1> 추운건 못참아! ‘부산에는 지금 30년만의 눈으로 모든 시내 도로가 극심한 정체를 보이고 있습니다...’ TV가 조용한 거실에서 혼자 떠들고 있었다. 화면에선 순백의 눈이 가득 쌓여 있는 거리가 비춰지고 있었다. TV를 보고 있는 한 소녀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화면의 빛에 비취어 조금씩 보였다가 사라지곤 했다. 하지만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도 그녀가 두 주먹을 꼭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음은 확연히 들어났다. “제길!!! 이건 사기라고!” 하연은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이 따뜻한 남쪽 나라로 내려왔는데! 과거 탈북에 성공한 북한 주민의 명대사를 그녀는 일말의 죄책감 없이 그대로 표절하고 있었다. 그녀의 굳게 쥔 두 주먹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하자 그녀는 잔뜩 껴입었던 파카를 다시 꼭 여몄다. “으으으... 추워....” 놀랍게도 그녀의 불끈 쥔 주먹은 눈으로 인한 내일의 심각한 교통체증이나 눈 녹은 뒤의 진탕길에 버릴 가죽부츠에 대한 짜증스러움에서 나온 분노는 아니었다. 단지 추위 바로 그것 때문이었던 것이다. ‘아아.. 지금이라도 보일러 온도를 조금만 더 올리면..’ 얼마 전 엄마가 그녀에게 호통 치던 생각이 나자 다시 고개를 절래 절래 젓는 그녀였다. [방 온도를 1도 낮추면 난방비가 얼마나 절약되는지 알아? 가뜩이나 불경기에 나라경제도 안 좋은데 꼭 그렇게 살아야겠니? 그리고 너 때문에 피해보는 다른 사람도 좀 생각을 해보렴] ‘하지만 적정온도 22도 라니.. 너무 춥단 말이야.’ 그때 구원의 손길을 바라는 하연의 눈빛은 아버지와 동생의 외면으로 처절히 무시당했다. 하긴.. 하루 이틀도 아니었지. 사실 22도 정도라면 일반 가정집에서는 상당히 따뜻한 축에 속했다. 서울 사는 예림이네는 19도 이상을 올려본 적이 없다고 했으니까. 언제나 늘 추위를 타는 세연은 자신의 몸을 원망스럽게 내려다 봤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추위를 잘 타던 하연은 옷이 단 2가지로 정해져 있었다 바로 겨울옷과 여름옷. 그 중 일 년의 3분의 2가량을 겨울옷으로 버티는 그녀를 친구들을 얼음마녀라고 놀려대었다. ‘그 때문에 오해도 많았지.’ 피식 웃는 하연이었다. 하여튼 추위를 엄청나게 싫어하는 하연은 남들이 교복 줄여 입을때 두꺼운 옷을 교복위로 둘둘 감고 다녔으며 학교 규칙상 어쩔 수 없이 치마에 스타킹을 신고 다니기는 했지만 언제나 아래에는 체육복 바지를 겹쳐 입고 다녔다. 심지어는 하교시간에까지. 그런 그녀에게 남자 친구가 생길 리가 없었다. 아무리 ‘성격이 좋아야 여자다’라고 외치는 남자들이 많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외모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하여 상대의 호의를 이끌어내려는 얄팍한 수작에 불과했고 정작 그들은 조금이라도 예쁜 여자가 지나가면 순식간에 태도가 돌변하는 것이 세상 진리였으니까. 뭐 그것을 한탄하거나 그들의 표리부동을 비판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이 그렇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하연이었다. “내가 왜 이 부산으로 내려왔는데..흑.” 그녀의 특이 체질 때문에 그녀의 어머니는 좋다는 병원 다 찾아가 보았지만 그때마다 나오는 대답은 [정상]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대학병원에서 수십만 원의 치료비를 내고 잘한다는 의사 만나기 위해 특진료 까지 물어냈지만 무수한 돈 낭비만 하고 끝나 버렸다. 분명 체온은 36.5도로 정상이었고, 특별히 내분비 기관 등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게 말이 되냐며 투덜거리는 그녀를 향해 의사는 ‘그냥 살아요 뭐 죽을병도 아니구만’이라는 소리로 속을 박박 긁어 놓았고 그 이후로는 다시는 병원에 찾아가지 않았다. 과거의 안 좋은 추억으로 잔득 찡그린 얼굴을 하고 있던 하연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씨익 미소지었다. “후후후. 하지만 낼 모래면 이몸은 이곳을 더난단 말씀이라구 후후훗. 2주전 발생한 쓰나미 때문에 겁먹고 여행자들이 전부 여행을 취소해 버려서 이 몸은 단돈 10만원에 1주일 동안 꿈에 그리던 캄보디아로 여행을 간단 말이지.” ‘뭐 솔직히 그 끔찍한 재해가 났다는데 놀러간다는게.. 조금은 죄책감이 들지만 말이야.’ 친구가 가려고 계약금까지 절반 이상 치룬 여행을 취소하려 하기에 그녀가 나머지 잔액을 치르고 가게 된 곳은 얼마 전 지진해일이 휩쓸고 간 인도양 근처의 캄보디아였다. “아니지. 나 같은 여행객이 아니면 그곳 주민들의 생업이 어떻게 되겠어. 가이드랑 여행사도 먹고 살아야지. 흠흠. 난 그들의 생계를 위협받게 하고 싶지는 않다고. 그리고 나같이 용감한 사람이 먼저 나서서 여행을 해야 사람들이 다시 용기를 낼 것 아니겠어? ” 스스로도 유치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하연은 TV를 끄고 방으로 들어가 두터운 이불을 덥고 침대에 누었다. 자기전에 옥매트의 온도를 최고로 맞춰놓는 것을 잊지 않고 조금씩 잠에 빠져든다. * * * * 여전히 같은 말로 시작되는 언제나와 똑같은 꿈. 더 이상은 신기하지도 그렇다고 당황스럽지도 않다. 하지만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꿈을 꿀 때만은 진짜상황인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타오르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이가 날 향해 미소짓고 나는 그의 모습을 비춰내는 투명한 수경(水鏡)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시선만 공유할뿐 나에게는 어떤 감정도 전해지지 않는다. 단지 내가 내는 것이 분명한 목소리만이 나의 감정을 미루어 짐작하게 할뿐.. [어찌하여 저자를 그리 바라보는 거냐. 나의 훼레슈티. 어찌하여 불길한 어둠에 연연하는 것이냐.] 난 뒤돌아보지 않는다, 언제나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만 꿈속의 나는 수경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보세요 훼렌. 내앞의 그는 나의 그림자. 그가 없다면 제 존재도 의미가 없습니다.] 알수 없는 말이 내 입에서 흘러나오고 내손임에 분명한 희디흰 손이 수경을 휘젓는다. 차갑다. 더 이상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빛과 어둠은 같은 장소에 머무를 수 없다. 그것은 변할 수 없는 진실.] [그를 어둠으로 내몬건 당신이 아닙니까.] [그가 선택한 것이다.]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제가 선택할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 [나의 창조물중 가장 아름다운 아이야. 나의 보물, 그에게 너를 내어줄 수는 없다.] 등뒤에서 나를 감싸는 온기가 느껴져 오지만 무겁다는 생각만 든다. 이건 나의 감정인가. 아니면 이 꿈의 주인이 느끼는 것일까. [후회하실 것입니다.] [나는 이 세계의 창조자의 의지의 구현체. 그러나 나의 마음은 나의 의지이다. 그러므로 후회하지 않는다. 너와는 반대의 길을 선택한자 그의 의지도 곧 창조주의 의지. 그러므로 그와 나는 동일하다.] 여전히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는다. 눈물이 흐른다. 미동도 하지 않는 나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손등을 적신다. 어느새 눈앞에 보이던 풍경이 다른 장소와 서서히 겹치며 시야에 들어왔다. 사방은 희디흰 벽으로 둘러쌓여 있다. 화려한 무장을 걸친 9명의 남자들이 내앞에 무릅을 꿇고 있다. 언제나처럼 가장 앞에 서있던 자가 먼저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는 나에게로 다가와 천천히 입을 연다. [진정 그리하실 것입니까.] [그렇다.] 그리고 순식간에 모든 것이 변했다. 아까의 순결하리 만큼 하얗던 방은 이제 더 이상 백색이 아니라 피로 불들어 붉디붉다.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다. 아까 나에게 말을 걸던 자가 비틀거리며 나타난다. 온몸이 붉지만 난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뿐이다. 털썩, 그가 한쪽 무릅을 꿇고 주저않는다. 콜록이는 숨결이 금방이라도 멎을 듯 거칠기만 하다. 날보는 그의 눈동자는 금새라도 꺼질듯 미약하여 더 이상 생기가 없다. 간신히 버티고 있음이 분명한 그의 손도 붉고 그가 바닥에 꼿아 몸을 지탱하고 있는 검도 붉다. 그의 피가 바닥에 커다란 핏빛 웅덩이를 만들고 있다. [......] 미약해서 들리지 않는다. 하얗게 메마른 입술이 뭐라고 중얼거린다. 들릴것 같은데 들리지 않는다. 내입은 여전히 봉해진듯 말이 없다. 다 헤어진 망토를 타고 피가 방울지어 떨어지며 조용한 방안은 불길한 소리로 가득찬다. 무언가 날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허공을 가르고 짙은 붉은색의 기가 그를 표적으로 날라간다. 그리고 천천히 나를 바라보고 있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쓰러진다. [훼레슈티. 나의 반대에 선자. 그대가 원한 일이 아니였는가.] 목소리가 들려온다. 처음에 나에게 말을건 자와 똑같은 음성, 같은 느낌의 음울한 어조가 나에게 말을 건다. [그렇습니다.] 눈앞에서 생명이 쓰러졌음에도 나의 목소리는 담담하다. [너의 생명은 이제 나의 것이다.] 강한힘이 나를 잡아끈다. 강제로 나의 얼굴을 잡아 돌리는 그는 아까의 붉은 머리카락의 붉은 눈동자의 남자. 그의 눈에 담긴 증오가 나를 향한 이글거린다. 그가 잡은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비명이 나올것 같은 고통이지만 소리를 칠 수가 없다. 이상하게 시야가 조금씩 흐려진다. 격하게 나를 흔드는 그의 모습이 조금씩 사라진다. [훼레슈티!!] 아아.. 저것은 누구의 목소리일까. 처음 들었던 ‘그’의 목소리일까. 아니면.. 마직막으로 보았던 ‘그’의 목소리일까. 이제는 암흑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조그많게 무슨 소리가 들린다. [훼레슈티, 이것이 너의 선택인 것이냐.] 처음듣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온다, 아니 머릿속에서부터 들려오는듯 나의 전신을 울리는 목소리가 계속 말을 잇는다. [빛이 없어지면 어둠도 없어지는 것. 네가 사라지면 그도 사라진다. 그것을 원하느냐.] [아닙니다.] [내 아이 훼렌을 용서해라. 나의 의지체이나 그 또한 스스로의 의지를 지니고 있는자. 스스로의 의지에 삼켜져버린 불쌍한 아이란다.]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 번 더 기회를 주마. 훼렌과 너 훼레슈티. 그리고 ‘그’ 에게 모두.] 다시 한 번 더 라는 말이 이상한 여운을 남긴다. 마치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는 듯 그가 말한다. [이번에는.. 너는 더 이상 훼레슈티가 아니다. 그들중 누가 먼저 너를.....] 말이 끊긴다. 더 이상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고 나는 잠이 든다. 그리고 “에에에에엣취~~~!!” 어느새 뽑혀저 나갔는지 옥매트가 차디차다. 언제나 이꿈을 꾸고 나면 감기에 걸렸지. 정확히 말하자면 자다가 갑자기 주위가 추워지면 이 꿈을 꾸고 추위 때문에 감기가 걸리는 것이 지만 꿈 때문에 감기가 걸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감기 걸린 것 같은데. 오늘 학원에 못가면 지현이가 전화해서 놀리겠지. 또 그 개꿈 꾼거냐고. 에고..” 10년지기 단짝 친구인 지현이는 어떻게 된게 자신이 학교를 부산에 옮기자 아버지가 갑자기 전근발령이 나는 바람에 같이 부산으로 오게 된 질기게도 오래된 친구이다. 예전부터 서로의 모든 것을 터놓고 지내던 친구라 자신에 대한 것은 하연 본인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벌써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속이 울렁거린다. 하연의 감기 증상은 가족들이 모두가 쉬쉬했는데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릴때 몇 번 보살펴 주신 것 같은 기억이외에는 자신이 감기만 걸리면 문을 닫고 아무도 들어와 보지 않았다. ‘그래도 방은 엄청 따뜻하게 해주니 좋지 뭐야. 귀찮게 약먹어라 주사맞으러 가자하고 달려들지도 않고..’ “헉!! 엄마! 누나 감기걸렸어요!!” 갑자기 옆방에서 자고 있던 동생이 하연의 기침소리에 깼는지 방문을 열고 하연을 살펴보고 고래고래 고함을 친다. 그 소리에 곤히 자고 있던 아빠와 엄마가 깨어나서 동시에 외쳤다. “어서 문 꼭 잠가라!” 엄마의 목소리다. “하린아! 어서 하연이방만 보일러 잔득 열어놓거라!.” 딸이 아프다는데 아버지란 작자는 들어와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 순식간에 문이 쾅소리와 함께 닫히고 남동생이 발빠르게 어디론가 달려간다. 아마 시킨대로 보일러실로 간거겠지. 하지만 왠지 저 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서운하다. 애써 서운한 마음을 달래며 하연은 다시 눈을 붙였다. ******보지 않아도 됩니다****** <시노페의 어머니편-일부만..> “뭐하는 짓거리지! 감히 내말을 거역하려던 것인가?” 익숙한..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찔거렸다. 공포와 두려움으로 차갑게 얼어붙은 심장이 왼쪽가슴에서 지그시 조여들어 오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천천히 소리나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지막하게 그러나 확실한 분노를 표출하면 펠리펜이 쏘아보고 있었다. 찌를 듯한 날카로운 레드 아이가 뭐라 형용할 수 광채를 띄곤 그녀를 향했다. 당장 도망가고 싶을 만큼 위압적이며 그녀의 신경을 온통 곤두서게 만드는 시선이다. “더 이상은 그를 만나는 것을 금한다 했다. 정혼자가 있는 몸이 무슨짓이지?” 노골적인 적의, 펠리펜의 눈이 그녀의 온몸을 핥아갔다. 오늘은 무슨 일로 심사가 뒤틀렸는지 평소와는 달리 붉어진 얼굴의 펠리펜은 잔뜩 성난 황소처럼 씩씩 거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대체 무엇이 그의 비위를 거슬리게 만든거지? 얼마전 대들다가 팔이 부러진게 1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이건 순전히 잠시 예전 추억에 방심했던 탓이다. 펠리펜이 뒤에서 다가오고 있는 것도 몰랐다니. 그녀는 마른침만 꿀꺽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대답해 봤자 펠리펜의 화를 복돋울 뿐이다. "그는 정혼자의 친구예요!" "..친구?" “아파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앞으로 다가오며 그는 아직 다 낫지 않은 팔을 억세게 쥐어잡았다. 아직 붕대가 감겨 있는게 보일텐데 이 잔인한 놈. 팔이라도 무사하면 그를 밀치고서라도 도망가련만 그의 양손은 이미 그녀의 팔을 꼼짝 못하게 단단히 잡고 있었다." “저번에의 경고가 부족했던건가?” 놀랍게도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그가 나직히 중얼거렸다. 위험하다. 머릿속에서 어서 이 상황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다급히 외치고 있었지만 그와의 거리가 너무 좁아서 조금의 움직일 틈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인사만 했을 ... 으으.. 뿐 ..헉.......” “그것 뿐이라고?” 마침내 그가 으르렁 거리며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의 분노가 팔을 통해 생생히 느껴졌다. 그가 잡은 오른쪽 팔위의 손에 조금씩 힘이 가해지고 있었다. 불이 붙는 듯한 고통이 다시 한번 느껴졌다, “그래서. 지금 감히 인질 주제에 마계의 군주인 내 앞에서 뻔뻔스럽게 고개를 들고 말같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을 셈인가?” 두 개의 눈동자가 이글거리며 그녀에게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팔이 산산조각나는 듯한 고통에 말하기도 힘들었지만 그나마 대답을 하지 않는다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아닙니다. 마왕님.” “그럼 이 시간에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던거지? 그것도 인적이 드믄 이 후원에서 말이야. 너 따위는 이런 곳에 출입할 수가 없을 텐데 누가 허락한 거지?” “바이욘느 전하께서.. 흡!” 그다음 말은 채 이을 수가 없었다. 그가 왼쪽 손에 힘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얀 붕대 위로 붉은 피가 점점히 배어나오고 있었다. 다친 상처가 아까의 충격으로 도진 모양이었다. 말대답을 했기 때문일까. 그녀를 쳐다보는 마왕 펠리펜의 눈동자엔 붉은 광기가 엿보였다. 머리가 아찔해진다. 지금이라도 뿌리치고 달아날까 아니면 반항을 해버릴까. 하지만 단단한 그의 손아귀에 잡혀있는 그의 손을 빠져나갈 힘도 또 그렇게 당하고도 그의 면전 앞에서 반항을 해댈 용기도 배짱도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나마 털끝같이 남아있는 자존심 때문에 솟아나오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똑똑히 알게 해주지, 네 몸으로, 네 영혼까지 단단히 각인되게 말이야. 네 따위가 이 마계에서 어떤 존재인지 말이야. 네가 있던 천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곳이라는 것을!” 불길한 예감에 어떻게든 피해보려 했지만 그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마왕의 붉은 눈동자가 가늘게 좁혀들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녀의 몸은 순식간에 차가운 땅바닥에 내던져졌다. 어떤 수를 썼는지 모르지만 그녀의 몸이 순식간에 뒤로 넘어져 볼품없이 땅바닥으로 쓰러지게 되었다. “헉!!!” 눈을 질끈 감고 그의 주먹이 날아 올 것을 기다렸다. 지난번 기억이 맞는다면 분명 한 두 대로 끝날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향해 다가온 것은 전혀 뜻밖의 물체였다. 뜨겁고 부드러운 것이 악문 그녀의 입술을 해치고 들어왔다. 이건 뭐지? 라고 바보같이 떠올리던 그녀는 눈을 번쩍 뜰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무......우..........으.....” 눈에 보이는 것은 강렬한 욕망을 담은 어두어진 붉은 눈동자. 갑자기 알 수 없는 공포가 밀려왔다 내뱉으려던 소리는 삼킬 듯한 기세로 달려든 그의 입술로 인해 막혀 버렸고 잠시 입을 벌린 사이 그의 혀가 그녀의 입안을 점령하고 거칠게 탐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 위로 얹혀진 그의 몸의 무게 때문에 꼼짝달짝 할 수 없었고 단단한 그의 몸이 주는 충격으로 아무런 반응도 보일 수 없었다. "윽..........!" "퉤!!" 그녀는 입에 한 가득 고인 피를 고개를 돌려 바닥에 내뱉었다. 그는 황급히 내 위에서 내려와 무시무시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의 입가로 쉴새없이 흐르는 피 때문에 흡사 흡혈귀처럼 끔찍해 보였다. 그의 피만큼이나 붉은 눈동자가 어둠속에서 번득였다. 그 사이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등으로 입을 문질렀다. “온순하고 착하기만 한 천계의 여인도 이런 면이 있었군. 크크크큭.” 마왕 펠리펜은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난데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은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라고 느끼게 하는 득도의 웃음이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깊이, 그의 어두운 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녀는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가 뭘 원하는 지는 알 수 없지만 결코 자신에게 이로운 것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전.. 전.. 원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당신의 신하의 정혼자에게 무슨짓을 하시려는 것입니까!” "............널 원해." “!!!” “그 녀석따위에겐 넘겨주지 않겠다.” *원래제목은 '인간 하연VS마공녀 시노페[차원이동/로맨틱판타지]'입니다. 현재 각편당 평균12kb로 43회까지 나갔습니다. 이것은 종래의 설정변경으로 다시 수정하여 올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래진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적해 주신분^^ 정말 감사드립니다. 처음 설정이 세연이었는데 확인을 안했나봐요ㅠ.ㅠ 근데 지금까지 아무도 말을 안해주다니..(관심이 없는 걸까..) 그런데.. 그년은 .. 못찾았어요ㅠ.ㅠ 내가쓰고도 못찾다니.. 키루미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고쳤어요^^ 2>산적아저씨 “누나 부탁이니까 좀 떨어져 걷자. 응?” 하연과 걸어가는 동안 쏱아지는 주위의 시선에 하린이가 자꾸 주위를 살피며 안절부절 못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내가 처음가는 길은 지독한 길치라는 거 잘 알지. 날 버리고 가겠다고?” “그게 아니라, 누나가 입은 옷좀 어떻게 할 수 없어? 쪽팔려 죽겠단 말이야!” 아닌게 아니라 하연의 코디는 국제선을 타려는 비교적 세련된 옷차림의 사람들이 모인 이곳에서는 유난히 눈에 띄는 모습임에 틀림없었다. 공항내부는 얇은 코트하나만 입어도 충분히 따뜻할 정도였는데 하연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터운 코트와 신발 그리고 장갑도 모자라서 모자에 귀마개까지 전신무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발~ 그 귀마개라도 벗으면 안되? 요즘 유행하는 패셔너블한 벙거지 모자도 아니고! 그게 뭐야?” 자신의 말은 들은척 만척하는 누나를 바라보는 하린의 마음은 타들어갔지만 하연은 그 촌티나는 귀마개를 벗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게 소리가 잘들린단 말이야. 너 이누나가 뒤에서 달려오는 차 소리도 못듣고 깔려 죽으면 좋겠냐?” 하린은 ‘누나. 그 정도로 옷을 껴입으면 아무리 치어도 절대로 안 다칠꺼야. 분명히 옷이 쿠션역활을 할테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꾸욱 참았다. “앗 저기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하연은 신이나서 하린을 잡아끌었다. 빨간 바탕에 희안한 금빛 왕관무늬 깃발을 매단 일단의 그룹이 보인 것이다. 참 센스한번 후지다고 생각하고 있는 하린이었지만 분명히 오늘 함께 출발하기로 한 사람들이 말하던 그 표시가 틀림없었다. “안녕하세요? 전 하연이라고 해요.” 예의바르게 인사하는 하연을 사람들은 잠시 멍하니 바라보더니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그중에서도 산적처럼 생긴 덩치큰 아저씨는 아예 배까지 두들겨 가며 웃고 있었다. “저,,저기 누나.. 잘갔다와!!” 하린은 이말 한마디를 남겨놓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어짜피 일행에게 대려다 주었으니 누나를 잘 데려다 주라는 아버지의 말은 지킨셈이었다. 더 이상 누나랑 같이 있으면서 창피를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가씨, 어디로 가는 지는 모르겠지만 우리팀은 아닌것 같은데요?” 일행의 가이드로 보이는 화장을 짙게한 미니스커트의 아줌마가 얼마나 웃었는지 눈물을 손으로 살짝 닦으며 하연에게 대답했다. “성남의 국제여행사 캄보디아 2박3일 여행단 아니예요? ” “설마.. 하연양?” “맞는데요.” 상대의 눈에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같은 일행으로 보이는 나머지 사람들도 웃음을 멈추고 하연을 호기심어린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들 하연을 향해 질문을 던져왔다. “호오? 특이한 체질이구나 혹시 ‘세상에 요런일이’라는 프로에 나가볼 생각없냐? 사례금 오면 반반으로 나누자고” “됬어요.” “설마 뚱뚱한거 감추려고 일부러 그러는거 아니야?” “댁만큼이야 되겠어요?” “오옷 나 상처받았어. 어떻게 그런 심한말을?” “저도 상처받았어요.” “이런. 내가 호~해 줄까?” “죽을래요?” 유난히 친한척하며 말을 계속걸어오는 옆자리의 산적아저씨는 하연이 귀찮다는 티를 팍팍내도 좀처럼 말을 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무슨 -듣지도 못한-대학의 동아리 회장이라는 아저씨틱한 이 오빠는 자신이 하연보다 10살은 많다는 것을 생각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저기 언니!” 하연은 마침 지나가는 여승무원에게 손을 들었다. “혹시 자리 바꿀 수 있나요?” 다행히 자리가 있었는지 잠시후 하연은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며 느긋하게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미리 알았으면 좋았으련만.. 저번 감기의 후유증이 조금 남아있어서 사실 피곤했던 하연은 그제서야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 공항을 나오자 뜨거운 공기가 일행을 에워쌌다. 모두들 생각보다 심한 더위에 몸을 흠칫 했지만 현지 가이드와 하연 두 사람만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역시 거짓말이 아니었나보네?” 아까의 산적이다. 하연의 인상이 대번 확 일그러지며 잽싸게 그에게서 벗어나 다른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가이드 언니. 저 산적같이 생긴 오빠좀 못 오게 해주세요. 진짜 기분 나빠요.” “어머나. 산적이라니? 저래뵈도 꽤 미남자라고.” 의외의 반응에 멍해진 것은 하연이었다. 아니 저 생김세 어디가 미남이란 말인가. 저 촌스러운 체크무의 반팔남방에 다 구겨진 베이지색 면바지을 입고 어울리지 않는 검은색 가죽벨트를 한 저 남자가? 아무리 자신이 남자보는 눈이 없다고 해도 저건 아니었다. “잘됬네요. 언니가 좀 맡아주시겠어요?” “난 가이드잖니. 그리고 안된 말인지는 몰라도 저사람이 네 파트너야. 어쩌겠니?” “다른 사람으로 바꿔주면 되잖아요!” 결국 한참을 입씨름한 끝에 얻어낸 결론은 안된다였다. 자신이 그날 제일 늦게 공항에 도착한 탓도 있지만 10명뿐인 구성원중 4쌍이 연인 사이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참을 입씨름하는 하연을 바라보던 산적아저씨가 맥빠진 하연을 보고 킥킥거렸다. 그 모습에 성질난 하연은 뭐하고 쏘아붙여주려다가 그냥 참았다. 그래도 자신보다 나이가 10살이나 많으니 괜히 입씨름을 해봤자 자신만 손해였다. “ 날씬하잖아?” 탈의실에 들어갔다가 나온 하연을 본 산적아저씨의 첫마디는 안 그래도 별로 좋지 않은 평가가 매겨저 있는 그에 대한 호감도를 더욱 악화시켰다. 대놓고 날씬하다 뚱뚱하다라는 말을 하는 남자치고 여자를 외모로만 평가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댁은 생각보다 더 거대하시군요.” 하연이 심술궂게 내뱉은 말은 사실은 진실과는 약간 거리가 있었다. 거대하다기 보다는 일반적인 남자치고 근육이 좀더 많은 탄탄한 몸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자의 드러난 몸을 본거라고는 한창 성장기에 들어가 뼈만 남은듯한 남동생의 몸과 선천적으로 호리호리한 몸매 때문에 군대에서 집으로 돌려보낸 아버지 뿐이었으니 하연의 반응은 당연한 것일 수 밖에 없었다. “오호~ 그거 칭찬인가? 감사히 받도록 하지.” “당신,, 설마 바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싱글벙글이라니, 상대의 정신상태에 점점 의심이 간다 해도 어쩔수 없었다. 그러나 상대는 하연의 마지막말은 듣지 못했는지 그대로 일행이 모여있는 밖으로 발걸음을 옮겨 나가버린 뒤였다. “그럼 오늘 일정은 ... 같뒤에...해서....한후.....예정이고 마지막에는 정글에 있는 앙코르와트 신전에 들릴거예요.” 지겹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신이 난듯 떠드는 가이드의 목소리도 지겹고. 계속 옆에서 앵앵거리는 끈질긴 파리같은 남자도 성질이 난다. “이봐요. 산적아저씨.” 하연은 참다못해 상대에게 한마디 했다. 아직까지 통성명은 안한지라-어떻게 그 많은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이름은 말하지 않을수가 있단 말인가-상대의 이름을 몰라서 그냥 산적이라고 부른것이다. 무례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걸 예의로 무마하기에는 이미 성질이 나버릴데로 나버린 하연은 상대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그제서야 좀 심했는가 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똑같은 말을 하는군..” “에?” “아. 내 이름은 정훈이야. 이제부터 정훈오빠라고 불러줘~” 순간적으로 사람이 바뀐다는 말이 이런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침울해졌던 정훈이하는 남자가 다시 순식간에 원래 얼굴로 돌아와 느끼힌 대사를 날리며 한쪽눈을 찡긋했다. “뭐예요! 이 아저씨가?” 하지만 이상하게도 더 이상 대답은 없었다. 어느새 조용해진 상대가 버스의자에 몸을 기대고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를 얼굴로 내리 눌렀기 때문이다. 괜히 말 한마디 더 했다가 또 입을 열까 두려웠던 하연은 입을 다물고 차창밖으로 지나가는 이국적인 나무들을 구경했다. 밖의 이국적이 모습에 잠시 넋이 빠진 하연은 그래서 정훈의 모자 사이로 소리없이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1,2 합쳤습니다. 3/28 냉방이 잘된 버스에서 내려서자 후끈한 열기가 얼굴을 타고 올라왔다. 전면에 보이는 것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중 하나라는 앙코르와트 신전이었고 항상 붐빈다는 이곳은 그날 재해의 영향인지 하연이 속한 그룹외에 다른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1시간동안 자유시간을 가진후에 떠나겠다는 가이드의 말에 하연은 손을 번쩍 들었다. “저 혼자 다녀도 되요?” “안되요.” 하연은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정훈이라는 남자와 같이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처럼의 자유시간에도 같이 있으면 왠지 마음이 불편해 지는 사람이랑 함께 있어야 한다니 생각만해도 짜증이 나왔다. “아. 나 잠깐 어디좀 갔다가 올게.”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자 버스에서 지금까지 자신의 곁에 붙어있던 정훈은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하연에게 평상시와는 다른 목소리로 말했다. 안그래도 먼저 그말을 하고 싶었던 하연은 좋아라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연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모습을 굳은듯 바라보던 정훈은 갑자기 몸을 돌려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거기서 나와라.” “눈치채고 있었던건가. 샤렌 아니, 이젠 정훈이라고 불러야 하나?” “너따위를 눈치채지 못할 내가 아니지.” 놀랍게도 허공에 서서히 사람의 모양이 나타나더니 마치 하늘에서 튀어나온 듯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였다. 이 더운 날씨에서도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평이한 어조였다. “저 아이이군. 훼레슈티님의 환생체가. 안 그런가 샤렌.” “정확히는 아니지. 네놈의 짓거리 때문에 봉인되어 있으신 상태니 말이다.” 정훈, 아니 샤렌은 검은 로브를 입은 사나이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격한 목소리들였지만 억지로 자제하고 있는 듯 그의 움켜진 손이 꿈틀거렸다. 샤렌의 모습을 바라보는 로브는 과거의 샤렌의 모습을 생각하고 있었다. 훼레슈티님을 수호하는 9명의 최고수호신들 중 가장 침착하던자였던 샤렌은 어둠에 속한 ‘그’와 훼레슈티님의 결전의 날에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스스로 죽기를 원하지 않았던자 환생의 굴레를 걷어차고 무한에 가까운 시간동안 기다림의 세월을 보낸 샤렌은 자신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뿜어대고 있었다. “바로 배신자 같은 네놈 때문에 말이다. 다렌! ” 샤랜은 자신을 포함한 9명의 최고수호신중 가장 냉정한 성품을 가졌다는 다렌을 향해 격하게 소리쳤다. 훼레슈니님의 휘하 9명의 수호신중 살아남은 또 하나의 수호신. 한때 냉철한 지성과 판단력으로 훼레슈티님의 가장 측근으로 신임을 받던 그는 마지막에 주인을 배반하고 상대에게 붙어버렸고 그에 의해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7명은 모두 다렌의 계략에 빠져 차례차례 죽임을 당하였다.그러나 그 말에도 다렌은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각오는 되어 있는건가 샤렌. ”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샤렌이 다렌자신에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듯 다렌은 뼈만남은 앙상한 손으로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샤렌에게 건냈다. 화련한 보석이라곤 하나도 모이지 않는 완연히 은색으로 빛나는 한자루의 소도가 시릴만큼 차가운 빛을 발했다. “네 말을 무슨수로 믿지! 내가 지금 네가 시킨대로 한다하여 훼레슈티님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보장도 없잖아. 그리고 이미 그분의 육체는 사라진지 오래인데 과연 봉인이 깨어진뒤 그분의 혼을 담을 육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거냐! 난 못해!” “네가 아니더라도 1주일 뒤면 또다시 또 한 번의 생을 마치실거라는 것은 훼레슈티님이 환생을 시작한 처음부터 지금까지 지켜봐온 네가 잘 알텐데.” 그래.. 그랬다. 언제나처럼 훼레슈티님은 16살이 된 겨울을 지나고 새로운 해를 맞이 하지 못하셨다. 그동안의 수많은 환생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단 한번도 변하지 앟았다. 샤렌은 다렌에게서 거칠게 검을 받아들었다. 손안에 잡힌 검이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고 그의 온몸은 차갑게 식어갔지만 그는 상관없다는 듯 애써 흔들리는 두손에 힘을 주고 다렌은 향해 말을 이었다. “확실히 육체는 만들어 놓은 거겠지?” “비록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원래의 육신을 찾으실 때까지는 버틸수 있다. 적어도 마계의 군주라는 자의 친자식이니, 최소한 시간은 벌수 있어.” “마계의 군주라니!! 그게 무슨말이야. 훼레슈티님과 정반대되는 속성을 그분의 육신으로 삼겠다고? 다렌 지금 제정신이냐!” 막연히 훼레슈티님의 속성과 일치하는 천계의 일족이라 생각했던 샤렌은 다렌의 천연덕스런 대꾸에 믿을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그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손을 허공을 스칠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넌 이제 아무런 힘도 없으니 내 몸에 손을 댈 수는 없다. 그리고 훼레슈티님의 육체로 마족을 택한 것은 그 편이 훼레슈티님의 힘을 누르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봉인이 깨어질때의 여파를 생각해라 샤렌.” “하지만!...” 아까는 순간적으로 마계라는 소리에 욱해 버리고 말았지만 인정하기 싫어도 다렌의 말은 모두가 사실이었다. 다렌이 조용한 목소리로 정적을 깼다. “어짜피 수 만년을 환생 한 번 하지 못하고 지내온 너의 몸은 더 이상 버틸수 없어. 얼마후면 너도 원래의 무의 상태로 돌아가게 될거다.” “그것은 너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다렌? 훗. 아니지 네놈한테는 변절의 댓가로 받은 그것들이 있었으니 적어도 나보다는 오래버티겠군.” “.....” “그만두지. 어짜피 그분을 위해 그때 목숨을 버리지 않았다는 수치는 나도 가지고 있으니.” “...저기 오는군. 반드시 그것을 심장에. 잊지마라.” 어느새 다렌이 사라지고 없는 허공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샤렌은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하연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하연은 샤렌의 굳은 표정을 보고도 그저 짜증어린 표정만 지어보일뿐 경계하지 않았다. ‘어휴 저 쫌생이 설마 아까 버스에서의 일로 아까부터 인상을 쓰고 있는건가?’ 혹시 그가 잠든 사이에 자신이 투덜댄 것을 들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하연의 머리를 스쳐 갔다. "산적.. 아니 정훈오빠!" 처음에 그분께서 훼레슈티님을 창조하시고 인격을 불어넣으신 후 자신들을 소개했을때 그분이 처음 하신 말씀도 ‘산적같아.’라는 말이였다. 여러번 환생을 거치면서도 자신을 처음 본 훼레슈티님의 반응은 언제나 한결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언제나 들어왔던 최후의 말.’ 하연은 아까 걸어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면서 하연은 점점 가까이 보이는 정훈의 얼굴이 어디선가 많이 보았다는 생각에 잠시 멈칫했다. 지금까지는 실없이 굴어서 느끼시 못했는데 지금의 차가워 보이는 얼굴은 어디선가 많이 본 모습이었다. ‘만약.... 저 머리에 은빛 투구를 씌우고.... 검은색 망토를 입히면...’ 하연이 채 기억을 떠올리기도 전에 갑자기 정훈이 다가와 한쪽 무릅을 땅에 꿇었다. 오른손을 왼쪽가슴에 올리고 고개를 숙였다. 너무나도 정중한 태도. 입고 있는 옷위에 순식간에 여러번 꿈에서 보았던 영상이 겹처지면서 하연은 순간 놀라 뒷걸음 쳤다. “넌!! 넌! 누구야!” “훼레슈티님께 9인이 수호신중 9번째 품계를 수여받은 샤렌이 인사올립니다.” 아니다. 그건 꿈이었을 뿐이야. 흔하고 흔한 개꿈, 단지 언제나 반복되는 이상한 꿈, 그게 일어났던 일일리 없어. 그때 분명히 모두가 죽어 버린 것 같았는데.. “훼레슈티! 누군데 내 꿈을 알고 있는거지!” 확실했다. 처음부터도 느끼고 있었지만 이분은 분명히 훼레슈티님이었다. 꿈으로 보았다는 그것들은 분명 채 보인되지 않은 기억의 일부분임에 틀림없었다. 샤렌은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하연의 마음은 도망가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몸은 마치 얼어붙은듯 꼼짝하지 앟았다. “아직도 깨어나시기를 거부하시는 겁니까. 훼레슈티님. 당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런 봉인은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을 것인데 언제까지 환생의 사슬에 몸을 맏기신채 계실 것입니까.” 안타까운 눈동자가 하연의 얼굴을 비추자 하연은 이 말도 안되는 상황속에서 비논리적이게도 그의 말을 들어주어야 할 것만 같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내가.. 훼레슈티? 하지만 그건 꿈인데..” “꿈이 아닙니다. 단지 그 때 이후로 인간의 몸으로 환생하셨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때 모두 죽었잖아! 설마 당신도 환생한 건가!" 갑자기 자신이 훼레슈티의 환생이라고 중얼거리는 눈앞의 남자의 말을 믿는 마음은 털끝만치도 없었다. 단지 자신의 꿈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듯한 상대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을 뿐이었다. “제 생명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전 환생을 거부했고 덕분에 훼레슈티님을 지켜볼 수 있었지요. 그리고.... 이제... ” 말을 흐린 샤렌은 아까 다렌이 건내준 칼을 손에 쥐었다. 분명 지난 수많은 생애에서도 언제나 평범한 삶을 살아오던 훼레슈티님은 잎으로 자신이 할 행동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칼을 꺼내는 샤렌의 모습에 하연은 기절할 만큼 놀랐다. 아니 사실 더 놀란 것은 그 칼의 끝이 그것을 들은 주인의 몸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슨짓이야!” 쨍그랑. 어디서 그런 용기가 튀어나왔는지. 하연은 그에게 달려들어 그의 손에서 칼을 쳐 떨궈냈다. 얼어붙은 심장이 그제서야 쿵쾅거리며 뛰었다. 눈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내 허락없이 죽지마, 샤렌.” 자신의 입에서 나온말에 하연은 경악했다. 어째서? 저사람은 정훈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잖아. 샤렌이 아니야. 그런데 난 왜 그런말을 했지. 그리고 내 허락이라니. 내가 그를 이전에 알고 있었던 건가! 그럼 그의 말이 전부 진실이란 건가! 샤렌은 자신의 손에서 칼을 떨구어 낸 그 순간적인 기운에 다렌이 말한것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아까의 그 기운은 분명 훼레슈티님이었어.. 그리고 이어진 하연의 말에 샤렌은 뛸듯이 놀랐다. <죽지마. 날 위해 죽지마. 내 허락없이는 죽지마.> 아아.. 그때의 훼레슈티님은 탄식처럼 광풍에 힘없이 덜어지는 봄날의 꽃잎처럼 처연한 목소리로 자신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살아남은 것은 주인을 지키지 못한자라는 무거운 멍애를 매고도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모습뿐이었다. 너무나 고위하여 바라만 봤던 자신의 주인이 자신을 보고 울고 있었다. 자신만을 바라바주었으면 하는 불경스런 비밀을 마음속에만 간직하고 생각해 왔었다. 아니 자신뿐만이 아니라 그들모두 차마 말할수 없는 은밀한 소망을 가지고 그렇게 훼레슈티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말로 이것이 마지막이군요. 훼레슈티님.’ 순간적으로 은빛이 허공을 갈랐다. 어느샌가 다시 샤렌의 손위로 옮겨진 칼이 야수처럼 샤렌의 심장으로 달려들었다. 시간이 멈춘듯 굳어있는 창백한 하연의 얼굴이 천천히 샤렌을 향해서 다가온다. 은빛 검신을 타고 심장에서 흘러나온 붉은피가 검신을 타고 그것을 쥐고 있는 너무나도 창백한 손을 따라 붉은 눈물처럼 흘러내린다. 파아아악! 심장에 박혀 있던 검이 뽑히자 하늘을 가릴것 같은 붉은 안개가 펴진다. 더 이상 생명을 담고 있지 않는 붉은 피가 하연의 시야를 뒤덥었다. 뜨겁다. 이상하리만큼 뜨거운 열기가 그것에 대인 피부하나하나마다 낙인을 찍듯 뜨거운 열기로 하연을 감싸안았다. “안되!!!! 샤렌!!!!!!!” 그리고 어디선가 들은 듯한.. 익숙한 언어가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마치 꿈에서처럼 자신은 몸하나 움직일 수 없었고.. 이윽고 완전한 어둠이 하연의 의식을 점령했다. 내일은 샤렌과 다렌이 나누는 대화와 엘과 하연의 만남이 나옵니다. (원작에서 얼렁뚱땅 넘어간.. 이야기..) “자 이제 모두 모이셨나요. 그럼 다음 목적지로 출발합니다.” “아까 조그만 여자애랑 같이 있던 남자는 어디에 있죠?” 가이드가 확인차 한 질문에 한 키작은 여자가 손을 들었다. “무슨 소리야. 작은 여자애랑 남자라니. 8명밖에 안되는데 설마 헷갈린거야?” 그녀옆에 서있던 애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그녀의 허리를 쿡 찌르며 핀잔을 주었다. “어.. 그랬지. 내가 왜 그런말을 했을까?” “혹시 더위 먹은거 아니야. 그러면 큰일인데..” 잠시 하연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던 여인의 말은 어느새 이동준비로 시끄벅적한 주위의 소리로 묻여버리고 그 말을 한 그녀 자신도 잠시 이상하다고 생각하고는 남자친구의 걱정어린 시선에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다렌이 검은 로브 밖으로 나온 가느다란 팔로 피투성이가 되 쓰러져있는 샤렌을 가뿐히 안아올렸다. 옆에는 역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하연이 있었고 샤렌의 피는 이미 차디차게 굳어 식어있었다. “샤렌, 내가 필요한 것은 그대의 피가 아니였어. 훼레슈티님을 깨우기 위해서는 다른 것이 필요하지. 네 목숨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말을 마친 다렌의 손가락에서 날카로운 검은색의 칼날들이 솟아났다. 그리고 주저없이 이미 싸늘하게 식어 더 이상 뛰지 않는 샤렌의 심장을 향해 파고 들어가자 죽어버린 검은피의 덩어리가 쏟아져 내렸다. 잠시후 다렌의 피투성이가 된 손안에 샤렌의 몸안에서 꺼내어진 무엇인가가 올려졌다. 그것은 놀랍도록 푸른빛을 사방으로 뿜어내고 있었고 이것은 바로 물을 상징하는 샤렌의 심장석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렌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위해 마왕으로부터 부탁받은 물건이었다. “미안하지만 샤렌, 그대는 이용 당했을뿐이야. 그때와 똑같이 말이지.” 샤렌의 몸을 허공으로 던진 다렌의 손이 검은빛을 발하자 이미 생명을 잃은 샤렌의 육체는 먼지로 화하여 허공으로 사라졌다. “다렌님 마왕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사방이 암흑으로 둘러쌓인 이곳에서 다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 한 마족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상대는 마왕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자, 비록 그 출신과 힘의 내력을 알수 없다 하나 그 실력만큼은 그 누구도 인정하는 자였다. 자신의 지위가 높다하나 마왕에 비할 수는 없는터 그가 이렇게 몸을 숙이는 것이 당연했다. “가지.” 상대는 짧게 말 한마디만을 남긴 뒤 어디론가 사라졌다. 마왕성내에서 유일하게 성안내부로 텔레포트를 시전할 수 있는 자는 단 마왕뿐이었으나. 다렌은 너무나도 쉽게 단숨에 마왕이 있는 곳으로 이동해 간 것이었다. 다렌이 도착한 곳은 마계에서도 보기 드문 아름다운 정원이었지만 그곳에 있는 마왕이라는 자는 꽃에는 관심이 없는 듯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주위의 시종은 모두 거두었는지 그곳에 느껴지는 생명체라곤 오로지 그들뿐이었다. “구해 왔는가?” “그렇다, 마계의 군주여. 이것이 그대가 말한 물의 심장석이다.” 다렌의 손위에 떠있는 푸르른 보석을 보자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마왕의 눈에 탐욕이라고 착각할 정도의 절실함이 깃들었다. 저것이 바로 천족이 말하던 전설의 물의 심장석, 그것만 있다면 혼이 떠나버린 육체라도 다시 되돌릴 수 있다는 전설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만 있다면 그녀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얼마나 찾아 헤매었던가. “대가는 잊지 않았겠지. 그것이 우선이다.” 손을 뻗어 물의 심장석을 만지려는 마왕의 손을 쳐내며 다렌이 싸늘하게 말했다. 비록 지금은 자신의 혈육에 의한 정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라 하나 상대는 엄연히 야비하기로 유명한 마계의 왕이었다. 뒤에 가서 약속을 엎는 일 따위는 눈 깜박하지 않고 저지를 자였다. “저기에 있다.” 마왕이 가리킨 곳에는 온몸이 잔혹한 구타에 의해 완전히 엉망진창이 된 한 붉은 머리의 남자가 죽은듯 쓰러져 있었다. 아직도 흐르고 있는 피만큼이나 붉은 머리카락이 피에 엉겨 흉하게 헐클어져 있었고 과거에는 분명히 아름다웠음에 분명한 얼굴은 더 이상 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게 부어올라 있었다. “피에서 이토록 진한 향기가 나는 것을 보니 분명 ‘그’가 맞군. 무슨 말로 그를 꾀어들인 것이지. 그 혼자서 이곳으로 오는 것을 그의 가신들이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텐데. 하긴.. 그녀의 말이었다면..” “쓸모없는 소리는 집어치워! 어서 그것을 달란 말이다!” 자신과 쓰러져있는 뱀파이어 로드만이 알고 있는 사실을 태연하게 중얼거리는 다렌을 본 마왕 펠리펜이 격하게 소리쳤다. 이미 죽어버린 그녀의 일 때문에 무모하게도 자신에게 단신으로 찾아온 그를 보고 느낀 것은 상대의 어리석음에 대한 비웃음보다도 그녀의 사랑을 온전히 독차지한 그에 대한 분노였다. 다렌은 비웃음을 던지며 샤렌의 심장에서 꺼내 아직도 피가 묻어있는 심장석을 펠레펜에게로 던졌다. 펠리펜이 심장석을 받으려 손을 내미는 순간 다렌의 그림자속가 수십개로 늘어나더니 쓰러져 있는 뱀파이어 로드의 몸을 순식간에 산산조각을 내버렸다. 자욱한 피의 운무가 아름다운 정원을 향기로운 향기로 가득채우고 펠리펜이 고개를 들었을때 다렌은 더 이상 거기에 없었다. 머리가 깨어질 것 같은 고통에 하연의 하얗게 말라버린 입술 사이로 탁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아까 샤렌의 죽음과 흩뿌려진 피에 의해 더러워져 있던 옷은 더 이상 깨끗하지 못했고 그것은 하연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것인지 하연의 눈꺼풀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깨어났나?” 누군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지만 입안은 모래처럼 버석이기만 할뿐 목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촛점이 멍해진 눈은 아직도 사물을 제대로 판별하고 있지 못했다. 한참이나 눈을 깜박이는 하연의 눈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한 남자가 들어왔다. “누,, 누구?” 아까와는 달리 이제는 목소리가 조금씩이나마 나왔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하연은 고개를 들고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이다. 마치 여자같은 선의.. 이렇게 생긴 사람은 처음 본다는 생각에 하연은 놀라 주위를 돌아보았다. 정훈오빠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모일시간이 다되어서 그에게로 돌아가는 길에 멀리에 누군가랑 서 있는 것을 본 것 같았는데 주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앙코르와트 사원도 보이지 않았다. 정글 깊숙이에 있다하나 엄청나게 큰 건물이다. 숲에 있다고 가려저서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머리가 무슨 충격을 받았는지 지끈거리며 하연을 괴롭혔다. 머리에 손을 대려고 팔을 들어 올린 하연은 순간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꺄아아아아아악!!” 하연의 두손은 붉게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손도 발도 그리고 얼굴에 느껴지는 이감촉도 분명히..,. 누군가의 피였다. “시끄러워!” 궁궐을 출입할 수 있는 마족이라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금역에 들어온 피투성이가 되어 들어온 인간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침입자가 이곳까지 오도록 무방비 하게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바이욘느 전하는 분명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었지만 침입자는 무조건 목숨만은 붙여서 왕궁에 데려가야 했기에 잠기 갈등하고 있던 엘은 난데없는 비명에 황급히 하연의 입을 막았다. “시끄럽게 굴면 죽.여.버린다.” 절반정도는 진심이 들어가 있는 말은 하연에게는 충분히 진담으로 다가왔고 엘의 무시무시한 분위기에 질려 그만 눈물이 맺히고 말았다. “넌 누구냐?” “..흑흑.. 끄윽.. 하연.” “시끄러워! 난 질질 짜는 것은 딱 질색이니까. 만약 또 한 번만 훌쩍거리면 바이욘느님께 혼나는 한이 있어도 엘류시온이라는 내 이름을 걸고 널 죽여 버릴 테니 알아서 해.” 자신이 왜 이곳에 피 칠을 하고 와 있는 것인지 하연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곱상한 생김새와는 달리 험악하게 자신을 닦달하는 엘류시온이라는 남자가 자신을 누군가에게 데려간다는 이야기를 추측해 볼 때. 상대는 살인을 일삼는 인신매매범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자신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자신의 말을 알아들은 듯 더 이상 훌쩍이지 않는 하연을 바라본 엘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분명 인간의 냄새가 나는 데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는 어딘지 모르게 바이욘느 전하나 마왕님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혹시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었지만 상대는 의외로 높은 신분일지도 몰랐다. “제 이름은 엘류시온입니다. 이곳 마왕님의 서쪽 숲을 수호하는 자 중 하나입니다. 실례지만 어느분의 이름밑에 계시는 지요..”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엘류시온은 상대의 성을 물어보았다. 왕족 중 인간과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얻는 경우도 있었기에 그는 그 유력한 후보자인 누군가를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물은 것이었다. 비록 사생하라 하더라도 그 힘은 하위마족보다는 강했고 반쪽이나마 왕실의 피를 이엇다는 사실은 그 존재가 왕실의 소유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왕실의 재산에 손을 대는 것은 중조에 속했다. 갑자기 정중하게 나오는 상대에게 당황하고 있던 하연은 그의 말속에 들어있는 한단어에 뒬듯이 놀랐다. “마...왕? 당신... 누구야. 설마 마족..?” 상대의 의외의 반응에 엘류시온은 코웃음을 쳤다. 상대는 인간임에 틀림없었다. 방금 보인 그 표정과 태도는 인간이 자신의 정체를 처음 알아차렸을 때 보이는 반응과 똑같았다. 어디서 그런 이상한 기운을 내뿜는지는 몰라도, 분명 공식적인 왕가의 재산은 아닐터였다. “인간 주제에 어디에 대고 반말이냐!” 친절해 졌다고 생각했더니 순식간에 돌변하는 상대의 태도에 놀랄 겨를도 없이 하연은 상대가 마족이라는 사실에 정신이 멍해졌다. 아닐거라고 마족이 저런 누부시게 빛나는 은색머리카락을 가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저 몸에서 풍겨나오는 기운은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하연은 생전 처음 비굴스러워 저는 자신을 한심스럽게 생각하며 조심조심 말을 건넸다. “여긴 마계....?” 무서워서 뒷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연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듣든이 쪽에서는 충분히 반말로 들리게 충분했고 그것은 엘류시온의 화를 북돋았다. 평소의 핏기 없이 창백하던 얼굴이 검푸르게 변한걸 보면 그가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엘류시온 자신에게 지금까지 이렇듯 오만방자하게 행동한 ‘것’은 시노페를 제외하고는 처음이었다. 마계라면 분명 눈앞에 있는 녀석이 자신을 납치한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름을 물어보는 것으로 보아 금방 죽일것 같지 않다는 생각에 하연은 좋은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피는 아마도 저녀석이 묻인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인신매매범이라고 보기엔 너무 잘생긴 외모였다. 은색 머리카락이라니... 참 희한하네. 하연은 무심코 멍하니 그의 머리칼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음... 실버블론드라. 막연히 윤기나는 흰색이라고 생각했는데. 헉. 그러고 보니 눈동자도 은색이네. . 왠지 무서운걸.. 이런저런 생각에 그를 유심히 띁어보던 하연은 그만 멍하니 그의 얼굴만 보고 있었다. 인상을 가득 쓰고 있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아마도 방금 멍하니 그를 처다본 것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여긴 마계...? 이것이 어디다 대고 반말이냐!” 버럭 화를 낸다. 생긴거랑 달리 엄청 다혈질인 녀석이었다. 게다가... ‘짜악!’ ‘성질까지 더럽구나.’ 눈에서 불이 번쩍했다. 오른쪽 뺨이 화끈거렸다. 하연은 얼떨결에 얻어맞은 뺨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다시 엘류시온을 보았다. “저기.... 누구신데요?” “머리까지 나쁘군.” “...?” 말없이 자신을 지그시 노려보는 눈빛을 애써 피하며 하연은 또 자신이 뭘 잘못 말했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엘류시온이 자신의 이름을 말한것은 완전히 잊은 상태였기 때문에 상대의 이런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규칙만 아니었어도 너 따위 인간 침입자를 살려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는 수 없지. 자. 가자.” 그리고는 다짜고짜 하연의 손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손목을 잡은 엘류시온의 손은 여자의 손이 아닐가 할 정도로 하얗고 부드러웠다. 단지 여자의 손이라고 보기엔 무지막지할 정도의 괴력이 달랐기에 하연은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잠깐만요.” “뭐냐?” 엘류시온은 여전히 하연을 질질 끌고 가면서, 노려보았다. 이 인간을 죽여서 그냥 입을 막아치울까, 아니면 원칙대로 바이욘느님께 데려갈까 망설이던 엘류시온은 짜증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디로 가는거죠?.” 상대가 개같이 굴어도 나는 어디까지나 인간이니까. 하연은 꾹 참고 다시 한번 물었다. 질질 끌고 가던 엘류시온이 갑자기 멈추고 하연은 노려본다. 황당하다는 듯한 눈빛이다. 그러더니 갑자기 아까의 살벌한 눈빛이 다시 반짝한다. 헉! 이번에는 발로 짓밟는거 아냐? 잠깐 동안의 만남이긴 하지만 왠지 이놈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지금... 나한테 말한거냐?” ‘그럼 여기 너랑 나 말고 다른놈이 있다는 거냐. 얼굴예쁜 여자는 머리가 비었다는 말 따윈 믿지 않지만 최소한 여기 남자 아니 여기 이녀석한테는 정확한 표현인 것 같아, 게다가..’ “휴우..성격만 아니라 귀에까지 문제가 있잖아. 아니 혹시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지도..” 자신도 모르게 생각이 말이 되서 흘러나오는 것을 하연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상대의 얼굴이 점점더 험악해 진다는 것도 물론 보지 못했다. ‘퍼억!’ 그리고는 암흑이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불행히도 날 아까보다 더한 고통을 느꼈을 뿐 정신은 멀쩡한 상태였다. 흑흑 역시 모험은 하는게 아니였어. 나의 감을 믿어야 했는데. 여전히 질질 끌려가면서 놓여있는 왼쪽팔로 양 뺨을 차례차례 문지르는 하연이었다. “엘류시온! 또 몰래 도망치는 것이냐!” 헉! 이놈은 또 누구야. 밤하늘 보다 검어보이는 머리카락을 가진 마족의 전형적이 모습을 가진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 날 끌고 가는 녀석을 보고 아는 체를 했다. “보면 모르냐. 카란?” 방금의 말을 들어보니 이녀석의 이름은 엘...뭐시기다. 엘-그냥 편의상 엘이라 부르기로 했다, 절대!!!! 애칭이 아니다!-은 하연을 한번 더 째릿 흘겨보더니 카란 앞에 들어올려보였다. 끄응.. 난 짐꾸러미가 아니라구. "근데 네 손에 있는 그건 뭐냐? 완전히 먼지투성이잖아." 그가 가리킨 손가락 끈에 땅바닥을 한참이나 끌려온 덕에 온통 흙투성이가 된 하연이 널부러져 있었다. "눈으로 보고도 모르겠냐?" 엘이 한심하다는듯 카란을 바라보았다. "글쎄 여자를 싫어하는 네가 데리고 온 녀석이라면.. 분명 흔히 볼 수 있는 녀석은 아닐것 같은데?" 검은 눈동자가 불길하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하연은 아까 부딪친 엉덩이를 주무르며 불길한 예감에 애써 시선을 피했다. 저 눈빛은 관심있음’ 이다. 만약 그것이 이성으로서의 건전한(?) 눈빛이었다면 하연이 이렇게 까지 떨고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분명 엄.청.난. 골칫거리로 보이는 녀석이 관심을 보이다니 절대 사절하고 싶었다. 순간 카란의 눈빛이 아까와는 이질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설마 이것 인간이냐?" 아까까지의 관심어린 눈빛은 어디가고 더러운 것을 보았다는 듯 경멸어린 눈빛을 보내는 카란이었다. 그것 참 잘도 변하는군. 엘이나 카란이나 연기자로 나섰으면 벌써 떼돈 벌었을지도 모르겠다. 저렇게 풍부한 얼굴 변화라니. “침입자다. 보다시피 인간이지. 조금 특이한 기운을 풍기고 있기는 하지만 왕실의 소유는 아닌것 같다아. 내 지금까지 이런 건 처음이다.” 엘은 한숨섞인 목소리로 이마에 짜증이라는 두글자를 새겨넣고 있었다. “침입자라니? 인간이 말인가.” “젠장, 하필이면 내가 경계서는 날 이런일이 생기다니. 으윽 이건 분명히 아버지의 농간이라고! 날 골탕먹이려고 일부러 인간을 데려온게 틀림없어!! ” “..... 그래도 내 주인이신분이다. 그분을 욕되게 하는 말은 하지않는게 좋을 거야.” 아버지란 말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그 대상을 두둔하는 카란이었다. “넌 말이야. 그 고지식한 면을 고쳐야되. 뭐 어떠냐? 아무도 안보는데..” 갑자기 분위기를 잡는 카란의 대답에 빙긋빙긋 웃는 엘의 눈동자가 재미있다는 듯이 반짝였다. “그런데 얼굴이 왜 이 모양이지? 힘도 별로 없어보이니 잡기 위해 이렇 필요는 없었을 것 같은데?” “나도 그렬러고 했어. 그런데 말이야 이게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잖아. 감히 나 엘류시온한테 말이야! ” “결국 네 멋대로 쳤다 이거군.” 다들 두려워서 눈을 피하는 엘의 눈빛을 마주보고 꼬박꼬박 말대꾸를 했다는 눈앞의 이것에 대해 카란은 흥미가 생겼다. 아마 저 인간은 모를 것이었다. 저 엘류시온 이라는 마족이 사실은 얼마나 잔혹한지. 빙긋빙긋 잘웃고 잘 성내는 것처럼 보여도 손속이 잔인하기로 유명한 녀석이었다. 인간이어서 조금 신경을 써서 이 모양이지 원래 성격대로였다면 벌써 몸의 한쪽이 떨어져 나갔을 것이 틀림없었다. “넌 꼭 그런식으로 말해야 속이 시원하냐? 그저 좀 귀여워 해준 거라고.” “..... 관두자 어쨌든 궁으로 갈꺼면 서둘러야 해." 의외로 카란이 선선히 물러서자 카란과 말싸움을 해봤자 밀리는 건 자신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엘은 그만 말씨름은 끝내기로 했다. “조금 있으면 어두워 질꺼다. 어두워 진 이후에는 왕의 허락없이는 죄인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지? 근무지 이탈에 침입자 방조라는 직무유기, 그리고 사후처리 미흡이라면 상당히 오랫동안 감옥에 있어야 하겠군." 용케도 엘의 치부만을 들추어 내어 콕콕 지르는 카란이었다. 엘의 얼굴이 뭐 씹은 것처럼 일르러졌다. 어쩐지 져주는 것처럼 말을 하더니 뒤통수를 치는 저 말재주에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엘의 시선을 무시한대 카란이 하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단은... 어디 한번 구경이나 해볼까?” 하연은 멍하니 눈앞의 남자를 처다 보았다. 카란이라고 불리운 이 남자는 아까의 엘과는 달리 완전히 검은색 그 자체였다. 검은색이 이렇게 반짝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얼음처럼 서늘한 생김새의 미남 싱긋 웃는 것은 솔직히 이런 미남이 나에게 미소짓고 있어~~~! 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공포영화를 보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숨이 막힐듯이 차가운 이미지가 갑자기 미소하나로 화사하게 바뀐다는 설정은 역시 만화에서나 가능한 거였어. 하연은 그런 만화를 그린 인간들을 마음속으로 저주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아까의 흙먼지 때문에 목이 따끔따끔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이 녀석은 마치 신기한 동물을 구경하는 양 하연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그 집요한 눈빛에 '뭘봐!' 라고 소리치려다 이놈이 그 사악한 엘이란 녀석의 친구인 것을 깨닫고 입을 두 손으로 막아버리고 말았다. 언제나 주인을 배신하는 이 입이 말을 먼저 뱉어내기 전에 사전 봉쇄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네가... 하연인가?” 눈에 담긴 호기심과는 달리 카란이 나직히 가라않은 목소리로 하연에게 물었다. 카란의 암청빛 눈동자가 가만히 하연를 들여다 보았다. 짧은게 손질된 검은 머리를 배경으로 약간은 그을린듯한 얼굴에서 반짝이는 눈동자는 왠지 어둠속에서도 빛날듯 그렇게 빛나고 있었다. 꽤 잘생긴 녀석이잖아. 핫 내가 무슨 생각을? “그런데...습니다.” 아까의 피눈물 나는 교육 덕분에-엘의 덕분이다- 하연의 말투는 경어체로 바뀌어져 있었다. 하연의 손은 여전히 엘의 손에 의해 부은 손목과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많이 아프니?” 카란의 측은하다는 얼굴에 하연은 그만 엄청난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럼 아프지 안아파요? 이것좀 보라구요. 저 엘인지 엔인지 하는 놈이 날 무지막지하게 내려치더니 짐짝처럼 사람을 질질 끌고 왔는데 안 아프면 그게 인간이예요?” 헉!!! 갑자기 카란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갑자의 주위의 기온이 급강하하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저놈 엘의 친구였잖아! 친구가 아니라면 분명 방금 전 자신이 들었던 대화는 불가능 할 터였다.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카란의 음산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조용히 들려왔다, “걱정마라. 내일 네목이 몸에서 떨어지는 고통보다는 덜할테니.” “!!!!” 축축한 바닥이 싸늘하게만 느껴졌지만 눈을 뜨고 싶지는 않았다. 믿기 힘든 현실을 눈으로 인해해야 한다는 사실이 몸서리쳐지게 싫었던 하연은 눈을 감은채 그대로 있었다. 성역을 침범했으니 죽여야 한다는 카란의 말이 너무도 담담해서 오히려 엘이 화를 내며 말할 때보다 더 현실감 있게 다가왔었던 기억이 자꾸 떠올랐다. "깨어나셨군요." 누군가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누워있던 하연에게 조용히 말했다. 자신 말고도 누군가 있다는 생각에 놀란 하연이 몸을 돌렸다. 어둠속에 묻혀있던 상대는 물이 흐르듯 매끄러운 동작으로 몸을 돌려 하연에게 다가왔다. 섬세하게 생긴 하얀 얼굴에 자연스럽게 구부러진 날렵한 검은 눈썹. 그 아래 빛나는 검은색 눈동자가 하연 얼굴을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좀 어떠십니까?" 하연은 남자를 잠시 바라보다 자꾸만 눈을 감고 싶은 욕망을 뿌리치고 몸을 일으켰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까까지는 자신밖에 없던 이곳에 잠든 사이에 들어왔고 자신과 같은 감옥에 있다는 것은 그도 죄수라는 것을 의미했다. "누구세요?" 밤새 추운 곳에서 지낸탓에 머리가 핑 도는 현기증과 오한을 느끼며 하연은 침착하게 말하려 애썼다. "전..다렌이라고 합니다." 상대의 말은 약간 망설이는 듯 했지만 하연의 개의치 않고 다렌이라는 남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은 무슨 죄를 지은거죠?" "전 그들에게 해가 될 만한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 어쨌든 다렌도 나처럼 내일 바이욘느 전하라는 사람에게 가는 건가요?” 하연은 상대의 말이 왠지 미심쩍었지만 세상에 누가 자신이 죄인이라고다 스스로 말해겠는가 지금 하연 자신도 그 질문에는 무죄하고 대답할 것이 분명했기에 다렌의 말을 무시하고 날카롭게 되물었다. 하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다렌이 몸을 일으켰다. "그를 만나는 것은 당신입니다." "당신이라니요! 당신도 나와 같은 죄수가 아닌가요? 그렇다면 어째서 여기있지요? 당신은 대체 누구에요?" 다렌이 그들이 갖혀있는 감옥의 문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 언제든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그럼 나중에 다시 뵙지요." 엘이 멍하니 입술을 벌렸을 때 이미 다렌은 문을 나선 뒤였다. 굳게 잠긴 문을 열고 나간 것이 아니라 그저 몸이 문에 흡수되듯 문을 통과하여 사라져 버린 것이다.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유령인가? 말도 안돼! 그럼 내가 미치기라도 한건가! 아니야 어쨌든 내일이 되기전에 여기서 빠져나가야 되. 그런데 여긴 도대체 어디지?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기다릴 거야 엄마랑 아빠랑 동생이.. 집에서..날 기다릴텐데.. 언제나처럼 내 이름을 부르면서 이제 왔냐고.... 눈을 감았다 떠도 보이는 것은 몸서리쳐지는 악몽같은 현실이었고 그것은 태풍같이 그녀를 덮쳤다. 이건 꿈이야! 지독한 꿈일 뿐이야! 하연은 이를 악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성역에 침입한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참살이다.> 하연은 입 속으로 나지막이 카란이 한 말을 중얼거렸다. 파리한 얼굴에서 조금씩 핏기가 빠져나가며, 마치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그렇게 무감각한 상태로 얼마나 있었을까.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하연의 정신을 들게 한건 복도를 울리는 단호한 발소리였다. “전하! 굳이 이런 누추한 곳까지 찾아오실 필요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긴장이 뱃속에서 점점 단단하게 뭉쳐지기 시작했다. 하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두 손을 마주잡고, 차가운 돌 벽에 육중하게 세워진 문을 바라보았다. 전하라는 자가 자신을 만나러 올리는 없었다. 자신은 낮의 그 두 사람이 말한 죄인이었으니까. 끼이이이익 문이 열렸다. 무거운 문이 시끄러운 소리를 냈지만 움직임만은 매끈했다. 귀를 거스르는 소리에 하연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그 순간 강렬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가 그녀의 시선을 번개같이 옭아맸다. 하연은 숨을 죽이고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눈을 사로잡고 있는 황금색 눈동자에서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공포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어디있나?” “분..명 .. 여기계셨습니다. 전하 !!” 그들의 목소리가 하연의 모든 걸 낱낱이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눈동자에서 옴짝달싹 못하던 그녀를 풀어 주었다.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남자는 자신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자신과 함께 있던 아까의 다렌이라는 남자를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다렌이라는 사람은 방금 사라졌는데요.” 하연은 전하라고 불리우는 사람 앞에서 사시나무떨듯 떨고있는 한 남자를 도와주고자 한 말이었지만 상대는 오히려 하연에게 버럭 소리를 지렀다. “무엄하다! 감히 침입자 주제에 바이욘느전하님께 함부로 말을 올리다니!” “허락없이 말을 한것은 바로 너다 첸.” 아까의 목소리가 싸늘한 눈빛으로 첸이라 부르는 남자를 향해 사정없이 내리꽃혔다. 그가 고개를 돌려 하연을 바라보았다. 그의 모든 것이 진한 황금빛 눈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부드러운 황금빛 눈썹, 곧게 뻗은 콧날, 아름답지만 딱딱해 보이는 얇은 입술과 단호한 턱, 그리고 얼굴 주위로 물흐르듯 흘러내린, 눈동자와 같은 빛깔의 금빛 머리카락.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부드러운 기운이 흐르는 자였다. 이 사람이 바이욘느?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넌 대체 누구냐?” “함부로 부르면 안되는 이름인줄 몰랐습니다. 제가 물어보자 이름을 알려주기에..” “그가... 너에게 이름을 알려줘?” 하연은 시선을 내려, 당당하게 벌리고 있는 긴 다리를 바라봤다. 하연의 시선이 탄탄하고 힘찬 선을 그리는 상대의 몸을 타고 올라갈 때만 해도 하연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하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생각없이 저지른 일이었지만 자신을 상대를 노골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너는 왜 여기 있는 것이냐" 하연이 상대의 짤막한 질문에 성역을 침범해서 내일 당신을 만나기 위해 있다는 대답을 해야 하나 망설였을 때, 뒤쪽에 서 있던 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인간의 몸으로 성역을 침범한 죄입니다." "그래서?" "내일 전하께 아뢰고 즉시 처형할 예정이었습니다." 하연이 바로 눈앞에 버젓이 앉아 있는데도 바이욘느 전하라는 사람과 첸이라는 두 남자 모두 그녀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다. "왜 즉결처분을 하지 않은건가?"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에서 아까는 느끼지 못한 희미한 짜증이 느껴졌다. "그것이.. 마족이 아닌 인간이라서 어떻게 그곳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하여 내일 전하를 찾아 뵙고 그 후에 처형을 할 예정이었습니다....." 바이욘느는 미간을 찡그리며 짙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여전히 자신을 무시하는 두 사람의 행동에 점점 불쾌감이 더해지고 있었다. 어짜피 저자들의 말대로라면 내일 죽을 것이 뻔했다. 그럴 바에야 할 말이라도 다하고 싶었다. "당신이 바이욘느인가요?" 불쑥 나온 하연의 질문에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첸이라는 남자가 뻐끔거리자 감옥안에는 한순간 숨막히는 침묵을 맴돌았다. 바이욘느가 조금은 날카로운 눈으로 다시 하연을 향했다. "그렇다." "이제 날 성역을 침범했다고 해서 죽일건가요? 그러면 차라리 지금 죽여주었으면 좋겠네요. 전 죽음을 기다리며 그 초조함을 즐기고 싶어하는 새디스트가 아니라서요.“ “죽고싶은건가.” 하연이 말을 끝마치는 순간 바이욘느의 시선이 자석에 이끌린 듯 하연에게 날아갔다. "살고 싶어요." 하연은 그저 무표정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상대의 질문이 단순한 물음에 불과한 것이지 자신을 살려주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데리고 나와라. 나와 함께 궁으로 간다.” “전하!!” 첸이 말도 안된다는 듯 몸을 돌려 문밖으로 향하는 남자를 향해 소리쳤지만 그 소리에 뒤돌아보는 바이욘느의 차가운 눈빛에서 그것이 진실임을 느끼고는 곧 입을 다물었다. 바이욘느의 의외의 행동에 놀란 하연이 그에게 말했다. "절 살려줄 건가요?" "일단은." 상대의 진의가 의심스럽다는 생각이 확연히 드러난 그녀의 질문에 바이욘느가 검을 내려치듯 단호하게 답했다. 일단은? 그럼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는 건가? 그럼 지금은 왜 살려두는 거지. 온갖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지만 더이상의 질문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목소리에 하연은 입을 다물었다. 바이욘느란 자의 행동에 다른 의도가 있건 없건간에 이것만은 분명했다. 만약 지금 그의 말을 거절하면 내일이후의 태양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연은 자신을 노려보는 첸의 시선을 무시하고 이미 밖으로 나간 바이욘느의 뒤를 따라 문밖으로 발을 옮겼다. "이.. 이런 아무리 바이욘느전하지만.. 여봐라! 어서 펠리펜 마왕님께 연락을 넣어라!" 하연과 바이욘느가 사라진뒤 정신을 차린듯한 첸이 허겁지겁 문밖에 서있던 자신의 서기관을 닥달했고 한밤중 조용하던 성의 지하는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잠에서 깨어난 하연은 잠시 방안을 둘러보다 팔을 뻗어 무늬가 정교하게 조각된 창문의 빗장을 풀고 그녀의 키보다도 높은 거대한 창을 열어 젖혔다. 창문 쪽으로 한 걸음 내디딘 하연은 눈이 부시도록 환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자 눈살을 찌푸리고 손으로 빛을 가렸다. 그 즉시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한 싸늘한 바람이 몰아쳤다. 하연은 눈을 감고 신선한 공기가 몸 안 가득 차 오를 때까지 깊이 숨을 들이 마셨다. “일어나셨습니까.” 언제 문을 들어왔는지 시녀로 보이는듯한 한 여인이 양팔에 무엇인가를 가득안고 들어오고 있었고 그뒤를 따라 여러명의 시종들이 커다란 욕조를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바이욘느님의 지시로 왔습니다.” 시녀는 어젯밤 바이욘느 전하가 데려온 하연을 조심스럽게 훔쳐보았다. 확실히 마족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인간같은 외모였다. 그러나 마족으로 치면 못생긴 것이라고 볼 정도로 굴곡없는 몸매에 밋밋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풍기는 기운만은 왕족과 비슷한 기운이었다. 어떻게 인간이 저런 기운을 뿜어내는 지는 몰라도 눈에 드러난 육체는 분명히 인간이었다. 바이욘느 전하의 일이라면 언제나 날카로워지는 피오렌님이 그렇게 조바심을 칠 것 같지는 않아보였기에 시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연의 앞에 놓인 욕조에 순식간에 뜨거운 물과 찬물이 차례로 부어졌다. 그리고 무엇을 넣었는지 향기로운 꽃내음이 온 방을 가득메우고 욕조에 물이 절반정도 차자 시종들은 아까처럼 질서정연하게 문밖으로 사라졌다. “옷을 벗으시지요.” 하연은 깜짝 놀라 상대를 바라보았다. 분명 여자임에 틀림없었으나 처음보는 사람앞에서 옷을 훌렁훌렁 벗을수는 없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모두 옷을 벗고 목욕을 하는 곳인 대중탕에도 한번도 간적이 없는 하연은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다. “저 혼자 할께요! 저기 그분이 뭐라고 하셨는지는 몰라도 저 혼자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예전부터도 혼자 해 왔거든요.” “그럼 잠시 후 뵙지요, 그리고 이것이 갈아입을 옷입니다.” 보통 소설에서는 절대로 그럴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보통이라 하연은 필사적으로 말했지만 시녀인 트리안이 이렇게 말하고는 허리를 살짝 숙이고 문을 향해 몸을 돌리자 잠시 허탈감이 몰려왔다. ‘바이욘느 전하께서는 그저 깨끗이 한 뒤에 데려오라고 하셨으니. 상관없겠지.’ 기운은 왕족인 것 같았지만 육체는 분명 완전한 인간이었고 그런 천한 인간의 몸에 손을 댄다는 것은 아무리 자신의 임무라 하나 내키지 않았기에 상대의 말을 받아준 것이었다. 문을 나선 트리안은 발걸음을 옮겨 바이욘느님의 샨트이신 피오렌님의 처소로 황급히 발을 옮겼다. 피오렌님께 그 아이에 대해 빨리 보고를 드려야 했다. “이거 도대체 어떻게 입는 거야!” 바닥에 깔린 고급스런 붉은 양탄자에 물이라도 묻일까 조심조심 모욕을 마친 하연의 검은 머리카락은 촉촉이 젖어 아직도 물기가 뚝뚝 흘러나오고 있었다. 목욕을 마친후 한참이 지난지라 이제는 슬슬 추워지기까지 했다. 아까 그 시녀는 금방온다더니 왜 아직까지 안오는 거야라며 상대를 원망하던 하연의 귀에 반갑게도 문이 열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다행이다! 이 옷을 어떻게 입는지 몰라서 곤란했거든요. 어떻게 입는 것인지좀 알려주시겠어요?” 문을 열고 등장한 것은 아까의 시녀보다는 한참 키가 커 보이는 긴 하늘색 머리를 가진 아름다운 여자였다. 아까의 시녀와는 달리 어깨에서 발목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가운같은 것을 걸치고 있었지만 아무말 없이 다가와서 하연이 들고 있던 옷을 주섬주섬 챙기는 것을 보니 시녀는 맞는듯 했다. “혼자서 입기에는 벅찬 옷입니다. 저의 도움이라도 원하신다면 수발을 들어드리지요.” 여자치고는 낮은 저음의 목소리라고 생각하며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속옷으로 보이는 것은 어느정도 챙겨 입었기에 맨몸이라야 얼마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 정도 보이는 것쯤이야 목욕할 때 누가 도와주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바이욘느형님이 데려왔다는 아이라기에 잠시 구경이나 할까하고 문을 살짝 열어보았던 레기어스는 어쩌다 보니 시녀로 오인받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지만 굳이 그것을 정정해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하연이 시키는 데로 움직였다. ‘여자였나?’ 레기어스의 푸른 눈에 이채가 서렸다. 겉보기에는 아직 소년으로 보이는데 얇은 속옷사이로 보이는 것은 분명히 여인의 가슴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들고 있는 것이 남자의 옷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아마도 이 옷을 보내라고 지시한 바이욘느가 다른 이들의 생각처럼 침실상대로 방안에 들인 것은 아닌 듯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길길이 날뛸게 분명한 피오렌을 상대하고 있는 시녀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원통해 할까?’ 갑자기 킥킥대는 자신의 웃음에 하연이 의아스럽다는듯 바라보자 금새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온 레기어스는 풍성한 푸른 색 윗도리를 하연에게 입혀주었고 하연은 잠시 머뭇거리다 조금은 어색해 하며 옷을 입었다. 처음 입어 보는 고급스러운 옷이었다. 살갗에 닿은 느낌이 어찌나 부드럽고 따스한지 마치 깃털을 걸친 것 같았다. ‘옷을 입을때 누군가의 도움은 받아본 적이 없는 얼굴이군.’ 레기어스가 나름대로 하연에 대한 판단을 마쳤을 무렵 누군가 문밖으로 쿵쿵거리며 다가왔고 방안에 있던 하연이 누굴까라고 생각 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열렸다. “네가 어젯밤에 바이욘느님과 함께 밤을 보낸 인간이냐?” 바닥에 끌릴 것 같은 타오르는 붉은 머리카락과 크림빛처럼 부드럽게 반짝이는 피부의 조화가 사람을 순식간에 멍하게 만들정도로 매혹적이였지만 그런 여인의 붉게 반짝이는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결코 아름답지는 못했다. “지난밤 같은 방에서 함께 있었다는 것은 맞는데요..” 그녀의 뒤로 우르르 시녀들이 따라 들어오는 것을 보아서는 분명히 상당히 높은 신분의 여인이 틀림없었기에 하연은 존대를 했다. 그러나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피오렌의 손의 높이 올라가더니 하연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다가왔다. 탁. 꼼짝없이 그 손에 맞는다고 생각한 하연이 눈을 질끈 감았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형수님. 지나치십니다.” 아까 옷을 입을때 도와주던 시녀가 상대의 팔을 가로막고 있었다. 아까의 무표정하던 얼굴과는 달리 푸른 눈동자에는 왠지모를 즐거움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형수님이라니? “이렇게 추태를 부려보여봤자 바이욘느 형님의 미움을 받을텐데요.” 순간 엄청난 기세로 하연과 푸른머리의 남자를 노려보던 피오렌의 기운이 수그러들었다.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에 잠시 눈물이 어리는 듯 하더니 격렬한 기세로 몸을 홱 돌리고는 소리졌다. “바이욘느 전하께로 간다.” 피오렌이 나가고 난뒤 레기오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믿을 수 없다는 경악에 찬 시선을 느꼈다. 파래졌던 얼굴이 다시 희어지고 희어진 얼굴이 다시 불타오를 듯 붉어졌다. 정말 얼굴색한번 잘 바뀌는군. “설..설마 남자?” 형수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분명히 누군가를 형으로 두고 있다는 것이고 방금말을 들어보면 바이욘느의 부인이 방금전 빨간머리이니까 눈앞에 있는 자는 바이욘느의 남동생이라는 뜻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맨몸을 맡기고 옷을 입혀주는데로 가만히 있었다고 생각하니 화끈 열이 올랐다. “내가 옷을 입혀준 여인들은 하나같이 좋아하던데. 설마 싫었던 거냐?” “누가 남자 따위가 옷을 입혀주는 걸 좋아한다..흡” 생각해 보니 상대는 전하라는 자의 동생이었다. 말을 함부로 했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다. 보기에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난폭한 마족-엘,카란,방금전 빨간머리-만 만났으니 하연의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질색하는 반응을 보니 아직 누구의 손도 타지않은 모양이었다. 사실 저 정도 외모라면 중간계라면 몰라도 마계에서는 군침을 흘리며 달려들 자는 없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저렇게 온몸을 붉게 물들일수 있다니. 언제나 적극적인 마계의 여성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레기오스는 호기심을 느꼈다. “정말 신선하군. 내궁으로 오겠어? 아니지 형님에게 부탁하면 주실지도 모르겠군” 어제에도 그리고 오늘도 눈이 돌아갈만큼 잘생긴 남자들이 자신을 따라오라는 식으로 말했지만 하연은 전혀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마치 동물원 원숭이를 보는 듯 호기심에 가득한 하늘색 머리를 가진 녀석의 말은 하연의 심사를 북돋우기에 충분했다. “내가 물건이냐! 함부로 넘기게! ” “몰랐나본데. 마계에서 인간은 물건이야. 그러니 얼마든지 넘기는게 가능하지.” 하연의 무례한 말에도 아무렇지도 않은듯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던 레기오스는 사나운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하연의 머리를 한번 쓰윽 문지르고는 유유히 방을 빠져나갔다. “저런 놈한테 내 몸을 보였다니..게다가 여자들이 좋아해? 바람둥이가 틀림없어!!” 바이욘느와는 달리 수많은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 레기오스의 본질을 한눈에 깨달아버린 하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행이라면 그의 시선이 장난감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몸을 보였다는 수치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해 어째서 저 인간에게서 시노페의 느낌이 드는거지? 생긴것도 목소리도 그렇게나 다른데.. 우습군 시노페가 죽은지도 벌써 10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런 감상에 빠지다니..” 100년전에 알 수 없는 사고로 죽어버린 시노페는 지금 그녀의 아버지의 궁 어딘가에 완전히 살아있을때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했지만 단지 떠도는 소문일뿐 누구도 그것을 본자는 없었다. 하지만 그때의 사고에 살아남을 수는 없다는 것은 당시에 그 장면을 목격한 레기오스로서는 시노페의 죽음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은 피오렌이 한바탕 하고 있을 테니. 형님을 오후에나 찾아뵈어야 겠군.” 레기오스는 바이욘느의 집무실로 갈까 잠시 망설이다가 소란이 잠잠해지면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몸을 돌려 반대편 정원으로 이동했다. 이미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듯 한 여인이 다가오자 여인을 대할때면 레기오스의 얼굴에 늘 떠오르는 달콤한 미소가 걸렸다. 1회 카오메이 / 유리엘르 /차칸소녀 3회 유리엘르/카오메이 그리고 뜰에 글 남겨주신 이카엘님께 모두 감사드립니다^^ 새로 등장한 레기오스.. 바람둥이이지만 성격은 굉장히 좋답니다~(당연한건가요-_-;;) 썩세스 : 감사합니다^^;; 피오렌이예요, 고쳤습니다.(어째서.. 다들 침묵을 지킨거냐..) 03.28 18:49 거리의천사 : 시노페는 죽었다고 되어있는데 왜?<시노페의 손의 높이 올라가더니..>란 문구가 나올까요? 03.28 18:42 썩세스 : 앗,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03.28 02:51 고양이푸푸 : 100du는 오타인가요?;; 03.27 21:47 차칸소녀 : 우아~ 레기오스 맘에 든다.. 하연과 이어버려요~캬캬캬 03.19 15:34 유리엘르 : 억. 내, 내 이름이..[부들부들]........만세 해야하나... 03.02 02:12 sonicboom : ;;; 02.25 17:35 “뭐라! 분명 ‘그’가 그곳에 온 것이 확실하단 말이냐!” 그때의 일 이후 사라진지 수 백년이 지난자가 성역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에 놀란 마왕 펠리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언제나 귀찮다는 듯 권태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마왕의 모습에 놀란 첸이 부들부들 떨었다. “예, 분명 그분의 이름을 입에 올린 인간이 있었습니다.” “인간? 설마 성역에 인간이 들어갔단 말인가!” 가늘게 좁혀진 마왕의 눈에서 엄청난 기운이 흘러나왔다.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공포에 첸의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분의 이름을 올리서는 안된다는 마왕의 명령과 ‘그’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한말이 섞이다보니 실수를 한 것이다. 마왕의 분노가 성역을 소흘히 관리한 자신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한 첸은 황급히 변명을 했다. “죄..죄송합니다. 하지만 어째서 인간이 그곳에 들어가 있는지는...그리고 그 인간은 바이욘느전하께서 이미 궁으로 데리고 돌아가신지라..” 그러나 펠리펜 마왕의 얼굴은 분노가 아니라 기쁨이었음을 첸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첸의 입에서 바이욘느의 이름이 나오자 순식간에 그 표정은 사라져버렸다. “바이욘느 녀석이?” “그래서 아직 처벌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처벌이라니! 감히 누구를 처벌한다는 말이냐! 괘씸한것!” 평소에도 바이욘느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는 마왕에게서 의외의 반응이 나오자 땅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린 첸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언제나 마왕과 대립하던 바이욘느가 마왕의 허락도 없이 죄인을 빼내어 갔다는 사실에 화를 내는것이 아니라는 지금의 상황은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당장 내 눈앞에 그 인간을 대령하도록 해라! 단...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한다. 만약 이것이 누설되면 네 목은 더 이상 몸에 붙어있지 못할 줄 알아라! 그러나 임무를 잘 완수한다면 큰 상을 내리마.” 펠리펜은 2백여년전 다렌이 자신에게 심장석을 가져왔을 때를 떠올리며 첸에게 명했다. 바이욘느가 어디까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연히 그리하였음에 틀림없었다. 시노페가 죽은뒤100년 뒤에 그 숲에 나타난다는 인간만 있으면 시노페가 깨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있다면 아직까지 잠잠할 리가 없었으니까. ‘이제 내 딸이 다시 눈을 뜨는 것을 볼 수 있어. 이번에는 빼앗기지 않을테다!’ 아무도 없는 허공을 노려보던 마왕 펠리펜의 머릿속에 과거의 영상이 흘러지나갔다. * * * * <천계와 마계인 사이에서는 혼혈이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시겠지요. 그러나 그들이 물의 심장석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가능합니다.> 에네스틴과 엘라힘의 혼례가 있은 다음날 홀연히 찾아온 다렌의 말에 펠리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그게 사실인가! 그렇다면!!> 그것이 사실이라면 에네스틴과 엘라힘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에게 속해 있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의 사랑의 결실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그나마 위안을 삼고 있던 펠리펜은 다렌의 말에 절망적인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물의 심장석은 이미 사라져버린 고대 신족의 후예만이 가지고 있으니 사실상 그들이 아이를 갖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없는 것을 무엇하러 이야기 하는 것인가.> <만약. 제가 그 물의 심장석을 가져다 드리면 저에게 무슨 대가를 주시겠습니까> 그 때 펠리펜은 다렌과 마왕이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계약을 맺었다. 절대적이던 마왕의 힘이 지금처럼 분산된 것도 그때 계약의 영향이었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품은 모체는 아이의 탄생과 동시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도 채 100년을 넘기지 못합니다.> 수천년에서 많게는 1만년이상을 사는 마족에게 겨우 100년이라니. 펠리펜은 다렌의 말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마음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에 절망감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육체가 보존되어 있다면 정확히 잠든 후 100년 이후에 다시 깨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온전히 마왕님의 것이 되겠지요. 어떻습니까. 그래도 계약조건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 * * * 마왕 펠리펜은 모든 시종을 물리고 마왕성에서도 제일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마법으로 보호되는 문을 몇 개나 지나고 어둡고 눅눅한 습기로 가득찬 차가운 복도를 거쳐 그는 마왕성의 제일 아래쪽에 위치한 커다란 공간에 도착했다. “마왕 펠리펜이 어둠과 암흑의 권능으로 명하니 공간은 그 길을 열어라!” 펠리펜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 갈리며 그곳에서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이 쏟아져 나왔고 마왕은 주저없이 그곳으로 몸을 옮겼다. 펠리펜이 도착한 곳은 빛도 어둠도 아닌 어슴푸레함이 가득한 이상한 공간이었다. 사방이 돌로 만들어진 벽으로 되어 있었고, 일반적인 돌들과는 달리 은은한 은빛을 내뿜는 벽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바닥은 삐걱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단단한 참나무, 거기다가 그 위는 최고급 적색의 양탄자가 폭신하게 깔려있었다. 방안에 버티고 있는 유일한 가구라고는 3~4명이 자도 충분할 정도의 거대한 침대였다. 기둥은 반짝반짝 윤이 나는 상아, 덧붙여진 장식은 보기 드문 다크 사파이어와 묘안석이고, 심지어 기둥 사이를 지탱하는 향나무에도 루비와 에메랄드가 점점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내는 옅은 푸른색의 휘장이 겹겹이 침대를 가리고 있었다. 어슴푸레한 빛 아래 창백한 얼굴의 소녀가 화려한 침상위에 누워 있었다. 침대를 덮고 있는 차가운 푸른 천이 반짝이는 소녀의 황금빛 머리카락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길다란 써니 블론드가 청색 비단 이불 위로 늘어져 있고, 아직도 살아있는듯 생생하기만 한 얼굴빛은 잠자는듯 고요하기만 했다. 겹겹이 쳐진 휘장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은 창백한 청색. 그래서인지 그녀의 얼굴은 그림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이 대단히 신비로웠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고 있던 마왕의 손이 조금씩 움직였다. 하지만 너무도 느려서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시간이 지나서 그의 손은 소녀의 얼굴을 따라 미끄러지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잠든듯 누워있는 소녀의 입술선을 따라 조심스레 움직였다, 마치 금방이라도 그녀가 깨어날듯 나비가 꽃을 스치듯이 가볍고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시노페...한번도 내 딸이라고 불러보지 못한 내 딸아...” 그때의 아픔이 다시 그의 심장을 찔러왔다. 처음으로 시노페를 보았을 때 그가 얼마나 가슴두근거리며 손을 내뻗었던가. 붉게 물든 하얀뺨. 에네스틴을 그대로 빼어담은 화려한 금발. 그리고 자신을 향해 생글거리고 있는 얼굴.. “제 딸입니다! 당장 손을 치우십시오.” 채 손을 대보기도 전에 엘라힘은 자신의 손에서 시노페를 엘라힘의 가슴에 품어안았다. 급격한 상실감에 펠리펜은 엘라힘을 향해 노성을 뿜었다. “어찌 그대아이라고 확신하는 거지 엘라힘! 그 아이가 내 아이일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는 거냐!” “더 이상 말씀하시면 아무리 당신이라 해도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시노페는 에네스틴과 저 사이에서 태어난 제 딸입니다. 장차 저의 후계자가 될 아이이니 무례한 언동은 삼가 주시지요!.” 예전 같았으면 무례하게 자신을 향해 말대답하는 엘라힘 따위야 즉시 죽여버릴 수 있었지만, 다렌과의 계약으로 마왕 펠리펜의 힘은 예전과 같지 못했기에 그는 울분을 머금고 그렇게 시노페를 보내야만 했고 이후에는 온갖 핑계를 대며 자신의 부름을 무시하는 엘라힘 때문에 시노페의 어린시절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나마 시노페의 얼굴을 자주 볼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아들이 태어나면서 해마다 있는 파티에서만은 참석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시노페를 지키듯이 서있는 엘라힘과 그의 가신들은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 거부했고 연회만 끝나면 황급히 자신들의 영지로 돌아가 버렸다. “아버지! 전 시노페랑 결혼할꺼예요! 허락해 주실꺼죠?” 어쩔 수 없이 샨트를 들여 낳은 아들이었다. 그 아이의 생일날에만 볼 수 있던 시노페만 아니었더라면 당장 죽어 없어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녀석이 어느날 자신에게 얼굴을 붉히며 한 이야기에 그는 그날 잠시 이성을 잃었다. 어차피 그 어미부터 자신을 사랑해서 샨트로 들어온것도 아니었고 아들이라는 녀석도 시노페에 비하면 능력이 턱도 없이 모자란 천치같은 녀석이었기에 조금의 동정심이나 혈육의 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석이 기어코..’ 자신의 분노를 피해 도망간 곳은 하필이면 엘라힘의 영지였고, 그곳에서 시노페과 함께 지낸다는 첨자의 말에 그가 수차례 자객을 보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아서 이제는 이복동생인 바이욘느의 오른팔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레기오스. 내 눈에 한번만 더 띄이면 죽인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니 얌전히 있는 것이 좋을거야.” 잠들은 시노페의 육신과 자신밖에는 아무도 없는 이공간 속의 방에서 마왕 펠리펜은 자신의 아들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따라오시지요.” 눈앞의 시종을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 하연은 차갑게 보이던 황금색 눈동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바이욘느에게 불려 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쪽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시종은 복도 맨 끝에 위치한 커다란 갈색 문 앞에 서서 문을 두 번 두들긴후 하연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문을 열었다. "들어가십시오." 시종이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서자 하연은 당황한 기색을 나타내며 그를 바라봤다. "저 혼자요?" "예." 극히 짧은 대답이 나왔다. 하연은 긴장으로 인해 심장 박동이 조금씩 거세지는 걸 느끼며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피할 수 없는 거라면 절대 겁쟁이처럼 굴진 않으리라라 결심했지만 정작 자신의 목숨을 잡고 있는 자를 만나면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ㅇㅇㅇ 하연은 용기를 북돋기 위해 결연히 가슴을 펴고 문을 열어 젖혔다. 그리고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심장은 담담한 표정과는 다리 금방이라도 튀어나갈듯 두근거렸다. 밝은 밖과는 달리 안은 엷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밖에 있던 시종이 문을 닫자 한순간 앞이 거의 안보일 정도로 시야가 어두워졌다. 하연의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두텁게 내려진 커튼과 육중하게 자리잡은 거대한 책상, 그리고 그위에 올려진 은색 촛대에서 작게 타오르는 불길을 담고 있는 초들이 보였다. 바로 그 촛대 앞에 바이욘느가 우뚝 서 있었다. 하연은 무의식 중에 숨을 죽였다.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위압감에 가슴과 목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하연에게 등을 보인 채 미동도 없는 바이욘느는 들고 있던 무엇인가에 살며시 입을 맞춘 다음 조심스럽게 책상위에 올렸다. 그 행동이 너무나 조심스럼고 부드러워서 마치 다른 사람이 그곳에 서있는 것 같았다.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사각형의 테두리에 받침이 달려있는 것을 보아선 누군가의 그림인 것 같았다. 자신이 있던 바이욘느의 방에도 그와 비슷한 것을 본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금발머리에... 굉장한 미인이었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바이욘느랑도 좀 닮은 것 같고.. 혹시 엄마나 동생인걸까?’ 하연과 바이욘느 둘 다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잔인할 정도로 숨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할 말이 있어요." 하연에 의해 끈질기게 이어지던 정적이 깨졌다. 그녀는 시시각각 커지는 긴장감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게다가 이 어두컴컴하고 묵직한 분위기에 금방이라도 짓눌리는 것 같았다. "말해라." 바이욘느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상태로 짧게 응수했다. "절 어떻게 하실 건지 알고 싶어요. 도와준 건....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전 당신이 만나고 싶어하는 다렌이라는 사람을 그때 처음 봤어요, 물론 그가 다시 온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전 이곳에 속한 사람도 아니고.. 그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언제까지 이곳에 있고 싶지는 않아요." 하연은 두근거리는 가슴 고동을 무시하고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지만 조금식 목소리에 떨림에 묻어나오고 있었다. "있고 싶지 않다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그제서야 바이욘느가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황금빛 눈동자가 어둠속에서 놀랄만큼 빛을 발하고 있었다. "넌 성역을 침법했고, 네가 이곳에 있고 싶지 않다면 난 너를 죽일 수밖에 없다." 소름 끼치도록 감정을 배제한 메마른 말투였다. 잠시 멍했던 정신이 바로 잡히며 불끈 화가 치밀었다. 정중했지만 자신을 무슨 벌레보듯 대하던 시종과 시녀들의 눈빛을 생각하면 한시도 있고 싶지 않았다. "제가 성역을 침범했다고요?" 흥분해 소리친 하연에게 돌아온 대답은 없었다. 오로지 여전히 자신을 싸늘하게 바라보는 한 쌍의 황금빛 눈동자만이 보일 뿐이었다. “젠장! 난 성역같은데에 침입한적 없어요! 생각해봐요! 말도 안되잖아요! 인간인 제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마족이 지키고 있는 그곳에 있을 수 있었겠어요! 그리고 이곳에 있지 않으면 죽이겠다니요. 보아하니 당신은 마왕도 아닌 것 같은데 마왕이 성역으로 정한 곳에 들어간 침입자를 자기 마음대로 죽이고 살릴수도 있는 건가요?” 격앙된 하연의 목소리가 방안 구석구석을 울리자 바이욘느의 입가에 처음으로 옅은 웃음기가 나타났다. 하연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녀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바이욘느는 그가 한발만 더 다가오면 두 사람의 얼굴이 서로 부딪힐 정도의 거리에서 멈춰 섰다. 하연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치려 하는 다리에 잔뜩 힘을 줬다. 그리고 바이욘느의 황금색 눈을 똑바로 올려다봤다. 어두운 방안에서 그의 눈은 조용히 타오르는 불길처럼 따뜻하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부드러움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던 눈동자의 변화가 하연의 말문을 막았다. 하연은 강렬하게 시선을 잡고 있는 바이욘느의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왜 이자 앞에서는 이리도 홀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걸까? 이 사람은 어떻게 이리 쉽게 날 꼼짝하지 못하게 하는 걸까? "내 보호를 벗어나면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이의 손에 죽게 될거다. 그리고 내가 너를 머무르게 한 것은 다렌을 만나기 위해서니 너를 떠나보내게 놔 둘 수는 없다. 그리고 설사 이 곳에서 나간다 치더라도 어디로 갈 생각이냐?" "그건....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미처 그것을 생각하지 못한 하연이 우물쭈물 하다가 생각나는데로 냉큼 대답했다. "한가지 알려줄까?" 하연의 건방진 대답에 잠시 말을 멈춘 바이욘느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곳은 마계다. 네가 있던 중간계로 가기위해서는 왕족이상의 실력자가 도와주어야만 해." 핵심을 찌르는 말에 움찔해 하연은 바이욘느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마계에서는 아는이도 그렇다고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차원계로 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왕족 이상의 능력자가 필요한 줄은 알지 못했다. "어떻게 돌아갈 생각이냐?" "어떻게든 돌아갈 거예요. 난 반드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구요. 반드시!" 내뱉듯 말하는 하연의 몸이 눈에 보일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하연도 알고 있었다. 마족중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인간따위는 벌레처럼 여기는 마족중 최고위에 속하는 왕족이 도와줄 리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여길 떠나겠느냐?" 하연이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바이욘느는 어느새 자신에게서 떨어져 책상위에 기대고 서 있었다. "당연하죠!" “그럼 가라. 단... 안전은 책임질 수 없다.” 하연는 이를 악물고 바이욘느를 노려보았다.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알수가 없었다. 하연의 예상과는 달리 바이욘느는 하연에게서 이미 시선을 거둔채였다. "무슨 소리죠?" 하연은 두 손을 움켜쥐고 말끝을 흐렸다. 왠지 불길하게 느껴지는 말투다. “주인이 없는 인간은 처음 본 마족이 소유하게 되는 것이 규칙이다. 너에게는 주인이 있는 인간이라는 증표가 없으니 누구든 너를 먼저보는 자가 너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게 되겠지.” “상관없어요!” 느릿느릿 말하는 바이욘느의 말에 공포가 뭉게뭉게 솟아올랐지만 하연은 애써 태연한척했다. 하지만 마음은 불안으로 가득 찼다. 만약 엘이나 카란 같은 마족을 만나게 되면 분명히 온전한 몸으로 있을 수는 없을 터였다. 말을 그렇게 했지만 하연은 이도저도 못하고 그렇게 방안에 한참이나 서 있었다. ‘어쨋든 여기서 나가야 되.’ 정신을 차린 하연은 상대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게 어색해서 말없이 몸을 돌렸다. 하연이 막 문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뒤에서 들려 바이욘느의 목소리가 그녀의 동작을 멈추게 했다. "원한다면 내가 너를 원래의 세계로 보내주지." 일말의 조급함도 담겨있지 않는 무심함이 담긴 어조였다. "정말이야! 날 보내줄수 있어? 그럼 당신도 왕족?" 놀란 하연이 바이욘느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바이욘느는 재미없는 무언극을 보고 있는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하연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다.” 환호성을 애써 참으며 하연은 조심스럼게 그의 다음말을 기다렸다. “나의 것이 되라.” "!!" 썩세스 : 양의탈의쓴여우가되고싶은여자 정말,.,길군요.하지만 필이 확!!닉네임 바꿔주면 좋은데 ㅠ.ㅠ제꺼 싫어요.. (03.04 20:30) 양의탈의쓴여우가되고싶은여자 : 재미있네여... 더욱 많이...ㅋㅋ (02.26 11:30) 순간 하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정작 그 말을 한 바이욘느의 표정을 전혀 변함이 없었다. “설마, 그게 내가 생각하는 거랑 같은 의미는..” “난 남색에는 관심이 없으니 네가 걱정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설령 네가 여자라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단지 다른 마족에게서 너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인간과 천족들은 이상하게 그 사실에 연연하더군.” 상대가 자신을 남자로 보고 있다는 사실에 잠시 발끈한 하연은 뒤늦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여자보다는 남자가 활동하기에도 편했을 테니 이곳의 지리를 익히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럼 내가 당신에게 해주어야 할 일은 뭐지?” 이정도로 파격적인 대우를 해준다면 분명 그에 상응하는 조건이 붙을 것이 분명했다. “없다. 주종의 관계를 맺게되면 어짜피 네가 느끼는 것은 모두 나에게로 전달되니 네가 항상 내옆에 있을 필요도 없다. 다렌이 나타나면 그대 널 풀어주마.” “그..그럼. 혹시 시중을 들라거나. 일을 시킨다거나.. 그런건 아니지?” “..인간에게 그런 중요한 일을 맡길 마족은 없다.” 마직막 말에 자존심이 조금 상했지만 하연은 잠시 망설이다 그의 제안을 수락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만난 마족 중에서 그나마 정신이 제대로 박히고 자신을 인간(?)답게 대접하는 녀석이었으니 어느 정도는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럼 좋아!” “그럼 더 이상의 하대는 용납하지 않겠다. 더 이상 나에게 그런 말투를 사용하지 마라. 나를 그런 식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사람뿐이니 만일 한번만 더 그런 말투를 사용하면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응..아니..예.” 자신이 누군가에 속했다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바이욘느의 잔인한 말이 심장에 와서 꽂히는 것 같았다. 하연은 분노에 몸을 떨며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의 말이 한 치의 틀림도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이미 마음 깊은 곳에선 수긍하고 있었다. 그 누가 주인에게 반말을 하는 종을 내버려 두겠는가. 바이욘느가 가만히 있더라도 다른 마족이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두번째, 결코 남들앞에 나서서는 안된다. 네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내가 지정해 주는 곳에 한한다." "그게 무슨 소리야..입니까!" 노려보는 눈동자에 하연이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내 샨트인 피오렌이 그대를 분명 그냥두지 않을 것이니 그녀의 손에 죽고 싶지 않으면 그렇게 해야 한다. 너와 내가 아무런 관계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녀의 성품상 네가 나의 것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널 죽이려 들테니까." “혹시.. 붉은 머리에 붉은눈동자를 가진 여자..입니까?” “그렇다. 이미 만나보았겠지. 그리고..” 나지막한 혼잣말이 들리더니 단단한 팔이 하연의 허리에 감겼다. 하연이 놀라 숨을 들이 마셨을 때는 이미 하연의 몸은 그에게 붙잡힌 후였다. 바이욘느는 하연의 양팔을 뒤로 틀어 한 손으로 결박했다. 하연은 미친 듯이 발버둥치며 그녀의 몸을 옥죄고 있는 완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바이욘느의 팔은 조금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슨 짓이야!!” “잠깐이면 된다. 나도 좋아서 하는 것은 아니니 참아라.” 바이욘느의 무심한 눈동자가 하연의 얼굴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황금빛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지럽힌다고 느낀 순간 하연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나 곧바로 억센 손아귀의 힘에 의해 얼굴이 비틀려 세워졌다. "개자식, 무슨.....!!" 억눌린 분노를 분출할 사이도 없이 그대로 상대방의 혀가 벌려진 입안으로 침입했다. 한 순간 들이마셔지는 숨을 막아버리며 혀뿌리까지 섞여오는 타인의 것에, 황당함과 더불어 불쾌감이 앞섰다. 입안으로 들어온 것을 확 깨물어 버리고 싶었지만 그의 강한 손에 잡혀있는 턱에는 고통만 느껴질뿐 주인의 의지를 따라 움직이지 못했다. 하연은 입 밖으로 터지려는 신음소리를 입안으로 삼키며 그가 하는 데로 내버려둘 수 밖에 없었다. "윽.......으...." 이런 개자식의 명치에 주먹다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이미 손은 등 뒤로 봉쇄당한 후였고, 그보다 먼저 하연 허리가 뒤로 꺾여 버렸다. 강하게 손목을 조이는 팔이 허리를 받치며 하연 몸을 뒤로 넘겨버린 것이다. 더구나 바싹 밀착된 터라 엇갈린 다리는 꼼짝없이 하연의 몸을 구속해버렸다. 하연은 목 안 깊숙이 들어온 타인의 액체를 버리지 못하고 억지로 삼켜버린 수 밖에 없었다. “젠장! 이 자식 무슨짓이야!!” 이런 불쾌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첫 키스에 늘 있다는 달콤한 감정도, 뜨거운 정열도 배제된, 기계적인 키스 따위에 토할 것만 같았다. 게다가 더없이 차갑기만 한 입술은 마치 개구리나 뱀처럼 몸서리쳐지게 느껴졌다. “네가 내 것이 되었다는 증표를 심을 것 뿐이다. 설마 육체적 관계를 원한 것은 아니겠지.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만 널 안고 싶은 생각은 없다.” 무엇인가를 삼켰다 싶었더니 그게 바로 그 징표란 것이었나. 에어리언과 스피시즈에서 본 괴물이 생각난 하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리자 바이욘느가 추가적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단지 증표일 뿐이다. 그리고 다렌이 나타나면 그것은 자동으로 사라지게 해줄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 “....” 무슨말을 해야할까. 그냥 가볍게 키스로만 끝내줘서 고맙다고? 아니면 허락도 없이 키스를 했다고 욕을 퍼부어야 하나. 나중일까지 생각해줘서 기쁘다고? 복잡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하연은 말을 채 있지 못했다. 상대의 태도에 조금의 욕정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지만 첫키스가 이렇게 불쾌하게 끝나버린게 너무나 억울했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분위기 있는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키스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조금은 좋아하는 사람과 키스하고 싶었는데.. 하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지.” 하연이 눈물이 그렁그렁 어린 눈으로 자신의 옷소매로 입술을 쓱쓱 거칠게 문질러대고 있을때 무심한 바이욘느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정 미안해서 말한다기 보다는 상대의 반응에 의무적으로 하는 말투였다. 아마도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감정을 가벼본 적이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워졌다. “됐습니다. 어짜피 당신도 원한 일이 아니었다면서요. 서로 비긴 셈치죠.” 한없이 떨리는 손과는 달리 목소리는 침착해서 그것이 정말 자신의 목에서 나온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역시나 하연의 이런 태도에도 바이욘느는 흔한 가식적인 말초차 하지 않았다. 잠시뒤 하연은 먼저 걸음을 옮긴 바이욘느의 뒤를 따라 어디론가 향했다. 의외로 빠른 바이욘의 걸음을 따라잡느라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씨근덕거리는 하연를 뒤돌아 바라보는 황금색 눈에 작은 반짝임이 지나갔다. ‘이상해 아까 순간 시노페로 느껴지다니..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이상한 기운 때문인가. 아니면 때때로 시노페와 너무나 같은 표정을 지어보이는 저 얼굴 때문일까.’ “뭐예요! 갑자기 멈춰서면 다치잖아요.” 갑자기 멈춘 바이욘느의 등에 얼굴을 박아버린 하연이 부딪힌 코를 문지르며 찡그렸다. 의례적인 사과라도 나오나 했더니 바이욘느는 다시 몸을 빙글 돌려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멍하니 있는 하연을 무시하고 바이욘느는 뚜벅뚜벅 세 번째로 만나는 정원을 지났다. 잠시후 자그마한 건물이 나타났다. 사방에 하얀기둥이 수십개가 둘려저 있었고 고대 그리스의 신전처럼 직사각형의 구조를 가진 단순한 생김새의 건물이었다. 문으로 들어서니 수많은 보라색 휘장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바이욘느는 길게 늘어진 휘장을 걷었다. 서늘하고 축축한 공기가 확 밀려들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실내였지만 바이욘느가 뭐하고 중얼거리자 금새 내부가 환해져 왔다. 그러자 화려하게 꾸며진 실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비록 아까 보았던 바이욘느의 방이나 집무실에 비하면 초라해 보였지만 하연이 예전에 가지고 있던 방보다는 훨씬 좋았다. “여기가 네가 머물 곳이다.” “..혼자요?” “식사는 하루에 세 번 아까 들어왔던 문으로 들어올테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식사를 가져오는 시종에게 말하면 들어줄 것이다.” 한마디로 혼자 있으라는 소리였다. 하긴 누군가에게 감시당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고 또 아까처럼 누가 목욕을 도와준다고 달려드는 것도 불편했다. 단지 조금 걱정이 되는 건 옷을 입는 문제였지만.. “그럼 제가 움직일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요?” “여기에 문은 우리가 들어왔던 곳 북쪽문 하나뿐이다. 나머지 3면은 각각 숲과 연못으로 이루어져 있는데다가 각각 결계가 쳐져 있어 나 이외에는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으니 알아두도록 해.” 왠지 강한 눈빛을 보내는 것을 보니 혹시라도 이 곳을 빠져나갈 생각은 버리라고 말하는 듯했다. 일단은 이곳을 둘러보고 계획도 세워야 하니 당분간은 빠져나가고 싶어도 그럴수는 없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하연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아직도 그곳에 서있는 바이욘느에게 재빨리 작별의 인사를 했다. 더 이상 붙잡고 물어볼 것도 없었고 바이욘느가 계속 알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부담스러워져 빨리 헤어졌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게다가 많아봐야 20살도 안되어 보이는 남자에게 계속 존댓말을 하는 것도 힘들었다. “.. 그나저나.. 도대체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거지. 그 다렌이란 녀석이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이렇게 까지 붙잡아 놓다니..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걸까?” 바이욘느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며 하연이 궁금한 듯 중얼거렸다. * * * * “어? 형 어디갔다 오는거야?” “난 네 숙부다. 언제까지 형이라고 부를꺼냐. 레기어스.” 하연을 그곳에 데려다 놓고 돌아온 바이욘느를 반기는 레기어스는 오늘도 여전히 화려한 차림이었다. 여자들이나 입는 화려한 색상의 웃옷과 그것을 장식하고 있는 수많은 레이스 군데군데 박힌 진주와 다이아몬드가 촛불에 반사되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뭐 어때. 나이차도 얼마나지 않는걸. 그나저나 산책이라도 다녀온거야? 발에 흙이 묻었어.” “숲속의 오두막에 잠시 갔다왔다.” “에! 거긴.. 그때 이후엔 완전히 폐쇠시켜 버렸잖아. 그런데..왜?” 예전에 시노페가 숲속의 오두막이라고 이름지은 그곳은 시노페가 죽은후 바이욘느에 의해서 굳게 봉인된 일종의 금지구역이 되버린 곳이었다. 그곳만 보면 시노페가 떠오른다 하여 그 근처로는 발조차 옮기지 않던 바이욘느였기에 레기어스는 호기심에 가득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 소유의 인간 하나 생겼다. 그래서 거기두고 오는 길이다.” “형! 미쳤어? 피오렌의 성격을 제일 잘 아는 형이 도대체 무슨 짓이야! 나 죽는꼴 보고싶어? 젠장. 아까도 날 찾아와서는 내가 형한테 바람을 집어넣었다나 어쨌다나 하면서 온갖 욕이란 욕은 다하고 갔다고. 그런데 이젠 날 완전히 산채로 죽이려 드는거야?” “난 너처럼 남색에는 취미가 없다. 그건 누구보다 피오렌이 잘 알고 있지.” 자신이 언제 남색을 즐겼다고 저런 소리를 하는지 레기어스로서는 가슴을 치고 통곡할 일이었으나 당장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 우선이었다. “그게 아니잖아. 형 소유의 인간이라니. 지금까지 그런것을 둔적이 없었는데 그런 말로 피오렌이 그냥 넘어갈 것 같아?” “다렌을 만나기 위해서 필요한 매개물일 뿐이다. 너도 그를 알겠지.” “설마 그 ‘다렌’말이야? 하지만 펠리펜이 그렇게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잖아.” 자신의 아버지를 남말하듯 이름을 불러대는 레기어스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다. 바이욘느의 말 때문에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떠올린 덕분이었다. “그 애한테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더군, 그리고 다시 오겠다는 말도 남기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애가 그의 얼굴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럴리가! 마왕이 아니면 불가능해! 내가 보았을때는 평범한 인간 소녀.....ㄴ 이었는데.” “잘하면 그를 만날 수도 있어.” 바이욘느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분명히 또 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레기어스가 그런 그를 못견디겠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아직도 포기 못한거야? 도대체 언제까지 그런 상태로 있을껀데. 피오렌이 불쌍하지도 않아?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너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야. 네가 정식으로 맞이한 샨트이기도 하고, 그런데 넌 죽어버린 시노페만 생각하고..” “닥쳐! 내가 뭘하던 넌 할 말이 없어! 그녀를 지키지도 못한 주제에 무슨 헛소리냐! 그런 말 하려면 당잔 내궁에서 꺼져버려!” 붉은 광기가 일렁이는 그의 모습이 지옥에서 튀어나온 죽음의 사자(使者)를 연상시켰다. 언제나 침착하고 냉철하다고 칭송받는 바이욘느였지만 시노페의 이야기만 나오면 언제나 이성을 잃었다. “할 말을 해야겠어!” “그만 하라고 했다” 어제까지나 죽은 자를 마음에 품고 살아갈 수는 없었다. 그래도 바이욘느 자신은 적어도 그녀의 사랑을 얻기라도 하지 않았던가. 그저 바라만 볼 수 밖에 없던 자신보다는 더 많은 추억과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시노페는 죽었어! 다렌이라 하더라도 살려내지 못해!” "그녀가 죽은건 다 네탓이 아니냐! 그런데도 그딴 소리를 지껄이다니! 아무리 시노페가 마지막에 널 미워하지 말라고 했다 하나 내가 널 죽이지 못할 거라 생각하나. 레기어스?“ 싸늘한 공포가 집채만한 파도가 되어 레기어스를 꼼짝 못하게 붙잡아 놓았다. 바이욘느는 진심이었다. 자신이 막는다면 단숨에 칼을 들어 베어버릴 기세로 말하고 있었다.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는 그의 심장이 그의 눈동자가 너무도 처절하게 다가와 레기어스는 시선을 돌려버렸다. 시노페가 남긴 마지막 말은 약혼자인 바이욘느를 사랑한다는 말도 누군가를 원망하는 원한도 아니었다. 그저 레기어스를 미워하지 말라는 말만 남겼다고 한다. 그랬던 건가. 바이욘느. 그녀가 나만을 걱정해서. 그래서 상처받았던 거냐. 하지만... 난 그녀가 죽어가면서까지 걱정할 정도의 녀석밖에는 되지 못했어. 사랑하는 그녀에게 그 정도밖에 되지 못했다는 기분을 네가 알까? 넌 완벽한 신뢰를 받았다. 그걸 모르는 거냐. 바보녀석. 넌 바보야, 그리고 나도 똑같은.. 바보. 너처럼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아차.. 그리고 설문조사 중인데요, 거의 창작에 가까운 개작이 되어버린터라.. 독자분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설문에 들어갑니다. 문항은 3개. 잠깐만 시간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서 어쩌다 보니.. 자꾸 진행이 느려지는 군요.-극악 늘리기 신공(나도 어쩔수가 없어 ㅠ.ㅠ)) 벌써 백여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이 곳은 예전처럼 조용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여전히 미풍에 살랑이는 꽃들과 태양을 반사하여 반짝반짝 빛나는 수면 그리고 거기에 비친 아름다운 숲의 그림는 예전과 다름없이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정말 오랬만이구나, 시노페는 유난히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항상 이맘때만 되면 이곳으로 사라져서 바이욘느와 함께 찾으러 오곤 했지. 그러면 언제나 저만치에서 잠들어 있곤했고...” 이미 백여년 전의 일인데도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언제나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던 시노페와 그때까지만 해도 잘 웃던 바이욘느의 눈부신 금발이 언제나 눈부셨다.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세요?” 하연은 갑자기 들려온 인기척에 밖으로 나왔다. 거기에는 아침에 보았던 하늘색 머리의 남자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바이욘느를 형님이라고 부른 녀석인 여긴 왠일이지? 혹시 바이욘느 그 녀석이 마음을 바꿔서 감시자를 보낸걸까. 그러고 보니 아까 피오렌인가 하는 여자한테서 맞을뻔한걸 구해줬으니 아는척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하연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전 하연인데요. 또 뵙네요. 여긴 무슨 일이세요?” “아. 난 레기어스라고 해. 그냥 잠깐 놀러왔어. ” 자신을 레기어스라고 소개한 이 남자는 상당히 유쾌하고 쾌할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귀찮은 질문을 해도 계속 웃는 얼굴로 대답해 주는 걸 보면 분명히 원래부터 그런 성격인 것 같았다. 아마도 좋은 부모님 밑에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이 틀림없었다. 저런 성품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잠깐 머리나 식힐까 하고.” “도망쳐온 거잖아?” "그런 셈이지." 결국은 형이랑 말다툼을 한 끝에 여기로 왔다는 그의 말에 하연이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다 털어 놓는 레기어스가 한심해 보이지는 않았다. 누구에게나 이런식으로 말하는 것은 아닌것 같았고 지금은 단지 이야기를 들어줄 상대가 필요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형이 화나면 얼마나 무섭다고, 그리고 그때 일 이후에는 날 잘 보려고도 하지 않는걸..” '그러고 보니 그냥 평소의 얼굴로 서있어도 위압감이 드는 얼굴이었어. 웃으면 훨씬 예뻐보일텐데..'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자신에게 잘 보일려고 애교를 떨지도 애써 매혹적인 웃음을 지어보이지도 않는 하연에게 레기어스는 이상한 끌림을 느꼈다. 무척이나 편안하고 마치 예전부터 알아왔던 느낌에 그는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이야기가지 이것저것 하고 있었다. 싸우고 나서는 화가 가라앉을때까지 숨어있는 편이 좋다는 레기어스의 맥빠지는 대답에 하연은 쯧쯧 혀를 차며 그래서는 안된다는 듯 손가락 하나는 들고 좌우로 흔들며 고개를 도리질 쳤다. “잘못한게 있으면 금방 사과를 해야지. 그리고 형제나 다름 없다며. 형제는 싸우는거 아니야! 이렇게 손잡고 악수하면서 화해하는 거라고.” <형제는 싸우는거 아니야! 자 이렇게 손잡고 악수해. 이제 화해한거다.> 뭐지?... 방금... 이건. 레기어스는 예전의 시노페와 똑같은 얼굴표정을 지으며 악수하는 흉내를 내는 하연을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시노페의 얼굴이 겹처 보였다. ‘나도 참 한심하군, 이 애는 전혀 닮지 않았는데 같은 표정으로 그때와 같은 말을 한다고 시노페처럼 보일 리가...’ “하긴.. 내가 봐도 바이욘느가 성질이 좀 안 좋은 것 같더라. 여자는 자고로 레기어스 처럼 친절한 남자를 좋아한다고 원 그렇게 무뚝뚝해서야..” <여자들은 레기어스 처럼 친절한 남자를 좋아한단 말이야. 바이욘느는 너무 무뚝뚝해.> 레기어스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서 자신을 바라보자 하연은 그가 이제 가려나 싶어 역시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며 계속 말을 이었다. 상다히 즐거운 대화였기에 하연은 밝게 말했다. “앗 참. 레기어스 내일도 놀러올꺼지? 나 혼자는 심심한데.. 나 기다리고 있을게 그러니까 꼭 와야되?” <레기어스! 내년에도 놀러올꺼지! 나 기다리고 있을게.>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걸까.고통스럽다. 이제는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왜 전혀 다른 이의 입에서 들려오는 똑같은 말에도.. 내 심장은 이렇게 아플정도로 두근거리는 걸까. 그녀가 내가 아닌 바이욘느를 선택했을 때.... 더 이상은 나의 시노페가 아닌 바이욘느만의 시노페가 되었을때. 그때 다 흘려버렸다고 생각했는데.. 하연은 맨바닥에 그냥 앉은 것 때문에 옷에 뭍은 플들을 털어내다가 이상하게도 아까부터 잘 대답해주던 레기어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고개를 올려 레기어스를 바라보았다. 하연의 눈과 마주친파란 하늘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무언가 그림움을 가득안고 물기에 젖어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 왠지 아까 바이욘느가 갑자기 멈춰섰을 때의 눈빛이랑 비슷한데. 착각인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흘리는 레기어스를 보고 하연은 어쩔줄 몰랐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가 소리없이 흐느끼는 모습이 이상하게도 위로해 주어야만 할 것 같아서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레기어스의 등을 손으로 탁탁 지며 애써 밝은 목소리로 쾌활하게 말했다. “뭐야! 레기어스. 갑자기 눈물이나 보이고. 너 남자 맞아? 아무리 생긴게 여자라지만 넌 남자라구.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이상은 울면 안되, 첫 번째는 태어났을때, 두 번째는..” <레기어스 울지마, 남자는 일생에 딱 세 번 우는거랬어> 어째서 저 아이는 시노페와 같은 말만 하는걸까. 아니야. 이건 단지 이곳이 주는 추억에 잠시 방심한 탓이야. 그래서.. 이렇게나 감상적이 된거야. 그뿐이라고. 하지만.. “뭐하는 거야!” 갑자기 하연을 끌어안는 레기어스의 두 팔에 놀란 하연이 버둥거렸다. 아까 바이욘느와의 악몽이 떠올랐다. 설마 이녀석 우는척 하면서 여자마음을 약하게 한 다음 접근한다는 작전을 쓴 건가? 갑자기 괘씸하다는 생각이 든 하연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아주 작게 레기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이렇게 있어줘, 다른 짓은 안할게.. 그러니까..” 예전부터도 남동생이 어떤 잘못을 해도 눈물을 흘리면 마음이 약해지던 하연은 마계로 건너와서도 그렇게 그날 두 번째 본 남자의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일이냐고 한탄하면서도 하연은 구태여 상대를 떠밀지는 않았다. “에휴. 난 왜이렇게 마음이 약한 걸까. 좋아 인심썼다. 이번만이야! 알았어 레기어스?” <마음이 약한 내가 인심써야지. 이번만이다? 레기어스.> 또 한번 귓가를 스치는 듯이 지나가는 시노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연은 들고있던 빵조각을 식탁위에 올려놓고 열심히 나이프를 움직이고 있는 레기어스를 물그러미 바라보았다. ‘정말 회복이 빠른 녀석이야.’ 보통사람이라면 분명 지금쯤 두 눈이 퉁퉁부어있어야 정상일텐데 레기어스는 어깨가 다 젖을 정도로 울어놓고서도 멀쩡한 얼굴로 왜 밥을 안먹고 나를 바라보냐는 듯한 시선을 날리고 있었다. 정말 축복받은 체질이군. 난 조금만 울어도 눈이 퉁퉁부는데 역시 미남은 울고 난후에도 아름답다 이건가. “하연. 왜 그래? 빵에 돌이라도 들었어?” 이녀석은 하필이면 비유를 들어도 이런 식으로 드는거지? 게다가 걱정해 주는건지 놀릴려고 그러는지 도통 알수 없는 얼굴로 저런말을 하면 어떻게 대답하란 말이야. 하연은 아무말없이 레기오스를 바라보다가 입에 들어있던 빵을 꿀꺽 삼키고는 아까부터 궁금해 하던것을 물었다. "그런데 다렌이 누구야?" 레기어스가 손을 멈추고 눈을 크게 뜨고 하연을 바라보았다. "그걸 모르고 있었단 말야?!!!" "몰라....." "너......도대체......다렌의 얼굴도 봤다며 거짓말이었어?" “그거랑 무슨 상관이지?”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레기어스의 파란눈이 탐색하듯 잠시 하연을 바라보다 하연이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을 바라보자 말을 잇는다. 정말로 모르는 것 같은 얼굴이다. 다렌이라면 중간계에도 그 이름이 상당히 알려져 있는 굉장한 자인데.. "혹시 주술사라고 들어봤어?" "응....마법사랑 비슷하거 아닌가?" "아냐, 주술사랑 마법사는 엄연히 다르다구. 주술사는 술법을 사용하고 마법사는 마법을 사용하니까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들이라고.“ 뜬금 없이 주술사이야기가 나오자 하연은 다렌이 주술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레기어스의 설명은 수학선생이 수학 가르치고 영어선생이 영어가르친다는 거랑 같은 이야기여서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 이론강의는 받기 싫다는 표정으로 하연이 바라보자 레기어스는 한숨을 쉬고 말을 끊었다. 더 이상 설명해봐야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다렌은.. 최고 주술사야. 천계, 마계, 중간계의 삼계를 통털어 가장 대단한 주술사여서 못하는 것이 없다고 알려져 있어. 그래서... 바이욘느가 그를 만나려 하는 거지.. 다시 되돌리기 위해서..그런데 그를 만나는 것은 굉장히 어려워, 일단은 어디있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불러야 할지도 몰라. 대신.. 만나기만 하면 대가를 받고 무슨 일이든 들어준다고 해.” “잠깐! 다른 건 이해하겠는데 바이욘느가 되돌리다니? 뭘?” “아.. 그런게 있어. 내가 말하면 분명 형님이 가만 있지 않을테니. 여기까지만 하자.” 무언가를 감추려 하는 듯 했지만 이번만큼은 아까처럼 은근슬쩍 넘기고 싶지 않았던 하연은 레기어스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바이욘느같은 남자가 화를 내면서까지 동생과 다름없는 레기어스에게 큰소리를 칠만한 일은.. “그거.. 혹시 여자?” “너... 알고 있었어?” 걸렸다! 하연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너무 전형적인 스토리잖아? 약간은 실망한 하연은 일단 조금 더 질문의 강도를 높혔다. “바이욘느가 지키지 못한 사람이지. 안 그래? 레기어스.” 순정만화의 패턴대로라면 무뚝뚝하고 감정없어 보이는 남자주인공이 그정도까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만나려고 하는 그 대단한 존재가 필요한 이유는 그것밖에는 없었다. “...내가 지키지 못한 거다.” 무언가 질문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해버린 말을 주어담을 수는 없었다. 레기어스의 표정이 이곳에 처음 서있을때 보았던 표정으로 변해 흔들리는 촛불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바이욘느와의 혼례식이 1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을 때였어. 그때 바이욘느는 종족간의 분쟁을 해결하러 자리를 비웠었지. 그리고 나와 시노페 그리고 엘라힘은 근처 고대 신족의 유적지로 놀러갔었어. 원래는 마왕님이 안된다고 하셨는데.. 시노페가 조르니까 할 수 없이 허락해 주셨지. 언제나 시노페의 말만은 잘 들어주셨으니까.” 레기어스의 눈동자에 쓸쓸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버지는 언제나 친아들인 자신을 마지못해 보곤했다. 그나마 자신이 아버지를 볼 수 있을 때라곤 일년에 한번 있는 자신의 생일 파티때였고, 그때에도 아버지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던 것은 자신이 아닌 시노페라는 사촌동생이었다.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빛나던 그 모습에 자신도 정신없이 빠져들고 만.... “그런데. 거기서 사고가 난거야. 갑자기 유적지에서 빛이 번쩍하더니. 신전으로 먼저 들어가신 엘라힘과 다른 가신들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시노페는.... ” 마치 목이 무거운 것에라도 눌린듯 한참을 억눌린 듯한 숨소리를 내던 레기어스가 다음말을 간신히 이었다. “...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어. 내가 말렸어야 했는데.. 그랬는데.. 난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지. 뒤늦게 아버지의 신하들이 달려와서 시노페를 안아올릴 때까지도 난 그렇게 멍하니 보고만 있었어. 시노페가 내이름을 불렀다는데.. 난 대답하지 못했어. 그리고.. 궁궐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죽어버렸지.” 얼마나 자신의 미약한 힘을 원망했는지 모른다. 적어도 아버지가 늘 말하던 것처럼 시노페의 절반 정도만 되는 능력만 있었다면은 시노페를 그렇게 보내지는 않았을텐데. 바이욘느의 말처럼 그녀를 지키지 못하고 혼자만 살아남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심장이 날카로운 가시줄에게 얽매이는 듯 했다. 어릴때.. 그녀가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란 적이 있었다. 언제나 차가운 아버지가 그 아이만을 향해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일때. 언제나 엘라힘과 함께 어디든 다닌다는 의좋은 부녀의 이야기가 궁궐안에서 화제거리가 되었을때. 그리고 마왕의 후계자이면서도 시노페보다 못하다는 비웃음을 들을때 어머니가 눈물로 가득찼던 생의 마지막 숨을 쉬던때 정말로 시노페가 죽어버리기를 바란적이 있었다. 한번이라고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시노페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 같은 생각에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바이욘느와 약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 정말 잠시 차라리 그녀가 죽어버렸더라면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을텐데라고 생각한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아.. 미안해.” 뒤늦은 사과였지만 하연은 진심으로 미안했다. 누군가의 아픈 상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별로 유쾌하지 못했다. 그렇게나 밝은 표정을 지어보이던 레기어스의 이런 어두운 표정이 자신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죄책감이 밀려 들어왔다.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하연을 보고 레기어스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주먹으로 하연의 머리를 가볍게 콩 내리찧으며 농담처럼 대답했다. “..라고 말할줄 알았냐! 네가 날 떠본다는 걸 다 알고 있는데 내가 순순히 말할것 같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하연의 얼굴을 바주본 레기어스는 장난이었다는 듯 웃어보였다. 뭐야, 그럼 지금까지 몽땅 거짓말? “....거짓말 이었어?” “어떻게 그렇게 잘 속아넘어가냐? 하긴 이몸의 연기가 좀 뛰어나긴하지 순간적이지만 아까의 네 표정 정말 볼만했어. 킥킥.” 거짓은 아니었지만 레기어스는 그렇게 말했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걱정하던 시노페가 바라보던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앟겠다고 결심했었지만. 어쩐지 자꾸 약해지는 마음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해버렸다. 다행이 하연은 자신의 말을 믿는듯 했다. 조금은 안도의 표정을 짓는 레기어스와는 달리 하연은 그를 한방 먹이고 싶다는 생각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었다. “이~~ 이자식! 다시는 오지마!!” 하연의 고함소리가 작은 방안에 가득 울려퍼졌다. 커다란 방에는 훨훨 타오르는 벽난로가 따듯한 온기를 내뿜고 있었고, 바닥에 깔린 붉은 양탄자는 방의 분위기를 따뜻하게 보이게 해주고 있었지만 두 사람을 앞에 세워둔 첸의 표정과 그들 사이에 흐르는 기운은 냉냉하기 짝이 없었다. “아직도 못찾았단 말이냐. 일을 하는거냐 마는거냐!” “... 죄송합니다. 첸님.” 딱! 카란이 고개를 숙이자마자 무엇인가가 날라 들어왔다. 성난 첸이 책상위에 놓였있던 문진을 집어던진 것이다. 카란의 검은 머리를 타고 붉은 액체가 얼굴로 흘러내렸지만 카란은 꼼짝도 하지 않은채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한 달이다! 그동안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건 아니겠지?” 마왕이 성역에서 발견된 인간을 찾아내라는 명령을 내린지 벌써 1달이 다되어 가고 있었으나 아직까지 알고 있는 것은 바이욘느와 함께 궁성으로 들어갔다는 것 뿐이고 그 이후로는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왕의 성격을 잘 아는 첸으로서는 다급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젠장, 죽은 제 아비를 닮은건지 도저히 속을 알수가 없어.’ 눈앞에 서있는 카란의 부친이 그 사건이후 반역으로 몰려 죽음을 당하지만 않았더라도 분명 고위 마족의 후계자로서 인정받을 터였지만 지금은 자신의 개인노예일 뿐이었다. 노예주제에 저런 침착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첸의 눈에 늘 거슬렸지만 왕실에서 내린 노예를 함부로 다룰수는 없었다. ‘언제가 저 숨기고 있는 반항적인 눈빛을 완전히 손봐주마.’ 첸은 카란에게서 고개를 획 돌렸다. “거기 너!” 그는 카란의 옆에 서 있던 엘을 손가락으로 불렀다. 카란의 단정한 옷차림과는 달리 지금까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잔뜩 어질러진 옷차림을 한 엘이 건들건들 다가오자 첸의 눈이 가늘게 찟어졌다. “도대체 넌 무슨 녀석이 벌건 대낮부터 그 모양이냐! 지금 당장 바이욘느의 궁성으로 가서 그 인간의 행방을 알아와! 이건 명령이다!” 화난 첸의 목소리에도 엘의 목소리는 전혀 긴장감없이 늘어져 있었다. “참 나. 아버지 혈압도 안 좋으시면서 그렇게 큰소리를 치시면 빨리 돌아가신다구요. 그리고 저더러 바이욘느의 성으로 가라니요? 바이욘느가 절 못잡아 먹어서 환장하는데 거길 들어가란 말입니까?” “도대체! 이 일이 누구 때문에 일어났는데 그렇게 무사태평인거냐. 그리고 바이욘느의 궁성을 방문하는데 노예인 카란이 손님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네가 아무리 돌머리라 해도 그 정도는 알테니까. ” 첸은 두통이 이는 머리를 잡고 책상을 꽝쳤다. 책상위에 가득 쌓여 있던 서류들이 우루루 바닥으로 쓰러졌지만 엘은 여전히 딴청만 피우고 있었다. “카란의 제 개인 시종으로 붙여주면 가지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아버지의 유일한 후계자인 제가 시종하나 없이 그곳을 갈 수 는 없잖아요.” 아버지가 카란을 눈에 가시 보듯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엘은 일부러 카란을 노예 취급했다. 평소에는 친구처럼 지내지만 아버지가 앞에 있을 때는 이렇게 말해야 카란이 덜 혼난다는 것을 어릴 때 알게 된 이후로는 엘은 카란에 대해 철저히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좋아. 대신 일처리는 확실히 해라! 절대 들키면 안되!” “알았어요. 참 그런데 그 인간의 목은 들고 와야 되나요? ” 엘의 황당한 말에 첸의 이마에 핏줄이 하나도 아닌 세 개가 한꺼번에 솟았다. “도대체 뭘 들은 거냐! 이 바보 녀석. 절대로 죽이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그새 까먹은 거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절.대.로. 죽이면 안되! 알았어?” “그럼 목숨만 붙여놓으면 되죠?” 첸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분명 마왕은 인간을 살려서 데려오라고 했다. 분명히 어떤 방식으로 살려서 데려오라는 말은 없었다. 그렇다면 목숨만 붙여와도 되는 것이 아닌가. 첸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만 살려와. 다른건 상관 안하마.” 벌써 한 달이나 지났다 안 그래도 성질 급한 마왕이 자신을 호출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어쨌든 자신은 임무만 완수하면 되니까라고 생각한 첸은 여전히 미적거리고 있는 엘을 등 떠밀어 내보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인생 최대의 실수가 될 것은 첸은 알지 못했다. “요즘 도통 레기어스가 안보이는군.” 산더미 같인 서류를 일일이 훑어보던 바이욘느가 펜이 종이에 긁히는 소리만 나는 방안의 침묵을 깨며 말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바이욘느를 찾아오던 레기어스가 요즘에는 도통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형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어릴때 시노페의 등에 떠밀려 억지로 사과를 하러온 이후에는 한 번도 먼저 사과를 한 적이 없던 레기어스가 자신과 한바탕 한 이후 그날 저녁 찾아와 더듬거리며 꺼내 놓은 말은 사과의 말이었다. 비록 얼굴은 여자처럼 생겼지만 맺고 끊는 것은 수많은 여자들과의 관계처럼 확실한 레기어스였으니 분명 그때의 일로 자신을 멀리하는 것은 아닐터였다. 바이욘느가 중얼거리는 말은 들었는지 옆에서 바이욘느를 도와주던 바론이 안경을 고쳐올리며 입을 열었다. 여전히 눈은 서류를 향한 체였다. “그러고 보니 레기어스 전하의 비서인 기온이 전하께서 요즘 좀 이상하다고 하더군요. 평소에는 거들떠도 안보던 업무들은 매일 아침 엄청난 속도로 해치우고. 예전에 입던 화려한 옷들도 더 이상 입으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론의 말에 바이욘느의 눈썹이 위로 치켜올라갔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놀란 표정이었다. 서류업무라면 질색을 하던 레기어스가 아침 일찍- 게다가 늦잠꾸러기다-일어나 업무를 본다? 그러고 보니 레기어스 때문에 늘 울쌍이던 기온은 요즘은 콧노래까지 부르며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게다가 요즘은 그리 좋아하시던 여인들까지 멀리 하시고 매일 어디로 놀러 간다고 합니다. 저도 처음에 그것을 들었을 때는 반신반의 했지만 벌써 한 달이나 계속하는 것으로 보아선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는 것이 아닌지..” 아론의 손은 계속 무엇인가를 써 내려 가고 있었다. 얼마 뒤 있을 연회준비에 정신없이 바빴던 그는 미처 바이욘느의 표정을 살피지 못했고. 바이욘느가 벌떡 일어나서 문밖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그렇게 한참을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연은 레기어스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침대에 누워 꼼짝도 못한채 땀만 뻘뻘 흘리고 있었다. 찌푸린 얼굴이 하얗게 질려 마치 죽어있는 사람의 얼굴이었고.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 침대는 온통 땀투성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고쳐준다고 했잖아. 왜 고집을 부리는거야?” “이상한게 내 몸에 들어오는 기분이란 말이야! 절대로 싫어!” 레기어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인들은 조금만 아파도 견디지 못하고 자신에게 치료를 부탁하곤 했다. 심지어는 장미가시에 일부러 손을 찔려서 자신에게 보이는 이들도 있었는데 궂이 스스로 고통을 택하는 하연의 심리를 알 수가 없었다. 한달에 한번씩 찾아오는 귀찮은 행사는 마계에 온 이후에도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 끔찍한 생리통까지. 하연은 다시 찾아오는 고통에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신음성을 내질렀다. 그나마 다행인건 레기어스가 도와준 덕분에 생리대라는 것을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으으.. 정말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어.’ 생리대라는 것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해야했던 수 많은 낯뜨거운 말을 생각하며 하연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 * * * 레기어스를 만난지 3일째 되는날 하연은 가슴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순간 잊어버리고 있던 사실에 하연은 당황했다. 언제나 생리가 시작되기 이전에는 이렇게 가슴이 아파오곤 했다. 하지만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숨기고 있는 상황에서 생리대를 달라고 할 수도 없었고. 마계에 현대에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있는 지 어떤지도 알수 없었다. 그나마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은.. 레기어스 뿐이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척 해주고 있었의까. “저기.. 레기어스는 여자에 대해 얼마나 알아?” “...알만큼은 알아.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는거야?” 뜬금없이 얼굴을 붉히며 물어오는 하연의 모습에 잠시 당황하던 레기어스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하연이 자신을 남자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런 종류의 약간은 노골적인 질문을 그래도 여자인 하연에게서 받는 다는 상황에 레기어스의 얼굴도 약간 달아올라 있었다. "레기어스는 바람둥이잖아. 그러니까 여자에 대해 잘 알꺼라고 생각해서.” 하연의 발언에 레기어스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도대체 뭘 가지고 내가 바람둥이라고 추측한 거지? 레기어스가 대답이 없자 하연은 긍정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말을 이었다. “항상 여기 올때면 향수냄새가 바뀌는걸. 봐 지금도 어제랑 다른 향가 나잖아. 이건 분명 여자들이 쓰는 향수란 말이야. 몸에 이정도 향기가 배일 정도면 상당히 가까이 있어야 한다구. 그런데 매일 향수가 바뀐다는 건 여자가 한둘이 아니라는 소리지.” 하연은 이렇게 말하면서 풀밭에 드러누어 있는 레기어스의 가슴좌우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그의 가슴으로 얼굴을 가져다 댔다. 하연의 숨결이 반쯤 드러난 민감한 가슴에 와닿자 깜짝 놀란 레기어스가 황급히 옷을 여몄다. “젠장! 너 여자 맞냐? 나도 남자라고!” 갑자기 얼굴이 벌개저서는 가슴을 꽁꽁 감추는 레기어스의 태도에 하연은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알아. 너 남자잖아? 가슴좀 보인거 가지고 왜그렇게 민감하게 구는건데?그리고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야? 너 내가 바람둥이라고 하니까 무안해서 일부러 그러는거지?” 레기어스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방금전의 행동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는 하연의 태도에 화도 낼수 없고 그렇다고 그러면 사실대로 설명하기도 곤란한 상황에서 하연이 계속 말을 이었다. “하여튼 네가 여자를 잘 알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너 여자들이 하는 월중행사에 대해서 아는거 있어?” “무슨소리야? 월중행사라니?”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레기어스의 벙뜬 표정에 하연이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저녀석이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아까 바람둥이라고 해서 모르는척 하는건 아닐까 한참을 생각해 보던 하연이 이번에는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해 보기로 했다. “..아기를 가지기 위해서 하는거 말아야! 왜 한달에 한번! 몰라?” 갑자기 악을쓰듯 말하는 하연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붉게 달아올라 있았다. 이렇게 까지 말하는데 레기어스 설마 모른척 하지는 않겠지. 하연은 씩씩거리며 레기어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기를 가지기 위해서 하는?. ...한달에 한번? 인간 여자들은 한 달에 한번만 관계를 갖는건가? 아니. 그런데 그건 왜 나한테 물어보는거야. 설마 마음에 드는 녀석이라도 생긴건가?’ 갑자기 레기어스의 표정이 싸늘해 졌다. 아무리 이곳에 오고가는 자가 없다고 해도 여자란 한눈에 상대에게 반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레기어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떠오르는 불쾌한 가능성에 레기어스의 눈이 날카롭게 하연을 향했다. “알아.” “정말? 아.. 다행이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난감했거든. 난 사실 그거할 때 좀 많이 아픈편이고 기간도 길거든. 그래서 네가 모르면 어떻하나 하고..” 아파? 그럼 이미 이전에도 남자가 있었다는 건가. 갑자기 하연이 누군가와 함께 있는것을 떠올리자 얼굴도 모르는 그 상대에 대해 분노가 치밀었다. 어금니를 꽉 깨문 레기어스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경험이 있는건가?” 갑자기 레기어스의 푸른 눈동자가 어두운 빛을 발하면서 하연을 향했다. 갑자기 목소리를 까는 레기어스의 표정이 무서웠지만 하연은 움찔거리면서도 말을 이었다. 운이 없으면 오늘 밤이라도 당장 시작될텐데 빨리 준비하지 않으면 곤란했다. “3년전부터니까.. 꽤 됬어. 뭘 그런눈으로 보는거야? 내가 비록 좀 발육부진이라고 그래도 남들 하는것 정도는 다 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도대체 뭐가 알고 싶은건데!” 갑자기 성질을 내며 자신을 외면하는 모습에 하연은 자신이 무슨 말을 잘못한건가 싶어 뒤돌아 앉아있는 레기어스의 어깨에 손을 가져다 댔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는 몰라도 부끄러움을 참고 여기까지 이야기를 한 이상 반드시 원래의 목표를 달성해야 했다. 탁! 레기어스가 자신의 어깨에 올린 하연을 손을 차갑게 져내자 하연의 약한 피부가 금새 빨갛게 변해버렸다. 하연은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갑자기 삐져버린 레기어스의 모습에 망설이다가 그의 뒤에 대고 그만 큰소리로 말해버렸다. “그러니까. 생리대 좀 가져다 달라고!! 이 바보야! 내가 이런말까지 해야 알아듣는 거야? 너 정말 여자를 알긴 아는거야?” 그 뒤에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레기어스에게 하연은 한참이나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어야만 했다. 다행이 설명이 잘되어 레기어스가 그것 대용으로 쓸 수 있는 천을 가져다 준다고 약속해서 하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마족 여인들에게는 한 달에 한번 있는 행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에? 그럼 어떻게 아이를 가지는건데?” “상대의 정식 샨트가 되면 아이를 가질 수 있어, 샨트는.. 그러고 보니 잘 모르겠구나. 마족은 단 한명의 상대에게서만 후계자를 볼 수가 있어. 그러니까 아무리 여인을 많이 거느린다고 해도 아이는 오직 샨트에게서만 얻을 수 있지. 그래서 누군가의 샨트가 된다는 것은 여성마족에게 있어서는 굉장한 명예야.” “그럼 그 피오렌인가 하는 여자도 샨트야?” “응. 아직 아이는 없지만. 바이욘느의 샨트지. 그런데.. 인간들은 전부 그런거야?” 하연의 설명이 워낙 두서가 없고 복잡했기에 대충은 알아들었지만 여전히 궁금한 것이 많았던 레기어스는 하연에게 질문을 던졌다. “으응. 보통 12살 이후면 온다고 그러는데. 그때부터는 여자라면 누구나 아이를 가질 수가 있어. 하지만.. 너무 어리니까 20살이 넘어야 결혼이 가능해. 하지만.. 아이는 그 이전에도 생길수 있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셨어.” “..그럼.. 넌 경험이.. 있는건가?”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레기어스가 긴장하며 물었다. 레기어스의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챈 하연의 얼굴과 몸 전체가 붉게 달아올랐다. “날.. 뭘로 보는거야!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아직 키스도 제대로 못해 봤다고. 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질문을 하는거야!” 씩씩거리며 완강히 부인하는 하연의 말에 눈치채지 못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레기어스는 자신의 행동에 놀라 순간 멈칫했다. 내가 왜 저 말에 기뻐하는거지? 레기어스는 자신의 감정을 숨긴체 일부러 담담하게 말했다. “그냥 궁금했을 뿐이야. 그럼 거기도 한 사람의 아이만을 가질 수 있는거야?” 하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갑자기 어두워진 표정에 레기어스는 일순 긴장했다. “..그건... 아니야. 가끔은 강제로 당해서.. 어쩔수 없이 아이를 갖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어. 결혼을 하지 않아도 아이는 가질수 있으니까.” “결혼을 하지 않아도?”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마계는 그럼 면에선 여자들에게 유리한 곳이구나.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선택하지 않으면 절대로 그의 아이를 낳지 못한다니.. 조금은 불리한 것 같기도 해..”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겠지.” 레기어스의 뒤이은 낮은 말소리는 하연의 귀에는 미처 도달하지 못하고 공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 * * * “엇! 전하 여기에는 어쩐일로..” 예전과 달리 부지런해진 레기어스 때문에 일치감찌 업무를 긑내고 즐거운 티타임을 가지고 있던 기온의 앞에 바이욘느가 예고도 없이 나타나자 기온은 황급이 찻잔을 내려놓고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레기어스는?” 짧은 질문이었지만 기온은 정중하게 대답했다. “잠시 외출중이십니다. 목적지는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요즘 레기어스가 이상하다던데.. 사실인가?” 갑자기 기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고 보니 정말 레기어스님의 변화는 눈이 부실 정도였다. 자신이 이렇게 느긋하게 티타임을 가질 여유마저 부릴 수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긴장하고 있던 기온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지자 바이욘느는 바론이 말해준 것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기온은 일주일에 한번 이상을 꼭 자신의 비서겸 최측근 가신중 하나인 바론을 찾아와 눈물로 하소연 하곤 했다. 한달전 정도만 해도 아래와 같은 상황이었으니까. “바론님. 제발 저좀 옮겨주세요, 레기어스님은 서류는 거들떠 보지도 않으시고 매일 여자들이랑 놀러만 다니신단 말이예요. 이러다간 과로사 할꺼란 말이예요.” 커다란 문에 막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남자치고는 높은 하이톤의 목소리는 바이욘느의 귀에도 들릴만큼 충분히 컸다. “...미안하지만 기온. 아직은 그곳에 가길 희망하는 자가 없어서 말이지.. 네가 좀 더 수고해야 겠다.” 난감해 하는 목소리로 바론이 말꼬리를 흘리자 이번에는 울쌍이 된 목소리가 거의 통곡하듯 변했다. “하지만 제 얼굴 좀 보시라구요! 이 얼굴이 작년에 성마식을 치른 얼굴로 보이냐구요. 이 푸석푸석한 피부 생기없는 눈동자! 거의 중년기 마족에 해당하는 상태란 말이예요! 매일같이 야근에 잔업에 게다가 레기어스님을 찾아오는 여인들 시중까지 들어야 하니 이래서야 몸이 둘이라도 남아나지 않겠어요!!” “아... 저기 바이욘느님이 불러서 이만..” 자신은 바론을 부른 적이 없는데도 거짓 명령을 만들어 내는 바론의 표정이 눈에 선했다. 그리고 뒤이어 바론이 무안한 표정으로 바이욘느가 있는 방안으로 들어왔고 뒤이어 서럽게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론님!!! 너무해요!!!” 이러던 기온이 저리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면 바론이 말한 것이 사실인 것이 틀리없었다. 행복감에 빠져있던 기온은 자신이 아직 바이욘느 전하께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각하고 황급히 미소를 거두고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 변하신 것은 맞지만.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좋아지셨어요. 다시 예전으로 돌아오신 것 같다니까요? 글쎄 이제는 업무도 미루지 않으시구요. 예전처럼 지독한 향수냄새를 풍기고 다니는 여인들과도 만나지 않으세요. 얼마 전부터는 즐겨 애용하시던 향수도 사용하지 않으시고. 옷들도 전부 다른 것으로 바꾸라고 하셨다니까요?” 자신이 너무 재잘댔다는 것을 알아차린 기온이 조심스럽게 바이욘느의 눈치를 살폈지만 바이욘느 전하는 별로 불쾌한 기색이 아니어서 그는 계속 말을 잇기로 했다. “뭐, 굳이 이상한 점이라면.. 한달정도 전부터 오후만 되면 어디로 갔다가 저녁때가 되어야 나타나시더라구요. 신발이랑 옷에 흙이랑 나뭇잎들이 묻어있는걸 보면 어디 사냥이라도 다니시는 건가 했는데 레기어스님의 마굿간 시종 이야기를 들어보니 한 번도 말을 가지러 오신적은 없다고 하고 제가 물어봐도 대답을 해주시지 않으시더라구요.” “흙과 나뭇잎?” 바이욘느의 머릿속에 무엇인가가 집혀왔다. “아. 그럼 이만 가보지. 차 잘 마시게 기온.” 말을 마친 바이욘느는 아마도 레기어스가 있을 곳이 분명한 곳으로 재빨리 몸을 옮겼다. 바이욘느가 갑자기 가버린 방안에 있던 기온은 잠시 이게 무슨일인가하고 생각하다가 그냥 마시던 차를 입에 가져갔다. “에엑! 뭐야 다 식었잖아?” 식어버리면 엄청나게 떫은 맛을 네는 그리안 차라는 것을 깜빡하고 단번에 마셔버린 기온이 그 지독한 맛에 인상을 있는대로 찌푸렸고 그렇게 기온의 한가한 티타임은 끝이 안 좋게 끝나버렸다. “네가 싫어해도 할 수 없어. 이리내.” “무슨 짓이야?” 아픈 중에도 레기어스가 자신의 이불을 잡아 당기는 것은 알았는지 하연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그를 제지했다. 하지만 레기어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힘으로 이불을 벗겨냈다. 안 그래도 약한 하연의 힘은 레기어스의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고 금새 땀에 젖은 얇은 잠옷이 드러났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레기어스는 한참이나 말없이 서 있다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바보 아니야? 벌써2일째란 말이야. 아파서 밥도 제대로 못먹는 주제에. 너는 견딜수 있을지 몰라도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죽을 지경이라고! 어서 옷좀 걷어올려.” 투덜거리는 레기어스는 하연의 모습을 외면하고 소리질렀다. 왜 또 저러나 싶어 하연은 다시 귀찮다는듯 눈을 감아버렸다. 힐링을 쓰려면 상대방의 상처부위에 직접 손을 대고 시전해야 했다. 이 경우에는 자궁쪽의 문제이니 잠옷을 조금 걷어 올려야 자신의 손이 닿을 수 있었고 그래서 레기어스는 어쩔 수 없이 힘으로 하연이 갑옷처럼 돌돌 말고 있던 이불을 걷어버린 것이었다. ‘젠장.. 이럴줄 알았으면 그냥 두는 거였는데.“ 레기어스가 이불을 걷자 땀에 젖은 하연의 몸이 드러났다. 위아래로 나누어진 소년용의 잠옷이어서 레이스가 달린 비출듯 말듯한 잠옷과는 다를 거라고 생각한 것은 분명히 맞았다. 하지만 그 잠옷이 하연이 흘린 땀으로 거의 반투명할 정도로 변해 하연의 몸에 달라붙어 있다는 것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열로 인해 약간의 붉은 기가 감도는 뼈가 드러날 듯 투명한 피부와 얼굴 위에 흘러내린 물기를 따라 이어지는 가는 목선. 그리고 허리께까지 젖은 채 붙어 있는 길고 곧.윤이 나는 검은 머리 약하게 헐떡이며 숨쉬는 적당한 크기의 붉은 꽃잎과도 같은 입술이 눈을 사로잡았다. 레기어스는 눈앞의 하연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욕망에 가득찬 눈으로 하연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 레기어스는 황급히 고개를 돌린 것이다. 가슴이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고 격하게 뛰었다. 갑자기 숨이 막혀오는듯한 느낌에 레기어스는 한참이나 그렇게 서 있다가 퉁명스럽게 간신히 말한 것이었다. “싫..어..” 하연은 아직까지도 고집을 피우고 있었다. 힐링이라면 그저 따뜻해졌다가 나을 거라고 생각한 하연에게 지난번에 레기어스가 해준 힐링은 결코 좋은 느낌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부러 친절히 마법으로 도와준 레기어스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지난번 힐링이후 밤새도록 구역질을 해댔던 것이다. ‘젠장.. 난 마법에 알러지가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하연의 심정을 알리 없는 레기어스는 이제는 몸을 더욱 웅크리는 하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까의 당혹스런 욕망은 간신히 억제시킨 뒤였고 무엇보다도 하연이 더 이상 아파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싫어도 할 수 없어. 조금만 참아라.” ‘뭐야.. 역시 형제라는 건가? 그때의 바이욘느랑 똑같은 소리를 하네..잠깐 이게 아니잖아!’ 순간 그때의 악몽이 떠오른 하연이 눈을 번쩍 떴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하연이 크게소리 질렀다. 그때의 구역질을 또다시 경험하고 싶은 생각은 절대로 없었다. “싫어! 레기어스. 그러지 마! ” 그리고 그 소리는 마침 레기어스를 찾아 하연이 있는 곳으로 오던 바이욘느의 귀에도 들릴정도로 충분히 컸다. 양의탈의쓴여우가되고싶은여자 은빛파수꾼 ♡lovelygirl♡ 님 리플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오늘은 2편 올립니다 *^^* (리플은 저의 양식~) 그리고.. 설문조사 결과가 충격(쿠쿠쿠쿵) 그래서..재업했습니다. 시간나면... 써야죠. 스토리 라인은 다 만들어 놓았으나.. 검술장면때문에..주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과거의 기억이라도 회상하고 있는 건가?” 바이욘느가 막 소리가 들려온 건물로 발을 옮기려고 하는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바이욘느가 움직임을 멈추고 뒤돌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타오르는 듯한 붉은머리와 적안의 소유자를 담담히 바라보았다. “그대가 여긴 왠 일이지?” 흔히 하는 인사치레도 없이 바이욘느가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 오늘 하루만 지나면 거의 다 끝난단 말이야. 너 때문에 오늘밤도 잠자기는 다 글렀잖아! 저번에도 그거 때문에 밤새도록 토했단 말이다! 왠만하면 도와준 성의를 생각해서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게 뭐야!” 억지로 마법을 건 레기어스 덕분에 더 이상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픔이 사라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진 하연은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키고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와있던 레기어스의 조끼를 두 손으로 꽉 잡고 으르렁거렸다. 하연이 당기는 힘에 하마터면 침대위로 넘어질뻔한 레기어스는 간신히 침대에 두 팔을 뻗어 중심을 잡았다. “저기.. 이것 좀 놓고 말하지?” 이런 자세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옷을 꽉 붙잡고 있는 하연의 손을 난감하게 바라보던 레기어스가 목이 졸린듯한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지만 하연은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오늘 밤에 마법의 부작용에 시달릴 것을 생각하면 레기어스가 하지 말라는 것은 더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싫어! 너도 내가 하지 말라고 했어도 억지로 했잖아! 나도 내 마음대로 할꺼야. 레기어스 ” ‘이녀석. 지금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 건지나 알고 있는건지 모르겠군. 안 그래도 젖은 옷 때문에 거의 다 비치는데다가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 위험해.’ “옷 찢어져. 빨리 놔라.” “그깟 옷 좀 찢어지면 어때? 책임지란 말이야. 너 때문에 오늘밤은 엄청나게 고생할텐데 어떻게 할꺼야?” 자신이 오늘밤 고생할거란 이야기보다 레기어스 자신의 옷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그가 얄미워진 하연이 더욱 손에 힘을 주었다. 이런 옷이 더 중요하다는 거야? 게다가 찟어진다니. 옷이 그렇게 잘 찟어질 리가 없잖아. 이 쫌생이 같으니! 옷이 그렇게 아깝냐? 찌이이익. “......!!” 갑자기 옷이 3조각이 나면서 하연은 그 반동으로 양손에 찟어진 옷자락을 하나씩 쥐고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내가 말했잖아. 이거 굉장히 약한 천이라고.” 그제야 하연에게서 벗어난 레기어스가 한쪽이 완전히 찟겨저 나간 자신의 보랏빛 상의를 보고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가격이 비싼마큼 가볍고 활동하기에 편했지만 충격에 굉장히 약한 천이었다. 그것을 하연이 두 손으로 체중을 싣고 당기니 온전하게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기온이 보나마나 잔소리를 하겠군. 하연 그거 좀 이리 내놔.” 이번에 옷을 새로 다 바꾸느라 예산이 초과됬다며 신경질을 부리던 기온이 생각난 레기어스가 하연이 쥐고 있는 옷자락을 받아낼 생각으로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한 하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쾅! 갑자기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레기어스는 순간 발을 헛디뎠고 그만 간신히 중심을 유지하고 있던 팔이 꺽이면서 하연의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레기어스. 그대는 또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거지?” 자신이 아는 누구와 매우 익숙한 목소리에 레기어스는 황급히 몸을 세워 갑자기 문을 박차듯이 차고 들어온 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목소리는 틀림없이...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붉은머리를 어깨위로 늘어뜨린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부담스런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 있는 바이욘느의 얼굴을 그제서야 발견한 레기어스의 얼굴위로 곤혹감이 밀려들어왔다. ‘이런.. 저 사람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벅찬데 바이욘느까지 함께라니.’ 바이욘느의 차가운 대답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만면에 미소를 띄고 능숙하게 바이욘느의 탐색하는 듯한 시선을 받아내고 있었다. “여긴 왠일이라니? 오랜만에 만난 것 치고는 너무 차가운 반응 아닌가? 그리고 내가 온다는 것 정도는 피오렌을 통해 이미 연락을 했으니 알고 있었을텐데. 안 그렇가 바이욘느?” "여긴 어떻게 알고 왔지?" “딱히 널 찾으러 온건 아니야. 왠지 여길 한번 와보고 싶었는데 우연히 널 만난거니 그런 눈빛은 좀 거두지 그래? 그래도 매제와 처남 사이인데 그렇게 딱딱하게 굴건가? 그나저나 바이욘느 그대는 여기 무슨일로 온거지. 설마 누구라도 만나러 온건가?” 피오렌과 똑같은 붉은 머리와 붉은 눈동자를 가진 뱀파이어로드 라인슈타인의 말을 그대로 믿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시노페와 관련된 일이라면 얼마나 싫어하던 그인가. 그런데 한번 와보고 싶었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레기어스를 찾으러 왔다. 이제 질문이 끝났다면 그만 이곳에서 나가주면 고맙겠군.” 잠시 주위를 바라보는 척하던 라인슈타인은 퍼뜩 시선을 돌려 바이욘느를 바라봤다. 그 일이후 레기어스에게 무관심해 보이던 바이욘느가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게 조금은 얼떨떨하고 신기했다. "그가 여기에 와있다는 건가? 자네도 정말 대단하군. 아직까지 마왕의 아들을 데리고 있다니 말이야. " 라이슈타인은 솔직하게 말했다. 시노페의 죽음을 마왕의 음모가 틀림없다고 밑고 있는 그가 아무리 어릴적 친하게 지낸 사이라 하나 여전히 레기어스를 가까이 두고 있는 것도 놀랐는데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장소에 레기어스가 들어오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는 것은 더욱 놀라웠다. 자신이 있는 것도 불쾌해 하는 저 바이욘느가? “.....의 부탁이었으니까.” 바이욘느가 갑자기 몸을 돌렸다. 더 이상 라인슈타인과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아무리 피오렌의 오빠인 그라 하지만 더 이상의 참견을 듣고 싶지않았던 바이욘느는 하연이 머물고 있을 건물로 잰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뒤로 축객령을 받고도 뻔번하게 따라가는 라이슈타인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여긴 예전이랑 똑같군. 마지막으로 본게 100년이 훨씬 넘었는데 아직도 이렇게 깨끗하다니 피오렌 녀석 꽤 괴롭겠군. 그래서 내가 그렇게 말렸는데..’ 예전부터 바이욘느를 좋아하던 피오렌이 억지를 부려 어쩔수 없이 맺어진 두사람이었다. 오빠인 자신이 반대해도 듣지 않는 피오렌의 고집에 어쩔수 없이 손을 들었을 때는 바이욘느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가 자신이 보낸 사자의 혼인제안을 받아들이고 시노페를 대신하여 피오렌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한달이 채 안되서였다. 모두들 바이욘느의 태도에 경악했다. 그렇게도 끔찍히 위하던 약혼녀가 죽은지 한달도 안되어 결혼을 할 줄은 상상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결혼식전 예물을 가지고 자신의 성으로 온 바이욘느를 보았을때 라인슈타인은 그가 아직도 시노페를 잊지 못하고 있고 아마 영원히 다른 여인을 마음에 둘리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눈치챘고 그날 연회후에 둘만이 있는 자리를 만들어 그의 심중을 떠보기로 했다 "왜 혼인을 거부하지 않은거지?" “..당신 일족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지.”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조금도 둘러대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바이욘느에게 당황한 것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그런 말을 하면 내가 파혼을 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하는 소리인가? 바이욘느." “어짜피 지금 상황에서는 동맹이 필요하니 그대도 나의 힘이 필요할 것이고 내가 혼인을 원하든 원하지 않던 무엇보다도 동생을 아끼는 그대가 피오렌이 진심으로 원하는 일을 막을리는 없지. 그리고 내가 혼인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이미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니 구태여 거짓을 말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평이한 어조로 말을 잇는 바이욘느의 말이 끝나자 라인슈타인이 다시 물었다. “...정말 냉정하군 그대는. 그럼 피오렌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건가? 그저 필요에 의한 혼인이상은 안되는 건가 말이네.” 비록 고집이 세고 성격이 급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하나뿐이 친여동생이었다. 적어도 피오렌이 사랑하는 상대가 피오렌을 사랑하는 것 까진 차마 바라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샨트로써의 보살핌과 애정은 받기를 바랬다. “나의 후계자는... 피오렌의 소생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내 심장에 더 이상 다른 여인을 위한 자리는 남아있지않아.” 그 말은 피오렌을 자신의 정신 샨트로서 대접하고 인정은 하겠다는 말이었지만 반면 진정한 반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중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었기에 라인슈타인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그 대화이후 다시 한 번 피오렌을 설득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가 바이욘느의 샨트가 되어 자신을 궁을 떠났다. ‘그리고 100년이 다되어 가는 지금에도 후계자의 소식은 들리지 않고있으니..’ 잠시 과거를 떠올리던 라인슈타인의 귀에 무슨 말소리가 들렸다.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 “억지로....” “책임지란 말이야” 아까 바이욘느가 말한 레기어스의 목소리라고 하기엔 조금 더 높은 톤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간간히 들릴듯 말듯 들려오는 나지막한 소리는 분명 레기어스의 목소리였고 그것은 이 건물안에 두 명이 있다는 것이엇기에 라인슈타인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 올랐다. ‘이곳에 레기어스 말로 다른 자가 또 있다는 말인가? 오늘은 여러 가지로 놀랄일이 많이 생기는군. 그런데 이 목소리의 주인은 누구지? 처음듣는 목소리인데 여기에 외부인이 들어올리는 없고..’ 재빨리 건물 안으로 들어간 라인슈타인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왠일인지 문이 잘열리지 않았고 그것이 안에 누군가가 있을때 자동으로 잠기는 자물쇠가 달린 문이라는 것을 미처 생각해 내지 못한 라인슈타인이 짜증을 내며 문을 어깨로 강하게 밀자 엄청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고 눈앞에 펼쳐진 믿기 어려운 장면에 그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하필이면.. 이럴 때 들어오게 되다니. 그나저나 레기어스 녀석 그런 소문이 돌때는 반신반의 했는데 사실이었던 건가?’ 방안은 열기로 가득차 있었고 레기어스는 침대에 소년으로 보이는 굴곡없는 몸매의 소유자위에 팔을 굽히고 엎드린 포즈로 있었다. 게다가 아까 하연이 잡아당겨 찟어진 옷이 라인슈타인의 좋은 눈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으니 라인슈타인이 오해를 한다해도 충분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아까 들려온 말을 종합해 볼때 그의 의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란듯 레기어스가 벌떡 일어서더니 심하게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지난번 몇몇의 여인과 침실에서 어울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도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던 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다 못해 이제는 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레기어스. 그대는 또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거지?” 그런 레기어스의 모습이 재미있다는듯 다 안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라인슈타인이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으로 말하며 레기어스의 뒤로 보이는 상대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꽤 작은데? 아직 성년도 안된 녀석 같은데.. 게다가 기운이 특이해. 인간 같은데 왠지 모르게 레기어스랑도 비슷한 느낌이 들고.. 도대체 누구지?’ 눈앞에 능글맞은 눈빛을 해보이는 라인슈타인이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는것은 보나마나 뻔했기에 레기어스는 식은땀만 흘렸다. 그나마 다행인건 라인슈타인이 옆에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바이욘느가 잠자코 서 있을뿐이라는 사실이었다. 비록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평상시의 바이욘느와 똑같아 보였다. “누구..?” 라인슈타인의 호기심 어린 눈이 자신으 등뒤에 누어있는 하연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순가 등뒤로 하연의 목소리가 들리자 경악한 레기어스가 황급히 몸을 돌리고는 하연에게 귓속말을 했다. “바이욘느랑 피오렌의 오빠야. ....들키지 않으려면 그 옷좀 어떻게 해봐. 다 비친다.” 엄청나게 청각이 좋은 그들이니 자신이 하는 말이 다 들릴것은 분명했기에 레기어스는 일부러 주어를 빼고 모호하게 속삭였다. 그리고 그말을 들은 라인슈타인의 얼굴과 바이욘느의 표정이 각자 다른 형태로 변하는 것을 등을 돌리고 있던 레기어스는 눈치채지 못했다. “레기어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레기어스의 옷이 찟어지고, 그와 거의 동시에 문이 굉음을 내면서 열리는 소리에 삐끗한 레기어스의 무거운 몸이 자기위로 쓰러져 잠시 숨이 막히는 경험을 한 하연의 귀에 그제서야 레기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레기어스의 말에 무심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던 하연은 노골적으로 드러난 자신의 옷차림에 비명을 지르고는 황급히 옆에 있던 이불을 잡아당겼다. “꺄아악!!” “....” 아까부터 말이 없는 바이욘느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이번 상대는 유난히 부끄러움을 타는군.” 그나마 조금 보이던 몸이 방금전 레기어스의 말로 상대가 이불을 끌어올리면서 더 이상 보이지 않게되자 약간은 아쉬워하며 라인슈타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저 그게 아니라.” 어쩔줄 몰라하는 레기어스의 뒤로 하연의 목소리가 방안을 갈랐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레기어스의 얼굴에는 절망의 빛이 라인슈타인의 얼굴에는 황당과 분노의 빛이 그리고 바이욘느의 얼굴에는 잠깐 귀찮게 되었다는 찡그림이 나타났다. “레기어스. 바이욘느! 그리고 너 빨강머리! 당장 여기서 나가지 못해?” 우울증소녀님 감사합니다^^ 3/4 '배경묘사는 자제했습니다(전작에서 묘사에 치중하다가 이야기의 진도가 너무 늦어지는 경향이 있더군요. 그래서 중요장면(?) 이외에는 자제할 생각입니다. 묘사가 미흡해도.. 용서를 “오옷! 굉장한걸? 여기가 바로 왕제인 바이욘느의 궁성이란 말이지? 어릴적에 한번 와보고는 이번이 처음인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더 크잖아? 바론! 저기 저 궁전은 뭐지. 분명 전에는 없었는데? 휘유~ 엄청나게 번쩍이잖아 저거. 카란 너도 뭐라고 말 좀해봐.” 자신을 무슨 하인 취급하는 엘의 질문에 앞에서 그들을 안내하던 바론은 인상을 찡그렸다. 끊임없이 촐싹대는 저 입을 당장이라도 봉해버리고 싶은 충동은 그동안 쌓아온 자신의 인내심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었다. “..바이욘느 전하의 샨트이신 피오렌님의 궁성입니다. 혼례식이후에 새로 신축한 것이라 아마 처음 보시는 것이 당연하실 겁니다.” “흐음? 그 여자 굉장히 미인이라던데. 사실이야?”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평정을 가장하고 있던 바론의 얼굴색이 확 변하고 그들을 뒤돌아 보는순간 카란이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엘류시온님. 왕족의 여인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은 크게 예의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방금 전 말씀은 궁정과는 먼 곳에서 생활하시는 엘류시온님이 왕실의 예를 잘 모르셔서 그런 것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바론님”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말하는 카란의 태도에 바론은 간신히 화를 억눌렀다. 품위있는 행동거지와 차분한 목소리의 시종으로 따라온 이 검은머리의 남자의 정중한 사과에 마음이 조금 누그러든 것도 있지만 하마터면 이딴 어린 녀석을 상대로 이성을 읽기 직전까기 갔다는 사실에 당황한 바론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첸의 아들놈이라는 이 녀석을 당장이라도 쫒아내고 싶기는 했지만 피오렌님의 탄신일을 맞이하여 열리는 연회였다. 거의 연회다운 연회가 벌어지지 않는 이곳에서는 유일하게 가장 성대하게 치루어지는 행사였기에 저런 마왕의 끄나풀까지 받아야 하는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이런 일로 그들을 내쫒는다면 안 그래도 심각한 불화설이 나도는 마왕과 바이욘느 사이는 더욱 벌어질 것이고, 바이욘느님의 명망에 누를 끼칠수도 있었다. ‘마왕의 최고측근인 첸의 아들이 올 줄이야. 분명 무언가 꿍꿍이가 있어. 감시를 단단히 붙여야겠군. 행여 저번처럼 무모한 짓거리를 하지는 않겠지.’ 바론은 바로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여관을 향해 손을 까딱이자 여관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럼 여러분들의 숙소까지는 여기 있는 여관이 안내할 것입니다. 바이욘느 전하께서는 아직 외출중이시니 돌아오시는 데로 여러분의 도착소식을 알려드리도록 하지요. 그럼 잘 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함부로 돌아다니지 않으시는 것이 좋으실 겁니다. 무슨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말입니다.” 마지막 말은 경고였다. 저 은발머리의 무식한 놈은 전혀 알아듣는 것 같지 않았지만 마음대로 돌아다녔다가는 없는 누명이라도 씌워서 쫒아내고 말겠다는 뜻이었고 그것을 눈치챈 카론은 다시 한번 바론의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잠시후 카란과 엘이 사라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바론이 몸을 돌려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진 아무도 없는 벽을 향해 중얼거렸다. “지금부터 저들을 감시해. 분명 3일내에 무슨 짓을 벌일게 분명하니. 그리고 레기어스에게도 감시를 2배로 늘려라.” “...” “그럼 이만 가봐라.” 아무런 대답은 없었지만 바론은 그렇게만 말하고는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방금전 날라온 보고서를 찡그린 얼굴로 신중하게 읽어나갔다.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손님들이 많았다. 마치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바론을 긴장시켰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긴장을 견뎌야 하는 것인지. 바이욘느 전하께서 용단을 내리실 때도 되었는데..’ 요즘 들어 마왕의 활동이 눈에 띄게 줄어들은 것은 다행이나 그 꿍꿍이가 무언지는 알 수 없었다. 지난번처럼 또 바이욘느님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레기어스가 버젓이 이 궁 안에 버티고 있는 한은 안심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유일한 마왕의 적자였으니 마왕의 피를 이어받은 음흉한 심성이 언제 나타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호랑이의 자식이 고양이일수는 없지. 지금은 저리 보여도 분명 날카로운 발톱과 이를 드러낼 때가 있을꺼야. 하지만.... 바이욘느님의 명령이니 지금은 두고볼 수 밖에.” 언제나 온화하던 바론의 얼굴에 냉혹한 그림자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의 이런 모습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는 바이욘느조차도. 숙소로 배정받은 곳은 아버지인 첸의 본성에 있는 자신의 방보다도 훨씬 화려했다. 커다란 창문이 남쪽을 향해 3개가 붙어있었고, 창문겸 문을 열고나가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새하얀 베란다에서 화려하게 물든 가을의 정원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방안은 전반적으로 금색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천장에 매달려 있는 화려한 샹들리에였다. 색색의 아름다운 보석이 정교하게 컷팅되어 그 각각의 면들 사이로 수백개의 아름다운 빛을 반사해 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방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엘은 뭐가 그리 불만인지 침대에 퍼질러 누은채로 그 곁에서 말없이 짐을 정리하고 있는 카란을 향해 궁시렁거리고 있었다. “것 참 되게 땍땍거리네. 카란. 아까 날 쳐다보던 그 늙은이의 얼굴 봤어? 얼굴은 공손한 척 하고 있었지만 완전히 아버지가 날 혼낼 때의 눈빛을 하고 있더라고. 분명이 음흉한 너구리 같은 영감일꺼야.” 자신의 아버지가 너구리 같은 영감이라는 식의 불효막심한 발언을 하며 엘이 몸을 데구르르 굴려 카란쪽으로 몸을 옮겼다. “바론은 바이욘느의 가장 신임 받는 측근중의 한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림자족의 일원이기도 해. 게다가 우리는 바이욘느 측과 뜻을 달리하는 입장이니 그가 그렇게 나오는 것도 당연하지. 그리고 비록 미수로 그치고 증거가 없어 그쪽에서 따지지는 못했지만 저번에 너희 아버지가 벌인 사건도 있으니 보나마나 감시를 붙일게 뻔하다.” 여전히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들고 온 물건들을 정리하던 카란이 검은 상자를 꺼내며 대답했다. 크기는 작았지만 짙은 검은색에 윤기가 흐르고 가장자리를 튼튼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두른 금색의 테는 많이 닳았음에도 반짝이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히 소중히 여기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쩐지 그 방에서 또 다른 기운이 느껴진다 했더니. 그게 그림자 일족이었던건가?” 카란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검은색 상자를 꺼내는 것을 바라보던 엘이 지나치듯 중얼거리자 카란이 갑자기 놀란듯 벌떡 일어서 엘에게 다가왔다. “다른 기운이라니?” “어? 몰랐어? 왜 그 늙은이의 왼쪽과 오른쪽 벽에 말이야 하나씩 느껴지던데. 처음엔 또 내가 잘못 알았나 싶었는데 우리가 나간다음에 바론쪽으로 가까이 가더라고. 그래서 바론이 아는 녀석들 인가 했지.” 엘은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말을 하지만 그림자 일족이란 이름은 달리 붙은 것이 아니었다. 비록 전투력을 약하지만 뛰어난 은신술을 익히고 있어 상대의 진영에 누구보다도 쉽게 잠입할 수 있어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은신술은 비록 마왕급의 실력자라고 해도 쉽게 눈치챌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계속 마왕들에 의해 핍박을 받아온 일족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아마도 그들이겠지. 다행이군. 분명 그들 중 하나가 우리 감시로 따라붙을텐데 네가 있으니 가까이는 붙지 못하겠지.” 엘이 어떻게 그런 것을 느꼈는지는 모르지만 말썽부리는 것 빼고 이런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번일은 아무래도 생각보다는 쉬워질 것 같아 마음이 놓인 카란이 들고 있던 상자를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서랍에 넣었다. 카란의 행동을 지켜보던 엘은 어쩔수 없다는듯 중얼거렸다. “여기까지 가져온거야? 내가 그런거 들고 다니지 말라고 했잖아. 뭐하러 그런 약상자는 들고 다니냐. 네가 다치면 이 몸이 나서서 다 치료해줄텐데 고집도 세다니까.” 마력이 봉인된 카란은 마족임에도 불구하고 마력을 쓸 수가 없었다. 게다가 반역자의 자손이라는 사실 때문에 어려서부터 몸을 다치거나 병에 걸려도 누구하나 카란을 치료해 주려는 자는 없었고 덕분에 일반적인 마족이라면 익히지 않았을 상처봉합술이나 치유를 위한 여러 가지 약초에 대한 조예가 깊은 카란은 항상 이런 비상약을 상비하고 다녔다. 그런 카란에게 엘은 늘 자신이 치료해줄테니 그딴 상자는 놔두고 다니라고 말해도 카란은 들은척도 하지 앟았다. 언젠가는 몰래 그 상자를 숨겼다가 어지간해서는 화도 내지않던 카란이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추궁하는 바람에 찔끔하고 돌려준 일이 있었을 정도로 카란은 그것을 아꼈다. ‘저 약들 보다는 저 상자가... 더 카란에게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지...자식! 또 저런 얼굴을 하잖아? 나한테는 맨날 잔뜩 인상만 쓰면서...’ 가끔씩 저 무표정한 얼굴이 상자를 바라몰때만은 한없이 부드러워 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엘은 가끔씩 저 상자를 완전히 없애 버리고 싶은 충동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없어지고 나면 정말 완전히 다시는 카란의 그런 얼굴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차마 그것을 시행헤 옮기지는 못했다. 바이욘느, 하연, 그리고 레기오스랑 헤어진 라인슈타인의 발걸음은 자신의 누이동생인 피오겐의 궁으로 행하고 있었다. 얼마나 피오렌이 닦달을 했는지 초조한 얼굴로 계속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시녀는 그를 보자 안도의 표정을 짓고 피오렌에게 라인슈타인니 돌아왔다는 것을 알렸다. “오라버니? 제가 부탁드린 일은 어떻게 되었나요. 확실히 알아보고 오신건가요?” 라인슈타인이 방아네 돌아오자마자 피오렌은 잠시도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들고 있던 수틀을 내던지며 성급하게 물어왔고, 그런 피오렌을 보며 라인슈타인은 슬며시 장난끼가 솟아났다. 질투심 강한 누이동생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당히 기대가 된 그는 일부러 침통한척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질문에 대답은 커녕 시선을 피하는 오빠를 본 피오렌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찾아간 바이욘느가 오후부터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어 자신을 들어갈 수 없는 그곳에 오빠를 대신 보낸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반응이라니.. “네가 말한대로 바이욘느가 거기에 있더구나. 게다가.. 그 인간도 거기 있더군.” 갑자기 어두워지는 동생의 눈빛을 바라보며 말하기란 생각보다 힘들어서 고개를 숙여버린 라인슈타인의 어깨가 미처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하고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작은 웃음소리는 피오렌의 귀에 들려오지 않았고 오로지 고개를 숙인채 어깨를 떠는 오빠의 모습에 불안감만이 가중될 뿐이었다. “절 보고 확실히 말씀하세요. 그 인간이 거기 있다는게 확실해요? 정말 두 눈으로 확실히 본거예요?” 새파랗게 질려서 자신을 바라보는 피오렌의 얼굴에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 고개를 들어올린 라인슈타인의 얼울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지만 피오렌에게 그 얼굴은 차마 말하기 힘들어하는 오빠의 얼굴로 보였다. 자신은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는 그곳에 인간을 몰래 숨겨놓고 있었다는 믿기 힘든 사실에 피오렌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내가 들어갔을때는 두 사람이 서로 껴않고 침대에 쓰려져.. 하여튼 옷까지 찟어지고... 그러고 보니 그렇게 당황하는 녀석의 얼굴은 처음 봤어. 나를 보자 얼굴이 붉어지더니..식은땀까지 흘리더구나.” 교묘하게 그 상대가 레기어스라는 사실을 빼놓고 말한 라인슈타인은 살며시 고개를 돌려 피오렌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뱀파이어족인 탓에 월래도 창백한 피부를 가지고 있던 피오렌의 피부가 더 이상은 하얗게 변할 수 없을 정도로 질려 있었고 이제는 푸른빛까지 돌고 있었다. “그..그럼... 설마 바이욘느가.. 진심인것은...” 자신을 멀리하는 것은 참을 수 있었다. 적어도 바이욘느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여인들에게도 관심이 없었고 그의 유일한 여인은 자신뿐이기 때문이었다. 한달전 그때에도 아이의 말라비틀어진 듯한 볼품없는 생김새와 그날 밤 바이욘느의 침소를 정리한 여관의 말을 듣고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음을 알고는 신경을 끄고 지내왔던 것이다. ‘나에게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던 얼굴을 그 천박한 인간 하나 때문에 보여줬다고?’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듯 헐떡이는 피오렌의 모습에 자신이 조금 심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거 확실히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에 라인슈타인은 일부러 목소리까지 떨며 입을 열었다. “내가 들어가자 그 인간을 황급히 감싸더니 하는 말이 들키지 않으려면 그 옷 좀 어떻게..” “그만!! 그 인간 어디있어! 분명 아직도 거기에 있겠지? 감히 나의 바이욘느를 홀려? 당장에 그 목을 쳐버리겠어. 아니 사지를 갈갈히 찟어버리겠어!!! 더러운 인간 주제에 감히!!” 갑자기 라인슈타인의 말을 중간에 끊은 피오렌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흉흉한 눈빛을 하고는 금방이라도 그 곳으로 뛰어갈 기새로 소리쳤다. 순간 라인슈타인은 자신의 장난이 정도가 지나쳤음을 깨닿고 피오렌을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피오렌은 벽에 걸려있던 검을 빼어들고는 부숴버릴듯 문을 박차고 흉흉한 기새로 빠져나간 뒤였다. “이런... 큰일났군.”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피오렌이 사라진 방향을 보고 있던 라인슈타인은 방금전 엄청난 소리에 두려운 눈빛을 하고 몰려든 시녀와 시종들을 보고는 그제서야 느긋하게 피오렌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피오렌이 사라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간정도야 죽인다고 해도 큰일은 없겠지. 설사 피오렌이 칼부림을 벌인다고 해도 상당히 훌륭한 검술을 가지고 있는 레기어스가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하니 최소한 죽지는 않겠지. 약간의 상처는 어쩔수 없겠지만. 뭐 그럼 구경이나 하러갈까?”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한말이었으니 뒤에 숨어서 라인슈타인을 바라보고 있던 자들의 귀에 그 목소리가 분명히 전달되었음을 분명한 일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라인슈타인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세상에.. 들으셨어요? 바이욘느님이 데려오신 인간을 글쎄 레기어스님이..” “어머나. 어쩐지 요즘은 도통 여인들을 찾질 않으시더니. 그새 취향이 바뀌신 모양이군요, 하지만 인간의 남자애라니.. 불결합니다. 어찌 그런 천박한 행위를 하시는지.” “하지만 바이욘느님께서 한번도 손을 대지 않으셨다 하나 그분의 소유가 아닙니까? 그럼 이 상황은 어떻게 설명해야 되는 거지요. 주인이 있는 물건을 탐하다니. 그분답지 않으신 처사군요.” “어쩌면 다행 아닙니까 바이욘느님이 그런 인간을 소유로 하시고 계신 것도 불쾌한 일인데 이번 기회로 아예 레기어스 님에게로 이전된다면 추문이 퍼질일도 없겠지요. 비록 정을 통한 상대이더라도 인간은 쉽게 양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사건이후 한동안 레기어스의 주위에는 남녀시종 모두가 좀처럼 접근하려 하지 않았으나 그 이유를 모르는 레기어스는 한동안 고민에 빠져 지내야 했다. 시노페는 정확히 마왕의 딸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만 출생에 의심이 많기 때문에 일부는 마왕의 딸이라고 생각하고 있기도 합니다. 마족은 부모의 모습을 아이가 닮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 타고나는 능력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진다는 설정이어서 외양으로 누군가의 아이라는 것을 판별하기는 곤란합니다. 게다가 천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시노페는 그 유래가 없던 생명이라 더더군다나 알기 힘들지요. 공식적으로는 엘라힘과 에네스틴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구요. 마왕은 자신의 아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가 나올겁니다. 재미있으셨으면 추천좀^^:: 전작에 리플주신 ♡lovelygirl♡, korapha-duck, 은빛파수꾼 ,리안케이트님 감사합니다. korapha-duck님은 제 전작부터도 리플 주셨었죠^^ 제 뜰에도 오시구요. 감사드립니다~ “레기어스. 바이욘느! 그리고 너 빨강머리! 당장 여기서 나가지 못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찮은 인간 따위에게 이렇게 무례한 대접은 처음 받았던지라 그 충격에 라인슈타인은 잠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감히 인간주제에 뱀파이어로드인 자신에게 빨강머리라고 부르는데다 뻔뻔하게 반말까지 해? 싸늘한 분노가 밑바닥에서부터 천천히 차올랐다. 심상치 않게 흔들리는 라인슈타인의 모습이 금방이라도 칼을 빼들 것만 같아 레기어스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라이슈타인은 상대가 여자라고 해서 봐주는 법이 없었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일족의 수장으로서 방금 같은 모욕을 받고 인간인 하연을 그냥 놔 둘리가 없었다. '저 눈빛은 분명히..하지만 하연을 해치도록 놔둘수는 없어.' 자신의 위치가 그를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레기어스였지만 그렇다고 하연이 그냥 당하게 둘 수는 없었기에 그의 손이 슬그머니 허리쪽 검을 향했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 내가 분명히 반말은 하지 말라고 했을텐데. 잊은 모양이군.” 방안에 감도는 팽팽한 긴장감을 깨트린 것은 바이욘느의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라인슈타인의 몸에 쌓여있던 기운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 사라졌다. 방금 전 사건으로 깜박하고 있었지만 여기는 분명 바이욘느의 관할 하에 있는 곳이었고 레기어스가 여기서 무엇을 했던 그 처벌은 바이욘느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지 손님에 불과한 자신이 판단할 문제는 아니었다. ‘게다가 허락없이 이곳으로 들어온 것은...나도 마찬가지군.’ 방금 전 명백한 축객령에도 불구하고 따라 들어온 것은 자신이다. 재빨리 머리를 굴린 라인슈타인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 바이욘느의 뒤에 섰다. 그런 라인슈타인의 태도 변화에 놀란 레기어스가 허리로 가져갔던 손을 어찌할까 망설이다 다시 아래로 늘어뜨렸다. “죄..죄송합니다. 바이욘느님. 제가 당황해서..” 그제서야 뒤늦게 대답하는 하연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그때의 계약을 조건중 하나 반말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이 있었고 지금 바이욘느가 내뿜는 기운은 금새라도 얼어붙을듯 차갑기 그지없었다. 언제나 친절한 레기어스 때문에 잊고 있었지만 이곳은 마계, 하연같은 인간의 목숨은 어떻게 취급해도 아무도 말리지 않는 곳이라는 것을 방금전 그의 말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아닙니다. 형님. 제가 갑자기..” 하연의 얼굴이 금방 기절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하얗게 변하자 레기어스가 황급히 하연을 대신해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바이욘느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오른손을 올렸고 레기어스는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레기어스. 방금 전 마력의 움직임은 회복계열인것 같던데. 맞는건가?” “예? 예. 힐링이었습니다만.”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져오는 바이욘느에게 레기어스는 잠시 지체했다가 어째서 저런 질문을 하는 것인지 의아해 하며 대답했다. “하연이 어디 아팠던 모양인데 레기어스 그대가 치료해준 모양이군. 이제는 저리도 멀쩡한 걸보니 말이야. 어쨌든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에게 힐링을 쓰는 것은 좋지 않아. 마족의 기운은 인간이 받아들이기엔 지나치게 어두운 측면이 강하니 오히려 나중에 더 힘들어지는 수가 있지. 그러니 앞으로 하연에게 마법을 쓸 때는 나의 허락을 받도록 해.” 라인슈타인은 바이욘느를 놀란듯 바라보았다. 어떻게 저렇게 짧은 순간에 자신도 아닌 제3자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마력을 느끼고 그것이 무슨 종류인지도 알아낸단 말인가. 능력이 뛰어난 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알겠습니다. 형님.” 바이욘느의 배려에 레기어스는 어쩔줄 몰랐다. 저 뒤에서 감탄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라인슈타인은 미처 눈치채고 있지 못한 것 같지만 바이욘느는 말 한마디로 자신이 여기에 있는 것을 정당화 하고 방금 전 상황에 대한 상황을 담담히 설명함으로서 라인슈타인의 오해를 단숨에 풀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하연의 무례한 행동도 더 이상 트집잡지 않을 것 같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는 몰라도 바이욘느와 뒤따라 들어와 엄청난 살기를 쏟아내던 붉은 머리의 소유자가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일이 잘 해결된것 같이 보이자 하연은 조심스럽게 바이욘느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이다. 내가 여자라는 것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네. 그러니까 아까의 장면에도 오해를 하지 않은거구나.’ 아까의 레기어스와의 사고로 바이욘느가 혹시나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알았을까봐 걱정하던 하연은 태평스럽게도 그 것으로 모든 문제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눈에 띄일 정도로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들 간에도 남녀간의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하연은 자신이 남자이기 때문에 아까의 상황에서도 바이욘느가 레기어스가 힐링을 쓴 것을 알아냈다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라인슈타인은 여전히 탐색하는 눈초리로 바이욘느과 레기어스를 동시에 바라보고 있었다. ‘흐음. 왠지 분위기가 이상한데? 힐링이라.. 아무에게나 써주는 그런 것이 아닌데 다른 사람도 아닌 저 레기어스가 바이욘느의 허락도 받지않고 힐링을 써줘? 이곳이 바이욘느만이 출입 가능한 개인전용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저 인간은 피오렌이 말한 그 인간이 분명한데. 형에게 소유된 자에게 저리도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노예와 소유된 자의 의미는 달랐다. 노예와는 달리 소유된 자는 다른 목적에 의해 들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주 가끔은 가장 곁에 가까이 두는 호위를 일컫는 말로도 쓰이곤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공식적인 첩실로서의 의미가 강했다. 오직 샨트만이 아이를 가질 수 있으니 인간처럼 다른 부인을 두는 것은 의미가 없었기에 생긴 제도였다. 보통 마족들은 자유로운 남녀관계를 유지했고 여성의 경우 누군가의 샨트가 되기 이전에는 누구와 밤을 같이 보내건 간섭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남성의 경우는 조금 달라서 언제든지 원하는 여인을 안을 수 있었다. ‘소유된 자란 의미는 다른자가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의미인데.. 그것을 왕실에서 자라온 레기어스가 모를리는 없고.. 그렇다면 알면서도 접근했다 이건가? 하지만 상당히 심미안을 지닌 레기어스가 저리도 평범하게 생긴 아이에게 접근하다니.. 의외인걸?’ 소유된 자는 일부 고위 마족이 오로지 자신만이 건드릴수 있다는 의미로 상대에게 주는 것이었다. 보통 마족은 소유된 자를 가질 수는 없었기에 그것이 곧 고위마족의 특권중 하나였다. 생각이 어느정도 정리되자 이제는 느긋한 자세로 레기어스와 하연을 차례로 바라보던 라인슈타인이 입을 열었다. “하하. 그랬던건가? 난 또 그대의 유희를 방해한줄 알았네. 그런데.. 이번 상대는 조금 수준미달인 것 같군. 글쎄 한 2년 뒤면 조금 달라지려나? 하긴 저 몸매에 살이 좀 붙으면 안을때 덜 배기긴 하겠지.” 아까부터 이상하게 음흉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빨간머리가 내밷은 수준미달이라는 소리에 하연이 울컥했다. 그러는 자기는 꼭 빨간 홍당무처럼 생겨서는 뭐가 어째? 금방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을 느낀 레기어스가 하연이 입을 열기전에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 예. 그나저나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 뱀파이어로드이신 라인슈타인님. 혹시 피오렌님의 탄생일을 맞이하여 오신것인가요?” 하연만 빼놓고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하는 레기어스를 라인슈타인이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냐는 듯 바라보다가 레기어스의 뒤에 꼬옥 숨어있는 하연을 보고는 그제서야 그가 그런 말을 한 이유를 깨달았다. ‘흐음.. 인간은 아마도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지. 그래서 일부러 이렇게 설명을 해주는 건가? 그렇다면 나도 장단을 맞춰주지.’ “사실 피오렌이 이곳에 숨겨둔 인간을 알아보라고 해서 말이야. 뭐 여기있는 바이욘느를 건드리면 그냥두지 않겠다나 어쩌겠다나. 하여튼 그래서 호기심으로 와본 거라네. 하지만 저정도라니.. 상당히 안심이 되는구만. 하하핫!” 일부러 하연을 도발하는 라인슈타인이었다. 자신이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잘은 보이지 않지만 발끈하는 것이 상당히 재미있었다. 잠자리 상대로는 별로겠지만 가지고 놀기에는 딱 좋을 것 같았다. 뱀파이어 로드가 되기 이전부터도 언제나 존경과 존대만 받아오던 그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상대를 만난 것은 당돌하기 짝이 없던 시노페을 본 이후로 처음이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저 인간의 느낌..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왕족 중에서도 시노페의 기운이랑 아주.. 조금 비슷한 것 같은데..? 하지만 말도 안되지. 시노페가 죽은지 벌써 백년이 다 되가는데.’ 말도 안되는 어처구니 없는 이 느낌은 아마도 시노페와 가장 가까웠던 바이욘느와 레기어스가 한방에 있어서일거라고 결론 내버린 라인슈타인은 더 이상 그곳에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재빨리 바이욘느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피오렌이 기다리는 궁으로 가버리고 방안에는 남은 세명이 아무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하연은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사방의 벽이 무너져 내려 몸위에 쌓인다고 해도 이보다는 가벼울거라 생각하며 하연은 라인슈타인이라는 마족이 나간 후 싸늘한 분노로 단단히 굳어버린 바이욘느의 황금빛 눈동자를 애써 피했다. ‘왠지 저 눈동자만 보면 가슴 한쪽이 얼어붙어 버리는 것 같아.’ 하연이 막 그때의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입맞춤을 생각하고 몸을 부르르 떨고 있을때 바이욘느의 일자로 굳게 다문 입에서 말소리가 새어나왔다. “....레기어스 나의 소유된 자에게 왜 접근한 거지?” “.....” 바이욘느의 말에 그제서야 레기어스가 여기에 왜 온걸까 라고 생각해본 하연은 마땅한 대답을 찾을 수가 없어 아무말이 없는 레기어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아까의 상황에서도 조금 긴장하기만 했던 그의 얼굴이 흙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왜 대답이 없지? 그렇다면 내가 짐작하고 있는 것이 맞다고 인정하는 건가. 아니면 변명거리를 찾는 중인가. 어서 내가 수긍할만한 답변을 준비해 두는게 좋을꺼야. 하지만 어설픈 변명이면 용서하지 않겠어. 그러니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라고. 레기어스!” “....” “훗, 대답이 없다는 것은 역시 그렇다는 뜻인가? 하지만 시노페를 되살리는 것은 바로 나야! 그러니 하연은 절대 넘겨줄수 없다!” "!!!" ♡lovelygirl♡ 카오메이 님 리플 감사드려요!!! 오늘은 추천이 많아서.. 이거 내일 올리려다 또 올립니다. (별 내용은 없지만... 마지막 내용이 중요한 거라서요, 그럼 내일~또 올릴께요!) 구라파덕님^^ 오타지적 감사드려요~ ‘지금.. 뭐라고 그런거지? 시노페를 되살려? 날 넘겨줄 수가 없다니.. 무슨 말이지?’ 바이욘느가 한말이 고장난 카세트마냥 계속 끊임없이 같은 소리를 내며 점점 커져오고 있었다. 하연은 애써 웃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얼굴이 잘 움직여지지가 않아서 하연의 얼굴은 웃는 것도 아니고 찡그린 것도 아닌 이상한 얼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레기어스... 지금.. 바이욘느가 한 말.. 그거 무슨 말이야? 나 알아들을 수가 없어..” 하연이 떨리는 손을 레기어스에게 뻗었다. 하지만 자신이 레기어스의 옷자락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레기어스는 그대로 굳어버린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연의 혼란으로 가득한 검은 눈동자가 레기어스에게로 손을 뻗는 모습을 차갑게 바라보던 바이욘느는 그 순간 알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하연이 잡고 있는 레기어스의 옷을 노려보았다. “날 넘겨줄 수 없다니. 말이 안 되잖아. 레기어스는 그냥..... 이야기만 하려고 온 거잖아. 바이욘느한테 저런 말 들을 이유가 없는 거야, 그런데 왜 그냥 서있어..?”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귀에까지 올라와 레기어스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하연은 애써 목소리를 높혀 말을 했다. 레기어스가 대답을 하지 않는건.. 당황해서 그런거야. 그러니까.. “헤헤. 갑자기 그런 말 들으니까 당황한거야?” 일부러 웃음을 섞어가며 말을 했지만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나 묻는데 레기어스는 대답이 없었다. 그것은 분명히 긍정의 표현, 바이욘느의 말이 사실이라고 레기어스는 침묵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처음부터도 레기어스같은 남자가 자신을 좋아해 줄거라고 믿지는 않았다. 언제나 친절하고 유머넘치는 그에게는 자신보다 나은 여자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 분명했고 레기어스라면 자신처럼 초라한 인간이라는 종족이 아니라 같은 마족의 아름다운 여인들이 훨씬더 잘어울린다는 것을 하연은 알고 있었다. 그를 볼 때마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애써 죽이고 붉어지는 얼굴을 감추면서 마치 동성 친구처럼 그를 대한 것도 사실은 자신이 보통의 여자처럼 행동하면 그가 부담을 느끼고 다시는 오지 않을까봐여서였다. [너 여자 맞냐?] 그런말을 들어도.. 좋았다. 그의 앞에서 여자로 보여서 더 이상 그의 곁에 있을 수 없게 되는 것보다는 여자로도 보여지지 않는 친구가 나았으니까. 그래서 억지로 참고 참았는데..여기서 만나게 된 유일한 말벗을 잃을까 두려워서 간신히 마음을 숨기고 있었는데. '속은것 때문에 이렇게 마음이 아픈거라면..... 좋겠어. 그러면 미워하면...... 되니까. 한없이 원망하면 되니까.' ‘..하지만... 정말.. 한번도.. 아니 한순간 만이라도. 날 친구로서도 좋아한적이 없는거야? 그건.. 아니지? 보기 싫었는데도... 내가 다렌을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인간이라서... 일부러 찾아와서 말을 걸어주고 억지로 웃어보인거야? 사실은 나에게 찾아오는 것도 싫었고, 날보고 즐거운듯 미소짓던 눈동자도 네가 말한 것처럼 전부 연기였던 거야? 처절할 정도로 젖은 눈을 한 하연이 두 번 세 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핏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을 하고 레기어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냘프게 떨리는 손이 그리고 어깨가 오로지 그만을 바라보며 제발 아니라고 말해달라고 소리없이 울부짖고 있는 것을 본 바이욘느의 어깨가 가늘게 흔들렸다. ‘뭐지? 이 불쾌한 기분은. 오히려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닌가? 어째서 이렇게 더러운 기분이 드는거지?’ 이제는 더 이상 레기어스가 다렌을 만나게 해줄 매체인 하연에게 접근할 수는 없는 터였다. 오히려 기뻐해야 마땅한 상황인데도 무언가가 자신의 숨겨진 본능을 자극하고 있었다. 하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할때마다 머릿속의 무엇인가가 툭툭 하고 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하연이 까만 밤하늘 같은 눈동자에서 투명한 물방울이 투명하리 만큼 맑은 피부를 타고 내려오는 순간 강하게 바이욘느의 가슴속을 직격했다. ‘설마,, ..레기어스를..... 진심으로 좋아했던 건가?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이 느낌은 분명히...’ 하연의 감각을 일부 자신과 연결시켜 놓은 것은 자신이었다. 비록 그것이 원래의 목적인 사랑하는 연인과의 감정을 공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렌을 만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하연의 강한 충격은 바이욘느의 가슴으로 그대로 이동되어졌다. 더불어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사실까지 알게 되 버린 바이욘느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다. 레기어스의 침묵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하연이 울부짖듯 소리쳤다. “무슨말이야! 시노페라니.. 그럼 그 사람이 정말로 있었다는 거야? 레기어스! 뭐라고 말 좀 해봐! 그냥.. 장난이라고. 연기였다고 그랬잖아! 너 연기 잘한다며, 그런데 지금은 왜 아무말도 하지 않는거야! 뭐라고.. 말좀.. 해.... 제발.. 변명이라도 하란 말이야!!” 하연은 대답 없는 레기어스의 허리를 두 팔로 안고서 등에 얼굴을 묻었다. 언제나처럼 넓고 따스한 등에서 희미하게 풀 내음이 났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단단히 경직된 등은 더 이상 돌아서서 하연을 안아주려 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웃으며 자신을 향해 장난치지 말라던 레기어스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하연이 소리없이 흘리는 뜨거운 눈물이 레기어스의 등을 적셨다. 울음소리 하나 내지 앟고 입술을 깨문 하연의 입사이로 희미한 붉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자신의 등에 밀착된 하연의 가슴에서 격하게 진동하는 심장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지만 레기어스는 차마 뒤돌아 설수가 없었다. ‘처음엔.. 그래.. 형의 말이 맞아. 난 너를 이용하기 위해서 접근했지. 하지만.. 내가 이런 마음이 될 줄은.. 정말 몰랐어. 내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을거라고. 시노페가 아닌 그 누군가를 보고 두근거리지는 못할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서서 미안하다고. 울지 말라고 속삭이고 싶었다. 흘러내린 눈물을 입술로 닦아주며, 떨리는 두 어깨를 품에 안고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자신을 향해 미소짓고 몸을 기대어 오는 하연의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리며 웃음짓고 그리고... ‘하지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 너에게만은.. 거짓말을 할 수 없어. 한때나마 그렇게 생각했던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절대로 잊지 않으리라 맹세한 시노페를 잊어버린 내가 널 좋아한다고.. 말할 자격은 없으니까.... 네가 이렇게나 슬퍼할 정도로,, 난 좋은 녀석이 아니니까.. ’ 열릴 것 같지 않던 레기어스의 입이 아주 천천히 조금씩 움직였다. 하지만 목이 메인듯 한참이나 벌어진 입 사이로는 아무런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의 허리를 꼭 붇잡고 있는 하연의 손을 자꾸만 흔들리는 손으로 천천히 감싸안았다.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지만.... 놔주어야만 해. 처음부터 속임수로 시작된 시작이었어. 그러니까.. 내가 끝내야 되. 비록 가슴이 찟어지는 것 같지만.. 약해지면 안되...레기어스’ 바이욘느의 눈에 레기어스의 지독히도 슬퍼 보이는 눈동자가 비쳤다. 눈물은 보이지 않았지만 팽팽하게 당겨진 얼굴이 눈썹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하연의 손을 향해 가까이 가는 레기어스의 손이 하얀 관절이 들어날 정도로 힘을 주고 있어서 그가 자신을 간신히 억제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한참이나 주저하고 망설이던 레기어스가 단호하게 하연의 손을 풀어냈다. 하지만 격한 움직임과는 달리 그의 눈동자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난.... 미안해..... 하연...” “...뭐가? ...내 얼굴을 보고... 나 좀봐.. 레기어스.. 나 화내는거 아냐. 레기어스가 날 속였다고 해도 상관없어... 그러니까. 제발... 날보고 이야기해!” 자신을 보려고도 하지 않는 레기어스를 억지로 돌려세우려고 했지만 레기어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연이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는 맨발로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바닥에 닿은 발이 차가웠다. 자신이 다가가자 고개를 돌리는 레기어스의 팔을 하연이 붙잡았다. 너무나도 약하게 간신히 자신을 잡고 있는 팔인데도 그는 뿌리치지 못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하연의 체취가 느껴졌지만 레기어스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정말로.... 그것 때문이었어? 아주.. 조금이라도.. 다른 감정은... 없었던 거야?” 고개를 숙여 흘러내린 머리카락으로 레기어스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간 하연이 고개를 위로 들어올리고 오른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길다란 하늘색 머리카락을 천천히 다가갔다. 흘러내린 소매 사이로 드러난 하연의 가느다란 팔의 유려한 곡선이 그리고 섬세한 손가락이 천천히 머리카락에 닿았다. “이정도면 시간은 충분했다고 생각하는데? 하연 이리로 와라.” 순간 바이욘느가 하연의 오른손을 강하게 잡아챘다. 왠지 더 이상 하연이 레기어스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던 바이욘느가 예고도 없이 레기어스의 머리카락을 향하고 있던 손을 사냥감을 붙잡는 매처럼 매섭게 잡아챘다. 그 반동으로 하연의 작은 몸이 넓은 바이욘느의 품안으로 한손이 잡힌채로 빨려들어가듯 감싸안겨 버렸다. 단단한 바이욘느의 가슴에 부딪힌 하연이 숨간적으로 호흡이 막혀 고통스러워했다. 격하게 기침을 하며 허리를 숙이고 앞으로 쓰러지려는 하연의 허리를 바이욘느의 왼팔이 강하게 감싸 안았다. “더 이상 ‘나의 것’에 접근하지 마라. 이건 최초이자 최후의 경고다. 레기어스!” 더 이상 상대에게 싸울 힘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이욘느는 그렇게 소리쳤다. 아니 그 말은 눈앞에 공허한 껍데기만 남아있는듯 멍한 눈길로 레기어스만을 바라보고 있는 하연을 향해 하는 말이었다. “저리꺼저! ” 바이욘느의 팔에 간신히 매달려 서있던 하연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거칠게 자신을 안고 있는 바이욘느의 가슴을 밀쳐냈다. 급작스런 하연의 몸부림에 바이욘느의 팔이 풀려버렸다. 뒷걸음쳐 바이욘느의 품에서 빠져나온 하연은 바이욘느를 노려보았다. “당신따윈 보고싶지 않아! 당신이 뭔데? 어짜피 당신도 다렌인가 뭔가 때문에 나한테 이러는 거잖아. 당신을 뭐가 그렇게 대단한데? 레기어스 나 혼자 있을때 매일 같이 찾아와 줬어. 비록... 그게 거짓이라고 해도.. 난 지난 한 달동안 충분히 행복했어. 하지만 당신은 뭐지? 당신이 한 거라고는 그저 먹고 자는 것만 제공해 준것뿐이잖아! 그런데 당신이 레기어스를 비난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이건.. 정말 예상회였다. 배신감에 치를 떨줄 알았던 눈 앞의 인간은 오히려 당당하게 자신의 앞에서 레기어스를 감싸고 있었다. 자신을 속인 것이 분명한데도 저 눈동자는 오로지 레기어스만을 위해서 자신을 비난했다. 그정도로.. 너의 마음을 빼앗아 간건가? 저 녀석이? “넌 내 것이다. 계약을 잊지는 않았겠지?” 아까보다 더욱 싸늘해진 눈동자가 차가운 분노로 불타며 하연을 똑바로 응시했다. “계약이란 말 꺼내지 마! 계약이라며 네가 나한테 키스했을때 얼마나 기분나빴는지 네가 알 리가 없지. 내 기분이 어땠는지 말해줄까?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어. 네 차가운 입술이 얼마나 괴물같이 느껴져는지 그것도 말해줄까? 난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온몸이 얼어붙어 온다고! 그러니까 그딴 말은 꺼내지도 마!” 발악하듯 외치는 하연의 모습에 바이욘느의 가느다랗게 매달려 있던 이성의 끈이 툭하고 끊어졌다. 차갑기만 하던 바이욘느의 황금빛 눈동자가 주체할 수 없는 검은 욕구로 어둡게 변했다. “그래도 넌 내 것이다.” 무시무시한 오라를 내뿜으며 바이욘느가 하연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와 한손으로 하연의 가느다란 목을 잡아 쥐었다. 어두운 황금빛 눈동자가 하연에게로 가까이 다가오고 뜨거운 그의 숨결이 얼굴위로 다가오자 하연이 오른손을 들어 바이욘느를 치려고 했지만 바이욘느의 다른 손이 하연의 손을 공중에서 낚아챘다. “감히 천한 인간 주제에 날 치려고? 잘못을 했으니 벌을 받아야겠군.” 바이욘느는 고개를 돌려 하연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느릿느릿 말했다. 그 소름끼치는 느낌에 하연이 고개를 돌릴려고 했지만 바이욘느의 손이 강하게 힘을 주는 바람에 목이 졸리는 듯한 고통을 느낀 하연이 신음성을 내질렀다. “내 키스가 그렇게나 싫었나? 그럼 그걸로 하지.” 하연의 동공이 차마 믿고 싶지 않은 바이욘느의 말에 크게 확장되었지만 바이욘느의 손에 억세게 잡혀 있는 목에서는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기에 하연은 마음속으로밖에 비명을 지를 수 없었다. ‘싫어!!!! 제발.. 누가 좀 도와줘!’ 오늘꺼 올렸습니다^^::3월1일 내일 오후에는 어떤 장면이~ 그럼 추천 부탁드려요 ㅎㅎㅎ 괭이친구님 고쳤습니다3/4 바론은 화원의 문앞에 서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차분하게 기다리지도 못하고 초조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다른 곳을 다 찾아 보았으나 바이욘느 전하는 계시지 않았으니 남은 것은 여기뿐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타인의 출입을 금한곳 아무리 급박한 일이 일어났다 해도 자신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어떻게 그가... 아니지. 엘이란 놈이 왔을 때부터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어... 하지만 이 일을 어떻한다.’ 엘과 일행을 감시하고는 명령을 내린지 얼마되지 않아 마왕성에서 급하게 보낸 것이 틀림없는 서신을 받아든 바론은 자신도 모르게 서류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급하게 휘날려 쓴 글씨는 분명 마왕의 친필이었다. ‘이런 악필도 드물지..’ 왕은 친필을 거의 쓰지 않고 대부분 대필을 했다. 잘 모르는 이들은 그것이 하찮은 일에는 친히 글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마왕의 성품 탓이라고 하나 사실은 읽기에도 버거울 정도의 날려쓰는 글이라 그것을 해독할 수 있는 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바론이 부스럭 거리며 품안에 손을 넣어 잔득 구겨진 종이를 꺼내들었다. “분명히 뭔가 중요한 일이 적힌 것은 틀림없는데. 이게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있나... 바이욘느 전하라면 어느 정도는 읽으실 수 있을텐데.. 어서 빨리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미친 사람처럼 혼자서 한참이나 중얼거리던 바론의 귀에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붉은 색을 띈.. “..피오렌 전하? 여긴.. 어쩐일로..” “하! 그대까지 여기 와 있는 건가? 그 정도로 그 인간이 소중한 모양이지.” 우아하게 바닥을 사뿐히 쓸고다녔을 치맛단은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연신 가쁘게 숨을 내쉬는 피오렌의 오른손에는 무술을 전혀 모르는 바론이 보기에도 흉흉한 기운을 내뿜는 기다란 검이 붉은 기운을 머금고 싸늘한 검신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갑자기 이곳으로 저런 차림으로 찾아와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얼굴로 알수 없는 대답을 하는 피오렌을 바론은 언제나 그렇듯이 몸에 밴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건지..” “바이욘느가 시키더냐? 감히 내 앞을 가로막다니! 당장 거기서 비켜라.”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평상시와 같은 표정으로 되물어 오는 바론의 표정이 더없이 가증스럽게 보인 피오렌이 검을 휘둘렀다. 차가운 검날이 바론의 목에 낳아 위험스럼게 번득였다. 대번에 굳어진 다렌이 주춤거리자 피오렌은 문을 막고 서 있던 바론을 발로 걷어차고 바론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바이욘느가 있을 그곳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이게 무슨일...” 피오렌의 급작스런 행동에 뒤로 한 바퀴 데구르르 구른 바론이 그에서야 끄응 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언제나 단정하던 그의 희색 옷이 완전히 흙투성이가 되어 버리고 온몸이 뿌드득 소리를 냈다. 얼얼한 머리를 손으로 매만지던 바론은 순간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마왕의 서한이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만 하얗게 질렸다. "이곳의 모든 자들은 저를 제외하고 모두 내보냈습니다. 마왕님." 첸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마왕 펠리펜의 시선이 그의 옆에 서 있는 보라색 로브를 입은 자에게 옮겨졌다. 첸은 아까부터 저렇게 마왕의 곁에 서 있는 자가 누구인가 하고 열심히 추측해 보았지만 상대에게서는 어떤 기운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따라와라!" 동등한 위치에서의 계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펠리펜의 말투는 여전히 거만한 명령조였다. 그러나 다렌은 원래 그런것에 따지지 않는 쪽이었고 마왕도 또한 특별히 상대에게 존대를 해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그들은 곧바로 문을 나섰다. 첸은 따라가지 말까 하는 생각에 잠시 머뭇거리다 한숨을 내쉬며 그들의 뒤를 쫒았다. 펠리펜은 지하 감옥으로 연결된 통로가 있는 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첸으로서는 그 방에 절대 발을 들이밀고 싶지 않았으나 왕의 명령이 없는 한 계속 그의 뒤를 따라야만 했다. 마왕성의 대부분의 방과 마찬가지로 방안은 두터운 커튼이 내려져 있었고, 벽난로에서 낮게 타오르는 불길이 주변에 희미한 빛을 던져 주고 있었다. 첸은 눈을 깜박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가 좋겠군.”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에 첸이 귀를 쫑긋 세웠다. 한번 들은 자의 목소리는 완벽히 기억하고 있는 자신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상대의 목소리는 들어 보았다는 느낌만 들뿐 누구인지는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 이제는 옮겨올 수 있는건가? 혹시 잘못되는 것은..” “!!!!” 무척이나 불안한 듯한 마왕의 목소리에 첸은 무례하다는 것도 잊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것이 그 냉정하기로 소문나 마왕에게서 나오는 목소리란 말인가? 보랏빛 로브는 그런 마왕의 질문에는 입을 다문 채 잘 보이지 않는 얼굴로 뭐라고 중얼 거리며 허공에 손의 궤적을 남겼다. 곧 어둡던 방안에 환한 은빛의 작은 원이 생겼다. 허공에 떠있는 구처럼 둥근 모양을 하고 있던 은빛 원은 투명한 액체인 듯 출렁거리더니 갑자기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면서 순식간에 방안을 가득 메웠다. “으으윽!” 강한 빛에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린 첸이 눈을 떴을 때는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텅 빈 방안 허공에 무언가가 떠있었다. 조금씩 빛이 사라지면서 첸은 조금씩 드러나는 그것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저건. 설마!’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첸은 그 순간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허공에 떠있던 그것은 어느새 마왕의 품에 안겨져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고 시체처럼 창백하기만 했다. 아까의 빛이 사라진 방안은 어둡기만 했지만 어둠속에서도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만은 확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아래로 떨어진 가느다란 팔다리의 곡선도 비록 옷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여인의 곡선이었다. ‘하지만.. 분명 그때 내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했는데....’ 피투성이가 된 시노페의 몸을 안아 올린 것도 자신이었고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는 모습을 지켜본 것도 바로 자신이었다. 그리고 육체가 대기로 화하여 사라지는 것을 자신을 포함한 다른 모든 마족이 확인하지 않았던가. “내가 알려준 것은 잊지 않았겠지? 봉인 4개를 깨야 완전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다" 아까와는 달리 조금 지친듯한 목소리가 마왕을 상대로 반말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봉인이 무엇인지 내가 어찌 알고 3년 안에 한 개도 아니고 4개씩이나 깰 수 있겠나! 무언가 실마리라도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다렌!” 마왕이 내뱉은 펠리펜이라는 단어가 순식간에 첸의 머리를 스쳐 갔다. ‘그럼 저 보랏빛 로브를 입은 자가 바로 그때의 다렌? 어째서.. 여기에 나타난 것이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다. 마왕의 품에 안겨 있는 저것은 분명 시노페님과 똑같은 형상. 설마 봉인이라는게 이미 돌아가신 시노페님을 되살리는 것은 아니겠지?’ 마왕이 안고 있는 것은 분명히 시노페의 형상이었다. 한번 보면 절대로 잊을 수 없다는 극상의 미. 그것을 다른 자와 혼동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시노페님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청량한 느낌의 맑은 기운은 조금도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혼이 빠져나간 그것은 단순한 껍질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각각 천계와 마계, 그리고 중간계에 하나씩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고대 신족의 유물과 관련이 있다는 것 정도지. 내가 한 봉인이 아니니 나도 더 이상을 알 수가 없다.” “그럼 누가 봉인을 했단 말인가!” 다렌이 아닌 그 누가 다렌도 알지 못하는 주술을 걸 수 있다는 것인가. 마왕 펠리펜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펠리펜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다렌이 아까보다는 조금 편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노페 본인이 했다면 믿겠는가? 그대는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시노페의 능력은 천계와 마계의 힘을 한데로 모은다 해도 훨씬 더 크니 나의 주술이 먹혀들 리가 없지.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 영원히 깨어나지 않았을 영혼을 인간으로 환생시키는 것 뿐이었어. 그것도 전혀 각성이 되지 않은 상태로 말이야.” 하나씩 터져 나오는 충격적인 사실에 첸은 난생 처음으로 정말로 할 말을 잊고 마치 그곳에 서있는 기둥중 하나인양 그리 서 있었다. ‘삼계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다는 다렌도 시노페님이 스스로 건 봉인을 풀지 못한다니. 게다가 시노페님의 능력이 그 정도로 뛰어날 줄은... 언제나 그분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시지 않는 마왕님이기에 그저 총애하는 아이에게 습관적으로 하는 말씀인줄 알았는데...’ 이마를 찡그리고 아픈 머리를 간신히 진정시키던 첸은 순간 거세게 항의하는 마왕의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전혀 각성이 되지 않았다니. 그건 완전히 인간과 같다는 말로 들리는데 설마 그런건가?” “약간의 충격에도 쉽게 죽어버리는 인간을 의미한다면 맞네. 지금의 육체에 완전히 동화되어 있는 상태이니 육신이 타격을 입는 순간 혼도 빠져나가겠지.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나도 더 이상은 손을 쓸 수가 없어, 인간의 몸에 들어있는 동안에는 분명 인간의 혼이지만 인간의 혼을 잡아둘 수 있는 마족이라고 해도 육신이 죽은 후의 시노페의 혼은 더 이상 인간의 혼이 아니니 말이야.” “그럼.. 아무것도 기억을 하지 못하는 건가..?” “그렇지. 그럼 내가 할 일은 다 끝난 것 같군, 첫 번째 봉인이 깨지면 그때 찾아오지.” 순간 다렌은 사라지고 방안은 죽음과도 같은 적막에 휩싸여 버렸다. 잠시 망설이던 첸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여전히 시노페로 보이는 몸을 안고 있는 마왕에게 다가갔다. 서너 걸음 걸은 후 마왕의 노려보는 시선을 깨닫는 순간 엘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다가오지 마라." 펠리펜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내가 저번에 말한 인간은 어찌 되었느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어조와는 달리 마왕의 눈빛은 살벌한 빛을 발하고 있었기에 첸은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다시 한번 마왕의 시선이 첸에게 못 박혔다. “지금 제 아들이 그곳에 가 있으니 3일 내로 연락이 올 것입니다.” "분명히 내 말을 잘 전했겠지?" "예 분명히 목숨만은...." 순간 그때의 대화를 떠올린 첸의 얼굴이 양초보다 더 하얗게 되서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들놈이 한 말에 자신이 대꾸한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럼 목숨만 붙여놓으면 되죠?] [목숨만 살려와, 다른 건 상관 안하마.] 갑자기 식은땀이 등 뒤로 흐르고 두 다리가 힘없이 비틀거렸다. 아까의 대화를 추측해 볼 때 분명 그 인간은 시노페님의 혼이 봉인된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마왕이 그 인간을 찾는 이유는 분명히... "어째서 대답이 없는거지?" "그..그게.. 전 단지 살려서 데려오라고 명하였기 때문에..." 마왕의 눈이 위험하게 번득인다고 느끼는 순가 첸은 강한 충격을 받고 차가운 바닥으로 구르고 말았다. 아까 얻어맞은 어깨가 부러진 모양인지 엄청난 고통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다행이 진짜 검 날이 아닌 검 집에 넣어진 칼로 맞았기에 팔이 날라가지는 않았지만 그 엄청난 힘에 분명 어깨뼈가 조각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죄송합니다. 당장.. 서신을 보내서..오늘 그쪽에 도착한다 하니 아직은 직접적인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돌아오라 명하면..” “시끄럽다!” 간신히 터져나오는 비명을 삼키며 첸이 몸을 추스르고 대답했지만 마왕의 눈빛은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직접 간다. 만에 하나 그 애의 몸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그냥두지 않겠다. 누구든 그 애의 몸에 손을 댄 자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하지만.. 그곳은 바이욘느의 본거지인데 어찌 직접 가신단 말입니까?” 아무리 시노페의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마왕이라 하나 그의 말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과거라면 몰라도 바이욘느와 뱀파이어족이 혼인을 통한 동맹을 맺은 상황에서 양측의 세력은 거의 비등했기에 마왕의 발언에 당황한 첸은 팔의 고통도 잊고 만류한 것이었다. "내 아들을 만나러 가겠다고 한다면 함부로 굴지는 않겠지." 메마르고 건조한 답이 들려 왔다. “..레기어스 님을.. 이용하실 생각이십니까?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분의 처지가.. 지금도 충분히 의심을 받고 있다고 하는데..” 자신의 친아들임에도 단순한 도구 정도로 여기는 마왕의 행동에 익숙해질 때도 되었지만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 저런 태도를 보이는 마왕 펠리펜의 모습에 첸은 레기어스에 대해 동정심이 들었다. 마왕의 적자로 태어나서도 한 번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 비운의 왕자. 한때는 외삼촌인 자신의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한 그였다. 혈육이라고 해서 특별한 정은 없었지만. 제 어미를 닮아 성정이 온후하고 수줍음이 많은 녀석이었다. “감히 내말에 토를 다는 것인가? 그 애의 친모가 네 누이였다 해도 그 애는 내게 속한 것이야. 내 것을 내 맘대로 하겠다는데 무슨 참견이지?” ‘어찌 저리 다른가. 시노페님을 대할 때와는 이리도 다르니..’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크게 심려치 마십시오.” 레기어스를 조금 두둔하는 말을 했다하여 막바로 아까의 검으로 손이 가는 마왕의 모습에 첸이 허겁지겁 사죄의 말을 하며 고개를 바닥에 닿을 정도로 숙였다. 첸의 이런 모습에 화가 풀렸는지 마왕은 자신의 팔 안에 안겨있는 시노페를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나가봐! 그리고 입은 봉하도록. 내일 출발한다.” “예. 그럼 이만 물러갔습니다.” 조심스럽게 아픈 팔이 더 이상 덧나지 않게 성한 나머지 팔로 붙잡은 첸이 고통을 참고 일어나 허리를 깊이 숙였지만 마왕은 여전히 시노페만 바라보고 있을 뿐 더 이상 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문밖을 나선 첸이 그제서야 억눌렀던 신음성을 흘리며 그곳에 쓰러지듯 주저 않았다. 사람들을 다 내보낸 덕에 평소 같았으면 금방 달려와 자신을 치료해줄 다른 마족들은 보이지 않았고 첸은 품속을 뒤져 카란이 주었던 작은 약병을 꺼냈다. ‘젠장. 설마 했지만 그놈이 만들어준 것을 먹을 일이 있을 줄이야.’ 혹시 모르지만 외상에 통증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다 하여 카란이 자신에게 건내 준 물건이었다. 그것을 받았을 때는 치료 따위는 받기 어려운 노예놈다운 발상이라고 무시해 버렸지만 이 같은 상황에서는 정말로 효과가 있는지 아까까지 엄청나게 쑤셔오던 팔이 감각이 무디어진 듯 더 이상 아파오지 않았다. ‘..이번 일로 더욱 설 곳을 잊어버리겠지. 분명 바이욘느의 가신들이 레기어스를 내치자고 예전부터 주장해 왔는데.. 이런 시기에 마왕이 직접 레기어스를 찾아간다면,,.’ [오빠.. 레기어스를 부탁해요] 마왕에게서 내침을 당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숨을 거둔 라헬의 마지막 부탁이 떠올랐지만 첸은 고개를 흔들어 애써 그 말을 지워버리고는 약의 영향으로 비틀거리는 걸음을 하고는 길고 깉 홀을 빠져나왔다. “세상에 무슨 일이십니까 첸님?” 그리고 자신을 보고 달려온 자들이 사용한 회복마법으로 첸의 팔은 완전히 다 낳아 버렸고 잠시 카란이 만들어준 약을 고맙게 생각하던 첸은 그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재미있으셨다면 추천좀^^:: 오늘 밤 정도에 한편 더 올릴 생각입니다(오늘을 삼일절~) 괭이친구님.. 정말.. 오타 장난 아니더군요. 혹시 아직도 있나요? 3/4 <<<<글의 스토리 라인.>>>> 많은 분들이 이름 때문에 혼란을 느끼시는 것 같군요. (하긴 레기어스의 이름도 조금씩 틀리게 쓰니..) 질문하신 바렌과 다렌의 차이입니다. 바렌은 바이욘느의 비서.. 정도구요 다렌은 처음에 나온 검은로브이고. 샤렌의 동료였습니다., 지금은 주술사로 마왕과 거래를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구요 다른 계약자들도 있습니다. 수 천년전의 것도 있고,, 원계약자는 죽어버리고 후손들은 기억도 하지 못하는 계약도 있지만..하여튼 이것저것 철저하게 준비(원래의 진짜목적)해 놓은 다렌이지요. 그리고.. 렌자가 붙은 이름은 과거의 9명의 수호신과 관계가 있는 자들인데-앞에서 나왔죠?- 아닌 자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수호신으로서의 각성을 하는 단계에 있어서 모두가 받아들이는 것도 아닙니다. 일부는 거부하고 일부는 오히려 하연을 해치려 하지요.(결국 하연은 이래저래 괴롭게 됩니다.) *하연과 다렌의 다른 시간대의 설명 하연이 샤렌과 만난시점에서 물의 심장석을 얻은 다렌이 거의 200년전으로 시간이동해서 마왕과 거래를 하고 그로 인해 태어난 것이 시노페입니다. 마왕이 억지로... 그뒤에 임신을 했으니..(말로 안하겠습니다, 나중에 그 장면이 나올테니) 시노페가 100년이 되자마자 (여기서 약간의 예연이 틀려지죠-이유는 다렌의 착각, 결국 이게 사건의 해결과 직결됩니다) 사고로 사망하게 되는데 다렌이 그 혼을 가져다가 원래의 훼레슈티가 환생하게 될 몸에 넣었습니다. 바로 샤렌을 속이기 위해서죠 (대단한 다렌입니다..) ->결국 하연을 만들기 위해서 하연을 찾아오고 그래서 얻은 물의 심장석으로 하연을 만든다는 돌고도는 이야기가..(-_-;;) 원래의 훼레슈티의 영혼은 자기가 챙기구요(?) 하여튼 하연이 자라는 16년간의 시간이 마계에서는 약 100년의 시간이 됩니다. 샤렌의 죽음은.. 한마디로 완벽하게 다렌에게 속았다입니다. 일단은 다렌이 훼레슈티의 환생체라고 믿었던 인간이 몸만 훼레슈티의 환생체라는 사실을 모르고 계속 지켜본 것이 첫 번째고. 두 번째는 다렌의 거짓말에 속아서 물의 심장석을 넘겨주게 되고 영원히 소멸되어 버린 것이지요. 어쨌거나 결국에는 그래도 그 죽음이 헛수고가 아니게는 되지만.. 하연이 마계로 오게 되는 것은 다렌이 마왕과 계약을 한지 거의 200년 이후가 되는 것입니다. (너무 복잡한가..) 다렌이 마왕과 계약을 한 것은 훼레슈티로서의 꿈에서 나오는 붉은 머리의 남자 때문인데요. 훼레슈티의 수호신이었던 다렌은 배신자가 되어 그 붉은 머리에게 붙습니다. 사실 지금도 그쪽 편이지요. (이미 고대신족은 다 멸망당해버렸지만 환생은 했으니)하지만 그 배신에도 조건이 있었는데 그로 인해 붉은머리도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다렌의 신조는 기브앤 테이크) 소결>다렌이 얻은 것 = 훼레슈티의 영혼, 4개의 봉인을 깨기 위한 마왕의 협력. *훼레슈티로서의 하연(?) 훼레슈티와 붉은머리를 만든(!?) 훼렌이란 신은 월래 창조신의 대리인이었는데 지금은 환생한 상태이고 붉은머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훼렌은 자신의 피조물인 훼레슈티를 빛으로 그리고 붉은 머리 남자를 어둠으로 갈라놓는데요. 처음부터 둘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고 자기 멋데로 훼레슈티를 빛으로 삼았습니다.(그래서 처음부분에 보면 대사가 있습니다) 그는 나의 반대에 선자.. 어쩌고 저쩌고. 원래 조화롭던 세계가 빛과 어둠으로 갈리면서 분열되는 조짐을 보이고-정확히는 훼렌의 지나친 훼레슈티의 편애 때문에 불균형이 생김- 훼렌은 자신이 창조한 것들을 모두 없애거나 아니면 하나만 선택해야 할 상황에 몰립니다. 그가 선택한 것은 훼레슈티인데 그녀는 그런 결정을 받아 들이려 하지 않지요. 그렇지만 훼레슈티가 그런 결정을 한 것을 모르는 붉은머리는 오히려 먼저 훼레슈티를 치려고 하고 원래도 싸울 마음이 없었던 훼레슈티는 훼렌이 그 사실을 알면 그를 죽일까봐 맞써 싸우겠다고 하여 훼렌은 그것을 허락합니다.-그녀가 계속 감싸고 돌던 붉은머리에 대해 마음이 떠난줄 알고 좋아합니다. 하지만 다렌의 배신과 원래부터도 싸울 마음이 없던 훼레슈티와 수호신들은 결국 최후의 일전에서 모두 죽고 마는데요. (다렌과 샤렌만 빼고) 자신이 붉은머리의 손에 죽게 되면 훼렌이 그도 또한 소멸시킬 것이 분명했기에 훼레슈티는 스스로 고대신족의 지위를 버리지요-이정도가 꿈의 내용이고. 그 뒤에 훼레슈티의 죽음이 고의적이었다는 것을 알게된 두 신(?)사이에 창세신이 끼어들고 그들은 각기 다른 선택을 합니다. 이미 더 이상 신이 아니게 된 훼레슈티의 혼은 창세신이 거두게 되는데. 그는 여기서 한가지의 제안을 합니다. (그가 왜 그랬냐고 물으신다면.. 훼렌에 대한 애정이랄까.. 하여튼 기독교의 모티브를 조금 따왔는데..)그리고 알려진대로 고대 신족은 깡그리 멸망하지요. 그도 그럴것이 근원인 훼렌이 없어지고 훼레슈티와 붉은머리까지 사라져 버렸으니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유적과 유뮬은 천계와 마계 그리고 중간계에 오로지 4개만이 남아 있습니다. 하연이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요. 그리고 그 유적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봉인된 것입니다. (달랑 4개만 남아있을 이유가 없지요) 결국 다렌이 말한 4개의 봉인이란 시노페의 기억을 되찾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마왕을 이용하고 시노페의 인연의 고리에 맞닿아 있는 자들을 이용하려는 것에 불과하지요. 일단 엄마부터 굉장한 인연의 고리를 자랑하고 있으니.. * 하연은 누구?* 최종적으로 하연은 시노페가 아닌가하는 큰 문제에 봉착하는데. 한가지만 말씀드리자면 하연은 과거에 마계에서 살았던 시노페가 맞습니다. 같은 영혼이지요. 일단은 이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문제는 하연으로서의 삶을 살기 이전의 하연이 좋아하던 상대와 하연으로서 좋아하는 상대가 다르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과거에 있었던 고대신족의 유적에서 발생했던 사고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이전에는 바이욘느를 그 이후에는 레기어스를 좋아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연은 그 사실을 모르구요. 나중에 기억을 되찾고 나서도 그대의 사고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만약 이걸 끝까지 쓴다면 가장 나중에 나오게 될 부분이지요. 주위의 사건들에 말려들면서 봉인이 하나 깨어지는데 그때 하연은 시노페로서의 기억을 되찾고 더불어 유물도 하나씩 얻게 되지요. (없던 능력이 생긴다..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그리고 점점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게다가 반갑지 않게 훼레슈티라는 여자의 기억도 원치 않았음에도 하나씩 알게되지요, 하연은 자신이 시노페인지 하연인지 훼레슈티인지 혼란을 거듭하고 어떤 계기로 완전히 그것들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변명들* 결국 제가 쓰게 되는글은.. 중간에 엄청나게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며.. 훼레슈티의 과거의 수호신들이 하나둘 등장하는데다가. 훼렌이란 붉은머리도 만나고. 시노페와 인연이 있던 사람들이 여러갈래로 무리지어 권력 다툼도 하고.. 하여간 이래저래 복잡한 내용입니다. 조금더 나아가면 선과 악, 빛과 어둠으로 갈린 이곳 세계에서 그 모든 것이 공존하는 곳(지구)에서 자라온 하연의 존재는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칠 것인가.. 그리고 창세신이 제안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나. 그리고 하연의 선택은.. 이라는 식으로 결말이 나아가겠지요. 근본적으로 허무 엔딩이나. 배드, 새드 앤딩 싫어하구요. 가능하면 해피엔딩으로 나가고 싶습니다만.. 다른 사람의 생각에도 그리 보일지는 의심스럽군요. *끝으로* 아이고,, 중요한 감출 것은 어느 정도 감췄는데 너무 많이 적은 것도 같군요. 하지만 역시 숨긴것도 꽤 되니까요^^:: 이정도면 조금 설정에 이해가 된 것인지 모르겠네요. 너무 복잡하다고는 하지만.. 최대한 스피디하게 넘어갈 생각이고. 이 설정은 중간에 하연이 만나게 되는 수많은 남정네(?)들이 왜 하연에게 관심을 보이는지의 이유가 되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3월 2일자. 올립니다. * 전화위복(轉禍爲福) * “내 키스가 그렇게 싫었나? 그럼 그걸로 하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이 몸을 떨어대는 하연을 보자 바이욘느는 불현듯 부숴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하연이 다렌을 만나게 해 줄 유일한 수단이라는 것도, 자신이 사랑하는 시노페를 살릴수 있는 매개체라는 사실도 일그러진 욕망에 가려저 더 이상 바이욘느를 저지하지 못했다. ‘감히.. 인간주제에 내 말을 거역해?’ 인간 주제에 자신에게 반항한 것에 대해서 화가 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바이욘느가 거칠게 반항하는 하연의 목을 더욱 세게 쥐자 하연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러나 바이욘느는 레기어스가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데 성공했으니 하연이 그를 감싼다 하여 화를 낼 필요는 없다는 것과 화를 내고 있는 현재의 상황 사이에 심각한 괴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레기어스에게는 스스로 잘도 안기면서 내 손길은 그렇게 싫단 말인가?’ 바이욘느가 하연의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하연이 몸서리를 치며 그나마 자유로운 발로 그의 다리를 마구 쳐댔다. 힘이 하나도 실려있지 않은터라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상처받은 자존심이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바이욘느를 찔러댔고 그것은 숨겨저 있던 바이욘느의 야성을 자극했다. ‘무,, 무서워..’ 하연은 갑자기 거칠게 달려드는 바이욘느의 모습에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눈을 감는다 해서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금의 무력한 상황에서 하연의 방어본능은 현실도피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때의 차가운 키스를 떠올린 하연은 곧 다가올 것이 분명한 섬뜩한 느낌에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전과는 달리 데일것 같이 뜨거운 입술이 다가오자 하연은 화들짝 놀랐다. 꼭 다문 하연의 아랫입술을 머금은 바이욘느의 난폭한 키스에서 하연은 지난번처럼 그가 강제로 자신의 입을 열고 그의 혀를 집어넣을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진심으로 두려워졌다. “젠장. 입을 벌려.”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기에 어느때보다 바이욘느에서 전해져 오는 분노가 그대로 전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때처럼 무방비로는 당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하연은 있는 힘을 다해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격한 키스로 부풀어오른 하연의 붉은 입술이 매끄럽게 감겨오자 바이욘느는 지난번처럼 하연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고 단단한 이로 하연의 입술을 꽉 깨물었다. 순간 지독한 고통에 하연이 신음을 흘리자 그의 뜨거운 혀가 입안으로 밀려들어갔다. 숨쉴큼도 주지않고 격하게 탐해오는 바이욘느의 몸짓에 하연은 숨이막혀 그를 마구 밀어댔다지만 그것을 자신을 거부하는 몸짓으로만 여긴 바이욘느는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입술을 포개왔다. 공포로 쾌감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고 이제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며 눈앞이 조금씩 멀어져 갔다. 더 이상 팔다리에도 힘을 줄수 없었던 하연은 늘어지듯 바이욘느의 팔 안에 안겨버리고 말았지만 그것조차도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만 둬!!” 막 정신을 잃으려는 순간 요란한 소리가 나며 하연의 등 뒤로 무언가 단단한 것이 부딪치는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언가 무거운 것이 하연을 감싸고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 잠시 후에 느껴지면서 하연의 의식은 천천히 어둠속으로 내려앉았다. “레기어스, 방금 전 상황은 뭐죠?”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피오렌의 아름다운 외모는 서늘할 정도로 차가운 빛을 내뿜는 붉은 눈동자에 가려 오히려 잔인하게 보였지만 그녀를 대한느 레기어스의 태도는 오히려 침착하기만 했다. “이미 다 보셨을 테데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건지 모르겠습니다. 형수님.” “이 상황이니까 하는 말이예요, 여기서 일어났던 일을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자가 바로 당신이지 않나요? 보아하니 저기 있는 바이욘느는 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상태로는 보이지 않고.. 지금 그대의 품에 안겨있는 그 인간도 마찬가지 인데 내가 누구에게서 대답을 듣겠어요?” 피오렌이 재미있다는 듯 바이욘느와 하연을 차례로 가리키더니 레기어스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이미 저질러 버린 일이다. 아까의 그 장면을 정통으로 피오렌에게 들켜버렸으니 자신이 무슨 변명을 하더라도 소용없는 일이었지만 피오렌의 반응이 의외로 호의적이라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사실.. 제가 이곳에 드나든지는 한 달이 다되어 갑니다. 평소에 아무에게도 관심이 없으시던 형님이 왠 인간아이를 이곳에.....” 피오렌이 알아서는 안 되는 시노페와 다렌의 이야기는 빼놓고 레기어스가 모든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는 꽤 긴 시간이 흘렀지만 피오렌은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앟았다. “.....그래서 방금 보신 장면이 마지막입니다.” “변명은 하지 않을 셈인가요?” 레기어스의 말이 끝나자 우아한 자세로 앉아있던 피오렌이 몸을 일으키며 옆에 놓아두었던 칼을 쓰다듬듯이 손가락으로 쓸며 레기어스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평소의 레기어스라면 아마도 웃음으로 대충 얼버무리거나 변명 한 두 가지는 분명히 집어넣었을 텐데 그는 마치 딴사람의 이야기처럼 보고서라도 읽듯이 그렇게 대답한 것이었다. “드러난 사실이 이리도 명백한데 무슨 변명을 하겠습니까. 단지...” 갑자기 처들어온 자신을 보고도 오히려 침착함을 유지하던 레기어스가 묘하게 떨린 목소리로 주저하듯 말하자 피오렌이 놀란 눈빛을 보냈다. “..저 아이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아까 바이욘느가 그리한 것도 하연이 저를 변명하는 말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벌을 준 것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처벌은 어떻던지 상관없다는 듯 초연하던 레기어스가 초초하게 하연을 바라보자 피오렌은 들고 있던 칼을 도로 내려놓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럼 왜 그런 당연한 처벌을 하는 바이욘느를 저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거지요?” “그.. 그건..” “솔직히 말해봐요. 레기어스. 이 아이에게 마음이 있는 건가요?” 레기어스는 주저했다. 아까의 바이욘느의 질문에 자신에게 수십번은 했던 질문이었다. 그리고 비록 말로는 할 수 없었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형님의 것이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하연이라는 인간 자체만으로도 저에게는 의미가 있는 존재입니다.” 레기어스의 말속에는 바이욘느가 말하는 것처럼 다렌을 만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존재로서 하연을 가슴에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연이라는 존재차체를 진심으로 마음에 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피오렌의 귀에는 그것이 바이욘느의 것이라 해도 진심으로 원한다는 뜻으로 들렸다. “한심하군요.”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심각한 표정을 짓는 레기어스가 어리석어 보여 피오렌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아까의 일을 저지를 정도로 좋아하는 상대라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상대를 절대로 얻을 수 없을 것이라는 듯 체념의 눈빛으로 마라보고 있는 레기어스가 우스워 피오렌은 그만 웃을소리를 내고 말았다. “...비웃으셔도 할 말은 없습니다.” 피오렌의 웃음을 비웃음으로 착각한 레기어스가 다시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 정말 바보군요. 그 정도로 원한다면 그냥 나에게 왔어도 되었을 것을 이렇게나 일이 꼬이게 놔 두다니요. 진실로 소유된 자가 아닌 것을 모르셨단 말입니까?” 피오렌의 말에 레기어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런 레기어스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이 피오렌이 일부러 뜸을 들였다. “그대처럼 총명한 자가 왕족이 소유된 자를 들이는 법도를 모르셨던 것인가요?” “그..그럼 아직까지 피오렌님께서 허락을 하지 않으셨다는..” “어머. 인간따위를 소유된자로 삼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실제로 관계를 맺으신 것도 아니고 그 일 이후로는 언제나 자신의 침소에서 지내셨던 분인데 허락을 할 이유가 없지요. 바이욘느전하도 저에게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답니다,” 왕족의 경우 샨트의 지위는 일개 족장에 버금갈 정도로 격상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사실 그리 지위를 격상 시킬 필요도 없는 것이 대개의 경우 왕실의 샨트가 되는 여인들은 모두 쟁쟁한 실력을 뽐내는 각종족의 수장의 딸이거나 누이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여인의 지위가 낮은 이곳 마계에서도 왕족의 샨트의 발언력은 왕족과 거의 대등할 정도였고 그것은 궁중 내 여인의 지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소유된 자가 남성마족의 일방적인 선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과는 달리 왕족의 경우는 반드시 샨트의 동의를 얻어야만 했다. 그리고 샨트의 동의가 없는 소유된 자는 그 이름의 효력이 인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피오렌은 그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었다. “호호, 제가 오늘 이렇게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이곳에 온 것도 사실은 한 번도 이곳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으시던 전하께서 이곳으로 납시셨다 하여 혹시나 해서 찾아온 것인데 그대의 말을 들으니 심히 안심이 되는 군요.” 레기어스는 순간 아까의 긴박한 상황에서도 흐르지 않던 땀이 등뒤로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만약 자신이 아까 하연이 말한대로 그냥 가버렸다면 분명 바이욘느와 단둘이 있는 하연을 목격했을 것이고 피오렌은 분명히 저 칼로 아무런 설명도 듣지 않고 하연을 내리쳤을 것이 틀림없었다. ‘설사.. 바이욘느가 막았더라도 분명 무슨 수단을 써서든 하연을 해치고 말았겠지..’ 피오렌의 질투심을 자극한 여인치고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남은 여인을 없다는 것을 레기어스는 누구보다도 잘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레기어스가 소유된 자를 들인다면 그대가 쟁쟁한 세력의 여인과 혼례라도 올릴까봐 전전 긍긍하던 늙은이들이들 특히 장로들이 기뻐 날뛸겁니다, 특히나 그대를 쫏아내야 한다고 눈에 불을 켜던 바론이 가장 좋아하겠지요.” 피오렌의 말은 이 궁에서의 레기어스의 지위를 뼈저리게 확인시켜주는 잔인한 말이었지만 본인은 아무런 생각없이 그저 생각나는대로 지껄이고 있을 뿐이었고 또한 그 말이 냉정한 현실이기도 했기 때문에 레기어스는 말없이 피오렌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비 공식적이긴 하지만 바이욘느전하의 소유된자를 물려받는 다는 것의 의미도 크고 말이지요.” 형제간에는 소유된 자를 넘겨받는 일은 비일비재 했고 오히려 그것이 형제간의 우애를 표시하는 방법으로도 자주 애용되곤 했다는 사실은 피오렌이나 레기어스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껏 들뜬 표정으로 이것저것 계획을 세우고 있는 피오렌과는 달리 레기어스의 표정은 오히려 아까보다 더 어두워졌다. 시노페에게는 숨겼지만 하연이 다렌과 만나는 유일한 매개체라는 현재 상황에서 바이욘느가 피오렌의 생각처럼 그리 쉽게 하연을 놓아 줄리는 없었다. ‘그리고... 내가 하연을 이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해도.. 믿지 않겠지..“ 언제나처럼 시노페의 일에는 이성을 잃는 바이욘느였다. 언제나 부드럽게 상대를 대하던 그가 아까 하연을 금방이라도 잡아죽일 듯이 대한느 모습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바이욘느를... 레기어스의 눈 앞으로 피오렌이 나타나기 직전의 장면이 하나씩 지나가기 시작했다. 바이욘느가 거칠게 자신의 품에서 하연을 빼앗아 갈 때 레기어스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다. 그가 억지로 하연의 목을 움켜쥐었을때도 반항하는 하연에게 억지로 키스할때도 레기어스는 애써 외면해야 했다. 자신을 감싸며 변명을 해줄때 얼마나 그 손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기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은 그저 ‘형님의 소유다,’ ‘내가 뭐라고 할 수는 없다’라는 비겁한 변명으로 자신을 설득했던 것이다. 하연이 계속 몸부림을 치고 빠져나가려고 했는데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숨이 막힌 하연이 더 이상은 장밋빛으로 빛나지 않는 싸늘한 안색을 하고 거세게 움직이던 팔다리가 서서히 힘을 잃고 늘어져 가는데도 그것 따위에는 상관하지 않는다는듯 여전히 하연을 안고 있는 바이욘느를 보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그만 둬!!”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을 근처에 있던 탁자로 바이욘느의 뒷머리를 가격한 후 산산조각나 버린 탁자의 다리만을 양손에 쥐고 있었다. 하연과 바이욘느가 한덩이가 되어 바닥으로 쓰러진 것을 보았다. 그리고 황급히 바이욘느에게 깔린 하연을 끄집어 내어 차가운 하연의 뺨을 떨리는 손을 매만졌다. 다행히 미약하게나마 맥이 뛰고 있다는 것을 느낀 레기어스의 얼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죽는 줄만 알았어. 그때처럼.. 시노페가 내 눈 앞에서 사라지던 것처럼.. 너도 사라지는 줄만 알았어..“ 여전히 떨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레기어스는 하연을 가슴에 꼬옥 안았다. 그리고 그순간 익숙한 톤의 경악성이 방안에 날아들었다. “레기어스! 무슨짓이지? 설마.. 네가?” 라인슈타인이 들어오면서 고장나 열어놓은 문 사이로 언제부터 이 장면을 보고 있었는지 모를 피오렌이 산발을 한 채로 한손에는 우아하게 휘어진 곡도를 살벌한 기세로 들고 레기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먼저 바이욘느를 향했다. 그리고 잠시뒤 레기어스에게로 옮겨갔다고 느낀 순간 레기어스는 재빨리 하연을 꼭 안고 일어서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피오렌이 어디서부터 이 장면을 보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하연이 시노페를 깨우기 위한 매게체라는 말을 몰래 듣고 있었다면 하연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자신이 바이욘느를 공격한 것에 대해 추궁받을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 그 아이 바이욘느의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째서 바이욘느는 저런식으로 쓰러져 있고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그대가 그 아이를 안고 있지?” 잔뜩 긴장하고 있던 팔에서 힘이 빠졌다. 피오렌이 본곳은 아무리 많아봤자, 바이욘느가 하연에게 키스한 이후의 일이 분명하다고 느낀 순가 레기어스는 진심으로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곳에 들어서는 순가 레기어스가 바이욘느의 머리를 내리치는 장면을 목격한 피오렌은 갑자기 안도의 표정을 짓는 레기어스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곳에 온지 꽤 되는듯 이리저리 구겨저 있는 옷을 입은 레기어스가 황급히 인간의 바이욘느의 품에서 빼어내는 것을 보아서는 분명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상황은 아닌듯 했다.게다가 레기어스의 옷을 앞이 거의 다 찟겨져..오히려.. 레기어스와 저 인간이 함께 있었다는 것이 더 정확.... 순간 자신의 오빠가 한 말이 고스란히 머릿속에 다시 울려 퍼졌다. [..내가 들어갔을때는 두 사람이 서로 껴않고 침대에 쓰려져.. 하여튼 옷까지 찟어지고... 그러고 보니 그렇게 당황하는 녀석의 얼굴은 처음 봤어. 나를 보자 얼굴이 붉어지더니..식은땀까지 흘리더구나.] 생각해 보니 바이욘느가 오빠를 보고 식은땀을 흘릴턱이 없었다. 언제나 노골적인 질문을 해와도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로 오히려 말한 상대를 서먹하게 만들던 바이욘느였다. [내가 들어가자 그 인간을 황급히 감싸더니 하는 말이 들키지 않으려면 그 옷 좀 어떻게..] 그리고 보니 그 때 어깨를 들썩이던 것도 이상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던 것은 전부 웃음을 참기 위한 행동이었음에 틀림없었다. 라인슈타인이 말한 언행을 할 만한 성격은 오히려 레기어스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질투에 눈이 멀어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것에 피오렌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감히... 날 가지고 놀았겠다. 라인슈타인!” 자신을 속여넘긴 것을 통퇘해 하며 어디선가 느긋하게 웃고 있을 라인슈타인을 생각하자 머리끝까지 열이 오른 피오렌이 이를 으드득 갈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몸을 빙글 돌려 눈앞에 펼처진 광경을 눈살을 찌푸리고 바라보았다. 아까의 오해는 풀어졌지만.. 이상황은 역시 약간의 설명이 필요했다. “레기어스, 방금 전 상황은 뭐죠?” 여전히 인간의 가슴에 안고 있는 레기어스는 아까의 당황스런 표정과는 달리 자신도 처음보는 듯한 담담함으로 자신의 눈빛을 마주하고 있었다. 졸려서 탈고 못했어요. 대신.. 양이 많으니.. 전작에 추천 주신분들 감사드립니다. 이름은 내일 오후에 여기 올려드릴께요. 도저히 졸려서... 재미있으셧으면 추천을~ “아니 바닥에서 뭘하는건가? 바론.” 없어진 종이를 찾느라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개념치 않고 바닥을 샅샅이 헤메던 바론의 눈앞을 빛이 날정도로 반짝이는 한쌍의 부츠가 가로막고 서자 그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그런 괴상한 차림새를 하고 있는건지? 요즘 운동이라도 시작한 건가. 온몸이 흙투성이이군. 그런데 가슴의 그건 뭔가? 이크. 다가오지 말게나. 그대 때문에 옷을 갈아입고 싶지는 않으니." “.....” 연신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키득거리는 시선이 눈처럼 하앴던 자신의 옷 위의 피오렌의 발에 의해 생긴 발자국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바론이 손으로 먼지를 털자 라인슈타인은 질색하며 뒤로 물러났고 바론은 그 모습에 더 요란을 떨며 먼지를 털었다. “콜록! 원 먼지한번 대단하군, 그런데 누구에게 습격이라도 당한건가? 하긴 그림자 일족의 일원인 자네이니 허,약,한, 여인에라도 걷어차여 쓰러진 것인가.” 저 얼굴은 분명 아까부터 다 보았다는 얼굴이다. 아니 그런게 아니라 해도 바론의 가슴팍에 찍혔던 발자국은 남자의 것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작았으니 그 말은 한 마디로 바론을 놀리기 위한 것이었다.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다 보시고서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음속의 진실한 외침과는 달리 어느새 몸에 묻은 먼지를 다 털어낸 예의 예의바른 얼굴로 돌아와서는 고개를 숙였다. “피오렌이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이번에 바이욘느가 들인 인간을 죽이겠다고 칼을 빼들고 달려나가서 말이야. 오라비된 자로 말리러 가는 길이지. 아마 지금쯤 저기 정원안쪽에서는 난리가 나고 있을껄? 레기어스와 인간 그리고 바이욘느에 피오렌까지 모였으니 굉장한 구경거리가 될텐데. 자네도 들어가 보지 않겠나?” 자신의 말에도 별로 놀란듯 보이지 묵묵히 서있는 예상외의 바론의 반응에 라인슈타인은 조금더 강한 수를 던져볼까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레기어스도 상당히 용감한 녀석이더군. 형님의 소유된자를 건드릴 정도니 말이야.” “오라비로서 말리러 가시던 길이 아니셨습니까? 이렇게 저와 하찮은 잡담을 할 때가 아니지않습니까.” 바론은 라인슈타인에게 어떠한 질문도 설명도 요구하지 않았다. 라인슈타인은 당황한 얼굴로 바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장 레기어스를 싫어하는 그가 자신이 던진 미끼를 물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하찮은 인간이지만 바이욘느의 것이었고 그것을 건드린 것이 분명한 레기어스를 쫒아낼 좋은 기회로 여기고 달려들 줄 알았는데 상대의 반응은 라인슈타인의 맥을 빠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럼 이만 가 보시지요. 저는 할 일이 있어 따라가지 못합니다.” 잠시 말없이 서있던 그들중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바론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바론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어디론가 황급히 걸음을 옮기고 사라졌다. 일이라고는 주로 자신의 집무실에서만 하는 바론이 자신의 집무실과는 전혀 관계없는 반대쪽으로 가는 것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정말로 다급한듯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모습으로 다렌은 곧 라인슈타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쳇! 바론을 만나서 일이 더 재미있게 되는가 했더니.. 그나저나 무슨 일이 있기에 저렇게 황급히 사라지는거지?” 놓쳐버린 사냥감에 미련이 남는지 라인슈타인은 불만족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이쪽까지 날아왔을리는 없는데..' 분명 아까 놓친 마왕의 서한은 바람을 타고 이쪽으로 날라왔음이 분명했다. 그런 엉망진창인 글씨를 누가 읽을리도 없고 그 내용이 누설될리도 없었지만 마왕이 직접 작성하여 보낸 서한이었고 자신은 그것을 바이욘느전하에게 보고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었다. ‘절대로 그럴리는 없지만 마왕이 이번 연회에 방문하겠다는 내용이기라도 하면 한시가 바쁘다. 젠장! 도대체 어디로 날라간 거야! 여기까지 왔는데 아직도 찾을 수가 없다니.’ 예전에는 아름답게만 보이던 거대한 정원이 더할나위없이 원망스럽게 여겨진 바론이 짜증이 가득찬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중얼거리고 있는 말이 정확한 진실인 것을 모르는 바론의 눈은 어느새 붉게 핏발이 서 있었고 역신 두리번 거리는 모습은 마치 먹이를 찾는 하이애나처럼 보였다. “어라? 여기 바이욘느의 궁성에도 글을 매우는 꼬마 녀석이 있었나? 도대체 이거 글씨인거야. 아니면 그림인거야? ”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테라스에서 일광욕을 즐기던 엘의 얼굴에 무언가 날아와 막 잠이 드려던 엘의 얼굴을 덮친 것은 다름아닌 꾸깃꾸깃한 종이였다. “뭐냐? 이 종이는. 이딴 식으로 글을 처음 쓰는 놈한테 이런 고급 종이에 고급 잉크를 쓰게해? 누구 아들내미인지는 몰라도 애들 교육을 이렇게 시키면 안 되지. 게다가.. 이건 또 뭐야. 꼴에 금가루까지 뿌려져 있잖아?” 엄청난 악필임을 자처하는 엘의 눈에도 도저히 알아보기 힘든 글씨였다. 평소같았으면 그냥 쑤셔서 어디론가 던져버렸을 엘이었지만 손에 느껴진 종이의 촉감과 고급 향수라도 뿌린듯한 내음에 혹시 누군가의 연애편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호기심이 나서 펼처본 것이었다. 아버지도 아껴쓰곤 하던 고급종이였으니 분명 굉장한 신분의 사람이 사용하는 것이 틀림없었기에 두근거리며 종이의 반대쪽을 보는 순간 엘의 입에서 실망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도저히 인간의 글씨라고는 볼 수 없는 악필. 그것도 양이 많은 것도 아니고 얼굴크기만한 종이에 적힌 거라고는 달랑 10줄 정도의 얼마 안 되는 분량이었다. 휙! 한참을 노려보았지만 정말, 단 한글자도 읽을 수 없어 성질이 난 엘이 종이를 구겨버리려는 순간 뒤에서 소리 없이 다가온 손이 잽싸게 종이를 나꿔챘다. “뭐..뭐야! 놀랐잖아? 달라고 말을 할 것이지 갑자기 나타나서 뺏어가기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깜짝 놀란 자신이 무안해서 엘은 일부러 카란을 향해 소리를 쳤다. “너... 이거 어디서 난거냐?” “....공중에서.” “장난하지 말고 제대로 대답해!” 갑자기 자신의 손에서 빼앗은 편지를 빠르게 훑어보던 카란이 그래도 솔직하게 대답한다고 진실을 말한 엘에게 화를 내며 추궁하자 엘은 죄지은 것도 없이 우물쭈물 거렸다. 그리고 엘의 그런 모습을 본 카란은 더더욱 싸늘한 눈동자로 엘을 바라볼 뿐이었다. “진짜라구! 막 자려고 하는데 그 종이가 날라와서 내 얼굴을 덮었단 말이다! 그냥 구겨 버리려다가 하도 고급 종이고 향수까지뿌려져 있길래 누군가의 연애편지인줄로만 알았다고. 젠장 화낼건 나라고. 잔득 기대를 하고 열었는데 이건 10살짜리 애도 안 쓸 그냥 글씨 연습이라니! 내 시간이 아깝다!” 자신이 카란에게 이런 바보같은 연습장 때문에 이런 대접을 받을 이유는 없었기에 억울해진 엘이 궁시렁 거렸지만 카란의 눈은 더욱더 차가워지고 있었다. “네 눈엔 이게 안보인 거냐?” “그게 뭔데, 그냥 금박을 입힌 거잖아.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종이에는 없었던 것 같지만 누구지 몰라도 엄청 폼내기 좋아하는 녀석이 특별히 주문한 거겠지.” 카란이 가르키는 종이의 가장자리에는 엄청나게 화려게 장식된 금빛의 은은한 선들이 종이의 네면을 장식하고 있었지만 특별히 다른 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 이거다.” 카란이 가르킨 것은 아까는 보지 못한 종이의 제일 아랫부분에 찍혀진 붉은 인장이었다. 하지만 그게 어떤 종족의 문장인지 엘이 알 리가 없었다. 언제나 공부하는 시간에는 잠만 퍼질러 자고 그나마 잠을 자지 않으면 언제나 밖으로 싸돌아 다녔으니 엘이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모르는 것이 오히려 맞는 것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닳은 카란이 포기한듯 대답했다. “이 붉은 인장은 마왕님의 것이야. 한마디로 이것은 마왕님의 친서라는 이야기지. 그래서 내가 너에게 이것을 어디서 얻은 거냐고 물은건데.. 정말 공중에서 날라온 게 맞는건가?.” “..방금.. 마왕님이라고? 그럼.. 설마 우리에게 보내신거야? 말도 안되. 여기엔 우리밖에 마왕을 따르는 쪽은 없잖아. 그런데 어떻게 이걸... 아니,,, 도대체 뭐라고 쓰여 있는거야? 정말 우리한테 온게 맞아? 젠장 도저히 읽을 수가 없잖아!” 카란의 말에 의자가 넘어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엘이 카란에게 다가와서 황급히 편지를 잡아챘지만 여전히 읽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리내.” 마왕의 편지라면 예전에 아버지가 읽는 법을 알려준 적이 있었기에 카란은 다시 종이를 받아들고 세심한 눈길로 한글자씩 읽어내려갔지만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더 엉망인 글씨에 모든 글자를 다 읽어내릴 수는 없었다. “나 마계의 지배자....아마 펠리펜이라는 글자 같은데.. 는 .....를 확인? 일단 넘어가고...이번 연회.... 참석.....때까지 이 뒤부터는 확인하기가 어려운데...... 잘..... 처리.... 오늘중으로...끝내.... 명심...이게 끝이다.” “뭐야? 그게 다야?” 잔뜩 긴장한채로 카란의 입만 바라보던 엘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카란을 바라보았지만 카란의 입에선 더 이상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에 수신인이 번져서 누구에게 보내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왕님이 이곳에 오신다는 내용인 것 같다. 아마 이번 연회에 참석하시는 것 같은데..” “그럼 잘, 처리, 오늘중으로, 끝내. 명심은 무슨듯이야?” 마왕이 온다는 사실보다는 뒤의 문구에 더욱 신경이 쓰인 엘이 카란을 닦달했지만 그런다고 자기랑 똑같은 상황에 놓여있는 카란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다는 것은 엘도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건,,” “누구냐!” 카란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엘이 갑자기 몸을 돌려 베란다 아래로 뒤어내렸다. 그리고 감자기 숨이 막힌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듯 부딪히는 타격음이 연신 들려왔다. 황급히 엘이 사라진 베란다의 아래쪽으로 자신도 몸을 날린 카란이 엘을 발견했을 때 엘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엘의 주먹에 맞아 정신을 잃고 있는 한 사람을 자랑스럽다는 듯 번쩍 들어올리고 있었다. “카란! 잘했지? 뭐가 갑자기 부스럭 거리길래 내려왔더니 이녀석이 있잖아. 아마 아까부터 여기 있었는지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어있더라구. 이 염탐꾼이 뭐라 변명하려는 것 같길래..” “염탐꾼이 아니라 바론이란 말이다! 이 바보녀석. 도대체 얼마나 때린거냐?” 엘이 자랑스럽게 들고 있던 바론의 몸이 순간 아래로 곤두박질치며 땅바닥과 감동적인 해후를 하고 있었다. 이게 아까 그 단정하던 바론이라니. 흙으로 꼬질꼬질 해진 이 녀석이 티끌하나 없이 하얀 옷을 입고 있던 그 바론? 하지만 분명 여기에 엎드려 있었는데.. “하여튼 일을 크게 벌이는 재주하나는 뛰어나군, 그가 네 얼굴을 봤어?” “아.. 아니.. 그냥 바닥에 엎드려 있었고 갑자기 내가 내려쳤으니까.. 아마.. 못봤을 꺼야.” 얼굴이 마주쳤다면 그것이 바론인 것을 알았을 것이고 그렇게 무작정 두들겨 팼을리는 없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정신을 잃기 전에 자기를 보기라도 했다면..우물쭈물하며 카란의 눈치를 살피던 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하지만 이 영감이 잘못한거라구! 왜 여기서 땅바닥에 납죽 엎드리고 있었던 거냐구!” 찰싹! “정신차려! 여긴 적진이다. 아무리 바론이 의심스러운 짓을 했다고 해도 그런 것쯤이야 조작하면 그만이야. 만약 이 자가 네가 갑자기 자신을 납치하여 이리 구타하고 자신이 간신히 빠져나온 것이라 꾸며대도 넌 한마디도 할 수 없단 말이다.!” 얼얼한 뺨위로 카란의 차가운 목소리가 흥분한 엘의 이성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적막할 정도의 침묵이 흐르고 뉘우치는 듯 고개를 숙인 엘을 바라보던 카란이 쓰러져 있는 바란의 몸을 살펴보았다. “어디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으니 다행이군. 엘. 난 마법을 쓸 수가 없으니 이리로 와서 외상 좀 회복시켜. 네말대로 불시에 당한 습격이라면 깨어나도 기억하지 못할테니 일단은 회복시켜놓고 모른척 하는 수밖엔 방법이 없다.” 그제서야 시무룩해 져 있던 엘이 다가와 회복마법을 걸자 아까까지 퉁퉁 부어있던 바론의 얼굴은 원래의 깨끗한 얼굴이 되었다. 비록 옷에는 아직까지 여러개의 발자국이 남아있었지만 카란이 조심스럽게 털자 거의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끄으으응.” 마법의 효과는 놀라운 것이어서 거의 빈사상태에 빠졌던 바론이 꿈틀거리며 깨어나려고 하자 카란은 엘에게 어서 위로 올라가라는 눈빛을 하고 재빨리 바닥에 패여있던 자신과 엘의 발자국을 지웠다. 그리고 몸을 돌려 위로 올라가는 순간 카란은 아차했지만 이미 바론이 눈을 뜨고 있어 되돌아 갈수는 없었기에 그저 입술을 깨물고는 아까 그들이 있던 베란다로 몸을 옮겼다. ‘하필이면. 마왕의 서한을 떨구다니. 그것도 바로 바론 앞에!!’ 카란은 불안한 눈으로 마왕의 서한을 놀란듯 바라보던 바론이 그것을 나꿔채고 이리저리 두리번 거리다 그것을 소중하게 품에 안고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저 서한을 읽기는 어렵겠지만.. 여기 레기어스 전하와 바이욘느 전하가 본다면 분명.. 비록 자세히는 적혀저 있지 않지만 더 이상의 임무수행은 불가능해 진다. 그렇다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엘과는 달리 카란은 있는대로 인상을 찡그리고 이미 사라져 버린 바론이 있던 곳을 한참이나 노려보다가 심상치 않은 카란의 분위기에 구석에서 눈치만 보고 있는 엘을 부르고는 엘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계획 변경이다. 오늘밤 습격한다.” "뭐어!!" *마왕의 글 전문은 나중에 나옵니다.(카란이 도착한게 아침 하연이 그런일이 생긴게 점심때쯤, 그리고 바론이 구타당한게 오후쯤이니.. 제글의 진도는 ... 극악이라고 볼수 있겠네요. ) 오늘은 그저 보통 스토리입니다. ^^(수정 안봤어요.) 오타지적 감사드리구요, 추천과 선작 날려주신분들 감사합니다! 16회 리안케이트 korapha-duck 17회 apple22 18회 이쁜영이 19회 카오메이 ekfejddl0517 샤르릉_♥ 20회 유리엘르 이은이 리플 주신분들~ 전부다 읽어보구 있어요^^ 제가 다작을 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은 이것만 쓰니까요.*^^* 늘 참고하고 있습니다.! 머리가 아프다. 그저 약간 쑤시는 정도가 아니라 지끈지끈 울려왔다. 마지 무언가로 얻어맞은듯이..? 바이욘느는 쑤셔오는 머리에 손을 댔다. 평상시와 같다. 고통도 어느새 사라져 버려 아까의 끔찍한 고통이 진짜 있었는지도 의심스러워졌다. “전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전하. 갑자기 쓰러지셔서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동안 너무 무리하신 것 같습니다. 바론의 말로는 갑자기 쓰러지셨다고 하는데..” 피오렌이 무슨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머릿속이 텅빈것 같은 이상한 공허감과 이해할수 없는 말이 뒤죽박죽이 되어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무언가 가슴을 꽉채웠던 것이 사라져 버린 이상한 허탈감이 들었다. “무슨 말이지? 내가 쓰려졌다니.” “또 만났군요 하연.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누군가의 외침과 거의 동시에 눈을 감아버린 하연이 의식을 되찾았을때 눈 앞에 보인 것은 바로 그때의 그 남자였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주제에 그는 얼굴에 미소까지 띄우며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너! 네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어? 너 때문에 내가 역기서 무슨 꼴을 당했는지나 알아? 너 분명히 다렌인가 뭔가 하는 그 주술사 맞지. 나한테 원하는게 뭐야? 뭣 때문에 날 다시 찾아오겠다는 소리를 해서 사람을 이 모양으로 만드냐고!” “싫으시다면 이만 가겠습니다.” “잠깐 기다려! 그렇다고 그냥가냐?” 그말 좀 했다고 정말 가버리려는 듯한 몸짓을 하는 다렌의 향해 하연이 다급하게 외쳤다. 귓가에 들리는 마지막 소리를 끝으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뜬 하연앞에 한달 전 그날의 밤처럼 검을 로브를 입은 다렌이 빨려들어갈 것 같은 깊은 어둠의 눈동자로 하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절 붙잡으려면 소원을 말씀하셔야 합니다.하연, 소원을 말씀 하시겠습니까?” 악마의 목소리처럼 하연을 파고드는 매끄러운 목소리에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금새 마음을 다잡았다. 레기어스의 말로 다렌은 분명 대가를 받고 계약을 한다고 했다. 그렇다는 것은..저녀석이 약속을 들어주고 무엇을 요구할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네가 대가를 받는 다는 것은 알고 있어. 하지만.. 난 줄 것 도 없고, 내 영혼을 팔라던가 그런 말에는 넘어가지 않을꺼야.” 일부러 자신을 아까처럼 절망적인 상황에 집어놓고 이제야 나타난 것이 틀림없었다. 방금도 무심결에 그만 고개를 끄덕일 뻔하지 않았던가. 하연의 경계하는 듯한 말투에 다렌의 눈가에 웃음이 스쳐지나갔다. 영혼 따위를 받아서 무얼 하겠는가. 비록 그 영혼이 마왕이 간절히 원하는 시노페의 혼이라지만 다렌으로서는 전혀 필요가 없었다. “대가는 이미 받았습니다. 바로 여기 있는 자들의 기억으로. 아마 깨어나면 오늘 이곳에서 있었던 일과 그대와 관련이 있던 말은 모두 사라져 있을 겁니다. 대신 제가 조작한 기억이 그것들을 대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말해 보시지요.” “그럼 아까 일들도 전부?” 하연의 얼굴이 희망으로 밝아졌다. 오히려 그것을 바란 것은 다름아닌 하연 바로 자신이었던 것이다. 레기어스와 바이욘느가 한말에 자신이 얼마나 절망했던가. 하지만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레기어스가 자신을 이용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질문에 끝까지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순간 다렌의 마직막 말이 하연의 사고를 정지시켰다. 소원을 말해 보라고? “잠,,깐. 지금 대가를 받았다고 했지? 그러면..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는거야? 집에 돌아가는 것도?” 하연이 다급하게 물어보았다. 분명 레기어스는 다렌이 대가만 받으면 무슨 일이든 다 해준다고 했었다. 심지어는.. 죽은...자를 되살리는 일까지.. “그건 곤란합니다. 다른 자와의 계약위반이거든요. 다른 계약과 어긋나지 않고 대가에 비해 지나치치 않는다면 3가지까지는 들어드리지요.” 혹시나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잔득 기대에 부풀어 있던 하연은 다렌의 말 속에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은 다른 이와의 계약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냥 흘려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세 가지의 소원이라.. 왠지 마법 램프같다는 생각을 하며 하연이 조심스럽게 레기어스를 바라보았다. “그럼,, 레기어스의 진심이 알고 싶어.” 불안감이 가득찬 눈동자로 하연이 떨리는 손을 애써 움켜쥐고는 다렌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에는 그동안 다렌을 만나면 꼭 물어보겠다고 생각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방법이나. 자신이 이 곳에 왜 왔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고 생각한 것 따위는 이미 멀리 사라져 있었다. 처음으로 호감을 가진 사람.. 아니 마족이었다. 언제나 자신을 편하게 대해주고, 밝게 미소지어주던 레기어스가 자신을 이용할 생각만으로 억지로 자신에게 오려고 했다는 것을 믿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던 그의 모습에 하연은 불안감을 더 이상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레기어스는 그대를 좋아합니다. 그의 말대로 처음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확실히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군요. 단지 그는 마왕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신분과 하연이 바이욘느의 소유된 자라는 사실 때문에 진심을 말하지 못한 것 뿐입니다.” “그..그럼 날 도와준 것도,,레기어스?” “눈에 보이는 것을 보고도 모른다니 할수없군요. 그대는 아까 하마터면 질식사 직전까지 갔고 그것을 눈치챈 레기어스가 이것으로 머리를 내리친 것입니다. 그로서는 목숨을 건 일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알아두시지요.” 하연은 다렌의 말에 멍하니 서있었다. 레기어스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 하지만.. 내가 바이욘느에게 억지로 키스 당할때도 그냥 보고만 있었잖아. 그런데.. 나 때문에.. 바이욘느를 공격했다고? 나 같은것 때문에? 어짜피 바이욘느가 날 죽이지는 않았을거란거... 레기어스도 알고 있었을텐데..하연의 목소리가 점점 크게 떨렸다. “그럼.. 당신 시노페도 살릴수 있어?” 처음부터 바이욘느가 자신을 이곳에 잡아놓은 목적은 시노페라는 여인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다. 만약 다렌이 시노페를 살린다면 하연은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일뿐만 아니라. 바이요느의 소유된자의 지위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었다, “시노페..라면 이미 살아났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조금더 말씀드리자면.. 이 마계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다른 계약위반이니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그럼 이제 세가지 소원에 답을 다 해드렸으니 다음에 또 뵙도록 하지요.” 순간 무엇인가 어둠이 하연의 시야를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때 하연은 아무도 없는 텅 빈 방에 혼자 남겨진 채였다. 자신이 갑자기 쓰려졌다는 이야기는 왠지 의심스러웠지만 피오렌과 라인슈타인 그리도 레기어스와 바론까지 그렇게 이야기하니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자들은 몰라도 바론이 자신에게 거짓을 말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바론이 건낸 꼬질꼬질한 종이를 바라보던 바이욘느의 시선을 붉어진 얼굴로 외면한 바론이 어물거렸다. “마왕성에서 온 친서이온데.. 도저히 읽을수가 없어서..” 친서라는 말에 종이를 빼앗듯 낚아챈 바이욘느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리고 주위에 서있던 다른 자들의 얼굴도 하나같이 굳어버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마왕의 친서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직접 글을 썼는지는 몰라도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마왕 본인이 이번 연회에 참석한다는군, 출발은 업무를 다 처리한 뒤 오늘중으로 올거라고 하는군 그때까지 준비를 끝내고 ... 그리고 ...레기어스가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내용이야.” 순간 방안의 시선이 모두 레기어스를 향했다. 의심과 불신이 가득찬 눈빛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의절한지 벌써 150년이 다 되어 가는 그가 이제와서 왜 레기어스를 찾는다는 말인가. “다른 말은 없군. 피오렌. 라인슈타인. 그만 궁으로 돌아가게. 그리고 바론, 레기어스는 잠시 할말이 있으니 남아있고.” 말도 안된다는 눈빛을 한 구사람에게서 무언가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오려다 바이욘느의 차가운 눈빛에 아무말도 하지 않고 방안을 나섰다. 세사람만이 남은 방안에서 바이욘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레기어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추궁하듯 레기어스를 바라보는 바이욘느의 눈동자가 번득였다. 무거운 한숨이 또 한번 들려 오자 기온은 책을 덮으며 고개를 들었다. 책과 서류 앞에서는 좀처럼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는 기온이였지만 땅이 꺼져라 터져 나오는 요란한 한숨 소리가 십여 차례 연이어 머리를 파고들자 더 이상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왜 이러는 겁니까? 도대체 무슨일이 있었냐고 물어도 대답도 하지 않으시고 언제까지 이렇게 한숨만 쉬실꺼냐구요?" 한숨 섞인 기온의 물음에 레기어스는 푸른 눈을 지긋이 감을 뿐이었다. 끈질기게 매일 어딜 가느냐고 물어보는 기온을 피해다니다가 자신의 노력이 성공했을 때, 재미있어 하며 기온을 놀려대곤 하던 이전의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레기어스의 얼굴을 살피는 기온의 눈엔 걱정스러운 기색이 어려있었다. "기온!" "예 레기어스님." 별안간 레기어스가 정색을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자 기온은 얼른 응수했다. 하지만 그 말을 끝으로 꾹 다물어진 레기어스의 입술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기온...." 그 말만을 한 채 레기어스는 다시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해 보세요! 제 이름만 부르지 마시구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기온이 버럭 소리를 높였다. 침착하고 조용한 평소의 그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순간 자신이 지금 레기어스의 비서라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기온이 황급히 입을 막았다. “만약에.. 내가 마왕성으로 돌아가게 되면..” 기온은 레기어스의입에서 나오는 믿기지 않는 말에 들고 있던 책을 툭하고 떨어뜨렸다. “....다시는 여기 올 수 없을까?” 레기어스가 풀 죽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기온의 대답은 바라지도 않는다는 듯 한번 열린 레기어스의 입은 흐르는 시냇물처럼 조용히 계속 이야기를 흘려내리고 있었다. 경악한 기온이 책을 주울 생각도 하지 않고 입을 떡 벌린채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레기어스가 털어놓는 충격적인 발언에 멍하니 잊었던 기온이 그나마 정신을 추스렸을때는 이미 어둑어둑해진 방안에서 몸을 일으킨 레기어스가 중얼거리는 한마디가 마지막으로 들려왔다. “오늘밤이... ....를 만날 수 있는 마지막이 되겠지” 그리고 기온이 채 뭐라 말하기도 전에 레기어스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빛이 하나도 비추지 않는 복도를 걸어간느 레기어스의 머릿속이 계속되는 메아리로 어지러웠지만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레기어스! 아까는 둘러댔지만 마왕이 이곳에 오는 것은 너를 만나기 위해서다.] [무슨 모종의 협의라도 있었던 것인가요? 레기어스님?] [더이상 너를 이곳에 두기가 힘들어 질 것 같구나. 나도 할만큼은 했다고 생각하니..] [제가 대신 말씀드리죠. 이제 그만 이곳에서 떠나주셨으면 합니다.] 엘과 카란이 침입해야 할 곳은 다른 정원들처럼 건물과 이웃해 있지 않았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이웃해 있다는 건 어폐가 있지만, 하여튼 다른 정원들에 비해 그곳은 외톨이처럼 뚝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는 말이다. 몰래 숨어들어야 할 정원이 외딴 곳에 위치한다는 것은 그곳을 몰래 침입해야 하는 엘과 카란에게 있어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단지 그곳과 연결된 통로에 도달할 때까지 무릎까지 밖에 온지 않는 낮은 관목 아래를 기어서 지나가야 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리 매력적인 장점은 아니었지만. 엘은 그나마 목적지과 가장 근접해 있는 건물 그림자 속에 몸을 묻고 있었다. 적진의 한가운데서 행하는 일이어서 인지 평소와는 달리 불안할 정도로 생생하게 다가드는 밤이었다. 나무 사이를 스치는 바람이 음산한 신음소리를 냈다. 엘은 몸을 부르르 떨며, 기분 나쁜 달 그림자에서 시선을 내렸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던 달이 오늘따라 섬뜩하게 보였다. 갈팡질팡할 시간이 없었다. 카란이 말한대로라면 금방 계획이 탄로날 지도 몰랐다. 어차피 해야 한다면 빨리 해치우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엘은 건물 그림자에서 벗어나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관목수풀아래에서 열심히 기어가고 있는 엘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아까부터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아무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이렇게 대담하게 행동한 것이었다. 눈 앞에 다가든 정원은 불길함과 음산함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거대한 호수는 스산한 달빛을 반사하고 어둠을 빨아들이는 듯한 숲이 만들어 내는 기괴한 그림자가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짙은 정적과 어둠에 쌓여 있는 눈앞의 창백한 건물이 마치 엘과 카란을 향해 경고를 보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맥없이 물러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새 자신을 뒤쫏아온 엘은 주위를 한번 둘러본 다음 건물로 들어가는 그리 높지 않은 계단을 신중하게 올라갔다. 열려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한 문이 의외로 열려 있다는 걸 확인하자 묘하게도 실망감이 들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눈을 깜박이며 문을 노려보고 있던 엘을 무시하고 카란이 조심조심 칼을 빼어 들었다. 인간여자 하나쯤 제압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칼을 미리 빼어두는 편이 좋았고 그것을 본 엘도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목숨만 살려서 데려와 . 다른건 상관 안하마.] 팔 한두개 정도 잘라버려도 죽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칼은 쓰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카란과는 달리 엘은 오히려 상대가 반항을 해서 자신이 칼을 사용할 수 있을 기회가 있기를 내심 기대하며 검을 고쳐쥐고 있었다. 다음편은 하연과 레기어스가 만나는 장면과 습격을 당하는 하연이 나옵니다. 끝부분에 마왕과 바이욘느도 다올 예정입니다. 가능하면.. 오늘밤안에 올릴께요..(장담은.. 못하지만..) 오월에부는바람님 감사드려요^^ 고쳤답니다. 3/4 이런 늦은 밤에는 한 번도 하연을 찾아간 적이 없었기에 레기어스는 긴장했다. “어! 레기어스? 어서 들어와.” 하연은 탐색하는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레기어스는 그저 자신이 만들어낸 자의식이라고 생각하고 애써 미소를 지었고 잠시 알수 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하연은 언제나처럼 레기어스를 꼬옥 껴안았고 언제나 처럼 레기어스는 하연의 머리를 가볍게 툭툭 쳤다. 다렌이 오늘의 기억을 일부 지웠다고는 하지만 반신반의하던 하연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예전과 같은 레기어스를 보고 안도했다. 그리고 언제나와 같은 인사. 그래..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최소한 날 싫어하는 건 아니니까. 그게 사랑은 아닐지 몰라도.. 다렌이 해준 대답은 분명 좋아한다였지. 사랑한다가 아니였다. 질문을 할때 망설인 것도 그것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아니라는 말을 들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레기어스의 변함없는 태도에 왠지 아쉽기는 했지만... 언제나처럼 책을 읽고 있었는지 작은 탁자위에는 그가 가져다준 책이 올려져 있었다. 늘 레기어스가 앉던 자리를 내어준 하연이 잠시 머뭇거리는 듯 서 있다가. 뭐라고 말할 것처럼 입을 열었다. “..무슨일 있었어?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그리고 이렇게 늦게는 한번도 찾아온 적이 없잖아. 혹시 나쁜일이라도 있는거야?” 아닌게 아니라 언뜻 스친 레기어스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억지로 미소짓고 있는듯 인위적인 그런 느낌이었다. “..그냥 네가 보고 싶어서.”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하연을 마주볼수 있게 끌어당기며 레기어스가 중얼거렸다.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듯 자신을 바라보는 하연의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비췄다. 순간 하연의 얼굴이 약간 달아오르는 듯했다. "뭐야? 좀 구체적으로 말해 봐, 레기어스. 그래, 맞아! 너 다른 이유가 있는거지? 그런 거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아니면, 어디 아픈 데라도 있어? .... 설마..또 부모님이랑 관련된 이야기야? 그러니까 내가 누누이 말한 거잖아. 말은 가슴에 담아만 두고 있으면 병이된다고. 그러니까 나한테 탁 털어 놓아보라니까? 넌 도대체 내 말을 콧등으로도...."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레기어스에게 안겨 그를 올려다 보며 열심히 소리치던 하연은, 순간 말끝을 흐렸다. 그에게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지만 자신을 조금도 진실을 말하여 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갑자기 말을 멈춘 자신을 바라보는 레기어스의 모든 것을 뚫어볼듯한 눈빛에 찔끔한 하연은 오늘따라 도저히 읽을 수 없는 레기어스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그거야....뭐....난 너한테 그런거 물어볼 자격도 없고 아무것도 아니지만.. 난 그저.... 네가 평소와 다른 것 같아서.... 그냥.... 네가 평소와는 달라보여서....별 생각없이.... 불쾌했다면 미안해" “....아니야.” “응?” 입을 다물고 있던 레기어스가 탁한 목소리로 억지로 끌어내듯 대답하자 하연이 재빨리 시선을 올렸다. "저 나...... 잘 못 들었거든?." “....아무것도 아닌게.. 아니야.” "그,그래? 아 그래 우린 친구였지? 미..미안." 하연이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심장이 격하게 뛰었다. 다렌이 분명히 그때 기억을 지웠다고 했는데 오늘의 레기어스는 평소와는 달리 잔뜩 긴장해 있었고.. 굉장히 불편해 보였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자신이 별거 아닌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고 생각한 하연이 쑥쓰러운듯 말을 이으며 레기어스의 어깨를 탁탁쳤다. “그래 우린 영원한 친구야! 뭐 남녀간에는 우정은 있을 수 없다지만.... 여기 이렇게 우리가 있잖아? 게다가 종족을 넘어선 이 진한 우정! 앗, 그러고 보니 레기어스 너 애인 생기면 나한테 말하기로 한거 잊지 마? 이렇게 지장까지 찍었잖아.” 레기어스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만 생각해도 가슴이 저며왔지만. 하연은 레기어스의 손을 잡고 그때 어정쩡한 자세로 손가락을 걸고 맹세했던 것을 재현해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싫어...” 하연이 하는데로 가만히 있던 레기어스가 손을 빼려는 하연의 손을 움켜잡았다. 평소와는 달리 조금 뜨겁게 느껴진 하연은 자신이 무슨 말을 또 잘못한건가 싶어 잠깐 레기어스를 바라보다 레기어스의 턱 바로 아래에 상체를 들이밀며 다급히 물었다. "열이 나잖아? 왜 말 안했어? 역시 아픈거구나. 그러고 보니 목소리도 이상해." “...아픈게 아니야. 하연. 오늘 할 말이 있어.” 하연의 나머지 한손까지 잡아 자신의 손안에 올려놓은 레기어스가 하연의 두손에 입을 맞췄다. 그것은 마치 나비의 날개짓 만큼이나 가볍게 닿아왔지만 하연은 깜짝놀라 자신도 모르게 손을 뿌리치려고 하는 그 순간 레기어스가 하연의 손을 자신에게 강하게 끌어당겨 그의 가슴께로 가까이 가져갔다. 두근 거리는 심장의 소리가 민감해진 손을 타고 그대로 느껴졌다. 레기어스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분명 빨갛게 변했을 얼굴을 보이기 싫어 하연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레기어스는 그런 하연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쉈다. 순순히 자신의 품에 안겨오는 하연이었지만..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볼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금방이라도 고개를 잡아올리고 자신을 바라보게 하고 싶었지만.. 놀라서 도망칠까 두려웠던 레기어스는 그냥 말없이 다른쪽 팔을 들어 하연의 어깨를 자신에게로 당겼다. 순간 긴장한듯 하연이 몸을 굳히며 가쁜 숨소리리를 내더니 살며시 그의 가슴을 두 손으로 밀어냈다고는 밀착되어 있던 몸은 빼냈다. “저.. 저기.. 레기어스.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그러니까.. 우린 친구잖아.” 레기어스의 태도에 자꾸만 약해지는 자신을 느낀 하연은 예전처럼 그렇게 레기어스가 껴안는데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신의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뜨거운 숨결이 닿은 피부가 녹아내리는듯 따끔거렸다. 게다가 남자답게 단단한 레기어스 몸에 밀착되자 평상시와는 다르게 금방이라도 쓰러질것 처럼 다리가 후들거려 견딜수가 없었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거야. 하연?” 고개를 숙인 하연이 자신의 행동이 친구로서 부담스럽게 느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여서라는 것을 모르는 레기어스는 차마 목소리의 떨림까지 막을 수는 없어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니 그게... 내가 널 좋아하는 건 맞지만... 난 바이욘느의 그 뭐냐 소유된 자 이고. 또 넌 그 바이욘느의 동생이잖아? 어쨌거나 친구인 우리사이에는 좀 부적절한 포즈같은데.. 약간 숨이 막히는 것도 같고.” 레기어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하연의 심장은 쿵쾅대고 있었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레기어스의 가슴이 너무나 크고 그의 체취가 강하게 하연을 자극해서 흥분한 하연의 폐는 제대로 호흡하지 못하고 숨이 턱까지 차올라온 것이지만 레기어스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연을 잡고 있던 레기어스의 손에 힘이 빠졌다. 조금이라도 자신을 친구가 아닌 다른 존재로 보아주었으면 했지만 시노페때처럼 자신은 그저 친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어째서 왜 내가 원하는 것은 모두 바이욘느에게 먼저 속하게 되는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레기어스가 창문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죽음과도 같은 상실감이 가득찬 자신과는 달리 밤은 마치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것 같았다. 새까만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고, 커다란 은광이 그 중앙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예전에.. 한 작은 소년이 잘 알던 한 소녀가 있었어.” <안녕 레기어스. 네가 마왕님의 아들이구나.> 먼 꿈속의 나라를 상상하듯 레기어스의 눈이 아름다운 환상을 보듯 아련해졌고 하연은 레기어스가 자신이 가장 듣고 싶지 않은 시노페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처음 만났을때 거짓말이라고 둘러댔지만.. 사실은 진실이었던 그 이야기를.. “너무나 아름답고 누구보다도 상냥했던 그애한테는 내가 가지고 있지 못했던 모든 것이 있었지. 언제나 다정한 아버지와.. 그녀를 아껴주던 수 많은 사람들...” <굉장한데. 시노페 벌써 이런것도 할줄 알다니. 역시 자랑스러운 내 딸이야.> 누구에게나 사랑받던 그 소녀가 부러웠다. 그 애만 곁에 있다면 자신도 그 넘치는 관심과 사랑을 조금은 나누어 받을 수 있을 거라고생각했다. “그리고.. 아름다운 소녀에게는 멋진 기사님이 언제나 옆에 있었어.” <인사해. 이쪽은 내 약혼자인 바이욘느야. 너한테는 삼촌이구나.> 아버지에게서도 인정받지 못하던 자신과는 전혀 다른 바이욘느는 시노페와 똑같은 빛나는 금발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은 받아보지 못한 충성심과 신뢰의 눈빛의 가지고 있는수많은 가신을 거느리고 있었다. 조그마한 자신을 처다보기도 힘들만큼 대단한 황금빛으로 빛나는 바이욘느.. “그래서 소년은 언제나 바라보기만 했지. 그들이 너무 눈부셔서,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그렇게 바라만 보고 있었어.” <다음달에 우리 정식으로 혼례식을 치르기로 했어. 꼭 와줄꺼지>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소녀에게는... 자기같은 조그만 힘없는 어린 소년이 아니라 멋진 기사님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거든.” <축하해. 시노페. 행복하세요, 형님.> 하연은 달빛을 받으며 서있는 레기어스를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자꾸만 눈물이 흘러나오려고 했다. 레기어스가 시노페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확인해야만 한다는게 싫었다. ‘어째서.. 벌써 죽어버린지 한참이나 됬는데... 그렇게 슬픈 눈을 하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속삭이듯 이야기 하는거야... 나,, 그냥 친구로 있으려고 했는데.. 자꾸 이런 모습 보이면.. 더 이상.. 널 보기가... 힘들어져.. 그래서 ..자꾸.. 도망치고 싶어지는걸..’ 레기어스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한 다렌의 말은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서 였다고 그러나 지금은 아니라는 말도 맞았다. 진심으로 원했던 상대라면.. 나같아도 레기어스처럼 그랬을 테니까. 원망하지는 않아. 하지만.. 레기어스가 좋아한다는 의미가... 미안함 때문에 언제나 친절한 그의 성품 때문에 그래서 좋아해줘야 겠다고 생각해서 그런거라면.. 너무 비참해.. 울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미 눈 안 가득히 투명한 액체가 차올라 금새라도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아 하연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레기어스를 외면한채 울음을 삼키고 있던 하연의 귀에 다시 끊어질듯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언제나 난 친구일 수밖에 없는걸까? 이렇게 원하는데 말한마디 못하고 보내버려도 될까..?” 레기어스는 하연이게 하는 말이었지만 하연의 귀에는 사랑고백한번 못해보고 떠나보낸 시노페에 대한 고백처럼 들려왔다. 순간 참았던 눈불이 또르르 얼굴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래! 이 바보야! 그러니까 넌 영원히 친구따위밖에 안되는 거야! 맨날 도망만 치고. 솔직하게 이야기 하지 못하니까 그래서 친구밖에는 되지 못하는 거라구! 아무말 하지 않고 혼자서만 슬퍼하면 누가 알아준대? 혼자서 사랑한다고 골백번 중얼거려봐라 상대가 눈길이나 돌려줄것 같냐고! 그런 바보같은 사랑이나 하니까 친구밖에 못되는거야, 알아!” 화가 나서 견딜수가 없었다. 바이욘느에게 강제로 키스 당할때도 느끼지 않던 살인적인 분노가 시노페와 바보같이 한사람만 바라보다 말도 못하고 가슴앓이만 해온 레기어스에게로 불붙듯이 쏟아져 내렸다. 넌.. 나따위는 보이지 않는거지... 나.. 친구로만 있으려고 했어... 어떨때는 정말로 참기힘들 어서.. 하마터면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할뻔 했지,,. 넌 그런 나한테.. 너의 심장은 다른곳에 바쳐졌다고 말하는구나.. 그럼,, 난 뭐야? 너랑 똑같은 상처로 고통받는 난.. 누구한테 털어놓아야 하지? 이 외딴곳에서 너 하나만 바로보고 있는 나는,..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그냥 잊어버리라고 이야기 해야되는 거야? 내가 너에 대한 감정을.... 지워버릴 수 없는 것처럼.... 너도 그럴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해야되? 바보구나.. 레기어스.. 너도.. 그리고 나도.. 바보들만이... 가슴아픈 사랑을 하지.. 넌,,, 바보야. 그리고.. 바보같은 너를 바라보는.. 나도... 죄송,, 작가의 분량줄이기 실패로..(카란과 엘 그리고 바이욘느와 마왕이 나오는 부분) 예고한 내용은 3시간 뒤에나 올릴수 있을듯 합니다. 이거 쓰고 재빨리 쓰러 갑니다. 3월 3일 분입니다.오늘은 피가 튀는 재미(?)를 보장해 드리겠습니다.그리고.. 저번에 고백(?)장면,, 반응이 으음.. 역시 사람은 천성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작선적인 스타일의 작가임) 아니면강수강공을 좋아하는 저이다 보니.. 어쩔수 없는 걸까요. “좀 심하셨습니다. 전하.” “뭐가 말인가?” 바이욘느가 짧게 응수하고 입을 다물자, 불만에 찬 바론이 입술을 실룩였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 마왕도 알고 있었을 텐데요. 게다가.. 이번에 연회에 참석한 첸의 아들도 그렇고.. 뭔가 이상합니다." 대답을 기다리며 바이욘느를 바라보는 그의 눈엔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바이욘느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자, 긴장은 짜증으로 변했다. ‘도대체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것인지..도통 들으실 생각이 없으신듯 하니’ 속으로 투덜대던 바론이 일어나기 위해 의자를 뒤로 밀었을 때였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바이욘느가 불쑥 말을 꺼냈다. "그 아이와 레기어스는 뭘 하고 있지?" 몸을 흠칫한 바론이 바이욘느에게 고개를 홱 돌리는가 싶더니 바이욘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바이욘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대가 레기어스에게 그림자들을 붙인 것을 알고 있다. 그것도 두 녀석이나 붙였더군. 어때 내말이 틀린건가?” 부자연스럽게 높아졌던 어조가 급속하게 낮은 중얼거림으로 변했다. 숨막힐 듯한 침묵이 공기를 묵직하게 내리눌렀다. 바론은 고개를 숙이고 망설이고 있었고 바이욘느는 창백한 얼굴의 바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바이욘느가 입을 연 건 망설이던 바론이 그를 흘끗 올려다 봤을 때였다. "어느 정도인가?" “아직까지는 잘 확인 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말동무만으로 만나는지.... 혹시 완전히 빠져드신 것인지 아닌지 의심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 조금 더 확실해 지면 말씀드릴 생각이었습니다만.. 아직까지 별다른 일은 없었다고 하니...." 두 사람 모두 말을 돌리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들이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레기어스가 대하는 다른 여인들과 비교해 보면 될 것 아닌가? 그걸 확실해 질때까지 기다린다고?"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레기어스 전하의 태도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어서... 분명 웃는 것이나 말씀하시는 것은 분명 여인을 대할때와 같은데 정작 그것을 받아들이는 상대방은 오히려 담담하기만 하고 그분이 먼저 신체적인 접촉을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보고하기로는 오히려 상대가 우연히라도 부딪치면 깜짝 놀란다고 했으니 도저히 뭐라 결론 내릴수가 없어서....” 얼굴이 상기된 바론이 쥐어 짜내듯 힘겹게 말했다. 그러자 바이욘느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물었다. “지금은?” “예?” “지금은 어디 있냐고 물었다. 방금전 보고를 받는 것을 보았으니 숨길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을꺼야. 분명 나에게서 최후통첩을 받았으니 분명 무언가를 행동에 옮기겠지. 안그런가?” “그.. 그럼 아까는 일부러..” 레기어스를 시험해 보기 위해 일부러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그제서야 눈치챈 바론의 등뒤로 서늘함이 목돌미까지 올라가 펴졌다. 일부러 새끼가 있는 여우를 궁지로 몰아넣고 새끼에게 돌아가는 어미를 추격하여 모두 포획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리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그림자들을 그 숫자까지 정확히 알고 있는 바이욘느를 새삼 두렵게 바라보던 바론은 조심스럽게 그 질문에 대답했다. 바론이 말한 하연이 머무르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바이욘느가 갑자기 움찔거리더니 걸음을 멈추고 숨을 들이쉈다. 뒤따라가던 바론이 무슨 일인가 하여 눈이 휘둥그래졌다. “전하! 혹시 몸이 불편하신 것입니까?” “...여기가 아프다. 방금전에도.. 같은 부분에 고통이 느껴졌는데.. 지금은 큭.” 바이욘느가 자신의 심장 부분을 가르키더니 쓰러질것 처럼 비틀거리자 바론이 황급히 그를 부축했다. 그러나 허약한 바론이 거구의 바이욘느를 지탱하는 것을 처음부터 무리였기에 이내 바론의 몸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어째서 말씀을 아니하셨습니까?”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고통이면 어지간한 것은 아닐 터였다. 바론은 그 지경이 되기까지 아무말도 하지 않은 바이욘느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이건 내가 느끼는게 아니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바이욘느가 간신히 내뱉었다. “하지만 이번은 조금.. 심하군.. 상대와의 연결이라는게 이 정도인줄은 몰랐는데.” “연결... 이라니요? 도대체 누구와..,섦마!!” 틀림없었다. 바이욘느 전하가 저리 괴로워하시는 것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연결대상이 피오렌님 정도의 마족이라면 어지간한 일에는 고통조차 느낄리 없었다. 그리고 설사 부상을 입었다고 해도 금방 치유해줄 자들이 사방에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심한 고통을 이리 오랫동안 느끼신다면.. 분명 그 상대는 그 인간뿐이다!’ 상대와 연결이 되면 상대의 감정이나 고통을 어느정도 연결시킬 수 있었다. 즉 한쪽이 무슨일을 당하거나 하면 바로 그 반대쪽이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단지 그 연결의 감도라는 것은 개개인의 차이가 있었지만 대개 능력이 높을 수록 강한 연결고리가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한 번도 상대와의 연결을 한 적이 없었고 그 능력으로 따지면 마왕에 버금가는 바이욘느이니 그 연결정도는 분명 거의 동일인이라고 보아도 충분할 것이었다. “바론, 그림자들을 데리고 빨리 가 봐라. 분명 무슨일이....생긴것이 분명해, 그렇지 않으면.. 으윽.. 이리 고통스러울 리가 없다.” 이도저도 못하고 서있던 바이욘느가 자신을 뿌리치고 옆에 있는 기둥에 간신히 몸을 기대고서는 명령했고 잠시 망설이던 바론이 품속에 손을 넣어 무엇인가를 꺼내 입에 넣고 불자 바닥의 어둠으로부터 하나씩 인영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어둠을 머금은 듯한 기다란 검이 높이 들어올려졌다. 하늘로 솟구치듯 높이 솟아오른 검이 먹이감을 노린는 매처럼 빠르게 아래로 하강하며 날카로운 검날로 목표물을 일격에 유린했다.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더 이상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멈춘것처럼 보인 칼이 조금씩 위로 날아오르면서 사냥에 성공했다는 것을 자랑이나 하듯 붉디 붉은 핏방울이 차가운 검신에 매달려 있다. 모든 것이 하나하나 사진을 넘기는 것처럼 느리게 움직인다. 파아아악! 붉은 안개가 사방을 적신다. 뜨겁다. 얼굴에 맞다은 그것이 너무 뜨거워서 피부로 파고드는 듯한 느낌에 고통스럽다. 예전에도 이런일이...? 아니다. 이건 꿈이다. 한달전부터 가끔씩 꾸던 끔찍한 꿈과 똑같은 상황이다. 단지 장소가 틀리고. 칼이 다르고... 그리고... 그리고... 하연의 눈앞으로 창백해진채 빛을 잃어가는 푸른 눈동자가 서서히 쓰러지고 있었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달빛에 젖어있던 푸른 머리카락이 이제는 붉은 피에 붉게 물들어 있었고 창백했지만 약간의 홍조를 띄고 있던 입술은 새하얗기만 하다. 쓰러진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담겨저 있지 않았다. 언제나와 같은 미소도 가끔씩 찡그리던 얼굴도 그 어느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금방이라도 산산조각날듯이 저려온다. 아니 더 이상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무서우리만큼 조용한 이 공간에서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적막. 완전한 침묵으로 가득찬 세계가 갑자기 맹렬한 소음을 내며 정신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안되!! 레기어스!” “젠장 입닥쳐!”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하연의 복부를 찔러들어오자 하연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방안 가득 두 사람의 혈향이 진하게 풍겨왔지만 이들을 습격한 두 인영은 전혀 개의치 않는듯 근처에 놓여있던 테이불보에 피묻은 검을 재빨리 닦았다. “아직 죽진 않았군.” 카란이 쓰러진 레기어스의 목에 손을 대고는 중얼거리자 엘이 다시 검을 고쳐쥐었다. 확실히 목숨을 끊어놓겠다는 심산이다. “잘됬군, 아버지가 실패한 일을 이 내가 끝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야.” “그만둬. 엘 어짜피 저대로 놔두어도 살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게다가 한시가 바빠. 이 인간쪽도 위험한 상황이다. 어쩌자고 다짜고짜 지혈하기도 힘든곳을 찌른거냐. 차라리 팔다리를 찌를 것이지. 이러다간 그곳에 가기전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겠다.” “무슨 걱정이야? 마법한방이면.” 심각하게 하연의 상태를 가늠해보던 카란이 황급히 빛을 발하는 엘의 손을 칼등으로 태리치자 완성되지 않은 주문은 빛을 뿌리며 산산조각나서 자라져 버리고 엘은 손등을 붙잡고 펄쩍펄쩍 뛰었다. “이렇게 다 죽어가는 인간에게 마력을 쓰면 바로 즉사야! 첸님의 말을 듣지 못한거냐?” “그럼 어쩌란 말이야? 다 죽어 간다며!” 카란은 투덜거리는 엘을 바라보지도 않고 품에서 무언가 병을 꺼내더니 그안에 들은 것을 하연의 상처에 뿌렸다. 놀랍게도 그것이 뿌려지자 하연의 상처에서는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았다. “굉장한데? 이거 뭐야? 네가 만든 이상한 약물보단 훨씬 좋은데?” 카란이 사용한 것은 인간계에서도 특히 귀하게 여긴다는 힐링포션이었지만 엘에게 굳이 설명해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그는 하연의 맥이 낮지만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숨이 끊겼을 지도 몰랐다. 엘이란 녀석이 제멋대로 칼을 박아넣어 예상보다 시간이 지체되었지만 어느정도는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갑자기 엘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림자 일족이다. 여기서 멀지 않아. 게다가.. 5명도 넘는것 같다. 아주 가까워, 게다가 엄청난 속도로 이쪽을 향하고 있다. 실력도 상당한 것 같다,” 엘이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3명까지는 처리할수 있었지만 4명이상은 무리였다. 그렇다는 것은 이번 임무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었고, 잠깐 서로의 얼굴을 마주본 엘과 카란은 미련없이 막바로 그곳을 빠져 나갔다. 임무는 실패하더라도 들켜서는 안되었다. “이쪽이다!” 바론의 휘하 그림자 일족이 불길한 기운이 도는 문을 열어젖혔을때는 이미 방안은 하연과 레기어스의 굳어가는 피로 검붉게 변해 있었고 비릿한 혈향이 지독할 정도로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직 숨을 쉬고 계십니다!” 제일 먼저 레기어스에게로 달려간 한명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그의 맥박을 잡아냈다. 그들은 재빨리 자신의 피로 온몸이 물든 레기어스를 업고 본궁이 있는 것으로 황급히 뛰어갔다. “여기 인간은 어떻게 할까요?” “그냥 둬라. 하찮은 인간따위에게 손을 댈 필요는 없다.”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에게 다른 그림자족이 묻자 그가 잠시 인간을 바라보더니 차갑게 대답했다. 바론님이 말씀하신 것인 레기어스님까지였고 인간은 단지 레기어스에 따라붙은 귀찮은 관찰대상에 불과했다. 인간따위야 죽건말건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카란이 해놓은 방편은 임시였기 때문에 아직도 하연의 상처사이로는 조금씩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안정된 것 같던 호흡은 조금씩 잦아들고 위아래고 오르락 내리락 하던 가슴도 점차 그 움직임이 잦아들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하연에게 관심을 가지는 자는 없었다. 피가...튀었습니다.(허억! 그렇다고 그렇게 사시미를 가실 필요는!!) 진도 조금 빨리 나갔습니다. 부실해 보이는건 아닌지.. 걱정이군요. 오타지적. 해주세요. 오늘도 수정 안보고 그냥 자렵니다. Good night 그리고 바렌 바론 자꾸 헷갈렸는데 고쳤어요. 혹시 아직도 남은 것 있으면 지적 부탁드립니다.! 21.뭘꼬다봐,믿지않는자,♡lovelygirl♡,이쁜영이 22. ♡lovelygirl♡,이카엘,이은이,이쁜영이 23 이은이,네르히나 ,♡lovelygirl♡,이쁜영이 역시 익숙한 닉네임이 주로군요. 언제 한번 순위를 매겨볼까요?.^^:: 이쁜영이 : 추천 꾹~~ (03.03 13:38) 썩세스 : 요즘 이은이 님이 리플을 많이 달아주시네요^^ http://yard.joara.com/humpty14 (03.03 01:22) 이은이 : 헉!!!! 니임~~ 뒤편이 더 궁금하게 만들어놓으셨네요 ㅜㅡ (03.03 00:42) 복부로부터 전해지는 뜨거운 고통이 온몸을 태워버릴 듯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아팠다. 그리고 고통보다 더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하연은 이미 감감이 거의 없는 자신의 손을 겨우 움직여 복부의 고통의 원인을 찾았다. 고통의 진원지. 그리고 차가운 감촉, 하연은 자신의 복부를 뚫고 들어왔다가 사라진 검의 자국을 발견하고는 지금가지와는 다른 두려움에 떨었다. “헉...헉... 으..윽...” 하연의 입에서 거친 숨과 함께 낮은 신음성이 흘러 나왔다. 필사적으로 고통을 억누르려고 하는 그녀의 모습은 이미 엉망이었다. 머리와 얼굴은 군데군데 피가 튀어 엉망진창이었고, 입고 있던 옷은 온통 알수 없는 얼룩에 여기저기 짓어져 있기까지 했다. 그리고 하연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죽는..건가..?’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청하려고 했지만. 복부의 상처때문이지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무서웠다. 하지만 곧 닥쳐올 것이 분명한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정말로 무서운것은 누구하나 아는 이 없는 이 곳에서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혼자’인 자신의 비참한 처지였다. 그러나 하연은 여기서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자신이 도움을 기대할수 없는 혼자라도, 오히려 죽고싶은 지금의 고통에도 그녀는 죽고싶지 않았다. 아니 죽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레기어스 때문이라도 절대로 살고 싶었다. ‘살아야...되.’ -하연! 피해. 누구냐? ‘난.. 죽을수.. 없어..’ -이 인간과 여기 함께 있던 걸 원망하게! 레기어스가 아닌 자신을 노리고 숨어든 자들이었다. 단지 자신과 팜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왼쪽가슴에 칼을 맞고 피를 뿜으며 차가운 바닥으로 쓰러져야 했던 그를 떠올린 하연의 몸이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듯 꿈틀거리고 하연의 입사이로 쿨럭이며 피거품이 흘러나왔지만 이제는 신음성조차 낼 수가 없었다. ‘절대..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꺼야..’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기 때문일까 심장의 박동이 점점 느려지는 것을 느끼면서 뭐가 부드럽고 아주 강한것이 자신을 감싸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그리고 하연의 고통에 몸부림치던 몸의 통증도 점점 사라졌다. 조금전의 일이 거짓말처럼 더 이상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뭐야? 이 피투성이는?” 언제나처럼 쓸모없는-본인은 극구 부인하지만-실험을 하고 있던 아르드미한은 자신이 완성해 놓은 고대 신족의 소환진위에 갑자기 나타난 핏덩어리를 보고 기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더욱 놀란 것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커다란 보석의 행방이었다, 아마도 방금 나타난 인간의 몸속으로 스며들어간듯 보석의 기운은 인간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인간의 창백한 얼굴은 점점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지만 아르드미한은 울쌍을 지으며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다. 아들녀석이 예전부터 집요하게 노리던 보석이 사라진 것을 알면 그냥 있을리 없었다. “어쨌거나 나랑 똑같은 금발머리는 처음보는군..잠깐.. 아까까지만 해도 검은색이 아니었더가? 그러고 보니 생김새도 조금 달라진것 같은데..” 방금전의 고민은 이미 다 사라진듯 아르드미한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세상에! 레기어스님. 정신차리십시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그림자족 일원이 심장 부분을 정통으로 맞은 레기어스를 데려오자 먼저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린 바이욘느를 어떻게든 깨워 보려고 하던 바론이 어찌할줄 모르겠다는 듯 당황한 목소리로 그를 데리고 온 자에게 물었다. “인간은! 같이 있던 인간은 어찌 되었느냐?” 쓰러져 있는 바이욘느전하를 내팽개치고 눈에 핏발을 세우며 달려드는 바론의 모습은 마치 정신병자처럼 보였다. 주군보다 한낱 인간의 안위를 더 먼저 하는 그의 모습이 낯설었다. “거의 숨이 끊어져 가던 상황이었으니. 지금은 아마 죽었을 것입니다.” “어째서! 그냥 두었느냐! 그 인간은 바이욘느 전하와 연결되어 있는 자란 말이다! 이 천치같은 것들!” 평소와는 다르게 폭력적인 언사를 사용하는 바론에 놀란 것이 아니라 바론의 입에서 나온 연결이라는 의미에 경악한 그들은 재빨리 왔던길로 다시 뛰어갔다. 인간이 죽으면 바이욘느 전하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었다. 강제로 깨어진 연결의 부작용은 심한 경우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의 엄청난 반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에우로테님! 인간은 어찌되었습니까?” 갑자기 다짜고짜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부하가 숨이 턱까지 차서 자신을 향해 물어오자 짜증이 난 에우로테가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보았다. “무슨일이냐?” “그.. 인간이 바이욘느 전하와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어서 빨리 살려내지 못하면!!” 놀란 에우로테가 재빨리 아까의 참상이 벌어졌던 방으로 몸을 옮겼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떨어져 나갔다. 잠시 방안에서 인간이 쓰러져 있던 곳을 찾던 그의 눈이 경악으로 굳어져 버렸다. 그 뒤를 따라 들어온 자들의 눈도 밑을수 없다는듯 꼼짝도 하지 않고 잠시전까지만 해도 인간이 쓰러져 있던 바닥을 바라보았다. “...대체...” 어지간해서는 떨리지 않던 에우로테의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졌다. 분명 이 앞을 자신들이 서 있었고 누군가가 접근하는 자가 있었으면 그들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어디로 사라진....거지?” 흥건하게 고여있던 피는 이제는 조금식 굳어가며 원래의 붉은 색을 잃어가고 있었고 방안을 가득 메우던 혈향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 곳에 있어야할 인간의 모습은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던 양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인간은 사라지고 레기어스는 중상이라?” 가운데 심장이 뚫리면 어버이나 형제의 도움없이는 회생이 불가능했다. 하연의 문제는 일단을 자신이 깨어난 것을 보면 분명히 살아있는 것이 분명하니 별로 걱정은 되지 않았지만 레기어스는 달랐다. 그를 도울만한 유일한 자는 마왕뿐이라는 사실은 사실상 레기어스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의미했다. “처음부터 레기어스님을 노린 것 같습니다.” 마왕이 곧 도착한다는 소리에 화려한 예복을 입는것을 도와주는 시녀들 옆에서 보고를 마친 바론이 대답했다. 자신의 아들을 죽이라 명한 그이니 분명 레기어스가 중태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것이 의심스러었지만 어쨌든 마계의 지배자인 그를 정중히 맞아들여야 했기에 이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전하. 마왕 펠레펜 전하게서 방금 성문앞에 당도하셨다고 합니다.” 전령이 밖에서 외치자 바이욘느와 바론은 얼굴에 드러났던 표정을 모두 지우고는 마왕을 맞이하거 접견실로 걸음을 옮겼고 그 뒤를 시녀들과 시종들이 조심스럽게 따랐다. “깨어나는가 본데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리듯 들려왔다. 아마도 남자인 듯한 그 사람의 목소리는 아주 맑고 깨끗했다. 처음 듣게 된다면 누구라도 호감을 가질것 같은 그런 멋진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은 오히려 그 목소리의 주인에 대해 불쾌감을 일으킬 정도였다. “하긴 나 아르드미한이 과거 대신관이던 시절에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이 약이 효과가 없을리 없지. 그나저나 갑자기 밤새도록 토할것처럼 욱욱대다니 내 평생 그런 이상한 병은 본적이 없는데 말이야. 어쨌거나 이제는 멀쩡한 것 같군” 왠지 좀 더 나이가 많게 들리는 목소리는 약간의 오만함이 섞여 있었지만. 방금전의 목소리와는 달리 약간의 온화함이 섞여 있었다. 아마도 자신을 살린 것이 분명한 그의 말을 들어보면 상당히 고마워야 할 사람이라고 하연은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쓰레기를 어디다 쓰시려구요? 그래 오랜만에 유희중인 아들을 불러낸게 겨.우. 이것 때문이라는 겁니까? 안그래도 황제라는 놈 때문에 머리가 아파 죽겠는데, 제 유희를 망치시려고 작정을 하신 겁니까?” 누군가를 첫인상만으로, 그것도 상대의 목소리만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일인지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며 젊은쪽이 비아냥거렸다. “누,,가 쓰레기 라는 거야..?” 이미 정신을 차린 상황에서 계속 그들의 말을 엳듣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에 하연은 몸을 일으켜 입을 열었지만 얼마나 누워있었는지 건조해진 입술을 마음대로 움직여 지지 않았다. “호오? 눈을 뜨니 생각보다 괜찮은 걸? 게다가 저 황금빛 눈동자라.. 어떠냐 나를 쏙 빼어담은 것 같지 않으냐?” 40이나 되었을까 빛난다는 표현이 정말 잘어울리는 화사한 금발의 사내가 근엄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하연을 손가락질했다. “그렇군요. 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버지의 번들번들한 눈이랑 정말 똑같은 색이네요. 친 부녀간이라고 해도 믿겠습니다.” 비아냥 거리는 목소리는 처음 들었던 그 맑은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 담긴 말이 담고 있는 가시에도 상관없다는듯 아르드미한이 싱글거리며 대답했다. “그렇지? 내 일족에서도 나랑 똑같은 이런 색의 눈은 본적이 없는데. 아마 내 자식이라고 해도 다 믿을꺼야. 그리고 인간치고는 상당히 아름답고 머리색까지 나랑 똑같으니 말이야.” 하연의 첫 말을 그렇게 완벽하게 묵살되었다. 강제로 들어올려진 하연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마치 보석을 감정하는 듯한 것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진한 황금빛이였고 그것은 그녀로 하여금 바이욘느를 연상시켜 어떻게든 빠져나가고 싶다는 충동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손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마치 무언가 단단한 것이 몸을 옥죄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 이제는 이런 일로 저 좀 오라가라 하지 마세요. 벌써 성룡이 다된 아들의 일에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것도 아버지가 드래곤 로드라 봐 드렸지만 이런 인간따위나 보라고 부르면 이젠 절대로 오지 않겠습니다.” 꼼짝도 하지 못하는 하연의 눈에 목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름답다기 보다는 훤칠하고 강한 인상을 주는 얼굴. 그리고 매와 같이 날카로운 눈매, 하연은 그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보는 남자의 얼굴을 두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이상했지만 그것이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강제로 자신의 몸을 속박하고 있는 금색눈동자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저 검은색 눈은 왠지 모를 섬득함이 감돌고 있어 하연은 가늘게 몸을 떨었다. “선물이다. 그래뵈도 고대 신족의 유물로 불러낸 녀석이니 뭔가 쓸모가 있겠지. 네가 그때 그 보석을 달라고 하도 졸라대서 주는 거야. 아깝지만 할 수 없지.” “!!!” “...장난 하시는 겁니까?” 눈동자와 같은 색의 머리카락을 부르르 떨던 블랙드레곤 브레마네스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 미소는 아주 차갑고, 그리고... 오싹한 느낌이었다. “제가 달라고 한건 보석이었지 이런 쓸모없는 쓰레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리고 불러내다니요. 설마.. 그 보석을 아버지의 말도 안 되는 실험재료로 써버린 것은 아니겠지요?” “맞는데? 지금 그 인간의 몸속에 들어있어.” 그의 말은 하연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까의 말들로 미루어 볼 때 저들은 드래곤이 분명했다. 하지만 마족도 만나본 지금 그들이 드래곤이라 해서 별다른 놀라움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그렇구나’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가 경악한 것은 드래곤의 실존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들어있다는 신족의 유물인가 뭔가였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자신을 향해 휙 몸을 돌린 남자가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갑자기 손에 빛을 모으기 시작했다. 검은색의 빛이 모여들어 검모양을 형성하는데는 약간의 시간조차 걸리지 않았고 어느새 그 검은 하연의 심장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피할 겨를도 놀랄 겨를도 없었던 하연은 그저 검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탕! 검이 심장에 닿았다고 생각한 순간 검이 산산조각나며 다시 어둠으로 화해 사라져 버렸다. “무슨짓이십니까? 아버지.” “네가 그렇게 갖고 싶어하던 보석에 금을 내려는데 보고만 있을수는 없어서 말이지. 그애가 죽으며 보석도 깨어져 버리거든. 처음과 같이 꼬여버린 감정을 담은 남자의 질문, 그리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하연의 침묵,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답변이 뒤섞여 무섭게 주위의 공기가 냉각되는 것 같은 오싹한 기운이 검은머리 남자로부터 흘러나왔다. 비꼬는 목소리와는 달리 얼굴만은 무심하던 브레마네스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었고. 눈동자는 살기를 풀풀 날리고 있었다. 조금 정이 무심한 듯 짜증을 내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눈빛으로 누군가를 죽일 수 있을 듯한 날카로운 느낌이었다. 그제야 자신의 설명이 조금 부족했다는 것을 눈치 챈 아르드미한이 입을 열어 변명을 시도했다. “그게 어쩌다 보니 소환식을 할 때 이 녀석의 몸이랑 동화가 되어 버려서, 도저히 분리시킬수가 없더구나. 만져보면 알겠지만 그 애의 몸은 완전히 그 보석의 기운과 동일할꺼야. 그러니까 그 녀석의 몸이 바로 그 보석이나 마찬가지지.” 자신의 아들녀석이었지만 이렇게 인상을 쓸 때는 조금 무서운게 사실이었다. 어미를 닮아 블랙으로 태어난 브래마네스는 폭력적이고 멍청한 다른 블랙일족과는 달리 차분하고 아는 것도 많았지만 -물론 골드보다야 못하다-이렇게 분위기를 잡을때는 그 자신도 움찔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댔다. “....그래서, 지금 저더러 이 녀석을 맡으라는 말입니까? 하필이면 제가 유희중일때요?” 차가운 그의 얼굴에서 두려움을 느낀 탓인지 하연은 한마디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가 그의 마지막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누구 멋대로 나를 넘기고 받겠다는 거야!” 예전처럼 누군가에게 속하고 싶은 마음은 죽어도 없었다. 특히나 저 검은색의 바이욘느같은 놈에게는 더더군다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쓰레기 취급하고 마치 물건처럼 여기는 것은 마계에서 충분할 정도로 받아왔다. 그런데 이제는 드래곤들한테까지 이런 취급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순간 하연의 숨이 턱하니 막혀왔다. “넌 내꺼다.” 하연의 몸엔 손 하나 대지 않고 그녀를 공중으로 들어올린 브레마네스가 한마디한마디 각인시키듯 대답했다. 무시무시한 소유욕을 드러내는 브레마네스의 눈동자에는 상대가 자신과 같은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것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듯 보였고 실제로 그럴수 있다는 것을 증명이나 하듯 몸을 감싼 기운이 점점 조여들어왔다. 고통스러워하는 하연을 바라보던 브레마네스가 힘을 거두자 하연은 바닥으로 떨어져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고 그것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무섭게 번득였다. 원래의 형태는 사라졌지만 분명 그 유물과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으니 상관없었다. 이 인간만 있으면 그 유적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 분명했고 그 안에 잠들어 있을 것이 분명한 수많은 유물은 자신의 소유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때까지는 살려두지. 인간. ’ 스스로에게 결심하듯 중얼거리는 브레마네스였지만 운명은 그와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그는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다. 말을 마친 그가 말없이 이동해 간 곳은 대제국 테아난의 황궁이었다. (흐음.. 과거의 이름들을 그대로 써먹고 있는 저...입니다. 부다 용서를.. 몰래 올리는라 가슴이 두근두근..) *브레마네스는 유희중입니다. (다음편에 나옴) *하연은 습격바로 이전까지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브레마네스의 검은색 머리카락에 레기어스를 찌른 카란을 무의식적으로 기억하고서 두려워 하는 것이지요. *신의 유물과 유적은 다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바이욘느는 마왕의 신하가 됩니다. 오늘은 이정도만.. 5시쯤에 하나 더 올릴께요 "난 누가 접촉해 오는 것이 가장 싫다." 자신을 꼭잡고 부들부들 떠는 하연의 손을 떨궈내며 원래의 흑발과 흑안의 모습에서 금색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브로만 공작으로 변한 브로마네스가 말했다. 무정한 내침에 하연이 비틀거렸다. 왠지 몸이 정상이 아닌듯 아까부터 다리가 후들거렸다. 갑자기 이상한 상황에 무감각한 상태에 있었던 하연이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녀가 처한 상황에 대한 현실감이 점점 명확해졌다. “브로난 공작님!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어서 대전으로 드시지요.” 땅딸맞은 키의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가 그들을 보고 반갑게 달려오다 하연을 보고는 멍하니 입을 벌린채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저러는지 알수 없었던 하연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해서 주위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저.. 그 옆의 분은?” 언제나 혼자서 다니던 브로난 백작의 옆에는 처음 보는 아름다운 소녀가 서 있었다. 황실의 내명부일을 맡아보기도 했던 그이니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라면 질릴 정도로 본 그의 눈에도 소녀는 범상치 않은 아름다움과 나이에 걸맞지 않는 신비로움까지 지니고 있었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질문을 한 것이다. “이름이 뭐냐?” “예?” “하연..인데요.” 브로난 공작이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린것이가 싶어 르우벤은 잠시 눈을 깜빡였지만 이윽고 들려온 영롱한 목소리에 그 질문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을 깨닫고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내 처소로 대려가라. 그리고 이 누더기 같은 옷좀 갈아입혀.” 여인을 처소에 들이는 적이 한번도 없던 브로난이 그렇게 말하고 대전쪽으로 사라지자 그제서야 르우벤은 눈앞에 있는 소녀를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상대의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 심하게 부담감을 느낀 하연은 난감한 상황에 처하면 늘 그러듯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연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얼굴이 약간 상기된 체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충격적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웃을 때 어깨가 흔들리며 허공에 긴 궤적을 그었고 매끈한 금발, 금색 눈동자는 긴 속눈썹에 가리어져 미소만으로도 굉장히 매혹적이었다. “..따라오시지요.” 나이 50이 다되어 손녀처럼 어린 아이를 보고 얼굴을 붉히다니. 하연이 자꾸만 그를 바라볼때마다 그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느라 진땀을 빼야했다 .어디론가 또 사라졌던 브로난 공작이 신원미상의 아름다운 소녀를 데려왔다는 사실은 하루만에 궁 안 모두에게 퍼져 나갔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을 가지각색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공작의 5년전 행실을 기억하고 있는 일부 귀족들은 원래의 성격이 다시 나왔다며 그들의 아내와 딸들을 단속하기에 바빴고, 그 일부는 내심 브로난 공각가와 혼인을 맺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뭐가 이리 시끄럽지?” 여기저기서 소란스럽게 재잘대던 여인들의 말소리가 대번에 멈추고 사방은 적막에 빠졌다. 화려한 홀의 한 가운데에 갑자기 나타난 남자는 신경질이 난다는듯 주위를 한번 노려보고는 근처에 있던 한 남자의 어깨를 붙잡고는 입을 열었다. “무슨일인가?” 자신의 붙잡은 붉은 눈동자의 무식(흉폭이 아니다)한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남자가 두려움을 애써 참으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단순히 겁에 질린 공손함만은 아닌 제국 최고의 검사이자 제국의 지탱하는 공작에 대한 예의였다. “어젯밤에 브로난 공작님이 돌아오셨다 합니다. 그것 때문에 이리 요란한 것입니다.” 슈마이츠는 그 말을 듣자마자 거의 나는듯한 걸음걸이로 궁 안에 있는 브로난의 처소로 향했고 문을 두드리고 문이 조금 열리자마자 온몸으로 문을 밀고 진입해 들어왔다. 그리고 갑자기 들어오는 슈마이츠의 행동에 놀라 그를 제지하려던 르우벤은 그만 바닥으로 널부러지고 말았다. “거긴 안됩니다. 그쪽은 지금..!” 르우벤이 그 경황중에서도 소리쳤지만 슈마이츠에겐 전혀 들리지 않았다. 문 안쪽에는 커다란 거실을 사이에 두고 열려있는 문들이 보였고 그 사이로 보이는 방들에는 사람의 인기척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굳게 닫혀진 저 두 개의 어두운색 원목문 뿐이었다. 슈마이츠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수면이 부족해지면 누구나 짜증을 부리곤 하지만 슈마이츠의 경우는 조금 정도가 심해 누가 잠을 깨우려 들거나 하면 무조건 베개속의 칼부터 휘두르곤 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지난밤의 일로 수면부족 상태인 그는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어젯밤 황제가 중요한 회의를 한다하여 급하게 자신들을 비롯한 신료들을 불러들였는데 브로난만이 끝까지 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없이는 회의를 시작하지 않겠다는 황제의 말에 점심때가 다 되도록 잠 한숨 자지 못하고 있다가 지금에야 나온 것이었다. ‘나를 이렇게 물먹이고서는 여기서 태평하게 잠이나 퍼질러 자?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이 뺀질이 자식아!’ 공작으로서 차마 할 말이 아닌지라 입으로만 웅얼거리던 슈마이츠가 침실의 문을 열어젖히자 커튼을 내렸는지 어두침침한 방안이 모습을 드러냈고 방 중앙에 자리잡은 거대한 침대에 브로난의 것이 분명한 금발머리가 보였다. 평소의 슈마이츠라면 머리카락 아래로 솟아오른 이불아래의 몸이 남자의 것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작다는 것에 의심을 가졌을 테지만 하룻밤을 새고 난 슈마이츠는 그 사실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이 자식 당장 일어나!” “..시끄러워...” 간신히 목욕을 끝마치고 옷까지 갈아입은 후에 잠을 잘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는데 또 누군가가 자신을 귀찮게 하자 하연은 머리끝까지 이불을 끌어올렸다. 생각할 것도 많았고 뭔가 이상한 것도 많았지만 지금 당장 하연에게 절박한 것은 바로 수면이었다. 아무리 화가 났다 하지만 상대는 브로난이었고 평소처럼 함부로 칼을 빼들 수는 없었다. 침대 옆의 끈을 세게 잡아당기자 넓은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열리면서 눈이 부시도록 밝은 햇살이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슈마이츠는 발 아래쪽으로 늘어져 있는 이불을 확 잡아당기고 그 바람에 이불을 누에고치처럼 돌돌말고서 잠을 자던 하연은 그만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연님! 슈마이츠님 이게 무슨 짓이십니꺼?” 끄응거리는 신음성을 내뱉으며 비틀거리는 브로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통쾌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슈마이츠의 뒤로 그제서야 뒤따라 들어온 르우벤이 비명을 지르며 헐레벌떡 하연에게로 다가갔다. ‘하연이라니. 르우벤녀석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거야? 저런 금발을 가진 녀석이 브로난외에 누가 있다고...’ 유난히 호들갑을 떠는 르우벤이었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심했다. 이런일이 몇 번 있었으니 익숙해질 만도 한데 오늘은 왠일인지 신체접촉을 극도로 싫어하는 브로나의 옆에 가서 몸을 무축해주기까지 하고 있었다. ‘어라? 저 녀석이 왠 일로 오늘은 저렇게 얌전하지? 보통때 같은면 저리치워라 하면서 차갑게 쏘아붙였을 텐데.’ 너무나 순순히 상대의 부축을 받는 브로난의 길다란 잠옷사이로 드러난 팔이 이상하게도 가늘어 보였다. 평소에도 여자같은 팔이라고 놀리기는 했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몸집도 조금 많이 작은 것 같고 .. 이상하게 친구의 드러난 팔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기분나쁜 상황에서 슈마이츠는 자신의 이상한 떨림이 순전히 수면부족이라고 애써 납득시키고 있었다. 자신이 남자따위에게 가슴이 두근거릴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고개를 돌린 브로난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슈마이츠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완벽하다고 할 정도의 미모...이 도자기 같은 피부. 유혹적인 색의 입술이 최고의 조화로움으로 태양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고 거기에다 허리까지 내려와 닿는 긴 금발은 성화에서 나오는 천사처럼 반짝반짝 빛이 나고, 몇 가닥 다소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아름다운 어깨의 곡선조차 완벽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하연의 눈에 강한 햇살이 파고들자 눈이 부셔 견딜 수가 없었던 그녀는 몸을 반대쪽으로 획 돌리고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올렸다. 이상하리만큼 매끄러운 자신의 머리카락의 감촉과 생각보다 긴 길이에 조금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유혹적으로 보이는지 알지 못한채 별 생각없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겼다. 갑자기 들어온 빛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이 누워있던 침대의 발머리 부분에 서 있었다.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브로마네스란 드래곤보다도-그러고 보니 폴리모프하면서 자신을 브로난이라고 부르라고 했자-훨씬 큰 체구에 붉은 머리카락이 뭉쳐저 보였다. “누구세요?” 멍하니 하연을 있던 슈마이츠에게는 부드러운 울림을 일으키며 자신이 잘 보이지 않는듯 약간 얼굴을 찡그리는 모습마저도 매혹적이었지만 당황스럽게도 자신의 목소리는 그 질문에 대답을 하고 있지 못했다. “슈마이츠님! 이 무슨 무례한 짓이십니까. 하연님은 브로난님께서 친히 모시고 오신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함부로 하시다니요. 어서 사과드리십시오.” 하연을 부축하면 어디 다친곳은 없나 유심히 살펴보던 르우벤이 투덜거리며 대꾸했다. “아.,예 저.. 죄송합니다.” “!!!” 언제나 콧대높고 자만심에 가득찬 무술밖에 모르는 슈마이츠가 사과를 할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언제나처럼 말이나 던져본 것인데 슈마이츠가 고개를 숙여 더듬거리며 사과를 하자 르우벤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레이디, 어디 다치신 곳은...?” 여자란 전부가 불여우이며 간사하고 사악하여 가까이 할 존재가 아니라고 피력하던 그가 아닌가. 어머니와 여동생을 제외하고는 어떤 여자도 믿을수 없다며 공공연히 여자에 대한 비난을 늘어놓던 그가 자신을 밀치고 하연의 손을 받아들며 레이디란 말을 입에 담는 것을 말한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었다. “괜찮아요. 그냥 잠깐 떨어진 것 뿐인데요.” 게다가.. 저 넋이 빠진 얼굴이라니. 별로 미남이라고 볼수 없는 슈마이츠가 햇볕에 그을린 구리빛 피부를 붉게 물들이는 장면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있었다. 르우벤은 아까 자신이 처음 하연을 보았을때의 자신이 보였던 장면은 완전히 망각하고 혀를 차고 있었다. 그리고 브로난이 저녁이 되어서 궁궐내 자신의 처소로 돌아올 때까지도 슈마이츠는 여전히 거실에 진을 치고 앉아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다가 무섭게 노려보는 브로난의 얼굴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하연의 손을 잡아당겨 입술자국이 남을 정도로 키스하고는 당황하는 하연을 남겨놓고는 사라졌다. 그리고 그날이후 슈마이츠가 연무장이 아닌 황궁에 더 자주 출몰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수 많은 사람들은 분명히 무슨일이 벌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냐며 내심 불안해 했지만 반락도 전쟁도 일어나지 않아 사람들의 의아하게 했다. 귀빈이 오면 그들을 맞이하는 화려한 접견실은 바이욘느의 궁성안에서도 가장 화려하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바닥을 따뜻하게 덮고 있는 붉은 색의 푹신한 양탄자도 벽에 걸려있는 화려한 테피스트리의 화려한 무늬도. 창분을 장식하고 있는 색색의 유리창으로 쏟아들어오는 영롱한 햇살도 싸늘한 분위기를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그런데 레기어스는 어디에 있나?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군.” 간단히 인사를 나누후 자리에 앉은 마왕이 처음으로 거낸 것은 레기어스에 대한 이야기였다. 마음에도 없는 안부를 물어보는 것이었기에 그의 눈은 싸늘하기만 했다. “아마 퍽 마음에 드시는 상태일겁니다.” 마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말은 공손했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지 못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에어컨 다느라 늦었습니다. 제방에도 드디어 에어컨이! 사은품으로 스탠드식 선풍기도 얻었습니다. 한겨울에 에어컨 시험운전해보니.. 왠지 묘한 기분이 드네요. 조금있다 나머지 올릴께요. 정중한 말투였지만 말속에 뼈가 들어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마왕이 아니였다. 그리고 그런 도발에 걸려들마큼 마왕은 녹녹하지 않았다. 노련히 그 대답을 웃음으로 넘겨버린 마왕이 고개를 돌려 피오렌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대는 아직 후계 소식이 없는가? 그대가 샨트가 된지 백여년이 다 되어가는데 어찌하려고 그러는가. 그러다가 바이욘느가 한눈이라도 팔면 어쩌려고. 허허 그러고 보니 레기어스는 여전히 정식으로 혼인을 하지 않겠다던가?” 농담을 가장해 피오렌의 속을 긁어놓는 말을 하는 마왕을 행해 피오렌은 애써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지었고 참는것이라면 절대로 하지 못하던 동생의 놀라운 변신을 목격한 라인슈타인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어머! 모르셨나 보군요. 레기어스는 바이욘느 전하의 소유가 된 인간에게 요즘 크게 관심을 보이더군요. 혼인을 생각하고 있는 것도 같이 보였습니다.” 피오렌은 나름대론 복수를 한 것이었다. 늘 레기어스를 자신이 원하는 종족의 딸과 혼인을 시키려던 그가 하찮은 그것도 한 때 바이욘느의 것이었던 인간에게 푹 빠져 있다는 것은 상당한 충격이 될 것이 분명했다. “인...간? 혹시 성역에서 발견되었던 아이가 아닌가? 내 첸에게 보고를 받은적이 있는것 같은데 그 인간이 여기 있나?” 아니나 다를까 상당히 당황해 하는 마왕의 모습에 통쾌해진 피오렌은 뭐라고 열심히 눈빛을 보내는 바론을 무시하고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있었지요.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말입니다.” “피오렌!” 라인슈타인이 당황하여 피오렌을 막아섰다. 이야기가 점점 험악하게 돌아간다는 느낌을 맏았기 때문이다. 아직 확실한 것은 없었다. 분명 레기어스가 목숨을 잃을뻔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이 마왕이 시킨일이라고 할 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잘못하면 모독죄로 엄한 처벌을 받게 될지도 몰랐다. 라인슈타인의 불길한 예감이 정확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이 갑자기 마왕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피오렌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어제까지라니.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 “아니 왜 그리 분은 내시는 것입니까? 누가 보냈는지는 몰라도 극악무도한 자가 보낸것이 틀림없는 자들이 레기어스와 인간을 공격하였고 인간의 행방은 알 길이 없습니다만 그깟 인간따위야 어찌되든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너무나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피오렌의 모습에 펠리펜은 자신이 성급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이들은 그 인간의 영혼이 시노페인줄 알지 못했다. 그러니 자신의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이 의심을 살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펠리펜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러나 그 인간을 레기어스가 소중히 여긴다 하지 않았는가. 혼인을 생각할 정도라 했으니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그렇지 않은가 바이욘느, 그래 그애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레기어스가 인간과 깊은 관계이라는 것을 듣고도 저렇게 태연한 태도를 보일 마왕이 아니었기에 바이욘느의 얼굴이 굳어졌다. “레기어스라면 제 궁에 있습니다.” “그녀석이야 갈데가 없으니 당연히 이 궁에 있겠지. 내가 묻고 싶은건 인간쪽이네. 내 며느리가 될지도 모르는데 얼굴이라도 한번 보야 하지 않겠나?” 역시 이상했다. 다 죽어가는 레기어스의 상태를 알면서도 저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할 리가 없었기에 바렌은 바이욘느와 눈빛을 교환하고 마왕의 앞으로 나섰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어젯밤 그 인간이 머물고 있던 곳에 괴한이 침입하여 인간은 사라지고 습격당시 유일하게 그곳이 함께 계시던 레기어스 전하는 가운데 심장이 관통되는 중상을 입으시고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고 계시지 못하여 깨어나시기 전에는 뭐라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말을 할 때마다 마왕의 주위로 참기 힘든 중압감이 더해져 갔고 말을 채 마치지 못한 바론은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는 억지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습격당시 흘린 피의 상당부분에 인간의 피가 섞여 있고 그 양이 많은 것으로 보아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아마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바이욘느와의 연결이 끊어지지 않아 살아있는 것은 확실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죽은 것으로 되어 있었기에 바론은 그렇게 대답했고 자신과 바이욘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알고 있었다. “뭐라고?” 인간은 사라졌고 그날 유일하게 그 장면을 목격한 레기어스는 중태라는 것은 그가 깨어나기 전에는 인간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것이 된다는 결론을 내린 마왕은 자신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을 무시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당장 레기어스에게로 간다! 바론 어서 길을 안내해라!” 엉겹결에 방안에 있던 모든 자들은 죽음과 싸우고 있던 레기어스에게 마왕이 직접 찾아가 자신의 힘을 나누어 주며 그를 회복시키는 믿기 어려운 장면을 목격해야 했고 그런 마왕의 태도변화에 놀란 그들은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뜻밖의 상황전개에 할 말을 잃었다. 중앙심장의 부상은 한명이 달라들어 고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는데도 마왕은 얼굴이 창백해질 때까지 무리하며 힘을 쏟아 부었다. 주위의 신하가 만류했으나 결국 레기어스의 심장이 완전히 다 아물어 버릴때까지 힘을 쓴 마왕이 탈진하여 비틀거렸고. 그 와중에도 한가지만은 신신당부하고 엎히다시피 하여 미리 예비된 마왕의 숙소로 돌아갔다. “지금의 마왕의 태도를 어찌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까? 전하.” “스스로 죽이라 명하고서는 저렇게 될 때까지 힘을 쓸 마왕이 아니다. 그대 같으면 적진에서 자신의 힘을 다 써버리는 무모한 짓을 하겠느냐? 아마.. 레기어스를 습격한 자들은 다른 자들일것이다.” “하지만 바이욘느, 첸의 아들과 시종이 어젯밤 사라져 아직 나타나지 않는 것은 어찌 설명할 텐가?”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던 라인슈타인이 예리한 지적을 해오자 바이욘느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잠시 눈치를 살피던 바론이 조심스럽게 자신이 생각한 바를 꺼냈다. “첸이라면.. 아마도 천족과도 깊은 연관이 있는 자니.. 혹...” “무슨소릴 하는건가요! 아무리 첸이라 하나 천족은 우리 마족의 적입니다. 그들의 사주를 받았을 리가 없어요.” “아니야 피오렌. 설마 잊은건 아니겠지 시노페의 어머니인 에네스틴님의 일을.. 어쩌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그리고 내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요즘들어 천계와 마계의 접경기대인 나의 영역에서 심심치 않게 도발을 걸어오고 있다. 비록 하급천족들이 주이기는 하지만 바론의 말도 충분히 고려해볼 필요가 있어.” 라인슈타인의 말은 충분히 타당성이 있긴 하지만 역시 이번 사건을 천족과 연계시켜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일지도 몰랐다. 결국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그렇게 하루가 저물어갔다. “이즈라일님? 여기서 무얼 하시는 것입니까? 날이 춥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차가운 베란다에 서서 밖을 내다보던 이즈라일이라는 천족이 고개를 돌려 소년을 한번 바라보고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무도회장으로 들어왔다. 그가 들어오자 순수한 은을 뽑아 세공한 듯한 머리카락은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에 흔들리고, 따뜻한 은회색 눈은 사람을 매혹시켰다. 소매가 없는 백색의 케이프가 남자치고는 가냘픈 어깨 위에 걸쳐지고, 그 안에 커다란 드레이프를 만들며 허리 아래로 떨어지는 상의도 순결한 흰색이다. 손목에 감긴 넓은 팔찌 역시 백금과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져 움직일 때마다 찬란한 백광을 뿜어냈다. 금방이라도 그림에서 빠져 나온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서, 어느 누구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래, 중간계에서 드래곤 로드와의 일은 잘 끝내셨다지요? 그 괴팍한 생물체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쉽지는 않으셨을텐데, 역시 이즈라일 이십니다.” 천계의 몇 안되는 제1천사 계급인 세라핌 지위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의 압도적인 분위기를 빛내주고 있었고 평소에는 잘 볼수 없었던 그에게 천족들은 앞다투어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어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온화하게 미소짓는 그의 표정이 만들어낸 완벽한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이는 거의 없었고 이런 이즈라일을 바라보는 페리엘이 겉모습에만 현혹된 천족들을 보고 혀를 찼다. “저것들도 천족이라니. 저 탐욕스런 눈빛에 비하면 마족은 차라리 순수하기라도 하지.” 누가 들으면 큰일날 소리를 페리엘은 서슴없이 해대고 있었지만 페리엘의 표정은 전혀 거칠것이 없었다. 마족과의 접촉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페리엘은 저런 가식적인 웃음보다는 오히려 그나마 직설적인 마족의 사고방식이 더 좋았다. "페리엘 형? 마족이 순수하다니 무슨소리야?" 금발의 녹색눈을 한 작은 소년이 궁금하다는 듯 물어왔다. 페리엘은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던 진심을 담은 미소로 마르셀을 안아 올렸다. 저기 있는 이즈라엘과는 10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아직도 소년의 모습인 마르셀은 정신게계도 여전히 성장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아. 그냥 해본 말이야. 우리 마르셀, 피곤하지 않니? 이즈라엘 형이랑 같이 드래곤 로드 만나고 온 이야기 해 줄까?" "와아~ 정말? 이즈라일 형은 아무리 졸라도 이야기를 안해주는데.. 난 그래서 페리엘 형이 좋아. 하지만.. 왠지 이즈라일 형은 페리엘 형 이야기만 하면 얼굴을 찡그려.." 이즈라일이 마르셀 앞에서 얼굴을 찡그릴 정도라니.. 나 완전히 미움받고 있군.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는건가.. 페리엘은 억지로 쾌할한 표정을 하고 마르셀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 "이즈라일 형은 마르셀을 너무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 이즈라엘 형은 꽤 욕심장이라서 마르셀이 자기랑 있을때는 자기만 봐줬으면 해서 그래. 그러니까 앞으로는 이즈라일 형이랑 이야기 할때는 내 이름을 말하지 마. 알았지? "응. 할수없지. 이즈라일 형이 화나면 무섭거든. 앗! 그러고 보니 나 방금 그거 무슨 뜻인지 알아. 얼마전에 어떤 여자가 말하는거 들었어!" "뭔데?" "그게.. 뭐더라.. 아 생각났다. 바로 '질투'라는 거지?" 화려한 무도회장의 한족 구석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번져나갔고 그것이 페리엘의 웃음 소리라는 것을 눈치챈 몇몇천족들이 수군거렸지만 곧 음악소리와 말소리에 묻혀 사라지고 말았다. 다사다난했던 하루가 지나고 잠자리에 들기전 서류를 한번 훑어보던 바이욘느가 열려있는 창가로 다가가 밥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한점 없는 어두운 밤하늘은 언제나처럼 반짝이는 별들로 인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데리고 간거지? 분명 그때의 고통은 나도 참기 힘든 것이었는데. 인간이 그것을 견디어 내기는 거의 불가능 할텐데 이렇게 편안한 느낌이 들다니. 게다가 왠지 모르게 하연의 상태에 약간의 변화가 온 것도 같고...’ 더 이상 하연을 인간이라고 부르지 않은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혼자 있을때면 하연을 인간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 아이 하연은.. 왠지 시노페랑 비슷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지. 행동도 비슷했고.. 레기어스랑 친한 것도.. 그래서 내가 그만 그때 억지로...!’ 갑자기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물에젖은 편지의 글씨처럼 희미하게 번져버린 장면에 바이욘느는 굳어버렸다. ‘질투,,? 어째서 그런 감정이... 어제는 레기어스와 하연을 만난적도 없는데 갑자기 왜 이런 기억이 떠오르는 거지?’ 다렌이 새로 만들어준 기억들에는 레기어스와 하연이 가까이 지낸다는 내용의 기억이 심어져 있었지만 흩어져 있는 기억의 파편이 되살아나는 것은 어쩔수 없었고 갑자기 떠오른 영상에 바이욘느의 얼굴이 굳어졌다. ‘설마.. 기억이.. 하지만 그런일을 할 수 있는 자는....설마 다렌이 그대 나타났던 것인가?’ 그러고 보니 레기어스가 다쳐서 들어오자 기온이 자신을 찾아와 그날 레기어스님을 찾으시더니 혹시 무슨 잘못이라도 해서 이렇게 한 거냐고 항의하고 간일이 생각났다. 그냥 억지를 부리는 줄만 알았는데.. 아무리 다렌이라고 해도 이 궁궐안의 모든 사람의 기억을 조작할 수는 없었다. 바이욘느가 침대옆의 줄을 잡아당기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들어왔다. “각 궁의 시녀장들을 전부 이리로 불러라.” 궁내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이들은 그들이 모두 알고 있으니 그들의 말을 조합해 본다면 그날 무슨일이 일어났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였다. 괭이친구,이쁜영이 님 항상 리플 감사드리고 있어요^^ 오타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전개의 어설픔은.. 이번이 2번째 작품이라..이렇습니다. (첫작은 44회밖에..완결도 못하고) 은색의마수 : 밥하늘->밤하늘 (03.12 17:48) 이쁜영이 : 아~ 젬땅 건필이용 (03.04 12:28) 괭이친구 : 잘 보고있습니다. 건필이요~! (03.04 01:20) 황궁을 떠나 마차를 타고 한참 갈줄 알았는데 의외로 마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추어섰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공작의 저택은 영지에 있는 것과 이곳 수도에 있는것 그리고 여기저기에 투기(?) 목적과 휴양 과시용으로 사놓은 것등 여러개가 있었다. 보통 주인이 도착하면 잽싸게 나타나는 집사나 아니면 블랙 앤 화이트의 옷을 입고 우르르 도열해 서 있는 시종이나 시녀를 기대했건만 그 예상은 완전히 벗어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고 브레마네스는 자기손으로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그러고 보니.. 공작의 저택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작았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뭐! 뭐야?” 무언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하연의 목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하연의 비명에 브로마네스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칼을 치워. 롤프. 내 소유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되.” 브로마네스는 홀으로 들어서며 말하고 있었다. 하연에게 검을 들이댄 남자는 잠시 브로마네스을 바라보더니 검을 뽑았던 것처럼 재빠른 속도로 검을 거두어 들였다. 그가 들어가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하연은 그 자를 쏘아보면서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브로마네스에게로 달려갔다. 그자의 잿빛 눈매는 매서웠다. 그의 눈과 끝까지 경쟁하며 커다란 홀에 들어섰을 때, 문이 닫혔다. "……." 하연은 고개를 돌려 브로마네스을 보았다. "롤프는 인간이 아니야. 내 허락없이 이곳에 들어가고 나가는 자는 처리하라는 명령받은대로 했을뿐이다." 정말 죽여버릴 것 같았던 그 남자의 검에 목을 맞댔던 하연의 원망이 섞인 눈을 마주한 브레마네스는 차가운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하연은 그런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지만 쓸모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닿고 고개를 돌렸다. 이 녀석의 심장은 돌로 만들어진게 틀림없어. 그러고 보니 드래곤들의 심장은 드래곤 하트라는 돌덩어리였던가?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한 하연은 잠시 후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그래, 이런 것을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이 녀석이 나를 어떻게 할지나 알아야 되.' 하연은 그렇게 생각 한 후에 눈을 똑바로 뜨고 사방을 살펴보았다. 그들이 들어선 방은 놀라울 정도로 컸다. 어느정도였나 하면 방이 아니라 무도회장이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였다.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방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방안은 무척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엄청나게 큰 바닥을 그대로 덮어주고 있는 고풍스러운 무늬의 밝은색 카펫과 그 위에 놓여진 무수한 의자들, 화려하게 조각된 탁자를 비롯해서 사방에 걸려있는 초상화들이 방안을 가득메우고 있었다. “브레마네스?” 탁하고 쉰듯한 목소리가 바로 하연의 눈앞에서 들려왔다. 하연은 그 목소리를 듣고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가 움찔하고 놀라고 말았다. 이 방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방안에 선 사람은 험악하게 생긴 남자 하나와 소녀 하나였다. 브레마네스라고 이름을 부른 것은 소녀인 듯 싶었는데 하연이 놀란 것은 바로 그 소녀 때문이었다. '… 설마 이것도 드래곤이 폴리모프한건가?' 정말로 절세미녀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운 얼굴을 소녀가 소유했기 때문이었다. 하연은 홀린 듯 눈앞에 있는 그 소녀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사람이 저렇게 생길 수가 있을까, 인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소녀는 아름다웠다. 소녀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짙은, 끝이 없을 것 같이 깊은 보랏빛이었다. 머리카락 색은 은은한 은빛이 감도는 보라색이었는데, 신비하다 못해 두렵다는 느낌마저 드는 그런 색이었다. 조각 같은 얼굴 생김생김, 섬세한 얼굴선. 하연은 탄성이 튀어나오려는 것은 참기 위해 애써야 했다. '이런 얼굴도 세상에는 있었구나, 도대체 부모님이 어떻게 생기면 이런 애가 나오는거지?.' "브레마네스. 고대신의 유물은 받아왔어?" 하연이 연신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감탄을 하고 있는데, 아름다운 소녀의 앞에 서 있던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브레마네스를 바라보며 갑작스럽게 물어왔다. 하연은 자기의 몸속에 녹아들었다는 보석이야기가 나오자 정신없이 훔쳐보던 시선을 거두곤 몸을 움찔했다. 브레마네스의 미간이 잠시 좁혀졌다. "…이거다. 아버지가 멋대로 실험을 하는 바람에.." 브레마네스는 짧게 말을 던지더니 자신에게 질문을 한 남자에게 천천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실험을 하다가 하연을 불러온 이야기며, 그 때문에 그 유물이 하연의 몸속에 동화되어 버렸다는 이야기를 그는 무척 간단하게 했다. 그의 말투가 너무 딱딱해서 듣기에 거북했다는 것만 빼면, 정말이지 완벽한 객관성을 유지하는 대답이었다. "정말이야?" 브레마네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척 엄숙하면서도 도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연은 깜짝 놀랐다. 그 말을 한 것은 험상궂은 남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엄숙하고 도도한 목소리를 낸 것은 하연이 절대 이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리라고 믿은 미소녀였다. 아름답기 그지 없는 소녀의 목소리에서는 아름다운 미성이 아니라..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티엔, 내가 그 괴상한 취미 좀 버리라고 그랬잖아. 애가 놀란것 안보여? 아가씨 미안해요, 놀라셨죠?” “.너처럼 말도 안되는 무식한 근육질보다는 월씬 낫다고. 힘도 없는 주제에 근육만 우락부락하게 보이게 단련한 너보다는 나아.” “남자주제에 여자처럼 바꾸어 다니는 비정상적 사고방식을 가진 너보다는 나아. 이왕에 바꿀꺼면 목소리도 완벽하게 바꾸어야 하는거 아냐?” 처음에 무섭게 생겼다고 생각한 남자...(왠지 그것도 의심이 들기 시작하지만)와 초절정 미소녀-아니 미소년이다-가 티격태격대는 모습을 바라보던 하연은 문득 이상하다고 느꼈다. 왠지 모르지만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생긴것도 다르고.. 말하는 것도 완전히 다른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저러나 그럼 저 미모가 다 만들어 낸 것인가 하는 생각에 하연은 문득 보라빛 눈동자의 미소녀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는 별의 별 생각이 다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브로마네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프란의 그 어떤 생각도 뛰어 넘어 버리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내 친구들이지. 시엔, 티엔 그만해라." 원래모습으로 돌아온 브래마네스가 친구라고 칭하는 자라면 설마 이 눈앞에 있는 것들도 모두 드래곤인건가. 하지만.. “누가 네놈 같이 꼬리 달린 놈 따위의 친구라는거야?." “티엔 제발 그 모습을 하고 있을때는 좀 조신하게 행동할 수 없는 거냐? 아니면 원래대로 모습을 바꾸던가. 둘 중 하나만 하라고.” 드래곤을 감히 동물이라고 칭한 티엔의 말에도 브로마네스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절부절 못하는 것은 하연뿐이어서 하연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티엔과 시엔도.. 드래곤인 건가요?” 갑지기 소리가 뚝 끊기고 열심히 떠들어대던 그들이 고개를 돌려 이상하다는 듯이 하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신들을 모르는 인간이 있다는 말은 처음인데다가 자신들의 눈빛을 받고도 정말 모른다는 듯이 약간은 겁에 질린 얼굴로 서있는 하연을 본 그들은 약간 자존심이 상한듯 인상을 찡그렸다. “시엔과 티엔은 드래곤이 아니지만 내 친구들이다. 너도 인간이면서 그들을 모르다니 이상하군. 드래곤들은 이렇게 품위없게 말하지는 않아. 그리고 오늘 낮에 네가 만났던 슈마이츠가 진짜 드래곤이다.” 충격적인 말을 사람을 무시하고 드래곤들을 칭찬하며 말한 브레마네스는 무슨 바보라도 보는듯한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기분이 나빠진 하연이 맞받아 소리쳤다. “내가 모르는게 당연하잖아. 난 갑자기 그 아르드미한인지 뭔지 하는 골드드래곤이 날 납치하기전까지만 해도 마계에 있었단 말이야. 난 이곳에 황실이라는게 있는줄도 몰랐다고. 게다가 마족에 이어서 이제는 드래곤까지 사람을 바보취급하다니. 도대체 이놈의 세계는 뭐가 이모양이지?” “마계?” 여전히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로 티엔이 자신의 은보라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그들 사이로 뭐라고 설명하기도 힘든, 짙은 검은색의 정적이 맴돌았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무엇인가가 티엔의 유리알 같은 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티엔의 눈빛이 위험한 빛을 내는 순간 시엔이 소리쳤다. “업드려!” [넌 왜 그렇게 마족들을 싫어하는 거냐?] 아마도 처음으로 티엔을 만났을 그 때라고 기억한다. 그 당시, 마법을 배우는 같은 또래 중 유난히도 유별난 녀석이 하나 있었다. 같은 스승 밑에서 시엔과 함께 마법을 배웠던 꼬마였는데, 시엔은 그 당시 그의 이름을 [헤르미디안]이라고 기억한다. [마족은 악한 녀석들이니까.] 자신의 질문에 한참만에 교과서적인 대답을 내어놓고는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던 티에의 모습에 더 이상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평소같았으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이것저것 질문을 더 했겠지만 그냥 고개만 돌리고 있는데도 말을 걸어서는 안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 도저히 물어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얼마뒤 스승님을 만나 그렇게 무뚝뚝한 녀석은 처음 보았다고 시엔이 툴툴대듯 한마디 했을 때, 스승님은 난감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헤르미디안이 마족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단다. 마족때문에 원래 황제의 아들이었던 자신이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니까.] [뭐……?] 시엔은 그 뜻밖의 말에 살짝 입술을 벌리고 반문했다. 황족이라니. 하지만 황제라니. 황제라고 불리는 자는 테아난 제국의 황제밖에 없잖아. 하지만 이 나이의 황자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혹시 사람이 안오는 이 숲속에 숨어사는 것도 황자를 납치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그런건가? 그럼 스승님의 정체는? [이녀석! 스승을 뭘로 보는거냐. 갑자기 내가 인신매매범이라고 보이는거냐?]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칼세온이 시엔을 들고 있던 지팡이로 머리를 쳤지만 시엔의 의심의 눈동자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그에게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때 파멸의 흉성이 나타난 때를 기억하느냐? 헤르미디안은 그 별의 운명을 타고난 아이였다. 만약 여자아이였더라면... 그 운을 피해갈 수도 있었을 테지만. 불행히도 태어난 것은 남자아이였다.] 100년에 한번 흉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나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 운을 타고난 아이는 에일지브신단에 의해 가혹하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들의 교리에 의하면 그 별은 중간계의 파멸을 가져올 힘을 얻게 된다고 하였고 그들의 임무는 이러한 악의 씨를 제거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공부시간만 되면 졸던 시엔은 이것을 기억할리가 없었고 그저 그런가보다 하는 표정으로 얌전히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 그 애의 어미였던 내 동생은 자신을 아이를 내어줄 수 없다 호소했고. 나는 결국 그녀의 소원대로 마족을 불러내야 했지, 그리고 그애의 어미는 자신의 영혼을 담보로 그 아이를 여자로 만들었고 헤르미디안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시엔의 눈이 둥그래 졌다. 하지만.. 지금은 남자인데? [하지만.. 처음부터 마족의 힘을 빌린 것이 문제가 됬지. 아이가 커 가면서 파멸의 흉성의 기운이 강해지면서 필요로 하게 된 마족의 힘이 많아지게 되었단다. 결국 더 이상 마족의 기운을 숨길 수 없게 되었고 그 사실은 결국 신관에게 발각되어 황제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지. 그리고.. 마족과 계약을 맺었다하여 내 동생은 잔인하게 처형되고 나는 간신히 이 아이만 데리고 도망칠 수 있었단다.] [그.. 그럼 왜 다시 남자가 된거지요? 마족의 계약은 절대적인 거라면서요.] 스승님이 씁쓸하게 허공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마족과 계약한 자는 에일지브신단에 의해 영혼이 완전히 소멸되지. 대가를 받지 못한 마족의 계약은 자동으로 해지되었고, 다시 원래의 몸으로 돌아온 거란다.] 무언가 이상했다. 그렇다면 헤르미디안이 미워해야 하는 것은 에일지브신단이 아닌가 말이다. 어째서 단지 계약을 받아들이기만 했던 마족을 미워하는거지? 시엔의 의문을 눈치챈 스승은 그런 시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족의 힘이 아니었으면 자신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고.. 그러면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차가워 보여도 원래는 심성이 고운 아이였으니 어느날 모든 사람들이 자기 때문에 죽어야 했던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던 거겠지.] 지금은 언제나 누군가를 찌를 것처럼 날이 선 날카로운 검처럼 표독하게 굴고 감정이라곤 비치지 않는 매서운 눈을 했지만 불행히도 예전의 티엔은 지금처럼 굳세고 단단한 녀석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지금은 그대처럼 말없고 음침하다는 것과는 거리가 먼 괴팍함을 보이고 있었고 농담도 잘하고 장난도 잘 치지만 지금처럼 마족과 관련된 자만 만나면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폭주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 때의 티엔은 정말로 무서워서 자신조차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전에 한번 마족인척 기운을 썼다가 거의 죽을뻔한 그 땐 정말로 억울했다고, 시엔은 생각했다. 한번 머리뚜껑이 열리면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고 유일하게 그런 그를 억제할 수 있는 녀석은 눈앞의 브로마네스란 드래곤 뿐이었다. “마계?” 방금까지만 해도 평이한 어조로 말하던 티엔의 목소리가 나지막해지며 앞으로의 상황을 예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브로마네스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티엔의 허리에 매달려 있던 레이피어가 빠르게 빠져나오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브로마네스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아까 저거 신의 유물이라고 하지 않았나? 어떻게 저렇게 태연한 거야? 시엔은 이를 악물고 이미 하연의 목을 향하고 있는 레이피어를 보며 늦은 것이 분명했지만 뒤늦게 소리쳤다. “엎드려!” 시엔에게는 저 보석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아니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티엔을 위해서 저것이 꼭 있어야만 했기에 시엔은 그렇게 외쳤다. 인간이야 죽어도 상관없지만 보석이 부숴지는 것을 보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이쁜영이님 고쳤어요^^ 그리고 다른 편에 있는 오타 지적해 주신분들도 감사드려요. (그런데.. 왜 고치려고 하면, 잘 안보이는 건지.. -_-a 못본척 한거 아니예요^^::) 넓은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이곳의 주인이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이나 하듯 화려하기만 한 방에는 주인의 애정이 담긴 것이라고는 하나 없이 그저 보여주기 위해 잘 장식된 듯한 그런 공기가 감돌았다. “하아.. 아직도 아무도 안 오네..” 하연이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이 방에 들어온지 벌써 하룻밤 하고도 반나절이 지났지만 이상하게도 그 누구도 이곳에 발을 들여놓는 이가 없었다. ‘혹시 그 검정 드래곤이 거짓말을 한거 아니야?’ 의심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분명 브레마네스는 하연을 황제의 황비가 머무르는 곳에 데려다 준다고 하였고 몇 가지 주의해야할 사항을 알려주고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가버렸다. 분명 책 같은 데서는 아침 일찍 시녀들이 시중을 들러 찾아오곤 한다던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 시간이 되도록 아무도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있다가는 분명 굶어죽고 말거라는 생각에 하연은 더 이상 자는척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나가보아야 겠다고 결심했다. 자신이 누워있는 침대를 바라본 하연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지나치리만큼 큰 침대.. 가로는 자신의 키의 3배는 되고 길이도4미터정도나 되는 거대한-그걸로도 부족하지만-침대의 중간에 자신은 누워있는 것이었다. ‘거짓말 안하고 20명은 자겠다..’ 그정도로 큰 침대였다. 침대가 너무 푹신푹신해서 도저리 걷기가 어려웠던 하연은 침대위를 비틀거리며 기어가서는 거의 끝부분에 도달했을 때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그 순간 자신이 밟고 있던 옷자락이 앞으로 당겨지면서 그만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아얏!” 이곳에 오기전 브레마네스가 던져준 옷은 속이 거의 비칠락 말락하는 화려한 레이스로 장식된 비단으로 된 잠옷이었다. 원래 살던 곳에서는 긴 치마를 입을일이 거의 없었고 마계에서는 남자취급을 받아 거의 바지와 비슷한 종류의 옷만을 입어왔던 하연이 이런 옷을 입고는 항상 양손으로 치맛자락을 걷어올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리 없었다, 바닥에 양탄자가 깔려있기는 했지만 일어나다 미끄러진 곳이 하필이면 침대모서리여서 하연은 그만 몸의 아랫부분은 침대에 그리고 나머지 반쪽은 바닥에 기댄 이상야릇한 자세가 되고 말았지만 허리를 비끗 했는지 도통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누군가라도 도와주지 않으면 일어설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누구냐!” 누군가 방안의 소동을 눈치챘는지 방문을 박차고 들어왔고 하연의 시야에 들어온 그 남자는 파란 눈을 크게 뜨고서는 한참이나 입을 뻐끔거렸고 그 반대로 하연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도와줄 것으로 기대한 하연의 기대와는 달리 그남자는 하연을 보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나가려 하였고 이런 남자의 행동에 당황한 것은 하연이였다. "잠..잠깐만요!" “황.. 황후마마가!!!!!!!!!!!!!!!" 하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경악한 얼굴로 방을 빠져나가는 남자의 말에 하연은 새삼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그래.. 난 이제부터 황후마마지... 그 사악한 브로마네스 때문에 말이야. 하연은 어제 저녁에 만난 티엔과 시엔을 생각하며 이를 뿌드득 갈았지만 지금 하연의 포즈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티엔의 칼이 하연의 목에 꼿힌다고 생각한순간 갑자기 환한 금빛이 하연을 감쌌다. 순간 그 빛에 눈이 부신 시엔은 고개를 돌리고 빛이 사라진후에야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눈앞에 펼처져 있을 참상을 예상하며 시엔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눈에 어느새 제정신을 차린듯 멍하니 서있는 티엔과 그 옆에 서있는 브로마네스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향한 바닥에는.. “....티엔...이.... 두명?”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은 옷은 다르지만 분명 티엔이었다. 저 희귀한 은보라빛 머리. 섬세한 얼굴선과 결정적으로 티엔의 팔목에만 있는 저 보랏빛 문신마저 똑같았다. “고대 신족의 유물인 그 황금색의 보석에는 다른 용도도 있더군. 이게 바로 그 증거야.” 원래 티엔이 그 보석을 필요로 했던 것은 그것이 바로 엄청난 가치가 있다는 고대신족의 유적에 들어갈 수 있는 두개의 조건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티엔이 황제가 되는데 도와주는 조건으로 이 블랙 드래곤은 그곳에 잠들어 있을 유물을 요구했고 오로지 황제만이 열수 있는 그 문을 열기위해서는 반드시 황제와 그 유물이 필요했다. 티엔이 황제가 되는 것은 드래곤으로서 직접적으로 인간세계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불문율때문에 조금 시간이 걸릴 것이었지만 다행히 행방이 묘연했던 유물은 브로마네스의 아버지인 아르드미한이 가지고 있어 다행으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그 유물에 이러한 능력이 있을 줄이야.. “하.. 하지만 지금 분명 티엔의 칼이 가슴에 닿는 것을 보았는데. 어떻게 상처하나 없지? 아니 그리고 이정도의 완벽한 변용이라니. 이건 완전히 본인과 똑같은 모습에다가.. 기운까지 같잖아? 이런건 드래곤들이나 하는 폴리모프라 해도 불가능한데.. ” 어지간해서는 당황하지 않던 티엔의 표정을 감상하듯 바라보던 브로마네스가 쓰러진 하연을 일으켜 세우더니 뭐라고 중얼거리고는 기운을 손에 모아 완전히 티엔과 똑같은 하연의 가슴에 손을 대자 순식간에 그 모습은 다시 하연의 원래 모습으로 바뀌었다. “내 모습으로도 바꿀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옷이 맞지 않아서 말이야. 이 모습도 원래의 모습은 아니지. 아마 이것을 불러냈을 때의 아버지의 기운에 영향을 받아 이런 모습으로 변한 것 같다. 아버지의 일족 중에서도 이런 색은 극희 희귀한데 나타났거든. 그렇다고 인간들에게는 절대 없는 색이니..그때 눈치를 챘지.” “하지만.. 어떻게? 무슨 원리로 이렇게 되는거야?” “잘은 모르겠지만 어떤 자의 기운이 직격으로 심장을 향하게 되면 상대와 완전히 같은 모습으로 변하게 되는 것 같다. 방금전의 공격에도 티엔의 검기가 담겨 있었으니.. 아마 그 영행 때문에 변한 거겠지.” “그럼. 황제로도 변할 수 있는건가?” 아무말없이 서있던 티엔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시엔은 그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고는 하얗게 질려버렸다. 티엔은 더 이상 말이 없었고 그런 그를 바라보던 브로마네스가 약간은 아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불행히도 이 녀석 몸에 있는 마족의 기운 때문에 천족과 관련이 있는 자의 모습으로는 변할 수 없더군. 오늘 황제의 기운을 잠시 받아다가 증폭시켜 사용해 보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마족이라는 말에 또다시 티엔의 눈이 가늘어졌지만 아까처럼 폭주할 기미는 모이지 않자 시엔은 안도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 애는 마족인가?” “아니. 그렇지는 않지만.. 아마도 마족의 소유인 것은 확실해.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강한 연결이 형성되어 있더군. 게다가...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강한 마족의 기운도 들어있고..” “연결과 마족의 힘이 들어있다면 마족이나 마찬가지잖아. 그럼 이런 걸 어떻게 쓴단 말이야. 정작 황궁으로 들여보내지도 못할텐데.” 어느새 평소처럼 빈정대는 목소리로 돌아온 티엔의 태도에 브로마네스는 못마땅한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의 약속만 아니면 이런 인간들 일을 도와줄 필요도 없었는데 고대신족의 유물이라는 말에 그만 훌러덩 넘어가 버려 이런 골치덩어리들의 뒤를 바주어야 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잊었는가 본데.. 난 드래곤이다. 이정도 힘이야 충분히 감출 수 있어. 약간의 제약은 따르겠지만 계획을 수행하는데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게다가... 황비가 갑자기 쓰러진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수야 없지.” “그럼, 설마 이 아이를? 하지만 황제는 황비를 증오한다고 하던데, 차라리 황비의 아버지로 바꾸는 편이 낫지 않을까? 오히려 실권이라면 그쪽이 더..” 테아난 제국의 황제인 하티무르 2세는 황비인 하이네인의 아버지인 슈피르에 의해 억지로 혼인을 해야 했고 황비와의 잠자리 문제까지 간섭한다고 했다. 게다가 요즘에는 어떤 이유인지 난잡한 행동을 보이는 황비와는 공식석상에서 말한마디 하지 않아 그들의 불화설은 더욱 확실해 지고 있었기에 시엔은 그리 말한 것이었다. “내 생각에는 브로마네스의 말이 옳아.” 잠자코 있던 티엔이 평소처럼 꼬리달린 짐승이란 말 대신에 브로마네스라고 부르며 그의 말에 동의하는듯 대답했다. “그대의 말을 들어보니 겉모습만 바뀌었을뿐 성격이나 지혜 몸가짐등은 바뀌지 않는 모양이군.” 브로마네스는 자신의 짦은 말에서 그런것을 유추해낸 티엔을 약간 놀랐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비록 행동이 건방지기는 했지만 이 인간의 두뇌회전은 가끔 상상을 초월했다. “그렇다면 엄청난 업무를 감당해야 하는 공작의 지위를 수행해내기는 힘들고. 그렇다고 해서 다른 2명의 공작으로 변하기에는 둘다 드래곤이니 힘들겠지. 나머지 실세들은 전부 슈피르 공작보다 세가 약하니 별 도움이 되지 않을테고 말이야.” 그나마 세가 강한 반슈피르파인 후작이 있지만 아직은 약했다. 많은 백작이나 다른 후작들의 지지를 받는 것은 분명하지만 슈피르와 대적하기에는 불안한 요소가 너무 많았고 그 역할을 이 소녀가 해 내지 못할 것은 자명했다. “그렇다면 슈피르 공작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자. 황제의 편이 아닌자. 그리고 그와 자주 만날 일도 없으면서 황제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자는 황비이니 최선의 선택이군, 게다가 이 아이가 어떤 헤괴한 일을 저질러도 그동안 워낙 스캔들이 많이 터진터이니 의심도 받지 않을테고 말이야.” 게다가 황제가 보낸것이 틀림없는 자객의 칼에 스쳐 그 독으로 생사가 왔다갔다 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바꿔친다면 아무도 모를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후의 변한 행동은 그때의 영향이라고 둘러대면 되니 그야말로 완벽한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럼 동의 하는 건가?” 이번 계획은 분명 성공할 자신이 있었던터라 브로마네스는 약간 긴장하듯 물었다. “대신.. 저 기운은 확실히 숨겨. 젠장 마족의 기운이 스며든 자라니.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내손으로 숨통을 끊어놨을텐데.” 티엔이 하연을 노려보듯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제서야 브로마네스의 품에 안겨있던 하연은 조금씩 눈꺼풀을 떨면서 깨어나고 있었다. “깨어났는가 보군. 그럼 오늘밤 중으로 이 아이를 황궁으로 보내지.” 무슨일이 일어났나 잠시 멍해 있던 하연의 앞에서 티엔은 쳐다도 보기 싫다는 얼굴로, 그리고 시엔은 왠지 하연을 향해 안타까운 시선을 남기고서는 하연이 들어온 문을 통해서 나가 버렸다, 텅 빈 방안에 브로마네스와 하연만 남게 되자 왠지 모르게 찬바람이 부는듯 해서 하연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그래서 지금 하연은 황궁에 와 있는 것이다. 그것도.. 테아난 제국의 황제인 하티무르2세의 황비인 하이네인으로서. 졸지에 처녀가 유부녀가 되어버렸지만 어쨌거나 다행인 것은 황제가 황비를 잘 찾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네니님! 황비마마께서 깨어나셨습니다.!!" 그가 나간지 단 몇분만에 하연이 깨어난 이 방으로 사람들이 몰려왔다. 고급스러운... 하지만 입기에는 심하게 부담스런운 옷을 차려입은 중년부인이 가장 먼저 달려와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뒤따라 들어오는 시녀로 보이는 여인들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황비님이 정신을 차리셨다! 어저 황제폐하와 슈피르 공작님을 모셔오너라!" '아. 아니. 이게 아닌데..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됬다고!!' 그러고 보니 이 모습은 분명 황비의 모습. 자신이 깨어났다는 사실에 황제와 아버지가 달려올 것이라는 것은 이미 예상하고있었지만.. 마음으로만 생각했던 것과 실제로 닥치는 것에는 크나큰 차이가 존재했다. 오늘은 이제 마지막입니다^^;; 어제는 억지로 쓰느라.. 죽는줄 알았는데.. 오늘은 갑자기 막 떠오르길레 설정만 한가득 만들어 놨어요.. 묘사랑,, 감정표현이 조금 걱정되지만.. 당분가 마계는 가끔식만 나오게 됩니다. 주인공은 역시. 하연이니까요. 그리고.. 시노페가 된건 아니예요. 몸은 여전히 마계에 있고 봉인은 아직 하나도 께지지 않았답니다. 하연은 유물이 부르는 힘에 의해서 오게 된거구요. 이건 정말 우연입니다. (다렌이 모의한 것도 아니구요.) 에일지브 신단은 천족과 관련이 있는 신단입니다. 그 리고 예언은 고대신족의 예언과 관계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다렌의 입김이 작용했지만요.) 화려한 방안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슈피르 공작이 맹렬히 노려보는 상대는 태연하기만 했고 그것은 그의 화를 더욱 북돋우고 있었다. “..숙부님. 증거라도 가지고 그런 말씀을 하신다면 모르겠지만, 그 말씀은 너무하시군요. 제가 명색이 황비인 하이네인을 그리하라 명하였을 리가 있습니까.” 그럼 삼엄하기가 하늘을 찌른다는 이 황궁 내부 깊숙한 곳에 있는 황비의 처소에 누구의 눈에 띄지도 않고 자시의 딸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자신이 황궁에 심어놓은 자들의 말에 의하면 그날 밤 황제궁을 빠져나간 자는 아무도 없었기에 그는 뻔뻔스런 황제의 얼굴을 죽일 듯이 노려볼 수 밖에 없었다. “조카는 그 아이가 불쌍하지도 않은가!” 노성을 날리는 공작의 모습에 실소하며 황제가 싸늘하게 미소지었다. 불쌍하다니. 정작 불쌍한 처지는 자신이 아닌가? 황위에 오를 생각도 없었던 5황자인 자신을 억지로 황제로 만들고는 외모만 아름다운 뱀같은 여인과 결혼을 강요당한 데다 허울만 황제인 자신이다. 동정을 받아야 한다면 오히려 자신쪽이 더 올바를 터였다. “그러기에 이리 마음이 아파서 그녀를 보러가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녀만 보면 가슴이 찟어지는 듯 한데 그런 매몰찬 말씀을 하시다니요. 아무리 요즈음 저희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나 딴 상대를 본 것은 제가 아닙니다. 그래도 충실히 의무를 지키며 그녀의 침소를 찾아가곤 했는데 제가 그녀를 불쌍히 여기지 않을 리가 있습니까.” 황제는 속으로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말에 일그러지는 표정의 공작을 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상당한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었다. 숙부로서는 할 말이 없을 터였다. 요 근래 황비가 공공연하게 남자들과의 밀회를 가졌다는 것을 그녀의 아버지인 슈피르 공작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황비의 부정(不貞)을 감싸준 것은 오히려 황제인 자신이었다. 황제의 말에 기운이 빠져버린 것은 공작이었다. 딸아이가 남자들을 끌어들였다 하나 그것이 어떻게든 황제의 관심을 끌어보려는 처절한 노력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황비가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는 태도로 일관하였고 그것은 하이네인의 평판을 더욱 악화시키기만 하였다. ‘어째서 저런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이냐. 하이네인. 네가 원했더라면 그것이 설사 천민이라 해도 들어주었을 텐데..’ 황제가 되지 못한 황자는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도 슈피르 공작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자신도 황제의 즉위와 더불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가는 운명을 맞이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자신의 딸이 사랑하는 이 남자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테아난의 황제라면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무술실력도 형편없고 온종일 서가에 앉아 책만 읽고 시나 쓰던 아무런 세력도 없는 이 자를 황제로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하이네인이 사랑하는 자를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잔인했던 초대 황제의 환생이라고도 불리 우는 가장 유력한 황제 후보인 첫째 황자가 그를 살려 둘리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자신의 조카뻘이 되기도 하는 이 자는 오히려 자신을 구해주고 황위에 올린 자신과 하이네인을 무슨 벌레보듯 대하였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태도는 자신이 그동안 익혀왔던 황실예법이 무색하리 만큼 정중하고 예의발랐지만 그 눈에 언듯 언듯 비치는 그것은 경멸과 혐오 그 뿐이었다. ‘딸아이가 죽기라도 하는 날에 내가 직접 네놈의 목을 베고 황제의 위에 오르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테다!’ 황제의 후손이 하나 있다 하나 아직은 어린아이이고 전식으로 비로서 인정받지도 못하고 쫏겨나간 평민출신 시녀의 아이였다. 황가의 직계로서 성인남자는 오직 슈피르 공작뿐이었으니 그가 황제가 된다 해도 정통성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신하된 자로서 반역을 저질렀다는 정당성에 문제가 있을 뿐이었지만 제국내의 다른 두 기둥인 브로만 공작과 슈마이츠 공작이 중립을 보이고 있으니 전혀 문제될 일이 없었다. 슈피르 공작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뻔했다. 아마 자신의 딸이 죽는다면 자신도 따라보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겠지. 저 부릅뜬 눈을 보더라도 충분히 눈치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와 죽는다고 해도 이미 오래전에 죽었어야 할 자신인데 이제와 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를 비로 맞아들인 것이 벌써 1년이다. 황자라도 태어났다면.. 이리 하지도 않았을텐데.’ 일주일에 두 번 그녀의 침소를 찾아 잠자리를 같이하는 것도 이제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기에 저지른 일이었다. 아무리 후손을 보기 위한 목적이라고 스스로에게 위안을 삼은 그였지만 같이 있기도 싫은 여인을 공작과 그녀의 억지에 의해 안는 것은 극심한 모멸감만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렇게 자주 황비를 찾는 데도 그녀는 임신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와 결혼하기 전에 우연히 단한번 관계를 맺은 시녀는 임신하여 자신을 빼어닮은 은보라빛 머리카락의 남아를 낳았다. -저것을 내치지 않으면 왕자의 목숨은 보장 할 수 없습니다. 싸늘한 표정으로 최후 통첩을 해온 하이네인 때문에 그는 왕자의 생모를 궁 밖으로 내보낼 수도 없었다. 심지어는 왕자라는 아이에게 유모를 붙이는 것도 거부했다가 슈피르 공작의 설득으로 간신히 작은 별궁에 가두어 놓고 황제가 절대 그곳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승낙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아이가 5살이 넘어 6살이 다 될 때까지 1년여를 그는 자식의 얼굴한번 보지 못했다. 어릴 적 한 번도 자신을 찾아와 주지 않는 아버지를 하염없이 가다리던 어머니와 다른 황자들은 전부 한번쯤은 찾아와 주었다는 그를 미워했던 자신이다. 살아남을 것이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만약 아이를 낳게 된다면 절대로 아버지처럼 혼자 두지 않으리라 맹새했건만 자의가 아니라 해도 지금의 자신은 전대황제의 모습 그대로였다. ‘유일한 걱정이라면 황비가 죽고 난뒤 그 아이가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지만..’ 아마 황비가 죽어버리면 자신도 온전하지는 못할 터였지만 오히려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져 온 황제는 오랜만에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끼고서는 눈앞에 앉아있는 슈피르 공작을 바라보았다. 원래는 비교적 온화한 성품의 숙부였다. 그도 또한 제 2황제의 몸으로 자신처럼 죽임을 당할뻔 하였으나 마침 슈피르 공작가의 가주가 딸 하나만을 남겨놓고 죽자 황제가 그 공작가를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제2황자와 유일한 후계자인 슈피르 공작가의 영애와 결혼을 시켜 지금의 그가 된 것이다. 처음엔 어쩔 수 없이 한 결혼 이었지만.. 제 2황자는 공녀와 사람에 빠졌고 원래 몸이 약했던 영애가 5년 만에 간신히 얻은 지금의 하이네인을 낳고서는 죽어버렸을때 그는 거의 미쳐버렸다는 소리가 들을 정도로 자신을 찾지 못했다. 만약 죽음의 경계를 떠돌던 하이네인이 기적적으로 살아나지만 않았더라면 분명 슬픔에 빠져 있던 공작은 죽음을 택했을지도 몰랐지만 오로지 딸에 대한 애정 하나만으로 그 슬픔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내 유일한 후계자는 내 딸 하이네인 뿐이다.!” 그의 선언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황제였다. 황족의 피를 간신히 공작가에 흐르게 하였더니 고작 딸에게 후계권을 준다는 것은 그녀의 부군이 새로이 공작가를 차지한다는 말이나 진배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황제가 황자들 중의 한명을 미리 약혼자로 삼으라 명하자 공작은 이리 말했다. “내 딸이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라면 그 누구라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 말에 노한 황제는 황자뿐만 아니라 어떤 사내라도 하이네인의 근처에 가는 것을 금했고 오히려 그것을 다행으로 생각한 공작은 담담히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당신.. 누구야?” 그래서... 지금은 땅을 치고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그때의 일이 일어난 것이다. 처음으로 자기 또래의 남자아이를 만난 하이네인과, 그녀를 황제가 명한 절대 접근 불가의 베일에 싸인 공녀라는 것을 모른 하티무르의 그날의 첫 만남. 그리고 그날 이후 하티무르의 편안하고 조용하던 삶은 순식간에 격한 변화의 물살을 타고 요동치기 시작했다. “폐하! 큰일 났사옵니다!” 황급히 문을 두들기며 소리를 질러대는 자는 분명 황비궁 소속의 호위기사었다. 황제의 처소에 볼일이 있다면 언제나 문 앞에 서있는 시종에게 그 사유를 알리고 그가 황제에게 그것을 큰 목소리로 외친 다음에야 들어올 수 있었는데 그는 그와 같은 절차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었다. “무슨일이야! 설마..?” 몸을 벌떡 일으키는 공작의 눈에 눈물이 어른거렸다. 벌써 1주일간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딸이었다. 2일전 에일지브 신단 최고 대신관이 마지막으로 찾아왔지만 설레설레 고개만 흔들고 가버린 이후로 거의 포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이렇게 찾아온다는 것은 가장 최악의 일이 벌어졌다는 것 외에는 달리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었다. “황비전하께서.. 황비전하께서.. 방금...” 숨이 턱까지 찬 그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였고.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공작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져 갔지만 뒤에 있는 황제의 표정은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의식이.. 돌아오셨습니다!” 순간 공작과 황제의 얼굴 모두에 경악이 흘렀다. “그게 .. 사실이냐? 죽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의식이 돌아온 것이 맞단 말이냐?” “예 분명 일어나셔서 침대에서 스스로 몸을 일으키시고 말도 하셨다 하옵니다. 어서 황제폐하와 슈피르 공작님을 모셔오라는 시녀장님의 분부가 계셨습니다. 제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일이니 어서 가시지요.” 그러나 그 말에 그 누구도 선뜻 발을 먼저 옮기는 자는 없었다. 황제는 절대로 일어날리 없는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한 충격과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자신의 상황에 극심한 분노 때문에 좀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고. 공작은 급작스런 희망의 빛이 금방이라도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제정신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슈피르 공작님. 당신의 딸이 깨어났다 하니 어서 가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황비가 정신을 차렸다는 말에도 냉냉한 얼굴로 서있는 황제의 표정에서 기사는 황제가 황비의 깨어남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황비전하를 당신의 딸이라고 칭하는 것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는 사실이었다. 지금껏 궁밖에서만 있다가 1주일전 이곳으로 배치받아 온 그는 황실 내부의 비사(事秘)를 잘 몰랐기에 그저 당황한 채로 서 있었고 그제서야 황제와 공작은 빠른 걸음으로 황비궁이 있는 것으로 발을 옮겼다. “아. 안녕하세요.” 황제는 자신을 보고 부끄러운듯 얼굴을 붉히며 인사를 하는 황비의 모습에 가증스러움을 느꼈지만 주위의 눈이 있는 지라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얼굴로 미소지으며 이제는 괜찮냐고 물어보았다. “예, 침대에서 떨어져서 허리가 조금 아팠지만 신관님이 고쳐주셔서 지금은 하나도 아프지 않아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지 저 말투는? 마치 10살 정도의 예법을 잘 모르는 귀족가의 여식이나 사용함직한 말투로 말하며 자신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는 하이네인의 모습에 하티무르는 잠시 당황했다. 침대에서 떨어졌다고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도 놀랐지만 신관님이라니. 자신에게도 하대를 하던 그녀가 아닌가. 게다가 걱정해주셔서 감사하다니. 죽을때까지 그녀의 입에서 나올리 없다고 생각한 말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었다. “저.. 황제폐하?” 게다가 그녀답지 않게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에 하티무르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려 하이네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언제 죽을뻔 했냐는듯 얼굴색은 완전히 정상을 되찾은 듯 했다. 그런데 그의 시선을 받자마자 하이네인은 고개를 획 돌리고서는 슈피르 공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목덜미까지 붉게 달아오른 하이네인을 바라보게 될 줄은 몰랐다. 첫날밤을 보낼때도 눈 하나 깜박 하지 않던 그녀였기에 그녀가 처녀가 아닐거라고 의심하기도 했지만 분명히 처음이었기에 그는 하이네인의 천성이 부끄럼과는 거리가 먼 여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설마 그건.. 당황인가라고 생각하던 황제는 그럴리 없다고 생각했다. “신관!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하이네인의 상태가 이상하지 않은가!” 하이네인은 공석이 아닌 자리에서 황제를 황제폐하라고 부르는 일은 없었다. 제국내 유일무이하게 황제의 이름을 거침없이 불러대던 그녀가 아닌가. 누구보다도 딸을 잘 아는 슈피르 공작도 이상하게 변한 하이네인의 태도에 놀랐는지 다짜고짜 옆에 서있는 신관의 멱살을 움켜쥐고 으르렁 대자 숨이 막힌듯 캑캑거리던 신관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 저도 잘. 아마도 그 독의 부작용이 아닌가 합니다만 부분적인 기억상실이나 그런종류가 아닌 지.. 그러나..저도 자세히는..” “부작용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자주는 아니지만 이정도의 강한 독에 사경을 헤메던 자가 완전히 기력을 회복한 이후에는 마치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기억상실과는 비교적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고. 적절한 치료를 받는다면 곧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니 그리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신관은 멱살이 잡힌 상태에서도 할 말은 다 하고는 그제야 자신을 놓아준 공작의 더 말해보라는 시선에 한숨을 돌리고는 말을 이었다. “단지.. 이 독은 제가 본 것 중 가장 독한 것이라.. 그 기간이 얼마가 될지는 잘...” “그럼. 그게 평생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인가?” 하연은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두 남자중 누가 황제인지 한참을 고민했다가 그나마 나이가 젊어보이는 쪽에게 황제라 불렀으나 상대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은 ‘너 문제있냐?’라는 것처럼 보였고 오히려 자신의 말에 신관의 멱살을 잡고 날뛰는 사람은 뒤에 있던 풍채좋고 권위있어 보이는 아저씨였다. ‘젠장. 이놈의 드래곤 알려주려면 확실하게 알려주고 가야지! 둘 다 보라색 머리카락인데 내가 어떻게 누가누구인지 알아? 게다가 거의 비슷하게 늙었구만. ’ 무술에 뛰어난 조예를 보이는 슈피르 공작은 이미 40대의 나이였지만 20대 후반에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른후 더 이상의 노화를 보이고 있지 않아 황제와 거의 비슷한 나이로 보였던 것이다. ‘....아무래도 잘못 찍은 것 같아.’ 그러고 보니. 브로마네스가 자신과 황제와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말을 한 것도 같았다. 자신에게 괜찮냐고 물어보며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띄던 이 남자가 황제일 리가 없었다. 너무나도 부드러운 눈동자에 보랏빛이 일렁이는 모습은 넋을 잃고 바라볼만큼 충분히 아름다웠기에 하연은 잠시 멍하게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마치 거울 같아. 있는 그대로를 반사해버리는 보랏빛 거울. 하지만 표정은 무척이나 다정다감하게 보이는데.. 왠지 싸늘한 느낌인걸. 나참 무슨생각을 하는거야? 이 이상한 곳으로 넘어간 이후 마족이다 드래곤이다 뭐다 해서 피해망상이 생겨서 그런가. 어쨌든 이 사람도 어제 만난 티엔정도는 아니지만 꽤 미남이네.’ 황제의 외모는 그냥 미남정도가 아니었지만 워낙 화려한 외모-레기어스. 바이욘느. 브로마네스, 어제의 티엔-에 익숙해져 있는 하연에게는 그냥 괜찮은 정도의 외모. 수준으로만 인식되고 있었다. 처음에 하이네인이 반한 것도 사실은 황제의 외모였고 그 외모덕에 하이네인인 눈에 불을 켜고 황제의 곁으로 접근하는 여인들을 모조리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고 말한다면 하연은 아마 말도 안된다고 웃어넘겨 버릴것이 분명할 정도로 하연의 외모 불감증은 정도가 지나쳤다. ‘에라 모르겠다. 저 신관의 말을 들어보면 나를 약간의 기억력 장애라는 진단서를 끊고 있는 모양인데 누가 누군지 모르면 그게 대수야. 그냥 ’어머 실수했네요‘하고 넘겨버리면 그만이지. 설마 다른 사람보고 황제라고 했다고 황비를 죽이겠어 어쩌겠어.’ 원래 하연의 성격은 이런 무대포 정신이 아니었지만 어느새인가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신경이 소심줄보다도 더 질겨졌다. 오죽하면 자신의 모습이 변한 것에 경악이라도 해야 할텐데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하고 있겠는가. ‘그래도 마계에서 벌레취급 받던 거하고 드래곤들 한테 쓰레기 취급 당하던 것보다는 낫네. ..유부녀라는 점이 좀 걸리기는 하지만, 황비라면 여성으로서는 최고의 지위잖아. 하마터면 드래곤의 노예가 되는게 아닌가 했는데. 왜 날 여기로 보냈는지는 모르지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뭐, 유부녀라고 해도 진짜 남편도 아니고 사이도 안좋다고 하니까. 별일이야 없겠지. 급하면 브로마네스가 준 이것도 있고.’ 하연은 자신의 팔목에 걸린 가느다란 팔찌를 만지작 거리며 생각했다. 이것을 주면서 심할 정도로 거만을 떨던 브로마네스가 생각났다. 정말이지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으며 무슨 큰 선물이라도 되는 양 감사히 받으라고 했었지. “절대로 떼어놓아서는 안 된다. 이것을 떼어놓는 순간 너를 목표로 하는 공격을 전혀 막을 수가 없게 된다. 7서클 이상의 힘을 담은 방어마법들이 담신 것이니 너 자신의 몸은 충분히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건 마법 팔찌?” 반짝이고 화려한 것을 좋아한다는 드래곤이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아무런 무늬도 없는 그저 단순한 윤기나는 검은색 금속고리에 불과한 이것이 7서클의 마법을 담고 있다고 보기엔 조금 의심스러웠다. “조금 다른 의미이지만 이것은 너밖에 사용할 수 없어. 네 몸속에 들어있는 고대신족의 유물의 힘을 이용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라. 다른자에게는 그저 팔찌에 불과하지.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절대 빠지지 않을테니 걱정하지는 말아라.” 하연의 팔에 가느다란 흑색 팔찌를 채워주면서 한 말이었다. 시동어도 없냐는 하연의 질문에 그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대답했다. “마계에 있었다면서 그것도 모르다니. 원래 방어용 마법 아티펙트들은 시동어가 필요 없어.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불시의 습격에 주인을 보호하겠느냔 말이다. 그런 것은 공격마법에나 있는것이다.” 공격마법이 없다니.. 그럼 공격마법의 기본이 되는 파이어볼 하나도 날릴 수 없단 말인가? 그럼 막기만 하라고? 조금 안타까왔지만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성질이라도 부렸다가 저 성질 더러운 드래곤이 도로 빼앗아 갈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래 하나 정도의 공격마법은 있어야 겠지. 하지만 너한테 공격마법을 주기에는 네 행동이 걱정스러우니.. 대신 나중에 다른 선물을 보내주지.” 왠지 사악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브로마네스의 시선에 하연은 불안감을 느꼈다. 뭔가... 제대로된 선물이 아닐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드는건 도대체 왜일까? 공작의 권유로 먼저 황비의 궁에서 나온 황제가 향한 곳은 자신의 집무실이었다. 지금은 초겨울이었고 추수가 끝난 지금 각 공국과 속국 그리고 제국내의 영지에서 쉴새없이 공납과 세금이 들어오는 시기였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일년중 가장 바쁜시기였지만 이시기 만큼은 황비도 자신을 귀찮게 굴지 못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남쪽의 올해 풍작은 어떠한가.” 이렇게 일찍 황제가 돌아올 줄은 몰랐던 관료가 허둥대더니 산더미 같은 서류뭉치에서 솜씨 좋게 서류를 꺼내 황제에게 건냈고 황제의 등장으로 잠시 조용해졌던 집무실은 다신 소음속으로 파묻혔지만 그 누구도 황제에게 황비의 용태를 묻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정신이 든 자신의 딸과 대화를 나누는 슈피르공작의 얼굴엔 전장에서도 보이지 않던 당황과 난감함이 섞여 어쩔줄 몰라하는 공작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쉴새없이 질문을 던지는 하연의 모습을 네니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네니성격은 원판과 동일합니다. 무서울 것이 없는 자신의 아가씨만의 행복을 바라는 여인이지요. 실제로 하이네인을 지금까지 길러온 사람이기도 합니다. 주말이니.. 한 두편정도 더 올릴수 있을 것도 같네요^^::(다른일만 없다면) 황제가 나가고 난 뒤 방안에는 공작이라는 남자와 공작이 네니라고 부르는 처음의 여인 그리고 아까의 신관만 방안에 남았다. 뭔가 말을 할 듯 머뭇거리던 공작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까 한 말이 무슨 뜻인가? 설마 평생 이러고 있어야 한다는 뜻인가?” 날카로운 공작의 시선은 유약한 신관이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었고 신관은 연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아닙니다. 제가 알기로는 기억상실의 경우에는 본인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이 과거의 일을 재현하거나 기억속에 강하게 남아있는 상황을 재현하면 회복속도가 수십배로 빨라진다 하니 그렇게까지는..” 말을 흘리는 신관의 표정엔 자신감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죽을것이 분명한 사람이 깨어났다. 일반적이 독이었다면 그래도 확실하게 몇 년이다. 몇 달이다라고 말을 해 줄수는 있겠지만 이 경우는 틀렸다. 행여 1년이다 2년이다 했다가 혹시라도 저 상태 그대로 있다면 분명 공작의 손에 목이 날라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일을 재현한다?” ‘하지만..오히려 이번 기회에 황제에게서 완전히 떼어놓는 것이 나을지도.. 더 이상 이런일을 당하게 할 수는 없어.’ 얼굴을 붉히는 하이네인의 표정은 처음으로 은보라빛의 귀여운 남자아이를 만났다며 신이나서 재잘대던 10살때의 순진한 모습을 그대로 옮겨온 듯했다. 차가운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는 있었지만 황제를 향한 맑은 눈동자에서는 더 이상 깊이 상처받은 애절함도 그리고 진심으로 사랑받지 못함으로서 괴로워하는 고통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연인에 대한 부드러움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번일로.. 그에 대한 감정까지 모두 사라진 것인가?’ 언제나 혐오감에 하이네인의 눈동자에 담긴 빛을 제대로 보지도 않던 황제가 그런 자신의 딸의 심경을 변화까지 읽어냈을리는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번 기회에.. “내가 누구인지 알겠느냐?” 공작의 질문에 하연은 잠시 당황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나 주위에서 굽신거리며 공작님 공작님 하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하연의 끄덕임에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은 그는 이번에는 옆의 여인을 가르켰다. “이 여인도?” 아까부터 눈물을 글썽이는 여인의 이름은 아마도 네니였다. 하연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아까 시녀장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으니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제 이름은 뭔가요?” 순간적으로 자신이 황후라는 것만 알지 정작 자신의 이름은 모른다는 사실에 하연은 무심코 물었다. 하연의 말에 조금씩 안도의 표정으로 바뀌어 가던 공작의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거냐? 그..그럼 내 이름은? 아니지.. 황제폐하의 존함은 알고 있느냐?” “그러니까.. 당신은 내 아버지인 슈피르 공작님이고 황제폐하의 이름은 하티..? 뭐라고 한 기억은 나는데 나머지는 잘 모르겠어요.” 한참을 고민했지만 황제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애시당초 풀네임을 가르쳐주지 않은 브로마네스의 탓도 있지만 그 짧은 황제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니 미리 알려주었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럼.. 그날 밤의 일은 . 아니 네가 황제의 비라는 사실은 알고 있는게냐?“ 그를 놀라게 한 것이 미안해진 하연은 마음을 진정하고 그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심하게 당황한듯 공작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있었다. “그냥.. 아주 조금만 기억이 나요. 우리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정도인데. 황제의 얼굴을 보니까 별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어요. 굉장히 ... 따뜻한 느낌이랄까. 아앗, 죄송해요 제 말 이해하기 힘드셨죠?” “따뜻...해?” ‘설마.. 기억은 하지 못해도 감정은 그대로인 것인가?’ 공작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하지만 하연은 황제의 얼굴을 떠올리느라 공작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브로마네스의 말과는 달리 상당히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물론 눈동자가 약간 이질적인 느낌을 주기는 했지만 아마 그것은 다른 이유 때문일 것이었다. “신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인가?” “저..죄송합니다만..공작각하..황후께서는 기억이 일부 소실되신 듯합니다." "뭐라고!!!" "기억이 사라지는 것과 기억이 소실되는 것이 틀리다는 것은 알고 계십니까? 기억이 사라진 것은 다시 끄집어내면 그만이지만.. 소실된 기억은...찾을 가망이 없습니다." " 그들이 나오는 대화를 하연은 그저 바라만 보았다. "어..어째서?" "기억이 소실되는 것은 극한의 상황에 도달했을 때에 사람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택하는 최후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날 극심한 충격을 받으시고..황후께서는 스스로 기억을 지우신 것 같습니다." “되찾을 .. 가능성은?” “아주 드문 예로 그때와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자 완전히 돌아온 경우도 있지만,, 황비님이 당하신 사건이 사건인지라 아마도 그와 똑같은 상황을 재현하는 것은..” 그의 말이 끝나자 방에 있던 남자와 여인의 사이에는 암울한 기색이 감돌았다. 하연은 그런 그들에게 무어라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의 딸이라고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는 너무나 늦었고. 설사 그들에게 사실대로 말한다고 해서 그들이 믿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황후마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기억을 지우시다니요.." 눈가에 이슬이 보이는 부인이 하연의 손을 조심스레 잡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설마 황제폐하에 대한 사랑마저 지우신 것입니까?” 네니라는 여인의 말에 하연은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누가! 내가? 황제를?” 허연은 자신이 변해있는 사람이...황후가 황제를 사랑하는 줄은 몰랐다. 그저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기에 정략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사이가 좋지 않다는 말을 했던 것일까. "네니! 무슨말을 하려는게냐!" 공작이 외쳤다. "그럼..제가 황제를 사랑했다는 말인가요? 그러면.. 황제는요?" 하연의 물음에 부인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무엇인가를 자신에게 가르쳐 주지 않은 듯하다. 그러고 보니 저 뒤에서 무서운 표정으로 네니를 바라보고 있는 공작의 탓이 큰 것 같았기에 하연은 네니에게 재촉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분은... 그분도.. 황후 마마를..사랑.." "아니예요. 내가 기억하기로는 분명 우리는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흐흐흑.. 아가씨...." 가슴아픈 표정을 지으며 더 이상 말하길 꺼려하는 부인을 하연은 더욱 재촉하며 모든 것을 알아내려 했지만 여인은 계속 눈물만 흘릴뿐이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알고 계시죠?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조금은 어색했지만 하연의 결연한 눈빛으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입을 앙다문 공작은 서서히 눈을 감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황제 때문에 남 몰래 울던 자신의 딸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현 황제폐하는..황후인 너를 사랑하지..않으셨단다.." "...그렇군요" 하연의 태연한 태도에 오히려 목이 메이는 것은 공작이었다. "하지만 너는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하게 되었지. 그가 제5황자이며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게 되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야. 그래서 너는.... 그분을 황제로 만들어 달라.... 내게 부탁했고 그렇게 되어 네가 황비가 된거란다.“ “아버지가 그 분을 황제로요?” “그래. 하지만 그 사실에 분노와 수치심을 느끼신 황제께서는 그런 너에게 한 번도 사랑한다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지. 황제께서는 사랑을 하실 줄 모르는 분. 사랑받아본 기억이 없던 분이겼기에 사랑받을 줄도 모르셨지...하지만... 넌 그런 차갑디 차가우신 분을 사모했고...그분께 사랑받기 위해..끝임없이 노력했단다." 하연은 공작의 말을 들으면서 왠지 가슴이 아려왔다. 아마도 그것은 하연에게 레기어스를 마지막으로 보던 날 밤 들었던 가슴아픈 이야기 때문일 것이었다. 자신의 형인 바이욘느를 사랑하는 시노페를 바라만 보아야 했을 그처럼... 황후라는 여인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찟어지는 듯한 대답없는 사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레기어스처럼.. 죽어서도 잊지 못하는.. 슬픔에 물든 얼굴을 하고서도 그 가슴아픔까지 사랑한다는 눈동자로 멍한 얼굴을 하는 그런 사랑을 황후는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 어짜피.. 친구로서 지내기로 했으니까... ’ 자신처럼 돌아봐 주지 않을 상대를 향해사랑을 했음이 분명한 황후를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계에서 이쪽으로 온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사실은.. 오히려 잘됬다고..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보고싶어.. ’ 하연의 눈물은 레기어스를 향한 것이었지만 공작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황제를 향한 황후의 마음의 표현처럼 보여졌고 공작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한참을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던 하연이 잠시후 눈물을 딱아낸고서는 약간 진정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결국 사랑받지 못한건가요?" 결론은 분명했지만 하연의 대답에 공작은 망설였다. 황제는 너를 사랑하지 않은 것뿐 아니라 오히려 죽일정도로 혐오스러워 한다는 사실을 말해 주어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다. 증거는 없었지만 네가 그렇게 기억을 잃게 된것도 사실은 황제가 보냈음이 분명한 자객에게 당했기 때문이라고 말을 해야 하나 그는 주저했다. 하지만... 아마도 자신이 황제를 사랑했음을 기억하지는 못해도 마음으로는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한 딸의 모습에 그는 그말을 꿀꺽 삼켰다. 이미 사랑받지 못했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더 이상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동안 받은 상처만으로도 이렇게 될 정도로 고통스러워했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대답없는 공작의 표정에는 슬픈 표정이 어려있어 그것이 진실임을 알아볼수 있었다. 그의 표정은 그대답없이 그것이 진실이라고 대답하고 있었다. 한숨을 내쉰 하연은 생각했다. 아까의 따뜻한 표정을 보면 그렇게 가망이 없어보이지는 않았다. 연인으로 사랑받지 못한다면 친구나 동반자는 될수 있을 게 아닌가. 하연과... 레기어스처럼... 비록 처음엔 악연으로 시작됬지만.. 조금은 나아질수 있을거라고 그녀는 믿고싶었다. "그래도 완전히 버림받은 건 아닌가 보네요. 여기까지 와서 걱정하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았는 걸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럼 이제부터 그냥 친구로 지내면 되겠네요. 저 말고도 부인은 많을 테니 후계자 걱정도 없을거고 그분이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생길일은 없겠지요 뭐." 하연의 태도에 네니와 공작 심지어는 말없이 듣고 있던 신관마저 말을 잃고 하연을 바라보았다. 다른 부인이라니. 질투심많던 황후의 입에서 어찌 저런 말이 나온단 말인가. 원래 테아난 제국의 황제는 기본적으로 황후와 정비 그리고 후궁을 합쳐 모두 6명의 공식적인 아내를 가질 수 있었으나 황후의 반대로 아무도 그 지위에 오른자가 없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가씨 황제폐하의 유일한 부인은 황후님이신데 어찌 그런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어?..그럼 지금 황제는..다른 부인이 하나도 없는 건가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지금의 황제폐하가 되셨는데 감히 다른 비를 들인단 말씀이십니까. 절대로 말이 되지 않지요." “...하아.. 그러니 사랑을 받지 못한 거군요.” 자신의 말에 분개하며 그런일은 있을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네니를 바라보며하연은 말했고 그녀의 충격적인 발언에 주위의 사람들은 얼음물을 뒤집어 쓰기라도 한 듯 꼿꼿이 굳어 있었다.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몰라도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는데.. 황후였던 저는.. 그런 짓을 해버린 거군요. 게다가 제국의 황제이신 그분에게 비가 저하나 뿐이라니.. 그동안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사랑하지도 않는 여인을 비로 맞아들이신 것 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웠은텐데..” 마계에서 바이욘느에게 물건 취급을 받고 억지로 키스당한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떨려왔다. 자신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강압에 의한 관계라면 이미 자신이 신물 날 정도로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상대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어도 그리할텐데 하물며 싫어하는 상대에게 그런 것을 강요당한다면 분명 그 고통은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지배자의 자리는 외롭다고 기억해요. 언제나 주위를 경계해야 하고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자리인 것은 기억을 잃은 저도 알고 있어요, 황제가... 숨을 쉴곳도 없이.. 막아버렸으니 그분이 황후를..사랑하지 않으신 것도 당연겠지요. 진정한 평안은 오로지 사랑하는 이의 품안에서만 느낄수 있는 것이니까요." 비록 자신이 황후는 아니었지만. 분명 그녀는 잘못된 사랑법을 택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연은 그것을 바로잡아 놓고 싶었다. “하..하지만 너의 감정은 어떻게 할 셈이냐! 설마 지금 와서 포기하겠다는 말이냐?.” 하연은 잠시 주저했다. 자신은 황후가 아니었다. 그러기에 자신이 마음대로 그 여인의 운명을 마음대로 정할 수는 없었다. 행여라도 그녀가 깨어나게 되어 원래의 위치로 돌아오게 되었을때 자신이 황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절망에 빠질지도 몰랐다. “포기할 수 없겠지. 아무리 기억을 잃은 너지만 네가 그 지위를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아마 너도 조금은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하연의 주저하는 모습을 황제에 대한 미련으로 여긴 공작이 힘빠진 목소리로 대신 대답했다. “..... 내일.. 황제폐하를 따로 만나 뵐수 있나요?.” 한참만에야 하연이 입을 열었다. 주말인데 ^^:: 코멘트 부탁드려요, 오타지적이나. 아무거라도 좋습니다. (설마 너무 심한 악플이 올라오는 건 으음...) 몇개는 고쳤어요. 기억이 없던 '분이겼기에'를 '분이셨기에'로, 눈물을 '딱아낸고서는'을 '닦아내고서는'으로 한글2004가 안되서.. 나중에 고칠께요^^:: 원래는 30장분량의 내용이지만.. 팍팍 줄여서 한번에 올립니다.(안그래도 진도가 늦어서..) 거의 외전형식으로 짧게 올린것이니까요. 그냥 부담없이 보세요, (별로 중요한 일은.. 없는것 같기도 한데..) <레기어스,, 외전> 어두운 방안의 중앙에는 작지만 화려한 침대가 놓여있었고 침대의 머리맡에는 간신히 주위만 보일 정도의 촛불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불빛은 창백한 표정으로 누워있는 환자의 미약한 숨결에도 금새라도 꺼질듯 위태위태하게 흔들리며 몰려오는 어둠을 혼자서 밝히고 있었다, 침대 위에는 하늘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시트보다도 하얀 얼굴을 하고 누워있었다. 어깨와 가슴은 온통 하얀 붕대가 감겨져 있었고 여전히 피가 배어나오는 듯 붕대의 혈흔이 붉었다. 거의 움직이지 않는 가슴만이 눈처럼 창백한 이 남자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고 그 머리맡에는 이틀밤을 잠 한번 자지 못하고 간호하다 지친 기온이 엎드려 선잠이 들어 있었다. 처음에 그가 이리로 실려왔을때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듯 했지만 지금은 안정을 되찾았다는 궁의의 말에도 레기어스는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 가슴의 상처가 아직 덜 나았다고는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라면 벌써 한참전에 의식을 차렸어야 했기에 기온은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휘잉 찬바람이 닫힌 창문사이의 틈으로 거세게 밀려들어오는 소리가 마치 누군가의 통곡소리처럼 서럽게 들려오자 얼핏 잠이 들었던 기온이 화들짝 놀라 입가의 침을 닦으며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바람 소리였나.” 레기어스의 얼굴을 살폈지만 의식이 돌아온것 같지 않았다. 궁의의 말로는 중앙심장에 관통상을 입은 자들은 대게 과거의 기억으로 회귀하는 꿈을 꾼다고 하였다. 극심한 충격에 그동안의 생을 다시한번 경험한다는 이것은 가끔은 그 기억속에 파묻혀 현실로 돌아오기를 거부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여 기온을 두렵게 했다. “상처가 아문 뒤 이틀 안에 깨어나지 않으면 영원히 저렇게 잠든 채로 계시게 됩니다.” 원래 마족은 추억에 빠져 살아가는 종족이 아니었다. 그들 앞에는 오로지 차가운 현실만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들이 이러한 경우에 의식을 되돌리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기온은 알고 있었다. 레기어스는.. 아마도.. 현실로 돌아오기를 거부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 분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이리저리 떠돌며 키워졌다. 본래의 착하고 여린 성품은 마왕이라는 존재와 동일시되어 배척받았고 커서는 시노페님을 바라만보다 다른 이의 품으로 보내야만 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아버지와 적이 되어 바이욘느님의 궁성에서 항상 이방인처럼 의심과 감시를 받아온 그는 언제나 미소지어보였지만, 사실 가장 마음이 공허한 자였다. 화려해 보이는 의상이 사실은 상처받은 자신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허세였다는 것을 기온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잔소리를 했던 거였습니다. 조금쯤은.. 마음을 터놓으실 수도... 있었을... 아아..그렇지요, 결국 그것은... 불가능 했었을 겁니다.’ 마음을 터놓을 상대는 없었다. 마족이면서도 오히려 인간처럼 수많은 번민에 잠못이루며 뜬눈으로 밤을 세우는 일이 많았던 레기어스의 마음은 마계에서는 오히려 비웃음 받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기온 오늘 할 일 다해 놓았으니까. 나 이제 간다!” 언제부터인가.. 그분은 자신이 처음으로 그분을 뵈었을 때처럼 해밝은 웃음을 지으시며 아이처럼 신나서 어디론가 달려가게 되었다. 더 이상 한밤중에 깨어 슬픈 듯 하늘을 바라보는 일도 줄어들었고, 잠 못들어 새벽녘까지 뒤척이지도 않으셨다. 바이욘느 전하의 소유인 인간을 만나러 간다는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짐짓 모르는 체 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곳에 다녀와서는 어디를 다녀왔냐며 추궁하는 자신에게 쑥스러운듯 미소를 지었다. 마치 가장 소중한 보물을 아끼며 보여주기 싫어하는 어린아이처럼 고집센 표정을 지어보이는 레기어스를 기온은 더 이상 추궁하지도 않았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레기어스님. 그렇게까지 죄책감을 느끼실 필요는 없었잖아요, 어째서 당신은 그렇게 정직하신거지요? 한번쯤은 욕심대로 행동할 수도 있었을 텐데.. 가장 소중하다 여기는 것 앞에서는 자신이 믿던 모든 것을 버릴수도 있는 거랍니다. 언제나.. 진실한 것이.. 최고의 방법은 아니라는걸,... 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날 부터인가 오후의 비밀스런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레기어스의 표정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걱정이 되었지만.. 물어볼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기온, 난 지금 누군가를 배신하려고 하고 있는것 같아. 잊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존재를.. 이렇게 쉽게 잊어버려도 되는걸까? 너라면... 대답을 해 줄수 있겠지?.” 너라면.. 기온은 그 말에서 직감적으로 그것이 시노페님을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와 자신이 닮은 것은 그것뿐이었으니까. “잊어버렸다거나 배신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기온은 입을 열었다. “그저,, 아름답고 기뻤던 기억만 남겨놓고 슬프고 괴로웠던 갈무리해서 마음속 깊이 넣어두었을 뿐이예요. 전.. 그녀를 가장 아름답게 기억하고 싶어요. 저에게는 기쁨만 준 존재로, 최대의 행복이 된 존재로..” 그녀를 자신에게 아픔과 비통함만 남겨놓은 존재로 기억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에게 기쁨과 환희만을 안겨준 너를 나는 이렇게 행복하게 추억하고 있다고...그렇게 말하며 웃고 싶었기에 기온은 그렇게 했다. “...난... 예전부터도 그랬지. 결국.. 언제나 도망치고 말았어. 어려서는 아버지에게서 커서는 시노페에 대한 나의 감정에서.. 그리고 지금도.... 난 비겁하게 숨기고 감추고만 있어.. 결국 진실따위는 대면할 용기가 없는거야.. 간신히 손에 넣은 것이 사라질까 두려워서.. 내 모습은 전부 허상뿐이었는데 그런 내가 사라지고 진짜의 모습을 보인다면.. 모두가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간신히.. 이제는 붙잡았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레기어스 전하는 그렇게만 말할 뿐이었다. 휘잉 또다시 바람이 불어와 기온의 머리카락을 살랑 흔들었다. “좋은꿈을 꾸시는군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랍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뒤쫒는다면.. 간신히 붙잡은 것을 정말로 놓치고 말거예요. 그러니.. 어서 깨어나세요.” 기온의 목소리가 나지막히 울려퍼졌다. “안녕? 난 시노페라고해. 네가 마왕님의 아들이라던 레기어스가 맞니? 와아.. 마왕님을 닮아서 붉은 눈동자일 줄 알았는데. 굉장히 맑은 바다빛 색이야. 너 정말 예쁜 눈을 가졌구나?” 자신의 생일날 처음으로 마왕성으로 온 금발의 어린 소녀는 녹색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미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마족들의 눈에 담겨있던 무시의 빛은 전혀 보이지 않은 순수한 호기심과 어린아이다운 당돌함으로 빛나던 그녀는 그렇게 레기어스와 첫 만남을 가졌다. “어쩐일로 엘라힘님께서 왕궁에 다 오셨는지요?” 언제나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던 어머니의 얼굴에 살펴시 미소가 떠오른다. “이 곳에서는 악한 유괴범이 나타날 가능성이 많아서요.” “아.. 죄송합니다. 그 일은.. 저도 이미 들어 알고 있습니다. 설마 마왕님께서 아직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실 줄은..” 당황하는 어머니에게 엘라힘이 부드럽게 대답한다. “아니, 무엇보다도 제 자신이 이 아이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지요, 나의.. 보물입니다.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장차 제 뒤를 이을 아이이지요.” “하지만. 딸이 아닙니까.” 갑자기 소녀가 자신의 손을 놓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전 엘라힘의 딸입니다. 여자라고 해서 그 것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수장으로서의 책임을 그리고 의무를 무서워하지도 않고 도망칠 생각도 없습니다. 그말은 저희 일족 모두를 모욕하시는 말입니다.” 너무도 당당히 대답하던 시노페는..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빛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 앞에서 앞장서 어두운 밤의 길잡이가 되는 타오르는 횃불같은 빛을.. 해마다 시노페는 아버지 엘라힘과 함께 자신의 생일날만 되면 찾아오곤 했고, 그날 만큼은 언제나 엄하던 아버지도 조금은 자신에게 웃어보여 주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시노페는 구석에 숨어있는 자신을 찾아내었고, 자신을 끌고나가 넓은 홀 중앙에서 정중히 댄스를 청하고는 했다. “이런 건 남자가 먼저 청해야 하는 거라고, 도대체 언제까지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되는거야? 너도 충분히 잘 생겼으니까 여자들이 널 거부할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 이 시노페님이 말하는 거니까 믿으라고!” 그리고 언제나처럼 시노페가 리드하는 댄스. 하지만 그날만큼은 누군가에게 휘둘림을 당한다는 사실이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그리고,, 언젠가 성년이 되면,, 그녀에게 처음으로 춤을 신청할거라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의 세월이 지났다. “젠장 한번만 더 해요 바이욘느!” 처음으로 들른 시노페의 성에서 그녀는 처음보는 남자와 칼을 맞대고 있었다. “저분은 마왕님의 이복동생이신 바이욘느 전하시다. 저번 천족과의 전쟁때 가장 큰 공을 세우신 분이지. 그리고 엘라힘님과는 막역한 관계이시고.” 시노페와 같은 아름다운 머리카락에 넓은 어깨와 단단히 단련된듯한 두 팔, 그리고 여유마저 묻어나는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자신에게는 없는 자신감으로 넘쳐나는 듯한 바이욘느를 자신은 그날 처음으로 보았다. “레기어스 왔어? 바이욘느 이쪽은 마왕님의 아들인 레기어스야. 내 친구이기도 해,” 자신을 친구라 불러주는 시노페의 말에 기뻐할 틈도 없이 그의 강한손이 자신의 손을 억세게 쥐었다. 금방이라도 비명이 터저나올듯 아파왔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단지... 이 사람이 어째서 이렇게 적의를 보이는 것인지.. 그것이 궁금했다. 그리고.. 며칠뒤. “바이욘느 그대의 마음은 잘 알겠네만.. 아직 시노페는 어리네. 그래서,, 성마의식이 있기 5년전까지는 그대가 약혼자로서 적합한지를 증명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시노페 본인이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잠시 시노페가 자리를 비운사이 찾아온 엘라힘은 자신과 함께 있던 바이욘느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그때에는 자신을 약혼자로 인정해 주도록 하지. 그러나 결혼을 하고 안하고는 온전히 시노페가 직접 정하는 것으로 하겠네.” 그가 시노페에게 청혼을 했다는 것을 자신은 그제서야 알았다. 어째서 자신과는 다리 모든 것을 가진 이 사람이 시노페마저 빼앗아 가려는 것인지 인정할 수 없었다. “뭐야. 레기어스. 설마 질투하는 거야? 걱정마. 그건 아버지가 멋대로 정한 거라구. 내가 그냥 남편감으로는 강한 남자가 좋다고 그랬더니 마음대로 데리고 온 거야. 음.. 물론 강하기는 정말 강해, 거의 아버지 정도랄까?”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그는 강했다. 검술, 마법, 예의, 품위. 그리고 우아함과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까지 모든것이 완벽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은 그처럼 될 수 없었다. “아직도 연습하는 거야? 하지만.. 레기어스 너한테는 이런 검보다는 다른게 어울려. 예를 들면, 저번에 연주하던 줄달린 악기 있잖아? 난 그 연주만큼은 네가 세상에서 최고라고 생각해, 너랑 바이욘느는 달라.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하는 거라고, 네가 바이욘느처럼 된다면.. 아마도 난 널 싫어하게 될꺼야. 내가 좋아하는 건 평소의 너라고. 그러니까.. 이러지 않아도 되. ” 질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녀에게 부족하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아서 노력했지만,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어 절망하던 그에게 시노페가 한밤중에 찾아왔다. 그리고 이런 자신이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그건 단지 위로가 아니었을까. “저는 지금부터 마왕의 명으로 멀리 떨어진 전지로 향합니다, 살아 돌아올지 어떨지도 없는 몸으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비겁할지도 모르지만, 용납해 준다면 다시 한번 여기서 청혼을 하고 싶군요. 시노페 저의 신부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갑자기 일어난 천족과의 전쟁에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바이욘느는 완전히 무장을 하고서는 바닥에 한족 무릅을 꿇고 시노페에게 다시한번 청혼을 했다. 무릅을 꿇었음에도 너무나 당당한 그의 모습이 시릴만큼 눈부셨다. “보고싶어지면 제가 당신을 만나러 갈께요. 그곳이 어느 곳이더라도 전 갈 수 있어요. 그러니까. 만날 수 있어요. ” 자신에게도 시노페가 저렇게 말해줄까, 처음으로 그에게 적의를 느꼈지만. 자신은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기에 그것은 싸늘한 재로 변해 버렸다. “걱정해주는 거야. 레기어스? 음 하지만 네가 옆에 있잖아? 그러니까 쓸쓸하지 않아. 그리고 그는 강한 사람인걸? 말은 저렇게 하지만 분명히 살아 돌아올거야. 그러니까 걱정따위는 안해.” 그녀의 무조건적인 신뢰는 그만의 것이었다. 언제나 자신을 돌보는 어미새처럼 바쁘게 움직이는 시노페는 바이욘느의 일이라면... 언제나 무심할 정도로 완전히 그에게 맏겨놓고 있었다. 그정도로.. 믿음직스런 남자가 자신은 되지 못했으니까. “레기어스인가? 그대도 많이 변했군, 아름다운 하늘색 머리카락, 그리고 물빛 눈동자, 분명 시노페의 취향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었을리 없지. 하지만 검술은 지난번과 전혀 달라지니 않은 것 보면 실력은 형편없는 모양이군,” 이십여년의 긴 세월뒤에 찾아온 그의 눈은 마치 상대를 조여죽일 듯 했다. “나의 소중한 사람 옆에 그런 미숙한 자가 있다는 것은.. 용납못해!” 자신이 어째서 이런 시선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저,, 저도 충분한 실력이 됩니다! 여기서 시험해보아도 좋아요!” 그리고.. 불현듯 튀어나온 말. “그만! 네가 지금 얼마나 무례한 짓을 했는지 알고 있느냐? 자기 자만도 정도껏 해라 물러가! 레기어스. 너 따위에게 내 약혼자를 모욕시킬 수는 없어!” 진짜..진짜로 화를 내며 자신을 때렸다, 그... 남자를 위해서.. 분노와 슬픔으로 흘러내린 눈물을 씻어내리러 간 분수대에 비친 얼굴은 상처받은 어린아이... 그리고.. ‘...아..?! 뭐야,, 이눈은 내눈이..? 마치 아까 바이욘느의 것과 같은 눈빛으로..?’ 한참후에야 그것이 나를 지키려는 시노페의 마음이었다는 것을... 아주... 아주.. 나중에야 자신은 깨달았다. 그녀가..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하게 되었을때.. 그제서야.. "그분이 그렇게 하신것은 진심이 아니셨습니다. 지금까지 바이욘느전하께 그리 말하고도 살아남으신 분은 오직 레기어스님 혼자이시니까요. 시노페님에겐 한없이 친절하시지만 그분은 타인에게는 냉혹할 정도로 잔인하게 구신답니다. 만약,, 시노페님이 그리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면..." "바이욘느. 레기어스를... 미워하지 말아..." 시노페는.. 자신을 ,,,끝까지.걱정..했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굳게 감고 있던 레기어스의 눈에서 한줄리 은빛 물줄기가 흘러내렸지만, 마치 행복한 꿈을 꾸기라도 하는듯... 그의 입가에는 어느때보다 아름다운 잔잔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불길한 징조> “당분간은 황제 폐하를 만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구나..” 이어진 공작의 설명은 그야말로 길고도 길었다. 무슨 알아듣지도 못할 용어가 난무하더니 결론은 ‘황제는 바쁘니 당분간은 만나지 마라.’라는 뜻이었다. 무슨 연회니. 집무니 하는 말을 했지만 하연은 공작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기억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자신에게 그렇게 빙빙 말을 돌려 할 리가 없었다. “네가 기억을 일부 잃었다는 사실은 절대로 비밀로 하거라. 너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의 황제를 황위에 세우기 위해서 우리 가문은 많은 다른 가문과 등을 돌려야만 했다. 만약 네 상태가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분명 그쪽에서 무슨 행동을 해올 것이 분명해.” 겨우 딸 하나 때문에 수많은 가문과 원수가 되었다는 슈피르 공작의 말에 하연은 잠시 말을 잃었다. 새삼스럽게 이 공작이 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보니 자신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올 반응이 새삼 두려워졌다. “그러고...” 공작은 잠시 숨을 돌리고서는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창백하게 질린 것을 보니 이런 기본적인 사실마저도 잊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했다. “....이 사건이 있기전.. 너는 한 남자와 심각한 추문이 있었다. 그러니까..” “추문... 이라니요?” “,,..한밤중에 그 남자와...” 얼굴을 붉히며 간신히 대답하는 슈피르 공작의 말에 하연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흙빛이 되었다. 생각만 해도 욕지기가 올라왔다. 예전에 읽은 프랑스 왕궁의 문란한 귀족사회가 떠오르면서 온갖 불길한 상상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남편 따로 정부 따로.. 설마 이 제국도 그런게 허용되는 곳이었던가? “...잤나요?” 하연은 눈을 딱 감고 물어보았다. 제발 아니기를 바라면서. 혹시라도 누가 예전 애인이라고 밤중에 찾아오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아니 그것을 떠나서 자신을 도저히 그런 여인을 연기할 자신이 없었다. “그게... 나도 잘 모르겠다. 네가 황제폐하의 질투를 불러일으키려고 일부러 그랬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그 사건이후 막바로 이런 사건이 생겨서.. 네니도 그것만은 잘 모른다고 하더구나.” 이걸 다행이라 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절반의 가능성이 있는 공작의 말에 하연은 조금은 안심했다. 하지만.. ‘혹시라도 그 사람을 만나면 어떡하지? 기억상실증인 척도 할 수 없고 그냥 웃으며 안녕하세요. 할 수도 없을텐데.. ’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어째서 예전에 읽은 판타지 소설과는 이렇게 다른건지 알 수 없었다. 이 세상으로 넘어오면서부터 죽을 뻔한 것이 여러차례, 항상 구박만 받고 도구 대접이나 받는 것은 이제 정말 지겨웠다. 생각만해도 머리가 어지러워진 하연은 양미간을 좁히자 공작이 걱정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너를 대하는 태도가 이상해도 참거라. 어디를 갈 때는 반드시 네니를 동행하고. 원래도 항상 너의 곁에 있었으니 누가 뭐라 할 자는 없을 것이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말이 오간 후에야 공작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뒤를 몇 번이나 돌아보더니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잠시 이야기를 한다하여 공작이 내보낸 네니가 다시 들어왔다. “저기.. 네니는 내 유모라고 했지? 미안. 나 아무래도 그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아. 저,, 그런데 물어볼게 있는데 괜찮을까?” “그럼요,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나,, 평소에 어땠어? 그러니까 옛날일 말고 최근에 말이야.” 네니는 망설였다. 진실대로 이야기를 하자니 기억이 온전하지 못하신 황후님이 충격을 받을것이 분명하고 그렇다고 거짓을 말하자니 황제가 이상이 여길 것이 분명했다. 하연은 그런 네니의 심중을 눈치채고 그녀의 손을 꼬옥 잡으며 말했다. “나 놀라거나 하지 않아. 황제가 날 좋아하지 않는 것도 별로 아무렇지도 않은걸. 정말이야. 아버지가 말한대로라면 나 의심받으면 안 되는 거잖아.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줘.” 잠시후.. 하연은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후회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황비의 역할을 제대로 해낸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브로마네스! 하연 어디다 뒀어?” 브로만 공작의 집무실에 예고 없이 찾아온 슈마이츠가 주위를 두리번 거리면 급하게 물었다. 며칠간 황궁을 구석구석 돌아다녔지만 브로만이 데려왔다는 하연이라는 여인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의 보호자임을 자처하고 있는 이 블랙 드래곤에게 찾아와 묻기는 싫었지만 결국 이렇게 찾아오게 된 것이다. “슈마이츠 제발 이곳에서는 내 본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내 말이 말 같지 않은거냐? 게다가 날 찾아 오다니 우리는 여기서는 별로 서로 관계가 없는 사이야! 네가 자꾸 이러면 귀족들이..” “묻는 말에나 대답해. 어디 있어?” 성질 급한 레드드래곤답게 슈마이츠는 상대의 훈계 따위는 상관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해버렸고 그런 그의 모습에 브로마네스는 타는 속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황궁에! ” 어지간하면 이 녀석에는 알리지 않고 진행하고 싶었지만 벌써 며칠 전부터 황궁을 뻔질나게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분명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에 브로마네스는 내뱉듯이 대답했다. “거짓말마! 내가 거의 3일을 샅샅이 뒤졌지만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당연하잖아! 도대체 내가 저번에 너한테 해준 이야기는 다 어디로 들어간 거냐. 이번 유희는 좀 스케일을 크게 한다고 그렇게 누누이 말했건만 넌 도대체 드래곤이 맞긴 맞는 거냐? 어떻게 그렇게 기억력이 형편없을 수가 있지?” 슈마이츠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자신이 그 말을 들은 기억이 있던가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보는 것이었다. 잠시후 생각났다는듯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치던 슈마이츠가 다시 이상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그애가 그애란 말이다! 신족의 유물!” 그제서야 알았다는듯 고개를 끄덕이는 슈마이츠를 보며 브로만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의 유희에 끼어드는 것은 분명한 불법(?)이었지만 보호자로서의 권한은 최대한 남용하여 이 레드드래곤을 이용해야 했다. “뭐야. 그럼 아까 황제가 부를때 가볼 껄 그랬나. 젠장. 안간다고 튕기고 오는 길인데. 황후가 됬다면 만나기도 힘들잖아?” 얼굴이 부은체로 슈마이츠가 툴툴거리자 브로만이 놀라서 물었다. 황제가 슈마이츠를 부르다니. 그것도 자신도 몰래 불렀다는 것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무슨 모의가 벌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평소 같으면 그냥 모른 척 할 일 이었지만 이미 이 계획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그로서는 간과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황제가 너를 부른거냐? 그거 이상하군, 나에게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한 두 번도 아니야. 꽤 됬다고, 말하려다가 귀찮아서 관뒀지만.” 심드렁하게 대답한 슈마이츠는 잘 들리지 않게 궁시렁대더니 도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하연을 보러 황제의 내궁에 갈 생각이었다. 그것을 눈치챈 브로만이 슈마이츠를 불러세웠다. “지금 가봐야 황제의 얼굴만 볼꺼다. 황후는 지금 공식적으로는 요양중이니까. 내일 아침에 슈피르 공작과 함께 문병을 가기로 했으니까 그때 함께 가도록 하지.”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슈마이츠를 보며 브로만은 문득 일어나는 궁금증에 슈마이츠에게 질문을 하나 했다. “그런데.. 왜 하연을 그렇게 만나고 싶어하는거지? 이미 가봐야 외모도 완전히 변해 버렸는데. 그리고 네가 본 모습도 원래의 모습이 아니고.” 브로마네스로서는 정말 너무도 당연한 의문이었다. “그거? 아.. 넌 잘 모르는구나.” 피식 웃으며 대답하던 슈마이츠가 안타깝다는 듯 브로마네스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평범한 (?) 드래곤인 그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희귀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알 리가 없었다. 하긴 그런 능력을 가진 드래곤은 자신이 유일무이한 존재였으니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말해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슈마이츠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 애 빛이 났어. 아주 눈부신 빛이.” “....됐다.” 첫눈에 반했다는 건가. 하지만 저런 낯간지러운 말도 할 줄 알다니. 조금은 의외라고 생각한 브로만은 질렸다는 표정을 하고서 슈마이츠를 내보냈다. “..황제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조사를 해볼 필요가 있겠군.” 안그래도 요즘 반슈피르파 귀족들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내심 긴장을 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제국의 군사력의 절반을 지휘하고 있는 슈마이츠와의 밀담을 준비한다는 것은 분명 황제가 그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더니... 슬슬 발톱은 드러내는 것인가? 그래봤자. 나 브로만의 손바닥위에서 놀 것이 분명한데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하지만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모르지. 그것이 실패하게 된다면 오히려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기가 더 쉬워지니 말이야.” 솔직히 자신은 티엔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황제는 절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리고.. 황제의 뒤에 있는 에일지브 신단은 천족과 직접 연관이 되어 있어 자칫 실수했다가는... 그들에게 그저 말이 아닌 진짜 꼬리를 밟히는 수가 있었다. 당연히 행동이 조심스러워질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이유에서지 몰라도 에일지브 신단은 고대신족의 유물에 접근하는 것을 최고의 금기로 삼고 있었다. 그들 스스로도 접근을 금한 그곳을 들어갈 수 있는 것은 황제뿐이라는 말에 인간들이 금계를 삼아봐야 별거겠냐고 접근하다 거의 죽을뻔한 일이 있었던 이후로 브로마네스는 더더욱 그 유적에 대해 궁금증이 솟아나서 견딜수가 없었다. “도대체 그 곳에 무엇이 들어있길래 그 난리인지 꼭 보고 말겠어!” 물론,, 대의명분은 그럴싸 했지만, 결정적으로 그의 결심을 부채질 것은 그 안데 무궁무진하게 쌓여있다는 엄청난 양의 재보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황궁에서 방금 도착한 서신에 화기애애했던 방안의 분위기는 금새 차가워졌다. 황후가 깨어났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매우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고 거기에다 슈마이츠 공작이 또 한번 자신들의 제의를 거절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을 답보하도록 강요하고 있었다. “후작,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요! 분명 성공한다 하지 않았소?” 화난듯 누군가에게 따지는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작을 탓할 일이 아닙니다, 대신관도 와서 포기하고 산 여인이 살아난 것 자체가 의심스럽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황제폐하께서 직접 나서신 일이 아니십니까? 그런데도 이리 되었으니.. 이는 천운이 따랐다고 밖에는..” “무슨 소리요! 천운이라니 그 간악한 부녀에게 천운이란 말이 가당키나 합니까? 분명 사악한 술수를 사용한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지금 내말에 토를 다는 것인가! 자작!” 처음의 노인이 테이블을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나이가 들면 조금은 침착해진다고 했는데 이 자는 그 중에서도 예외에 속하는 자가 틀림없었다. 주위의 사람들도 그런 그의 성격을 아는지라 다들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신관이 직접 치료를 했는데도 아무런 이상한 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니.. 분명 사악한 술수를 쓴 것은 아닙니다.”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남자가 어둠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잠시 흥분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노인이 머쓱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면 이제는 어떻게 할 것이요, 이대로 또 다음 기회나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단 말이오? 이러다가 황후의 몸에서 황자라도 태어난다면 어찌할 것이요? 그땐 이미 늦다는 것에 여러분도 동의하지 않았소. 한시라도 바삐 다른 계획을 세워야 하오.” 그렇지만 할 말이 남은 듯 한참이나 말을 멈추지 않던 노인이 말을 끝내자 남자가 대답했다. “제가 황후를 만나보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계획을 실행하도록 하지요.” 그의 말에 모두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후작을 바라보았다. 두 번째 계획이라면,, 분명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하여 제외시킨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것을 하겠다 하니 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 어렵게 ‘그것’을 구하였으니.. 가능할 것입니다. 시엔이 직접 만든 것이니.. 아마 그 효과는 확실하겠지요, ” 그들은 다시 한 번 소리 없이 경악성을 질렀다. 그 시엔이 ‘그것’을 만들어 주었다는 말인가? 하지만.. 절대로 만들지 않겠다 한 그가 무슨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것이 그들의 수중에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것과 후작이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고 그들은 확신했다. 후작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동자에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떠올랐다. “그럼.. 잘 부탁하네. 시간은 아직 넉넉하니 부디 숙고해서 세부계획을 짜길 바라네.” 아까의 성질 급하던 노인이 만족스러움 듯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그런 노인의 표정과는 반대로 후작을 바라보는 나머지 사람들의 표정은 그다지 기뻐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회의적인 반응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후작은 수도에 있는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황궁으로 출발하였다. 공식적인 방문 이유는 황제폐하의 겨울 무도회기간에 참가하기 위해서였기에 그가 준비해야 했던 짐이 생각보다 많아 시간이 걸렸다. “또 단 둘이서만 만나게 되는건가....하이네....아니 황후를.." <첩(?!) 들이기>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며 하연은 눈앞의 황제를 몰래몰래 열심히 뜯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부드러워 보이는 사람이 그렇게 냉정하게 굴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할 말이 있는건가?” 자신을 아까부터 힐끔거리는 황후의 눈빛이 신경이 쓰였던 하티무르는 짜증을 억누르고 부드러운 얼굴을 유지한채 식사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고 있는 하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 네 저,, 잘생겼구나 해서,,” 스스로도 자신의 말에 놀랐는지 들고 있던 포크가 바닥으로 쨍그랑하고 떨어졌다. 당황하는 빛이 역력한 모습이었지만 그는 놀라지 않았다. 아마도.. 이것은 그녀의 또 다른 형태의 게임일 것이 분명했다. 이번엔 순진한 척하는건가? 하긴 저번의 요부흉내는 어설프기 짝이 없었으니까. “그대도 오늘따라 더 아름다워 보이는군.” 장단을 맞춰주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황후의 모습이 낯설다. 분명 거짓은 아니었다. 테아난 제국내 최고의 미를 꼽는다면 그것은 당연 황후일 것이었다. 어릴때부터 수많은 찬사만은 받아온 그녀가 새삼스래 자신의 말에 감동했을 리가 없다. “저.. 할 말이 있어요. 하티,” 이상하게도 지나번 일이 있고나서 황후는 자신을 티무르라 부르지 않고 하티라고 부르고 있었다. 하티로 부르건 티무르라고 부르건간에 그녀의 입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간다는 것이 싫었지만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늦게 자신을 찾아온 슈피르 공작은 그녀에게 이번에 황제에게로 들어온 수많은 구혼장들과 그림들을 보여주면서 그 중 자신이 마음에 드는 여인을 선택하라고 했다. 급하게 가져온듯 정리가 되지 않은 것이 태반이었지만 다들 굉장한 미인들 뿐이었다. “이 중에서 2명만 일단 뽑거라. 둘 다 정비로 들어올만한 신분의 공녀들이니 네가 마음에 드는 공녀를 뽑으며 내가 황제폐하께 말씀을 올리마.” 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허겁지겁 가져온 그림속의 여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타국의 공작가의 여식이거나 작은 공국의 공주의 신분이었다. 그래서 슈티르는 그속에 '알리샤'라는 반슈피르가문의 공녀가 들어있는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제 마음대로요?” 하지만 자신이 황제의 마음에 들지 않으니 최소한 정비들이라도 황제의 취향으로 골라야 하지 않겠냐고 하연은 생각했다. 무도회라도 열어서 황제가 직접 선택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하연의 말에 공작은 절대 안된다는 얼굴로 반대했다. 이유는 대부분이 타국의 공주여서 그들이 모이는데에 걸리는 시간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었다. 조금만 더 생각을 해보면 그중 10명 정도를 뽑아 사신을 보내 이번 초겨울에 있을 무도회에 참석하게 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하연은 몰아치는 공작의 기새에 몰려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도 황제도 남자인데 뭔가 이상형이 있겠지. 적어도 키라든지 좋아하는 머리색이라든지도 물어봐야겠다.’ 하연은 잠시 목청을 가다듬고는 진지한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이상형이 뭐예요? 라고 물어볼수는 없는 일. 하연은 조금씩 멀리서 접근하기로 했다. “하티. 혹시 요즘 날이 추워졌죠? 혼자서는 좀 쓸쓸한 느낌이 들기도 하구요. 그러고 보니 가을도 거의 다 갔네요.” “그대의 옷을 보니 확실히 날이 추워졌군, ” 황후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짐작하지 못한 황제는 오늘따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맨듯한 하연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대답했다. 언제나 자신의 몸을 드러내기를 즐기던 평소의 모습과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이었다. 다행히 황제는 하연의 질문에 비교적 성실하게 대답해 주고 있어서 하연은 조금 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 “혹시.. 쓸쓸하지 않으세요?” 말하고 보니 너무 노골적이라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하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죄없는 샐러드를 갈기갈기 찢으며 황제의 시선을 피했다. 자신이 황제에게 정비를 들이고 싶냐고 직접적으로 물을수는 없었다. 예전의 황후는 질투가 무척이나 심했다고 했으니 아마 그말을 꺼내는 즉시 의심의 눈초리가 날라들 것은 자명했다. “.... 그렇지.” 한참이나 대답이 없던 황제는 이를 악물고 분노로 어깨를 떨었지만 하연은 미처 그것을 보지 못했다. 황제가 정비를 들일 생각이 있는 것으로 확신한 하연은 조심스럽게 가장 중요한 질문을 꺼내기로 했다. “혹시.. 원하는.... (스타일이 있는)가요?” 황제와의 거리가 조금 있었기 때문에 하연이 떠듬거리며 말한 대사의 중간 부분은 황제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황제는 당장이라도 식탁을 엎어치우고 나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황후를 노려보았다. 죽을뻔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지금 자신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뻔뻔스럽게 스타일이라고? 언제부터 그런것에 신경이라도 썼던가? 전혀 욕정도 생기지 않는 여인을 안는것이 얼마나 고역인지 알기라도 하는지 궁금했다. ‘알 리가 없지. 그랬다면 제 아버지를 시켜 억지로 횟수까지 정해 나에게 강요할리 없었을 테니까. 그래도 이전에는 직접적으로 말은 못하더니 지금은 아주 노골적으로 나오는군. 저것이 정말 황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맞는 것인가?’ 그녀의 뻔뻔함에 질릴대로 질렸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놀랄일은 없을거라 믿었는데 황후는 역시 자신의 기대를 처참하게 배신하도 있었다. “... 내 마음은 그대가 더 잘 알텐데.” 하연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고 보니 황제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분명 황후인 자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진짜 황후가 아니지 않는가. “아니,, 저 그러니까 혹시 새로운 것에 흥미가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급하게 변명하려 한 말은 오히려 황제의 오해를 불러 일으켰지만 하연은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황제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은 것을 보면 자신을 의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하연은 급히 전략을 바꾸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그냥 확 직접적으로 말해야지. 오늘오후에 시간이 나면 내 궁으로 와서 공녀들의 그림 중 마음에 드는 것으로 선택하라고 해야겠다. 아버지가 절대로 가져나가지 말고 나 혼자 고르라고 했지만. 황제가 와서 보는거야 아무 말 하지 않겠지.’ “그대의 아버지가 그러라고 시키던가?” 입을 열려는 순간 황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연은 그만 깜짝 놀라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뭐.. 뭐야. 설마 지금 독심술이라도 한건가? 어떻게 말도 안했는데 저런 대답이 나오는거지?“ “... 그 일 때문이라면 오늘 저녁 그대에게로 내가 직접가지. 이제 됬는가.” 아마도 황제는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정비후보를 뽑고 있다는 것과 그것 때문에 황제를 부른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저리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연은 안도감에 어깨에서 힘이 쭈욱 빠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말에 지금껏 긴장했던 듯 굳었던 어깨가 부드럽게 내려앉는 것을 본 하티무르는 다시금 그녀의 가증스러운 태도에 없던 정나미가 다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말에 순순히 인정을 하며 다행이라는 얼굴을 해 보이는 황후의 얼굴을 외면했다. 더 이상 보았다가는 정말 인내심의 끝을 보일지도 몰랐다. ‘오히려 이전보다 뻔뻔스러워졌군, 날 보고 얼굴을 붉히던 것은 역시 연기였던가? 훗, 바보같이 그녀가 변했다고 생각한 나 자신이 우습군. 설사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로 그 본성이 바뀌지 않을 여인이 아니던가.’ 황제의 생각을 전혀 모르는 하연은 자신의 마음을 미리 읽어서 대답을 해준 황제가 고마웠다. 솔직히 진짜 남편도 아닌 남자에게 친한척 하며 이것저것 물어보기가 상당히 난감했었다. 솔직히 인상만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지만 황제는 첫인상만큼이나 상대를 잘 이해하고 배려하는 사람 같았다. “네, 하티 고마워요, 그럼 오늘 저녁에 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께요.” 얼굴 전체에 순수한 기쁨의 빛을 띄며 하연이 방긋 웃어보였다. “... 조금 늦어질 수도 있어,” 무뚝뚝한 말투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자 황제는 내심 본심이 나온것에 대해 당황했다. 분명 황후의 날카로운 불평이 튀어나오겠지라고 생각하는 황제의 귀에 낯선 대답이 들려왔다. “일이 많으면 어쩔수 없지요, 하지만 오늘중으로 들른다고 약속해 주세요. 그때까지 기다릴테니까요.” 슈피르 공작이 내일 온다고 하였으니 무조건 오늘밤안에는 결정해야 했다. 황제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했지만 그것은 아마도 그동안의 과중한 업무 때문일것이 분명했다. 어제만 해도 거의 수백명이 황제의 집무실에 들락날락 거리는 것을 직접 보았으니... 하지만 국사도 중요하지만 인생의 나머지를 함께할 여인을 정하는 것은 더 큰 문제였다. 국사야 조금 미루면 되지만 반려를 정하는 것은 그런 업무를 조금 늦추어도 충분한 일이라고 생각한 하연은 아까의 말에 덧붙여 말했다. “국사도 중요하겠지만 황제께 정말 중요한 문제예요, 황실의 후손과도 관계가 큰 일이니 반드시 오셔주시겠지요? ” “...그대에게 중요하겠지.” 왠지 조금 가시가 박힌듯한 목소리였다. 설마 국사보다 반려문제가 중요하다고 해서 화가난건가, 슬며시 황제의 표정을 보니 분명 아주 작은 변화이기는 하지만 미간이 약간 구겨저 있었다, “..물론 저에게도 중요해요, 우리 둘에게 모두 중요한 일이니 꼭 와주시겠지요?” 두 번 세 번 확인하는 하연의 말은 황제의 인내심을 거의 극한데 몰고가고 있었다, 격하게 터져나오려는 숨을 강하게 억누르며 황제 하티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그의 그런 모습을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름답지만 수치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여인이 정말로 죽어없어지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때... 확실히 해야 했어..’ “황제폐하께 가서 그리 말씀하셨다는 것입니까?” 자신이 오늘 아침을 먹으며 한 이야기에 네니가 뒤로 넘어갈듯 눈동자를 뒤집자 하연은 놀라 쓰러질뻔한 네니를 받쳤다. "뭐야! 내가 못할 말이라도 한거야?“ “그건,, 아니지만, 정말 황제폐하께서 오신다 하신것이 맞습니까?” 황후님의 정비를 고르라는 말에 그렇게 부드럽게 말씀하셨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네니가 혹시 하연이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여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순수하리 만큼 맑은 얼굴에서는 거짓을 읽을수가 없었다. “정말.. 오신다고 하신것인가요?” “진짜야! 왜 그렇게 못믿는거야? 늦어질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했다니까? 내가 반려를 맞아들이는 것은-사실을 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국사보다도 중요하다고 했더니 황후인 나에게도 중요한 일이라고도 했는걸?” 네니의 회의적인 시선에 약이 오른 하연이 바락바락 우겼다. "그럼.. 일단 황후님이 좀 추려놓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네니의 난감해 하는 말에 하연이 무슨 걱정이냐는듯 네니를 바라보았다. 그림이라야 몇장 되지도 않는데 그중에 고르면 되지 않는냐는 뜻이였다. “사실은.. 방금전 나머지 그림들이 외무성에서 추가로 도착했거든요.” 그러고 보니 방안 한가운데에 있던 거대한 테이블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대신 그 자리에 사람키 정도의 물건이 하얀천에 쌓여 있었다. 그리고 네니가 말을 끝냄과 동시에 끈을 잡아당기자... 거대한... 정말로... 수천장이 아닐까 의심이 되는.... 초상화의 산이 나타났다. “설마.. 이게 전부?” “예, 그나마 그저그런 가문의 영애들은 제외하시라 명하신 것이 이정도라 합니다.” “하,,하지만 황후도 아니고 정비인데도 이렇게 많이들 보낸다니.. 도대체 다들 생각이 어떻게 된거 아니야? 자신이 한 남자의 여러명의 부인중 하나라니.. 그래도 좋다는 건가...?” 하연은 기가 막혔다. “대 테아난 제국의 황제폐하이신걸요. 게다가 황제폐하의 준수하신 용모는 널리 알려저 있답니다. 황자 때에도 수많은 여인들이 그분을 한 번 보기위해 수많은 연서를 보냈다던 걸요.” “하지만.. 그정도로 목을 맬 정도로 잘생긴것 같지는 않은데 그냥 조금 잘생겼다 정도 아닌가? 내 생각에는 브로마네 아니 브로만 공작이나 슈마이츠 공작이 더 잘생긴 것 같은데..” 무심하게 중얼거리는 황후의 말에 네니뿐만 아니라 곁에 서있던 시녀와 시종들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브로만공작이나 슈마이츠 공작이 못생겨서가 아니라 언제나 시종 냉냉한 관계를 유지하던 그들의 외양을 칭찬하는 황후의 모습이 너무도 낯설어서였다. “..그럼 어떤 기준으로 고를까요.” 네니의 독촉에 하연이 번득 정신을 차리고 어마어마한 액자의 산을 바라보고는 간단히 대답했다. “얼굴 예쁘고 몸매 좋은 순으로 골라놔. 황제도 남자인데 예쁜 여자를 좋아하겠지. 가능하면 황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면 좋겠는데.” “예?” 딱 6장입니다^^ 반응이 좋으면 한편더 올리지요 ㅋㅋㅋ(뭐냐? 이 협박겅 멘트는) 이번편은 대사가 많네요. 혹시 싫으신분? 대사로 진행하면 지도가 빠르기는 하네요, 주말 잘 지내라고 리플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고 남은시간 잘 보내세요!! ->설마 황제의 행동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지는 분,, 계시나요? (세상을 자신처럼 타락한?! 인간이 주라고 믿고 있는 작가 -ㅁ-;;) "예?" 시녀들의 놀라워하는 시선도 이제는 지겨웠다. 하연은 약간 짜증을 섞어 대답했다. “....자세히 말해? 상체는은 이정도 이상 중간은 요정도. 그리고 얼굴은 내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나 정도나 그 이상. .” “.....” 황후가 정비를 고른다고 하기에 미리 골라놓은 것은 황후가 지금 말한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말은 저리해도 분명 자신보다 못한 여인을 선택할 것이 분명할 것이라는 예상에 개중에서도 그나마 가장 외모가 떨어지는 그림을 골라놓은 것은 완전히 헛수고 였던 것이다. “참 그러고 보니 나랑은 반대의 스타일이 좋겠어.” 말을 다하고 보니. 황제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 기억난 하연이 덧붙였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와 닮은 자만 보아도 불쾌감이 들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황후도 아닌 정비를 자신과 비슷한 사람으로 골라 사랑도 못 받고 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황후의 말이 덜어지기가 무섭게 시녀들과 시종들은 모조리 팔을 걷어부치고 다시 그림들을 골라내기 위해 그림의 산으로 달려들었다. 그들이 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하연이 네니가 방금 던져버린 그림을 주어들었다. “네니! 벌써 두 번째야 어떻게 이게 저거보다 너 못할 수가 있어? " "...." “흐음.. 이게 다인건가?” 그렇게 추리고 추려서 골라놓은 것이 10장이었다. 전부다 하나같이 아릅답기로는 우열을 매길수 없을 정도로 나름대로의 고유의 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연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나를 조금이라도 닮은 사람은 없네.” 하연은 빙긋이 웃었지만. 네니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도대체 저러다가 나중에 기억이라도 돌아오셔서 후회라도 하시면 어찌한단 말인가. 네니는 점점 울쌍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황제는 언제 오려나.” 황제를 기다리는 모습의 황후를 바라보는 네니의 눈에 결국 눈물이 고이고 말았다. - 네니. 내가 질투가 심하다고 생각해? 나.. 그분의 곁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만해도 가슴이 찟어질 듯 아파. 이런 내가 잘못된 거야? - 나도...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하지만.. 그는.. 언제나.. 마지막 순간에는 나를 외면해. 나 따위에게서는 아이를 보고 싶지 않은거겠지... - 오늘도., 티무르는 오지 않아. 나를 찾는 것도,, 아버지가 억지로 보내기 때문이라는거.. 잘 알고 있어, 하지만.. 그가 오지 않을걸 알면서도.. 난 왜.. 늘 이렇게 기다리는걸까? 황후마마도 그리고 황제폐하도 사랑하고 사랑받는 방법이 너무나 서툴러서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 황후님의 잘못된 행동들도 결국은 사랑받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황제폐하는 끝까지 알아주지 않았다. 차라리 뜨겁게 분노를 표출했더라면.. 오히려 황후님은 그분을 포기하셨을텐데.. 언제나 보여주는 가식적인 따뜻함에 자꾸 기대하고 스스로 배신당하다 결국 저리되셨다. “네니~ 우리 산책나가자! 날 진짜 좋아!” 어릴적처럼 환하게 미소짓는 나의 공주님. 전 사실 기뻐하고 있답니다. 황제폐하를 잊어버린 것을.. 나중에 기억이 돌아오셔서 막지 않으셨다 원망하셔도 전 정말로 지금이 기쁘답니다. 더 이상은 눈물지으며 탄식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은 보고싶지 않으니까요. “네니! 뭐해? 빨리 안오면 나 혼자 갈꺼야!” “잠깐만 기다리세요! 햇볕에 살이라도 타시면 어쩌시려구요.” 그래요,, 그동안 슬펐던 기억,, 그리고 아파했던 것,,지금은 모두 잊고 웃어만 주세요, 그것이 저의 유일한 행복이랍니다. 하연은 자신의 궁에서 나왔다. 날이 좋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황궁을 구경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네니가 붙어다니니 별일은 없겠지만..혹시라도 황궁에서 길을 잃으면 무슨 개망신을 당할지 몰랐다, 정원의 아름다움과 황궁의 웅장함에 취해 하연은 황후의 궁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곳까지 오게 되었다. 아까와는 달리 약간은 관리가 잘 되지 않은 어두침침한 궁이었다. 약간의 스산함마저 느낀 하연이 네니를 돌아보았다. “황제의 궁 안에서도 이런 데가 있네?” “아...네..” 이곳은 황후마마가 직접 황제의 아들이기도 한 어린아이를 유폐시키다시피 한 곳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던 네니는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가능하면 이곳에서 빨리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황후는 오히려 이곳에 흥미가 생겼는지 건물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훌쩍..훌쩍..흑.." 작게 숨죽여 우는 어린아이의 소리가 하연에게 들려왔다. 하연은 소리가 들려오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싸늘한 벽과 먼지 앉은 가구들만 보일뿐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어린아이 소리 같은데. 네니 혹시 이 궁에 누가 사는지 알아?” “....그게..” 이제 하연은 본격적으로 나서서 아이를 찾기 시작했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네니는 당황하여 하연을 보고만 있을 뿐이였다. 하연은 울음소리가 들리는 방으로 발을 들여놓았고 작은 침대위에서 엎드려 울고 있는 작은 아이를 발견하였다. “....티엔이랑 같은 머리색이네. 그러고보니 황제랑도 비슷한 것 같고.” 아이는 작고 흰 가녀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훌쩍거리고 있어서 얼굴이 잘 안보였지만 아이의 머리는 보라색 아이리스에 이슬이 맺힌듯한 은보라색이였고 마치 아이리스 꽃들의 정령같이 작았다. 하연은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손을 뻗어 조심스레 아이를 안아들었다. “때리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아이가 자지러질듯 소리치며 몸을 있는데로 웅크렸다. 하연의 눈이 충격으로 굳어졌다. 아까는 잘 보이지 않았는데 아이의 두 팔을 무엇인가로 얻어 맞은 듯 희디흰 피부에 검붉은 선들이 하나 가득 새겨져 있었다. "누가 널 이렇게 한 거니?" 아이의 얼굴을 보던 하연은 아이의 눈물 어린 자수정 눈동자를 보고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티엔을 떠올렸다. 아이의 눈동자가 맑은 자수정이라면 티엔의 눈동자는 얼어버린 제비꽃의 보라색이였다. "누..누구세요?" 그날 저녁 늦게 돌아온 하연의 손에는 작은 은보라빛 머리카락의 소년이 안겨있었다. 그 소년을 본 순간 모두들 그 아이가 황후에 의해 어미의 품을 가혹히 빼앗긴 아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은보라빛의 머리카락은 황제의 직계에서만 나타나는 색이였으니까. 하지만 네니의 아무말도 하지 말라는 시선에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아니 황후가 너무나도 즐거운 표정으로 아이의 응석을 받아주는 모습에서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과연 사실인가하고 의심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함께 목욕까지 마친 황후와 소년은 마치 친엄마와 아들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다정해 보였다. “황후마마.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시녀가 가져온 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 소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하연이 여기서 이야기하라는듯 자신을 바라보자 네니가 그럴수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황후마마. 저 아이가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심각한 표정이 된 네니가 무겁게 말을 꺼냈다. “......해서 저 아이는 현재 황제의 유일한 자식입니다.”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거야?” “그래서라니요. 정녕 저 아이를 이대로 이곳에 두실 작정이십니까?” 아무리 영리하다 하나 그 아이는 황후의 몸에서 나온 아이가 아니였다.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한 아이이니 이곳에는 둘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이야, 약속 했으니까. 난 약속은 지켜, 황제의 아이라는 것을 알았어도 난 이 아이를 받아들였을꺼야.” 하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니가 뭐라 반론을 펴려하자 하연은 단호하게 그것을 제지했다. “그만. 난 티르가 마음에 들어. 그리고 더 이상 그런 상처를 줄 수 없어. 설령 황제가 뭐라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야.” "누..누구세요?" “난. 하이네인이라고 해,” 황제의 내궁에 다른 이의 아이가 들어올 수는 없다는 것을 모르는 하연은 이 아이가 귀족가에서 흔히 태어나는 사생아인가보다 생각했다. 내니는 무언가 말을 할 것처럼 연신 입을 들썩이다가 결국은 포기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하연은 아이의 예쁜 얼굴위에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올려 주었다. 엄마나 아빠가 없음은 분명해 보였다. 입고 있는 옷은 재질은 고급이었지만 많이 낡아 있었고 또한 부모가 있다 해도 이런식으로 아이를 방치하는 자들은 부모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하연은 아이를 데려가기로 마음먹었다. “저.. 싫지 않으세요?” “아니? 왜, 그런 질문을 하니?” “머리색이랑.. 눈의 색 때문에요, 다들 싫어했어요,” “무슨 소리야. 얼마나 예쁜데 그러니? 나 같은 흔해빠진 검은색 머리보다야 훨씬 낳지, 게다가 내가 아는 보라색 머리의 사람들은 전부다 굉장한 미남인걸? 너도 크면 엄청나게 미남이 될게 분명해!” 아이의 눈이 잠시 안도의 빛으로 편안해졌다가 금새 의문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이어진 아이의 말을 듣는 순간 하연은 깜짝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황후님은... 검은 머리가 아닌데요?” 너무나도 아름다운 흑청색 머리카락이기는 했지만 칙칙한 검은색은 아니었다. 아이는 하연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만져보며 중얼거렸다.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밤바다 같은 색이예요. 전.. 아직 한 번도 바다를 보지 못했지만 밤바다는 무척이나 아름답데요.” 어린아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성숙한 말투에 하연은 놀란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직 5살도 안되보이는데 아이는 너무나도 또박또박하게 말하고 있었다. 이곳의 아이들의 성장속도가 어떤지는 몰라도 분명 평범한 재능을 가진 아이는 아닐듯 했다. “이름이 뭐니?” “티르..라고 다들 불렀어요,” “그래? 내가 아는 사람도 그거랑 비슷한 이름을 가지고 있단다. 티르 나랑 같이 갈래?” 갑자기 울먹이는 소년에 하연은 당황해서 달콤한 목소리로 아이를 달랬다. 한참을 울먹이던 소년은 씩씩하게 눈물을 닦더니 하연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저.. 버리지 않을거지요? 저를 버렸다는 엄마처럼,, 저 버리지 않으실 거죠?” 당당한척 하고 있었지만 아이의 주먹은 가늘게 떨리고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두 다리도 후들거리고 있었다. 하연은 아이를 꼭 안았다. “물론이지! 그럼 같이 가는거다?” 하연은 자신의 침대에서 잠이 든 티엔의 이불을 끌어당겨주었다. 너무나도 평안하게 잠든 모습에 하연은 무언가 가슴속에서 따뜻한 감정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누군가를 지켜줄수 있다는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을 것이다. “티르. 내가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지는 모르겠지만....널 지켜줄게." 온다던 황제는 밤이 깊었는데도 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오늘 낮 동안 여러 가지 일로 바빴던 하연은 그만 잠깐만 누워야지 하고 티르의 옆에 누웠다가 살포시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30분이나 지났을까. 황후의 침실과 연결되는 테라스에의 정원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조용한 궁안에 울려퍼지고 이윽고 커다란 유리문이 열리며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미 깊은 잠에 빠져있던 하연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황제와 함께 방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어두움에 익숙해지지 않은 눈때문에 몸을 멈추고 서 있던 황제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은은한 달빛이 구름을 헤치고 방안으로 비춰 들어오면서 부터였다. 하연이 잠들어 있는 침대로 다가온 황제는 그대로 굳은듯 하연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입술을 깨물며 하연에게 손을 뻗었다. ^^:: 거상하느라.. 조금 더..쓰려고 했는데.. 저녁먹고 가능하면 한편 올릴께요. 이쁜영이 : ))ㅑ 젬있어여 ~ 작가님 건필!!! (03.07 21:16) 오월에부는바람 : 정말로 재미있어요... (03.07 11:41) korapha-duck : 새벽에라도 올릴 계획이 있으.. (쿨럭) (03.07 00:05) ♡lovelygirl♡ : 건필요~~~ ^^ (03.06 23:07) §Remonade§ : 정말 재미있네요. 많이 올려주세요 ^-^ (03.06 22:32) . 약간 중간에 잘렸습니다만,,(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나머지는 나중에,, 오늘은 힘이 빠졌어요,,, 리플때문에 죽자사자 써서 올립니다. '기다리라고 하더니 잠이 들어버린 것인가.' 확인차 침대로 다가간 황제는... 너무나도 깊은 허탈감을 맛보았다. 기대했던 것을 박탈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를 악물며 긴장한 것이 한순간 스르르 풀렸기 때문이었다. 알아서 준비하고 있는 줄 알았던 황후는.. 너무나도 행복한 표정으로 곤히 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가버리면 분명 다음날 가만 있지 않을테니 그냥 갈수는 없겠군.’ 그렇지만 자고 있는 황후를 깨우고 싶은 마음은 결단코 없었던지라.. 황제는 의자 하나를 들고 와 침대 옆에 앉아 황후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저것이 자기를 떠보기 위한 연기일지도 모르니 이렇게 앉아 있기라고 해야 했다. 결코 좋아서 보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자세히 보는 황후의 얼굴이라 그런지 왠지 낯설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달빛때문이리라. 만월의 달은 모든 것을 왜곡시켜 보이기도 하니까. 잠시 달을 바라보던 황제의 시선이 황후의 얼굴로 옮겨졌다. 그녀의 주위로 자연스럽게 흩어 진 청흑발의 신비로움만큼이나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눈을 감은 그녀의 얼굴 위로 하얀달빛속을 떠다니는 조각배를 연상케하는 청흑색의 속 눈썹이 길게 음영을 드리운 가운데, 그녀의 자그맣고 오똑한 코... 그리고 연신 색색 고른 숨을 조금씩 토해내는 그녀의 선홍빛 입술이 그녀의 희디흰 얼굴 안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행복한 듯 미소 짓는 얼굴을 본 것도 그때 이후로..처음... " ......! " 황후의 얼굴에서 지나칠 정도로 오랜 동안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그는 속으로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황급히 그녀가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자신을 마구 다그쳤다. 그녀의 저 순수해 보이는 아름다움은 단지 겉껍데기에 불과할 뿐, 속은 분명 추하다는 것을 알지 않느냐고 그는 속으로 단단히 되뇌었으나 정작 그의 안에선 그 자신도 당황스러운 강렬한 충동이 끓어올랐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옅은 달빛을 받은 황후의 얼굴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불러일으켰다. 은은한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빛나는 흑청색 머리카락과 투명한 피부. 곧은 눈썹과 가끔씩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곧은 콧대와 살짝 벌려진 입술. 그 입술로 미약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그 소리가 자신을 유혹하는 소리 같아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황후의 입술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부드러웠다. 저 금방이라도 달콤한 즙이 배어나올 듯한 촉촉한 입술의 감촉을 그의 입술로 생생히 느끼고 싶다는 자신의 이런 너무나도 생소한 반응에 그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돌변했다. ‘나도 결국은 애정이 없어도 욕망만으로 여인을 안는 그런 남자에 불과했던건가? 그 상대가 증오해 마지않았던 황..후라.. 해도 말이지. 이런.. 더러운 느낌이 들 줄 알았다면.. 차라리 오지 말았어야 했다.’ 오늘의 목적은 황후의 자는 얼굴을 구경하는 게 아니었다. 황후가 스스로 자신을 불러들인 것이 아닌가. 그리 노골적으로 말해놓고서는 이렇듯 무방비한 상태로 잠이 들어버린 황후 때문에 이런 불쾌한 욕망이 자신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황제는 아까의 손길과는 달리 약간 거칠게 잠들어 있는 황후의 어깨를 흔들며 깨웠다. “일어나라."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황후를 보고 언제나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던 그 목소리를 듣는다면 이 혼란스런 감정도 불시에 식어버릴 터였다. “으응.,, 조금만 더.. 잘래..” 어느샌가 그에게 바싹 다가온 그녀가 경직된 그에게 찰싹 달라붙더니 침대곁에 앉아있는 그의 상체 바로 옆에 얼굴을 열심히 깊숙이 파묻고 있었다. 옆구리에 맞닿은 그녀의 가슴과 그를 간지럽히는 그녀의 따뜻한 숨결, 그의 허리에 둘러진 한 쪽 팔에서 느껴지는 그 불에 데일 듯 섬뜩하도록 생생한 촉감에 그는 뛸듯이 놀랐다. 그동안 수십번이나 황후를 안았지만 이런 느낌이 든 적은 없었다. 그런데 단순히 이런 접촉에 미숙한 십대처럼 반응하는 자신이라니. 그는 자신의 배반하는 육체의 유혹을 뿌리치고 자신을 감싼 황후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그 반동에 황후의 몸이 내동댕이치듯 침대의 중앙으로 굴러갔지만 그가 기대한 것처럼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고르게 쉬던 숨이 갑자기 멈춘듯 한참이나 숨을 쉬지 않았다. 얼굴은 점점 창백해져 갔고 몸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그대로 뻣뻣이 굳어 있었다. 갑자기 황후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하면서 그는 자신이 황후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바래왔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단숨에 침대위로 올라와 황후의 얼굴을 돌려 자신을 향하게 하였다. 그리고.. 갑자기 황후의 두 손이 올라오는 것을 느낀 그가 또 속았다는 분노에 몸을 떨며 침대를 빠져나가려 했을 때 그는 자신의 옷을 약하게 쥐어잡으며 눈물을 흘리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흐느끼는 황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지...마.. 제발... 부탁이야.. 레기어스.. 제발,, 가지마,,” 순간 자신도 억제할 수 없는 격렬한 고통이 온몸에 작렬했다. 매몰차게 자신의 옷을 잡아뺀 황제는 여전히 뭐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황후의 두 어깨를 잡고 거칠게 흔들어 댔다. 도대체.. 레기어스라는..놈은.. 어째서... 그런 얼굴을.. 눈을 떠보니 마계에 있는 자신이 머물던 방이었다. 습하지만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하연은 조심스럽게 자신이 베고 있는 베개의 감촉을 손바닥으로 느꼈다. 까칠했다. 덮고 있는 이불에서는 꽃향기가 아닌 풀내음이 났다. ‘아아.. 이상한 꿈이었어.. 이상한 드래곤들도 만나고.. 황제도 만나고 나는 그의 황후가 되었지..’ 키득거리는 자신의 웃음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밖은 이미 밝았고 분명 점심때가 지난것 같았지만.. 조금 더 자고 싶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런 푸근함에 마냥 행복해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일어나라." 언제나처럼 이 시간에 자신을 찾아온 레기어스가 하연의 잠을 깨우고 있었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묵직한 목소리, 아마도 이때가 되도록 잠을 자고 있는 자신에게 심통이 난 것이리라. 하연은 몸을 굴려서 레기어스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따뜻해, 언제나처럼 약간은 긴장한 듯한 레기어스의 몸이 주는 따스함에 하연은 잠시 그러게 눈을 감고 레기어스의 심장박동을 즐기고 있었다. “나 이상한 꿈을 꿨어. 레기어스가 한밤에 날 찾아와서는 막 고백을 하는거야. 그리고... 자신은 그녀만 사랑한다고..” 하지만 다행이었다. 멀리로 떠나버릴 것만 같았던 그날밤의 레기어스는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다. 이렇게 온몸으로 느낄수 있는걸.. 하연은 미소를 지었다. 너무 행복해서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 어,,어째서? 레기어스가 차가운 손길로 자신을 뿌리쳤다. 더 이상 아무것도 손에 닿지 앟았다. 갑작스런 상실감에 숨을 쉴수가 없었다. “나에겐 오직 시노페뿐이야. 너를 위한 자리는 없다. 난.. 시노페에 대한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벅차. 더 이상은 찾아오지 않겠다. 이제 다시 볼일은 없을 거다.” 차갑게 돌아서는 레기어스의 모습이 눈물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움직여서 잡아야 했는데 몸을 움직이지도 숨을 쉴수도 없었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질것처럼 쿵쾅거리고 그 심장이 산산조각날만큼 아려왔다. 안되.. 이대로는 보낼 수 없어. 레기어스, 제발 가지마. 나.. 친구라도 좋으니까. 그러니까 나 버리지 마.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게. 시노페를 잊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니까.. 오로지 그녀만 바라보고 살아도 좋아. 그러니까.. 제발.. 날 떠나겠다는 말은 하지말아. 수백가지 말들이 소용돌이 쳤지만.. 간신히 입을 열었을때는 이미 레기어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정말 끝인거야? 나.. 당신을 다시는 볼수 없는거야? 왜? 나.. 그냥 친구라도 좋다고 했는데..그런데..왜? 날 버리는거야...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온다.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레기어스의 체취에. 그리고 더 이상은 볼수 없는 그의 모습에..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이제는 시야마저 까맣게 변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말없이 잡아 올린다. 아까의 향기와 똑같은 향기.. 레기어스야, 그가.. 돌아온걸까? 놓칠수 없어. 지금 놓치면.. 정말 영원히 ... 다시는 볼수 없게 될꺼야. 말을해! 하연, 가지말라고 말을 하란 말이야. 바보처럼 눈물만 흘리지 말고 말을해!! “...그러지...마.. 제발... 부탁이야.. 레기어스.. 제발,, 가지마,,” 하지만.. 결국.. 레기어스는 자신이 붙잡는 옷자락마저 냉정하게 뿌리쳤다. 더 이상.. 정말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가버린거야.. 정말로...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꺼야. 바보, 왜,, 왜,.,. 더 강하게 잡지 못했어? 죽어버릴꺼라고. 그렇게 발했어야지. 바보처럼 애원만 하고,, 이게 뭐야.. 더 이상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얼굴을 가로지르는 축축한 것이 자신의 두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라는 것 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추워,, 너무 추워,, 심장이.. 온몸이.. 얼어붙는것처럼,, 다시는 뜨거운 피가 돌지 않을 것처럼 추워,, 추워서,,, 견딜수가..없어... .. 하지만.. 황제의 거친 손길에도 황후는 눈을 뜨지 않았다. 마치 깨어나는 것을 거부하듯 다신 뜨지 않을 것처럼 굳게 눈을 닫은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흘렀다. 자신의 몸이 닿으면 언제나 뜨겁게 달아오르던 황후의 몸은 오히려 차갑다고 느껴질 정도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중에도 황후는 그에게 잡힌 팔이 아프다는듯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에게서 벗어나려는 듯한 미약한 거부의 의사를 표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잡은 부드러운 맨살이 드러난 팔은 여전히 차가웠다. ‘나를 거부하는건가.’ 황제는 하연의 몸 위로 천천히 자신의 몸을 포개어갔다. 황후는 여전히 눈을 감은채였지만 자신을 밀쳐내지는 않았다. 차가운 자신의 손길에도 불 붙는듯 타오르며 매달리던 황후였다. 이 상황에서까지 연기를 할 자제력이 있을 리가 없다. 황제는 이를 악물듯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반응 없이 누워만 있는 황후의 가면을 깨트리겠다 다짐했다. “얼마나 그렇게 모르는척 버티는지 보지.” 더 이상 자신의 심장박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온몸은 차갑게 식어들고 이제는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상관없어..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그저.. 이렇게 한없이 깊은 수렁으로 끝없이 빠져드는 느낌... 그냥.. 이대로 잠들고 싶어... 갑자기 누군가가 팔을 잡아오는 감감이 생생하리만큼 강한 고통과 함께 느껴졌다. ‘바... 바이욘느?’ 상대의 단단한 두 손이 자신의 양팔을 강하게 감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처럼 단단한 몸이 하연을 짓누르고 있었다. 숨이 막힐듯 짓눌러오는 그의 체중에 숨이 막힐것만 같았다. 귓가로 그리고 목덜미로 뜨거운 숨결이 휘감기듯 다가왔다. ‘..싫어! 그때처럼,, 은...싫어!’ 조금의 배려도 없는 오로지 소유욕만 가득하던 숨이 막힐듯 고통스럽던 바이욘느의 키스의 기억이 하연의 이성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했다. 이제 자신을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바이욘느에게서... 자신을 구해준.. 레기어스는..이제..없으니까.... 싫어... 레기어스가 아니면... 그가 아니면.. 싫어! 하연은 있는 힘을 다해 벗어나려 발버둥쳤다. 손을 버둥거렸지만 닿는 것은 레기어스의 것이 아님이 분명한 짧은 머리카락뿐이었다. 차가운 공포가 점점 하연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잠시 하연의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가져가던 황제가 멈춰섰다. 격하게 몰아붙이리라 생각했지만.. 여전히 눈을 감은 황후의 몸이 몹시도 아름다웠다. 흘러내린 눈물자욱마저 달빛에 녹아내릴듯 아름답기만 했다. 황제는 잠시 망설이다 그녀의 이마로 흘러내려온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이마에 날개같이 부드러운 키스를 해주었다. 스스로도 놀랄만큼 가벼운 키스였지만, 단지 그녀의 피부에 입술이 잠시 스쳤다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신경이 한군데로 쏠리는듯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황후가 눈을 뜨지 않았다는 것에도 개의치 않듯, 황제는 입술을 내려 천천히 황후의 얼굴 곳곳에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황후를 상대로 성마른 거친 호흡이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신의 열기에 스스로가 불타오르는 듯한 느낌도.. 못견디게 그녀의 품으로 빠져들어가고 싶다는 열망도... 처음이었다. 자신이 황후를 상대로 그런 생각을 할수 있다는것도, 그런 욕구를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상상조차 해본적이 없다.. 그런데...지금 이 순간만큼은... 알겠어.. 알겠어.. 난 널 안고싶다. 지금 이 순간 완전한 나만의 것으로 하고 싶어. 그래.. 난 널 원한다. 하이네인, 처음으로,, 내,,,의지로서.. 그대를 원한다. “,,,그러니,, 눈을떠라,” 여전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황후에게 그는 속삭였다, 황제가 스스로의 감정을 인정하는 그 순간.. 황후의 천천히 열리며 자신을 행했다. .... 그를 한없이 당혹의 소용돌이에 빠뜨린 채 천천히 눈을 뜬 그녀의 흑청색 눈동자를 본 그 순간. 그는 정신이 아찔해짐을 경험했다. ...그런 이해 불가능한 현상에 그는 문득 자신에게 이렇듯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그녀가 무섭도록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 그는... 속수무책이었다. 눈을 뜬 황후의 깊은 밤바다가 담긴 눈동자는, - 완전한 거부와 자신에 대한 혐오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황후를 바라볼 때 안간힘을 다해 숨기고 있던... 자신과 똑같은 눈동자가 자신을 마주보고 있었다. 그 순간 황후가 자신을 거부할까...갑자기.. 두려워졌다.. ‘...그럴 리가...없다.. 언제나.. 먼저 손을 내민것은... 그녀인데..’ 근거없는 불안감에 황제는 몸을 떨었다. 아니다.. 바이욘느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숨막힐 듯한 열기를 뿜어내는 몸은 점점 하연을 구석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거부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강한 체취가 담겨있는 숨결에 하연은 공포에 질렸다. 그때처럼,, 레기어스가 구해주러 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가버렸으니까. 하지만. 이건 싫다. 여전히 시야는 어둡다, 눈을 감고 있는 것처럼... 눈을 떠야 했다. 눈을 뜨는 순간 들어온 것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충격을 담은 한 쌍의 보랏빛 눈동자. 하지만.. 누구인지 공포로 굳어진 머리는 그가 누구인지 밝혀내지 못했다. 오로지 하연을 지배하는 것은 벗어나야만 한다는 공포와 두려움뿐이었다. “오지마!” 황후가 자신을 바라본다.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듯한 시선이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면 가끔 떠오르던 기쁨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몸짓 하나에 일일이 반응하며 늘 열기에 달뜨던 얼굴을 하고 매달리던 얼굴은 정반대로 파랗게 질려있다. “황제...? 어째서... 여기에?” 하연은 그제서야 그를 기억해내고서는 황제의 모습을 바라본다. 어두운 욕망에 잠식된 황제의 모습은 아침에 하연이 기억하고 있는 그가 아니다. 너무나 낯설고 무섭기까지 했다. 황제는 이루지 못한 욕망에 탁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다. “오늘 궁으로 나를 부른 것은 그대가 아닌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그가 몸을 조금 움직이자 황급히 뒤로 물러난다. 황후는...자신에게서 눈을 때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초청의 의미가 아니었다. 마치 도망칠 곳을 찾는 사냥감처럼.. 황후는.. 두려워하고,.,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갑자기 거부당했다는 생각이 들며 화가 머리끝가지 솟구쳤다. ‘이제와서 거부하는 건가?’ 거부해야할 권리가 있는 쪽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자신마저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런 감정을 일으킨 장본인이 아닌 바로 자신이 그녀를 거부해야 했다. 그러데.. 이제 와서 저런 태도라니... 더 이상 황후의 손아귀에서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여태껏 자신이 느낀 감정을 고스란히 맛보여 주고 싶었다. 황후의 계획된 행동에 말려들어 스스로도 혼란스러워 했던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그... 그건 맞지만..” 하연은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황제가 찾아온 것은 자신이 그를 불렀기 때문이다. 하지만..어째서 그가 자신의 침대위에 올라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 꿈에서는.. 아아.. 꿈이었어. 그건.. 레기어스가 그렇게 차갑게 이야기하고.. 돌아서던 건,, 전부 꿈이었던 거야. 갑자기 황후의 경계심으로 차갑게 반짝이던 눈에 스르르 힘이 빠지면서 몽롱하게 변했다. 마치 아름다운 환상이라도 보는듯 흑청색 눈동자가 황홀하게 빛났다. 경계하며 뻣뻣이 굳어있던 온몸이 예전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드러내며 황제의 시선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있었다. 붉은 입술이 살며시 떨리면서 살짝 들여올려지더니 아까 처음 보았던 그 행복한 미소가 얼굴위에 서서히 번져나갔다. 그리고.. 그것을 본 황제는 안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자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놀랐을 뿐이었다. 황제가 하연에게 손을 뻗었다. 갑자기 다가온 황제의 손에 하연은 그제서야 황제가 자신의 앞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두팔로 자신을 안자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됬다. 하지만.. 자신은 일단은 그의 부인이였기에 불편한 마음을 애써 숨기며 하연은 그가 하는대로 가만히 있었다. ‘정비를 고르러 왔으니 다른 짓은 하지 않겠지. 원래 사이도 좋지 않았다고 하고.. ’ 황후를 가슴에 안았지만 아까와는 달리 별다를 거부의 몸짓은 보이지 않았다. 부드럽게 황후의 머리카락을 휘감아오르는 손에 힘이 들어가며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에 손길이 거칠어지자 놀란듯 자신을 바라보는 황후의 시선이 닿아왔다. 서서히 황제의 얼굴이 하연의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연은 의외의 전개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있는 상황이었다. 잠시 얼떨떨하게 멍하니 앉아있던 하연은 곧이어 들려온 약간의 광소어린 황제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연기는 그만하면 된 것 같은데?" 그와 동시에 황제는 거칠게 하연을 내리 눌렀다. 그의 짧은 머리칼이 하연의 이마위에 느겨질 만큼 가까이 내려지고, 예고도없이 갑작스럽게 거칠어진 황제 때문에 하연은 정신을 차릴겨를도 없이 입이 막혀버렸다. 갑작스럽게 키스해오는 황제에게 하연은 당혹감을 느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우리 사이가 나쁜 것이 아니었던가? 벌려진 하연의 입으로 황제의 것이 부드럽게 들어왔다. 당황과 혼란에 어쩔줄 모르고 얌전히 있던 하연의 혀를 살짝살짝 건드렸지만 제대로 된 반응이 오지 않자 강하게 끌어당겼다. 지나칠 정도로 접근해 오는 황제에게서 당혹감을 느낀 하연은 움찔거리며 입안을 들어온 황제의 것을 밀어내려 했다. '제발 멈춰라. 난 네 진짜 부인이 아니라구.'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황제를 자극한 모양인지 자신의 것마저 집어삼킬듯 더욱 깊숙이 다가오는 황제의 자세로 보건데... 아무래도 키스만으로는 끝날 것 같지 않았다. 피해야 하는데... 황제의 몸은 자신이 밀어내기엔 너무나도 무겁다.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도 없어 하연은 살짝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번의 판단착오였던지 갑자기 키스를 멈춘 황제는 더욱더 격하게 자신의 몸을 하연에게 맞닿아 왔다.심지어는 그의 손이 하연의 가슴을 향해 미끄러지듯 다가오고 있었다. (저녁에.. 가능하면 또한편,,,예고한대로 오늘밤 이야기는 4편정도가 됩니다.-이제 2개..정도..) . "자..잠깐만.." 다행히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황제가 갑자기 몸을 들어 하연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마치 처음인것처럼 자신을 받아들이는 황후의 태도에 일부러 격하게 키스했지만 자신을 밀어내는 황후의 몸짓에 그만 자제력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키스만으로 황후를 굴복시키려던 생각도 자신의 몸 아래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마찰과 따스한 피부가 주는 감촉에 그만 어디론지 사라저버렸다. 오로지.. 한가지만을 생각하는 자신을 깨운 것은 떨리는 듯한 황후의 목소리였다. 그 순간 이성을 잃은 자신과는 달리 황후는 온전히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아차린 황제는 몸서리를 치며 황후에게서 몸을 떼었다. "나의 이런 모습을 보니 만족스럽겠군.” 자신의 계획에 이렇게까지 넘어가 욕망에 휘둘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만족스러운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황제는 이렇게까지 반응해버린 자신을 욕했다. 결국 저 여자의 계획대로다. 하지만. 대답이 없다. 고개를 돌린 황제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낯익은,,그러나 황후에게서는 처음보는 눈동자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어 억지로 황후의 방에 들던 때의 자신과 똑같은 눈동자가 눈물을 가득 담고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완벽한 거부, 꾸며낼 수 없는...아까 자신이 보았던 것은.. 그저 놀란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시선은.. 자신을 행한 것이었다. 어째서 그런 눈으로.. . 아까의 얼굴은 행복한듯 미소 짓는 얼굴은..항상 나를 향한 것이었는데. 가끔씩 자신의 친절한 행동에 황후가 그런 얼굴로 자신을 몰래 바라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무시했다. 그녀의 감정을 무시함으로써 작은 복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얼굴에 그 눈동자에 내 가슴이 이렇게나 아파오는..것인가.. “그대가 먼저 나를 부르지 않았던가? 어째서 그런 눈을 하지?” “전...” 하연은 말을 삼켰다. 자신이 사실은 황후가 아니라고 말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도 심지어는 그녀를 길러왔다는 네니도 자신이 황후가 아닌 가짜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지 않았던가. 황제는 분명 황후가 자신을 거부한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진짜 황후가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줄어드는 것이었기에 하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날더러 어쩌란 거야! 그렇다고 팔찌를 벗고 죄송해요 제가 황후인척 했어요. 했다가는 당장 모가지가 날라갈 지도 모르는데...’ 하연의 얼굴이 점점 울쌍이 되어가고 있었다. “...묻지 않는가. 그런 얼굴을 할꺼면 왜 나를 불렀지?” 황제의 눈이 매섭다. 그와 거의 동시에 방안을 비추던 달빛이 구름에 가렸는지 점점 들어오는 빛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방안은 서서히 다시 어둠속으로 가라앉았다. 다행이면 다행일까. 더 이상 황제의 무시무시한 눈초리를 받지 않아 내심 안도하고 있던 하연과 황제의 귀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후나 자신이나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것도.. 바로 황후의 침대 바로 위 황후의 옆자리이다. 황제의 눈이 가늘어진다. 누군가가 황후의 곁에서 자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황제가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날카로운 단도를 뽑아냈다. 예전부터 암살의 위협이 많았던 황제들은 대대로 자신의 몸을 스스로 방어해야만 할 일이 많았다. 그런 목적으로 항상 착용하게 된 이 검은 황제의 상징이나 마찬가지가 되었고 황제로 즉위한 이래 그는 한 번도 이것을 몸에서 떼어논 적이 없었다, 스르렁 그가 검을 꺼내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려퍼졌다. 황제는 지금 황후의 곁에 잠들어 있는 자가 누구인지도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황후의 곁에 있는 상대를 죽여버려야겠다는 생각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하연의 눈에 번쩍이는 칼날의 번득임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검이 자신의 옆에서 잠들어 있는 티르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자마자 몸을 날렸다. “안되!”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황후가 몸을 던져 상대를 감싼다. 멈추기엔 이미 늦었다. 그녀의 심장을 정통으로 향하고 있는 자신의 검을 멈추려했지만 이미 늦었다. 자신의 칼은 그녀의 심장으로 파고 들고.. 그리고 저 하얀 피부위로 붉게 피가 솟아오르며 순식간에 절명하고 말것이였다. 황후가... 죽게 된다!! 하지만 그 생각은 자신이 늘 기대하던 극도의 해방감이 아니었다. 심장을 죄이는 무거운 사슬이 스치면서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고 다가오자 그는 검을 놓았다. 맹렬한 속도로 자신과 함께 돌진하던 검을 놓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파아악! 붉은 피가 희디흰 이불위에 흩뿌려지고 점점히 번져나갔다. 황제의 어깨를 스친 검은 피를 머금어 붉은 빛을 띄고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어깨에 불이 붙는듯 통증이 온자 손을 대자 붉은 피가 방울방울 맺혀 떨어진다. 아무리 기다려도 검은 날라오지 않았다. 그제서야 하연이 황급히 고개를 들어 시트를 들어올린다. 붉다.. 티르의 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연은 그만 신음성을 내질렀다. “아..안되...” 자신의 몸에 깔린 티르의 몸은 아직은 따듯했지만..이불을 들어 올리는 하연의 손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 황후가 정작 피를 흘리는 황제인 자신은 돌아보지도 않고 몸을 던져 구하려한 상대를 먼저 찾는 것을 보고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거의 반라의 몸으로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을 때도 이런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닌가. 그녀의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니.’ 저 정도로 심하게 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들어 올리는 황후는 지난번처럼 일부러 보이기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니라 진심인 것 같았다.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그녀의 모습은 자신이 늘 바래왔던 일이건만. 조금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티르? 괜찮니?” 황제의 보랏빛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지금... 뭐라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거북스럽다. 자신의 말이 그런 식으로 들리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고 보니 사이가 좋지 않아도 두 사람의 관계는 부부이다. 게다가 반드시 후손을 보아야 하는 황제이니 밤을 같이 보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자신이 그렇게 거부를 했으니.. “그런 일이 이유가 아니라면 왜 날 부른거지?” 이미 방을 옮겨 불을 환하게 켜놓은 상태에서 보이는 황제는 불편해 보이는 시선이다. 그것이 자신이 황제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느낀 하연은 황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까 그런 일이 있고 나서니 도저히 황제를 하티라고 친하게 부르기가 힘들었다. “아버지가.. 황제의 정비를 고르라고 하셔서..” 정비? 그렇게나 반대하던 황후가 아닌가, 그녀의 아버지가 고른 정비도 싫다하던 그녀가 아닌가. 정비를 들인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것 때문에 자신을 부른 것이 놀라웠다. 그저 황후 마음대로 고르면 될 것이 아니가.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았다. “일단.. 골라놓기는 했는데.” 뻔했다. 말은 자신에게 선택권을 준다고 하지만 이미 골라놓은 것 중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분명 자신보다 외모가 달리고 자신에게 힘을 실어주지 못할 여인들만 골라놓았겠지. “그럼 빨리 끝내지.” 예상외로 황제의 반응은 담담했다. 원래 황후는 질투심이 많았다고 했는데 황제는 자신의 말에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듯했다. 하연은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미리 벽에 세워둔 대형 전신그림을 덮고 있던 천을 벗겼다. “......” “.. 일단을 외모 순으로 뽑아 놓았는데...” 황제는 말이 없었다. 뚫어져라 그림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하연이 살던 기준으로 일반적인 남자들이 좋아한다는 몸매에 자신이 보아도 숨이 막힐 것 같은 미인들로만 뽑아놓았지만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우였다. 황제의 눈에는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몰랐다. “..황제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것들도 많아요, 그러니까..” 역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황제는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아름다웠다. 단지.. 황후는 아까부터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황제라 했다. 왠지 신경에 거슬렸다. "이름을 불러라..." 자신의 말에 스스로도 놀랐다. 하지만,, 그녀의 입이 자신의 이름을 부를때 움직이는 리드미컬한 움직임이 보고 싶었다. 하연은 내심 황제가 단단히 삐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빨리 끝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이름도 잘 못 외우는 하연이 아닌가. 초상화에 있는 여인들의 이름을 다 외울 리가 없었다. 자신의 말에 심하게 난감한 표정을 짓는 황후의 얼굴은 별로 자신의 말이 탐탁지 않다는 것 처럼 보였다. 갑자기 일어난 황후 커다란 전신 초상화를 낑낑대며 들고서는 그림의 뒤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쪽은 파르미샤 공국의 엘르밈. 드 .파샤, 하리테임 수장의 여동생 엘르밈. 드 .파샤, 샤리엔느, 나이는 17, 취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라는 말에 아까의 표정을 보인 것이 아니었다. 왠지 안도감에 그는 낑낑대며 잘 보이지 않는 글씨를 읽느라 고생하고 있는 황후를 바라보았다. 눈을 살짝 찡그리고 잘 보이지 않는지 한참이나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 또다, 아까는 달빛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방안이 환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 이건 테아난 제국 사람이네. 페르난 . 듀이. 하투라 가문의 페르난 . 듀이. 알리샤. 이름이 참 예쁘네. 나이는 저랑 같은 동갑 16살이네요. ” “알리샤?” 어째서 그녀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라면 반 슈피르공작 파 중에서도 가장 노골적으로 공작과 맞서는 가문의 딸이 아닌가. 그것을 모르는 황후가 아닐텐데.. 자신이 이름을 부르는 내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황제가 그제서야 관심을 가졌다. 분명 마음에 드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마음에 드세요? 그럼 둘 중에 한명은 이 공녀로 해도 될까요?” “...상관 없겠지.” 오히려 기뻐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면 황후의 마음이 돌변할지도 몰랐기에 황제는 일부러 무덤덤하게 말했다. 하연은 일단 한명정도는 확실히 황제의 마음을 잡을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에 기뻐 환하게 미소지었다. ...아름답군.... 자신을 향해 환하게 미소 짓는 황후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로서 화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자 또다시 아까의 불쾌한 기분이 몰려왔다. 다른 부인을 들인다는데 저리도 기뻐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않아? “그럼.. 이분은 어떠세요? 제일 처음에 뵈었던 분인데. 그래도 한 나라의 국왕의 여동생이라면 제국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황제는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뽑아놓은 공녀들 모두가 상당한 지위의 여인들이었기에 특별히 누구를 고를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큰 짐을 벗었다는 생각에 하연이 황제의 옆으로 다가와 그가 고른 여인들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역시 아무리 봐도,, 정말 예쁘구나. 온몸을 타고 흐르는 저 우아함이라니.. 난 아마 절대 불가능할꺼야.’ 네니가 말한 바에 의하면 황후는 무척이나 우아하고, 세련된 움직임을 가졌다고 했다. 그리고 각종 예법이나 가지각색의 춤에도 능숙하고 승마실력도 뛰어난 그야말로 팔방미인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연은 그중 어느 것도 잘 해낼 자신이 없었다. “네니가 그러는데 이 공주님은 다른 나라에서도 청혼이 끊기지가.....” 황제는 더 이상 그림들을 보고 있지도 하연을 말을 듣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곁에 와 약간 거리를 떨어뜨리고 선 황후의 옆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이 때까지 정면 모습과 뒷모습밖에 봐서 몰랐는데 옆모습이 넋을 앗아갈 정도로 아름다웠던 것이다. 드러난 어깨와 목을 미끄러지는 우유빛 능선과 자신의 손에 흐트러진 매끄러운 촉감의 향기로운 머리카락이 날씬한 등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반듯한 이마를 따라 내려오는 오똑한 콧날, 다물려진 입술의 모양, 턱선을 따라 곧게 내려오는 목... 아까 자신의 격한 입맞춤으로 붉게 부풀어 오른 도톰한 입술...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열심히 설명하며 달싹이는 황후의 입술만을 황제는 한없이 바라보았다. 붉고 보드라운 입술.. 촉촉한 느낌..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야릇한 기분... 점점 황제의 이성이 달아나고 있을 때, 하연은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었고 황제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황제의 눈을 쳐다봤으나 눈이 마주치진 않았다. 하연은 곧 쉽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황제의 눈은 하연의 입술을 향하고 있었으니.. 눈이 마주칠 리가 없었다. 다시 하연의 머릿속으로 아까의 키스가 생각났다. 숨이 막힐 정도로 격하게 공격해 오던 황제의 입술... '이, 이런... 어떡한다지?? ..갑자기 이야기하다가 도망칠 수도 없고..' 하연은 이 새벽처럼 어두운 눈을 하고 있는 황제의 눈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황제의 뜨거운 시선에 마치 발가벗겨진 것 마냥 부끄러웠다. 황제 자신조차도 하연에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하연에게 키스하고 싶었고 그녀를 안고 싶었다. “저기.. 황제폐하?” 어색해진 침묵을 견디지 못한 하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뭐라도 말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내이름은 하티무르다.” “예?” 조금전 그때, 그녀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덥어버리고 싶었던 욕망 가운데.. 황후의 눈을 보았다.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였던 간에.. 강제적으로 할려면 할 수도 있었던 키스. 하지만.. 자신이 그녀에게 키스했을때 방금의 환하게 미소 짓는 얼굴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그를 제어했다. ..아까의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아. “황제폐하?” “...우리 둘만 있을 때는 그렇게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다.” 여전히 자신을 황제로 부르는 황후가 .. 이상하게 낯설었다. 마치 .. 완전히 다른 사람 같다는 느낌이었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이라도 자신의 손을 빠져나갈 것만 같은..착각이 들었다 하연은 그제야 황후가 공식석상에서도 황제의 이름을 불러댄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아차 했다. 아무리 어색하다고 해도 이름을 불렀어야 했는데. “알았어요, 하티무르 그럼..” 유쾌한 표정으로 황제를 향해 알았다는 대답을 하려던 하연은 갑자기 속에서 느껴지는 그때의 감각에 말을 채 잇지 못했다. ‘하.. 하필이면 이때.. 하루가 지나도록 아무일이 없기에.. 그 증상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된게.. 지난번보다..’ 갑자기 황후가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이 흙빛이 되어 입을 가리고 식은땀을 흘리자 황제는 당황했다. 무언가를 억지로 참는듯 고통스러운 표정의 황후가 허리를 구부리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여전히 두손을 입을 막고서는 무슨 일이냐는 자신의 말에 대답조차하지 못하자 황제는 하연을 안아 근처에 있는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시녀들을 부르는 금빛 줄을 잡아당기자 얼마지나지 않아 네니와 시녀들이 잠이 덜깬듯 눈을 부비며 나타났다. “..황제 폐하!” 그들을 부른 것이 다름아닌 황제라는 것을 알아채자 시녀들과 네니의 얼굴빛이 눈에 드러날 정도로 하야졌다.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황제의 옷매무새는 흐트러져 있었고 그뒤로 보이는 황후의 옷림도 마찬가지였다. “황후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제의 뒤에 놓인 의자에서 신음을 흘리고 있는 황후를 발견한 네니가 한달음에 하연에게로 뛰어갔다. 하연의 머리위로 흘러내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린 네니가 신음소리도 내지 못하는 하연을 보고 놀라 소리쳤다. “황후마마! 도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이 땀은..” 네니는 차마 다음말을 잇지 못했다. 약간 풀린 황후마마의 옷사이로 보이는 생긴지 얼마 안되어 보이는 붉은 자욱들, 그리고.. 양팔에 누군가의 것이 분명한 손자국,,황후의 몸에 이 정도로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 자신의 뒤에서 자신과 황후를 보고 있는 황제뿐이었다. “너무하십니다! 폐하. 황후님은 지난번 사고 이후 몸도 성치 않으신데 이리 만들어 놓으시다니요!” 감히 황제에게 이리 대드는 자는 없었다. 아무리 황후의 유모라 하나 네니의 지금 행동은 지나쳤다. 게다가 평소 황제의 칼 같은 성정으로 보아 분명 그냥 넘어가지 않을 터였다. 부드러워 보이지만 실은 조금의 조금의 아량도 베품이 없이 원리원칙대로 국사를 논하시는 분이 아니신가. “네니.. 제발.. 조용히 좀,,해.. ” 간신히 욕지기를 참고 있던 하연이 네니의 우렁찬 목소리에 속이 더욱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대꾸했다. “마마. 정신이 좀 드시옵니까? 아니.. 어디가 어찌 안좋으신겁니까. 지금 당장 신관을,,” 신관이라는 말에 하연이 깜짝 놀랐다. 아까까지 그리 심하던 고통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환상같은 경험을 하게된 하연은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이번에 또 그 마법을 받으면 분명 얼마지나지 않아 이 고통을 받게 될 것이 분명했다. “아..아니야. 신관이 와서.. 고칠만한,, 건 우욱.” 순간적으로 다시 속이 메슥거려오면서 하연은 그만 헛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다행히 저녁식사를 간단히 마친데다가 새벽이 가까워진 시간이어서인지 아무것도 게워내지 않을 수 있었다. 황후가 돼서 그런 추한꼴을 보일수는 없어, 안간힘을 다해 참았던 하연은 황후의 체면을 깎아먹지는 않게 되었다는 생각에 애써 그것을 감추지 않았다. “황후마마..” “괜찮아..네니 우욱,, 그냥.. 욱.. 저녁식사가,. 우욱..” 황후마마는 저녁식사의 탓으로 돌리지만 네니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피곤하다며 그냥 주무시려는 것을 억지로 독촉하여 간신히 빵 반조각만 먹고 잠드신 분이 아닌가. 빵 반조각에 체한 것도 말이 되지 않을뿐더러 아침이 다된 지금에서야 이리 증상을 보이신다는 것은 이 증상의 이유가 따로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자신이 맞잡은 황후의 손은 차갑기는커녕 따뜻하기만 했다. ‘설마...’ 단순히 헛구역질 이라고 하기엔 증상이 너무나 황후님의 어머님이셨던 하르트르님과 같았다. 그분이 하이네인님을 가지셨을때도 이리 괴로워 하신것이 여러차례였다. 헛구역질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워 하셨지만 반나절이 지나면 금새 원래대로 돌아오시곤 했다. '으윽.. 갑자기 마법에 알러지가 생겼다면 분명 의심할 텐데.. 어째 네니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은데.. 설마 눈치챈건 아니겠지.." 하연이 애써 둘러대는 것을 알리없는 네니는 황후의 증상에서 자신의 예상이 맞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 원하셨을 때는.. 얻지 못한 아기님을.. 기억을 거의 다 잊어버린 지금에야..차라리..미리 알았다면.. 그리 기억을 지워버리지 않으셨을 터인데..' 1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던 분이시다. 신관과 치료사들을 불러 백방으로 알아보았으나... 모두들 황후는 정상이라 하였다. 애타하며 어쩔줄 몰라하던 자신을 얼마전 따로 부른 황후님은 눈물을 흘리며 황제가.. 일부러 그리한다.. 말씀하셨다. 그러니 소용없는 짓이라고,, 자신을 안아도 한번도 끝까지 간적은 없다는 그분의 말씀에 그제서야 자신의 멋모르는 행동이 황후님께 얼마나 고통을 안겨주었었는지를 깨닿고 다시는 그에 대하여 입을 열지 않기로 결심했던 자신이다. 하지만.. 하필이면,, 이지경이 돼서야... “황후가 저리 괴로워 하는데 어찌 보고만 있는 것이냐. 지금당장 신관을 불러오너라,” 황제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달리 약간의 긴장감이 돌고 있어지만 신관을 부르는 황제의 말에 이 것을 어찌 숨길 것인가 고민하는 네니의 귀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황제에 대한 감정이 모두 사라지신 지금.. 그분의 아이를 가지셨다는 것을 알면.. 분명 황제께서는...’ 네니는 눈앞의 황제가 그날 밤 황후를 습격하라 지시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슈피르공작의 말이 아니더라도 대때로 황후를 바라보는 황제의 시선에서 살기를 느낀 자신이었다. 게다가 황후마마의 아이를 얻지 않으려 한 그동안의 행적을 볼때 이 사실이 밝혀지면 분명 지난번의 일이 다시 일어날 지도 몰랐다. “전하 신관님을 모셔왔습니다.” 마침 새벽기도를 하기 위해 궁내 신전으로 행하던 신관을 납치하듯 데리고 온 시종이 숨을 헐떡였다. 그리고 신관은 연유도 알지 못하고 부지불식간에 끌려온듯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신의 눈앞에 서있는 황제의 모습에 놀라 이마를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조아렸다. “황후가 갑자기 고통스러워하네. 도대체 왜 그런것인가?” 새하얀 신관복을 차려입은 신관의 모습은 보통의 병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천사로 보일 정도였지만 하연에게는 흰옷을 입은 악마로만 보였다. 자신을 보자마자 부르르 몸을 떠는 모습을 병의 증상으로 본 신관이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신성력을 모았다. “티텍티브 일니스 (detective illness)” 새하얀 빛무리가 하연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방금전 마법은 질병의 원인을 밝혀낼 때 사용하는 것이었기에 하연은 여전히 끙끙거리고 있었다. “...?” 자신이 느낀 이상한 감각에 신관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분명 질병은 아니었다. 단순히 체한것이라면 자신에게 그것이 감지되었을 것인데 아무것도 발견해 낼 수가 없었다. 신관은 고개를 갸우뚱 했다. ‘이상하군. 황후님의 몸에 두 가지의 다른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데.. 하나는 조금 더 큰 기운에 가려저 잘 느껴지지 않지만 분명 서로 다른 기운이 뭉쳐저 있다. 이런것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네니는 황후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신성력을 사용한 신관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을 보고 그가 무언가 눈치을 챘다고 생각했다. 황후가 누워있는 의자아래쪽에 무릅을 꿇고있던 신관이 좀더 황후를 살피기 위해 몸을 반쯤 일으키고 황후에게로 다시 손을 뻗는 순간 네니는 그의 손을 강하게 쥐어잡았다. “..이게 ..무슨?” 갑자기 여인이 자신의 손을 강하게 잡아오자 놀란 신관이 네니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그위에 떠오른 무시무시한 위협의 표정에 그는 귀신이라도 본듯 뻣뻣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께는 말.씀.드리지 않,는,것이 좋을 것입니다.” 마음약한 신관이 산전수전 다겪은 여인의 눈빛공격을 마주보고도 무사할 수는 없었던지라 그의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이 여인이 왜 이러는 지는 몰라도 분명 그녀의 말을 듣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기세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어서 말을 해보아라.” “...네? 아,., 저 그게..” 뒤에 서있는 황제에게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그의 손을 잡은 네니의 힘은 더욱 강해지고 있어서 비명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신관으로서 거짓을 말할 수는 없었던 터라 그는 뒤돌아보지도 못하고 땀만 흘리고 있었다, “황제폐하. 신관의 말로는 황후께서 아직 그때의 독이 덜 나은듯 하다 합니다. 여전히 독이 체내에 남아있는지라 앞으로도 몇 번 더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니 그리 심려하지 마시지요,” 자신이 언제 그런말을 했단 말인가, 신관은 기가 막혔지만 꼼짝없이 손이 이렇게 잡혀 있는 데야 뭐하고 다른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다행이라면 자신이 거짓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이제와서 걱정하는 듯 말하는 황제의 모습이 꼴도 보기 싫은 네니였지만 일단 이상황을 잘 넘겨야 했기에 적당히 둘러대었다.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황후마마의 이런 증상은 앞으로도 여러번 있을 것이고 그 때를 대비하여 이것으로 변명을 삼는다면 황제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말은... 황후를 죽이려한 놈이 무슨 걱정이냐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때의 일... 때문인가.’ 갑자기 저리 고통스러워 하는 것이 자신이 명했던 일 때문이라는 말에 황제는 망연자실했다. 애초에,, 살아날리 없을만큼 강한 독을 사용했기에.. 깨어날리 없다고 생각한 황후였다. 그런데. 너무나도 멀쩡해 보이는 모습에 잠시 그 독이 얼마나 강한 것이었는지 잊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는 자신을 바라보는 네니의 시선이 예전과 같이 곱지 않다는 것을 느꼈지만 황후에게로 한발자국 가까이 다가갔다. 황후의 얼굴색은 여전히 새파랬다. 이제는 숨마저 막히는지 숨소리가 끊겼다 이어졌다를 반복하며 전신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증상이 너무 심하지 않느냐. 뭐라도 해 보거라,” 자신이 쓴 독이 대신관이 와서도 어쩔 수 없던 그런 종류의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억지를 쓰는 황제였다. 고통스러워하는 황후의 모습을 보니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었던 것이지만 네니의 귀에는 곱게 들리지 못했다. 이제와서 병주고 약주려는 것인가. “..저 이런 경우에는 치료사들의 진통제라 하는 것이 있다 들었습니다.” “감히 황후의 몸에 그런 천한것들이나 쓰는 약을 쓰다니요! 절대로 그럴수 없습니다. 도대체 신관은 황후마마를 무엇으로 알고 그리 말하는 것인가? 대신관님도 환전히 해독 불가능했던 독이다. 약을 잘못 써서 또한번 그런일이 발생하면 그대의 알량한 목숨은 백개가 있다해도 부족할 것이다.” 치료사들의 치료는 신관을 만날만한 지위와 능력 안되는 자들이 이용하는 것이였다. 그러나 네니가 이리 지나칠정도로 요란을 떠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임신인줄도 모르고 치료사가 조제한 진통제를 복용했다 아이를 잃은 여인이 많다는 것을 한 때 마을의 산파 노릇을 하기도 했던 네니는 잘 알고 있었다. 신관의 말이 틀린것은 없었다. 이경우에 증상을 호전시킬 만한 것으로는 오로지 그들이 만든 진통제였지만.. 그것을 썼다가는 황후님은 유산을 하게될 것이 자명했기에 무슨 방법을 써서든 막아야 했고, 운없게도 그 희생물로 선택된 것이 이 신관이었던 것이다. ‘신관에게는 .. 나중에 따로 찾아가 사과를 드리고 자초지정을 설명하면 되.’ 다행히 날이 밝아오면서 황후마마의 증상도 많이 가라앉은듯 이제는 더 이살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자 황제가 네니의 말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착찹한 표정으로 나머지 시녀들을 전부 내보냈다. "...이제 좀 나아진것 같은가. 황후.“ “아니요!” 보통 이런 질문에는 아파도 괜찮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힐링을 써 자신을 이리 만들어 놓은 신관의 상판데기가 눈앞에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자 짜증이 치솟았다. 황제의 옆에 서있는 신관을 바라보는 하연의 눈동자에 원망으로 물들자 황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원망하는건가.....’ 하연은 그저 신관을 원망스레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지만 그가 황제의 바로 뒤에 서있는 지라 그것은 황제를 향한 감정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황제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지는 듯 하더니 잠긴 목소리가 여전히 황제의 뒤에 숨어있는 -하연의 눈에는-신관을 노려보는 하연에게 질문을 던져왔다. “그대를..이렇게 되도록 한.. 자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네니의 눈이 강한 빛을 담고 황제를 바라보았지만 황제는 오직 황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로지 그녀의 대답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듯이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하연은 또다시 욕지기가 몰려오는 것을 느끼자 참기 힘든 분노가 솟아올랐다. 다시 보니 저 신관은 꼭 쥐새끼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몸이 아프면 성격이 괴팍스러워지는 것은 당연했지만 하연은 그 정도가 심한 편이었고, 그런 와중에 황제가 질문을 던지자 그만 온갖 짜증과 분노 원망을 담아버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절대! 절대! 싫어요! 꿈에서라도 보기 싫은 놈이 있다면 바로 그놈일 꺼예요. 그런 무식하고 악독한 놈은 살아갈 자격도 없어요. 여러 사람 고생시키기 전에 차라리 없어져 주는게 이 세상을 위하고 저를 위하는 길이예요!!” 자신에게 회복마법 알러지가 있는 줄도 모르고 무식하게 자신을 괴롭히는 악독한 짓을 저지를 신관을 생각하자 열기가 얼굴을 타고 올라왔다. 저런 돌팔이 신관은 자신말고 여러사람을 고생시킬 것이 분명했다. 자신 이후에 나올 수많은 희생자를 생각하면 신관지위에서 당장 끌어내려야 한다는 것이 하연의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강한 반응에 황제는 잠시 말을 잃었다. 연신 숨을 씩씩거리며 주먹까지 부르르떠는 황후의 모습은.. 우습다고 볼만큼.. 얼굴과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 말에 담긴 단어 하나하나가 자신을 강하게 내리치고 있었다. “..용서할,,생각은 없는건가?”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황제가 떠나고 나서 네니는 그만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신관을 붙잡았다. 화들짝 놀라는 신관은 이번에는 또 무슨일인가 하여 괜시리 걱정이 앞섰다. 아직도 저 여인에게 잡힌 손목이 시큰거리고 있었다. “...황후님이 태기가 있으신듯 합니다.” 자신의 귀에 속삭이듯 말하는 네니의 말은 신관을 극심한 패닉 상태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황후궁 전속 신관으로서 그렇게 노력을 했음에도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던 그로서는 전혀 기대치 못했던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행여 누가 들을까 싶어 긴장한 빛이 역력한 네니의 표정을 보고 신관은 그녀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눈치챘다. 그리고 그제서야 자신이 느낀 그 이상한 감각이 새 생명을 품고 계시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확신한 신관은 네니를 안심시켰다. “걱정마십시오, 절대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치료사의 약의 쓰자는 것을 반대하셨군요.” 황제의 후손이 황후에게서 나오는 것을 원치 않는 이들이 알면 분명 황후마마의 신변이 위험해질 것은 자명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황후가 지난번 목숨을 잃을뻔한 사건도 증거는 없으나 그들의 소행임에 확실했다. “그리고..이미 황제에 대한 기억도 거의 잊으신 분인데.. 당분간은 황후마마께도 비밀로 해 주실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분은 아직 모르시는듯 합니다.” “..하지만.. 황제폐하께서 정기적으로 황후를 찾지 않으십니까. 그것은 어찌막는단 말입니까?” 황후의 몸의 상태를 알아차릴수 있을 정도로 몸에 손을 댈 만한 자는 몇몇 시녀와 신관인 자신 그리고 황제뿐이었다. 시녀들이나 자신은 입을 다물면 그만이었지만 황제가 찾아오는 것을 막을 방도는 없었기에 신관은 얼굴을 찡그렸다. “..슈피르 공작님께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황제의 정기적인 방문은 의무적이였다는 것을 신관은 모르고 있었기에 네니는 그저 그렇게만 말했다. 황제가 황후를 찾는 것은 강요에 방문이었다는 것을 다른 자들이 알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순진하기 짝이 없는 신관은 네니가 두려워하는 것은 반슈피르파가 아니라 황제 본인이라는 것을 모른채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갔다. “이 애는 안된다!” 평소의 딱딱한 검은색의 옷 대신 은빛의 천에 금색실로 가장자리에 단순한 선을 넣은 아름다운 정장을 갖추어 입은 슈피르 공작은 단호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공작이 부드럽게 컬진 보랏빛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올리는 것을 바라보던 하연이 역시 고집센 얼굴로 대답했다. “무.조.건. 해야되요!”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두 부녀의 모습이 놀라울 정도로 닮았기에 네니는 한숨을 쉬었다. 기억을 잃으셨지만 이럴 때 보면 황후님은 마치 예전의 어린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신 듯 했다. 그리고 결국 두 분 중에서 이기시는 분은 항상.. “알았다! 이 녀석, 결국은 내가 네 부탁을 들어줄거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이번에도 내가 물러서는 수밖에.” 16살이나 된 황후를 끌어않으며 아직도 딸을 물가에 내어놓은 어린아이처럼 바라보는 공작은 그러나 여전히 탐탁지 않은 얼굴로 하연이 골라놓은 두 개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저 그림이 거기에 섞여 있었는지는 몰라도... 알리샤가 궁으로 들어오게 된다면 문제가 조금 심각해졌다. 게다가 이 아름다운 얼굴과는 달리 성격이 고약하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공녀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 공녀를 택한 거냐? 물론 두 번째 파르미샤국 공주야, 더할 나위없이 괜찮은 상대이긴 하다만..” 최종선발에서 탈락된 것이 분명한 나머지 8장의 그림들의 공녀들은 하나같이 알리샤보다는 더 나은 외모에 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알리샤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황후가 객관적인 조건으로 가장 떨어지는 수준의 알리샤를 고른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 그거요? 다른 그림은 심드렁하게 보던 황제가 제일 관심을.... ” 자신더러 고르라 명한 공작에게 그만 사실대로 말해버리고 만 하연은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공작은 하연의 말에 오른쪽 눈썹을 한번 들어올렸을뿐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 안심한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확실히.. 그런것 같구나.” 황제가 가장 관심을 가진다는 것에 화를 냈을 황후가 오히려 그 상대를 선택했다는 것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지 않는 다는 뜻이었다. “앞으로 2주정도 남은 이번 대 연회 때에 이들을 참석시킬 수 있으려면 오늘 당장 사신을 보내야 겠구나. 알리샤는 그렇다 치더라도 네가 두 번째로 고른 왕녀는 테아난 제국에서도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파르미샤공국의 출신이니 말이다.” 지금은 늦가을이었고 대부분의 나라들이 제국으로 공물을 바쳐오고 1년간의 세금이 한 번에 수도로 모이는 시기였다. 눈코뜰새 없이 바쁜 이 시기가 끝나고 나서 열리는 겨울의 대연회는 각종 사냥대회를 겸한 제국 최대의 행사였다. 그리고 제국에 공물을 바치기 위해 참가한 수많은 사신과 그의 일행이 참가하니 만큼 그 화려함과 규모는 대단했다. 그리고 사냥구경을 좋아하던 자신의 딸이 가장 기다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황제께 올라온 진상품중에 렉샨공국의 명마가 한 마리 있다고 하더구나. 내가 따로 빼어놓으라 했으니 이번 연회에는 그 놈을 타도록 해라. 아마 가두행진을 할때 네가 그 말을 탄다면 분명 무척이나 당당해 보일 것이다.” 사실은 황제께 바쳐진 물건이었으나 황제는 말이나 사냥 따위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었고 실상 대부분의 명마들은 황후궁 소속의 마굿간에 들어 있었기에 공작은 가벼운 마음으로 말했다. 하지만 공작의 말이 길어짐에 따라 하연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지고 있었다. 황후와의 즐거운 면담을 마치고 황제에게로 발걸음을 옮기던 공작은 자신이 방에 들어가기 전에 제지가 귀뜸해 준 말을 생각해 내고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 원하던 일이 황제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린 지금에서야 일어나다니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은 황제가 황후궁을 찾지 않도록 막아두는 일이 중요했다. “일단은. 황제의 혼례 준비를 이유로 들어야겠군, 다행이 한창 바쁜시기이니..” “허리를 펴! 턱을 당기고. 이봐! 고삐를 너무 꽉 쥐지 말라고 했잖아.” 하연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정말이다. 하지만 슈마이츠는 한 번도 그녀에게 만족스러운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그는 하연이 말을 타고 하늘을 날아오르길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긴 해도 댄스는 어느 정도 진척을 보이고 있었다. 말 타는 건 아직 별 볼일 없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하연에게 있어 능숙하게 춤을 출 수 있다는 건 전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대단한 일이었다. 엄청난 몸치에다가 박자감각이라고는 전혀 없던 자신이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능숙하게 춤을 추게 될 수 있다니. 춤을 출 때 느껴지는 얼굴을 스치는 공기의 흐름이나 물결치듯 흔들리는 옷의 부드러운 감각에 매료되어 버린 하연은 더 이상 춤은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슈마이츠의 말에 약간 실망하고 있었다. “하연!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되! 앞을 보란 말이다, 또 다른 생각을 하는거냐." 자신이 여전히 말의 등위에 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은 하연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슈마이츠을 바라봤다. 슈마이츠는 바쁜 와중에서도 자청해서 자신을 가르쳐주고 있는 중이였다. 마술은 거의 다 할 줄 안다는 황후가 기초부터 배우기 위해 선생을 들인 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또한 입이 무거운 자를 찾기도 힘들었기에 슈마이츠가 오게 된 것이었다. 일단 겉으로는 마술실력의 향상을 위한 특별수련을 가장하고 있지만 하연이 배우는 것은 승마의 기본이 되는 평보, 속보 등의 아주 기초적인 것이었다. 현재 제국의 기사단을 훈련시키는 슈마이츠로서는 시간낭비나 마찬가지인 일이었으나 그가 화를 내는 것은 아주 다른 이유에서였다. 바로 하연의 실력이 도통 나아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평소엔 무척이나 친절한 슈마이츠는 하연이 말만타면 이렇게 돌변했고 그 이유가 자신 때문이기에 은근히 미안한 마음이 든 하연은 슈마이츠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얼빠진 미소 짓지 말고 앞이나 봐! 또 지난번처럼 떨어지려고 작정한 거냐! 내가 받쳐준다는 거 알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이번에 떨어지면 정말 모른 척 할 거니까 알아서해!” 슈마이츠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하연은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비록 지금은 저렇게 말을 막 하지만 하연이 정작 하연이 실수를 해도 정말로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는 일이 없었다. 지금도 하연을 바라보는 슈마이츠의 얼굴은 온통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슈마이츠가 놀랄 정도로 이해심 많고 다정하다는 것은 그가 말을 다루는 모습이나 연무장에서 기사들에게 검술을 지도하는 모습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의 사람은 성질이 급하다고 했는데 그것은 슈마이츠에게는 예외인 듯 했다. 특히나 그가 레드드래곤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말이다. 별로 진전이 없는 승마수업을 마치고 말을 타고 숲에서 돌아오는 길에 하연은 문득 말을 타고 달린다는게 어떤 기분인지 궁금해졌다. 지금까지 말을 타 왔지만 천천히 걷는게 다였고. 몸이 조금 흔들린다는 것 밖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던 것이다. 한없이 지루한 느낌.. 아마도 그것이 실력이 늘지 않는 가장 큰 원인이 분명했다. “슈마이츠?” 하연이 갑자기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을 몰아 자신에게로 가까이 다가오자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낀 슈마이츠는 하연을 돌아보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저 반짝거리는 두 눈동자와 갈망하는 듯한 눈빛 그리고 찬바람에 약간 달아오른 듯 붉게 반짝이는 얼굴이 말하는 것은 분명했다. “그런 얼굴로 간청해도 안되. 네가 원하는 건 들어줄 수가 없어.” “슈마이츠으으~~~ 으응? 한번만~~” 이제는 몸까지 꼬아가며 하연이 말을 몰고 슈마이츠의 곁으로 바짝 붙으며 칭얼거리자 슈마이츠는 꽥 소리를 질렀다. “안되! 지난번에도 그냥 평보에서도 떨어질뻔 했잖아! 꿈도 꾸지 마! 그대로 했다간 넌 축 사망이라고. 나한테 황후시해죄를 덮어씌울 참이냐?” 한번만 말을 타고 달려보고 싶다는 하연의 짐심어린 호소에도 불구하고 하연의 실력을 아는 슈마이츠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정말로 말을 타고 달려보고 싶었던 하연은 포기하지 않았다. 슈마이츠의 성격이 슈피르 공작이랑 비슷하다는 것을 이미 눈치채 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꼭 해보고 싶다구! 치. 슈마이츠 이젠 내가 싫어진 거지? 뭐야, 맨날 화만내구. 솔직히 말해, 내가 떨어질까봐 걱정이 되는게 아니라 실력이 떨어져서 날 못받을까봐 그런거지?” 슈마이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주먹을 불끈 쥐던 슈마이츠는 자신을 기대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하연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씨익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하연. 난 안넘어가. 포기하는데 좋을꺼야.” 자신의 계획이 전혀 먹혀들어가지 않는 슈마이츠를 보고 실망한 하연은 금새 풀이 죽었다. 어떻게 된게 거의 먹혀들어갔다 싶으면 번번히 빠져나가는 슈마이츠였다. 그런 하연을 약간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슈마이츠가 하연의 머리를 살짝 쥐어박자 하연이 아프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달려보고 싶어?” 슈마이츠가 살짝 미소를 담고 하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완전히 포기하고 있던 하연은 그의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신 너 혼자는 안되. 내가 너랑 같이 탄다.” 하연의 얼굴이 대번에 불만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슈마이츠를 아래위로 흝어보았다. 저 덩치랑 같이 앉을 자리가 어디있단 말인가. 게다가 이런 비실거리는 늙은 말로는 제대로 뛸 수 없음이 분명했다. 하연의 표정은 너무 생각이 잘 드러났기 때문에 슈마이츠는 하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챘다. “걱정마. 이번에는 내 헬리오스를 탈꺼니까. 성질이 좀 더럽기는 하지만, 네가 원하는 것 만큼은 충분히 달릴수 있을꺼야. 어디보자. 흠.. 향수냄새는 안나는군. 헬리오스녀석 종마라서 여자를 태워본 적이 없어서 그러지 그런 냄새에는 굉장히 민감하거든.” 하연의 목덜미에 코를 들이밀고 킁킁거리던 슈마이츠는 다행이라는 얼굴을 하고서는 턱으로 저쪽에 묶여있는 거대한 검은색의 종마를 가르켰다. 헬리오스는 하연이 타고 있는 말의 거의 2배가 되는 엄청난 체구에다가 연신 발로 땅을 긁고 있었다. 지난번 정벌전쟁때 얻은 말이라며 슈마이츠가 침을 튀겨가며 자랑하던 말이었기에 하연도 잘 알고 있었다. “슈피르 공작. 슈마이츠가 요즘 궁을 자주 찾는다더군요. 그리고 오늘도 찾아왔다 하는데 무슨 일입니까?” “아, 황후의 승마교습때문입니다만. 별거 아니니 곧 끝나겠지요,” 황제의 눈빛은 의심을 담고 있었지만 공작은 애써 태연한척 서류로 눈을 돌렸다. 황제가 슈마이츠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을 알고서 그를 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했을 뿐인데 슈마이츠 본인이 자청한 것이었지만 그 말을 믿을 황제가 아니었기에 공작은 그렇게만 말했다. “황후의 승마실력은 누구보다 뛰어날텐데 얼마나 대단한 마술을 배우기에 그러는 것입니까.” 황제의 말대로 황후는 제국내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승마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특별히 슈마이츠에게서 배우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것을 황제는 알고 있었다. 공작은 집요하게 물어오는 황제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다가 차라리 공격적으로 나가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사실은.. 지난번 사건도 있고 해서 슈마이츠 공작에게서 마술과 일종의 호신술을 배우고 있습니다. 딸애가 갑자기 배우고 싶다하여 혹시나 가르쳐주실 의향이 있으신지 물어보았더니 흔쾌히 승낙하시더군요. 황제께는.. 부탁드릴수 없는 일이라. 이리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황제의 얼굴이 약간 찡그려졌다. 본래 황후나 황제의 비빈들이 호신술을 배우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것을 배우자면 필연적으로 상대의 몸에 접촉해야 하는 일이 많았기에 대개의 경우에는 황제가 친히 사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때로는 그것을 가까운 혈족이 대신하기도 했지만 황후에게는 혈족이 거의 없었다. 황제에게 부탁을 할수도 있었겠지만 황제는 무예나. 무술에는 거의 조예가 없었다. 오히려 그쪽으로는 아는것이 거의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공작은 그 점을 지적하며 교묘히 말을 돌리고 있었다. “그래요? 잘됬군요, 황후를 만나본지가 꽤 되었고 슈마이츠 공작도 한번 만나볼까 했는데 한번 같이 가 보시겠습니까?” “...황후를 만나러 가신다면 제가 길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마 지금쯤 황후궁에 붙어있는 북쪽 사냥터에 계실테니 가 보시지요. ” 황제가 황후를 찾아간다 하여도 자신은 아무것도 찔릴일이 없다. 공작은 태연한 목소리로 친절하게 황제가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알려주었다. 황제의 눈이 자신의 얼굴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해 내고 말겠다는 듯 번쩍이고 있었지만 공작은 황제의 시선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북쪽 숲으로 간다.” 황제의 말에 근처에 서 있던 몇몇 귀족과 기사단이 빠져나가면서 복잡하던 방안은 조금은 숨통이 트일정도로 넓어졌다. 잠시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공작을 바라보던 슈피르파 귀족이 입을 열었다. “저대로 보내셔도 되겠습니까. 황제가 벌써부터 슈마이츠 공작을 끌어들이려다 실패한것이 여러차례이지 않습니까. 행여 황후님을 의심하기라도 하시면..” 황후와 황제의 관계를 잘아는 그였기에 그의 걱정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공작의 대답은 그가 과연 자신이 알던 슈피르 공작인지 의심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상관없네. 황후가 의심받는다면 오히려 좋을지도 모르겠지. 지금 상황에서 그런 의심을 당한다면 그나마 남아있던 잔정도 완전히 떨어져 버릴것이 아닌가. 차라리 그리 되었으면 좋겠군,” 공작의 얼굴은 진심이었다. .(어제 새벽에 올릴꺼 다 날려서.. 지금 올립니다.) 다시는 이런일이 안생기도록..1초마다 저장 모드로 바꾸었습니다. (어둠의 경로로 받은 것이라. 그런지.. 말썽이 심하군요-공공기관용) 공작의 말은 진심이었다. 약간 당황한 그의 귀에 오히려 다른 것을 걱정하는듯한 슈피르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보다는 티르라는 아이의 일이 먼저야. 거취를 분명히 해야하지 않겠는가. 황후궁에 머무를수 있는 것은 황후의 자식뿐이니..” 슈피르 공작이 눈앞에 놓인 서류를 옆으로 물리며 한숨을 쉬었다. 황후가 그 아이를 양자로 들이겠다 주장하고는 있지만.. 이후에 태어나게 될 황후의 아이가 그 티르라는 아이에게 밀려나게 되는 일은 막고 싶었다. “..아무래도 어미의 신분이 미천하니 정식으로 양자가 되는 것은 어렵겠지요. 그러나 분명 황제의 후손이니 다른 귀족가에 양자로 보낼 수도 없는 일이고. 남아있는 황족이라도 있으면 그리로 보내련만..” “자네..지금 뭐라고 했나?” “예?” 상대의 말을 무심결에 흘리고 있던 슈피르 공작의 얼굴에 환희가 떠올랐다. 이제 방법을 찾은 것이다. 황후의 후손들이 지위를 위협받지도 않고 아이를 지켜주겠다한 황후의 약속도 지키며 자신또한 지금까지 걱정해 왔던 후계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른 것이었다. “하하핫! 그 아이를 내 양자로 들이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을,,” 비록 어미의 신분이 미천하다 하나 분명 황제의 자식임은 부정할수 없는 강력한 증거로서 나타나고 있는 아이이다. 만에 하나 황제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해도 이미 딸아이의 마음이 떠나간 그 황제 따위야 폐위시키고 그 아이를 올려도 전혀 적통성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별 문제없이 황후가 아이를 낳아 대를 잇는다면 그 아이는 자신의 후계가 될 것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내 후계와 황후의 자손은 서로 형제간이 되는 셈이니 황권도 더욱 강화되겠지. 당장 일을 추진해야겠다. 처음부터 황후의 양자로 들일 생각만 하는 바람에 이것을 눈치채지 못하다니!’ 아직 황후궁에 있은지 3일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네니와 시녀들의 말을 들어보면 무척이나 영특한 아이라고 했다. 신관의 말로는 마법쪽의 재능도 특출나고 타고난 신체도 기본적으로 무골인 아이라 했으니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내 당장 황후궁으로 간다.” 그날 이후로 황후를 만나지 못한지가 사흘째였다. 공작의 말로는 자신의 혼례를 준비하느라 바쁘다 했지만 그 사이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황후궁을 들락날락 한다는 슈마이츠와 무슨 모의를 꾸미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이 이리 서두르고 있다고 그는 서두르고 있는 자신의 행동에 타당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어재서 갑자기 정궁을 한 번에 두 명이나 들인다 하고, 티르를 거둔다 하는 것인지... 게다가 공작은 그런 이유를 들었지만 황궁출입을 거의 하지 않던 슈마이츠가 어째서....’ 그 사건이 있기 전의 황후는 질투심이 많고, 상대에 대한 동정심 같은 것은 없는 여인이었다. 그러기에 그 티르라는 아이에게 그처럼 가혹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혼자서 상처받은 척은 다 했지만 결국은 갖고 싶은 물건을 얻지 못해 심술을 부리던 어린아이 같은 여인이었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날이후 황후는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전혀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행동이나 말이 달라져서는 아니었다. 예전에도 다른 사람들이 속아 넘어갈만한 연기로 종종 사람들을 골탕먹일 정도로 연기를 하던 여인이었다. 다른 사람은 속여도 자신만은 속일 수 없던 연기라는 한계를 가지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의 황후는 마치 그것이 본래의 천성이라도 되는 듯,, 너무나 자연스러운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그날 밤... 분명 다른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그저 욕망이라고 생각했던 그때의 여운은 아직도 그날 밤의 황후를 떠올리면 자꾸만 더해가 이제는 참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특히..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다른 남자의 이름을 부르던.. 것을.. 연상할 때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끈적 하고 기분 나쁜 감각이 온몸을 휘감아 오는 것을 느꼈다. “아직도 멀었느냐.” 약간은 초조한듯 황제가 옆에 있던 기사에게 물었지만 기사는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만 숙일뿐 대답이 없었다. 황후궁 전용의 북쪽 숲은 황후가 허락한 자가 아니면 들어올 수 없었고, 황제가 오간 것은 오로지 황후궁뿐이었던 지라 이곳의 지리를 잘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황후의 마굿간을 관리하는 자가 이쪽으로 향했다 하여 한참을 달려왔지만 황후는커녕 슈마이츠 공작이 항상 데리고 다니는 거대한 흑마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전하! 저쪽에 말의 발자취가 있습니다. 방금 지나간 것이 분명합니다.” 기사가 가르킨 곳을 보니 과연 두 마리 말이 지나간듯 편자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두 마리의 말이 거의 바로 옆에 붙어 달려간듯 나란히 새겨진 발자국을 본 황제는 아무 말없이 속도를 올려 달려나갔고 기사들은 영문도 모르고 황제를 따라 말을 채근하여 뒤따라 갔다. 슈마이츠가 헬리오스를 태워준다는 말은 굉장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슈마이츠 공작이 헬리오스를 자신이 직접 씻기고 먹인다는 점을 제외하고서라도 그 위에 자신외에 아무도 올린 적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면 말이다. 심지어는 슈피르 공작이 한번만 타 보았으면 좋겠다 운을 띄워도 완전히 무시하던 슈마이츠였다. 그러나 하연이 그 사실을 알리는 없었고 그저 슈마이츠가 태워준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이 타고 있는 황후의 말과 비슷한 덩치의 온순한 회색말에서 내려 하연에게로 걸어가던 슈마이츠는 무언가 다가오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하연에게는 들리지 않았지만 수많은 전장을 누비던 슈마이츠는 충분히 눈치챌 수 있을 정도의 소리였다. 가장 선두에 달려오는 말과 그리고 꽤 떨어진 거리에서 뒤이어 달려오는 말이 땅을 박차는 소리는 분명.. ‘황제가 오는 모양이군, 내가 이곳을 자주 오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오는 듯하군.’ “슈마이츠? 왜 그래. 나 혼자서는 못내 리는 거 알잖아.” 하연은 자신을 내려주기 위해 다가오던 슈마이츠가 갑자기 엉뚱한데를 보면서 움직이지 않자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하연에게 있어 천만 다행인 것은 말을 오르고 탈 때 여인들이 혼자서 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승마 때에도 풍성한 드레스를 입어야 하는 까닭에 말을 오르고 내릴 때 시종들이 발을 디딜 수 있는 것을 항상 가져다 주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시종이 없는 경우에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내릴 수가 없었다. “....귀찮은 손님이 온다.” 슈마이츠가 약간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누구? 여긴 황후의 말이 없으면 아무도 안온다면서.” 하연은 네니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슈마이츠가 바라보고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아닌게 아니라 저족 숲에서 무언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점점 다가오면서 형채가 분명해 지고 있었다 가장 선두에 있는 것은 까만 색 흑마였는데 그 위에 올라탄 사람의 머리키락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뒤따르는 자들은 기사들인듯 비교적 단순한 옷차림의 붉은색 상하의를 입고 있어 잘 알아볼 수 있었지만 선두의 남자로 보이는 자는 누구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황제다. 내가 전에 말했지? 황제가 날 자기편에 끌어들이려고 한다는거. 아마 내가 너에게 자주 찾아온다는 소리에 분명 이리 달려온걸꺼야. 아무래도 널 태우는 것은 다음으로 미뤄야겠는데.” “뭐어? 말도 안되!” 슈마이츠가 안되겠다는 듯 말하자 하연이 성을 냈다. 이제야 가까스로 말을 타고 달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저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황제 때문에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었다. 황제의 뒤를 이어 도착한 에른하임은 가장 먼저 도착한 황제가 말위에 올라타 차가운 시선을 황후에게 던지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시선이었지만 평소와는 조금더 그 차가움이 더했다는 사실에 에른하임은 약간은 안됬다는 시선을 황후에게 던졌다. 갑자기 도착한 황제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왠지모를 스산함이 든 하연은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는 슈마이츠를 손짓으로 불러 소근거렸다. “황제가 왜 저런 얼굴로 보는거지?” 황제가 도착하면 말위에서 내려 예의를 표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었거늘 황후는 말에서 내리기는 커녕 슈마이츠공작에게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엘른하임이 자신을 노려보는것을 눈치챈 슈마이츠가 한숨을 쉬며 하연의 귀에 속삭였다. “설마 그동안 배운거 다 잊어먹은 거냐. 황제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야지. 빨리 발 이리 내라.” 주위에 시종이 없는 관계로 가장 가까이에 있던 슈마이츠가 황후를 내려야만 했던 것이다. 보통의 경우 자신은 손으로 발을 디딜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관계였지만 늘 슈마이츠가 안아서 내려다 주는 것에 익숙했던 하연은 갑작스래 그런 방법을 취하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왜? 평소에는 그냥 안아서 내려줬잖아.” 남의 손을 밟고 내려서다니.. 아무리 그것이 예법이라고는 하지만 찜찜하기만 했던 하연은 약간 높아진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게... 저기 황제가 있잖아! 넌 네 남편 앞에서 그래야겠냐?” 슈마이츠가 약간 높아진 하연의 목소리에 기겁하며 최대한 작을 목소리고 속삭였지만 근처에 있던 황제와 그 뒤에 바짝 붙어 서 있던 기사단장인 에른하임의 얼굴은 이미 황후의 말을 들은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심상치 않게 붉게 변한 이 기운이라니.. 이럴때 슈마이츠는 상대의 감정을 색으로 볼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이 싫어지고 있었다. 자신이 처음에 하연을 보고 흥미를 느낀 것도 은색과 금색이 동시에 뿜어져 나오는 듯한 특이한 기운이 너무나 매력적이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것을 보지 못하는 자들도 은연중 이 빛에 끌리고 있으니.. 아무리 봐도 신기하단 말이야.' 잠시 딴 생각을 하던 슈마이츠는 평소와는 다른 찌를듯한 황제의 기운에 인상을 쓰고 있었다. 평소처럼 무심한듯 차가운 푸른색의 기운이 아닌 피로 물든듯한 짙은 붉은색. 그것도 자신을 향해 쏟아지고 있는 기운이 기분을 상하게 했다. “아얏!” 황제를 신경 쓰던 하연은 그만 슈마이츠가 내민 손이 아닌 허공으로 발을 디뎠고 그만 말안장에서 미끄러지듯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평소의 슈마이츠라면 그런 일이 일어나기 직전에 막을수 있었겠지만 그 또한 평소와는 달리 과격한 기운을 뿜어내는 황제의 붉게 일렁이는 기운에 신경을 쏟느라 미처 하연을 신경 쓰지 못했다. 슈마이츠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지려는 하연의 허리를 팔로 잡아내기는 했지만 완전한 것이 아니었던지 하연의 발이 바닥에 강하게 부딪치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지른 하연의 눈물이 고였다. 아무래도 발을 접지른 것이 분명했다. "괜찮은가?" 갑자기 아래로 미끄러지는 황후의 모습에 황제는 눈쌀을 찌푸렸다. 황후가 발을 헛딛을리가 없었다. 말이라면 마치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는 그녀가 아닌가. 어설픈 연기를 하는 황후였지만 보는 눈들이 있는지라 어쩔수 없이 걱정하는 척 물어본 것이다. "안 괜찮아요. 이게 다 누구... 아니예요 괜찮아요." 하연은 황제의 물음에 얼떨결에 황제를 원망하려는 대답을 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황급히 말꼬리를 감추었다. 그리고 억지로 웃으며 괜찮다는 말을 했지만 몸은 여전히 슈마이츠의 팔에 안긴 채였다. “제가 제대로 보지 않고 발을 내딛어서 그런걸요. 미안해요 슈마이츠” 황제가 자신의 허리를 잡고 있는 슈마이츠를 향해 심상치 않은 눈길을 보내자 하연은 그가 자신을 제대로 받치지 못했다는 이유로 화를 내고 있는것이라 짐작하고 재빨리 그를 감쌌다. 그리고 자신 때문에 황제의 분노를 받게 된 슈마이츠에게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사과했다. 다쳤다고 엄살을 피울줄 알았던 황후는 오히려 그녀를 붇잡고 있는 슈마이츠를 향해 얼굴에 홍조를 띄운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다정한 모습에 에른하임은 혀를 찼다. '저런다고 황제폐하가 눈이라도 깜박할리 없을 텐데.. 황후도 어지간하군. 이보다 더한 상황에서도 황제는 무심한 얼굴로 마음대로 하라는듯,.' “황후가 다친 곳이 없다하니 이제 황후를 놓아주어도 되지 않겠나? '...아무말도 하지 않았는데..?' 슈마이츠의 얼굴에 놀랍다는 표정이 어렸다.그것은 황제의 주위에서 말에 내려 서있던 엘른하임과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황후가 일부러 황제의 앞에서 저런 식으로 연기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오늘따라 그러고 있는 황후와 슈마이츠가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보는 황제를 그들은 놀란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에른하임들과는 다른 놀라움으로 황제를 바라보던 슈마이츠의 얼굴위로 어렴풋이 즐거움이 섞여 가고 있었다. 황제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 것임을 알 수는 있었지만.. 분명 이 기운은.. 평소와는 다른 색이다. 게다가 이 초조하게 흔들리는 파장은 분명,, ‘흐음.. 나를 찾아온 것 인줄 알았더니 정작 목적은 다른데 있었잖아? 이거 왠지 섭섭해 지는걸, 항상 황후보다는 내가 먼저였던 것 같은데.. 그리고 내 짐작이 맞다면 이 감정의 이름은... 분명히...어디 한번 실험해 볼까?’ 겉으로는 여전히 침착한듯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황제는 스스로도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분명 자신이 느끼는 지금의 감정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지 못함에 틀림없었다. “죄송합니다만. 황제폐하. 말씀대로 행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슈마이츠가 슬쩍 고개를 숙이자 황제보다 먼저 나서는 이가 있었다. “무슨 말이요! 황제폐하의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것이요 공작!” 에른하임이 벌컥 화를 내며 금방이라도 칼을 뽑아들 것처럼 슈마이츠 공작에게로 다가왔지만 슈마이츠는 태연하기만 했다. 슈마이츠의 팔에 안겨있던 하연은 갑자기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놀랐다. “아..아니예요! 슈마이츠가 그냥 장난하는거예요. 저리 비켜 슈마이츠 나 괜찮다니까..” 에른하임이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슈마이츠 공작이 장난으로 황제의 명을 거역한다니. 변명도 무언가 설득력이 있어야 했는데 황후의 말은 그것이 완전히 배재되어 있었다. 공석에서 농담은 커녕 흔한 장난한번 하지 않는 저 슈마이츠 공작이 장난으로 그랬을 리가 없다. “슈마이츠 공작! 황제의 명이 들리지 않는것이요!” 황제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슈마이츠는 자신이 잘못 판단했나 싶어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좀더 강수를 쓰기로 했다. “...그럼..” 슈마이츠가 잽싸게 하연의 몸에서 손을 때었다. 순간 하연은 왼쪽 발목에 격한 통증이 느껴지는 것을 느끼고는 그만 또다시 앞으로 쓰러질듯 비틀거렸다. “..이래서 제가 비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를 감싸주시기 위해서 괜찮다 하였지만 보시다시피 혼자서는 서 계실수도 없으시니까요.” 이제는 완전히 황후를 안은 자세가 된 슈마이츠가 빙그레 웃자 그제서야 상황을 판단한 헤른하임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도 무장이면서 어찌 황후마마의 몸 상태를 판단하지 못했던 것인가. 하지만 조금이라도 다치면 온갖 엄살을 피우던 황후가 어째서.. 저 슈마이츠를 감싸는 말을 하는 것인지... “아.. 죄송했습니다 공작전하. 제가 그만 오해를 했군요.”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고 물러서는 에른하임의 말에 뒤에 서있던 나머지 기사들도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 성격이 불같다는 슈마이츠 공작이다.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라 하나 에른하임의 무례에 칼을 휘두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싱글벙글 하는 슈마이츠공작의 얼굴은..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슈마이츠는 재미있어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이 하연에게 조금 손을 댈 때마다 파르르 떨리는 황제의 붉은 기가 무척이나 신기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방금 일로 하연이 완전히 자신에게 몸을 기댄 상태가 된 지금은 자신도 처음 보는 거대한 일렁거림이 황제에게서 뻗어나오고 있었다. ‘호오~ 얼굴은 무관심 그 자체인데 기만은 불 탈정도로 활활 타오르다니 정말 재미있군, 이거 점점 재미있어지는데? 저 차가운 기만 뿜어내던 황제가 말이야. 어지간하면 그만 두려고 했는데 이래서야 그만둘 수가 없잖아?’ 슈마이츠가 갑자기 씨익 웃으며 황제에게 정중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황제폐하. 아까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황후마마의 상태가 이러하니 응급조치를 취해도 되겠습니까? 소신이 아는 바는 많지 않으나 접골이나 탈골에는 상당히 조예가 있으니 지금 황후마마의 몸을 잠시만 저에게 맡기시면.." 슈마이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른하임이 말을 끊고 기쁘다는 듯 외쳤다. “그렇군요! 슈마이츠 공작의 그쪽 방면의 실력이야 기사단 전체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 아닙니까.” 슈마이츠의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실제로도 그의 응급치료는 유명 치료사에 버금갈 정도로 훌륭했고 자신의 기사단 일원 중에도 그의 신속한 처치로 경미한 부상으로만 끝난자가 있었기에 에른하임은 반색을 했다. "불허한다. 황후는 황족이 아닌가." 그러나 에른하임의 반가운 말투와는 달리 황제는 싸늘한 어조로 절대 허락할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억지로 멀쩡한척 하고 있지만 힘들어보이는 것이 분명한 황후의 모습에 에른하임은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슈마이츠가 그런쪽에 조예가 깊다는 말에 신관의 끔찍한 부작용을 가져오는 치료마법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에 반색하던 하연은 반대하는 황제의 말에 금새 기분이 다운되고 있었다. 자신이 아픈게 아니니까 저런 말을 하는거라 생각하니 발목이 더 아파오는 것 같았다. "그럼 계속 이대로 있어야 하는 건가요? 황제폐하." 반쯤은 자포자기하고 반쯤은 짜증이 난 목소리였다. 자신을 행하여 신경질을 부리는 황후의 모습에 황제는 갑자기 숨이 막혔다. 자신을 떠보기 위해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 한참만에야 나온 목소리는 자신이 생각에도 어색할 정도로 굳어 있었다. "...당장 황후궁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도대체.. 제가 이 상태로 어찌 말을 탄단 말입니까! 폐하께서 저를 짊어지시고 가시게요?" 자신을 원망하는 듯한 황후의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아무래도 이상하다. 평소와는 다른 심장박동도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시선도.. 황후를 안고 있는 슈마이츠의 손을 당장이라도 떨쳐내고 싶어하는 이 손을.. 이해할 수가 없다. “....나와 함께 타도록 하지.” 분명 평소의 자신이라면 슈마이츠를 끌어들이려는 것이 분명한 황후에게 분노의 감정을 느꼈을 것인데.. 오히려 그녀의 보호하는 듯한 시선을 받고있는 슈마이츠를 향한 이 이상한 감정에...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하고 있다. 가장 먼저 황제의 말에 놀란 것은 에른하임 무리였다. 자신들에게 맡겨도 충분한 일을 황제가 자청하고 있는 것도 놀랐지만 약간 주저하는 듯한 황제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낯설었기 때문이다. “..함께?” 하연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대답했다. 황제와 한말에 타라고? 자신이 방금 타고 있는 말보다 조금더 클뿐인 말인데다 안장도 1인용이다. 아무리 황제와 자신의 덩치가 여기있는 다른자들과 비교할 때 외소하다 하나 황제와 같은 말을 타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싫어요라고 대놓고 말할 수도 없는일.. 하연은 한참이나 황제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노려보았다. ‘저 손으로는 자기가 탄 말 하나도 제대로 몰수 있을까? 가다가 둘이 같이 쓰러지는 거 아니야?“ 거의 자신의 손가락만큼이나 곱고 하얀손이다. 아무리 봐도 슈마이츠의 크고 단단한 손과는 차이가 있다. 게다가.. 말도 슈마이츠의 것에 비하면.. 턱없이 작다. 하연의 불신이 어린 눈이 황제의 손으로 향한채 움직이지 않았고 그런 하연의 시선에 황제는 자신도 모르게 변명처럼 대답했다. “슈마이츠만큼은 못하지만.. 그대하나 정도는 태우고 갈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름대로는 황후에게 신뢰를 주기 위한 말이였지만 황후에게는 오히려 변명처럼 들리는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깊어진 불신의 빛으로 물든 황후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황제를 훑었다. “...차라리.. 슈마이츠랑 같이 가지요, 그편이 좀 더 믿음직스러울 것 같네요.” 하연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거부의 의사를 보이는 순간 황제의 어깨가 꿈틀거렸다. *랜덤타다 발견한 글입니다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의 가치는 나의 가치는 내가 결정한 것을 넘어서지 못한다. 나의 가치는 남이 결정한 것을 넘어 설 수도 있다. 때로는 나의 가치가 남이 결정한 것보다 형편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가치는 결국 내가 결정한 것만큼만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의 가치를 내 스스로 가치있게 만드는 일이다. 남이 나를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옹졸함보다 나에게 스스로 나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절실하다. 나는 때론 내가 가치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형편없이 비하하여 삶의 의미를 상실할때도 있었다. 죽고 싶을때도 있었다. 나의 가치는 우주의 모든 재보보다 소중하다고 깨달을수 있을까. 나의 가치는 내 마음이 결정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마음의 성장이 중요한 것이다. 추하던, 아름답던 다만, 마음의 방향키를 잡은 나의 손에 달렸다고 본다. - 김용화 <나의 가치에 대하여> - 한때.. 자신의 가치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었지요 나라는 존재보다는 나를 만들어준 존재들과의 관계에서만 나의가치는 존재하지 않는건가. 그들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가. (지금은.. 무시하고 삽니다. 무시...라..그건.. 아니지만..) ‘어떻게 날 버리고 갈수 있어! 슈마이츠! 내가 나중에 그냥 두나 봐라!’ 자신이 슈마이츠와함께 가겠다는 말을 끝내자마자 슈마이츠는 갑자기 씨익 불길한 미소를 하연에게 지어보였다. 그리고서는 매우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잊고 있었지만 브로만 공작과의 급한 볼일이 있다며 황제에게 자신을 떠맏기고는 뭐라 말하기도 전에 헬리오스를 타고 사라져버렸다. “..이젠 어떡할 셈인가 황후.”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아드레날린이 온몸으로 분출되는듯 호흡이 거칠어지는 하연과는 달리 황제의 표정은 아까보다 훨씬 편안하게 바뀌어 있었다. 슈마이츠가 만나러 간다는 브로만 공작은 어제부터 어딘가 다녀온다며 황궁을 비운 상태여서 그의 말이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에른하임과 함께 타고 가지요.” 에른하임은 황제의 시선을 그대로 받고는 굳어져 버렸다. 황제가 친히 자신이 태워다 주겠다고 하는데도 황후는 자신을 선택했다. 심장에 얼음화살이 박히는 듯한 느낌에 그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 말은.. 저 하나 태우기도 힘들고.. 다른 기사들의 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말이다. 슈마이츠 공작의 헬리오스정도의 크기는 되지 않지만 황제를 지키는 기사들이 타고 있는 말이다. 풀 플레이트를 걸지고 탄다 해도 거뜬히 전장을 누빌 수 있는 말이지만 에른하임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에게 날라오는 시선만으로 얼음화살로 뒤덮힌 고슴도치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애른하임의 말에 하연이 목을 돌려 등뒤에 서 있는 황제를 올려다 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상당히 격해 보이던 황제는 이전처럼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에른하임의 말대로라면 자신에게 주어진 최후의 선택은 황제뿐이었다. 그나마 황제의 말이 더 크고.. 타고있는 사람의 체구도 더 작았으니까. 어짜피 혼자서는 말을 탈 수 없는 상황에서 오기를 부려보았자 손해보는 것은 자신이었다. 차라리 조금 불편해도 황제의 말을 타고가는 편이 나았고 그렇게 된 이상 더 이상 인상을 구길 필요는 없었다, 하연이 할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럼...” 황제는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먼저 말에 오른 황제를 대신하여 하연을 부축하고 있던 에른하임이 가벼운 몸짓으로 황후를 황제의 앞쪽에 앉혔다. 안장의 크기가 작았던지라 황제와 완전히 밀착되어버린 하연은 내심 불편한 기색을 감출수가 없었다. 혼자만 앉기에도 좁게 느껴지던 안장이다. 게다가 앞을 본 것도 아니고 옆으로 앉아 있으려니 금방이라도 말안장 아래로 미끄러질것 같았다. ‘으윽.. 너무 높잖아. 게다가 잡을 것도 없고.’ 하연은 한참이나 꿈틀거리면 조금이라도 안정된 자세를 취해보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오히려 황제의 품에 더욱 안겨버리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옆으로 앉은 자세 때문에 황제의 한쪽 허벅지 위로 두 다리가 얹혀진 상황에서 붙잡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설마.. 조금 잡는다고 해서 황제의 옷이 찟어지지는 않겠지.’ 이상하게도 고급의 옷일 수록 잘 찟어진다는 이상한 경험을 많이 한 하연으로서는 황제의 새하얗고 부드러운 천에 은은하게 금색 나무줄기의 무늬가 박힌 옷의 강도가 심히 의심스러웠고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얼마나 얇은지 보려고 손바닥으로 살짝 쓸어보았다. 겉보기에는 두터워 안이 전혀 비치지 않던 옷은 상대의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얇았고 갑작스런 자신의 손길에 놀랐는지 황제의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낀 하연은 재빨리 손을 치웠다. ‘뭐야, 겉보기에는 두꺼워 보이더니 굉징히 얇잖아? 하마터면 큰일날뻔 했네. 그걸 잡고 갔으면 분명 중간에 땅바닥으로 굴렀을거야.’ 하연은 어쩔가 하고 망설이다가 결국은 황제의 허리에 손을 두르기로 했다.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남자의 허리를 감는다는 것이 어색하기는 했지만 그 어색함은 황제도 마찬가지인듯 약간 주저하듯 몸을 뒤로 빼는 것이었다. “뭐하는 건가.” 아까부터 연신 불편하다는 얼굴로 자신의 허벅지 위에서 몸을 비트는 것에 자극되어 억지로 참고 있는 와중에 황후가 자신을 안으려는듯 고개를 숙이고 가슴에 머리를 기대어 오자 가슴에 느껴지는 따스한 피부와 부드러운 맥박에 몸에서 열이 오르기 시작하고 호흡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진다. “...싫어요?” 하연이 실망한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황제를 잡지 않으면 무엇을 잡으란 말인가. 한손으로 말의 갈기라도 잡아야 한단 말인가? 겨우 허리좀 빌려주는거 가지고 치사하게 굴기는.. “누가 좋아서 그러는줄 알아요? 그냥 옷만 잡으려고 했는데 찟어질 것 같아서 그랬던 거라구요... 싫으면 안하면 되잖아요.” 순식간에 황후의 몸이 떨어져 나가고 더 이상 그녀의 두근거리는 심장의 느낌도 부드러운 몸이 주는 황홀한 여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진 황후의 말에서 느껴지는 것은 약간의 실망. 황후가 자신을 껴안은 것은 그저 몸을 지탱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출발한다.” 그나마 잡을 만한 것은 안장의 앞쪽에 솟아오른 부분뿐이었기에 하연은 몸을 비틀어 두 손으로 그것을 꼭 잡았다. 다리는 옆을 보고 있는데 몸을 90도로 돌려야 하니 상당히 힘들었지만 저 쫌생이 황제에게 부탁한다는 말은 하기 싫었다. 황제는 말을 모는 내내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나마 한 두마디 하던 하연도 아무런 대답없이 혼자만 하는 이야기에 지쳐 입을 다물어 버려, 숲을 절반쯤 벗어날 때까지 불편한 침묵이 지속되던 참이었다. “...지금쯤 말을타고 달리고 있었을 텐데..” 황제의 갑작스런 등장에 기대하고 있던 것이 완전히 날아가버리고 이런 불편한 침묵 속에 최대한 자신과 몸을 접하려 하지 않는 황제와 같은 말을 타고 가야 한다는 상실감이 갑자기 밀려오면서 하연은 큰 한숨과 함께 들릴 듯 말듯 중얼거렸다. 순간 핫, 하는 기합이 갑자기 머리 위에서 들리더니 황제가 말의 옆구리를 힘 있게 박찼다. 이에 놀란 듯 말이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황제의 돌출행동에 놀란 에른하임과 기사들도 말을 채근하여 조용하던 숲은 말이 내뱉는 거친 숨소리와 땅을 파헤치는 말발굽소리에 시끄러워졌다. 그 속도감과 말 등위의 격하게 흔들리는 불안전성은 하연의 상상을 뛰어 넘었고, 이에 기겁한 하연은 화들짝 황제의 허리를 붙들었다. 게다가 그 순간 황제가 재차 말을 다그쳐 속도는 더욱 빨라지게 되었다. ‘갑자기 이렇게 속도를 높이다니.! 게다가 이건..내가 생각한 거랑은 너무 다르잖아?’ 하지만 더 이상의 생각은 곤란했다. 달그락거리는 리듬감 있는 소리가 전개되던 말발굽에선 들소가 돌진하는 듯한 기세의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게다가 말의 덥혀진 체온에서 흘러나오는 열기가 확 끼쳐오며 본격적인 말의 질주가 시작되었다. 말안장을 사이로 말에게서 전해지는 진동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온몸이 흔들리고 심지어는 정신마저 흔들리는듯 옆으로 스쳐지나가는 사물들에 전혀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사색이 된 하연은 이젠 거의 황제에게 매달리는 형국이 되었다. 그저 자동차정도의 속도로만 생각했던 하연은 경악했다. 조용하게 귓전을 간지럽히던 숲의 미풍은 사납게 휘몰아치는 돌풍으로 변해 하연의 치렁치렁한 옷자락을 물어뜯을 듯 거침없이 헤집었으며, 격한 흔들림에 어느새 풀어져 미친 듯 나부끼는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렸다.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한 착각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떨어질것만 같다는 공포뿐이었다. 하연은 정신없이 무작정 황제의 품안에 고개를 파묻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뛰어오르는 자신의 심장소리와는 달리 황제의 맥박은 평소보다는 약간 빠르고 뜨거운것 같기는 했지만 자신의 것에 비하면 굉장히 안정적이었다. 자신은 이렇게 겁에 질려있는데 멀쩡하게만 보이는 황제가 원망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손을 놀수도 없는 처지여서 하연은 여전히 그를 꼭 안은채로 있어야만 했다. ‘..이상하군, 이 정도로 그렇게 질린 얼굴이 되다니.’ 자신 때문에 승마를 즐기지 못하게 되었다는듯 실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황후의 말에 어째서인지 자신은 별로 즐기지도 않는 속도감을 내기위해 말을 박찬 것이었다. 자신의 얼굴로 날아오는 황후의 길고 윤기나는 머리카락이 주는 친근한 느낌에 그는 오랜만에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황후궁에 도착할때까지는.. 계속 이렇게 가야겠군.’ 하연이 정신을 차린 것은 주위의 공기가 잔잔해지고, 질풍처럼 내달리던 발굽소리와 말들이 내는 거친 호흡이 누그러든 이후였다. 말이 낙엽을 버석이며 밟는 작은 부서짐의 소리와 나뭇가지를 스치는 자연스런 바람이 내는 소리가 점차 확연히 귓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것은 하얗게 빛나고 있는 익숙한 건물.. 황후궁이였다. “황제폐하.? 어째서 황후마마와 함께..” 평소와는 달리 궁안까지 말을 몰고들어온 황제의 예고없는 방문에 놀란 궁안 사람들이 튀어나왔고 그들의 경악하는 듯한 시선에 하연은 그제서야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었다. ‘이..이런..’ 그순간 하연은 자신이 아직까지 내가 황제의 등허리를 잔뜩 움켜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얼굴을 붉히면 재빨리 몸을 때었다. “아야!" 갑자기 머리채가 당겨져 눈물이 나올정도로 아파왔다. 아까의 과격한 말의 흔들림으로 풀린 머리카락이 황제의 옷을 고정시키는 핀장식에 걸린모양이었다. 게다가 머리의 윗부분이라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었다. 누가 풀어주기 이전에는.. “잠시만 기다려라.” 말의 고삐에서 손을 뗀 황제가 엉킨 하연의 머리를 천천히 떼어내고 있었다. 황제가 마치 소중한 것을 다루듯 황후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어루만지고 있음을 알아차린 시종과 시녀들은 저마다 놀란 얼굴로 서로 속닥였다. 어쩔수 없는 공식석상에서 친근한듯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저렇게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듯한 세심한 손짓을 하는 황제를 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고 비웃는것 처럼 느껴진 하연은 눈을 찌푸렸다. “됬어요. 그냥 잘라버리면 되죠. 이런 귀찮은 것 벌써부터 자르려고 했는데..” 별로 애착도 없는 머리카락이였다. 움직일때마다 걸리고 감을때마다 얼마나 귀찮은지 몰랐다. 게다가 머리단장을 이유로 하루에도 수천번씩이나 빗질을 해대는 통에 차라리 이번기회에 확 잘라버렸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안돼.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갑자기 황제의 손동작이 멈추더니 강압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에 따르지 않으면 더 이상 머리카락을 풀어주지 않을것 같아서 하연은 약간 불만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어요. 어서 이거나 풀어주세요. ..다들 보고있는데서 이러고 있어야 하다니.. 누가 보면 우리가 서로 엄청나게 사랑하는 것처럼 보일텐데 우리가 그렇지 않다는건 만인이 아는 사실이잖아요. 얼마나 웃기게 보이겠어요?” “..웃기게 보인다..?” 순간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풀어내던 황제가 손을 뻗어 아프게 하연의 어깨를 쥐어왔다. 급작스레 변한 황제의 위험스러운 기운을 품은 낮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하연은 이에 대꾸하지 않았다. 사실 틀린말도 아니지 않는가. 돌연 하연의 팔이 뒤에서 거칠게 낚아 채였다. 순간 아까의 과격한 질주에도 차분하던 황제의 숨소리가 격하게 얼굴로 다가왔다. “뭐예요?.. 무,, 무섭게 노려보고... 내가 거짓말이라도 했으면 모르지만..전부 사실이잖아요.” 약간 떨어져 있는 자들에게는 들리지 않고 오직 하연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직한 목소리가 위험하게 속삭였다. “모르는 모양인데. 황후와 황제는 공식석상에서는 항상 행복한척 연기해야 된다고 말한건 당신이 아닌가?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때인것 같군,” “그.. 그래서요?” 왠지모를 불길함에 하연이 몸을 떨었다. “뭐라니. 그럼 내가 그대에게 키스해야 하는건가? 항상 먼저 다가온 것은 그대였는데. 그리 하지 않는다면 분명 저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비명이라도 지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행복한척 연기하라고? 황후가 황제한테 그랬단 말이야? 게다가... 내가 먼저? 저 황제한테 키스해야 한다니.. 이게 설마.. 꿈은 아니겠지.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한번도 비켜가는 적이 없는거야. 이럴줄 알았으면 머리카락 따위야 네니가 아무리 반대해도 그냥 잘라내는 거였는데. 키스라니. 강제도 당한 적은 있지만 상대에게 하는 것은 처음이다. 게다가 조금의 감정도 없는 상대에게 하는 키스라니. 하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갔지만 황제는 조금도 양보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하지 않으면 자신이 의심당할 것은 너무나 뻔했기에 하연의 눈은 점점 차가운 공포로 얼어가고 있었다. ‘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그냥 볼에만 살짝 대면 되지 않을까? 아냐.. 그런건 그냥 인사로도 하는 거잖아. 아니.. 그보다도 손은 어떻게 하지? 젠장. 저 입술에다가 해야되는거야? 으윽... 진짜 싫다. 차라리 그냥 확 바닥으로 떨어져 버려? 하지만.. 분명 그 신관의 힐링을 받으면 밤새도록 토할텐데... 하지만 역시 황제와 키스라니.. 그것도 싫고..’ 바닥을 보았지만.. 아까와는 달리 흙이 아닌 대리석 바닥이라 떨어지면 분명 엄청난 충격이 올것이 뻔했다. 재수없으면 뇌진탕이 일어난다던가 팔이나 다리가 하나 부러질지도 몰랐다. 하연이 살짝 바닥을 바라보며 뛰어내릴까 고민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하연의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기에 하연은 두 번째는 포기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황제에게 키스할 엄두는 도저히 나지 않아 두 번째 방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하연은 한참이나 바닥을 바라보았다. ‘할..수 없지. 그냥 눈 딱감고 입만 대고 떨어지면 되. 용기를 내자! 하연.’ 마지막 전투를 목전에 둔 기새로 눈을 뜬 하연은 굳은 의지를 다지고 황제의 차가운 보라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손을 황제의 가슴에 대었다. 여전히 옆을 보고 있는 상황에서 그를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산넘어 산이잖아. 왜 저렇게 멀리 있는거야?’ 황제의 얼굴이 너무 멀리에 있었다. 자신과 머리 2개는 차이나는 황제이다 보니 몸을 돌렸을때 닿는 것은 황제의 가슴뿐이었다. 그렇다고 손을 내밀어 그를 당겨 키스를 할만큼 뻔뻔하지 못한 하연은 거의 울쌍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보랏빛 눈은 이제는 어두워서 거의 검은색으로 보였다. 게다가 시간을 끄는 자신의 모습에 화가났는지 어개에 가해지는 힘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냥.. 하는척만 하면 안되요? 꽤 멀리 있으니까..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은데..” *랜덤타다 발견한 글입니다. 읽지 않으셔도됩니다 너부리의 설교. 도대체 곤란한 걸 왜 그렇게 곤란해 하는거냐? 살아가는 게 그렇게 힘드냐? 누가 힘들다고 하면 힘들어지는 것 같지 않냐? 밥 먹고 돌아다니고 자고. 밥 먹고 돌아다니고 자고. 죽을 때가 오면 죽을 수 밖에 없잖아. 그게 뭐 그렇게 어렵냐? 보노보노의 질문. 그런데, 너부리야. 난 왜 곤란해 하는 걸까? 너부리의 대답. 그건, '곤란해지고 싶지 않아. 곤란해 지고 싶지 않아' 라는 생각을 해서 곤란한거야. 보노보노. 생물은 절대 곤란한거야. 살아있는 한 절대 곤란한거야. 곤란하지 않게 사는 방법 따윈 절대 없어. 그러니까 곤란한 것은 절대 끝나지 않아. 그래, 이젠 조금 진정하고 곤란해 할 수 있겠니?, 집에 가자. 곤란해지고 싶지 않기 때문에 곤란해진다..(가슴에 와닿는 군요, 왜일까) .(.대사가 많은 관계로 별로 시간이 안걸려서 올릴 수 있었습니다.) “브로만 공작. 여긴 어쩐일 이신가요?” 황후의 궁에는 슈피르가 예상치 못한 손님이 이미 먼저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상대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다 해도 같은 공작이기에 슈피르는 반경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전에는 보지 못한 날카로운 인상의 잿빛머리카락에 우울한 회색을 띤 눈을 가지고 있는 건장한 남자가 서 있었다. 무척이나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인상을 주는 사내였기에 공작은 호기심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 저자는 누구 길래 공작의 옆에 서 있는 것이오?” 자신이 들어왔는데도 그 사내는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고 있어 조금 눈에 거슬리고 있었다. “웨어울프 족의 아이입니다. 예전에 제가 그 일족을 저의 영지에 거둔 일 은 기억하시고 계시겠죠. 그때 신의의 증표로서 일족의 수장이 인질로 넘긴 아이입니다. 지난번 황후께서 당하신 일도 있어 제가 그분의 개인시위로 드리기로 약속하였었죠. 조금 늦었습니다만 이리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담담히 말하는 브로만 과는 달리 슈피르 공작은 놀란 듯 다시 한 번 그 회색의 사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웨어울프 일족이 아무리 구해준 자에 대한 충의가 뛰어나다 해도 만월의 밤에는 본래의 늑대로 돌아가지 않소. 게다가.. 저 눈을 보아하니 상당히 순수혈통에 가까운 것 같은데 나중에 일족과 일이 틀어지지 않겠습니까.” 웨어울프족이라면 그 전투력과 놀라운 회복력으로 인해 과거부터 노예 겸 호위로 사용하기 위해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이제는 그 수가 얼마 남지 않은 귀중한 존재였다. 일족의 생존을 위협받던 그들이 절대로 타부족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는 금기를 깨트리고 브로만 공작가의 보호하에 놓이게 되면서 더 이상 인간과 함께 있는 그들을 보기는 어려워졌다. 그런데 공작은 그런 웨어울프족 중에서도 순수혈통에 가까운 이것을 황후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준다고 말하고 있으니 슈피르 공작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물론 형식상 완전히 넘기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맹약이 저와 이 녀석 사이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완전한 복종은 힘들겠지요. 하지만 제가 최우선 명령으로 내린 것이 황후마마의 위협이 되는 존재는 제거하라는 것이니 거의 개인호위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그럼 그 변신은 어찌합니까. 저것이 변하면 덩치가 상당할 터인데 황궁 안에서 마땅히 둘곳이..” 슈피르 공작은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넉넉잡아 보아도 상대의 덩치는 거의 슈마이츠 공작과 비슷했다. 게다가 순수혈통에 가까운 만큼 크기가 늘어나면 늘어나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제 개인 마법사인 시엔이 특수한 제어장치를 걸어놓았고 일반적인 인간정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으니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입에 대었던 찻잔을 때며 대답하는 브로만 공작의 어조에는 약간의 짜증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제서야 자신이 지나치게 꼬치꼬치 캐물었다는 것을 깨달은 공작은 무안함을 감추며 옆에 서있던 네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황후마마께서는 아직도 오시지 않는겐가. 아까 황제폐하께서 찾으러 가셨으니 곧 도착할 때도 되었는데.” 그 순간 밖에서 소란스런운 말들의 히잉거리는 소리와 여러 사람들이 웅성이는 소리가 한 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먼저 슈피르 공작이 황후궁 앞의 뜰로 나서자 그 뒤를 브로만 공작과 회색머리의 남자가 뒤를 따랐다. 황제와 황후가 같은 말위에 올라타 있는 것을 보고 잠시 의아해 하던 슈피르 공작이 자신을 따라 내려오는 네니에게로 슈마이츠 공작은 어디있느냐고 물으려는 순간 무언가 커다란 회색빛 물체가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나 자신 앞에 무언가 지나간 것이 확실한지도 의심하고 있을때 갑자기 아래쪽에서는 일대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이건! 황제폐하를 보호하라!” 그리고 이어 들려온 검이 뽑히는 듯한 마찰음이 들렸다. “이것이 그대가 황후를 위해 가져왔다는 그 웨어울프요?” 황제는 황후의 옆에서 경계하는 듯한 눈초리로 황제인 자신을 바라보는 회색머리의 웨어울프라 불리우는 인간을 노려보고서는 찻잔에 우유를 붓고 있는 브로만 공작에게 질문을 했다. “그렇습니다. 이름은 롤프라고 하지요.” “이게 그때의 롤프인가요? 분명 그때 검을 쓰는 것을 보았는데. 혹시 이게 저번에 말한 그 선물?” “아니 공작, 저것이 검도 쓴단 말입니까? 웨어울프라면 신체를 사용한 격투기에만 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니 그런 위험한 동물을 함부로 풀어놓는단 말이요?” 갑자기 쏟아지는 황후와 슈피르 공작의 질문에 약간 귀가 따가운듯 브로만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은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빼고 아까부터 세사람들만 아는 듯한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정작 습격당한 것은 본인이데 이리도 태연하게 앉아있는 이들은 물론 황후 옆에 서 있는 웨어울프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검뿐만 아니라 다루지 못하는 무기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먼저 공격하는 일은 없지요. 이름은 롤프이고 황후님께 선물로 데리고 온 것이니 오늘부터 이 녀석의 주인은 황후님이십니다. 이제 질문에 대한 답이 되었겠지요.” 딱 잘라 말하고 더 이상의 질문은 받지 않겠다는 듯 공작이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궁금한 것을 참을 수는 없는지라 에른하임은 그가 찻잔에서 입을 떼는 순간을 기다려 다음 질문을 퍼부었다. “하지만. 아까 황제폐하를 공격한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다행히 저희들이 있어 막을 수 있었지만 이리 흉폭해서야 어디 데리고 다닐수 있겠습니까.” 금방이라도 없애버리고 싶다는 듯 상대에 대한 증오가 철철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제서야 하연은 롤프라고 불리우는 웨어울프를 죽일듯 노려보는 에른하임을 비롯한 기사단들의 살기어린 시선을 발견하고 움찔거렸지만 정작 롤프는 조금도 하연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 같은 말을 자꾸 하게 하시는 군요. 저 녀석이 인간처럼 보인다 해서 인간으로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브로만은 차를 마시는 것을 포기하고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향해 입을 열었다. “동물이 어재서 동물인지 아십니까. 본능에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지능으로 기본적인 동물이 가지고 있는 식욕이나 번식욕, 수면욕등은 제어가 가능하지만 제가 내린 명령에 관한 본능만은 완전히 발휘되는 것이 이 웨어울프입니다.” “그게 이것이 황제폐하를 공격한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이요!” “...한마디로 황제폐하가 황후님께 해가 된다고 느꼈기 때문이지요.” “황제께서 황후께 그럴 리가 있소! 저 하찮은 짐승이 무엇을 안단 말이요!” 에른하임이 노성을 발했지만 브로만은 이래서 기사들은 어쩔수 없다는듯 고개를 흔들고는 대답했다. “이 녀석이 감지하는 것은 황후님의 상태입니다. 황제폐하께서는 별 의도가 없으셨을지 모르지만 황후께서는 위협적으로 느끼셨기 때문에 그리한 것입니다. 그리고 공격이라니요. 분명 이 웨어울프가 달려간 것은 황후님이 아닙니까. 단지 황제께서 그것을 막으셨기 때문에 공격한 것이지요, 공격을 받으면 공격한지만 먼저 상대가 달려들기 전에는 절대 먼저 공격하지 않습니다. 뭔가 웨어울프에 대해 좀 아셔야 할 것 같군요. 이건 아주 기초적인 것입니다.” “아까의 말은 무슨 뜻인가요?” 브로만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가버린 황제의 행동이 이해가 잘되지 않았던 하연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누군가에게 ‘해’를 입힌다는 것은 꼭 육체적인 손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정수준 이상의 정신적인 부담감을 안겨주는 것도 분명 ‘해’에 속하는 것이고 롤프는 ‘황후에게 해가 되는 조건은 제거하라.’라는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그 조건이 황제가 된것이지요.” “....” “차 맛이 좋군요.” 아까의 충격적인 발언에 하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다는 것은 이 녀석이 자신의 감정을 읽는다는 말이 아닌가. 왠지 찜찜해지고 있었다. 황후에게 볼일이 남아있던 슈피르 공작이 여전히 이곳에 죽치고 앉아 있는 그와 여전히 황후의 뒤에 서있는 롤프라는 웨어울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대는 안가나?” “아, 그게 저 녀석을 다룰 때의 주의사항 같은 것은 알려주어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설마 저 녀석이 인간처럼 생겼다고 인간과 같이 다루려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아무리 봐도 인간인데 계속 인간이 아니라 하니 하연은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날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대던 저것이 늑대라니. 조금 험악하게 생겼지만 날카로운 눈빛과 약간 외소한듯 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몸매에 옷까지 잘 챙겨입은 저것이 정말 늑대인가 하연은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이전에 슈피르 공작님이 볼일이 있으신 것 같은데 먼저 말씀하시겠습니까?” 얼마지나지 않아 황성과 제국내로 널리 알려질 사실을 특별히 감출 필요도 없었기에 그는 네니에게 눈짓을 했다. 이윽고 유모의 손을 잡고 5살이 채 안 되보이는 소년이 걸어나왔다. 브로만 공작의 눈이 그제서야 흥미를 느끼는 듯 반짝거렸다. “티르를 내 양자로 들이기로 했다. 이미 네가 오기전에 아이는 좋다 하였고 너의 의견만 들으면 이제부터 내 영지에서 기르고 싶구나.” 하연은 당황했다. 아무리 티르가 정실소생이 아니라 하지만 분명 황제의 아들이 아닌가. 황제에게 물어보고 결정해야 할 것 같았다. “네가 이 아이를 책임지겠다 한 것은 알고 있지만 이 아이는 정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핏줄이다. 그리고,, 네가 거둔다 해도 나중에 황제의 후계다툼에서 밀려나게 되면 즉시 제거되는 것이 황가의 전통이니. 차라리 나의 양자가 되는 편이 낳을게다.” “하지만.. 티르의 결정이 먼저가 아닌가요.” 몰랐던 황실의 잔혹한 면을 알아버린 하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 괜찮아요. 슈피르 공작님은 황후님의 아버님이시기도 하잖아요. 황제님께선.. 그날 저에게 아무말씀도 하지 않으셨는걸요. 그리고 전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배우고 싶은 것도 많고요.” “그..그래” 황제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도 아이의 황제에 대한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마치 남처럼 아무 감정 없는 말에 하연의 눈에 이슬이 고였다. 황후가 티르를 그리 엄마와 떼어놓은 것을 알고서 미안하다 말해도 아이는 그저 웃으며 이렇게 말할뿐이었다. “절 거기서 구해주신 것도 황후님이시잖아요. 앞으로 다시는 버리지 않겠다 약속해 주신 것만 지켜주세요. 정말. 그거면 되요.” 상처투성이의 과거를 가지고 있었지만.. 언제나 웃는 아이는 지금도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연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티르의 선택이 옳은 것이라 믿으면서. “대신.. 1년에 한번이라도.. 절 꼭 만나러 와주세요.” “무슨일이 있어도. 꼭 갈게. 약속해 티르.” 눈물어린 하연이 티르를 꼭안아 주자 슈피르는 아이를 데리고 황제가 사라졌던 방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동안 하연은 닫힌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하연의 모습을 바라보는 브로만은 보일듯 말듯한 미소인지 찡그림인지 알수 없느 표정을 짓고 있었다. “브로마네스 이번이 마지막 부탁이다.” 언제나처럼 아찔할 정도의 색기마저 뿜어내는 티엔의 말에 브로마네스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야 자신을 옭아매던 용언의 계약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된 것이었으니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티르의 몸을 내가 차지하도록 도와다오.” 술잔의 술을 한번에 들이키던 브로마네스가 입밖으로 그것을 모두 뿜어내며 캑캑거렸다. 그리고는 잠시 자신의 귀가 잘못되었나 두들겨보았다. “잘못 들은게 아니야.” 아름다운 미성이 차갑게 울려들어왔다. “다생히야 역시 잘 들리는구나.역시 내귀는 정상.. 아니! 잠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티르? 그 버려진 아이의 몸에 왜 들어가겠다는거야? 아무런 힘도 없는 꼬맹이잖아. 게다가 거의 유폐된 상태고. 너 황제가 목표 아니였어? 설마 이제와서 꽁무니를 빼려는거냐?” “힘이없다라... 이제부터는 달라질 거다.” 분명 아름답다고 표현해도 부족한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분명 반짝이는 보랏빛 눈동자가 즐겁게 춤을 추고 티 한점 없는 피부가 붉은 혈색을 자랑하고 있는데도 선명한 붉은 입술에 매달린 미소는 섬득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의 황후는 이전의 그 황후가 아니니 말이야.” 그때는 무슨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황당해 했지만.. 지금의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티엔의 말이 맞았다. 분명.. 정식으로 황제의 후계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황제가 자식없이 죽으면 몰라도 그는 아직 젊었다. 얼마든지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하연이 황후로 들어오면서 정궁을 두명이나 얻었다. 그 여인들에게서 아이가 태어난다면 티르의 존재는 아무것도 아닌게 된다. 하지만 슈피르 공작가의 후계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공식적으로 황제의 숙부이자 동시에 장인인 자다. 인정은 받지 못하나 누구도 황제의 아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티르가 양자로 들어가게 되면 황후의 동생이 되는 셈이다. 정궁의 자식이라 하나 후계순위에 티르와 같은 순위일 뿐인 자들과 경쟁한다면 슈피르 공작가의 위세를 등에 업은 티르가 유리할 수 밖에 없다. 특히나.. 황후가 티르의 편이라면.. ‘정말.. 놀랍군, 그렇다면..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하연을 황후를 대신하여 들여보낸 것인가. 분명 하연이라면 황제의 외모에 넘어가지도 않을 것이고 보기 드물게 동정심도 많은 아이니 티르를 발견하고 그냥 두었을리 없지.’ 처음에 자신이 폴리모프한 모습을 보고도 꿈쩍하지 않던 하연이고 황제의 얼굴에도 무덤덤하게 반응했기에 하연이 상대의 외모에 끌리는 인간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하연이라는 존재가 없었더라고 해도.. 황후를 대신할 자를 만들어 냈겠지. 하지만 언제까지 저 아이에게 저 일을 시킬 셈이지? 저 아이.. 자신을 모르고 있지만 주위의 사람을 끌어당기고 있어. 분명 황제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한데..설마.. 또 다른일을 꾸미고 있는건가.’ 아직도 티르가 떠난 방문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하는 하연은 이제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다. '게다가.. 티르라는 아이가 끝까지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에 해마다 찾아가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내다니. 티엔이 이 아이에게 들어가면 과연 어찌될지 궁금하군, 황후의 전폭적인 후원에.. 슈피르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 그리고 황제의 아들임에 분명한 태생,.. 황제가 되는 것에는 전혀 무리가 없겠지." 하연은 그제서야 진정이 된듯 목이 멘 목소리로 브로만을 향햐 중얼거렸다. “티르은 잘 지내겠지요. 슈피르 공작가라면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을테니까요.” 브로만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하연이 알던 티르는 영원히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것도 바로 하연의 앞에 앉아있는 자신에 의해 가까운 장래에 그리될 것이다. 브로만은 하연의 시선을 살짝 피하며 대답했다. “분명.. 지금보다는 나아질 겁니다.” 어쩐지.. 이번일은 내키지 않았지만.. 이게 마지막 용언의 구속을 벗을수 있는 기회다. 놓칠수는 없었다. 괭이친구 - 언제나 리플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번편은 스토리 파트네요. 이쁜영이 - 전 항상 고개 돌렸다가 우연히 입이 마주치는 장면은 황당하다고 느꼈습니다. 개인적으로 여자랑 30cm정도 차이나는 커플이 딱 그리기도 좋아요, (폼도나고) 뭘꼬다봐 - 황제는 사랑 경험이 없습니다. 게다가 싫어하던 상대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니 혼란스러운거지요, 게다가.. 표현방법을 잘 모릅니다.(분노나 증오에는 익숙하지만) 베네딕트 - 원래부터 재미추구의 인물입니다. 하연옆에 붙어있는것도 재미있는 일이 많이 생길것 같아서..니까요. (첫유희를 하는 드래곤한테 뭘 바라십니까. 그저 모든게 흥미꺼리일뿐) 이레이스 - 감사합니다, 고쳤구요, 43회.. 조금은 마음에 안드실지도 모르겠군요.^^:: *아랫글은 랜덤타다 발견한 것이니 안읽으셔도 됩니다. 나를 바꾸는 힘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모습대로 되는 것이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자신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일 다른 위치에 있고자 한다면 자신의 생각을 바꾸면 된다. - 얼 나이팅게일의 <가장 낯선 비밀>중에서- 자신의 현재 모습은 어느누구의 선택도 강요도 아닙니다. 바로 자신의 선택으로 만들어 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바꿀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바로 자신이듯이 자신이 간절히 원한다면 무엇이든 바꿀 수 있습니다. 세상조차 바꿀수 있는 아주 강력하고 커다란 힘이 자신의 내면 속에 생각 속에 존재합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 에서- 자신의 궁으로 돌아온 황제는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신하들을 전부 내몰고서는 문을 쾅 닫아버렸다. 언제나 침착하던 황제의 모습만 보아온 그들은 돌아가라는 명을 듣지 못했기에 그저 쫒겨난 방문 앞에서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지요.” “하지만 황제폐하의 명령없이는..게다가 방금 하투라 후작님께서 곧 도착한다 하셨습니다.” (38회참고) 에른하임의 말에 집달관의 직책을 맞고 있는 한 귀족이 걱정스레 대답했다. 이번 혼례문제로 찾아오는 것이었기에 자신은 반드시 황제폐하께 알려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건,,.” 에른하임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황제 혼자 있는 방안에서 무언가 요란하게 부딪치는 것과함께 산산조각나는 날카로운 소리가 그의 말을 막았기 때문이다. “...들으시다시피 오늘은 황제폐하의 심기가 좋지 않으십니다. 그 서류는 제가 황제께 드리지요. 그럼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에른하임은 집달관이 들고 있는 붉은 리본에 묶여있는 양피지를 받아들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들은 두 번째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자 황급히 자신들이 서있던 홀을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그들이 다 나간이후에야 에른하임은 한숨을 쉬며 문옆에서 오들오들 떠는 시종을 불렀다. “지금 당장 가서 신관을 모셔오도록.” 새파랗게 질린 소년이 채 대꾸도 하지 못하고 급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궁에 들어온지 6개월이 다되어 가지만 황제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다른 귀족들처럼 심술궂지도 별것 아닌일에도 신경질내지 않던 언제나 온화하게 웃던 황제였다. 그런데.. “로이츠님 도대체 무슨일일까요. 황제게서 저리 화를 내시는 것은 재위이래 처음이지 않습니까.” 유난히 덩치가 큰 곱슬머리의 귀족이 붉은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정신없이 나오는 통에 서둘다 보니 안그래도 운동부족인 그의 심장은 격하게 뛰고 있었다, “글쎄. 분명 아까 나갔던 일이 잘못 된 것이겠지.” “아까 나가셨던 일이라니요. 그저 잠시 황후마마를 뵈러 간 것이 아닙니까.” 여전히 헉헉거리고 있는 그를 바라보는 바짝마른 체구의 남자는 상대를 한심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자신의 체구하나 감당하지 못하는 꼴이 보기 싫었던지라 그는 고개를 돌렸다. “아까 무얼 들은건가. 황제께서 황후마마를 보러 일부러 찾아가실 일이 있겠는가. 안그래도 두 분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은 알만한 자들은 알고 있는 터인데. 황제께서 만나러 가신 분은 실상은 슈마이츠 공작인 것을.” “그.. 그렇군요. 황제께서는 평소에도 슈마이츠 공작의 행적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으셨습니까.” 가장 구석에서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남자가 그제서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분명 황후께서 먼저 슈마이츠공작과 손을 잡은 것일까요?” “속단하긴 이르지만.. 황제폐하의 저런 반응으로 보아 분명하겠지. 아무래도.. 황후의 세력이 점점 커지는 것 같으니. 우리도 몸조심해야 할 것 같소. 중립을 지키던 슈마이츠 공작이 슈피르 공작쪽과 손을 잡는다면... ” “그래도 다행이지 않습니까.. 이번에 정궁으로 들어오는 알리샤 공녀의 아버님이신 하투샤 후작께서는 예전부터도 황제폐하를 지지해 오셨으니 말입니다.” 그의 말에 여전히 땀을 닦아내는 자신 옆의 남자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남자가 바짝 마른 손가락으로 계단의 층계를 손으로 톡톡 두들기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는 우리편이 아니오. 하투샤 후작과 슈피르 공작과의 과거를 잊지는 않았겠지. 그는 단지 슈피르공작과 반대쪽에 서 있을 뿐이야. 황제폐하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니 섣불리 그를 우리와 같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 “하지만. 당장은 우리 편이 아닙니까. 게다가 알리샤가 황제의 총애라도 받아 먼저 후계를 생산하신다면 1년이 되어도 아무 소식없는 황후보다야 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모두들 키 작은 남자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야기를 주도하던 그는 여전히 앙상한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며 대리석층계만 두들기고 있었다. “...... 일단은 헤어지고 내일 보세.” 무언가 석연치 안은 대답이었지만 그들은 이윽고 뿔뿔이 흩어져 각자 자신의 부서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여전히 층계에 기대어 있던 그는 한참이나 생각에 빠져있었다. “무언가,, 손을 써야 되겠군. 이대로는..” 오늘도 변함없이 중앙대신관에 평소와 다름없는 보고서를 보낸 뒤 돌아오던 황후궁 소속의 신관 글러디스는 자신을 낚아채고 무작정 달리는 소년에게 이끌려 황제의 집무실로 들어오게 되었다. 얼떨떨하게 서있는 글래디스를 본 황제가 지금은 황후와 관련된 자는 아무도 보고 싶지 않다 명했지만 에른하임은 황제의 말에도 굴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의 상처는 치료하셔야 합니다. 신관은 뭘하는 건가. 어서 황제폐하를 치료하시게.” 황제의 손은 곳곳에 날카로운 유리조각이 박혀 있어 일단 그것을 빼내야 했다. 조심스래 깊이 박혀있는 유리조각을 떼어내는 대는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황제는 조금도 꼼짝하지 않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으로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다 되었습니다.” “수고했네, 글러디스. 이만 나가보아도 좋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글러디스는 고개를 숙였다. “...잠깐!.” 아까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던 황제가 갑자기 돌아가려는 그를 붙잡자 글러디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황제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마음이 약한 신관은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황제가 자신을 부른 것이 그날밤의 일 때문인가 하여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차료를 받는 내내 방금 전 황후궁에서 떠나오기 직전 오갔던 말들이 계속 머릿속을 빙빙 돌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부숴버린 거울의 조각이 살을 헤집어 놓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아픔이 마치 타인의 것 같이 무심하게 다가왔다. <내가 그대에게 키스해야 하는 건가? 항상 먼저 다가온 것은 그대였는데.> 말위에서 황후에게 그리 말했지만 사실은 그저 심술을 부린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마치 예전의 모습은 어디에라도 버려두고 온 곳처럼 다른 행동 다른 몸짓을 보이는 황후의 가면이 깨어지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의 바뀐 모습에 자꾸만 시선이 가는 자신이 원래의 무감각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했다. <..그냥.. 하는척만 하면 안되요? 꽤 멀리 있으니까..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은데..> 하지만.. 자신의 말에 새파랗게 질리며 더듬거리다 차라리 뛰어내릴 듯 바닥을 바라보던 황후의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화가났다. “꺄악!” 그 순간 갑자기 자신에게로 무엇인가가 순식간에 다가오는 ‘그 것’을 느꼈다. 하지만..‘그 것’이 노리는 것이 자신이 아닌 황후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자신이 한 것은 자신의 검을 뽐아 막아버린 것이었다. 어째서.. 자신이 직접 죽이라 명했던 황후를 스스로 구하기 위해서 검을 뽑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자신에게 안겨있던 황후가 사라지는 순간 느낀 공포감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황제폐하를 보호하라!” 그리고.. 뒤늦은 에른하임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정신을 차린 그의 앞에 안도의.... 표정을 짓고 회색머리의 사내에게 안겨있는 황후를 보는 순간...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이 녀석이 감지하는 것은 황후님의 상태입니다. 황제폐하께서는 별 의도가 없으셨을지 모르지만 황후께서는 위협적으로 느끼셨기 때문에..> ‘날... 무서워 했다는 건가? ’ 브로만 공작의 말을 듣는 순간 더 이상은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슈피르 공작의 경계어린 시선도 싫었고 황후를 지키듯이 감싸고 있던 웨어울프라 하는 것도 보기싫었다. 하지만.. 가장 싫었던 것은... 안도하는 듯한... 편안한... 표정의 황후. 브로만 공작의 말에 황후는 부정하지 않았다. ‘한번도... 눈을 맞추지 않았어,’ <...한마디로 황제폐하가 황후님께 해가 된다고 느꼈기 때문이지요.> “황제폐하..?” 글러디스는 자신을 불러놓고도 아무말이 없는 황제가 뿜어내는 기운에 억눌려 간신히 숨을 들이키며 황제를 불렀다. “.... 그대는 알고 있겠지. 글러디스.” 순간 글러디스의 심장은 덜컥 내려앉았다. 그날 밤에 자신이 네니의 강압으로 하지 못한 말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분명 황후를 노리는 이들이 있다며 자 신에게 비밀을 지켜달라 부탁한 네니의 말을 생각하며 글러디스는 안간힘을 다해 주먹을 꼭 쥐었다, “..그날 이후.. 황후가 조금 달라졌어. 내 생각에는 그대가 그 이유를 알고 있을 것 같군.” 글러디스의 이마에 맺혀있던 땀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브로마네스는 정말 오기 싫었던 이곳을 다시 방문하게 되자 눈살을 찌푸렸다. 수십미터는 족히 되는 천정부터 바닥 벽의 규모는 그야말로 감탄할 정도였지만 정작 그것을 장식하고 있는 것들은 무식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왠일이냐? 네가 스스로 여길 다 찾아오고 말이다.” 언제나처럼 황금더미 속에서 낮잠이라도 잤는지 아르드미한의 옷에 묻어있던 금화가 떼구르르하고 굴러와 브로마네스의 발에 부닺혔지만 그는 눈길한번 주지 않았다. 레어의 전체에 번쩍이는 황금색만으로도 충분히 어지러웠다. “저도 이제 금 좀 모아서 레어좀 장식해 보려구요.” “...어디 아프냐?” 자신의 아들이지만 금이나 보석보다는 예술품을 더 좋아하는 아들이다. 평소에도 금만 밝히는 늙은이라고 대놓고 함부로 굴던 녀석이 저런 말을 하는 것은 분명 자신에게 볼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저번에 준 신의 유물 말고는 나한테 보석은 더 이상 없다. 도대체 무슨 일로 온거냐?” 말로만 드래곤 로드가 아닌지라 아르드미한은 브로마네스가 뭔가 어려운 부탁을 하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도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수 있었다. 브로마네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 혼을 바꾸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요?” 혼을 빼내어 봉인하는 것과 같을 줄 알고 범죄다 둘을 잡아다가 시험해 보았지만 결과는 완벽한 실패였다. 게다가 미처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닺쳐 이렇게 찾아온 것이었다. “알아.” “방법은요?” 혼을 바꾸는 방법이라. 분명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 방법이 조금 번거롭다는 것과 약간 귀찮은 일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는 것 때문에 자신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유희중 친구로 만났던 한 마족이 그것을 하는 것을 구경했을 뿐이다. “싫은데? 내가 왜 널 도와주어야 하지? 난 네놈한테 투자한 이후로 나한테 득이 되지 않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자식한테 투자해봤자 제일 밑지는 장사야. 게다가 난 지금도 꽤 잘나가는 편이라고.” 노골적으로 대가를 요구하는 아르드미한의 태도에 브로마네스는 당장이라도 레어를 박차고 나가려다 지긋지긋한 티엔과의 계약을 떠올리며 간신히 참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연기한 것이 아깝기도 했다. ‘호오. 이거보게. 저 녀석이 내 앞에서 성질을 다 누그러트리는 일이 생길줄이야. 아무래도 이번에 한껀 한것 같은데?’ 어지간하면 시간이 걸려도 방법을 알아낼 터였지만 불행히도 티엔은 황실에서의 관례대로 태어난지 1주일후 대신관의 축복을 받아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었다. 방법을 알아낸다 해도 혼을 바꿔넣으려고 시도하는 순간 곧바로 에일지브 신단이 알아버릴 것이 분명했다. 결국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아까까지는 전부 연기였다. 역시나 자신의 반응을 보고 음흉하게 미소짓는 아버지를 보니 분명 이번에 왕창 뜯어낼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잘 나가셔서 에일지브 신단에서 쫒겨나셨습니까? 하긴 한창 잘 나가던 시기가 있긴 했지요. 대신관이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여기저기서 금을 긁어모으다가 파문당했으니까요.” 보통의 드래곤들은 유희중에는 완전히 그 사람과 같은 인격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아르드미한은 대신관이라는 엄청난 지위에 속해 있으면서도 드래곤으로서의 탐욕을 그대로 발휘해서 청빈과 겸손을 내세우던 교단의 이미지를 한번에 실추시키며 금모으기에 열중하던 시기가 있었고 결국 그것이 발각되어 대신관으로서는 최초로 파문당하는 불명예를 당했다. “됬습니다. 매일 실험 실패만 거듭하는 아버지한테서 뭘 바라겠어요. 차라리 실버 일족의 수장에게나 가봐야 겠군요.” 실버일족의 수장과 아르드미한의 사이는 아주.... 좋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아는 브로마네스는 얼핏 텔레포트을 하려는 척했다. 평소같으면 자신이 실버일족의 수장에게 간다고 해도 '네가 그 잘난척 하는 놈의 얼굴을 1초라도 버틸수 있을것 같으냐?'라며 무시할 아버지였다. 하지만... 자신이 아버지의 말에도 화를 억누르며 절박한 심정을 약간-너무 많이 보이면 의심하니까-보였으니 자신의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할 것이 뻔했다. 그러면 분명 아버지는.. “좋아! 도와주면 될거 아니야! 젠장. 내 이름을 걸고 네가 그 녀석한테 도움을 청하는 꼴은 못본다. 분명 내가 해결하지 못해 네가 찾아왔다고 사방에 떠들고 다닐게 분명하니까!” ..이렇게 말하게 된다. 브로마네스는 씨익 웃었다. “이름을 걸고 하신약속은.. 꼭 지켜야 되는 것을 아시죠?” “.....너.. 설마..” 그제서야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아르드미한이 어느개 여유만만해진 브로마네스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대신관인 시절의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영혼을 어찌 떼어내시렵니까? ” 미르엔 처음뵙겠습니다^^ 칭찬 감사드려요. 마론인형B 역시 처음이시군요. 지적도 부탁드립니다~ 레몽시이 티르..는 조금 더 살아남을 예정이예요. 야무진양갈래소녀 오옷! 예리한 질문이시군요. kh미소천사 제 글이.. 조금 왔다갔다 합니다.(처음엔.. 정말 심했죠, 이번이 두 번째 작품) 괭이친구 늘 열심히 코멘트 주셔서 감사해요.*^^* 베네딕트 보디가드라. 약간은 감시역도 맡고 있죠. 보디가드는 부업? 이쁜영이 오늘도 코멘트 주셨군요. 늘 열심히 봐주셔서 감사드려요. 혹시 오타 있으면 지적해 주세요. *덤* “착각하지마라. 널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황후인 너의 안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 이 녀석의 소유권은 나에게 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나가자마자 싸늘한 목소리로 하대를 하는 브로만이었지만 하연은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저 웨어울프라는 것이 궁금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런식의 하대는 예전에도 많이 들어왔던지라 특별히 기분이 나빠지지도 않았다. “정말 늑대로 변해요?” 하연이 손을 들어 어개까지 내려온 기다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군데군데 은빛이 섞인 머리카락은 일반적인 사람들에 비해 굵고 거친편이었지만 곧게 뻗어있어 강한느낌을 주었다. 브로만은 하연의 질문을 무시하고서는 롤프에게 이리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여기 귀걸이가 있다.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하나씩 있지. 만월에 이 녀석이 본래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것을 막아줄거다. 그리고 평상시에는 늑대의 모습과 인간의 모습 중 선택할 수 있지.” “잠깐만. 본신과 늑대라니. 무슨 말이예요?” “해제!” 순간 롤프의 몸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후 나타난 것은 온몸이 은회색의 털로 뒤덥힌.. 머리가 하연의 허리까지 오는 상당히 큰 늑대였다. “이게 늑대일 때의 모습이다.” 목덜미의 긴 갈기는 유난히 은색으로 반짝거렸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분히 가라앉은 풍성한 털들이 롤프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단단한 근육의 미려한 움직임과 함께 물결치듯 흔들렸다. 그리고 단단한 네 다리리가 지면을 박차고 서 있었고 당당하게 들고 있는 준수한 얼굴에서 하연은 인간일 때의 롤프와 똑같이 빛나는 한 쌍의 짙은 그레이 아이를 발견한 수 있었다.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충분히 압도당하고 말 당당한 위엄과 풍채를 뿜어내는 롤프는 인간일 때와 마찬가지로 연마되지 않은 야성의 강인한 힘을 세포하나하나에서 뿜어내고 있었지만 하연은 조금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놀람보다는 오히려 감탄과 경이를 보이는 하연의 반응에 약간 실망한 브로만이 입을 열었다. “롤프는 성인이 되기전에 나와 맹약을 맺었기 때문에 만월이 되어도 다른 웨어울프처럼 변신하지는 못한다. 대신 그 시기에는 다른 때보다 본능이 조금 강해지는 편이지. 만약 성장하여 본신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크기는 아마.. 슈마이츠의 헬리오스정도가 되겠지.” 한참이나 설명과 주의사항을 늘어놓은 브로만은 여전히 반 건성으로 듣고 있는 하연을 바라보았다. “롤프가 공격력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때문에 너에게 이 녀석을 맡기는 것은 아니야. 너도 조금은 눈치채고 있겠지만.. 지금의 황후와 슈피르 공작은 적이 많다. 그건 알고 있겠지?”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째서 브로만이 그것을 말해주는 것인지 의아스러웠다. “그 중에는 가식적인 웃음으로 다가오는 자들도 많을 것이다. 너에게 무엇을 얻어내려 하거나 반대로 너를 끌어내리려는 자들도 있겠지. 하지만 너는 그것들을 파악해 내기에는 너무 물러터졌어. 게다가 넌.. 누구와도 잘 지내고 싶다는 이상한 사고방식을 가졌더군, 이곳에서 모두와 잘지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나 황후의 자리는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는 자리이지. 게다가 황제는 너를 감싸주지 않을 것이다.” 브로만은 앞으로 채 열흘도 남지 않은 대연회를 생각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각국의 사절과 그 일행들이 참석하는 연회에서 하연이 과연 완벽한 황후역을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저렇게 아무에게나 진심을 내보이는 황후는 그들의 좋은 먹잇감이 될 것이 분명했다. “...사람들에 대한 판단은 무조건 롤프의 반응을 믿어라. 너의 감정만큼은 아니지만 상대의 마음도 읽어낼 수 있는 녀석이니까.” 브로만이 떠나고 난뒤 황후궁에는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황후마마 바로옆에 서 있는 것은 아무리 봐도 사납기 그지 없는 은빛의 대형 늑대. 아무리 그것이 브로만 공작이 선물로 가져온 웨어울프라고는 하지만 공포스럽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게다가.. 하연이 두려워하는 시녀들을 보다못해 다시 복귀라고 명하는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수 많은 시녀들이 일시에 실신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 “황후마마! 돌아보지 마세요!” 그중 유일하게 쓰러지지 않은 네니가 고개를 뒤로 돌리는 하연을 향해 소리쳤지만 이미 하연은 고개를 돌린 상태였다. 그리고.. 눈앞에 들어온 것은 완벽한 나신의 남자. “황후마마!” 하연은 그대로 쓰러져 1시간이 넘게 깨어나지 못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의 표정이 더욱 싸늘하게 굳어온다. "감히.....잊었다는 거냐...." 이를 갈 듯 뱉어내더니 눈동자 속에 분노의 불꽃이 일기 시작한다. 심장이 갑자기 거칠게 뛰기 시작한다. 손을 뻗어 아프게 어깨를 쥐어온다.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자꾸만 두근거리는 심장소리에 쫓기 듯 날카롭게 소릴 질러댔다.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말은 없다. 도대체.. 내가 무슨말을 잘못한 거지? * * * * * -황제폐하께서 오늘 저녁의 석찬에 황후마마님께 초청하셨습니다... 딸랑 한줄이 적인 고급 종이위의 멋들어지게 장식된 활자들은 그 아름다움과는 어울리지 않게 지독히도 딱딱한 말로 쓰여있었다. 뒤늦게 사정을 알아온 네니의 말로는 오늘 알리샤 공녀와 그 부친을 만나는 비공식적인 자리라고 했다. “이 옷을 입으시지요.” 이 곳에 온 뒤로는 항상 예상을 벗어나는 일들이 많았다. 적어도 몇시간이나 시녀들에게 시달림을 당할 줄 알았지만 네니는 한참을 옷장과 자신 그리고 초대장을 번갈아 살펴보더니 아무런 주저함없이 드레스와 보석 그리고 신발 부채들은 척척 꺼내놓았다. 오히려 가장 많은 시간이 걸린것은 머리의 손질과 화장이었고 옷은 골라진 것을 그저 입기만 하면 되었다. “...다른것도 입어봐야 되는거 아냐?” 약간의 인형놀이도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하연의 말에 네니가 말도 안된다는 듯이 대꾸했다. “여러번 옷을 바꿔입게 하다니요. 훈련된 시녀로서 단 번에 여주인의 옷을 골라내지 못하여 자꾸만 번거롭게 하는 것은 기본이 되지 못한 자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하연이 석찬이 열리는 커다란 유리온실로 들어선 것은 약속시간에서 10분 이른 시간이었다. 조금은 늦어도 된다는 네니의 말에 황후가 되어 그럴수는 없다고 생각한 하연이 서두른 결과였다. “일찍 오는군.” 황제는 이미 먼저와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짧은 보라색 머리카락과 어울리는 진한 청색의 옷을 입은 황제는 평소와는 달리 굉장히 경직되어 보였다. 황후인 자신이 가장 늦게 도착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한 하연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사람이 오늘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알리샤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바로 옆자리에 앉은 하투라 공작에게 말을 건넸다. “공녀가 몸이 많이 좋지 않다던데.. 사실인가요?” “...예?” 분명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후작의 대답은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분명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긴장한듯 앉아있던 약간은 신경질적으로 보이던 후작이 멍한 얼굴이 되어 대답할 줄은 몰랐다. “방금 들으니 공녀는 평소에도 몸이 많이 좋지 않다더군요. 걱정이 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걱정마십시오. 그저 심장이 조금 안좋을 뿐이니까요.” 처음의 인상과는 달리 굉장히 깊은 감정을 담은 듯한 눈이 하연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딸을 생각하는 것인지 그것에는 따듯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약간 긴장한것처럼 목소리가 약간 떨리고 있었지만 분명 자신히 알리샤를 나쁘게 볼까봐 그리하는 것이 분명했다. “걱정마세요, 황제폐하께서 두분의 정비중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이 알리샤입니다. 제가 보여드린 그림들 중에서 유일하게 이름을 입에 올리셨으니까요. 분명 황제께서 마음에 두고 계신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연의 말이 끝나자 마자 하연보다 작은 체구의 굉장히 섬세한 곡선의 소녀가 은청색 머리카락을 곱게 늘어뜨리고 홀안으로 들어와 황제와 하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비공식 석찬이었기에 특별한 소개는 없었다. “공녀님은 황제폐하의 바로 옆자리에 앉으시면 됩니다.” 거의 은색으로 반짝이던 그림과는 달리 머리는 청색에 가까웠다. 하지만 한번도 태양빛을 받지 못한듯 티없이 맑은 피부와 시월의 하늘빛을 연상하게 하는 꿈꾸는 듯한 눈동자. 그리고 마치 체중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사람처럼 소리없이 미끄러지는 우아한 발놀림에 하연은 감탄했다. “...그래서 저는 그곳과 거래를 시작할 수 있었지요.” “세상에 정말 대단하시군요. 그런데 왜 자제분께는 가문을 잇도록 하지 않으신 건가요?” 주위의 사람들은 뜨악한 표정으로 두사람을 믿을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진심으로 즐겁다는듯 하토르 후작과 이야기를 나누는 황후는 아까부터 한번도 황제쪽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저 하토르 후작이 수다라니. 평소에도 말이 없는 것이라면 브로만 공작에 버금가던 그가 아닌가. “그 녀석은 검술이 좋다면 슈마이츠 공작님의 수하로 들어가 있습니다. 저는 반대했지만 워낙 고집이 센 녀석이라. 안 그래도 오늘 여동생이 황제폐하를 만나는 길이니 같이 들어가자 했지만 임무를 빼먹을 수는 없다면 고집을 피우더군요.” 하토르 후작은 자신의 말에 연신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며 황후를 바라보며 과거의 쓰디쓴 추억을 회상하고 있었다. 춤추듯 부드러운 흑청색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하토르 자신이던 때, 그는 앞으로의 장밋빛 미래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가지지 않았다. <당신은 언제나 그 여자 뿐이지! 이젠 지겨워!> 하지만.. 마음만은 어쩔수 없었다. 머리로는 포기했지만, 적어도 순수하던 그때의 시절만큼은 손이 더럽혀진 지금에서도 한줄기 빛처럼 암흑으로 가득찬 마음속에서 유일한 구원의 빛이었기 포기할 수 없었다. <황후마마께서 알리샤 공녀를 직접 임명하셨습니다.> <알리샤! 안된다. 이 어미는 널 절대로 보내지 않겠다. 차라리 네 아버지와 헤어지는 한이 있어도 그건 안된다.> <아버지 때문이라면 그만둬! 알리샤. 너만 불행해질 뿐이야.> “하토르 후작님?” 하연은 갑자기 한참이나 말을 멈추고 있는 후작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가 말한것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느라 탄 것이 분명한 약간은 귀족적이지 못한 구리빛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황후마마. 부탁이 있습니다.” “뭔가요.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들어드릴께요.” “제,,, 딸이 황자를 낳도록 도와주십시오.” 저녁식사를 마친 후 홀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전부 그 옆에 딸린 작은 응접실의 구조를 가진 방으로 안내되었다. 우아하게 조각된 장식이 달린 희색의 난로에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두꺼운 양탄자가 푹신푹신하게 발을 감싸고 있었다. 아까부터 황제의 곁에는 알리샤가 계속 뭐라고 말을 걸고 있었지만 하연은 아까 후작이 한말을 생각하느라 머리가 아파왔다. 도대체.. 황자를 낳게 도와달라니. 자신이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른 사람과 홀로 동떨어져 창가에 서있는 하토르 후작에게 다가갔다. “저.. 죄송합니다만. 아까의 말뜻이 무엇인지 알수가 없어서요.” “..정궁의 침소에 드는 것은 전적으로 황후마마의 소관입니다. 물론,, 구체적으로 법률로 정해진 것이 아닌 관례가 있기는 하지만,, ” 하토르 후작은 의외로 솔직한 성격인듯 하연의 대답에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었다. 그제서야 그의 말이 이해가 된 하연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별로 황제랑은 같이 있고 싶지 안....알리샤에게서 기회를 고의적으로 박탈할 생각은 없어요. 오히려 그건 제가 더 바라는 일인걸요,” 순간적으로 본심을 말할뻔한 하연이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황제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알리샤를 새삽스럽게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별 대화가 없던 그들은 하연이 하토르 공작에게로 다가가는 순간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에게는 식사내내 말 한마디 건내지 않더니.. 하토르 후작은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황후를 바라보았다. 그때의 그녀와 같은 나이가 된 황후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희미한 추억속의 그녀보다 더욱 아름다웠다. 어두운 밤바다를 그대로 올겨놓은 듯 그녀의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이 그녀의 허리 아래로 부드럽게 물결쳤다. 갓 태어난 아기의 피부처럼 분홍빛이 약간 감도는 하얀 얼굴과 그녀의 심해의 흑진주의 색상보다 훨씬 더 깊고 청명한 검푸른 눈동자는 정신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그때의 하토르 후작의 마음을 사로잡은 요소 중의 하나였다. ‘다른건...분위기 뿐인가.’ 귀족다운 고귀한 분위기가 물씬 배어나던 그녀와는 달리 백지장처럼 순수하고 맑아보이는 모습은 그로 하여금 그가 현실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하지만 결국은 항상 똑같지. 어째서.. 그녀들은 항상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일까. 그러기에 난이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어. 내 눈앞에서 또다시 과거가 재현되는 것따윈 절대 볼수 없어! 그럴바에야... 이 손으로... 부숴버리겠다. 아니.. 최소한 그대들이 믿었던 것에 배신당해 스스로 죽음을 생각할만큼 고통스럽게 해주지.’ 자신에게는 냉정하게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알리샤에게는 친절히 대해주는 모습에 하연은 내심 투덜대고 있었다. ‘도대체 저 황제의 어디를 보고 내가 처음에 친절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어. 아무리 봐도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데 말이야. 맨날 심술이나 부리질 않나, 갑자기 화를 내질 않나, 저놈의 성격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야. 어쨌거나 다행이네. 황제의 마음에는 드는 모양이니 하투르 후작이 걱정하지 않아도 일은 잘 되겠는데. 어라? 그런데 갑자기 왠 음악?’ 갑자기 시작된 음악에 하연이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리고.. 그 음악이 바로 알리샤가 있는 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기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은색의 플롯 비슷한 것에서는 아름다운 음색이 흘러나왔다. “굉장해..” 연주가 끝나자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큰 박수갈채를 퍼부었다. 능숙한 연주실력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선율이 심금을 울려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안그래도 유난히 사소한 것에 감동을 많이하는 하연은 정말 부럽다는 시선으로 알리샤를 바라보았다. “얼마뒤 있을 대연회대 황후님과 함께 연주하겠다고 그동안 잠도 아껴가며 연습한 보람이 있군요. 유명한 시탄연주자이기도 하신 황후님이 감동하실 정도니 말입니다.” 하토르 후작의 말이 들려오자 하연은 깜짝 놀랐다. “예? 지금 뭐라고..” 하지만 하연의 말에 대답을 한 사람은 하토르후작이 아닌 황제였다. “그대의 시탄 연주는 나조차도 감탄할 정도였지. 대연회때는 항상 황후와 비빈들이 함께 신께 바치는 연주를 하는데 이번에는 알리샤의 트랑연주가 덧붙여지면 분명 굉장하겠군.” 망연자실하게 아무대답도 못하고 있던 하연은 황제의 비꼬는 듯한 말투에 발끈했다. “..누가 같이 연주 따위를 한다고 그래요!” 순간.. 장내는 고요한 침묵의 바다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경악이나 놀람이 아닌 전혀 다른 것이었다. 모두들 오히려 안도하는 듯한 저 표정은, 이럴줄 알았어...였다. * * * * * 황후궁으로 돌아오는 내내 하연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시탄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악기이다. 그런데 제국에서도 알아주는 연주가라니. 대 연회에서 아까의 알리샤의 트랑과 같이 합주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입이 바짝바짝 말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하연의 표정과는 달리 황제는 처음과 달리 유쾌한 표정이었다. 분명 아까의 일로 개망신을 당한 자신을 보니 즐거움이 넘치는 모양이었다.아까의 민망한 상황에서 목이 타 들이킨 것이 하필이면 약간의 알코올이 함유된 것이라 그런지 아까부터 유난히 말이 많아지고 있었다. “별로 유쾌하지 않았던 모양이군.” "그런 상황에서 제가 기분이 유쾌할 수 있겠어요?" 어느 새 하연의 말투는 탄식조로 변해 있었다. 황제의 단정한 입가에 미소가 살짝 걸렸다. "그럼 내가 들었던 하토르 후작과의 유달리 화기애애하던 대화는 환청이었나 보군." 하연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자 그는 헛기침을 하는 척하며 슬쩍 웃음을 감췄다. 못마땅한 눈으로, 억지로 미소를 참느라 가늘게 떨리는 그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던 하연의 입에서 어쩔 수 없이 무거운 한숨이 나왔다. "전 진심이라구요. 정 심심하시면 알리샤 공녀에게나 가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시던가요." “큭. 질투하는 건가?”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기껏 자신은 심각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전히 농담조인 황제의 말투는 확실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터라 하연은 거칠게 대답했다. 때마침 차가운 가을 바람이 불어와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자 하연은 거칠게 머리카락을 떼어 냈다. 안그래도 그 연주 때문에 속이 상해 견딜수가 없는데 머리카락마저 말썽이라니. "어휴! 귀찮고 답답해서 정말 미치겠네! 쓸모없이 길다란게 거치적거리기만 하니! 도대체 이떤 머리는 뭐하러 길러야 되는거야? 네니 몰래 그냥 확 잘라버릴까보다.“ 하연이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을 때 갑자기 목덜미에 부드러우면서도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놀란 하연이 고개를 확 돌리려 하자 머리가 당겨 왔다. 황제의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모아 쥐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오늘 말위에서처럼 똑같은 손놀림으로.. 하연이 기겁을 하면서 머리카락을 잡아챘지만 단단히 잡혀 있는 모양인지 머리카락은 조금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움직이지 마라." 황제가 자신의 검에 느슨하게 달려있던 금빛 장식끈을 풀러 하연의 머리를 묶었다.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 지는 몰라도 나는 그대의 머리카락이 마음에 들어. 그러니 자르지는 말아라." 하연은 황제의 손이 머리에서 떨어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부드럽게 대해주는 그의 부드러운 손길과 낮은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안도감이 섞여 있는 듯 했다. 하연이 이상한 느낌에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을 깜박였다. “싫어하는거 아니였어요?”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거지?" 질문을 던지는 황제의 보라색 눈동자가 미묘한 빛을 발했지만 하연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입에서 나오는대로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거야 황제는 날 싫어한다고 들었으니까 그렇죠."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한참뒤에야 잔뜩 억눌린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었다?" 유리엘르 빼려다 쓴게 아까워서 넣었어요. 마론인형B 지금은.. 못합니다. 불행히도. 미르엔 오늘도 리플 주셨군요^^ 카오메이 감사합니다~ ♡lovelygirl♡ 조금더 읽기는 좋아진것 같지요?(주관적)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분들은 30화와 31회를 참고하세요^^) 오늘 오후에 만났던 신관의 말을 떠올리며 드러나지 않게 인상을 쓰고 있던 황제 하이네인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늘 연회에서 가장 늦게 도착하던 황후는 왠일인지 예정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게다가.. 자신보다 늦는 자에게 불같이 화를 내던 황후는 알리샤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말에 반색을 하며 안도하기까지 했다. ‘그 신관의.. 말이 사실인 건가.’ * * * 아까부터 얼굴도 못 들고 있던 신관의 몸이 이제는 이상할 정도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무언가를 감추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는 듯한 행동이다. “벌써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황후의 행동이 이상하지 않은가. 분명 그대가 부분적인 기억상실은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곧 원래의 상태로 돌아온다고 했는데 그대의 치료가 부적당했던 것은 아닌가?” 황제의 차가운 시선에 신관은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다. “....치료.. 말입니까? 그..그게..” “그대의 자질이 의심스럽군! 도대체 치료를 제대로 한건가. 아니면 능력이 부족한 것을 감추려 일부러 모른척 한건가!” 자신이 한참을 추궁한 끝에야 신관은 거의 사색이 되어서 입을 열었다. 자신이 위협을 한덕에 심약한 신관의 목소리에는 거의 울음조였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제 힘으로는 황후님께서 스스로 잊어버린 기억은 다시 살아나지 못합니다. 분명 독으로 인해 잃어버리신 것은 치료를 통해 다시 되살릴수 있지만 스스로 잊어버린 기억은 감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일반적인 일시적 기억상실과는 다릅니다.” 순간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스스로 잊어버리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내 지금까지 그런 말도 안되는 변명은 들어본적이 없다. 혹시 지금까지 황후를 정상으로 되돌리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인가!” “하지만 황제폐하! 기억을 스스로 지웠다는 것은 그정도로 당시의 충격이 심하였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과거의 기억과 감정이 그정도로 고통스러웠다는 뜻입니다. 과거에 선호하던 것을 이제는 더 이상 즐기시지 않는 것을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예전에 즐겨드시던 차나. 음식, 그리고 의복에 대한 기호도 판이하게 달라지셨고... 심지어는 그 좋아하시던 승마조차 꺼리십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말을 달려올때 지나칠 정도로 자신에게 달라붙던 황후다. 게다가.. 그날 밤.. 자신의 접촉에 마치 한 번도 경험이 없었던 것처럼 미숙한 반응으로 보이던 것이 전부...진짜였다는 말인가? 하지만 스스로 잊어버리다니. 그럼 그게 전부 연기가 아니라.. 진심?... 날..거부하는 그것도..? “고쳐라! 일주일내로 고치지 않으면 살려두지 않겠다.” 자신의 입에서 처음 듣는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째서... 그녀의 집착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라 불리던 그것을 끔찍하게도 싫어했던 자신이 아닌가. 이제와 고쳐놓으라니..언제나 그녀에게서 벗어나고 싶어하던 것은 자신이었는데.. 하지만.. 그정도로 고통스러웠던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나 자신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스스로 기억을 지울만큼..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었다는 건가? 그래서.. 모두 잊어버린건가. 더 이상은.. 날,,, 바라보지 않겠다고..? * * * * “일찍 오는군.” 황제는 신관의 말이 맞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황후의 맨몸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옷과 은은한 하늘색과 짙은 청색이 조화된 단아한 드레스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초대에도 전혀 흥분되지 않은듯 담담한 얼굴 때문이었다. 부드러운 얼굴선을 따라 흘러가는 몇가닥의 흑청색 머리카락이 은은한 촛불에 눈이 부실듯 반짝이고 윤기흐르는 머리카락위로 은청색의 진주로 만든 장식이 모아올린 머리카락을 장식하고 그사이로 자리잡은 매끄러운 곡선의 작은 얼굴에 놀랍도록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상대의 눈을 잡아끌기에 충분할 정도로 빛났지만.. 언제나 자신을 바라보던 넘치도록 풍부하던 감정을 담고 있던 눈동자는 없었다. <황후님의 기억을 되살릴려면 황제폐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전처럼 한 번도 말을 걸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 자신과의 대화를 독점하려던 황후는 오히려 자신의 적이 분명한 후작과 함께 화기애애하게 웃고 있었다. 자신의 시선이 알리샤에게 가있는 것을 보고도 전혀 상관없다는듯.. <과거의 기억을 재현시키면..> 내키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아양을 떨어오는 알리샤의 말에 일부러 즐겁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약간 인상을 찌푸리는 황후의 모습에.. 희열을 느꼈다. 다른 여인에게 이리 웃어보였을때와 같은 반응. 예전과는 약간 다른 느낌이었지만 분명 그것은 못마땅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표정. 그리고 이어진 알리샤의 연주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그녀가 분명했다. “...누가 같이 연주 따위를 한다고 그래요!” 자신이 말하고서도 놀라던 그녀.. 알리샤를 향한 질투어린 말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기뻐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이제.. 원래대로 돌아온건가.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이제 다시 돌아온거야. 원래의 그녀로.. 날.. 사랑하던,, 이제 이 낯선 감정에 혼란스러워 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녀를 볼 때마다 이상스레 뛰는 심장박동과 미칠것처럼 온몸을 도는 피로 열기가 오르는 몸도. 자꾸만,, 눈을 뗄 수 없는 황후의 붉디 붉은 입술을 향한 이 이상한 욕구도.. 저 머리카락에 손을 파묻고 그녀의 체취를 느끼고 싶다는 욕망도..이제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겠지. 이제.. 다시 원래대로다. * * * * 돌아오는 내내 뭐엔가 삐친듯 알리샤에게나 가보라는 가시돋힌 말이 그렇게 듣기 좋았던 적이 없었다. 질투하는 황후의 모습은 언제나 짜증만 불러일으켰는데.. 무안했는지 괜히 머리카락에 화를 내는 황후의 모습조차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들었다?” 순식간에 유쾌했던 기분은 흔적없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시녀들이 수군거리지 않게 대놓고 말하라구요. 맨날 내뒤에서 수군거리는 것도 듣기 짜증나고, 아예 그냥 공개적으로 황후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얼마나 좋아요? 그럼 포기도 쉽게 할텐데.” 포기..? 그것이 나를 억지로 황제로 만든 여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그 말 한마디로 끝날 것 같으면.. 내가 왜 지금까지 이러고 있었겠는가. 아마 벌써 해버리고 남았겠지. 하지만.. 저 말은 정말.. 진심인건가. “뭐라고 말좀 해봐요, 그런 어중간한 태도라니.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굉장한 실례라구요. 도대체 왜 좋아했는지 알 수가 없다니까.” <하지만 과거의 사건을 재현한다해도...> 그제서야 신관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이 떠올랐다. <스스로 지워버린 기억은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 “알수 없다니.. 그럼 지금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건가?” 하연이 피식 웃었다. 자신은 황후가 아닌데도 자꾸만 저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 황제의 표정이 너무 재미있어서 하연은 고개를 숙이고 킥킥거렸다. “말해라.” 얼마나 웃었을까. 자신의 어깨를 강하게 잡으며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는 황제의 손에 정신을 차려 그를 올려다보니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의 표정이 더욱 싸늘하게 굳어온다. "감히.....잊었다는 거냐...." 이를 갈 듯 뱉어내더니 눈동자 속에 분노의 불꽃이 일기 시작한다. 심장이 갑자기 거칠게 뛰기 시작한다. 손을 뻗어 아프게 어깨를 쥐어온다.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자꾸만 두근거리는 심장소리에 쫓기 듯 날카롭게 소릴 질러댔다.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말은 없다. 술기운에 멍해진 정신은 더 이상의 사고를 막고 있었기에 하연은 그냥 그렇게 황제의 어두워진 보랏빛 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젠..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냐? 기억하지 못하는건가? 아니면.. 잊어버린건가.” “쿡, 기억이 안난다가 정답에 가까운것 같네요. 당신을 사랑한 기억은 없는 것 같으니까. 그리고 그만좀 찡그려요,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건 그 예쁜 눈인데 왜 맨날 나만보면 찡그리는건지. 그렇게 노골적으로 싫다고 표시내지 않아도 다 안다구요.” 자신은 황후가 아니니 황제를 사랑했던 적이 있을리 없다. 그러니 기억할 리가 없지. 하연은 자꾸만 감기는 눈이 이상타 여기면서 자꾸만 흐려저 가는 황제의 보라색 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라? 눈이 네 개야. 아니.. 여섯갠가. 괴물같아. 큭큭...” 그리고 자신의 품으로 쓰러지듯 안겨들어오는 황후를 그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째서 숨긴거냐?> <그것이 공작님께서 직접 명하신 것이라.. 게다가 이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황후마마의 신변에 위협이 될까.. 하여> 말은 돌려서 했지만.. 황제인 자신이 이번기회로 황후의 지위에서 내쫒을까 분명했기에 그리했다는 뜻이였다. 황후가 될자의 정신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 내침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미였으니까. 자신의 도움이 없으면 기억해내지 못한다는 황후의 증세이니.. 숨길 수밖에 없었겠지.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싫었다. 지금이라도 놓아주면 조금의 미련없이 가볍게 날아가버릴 황후가 아닌 조금이라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면.. 왠지 붙잡고 싶다는.. 이상한 감정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마치 황후인 자신이 낯설다는 듯 중얼거리는 그녀의 말은.. 그녀가 조금의 미련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극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황후마마께서 스스로 잃으신 기억은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 ‘당분간은 덮어두지... 이렇게 편하게 보내줄 수는 없어. 날,, 잊어버린채로 내 보낼 수는 없다. 내가 그대로 인해 느꼈던 수치와 분노 그리고 모멸감을 그대로 안겨주기 전에는 절대로 내보낼 수 없어. 그러니.. 이건 당신을 보호하려는게 아니야.’ 그는 자신의 품에 안겨 세상모르게 새근거리며 잠이 든 황후가 예전처럼 ....처연한 듯한 밤하늘을 닮은 눈이 나만을 담고.. 나를 향해 미소짓고 나를 향해 기쁨의 표정을 담는다면.. 저 붉은 입술이 오늘과 달리 내 이름만을 부르고. 나를 향해 살짝 벌리며.....내게 키스해 달라고 봉오리를 벌리는 꽃처럼 벌어질때까지는... “그래...그때까지는... 보낼수 없어..” 길고 긴 속눈썹 아래로 아까의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듯한 붉그스름해져 있는 황후의 뺨과 약간 벌어지려 하는 붉은빛 입술이 참을수 없게 자극적이다. 그는 그날밤 이후 처음으로 무방비 상태로 온전히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황후의 약간 벌어진 물기 어린 붉은 입술에 격하게 키스하며 자기 자신밖에는 듣지 않는 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보낼수 없다...” 하지만... 부드럽게 휘감겨오는 입술과는 달리 정작....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키스가.. 이리 씁쓸하리라곤.... 그래..........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내손으로 죽이라 명한 그녀가 의식을 잃었을 때. 이제는 나를 옭아매던 그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을 때....한데 왜,,,,, 왜 이렇게 가슴이 이렇게 정신없이........죄어드는지.... 내 가슴속에서 휘몰아치는 이...감정의 실체는 정말..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지금은.... 이렇게는.. 나를 잊은채로는..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 이쁜영이 없던 술주정(?)이 생겼으니.. 완전히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 korapha-duck 어떻게 할까요^^ 의견 있으시면, 이은이 들켰다고 봐야 하나요? 괭이친구 합주.. 으음.. 고민중입니다. 야무진양갈래소녀 신관이 일시적인 증상이라고 했으니까요. 심신이 온전치 못한 여인은 황후의 자리에 있을수 없습니다. 후계자도 없는 상황에서.. 황실의 피를 흐리면,, 곤란하죠^^:: 미르엔 들키긴.. 한거죠? 뭘꼬다봐 앞에서 레기어스와 시노페의 대화중 힌트가 있지만..(기억하는 자는 작가뿐) 마론인형B 한줄 건너 엔터는 좀 심하죠? 그렇다고 다 붙이는 것도^^ 감사합니다. ▩맛있는까까▩ 앗 첫 코멘트시네요^^ ♡lovelygirl♡ 리플도 옆으로 늘어나서 좋아요. 그리고.. 하토르 공작의 아들도. 신경써주세요 그냥 나온 인간이 아닙니다. 그리고 알리샤.. 너무 비중이 적었는데..황제도 본적이 있고, 황후도 이전에 만난적이 있는지라. 그저 연회를 앞두고 찾아온 그들을 존대하는 차원에서 있었던 식사입니다. 그리고 식사 이전에는 기다리는 곳이 따로 있었구요. 식탁은 넓은 홀을 위에서 바라보는 구조라 한복 면에만 사람들이 앉아있습니다. 홀을 바라보고 있는데 보통 궁중악사나. 무희들이 춤을 추기도 하지요. 황제와 황후는중앙에 앉고 각각 황제옆 황후옆 황제의 옆의옆순으로 손님의 중요도에 따라 자리가 배치됩니다. (비슷할 경우에는 남녀남녀순으로) 식사후에는 막바로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응접실 같은데서 술을 가볍게 한잔. 또는 여인들의 노래나 악기연주를 듣는 것이 보통이었지요. 뭐.. 산책도 합니다만.. (초겨울이라 이미 날이 어두워서..) .. 묘사에서 전부 빼버린 설정이지만요. 하연이 마계에서 이곳으로 온지는 열흘이 안되었구요. 마계와 중간계의 시간관념은 그곳 3년이 이곳10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제가 제 뜰에만 올렸었나 보군요.(-_-;;) 결국 거기서는 3일이 지났을 뿐이고.. 안그래도.. 오늘 나옵니다. 어제의 하토르후작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라서요. 게다가 바이욘느나 마왕쪽이나 서로 눈치를 보면서 행동하기 때문에 대놓고 찾을 수는 없지요. 이점은.. 제발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전날 : 하연, 레기어스 습격당함(밤) 1일 : 마왕도착(오전)과 레기어스 고쳐줌(오후) 2일 : 피오렌의 탄신축하연 3일 : 마왕및 손님들이 떠남. 배웅. 사건처리. ->중간계에서는 10일정도가 지났습니다.(전에 계산한걸 여기 글쓰면서 올린것 같은데요) 기억하십니까? 게다가 아르드미한이랑 이번에 나온 후작이랑 나와야 엘류시온이랑 카란도 나오기 때문에.. 그저 사전준비 정도로만 생각해 주세요. 전에도 왔다갔다 쓰니까 다들 헷갈린다고 (저의 역량부족입니다.)난리가 나서.. 바꿔보았는데. 역시나.. 불만이 접수되는군요.(진도가 느릴것이 가장 큰 이유라는것은.. 통감하고 있습니다.) “누구냐!” 일부러 낸 것이 분명한 소음이었다. 어느새 테라스에 들어와 있는 그것을 본 황제의 눈이 일그러졌다. “...” 어둠속에서 걸어나온 상대는 대답이 없다. 그저 황제에게 까딱 고개를 숙인 것이 다였다. 어둠속에서도 유난히 빛을 발하는 회색빛의 눈동자가 오로지 한군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황제의 품에 안겨있는 하연이다. “건드리지 말라는 것인가.” 오후에서처럼 자신에게 달려들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신뢰라고는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로지 먹이를 노리는 듯한 사나운 맹수의 모습은 황제에게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숨도 거의 쉬지 않고 마치 금방이라도 도약할것 같이 팽팽한 긴장감으로 굳어진 근육이 짧은 상의 위로 튀어올랐다. “데려가 보시지?” 이번은 지난번처럼 그렇게 허무하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황제는 자신과 상대의 거리를 가늠하며 안고있던 황후를 앉아있던 소파에 기대어 앉혔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 하나 이미 모습이 드러난 상태다. 황제의 손이 허리의 검으로 옮겨갔다. 기술이나 파워면에서는 분명 뒤처지지만 발도술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순간, 회색빛의 머리카락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살기를 띈 회색 눈동자가 사라진것도 거의 동시였다. 그리고 이미 그 이전에 황제의 검은 검집을 박차고 나와있었다. 챙! 황제의 날카로운 검날이 무언가에 부딪쳤다. 무장이라곤 하나도 하지 않았던 자를 베었다 느낀 순간 들려온 것은 살을 가르는 소리없는 묵직함이 아닌 튕겨저 나가는 금속성, 상대는 언제 빼내어갔는지 황제의 검집으로 칼을 막아낸 것이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 황후를 안아올리고서는 반대쪽으로 미끄러지듯 피했다. 전혀 불필요한 동작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한순간에 이어진 민첩한 몸놀림과 전혀 거칠어지지 않은 호흡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상대는 그 와중에서도 자신의 온몸으로 하연을 감싸않고 있었다. “네놈이 과연 끝까지 지킬 수 있을까?” 황제가 달려들자 상대는 황제의 날카롭게 파고드는 검을 간단히 발로쳐 떨구고 그 찰나의 틈을 파고들어 황제의 목을 거머쥐고 벽에 밀어붙였다. 낮게 으르렁 거리는 소리와 함께 드러낸 이빨이 기형적일 적도로 뾰족하다. 그제서야 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싸늘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잠시 그 상태로 황제를 노려보고 있던 롤프는 한발씩 뒤로 물러서더니 황제의 목에서 서서히 손을 떼었다. 애초부터도 별로 힘을 준 것은 아니었던지 황제의 목에는 손자국 하나 나지 않았다. 상당히 넓은 거리를 그렇게 황제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뒷걸음치던 회색머리의 사내는 이제는 안전하다 싶었는지 조심스레 한 팔로 안고 있던 인물을 살펴본다. “으응...” 주인의 안위가 확보되자 금새 눈동자라 환해진다. 아까의 날카롭던 표정은 이미 사라졌다. 하지만 주인이 이곳에 있는 것은 황제와의 볼일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지 그냥 그렇게 주인이 깨어날때까지 기다리겠다는듯 서있는다. 흠칫! 황제가 조금 움직이자 마자 회색눈이 경계의 눈빛으로 변한다. 하연을 안은팔에 다시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피할수 있게 황제의 움직임에 시선을 떼지 않는다. “...공격하지 않는다. 그러니 돌아가라.” 먼저 패배를 선언한 것은 황제였다. 저따위 동물한테 졌다는 자존심에 입은 상처 때문에 목소리는 거의 들을 수 없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였지만 롤프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갔던 일은 잘 되셨습니까?” 황궁에서 돌아온 하토르 후작의 코트를 받아들며 이번 여행에 같이 뒤따라온 집사의 아들이 공손하게 물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말없이 그저 나가라는 손짓만 할 뿐이었다. 집사가 나간뒤 벽이 일렁이더니 새하얀 은빛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은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왔다. “그래 내가 할 일은 뭐지? 말해 두지만 나 엘류시온은 너같은 놈의 허튼수작 따위나 들어주기 위해 계약한게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이런 구석에 처박아 놓고 혼자만 싸돌아 다녀?” 놀랍게도 연신 신경질을 내며 방안의 가구를 툭툭 차는 자는 하연을 공격한 바로 그 엘류시온이라는 마족이었다. 하연을 공격한 이후 아버지에게로 도망친 엘은 자신이 공격한 그것이 바로 시노페의 봉인된 영혼을 담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말대로라면 분명 마왕이 카란과 엘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 분명했고 그것을 알자마자 엘은 자신을 소환하는 미약한 기운에도 불구하고 그 소환에 응해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그냥 바보같은 인간이었으면 내 마음대로 조종해서 부려먹는 건데. 하필이면 이런 능구렁이 같은 놈한테 걸려서 이게 무슨 꼴이람.’ 마족이 중간계에 내려오기 위해서는 소환에 의한 계약자가 필수 불가결했다. 계약자의 존재가 없으면 중간계로 나올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본신의 힘의 백분의 일도 제대로 쓸수가 없는 것은 물론 자신의 육체마저 잃게 되었다. 그것은 천족에게도 해당하는 것이었다. 신의 신탁을 빙자하는 천족들은 마족이 행하는 그런 계약을 혐오스러워하며 그것과는 다른 의미의 대신관이라는 존재나 무녀라는 존재를 통해서 그들의 힘을 사용했지만 근본적으로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마족과 비교할 때 간접적으로 계약을 맺는 그들이 미치는 영향력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성질이 급하시군요, 마족은 만년가까이 산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고작 이틀을 견디지 못하시다니요. 제 딸이 황궁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당분간은 자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곳은 에일지브 신단의 3개의 대신전중 하나가 있는 곳입니다. 함부로 움직이시다간 걸리고 마실겁니다. 엘류시온님은 아직도 마력을 제어하지 못하시지 않습니까.” 엘이 뻘쭘한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남자의 말은 조목조목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마계서열 2위의 첸의 아들인 엘류시온이 이 중간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천계에서 안다면 가만 있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마족의 기운을 숨기는 방법을 한번도 배워본적이 없는-배우기는 했는데 졸았다-자신으로서는 이녀석이 마련해준 이곳의 진안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럴줄 알았으면 제대로 듣는 거였는데. 내가 이 중간계로 오게될 줄이야. 그런건 하급 마족이나 심심풀이로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젠장. 이럴때 카란이라도 있으면 도움이 될텐데. 이녀석은 도대체 어디로 떨어진 거야?’ 마계와는 달리 한밤중까지 소란스러움이 그치지 않는 이곳이 엘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도저히 알수 없는 여러 가지의 모순된 감정이 뒤엉켜 있는 이 알 수 없는 계약자도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자신이 이곳에 어쩌면 평생 눌러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이제 전부 아버지 때문이야! 분명 나한테는 목숨만 살려서 데려오라 하고서는 나중에 시노페의 영혼이라고 설명해주면 어쩌잔 말이야. 분명히 죽었을게 뻔한데.. 이렇게 되면 바이욘느가 마왕이 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펠리펜 마왕이 살아있는한 이제 마계는 영영 못 돌아 가겠지.’ 예나 지금이나 화려한 도성밖은 언제나 시끄러운 소음과 더러운 골목, 그리고 허름한 옷차람의 사람들과 다 허물어져 가는 삐걱이는 집들이 모여 있는 소위빈민가라는 곳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언제부터인가 병자가 생기면 그들을 모아놓는 영원의 안식이라고 불리우는 허름한 목조건물이 있었다. 병이 들어도 이곳에 있는 자들은 그것을 고칠만한 여력이 없었고. 가족이 있는 자라 해도 신관을 찾아간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려웠다. 언제나 귀족들의 부름에도 모두 찾아가 볼수 없을 정도에다 부유한 상인들이나 가끔 치료를 받을 수 있을뿐이었다. 가끔 평민들을 위해 약을 지어주고 상처를 치료해주는 치료사들이 존재했지만. 치료사는 수십년의 세월을 훈련해야 하는 겨우 제대로 된 자가 하나 나올정도로 실제 제대로 된 치료사를 찾기는 어려웠다. 그저 곁눈질로 얻은 지식으로 엉터리 치료사 짓을 하다가 잘못된 처방으로 미미한 병세의 환자들을 중병으로 몰아넣고도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병자를 앞에 두고도 찾아 갈 곳이 없는 자들은 그런 그들이라도 찾아가야 할 정도였다. “ 어째서 이렇게 손님이 없는거냐?” 이구역에서 그래도 가장 잘 나가던 치료사인 한센이 분통을 터트렸지만 늘 손님들로 바글바글 하던 그의 작은 치료소는 아무도 없이 먼지와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구석에서 남편의 눈치만 살피고 있던 보조역의 실리아는 그런 남편의 모습에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언제나 화만 나면 자신을 무슨 짐짝처럼 발로 차기 일쑤였기에 벌써부터 온몸이 떨려왔다. “이게 다 얼마전에 여기로 들어온 그 녀석 때문이야!그놈이 들어오면서부터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분명 그 반반한 낯짝하나 믿고 실력도 변변치 못한 놈이 내 환자들을 다 빼어가는 모양인데 그냥두지 않겠다.” 한참이나 씩씩대던 한센은 구석에 세워두었던 몽둥이를 꺼내들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뒤에 남은 실리아는 오늘은 맞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보다는 남편의 몽둥이세례를 받게될 그 남자의 명복을 빌었다. 한때 용병일을 하기도 했던 한센은 덩치도 남들의 두배 이상으로 컸지만 그 힘도 장난이 아니어서 왠만한 성인남자 셋이 달려들어도 몽둥이 하나로 가뿐히 해결하는 괴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센이 문을 밖차고 거리를 지나가자 모든 사람들은 슬슬 눈치를 보며 몸을 피했고 그 복잡하던 거리는 순간 정적이 흐르며 한센의 앞으로 쭉 길이 터지는 모세의 기적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자그마한 건물도, 그렇다고 천막이라도 하나 처놓은 간이 치료소도 아닌 그저 마을의 공동 수도가 있는 그나마 큰 공터였다. 어느때처럼 이곳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지만 평소보다 두배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비켜! 이 새끼들아! ” 거칠게 사람들을 떠밀며 들어오던 한센이 걸치적 거리는 것은 죄다 발로 한번씩 걷어차자 여기저기서 신음성이 들려왔지만 누구하나 불평의 말을 입에 올리는 자는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워낙 한센의 기세가 살기등등했기 때문이다. 한센이 걸음을 멈춘곳은 다름 아닌 수돗가 바로 앞이였다. 거기에는 황토색 흙먼지가 가득 앉아 누런색으로 보이는 낡은 갈색 로브를 입은 외소한 남자가 한 소년의 다리를 살펴보고 있었다. 한센이 그를 내려다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지만 상대는 고개를 돌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제 됬습니다. 부러진 다리는 잘 맞추어 봉합하였으니 이제 집에 가서 안정을 취하면 됩니다. 단지 조심해야 할 것은 이후에 다친 다리를 사용하지 않으면 그대로 굳어버리니 반드시 의식적으로 이쪽의 다리를 사용해야 하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아이엄마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도 못하고 황급히 아이를 안고 그저 고개만 숙이고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 그 여인을 마지막으로 아무도 그에게 가까이 가지 않아 공터에는 2미터 정도의 원이 생기고 그 안에는 로브의 남자와 커다란 몽둥이로 손바닥을 툭툭 치고 있는 한센만이 남게 되었다. 그제서야 로브의 남자는 잠시 쉴틈을 얻었다는 듯이 어깨를 두 번 두드린다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늘어보이는 체구와는 달리 상대의 키는 일반적인 평균이상의 한센보다도 훨씬컸다. 순간적으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자 주위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정도로 조용해 졌다. 한참만에야 먼저 입을 연 것은 로브쪽이었다. “...어디 아프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진심으로 걱정한다기 보다는 마치 의무적으로 말하는 듯 평이한 어조였지만 한센에게는 자신을 놀리는 듯 들려왔다. “이 새끼 어디서 개 수작이야! 오늘 내 몽둥이 맛좀 봐라!” 한센은 예고도 없이 말과 동시에 몽둥이를 내리쳤다. 그순간 그곳에 모여있던 자들은 모두 눈을 감았다. 엄청난 속도와 무게감을 싫은 그것이 바로 정수리를 향해 다가오는 데도 로브의 사나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분명 다음순간이면 바닥으로 피를 흘리며 쓰러질 것이 분명했다. 따악-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생각보다 더 큰 소음에 그곳에 서있던 사람들은 차마 볼수 없을 참혹한 광경을 예상하면 천천히 눈을 떴다.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자의 입에선 피가 흘러나와있었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자의 눈에는 일말의 자비심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듯 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죽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한동안 운신은 힘들겠지요.” 상대의 몽둥이를 두동강이 낸 로브의 사나이가 그를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말했다. 잠시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생각하던 먼저 입을 열었던 남자는 한센의 드러나 가슴에 아까의 몽둥이가 친것이 분명한 둥근 피멍이 생긴것을 보고는 경악했다. 잘은 알 수 없지만 머리위로 몽둥이가 내려치는 순간 그것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잡아뺀 상대의 가슴을 공격한 것이 틀림없었다. ‘말로는 쉽지만.. 그 찰나와도 같은 순간을 잡아내는 것은 쉽지 않아.. 게다가 상대는 한때 2급 용병이기도 했던 한센이다. 그런데 어떻게 저자가.. 게다가 방금의 그 폭팔적인 힘을 막아낸것은.. 분명 순순한 육체의 힘 뿐이었는데..’ 다시 아까와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돌아간 사내를 바라보던 그의 눈이 작아졌다. 상대가 옆에 꺼내놓은.. 상자는.. 분명... 틀림없다, 저정도의 검은 나무로 된 고급상자는 많이 보아왔다. 하지만 가장자리를 장식하고 있는 저 테의 무늬는 분명,,. 그는 황급히 그곳을 벗어났다. 벌써 200년 전에 사라졌던 물건이다. 자신들이 그렇게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던 물건이 남루한 로브를 걸친자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서 바삐 알려야만 했다. 사내가 떠난뒤 쓰러진 한센을 바라보던 남자는 아까의 일로 풀어진 머리카락이 바닥에 끌리는 것을 깨닫고는 뒤집어 쓰고 있던 모자부분을 벗었다. 환한 햇살사이로 놀랍도록 윤기나는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나왔고 머리색과 완연히 대비를 보이는 가는 선의 단아한 얼굴이 드러났다. 곧게 벋은 콧날위로 그려진 짙은 눈썹은 그 아름다운 붉은 입술을 가진 자가 여성이 아닌 남자임을 분명히 해주고 있었다. “카란님. 이 아저씨 고쳐주지 마요. 얼마나 나쁜 사람인데요. 아마 마족도 이사람보다는 나을꺼라고 우리 아빠가 그랬어요.” “맞아요. 그리고 엄청 튼튼해서 절대로 죽지도 않을 건데요,뭐.” 한센을 치료해 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아이들이 연신 볼멘 소리를 해 댔지만 로브의 사나이. 아니 카란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손만 움직이고 있었다. 하얀 침대에 눕혀진 채로 색색거리는 숨을 내뱉고 있는 알리샤의 얼굴은 극도로 창백했다. 그녀의 손은 힘없이 소파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고, 주위에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저마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후님도 어떻게…그렇게 심한 말씀을.. !!" "괜...찮아요." 황후가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는 순간부터 하얗게 질려있던 알리샤를 지켜보고 있던 그들은 이제나 저제나 그녀가 쓰러질까 걱정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입술이 새파래질 때까지도 그저 혼신의 힘들 다해 자신의 품위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황제와 황후가 떠난 뒤에야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바닥으로 쓰러져 버리는 그녀의 모습에 그들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알리샤 공녀가 평소에도 조금의 충격을 받으면 쓰러질 정도로 약한 심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황후는 그런 모진 말을 한 것이 분명했지만 최후의 순간까지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묵묵히 수모를 참고 견디는 모습은 그녀야 말로 진정한 황후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에 충분했다. 황후가 하토르후작과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눌 때부터 무언가 이상했다. 그들이 아는 황후는 결코 자신과 반대쪽에 서 있는 자들의 말을 받아줄 정도로 너그럽지 못했다. 알리샤의 입장을 잘 알고 있는 황제가 유난히 황후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것도 아마 평소와는 다른 황후의 그런 모습을 끌어내려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 지경이 되어서 황후를 감싸지 않아도 된다!!! 보는 자들이 있다하여 굳이 그리 말할 필요는 없어. 황후의 저런 안하무인격인 태도는....!!" "……그만 하십시오. 그래도 황제폐하의 사람이십니다. 그분을 욕되게 하는 것은 황제폐하께도 누가 되는 것을 모르십니까." 알리샤는 자신의 옆에서 오히려 자신보다 펄펄 뛰는 남자를 향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먼 사촌인 그는 혼절 직전까지 갔던 자신을 두고 눈물 콧물 다 짜대며 징징대고 있었는데, 알리샤는 그런 사촌의 태도가 심히 짜증스러웠다. ‘여기서 황후를 욕하면 어떡하자는 말이야!’ 일부러 연회에 늦었지만 평소와는 달리 늦은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황후였다. 게다가 자신의 자리가 바로 황제의 옆자리 였음에도 오히려 자신의 아버지와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모습에 오늘의 계획이 모두 틀어질까 내심 걱정하고 있었고 그러던 차에 마지막으로 황후가 내뱉은 한마디에 안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말에 즉시 바닥으로 쓰러질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오히려 자신이 몸만 약한 그저 그런 공녀로 인식될까 일부로 그들이 떠난 뒤에 쓰러진 것이었고 자신을 바라보는 눈들로 볼때 그 작전은 충분히 실효를 거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저 멍청한 사촌은 그것도 모르면서 쓸데없이 황후를 함부로 입에 올리고 있었다. ‘아무리 궁 안에서 인기를 잃은 황후라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구축해 놓은 세력은 적지 않아. 비록 마음은 떠났다 하지만 실질적인 이득이 그녀에게 있는 한 그녀에게 아부하는 자들은 적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날 동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 내 언행 하나하나가 황후에게 들어갈 것은 자명하니 말을 조심해야 해.’ 알리샤는 가늘게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자들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그 중에서 황제의 정무에 가장 많이 관여한다고 알려저 있는 로이츠의 해골 같은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알리샤는 몸은 많이 좋지 않지만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는 애써 미소짓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네 얼굴이 어떻게 보이는 줄이나 알고 있는거야! 이 정도 충격이면…지난번처럼 사흘은 꼬박 누워 있어야 할 정도란 말이다!!" 알리샤와 비슷한 은청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이미 그곳에 없는 상대를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어짜피.. 처음부터도 환영받을 거라곤.. 하지만 난 어떻게든 잘 지내보고 싶어서 황후님이 음악을 좋아하신다는 말에 트랑을 연주한 거였는데.. 아마.. 내가 싫으신게 아니라.. 내 연주가 너무 모자랐기 때문이겠지요." 알리샤의 트랑 연주는 어머니가 결혼 때 데리고 온 엘프 노예에게서 직접 배운 것이고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연습을 쉰 적이 없었기에 그 수준은 왕궁악사에 비견할 정도였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알리샤와 가족뿐이었다. 얼마 안 되는 시간에 그 정도의 경지에 오른 놀라운 연주실력을 스스로 폄하하는 알리샤의 말은 그러기에 더욱 빛이 발하고 있었다. "…알리샤님의 트랑 연주는 제가 듣기에도 충분히 훌륭했습니다." 로이츠의 얇은 입술이 열리면서 해골이 덜그럭 거리는 것과 비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여기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이고 있는 감탄이나 동정의 눈빛이 아니었기에 알리샤는 긴장했다. 평민출신에서 여기까지 올라온 로이츠의 능력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냉철한 이성이었고 그것은 곧 자신의 연기를 가장 먼저 눈치 챌 사람이 저기 서있는 로이츠란 이야기였다. 게다가.. 약간은 의심의 빛을 띄고 있는 저 눈동자를 상대로 더 이상 연기를 펼쳤다가는 들통날것이 분명했다. "....!" "알리샤님!" "알리샤!!" 알리샤가 가슴에 무리가 오는듯 상반신을 구부리기가 무섭게 사촌이 득달같이 달려와서 알리샤를 부축했고 다른 사람들도 당황했는지 연신 웅성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로이츠의 입술은 묘하게 비틀어져 있었고 잠시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을 한번 바라보던 그는 팔짱을 끼고 옆에 서있던 시종에게 무엇인가를 일렀다. 잠시 후 시종이 종이와 펜을 가져오자 로이츠는 거기에 재빨리 뭐라고 쓴 다음 그것을 살짝 흔들었다. 보통은 잉크가 빨리 마르게 하기 위해 종이를 살짝 흔들지만 알리샤의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의 벽에 갇힌 그녀의 눈에 들어올 정도로 높이 들어 올려 좌우로 흔들어대는 것은 분명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 틀림없었다. 순간 알리샤는 숨을 들이켰다. 상대는 자신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알리샤의 그런 행동이 아까의 충격의 여파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그녀의 안색에 걱정을 할 뿐이었다. 사람들이 전부 알리샤만을 바라보고 있을때 로이츠는 종이를 접어 네모모양으로 만든 다음 그것을 벽난로 위에 있는 시계의 바로 아랫부분에다가 밀어넣었고 뒤돌아보지도 않고 방을 빠져나가 버렸다. “알리샤? 괜찮은 거냐?” 루시앙은 얼굴 가득 걱정을 머금은 채 알리샤를 보고 있었다. 사촌이긴 하지만 가끔 가문에 행사가 있을 때만 보던 사촌은 여전히 몸이 약했던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들릴듯 말듯 갸냘픈 목소리는 조금도 바뀐 것이 없었다. “아니예요, 밤도 깊었는데.. 제가 붙들어 놓은 것 같아 죄송하네요. 그만 돌아가셔도 됩니다. 게다가.. 저를 이리 걱정해 주시는 것은 고맙지만.. 괜히.. 황후께 오해라도 받게 되시면..” 알리샤가 일부러 말꼬리를 흘리자 그제서야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마지못해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루시앙은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변한게 없구나..’ 루시앙은 해마다 알리샤의 생일파티때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홀로 쓸쓸히 앉아있는 모습에 관심을 가진것을 처음으로 그녀를 상당히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 있었다. 바람에도 날라갈듯한 저 모습은 사람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아까의 황후의 태도를 보니 앞으로 알리샤가 넘어야 할 산은 멀고도 험해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황제가 알리샤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하긴 평소에도 억센 편이던 황후와 알리샤를 비교한 다는 것이 처음부터도 말이 되지 않는다. 루시앙은 알리샤의 은청색 머리카락을 바라보고 있다가 나직하게 숨을 뱉어냈다. 하지만..확실히, 무리인 것으로 보인다……. 루시앙은 알리샤의 가느다란 두 팔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싸늘한 황후를, 필요하다면 누구보다도 차가워질 수 있는 슈피르 공작을. 게다가 그들 둘에 밀려 힘없는 황제를 믿고 알리샤가 황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확률은 적어보였다. "알리샤." 루시앙은 미약하게 숨을 몰아쉬는 알리샤의 이름을 천천히 불렀다. 그녀는 그의 부름이 있은 후 한참 후에야 눈을 들어 루시앙을 마주보았다. "……부탁할 일이 있으면..." 루시앙의 말에 알리샤는 한동안 눈을 꿈뻑였다. 잠시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달이 잘 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계속 눈을 깜빡거리던 알리샤는 루시앙의 약간 붉어진 얼굴과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듯한 몸짓을 보고 속으로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 말은…절 도와주시겠다는..?" 루시앙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그저 백작의 세명의 아들중 세 번째의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지만 두 형이 갑작스레 사고로 죽은 이후 병든 아버지의 유일한 후계자는 자신뿐이었고 예전과는 달리 알리샤를 도와줄만한 충분한 능력이 되었다. ‘이건... 정말 의외로군. 늘 연회에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구석에 처박혀 있길래 소심한 줄 알았는데.. 하지만 저 순해빠진 루시앙이라면 충분히 이용가치가 있겠어, 보아하니.. 나에게도 관심이 있는 것 같고.’ 알리샤는 진한 미소를 띄고 루시앙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그런 알리샤의 태도에 용기를 얻었는지 루시앙이 다정스럽게 알리샤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면 말했다. "알리샤의 말이라면 내 힘이 닿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황후의 세력에 비하면 보잘것 없겠지만.. 그래도 널 지켜주마." 초겨울의 짧은 낮 때문에 금새 어두운 밤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두터워 보이는 짙은 청색커텐은 날이 별로 춥지 않은데도 두텁게 쳐져 있는 것을 보면 의도적으로 방안의 기척을 숨기기 위한 것이 분명했는지 창밖으로는 방안의 불빛 한 점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았다. 방을 밝혀 주는 것이라고는 은으로 화려하게 세공된 장식용 촛대에 꽃인 양초들이 전부였지만 은은하게 방안 구석구석을 비춰 주는 주황빛 불빛은 왠지 모를 은밀한 분위기마저 조성했다. 그러한 방안의 가장 구석에 자리잡은 품위 있는 테이블 위는 방안의 분위기에 맞는 푸른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푹신해 보이는 의자에는 아까의 창백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혈색이 넘치는 얼굴로 알리샤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한 남자의 시선은 일견 요염해 보이기까지 하는 알리샤의 모습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침착하게 맞은편 의자위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메마른 나무껍질을 연상시키는 그의 짙은 갈색 눈동자에는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그에 반해 그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는 야심으로 가득차 있어 보였다. 아까와는 달리 살짝 눈꼬리가 올라가 고집스러워 보이는 것도 놀라웠지만 순진무구해 보이던 얼굴에 넘칠듯한 색스러움이 풍기는 표정이 자연스럽게 짓고 있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었지만 남자는 그저 얄팍한 입 꼬리를 올리며 사무적인 투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알리샤님을 뵙는군요, 예전에 비하면 지금 모습은 거의 그대로인것 같지만 분명 외면의 아름다움은 빛을 더했다는 것이 분명하군요." 칭찬을 듣고서 기분 나빠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아니라는 것과 비꼬는 듯한 칭찬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렇지 않을이가 태반이었고 그것은 알리샤도 마찬가지였지만. 애써 태연한척 고개를 높이 들고 있었다. 자신이 로이츠를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였다. 대부분의 귀족이 비교적 투실한 몸매를 하고 있는 것에 반해 마치 회초리처럼 마른 그의 몸과 평범하기 짝이 없는 외모는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단지 이상하다면 상대가 자신에게 약간의 적의를 가지고 있는 듯한 말투를 사용한다는데 있었지만, "감사합니다. 로이츠님. 그런데 무슨 일로 이렇게 깊은 시각에 저를 만나자고 하신 것인가요? " 알리샤의 목소리는 가냘픈 미성이라기 보다는 상대를 방심시키려는 듯 촉촉히 젖어있는 요염한 목소리였다. 왠만한 절제심이 없는 남자라면 한번에 그녀에게 넘어가 버릴정도로 알리샤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요염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저는 연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의 태생이 귀족과는 먼 것이라 연극을 보면 보통은 지루해지고 짜증까지 나더군요. 일부는 저의 이런 태도를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이라 비난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의 말처럼 역시 근본적인 것은 바뀔 수 없나 봅니다." 연기라는 말에 특히 힘을 주며 말하는 상대를 바라보는 알리샤는 살짝 눈꼬리를 들어 올렸다. 상대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연기가 형편없다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그녀의 연기에 질려가고 있다는 것도. 그제서야 알리샤는 처음의 가냘펴 보이는 얼굴도 지금의 유혹적인 얼굴도 모조리 집어던지고 본래의 표독한 얼굴을 드러내며 로이츠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상대가 이런 늦은 밤에 비밀리에 자신을 찾아오겠다고 쪽지를 남긴 것은 분명 그도 무언가 자신에게서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알리샤는 먼저 머리를 숙일 생각은 털끝 만큼도 없었다. 특히나 이런 평민출신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지금 하시고 계신 일을 그만두시지요.” “..그럴수 없다면요?” 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저도 나름대로 방법을 취해야 겠지요. 하지만.. 당신의 피해도 상당히 클 것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희쪽도 만만한 것은 아니니까요. 당신의 생각처럼 이곳이 호락호락할 것이라는 기대는 버리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걱정 마시지요. 제 목적은 ‘황제’가 아니라 ‘황후’니까요. 당신들의 계획 따위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증오로 불타오르는 눈이 된 알리샤가 내뱉듯 말하자 알리샤를 바라보던 로이츠의 눈빛을 강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둘 사이에 놓인 촛불이 아슬아슬하게 자태를 유지하며 불지 않는 바람에라도 휩쓸리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이제 간신히 황궁에 자리를 잡아가는 그대들이 날 어찌할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은 지나친 오만이 아닌가요? 아무리 요즘 황제폐하가 그대들을 대거 임용하고는 있지만 황후를 위시한 귀족측이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대 따위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여인과 자신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로이츠의 콧대를 꺽어놓겠다는 듯 알리샤는 로이츠의 최대 약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귀족이 대부분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테아난제국에서 일반 평민으로서 제국의 관리가 된 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또한 그들 대부분이 명령권자라기 보다는 실무자의 직책에 몰려 있다는 것은 그들이 언제라도 지금의 지위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분명.. 이자는 경계해야 한다.’ 황제의 파격적인 신뢰를 얻고 있는자다. 그가 한마디 자신에 대해 나쁜 쪽으로 몰고가고자 하면 얼마든지 그것이 가능한 것이었기에 알리사는 최대한 인내하고 있었다. “하지만 황후를 건드려는 계획은 중지하시지요. 오늘 일부러 황제폐하께 가까이 접근한 것도 그 계획의 일환이겠지요? 하지만 앞으로 대 연회가 4일밖에 남지 않았고 타국의 사신들이 모두 모여 있는 지금 상황에서는 각자의 이익보다는 테아난 제국의 위엄과 안정을 드러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런 말을 하는 본인이 그것을 뿌리부터 흔들려고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한번만 더 말씀드리지요. 당장 지금 하고 있는 계획을 멈추십시오. 아주 그만두라는 것이 아니라 잠시 미루라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알리샤의 질문을 무시한 대답이었지만 알리샤는 개의치 않았다. 기분 나쁜 웃음을 지어 보이던 알리샤의 눈동자가 무섭도록 빛났다. 대연회가 끝날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지만 이런 자가 자신을 위협하는 것은 견딜수 없었다. 자신의 꿈이 실현되려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는 이때에 이런식으로 방해를 놓다니. “대가는?” 이번 일에 들인 공이 얼마이던가. 그냥 순순히 포기하기는 아까웠다. 하지만 로이츠가 이미 냄새를 맡아버린 상황에서 일을 계속 추진할 수도 없었다. “....무엇을 바라십니까.” “내 오라비를 황궁에 넣어줘. 가능하면 황제궁이 좋겠군. 우리집안과는 이미 의절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다가 슈마이츠 공작의 차기 부관으로도 손꼽히는 인재니 그대가 조금 힘만 쓴다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반말투로 바뀌어 버린 알리샤의 말에도 로이츠는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알리샤의 오라비란 자는 예전에 후작과 의절하여 이름과 성마저 바꾸면서 귀족의 지위까지 잃은 자였다. 그런 자를 황제궁에 넣는다 해도 전혀 문제될 것은 없었다. 게다가 자신도 몇 번 보아왔지만 알리샤나 그녀의 아버지인 하토르 후작과는 완전히 다른 강직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궁이라니.. 로이츠의 눈이 가늘어졌다. “걱정마. 난 단지 나의 혈육이 지금처럼 고생하는 것이 보기 싫어서야. 어짜피 내가 정비가 되면 지금 있는 곳에서는 더욱 견디기 힘들어질 테고. 당신도 눈앞에 두고 감시하는 편이 좋을테니까.” 알리샤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순간적으로 사라지긴 했지만 혈육에 대한 애정이었고 그것을 눈치챈 로이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서 인간적인 감정을 발견하고서 호응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어짜피 감시해야할 대상이라면 조금은 유용하게 써먹을 수도 있을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오만함은 5년전 그때와 똑같군.. 날 잊은건가? 하긴 그저 엘츠의 아카데미의 가난한 학생에 불과했던 날 기억할리가 없지.' 47회 베네딕트 - 엘이 억지로 데리고 탈출..(중간에 헤어짐이 정답이네요) 야무진양갈래소녀 - 하토르 후작은 공식적으로는 황제편입니다.(일단은..이것만) kh미소천사 -처음인것 같은데요^^(리플 감사해요) 에슐렌 - 첫리플이죠? 레기어스는 여전히 과거에서.. (의식불명상태) 소월령 -역시 처음이신 것 같은데..예! 오스카님이시죠. 다른 그림도 있는데.. 이게 제일 깔끔하게 보여서 야옹~♥ - 오타 지적은 언제나 환영^^ 첫리플 감사드립니다. 하을이 - 감사드립니다.(오타지적) 이은이 -마족이기에 악운이 더 잘어울리는 것 같은데... (ㅋㅋㅋ) raw - 하연의 회상신으로 등장할 예정입니다. 미르엔 - 그저.. 설정집대로 밀고 갈 생각이라.. ☆드래곤™ - ™이란 뜻.. 저도 몰라서 찾아보니 Trade mark. 등록상표라 뜻이라는군요. 48회 오를르 - 첫리플이시군요^^ 게다가 한번에 모두 봐주시다니. 감사합니다. 하을이 - 하지만.. 세상은 함께 살아야..(크헉) 베네딕트 - ...오늘편..은...(아마. 실망이 크실듯) 마론인형B - 추천 감사드립니다. 다들 하연을 좋아해 주시네요. 하연편은 써놓은게 3장정도 있는데. 마음에 안들어서 다시 써야 되요. 이쁜영이 - 그렇죠^^(게다가 하연이 팍팍 밀어줄테니... 잘 되야 되는데.) kh미소천사 - 리플 감사드려요! kh는 뭐의 약자인지요? 괭이친구 - 카란은 롱~ 덤으로 황제는 숏(약간 목이 덮이는) 레기어스도 길어요 (하연이 처음에 여자인줄 알았던 이유중 하나니까요.-얼굴도 미남이지만,) 야무진양갈래소녀 - 오늘편을 보면.. 당분간 연회끝까지는(1달정도) 조용하겠지요. 미얄세려 - 처음인것 같은데. 리플도 첫타시네요. 감사합니다. 추가:엘윈님. 굉장하시군요. 제가 그런 분위기를 깔긴했지만 눈치채시리라고는.. 하연은 워낙 가드(?)들이 많아서.. 하지만 그 공주는 다르지요. 그리고... 설문조사 중입니다. 앞으로 무도회도 있구요. 사냥도 있고 예식도 있는데다가.. 그모든 사전연습이 있는지라..만남이 많아집니다. 다음회부터는 마계력과 중간계렬을 적어야 할것 같군요.... (하룻밤 이야기로 며칠 썼는지..) 설문조사 중입니다! 제발~~~~~~~ 참여해 주세요.(다음편에 황제가 나올예정이라...) 지금 상황을 말씀드리자면.. 황제는 황후가 자신을 기억에서 잊어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고. 예전에는 황후의 사랑을 집착이라 생각해 외면했었지요. 지금은 아쉬워하는 분위기(?) 실질적인 부부관계...는 이미 있었던(진짜황후와) 상태고. 기억상실이 드러나게 되면 황후는 폐위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연의 옆에는 슈마이츠공작과 롤프가 늘 얼씬(!!)거리고 있습니다. 오늘 자른 부분다음이 황제와의 장면이 됩니다. *중간계12일째 아직 이른 오후이지만 시녀들은 자신의 할 일도 잊었는지 죄다 황후의 문 밖에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오전에 제국내에서도 알아주는 시탄 연주자인 엘더가 찾아왔다는 소문에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이곳에 모인 시녀들이 태반이었다. “정말...뭐라 말할수가 없네요..” “황후님의 실력이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방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분명 시탄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틀림없었다. 두터운 문을 뚫고 나오느라 거의 들리지 않는 미약한 소리였건만 그 정도의 작은 소리에도 그들은 연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일부는 몸을 부르르 떨고 있기까지 했다. 벌컥! “뭘 보는거냐! 당장 각자 할 일이 있지 않느냐!” 방문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시녀들과 눈이 마주친 네니는 연신 키득거리는 시녀들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황급히 사라지는 시녀들은 저희들끼리 연신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네니는 차마 그것까지는 뭐라고 하지 못했다. 도저히 황후마마의 방에 들어가지 못해갔다는 그들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던 방금 전의 당당한 자신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설마 이 정도이실 줄이야..’ 두꺼운 문틈사이로 아까의 소리가 다시 들려오자 네니는 황급히 귀를 막았다. * * * * * "허리를 펴시고 턱을 조금만 더 당기세요. 아니, 어깨를 뒤로 젖히시면 안됩니다. 현 끝까지 손이 닿을수가 없지 않습니까. 구부리지 마세요! 시탄연주를 할 때는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보여야만 합니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하연은 계속되는 악사의 외침을 못 들은 척하고 너무 오랫동안 앉아있어 뻣뻣한 다리를 움직여 비틀거리며 의자로 다가가 주저앉아 버렸다. 아까부터 잠시도 쉬지 않고 시탄의 현들을 튕겼던 손가락들은 퉁퉁부어 있었고 하연에게서 괴로운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시간이 없습니다. 아직 기본적인 음계도 외우지 못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연회가 3일뒤로 정해졌는데 어찌할실 셈입니까!." 하연의 신음소리가 한층 커졌다. 슈피르 공작이 비밀리에 알선해준 이 악사는 조금도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이 열정적으로 교육에 임하는 이 사람이 70세 노인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엘더! 제발 그만해요!" "아직도 배우실 것이 산더미입니다. 반드시 황후마마께 시탄연주를 마스터 시키라는 공작님의 엄명이 있었습니다. 당장 이리로 오십시오." "그럼 조금만 쉬었다 해요! 잠깐만이라도! 제발이요! 엘더! 제발! 나 아까부터 물 한잔 못마셨다구요," 간절히 애원하는 하연의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했지만 엘더는 조금도 꼼짝하지 않았다. 하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해 시탄이 서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은 하연도 잘 알고 있었기에 엘더의 눈빛공격에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의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눈빛 앞에서는 거절의 말을 하기가 끔찍할 정도로 힘들었다. 하연은 자포자기한 심장으로 엘더의 맞은편에 앉았다. 하연의 손이 다시 시탄으로 다가갔다. 거대한 악기에서 선율이라 부르기에 무엇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한 마리의 동물과 한명의 사람은 인간의 얼굴에 얼마나 많은 주름이 생길수 있나 내기라도 하듯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안 그래도 매우 예민한 귀를 가지고 있는 롤프에게는 하연의 연주는 그야말로 최악의 고문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연신 귀를 움찔거리고 있었다. 끈질기게 그녀를 독려하던 엘더도 이제는 포기 단계에 진입했는지 어두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하연은 지금까지 버틴 그에게 씁쓸한 감탄의 마음까지 들었다 “...잠시만.... 쉬도록 하지요.” 갑자기 안색이 굳은 엘더가 딱딱한 표정으로 주섬주섬 악보를 챙기기 시작하자 하연은 놀랐다. 오전부터 아무리 졸라도 한 번도 양보한 적이 없는 엘더가 먼저 쉬자고 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진도는 어느 정도 나간것인가.” 슈피르 공작이었다. 방금 전 문밖에서 하연이 연주하는 소리를 들었는지 공작의 얼굴은 있는데로 일그러져 있었다. 음악이라고 보기엔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불협화음의 조합이 주는 충격이 생각보다 엄청났던 것이다. 공작의 표정을 눈치 챈 하연은 입도 벙긋하지 못했고 그것은 엘더도 마찬가지였다. 손을 꼭 맞잡고 조금 초조해 하고 있던 엘더가 찔끔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만족하실 만한 성과는 아직...." "정확해 대답해라!“ 싸늘한 노기를 품고 있는 목소리였다. 엘더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방안에 흉흉한 기운이 감돌자 하연은 슬그머니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몸을 뺐다. 하연이 조심스럽게 한발자국을 옮기자마자 어디선가 불호령이 떨어졌다. “어딜 가는거냐! 엘더가 이렇게나 너에게만 붙어 가르치는데 어째서 어제와 조금의 변화도 없는 것이냐. 아까 들은 소리가 정말 시탄에서 나오는 소리가 맞는지 궁금하구나.” 하연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시탄을 바라보았다. 높이는 서 있는 하연의 키보다 컸고 길이도 거의 그와 비슷한 크기의 하프모양의 악기와 비슷한 이것 때문에 이런 수모를 당하고 있디고 생각하니 부숴버리고 싶다는 파괴본능이 마구 샘솟았다. 하지만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전체적으로는 검은 빛을 띠고 있는 시탄은 하연이 아무리 힘을 줘도 넘어가지도 그렇다고 줄이 끊어지지도 않았다. 손의 끝이 간신히 닿는 끝부분의 긴 현을 시작으로 백 여개 이상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투명한 실들이 촘촘히 세로로 나열되어 있었고 그 중간중간에는 허공에 떠있는 것처럼 보이는 물방울 모양의 반투명한 금색 보석들이 달려 있었다. 엘더가 이것을 타는 것을 보면 마치 손가락들이 나비처럼 부드럽게 흔들리며 영롱한 소리를 만들어냈고 특정한 화음을 맞추면 그 화음에 해당하는 보석중 하나가 빛을 발하면서 하늘의 별무리와 같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뽑냈다. 하지만.. 하연이 연주는.. 차마 말로 할수 없을 정도였다. “..죄송해요.” 핏기가 가신 얼굴로 하연이 엘더에게 미안하다는 시선을 던지며 중얼거렸다. 한시도 하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롤프가 어느새 다가와서 하연을 부축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던 참이라 도와준 롤프에게 감사의 인사라도 해야 했지만, 지금 하연에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정신은 없었다. 저 정도로 화를 내는 슈피르 공작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엘더. 그대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잘 알고 있네. 아까의 음악은,,.. 나도 도저히 참기 힘들더군." 엘더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 슈피르 공작은 그를 내보내고서는 잔뜩 기가 죽은 하연을 애처롭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그의 입에선 위로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대 연회에서 외국의 사신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이런 연주를 했다가는 무슨 수모를 당할지 몰랐다. 엘더가 나간 뒤 공작이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는 엘더가 널 가르치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섬뜩한 불길함을 느낀 하연이 공작을 향해 세차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 시탄 연주는 엘더가 가장 뛰어나다고 했잖아요. 이제 와서 누구한테 배우라는 거지요?” 경악에 쌓인 하연을 보며 슈피르 공작은 내키지 않는 입을 열었다. “....나다.” 지옥의 시간이 느릿느릿 흐르고 있었다. 하연은 슬쩍 눈을 치켜 떠 공작의 얼굴을 살폈다. 어제 보았던 황제와 비슷한 표정으로 서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하연은 보라색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꼬리 내린 강아지마냥 허겁지겁 시탄을 향해 얼굴을 내렸다. 엘더가 나간 뒤 1시간째 같은 부분을 연주하고 있지만, 그녀의 연주에서 나아진 부분을 찾는 건 불가능했다. “처음부터 다시 해라.” 슈피르 공작의 교육 방법은 엘더와는 완전히 달랐다. 엘더는 시탄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손수 시탄을 다루며 기본음을 가르쳐 주고서는 하연에게 직접 다뤄 보게 했다. 하연이 음을 잡을때는 직접 손을 잡아주기도 했다. 그는 방금전 설명한 것이라 해도 하연이 또다시 질문을 해 와도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고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비록 알게 모르게 한숨은 내쉬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공작은 그야말로 공작답게 하연을 가르쳤다. 그가 한 것은 그저 한번 시탄을 짧게 연주하고 그녀로 하여금 그걸 그대로 따라하게 하는 것이 전부였다. 조금이라도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언성을 높이는 법은 없었지만 마치 머리나쁜 강아지를 훈련시키듯이 공작은 끊임없이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하연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으며 입술을 비죽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하연을 바라보고 있던 슈피르 공작의 보라색 눈에 작은 반짝임이 스쳐갔다. “포기하는거냐?” 왠지 공작이 바라는 것은 하연이 포기하기를 바라는 것 같아서 하연은 의아스러웠다. 하지만 정말이지 이제는 그만두고 싶었기 때문에 하연은 잠시 망설였다. 고개를 끄덕이려니 자존심이 상하고 그러지 않자니 몸이 괴로웠다. 하지만 여기서 도망치고는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하연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절대로 포기 안해요.” “그럼 다시 시작해라.” 하연은 왠지 안도하는 듯 들리는 다시 해 보라는 슈피르 공작의 말을 묵묵이 따랐다. 또 한번 소름 끼치는 날카로운 소음이 공기를 갈랐다. 소리가 어찌나 끔찍한지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슈피르 공작이나 엘더의 손에 닿으면 바람처럼 부드럽고 깃털처럼 가벼운 선율이 나오는 악기가 왜 그녀의 손에선 칠판을 긁는 분필소리로 변하는지 하연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창피하고 애가 탈 뿐이었다. ...결국 공작이 돌아갈 때까지 하연의 실력은 조금도 나아지지 못했다. * * * * * * ‘어째서 그렇게 연습했는데도 이 모양이지?’ 하연은 울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이제는 얼얼해져 감각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 시탄을 연주라고 있는 자신의 손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하연 자신도 스스로 만들어 내는 소음에 견디기 힘들 만큼 머리가 지끈거렸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녀로 인해 심한 괴로움을 겪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열심히 하려면 할수록 더 끔찍한 소음이 나고 있었다. "그만!" 짧고 단호한 말이 들리자마자 하연은 반사적으로 손을 멈췄다. 한순간 귀가 멍해졌다. 갑자기 찾아온 정적 속에 아직도 조각난 소음의 파편들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하연이 목소리의 주인공인 브라만에게 슬쩍 고개를 돌렸을 때, 낮은 한숨이 섞인 통렬한 말이 들려 왔다. “축하해. 시탄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연주였어. 상대를 다치게 하지지 않고 고문하는데 쓰면 아주 효과가 좋겠는데. 슈마이츠에게 한번 건의해 보지.” 아주 노골적으로 귀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는 듯 귀를 두들기는 브라만의 말에 하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그 드래곤의 기억전수 마법같은거나 좀 써달라고!” “미안하지만 티엔이 그러지 말라고 했거든. 그리고 유희 중에는 내가 맡은 역이 가진 힘 이외의 힘은 쓰지 않는게 규칙이야. 내가 기억을 전수해준다고 해도.. 육체와 지식은 따로 노니까 별로 도움도 안될꺼야. 그나저나 그게 인간의 손이냐? 그렇게 뻣뻣해서야 원..” 필요할 때는 멋대로 드래곤으로 돌아가는 주제에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브레마네스의 말에 하연이 분통을 터트렸다. “누가 날 이렇게 만들었는데 그래? 그리고 내가 진짜 황후가 아닌게 들통나면 곤란해지는 건 너희들이잖아! 이제 연회도 3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날더러 어쩌라고! 솔직히 말해봐. 너 마법 할줄이나 아는거야? 드래곤 주제에 맨날 티엔의 눈치나 살피고 세상에서 제일 강하고 긍지로 넘치는 일족이라더니 순전히 말뿐이잖아?” 하지만 하연의 이런 말에도 브로마네스는 콧방귀만 뀔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애초에 황후의 지식을 하연에게 넘겨주는 일을 하려고 한 자신을 말린 것은 티엔이었다. 뭐, 기억이 들어가게 되면 계획에 차질이 있다며 그렇게 말한 것이지만 하연의 지금 상태를 보아하니 오히려 이쪽이 더 큰 차질이 생길것 같았다. ‘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설마 하연이 원래의 기억을 잃었다는게 들통난다고 해도 쫒겨나기밖에 더 하겠어? 티엔녀석 또 무슨 꿍꿍이가 있길래 그러겠지.’ 철두철미하기로는 드래곤 뺨치는 티엔이 그런 사실도 모를리는 없었다. 아무리 난리를 쳐도 브로마네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지쳐버린 하연이 시탄과 브로마네스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자신이 망신당하는 거야 별로 상관이 없었지만 자신 때문에 피해를 입게 될 황후의 명성(?)을 생각하면 한시가 바빴다. ‘시탄이 현악기라고 해서 그 하프랑 비슷한 건 줄 알았는데. 생긴 건 비슷한데 뭐가 이렇게 복잡하고 배우기도 힘든지. 음악시간에 그래도 성적은 잘 나온 편이었는데 이게 무슨 꼴이야. 이게 순전히 교과서식 주입교육의 폐단이라고. 맨날 악기라고는 리코더에 피아노에 단소밖에 불어본 적이 없는 내가 이런 줄 달린 악기라니..’ 하연은 여전히 자신의 방안에 떡하니 버티고 서서 엄청난 부담감을 주고 있는 시탄을 발로 찼지만 아파오는 것은 자신의 발뿐이었다. 슈피르 공작의 굵은 손가락이 지나가도 거미줄위의 이슬방울처럼 영롱한 소리가 울려퍼지던 악기가 어째서 자신의 가늘고 여린 손가락만 지나가면 지옥에서 망자들이 부르짖는 듯한 살벌한 소리가 들리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시탄은 원래 켜는 자의 마음상태가 반영되는 특수한 악기입니다. 이것을 켤 때 어떤 마음으로 현을 튕기는가에 따라 음색이 달라지게 되지요. 따라서 같은 현을 탄다 해도 울려오는 소리는 저마다 다 다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시탄에는 음계도 그리고 악보도 없습니다.> 음계가 없고 타는 사람에 따라 다른 소리가 난다니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불량품을 만들어 낸 자가 변명처럼 늘어놓은 말이 틀림없었다. 분명히 그런 말로 사람들을 홀려서 악기를 비싸게 팔아먹으려고 한 것 일거라고 확신하면서 하연은 다시 한 번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마음이 반영되는 악기라..’ * * * * * 엘더에게 어떻게 항상 같은 마음으로 시탄을 켜는 것이냐고 묻자 그가 빙긋이 웃으며 하연이 건드린 현을 살짝 건드렸다. 으윽! 하연이 귀를 막을 정도로 엄청난 괴음이 흘러나왔다. 저게 과연 그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던 엘더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아연실색한 하연이 바라보자 그는 다시 같은 손으로 같은 힘을 주어 그 현을 건드렸다. 챠라랑~ 아까와는 달리 부서지는 폭포의 물방울이 태양빛에 반사되는 듯한 소리의 울림이 방안으로 펼쳐졌고 그와 동시에 현에 매달려 있던 구슬들이 위치를 옮기면서 환한 빛무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느껴지는 것은... 날아갈듯한 해방감이었다. “지금.. 그건....?” “아직은 미흡하지만 제가 최근에 깨달은 것이지요. 시탄의 다른 용도는 이렇게 이런 환영을 만들어 내면서 상대가 특정한 감정을 느끼게 할 수 있는 효과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켜는 자의 마음이...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에... 상당히 조절하기가 곤란합니다. 게다가 지속성이 약해서 오래 켤수도 없지요.” 약간은 자신을 외면하는 듯 말하는 엘더의 목소리가 수상쩍었다. 무언가 캥기는 것이 있는지 연신 헛기침을 하는 그의 모습에서 하연은 자신이 방금 놓친 말을 생각해 냈다. 설마하는 시선으로 하연이 엘더를 바라보자 감정이 그대로 들어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70이 다 먹은 노인이 황후를 보고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다른 자들이 본다면 노망난 늙은이라 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하연과 반나절 내내 연습을 하며 손을 붙잡았지만 전혀 얼굴색이 변하지 않던 엘더이고 그가 극진히 사랑해 마지 않는 부인이 아직 눈을 뜨고 생생히 살아있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가 새삼스래 황후의 시선에 그리 얼굴을 붉힐 이유는 없었다. “처음엔 무슨 생각을 한거죠?” 무슨 마음으로 켰는지는 몰라도 자신이 느낀 것이 분명 해방감이였고 허공으로 흩뿌려진 청색의 환영은 분명 새를 닮은 것이었다. 하연의 질문에도 한참이나 대답을 하지 못하던 엘더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황후님의 시탄연주를 듣는 제 자신을 생각했습니다.” “...두번째는.. 뭐죠?” 이번 대답은 아까보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모기만한 목소리로 들려왔다. “더..이상은 그 연주를 듣지 않는....저를......” * * * * * 그때는 그저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끝냈지만... 어쩐지 지금은 그의 말이 정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계에 있을때도 자신이 켜는 시트린은 항상 경쾌하고 밝은 소리를 냈지만 정작 자신에게 시트리을 가르쳐 준 레기어스의 것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하연은 살며시 시탄에 손을 가져다 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마.. 그건 시탄이 아닌 모든 악기에 해당되는 말이겠지. 그래서 레기어스가 켜던 시트린도 그런 소리를 냈던 건가... 아름답지만.. 늘 애절하던,,,’ 제 초기작품이!!! 파일이 손상되었습니다!!! 라니요 으아아아아악!!! 제 첫작품이... 이렇게 날아가는 건가요? ㅠ.ㅠ 정말..... 말이 다 안나오는군요.. 이게.. 도대체.. 살리는 방법 아시는분!!! 이대로 포기해야 하는건가.. 미치겠습니다!! 올린것만큼이 남아있었는데!!! 중간에 어색한 부분이 있어 수정했습니다. 아까 코멘트 주신분께 죄송합니다^^:: 이은이 : 이럴수가!!! ...........근데 황후가 가짜라는걸 알게되면 왕은 어떤 방으을 보일지.... 알게되도 모른체할것같은....(내 생각이지만) (03.15 18:18) 베네딕트 : 저런, -ㅁ-)/ 의심하는 건가. (03.15 18:17) 령아 : 우오오오오 ;ㅁ;.. 본격적이라니.. 크아아앙/.[인내하지 못하는 자의 최후..] (03.15 17:42) 브로마네스는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화들짝 놀라 하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하연도 마찬가지였는지라 얼떨떨하게 자신의 손을 바라볼 뿐이었다. 순간적이기는 했지만 방안을 가득 메우던 황금빛 함께 흘러나온 영롱한 소리는 결코 환상이 아니었고 그것을 목격한 브로마네스의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이 하연을 향했다. “....나..나도 몰라! 그냥 어쩌다 보니까!!” 당황한 하연이 손을 휘젓자 가늘게 눈을 뜬 브로마네스는 말없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하연의 손을 허공에서 잡아채고서는 하연의 오른쪽 팔 윗부분을 더듬었다. 워낙 불시에 당한 일이라 비명이라도 나올법도 하지만 진지한 브로마네스의 표정에 하연은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아까의 빛은 뭐지?” 하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브로마네스는 손 끝에 하연의 몸에 스며 들어있는 보석의 기운을 감추기 위해 만들어 준 팔찌가 제대로 착용되어 있음이 느껴지자 인상을 찡그렸다. “분명 내가 채워놓은 팔찌가 그대로 있는데 어째서 이런 식으로 기운이 방출된거지? 아까 그건 분명히 신족의 유물에서 나온 기운과 동일한데.” 여전히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브로마네스의 손을 뿌리치며 하연이 팔을 문질렀다. 아프기는 했지만 참을만 했기에 하연은 재빨리 궁금한 것을 물었다. “무슨 소리야. 아까 그건 뭐야? 분명 엄청난 기운이 휘몰아치는 것 같았는데....정말 내가 건드린 시탄에서 나온 소리야? 혹시 이거 알고 보면 잊혀졌던 아주 귀중한 전설속의 악기같은거 아니야? 갑자기 무슨 조건이 맞아서 봉인이 풀렸다던가..” "..조용히 해봐!“ 갑자기 성질을 버럭 내는 브로마네스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아까의 파장은 자신이 하연에게서 들은 엘더가 만들어 내는 환영과는 달랐다. 그가 만들어내는 음파가 시탄의 보석들을 공명시켜 환영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하연의 경우는 하연 자신의 몸이 보석의 역할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하연은 시탄의 바로 아래에 앉아서 소리를 냈기 때문에 잘 모르고 있지만 사실 아까의 빛무리는 하연을 중심으로 뻗어나오고 있었다. 엘더의 것이 시탄 본체에서 나온것이라면 하연의 것은 소리는 시탄에서 그리고 그 빛은 하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저 뿌연 황금빛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시야가 막히는 듯한 진하디 진한 황금색의 빛이.. 브로마네스는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에 붙잡고 있던 하연의 팔에서 팔찌를 뺐다. 원래는 하연밖에 뺄 수 있는 자가 없었지만 그것을 원래 만든자는 브로마네스 본인이었기 때문에 팔찌는 손쉽게 벗겨졌다. “..다시 켜봐라.” 하연은 시탄을 한번 그리고 브로마네스를 한번 그리고 자신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 전 그것은 예전 음악시간에 단소를 배우면서 한 시간 넘게 쩔쩔매다 우연히 소리가 한번 난 것 처럼 두 번째에는 원래의 괴음이 나올 것이 분명했다. 하연은 한참 망설이다 시탄을 살짝 건드렸다. 챨라라라랑 제일 작은 것 하나에만 손을 가져다 댔는데 순식간에 모든 현이 울리며 방안을 가득 메울 정도의 폭팔적인 음이 웅장하게 퍼져나왔다. 그리고 방안 가득 커다란 금빛 물결이 출렁거리면서 황금빛 물결을 만들어내며 하연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지면서 거센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내 생각이 맞았군. 지금 네 몸속에 동화되어 있는 그것이 이 악기를 공명시키는 것 같다.” 브로마네스가 입을 열자 그제서야 하연은 바닥으로 털석 주저앉았다. 그제서야 아까의 충격으로 인해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런 하연을 받쳐줄 생각도 하지 않던 브로마네스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손에 자신의 기운을 모아 시탄의 현을 건드렸다. “역시 현이 끊어지는군.” 놀랍게도 하연이 아무리 발로 걷어차고 있는 힘을 다해서 고장 내놓으려 해도 꼼짝도 하지 않던 시탄의 줄이 끊어지면서 매달려 있던 보석이 창을 뜷고 밖으로 튀어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 반동이 얼마나 세었는지 시탄의 줄이 허공을 가르며 날카로운 파공성을 냈다. 하연은 브로마네스가 기운을 모아 현을 건드렸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겨우 손가락 하나로 현을 가뿐히 뜯어내자(?) 무슨 괴물보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냐? 그 기분 나쁜 표정은. 그저 마나를 조금 싫어서 타 보았을 뿐이야. 내가 알기로 마나를 넣어서 탈 수 있는 악기는 분명 성황(聖皇)이 가지고 있는 그것밖에는 없다고 알고 있는데 네가 방금 낸 소리는 그것과 무척이나 흡사했다.” “마나를 넣어서 타는 악기라고? 성황은 누군데?” 마나라면 들어본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마나를 이용하여 무엇도 가른다는 검기를 만들어 낼수 있다고 하니 브로마네스 같은 마법 생물인 드래곤이 그 정도야 간단히 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하연은 뒷말에 관심을 보였다. “그런게 있어. 그것보다는 네가 지금 연주한 시탄이 너의 기운에 의해서만 공명한다는 것만은 확실해.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건드렸을때 이렇게 선이 끊어지지는 않았겠지. " 브로마네스는 자세한 설명은 귀찮다는 듯이 하연의 질문을 무시하고 자신이 하고싶은 말만 했다. 하연도 특별히 그 질문에는 의의를 두고 있지 않던터라 그냥 넘어가서 대화는 순조로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럼 악기가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이게 이렇게 된거라고?" 하연은 새삼스럽게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약간 인상을 찡그렸다. 그동안의 연습으로 손의 여기저기에는 물집이 터진 자국이 남아 있었고 약간 부어 보기에 좋지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손이 이런 소리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니 약간은 뿌듯해지고 있었다. "그래.이 시탄은 조금 고급스럽기는 하지만 조금 산다는 귀족가에는 하나씩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니. 특별히 너의 기운에만 공명했다는 것밖에는 해답이 없다.아마.. 그렇다는 것은 다른 악기도 이와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것이겠지.” “잠깐, 이건만 확실히 하자. 나 이거 연주할 수 있게 된 거야?” 하연으로서는 이 시탄이 울린 이유나 갑자기 황금빛이 뿜어져 나간 이유따위야 아무래도 좋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며칠 남지 않은 대 연회때 이것을 탈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지나치게 신나하는 하연을 보고 브로마네스는 그거가지고 뭘 호들갑이냐는듯 하연을 바라보았다. “너무 좋아하지 마라. 네 본연의 힘이 아닌 그 유물의 힘이니까. 게다가 방금 보니 넌 제어하는 방법도 모르는것 같던데 그래서야 네 힘이라고는 할 수 없지. 그저 넘치는 힘이 방출되는 것 뿐이니까.” “쳇! 뭐야? 설마 내가 이런 멋진 연주를 했다고 시기하는 거야? 하긴 드래곤이라 해도 나처럼 멋진 연주는 불가능 하겠지. 하지만 말이야 드래곤인 네가 나처럼 일순간 깨달음을 얻으려면 힘들껄? 오만과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너희들이니까 말이야.” “깨달음? 그럼 처음에 팔찌에 의해 억제되어 있던 힘이 풀린 것도 그것 때문인가? 말해봐. 아까 처음 현을 건드렸을 때 무슨 생각을 했지?” 하연은 약간 우쭐대며 자신이 아까 생각했던 것을 빠짐없이 이야기 해주었다. 마음이 반영되는 악기라는 엘더의 말을 마음속으로 느낀 것이라고.. 하지만 마지막에 레기어스의 시트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레기어스를 보고 싶기는 하지만... 그로 인해 행복한 추억이 많았던 만큼 계속 친구로만 남기를 원했던 그를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우울해지고 말았다. “또 딴생각을 하고 있군. 너답지 않게 우울한 표정이라니? 남자한테 차인 기억이라도 하고 있는거냐?” 브로마네스는 갑자기 자신만의 세계로 파고들어 몇 번씩이나 이름을 불러도 대답없는 하연에게 그저 가볍게 던진 말에 하연이 심하게 당황하자 놀랐다는 듯 하연을 바라보았다. 평소같으면 자신이 드래곤이거나 말았거나 대들 것이 분명한 하연은 그의 말에 가타부타 대답없이 몸을 파르르 떨더니 그냥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이었다. 뭐라고 성질이라도 내면 차라리 받아주겠지만 이런식으로 반응하는 하연은 처음이라 브로마네스는 당황했다. 잠시 당황하던 브로마네스는 약간 굳어진 팔로 하연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툭. 하연의 눈물방울이 그의 옷 위로 떨어졌지만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미안하다.” “...” 하연은 자신의 굳은 어깨를 쓰다듬는 브로마네스의 손실이 어색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드래곤으로서나 이곳에서의 브로만 공작으로서 남에게 사과같은 것을 해본적이 없는 것이 분명한 그의 손은 따뜻했다. 예전처럼 다시 혼자가 된 이곳에서 처음으로 느끼는 안정감이었지만.. 예전처럼 그렇게 기대고 싶지는 않았다. “바보! 내 연기에 속아넘어갔지?” 예전에.. 처음 레기어스를 만났을때. 그도 자신처럼 비슷한 말을 했다. 하지만.. 그게 자신의 상처를 숨기기 위한.. 것인줄은..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됬었다. 정말 깊은 상처는 조금만 들쑤셔도 주체할 수 없을만큼 아파왔다. 억지로 웃으려고 괜찮은척, 강한척 하지만.. 사실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억지로 강한척 하지마라. 아무리 그래도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어.”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말하는 하연의 장난스런 말투와는 달리 끊임없이 떨리고 있는 상처받은 눈동자에 브로마네스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드래곤인 자신이 하연의 진짜 감정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늘 쾌활하던 하연에게 이런 모습을 발견한 그는 왠지 그 상대에 대해 불쾌한 감정이 생겨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고 만 것이었다. 하연이 누군가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조금은 눈치채고 있었다. 마계로 차원이동 당했다는 인간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생기발랄했던 것이다. 보통의 인간들은 다른 차원계로 끌려오기만 해도 극도의 정서불안이나 혼란으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하연의 경우는 놀라울 정도로 주어진 상황에 잘 적응하고 있었고 그것은 아마도 처음의 이동에서 적응하는 과정에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버지가 분명히 어떤 고위급 마족과 강한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하셨으니.. 분명 하연에게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든 상대는 그 마족이겠지. 인간과 연결을 맺을 정도라면 상당히 소중히 여기고 있었을 것이 분명한데 어째서 처음 나타났을때는 그런 큰 부상을 입었던 것일까?’ “쳇! 이래서 브로마네스는 재미가 없다니까. 이럴 때는 말이야. 알면서도 속아줘야지. 뭐야. 무안하게.. 도대체 여자의 심리에 대해서라고는 하나도 모른다니까. 그러니까 아직도 결혼도 못하고 있지.” 하연은 브로마네스가 한참이나 말없이 자신을 안고 있자 약간 당황스러워졌다. 브로마네스 본인은 특별히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무런 배려없이 자신의 어깨위로 턱하니 올려놓은 그의 손이 주는 무게가 상당했다. 물론 나름대로 위로해 준 것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무겁다는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너! 나랑 처음에 만났을때 접촉하는게 싫다고 하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껴안고 난리야? 넌 아주 편안할지 모르겠지만 난 엄청 힘들다구” 브로마네스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금새 팔팔해져서는 자신을 향해 떠들어 대는 하연에게서 아까의 애처로워 보이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브로마네스의 얼떨떨하다는 반응에도 상관없이 시탄을 바라보던 하연이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또 무슨 생각을 하는거냐?” 브로마네스의 약간은 힘이 빠진듯한 목소리였다, “그게.... 생각해 보니까 나 소리는 낼 수 있게 되었는데.. 음악을 연주할 줄을 모르겠어.” 브로마네스가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하연이 정말 화가 났다는 듯 허리에 손을 올리자 그는 아까보다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엘더도 70평생에 걸쳐 겨우 완성한 것이라는 것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꺼다. 넌 그와는 조금 다른 방식이지만 어짜피 음악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녀석들은 거의 없으니 차이점을 알지는 못하겠지. 아마 아까처럼 현 하나만 울리고 나와도 될꺼다.” “그거 진심이야? 현 하나만 울리고 나오라니. 그래도 그건,,.좀,.” 하연이 잠시 머뭇거리고 있을때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이윽고 네니와 시녀들이 나타났다. 네니는 누구를 찾는지 한참을 두리번거렸고 평소와는 달리 약간 당황하고 있었다. “어서 들어오지 않고 뭐해? 안 그래도 차 생각이 간절하던 참인데 잘됬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이 방에 있는 사람은 둘인데- 롤프는 뜨거운 것을 먹지 않는다- 네니가 가져온 찻잔은 3개인 것이다. 게다가 평소에는 간단히 티포트와 찻잔만 올려져 있던 쟁반위에는 우유와 약간의 쿠키도 올려저 있었다. “.... 롤프는 우유 안먹어, 네니.” 항상 털이 날린다고 롤프를 구박하던 네니가 오늘따라 특별히 챙겨온 것이 이상했지만 하연은 그렇게 말했다. 여전히 누군가를 열심히 찾던 네니가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황제폐하는 벌써 가셨나요?” “...누구?” “황제폐하께서 오늘따라 수행원도 거느리시지 않으시고 홀로 오셔서 저에게 황후님이 계신곳을 물어보시기에 말씀해 드렸는데.. 여기 들리지 않으신 건가요?” 하연은 도리질을 쳤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아.. 혹시 아까 시탄을 연주했을때...네니 황제가 찾아온게 언제쯤이지? 한 30분전인거야?” “아뇨. 한 5분도 되지 않으셨습니다.” * * * * * 찬바람이 분다. 하연은 지금 이 순간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황제와의 약속을 잊어버린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까지 화를 낼 필요는 없지 않냐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입안에서만 맴돌뿐이었다. 정작 입을 열려면 싸늘한 황제의 시선에 혀가 얼어붙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하연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찻잔속의 맛없는 차를 억지로 들이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도 우유가 담긴 컵과 작은 쿠키가 보인다. 아마도 황제는 차에 우유를 타서 마시는 모양이었다. ‘애도 아니고 왠 우유? 이게 홍차랑 비슷한 맛도 아닌데. 게다가 쿠키라니.. 황제는 단걸 좋아하는가 보네.’ 억지로 딴 생각을 하며 긴장된 마음을 풀어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던 하연은 문득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는 손도 안된 황제의 찻잔을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황제는 차를 진하게 마시는 편이었다. 순간 갑자기 황제의 목소리가 머리위로 떨어졌다. “브로만 공작은 무슨 일로 그곳에 왔었지. 황후?” 순간 차를 마시던 하연이 사례가 걸려 캑캑댔지만 황제는 그 자리에 못 밖힌 듯이 서 있었다. 하연은 제가 왜 또 저러나 했지만 별로 숨길 것도 없었기에 사실대로 말했다. “제 시탄 연주를 들으러 왔습니다. ” 말끝마다 황후를 강조하는 황제 때문에 황후라는 말만 들어도 두드러기가 생길 판이었다. 안 그래도 자신을 모두 황후로 불러대는 통에 원래 황후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완전히 잊어버린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가 보았을 때는 시탄연주를 감상하는 것 같지는 않던데?” 황제의 말에 하연이 인상을 썼다. 아니 왔으면 왔다고 인기척이라도 낼 것이지 제멋대로 삐져서 간 주제에 남이 누굴 만나건 무슨 상관이 있길래 범인을 심문하는 분위기로 몰아가는거야. 내 실력이 형편없다는 소리라도 하고 싶은 걸까? 하연은 뭐라 받아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황제의 말은 일부분은 분명 사실이었으니까. “왜 대답이 없는 것인가?” 하지만 정말 성질난다. 하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황제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정이 안가는 인간이다. 아무리 자기 부인이고 싫어하는 사람이라지만 이런식으로 추궁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고 하연은 그것을 참을 정도로 순한 성격이 아니었다. “지금 저를 무슨 범인 몰듯 추궁하시는데. 좋아요. 원하는 대답이 있으면 말씀해 보시죠. 황제폐하. 어짜피 저를 싫어하시는게 분명하니 제가 뭐라해도 믿지 않으실 것 아닙니까. 무슨 대답을 원하시는지는 몰라도 무조건 그랬다고 말씀드리죠.” 상대의 예전 모습만을 자신에게서 찾아내려고 애쓰는 황제에게 특별히 변명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전에는 황제를 사랑했다는 황후를 생각해서 일부러 자제하고 있었지만 저런식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는 사양하고 싶었다. 간신히 분노를 억제하고 있는 자신의 목소리가 탁하게 들려왔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찾아가 놀라게 해주려고 했지만 이미 다른자가 와 았었다. 그리고 열린 문 사이로 브로만 공작과 친근하게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조금 들려왔다. <또 딴생각을 하고 있군. 너답지 않게 우울한 표정이라니? 남자한테 차인 기억이라도 하고 있는거냐?>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의 말에 아무말도 못하는 황후의 모습에 잠시.. 아주 잠시나만 죄책감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미안하다.> 브로만 공작이 아닌 낯선 자가 서 있는 것 같았다. 평소에도 다른 이들과의 접촉을 꺼리는 그가 먼저 손을 내밀어 그녀를 껴안고서는 어색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꼬리를 쳤기에.. 하마터면 뛰어들어갈뻔 했던 자신을 막아선 것은 뭐라고 잘 들리지 않는 황후의 대답에 대답하는 공작의 목소리였다. <억지로 강한척 하지마라. 아무리 그래도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어.> ...예전부터.. 아주 잘 알아온듯한... 자신보다도.. 그녀를 잘아는.. 목소리였다. “공작과 무슨 관계인거지?” 태연한척 평정을 유지하던 어깨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49회> 푸르른새벽 감사합니다. 뭘꼬다봐 :샬리엔느의 인생은 가시밭길,, 엘윈 실제 현실에 있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베네딕트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이젠 멀쩡해요^^) 50회> 괭이친구 맞아들어간건가요? 그리움 반갑습니다.^^(처음 맞죠?) 오를르 역시 처음 같은데요?(아를르의 여인/비제 가 연상되는데 의미라도?) 베네딕트 하지만...여긴 어덜트가 아니라서..조아라에서 삭제라도 당하면-소심쟁이 야무진양갈래소녀 연주,,라기 보다는 좀더 종합적인 의미이지만. 일단은 통과네요. 有恩宥互 이건 어찌 읽는 건가요? *유은..? 카오메이 리플감사해요! 엘윈 두 개나 남겨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레기어스.. 이름은 나왔지만..) ***본격적인(?) 내용은 52회겠군요.**** 중간계13일 오후> “공작과 무슨 사이지?” 이상하게도 황제의 목소리가 음성변조를 한 것처럼 낮은 저음으로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순간적으로 바닥이 눈앞에 가까이 다가왔다가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해서 하연은 잠시 눈을 깜박였다. 아니다. 자신을 그대로 서 있는 상태였다. “....가까웠던 것 같은데...” 하연이 중얼거렸다. 순간적으로 바닥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눈앞으로 다가와서 자신이 바닥으로 쓰러지는 것인가 싶었던 것이다. 아까의 느낌이 너무도 생생해서 하연은 고개를 숙여 바닥을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다시 바닥이 솟구쳤다가 다시 한없이 아래로 빨려들어가듯 멀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식은땀이 솟아 하연은 비틀거렸다. “..... ........ ........?” 지독히도 느린 테이프가 돌아가는 것처럼 황제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귓가에 윙윙거리는 소음이 점점 커지면서 황제의 입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처럼 느리게 움직였고 주변의 사물이 조금씩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말을 해봐!”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 지면서 날카로운 통증이 팔 아래로 느껴졌다. 안개로 가득찬 듯 희뿌옇던 시야가 일시에 밝아지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황제의 보라색 눈동자가 무엇보다도 선명하게 시야로 들어왔다. 그의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거울처럼 모든 것을 반사해 버릴것 같은 눈동자다. “아.. 방금 뭐라고 했어요?” “기억을 잃기 전의 나와의 관계만큼이나 가까운 건가?” 기억을 잃어? 황제가 그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알고 있었다면 어째서 말을 하지 않은거지? 조금씩 머리가 맑아지면서 간신히 생각해 낸 것은 그 정도의 사고뿐이었다. “...알고 있었던.... 거예요?” 순간적으로 두통이 일면서 중간에 말이 끊기고 말았다. 자신을 향한 황제의 눈에 문득 미미한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보였고 그의 보라색 눈동자색이 검은색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짙어졌다. 시선이 빨려 들어갈 만큼 너무나 깊어진 그의 동공을 멍하니 바라보는 하연의 머리 속에서 어쩐지 기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것 같단 느낌이 들 때였다. “그.. 말은 인정하는 건가?” 또다시 현기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몸이 휘청거려 이대로라면 정신을 잃어버릴 것 같아 입술을 깨문 하연의 입술사이로 가느다란 선혈이 흘렀지만 정신은 조금도 맑아지지 않았다. 무언가 목구멍까지 차오르면서 숨이 막히는 듯 호흡이 가빠왔다. 숨이 찬다. 예전에 물에 빠졌을 때처럼 무엇인가가 폐 속으로 계속해서 넘어오기만 하고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무언가에 붙잡힌듯 몸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누군가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명령에도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기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놓아 줄수 없어. 널 버리는 건 나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흔들리고 일그러지는 와중에서도 그의 목소리만은 제대로 들려오고 있었다. 감각이 없어진 팔다리에서도 유일하게 황제가 잡고 있는 팔만은 불타오르는 듯 강한 고통이 느껴졌다. 정신을 놓아버리면 차라리 편해질 것 같았지만 이 생생한 느낌은 하연의 의식이 잠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뇌,,,줘요.. 숨이.. 막혀..” 차라리 기절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자신의 의식을 억지로 붙들어 놓는 것이 분명한 황제의 손에서 벗어나면 이 숨막힘과 어지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까웠던 것 같은데...” 시선을 피하며 난감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황후의 모습이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다. 약간은 흔들리는 듯한 가냘픈 어깨가 비틀거리자 순간적으로 손을 뻗어 붇잡아 주려다 이를 악물고 거두어 들였다. 한번도 느낀적이 없는 잔인한 야수가 기지개를 펴듯 꿈틀거린다. 조금씩 몸을 일으키는 이 야수는 한번도 느껴본적이 없는 잔인함을 조금씩 드러내며 온몸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금새라도 감은 눈을 뜨고 튀어나갈 것만 같았다. 심장이 금새라도 비명을 질러낼 정도로 아프게 뛰고 있었지만 반대로 손은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완전히... 변해버린 건가? 더 이상.. 내가 알고 있던 황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거군. 그녀가 기억을 잃었다는건 이미 알고 있는데.. 어째서 예전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지?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자신을 잊어버렸다고 신관은 말했다. 고통스러워서 더 이상은 견딜수가 없어서 일부러 지워버린 것이라고 그래서 더 이상은 자신을 사랑하던 황후가 아니라고 한다. 이렇게나 예전과 같은 섬세한 얼굴에 밤바다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향기로운 머리카락이 더 이상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타인이라고 했다. 이전에.. 황후의 눈동자에 어리던 눈물과 환희는 순수하고 직선적으로 자신만을 향해 있었다. 사랑을 나눌때 그녀의 모든 것은 그대로 내 것이었고, 끊임없이, 끊임없이... 나만을 갈구며 나의 이름을 부르던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도 자신만의 것이었다. 그녀의 열락에 물든 얼굴과 음성과 그 가슴과 그 영혼이 모든 나의 것이었다. 나에 대한 그녀의 바닥을 모를 소유욕에 진저리가 나서, 그리고 나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그녀의 영향력에 갇혀있을 생각도 없어..,.. 저지른 것이 사실은 나의 심장에 비수를 박게 되는 일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저..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놓아 줄수 없어. 널 버리는 건 나다.” 그녀가 나에게 보였던 그 어린애같은 소유욕이라고 해도 좋다. 놓아줄 수는 없다. 그녀의 마음속에 스며들어 있는 존재가 나 자신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래... 아직은 여전히 나의 소유다. 이 존재는 지금도 내 품 안에 있어, 나만이 건드릴 수 있다. 하지만... 몸을 잡아 둔다고 해도 그녀의 마음은 나에게 묶여있지 않겠지. 상관없다. 어짜피 그녀의 마음을 원하는 건 아니다. 단지.. 익숙했던 시선이 사라진 것에 대한 허탈감이.. 어릴적 아끼던 말이 죽어버렸을 때 느낀 상실감과 같은 종류의 것이 틀림없는 이 감정이 사라질때 까지만.. ...붙잡아 놓겠다. “..놔,,,줘요.. 숨이.. 막혀..” 파르르 떨리는 감겨진 하연의 눈두덩에 그의 뜨거운 입술이 내리누르며 달싹거린다. 감아버린 눈썹 아래를 지나 그는 목과 귓볼을 입술로 쓰다듬으며 연신 부드럽게 애무를 하고 있다. 하연의 앙다문 입술로 자신의 입술을 갖다댄다. 그는 안고 있던 하연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눌렀다. 차갑다.... 이상하다. 인간의 체온이라고 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차갑다. 그는 황급히 황후를 흔들었다. 하지만 축 늘어진 몸이 그의 손에 떨릴 뿐 힘없는 목은 뒤로 젖혀진 채로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데도 황후는 꿈틀거리기조차 않는다. 아니 미세한 찡그림조차 드러나지 않는다. 설마... 황급히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에 댔지만 조금의 숨결도 느껴지지 않았다. 방금 전 미약하게 헐떡이던 숨결이 피부를 간지럽히며 닿았던 것과는 달리 지금 느껴지는 것은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황후의 뺨이다. 황제는 떨리는 자신의 두 손을 하연의 겨드랑이에 넣고 하연의 몸을 자신의 몸에 밀착시킨 채 허공으로 하연의 몸을 들어올렸다. 그의 머리가 하연의 목과 가슴께에 닿는다. 심장이... 뛰지 않았다. 황제는 숨 쉬는 것도 잊고서 간신히 쥐어짜듯 목소리를 내뱉는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바닥에 발이 붙어버린 것처럼.. 몸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신관...신관을 불러라. 신관은 어디 있느냐! 당장 데려 와!!!!” 황제의 목소리가 성안을 찢어놓으며 문앞을 지키고 있던 로이츠와 에른하임이 놀라 문을 박차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황제의 양 팔에 죽은듯 창백한 얼굴의 황후가 안겨 있었고 황제는그런 황후를 급히 안고 미친 듯이 외치고 있었다. 성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황제와 황후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유일하게 방 근처에 있던 로이츠와 에른하임은 입을 꾹 다문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모두들 침묵을 지키면서 눈치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슈피르 공작이 시종의 연락을 받고 하연에게 곧장 달려왔다. 어찌나 급하게 왔는지 언제나 단정하던 그의 머리카락은 온통 산발이 되어 있었고 얼굴을 붉게 달아올라 연신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어쩔줄 몰라하고 있는 신관들이었다. “어찌된 것이냐!” 여전히 시체처럼 창백한 황후는 꺼질 듯한 숨을 가늘게 이어나가고 있을 뿐 조금의 핏기도 없이 흰 눈처럼 음영이 전혀 없는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다. 거의 움직이지 않는 가슴이 금새라도 멈출 것처럼 위태롭다. “...저희들도 도저히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습니다. 황제께서는 그저 갑자기 심장이 멈추었다는 말씀만 계속하시고.. 다행히 심장은 다시 뛰게 되었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하시고 계속 이 상태입니다.” “시끄럽다! 너희들이 그러고도 신관이란 말이냐?” 슈피르 공작의 보라색 눈이 살기를 발한다. 이 자리에 황제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분노가 방향을 잃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신관들에게 향했지만 그들은 그저 오들오들 떨 뿐이다. 황제의 분노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다면 분명 그것은 슈피르 공작이 뿜어내는 끔찍할 정도로 차가운 살기일 것이다. “이 머저리 같은 것들! 만약 황후가 다시 숨이 멎기라도 하는 날엔 내 너희들을 하나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공작은 진심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방안에 싸늘한 울림을 만들어 냈고 평소와는 달리 붉은 기운까지 도는 그의 눈동자에서 그들은 그가 결코 빈말을 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진정하시지요 슈피르 공작님." 나이에 비해 굵직하고 중후한 목소리로 말하며 방안으로 들어오는 남자는 브로만 공작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키가 180정도에 상당한 덩치를 지닌 거친 인상의 남자가 있었다. 2미터는 족히 넘어보이는 마법구가 달린 거대한 지팡이를 한 손에 잡고 있는 전사스타일의 남자였다. 비록 마법사들이 입는 바닥을 끌고도 남는 길다란 옷을 입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는 분명 브라만 공작가의 전속 마법사인 시엔이 분명했다. “지금 내가 진정하게 되었소? 그 일이 있은 후 며칠이나 지났다고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요! 그때처럼 다신 한번 이 아이를 잃게 되는 일이 있다면..” 살기를 뿜어내던 슈피르 공작의 눈에 급작스레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채 말을 잇지 못한 공작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자 신관들은 당황해 어쩔줄을 몰랐다. 제국에 몇 안되는 소드마스터인 슈피르 공작의 눈에서 눈물을 볼 것이라곤 한번도 상상해 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대들은 모두 나가 있게.” 브로만 공작의 말에 신관들이 기다렸다는 듯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갔다. 방안에는 오로지 두명의 공작과 시엔, 그리고 여전히 정신을 잃은채로 누워있는 하연 이렇게 네 명만 남게 되었다. "황후가 쓰러진 것은 황제의 탓이 아닙니다." 그때까지 아무말이 없던 시엔이 조용히 말했다. “무슨 소린가! 분명 황제와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누다 이리되었다 했는데. 설마 내 앞에서 황제를 두둔할 셈인가?” 슈피르 공작이 몸을 벌떡 일으키자 브로만 공작이 그런 그를 진정시키며 다시 자리에 앉도록 했다. 브로만 공작은 잠시 시엔에게 눈짓을 했고 시엔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법지팡이를 들고 고개를 숙이고 한손을 세웠다. “대기를 흐르는 공기의 흐름이여. 그대의 움직임을 멈추고 소리의 이동을 막아라. 사일런스!” “이제 이 방안에서 나오는 소리는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방금전 시엔이 사일런스마법을 주위에 시전 했으니까요. 이 일은 비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런 방법을 써야 했습니다.” 브로만은 하연의 이마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 다시 손을 심장이 위치한 왼쪽 가슴위로 이동시켰다. 지독히도 낮은 심장 박동은 겨울잠을 자는 동물보다도 더 낮았고 몸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차디찼다. 역시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 분명히 이 증상은.. “비밀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건가 공작!” “황후님이 이리 쓰러지신 것에는 ...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황제는 아까부터 창문밖으로 보이는 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나무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황후님은 어떠신가?” 로이츠가 마침 황후가 누워있던 방에서 나오는 것이 분명한 신관을 붙잡고 물었다. “다행히 황후님의 숨은 되돌아오셨습니다. 지금도 약간의 호흡곤란을 보이고 계시고.. 여전히 몸이 차가운데다가 의식이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만.. 브로만 공작께서 시엔을 데리고 오셔서 저희를 내보내시고 문을 닫으셨습니다.” “브로만 공작이? 그럼 슈피르 공작님은 어찌하고 계신가..!” “아까까지만 해도 길길이 날뛰셨는데, 브로만 공작님이 들어오시자 조금은 평정을 되찾으신 것 같습니다. 황제폐하께선 좀 어떠신가요?” 로이츠의 마른 어깨 뒤로 보이는 황제를 향해 걱정스럽다는 듯 시선을 던지는 신관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자신이 처음 황후를 안고 있는 황제를 보았을때 황제의 얼굴도 황후의 얼굴 못지 않게 창백했던 것이다. “황후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걸 확인하신 뒤부턴 계속 저 상태시라네. 조금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지만.. 도통 말씀을 듣지 않으시네.” 그러고 보니 방안의 누구도 왕의 근처엔 가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만 하고 있다. 심지어는 항상 황제의 바로 옆에 서 있던 에른하임조차 멀리서서 황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신관이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다가선다. “황제폐하.” 황제는 아무말이 없다.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일까. 신관은 조금더 가까이 다가가 목소리를 높였다. “황제폐하. 방으로 옮기시지요. 날이 춥습니다.” “.....차가웠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어. 숨을 쉬지 않았다. 심장이.... 멈춰버렸었어.” 그의 나즈막한 목소리가 신관의 귓가로 들려온다. 뒷모습 밖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가 몸을 가늘게 떨고 있음은 명확했다. “숨을 쉬지 않았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숨을 내쉬던 황후가...갑자기 숨을 쉬지 않았다... 얼굴을 대보았지만 전혀 숨을 쉬지 않았어. ” 황제는 망연자실한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본다. 더 이상 느껴지지 않던 심장과 차가워지던 황후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하다.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그는 몹시도 괴로운 표정으로 어찌할 바 모르고 있다. “단지 놓아주지 않겠다 생각했을 뿐이다... 그저 생각만 했던 것 뿐인데.... 그렇게 숨이 끊어질 줄은 몰랐어. 심장이 멈춰버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어. 보내달라고.. 숨이 막힌다는 말은 나를 더 이상 보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말인줄 알았는데....” 신관은 그제서야 황제가 황후를 해하려 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황제 생전 처음 본 너무나 낯 설은 표정이다. 황제가 황후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을 자책하는 하며 괴로워하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언제나 황후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그가 아닌가. “황후님은 곧 원래대로 돌아올 것입니다. 브로만 공작님이 직접 시엔과 함께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시엔님이야 치료사로도 유명하시고 치료계열 마법에도 능하신 분이시니까요.” 그러나 황제는 브로만 공작이란 말에 무섭게 인상을 일그러트릴 뿐 그의 목소리는 황제에게 공허하게 울릴 뿐이다. 브로만 공작과 시엔이 떠나고 난뒤 방문을 나선 슈피르 공작은 처음의 흉흉하던 기새와는 달리 황제를 만나지도 않고 그저 말없이 황궁을 빠져나갔다. 내심 황제와 공작의 맞대결을 예상하고 불안해 하던 이들은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 내렸다. 특히나 황후가 의식이 돌아왔다는 소리에 누구보다도 반색한 것은 황후를 치료하러 들어왔던 신관들과 치료사들이었다. 황궁은 여전히 폭풍전야의 견디기 힘든 침묵속에 빠져 있었지만 그들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정말 놀랐습니다.” 한 신관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좀더 나이많은 신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황제의 모습은 처음 봤네. 우리들이 달려갔을 땐 정말 황제는 완전히 미친 사람 같았어. 황후를 살리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고 얼마나 날뛰셨는지 정말 죽을 각오까지 해야 할 정도였네.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아찔해지는군.” 모두들 그때의 황제의 모습을 생각하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약간 차갑기는 했지만 항상 언성을 높인 일이 없던 황제가 그 모습은 꿈에서라도 다시 볼까 두려운 정도였다. 어쨌거나 위기는 넘어갔고 그들은 새삼스래 황후를 고쳐준 브라만 공작과 시엔에게 감사했다. “그런데 황제폐하는 어디 계신 건가? 아까부터 보이지 않으시니.” “아마 지금도 황후마마 곁에 계시겠지요. 아까 제가 황후궁에 들렀을 때도 여전히 그곳에 계셨으니까요. 네니의 말로는 아무도 가까이 들이지 않고 계신다 합니다.” “허어.. 식사도 거르시고.. 밤까지 새시다니.. 황제께서도 충격을 많이 받으신 것 같은데..조금은 휴식을 취하셔야..” 나이많은 신관이 이미 하룻밤이 지나고 어슴푸래하게 밝아오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베네딕트 - 조금 늦었나요? ·ㅅ·;; †Lovedestiny-☆† - 처음뵙네요^^ 시아탱 - 첫리플이시네요. 근데 약간 실망하셨을지도(작가는 소심해서,,차마..) 레몽시이 - 역시 처음인것 같네요. 반갑습니다. 카오메이 - 조심하세요. 들키면..으음.. kh미소천사 - kh가 이름이시라고 하셨죠? 늘 감사합니다. 오월에부는바람 - 과분한 말씀////(칭찬에 약하다) 고맙습니다. 야무진양갈래소녀 - 당분간.. 삶이 고단해져서. 힘들어요(죄송,,) 有恩宥互 - 그런데 도대체 님의 닉네임 어떻게 읽는거지요? 괭이친구 - 황제의 질투라.. 뭐 질투는 맞습니다만 그게 인간에 대한 건지 그저 관심을 빼앗긴 것에 대한 어린아이같은 투정(?)인지는..고민중, ♡lovelygirl♡ -오타지적은 언제나 환영이예요. 그리고 문맥에 맞지 않는것두요. ***이게 어덜트였다면.. 어쩌면 오늘 수십번은 수정본 것을 올렸을수도.. 혹시나. 유조아 방침에 위반되는게 아닌가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은 이정도밖에는... 어째서 머리가 날라가고 뇌수가 터지고 허리가 절단나는 이야기는 괜찮으면서 이런건 유난을 떠는 이유가 뭔지.. ...알 수가 없네요..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야?" "글쎄, 난들 알겠어?" "어휴! 이게 뭔 꼴인지.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제대로 밥도 못먹고 꼬박 서서 말이야.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정말 죽겠다!"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인 기사가 찔끔해 반사적으로 에른하임을 살폈다. 그는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시선과 마주치자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죄송합니다, 단장님." "다시 한 번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면 톡톡히 혼을 내주겠다." 기사들과 별 다를 바 없는 녹초가 된 에른하임이 짜증스럽게 으름장을 놨다. "명심하겠습니다!" "또! 조용히 하란 말이다!" 신경질적으로 소리친 에른하임이 돌연 숨을 죽였다. 천천히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기사들도 긴장한 채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비추는 복도에 정면으로 보이는 방문을 바라보았다. "돌아가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황제가 걸어나왔다. 에른하임은 하룻밤새에 엄청나게 초최해진 얼굴의 황제의 모습에 걱정이 되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황후님은 어떠십니까." "....피곤하군"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어서 황제폐하를 모셔라!." "예! 에른하임님." 오전과 오후 내내 황성내의 상인들을 찾아다니느라 바빴던 하토르 후작이 숙소로 돌아오자 마자 다급한 발소리가 그를 향해 뛰어왔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하토르 후작은 고개를 숙였다. 상대는 보통의 신관이 아닌 평소 안면이 있던 고위사제였던 것이다. “이 누추한 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누추한 곳이라고 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다 못해 사치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곳이었지만 상대는 고위사제였다. 그가 이곳에 직접 왔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이었다. "지금 당장 대량의 마나석이 필요하다네. 한 10개 정도면 되겠는데 구해줄 수 있겠는가?" 허둥지둥 입을 여는 고위사제의 얼굴은 초조함으로 가득차 있었다. 자신에게 황급히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당황한 시종이 자리를 앉아 대화할 것을 권했지만 그는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마나석을 10개 씩이나요?" "당장 급해서 그러네. 내일 아침까지는 구해야 하는데 구할수 있겠나?" "하지만.. 가격이 상당할 텐데요?" "상관없네." 흥분한 고위사제의 모습에 하토르 후작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진정하십시오. 도대체 무슨 일에 쓰시려는 것이기에 한 개도 아니고 열 개씩이나 필요한 것입니까. 제가 알고 있는 상단을 통하면 10개 정도야 구할 수 있겠지만 2개 이상은 개인이건 단체건 소지를 금하고 있는 품목이 아닙니까. 신단에서 무슨 일로 필요로 하시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유를 알지 못하면 구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 내리던 고위사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거참, 이상하군. 아직 그대는 모르는 것인가? 그대의 딸도 황궁에 있으니 이야기 정도는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고위사제의 말에 하토르 후작이 앞으로 한발 나섰다. "신단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황궁에도 대량의 마나석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그것도 최상품으로만 2백 여 개가 넘지 않습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하토르 후작이 대신관에게 고개를 기울이며 작게 물었다. "그리고 어째서 황궁에서 직접 나오지 않고 대사제께서 이리 직접 찾아오신 것인지요?" "아직까지 아무 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하긴 황제와 슈피르 공작이 모두 입을 닫으라 명하였으니.." "황궁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황궁에서 벌어진 일대소란과 실추된 신관의 이미지를 생각하고 의기소침해진 고위사제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신관들이 고치지 못한 황후의 증상을 일개 마법사인 시엔이 고쳐냈다는 것은 분명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황궁에서는 비밀로 하라고 했지만 결국은 정비로 들어오게 된 알리샤공녀의 부친인 하토르 후작도 알게 될 이야기였기에 그는 입을 열었다. “황후마마께서 잠시 심장이 멈추셨다네.” 하토르 공작이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그는 망연한 시선으로 고위사제를 바라봤다. 핏기 가신 얼굴로 서 있던 그는 믿기어렵다는 눈빛으로 되물었다. “뭐라 하셨습니까?” “황후마마께서 황제폐하와 단둘이 말씀을 나누시던 중에 일어났다고 하니 이유는 잘 모르겠네. 브로만 공작의 마법사인 시엔의 조치로 위기는 넘겼지만 완전히 원상태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대량의 마나석이 필요한 모양이야. 아니 자네 얼굴이 왜 그리 창백한 건가?” 잠시 휘청이는 하토르 후작을 붙잡으며 고위사제가 물었다. “아..아닙니다. 그나저나 내일 아침까지라고요? 걱정마십시오. 제가 직접 황궁으로 찾아가 전해드리겠습니다. 안그래도 알리샤를 만나러 가 볼 생각이었습니다.” 고위사제가 나가고 나서 하토르 후작은 탁자를 거칠게 내리치며 중얼거렸다. 평소의 침착하던 태도는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연신 숨을 헐떡이는 주인을 놀란눈으로 바라보던 시종의 귀에 으르렁거리는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리샤.. 네가 기어코.. 일을...” *27회참고 “바론님 바이욘느님께서 찾으십니다.” 한밤중에 사람을 오라가라 하는 것은 평소의 바이욘느의 업무처리 경향으로 볼 때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대충 잠옷위에 겉옷 하나만을 챙겨입은 바론은 시종의 뒤를 따라 갔고 그가 안내한 곳은 평소 바이욘느가 그를 부르던 집무실이 아닌 개인적인 침소였다. “거기 앉게, 바론.” “뭔가 새로운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직 마왕측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만.” 바론은 어제 의식을 차리지 못한 레기어스와 함께 마왕성으로 돌아가 버린 마왕의 일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을 것이 분명한 그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방금 그 아이와의 연결이 다시 이루어졌다.” “예? 그럼 죽은 것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바론은 놀랐다. 분명 그때 흘린 피의 양으로 보아 인간이 사라남았을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바이욘느가 아직도 그 인간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에 있었다. “방금전 어떤 기운에 막혀 미처 정확한 장소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분명히 살아있는 것이 확실해.” “하지만 바이욘느님의 연결을 방해할 정도의 힘을 가진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게. 이상하다는 거다. 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 애의 기운이 있는 곳이 중간계인 것은 확실해. 그곳에서 나와 하연의 연결을 막을 만한 존재는 드래곤 이외에는 없을텐데. 그들이 무슨 이유로 나의 것을 훔쳐낸거지?” 바론은 드래곤이라는 말에 집히는 것이 있었다. 아직 확실한 것이 아니라 보고하지는 않았지만 얼마전 중간계의 드래곤로드인 아르드미한과 천계의 세라핌인 이즈라일이 비밀리에 만났다는 정보가 있었던 것이다. “천계의 이즈라일이 드래곤 로드와 만나 무언가 모종의 이야기가 오갔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혹시 그와 관련된 것일가요? 이즈라일 이라면 첸과도 안면이 있는자가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하연이 다렌을 만났을때 그 장소에 첸도 있었다. 미처 생각해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마왕이 인간에 대해 그렇게 관심을 보인것이.... 그 이유 때문이었나? 그렇다면 애초에 엘류시온이 노린것이 사실은 하연이었겠군.” “그렇다면 마왕이 일부러 인간을 죽은 것처럼 위장한 다음 중간계로 보냈다는 말씀이십니까?” 다렌은 순간 모든 것이 아귀가 들어맞는 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레기어스를 습격한 것도 사실은 인간을 죽은것처럼 위장해 중간계로 빼돌린 다음에 드래곤의 힘을 이용해 그 기운을 감추기 위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드래곤들의 힘을 빌리게 되면 들통날 것이 뻔하니 첸을 통해 천족들에게 부탁을 넣은 것이 틀림없었다. “레기어스님만 불쌍하게 되셨군요. 어쩐지 마왕이 이상하게 자신의 힘을 거의 다 소진시키며 힘을 불어넣는다 했습니다. 결국 그게 고도의 눈속임이었던 거군요. 그럼 어찌 하시겠습니까. 지금 당장 중간계로 수하들을 보내시겠습니까?” 바이욘느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 되더니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자신이 수하들을 보내면 분명 들통이 날 것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피오렌과 그녀의 오빠인 라인슈타인이 이 사실을 알게되면 인간을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었다. “일단 드래곤이 지키고 있으니 별일이야 없겠지. 분명 마왕측에서 먼저 움직임이 있을것이다. 우리는 그때 움직이면 되.” “그럼 지금 레기어스님께 붙인 아이들은 어떻게 할까요. 두명씩이나 붙어놓는 것은 별로 효율적이지 못한것 같은데요. 차라리 첸에게 붙이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바이욘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달빛속에 앉아있던 라인슈타인은 아까부터 인상을 쓰고 있었다.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점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마왕의 태도도 이상했고 갑자기 사라저버린 인간에게 관심을 보이는 바이욘느도 이상했다. 듣기로는 바이욘느는 인간을 품에 안은적이 한번도 없다 했는데 어째서 보호하고 있었는지 알수 없었던 것이다. “오라버니. 또 인상을 쓰십니까?” 피오렌이었다. 아름다운 자신의 동생이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인슈타인은 머리위로 두 손을 뻗어 자신이 기대고 있던 기둥에 맞대게 했다 어깨에서 우두둑 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피오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짓은 골라서 하시는 군요. 내일 돌아가신다면서 아직까지 주무시지 않는 것입니까?” 투덜대면서도 그의 옆자리로 와 앉은 피오렌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냐?” “....없어요?” 피오렌이 노려보았다. 내일 돌아갈꺼면서 아직도 내놓지 않고 있는 심보가 고약해서 피오렌은 입을 삐쭉였다. 한 번도 생일 선물을 제때 받아본 기억이 없었던 것 같다. 라인슈타인은 늘 선물을 가장 나중에 주곤 했던 것이다. 언젠가 이유를 물어보는 자신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남들과 똑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선물은 싫다. 네가 나한테 특별한 존재인만큼 내 선물도 너에게 조금은 특별한 의미로 받아들여졌으면 해.> 하지만 언제나 이렇게 졸라야만 온갖 생색은 다 내며 주는 라인슈타인의 선물은 충분히 그 가치를 했다. 항상 자신이 가장 원했던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준비해 두곤했던 것이다. “선물 빨리 달란 말이예요. 도대체 어디 숨겼어요? 방금 방을 다 뒤졌는데도 없었으니 분명 몸에 지니고 있겠지요?” 피오렌이 다짜고짜 라인슈타인을 구석에 몰아넣고 그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언제나 피오렌에게는 한수 접어주던 그는 그날따라 정색을 하고 피오렌의 손을 붙잡았다. 평소의 장난스런 태도가 사라진 라인슈타인의 모습은 언제나처럼의 오빠가 아닌 뱀파이어 로드인 라인슈타이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피오렌은 잠시 주춤했다. “뭐예요? 갑자기 분위기를 잡고.” “...나와 같이 돌아가자 피오렌. 그는 널 돌아보지 않을 사람이야. 단지 우리 일족의 힘이 필요해서 널 곁에 두고 있을 뿐이다.” “또 그 말인가요. 지겹지도 않나요.” 피오렌은 차갑게 대답하고 몸을 돌렸지만 라인슈타인이 손을 놓지 않자 인상을 찡그렸다. 손을 빼려는 순간 라인슈타인은 피오렌을 끌어당겼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피오렌이 중심을 잃고 그의 품에 안겨버렸다. “내 곁으로 돌아와라. 피오렌. 지금이라도.. ” 피오렌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라인슈타인이 물기가 배어나는 목소리로 탄식하듯 속삭였다. 하지만 피오렌은 몸을 빼내고 아무 말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애초에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피오렌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오라버니께서 샨트를 들이신다면요.” 그럴수 있을 리가 없었다. 라인슈타인은 힘없이 손을 떨궜다. 잠시 침묵이 달빛에 비치는 그들사이에 내려앉았다. 어색한 침묵을 깨트리며 장난스레 손을 내민것은 피오렌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선물없어요?” 이쁜영이 - 조금 뉘앙스가 틀린것 같지만 아픈것은 맞습니다. 엘윈 - 내일쯤 나올 예정입니다. †Lovedestiny-☆† -제뜰에 약간의 설명을 붙여놓았습니다만(도움이 될지도) ♡lovelygirl♡ -언제나 매일매일 방문해 주시네요. kh미소천사 -오늘도 봐주셔서 감사해요. 이은이 - 다음회는 마계편입니다. 레몽시이 - 첫코멘 맞지요? 감사합니다. 베네딕트 - 그럼 이제부터 그렇게 쓸께요. 황후마마로^^ 초선냥 - 첫 코멘이네요. 여포와 초선을 연상시키는.. 괭이친구 - 굉장히 심오한 코멘트를 주셨네요. 글올리고 방금봤어요^^:: 지금 다시 올립니다. *평소보다 조금 짧습니다. 그리고 약간은 가볍게 썼어요, 피오렌과 라인슈타인의 대화가 그냥 나온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조금 드러나게 묘사했는데.. 설마 그냥 지니치시려나 "지금 뭐라 했느냐?" 마왕의 날카로운 물음에 움찔한 첸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예, 마왕님. 카란과 엘은 날이 밝아오기 직전 어디론가로 사라졌습니다. 정확히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아직... 하지만 이곳 마계는 아닌것 같습니다. 아마도 중간계가 아닐지..." 마왕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두려움에 몰려 있던 첸은 잔인한 침묵을 견뎌 내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하지만 잠시 살벌한 기운을 뿜어내던 마왕은 옆에 서있던 기온을 손짓으로 불렀다. "사건의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자세히 말해봐라." "알겠습니다." 기온은 서둘러 마왕의 명령에 복종했다. 기온은 보고가 길게 이어지는 동안 한 번도 말을 끊지 않았다. 첸은 기온의 놀랍도록 철저한 보고를 감탄하며 듣고 있었다. 바이욘느의 궁성에서 기온이 따라나올 때만 해도 그저 레기어스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찬 철부지인줄 알았는데 주관을 전혀 배재하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능력을 보아하니 보통내기가 아니였다. "...인간과 레기어스 전하가 습격을 당하던날 갑자기 바이욘느전하도 극심한 고통으로 쓰러지셨습니다. 그리고 부상당한 레기어스님을 보고도 다론은 인간을 먼저 찾아오라 명하여 그림자 일족이 그곳에 갔으나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합니다." "그 바보녀석들이 레기어스까지 건드린 것은 의외지만 아무런 부상도 당하지 않은 바이욘느가 그날 밤 고통을 느껴 몸을 쓰러지다니 이상하군. ....연결인가? 그 아이의 정체를 알고 서 그런것은 아닐텐데." 높낮이 없는 말투에서 싸늘한 분노가 느껴지자 첸은 잔뜩 어깨를 움츠렸다. "한 가지만 더 묻겠다. 레기어스는 그날 왜 그곳에 갔었느냐?" "의절하셨던 마왕님께서 레기어스를 꼭 만나보겠다는 문구를 적어 보내셔서 그 일로 바론님과 바이욘느님께 추궁을 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왕성으로 돌아가야 할지 모른다 생각하시고는 마지막으로 찾아간 것일 것입니다...." "잠깐, 그럼 레기어스가 그 아이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냐?" 마왕이 기온의 말을 잘랐다. 피오렌이 그런 말을 할 때도 그저 자신의 화를 돋우기 위해 한 말인줄 알았던 것이다. “예. 매일 오후는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순간 마왕이 테이블을 내리치자 산산조각난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거칠어지는 숨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우자 첸은 하얗게 질렸다. 마왕은 수많은 여인들과 구설수에 오르던 레기어스가 그렇게나 오래 그 인간과 함께 보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인간을 빨리 되찾아 오지 못한 자신에게 쏟아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한 번도 늦은 시간에 돌아오신 적도 없고, 옷이 흐트러지거나 한 적은 없는 것으로 보아 그저 단순히 마음만 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 아이는?” 기온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첸은 다음순간 이어진 마왕의 말에 또다시 하얗게 질렸다. 기온은 잠시 망설였다. 마왕이 유난히도 인간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것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촉하는 마왕의 시선에 기온은 입을 열었다. “레기어스님이 직접 말씀하신 적은 없으시지만 거의 한달 내내 매일 찾아오는 그분께 마음이 없었다면 바이욘느님의 소유된 자의 신분으로서 계속 만나지는 않았겠지요.” 마왕이 기온을 레기어스에게로 되돌려 보낸 뒤 첸과 마왕 둘만이 남아있는 방안은 무시무시한 정적만이 가득 차 있었다. 연신 식은땀을 흐리던 첸이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모든 게 다 제 불찰입니다, 무슨 벌을 내리셔도, 그게 설령 죽음이라 해도 달게 받겠습니다." 마왕은 짧게 웃었다. "네놈의 죽음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이라면, 이번 일에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죽음을 내렸겠지." 피흐름이 일순 얼어붙는 것 같은 냉혹함에 첸은 숨을 헐떡였다. 그는 한가닥 평정심을 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입을 열었다. "마왕님, 전 어찌해야 하는 겁니까?" 첸은 주춤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 아이를 찾아내라. 분명히 살아있는 것이 틀림없어." 믿을 수 없는 얘기에 첸이 격한 숨을 들이켰다. "그래, 분명 그날밤 그 아이가 살아남기 힘들 정도의 부상을 입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네가 목숨은 붙여서 데려오라 했다니 단칼에 죽을 치명상을 입은 것은 아니겠지. 게다가 바이욘느와의 연결이 되어 있던 상황이라면 상대의 죽음으로 연결이 끊어지고 난 다음날에 멀쩡하게 앉아서 나와 대화를 나눌수 있을리 없다. 지나치게 조용한 바이욘느의 태도도 이상해. 바이욘느는 그 아이를 다렌을 만나게 해줄 것으로 믿고 있다고 하니 정말로 자신이 모르는 곳으로 끌려갔다면 이렇게 가만히 있을리 없지.“ "그럼 바이욘느전하는 그 분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겠군요?... 알겠습니다, 마왕님.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분을 찾아내고 말겠습니다." 마왕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어느새 어둠이 깔린 창가로 걸어갔다. “그대는 움직이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엘류시온이 그런 난리를 치고 도망갔는데 바이욘느가 너에게 감시를 붙이지 않을리 없지. 게다가 바론이 데리고 있는 그림자 일족의 감시를 피해갈 만큼의 능력을 네가 지니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너는 그저 그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해주는 역할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들이 움직이겠습니까?” “그러니 저쪽에서 덥석 물만한 미끼를 던져야 겠지. 바이욘느가 이성을 잃고 달려들 정도의 것이라면.. 그대의 수하 중에 커데이벌이라 하는 자를 빌려야 겠군. 시노페를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바이욘느 정도의 물고기를 잡으려면 어쩔 수 없지.” 다른 능력은 별 볼일 없는 녀석이지만 혼이 빠져나간 육체를 조종하는데는 최고의 실력자인 커데이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마왕이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서겠다는 의미였다. "그럼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여기 이것입니다." 남자가 작은 상자를 책상에 내려놨다. 알리샤는 작은 상자를 열고 안에 들어있는 작은 병들을 신중하게 꺼내 들었다. 꼼꼼히 그것들을 살펴보던 알리샤가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따로 명한 일을 수행하는 과장에서 정체가 드러날 만한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겠지요?" "예, 절 의심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제가 돌아다닌 것은 공식적으로 이것들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으니까요. 일은 예정대로 진행될 것입니다." 남자의 어조엔 경외감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알리샤는 고개를 저었다. 로이츠가 약속을 지켰으니 자신도 그에 따른 조건을 수행해야 했다. "이번일은 연기하기로 했습니다. 적당한 시기를 보아 다시 연락하지요. 그리고 완벽하게 시기가 무르익었다는 판단이 설 때까지 일체의 연락을 끊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남자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알리샤는 단호하지만 부드러움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수고 많았습니다, 이것들을 구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텐데요." "감사합니다." 남자가 애써 기쁨을 감추며 뒤로 물러나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알리샤는 남자가 사라지자마자 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뚜껑을 하나하나 열어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녀의 입술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 정도라면 충분하겠어. 이정도의 최상품이라면 아무리 황후라 해도 분명..”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을 때 알리샤는 확인을 마친 작은 병들은 원래의 상자에 넣고 있는 중이었다. "공녀님, 저 류시아나입니다. 아버님이신 하토르 후작님이 드릴 말씀이 있다며 뵙기를 청하십니다." "들어오세요." 알리샤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답했다. 문이 열리며 그녀의 시중을 드는 류시아나가 하토르 후작을 위해 몸을 비켜서자 후작이 안으로 한발 들어섰다. "그럼 말씀 나누세요. 전 이만 나가 간단한 다과라도 준비하겠습니다." "그러실 필요없어요, 그리 오래 계실 분이 아니니까요." 담담한 어조로 말한 알리샤가 하토르 후작에게 시선을 옮겼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대립을 느낀 류시아나는 혼란스런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떻습니까, 아버님 제 말이 틀리다 하시겠습니까?" 하토르 후작은 알리샤가 아닌 류시아나를 향해 대답했다. "다과는 필요없네. 방금전 마시고 오는 길이니까. 잠시 자리를 비켜줄수 있겠나?." 알리샤의 눈치를 보던 류시아나는 알리샤가 후작의 이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한치의 망설임 없이 수락하자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그제서야 몸을 돌린 알리샤는 상자뚜껑을 소리나게 덮으며 아버지인 하토르 후작을 향해 차갑지만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어서 오세요, 아버지. 그렇잖아도 제가 공식적으로 정비로 인정되기 전에 한 번쯤 들러 주시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던 참입니다." "갑작스런 방문임에도 너는 전혀 당황한 것 같지 않구나." 하토르 후작 역시 표면적으로는 예의를 갖춰 알리샤를 대했다. 상자가 놓여있던 테이블을 돌아나온 알리샤가 하토르 후작에게 의자를 권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아버님. 이토록 늦은 시간에 절 만나려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황후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단히 정보가 빠르시군요, 아버님. 놀랐습니다. 아버님껜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황후께 보이는 그 정성의 반의 반만이라도 어머님께 쏟아부었다면 좋았을텐데요.“ 말을 끊은 알리샤가 입술에 엷은 조소를 그렸다. "황후를 그리 만든 범인이라도 궁금하셔서 오신 겁니까?" "물론 아니다, 알리샤. 더 이상 시간 끌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 용건을 말하지. 이미 눈치채고 있었지만 네가 이렇게 무모하게 일을 벌일줄은 몰랐다. 황후는 폐위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것이냐." 두 사람의 눈길이 맞부딪쳤다. 알리샤는 느릿느릿 입술을 움직였다. "제가 그랬다는 증거라도 있나요?" "방금전 방안을 빠져나간 자는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자다. 그라면 오늘 있었던 사건을 만들어 낼 정도의 약을 구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이렇게 드러나게 하는 것은 곤란해. 아무리 그자가 취급하는 것이 흔적이 남지 않는 것이라 해도 말이다." 알리샤가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지금 그 말씀은 저를 범인으로 간주한다고 생각해도 충분한 발언이시군요." "황후는 내가 처리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넌 그저 황제의 눈에 들도록 노력이나 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나에게 말도 없이 멋대로 행동하는 것은 그만두도록 해라. 이건 명령이다." 후작이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글쎄요... 아버지가 그날 황후와 친하게 말씀을 나누시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제 손으로 처리하는 편이 낳겠다는 생각이 들던데요. 사랑하던 사람을 꼭 닮은 황후를 보니 옛정이 새록새록 솟아나 판단이 흐트러지신 것 같더군요." 거리낌없이 말을 받은 알리샤는 후작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의자에 앉아 깊숙이 등을 묻었다. "제 말이 틀립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황후는 그냥 놔두어라. 애초에 황후위에서만 떨구어 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였느냐, 만약 내 명을 어기고 이후로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후작은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경고조로 끝을 맺었다. "네가 아끼는 것들이 대신 고통을 당하겠지." "그러니까 '어머니와 오빠가 목숨의 위협을 당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내말을 따라라'... 그런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로군요." "황후는 건드리지 마라." 후작은 말을 돌리지 않았다. 그것은 알리샤의 말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건드리지 마라...그런데 어쩌지요? 전 그걸 막을 수가 없는데요. 그리고 막고싶은 생각도 전혀 없습니다." 하토르 후작의 청색 눈동자가 차갑게 번뜩였다. "게다가 거의 다 죽어가시는 어머니와 아버님의 품을 떠난 오라버니를 가지고 저를 협박하시다니요. 전 더 이상 혈육의 정에 이끌리는 바보가 아닙니다. 그 점은 아버지를 닮은 것에 감사드리고 있어요." "그래서 일을 계속 진행하겠다는 거냐?" 알리샤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아버지. 전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죽이시건, 오라버니를 괴롭히건 더 이상 상관하지 않습니다. 어짜피 하루하루 죽을 날만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가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신다면 어머님의 유산을 물려받을수 있겠지요. 예전처럼 오라버니의 앞길을 막아 그저 평기사로 머물게 하셔도 전 아무 상관없습니다. 아버님이 저를 협박한다는 지금의 상황이 그리 유쾌하지 않지만 부모형제야 언제든지 버릴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말입니다. 그런것이라면 이미 아버지께 너무나 잘 배웠으니까요." 말을 끊은 알리샤는는 은밀한 비밀을 털어놓듯 목소리를 낮췄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아버님은 더 이상 저를 협박하실 수 없습니다." 후작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그만 돌아가시지요. 아버님." 두 사람의 시선이 날카롭게 맞부딪쳤다. 후작은 오직 냉기만이 감도는 은청색 눈동자에서 알리샤의 말이 모두 진담임을 느낄 수 있었다. "황후에게 쓴 것이 무엇이냐? 황후를 고쳐 놓지 않으면 슈피르 공작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도 위험해진다. 흔적이 남지 않는 독은 구하기도 어렵고 종류도 많지 않지 결국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다행히 황제가 의심을 받고 있는 듯하니 지금이라도 해독약을 내어 놓거라." "해독약을 내어 놓으라......" 엷은 미소를 띤 알리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끝까지 절 놀라게 만드시는군요, 아버지. 전 아버지께서 지금쯤은 눈치채셨을 줄로 알았습니다. 황후와 관련된 일이 되니 그 냉철하던 이성도 약간은 마비가 된 모양이군요. 제가 그렇게 얕은수를 써서 황후를 그리 만들었겠습니까? 아버님의 말씀대로 들통날 것이 뻔한데요. 저를 너무 만만히 보시는 군요. 그리고 황후를 노리는 것이 어찌 저뿐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이를 악문 듯 후작의 턱이 단단히 굳어졌다. "아까 네 방을 빠져나가던 그 놈이 가져온 것들은 무엇이냐. 그자가 직접 너에게 가져온 것을 보면 분명 중요한 것이 틀림없겠지." 냉정한 목소리에선 동요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알리샤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까 자신이 만지작 거리던 상자를 가져와 후작앞에서 열어보였다. “그자가 왜 저를 찾아왔는지 궁금하신가요?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상자를 열자 20개정도의 작은 병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하나의 뚜껑을 연 알리샤가 그것을 후작에게 내밀었다. 진한 향기가 방을 메우자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버님도 상단을 운영하시니 잘 알고 계시겠지요.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꽃의 도시에서도 일년에 종류별로 1병씩만 생산된다는 여신의 눈물들입니다. 신전에서 특별히 신성력을 받고 자라는 각각의 꽃이 50종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20병이나 모아올수 있는자는 그 밖에는 없지요. 전 단지 황후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 그를 불렀을 뿐입니다.” 알리샤가 전부 색이 다른 병들을 차례차례 그에게 확인시켜 주며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아무래도 황후를 없애고 싶어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인 것 같네요. 아버님.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아버님이 속해 계시는.. 그 조직이겠지요? 자신이 속한 곳에서 벌이시는 일도 잘 모르시다니 소녀는 실망이 큽니다. 그러니 저더러 그만 두라 하셔도, 해독약을 내어 놓으라 하셔도 전 아무것도 할 수 없답니다.” 후작은 말없이 몸을 일으켰고 알리샤도 웃음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후작이 몸을 돌려 문을 열었지만 두 사람 모두 의례적인 인사말은 더 이상 입에 담지 않았다. 찍어누른 분노를 말해주듯 문이 소리없이 닫혔다. 알리샤는 의자에 등을 파묻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건드리지 마라’ 라... 혈육마저 인질로 삼는 당신께도 두려운 것은 있는 모양이군요. " 야옹~♥ - 지적 감사합니다, 고쳤어요. 시아탱 - 많은 분들이 레기어스와 하연을 응원하시네요. 그런데 이놈의 마왕이 문제라는... 많이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마왕의 계략에 빠지는 건 바이욘느와 레기어스 양자(兩者)입니다. 하연이 시노페의 혼을 가졌다는 것은 마왕과 첸 뿐이예요. 오를르 - 리플 감사드립니다. 기껏 설명해 주셨는데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ㅅ-(?) 살쾡이 - 엇 처음이신가요? 살쾡이의 표준어가 삵이었던가요. 리플 감사합니다. 베네딕트 - 하렘~ 저도 여성향 연애시물레이션 좋아한다는.. 괭이친구 -쓸수록 힘든게 글이라..(전 현실성 100점 만점에 99점 나온 인간입니다. 게다가 EQ는 바닥을 기었지요. 결국 냉정하고, 무드에 강한 여자같지 않은..) 하지만 노력은 해봐야죠? 감사합니다. 야무진양갈래소녀 - 알리샤는 아니네요. (어제편에서 힌트가 나왔죠?) 네르히나 - 감사합니다. 뭘꼬다봐 - 그 라인슈타인은.. 레기어스에게 밀렸어요. 이은이 - 선정적인..멘트다..(!!!) 농담입니다. 엘윈 - 분량 계산을 잘못해서 ㅠ.ㅠ(안나왔어요, 죄송) 레기어스의 의식이 돌아왔을 때는 기온이 마왕을 만나고 돌아온 밤이었다. 언제나 절약을 강조하던 기온의 성격은 이곳에 와서도 변하지 않았는지 방안을 밝히는 것은 작은 촛불 하나였다. 그러나 짙은 어두움에 잠겨있던 의식에서 눈을뜬 레기어스는 미약하지만 집요하게 눈을 파고 드는 불빛을 가리기 위해, 팔을 들어 올리려 했다. 하지만 그 작은 움직임에도 가슴부분에 참기 힘든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이를 악물었지만 이미 괴로운 신음소리가 새어 나간 뒤였다. "레기어스님? 깨어나셨군요!" 침대에 엎드려 선잠이 들었던 기온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여긴... 어디지?." 그는 한참이나 눈을 깜박인 후에야 걱정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기온을 바라봤다. 주위가 낯설다. 게다가 주위의 공기는 굉장히 탁해서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사흘이 지나도 깨어나지 않으셔서 영원히 눈을 안 뜨실 줄 알았어요.." 마음이 좀 놓이는지 기온이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다시 주저앉았다. 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세차게 문질렀다. 흐릿한 불빛이지만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은 분명히 눈물이었다. "미안하구나. 기온. 고생이 많았지?" 손을 내리며 기온이 피식 웃었다. 눈물은 이미 감춰진 후였다. "이 정도 갖고 피곤하면 천하의 기온이 아니지요. 몸은 괜찮으세요?." "그래, 네가 힘만 넘치는 꼬맹이라는 걸 내가 잊었구나." "앗! 마왕님이 레기어스님이 깨어나시면 연락을 해 달라고 하셨는데!." 말을 마친 기온이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자 레기어스의 얼굴위에 떠있던 미소가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흥분된 어조로 소리치던 기온은, 잔뜩 긴장해 뻣뻣하게 굳은 레기어스의 상태를 눈치채고 일순 말을 멈췄다. 자신이 너무 성급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너무 놀라지마세요. 사실 레기어스님의 상처를 치료해주신 것이 마왕님이시거든요. 여긴 마왕성이구요." "뭐?" 레기어스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며 벌떡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무의식 중에 나온 그의 행동은 참기 힘든 고통만 가져올 뿐이었다. "레기어스님! 괜찮으세요?" 레기어스가 거칠게 신음성을 토해내자 기온이 소리를 높였다. 침대 옆으로 다가 선 기온이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그를 일으켜, 미리 준비해둔 말끔하게 접은 천을 등에 받쳐주었다. 레기어스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기온을 바라봤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가 나를 치료했다고?" 도저히 믿겨지지 않은 말에 레기어스는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레기어스의 목소리가 저절로 높아졌다. "예, 그리고 이곳 마왕성으로 레기어스님을 모셔온 것도 마왕님이세요." 마왕이 나를 치료하고, 그의 성으로 나를 데려왔다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레기어스는 기온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시선을 맞췄다. "저.. 그리고 지금 말씀드리고 싶지는 않지만 그때 함께 계셨던 인간은 아직 생사를 알 수가 없어요. 마왕님도 찾고는 계시지만 그날 갑자기 사라졌다고 하더군요," 마왕이 자신과 함께 있던 인간을 찾고 있다는 기온의 말에 레기어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뻣뻣한 고개를 들고 기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연결을 맺은자가 급작스레 죽어버리면 상대는 며칠 동안 움직이지도 못한다고 하는데 바이욘느님이 별로 충격을 받지 않으신 것으로 봐서 분명히 살아계실 거예요." 걱정말라는 듯이 기온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다시 자리에 주저않으며 거친 동작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리고 초조한듯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마왕님이 뭔가를 눈치채신것 같아요. 요즘 첸과 그의 수하인 커데이벌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요." “커데이벌?” 앞뒤가 뒤죽박죽 섞인 이야기에 레기어스는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아직도 정신이 몽롱한 생태다. 게다가 연신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탓인지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왜 영혼을 수집하는 이상한 취미가 있는 변태말이예요. 생긴건 정말 느끼하게 생겨가지고 하는짓은 잔인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잖아요.그러니까 레기어스님께서 어서 빨리 그분을 찾으셔야 하지 않겠어요?" 기온이 누가 들을까 무서운 사람처럼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기온은 레기어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기쁨과 안도감에 환하게 미소지었지만 그런 그를 바라보는 레기어스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그의 그런 시선을 느낀 기온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자 레기어스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난... ." "예?" 입술을 꾹 다물고 기온의 어깨너머를 바라보던 레기어스가 다시 기온와 눈을 마주했다. 레기어스의 머리 속으로 그날밤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우린...네가 생각하는..그런... 관계가 아니야..." <그러니까.. 우린 친구잖아.>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거야. 하연?> <아니 그게... 내가 널 좋아하는 건 맞지만... 난 바이욘느의 그 뭐냐 소유된 자 이고. 또 넌 그 바이욘느의 동생이잖아? > “....친구일뿐이지..” <그러니까 넌 영원히 친구따위밖에 안되는 거야! 맨날 도망만 치고. 솔직하게 이야기 하지 못하니까 그래서 친구밖에는 되지 못하는 거라구!> 잠시 흐르던 침묵을 깬 것은 기온의 목소리였다. "그래서요? 그러니까 더욱 데리러 가셔야죠!!! 그 애가 바이욘느나 마왕님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상상이나 할 수 있으세요?" 격양된 어조로 소리치던 기온이 거칠게 숨을 내쉬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언제나처럼 레기어스를 향해 보여주던 고집스런 얼굴로 돌아온 기온은 애써 진정시킨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에게도 친구라고 하셨잖아요! 설마 저도 그 인간처럼 버리실 생각이세요? 그건 제가 용납 못합니다. 친구라면 무슨일이 있어도 끝까지 지켜줘야 하는 거라구요. 제가 왜 바이욘느님의 궁성에서 이곳까지 따라 왔다고 생각하세요! 전 레기어스님을 친구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요. 그런데.. 지금 저에게 친구를.. 저를.. 버리겠다고 말씀하시는겁니까?” 레기어스는 지금 또 도망치려고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날밤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자신도 잘 알수 없었지만 이렇게 쉽게 포기해버리는 그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또 한번 간신히 찾아온 사랑을 놓치고 예전처럼 공허한 눈동자로 아무것도 마음에 담지 않고 예전의 텅빈 삶을 살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어째서 한번만이라도 자신의 마음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는 것일까. 거절을 당한다 해도 상관없지 않는가. 친구라는 이름만으로도 곁에 남을 수 있다면 기온 자신은 그것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레기어스는 그 작은 관계마저 스스로 끊어내려 하고 있었다. 기온 자신이 간절히 원했지만 허락되지 않았던 그 작은 하나의 고리마저도 말이다. 아무리 예전에 받은 상처가 깊다하지만 이렇게 포기해 버리면 상처는 아물기는 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곪아간다.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지켜주셔야지요! 그게 친구니까요.” 기온을 바라보는 레기어스의 하늘색 눈동자가 어둡게 반짝였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이 담긴 눈으로, 한동안 기온을 바라보던 레기어스가 시선을 돌렸다. <레기어스를 미워하지마.> ‘...그녀도 날 지켜주려 했었지.. 바이욘느로부터.. 우리는...친구...였으니까.’ 시엔은 자신의 앞에 테이블 위에 조그만 무더기를 이루고 있는 마력석을 보고는 놀랐다는 듯 중얼거렸다. “설마 황제가 이것들을 다 내어줄 줄은 몰랐는데요.” “나로서도 놀랍군. 이 정도의 마력석이면 드래곤들도 침을 흘리겠어.” 실제로 약간의 탐욕이 어린 눈으로 마력석을 바라보던 브로만은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 약간 아쉬워하며 잠들어 있는 하연을 바라보았다. 그때 끄응하는 소리와 함께 하연이 천천히 눈을 떴다. “정신이 드냐?” “어! 브로만, 그리고 그 뒤에는 시엔? 여긴 왠일이예요?” 기지개를 펴는 하연은 어제 한번 심장이 멈추었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원기완성했다. 브로만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하연에게 다가갔다. “너 어제 쓰러졌었어. 정말 기억 안나는 거냐? 신관들이 몰려오고 슈피르 공작까지 왔다 갔는데.”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하연이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멈추고 호흡까지 끊어졌었으니 그냥 쓰러진 정도가 아니지.” “에엑! 정말?” 상황을 잘 모르고 있던 하연에게 브로만은 차근차근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한참을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하연이 갑자기 하얗게 질려서는 어쩔줄 몰라하며 입을 열었다. “궁금한게 있는데... 만약 황제가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되는거야? 뭐 별로 큰일은 없겠지?” “...들킨거냐. 생각보다는 늦군.” 브로만이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리자 안도하던 하연의 귀에 청천벽력같은 소리가 들렸다. “뭐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니 더 이상은 황후자리에 앉아있을 수 없겠지. 아마 황제가 마음만 먹으면 쫒겨나는건 시간문제일 거다. 테아난 황실은 황제의 여인에게서 열성적 인자가 나타나는 경우에는 상당히 가혹한 편이니까.” “그..그럼 더이상 황후가 아닐수도 있단 말이야?” 다연한 걸 뭐하려 물어보냐며 브로만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연은 털썩 침대위로 주저앉아 버렸다. 더 이상 황후역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마음에 들었지만 자신의 미흡한 연기로 진짜 황후가 피해를 볼게 되었다는 사실이 엄청난 죄책감이 들고 있었다. “걱정마라. 어짜피 한 달 동안은 대 연회 기간이니 타국 사신들의 눈을 보아서도 그동안에는 황후를 폐하는 일은 하지 않을테니까. 너도 의외로 지위에 집착하는 것을 보니 인간은 인간이구나. 설마 황제한테 정이라도 들은 거냐?” 하지만 하연은 브로만 공작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고 그런 하연을 바라보던 그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 “황후로 계속 있고 싶은거냐?” “응” 갑자기 싸늘해진 브로만 공작의 태도가 이상했지만 하연의 머릿속은 그것을 염두에 두기에는 충분히 복잡했다. “그렇게 황후로 남아있고 싶으면 황제에게 부탁이라도 해보던지.” 다분히 비꼬는 말투였으나 하연은 그 말에 화색이 돌았다. 갑자기 환해진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하연이 큰 목소리로 네니를 불렀다. 하연이 깨어난 사실을 알고도 들어오지 못하고 있던 네니가 한달음에 달려 들어왔다. “지금 당장 황제를 만나러 갈테니까 준비좀 해줘, 그리고 브로만 볼일 끝났으면 가도되. 그리고 마력석은 시엔이 알아서 처리하면 되지? 뭘 그렇게 서 있어. 나 옷 갈아입어야 되니까 그만 가봐.” “.....” 쾅-----!!!! 문짝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에 네니가 놀라 문을 바라보았다. 방금 나간것이 정말 살아있는 예절교본인 브로만 공작이 낸 소리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눈앞에서 문이 닫히는 바람에 미처 나가지 못한 우락부락한 시엔이라는 마법사는 연신 미안하다는 듯 허리를 굽히고는 재빨리 탁자위에 올려져 있던 것들은 주머니에 주어담고는 바람처럼 잽싸게 사라져 버렸다. “뭐해? 네니. 빨리 가봐야 되니까. 어서 준비해줘.” “하지만. 아직 몸이 좋지 않으시지 않습니까. 적어도 반나절은 요양을 취해야..” 네니의 의견은 입을 다문 하연에 의해 묵살되었다. 외솔 - 닉네임이 왠지 솔향기가 나는듯^^ 과분한 칭찬 감사드립니다. 달빛의시련 - 리플달으시려고 가입하셨다니!! 그저 감사드릴뿐입니다. 하연과 레기어스가 만나는것은 ....(침묵..) 네르히나 - 용도는 아직 특별히 정하지는 않았지만.. 엄청나게 귀한 특이한 향이라는 것을 잘 이용해야 겠지요^^ ≤류시아느≥ - 앗 혹시 님의 닉네임이 제 잠재의식속을 파고든 것인가요? 베네딕트 - 유치한 짓은 안하겠죠?(옷을 뜯어놓는다거나. 말안장밑에 돌을 넣는다던가. 단둘이 있을때 적의를 드러낸다던가..<-뭡니까.이런거 짜증나요!) kh미소천사 -감사합니다. 이쁜영이 - 하렘을 만듭시다 쿠하하하핫!!(그런데 능력부곶 -ㅁ-;;) 엘윈 - 이제부터는 기온의 활약이 두드러집니다,<행릿형마족=레기어스> (햄릿의 친구 핫쇼레이의 이미지를 따온 녀석이예요.) 초선냥 - 곧 나올겁니다.(특별히.. 러브스토리라 보기는 그렇지만요..)오타 수정했어요 오를르 - 알리샤도 상처가 많지요.(하지만 말과 달리 오빠를 무척이나 소중히 여깁니다) 물론 그것이 모든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는 없겠지만... “하지만, 황후마마 혼자서 가시다니요. 안됩니다.” “네니. 아까부터 계속 그 소리야? 황제가 날 그렇게 만든게 아니라고 하잖아. 그런데 왜 자꾸 따라오겠다는 거야? 이번에는 롤프도 같이 가니까 별일 없을거야. 그러니 제발 따라오지좀 마.” 우르르 따라나오려는 시녀들을 물리치고 오로지 롤프만을 데리고 황제의 궁으로 향하던 하연은 갑자기 뭔가 단단한 것이 부딪치는 충격에 신음성과 함께 머리를 감싸쥐었다. 어찌나 아프던지 하마터면 주저 앉을뻔 했다. 비틀거리는 하연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서류들이...” 그러고보니 하연의 주면으로는 사방으로 굴러떨어진 문서들이 눈처럼 새하얗게 사방으로 펼처져 있었고 지금도 몇장이 나폴거리면 하연의 머리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무심결에 눈앞으로 내려오는 종이를 잡아든 하연이 이게 뭔가 하고 들여다보려는 순간 무언가가 잽싸게 하연의 손에서 그것을 빼앗았다. “이리 주시지요. 황후마마.” 덜그럭거리는 듯한 이상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로이츠였다. 언제나처럼 인상을 쓰고 있는 듯한 얼굴의 그는 재빠른 손길로 사방에 흩어진 서류들을 주워 모으고 있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상대의 안부를 물어보는 것이 예의이겠지만 평소 황후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로이츠는 이마가 벌겋게 부어있는 황후를 보고도 모른척하고 있었다. “앗! 죄송해요. 저 때문에 서류가 다 흐트러져 버렸네요.” “괜찮습니다.” “아니예요, 저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걸요, 제가 도와드릴께요.” 항상 황제의 집무실에서 산더미 같은 서류를 쌓아놓고 말없이 종이만 넘기고 있던 그를 보아온터라 하연은 무뚝뚝한 로이츠의 말에도 원래 그려러니 하고 넘어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복도를 거의 뛰다시피 달려가 상대와 부딪힌 것도 자신이 아닌가. 서류가 엉망이 되었으니 화를 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였다. 슬쩍 고개를 돌려 로이츠를 바라본 하연은 놀랄만한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가까이서 본 로이츠의 얼굴이 생각보다 젊어보인다는 것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힐끔거리며 로이츠의 얼굴을 훔쳐보던 하연의 손이 제대로 서류를 잡을리 없었고 마침 그때 로이츠의 손이 하연의 손을 스쳤다. ‘손에 왠 흉터가..? 그것도 꽤 오래전에 생긴것 같은데..’ 늘 서류만 만지는 로이츠일텐데 손에 생긴 흉터는 마치 화상을 입은듯 선명했다. 햇볕을 거의 받지 못해 창백한 흰피부 위로 도드라진 붉은 얼룩은 흉측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눈치챌 수 있을 만큼 도드라져 보였다. ‘상처가 나도 여기 귀족들은 신관의 치료로 상처하나 남지 않는것 같던데 저 상처는 뭘까?’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까부터 저를 계속 바라보시는 군요.” 자신을 탐색하듯 바라보는 시선에는 익숙해져 있는 그였지만 왠지 황후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럽게 느껴진 로이츠가 서류를 줍느라 숙인 몸을 일으켰다. “아니예요. 그런데....나이가 어떻게 되요?” 하연은 그순간 진심으로 로이츠의 나이가 궁금해졌다. “...그 서류좀 이리 주시겠습니까.” 하연은 왠지 더 이상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그의 말투를 보고 재빨리 그에게 자신이 모은 서류뭉치를 건넸다. 서류를 받아든 그는 장수가 맞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종이를 한 장 한 장 세어 나갔다. “저기.. 황제폐하는 지금 집무실에 계신가요?” “잠시 밖에 나가셨습니다. 2일 뒤에 열리는 대 연회 때문에 각국의 사신들이 도착한 상태이니까요. 지금 접견실에 계십니다.” 하연은 망설였다. 황제를 한시라도 빨리 만나야 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런 비밀스런 이야기를 타국의 사신들이 모여 있는 접견실에서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연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때 로이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뒤면 돌아오실 겁니다.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지요. 그렇다면 잠시 집무실에 계셨다가 만나 뵙고 가셔도 될듯합니다.” 모레로 다가온 대 연회를 맞이하여 테아난 제국에 거주하는 귀족들과 각국의 사신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일주일간의 단기 체류를 할 예정이었지만 일부는 황제의 겨울 사냥에도 참석하기로 되어 있는 자들도 많았다. 그들 대부분은 각 왕국에서 중책을 맞고 있는 귀족들이 대부분이었고 얼마 되지는 않지만 친선사절로 온 왕족들도 있었다.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한 피곤한 몸을 간신히 이끌고 아무 일 없었다는듯 여유로운 모습을 가장하고 있는 것은 이런 접견을 수십 번을 해온 황제로서도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그들에게 틈을 잡힐 수는 없는 일이라 그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드디어 명단의 제일 아래에 적힌 코린트국의 사신이 물러가자 황제는 참고 있던 한숨을 크게 내쉬며 뒤에 서 있던 시종장을 불렀다. “그만 돌아가겠다.” 백발이 성성한 시종장은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서는 문 앞에 서있는 에른하임에게 눈짓을 하였다. 이제 다가와도 좋다는 뜻이였다. 황제의 곁으로 다가온 에른하임이 고개를 숙여 황제에게 작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브로만 공작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황후가 쓰러졌던 일은 철저히 비밀로 하라 명한 황제였기에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자들은 얼마되지 않았다. 각국의 사절이 모두 모인 지금시점에 그 사실이 외부로 알려져봐야 좋은 것은 없었다. “..뭐라던가.” “이제 완전히 회복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 심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에른하임 나름대로는 위로랍시고 한 말이었지만 황제는 입을 다물었고, 무안해진 에른하임은 그의 앞을 지나 걸어나가는 황제의 뒤를 황급히 뒤따랐다. ‘굉장해.. 저 많은 서류더미를 들고도 저렇게 잘 걸어가다니. 역시 전문가라는 건가?’ 하연이 로이츠의 제안을 받아들일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때 그는 당연히 황후가 따라오리라 생각했는지 한발 앞서 걷기 시작했고 하연은 엉겹결에 그의 뒤를 따르고 있는 중이었다. 로이츠가 황후와 나타난 것을 보고 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곧 그것을 감추고는 고개를 숙였다. “어서오십시오. 황후마마. 로이츠님도 어서 들어오시지요.” 집무실은 크게 7개의 방이 연결된 구조였다. 처음에 이곳을 들어오면 만나게 되는 가장 큰 방에 있는 거대한 테이블은 황제가 각료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하는 곳이라는 것을 드러내 주듯 화려한 장식보다는 철저하게 실용성 위주로 되어있는 단순한 꾸밈으로 되어 있었다. 로이츠는 말없이 그 곳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 있는 6개의 통로 중 오른쪽 창문에 있는 첫 번째 통로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작은 양문을 지나 나타난 방은 아까의 회의실에 비하면 작다고도 할 수 있지만 장식은 같았다. 다른 점이라면 사방에 정리되지 않은 서류뭉치가 산처럼 쌓여있다는 것이었다. “그쪽에 앉으시지요.” 하연은 방안을 휘휘 둘러보았지만 보이는 앉을만한 곳에는 전부 책이나 서류뭉치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로이츠는 어느새 자신의 책상위에 들고온 서류더미를 올려놓고는 의자에 앉아버렸다. 책상위에 가득 쌓인 서류 뭉치때문에 로이츠의 숙인 얼굴이 보이지 않아 어디에 앉느냐고 물어보기가 곤란해진 하연은 소파를 차지하고 있는 수많은 책들을 한군데로 모으기 시작했다. 앉을 곳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비서도 없나. 보기에는 깐깐하고 빈틈없어 보이더니 뭐가 이렇게 사방에 널려 있는거지. 정리 좀 하고 살아라. 이건 완전히 내 동생 방이나 다름 없잖아?’ 하연의 동생의 방도 온갖 게임잡지와 만화책, CD, 교과서, 참고서, 문제집등으로 이와 비슷했던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속에서 필요한 것만을 쏙쏙 찾아내는 능력은 대단해서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한번도 물건을 못찾는다고 난리가 난적은 없었다. ‘로이츠도 그런 부류인가 보네. 아니.. 남자들은 다 그런건가?’ 하연은 서류는 서류대로 책은 책대로 한군데 모아놓고는 한숨을 쉬었다. 단 두 개로만 분류를 했는데도 방안에 작은 종이의 산이 두 개나 쌓인 것이다. 그저 앉을 자리만 만들려던 것이었지만 중학교 때 도서부에서 3년간 책만 정리했던 습관이 그만 튀어나오고 만 것이었다. ‘정말 대단해. 어떻게 저렇게 조금도 쉬지 않고 일을 할 수가 있지?’ 자신이 이리 부산을 떠는데도 로이츠는 한 번도 얼굴을 들지 않았고 연신 종이 넘어가는 소리와 펜이 스쳐가는 사각거리는 소리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은 하연은 모아둔 책더미 속에 있는 글자에 눈이 갔다. 화려하게 장식된 글자들로 적혀있는 표지들과는 달리 단호하면서도 각진 모양이었다. <빈민구제책(貧民救濟策)> 별로 읽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하는일 없이 앉아 있는것보다는 뭐라도 읽어야 겠다는 생각에 하연은 종이를 한 장 넘겨서 심드렁한 표정으로 읽기 시작했다. ‘이상하군. 정말 저 사람이 내가 알던 황후가 맞는건가?’ 자신과 부딪치고서도 먼저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모습은 한 달 전쯤 자신을 마주 보았다는 이유로 그에게 손을 휘두른 인물과 동일인이라고 보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항상 자신이 앞서 나가야 성이 풀리던 그녀가 말없이 자신의 뒤를 따라오자 그는 내심 당황했다. 일부러 관심이 없는 척 서류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지만 부산스럽게 이리저리 왔다 갔다하며 방안을 정리하는 황후의 모습에 자꾸 시선이 가고 있었다. 한번도 청소 같은 것을 해본일이 없을 텐데도 황후는 거의 황실도서관의 사서에 버금가는 실력으로 책들과 서류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제는 깨끗해진 소파에 앉아 뭔가를 집어들고서는 읽기 시작했다. ‘황후가 내 글을?’ 평민출신의 자신을 혐오하고 자신이 올리는 글마다 전부 쓰레기나 마찬가지라며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던 그녀가 자신의 글을 읽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까지 지으며 읽고 있었다. 순간 저것이 자신이 쓴 글이 아닌 것인가 생각도 해 보았지만 저 글씨체는 분명 자신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황후는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자리에서 일어서서 어느 한 대목을 손가락을 짚어가며 천천히 다시 읽어보는 것이었다. 그리고서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리고는 잘 들리지 않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무슨 문제점이라도 있는지요?” 느닷없는 로이츠의 목소리에 놀란 하연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글은 제가 쓴 것입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말씀해 주실수 있으십니까?” 로이츠의 무심해 보이던 눈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기새에 놀란 하연은 자신이 남의 글을 가지고 마음대로 평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너무 이론적인 것 같아서...앗! 그게 아니라. 제가 생각한 것이랑 조금 달라서 그랬던 것 뿐이예요.” 막상 말을 하고 나니 상대를 무시하는 듯 들릴것이 분명한 말이여서 하연은 황급히 말을 정정했다. “예를 들면 뭐가 있습니까?” 하연은 로이츠의 시선이 불편해서 헛기침을 한 두 번 하고 상황을 모면하려 했지만 끈질기게 대답을 요구하는 그의 집요한 추궁에 그만 항복하고 말았다. “첫번째 안은 의도는 좋지만..빈민들이 부유한 교구로 이동해 다닐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했구요, 두 번째 안은 별 기술이 없는 그들이 생산하는 물건은 질이 떨어지고 판매에서도 다른 제품과 경쟁을 할 수가 없을 거예요. 결국 재료의 낭비를 가져오고 국가의 세 부담만 늘어나겠지요. 그 뿐만 아니라 빈민의 학대와 노동력의 착취 등이 발생할 가능성도 높아요.” 로이츠는 놀란 눈으로 하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간결하지만 핵심을 찍어 하나씩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있는 황후의 이야기에 빠져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 대안책인 세번째 안은 어떻습니까?” 아직 세 번째 안을 읽지 않은 하연이 종이를 뒤적이자 로이츠가 하연의 뒤로 다가와 그녀의 손에 잡힌 책장을 몇 장 넘겨주었다. 하지만 오래전에 쓴 것이라 내용은 기억하고 있지만 정확히 종이의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한 그는 고개를 숙여 손가락으로 글들을 찾아 내려갔다. “아. 찾았어요. 잠깐만요, 아직 이 부분은 읽지 못했거든요,” 자신의 뒤에 서있는 로이츠 때문에 그림자가 져 글씨가 잘 보이지 않자 하연은 얼굴을 찡그리고는 몸을 돌렸다. “어머나. 에른하임경. 언제 오셨어요? 황제폐하는요?” 로이츠의 가느다란 몸 사이로 보이는 붉은 망토는 분명 에른하임이었기에 하연은 깜짝 놀랐다. 아마도 방금 전의 토론(?)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이제는 멀쩡해 보이는군. 그대의 목소리가 문밖까지 들려올 정도니 말이야.” 에른하임의 뒤에서 나타난 황제의 목소리는 별 높낮이 없이 무미건조 했지만 뒤로 물러선 에른하임은 근심스런 눈으로 하연과 로이츠를 조심스레 훔쳐보고 있었다. 황제는 묵묵히 걸음을 옮겨 하연이 방금 전 앉아 있던 소파에 앉았다. 하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황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그 세 번째 대안에 대한 그대의 의견은 뭐지?” “음.. 잠깐만요. 아직 읽어보지를 않아서요.” 하연은 다행히 별말이 없는 황제의 태도에 안도하며 빛이 들어오는 창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창으로 들어오는 저녁의 마지막 석양에 물든 종이가 붉었다. 븕게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고개를 살짝 숙인 하연의 머리카락이 이마로 살짝 내려오고 마치 따뜻한 불꽃에 감싸인듯한 하연의 모습을 바라보던 황제는 조용히 손짓으로 에른하임과 로이츠를 내보냈다. 그들이 빠져나가고서도 한참이나 글에서 고개를 떼지 않던 하연은 조금씩 어두워져 가는 저녁의 마지막 석양 속에서 사라져 가려는 글자들을 손으로 짚어가며 입을 열었다. “이 세 번째 안도 조금 허술한 것 같아요. 빈민들의 최저임금을 보장해 준다고는 하지만 이건 노동자를 위한 임금보조금이 아니라 고용주에 대한 보조금이잖아요. 그리고 아마 빈민들은 수입이 적어도 부족분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열심히 일을 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방금 읽은 네 번째 안도..” 하연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무언가가 가냘프게 들어오는 빛을 가리고 하연이 들고 있는 종이 위로 어두움 그림자를 드리웠기 때문이다. 누군가 하여 고개를 들은 하연의 눈에 어둑어둑해져 가는 하늘은 배경으로 서 있는 황제의 눈동자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카오메이 - 기온이 열심히 활약을 해야 할텐데요. (기온은 동기요인(動機要因)자.) 외솔 - 하지만 장애물이 너무 많네요. 신화창조? - 옷 첫 리플이시군요.(신화창조의 비밀 프로를 연상시키네요.) 볶음밥 - 레기어스의 고백신도 하연의 둔함으로.. 황제도 고생이 많겠죠. 베네딕트 - 저로 하렘을 원하지만.. (ㅋㅋㅋ) 이쁜영이 - 해독 불가. 무슨 말이예요?(?_?) kh미소천사 - 리플 감사합니다. 달빛의시련 - 오오~ 어찟하여 그대는 햄릿이란 말인가(로미오앤쥴리엣) 시아탱 - 인생이란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가진다(크헉..) 이은이 - 세월은 기니까... 어찌 될지는(중간계10년/마계3년) 초선냥 - 오늘로 리플 감사드려요. *집무실로 오기 한시간전* 접견실에서의 접견을 마치고 돌아오려던 그는 잠시 슈마이츠 공작이 기사단을 훈련시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로이츠에게 돌아간다고 한 시간에서 늦어질 것이 분명했지만 그를 만나보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들어와라." 안으로 한발 들어서던 슈마이츠가 멈칫 서더니 절도있게 몸을 숙여 황제를 배알했다. 은밀하게 부른 것이 아닌 공식적인 부름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황제가 직접 이곳을 찾는 일은 흔한일이 아니였다. "내가 따로 부를 테니 지금은 나가있게." 에른하임에게 단호한 황제의 명령이 떨어졌다. "너희들도 물러가라." 방안에 있던 시종과 시녀들에게도 황제의 명이 떨어졌다. 엉겹결에 방밖으로 쫏겨난 에른하임의 귀에 숙덕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께서 왜 저러시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지난번 황후님의 일로 슈마이츠 공작과 사이가 벌어지신 것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럼 이번에도..?” “뭐라 떠드는 것이냐! 다들 물러가지 못하겠느냐.” 잔뜩 찌푸린 에른하임의 갈색 눈이 황제와 슈마이츠 공작이 있는 곳의 문앞을 떠나지 못하고 소란을 피우는 자들에게 꽂혔다. 그들은 황급히 에른하임의 눈을 피해 어디론가 사라졌고 성난 그는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문밖을 지키고 서 있었다. "황후가 기억을 잃었더군." “결국 눈치채셨군요. 그런데 그 말을 저에게 하시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황제폐하?” 황제는 슈마이츠의 붉은색 눈동자를 똑바로 노려봤다. 저 알수없는 여유가 싫었다. 묘하게 자신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는 저 얼굴을 보자 적의가 끓어올랐다. 그리고 언제나 삐딱한 듯한 말투도 오늘따라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대는 유난히 황후와 잘 지내는 것 같더군, 그 방법이 뭔가.” 슈마이츠는 황제의 기분이 그리 좋지 않음을 깨달았다. 평소엔 감정이 드러나지 않던 얼굴에 추할 정도로 일그러진 한 평범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지금 그는 황제로서 그에게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기와 질투에 빠진 한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슈마이츠는 황제의 질문을 무시하고 활활 불이 타오르는 난로가로 걸어갔다. 황제는 부지깽이로 불을 들쑤시는 그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불을 뒤척이자 순식간에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고 한참을 말없이 서있던 슈마이츠가 입을 열었다. “지금의 황후마마는... 이 불과 같으십니다. 그리고 황제폐하는 황후께 이 부지깽이와 같은 존재지요.” 평소에는 직설적으로 말하던 슈마이츠는 완곡히 돌려서 표현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황제가 겉은 성인이지만 누군가를 배려하는것에는 미숙한 어린아이라는 것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이 불은 그저 가끔씩 장작을 던져넣어주면 끊임없이 부드러운 열기만을 전해주지만. 이렇게 부지깽이가 강하게 뒤척이면 온기가 아닌 화염과 같은 열기로 상대에게 달려들지요. 그리고 순식간에 이렇게 사그라 들고 맙니다.” 황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니 좀 더 부드럽게 대해주십시요. 황후마마께 황제폐하는 현재 황제라는 이름의 타인 그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스스로 구속을 선택한 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다른 이의 손으로 날아갈 수 있지요.” 말이 끝나자마자 가볍게 고개를 숙인 슈마이츠는 문을 열고 사라졌다. 황제는 그가 서 있던 곳을 바라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입술에서 거친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되도록 놓아 주지는 않는다. 올 때는 너 스스로의 의지로 왔지만 내 것이 된 이상 보내주지는 않아. 그러니 다른이의 품으로 날아갈 수는 없을 거다." * * * * * “이 세 번째 안도 조금 허술한 것 같아요. 빈민들의 최저임금을 보장해 준다고는 하지만 이건 노동자를 위한 임금보조금이 아니라 고용주에 대한 보조금이잖아요. 그리고 아마 빈민들은 수입이 적어도 부족분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열심히 일을 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방금 읽은 네 번째 안도..” 예전에 논술방문 교사를 하시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온갖 종류의 책을 섭렵한 덕에 독서이해도 경시대회에서도 전교1등을 맡아놓았던 실력이 녹슬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마계에 떨어지면서 부터는 머릿속에 든 지식(?)이 정작 살아가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아 그동안 배웠던 것에 대한 회의가 들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왠 그림자가..?’ 하연은 고개를 든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황제의 눈동자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황제에게 다가올 때마다 좋은 일이 없었던터라 하연은 뛰어나가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사라졌는지 에른하임과 로이츠는 없었지만 롤프만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다. ‘휴우. 그나마 다행이다. 혹시라도 황제가 음흉한 생각을 한다면 롤프가 지켜주겠지. 그나저나 갑자기 왜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는 거냐. 아니지. 그러고 보니 나 여기 황제를 만나러 왔었구나. 정신 차려, 하연! 이렇게 쫄면 어쩌자는 거야?’ 하연은 입술을 꾹 다문 채 황제의 눈치만 보았다. 더 이상은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그의 모습에 안심이 되기는 했지만 그에게서 좀처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자 하연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하연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려 했을 때, 황제가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역시.. 날 두려워하는 건가? 내가 가까이 다가만 가도 그대는 움츠러 드는군.” 짙게 드리워지는 어둠때문인지 황제의 보라색 눈동자가 일순 검은색으로 보일 만큼 어두워졌다. 갖가지 감정들이 그의 강렬한 눈동자 속에서 혼란스럽게 춤추는 것 같았다. 하연은 숨을 죽였다. 길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하연의 얼굴위로 나비처럼 내려앉았다. "대체 그대를 어떻게 해야 좋을까?" 자신을 향한 황제의 보라색 눈동자에선 어떤 감정도 확실히 찾을 수 없었다. 너무나도 많은 감정이 섞인 나머지 어지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평소에 단정히 묶여있던 보라색 머리카락은 그의 어깨 위로 흩어져 있다. 흐트러진 듯한 그 모습이 황제를 부드럽고 어딘지 모르게 연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나이 어린 소년으로 보이게 했다. 하연은 평소와는 다른 그의 모습에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그렇게 황제의 손이 얼굴을 공기처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조심스러운 침묵이 흘러갔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하연의 이마에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올렸다. 그리고 손을 내리는가 싶더니 손가락으로 하연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었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그대를 보내야 할까." 말과는 달리 황제는 하연을 향해 한발자국씩 걸음을 옮겼다. 그는 하연을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길게 흘러내린 하연의 머리카락을 손을 내밀어 뒤로 넘기고는 하연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을 조심스럽게 옆의 책상위로 내려놓았다. 그는 심란한 한숨을 내쉰 다음 하연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그리고 하연의 어깨와 허리를 조심스럽게 감았다. 하연은 불편한 듯 몸을 움찔거렸지만 곧 얌전히 그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황제의 입술에 작은 곡선이 보일듯 말듯 피어올랐다. “그대에게 나는 어떤 의미지?” 하연이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을 때, 황제는 하연에게서 떨어져 팔을 내렸다. 그의 입가엔 애달픈 떨림이 매달려 있었다. 하연에게서 대답이 나오지 않자 황제는 대답을 듣기가 무섭기라도 한 듯 갑자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손을 뻗어 하연의 어깨를 잡아 당겼다. 그의 손가락이 리드미컬하게 둥근 어깨를 쓰다듬었다. 보라색 눈동자가 안타깝게 흔들렸다. 막 입을 열러던 하연은 황제의 보라색 눈동자에 나타난 괴로움을 깨닫는 순간 입술을 닫았다. 어째서.. 저렇게 상처받은 것 같은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인지. 저 눈길을 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닌데 저 안타까운 눈빛을 받을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을 아는데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기억을 잃어버린 너에겐 난... 이제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하는 건가.” 대답이 들리지 않자 황제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친구가.... 되면 안될까요?” 하연은 찔리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어느새 떠오른 달이 흐릿한 여명을 내뿜으며 밤하늘 끝자락을 물들이면서 어두운 방을 밝혔다. 그 은은한 빛은 창을 등지고 서서 황제를 올려다보고 있는 하연의 얼굴을 더욱 사라질듯 아련하게 보이게 하고 있었다. “받아들일 수 없어! 난 너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다. 그런 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다.” 싸늘한 표정이 된 황제가 하연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말투는 오만하리만큼 냉정했다. 그리고 지나치리만큼 확고했다. 그리고... 자신에겐 없던 그의 고집스러움이 부러워졌다. 자신이 차마 말하지 못했던 것을 그는 너무나도 당당히 말하고 있었다. 황제는 다시 시선을 돌려 똑바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그의 타오르는 듯한 시선을 피해 내려깐 하연은 눈길이 하얀 손마디가 불거지도록 주먹을 움켜쥐고 있는 황제의 손에서 멈췄다. 억지로 치솟는 격정을 참는듯 그의 손은 어둠속에서도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진심이구나.... 나도 이 사람처럼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더라면.. 이렇게 후회하는.. 마음은 남지 않았겠지.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난 그렇게 밖에 하지 못했을꺼야.’ 하연은 처음으로 황제에게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감쌌다. 긴장한듯 굳어진 황제의 몸을 그대로 나타내듯 좀 전의 떨림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후였다. 차가운 자신의 손을 부드럽게 감싼 하연의 손에서 따스한 기운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그는 막지 않았다. “난 친구는 되고 싶지 않다.” 황제는 고집스럽게 대답했다. 여전히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다른 대답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번득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삼켜버릴듯 깊은 눈동자에 하연은 당황했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황제의 이런 모습에, 격렬하지만 소리 없는 열정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하연은 천천히 손을 놓았다. 황제의 감정에 휩쓸리기 전에 고개를 돌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하연의 시선은 그에게 고정된 채 움직이지 못했다. 단단하게 굳은 황제의 왜소해 보이는 어깨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이해할 수 없게도 그의 마음을 상처입히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어 하연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친척은 어때요?” 자신은 진짜 황후가 아니다. 하지만 그에게 거짓말로 당신은 나에게 특별한 존재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자신에게 있어 특별한 사람은... 오직 하나뿐이니까. 적어도 그것만은 거짓을 말할 수 없었다. 특히나 그것이 상대의 진심에 대한 대답일 때는.. ‘그래 레기어스..도 날 위로하려고 거짓을 말하지 않았겠지. 그러기엔 그는 너무나 정직했으니까. 난.. 그가 나의 고백에 무엇이라고 대답할지 이미 알고 있었어,’ 황제의 팔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가 천천히 이를 악물자 하연은 그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무언의 항의를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연은 오랜만에 부드러워진 황제가 언제 원래의 무서운 모습으로 바꿀지 모른다는 불안에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우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피를 나눈 사촌간이잖아요.” 알수없는 표정으로 하연을 내려다보던 황제의 입술에 조금씩 미소가 번졌다. 그는 손을 올려 떼어놓기 싫다는 듯 하연의 머리를 천천히 서너 번 쓰다듬은 다음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감상하기라도 하듯 손에 넣고 흘려보냈다. 황제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낮게 중얼거렸다. “친척이라. 너와 나만이 공유할 수 있는 피의 흐름이라는 건가.” 황후의 말대로 테아난 황실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황제외의 직계후손은 슈피르 공작뿐이다. 그리고 그의 딸인 그녀와 자신은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단 하나뿐인 피를 나눈 사촌이다. 공작을 제외하고 자신보다 가까운 그녀의 혈족은 자신이 유일한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끊어질 수 없는 연결이다. “지금은 그것만으로 물러나지. 그렇지 않으면 넌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니까.” 하연은 살며시 눈을 치켜 떠 속눈썹 사이로 황제를 살폈다. 눈이 마주치자 황제가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그 목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흘러가듯 들려와서 그것이 정말 황제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 *  *  *  *  * 내일이면 테아난 황성에 도착한다.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너무도 낯설어 마치 자신만이 이곳에 있는 유일한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샤리엔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을 때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어둑어둑한 방으로 걸어 들어왔다. "걱정이 되십니까?"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흠칫 놀란 샤리엔느는 이곳으로 오는 내내 자신을 호위해온 남자를 발견하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가 가지고 온 것은 두터운 양모로 된 소박한 무늬의 쇼올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방금..." "걱정이 되시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샤리엔느에게 쇼올을 씌워주는 티리스의 얼굴에는 근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던 샤리엔느는 고개를 저었지만 눈에 담긴 감정마저 지울수는 없었다. "아닙니다. 그저 이곳이 제가 태어나 자라온 파르미샤와는 너무도 달라 잠시 놀란것이 그리 보인 모양입니다. 저쪽에 유난히 밝은 기운이 떠올라 있는 곳이 황성이겠죠?" 그녀의 말처럼 샤리엔느가 가르킨 동쪽 밤하늘은 유난히 뿌옇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쾌활한 목소리와는 달리 샤리엔느는 어딘지 모르게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살피던 티리스가 낮은 어조로 말했다. "예, 내일은 일찍 출발할 생각이니 일찍 잠자리에 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샤리엔느의 혼수문제로 출발이 조금 늦어진터라 예정보다 일정이 하루 늦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빨리 출발해야했다. 샤리엔느는 그가 문을 나서려는 순간 망설이다 그를 불러 세웠다. “저,, 티리스?” “예. 말씀하십시오.” "티리스도 피곤할 텐데 이런 말을 해서 죄송하지만....." 티리스가 천천히 몸을 돌려 샤리엔느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뿐 예전처럼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샤리엔느는 그의 이런 태도가 익숙치 않았지만 고국을 떠날 때 하리테임이 주의를 주던것을 생각해 내고서는 한숨을 쉬었다. "테아난의 황후.. 마마는 어떤 분이시죠? ...그리고 황제폐하는 저를 마음에 들어 하실까요?" 여행을 계속해 오면서 머리를 떠나지 않던 질문이 쏟아내려졌다. 그러나 티리스가 아무 말이 없자 샤리엔느은 그제서야 말을 멈추고 그를 향해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티르스의 표정은 정반대로 차디차다. "아.. 죄송해요. 티리스도 사실은 테아난 제국이 처음이지요. 하지만 그분이 저를 좋아하지 않으시면 어쩌나 너무 걱정이 되어..." "하실 말씀이 그것뿐이라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티리스가 무뚝뚝한 어조로 샤리엔느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그 즉시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밖의 찬바람이 샤리엔느의 머리카락을 휘날린다. "티리스..." "주무십시요." 날카롭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리며 문이 닫혔다. Special Thanks To 앙고라 : 수많은 리플로 고치는데 고생(?)했어요, 감사드립니다. 외솔 - 늦은 시간인데도 봐 주셨구요^^ 뭘꼬다봐 - 설명 넣었습니다~ 有恩宥互 - 흐음.. 하지만 이런 지식은 정작 써먹을데는 많지 않지요, (황후가 됬으니 빛을 발하는 거지요. 힘이 없으면 초기 사림파나 마찬가지) 마녀진혼곡 - 황제와 레기어스는 조금은 비슷합니다. 어쩌면 하연과도 비슷(?) 야무진양갈래소녀 - 하지만 한번에 신뢰와 충심을 얻기는 힘들겠지요. (카리스마가 넘쳐도 힘든데..한번에 목숨바쳐 충성..우습지 않습니까?) 크로시카 - 초반 설정 그대로입니다. 사실은 원래 이런 캐릭터였다는..(으윽!! 메테오가!!!!) 이쁜영이 - 오늘도 코멘트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이은이 - 그거야 모르죠. ㅋㅋㅋ (하렘건설!!) 하을이 - 감사합니다! 추천두요. 무호 - 앗 그동안 조용히(?) 보아주시던 분이시군요~ 감사합니다. 볶음밥 - 다행이네요. 전 나름대로 모든 캐릭터에 애정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러고 보니..한센과 실리아는 예외군요.) 신화창조? - 가능하면 늘 하루 한편은 올릴려고 하고 있답니다. (제발 슬럼프가 오지 말아야 하는데..) 달빛의시련 - Out of sight Out of mind... (반박하셔도..할말은 없지만요) 오를르 - 레기어스는 제 작품에서 가장 고뇌가 많은 인물이니.. 베네딕트 - 황제의 교육은 그리 도의적인 것만 있지는 않으니까요. 게다가 진심으로 원하는것에는...아마도.. ▩맛있는까까▩ - 첫 리플이시군요.^^ korapha-duck - 명색이 로*판(로맨스판타지)인데 너무 딱딱한 이야기만 나오는 것도^^;; 리플의 힘!!! 그리고 추천!!!과 선작!!!의 힘으로 2월 23일 시작한 것이 벌써 56회에 이르렀네요. 하루에 평균2개.. 그리고 평균용량 : 13.139453125kb 전체용량 : 262.7890625kb 그런데... 진도는 무진장 느리군요. 하연이 이세계로 온지 한달하고 15일 정도? 그나마 한달은 묘사도 없이 지나가 버렸다는(어째 현실보다 시간이 느리게 가냐..) 중간에 묘사가 미흡한것도 많고 매끄럽지 못한 부분도 많지만. 완결때까지는 수정안봅니다. 왜냐하면.. 수정보는 순간 리메가 되버려서,(제 첫작을 보신 분이라면 아실듯) 그러니. 그런가보다 하는 생각으로 봐주세요.(-ㅁ-;;) “지금은 그것만으로 물러나지. 그렇지 않으면 넌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것만으로 일단 만족하겠다며 한발 뒤로 물러서 황제이지만 하연은 점점 두려워졌다. 실상 그가 자신에게 한 말은 일종의 강한 소유욕의 표현이었고 그것은 자신을 강제로 잡아두었던 바이욘느를 생각나게 했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도 단지 자신의 것이 빼앗길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을 함부로 대했던 그처럼 황제도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생각에 두려워졌다. 밤바람이 싸늘하다. 무심코 걸어 들어온 정원에서 강하게 흘러나오는 숨이 막힐 듯한 진한 향기에 숨이 막힐 것 같다. 쉴새 없이 흐르는 분수의 물소리가 혼란스러운 감정의 외침처럼 귀를 괴롭힌다.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누구라도 좋으니까.. 뭐라고 말 좀 해 줬으면 좋겠어..’ 이곳에 자신을 보살펴주는 사람은 예전보다는 많았지만... 브로마네스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그리고 네니와 슈피르 공작은 자신이 황후인줄 알고 정성을 쏟는 것이다. 황제도 마찬가지다. 결국 자신이 진심을 털어놓고 기댈만한 사람은 없는 것이다. 모두.. 친한 타인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심란해지는 날이면 하연은 어느 때처럼 대답이 없는 롤프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대답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도 언제나 무심한빛을 뿜어내는 그 회색빛 눈동자에게는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누군가의 부담스러운 감정을 받아들여야 할 때는 정말이지 혼란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차라리 사실을 모두 말해버리고 싶다는 충동에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마계로 오게 되었고 다시 이곳에서 원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변해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연기하고 있다. 가끔 거울을 보면서 자신이 아닌 타인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음을 깨달을 때 그것은 자신과는 다른 화려한 외모에 대한 경탄이 아니라 점점 자신이 아니게 되어가는 것에 대한 슬픔이었다. 돌아가고 싶다.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갈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도망을 친다?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설사 도망을 친다한들 지위도 재산도 없는 홀로 다니는 여인에게 이곳은 위협적인 곳 일뿐이다. 게다가 자신의 몸속에 들은 그 보석인가 뭔가 때문에 브로마네스가 자신을 쉽게 놓아줄리 없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드래곤들의 소유욕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알려져 있었으니까. “넌 돌아가고 싶지 않아?” 하연은 물었다. 롤프도 부모가 있고 사랑하는 형제들이 있을 것이었다. 그 또한 원하지 않았지만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그리고 브로마네스의 소유인 것은 자신이나 그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의지가 조금은 허락되는 황후의 위치와 달리 그는 오로지 계약에 의해 묶여 있을 뿐이다. 자신의 의지 같은 것이 허락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 언제나처럼 롤프는 대답이 없다. 감정이라도 떠올라치면 다시 천천히 가라앉는 회색 눈동자는 하연에게 언제나처럼 아프게 다가왔다. 아무런 표정이 없다는 건.. 한편으로 언제나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다 주기도 했지만, 거짓 위로라도 받고 싶은 지금에서는 너무나도 절망적이기만 했다. “....난 돌아가고 싶어. 지금이라도. 여길 벗어나서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힘들어. 나란 존재는 점점 사라지는 것 같은 상황이 싫어. 나를 소유물처럼 생각하고 자신들 멋대로 다루려는 그들이 싫어. 아니... 그보다도 더 싫은 것은 불확실한 미래에 잡혀 나 스스로의 의지를 뭉개버리고 강압에 자발적으로 굴복하는 나 자신이야.” 눈물이 흘러내린다. 슬퍼서도, 억울해서도 아니다. 그저 이런 상황에서도 항상 남들의 눈치만 보는 자신이 싫어서 그리고 당당해지지 못하는 자신이 싫어서 눈물이 나온다. 하연은 판목에 채워진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당장이라도 빼버리고 싶다. 도망치고 싶다. 그러나.. 정작 갈 곳이 없다. 소설에서는 이것저것 긁어모아 도망치는 장면이 나오지만 현실은 달랐다. 중앙황궁만 해도 가장 황제와 황후궁만 해도 방이 천 여 개다. 게다가 거기에 부수적으로 딸린 정원과 사냥터 그리고 각종 목적을 가지고 지어진 다른 궁들을 포함하면 그것의 20배는 되는 것이 이 황궁이다. 하루 종일 걸어가야 간신히 황궁을 둘러싼 내성이 나온다. 그리고 내성을 감싼 외성은 자그마치 5개나 된다. 그리고 각각의 성 사이에는 수많은 건물이 있고 병사들이 있다. 혼자서는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곳이다. 그 정도로 황궁의 벽은 높고 높았다. 마법이라도 할 줄 안다면 손쉽게 빠져나가겠지만 자신에게 있는 능력은 미약하고 보잘것없다. 누군가를 조정하여 이용해서 빠져나간다는 것은 자신의 성격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갑자기 마법을 익히겠다고 하면 그 드래곤이 의심의 눈빛을 번득일 것을 자명했다. 슈마이츠라면.. 아마 도와줄지도 몰랐지만 결국 자신보다 힘이 센 브로마네스의 물건을 함부로 건드릴만큼 무모하지는 않을 것 이였다. 그리고 그에게 그런 부탁을 해서 곤경에 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바보같아. 결국은... 늘 이대로면서 왜 고민하는거지?” 별이 반짝인다. 하늘은 저렇게나 맑고 아름다운데. 자신의 마음속은 혼란과 어둠으로 가득차 있다. 별은 저리도 반짝이는데 자신의 마음을 비춰줄 단 하나의 빛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혼자서 훌쩍이고 있는 정원의 이 은밀한 그림자처럼 그렇게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너무나 어두워서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하연은 여전히 말없이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롤프에게 머리를 기댔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이 화를 내도 울어도 그리고 이렇게 몸을 기대도 그는 여전히 그렇게 가만히 있다. 따스하다. 사람보다 체온이 높다는 동물들처럼 본질은 웨어울프인 그의 몸은 언제나 뜨거울 정도로 따스했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우는 것을 보여주기 싫어서, 비참한 처지에 처해 있는 자신을 보아달라는 식으로 보여지는 것은 싫어서 소리 없이 우는 하연의 어깨는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차마 참을 수 없어 눈물은 흘리지만 누군가에게 자신의 약함으로 인해 동정 받고 싶지는 않았다. 롤프의 어깨가 젖어들어 갔고 그의 옷깃을 잡고 있는 하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날 진짜 이름으로 불러줬으면 좋겠어. 그리고..내가 겁쟁이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소리 내어서 울어도 된다고 그렇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결국 작은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입을 막았지만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다. 너무 슬퍼서 고통스러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혼자라는 생각에, 예전에 하연이라 불리던 자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되?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닌데, 난 왜 여기 있는거지?” 하연은 롤프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아무런 감정이 비치지 않는 눈동자. 그는 자신을 위로조차 하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저 말없이 등이라도 토닥거려 줄테지만. 롤프의 손은 평소처럼 두 무릅 위에 얌전히 놓여있다. “나...좀 안아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의 손이 하연의 어깨위로 올라온다. 그저 명령에 복종하는 것일뿐 손에는 아무런 따스함도 상대를 배려하는 부드러움도 존재하지 않는다. 씁쓸하다.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오히려 더 비참해지고 있다. 하연은 롤프의 손을 쳐냈다. 떨어져 나간 손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주인이 거부했으니 더 이상 행동을 하지 않는 것임을 알지만.. 그런 그의 태도에 화가 난다. 그에게 화를 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무심함에 화가 나서 하연은 롤프의 가슴을 파고들어 그의 두 가슴은 손으로 쳐댔다. “왜?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거야? 난 이렇게 힘드는데. 넌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어째서 넌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얼굴로 그렇게 흔들림 없이 서 있을 수 있지? 나한테 매여 있는 것이 싫지 않아? 아무것도 아닌 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당연한 듯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야! 내가... 이렇게 너한테 이런 식으로 굴어도.. 넌 어떻게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거야? 뭐라고,,, 말 좀.. 해봐..” 하지만 상대는 여전히 무표정한 회색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뿐 입도 열지 않는다.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뭐라도 좋으니.. 자신의 말에 대답을 해 주었으면 했다. 하연이 눈물을 닦는다. 그저.. 오늘은 왠지 우울했을 뿐이다. 평소에는 전혀 하지 않던 이런 투정을 한 것도,. 아무런 죄도 없는 롤프를 닦달한 것도. 다시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가족을 생각한 것도, 그리고 어째서 자신이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다시 가슴속으로 밀어 넣어야 했다. ‘그저.. 기분이 좋지 않아. 그것뿐이야.’ 하연은 자신을 다독였다. 스스로의 감정을 이해하게 되면... 미처 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저 억지로 기억한구석에 처박아 놓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숨도 쉴 수 없을만큼 아파왔으니까.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버티지 못할테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웃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이었다.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보든.. 결국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하연으로서의 마음은 필요 없는 것이다. 그저 상황이 주어진 대로 연기하는 것. 그것이 자신인 것이다. “가자.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지만.. 황후를 기다리는 사람은 많으니까.” 하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너무 운 탓일까. 잠시 머리가 어질해졌다. 속이 울렁거리고 두 눈은 퉁퉁 부은 것 같아서 하연은 비틀거리며 근처에 있는 분수대로 다가갔다. 차갑다. 밤기운이 녹아들은 분수대의 물은 손이 발갛게 될 정도로 차디찼다. 하지만 텅 빈 가슴을 휘감고 도는 바람보다는 차지 않았다. 분수의 물결로 인해 밤하늘이 비추인 불에는 수 십 개의 별의 파편들이 흩어져 반짝이고 있었다. 기대고 싶을 정도로 포근해 보인다. 물결이 흔들리면서 수 십 가지의 모양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언듯 언듯 비추는 나무의 그림자와 별빛 그리고 바람이 만들어내는 물결이 만들어내는 것은 보고...싶은 누군가의 얼굴인 것 같다... 첨벙-! 그만 분수 속으로 빠져버린 하연은 뼈를 파고드는 듯한 차가움에 그제서 냉혹한 현실을 깨달았다. 허상이다.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도 믿고 싶어 손을 내민 것은 그저 차가운 물에 비친 그림자다. 물은 깊지 않아서 하연의 상반신은 물위로 드러나 있었다. 나올 생각도 하지 않고 하연은 두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파랗게 얼어버린 자신의 손이 낯설다. 가느다랗고 연약해 보이는 손이다. 원래의 자신과는 다른 가느다랗고 우아한 손가락 그 손이 지금 새파랗게 변해가고 있었다. 큭- 하연이 웃음을 터트린다. 이대로 있으면 폐렴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자신이 죽으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이 모습 그대로 죽어버리는 걸까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아니 정확히는 지금 추위를 느끼고 있는 것이 정말 자신이 맞는 걸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건 남의 몸이 아닐까. 난 단순히 긴 꿈을 꾸는 거고 여기서 이렇게 죽어버리면 꿈도 깨는 것이 아닐까 하연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 조금씩 추워지는걸,, 하지만.. 이런 걸로 죽을 리가 없겠지. 롤프도 저렇게 가만히 있는걸 보면 말이지.” 정말 확실하게 죽으려면 여기서 손목이라도 끊고 찬물에 손을 담구고 있어야 할 것이었다. 게다가,. 황후인 자신의 주위엔 신관이 즐비하다. 보나마나 황급히 달려와서 자신을 고쳐놓을 것이 분명했다. “정도로 죽을 리가 없잖아? 확실하게 심장을 찌르지 않으면.. 힘들겠지. 하지만.. 심장을 찌른다고 해서 정말 확실히 심장이나 찌를 수 있을까. 이 가늘어빠진 손으로? 일격에 죽지 않으면 분명 살려내겠지.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그럴 수도 없구나.” “훼이렌 태자저하가 아니십니까? 어떻게 기별도 없이 이리 오신 것입니까?” 황제가 되기 전의 하티무르와 절친한 사이였던 훼이렌을 용케 알아본 에른하임이 막 숙소로 돌아가려는 한 무리의 사신 중 섞여있는 그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지만 정작 슈리엔의 얼굴은 잔득 굳어져 버렸다. 엄연히 비공식적으로 사신들을 호위하는 기사로서 따라온 자신의 정체를 알아본 에른하임을 향해 그는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오랫만이군. 에른하임. 2년전 보고 처음인가? 그 좋은 눈썰미는 변함이 없군.” 다행히 타국에서 온 사신들은 이미 다 나가고 없었다. 훼이렌은 눈짓으로 사신들을 먼저 보내고는 에른하임을 향해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내 복장을 보면 내가 태자의 신분으로 이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텐데? 그렇게 대놓고 날 부르면 곤란하지. 그 정도의 눈치도 없어서야 어찌 황제의 수호기사라 할 수 있겠는가.” 책망한는 듯한 말투에 그제서야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에른하임이 주위를 살피더니 낮은 목소리로 송구하다는 듯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저에게는 태자저하께서 오신다는 말씀이 없으셨는데요. 그럼.. 황제폐하께서도 모르시는 것입니까? 하지만 이번 대연회에 참석하셔도 되는 것입니까? 아직 후계자 계승시험이 끝나지 않았다 들었습니다.” 훼이렌이 속해있는 펠샨 제국은 테아난 제국과는 달리 황제의 아들이라면 누구나 다 황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황위를 물려받는 자는 엄격한 시험을 통과한 자라야만 했고 일정정도의 성적을 거두지 못한 자는 황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자가 되는 것이 보통이였다. 그런 중요한 시험 중의 그가 머나먼 테아난 제국까지 왔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었다. “아. 상관없어, 어짜피 황제 따위 되고 싶지도 않다. 뭐 한때는 황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하티무르 녀석이 고생하는 것을 봐서 그런지 이제는 전혀 그런 것 따위에는 관심도 없지. 덕분에 어머니는 애가 타 죽으려고 하지만 말이야. 게다가 요즘은 결혼하라고 얼마나 잔소리를 해대던지 이리로 도망 온 거야” 하트무르와 동갑인 훼이렌은 아직 미혼이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적어도 한 두 명의 후궁정도는 거느려야 했고 지금쯤 태자비가 한명 있어야 했지만 그는 완강하게 혼인을 거부하고 있었고 덕분에 황위계승이 유력시 되는 자들 중 가장 세력이 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혼인을 거부하는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다. 한마디로 귀찮아서가 그 이유였다. 펠샨제국은 테아난 제국과는 달리 여인의 지위가 높은 편에 속했다. 그리하여 남자는 아무리 부인이 싫어진다 하여도 부정을 저지르지 않은 한 내칠 수 없었고 일주일에 정해진 날 수 이상은 부인의 침소에 들어야 했다. 아름다운 여인을 탐하는 그가 한 곳에 매여 있을리 없었다. “그나저나 당신에게 들켰으니 황제가 된 하티무르나 만나러 가볼까? 그 녀석 지금도 집무실에 틀여박혀 있는 건가?” 예전에 와본 곳이라 익숙한 발걸음으로 황제의 집무실로 향하던 그는 자신을 붙잡는 에른하임의 말에 발걸음을 멈췄다. “죄송합니다만. 지금 황제폐하는 황후마마와 독대중이십니다. 저와 로이츠 모두를 내보내신 것이라 아마 지금은 만나뵙기 힘드실 겁니다.” “....황후와 독대를?” 하티무르가 그리도 싫어하던 여인, 그의 표현에 의하면 얼굴은 아름답지만 어린아이 같은 맹목적인 소유감으로 자신을 휘두르려는 여인이라고 했다. 더불어 단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은 여인이라고 했다. 그러 그가 황후와 독대중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분명 가벼운 대화는 아닐 것이 분명했고 그것이 황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루어 지리라고 보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예, 게다가 지금은 날도 저물었으니 내일 황제폐하를 만나시는 편이 좋을 듯 합니다. 게다가.. 지금 심기가 많이 좋지 않으십니다.” 에른하임은 어제 있었던 일을 말하려다 깜짝하고 말을 돌렸다. 황제가 직접 입을 다물라고 명한 일이다. 아무리 훼이렌 태자가 황제와 친한 사이라 하나 명령은 명령이었다. 당황하는 에른하임의 모습에 훼이렌은 뭔가가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지만 구태어 캐물으려 하지는 않았다.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속인 적이 없던 하티무르다. 물론 그것이 제국과 관련된 일이 아닌 자신의 개인감정에 국한된 것이지만 말이다. “그럼, 잠시 황제 궁에 딸려 있는 정원을 구경해도 될까? 내 여러 곳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그만한 데는 아직 보지 못했지. 오랜만에 한번 보고 싶군.” “그러시지요. 여기 계실 때에도 여러 번 오가셨으니 길은 알고 계시겠지요? 아! 그리고 지금은 일개 기사의 신분이시니 이것을 드리겠습니다. 이것만 보여주면 거의 모든 곳을 통과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무신경해 보이지만 의외로 그런 보안문제에 있어서는 철저한 에른하임은 훼이렌 태자가 말도 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허리에서 금색의 패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황제의 수호기사단의 단장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패였다. 한마디로 그것은 이것을 가지고 있는 자는 에른하임이 갈 수 있는 곳은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만능 출입증이였다. 오랜만에 온 이곳의 정원은 역시나 아름다웠다. 가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잎이 채 다 떨어지지 않은 나무들이 화려한 색의 낙엽을 자랑하고 있었고 잘 정돈된 사철 내내 푸른 나무가 만들어 내는 나지막한 담들이 정갈한 맛을 더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곳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정원한가운데에 있는 흰색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분수였다. 약 2미터정도의 높은 기단을 가지고 있는 분수에는 수 십 가지의 동물과 식물 그리고 아름다운 곡선이 어우러진 보기에도 화려한 조각이 사면을 둘러쌓고 있었고 마치 아름다운 너울을 연상시키는 원형의 분수가 휘장을 드리우듯 쏟아 내리고 있었다. “여긴 여전히 그대로군.” 그는 예전에 자신이 깨먹었던 한 조각상의 팔을 찾아내고는 피식 웃어버렸다. 테아난 제국의 국보급의 분수에 이런 흠집이 생겼다는 것을 아는 자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곳은 황제와 황후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고 설사 이것이 완전히 산산조각이 난다해도 정원사나 분수를 관리하는 자들은 쉬쉬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이 독특한 향기도 그대로군. 사람의 혼을 잡아끌 것 같은... 펠샨 제국에서는 어찌된게 심는 대로 죽어버리니... 그리고 테아난 제국에서도 여기만큼 강한 향이 나는 곳은 없지. 뭐. 정원도 볼만하지만 이 향기만큼은 이곳이 최고군.” 손에 닿아 쓸리는 푸르른 나무의 잎을 어루만지던 그는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강한 향기에 눈을 감고 그것을 음미했다. 유독 향기에 대한 조예가 깊은 그는 여인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해도 향기를 맡고 여인을 알아내는 능력만은 탁월할 정도였다. “...!!” 그 순간 누군가가 이곳으로 오는 듯한 발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것이라고 보기엔 가볍고 짧은 보폭과 사각사각 스치는 드레스의 소리가 그것의 주인이 여인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을 드나들 수 있는 여인이라면 오직 단 한 명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재빨리 마법을 써서 몸을 감추었다.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밤하늘에 녹아들을 것 같은 짙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여인은 분명 하티무르의 황후가 틀림없었다. 하티무르가 말한 차갑기 그지없다는 창백한 피부와 독사와 같다는 붉은 입술, 그리고 놀랄정도로 아름다운 얼굴,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난히도 고급스러운 드레스와 그 옷의 주인이 풍겨내는 위엄은 그녀가 황후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젠장. 하필이면 내가 숨어 있는 곳 바로 앞의 의자에 앉을게 뭐냐!’ 그는 속으로 욕을 늘어놓았다. 게다가 황후의 옆에 서 있던 남자가 황후의 손짓에 그녀의 옆에 와 앉는 것을 본 순간 그는 숨을 들이켜야했다. 이제는 극히 보기 어려워진 웨어울프들이 갖는다는 회색머리와 회색눈동자. 그것도 희미한 것이 아닌 짙은 회색, 분명히 지도자급의 웨어울프였다. ‘하지만.. 저 정도의 고위급이 어째서 황후의 명령을 듣는 거지? 분명 테아난 제국에서는 브로만공 작이 유일하게 저 정도의 웨어울프를 가지고 있다 했는데... 설마 저게 그것인가?’ 놀란 마음도 잠시 훼리엔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황후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뒷모습밖에 보여서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아무 말없이 하염없이 앉아만 있었다. 무언가 조금이라도 입을 열거나 한숨을 쉰다던가 이도저도 아니면 움직이기라도 하련만 상대는 마치 조각상이나 된 듯 꼼작하지 않고 있었다. “넌 돌아가고 싶지 않니?” 불현듯 예고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훼이렌은 숨을 들이켰다. 나름대로 여인의 감정을 잘 짚어낸다 자부하는 그였다. 여인의 말은 언제나 실제의 감정과는 다른 것이 허다했고 그것을 파악해 내지 못한다면 상대의 마음에 들 수도 없었다. 그가 수많은 여성과 무난히(?) 지낼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동물적인 이런 재능 때문이었다. ‘...지독히도 절망적인 느낌이다. 분명 목소리는 아무렇지 않은듯 가늘고 아름답지만... 이 느낌은 마치 죽음을 앞에 둔 사람과 비슷해. 하지만 어째서?’ 가지고 싶은 것은 모두 가질 수 있는 그녀이다. 아니 오히려 황제보다도 더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슈피르 공작을 움직이는 황후가 아닌가. 그런데 모든 것을 빼앗긴 듯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가 탄식하는 듯이 말하다니.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난 돌아가고 싶어. 지금이라도. 여길 벗어나서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힘들어. 나란 존재는 점점 사라지는 것 같은 상황이 싫어. 나를 소유물처럼 생각하고 자신들 멋대로 다루려는 그들이 싫어. 아니... 그보다도 더 싫은 것은 불확실한 미래에 잡혀 나 스스로의 의지를 뭉개버리고 강압에 자발적으로 굴복하는 나 자신이야.” 스스로를 비난하는 듯한 말이다. 아니.. 비난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그리고 무거운 짐을 진듯 한마디 한마디 내뱉는 숨소리가 힘들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이 비틀거리며 간신히 한발자국씩 내딛는 상대의 목소리에는 생기라고는 조금도 없다. 차분한 말, 그리고 떨림 없는 목소리에 담겨있는 감정의 깊이는 드러나는 것과는 달리 너무도 어둡고 밑이 내려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눈물..?’ 별빛에 비추이며 떨어지는 것은 은빛의 방울, 분명 창백하리 만큼 서글픈 얼굴을 하고 있는 여인의 뺨을 따라 소리 없이 흘러내린 은빛의 결정이 소리 없이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조금도 어깨는 떨리지 않았다. 아주 작은 숨 죽인듯한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기에 드러난 얼굴위의 별빛에 흔들리는 밤바다처럼 흐르는 눈동자가 물기에 반짝이고 있었다. “...바보같아. 결국은... 늘 이대로면서 왜 고민 하는거지?” 그녀가 천천히 옆에 앉아있는 웨어울프에게로 아니 회색머리카락의 남자에게로 몸을 기울인다. 하지만 그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상대도 마찬가지이다. 보통의 남자라면 손을 들어 살짝 감싸주기라도 하련만 그의 손은 얌전히 아래로 내려져 있다. ‘그렇지. 저자는 인간이 아니였지.’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에 그는 잠시 안도했다. 웨어울프들은 주인이 명하기 이전에는 주인의 몸에 손을 대지 않는다. 생명의 위급이 닥쳤다거나 위협이 느껴졌을 때를 제외하고는. 그러니 황후에게 어떤 짓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저 기대고만 있던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상대의 옷자락을 두 손으로 꼭 잡은채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자신이라면 분명 두 손으로 그녀를 안고 위로의 말을 던졌겠지만 회색머리는 여전히 그대로 앉아 있을 뿐이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날 진짜 이름으로 불러줬으면 좋겠어. 그리고..내가 겁쟁이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소리 내어서 울어도 된다고 그렇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대답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비밀스럽게 토해내는 목소리는 누군가의 위로를 원한다고 그리고 그에게 기대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 목소리에는 정말로 간절함이 담겨 있다기 보다는 포기해버리지 못한 미련섞인 어조만이 들어 있었다. 그저.. 혼자서 한탄하듯.. 하지만 바랄 수는 없다고 스스로 포기해 버리면서.. “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되.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닌데, 난 왜 여기 있는거지?” 울음소리 하나 나오지 않던 입에서 드디어 울음이 새어나왔다. 폐부를 가르는 듯한 고통어린 작디작은 울음이 귓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흐르는 물소리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그마저도 그것이 새어나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듯 그녀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눈물만은 어쩔 수 없는듯 하염없이 뺨을 타고 손가락을 지나 손등으로 그리고 상대의 가슴위로 뚝하고 떨어졌다. “나...좀 안아줘.” 눈을 뗄 수 없을만큼 아름다운 여인이 남자를 보고 그렇게 말하는데도 전혀 유혹적이지 않았다. 상대가 웨어울프라서가 아니다. 그의 손이 마치 명령을 수행하듯 어색하게 움직여서도 아니다. 그 목소리에 담긴 것이 남자의 손길을 원하는 유혹이라곤 전혀 들어있지 않는 처절하리 만큼 외로움이었기 때문이다. “왜?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거야? 난 이렇게 힘드는데. 넌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어째서 넌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얼굴로 그렇게 흔들림 없이 서 있을 수 있지? 나한테 매여 있는 것이 싫지 않아? 아무것도 아닌 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당연한 듯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야! 내가... 이렇게 너한테 이런 식으로 굴어도.. 넌 어떻게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거야? 뭐라고,,, 말 좀.. 해봐..” 상대의 손을 거칠게 쳐낸 여인이 절규하듯 소리친다. 더는 견디기 힘들다는 것처럼. 몸부림치며 눈앞의 상대의 가슴을 쳐댄다. “...가자.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지만.. 황후를 기다리는 사람은 많으니까.” 또다시 침묵이 찾아온다. 들리는 것이라곤 여전히 쉴새 없이 흐르는 물소리와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 그리고 간간히 들려오는 나뭇잎 굴러가는 소리뿐이다. 여전히 말이 없는 그를 대신해서 자신이 대답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 낯선 감정에 그는 놀라고 있었다. 첨벙- ‘이건..?’ “아.. 조금씩 추워지는걸,, 하지만.. 이런 걸로 죽을 리가 없겠지. 롤프도 저렇게 가만히 있는걸 보면 말이지.” 혼란스런 감정의 실체를 알아내려 노력하던 그는 순간 들려오는 물이 사방으로 튀는 소리에 하마터면 숨어있던 곳에서 일어나 뛰어나갈뻔했다. 하지만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는 얼어 붙은듯 제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정도로 죽을 리가 없잖아? 확실하게 심장을 찌르지 않으면.. 힘들겠지. 하지만.. 심장을 찌른다고 해서 정말 확실히 심장이나 찌를 수 있을까. 이 가늘어빠진 손으로? 일격에 죽지 않으면 분명 살려내겠지.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그럴 수도 없구나.” 추위에 새파래진 얼굴로 자신의 손을 물그러미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공허하다. 텅 비어 아무것도 남지 않은 눈에 담기는 것은 오로지 아무런 의미 없이 빛나는 별빛과. 어두운 밤하늘 뿐이다. 생기라고는 한 점도 남지 않은 눈동자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한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가에는 서글픈 미소가 감돈다. 이 곳에는 아무런 미련이 없다는 듯 모든 것을 초월해버린 미소는 그 처절함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하연은 물을 뚝뚝 흘리면서 분수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옷이 물에 젖어 온몸을 휘감았지만 하연은 상관하지 않았다. 치마에 힘을 주어 물을 짰다. 이제 조금 가벼워진 치마를 걸친 하연은 말없이 황후궁으로 향했다. 롤프도 말없이 그 뒤를 따른다. 더 이상 눈물자국은 보이지 않는다.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등을 편 하연의 모습에서 아까의 모습은 꿈결이었던 것처럼 간곳없다. 하연과 롤프가 떠나고 난 뒤 아무것도 없어보이던 숲에서 무언가가 일렁였다. 그리고 잠시후에 나타난 훼이렌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황후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그는 마치 그녀의 뒤를 따라갈 것처럼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다. Sepecial Sorry To 달빛의시련 - 헉.. 허쩌다 보니(허접한 변명을 늘어놓는중) 빠졌습니다. 고의가 아니오니.. 용서를..(아무래도 여행의 여독이...-필계임) 무호 - 갑자기 짐이.. 무거워집니다.(저도 님과 같은 경험이 많지요..) 이쁜영이 - 황제나름대로는 진심이겠죠^^(하연쪽에서는 어쩐지 몰라도) 크로시카 - 하지만 언제 이야기가 끝날지.. 오늘 적은 것도 밤의 짧은 이야기.(10장) 신화창조? - 레기어스의 불우한 어린날 때문에 그가 용기를 가지기란.. 힘들것 같아요. 야옹~♥ - 언제나 오타지젹해 주셔서 감사해요(이번은 2개네요) 하을이 - 그래서 오늘도 올렸습니다.(그런데 개인감정이 많이 들어가서.. 으음..) 이은이 - 용랑전 보면서 하룻밤일로 거의2권잡아먹는 것을 보고 분노했지만 여기서는 제 자신이 그런짓(!)을 하고 있군요. korapha-duck - 원래 가지고 있던 것에는 소중함을 못 느끼고 그것이 사라진 후에야 깨닫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잘 될지는..) 꿈꾸는영원 - 그런거 정말 많더군요. 저도 요즘 선작순으로 글 찾아서 보는데 정말 저와는 비교도 안되게 잘쓰시는 분들이 연중하신게 너무 많아요. (ㅠ.ㅠ) 에페포미 - 저도 선작 못지운게 꽤 있답니다.(5번 이상 본것도 있고,) kh미소천사 - 늦은밤까지 자면 피부에 좋지 않다지만..(저도 올빼미랍니다. 이러다간 곧 나이에 비해 조숙(?!!!)하다는 이야기를 들을지도 (으아아아악!!!) 밍임 - 대..대단하시군요.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야무진양갈래소녀 - 이제 줘야지요. 오늘 등장한 훼이렌은 마법을 잘 쓰니까요. †Lovedestiny-☆† - 늘 봐주셔서 감사해요. 有恩宥互 - 다른일에서 절대로 숙이지 않지만(황제의 자존심?) 하연에겐 특별히..^^ ☆드래곤™ - 그러데 정작 하연 본인의 스타일은 없다는.(하연의 이상형은 자상한 남자.) 외솔 - 일보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고 할까요?(일단은..이니까.) 베네딕트 - 어릴적 친구로 설정해 놓았습니다. 샤리엔느의 결정이 못마땅하긴..하죠, 엘윈 - 레기어스의 이미지는 아르미안의네딸들 중 미카엘입니다. (흐흑..마직막에 넘 슬펐어요..헉! 너 레기어스를 죽일참!!이냐!!) 레몽시이 - 이런.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내가 분명히 말했을텐데? 어쩨서 이것이 여기에 있는 거지?” 싸늘한 목소리가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시엔의 귀에 들려왔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듯한 어조였으나 그 속에 담긴 약간의 신경질이 시엔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이미 눈물이 하나 가득 고인 한 어린 시녀가 고개를 푹 숙이고 브로만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 막나가는 슈마이츠 공작도 두려워하는 브로만의 시선이다. 어린 소녀에게는 버거울 수 밖에 없었다. “나가봐라!” 시녀는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는 소리가 시엔의 귀에까지 들렸으니 그녀가 얼마나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기를 원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저런 어린소녀를 상대로 화풀이는 옳지 못한 것 같아.” 다른 자들이 있을 때에는 존댓말을 쓰지만 이렇게 단둘이 있을 때는 마음대로 말해도 되는 것으로 되어 있기에 시엔은 누가 들으면 불경스런 어조로 혀를 차며 브로마네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듯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다시 책상위로 고개를 돌렸다.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자를 책망한 것이다.” 평소의 브로마네스는 시녀들을 상대로 직접 책망을 한 일은 없었다. 일단 공작이라는 신분으로서 하찮은 신분의 시녀에게 말을 건넨다는 것 자체가 품위가 떨어지는 일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브로만이 머무는 황궁내 숙소에 배치된 자들은 전혀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훈련된 자들만이 배정되어 있었다. 그들이 일을 함에 있어 조금의 실수도 있을리 없었다는 것이 브로마네스가 시녀들을 책망한 적이 없던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저 아이는 일 처리가 상당히 뛰어나던걸? 어릴때부터 궁에서 일해 와서 눈치도 빠르고 또래에 비해 영리하기도 하던데..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리 야단을 치는 거야?” “내가 서류는 분명히 책상위 중앙에 올려놓으라 했는데 오른쪽에 두었다.” 시엔은 브로만이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서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황당하다는 시선을 던졌다. 서류는 중앙에서 아주 조금 눈에 띄이지 않을 정도로 오른쪽에 위치해 있었다. 말은 그럴싸 했지만 결국은 생트집을 잡은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가지고 말싸움 할 생각도 없어서 시엔은 로브사이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묵직한 느낌이 전해져 오면서 잘그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로에 가까운 의자에 앉아 탁자위에 조심스럽게 천을 깔고 내용물을 꺼낸 시엔은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마력석들을 들여다 보았다. 마력석은 보통 색이 정해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상품일수록 수 십가지의 색이 어우러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 색들은 전혀 섞이는 일 없이 각각의 색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면서 조화롭게 섞여 물결치는 듯 보였다. 시엔이 들고 있는 이 마력석도 정해진 색이 없이 마치 춤을 추는 듯 다양한 색 무리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나타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보석을 들고 있는 손은 두꺼운데다가 여기저기 굳은 살이 박혀 있어 보석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은 시엔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더욱 이상한 것이었다, 마법사들은 육체적인 노동과는 거리가 먼 종족이었고 그래서 그들의 손은 여인의 손과 비슷할 정도로 곱고 가늘었지만 시엔은 손만 두고 본다면 검사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티엔은 뭘하고 있는거냐?” 갑자기 브로마네스가 말을 걸자 시엔은 떨어뜨릴 뻔한 마력석을 간신히 반대쪽 손으로 잡아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떨어진다고 해서 깨지는 물건은 아니지만 어쨌든 하나의 가격이 어지간한 영지 하나의 가격과 맞먹는 물건이니 자연스레 조심스러워질 수 밖에 없었다. “그 티르라는 아이와 혼을 바꾸는 일은 아직도 그대로인 모양이야. 아르드미한 님이 수고를 하고 계시지만..뭐, 티엔이 말하기를 쉬운 일은 아니고 아직은 어린 아이니 몇 년쯤 걸려도 상관없다고 말한 걸로 봐서는..” “뭐야!” 무심히 브로마네스의 질문에 대답하던 시엔은 자신이 방금들은 것이 브로마네스의 고함소리인가 하여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지나칠 정도로 무례하게 말하던 티엔의 말에도 그저 약간 인상을 찡그렸을 뿐인 브로마네스가 고함을 칠 리가 없었다. 잘 못 들은 거라고 생각한 시엔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적어도 3년 이상은 걸릴 것 같아. 게다가 아르드미한 님도 이번 일은 별로 내키지 않으시는 듯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이니 시간이 걸려도 해 내시겠지. 그나저나 요즘은 오랜만에 세상구경을 하셔서 그런지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바쁘다고 하시더군. “도대체 생각이 있는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군. 한시가 바쁜 때에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거지?” “티엔은 상관없다고 했는..” “난 상관있다. 더 이상 이런 일에 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시엔은 입을 떠억 벌렸다. 저것이 드래곤이 할 말인가. 시간이 남아돌다 못해 잠으로 인생의 절반이상을 때우는 종족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니. 게다가 수 십년도 아니라 단 3년 정도만 기다리면 되는 일을 견디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그가 정말로 드래곤인지 의심히 갈 정도였다. 평소에도 느긋한 태도로 다른 이들에게 거만하다는 평을 들을 정도의 브로마네스가 이렇게 조급증을 보이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순간 시엔의 머리로 아까 유난히 화를 내며 문을 쾅 닫고 나와 버린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이전에 있었던 대화를 떠올린 그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입을 떼었다. “그 인간 때문인거야?” “....엉뚱한 것을 끌어다 붙이지 마라,” ...아주 조금 브로마네스의 말에는 공백이 있었다. 망설인 것이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것을 놓칠 시엔이 아니었다. 하지만 망설임이라니. 저 브로마네스가? 흑이면 흑 백이면 백이라는 철저한 흑백논리는 강조하는 그가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말을 하다니. 그것은 시엔 자신의 말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아까 보니 황후 역을 아주 잘 하는 것 같던데? 처음엔 하도 어리버리해서 한 1달이나 버틸까 걱정되었는데 정신을 차리자마자 황제한테 뛰어가는 걸 보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하지만.. 그 녀석 별로 요령이 좋은 녀석은 아니었는데.. 설마 황제가 마음에 들기라도 한 건가?” 처음에 하연의 기억을 조작하지 말고 황궁에 넣으라 한 티엔의 말에 가장 반발한 것은 자신이었다. 아마 대개의 인간이라면 좋아라 하고 받아들였을지도 모르는 황후 역활에 대해서 심한 거부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원하지 않는 역할을 시키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었다. 그 러기에 걱정이 하고 있었는데 스스로 황후자리에 있기를 원하는 듯한 말을 한 것이다. “인간. 특히 그 중에서도 여자들은 돈과 권력, 그리고 지위에 자신의 마음을 사고팔지. 그녀석도 그런 인간들 중 하나에 불과해. 황제라면 아마 최고의 먹이감이겠지.” 냉소적인 말에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정궁들을 들였겠어? 그리고 절대로 티르를 받아들이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그때의 표정은 정말 걱정하는 게 분명했다고. 하긴. 뭐 그 애가 황제를 좋아하기로 마음먹었던, 아니면 진짜로 좋아하건 간에 잘 된 일이지. 이제 들킬 위험은 줄어든 거니까.” “진짜로 좋아할 리가 있겠나.” 말도 안 된다며 비웃듯 입매를 들어올리며 브로마네스가 시엔을 바라보았다. 시엔은 푸른 눈동자와 황금빛의 머리카락이 우아하게 어우러진 브로마네스의 자신만만한 얼굴을 마주대하고는 불현듯 그 오만한 표정을 싹 걷어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봐, 너무 자만이 지나친거 아니야? 물론 황제가 자네나 슈마이츠처럼 건장한 체격에 남성미가 넘치는 것은 아니지. 하지만 내 경험으로 볼 때 황제처럼 약간은 호리호리한 미남형이 그 아이의 나이대의 소녀들에게는 더 이성으로 다가오는 법이라고, 게다가 그 녀석 주면에는 딱히 황제보다 나은 남자도 없잖아? 마음이 끌린다 해도 이상한 것은 아니지.” 시엔은 말을 하는 내내 브로마네스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자신의 말 한마디마다 미묘하게 바뀌는 분위기가 묘하게도 위협적이었지만 평소에 볼 수 없는 그의 그런 모습에 시엔은 그것을 무시했다.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그 녀석은 감정을 잘 숨기는 편이 되지 못해. 본인은 감추려고 애를 쓰는 모양이지만 말이야. 특히나 좋아한다는 감정이나 싫어한다는 감정을 감출 정도로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릴때부터 그런 것에 익숙해져 있는 귀족도 아니니지, 그러니 그런 감정으로 잔꾀를 부릴 정도로 영악한 녀석이 아니야.” “그래서. 지금 그녀석이 황제를 좋아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순간적으로 소름이 끼쳐왔다. 언제나처럼 평온한 모습에 나지막한 어조인데도 갑자기 온몸에 한기가 들어와 시엔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 뭐 꼭 그럴거라는 것 아니지만, 가장 가능성이 있는 상대라면 황제겠지. 그 애가 만날 수 있는 남자 중에는 제일 나으니까.” “어째서지?” 오늘따라 유난히 물어오는 것이 많은 브로마네스에게 살짝 짜증이 나려던 시엔은 차라리 빨리 대답하고 이 지겨운 대화에서 벗어나야 겠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슈마이츠는 도무지 진지하지 못하니까 안되, 슈피르 공작은 현재 아버지에다 결혼한 적이 있으니까 역시 불합격. 브로마네스 너는 너무 딱딱하니까 실격, 그리고 어디보자 에른하임은 애가 셋 딸린 아버지였지. 로이츠는 너무 마른데다가 평범한 얼굴이 문제로군, 음.. 난 너랑 같이 다니니까 역시 패스. 롤프는 인간이 아니니까 불합격.” 말을 마친 시엔은 이제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을 너무 지체한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연애학 강의를 펼칠 시간이 없었다. 일부의 마력석의 힘을 뽑아내서 하연에게 들어부었지만 임시방편이었다. 좀더 확실하게 보석의 힘을 제어하려면 보다 강력한 금기(禁機)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을 만드려면 오늘 날밤을 새어도 부족할 판이다. “그런데 뭘 그렇게 신경을 쓰는거야? 티엔은 그 녀석이 황후에서 폐위되지만 않는다면 무슨일을 해도 그냥 놔두라고 했잖아. 뭐 원주인으로 따지자면 네가 먼저겠지만 지금은 티엔에게 빌려준 상태 아니야? 그러니까 황제랑 눈이 맞아서 같이 자던, 애를 낳던 상관하지 않아도 되.” 일단 이쪽의 제일 큰것 두 개는 귀걸이로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하며 시엔은 두 개를 따로 빼어 놓았다. “하지만 소유권은 나에게 있다. 그러니 내가 상관하지 않을 수는 없는거지.” “그래그래. 그 보석타령이냐? 하지만 그렇게 말해도 네 소유권은 보석에 국한되니까. 그애가 뭘하든 넌 상관할 필요가 없어. 마음까지 네 소유는 아니잖아? 그리고 제발 부탁인데 말좀 걸지마라. 넌 잘 모르는 모양인데 이게 얼마나 섬세한 작업인줄 알아?” 마력석은 크기와 색으로 보통 그 힘의 정도가 정해지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고유의 힘은 가각 달랐다. 따라서 이것들을 비슷한 힘의 성질과 크기별로 분류하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다. 일단 크기와 색상별로(미세한 차이가 있다)구분을 해 놓아야 하고 그 다음에는 각각에 힘을 불어넣어 그 파장을 살핀 후 다시 분류해야 했다. 그것을 마친 이후에는 또다시 다른 크기의 힘을 불어넣어야 했다. 힘을 처음부터 조금씩 올려나가다 보면 순간적으로 빛을 내는 때가 있는데 그것을 맞추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같은 힘과 같은 파장을 가진 것들을 모아서 5개의 더미로 분류한 다음 하연이 가진 힘을 제어할 수 있는 일종의 마법진과 아티팩트의 2가지 기능을 가진 머리 터지게 복잡한 것을 만들어 내야 했다. 하연이 갑자기 쓰러진 것의 원인은 지나친 보석의 힘이 방출되면서 그와 동시에 하연의 몸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마나도 동시에 빠져나가면서 나타난 것이었다.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마나마저 빠져나가 버렸기 때문에 심장이 멈춘 것이었다. 신관들의 신성력이 별 효과가 없었던 것도 빼앗긴 것에 비해 너무나도 적은양의 마나였기 때문이다. 간신히 숨을 쉴 수 있었지만 의식을 차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내부에서 마나를 모아주는 동시에 지나친 보석의 기운이 빠져나가지 않게하는 도구가 필요한 것이다. 자신이 들고 있는 것은 100여개다. 절반은 지금 하연의 몸속에서 마나를 공급해주기위한 공급원으로 들어있는 상태이고 이것들은 그 마나를 적절히 끌어내고 지나친 힘의 방출을 막아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용도보다는 그것이 지닌 물질적 가치에 시엔은 한숨을 내쉬었다. ‘걸어다니는 재무성이 되겠군, 정확히 237개의 마나석이니 말이야. 아마 테아난 제국의 10년치 예산은 되겠지. 하지만 이렇게까지 해서 이 녀석을 이용해야 되는 걸까? 티엔의 생각은 도통 알 수가 없다니까. 게다가 황제도 어쩌자고 이걸 다 넘긴거지?’ 귀찮다. 시엔은 머리가 복잡해지자 잡생각을 다 지워버렸다. 시엔이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싫어했다면 어떻게 마법사가 되었겠는가. 그는 단시 생각해봐야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포기해버린 것이다. 어짜피 나중에는 알게 될 일이니까 지금 자신이 고민해 봐야 시간낭비인 것이다. ‘그런데 저 녀석은 또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거야?’ 언듯 보니 브로마네스의 눈동자가 심상치 않게 빛나고 있다. 약간 입술을 깨문것 같지도 하고 무언가 혼란에 빠진 것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주먹을 움켜쥔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기도 하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을때의 표정과 비슷하지만 약간 다르다. 무슨일일까 궁금해졌다. 하지만 역시 귀찮다. 시엔은 고개를 돌렸다. 한숨이 나온다. 아무래도 오늘밤은 잠자기는 그른 것이 분명하다. “내가 어째서 이런 복장을 해야 하는 거야?” 엘의 아름다운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진다. 절대로 안된다는 강한 의지가 눈에서 활활 타올랐지만 엘을 바라보는 하토르 후작의 얼굴은 차분하기만 하다. 아무리 머릿속에 든 것이 별로 없어 할 줄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엘이지만 명색이 마왕의 측근인 첸의 아들이다. 고위마족인 엘의 시선을 받고도 태연한 하토르 후작은 그야말로 대단한 자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저도 나름대로의 평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단을 운영하는 자로서 평소의 이미지 관리는 중요한 것이지요. 그러니 이것을 입어주셔야 겠습니다.” 하토르 후작이 가르키는 침대 위에는 화려한 옷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모두다 최고급의 옷들이다. 부드러워 보이는 망토의 새하얀 모피 장식이나 고운 백색 벨벳위로 은빛으로 아련하게 보일듯 말듯 수놓은 화려한 무늬의 겉옷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화려한 보석 벨트와 각종 소지품들이 화사하게 빛났다. “왜 내가 너같은 놈이랑 같이 다녀야 되는거지? 그리고 저 옷들은 다 뭐야!” 엘은 그중에서도 무엇보다도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새하얀 공단으로 만들어진 수백개의 작은 다이아몬드가 별처럼 뿌려진 드레스를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가르켰다. “...그러길레 들키지 말으셨어야지요.” “누가 들키고 싶어서 들켰어? 난 그냥 침대에 누워 잠을 좀 자려고 했을 뿐이야. 그러데 그 시종이란 놈이 들어와서 깨우는 바람에..” 엘은 점점 목소리가 작아졌다. 하토르 후작이 계속할태면 해보라는 식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말이 길어지면 지는 것은 자신이다. 엘은 입을 다물었다. “전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비록 금기시 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름다운 남성과 침상을 같이 쓰는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저의 지위는 그것을 암묵적으로 묵인해줄 정도니까요. 하지만..그렇게 되면 엘류시온님은 아마 많은 남자에게서 구애를 받으시겠지요. 그것이 좋다면 제 평판이 조금 희생되는 한이 있어도 남자 옷을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너무 하는 일 없이 방안에만 틀여박혀 있었더니 심심해서 견딜 수가 없어 잠시 침대에 누웠던 것이 화근이었다. 문도 두들기지 않고 갑자기 쳐들어온 그 시종이라는 놈이 자신을 보자마자 채 뭐라 말하기도 전에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는 죄송합니다라는 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토르 후작이 전해준 말에 의하면 후작이 침소에 여인을 재우고 있으며 분명 후작의 정부가 틀림없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했다.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 하면 되잖아! 왜 내가 네 정부가 되어야 하냔 말이다!” “그 말을 사람들이 믿어주면 정말 좋을텐데요.” 하토르 후작은 쓴 웃음을 지었다. 마족이면서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족과 닮은 이 자의 외모는 실로 여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자신의 시종조차 여인으로 착각했을 정도가 아닌가. 게다가 주인의 침대에 당연한듯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 다른 관계를 생각할 자들은 없었다. 땅에 끌릴듯한 긴 은빛 머리카락이 서늘한 빛을 내뿜고 사내와는 다른 가녀린 몸의 선과 장미꽃만큼이나 붉은 입술이 섬세하게 빙설처럼 새하얀 얼굴위로 도드라진다. 게다가 묘하게 색정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은 분명 미색을 밝히지 않는자라 해도 충분히 넘어갈 정도였다. 그러니 자신-하토르후작-이 처음으로 들인 정부라는 설정도 충분히 납득되어질 것이 분명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전 남색에는 취미가 없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시지요. 언제까지 이곳에 같혀 지내실 수도 없지 않습니까? 제 이름하에 보호를 받는 자가 되면-정부를 돌려서 한 말이다-마음껏 돌아다니실 수 있습니다.” 시큰둥하던 얼굴에서 금새 관심의 빛이 떠오른다. 하토르 후작이 마지막 말로 쐐기를 박았다. “그러면 카란이라고 하는 친구분도 빨리 찾으실 수 있겠지요.” <원래썼던 설정> 브로만 공작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시엔은 평소에는 조용하기만 하던 방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고함치듯 언성을 높힌 한 남자와 훌쩍이는 듯한 울음소리가 뒤섞여 들리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시엔의 눈앞에 고개를 푹 숙인 한 시녀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져 있었고 그 앞에 서있던 브로만은 뭐가 그리 화가 났는지 연신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그 훌쩍이는 것좀 그만두지 못해! 뭘 잘했다고 우는거냐. 다들 당장 내앞에서 꺼져라!” 다른 귀족들처럼 사소한 것에 트집을 잡던 그가 아니었기에 방안에 있던 다른 시녀와 시종들은 그저 눈치만 살피고 있었고 공작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쏜살같이 방안을 빠져 나갔다. 그중 한명은 얼마나 서둘렀는지 시엔에게 부딪히기까지 했다. 시엔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도 브로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안았다.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자시의 책상을 중앙에 두고 계속 이리저리 왔다갔다만 할뿐이었다. 평소와 달리 불안정한 호흡은 그가 평상심을 읽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게 했다. 시엔은 한숨을 내쉈다. “화풀이를 하시는 것은 당신답지 않습니다.” 분명 아까 하연이 그에게 한 말 때문에 화를 낸 것이리라. 시엔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마력석들을 테이블위에 쏟아놓으면서 입을 열었다. 순간 브로만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시엔은 계속 입을 열었다. “그 아이도 뭔가 이유가 있어서 그런 말을 했겠지요.” 순간 꽝하고 책상을 치는 소리가 방안을 메웠다. 책상위에 올려저 있던 물건들이 허공으로 튀어올랐다가 다시 책상위로 주저앉았다. 하지만 시엔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유? 그래 갑자기 고귀한 황후가 되니 자신의 신분을 잊은 모양이지? 그래서 갑자기 지위와 권력이 탐이 난 모양이군. 그래서 황제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렇게 뛰어간건가? 인간들이란 다 똑같아. 잠시라도 그 녀석은 다른이와 다를 것이라 생각한 내가 바보같군, ” “황제를 정말 좋아하게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시엔이 약간 질이 떨어져 보이는 마력석 하나를 인상을 찌푸리며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건 다른 용도로 써야 할 것 같았다. “좋아해? 감히 내 물건 주제에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자신이 정말 황후라도 되는줄 착각하는 건가!” 시엔은 들고 있던 마력석을 다시한번 살펴보았다. 자세히 보니 쓸만한것 같지도 했다. 흠집은 조금 있었지만 크기는 컸으니까. “황후역을 하라고 맡긴 것은 당신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예전의 황후처럼 행동하니 다행이지 않나요? 게다가 황제는 객관적으로 볼때 분명 이성에게 호감을 줄만한 외모를 가졌습니다. 마음이 끌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요.” 시엔은 이것을 그냥 사용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그제서야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브로마네스를 바라보았다. 연신 싹씩대는 폼이 심상치 않았다. 평소 장난은 좋아하지 않지만 그의 그런 모습에 시엔은 지나가는 듯이 말했다. “질투라도 하시는 겁니까?” 순간 브로마네스의 눈이 번쩍였다. 그리고 다음순간 그의 손이 자신의 멱살을 단단히 틀어쥐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온다고 느낀 순간 나지막하지만 위협적이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누구인지를 잊은거냐? 드래곤인 내가 천박한 인간따위나 느끼는 그런 시시한 감정놀음 때문에 이런다고 생각하는 거냐?” “..이렇게 힘을 주실 필요는 없는데요.” “.....” (너무 노골적이어서.. 바꿨는데. 시엔은 이쪽이 더 마음에 들어요. 하지만 개성이 부족한듯..) 간신히 22일에 맞춰서 올립니다.(하루 한편은 올려야..) “뭐야. 한밤에 수영이라도 한거냐?” “...슈마이츠” 슈마이츠는 물에 흠뻑 젖은 자신을 보고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정령들을 불러내서 하연의 옷을 말려주고 자신의 망토로 하연을 감싸주고서는 하연의 머리를 가볍게 한 대 치며 꾸중하는 듯이 입을 열었다. “어지간히도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구나. 그나저나 너까지 오늘 왜 그러냐? 황제도 그렇고 브로마네스도 그렇고 게다가 너까지 오늘은 모두들 다 이상해.” * * * * “황후마마께서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낮에 찾아온 황제의 행동이 마음에 걸려 조금 늦은 시간에 황후궁으로 찾아온 슈마이츠에게 시녀가 전해준 말이었다. 황후의 목적지가 황제의 궁이라는 것 때문에 시녀들은 그저 오늘은 황제궁에서 황후가 머무르고 오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네가 여기는 무슨일인가.” 다음에 찾아간 황제궁에는 황제와 로이츠만이 남아 업무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노골적으로 자신이 온 것에 대해 탐탁지 않다는 시선을 던지는 황제에게 슈마이츠는 앞으로 일주일이나 남은 사냥의 일정 이야기를 꺼내야 했고 한 시간정도를 붙잡혀 있어야 했다. 혹시나 싶어 브로만이 있는 곳으로 갔지만 브로만은 차갑게 인상을 쓰고서 자신이 들어와도 고개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볼일 없으면 나가라.” 자신이 들은 말은 그것뿐이었다. 이상하게도 오늘 자신이 만나는 자들마다 기분이 매우 저조한 것 같았다. 늘 음울한 로이츠는 그렇다쳐도 평소엔 평온한 듯 보이던 황제의 기분은 무척이나 않좋았고, 브로마네스도 그렇게 짧게 말하는 것을 보면 무언가 단단히 마음이 상한 모양이었다. “이상하네. 황후궁에도 없고 황제궁에도 없으면 도대체 어딜 간거지?” 한숨을 쉬며 방을 나서는 슈마이츠를 붙잡은 것은 아까의 무심한 목소리가 아닌 약간 높아진 브로마네스의 목소리였다. “없는거냐?” “걱정마. 아마 길이 어긋난 모양이야. 그냥 오늘 낮에 황제가 한 말 때문에 조금 걱정이 돼서 찾아보러 다닌 것 뿐이야. 그러고 보니 오늘 정말 재미있는 일이 있었는데. 혹시 너도 황제가 나 찾아온 이야기 들었어?” 슈마이츠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처음엔 또 그때 이야기를 꺼내려는 줄 알고 긴장했는데, 대뜸 하는 말이 뭔줄 알아? ‘그대는 유난히 황후와 친하더군, 그 방법이 뭔가?’라는 거야. 네가 그 얼굴을 봤어야 했는데. 어쨌거나 하도 진지해서 나도 일부러 분위기 맞쳐주느라 힘들었다는 거 아니냐. ” 그런데 어쩐지 반응이 좋지 않다. 평소같으면 자신의 품위없는 말에 일장 훈계를 늘어놓았을 브로마네스의 입가가 일그러졌고, 점점 위험스러워져 가는 분위기에 슈마이츠는 잽싸게 작별의 인사를 남기고 그곳을 빠져 나와야 했다. * * * * “슈마이츠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여?” 난데없는 질문에 당황한 슈마이츠는 걸음을 멈추고서는 하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앞만 응시하고 있는 하연의 뒷모습만 보일뿐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잠시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던 슈마이츠는 하연의 질문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는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넌 너지.” 말은 장난스러웠지만 정작 목소리는 무척이나 단호했다. 그 이외의 대답은 생각도 할 수 없다는듯한 대답에 하연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럼 난 황후인걸까. 아니면 하연인걸까?” “둘 다야.” 묘한 대화가 계속되고 있었다. “...어째서?” “넌 지금 내가 드래곤인과 슈마이츠 공작 중 어느쪽인 것 같아?” 하연은 쉽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슈마이츠는 분명 드래곤이었다. 본신의 모습을 한번도 본적은 없지만 그가 드래곤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자신은 그를 드래곤이 아닌 테아난 제국의 공작중 한 사람으로 대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친구에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드래곤이라는 압도적인 존재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둘... 다인것 같아..” 한참만에야 하연은 입을 열었다. “마찬가지야. 나도 네가 황후로 보이지도. 그렇다고 해서 내가 모르는 존재였던 다른 삶을 살아온 인간으로 보이지도 않아. 그거면 된거 아니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들도 널 너라고 생각하겠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에게서 예전의 황후의 모습을 찾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슈피르 공작과 네니마져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똑같은데.. “또 그 표정이냐? 좋아. 그럼 예를 하나만 들자. 그들이 너와 대화를 한다고 치자. 그럼 그들에게 한 너의 말은 황후가 한 것일까. 아니면 네 자신이 한걸까?” “....그들이 보는건 황후니까 그 말을 하는 건..” 하연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들긴 슈마이츠가 말을 가로막았다. “또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거냐? 내가 아까부터 말했잖아. 넌 너라고. 네가 유난히 상대와의 관계에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인간이라는 종족이라는 것을 알지만 이럴 때는 이것저것 다 제쳐두고 자기 자신만 생각해 보란 말이야.” 하연은 갑자기 언성을 높이는 슈마이츠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과거에 얽매일 필요는 없어. 이제는 네가 그 모습의 인생을 사는 거야. 네가 하는 말, 행동 모두가 황후가 아닌 네가 만들어낸 거야. 단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의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 뿐이지. 너 자신은 변하지 않았어.”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가 그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 것이 되잖아. 어떻게 내가 황후의 과거에 얽매이지 않을 수가 있겠어?” 하연은 씁쓸하게 웃었다. 슈마이츠의 말은 맞는것처럼 보였지만, 다른 누군가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의 영향이 미치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원래의 황후라는 것을 알기에 솔직해질 수 없었다. “....모르는 거냐.” 브로마네스가 말해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슈마이츠는 서글픈 미소를 짓는 하연을 바라보았다. 애초에 하연이 이렇게 번민에 빠진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누군가의 인생을 망치는 것이 아닐까하는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하연 본인으로 하여금 모든 점에서 황후의 입장에서 말하고 생각하고 그리고 행동하게 했을 것이다. “진짜 황후는 그날 밤에 죽었어.” “!!!” “그러니까 누군가의 삶을 망치는 것이 아닌가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 이것은 너의 인생이 되는 거다. 앞으로의 모든 관계는 네가 새로이 만들어 나가는 거고 그에 대한 책임도 네가 져야하지. 그러니 네 마음의 소리에 따라 움직여.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의 과거에는 얽매이지 마라.” “...고마워,” 진심으로 고마웠다. 특별히 살갑게 대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의 행동과 말은 때로는 생각없어 보이지만 자신의 앞길을 밝혀주고 해결방법을 찾아준 것은 그였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고. 너는 너라고. 겉모습이 달라도 네가 상대를 향해 하는 말은 너 자신이고 그 순간부터 너는 너 자신이 되는 것이라고 그는 그렇게 말해 주었다. “앗! 그리고 내가 너한테 이런말 한건 브로마네스한테는 말하지마. 사실 황후가 죽었다는 거 너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했거든. 내가 너한테 이런 말 한걸 알면 분명 자기말을 어겼다고 펄펄 뛸꺼야.”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 하던 슈마이츠가 갑자기 난감한 얼굴이 되더니 하연을 향해 비밀로 해달라는 듯 손가락 하나를 입에 대었다. 정말 걱정이 되는 듯한 얼굴로 심각하게 이야기 하는 슈마이츠를 보니 하연은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흐음...” “뭐..냐? 그 부담스런 눈빛은?” 하연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슈마이츠는 자신의 주위로 찬바람이 도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갑자기 실제로도 갑자기 싸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이걸로 나 슈마이츠의 약점 하나를 잡은 셈인가?” 정말로 굳어버린 슈마이츠의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수가 있냐는 무언의 시위가 담긴 눈동자에 하연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정말로 오랜만에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움이 담긴 웃음소리가 밤공기를 가르고 멀리까지 퍼져갔다. “.....” “...삐진거야?” 슈마이츠는 정말로 삐진 모양이었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획 돌린 모습에서 나 화났어라는 오라가 펄펄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원래의 슈마이츠와는 너무나 달라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하연은 애써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고 입을 열었다. “큭큭 농담이야 농담, 그렇게까지 얼굴을 굳일 필요는 없잖아. 슈마이츠” 하지만 그 말에도 여전히 뿌루퉁해져 있는 슈마이츠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외모상으로는 멋있고 늠름한 기사가 어린애처럼 삐져 있는 모습은 묘하게 귀엽다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했다. 물론 눈 앞에 있는 저 드래곤이 천년이 넘게 살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말이다. “쳇, 아까까지만 해도 죽을상을 하고 있더니. 내 놔” “뭐야? 슈마이츠의 내민손을 보자 하연은 아까까지 그에게 감사했던 마음이 눈녹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드래곤들이 재물을 탐한다고는 이런 상황에서도 저렇게 철저하게 챙기다니. 역시 슈마이츠는 뼛속까지 드래곤이 분명했다. “당연하지! 설마 이 몸의 상담을 공짜로 받으려던 생각은 아니겠지.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 답례를 해야 하는 거라고. 가끔 세상에는 남의 도움을 그냥 받으려는 덜되먹은 인간들이 있지만 넌 그럴 리가 없겠지. 그리고 말해 두지만 난 조금 비싸.” 의기양양하게 말하던 슈마이츠는 순간 자신의 볼에 닿는 촉감에 깜짝놀라 말을 멈췄다. 거의 데일듯 말듯한 스쳐지나가는 미풍만큼이나 가벼운 입맞춤이었지만 차가운 공기에 식어버린 뺨에 닿는 부드러운 열기를 전해준 입술의 감촉이 주는 느낌은 너무나 생생했다. “너..너! 무슨짓이야!” “누가 황후의 키스를 쉽게 받을 수 있겠어? 이 정도면 답례는 충분한 것 같은데. 설마 그걸로는 부족한거야?” 말을 더듬으며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슈마이츠와는 달리 하연은 씨익 웃으며 슈마이츠에게 한발한발 다가서고 있었다. “원한다면 이 한 몸 희생해서 한번 더 해줄 용의도 있어. 내가 좀 손해보는 것 같기는 하지만.” “됐어! 그러니까 저리가!” 기겁을 하며 두손을 내젓는 슈마이츠를 보며 하연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었다. 겨우 뺨에만 그것도 스치듯이 키스했을 뿐인데 과민반응을 보이는게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마치 송충이라도 얼굴에 달라붙었던 것처럼 지금은 연신 소매로 얼굴을 문지르고 있었다. “아무리 싫어도 그렇지 그렇게 노골적으로 표시할 것은 없잖아.” “그게 아니라... 제길 관둬! 하여튼 나한테 가까이 다가오지 마라.” 하연은 입을 삐죽이면 한걸음 뒤로 물러나서 슈마이츠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어둡기는 했지만 붉어진 슈마이츠의 얼굴은 잘 보였다. “얼굴이 빨개. 슈마이츠.” “누,,,,누가!! 얼굴이 빨갛다는 거야?” 갑자기 성을 낸다. 하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매로 얼굴을 그렇게 문질러 대니 얼굴이 붉어질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저 혹시 쓰라리지는 않을까 해서 물어본 것 뿐인데. 남자들은 별 것 아닌데에 자존심이 상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문질러 댔는데 안 빨개지는게 이상해. 어쩐지 너무 문질러 댄다고 했어.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옷에 슬친거 아냐?” 하연은 슈마이츠의 반응을 무시하고 그의 뺨에 손을 대었다. 자신의 차가운 손에 후끈한 열기가 전해졌다. “열이 더 올라가는 것 같은데? 혹시 많이 긁힌거 아니야?” “....빨리 가자.” 하연은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슈마이츠는 왠지 어색한 목소리로 먼저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버린 것 같았다. 자신이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으니 네니랑 시녀들이 걱정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먼저 간다.”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가면 좋을텐데, 슈마이츠는 그냥 그 말만 남기고 잘가라는 인사를 할 틈도 없이 왔던길로 되돌아 가 버렸다. “왜 저러지? 아까부터 말도 도통하지 않고... 내가 아까 너무 심하게 놀렸나..” “네니. 저기...화난 거야?” 하연은 조심조심 네니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을 먼저 발견했던 시녀들 때문에 네니가 아무말도 하지 않았겠지만 그들이 다 물러간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아까부터 자신을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은 분명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었다. 자신이 물었는데도 네니는 말없이 하연이 옷을 벗는 것을 도와주었고 잠시 후 갈아입을 실내복을 가지고 왔다. 하연이 옷을 다 갈아입을 때까지 네니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견디기 힘든 침묵이 계속되자 하연은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 내가 말도 없이 늦어서 걱정했지? 사실은 일찍 오려고 했는데..” “...목욕부터 하시지요.” 하지만 하연의 말에도 네니는 하연이 벗어놓은 옷 무더기를 안고는 방문을 나가버렸다. 항상 목욕을 도와주던 시녀가 하연을 안내했고 잠시 후 하연은 뜨거운 물이 가득 찬 유백색의 도자기로 만들어진 욕조 안에 몸을 담굴 수 있었다. ‘화난 것 같지는 않은데.. 내가 없을때 무슨일이라도 생긴건가?’ 따뜻한 물에 몸을 누이자 몸이 풀어지며 한없이 편안해 졌지만 정작 마음은 편치 않았다. 한손으로 장미꽃잎이 붉은 빛을 빛내며 하얀 거품위로 었있는 것을 아무런 의미 없이 만지작 거리던 하연은 갑자기 머리카락이 당겨지는 아픔에 그만 작게 신음을 흘렸다. “죄..죄송합니다! 황후마마!!” 어찌나 아픈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하연은 손을 들어 아픈 머리밑을 문질렀다. 평소에는 실수 한번 안하던 시녀가 왠일로 실수를 다 했을까 생각하던 하연은 그 이유가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았다. “아니 괜찮아.” “하지만...” 울쌍이 된 시녀에게 하연은 2번이나 더 괜찮다고 말해야 했다. 하지만 그래도 계속 울것같은 표정을 지우지 않는 시녀에게 하연이 입을 열었다. “이건 너 때문이 아니야. 아까 들렀던 정원에서의.... 일 때문에 이렇게 된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되. 그리고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꺼야. 오늘은 피곤하니까 빨리 좀 끝내주겠어?” 황후가 되어서 볼성사납게 정원에서 혼자 훌쩍였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어서 하연은 그 일은 얼버무리고 지나갔다. 자신의 말에 약간 묘한 표정을 짓는 시녀가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그것은 아마 자의식이 만들어낸 망상이라고 간주한 하연은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었고 다시 시녀의 손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아까 분수대에서 완전히 젖어버렸을 때 슈마이츠가 그냥 말려버려서 완전히 엉킨 모양이네. 하긴 예전에 목덜미밖에 안 오는 머리카락 이었는데도 비를 맞았을때 집에가서 그냥 대충 말렸다가 엄청나게 고생했었는데 지금은 허리 아래까지 오니..’ 그러고 보니 그때도 황제의 옷에 머리카락이 걸려서 꼼짝도 못한 것도 다 이렇게 쓸데없이 치렁치렁하기만 한 머리카락 때문이었다. 부드럽게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눈이 갑자기 위험하게 변해서 자신에게 키스를 요구하던 그 순간이 머리를 스쳐지나가자 얼굴로 열기가 몰려 들어왔다. “어디 아프신 것은 아닌가요? 황후마마.” 하연의 얼굴이 갑자기 달아오른 것을 눈치챈 시녀가 걱정스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금이라도 아픈것같은 기미를 보이면 신관을 부르러 달려가는 시녀들이라 하연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저.. 잠깐 다른 생각을 해서..” 다행히 시녀는 신관을 부르러 가지 않았다. 그저 조금 얼굴을 붉히고 다시 하연의 시중을 들었을 뿐이다. “내일까지 말끔하게 세탁을 끝내놓거라.” 궁전의 세탁담당인 시녀인 앤이 허리를 숙였다. 네니가 사라지고 난 뒤 어디서 나타났는지 네 다섯명의 시녀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앤의 손에서 옷을 낚아챘다. 뭔가 잔뜩 기대하는 눈으로 잔뜩 구겨진 옷을 살피던 그녀들은 옷에서 은은하게 풍겨나오는 향기에 모두 놀란 표정이 되었다. “어머나! 이거 혹시...” 한때 황제궁 소속이었던 그들은 지금 이 옷에서 풍겨나오는 향기가 무엇인지를 까닫고서는 모두 얼굴을 붉히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황제폐하랑 계실줄은 알았지만 그게 금단의 정원일 줄은 몰랐는데. 의외로 황제폐하도 낭만적이시구나. 늘 별 말씀이 없으셔서 그런건 모르시는 줄 알았는데.” 그들이 말하는 금단의 정원은 원래 초대건국황제인 크라틴스 대제가 사랑하는 황후를 위해 만들어준 알드류네인 정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정원과는 달리 타인의 출입이 엄히 금지되는 곳이었기에 금단의 정원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굉장히 적극적으로 나오신 것 같지 않니? 이 옷 구겨진 것 좀 봐.” 앤이 입을 열었다. 황후궁의 의복 담당답게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옷의 상태였다. 그러나 그녀의 핑크빛 상상과는 달리 하연의 옷이 구겨진 것은 단순히 젖어버린 옷이 슈마이츠에 의해 강제로 말려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이 알리 없었다. 이제는 완전히 황후와 황제가 그곳에서 함께 있었다고 확신한 그들은 하나둘씩 자신이 본 것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들 중 처음으로 황후가 돌아온 것을 목격한 조안이 두 손을 붉어진 얼굴로 갖다대며 입을 열었다. “맞아, 난 아까 황후님의 늘 단정하던 머리가 그렇게 흐트러진 건 처음 봤다니까. 이곳을 떠나시기 전만해도 단단히 고정해놓았던 머리핀도 사라지고 말이야.” 황후의 머리손질을 담당하는 시녀는 자신과 같이 이곳에 입궁한 동기였기에 그녀의 실력은 누구보다도 잘 아는 조안이였다. 보기에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듯 부실해 보이지만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작정을 하고 풀어내지 않는 이상은 그것은 어지간한 힘에도 잘 빠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 옷에 배인 프리클리애쉬의 향기가 이렇게 진하게 배어 있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증거라구,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한밤중에 정원에서 볼게 뭐가 있니?” “그렇지? 아마 네니님도 눈치채신게 틀림없어. 엄청나게 굳은 얼굴이 되시는데. 어휴,, 난 무서워서 혼났다니까.” 황제를 만나러간 황후가 돌아오지 않자 안절부절 하지 못하며 사방을 서성이던 네니가 황후가 돌아왔다는 소리에 반갑게 뛰어 나왔다가 갑자기 안색이 변한 걸 다시 떠올린 피어린이 입을 열었다. “네니님은 아직도 황제폐하를 싫어하시나봐.” “하지만 그건... 황제폐하도 마찬가지셨잖아. 솔직히 그때 딱 한번 우리 몰래 황후마마를 찾아오셨던 이후로는 더 이상 함께 밤을 보내지도 않으셨고. 그리고 정원에서.. 꼭 황제폐하만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금단의 정원이 아니더라도 그 근처에 있는 다른 정원에도 프리클리애쉬의 향기는 날라올 수 있는 거니까.” 그동안 계속 그들의 말을 듣고만 있던 젤다가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뭐야! 너 설마 그럼 황후마마가 다른 분이라도...” 젤다의 말에 앤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황후의 목욕 시중을 하러 나갔다온 에린이 쾅하고 문을 젖히고서는 달리듯 재빠른 걸음으로 걸어들어왔다. “뭐야! 에린 제발 문좀 살살 여닫아. 난 네니님이 오시는 줄 알고 깜짝 놀랬단 말이야.” “난 혀까지 깨물었다고.” 여기저기서 놀란 시녀들의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졸지에 비난의 눈초리를 한눈에 받게된 에린은 짐짓 너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 내가 황후님께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줄려고 이렇게 열심히 달려온건데 너희들은 별로 관심이 없는 모양이구나? 그럼 너희들끼리 이야기해라.” “우리사이에 그 정도 일 가지고 뭘그러니? 그냥 농담이야. 애~” “그나저나 그 이야기가 뭔데?” 모두의 시선이 에린에게 향하자 그들의 애를 태우려는 듯이 에린이 빙긋이 웃음을 짓고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에린의 이야기가 끝나자 조안이 입을 떡 벌리고 에린을 바라보았고 그것은 앤과 나머지 시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황후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이야?” “그렇다니까. ‘아까 들렀던 정원에서의.... 일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고. 중간에 잠깐 말씀을 멈추신걸 보면 분명히 그게 틀림없다고.” “그리고 얼굴까지 붉히셨다고 했지?” 내일까지 옷의 세탁을 끝내놓으려면 지금부터 서둘러야 했는데도 앤은 계속 이야기에 푹빠져 일을 시작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뭐야? 젤다. 너 또 그 이상한 소리를 하려는 거야? 아무리 그때 그런일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황후궁에서 있었던 일도 아니고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이잖아! 그 일은 황후님이..” “그만둬! 앤, 그건 우리들끼리만 알고 있기로 했잖아.” 돌아오는 황후를 처음으로 만난 피어린이 평소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아닌 날카로운 음색으로 앤을 다그쳤고 그 눈빛에 언제나 기새 등등하던 앤은 기가 팍 죽어버렸다. “미안.. 피어린. 하지만 젤다의 말이 너무 심하잖아. 그래서..” “...무슨 말이야? 피어린. 그 때 일.. 너는 알고 있던 거였어?” 열심히 이야기를 전해주던 에린은 갑자기 조용해진 분위기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고 앤과 피어린은 입을 꾹 다물고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피어린,, 우리한테는 이야기 할 수 없는거야? 하지만 앤은..” “앤은 어쩌다 알게 된거야. 그리고 난 황후마마와 약속을 했어. 그러니까 더 이상 묻지마.” 냉서리가 내려앚은 듯한 말투는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들과 방실방실 웃으며 이야기를 하던 피어린의 모습과는 엄청난 괴리가 있었다. 피어린이 자신들과 동기이기는 하지만 직책상 그들보다 한참 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더 이상 질문을 할 수 없었다. “한 가지만 말해 두지. 젤다. 생각은 네 자유지만 이 궁에서 쓸데없는 말을 하고 돌아다니면 태양빛을 그리 오래 받을 수는 없을거다.” “...!!” “그리고 너희들도 마찬가지야. 너희들끼리 말하는 것까지는 막고 싶은 생각은 없어. 하지만 이 일이 밖으로 흘러나가는 일은 없길 바래.” 돌변한 피어린의 태도와 위압적인 말투에 반발을 느낀 에린이 반발했다. “지금 우리를 위협하는거야? 피어린?” 하지만 에린의 말에도 피어린은 싸늘한 표정으로 앤을 제외한 나머지 시녀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너희를 친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말해주는 거다. 설마 잊지는 않았겠지? 황후마마께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에게 당해 목숨을 잃을뻔한 사실을. 너희는 잘 모르고 있겠지만 네니님은 아직도 포기 하지 않으셨어.” “그 이야기를 우리한테 하는 이유가 뭐야?” 갑자기 피어린의 입에서 나온 지금 상황과 관계없어 보이는 말에 조안이 의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런 조안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나머지 시녀들들 다시 한번 날카롭게 응시한 피어렌은 마지막으로 젤다에게 시선을 던지여 입술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건 너희들이 의심을 받고 있다는 뜻이지. 그리고 난 너희들 중 하나가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일순간 주위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 * * * * “황제폐하께서 납시십니다."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하연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홀 안으로 들어서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원망스러운 눈길로 자신이 입고 있는 엄청나게 무겁고 화려한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하얀색 눈부신 천에 붉은실과 황금빛 실로 수놓아진 예관(禮官)은 하연의 흑청색 머리카락과 우윳빛 피부와 무척이나 잘 어울려 실로 제국의 황후라는 위엄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우아함과 고귀함보다는 당장에 몸을 감싸는 불편함은 정말로 참기 힘들었다. 평소에는 잘 신지 않는 굽 높은 구두는 발을 조여왔고 손에 든 가지각색의 보석들로 섬세하게 장식된 황금빛 홀은 연신 옷자락을 잡아물었다. 게다가 머리에 쓴 관은 어찌나 무거운지 목이 아파왔고 가볍게만 보이던 부드러운 흰색 모피로 안감을 덧댄 화려한 연보라빛 망토는 어깨를 짓눌러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자신과는 달리 황제는 자신의 것에 비교하면 2배는 넘을 정도의 황제를 나타내는 예식용 관을 쓰고도 조금도 흔들림없이 당당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것도 마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것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허리에는 화려한 금빛 장식술이 달린 예검(禮劍)까지 차고 거기에 엄청나게 무거워 보이는 금빛 장식으로 된 망토를 고정하는 핀과 양쪽을 연결하는 역시 같은 디자인의 금색 줄이 가슴을 여러 번 교차하고 있었다. 물론 옷은 그녀보다는 가벼워 보였지만 경험상 황제가 차고 있는 저 검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잘 아는 하연으로서는 아무리 경량화 마법이 걸려 있다고는 하지만 저리도 자연스럽게 걸어가는 그가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황후마마께서 드십니다.” 휘장이 쳐저 있던 의 휘장이 양쪽에 서 있던 시종들이 짙은 보랏빛 끈을 당기자 부드럽게 올라가기 시작했고 휘장틈으로 몰래 홀의 모습을 훔처보던 하연은 그곳에서 나와 홀로 들어섰다. 넓은 실내 안에 엄숙하게 흐르는 음악과 하연의 옷자락이 끌리는 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은 예행연습 중이었으니 황제와 자신을 제외하고는 수십에 달하는 악사들과 몇몇 시종 그리고 로이츠 외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솔직히 거의 백 여 명에 달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아무도 없다라고 표현하기에는 충분히 많은 숫자였지만 이 홀의 규모를 생각할 때 백 여 명이란 숫자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3층높이의 천정을 가진 이 홀은 어떻게 지어졌는지는 몰라도 기둥이라고는 중앙 홀을 사이도 이열씩 서있는 좌우의 백색 대리석 기둥들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천정을 받치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뭐랄까 마치 롯데월드 같아. 잘은 모르겠지만 거기보다 훨씬 큰 것 같은데... 저쪽 문에서 내가 있는 곳까지는 아무리 안 되도 운동장 4바퀴는 넘겠다. 게다가 저 천장은 뭘로 만든거지?’ 천정은 마치 허공이 비어있는 듯 중앙 홀과 같은 크기의 하늘이 고스란히 보이고 있었다. 파아랗고 청명한 가을빛 하늘이 고스란히 비쳐 백색의 궁과 어울려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원리야 어찌되었건 아마도 무슨 마법으로 천장에 경계를 설치한 듯 밖의 차가운 공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오로지 따스한 햇살만이 하연이 가고 있는 길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중앙홀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난 두 개의 작은 홀들의 천장위에는 가지각색의 아름다운 벽화들이 마치 살아숨쉴 듯 아름답게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평소라면 그 아름다움과 화려함에 넋을 놓았을지도 모르는 하연이지만 당장 이곳에서도 가장 높은 연단위로 깔린 붉은 카펫트위로 발걸음을 한발 한발 옮기는데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발이 푹푹 빠질것 같은데다가 익숙치 못한 예장으로 몸이 자꾸 흔들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긴장된 얼굴로 하연은 조심스럽게 두 개의 화려한 옥좌가 당당하게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고 그 위에 황실을 상징하는 보라색에 황가의 문장인 금색으로 박힌 휘장이 우아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곳으로 무사히 걸어갈 수 있었다. 자신보다 먼저 반대쪽에서 걸어온 황제의 손을 잡고 다시 앞을 바라본 다음 황제가 개회를 선언하고 자리에 앉는 것으로 일단은 끝나는 것이었다. “황후마마께서 드십니다.” 시종장의 말과 함께 등장하는 황후의 모습에 모두들 넋을 잃고 그녀를 쳐다 보았다. 실크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은빛이 도는 흰색천은 가느다랗고 섬세한 목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평소와는 달리 정말 필요한 장식이외에는 아무런 보석을 걸치고 있지는 않았지만 황후는 무언가가 엄숙하지만 무척이나 아름답고 순수해 보였다. 약간은 창백할 정도로 하얀 얼굴은 약간 붉은빛 홍조를 띄운듯 옅게 화장을 하고 있었고 흑청발은 화사하게 틀어올려 붉은 루비로 장식된 황후의 위를 나타내는 관을 쓰고 있었다. 뭐라 할수없는 완전한 미(美). 정말 이것이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여신의 그것처럼 위엄있고 엄숙하였으며 반면에 유혹적이며 고혹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유혹적인 모습은 결코 손을 대고 싶다는 그런 의미의 것이 아닌 손을 대어서는 안될 것 같은 이상한 경외감을 낳고 있었다. 황제는 황후가 걸어 들어오고 있는 입구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국 제일의 미라고 칭송되던 그녀이다. 그것은 결코 그녀가 대단한 지위에 있었기에 붙여진 찬사는 아니었다. 누구라도 그녀를 한번 보면 그녀 이상의 미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녀를 싫어하던 자신도 인정하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을 향해 긴장한 얼굴로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에서 황제는 이전에는 느낄수 없던 가슴 두근거림을 느끼고 있었다. 예전의 우아함이 교육에 의해 만들어진 일종의 습관 같은 것이었다면 지금의 모습은 마치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몸 안에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약간은 다듬어지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운 몸동작이 순수한 눈동자와 어우러져 화사한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었다. 순수한.. 눈동자. 손을 대어서는 안될 것 같은 그 모습에 그는 갑자기 한쪽 가슴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향해 열망어린 감정을 가득 담고 있던 깊은 눈동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이 가득 찬 눈에는 오히려 약간의 긴장감마저 담겨 있었다. 그래서인지 자신에게로 한발 한발 다가오고 있음에도 너무나도 멀어져버린 존재처럼 느껴졌다. 바로 자신의 앞에 있는데도 금새라도 사라질 것처럼 아련한... <스스로의 자유를 버린 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제부터 계속 자신을 괴롭힌 슈마이츠 공작의 말이 연신 머리를 맴돌았다. 그의 말에 보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잊어버렸다고 해도 놓아주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데도 마치 남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견디기 힘들었다. 미소를 띄우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조금의 특별함도 없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나누어주는 미소가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친척은 어때요> 그것만으로도 만족하려 했었다. 자신이 다가갈 때마다 놀란 사슴처럼 눈을 크게 뜨며 불안해 하는 그녀의 모습은 더 보고 싶지 않았기에 그러겠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다른 자들과 동격으로 자신을 대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그 결심은 모래성처럼 사라질 것 같았다. 한번도.. 자신이 그녀에게 특별한 존재로 비추어 지기를 바란적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만을 향한 그 눈동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디를 가든지 따라올 것만 같던 그 집요함마저 보이던 그 눈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를 바랬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원하던 현실이 눈앞에 이루어졌는데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심장이 조여 오는 듯한 아픔에 그 생소한 고통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손을 내밀어 그녀를 안고 자신의 모습만이 그녀의 눈동자에 담기도록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다 해도,.,, 그때 말위에서처럼 자신을 향한 얼굴에 드리우는 공포와 거부의 빛이 다시 떠오르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수락했다. 마음은 절대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그의 말처럼 날아가 버릴지도 몰랐으니까. 그녀가 자신을 거부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두려워졌다. 어릴적 세상에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어머니나 아버지처럼 자신이 원하더라도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부터는 가지고 싶다고 진심으로 원한 것은 없었다. 처음부터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원함으로서 생기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므로 원하지 않았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주위의 변화에 그저 따랐다. 그래서 조금도 원하지 않았음에도 황제가 되었다. 아니 원하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 그녀가 그렇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은 그저 방관함으로 그것을 묵인했다. 동의는 하지 않았지만 동의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얼굴도 잘 알지 못하는 형제들이 죽어갔을 때도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처음부터도 조금의 애정도 없던 그들이다. 아니 어쩌면 애정을 가지지 않은 것은 자신일지도 모른다. 어짜피 자신은 황제가 되지 못한다. 형이 자신을 죽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지라도 황제가 되지 못한 자들은 다 죽어야 했다. 막내로 태어난 자신에게 살아갈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세상에 미련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처음으로 자신이 가진 그녀의 남편이라는 지위에 집착을 하고 있다. 어찌되어도 생각 없다고 생각한 황제라는 자리에 그는 안도하고 있다. 그 누구도 그녀를 자신에게서 데려갈 수 없다는 것에 대해. 그녀가 자신의 것이라는 것에 대해 안심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놓아주기 전에는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그녀가 말하곤 하던 사랑이 아니라도 좋았다. 단순한 독점욕과 소유욕일 뿐이라도 좋았다. 그래도...지금 이 순간은 그녀는 자신의 영원한 비(妃)이다. 저 마음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자신의 손을 잡고 지금 이렇게 바로 옆에 서 있는 것이다. 살포시 피어나는 듯한 저 미소가 자신만을 위해 반짝이지 않더라도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그녀를 만질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그러니.. 참을 수 있다. 참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생각은 하지 않을것이다. 그 얼굴이 다른이에 의해 태양이 빛나듯 환해지는 것 따위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전에 자신이 먼저 그녀의 마음을 차지하면 된다. 처음부터 나를 먼저 바라본 것은 그녀였다.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그것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어떤 방향으로 튈지 알 수 없으니까.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내 것이 되지 않는다면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다. 그러니.. 하이네인 그대는 알아두는 것이 좋아. 설령 그대에게 다른 정인이 생긴다 해도 나는 그대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나의 비(妃)인 그대의 가슴에 다른 자가 담기면 나는 그자를 갈갈히 찢어놓고 말 것이니 그 눈에. 그 입술에 다른 자의 이름과 모습을 담지 마라. 지금처럼 타인처럼 나를 바라봐도 좋아. 그게 내가 그대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다. 하지만.. 내가 아닌 그 누구에게 나에게만 보이던 그 눈빛을 보낸다면 나도 더 이상 참지 않아. 그러니.. 지금처럼만 내 곁에 있어라. 그러면 나도 지금처럼 이렇게 평온함을 가장하며 그대의 곁에 서 있을 것이니 아무도 바라보지 마라. 나에게.. 보여주었던.. 그 눈빛으로는.. 식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내일 이 짓을 다시 한 번 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가 갈렸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렇게 등장한 이후에는 그저 가만히 앉아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1시간정도로 끝났지만 적어도 3시간이상은 걸린다는 로이츠의 말은 식이 끝나는 내내 황제와 황후 이외에는 누구도 자리에 앉아있을 수 없다고 말해준 네니의 말과 어울려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다. 상아와 황금 마노로 장식된 이 옥좌가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푹신푹신해서 잠이 들어버릴것만 같다는 사실이 하연을 난감하게 했다. 수 십 개는 되어보이는 수많은 계단위의 이 곳은 사신들이 예를 올린다는 저 아래쪽 지점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지금도 저 아래에서 뭐라고 자신과 황제에게 이야기를 하는 로이츠의 얼굴이 가물가물했다. ‘왠지 잠들어도 모를 것 같아. 물론 이 왕관이 조금 무겁기는 하지만.’ 고개를 조금이라도 숙이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면 앞으로 흘러내릴 것 같았기에 머리는 오로지 좌우로 밖에 움직일 수 없었다. 어짜피 누군가에게 고개 숙여 인사할 위치가 아니기 때문에 예절문제는 제쳐두고서라도 턱을 높이들고 목을 쭉 뻗은채로 앉아있는 다는 것은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이러다가 목 디스크라도 생기겠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을 주시하고 있는데 목을 주무를 수도 없는 일이라 그저 마음만 간절할뿐 손을 들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목의 통증보다는 양어깨죽지를 타로서 등으로 이어지는 부분에서 느껴지는 근육결림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어깨를 살짝 돌려보았지만 오히려 움찔할 정도의 격통만 느껴졌을 뿐이다. “이 다음에는.... 해서.... 한후...님의... 마지막.. 황제께서.... 황후마마님은....입니다.” 로이츠가 뭐라고 한참이나 중얼거리더니 몸을 한번 깊숙이 숙이고는 이것으로 예행연습은 마친다는 에른하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의 순서를 간단히 결론짓자면 굉장히 긴장했던 것과는 달리 황제와 황후는 그저 대신전에 가서 대신관의 축복을 받은뒤 가두행진을 한 다음 다시 황궁으로 들어와 저쪽 방에 있다가 이곳으로 걸어와 앉으면 되는 것이었다. 각국의 사신들의 소개는 그날 로이츠가 맡아서 하기로 되어 있었고 그들에게 짧게나마 환영의 인사를 하는 것은 모두 황제의 일이었다. 자신은 그저 앉아서 식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끝나면 각국의 사신앞에서 알리샤 공녀와 샤리엔느 공녀를 소개하고 그녀들이 나와 자신과 황제앞에 무릅을 꿇으면 그때 한번 일어서서 황제가 그들에게 각각 그녀들의 신분을 상징하는 관을 내리는 것으로 식은 완전히 끝나게 되는 것이다. 난감했다. 정말로 난감했다. 금새라도 이 무거운 옷을 번져 던질줄 알았건만 시녀들이 그 길다란 망토를 떼어내는 순간 황제의 전언이라며 달려온 한 시종의 말에 하연은 할수 없이 그 무거운 관을 머리위에 쓴채로 그에게로 가야 했다. 그리고 지금 황제와 단둘이 독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점점 등의 통증이 심해져 가고 있었다.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는건가?” 황제의 목소리에 약간의 걱정이 담겨 있다는 것에 하연은 내심 놀랐다. 식이 진행되는 내내 왠지 무서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기에 내심 불안해 하고 있는 터였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조금은 부드러워진 표정에 하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어젯밤 친척으로 지내자는 자신의 말에 긍정적인 답변을 보인것을 기억해 낸 것이다. 일단은.... 이라는 약간은 찜찜한 단서가 붙어 있었지만.. “아.. 어깨가 조금 아파요. 여기 등도 조금 아프구요. 황제폐하는 어떠세요?” 나름대로 솔직히 말한 것이었다. 둘밖에 없는데 없던 위엄을 차리느라 입도 벙긋하지 못한다면 우습지 않겠는가. 하연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면서 조금 주무르면 덜 아플 것도 같아서 자신의 목덜미를 향해 손을 들었다. 아파-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목만 아픈 것이 아니라 등부터 어깨죽지까지 모조리 아파왔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손을 위로 드는 순간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등쪽의 근육이 모조리 저려오는 느낌에 하연은 그만 팔을 아래로 떨구고 말았다. 자신을 놀란듯 바라보고 있는 황제의 시선에 민망해 팔을 들어올리려는 순간 하연은 다시 신음을 삼켜야 했다. 아까의 생각없는 팔의 움직임으로 다른 근육까지 문제가 생겼는지 오른쪽 팔과 어깨 근육이 조금 움직일 때마다 엄청난 비명을 질러댔다. “움직이지 마라. 내 경험상 움직일수록 더 아파지니까.” 그의 말대로 움직이는 것을 포기하자 아까의 격통은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고통이 사라지자 하연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떠올랐다. ‘경험상? 그럼 황제도 나처럼 이렇게 고생한 적이 있었던 모양이지?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여서 태어날때부터 이러건 편하게 하는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네.’ 하지만 자신처럼 어깨와 틍 목이 아파서 끙끙댔을 황제를 생각하니 도저히 상상히 가지 않았다. 가느다란 선의 황제이지만 그래도 황제다운 위엄은 흘러나오는 그가 자신처럼 아팠다? 왠지 웃음이 새어나왔지만 순간 숨을 들이켜야 했다. 몸이 약간 들썩이다고 느낀 순간에 엄청난 통증이 또 밀려왔으니까.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다. 분명 오른쪽은 거의 움직이기 힘들텐데...” 어느틈에 자신이 앉아있는 소파 옆으로 몸을 움직여 다가온 황제였다. 그의 손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하연은 움찔했다. 어젯밤의 그가 생각났기도 했지만 갑자기 그의 눈에는 자신이 그의 비로 보인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특히나 저 보랏빛 눈동자에 담긴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눈빛은 더더욱 그러했다. 몸이 움츠러 드는 것은 당연했다. 억지로 시선을 피하려는 하연을 내려다보던 황제는 잠시 손을 허공에서 정지했다가 천천히 내리고서는 입을 열었다. “신관을 불러야겠군.” 그 말에 깜짝 놀란 것은 하연이었다. 신관이라니! 보나마나 와서 또 힐링인지 뭔지를 써댈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팔다리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지난번처럼 발목을 접지를 것도 아닌 단순한 근육통에 신관을 불러 치료를 받고 그 후유증으로 시달릴 것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게다가 내일은 각국의 사신들이 모이는 자리가 아닌가. 그들 앞에서 그런 추한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잠깐만요!”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하연은 그나마 멀쩡한 왼쪽 손으로 그의 오른쪽 팔을 붙잡았다. 금방이라도 일어서서 문밖에 있는 시종을 불러들일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황제의 시선이 자신이 잡고 있는 그의 팔로 향했지만 하연은 놓지 않았다.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다. “그냥 이런건 주무르면 낳는 다구요. 그러니까 신관은 부르지 말아요.” 하지만 황제의 시선은 여전히 하연에 의해 잡혀있는 자신의 팔만을 향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이것 놓으라는 듯이 보여서 하연은 행여나 그가 자신의 팔을 뿌리칠까봐 더더욱 꼬옥 붙들어 잡았다. 그제서야 황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보랏빛 눈동자가 정면으로 하연을 향했고 단정하게 닫혀있던 그의 입매가 살짝 흔들렸다. “...그대의 몸에 손을 댈 수 있는 것은 나뿐이라는 것을 알고 하는 말인가?” “!!!!” 황제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하연은 금방이라도 얼굴이 불이 붙은듯 붉어졌다. 자신에게 무안을 줄 의도는 없는듯한 목소리였지만 당장 자신이 한 말이 상대에게 어떻게 들릴 것인지를 생각하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역시...잊고 있는 모양이었군. 내가 그대를 건드리는 것은 원치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니 그렇게 놀란 표정은 짓지 마라." 언제나처럼 억양 없는 목소리. 그런데도 이번에는 씁쓸함이 묻어나오는 것도 같았다. 그런 그의 목소리에 하연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아까 까지는 전혀 표정이 없던 그였는데, 지금의 그의 얼굴은 이유모를 안타까움과 가슴 아픔이 가득했다. “아니예요!” 황제가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순간 하연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한말에 놀라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이럴 생각으로 입을 연 것은 아니지만 황제의 굳어버린 얼굴을 보니 자신이 한 말의 파장이 충분히 컷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저 미심적다는 얼굴은 자신이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추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엉뚱한(?) 오해를 하기전에 미리 변명을 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그게.. 저...난... 아니..” 어찌된 셈인지 하고 싶은 말은 머리에서 빙글빙글 도는데 그것이 입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말이 입속에 가득 차 뭐라고 말을 할 수조차 없었다. 버벅대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 쌍의 눈동자를 처다 볼 용기는 나지 않았던 하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건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줄은 알지 못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다가가지 전에 항상 다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주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황제와의 대화는 언제나 그가 먼저 입을 연 것이 대부분이었다. 자신이 그를 붙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원래 세계에 있을 때도 그리고 마계에서도 자신은 누군가에게 먼저 용기를 내서 접근한 적이 없었다. 절친한 친구였던 지현은 유치원 입학식 날 혼자서 구석에서 서 있었을 때 먼저 다가와서 손을 내밀어 주었었다. 그리고.. 마계에서도 처음 우호적인 태도로 먼저 다가와 준 것은 레기어스였다. 누군가와 친해지기 위해서는 한쪽이 용기를 내야 했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는 그 용기를 내야할 상대는 자신이었다. 비록 별로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 상대였지만 앞으로도 자주 만날 것이 분명한 상대와 이런 껄끄러운 기분으로 지낸다는 것은 하연의 성격상 견디기 힘들었다. 그리고 어제부터 그나마 우호적으로 나오는 그의 태도를 보면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하나뿐인 사촌오빠인데 싫어할 리가 없잖아요.” 하연은 심사숙고해서 단어를 골랐다. 혹시나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싶지 안았다. 평소의 자신이 말하는 습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나름대로는 상황에 맞는 말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가끔 상대는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 황제는 대답이 없다. 눈을 뜨고 싶었지만 차마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 분명한 황제의 눈과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숨이 멈출듯 답답해져 왔다. 분명 몇 초밖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데도 마치 재판정에서 사형 날짜를 언도받는 사형수의 심정이 이렇지 않을까 할 정도로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런건가.” 한참만에야 깊은 한숨이 녹아든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리고 순간 무언가 따뜻한 것이 자신의 뺨을 스쳐지나가자 하연은 눈을 번쩍 떴다. 숨결처럼 가벼운 손짓이 자신의 뺨을 스쳐 목을 지나 드러난 목덜미를 향해 가고 있었다. 긴장으로 민감해진 피부에 그의 손이 스치자 하얀 피부에 붉은 꽃들이 번져가며 피어났다. 그저 가볍게 스친 것에 불과한데도 온몸의 신경이 그쪽으로 쏠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길을 뿌리치기엔 너무나도 가벼운 접촉이었다.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피부를 미끄러지듯이 날아가는 날개짓과도 같은 손길에 이렇게 긴장한다는 사실이 이상할 정도였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어 표정을 확실히 보이지 않았지만 정작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그는 담담한 것처럼 보였다. 뭔가 이상한 짓은 하지 않을 것 같은 안도감이 밀려왔다. 지금보다 차분해 보이는 황제는 본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정말 최소한의 접근만 하겠다는 듯 조심스러웠기에 하연은 긴장을 풀었다. 뻗뻗이 굳어있던 어깨가 편안히 아래로 내려가자 일순 움직임이 멈춘 것 같다고 하연은 생각했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잠시 멈추었던 손은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신관을 부르겠다.” 황제의 오른손이 다시 하연의 어깨를 감싸려고 올라오다가 한참을 망설이더니 그냥 다시 내려갔다. 왠지 착찹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힘들어하는 것 같기도 하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하연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할 만한 행동을 한 것은 없는 것 같았기에 그의 행동의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았다. ‘이상하네?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혼자서 떨어져 나가다니...’ 이유야 어찌 되었건 자신이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멈춘다는 새로운 사실에 하연은 이걸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반항하지 않으면 건드리지... 않는다는 건가?’ 그러고 보니 소설 속에서는 이세계(異世界)에서 온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상당히 막(?)나가는 스타일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럴 때마다 ‘그대는 뭔가 다르다.’.라는 느끼한 대사를 날리는 인간들이 등장했었지. 싫다는데도 열심히 따라다니던.. 그렇다면 황제도 그 부류였던 거구나. 하연은 혼자서 만족스러운 결론을 도출해내고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이번이 처음이긴 하지만 자신의 가설이 맞아들어 간다면 앞으로 황제가 접근해도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몇 차례의 시험을 거쳐봐야겠지만 왠지 자신의 추리가 맞아 들어갈 것 같았다. “에른하임. 지금 당장 신관을 불러와라.” 황제는 문밖에 서 있을 것이 분명한 에른하임을 향해 닫힌 문사이로 명을 내렸고 에른하임의 대답과 함께 곧 문밖을 떠나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에른하임의 걸음이 빠른 편이었지만 하연은 그가 돌아오려면 적어도 30분 정도가 걸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혼자서야 왕북 15분 정도면 충분하겠지만 이곳의 신관들은 걸음이 거북이에 비견될 정도로 느렸다. 그나저나 그 30분 동안 뭘 하나 곰곰이 생각하던 하연은 그제서야 황제가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이유를 아직 듣지 못했다는데 생각이 미쳐 이제는 약간 자신과 떨어져 앉아있는 황제에게로 몸을 돌렸다. “왜 불렀어요?” 황제에게 하는 말치고는 참으로 버릇없다고 생각될 말투였지만 이 고요한 침묵에 짓눌린 하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주어를 끊어먹은 그 짧은 대답에 하연은 저게 무슨 말인가 하고 머리를 굴려야 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의 말은 황제인 자신이 황후를 찾아오는 것보다는 황후가 직접 찾아오는 것이 낫다는 의미로 해석이 되었다. 하지만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오라가라 하다니, 게다가 별로 급한 일도 없어보이는데 부른 것이 분명한 황제의 대답에 하연은 조금 심통이 났다. “직접 할 수도 있었잖아요.” 자신도 모르게 약간의 원망이 섞여 있었지만 하연은 그것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황제라는 이유로 타인의 사정은 고려하지도 않고 중요한 일도 아닌데 사람을 불러 쓸데없이 시간 낭비를 하게 만드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황제를 원망어린 눈길로 바라보았지만 그는 테라스로 연결된 창문 겸 문인 대형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정원을 바라보는 듯 했다. 하연은 대답을 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에게 조금 더 성질이 났다. 하지만 감히 황제더러 너 내 말을 씹는거냐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그저 성질만 삭이는 수밖에. 그를 다시 한 번 노려보는 순간 황제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하연을 향했다. ‘헉! 또 왜 저런 얼굴로 나를 보는 거지? 설마 아까 내가 노려본 걸 눈치챈걸까?’ 하연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까의 예행 연습 때 보았던 약간은 무서운 느낌마저 드는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면 마치 뱀 앞의 쥐처럼 꼼짝을 할 수가 없었던 터라 하연은 살짝 시선을 황제의 옆에 있는 작은 화병으로 돌렸다. “저기.. 제 말은 별것 아닌 일에 사람을 오라 가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건데...요.” 시선을 돌린다고 그 사람이 뿜어내는 기운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왠지 자신을 압박해 들어오는 그의 기운에 하연은 말꼬리를 흘렸다. “나에게는 중요한 문제다.” 더없이 고압적이고 확신에 찬 말투. 정녕 뿌리부터 황제인 자만이 당당하게 저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찮은 일로 사람을 불러놓고도 저렇게 당당할 수 있다니. 하지만 분하게도 저 모습이 너무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 하연은 한숨을 쉬었다. ‘이건 뭐라고 할 수도 없잖아. 하지만 겨우 자신이 직접 온다는 것 하나에 그렇게 정색을 할 필요는 없는것 같은데. 급하면 자기가 먼저 찾아올 수도 있잖아.’ 그나저나 자신이 물은 것은 그런 질문이 아니었다. 이곳에 자신을 왜 불렀는지는 알아야 했다. 지금 이렇게 슬그머니 넘어가 버리면 황제는 자신을 또 부를 것이 아닌가. 하루에 한번 보는 것도 이렇게 불편한데 또 다시 부른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하연이 자신을 오라가라 하는 것은 더 이상 상관없다는 듯 대답을 요구했다. “알았어요. 그나저나 아까 질문에 대한 답은요?” “...방금 하지 않았나. 그러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뭔가 핀트가 조금씩 어긋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잠깐만요. 그려면 절 이곳까지 부른게 그저 당신 말에 잘 따르는지 보려고 불렀다는 건가요? 뭐 다른 할 말이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물론 당신이 아까 그게 중요한 문제라고 말한 것도 이해하고 황제로서의 위엄이나 권위의 문제가 달린 것은 이해하지만.. 정말 그것 때문에 부른 건가요?” 허탈했다. 그럼 뭔가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 있는 것처럼 허둥대던 시종의 모습은 그저 지나친 직업의식과 결부된 자신의 착각이었단 말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옷이라도 갈아입고 왔을텐데. 허탈해졌다. 겨우 황제가 급히 부른다는 소리에 겁을 먹고 쪼르르 달려온 자신이 우스워졌다. “무슨 소리를 하는거지?” 황제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무언가 자신의 말이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다는 얼굴이었다. 정작 그런 얼굴을 해야 하는 것은 자신인데 황제가 그런 얼굴을 한다는 것이 의외였다. “직접 할 수도 있지 않는냐고 물은건 무슨 의미였지?” 약간은 긴장된 어조였다. 마치 무언가 다른 대답을 원한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의 질문에 솔직히 대답하기에는 황제라는 지위가 가지는 부담이 커서 하연은 주저했다. 솔직히 말할 구도 있었지만 화를 낼 것 같기도 했던 것이다. 분명 황제로서는 자신의 말이 충분히 반역(!)적인 것으로 들릴 수도 있었다. 감히 황제를 오라가라하고 그의 행동에 토를 달다니. 이 시대의 사람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솔직히 말해도.. 화 안 낼거죠?” 황제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직접 허락한 일이니 용기를 가지기로 했다. 사실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나중에 가서 딴소리는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마음속에 담아둔 말을 속여 가며 매끄럽게 말하는 것은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았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말해 버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슈마이츠가 말한 것처럼 나는 나니까. “아까 처음 질문은 왜 시종을 불러 저를 오라고 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는데요. 제가 들은 대답은 그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는 것 뿐이여서 전 단지 당신의 말에 제가 얼마나 잘 복종하는지 보려고 부른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조금 화....가 났어요.” 하연은 살짝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그는 아무말이 없었다. “그래서 별건 아닌 일이라면 직접 찾아와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순간적이지만요. 제가 기억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아서 그게 무례라고는 생각을 못했거든요.” 계속되는 침묵에 한연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문제라는 대답을 듣고는 제가 말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든거예요. 기억을 잃어서 인지 그게 황제로서의 권위에 누를 끼칠수 있는 말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거죠.” “....신관 이야기가 아니었던 거군,” “예?” 갑자기 여기서 신관 이야기가 왜 나온다는 말인가. 혼란스러웠다. 하연의 귀에 약간은 자조적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저 태도는 뭐란 말인가. 약간은 찡그리것도 같지만 공허한듯한 억누르는 듯한 웃음소리에 담긴 감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불렀어요?> <직접 할 수도 있었잖아요.> <저기.. 제 말은 별것 아닌 일에 사람을 오라 가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건데...요.> <나에게는 중요한 문제다.> <....신관 이야기가 아니었던 거군.> 뭔가 굉장히 언밸런스한 대화였던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저런 태도를 보일 정도로 어색한 대화였던가? 그 순간 신관이 도착했는지 에른하임이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한손으로 이마를 가린채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있던 황제가 고개를 들어 그들이 오는 것을 허락했다. “이제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역시 신성력이란 놀라운 것이어서 하연의 끔찍하던 증상을 말끔히 가라앉았다. 다른 사람의 눈도 있어 하연은 우물거리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긴 했지만 앞으로 당할 부작용을 생각하니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운이 좋으면 내일 연회가 끝나서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아니라면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는 것은 분명했다. “지금 그 관을 벗으시는 편이 좋으실 듯합니다. 원인이 제거되지 않으면 아까의 통증은 다시 유발될 것이 분명하니까요.” 신관의 짙은 하늘빛 눈이 따뜻한 미소를 담고 있었다. 신관복에 달린 흰색 모자같은 것에 쌓여 머리카락의 색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머리색도 밝은 청색에 가까울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보는 하늘색 눈동자였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따뜻함도.. 빠져들것만 같던... 그 고요함이 비록 색은 조금 달랐지만 그..와 비슷했다.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레기어스의 눈동자는 조금 더 슬펐지. 겉으로 보이는 장난기로 차있던 눈동자에는 그 다정함만큼이나 깊은 상처가 숨겨져 있었어.’ “....황후마마?” 그제서야 번득 정신을 차린 하연은 난감한 표정으로 금방이라도 식은땀을 줄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불안한듯 시선을 제대로 고정시키지 못하는 신관의 목소리를 들었다. 게다가 신관의 뒤에 서 있는 에른하임은 애써 고개를 외면하고 있었다. “아. 죄송해요. 방금 뭐라고 하셨죠?” 하연은 그의 말을 자신이 무시했다는 것에 미안함을 느껴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신관이 채 입을 열기도 전에 머리 위에서 낮게 일렁이는 듯한 목소리가 신관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나가라.” 의아할 정도로 상대를 향한 적의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황제의 말이 끝나자마자 신관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는 뒷걸음질 쳐 문을 열고 사라져 버렸다. 설사 몸을 돌려 걸어가더라도 그것보다 빠를 수는 없을 정도로 신속한 동작에 신관은 모두 거북이처럼 느린자들만 있다고 생각한 하연은 내심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너도 나가라.” 방안에 남아있던 에른하임을 향해 황제가 명령했다. 작은 충격에 에른하음은 몸을 움찔했다. 황제는 한 번도 자신을 향하여 너라고 한 적이 없었다. 황제가 자신을 향해 너라고 부르던 그보다 더한 말로 부르건 그것은 온전히 황제의 마음에 달린 것이고 그것을 가지고 무엇이라 할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에른하임 자신을 향해서는 한 번도 저런 목소리로 명령을 한 적이 없었다. ‘설마.. 황후마마 때문에..’ 확실하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신관을 향한 황후의 얼굴은 자신이 보기에도 너무도 명확한 감정을 싣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하지만.. “당장 나가라 했다!” 불호령이 떨어졌다. 순간적으로 터져 나온 노성에 에른하임은 뛸 듯이 놀랐다. 자신에게 쏟아내리는 그 기운은 결코 자신이 알고 있던 황제의 평소의 모습이 아니었다. 누르고 눌러 금방이라도 터질듯 팽팽한 기운을 담고 있는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에른하임은 재빨리 방을 빠져나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얼굴로 당황하여 자신과 황제를 번갈아 바라보던 황후를 황제와 단 둘이 남겨놓은채로.. ‘어쩌시려는 것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종장에게 그는 아무도 이곳에 들이지 말 것을 명했다. 전황제 때부터 이곳에 있었던 시종장답게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저 알고 싶어도 듣고 싶어도 눈과 귀를 막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었으니까.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지만 황후로서의 기본적인 자세마저도 잊은것인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히 기분이 좋아보였는데 도대체 자신이 또 뭘 잘못했다는 말인가. 도대체 저 황제라는 인간은 정말로 예측불허였다. 부드러워 보인다고 생각한 순간 무섭게 돌변하고 화산처럼 타오르다가 순식간에 빙하보다 차갑게 식어버린다. 어지간하면 성질을 부려도 봐 주려고 했는데 그 장단에 맞춰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러다가는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었다. ‘내가 미쳤지. 아까 왠지 쓸쓸해 보이는 것은 착각이나 환상이 분명해. 어떻게 아무것도 아닌데 저렇게 성질을 낼 수 있는거지?’ 마음 같아서는 당당히 맞서고 싶었지만 정작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지난번처럼 롤프라도 있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자신과 황제 단 둘 뿐인 것이다. “...미안해요.”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냐고 따지고 싶은 생각을 간신히 참고 하연은 모든 자제심을 한 방울 한 방울 긁어모아 입을 열었다. 하나도 미안하지 않았지만 일단은 굽히고 들어가야 했다. 더러운 것은 피해가라 했다. 괜히 성질을 건드려 일을 크게 부풀리고 싶지는 않았다. 하연은 새삼스래 자신을 이곳으로 밀어 넣은 브로마네스를 생각하니 이가 갈렸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전부 그 깜장 도마뱀 때문이다. 억지로 황후를 시킨 것도 자신에게 황후가 죽었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은 것도 전부 그 녀석이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이건 숫제 싸움을 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잔뜩 비꼬인 어조에서 하연은 다시 한 번 황제라는 이름의 이 남자가 얼마나 좁은 속을 가지고 있는지를 재확인하고 있었다. “황후로서의 기본적인 자세마저도 잊어서 그게 뭔지 잘 모르겠네요. 황후로서 그런 것도 몰라 죄송합니다.” 겉으로는 정중한 말투였지만 가시가 박혀있다는 것은 아무리 신경이 둔한 자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인 말이였다. 황제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굳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하연은 상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황후로서의 기본적인 자세도 완.전.히. 잊어버린 제가 이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확인시켜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이 황후라는 자리가 저한테 과분하다는 것은 알고 있으니까요.” 솔직히 말하면 이딴 황후 줘도 싫다고 말하고 싶었다. 누군한테는 소유물 취급 당하고 누구한테는 원하지 않는 접촉까지 참아가며 저 알 수 없는 성격을 감당하는 지금의 상황은 아마 그 누구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어제 슈마이츠가 말해준 진실을 알기 전에는 자신이 다른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것이 싫어서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신이 그나마 지금까지 참았던 것은 앞으로도 계속 봐야만 하는 그와 조금이라도 잘 지내고 싶어서였고 어젯밤에 한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모욕까지 받으면서 자신이 굽히고 들어갈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 * * * * * 뭔가 굉장히 좋지 않은 꿈을 꾼 것처럼 머릿속이 안개로 쌓여 좀처럼 맑아지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왠지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았다. ‘무언가.. 중요한 꿈이었던 것 같은데..’ 어슴푸레하게 붉은 안개가 낀 것 같다는 막연한 영상만 떠오를 뿐이었다.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자신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과 그 이유가 분명 그 기억나지 않는 꿈이라는 것밖에는 알 수 없었지만 중요한.. 아니 소중한 기억인 것 같았다.. “황후마마 브로만 공작님의 직속 마법사이신 시엔님이 만나뵙기를 청합니다.” 시녀의 말과 함께 들어온 시엔은 하연에게 잠시 자리를 물러줄 것을 청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게 되자 그는 품에서 작은 팔찌를 꺼냈다. 브로마네스가 준 것에 비해 지나칠정도로 화려한 장식이 달린데다가 눈이 무실정도로 반짝이는 것들이 주렁주렁 박힌 부담스러운 디자인의 팔찌였다. “..이런 디자인을 좋아하나 보네요. 조금 더 수수한 쪽을 좋아할 줄 알았는데..” “뭐. 이왕이면 아름다운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일단 이 팔찌는 상상을 초월하는 가치를 지닌 마력석들이 들어간 것이니까 이왕이면 고급스러워 보여야지요. 그리고 이건 손목에 차는 거라서 특별히 외양에 신경을 썼습니다.” 고급스럽다,,,고 보기에는 돈자랑이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하연은 밤을 꼬박 샜을 것이 분명한 시엔의 얼굴을 보고는 팔에서 브로마네스가 준 팔찌를 빼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순간적이었지만 원래의 자신의 모습이 맞은편에 걸린 벽난로 위의 거울에 비쳤다. “이제 됬습니다.” “...시엔, 나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되요?” 우습게도 이곳에 온지 2주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자신의 진짜 모습이 너무나도 낯설게 보였다. 아침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깜짝깜짝 놀라던 것이 이제는 방금전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오히려 더 크게 놀라게 되어 버린 것이다. “힘드십니까.” “힘들어요.” 시엔은 위로하지 않았고 하연도 애걸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가 아무 감정없이 바라보면서 입을 열어 그것이 사실이다라는 식으로 이야기 하고 있었다. 하연도 애초에 동정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하연의 일견 담담해 보이는 눈을 바라본 시엔이 입을 열었다. “저희는 당신의 행동을 구속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한 것은 당신을 황후로 바꾸어 이곳에 데려다 놓았을 뿐이고 직접적으로 당신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한 적은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 시엔은 팔찌가 잘 채워졌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듯 한번 당겨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므로 당신이 왜 힘들어 하는지에 대한 이유도 그리고 그것에 대한 위로나 충고도 저는 드릴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당신에게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당신도 이미 그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군요.” * * * * * “...저도 이 황후라는 자리가 저한테 과분하다는 것은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하연은 자신의 눈앞에 서있는 낯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특이하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보라색 눈동자와 머리카락을 가진 황제가 아닌 그저 하나의 인간으로서 그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아니였다. 사실 그를 어려워했던 것도 그의 접촉에 무서워했던 것도 그가 황제였기 때문은 아니였다. 아무리 황제의 권력이 강하다 하나 자신이 연기하고 있는 황후의 아버지쪽이 더 세(勢)가 강하다. 처음부터 목숨의 위협을 받는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엔의 말처럼 그들은 자신에게 황후역을 잘 해내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식의 협박 도 하지 않았다. 그것에 구속되어 스스로의 행동에 의문을 가질 정도로 자신이 아닌 상태로 그를 대한 것은 바로 자신이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자신은 그의 접근을 방치했다. 그가 황제이고 자신이 황후역을 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더 이상 황제가 알고 있는 그 여인은 세상에 없다. 누군가의 의지(意志)인 것을 가장하여 자신을 속이는 행위는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었다. 무언가 강한 결심을 한듯 결연히 빛나는 흑청색의 얼어붙은 눈동자가 황제를 향했다. 조금의 두려움도 그리고 망설임도 없는 눈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더 이상 이 지위에 머무르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처음으로 하연자신의 의지로서 입을 열었다. 진심을 담아서. 그리고 조금의 미련도 남기지 않고 하연은 황제를 바라보았다. 답답하던 가슴이 일순간에 텅 비어버린듯 상쾌해져 왔다. 여기 온 이후로 정말 처음으로 맑은 머리가 되었다. 깃털보다 가벼워진 마음을 창공을 향해 비상할 것처럼 약동했다. 순간 피할 수 없는 칼이 심장으로 날라들어오는 충격이 황제를 강타했다. 삽시간에 붉은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며 두 손이 차디차게 식어가는 것 같았다. 자신의 곁에서 떠나고 싶다고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자신을 떠보기 위한 말이 아니다. 평안함, 안도감. 그리고... 해방감이 가득찬 얼굴과 눈이 그것이 진심임을 부인하고 싶지만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가지고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현실이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도..” 처음 그를 만났을 때처럼 차가운 무기질의 광택을 뿜어내는 보랏빛의 수정체가 하연을 그대로 반사해 내고 있었다. 하지만 하연은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수가 없었다. “황제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대가 황후가 된 것도 나의 의지가 아니었지, 하지만.. 그대를 보낼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바로 나다.” “...제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이 밝혀져도 그것이 가능할까요?” 어제 황제를 만나러 가기 전에 브로마네스가 말한 것처럼 황후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그것은 더 이상 황실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낸 하연이 입을 열었다. 순간 아무것도 비추지 않던 눈동자가 일순 다른 색으로 변했다. 그 알 수 없는 분위기에 압도된 하연은 몸을 떨었다. “가능하지. 그대는 잊은 모양이지만.” 갑자기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늦은 오후의 가을의 햇살이 창문사이로 환하게 들어오고 있었는데도 마치 어두운 구름이 눈앞의 황제를 중심으로 엄청난 속도로 번져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어두움이 금새라도 자신을 삼켜버릴 것처럼 입을 벌리고 달려들 것만 같았다. 순간적으로 진심으로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의 알 수 없는 저 눈동자와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저 얼굴이 피해야 한다는 이상한 충동으로 자신을 몰아가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공포감에 휩싸인 하연의 눈앞에 어느틈에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황제가 다가와 있었다.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렇게 뒷걸음을 치고 있음에도 그와의 거리는 조금도 넓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무언가 등 뒤로 단단한 것이 느껴져서야 하연은 그것이 벽이고 자신은 더 이상 뒤로 물러날 수 없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황제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는데도 하연의 가슴은 세차게 두근댔다.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터질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드는 것은 자신의 기분 탓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지독했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압박감이 짓눌러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앞으로는 그가 그리고 뒤로는 벽이 가로막은 상황에서 하연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재빨리 좌우를 둘러보려는 순간 하연의 얼굴 바로 양옆으로 황제의 팔이 빠져나갈 수 없는 장벽을 만들었다. 눈앞에는 그의 가슴이 단단한 벽이 되어 자신을 짓누르려고 하고 있었다. 그의 몸과 자신의 몸 사이에는 종이 한 장 정도의 틈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타오르는 듯한 열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그들 사이의 좁은 공간을 맴돌고 있었다. “왜.. 이러는 거예요.” 뭐라도 말을 해야 했다. 하지만 냉정해 져야 한다는 생각과는 달리 자신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지극히 작고도 가늘었다. 그리고 듣기 흉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행동 그 어느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어제 그는 자신에게 특별한 존재이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행동들은 자신에게서 그런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자기 중심적이었다. 특히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것이 진심이었는지 조차도 의심스러워졌다. 그의 시선에는 상대를 향한 조금의 배려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순간 자신의 눈만을 쳐다보고 있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고 하연은 생각했다. “그대가 기억을 잃었다 해도..” 한쪽 손이 미끄러지듯 어깨를 타고 내려와 하연의 겨드랑이 밑으로 들어와 허리를 끌어당겼다. 어느새 부딪칠 정도로 다가온 그의 얼굴이 하연의 목덜미에 파묻히다 시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의 축축하고 뜨거운 숨이 바로 귓가에 느껴졌다. 나직하고 끈적이는듯한 목소리가 하연의 귀를 간질이듯 천천히 울려퍼졌다. “...나의 아이를 가지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하연이 그 말의 의미를 채 파악하기도 전에 그는 하연의 목덜미에 입술 자국을 남기며 손바닥을 하연의 가슴 바로 아래에 댄 채로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생소하지만 은밀한 접촉은 하연을 경악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싫어! 저리 가!” 하연은 이제는 자신의 귓가를 애무하고 있는 그의 어깨를 있는 힘을 다해 밀었다. 자신의 이런 행동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황제의 몸이 잠시 뒤로 밀려났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문으로 달려가려던 하연은 자신의 손목을 단단하게 휘감아 오는 거친 손놀림에 그만 뒤로 쓰러질듯 휘청거렸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황제의 몸에 완전히 안겨버린 상태가 되었다. 등 뒤로 느껴지는 자신과는 다른 남자의 단단한 몸이 자신이 탈출에 실패했음을 잔인하게 일깨워 주고 있었다. “도망...치려는 건가?” 하연은 헐떡이는 소리를 내며 몸의 자유를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나 단호하게 허리를 휘감은 오른손과 여전히 자신의 손목을 아프도록 쥐고 있는 황제의 왼쪽 손은 하연을 놔주지 않고 더욱 자신에게로 밀착 시킨다. 으르렁 거리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안아오며 하연의 귓가에 속삭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감히 날 거부하는 건가?"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드는 차디찬 어조에는 아까의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크게 상처 입은 듯한 경직된 눈동자가 그의 얼굴위로 드러났지만 그에게 등을 향하고 있는 하연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반항을 멈추지 않는 하연을 다시 벽으로 밀어붙인 그는 하연의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한손으로 움직일 수 없게 고정시켰다. “싫다고 했나? 하지만.. 그 말은 남자를 더 자극한다는 것을 알아야지. 아니, 이미 알고 그러는 건가?”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귓가를 스쳐지나가듯 속삭이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하연은 몸을 떨었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굳어버린 가슴은 숨쉬기에도 벅찼고 입을 열었지만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극도의 공포에 질린 심장은 엄청난 속도로 뛰고 있었고 귓가에는 연신 피가 빠르게 도는 소리가 거대한 강물이 요동치듯 들려왔다. 목덜미에 닿는 축축한 숨은 최악이다. 그의 행위에 몸이 딱딱하게 굳어져버린다. 당연한 것이다. 조금의 감정도 없는 상대에게 이런 친밀한 행위를 강요당하는 것 자체가 심장을 싸늘한 공포로 채울뿐이다. 두려움으로 쿵쾅거리는 심장이 뿜어내어 혈관을 달리는 피는 차디차게 식어간다. “..!!!” 하연의 목 뒤로 황제의 손이 다가오더니 거칠게 옷을 잡아 당긴다. 후두둑거리는 소리와 함께 섬세한 천이 강한 힘을 견디지 못하고 숨기고 있던 우유빛으로 빛나는 매끄러운 피부를 드러냈다. 싸늘한 공기가 맨살에 닿자 견딜수 없을만큼 온몸이 후들거리며 떨려왔고 더 이상 서 있을 힘이 없을 정도로 다리에 힘이 빠져왔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손에 의해 벽에 고정되어 있는 두 팔은 쓰러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차가운 공기와는 대조적으로 뜨거운 손이 하연의 도드라진 목뼈와 척추를 따라 미끄러지듯 아래로 향했다. 수치심과 공포가 하연을 감쌌다. 한 번도 누군가에게 자신을 이렇게 만지도록 내버려 둔 적은 없다. 그것도 이렇게 굴욕적인 자세로 능욕을 당하는 것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그의 손이 주는 것은 오로지 쓰디쓴 모멸감과 증오뿐이었다. 순간 경련하듯 하연의 등이 꿈틀거렸다. 손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목덜미에 닿아온 것이다. 손가락보다 더 뜨겁고.. 축축한 것이 유난히 드러나는 목뼈에 닿았다고 느낀 순간 단단한 것이 그것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동작으로 그것을 빨아들일 듯이 애무하는 피부가 닿아오자 하연은 혐오로 온몸을 굳혔다. 그리고는 아까보다 더 세차게 반항했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무슨 짓이야! 이 개자식아!” 극도의 위기의식에 하연의 입이 열렸고 거센 거부의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퍼지는 순간 황제의 동작도 마치 그대로 굳어버린 것처럼 멈춰버렸다. 방안을 메우는 것은 오로지 하연의 분노에 찬 헐떡이는 숨소리 뿐이었다. 그러나 하연을 놓아주지 않는 황제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즐거움이라는 감정과는 거리가 멀다. 마음 속에서 스믈거리며 올라오는 불쾌한 기분과 파괴의 충동이 고개를 들며 떠오르고 있는 얼굴이다. ‘정말로... 기억하지 못하는 거군..’ 이 몸은 자신을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 언제나처럼 자신의 손길에 부드러운 신음을 흘리는 던 붉은 입술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만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도망치려 한다. 달아나려 한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자신의 몸은 제어할 수 없는 괴물이 되고 있었다. 지독한 이기심으로 가득찬 모든 것을 삼켜버리고 싶어하는 괴물로 변하려 하고 있었다. 한 가닥 이성의 끈으로 붙들어 놓은 그의 정신은 이제는 그만 두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이거 놔! 나한테 그런 더러운 짓 하지 말란 말이다. 난 장난감이 아니야!” 순간 머릿속에서 간신히 붙잡고 있던 한 가닥 가느다란 이성의 끈이 툭하고 끊어졌다. 순식간에 자신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격심한 분노가 온몸을 감싸고 그것은 이성을 마비시켰다. 하연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손이 가느다란 목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허공위로 고정시켰던 손이 풀림과 동시에 하연의 어깨를 격하게 잡아 돌렸다. 빠져들 것 같다. 말하자면 그랬다. 한 점의 티끌도 없는 밤하늘을 닮은 눈동자가 격렬한 감정을 담고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바다 빛을 머금은 흑진주를 연상시키는 눈동자였다. 영원히 바라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묘한 마력을 지닌 눈동자이다. 하지만.. 자신을 비추고 있는 저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오로지 혐오와 공포 그리고 불안과 수치심만이 담겨 있을 뿐이다. 자신을 향한 따뜻함이라곤 단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다. 사납게 자신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그 아름다운 눈동자가 자신이 싫어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리고..그것은 난생 처음 느껴보는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다. 아무리 안달해도 손에 닿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부당했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왔다. 자신에게 붙들려 꼼짝도 못하는 지금의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그 영혼은, 자신을 똑바로 직시했다. 벗어나고야 말겠다는 의지만으로 있는 힘을 다해 반항하고 있었다. ‘왜.. 저렇게 바라만 보고 있는거지?’ 조금은 진정된 듯 멈춰서 자신을 바라만 보고 있는 황제의 모습에 망설이던 하연이 막 입을 열러는 순간 목에 감아오는 손아귀의 힘이 점점 강해졌다. 억세게 숨구멍을 틀어막는 손아귀에 숨이 막혀서 켁켁거리자 그는 손아귀의 힘을 빼지 않은 채로 입술을 겹쳐 순식간에 입안을 점령해버렸다. 끈적하고 미묘한 내음을 품은 혀가 거칠게 입 안을 파고 들었다. 점점 숨쉬기가 곤란해지고 있었다. 이건 키스라기보다는 마치 모든 것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겠다는 약탈자의 광기이다. 그의 혀가 끊임없이 하연의 혀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의 혀는 점점 더 깊숙히 들어오려 안간힘이다. 하연은 숨을 쉴 수 없어 고통스러웠다. 갈 곳을 잃은 탁해진 피가 얼굴로 려든다. 금새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지만 황제는 눈치채지 못했다. 억세게 저항하며 그의 가슴을 밀어대던 손이 조금씩 힘을 잃어갔다. 버둥거리며 돌리려던 고개는 마치 이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듯 머리카락을 파고든 손위에 얌전하게 놓였다. 어둡게 변했던 얼굴은 이제는 핏기가 가시며 새파랗게 변해갔다. "허......헉헉............." 이제는 정말 숨이 막혀 죽는구나 라고 생각한순간 황제가 떨어져 나갔다. 폐 속으로 타인의 숨결이 아닌 공기를 들이마시자마자 온 몸에 힘이 빠져 바닥으로 축 늘어졌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을 떨어짐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황제는 하연의 허리를 그의 손으로 받쳐들었다. "입을 벌려라." 황제가 나직한 어조로 명령했다. 거역하면 목뼈를 부러뜨리겠다는 듯이 손에 힘을 준 상태였다. 여전히 숨이 막혀서 머리가 몽롱했지만 다시 부딪혀 오는 입술에 입을 열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입안에서 움직이는 그의 혀를 피해 움직였다. 하지만 오히려 자신을 추격하다시피 쫒아오는 그의 격해진 움직임에 지쳐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그는 손가락을 풀고 하연의 머리를 당겨 깊숙이 키스를 퍼부었다. 그는 차가운 자수정을 닮은 눈동자를 가늘게 뜬 채로 하연에게는 잔혹하게만 느껴지는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약간의 부드러움마져 담겨 있다. 지독히도 상반된 두가지 표정을 공존시키며 황제가 입을 열었다. "한 번만 더 그런 말을 하면...." 느닷없이 가슴 주위를 더듬던 황제의 손가락이 하연의 목에 얽혀왔다. 그는 목을 조일듯이 사나운 표정이 되어서 새하얗게 질린 얼굴 위로 뜨거운 숨결을 쏟아 부었다. 잠잠하다고 생각했던 광기가 다시 돌아온 듯 부드러운 표정은 씻은 듯 사라지고, 짙어진 보라빛의 눈동자를 일그러뜨리며 또박또박 속삭였다. "너의 동의가 없다해도 이 자리에서 너를 당장 안아버리겠다. 그러니 나에게서 도망치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가늘게 뜬 눈은 묘하게 만족감을 띄었던 아까의 얼굴과는 또 틀렸다. 뒤로 넘긴 보라색 머리카락은 그 표정을 더욱 강렬하게 만든다. 꽉 다문 입매는 예리한 선을 그리고 있고, 보라빛의 눈동자엔 확답을 요구하는 빛이 담겨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자신의 품안에 온전히 안겨있는 자신만의 아름다운 여인이다. 자신의 손에 의해 흐트러진 윤기나는 청흑발은 보는 것만으로도 매혹시키고, 이목구비는 얼음을 깎아낸 듯 맑고 투명했다. 순진해 보일 정도로 깨끗한 얼굴은 오히려 그 때문에 요염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자신을 자극한다. 부풀어 오른 입술이 더욱 농염한 붉은 빛으로 자신을 유혹한다. 하연은 아득해져 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았다. 자신이 온힘을 다해서 반항을 했는데도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힘이 빠져버린 것은 자신이었다. 자신을 받치고 있는 손이 그가 찟어버린 옷 사이로 드러난 등을 어루만지고 있었고 자신의 팔다리가 그에게 엉켜있는 상황에서도 몸 하나 추스르기가 힘들었다. 격한 키스로 부풀어 오른 입술이 어딘가 상처가 났는지 따끔거려왔다. “대답해! 절대로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지금 약속해라. 그렇지 않으면..” 거의 검은색으로 변한 눈동자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하고 싶어하는 말이 무엇인지 깨달은 하연은 억지로 입을 벌렸다. 그는 진심이다. 자신에 대한 감정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이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분명 이 곳에서 자신을 취할 것이 틀림없다는 것만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ㄱ.....” 너무나 작아 스스로도 그 말을 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황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무런 대답도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가 손을 들어 하연의 턱을 잡아 자신의 얼굴로 가까이 가져갔다. 그제야 달싹이는 입술사이로 들려오는 바닥으로 꺼져가는 것만 같은 신음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께요. ” 모든 것을 체념한듯 한 마디 한 마디 힘겹게 만들어내는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긴 맹세의 말이 다시 한 번 듣고 싶어 그는 하연의 목과 귓볼을 입술로 쓰다듬으며 말을 재촉했다. “이름도 불러라. 하티무르라고. 네 입에서 들리는 내 이름을 듣고 싶다.” "하..하티무르........" 자신도 모르게 애원하는 목소리가 나온 것에 지독한 수치심이 들었지만, 지금은 이거 저거 가질 처지가 아니었다. 처음 보는 나른한 얼굴로 태연하게 몸을 더듬는 황제에게 달아나야만 했다. 그가 시킨대로 이름을 부르자 그는 잠시 손을 멈추고 하연을 내려다 보았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결국은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워서 그의 요구대로 그의 이름을 불러야만 하는 자신이 수치스러워서 하연은 울음을 삼키며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의 느낌이 너무 뜨겁고 생소하다. 울음을 참느라 입술을 질끈 감는데도 입술이 파르르 떨려오는 느낌이 끔찍하다. 하연의 쥐어짜내는 음성은 그것이 자신의 강압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을 드러내듯 힘이 없었다. 하지만 그 원인이 어디 있던 간에 좋았다. 자신이 들은 것은 분명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맹세이다. 그의 한 손이 어느새 풀려버린 하연의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의 몸으로 천천히 밀착시켰다. 기운을 잃고 자신에게 완전히 밀착되듯 달라붙은 하연의 늘어진 몸을 부드럽게 쓸며 그는 묘한 도취감에 젖었다. 어깨위로 흐트러진 흑청색 머리카락에 코를 박고 그는 짓누르듯 자신의 얼굴을 하연의 머리에 문질렀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어처구니 없는 맹세를 시키는 황제도 그리고 앵무새처럼 그의 말을 따라하는 자신도 모두가 현실이 아닌 꿈처럼 아득했다. 하지만 조금싹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면서 하연은 그제서야 자신이 살아 숨쉬고 있음을 자신에게 맞닿아 있는 것이 타인의 신체임을 실감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에게 힘없이 안겨있음도.. ‘이게.. 여자의 힘의 한계라는 건가..’ 있는 힘을 다해서 반항했는데도 제대로 된 비명한번 지르지 못했다. 황제가 그렇게 덩치가 큰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약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가느다란 손가락을 지녀 그가 자신의 말을 타라고 했을 때 의심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았었다. 하지만... 자신의 전력을 다한 거부에도 숨소리 하나 거칠어지지 않던 그의 모습에서 하연은 절망을 느꼈다. 만약 그가 중간에 멈추지 않았다면.. 자신은 분명... “...울지마라.” 자신의 어깨에서 고개를 뗀 황제가 메마르고 건조한 어투로 말하는 것이 들려온다. 하지만 소리 없이 굴러떨어지는 눈물방울만큼은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얼굴을 당겨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서 바라보던 그가 입술로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 자국을 지워 올라갔다. 하지만 샘물처럼 솟아나는 눈물방울은 기어코 그의 손으로 흘러떨어졌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강제로 몸을 빼앗길뻔 했다는 충격보다는 누구의 도움도 구할 수 없다는 차가운 현실이 주는 살점이 도려지는 듯한 고통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은 혼자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혼자. 텅 비어버린 가슴이 금방이라도 깨어져 버릴듯 아파온다. ‘아파.. 혼자라는게.. 이렇게 슬픈건줄은.. 몰랐어..’ 그런 눈을 보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비어버린 눈을 보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생기를 모두 빼앗긴 사람 같은 그런 눈을 보고 싶은게 아니었다. 생기 넘치는 것으로 가득한 눈을 가지고 싶었다. 그래고.. 말뿐인 맹세라도 듣고 싶었다. 짧은 순간 세상을 얻은듯 기뻤다. 하지만.. 그 순간의 희열이 끝난뒤에 남겨진 것은 쓰디썼다. 사실....안고 싶었다. 그녀를 안고 싶었다. 키스 할때마다. 그녀의 온기가 내 피부에 닿을때마다. 내 안에 가두고 아무도 보여주지 않은채, 그 하얀 피부에 나를 각인시키고 그 붉은 입술에서는 고혹적인 미성과 신음이 흘러나오게 하고 싶었다. [이거 놔! 나한테 그런 더러운 짓 하지 말란 말이다. 난 장난감이 아니야!] 손이 닿을 때마다 격렬하게 반항했다. 마치 나무토막처럼 뻗뻗해졌다. 그렇겠지..... 견디기 힘들어서.. 날 지워버렸으니.. 기억할 리가 없지. 이미 그 마음은 영원히 사라져 버렸으니 더 이상 날 향한 마음은 생기지 않겠지. 하지만.. 평생 내 곁에만 둔다면...그걸로도 족해. 마음이 아닌 몸뿐이라도...그걸로도 족해.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아픔이라 할지라도. 하지만... 텅빈 껍데기만으로.. 난 만족할 수 있을까... 어째서...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들은 언제나 내 손을 빠져 나가는 것인가. 지금도 이렇게 바로 옆에. 내 품안에 나의 것인데 너무나 멀게만 느껴진다. 그녀가 떠나지 않겠다 약속했는데도 마음은 오히려 더 텅 비어버린다. 그녀의...마음까지는 바라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가슴이 이렇게 아파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때 심장이 찢어질듯한 아픔을 아고 있었기에... 아무리 여러번 겪어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을 아픔인줄 알고 있었기에 외면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손에 쥐었던 것이 내가 가장 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왜... 그때는 깨닫지 못했을까. 더 이상 나를 보기를 포기한 그녀를... 붙잡아 두는 것은 이따위 치졸한 짓 뿐이라는 건가. 혐오스럽다. 하지만.. 난 포기 하지 않아. 그대처럼 무책임하게 상대를 버려두고 혼자만 살아남는 사랑따위는 난 모른다. 그러니까.. 난 절대로 포기하지 않아. 그대가 날 미워한다고 해도.. 날.. 거부한다고 해도.. 그대를 놓아버리는 일따윈 절대로 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그대로 하여금 나의 심장에 칼을 박아넣게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도.. 좋겠지. 그대의 손으로 이 집착의 고리를 끊어버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그대를 향한.. 이 가슴아픈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 * * * * ...생각해 보건대, "사랑해" 는 고백입니까, 명령형입니까. * * * * * ***위의 사랑해..는 어디서 가져오긴 했는데.. 어딘지는 까먹었어요. 전 돌아다니다가 좋은글은 모아놓거든요. 심지어는 만화책의 대사도 베껴놓는...가끔은 외어버리는 짓도 한다지요. (그러나 절대로 출처는 적지 않는다. 당장 적을 것도 많은데.. 게다가 헷갈리기도 하고)**** <1> ‘정말이지 한심하군, 나는 또 홧김에 그녀를 난폭하게 다루려고 했다. 누구보다도 소중하게 대해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데도 그녀의 일이라면 도무지 냉정해 질 수가 없다.’ “기분좋은 환상을 보여주는 말이군. 이렇게까지 내게 반해 있는 것처럼 말하다니. 하지만.. 네 생각은 자유를 얻고 나면 나를 포기할 생각 이었겠지. 너는 언제나 그래. 너는 나를 쉽게 포기할 수 있다. 내가 아무리 우리의 관계를 강하게 만들려고 해도 깨끗이 버려버리지. 그럼 나는 어떻게 되지? 너를 도망칠 수 없는 곳까지 몰아부쳐서 단단히 조르고서 동째로 삼켜버릴 수밖에.. 너는 내가 이런 놈이라는 걸 모르겠지? 만약 네가 진짜 날 알게 된다 해도 그때는 이미 내게서 벗어날 수 없어.” “그에게와 같은 똑같은 감정은 바라지 않아. 지금 네 옆에 있는건 나다.” “상처입힐 생각은 아니었다. 그녀는 언제나 많은것을 응시하고 있어, 그 눈동자.. 나만 비추고 있다면 좋을텐데.. .” “사랑하니까 누구보다도 독점하고 싶은거다. 그래서 모든 것을 속박하고 싶어.” “네가 다가올 수 없다면 내가 빼앗겠어....난 빼앗을 수밖에 없다. 빼앗는 걸로 밖에는 사랑할수 없어.” <2> “사랑이란걸 자각한 순간 실연인가. 꼴사납군.” ‘제길. 내가 도대체 뭘하고 있는거지? 미련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발길이 향한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그랬지. 상대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쉽게 포기가 안 된다. 나도 참 질리지도 않는 남자로구나.’ ‘이사람은 내 친구가 사랑하는 사람 나로서는 멀리해야할 존재다, 그래.. 난 이 사람이 나에게 호의를 보일 때마다 행복했어, 잃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어느틈엔가 가까운 존재가 되어 있었어. 나 역시 그 사실과는 상관없이 당신과 알고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단지.. 좋아한다는 감정만으로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는 건 이제 내 쪽에서 사양이야.’ “지금까지 고마웠어. 하지만 정말 더 이상은.. 뭔가를 기대하게 될 것 같은 내 자신이 무서우니까..” “이제 그만두자.‘친구놀이’라는 건 역시 나한테는 무리였어. 미안하지만 널 더 이상은 보고 싶지 않다.” 이게 무슨 짓이야. 하지만.. 그녀의 눈물을 본 순간 내 몸에서 뭔가가 폭팔했다. 작은 몸에서 넘치도록 큰 슬픔과 의미를 감추고 있던 그녀를 양팔로 끌어안고 놓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뿐이었다. 인간으로의 분별이나 도의에 너무 얽매여서..하지만 지금은 마음속이 똑똑히 보인다. 내가 바라고 있는 것. 내가 손을 놓으면 안 되는 것.’ “..사랑하고 있다.” <3> ‘그것만은 잊지 말아줘. 사랑했었다는 것만은 기억해 줘.’ 그렇게 자상하게 대해주니까 자꾸만 착각하게 되잖아. 차갑게 말하고 난폭하게 굴면서.. 지금은 또 왜 그렇게 자상한거야. 하지만.. 좋아해주지 않을 거라면 자상하게 대해주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무해.. 왜 그렇게 오해할 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거야? 잔인해도 냉정해도 난폭해져도 좋아. 내가 아무생각도 할 수 없게 될 정도로 행동해. 그래서..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부드럽게 굴지 마.. ‘이상한 기분이 든다. 어쩔 수 없이 따라온 것 뿐인데.. 즐거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설정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작가의 정신상태에 따라서..-_-;;; 우울모드를 타는 중이라.. 지금은 언해피안 이야기만 나오고 있습니다.) *인물설정* 황제(일단은 하티무르라고 불리지만..) 이것은 제가 네이버에서 찾아 제 뜰에 올렸던 글입니다. ▶ 보라(violet) 보라는 직관적인 색이다. 자수정처럼 정신적이고 사려 깊은 색이다. 보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천부적이고 직관력이 좋다. 때로는 수줍음이 많아 세상과 등지고 틀어박혀 지내는 일이 있다. 또한 이것과는 반대로 지도적인 입장에서 위엄과 기품을 지닌 사람도 있다. 하지만 고도의 감성이 오히려 화가 되어 다른 사람을 신용하지 못한다. 일은 언제나 굳은 신념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해치운다. 보라색의 또 하나의 측면은 불가사의해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기품이 높은 색으로 간주되고 있다. 보라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문화적 지향성이 있고 예술가에 압도적으로 많다. 다른 한편으로는 거만하거나 아니꼬워 보이는 타입도 있다. 일반적으로 감성이 뛰어나다. 자만심은 감출 수 없다. 세련된 예술을 좋아하며 인생을 유유자적하게 즐기는 방법을 알고 있다. 신의 색이라 하여 영적인 것을 나타내며 마음 깊은 곳의 억압된 감정과 연관성이 있다. 이에 반해 고귀하고 장중한 느낌을 주는 색이기도 하다. 직관력이 있지만, 격려의 날이 필요하다. 보라색을 고집스럽게 많이 사용하는 사람은 불행한 느낌과 관계가 있으며, 불안정을 뜻한다. 진구들로부터 고립상태에 있는 사람이 많으며 자기의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다. 사랑을 그리워하는 형이다. 감상적인 성격이어서 우울하고 고독한 감정에 잘 빠진다. 보라색은 숭고, 천사, 냉철, 천사의 사랑, 신비, 우아, 고귀와 무한한 사랑의 감정을 뜻한다. ->처음엔 생각없이 썼는데.. 제가 생각한 황제의 이미지와 너무 닮아서 놀랐답니다. (돗자리 펴고 앉아도 될듯.. 내일은 레기어스의 성격이나 알아볼까나.. 하지만 하늘색이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