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31-01-2001 19:25 Line : 996 Read : 4708 [1] 마신 소환사 -1~9- -------------------------------------------------------------------------------- Ip address : 211.112.121.180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88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0-12-08 , 04:10:03 PM 마신 소환사 -1~9- ...님의 요청에 의해 다시 올립니다. 재미있게 봐주세요.^-^ prologue 태어날 때부터 몸이 허약하긴 했지만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운동을 잘하는 사람보다는 똑똑한 사람이 더 좋았으니까. 그런데 뇌종양이라니...... 가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기는 했지만 내가 그런 특별한 병에 걸릴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주변 에 별로 아픈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그런 병은 단순히 소설 속의 주인공이나 걸리는 병이라고 생 각했던 것이다. 의사로부터 짧으면 삼 개월 길어야 일년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 는 것 같았다. 너무 어이가 없어 눈물도 나지 않았다. 낮이라 집안은 텅 비어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TV를 틀자 정말 즐거운 듯이 웃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갑자기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죽게 된다는 사실이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두려웠다. 살고 싶어! 누군가 제발 날 도와줘! 제 1장 소환. 마신 카이람은 태초이래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처음으로 들었다. 순수하고 강한 부름. 그 것은 기적과 같았다. 흥분한 카이람은 즉각 그 부름에 응했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은 눈물로 푹 젖은 베게를 베고 잠이 든 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순결한 처녀의 내음을 맞은 카이람은 그녀가 제물이라고 생각해 자신을 부른 소환자를 찾아 주위 를 두리번거렸다. 부하 마족들의 말에 따르면 인간들이 그들을 부를 때는 보통 계약의 조건으로 순결한 처녀나 어린아이를 바친다고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소환자를 찾을 수 없었다. 설마 자신을 재물로 소원을 말할 생각인가? 태초의 소환자가 계약을 하자마자 죽여버린다는 것은 그로서는 무척 애석한 일었다. 이것이 첫 번째 소환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카이람은 여인을 불렀다. [네가 날 불렀느냐?] 하연은 그렇치 않아도 지끈거리는 머리속에서 누군가 소리치자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저 잠이 들어 이 고통을 잊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계속해서 울려댔고 하연은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시끄러워! 저리 꺼져!" 카이람은 기가 막혔다. 부를 때는 언제고 나타나 주니까 꺼지라니...... 게다가 자신은 대마신 카 이람이 아닌가? 하찮은 인간 따위가 그에게 소리를 지르다니...... 분노한 카이람의 몸에서 불꽃의 화염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카이람은 차마 하연에게 그 분노의 불꽃을 뿜어낼 수는 없었다. 태초이래 처음으로 그를 불러 준 인간이 아닌가? 또 언제 누가 자신 을 불러 줄지 알 수 없는 이 때 이 인간을 간단히 죽여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애꿎 은 지붕만 날려 버리고 말았다. 콰앙! 지붕이 날아가는 소리에 하연은 겨우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달빛이 환하게 비치고 있었다. 달이 참 밝군 하고 생각하며 다시 잠을 자려던 하연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벌떡 일어났다. 분명 집에서 잠이 들었는데 달이 보이다니...... [정신이 들었으면 나를 보라!] 하연은 마치 무언가에 끌리듯 고개를 들어 카이람을 보았다. 머리에 두 개의 기이한 뿔이 달렸고 온 몸이 붉은 대다가 이마에는 붉꽃 문양의 낙인이 찍혀 있었 다. 그리고 소의 꼬리 같은 긴 꼬리 끝 부분에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 꼬리를 어깨에 걸치 고 당당히 서 있는 거대한 짐승의 모습이라니 흡사 지옥의 악마와 다를 바 없었다. 하연은 하얗게 질려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정작 미칠 것 같은 것은 그 때까지 깨어질 듯 이 아프던 머리가 상쾌할 정도로 또렷해지기만 할 뿐 쓰러지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멍청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하연을 보며 카이람은 자신의 위대함에 감탄하고 있는 하찮은 인간 의 모양새에 은근히 만족하며 거만하게 물었다. [네가 나를 불렀느냐?] "......아닌데요?" 간신히 중얼거리듯 하연이 내뱉은 말에 카이람은 벌컥 화를 냈다. [무슨 소리냐? 네가 아니면 누가 날 불렀다는 말이냐? 여기에 너 말고 또 누가 있다는 거냐?] "없지만......" 하연은 골치가 아팠다. 자신이 언제 악마를 불렀다는 말인가? 그리고 악마란 존재가 부른다고 나 타나는 것이었단 말인가? 대답은 아니다였다. 게다가 자신에게 악마를 불러낼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였기에 하연은 저 악마를 부른 것은 자신이 아니다라는 훌륭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하연의 너무도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결론을 카이람은 완전 무시해 버 렸다. [너의 부름에 따라 여기 나 대 마신 카이람이 소환되어 왔느니라. 나와 계약을 하겠느냐?] 대 마신! 계약? 혹시 벌써 죽어서 지옥의 관문을 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얼핏 죽은 자에게는 여러 가지 인간 의 욕망을 자극하는 관문이 있어서 거기에 빠지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났 다.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한 하연은 가슴이 저렸다. 이제 두 번 다시는 부모님의 얼굴도 말썽꾸러기 남동생의 얼굴도 볼 수 없는 것이다. 슬퍼할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르자 망막했지만 어차피 산 자는 산 자의 길을, 죽은 자는 죽은 자 의 갈 길을 가야하지 않겠는가? "싫어!" 하연은 단호히 거절했다. 천당을 목표로 하는 자신에게 이건 너무 유치한 관문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그녀의 생각처럼 유치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뭐! 뭣이라?] 카이람은 대노해서 벼락치듯 고함을 질렀다. [이 내가 친히 계약을 해주겠다는데 거절을 해? 너 죽고 싶어?] 카이람의 몸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불덩어리처럼 보일 정도로 큰 불길이 그의 몸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두면 집전체가 불타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벌써 죽은 인간에게 무슨 새삼스럽게......" 다른 때라면 분명 겁에 질려 기절을 해도 예닐곱 번은 했을법한 광경이었지만 이미 죽었다고 생 각한 하연은 모든 것을 초탈한 듯한 태도로 무덤덤하게 중얼거렸다. [무슨 헛소리냐? 죽은 인간의 영혼은 영계의 권한. 아무리 내가 마신이라도 결코 손 델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럼.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거야?" 카아람의 말을 곰곰히 되세기던 하연은 펄쩍 뛸 듯이 놀라서 외쳤다. "그런데 어떻게 악마가 내 앞에 서 있는 거지?" [다시금 또 말을 반복하게 만들지 말아라. 네가 불렀지 않느냐?] "하지만 난 그런 기억이......?" [정말 짜증나는 인간이군. 분명 불렀다. ......도와달라고.] 카이람의 붉은 눈이 물끄럼히 하연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그래서 뜨겁게 보여야 마땅할 그 눈동자를 처음 마주했을 때 하연이 느낀 것은 이질적인 차 가움이었다. 그런데 이 순간 그 눈길이 왠지 부드럽게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하연은 어쩌면 저 악마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누군가라도 좋으니까 자신을 도와달 라고 밤새도록 기도했었던 것이 떠오른 것이다. 그런데 그 기도의 대답으로 악마가 나타나다니...... 그런 기도에 응답해 주어야 할 대상은 천사 가 아니었던가? 얼마 되지 않은 생이었지만 그 동안 자신이 그렇게 잘못을 많이 저질렀던가 하고 하연의 자신의 생을 반추해 보았다. 하지만 이렇다할 잘못을 저질렀던 기억은 없었다. 그야말로 모범생처럼 따분한 인생을 살았을 뿐.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차라리 이것 저것 하고 싶 은 일은 다 해보는 건데. [계약을 하겠느냐?] '뭐, 이제부터라도 나쁠 것은 없겠지.' "어떻게 하는건데?" [네가 원하는 것을 말해라. 대가에 따라 그 소원을 들어주겠다.] "대가? 어떤?" 미심적은 눈길로 하연은 카이람을 노려보았다. 터무니없는 대가를 내 놓으라고 하면 당장 모든 것을 덮어버리겠다는 각오로. [음, 내 부하들의 경우 순결한 처녀나 어린 아이의 피를 받았다고 하더군.] 흥분한 듯 카이람의 주변에서 불꽃이 춤을 추듯 움직였다. 하연은 기가 막혀 멍하니 그런 카이람을 보다가 문뜩 떠오른 생각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래서, 너도 부하들이나 받는 그런 제물을 받겠다는 거야? 명색이 대 마신이라면서?" 순간 카이람의 주변에서 춤추던 불꽃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카이람 이 물었다. [대 마신의 품격에 어울리는 제물로 뭐가 있을까?] 하연은 씩! 웃으며 자신의 컬렉션을 자랑하듯 선보였다. 스타 크래프트, 은하영웅전설, 창세기전, 드레곤 퀘스트, 킹오브 파이터즈, 아랑전설, 파이널 판 타지, 삼국지 등을. 그러나 카이람은 그저 멀뚱거리며 쳐다볼 뿐 게임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들 컬렉션들을 보고도 조금의 감동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저건 인간이 아니었지.'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느끼며 하연은 스타크 CD를 컴퓨터에 넣었다. 그리고 시범을 보여주었다. 역시나 카이람은 금방 그 게임에 빠져들었다. '한번 게임에 빠지면 도박이나 마약처럼 끊기가 어려운 것.'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하연은 빼앗듯이 자신에게서 마우스를 잡아 채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카이 람을 즐겁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초보자인 카이람은 곧 게임오버되고 말았다. "어때? 이 정도는 되어야 대 마신의 품격에 어울리는 제물이 아니겠어?" 동의하듯 카이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럼 이 게임CD 모두를 놓고 계약을 하자.] "뭐! 무슨 헛소리야! 이 게임CD들의 가치를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이것 한 장이면 혼자서 평생 을 즐길 수 있는 오락이라고. 그런 즐거움을 겨우 계약 하나와 바꾸란 말이야? 절대 안돼!" 죽어 저승을 가더라도 이 게임CD들만은 기필코 갖고 가겠다는 황당한 결심을 하고 있던 하연으 로서는 당연한 말이었다. 그러나 카이람이 누구인가? 지옥의 불이라고 불리는 대 마신이었다. [그럼. CD 열 개.] "좋아, 양보했다. 2장." [째째한 인간 같으니라고. 8개.] "인심썼다. 3장." [할 수 없군. 다섯 개. 나도 이 이상은 양보할 수 없어.] 신중히 생각해 본 하연은 동의했다. "좋아. 계약하지." [소원을 말해봐라!] 소원? 살고 싶어. 하지만 하연은 그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런 소원을 들어 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으 니까. 대신 그녀는 말했다. "모험을 하고싶어." [모험?] "그래. 울트라 스페셜 판타스틱 어드벤쳐." 카이람은 어리둥절했다. 소환자의 안색에서 꺼져 가는 생명의 불꽃을 본 그는 당연히 하연이 자 신의 생명을 불꽃을 연장시켜 달라고 말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모험을 하고 싶다 니......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하기 힘든 황당한 인간이었다. 문뜩 카이람은 이 인간을 시험해 보고 싶어졌다. 과연 이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할까? [좋아. 너를 내가 사는 차원으로 보내주지. 신비한 모험이 네 앞에 펼쳐질 것이다. ] 제 2장 모험의 세계로. 의식이 흐릿해지며 마치 마신의 말이 꿈속에서 들리듯 하더니 하연은 그만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연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온통 은빛으로 빛나는 세상이었다. 뭐라고 해야할까? 온통 눈부신 은색의 가루로 뒤덮여 있는 듯한 곳이랄까? 천장을 보니 석굴에서 나 볼 수 있는 종류석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아마도 동굴의 내부인 듯 한데 그것은 일찍 이 하연이 본적이 없는 신비로운 아름다움이었다. 멍하니 그 광경에 넋을 잃고 있던 하연은 어디선가 시계추 소리처럼 일정하게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자신이 이곳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여긴 어디지?" 그 때 그 물음에 대답하듯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실버 드레곤 칼링스타의 레어다.] "......드... 레곤의 레어? 여기가 드레곤의 집이란 말이야?" 하연은 새삼스럽게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 드레곤이 살만한 환상적인 곳이었다. 그러다 문뜩 어떤 생각이 떠오른 하연은 헬쓱해진 안색으로 물었다. "설마 아무리 내가 울트라 스페셜 판타스틱 어드벤쳐를 하고 싶다고는 했지만...... 드레곤 슬레이 어가 되라는 말은 아니겠지?" [흠. 그것도 좋은 생각인데?] "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 멍청한 마신아! 꼭 초보 게이머 티를 내요, 티를! 드레곤은 가장 나중에 나오는게 게임의 정석이야. 최강의 적수를 처음부터 만나게 하면 어떻게 해? 맨 처음에 는 슬라임부터 시작하는거야. 거기다 마법 방어구와 무기가 갖춘 상태에서." 하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앞에 갑자기 번쩍 하고 빛이나더니 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불꽃같은 긴 붉은 머리를 땅에 스칠 정도로 기른 검은 피부와 붉은 눈을 한 키가 큰 샤프한 청년 이었다. 보통 인간의 모습과 다른 점이라면 약간 뾰족한 귀뿐이었다. [무슨 헛소리냐? 나처럼 똑똑한 마신을 보고? 게다가 경고해 두겠는데 이것은 네가 가진 게임들 처럼 게임오버가 나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그런 게임이 아니다. 차원만 다른 뿐 이곳도 현실이 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인.] 갑자기 나타난 매력적인 청년의 모습에 말문이 막힌 하연은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다가 카이람의 말이 끝나자 설마하는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카이람을 가르키며 물었다. "대 마신 카이람?" [무슨 당연한 말을? 아! 이 모습?] 그제야 하연이 놀란 이유를 알아챈 카이람은 의기양양해 하며 말했다. [당연한 거지. 난 마신이니까. 원래 마신은 형상이 없거든. 하지만 인간이란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아서 그들이 원하는 모습대로 나타나는 거다. 또 차원마다 마신에게 요구하는 모습도 다르고.] "그럼. 이 차원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마신의 모습이 지금 그 모습이란 말이야?" [그래.] 하연은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을 한시라도 빨리 만나보고 싶어졌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기에 저 런 마신의 모습을 만들어낸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카이람은 하연이 생각에 잠기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서둘러. 곧 칼링스타가 돌아올 시간이다.] "에?" 카이람은 하연의 손을 잡아끌고 드레곤의 보물 창고로 들어갔다. 보물 창고의 한쪽에는 금화와 보석들이 산처럼 쌓여져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두르마리 종이 뭉치들과 기이한 색들의 유리병들 이 빼곡히 늘어서 있었다. 카이람이 무언가를 찾는 듯 보물더미들을 파헤치고 있을 때 하연은 두르마리 종이 하나를 꺼내 펼쳐 보았다. 드레곤의 보물창고에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진귀한 마법서일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종이 위에는 알아보지도 못할 기이한 글자들뿐이었다. 아쉬움의 한숨을 쉬며 할 수 없이 다시 두르마리를 말아 제자리에 돌려놓은 하연은 이번에는 기 이한 색상의 유리병들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색들이 너무 곱고 예뻤다. '마법의 아이템이 분명해. 이걸 먹으면 체력이나 정신력이 강해질지도.' 하지만 너무 예쁜 색상이 마음에 걸렸다. 버섯도 독버섯이 예쁘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망설이고 있을 때 카이람이 외쳤다. [찾았다.] "뭐야?" 카이람이 들고 있는 것은 긴 수정 지팡이였다. 봉 대에는 물론 끝에 둥글게 말려 올라간 가드에 도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가드에 쌓인 물빛 수정이 춤을 추듯 돌고 있었다. [현자의 지팡이다.] "마법의 지팡이란 말이야?" 대뜸 수정 지팡이를 받아 들며 하연이 물었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지팡이지.] "이걸로 무슨 마법을 사용할 수 있어?" 기대에 차 흥분한 눈빛으로 물어보며 하연에게 카이람의 대답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마법은 못해.] "그럼 이런 쓸모도 없는 지팡이는 왜 준거야?" 투덜거리면서도 하연은 그 지팡이를 버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왜냐면 예쁘니까. 그 때였다. -뭣이? 도둑 년 주제에 감히 누굴 쓸모 없는 지팡이로 매도하는 거야?-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하연은 기겁을 해서 외쳤다. "설, 설마......!" [에고 지팡이다! 예전에 현자였던 갈루마의 영혼이 갇혀 있는.] -들었냐? 난 현자의 지팡이라고. 위대하신 분이니까 앞으로 경건한 마음가짐과 공손한 태도로 받 들거라.- 당연히 하연은 지팡이의 말을 무시하고 카이람에게 물었다. "현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어쩌다가 이 지팡이 속에 갇힌 거야?" [진짜 멍청한 인간이었지. 현자가 됐다고 기고만장해져서는 드레곤에게 도전했다가 박살나고 그 수정 속에 갇힌 거지, 뭐?] "헤! 진짜 멍청한 인간이었네. 감히 최강의 마법종족인 드레곤에게 도전하다니. 그 드레곤 마음 도 넓네. 영혼이나마 이렇듯 구제해 주다니......." -크......으드득! 으드득!- 귓가에서 들리는 이가는 듯한 소리를 즐기며 하연이 말했다. 그러자 카이람도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때 칼링스타가 무지 심심했던 모양이야. 갈루마의 말이 재미있다면서 말상대를 하려고 그의 영혼을 수정 속에 봉인해 놓았으니까.] "우와! 현자다운 말솜씨였나 보네. 드레곤도 반할 정도의. 대단한 사람이었군." 카이람은 가죽 주머니에 금화를 가득 담으며 말했다. [대단한 인간이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현자였다니까 아는 것은 많을 테지. 이 세계 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너에게는 꽤 쓸만한 물건일거다. 그리고 이 금화는 여행 경비로 쓰고. 어디 보자......] 카이람은 하연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하연은 체격에 비해 큰 흰 면 티에 몸의 곡선이 잘 드러나는 낡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평범한 옷차림이었지만 하연의 긴 검은 머리와 검은 눈, 그리고 하얀 얼굴 때문에 평범하게 보이지 않았 다. 은연중 보는 이의 눈을 자극하는 옷차림이랄까? 이 세계에서 그런 모습으로 밖으로 나가면 하루도 못돼서 남자들의 먹이 감이 되어 버릴게 뻔했 기에 카이람은 안쪽을 뒤져 은빛의 실크 같은 천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하연의 몸에 맞추고 뭐라 고 중얼거리자 은빛의 천이 검은색의 로브로 변해 버렸다. 그것을 하연에게 둘러주고 카이람의 하연의 이마에다 손바닥을 올려 놓으며 다시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하연의 이마에 붉은 보석이 박힌 서클렛이 생겨났다. 한순간 이마에 뜨거운 불덩어리가 통과해 가는 듯한 느낌을 받은 하연은 놀라서 이마를 만져 보 았다. "이게 뭐야?" [네가 나, 불의 마신 카이람을 받드는 사제라는 증표다. 웬만한 인간은 감히 널 건드리지 못할 것 이다. 자, 이제 이 곳을 떠나자.] 하연은 카이람이 건내 오는 손을 잡으며 아까 갈루마가 말한 도둑 년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려 묻 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주인의 허락도 없이 이렇게 가져가도 되는 거야?" [물론 안되지. 그런 당연한 걸 묻다니. 아마 네가 현자의 지팡이를 훔쳐갔다는 사실을 알면 칼링 스타가 당장이라도 널 디저트로 꿀꺽 삼키려고 들걸.] "뭐, 뭐라고?" 금방이라도 드레곤이 입을 쩍 벌리고 자신한테 달려드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해 하연은 몰골 이 송연해 졌다. 그러나 카이람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왜? 네가 원한 거잖아? 울트라 스페셜 판타스틱한 어드벤쳐. 드레곤한테 쫓기는 모험처럼 울트 라 스페셜한 모험도 없을걸?] -나보다 더 멍청한 인간이 있었군.- 갈루마의 감상이었다. 하연은 너무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렇게 하연이 넋을 잃고 있는 동 안 텔레포트 해 어느 숲 속 길 한가운데 그녀를 내려놓은 카이람은 단 한마디 말을 남기고는 사라 져 버렸다. [무슨 일 있으면 또 불러 줘!] 자신을 곤경에 빠트리고 도망치듯 사라져 버린 카이람에게 실컷 욕설을 퍼 붇자 어느 정도 기분 이 낳아진 하연은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엽수림을 보는 듯 곧고 긴 나무들이 빽빽이 늘어서 있는 숲은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요정이 튀 어나올 것 같이 신비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지금 하연에게 그 숲의 아름다움따위는 눈에 들어 오지도 않았다. 낯선 차원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실감이 비로소 든 듯 외로움과 막막함이 그녀를 휘감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모험의 시작이라는 사실이 떠오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가라앉았던 기분이 회복되자 하연은 짐짓 밝은 목소리로 갈루마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지?" -몰라.- 갈루마는 시쿤둥하게 대꾸했다. 왠지 속은 것 같은 기분에 하연은 억울한 듯 말했다. "......현자라며?" -혼 대륙은 대부분이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계집애야. 갑자기 텔레포트해서 떨어졌는데 그 숲 중 여기가 어딘 줄 안단 말이냐?- "그럼, 이제 어쩌지?" -멍청한 계집애 같으니라고. 지금 넌 길 위에 서 있잖아. 그럼 그 길을 따라가면 되지, 뭐가 걱정 이냐?-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중에도 하연은 무언가 현기가 긷든 말을 들은 것 같은 기분에 빈말이 아니라 갈루마가 진짜 현자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하연의 마음을 짐작이라도 한 듯 자기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갈루마의 수다에 하연은 곧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다쟁이 현자라니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카이람과 하연이 사라진 뒤. 은빛 동굴에 거대한 신형의 실버 드레곤 칼링스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오십 년마다 한번씩 있는 드레곤 종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모임에 참석하고 돌아 온 것이다. 모임의 결과는 무척 만족스러웠다. 토론의 내용은 언제나 같이 요즘 드레곤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데 비해 인간들의 수가 많이 늘어 나 걱정이라거나 성인이 되어 가는 드레곤들이 좋은 레어 구하기가 어려워 졌다거나 하는 등으 로 별다를 것이 없는 내용이었지만 토론 도중 내내 무식하게 힘으로만 모든 것을 해결하려드는 드레곤 종족의 수치 레드 드레곤 바블라드를 말발로서 누른 것이 꽤 유쾌한 일이었던 것이 다. 그러나 그 즐거운 기분은 누군가 자신의 레어에 침입한 흔적을 발견하자 분노로 바뀌었다. 천년 전 바블라드가 자신의 레어에 있던 자그만치 드레곤을 셋이나 죽인 드레곤 슬레이어 슈바 크샨티에의 검인 룬블러드를 도난당했다고 털어놓았을 때 그가 바블라드에게 했던 조롱의 말들 을 떠올리자 더욱 울화가 치밀었다. 이제 그 조롱이 자신에게 돌아 올 것이 아닌가? 서둘러 창고로 이동해 뭐가 없어졌는지 확인 한 칼링스타는 없어진 물건이 무엇인지 깨닫고는 커 다랗게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 아하하하!- 훔쳐 갈게 없어 하필이면 갈루마를 훔쳐가다니...... 인내심과 참을성 많기로 소문난 그 조차 삼 십 년만에 갈루마의 수다에 질려 창고에 처박아 두었지 않았던가? 물론 그 덕분에 토론 내내 바 블라드를 누룰 수 있긴 했지만. 갈루마를 훔쳐 간 인간이 지금쯤 하고 있을 고생을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나 웃었을까? 웃음이 가라앉자 호기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 배짱 좋게 자신의 레어에 침입했으며 이 많은 보물들 중에 하필이면 재수 없 게도 갈루마를 훔쳐가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호기심이 동한 칼링스타는 즉각 그 거대한 몸을 일으켜 갈루마를 훔쳐간 인간의 뒤를 쫓았다. 카이람의 생각처럼 목숨의 위협을 받는 죽음의 추격전은 아니었지만 그런 대로 하연의 드레곤에 게 쫓기는 모험이 시작된 것이다. 다행이 카이람이 인간들이 사는 마을 가까운 곳에 떨구어 주었던 듯 하연은 얼마 걷지 않아 마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대부분이 나무로 지은 집들이었고 극히 일부의 집들만이 돌로 지어져 있었다. 사람들도 각양각색 의 피부색과 머리색을 지니고 있어서 하연은 마치 외국에 발을 들여놓은듯한 기분이었다. 아직 초저녁이라서 인지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하연을 보자 모두 깜짝 놀라더니 마치 전 염병 환자라도 보듯 피해 버리는 것이었다. 하연은 어리둥절해서 지팡이를 두둘이며 갈루마에게 물었다. "왜 저러지?" -그거야 네가 어둠의 사제니까. 보통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지.- "왜?" -정말 다른 차원에서 왔다는 말이 사실이었군. 휴우~그런 단순한 것도 모르다니... 하긴 이 위대 한 대 현자 갈루마에 대해 모른다고 할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만...... 크하하핫! 이 혼 대륙에서 나 대 현자 갈루마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있다니 말이 안되지, 암~- "잡소리 그만하고 빨리 이유나 말해봐! 모험의 즐거움이 뭐야?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더 불어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인데 사람들이 날 피하면 다 틀린 일이잖아." 갈루마는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그런 것이라면 네가 사는 세계에서도 가능했을 텐데 왜 불의 마신인 카이람의 힘을 빌리 면서까지 다른 세계로 온 것이지?- "......나에 대해 아무도 모르고 나도 그들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그런 세계에 가고 싶었어." 하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 병에 대해서도......' "게다가 여기선 돈까지 받아가면서 모험을 하는 것이지만 거기선 돈을 주고 해야 한다는 아주 결 정적인 차이가 있지. 자, 어서 그 사람들이 왜 어둠의 사제를 두려워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나 말해봐!" 하연의 어이없는 말에 갈루마는 피식 웃으며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은 두 주신인 빛의 주신인 펠레아와 어둠의 주신 가란에 의해 만들어 졌다. 그 두 주신 이 결혼해 아이들이 태어나니 그들이 바로 불의 마신 카이람, 물의 여신 엘레나, 땅의 신 부탄, 바 람의 정신 디아스다. 두 주신과는 달리 그 자식들은 각기 그들을 섬기는 신전과 사제들이 있는데 빛의 주신인 펠레아 를 받드느냐 아니면 어둠의 주신 가란을 받드느냐에 따라 로브의 색이 다르다. 넌 검은 색 로브를 입었으니 그건 어둠의 주신을 받드는 쪽이라는 뜻이고 붉은 보석의 서클렛을 했으니 불의 마신 카이람의 사제라는 뜻이지.- "물, 땅, 바람의 사제들은 어떤 색의 보석을 다는데?" -물의 여신을 받드는 사제들은 은색, 땅의 사제들은 황색, 바람의 사제들은 푸른 색 보석이지. 각 사제들은 특별한 힘을 갖는데 불의 사제들은 빛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용기와 생명력의 회복, 어둠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파괴와 질병의 저주가 있고 물의 사제들 쪽에서는 빛을 따르는 자들에 게는 회복, 어둠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망각의 저주가 땅의 사제들은 빛 쪽에서는 생성, 어둠 쪽에 서는 지진이나 기근의 저주가 바람의 사제들은 빛 쪽에서는 사랑, 어둠 쪽에서는 미움과 증오의 힘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둠의 사제들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자신들에게 이롭지 못한 힘을 지니고 있으 니까.- 설명을 다 들은 하연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카이람이 나한테 검은 색의 로브를 입혔기 때문이라 이거지? 나쁜 놈! 나 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이따위 짓을 하다니!" 이를 으드득 갈던 하연은 문뜩 어떤 생각이 떠올라 물었다. "그럼 이 로브만 벗으면 사람들이 내가 어둠의 사제라는 것을 모르겠네? 그러면 날 피하지도 않 을 거고?" -음, 그렇긴 하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냥 쓰고 있는 것이 더 좋을 듯 싶은데......-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내가 모험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달린 일인데......" 하지만 결정적으로 생각지 못한 것이 있으니 로브를 벗어 넣을 가방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연은 로브를 입은 채로 우선 가게를 찾아 나섰다. 마을의 중간쯤이었을까? 마을 공동 우물로 보이는 우물이 있었는데 한 아주머니가 두레박으로 물을 긷고 있었다. 인상이 푸근해 보이는 아주머니로 그 아주머니라면 자신을 피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하연은 그 아주머니에게 다가가 가방 가게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려고 결심했다. 그런데 하연을 보자 아주머니는 기겁을 한 듯 물동이마저 버려 두고 도망을 쳐버리는 것이었다. 그 태도에 하연의 낙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곳 사람들의 반응은 너무 심한데?- "저 반응이 정상이 아니란 말이야?" -그래. 비록 어둠의 사제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신을 받드는 사제지 않느냐? 보통은 두려워하고 어려워 할뿐 이렇게까지 심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 할 수 없이 혼자 힘으로 가게를 찾아보기로 결심한 하연이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왠 병사 들이 우르르 몰려와 하연을 에워싸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일에 하연이 어리둥절해서 서 있으려니까 그들 중 한 병사가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 이며 청했다. "저희들은 이곳 마을의 경비대원들입니다. 사제님이 저희 마을에 들르셨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성 주께서 사제님을 청하십니다." "저를... 요? 왜요?" 병사는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연이 저 병사들을 따라가도 좋을지 망설이고 있자 갈루마가 말했다. -따라가 보자. 어쩌면 이 마을 사람들이 너를 이렇듯 심하게 피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 니까.- 그 말에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 병사들을 따라 나섰다. 병사들은 하연이 행여 도망이라도 칠 까봐 불안한 듯 그녀의 주위를 빙 두른 채 움직였다. 그들이 마을을 조금 벗어났을 때였다. 자동차 두 대가 나란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큰 길이 보이더니 커다란 고성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마치 적을 방어하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성이 아니라 격조 높은 예술품을 보는 듯 해 도무지 이런 시골 마을에 있을법한 성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로인해 하연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갈루마가 말했다. -그렇군. 이 곳은 유즈베리아라는 나라의 국경에 있는 오벤성이다. 유즈베리아는 오랜 역사를 지 닌 나라로 그 건축물과 술이 유명한데 오벤성은 그 중 삼대 건축물에 들 정도로 유명한 성이지. 이 조형미와 섬세함. 몇 번을 보아도 도무지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 같지 않은 아름다움.- 감동에 젖은 듯한 갈루마의 말이었다. 하지만 정작 하연이 감동한 것은 그들을 마중 나온 집사라 는 존재였다. 옛날 외국영화에서 보는 것 같은 정복차림의 집사는 아니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집사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정도의 깔끔한 차림에 정중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집사노인이 말했다. "오벤 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사제님. 성주님이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시니 저를 따라 오십시 오." 무도회를 열어도 될 것 같은 넓은 홀을 지나 긴 복도를 따라 걸어가니 양쪽으로 여는 큰 문이 보 였다. 집사가 그 문을 양쪽으로 열자 접대실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사십대 중반의 사내가 돌아보았 다. 체구가 크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그 사내는 하연을 그대로 세워둔 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속으 로 뭐라고 중얼중얼 거렸다. 그러더니 대뜸 거친 목소리로 묻는 것이었다. "나이가 몇인가?" 보통 때의 하연이라면 숙녀의 나이를 함부로 묻다니 매너가 없군요 라고 말하며 대답하길 거부했 을 테지만 너무도 심각해 보이는 성주의 모습에 얼떨결에 대답하고 말았다. "스물 세 살인데요." "저, 정말인가?" 성주는 놀라서 외쳤다. 아무리 보아도 열 다섯에서 열 여섯쯤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스물 세 살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 었던 것이다. 갈루마도 놀라서 물었다. -너, 그렇게나 나이를 많이 먹었냐? 오랜만에 싱싱한 아가씨와 놀아볼까 했는데 다 늙은 여자였 다니......!- '그래. 나 동안이다. 나 동안인데 뭐 보태준 거 있어?' 겉으로 내색은 못하고 속으로 궁시렁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성주가 그 커다란 손으로 하연의 손 을 덥석 잡더니 외치는 것이 아닌가? "아가씨. 내 며느리가 되어주게." 오벤 성의 서제에는 성주의 아들인 로베인 볼트라인이 책을 읽고 있었다. <가드리언의 맹세>라는 책으로 요즘 왕궁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기사의 충정과 사랑을 다룬 소 설이었다. 하지만 로베인이 보기에는 한심한 내용이었다. 자신의 맹세 때문에 사랑을 버릴 수밖에 없는 기사의 고뇌가 잘 표현되어 있다는 서두문의 내용 과는 달리 로베인은 그 기사가 어리석게만 비쳤다. 사랑을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다면 어째서 그 따위 어리석은 맹세에 매달리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기사가 충성을 맹세한 왕은 더할 수 없이 이기적이고 포악한 왕이지 않 는가? 하지만 그 책이 요즘 왕궁에서 유행하는 책이라는 이유만으로 로베인은 그 책을 읽지 않을 수 없 었다.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교양으로서. 생각하면 할수록 한심스러운 일이었다. 그의 나이 이제 스물 여섯. 바람에 사르락 거리는 부드러운 금발과 맑은 하늘처럼 아름다운 푸른 눈. 그리고 완벽에 가까운 조각품이라고 감탄할 정도로 빼어난 외모. 거기다 백 구십에 가까운 큰 키에 탄탄한 몸매. 뛰어난 검술. 남들에게 빠지지 않는 학식과 성품. 이만하면 어디에 내 놓아도 빠지지 않는 훌륭한 청년이 아닌가? 그의 인생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그는 유즈베리아의 꽃이라고 소문난 아이린느 공주의 남편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 은 어떤 여자도 그를 좋아하지 않아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교양이나 쌓으며 소일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왜냐하면 어느 날 눈떠보니 그는 그를 본 모든 여성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새삼스럽게 로베인은 그 어둠의 사제를 향한 증오로 불타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오벤성은 유즈베리아의 삼대 건축물 중 하나인 만큼 성을 구경하려고 몰려드는 방문객들로 줄을 이었다. 그 날도 방문객들이 아침부터 몰려들어 그렇지 않아도 성내의 일로 바쁜 아버지를 위해 로베인 이 손님들을 맞았었다. 그 중 어둠의 사제가 한 명 있었는데 바람의 정신인 디아스를 받드는 여사제였다. 보통 바람의 정 신은 사랑과 미움, 증오 등의 감정을 다루는 신으로 대부분 그 사제들은 창녀나 파락호들이었다. 때문에 그 여사제가 은밀한 관계를 요구해 왔을 때 로베인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것에 앙심을 품은 여사제는 로베인에게 저주를 걸었다. 모든 여성이 그를 증오하게 만드는. 그러나 로베인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저주라는 것도 상대적인 거라서 저주를 건 자보다 강 한 힘을 지닌 자를 찾으면 저주를 풀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그녀의 힘이 대단해 어떤 어둠의 사제도 그에게 걸린 저주를 풀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해 로베인은 벌써 성혼의 시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지내고 있었다. 유일한 희망이라고는 이제 바람의 정신인 디아스를 받드는 여사제들을 제외한 대륙에서도 극히 소수라는 어둠의 여사제를 만나 결혼하는 것이다. 어둠의 사제들에게는 저주에 대한 면역이 되 어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성주로부터 모든 설명을 들은 하연은 기가 막혔다. 하지만 한편으론 우습기도 해서 피식피식 세 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그런 저주에 걸리다니...... 하연의 웃자 성주의 그렇지 않아도 우락부락한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 험악한 모습에 흠칫 놀라 세어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꿀꺽 삼킨 하연은 정중하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런 저주에 걸린 사람의 예기를 처음 들어서......" 불쾌하긴 했지만 아쉬운 쪽은 어쨌든 그인지라 성주는 그 문제를 그냥 넘겨버리고 조급하게 재촉 하듯 물었다. "어떻게 하겠나? 그래, 우선 내 아들을 만나보아야겠지? ...집사? 가서 로베인을 이리로 불러오 게." "네, 성주님!" 하연은 당황했다. 그녀는 전혀 결혼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혼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 지 않는가? 게다가 그녀의 이 어둠의 사제라는 신분도 임시변통이었을 뿐이지 진짜가 아니었다. 그러니 자신 에게 저주에 대한 면역이 있을 리 없었다. -결혼이라...... 오벤 성의 성주부인이라면 볼트라인 백작부인이 되는 거구나. 여자로서는 큰 출 세지. 축하한다, 하연.- '이게 축하할 일이냐, 이 멍청한 지팡이야?' 처음으로 갈루마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었다는 것 따위는 눈치채지도 못한 하연은 그저 그 자리 에서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리저리 도망갈 곳을 찾고 있는데 마치 그런 그 녀의 기분을 알기라도 하듯 성주는 일순간도 하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어느덧 접대실의 문이 열리고 한 청년이 들어섰다. 순간 하연은 소설 속에서 흔히 접하는 누군가가 들어섬으로서 그 장소가 환해졌다는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그림처럼 아름다운 남자였다. 그것도 여자처럼 생긴 아름다움이 아니라 충분히 사내라는 것 을 알아볼 수 있는 깔끔하게 조각된 조각상을 보는 듯한 아름다움이었다. 신중하게 하연의 반응을 주시하고 있던 오벤 성주는 하연의 놀라움에 가득 찬 경탄에 만족한 미 소를 지었다. 하연이 전혀 자신의 아들을 증오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로베인은 차라리 혼자 늙어 죽을지언정 어둠의 사제를 자신의 아내로 삼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슬쩍 얼굴만 내보이고 거절할 생각으로 접대실에 들어섰다. 그런데 뜻밖에 상대를 본 로베인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어둠속에 피어난 붉은 장미를 보는 느 낌이랄까? 검은 벨벳같은 로브를 뒤집어 쓴 여인의 하얀 얼굴은 흑진주를 박아 넣은 듯한 눈과 붉은 입술에 의해 더욱 빛이 나는 듯 했다. 마치 밤하늘에서만 달이 그 빛을 발하듯. 잠시 그 신비롭고 이국적인 하연의 아름다움에 취해있던 로베인은 작고 가냘픈 하연의 체구를 보 고 무엇을 깨달은 듯 놀라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설마 저 보고 이 어린아이와 결혼하라는 건가요?" 그 말 한마디로 하연에게 로베인의 인상은 결정지어 지고 말았다. 저주받아 마땅한 재수 없는 놈 으로! 감히 겁도 없이 이 몸의 컴플렉스를 건드리다니...... 억지로 웃으며 하연은 성주를 돌아보고 말했다. "제게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시겠어요? 지금은 좀 피곤해서......!" 로베인을 본 순간의 하연의 반응을 보고 당장 승낙의 대답을 얻을 줄 알았던 오벤 성주는 왠지 대 답을 피하는 듯한 하연의 말에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하연이 정말 피곤해 보여 할 수 없이 허락했 다. "알겠네. ...집사? 이 아가씨를 손님용 침실로 안내 주게." "네, 알겠습니다. 아가씨, 이리로." 집사를 따라가는 하연을 보며 오벤 성주는 한 마디 말을 잊지 않았다. "좋은 대답 기다리겠네." 하연이 집사와 함께 접대실에게 나가자 로베인이 말했다. "아버지. 아무리 예쁜 아이라도 그렇지 어린아이와 결혼할 수는 없잖아요?" "......스물 셋이다." "네!?" 로베인은 놀라서 멍청한 표정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로베인의 반응에 오벤 성주는 짜증난다는 얼굴로 외쳤다. "어린애가 아니란 말이다. 너는 도대체가!" "설마 그 얼굴에......!" "그 동안 내가 너에게 들인 공이 아깝다.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라고 수십 권의 소설책들을 어 렵게 구해서 갖다 주었더니 그 책들을 읽기는 한 거냐?" "읽었어요." 조금전에 읽은 그 한심한 소설 <가드리언의 맹세>를 떠올리며 로베인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아가씨 앞에서 그런 말을 해? 어떤 여자가 어린애 취급을 받고 기분이 좋겠어?" 아차! 로베인은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이미 일은 물 건너 간 뒤였다. 오벤 성주는 그런 로베인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 어쨌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으니 며칠 동안은 우리 성에 머물러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 동안 너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아가씨의 마음을 사로잡도록 해야 한다. 알겠느냐?" "...네." 자신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대답이었지만 반발할 줄 알았던 아들의 입에서 긍적적인 대답을 들 었다는 사실에 오벤 성주는 만족했다. 저주를 받기 전에도 성에 차는 여자가 없어서 혼인을 거부해오던 아들이 아니었던가? 아무래도 그 아가씨가 로베인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왠지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기대에 오벤 성주는 마음이 부풀었다. 손님용 침실로 안내 받은 하연은 자신에게 주어진 방을 보고는 그 화려함과 크기에 입이 다물지 못했다. 한 24평 아파트 정도의 크기랄까? "도대체 방이 왜 이렇게 큰 거야?" 자는 방에 침대 이외에 뭐가 또 필요하다고 이렇게 큰 건지. 그러나 갈루마의 생각은 다른 듯. -이만하면 보통이네, 뭐!- "이, 이게......?" 황당해서 저도 모르게 하연은 빙그르르 도는 물빛 수정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결혼 할거냐?- 한참만에 하연은 대답했다. "아니!" -왜지? 그 로베인이란 녀석, 네 마음에 들었던 것 같은데?- 퀸 사이즈는 족히 넘어 보이는 침대에 털썩 들어 누운 하연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마음에야 들지. 하지만 세상은 넓고 남자는 많다는 말도 있잖아? 이 내가 겨우 백작부인으로 만 족해야겠어? 최소한 일국의 왕은 잡아야지. 이래봐도 내가 대 현자의 지팡이 갈루마의 주인이잖 아?" -하긴.-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히긴 했지만 갈루마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 현자인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그 녀석 본 여자들은 하나같이 그 녀석을 증오하게 된다더니 난 멀쩡하 잖아? 어둠의 사제도 아닌데." -아? ......하지만 넌 카이람이 직접 만들어 준 서클렛을 하고 있잖아? 아마도 그 때문이겠지.- "그런가? ...정말 로베인은 어둠의 사제하고밖에는 혼인할 수 없는 건가? 어디에선가 읽은 적이 있었는데 저주를 건 대상자를 죽이면 저주가 풀린다고 말이야." -그렇지. 하지만 이 경우, 분명 바람의 정신 디아스의 이름으로 저주를 걸었을 테니 디아스를 죽 이기 전에는 저주가 풀리지 않을걸? 왜 실버 드레곤 칼링스타에게 쫓기는 것도 모자로 바람의 정 신 디아스를 죽이는 모험을 떠나려고? 하지만 그 모험도 여기서 끝이구나. 겨우 발견한 며느리 감을 오벤 성주가 그냥 곱게 보내 주겠냐? 이제부터 넌 꼼짝없이 성안에 갇혀 백작부인이나 되어 야 할걸.- 이죽대는 갈루마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던 하연은 무엇을 생각해 냈는지 탄성을 터트리듯 외쳤 다. "그렇지, 모험! 그 방법이 있었지?" -뭐냐? 뭔데 그래?- "후훗! 결혼하지 않고도 이 성을 걸어나갈 좋은 방법이 떠올랐어." -그래? 어떤?- "내일 말해 줄게.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두두두두!" -두두두두? 무슨 소리야? 주문인가? 아니면, 기도문?- "하아! 정말 너 현자 맞아? 두두두두, 북소리잖아?" 그렇게 인간과 지팡이의 말싸움이 이어지는 가운데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갈루마는 영혼뿐인지라 잠을 자지 않아도 되지만 인간으로 있었던 때의 기억 때문에 다른 인간들 처럼 잠을 잤다. 새벽쯤이었을까?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듯한 신음소리에 잠을 깨고 말았다. "으... 음.... 하아......!" 처음에는 하연이 악몽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마음의 시야를 넓혀보니 고통스러운 듯 시 트를 움켜쥐고 있는 모양새가 분명 깨어있는 자의 몸부림이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고통을 견디고 있는 하연이라니...... 갈루마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모습이었다. 그가 아는 하연은 단순하고 쾌활한 철부지 아가씨였던 것이다. 백작부인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며 더 좋은 남자를 찾아보겠다고 할 정도로 야심도 큰. 그런 데...... '하아~ 아직 멀었구나, 갈루마. 아직도 보여지는 사람의 모습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다니......' "흐윽! 으......" 동이 틀 무렵, 신음소리도 가라앉고 하연도 다시 잠이 들었지만 갈루마는 잠을 잘 수 없었다. 다음 날 하연이 눈을 뜬것은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늦잠을 잤다는 것을 알아챈 하연은 이 시끄러운 지팡이가 또 뭐라고 한마디, 아니지 몇 마디는 족 히 잔소리를 늘어놓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갈루마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되었지만 하연은 괜히 그것을 들추어 긁어 부스럼을 만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흐흠! 오늘도 날씨가 좋을 것 같지, 갈루마?" -그렇구나.- 웬일인지 고분고분한 갈루마의 말에 하연은 어색해서 허둥대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프네. 나를 며느리 감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밥은 주겠지? 어서 식당으 로...... 아차! 세수를 안 했네." 재빨리 세수를 마치고 로브를 둘러쓴 채 문을 나선 하연은 문밖에서 초조하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로베인과 부딪쳤다. 로베인은 하연이 갑자기 문을 열고 나타나자 당황한 듯 보이더니 곧 어색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 다. "날씨가 참 좋지요, 우리 잠깐 산책할까요?" 아무래도 할말이 있는 듯 보여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로베인을 따라 나섰다. 생각대로 날씨는 참 좋았다. 그렇게 더운 것도 아니고 바람이 뺨에 스치자 상쾌함이 느껴질 정도의 온화한 날씨였다. 로베인이 안내한 곳은 화원이었다. 소설책에서 흔히 나오듯 아름다운 화원의 모습으로 우선 하연의 마음을 누그러트리자는 계산이 었다. 그리고 오벤 성의 화원은 빛의 주신 펠레아의 화원이라고 불릴 정도도 아름다운 곳이기에 직접 구경 시켜주며 호감을 사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로베인이 생각 못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인간의 삼대 욕구 안에 든다는 식욕이었다. 금강 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왜 생겨났겠는가? 지금 하연의 눈에는 화원의 아름다움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왜 빨리 본론을 꺼내 지 않나 하는 초조함뿐이었다. 그런데...... "정말 아름답지요? 이 아름다움 때문에 이 화원은 빛의 주신 펠레아의 화원이라고 불린답니다. 저기, 보이십니까? 저것이 바로 전설로만 전해지는 드레곤 슬레이어 슈바 크산티에의 연인인 베 이샤가 갖고 싶다고 눈물로서 애원했던 영원한 사랑을 이루게 해 준다는 바람의 꽃 다이아스입니 다." 전설의 꽃이라기에 무언가 보니 석류처럼 붉고 작은, 이름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는 꽃이었다. "다이아스는 이른 여름 한순간에 잠깐 피었다가 지는 꽃으로 유명하지만 이 화원에서는 일년 내 내 그 향기를 피우지요. 마법에 관심이 있던 제 선조 중 한 분이 이 화원에 마법진을 설치하고 저 꽃에 영구 보존마법을 걸어 놓았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하연은 그 로베인의 선조가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다이아스의 가치는 그 꽃이 단 한 순간만 피었 다 지기 때문인데 그 꽃을 일년 내내 피어 있게 만들다니...... 어쩌면 인간의 삶이란 그런 어리석은 일의 반복인지도 몰랐다. 자신의 경우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남은 시간을 후회가 남지 않도록 소중하게 써도 모자랄 판 에 언제까지나 이렇듯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에 대한 원망으로 주체를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미련, 미련...... 그런 자신에 대한 짜증에 하연은 로베인을 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할 예기가 아직 많은 것 같은데 밥이나 먹으면서 계속 하지요?" 밤새도록 궁리해 준비해 놓았던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로맨틱한 예기를 신나게 쭉 늘어놓 으려던 로베인은 하연의 밥 먹자 라는 말에 그만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자신이 시간을 잘 못 맞추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 그럼 제가 식당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우울한 표정으로 옆에서 걸어가는 자신보다 이십 센티는 더 커 보이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하연 은 자신이 너무 했나 싶어 말을 꺼냈다. "저, 로베인이라고 불러도 되지요?" "아! 무, 물론입니다." "제 이름은 하연이예요. 하연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리고 저 보다 나이도 많은 것 같은데 편하게 반말로 하세요." 그 말에 로베인은 우뚝 멈추어 서더니 하연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좀 전까지 퉁명스럽게 굴다 가 갑자기 호의를 보이자 이상하게 생각되었나보다. 하연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름다운 화원까지 구경시켜 주셨는데 제가 좀 퉁명스러웠지요? 원래 배가 고프면 제가 그래 요. 이해해 주세요, 로베인." 부드러운 말투와 그 웃음이라니...... 로베인은 마치 다이아스 꽃이 피어나는 순간을 보는 듯한 느낌에 멍해지고 말았다. 그런 로베인의 표정에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하연이 물었다. "식당, 안가요?" "가, 가야...... 지." 식당도 굉장히 크고 넓었다. 마치 파티를 위한 뷔페 식단이 한 상 가득 긴 테이블 위에 올려 진 듯 하다 고나 할까? 그리고 각기 하녀 한 명이 옆에서 서서 식사하는 것을 거들어 주었다. 로베인은 익숙한 듯 태연해 보였지만 하연은 그것이 거북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배가 너무 고파 우선 먹고 보자는 심정이 강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먹었지만 먹고 나니 속이 거 북한 게 꼭 채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소화도 할 겸 하연은 산책이나 하자고 생각해 뒤따르려는 로베인을 만류하고 좀 전에 보았던 화 원으로 갔다. 그런데 화원에는 벌써 손님이 있었다. 긴 붉은 머리에 초록빛 눈동자를 지닌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이 멍하니 그 다이아스라는 꽃을 들 여다보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예전의 하연이라면 분명 그냥 지나쳐 버렸을 것이 분명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자신의 병을 알 아버린 뒤로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자신의 조그마한 흔적이라도 남기로 싶다는 욕심에 자꾸만 참견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꽃이 예쁘지요?" 여인은 처음에는 하연이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듯 하다가 재차 하연이 말을 걸자 놀라서 물었다. "설마...... 제가 보이세요?" 이상 9편까지의 내용이었읍니다....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31-01-2001 19:25 Line : 111 Read : 3216 [2] 마신 소환사 -10- -------------------------------------------------------------------------------- Ip address : 211.112.121.180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77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0-12-07 , 08:06:44 PM 마신 소환사 -10- 그럼 눈앞에 서 있는데 안보이길 바란단 말인가? 저도 모르게 시니컬한 대답이 튀어나오려는 것 을 침묵으로 대신하는 하연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울고 있는 상대에게 할 말이 아니지 싶어서였 다. 그러자 이번에는 기쁜 듯 활짝 웃으면서 또 우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우는 것일까? 그리고 그 눈 물을 따라 퍼지는 이 미묘한 향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진한 향수냄새를 싫어하는 하연이었는데 왠지 이 향기는 틀렸다. 지독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향기 가 짙은 대도 불구하고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윽고 울음을 그친 여인이 말했다. "전 이 다이아스의 정령, 다이아예요. 설마 절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 곤." 설마 이 다이아스 꽃의 정령이란 말인가? 정령이 실제로 보다니...... 놀라고 있는 자신을 의식한 하연은 그만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마신을 만나 게임CD 다섯 개로 계약을 맺어 이렇듯 다른 차원의 세계로 모험을 오고, 말하는 지 팡이를 들고 다니는 자신이 아닌가? 그런데 새삼 정령을 보았다고 놀라다니. 웃는 하연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정령 다이아는 울쌍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정령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거군요. 하긴...... 흐흑, 저처럼 정령의 세계에서 추방을 당하 고 이렇게 비대하게 커버린 정령을 정령이라고 믿으라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흐흐흑!" 에!? 뭔가 잘못 건드린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아니나 다를까? 정령 다이아가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좀처럼 그치지 않을 것 같은 그 울음소리에 하연은 짜증이 났다. 더 이상 눈물은 싫었다. 자신이 우는 것도 다른 사람이 우는 것도. "그만 닥쳐! 내가 언제 네가 정령이라는 것 믿지 못하겠다고 했어?" -정령? 아까부터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정령에게 하는 말이었냐? 아니, 그 보다 너 정령 이 눈에 보이냐?- 갈루마를 말의 싹 무시한 채 하연은 정령을 노려보았다. 그 매서운 눈초리에 정령은 겁에 질린 듯 딸꾹질을 해대며 울음을 멈추려고 애썼지만 잘 되지 않는 듯 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애처롭게 올려다보는 정령의 모습에 하연은 더이상 화조차 낼 수 없었 다. "하아~ 정령 다이아라고 했지? 그런데 왜 울고 있었던 거야?" "훌쩍! 훌쩍! 전... 정령이예요." 그래. 너 정령이다. 그래서......?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고 하연은 되도록 부드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그 표정에 안심했는지 다이아는 본격적으로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알고 있어요? 보통 정령은 말이에요. 제 삼분의 일도 안돼요. 게다가 다이아스의 정령은 삼십 년 동안 자라 이른 여름에 단 한번 꽃을 피우고 지는... 크윽, 크윽... 그런데 전 벌써 150년이 넘 게 살고 있어요. 그 때문에 이상한 정령이라고 정령계에서 추방까지 당했다고요! 이제는...... 전 어떻게든 빨리 죽고 싶다고요. 그런데 이 안에 갇혀서는 그게 안돼요." 역시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는 하연이었다. 누군 죽고싶어 날리고 누군 죽고 싶 지 않아 날리니...... 하연이 말했다. "좋아. 내가 죽는 것을 도와줄게. 어떻게 하면 되지?" "네, 정말이에요?" 다이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큰 눈을 들어 하연을 쳐다보았다. 하연은 맡겨만 두라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아가 말했다. "아주 간단해요. 절 먹어주세요." "그래. 정말 간단하군."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이던 하연은 다음 순간 무엇을 깨달았는지 얼굴이 창백해졌다. "먹어...... 달라고... 널?" "네!" 싱글싱글 웃으며 대답하는 다이아의 모습이 이젠 무서워 보이기까지 했다. 아무리 정령이라도 겉 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이는데 인간에게 인간을 먹어달라니......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도망치려는데 다이아에 의해 손이 잡히더니 채 거부하기도 전에 다이아의 머리가 하연의 벌어진 입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으~! 난 식인종이 아니야!!!' 그러나 그것은 마음속의 외침일 뿐 겉으로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다이아가 산채로 하연 의 입속으로 들어오는 중이었으니까. 마구 허우적거리며 손발을 흔들어 대던 하연은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인간이 입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마치 신선한 공기가 입으로 들 어가 몸 속을 깨끗이 정화시켜주는 기분이랄까? '역시 정령이었구나! 뭐, 이렇게 된 이상. 그래, 산삼 먹은 것으로 치자! ......심봤다고 외쳐야 할 까?' 하연이 엉뚱한 고민을 하고 있는 동안. 약간 긴장한 표정의 로베인이 천천히 다가왔다. "저, 하연! 아버님께서 찾으십니다. 아니, 찾으셔." 하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로베인을 따라 나섰다. 그런 그들의 뒤로 150년 동안 피어있던 다이아스 꽃이 한줌의 모래처럼 가루가 되어 흩어져 버렸 다. 오랫만에 올리네요. 그 동안 이 홈피가 자꾸 변해서...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1-02-2001 12:57 Line : 91 Read : 2668 [3] 마신 소환사 -11- -------------------------------------------------------------------------------- Ip address : 211.112.121.180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78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0-12-07 , 08:13:01 PM 마신 소환사 -11- 잠시 후, 하연은 오벤 성주와 로베인을 마주 대하며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앉아 있었다. 오벤 성주와 로베 인은 초조한 표정으로 그런 하연의 안색을 살폈다. "그래. 마음은 정했는가?" 참지 못한 오벤 성주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하연은 그런 오벤 성주에게 빙그레 웃어 보이고는 물었다. "한가지... 만약 아드님이 이런 저주에 걸리지 않으셨다면 저 같은 여자를 며느리로 맞이하려고 했을까요?" 오벤 성주가 즉각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자 하연은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지는 않겠지요? 이해합니다. 저라도 제게 아들이 있다면 출신성분도 모르는 여자와 혼인시 키지는 않을 테니까요. 거기다가 하필이면 어둠의 사제라니......" 하연은 이번에는 로베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로베인도 할수만 있다면 자신에게 저주를 건 어둠의 사제와 혼인하고 싶지는 않지요?" 오벤성주와 로베인이 하연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자 하연은 짐짓 정 말 한심한 사람들을 본다는 듯 한탄하며 말했다. "혼인은 본인은 물론 가문으로서도 아주 중대한 일이에요. 그런 일을 이렇듯 가볍게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말해보세요, 로베인. 저주에 걸리기 전 자신을 위해 가문을 위해 어떤 여자를 아 내로 맞이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너무도 진지한 하연의 표정에 이끌려 로베인은 솔직히 말하고야 말았다. "아이린느 공주라면 내 아내감으로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역시! 그 정도는 되어야 로베인의 혼인 상대로 어울리지요." 하연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실망스런 표정으로 로베인을 보았다. "그런데 그깟 저주에 좀 걸렸다고 이내 아이린느 공주를 포기한 건가요? 어쩌면 아이린느 공주 로 로베인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이건 아이린느 공주를 배반하는 일이 아니던가 요?" 로베인의 당황하는 표정을 보자 하연은 더욱 연극조로 목청을 돋구어 구슬프게 말하기 시작했 다. "저 옛날 슈바 크산티에는 여인의 사랑을 얻기 위해 드레곤 슬레이어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용을 죽이는 것도 아니고 대륙 어딘가에 있을 강한 힘을 지닌 바람의 사제를 찾는 것뿐인데 그것 을 포기하고 지나가는 아무 여자나 붙잡고 결혼을 하려 들다니......" 물론 갈루마로부터 들은 예기로 신빙성은 없어 보였지만 이 부분에서는 꼭 필요한 건설적인 예기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건설적인 예기가 통한 듯 오벤 성주가 로베인에게 물었다. "진정 아이린느 공주에게 마음이 있었느냐?" 오벤 성주는 아이린느 공주라면 한 사내가 목숨을 걸고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것이 아니린느 공주는 죽은 그의 아내와 닮았던 것이다. 어찌 그런 여인을 잊고 하연의 말처럼 지나가는 아무 여자와 결혼하라고 시킬 수 있단 말인가? 자신 또한 아직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해 이렇게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자식에게까지 사랑하는 여인을 잊어야 하는 고통을 물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로베인은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분명 예전에는 아이린느 공주 정도는 되어야 자신의 아내로서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아이린느 공주의 얼굴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오직 당당히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말을 하는 그리고 밝은 미소와는 대조적으로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슬픈 눈동자를 지닌 하연의 얼굴 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로베인은 하연과 결혼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의 하연의 말들로 그녀가 자신과 결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에 억지로 자신과 결혼하게 만들 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로베인이 말을 꺼내지 못하자 그것을 자신의 말에 대한 긍정으로 알아들은 오벤 성주는 커다란 한숨을 쉬었다. "그렇구나. 네 뜻이 그렇다면 더 이상 결혼을 강요하지 않겠다. 떠나거라. 그리고 저주를 풀고 오 너라!" "......아버님!" "나도 도와줄게요, 로베인. 꼭 저주를 풀 수 있을거예요." 즐거운 듯한 하연의 말에 로베인은 결국 억지로 웃음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하연과 로베인은 모험을 떠나게 되겠군요.^-^ 과연...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1-02-2001 12:57 Line : 92 Read : 2499 [4] 마신 소환사 -12- -------------------------------------------------------------------------------- Ip address : 211.112.121.180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97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0-12-09 , 01:13:45 PM 마신 소환사 -12- 오벤성주는 막상 로베인을 떠나보내기로 결심하자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정도 검술 을 익혀 제 몸 하나는 충분히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은 세상 물정도 모르는 철부지였기 때문이다. 어둠의 사제가 함께 동행하니 큰 위험은 없을지 몰라도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닌지라 아무 래도 둘만 보내기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래서 오벤 성주는 즉시 사람을 풀어 용병들을 구하기로 결심했다. 마을 여기저기에 오벤 성주가 용병을 구한다는 방이 붙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성문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로베인? 관광객들인가?" 연무장에서 검술 연마를 하는 로베인을 구경하던 하연이 물었다. 로베인은 검 끝에 신경을 집중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곁에 하연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좀처럼 집 중을 하지 못하고 괜히 멋만 잔뜩 부린 휘두르기를 하고 있다가 그 말을 듣자 즉시 대답했다. "아니야. 아버지가 용병을 구한다는 방을 붙였거든. 아마 그 때문에 몰려든 용병들일거야." "그래? 그럼, 나도 가서 뽑는걸 도와야지." "네가, 왜?" 어느새 친숙해진 하연과 로베인은 서로 반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거야 당연히 우리 동료가 될 사람이니 이왕이면 내 맘에 드는 사람으로 뽑으려고." "......어떤?" "미남으로!" 지극히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 허리에 양손을 얹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하연을 잠시 바라보던 로 베인은 검을 도로 허리에 찬 검집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나도 가겠어." 그러면서 속으로 절대 자신보다 미남은 뽑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다짐하는 로베인이었다. 접대실에는 꽤 많은 용병들이 모여있었다. 용병들은 하연과 로베인이 들어서자 제각기 떠들던 것?????????????????????????????????? 을 멈추고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한결같이 놀란 표정으로 그들을 주시했다. 좀처럼 보기 힘든 미남미녀였기 때문이다. 몇몇은 노골적으로 하연의 몸매를 훑어보았으나 그것 을 눈치채지 못한 하연은 용병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같이 산적들 같이 험악하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로베인이 그런 시선들을 눈치채고 날카로운 경고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로브 를 입고 있지 않은 하연을 원망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저따위 시선들은 받지 않을텐데...... 하연이 보기에 그나마 나은 사람은 로베인과 비슷한 정도의 키에 검은 머리의 머리로 얼굴을 절 반쯤 가려 얼굴을 잘 알아볼 수 없는 날렵한 체구의 사내뿐이었다. 실망한 하연과는 달리 그녀의 마음을 눈치 챈 로베인은 저도 모르게 휘파람이 나오려는 것을 참 아야 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하연의 편이었던가? 그 때 다시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들어섰다. 은빛의 찰랑이는 머리에 도저히 인간으로는 보기 힘든 아름다움을 지닌 남자였다. 하연은 지금까 지 남자와 꽃은 절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그는 꽃과 너무도 어울려 보였 다. 그것도 고아한 품격을 지닌 백합꽃과. 로베인도 그의 아름다움에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도저히 눈을 떼지 못하는 하연을 보자 단번에 그가 싫어졌다. 그리고 절대로 그만은 뽑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잠시 후,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오벤 성주가 접대실로 들어섰다. 용병들은 오벤성주가 들어서자 하연과 로베인 때와는 다르게 긴장한 표정들을 지었다. 오벤성주의 분위기에서 강한 힘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벤 성주는 용병들을 한차례씩 둘러보고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먼저 이 일에는 일정한 기한이 없다는 것을 알려드리겠소. 그러니 자신의 계획에 맞지 않는 일이 라고 생각되는 분은 나가주시오." 그러자 모여들었던 반수이상의 용병들이 문으로 걸어나갔다. "일의 내용은 여기 있는 내 아들 로베인 볼트라인과 하연을 경호하는 일이요. 선금으로 우선 금 화 오십 개를 줄 것이고 무사히 돌아오면 다시 금화 오십 개를 주도록 하겠소." 그 말에 용병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금화 한 개면 은화 스무 개에 해당하는 돈으로 보통 은화 한 개면 네 식구가 한 달은 먹고 살 수 있는 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겨우 두 사람의 경호 대금으로 그만큼의 거금을 주겠다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놀라는 용병들에게 만족스럽게 지켜보던 오벤 성주는 그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실력!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 이상은 보지 않겠다." 용병들은 환호했다. 오벤성주의 말이 그들의 생리에 딱 들어맞았던 것이다. 오벤 성주는 용병들을 이끌고 연무장으로 갔다. 그 뒤를 하연과 로베인이 따랐다. 어제 올리려고 했던건데... 저녁에 연재란이 들어가질 않더라구요. 그래서... 아직 하연과 로베인 출발하지 못하고 있읍니다.^-^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1-02-2001 12:57 Line : 113 Read : 2417 [5] 마신 소환사 -13- -------------------------------------------------------------------------------- Ip address : 211.112.121.180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139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0-12-10 , 11:56:17 AM 마신 소환사 -13- 오벤 성주는 그들 중 최종 결승전에 진출하는 두 명을 뽑겠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모두 아홉 명이 기 때문에 한 명은 부전승으로 올려야 했다. 누굴 부전승으로 올려야 좋을지 고민하던 오벤 성주 는 은빛 머리의 사내가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는 것을 보고는 물었다. "자네, 무기는 어떻게 된 것인가?" "저에게 무기는 필요 없습니다. 마법사니까요." "뭐?" 오벤 성주는 상대가 마법사라는 말에 놀라서 새삼 은빛 머리의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용병 들과 로베인도 마찬가지로 예외라면 처음부터 은빛 머리 사내만을 쳐다보고 있던 하연뿐이었다. 그녀는 현 혼 대륙에 마법사라는 존재가 얼마나 극소수인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 곳은 판타지 세계니까 당연히 마법사들이 마법 학교에서 무수히 많이 배출되고 있다고 생각하 고 있는 것이다. "몇 서클까지 익혔나?" 오벤성주의 물음에 은빛 머리의 사내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5서클까지 익혔습니다." 현 대륙의 최고 마법사가 7서클의 마법사다. 그런데 아직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벌써 5 서클의 마법을 익혔다니......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모두 경악해서 은빛 머리의 마법사를 바라보는 가운데 하연만이 혼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겨우 5서클이라니...... 마법은 12서클까지로 9서클을 익히면 마스터, 10서클에 이르면 현자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다고 했는데...... 아직 멀었군.' 그러나 그것은 하연이 인간이 이룰 수 있는 마법은 10서클까지가 전부이고 11서클은 용언마법을 지닌 드레곤만이 가능하며 12서클은 신의 창조마법이라는 것을 몰랐기에 한 생각이었다. 갈루마가 늘 자신이 대 현자라고 떠들어대는 바람에 하연도 마법이라는 것을 좀 배워 볼까 해서 갈루마를 충동질해 마법을 가르쳐 달라고 조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마법이 란 머리만 아플 뿐 전혀 배울게 못된다는 것이었다. 무슨 도가의 도인술도 아니고 왜 그렇게 뜻 모를 말이 많은 건지...... 뭐 천지에 고루 퍼져 있는 것이 마나이고 그 마나를 다스리는 것이 마법이라고? 하아~ 그렇다고 수학 공식도 아닌 주제에 무슨 외울게 그리도 많은지...... 그래서 대충 마법에 대해 들어두기는 했지만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 데 그런 골치 아픈 공부로 머리 썩일 일은 없지 않은가? 오벤 성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보, 보여줄 수 있겠나?" 고개를 끄덕인 은빛 마법사는 오른손을 펴들며 작은 소리로 뭐라고 속삭이더니 담담한 어조로 중 얼거렸다. "......파이어 볼!" 그러자 그의 손바닥에서 붉꽃이 피어오르더니 축구공만한 불덩어리가 만들어졌다. 그 놀라운 광경에 모두 넋을 잃었다. 마법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하연 또한 그 광경에 마법 공부를 포기한 것을 아쉬워 할 지경이었다. 오벤 성주는 언젠가 궁정 마법사인 페이에른이 마법을 펼치는 것을 본 적이 있어서 그것이 분명 5서클에 해당하는 공격마법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자 의문이 일었다. 저 정도의 마법사라면 분명 마법사가 흔치 않은 이 혼 대륙에서 어느 나라에 가도 궁정 마법사로 임명될 수 있는데 왜 용병 따위의 일을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실력만을 보겠다고 했으므로 그 이유를 물어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흠~ 그 정도의 실력이면 충분하겠군. 자네를 고용하도록 하지. ...다른 사람들도 물론 동의하리 라고 믿네." 마지막은 용병들을 둘러보며 한 말이었다. 용병들은 제각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의 마법으로 그들이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 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싸움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이 곳 오벤 성은 유즈베리아의 수도인 위도프와 가까워 할 일없는 귀족들의 휴양지나 관광지로 쓰일 뿐 별 위험이 없는 지역이었기에 이름난 용병들이 있을 리가 없었다. 때문에 그들의 실력이 라고 해봤자 뻔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나 예외가 있듯 한 사람만은 달랐다. 은빛 마법사가 나타나기 전에 하연이 찍어 두었던 검은머리로 얼굴을 가린 날렵한 몸매의 사내였 다. 검술의 검자도 모르는 하연이 보기에도 그 사내의 실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빠름, 그 한가지만 가지고 어느새 상대의 목에 검을 들이대고 있었던 것이다. 세 번의 싸움을 가볍게 이겨낸 그는 두 명 중 나머지 한 사람으로 뽑혔다. 그의 마지막 상대인 덩 치가 크고 도끼를 든 사내는 그의 빠름에 쥐새끼 같은 놈이라고 실컷 욕을 퍼붓고는 사라졌다. 그 런데도 그는 무표정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원래 말이 없는 인물인 듯 오벤 성주가 그에게 이름을 물었을 때도 마지못한 듯. "사담." 이라고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하연의 흥미를 자극했다는 것도 모른 채. 은빛 마법사의 이름은 카리스로 대륙 여기저기를 여행하는 여행자라고 했다. 그는 시종 부드러 운 얼굴로 여기저기 여행했던 일에 대해 말하며 대화를 주도해 나갔는데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예기는 한 마디도 없었다. 때문에 그의 말에서 그의 신분내력을 알 수 있을까 해서 이것저것 말 을 시켜보던 오벤 성주도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 두사람에게 따로 당부해 둘게 있다는 오벤 성주의 말에 하연과 로베인은 접대실을 나왔다. 이제부터 멋진 동료들과 모험을 떠날 수 있겠다고 즐거워하는 하연과는 달리 로베인은 어쩐지 침 울한 얼굴이었다. "왜 그래, 로베인? 집 떠날 일을 생각하니까 걱정돼? 너무 걱정하지마.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거 야. 산적도 만나고 보물도 털고 어쩌면 노예로 팔려갈지도 모르지. 그 때도 정신만 바짝 차리 면......" 로베인은 황급히 하연의 입을 막았다. 로베인이 걱정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하연이 은빛 마법사 카리스에게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도무지 하연이 카리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지 않은가? 그런데 이제 하연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걱정은 아주 작은 걱정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보니 하연이 자신을 도와 저주를 풀어주겠다는 것은 말뿐이었고 실상은 위험천만한 모험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빤히 보였던 것이다. 그런 모험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할 계획인 듯 하지 않 은가? 노예로 팔려가면서도 즐겁게 웃고 있을 하연을 떠올리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로베인은 한시도 하연에게서 눈을 떼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모험을 떠나게 되는군요. 그러나... 과연 하연이 생각하는 모험이 될지는......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1-02-2001 12:57 Line : 118 Read : 2526 [6] 마신 소환사 -14- -------------------------------------------------------------------------------- Ip address : 211.112.121.180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191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0-12-11 , 08:49:14 PM 마신 소환사 -14- 이곳 여자들이 입는 옷은 하연이 보기에 전혀 여행할 때 입을 만한 것이 못되었다. 긴치마에 거치적거리는 레이스와 리본이 가득 달린 블라우스는 기본이고 여행 복이라고 따로 마 련해서 가져온 것 역시 가지각색의 리본과 레이스가 안 달린 것이 없었던 것이다. 성에 있을 때는 하녀들이 가져다 놓은 옷을 대충 걸쳤지만 이제 여행을 떠나는 마당이라 하연은 본래 입었던 청바지와 면티로 바꿔 입었다. 그리고 바람이 불거나 날씨가 추울 때를 대비해 검 은 로브를 하녀에게 가방 하나를 가져다 달라고 해서 거기에 챙겨 넣었다. 그러고 나서자 그런 차 림의 옷을 처음 보는 로베인 등은 기겁한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짝 달라붙어 늘씬한 다리 선이 그대로 들어 나는 청바지에 헐렁한 면티는 그들의 얼굴을 단번에 붉히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 하연!" 로베인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러나 하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멀뚱멀뚱 로베인을 쳐다볼 뿐이었다. "왜?" "도, 도대체 옷, 옷차림이 그게 뭐야?" 하연은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거꾸로 입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 고 어디 찢어진 것도 아니고. "이상 없는데....?" "창녀도 그런 옷차림을 하지는 않을 거다!" 뜻밖의 폭언을 들은 하연은 입이 쩍 벌어졌다. '내가 가슴을 들어내 놓았나? 아니면 팬티가 보일락 말락한 짧은 미니 스커트를 입길 했나? 왜 그 런 소리를 들어야 해!' 화가 나서 소리를 치르려던 하연은 문뜩 어떤 생각이 떠오르자 눈을 빛내며 로베인에게 물었다. "이 옷은 내 고향에선 그저 평상복일 뿐이라고. 그런데 창녀라니? 난 창녀를 만나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로베인은 창녀를 만나 보았나 봐? 흐응! 창녀랑 만나서 뭐 했어, 로베인?" 하연의 말에 로베인은 말문이 막힌 듯 식은땀만 뻘뻘 흘렸다. 오벤 성주는 그런 로베인을 보며 멍 청한 녀석이라는 듯 혀를 쯧쯧 차더니 사담과 카리스에게 잘 부탁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숙여 보 였다. 사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카리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하연과 로베인은 그것을 단순히 그들을 잘 보호해 달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지만 실상은 달라도 한 참 달랐다. 오벤 성주는 로베인의 여행을 허락한 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아이린느 공주에게 마음이 있었다면 왜 진즉 자신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었 다. 그리고 며칠 동안 로베인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오벤 성주는 로베인의 마음을 눈치챌 수 있었 다. 여자들의 혐오감에 찬 시선이 싫어서 하녀들이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싫어하던 로베인이 손수 하녀를 뽑아 하연의 시중을 들도록 시키지를 않나, 어둠의 사제라는 것 때문에 사람들의 두려움 에 찬 시선을 받지 않도록 일일이 신경 쓰는 것하며 둔한 하연을 제외하고 성안의 모든 사람들이 로베인의 마음을 눈치챌 정도였다. 오벤 성주는 하연이 며느리 감으로 마음에 든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말대로 하연은 출신내력도 불분명했고 또한 어둠의 사제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혼인하기 싫어하는 하연을 위해 다른 여자에게 마음이 있다는 잘못된 추측까지 뒤집어 쓴 아들의 마음을 생각하자 둘이 잘 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벤 성주는 사담과 카리스를 따로 남도록 해서 은밀히 부탁했던 것이다. 이번 여행 동안 로베인과 하연이 이 어질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신경 써 달라고. 아웅다웅 싸우던 하연과 로베인은 결국 하연이 지금 입은 옷에 검은 로브를 걸치는 것으로 낙찰 을 보았다. 검은 로브를 입으며 하연은 투덜거렸다. "우웅! 이 로브를 입으면 사람들이 날 피하는데......!" 그래서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로베인은 자신의 성과를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로베인은 몰랐지만 거기에는 갈루마의 도움이 상당히 들어가 있었다. 하인들이 바리바리 짐을 들어 마차에 싣는 것을 보면서 하연은 승마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마차 여행이라니 어딘지 폼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인생은 폼생폼사가 아니었던가? 이윽고 그들이 출발한 시각은 정오가 다 되어서였다. 그들은 우선 수도인 위도프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곳에 오래 된 어둠의 신전이 있는데 그 어둠의 신전에서 현재 등록된 바람의 사제들의 명단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사담이 말을 몰았고 카리프와 로베인은 심각한 얼굴로 바칸과 길로아의 전쟁이 어떻고 나바린 반 도에서의 해적의 출현이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하연이 전혀 알아듣지 못할 예기로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래서 하연은 그들의 대화에 끼기를 포기하고 멍하니 창 밖의 풍경이나 구경하고 있는 데 갈루마가 말했다. -수상해! 엄청 수상해!- "뭐가?" -뭐긴 저 카리스라는 마법사지!- "카리스씨가? 왜?" -저 나이에 벌써 5서클의 마법사라니 있을 수 있는 일이냐? 게다가 왠지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것 같은 친숙한 느낌이 든단 말이다.- "훗! 질투하는구나!" -뭐, 질, 질투!! 내가 왜?- "그거야 자칭 대현자 갈루마님도 저 나이에는 못 오른 경지에 카리스씨가 올라가 있으니까." -으...... 너, 나를 못 믿는 거냐? 내가 수상하다면 수상한거야!- "그래, 그래! 하긴... 카리스씨의 은빛머리는 나도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것 같긴 해." -그렇지. 은빛머리... 은빛? 헉! 서, 설마......!- "왜 그래? 뭐 짚이는 거라도 있어?"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그래, 그럴 리가 없어.- 혼자서 뭐라고 중얼중얼 거리는 갈루마의 횡설수설에 하연은 드디어 이 지팡이가 미쳤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젖고 있다가 문뜩 카리스씨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카리스씨가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싱긋 웃는 것이 아닌가? 그 웃음에 하연도 싱긋 웃음을 되돌려주면서 갈루마의 수상하다는 말에 속으로 동의를 표했다. 헤헤! 이젠 카리스의 정체를 모두 알았겠지요? ^-^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1-02-2001 12:58 Line : 92 Read : 2786 [7] 마신 소환사 -15- -------------------------------------------------------------------------------- Ip address : 211.112.121.180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242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0-12-13 , 10:22:31 PM 마신 소환사 -15- 하연의 생각과는 달리 마차 여행은 짜증이 날 정도로 한가하기만 했다. 처음에는 두근두근 했었 다. 혹시나 농기구라도 든 산적들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아 주지 않을까 하고. 그런데 산적은커녕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길이 몇 시간이나 계속 되었다. 그래서 안절부절하고 있으려니까 카리스가 위로하듯 말했다. "너무 초조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녁때까지는 수도에 도착할 수 있을 테니까요." "뭐라고요? 그렇게 빨리?" 그 말에 카리스는 무슨 소린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연을 쳐다보았으나 하연의 생각을 익 히 짐작하고 있던 로베인은 놀리듯이 말했다. "괜한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하연. 우리 유즈베리아는 작은 나라로 거의 대부분이 성 지를 순례하기 위해 이 곳을 지나는 사제들이나 문화 유적을 발굴하는 헌터들 그리고 관광객들로 부터의 수입이 대부분이라고. 때문에 치안유지에 각별히 신경을 쓰지. 기사들의 대부분이 치안경 비를 담당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정도야. 그런데 누가 이런 대낮에 산적질을 하겠다고 나서겠 어?" 풀이 죽은 듯 축 쳐진 하연의 어깨를 보면서 카리스는 새삼 자신의 선택에 만족감을 느꼈다. 하필이면 자신의 보물창고에서 고르고 골라 갈루마를 훔쳐 간 재수 없는 인간을 찾아 가 보자는 그 선택에 대해. 카리스는 바로 실버 드레곤 칼링스타의 폴리모프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앞으로 왠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기대감에 칼링스타는 순간 가식적인 미소가 아닌 진 정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만큼 하연은 칼링스타에게 있어서 몇 백년만에 만난 흥미로운 존재였던 것이다. 마차는 마치 시골길을 달리듯이 덜컹거렸다. 그 덜컹거리는 승차감을 맛보며 얼마 쯤 갔을까? 갑자기 하연이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흥분한 표정으로 마차 지붕을 두들이며 사담에게 외쳤 다. "잠깐! 마차 좀 세워봐요!" 그 소리에 사담은 급히 마차를 세웠다. 모두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연을 쳐다보는 가운데 하연이 말했다. "이건 불공평해요." "뭐가?" "무엇이 말입니까?" 로베인과 카리스가 동시에 물었다. "왜 사담이 마차를 모는 거지요?" "그거야 우리 중에서 사담만이 마차를 몰아 본 경험이 있다니까." 로베인의 말에 하연은 쯧쯧 혀를 차며 검지 손가락을 그들의 눈앞에 가로 저어 보이더니 자신만 만하게 주장했다. "저도 마차를 몰아 본 경험이 있어요." 로베인과 카리스는 서로 마주보며 한숨을 쉬었고 사담은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마차를 출발시키려 고 했다. 그들이 모두 마차를 몰아 본 경험이 아무도 없다고 쳐도 하연에게 마차를 몰게 할 생각 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혼 대륙은 대륙의 중앙에 자리 한 하라마르트 산을 경계로 북쪽으로는 유즈베리아, 슈이센, 그랑 디 아, 나바린이 남쪽으로는 바칸, 갈로아, 다렌이 자리해 있다. 그리고 남자에 비해 여성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너무 적어 나바린에서는 약탈의 대상이 되기도 하 지만 유즈베리아, 슈이센, 그랑디아에서는 철저한 기사도가 신봉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여 자에게 마차를 몰게 하고 편히 마차 안에서 앉아 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미 늦어 하연은 벌써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가볍게 마부 석에 올라가 놀라서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사담으로부터 고삐를 낚아채더니 말했다. "사담은 들어가서 쉬어요. 내가 몰게요." 순간 사담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그러더니 순순히 마부석에서 내려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 런 사담을 로베인과 카리스가 비난하듯 쳐다보았지만 사담은 무표정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사담은 자신의 행동을 무진장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덜컹거렸던 마차가 갑자기 광란의 질주를 시작했던 것이다. 자신만만하게 몰아보았다던 하연의 말이 거짓말임이 들통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리저리 부딪쳐서 여기저기 멍이 들고 속이 울렁거려 토할 것만 같았다. 그런 마차 안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하연은 마치 청룡열차라도 탄 듯한 스릴을 즐기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이야호! 달려라, 달려!" 한참 만에야 겨우 하연의 손에서 다시 고삐를 쟁취한 사담은 가끔씩 교대하자는 하연의 말을 들 을 때마다 경기를 일으키듯 몸을 떨며 고삐를 꼭 움켜쥐었고 로베인과 카리스는 무섭게 하연을 노려보았다. 올릴려고 그랬는데... 올때마다 이상하게 문이 안열려서... 죄송해요.^_^ 좀 짧지요? 그래서 내일은 꼭 연참을... 기대해 주세요.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2-02-2001 12:58 Line : 108 Read : 2231 [8] 마신 소환사 -16- -------------------------------------------------------------------------------- Ip address : 211.112.121.180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260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0-12-14 , 11:31:52 PM 마신 소환사 -16- 얼마 후, 드디어 그들은 수도인 위도프에 도착했다. 수도는 돌로 쌓은 높은 성곽으로 길게 둘러 쌓여 있었고 마차 두 개 정도는 쉽게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성문이 활짝 열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허리에 검을 찬 서너 명의 병사들 이 저희들끼리 모여서 떠들고 있었다. 성문으로는 각양각색의 많은 사람들과 마차들이 드나들고 있었고 그 중 상당히 수상해 보이는 사 람들도 많았지만 그 병사들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많아 하연 일행은 조금 성문에서 지체한 후에야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성안은 분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인지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여기저기 여관을 알아보는 사람들, 초저녁부터 술집에서 흥청거리는 고함소리와 웃음소리로 거리는 시끌 벅적했다. 호기심에 이리저리 둘러보는 하연을 보며 로베인은 빙그레 웃었다. 이렇게 복잡한 곳은 처음 보 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부탄의 안식처라는 제법 큰 여관에 마차를 세웠다. 그러자 여러 명의 소년들이 달려오며 외쳤다. "어서 오십시오. 부탄의 안식처에 잘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곧 마차를 마구간으로 가져가거나 그들의 짐을 받아 주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여관에 들어가자 위층은 여관을 하고 아래층은 식당을 하는 듯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가득 차 있 었다. 그리고 음악. 단조롭고 경쾌한 리듬이 반복적으로 식당 안에 넓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 느새 그 음악이 귀에 익어 하연이 허밍으로 따라 부를 정도로. 위층에 짐을 정리하고 내려오자 다른 일행들은 벌써 음식을 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기름기가 둥둥 떠 있는 고기를 넣은 스프와 빵. 그리고 이름 모를 야채들을 대강 썰어 수북히 쌓 아 놓은 셀러드. 그 이외에 정체불명의 고기요리들이 마치 곰팡이가 핀 것 같은 모습으로 놓여 있 었다. 하연은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벌써 몇 일째인가? 맨 처음에는 이 세계의 신기한 요리에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먹었지만 이제 는 그것도 질려버려서 오직 쌀밥과 된장국 생각만이 간절했다. 그 때문인지 기름기가 둥둥 떠 있 는 스프를 보자 속이 니글거릴 정도였다. 그래서 빵이랑 아채만 조금씩 먹고 있자 걱정되는지 로 베인이 물었다. "왜 그래, 하연? 맛이 없어?" "아니......" 어떻게 쌀밥과 된장국이 먹고싶어서라고 대답하겠는가? 그래서 대충 얼버무리고 있는데 카리스 가 말했다. "걱정마세요, 로베인. 여자들은 원래 조금씩밖에 먹지 않는답니다." 하연은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에요, 카리스. 숙녀란 원래 소식을 하게 마련이지요." "어? 하지만...... 음식을 남기는 것은 죄악이라면서 여기 있는 음식의 두 배 정도를 먹은 적도 있 잖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로베인이 끼어 들었다. 그 말에 카리스와 사담은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하연을 쳐다보았다. 저 가냘픈 몸매 어디에 그 많은 음식이 들어간단 말인가? 그러면서 그들은 하연의 입에서 당연히 말도 안 된다는 식의 반응이나 변명의 말이 나올 것을 기대했다. 여자들이 란 의례 그러니까. 그런데...... "지극히 당연하고도 옳은 말이네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이 음식들을 하나도 남기지 말고 전부 먹 도록 하세요. 전 오늘은 별로 식욕이 없어서요." 뻔뻔하기까지 한 그 말에 카리스와 사담이 멍하니 하연을 쳐다보는 가운데 하연은 그런 그들을 의식하지 못하고 식당 한 구석에 있는 작은 무대를 쳐다보았다. 한 젊은 남자가 바이올린과 비슷해 보이는 악기를 켜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부드럽게 흘러 나오는 아름다운 음률. 그 소리는 듣고 있자 하연은 점점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모험에 대한 기 쁨은 가라앉고 스스로를 바라보게 되었다. 한없이 초라하고 비참한 자신이 느껴졌다. 금방이라 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그런 자신의 상태에 기분이 나빠진 하연은 벌떡 일어나서 무대로 가 젊은 남자에게 말했다. "그것 좀 제가 연주해 봐도 될까요?"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하연의 검은 로브를 인식한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비엘라를 연주할 수 있습니까?" 하연은 당당하게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물론이지요." 그 모습에 로베인 등은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들은 이미 하연이 거짓 말을 할 때는 심할 정도로 과장되게 당당한 행동을 취한다는 것을 알아챘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낚아채듯 비엘라를 집어 든 하연이 심호흡을 한 후 활을 한번 긋자 끼이이익! 하는 듣기 괴로운 잡음이 흘러나왔다. '역시나!' '그럼 그렇지!' 로베인 등이 탁자에 고개를 쳐 박고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경쾌하고 밝은 음악이 연 주되기 시작했다. 하연이 비엘라를 주인에게 돌려주었나 싶어 고개를 든 로베인 등은 비엘라를 연주하고 하연을 보 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박자를 맞추듯이 한쪽 발을 구르며 즐거운 듯이 연주하고 있는 하연의 모습은 마치 작은 요정 같 았다. 로베인 등은 넋이 나간 듯 그런 하연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고 그 흥겨운 음악소리에 이끌린 식 당 안의 모든 사람들은 어느덧 같이 발을 구를 정도였다. 그 작은 음악회는 밤중까지 계속 이어졌고 새벽이 가까워 올 때에야 하연은 잠을 자기 위해 위층 으로 올라갔다. 그러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역시 작은 별은 위대한 곡이었어. 반짝 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추네......" 눈이 오네요. ^-^ 나가 놀고 싶은데... 글을 써야 겠지요?!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2-02-2001 12:58 Line : 98 Read : 2119 [9] 마신 소환사 -17- -------------------------------------------------------------------------------- Ip address : 211.112.121.180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261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0-12-14 , 11:34:01 PM 마신 소환사 -17- 다음 날. 하연 일행은 늦은 아침을 먹고 어둠의 신전으로 갔다. 낡은 목조 건물로 되어있는 신전은 금방이 라도 허물어질 듯 위험해 보였다. 그들이 들어서자 견습사제로 보이는 어린 소년이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길 바라겠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우리는 현재 대륙에 존재하는 어둠의 사제들의 명부를 보고 싶어 왔습니다. 관람을 허락해 주셨 으면 합니다." 로베인의 말에 어린 견습사제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은 대사제님의 허락이 필요한 사항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기다리는 동안 하연은 벽에 걸린 그림들을 구경했다. 빛과 어둠.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신들 의 그림이었다. 그 그림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으려니까 갈루마가 말했다. -불의 마신인 카이람은 보통 마족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지지. 그것은 마족이 두려움을 모르는 종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의 여신인 엘레나는 엘프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지는데 그것 역시 엘프가 자연과의 조화로움과 평화를 사랑하는 종족이기 때문이다. 땅의 신 부 탄은 드워프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끊임없이 일하는 종족이기 때문이고 바람의 정 신이 요정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낙천적이고 쾌활한 그들의 종족적 특성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형상을 한 신의 모습은 없는 거네. 왜 일까?" "그것은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인간에 대한 경고가 아닐까? 결국 인간은 다른 종족이 지 닌 용기, 조화, 끈기, 낙천성 어느 것 하나 가지고 있지 못하니까." 갈루마에게 물은 것이지만 그 질문에 대답한 사람은 뜻밖에 다른 사람이었다. 누군가 싶어서 돌아보니 검은 로브를 입고 흰 수염을 길게 늘어트린 날카로운 눈을 지닌 노인이 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흰 로브를 입은 인상이 부드러운 노인과 젊은 빛의 사제 한 명이 따르 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노인은 마치 자신의 생각을 하연에게 강요하듯 말하는 것이었다. 그에 반발심이 생긴 하연은 싱 긋 웃으며 말했다. "꽤 부정적인 생각을 지니신 분이군요. 반대로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나요?" 노인이 눈쌀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떻게?" 하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인간은 모두 신이 될 수 있다. 그가 오직 한 가지를 목표로 앞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이 용기든 끈 기든... 조화로움이든." 그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런 식으로는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충격 속에 잠긴 그들을 일깨웠다. "허허허허! 상당히 긍정적인 젊음이로군." 하연은 방긋 웃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노인이 자신을 소개를 했다. "나는 빛의 사제 엘 노아라고 하네. 자네는 누군가?" "하연이예요." "자네같은 인재가 어둠의 신전에 있었다니...... 그래, 정식으로 신전에 등록은 되어 있는가?" 하연은 당황해서 대답했다. "아, 아닌데요." "그렇다면 어떤가? 자네의 성정으로 보아 빛의 사제가 되는 것이 더 나을 듯 한데...... 자네가 원 한다면 내 지금이라도 당장 빛의 사제로 등록시켜 줄 수가 있네. 그 정도의 힘은 내게 있지." 엘 노아. 신성국가 그랑디아의 빛의 대사제. 현 대륙에서 빛의 사제는 대부분이 귀족의 자제들이었다. 간 혹 평민 중에서 신성마법을 소유한 자들이 빛의 사제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분 일 뿐이고 귀족 가의 자제들이 아니면 빛의 사제가 될 수 없는 것이 현 교단의 실정이었다. 그것 은 귀족이 아니면 빛의 사제가 될 수 없다는 그릇된 편견이 교단 내에 생겨났기 때문이었 다. 그러나 엘 노아가 누구인가? 그랑디아 현 국왕의 아우이자 최고위 대사제였다. 그의 뜻을 막을만 한 존재는 현 빛의 교단 내에 아무도 없었다. 엘 노아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로베인도 어서 승낙하라는 듯 하연을 재촉하 는 눈빛을 보냈다. 그도 귀족인지라 빛의 사제가 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연은 애초부터 빛의 사제든 어둠의 사제이든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사람이었 다. 그러니 새삼 어둠의 사제에서 빛의 사제가 된다고 기쁠 것도 없었다. 때문에 시쿤둥한 표정을 지으며 거절해 버렸다. "싫어요." 눈이 온다는 기분에... 글을 많아 못썼지만 그래도? 연참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비굴한 웃음) 좀 봐주세요^-^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2-02-2001 12:58 Line : 114 Read : 2098 [10] 마신 소환사 -18- -------------------------------------------------------------------------------- Ip address : 211.112.121.180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287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0-12-15 , 11:23:19 PM 마신 소환사 -18- 설마 거절당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엘 노아와 그의 뒤에 서 있던 젊은 빛의 사제, 로베인 등은 모두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진 채 하연을 쳐다보았다. 그 속에서 오직 검은 로브를 입은 노인만이 하연의 결정이 기쁜 지 괴상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크캬캬캬! 잘 말해주었다. 그 놈의 귀찮은 예법만 찾는 빛의 사제놈들 보다야 어둠의 사제가 훨 씬 낫지. 흥! 꼴같잖게 고상이나 떨면서 신의 말씀이 어쩌구저쩌구. 정작 신의 말은 믿지도 않는 것들이 말이야!" 그 말에 젊은 빛의 사제가 화가 난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저희들이 어째서 신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불, 물, 땅, 바람. 어느 신의 경전이나 맨 처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빛과 어둠에서 태어났으니 그들은 우리의 부모요. 우리는 그 자식들이라! 그런데 너희는 그 어둠의 자식들인 우 리들은 배척하고 빛만이 유일한 주신인 듯 떠받들고 있지 않느냐? 그런데도 너희가 신의 말씀을 믿는다고 할 수 있느냐?" 젊은 사제는 당황한 듯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자 엘 노아가 나서며 노인을 말렸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우리 쪽의 실수였네, 바스카. 그만 용서하게." 빛의 대사제인 엘 노아의 사과였다. 그러나 노인은 코방귀만 뀔 뿐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인데요?" 하연이 관심을 갖고 물어오자 옳다구나 하고 엘 노아가 설명했다. 그녀가 자신을 도와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네도 바칸과 갈로아가 지금 한창 전쟁 중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갈로아는 대륙 전체 식 량의 삼분의 이를 차지하고 있는 농업국가로 이번 전쟁이 길어지면 대륙의 식량난으로까지 번질 지도 모르네. 그 때문에 이번 교단회의에서 전쟁을 막기 위해 성기사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네.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사제들의 특성 상 파견할 수 있는 성기사단은 회복을 담당하는 빛의 속 성을 지닌 물의 사제들뿐이었지. 어둠의 사제들을 파견했다가는 전쟁이 더욱 번지거나 중요한 곡 창지대를 잃을 염려가 있어서...... 그러자 한 젊은 빛의 사제가 그 사실을 놓고 어둠의 사제들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비아냥거렸지 뭔가? 그 말을 들은 어둠의 사제들이 그 말을 여기 이 바스 카 대사제에게 전했고 그로 인해 바스카 대사제가 이렇듯 화를 내며 그 사제의 사제직을 당장 박 탈하지 않으면 어둠의 신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엘 노아 대사제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휘저었다. "이런 사소한 문제로 인해 내 대에서 빛과 어둠의 전쟁이 다시 일어나게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앞날이 창창한 젊은 사제의 앞길을 막을 수도 없고." 그 젊은 사제가 아무래도 같이 온 젊은 빛의 사제 같았다. 짧은 갈색 머리에 순진해 보이는 갈색 눈동자의 청년이 자기로 인해 빛과 어둠의 전쟁이 다시 발발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리에 크게 안색이 창백해지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순간적인 말실수였지 무슨 깊은 뜻이 있어서 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 작은 실수 로 쫀쫀하게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다니...... 하연은 일부러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로베인에게 말했다. "나, 참! 로베인, 어서 대사제님께 바람의 사제들의 명부를 보여달라고 부탁드려요. 빨리 명부나 보고 가자고요." 그러자 엘 노아 대사제뿐만 아닌 바스카 대사제까지 당황하고 말았다. 그 또한 빛과 어둠의 전쟁 이 다시 일어나길 바라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하연이 중재를 하면 못이기는 척 사과를 받아 들일 생각이었는데 하연이 말려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당황한 것이다. "너, 너는......!" 교단의 전쟁은 1, 2차 빛과 어둠의 전쟁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륙을 거의 폐허로 만들어 놓을 수 도 있다. 그것은 그 전쟁이 빛의 힘과 어둠의 힘의 대결의 장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 때 문에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질병으로 죽거나 그들의 땅이 죽음의 땅으로 변하고 문명이 파 괴되고. 그것은 1차 전쟁으로 사라진 고대문명을 회고해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무서운 전쟁이 다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인데 마치 별것도 아닌 것 처럼 지나쳐 버리려고 하다니...... 바스카 대사제가 화가 나서 자신의 처지도 잊은 채 하연을 나무라는데 다행이 그 보다 먼저 로베 인이 나서서 그의 체면을 유지시켜 주었다. 로베인이 외쳤다. "하연, 이런 중요한 때에 그게 무슨 말이야? 이건 대륙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하연은 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봐야 부부싸움이잖아? 부부싸움에 끼어 들어서 뭐 하려고?" "부, 부부싸움!" 모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보는 가운데 하연은 뻔뻔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그렇잖아? 자식들이 싸움이 났다. 빛과 어둠인 두 부부가 싸움을 말리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자 식들을 달랠 줄 모르는 어둠이 자신은 빠지기로 결정했다. 이에 화가 난 빛이 어둠에게 '당신은 도무지 할 줄 아는 게 없군요.' 라고 비아냥거리자 어둠이 자신을 무시했다고 화를 냈다. 정리하 면 그런 것 아닌가요?" 하연은 두 대사제들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별로 틀린 말은 아닌지라 두 대사제들은 할말을 잊은 채 하연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전 부부싸움에 끼어 들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두 분이 알아서 해결하라고요." 그러면서 하연은 다른 일행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는 잠시 나가 있도록 하지요? 두 분이 서 잘 해결하도록 말이에요. 어른들이 말이야, 유치하 게..... 나, 참." 한심하다는 듯 두 대사제를 힐끔 노려보며 하연은 다른 일행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얼떨결에 같이 따라나온 젊은 빛의 사제는 하연을 한없이 존경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에 게 하연은 말 한마디로 대륙의 평화를 지킨 위대한 영웅이었던 것이다. 역시 주인공 다운 하연... 와하하하!! 앞으로 더욱더 주인공 다운 활약(?)을 할 하연을 기대해 주세요.^-^ 앞으로 나올 조연들이 많은데 그 조연들을 다 이끌고 다녀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2-02-2001 12:58 Line : 147 Read : 2154 [11] 마신 소환사 -19- -------------------------------------------------------------------------------- Ip address : 211.112.121.180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326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0-12-17 , 07:16:52 PM 마신 소환사 -19- 예기가 길어지는지 아직 열리지 않고 있는 문을 보며 사담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처음 오벤에서 하연을 보았을 때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륙에서 흔치 않은 검은 머 리와 검은 눈. 게다가 어둠의 사제를 뜻하는 검은 로브. 순간 죽은 여동생이 살아 온 듯 했다. 일찍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어린 여동생과 살았던 그는 먹고 살기 위해 거 리에서 구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어디론가 도망가 버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자신만을 바라보고 사는 여동생 때문에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여동생이 보이지 않아 이리저리 찾아다니다 결국 찾지 못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술에 잔뜩 취해 돌아와서는 여동생을 어둠의 신전에 팔아 치웠다고 말 하는 것이었다. 그는 천지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 분노가 치민 그는 술에 취한 아버지를 두들겨 패고 그 길로 여동생을 찾아 신전으로 갔지만 돈을 돌려주지 않으면 여동생을 돌려줄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은화 한 개. 여동생의 몸값이었다. 게다가 그 돈은 이미 아버지의 술값으로 모두 들어가 버리고 없었다. 검은 잡아 본적도 없었지만 사담은 그 길로 돈을 벌기 위해 용병에 들어갔다. 전쟁터에 가서 사람 을 죽이고 또 죽이고...... 그렇게 해서 목표했던 은화 한 개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지만 여동생은 찾지 못했다. 이미 그 신전에서 여동생을 다른 곳으로 빼돌린 후였던 것이다. 그 후, 어둠의 신전을 찾아다니다 얼마 전 슈이센에서 죽은 여동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말이 신전이지 매음굴이나 마찬가지였던 그곳에서 여동생은 신도들에게 축복을 내린다는 미명아 래 몸을 팔았던 것이다. 후미진 신전구석에 다른 시체들과 함께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여동생 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 그는 눈이 뒤집히는 듯 했다. 그래서 그 신전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죽여버리고 그 곳을 도망쳐 정처 없이 걷고 있다가 오벤 에 이르렀고 하연을 본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을 피하자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 하는 모습 속에서 여동생을 떠올린 사담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벤 성에서 용병을 구한다고 했을 때 망설이지 않고 응모한 것이었다. 그녀를 지켜주면 서 곁에 있고 싶었다. 그것이 그가 살아야 하는 유일한 이유인 듯 느껴졌다. 그러나 며칠 동안 같이 지내면서 그녀가 결코 누군가의 보호를 기다리고 있을 여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여동생과는 달랐다. 오히려 위험 속을 헤치고 다니는 여인이라고나 할 까? 처음으로 웃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녀 덕분일 것이다. 빛과 어둠의 전쟁이 부부싸움이라니...... 그 생각을 하면서 쿡쿡!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는데 마침내 삐걱! 문이 열리며 두 사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의가 잘 끝난 듯 엘 노아의 표정이 밝아 보였다. 바스카 대사제는 여전히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 고 있었지만. 하연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상의가 잘 끝났나 보군요. 그러면 이제 저희 부탁을 들어주세요." 바스카 대사제가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바람의 사제들에 대한 명단이라고 했지? 그런데...... 알고는 있는가? 현 대륙에 퍼져 있는 바람 의 사제들의 인원은 대략 만 명이 훨씬 넘네. 무엇 때문에 그 명단이 필요한지 가르쳐 준다면 일 이 더 쉬어질 것 같군." 만 명이 넘는다는 말에 입을 쩍 벌리고 있던 로베인은 도와주겠다는 뜻을 품은 바스카의 말에 자 신이 저주를 받게 된 경위를 털어놓았다. 그 말을 들은 엘 노아와 젊은 빛의 사제는 황당하다는 표정이었고 바스카는 실실 웃음을 쪼개며 즐거워하는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얼마 전 어둠의 마녀 휠리아가 이 곳에 들렸었지. 오벤쪽에 오는 길이었던 모양이군. 그녀의 저 주라면 웬만한 사제들은 풀기가 힘들지." "그 마녀를 알고 있습니까?" 로베인이 놀라서 물었다. "알고 말고. 벌써 육십이 넘은 노파지만 모습은 아직도 팽팽한 이십대에 붉은 머리, 보라빛 눈동 자의 육감적인 미녀가 아니었던가?" "네. 맞습니다만... 그녀가 육십이 넘은 노파라고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로베인이 되물었다. "그래. 인간과 엘프의 혼혈인 하프 엘프거든. 게다가 별종이지. 엘프주제에 바람의 사제가 된 것 만 해도 웃기는 일인데 그것도 어둠 쪽이라니." 확실히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조화와 평화를 사랑하는 엘프의 피를 이른 여인이 바람의 그것도 어둠의 사제라니...... 그러나 어쨌든 다른 사람의 직업선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하연이 물었 다. "그래서 저주를 풀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건가요? 없는 건가요?" 곰곰히 생각해보던 바스카 대사제가 말했다. "딱 한사람이 있긴 있지." "누군데요?" 로베인과 하연의 기대에 찬 시선을 받으며 바스카 대사제는 또박또박 말했다. "대 현자 갈루마!" -암! 나라면 당연 그따위 저주쯤 문제없이 풀었지. 달리 대현자였겠냐? 물론 모두 예전의 일이지 만......- 갈루마의 자화자찬을 한귀로 흘리며 하연은 맥이 탁 풀린 듯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 러나 갈루마의 현 상태를 모르는 로베인은 들뜬 표정으로 물었다. "그 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모르지. 일설에는 하라마르트 산으로 수행하러 들어갔다고도 하고. 드레곤을 잡으러 갔다는 말 도 있고. 정체를 감춘 채 어느 나라의 재상이 되었다는 말도 있는데. 소문만 분분할 뿐 어디 있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네." 그런 말을 듣고도 한 줄기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반드시 갈루마를 찾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다지 는 로베인을 보며 하연을 말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망설였다. 그러다가 사실을 알았을 때 로베인이 받을 충격을 생각해 하연은 입을 다물기로 결심했다. 그리 고 혹시 있을지도 모를 다른 가능성을 찾아 확인하듯 물었다. "대 현자 갈루마 말고 다른 사람은 없나요?" "현재로는 없다고 봐야겠지. 휠리아는 하프 엘프다. 인간과는 달리 자신이 믿는 존재에 대해 의심 을 한다거나 상황에 따라 신앙생활이 게을러진다거나 하는 일이 극히 드물지. 그래서 성격은 나 쁘지만 그녀의 믿음만큼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웬만한 인간은 그런 그녀의 저주를 절대 풀 수 있을만한 믿음을 갖기 힘들지. 게다가 바람의 사제들을 잘 알지 않는가? 어느 정도 수련을 마 치면 대개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정을 흩뿌리고 다닐 뿐 신앙에 대해 깊이 통찰하려는 의지 가 부족하지." 그 말에 하연은 긴 한숨을 쉬더니 위로하듯 로베인의 등을 툭툭! 쳤다. 그리고 바스카 대사제에 게 말했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바스카 대사제는 개면적은 듯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흐흠! 이 정도의 일로, 뭘. 그만 가 보거라!" 하연은 엘 노아 대사제와 젊은 빛의 사제에게도 인사했다. 그러자 엘 노아 대사제가 부드럽게 웃 으면서 하연에게 말했다. "고맙네. 일이 잘 끝난 건 모두 자네 덕분일세. 언제 그랑디아에 들릴 일이 있으면 꼭 날 찾아주 게. 그 때 내 꼭 오늘 일을 보답하도록 하겠네. 만나서 정말 반가웠네." 하연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일행들이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 로 생각했다. 역시 모험은 이 맛이야! 이래선 로베인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안담하기만 할뿐./// 그러면서도 열심히 로베인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차단하고 있는 유지였읍니다.^-^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2-02-2001 12:59 Line : 88 Read : 2726 [12] 마신 소환사 -20- -------------------------------------------------------------------------------- Ip address : 211.112.121.180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349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0-12-18 , 10:24:18 PM 마신 소환사 -20- 다시 부탄의 안식처로 돌아온 하연 일행은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기 위해 로베인의 방에 모였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까? 로베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반드시 대현자 갈루마님을 찾아야 합니다. 대륙을 모두 뒤져서라도." 비장해 보이기까지 한 로베인의 표정에 괜히 찔린 하연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맞는 말이에요. 로베인과 아이린느 공주의 미래가 걸린 일이니까요." "에...... 그래서는 아니고......" 로베인이 당황해서 변명하듯 중얼거렸지만 이미 하연은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방안을 왔다갔다하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망막하기만 했다. 갈루마는 이미 자신의 손안에 있지만 마법은 전혀 쓸 수 없는 상태. 그런데 그 런 갈루마를 찾아 대륙을 뒤져야 하다니...... 그런 바보 같은 짓이 또 어디 있겠는가? 너무 고민을 많이 해서 그런 것일까?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머리 속이 하얗게 비어오고 몸이 떨려오는 것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런 하연의 상태를 가장 먼저 눈치챈 건 카리스였다. 갈루마가 이미 그녀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녀가 고민하는 모습을 더욱 즐겁게 보 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은연중 그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자신의 레어를 침입해 갈루마를 훔쳐 간 하연에 대한 분노가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하연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순간 카리스는 자신조차 놀랄 정도로 큰 목소리로 외쳤다. "하연! 왜 그러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얼버무렸지만 그녀의 창백한 얼굴 색은 괜찮지 않음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그제야 그녀의 안색이 심상치 않음을 본 로베인과 사담도 걱정스런 얼굴로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그러자 하연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저 좀 피곤하네요. 오늘은 그만 쉬고 내일 다시 상의하도록 하지요." "그러는게 좋겠어. 어서 가서 푹 쉬어." 로베인이 적극적인 찬성 속에 하연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런 하연의 뒷모습을 보며 세 남자는 왠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금방이라도 그녀가 그들의 시 선 속에서 사라질 듯한. 그러나 이내 그들은 그 생각을 떨쳐버렸다. 그 어떤 불길함도 그녀만큼은 피해 가지 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정말 괜찮은 거냐, 하연?- "괜찮아! 난 괜찮아!" 마치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는 듯한 그 말에 갈루마는 가슴이 지끈지끈 아팠다. 갈루마는 태어날 때부터 마법에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후천적인 노력도 결코 만만치 않았 다. 한 순간도 마법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순간이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때문에 친구라곤 사귈 틈도 없었고 그의 친구가 되려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의 경외의 대상이었을 뿐 그 의 친구가 되겠다는 생각은 누구도 감히 하지도 못한 것이었다. 스스로도 별로 그런 점에서 아쉽 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늘 혼자였고 마법만의 그의 전부였다. 그래서 인간으로서 이룰 수 있는 마법의 한계인 현자가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드래곤에게 도전했던 것이다. 결국 패배하긴 해 영혼의 상태로 봉인 당하긴 했지만 마법사 로서 드래곤에게 도전한 최초의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을 늘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 순간 갈루마는 드래곤에게 도전했던 자신의 멍청함을 저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혼의 상태가 되어서야, 마법을 쓸 수 없게 되고서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는 친구가 생길 줄 그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마법만 쓸 수 있다면 하연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 텐데...... -마법을 쓸 수만 있다면......- 기절을 한 듯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하연을 보며 불가능한 일을 기원하듯 갈루마는 중얼거 렸다. 그날 밤. 잠들어 있는 하연의 방 창문이 살며시 열리더니 검은 그림자가 들어섰다. 그는 잠시 하연의 얼굴 을 내려다보더니 그녀의 머리맡에 무엇인가를 놓아두고는 재빨리 창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드이어 본격적인 모험의 시작이 될 것 같습니다. 모험! 모험이라네~ 와!!!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3-02-2001 23:37 Line : 133 Read : 1798 [13] 마신 소환사 -21-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351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0-12-19 , 01:14:53 AM 마신 소환사 -21- 밖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하연은 또 다시 날이 밝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로운 하루 가 그녀의 앞에 펼쳐진 것이다. 어제만 해도 다시 내일을 볼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지 않은가? 진정 하연은 감사했다. 어쩌면 오늘 하루뿐인 생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이 하루를 자신에게 준 신 에게. 일어나 세수를 하려던 그녀는 자신의 머리맡에 놓인 낡은 종이를 보았다. "뭐지?" 펴보니 지도였다. 그것도 반쪽자리. 순간 하연은 속으로 외쳤다. '보물지도다!' 연대를 추정할 수조차 없는 오래된 종이와 알아보지 못할 이상한 글들. 그리고 반쪽으로 ?어진 종이. 그것을 보고 하연은 확신을 얻은 것이다. 이 곳 세계를 글들을 그녀가 알아볼 수 없음은 너 무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지금의 그녀에게는 그것조차 신비함으로 다가오는 듯 했다. 그리고 그 지도가 왜 자신의 머리맡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조차 품지 않은 채 당연한 듯 중 얼거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모두 내 선행의 결과다. 역시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더니......" 전혀 자신의 선행에 대해서는 기억조차 없으면서도. 그 소리를 듣고 누군가 나무 위에서 떨어질뻔 했다는 것도 모른 채. 보물지도를 청바지에 챙겨 넣은 하연은 재빠르게 세수를 하고 갈루마를 든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 며 식당으로 내려갔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하연을 기다리고 있던 로베인 등은 밝은 표정으로 내려오는 하연을 보자 모 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로베인의 저주를 풀어야 한다는 생각은 이제 완전히 잊어버린 채 보물을 찾아 떠날 생각으로 꽉 찬 하연은 우선 든든하게 속을 채워둘 생각으로 와구와구 음식을 먹어댔다. 하연의 왕성한 식욕을 처음으로 목격한 카리스와 사담이 놀라던 말던. 그리고 로베인은 잘 먹는 하연의 모습을 만족한 듯 지켜보며 말했다. "내 저주 때문에 너무 고민하지마, 하연. 금방 저주를 풀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 니까. 그 때문에 하연이 병이라도 난다면 난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거야. 내겐 하연이 더 중요 해." 로베인이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그들이 돕지 않아도 이제 하연이 로베인의 마음을 눈치챌 것이라 고 카리스와 사담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착각이었으니...... 이미 생각이 온통 보물찾기 쪽으로 빠진 하연. 그 말을 듣자마자 희색이 영역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럼. 우리 보물 찾으러 가자! 그래도 되지, 응?" 세명의 인간과 지팡이의 낙담을 뒤로하고 하연은 열렬히 보물찾기를 주장했다. 간신히 용기를 내어 자신의 마음을 토로했더니 웬 보물찾기란 말인가? 그러나 하연의 잔뜩 흥분 한 얼굴을 보자 로베인은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애써 펴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보물이라니, 어떤?" "몰라!" 카리스는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모른다고... 요? 그렇군요. 모르는군요." 그러다가 문뜩 어떤 생각이 떠오르자 긴장한 채 그녀의 다음 말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다시 내 레어를 털겠다는 생각은......?' 그러나 다행이 그것은 아닌 듯. 하연은 의기양양하게 오늘 아침 머리맡에서 주어들은 종이를 꺼내서 보여 주었다. "짜잔! 봐요! 보물지도예요!" 카리스는 자세히 지도를 살펴보았다. 시간이 남아도는 종족이기에 대륙 구석구석 안가 본 곳이 없던 그는 비록 반쪽 자리 지도였지만 지도에 표시된 지형이 어디쯤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도가 진짜라는 것도. 지금은 사라진 고대어가 쓰여진 지도가 가짜일리는 없었던 것이 다. 그러나 그 보다 더욱 궁금한 건 하연이 이 지도를 어떻게 구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지도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지도를 구한 경위를 비밀로 해야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 하연은 당당하게 사실을 밝혔다. "오늘 아침, 내 머리맡에서요." 순간 그들 주위로 정적이 감돌았다. 그리고 얼마 후, 로베인이 창백한 얼굴로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 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 다. "머리...... 맡에서?" "응!" 하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로베인 등은 벌떡 일어나서 위층으로 달려 올라갔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그들을 따라 올라 간 하연은 그들이 하연의 방을 이리저리 살피는 것을 보았다. 창문을 열어 밖을 살피던 사담이 물었다. "이 창문 어젯밤에 닫았습니까?"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기절하듯 침대에 쓰러져 잤던 어젯밤을 떠올리며 하연은 고개를 가로 저었 다. 그러자 로베인이 하연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외쳤다. "왜 그렇게 조심성이 없어? 어젯밤 그 놈이 자객이었으면 어쩔 뻔했어? 넌 벌써 죽었다고, 알아? 알겠냐고!" 흥분해서 화를 내는 로베인을 묘한 표정으로 보며 하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안해, 로베인! 넌 원치 않겠지만 난 너에게 내가 죽는 모습까지 보여줄지도 몰라. 지금도 이렇 게 흥분하는데 그 때는 더 아파하겠지?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아. 난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배려해줄 여유가 없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간만이라도 내 좋을 대로 살고 싶어. 미 안...... 미안!' 그러나 카리스가 하연에게서 로베인을 떼어내어 주자 하연은 곧 투덜거리듯 소리내어 중얼거렸 다. "쳇! 자객이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 나 같은 천사표 인간을 누가 죽이려고 하겠어? 그 증거로 보 물지도까지 주고 갔잖아?" 하연의 중얼거림을 들은 로베인 등은 기가 막혀서 서로를 응시했다. 그 가운데 사담이 단호한 어 조로 말했다. "오늘부터는 제가 망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조차도 로베인에게 동정을 금할 수가 없군요. 로베인에게 부디 많은 격려를...... 참! 오늘 제가 쓴 글들에 넣어주신 의견들을 쭉 읽어보았읍니다. 재미있는 의견들과 격려의 말씀 너무 고마웠읍니다. 그래서 한편 올리고 열심히 써서 이번편을 올리게 되었읍니다. 짝짝짝!!! 부디 앞으로 많은 의견 부탁드립니다.^-^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3-02-2001 23:37 Line : 114 Read : 1693 [14] 마신 소환사 -22-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426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0-12-21 , 10:10:22 PM 마신 소환사 -22- 유즈베리아의 남쪽 고다 지방의 고다 항에는 아침부터 많은 선박들이 분주히 출항준비를 서두르 고 있었다. 그 가운데 유난히 돋보이는 상선이 한 척 있었으니 바로 붉은 매가 그려진 깃대가 높 이 꽂혀 있는 상인길드의 수장 카라반의 상선이었다. 그 상선 갑판에는 현 상인길드의 카라반인 네이브 스마인이 쌀쌀한 강바람을 맞으며 말없이 마라 브르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라브르 강. 지금은 사라진 고대 문명의 발상지이자 대륙을 잇는 가장 큰 교통수단. 아침 햇살을 받아 강 위 의 수면은 마치 깨진 거울 조각들이 빛을 받아 반짝이듯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언제까지라도 바라보고 있을 듯한 네이브 스마인이 문뜩 어떤 기척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애써 발걸음 죽이며 그에게 다가가고 있던 휠리아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어깨까지 내려오는 푸른 머리에 너무도 깨끗한 인상이라 차가워 보이기까지 하는 이지적인 네이 브의 얼굴을 보자 그런 마음도 어느새 깨끗하게 사라졌는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달려 들었다. "네이! 날 혼자 남겨두다니...... 일어나서 곁에 네이가 없는 걸 보고 내가 얼마나 쓸쓸했는지 알 아? 여기서 뭐하는 거야?" 네이브의 품에 반쯤 기대어 강바람에 앞으로 쏠린 그의 부드러운 푸른 머리를 목뒤로 넘겨주며 휠리아가 달콤한 목소리로 물었다. 붉은 머리의 보라빛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어둠의 마녀 휠리아. 그녀의 주위에는 마치 사람의 욕망을 자극시키는 매혹적인 향기가 흐르는 듯 보였다. 그런 아름다운 미녀가 기대어 오는 대도 네이브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 짜증스런 표정으로 휠리아를 밀쳐내며 차갑게 말하는 것이었다. "제 이름은 네이브입니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선실 쪽으로 가버렸다. 그런 네이브의 뒷모습을 상처 입은 듯 애잔 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던 휠리아는 잠시 후 어깨를 으쓱하더니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중얼거렸 다. "하긴, 그게 네이브의 매력이지!" 네이브가 선실로 들어서자 스마인 가의 집사이자 마법사인 아스탄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 다. 로브를 깊게 눌러쓰고 있던 그가 로브를 반쯤 내리자 마치 눈동자가 없는 듯 하얀색의 무서운 눈 동자가 들어 났다. 바로 그가 현재 알려진 대륙 최고의 7서클의 마법사 아스탄이었다. 그런 그가 카리반의 가문이라고는 하지만 일개 상인가문의 집사노릇이나 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 히 놀랄 일이었다. 그렇지만 눈동자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버림받고 거지처럼 떠돌던 그를 거둬 준 사람이 바로 선대 카리반인 마호이 스마인이었다면 이해가 갈 것이다. 거둬 주기만 했어도 아스탄으로서는 감지덕지 했을 것이다. 그런데 마치 식구처럼 그를 따뜻하 게 보살펴 주었고 그가 마법에 흥미를 보이자 마법을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마 법서라는 자체가 굉장히 희귀한 이 시대에 그를 위해 그 귀한 책들을 책장 하나 가득 채울 정도 로 사들여 놓았을 정도였다. 때문에 그의 스마인 가에 대한 충성심은 대단한 것이었고 스마인 가의 집사로서 일하는 것을 대 단히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를 본 네이브의 차가운 얼굴에는 엷은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그에게 아스탄은 죽은 아버지의 대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자 안색이 무섭게 굳어지며 물었다. "차크에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차크는 이제 8살이 되는 그의 남동생이다. 더 이상 자식이 없을 줄 알았던 그의 부모가 말년에 차크를 가지고 얼마나 기뻐했던가?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네이브가 아스탄과 함께 첫 상단 항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의 부모님은 이미 자객의 무리들 에게 살해당해 있었고 어린 남동생은 저주를 받아 병에 걸려 있었다. 병명은 폐렴이었다. 아직 세 살의 아이에 불과한 어린아이가 견디기에는 지극히 고통스러운. 하지만 네이브는 차크의 곁을 지키며 그를 돌봐 줄 수가 없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에 대한 충격을 느낄 새도 없이 아버지에 이어 카리반으로서의 자격을 시험 받는 시험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차크의 병을 치료하는 일은 전적으로 아스탄이 맡게 되었다. 아스탄은 한시도 차크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의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한편 어떻게 해서든 마법의 경지를 올리고자 노력했다. 현자가 되면 절대무위마법으로 모든 저주를 풀 수 있 기 때문이었다. 그런 아스탄이 갑자기 이곳으로 나타났으니 차크의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싶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스탄은 그런 네이브를 안심시키려는 듯 서둘러 말을 꺼냈다. "차크님에게는 별일 없습니다. 병은 더 이상 진척되지도 않았고 그 상태 그대로이지요." 네이브는 안도의 한숨을 쉬는 한편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차크님의 병을 치료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네이브는 눈이 빛내며 그답지 않게 흥분한 어조로 물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혹시 엘레나의 눈물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엘레나의 눈물. 엘레나의...... 설마 신화에 나오는 ......그 엘레나의 눈물 말입니까?" 신화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어둠이 세상을 비추자 악의 씨앗이 자라고 그로 인해 마족이 태어났으며 질병과 죽음이 생겨났 도다. 병에 걸린 인간들이 고통 속에 신음하며 죽어가자 빛 속에 머물러 계시던 선한 엘레나 여신 은 그 참혹함에 한줄기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그 눈물이 떨어진 호수의 물을 마신 인간들은 모 두 병이 나았으며 다시는 병에 걸리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엘레나 여신의 자비였다. 아연해 하는 네이브의 표정에도 불구하고 아스탄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네이브는 혹시 아스탄이 미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화 속의 이야기 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문명과 과학이 발달한 지 금 그런 허무맹랑한 예기를 진짜로 믿다니...... 분명 차크의 병을 고치는데 너무 몰두한 나머지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 틀림없다고 네이브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 엘레나의 눈물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찾았습니다." 하연이 안나오니 이상하게 글이 늦어져서...... 게다가 크리스마스도 다가오고 하니 한층 게을러져서... 그러나 열심히 써 보겠읍니다. 목표 3(......) 아니 2연참을 향해 전진하겠읍니다.^^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3-02-2001 23:37 Line : 113 Read : 1630 [15] 마신 소환사 -23-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476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0-12-22 , 10:50:07 PM 마신 소환사 -23- "뭐라고요?" 황당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네이브에게 아스탄은 낡은 반쪽자리 지도를 꺼내 보여 주었 다. 바로 하연이 가지고 있는 지도의 다른 반쪽이었다. "반쪽자리라 지형은 알아보기 힘들지만 이 지도에 쓰여진 글씨를 보십시오. 이것은 고대어입니 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글자라 알아보기 힘들지만 신의 이름만큼은 고대어나 지금이나 같아 알아 볼 수 있지요. 이것이 엘레나이고 이 나머지 두 글자가 눈물이라는 고대어입니다. 다행이 앙블르 의 서사시에 나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몇 안 되는 고대어 중 하나가 바로 이 글자이기 때문 에 알아볼 수 있었읍니다. 신화에 나오는 엘레나의 눈물이 실재로 존재했던 것입니다." "이 지도를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일년 전 트레져 헌터들이 노르트 해에서 건져 올린 선박을 기억하십니까?" "아틀리아 호 말입니까?" "네. 천년이 넘은 물건이라 유적이라도 있을까 해서 제가 사들였었습니다. 거기서 발견된 것이니 틀림이 없습니다." 들떠있는 아스탄과는 달리 네이브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차크를 생각하시는 아스탄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신화가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알고 있는 글자는 엘레나와 눈물이라는 단 두 글자. 게다가 반쪽뿐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스탄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나머지 반쪽도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결코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단호한 어조로 말하는 아스탄을 네이브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괜한 희망을 품었다가 절망하는 아스탄의 모습을 보게되는 것은 싫었지만 그는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또한 엘레나의 눈물이 실재해 차크가 병을 고치기를 바랬던 것이다.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네이브를 보며 아스탄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서둘러 일을 추진하려는 듯 급하게 선실문을 열고 나가려던 아스탄이 문뜩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언제나 제게 물으셨었죠? 마법이 뭐냐고요?" 네이브는 갑자기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싶어 아스탄을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처음으로 아스탄이 마법으로 빛의 구를 만들어 내는 것을 보고 놀라움에 그런 질문을 했던 기억이 있긴 했다. 하지만 이제 마법이 무엇인지 쯤은 알고 있었다. 마법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기 전 마법서를 몇 권 읽어 본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스탄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을 텐 데 왜 새삼스럽게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아스탄은 빙그레 웃으며 마치 비밀을 이야기하듯 신중하게 한자한자 내뱉었다. "마법은 환상을 현실로 만들겠다는 의지입니다." 아스탄이 사라진 뒤에도 그 말은 네이브의 머리 속에는 맴돌았다. '환상을 현실로 만들겠다는 의지! 그것이 마법이라고......' 부모님이 살해당한 이후로 현실밖에는 볼 수가 없었다. 카리반이 되기는 했지만 아직 상인들 사 이에 그의 지지기반은 약했다. 그들은 언제든 자신의 이익에 따라 그를 카리반의 자리에서 내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냉혹한 현실을 살기에도 힘겨운데 언제 환상을 품을 수 있겠는가? 가끔 아스탄은 너무 힘겨운 문제를 그에게 내민다고 생각하며 네이브는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 때 선실 창문으로 검은 그림자가 뛰어 들어오더니 그의 뒤에 공손히 시립 했다. 검은 옷에 검 은 복면을 한. 네이브는 그의 존재를 익히 아는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일은?" 복면인이 말했다. "깨끗이 처리되었습니다." "그래? 이것으로 유즈베리아의 상권이 모두 내 밑으로 들어왔군." "그런데 한가지......" "무언가?" "신전에 있는 그림자 6호의 말이 바스카 대사제가 엘 노아의 사죄를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뭐야? 믿을 수 없군. 그 고지식한 늙은이가 용서를 했다니......" "사과를 받아들이기 전 신전에 한 젊은 어둠의 여사제 일행이 들렸었다고 합니다. 그 여사제의 입 김이 작용한 것 같다고 그림자가 말했습니다." 네이브는 누군지도 모를 여사제에게 냉혹한 살기를 들어냈다. "이번에야 말로 성공할 줄 알았건만 어디서 굴러온 돌이 감히 내 일을 방해하다니...... 그 여사제 의 신분이 무엇인지 알아내. 바스카 대사제가 평범한 여사제의 말을 들어줄 리가 없다. 뭔가 내력 이 있을 거야. 그리고 그 일행에 대해서도 조사해보도록." "네." "그리고 신전에 있는 그림자들에게 빛과 어둠의 출동을 계속 일으키도록 명해라. 반드시 빛과 어 둠의 전쟁은 다시 일어나야 한다." "네, 알겠습니다." 사라지는 복면인을 보면서 네이브는 으스러지도록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추잡하고 더러운 어둠의 자식들을 반드시 이 대륙에서 모두 쓸어버리고 말겠다!" 부모님이 살해당한 뒤 그는 복수를 위해 그의 부모님을 죽인 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스마인 가의 모든 재력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그가 알아낸 것이라곤 그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배경에는 어둠 의 사제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 그것 하나밖에는 없었다. 그것도 차크가 저주에 걸려 그 저주를 풀어 줄 수 있는 사제들을 찾다가 고위사제조차 그 저주를 풀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알아낸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것만으로도 네이브는 충분히 어둠의 사제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탔다. 빛과 어둠의 전쟁으로 혼 대륙이 멸망의 길에 이른다할지라도 그는 이 복수를 멈출 수가 없었다.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3-02-2001 23:38 Line : 110 Read : 1737 [16] 마신 소환사 -24-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542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0-12-25 , 12:53:15 AM 마신 소환사 -24- 위도프의 정보길드는 하연이 보기에 매표소나 다름없었다. 검은 장막으로 안쪽은 가려져 있고 작은 구멍을 통해 돈을 지불하면 정보를 건내 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로베인은 대현자 갈루마에 대한 모든 정보를 요구했다. 태어나면서부터 현자가 되기까지의 그의 모든 것을 알아보면 현재 그가 어디에 있을지도 유추해 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카리스의 조언에 따라. 정보길드는 그 정보에 금화 한 개를 요구했다. 대현자 갈루마는 세상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에 별 다른 비밀 정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유명 인물이라 인물값을 한 것이다. 그 러나 갈루마는 대노했다. 어떻게 자신에 대한 정보가 겨우 금화 한 개 일 수 있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연으로서는 그것도 아까웠다. 이렇듯 원하지 않아도 시도 때도 없이 자신에 대해 주저 리주저리 늘어놓는 갈루마가 손안에 있는데 새삼 돈주고 그에 대해 알아보자니 속이 쓰리기까지 했다. 하연은 구두쇠였던 것이다. 솔직히 하연은 일부러 정보길드에 정보를 사러 갈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로베인의 경우 그녀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세가지뿐이었다. 첫째, 새로운 현자가 탄생하길 기다린다. 두 번째, 바람의 정신 디아스를 소환해 저주를 푼다. 세 번째, 어둠의 마녀 휠리아를 찾아내 저주를 풀어주게 만든다. 그 나마 여기서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은 세 번째 뿐이었다. 하지만 일부러 저주까지 건 상대가 다시 저주를 풀어준다는 것도 우습고 해서 하연은 죽기 전에 마법에 재능이 있는 마법사에게 갈 루마를 넘겨 줄 결심을 했다. 떠들기 좋아하는 갈루마의 가르침을 받으면 새로운 현자가 탄생할 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지도에 대해선. 이것이 진짜 귀중한 지도라면 분명 이 지도를 놓고 간 사람이 다시 찾으러 올 것이고 그 때 이 지 도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면 되기 때문에 굳이 돈 낭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아는 것 이 무지 많아서 현자라는 칭호까지 받은 갈루마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세 남자가 보물지도를 둘러싸고 앉아서 무슨 음모의 산실이라도 보는 듯 지도를 노려보더 니 한참 만에야 하연의 호기심도 해결하고 로베인의 저주를 풀 방도도 찾을 겸 정도길드에 가서 정보를 의뢰하기로 결정하자 하연은 그 결정에 순순히 동의했다. 정보길드가 어떤 곳인지 한번 구경해 보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때문에 요구할 정보 따위는 없었지만 정보를 얻은 로베인과 사담, 카리스가 이제는 그녀의 차례 라는 듯 하연을 쳐다보는 모습에 무언가 어떤 정보라도 사야한다는 의무감에 휩싸인 하연은 천천 히 검은 장막 쪽으로 다가섰다. 로베인 등은 긴장했다. 그들은 하연이 당연히 자신이 얻은 보물지도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어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여 기 오기 전 잘못하면 그 지도를 노리는 인물들에게 오히려 정보를 주는 격이 될지도 모르니 직접 적으로 지도에 대해 묻거나 보여주지는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 두긴 했지만 하연이 워낙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은 인물이라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때 하연의 뇌리에 기막힌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 생각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하연은 입 을 열었다. "정보를 팔러 왔어요." "무슨 정보입니까?" "마신 소환사에 대한 정보예요. 얼마 줄 거예요?" 로베인 등의 눈이 휘둥그레진 것은 물론이고 장막 속의 인물도 믿어지지 않는 듯 떨리는 목소리 로 물었다. "설마 현 대륙에 마신을 소환할 수 있는 자가 존재한단 말입니까?" "흠, 역시 아직 모르고 있었군요. 하지만 좀 있으면 유명해질 예기니까 필요 없는 정보려나......" "아, 아닙니다. 잠,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쪽에서 우당탕 의자가 넘어지고 철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조용해 졌다. 그러자 로베인이 황급히 입을 열어 물었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마신 소환사라니?" 하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조용히 미소지을 뿐이었다. 그러자 카리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같은 장난은 정말 좋지 않습니다, 하연. 거짓 정보는 정보길드의 신용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 에 정보길드를 적으로 돌리는 행위와 마찬가지입니다." "앗! 지금 이게 하연의 장난이란 말입니까?" 로베인의 말에 카리스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않고요. 마신 소환사란 불의 마신 카이람을 소환해 낼 수 있는 자를 말합니다. 유사이 래 그런 인간이 있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장난이지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요?" 불안해하는 로베인을 안심시키듯 카리스가 중얼거렸다. "좀 있으면 정보길드의 장이 올 겁니다. 그에게 정중히 사과를 하시고 용서를 빌면 아직 등록되 지 않은 정보이기 때문에 저 쪽에서도 너그럽게 용서해 주겠지요." 자기들끼리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하는 카리스와 로베인을 보며 어이가 없어진 하연을 소리를 버 럭 질렀다. "무슨 소리예요, 카리스? 장난이라니. 내가 이런 문제로 장난을 칠 것 같아요?" 카리스는 물론 로베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연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으리라는 것이 그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이에 하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사담에게 고개를 돌렸다. "설마 사담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겠지요?" 돌연 화살이 자신에게로 돌아오자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라 우물쭈물하는 사담에게 카리스가 진지하게 충고했다. "우리는 이제 동료입니다, 사담. 어디까지나 서로에게 진실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충고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듯 사담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에게 말했다. "저도 장난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하연이 또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저더러 어떻게 해결하라고....T-T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시고요. 저는 어떻게든 하연이 벌려 놓은 일을 수습해야......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3-02-2001 23:38 Line : 229 Read : 2407 [17] 마신 소환사 -25-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622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0-12-27 , 07:39:34 PM 마신 소환사 -25- 사담마저도 그렇게 말하자 하연은 짐짓 허탈하다는 듯 탄식하며 말했다. "세상에 이렇듯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다니......!" -내가 있잖아! 이 대 현자 갈루마가 알아주면 됐지 또 누가 필요해?- "하긴. 알아주는 이가 없으면 또 어떠리...... 어차피 한 세상 이슬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사라지는 것." 하연이 어디선가 들을 말은 아무렇게나 주절대자 로베인들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 보았다. 그 때 장막 안쪽에서 헛기침 소리가 났더니 장막이 걷히고 외알 안경을 쓴 날카로운 인상의 삐적 마른 중년인이 나왔다. 그리고 하연 일행은 둘러보다가 하연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물었다. "저는 이곳의 책임자인 베이런이라고 합니다. 마신 소환사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계시다고요?" 생김새와는 달리 확인하듯 묻는 조용하고 침착한 목소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뢰감을 불러 일으키도록 했다. 하연은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곧장 대답했다. "네!" "흠...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예기를 듣고 싶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서 삭막하게까지 한 겉쪽과는 달리 안쪽은 아기자기하고 분위기 있게 꾸며져 있었 다. 목제로 만든 작은 테이블에 토막 의자들. 그리고 창문에 달린 녹색의 부드러운 커텐. 그들을 위 해 사람 수대로 마련된 세밀한 문양이 세겨진 찻잔세트. 찻물은 방금 끓인 듯 뜨거운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베이런은 하연 일행에게 의자를 권한 후, 자리에 앉아 각자의 잔에 차를 따라주며 지나가 듯한 말 투로 물었다. "그 소환사를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그 질문에 당황하는 다른 일행들과는 달리 하연은 느긋하게 베이런이 따라 주는 차를 마시며 말 했다. "태어날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에요. 이 세상에 저만큼 그 마신 소환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 람도 없을걸요." 그러자 베이런이 놀란 듯 눈썹을 치켜 뜨더니 의아한 듯 물었다. "그렇다면 상당히 친한 사이일텐데 그런 분에 대한 정보를 왜 저희에게 파시려는 거지요?" 그 같은 의문은 로베인들도 마찬가지인 듯 어느새 모두들 하연을 주시하고 있었다. "모험을 좋아하거든요. 유명해져서 사람들이 찾아와 어려운 일을 부탁하면 오히려 기뻐할 거예 요." 그 말을 들은 로베인이 중얼거렸다. "하연을 닮았나보군." 베이런이 말했다. "그렇다면 모험자길드나 용병길드에 가입하셨습니까?" "아니요." "아니, 왜?" 베이런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정보길드에 자신에 대한 정보를 팔아도 좋아할 정도로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험자 길드 나 용병길드에 가입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닌가? "쯧쯧! 뭘 모르는군요. 모험자길드나 용병길드에 가입하려면 우선 가입비가 들고 의뢰 받아 일을 처리한 뒤에는 10퍼센트의 소개비를 내야 한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맞습니다만......!" "거기에 비해 정보길드에 정보를 팔면 오히려 돈을 받게 되는데 그런 손해 보는 장사를 왜 해 요?" 그 말에 익히 마신 소환사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베이런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두 루말이 종이하나를 꺼내 펼치더니 펜으로 그 위에 무언가를 적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 정보에 5골드를 드리겠습니다. 그 분에 대해 상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말도 안돼! 그까짓 마신 소환사가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5골드씩이나...... 이 대현재 갈루마님 은 1골드밖에 쳐주지 않았으면서. 이건 사기야! 무언가 잘못된 거라고!- 갈루마의 비명같은 외침을 귓등으로 흘리며 하연은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베이런이 받아 적기 좋도록. "검은머리에 검은 눈. 붉은 보석이 박힌 서클렛을 했고 검은 로브를 입었으며 수정 지팡이를 들 고 있어요." "지팡이요? 어느 정도 크기의 모양은 어떤......?" 일일이 설명하려니 귀찮아진 하연은 갈루마를 들어 보였다. "이것과 똑같이 생겼어요." "그렇군요." 베이런이 갈루마의 모양을 대충 그려 넣는 것을 보며 하연은 계속 설명했다. "나이는 23세. 여자고요. 이름은 하연이예요." 순간 베이런의 펜 굴러가는 소리가 뚝 그쳤다. 그리고 로베인 등이 경악한 채 하연을 노려보기 시 작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진지해 보이는 하연의 표정으로 인해 이때까지 반신반의하던 로베인들도 이제는 완전히 이것을 하연의 장난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연의 표정은 어디까지나 당당했다. 그것이 더욱 그들의 속을 뒤집어 놓는 것도 모른 채. 베이런이 약간 노기가 긷든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장난하십니까?" "아니오. 전 마신 소환사고 지금 저에 대한 정보를 정보길드에 팔려는 것뿐이에요. 어째서 이게 장난이라는 거지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 마신을 소환해 보여주십시오. 그거기 전에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베이런이 두루말이 종이를 찢으며 냉소적인 어투로 말하자 그제서야 하연은 당황한 듯 무언가 고 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하연의 난처한 듯한 표정에 로베인이 대신 나서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미, 미안합니다. 하연이 장난을 좋아해서......!" 로베인으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사과였다. 백작가문의 후계자로서 그가 누구에게 이렇듯 자세를 굽히며 사과인들 해 보았겠는가? 실로 하연의 위해 굴욕을 참고 사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로베인의 마음 고충도 모른 채 하연은 중얼거렸다. "이런 일로 그 녀석을 또 소환하면 내 피 같은 CD들이...... 흠...... 뭐, 어쩔 수 없나?" 그러더니 이내 마음을 결정한 듯 마음속으로 카이람을 떠올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카이람... 카이람......" 그렇게 오분 정도 지났을까? 털끝만큼도 행여 카이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떠올리지도 않는 하연이었다. 마 치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오히려 보고 있는 로베인들 쪽이 온갖 불안에 떨며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리고 카리스와 사담은 일이 잘못될 경우를 대비해 이곳에서 빠져나갈 만한 길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때였다. 하연의 붉은 서클렛이 빛을 발하더니 긴 붉은 머리의 마족이 모습을 들어내더니 버럭 고함을 질 렀다. [누구냐? 그렇지 않아도 바빠 죽겠는 이 대마신 카이람님을 계속 부르는 자가?]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경이로운 눈으로 대마신 카이람을 쳐다보았다. 설마 하연이 진짜 대 마신 카이람을 소환해 낼 줄이야...... 그런 그들을 더욱 경악할 사태로 몰고 가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하연이었다. "나다." [아? 하연......] "내가 꽤 중요한 순간에 널 불렀나보지? 아주 잘나가던 순간에?" [알긴 아는군. 조금만 더 했으면 저그들을 완전히 몰살시킬 수 있었는데 네가 불러내는 바람 에......] '역시. 이 녀석 아주 게임에 중독 다 됐군.' 보자마자 카이람이 화가 난 이유를 알아챈 하연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 또한 그 때문 에 동생에게 화풀이를 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 것이다. "너 부르면 좀 제 각 나와! 도대체 몇 번이나 불렀어? 그리고 뭐 꿈도 크게 저그 몰살? 겨우 며칠 했다고 저그들을 몰살시킨다는 거야. 나도 아직 못해봤는데......" 게임은 좋아하지만 실력만큼은 별 볼일 없던 하연이었다. 그렇지만 겨우 며칠 게임에 발을 디딘 초보자한테까지 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카이람은 그런 하연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런데 왜 불렀어?] "응? 하하! 여기 계신 이 분이 꼭 존경하는 대 마신 카이람님을 보고 싶다고 해서......" 베이런을 앞으로 들이밀며 하연이 말했다. 순간 살기 어린 카이람의 시선이 베이런을 향했다. 자신의 소환자인 하연에게 풀지 못한 분노를 풀만한 대상을 찾았다는 듯이. 그 시선은 도저히 한낱 인간이 감당해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몸을 떠는 베이런을 보던 하연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자, 소환해 냈으니까 5골드 주시지요." 그러나 베이런은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카이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하연이 말했다. "이제 됐으니까 그만 가, 카이람." 그제서야 베이런에게서 시선을 뗀 카이람은 빤히 하연을 쳐다보았다. [뭐, 잊은 것 없냐?] "잊은 것, 뭐?" [제물.] "아? 그거. 그걸 왜 나한테 받으려고 해? 널 불러달라고 한 건 이 사람인데. 이 사람한테 받아." 모든 것을 베이런에게 떠넘기는 하연이었다. 베이런은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마족이나 마신을 소환하는데는 제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보통 그 제 물은 순결한 처녀나 어린아이의 피이지만 지금 이 순간 저 마신이 자신의 목숨을 요구하지 않는 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카이람은 베이런은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하연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 어떤 불길 함을 느낀 로베인들은 하연의 주위를 둘러쌓다. 행여 카이람이 제물로서 하연을 요구할지도 모르 기 때문이었다. 카이람은 그런 로베인들을 가소롭다는 시선으로 힐끗 보더니 하연에게 말했다. [뭐, 이번만큼은 관대히 넘어가 주지.] 그렇게 말하더니 카이람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져갔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가 남긴 말에 하연 은 광분하고 말았다. [아참! 이번에 창세기전3 파트2가 나왔거든. 내가 네 돈 탁탁 털어서 대신 사뒀으니까 고마워해 라!] "으아아악! 카이람!! 너 두고보자!" 오늘도 안 올렸다가 맞아 죽을것 같아서.... 길게 써달라는 분들. 저 오늘 이거쓰느냐고 하루종일 고생많이 했어요. 이 정도면... 어떻게 좀 봐주면...... 게다가 하연의 성격이 보통 성격이 아니라...T-T 부디 제게 위로의 말씀을......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5-02-2001 22:31 Line : 107 Read : 1385 [18] 마신 소환사 -26-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649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0-12-28 , 11:16:37 PM 마신 소환사 -26- 정보길드를 나온 하연은 베이런에게서 받은 5골드의 금화를 황홀한 눈으로 감상하며 걷고 있었 고 그 뒤로 로베인들이 심기를 너무 써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조용히 하연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하연은 기분이 너무 좋았다. 솔직히 그녀의 가죽 주머니에는 카이람이 드래곤의 레어에서 훔쳐 준 금화가 아직 한 개도 쓰이지 않은 채 가득 들어있었지만 이 다섯 개의 금화들과는 어딘지 모르 게 생김새부터 다른 것 같았다. 이 금화들은 순수하게 스스로의 힘으로 번 돈이 아닌가? 사람은 역시 노력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으로 발걸음도 가볍게 걷고 있던 하연은 갑자기 골목에서 그녀 쪽으로 뛰어 나오던 한 소년과 부딪쳐 그만 나동그라지 고 말았다. "아얏!" "하연, 괜찮아!" 하연이 넘어지는 모습을 본 로베인이 황급히 달려와 물었다. 엉덩방아를 찐 하연은 인상을 일그러트리며 눈앞의 소년에게 화를 냈다. "뭐야? 앞도 보지 않고 갑자기 그렇게 뛰어 나오면 어쩌자는 거야?" 그러자 생기기는 반듯하게 생겼지만 꾀죄죄한 옷차림을 한 소년이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 으로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로베인이 하연을 일으켜 세워주자 소년이 이곳저곳 하연의 옷에 묻은 흙을 털어 주며 다시 말했 다. "용서해 주세요. 급한 나머지 그만......!" 비굴하게까지 느껴지는 소년의 태도에 귀찮아진 하연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됐다. 그만 가봐!" 소년은 연실 고개를 숙여 보이며 저 쪽으로 다시 뛰어갔다. 옷을 털며 로브를 여미던 하연은 무언가 허전함을 느끼고 로브 안쪽을 더듬어보니 어느새 금화 를 가득 넣어 둔 가죽 주머니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연은 놀라서 더듬거리며 로베인에게 말했다. "도... 도둑이야!" "뭐!" 사태를 알아챈 사담이 소년이 달려간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러나 소년은 수도의 골목골목 을 잘 파악하고 있는 듯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헛수고를 하고 돌아온 사담을 보며 로베인이 걱정이 되어서 물었다. "하연, 얼마나 들어있었어?" "...몰라. 카이람이 드래곤의 레어에서 금화를 주머니 가득 채워 넣어주었었거든." 그 말을 들은 로베인과 사담은 벙찐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신을 소환해 드 래곤 레어를 털었다니...... '그러니까 그 정신나간 마신 녀석이 내 레어를 털었단 말이지? 하긴 능력도 없어 보이는 하연이 어떻게 내 레어에 침입했나 궁금하게 생각했더니......!' 카리스는 속으로 카이람에게 이를 갈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방긋 웃으며 하연에게 말 했다. "그렇다면 제가 찾아낼 수 있을 것 같군요." "카리스가요? 어떻게요?" "드래곤들은 자신의 물건에 뭐든지 추적마법을 걸어 놓기로 유명하지요. 그러니 추적마법이 걸 린 물체를 역 추적하면 금방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카리스의 말같이 드래곤들이 다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심심하다고 어떤 드래곤이 금화 하나 하나에 일일이 추적마법을 걸어 놓겠는가? 오직 실버드래곤 칼링스타 뿐이었다. 드래곤이라면 당연히 금화 한 개라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완벽함을 자랑할 속셈으로 한 삼 년 동안 모든 물건에 일일이 추적마법을 걸어두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것이 이런 일에 소용될 줄이야 그조차 몰랐던 일이지만. 다른 일행들을 돌려보낸 카리스는 소년을 찾아 나섰다. 조금씩 조금씩 몸 속의 마나를 개방해 마 나의 느끼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미세한 마나의 기척이 느껴졌다. "텔레포트!" 순식간에 공간을 이동해 간 카리스는 낡고 허름한 한 헛간에서 가죽 주머니에서 쏟아져 나온 많 은 금화들을 보며 놀라움과 경이로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소년을 볼 수 있었 다. 사제의 주머니에서 이렇게 많은 금화가 나올 줄은 소년조차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새 눈앞에 서 있는 카리스를 본 소년은 체념한 표정으로 말없이 금화를 다시 가죽 주머니에 담아 돌려주었다. "여기 있어요. 가져가세요." 가죽 주머니를 받아든 카리스는 의아한 듯 물었다. "왜 순순히 돌려주는 거지요? 이 금화가 욕심나지 않습니까?" 그 말에 잠시 열망에 가득 찬 눈길로 주머니를 쳐다보던 소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욕심나요. 그 돈이면 병든 저의 아버지를 고칠 수 있고 제 동생들을 마음껏 먹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돈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두려운 걸요." 착한 소년이지요? 흐음~ 마음에 드니 어찌해야 할꼬.^-^ ......연참을 부르짓는 분들(먼산) "언젠가는...... 반드시......" 기다려주세용^_^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5-02-2001 22:31 Line : 111 Read : 1304 [19] 마신 소환사 -27-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693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0-12-29 , 11:16:11 PM 마신 소환사 -27- 카리스는 그런 소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금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닌가? 금 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르지만 반짝이는 금빛을 좋아해 레어에 금화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사 는 칼링스타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찾을 것도 찾았고 이제 이곳을 나가버리면 그만이었지만 카리스는 왠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 다. 소년의 공허해 보이는 눈동자가 머리 속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가죽 주머니에 있는 금화가 아니더라도 그에게는 볼트라인백작에게 선불로 받은 50골드가 있었 다. 그것을 몇 개 던져 줄 수도 있었지만 소년이 받지 않을 것 같아 고민하던 카리스는 소년을 하 연에게로 데리고 가기로 결정했다. 왠지 하연이라면 이 문제를 아주 간단히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여관에 도착한 하연은 금화 다섯 개를 마치 검사가 검을 닦듯 천으로 정성스럽게 닦았다. 로베인 과 사담으로서는 혹시 하연이 금에 미친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금화를 반짝거리게 닦아 놓고 감탄하는 하연을 보며 로베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연, 금을 좋아 하나보지?" "응, 반짝이는게 예쁘잖아." "......혹시 눈치챘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볼트라인가문은 아주 부자야. 하연이 원한다면 원하는 만 큼 금화를 쌓아 놓을 수 있어." 그리고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사담은 그것이 하연의 호의를 사려는 것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돈으로 환심을 사려는 로베인의 태 도에는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로베인의 수작을 눈치채지 못한 듯 하연은 평이한 어조로 되물었다. "로베인은 돈을 벌어 본적 있어?" "......아니." 로베인은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작위와 함께 오벤성을 물려받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어떻 게 하면 영지를 잘 다스리고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배웠지만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본 적은 없었던 것이다. "늘 타다 쓰기만 했지 나도 오늘 처음 돈을 번 거야." -정말 기가 막혀서! 그게 네 힘으로 번 거냐? 그런 걸 위협을 해서 돈을 강탈하는 강도 짓이라고 하는 거다!- '시끄러! 그 강도 짓을 한 건 나잖아. 그러니 내 힘으로 번 것 맞아.'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하연은 계속 말했다. "카이람이 준 금화들을 잔뜩 가지고 있었을 때는 솔직히 그 금화들이 가치 있게 생각되지 않았 어. 그런데 이 금화들은 아주 소중하게 느껴져. 이 세상에 널리고 널린 많은 금화들 중에 몇 개일 뿐인데 말이야, 재미있지?" 순간 로베인은 자신이 번 것도 아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을 재산을 자랑하며 금으로 하연의 마음 을 돌리려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하연이 번쩍일 정도로 닦아 놓은 금화들처럼 그녀 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을지 그 방법은 모르겠지 만. 그리고 사담은 잘 자란 누이동생을 보듯 뿌듯한 마음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그 때 문이 열리고 카리스가 소년을 대동하고 들어섰다. "어? 카리스! 그 꼬마는 누구예요? 돈은 찾았어요?" 하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카리스와 소년을 번갈아 보았다. 카리스는 조금 전에 자신과 부딪힌 소년을 기억 못하고 있는 하연의 모습에 약간 어이가 없어서 대답이 늦어지고 말았다. "......찾았습니다만." "그래요? 다행이네. 그런데 그 꼬마는 누구예요?" 그 질문에 대답한 것은 로베인이었다. "네 돈을 훔친 바로 그 녀석이잖아?" "아!"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하연은 소년을 빤히 쳐다보았다. 소년은 하연이 자신을 쳐다보자 움찔 몸 을 떨며 카리스의 뒤에 숨었다. 어둠의 사제의 돈을 함부로 훔쳤으니 어떤 저주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하연은 그 말에 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돈을 찾았으면 됐지. 저 꼬마는 왜 데려왔어요?" 설마 저 꼬마를 감옥에 보내려는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아닌 듯 카리스가 소년의 사정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순순히 돈을 돌려주었다는 사실도.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하연은 곰곰이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너, 정말 운이 좋은 녀석이구나!" "제가요?" 소년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자신이 운이 좋다니...... 만약 그가 운이 좋았다면 귀족집안 에 태어나 호위호식하며 살지 지금처럼 병든 아버지의 치료비와 줄줄이 딸린 동생들을 위해 남 의 물건이나 훔치는 소매치기 따위는 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연은 그런 소년에게 마치 비밀예기라도 하듯 작은 소리로 물었다. "너, 네가 훔친 그 금화들이 어디서 난 건지 아니? 나 같은 사제신분에 그 많은 돈을 어디서 났는 지 궁금하지 않아?" 호기심이 동한 듯 소년은 카리스의 뒤에서 걸어나와 하연의 가까이로 다가왔다. "실은 그 금화들은 말이야...... 드래곤이 레어를 비운 사이 몰래 들어가 훔쳐온 거야." "헉!" 어제도 올리고 오늘도 또 올렸읍니다. 성실하게 올리고 있읍니다. 나는 정말 대견해!! 감탄하고 있는 작가^_^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5-02-2001 22:32 Line : 105 Read : 1311 [20] 마신 소환사 -28-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746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0-12-30 , 10:11:21 PM 마신 소환사 -28- 소년이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자신이 훔친 그 금화들이 드래곤의 것이었다니...... 혹시 자신을 놀리려는 수작이 아닌지 소년은 하연의 얼굴을 황급히 살폈으나 하연의 얼굴은 어디 까지나 진지한 가운데 수심마저 깃들어 있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믿을 수가 없는 모습이었 다. 하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금화들을 들고 나왔을 때만해도 무척 기뻤지. 큰 부자가 됐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결국 단 한 개의 금화도 쓸 수가 없었어." "아니, 왜요?" 소년이 다급하게 물었다. 사실을 알고 있는 로베인들마저 하연의 말솜씨에 빨려들어 귀를 기울이 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 금화들에는 모두 추적마법이 걸려 있었지 뭐야? 그래서 쓸 수가 없었어. 그 금화들 을 쓰면 금화들을 가진 사람들까지 드래곤의 분노를 받게 될 테니까." 소년은 자신이 드래곤의 분노를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연은 계속 말했다. "솔직히 난 네가 금화 주머니를 가져갔을 때 아주 기뻤어. 드래곤의 분노로부터 벗어난 것이니 까. 그런데 네가 다시 돌려주다니...... 정말 넌 운이 좋구나!" 이제는 소년도 하연의 말에 동의했다. 불행한 인간의 표본이라고 생각했던 그 자신이 알고 보니 무척 운이 좋은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난 너에게 투자하고 싶어!" "투자요?" "그래. 난 너처럼 운이 좋은 사람을 여태껏 만나보지 못했거든. 아마 넌 나중에 크게 될게 틀림없 어. 그러니 지금 너에게 미리 투자해 두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잠시 생각해보던 소년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설마 그 드래곤의 금으로 투자를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후후! 물론이야." 하연은 자신이 반짝반짝 닦은 금화 다섯 개를 소년의 손에 쥐어 주었다. "아니, 그건?" 로베인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그 금화는 하연이 소중하게 생각하던 돈이 아니었던가? 로베인 의 놀라는 모습에 소년은 의아한 표정으로 하연을 쳐다보았다. 하연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5골드는 내게 무척 소중한 돈이야. 처음으로 내가 번 돈이지.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이니 까 아마 너에게도 행운을 가져다 줄 거라고 생각해." 소년은 감격한 듯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그리고 하연이 준 5골드를 손에 꼭 움켜쥔 채 말했다. "제 이름은 가일입니다. 이 돈은 성공해서 꼭 갚겠습니다." "그래. ......이자는 일년에 은화 한 개로 싸게 해 줄게." 그 말에 잠시 멍해 있던 가일이라는 소년은 눈물을 훔치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네. 이자까지 쳐서 반드시 갚겠습니다." "좋아." 몇 번씩이나 감사 인사를 한 후 소년이 나간 뒤에도 하연은 멍하니 소년이 나간 문을 바라보고 있 었다. 로베인은 그런 하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 돈을 준거야? 그 돈은 네가 무척 아끼던 돈이잖아? 나한테 있는 돈을 주어도 됐을 텐 데......" "그래서야." "뭐?" "내가 아끼는 것이니까 주고 싶었어. ......죽으면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는데...... 결국 이 내 몸 조차 내 것이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데 왜 이토록 집착하게 되는 걸까?" 로베인들은 갑자기 하연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좀처럼 볼 수 없는 하연의 우울한 표정에 당황했다. "이제 그 소년은 행복해 지겠지? 의외로 세상은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이 많은 것 같아. 하지만 만약 돈으로 살 수 없는 행복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소년은 다시 불행해 질까?"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리던 하연은 언제 우울해 했느냐는 듯 밝은 표정으로 웃으며 로베인들 에게 말했다. "오늘도 재미있는 하루였지? 내일은 우리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요! 내일은 더욱 즐거운 일 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으니까요." 그 말에 로베인들은 하연을 따라 웃고 말았다. 내일은 또 하연이 무슨 장난을 칠까 궁금하게 여기 면서. 이글을 다 읽고 지금 저주를 준비하시고 계신 분들. 잠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요. 늦더라도 새벽에 한 편 더 올릴테니까요...T-T 부디 자중을...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5-02-2001 22:32 Line : 82 Read : 1377 [21] 마신 소환사 -29-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754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0-12-31 , 01:33:25 AM 마신 소환사 -29- "와! 화창한 아침이다!" 여관 밖을 나온 하연이 외쳤다. 하지만 아무도 그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점심때가 지난 시간이었던 것이다. 로베인은 정말 노력했다. 하연을 깨우려고. 그러나 마신 카이람이 깨웠을 때조차 시끄럽다고 저리 꺼지라고 소리치던 하연이 아니었던가? 결국 하연에게 베개로 얻어맞고 방에서 쫓겨난 로베인은 다시 문밖에서 하연이 일어날 때까지 하 염없이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하연의 무서운 점은 바로 잠에서 깨어나면 전혀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로베인을 보면서 한다는 소리가. "어머, 로베인. 누구한테 맞았어? 남자가 맞고 살면 안되지. 남자가 맞을 때는 부모님과 스승, 아 내한테 뿐이어야 하는 거야." 생각 같아서는 미래의 아내 될 여자한테 맞았다고 하고 싶지만 기억도 못하는 하연에게 그런 말 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할 수 없이 이럴 때 쓰는 고정된 변명 패턴에 따라 그냥 넘어졌다고 말하는 수밖에. "......넘어졌어." "그래? 좀 조심하지." 점심을 먹고 부탄의 안식처를 출발한 하연 일행은 거리에서 풍기는 긴장된 분위기에 의아하지 않 을 수 없었다.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이곳 저곳 닥치는 대로 수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수색의 손길은 하연일행에게까지 미쳤다. 마차가 성문을 빠져나가려는데 한 무리의 기사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수색을 요청했던 것 이다. 사담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의견을 묻듯 로베인을 쳐다보았다. 로베인이 인상을 굳히며 물었다. "난 볼트라인 가의 장자 로베인 볼트라인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마차 안을 수색을 하겠다는 것이냐?" 볼트라인 가의 위엄에 눌린 듯 몇 몇 기사들이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 는 기사가 앞으로 나서더니 정중하게 사과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말씀드릴 수 없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국왕폐하의 명이십니다. 수색에 협조해 주시 면 감사하겠습니다." 국왕폐하의 명이라는 말에 로베인은 더욱 호기심을 느꼈지만 더는 묻지 않고 수색을 허락했다. 왕의 명령을 거스를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로베인의 입에서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마차 안은 물론 그들의 소 지품까지 모조리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기사들은 하연과 카리스를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마치 이국의 보석을 보는 듯한 하연과 눈부실 정도로 화사한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는 카리스의 미모 때문이었다. 로베인은 카리스를 쳐다보는 기사들의 눈길은 상관하지 않았지만 하연을 쳐다보는 기사들의 눈 길에는 날카로울 정도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윽고 수색을 마친 기사들이 물러서자 우두머리 기사가 말했다. "수색에 협조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로베인이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자 사담이 다시 마차를 몰았다. 성문을 벗어나 얼마를 갔을까? 카리스가 갑자기 입을 열어 말했다. "사담님! 누가 우리를 쫓아오고 있는데요?" "네?" 사담은 마차 안의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척 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과연 누군가가 은밀히 그들 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고삐를 한 손으로 몰아 쥐며 사담은 긴장된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을 쫓고 있는 자가 마차로 달리는 그들의 뒤를 쫓아올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마차의 속도를 천천히 늦추며 사담은 다른 한 손으로는 검의 손잡이를 쥐 었다. 언제라도 뽑을 수 있도록. 얼마 쓰지 못했지만. 졸려서 더이상은...T-T 저에게 비축분따위는 없읍니다. 쓰면 쓰는 족족 올리지 성격이라......^-^ 내일, 아니 오늘 저녁에 다시 뵙겠습니다.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5-02-2001 22:32 Line : 144 Read : 1811 [22] 마신 소환사 -30-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822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1-01-02 , 10:03:49 PM 마신 소환사 -30- 로베인도 이미 검을 반쯤 뽑은 상태였고 카리스는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들은 사람이 아 무도 없어서 다행인 말들을. "드래곤의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최고로 현명한 실버 족의 자존심이자 긍지인 칼링스타의 이름으 로, 작은 파이어 볼!" 다른 평범한 드래곤이라면 그 말을 하면서 약간의 쑥스러움을 느꼈을 게 틀림없지만 카리스는 마 치 당연한 사실을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것뿐이라는 듯 진지하게 그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마 도 갈루마의 영향이 상당한 듯. 그러자 그의 손안에 작은 불덩어리가 생겨났다. 이윽고 마차가 완전히 멈추자 카리스는 그 불덩어리를 길가의 울창한 숲 속으로 쏘아 던졌다. 콰쾅! 굉장한 소리가 나며 큰 나무 한 그루가 부러지듯 꺾여 넘어갔다. 그러자 그 뒤편에서 로브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쓴 사람이 검을 들고 재빠른 몸놀림으로 구르듯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하연을 향 해 달려들었다. "멈춰라!" 로베인이 외치며 검을 뽑아들고 하연의 앞을 막아서는 동시에 사담이 달려나갔다. 그리고 그의 검은 어느새 상대의 검을 날려버리고 목에 검을 겨눈 채 거칠게 로브를 벗겨내 버렸다. 그러자 긴 금발머리의 머리채가 출렁이듯 쏟아져 내리며 굵은 얼굴선을 한 잘생긴 남자의 얼굴 이 드러났다. 같은 남자다운 얼굴이라고 해도 로베인의 다르게 어딘지 모르게 중성적인 매력을 풍기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그 때 사담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여자군." 그 말에 하연 일행은 물론 그 여인까지 놀라서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 어떻게 제가 여자인 줄 알았습니까?" 말투며 목소리까지 낮고 허스키한 것이 영락없는 남자라서 본인의 입에서 여자임을 시인하는 말 이 나오지 않았다면 아무도 그녀가 여자임을 짐작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담은 그녀가 여 자인줄 어찌 알았을까? 모두 의아한 얼굴로 사담을 쳐다보자 사담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냄새가 다르다!" 하연은 어이가 없었다. "냄새? 그런 것 가지고 어떻게 구분해요? ......아! 우리한테는 남녀를 구분하는 확실하고도 간단 한 방법이 있잖아요?" 모두 의아한 얼굴로 하연을 쳐다보는 가운데 하연은 장난스런 표정으로 웃으며 로베인을 가리켰 다. 순간 로베인의 얼굴이 참담하게 구겨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카리스와 사담은 과연 확실한 방법 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인만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채 로베인을 바라보았다. 그리 고 다음 순간, 여인은 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모르게 일그러진 얼굴로 로베인에게서 뒷 걸음치듯 물러섰다. 로베인에 대한 혐오감을 확실히 들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여자군요." "그렇군요." 카리스가 대꾸였다. 그러면서도 믿기 힘들다는 듯 남자의 얼굴을 한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우리 일행의 뒤를 쫓아온 것이지요?" 카리스의 시선을 받은 여인은 순간적으로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전 트래져 헌터인 미루엘입니다. 사람을 헤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단지 제 물건을 찾으러 왔을 뿐입니다." "물건? 아!" 하연은 청바지주머니에서 반쪽자리 지도를 꺼내 보이며 물었다. "이 지도 말이에요?" 미루엘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건 제 것입니다. 돌려주십시오." 그 말에 하연은 그런 말도 안돼는 헛소리는 난생처음 들어본다는 듯 길길이 날뛰며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이건 제 머리맡에 있던 물건이라고요!" 흥분하는 하연과는 달리 미루엘은 침착하게 말했다. "맞습니다. 제가 놓아두었습니다." "아가......" 아가씨라고 말하려던 하연은 미루엘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괴리감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얼버 무리듯 말했다. "......으흠! 그 쪽의 말대로 라면 자신의 물건을 내 머리맡에 놓아두었다는 뜻인데...... 그러면 그 시점에서 그 물건을 저에게 주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돌려달라니 절 가지고 장난치시 는 건가요? 전 제 머리맡에 놓여진 이 지도를 보고 얼마나 기뻐했는데요. 드디어 산타클로스 할 아버지께서 내가 착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구나 싶어서 얼마나 감격했는지 아십니까? 그 런 제 여린 마음에 이처럼 상처를 주다니......" '여린 마음.....' '......상처!' 나름대로 로베인과 카리스가 하연의 말에 충격상태에 도달에 있을 때 미루엘 역시 무언가 떠오 를 듯 말 듯한 꺼림칙한 기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착한 사람......' 그러다 문뜩 하연이 맨 처음 지도를 보자마자 한 말이 떠올랐다. 그로 인해 그녀 자신은 나무에 서 떨어질 뻔하기까지 했지 않은가? 그런데 그것을 잊고 있었다니...... 미루엘은 약간 질린 기색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지도를 보았을 때 '이것은 모두 내 선행의 결과다. 역시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더니......' 라 고 말했었지요? 그럼 그 말이 진심이었습니까?" 그 말에 로베인과 카리스가 하연의 가까이로 다가와 속삭이듯 물었다. "정말 그랬어?" "정말 그랬습니까?" 하연은 그들을 애써 무시하며 미루엘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물론이지요. 전 마음에도 없는 말은 절대 안 해요." 골치가 아픈 듯 이마를 집으며 미루엘이 협상을 시도했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제가 그 지도를 사겠습니다. 얼마를 원하십니까?" 좀처럼 이 부분이 진행되지 않아서 올릴 수가 없었읍니다. 새 케릭터 때문에요. 여성 케릭이 너무 적어서 여자 캐릭이 이제 하나쯤은 나와야 한다는 생각과(휠리아도 있지만 악역이니까 무시하고) 하연을 위해서 여성 캐릭보다는 남자 캐릭이 많을 수록 좋다는 생각이 엇갈려서 결국은 남자같은 여자 캐릭을 집어 넣었읍니다. 미루엘이 그 캐릭이지요. 앞으로도 여성 캐릭은 별로 등장하지 않을 것 같읍니다. 오직 하연을 위한 하연에 의한을 부르짓는 유지였읍니다.^-^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6-02-2001 22:33 Line : 165 Read : 1339 [23] 마신 소환사 -31-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853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1-01-03 , 06:34:44 PM 마신 소환사 -31- 하연은 그 말을 못들은 척 하며 중얼거렸다. "성문을 빠져나가는데 경비기사들이 마차는 물론 저희 물건들을 수색하더군요. 그런데 이곳 사람 들은 주머니라는 것이 없어서인지 제가 바지주머니 속에 이 지도를 숨겼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더군요. ......이 지도는 왕궁에서 훔친 것이지요?" 미루엘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진 가운데 하연은 계속 말했다. "이 지도를 갖고 왕궁으로 돌아가면 분명 국빈 대우에 어쩌면 그 쪽에서 내 놓는 돈보다도 많은 돈을 상금으로 줄게 틀림없어요. 그런데 왜 내가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받고 이 지도를 미루엘씨 에게 넘겨 드려야 하지요?" 미루엘은 그 말이 사실인지라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런 사실을 다 짐작하고 있으 면서도 하연이 왕궁에 지도를 넘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약간의 희망을 느낀 미루엘은 하연에게 물었다. "제게 무엇을 원합니까?" 하연은 작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제야 뭔가 말이 통하는군요. 내가 원하는 것은 간단해요. 약간의 정보와 모험이지요." "정보와 모험!" "네. 정확히." "......그럼, 제가 얻는 것은 요?" "목숨과 어쩌면 모험이지요." 하연은 방긋 웃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미루엘은 왠지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마음에 없는 말은 결코 하지 않는다는 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그 말은 미루엘이 협조하지 않으면 왕궁에 그녀를 넘겨버리겠다는 협박이 아니겠는가? 긴 한숨과 함께 미루엘은 어쩔 수 없이 지도의 내력에 대해 설명했다. 미루엘이 열살 때였다고 한다. 트레져 헌터였던 아버지가 용사일행과 함께 얼음의 마왕인 데바의 빙검 카마르시아를 빌리러 갔 다가 팔 하나를 잃은 채 집으로 돌아온 것은. 모험만이 인생의 전부였던 아버지는 그 후 생의 의미를 잃고 술로 세월을 보냈는데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해서 할아버지에 대한 예기를 꺼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그 유명한 도둑인 검은 다이아스였다는 사실을...... 다이아스 꽃이 언제 피었다 지는 지 모르는 것과 같이 언제 들어왔다가 훔쳐 갔는지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물건을 훔쳐가기 때문 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유즈베리아 왕실에서 신의 유산이 전해 내려온다는 사 실을 알게 된 할아버지는 그 유산을 훔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유즈베리아 왕실 깊숙한 지하비고에 자리해 있던 신의 유산에 다가가는 일은 생각보다 쉬었다고 한다. 그런데 유산이 들어있는 상자를 가지고 나올 때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바로 그 상자가 지 하비고의 바닥과 반응해 마법진이 작동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법화살이 날아오고 불길이 솟고 석벽이 앞을 가로막는 등 함정이 잇달아 그의 앞을 막았다고 한다. 하지만 검은 다이아스의 명성답게 재빨리 상자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상자를 열고 지도 를 꺼내고 있는데 마법진이 발동하자 그 소리를 듣고 달려온 왕과 기사들에 의해 잡혀 그만 교수 형을 당했다고 한다. 미루엘은 어린 마음에도 언젠가는 자신이 그 유산을 손에 넣어 보이리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 후, 저는 트레져 헌터가 되었지만 그 신의 유산을 얻겠다는 결심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마침내 그 유산을 손에 넣을 수 있었지요." 로베인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렇다면 왜 그걸 하연에게 주신 겁니까?" "준 것이 아닙니다. 잠시 맞긴 거지요?" "하연이 자기 것이라고 정하며 하연의 것이지. 아마 신이 내려와 자기 것이니 돌려 달라고 말해 도 불가능할걸? ......어쨌든 왜 하연에게 준거지?" 하연은 로베인의 지도의 소유권을 하연으로 확정짓는 듯한 말에 사뭇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로베 인을 바라보았다. 로베인은 비록 미루엘을 향한 불쾌한 감정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 뿐이라 할지라도. 미루엘은 속에서 울분이 치밀 지경이었으나 새삼 다시 맞긴 거라고 말하기도 뭣해서 울화를 참 고 설명했다. "사실 제 조부이신 검은 다이아스까지도 실패한 일입니다. 함부로 시도해 볼 수가 없었지요. 그런 데 다행이 아이린느 공주를 만나고 그 분이 저한테 반하는 바람에 쉽게 신의 유산에 접근할 수 있 었습니다." 그 말에 하연은 슬쩍 로베인의 눈치를 살폈다. 충격을 받을게 틀림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로베인의 표정은 담담했다. 의아해하는데 미루엘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니 신의 유산이 없어진 이상 가장 먼저 의심할 사람은 분명 저입니다. 그러니 제가 갖고 있 을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그래서 하연에게 주었단 말이군. 하필이면......!" 카리스는 한탄하듯 말했다. 애초에 갈루마를 훔쳐간 하연만큼 운이 없는 사람은 또 없을 것이라 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저 미루엘이라는 인간만큼 운이 없는 인간 이 또 어디 있겠는가? 여자인 몸으로 미남계까지 써서 얻은 신의 유산을 고스란히 하연에게 넘겨 주게 되다니...... 그런 카리스를 힐끗 노려보며 하연이 물었다. "잘 듣긴 들었는데 이 신의 유산이라는 지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단 한 말씀도 없네요?" "아! 그건 저도 잘......" 하연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게 변해가자 미루엘은 다급하게 말했다. "정, 정말입니다. 저도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신의 유산이라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 까? 신이 남긴 물건이니 분명 대단한 것일게 틀림없습니다." 그제야 하연의 안색이 좀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불만인 듯 투덜거렸다. "그러면 좋겠지만 그 신이란 것이 카이람 수준이라면 안 봐도 뻔한데......하지만 뭐 모험을 한다 는 사실에 의의가 있는 거니까." 그리고 미루엘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좋아요. 우리 동료로 받아줄게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미루엘은 어리둥절한 채 하연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하라는 뜻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 다. 그리고 언제 자신이 동료가 되어주겠다고 했단 말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미루엘이 계속 바라만 보고있자 그제서야 상대가 악수를 할 줄 모른 다는 것을 알아챈 하연은 미루엘의 왼손을 잡아끌어 억지로 악수를 나눴다. "그건 무슨 행위입니까?" 카리스가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 이거요?" 그런데 막상 설명해주자니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그래서 하연은 아무렇게나 말하고 말았 다. 어차피 이곳에서는 틀린 말을 해도 누군가 나서서 항의할 사람도 없지 않은가? "어떤 일을 할 때 한 손보다는 두 손으로 하는 것이 쉽잖아요? 그것과 같이 동료로서 상대의 힘 든 일을 함께 해주겠다는 뜻으로 이 같은 악수를 나누는 거예요. 미루엘, 앞으로 힘든 일이 있으 면 내가 도와줄게요. 미루엘도 내가 힘든 일이 있을 때는 거들어 줄 거지요?" 미루엘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연과 맞잡은 자신의 손이 뜨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들과 동료가 되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때 로베인이 하연의 손에서 미루엘의 손을 잡아 빼며 하연에게 악수를 하는 것이 아닌 가? 어리둥절해서 하연이 쳐다보자 로베인이 말했다. "나도 하연의 동료잖아? 하연이 힘들 때는 거들어주는. 그러니 나도 악수할거야." "풋!" 자신도 모르게 실소하며 하연이 로베인과 악수하자 카리스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다음은 제 차례입니다." 그 말에 로베인이 웃으며 물러서자 하연은 카리스와 악수하며 묵묵히 차례를 기다리는 사담을 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담과 악수를 나누며 하연은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아직 살아 있어서...... 그리고 힘 든 일이 있을 때는 도와주겠다고 서슴없이 나서는 좋은 동료를 넷이나 만나서...... -쳇! 나도 악수해주고 싶은데......- '아니, 다섯인가?' 투덜대는 갈루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연은 환하게 웃었다. 오늘은 좀 길게 써서 올립니다. 이제는 짧다는 말은 안하겠지요? 기대로 두근거리는 유지입니다.^-^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6-02-2001 22:33 Line : 91 Read : 1253 [24] 마신 소환사 -32-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935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1-01-06 , 06:54:31 PM 마신 소환사 -32- 하연 일행은 벌써 이틀째 헤루아의 숲을 헤매고 있었다. 마차도 버린 채 터벅터벅 걸어서. 나무 가 너무 빽빽이 들어차 있어서 더 이상 마차가 지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은 다시는 하연에게 고삐를 넘겨주지 않겠다던 굳은 결심에도 불구하고 사담이 애처롭 게 빛나는 하연의 눈빛에 넘어가 그만 고삐를 넘겨주고 말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무가 햇빛을 가려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숲을 헤매며 그들은 하연에게 원망의 눈길을 보 냈지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연은 앞서 나무를 헤치고 가는 사담의 뒤를 말없이 따르며 고 민에 잠겨 있었다. '오늘 저녁에는 어떤 요리를 할까?' 그 문제를 고민하는 하연의 표정은 마치 삼림욕이라도 즐긴 듯 생생했다. 그만큼 하연은 요리를 하는 즐거움에 빠져 있었다. 자신이 요리를 하면 맛이야 어떻든 기름기가 가득한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 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집에서는 개도 안 먹던 자신의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는 동료들도 있었 으니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와 반대로 식사 때가 다가올수록 로베인들의 얼굴은 핼쑥해지고 있었다. 실상 로베인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걷고 있었다. 숲을 헤매던 첫날. 하연이 요리를 한다고 했을 때만 해도 그들은 그저 그러려니 했었다. 요리에 넣을 수 있는 재료들 도 한정되어 있어서 누가 만들든 맛은 비슷하게 되어 있었다. 때문에 조금 맛이 없더라도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연이 요리라고 내 놓은 음식을 한입 먹었을 때 그들은 그야말로 세상에는 이런 요리도 있을 수 있다라는 엄청난 경험을 하고야 말았다. 다시는 생각조차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연의 음식을 남기면 죄 받는다는 명 강의 함께 안 먹으면 카이람을 소환해서라도 먹이고야 말 것 같은 그 집요한 눈길-실상 하연은 자신의 요리가 그들의 입맛에 맞 을지 몰라 초조해 했을 뿐이었다-에 못 이겨 그 엄청난 요리를 전부 먹어야 했던 그리고 후에 하 연의 시선을 피해 모조리 토해내야 했다. 일행들은 특히 로베인은 식사 때가 다시 돌아온다는 사 실이 공포 그 자체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들은 왜 인간이란 세끼를 먹지 않으면 안 되는가 라는 명제를 놓고 고뇌하며 하연이 없 었다면 그것에 대해 진지한 토론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배는 고파서 애써 식사에 대한 생각을 머리 속에서 지우려고 노력하는 그들에게 하연 의 말이 들려왔다.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다시 길을 찾는 것이 좋겠어요. 이제 저녁 먹을 시간이에요." 순간 나뭇잎들을 헤치던 사담의 손길이 굳은 듯 멈춰졌고 다른 일행들 또한 그 자리에서 돌이 된 듯 굳어졌다. 요리기구를 꺼내드는 하연을 보고 그제서야 정신이 든 미루엘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하연 혼자만 식사당번을 하게 할 수는 없지요. 오늘은 내가 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돌아가 면서 식사당번을 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로베인들은 즉시 적극적인 찬성을 표했다. "그것 좋군요." "좋은 생각입니다." "내일 아침은 제가 하겠습니다." 말이 없던 사담조차 입을 열어 말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보며 하연이 방긋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고 이 정도의 일도 하지 않는다면 전 제가 쓸모 없는 인 간으로 느껴질 거예요. 그러니 제가 하도록 해 주세요." 로베인들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연이 쓸모 없는 인간이라고 느끼게 할 수는 없지 않은 가? 결국 그들은 그 날 저녁에도 굶주린 배를 움켜쥐며 하연이 만든 음식을 먹는척하다가 버리고 말 았다. 그 날 밤. 로베인들은 자는 척하며 하연이 잠들기만을 기다렸다. 하연이 잠들면 그들끼리 뭐라고 만들어 먹기로 의논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의도를 눈치채기라도 한 것일까? 하연은 좀처럼 잠잘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 으로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에 갑자기 어디가 아픈지 미약한 신음을 흘리는 것이 아 닌가? "하연?"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 로베인과 사담은 하연이 로브로 입을 틀어막으며 신음소리를 죽이려 고 애쓰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깜짝 놀라서 황급히 가까이 다가간 그들은 다음 순간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퍼지는 상대의 영혼을 갈구하는 듯한 매혹적이고 진한 향기가 그들의 영혼을 뒤흔들 었기 때문이었다. 날씨가 점점 쌀쌀해져서 늘 몽롱한게 글도 잘 안써지고. 재미없다는 말도 듣고. 하아~ 하연은 점점 사악해져 가는 것 같고....T-T 그래도 오늘도 앞을 향해 전진하는 유지입니다. 화이팅!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6-02-2001 22:34 Line : 81 Read : 1281 [25] 마신 소환사 -33-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1032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1-01-07 , 11:10:16 PM 마신 소환사 -33- 이건 도대체 무슨 향기일까? 로베인과 사담은 그 향기가 하연에게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하연의 눈가에서 떨어져 내리는 눈물을 타고 지독하리 만치 강한 상대의 혼 을 빼앗는 향기가 진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향기를 맡는 순간 그들은 하연을 향한 주체 할 수 없는 열정에 몸을 떨었다. 오직 하연만이 자신의 전부라는 듯. 하연 자신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일이었지만 하연이 먹은 다이아스의 정령 다이아의 기운과 하 연 특유의 향기가 겹쳐 눈물이나 땀이 나면 이런 지독하리 만치 매혹적인 향기를 내뿜게 되는 것 이었다. 뒤이어 그 향기를 맡은 카리스와 미루엘도 향기에 취한 듯 넋이 나간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보기 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카리스는 곧 드래곤답게 냉정한 이성을 회복하고 재빨리 하연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닦아주며 카리스는 하연의 곁에 떨어져 있는 갈루마에 손을 댔다. 살기에 가까운 시선으로 사담과 로베인이 노려보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그러자 시끄러운 그러나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이 둔하고 멍청한 드래곤! 이제야 하연이 아픈걸 안 거냐? 동료니 어쩌니 하면서 그런 것도 진 작 눈치채지 못하고, 이 바보 같은 녀석들아! 그 동안 하연이 너희들 모르게 얼마나 고통스러워했 는지 알아? 그런데 이 둔탱이 같은 자식들은 하나같이 눈치도 못 채고...... 이것 봐! 뭐해? 어서 마법으로 치료부터 해야지. 제길! 이런 상태가 아니라면 하연이 어디가 아픈지 알아낼 수 있었는 데 도대체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거냐?- 카리스는 충격을 받았다. 그럼 그 동안 쭉 이렇게 아팠었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그렇게 세상의 고통이나 괴로움 따위 조금 도 모르는 듯 밝고 천진난만하게 웃었단 말인가? 수많은 세월동안 카리스는 많은 유희를 즐겼다. 그래서 인간에 대해 많은 것을 안다고 자부해왔 었다. 자신의 고통에는 민감하고 타인의 고통은 오히려 기쁨으로 여기는 것이 자신이 고통 당하면 남들 도 똑같이 고통을 당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짧은 생을 사는 만큼 삶에 대한 집착도 강한 그런 존재 가 바로 그가 아는 인간이란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카리스는 인간에 대한 고정관념이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작고 여린 몸 어디에서 이처럼 강인한 정신이 숨어 있는 것일까? 사랑스러웠다. 떨리는 손으로 하연의 얼굴을 쓰다듬던 카리스의 손에서 은빛의 빛이 뿜어져 나와 엷은 막을 형 성하듯 하연을 둘러쌓다. 그러나 다음 순간 카리스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빛이 전혀 하연의 몸 속으로 스며들지 않았 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즉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었고 마법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무슨 일이야? 왜 그래?- "마법이 듣질 않아!" 그 말을 들은 갈루마 또한 충격을 받은 듯 말이 없었다. 하지만 카리스와는 달리 갈루마는 그 이 유를 알 수 있었다. 로베인의 저주 또한 하연에게는 듣지 않았었고 그 때 짐작한 것이지만 다른 세계의 인간인 하연에게는 이 세계의 법칙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세계의 마법으로는 하연의 병을 치료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아낸 갈루마는 마지막 희망이 스 러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카리스가 하연이 아픈 것을 눈치채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잘 해결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 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법이 통하질 않는다니...... 그 때 하연이 마법에 둘러 쌓여 그녀의 냄새가 전해지지 않은 덕분에 정신을 차리게 된 세 사람 은 심상치 않은 하연의 모습에 다급히 카리스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연이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겁니까?" 그러나 카리스는 그들의 말에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당황하고 초조해서 제 정신이 아 니었던 것이다. 로베인들도 평소의 온화한 카리스 답지 않은 무서운 표정에 더 이상 카리스에게 물어보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하연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로베인은 쉰 듯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하연의 이름을 불렀다. 그렇지 않으면 하연이 눈 앞에서 사라질 듯한 불길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잠시 후 어느 정도 고통이 가신 듯 하연이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 싼 동료들을 보자 자신 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모두에게 들켜버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난처한 마음에 하연은 그들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왜 아직 안 자고 이러고 있어?" 모두모두 하연에게 사랑을...^-^ 오늘 눈 많이 왔지요? 저도 눈구경하는냐고 하루 종일 창밖만......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6-02-2001 22:34 Line : 85 Read : 1278 [26] 마신 소환사 -34-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1033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1-01-08 , 02:05:06 AM 마신 소환사 -34- 그 말에 기가 막힌 듯 로베인이 외쳤다. "네가 아픈데 어떻게 잘 수 있겠어? 왜 혼자 앓고 있는 거야? 아프면 아프다고 예기를 해야 할 것 아니야! 도대체...... 어디가 아픈 거야, 하연?" 아픈 사람에게 계속 소리 지르기가 뭣했는지 끝에 이르러서는 되도록 부드럽게 물어 보았다. 그러자 하연은 어리광을 부리듯 말했다. "우웅! 잘 모르겠어. 갑자기 배가 너무 아픈 것 있지." "......배가?" "응!" 순간 카리스를 제외한 로베인들은 하연의 요리를 떠올렸다. 그들은 지금까지 먹는 척하며 슬쩍슬 쩍 버렸지만 하연은 그 요리를 모두 먹어 치웠지 않은가? '그 이상한 요리를 먹고도 지금까지 멀쩡한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지.' 그들은 공감하듯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연을 위해서라도 더 이상 하연이 요리를 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미루엘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젠 좀 괜찮아?" 하연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응. 이제는 안 아파." 카리스는 그 웃는 얼굴이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만큼이나 슬퍼 보였다. 저렇게 웃기까지 얼마나 울었을까...... 그런 카리스를 향해 사담이 문뜩 물었다. "...그런데 마법이 듣질 않는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제서야 의문이 든 듯 로베인도 물었다. "맞아. 나도 들었어. 무슨 소리야?" 복잡해 보이는 얼굴로 카리스가 말했다. "말 그대로 제 마법이 하연에게는 듣질 않습니다." "뭐라고?" "뭣?" 그들 또한 마법이 듣지 않는 인간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지라 놀라운 얼굴로 하연과 카리스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하연은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놀라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게 그렇게 이상해?" "그럼. 이상하지. 그리고 좋지도 않은 일이야! 네가 다쳐도 카리스가 마법으로 상처를 낫게 해 줄 수 없다는 뜻이니까."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로베인이 말했다. 그러나 하연은 웃었다. 그리고 검지 손가락을 가로 저으 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아니지! 좋은 일이야. 그것도 무척. 왜냐하면 그건 어떤 마법사가 공격해 와도 날 다치게 할 수 없다는 말이니까. 역시 난 대단해!" 스스로의 대단함에 자신조차 감탄한 듯 말하는 하연의 말에 모두는 피식 웃고 말았다. 카리스조 차. 그날 카리스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할 일 없는 드래곤들의 취미생활이란 어디까지나 잠자는 것이었고 카리스도 잠자는 것을 좋아했 지만 어쩐 일인지 잠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오랜만에 갈루마와 대화나 해 볼 생각으 로 자리에서 일어나 하연에게로 갔다. 하연은 편안한 얼굴로 잠이 들어 있었다. 혹시 죽어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 될 정도로. 그래서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카리스는 하연 의 몸 위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생각지도 못한 연참을 하게 되었읍니다. 흐흠~ 역시 난 대단해!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6-02-2001 22:34 Line : 94 Read : 1579 [27] 마신 소환사 -35-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1076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1-01-10 , 12:24:41 AM 마신 소환사 -35- 그 때 사담 또한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일순간이긴 했지만 하연을 향해 여동생을 생각하는 그런 감정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강렬한 소유욕을 동반한 그런 감정을 품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는 진정 자신이 하연을 여동생대신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뿐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자신조차 잘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주위를 한바퀴 돌아보기 위해 일어난 사담은 그 광경을 보고 말았다. 카리스가 하연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을. 순간 그의 머리 속을 어지럽히던 모든 생각들이 깨끗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어느새 그의 검은 카리스의 목 줄기를 향해 겨누어져 있었다. "떨어져!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 살기가 가득 찬 목소리와 함께 그의 검에는 은은한 검기가 어려 있었다. 그러나 카리스는 어디까지나 태연했다. "미약하나마 검기를 내뿜을 정도라니...... 대단한 분이시군요. 역시 당신이 그 유명한 용병왕 사 담이었습니까?" 용병왕 사담. 혼 대륙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며 돈을 받고 대신 전쟁을 하거나 싸우는 사람들이 바로 용병이 다. 때문에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료가 될 수도 있고 오늘의 동료가 내일은 적이 될 수 있는 것이 용병들의 세계이다. 그런 그들이기에 그들에게 왕이란 존재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서슴없이 용병왕이라 부르는 자가 있으니 바로 사담이라는 이름의 용병이었 다. 강하고 자유로운 용병. 가난한 이에게는 빵 한 조각만으로도 청부를 받아주지만 왕의 앞이라 해도 결코 무릎 꿇지 않는 진정한 의미의 용병. 그렇기에 용병들은 존경의 뜻으로 그를 용병왕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그 말에 사담은 잠깐 눈살을 찌푸렸으나 그렇다고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싸늘한 목소 리로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떨어져라!" 카리스는 천천히 하연에게서 물러나면서 물었다. "그런데...... 설마 제가 하연의 상태를 살피는게 못마땅해서 이러시는 것은 아닐 테고 무슨 이유 로 제게 검을 겨누시는 겁니까?" 순간 사담의 몸이 굳어지는 듯 하더니 검을 거두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착각했습니다." "착각? 무슨 착각을 하셨기에 검기까지 보이셨단 말입니까?" 사담은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카리스가 꼭 듣고야 말겠다는 눈빛으로 계속 바라보고 있자 자신 의 잘못도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어 말해 주었다. "하연에게 허튼 수작을 하려는 줄 알았습니다." "허튼 수작? 그래서 검기를......?" 할말을 잃은 듯 망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카리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애써 외면하 며 사담은 그 자리를 도망치듯 떠나버렸다. 그런 그의 등뒤로 카리스의 숨죽인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쿡쿡쿡! 쿡쿡쿡!" 그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던 것이다. 사담이 저토록 불같은 성격이라고는....... 그런 쪽으로 는 좀 둔한 듯 사담이 하연을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는 생각지 못하는 카리스였다.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갈루마를 집어든 카리스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지팡이에 가벼운 전격마 법을 날렸다. -으아악! 이 망할 놈의 드래곤 자식아! 내가 이렇게 깨우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 이 오리하 르콘 머리야! 그리고 난 아직 잠들지도 않았단 말이야!- 카리스는 다른 사람들이 깨지 않게 마음으로 언어를 전달했다. -뭐! 깨어 있었으면서 지금까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차라리 오 크가 약탈을 안 하겠다는 약속을 믿지.- -......하연의 병을 치료해 줄 방법이 정말 없는 거냐? 야, 넌 드래곤이잖아! 이 대륙의 역사보다 도 오래 살아온. 분명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그렇지?- 카리스는 할말을 잃었다. 순간 처음 갈루마를 만났던 그 당시의 광경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도 여러분들의 의견에 부응해 연참을 하고 싶지만. 더 이상 짧다는 예기는 듣고 싶지 않지만. 집안 사정이... 환자가 있어서... 당분간은 어려울 듯. 그래도 되도록 꾸준히 연재할 생각이니까 많이 많이 사랑해주세요. 그리고 혹시 하연에게 이런 모험을! 이라는 의견이 있으시면 적극 수용할테니 의견 보내주시고요.^-^ 눈이 많이 오니 늘 발길 조심하세요.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7-02-2001 13:11 Line : 119 Read : 1487 [28] 마신 소환사 -36-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1148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1-01-12 , 12:04:38 AM 마신 소환사 -36- 그 날 칼링스타는 어떤 드래곤도 시도해 보지 않았던 일을 해보기로 결심했었다. 바로 선탠을 하 기로 결심한 것이다. 두꺼운 드래곤의 피부로는 선탠을 하는데 몇 천년이 들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차피 시간이 야 남아도는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생각이 많아서인지 자신의 고상하고 우아해 보이던 피부가 갑 자기 그 변태에다가 사이코 기질이 농후한 얼음의 마왕 데바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던 것이다. 결정을 하자 칼링스타는 대범하게 햇빛이 잘 들도록 레어의 천장을 모두 날려버렸다. 선탠이 끝 나면 천장을 보수 공사는 이웃 마을에 있는 드워프들에게 맡기고 공사가 끝날 때까지 햇빛에 탄 자시의 멋진 몸을 자랑도 할 겸 다른 드래곤들의 레어를 돌아보고 올 생각이었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볼 다른 드래곤들의 시선을 생각하며 칼링스타가 자신의 육중한 몸체를 자랑 스레 햇빛아래 누이고 레어안에서 선탠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강력한 마나의 기운이 느껴졌다. 근처에 헤즐링이라도 와 있는 건가 하고 생각될 정도였다. 아니면 마나의 기척을 어느 정도 감춘 드래곤이던지. 그런데 그것은 아닌 모양으로 그가 입구에 설치해 놓은 여러 가지 트랩들이 마구 파괴되며 그 강 력한 기운을 지닌 자가 다가오는 것이었다. 만약 헤즐링이나 다른 드래곤이었다면 다른 동료의 레어에 이렇듯 무례하게 침입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떤 자인지 궁금하긴 했지만 드래곤 특유의 게으름으로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자 어디서 굴러 들어왔는지 모를 먼지 덩어리가 그의 눈앞에 나타나서 말하는 것이었다. "여! 네 녀석이 실버 드래곤 칼링스타 맞지? 네게 도전하러 왔다. 이 대현자 갈루마님이 널 선택 한 걸 영광으로 알도록. 아, 그 전에 먼저 목욕물하고 식사를 대령해라!" 기가 막혔다. 그 때문에 칼링스타는 드래곤으로서의 고상한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평소의 지론조차 잊고 입 을 쩍 벌린 멍청한 모습으로 인간을 쳐다보고 말았다. 저 다 헤어지고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로브에 수정 지팡이를 든 모습으로 봐서는 분명 마법사가 분명할 진데 마법 생물이라고 할 수 있는 드래곤에게 도전하는 멍청한 짓을 하다니...... 게다가 뭐 목욕물과 식사를 대령하라고? 여기가 여관이냐! 아무래도 저 마법사가 현자라는 이름만으로는 역사에 그리 이름이 남지 않을 것 같으니까 드래곤 에게 도전한 현자라는 이름으로라도 역사에 남고 싶어서 발악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 될 정도 였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갈루마는 드래곤을 이긴 마법사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작정으로 칼링스타를 찾아온 것이었던 것이다. 칼링스타는 그리 마음이 넓은 편이 아니었다. 아니, 드래곤들 사이에서는 그야말로 속 좁기로 유 명한 드래곤이었다. 따라서 브레스 한 방이면 끝날 일이었지만 그렇게 간단히 죽이고 싶지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잘 죽였다고 드래곤 역사에 길이 남을까 고민하던 칼링스타는 그의 영혼을 유체이 탈 시킨 다음 육체를 소멸시키고 영혼은 그가 들고 있는 수정지팡이에 영원히 봉인해 버리기로 결심했다. 현자라고 했으니까 현자라고 불린 그 정신이 무너지기 전에는 결코 소멸할 수 없는 영겁의 저주 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사악한 결정에 만족한 칼링스타는 갈루마의 요구대로 목욕물과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목욕 후에 깨끗해진 모습으로 나온 갈루마의 아름다운 모습에 일순 그 육체가 소멸된다는 사실 에 좀 아쉬운 마음도 언뜻 들었지만 그는 자신의 결정을 계속 밀고 나갔다. 갈루마의 더없이 오만한 태도 때문이었다. 설마 갈루마의 수다에 자신이 더 괴롭게 될 줄은 생각도 못한 채 칼링스타는 희희낙낙한 표정으 로 빨리 대결의 순간이 오기를 고대했다. 그리고 이윽고 그 순간이 도래했을 때 갈루마가 긴 주문을 외우는 동안 칼링스타는 간단한 용언 마법으로 모든 일을 해 치웠다. "레이스!" 갈루마의 영혼이 마치 투명한 실처럼 육체에서 빠져 나왔다. 그 영혼을 칼링스타는 순식간에 수정 지팡이에 봉인해버렸다. 치사하다, 이건 정당한 대결이 아니다라는 등의 헛소리를 해대는 갈루마의 항의를 즐기면서. 그런 갈루마였다. 그 갈루마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마치 애원을 하듯 방법을 생각해내라고 자신에게 요구하 다니...... 인간이란 드래곤인 그의 입장에서 볼 때 변화가 너무 빠른 존재였다. 그리고 갈루마도 다른 인간 들처럼 변한 것이다. 씁쓰름한 표정으로 그것을 인정하며 카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내어 중얼 거렸다. "그래. 생각해보지." 갈수록 숲이 적어지고 바위투성이인 험악한 지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체력이 약한 하연은 위태위태한 모습이었다. 그런 하연의 모습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로베인은 더 이상 안되겠는지 더듬거리며 물었 다. "하연, 괜찮아? 저, 내가... 내가......" 로베인이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하고 더듬거리고만 있자 하연은 짜증스런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러자 로베인이 벌개진 얼굴로 악을 쓰듯 외쳤다. "......내가 업어줄까?" '겨우 그런 말을 하려고, 그렇게?' 허탈한 표정으로 잠시 로베인을 쳐다보던 하연은 긴장한 얼굴로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로 베인을 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나야 좋지만...... 무거울 텐데?" 순간 로베인의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아, 아니야! 전혀 무겁지 않아! 하연 정도는 내가 평생이라도 충분히 업고 다닐 수 있어!" 그러면서 로베인은 하연에게 등을 돌려 대었다. 다분이 과장이 섞인 로베인의 말투에 피식 웃으며 하연은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따뜻하게 보였 다. 마치 어린 시절 아빠의 등 같이. 그 때는 참 많이 업혔었는데...... 그 때로 다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끼며 하연이 로베인의 등에 업히려고 할 때였다. 사담의 비아냥거리는 듯한 퉁명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정도로 벌써 지친 것입니까? 그러면서 무슨 모험을 한다는 말입니까? 포기하고 지금이라도 돌아가시지요?" 짜잔! 본격적인 삼각관계의 돌입입니다. 하지만 전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읍니다. 앞으로 사각, 오각, 육각... ...이게 아닌가? 어쨌든 하연을 좋아하는 캐릭들을 많이 많이 등장 시킬 생각입니다. 하연을 위하여 오늘도 고심하는 유지입니당.^-^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7-02-2001 13:12 Line : 123 Read : 1323 [29] 마신 소환사 -37-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1202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1-01-15 , 06:14:21 PM 마신 소환사 -37- 그 소리에 울컥한 하연은 로베인의 등을 밀치고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신경 쓰지마, 로베인. 가다가 죽어도 내 발로 걸어갈 거야." 몸을 일으킨 로베인은 사담을 험악하게 노려보았다. 하연을 업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그 때문 에 놓쳐 버렸기 때문이었다. 사담은 그런 로베인을 못 본 척하며 오기로 버티듯 힘겹게 걸어가는 하연의 뒷모습을 침울한 얼 굴로 바라보았다. 그는 하연의 체력이 한계에 부딪쳤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아 무 말 없이 버틴 것만 해도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녀를 업고 가야 한다면 그것은 사담 바로 그 자신이어야만 했다. 하연이 로베인의 등에 업혀 가는 모습은 떠올리기도 싫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것만은 말려야겠 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들을 내뱉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런 말을 해서 하연의 미움을 사다니...... 다른 말도 있었을 텐데...... 분명히 하연이 자신을 욕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사담은 스스로를 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하연은 사담을 욕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이렇게 나약해 지다니. 육체적으로는 나약할지라도 정신력만큼은 강하다고 자부했었는데...... 전의 하연이라면 분명 누군가에게 업혀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로베인을 만 나고 나서부터는 어쩐지 자꾸만 그에게 의지하게 되고 어리광을 부리게 되는 것이었다. 모두가 로베인이 내 말은 뭐든지 들어주기 때문이야.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던 하연은 문뜩 걸음을 멈추고 생각했다. 로베인이 뭐든지 내 말을 들어준다고? 확실히 그랬어. 하지만...... 왜지? 무언가 생각이 날 듯도 한데 떠오르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도끼가 날아와 하연의 발 밑에 꽂혔다. 퍽! 놀라서 그나마 떠오르던 생각마저 모두 날려버린 하연은 거친 숨을 들이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그들은 포위되어 있었다. 바로 드워프들에 의해서. 드워프들에 의해 쇠고랑 같은 것을 차고 끌려가면서 하연은 드워프들의 모습을 관찰하기에 여념 이 없었다. 동화 속의 난쟁이처럼 생긴 그들은 마치 노인처럼 길고 풍성한 수염을 하고 있었지만 볼은 어린 아이의 볼처럼 발그레한 게 엄청 귀여웠다. 길을 잃은 것이 행운이라고까지 생각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들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 아닌 가? 그런 그녀와는 다르게 로베인들은 바짝 긴장해 있었다. 드워프 종족은 인간과 적대적인 관계였 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인간들이 드워프들의 뛰어난 손재주를 노리고 노예로 부려지거나 심지어 드워프 사냥꾼 까지 있어서 그들을 잡아 비싼 가격에 팔아 넘기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드워프들이 인간에게 우 호적이기는 힘든 일이었다. 아마 그들을 죽이거나 자신들의 노예로 부리려고 들것이 분명했다. 이윽고 그들은 드워프의 마을에 도착했다. 드워프 마을은 하연이 생각했던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은 집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굵은 원통형 의 나무에 나뭇가지가 자라나 있듯 집들이 쭉 뻗어 높이 솟아 있는 것이 마치 나무 모양의 아파트 가 수십 채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호기심에 차서 이리저리 둘러보던 하연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호기심에 찬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 보고 있는 한 드워프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바로 그들을 포로로 잡아 온 드워프들의 대장인 리밍스였다. 하연은 그에게 생긋 웃어주었다. 그러자 리밍스는 얼굴을 붉히며 재빨리 고개를 돌리더니 동료 들 중 한 명에게 화가 난 듯 소리를 질렀다. "뭐해? 브랭키! 어서 장로님을 모셔와!" 브랭키라고 불린 드워프는 갑자기 화를 내는 리밍스를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보더니 곧 고개를 끄 덕이고 중앙에 위치한 다른 나무 아파트들보다 작고 풍성한 나뭇잎들이 가득 달린 나무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나무 지팡이를 짚은 드워프 노인과 흰 로브를 쓴 빛의 드워프 사제로 보이는 드 워프가 함께 나왔다. 그들은 하연의 검은 로브와 붉은 서클렛을 보더니 서로를 바라보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 고 장로로 보이는 드워프가 하연에게 물었다. "인간 사제여! 어찌해서 이 깊숙한 오지의 땅인 우리 드워프의 마을을 침입했는가?" 하연은 그 말에 얼굴을 찡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침입이라니요? 말을 바로 하라고요. 저희는 단지 길을 잃고 이 숲을 헤매고 있었을 뿐인데 갑작 스런 도끼 세례를 받고 이렇듯 쇠사슬에 묶여 노예처럼 끌려온 거라고요." 드워프의 장로인 후마는 신중한 표정으로 그런 하연의 얼굴을 살피더니 드워프 사제인 글로윈에 게 물었다. "어찌 생각하는가? 저 인간의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글로윈이 하연에게 물었다. "당신이 믿는 신의 이름을 걸고 지금 그 말에 맹세할 수 있겠소?" 하연은 즉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글로윈의 얼굴에 엄숙한 빛이 어리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드워프들은 살생을 즐기지 않소. 하지만 당신들이 드워프 사냥꾼이라면 우린 당신들을 죽 여야 하오. 그러나 당신들의 말처럼 그저 길을 잃은 것뿐이라면 이 마을에서 나갈 수는 없겠지만 그런 대로 이 곳에서 편하게 살도록 해 주겠소." 하연이 아무 말도 않고 잠자코 있자 미루엘이 나서며 급히 말했다. "저흰 길을 잃은 것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그러나 드워프의 장로인 후마도 그렇고 사제인 글로윈도 하연의 얼굴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연 이 신의 이름을 놓고 맹세를 해야만 믿겠다는 태도였다. 미루엘은 초조해서 하연을 재촉했다. "하연! 빨리 맹세하십시오. 분명 길을 잃은 것뿐이지 않습니까?" 그제야 하연이 입을 열었다. "하아~ 솔직히 말해서 카이람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 건 너무 간단한 일이에요. 하지만 제가 여 러분들이라면 카이람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맹세 따위는 조금도 믿지 않겠어요. 그러나 여러분들 이 그래야 믿겠다면 할 수 없지요. ...저 하연은 마신 카이람의 이름을 걸고 지금 한 말이 모두 사 실임을 맹세합니다, 됐나요?" 그런 하연을 드워프들은 물론 하연의 동료들마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몇일동안 못 올렸지요? 집안 일이 이제야 끝나서... 그리고 메일 보내주신 분. 너무 짧으니 매일 올리지 않아도 좋으니 한번에 묶어서 길게 올려달라고 하셨지요? 하지만 짧아도 좋으니 매일 올려 달라는 분도 계셔서.... 어찌 되었든 되도록 길게 올리도록 노력해 보겠읍니다.^-^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7-02-2001 13:12 Line : 112 Read : 1320 [30] 마신 소환사 -38-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1211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1-01-16 , 07:58:45 PM 마신 소환사 -38- 드워프의 장로와 사제가 결정을 내릴 동안 하연 일행은 지니고 있는 모든 무기와 갈루마마저 빼 앗긴 채 창고에 갇혀 있어야 했다. 창고에는 많은 과일들과 곡식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는데 하연은 그 과일들 중 하나를 집어 우 적우적 씹어 먹으며 동료들에게도 먹어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런 하연을 보며 로베인과 카리스, 사담은 의례 그러려니 하며 자신들도 과일을 집어먹었지만 미루엘만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화를 억누르는 목소리로 물었다. "......꼭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그 말에 하연은 과일을 입 속에 우물거리며 불만스럽다는 듯 말했다. "솔직히 그런 맹세 따위는 하고 싶지도 않았어. 내 목숨 귀한 줄 아니까 했지, 그렇지 않다면 누 가 카이람의 이름에 걸고 맹세 따위를 하겠어?" "하지만 당신은 카이람님의 사제이지 않습니까? 그 분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게 뭐 어떻다고 그 러시는 겁니까?" "흥! 그 자식은 도둑놈이야! 그런 도둑놈의 이름을 걸고 무슨 맹세를 하란 말이야." 그 때까지도 카이람이 자신의 돈을 털어서 겜 CD를 산 일을 마음속에 세겨 두고 있었던 듯 하연 의 말속엔 가시가 돋쳐 있었다. 그러나 영문을 모르는 미루엘로서는 하연의 말이 황당하기만 할 뿐이었다. 사제가 자신이 모시는 신을 도둑놈이라고 욕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 미루엘 의 마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하연에게 물들어 버린 다른 일행들은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 렸다. "하긴 나라도 싫을 거야!" "싫은 일이라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지요." 미루엘은 새삼 왜 이들의 동료가 되었는지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자신은 운명의 여 신의 희롱을 당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이렇게 제대로 된 트레져 헌터도 못되어보고 드워프들에게 죽게 되는 건가 하고 생각하고 있는 데 사담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모두 사담을 쳐다보았다. 사담이 입을 여는 경우는 무척 드물고 그 만큼 중요한 일이 아니면 좀처럼 입을 열지 않기 때문이 었다. "여기서 나가면 제가 드워프 장로를 인질도 잡겠습니다. 장로를 인질로 이 마을을 빠져나가도록 하지요." 그것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는 듯 단호하기까지 한 사담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는 그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과연 사담이 드워프 장로 를 인질로 잡을 수 있는 건가 하는 것인데 사담의 여유가 넘치는 듯한 태도는 그런 걱정을 깨끗 이 지워버리게 만들었다. 그 때 드디어 의논이 끝났는지 창고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들을 잡아 온 드워프 청년 리밍스가 들어와 하연에게 말했다. "인간 사제! 장로님이 너를 부르신다. 따라와라!" 그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획에 차질이 오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연은 여전히 과일을 입에 문 채 태연하게 일어나 리밍스를 따라 나섰다. 일행들의 걱정 을 뒤로한 채. 하연이 나가자 다시 창고의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 로베인은 조금전과는 다르게 초조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왜 하연만 부른 걸까? 설마...... 하연을 고문하려는 것은?" 그 생각이 떠오르자 로베인은 안색이 창백해 졌고 사담은 문을 부수고 나가려는 듯 문에 어깨를 부딪혀갔다. 쾅! 쾅! "진정하십시오, 로베인! 사담! 하연은 마신 소환사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로베인과 사담은 카리스의 말이 귀에 들려오지 않는 듯 합심해서 문을 부수려고 해 보았 으나 워낙 문이 단단한 재질의 나무로 되어 있어 부서지지 않았다. 로베인은 초조한 어조로 카리스에게 외쳤다. "카리스, 어떻게 마법으로 이 문을 부술 방법이 없겠습니까?" 카리스는 그런 그들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보더니 한숨을 쉬며 그들에게 슬립 주문을 걸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 자리에서 쓰러지듯 자는 로베인과 사담을 보며 미루엘은 조심스럽게 카리스에 게 물었다. "저래도 괜찮겠습니까? 드워프들이 언제 다시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괜찮습니다. 그 때는 다시 마법으로 깨우면 되니까요." 그러면서 느긋하게 땅바닥에 앉는 카리스를 보며 미루엘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카리스님은 하연이 걱정되지 않습니까?" 카리스는 미루엘이 얼굴을 붉힐 정도로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신이 그녀의 편에 서 있는데 왜 걱정을 합니까? 전 조금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리밍스를 따라 하연은 간 곳은 법정을 보는 듯 했다. 제일 위쪽 단상에는 드워프의 장로인 후마가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사제인 글로윈이 서 있었으 며 아래에서 많은 드워프들이 쭉 둘러앉아 증오가 섞인 시선으로 막 문으로 들어 선 하연을 쳐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조금 긴장이 된 하연은 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드워프들을 가로질러 후마장로의 앞 으로 나아가 섰다. 그러자 후마장로가 나무지팡이로 단상을 두들이며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부터 우리 땅을 침범해 들어 온 인간들의 처리문제를 결정하도록 하겠다." 쓴게 좀 더 되지만 아무래도 수정을 해야할 것 같아서... 내일 올리겠읍니다. 기대해 주세요. 다시 멋진 하연의 사기극(?)이...^-^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7-02-2001 13:12 Line : 173 Read : 1618 [31] 마신 소환사 -39-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1222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1-01-17 , 03:07:49 PM 마신 소환사 -39- 그 말이 끝나자마자 드워프 하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이 바쁜 시기에 장로님께서 저희들을 급작스럽게 소집하신 이유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 리 드워프들의 신성한 결정의 장에 인간을 참석시킨 이유는 도무지 알 길이 없군요. 먼저 그 이유 부터 설명해 주십시오." "맞습니다!" "옳소!" "인간은 이 회의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하연의 퇴장을 요구하는 드워프들의 소란이 일자 후마 장로는 그들을 진정시키려는 듯 지팡이를 내리쳤다. "쾅! 쾅! 조용, 조용!" 겨우 장내가 진정되자 후마장로가 입을 열었다. "저 인간은 어둠의 사제다. 어둠의 사제가 뿌리는 저주의 힘을 너희들은 벌써 잊었느냐?" 순간 장내가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조용해졌다. 하연으로서는 생각도 못한 일이었지만 그 문제가 인간들의 처리문제를 결정짓는데 후마장로와 글로윈사제는 가장 곤혹스러웠다. 빛과 어둠의 전쟁의 댓가는 인간들만이 치른 것이 아니었다. 드워프들 또한 어둠의 사제가 뿌린 저주로 인해 자신들의 땅을 버리고 인간들에게 쫓기면서 이곳 헤루아의 숲 깊숙한 오지로 쫓겨 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있는 드워프들은 모두 그들의 후손이었다. 그들은 이 곳을 떠나면 더 이상 갈곳이 없었 다. 그런데 어둠의 사제인 하연이 이곳에 저주를 뿌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때문에 그들은 하연의 분노를 사지 않고 인간들의 처리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다가 결국 모두 의 의견을 들어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어져 이 결정의 장을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드워프들은 새삼 인간인 하연을 향한 증오와 어둠의 사제라는 신분에 대한 공포로 범벅이 된 시 선으로 하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아는 후마장로는 되도록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서 저 인간 사제를 우리 회의에 참석시킨 것이다. 우리 회의가 공정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 이다. 그러니 모두 소신껏 각자의 의견을 말하도록." 그러자 모두들 진지한 표정으로 회의에 임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들을 훑어보며 글로윈 사제가 자세한 상황을 설명했다. 하연일행이 길을 잃고 헤매다 그 들의 땅에 침입했고 그 사실을 하연이 카이람의 이름에 대고 맹세했다는 사실을. 설명을 들은 드워프들 중에 맨 처음 의견을 말했던 드워프가 사나운 눈길로 하연을 노려보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저들을 죽일 필요까지는 없겠군요. 하지만 저들을 이곳에서 나가게 해 줄 수는 없습니 다. 저들로 인해 이곳의 위치가 인간들에게 알려질 수 있는 일이니까. 관례대로 저들에게 이 곳 의 땅을 약간 떼어주고 이곳에서 살도록 조처를 취하시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하연 일행을 잡아왔던 드워프 무리들 중에 한 명인 브랭키가 일어나 말했다. "인간들이 단순히 길을 잃고 여기에 들어온 것뿐이라면 저들의 눈을 가리고 이곳에서 나갈 수 있 도록 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들을 우리 마을에서 살게 한다는 것은 보다 위험을 가중 시키는 것일 뿐 현명한 판단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하연은 정말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힐끗 보던 리밍스가 벌떡 일어나서 그 말에 반박했다. "저들은 인간들입니다. 인간들에게 맹세란 얼마나 헛된 것인지 이미 충분히 경험해 보지 않았습 니까? 저 인간이 하는 말을 장로님과 사제님도 들으셨지 않습니까? 저 인간 자신도 사제의 신분 이면서 카이람의 이름을 걸고 한 맹세라면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인간들입니다. 그런데 어찌 저들이 단순히 길을 잃었을 뿐이라는 말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저들을 보낼 수는 절대 없습니다." 많은 드워프들이 리밍스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회의는 점점 길어지고 좀처럼 의견이 모이지 않았다. 게다가 많은 드워프들이 중구난방으로 떠들 어대자 하연은 더 이상 참고 들어줄 수가 없었다. 단상으로 올라간 하연은 후마장로의 지팡이를 빼앗아 단상을 쾅! 쾅! 내리치며 외쳤다. "시끄러워요! 조용히 해요!" 모두들 놀라서 하연을 올려다보았다. 하연은 드워프들은 노려보며 정말 실망스럽기 그지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여러분들 정말 드워프가 맞아요?"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 인간? 우리가 드워프가 아니라면 뭐란 말이냐?" 드워프들이 항의하자 하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 솔직히 실제로 드워프들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하지만 제가 들은 드워프들과 여러 분들은 너무 다르군요." "어떻게 다르다는 거지, 인간?" 드워프들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하연은 애써 정말 얼떨떨하다는 듯한 표정까지 지어 보이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희 마을 사람들은요 모두들 드워프들을 존경하고 좋아해요. 드워프들에 대한 많은 예기들이 전해 내려오니까요." "예기?" "저희 나라를 세우신 왕과 왕비님에게는 자식이 없었어요. 그래서 매일 두 주신께 기도했지요. 자 식을 얻게 해 달라고요. 그렇게 삼년이 지나자 두 주신께서 왕과 왕비님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 셨는지 어둠과 같은 검은머리와 검은 눈을 지니고 빛과 같은 성품을 지닌 아주 아름다운 공주님 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온 나라에 경사가 일어난 거지요. 하지만 공주님을 나으신 왕비님은 얼 마 안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답니다. 그래서 왕은 새로운 왕비를 맞았지요. 아주 아름다 운....." 그 때 문뜩 드워프들은 용모의 아름다움보다는 솜씨의 아름다움에 반한다는 예기를 들은 기억이 떠올라 하연은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손재주가 대단히 뛰어난 왕비님이었지요. 거기에 반한 왕은 새 왕비님에게 푹 빠지셨답니다." "호오~" 왕이 반할 만 하다는 듯 감탄한 표정을 짓는 드워프들을 보며 하연은 만족해서 계속 말을 이어나 갔다. "세월이 흘러 공주님은 무럭무럭 자라 나섰고 아주 훌륭한 솜씨를 지니게 되셨지요. 청소, 요리, 빨래. 그야말로 집안 일에서는 못하는 일이 없는 훌륭한 공주님이 되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아주 부지런 하셔서 나라안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했지요. 그런데 왕비님은 공주님과는 달리 솜씨는 훌 륭했지만 아주 게으른 여자였어요. 매일 마법 거울이나 들여다보며 이렇게 물었지요. 거울아, 거 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저런!" "쯧쯧!" 혀를 차는 드워프들을 보며 더욱 자신을 얻은 하연은 점점 더 자신의 예기에 취해 어조에 열기를 띄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니 거울이 왕비님이 아름답다고 하겠어요? 공주님이 아름답다고 하겠어요?" "당연히 공주님이지." 한 드워프가 그렇게 외쳤다. "맞아요. 거울은 이 세상에서 공주님이 제일 예쁘다고 말했지요. 그러자 화가 난 왕비는 공주님 을 죽이기고 마음먹었어요." "저런 고약한!" 드워프들 몇몇이 흥분해서 외쳤다. 그와 같은 아름다운 공주를 죽인다니 너무 안타까웠던 것이 다. "왕비님은 사냥꾼을 고용해 공주님을 숲으로 끌고 가 죽이라고 명했어요. 사냥꾼은 공주님에게 숲에 사는 드워프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속여서 공주님을 숲으로 끌고 갔지요. 원래 드워프들은 솜씨가 훌륭하기로 소문이 났기 때문에 공주님은 그 드워프를 스승으로 모시고 더욱 솜씨를 갈 고 닦을 생각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슬쩍 예기를 끼어 맞춰 드워프들을 칭찬하자 드워프들은 흡족한 표정으로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 다. 그리고 공주의 운명을 안타깝게 여겼다. "숲 깊숙이 들어가자 드디어 사냥꾼이 본색을 드러내고 공주님을 죽이려 들었지요. 사냥꾼이 공 주님을 죽이려는 순간." 드워프들은 긴장해서 꿀꺽 침을 삼켰다. "다행이 숲속에 살고 있던 일곱명의 드워프들이 나타나 공주님을 구해주었어요. 그리고 그들은 공주님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자신들의 집에서 살게 해 주었어요. 그 드워프들을 스승으로 모신 공주님의 솜씨는 날로 늘어갔고 그녀의 솜씨는 이웃 나라에 까지 전해서 그 곳 왕자님이 직접 그녀를 만나기 위해 찾아왔어요. 공주님의 솜씨를 본 왕자님은 한눈 에 공주님에게 반해서 그녀에게 청혼을 했답니다. 마침내 둘은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고 드워프들 은 영원한 그 나라의 친구가 되었지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예기예요." 분명한 사실이었다. 백설공주 예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테니까. 그러면서 하연은 누구들이랑은 사뭇 비교가 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드워프들을 내려다보았다. 드워프들은 인간들과 드워프가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에 놀랍다는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인간들 에 대한 증오가 뼈 속까지 박혀있어서 마음을 여는 기색은 아니었다. 이내 하연은 백설공주정도로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기가 힘들다는 것을 깨닫자 다음 이야기를 준비했다. 어쩐지 갈수록 예기가 황당하게 흘러가는듯한... 우웅!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8-02-2001 09:35 Line : 146 Read : 1403 [32] 마신 소환사 -40-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1296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1-01-21 , 07:22:53 PM 마신 소환사 -40- "하지만 그 정도로 저희 마을 사람들이 드워프를 존경하게 된 건 아니에요. 예전에 저희 영지에 아주 흉폭하고 탐욕이 강한 드워프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에... 빨간 수염이었는데 그 드워프는 보석을 엄청 좋아해서 다른 드워프들은 물론이고 인간들까지 잡아 노예로 부리며 보석을 채집하 게 했습니다." "그, 그럴 리가!" "드워프 중에 그런 드워프가 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드워프들의 거센 항의에 내심 자신의 사기가 들통난 것 같자 하연은 남동생과 그 친구들로부터 마녀라고 불리게 만들었던 매서운 표정을 지으며 강하게 나갔다. "그럼. 제가 지금까지 여러분들에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단 말입니까? 저도 이 대륙의 대부분의 인 간들이 드워프들을 그저 자신들의 노예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그 런 제가 저희 나라 공주님이 그 노예나 다름없는 드워프를 스승으로 보셨다는 예기를 하는 것이 쉬운 일인 줄 아나요? 분명 여러분들이 아닌 다른 인간들이 들었다면 저희 나라를 얼마나 하찮 게 여기겠어요? 그래도 전 솔직히 사실이기 때문에 사실대로 예기한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은 자 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지금 사실을 거짓으로 매도하려는 것인가요?" 순간 드워프들은 잠잠해지고 말았다. 하연의 매서운 표정 때문에 약간 질리기도 했지만 지금 그 녀의 말이 거짓이라면 자신들의 마음에 약간의 종족적 우월감을 느끼게 만들었던 인간 공주의 스 승이라는 부분까지 거짓으로 치부되기 때문이었다. 조용해진 드워프들을 만족스럽게 훑어보며 하연은 다시 이야기를 계속 했다. "인간들과 드워프들은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광산에서 보석을 캐야했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 곤 허여멀건 건더기조차 별로 없는 스프뿐이었지요. 더 이상 견디지 못한 그들은 노조를 결성해 빨간 수염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우리에게 쉴 시간을 달라! 우리에게 먹을 것을 달라! 빵만으로 는 살 수 없다!" 어리둥절해하는 드워프들의 표정에 자신이 너무 흥분해 저들이 이해 못할 소리를 했다는 것을 깨 닫자 하연은 연실 헛기침을 했다. "흐흠! 어쨌든 빨간 수염에게 항의를 했으나 그들의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들은 집과 땅을 버리고 숲으로 들어가 숨게 되었습니다." 하연은 몰랐지만 그 상황은 지금 이들의 처지와 비슷했다. 저주와 인간들을 피해 이곳 헤루아 숲 으로 도망치다시피한 그들이 아니었던가? 따라서 드워프들은 하연의 말에 비상한 관심을 드러냈다. "그들의 우두머리로는 로빈 훗이라는 드워프로 땅 잘 파고 도끼 잘 쓰기로 유명한 드워프였지요. 그는 인간들과 드워프들을 이끌고 빨간 수염의 폭정에 항거해 싸웠습니다. 그는 힘없고 빽없는 백성들의 유일한 희망이자 빛이었습니다." "빽!" "빽이 뭐지?" 수근거리는 드워프들의 속삼임 속에서 연설을 하듯 힘차게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그런 자신을 참 으로 한심하게 여기고 있는 하연이었다. 차라리 카이람을 불러내 그들을 다른 곳으로 공간이동 시켜달라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서야 모험을 한다고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리고 위험한 순간마다 카이람에게 도 움을 청하다가는 CD겜 사는 것으로 재산을 탕진한 것으로도 모자라 다음 번엔 무엇을 빼앗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왕 모험을 시작한 이상, 이 정도 고생이야 당연한 거라고 애써 되뇌며 하연은 좀 더 말속에 비 장한 감정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그들의 항거는 빨간 수염의 병사들의 무력에 의해 번번히 진압되었고 로빈 훗은 더 이상 굶주린 백성들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자신이 드워프의 명예에 오점을 남기는 한 이 있더라도, 나중에 지옥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될 지라도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도둑질을 해서 라도 먹을 것을 구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숙연해지는 드워프들의 분위기를 본 하연은 자신의 이야기가 먹히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자 연 신이 난 하연의 말솜씨는 더욱 매끄럽게 이어졌다. "노예처럼 부려지는 가난한 백성들에 비해 빨간 수염의 병사들은 먹을 것이 넘쳐나 술로 연못을 채울 정도였고 드워프의 솜씨 좋은 여인들을 잡아 가두는 등. 그야말로 향락의 극치를 이루고 있 었습니다." 분개한 듯한 하연의 표정에 동조하듯 드워프들도 힘있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글로윈 사제마저도 부들부들 떨며 얼굴을 일그러트릴 정도였으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역시 어느 종족이든 자신들의 여인이 함부로 다루어지면 분개하기 마련인 것이다. "로빈 훗은 그런 병사들의 집을 털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지요. 그러나 백성들의 생활 은 여전히 고달프기 이를 데 없었고 삶의 희망조차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서야 로빈훗은 깨달은 것입니다. 진정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자유라는 것을! 빨간 수염으로부터 해방되 는 길만이 그들의 진정한 자유를 되찾는 날이라는 것을!" '도대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하연은 아무리 자신이 한 말이라지만 어이가 없었다. 빨간 수염으로부터 해방이라니......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는 일. "로빈 훗은 한 날 한시에 백성들과 함께 일제히 일어나 항일... 아니 항 빨간 수염 투쟁을 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날은 한 어린 드워프가 노동력 착취를 위해 병사들에게 끌려가다 가 나는 빨간 수염이 싫어요! 라고 외치며 스스로 자진을 한 날이기도 했지요." 드워프들은 감동으로 부들부들 떨었다. 시종일관 무표정하게 앉아서 하연의 말을 듣고 있던 후마 장로까지 한 드워프 소년의 죽음 앞에서는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그 날 영지의 모든 백성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무기도 들지 않은 채 빨간 수염 의 성으로 손에 손을 잡고 걸어 들어갔지요. 병사들은 밀고 들어오는 백성들을 무기로 쳐 죽었지 만 그들은 묵묵히 우리의 소원은 자유를 외치며 밀고 들어갔습니다. 그 모습에 겁에 질린 빨간 수 염은 자신의 재산을 모두 들고 도망치려 했으나 너무 많은 나머지 다 들고 갈 수가 없어 결국 우 왕좌왕 하다가 자신의 재산에 치여 죽었고 백성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원하는 자유를 찾았던 것입 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뭐 느끼는 것이 없나요?" 드워프들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물론 전 인간이 선하다고는 말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이렇듯 드워프 중에도 빨간 수염처럼 나쁜 드워프도 있고 로빈 훗처럼 존경할만한 드워프가 있다는 사실을 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들은 저희가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종족적 차별대우를 하시는군요. ...전 모든 종족 은 평등하다고 생각해요. 여러분도 저희 인간이 드워프들보다 못하다거나 잘났다고 생각하시지 는 않겠지요?" 이윽고 후마장로가 하연의 손에서 지팡이를 다시 받아들며 부드럽고 인자한 어조로 말했다. "인간 사제여! 나도 모든 종족이 평등하다고 자네의 의견에 동의하네." 그 말이 결정적으로 후마장로는 물론 모든 드워프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듯 드워프들은 옳다 는 듯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고 하연 또한 자신의 말이 통했다는 기쁨으로 활짝 웃었다. 그 때 후마장로가 장내의 흥분을 진정시키듯이 지팡이로 단상을 두들이며 말했다. "그러나 나는 대다수의 인간들이 우리 드워프 종족을 인간들보다 못하다는 생각하고 있는 것도 잘 알고 있네. 자네는 인간으로서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연은 안색을 굳히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 생각은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와 제 동료들은 이 곳을 나가면 그와 같은 인간들의 인식이 바뀔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여러분들 앞에서 약속드리겠습니다." 후마장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리밍스를 손짓으로 불렀다. 리밍스가 앞으로 나오자 후마장로는 하 연에게 리밍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아이는 앞으로 우리 드워프들을 이끌어나갈 차기 장로감이라고 할 수 있네. 드워프 종족의 지 위를 회복하는 일을 인간에게만 맡겨 둘 수는 없는 일이지. 이 아이를 데리고 가게 쓸모가 있을 걸세." 순간 리밍스의 얼굴에서 빛이 도는 듯 했다. 그러나 하연의 얼굴에는 검은 먹구름이 드리운 듯 했 다. 솔직히 그녀는 드워프 종족의 지위 향상에 이바지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모험을 하기 에도 짧은 그녀의 생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졸지에 감시자를 하나 달고 모험을 떠나게 되었으니...... 하연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불쌍한 리밍스! 앞으로 고생문이 훤하군요. 그리고 다시 모험을 떠나게 될 듯.^-^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8-02-2001 09:35 Line : 181 Read : 1272 [33] 마신 소환사 -41-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1391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1-01-26 , 08:06:00 PM 마신 소환사 -41- 좀처럼 하연이 돌아오지 않자 자신만만하게 하연의 무사를 장담했던 카리스조차 은근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순진한 하연이 드워프들의 암계에 빠져 카이람을 부를 겨를도 없이 당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때 창고의 문이 열리며 드워프들이 들어왔는데 그들의 손에는 수북히 쌓인 음식들과 커다란 맥주 통이 들려 있었다. 드워프들은 그것들을 그들 앞에 놓아두고는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멈칫 멈칫거리다가 카리스와 미루엘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한 드워프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맛있게 드세요, 인간 여러분." 그러더니 미처 카리스와 미루엘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도망치듯 재빨리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한동안 자신들 앞에 놓인 음식과 맥주 통을 멍하니 바라보던 미루엘이 중얼거렸다. "설마 이것이 우리의 최후의 만찬은 아니겠지요?" 순간 카리스의 뇌리에 하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너무나 작은 인간. 그러나 수 천년을 산 그조차도 모르는 어떤 비밀을 알고 있는 듯 신비스럽게 만 보이는...... 하연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자각한 순간 카리스는 안색이 창백해지며 곁에 미 루엘이 있다는 사실도 완전히 망각한 채 5서클이 넘는 마나를 사용해 창고의 문을 향해 파이어 볼을 날려 버렸다. 콰콰쾅! 재가되어 부서져버린 문짝과 반쯤 날아가 버린 창고의 모습을 보며 미루엘은 입을 쩍 벌렸다. 카 리스가 마법사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의 능력을 지녔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갑자기 창고 쪽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오자 드워프들은 깜짝 놀라서 우왕좌왕했다. 창고의 문을 박살내고 나온 카리스는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지닐 수 없는 무서운 기운을 뿜어대 며 드워프들을 노려보았다. 그 섬뜩한 눈빛을 마주한 드워프들은 마치 고양이 앞에 쥐처럼 온몸을 옴짝달싹 할 수조차 없었 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어린 드워프들에게 둘러 쌓여 있는 하연의 멀쩡한 모습을 보자 카리스의 온 몸 에서 흐르던 그 섬뜩한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평소의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도대체 지금 뭐하고 있는 겁니까?" 하연은 멍한 표정으로 카리스와 카리스 뒤쪽에 부서져 있는 창고를 번갈아 보며 무의식중에 대답 했다. "옛날 얘기 해주고 있었지. 그런데......"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카리스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다가 문뜩 창고 안에 있 을 미루엘과 마법으로 재워둔 로베인과 사담을 떠올리고는 황급히 창고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그런 카리스의 뒷모습을 보며 하연은 어리둥절한 채 중얼거렸다. "정말 수상한 인간이란 말이야. 그 점이 재미있어서 데리고 다니는 거긴 하지만." 수면마법에서 깨어난 로베인과 사담은 하연으로부터 드워프들의 회의장에서 있었던 얘기를 듣고 는 벙찐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존경이 가득한 눈길로 하연을 바라보며 그녀의 앞 에 맛있는 음식들을 줄줄이 늘어놓는 드워프들을 보자 연민에 가득 찬 시선을 보내지 않을 수 없 었다. 어쩌다가 하연의 말발에 말려들어서는...... 어린 드워프들은 마치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들 같은 표정으로 하연의 주위로 몰려들며 계속 얘기 를 졸라댔다. "산타클로스에 대해서 더 얘기해 줘요, 사제님!" "사제님, 산타는 어떻게 착한 아이와 나쁜 아이를 구분하는 거지요?" "산타가 저희들에게도 선물을 줄까요?" 미루엘은 속이 탄지 맥주를 물처럼 들이키다가 산타클로스라는 말에 하연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번에도 들었던 것 같은데 그 산타클로스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러자 한 드워프 아이가 말했다. "산타는 인간이 아니에요. 훌륭한 드워프라고요. 그렇지요, 사제님?"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장난감을 잘 만드는 아주 훌륭한 드워프지.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산타할아버지가 반드시 원하는 선물을 준 단다." "전 착한 드워프가 될 거예요." "저도요." "나도." 어린 드워프들이 너도나도 외치는 소리에 하연은 활짝 웃으며 드워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 다. 로베인과 사담은 그런 하연을 보며 자신들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녀의 주위에는 언제나 행복 이 따라 다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누구나 그녀와 함께 있고 싶을 만큼. 하연 일행은 많은 드워프들에게 둘러 쌓여 이것저것 주의와 부탁의 말을 듣고 있는 리밍스와 하 연을 멀찍이 떨어져 서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이 하연의 안전을 전적으로 책임진 자인 양 하연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리밍스 때문 이었다. 특히 로베인은 리밍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드워프 주제에 하연을 좋아하고 있는 듯 보였기 때 문이었다. 불쾌한 기분에 로베인은 딱히 누군가에게 라고 할 것도 없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드워프 주제에 인간을 좋아하다니 정말 어이가 없어서... 그렇지 않습니까?" 그 말이 왠지 신경이 거슬린 카리스는 약간 딱딱한 어투로 물었다. "사랑한다면 종족의 차이쯤 상관없지 않습니까?" 로베인은 그런 카리스에게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아니, 그럼 드워프와 인간이 어울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과 맺 어져야 하는 겁니다." 카리스는 로베인의 그 말에 마치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카리스는 자신이 본래 드래곤임을 자각하고 있는 자신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는 유희동안에는 마치 인간이 꿈속의 자신의 역할이 진짜 자신이라고 여기듯 폴리모프한 상태의 종족의 역할에 빠지곤 해서 이렇듯 자신이 드래곤임을 자각하는 순간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왜 지금 이 순간 그런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 사실에 왜 이렇듯 충격을 받고 있 는 것일까? 의문에 빠져 안색이 굳어진 카리스를 본 미루엘은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서 재빨리 물러섰다. 카리스의 모습이 왠지 위험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의 파괴적인 행위를 목격한 이후 그에 대한 본 능적인 두려움이 미루엘의 가슴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아직도 무슨 할말이 남았는지 드워프들과 얘기를 하고 있는 리밍스를 남겨두고 일행의 곁 으로 온 하연이 그들의 분위기가 이상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로베인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러나 카리스는 아무 것도 아닌 일도 치부할 수가 없었다. 하연이 그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꼭 알고 싶었다. "하연, 종족이 다른 자들끼리는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에!?" 갑자기 무슨 말인가 어리둥절했지만 하연은 곧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사랑엔 국경도 없다잖아요. 사랑만 있으면 성까지 극복되는 세상에 종족의 차이쯤 극복 못 할 것 도 없지요. 그런데......" 그러더니 하연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빛내며 카리스에게 물었다. "왜요? 혹시 마음에 드는 드워프라도 발견했어요?" 로베인 또한 아까부터 심상치 않은 카리스의 반응에 무엇을 느낀 듯 물었다. "진짜 그런 것입니까?" 그 말에 카리스는 순간적으로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아닙니다! 어째서 제가 저런 버러지 같은 드워프 종족을 마음에 둔다는 것입니까?" "그렇기도 하군요. 인간이 드워프에게 마음을 두다니 가당키나 합니까?" 미리 쐐기를 박아두려는 듯 로베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하자 하연은 기가 막히다는 듯 그들을 번갈아 보며 절래절래 고개를 흔들었다. "이러니......?" 그리고는 어느새 다가왔는지 시퍼렇게 눈을 치켜 뜨며 로베인과 카리스를 노려보는 리밍스의 작 은 두 손을 마주 잡고 힘차게 말했다. "우리 같이 종족의 평등한 미래를 위해 힘써보자고요." 자신의 손을 마주잡은 하연의 손을 보며 리밍스의 작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러나 하연은 로베 인과 카리스에게 눈총을 주느라 로베인과 카리스는 하연의 눈총을 피하느라 그것을 보지 못했 다. 단지 사담만이 그 광경을 보고 리밍스를 경계어린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아까 올렸다가 실패해서 다시 올립니다. 두편예정인 것을 한편으로 묶어서 올리는 거예요. 때문에 오늘 연참 없습니다. ? 어디서 찬바람 불어오는 소리가..... ...설날 잘 보내셨어요? 전 노예처럼 뼈빠지게 일만 했답니다. 지금으로서는 연휴가 무사히 지나가서 그저 감격할 따름입니다. T-T 내일부터는 정말 열심히, 열심히 쓸 생각이니까..... 그런데 저희집에 잠의 요정이라도 있나봐요? 왜 이리 시도 때도 없이 졸린지.^-^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8-02-2001 09:35 Line : 112 Read : 1356 [34] 마신 소환사 -42-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1424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1-01-28 , 06:26:13 PM 마신 소환사 -42- 리밍스의 안내로 하연일행은 비록 길은 잃지 않고 가게 되었으나 그들 사이가 무척 서먹해지고 말았다. 하연은 이런 서먹함이 싫었다. 다들 왠지 그녀의 눈치를 보는 것이 따를 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마 저 들었다. 게다가 가도가도 숲, 숲이었으니...... 너무 지겨워진 나머지 하연은 고층 빌딩들과 아스팔트 길 그리고 형형색색의 네온사인 불빛이 다 그리워 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깊은 숲 속에서 들리는 소리가 도시의 시끌벅적한 소음만큼이나 시끄럽다는 것도 알게 되 었다. 한시도 끊이지 않고 들리는 새소리, 벌레소리, 나뭇잎 스치는 소리들이라니...... 갈루마마저도 드워프 마을에서 잠깐 떨어져 있은 이후 무슨 할말이 그렇게 많은지 계속 쉬지도 않고 떠들어대서 하연을 무척 지치게 만들었다. "리밍스! 이 숲에서 벗어나려면 아직도 멀었어요?" 피곤에 지친 듯한 하연의 얼굴을 보며 리밍스는 난처한 듯 말했다. "아직 이틀정도는 더 걸어야......" "지름길은 없는 거예요?" "있긴 하지만... 그 길은 무척 위험해." "위험?" 순간 하연의 눈에서 빛이 번쩍였다. 그 모습을 본 로베인이 황급히 리밍스의 입을 막으려고 했으 나 이미 늦어 버렸다. 벌써 리밍스가 대답을 한 것이다. "응. 마물들의 서식지나 마찬가지로 그곳에 들어가는 것은 죽으러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지." "그래요? 하지만 그곳으로 가면 빠르다 그거지요?" "그렇지. 마의 산이라고도 불리는 하룬 산 중심에는 미도아 강이 흐르는데 그 강을 따라가면 금 방 헤루아 숲을 벗어나 마라브르 강 유역에 도착할 수 있거든." 그 말에 하연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럼. 그 길로 가지요?" "뭐?" 일시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한 리밍스가 멍하니 하연을 바라보았다. 설마 자신이 기껏 위험한 길 이라고 설명했는데도 하연이 그 길로 가자고 할 리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리밍스 의 마음을 배신하듯 하연은 자세히 설명했다. "그 마의 산이라는 하룬 산을 경유해서 가자고요." 역시라고 생각한 로베인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미루엘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보 았다. 대륙에서 가장 높은 산이 하라마르트 산이라면 대륙에서 가장 신비로 둘러 쌓인 산이 바로 하룬 산이다. 고대 문명국가 중 가장 번성했던 마법 국가 트리엔시라가 자리해 있던 곳으로 고대문명 이 무너지면서 아직도 그 마법유물이 고스란히 그 곳에 함몰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 다. 그로 인해 많은 트레져 헌터들이 그 유물을 노리고 하룬 산에 들어갔지만 아직까지도 살아 돌아 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때문에 유즈베리아 왕실의 보물까지 훔쳐낸 미루엘조차도 감히 도전 할 염두도 내지 못했던 곳이 바로 마의 산이다. 그런데 아무런 능력도 없는 하연이 그 곳에 가자 니...... 하연이 무슨 말을 하든 무덤덤하기 이를 데 없던 사담조차 그 말에는 입매가 굳어지며 단호하게 말했다. "안됩니다. 저와 카리스는 하연과 로베인의 안전을 위해 고용된 것입니다. 그런 위험한 곳으로는 가게 할 수 없습니다." 카리스도 동의하듯 늘 입가에 떠돌던 미소를 지운 채 고개를 끄덕였고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듯 리밍스도 강하게 반발했다. "정신이 나갔어, 하연? 무슨 미친 소리야!" 모두들 반대하자 하연은 더욱 가보고 싶어졌다. 어쩌면 그 곳에 그녀가 모험을 하며 찾고 싶었던 자신도 모르는 그 무엇인가가 있을 것만 같은 기 이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그 말이 정말 명언이구만. 너야 가서 죽어도 상관없지만 네 동료들을 생 각해야지! 너 때문에 저들까지 죽일 생각이냐?- 그 말에 하연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얼마나 제멋 대로였는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의 마지막을 화려 하게 즐겨보자는 생각에 자신은 그저 마음가는 대로 행동한 것뿐이지만 나름대로의 꿈과 희망이 있을 동료들은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이라면 몰라도 앞날이 창창한 동료들마저 죽음 속에 몰아 넣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하연은 하룬 산에 가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결심했다. 아쉽지만 이들과 헤어져야겠다고. 어차피 결국에는 이들과 헤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 시간이 좀 더 빨라졌을 뿐. 하연은 잠깐 동안이었지만 자신의 동료였던 이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세기 듯 쳐다보았다. 그리 고 사담의 얼굴에 이르러 언제나 긴 앞머리에 가려서 그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 올라 이 기회에 자세히 보아둘 생각으로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사담은 갑자기 하연이 다가오자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다가 하연이 발돋움해 자신의 앞머리를 쓸 어 올리려고 하자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하연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악!" 하연이 미약하게 비명을 지르자 사담이 놀라서 손을 놓았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하연은 재빨 리 사담의 앞머리를 뒤로 넘겨 버렸다. 그리고 들어난 얼굴을 본 하연은 잠시 멍해졌다. 주간 연재하냐는 괭이님의 메일받고 충격받아 내일 올리려던거 그냥 오늘 올립니다. 그러고보니 이번 주는 거의 못올렸군요. 연휴가 끼어서.....^_^ 내일도 반드시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화이팅!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8-02-2001 09:35 Line : 118 Read : 1852 [35] 마신 소환사 -43-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1442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1-01-29 , 11:47:57 PM 마신 소환사 -43- 너무나도 맑고 깨끗해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눈동자라니...... 보면 그 속에 빠 질 것 같은 눈동자라는 표현의 말을 듣긴 들었지만 모두 헛소리라고 생각했는데 하연은 지금 그 말의 뜻을 실감하고 있었다. "하, 하연!" 당황해서 물러서려는 사담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듯 잡아 더욱 가까이 들어 당기며 하연은 중 얼거렸다. "예쁘다!" 사담은 어쩔 줄 몰랐다. 하연의 작고 하얀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는 것이다. 그 붉고 섬세한 입술과 그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숨결이 그렇지 않아도 예민한 사담의 후각을 더 욱 자극하고 있었다. 붉게 물들어 가는 사담의 얼굴을 보며 로베인은 다급하게 하연을 사담으로부터 떼어놓았다. 그리 고 사담을 노려보며 하연에게 말했다. "무슨 짓이야? 사담이 당황해 하잖아?" 그제야 사담의 붉어진 얼굴을 발견한 듯 하연은 개면 적게 웃었다. 그리고 붉어진 사담의 얼굴을 불쾌감 때문이라고 생각한 듯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아! 미안. 사담은 날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 사담은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연을 볼 때마다 그는 마치 처음 검을 잡은 그 순간처럼 가슴이 마구 뛰어 그녀의 얼굴을 제대 로 쳐다보기도 곤란할 정도였다. 그런데 자신이 하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니 그 무슨 엉뚱한 소리란 말인가? 이 기회에 확실히 밝혀두어야겠다는 생각에 사담은 정색한 얼굴로 하연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싫어하지 않습니다." "네에, 네." 그러나 하연은 그 말을 믿지 않는 듯 그저 건성으로 대답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몰 려드는 것이 심상치 않게 보였다. 그것을 본 하연은 곧장 리밍스에게 달려가며 물었다. "비가 올 것 같지 않아요, 리밍스?" 결국 사담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런 하연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로베인은 불쾌한 시 선으로 그런 사담을 쳐다보았다. 사담이 하연을 좋아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싫은 일이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하연을 누군가 싫어하 고 있다는 사실 또한 불쾌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이다. 그 때 카리스가 그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로베인, 사담 어서 오십시오. 비가 오기 전에 어디 피할 곳을 찾아보아야겠습니다." 비가 막 쏟아지기 전 그들은 한 동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음습한 기운과 퀴퀴한 악취가 베인 동굴이었지만 안쪽은 상당히 넓은 듯 하연 일행이 전부 들어 가고도 상당한 공간이 남아돌았다. 하연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피곤해서인지 지저분한 바닥도 불쾌한 냄새도 상관하고 싶지 않 은 기분이었다. 조용히 눈을 감으며 하연은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점점 비 소리가 커지더니 장대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마음까지 깨끗이 씻어 내리는 듯 하연의 마음을 시원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그런 하연의 좋은 기분을 박살내듯 갑자기 다급한 카리스의 외침이 들려왔다. "모두 긴장하십시오. 안쪽에서 무엇인가가 다가옵니다." 그러자 로베인과 사담은 검을 리밍스는 도끼를 들고 동굴 안쪽을 주시했고 미루엘은 하연에게 다 가와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언제라도 하연을 데리고 도망칠 수 있는 준비를 마쳤다. 그와 동시에 안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크르르! 크르르! 다가오는 존재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카리스는 마법으로 빛의 구를 허공에 띄었다. 오크들이었다. 아마도 이 동굴이 오크들의 거주지였던 듯. 그러고 보면 이 동굴에 들어섰을 때 나던 악취도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크르륵! 인간들이다!" "......인간. 크륵! 크륵!" 저희들끼리 뭐라고 떠들어대는 오크라는 존재를 하연은 유심히 살펴보았다. 얼굴은 돼지에 길고 뾰족한 이빨을 지니고 있었으며 다리가 짧았다. 게다가 가죽으로 만든 옷가 지를 대충 걸친 것과 말을 한다는 점에 있어서 거의 인간과 흡사한 종족이었다. 때문에 하연은 갈등했다. 옷가지를 걸친 것과 말을 한다는 점을 보면 종족의 평등한 미래를 위해 함께 나아가야 할 종족으 로 보이지만 얼굴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군침이 도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돼지고기를 특히 좋아하지만 이곳에 와서는 그 비슷한 고기요리도 먹어보지 못했던 하연이었다. 그러던 차에 오크를 보자 피부가 두꺼운 것이 잘만 요리하면 맛있는 삼겹살을 먹을 수 있을 것 같 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하연의 갈등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오크를 본 리밍스가 다짜고짜 도끼를 날려버린 것이었다. 휘익! 도끼는 정확하게 한 오크의 심장에 가 박혔고 그 뒤를 이어 사담과 로베인이 오크들 속으로 뛰어 들었다. 로베인은 오크를 상대로 싸우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겁이 나고 자신도 없었지만 자신의 뒤에 하연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만큼 그는 물러설 수가 없었다. 무의식중에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면서 로베인은 처음 검을 쥔 어린 시절부터 수만 번이나 반복해 온 베고 찌르기를 시행했다. 쿵! 검이 오크의 두꺼운 목을 찌르고 들어가면서 오크 하나가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쓰러졌다. 그러 나 다음 순간 로베인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크의 목을 뚫고 들어간 검이 빠지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은 글쓰는데 좀처럼 집중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T-T 그래서..... 한참동안 일어났다 앉았다. 알고보니 라디오를 틀어놓고 있었더군요. 뭐... 그래서 약간 db오류를 감안하더라도 12시가 넘어서 올리게 되었습니다. 내일은 반드시 12시 이전에.....(주먹을 힘차게 움켜쥐며) 내일봐요.^-^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9-02-2001 17:48 Line : 150 Read : 1290 [36] 마신 소환사 -44-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1461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1-01-30 , 06:49:44 PM 마신 소환사 -44- 다시 힘을 주어 겨우 검을 빼들었을 때는 어느새 오크의 긴 창이 그의 가슴을 꿰뚫어 오고 있었 다. 순간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의식하며 로베인은 뒤로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 순간 하연의 얼굴을 보 고 싶었던 것이다. 하연은 그런 로베인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일시 말이 목안에서 걸린 듯 세어 나오지 않았 다. "......로, 로베인!" 겨우 소리를 질렀을 때는 로베인의 배가 오크의 창에 찔린 후였다. 하연은 마치 눈앞이 거대한 암흑으로 뒤덮이는 느낌이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넋을 잃은 듯 하연이 멍하니 서 있는 동안 카리스는 로베인의 배를 찌른 창을 뽑고 재빨리 회복마 법을 걸었다. "힐링!" 그러자 푸르스름한 빛이 로베인의 배를 감싸더니 서서히 피가 멎고 상처가 아물어갔다. 눈앞에서 동료가 창에 찔리는 장면에 하연이 미처 보지 못했지만 로베인이 오크에게 찔리는 순 간 마지막 오크를 베어버리고 고개를 돌리던 사담이 그것을 보고 그 오크의 팔을 순식간에 잘라 버렸고 그와 동시에 리밍스가 도끼로 머리를 부셔버렸다. 때문에 로베인은 그저 살갗만 조금 찔렸을 뿐 내장이 상할 정도로 다치지는 않아서 카리스의 마 법으로 금방 회복될 수 있었다. 미루엘은 충격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하연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하연, 정신차려요! 봐요, 로베인은 무사합니다." 한 줄기 빛이 어둠 속을 뚫고 들어오듯 미루엘의 말이 서서히 하연의 뇌리에 스며들었다. 그제야 정신이 든 하연은 완전히 회복된 자신의 배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짖고 있는 로베인을 발 견할 수 있었다. 하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가만히 로베인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 다가갔다. "로베인!" 로베인은 죽었다 살아난 것이나 다름없어서 어리둥절해 하는 한편 사담과 리밍스가 각기 대 여 섯 마리의 오크를 상대하는 동안 겨우 오크 한 마리밖에 죽이지 못했다는 사실에 기사로서 몹시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연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그런 부끄러움은 다 날아가고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걱정마! 난 아무렇지도 않아!" 그런 로베인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던 하연은 로베인의 품에 안기듯 깊숙이 고개를 파묻으며 중 얼거렸다. "......다치지마. 나 때문에 죽지마. 나 때문에 아파하지마." "...하연?" 갑작스런 하연의 행동에 로베인은 당황했고 다른 이들은 묘한 표정으로 그런 하연을 바라보았 다. 하연의 말들이 마치 하연이 로베인을 좋아하고 있다는 고백으로 들렸던 것이다. 그 때 로베인의 품에서 고개를 든 하연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로베인!" 무의식중에 따라 웃던 로베인은 환한 웃음과는 달리 하연의 눈이 무척 슬퍼 보이자 자신도 모르 게 묻고 말았다. "우는 거야, 하연?" 그 말에 놀란 듯 로베인을 보던 하연은 허세를 부리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난 하연이라고." "하긴." 피식 웃으며 동의해주긴 했지만 로베인들은 알고 있었다. 하연이 거짓말을 할 땐 늘 허세를 부리 듯 자신만만하게 행동한다는 것을. 어느덧 비가 그친 듯 빗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밤이었다. 하연은 다른 일행들이 깨지 않게 조용히 몸을 일으켜 동굴 밖으로 나갔다. 밤이라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비온 뒤의 촉촉한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져 하연은 크게 숨을 들이 마셨다가 내쉬기를 반복했다. -왜 그래, 하연? 어디 아프냐?- 갈루마가 물었다. "아니. 그냥 생각할게 좀 있어서......" -무슨 생각? 흐흠! 너 같은 평범한 인간의 생각이란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기 마련이지. 그러니 이 무한에 가까운 지혜를 소유하고 있는 대 현자 갈루마님에게 여쭤보도록 해라. 귀찮긴 하지만 넌 이 대 현자 갈루마님의 주인이니 널 올바른 길로 이끌어 줄 책임도 내게 있는 법. 어서 말해 봐 라!- 갈수록 늘어만 가는 듯한 갈루마의 자화자찬에 하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별 건 아니야. 그저 내가 이 세계로 온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나를 만남으로 해서 변 한 사람들의 운명은 과연 좋은 쪽인 걸까, 나쁜 쪽인 걸까......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어." -허! 너도 그런 생각을 다 하냐? 난 너는 생각도 없이 사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로베인이 다 친 건 너 때문이 아니다. 그러니 너무 가슴 아파 하지 마라!- "하지만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모험을 떠나자고 부축이지만 않았더라면......" 갈루마는 화가 난 듯 외쳤다. -너 답지 않게 왜 그래? 어떤 때라도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지니는 것이 너였잖아? 이럴 때는 너 를 만난 것이 그들의 일생일대의 행운었노라고 말해야 되는 것 아니냐?- 하연은 피식 웃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 그게 나지. 내가 만든......" '......내가 되고 싶었던.'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던 하연은 천연덕스럽게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긴 내가 아니었으면 저들이 어떻게 이런 기막힌 모험을 다 해보겠어. 다 내 덕분이야. 하지만 박복하게도 저들의 인연이 이것밖에 안돼는 걸 난들 어쩌겠어? 떨고 놓고 갈 수밖에." -뭐라고? 그럼 너 혼자 떠나겠다는 말이냐?- "그래. 난 지금 하룬 산으로 갈 거야!" -지금? 너, 너!- 기가 막혀서 말을 잇지 못하는 갈루마의 입을 막듯이 하연은 말했다. "왠지 내가 가야할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 어느 노래 가사에도 나오잖아. 아무도 못 가 봤지만 내 기억 속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서 영원히 갈 거라고 말이야." -......?- "아, 넌 모르지? 대 현자도 모르는 그런 것들이 이 세상엔 아주 많단다." 장난스럽게 말하던 하연은 약간 우울한 얼굴로 일행들이 잠든 동굴 쪽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듯 이 말했다. "하지만 위험한 곳이라니 저런 허약한 것들을 데리고 갈 수는 없지. 짐이 될게 분명하잖아?" 하연은 그렇게 갈루마로 하여금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히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만들고 는 천천히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늘 좀 빨리 올렸네요.^-^ 어제 여러분들의 연참공세에 잠을 못자....(흐흠! 커피를 너무 마셔서 잠을 못자는 바람에...) 좀 ›㎧윱求? 그리고 칸자키님, 상관없으니까 케릭터 그림 그려서 저에게 보여주세요. 님의 그림을 벽에다 걸어놓고 보면서 글을 쓰면 더 잘 쓸 수 있을것 같네요. 예쁜 그림을 아주 좋아하는 유지가......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09-02-2001 17:48 Line : 113 Read : 1457 [37] 마신 소환사 -45-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1562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1-02-02 , 01:41:23 AM 마신 소환사 -45- 하연에게 병이 있다는 사실을 안 뒤로 카리스는 밤마다 하연의 동정을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그 래서 한 밤중에 하연이 살며시 일어나 동굴 밖으로 나가는 것을 알았지만 금방 돌아오겠지 하는 생각에 따라 나서지 않았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그는 급히 밖으로 나가 살펴보았다. 어딘가에 쓰러져 고통을 호소하고 있을 하연을 떠올리자 심장이 조여드는 듯 했다. 닥치는 대로 이리저리 정신을 잃은 듯 찾아다니던 카리스는 한참 만에야 자신이 마법사임을 떠올 렸다. 게다가 하연에게는 자신이 추적마법을 걸어 놓은 금화들과 갈루마가 있지 않은가? 자신의 멍청함에 스스로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카리스는 몸 속의 마나를 유동시켜 하연의 위치를 찾았 다. 하연은 그로부터 채 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었다. 그런데 그 오브젝트가 움직이고 있었다. 바로 하룬 산 쪽이었다. 순간 하룬 산을 경유해 가자고 하던 하연의 말이 떠올랐다. 고집스런 하연이 의외로 쉽게 포기해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카리스는 안절부절하며 중얼거렸다. "이 철없는 인간이 거기가 어디라고 겁도 없이......!" 곧 텔레포트를 시전 해 하연에게로 가려던 카리스는 문뜩 다른 동료들이 떠올랐다. 지금쯤 그들 이 사라진 것을 알고 걱정하고 있으리라. 하연이 아직 멀리 가지 못했으니 우선 동료들에게 하연의 행방을 알리고 다 같이 찾아 나서는 것 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동굴로 돌아가려던 카리스는 어떤 생각이 떠오르자 우뚝 발걸음을 멈 추고 말았다. "......다치지마. 나 때문에 죽지마. 나 때문에 아프지마." 로베인을 치료하느라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카리스는 누구보다도 그 속삭임을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 순간 카리스는 생전 처음으로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 싶었다. 로베인이. 하연이 로베인을 자신이나 사담보다도 더 가깝게 여긴다는 것은 그녀의 말투만으로도 쉽게 짐작 할 수 있었다. 사담과 자신에게는 반 존칭을 사용하면서 로베인에게는 반말을 사용하기 때문이었 다. 로베인을 먼저 만났기 때문에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좀 서운한 마 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하연과 둘만의 모험을 하게 된다면, 상당히 위험한 모험이긴 하겠지만 그에 겐 하연을 지켜줄 자신이 있었다. 어쩌면 하연은 그를 로베인보다 더 가깝게 느끼게 될지도 모르 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카리스는 동료들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하연을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어쩌면 작은 이 카리스의 이기심이 설마 커다란 운명의 뒤틀림을 만들어 내리라고는 이 때에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둡기도 했지만 비가 온 뒤라 땅이 질척거려서 하연의 발걸음은 더욱 더딜 수밖에 없었다. 힘겨 운 걸음을 옮기던 하연은 이윽고 지친 듯 한 바위 위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러면서 자신이 걸어 온 길을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말은 멋있게 했지만 그래도 누군가 자신이 없어진 것을 알아채고 쫓아와 주길 바라는 마음이 그 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 하연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갈루마가 말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돌아가는 게 어때? 하룬 산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마법을 가 르쳐 줄 테니 어느 정도 실력을 키운 후 그 때 다시 하룬 산에 오르는 것이 낫지 않겠냐?- 하연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그 때는 너무 늦어." -늦긴 뭐가 늦어?- 갈루마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연이 다치기라도 하면 그는 또 속 수무책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하연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갑작스런 갈루마의 고함 소리에 깜짝 놀란 듯 하연은 멈칫하다가 생각해보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 다. "갈루마는 현자가 되는데 몇 년이나 걸렸어?" -훗! 내가 누구냐? 천재적인 재능과 각고의 노력으로 43년만에 대 현자의 자리에 오른 역사상 가 장 뛰어난 마법사가 바로 나다!- "그래? 그럼 나는 너 보다 더 뛰어나고 천재적이니까 한 십 년 정도 걸리겠네? ......차라리 좀 힘 들더라도 지금 가겠어! 뭐, 정 안되면 되게 해 줄 사람... 아니, 신도 있고." 그제서야 하연에게는 카이람이라는 비장의 카드가 있다는 사실이 떠오른 갈루마는 입을 다물었 다. 그러나 속으로는 투덜거리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젠장! 성질머리는 급해서...... 그리고 뭐, 나보다 더 천재적! 쳇! 그런 녀석이 1서클 마법스펠도 못 외워? 헛소리만 수준 급으로 늘어서는 말이야.' 하연은 좀 쉰 듯 다시 일어나 걸었다. 어두운 밤이라도 좀 익숙해지면 사물의 형태가 희미하게나마 보이기 마련인데도 이상하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하연은 조심스럽게 앞쪽을 더듬으며 한발한발 내디딜 수밖에 없었 다. 그러나 그만 발 밑을 채 주의하지 않아 나무뿌리에 채여 넘어지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쿵! -하, 하연! 조심......- 넘어지면서 아픈 것은 그렇다 치고 손에서 갈루마를 놓쳐버린 하연은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땅바닥을 더듬거리며 갈루마를 찾았으나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울상이 된 하연 은 속으로 카이람의 이름을 불렀다. '카이람!' 속태우던 카이람이 드디어 등장할 것 같군요.^-^ 태훈님의 메일 잘 받았습니다. 저로서는 아주 당황할만한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 왜 하연은 밤에만 아픈거냐고요.T-T 저도 알고는 있었지만 사건이 진행되려면 어쩔 수가 없어서... 낮에도 아프게 만들까요? 그렇지 않아도 하연이 너무 자주 아프다고 불평들이 많았었는데..... 그리고 또 한가지 하연이 다이아스의 정령을 먹은 후에 하연의 냄새와 정령의 기운이 혼합되어 나는 그 매혹적인 향기가 왜 헤루아 숲을 돌아다니면서 땀내에 섞여 나지 않느냐는 지적이셨는데 사실 그 이전에도, 눈물을 흘리기 전에도 돌아다니면 땀이 나지 않을 수 없는데 사담이 그 냄새를 맡지 못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지요. 사실 거기에는 비밀이 있는데 바로......? 후후, 나중에 보시면 아시게 됩니다.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10-02-2001 17:07 Line : 104 Read : 1106 [38] 마신 소환사 -46-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1584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1-02-02 , 07:47:49 PM 마신 소환사 -46- 카이람은 자신을 부르는 하연의 음성을 들었으나 그 호출에 응해줄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저번 에 보니 꽤 강한 동료들과 파티도 이루고 있었고 이번에도 또 시시한 일로 자신을 부르는 것이라 고 생각한 것이다. 다른 사람한테 그것도 꽤 어벙해 보이는 장사꾼한테 구경시켜 주려고 부르다 니...... 게다가 그의 눈앞에는 지금 강한 적이 가로막고 서 있었다. 핏빛천사라는 아이디를 가진 이 녀석 은 지금까지 상대한 적들과는 레벨이 틀렸다. 마신의 자존심을 걸고 말하건대 분명 프로였다. 반드시 이기겠다는 전의에 불타서 컴퓨터 화면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는데 계속 하연의 부름이 들려왔다. 무시하고 시작하려는데 바로 옆에서 그의 이름을 외치는 듯한 선명한 목소리와 함께 그 목소리 에 끌어당겨지듯 그의 신체가 이동해 가는 것이었다. [으왓! 안돼! 이럴 수는 없어!!] 분노에 불타 이번에야말로 하연에게 마신의 무서움을 보여주고야 말겠다고 다짐한 카이람. 그러나 하연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그는 그 모든 것을 잊고 황당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하연이 진흙범벅이 된 채 땅바닥을 더듬고 있었던 것이다. 카이람은 기가 막혀서 물었다. [너, 지금 뭐하고 있냐?] 하연은 흙투성이가 된 얼굴을 들어 어둠 속에서도 왠지 선명하게 보이는 카이람을 향해 씨익 웃 어 보이며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부른지가 언젠데 지금 나타나는 거야?" 찔리는 구석이 없지 않은 카이람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마신답게 위엄을 갖추고 말했다. [마신이 한가하게 인간의 부름에만 응하는 존재인 줄 아냐? 곳곳에 전쟁도 일으켜야지. 한가하 게 놀고있던 수하들을 두들겨 패 분쟁의 중요성을 강론해야지. 정말 바쁘다고.] "그래? 그런데 그 바쁜 마신님의 손에 들린 그건 뭐지?" '헉!' 카이람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마우스를 확인하자 난처한 듯 웃으며 말했다. [험험! 이게 왜 내 손에 들려있지.] 수세로 몰린 카이람은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라는 게임의 패턴에 따라 곧바로 반격을 시도했다. [그건 그렇고 왜 또 날 부른 거냐? 위험에 빠진 것도 아닌 것 같구만. 이번에는 또 누구에게 날 구 경시켜 주려고? ...그런데 네 동료들은 모두 어디 있지?] 하연은 일어나 로브를 툭툭 털었다. 신기하게도 가볍게 털기만 했는데 로브에 묻은 진흙까지 깨 끗이 떨어졌다. 그것을 확인하며 하연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제 없어!" [뭐?] "귀가 먹었냐?" [흠! 하긴 너 같은 성격에 동료들이 붙어 있을 리 없지. 그건 그렇고 왜 불렀냐?] "......어두워서 갈루마를 찾을 수가 없었어." 뇌종양 때문에 시력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하연은 그것을 인정하고 싶 지 않았다. 아직은 싫었다. 그래서 어두워서라는 핑계를 대며 카이람의 어처구니 없어하는 시선 을 피했다. 카이람은 자신을 머리를 감싸쥐며 발광하듯 외쳤다. [난 대 마신인데... 신들 중에서도 최고로 강한 전투 마신 카이람인데...... 그런 내가 어째서 저따 위 인간 계집애의 잔심부름이나 하는 하인처럼 이리저리 불러 다녀야 하는거냐구!] 하연은 그런 카이람을 위로하듯 말했다. "다, 팔자거니 하고 속 편하게 생각해! 그러다 머리 빠지겠다. 대머리 마신은 인기 없을걸." 복장을 긁는 듯한 하연의 말에 속 터진다는 듯이 가슴을 치던 카이람은 한참 후에야 좀 진정이 된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어떻게? ...우선 갈루마부터 찾아주면 안될까?" 그러나 카이람의 눈이 화르륵 타오르듯 불꽃을 피어 올리자 하연은 그 문제를 양보하기로 마음먹 었다. "아니야! 궁금하니까 먼저 네 말을 듣고 싶어. 빨리 말해봐!" [네가 심부름꾼 하인으로 쓸만한 녀석을 불러주겠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이런 쓰잘대기 없는 일 로 날 부르지 말도록.] 이를 으드득 갈 듯이 말한 카이람은 가볍게 손가락을 두 번 튕겼다. 그러자 갑자기 눈앞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곰돌이 문양의 잠옷에 모자를 쓰고 식사를 하고 있었 던 듯 포크와 나이프를 든 장신의 사내와 얼음을 깎아 만든 것 같이 아름다운 사내가 빙정같이 희 고 투명한 긴 머리채를 빗어 내리고 있던 모습 그 대로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이번에도 짧지만 그래도 꾸준히 올릴테니 T-T 희진님 격려멜 잘 받았습니다. 기분이 좋아서 그 기분이 글에도 나타난듯. 아참! 그리고 제가 글을 올리는 곳은 현재 이 곳 뿐입니다. 다른 곳은 모두 다른 분들이 퍼가시는 겁니다. 그럼. 오늘은 무척 행복한 유지였습니다.^-^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10-02-2001 17:08 Line : 137 Read : 1276 [39] 마신 소환사 -47-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1661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1-02-05 , 10:42:24 PM 마신 소환사 -47- 하연을 쫓아 왔다가 하연이 카이람을 소환하는 바람에 미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근처에 숨어 서 지켜보고 있던 카리스는 그들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자 화들짝 놀라서 경기를 일으킬 뻔했 다. 그들은 바로 불의 마왕 바토르와 얼음의 마왕 데바였던 것이다. 바토르는 그렇다 치고 데바는 그가 너무 싫어해 그와 비슷하다는 소리마저 듣지 않으려고 선텐 을 시도하게 만든 그 장본인이 아니었던가? 카리스는 일단 숨어서 사태를 지켜보기로 한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 었다. 바토르와 데바가 자신들이 어디론가 이동되어 왔다는 사실에 놀란 것은 한 순간이었다. 눈앞에 한번 본 것만으로도 한 백년은 괴로움에 몸부림칠 정도로 재수 없는 존재가 서 있다는 사 실을 안 순간, 그들에게 더 이상 누가 자신들을 불러냈냐는 사실 따위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 었다. 오직 어떻게 하면 저 재수 없는 면상에 한 방 먹일 수 있는 가 하는 생각뿐이었다. 데바가 차갑게 조소하며 말했다. "호오! 아직도 그런 어린애 같은 잠옷을 입고 자다니...... 실로 마왕다운 취향이라고 말씀드려야 할까요?" "그러는 네 놈은 계집애처럼 아직도 몸치장에 열을 내고 있는 거냐?" "훗! 꾸미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바토르님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말이었죠?" 머리를 빗어 내리는 시늉을 하며 데바가 비아냥거리자 바토르의 붉은 얼굴이 더욱 붉어지며 으르 렁거렸다. "하긴 계집애처럼 소심하게 말만 앞세운 놈에게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냐? 힘을 보여줄 수밖에."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토르의 몸을 중심으로 붉고 뜨거운 기운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에 대 항하듯 데바의 몸 주위에서도 안개처럼 희고 차가운 기운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츠츠츠! 츠츠츠츳! 그 기운들이 서로 맞붙어 강한 전류가 주위로 퍼져나갔다. 그 때문에 카리스는 그들과 가까이에 있는 하연의 안위를 걱정해 피가 마르는 것 같았지만 하연 은 무슨 기현상이라도 보듯 시종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찬 기운과 뜨거운 기운이 맞부딪쳐 충돌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지 진짜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진리를 찾겠다는 하연의 욕구는 카이람의 호통소리에 의해 무산되어 버리고 말 았다. [멈춰! 지금 어디서 힘 자랑이냐!] 그 호통소리에 담긴 힘에 놀란 바토르와 데바는 재빨리 뿜어내던 자신들의 힘을 안으로 갈무리하 고 돌아보았다. 그리고 카이람의 모습을 확신한 그들은 대뜸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동시에 외쳤다. "대 마신 카이람님의 현신을 뵙습니다!" 카이람은 그들을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노려보았고 바토르와 데바는 식은 땀을 흘렸다. 감히 대마 신 카이람님을 앞에 두고 자신들의 힘을 과시했으니...... 그런 그들의 시선에 만족하며 카이람은 어떠냐는 식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저런 공포스런 기운을 내뿜는 마왕들조차도 겁먹게 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존재임을 알았 으니 이제 하연이 조금은 자신을 두려워할게 틀림없다는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하연은 뚱한 시선으로 바토르와 데바를 보면서 물었다. "정말 저런 녀석들밖에는 없는 거야? 아무리 내 시종으로 쓸 자를 구하는 거 라지만 난 그래도 대 마신 카이람의 소환사로서 알려져 있는데 내 시종이 저런 녀석들이라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 어?" 정말 걱정이라는 듯 카이람을 바라보는 하연의 시선에 카이람과 카리스는 물론 당사자인 바토르 와 데바까지 입을 쩍 벌린 채 다물 줄을 몰랐다. 저런 녀석들이라니...... 하연에게 저런 녀석들이라고 찍힌 바토르와 데바는 현 혼 대륙에서 가장 강한 마왕들이었던 것이 다. 게다가 대륙 삼대 신기 중에 둘인 불의 망치 코도르와 얼음의 방패 카마르시아의 주인들인. 카리스는 기가 막히면서도 하연의 시종노릇 하는 데바의 모습이 떠오르자 자신도 모르게 피식 피 식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그 때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바토르와 데바가 도대체 하연의 말뜻이 무슨 소리냐는 듯 카이람을 바라보았다. 강렬한 그들의 시선에 어느 정도 그들의 체면을 세워줄 필요성을 느낀 듯 카이람이 말했다. [무슨 소리야? 그래도 얘네 마왕이라고. 둘 중에 하나만 골라!] 그 말에 하연은 저런 것들이 마왕이냐는 듯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마신이 저런데 마 왕인들 어련하겠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한번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바토르와 데바는 둘다 하연이 자신을 선택할 것이 틀림없다는 의미 모를 확신과 함께 앞날에 대 한 암울함을 느낀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가운데 카이람과 카리스는 과연 하연이 누구를 선택할지 관심어린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하연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잠시 머뭇거리며 다시 한번 확인하 듯 카이람에 게 물었다. "이 둘 중에서 선택하는 거지?" [......그렇지. 그런데 왜?] 마신답게 이미 카리스의 존재에 대해 감지하고 있었던 카이람은 하연도 혹시 숨어서 자신들을 지 켜보고 있는 드래곤 한 마리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어서 물은 것이었다. 그러나. "신화에서 보면 말이야 세 여신이 한 인간에게 누구를 선택할지 물어보는 게 있잖아? 그 때 세 여 신들은 그 인간에게 뽑아주는 대가로 권력, 승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주겠다고 했다 고. 그런데 난 대가도 없이 셋도 아닌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하다니...... 마신 소환사 치고는 좀 초라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니면 여신이란 게 원래 마신보다 지위가 높아서 그런 건가?" 기가 막혀서 듣고있던 카이람은 하연의 마지막 말에 버럭 고함을 질렀다. [헛소리!] 카이람은 두통이 인다는 듯 머리를 짚더니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손가락을 탁 튕겼다. 그러자 숨어있던 카리스의 몸이 희미해지더니 어느새 장내에 그 모습이 드러났다. 하연은 갑자기 나타난 카리스의 모습에 놀란 듯 멍하니 카리스를 바라보았다. 반갑기도 했지만 의아함이 앞선 것이었다. 그리고 순간 데바의 눈에서 빛이 번쩍였다. 데바는 카리스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가 마음에 들었었다. 은실로 짠 듯한 가늘고 긴 아름다운 머리카락. 서 있는 것만으로 그 자리에 향기가 도는 듯한 고아한 품격. 실로 딱 그의 취향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그를 취하려고 노력했으나 상대는 만만치 않은 드래곤 종족. 때문에 기회 만 노리고 있었는데 이렇듯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되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카리스는 그런 데바의 끈적끈적한 눈길을 의식할 여유가 없었다. 당황한 나머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던 것이다. 그 때 카이람이 말했다. [저 두 마왕과 드래곤, 이 셋 중에서 하나를 골라라!] "......드래곤?" 하연은 멍한 표정으로 카리스를 바라보았다. 이틀 못 들어왔는데 까마득한 예전의 일인듯. 제 컴퓨터의 하드가 날아가서... 그 동안 모아놓고 즐겨보던 소설들도 모조리 날아가고 ㅠ.ㅠ 정말 정말 슬픈 주말이었습니다. 게다가 오늘 보니 협박멜에 협박 글등등. 다들 제가 작은 메모장에 써 놓은 글을 못보신 모양이더군요. 흑흑! 하지만 가장 슬펐던건 여러분들이 보내 주신 메일들이 모두 사라졌다는거예요. 정말 너무 너무 슬펐어요. 달기님 다행이 슬럼프는 아니랍니다. 여러분들은 즐거운 주말 보내셨기를 바라고 내일부터는 꾸준히 연재할 수 있을듯.^-^ 힘든 주말을 보낸 유지였습니다.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11-02-2001 14:00 Line : 182 Read : 727 [40] 마신 소환사 -48-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1693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1-02-07 , 12:34:54 PM 마신 소환사 -48- 순간 카리스는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비록 종족의 평등을 주장하는 하연이지만 자신이 인간이 아님을 안다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똑바로 카리스를 응시하던 하연의 시선이 약간씩 빗겨가며 하연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카리스? 그러면 카리스가 갈루마의 전 주인인 그 실버 드래곤 칼링스타인 거예요?" 굳은 표정으로 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럼......" 하연이 난처한 듯 머뭇거리자 카이람은 물론이고 바토르와 데바까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연 을 바라보았다. 마신 앞에서조차 당당하게 할말 다하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갈루마랑 내가 칼링스타에 대해서 한 말도 들었어요?" 영문을 몰라하는 카리스의 표정에 좀 안도한 듯 하연이 말했다. "그럼. 내가 갈루마랑 칼링스타가 좀 쫀쫀하다느니 재수 없다느니 멍청하다느니 라고 한 말들, 못 들었단 말이지요? 그럼 됐어요." 그리고는 자신에게 환하게 웃어주는 하연에게 카리스는 웃어야 될지 화를 내야 될지 알 수가 없 어 이상야릇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 때 카이람이 재촉하듯 하연에게 말했다. [어서 골라! 난 바쁜 몸이라니까.] 하연은 그런 카이람에게 코웃음을 치며 바토르와 데바 그리고 카리스를 보며 물었다. "자, 내가 뽑아주면 뭘 줄 거예요? 어디 한 분씩 말해보세요." 바토르와 데바는 카이람만 아니라면 하연을 죽이기 싶은 심정이었다. 누가 인간 여자의 시종 따 위가 되고 싶어서 뇌물까지 준다는 말인가? 그러나 무섭게 노려보는 카이람의 시선에 바토르와 데바는 하연에게 줄만한 뇌물을 생각해 보았 다. 이윽고 생각이 난 듯 바토르가 마지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안 골라 준다면 너에겐 상당한 정령과의 친화력이 느껴지니 불의 정령 살라만더를 소환해 부릴 수 있는 불의 반지 로우를 주겠다." 데바도 말했다. "난 물의 정령 운디네를 소환해 부릴 수 있는 목걸이 사이라를 주겠다." 뽑아주면 주는 것이 아니라 안 뽑아주면 준다고? 하연의 얼굴은 무참하게 일그러졌고 카이람은 킥킥 웃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런 카이람을 한번 매섭게 쏘아봐 주고 하연은 마지막으로 고민하고 있는 카리스에게 이를 갈 듯 물었다. "카리스는 안 뽑아 주면 뭘 줄 거예요?" "......현자의 지팡이인 갈루마를 주겠습니다. 어느 누구는 잊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지팡이가 원래 는 제것이었지 않습니까?" 갈루마! 갈루마는 하연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얻은 동료가 아니었던 가? 하연은 심한 배신이라도 당한 듯 충격 받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카리스까지. ......그래도 난 동료라고 생각했는데......" 울먹이는 듯한 중얼거림으로 카리스의 동정심을 자극하는 하연이었지만 카리스는 그것에 속지 않았다. 그 동안 멋으로 하연의 동료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저에게도 드래곤으로서의 자존심은 있어서요. 동료는 되어 줄 수 있지만 시종은 되어 줄 수 없 을 것 같습니다." 언제 울먹였냐는 듯 잠시 궁시렁거리던 하연은 이윽고 카이람에게 툭 던지듯 말했다. "나 시종 필요없어." 그리고 바토르와 데바에게 손을 내밀며 말하는 것이다. "두 사람, 아니 두 마왕 다 뽑아주지 않았으니 저에게 줄 것이 있지요?" 내밀어진 하연을 손을 바라보는 바토르와 데바의 얼굴은 마치 썩은 사과를 베어 문 표정이었다. 그러나 마왕이 한 입으로 두말할 수는 없는 법. 짧게 소환이라고 중얼거리자 그들의 손에는 각기 손안에 보석 하나씩이 들려져 있었다. 바토르가 들고 있는 것은 기이한 붉은 도마뱀이 홍옥석 같은 붉은 보석을 입에 문 채 링 모양으 로 몸을 웅크리고 있는 듯한 반지였고 데바가 들고 있는 것은 여신같이 아름다운 여인이 다이아 몬드 같은 희고 큰 보석을 품은 채 두 손을 아래로 동그랗게 말고 있는 모습을 한 목걸이였다. 그 아름답고 고귀하게 보이는. 그래서 하연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무진장 비싸 보이는 보석들의 모습에 하연의 입은 쭉 찢어질 듯 벌어지고 말았다. 얼른 빼앗든 그 보석들을 받아 든 하연은 재빨리 반지를 손에 끼어보고 목걸이를 걸어 보며 물었 다. "어떻게 해야 정령들이 소환되지요?" 그 말에 데바가 시선은 여전히 카리스에게 고정시킨 채 말했다. "간단히 보석을 문지르며 소환이라고만 하면 된다, 인간." 하연은 즉각 반지에 달린 붉은 보석을 문지르며 소환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반지의 문양과 같은 붉고 커다란 도마뱀이 마치 붉은 보석 속에서 빠져나오 듯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하연은 신기하게 그 붉은 도마뱀을 쳐다보며 물었다. "도마뱀, 넌 뭘 할 수 있지?" 그 모습에 카리스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하연, 인간이 정령과 대화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정령이란 원래 이 세계의 구성요소로......" 그러나 카리스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하연이 마치 불의 정령과 대화를 하는 것처럼 말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하긴 불의 정령이니까. 그래, 이제부터 비록 짧은 시간이 되겠지만 내가 너의 주인이다. 잘 지내보자. 돌아가도 좋아!" 살라만더가 사라지자 카리스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하연에게 다급히 물었다. "하연! 지금 정령과 대화를 한 것입니까?" "응! 그런데 왜요?" 웬 호들갑이냐는 듯 하연은 힐끗 카리스를 보았다. 카리스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하연에게 물었 다. "하연, 정말 인간인 겁니까?" "인간이 아니면......?" 기분이 나빠진 하연이 매섭게 쏘아보자 카리스는 움찔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게, 아시다시피 정령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종족은 엘프 족 이외에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 연이 정령과 대화를 하니까......." 하연은 단호하게 말했다. "난 모르는 일이에요! 그리고 여기 인간이면서 정령과 대화를 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런데 어 째서 엘프 족만이 정령과 말을 할 수 있다는 거지요? 그거야 말로 고정관념일 뿐이에요." 카리스가 미안한 듯 개면적인 표정을 짓는 가운데 바토르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친화력이 상당하다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하연이 이번에는 물의 정령을 소환해 보려고 하는데 그때까지 하연이 하는 짓을 빙글빙글 웃으 며 지켜보고 있던 카이람이 그것을 막듯이 말했다. [이제 다 끝났지? 그럼 난 가보겠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사소한 일로 날 부르지 말아라! 만약 하 연이 다시 이런 사소한 일로 날 부르면 그 때는......] 카이람은 바토르와 데바를 살기 띈 표정으로 주시하며 말했다. [너희들을 먼저 소멸시켜 버릴 테니 그런 줄 알아라.] 바토르와 데바는 그 시선에 질린 듯 창백한 표정을 짖고 있다가 조금 뒤에나 카이람의 말뜻을 알 아들은 듯 당황해서 외쳤다. "그렇지만 카이람님, 저 인간이 시종은 필요없다고." "그, 그렇습니다. 분명 시종이 필요치 않다고......" [필요없는 것은 하연 사정이고, 필요한 것은 내 사정이다. 그러니 잔말 말고 너희 둘 다 붙어 다 녀!] 그 말에 바토르와 데바의 얼굴은 푸르죽죽하게 변해버렸다. 카이람이 사라지자 하연은 석상처럼 굳은 듯 멍해 있는 바토르와 데바를 보며 불쌍하다는 듯 혀 를 차더니 카리스에게 말했다. "어쨌든 카리스도 뽑히지 않은 것은 분명하니 이제 진짜 내 것이 된 갈루마를 좀 찾아줘요. 여기 어딘가에 떨어트렸는데 어두워서 찾을 수가 있어야지요." 카리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근처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갈루마를 찾아주었다. 그러나 갈루마를 손 에 쥐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하연을 보자 마음이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왠지 로베인에 이어 갈루마에게까지 밀려난 기분이라고나 할까? 어제 올리려다 못 올리고 오늘 아침에 올리네요. 오후 1시가 언제부터 아침이었냐고요? 1시면 저에게는 아침입니다. 점점 하연에게 물들어가고 있는 유지였습니다.^-^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11-02-2001 14:01 Line : 103 Read : 745 [41] 마신 소환사 -49-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1740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1-02-09 , 12:04:44 AM 마신 소환사 -49- 로베인은 문뜩 새벽에 눈이 뜨고 말았다. 한번 자면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에 빠지는 편 인 그로서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하며 무의식중에 하연의 모습을 눈으로 쫓던 로베인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하연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잠깐 나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왠지 텅 빈 하연의 빈자리가 심상치 않게 느껴졌던 것 이다. "하연!" 작게 중얼거리는 로베인의 음성이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하연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로베인은 그녀에게 끌렸었다. 처음에는 신비로운 그녀의 외모 때문이 라고 생각했지만 며칠 지나자 그 때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유 따위는 없었다. 그저 하연이 좋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로베인은 변해 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하연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예민하게 반응 해 슬퍼하고 화내고 어처구니없는 질투심에 사로잡히는 등의. 하지만 그런 자신을 로베인 자신조 차 어찌할 수가 없었다. 거대한 바닷물로 흘러 들어가는 강물처럼 그저 그의 마음은 하연을 향해 흘러갈 뿐이었다. 이제는 하연이 없으면 숨조차 쉴 수 없을 것 같은 로베인은 그 때문에 늘 불안했다. 어느 날 갑자 기 그녀가 눈앞에 나타난 것처럼 갑자기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그런데 자다 일어나 보니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크게 동요하게 된 것이었다. 지끈지끈 가슴이 아팠다. 통증에 가슴을 부여잡고 로베인은 큰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연!" 그 외침에 사담을 비롯한 미루엘, 리밍스가 자다가 놀라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입니까, 로베인?" "뭐야?" 다급하게 묻는 미루엘과 리밍스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로베인은 동굴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연! 하연, 어디 있어?" 그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은 다른 일행들도 재빨리 로베인의 뒤를 따라나갔다. 서서히 어둠이 밀려가고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무리 주위를 찾아보아도 하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서 있는 로베인들에게 미루엘이 그 때서야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카리스님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군요." 순간 로베인의 머리 속에 오만가지 생각들이 소용돌이쳤다. 하연이 혼자서 떠난 것일까? 아니 면....... 넋을 잃고 카리스의 얼굴을 쳐다보던 하연, 자신과 사담에겐 반말을 하면서도 카리스에게는 꼬박 꼬박 존대를 붙이던 하연의 모습 등이 떠오르면서 어쩌면 하연이 카리스와 사랑에 빠져 도망갔을 지도 모른다는 것에 생각이 이르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절대로 로베인은 하연을 놓칠 수 없었다. 그것은 하연이 자신의 저주에 영향을 받지 않는 유일한 여자여서가 아니었다. 그녀가 아닌 누구도 그의 마음속에 들어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 이었다. 설사 하연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선택한다 할지라도. 하지만 로베인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로베인은 으스러질 듯 두 손을 꼭 움켜쥐며 스스로 맹세했다. 자신의 손으로 하연을 죽이는 한이 있어도 그녀를 다른 누군가에는 빼앗기지는 않겠다고. 사담은 하연이 카리스와 도망쳤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자신들을 떠났다는 것에 대 해 혼란스러운 마음뿐이었다. 그는 왜 그녀가 그들을 떠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 누가 그녀를 지켜줄 것인가? 차라리 카리스와 함께 갔다면 안심이 될텐데 그런 것도 아 닌 것 같아 불안하기만 했다. 그 때 리밍스가 말했다. "하룬 산!" "하룬 산이라니요?" 걱정이 가득한 기색을 띄고 있던 미루엘이 의아한 듯 물었다. "하연이 하룬 산에 가 보고 싶어했잖아! 설마 거기에 간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라 말끝을 흐리고 마는 리밍스였다. 그러나 로베인과 사담은 그 말을 듣자마자 확신을 가졌다. 하연이 하룬 산에 같다고. 사담은 하연의 말을 떠올렸다. 사담은 날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 그렇게 생각한 채 하연이 죽게 만들 수는 없었다. "갑시다!" 사담이 단호하게 말하며 하룬 산 쪽으로 가자 리밍스가 무언가를 느낀 듯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하연이 하룬 산에 갔다고 생각하시는 거냐?" "하연이라면 충분히 그럴 겁니다." 로베인이 말없이 따라나서는 것을 보며 미루엘은 복잡해진 심정으로 대답했다. 자신이 과연 하연을 찾아서 하룬 산까지 가야할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죽을 지도 모르는 길이 었다. 하지만 자신의 손을 잡아주며 동료가 되어 주겠다던 하연의 환한 얼굴이 떠오르자 괘씸하 고 원망스럽긴 하지만 이제는 자신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주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숨과 함께 미루엘은 성큼 앞서가는 사담과 로베인의 뒤를 따라가자 당황한 표정으로 리밍스도 그들을 따라나섰다. 지금 축구 0:1입니다. 만약 후반에서 동점이라도 만든다면 내일 연참입니다. 불끈! 각오를 다지는 유지. 화이팅, 한국입니다!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12-02-2001 09:59 Line : 70 Read : 2310 [42] 마신 소환사 -50-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1762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1-02-10 , 12:08:52 AM 마신 소환사 -50- 날이 환하게 밝아올 무렵, 하연과 카리스 그리고 하연의 시종으로 임명된 두 마왕은 거대한 암벽 앞에 서 있었다. 하연은 새삼 눈을 비비며 앞에 서 있는 벽을 바라보았다. "이거 뭐지? 이 벽이 어디서 갑자기 튀어 나왔어요?" 좀 전까지만 해도 분명 보이지 않던 벽이 눈앞에 서 있다니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카리스는 벽을 툭툭 쳐보았다. 그런데 마치 허공을 두들인 듯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일루젼이군요." "일루젼!" -환상을 실재처럼 보이게 하는 마법이지. 마법왕국 트리엔시라가 있던 곳인 만큼 이 정도 마법트 랩은 아무 것도 아니다.- 갈루마의 말에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한 듯 벽을 만져 보았다. 정말 환상일 뿐 만져지지는 않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벽이 이렇듯 갑자기 생겨나지만 않았어도 실재로 존재하 는 벽인 줄 알고 돌아갔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때 데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는 것이었다. "이상하군요. 마법왕국 트리엔시라의 마법이 이렇게 허술할 리가 없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게 생 각지 않습니까, 칼링스타님!" 허술? 하연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곧 자신이 살던 세계의 현대의 기술력으로도 이 정도의 환상은 홀로그램으로 만들 수 있 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어느 정도 그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리스가 말했다. "그렇군요. 이렇듯 쉽게 일루젼임을 알아낼 수 있게 설치해 놓았다니 뭔가 이상합니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세월이 흐르다보니 이곳에 집중되어 있던 마나가 조금씩 흩어져 이렇게 허술한 마법으로 변해버린 거겠지." 바토르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더니 누군가 말리기도 전에 성큼성큼 암벽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 바토르를 불쾌한 시선으로 노려보던 데바는 곧 카리스에게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 안에 뭔가 함정이 있을 듯한데 그래도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카리스는 그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하연을 바라보았다. 결정은 어디까지 하연이 하는 것이었 으니까. 하연은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눈앞에 놓인 길은 우선 가고 보기로 결심한 그녀가 아니었던가? "들어가겠어요." 벽 속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에 좀 이상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서서히 벽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져 가는 자신의 손과 팔을 보면서 하연은 이런 것도 한번쯤은 경험해 볼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연이 들어가자 곧 카리스도 따라 들어갔다. 그런 그들을 보며 마지막으로 남은 데바는 눈살을 찌푸렸다. 맨 처음에 데바는 인간 여자의 시종 노릇이나 하라는 카이람님의 명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금방 이 상황이 자신에게 좋은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다. 카리스와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 다. 이 기회에 데바는 카리스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그런데 하연이 방해가 되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데바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카이람님은 분명 시종으로 따라다니라고는 하셨지만 지켜주라고는 하지 않으셨다. 게다가 이 곳 은 위험이 산재한 지하미로. 자칫 실수해 죽는다해도 이상할 것 없지." 연참하기 참 힘들군요. 그래서... 폼이라도 잡아보기로 했습니다.ㅠ.ㅠ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14-02-2001 11:12 Line : 85 Read : 1556 [43] 마신 소환사 -51-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1763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1-02-10 , 12:16:54 AM 마신 소환사 -51- 하연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넓은 석굴 안에 쭉 늘어선 빛의 구가 마치 고속도로 가에 늘어선 가로등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고 벽에는 빽빽이 기이한 문양의 도형들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굉장히 멋지군요." 카리스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감상은 그게 다입니까, 하연? 고대인들의 이런 마법의 사용은 우리 드래곤 족이 보기에도 대단 해 보이는데 말입니다. 이렇듯 오랜 시간 한 곳에 마나를 집중시키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요? 제가 사는 곳에서는 이런걸 언제나 볼 수 있거든요." 카리스는 그 말에 놀란 듯 하연을 보며 물었다. "예전부터 궁금했었는데 하연이 사는 곳은 도대체 어디입니까? 하연의 말대로 라면 모든 종족이 평등하고 이런 마법조차 흔히 볼 수 있는 문명이 아주 발달한 이상적인 곳 같은데 말입니다." 이상적인 곳이라는 말에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흐음~ 이상적인 곳이라기 보다는 내 마음의 천국이라고만 해두지요." 그 말에 카리스는 더욱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하연은 상관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 와서 가족들이 그리울 때면 하연은 언제나 자신이 살던 세계를 꿈꾸곤 했다. 가슴 아 린 그리움을 품고. 아마 천국이란 그런 곳일 것이다. 자신이 언제나 꿈꾸는 곳. 그래서 하연은 자신이 살던 세계를 내 마음의 천국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 때 앞서 가던 바토르가 걸음을 멈추고 바닥에 귀를 대어보더니 하연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 앞쪽에서 뼈다귀들이 오고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주~인~님!" 비꼬는 투가 영역한 말이었지만 하연은 그 주인님이라는 말이 듣기 싫지 않았다. 아니, 듣기 싫 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기분이 날아갈 듯 했다. 그래서 바토르의 말에 맞추어 하연은 뒷짐을 집고 짐짓 위엄 있는 태도로 대꾸했다. "허헛! 주인체면에 벌써부터 내가 나설 수야 있나? 네 선에서 처리하도록 하라!" 놀려먹으려다 되려 당한 바토르는 기가 막히다는 듯 입을 쩍 벌렸고 카리스는 손으로 입을 틀어 막으며 웃음을 참으려는 노력이나마 보였지만 데바는 대놓고 박장대소했다. "크하하하하! 큭큭큭! 우하하하하!" "쿡쿡쿡!" 삐그덕! 삐걱! 끼이익! 끼르륵! 모욕감에 얼굴을 온통 붉힌 채 부들부들 떨던 바토르는 때마침 가까이에 이른 스켈레튼들에 시선 이 이르자 불의 망치 코도르를 소환해 손에 쥐고는 무작정 스켈레튼들을 내리쳤다. 쾅! 콰르릉! 우레와 같은 소리가 잇달아 일며 스켈레튼은 마치 모래처럼 부서져 내렸다. 순식간에 스켈레튼들을 모조리 처리한 바토르는 이내 분노가 가라앉자 후회가 일었다. 스켈레튼들이 나타나자 그것들을 이용해 공포에 질린 인간의 표정을 보며 즐길 생각이었는데 그 게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허탈한 듯 한숨을 쉬며 바토르는 다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때 로베인들은 오거들에게 둘러 쌓여 있었다. 이미 적지 않은 마물들을 만난 듯 그들의 옷은 피에 물들어 있었고 로베인은 오크와 싸울 때와는 달리 많이 침착해진 태도로 눈앞의 오거들을 상대해 나갔다. 촤아악! 피가 튀어 얼굴에 묻었지만 로베인은 상관하지 않고 오거의 팔을 완전히 잘라버렸다. 그리고 비 스듬히 검을 들어 그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다. 미루엘도 그 재빠른 몸놀림으로 가볍게 오거들의 공격을 피하며 빈틈을 노려 약점을 찔러 들어갔 다. 그리고 리밍스는 두 손으로 도끼자루를 움켜잡은 채 온 몸을 날려 오크의 목을 잘라 넘겼다. 사담은 정말 미친 듯이 오거들을 죽여나갔다. 한 마리의 미친 들개를 보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동생을 잃은 뒤 하연을 지키기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그였는데 이제 하연까지 잃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이자 정말 미칠 지경이었던 것이다. '제발, 하연. 내가 갈 때까지만 살아 있어 줘! 내가 너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단 한마디만이라도 할 수 있는 기회를 줘!' 당분간은 연참은 없을 것 같습니다. 요즘 제 몸이 좀 부실해져서...... 하지만 며칠 후 축구 이긴다면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신 소환사 -------------------------------------------------------------------------------- Name : 운영자 Date : 15-02-2001 09:03 Line : 131 Read : 1362 [44] 마신 소환사 -52- -------------------------------------------------------------------------------- Ip address : 211.115.239.2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0; Windows 98; DigExt) 22838 연재란이네? 글 번호 : 1904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1-02-13 , 10:20:03 PM 마신 소환사 -52- -고대 마법왕국 트리엔시라의 멸망은 물론 빛과 어둠의 전쟁이 그 결정적인 역할을 차지했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니었다. 트리엔시라 내의 내부적 정치상황 또한 그들을 멸망으로 이끄는 중요 한 역할을 했지. 트리엔시라의 역대 왕들은 대부분 뛰어난 마법사이긴 했지만 대부분 단명해 버렸기 때문에 트리 엔시라의 마지막 왕인 자마 왕은 7살에 왕위에 올라 정치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래서 실질적인 정치를 맡은 것은 자마 왕의 숙부이자 재상인 슈마였다. 트리엔시라의 역대 왕들에게는 또 다른 특징이 있었는데 그것은 모두 검은머리에 검은 눈이었다 는 거다. ......그러고 보니 너도 검은머리에 검은 눈이지?- 뭔가 기분이 나빴다. 같은 검은머리와 검은 눈인데 왜 이렇게 다르냐는 것처럼 들려서 하연은 속으로 툴툴거리지 않 을 수 없었다. '흥!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깟 마법쯤 못 익힐 것 같아? 익힐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지.' 갈루마가 계속 말했다. -그래서 백성들은 검은머리와 검은 눈을 왕의 상징처럼 여겼지. 그런데 슈마 재상 또한 검은머리 에 검은 눈이었던 거다. 야심이 컸던 슈마 재상은 그 사실을 들추어내어 어린 자마 왕보다는 자신 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민심을 선동했고 결국 트리엔시라 정권은 두 세력으로 나뉘어 지고 말았 지. 그 때문에 빛과 어둠의 전쟁이 반발하자 트리엔시라는 권력층의 내분에 의해 이리저리 전쟁 에 휩쓸리다가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예기. 그러고 보니 조선시대 단종과 세조의 예기와 비슷하지 않은가? 이 세계에 와서 자신의 세계의 역사와 비슷한 예기를 들은 하연은 사람이 사는 곳이란 어디나 별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고...... 그런 생각에 피식 웃고 있는데 데바가 한 쪽 벽에 걸린 불쑥 튀어나온 어느 부분을 건드리며 말하 는 것이었다. "조심해라. 이곳은 트리엔시라 왕국이 함몰되기 전 자마 왕의 신하들이 왕을 지키기 위해 갖가지 마법트랩을 설치해 놓았다고 알려졌으니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우르르릉! 우르르릉! 갑자기 석굴전체가 무너져 내릴 듯 흔들리더니 바닥이 쩌억쩌억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으악!" 하연은 놀라서 급히 도망치려 했으나 남다르다 못해 유별난 운동신경을 지녔던 하연은 그대로 갈 라진 틈 사이로 떨어졌다. "아아악!" 바닥이 갈라지자 급히 부유마법으로 허공에 떠오른 카리스는 다급히 떨어져 내리는 하연의 로브 를 붙잡았으나 때마침 뒤에서 데바가 같이 부딪쳐 오는 바람에 순간 그 로브를 놓치고 말았다. "하연!"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하연의 보며 카리스는 다급히 그 아래로 내려가려 했으나 데바가 그런 카 리스를 꼭 붙들며 말했다. "위험합니다, 칼링스타님! 무슨 짓입니까? 저 따위 하찮은 인간이야 죽든 말든 내버려두십시오." 카리스는 그 말에 무엇인가를 느낀 듯 홱 돌아보았다. 저 쪽에서 흔들리는 석굴사이에서 희죽 웃으며 허공에 둥둥 떠있는 바토르가 보였다. 이들이 하연의 죽음을 일부러 방치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카리스는 노여움에 떨리는 목소리로 데 바의 팔을 뿌리치며 말했다. "그 하찮은 인간의 시종 따위들이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뭣이! 이 도마뱀 녀석이!" 바토르가 벌컥 화를 내며 덤벼들려고 했으나 벌써 카리스는 하연이 떨어진 곳으로 뛰어내리고 있 었다. "죽은 인간의 시체를 확인하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겠지." 만족한 웃음을 띄우며 그렇게 중얼거리던 데바가 바토르에게 말했다. "어떻습니까? 우리도 그 인간의 최후를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카리스의 뒤를 따라 내려가는 데바의 모습을 보며 있는 대로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바토르는 하연이 죽음의 순간 카이람님을 불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얼굴이 해쓱해지며 다급히 갈라진 틈 속으로 뛰어들었다. 만약 이런 일로 카이람님이 소환된다면 그들은 아마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피 냄새에 이끌려 몰려드는 마물들로 인해 로베인들은 포위되어 버렸다. 그들은 지친 듯 등을 기 대며 서로를 받치고 있었는데 그런 그들의 주변에는 죽어서 뒹구는 마물들의 시체들로 널려있었 다. 낮이 환하게 밝았는데도 계속해서 어슬렁거리며 몰려드는 마물들의 모습에 미루엘은 어처구니 가 없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대낮에 마물들이 돌아다니다니 말입니다." 달려드는 워울프를 도끼로 날려버리며 리밍스가 대답했다. "저것들이 제정신이 아니라니까. 하룬 산의 마기가 그만큼 강한 것일 수도 있고." 그 때였다. 우르르릉! 우르르릉! 산 정상이 무너져 내릴 듯한 커다란 굉음이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순간 사담의 눈빛이 번쩍였다. 소리가 들리는 그곳에 하연이 있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초조함에 이를 악물며 사담은 한번 모험을 해 보기로 결심했다. 여기서 이렇듯 언제까지나 마물들만 상대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에 사담은 빠르게 동료들을 향해 말했다. "미루엘은 뒤를 로베인과 리밍스는 각기 옆쪽을 맡아주십시오. 저는 앞을 맡겠습니다. 이 곳을 뚫 고 나갑시다!" 그 말에 로베인과 리밍스, 미루엘은 각기 무기를 고쳐 잡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사담의 외치자 로베인들은 일제히 괴성을 지르며 대형을 이룬 채 앞으로 달려나갔다. "으아아아악!"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포커게임에 빠지는 바람에......ㅠ.ㅠ 스트레이트 플러쉬라도 한번 해보려고 그렇게 발악을 했건만...... 결국 한번도 못해보고. 그리고 축구 1:4로 이겼는데 보셨나요? 정말 한 골 한 골 예술이었습니다. 이럴 때는 4연참쯤 해야 말이 되는 일인데 유지가 능력부족이 다 보니......(한숨) 하지만 내일 우승기념 연참을 올릴 생각입니다. 내일 기다려주세요.^-^ 꺄아악~~~드뎌올라왔다~~~만쉐이~~ 낼기대해요~~~ 타마하리트_ 후후~ 2등으루 쓰넹~~ 냥~~^^/// 건필하세여~유지님~~ 헤헤~ ㅡㅜ 기뻐... 유지님 옆에 계셨음 행복의 온몸 어택(?)을 날렸을지도 유지님... 연참두 중요하지만... 되도록이면 길~~~~~~~게...써줘영........ 와우~ 드뎌 DB오류를 이기고 겨우 봤는데.. 한편이라니.. 너무행 T_T 후....축구에 심취(?)해 있어서 연재가 느즈셔꾼여어~~ 오~~~~~~~ 제발 빨리 글구 길게 ~~ 짧아 맘이 넘 아파요.. 웅...길게~~~많이~~~~~~~연참으로!!!!!!!!!!!!!!!!!!!!!!!! 왜이리늦었어여-.-++++++ 크크크?이제야 올리시다니...후환이 두렵지 않으신가 보군요...것두 달랑 한편 연차아암!!! 웅..넘 짧아여~~ 점 길게~~해주거~~연참~~~~!!!! ....db오류의 굳센 방어막을 뚫고 겨우 들어왔건만...이렇게 짧다니...털썩... 우승연참이라~ 아아~ 행복해랑~ 하연♥카리스^^ 뽀에버^^ 길~~~게 연참헤주시면 않되요?? 좀 길게 써여 언능 좀 올려여 넘 짧다... 10번이 넘는 시도 끝에 겨우 들어왔는데 겨우 요거라니... 아아아!!!!너무 짧아아아!!!나의 기다림을 보상해 주오!!! ㅡ0ㅜ..길게길게..!!;; 연참이라.... 내일을기대하죠... 오늘은 덴마크에 졌습니다..ㅠㅠ 바부같이.......... 어둠. 마치 그 자체인 듯한 공간 속에서 하연은 멍하니 누워 있었다. -하연! ......하연, 대답해! 정신차려! 정신마법에 휩쓸리지마!- 자신을 부르는 갈루마의 비통한 외침이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지만 대답할 마음이 들지 않아 하 연은 무시해 버렸다. 너무나 편안해서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을 정도로 그저 이 편안함 속에 푹 빠져들고만 싶었던 것 이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갑자기 그 어둠의 공간이 깨어지며 한 줄기 빛이 스며들었다. 마치 그녀의 영혼을 끌어당기듯. 빨려 들어가듯 그 빛에 이끌려 들어간 하연은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와 함께 그 녀의 눈앞에는 무도회장을 연상시키는 화려하고 넓지만 텅 빈 홀이 펼쳐졌다. 그 텅 빈 홀 안에는 등받이가 높은 커다란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의자에는 검은머리의 검 은 눈동자를 지닌 한 작은 소년이 앉아 있었다. 이 넓은 홀에 왜 소년 혼자 앉아 있는지 의아해서 소년에게 가까이 다가가던 하연은 문뜩 발걸음 을 멈추고 말았다. 똑바로 앞을 바라보고 있는 소년의 눈동자가 어느 것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 다. 소년은 의자의 손잡이를 꽉 움켜잡은 채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난 왕이다. 난 왕이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기색이 영역했지만 소년은 의연한 태도를 취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소년의 말대로 소년은 왕이었으니까. 갈루마의 말대로 라면 아마도 저 소년은 자마 왕일 것이다. 자마 왕은 왕궁과 함께 묻혀버렸다고 들었는데...... 하연은 아련한 연민을 느끼며 소년에게 다가가 소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제야 하연의 존재를 느낀 듯 소년의 눈에 초점이 들어왔다. 하연을 본 소년은 흠칫 놀란 듯 했지만 곧 강경한 목소리로 물었다. "넌 누구냐?" 그러나 하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년은 하연의 검은머리와 검은 눈을 보고 미리 짐작한 듯 처연 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숙부의 딸인가 보군. 벌써 숙부가 마법트랩들을 뚫고 이곳까지 들어왔다니......."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으나 애써 눈물을 참고 있는 듯한 소년을 보면서 하연은 소년의 안에 있는 자신을 느꼈다. 이렇듯 시간도 공간도 다른 한 곳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도 없는 존재에게서 느낀 자신의 존재에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난 하연. 다른 세상에서 왔어. ......넌 왜 이곳에 있니?" 소년은 하연의 말에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숙부의 딸이 아니란 말이냐? 그런데 어떻게 검은머리와 검은 눈을 지닌 거지?" 순수하게 조금의 의심도 없이 자신의 말을 믿어주는 소년을 보며 하연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내가 사는 곳에선 검은머리와 검은 눈은 아주 흔해. 이곳에서처럼 인기가 없지." "그럼...... 그곳에선 검은머리와 검은 눈을 지녀도 왕이 되지 않아도 되는 거야?" 어느새 어린애 같은 말투로 돌아와 버린 소년의 말을 들으며 하연은 밝게 웃었다. "그래. 하지만 그곳에서 왕은 인기도 없고 욕만 얻어먹는 직업이라 아무도 하려들지 않으니 네가 가면 아마 왕으로 받들려고 할지도 몰라. 경험자를 우대하는 곳이거든. 그렇지만 그것도 사십은 넘어야 가능해. 너처럼 어리면 왕이 될 수 없어." 그 말에 소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숙부도 그렇게 말했어. 내가 너무 어려서 왕이 될 수 없다고......" 그러다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소년은 고개를 들고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난 왕이야. 그러니 신하들이 돌아올 때까지 내가 이 왕궁을 지켜야 하는 거야. 하연, 넌 그 만 물러가도록 해라. 신하들이 오면 검은머리와 검은 눈을 지닌 널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불안하게 흔들리는 소년의 눈에서 소년이 혼자 있고 싶어하지 않는 다는 것을 눈치챈 하 연은 소년을 꼬옥 끌어안아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제 넌 왕이 아니야. 백성이 없으면 왕이 될 수 없거든. 너의 백성들은 이제 없으니까 넌 더 이 상 왕이 아닌 거야." "......정, 정말? 이제 왕이 되지 않아도 되는 거야?" "그래! 이제 이 곳을 지키지 않아도 돼!" 소년은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지금 축구합니다. 축구 끝나고 한편 더 올릴게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 지금 글이 어떻게 올라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으악~~~ 한 골 먹었다. 안돼!!! 나두 축구 보고있는데...이기면 좋겠다~!! 야~~호!! 첨으로 두 자리 수 일 때 봤다.유지님짧아여.연참-이카르트 허걱...나도 연참을 부르짖을 군번은 아니구낭....-이카르트 유지님 축구이기면 연참부탁~~~~!! 그럼 이카르트님은 지금 쓰시고 있나요? ㅡ ㅡ++ 아악~~ 왜 재밌는 설은 다!! 속도가 느린거얏!! 타마하리트~~ ^^/// 7번째 의견~헤헤~ 언제나 건필하셔여~ 근뎅 연참은...ㅡㅡ;;; 우오오~ 연참을. 크흐흐. 설마 진다구 안올리실 것은 아니죠? ㅡㅡ;; 유지님은... 축구 좋아하시나 봐... 마신 연참의 운명은 축구에 달린건가? ㅡㅡ; 축구... 축구.. 졌더요.. 그러나.. 올릴건 올려야죠.. 그 눈물과 함께 소년의 몸이 희미해지더니 하연의 품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넓고 화려했 던 홀이 사라지고 거미줄과 먼지로 뒤범벅이 된 낡은 홀과 녹슨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그제야 하연은 정신을 차린 듯 낮게 탄성을 터트렸다. 그 긴 세월 동안 유령이 된 채 어린 자마 왕은 이곳에서 신하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이다. -하연! 이제 정신이 들어? 괜찮아?-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거라니까. 헤어짐이 있으면 만남도 있겠지." -또 무슨 엉뚱한 소리냐! 너 조금 전까지 네가 어땠는지 알아? 갑자기 울다가 웃다가......- 그 때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하연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갈루마, 분명 나 바닥 속으로 깊이 떨어졌던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멀쩡한 거지? 아픈데 도 없고." -워프가 가능한 이동 공간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칼링스타와 두 마왕이 뒤따라오지 않은 것을 보니 아무래도 좌표가 뒤섞여 어디로 떨어질지는 알 수가 없는 것 같다.- 갈루마의 말대로 카리스가 떨어진 공간과 데바, 바토르가 떨어진 공간은 각기 달랐다. 하연이 왕궁의 중심부에 있었다면 카리스는 북쪽, 데바와 바토르는 서쪽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 면서 카리스는 하연을, 데바는 카리스를, 바토르는 하연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간신히 마물들의 포위 속을 빠져 나온 로베인들은 흡사 피로 목욕을 한 듯한 형상으로 일루 젼으로 만들어진 암벽 앞에 이르러 있었다. 로베인은 등에 길게 상처가 나 지혈을 위해 대충 천으로 몸통을 둘렀으나 천 또한 흠뻑 피로 젖 어 있었고 미루엘은 다리에 상처를 입어 부목을 대고 있었으며 리밍스는 탐스러운 수염이 뭉텅 잘라나가 있었다. 사담은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았으나 그 또한 여기저기 가벼운 상처를 입고 있는 것은 마 찬가지였다. 미루엘은 그런 동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일루젼입니다. 트리엔시라의 마법트랩이지요. 지금 대륙에 알려진 마법이 고대 마법 왕국의 기 본마법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게다가 우리는 그 기본마법에 대한 지식조차 거의 없습 니다. 따라서 이 안은 분명 머리 나쁜 마물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 힘들 것입니다. 그래도 들어 가시겠습니까?" 확인을 하듯 묻는 미루엘은 말에 모두 얼굴을 굳힌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어이가 없다 는 듯 미루엘은 한숨을 쉬었지만 그녀자신 또한 여기서 돌아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연을 구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트레져 헌터로서 고대 마법왕국의 유물이 간직되어 있는 곳에 들어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침을 꿀꺽 삼치고 마음을 가다듬은 미루엘은 천천히 암벽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뒤이어 로베인들이 따라 들어갔고 그들은 얼마 후 하연 일행이 만난 스켈레튼들과 부딪쳤다. 사담이 엷게 검기가 어린 검으로 스켈레튼들을 부수는 것을 지켜보면서 리밍스가 중얼거렸다. "저런 녀석들까지 튀어나오는 곳인데 하연이 과연 아직까지 살아있을까?" 로베인은 그런 리밍스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리며 으르렁거렸다. "닥쳐! 하연이 죽었을 리가 없어! 알겠어?" 목이 졸린 리밍스는 컥컥 거리며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내팽개치듯이 리밍스를 내려놓은 로베인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점에 있어서 의심이 들기는 마 찬가지였다. 위안이 되는 점이라면 아직 하연의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라고나 할까? 초조한 얼굴로 스켈레튼들을 부수는 사담을 보면서 로베인은 애써 스스로를 위안하듯 중얼거렸 다. '하연은 어둠의 사제다! 마신 소환사야! 이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어! 카이람님이 하연을 지켜주 실 것이다!' 드디어 사담이 스켈레튼들을 모두 처리하자 그들은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미루엘의 함부로 아무 것이나 건드리지 말라는 거듭된 주의로 인해 그들은 하연과 카리스 들이 뛰어 든 바닥의 트랩을 무사히 지나가 버렸다. 하아~ 너무나 아쉬운 순간이 많았던 경기였습니다. 거기서 골을 넣었더라면......ㅠ.ㅠ 2:0으로 지다니...... 기분이 푹 가라앉는 군요. 몹시 우울한 유지였습니다.T-T 흠... 앗 13번째로 보고감~!~! 의견두번째~! 와하하하하하하 연참인 것이다! 우하하하 4번째넹... 켜켜 한국이 진건 안타깝당... 힘내세요~유지님 축구는 축구고 소설은 소설이고 ㅡㅡ 화팅!!(바카수 마시고 힘내요 ㅡㅡ{6딩}) 앗 이런 축구 이겼음 님 글 더 써셨을 텐데 ㅠ-ㅠ 어서 어서 연참을.. 허거걱....이럴쑤가....ㅜㅜ 님아 그래두 연참은 해주세염...^^ㆀ 10등이군...연참하는작가넘좋아... 연참을 부탁해여~!!!!! 연참!연참이 아님 우리에게 죽음을 달라~~!!!ㅡㅡㆀ 타마하리트~~옹... 연참하셨넹~~언제나 좋은글~ 부탁~ 해염~~~ㅋㅋㅋ 연참 짝짝짝 연참 짝짝짝 짝빡짝 짝짝짝 워어~~~~~~약 아앗.. 축구 져찌여...ㅡ_ㅜ..후움.. 힘내셔요~ 글고서 연참을...=_=; 유지님과 축구와의 관계는?!.... 님 계속 연참 부탁드려여~~님의 글을 읽는 이들을 위해~ 재미따..니마 연참부탁~~ 연참 좋지~~~~ 먼지구덩이나 마찬가지인 홀 안을 돌아다니면서 하연은 밖으로 나가는 문을 찾고 있었다. 그러면 서 갈루마를 사용해 거미줄을 걷어내고 먼지 쌓인 바닥을 두들겨대자 갈루마가 비명 섞인 외침 을 질러댔다. -으악! 싫어! 기분 나빠! 어서 이 먼지 속에서 날 들어올리지 못해?- "왜 그래? 지금까지 지팡이로 잘만 사용했지만 아무 말도 없었잖아?" -그게 같냐? 같아? 땅 집는데 사용하는 것하고 먼지 구덩이 속에 나를 처박는 것하고?- 하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주체성마저 상실하다니...... 갈대까지 갔구나, 갈루마! 잘 들어 네 몸은 비록 지팡이지만 넌 어디 까지나 인간이라고! 이 지팡이는 그저 네 영혼을 담은 그릇일 뿐이야!" 갈루마는 순간 어이가 없다가 간신히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하연, 얼마 전에 네가 말이다 영혼이야 인간이든 말든 그 영혼을 담은 그릇이 지팡이인 이상 나 는 지팡이일 뿐이라고 했었는데 그걸 그새 잊었냐? 그러면서 말하는 지팡이로 역사에 이름이 남 는 것도 좋을 거라고 비아냥거렸었지.- 새삼 화가 치미는지 부들부들 떨리는 갈루마의 음성을 들으며 희죽희죽 웃던 하연은 감탄했다는 듯 말했다. "그것도 옳은 말이네!" -뭣이 어째? 왜 이랬다 저랬다야?- 그 때 벽 쪽에 기이한 틈이 있는 것을 발견한 하연은 그 쪽으로 다가가며 태평하게 대답했다. "둘 다 옳다고 생각되니까. 그리고 내가 현자도 아닌데 어떤 것이 진리인지 어떻게 알아?" -입만 열면 자신은 그 현자보다 더 대단한 천재라고 자랑한 것이 누구였지?- '누가 갈루마 아니랄까봐 꼬투리 잡아 갈구긴.'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하연은 틈새를 조심스럽게 더듬어 보았다. 문을 찾아낸 것 같았다. 그러나 몇 번 밀어보아도 하연의 힘으로는 열리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포기하려던 하연은 문뜩 마 왕들로부터 받은 보석들이 떠올랐다. 재빨리 반지와 목걸이를 쥐고 소환이라고 외치자 다시 붉고 커다란 도마뱀과 물빛 투명한 아름다 운 여인이 하연의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불렀소, 주인?" 익히 살라만더는 알고 있는 관계로 하연은 먼저 운디네에게 말했다. "난 하연이야. 네가 물의 정령이구나. 사이라라고 불러도 좋을까?" 운디네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주인님!"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살라만더에게 물어보려는데 살라만더가 미리 하연의 말을 짐작한 듯 대답하는 것이었다. "물론 로우라 불러도 상관없네, 주인." "풋! 고마워, 로우 아저씨!" 하연은 로우와 사이라에게 문을 열 수 있는지 물었다. 사이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연이 가리킨 벽 쪽으로 다가가 문에 손을 갔다대었다. 그 러자 그녀의 손을 중심으로 투명하고 맑은 기운이 퍼져 나가더니 벽의 먼지나 녹슨 것들이 녹아 내리 듯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내 원래의 고풍스럽고 우아한 철문이 드러났다. "와!" 하연이 감탄사를 터트리자 사이라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물러섰다. 하연은 살짝 문을 열어보았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갈루마가 말했다. -마법으로 장금장치가 되어 있는 것 같은데?- 그 때 불의 정령 로우가 나서며 말했다. "내가 열어보도록 하지." 그러더니 로우가 입을 쩍 벌리고 불을 뿜어냈다. 화르륵 거센 불길이 일더니 철문이 녹아 내리기 시작하더니 조금 후 사람 하나정도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생겨났다. 갈루마는 감탄한 듯 말했다. -정령의 힘도 대단하군. 7서클의 파이어 볼로도 이런 철문을 이렇듯 순식간에 녹여버리기는 쉽 지 않을텐데.......- "흠흠! 뭐 이 정도를 가지고." -갈수록 뻔뻔해지는구나, 하연. 내가 칭찬한 건 네 저 로우 아저씨인데 왜 네가 잘난 척이냐?- "다 어떤 현자를 닮아서 그렇지, 뭐! 그리고 로우 아저씨는 내 부하니까 내 힘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면서 하연은 로우가 만든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밖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뜻밖 에 지하로 연결된 또 다른 통로였다. 이런 곳에 또 다른 지하로 연결된 통로가 있다는 것에 의아해 하면서 하연은 곧장 계단을 내려가 려고 했다. 그러자 갈루마가 말리며 말했다. -잠깐 기다려! 어떤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먼저 정령들에게 살펴보라고 해라!- 가만히 생각해 본 하연은 곧 고개를 끄덕이며 사이라와 로우에게 말했다. "이곳에 어떤 함정들이 있는지 좀 살펴봐 줘?" 사이라와 로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하계단을 내려갔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 연이 물었다. "그런데 정령들이 이런 일도 할 줄 알아?" 순간 갈루마의 입이 다물어진 채 열릴 줄을 몰랐다. 이에 어이가 없어진 하연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그저 정령들이 돌아오길 기다릴 뿐이었다. 실상 정령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었다. 대륙에서 인간과 엘프족과의 관계가 단절되면서부 터 정령을 다루는 인간들도 하나 둘씩 사라져 지금은 한명도 남아 있는 않은 상태였고 오직 푸른 계곡에 사는 엘프들은 바람의 정령을, 황금의 땅에 사는 엘프들은 땅의 정령을, 신비의 섬에 사 는 엘프들은 물의 정령을 다룬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때문에 갈루마 또한 정 령들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잠시 후, 정령들이 돌아오자 하연이 물었다. "어떻게 알아 봤어?" 사이라가 말했다. "네. 약간의 장치가 되어 있었지만 모두 작동하지 못하도록 로우님께서 처리해 주셨습니다." "잘했어, 로우 아저씨." "아까부터 아저씨라니...... 이왕이면 오빠라고 불러주었으면 좋겠네만, 주인!" "푸하하하하! 오, 오빠라니...... 안 어울려, 절대 안 어울린다고!" 하연이 폭소를 터트리자 사이라마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작게 쿡쿡 거렸다. 순간 로우의 도마뱀 얼굴이 일그러진 듯 보인 것은 단순한 눈의 착각만은 아닌 듯. 우우! 요즘은 진도가 잘 안나가는 군요. ㅠ.ㅠ 양이 너무 적어여.. 좀 많이씩 올려주세여...이건 보통 한편에도 못미치는 양인데... 케케케...넘 잼있군요. 햐..3등이다~~넘 잼있어여~~근데여~~양줌 늘려 주세여~~☆ 4딩이네 ㅡㅡ 흠... 로우 죽이는구만 ㅡㅡ 많이 써달라고하는 요청이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진짜 인간적으로.. 너무 짧네여....ㅠ.ㅠ 쿠쿡^^ 넘 잼따^^ 유지님!!! 연참해줘여~!!! 아자!아자! 빳팅!위대한 한국인 유지! 오옷 캬캬~~넘 재밌떠여!! ㅋㅋㅋ 연참을 바라면서 축배를..... 넘 짧아여..좀 길게 써주세염..글구 연참을!! 쳇 짧당...유지님... 넘.... 짧다..~~ 유지님아... 제발.. 마니마니...쩝 갈루마....지팡이에도 입이있나?;;; 크,크,크크크그...프하하하..!!!로우 오빠!!!꺄하하하~!!^^// 계단을 모두 내려간 하연은 두꺼운 석문 앞에 섰다. 그러자 크르릉! 하고 기관이 움직이는 소리 가 들리더니 석문이 저절로 열리는 것이 아닌가? 하연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거야 말로 모험의 결정판인 보물을 얻게되는 순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연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 광택이 번쩍번쩍 빛나는 수많은 보물들이 아니라 누렇게 떠 서 곧이라도 부서져 재가 되어버릴 듯한 두루말이들이 빼곡이 쌓여 있는 서재의 모습이었다. 순간 맥이 풀린 하연의 어깨가 축 쳐지고 말았다. 그 때 갈루마의 경악에 휩싸인 음성이 들려왔다. -이럴 수가! 이건 고대 마법왕국 트리엔시라가 존재하게 만든 마법서들이 아닌가?- 그 말에 하연의 눈이 번쩍 뜨였다. 머리 속에 한편의 영화가 스쳐지나갔다. 진귀한 마법서, 즉 보물을 지닌 미녀와 그 미녀를 쫓는 범죄자들. 그리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애 쓰는 남자 주인공. 그 미녀 역에는 자신을 그리고 남자 주인공 역에는 로베인을 즉석 케스팅 시켜 가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하연이었다. 생기 있게 눈을 반짝이며 얼른 이리저리 두루말이를 펼쳐보는 하연의 모습에 피식 웃던 갈루마 역시 하연이 펼쳐 놓은 두루말이 중 하나에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어떤 글에 멈춘 순간. 지팡이의 수정이 빠르게 팽그르르 돌아가기 시작했다. 갈루마가 본 글은 육체를 재창조하는 마법에 관한 것이었던 것이다. 고대 트리엔시라 왕국의 사람들은 일찍부터 마법수련에만 몰두해 정신은 발달해 있었을지 몰라 도 육체적 기능은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모든 기능을 태초의 상태 즉 태어난 상태 와 같은 상태로 바꾸는 마법이 생겨났는데 갈루마가 본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갈루마는 어쩌면 이 마법으로 하연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연의 육체를 태초의 순수한 상태로 바꿔 놓는다면 그러면 현재의 병마저도 없는 건강한 몸이 되지 않겠는가. 기쁨에 휩싸여 정신없이 그 마법주문을 외우던 갈루마는 그 주문이 오브젝트 마법이 아니라 스스 로에게밖에 걸 수 없는 마법이며 그것도 현자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 자 절망하고 말았다. 아무리 애써 가르쳐 주어도 마나를 모으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요 1서클 마법스펠조차 외우지 못 할 정도로 마법에 별 흥미도 없는 하연이 아니던가? 그런 하연에게 언제 마법을 가르쳐 현자를 만든단 말인가? 그런 갈루마의 절망을 모르는 하연은 또 다른 상상의 세계로 날아가고 있었다. 마법학원을 차려서 교장선생님이 되어 있는 자신, 마법상인이 되어 마법서들을 팔아 돈을 왕창 번 다음 나라를 하나 세워 여왕이 되어 있는 자신 등등. 그런데 그 때 갈루마의 한탄하는 말이 들려왔다. -이것들을 모두 가지고 나가 연구를 좀 해보았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가 없는 것이 아쉽군!- "왜?" 가지고 나가려고 로브를 벗어 그 위에 두루말이 종이들을 바리바리 싸며 하연이 건성으로 물었 다. -소용없는 짓이다. 용의주도하게도 모두 여기서 가지고 나가는 즉시 불에 타 없어지도록 마법을 걸어 놨어.- 순간 하연의 손에 들린 두루말이 하나가 땅에 떨어져 굴러나갔다. 하연은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 또한 책을 좋아해서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을 꺼리는 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신성한 책에 그따위 마법을 걸어 놓다니...... 어디까지나 하연은 훔쳐 가는 것 이 아니라 빌려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갈루마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굴러간 마법서는 석문을 나서자마자 금방 화르륵 불타 재가되어 버렸다. 한참을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하연은 맥이 빠져 털썩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3천만원짜리 복권에 당첨된 줄 알았는데 막판에 끝에 자리 수가 틀리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의 기분이랄까? 한숨만 요란하게 쉬던 하연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다시 눈을 번뜩였다. 그러고 보니 자신에게는 펜티엄까지는 못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486정도의 기능은 지니고 있는 똑똑한 현자의 지팡이 갈루마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갈루마~!" 느끼하게 자신을 부르는 하연의 말투에 갈루마는 갑자기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왠지 모를 불 길함과 함께. -......왜?- 하연은 재빨리 로브에 쌓아 두었던 두루말이들을 펼치고 그 위에 갈루마의 영혼이 들어있는 수정 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자, 외우는 거야, 갈루마! 지금이야말로 너의 현자로서의 능력을 보여줄 때인 거다. 그래서 우리 함께 대륙에 명성을 드높여 보자!" 흥분해서 외치는 하연의 말에 갈루마는 새삼 자신의 처지에 대해 비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다가 드래곤을 무찌르겠다고 칼링스타를 찾아가서 이 모양이 되었는지...... 미루엘은 대륙에서 가장 높은 하라마르트 산의 그림자 속에 존재한다는 전설의 미궁에 비견될만 한 미로가 바로 이곳일거라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벌써 한시간도 넘게 돌아다녔는데도 길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무슨 함정이 튀어나오 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 때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질문을 로베인이 던졌다. "미루엘, 정말 트레져 헌터가 맞아? 왜 길도 못 찾는 거야?" 같은 말이라도 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법이라던가? 리밍스나 사담이 할 때는 몰랐는데 로베인이 그 말을 던지자 미루엘은 불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형편없이 추락하고 있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그 불쾌감을 애써 무시하고 미루엘은 길 을 찾는데만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나 좀처럼 길이 있는 곳은 발견되지 않았고 이제는 미루엘 자신조차 초조해져서 다른 사람들 한테는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 한 벽을 자신이 발로 퍽! 차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러자 끼이익! 하는 기관이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벽이 돌아가며 새로운 벽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거대한 괴물들의 석상이 붙어있는. 순간 미루엘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외쳤다. "조심하십시오!" 로베인, 리밍스, 미루엘은 사담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그들 중 사담이 가장 강했기에 은연중 사 담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었다. 다음 순간 석상들의 눈이 마치 살아있는 괴물의 눈처럼 붉은 섬광을 발하더니 쿠쿠쿠쿠! 하는 진 동음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설마......!" 미루엘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골렘이란 말인가?' 속으로 삼킨 그 말의 비중에 미루엘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가고 있었다. 흐음~ 오늘 출판제의를 받았습니다. 기쁜 마음보다는 걱정이 더 듭니다. 아직 한권 분량도 되지 않는것 같은데...... 그리고 제 소설이 출판되어 책으로 나올만 하다고 생각되나요? 독자 여러분들의 의견을 좀 들어보고 싶군요. 흐음~ ...... 크크크 5번째다 말밥 당근 .........책으로 나와도 돼여~!!!! 3등이네.. 출판될만큼 잼있긴 하지만....넘 짧으니까 나중에 완결난 담에 출파해여........... 9등이네..기뻐라.ㅡㅡ;; 출판하신다면.... 기념으로 50연참 하시저....히히히 요즘나오는 허접판타지소설책보다는 훨 낮네용 용기을 가져용 ^^ ㅋㅋㅋ 출판 조티여... 출판을 위해 연참을 하시는게.... 연참이엽~~~~~~~~~~~ ㅠ.ㅠ 왜 이것밖에 없누~~~ ㅠ.ㅠ 그 출판사에서 운이 좋네여, 이런 소설을 발견하다뉘, 그런 의미에서 연참좀! 윗분들 의견에 찬성.. 출판은 완결댄담에..넘 느료... 내가 15등 안에 들아니...감격...그리구 출판 축하 그 출판사 잘알아보고 하세요....괜찮은 출판사라면 정말 축하드려염 출판되면 축카함니다. 그래도 출판은 완결이된담에하시죠.책기다리기가넘힘들어요. 타마하리트~출판되면 좋겠는데... 헤헤헤~ 미리미리 추카합니당~타마가 추카드려여~^^/// 타마하리트~출판되면 좋겠는데... 헤헤헤~ 미리미리 추카합니당~타마가 추카드려여~^^/// 출판이 되었으면 좋겠지만 한 반정도 연재한뒤 제의에 응하는게 났지않을지.... 오옷~ 축하드려욥...^^ 그러뉘.. 연참을...=_=; 축하드려요..하지만 위의 의견대로 연재를 많이 한뒤에 응하는게 낫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인터넷을 관리하십시오. 연재량이 많이 없을때 출판하면 일에 치여서 재밌는 글이 안되요.. 헤에....연재더 하구 출판~ >>ㅑ~! 출판!!! ㅊㅋㅊㅋ >>ㅑ~! 출판!!! ㅊㅋㅊㅋ 출판이라..출판 하시면..기념으로 한..100연참 정도..ㅋㅋ 출판사기 조심하세여 요즘 그런데 많아여..천리안에 출판관련 조언해주는 곳이 있다던데.... 출판은 좀...출판하시려면 퇴고하실때 감정과 배경묘사를 훨씬 많이 해주시길. 내용도 너무 가볍게 휙휙넘어가지 마시고 복선도 여기저기 깔고... 출판되면 소문 낼께여~~^.^ 출판되면 소문 낼께여~~^.^ 출판을 기념의루 연참을....ㅋㅋㅋ 아 글구 요즘은 하연이 별루 안아프네염? 하연이 아푼것두 잼있는데..커거걱 새디스트??ㅡㅡㆀ 하연은 아퍼야 한다?? 책으로 나와면 꼭 사드릴께여~ 출판 하신다면 어느 출판사? 요즘은 출판한다고 통신에 안올리기도 한다는데... 그럼 안되여...출판해도 이곳에서 아님 딴곳에서라도 연재는 하시길 출판사는 명상은 글이 통신에 없어서 싫어~~ 출판하시려면 연재속도를 늘리셔야 할듯.. -_-; 출판하신다뉘 ㅊㅋㅊㅋ 그참에 연참을!! 완결하신담에 출판하세여... 연제좀 더 하신뒤에 출판 하시는것이.... 미라클 하. 님 추카 드려여~출판하시게 된 거여~~★ 와 출판이라..요즘엔 주위에서 출판이 많이되는구나..흑 부러워..축하해여-이카르트 출판이라...졸긴 하지만 아무래도 100이상은 연재하고 생각해보시는 것이....흐음..ㅡㅡ 책 나오면.. 엄청나게.. 팔린다.. 돈 마니마니.. 받으세용.. ^^;; 출판출판~~!!!ㅋㅋ 출판제의~ 추카요~ 다음 글도 기다립니다.. 추카~ 책 나오면 꼭 사드릴게여..^^ 골렘은 돌에 시전자의 의지를 부여하는 마법의 산물이기에 미루엘 또한 골렘에 대해 말만 들어보 았지 실재로 존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 쿵! 쿵! 고막을 파열시킬 듯 요란한 굉음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저 거대한 존재를 거 부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었다. "저것들은 무엇이지?" 사담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미루엘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골렘입니다. 시전자의 의지가 무엇인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들의 살기로 보아 죽음일 가능성 이 클 것 같습니다." 로베인이 짜증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소리지?" 평소라면 로베인에 대한 불쾌감에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았을 미루엘이었지만 지금은 정신이 다 른 곳에 쏠려서인지 자세히 대답해 주었다. "골렘은 마법사가 부여한 의지의 산물이라 시전자의 뜻에 따라 골렘마다 그 역할이 각기 다릅니 다. 제가 알기로 고대 트리엔시라에서는 골렘을 성을 짓는데 사용했다고 들었습니다." 리밍스가 투덜거렸다. "젠장! 그럼 돌이나 나를 것이지 왜 여기 있는 거야? 트리엔시라의 왕성의 모습이 어땠을지 가히 상상이 가는군. 분명 돌덩이를 엉성하게 쌓아 놓은 모습일......." 그 때 사담이 리밍스의 말을 자르며 미루엘에게 물었다. "약점은?" 미루엘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모두 암담한 표정을 짓자 미루엘은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자신이 괜히 발로 벽을 차지만 않았어도 이런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사담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앞으로 나서며 말하는 것이었다. "싸우다보면 알게 되겠지." 미루엘은 사담이 차가운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언제나 말이 없고 무표정하기 때문이었다. 그 런데 여러 번 이처럼 자신의 마음을 써주는 말과 행동에 그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유난히 넓게 느껴지는 사담의 등을 보며 미루엘은 문뜩 그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하연은 그의 눈이 정말 예쁘다고 했었다. 정말 예쁠까? 그런 궁금증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며 미루엘은 어차피 이곳에서 죽기 것 죽기 전에 반드시 사담의 얼굴을 보고야 말겠다고 마음먹었다. 사담은 골렘을 노려보듯 주시하며 약점을 찾았다. 어떤 존재든 반드시 약점은 있기 마련. 하지만 돌로 이루어진 골렘의 약점이 어디인지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어쩌면 여기서 죽어 다시는 하연을 보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 생각에 불안으로 흔들리던 사담의 눈은 곧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언제 어디서든 침착하지 못하면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는 법 이라는 것을 이미 무수한 전투를 통해 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 사담의 눈에 골렘의 몸체에 미세하게 나있는 바위의 결이 포착되었다. 사담은 침착하게 검 을 내려트리며 천천히 호흡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호흡이 멈추는 순간 도약하듯 뛰어올라 그 결 에 검을 찔러 넣었다. 그러자 쩌억쩌억 골렘의 몸체가 부서져 내렸다. 그 모습에 미루엘은 입을 쩍 벌렸고 로베인과 리밍스는 환성을 올렸다. "우와!" "역시 대단한 인간이야!" 설마 이처럼 간단히 골렘을 처리해 버릴 줄은 그들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골렘은 모두 처리해 버린 거나 마찬가지라고 희희낙락해 하는 순간. 부서진 골렘의 돌덩어리들이 다시 빠르게 모여들며 원래의 모습을 회복해 가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암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셔버려도 다시 회복되어 버리다니...... 리밍스가 욕설을 퍼붓듯 외쳤다. "저것들이 무슨 트롤이라도 된 줄 알아? 왠 재생력이 저리도 좋은 거야?" "트롤은 약점인 심장이라도 있지! 저 돌덩어리들한테는 심장도 없을 것 아니야." 로베인이 한숨을 쉬듯 중얼거렸다. 미루엘도 이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 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담이 말했다. "겨우 이 정도로 포기하지 마라! 수십 번이라도 부셔버려 내가 시간을 벌 테니 어서 이곳을 벗어 날 길을 찾아봐!" 그 말에 미루엘도 그렇고 로베인과 리밍스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 이 정도의 일로 모든 것을 포기하다니 말이 안되지 않은가? 사담에게 그들에게 반말을 했다는 것 따위는 알아채지도 못한 채 로베인들은 다시 생존을 향한 전의를 불태웠다. 쿵! 쿵! 투두두둑! 사담이 잇달아 골뎀들을 부셔 버리는 것을 보면서 미루엘은 초조한 얼굴로 다시 길을 찾았다. 이 번에는 로베인과 리밍스도 벽이나 바닥을 두드려보면서 길 찾기에 나섰지만 미루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보다 더욱 상황이 악화될 일은 없을 테니까. 사담의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고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에 이르렀을 때였다. 미루엘은 바닥과 벽에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나 있는 선들이 결국 하나의 거대한 마법진이라는 사 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흔치는 않지만 다행이 몇몇 유적탐사에서 이 같은 마법진을 대한 적이 있 었던 미루엘은 재빨리 바닥에 그 선들을 축소한 모형의 그림을 대충 그려보고 마법진의 중심이 어디쯤인지 알아내자 동료들에게 환한 얼굴로 외쳤다. "찾았습니다! 이 쪽입니다." 미루엘은 사담과 골렘들이 대치해 있는 중간 부분을 가리켰다. 그 손짓에 재빨리 상황을 파악한 사담은 마지막 사력을 다해 골렘들에게 달려들었다. 퍼억! 처음과는 다르게 둔한 소리를 내며 사담은 골렘들을 부셔 내려갔다. 그 사이 미루엘은 재빨리 로베인과 리밍스를 이끌고 한 지점에 자리를 잡고 사담을 불렀다. "사담, 빨리 오십시오!" 사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제일 앞쪽에서 다가오는 골렘의 결에 검을 한 벅 박아 넣 고는 퉁겨지듯 뒤로 재빨리 물러나 미루엘들에게 이르렀다. 로베인과 리밍스는 도대체 길이 어디 있다는 건지 어리둥절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다른 곳과 전혀 다른 점이 없는 곳이었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부서졌던 골렘들이 다시 원상복귀 해 그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으니 그 중 가장 위험한 곳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런데 그 때 미루엘이 발로 바닥을 세 번 굴렀다. 그러자 그들의 눈앞에 흰빛이 번쩍이더니 눈앞 의 골렘들이 사라지고 거대한 돔 형식으로 된 지붕이 보이고 음습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기이한 석실 안에 들어서 있었다. 아무래도 새벽에 올리는 습관이 들릴 듯. 오늘도 새벽에 올립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하연이야기~~ 플리즈 그러니까 연참해줘요~~(문소리야??) 우와 2등이다 첨으로!!! 이거 넘 잼있는거 알죠? 출판~! -세미- 3등3등~~역시 마신은 잼이써~ ㅋㅋ 넘넘 재밌어여 !!! 켁5등이네염.. 출판 예기는 어찌된거신지??-_-?? 6등~! 넘 잼따..>.< ㄲ ㅑㄲ ㅑㄲ ㅑ~ 7등.....이넹....난 언제 1등 해 보나..잼써여..연참연참~!! 하연이 나오는 장면이 젤루 잼있어요... 연참연참 켁...8등~~ㅋㅋ...넘 잼이떠영~~ㅋㅋ 출판은??? 연참해여~ 연참연참연참연참연참연참...!!!!!!! 빨리빨리..우우...기다려진다.. 캬캬~!!연참연?연참~!! 넘 짧아여~ 연참~ 하연 이야기를 버구 싶어여 빨리~~~ 떨거지들 싫어욧!!! 우엥~~ 왜 하연은 안 나오구 저런 것들만 나오는 거얏!! 연참연참!!! 헐... 올라왔네~-타마하리트- 웅...머에여...궁금하게시리... 하하.. 넘넘 조아여 딱 1000번째~~~ 글고 넘 짧아여 "왠지 기분이 나쁜 곳인데......!" 리밍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산하고 차가운 한기가 뼈 속까지 치미는 기분이랄까? 사담은 이 느낌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바로 살기였다. 나를 잊고 오직 상대를 베어야만 하는 전쟁의 와중에서도 이처럼 강한 살기는 느껴보지 못했던 그는 온 몸이 바짝 긴장된 상태에서 주 위를 살폈다. 석실의 중앙에는 돌로 된 커다란 관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그 주위를 네 개의 머리는 개 의 형상을 하고 있고 덩치는 소 만한 괴물의 석상들이 지키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관에서 사담은 그 엄청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뭔지 모를 두려움 때문에 그들이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데 로베인이 갑자기 무엇인가에 홀린 듯 앞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로베인, 함부로 움직이면......" 깜짝 놀란 미루엘이 로베인의 팔을 잡았으나 로베인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그 손을 뿌리치 고 관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네 개의 괴물의 석상이 있는 곳을 지나쳐 그가 관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네 개의 괴물의 석상이 그 자리를 바꾸듯 오른쪽으로 조금씩 움직이더니 돔 형식의 지붕이 마치 꽃이 개화하듯 조금씩 열리며 그 사이로 달빛이 들어와 관을 비추는 것이었다. "으악!" 그 때서야 무엇인가에 홀린 듯한 로베인이 제정신으로 돌아오더니 일행들과 떨어져 관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에 경악과 공포로 일그러졌다. "뭐, 무슨 일이야?" 그 때였다. 어둠이 속삭이는 듯 어둡고 거대한 힘을 지닌 듯한 자의 음성이 들려온 것은. [마법사의 자질을 지닌 자여! 너의 몸을 나에게 다오. 그 대가로 네가 가장 원하는 것을 주겠다!] 그러더니 관속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며 로베인의 온몸을 휘감아 돌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으으...... 으아악! 크흐......" 마치 온몸을 벌레들이 기어다니며 물어뜯는 것 같은 느낌에 로베인은 자신도 모르게 커다란 비명 을 지르고 말았다. 그 소리에 사담이 로베인을 구하기 위해 뛰어 들었으나 마치 네 개의 괴물 석상들이 어떤 방어 막 을 친 듯 사담을 퉁겨내 버리는 것이었다. 로베인은 괴로웠다. 누군가가 자신의 뇌 속에 침입해 들어오는 느낌이랄까? 그 누군가가 속삭였 다. [거부하지 마라. 네가 가장 바라는 것을 생각해라. 그것이 네 것이 되는 순간을.] 순간 로베인은 하연을 떠올렸다. 자신을 향해 다이아스의 꽃이 피듯 환하게 웃던 하연. 그 모습과 함께 로베인은 서서히 의식을 잃어갔다. 그 때 지하서고에서 갈루마로 하여금 마법서를 외우도록 종용하고 있던 하연은 갑자기 이상한 느 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하연?- "응? 아, 이상해서...... 갑자기 날 이곳으로 끌어당기던 소리가 사라져 버렸어." -뭐?- 사담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넋을 잃고 말았다. 어느새 관속에서 나오던 검은 연기가 로베인의 몸 속으로 스미듯 사라져 버리더니 로베인의 머리 색이며 눈 색이 검은 색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로베인이 그 까만 눈으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로, 로베인!" 미루엘은 더듬거리며 로베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로베인이 고개가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 몸의 이름이 로베인인가?] 마치 자신은 로베인이 아니라는 듯한 그 말에 미루엘과 리밍스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사담이 그에게 검을 겨누며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넌 누구냐?" [...난 슈마! 트리엔시라의 왕이자 이 대륙을 지배할 지배자가 바로 나다.] 경악과 황당함으로 멍하니 자신을 보는 자들을 돌아보며 슈마는 고민했다. 저들을 어찌 처리하는 것이 좋을까. 근 이 천년동안 이곳에 봉인된 상태로 있으면서 슈마는 이미 가루가 되어 흩어져버린 자신의 육 체를 대신할 그릇을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로베인이 나타난 것이다. 그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 하룬 산으로 모험과 보물을 찾아 들어왔지만 로베인처럼 마법사의 재능을 타고난 자는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노력만 하면 누구나 마법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 았다. 마법은 재능이었다. 재능이 없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뛰어난 마법사가 되기는 불가능한 것 이다. 때문에 몇몇 그가 있는 곳까지 이른 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을 그릇으로 선택하지 않고 대신 그들 의 정신에 그의 의지를 심어 언젠가 그가 세상에 나갔을 때 대륙의 지배자가 될 수 있는 기반을 다지도록 명하는데 그쳤던 것이다. 슈마는 저들 또한 자신의 의지를 심어 인형으로 만들어 버릴까 하다가 아직 로베인의 육체와 동 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함부로 의지의 힘을 쓰다가는 그릇이 무너져 버릴 위험이 있어서 그냥 죽 여버리기로 결심했다. 이 곳까지 이른 저들의 능력으로 볼 때 언제가 저들이 그의 일에 방해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비상!" 위로 높이 솟아 오른 슈마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봉인되어 있던 그 수많은 시간을 보여주 듯 화려하고 웅장했던 트리엔시라의 왕성과 그 주위 사방으로 널리 발달해 있던 도시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나무들로 빽빽이 들어차 그 사이로 언뜻 돔형의 갈라진 지붕만이 보일 뿐이었 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슈마는 그 오랜 세월 곱씹어 왔던 자신의 야망이 모두 허망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어린 조카를 죽이면서까지 이루려했던 야망이었다. 죽음조차도 받아들이지 않고 이 세계 에 머물며 끝없이 갈구했던 야망. 혼대륙의 지배자가 되는 그 야망을 슈마는 결코 포기할 수 없었 다. 때문에 나약해져 가는 자신의 의지를 붙잡듯 으스러지도록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펼치며 슈 마는 하룬 산 정상을 향해 중얼거렸다. "파이어 스톰!" 주문도 없이 바로 발휘되는 마법. 용언마법이자 인간으로서는 결코 이룰 수 없다는 11서클의 마 법이 지금 바로 그의 손에서 펼쳐진 것이었다. 순간 불의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더니 콰콰콰쾅! 하고 하룬 산이 무너져 내리며 언뜻 보였던 돔형 의 지붕이 흙더미 속에 완전히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슈마는 텔레포트 해 그 자리에서 어디론가 이동해 버렸다. 며칠 안들어가지더니 드디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참, 오해하고 계신 분들이 많은것 같은데 출판 제의를 받았을 뿐 계약을 한 것은 아닙니다. 계약을 한다고 해도 아직 출판되려면 멀었지요. 이 연재속도로는.....ㅠ.ㅠ 2틀만에 첨들어왔당 T^T ㅋㅋ 재밌어여 2덩이당~~` 와!!! 내가 1등이당!! 조회수로는 5등인데... 넘 재밌었요.-유리구슬~★- 앗!!! 내가 처음으로 썼는뎅... -유리구슬... T.T 들어오자 마자 이 글을 읽게 되다니..ㅠㅠ 넘 기뻥~ 20등안에 들었당 ㅠ.ㅠ 훌쩍..ㅠ.ㅠ 더 저거주세여.ㅠ.ㅠ 넘 잼써여..ㅠ.ㅠ 우우.. 기뻐라.. 짧아..짧아...흑 더 줘여.~~ -이카르트 ㅡ_ㅜ 으읔.. 넘 잼써염~!!! 300등!! 그나저나 유지님~!! 원츄~ >_< 잼따...20등안이다... ㅋ.ㅋ 눈물나게 잼 있따~~☆ 쿠쿠...계약하고 출판하려면 설쓰는라 죽을걸여? 맨날 출판사에서 독촉멜이 날라오지여... 미치지요~ 이세상이 증오스러워질겁니다 ㅋㅋㅋ 간만이네요 파팅 진짜루 늦게 쓰시는 군여~~~ 넘넘 기다렸어여 ㅠㅠ 아 연참을 오랜만 이신데... 아~~ 제가 좋아하는 하연은 한번밖에........;; 음...졸려서 정신이 엄따...낼 다시 읽어야지....ㅡㅡ^ 후후훗~ 근성인 것이다!! 왜케 마나?? 빨랑빨랑 미~치~인~년~ 우헤헤 첨쓴다,,,잼있엉~!~ ㅡ그니- 갈루마가 열심히 마법서를 외우고 있는 동안 하연은 공상에 빠져 있었다. 나라를 세우면 하연국이라고 할까? 한국이라고 할까? 오래 산만큼 아는 것도 많을 테니 카리스는 재상으로 삼고 사담은 친위대장으로 삼는 것이 좋겠지? 그런 생각들로 하연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갑자기 머리를 강타하는 두루말이들로 인해 그녀의 몽상은 처참하게 깨어지고 말았다. 회초리와 몽둥이에는 맞아보았지만 두루말이에 맞아 보기는 처음인 하연은 화가 나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천장 벽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하연은 창백하게 질린 채 다시는 부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카이람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고 말았다. '카이람!'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는데도 또 다시 강제 소환을 당하자 카이람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래서 이번에야 말로 소환자건 뭐건 죽여버리고 말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나타났는데 하연이 천장에 깔려 죽을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 놀란 카이람은 하연을 죽여버리겠다던 생각도 잊어버린 채 재빨리 하연을 구해내 트리엔시라 왕궁의 지하미로를 빠져 나왔다. 무너져 내려 완전 흙더미로 변해버린 하룬 산의 정상을 보며 카이람은 어쩌면 자신의 소환자인 하연이 저 흙더미에 깔려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하연을 그런 상황에 처하도록 방치해 둔 데바와 바토르에게 무시무시한 분노를 불태우지 않을 수 없었다. 카이람은 억지로 목소리를 누그러트리며 품속의 하연에게 물었다. [하연, 괜찮으냐?] 대답이 없어 이상해서 내려다보니 하연은 충격 때문인지 기절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갈루마를 꼭 움켜쥐고 있는 하연을 내려다보며 카이람은 새삼 하연이란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는 하연이란 인간에게 약했다. 그녀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줄 정도로. 어느 마신이 게임 CD몇장으로 계약을 하고 시종으로 마왕을 두명이나 붙여주겠는가? 그것은 단순히 하연이 자신을 최초로 소환해 낸 인간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안에서 붉게 타오르는 너무도 밝고 순수한 생명의 불꽃 때문이었다. 언제까지나 그 불꽃을 보고 있고 싶을 정도로. 그래서였다. 손쉽게 그녀의 생명을 연장시켜줄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녀의 생명에 자신의 힘을 불어 넣어주지 않았던 것은. 그로 인해 그녀의 생명의 불꽃이 조금이라도 탁하고 어둡게 변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자신을 조소하듯 피식 웃으며 카이람은 하연을 살며시 품에 안고 중얼거렸다. '깨어나기만 하면 이번에는 게임 CD 몇 장 따위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큰 대가를 요구하고야 말겠어. 그러니 어서 깨어나라고, 하연.' 정신이 들었을 때 하연은 자신이 누군가의 품이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누군가의 품에 이렇게 안겨보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하연은 그 품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한층 더 품속으로 파고들며 중얼거렸다. "따뜻해!" 누구라도 좋았다. 잠시만이라도 이렇게 위안 받을 수 있다면...... 그러나 곧 살며시 자신의 등을 쓰다듬어주는 손길에 정신을 차린 하연은 몸을 뒤로 빼며 자신을 안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했다. 붉고 긴 머리에 붉은 눈. 그리고 검은 피부의 마족의 형상을 하고 있는 대 마신 카이람. 바로 자신을 안고 있던 존재가 그라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하연은 당황해서 어색한 미소를 짖지 않을 수 없었다. "...어, 저...... 부를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말이야. 무의식중에 나도 모르게, 그냥 저절로 말이야......" [됐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짐작한 카이람은 하연의 말을 잘랐다. 한번만 더 부르면 데바와 바토르를 소멸시켜 버리겠다는 협박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카이람도 이번만큼은 하연이 무슨 말을 하든 그들을 용서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들은 감히 자신의 소환자인 하연을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카이람이 그들을 용서한 것이라고 생각한 하연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데 갑자기 하룬 산 정상을 뒤덮고 있던 흙더미의 한쪽에서 요란한 폭음이 울리더니 땅속에서 몇몇의 인간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놀라서 자세히 그들을 쳐다보고 있던 하연의 얼굴에 빠른 속도로 반가움이 퍼져 나갔다. 그들은 로베인을 뺀 하연의 나머지 일행들인 사담, 미루엘, 리밍스, 그리고 카리스였던 것이다. 반갑게 그들을 부르며 다가오는 하연의 모습에 그들 또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연?" 하연의 무사한 모습에 그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앞에서 하연을 놓쳐버렸던 카리스의 반가움이 제일 컸다. "살아있었군요." 카리스의 말에 하연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다른 일행들이 카리스와 함께 여기서 나오는 거지요?" 그 질문에 대답한 것은 미루엘이었다. "우리는 동료가 아니었습니까? 하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서 우리를 떠날 수 있었던 건지 몰라도 우리는 하연을 동료로 생각했기에 하연을 찾으러 이곳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다 이런 변도 당한 거고요. 젠장, 살아서 관속 구경을 다 할 줄이야!" "하연, 우리는 종족의 평등한 미래를 위해 함께 어려움을 같이 하기로 했잖아? 그런데 우리를 버리고 떠나다니 이럴 수가 있는 거야?" 투덜거리는 미루엘과 리밍스의 말에 하연은 겸연쩍게 웃었다. 그런 하연을 보며 사담이 말했다. "다시는 우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대신 우리도 하연이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같이 가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놀라 하연은 멍하니 사담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긴장한 얼굴로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릴 뻔했다. 하지만 억지로 눈물을 참고 환하게 웃으며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응! 이제 떠나지 않을게. 그런데......" 그러고 보니 가장 호들갑을 떨며 그녀를 맞아야 할 로베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로베인은?" 하연의 물음에 사담들은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설마.......!" 창백한 얼굴로 하연은 무너져버린 하룬 산의 정상을 바라보았다. 로베인이 그 속에 묻혀 있다고 생각하니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막 눈앞이 흐려지려고 하는데...... "아닙니다! 로베인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하연의 오해를 막기 위해 미루엘이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빠르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막 천장이 무너져 내리기에 급한 대로 저희들은 그 관속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그 속에서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는데......" 그 말을 하면서 미루엘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다행이 그 때 카리스님이 나타나셔서 저희들을 구해주어 무사히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예기를 들은 하연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그 모습에 사담들은 어떻게 하연을 위로해야 좋을지 몰라서 당황했다. 그녀가 로베인의 생각하는 마음이 특별하다는 것을 잘 아는 만큼 지금 그녀의 괴로움과 슬픔이 어떨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으아악! 로베인, 그 못된 녀석! 그런 멋진 역을 맡다니....... 그 역은 원래 내 건데, 그 녀석이...... 대륙의 지배자는 나 같은 사람이 되야 하는 것 아니야? 그런데 그 녀석이...... 으아! 분통터져!" 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하연을 보며 사담들이 기가 막혀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데 하연이 지팡이를 꽉 움켜쥐며 그들에게 재촉하듯 말하는 것이었다. "어서 출발해요! 빨리 빨리 서두르자고요!" "어디로......?" 불길한 느낌을 감추지 못하고 카리스가 묻자 하연이 무슨 그런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 단호한 어조로 말하는 것이었다. "로베인을 찾아 가야죠! 그래서 그 슈마인지 뭔지 그 눈삔 놈을 만나 날 선택하지 않고 로베인 따위를 선택한 걸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겠어요." 의욕에 불타서 성큼성큼 산을 내려가는 하연의 뒷모습을 보며 사담들은 피식피식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그리고 곧 하연을 뒤를 따라 서둘러 내려갔다. 그녀의 말대로 그 눈삔 놈을 찾아 로베인을 선택한걸 후회하게 만들기 위해. 게시판 바뀐 후, 처음으로 올리는 글이군요. 흐음~ 좀 어색하긴 하네요.^-^ 흥분해서 내려가는 하연의 뒷모습을 보며 하연의 일행들은 식은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자신들의 뒤를 터벅터벅 따라오며 하연을 무섭게 쏘아보고 있는 마신 카이람 때문이었다. 로베인의 예기를 듣고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식으로 속이 끓어 완전히 카이람에 대해 잊어버린 하연 때문에 그들 사이에 낀 하연의 일행들은 카이람의 분노가 자신들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수십 번 넘나들고 있는 기분을 맛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새삼 하연의 무신경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족도 아닌 마신의 살기 어린 시선을 아직까지 눈치채지 못하다니. 얼마 후, 더 이상 카이람의 분노 어린 시선을 견디지 못한 미루엘이 슬쩍 하연의 곁으로 다가가 가볍게 그녀의 로브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의아해서 돌아보는 하연에게 슬쩍 턱으로 카이람을 가리켜 보았다. 그제서야 카이람의 존재를 눈치챈 하연. "어? 아직 안 돌아가고 여기서 뭐해? 게임하느라고 언제나 바쁘신 대 마신께서." 하연은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말이었다. 그렇지만 듣는 카이람에게는 비꼬는 말로 들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카이람은 안색이 검붉어지며 으르렁거렸다. [이래서 인간들이란 아무리 잘해줘도 소용이 없다니까. 기껏 구해줬더니 나 몰라라 하고......]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지!" 뻔뻔한 하연의 말에 오히려 카이람보다는 하연의 일행들이 더 어처구니 없어하는 표정이었다. 카이람은 이를 으드득 갈며 말했다. [그러니 대가를 받아야겠지?] "무슨 엉뚱한 소리야? 대가라면 벌써 받았잖아?" 대가를 언제 받았다는 말인가? 기가 막혔지만 카이람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 그런데 카이람보다 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짖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하연이었다. 하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이, 이럴 수가! 엄마가 남자는 다 도둑 놈이라더니 역시 그 말이 맞았어! 좀 전에 있었던 일인데 그 일을 벌써 잊어 버렸단 말이야?" [무슨 일?] "하룬 산 정상, 그 폐허 속에서 이루어졌던 우리의 그 강렬한 포옹을 벌써 잊었단 말이야? 그 때는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들어줄 것처럼 굴더니...... 그래서 내 마음을 설레이게 만들어 놓고는 이제 와서 모른 척 구해준 대가를 요구하다니......" 로브 자락으로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며 하연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소리에 기가 찬 듯 갈루마가 말했다. -허! 요물이 따로 없다니까!- 사담은 물론 하연이 울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연이 울고 있다면 분명 그 기이한 향기가 퍼져 그들의 이성을 마비시켰을 것이 분명하니까. 그럼에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진 채 카이람을 쏘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카이람은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너, 너... 너!] "처음 만났을 때 순결한 처녀가 좋다느니 어쩌니 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몸 주고 마음 주면 됐지 뭘 더 바라는 거야, 카이람?" 그러면서 하연이 카이람에게 다가서자 카이람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더니, [으아아악!] 정체불명의 비명소리를 남기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하연은 피식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마신 주제에 순진하기는!" 그런 하연을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던 일행 중 카리스가 물었다. "하연, 지금 방금 전에 그 말이 무슨 뜻입니까? 진짜 카이람님과......" 긴장해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담, 리밍스, 미루엘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리스를 보던 하연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장난이었어요." 그 말에 그들은 어이가 없어서 그냥 웃고 말았다. 하지만 그냥 웃으며 지나칠 수 없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카이람이었다. 그러기에는 그가 받은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컸던 것이다. 존재한 이후, 이런 희롱을 당하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감히 마신을 희롱할 자가 누가 있었겠는가? 도저히 억울함을 참지 못한 카이람은 공간의 저편으로 가 흙더미에 묻힌 트리엔시라 왕국의 지하를 헤매고 있던 두 마왕인 바토르와 데바를 소환했다. 바토르와 데바는 눈앞에 서 있는 카이람의 모습에 사색이 되었다. 하연이 카이람님을 소환했을지도 모른다고 어느 정도 짐작하긴 했지만 막상 그 짐작이 현실로 다가오자 생각과 현실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한번만 더 하연이 날 소환하면 너희들은 그 순간 소멸이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내 말을 우습게 들었단 말인가?] 바토르와 데바는 헬쓱한 얼굴로 변명했다. "마신이시여! 저, 저희들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그렇습니다. 갑자기 그 인간이 저희들의 앞에서 사라져버린 지라......" 카이람은 그들의 변명을 더 이상 들어주지 않았다. 그의 긴 붉은 머리채가 마치 붉은 노을처럼 그의 주위를 덮더니 살기를 드리운 채 바토르와 데바를 휘감았다. "으... 으아아악!" "허억! ......크으윽!" 바토르와 데바가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점점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느긋하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보고 있던 카이람이 마침내 손을 들어 완전히 그들을 소멸시켜 버리려던 순간이었다. 왜 그 순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소환한 이유에 대해 변명하던 하연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일까? 망설이던 카이람은 이내 내팽개치듯 바토르와 데바를 던져버리고 그들을 휘감았던 머리카락을 풀었다. 그러자 컥컥거리며 바토르와 데바가 의아한 얼굴로 카이람을 바라보았다. 왜 자신들을 소멸시켜 버리지 않고 살려주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던 것이다. 카이람이 말했다. [너희같이 능력이 없는 것들이라도 자신으로 인해 소멸 당했다는 것을 알면 하연이 슬퍼할 테니 우선은 살려주겠다. 항상 명심해라, 너희들은 하연에게 빚이 있다는 것을!] 그러면서 사라져버린 마신이 있던 공간을 바토르와 데바는 한참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 그들의 얼굴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이 이상야릇한 것이었다. 어쨌든 그들은 마왕이면서 인간에게 목숨 빚을 진 것이다. 카이람과 하연의 커플링 아니면 카리스와 하연의 커플링인가요? 흐음~ 사담과 맺어졌으면 하는 분도 있는 것 같은데 로베인과 맺어졌으면 하시는 분들은 한분도 없는 것 같군요. 불쌍한 로베인. 어쩌다가 이리도 인기가 없게 되었는지..... 윽! 맞습니다. 모두 제 탓이지요.ㅠ.ㅠ 하룬 산을 내려간 하연 일행은 미도아 강 유역에 이르렀다. 미도아 강은 상당히 폭은 넓고 급류가 흐르는 강으로 물결이 바위에 부딪쳐 물보라가 일면서 그 때마다 무지개로 다리를 이루는 아름다운 강이었다. "와아!" 하연은 감탄사를 터트리면서 급히 강가로 다가가 물에 손을 넣어보았다. 차가운 물이 산을 내려오는 동안의 힘든 피로를 씻겨주는 듯 상쾌했다. "로베인! 이것 봐! 물이 아주 시원해!" 고개를 돌려 활짝 웃으며 말하던 하연은 순간 굳어져 버린 일행들의 표정을 보고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더 이상 로베인은 없는데...... 분위기가 어두워지려고 하자 화제를 바꾸려는 듯 리밍스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하연, 너 아직 한번도 인어 뱃사공 본 적이 없지?" "인어 뱃사공?" 하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인어 뱃사공이라니? 하연뿐만 아니라 다른 일행들도 모두 놀라서 리밍스를 바라보는 가운데 리밍스가 설명했다. "그래. 이 곳 미도아 강은 물길이 빠르고 거세 다른 종족들은 배를 조종할 수 없었다더군. 그래서 예로부터 인어들이 강을 건너 준다고 들었어." "정말?" 갈루마가 말했다. -그건 사실이다. 고대 트리엔시라의 마법사들은 여러 종족들을 거느렸는데 그 중 인어들을 미도아 강의 파수꾼으로 삼았다고 <고대 마법왕국 트리엔시라로 가는 길>이라는 책이 쓰여 있었지.- 하연과 미루엘은 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인어를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자 의아해서 리밍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리밍스는 희죽 웃으며 강가에 서서 외쳤다. "미도아 강의 파수꾼이여! 여기 강을 건너고자 하는 자가 왔으니 물길을 열어다오!" 그러나 좀처럼 기다려도 미도아 강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에 하연의 얼굴에 실망의 기색이 어릴 즈음 갑자기 미도아 강에 커다란 물보라가 일며 두 개의 인어의 꼬리로 보이는 것이 서서히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긴 금발의 푸른 눈. 진주같이 고운 피부를 지닌 아름다운 인어 여인과 해초같이 칙칙한 녹색머리에 붉은 눈을 하고 날카로운 이빨이 나 있는 괴물같은 모습의 남자 인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인어 여인은 하연 일행을 특히 카리스를 보더니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의 손님이라 늦은 걸 용서해주세요. 어디까지 가시죠?" 리밍스가 말했다. "미도아 강 하류까지 부탁하오!" 인어 여인은 리밍스를 보더니 이채를 띄었다. 그녀가 아는 인간들 즉 고대 트리엔시라인들은 대체로 지위가 높은 자들만이 드워프의 용사를 경호원으로 삼아 데리고 다녔다. 때문에 드워프 용사 리밍스와 함께 있는 이들이 평범한 인간들은 아니라고 생각되어졌던 것이다. 이에 인어 여인은 아쉬운 눈길로 카리스를 보았다. 카리스의 아름다움에 반한 인어 여인은 카리스를 납치해 한동안 데리고 놀려고 했는데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로 인어 여인은 못생긴 인어 남자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인어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속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뗏목 같은 것을 어깨에 매고 나타났다. 인어 여인이 말했다. "어서 타세요." 그러나 하연 일행 중 누구도 선뜻 그 뗏목 위에 타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 다섯이 앉으면 꽉 찰 것 같이 작은 뗏목으로 저 거센 급류의 강을 헤쳐 나갈 수 있을지 불안했던 것이다. 그러자 인어 여인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되요. 이 뗏목은 밸런스 마법이 걸려 있어서 어느 순간에도 균형이 잡히도록 되어있으니까요." 그 말에 먼저 카리스가 다음으로 사담, 미루엘, 리밍스가 올라타고 마지막으로 하연이 카리스의 손을 잡고 뗏목위로 올라탔다. 불안해하던 하연은 올라타자 조금도 비틀거리지 않는 자신의 몸에 어느새 불안감은 사라지고 신기한 마음에 들떠 뗏목 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와! 정말 흔들리지 않네." 어린 아이 같은 하연의 행동에 일행들의 얼굴에는 자연스럽게 미소가 떠올랐다. 뗏목은 거센 급류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인어 남자가 끄는 대로 유유히 급류를 헤쳐나갔다. 그 가운데 인어 여인은 살짝 뗏목에 기대어 카리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노골적인 인어 여인의 시선에 카리스가 어색해하자 인어 여인은 작게 웃으며 뗏목 주위를 한바퀴 돌더니 카리스의 곁에 자신의 물기에 젖어 아름다운 벌거벗은 상체를 비스듬히 뉘이며 말했다. "전 루아라고 해요. 그 쪽은 이름이 뭐지요?" 카리스는 가볍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전 카리스라고 합니다, 인어 아가씨!" 인어 루아는 카리스의 말에 까르르르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라니...... 기분은 좋군요. 하지만 저희가 이곳 미도아 강을 지킨 지 벌써 만년이 넘었다는 것을 아시나요? 저희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늙고 싶어도 늙지 못한 채 언제나 이곳 미도아 강을 지키며 누군가 우리를 불러주길 기다려야 한답니다." 그 말속에 긷든 깊은 절망감 때문에 하연은 멈칫 움직임을 멈추고 루아를 돌아보았고 민망한 느낌에 루아를 피하던 다른 일행들도 모두 루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루아는 어디까지나 카리스를 보며 고혹적인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제가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 몸이 욕심나지 않으세요? 원한다면 드리겠어요, 어때요?" 여기 의견란 10개 이상은 올려지지 않는 모양이에요. 여러분들의 의견이 자꾸만 사라지고 있어서 정말 슬프군요. ㅠ.ㅠ 참, 그리고 출판계약 했습니다. 책으로 나올려면 아직도 멀었지만 말이에요. 그래서 앞으로 열심히 써서 올릴거구요. 여러분들이 의견 보내주시면 반영해서 수정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작성자 [ 유지 ] - 2001년 03월 04일 오전 01시 40분에 남기신 글 ⓝ 마신 소환사 -62- 조회수 [ 32 ] 카리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유감스럽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당신의 남편이 저희들을 이 미도아강 속에 쳐 박아 넣을 것 같아서 안되겠는데요?" "쳇!" 루아는 기분을 잡쳤다는 듯 샐쭉한 표정으로 물속으로 뛰어 들더니 묵묵히 뗏목을 끌고 헤엄쳐 가고 있는 남자 인어에게로 갔다. 미루엘이 약간 머뭇거리다가 카리스에게 물었다. "저 둘이 정말 부부입니까?" 왠지 자신을 피하는 것 같던 미루엘이 말을 걸어오자 카리스는 은근히 반가웠으나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네.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아 보이지만 말입니다." 하연도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남자를 서슴없이 유혹하는 아내와 그런 아내를 내버려두는 남편이었으니까. 그런데 갈루마가 말하는 것이었다.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어종족들은 여성체는 아름다운데 비해 남성체는 추하고 그 숫자가 극히 적기 때문에 인어들의 생식기에 들어서면 남자 인어는 많은 여자 인어들을 상대하다 정기가 고갈되어 죽어버리거나 임신한 여자 인어들의 먹이가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을 보면 저 루아라는 인어에게 저 남자인어가 어떤 의미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지.- 그런 말을 들어서일까? 루아라는 인어가 힐끗 남자 인어를 바라보는 시선이 왠지 애틋하게 느껴지는 것은. 빠른 물결을 따라가는 동안 점점 강의 폭이 넓어지고 혼 대륙 최대의 강이자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마라브르 강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남자 인어가 어깨에 맨 뗏목을 놓아버리고는 미친 듯이 헤엄쳐 마라브르 강으로 뛰어들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어는 마치 어떤 벽에 부딪친 듯 퉁겨져 나오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한동안 그 처절한 몸부림을 지켜보던 루아라는 인어가 진주 같은 눈물을 떨구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우우우! 우우우우!" 성량이 풍부한 그 노래 소리는 천지를 뒤흔들고 하연들의 마음과 미도아 강에 커다란 파문을 만들었다. 알아듣지도 못할 그 기이한 인어의 음성이 하연의 귀에 결코 멈출 수 없는 무언가를 향한 갈망으로 들리는 것은 왜일까? 어쩌면 그것은 하연 자신의 마음에 커다란 갈망이 자리잡아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삶에 대한...... 이러다 루아의 목이 쉬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될 때쯤 드디어 남자 인어가 마라브르 강으로 뛰어드는 것을 포기한 듯 다시 루아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루아도 노래를 멈추었고 둘은 한동안 말없이 포옹했다. 이 모든 것이 무슨 일인지 몰라 하연 일행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미루엘이 무엇이 생각났는지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랑디아의 아바드라는 마을에 일년에 한번씩 인어의 노래가 들려온다고...... 그럼 일년에 한번씩 이런 일이......" 그 말을 듣자 하연은 왜 그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지 그 이유를 꼭 듣고 싶어졌다. 그래서 인어들이 다가오자 물었다.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들어볼 수 있을까요?" "사연...... 훗!" 루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연이랄 것도 없어요. 휴와 난 그저 바다가 그리운 거예요. 바다는 우리들의 고향이니까." 그러면서 미나브르 강 쪽을 바라보는 루아의 눈에는 엷은 물기가 어려있었다. 만년이 넘는 세월동안 저 인어들은 이렇게 끊임없이 바다를 그리워하며 발버둥치고 울었던 것 같다. 하연은 가슴이 저렸다. 저들을 위해 무언가 해 줄 수 있다면...... 그렇게 생각한 하연은 카리스에게 물었다. "카리스, 카리스는 마법사니까 어떻게 저들을 바다로 가게 해 줄 수 없을까요?" 그 말에 인어들이 재빠른 반응을 나타냈다. 그 때까지 말이 없던 휴가 입을 열 정도로. "마법사이십니까? 부디 저희들을 이 속박에서 풀어주십시오." 그 말에 카리스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망설이다가 말했다. "속박에서 풀어 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속박에서 풀어 줄 수 있다는 말에 기쁜 표정을 짓던 인어들은 카리스의 하지만이라는 말에 불안한 표정이 지으며 카리스를 쳐다보았다. 카리스가 무언가 그들에게 대가를 원할 거라고 생각한 듯. 그들이 미도아 강에서 파수꾼 노릇을 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한 마법사에게 그들이 같이 있을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부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받아들인 일이었던 만큼 그들의 불안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카리스의 말은 그들의 생각과는 달랐다. "......하지만 그 순간 여러분들은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만큼 빠르게 늙어 죽어버릴 것입니다." 순간 굳어졌던 루아와 휴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휴가 루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만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살았으니까요. 보통 인간들이 말하는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요. 게다가 함께 늙어 죽을 수 있다니 저희에겐 이 이상의 축복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망설이지 마시고 저희들을 이 속박에서 풀어 주십시오." 카리스는 그래도 좋을지 몰라 하연을 바라보았다. 하연이 원하는 것은 이런 것이었을까? 하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리스가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릴리스!" 그러자 카리스의 손에서 은빛의 빛 무리가 소용돌이치더니 그 빛 무리가 공중에 떠올라 인어들의 주위를 돌다가 번쩍 하는 섬광과 함께 흩어져 버렸다. 그와 함께 들어 난 인어들의 모습은 카리스의 말대로 늙어가고 있었다. 루아의 그 아름답던 피부가 마치 거북의 등 껍질처럼 쩍쩍 갈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용히 손을 마주잡은 그들의 모습은 무척 아름답게 보였다. 휴가 루아에게 속삭였다. "이제 돌아가자!" 루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휴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저 멀리 지는 붉은 석양빛을 받으며 그들을 그렇게 늙고 결국에는 먼지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묵묵히 끝까지 그 모습을 지켜본 하연이 중얼거렸다. "......잘한 일일까? 잘된 일이겠지. 하지만......" 어쩐지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수 없는 하연 일행이었다. 네, 이정미님의 로베인은 절대로 안돼!! 라는 폭주메일 잘 받았습니다. 다른 분들의 로베인은 싫어라는 의견도요. 그러자 왠지 로베인과 연결시켜 버리고 싶다는 욕구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것이...... 날짜에 쫓겨 사악버전으로 가고 있는 유지였습니다.^-^ 그들이 아바드에 도착한 것은 사방이 완전히 어둠에 잠길 때쯤이었다. 밤인데도 마을은 여기저기 흥청망청 북적거렸고 사람들도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리저리 묶어갈 곳을 찾던 하연 일행은 한 여관의 이름 앞에서 모두 짠 듯 멈춰 섰다. 그리고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여관의 이름은 바로 인어의 노래였던 것이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자 요리를 나르고 있던 한 아가씨가 손님을 맞아 웃는 얼굴로 인사하려다가 카리스와 하연, 미루엘의 얼굴을 보더니 놀라서 멍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이렇게 아름답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세 명씩이나 보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뭘 멍청히 쳐다보고 있냐, 인간 여자? 어서 안내해라!" 하연 일행 외에 인간들을 처음으로 대하게 된 리밍스가 불안과 긴장으로 신경질적인 음성으로 소리쳤다. 그 소리에 멍해 있던 데리아는 정신이 번쩍 들어 자신에게 소리친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소리친 장본인이 드워프라는 사실을 확인한 데리아는 더욱 놀라고 당황해서 급히 하연 일행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빠르게 말했다. "귀, 귀하신 분들이 이처럼 왕림해 주시다니 영, 영광입니다. 저, 묵어 가시겠습니까? 방은 몇 개나 드릴까요? 식사는......?" 먹고 마시고 있던 다른 손님들도 그 소리에 어떤 귀족 나부랭이들이 왔나 싶어 힐끗 하연일행에게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시선을 돌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시선이 집중되자 리밍스의 긴장이 더욱 고조 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하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아가씨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다른 일행들은 리밍스의 존재가 그들을 귀족으로 오인 받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은근히 눈살을 찌푸렸다. 카리스는 인간의 계급이란 것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미루엘과 사담은 체질 상 귀족들과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루엘이 말했다. "저희들은 귀족이 아니라 그저 이곳저곳 떠도는 여행자들입니다.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리고 이 분은 노예가 아닌 저희들의 동료입니다." 그 말에 주춤거리며 고개를 든 그 데리아는 카리스와 하연, 미루엘의 모습을 뜯어보더니 오히려 미루엘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의심스런 눈길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자 언제까지나 그렇게 서 있을 것 같은 일행들을 재치고 사담이 나서서 말했다. "방, 이인 실 하나와 삼인 실 하나. 그리고 식사 준비해 주시오." "아? 네."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방을 준비하러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데리아를 하연이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이인 실 하나 취소해 주시고 일인 실로 둘 부탁드려요." 의아해서 쳐다보는 일행들을 돌아보며 하연은 멋쩍은 표정으로 그러나 장난스럽게 미루엘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미루엘. 확인해보지 않아도 미루엘이 여자라는 건 일찍이 로베인에 대한 반응으로 확신하고는 있지만...... 알지요, 미루엘?" 어느 정도 하연의 말을 짐작한 미루엘은 작은 신음 소리를 내며 억누른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곧 후회하긴 했지만. "정확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요, 하연?" "정말 오랜만에 갖는 편안한 잠자리잖아요? 밤새도록 미루엘이 언제나 날 덮칠지 이제나저제나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도 물론 꽤 흥미진진한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하, 하연!" 더 이상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당황한 미루엘은 얼굴이 시뻘개져서 급히 하연의 말을 막듯 소리쳤고 그 때까지 긴장으로 굳어졌던 리밍스도 하연의 짓궂은 말에 긴장이 풀린 듯 배를 움켜쥐며 폭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 우하하하!" 카리스는 물론이고 사담까지 피식 실소를 터트리고 있는데 그 때 충격을 받은 듯한 목소리로 데리아가 미루엘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저....... 지금 그 말씀은 이, 이 분이 여, 여자라는 말이에요?" 비명이나 다름없는 그 외침에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경악한 얼굴로 미루엘을 쳐다보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세상에, 저 얼굴로.......!" "여자라는데?" "정말인가? 허허...... 신들의 실수가 틀림없어." 그러자 당황한 미루엘은 서둘러 데리아의 등을 밀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방으로 들어가려는 하연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카리스는 잊고 있었던 어떤 사실을 떠올리고 다급하게 하연의 팔을 잡아 세웠다. 일인 실을 요청한 것이 어쩌면 자신이 아파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는. "하연!" 하연이 돌아보자 카리스는 가만히 하연의 얼굴을 살피듯 들여다보며 물었다. "......괜찮습니까?" "뭐가요?" 의아한 얼굴로 하연이 묻자 카리스는 차마 직접적으로 그녀의 몸 상태를 묻지 못하고 돌려서 말했다. "언제나 하연의 곁에는 우리가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우리들한테 말해주십시오. 그리고 절대 혼자 울지 마십시오." 멍한 표정으로 카리스를 보던 하연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카리스? 내가 왜 울겠어요? 이렇게 기쁘고 즐거운 일 널려 있는데...... 난 울지 않아요." 어색하게 마주 웃는 카리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방으로 들어 온 하연은 곧장 침대에 쓰러지듯 누우며 중얼거렸다. "피곤해! ......아파!" 마음이...... -뭐,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거야, 하연?- 당황한 갈루마의 말을 들으며 하연은 조그맣게 킥킥거리다가 나중에는 크게 웃어댔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하연, 왜 그래? 왜 갑자기 웃는 거야?- "하하...... 너무 행복해서, 갈루마! 너무 행복해서......" -쳇! 무슨 헛소리냐?- 궁시렁거리는 갈루마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하연은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걸 듯 중얼거렸다. "난 정말 행복해." 링 바이러스와 해킹, 저주를 피하기위해 로베인과의 커플은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시고...... 귀가 얇은게 흠인 유지였습니다.^^ 마신 소환사 -64- 간단히 씻은 하연은 로브를 벗어둔 가벼운 차림으로 식사를 하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데려가 달다고 애달프게 우는 시늉까지 하는 갈루마를 침대 옆에 놓아두고. 보니 아직 일행들이 내려오지 않아서 하연은 데리아가 내준 차를 마시며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바람의 빛의 사제인 덴이 인어의 노래로 들어왔다. 제법 잘생긴 용모와 바람의 사제로서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축복의 힘 덕분에 아바드에서는 소문난 바람둥이로 행세하고 있던 덴은 아직 자신이 정복하지 못한 여인인 인어의 노래 여관집 딸 데리아를 노리고 이 곳에 온 것이다. 그런데 그의 눈에 우아한 자태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멍한 눈으로 차를 마시고 앉아 있는 하연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순간 덴은 데리아에 대해서 싹 잊어버리고 하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자신하는 우수에 젖은 듯한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실례합니다만 합석 좀 해도 되겠습니까? 오늘은 왠지 혼자 있고 싶지가 않아서 그렇습니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하연은 잠깐 덴을 바라보다가 마음대로 하라는 듯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테이블에 의자는 여섯 개였으니까. 그러나 하연의 승낙이 자신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인 것으로 착각한 덴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잘만하면 축복의 힘 따위 쓰지 않고도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연의 맞은 편에 앉으며 덴은 짐짓 하연에게 관심이 없는 듯 행동했다. 여자란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듯 보이는 사람에게 더 끌리고 관심을 갖게 되는 법이기 때문이었다. 말없이 창문너머로 보이는 마라브르 강을 보며 덴은 작은 한숨을 쉬었다. 역시 그런 덴의 행동이 하연의 관심을 끈 듯 하연이 물었다. "무슨 걱정이 있으신가 보지요?" "하아~ 실은...... 전 한 여인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순간 하연은 눈을 반짝였다. 연애 얘기를 하려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 연애 얘기만큼 재미있는 얘기가 또 어디 있겠는가? 당사자들이야 속이 타 재가되는 기분일지도 모르지만. 하연이 몇 번 조르자 덴은 담담한 어조로 예기를 시작했다. "몰락한 귀족 가문의 태생인 저는 이 지방 유지의 딸인 미레이유라는 아가씨와 서로 사랑을 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결혼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미레이유의 아버님이 저처럼 별 볼일 없는 사내에게는 미레이유를 줄 수 없다고 하더군요. 일찍이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모아 놓은 재산도 한 푼 없었고 있는 것은 귀족이라는 이름뿐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지요. 때문에 저는 성지 하나브에 가기고 했습니다. 거기서 빛의 사제가 되어 돌아오면 미레이유의 아버님도 저희들의 결혼을 허락하시리라 생각한 것이지요. 그래서 삼 년 전 전 드디어 빛의 사제가 되어 이 곳 아바드로 돌아왔답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이렇게 그녀를 기다렸습니다. 인어의 노래가 들리는 날 이곳 인어의 노래에서 그녀와 만나기로 약속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가 오지 않더군요. 알고 보니 그녀는 내가 하나브로 간 다음 해에 이웃마을 영주의 아들과 혼인을 했더군요. 휴우~ 그런데도 전 벌써 삼 년이 지나도록 이렇게 그녀를 기다리게 되는군요. 오늘도 인어의 노래가 들렸거든요." 반쯤은 어느 정도 사실인 예기였다. 진짜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미레이유는 그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 버렸던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미련이 남은 것은 아니었고 이제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자신처럼 놀기 좋아하고 장내도 불확실한 사람보다는 영지가 있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확실히 더 나았으리라. 하지만 덴은 그로부터 여자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지금의 바람둥이가 되어 버렸는지도. 덴은 서글픈 표정을 지어 보이며 하연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애썼다. 그 동안 갈고 닦은 경험상으로 볼 때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동정심을 자극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덴의 의도가 적중한 듯 하연은 연민에 가득 찬 표정으로 덴을 보더니 위로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정말 안됐군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이제부터는 인어의 노래가 들려오지 않을 테니까. 다시는 청승맞게 여기 와서 변심한 연인 따위 기다리지 않아도 돼요." "엣......!" 순간 덴은 무슨 말을 해야할 좋을지 몰랐다. 이건 위로하는 건지, 청승 그만 떨라고 욕하는 건지. 그러나 어쨌든 하연의 동정을 이끌어 낸 덴은 계속 말했다. "훗! 저도 더 이상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그녀를 위해서라도 잊어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인어의 노래가 들려오지 않는다고 해도 제 머리 속에서는 언제나 인어의 노래가 들려 오고 있거든요." 덴은 속으로 자신했다. 이제 이 여자가 자신의 말에 감동해서 자신에게 정신없이 빠져 있으리라고. 그런데 뜻밖에 하연을 보니 그녀는 가만히 미소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더 없이 슬픈 미소를 지으면서 덴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부러운데요." "지금 뭐라고......?" "......정말 부러워요. 그런 사랑을 가슴에 지닐 수 있다는 것이." 하연은 새삼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가슴속에 눌러왔던 원망이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것이 느껴졌다. 왜 자신이 이런 병에 걸려야 하는지. 남들처럼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정말 평범한 인생을 평범하게 걸어가고 싶었는데...... 하지만 현실은 어이없게도 뇌종양이라는 확률이 희박한 병에 걸리지를 않나 이 세계로 모험을 오지를 않나? 어쩌면 이 특별한 모험이 평범한 자신의 인생과 맞바꾼 대가일지도 모르겠지만 선택을 기회가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하연은 충분히 원망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설령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픈 사랑이라도...... 나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었는데......" 무표정할 정도로 공허해 보이는 하연의 눈을 들여다보며 덴은 그녀가 울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면서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그녀에게 연민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녀를 자신의 품에 안아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가만히 그녀의 등에 팔을 두르려고 하는데 다음 순간 자신의 목에 겨누어진 시퍼런 검 날에 놀라 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헉!" 잘 하면 오늘 새벽쯤 다시 한편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기대하지는 말아주세요.^-^ 사담이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떨어져! 그렇지 않으면 베어버리겠다." 덴은 화들짝 놀라서 급히 하연에게서 떨어졌다. 사담의 목소리에서 직감적으로 그가 한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하연은 왜 갑자기 검이 왔다갔다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어느새 다가온 카리스 역시 심상치 않은 눈으로 덴을 노려보며 하연에게 물었다. "이 자는 누굽니까?" "합석을 요청한 사제 분인데...... 왜 뭐가 잘못됐어요?" "아니요. 이렇게 빈자리가 많은데 합석을 요청하다니 좀 이상해서 말입니다." "아? 오늘은 혼자 있고 싶지 않데요. 헤어진 연인 생각이 나서 말이에요." 별 일 아니라는 듯 하연은 말했지만 사담과 카리스는 충분히 별 일이었고 덴의 의도 또한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험악한 표정으로 덴을 노려보았다. "시간이 꽤 늦었는데 이제 가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소리에 드래곤 피어까지 섞어서 하는 카리스의 말에 덴은 떨리는 목소리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그렇군요." 그리고 하연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말했다. "시간이 늦어서...... 저는 그럼 이만." 황급히 도망치듯 나가는 덴의 뒷모습을 보면서 하연은 의문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사담과 카리스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사담과 카리스는 하연의 시선을 피하며 딴청만 피울 뿐이었다. 하연은 한숨을 쉬며 물었다. "미루엘과 리밍스는요?" "지금 내려오고 있습니다." 카리스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때맞추어 미루엘과 리밍스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이상한 장내의 분위기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하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저도 묻고 싶은 말이지만 아무도 대답해줄 사람이 없어 보이니 어떻게 하겠어요? 궁금해도 참아야지." 그들이 자리에 앉자 데리아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 간단한 오인 분의 식사를 주문한 그들은 정말 오랜만에 편안한 분위기에서 식사다운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에게 어두운 음모의 손길이 다가오는 것도 모른 채. 급하게 인어의 노래를 뛰쳐나온 덴은 여관으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골목에 기대어 서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자신이 점찍은 여자에게 그런 무서운 동료들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둠의 아버지 가란 신의 그림자를 언뜻 본듯해 덴은 소름이 돋았다. 그럼에도 얼마쯤 미련이 남아서. "젠장, 처음부터 축복의 힘을 쓰는 건데......" 라고 중얼거리며 후회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벽 속에서 검은 손 그림자가 튀어나오더니 그의 입을 틀어막고 골목의 안쪽으로 끌고 들어갔다. 거기에는 여러 명의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쓴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그 중 한 명이 음산하고 낮은 목소리로 덴에게 물었다. "바람의 정신 디아스의 빛의 사제 덴 와사프 맞는가?" 오늘은 정말 재수가 없는 날이라고 생각하며 덴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재수 없음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죽어주어야겠다!" 그 음침한 목소리가 그렇게 말하더니 옆의 사람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그 자가 검은 후드를 벗고 덴의 앞으로 나섰다. 기도 주문과 함께. "아버지 가란의 이름아래 불의 아들 카이람의 이름으로 그 분의 성스러운 축복을 내려주소서." 어둠 속에서 그 자의 서클렛이 붉은 빛을 발하는 것을 멍하니 보며 덴은 인어의 노래에서 만난 여인의 서클렛은 같은 붉은 빛이라도 어딘지 성스럽게 보이는 반면 저 자의 서클렛의 붉은 빛은 가짜 보석에 광택제를 바른 듯한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덴은 마치 온몸이 터져 버리는 듯한 고통 속에서 피를 흘리며 죽었다. 가란의 이름아래 카이람의 축복은 생명의 상징인 심장의 파열이었던 것이다. 덴. 제 소설에서 처음으로 죽는 사람이군요. 해피, 해피가 좋은데...... 이 넘이 좀 발직한 짓을 했지요? 감히 하연을 노리다니......^-^ 글 번호 : 2485 글쓴이 : 유지 게시일 : 2001-03-11 , 10:08:48 PM 마신 소환사 -66- 아직 어두운 새벽 밖에서 나는 소란스런 소리에 잠을 깬 사담은 무슨 일인가 싶어 창 밖을 내다보 았다. 그런데 병사들이 여관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서둘러 카리스와 리밍스를 깨워 밖을 보여주었다. "무슨 일인지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카리스가 말하며 마법으로 청력을 돋구어 밖을 소리를 들어 보더니 안색이 어둡게 변하고 말았 다. "무슨 일인데 그래?" 리밍스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인간들이 자신을 잡아 노예로 팔기 위해 모여든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의 카리스의 말은 정말 천만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저들의 말이 이 여관에 있는 어둠의 사제가 즉 하연이 덴 와사프라는 빛의 사제를 저주해 죽였다 고 합니다." 새벽부터 하연 일행은 병사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연은 아직 잠이 깨지 않 아 멍한 상태로 거의 사담에게 업혀가고 있는 실정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무슨 이유로 이렇듯 도망치고 있는지 그 이유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만약 알았다면 억울해서 이렇게 얌전히 도 망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선착장의 쌓인 화물 뒤에 숨은 하연 일행은 그들 앞을 지나가면서 하는 병사들의 말에 어이가 없 었다. "으~ 제발 그 어둠의 사제가 우리 눈에 띄지 않아야 하는데......" "맞아! 상대는 마신 소환사라잖아? 도대체 우리보고 어떻게 그녀를 사로잡으라는 거야? 저주에 걸려 도리어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저 쪽으로 사라져 가는 병사들을 보면서 미루엘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지요?" 그 때 찬 강바람에 어느 정도 정신이 든 하연이 무엇을 보았는지 놀랍다는 듯 감탄사를 터트렸 다. "와!"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니 선착장에 있던 거대한 상선이 돛을 올리고 있었다. 새하얀 돛들이 하 나둘씩 부풀어오르는 장관을 멍하니 보고 있던 하연이 돌연 말했다. "우리 밀항해요!" 그 말에 미루엘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보았고 카리스와 사담은 서로를 마주보며 어쩌면 좋은 생각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미루엘은 이런 바보 같은 짓도 없다는 듯 투덜거렸지만 결국 그들은 화물들의 뚜껑을 열고 그 속 에 있던 물품들을 강에 내던져 버린 후, 그 속에 몸을 숨겼다. 그러자 얼마 후, 몇몇 선원들이 그 들을 옮겨 배에 실었다. 부산한 움직임과 선원들의 고함소리가 잇달아 들리더니 이윽고 출항을 외치는 소리와 함께 서서 히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쯤 흥분에 얌전히 있던 하연이었으나 곧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먹은 것도 없는 데 속이 울렁거려 토할 것만 같았다. "으......" -왜 그래, 하연? 어디 아파?- 걱정스런 갈루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토, 토할 것 같아!" -......배멀미군.- "아무래도 여기서 나가야......?" 하연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화물뚜껑을 열려고 하자 갈루마가 당황해서 말렸다.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고?- "밀항은 들키려고 하는 거야. 안 들키면 오히려 재미가 없다고." 황당해서 말을 못하는 갈루마를 들고 뚜껑을 발로 차 열어버린 하연은 밖으로 나왔다. 그 소리를 들은 다른 일행들도 곧 뚜껑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배 안의 창고인 듯 여러 가지 화물들이 들어 찬 선실 안은 비좁고 답답해서 하연의 속을 더욱 울 렁거리게 만들었다. 마치 감옥 속에서 출구를 찾듯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 본 하연은 곧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발견하 고 그 곳으로 올라갔다. 뒤늦게 하연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챈 일행들은 당황해서 하연을 붙잡으려고 했으나 이미 하연 이 위로 통하는 선실 문을 열어버린 후였다. 차가운 강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서서히 수면위로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며 하연은 갑판위로 걸어나왔다. 배 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일하고 있던 선원들이 하나둘씩 하연에게 시선이 멎자 일을 멈추 고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도무지 자신들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 갑자기 저런 여자가 나타난 것일까? 그런 선원들의 시선을 당당하게 받으며 하연은 배의 난간이 있는 곳으로 가 비스듬히 기대어 편 안히 강바람을 맞았다. 그런 그녀를 보던 선원들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선장의 여자인가?" 그제야 하연의 당당한 태도 또한 이해가 간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일로 돌아가는 선원들이었 다. 차마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선실창고 계단 위에서 그 모습을 긴장한 채 지켜보고 있던 하연 일행 은 하연의 뻔뻔한 태도가 오히려 선장의 여자로 오해를 받아 위기를 넘기자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카리스가 말했다. "좀 더 지켜보기로 하지요." 벌써 들키면 다시 아바드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차하면 언제든 뛰어나가 모조리 쓸어버릴 각오로 허리에 찬 검 손잡이를 힘주어 움켜쥐었다. 어느 정도 배 멀미가 가라앉자 하연은 배가 고팠다. 그래서 갑판을 청소하고 있던 한 선원을 손으 로 불러 말했다. "여기로 먹을 것 좀 갖다 주시겠어요? 속이 안 좋아서 식당까지 갈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래요." 한쪽 뺨에 길게 칼자국이 난 것과는 다르게 동안에 순진해 보이는 청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 고 물걸레를 내려놓더니 음식을 가지러 식당으로 갔다. 그런 하연의 모습을 지켜보며 리밍스가 중얼거렸다. "나도 배가 고픈데......" 다른 사람들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지만 그들은 하연처럼 뻔뻔하지 못한 관계로 참을 수밖에 없었 다. 조금 후, 그 청년이 쟁반에 음식을 담아 갖고 돌아왔는데 왠지 불안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래 서 의아하게 쳐다보니 청년의 뒤에 푸른 머리의 인상이 차가운 사내가 하연을 무표정하게 쳐다보 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이 배의 선장인 듯. 게시판이 자주 바뀌니까 이상하네요, 흐음! 빨리 복구되야 할텐데....... Name 유지 [telefacy@hitel.net] Subject 마신 소환사 -67- 아무리 뻔뻔한 하연이라도 머쓱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하연의 머쓱한 표정도 30초를 넘기지 못하고 곧 다시 당당한 표정으로 청년으로부터 쟁반을 잡아당 겨 빵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이거 먹고 얘기해도 되겠지요?" 네이브 스마인은 마신 소환사인 하연이라는 여인과 그 일행이 아바드에서 도망치기 위해 자신의 배에 숨어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으니 까. 그래서 곧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 만날 줄은 꿈에도 생 각지 못했다. 도대체 이 여인은 어떤 인간인 걸까? 마신을 소환해 낼 수 있는 최강의 힘을 지니고 있어서 이처럼 당당하게 행동할 수 있 는 것일까? 그러나 허겁지겁 마치 며칠 굶은 거지가 음식을 먹듯 빵을 먹는 여인의 모 습에서는 도저히 그런 힘을 지닌 여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네이브는 정말 오랜만에 사람에 대해 흥미가 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는 위대한 성현의 말씀을 되 세기며 하연은 열심히 먹 었다. 먹는 도중 하연의 관점에서 볼 때 부러워 죽겠다는 듯 응시하고 있는 일행들에 게 싱긋 웃어주는 것도 잊지 않으며. 그 순간 카리스가 다른 일행들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고생 좀 하라고 좀 내버려두지요. 이 배 안에서 어디로 갈 것도 아니니까 말입니다." 다른 일행들이 조용히 찬성의 뜻을 보이는 가운데 어느새 다 먹은 하연이 네이브를 따라 일어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뻔히 아는 일행들은 잠자코 그런 그녀에게 애도의 뜻을 표했다. "쳇, 쳇, 쳇! 쪼잔하기는...... 뭐, 세상은 돈으로 굴러가는 게 아니라고? 쳇!" 주방에서 산더미 같은 감자를 놓고 까며 하연은 투덜거렸다. 배를 얻어타는 대가로 돈을 내겠다는 대로 그 선장이라는 차가운 작자가 돈을 받는 대신 주방에서의 신성한 노동으로 대가를 지불하라고 시켰던 것이다. "그만 좀 투덜거리고 감자나 제대로 까십시오. 그게 감자입니까? 콩입니까?" 하연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준 죄로 그녀의 감시를 명령받은 빌스가 뒤에서 다그쳤 다. 아닌게 아니라 하연이 깐 감자는 어느새 콩만큼 작아져 있었던 것이다. "하아~ 나같이 뛰어난 요리사가 감자나 깎아야 하다니...... 이건 다 인재를 적재 적소 에 배치 못하는 선장의 무능함 때문이야. 분명 이 배도 할부로 사서 아직 대금도 치르 지 못했을 게 분명해." 순간 반색을 하던 빌스가 하연의 감자를 깎던 서툰 솜씨를 떠올리고는 미심쩍다는 표 정으로 물었다. "진짜 그렇게 요리를 잘한단 말입니까?" 하연은 정직하게 사실대로 말했다. "물론. 내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좀 한 요리하거든. 그래서 동료들 중 한 명은 내 요리 를 먹고 세상에 이런 맛이 있을 수 있다니 정말 놀랍다고 표현했고 어떤 한 명은 세상 을 하직하는 그 순간까지 이 맛을 잊지 못할 거라고 찬사를 보냈지." 아직도 그 말속에 숨겨진 동료들의 진짜 뜻을 이해 못한 하연은 정말 그 때가 그립다 는 듯 아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빌스가 기쁜 얼굴로 대뜸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부탁했다. "그럼. 선장님께는 제가 말씀드릴 테니 저희들 위해 요리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연은 의아해서 물었다. "나야 좋지만 좀 전에 먹어보니 이 배의 주방장 솜씨도 괜찮은 것 같던데 왜?" "그건...... 아바드에 머물 때 미리 사 놓은 음식이었습니다. 저녁때면 그 음식들도 바 닥이 나고 요리사인 하인스씨가 요리를 하게 될텐데 그분의 요리 솜씨가 좀......" 맛없는 요리를 먹는 선원들을 위기에서 구해준 식칼 든 자신의 모습을 마치 광고 포 스터처럼 뇌리에 떠올린 하연은 기쁜 마음으로 빌스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감자 깎는 칼을 그에게 넘기며 말했다. "훌륭한 요리를 먹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고통이 따르는 법입니다. 자, 열심히 깎아 요." 할 수 없이 그 칼을 넘겨받은 빌스는 하연대신 열심히 감자를 깎았다. 더 이상 하인스 씨의 그 맛없는 요리를 먹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감사하며. 설마 그로 인해 더 극악한 요리를 먹게 될 줄은 감히 상상도 못한 채. 빌스로부터 하연으로 하여금 요리를 맡겨 보자는 소리를 들었을 때 네이브는 마음대 로 하라고 했다.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인스의 요리가 비록 맛이 없기는 하지만 먹는 대는 그리 큰 지장이 없는데 왜 그리 불평불만이 많은지. 그는 음식이란 먹어서 배만 부르면 된다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저녁때가 되어서 하연의 요리라는 이름으로 치장된 괴상한 음식을 목구멍으 로 넘겼을 때 그는 요리란 단순히 먹을 수 있는 것에 한한 것이 아니라는 인생의 진리 하나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음식그릇을 들고 선장실에서 나온 네이브는 갑판 위에서 하연의 요리를 먹고 고통스 러워하는 선원들과 그 옆에서 더 먹고 싶다는 사람에게 음식을 퍼주기 위해 국자를 들고 서 있는 하연의 모습을 보았다. 하연은 네이브를 보자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맛있죠? 더 줘요?" 네이브는 하연의 말이 진심에서 한 말인지 아니면 그들에게 악의를 가지고 일부러 한 행동인지 알아보기에서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상인으로서의 안 목으로 보아 그녀의 표정에 거짓이 없음을 잃자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음식 맛을 보긴 한 거요?" "맛이요? 물론 보았죠. 요리를 하는데 맛을 안보겠어요? 재료가 많아서 이렇게 맛있 게 요리하기도 처음인 것 같아요. 그런데 왜요?" 이 맛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하다니 네이브는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하연 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화학조미료와 인스턴트 음식 에 길들여진 사람이었으니까. 잠시 아무 말도 없던 네이브는 여기저기서 하연의 시선을 피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웩웩거리며 혀를 내 놓고 있는 선원들을 천천히 돌아보며 말했다. "......다음 정착지에서 요리사를 고용하도록 하겠다." "와아!" 순간 선원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그리고 비록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긴 했지만 이 모두가 하연덕분이라고 생각하며 감사했다. 덕분에 선상에서의 생활이 한 결 윤택해지게 되었지 않았는가? Name 유지 [telefacy@hitel.net] Subject 마신 소환사 -68- 일제히 들려오는 때아닌 함성소리에 건량을 우적우적 씹으며 허기를 달래고 있던 사담들은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하연이 또 무슨 일을 벌인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밤이 오기를 기다리며 그 궁금증을 눌러야 했다. 그리고 드디어 밤이 오자 그들은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연을 찾아서. 그 시각, 하연은 선장실에 있었다. 기가 막힌 표정으로 자신을 네이브 스마인이라고 밝힌 사내를 쳐다보면서. 네이브는 그런 하연의 시선을 못 본 척하며 말했다. "이 배는 상선이지 여객선이 아니오. 밀항자를 위한 방은 없소. 그래도 여자인 점을 감안해 내 선실을 함께 쓰도록 허락하는 것을 고맙게 여겨야 할거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녀가 유별한데 어찌......!" 비장하게 사극 투로 외치는 하연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말과 말투였지만 하연이 하는 말이 대충 무슨 뜻인지 짐작한 네이브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내게도 취향이라는 것이 있소. 더군다나 어둠의 사제는......" 그러면서 하연을 본 네이브는 도리어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말과는 다르게 아주 편안하게 침대에 들어 누워 있는 하연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 모습에 더 이상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네이브는 그때부터 서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너, 그렇게 들어 누워 있으면 어떻게? 그러다 무슨 짓을 당하면 어쩌려고?- 하연은 그저 편하게 누워 있으려는 것일 뿐 잠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새벽에 일어나느라 잠을 설친 데다가 등뒤로 느껴지는 푹신한 침대에 하연은 그만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하연이 잠이 들자 네이브가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남녀가 어쩌고 하더니 자신이 옆에 있는 것도 잊은 듯 편안히 잠들어 있는 하연을 보자 네이브는 이상하게 자신의 마음까지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하, 하연! 일어나! 어서 일어나라니까! 이러다가 일나겠어! 당할 것 같단 말이야!- 애간장이 타서 외치는 갈루마였지만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이랄까? 손가락사이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하연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 올려 주던 네이브는 선장실 앞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아쉬운 듯 손길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왔군." 천천히 일어나 다시 의자로 돌아간 네이브가 다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자 덜컥 문이 열리며 일단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하연 일행으로 카리스의 추적마법을 이용해 이 곳 선장실에 하연이 있는 것을 알고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선장실에 하연뿐만 아니라 웬 사내가 같이 있자 그들의 안색은 대번에 굳어지며 황급히 하연의 모습을 찾았다. 그리고 다행이 로브까지 걸친 채 편안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 하연의 모습이 보이자 그들은 은연중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연의 차림으로 보아 분명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이런 작은 선실에 하연과 단 둘이 있었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네이브를 용서할 수 없는 카리스와 사담은 매서운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카리스가 물었다. "어째서 당신이 이 곳에 있는 것입니까?" 네이브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 질문은 내가 당신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오만 왜 당신들이 여기 있는 거지? 난 분명 당신들을 내 배에 태운 기억이 없는데?" 그 말에 그들은 안색이 굳어지며 어색한 웃음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제야 자신들이 처한 입장을 깨달은 것이었다. 이에 미루엘이 수습에 나섰다. "실례했습니다, 이 배의 선장이셨군요. 실은...... 저희들은 하연의 동료들입니다. 몰래 승선을 한 것은 정말 죄송스럽기 그지없습니다만 우선 하연을 깨워 몇 가지 확인을 좀 해본 후, 다시 저희들과 말씀을 나누시지 않겠습니까?" 마음대로 하라는 듯 네이브는 어깨를 으쓱하며 눈으로 하연이 누워있는 침대를 가리켰다. 그러자 리밍스가 제일 먼저 하연에게 달려갔다. 다른 일행들과도 이미 몇 차례의 생사의 기로를 함께 드나들어 어느 정도 정이 쌓이긴 했지만 정작 마을을 떠나오게 한 하연만큼 그의 마음에 위안을 주는 존재도 없어서 그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하연과 떨어져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하연을 보자 너무 안도한 나머지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이었다. "하연, 하연, 일어나! 어서 일어나 봐!" 요즘은 글이 잘 안써지는군요.ㅜ.ㅜ 봄이라서인지 하루종일 잠만 자고 싶고...... 어서 빨리 연재속도를 높여야 할텐데...... Name 유지 [telefacy@hitel.net] Subject 마신 소환사 -69- 리밍스가 하연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도 하연이 좀처럼 눈을 뜨지 않자 이번에는 카리 스가 당황해서 황급히 하연을 흔들었다. 설마, 이 대로 죽어버리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에 카리스는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인간들이란 존재는 너무 미약해서 쉽게 죽어버린다. 하연 또한 그럴 것 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 하연을 향한 자신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아내 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죽어버리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다행이 죽은 것은 아닌 듯 하연은 작은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졸려! 깨우지마!" 왠지 허탈해진 카리스가 멍하니 서 있자 사담이 하연의 뺨을 찰싹찰싹 가볍게 때렸 다. 그제야 하연은 게슴츠레 눈을 떴다. 희미하게 검은머리와 눈물이 가득 고인 듯한 눈이 보이자 하연은 부드럽게 위로하듯 중얼거렸다. "울지마! 나 아직 죽지 않아! 울지 마라, 하민아!" 하민은 하연의 동생의 이름이었다. 아무래도 잠결에 사담을 하민으로 착각한 듯. 카리스를 제외한 하연의 일행들과 네이브는 지금 하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직 죽지 않는다니...... 그럼 곧 죽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들이 혼란스러웠고 카리스는 누군가로부터 가슴을 쥐어뜯기는 것 같이 고통스러웠 다. 그 때 하연이 정신을 차린 듯 침대에서 일어나 그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어? 왜 남의 방에 이렇게 몰려와 있는 거야?" 조금 전의 일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한 짜증스런 얼굴과 말투에 미루엘과 리밍스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앞다투어 말했다. "여기가 어째서 네 방이냐? 정신 좀 차려!" "......우리가 밀항자라는 사실을 그 새 잊었습니까?" 하연은 그제서야 그 사실을 기억해 낸 듯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방 주인인 네이브를 보았다. 그런 하연을 보며 사담은 등줄기로 한기가 치솟아 오르는 듯한 불길한 느낌을 받았 다. 그 느낌은 한 어둠의 신전 구석의 시체더미 속에 내던져져 있던 자신의 누이동생 의 시신을 발견하기 전에 받았던 느낌과 똑같았다. 하연이 뭔가 그들에게 숨기고 있는 사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애써 캐묻지 않은 것은 누구에게나 남들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아픈 과거는 한 가지쯤은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담의 그 불길한 느낌이 더 이상 하 연이 숨기고자 하는 사실로부터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담은 정색을 한 채 조금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도로 물었다. "아직 죽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연은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무슨 엉뚱한 소리예요?" "조금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울지마! 나 아직 죽지 않아! 울지 마라, 하민아! 무슨 뜻입니까?" 그제서야 조금 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하연은 일순 당황했으나 곧 안색 을 굳히고 물었다. "꼭 알고 싶어요?" 순간 사담의 입에서 알고 싶지 않다는 말이 나올 뻔했다.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사 담은 또 다시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 못한 말을 가슴에 담아두고 속을 태우는 짓 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사담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하연은 그런 사담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더니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이건 정말 남부끄러워서 말하긴 싫지만...... 실은 내 남동생이 좀 폭력적이어 서 말이에요."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어 어리둥절해하는 일행들과 네이브의 얼굴을 보며 하연은 마 치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런 기회가 오냐는 듯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정말 이런 예긴 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지만. 다 결국은 내 집안 흉이니까 요. 내가 아침에 잘 못 일어나잖아요. 그래서 남동생에게 깨워달라고 하는데 이 녀석 이 갈수록 폭력적이 되어서는 나중에는 날 아주 죽도록 패는 거예요. 세상이 이 가냘 픈 몸 어디 한군데 팰 때가 있다고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패는지. 그래 놓고는 가증스 럽게 눈물을 뚝뚝 흘리며 누나, 죽었어? 죽은 거는 아니지? 나 감옥가지 싫단 말이야! 하고 우는데......" 그러면서 이를 으드득 가는 하연을 보면서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그때까지 감돌던 긴장감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과 함께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누나를 깨워 야만 했던 그녀의 남동생에게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또한 하연과 여행할 때 처음 몇 번은 하연을 깨우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 결 과가 얼굴의 멍과 온 몸의 타박상이라는 것을 몸으로 깨닫고 결국 서로 미루다가 나 중에는 그냥 하연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쪽으로 합의를 본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정말 동생이라고 하나 있는 것이 누나를 존경하고 받들어 모시지는 못할 망정 두들겨 패기나 하고...... 어렸을 때는 내 옷자락을 잡고 뒤뚱뒤뚱 따라다니며 누나, 누나 하는 것이 정말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는데 자라니까 키만 멀뚱하니 커서 는......"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하연의 투덜거림에 사담과 다른 일행들은 더 이상 듣는 것 을 포기했고 카리스만이 그런 하연을 착잡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 때였다. "해적이다!" "해적이 나타났다!" 함성과 함께 선실 밖에서 이리저리 부산하게 뛰어 다니는 선원들의 발소리가 들려오 자 하연 일행들은 놀라서 네이브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네이브는 마치 이런 일은 늘 상 있는 일이라는 듯 무표정한 표정으로 침대머리 뒤에 놓아두었던 검을 들어 허리에 차고는 하연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서 나오지 말고 그대로 있으시오. 곧 처리하고 돌아오겠소." "도와주겠습니다." 사담이 나서서 말하자 네이브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힐끗 하연을 보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 밖의 해적들보다 저 여인이 더 위험해 보이니 여기서 저 여자나 잘 감시 하도록 하시오." 뜻밖의 중상모략을 당한 하연은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어떻게 자신 이 그들의 물품을 노리는 해적들보다 더 위험할 수가 있겠는가? 자신의 기막힌 심정 을 이해해 달라는 듯 동료들을 쳐다본 하연은 더욱 황당한 심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 다. 마치 네이브의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바라보는 다른 동료들의 시선 때문이었다. 새 연재란 정말 들어오기 힘들군요. 그래도 하연의 모험은 계속 됩니다.^-^ 해상왕국 나바린 편으로 가자! Name 유지 [telefacy@hitel.net] Subject 마신 소환사 -70- 네이브가 선장실에서 나오자 그의 오른팔이자 대륙 최고의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혼 슈이센 왕립학교 시절부터의 절친한 친구였던 글렌이 다가와 말했다. "심상치 않아! 그랑디아의 수도인 비오드가 바로 얼마 남지 않은 이곳에 해적이 출현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네이브도 해적이 나타났다는 말에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이 그 점이었다. 해상 왕국 나바린은 춥고 척박한 땅이라 대부분의 국민들이 어업이나 약탈을 그 주업으로 하고 있었다. 때문에 왕실에서조차 해적의 활동을 지원해주고 있다는 것은 대륙 내에서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마라브르 강이 끝나는 사이락 해안에서부터 아자란 군도를 그 주거점으로 활동할 뿐 내륙쪽으로는 들어오지 않았다. 바로 신성국가 그랑디아의 힘이 두렵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힘을 무시하고 내륙으로 들어오다니...... 분명 그랑디아의 힘을 무시하고서라도 얻으려는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것이 무엇일까? 재빠르게 머리를 굴린 네이브는 순간 자신의 선실에 있는 하연이라는 어둠의 사제를 떠올렸으나 곧 머리 속에서 그 생각을 제켜버렸다. 그녀는 분명 대륙에서 하나밖에 없는 마신 소환사이긴 했지만 나바린의 해적들이 필요로 하는 건 어디까지나 힘이 아닌 식량을 마련할 돈이었다. 그리고 저들이 그녀가 이 상선에 타고 있다는 것을 알 리가 없었던 것이다. 네이브가 말했다. "우선 지켜보기로 하지. 우리 배를 그냥 지나쳐갈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글렌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글쎄, 그럴까? 까마귀가 시체를 피해간다는 말은 아직까지 못 들어 봤는데?" 글렌의 말이 맞았다. 검은 돛을 달고 뱃머리에 상반신은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이고 하반신은 뱀인 라미아가 조각되어 있는 나바린의 거대한 해적선은 일정한 속도로 그들의 상선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할까?" 상선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이는 해적선을 보며 글렌이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네이브는 망설였다. 항복을 할 것인지 전투를 할 것인지...... 만약 항복을 했다가 자신의 선실에 있는 하연의 존재가 저들에게 알려진다면 그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도 저들은 충분히 하연을 자신들의 약탈 품목 안에 집어넣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저들에게 하연을 빼앗길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동생 차크의 저주를 풀 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마신 소환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해적들과 싸운다고 해도 무기도 싣지 않은 지금의 이 상선으로는 전투를 해도 이길 가능성이 없었기에 고민하던 네이브는 하연의 일행들의 실력을 믿어보기로 결심했다. 우연히 자신의 일에 방해가 된 하연의 신상내력에 대해 조사하던 중 그녀가 마신 소환사임을 알게 된 그는 그녀에게 동생의 저주를 풀어달라고 부탁할 생각으로 하연일행의 뒤를 추적했다. 그런데 하연 일행은 헤루아 숲으로 들어가 사라지더니 며칠 만에야 갑자기 아바드에 그 모습을 들어낸 것이다. 그 며칠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설마 그들이 하룬 산을 올라갔다 내려왔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고 그저 마의 산 근처를 지나왔으리라고 추측한 네이브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는 하연 일행의 강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이 해적들로부터 충분히 하연을 지킬 수 있으리라고 또한 하연 그녀 자신의 능력으로 보아 그녀가 원하지 않는 한 해적들에게 붙잡혀 갈 리가 없다고 안일하게 생각을 한 네이브는 결국 항복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이 배 안에 있는 정도의 물품은 그가 하루에 거래하는 물품의 십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양이었기 때문에 약탈당한다 해도 상관없었던 것이다. "항복한다!" 네이브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글렌은 돛대 위에서 망을 보고 있던 선원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그 선원이 돛대 위에 흰 천을 달았다. 조금 후, 해적선이 쾅! 하고 상선에 부딪쳐왔다. 그로 인해 상선의 전복될 듯 흔들리며 배의 일부가 파괴되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해적들이 배 위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찾아라! 최고의 보석을 찾아 베샤 공주에게 가져가야 한다. 아자란의 붉은 전갈인 나 수므카야말로 베샤 공주의 남편 될 유일한 자격을 지녔으니까, 크하하하하!" 정말 글 좀 쓰려는데...... 요즘은 별 잡다한게 다 말썽이라 절 바쁘게 하는군요. 게다가 얼마 후, 이사까지 해야 하게 생겼으니...... 저 좀 도와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마신님, 저 좀 도와주세요.^-^ Name 유지 [telefacy@hitel.net] Subject 마신 소환사 -71- 아자란의 붉은 전갈 수므카! 네이브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인길드에서는 얼마간의 통과세를 지불하고 나바린 왕실과의 교역을 해오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요즘 들어 해적들내에서의 강경파들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아자란의 붉은 전갈 수므카로 인해 나바린과의 교역이 끊기고 상당수의 상선이 약탈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오우거를 보는 듯한 거대한 체구에 짧게 치솟은 듯한 붉은 머리를 한 해적 수므카의 인상은 한마디로 보는 이로 하여금 오금이 저리게 할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거기에는 그의 얼굴을 비롯한 몸 여기저기에 난 무수한 상처가 한 몫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그런 수므카를 보는 네이브의 눈은 차갑고 냉정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교묘히 감추고 네이브는 해적들이 자신의 배 위를 마구 짓밟고 돌아다니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저 문 하나만 열면 해적과의 조우라는 환상적인 모험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문을 열고 싶어서 좀이 쑤신 하연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초조하게 왔다갔다하다가 문뜩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병을 알기 전 이 세계로 왔다면 자신은 과연 저 문을 열 수 있는 용기가 있었을까? 대답은 아니다 였다. 호기심에 어쩌면 문을 조금 열어 밖의 광경을 훔쳐볼 수는 있을지도 모르지만 문밖의 세상에 뛰어들 용기 따위는 그 전의 자신에게는 분명 없었다. '잃는 것이 있는 반면 얻는 것도 있다는 말이지?' 매일매일 죽음과 싸우면서 그 대가로 용기를 얻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하연은 피식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어렵게 얻은 용기를 이 안에 숨어서 썩히고 있을 수는 없지.' 슬쩍 동료들의 보니 사담과 카리스가 하연의 표정에서 어떤 심상치 않은 기색을 발견했는지 서서히 걸음을 옮겨 문을 막아서는 것이 보였다. 하연은 그런 사담과 카리스에게 활짝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이리 와서 앉아요." 그러나 사담과 카리스는 안색을 긴장시키며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하연은 두 손을 들어올려 보이며 짜증나는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요, 좋다구요. 절대 내 발로는 나가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그러니까 문에서 좀 비켜나줘요. 밖에서 나는 소리라도 듣게요. 그것도 안되는 건 아니겠지요?" 잠시 망설이던 사담과 카리스가 문에서 비켜나자 하연은 문에 귀를 기울이는 척 했다. 그리고 슬쩍 반지를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소환!" 그러자 커다란 도마뱀 형상을 불의 정령 살라만더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향해 하연이 재빨리 명했다. "로우 아저씨, 이 문을 부셔요!" 순간 깜짝 놀란 카리스가 문에 실드를 치려고 했으나 이미 살라만더가 쾅! 소리와 함께 문을 날려버리고 만 뒤였다. 망연자실한 카리스, 사담, 리밍스, 미루엘은 돌아보며 하연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걱정하지 말아요. 내 발로는 절대 이 곳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전 약속은 지키자는 주의거든요." 그러나 그들은 그런 하연이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미 방금 전의 폭발소리로 놀란 해적들이 모여들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선실 쪽에서 갑자기 폭발소리가 들리자 네이브는 안색이 변해서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날아간 문짝과 해적들의 손에 끌려나오는 하연 일행들을 보자 그는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건기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안해해야 마땅할 하연의 얼굴에 웃음이 감도는 것을 본 네이브는 곧 사태가 어떻게 된 건지 짐작하고 하연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지금도 고통스러워하며 연실 기침으로 침대시트를 붉게 물들이고 있을 동생 차크의 모습이 떠오르자 이렇듯 함부로 날뛰는 하연의 목을 졸라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네이브는 애써 화를 참으며 그들이 끌려나와 수므카의 앞에서는 것을 보았다. 수므카는 자신의 부하들의 손에 이끌려나오는 하연 일행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서는 처음 보는 이국적인 미모를 지닌 하연과 카리스의 신비한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리스가 남자임을 확인하고는 눈살을 찌푸리던 수므카는 사담과 미루엘에 이어 드워프인 리밍스를 보고는 다시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 여자와 드워프를 배에 실어라! 비싼 값에 팔 수 있겠다!" "예!" 해적들이 하연과 리밍스를 해적선에 태우려 하자 다급한 네이브가 그런 해적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이 여인은 내 약혼녀요. 내가 몸값을 지불할 테니 그녀를 놓아주시오." 네이브가 드디어 흑심을......^-^ 하지만 하필이면 카리스와 사담 앞에서... 애도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Name 유지 Subject 마신 소환사 -72- 무슨 바다표범 가죽같이 매끄러운 동물가죽으로 가슴과 하반신만 간신히 가린 해적들을 보며 문화적 충격과 함께 신기함을 느끼고 있던 하연은 네이브의 그 말에 충격을 받아 굳어버리고 말았다. 약혼녀라니...... 누가, 누구의? 그러나 하연보다 더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사담과 카리스였다. 아무리 하연을 구하기위해서라지만 그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네이브를 그들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네이브는 초조감으로 심장이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다른 때와는 달리 흥정을 하면서 여유로움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자신에 대해 네이브는 이 거래가 다른 때와는 달리 위험부담이 크기 때문이라고 자위했지만 그도 그럴 것이 하연이 네이브의 말이 거짓이라고 이 자리에서 부인하거나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사담과 카리스가 한마디만 뻥긋해도 이번 거래는 허사로 돌아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만은 아닌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마음 한 구석에서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뭔가 하연이 자신의 말을 부인하지 말아주었으면 하는 다른 이유가. 하연은 멍하니 네이브의 얼굴을 돌아보다가 초조해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이 걱정되어서 구하려고 그런 말까지 서슴없이 하고 나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서 하연은 인간의 마음은 참 따뜻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저 그의 배에 함부로 올라탄 불청객일 뿐인데 그런 자신을 걱정해서 약혼녀라고 까지 해 주다니...... 그런 네이브의 배려를 생각해 하연은 그녀가 그의 약혼녀가 아니라는 말은 하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그래도 해적들에게 끌려가는 것을 그만 둘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해적소굴이 어떨지 꼭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위험하면 카이람을 소환해 그곳에서 도망치는 되는 것이고.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하연은 문뜩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용기를 얻은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위험에 처하면 반드시 카이람이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마음 속 깊이 자리해 있었다는 사실을...... 그 때 붉은 전갈 수므카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좋다! 그럼 바람의 달이 시작 될 때까지 금 세관을 준비해 아자란 군도의 붉은 섬으로 와라! 그 때까지 이 여자의 몸값을 가지고 오지 않으면 노예로 팔아버리겠다." 금 세관이라면 엄청난 돈이었다. 수므카는 이런 작은 배의 선장이 그 금액을 지불하지는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하연을 자신들의 왕인 가라프에게 선물로 바쳐 그의 호감을 살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네이브가 누군가? 상인길드의 장인 카라반이었다. 그는 즉각 대답했다. "좋소! 바람의 달이 시작될 때까지 반드시 금 세관을 준비해 가겠소. 물론 그때까지 내 약혼녀를 그대들이 잘 보호해 주리라 믿겠소. 붉은 전갈 수므카의 명예를 걸고 말이오." 수므카는 놀랐다. 명예라니? 지금까지 그에게 명예를 운운한 자는 네이브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해적에게 누가 명예가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기분은 좋아진 수므카는 흔쾌히 승낙했다. "좋다. 그 때까지 기다려 주지!" 그리고 그가 배로 돌아가려 하는데 카리스가 다급히 말했다. "잠깐만, 좀 전에 듣기로 곧 베샤 공주님과 혼인을 하신다고요? 그렇다면 혹시 음유시인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지금의 심정 같아서는 본체로 돌아가 해적선에 브레스를 한 방 뿜어 버리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하연의 납치 극을 훼방놓았다가 무슨 후환을 당할지 알 수 없는지라 그저 어떻게 해서든 하연을 따라나서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수므카는 음유시인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여자들이란 음유시인의 노래를 좋아한다는 소리가 생각났던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베샤 공주도 좋아하리라. 수므카는 카리스의 승선을 허락했다. "타라! 베샤 공주를 위해 최고의 노래를 불러라!" 카리스는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재빠르게 하연의 곁에 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담이 말했다. "노래하는데 춤이 없어서는 안되지 않습니까? 저는 검무를 좀 출줄 압니다만." 그 말에 하연과 미루엘조차 놀라서 사담을 쳐다보았다. 사담이 춤이라니? 순간 사담이 로보캅처럼 춤을 추는 모습을 머리 속에 떠올라 하연은 풋! 하고 웃음을 떠올렸다. 그런 기분은 수므카도 마찬가지인 듯 상당히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사담의 아래위를 훑어보았지만 노래에 춤을 곁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하연 일행 중에 미루엘만 남자 미루엘은 초조하게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문뜩 최고의 보석이 어쩌구 하던 수므카의 말을 떠올리고 말했다. "전 최고의 보석 감정사입니다. 아자란의 붉은 전갈에게 사기를 칠 수 있는 사람은 설마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 저에게 감정을 맡겨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수므카는 그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하다가 완벽을 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미루엘 또한 승선을 허락했다. 그리고 네이브를 돌아보며 말했다. "바람이 달에 봅시다!" "바람의 달에." 멀어져 가는 해적선을 보며 네이브는 그의 주변에 한기가 감돌만큼 차가운 표정으로 글렌에게 말했다. "최대한 빨리 배를 수선해 본가로 돌아간다. 바람의 달까지는 시간이 촉박하니까!" 글렌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선원들을 독려했다. "서둘러라! 집으로 돌아간다!" 신권님! 님의 메일에 자극을 받아 하연의 매력에 빠지는 멋진 해적을 한 명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멋진 캐릭이 될지 모르겠지만 카리스와 카이람의 매력에 빠진 독자들을 모두 그에게 돌려 보려는 야심을 무럭무럭 피우고 있는 유지라고나 할까요? 헤헤, 기대해 주세요. Name 유지 [telefacy@hitel.net] Subject 마신 소환사 -73- 그랑디아의 빛의 신전 하나브의 모습은 마치 얼음의 결정모양을 그대로 땅위에 세워놓은 듯한 섬세하고도 화려한 신전으로 대륙 최고의 건축물이었다. 도대체 누가 지었는지조차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가장 유력한 설은 빛의 신인 펠레아의 권능의 소산이라는 설이었다. 도저히 신의 창조물로서는 그렇듯 정교하고 완벽한 건축물을 설계할 수 없다고 생각되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신전에 엘 노아를 비롯한 불, 물, 땅, 바람의 빛의 고위사제들이 모두 자리해 있었는데 그들의 안색이 하나같이 어두워 화려하게 빛나는 신전의 빛마저 바래 보일 정도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성질이 급한 불의 고위사제 프레인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말했다.ㅅㅅ "이것은 명백한 빛에 대한 어둠의 도전입니다. 저번 일은 분명 어느 정도 우리 쪽에서도 잘못이 있었기에 우리 쪽의 젊은 사제가 어둠의 대사제에게 사과를 하는 것을 용납했지만 이번 일은 다릅니다. 더 이상 저들의 도발을 참고 넘긴다면 빛과 어둠의 힘의 균형이 깨어질 것입니다. 저들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그러자 물, 땅, 바람의 고위사제들이 모두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 노아는 더 이상 굽히고 들어갈 수만은 없다는 듯 고집이 서린 고위사제들의 얼굴을 훑어보며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번 일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아는 하연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누구보다 자유로운 발상으로 세상을 관조하듯 보는 그녀는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결코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이 것이 음모라고 고위사제들에게 말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해 고민하던 엘 노아는 하연이 마신 소환사라는 점을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한 정보에 따르면 그 여사제는 마신 소환사라고 들었네. 우리로서는 그녀를 어떻게 해 볼 방도가 없는 상황이지. 이런 시점에서 어둠의 신전에 도전하는 것이 과연 대륙의 평화를 위해 옳은 일이라고 생각되는가?" 고위사제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적으로 엘 노아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승복할 수 없었다. 언제 빛의 신전이 상대가 강하다는 이유로 정의를 외면한 역사가 있었던가? 설령 아무 승산이 없는 싸움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정의이면 빛의 신 펠레아의 이름으로 실현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그들의 표정에서 읽은 엘 노아는 참담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어쩌면 이리들 외고집인지. 그러면서 그는 하연을 생각했다. 하연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녀는 어떻게 말했을까? 새삼 그 때 하연을 빛의 신전으로 끌어들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엘 노아는 당장이라도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 것 같은 신전내의 분위기를 식히기 위해 강경하게 말했다. "어찌 되었든 하연 사제가 덴 와사프 사제를 죽였다고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아니오. 그러니 확실한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기다려 봅시다." 결정을 늦추는 엘 노아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보던 바람의 고위사제 딜리언이 말했다. "그녀는 도망쳤습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대사제님!" 엘 노아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또한 그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 당당히 아바드의 경비대에 가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지 않았는지. 신전 안에는 무거운 공기처럼 침묵이 내려앉았고 빛들이 불길한 느낌으로 흔들렸다. 다가올 빛과 어둠의 전쟁을 예고하듯. 금 세관의 가치를 지닌 인질이라는 점 때문에 해적들에게 특별취급을 받아 독방에 좋은 식사까지 받아먹고 있지만 하연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근처에서 들려오는 노예로 팔려 가는 여자들의 구슬픈 울음소리 때문이었다. 그것은 하연에게 현실이 무엇인지 일깨워주고 있었다. 결코 이 세계가 모험과 낭만으로 가득 찬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에겐 단지 모험의 하나일 뿐인 이 일이 저들에게는 인생이라는 것을. 하연은 그들의 울음 속에 갇혀 있기가 싫었다. 슬픔은 전염성이 강해서 그녀의 슬픔마저 헤집어 놓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울음소리는 끊이지 않았고 하연은 그 울음소리가 듣기 싫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믿을 수 있나요. 나의 꿈속에서 너는 마법에 빠진 공주란 걸. 언제나 너를 향한 몸짓엔 수많은 어려움뿐이지만......" 마치 속삭이는 듯 하던 하연의 노래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감미롭게 울려 퍼졌다. "......그러나 언제나 굳은 다짐뿐이죠. 다시 너를 구하고 말 거라고 두손을 모아 기도했죠. 끝없는 용기와 지혜를 달라고. 마법의 성을 지나 늪을 건너 어둠의 동굴 속 멀리 그대가 보여." 그 노래 소리를 들은 여인들은 하나 둘 울음을 멈추었고 이윽고 배 안에는 조용한 침묵이 감돌았다. "이제 나의 손을 잡아 보아요. 우리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죠.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날아가도 놀라지 말아요. 우리 앞에 펼쳐질 세상이 너무나 소중해. 함께라면." 노래가 끝났을 때 여인들은 가슴은 희망으로 들떴다. 하연의 의도야 어떠하든 그 노래의 뜻은 분명 그녀들을 이 곳에서 구해주겠다는 메시지나 다름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줄 모르는 하연은 노래가 끝나자 그저 울음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래서 갈루마의 물음에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 너도 잡혀있는 주제에 저 여자들을 어떻게 구해줄 생각인 거야?- 늦게 올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 동안 제가 독감에 걸려서...... 요즘 감기 정말 심하더군요. 잘 떨어지지도 않고. 여러분들도 감기 조심하세요. Name 유지 [telefacy@hitel.net] Subject 마신 소환사 -74- "누가 누굴 구해 준다는 거야?" 갈루마는 황당했다. -네가 그랬잖아, 노래로? 구해줄 테니 함께 이 곳에서 도망치자고?- "내가? 난 그저 노래를 불......" 새삼 이곳이 다른 세상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하연은 마법의 성 노래가사를 다시 음미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갈루마의 말대로 그 가사의 뜻이 저 여인들을 구해주겠다는 뜻으로 들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저 여인들을 구하는 문제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카이람을 소환하지 않더라도 그녀가 갖고 있는 두 정령과 동료들의 힘이면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그러면 해적들의 소굴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때문에 고민하던 하연은 문뜩 이 세계로 왔을 때 자신이 가졌던 희망을 떠올렸다. 어쩌면 마법으로 자신의 병을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차마 말로 내뱉으면 사라질 새라 꺼내보지도 못한 그런 희망이었는데 자신에게는 이 세계의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던 것이다. 동료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그 때의 그 실망감이라니...... 그런 실망감을 저 여인들에게까지 맛보게 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에 든 하연은 작은 한숨과 함께 갈루마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하지, 저 여인들을 구하려면?" 일은 자신이 저질러 놓고 해결 방법은 그에게 찾으라는 하연이 못마땅해 금방이라도 목구멍에서 잔소리가 뛰어나오려고 했지만 왠지 침울해 보이는 하연의 어조에 갈루마는 억지로 잔소리를 삼키고 말했다. -어차피 넌 이 배에 계속 남고 싶은 거겠지? 저 여인들은 구해서 내 보내고?- 그런 방법이 있느냐는 듯 하연이 눈을 반짝이자 갈루마는 잠시 자신이 지금 하려는 일이 잘 하는 짓인지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 여인들을 구해서 밖으로 보낼 수 있는 곳은 지금으로서는 사이락 해안에서 뿐이다. 하지만 그랑디아의 경비선이 추적해오고 있을 테니 지금으로서는 그들을 따돌리는 것이 더 시급한 문제다.- "그랑디아의 경비선?" -잘 들어. 대륙에서 가장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나라는 바로 신성국가 그랑디아다. 첫 번째 빛과 어둠의 전쟁으로 고대 문명이 멸망하고 두 번째 빛과 어둠의 전쟁으로는 종족간의 불화가 생기면서 인간들은 타 종족을 말살하려고 들었지. 그 가운데 그 당시 현자였던 제베르타가 타 종족의 말살은 그들 종족의 형상을 하고 있는 신에 대한 도전이나 마찬가지라고 부르짖으며 말살을 막았지. 그리고 더 이상 빛과 어둠의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 중재자로서 강력한 왕권과 신권을 결합한 국가의 탄생을 주장했고 그로 인해 탄생한 국가가 바로 그랑디아다.- "뭐, 그럼 그 빛의 대사제 엘 노아라는 분이 그랑디아의 왕이였단 말이야?" 놀라서 외치는 하연의 물음에 갈루마가 말했다. -아! 아니야! 예외적인 경우인데 그 분은 신성사제이긴 하지만 왕은 아니야! 그의 형인 왕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신성사제 자리를 동생인 그에게 물려주었거든. 그래서 초기에는 왕권과 신권의 대립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의외로 형제의 우애가 좋아서인지 협조적인 상태에서 잘 다스려지고 있지! 어쨌든 그랑디아는 그로 인해 신전과 마법사 길드의 보호아래 막강한 군사력을 손에 쥘 수 있었고 현재 어떤 국가에서도 그랑디아의 힘을 무시하지는 못해. 그것은 나바린의 해적들도 마찬가지라 보통은 내륙쪽으로는 들어오지 않는데 이번에는 무슨 배짱인지 내륙으로 들어온 것 같군.- "분명 그 수므카라는 해적이 최고의 보석을 구한답시고 겁 없이 설치고 들어온 걸 거야." 하연의 말에 속으로 동의를 표하며 갈루마가 말했다. -일단 저 여인들이 잡혀온 것을 보니 벌써 몇 번의 약탈이 있었던 게 틀림없어. 따라서 약탈당한 배에서 그 사실을 경비대에 알리지 않았을 리가 없고 그랑디아의 경비선이 해적을 소탕하러 벌써 출동했겠지. 아마 얼마 안가 경비선과의 한바탕 충동이 있을 거다.- "그럼 곧 경비대에 해적들이 모두 잡히겠네? 그런데 왜 네이브는 내 몸값을 지불하겠다고 나선 거지? 그냥 경비대에서 해적들을 소탕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도 알고 있었겠지.- "뭘?" -네가 일부러 해적들에게 잡혀가고 있다는 걸. 따라서 해적들이 경비대에 붙잡히지 않도록 돕고 나서리라는 걸.- 그 말이 사실이기 때문에 하연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런 하연의 모습에 길게 한숨을 쉬면서 갈루마가 말했다. -휴우~ 바람의 달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하자!- 하연은 아까부터 궁금했던 점을 떠올리며 물었다. "바람의 달이라니...... 그게 언젠데?" -응? 아, 쉬워! 달이 북쪽에 있으면 바람의 달, 남쪽에 있으면 땅의 달, 동쪽에 있으면 불의 달, 서쪽에 있으면 물의 달이라고 부르고 다시 불의 달이 오면 1년이 되는 거다. 그러니까 지금은 초대 신성국왕인 라미엘의 이름을 딴 라미엘력 754년 땅의 달인 거지.- 자신의 세계에서조차 날짜 가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던 하연인지라 이 세계의 날짜에 신경을 쓸 리가 없었다. 때문에 갈루마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하연은 목거리를 잡고 소환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물의 정령 사이라가 그 아름다운 자태를 들어내며 방긋 웃는 얼굴로 하연에게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주인님!" 별로 오랜만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하연은 그러고 보니 하룬 산에서 소환한 이래 처음이라는 것을 생각해내고 왠지 미안해져서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응! 그 동안 더 예뻐졌네, 사이라!" 사이라는 하연의 아부가 마음에 든 듯 환하게 웃어 보였다. "사이라! 이 배를 추적해보는 경비선들이 있으면 좀 속도를 늦춰 줄 수 있겠어?" "네, 주인님!" 하하^^ 지혜님의 말처럼 제 글에 나오는 노래가 모두 예전 노래군요. 제가 예전 노래밖에는 잘 몰라서... 좋은 곡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Name 유지 [telefacy@hitel.net] Subject 마신 소환사 -75- 사이라가 사라지자 갈루마가 혀를 쯧쯧 찼다. 정령에게 아부라니...... 그 때 하연이 갇혀있는 독방의 문을 열쇠로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문이 열리고 해적 하나가 식사를 가지고 들어왔다. 식사를 가져다 놓고 다시 나가려는 해적을 하연이 불러 세우고 물었다. "잠깐만요! 저 말고 이 배 안에 여자가 몇 명이나 있어요?" -사전 조사냐? 하여튼 잔머리는......?- 잔머리가 아니라 머리가 좋은 거다 라고 쏘아주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하연은 방긋 웃으며 해적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해적은 멍하니 그런 하연의 얼굴을 보더니 무의식중에 대답하고 말았다. "...열 두명인데......!" "아? 그렇군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참, 친절하시군요." 해적질하면서 악당이니 죽일 놈이니 하는 욕설들은 많이 들어봤어도 친절하다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 그 해적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자 갈루마가 비아냥거렸다. -어쭈! 이젠 미인계까지?- 하연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원래 사랑과 전쟁에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법이야!" 하연은 가끔 그로서는 생각지도 않은 방식의 말을 한다고 생각하며 갈루마는 문뜩 떠오르는 생각을 물었다. -전쟁은 그렇다 치고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얻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냐?- "......아니.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난 그에게 미워한다고 말할 거야!" -뭐?- 설마 그런 대답을 들을 줄은 몰랐던 갈루마가 황당해서 묻자 하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난 성격이 나쁜 여자거든." 미루엘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푸른 보석을 보며 두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이 보석을 눈앞에서 볼 수 있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었던 것이다. "어, 어떻게 이 보석을......?" 말까지 더듬는 미루엘을 보며 해적 수므카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그 거대한 체구를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앉았다. "바람의 성자, 루페이론의 뼈를 가공한 보석 엘 루아다. 수돈 신전에 있는 것을 약탈했지. 진품이다. 살펴봐라!" 미루엘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말았다. 수돈 신전에 있는 루페이론의 보석 엘 루아를 훔치다니 그것은 곧 신전에 대한 선전포고가 아닌가? 엘 루아는 바람의 성자의 뼈를 가공한 만큼 푸른색을 띄고 있는 보석이지만 보석으로서의 가치보다는 성자만이 물려받을 수 있는 성자의 증표로서 사제들에게 그 가치를 띄고 있었다. 그런데 그 보석이 해적의 손에 들어오다니...... 미루엘은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떨리는 손으로 그 보석을 살펴 본 미루엘은 그것이 진짜 엘 루아 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엘 루아의 특징인 뼈 속까지 푸른색이 아닌 푸른 광택으로 둘러싼 듯한 은은한 푸른 빛이 그 증거였던 것이다. 그와 함께 미루엘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서 엘 루아를 도난당했음에도 신전에서 아무런 반응도 없는 가 하는 점이었다. 지금쯤이면 벌써 신전의 사제들이 엘 루아를 찾기 위해 들이닥쳤어야 옳지 않겠는가? 물론 그것은 미루엘이 고위 사제들 사이에서 알려진 엘 루아에 관한 예언을 모르기 때문이었지만. 언젠가 신전을 떠난 엘 루아가 새로운 성자의 손에 돌아오리라는 예언을. 때문에 신전에서는 언제가 엘 루아가 도난당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제 새로운 성자의 손에 엘 루아가 돌아올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수므카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엘 루아는 바람의 성자 루페이론의 의지가 긷든 성물. 청혼을 위해 베샤공주에게 바칠 최고의 보석이라 할 수 있지, 으하하하!" 호쾌한 웃음소리에 주위에 있던 다른 해적들도 모두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수므카님이야말로 베샤 공주의 남편이 되실 것이 확실합니다!" "물론이지요, 수므카님이 아니면 누가 베샤 공주의 남편이 되실 수 있겠습니까?" 해적들의 말을 듣던 미루엘은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수므카에게 물었다. "이 보석과 베샤 공주의 남편이 되는 것이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그 말에 수므카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현명한 우리 나바린의 왕께서 공포하셨다. 바람의 달이 정북을 향할 때까지 최고의 보석을 바치는 자에게 베샤 공주를 아내로 주겠다고." 헤^^ 이제 감기도 다 나았고. 연재 속도를 올리기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동안 노심초사하며 걱정해주신 분들 정말 고맙습니다. 여러분들의 메일 맛에 유지는 오늘도 글을 쓴답니다.^^ 하연은 며칠동안 자신의 식사를 가져다주는 해적으로부터 잡혀 온 여자들에 대한 정보와 동료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 해적들에 대한 정보 등 갖가지 정보를 모두 수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내일이면 사이락 해안에 도착하게 되자 하연은 갈루마의 의견대로 행동을 개시했다. "소환!" 불의 정령, 로우가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소환자인 하연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하지만 하연은 그런 로우 아저씨의 시선이 좋았다. 카리스와 사담의 시선은 뭐라고 할까? 왠지 말 한마디 잘 못 했다가는 그들에게 상처를 줄 것 같아서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을 쓰게 만드는 그런 거북한 시선이었다. 하지만 로우 아저씨의 시선은 아니었다. 그 어떤 말을 해도 좋을 것 같은 편안한 기분이 들게 만든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진 하연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저 벽을 좀 뚫어 줘! 그 다음 벽도, 소리 없이!" 로우는 하연을 잠시 바라보더니 말없이 벽을 뚫기 시작했다. 차츰 먼지가 되어 흩어지듯 둥그런 모양으로 벽이 사라지는 광경을 보면서 하연은 좀 착잡한 심정이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저 여인들을 이곳에서 구해 내 사이락 해안에 떨구어 주는 일 뿐으로 그녀들이 무사히 가족들의 품으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벽에 두 사람 정도 통과할 수 있는 넉넉한 구멍이 생기고 하연이 그 구멍으로 옆방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에게 정보를 준 해적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분명 자신의 옆방에는 아무도 없다고 했는데 어둠침침한 침대구석에 긴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한 여인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웅크리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정말 믿을 사람 없다더니......!" 투덜거리며 하연은 여인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툭 쳤다. "이봐요!" 그러자 여인이 화들짝 놀라서 몸을 움츠리며 뒤로 도망치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었다. 빤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하연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순간 발버둥치는 것을 멈춘 여인이 고개를 들어 하연을 올려다보았다. 긴 검은머리에 물기가 촉촉이 젖어 있는 검은 눈동자로. 그 순간 하연은 멍하니 넋을 잃은 듯 그녀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름답기도 했지만 이곳에 와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검은머리에 검은 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하연은 가슴이 아팠다. 트리엔시라의 고대 지하 왕국에서 자마라는 어린 왕의 머리와 눈도 검은 색이었지만 그 때는 이렇듯 가슴 아프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갑자기 사무치게 집이 그리운 하연이었다. 가족들의 얼굴도. 얼마나 그렇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을까? 아름다운 여인이 의아한 듯 하연을 보며 물었다. "누구......?"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하연은 부드러운 얼굴로 웃으며 약간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하연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만나서 반가워요. 너무 흔해서 잘 사용하지 않는 말이었지만 하연은 말을 하면서 아! 이럴 때에 이 말을 쓰는 것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 말이 특별한 울림이 되어 쟈스란의 가슴속에 녹아 내린 것은. 순간 쟈스란은 눈앞의 여인이 여신처럼 보였다. 그리고 속삭이는 듯 했다. 이 어둠 속에서 나와 빛 속으로 함께 가자고. 며칠 전 노래 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자신도 모르게 쟈스란은 하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황급히 그 손을 거두어 버리고 말았다. 떠올린 것이다. 자신의 손이 더러운 남창의 손임을. 갑자기 내밀어 오던 손이 거두어지자 하연은 의아했지만 마치 모든 것을 잃은 듯 공허해 보이는 여인의 눈을 보는 순간 하연은 가슴이 아팠다. 그녀에게서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연은 의식적으로 밝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이런. 좀 더 반갑게 맞아주실 수 없는 건가요, 공주님! 그래도 전 일단은 공주님을 구해 주러 온 사람인데요." 그러자 여인의 얼굴이 약간 흔들리는 것이 보이더니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 남자입니다." "에... 예?" 하연은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얼굴, 저 가는 몸 어디가 남자처럼 보인단 말인가? 그러나 여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남자라구요. 그러니 다른 공주님들을 찾아보시지요. 전 내버려두고요." 저 얼굴, 저 몸으로 남자라는 것도 기가 막혔지만 하연은 자신을 구해주지 않아도 된다는 그의 말에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하연은 곧 남자라서 여자에게 구함을 받는 것이 자존심이 상해서 일거라고 생각하고 방긋 웃으며 말했다. "하긴 언제까지 용사가 공주를 구한다는 스토리는 진부하지. 그러니 이번에는 우리가 여소환사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를 구한다는 스토리를 만들어 z보자, 어때?" zzz 정말 죄송합니다. 연재속도를 올리겠다고 말하고는 오히려 다음날부터 소식이 없어서....T-T 모두 이 놈의 감기 탓입니다. 도대체 나았다 싶었는데 다시 도지다니... 머리가 멍해서 글을 쓸 수도 없고...... 하아~ 연일 한숨만 쉬고 있는 유지입니다.ㅜ.ㅜ 쟈스란은 밤에는 손님을 받지만 낮에는 거의 할 일이 없어서 늘 자거나 책을 읽었다. 그가 좋아하는 책들은 이야기책이었다. 음유시인의 이야기로 전해지는 드래곤 슬레이어 슈바 크샨티에의 이야기나 마왕의 탑에 갇힌 공주를 구하기 위해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기사들의 이야기를 특히 좋아했다. 그것은 어쩌면 그 이야기들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야기책 속에 빠져 있을 때만은 결코 나갈 수 없는 이 작은 방도 자신이 처한 현실도 모두 잊을 수 있었기에...... 그러면서 언제나 쟈스란은 꿈을 꾸었다. 누군가가 이 어둠 속에서 그를 구해주기를. 그런데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여자가 그를 구해주겠다고 그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같이 만들자고 하는 것이었다. 쟈스란은 가슴이 벅차 오르도록 두근거렸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자신에게 내밀어진 저 손이 자신을 버린다면 그 때는 어떡해야할지. 하지만 잠깐의 꿈이라도 꾸고 싶은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주 잠깐 한낮의 꿈일지라도 그 꿈에 취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쟈스란은 하연의 손을 잡았다. 어쩌면 평생 그 꿈으로 가슴아플지라도 이 순간을 결코 후회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면서. 여인들의 그 해적의 말대로 쟈스란의 옆방에 갇혀 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벽에 구멍이 생기고 하연과 쟈스란이 나타나자 깜짝 놀랐으나 곧 하연이 그들을 구해주겠다고 말하자 모두 기뻐하며 눈물을 흘렸다. 하연은 자기 방에 있던 침대와 쟈스란의 방에 있던 침대, 그리고 여인들의 방에 있는 침대를 모두 로우의 도움으로 하나로 붙이고는 그 위에 여인들을 올라타게 했다. 그리고 배에 구멍을 크게 뚫어 물의 정령 사이라에게 그들을 무사히 사이락 해안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구멍으로 붙여진 큰 침상과 함께 여인들이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하연은 처음에는 구멍 때문에 배에 물이 들어 올까봐 불안하기 그지없었지만 곧 갈루마의 말대로 불의 정령인 로우가 버티고 서 있자 물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안심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쟈스란에게 물었다. "정말 여기 있을 거야? 저들과 함께 이 배를 떠나는 게 좋지 않을까?" "싫어요. 전 갈 곳도 없는 걸요. 그리고 하연이 절 구했잖아요. 그러니 하연이 책임져요!"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 놓으라는 소리에 어이가 없어진 하연이었지만 금방이라도 눈물이 글썽이는 눈으로 혹시라도 하연의 입에서 싫다는 말이 나올까봐 떨고있는 쟈스란의 모습에 하연은 피식 웃으며 말하고 말았다. "좋아, 내가 책임질게." 그 말에 활짝 웃는 쟈스란을 보며 왠지 귀여운 여동생이 생긴 것 같은 기분에 하연은 쟈스란을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자신의 말이 불러일으킬 파장은 생각지도 못한 채. 다음 날, 해적선은 미라브르 강을 지나 사이락 해로 들어섰다. 바다는 해적들의 고향이고 집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아침부터 활기에 차 있고 들떠 있었다. 마침내 불안한 여행을 마치고 안전한 그들의 바다로 돌아 온 것이다. 그러나 뒤늦게 여인들이 탈출하고 배에 커다란 구멍이 났다는 것을 알게 된 해적들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말았다. 그런 해적들의 모습에 쟈스란은 두려움에 떨었지만 하연은 자랑스럽기 그지없는 얼굴로 몰려든 해적들에게 방긋방긋 웃어 보였다. 수므카는 시퍼래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며 하연에게 물었다. "네 짓이냐?" "네. 전 이런 훌륭한 일을 할만큼 인간성이 좋거든요." 순간 수므카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설마 이러고도 네 년이 살기를 바란 것은 아니겠지?" "바라진 않아도 살수밖에 없잖아요? 서른 명이 넘는 해적들과 같이 바다에 수장되고 싶지 않다면." "......무슨 뜻이지?" "이런, 멍청하긴. 아직도 저렇게 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데 물이 들어오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나요?" 당장이라도 눈앞에서 깐죽거리는 계집을 쳐죽이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억누르며 수므카는 의아한 얼굴로 구멍난 배를 바라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구멍난 부분이 엷은 붉은 막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어떻게 한 거지?" "전 소환사거든요. 지금 불의 정령이 물이 들어오지 않게 구멍을 막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절 죽이면 다 같이 수장되는 수 밖예요." 수므카는 그 말에 이를 으드득 갈며 결국 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수하들에게 화풀이를 하듯 발길질을 해대며 외쳤다. 퍽! 퍼버버벅! "죽고 싶지 않으면 저 년을 잘 감시해! 알아들었냐, 이 멍청한 자식들아!" "넷, 수므카님!" 발길질에 채여 넘어지면서도 그의 수하 해적들은 엎드린 채로 고개를 숙이며 절절 기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하연은 웃음을 멈추었다. 누군가 자신으로 인해 아파하는 광경은 웃을 일이 아니니까. 제 감기를 걱정해 주시는 분들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감기가 다 낮지 않았습니다.T-T 감기로 입원하더라도 글은 계속 올려달라는 적월님! 안그래도 입원해 있어도 글을 써야하는 실정이랍니다.ㅜ.ㅜ 마감이 일주일도 안남았답니다./////탱자탱자 노는 동안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더군요. 하아~ 하아~ 한숨이 더 늘은 유지였습니다^-^ Name 유지 Subject 마신 소환사 -78- 늘 대 여섯 명의 해적들이 문밖에서 하연과 쟈스란을 감시하는 가운데 하연과 쟈스란은 대륙정복게임에 열중해 있었다. 흰색과 검은 색 바탕의 불, 물, 땅, 바람의 카드가 각기 네 장씩 해서 서른 두 장의 카드로 혼 대륙을 빛과 어둠으로 나눠 누가 더 빨리 대륙을 정복하는가 하는 게임인데 번번이 하연이 쟈스란에게 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디 이길 때까지 해 보자 하는 심정으로 밥 먹고 자는 시간만 빼고 쟈스란과 게임을 하게 되었는데 그 시간이 벌써 사흘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번 판이 마지막이라고 쟈스란에게 다짐하면서 시작한 판인데 하연의 손에는 빛의 물의 카드와 어둠의 불, 바람의 카드 두 장이 다였다. 나머지 카드는 쟈스란의 카드에 먹혀버리고 전투가 가능한 카드는 어둠의 불의 카드 한 장밖에 남지 않은 것이었다. 이에 하연은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쟈스란의 세력을 살펴보았다. 쟈스란은 어느새 벌써 혼 슈이센 왕립 학교와 하룬 산의 고대 트리엔시라 왕국의 마법 아이템들을 손에 넣고 세력을 점점 확장해가고 있었다. 그녀가 손에 넣은 것은 겨우 용병 길드의 세력이 다였는데 말이다. 그것도 쟈스란이 반쯤 손에 넣은 상인 길드의 돈에 의해서만이 움직일 수 있는. 시작부터가 이러하니 이번 판도 보나나마 질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새삼 왜 자신은 이렇게 게임을 못하는 것일까 하고 의아해 하며 하연은 손에 들린 카드를 던져 버리고 말았다. "졌어! 이제 안 해! 넌 매일 게임만 했냐? 왜 이렇게 잘하는 거야?" 쟈스란이 말했다. "하연이 못하는 거예요. 저도 별로 잘하는 편은 아니거든요." "쳇! 그럼, 내게 불운의 남신의 편애가 또 다시 발동한 모양이군. 하아! 불운의 남신은 날 너무 좋아해서 탈이라니까!" "불운의 남신이요? 그런 신도 있나요?" "있어. 보통 운이 좋은 사람한테 행운의 여신이 함께 한다고 하잖아? 그러니 분명 어떤 사람이 운이 나쁜 것은 불운의 남신이 함께 해서 그런 거겠지. 하긴 내가 좀 예뻐! 불운의 남신이 반할 만도 하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새삼 자신의 불운에 감탄하는 하연을 보며 쟈스란은 피식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면서 웃고 있는 자신에게 쟈스란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까지 그는 자신도 웃을 수 있다는 걸 한번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 때였다. 문이 열리며 일단의 해적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하연을 약간 두려운 눈으로 보더니 말했다. "따, 따라 나와라! 도착했다!" 하연은 도착했다는 말에 드디어 살았다는 표정으로 재빠르게 일어나 갈루마를 들고 그들을 따라나섰다. 쟈스란의 어두운 표정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밖으로 나와보니 배가 한 거대한 동굴 안에 선착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선착장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위에 해적들과 그녀의 동료들이 초조한 얼굴로 하연과 쟈스란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동료들의 얼굴을 본 하연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사담, 카리스, 미루엘, 리밍스!" 각자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한차례 포옹한 하연은 사담과 카리스의 얼굴이 붉어진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눈을 반짝이며 불의 정령 로우 아저씨를 불러들였다. 그러자 서서히 해적선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것은 마치 스펙터클 영화의 한 장면의 보듯 정말 장관이었다. 하연이 만족스럽게 그 광경을 보고 있을 때 수므카를 비롯한 해적들은 자신의 집이나 마찬가지인 해적선이 바다 속에 가라앉는 모습에 절망하는 한편 하연을 향한 살기로 충천했다. 그 모습에 하연은 짐짓 모르는 척 경건한 목소리 말했다. "이 모든 것이 다 마신 카이람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맞는 말이라고 하연은 생각했다. 마신 카이람이 자신을 이 세계로 보내지 않았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수므카를 비롯한 해적들은 하연의 말에 새삼 몸서리를 쳤다. 그제 서야 그 동안 하연의 미모로 인해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하연의 검은 로브와 붉은 서클렛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것은 바로 마신 카이람을 받드는 어둠의 사제라는 증표가 아니겠는가? 그 것도 모르고 하연에게 섣불리 복수를 하려 했다면 지금쯤 그들은 저주를 받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되었을 것이 아닌가? 새삼 두려움에 떨며 해적들이 모두 하연의 주위에서 몇 걸음씩 물러서자 희미하게 웃으며 하연은 쟈스란을 그녀의 동료들에게 소개했다. "소개할게. 이 쪽은 내가 책임지기로 한 쟈스란이야!" 유난히 책임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하연의 말투에는 해적들을 향한 경고가 들어있었다. 쟈스란에게 손대지 말라는. 해적들은 물론 그 경고를 알아들었다. 하지만 하연도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하연의 동료들의 반응이었다. 순간 사담과 카리스는 물론이고 미루엘 마저도 굳어진 채 하연과 쟈스란을 번갈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한참만에야 제일 먼저 정신이 든 미루엘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분, 남성입니까?" 제발 아니라고 부정해 주길 바라는 사담과 카리스, 미루엘의 눈빛을 알아채지 못한 하연은 사실대로 말했다. "응! 정말 여자같이 생겼지? 나도 처음엔 남자라고 해서 얼마나 놀랐다고." "......로, 로베인은요?" "응?" "하연, 로베인을 좋아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지금 우리가 대륙을 돌아다니는 것도 모두 로베인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제 로베인따위는 잊어버리고 저 자를 책임지겠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발작하듯 외치는 미루엘의 모습에 하연은 당황했지만 곧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저...... 미루엘? 한가지 질문이 있는데...... 왜 여기서 갑자기 로베인 예기가 튀어나오는 거지?" 몸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 모두 여러분 덕분이예요!!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 보답으로 내일은 연참을!! 기다려주세요.^^ ^^ Name 유지 Subject 마신 소환사 -79- 순간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일행들의 시선에 왠지 머쓱해져 버린 하연이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데 수므카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이야기는 나중에 해라! 이동해야 한다, ......우리들의 가라프에게로!" 그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흰빛의 장막이 마법진을 따라 솟아오르더니 순간 동굴의 모습이 사라지고 그들의 눈앞에 숲 과 너무 음침해서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유령 한두 마리쯤 나타나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이는 낡은 고성이 눈에 들어왔 다. "이 곳이......?" 미루엘은 놀란 표정으로 수므카를 돌아보았다. 도저히 저 낡은 고성이 해적들의 왕이라는 가라프가 사는 곳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므카와 해 적들의 표정에는 그 고성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애정이 듬뿍 담겨져 있었다. 이 성이야 말고 그들 나바린 해적들의 오랜 역사와 전통이 담겨 있는 유서 깊은 긍지의 상징이였던 것이다. 초기 나바린의 해적들을 탄생시킨 배경에는 왕실 기사들이 있었다. 지금은 모든 해적들이 가라프의 아래 하나로 뭉쳐 있지만 예전에는 수많은 해적들이 아자란 군도에서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에 빈부의 격차는 심해지고 심지어 굶 어 죽는 백성들 마저 속출하자 기사들은 백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기사로서의 명예를 버리고 해적이 되는 길을 선택 했던 것이다. 그리고 해적왕 가라프의 이름 앞에 모든 해적들을 굴복시키고 그들의 약탈품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백성들을 위한 해적! 그것이 그들의 긍지였고 그들이 해적의 길을 선택한 이유였다. 그 첫 발자국을 디딘 곳이 바로 이 성, 게일럭스 성이었 기에 이 성은 그들의 긍지의 상징인 것이다. 지금도 나바린의 수많은 아이들은 해적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한 번이라도 이 게일럭스 성에서 열리는 해적들의 모 임인 그렌챠에 참석하는 것이 일생의 꿈인 그것이 바로 나바린의 아이들인 것이다. 고성 주위에는 꽤 폭이 넓은 물길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들이 그 앞에 서자 성에서 다리가 내려왔다. 하연은 성안 어디에서 해적들이 그들을 보고 다리를 내려 준 것일까 싶어 유심히 성벽 쪽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좀처럼 감시병들을 찾을 수 없어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데 쟈스란이 그런 하연의 손을 슬며시 잡아왔다. 하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런 쟈스란을 힐끗 보다가 음침한 성 분위기가 무서워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성벽 위를 살펴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쟈스란은 물어보고 싶었다. 로베인이 누구인지. 그를 구하기 위해 대륙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냐고. 솔직히 하 연의 동료로부터 그 말을 들었을 때 쟈스란은 배신당한 느낌이었다. 그와 이야기를 만들기로 해 놓고서는 그 주인공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니...... 쟈스란은 가슴이 지끈거리는 가운데 어떻게든 하연의 관심을 자신에게로 돌리기 위해 용기를 내 하연의 손을 잡은 것 이었다. 그런데 하연이 자신에게 손을 잡히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자 그는 눈물이 흐를 것만 같 았다. 한번도 울어보지 않아 어떻게 울어야 할지 모르지만 않았다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고 말았을 것이다. 다리를 건너 성문 안으로 들어서자 붉은 색의 깃발을 든 해적들이 쭉 늘어서서 외쳤다. "아자란의 붉은 전갈 수므카님의 입성을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수므카는 가볍게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그들 중 한 명에게 하연 일행을 서쪽 건물로 데리고 가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그 해적은 의아한 얼굴로 하연 일행을 돌아보았다. 서쪽 건물은 노예들 중에도 위험한 인물들을 수용하는 곳이 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모두 하나같이 뛰어난 용모를 지니긴 했지만 그리 위험해 보이지 않는 하연 일행을 왜 서쪽 건물에 수용하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붉은 전갈 수므카의 명성, 즉 성질이 더럽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그 해적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하 연 일행을 서쪽 건물로 데려갔다. 하연 일행이 서쪽 건물로 가는 것을 보면서 수므카의 눈에서는 살기가 번뜩였다. '오늘의 수모는 반드시 잊지 않으마, 으드득!' 하하^^ 너무 기대리실 것 같아서 이번 편 먼저 올리고 다음 편은 어떻게 해서든 12시 이전에 올리려고 노력해 보겠습니다. 안돼면T-T 어쩔 수 없이 1시에...... Name 유지 Subject 마신 소환사 -80- 서쪽 건물의 긴 복도를 따라가며 카리스와 사담은 뒷골이 서늘해 지는 기분이었다. 천장에 마치 거미줄처럼 늘어져 있는 은색 실들은 맹독성이 강한 고아라는 바다괴물의 꼬리수염이었고 장식처럼 벽에 들러붙어 있는 붉은 돌들은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산다는 마마노가 분명했던 것이다. 게다가 여기저기 설치된 마법트 랩들은 한 걸음만 잘 못 디뎌도 죽음으로 내몰 만큼 위험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카리스와 사담은 그런 것들을 전혀 모르는 척 내색하지 않고 서로 간단히 눈빛을 주고받은 다음 다른 일행들은 안쪽에서 걷게 하고 자신들은 위험이 노출된 벽 쪽으로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마치 미로 속을 걷듯 이리저리 하연 일행을 끌고 가던 해적이 걸음을 멈추고 한 문 앞에서 멈추어 섰다. "이 방이다. 들어가라!"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치 귀족가의 응접실을 보는 듯한 방이 눈에 들어왔다. 사치품은 없었지만 그런 대로 고상한 분위 기를 내고 있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곳이었다. 그리고 벽 쪽으로 여러 개의 문이 보 였는데 아마도 그곳에는 각기 다른 침실이 있는 것 같았다. "쉬어라!" 해적이 귀찮은 듯 퉁명스럽게 말을 뱉고 나가 밖에서 문을 닫자 자동으로 문은 잠겨버렸다. 밖에서는 열어도 안쪽에서 는 결코 열 수 없게 만들어진 문이었던 것이다. 하연은 한숨과 함께 다른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또 갇히고 말았네. 정말 이러다가는 지루해서 죽겠어. 그 동안 여러분들은 뭐 했어요?" 무슨 화나는 일이라도 있었던가? 하연의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행동으로 그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보여 줄 뿐. 사담은 바닥에 털썩 주저 않아 검을 닦기 시작했고 카리스는 품속에서 책을 꺼내 읽었으며 미루엘은 대륙지도를 펼쳐 놓고 이리저리 제거나 표시를 하고 있고 리밍스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나무토막으로 조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대해 하연은 나름대로의 감상을 피력했다. "모두 그 동안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군요. 그럼 저도 유익한 시간을 보내도록 하겠어요." 그러면서 하연은 제일 안쪽에 있는 침실로 들어가려 했다. 이에 쟈스란이 다급히 하연에게 물었다. "뭐 하려고요?" "지금보다 더 미인이 돼 보려고요." "엣!"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쟈스란의 눈앞에서 하연이 방문을 닫아 버리자 쟈스란은 당황했다. 비록 하연의 동료들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이 낯선 사람들 앞에 혼자 남겨졌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침묵 속에서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일만 하자 쟈스란은 초조해졌다. 그들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자신을 그들의 동료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표시라고 생각되어졌다. '저들에게 난 로베인의 대신이 될 수 없는 걸까?' 쟈스란은 이야기 속의 동료들처럼 저들과 동료가 되고 싶었다.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왔다갔다 할말을 생각하던 쟈스란은 이윽고 용기를 내어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물었다. "저...... 저, 저 아까 하연이 한 말이 무슨 뜻이지요?" 그러자 미루엘이 여전히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건성으로 물었다. "무슨?" "왜, 더 미인이 되겠다는......?" "아? 그건 잠이나 자겠다는 뜻입니다." "아, 네!"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제대로 대화를 나누어 본 사람은 하연 뿐이었고, 그것도 요 며칠간이 전부라 쟈스란은 어떻게 대화를 시작해야 좋 을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을 싫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사람들에게. 어쩔 수 없이 쟈스란은 그들과의 대화를 포기하고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하연의 옆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런 그의 눈가에는 희미하게 눈물이 맺혀 있었다. 처음 강간을 당했을 때도 흐르지 않았던 눈물이. 정확히 1시군요. 흐음~ 지금 80회니까 곧 100회를!! 아! 빨리빨리 그 날이 왔으면......^^ Name 유지 [telefacy@hitel.net] Subject 마신 소환사 -81- 잠을 자려고 해 보았으나 웬일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한 사람의 이름을 들은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아플 수 있다 니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로베인!' 갈루마의 수다 소리조차 듣고 싶지 않은 기분이라 갈루마를 침대 밑에 넣어두고 가만히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 있는데 침대 가에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하지만 하연은 눈을 뜨지 않았다. 만사가 귀찮아 졌던 것이다. 그러자 그는 하연이 자는 줄 알았던지 중얼거렸다. "뭐야, 이건! 여자처럼 생겼다더니 완전 여자잖아!" 그 말에 하연은 그가 자신이 아닌 쟈스란을 찾아 온 것이란 사실을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만 있었 다. 그러자 그가 하연을 덥석 들쳐 매고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호오!' 하연은 조금전의 우울한 기분이 싹 가시고 흥분으로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졸지에 하연과 떨어지게 된 갈 루마가 침대 밑에서 발광하는 것도 모르고. 한 몇 분 지났을까? 하연을 들쳐업고 간 사내는 침상인 듯한 곳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때 한번 들으면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왕의 목소리였다. "이 아이인가?" 하연을 납치해 온 자가 간결하게 대답했다. "네!" "......남자라고." "네." 하연은 그 목소리를 더 듣고 싶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고 사방은 조용하기만 했다. 아마도 그녀를 이 곳에 내버려두고 모두 나가버린 것이라고 생각한 하연은 이 곳이 어딘지 살피기 위해 조용히 눈을 떴 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눈앞에 금빛 눈동자에 나비문양의 금속가면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사내가 그녀를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 가? 내심 놀랐으나 하연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순간 사내의 금빛 눈이 물결처럼 출렁이는 듯 하더니 나지막이 화가 난 듯 중얼거렸다. "이런 순간에도 사내를 유혹하려고 들다니...... 남창이란 어쩔 수가 없군." 하연은 기가 막혔다. 누가 납치범에게 자신처럼 친절하게 대해주겠는가? 다 자신이 마음이 넓고 이해심이 깊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뭐, 남창!? 모욕감으로 머리 속이 어지러웠지만 하연은 곧 그가 자신을 쟈스란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내고 간신히 화를 억눌렀다. 하지만 기분 나쁜 것은 나쁜 것. 하연은 저도 모르게 비꼬듯 말했다. "그 남창을 원해서 절 이리로 납치해 온 게 아니었단 말입니까?" 사내가 불쾌한 듯 하연에게서 떨어져 등을 돌린 채 걸어나가며 말했다. "네가 남창이라서가 아니다! 검은머리와 검은 눈을 지닌 남자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난 여자가 좋아!" "......다행이군요." 하연이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왠지 의미심장하게 들려 그 말의 의미를 물으려고 잠깐 멈추어 섰던 사내는 그런 자신의 행동에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밖으로 나와 버렸다. 마치 쫓기 듯 자신의 방에서 도망쳐 나와버린 마르세이는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여자처럼 생겼다지만 남자에게 욕망을 느끼다니......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변명처럼 여자가 좋다는 말이나 지 껄였으니. 뚜벅뚜벅 긴 복도를 지나 막다른 골목에 이른 그는 벽에 걸린 테피스트리를 걷고 벽을 밀었다. 그러자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보였고 마르세이는 익숙한 듯 그 계단으로 걸어 내려갔다. 나선형으로 되어 있는 계단의 끝에는 연구실로 보이는 방이 있었는데 온갖 진기한 서적과 실험도구들로 산재해 있었 다. 그리고 산발한 머리의 애꾸눈의 마법사가 실험에 열중해 있다가 마르세이를 보더니 실험을 멈추고 물었다. "검은머리에 검은 눈의 사내를 찾았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가라프여? 진짜 그런 자가 있긴 있었습니까?" 마르세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이번 의뢰는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벌써 오래 전에 사라졌을 검은머리에 검은 눈의 사내를 찾아 달라 니...... 하지만 그로서는 시도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의뢰인이 내 놓은 것이 바로 갈로아의 곡창지대라고 할 수 있는 브린스의 땅문서였기 때문이었다. 그 땅만 있으면 자신들의 백성이 더 이상 굶주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수소문 끝에 수므카가 쟈스란이라는 검은머리에 검은 눈의 남창 하나를 찾아 데리고 온 것이다. 신비스 러운 아름다움을 지녀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그러나 마르세이는 자신이 해적들의 왕인 가라프임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바린의 모든 백성들의 생계가 그의 어깨 위에 달려있다는 것을. 때문에 일순간의 감정으로 함부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비록 그가 쟈스란이라고 생각한 하연을 원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 마르세이의 고뇌를 모르는 애꾸눈의 마법사 비욤은 음침하게 웃으며 말했 다. "흐흐, 이제 갈로아의 곡창지대 중에 하나인 브린스가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되겠군요. 빌어먹을! 먹을 것 걱정하지 않아 도 되는 게 어디입니까?" "그래.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게 어디인가? 이만 가보겠네." 비욤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베샤님이 원하시는 최고의 보석이란 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마르세이는 씨익 웃으며 얼굴의 가리고 있던 나비문양의 가면을 벗어 버렸다. 그러자 따뜻한 인상의 잘생긴 이십대 후 반의 청년이 부드러운 미소를 띄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가면의 썼을 때의 마치 빙해에 부른 바람처럼 차갑고도 견고해 보이는 인상과는 정반대의 인상이었다. 금속가면이 아닌 부드러운 미소의 가면을 얼굴이 두른 듯한 느낌이라고 나 할까? 그것이 바로 해적왕 가라프가 아닌 나바린 왕인 마르세이 쿠스타 3세의 모습이었다. 대대로 가라프는 나바린의 왕이 이어받아야할 또 다른 사명이었던 것이다. 왕실 마법사와 몇몇 측근만이 알고 있을 뿐 비밀로 감추어져 있는. 새 캐릭터 마르세이입니다. 많이 사랑해 주세요.^^ Name 유지 [telefacy@hitel.net] Subject 마신 소환사 -82- 마르세이는 연구실 구석에 있는 작은 빈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왕궁의 중앙 홀로 이동할 수 있는 마법진이 설치되 어 있기 때문이었다. 비욤이 말했다. "마르세이님도 이제 혼인을 하셔야죠? 베커리스 가문의 아일린 양은 어떠신 지요? 요새도 마르세이님을 졸졸 따라다닙 니까?" 순간 마르세이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지는 것 같더니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일린 양은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그렇습니까? 제가 알기론 이번에 마르세이님이 결혼시키려는 베샤님과 같은 나이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습니까?" 그 둘이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것은 그 또한 알고 있었다. 얼마 전 그 둘의 성인식을 함께 치루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놀리는 비욤의 말에 마르세이는 약하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이동!" 그러자 흰빛의 기둥이 떠오르고 그 기둥이 사라지자 어느새 마르세이의 모습도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마르세이가 사라진 그 텅 빈 공간을 보며 비욤은 험악하게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젠장! 하필이면 그 분의 몸이 될 자가 남창이라니......!" 다음 날. 쟈스란은 일어나자마자 하연의 방문을 두드렸다. 하연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갑자기 두려워졌던 것이다. 늘 혼자였기 때문에 새삼 혼자라는 사실에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하연의 곁에 있으면서 자신이 하연에게 속해있다 는 실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랬다. 자신이 그녀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그녀도 자신을 필요로 해주길. 똑똑!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서운했지만 쟈스란은 하연이 잠이 많고 한번 자면 좀처럼 깨지 않는다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방문 앞에서 웅크린 채 하연이 깨어나 방문을 열고 나오며 자신에게 웃어지기를 기다렸다. 사담, 카리스, 미루엘, 리밍스가 나오고 아침식사에 이어 점심 식사까지 마쳤는데도 하연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멍하니 그런 방문을 바라보며 쟈스란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라 괴로웠다. 하연이 자신을 버리고 떠날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지 자꾸만 어머니의 얼굴과 하연의 얼굴이 겹쳐 보였던 것이다. 그 때쯤 카리스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안쪽에 갈루마의 반응이 느껴져서 그대로 두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해도 이렇게 늦게까지 일어나지 않을리는 없 었던 것이다. 혹시 어디 아픈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카리스는 벌떡 일어나서 사담에게 말했다. "문을 열어야겠습니다." 사담 역시 카리스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하연의 방문 쪽으로가 어깨를 들이받아 문을 부셔 버렸다. 쾅! 문짝이 날아가고 방안을 살핀 카리스와 사담의 안색은 어둡게 물들어 갔다. 하연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카리스는 재빨리 침상 밑에 있는 갈루마를 찾아들었다. 그리고 다른 동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외쳤다. "하연은......!" -젠장! 이제서야 나타나다니, 이 빌어먹을 도마뱀! 하연이 납치 당했어! 저 재수 없는 요물녀석 대신에!- 카리스는 갈루마가 말하는 그 재수 없는 요물녀석이 바로 쟈스란을 말하는 것임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그래서 아직 도 하연이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쟈스란에게 물었다. "하연이 납치를 당했습니다, 당신 대신에. 뭐, 집히는 것 없습니까?" 쟈스란은 혼란스런 얼굴로 카리스를 바라보았다. 하연이 자신 때문에 납치를 당하다니...... 왜, 누가 자신을 납치하려 든단 말인가? 별 볼일 없는 남창일 뿐인 자신을. 그저 돈 몇 푼만 던져주면 누구라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자신이 아니었던가? "......전 남창일 뿐입니다. 누가 저를 납치하려 든단 말입니까?" 피식! 자조적인 웃음을 짓는 쟈스란을 보며 그가 남창임을 몰랐던 하연의 동료들은 놀라서 잠시 말을 잇지 못했지만 무 뚝뚝한 사담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창을 원하는 자겠지." "그럼, 하연이 여자임을 알면 다시 돌려보내지 않겠습니까?" 미루엘이 안심한 듯 말했다. 그러나 사담과 카리스는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 없었다. 여자라도 상관없을지 모르지 않는 가? 카리스가 말했다. "우선 기다려보지요. 하연이 누군가에게 쉽게 당할 리는 없으니까요. 내일까지 기다려보고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때 행 동을 취하도록 합시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쟈스란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런 그들을 둘러보았다. "하, 하지만...... 하연이......!" 미루엘이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연이라면...... 오히려 납치된 것을 즐기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납치된걸 즐기다니...... 어리둥절해 하는 쟈스란과는 달리 하연의 일행들은 모두 의미심장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아침에 올립니다. 잘 하면 오늘 저녁에도...... 그럼 연참!!!^^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하연은 별로 납치 극을 즐기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방안에 갇혀 지루한 것은 물론이고 배까지 굶고 있었던 것이다. "아! 갈루마의 수다 소리가 다 그리워!" 투덜거리며 다시 침대에 들어 누워 있는데 문이 열리고 마르세이가 들어왔다. 얼굴을 가면으로 반쯤 가린 가라프의 모습으로. 하연은 그를 보자 왠지 찬 기운이 온 몸으로 밀려드는 것 같아서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렸다. "배고픈데 이어서 이젠 춥기까지......!" 이건 완전 거지 팔자가 아닌가? 화가 난 하연은 마르세이에게 소리쳤다. "야! 너 사람을 납치해 왔으면 밥은 줘야할 것 아니야! 밥도 안주는 주제에 왜 사람을 썰렁하게 만들어?" 마르세이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런 하연을 바라보았다. 그 험악한 해적들도 자신을 보면 이 얼음 같은 분위기에 얼어서 말도 못 꺼내는데 이 조그마한 녀석은 되려 화를 내고 따지다니...... 그러나 가두어놓기만 하고 신경을 써 주지 않은 자신의 잘못도 있기에 차분하게 물었다. "배고프냐?" "그럼, 밥도 안 먹었는데 배부르겠냐?" 마르세이는 아무 말도 없이 다시 밖으로 나갔다. 뒤에서 애타게 그를 부르는 하연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야, 야! 여보세요? 그냥 가면 어떡해! 밥은 주고 가야지!" 좀 비위에 거슬리는 말을 했다고 설마 이대로 굶겨 죽이려는 건. 그런 불길한 생각으로 하연이 고민하고 있는데 잠시 후, 마르세이가 다시 돌아왔다. 쟁반에 음식을 가득 담아서. 순간 하연은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며 마르세이에게서 쟁반을 낚아채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마르세이가 쟁반을 하연의 손이 미치지 못하게 높이 들어 올랐다. "뭐 하는 거예요? 지금 원숭이 훈련시켜요? 어서 내려나요!" "원숭이? 그게 뭐지? 어쨌든 내가 친히 이렇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데 뭐 할말없어?" "무슨 말이요?" 납치된 자에게 납치자가 먹을 것을 갖다 주는 건 당연한 의무가 아닌가? 도대체 무슨 말을 듣고 싶어서 저러는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마르세이가 다시 나갈 듯 발걸음을 돌리며 말했다. "아직 배가 들 고픈 모양이군. 먹고 싶지 않다니 할 수 없지 다시 가져가야지." "아악! 무슨 말이에요. 지금 배가 고파서 돌아가실 지경인데, 어서 내 놔요." "......할 말은?" "아!" 잠깐 생각해 보던 하연이 무엇을 떠올린 듯 환한 얼굴로 한 쪽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말했다. "잘 먹겠습니다!" 순간 마르세이는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마르세이가 듣고 싶은 말은 그 말이 아니었다. 우습지만 그가 하연에게서 듣고 싶었던 말은 단순한 한마디였다. 음식을 가져다주어서 고마워요. 그런 자신에게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마르세이는 쟁반을 하연에게 넘겨주었다. 그러자 하연은 정말 배가 고팠던지 허겁지겁 음식을 집어먹었다. 너무 급히 먹어 체했는지 켁켁 거리면서도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기를 멈추지 않을 정도였다. 마르세이는 그 모습을 보자 침대 머리맡에 있던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물컵을 하연의 입에 들이 대 주었다. 그러면서도 마르세이는 그런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자신이 이 소년에게 이런 친절을 베푸는 것인지. 도배라...... 저도 도배한번 해보는게 소원입니다. 언제나......(먼 산을 보듯) 마신 소환사 -84- 유지 [telefacy@hitel.net] Subject "뭐, 뭐라고!" 아일린은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꽃병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 모습에 시녀는 머뭇거리다 다시 한번 아일린에게 했던 말을 반복했고 그에 따라 아일린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그, 그럴 리가!" 아일린은 믿고 싶지 않았다. 그의 가라프가 자신의 침실에 남창을 데려다 놓고 손수 먹을 것을 가져다주다니...... 마르세이가 해적왕 가라프의 역을 할 때는 그 어떤 경우라고 친절하거나 부드러운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겨우 남창 따위를 위해 그런 일을 했다는 건 그 남창이 가라프의 마음에 중요한 자리를 잡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후들거리는 몸을 벽에 기대며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아일린은 이윽고 똑바로 몸을 일으키며 시녀에게 말했다. "베샤 공주님을 만나 뵈러 가야겠다, 준비해라!" "네, 알겠습니다." 시녀가 서둘러 고개를 숙이며 아일린의 옷을 갈아 입히고 머리를 빗겼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아일린에게는 마치 먼 꿈속의 일인 양 몽롱하게 비칠 뿐이었다. 얼마 후, 모든 준비를 마치자 그녀는 마차에 올랐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은 삭막한 나바린의 대지가 오늘따라 한층 아일린의 가슴을 시리게 만들었다.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사실이 아닐 거야!' 계속해서 그런 말들을 중얼거리며 아일린은 처음 마르세이를 보았던 그 때를 떠올렸다. 고개를 한껏 치켜올려야만 볼 수 있었던 꿈에 그리던 왕자님의 얼굴은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었다. 그의 미소는 마치 그녀의 모든 것을 포용할 듯 따뜻해서 아일린은 그만 그에게 푹 빠져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만큼 무서운 사내를 보았을 때 그녀는 그에게 끌리는 자신을 느끼고 당황했다. 그러나 곧 그 둘이 같은 사람이란 걸 알고 충격을 받았지만 받아들였다. 둘이 같은 사람이기에 자신이 그에게 끌렸던 거라고.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아일린은 그 두 표정은 다르지만 내면은 똑같은 차가운 얼굴이라는 것을 깨닫고 불안했다. 자신은 늘 이렇게 그가 자신을 돌아보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는 결코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데 그가 다른 사람을 그것도 남창 따위를 받아들였다니 믿을 수도 없고 믿어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절대 마르세이를 빼앗길 수 없다고 다짐했다. 이제 와서 그를 잃어버릴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편이 나았다. 활쏘기 연습을 하고 있던 베샤는 아일린이 뵙기를 청한다는 말에 엷은 한숨을 쉬었다. 그 소문을 들었다면 오리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자신을 찾아올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아쉬운 마음으로 활을 내려놓은 베샤는 어두운 얼굴로 손님을 맞기 위해 자신의 거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초조한 얼굴로 베샤를 기다리고 있던 아일린은 막상 베샤를 보자 목이 메이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공, 공주...... 님!" "아일린, 그냥 편하게 베샤라고 부르라니까. 소문을 들었나 보구나!" 순간 아일린이 넋을 잃은 듯한 표정으로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 모습에 베샤는 위로하듯 말했다. "걱정 마! 설령 오라버니가 그 자에게 마음이 있다고 해도 그 자는 남자잖아? 결국 왕비가 되는 건 너 일거야!" "알잖아, 베샤! 내가 원하는 건 왕비 자리가 아닌 그 분의 마음이란 걸." 울부짖듯 아일린은 소리쳤다. 베샤는 한숨과 함께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미안!" 그러나 계속해서 눈물만 떨구고 있는 친구를 보자 짜증이 치민 베샤가 소리쳤다. "뭐야? 아직 확인된 것도 없잖아? 소문일 뿐이라고. 자, 일어나! 확인해 보러가자!" "뭐?" 아일린은 놀라서 소리쳤다. 물론 그녀도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가라프님의 방에 어찌 함부로 쳐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베샤는 그런 아일린을 막무가내로 잡아끌었고 그들은 결국 가라프의 방 앞에 도착했다. 하하^^ 마신 소환사 -85- Subject 베샤는 문을 확 열어 재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과자를 먹고 있는 하연을 본 순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이 크게 떠졌다. 남창을 데리고 왔다더니 이건 여자가 아닌가? 베샤는 서둘러 뒤에 있는 아일린에게 외쳤다. "들어오지마, 아일린!" 하지만 이미 아일린은 들어왔고 하연을 보고 말았다. 베샤는 아일린이 자신의 오라버니가 침실에 들인 자가 여자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쓰러지지는 않을 까 걱정했지만 의외로 아일린은 냉정했다. 차분한 눈길로 하연을 보던 아일린이 물었다. "당신이 가라프님이 데려온 남창인가요?" 순간 베샤는 그럴 리가 라는 눈빛으로 하연을 돌아보았고 하연은 갑자기 들이닥친 두 여자로 인해 혼란스런 눈빛을 했다가 아일린의 말에 퉁명스럽게 과자를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맞아! 구경하러 오신 건가?" 솔직히 자신은 남창이 아니고 여자니까 하연이 기분이 나쁠 일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하연은 기분이 나빴다. 그 여리기 그지없어 보이는 쟈스란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남창이 뭐 그리 대단한 구경거리라고 이렇게 귀족의 여인들로 보이는 여자들이 남자 방에 들이닥친단 말인가? 베샤는 그런 오만한 하연의 태도에 화가 나 다짜고짜 하연의 뺨을 후려갈겼다. 짝! "일어나! 난 이 나라의 공주인 베샤다! 감히 내 앞에서 누워서 거들먹거리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느냐? 남창주제에 감히 가라프님을 꼬시고 나더니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더란 말이냐?" 하연은 뺨에서 열이 나는 것은 물론이고 가슴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다짜고짜 자신의 뺨을 때리다니...... 그 때 문뜩 어떤 생각이 떠오른 하연은 빙긋 웃으며 베샤공주를 훑어보더니 말했다. "아! 당신이 그 베샤 공주였군요. 저도 들었어요. 최고의 보석에 자신을 파시겠다고 공고하신. 훗! 그래도 전 몸은 팔아도 마음을 팔지 않는데......" 베샤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 저 남창이 자신을 마치 창녀보다 못한 인간으로 취급하고 있지 않는가? 화를 이기지 못한 베샤는 품속에서 단도를 꺼내들어 하연을 찌르려고 했다. 막 단도가 하연의 심장에 박히려는 순간. 쨍그랑! 하고 베샤의 손에 있던 단도가 떨어져 나갔다. 어느새 왔는지 마르세이가 장검으로 베샤의 단검을 쳐낸 것이다. 마르세이는 차가운 눈으로 베샤를 보며 명했다. "나가라, 어서!" 베샤는 자신이 당한 치욕을 고하려고 했지만 지금 마르세이가 가라프의 모습이고 그런 모습으로는 자신의 애원조차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애써 분함을 억누르고 험악한 눈초리로 하연을 쏘아보고는 아일린의 손을 잡고 방에서 나가버렸다. 아일린은 끌려나가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가라프와 하연, 둘만 저 방에 남아 있는 것이 불안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속으로 베샤를 탓했다. 베샤가 그렇게 성질대로만 행동하지 않았어도 물어볼 수 있었는데...... 가라프님과 어떤 관계냐고. 마르세이는 방문이 열려져 있었기 때문에 하연과 베샤가 주고 받은 말을 모두 듣고 있었다. 때문에 베샤가 화를 내는 것도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하연을 죽이려 들거라 고는 생각지 못했었기에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무척 당황해 있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화를 내며 하연에게 말했다. "무슨 짓이냐? 감히 건방지게 누구에게 그 따위 소리를!" "쳇! 내 입 가지고 내 맘대로 말도 못해요? 난 뺨까지 맞았는데......" 하면서 하연이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어루만지자 그 때서야 마르세도 어느 정도 화가 가라앉은 듯 하다가 문뜩 어떤 것을 떠올렸는지 입을 열었다. "......몸은 줘도 마음은 안 준다고? 내가 널 사도 그것은 마찬가지인가?" 하연은 갑자기 무슨 소린가 싶어 마르세이를 쳐다보았다. 마르세이는 마치 하연을 집어삼킬 듯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초리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하연은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마르세이가 그런 하연의 어깨를 잡아 누르며 대답을 독촉했다. "대답해!" 하연은 담담하게 말했다. "마찬가지에요. 설령 내가 나를 산다고 해도. 제 마음만은 누구에게도 줄 수 없어요. 그렇게 맹세했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하연의 눈은 마치 먼 어딘가를 보고 있는 듯 했다. 마르세이는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이 이렇게 눈앞에 있는데 다른 곳을 보고 있다니...... 마르세이는 하연의 어깨를 마구 흔들며 말했다. "나를 봐! 어디를 보고 있는 거지? 지금은 내가 너의 주인이다! 내가 명령하면 네 그 소중한 마음도 내게 주어야만 하는 거야. 알겠어, 쟈스란?" 그러더니 마르세이는 하연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난폭하게 밀어붙였다. 연참입니다^^ 연참을 올렸더니 하루가 보람차고 세상이 달라져 보이네요. 흐믓! 흐믓! 여러분도 오늘 즐거운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Name 유지 [telefacy@hitel.net] Subject 마신 소환사 -86- 자신의 입술을 거칠게 탐하는 마르세이의 입술을 느끼면서 하연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솔직히 그 때까지 하연은 마르세이가 남자라는 사실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마르세이가 그녀를 남자인 쟈스란으로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의식중에 여자라는 인식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랑을 해서 세상에 미련을 남기고 죽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키스하자 하연은 자신이 여자라는 인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동시에 두려워 졌다. 그리고 어느 새 정신을 차려보니 하연은 마르세이를 마구 밀쳐내고 있었다. 마르세이는 정신이 없었다. 너무나 달콤한 입술이었다. 마치 향기롭고 진한 술을 마시는 듯한 그 느낌에 취해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였다. 이런 경우는 정말 처음이었다. 키스 한번에 이렇게 취해보기는. 그런데 쟈스란은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자신처럼 키스에 취하지도 않았고 제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듯 자신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화가 났다. 자신은 이처럼 정신이 없는데 상대는 냉정을 유지하고 있다니......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그는 거칠게 하연에게 달려들어 로브를 벗겨내려고 잡아당겼다. 순간 마르세이는 강렬하게 정신을 빨아들일 듯한 향기에 취해 멍해지고 말았다. 바로 다이아스 꽃의 정령 다이아의 정기와 합해진 하연의 체취가 그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상시에 하연의 몸에서 그 사람의 정신을 매혹시키는 그 향취가 나지 않는 것은 바로 하연이 입고 다니는 로브 덕분이었다. 실버 드래곤 칼링스타의 보물창고에 있던 은빛 천을 카이람이 검은 색의 로브로 바꿔 하연에게 입힌 이 로브는 보통 로브가 아닌 바로 칼링스타가 자신의 비늘을 떼어 천으로 만든 것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체취가 밖으로 세어 나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물과 불에도 끄덕 없으며 언제나 일정한 온도를 유지시켜 주고 있었다. 그런데 마르세이가 그 로브를 들추는 바람에 그 동안 감추어져 있던 하연의 향취가 진하게 마르세이를 코를 자극했고 그의 이성을 빼앗아간 것이었다. 그 매혹적인 향취에 빠진 마르세이는 하연이 나바린의 오랜 숙원인 갈로아의 곡창지대인 브리스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귀중한 카드라는 사실조차 망각해버렸다. 좀 더 하연과 몸도 마음도 가까워지고 싶고 소유하고 싶다는 것,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생각이었다. 마치 그 황금빛 눈에 핏발이 선 듯한 마르세이의 모습에 하연은 두려움에 질려 그만 카이람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마르세이가 무슨 충격을 받은 듯 눈이 풀리며 서서히 하연의 몸 위로 힘없이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의아해서 마르세이의 뒤를 쳐다보니 불의 마왕 바토르와 얼음의 마왕 데바가 살기가 가득한 얼굴로 마르세이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어......!"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한 하연은 마르세이에게 깔린 채 눈물을 뚝뚝 떨구며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물을 따라 진한 다이아스의 향기가 자욱하게 주위에 퍼져나갔다. 그러자 재빨리 바토르가 하연의 위에 정신을 잃은 채 업혀져 있는 마르세이를 던져버리고 하연의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만 울어라! 네 향기에 나마저도 질식할 것 같다." 데바 또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도대체 카이람님은 어쩌자고 이런 위험한 여자를 방치해두는 건지." 그 때서야 간신히 제정신을 차린 하연은 쓰러져 있는 마르세이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그런 일을 당할 뻔했으면서도 왠지 걱정하는 듯 들리는 하연의 말에 인상을 찡그리며 데바가 말했다. "마법으로 잠깐 잠든 것 뿐이야!" "가라프가 왜 저런 거지요? 갑자기 눈빛이 이상하게 변하더니......" "휴우~ 지금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그러나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듯한 표정으로 하연이 자신을 쳐다보자 데바는 기가 차서 중얼거렸다. "여태까지 당하지 않은 게 기적이군." 그리고 말했다. "너, 네 몸 속에 상급정령에 해당하는 다이아스 정령의 기운이 녹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하연은 그 말에 문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다이아라는 정령을 꿀꺽 했던 희한한 경험을 하지 않았던가? "그 정령의 기운이 네 속에 녹아서 너의 체취와 섞여 그 냄새를 맡은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감성을 자극해 너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 같다. 애초 다이아스 꽃향기가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작용을 하니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 그러니까 내 냄새를 맡고 가라프가 이성을 잃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인가요?" 데바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면서 하연은 망연자실했다. "하, 하지만 다른 때는 멀쩡하다가 왜 하필 지금이지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안 그랬는데 저 가라프만......?" 그 질문에 바토르가 하연의 로브를 다시 여며주면서 말했다. "이 로브 덕분이지. 이건 드래곤 스케일로 되어 있어 웬만한 냄새는 밖으로 새나가지 않거든. 그러니 앞으로 당하기 싫으면 함부로 이 로브를 벗지도 말고 울지도 말아라!" 기가 막히다는 듯 잠시 넋을 잃고 있던 하연이 문뜩 생각난 듯 바토르와 데바에게 물었다. "그런데 당신들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요?" 순간 바토르와 데바는 말문이 막힌 듯 입을 열지 못했다. 그들은 카이람에게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뒤, 은밀히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카이람의 말처럼 그들이 하연에게 목숨의 빚이 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이 달리 마왕이겠는가? 그저 그들은 자신들이 소멸하면 그녀가 슬퍼 할거라는 카이람의 말에 그녀에 대해 호기심이 생겨 따라 다니는 것뿐이었다. 그러다가 하연이 카이람을 부르려는 기색이 느껴지자 당황해서 하연을 구해주게 된 것이었다. 자신들이 곁에 있으면서도 이런 하찮은 일로 그 분이 소환된다면 이번에야 말로 진짜로 소멸될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어찌 마왕의 체면에 한낱 여자의 뒤를 쫓아다녔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하연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마르세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남자의 조금 전에 이 방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기억을 지워 줄 수 있어요?" 데바가 말했다. "할 수는 있지만......!" 그러면 나중에 없어진 기억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말하려는데 하연이 그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지워주세요. 그리고 지금 내 동료들이 뭐하고 있는지도 좀 알아봐 주시고요." 바토르와 데바는 어이가 없었다. 마왕인 자신들에게 마치 자신의 수하를 다루듯 명령하다니...... 그러나 왠지 이 인간여자의 말을 거부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한숨과 함께 데바가 마르세이의 머리에 잠깐 손을 올렸다가 떼며 조금 전의 기억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그는 바토르와 함께 그 공간에서 사라져버렸다. 하연의 명대로 그녀의 동료들이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살피기 위해. 하연의 하렘이 점점 불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남자들을...... 어디 멋진 남자 없을까? 고민하는 유지였습니다.^^ 그때쯤 하연의 일행들은 드디어 하연을 찾아 나서기로 결심하고 트레져 헌터인 미루엘이 그 유명한 도둑 검은 다이아스의 손녀라는 것을 증명하듯 손쉽게 밖에서 잠긴 문을 열고 밖의 상황을 살펴보고 있었다. 밖에는 보초를 서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고 텅 빈 긴 복도만이 보였지만 오히려 그 것이 더욱 미루엘을 긴장시켰다. 그만큼 이 곳에 설치한 함정들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 때문에 좀처럼 문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자 성질이 급한 리밍스가 참지 못하고 먼저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겁쟁이같이! 내가 앞장서마!" 리밍스의 발이 막 문밖의 바닥에 닿으려는 순간 미루엘이 잽싸게 리밍스의 등뒤의 옷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보십시오. 우선 확인해 보고요." 그러더니 옷에 달린 단추 하나를 뜯어내 복도 위에 조심스럽게 떨어트렸다. 또르르르! 그러자 파파파팟! 하고 화살이 천장에서 바닥으로 빽빽이 내리꽂히며 작은 단추마저도 꿰뚫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 광경에 리밍스의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미루엘이 말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자신은 화살바디가 되어 있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고맙다." 리밍스가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리밍스로부터 생각지도 못한 인사를 받은 미루엘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짓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뭘요. 이제 시작일 뿐인데요." 미루엘의 말 대로였다. 최대한 조심해서 한 발짝 한 발짝 움직였지만 그 때마다 화살들과 암기들, 그리고 불덩어리들이 날아들었다. 사담과 리밍스가 검과 도끼로 화살들과 암기들을 쳐내고 카리스가 실드를 쳐 불덩어리들을 퉁겨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몇 개의 암기들이 그들의 어깨를 스치고 불덩어리들이 그들의 옷자락을 태우고 지나갔던 것이다. 쟈스란은 그들 속에 둘러 쌓여 여기저기 날아오는 화살들과 불덩어리들을 보면서 머리 속이 하얗게 비어오는 느낌이었다.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고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질식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를 더욱 두렵게 하는 것은 그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저 하연의 동료들에게 짐일뿐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를 책임지기로 한 사람은 하연이지 그들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로서는 그들이 자신을 버려 두고 간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것. 이 함정 속에서 혼자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를 가장 두렵게 만들었다. 그들이 갇혀 있던 방에서 한 백 보쯤 걸었을까? 츠츠츠츠! 갑자기 사방에서 검은 연기가 새어나와 복도를 가득 매웠다. "뭐, 뭐지?" 미루엘이 당황해서 그 검은 연기에 손을 대려하자 사담이 재빨리 그 손을 치며 말했다. "건드리지마! 독이다!" 그 말에 카리스가 재빨리 일행들 주위에 둥근 바리케이트를 쳐서 다행이 독을 들이키지는 않았지만 언제까지 카리스의 마나를 소모해가며 그렇게 서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 그들은 초조해졌다. 그 때 검은 독무 속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구해줘야 하나?" "뭐하고 있는지 보고 오라고 했지 구해주라고는 안 했던 것 같은데요!" "그렇지?" 그러면서 그들이 곧 사라질 것 같자 미루엘이 당황해서 외쳤다. "잠,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그냥 가면 어떻게 합니까? 위험에 빠진 사람을 보면 구해주는 것이 인지상정 아닙니까?" 순간 그 목소리들의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쿡쿡! 인지상정이라......!" "요즘 바토르님이 헛소리를 안 하신다고 좋다했더니 하찮은 인간 따위한테 헛소리를 듣게 되는군요." 그 말에 화가 나서 미루엘이 뭐라고 소리치려하자 카리스가 만류하며 말했다. "그만두십시오. 저들은 인간이 아닌 마왕입니다." "헉!" 순간 그들은 기겁을 하며 놀랐다. 마왕이라니...... 왜 마왕들이 이 곳이 있단 말인가? 혼란스러워하는 일행들을 대신하듯 카리스가 물었다. "어째서 너희들이 이곳에 있는 거지?" 그 차갑고 조금도 겁을 먹지 않은 듯한 카리스의 물음에 그의 일행들이 마왕을 대면했다는 사실보다 더욱 놀랐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그러자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더니 주위를 자욱하게 뒤덮고 있던 검은 연기들이 한순간 얼음 조각이 되어 바닥으로 후두두둑! 떨어졌다. 그리고 눈앞에 짧고 삐친 붉은 머리를 한 장신의 사내와 얼음으로 빚은 듯 투명하리 만치 희고 긴 머리채를 늘어트리고 있는 아름다운 사내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이 보였다. 데바가 입을 열어 말했다. "아무래도 인간들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것 같아 이 기회에 인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좀 해볼까해서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카리스님. 그렇지 않습니까, 바토르님?" 차마 하연의 심부름을 하고 있다고는 말못하고 말을 돌리는 데바의 말에 바토르는 재빨리 긍정을 표했다. "물론!" 그러나 그것이 더 카리스의 의심을 사고야 말았으니.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인 얼음의 마왕 데바와 불의 마왕 바토르가 함께 인간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돌아다니고 있다는 말을 믿으라는 건가?" 순간 바토르와 데바는 속으로 크게 당황했으나 수많은 세월동안을 살아왔던 연륜을 발휘해 애써 무심한 표정을 유지한 채 말했다. "흐흠! 어디까지나 윗분의 명령이라......" "그렇지요." 카리스는 의아한 얼굴이었다. "윗분이라면 카이람님을 말하는 것입니까?" "뭐, 그렇지!" 바토르는 대충 대꾸를 해 주고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말했다. "어쨌든 우리는 그만 바빠서......" 그러면서 재빨리 그들이 사라지려고 하는데 미루엘이 그들을 멈춰 세웠다. "잠깐만!" 그들이 돌아보자 미루엘은 정확히 얼음의 마왕 데바의 빙정의 박아넣은 듯 차갑기 이를 데 없는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한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십 삼년전 얼음의 방패 카르마시아를 빌리러 당신을 찾아갔던 용사일행을 기억하십니까?" 순간 데바의 머리 속에 십 삼년전 용사일행들답지 않게 마왕성의 정문에 노크를 하고 방문을 허락해 달라던 희한한 자들이 떠올랐다. 예의를 아는 마왕답게 각기 그들의 한 팔을 자르고 놓아주었던 것도. 그러나 마왕인 자신이 도전해온 용사들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우습고 해서 딱 잡아떼며 말했다. "모르겠는데!" "그렇다면 기억해 내십시오." "어째서?" 데바가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왜 자신이 그런 하찮은 인간들을 기억해야 한단 말인가? "그들에 대한 복수로 제가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훔쳐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데바는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토르 또한 마찬가지인 듯 커다란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 저 인간이 너의 가장 소중한 것을 훔쳐 간다는 군. 앞으로 불안해서 어떻게 사냐, 데바?" 데바는 피식 웃었다.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하지만 데바는 아무 것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몇 천년의 세월을 살면서 그에게 소중했던 것은 모두 사라지고 이제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바토르와 데바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미루엘은 이를 악물었다. 비웃어도 좋았다. 반드시 아버지의 복수를 하리라고 미루엘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꼬마악마님의 그림 잘 봤습니다.^^ 귀엽더군요. 그런데 그것 하연의 아기그림인가요? ......아무래도 다음 편에나 하연의 정체가 마르세이에게 밝혀질 것 같습니다. 기억이 돌아오게 하는 것은 힘들다 보니......^^ Name 유지 [telefacy@hitel.net] Subject 마신 소환사 -88- 머리가 약간 몽롱한 상태에서 잠을 깬 마르세이는 자신을 경계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는 그, 하연을 보며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사람들의 시선에 어떻게 비치는지. 때문에 그는 하연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존재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었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를 별로 의식하지 않는 하연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었는데 갑자기 하연이 자신의 의식하는 듯한 표정이자 의아했던 것이다. "뭐지?" 하연은 혹시 조금전의 일을 마르세이가 기억하고 있을까봐 걱정스럽게 그가 일어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아무 것도 모르는 듯한 마르세이의 표정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밝게 말했다. "아무 것도요. 그냥 잘생겼구나 싶어서." 마르세이의 그 말에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하연의 그런 태도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물었다. "그런데 내가 왜 자고 있는 거지?" "음? 잠깐 피곤하다고 눈을 붙이러 왔었잖아요? 잊어버린 거예요?" 그 말에 마르세이는 아마도 자신이 하연을 보러 올 핑계로 피곤하다고 말하고 들어 와 누운 것이 그만 진짜로 잠들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 그럼 너무 많이 쉬었는데. 난 이만 일이 있어서 저녁 때 보자고." 그리고 밖으로 나가는 마르세이를 보며 하연은 이 상황을 무사히 해결했다고 생각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가면을 벗고 나바린의 왕으로서 집무실에 이른 마르세이는 황당한 경우를 맞이하고 말았던 것이다. 자신이 기억조차 못하는 일로 추궁을 당하는. 좀전에 하연에게 당한 일로 분을 참지 못한 베샤가 마르세이가 가라프의 모습에서 나바린의 왕으로 돌아오는 때를 기다려 불만을 터트린 것이다. "오라버니! 어떻게 남창 따위로 인해 하나밖에 없는 동생에서 그런 모욕을 줄 수 있지요? 게다가 아일린도 있는 자리에서 말이에요. 설마 진짜 그 남창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오라버니는 왕이에요. 정통을 이어야 한다고요. 명심하세요." 잠자코 베샤의 말을 듣기만 하던 마르세이가 가면처럼 쓰고 있던 부드러운 미소를 지우며 물었다. "그게 언제 있었던 일이지?" "무슨 소리예요. 방금 전 게일럭스의 오라버니 침실에서 있었던 일이잖아요? 설마, 그런 일따위 기억 못한다고 시치미 떼려는 건가요?" 길길이 날뛰는 베샤를 보며 마르세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진짜 그런 기억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좀 전의 하연의 태도 또한 이상했었지 않은가? 분명 이 가운데는 무엇인가 있다고 생각한 마르세이는 베샤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비욤의 연구실로 향했다. 비욤은 방금 가면을 벗으러 왔다가 또 다시 오는 마르세이를 보며 설마 소문처럼 그 남창 때문인가 하는 생각에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이죽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자주 들리십니다, 마르세이님. 설마 정말 그 사이 취향이 바뀌기라도 하신 겁니까?" "그것보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기억하는 일을 나만 기억 못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던 비욤이 말했다. "아마도 충격을 받아 일시적인 기억상실에 걸린 것이거나 마법으로 기억이 지워진 거겠지요? 마르세이님이 그런 일을 당하신 겁니까?" 호기심을 들어내는 비욤의 말을 자르며 마르세이가 물었다. "그 기억을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가?" "글쎄요. 어려운 일입니다. 마법으로 지워진 거라면 마법을 시전한 자보다 뛰어난 마법사가 기억을 회복시켜야 하고 일시적인 기억 상실의 경우 강한 정신적 충격을 받으면 기억이 회복되는 수가 있다고는 들었지만 마르세이님의 경우라면 정신력이 강하시니 일시적인 기억상실보다는 마법에 의해 기억이 지워진 경우라고 보아야 타당할 것이니...... 어디 제가 한번 해보지요." 비욤이 외눈을 번뜩이며 마르세이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스펠을 중얼거렸다. "레스토어 메모리!" 그와 함께 그의 손에서 빛이 번쩍였다. "어떻습니까? 기억이 돌아왔습니까?" 기억을 더듬어보던 마르세이는 곧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그렇다면 상대는 저보다 높은 레벨의 마법사라는 말인데 설마 아스탄이 여기 왔을 리는 없는데......" 비욤은 6서클의 마법사였다. 따라서 현 대륙에서 그보다 마법의 레벨이 높은 마법사는 7서클 아스탄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 때 문뜩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아, 참! 또한 경우가 있습니다. 어둠의 물의 사제라면 약간의 저주로 기억을 지울 수가 있지요. 오늘 사제를 만나셨습니까?" "사제?" "네!" 그 말에 마르세이는 자신의 방에 있을 쟈스란을 떠올렸다. 그의 검은 로브와 붉은 서클렛. "젠장!" 붉은 서클렛은 물의 사제가 아닌 불의 사제라는 뜻이었지만 이 순간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속았다는 바로 그것이었다. 화가 난 마르세이는 재빨리 금속 가면을 쓰고 마법진으로 가 게일럭스 성으로 이동해 갔다. 그리고 웅성거리는 해적들 사이를 냉기 어린 시선으로 쏘아 본 후 서재로 들어가면서 소리쳤다. "당장 수므카를 불러와라!" 얼마나 서재를 왔다 갔다 했을까? 긴장한 표정으로 수므카가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가라프시여!" 수므카는 자신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는 가라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무슨 실수라도 했단 말인가? "쟈스란이 남창이 분명한가?" "네? 네. 맞습니다. 그랑디아의 바람의 거리에서 사온 물건입니다." 그랑디아의 바람의 거리는 유명한 고급 사창가였다. 거기서 사 왔다면 무엇보다 쟈스란이 남창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사제를 표시하는 검은 로브에 붉은 서클렛을 한 것일까?" 중얼거리듯 말하는 마르세이의 말에 수므카는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검은 로브에 붉은 서클렛을 했다면 자신이 기회를 봐서 죽이려고 일부러 가라프에게는 보고하지 않았던 그 어둠의 사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잠시 고민하던 수므카는 하연의 존재에 대해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어떻게 그녀를 잡았으며 바람의 달이 정 중앙에 오는 날까지 황금 세관을 받고 그녀의 약혼자에게 그녀를 건내주기로 했다는 사실까지...... 그러면서 수므카는 냉엄한 마르세이의 표정이 서서히 풀리는 것을 보았다. 마치 넋을 잃은 듯 멍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던 마르세이가 중얼거렸다. "......여자란 말이지?" 그러더니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크하하하하!" 어째서 그에게 욕망을 느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그녀였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 동안 그를 괴롭게 했던 모든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되어 버리자 마르세이는 세상 전부를 얻은 듯 기뻤다. 그리고 그 차가운 눈을 번뜩이며 맹세했다. "갖고 싶은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갖는다. 그것이 해적왕 가라프로서의 신념이니까!" ====================================================================================== 마법검사님을 비롯한 여러 분들이 하연과 카이람의 커플을 자꾸 지지하고 있다 보니...... 어느새 저도 세뇌가 되어가는건지......^^ 하지만 아직 먼 훗날의 일이니 열심히 열심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 Name 유지 [telefacy@hitel.net] Subject 하연 일행들이 간신히 서쪽 건물을 탈출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우르르 몰려드는 해적들로 의해 그들은 다시 방으로 잡혀갈 수밖에 없었고 쟈스란은 그들과 떨어져 애꾸눈 마법사 비욤의 연구실로 끌려갔다. 비욤은 끌려 온 쟈스란의 몸을 이리저리 찬찬히 살펴보더니 희죽희죽 웃으며 말했다. "계집애처럼 생기긴 했지만 꽤 쓸만한 몸이군. 이 정도면 그 분도 만족하시겠지." 분명 또 다시 누군가의 잠자리 상대로 팔려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 쟈스란의 얼굴은 절망적인 표정에서 이내 곧 체념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자신을 구해주겠다던 책임져 주겠다던 한 여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연!' 저녁때쯤 마르세이가 피곤한 표정으로 하연이 있는 방으로 들어오자 하연은 깜짝 놀랐다. 그가 이 방에서 자려고 할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마르베스가 슬쩍 고개를 들어 하연을 보더니 말했다. "언제까지 그 우중충한 검은 로브를 입고 있을 거지? 욕실은 저 쪽이니까 벗고 샤워해라. ......아! 같이 할까?" 하연은 기겁을 해서 재빨리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마르세이는 그런 하연을 보며 웬 호들갑이냐는 듯 말했다. "뭐야? 여자라면 몰라도 난 남자는 취미 없다니까. 그리고 같은 남자끼리 뭐 어때서 그래? 시간도 절약할 겸 같이 하자!" "아, 아니에요. 저 씻고 싶지 않아요." "왜 그래? 벗겨주기까지 해야 하는 거야?" 귀찮다는 표정이면서도 진짜 벗겨줄 것처럼 다가오는 마르세이를 보며 하연은 하얗게 질린 채 뒷걸음치듯 욕실이 있는 쪽으로 도망가 문을 안에서 잠궈 버렸다. "나 혼자 씻을 거예요. 그러니 들어올 생각하지 말아요." 욕실 밖에서 쿡쿡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하연은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았지만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혹시 지워버린 마르세이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은 아닐까 했지만 하연을 바라볼 때의 그 심드렁한 표정으로 보아서는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역시 내 몸에서 나는 다이아스 정령의 향기 때문에 잠깐 돌았었던 것뿐 일거야.' 스스로를 달래듯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하연은 정말 이럴 때는 갈루마가 곁에 없다는 것이 너무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있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적절한 충고를 해 주었을 텐데...... 간단히 씻고 로브를 꼭 여민 후, 욕실을 나선 하연은 침대에 누워 조용히 잠들어 있는 마르세이를 보았다. 부드러운 적갈색의 머리가 섬세하게 다듬어진 얼굴주위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고 벗은 상체는 구리 빛 근육들도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순간 가슴이 두근거려버린 하연은 그가 지금 자신에게 여자를 유혹하는 남자의 향기를 풍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 생각을 지운 하연은 곧 이맛살을 찌푸리며 어디서 자야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침대는 하나뿐이지만 장정 넷이 자도 넉넉할 정도로 충분히 컸다. 게다가 마르세이도 잠들어 있는데 괜히 땅바닥에서 자면서 고생을 사서할 필요는 없으리란 생각에 하연은 슬며시 마르세이 곁에 가 누웠다. 그러나 곁에 남자가 누워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하연은 좀처럼 잠을 자지 못하고 한동안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그러자 그 때까지 자고 있다고 생각했던 마르세이가 번쩍 눈이 떴다. 그리고 비스듬히 상체를 일으키고는 잠들어 있는 하연의 창백하게까지 보이는 하얀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약혼자가 있다고? 하지만 난 널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거다. 그러니 내 곁에서 만족해야 할 것이다, 하연." 다음 날. 하연은 자신이 여자임을 마르세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침밥을 먹고 싶으면 입으라고 내 놓은 옷 때문이었다. 그것은 여자 옷이었던 것이다. 아자란 군도에는 크고 작은 이름 없는 섬들이 암초처럼 이리저리 불쑥 솟아있었다. 때문에 큰배들이 드나들 수 없어 작은 배에 황금 세관을 싣고 노를 저을 선원 두 명과 글렌만을 데리고 네이브는 붉은 섬을 이르렀다. 붉은 섬은 이 곳 아자란 군도의 많은 섬들 가운데서도 유독 붉은 바위들이 많은 섬으로 금방 눈에 들어와 해적들이 물물교환의 장소로서 많이 쓰는 곳이었다. 그 섬을 보며 글렌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해적들이 약속을 지킬지 의문이군." "......지키지 않는다면 지키도록 만들어야지." 단오하게 말하는 네이브를 돌아보며 글렌은 작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처음 네이브를 만났을 때부터 그는 그의 이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대륙 최고의 교육기관인 혼 슈이센 왕립학교는 각기 다른 나라의 많은 귀족들이 입학해 새로운 지식을 늘리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사교의 장으로서 활용되고 있었다. 때문에 평민은 극소수였고 글렌도 그 중 하나였다. 그래서 아무리 뛰어난 성적을 거두어도 그와 같은 존재는 무시당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네이브만은 그런 그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동정이나 연민도 아니었다. 서슴없이 그의 면전에다 대고 그의 뛰어난 머리를 이용하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서라도 가는 자. 그런 네이브이기 때문에 글렌은 네이브가 그에게 자신의 한 팔이 되어달라고 제안했을 때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받아들인 것이었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길이 아닌 그와 함께 길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붉은 섬의 안쪽으로 돌아가자 그곳에는 이미 가라프와 수므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네이브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강한 카리스마를 발하며 빙해의 날카로운 바람처럼 서 있는 적갈색 머리에 황금빛 눈동자를 지닌 북해의 사자와도 같은 사나이. 바로 해적왕 가라프가 그의 눈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하연을 놓고 남자들의 결투가......^^ 쿡쿡!! 그저 자꾸 웃음만 나오는군요. ^-^ Name 유지 [telefacy@hitel.net] Subject 마신 소환사 -90- 한편 가라프 또한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네이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긴 푸른 머리에 어딘가 감정이 하나 메말라 있는 듯한 차갑고 이지적인 얼굴의 사내는 분명 그가 익히 아는 상인길드의 장인 카라반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약혼자인 이상 평범한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자였다니......' 네이브 또한 생각했다. '왜 가라프가 직접 이 자리에 나타났단 말인가? 설마 하연이 마신 소환사라는 사실을 알아버렸단 말인가?' 불길한 느낌에 시선은 계속 가라프에게 고정한 채 네이브는 수므카에게 물었다. "내 약혼녀는 어디 있습니까?" 그 질문에 대답한 것은 가라프였다. "그녀는 오지 않았다." "어째서이지요?" "내가 원하지 않으니까." 순간 네이브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 말은 가라프께서 제 약혼녀를 원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말은 단순하게 그렇게 물었지만 네이브의 머리 속에서는 그 순간 많은 생각들이 오가고 있었다. 정확히 가라프가 원하는 것이 여자로서의 하연인지 마신 소환사로서의 하연인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고민은 가라프의 다음 말로 인해 더 이상 길게 이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하연은 이제 내 것이다. 너에게 돌려주지 않아." 남자로서의 소유욕이 가득한 그 말에 네이브는 가라프가 원하는 것이 여자로서의 하연임을 알아챘던 것이다. "하!" 허탈해서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도대체 그 여자가 어떻게 했기에 저 냉혹한 북해의 사자의 마음을 녹여버린 것일까? 정말이지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데는 타고난 여자라고 생각하며 네이브는 치미는 짜증을 억지로 억누르고 말했다. "저 또한 하연을 누구에게도 줄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마음이 저에게서 떠났다면 그녀를 붙잡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음만은 돈으로도 살 수 없다는 것을 장사치인 저로서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저에게 그녀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그녀로부터 확실한 대답을 들어야겠습니다." 가라프가 망설이는 듯 얼굴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분명 하연을 잡아두려는 것은 그의 생각이지 그녀의 생각이 아닌 게 확실해 보였다. 그러자 좀 느긋해진 마음으로 네이브는 가라프의 대답을 기다릴 수 있었다. 오고 가는 것은 오직 하연의 마음에 달린 것이라는 사실을 네이브는 잘 알고 있었다. 마신 소환사인 그녀를 누가 붙잡아 둘 수 있겠는가? 마신 소환사가 아니라도 결코 손에 잡히지 않을 바람 같았던 여자. 어떻게 해서든 직접 만나 그녀 스스로 자신을 따라오고 싶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만큼은 네이브로서도 별로 자신이 없었지만 그는 반드시 그 일을 성공시킬 생각이었다. 굳은 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으려니까 가라프가 이윽고 결정한 듯 말했다. "좋다! 그녀를 만나게 해 주지. 마지막 인사말이나 생각해 두도록." 그 말에 시종 못마땅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가라프를 수행하고 있던 수므카가 퉁명스럽게 네이브에게 말했다. "따라와라!" 그리고 네이브의 뒤를 따르는 글렌을 보더니 말했다. "너 혼자 만이다!" 순간 글렌이 그 말도 안돼는 결정에 항의하려고 하자 네이브가 한 손으로 그를 막으며 말했다. "알겠소." 그러더니 글렌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 그리고 내일까지 내가 오지 않으면 돌아가서 아스탄과 모든 일을 상의해 줘." 글렌은 말없이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스탄을 제외하고 네이브가 한번 결정한 사항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하연은 마치 무슨 범죄의 온상을 보는 듯한 눈으로 침대 위에 놓여진 드레스를 노려보았다. 아니,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 어떤 범죄보다도 극악한 것이었다. 저 드레스를 입기 전에는 밥을 안주겠다고 해서 벌써 아침에 이어 점심까지 굶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두끼를 굶자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진 하연은 서서히 타협에 들어갔다. 자느라고 못 먹던 아침 한끼에 비해 눈뜨고도 못 먹는 아침 한 끼는 정말 서러웠던 것이다. '그래. 안에 저 드레스를 입고 겉에 다시 로브로 입으면 괜찮을 거야.' 자신의 몸에서 나는 이상한 향기. 그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뿐이라면 정말 저 귀찮고 어둠침침한 로브 따위 하연은 아무런 미련 없이 벗어 던졌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달려든다는 것이었다. 남자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던 저 냉혹한 인상의 가라프마저 자신을 남자라고 알고 있을 때조차 자신의 몸에서 나는 향기 때문에 눈빛까지 변해서 달려들었지 않은가?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걷는다고 만사에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는 것이다. 드레스를 입고 로브를 다시 걸치고 있으려니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가라프가 밥을 가지고 왔나 하는 생각에 하연은 서둘러 달려가 문을 열었다. 그런데 뜻밖에 문밖에는 마르세이가 아닌 얼마 전에 그 건방진 공주와 함께 방문했던 아일린이라는 여자였다. 그녀는 하연의 비록 로브 안이긴 했지만 극명하게 드러나는 드레스차림에 멍하니 굳은 표정이었다. "......여자예요? 여자였어요?" 충격이 가득한 표정으로 다그치는 아일린을 보며 하연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 이세계에 와서 많은 경험을 했지만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의심받는 경험을 하게 될 줄이야. 역시 이세계는 뭔가 달라고 다른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하연은 자신의 성별을 밝혔다. "여자인데요. 뭐가 잘못 되었나요?" "이럴수가!" 아일린은 창백한 얼굴로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다급한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그, 그분을 사랑하나요? 나만큼. 그 분 이외에는 모든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그 분을 사랑하는 건가요? 그것이 아니라면 포기해 주세요. 그밖에 다른 원하는 것이 있다면 모두 드리겠어요. 원한다면 제 한 팔이라도 잘라 드리겠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그 분만은 포기해 주세요." 이제 90편. 열편만 더 올리면 100편! 100편 올라가면 이벤트로 케릭터 인기순위나 메겨 볼까요? ^^ Name 유지 [telefacy@hitel.net] Subject 마신 소환사 -91-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듯한 얼굴로 애원하는 여자를 보며 하연은 난처하기도 했지만 화가 났다. '뭐야? 눈물로 구걸하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동정으로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게 쉬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을 원하는 내가 너무 초라해 지잖아?' 하연은 그런 아일린을 비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원한다면 이렇게 적한테 와서 구걸하듯 울지 말고 내게서 빼앗아봐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사랑은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 말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 아일린은 멍한 얼굴로 하연을 보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곧 얼굴을 밝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반드시 빼앗아 보이겠어요. 당신이 오늘 한 충고를 후회하도록 요. 기대해도 좋을 거예요." 그러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아일린의 뒷모습을 보면서 하연은 피식 웃었다. 그녀에겐 후회할 시간조차 없었으니까. 한동안 멍하니 그렇게 서 있던 하연은 문뜩 떠오르는 어떤 생각에 두눈을 반짝였다.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그러고 보니 감시자도 없고 방문은 열려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야 말로 탈출이라는 모험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겠는가? 마왕들의 말에 따르면 그녀의 일행들은 서쪽 건물에서 탈출 중이라고 하니 서쪽으로 가면 일행들을 만나서 같이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하연은 무작정 서쪽으로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만치 막다른 골목이 보였다.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하연은 멍하니 막다른 골목에 걸려 있는 테피스트리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원탁의 기사의 한 장면을 보는 듯 둥근 커다란 탁자를 중앙에 놓고 기사들이 빙 둘러서서 정 가운데 서로 칼을 맞대고 있는 그림이 수놓인 것으로 바로 나바린의 기사들이 기사의 명예를 버리고 백성들을 위해 해적이 되기를 맹세하는 장면이었다. 그것이 지금에 이르러 해적들의 모임인 그렌챠가 된 것이다. 그것을 알리 없는 하연이었지만 그 그림 속의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 속에서 그들을 서로 이어주는 어떤 뜨거운 열정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열정은 하연의 우울한 기분을 몰아내고 새 기운이 솟아나게 만들어 주었다.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고 그것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설령 그것이 궁지에 몰린 생쥐의 역할이라도. "영화에서 보면 이런 곳에 비밀 통로가 있기 마련인데...... 하지만 이건 영화가 아니니까......" 그러면서도 테피스트리를 걷고 벽을 더듬어 살피는 하연이었다. 그러자 벽에 뭔가 이음새 같은 것이 파여 있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하연은 조심스럽게 그 이음새를 따라 벽을 밀어보았다. 그러자 벽이 밀려나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하연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번 트리엔시라 지하 왕국에서는 이런 지하계단을 내려가자 그녀로서는 별로 쓸모도 없는 마법서들이 잔뜩 쌓여있는 서재가 나타났지만 이번에는 뭔가 쓸모 있는 보물들이 쌓여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기대 속에 계단 아래에 다다른 하연의 눈에 보인 것은 보물창고가 아닌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는 연구실이었다. 게다가 괴기영화 속에서나 나올 듯한 산발한 애꾸눈의 마법사가 뱀 같은 눈을 번들거리고 있는. 바로 비욤이었다. 그는 하연을 보자 기분 나쁜 목소리로 외쳤다. "넌 누구냐?" 그러나 그는 하연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하연의 검은머리와 검은 눈. 그리고 검은 로브를 보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하! 네가 바로 그 남자인척 가라프님을 속였다는 그 발칙한 계집이로군, 크크!" 재미있다는 듯 웃어대는 비욤의 웃음소리는 하연의 신경을 거슬리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뭐라고 쏘아주려고 하는데 하연의 눈에 놀라운 광경이 비쳤다. 쟈스란이 무슨 난폭한 동물마냥 쇠창살로 된 우리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애타게 부르던 하연이 눈앞에 있다는 것도 모르는 듯 하연과 처음 만났던 그 때처럼 웅크리고 앉은 채. 그 모습에 하연은 마치 어린아이를 버려 두고 있었던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비욤은 그런 하연을 비웃듯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네가 우리 가라프님의 마음에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얌전히 안기는 게 네 신상에 좋을 게다. 노예로 부려지는 것보다는 가라프님의 여자가 되는 게 훨씬 낫지." 그러나 하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가만히 우리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비욤이 당황해서 외쳤다. "건드리지 말아라! 마법이 걸려있다!" 그러나 하연은 그 말을 무시하고 쇠창살을 잡았다. 치지지직! 순간 하연이 잡은 쇠창살에서 하는 전기충격이 일어나는 듯한 소리가 났으나 그것은 마치 하연의 존재를 부정이라도 하듯 그녀에게 아무런 충격도 주지 않은 채 스쳐지나가 버렸다. 그 광경에 비욤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을 부릅떴다. 마법이 듣지 않는 존재라니...... 들도 보도 못했던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눈 속에서 섬뜩한 빛이 발해졌다. 하연의 몸을 갈라서라도 마법이 듣지 않는 이유를 밝혀내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다. 만약 그 이유를 알아내고 그것을 아이템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그는 무적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7서클 마법사인 아스탄이라 할지라도 그의 상대가 될 수 없는. 비욤이 그런 생각을 하며 하연을 무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동안 하연은 쟈스란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쟈스란! 이번에 널 구해주면 두 번째야. 알아, 첫 번째 선택은 우연일 수 있지만 두 번째 선택은 운명이라는 것? 아마 우리의 만남은 운명이었던 모양이야." 그 말에 쟈스란의 고개가 서서히 들려지면서 그 매마른 눈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하연은 그런 쟈스란을 향해 활짝 웃어 보이며 말했다. "기다려, 구해줄게." 정말 요즘 제가 너무 착실해 진것 같습니다. 이 매일 연재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내기를 한다면 전 앞으로 사흘에 걸겠습니다. 제가 저를 생각해 볼 때 그 이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일 것 같지 않아요? 이 름 유지 제 목 마신 소환사 -92- 순간 쟈스란의 공허하기만 하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며 표정이라는 것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막 하연이 우리의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하연의 뒤쪽에서 들려왔다. "운명이라고? 버젓이 약혼자가 있으면서 그따위 헛소리를 하는 건가?" 돌아보니 마르세이가 타오를 듯한 황금빛 눈으로 하연을 노려보며 연구실 문에 기대에 서 있었다. '약혼자라니......' 무슨 소리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하연의 시선 속에 연구실 안으로 들어서는 네이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때까지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네이브?" 네이브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뒤쪽 쇠창살 안에 들어있는 창백한 얼굴의 쟈스란을 힐끗 바라보았다. 아마도 가라프가 저 자를 인질로 하연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라고 짐작하면서. 네이브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오랜만이오." 하연은 약간 놀란 표정으로 일어나 네이브에게 물었다. "수므카와의 약속대로 정말 황금 세관을 구해 가지고 온 거예요? 그 돈이 다 어디서 났어요? 설령 배를 판다고 해도 황금 세관을 만들기란 어려울 텐데......" 돈에 관한 한 철저한 소시민인 하연은 마치 남편의 헤픈 씀씀이를 나무라는 아내처럼 따지고 들었다. 그런 하연의 말에 네이브는 그만 풋! 웃고 말았다. '그래, 이런 여자였지.' 미워해야 할 이유야 널리고 널렸는데도 그녀가 이런 여자이기 때문에 네이브는 하연을 결코 미워할 수가 없었다. 둘 사이의 분위기가 부드러워지자 가라프는 인상을 쓰며 이죽거리듯 말했다. "상인길드의 장인 카라반에게 그 무슨 섭섭한 말인가, 하연. 그 정도의 돈은 그에겐 아무 것도 아닐텐데." 하연은 놀라서 네이브와 가라프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그 말은 네이브가 부자라는 말인가요?" 가라프는 놀라는 하연이 도리어 이상하다는 표정이었다. "몰랐다는 말인가, 약혼녀이면서? 그는 카라반이다. 대륙의 모든 상권을 쥐고 흔드는 아주 대단한 분이시지." 하연은 새삼 네이브를 다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아는 네이브는 한 배의 젊은 선장이었다. 뱃전에서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모습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그런데 상인이라니...... 그것도 대륙의 전 상권을 쥐고 흔드는. 가라프는 하연이 이제 네이브의 실체를 알았으니 자신을 속인데 대해 분노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의 하연의 말은 엉뚱했다. "네이브, 그 동안 고생이 많았겠군요. 어쩐지 사람을 어린애 보듯 한다고 생각했더니...... 젊은 나이에 뼈 빠지게 일만했으니 마음이 쉽게 늙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러면서 불쌍하다는 듯 네이브를 보는 하연의 시선에 네이브를 비롯한 연구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황당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 혼 대륙이라도 살 수 있을 만큼 많은 돈을 지닌 자가 어디가 불쌍하다는 말인가? 그런 그들의 마음을 대변하듯 가라프가 말했다. "웃기는 소리! 못 먹어서 죽어 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돈을 쌓아 놓고 사는 저 자식이 어디가 불쌍하다는 거야?" 네이브 또한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요. 없으면 없는 만큼 불행하고 있으면 있는 만큼 불행한 게 인간이란 존재더라고요." 그러면서 씁쓸한 표정으로 웃는 하연의 표정에 잠시 연구실 안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그 때 네이브가 말했다. "나랑 함께 갑시다." 그러나 그 말에 대답한 것은 하연이 아닌 가라프였다. "내가 말했지 않았나? 그녀를 보내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네이브도 하연도 가라프의 말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그 결정이 전적으로 하연의 마음 하나에 달린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연은 망설였다. 솔직히 이제 더 이상 이 나바린에 머물고 싶은 욕심도 없었기에 네이브를 따라 떠날까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왠지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그냥 떠나기엔 뭔가 미진한 구석이 남았던 것이다. 그래서 선뜻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네이브가 하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에 하연을 물론이고 가라프와 비욤, 쟈스란까지 모두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저 자존심 강해 보이는 사내가 한낮 여자 앞에 무릎을 꿇다니...... 그렇게 해서라도 하연의 마음을 돌려보려는 수작일거라고 생각한 가라프의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지고 있는 가운데 네이브가 무릎을 꿇은 채로 말했다. "도와주시오." 어제 올리려던 글, 오늘 올리네요. ^^ 이 름 유지 제 목 마신 소환사 -93- 어이가 없다는 듯 하연이 물었다. "뭘요?" "지금은 말할 수 없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나의 집, 스마인가를 방문해 주겠다고 약속해주시오. 그러면 만족하고 돌아가겠소." 긴장한 채 자신을 쳐다보는 네이브의 얼굴을 보면서 하연은 서서히 어떤 점을 깨달았다. "당신, 처음부터 나에 대해 알고 있었군요. 내가 당신 배에 올라타기 전부터." 네이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하연은 그 침묵 속에서 긍정의 뜻을 읽어낼 수 있었다. 왠지 배신당한 느낌이었다. 그저 단순히 자신에 대한 걱정으로 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던 그래서 그의 행동 속에서 인간적인 매력을 느꼈던 그 모든 것이 계산된 행동이었다니......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화가 날 지경이었다. 간신히 그 화를 억누르고 하연이 말했다. "좋아요. 한 번 들르지요. 하지만 당신을 도와주겠다고는 약속할 수는 없어요." 순간 네이브의 몸에서 긴장이 빠져나간 듯 그 답지 않게 편안한 웃음을 떠올리며 말했다. "아니, 그것만으로 충분하오. ......당신은 반드시 날 도와주게 될 테니까." 그의 자신만만함이 마음에 들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는 하연을 보면서 가라프는 뭐가 뭔지 알 수 없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약혼한 사이라면서 마치 서로 잘 모르는 타인을 대하듯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잘 된 일이라 그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가라프는 무뚝뚝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잊고 있는 것 같은데 하연, 당신은 내 것이요. 내 허락이 없는 이상 어디에도 갈 수가 없소." 낮은 그 목소리에는 분명한 경고가 실려 있었다. 그 목소리에 비욤과 쟈스란은 두려움에 흠칫 몸을 떨 지경이었지만 네이브와 하연은 그저 어깨만 으쓱할 따름이었다. 뭔가 둘만의 비밀을 간직한 듯한 그 모습에 가라프의 표정이 다시 험악하게 일그러지려는데 쟈스란이 약간 갈라진 듯한 목소리로 하연에게 묻는 것이었다. "하연, 약혼...... 했어요?" "아니." 하연의 분명한 대답에 쟈스란이 안도하는 표정을 짖고 있으려니까 가라프가 하연의 팔을 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곧 하게 될 것이다, 나와!" 쟈스란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다시 창백하게 변했고 비욤은 갑작스런 가라프의 발표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데리고 노는 여자라면 몰라도 결혼이라니...... 가라프가 하연에게 실증을 느끼고 버리면 자신의 실험재료로 쓰려고 마음먹고 있던 비욤으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이 일은 막아야했다. 그래서 네이브가 있다는 사실도 잊고 해서는 안될 말을 입에 담고 말았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가라프님. 왕실마법사로서 한마디한다면 절대로 어둠의 사제 따위를 왕비로 맞을 수는 없습니다." "왕비라니......?" 네이브는 그 말을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떠오르는 어떤 생각에 눈을 번뜩이며 중얼거렸다. "그렇군.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어째서 해적소탕을 위해 그렇게 많은 군자금을 나바린 왕실에 퍼부었는데 번번이 무위로 돌아갔는지. 해적들의 왕이라는 가라프란 자가 나바린의 국왕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군." 오랜 왕실의 비사가 그렇게 들통났지만 가라프도 비욤도 알아채지 못한 듯 서로를 노려보고 있데 갑자기 하연은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아악!" 놀라서 돌아보니 하연이 창백한 얼굴로 머리를 움켜쥔 채 쓰러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놀라서 급히 하연을 받아든 가라프는 다급하게 비욤에게 외쳤다. "무슨 일이야, 하연이 갑자기 왜 쓰러진 거지?" 쟈스란도 걱정이 되는지 다급히 쇠창살 사이로 얼굴을 내밀어 보려고 창살을 움켜쥐었다가 치지지직! 하는 전기충격에 그만 손에 화상을 입고 말았다. 그것을 본 비욤이 무의식 중으로 쟈스란의 손을 잡고 치료마법인 힐링을 걸어주면서 말했다. "저도 모르겠군요." 가라프는 화가 나서 외쳤다. "그럼. 지금 저 남창에게 쓴 힐링이라는 마법이라도 써 봐야 할 것 아니야?" 비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마법이 듣질 않습니다." "무슨 헛소리야, 그게?" "말 그대로입니다." 그리고는 직접 보여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하연의 손을 조금 전 쟈스란이 대었다가 화상을 입은 쇠창살에 갖다 대었다. 치지지직! 그러자 마법이 발동하는 소리는 들렸지만 하연의 손은 멀쩡했다. 자신이 직접 해보고도 신기한지 눈을 번들거리며 하연의 손을 쓰다듬고 있는 비욤을 보자 왠지 소름이 끼친 가라프는 그의 손을 쳐내며 으르렁거렸다. "손대지마라!" 비욤은 그런 가라프에게 씨익 웃어 보이며 말했다. "한시라도 빨리 의사에게 보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얼굴이 창백한 것을 보니 곧 죽을 것 같아 보이는데......" 가라프는 비욤을 매섭게 쏘아보며 재빨리 하연을 안고 연구실을 나갔다. 그런 가라프를 보며 네이브는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렸다. "바람을 잡아둘 수는 없는 거지요." 하연이 또 쓰러졌군요.^^ 아픈 하연을 보며 왠지 모르게 기쁨을 느끼는 전 혹시 새디 증세가...... 웅! 안돼는데...... "어떤가?" 가라프의 다급한 말에 이리저리 하연을 살펴보던 노의사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도대체 모르겠어......!" "뭐 하는가? 어서 손을 쓰지 않고? 살려내라! 그렇지 않으면 널 죽여버리고 말겠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가라프의 고함소리에 희미하게 정신을 차린 하연은 입을 달싹였다. 죽이다니...... 누구를? 간신히 눈을 뜬 하연은 가라프가 노의사를 다그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희미하게 웃음이 났다. 자신을 위해서 누군가 화를 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걸 인식시켜 주는 듯 해서...... 아직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듯 해서 좋았다. 노의사가 두려움에 떨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죄, 죄송합니다, 가라프시여! 도대체 어디가 아파 쓰러지신 건지 어리석은 저로서는 도무지 알아낼 수가......!" "뭐라고, 이 멍청한 녀석! 그러고도 네가 어의라고 할 수 있느냐?" 고래고래 지르는 그 고함소리에 머리가 다시 아파 올 지경이라 하연은 간신히 목소리를 짜내어 말했다. "시, 시끄러워!" 작은 소리였으나 가라프의 귀에는 그 어떤 소리보다도 선명하게 들린 듯 재빨리 침대에 누워있는 하연의 곁으로 달려와 앉았 다. "하연, 괜찮으냐? 아프지 않으냐? 도대체 왜 쓰러진 거지?" 대답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쉴새없이 질문을 해대는 가라프를 노려보며 하연이 중얼거렸다. "......너 때문이잖아?" 무슨 소린지 몰라 어리둥절해서 가라프가 쳐다보니 하연이 외쳤다. "네 녀석이 날 아침도 점심도 굶겼잖아? 그래서 허기가 져 쓰러졌다, 왜?" 순간 가라프와 노의사가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빨리 밥 안 줘!" 한참만에야 비틀거리며 일어난 가라프는 허탈한 표정의 노의사와 함께 방을 나갔다. 밥 가지러. 나바린 왕성은 바위산 정상에 빙해의 차가운 바람에도 견딜 수 있을 만큼 견고하고 높은 탑들로 둘러 쌓여 그 누구의 침입도 허 용하지 않을 듯 당당하게 솟아 바다를 굽어보고 있었으나 유사이래 한번도 다른 나라의 공격을 받은 적은 없었다. 단 한차례의 내란조차도. 그러기엔 나바린은 아무 쓸모도 없는 땅이었고 백성들은 먹고살기에도 바빴던 것이다. 마르세이가 중앙 홀에 들어서자 홀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해적들과 귀족들이 모두 한쪽 무릎을 꿇고 그 무릎 위에 두 손을 올 리며 절했다. "현명한 우리의 왕 마르세이 쿠스타 3세께 인사 올립니다!" 함성이 홀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가운데 마르세이는 봄날처럼 훈훈한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바쁜 중에 모두 이렇게 모여주어 감사하오. 전에 공포한 대로 오늘 이 자리는 내 동생 베샤의 남편 감을 찾기 위해 마련한 것이 오." 그러면서 마르세이는 장막이 쳐져 있는 홀 안쪽을 향해 말했다. "베샤, 나오너라!" 그와 함께 장막이 스르륵! 장막이 거치고 허리까지 오는 긴 붉은 머리에 녹색 눈동자를 지닌 풍만한 육체의 아름다운 여인이 해 적들처럼 검은 가죽으로 가슴을 가리고 아래는 그들보다는 약간 긴 치마를 입은 채 당당하게 그 모습을 들어냈다. 순간 홀 안의 사람들이 황홀한 듯 숨을 들이켰다. 요부처럼 육감적인 몸매를 지녔지만 그녀의 눈은 천진하기 이를 데 없어서 그 자리에 있던 사내들의 정복욕을 자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홀 안의 사내들을 훑어보다가 곧 시선을 들어 자신의 오라버니인 마르세이 쿠스타 3세의 눈을 정면 으로 응시했다. 그런 그녀의 눈은 노여움으로 불타고 있었다. 자신을 놓고 이런 자리를 마련한 오라버니의 처사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녀는 결혼보다도 한 사람의 해적으로서 해적들의 모임은 그렌챠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르세이는 그런 베샤의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여자에게 검이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결혼 을 서두르려고 몇몇 남편 감 후보를 거론했지만 그때마다 베샤가 거절하자 이윽고 화가 난 마르세이는 베커리스 가문의 장자인 우드언과 결혼하라고 명해 버렸다. 베커리스 가문의 장자인 우드언은 용모와 머리, 심성이 모두 뛰어난 청년으로 베샤의 남편 감으로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베샤가 마지못해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자신이 원하는 최고의 보석을 구해오는 자와 결혼하겠다는 것이다. 해서 마침내 나바린에 그 사실을 공포하고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하게 된 것이었다. 마르세이는 여동생의 화난 눈초리를 환한 웃음으로 무시하고 홀 안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자, 내 동생을 원하는 자는 자신이 구해온 최고의 보석을 꺼내 보이시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자마로 가문의 둘째 아들인 스일러가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보석 중의 보석이라고 불리는 시론입니다." 순수한 보석의 결정이라고 일컬어지는 시론은 무지개 빛의 다양한 빛으로 스일러의 손안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가장 가치 있는 보석으로 일컬어지는 시론을 손안에 든 스일러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현 나바린에서 자마로 가문만큼 재력을 갖추고 있는 가 문도 없었기 때문에 시론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람도 그 뿐이었고 그러니 당연히 자신이 선택되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보석을 바라보는 베샤의 표정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제가 원하는 최고의 보석이 아니군요." 그 말에 충격을 받은 스일러는 당황해서 외쳤다. "무슨 소리입니까, 공주님? 이 보석은 시론입니다. 대륙에서 가장 값비싼 보석이라고요." 베샤는 차갑게 그런 스일러를 쏘아보며 말했다. "가장 비싼 보석이 최고의 보석은 아니지 않습니까?" 순간 시론을 보고 감탄했던 홀 안의 사람들과 스일러는 말문이 막힌 듯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그 가운데 수므카가 호탕한 웃음 과 함께 바람의 성자 루페이론의 뼈를 가공한 보석 엘 루아를 들고 나왔다. "크하하하! 사랑의 성자 루페이론의 보석 엘 루아입니다. 공주님께 전하는 제 사랑의 결정체인 이 엘 루아야말로 최고의 보석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 또한 엘 루아가 어떤 보석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번에야 말로 베샤 공주 가 그를 남편감으로 선택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베샤 공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성자의 사랑이 아닙니다. 저 또한 성자가 아니고요. 그러니 엘 루아는 제게 최고의 보석이 될 수 없습니다." 순간 홀 안 가득 나지막한 탄성이 터져 나왔고 거부를 당한 수므카의 얼굴은 모욕감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자리가 자리 인 만큼 그는 뒤로 물러서며 한마디 남기는 것은 잊지 않았다. "평생을 혼자 사시겠다면 말릴 수야 없겠지요." 그 소리에 곳곳에서 수므카의 발칙한 발언을 책하는 소리들이 들려왔지만 베샤는 화를 내지 않았다. 차라리 혼자 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수므카가 물러나자 이번에는 베커리스 가문의 우드언이 나섰다. 베샤는 그가 어떤 보석을 내 놓는다고 해도 거절할 생각을 다졌다. 자신의 친구인 아일린을 위해서라도. 그런데 뜻밖에 우드언의 손은 빈손이었다. 앞으로 나선 우드언은 자신의 검을 빼들어 두 손에 받치고 베샤에게 내밀며 말했다. "......베샤! 감히 공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절 용서해 주십시오. 제 나이 열 여섯. 열 살의 공주님을 처음 뵈었을 때부터 공주님은 제 마음의 주인이셨습니다. 공주님을 향한 제 마음만큼은 그 어떤 보석보다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제 마 음의 보석으로 이 검을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만약 거부하실 생각이라면 이 검으로 절 죽여주십시오." 베샤는 당황하고 놀랐다. 우드언은 진지하고 고지식해서 허튼 소리는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가족들에게조차 하루에 서너 마디 이상은 하지 않았고 왕궁에서 가끔 스쳐 지나갈 때도 그녀에게 한 마디 말이 없었다. 그래서 우드언이 자신과 결혼하려는 것은 단지 왕의 명령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하고 있었다니...... 그것도 자신을 받아들여주지 않으려면 차라리 죽여달라고 할 정도로. 혼란스러운 가운데 베샤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검을 받아들였다. 순간 우드언의 얼굴에는 그녀로서는 처음 보는 환한 미소가 떠올랐고 그 표정을 보자 베샤는 모든 것을 감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이 설령 그렌챠의 회의석에 한번도 앉아보지 못하 게 되는 일이라도. 홀 안에 환호성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지만 베샤와 우드언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 그들은 서로의 눈만을 마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며 나바린의 국왕 마르세이 쿠스타 3세가 공포했다. "이번 바람의 달, 달이 정 중앙에 뜨는 날. 베샤 공주와 우드언 베커리스의 결혼식을 거행하겠다!"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베샤 공주와 우드언을 보면서 수므카는 이글거리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이 미 선택을 끝내놓고 있었으면서 자신을 조롱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으로 그는 자신의 운명을 선택했다. 어쩌면 파멸 로 이어질지도 모를 그 길을. 정말 오랜만에 연재란에 들어온 느낌입니다. 그래서 한번 길게 올려 봤습니다. 후훗^^ 그건 확실히 청혼은 아니었다. 그저 명령이었을 뿐. 때문에 하연은 아픈 척 누워 있으면서 곁에서 그 동안 자신이 살아온 예기 라던가 앞으로의 자신의 꿈에 대해서 잔잔히 들려주는 가라프의 말을 흘려들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가라프의 말은 더 욱 또렷이 들려왔고 그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점점 깨달을수록 하연의 마음 또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인지 하연은 알 수가 없었다. 누군가 그녀를 사랑해주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살아 있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모험이라는 형태를 통해서나마 격렬하게 느껴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그 축복을 온 몸으로 느껴보고 싶었던 것이 다. 그리고 죽어 가는 인간을 향한 그 어떤 동정의 시선도 보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그녀를 사랑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면서 함께 미래를 만들자고 속삭이는 것이었다. 그녀에겐 있지도 않은 미래를 말이다. 하연은 새삼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가라프에게 말했다. "마르세이, 서쪽 건물에 갇혀 있을 때 내가 지팡이를 놓고 왔거든. 내게 소중한 거야, 좀 갖다 주겠어?" 마르세이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며 며칠 만에야 입을 연 하연의 말에 기뻐하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밖으로 나갔다. 갈루마를 받으면 그 날밤으로 하연은 이 해상왕국 나바린에서 떠날 생각을 굳혔던 것이다. 잠시 후, 가라프가 지팡이를 하나 들고 왔다. "이 것인가?" 봉 대 끝에 두 개의 가드가 있고 그 속에 물빛 구슬이 춤을 추듯 움직이는 그 지팡이는 분명 갈루마였다. 며칠 만에야 다시 보는 갈루마의 모습에 하연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지팡이를 받아들려고 했다. 그러자 가라프가 그것을 막으며 말했다. "한가지 약속해야만 이것을 주겠어." "......뭔데요?" "나에게 등을 돌리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설령 내가 아주 미워지는 일이 생기더라도 결코 내게서 등을 돌리지 않겠다고...... 약 속해 줘."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 하연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갈루마를 받아들였다. 순간 그녀의 머리 속에 갈루마의 목소리가 빠르게 들려왔다. -너, 너 감히 이 대 현자인 이 몸을 이 놈, 저 놈에게 함부로 들리게 하다니...... 네가 그러고도 내 주인이라고 할 수 있어? 그 때 마다 내가 입다물고 있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알아? 도대체 어디서 뭐하고 있었기에 그 동안 날 찾으러 오지도 않았던 거 야? 그리고 이 녀석은 또 뭐야? 너 또 뭔가 일냈냐?- 하연을 걱정했다기 보다는 그 동안 같이 수다 떨어줄 사람이 없어서 고생했다는 듯한 갈루마의 말에 하연은 화가 나려 했지만 보고 있는 가라프의 시선을 생각해 애써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좀 피곤하네요. 오늘은 그만 쉬어야겠어요." 연약한 여자인척 하는 건 정말 그녀의 체질상 맞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게 또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은 그녀의 외모와는 잘 어울린다는 것이 재미있다면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정말 피곤해 보이는 하연의 얼굴에 물론 갑작스런 갈루마의 시끄러운 수다 때문이었지만 가라프는 그녀를 혼자 있게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그럼 편안히 쉬라는 말과 함께 그녀를 남겨두고 방밖으로 나갔다. 하연이 갈루마에게 말했다. "떠나야겠어." 다짜고짜 하는 그 말을 알아들은 듯 갈루마가 물었다. -다른 동료들과 쟈스란은 어쩌고?- "함께 가야지." -어떻게?- "이번에 베샤 공주가 결혼식 하는 날. 카리스는에게 텔레포트 시켜달라고 할 생각이야." -흐음! 그래서 어디로 갈 생각인데?- "약속을 했으니까 우선 스마인 가에 들리고. 그 다음 일은 그 때 다시 생각해 볼 거야." -스마인 가라면...... 혹시 대륙 상인길드의 장인 카라반의 가문 말이냐?- "응." -어떻게, 누구하고 약속을 했단 말이야? 자세히 말해봐!- 답답한 듯 재촉하는 갈루마의 말에 하연은 네이브와 있었던 일을 예기해 주었다. 심각하게 그 말을 듣던 갈루마가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그 자가 하연, 네가 마신 소환사라는 것을 알고 널 끌어들일 속셈으로 그 덴 와사프라는 바람의 사제를 죽여 그 누명 을 너에게 덮어씌운 것일지도 몰라. 그래서 우리가 아바드에서 도망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자신의 배에 끌어들이고는 우리들 을 구해준 빌미로 네게 자신을 돕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 틀림없어.- 하연은 갈루마의 말에 말도 안 된다는 듯 피식 웃었다. "하지만 갈루마, 그렇다고 사람까지 죽여가면서 그런 짓을 벌일 이유가 없잖아? 게다가 신전세력까지 건드려 가면서. 그리고 우리가 그 배를 탄 것은 내가 갑자기 밀항을 하자고 했기 때문이었잖아? 그러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우연이었다고." 생각해보니 하연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아 갈루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상인길드에서 신전세력에 적대적일 이 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무심히 넘어간 이 일이 그의 존재이래 가장 후회할 일로 남게 될 줄은 이 순간 갈루마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달이 환하게 비추는 그 아래 베샤와 우드언은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 서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흐르는 맹세의 말. 그것은 마치 신비한 마법주문처럼 장중하게 장내에 울려 퍼졌다. 화려한 웨딩드레스도 부케도 없었고 그렇다고 홀 안을 가득 채우는 꽃들도 없는 그저 장식이라고는 그들과 하객들을 비추는 달 빛이 전부인 결혼식이었지만 하연은 지금 이들의 결혼만큼 아름답고 신성하게 느껴지는 결혼식은 본적이 없는 것 같았다. 마치 그들의 맹세의 말처럼 빛의 주신 펠레아와 어둠의 주신 가란이 조용히 내려와 그들을 감싸는 듯 느껴졌다고나 할까? 맹세의 말이 끝나자 카리스가 노래를 불렀다. 청아하고 맑은 목소리가 홀 안 가득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꿈결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 사랑한다는 그 말을 잊지 못해 다시 꿈을 꾸네. 빛이 가면 어둠이 오듯 예정된 운명처럼 사랑은 다가오지만. 아침의 이슬처럼 한 순간에 사라져버리는 아름다운 꿈일 뿐. 영원의 맹세도 긴 시간의 거울 속에서는 잠깐 반짝이다 사라지는 빛의 주신 펠레아의 작은 조각. 맹세가 깨어져 그 파편에 상처를 입는다 할지라도 사랑한다는 그 속삭임을 잊지 못해 다시 꿈을 꾸네. 긴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꿈속에서 나를 잊으며 그대를 꿈꾸네." 흐흠! 어쨌든 카리스의 마음을 표현한다고 써보긴 했는데 어떤지는......////// 이제 곧 하연이 나바린을 떠납니다. 기대해 주세요^^ 아름다운 노래이긴 했지만 베샤와 우드언의 결혼식을 축복하는 노래로는 들리지 않았다. 홀 안의 하객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잠시 웅성거렸지만 곧 베샤와 우드언이 서로에게 키스하는 모습을 보더니 환호성을 지르 며 잊어버리고 말았다. 노래를 마친 카리스는 하연의 모습을 찾았다. 그 노래는 한 인간을 사랑해서 미쳐버린 그린 드래곤 엔리시크가 미쳐버리기 전 에 지은 시로 드래곤들 사이에 경고와 명세의 중요성을 가르치지 위해 전해져 오는 것을 카리스가 오늘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 기 위해 노래로 부른 것이었다. 성룡이 된 엔리시크는 유희를 나가 한 인간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인간에게 영원한 사랑의 맹세를 해버리고 만다. 그러 나 세월이 흘러 그 인간이 죽자 행복은 깨어지고 엔리시크는 비통해하며 긴 수면기에 들어갔다. 그러다 깨어나면 다시 수면기에 드는 그런 생활을 반복했다가 어느 날 다시 인간 세상에 유희를 나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사 랑했던 인간과 너무도 닮은 인간을 만나고 엔리시크는 그 인간을 사랑하게 된다. 아니, 그 인간을 사랑했다기 보다는 서로 사랑 했던 그 행복했던 기억들을 잊지 못해 다시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하지만 맹세를 깨어졌고 그 깨어진 맹세에 엔리시크는 미쳐버리고 말았다. 때문에 드래곤 로드가 엔리시크를 봉인해 버렸지만 그 때까지도 엔리시크의 얼굴에는 행복했던 순간에 대한 기억 때문인 듯 행복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고 한다. 카리스는 인간을 사랑했던 그리고 그 하찮은 꿈에 대한 기억 때문에 맹세를 깨어버린 엔리시크를 이해할 수가 없었었다. 그러 나 하연을 만나고 하연에게서 사랑을 느끼면서 그는 엔리시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언제나 긴 꿈에 잠기고 싶어했던 그를. 하연이 보이지 않자 이상하게 생각한 카리스는 사람들과 떨어진 홀 기둥에 기대어 서 있는 사담에게 다가가 물었다. "하연은 어디 갔습니까?" 사담은 그런 카리스의 얼굴을 잠깐 유심히 살펴보더니 말했다. "조금 전에 은밀히 홀에서 빠져나갔습니다. 그 다음으로 미루엘과 리밍스가 따라 나갔지요. 이번엔 우리 차례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한 카리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담은 기둥에 기대었던 등을 떼고는 마치 그림자처럼 은밀하고 재빠른 몸놀림 으로 홀 안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카리스도 인비저빌리티로 자신의 모습을 감춘 뒤 당당하게 홀 안을 빠져나갔다. 하연은 쟈스란을 구하러 다시 연구실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연구실 문 앞에 이르자 그녀는 애꾸눈 마법사 비욤과의 싸움에 대비해 불의 정령 로우와 물의 정령 사이라를 미리 소환했다. 정령들은 평소처럼 하연의 소환에 반갑게 인사를 하려다가 하연이 바짝 긴장해 있는 것을 보고는 조용히 그녀의 곁에 떠 있었 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안에서 싸움이 벌어진다면 하연에게 있어서는 역사적인 첫 싸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가볍게 심호흡을 한 하연이 갈루마를 이용해 슬쩍 문을 밀려고 할 때였다. "으아아악!" 갑자기 연구실 안에서 소름끼치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하연은 대뜸 문을 걷어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놀라서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연구실 바닥에는 무슨 마법진 같은 것은 그려져 있고 그 위에 쟈스란이 손목과 발목을 묶인 채 발작하듯 온 몸을 비틀며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검고 사악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한 사내가 가부좌를 튼 자세로 둥둥 떠서는 그런 쟈스란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사내는 그녀가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로베인!" pirin님의 의견 정말 고마웠습니다. 하마터면 제가 그 부분을 놓치고 그냥 지나칠 뻔 했지 뭐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르디님의 의견에 대해서 지금 아주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답니다. 그 부분을 지울까 말까로요. ^^ 우웅! 어찌하면 좋을찌...... 이 름 유지 제 목 마신 소환사 -97-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하연의 목소리에 로베인이라고 불린 사내는 한순간 움찔 하는 것 같더니 계속 쟈스란을 내려다보며 뭐라고 중얼거렸고 그 때마다 쟈스란은 고통스러운지 비명을 토해냈다. 하연은 믿을 수가 없었다. 슈마라는 마법사가 로베인의 육체를 빼앗았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듣는 것과 보는 것은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저렇게 어둡고 무서운 기운에 휩싸여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비록 저주를 받아서 처음 만났을 때는 그의 얼굴에 짜증과 분노가 섞여 있긴 했지만 자신과 알고 난 뒤로는 저주를 풀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인지 그런 어두운 기운들도 사라지고 그의 본래의 밝고 낙천적인 표정들이 돌아와 있었다. 그래서 그와 함께 있으면 즐거워지고 어딘지 모르게 따뜻한 느낌이 들었었다. 로베인은 자신과는 다르게 태어날 때부터 빛에 둘러 쌓인 사람이라고 은연중 생각하며 부러워했던 하연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저런 어둡고 무서운 기운을 내뿜고 있다니...... 이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하연은 다시 로베인의 이름을 크고 간절하게 불렀다. "로베인!"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망연하게 로베인을 보는 하연의 등뒤로 비욤이 단도를 들고 서서히 다가들고 있었지만 하연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하연의 간절한 목소리가 통했던지 서서히 로베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 속에 하연의 등을 찌르려는 비욤의 모습을 보았다. 순간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던 로베인의 육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제길!" 로베인의 육체를 지배하고 있던 슈마가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처음에 슈마는 마법사의 자질은 지녔으되 아직 정신력이 훈련되어 있지 않은 로베인을 보고 그의 육체쯤은 쉽게 지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원하는 것을 얻게 해주겠다며 그것을 생각하게 했던 것이 실수였던 것이다. 끊임없이 하연을 만나고 싶다는 로베인의 목소리가 슈마의 정신까지 파괴할 지경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로베인의 육체를 포기하고 다른 육체를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륙에 흩어져 있던 많은 그의 첩자들에게 연락해 자신의 육체로서의 조건에 맞는 인간을 찾으라고 명했던 것이다. 검은머리와 검은 눈. 자신이 왕이라는 증거였던 그 증표를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 그러다 나바린의 왕실 마법사로 있던 비욤을 통해 그런 인간을 구했다는 연락을 받고 영혼 전이 마법을 시전할 수 있는 때를 맞추어 텔레포트 해 온 것이었다. 그리고 마법진위에서 마법을 시전하려는데 지금의 육체의 정신이 깨어나려고 하는 것이었다. 조금 더 하면 마법이 성공할 수 있는 그 순간에. 로베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며 신음처럼 작은 소리가 세어 나왔다. "......하연!" 그러더니 크아아아악! 하고 비명과 함께 로베인의 신형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쟈스란은 입에서 피를 토하며 고개를 떨구었고 비욤이 하연의 등에 단검을 내리 찍으려 했다. 그 순간 때마침 하연을 뒤따라오던 미루엘과 리밍스가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리밍스가 도끼를 던져 그런 비욤의 머리를 내리 찍었다. 퍽! 머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비욤은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다. 재빨리 피를 토하고 쓰러진 쟈스란에게 다가가던 하연은 뒤에서 들린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처참하게 죽어있는 비욤의 모습에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있는 광경을 본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얼굴이 창백해지고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가운데 비욤의 시체에서 시선을 돌리려고 했지만 아무리 애써도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치 저주하듯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듯한 비욤의 하나밖에 없는 눈동자 속에서 하연은 자신의 미래의 모습이 겹쳐지는 듯 해서 더욱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그런 하연의 얼굴을 보며 미루엘은 무엇을 느낀 듯 급히 하연에게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에 묻으며 중얼거렸다. "괜찮아, 하연. 하연은 살아있어. 그것만 생각해." 자신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미루엘의 손길에 하연은 차츰 떨림이 진정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포근했다. 마치 어머니의 품에 있는 것처럼. '이제야 미루엘이 여자라고 생각되다니......' 하연은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어 피식 웃으며 미루엘의 품에서 고개를 들다가 리밍스가 쟈스란의 손과 발을 묶은 쇠사슬을 도끼로 내리쳐 잘라내는 것을 보았다. 챙! 챙! 곧 걱정스런 얼굴로 변한 하연은 리밍스에게 물었다. "설마 죽지는 않겠지?" "......아직 숨은 붙어있는데...... 나도 모르겠다." 그 때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카리스와 사담이 들어왔다. 그들은 연구실 안에서 나는 피 냄새에 급격히 안색이 변해 달려왔다가 하연이 무사하고 또 그 피가 하연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내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카리스가 물었다. 그러나 하연은 그 질문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다급하게 말했다. "빨리 좀 와봐요, 카리스. 쟈스란이 다쳤어요." 입에서 피를 토한 듯한 쟈스란의 모습에 카리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상을 입은 것 같은데 내상을 입은 데에는 보통 치료마법인 힐링만으로는 상처를 치료할 수 없고 8서클 마법에 해당되는 리커버리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지금 5서클 마법사로 동료들에게 알려져 있으니 8서클의 마법을 사용해 쟈스란을 치료하게 되면 자신의 정체가 들통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이미 하연이 알고 있으니 알려져도 상관은 없었지만 귀찮았던 것이다. 그래서 망설이고 있는데 하연이 옆에서 자꾸 재촉하자 카리스는 어쩔 수 없이 마법을 시전 해 버리고 말았다. "리커버리!" 순간 쟈스란의 몸이 은빛의 투명한 막으로 둘러 쌓이더니 잠시 후 그 막이 쟈스란의 몸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그러자 얼마 후 정신을 차린 듯 쟈스란이 작은 신음성을 흘리며 눈을 떴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둘러싼 이들을 보던 쟈스란은 하연에게 시선이 이르자 안도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잠이 든 것이다. 그런 쟈스란을 보며 하연이 카리스에게 말했다. "카리스, 텔레포트 할 수 있지요?" "어디로......?" 어찌되었든 이 지긋지긋한 나바린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카리스가 흔쾌히 물었다. "슈이센으로요." 하연의 말에 재빨리 좌표를 계산한 카리스가 말했다. "자, 모두 손을 잡아." 모두 손을 잡자 카리스가 즉시 텔레포트를 시전 했다. 그런데...... 하연은 일행들이 모두 사라지고 텅 비어 버린 연구실에 혼자 남겨 졌던 것이다. "젠장!" 저도 모르게 욕설을 터트리며 하연은 중얼거렸다. "내겐 마법이 듣지 않는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니......" -네가 하는 일이야 다 그렇지, 뭐!- 자신도 그 생각을 잊고 있었으면서 짐짓 하연만을 나무라는 갈루마였다. 조금 후, 하연이 같이 텔레포트되지 않았다는 것을 안 일행들이 다시 텔레포트로 돌아왔지만 막막하긴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하지요?" 미루엘이 머리가 깨져 죽어있는 비욤을 힐끗 보면서 말했다. 마법으로 텔레포트해서 갈 수 없는 이상 이 나바린을 탈출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궁정 마법사인 자를 저렇게 죽여 놨으니 앞으로의 고생 길이 훤히 들여다보였기 때문이었다. 다른 일행들도 그 생각은 마찬가지인 듯 안색이 굳어지고 있었다. 그 때 사담이 창백해진 얼굴로 비욤의 시체에서 애써 시선을 피하며 시선을 어디로 둘지 몰라 안절부절 하는 쟈스란을 보고 말했다. "우선 이 연구실에서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하연도 쟈스란 정도는 아니지만 시체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신경에 거슬렸기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들이 연구실을 나간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머리가 부서져 죽어있던 비욤의 손가락이 꿈틀거린다 싶더니 천천히 부서진 머리가 다시 붙으면서 제 모습을 찾는 것이었다. 되살아난 비욤은 머리가 다시 제대로 붙었는지 확인하듯 머리를 만져보더니 음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리치가 아니었으면 정말 죽을 뻔했군. 두고보자, 계집! 사로잡아서 그 배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조각조각 찢어 발겨줄 테니......" 오늘 연참입니다, 헤헤^^ 이 름 유지 제 목 마신 소환사 -98- 한편 연구실을 나온 하연 일행은 뜻밖의 상황에 맞닥트리고 말았다. 국왕인 마르세이 쿠스타 3세가 호위기사들을 거느리고 그들의 눈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가면 같은 부드러운 웃음을 짓고서. 하지만 그 섬뜩한 눈빛만큼은 보이는 것들을 모조리 열려 버릴 것만 같이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르세이는 하연이 자신을 사랑할거라고는 착각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호감은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믿었다. 감시하고 가두지 않아도 자신에게서 도망치지는 않을 거라고...... 그런데 결혼식이 끝나고 하연이 보이지 않자 의심이 들었다. 혹시 도망친 것은 아닐까 하는. 그래서 자신에게 몰려들어 있던 귀족 아가씨들을 뿌리치고 즉시 호위기사들을 이끌고 연구실로 갔다. 도망치려고 했다면 우선 그 쟈스란이라는 남창녀석을 먼저 구하러 갔을 거라는 생각에서.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의 의심대로 하연이 그녀의 동료들과 같이 쟈스란을 구해서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르세이는 순간 하연의 가는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겨우 억제하고 하연 일행들을 쭈욱 훑어보다가 호위기사에게 말했다. "끌고 가라!" "네!" 호위기사들이 하연 일행을 붙잡으려고 다가서자 카리스가 마법을 시전했다. "홀드!" 그러자 마치 땅이 일그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호위기사들이 갑자기 땅에 발이 붙은 듯 발을 움직이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우어어어!" "으앗!" 그 모습을 본 마르세이가 눈에서 섬광을 번뜩이며 입가를 굳히더니 카리스를 쏘아보며 물었다. "넌 정체가 뭐냐?" "보다시피 마법사입니다." "마법사라고? 단순한 마법사가 주문도 외우지 않고 바로 마법을 시전하는가?" 그 소리에 하연을 제외한 일행들이 모두 카리스를 쳐다보았다. 대륙에 마법사가 흔치않아 마법에 대해서 잘 모르는 그들로서도 좀 전에 쟈스란을 치료할 때 카리스가 보여준 마법이 보통의 마법사가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란 건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이다. 단지 카리스가 꺼려하는 것 같아서 물어 볼 수 없었을 뿐. 그런데 마르세이가 묻자 궁금하던 차에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해서 모두 쳐다본 것이었다. 그러나 그 대답은 뜻밖에 하연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래! 카리스는 드래곤이었지. 우리 날아가자!" 순간 머리위로 천장이 내려앉는 듯한 충격 속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과 당사자인 카리스조차도 경직된 듯 굳어지고 말았지만 하연은 그런 그들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혼자 중얼거렸다. "......모험의 최종 결정판은 뭐니뭐니 해도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는 것이겠지만 생각해 보니 그건 너무 흔했어. 차라리 드래곤 나이트들처럼 드래곤을 타고 창공을 나는 게 훨씬 멋있는 일이지, 암." -흥! 꿈꾸고 있군. 드래곤이 어떤 종족인데 하찮은 인간 따위를 태워주겠냐?- 갈루마의 기가 막혀하는 듯한 핀잔소리에 하연은 애처로운 눈으로 카리스를 보며 물었다. "카리스, 안 태워 줄 거예요? 태워주면 드래곤 자존심에 금 쩌억쩌억 가는 거예요?" 황당한 표정으로 그런 하연을 보던 카리스는 설래설래 고개를 젖더니 폴리모프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갑자기 카리스의 은빛머리가 출렁이며 거대한 섬광이 그의 몸 안에서 터져 나와 왕성 전체를 감싸더니 은빛 거대한 드래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때문의 왕궁의 지붕이 무너지고 성의 반이 무너져 내렸지만 하연 일행의 눈에는 그런 것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멍하니 넋을 잃고 정신없이 눈앞의 거대한 생명체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연은 드래곤이란 큰 도마뱀의 모습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드래곤의 실재는 그녀의 넋을 앗아갈 만큼 성스럽고도 아름다웠다. 은빛의 비늘 하나 하나가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요정의 날개짓 같다고나 할까? 멍하니 그 장엄한 광경을 보고 있으려니 웅웅거리는 마치 소리라기 보다는 공기의 파장 같은 울림이 드래곤의 발 밑에 있던 인간들과 한 드워프에게 전해져왔다. -타라! 태워주마, 하연. 넌 내 드래곤으로서의 자긍심을 버리도록 만든 최초의 인간이다.- '내가 인간이기를 소망할 정도로......'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카리스는 하연과 그 일행들을 발톱으로 가볍게 들어올려 자신의 등위에 태웠다. 밑에서 그것을 올려다보며 마르세이가 광분해서 하연을 내 놓으라고 외치는 소리가 다른 일행들의 귀에는 모르지만 드래곤인 카리스의 귀에는 선명히 들렸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하고 가볍게 날아올라 창공을 향해 날아갔다. 후에 이 사건이 원인이 되어 인간과 드래곤의 종족간의 전쟁이 일어나게 되지만 그것은 아직 먼 훗날의 일이었다. 혹시 앞부분 못보신 분 있으시면 하이텔 시리얼란으로 가 보세요. 제가 요즘 하이텔에 마신 소환사 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ㅜ.ㅜ 조회수가 적네요. 많이 가서 봐주세요.^^ 마신 소환사 -99- 하연 일행이 내린 곳은 슈이센의 수도 라마드의 뒤쪽에 있는 에른 산맥과 이어져 있는 루보아 숲이었다. 루보아 숲은 그린 드래곤 엔리시크가 봉인되어 있는 숲으로도 유명했지만 그 숲에서 나는 에베나라는 열매로 빚은 술은 그 향 기가 진하고 달콤해 대륙에 그 명성이 널리 퍼져 있었다. 하연은 하늘을 날았던 덕분에 볼이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다시 폴리모프 해 인간으로 돌아온 카리스에게 매달리듯 달라붙으며 말했다. "카리스, 우리 다음에 또 날아봐요. 바이킹을 탄 것처럼 아주 쓰릴 만점이었어요." 그 말에 다른 말은 이해를 못해도 다음에 또 날자는 말만은 이해한 하연 일행들은 속이 울렁거리는 듯 창백한 표정으로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드래곤에 대한 공포도 잊은 채 카리스에게 부르짖었다. "전 다음엔 절대 안탈 겁니다." "맞는 말이야. 신이 우리 드워프에게 다리를 주신 이유를 망각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걷는 것에 대한 기쁨을 지금처럼 실감한 적도 없는 것 같아요." 쟈스란까지 그렇게 말하자 하연은 짐짓 안타깝다는 표정을 얼굴 가득 지으면서 어쩔 수 없다는 몸짓을 취했지만 그녀의 마음만 은 전혀 달랐다. '뭐, 다시 이 같은 상황이 닥치면 타야지 별 수 있겠어?' 그녀는 결코 드래곤이라는 편리한 교통수단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 때 사담이 주변을 돌아보며 물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슈이센에 있는 루보아 숲입니다." 사담은 드래곤한테 존댓말을 듣는 게 좀 어색하긴 했지만 말투를 바꿔달라고 하기도 뭣해서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그럼. 오늘밤은 여기서 야영을 해야겠군요." 그 말에 미루엘과 리밍스가 크게 실망한 표정을 짖고 있는데 카리스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여기는 숲의 끝이라 조금만 더 가면 슈이센의 수도인 라마드가 나올 겁니다." 순간 미루엘과 리밍스는 환호했고 쟈스란도 야영은 처음인지라 은근히 걱정했었는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럼. 어서 여기서 나가지요." 사담의 말에 모두 서둘러 발걸음을 움직이는데 하연만이 멍청히 숲 안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하연, 빨리 오십시오." "하연?" 일행들이 부르는 소리조차 듣지 못한 듯 멍하니 있자 걱정이 된 갈루마가 고함을 질렀다. -하연?- 그 소리에 정신이 든 듯 하연은 말했다. "응? 응!" -도대체 왜 그렇게 넋이 나간 거야? 일행들이 기다리잖아?- "......누가 애타게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한 소리가 들렸는데...... 잘 못 들었나?" -잘 못 들은 거야! 이 밤중에 그것도 숲속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런가? 그렇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하연은 머리 속을 정리하듯 세차게 한번 머리를 흔들고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동료들에게로 달려갔다. 얼마 후, 그들은 라마드의 북쪽에 있는 대 광장에 이르렀다. 다행이 밤이라 사람들도 없고 주위는 조용했다. "여기가 슈이센의 수도인 라마드입니다." 그러면서 카리스는 저 멀리 보이는 높이 솟아있는 슈이센 왕성의 지붕을 가리켜 보였다. "저 곳이 바로 슈이센 왕궁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 때쯤 하연의 시력은 현격히 나빠져 왕궁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저 건성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그 때 미루엘이 문뜩 어떤 생각이 떠올라 물었다. "그런데 왜 슈이센으로 오자고 한 거지요, 하연?" 하연은 그 이유가 생각나자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약속을 해서......" "약속? 누구하고 말이야?" 리밍스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지금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 우선은 좀 어디 가서 쉬고 싶어." 하연의 말에 미루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길을 안내했다. 미루엘은 이 곳 라마드에서 일년 넘게 살았던 적이 있어서 이 곳 지리에는 훤했던 것이다. 그녀가 안내한 곳은 대 광장 뒤편에 자리한 아담한 여관으로 <현자의 안식처>라는 곳이었다. 현자의 안식처에 들어서자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손님들이 꽤 있었는데 마치 찻집 같은 분위기였다. 그들이 들어서자 방금 과자를 굽다가 나온 것만 같은 달콤한 냄새가 떠도는 풍만한 체구의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아 줌마가 나왔다. "어서 오세요, 현자의 안식처입니다. 식사는 하셨어요?" 마치 오랫동안 나가 놀다 돌아온 자식들을 맞이하는 듯한 분위기에 하연 일행은 약간 놀랐으나 곧 얼굴을 풀고 기분 좋은 표정 을 지었다. 미루엘이 반갑게 말했다. "엘라 아주머니, 오랜만입니다." "오! 미루엘아가씨, 유즈베리아로 간다고 떠났던 것 같은데 이제 돌아 온 거야?" 그 미루엘 아가씨라는 호칭에 하연 일행이 받을 충격은 생각지도 않는지 얼굴 색 하나 변치 않고 그 말을 입에 담는 엘라 아주 머니였다. 미루엘 자신조차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곧 정신을 수습한 미루엘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전하시군요. 방, 있습니까?" "있지. 몇 개나 필요해?" 미루엘은 자신의 일행들을 돌아보다가 하연에게 시선이 멈추자 방 네 개를 달라고 말했다. 저번 <인어의 노래>에서 처럼 하연 에게 이상한 말을 듣고 싶지 않아 미리 그녀에게 독방을 내어주려는 것이었다. 다른 일행들에게는 이 인실을 내어주고. 엘라 아주머니에게서 열쇠를 받아든 하연 일행은 모두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그날 밤. 하연은 죽은 듯이 잠을 잤다. 갈루마 또한 지쳐있을 하연을 생각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소리 없이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흠흠! 견습마도사님, 하르페님, 비유님, TEFERI님 등 신경써 주셔서 정말 감격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조회수 따위는 신경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앗! 그리고...... 곧 여러분이 기다리시던 카이람이 등장하게 됩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스마인가는 슈이센의 대 귀족 가의 한쪽에 자리해 있었지만 다른 호화롭고 사치스럽게 치장된 대저택들과는 다르게 검소함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하연은 중얼거렸다. "역시 있는 쪽이 더 무섭다니까." 그들이 다가서자 스마인가를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이 다가와 그들의 평범하지 않은 용모를 보고는 정중하게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연이 말했다.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안에 하연이 왔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럼 알아들으실 겁니다." 경비병들은 하연이 어둠의 사제인 것을 보고는 그녀의 말을 의심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알겠다고 하고는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 통보했다. 그러자 잠시 후, 네이브 스마인이 글렌과 함께 직접 그들을 마중 나왔다. "어서 오시오. 이렇게 와 주어서 고맙소." "약속이니까요."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하연을 보며 네이브가 말했다. "장사를 해보면 알겠지만 약속을 지키는 자보다는 지키지 않는 자가 더 많은 법이오. 자, 안으로 들어갑시다." 카리스와 사담, 그리고 쟈스란은 그런 네이브의 뒷모습을 못마땅하게 보았지만 하연이 따라 들어가자 어쩔 수 없이 그들도 뒤를 따랐다. 이곳에 오기 전 하연의 약속이라는 것이 해적들에게 자신을 하연의 약혼자라고 소개했던 네이브라는 자를 만나러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그들은 불쾌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는 도중 하연이 몇 번이나 함께 가기 싫으면 현자의 안식처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할 정도로. 하지만 그들은 불쾌한 중에도 끝까지 따라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없을 때 네이브가 하연에게 무슨 수작을 부릴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뻔히 그들이 눈뜨고 있는 앞에서 자신이 하연의 약혼자라고 선언한 인물인데. 잘 손질된 정원을 지나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먼지하나 없이 깨끗하게 청소되어 바닥에 얼굴이 비칠 정도인 내부가 보였다. 그것을 본 하연은 혹시 네이브가 청결에 대한 어떤 결벽증을 가지고 있는 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하연 일행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아치형의 넓은 창문이 드러난 응접실 또한 거실과 마찬가지로 떨어진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다. 네이브가 가리키는 자리에 앉으면서도 하연은 이 자리가 좀 불편했다. 그녀의 외모가 맑고 고상해 보여 깨끗한 것을 좋아할 것 같지만 실은 여기저기 늘어놓은 것을 좋아하는 형이기 때문에 너무 깨끗한 데는 오히려 거북했던 것이다. 그들이 자리에 앉아 하녀가 차를 내왔다. 찻잔을 잡아보니 찻잔이 따뜻했다. 무의식중에 하연은 이 차가 홍차인가 하고 생각했다. 홍차를 마실 때는 미리 찻잔을 따뜻하게 해두는 법이니까. 그런데 차는 홍차가 아니었다. 청량한 레몬소다 같은 맛이 나는 차였다. 아마도 소독을 위해 방금 전에 뜨거운 물로 끓인 듯. 하연은 기가 막혀서 멍하니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용건만 마치고 여기서 빨리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물었다. "그래, 제게 부탁할 거라는 게 뭐지요?" 네이브는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두를 것은 없소. 오늘은 여기서 하루 쉬시오. 내일 말해드리겠소." 하연은 어이가 없었다. 저게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란 말인가? 그 부탁을 하자고 자신한테 무릎까지 꿇었던 사람이 저런 뻔뻔한 태도라니...... 저 자가 어떤 부탁을 하든 절대 들어주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한 하연은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일어서며 말했다. "좋아요. 하지만 내일 아침까지예요. 내일 아침에는 여기서 떠날 거예요." "그렇게 하시오." 전혀 말릴 생각 없다는 듯 가볍게 말하며 차를 마시는 네이브를 보며 하연 일행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응접실을 나온 하연 일행은 하녀가 안내해준 손님용 침실 중 카리스의 방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미루엘이 중얼거렸다. "분명 무슨 음모가 있긴 있는데..... 도대체 그 부탁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 문제는 내일이면 알게 될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미루엘. 문제는 로베인이에요." "로베인!?" 갑자기 왜 로베인의 이름이 거론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모두들 하연을 쳐다보자 하연은 나바린의 연구실에서 슈마에게 육체를 빼앗긴 로베인과 만났던 일들을 자세히 예기했다. 모두들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있는 가운데 하연이 쟈스란에게 물었다. "쟈스란, 힘들겠지만 내가 연구실로 가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예기해 주겠어?" 쟈스란은 그 말에 얼굴빛이 나빠지긴 했지만 심각한 하연의 표정에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더듬더듬 말하기 시작했다. 그 비욤이란 애꾸눈 마법사가 자신을 주군의 그릇이 될 거라고 했던 것과 자신을 마법진 속에 결박한 일. 그리고 그의 주군인 하연의 말에 따르면 로베인이 나타나 자신에게 주문을 외우자 갑자기 몸 속에서 피가 거꾸로 도는 듯 하더니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의식이 서서히 사라져 가기 시작했던 그 끔찍한 느낌들을 모두 설명해 주었다. 가만히 쟈스란의 말을 듣고 있던 하연 일행은 아마도 그 슈마란 자가 로베인의 육체의 그릇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육체 즉 검은머리와 검은 눈을 지닌 남자의 육체를 얻으려고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의 부하인 비욤을 시켜 쟈스란을 사오도록 한 것이고. 그러자 무엇보다 먼저 로베인을 찾아야 한다는 데에 생각을 모은 그들은 어떻게 하면 로베인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 그 방법에 대해서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사담의 의견에 따라 내일 아침 이 곳을 떠나자마자 용병길드에 로베인에 대한 추적을 의뢰해 보기로 하고 결정하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하연은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고 열어 놓은 창문 위에 걸터앉아 멍하니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양이 뜨고 달이 뜨는 자신이 살던 세계와 너무도 흡사한 곳. 하지만 분명 이 곳은 그녀가 살던 세계와는 다른 곳이었다. 말하는 지팡이가 있는가하면 정령도 있고 인어도 있는 곳. 바라기만 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은 곳. 하연은 이 세계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마법이 통하지 않는 자신을 깨달을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이 세계 사람이 아님을 자각하게 되고 이 세계로부터 거부 받는 느낌이었다. 결코 섞일 수 없는 이방인과도 같은. "돌아가야 하는데 가고 싶지 않......!" 문뜩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흘러나온 그 말에 하연 스스로도 놀라고 있을 때였다. 콜록! 콜록! 요란한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감기에 걸렸나?' 그렇게 생각하고 가볍게 무시하려고 생각했는데 기침소리가 그치지 않고 계속 들려오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 집 사람들은 사람이 감기에 걸렸는데 의사도 부르지 않고 뭐하는 거야 하고 투덜투덜 거리면서 하연은 창틀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기침소리가 들려오는 옆방으로 갔다. 문을 열어보니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래서 들어가 보니 전체적으로 흰색과 푸른색으로 치장되어 있는 방에 한 7, 8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이 커다란 흰색 침대에 푹 쌓인 채 격렬하게 기침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연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소년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물었다. "괜찮니?" 소년은 기침을 하는 가운데 눈을 들어 하연을 보더니 놀란 듯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어둠의 사신이세요? 저를 데려가려고 오셨나요?" 어둠의 사신이라니? 어리둥절해하는 하연의 머리 속에 갈루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세계에서 네가 저번에 말한 저승사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큭큭! 어둠의 사신이라니 너랑 정말 잘 어울리는 말이로군.- 꼬마의 말이니 그냥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딱딱한 목소리를 내고 마는 하연이었다. "그렇다면." "쿨럭! 쿨럭! 제발...... 제발 절 데려가지 말아주세요. 제가 죽으면 저의 형이...... 쿨럭! 형이 울어요. 전 죽으면 안돼요, 제발......!" 하연은 멍해지고 말았다.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이렇게 아픈데...... 죽고 싶지 않단 말이니? 형이 우는 게 싫어서! 어른인 자신조차 너무 아프면 차라리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어린 소년이 이렇듯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다니...... 왠지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고 생각해 자신의 목숨을 소홀히 했던 자신이 너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 때였다. 갑자기 소년이 커억! 입에서 피를 토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놀란 하연은 얼굴이 창백해지고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가 급히 카리스의 방으로 뛰어가 방문을 두드렸다. 쾅! 쾅! "카리스! 카리스!" 다급한 하연의 외침에 곧 문이 열리고 놀란 얼굴의 카리스가 나왔다. "진정하세요, 하연. 무슨 일입니까?" "꼬마가 아파요." 그러면서 다짜고짜 그를 끌고 가는 하연에게 이끌려서 카리스는 꼬마의 방에 이르렀다. 카리스는 피를 토한 꼬마의 모습과 초조한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하연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한숨을 쉬면서 리커버리를 시전했다. 드래곤인 자신이 왜 모르는 인간 꼬마 따위를 치료해야 하는지...... 은빛 장막이 꼬마의 몸 속으로 스며들고 하연은 쟈스란처럼 꼬마가 금방 나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 좀 진정되고 더 이상 피는 흐르지 않았지만 그것은 마법이 들어서가 아닌 듯 여전히 잔기침을 계속 하는 것이었다. 놀라서 카리스를 쳐다보니 카리스 또한 의외인 듯 다시 소년에게 마법을 펼쳤다. 그러나 소년은 여전히 차도가 없었고 이에 하연이 중얼거렸다. "설마 이 꼬마도 나처럼 마법이 듣지 않는 건가?" "그 때문이 아니오. 그 아이는 저주를 받아서 그런 거요." 돌아보니 네이브가 웬 눈동자가 희어서 눈이 모두 하얗게 보이는 마법사와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저주를? 이 아이가?" 하연은 놀라서 물었다. 이런 꼬마 아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저주씩이나 받는단 말인가? 네이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간략히 상황을 설명했다. "상인의 최고 우두머리인 카라반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우선 우리 가문을 쓰러트리지 않으면 안되거든." 권력다툼의 희생으로서 어린 나이에 이렇게 저주를 받아 누워 있다니 하연은 꼬마를 동정하지 않을 레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착잡한 표정으로 연실 기침을 하고 있는 해쓱하다 못해 얼굴빛이 파란 꼬마를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네이브가 담담히 말했다. "도와주시오." 그러나 그 말속에 긷든 간절함을 어느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저 꼬마를 도와주라는 말인지 하연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병조차 어떻게 하지 못하는 그녀가 아니었던가? "뭘요? 어떻게요?" 그래서 짜증이 나서 쏘아붙이자 네이브가 화를 내며 말했다. "지금 몰라서 묻는 거요? 이런 어린아이가 저주를 받아서 고통받고 있는데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요?" "그럼. 모르니까 묻지 알면서 묻는단 말이에요?" 그러나 네이브는 하연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어둠의 사제인 그녀가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모를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그녀는 마신 소환사가 아니었던가? 그가 믿을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서로 험악한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자 카리스가 그런 그들 사이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무슨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저도 하연의 말처럼 당신의 말을 이해할 수 없군요. 그녀가 어떻게 저 소년을 도와준단 말입니까?" 그러자 네이브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속으로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하연에게 말했다. "당신은 마신 소환사라고 들었소. 아니오?" "아!" 그제서야 카리스는 네이브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챈 듯 감탄사를 터트리며 말했다. "그렇군요. 저 소년의 병은 어둠의 불의 사제에 의한 저주로 인한 것이니 카이람님을 불러서 저주를 거두어달라고 하면 되겠군요." "그런 거예요?" 하연은 몰랐다는 듯 되물었고 카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제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다니 이상하군요. 불의 마신 카이람님이 용기와 생명력의 회복 그리고 파괴와 질병의 저주를 담당하고 있다는 것은 사제가 아니라도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하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예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잊고 있었군요. 그러니까 카이람을 부르면 된다 이거지요?" -바보!- 사제이면서 그런 것을 잊고 있었다니 어이가 없었지만 원래 그런 여자라니 하고 생각하면서 네이브는 재빨리 하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흰 눈의 마법사 아스탄도 눈앞에서 마신을 볼 수 있단 사실에 긴장한 채 초조한 얼굴로 그녀를 지켜보는 가운데 하연은 마음속으로 카이람의 이름을 불렀다. '카이람!' 이렇듯 어려울 때마다 그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게 되니 그야 말로 진정한 자신의 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잠시 후, 약간 초췌한 얼굴에 붉은 머리의 마족의 모습을 한 카이람이 공간을 열고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주위를 한번 휙 둘러보고 하연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침울한 얼굴로 물었다. [불렀냐?] 그런 카이람의 모습에 하연은 물론이고 카리스, 네이브, 아스탄 모두 놀라서 쳐다보았다. 이미 두 번이나 카이람을 본 카리스는 그렇다 치고 마신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던 네이브와 아스탄은 눈앞에 있는 마족이 정말 마신인지 의심스런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정도로 카이람의 모습은 평소 그를 꽉 채우고 있던 투기가 싹 빠진 모습이었던 것이다. "너, 무슨 일이 있었냐?" 네이브와 아스탄은 놀란 눈길로 하연을 보았다. 아무리 마신 소환사라고는 하지만 마신에게 함부로 너라니......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마신인 카이람이 그런 하연의 말투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었다. 카이람은 그저 힐끗 하연을 쳐다보고는 물을 뿐이었다. [이번엔 또 왜 불렀냐?] "아! 여기 있는 이 꼬마 저주 좀 풀어달라고." 하연이 차크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하자 네이브와 아스탄은 바짝 긴장해서 카이람이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할지 어떤 조건을 내걸지 대해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뜻밖에 카이람은 순순히 그래 라고 하면서 한번 손을 쓰윽 차크의 몸 위로 내 젖는 것이었다. 그러자 차크의 몸에서 뭔가 검붉은 빛이 카이람의 손안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차크의 푸른 혈색이 보통의 아이다운 혈색으로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네이브와 아스탄이 기쁘고 감격해서 쳐다보고 있는데 카이람이 말하는 것이었다. [대가로 뭘 줄 거지?] 그 말에 하연이 그럼 그렇치 하는 표정으로 인상을 팍 찌그러트리고 있는데 네이브가 나서며 애써 떨림을 감추고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원하시는 걸 말씀해 보십시오, 마신 카이람님. 뭐든지 들어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카이람은 불쾌한 시선으로 네이브를 힐끗 보고는 무시무시한 살기를 드러내며. [꺼져!] 라고 말하더니 다시 풀죽은 표정으로 하연에게 물었다. [뭘 줄 거야?] 그 급격한 표정변화에 하연조차 적응이 안되어 한 동안 멍해 있다가 잇따른 재촉에 하연이 말했다. "우선 너 무슨 일로 그렇게 기운이 없는 거야? 그 이유나 좀 알자." 카이람은 빤히 쳐다보는 하연의 시선을 애써 피하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또 졌다!] 다른 사람들은 최강의 전투 마신인 카이람이 졌다는 말에 놀라서 경기를 일으킬 지경이었으나 하연은 그 졌다는 게 게임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피식 웃으며 물었다. "상대가 누군데?" [핏빛천사.] 가만히 기억을 더듬던 하연은 놀라서 되물었다. "핏빛천사? 혹시 늘 테란만을 사용해 싸우는?" [어? ......그러고 보니 늘 테란이었군. 아는 상대냐?] "물론이지. 그 사람 아주 유명한 프로 게이머야. 테란으로만 싸우면서 한번도 져 본적이 없는. 이 바닥에서 아주 유명하지. 아직 초보인 네가 져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대야. 오히려 초보인 네 상대가 되 주었다는 것을 기뻐해야 할걸? 그 사람 우리 같은 초보는 상대도 안 하기로 유명하거든. 그런데 널 상대했다니...... 너 많이 늘었나 보다." 부러움이 섞인 표정으로 하연이 쳐다보자 자신감을 되찾은 카이람은 약간 뻐기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 이 몸이 대 마신 아니냐? 이 정도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지, 크하하하! 흠흠! 그럼, 대가는 다음에 받기로 하고 난 이만 가보겠다. 내가 좀 바빠서 말이야.] 안 봐도 그 바쁜 일이라는 게 핏빛천사에게 설욕하는 일임이 분명했지만 어쨌든 대가를 안 받는다니 잘됐다고 생각하며 기분 좋게 사라지는 카이람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있는데 자신을 마치 무슨 괴물 보듯 쳐다보는 네이브와 아스탄의 시선이 느껴지자 하연은 금방 불쾌해지고 말았다. "뭐지요?" 하연이 묻자 그때까지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시선을 거두고 네이브는 하연에게 고개를 숙이며 마음을 담아 말했다. "고맙소." 그의 진심을 느낀 하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그가 물었다. "내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 보시오. 내 동생의 저주를 풀어 준 대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소." 하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내가 좋아서 한 일이에요. 그리고 난 원하는 것도 없고요. ......있다면 지금은 모험을 하고 싶을 뿐이에요. 아주 길고 긴 모험을 요." 다음 날. 하연 일행은 아침 일찍 스마인 가를 나섰다. 졸린 눈을 비비적대는 하연을 미루엘이 반쯤 끌고서. 그런 하연에게 아스탄은 슬쩍 낡은 종이 한 장을 손에 쥐어 주며 말했다. "즐거운 모험이 언제나 함께 하길 기도하겠습니다." 무슨 종인가 궁금하긴 했지만 너무 졸린 나머지 보는 것도 귀찮아 하연은 대충 바지 주머니에 그 종이를 쑤셔 넣고 고맙다고 말하고는 미루엘이 이끄는 데로 끌려갔다. 그런 아스탄의 뒤로 어느새 다가온 네이브가 물었다.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아스탄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제 목적은 이미 이루어졌으니 더 이상 제게는 필요없는 종이입니다." 네이브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스탄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100를 맞아 특집으로 올려달라는 요청이 많아서...... 할 것도 없고 그저 한번 길게 올려봤습니다.^^ 참! 그리고 이벤트로...... 이름을 공모했으면 합니다. 많은 작가들의 고민!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흠흠! 어디까지나 예를 들어지만...... 어디까지나...... 헤헤! 솔직히 고백하면 카이람이 일을 벌렸습니다. 그래서...... [카이람이 프로 게임단을 창설한다면 그 이름은 뭐가 좋을까요?] 이번 공모의 주제입니다. 많은 의견 부탁드립니다. 이층으로 되어있는 라마드의 용병길드에는 많은 용병들이 있었는데 몇몇은 모여 게임을 하거나 피크닉 온 사람들처럼 식사를 하는 등 한가한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다 하연 일행이 들어서자 시선을 날카롭게 빛나며 일제히 그들을 쳐다보았다. 사담은 익숙한 듯 그런 용병들 사이를 헤쳐나가며 접수를 받고 있는 삼십대쯤으로 보이는 여인 에게 다가갔다. 여인이 물었다. "의뢰를 하러 왔나요? 일을 구하러 왔나요? 지금은 보시다시피 일자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기 다리겠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할거예요." "의뢰를 하러 왔소." 그 말에 용병길드 안은 쥐죽은듯이 조용해졌다. 자신에게 그 일이 떨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었 다. "무슨 일이지요?" 사담은 딱 부러지고 간결하게 말했다. "사람을 찾는다. 키는 188정도의 금발에 푸른 눈. 미남이며 이름은 로베인 볼트라인. 그를 보 고 위치를 알려주는 자에게는 20골드를 사로 잡아오는 자에게는 100골드를 주겠다." 순간 의뢰내용을 적어가던 여인은 물론이고 길드 안에 있던 모든 용병들이 놀라서 웅성거렸다. 사람하나 찾는 일에 대한 가격치고는 너무 높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웅성거림도 여인의 다음 질문에 대한 사담의 짧은 대답으로 인해 정적으로 뒤바뀌고 말았다. "의뢰인은?" "사담!" 그 이름이 던져준 충격 때문이었다. 용병 치고 누가 그 이름을 모르겠는가? 그들의 자존심이자 긍지인 용병왕 사담의 이름을. 의뢰의 내용을 적던 여인은 그 의뢰서에 특급의 인장을 찍으며 말했다. "의뢰비는 필요없습니다. 그리고 의뢰내용은 용병왕 사담님의 이름으로 최대한 신속하게 처리 될 것입니다." 사담의 정체를 알고 있던 카리스를 제외한 하연 일행은 여인의 말에 놀라운 눈길로 사담을 쳐 다보았다. 미루엘이나 쟈스란은 용병왕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가 바로 사담이라는 데에 놀란 것이고 하연이나 리밍스는 사담이 용병들에게 미치는 영향력 때문이었다. 주위의 모 든 용병들이 존경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사담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담 덕분에 으쓱해진 기분으로 용병 길드를 나선 하연 일행은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 현자의 안식처에게 머물기로 결정하고 다시 현자의 안식처로 향했다. 그러면서 대 광장을 지나는데 한 검은 고양이가 그들 앞을 가로막으며 가르랑거리면서 그들에 게 따라오라는 듯 한 수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 기품 있어 보이는 고양이의 모습에 반한 듯 재빨리 수풀 속으로 따라 들어간 미루엘은 잠시 후 한 십오륙세 정도로 보이는 상처투성이의 소년을 안고 나왔다. "어? 고양이는 요? 어떻게 된 일이에요?" 하연의 물음에 미루엘은 그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고양이를 따라갔는데 갑자기 고양이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이 소년이 얻어 맞아서 상처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소년만 데리고 나온 겁니다." 하연 일행은 우선 소년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소년을 데리고 현자의 안식처로 갔다. 그들을 다시 반갑게 맞이하던 엘라 아주머니는 사담이 업고 있는 소년을 보더니 깜짝 놀라며 외쳤다. "아니, 그 아이는 브리켄이 아니에요?" "이 소년을 아십니까?" 미루엘의 물음에 엘라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이지. 이 아이는 브리켄으로 머리가 뛰어나서 작년에 혼 슈이센 왕립학교에 들어갔었지. 그런데 왜 이렇게 다친 거냐?"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다쳐서 쓰러져 있는걸 데리고 왔거든요." "그래. 그럼 어서 저 쪽 방으로 데려가 눕히도록 해라. 내가 약을 갖고 가마." 엘라 아주머니의 말대로 방에 브리켄을 뉘인 하연 일행은 모두 카리스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카리스가 할 수 없다는 듯 마법을 써서 브리켄의 상처를 치료했고 때문에 조금 후 엘라 아주머니가 약을 가지고 왔을 때는 브리켄의 상처는 모두 아문 후였다. 그것이 카리스가 마법으로 상처를 치료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안 엘라 아주머니는 카리스에게 연실 고맙다고 말하며 고마움의 표시로 하연 일행에게 공짜로 점심을 대접해 주겠다고 말했다. 돈은 많았지만 공짜를 좋아하는 하연이 크게 기뻐한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막 점심 식사를 끝냈을 무렵이었다. 브리켄이 정신이 들었는지 방에서 나와 그를 구해주고 상처를 치료해 준 게 엘라 아주머니인 줄 알았던지 엘라 아주머니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신세를 졌습니다, 엘라 아주머니.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그러자 엘라 아주머니가 하연 일행을 가리키며 말했다. "감사 인사는 저분들에게 하거라. 널 구해준 건 저분들이니까." "네?" "네가 상처입고 쓰러진걸 저분들이 데리고 와서 마법으로 치료까지 해주셨단다." 그 말에 브리켄은 놀란 표정으로 하연 일행을 돌아보더니 급히 그들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뭘? 그건 그렇고 어쩌다가 그렇게 다친 거야?" 손가락 하나 거든 일도 없으면서 마치 자신이 전부 한 일 인양 대뜸 감사인사를 낚아채듯 받으 며 하연이 물었다. 그러자 브리켄이 몹시 난처한 얼굴로 대답을 꺼리는 기색인지라 하연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됐어. 말하지 않아도 돼." 그 말에 안도한 표정으로 브리켄은 다시 한번 하연 일행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그 리고 그들이 그 일에 대해 잊어가고 있을 때쯤의 일이었다. 용병 길드에 의뢰한 일에 대한 소식을 기다리며 저녁을 먹고 있는데 엘라 아주머니가 눈물에 젖은 눈으로 그들에게 뜻밖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 때 그들이 구해준 브리켄이라는 소년이 마족과 계약을 맺어 살인을 자행하는 바람에 혼 슈 이센 왕립학교에서 그를 처형했다는 것이었다. "그 착한 아이가...... 이건 뭔가 잘못된 일이야. 그 아이가 누굴 죽였을 리가 없는데......" 그러면서 부엌으로 들어가는 엘라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보면서 하연은 일행들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그 아이가 진짜 마족과 계약을 맺었을까요?" 마족이란 이 세계에서 악마와 마찬가지로 취급받는 존재였다. 그런 존재와 브리켄이 계약을 맺 었을까? 하연은 얼마 전에 본 브리켄을 떠올려 보았다. 편견이 많이 작용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말을 하 면서 시종 시선을 피하지 않았던 그 아이의 맑고 당당하던 눈빛은 결코 악마와 계약을 해 살인 을 할 아이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 미루엘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거야...... 예전이라면 확실히 아닐 거라고 말했겠지만 지금은 좀......" "예전과 지금이 뭐가 다른데?" 하연이 의아해서 묻자 미루엘이 다른 일행들에게 동의를 청하듯 물었다. "예전이라면 확실히 아닐 거라고 말했겠지만 하연이 그 마족들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마 신과 계약을 맺은 이상 브리켄이 그러지 않았을 거라는 보장은 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카리스가 동의를 표하자 잇따라 리밍스와 사담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리고 아직 하연이 마신과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쟈스란은 기겁을 한 표정으로 하연을 뚫어 지게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연, 마신과 계약을 맺었어요? 마족과 계약을 맺으려면 순결한 처녀나 어린아이의 피가 필요 하다고 들었는데...... 설마, 하연이......?" 차마 말을 못 잇는 쟈스란의 말에 그때서야 그런 사실이 떠오른 듯 다른 일행들도 하연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연은 심각한 일행들의 얼굴에 방긋방긋 웃으며 물었다. "계약의 대가로 내가 순결한 처녀나 어린아이의 피를 주었다면 어떻게 할 건데요?" 오랜만이라...... 도배란걸 해볼 생각입니다.^^ 혹시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는지 확인해 보시려는 분들. 저에게도 확인해 보시고 알려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이런 날이 오다니...... 잠시 일행들 사이로 침묵이 감돌았다. 그런 일행들을 보며 웃고는 있었지만 하연은 이런 자신이 너무도 싫었다. 이렇게 동료들의 마 음을 시험하고 있는 자신이...... 하지만 알고 싶었다. 그것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신의 마음 한 구석에 다른 목숨과 바꾸 어서라도 살고 싶다는 사악한 생각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 다. 이윽고 사담이 입을 열어 말했다. "설령 그랬다고 해도 전 상관없습니다. 전 이미 수많은 목숨을 죽인 용병이니까요." 카리스도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어깨를 으쓱하며 상관없단 표시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차 피 그는 드래곤인지라 하연이 그깟 하찮은 인간쯤 몇몇 죽였다고 해도 상관없었던 것이다. 리밍스도 하연을 따라서 종족의 평등한 미래를 지향하긴 했지만 인간이 아닌지라 인간 종족이 서로를 죽이는 것에 대해 별 느낌이 없었다. 어차피 인간들이란 다른 종족과는 달리 서로를 죽 이는 종족이 아니었던가? 따라서 새삼 하연이 다른 인간을 죽였다고 해도 배신감따위를 느낄리 만무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루엘과 쟈스란은 달랐다. 그들은 인간이었던 것이다. 하연이 유심히 그들의 표정을 살피고 있으려니까 쟈스란이 어느덧 떨림이 멈추었는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저도 상관없어요, 하연. 살인자라고 해도 아니, 악마라도 상관없어요. 하연은 내게 손을 내 밀어 준 유일한 존재니까요." 그러자 마지막으로 미루엘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우린 악수했지 않습니까?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서로를 도와주기로. 그 때부터 전 하연을 믿기 로 했습니다. 그러니 하연이 절 배신하지 않는 이상 전 하연의 동료입니다." 하연은 가슴이 뭉클하게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카이람을 만나게 해준 운명의 신이 있 다면 그 신에게 감사하고 싶었다. 그와 만났기 때문에 이 세계에서 이런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나 감동 받았다고 하기에는 어쩐지 계면쩍어 하연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피보다 더 중요한 걸 놓고 계약했었어." "피보다 더 중요한 것?" 모두 궁금한 표정으로 하연을 쳐다보는 가운데 하연은 다시 생각해도 아까운 듯 얼굴을 일그러 트리며 설명해주었다. "내가 일평생 고생고생해서 모은 게임...... 다섯 개 하고 바꿨거든." CD라고 하면 못 알아 들을까봐 그 말은 빼고 게임이라고만 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들 은 하연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분명 알지 못하는 단어는 한 마디도 없었는데 말이다. 누군든 쉽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마신과의 계약에 게임을 걸다니...... 한참만에 쟈스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게임이란 것, 요전에 우리가 했던 대륙정복 게임 같은 그 게임을 가리키는 말인가요?" 설마 아니겠지 하는 기대 속에 물은 질문이었지만 하연은 당연한 듯 그의 기대를 배신했다. "응!" 순간 미루엘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하연! 지금 그 말을 우리보고 믿으라고 하는 말입니까? 어떤 마신이 게임을 가지고 계약을 한 단 말입니다." "마신 카이람!" 허탈함을 감추지 못하는 일행들을 보며 하연이 중얼거렸다. "그 녀석이 좀 별종이잖아? 너희들이 이해해." 그 말에 하연도 그에 못지 않은 별종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는 일행들이었다. 어떻게 마신하고 게임을 갖고 계약을 할 생각을 다 했단 말인가? 하연이 사담에게 물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렇게 죽치고 앉아서 용병길드에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거예요?" 순간 사담이 미미하지만 난처한 표정을 짖자 미루엘이 하연에게 따지듯 말했다. "그렇다고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대로 기다리고 있을 수 밖예요." 그러자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하연이 말했다. "그럼. 그 동안 우리 심심한데 브리켄의 일에 대해 알아보면 어떨까요?" "에!?" 모두 놀란 듯 하연을 쳐다보긴 했지만 반대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자 하연은 자신의 생각을 밀 고 나갔다. "우선 그 혼 슈이센 왕립학교에 들어가서요......" 그러나 그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 있으니 혼 슈이센 왕립학교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는 사실이었다. 한 나라의 궁성을 방불케 하는 규모인 혼 슈이센 왕립학교의 학생들은 대부분 각 나라의 귀족 자제들이었기 때문에 많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학교의 정문 앞에는 항시 한 대대이상 되는 규모의 기사단이 배치되어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모른 하연 일행은 정문 앞에서 출입이 막혀 들어가지도 못하고 다시 현자의 안식처로 돌아와야 했다. "어떻게 들어갈 방법이 없을까?" 하연의 중얼거림에 대답한 것은 뜻밖에 엘라 아주머니였다. "왕립학교에 들어가려면 매년 열리는 시험을 보는 방법이 있지. 귀족이 아니라도 우수한 성적 을 거두면 입학이 허가되니까. 브리켄도 그렇게 해서 들어갔단다." 하지만 하연은 그 제안을 즉시 기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갈루마가 도와준다고 해도 그 녀는 이 세계의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기 때문이었다. "뭐,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엘라 아주머니가 잠시 생각해보더니 카리스를 보며 말했다. "아, 이분 마법사였지? 마법사는 드무니까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들어가면 어떨까?". 좋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카리스 이외에는 들어가지 못할 것이 아닌가? 그 때 사담이 말했다. "그렇다면 전 검술 선생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어어......!" 용병왕 사담이 검술 선생으로서 들어 가겠다는데 누가 받아주지 않겠는가? 하지만 하연은 불쾌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정작 자신이 들어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마신 소환사이긴 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마신을 소환하게 되었는지 그 방법을 알지 못하는 이상 그것을 가르칠 수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둘이 선생으로 들어가 주는 대신 특혜형식으로 하연의 입학을 허가해 달라고 하면......" 카리스의 말이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연의 표정이 확 하고 밝아졌다. 그런 하연의 얼굴을 보고 있던 리밍스가 당황해서 물었다. "그럼, 우리는?" 하연은 리밍스와 미루엘, 쟈스란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용병길드에서 연락이 오면 그거나 전해줘요." 순간 미루엘과 리밍스는 앞으로 심심하게 되었다는 듯 한숨을 쉬었지만 쟈스란의 얼굴은 불안 하게 흔들렸다. 하연과 떨어진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심한 성격 탓에 같이 가고 싶다는 말도 못하고 그저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여관방으로 들어간 하연은 문뜩 식사시간 내내 침울한 표정으로 짓고 있던 쟈스란이 걱정이 되어서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쟈스란과 한 방을 쓰고 있던 카리스가 문을 열고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하연?" 하연은 침대에 두손을 모으고 가만히 앉아있는 쟈스란을 힐끗 보며 말했다. "쟈스란과 함께 산책이라도 할까해서요." 그 말에 쟈스란이 번쩍 고개를 들고 눈을 빛내며 하연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 하연은 슈이센 에 온 이래 자신이 쟈스란에게 너무 무심했다고 속으로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리스는 자신도 같이 가겠다고 말하려다가 하연의 표정을 보니 뭔가 쟈스란에게 할 말이 있는 듯 해서 말없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쟈스란과 함께 현자의 안식처를 나온 하연은 익히 지리를 아는 대 광장 쪽으로 산책로를 잡았 다. 둘이 지나가자 사람들이 모두 한번씩 돌아보며 수군거리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둘을 자매로 보았는지 대게는 예쁜 아가씨들이라고 하는 소리였다. 그 소리에 쟈스란은 좀 침울한 표정이었지만 하연은 재미있어 할뿐이었다. 대 광장 중앙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그 위에 아름다운 물의 여신 엘레나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 었다. 한참 그 아름다운 여신상을 감상하던 하연이 쟈스란에게 물었다. "쟈스란, 무슨 걱정이 있어? 저녁 내내 침울해 보이잖아?" "......그랬어요?" "그래." 쟈스란은 하연이 자신의 우울한 마음을 알아챌 만큼 관심을 갖고 보고 있다는 사실에 기쁘긴 했지만 좀처럼 마음이 즐거워지지 않았다. "쟈스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마음속에 담아두기만 해서는 그 어떤 것도 전해지지 않 아. 두들기지 않으면 그 어떤 문도 열리지 않는 거야." '두들기지 않으면 그 어떤 문도 열리지 않는다고?' 멍하니 하연이 한 말을 되풀이해 중얼거리던 쟈스란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하지만 말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없는 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저도 하연 에게 뭔가 도움이 되어주고 싶은데......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뭐야?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어." 하연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충분히 도움이 되어주고 있으니까." 쟈스란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존재하는 것이 어떻게 그녀에 게 도움을 주는 일이란 말인가? 그의 어머니조차 그가 차라리 없어졌으면 하고 바랬지 않은가? 분명 그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한 빈말이라고 생각해 쓴웃음을 짖고 있는데 하연이 물었 다. "쟈스란은 지금 우리 일행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아?" 그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로베인이라는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하고 있잖아요." "맞아. 그런데 왜 우리가 로베인을 구하려는 지는 알아?" '하연에게 소중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 말은 쟈스란의 입 밖으로 세어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을 하고 나면 그 말이 사실로 굳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슈마라는 마법사에 대해서는 들어보았지?" 쟈스란은 슈마라는 마법사가 지금 로베인의 육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소리를 자스란 가에서 들 은 것을 기억해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슈마라는 마법사는 고대 트리엔시라 마법 왕국에서 왕위찬탈을 노리던 왕의 숙부였던 자인 데 그 동안 몇 천년을 지하왕국에서 육체도 없이 잠들어 있다가 로베인의 육체를 이용해 부활 해 버리고 만 거야. 그리고 지금은 이 대륙의 지배자가 되려고 하고 있지. 때문에 빨리 로베인 을 찾아서 그 슈마라는 자를 없애야 하는데 마침 그 슈마라는 자가 자신의 새로운 육체로서 쟈 스란의 몸을 노리고 있는 거야. 왜냐하면 고대 트리엔시라에서는 검은머리와 검은 눈은 왕의 상징이기 때문이지." "왕의 상징?" 놀랍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검은머리를 쓰다듬는 쟈스란을 본 하연은 희미하게 웃으면서 계속 말했다. "그래서 우리 쪽에서도 로베인의 위치를 찾으려고 하고는 있지만 그 쪽에서도 분명 우리를 찾 고 있을 거야. 아니, 정확히 말하면 쟈스란 너를 말이지. 너의 육체가 그에겐 필요하니까. 따 라서 우리는 항시 너를 지키고 있다가 그가 너에게 접근하면 그 때 그를 잡아 로베인을 구하고 슈마라는 자를 없애버리면 되는 거지. 왜 너의 존재가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 이제 알겠어?" 쟈스란이 자신의 존재가 하연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을 때 하연 또한 쟈스란에 게 말을 하면서 깨닫게 된 새로운 사실에 얼굴을 심각하게 굳혔다. 미루엘과 리밍스가 있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마법왕국 트리엔시라의 대마법사가 아닌가? 과연 그들만으로 쟈스란을 지킬 수 있을지 걱정이 된 하연이 일행들과 상의해서 쟈스란 또한 왕립학 교로 데리고 가는 방향으로 결정을 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어두워오는 공원에 흰 로브를 입은 대 여섯 명의 빛의 사제들이 애써 두려움을 감춘 얼굴로 하 연과 쟈스란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그리고 그 중 이마에 붉은 색 서클렛을 한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빛의 사제가 하연에게 입을 열어 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마신 소환사이신 하연님이십니까?" "맞는데요?" "저희들은 아바드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하연님에게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이렇듯 찾아뵈었습니다. 저희와 동행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그들은 하연의 공격에 대비한 듯 각자의 신성물을 자신들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디바인 파워가 은은히 흘러나오는 막대기와 지팡이를 든 사제들은 하연의 입을 뚫어질 듯 쳐다 보았다. 기도주문이 흘러나오면 바로 몸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하연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기도주문이 아니었다. "지금은 안되고 내일은 어떠세요? 지금 제가 현자의 안식처에 머물고 있으니 내일 아침 그리로 와 주시겠어요?" 빛의 사제들은 하연의 말을 진의를 파악하려고 애썼다. 말은 그렇게 하고 도망쳐 버릴지도 모 르지 않는가? 그런 그들의 마음을 알아챈 듯 하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두려워하는 쪽은 제가 아닌 여러분들 같은데요? 제가 피할 이유가 있을까요?" 빛의 사제들은 하연의 말에 약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내일 찾아가 뵙겠습니다."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쟈스란과 함께 현자의 안식처로 향했다. 쟈스란이 뒤를 돌아보자 빛의 사제들이 그들이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쟈스란은 하연의 눈치를 살피다가 물었다. "아바드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하연은 인상을 쓰면서 대충 아바드에서 있었던 일을 예기해 주었다. 빛의 바람의 사제 덴 와사 프가 그녀를 만난 후, 어둠의 불의 사제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사실을. 쟈스란은 놀란 눈으로 하연을 보며 물었다. "하연이 그런 것이 아니고요?" "설마...... 난 저주하는 방법따위 모르는걸." "네? 하지만 사제잖아요?" 하연의 짓이 아니라는 사실보다는 하연이 저주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다는 쟈 스란의 표정에 하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카이람과 계약을 해서 사제가 된 거지. 사제로서 카이람과 계약을 했던 건 아니었으니까." 어리둥절해 하는 쟈스란을 보며 하연은 중얼거렸다. "그 빛의 사제들에게 이 말을 믿어달라고 하는 건 좀 무리인 것 같군." 다음 회에 여러분의 이벤트 결과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기대밖의 결과일지도 모르겠지만요.^^ 다음날. 하연은 아침 일찍 찾아 온 빛의 사제들을 보며 자신을 따라나서려는 일행들을 만류한 뒤 그들 에게 쟈스란을 부탁하고는 혼자서 그들을 따라나섰다. 걱정 가득한 일행들의 얼굴을 보았지만 무시하고 빛의 사제들과 함께 간 곳은 라마드의 빛의 신전인 고로도 신전이었다. 빛의 신전답게 화사한 분위기를 풍기는 고로도 신전은 군데군데 유리로 빛의 반사되어 빛이 머 물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또한 신전 내부는 너무 조용해서 하연과 빛의 사제들이 걷는 발자국소리가 복도를 크게 울리고 있었다. 빛의 사제들에 의해서 하연이 이른 곳은 성스런 빛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불의 성전이었다. 그 곳에는 빛의 불의 고위사제 프레인이 미리 연락을 받고 직접 하연을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 다. 그는 빛의 대사제인 엘 노아가 그렇게 두둔하던 여사제의 얼굴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도 사악한 저주로서 사람들을 고통에 빠트리는 어둠의 사제 따위를 말이 다. 그런데 막상 방안으로 들어선 하연의 모습을 본 프레인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 다. 마치 어둠의 신 가란이 드리운 듯한 검은머리와 검은 눈에 그가 본 그 어떤 붉은 빛보다 성스 러운 빛을 띄고 있는 서클렛을 한 소녀의 모습은 그가 미쳐 생각지 못한 어떤 것을 깨닫게 해 주었던 것이다. 그녀가 마신 카이람의 선택을 받은 자라는 것을. 그것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한동안 충격 속에서 하연을 바라보던 프레인의 마음속에는 질시와 증오의 감정이 서서히 자라 나기 시작했다. 그는 그의 평생을 그 누구보다도 믿음을 갖고 카이람님을 섬겼다. 그 분의 뜻이 파괴와 저주보 다는 용기와 생명력을 불러 넣어주는데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때문에 지금의 고위사제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만약 그 분의 음성을 듣 거나 그 분의 선택을 받을 자가 있다면 당연히 자신일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아닌 저런 아직 나이도 어린 어둠의 사제가 그 분의 선택을 받고 자신 앞에 당 당히 서 있었으니 그는 속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듯 했다. 그러나 프레인은 자신이 생각해도 의 외일정도로 침착한 목소리로 하연에게 자리를 권하고 있었다. "앉게." 하연이 자리에 앉는 동안 프레인은 잠시 그녀의 붉은 서클렛을 탐욕스런 시선으로 쳐다보다가 하연이 눈치채지 못하게 자연스럽게 시선을 눈으로 내려트리며 말했다. "난 불의 고위사제인 프레인 블로리쉬라고 하네. 자네가 마신 소환사인 하연이지?" "네, 처음 뵙겠습니다." "자네에 대해선 엘 노아님께 들었네. 물론 자네가 마신 소환사라는 것은 미쳐 몰랐다고 하시지 만 그 분은 자네가 함부로 누군가에게 저주를 걸었을 리 없다고 믿고 계시네. 나도 그 분이 그 렇게 믿는 이상 자네의 결백을 믿고 있네. 하지만 세상이란 게 자네도 알다시피 믿음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지. 자네가 결백하다는 증거가 필요하네. 그래서 말인데 마신 카이람님을 지금 내 앞에서 소환해 볼 수 있겠나?"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는 일이랑 카이람을 소환하는 것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하연은 어쨌든 소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 때 문뜩 저번의 소환에 대한 대가를 아직 치 르지 않았다는 사실과 한번 그를 보여주기 위해 소환했다가 자신이 구경거리냐고 화를 냈던 일 이 떠올라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좋아하지 않을 걸요. 구경거리가 되는 걸 싫어하니까요." "어찌 그 분을 단순히 구경하기 위해 부른단 말인가? 내 그 분께 긴히 물어볼 말이 있어 그러 니 어서 소환해 보게." 속으로 그럼 빛과 어둠의 전쟁에 대해 신께 그 의견을 물으려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고개를 끄 덕인 하연은 정신을 집중해 마음속으로 카이람을 불렀다. '카이람!' 그러자 하연의 서클렛에서 붉은 성스러운 빛이 흘러나오더니 카이람이 그 모습을 그들의 눈앞 에 드러냈다. 순간 하연의 입이 쩌억 벌어지고 말았다. 검은 피부의 뾰족한 귀를 한 마족의 모습에 긴 붉은 머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안경에 목 부분의 단추를 약간 풀어헤친 와이셔츠 양복차림이라니...... 물론 멋있긴 했지만 자신의 세계의 옷을 입고 있는 카이람은 생각도 해 본적이 없었던 하연이 었던 것이다. "도대체 지금 그 옷차림은......?" [아? 이거!] 안경을 스윽! 치켜올리며 카이람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어때? 멋있지. 이번에 프로 게이머로 등록했다.] "프로 게이머!?" [핏빛천사인 그 놈하고 곧 프로 게임단도 창설할 예정에 있다.] "하, 하지만 프로 게이머로 등록하려면 두 개 이상의 게임 리그에 참가해서 입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들었는데...... 너 게임리그에 참가했던 거야? 그 모습으로?" [응!] 프레인이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는 하연과 카이람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지금 그녀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 [전혀. 오히려 프로 게이머가 될만한 패션감각이라고 칭송이 자자했지. 일전에 보니까 천사날 개를 달고 나오는 여자도 있던데, 뭘?] "하긴 거기가 그런 곳이었지." 허탈감에 기운이 빠진 표정을 짖고 있는데 카이람이 프레인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또 뭐냐?] "정말 몰라?" 하연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노려보자 카이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새삼 프레인을 자세히 들 여다보더니 말했다. [모르겠는데?] 그 말에 프레인은 좀 실망했지만 카이람님을 모시는 입장에서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즉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고했다. "마신 카이람님의 미천한 종 프레인 블로리쉬 인사 올립니다." [아? 이번에 고위사제가 너인가? 그런데 너......!] 갑자기 카이람의 전신에서 살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자 프레인은 황망히 고개를 숙인 채 부들 부들 떨었다. 그런 그의 귀에 카이람의 험악한 음성이 들려왔다. [앞에 '대'자 붙여. 이 몸은 그냥 마신이 아닌 대 마신 카이람님이시란 말이다.] "예? 예. 대마신 카이람님!" 그제서야 만족한 표정으로 살기를 거두며 카이람은 하연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서?] 왜 불렀냐를 생략한 그 물음에 하연은 프레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분이 대마신 카이람님께 긴히 여쭤 볼 말씀이 있으시다는군요." 비꼼이 다분한 하연의 말투에 카이람은 헛기침을 하며 프레인에게 물었다. [뭐냐?] 그러자 프레인이 하연에게 말했다. "잠시 카이람님과 단 둘이 할 말이 있으니 자리를 피해주지 않겠나?" 단 둘이 할말이 있다는 말에 하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고 성전을 나갔 다. [할 말이란 게 무엇이냐?] 좀 전의 퉁명스러운 속에서 부드럽게 느껴지던 카이람의 말투는 하연이 사라지자 차갑고 건조 하게 변해서 프레인의 귓가에 울렸다. 그 차가운 말투에 프레인은 일순 흠칫 몸을 떨었지만 곧 진정시키고 차분하게 물었다. "알고 싶습니다." [무엇을 말이냐?] "어째서 저 소녀를 선택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모르시리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저 소녀가 단순한 마신 소환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단순한 소환사였다면 당신의 의지가 깃들 여 있는 서클렛을 하고 있을 수 없겠지요. 어째서 입니까? 당신의 종으로서 당신의 뜻을 받들 며 평생을 기도로서 보내온 저희 불의 사제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한낱 어린 소녀를 당신의 의 지를 펼치는 도구로 삼다니요." [흥! 솔직히 말하면 어째서 네가 아닌 다른 자를 선택했는지 그것을 묻고 싶은 게 아니냐?] 카이람은 비웃듯이 말했지만 속으로는 유쾌하기만 했다. 이런 욕망도 없는 자를 그리고 그 욕 망을 말하지 못하는 자를 그는 경멸하는 쪽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 프레인의 그의 맘에 들 정도로 당당했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어째서 제가 아닌 저 소녀를 선택하신 것인지 듣고 싶습니다." 카이람은 그런 프레인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말했다. [한가지만 묻겠다. 넌 내 의지를 펼치기 위해 너의 목숨을 버려야 한다면 버릴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그것이 카이람님의 뜻이라면." [그렇겠지. 그렇기 때문이다.] 프레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이라니? 당연히 그의 사제로서 그의 뜻을 펼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어디가 잘못되었단 말인가? 고민에 잠겼던 그가 고개를 들어 다시 물으려 있을 때는 이미 카이람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카이람은 성전의 문 밖 복도에서 유리 조각에 반사되어 들어오는 빛에 이리저리 자신의 손을 비추어보고 있는 하연을 허공에 떠서 잠시 바라보다가 그녀의 눈앞으로 미끄러지듯 내려오며 짐짓 퉁명스럽게 물었다. [저번에 이어 이번의 소환까지 대가로 뭘 줄 거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질문이 한낱 말의 유희에 불과하다는 것을. 하지만 카이람은 이런 쓸모없 는 장난마저도 즐거웠다. 하연이 이번에는 또 어떤 대답을 할지 너무 기대가 되었던 것이다. 예상대로 하연은 그런 카이람의 말을 못 들은 척 하며 물었다. "네가 창설한다는 그 프로 게임단 이름은 뭐라고 지었어?" 그 말에 카이람은 인상을 찡그리며 대답을 망설이다가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마신박멸단.] "푸하하하핫!" 순간적으로 하연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무슨 바퀴벌레도 아니고 박멸단이라니...... 점점 험악하게 일그러지는 카이람의 얼굴에 애써 웃음을 참아보려고 노력했지만 박멸단이라는 말이 떠오르자 다시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큭큭큭! 푸하하하! 어, 어쩌다가 그런 요상한 이름이......?" [......모르겠다. 난 그저 무적 불패의 대 마신 카이람님과 그 용감한 수하들이라는 멋진 이름 을 제안한 것뿐이었는데......] "그, 그랬군. 큭큭!" 만약 돌아가게 되면 저 카이람을 앞에 두고 그런 이름을 제시한 그 핏빛천사라는 아이디 주인 의 얼굴을 꼭 한번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하연은 문뜩 좀 전에 프레인 사제에게 '대'자를 꼭 붙이라던 카이람의 말을 떠올리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그래서 그렇게 '대'자를 꼭 붙이라고 했군. 마신은 박멸해야 하니까. 박멸 당하지 않으려 면 꼭 대마신이라고 불려야겠지, 암암!" [젠장!] 뭐라고 투덜거리더니 갑자기 돌아가 버렸는지 카이람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게 된 뒤에도 하연 은 계속해서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프레인의 그녀의 어깨를 두드릴 때까지. 요즘 카이람에게 이를 갈고 있던 제 친구의 아이디어 였습니다. 불쌍한 카이람.ㅜ.ㅜ..... 그러면서도 은근히 카이람의 안되는 일을 즐기고 있는 저는...... 참! 그리고 몽매의 환상님...... 님의 궁금증에 저 또한 궁금증을 느끼고 고민하다가 제가 새로 글을 수정하면서 첨부를 했습니 다.^^ 하연이 어떻게 마법이 통하지 않으면서 이 세계의 말을 할 수 있는지를 요.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카이람의 신력덕분으로 설정했답니다. 다른 분들도 아직 수정할 시간이 있으니까 문제점들을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시 프레인과 마주앉은 하연은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고위사제를 보며 또 카이람이 무슨 헛소리를 지껄였기에 저 사람이 저런 표정을 짖고 있는가 하고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갑자기 프레인이 물었다. "사제로서 자네는 카이람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겠는가?" 하연은 순간 펄쩍 뛰었다. 어째서 자신이 그 카이람의 뜻 따위를 전하기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한단 말인가? 얼마 남지는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소중하고 귀중한 목숨이 아니었던가?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 그럴 수 없어요. 제 의지에 의해서라면 몰라도 그저 신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라면 제 귀중한 목숨을 던질 수는 없습니다." 그 말에 프레인은 충격을 받은 듯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던질 수 없다고...... 그런데 어째서 너 따위를......" 뭐라고 말하는지는 몰랐지만 그의 표정에서 자신을 비난하고 있다는 것은 하연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이 남은 시간은 설사 신이 와서 달라고 해도 줄 수가 없는 자신만의 자신만을 위해 써야할 시간이었으니까. 프레인은 분노한 듯 외쳤다. "벗어라! 불의 사제로서 너 따위가 그 분의 서클렛을 하고 있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다." 그런 그의 목소리에는 하연이 지닌 서클렛에 대한 탐욕이 깃들어 있었지만 하연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서클렛을 사제라는 신분의 증표 그 이상으로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서슴없이 서클렛을 빼 벗어 던지려고 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서클렛은 하연의 이마에서 벗겨지지 않았다. 그것을 알아챈 프레인도 벗겨보려고 했지만 서클렛은 마치 하연의 몸의 일부인 양 벗겨지지 않았다. "에잇!" 그러나 프레인은 그 서클렛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단지 서클렛에 손을 댄 것만으로도 그의 손안에서 느껴지는 무한한 신성력을 어찌 포기할 수 있겠는가? 탐욕에 일그러진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상대의 뒤에 마신 카이람이 있다는 것 따위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상대를 죽여서라도 그 신성력을 손에 넣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프레인이 기도주문을 외웠다. "어머니 펠레아의 이름아래 불의 마신 카이람의 이름으로 그 분의 성스러운 축복을 내려주소서. 홀리 레이!" 순간 빛의 다발들이 프레인의 몸 주위에서 소용돌이치더니 빛의 화살이 되어 하연을 공격했다. 갑작스런 공격에 하연은 멍하니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연!- 갈루마조차 당황하고 말았다. 설마 빛의 사제가 그것도 카이람을 받드는 사제가 하연을 공격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일까? 하연의 향한 공격이 마치 유리에 그 빛이 반사되듯 반사되어 프레인의 몸을 꿰뚫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퍼버버벅! 가슴에 수많은 구멍이 뚫린 채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는 프레인의 육신을 보면서 하연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프레인이 자신을 공격한 것이고 왜 자신을 공격했는데 도리어 그가 죽어버린 것인지. -도대체 어떻게 굴러가는 상황이야!- 갈루마 또한 어떻게 된 일이지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때 이미 돌아가 버린 줄 알았던 카이람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카이람!" 카이람은 무표정한 얼굴로 죽어버린 프레인을 내려다보더니 그의 시체를 발로 퍽! 걷어차며 중얼거렸다. [설마 했지만 진짜로 하연을 죽이려 들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연이 묻자 카이람은 그런 하연을 물끄러미 보더니 중얼거렸다. [멍청이!] "뭐야?" [상대가 자신을 죽이려 드는데 그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멍하니 있는 녀석한테 그럼 뭐라고 말할까? 토끼도 상대가 살기를 보이면 도망갈 생각은 한다. 그런데 넌 뭐냐?] "그야...... 생각도 못했으니까." 변명하듯 중얼거리는 하연을 보며 카이람은 프레인의 눈치가 심상치 않아 돌아가지 않고 모습을 감춘 채 숨어서 지켜본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연은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이 세계의 체계를 조합해 마나를 유동시키는 마법은 듣지 않지만 신성력은 달랐다. 신의 의지를 빌려서 펼치는 마법이라고 해서 보통 신성마법이라고 불리지만 그것은 마법과는 다른 힘이었다. 마법으로 저주를 풀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인 것이다. 즉 그것은 신성력으로 공격당하면 하연이라도 죽게 된다는 뜻이다. 때문에 하연에게 서클렛을 만들어 주었을 때 서클렛에 신성력이 접근하면 반사되어 퉁겨져 나가도록 의지를 실어두었으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자신이 아닌 다른 물, 땅, 바람의 신들의 신성력에 한해서였다. 그것은 모두 하연이 물의 사제로부터 신성력을 받아 병을 치료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는데 설마 그 헛점을 파고들어 자신을 받드는 사제들이 하연을 공격할 줄은 생각도 못했기에 카이람도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연을 야단치는 것으로 마음을 가라앉힌 카이람은 퉁명스럽게 하연에게 말했다. [네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줄 테니 머리 속에 그 장소를 떠올려 봐라!] 무의식중에 머리 속에 현자의 안식처를 떠올린 하연은 눈을 한번 깜빡 하는 사이에 현자의 안식처로 돌아와 있는 자신을 깨닫자 작은 탄성을 터트렸다. 그런 하연의 음성을 들으며 갈루마는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한 어떤 생각에 골머리를 굴리고 있었으나 하연이 돌아온 것을 보고 우르르 몰려드는 동료들의 모습에 곧 그 생각의 꼬리를 놓아버리고 말았다. 한편 죽어있는 프레인 사제를 발견한 고로도 신전의 사제들은 그것을 하연이 벌인 살인행위로 단정했다. 하연이 성전으로 들어간 뒤 프레인 사제만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있었고 하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즉시 통신 구를 이용해 빛의 대신전인 하나브로 연락을 보냈다. 전언을 보낸 사제의 눈빛은 섬뜩할 만큼 차갑게 빛을 발했다. '이로서 엘 노아라 해도 더 이상 빛과 어둠의 전쟁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은 오늘 올릴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채문희님의 예쁜 카드매일을 받고 기분이 너무 좋아져서^^ 연참에 들어갑니다!!! 바람의 달이 끝자락에 이르러 어느덧 대륙에는 추운 땅의 달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스마인 가만큼은 벌써 불의 달이 다가온 것처럼 따뜻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것은 모두 네이브의 동생인 차크가 저주에서 풀려나 건강을 되찾았기 때문이었다. 네이브는 드물게도 매일같이 대륙 곳곳에서 올라오는 산더미 같은 서류들을 모두 물리치고 차크와 함께 시간을 보냈고 아스탄도 하루도 쉬지 않고 하던 마법수련마저 거르고 차크에게 저택의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오랫동안 아팠던 몸이라 많은 시간을 움직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용케 걸어 다니는 차크의 모습을 보며 네이브와 아스탄은 애써 눈물을 감추어야만 했다. 차크가 마법에 관심을 보이자 아스탄은 벌써부터 차크를 대마법사로 만들겠다며 흥분해 있었다. 오후에 그들이 느긋하게 차크의 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글렌이 복잡한 얼굴로 들어오며 말했다. "네이브, 잠시 나 좀 봐!" "무슨 일이야? 중요한 일 아니면 나중으로 미루라고." 얼굴을 찌푸리며 하는 네이브의 말에 글렌이 차크와 아스탄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네이브에게 말했다. "미안! 급한 일이야. 잠시만." 어쩔 수 없이 일어난 네이브는 차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고는 글렌을 따라 나갔다. 복도를 쭉 따라 서재로 들어가자 글렌이 문을 잠그고 긴장한 얼굴로 네이브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 고도로 신전에서 불의 고위사제인 프레인 블로리쉬 사제가 신성 마법에 의해 죽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어. 범인은 어둠의 사제인 하연으로 곧 빛의 신전에서 그녀를 처단하기 위해 빛의 성기사단을 파견할 조짐이야." 순간 네이브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분명 글렌이 전한 소식은 네이브에게는 더할 수 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바로 그가 그토록 원하던 빛과 어둠의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 기회를 빌어 빛의 편에 서서 그가 증오하는 어둠의 세력을 모조리 쓸어내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속에 하연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동생의 저주를 풀어준 그녀가. 글렌은 조심스럽게 네이브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그가 알기로 네이브가 하연을 대하는 태도는 특별했던 것이다. 동생의 저주를 풀어주기 이전부터. "어떻게 할까?" 망설임 끝에 네이브는 결단을 내렸다. "내버려 둬!" "하지만......" '그러면 넌 그녀를 잃게 될지도 몰라!' 그러나 네이브는 글렌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다는 듯 차갑게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복수가 우선이다!" 글렌은 순간 입을 다물고 말았다. 네이브가 동생의 저주를 푸는 일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매달린 일이 바로 복수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글렌이 나간 뒤로도 한참을 서재에서 혼자 앉아 있던 네이브는 이윽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차크의 방으로 갔다. 늘 기침소리밖에 들려주지 않던 동생의 말소리가 문밖에 들려왔다. "처음엔 어둠의 사신이 들어온 줄 알았어요, 아스탄 아저씨." "어둠의 사신이요?" "네. 검은머리에 검은 눈. 게다가 검은 로브를 입고 그 창백한 피부하며 아저씨가 예기해준 어둠의 사신하고 똑 같았으니까요." "하하하! 그렇군요." "하지만 곧 아니란 걸 알았어요." "아니, 어떻게요?" "내가 기침을 하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는걸요." "......그랬습니까?" "네. 그리고요? 내가 죽으면 형이 울어서 죽을 수 없다고 하니까요. 나보다 더 아픈 표정으로 날 쳐다봤어요." "그렇군요." "그 누나가 내 병 고쳐 준거잖아요? 그래서 고맙다고 말하려고요. 나, 누나 방에 갔었거든요?" "아니, 언제 말입니까?" 아직 다 낫지도 않은 아이가 자신이 보지 않는 사이에 돌아다녔다는 사실에 놀란 아스탄이 추궁하듯 묻자 차크가 나직한 목소리로 미안한 듯 중얼거렸다. "음...... 새벽에요. 하지만 나 아프지 않았어요. 기침도 하지 않았고요." "그래도 아직은 함부로 돌아다녀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함부로 다른 사람이 자고 있을 때 방에 들어가는 것도 실례고요." "하지만 누나는 자고 있지 않았는 걸요." "네?" "자고 있지 않았어요. 창문틀에 기대앉아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고요." "그랬습니까? ......왜 안자고 있는지 물어 보셨습니까?" 의아한 듯한 아스탄의 목소리 못지 않게 네이브도 왜 그녀가 새벽까지 자지 않고 있었는지 궁금해서 귀를 기울였다. "네. 누나는 잠이 오지 않는데요. 자는 걸 아주 좋아했는데 요즘에는 잠들어 있는 시간이 아까워서 잠을 못 자겠데요." 무슨 말인지 아스탄과 네이브가 영문을 알 수 없어서 고민하고 있는데 차크가 계속 말했다. "그리고 누나가요, 이상한 말을 했어요." "무슨 말인데요?" "내가 병을 낫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하니까. 오히려 자신이 고맙다고 했어요." "네?" "내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니까. 누나가 내가 병이 나아서 행복해 하는 사람들, 형이나 아스탄 아저씨 같은 사람들을 보니까 자신도 행복하대요. 그리고 누나가요. 저한테 노래도 불러줬어요." "노래요?" "네. 저를 침대에 눕혀 주고는요. 누나를 절 갓난아기인줄 아는지 절 토닥거리면서 노래를 불러줬어요. 하지만 기분은 아주 좋았어요. 나, 그 노래 다 기억해요. 불러볼까요?" "네, 저도 들어보고 싶군요." "흠! 헤헤, 누나처럼 예쁘게는 못 부르니까 이해하고 들어줘요, 아스탄 아저씨." "네, 어서 불러보기나 하세요." "흠! 잘 자라 우리 아가. 앞뜰과 뒷동산에 새들도 아가양도 다들 자는데 달님은 영창으로 은구슬 금구슬을 보내주는 이 한밤. 잘 자라 우리 아가. 잘 자거라." 차크의 노래 소리는 낮고 부드럽게 울러 퍼졌다. 단순한 가사였지만 그들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그 아름다운 곡은 마치 치유와 자비의 물의 여신인 엘레나의 손길처럼 부드럽게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듯 했다. 네이브는 다시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지금은 그 누구도 보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서재로 돌아온 네이브는 넋 놓고 책상 위에 쌓여있는 서류더미들을 보았다. 그러다 문뜩 하연의 말을 떠올랐다. "네이브, 그 동안 고생이 많았겠군요. 어쩐지 사람을 어린애 보듯 한다고 생각했더니...... 젊은 나이에 뼈 빠지게 일만했으니 마음이 쉽게 늙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녀의 말대로 내가 늙은 것일까? 복수가 허무하게 느껴지다니......" 그러나 피살되어 처참한 시신으로 저택의 바닥에 쓰러져 있던 부모님들과 저주에 걸려 울어대던 어린 차크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네이브의 귓가에서는 떠나지 않고 있었다. 으스러지도록 책상의 귀퉁이를 움켜쥔 네이브는 중얼거렸다. "아니, 절대 복수는 포기할 수 없어! 설사 내 영혼이 사라진다고 해도." 그때였다. 누군가 서재 안으로 들어서더니 네이브에게 달려들었다. "네이!" 익숙한 향기가 느껴지고 그 주인이 누군지 알았지만 네이브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쌓여 있는 서류 중 제일 위에 서류를 들어 읽기 시작했다. 그러자 가늘고 긴 하얀 손이 다가와 네이브가 들고 있던 서류를 낚아채더니 보랏빛 눈동자의 아름다운 얼굴을 들이밀었다. "네이, 저 좀 봐주세요. 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 줄 아세요? 벌써 세 달이 넘었다고요. 그 동안 저 보고싶지 않았어요?" 네이브는 멍하니 그런 휠리아를 쳐다보았다. 아니 정확히 그녀가 입고 있는 검은 로브를 보고 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네이?" 그런 네이브를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휠리아가 보았다. 한번도 이렇듯 무방비 해 보이기까지 하는 네이브를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자 언제 그랬냐는 듯 네이브는 차가운 표정으로 휠리아에게 말했다. "비켜주십시오. 오늘 내로 이 서류들을 다 처리해야 합니다." "하지만 네이브?"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네이브를 보며 휠리아는 작게 한숨을 쉬며 서재를 나왔다. 그리고 네이브의 오른팔인 글렌을 찾아갔다. 글렌은 저택 안에 네이브가 따로 마련해준 자신의 사무실에서 사무를 보고 있다가 휠리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맞았다. "휠리아님, 언제 오셨습니까? 그래, 무슨 단서라도 발견하셨습니까?" 휠리아는 대륙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피의 반쪽인 엘프들의 땅을 찾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하프엘프라는 이유로 자신을 버리고 엘프들의 땅으로 떠나버린 어머니를.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전혀요. 그런데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요?" "네?" "네이가 평소랑 다른 것 같아서요." "아!" 글렌은 아마도 하연의 일 때문이라고 짐작했지만 그것을 휠리아에게 곧이곧대로 예기할 수가 없어서 웃으며 말했다. "차크의 저주가 풀려서 마음이 풀린 모양입니다. 그런데 급히 처리할 일이 많아 동생과 같이 못 있어 주게 되니 그게 섭섭한 모양이지요." "네? 아니, 어떻게?" 휠리아는 놀라서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 자신도 차크의 병을 고쳐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었다. 어쩌면 그러면 고마운 마음 때문이라도 네이브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줄까 해서 말이다. 그러나 신성력에도 차이가 있어서 차크의 저주를 풀려면 불의 그것도 고위급의 어둠의 불의 사제를 찾아야 하는데 그런 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 자신도 거의 포기상태에 있었는데 병을 고치다니...... 글렌은 되도록 하연의 예기는 피하고 싶었지만 강한 호기심을 들어내는 휠리아의 표정에 어쩔 수 없이 하연에 대해 예기를 해주었다. 지극히 사무적인 어투로. 그러나 여자의 직감인 것일까? 휠리아는 네이브가 하연에게 마음이 기울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듯 표정을 차갑게 굳히며 물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지금 어디 갔지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휠리아님. 그녀는 모험을 떠났으니까요. 다시는 네이브와 만날 일이 없을 겁니다. 그리고 네이브도 지금 그녀가 위험에 처해 있는데 그냥 방관하라고 하는 것을 보면 별 다른 마음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럴까요?" 휠리아는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는 듯 글렌의 말을 반가운 표정으로 듣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단지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 그녀가 마신 소환사라면 빛의 기사단 정도에 어떻게 될 리는 없을 것이고 네이브는 그런 그녀를 믿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던 것이다. 어두운 표정으로 글렌의 사무실을 나와 휠리아는 정원을 걸었다. 하프엘프이긴 했지만 엘프의 피가 섞여서 인지 그녀는 숲을 좋아했다. 나무와 풀들 사이를 걸으면 언제나 마음이 차분해지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아무런 생각도 없이 거닐고 있을 때였다. 저택 안으로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스며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네이브가 그 동안 거금을 들여 산 어쎈신들 중 하나이리라. 그리고 그 어쎈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휠리아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바로 자신이 속한 어둠의 사제들을 멸하는 것이 그 최종 목표라는 것을. 그리고 그녀자신조차 그 계획 속에서 제외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녀는 그 사실을 아는 척도 막을 수도 없었다. 그만큼 그녀는 그에게 빠져 있었던 것이다. 저택 안으로 들어갔던 어쎈신이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고 휠리아는 네이브를 다시 보기 위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네이브가 서재에서 나와 어디론가 가는 것을 보았다. 그를 놀라게 해 줄 생각으로 몰래 그의 뒤를 따라가던 휠리아는 네이브가 차크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밖에서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엿들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귀에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로서는 충격적인. 차크가 말했다. "형, 나 그 누나 또 보고 싶어. 누나한테 놀러오라고 하면 안돼?" "미안, 차크. 지금은 안돼. 그 누나 아주 멀리 여행 떠났거든. 네가 크면, 형만큼 크면...... 그 때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에이, 어디로 갔는데?" "글세, 형도 잘 모르겠다." "......형도 누나 보고 싶어?" "......그래. 보고 싶구나." 휠리아는 순간 머리 속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단순히 보고 싶다는 말이었지만 애초에 그 어떤 여자도 그의 마음의 벽을 허물지는 못하리라고 확신하고 있던 그녀로서는 너무도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은 그의 벽이 조금은 허물어졌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 그녀의 마음속에 하연을 향한 살기가 매섭게 휘몰아쳤다. '내가 갖지 못하는 것이라면 남에게도 줄 수 없어!' 헤헤, 드디어 네이브가 하연의 하렘에 가입한 것 같지요? ^^ 너무 많은 케릭들이 하연에게 빠져서 캐릭의 이름들을 잊어버릴 정도라는 분들이 많이 계시지만 그래도 하연에게 빠지는 케릭들은 계속 늘어갈 것이고. 하연의 인기는 쭈욱 계속 될 것입니다. 이상 작가 관측예보였습니다.^^ 하연으로부터 신전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들은 일행들은 안색이 어두워지고 말았다. 고위사제인 프레인 사제가 죽었다니...... 분명 하연이 죽이지는 않았지만 그곳의 다른 사제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담이 말했다. "그들이 그 프레인 사제를 하연이 죽였다고 생각하는 이상 빛의 신전에서 성기사단을 파견할 것입니다." 미루엘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하연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일을 처리하러가서는 덧붙여 가지고 오다니. 안절부절 하는 일행들과는 다르게 하연은 마치 남의 일인 양 태평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뭐. 어디 멀리 도망이나 갈 수밖에." "어디로요?" 미루엘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이 혼 대륙 어디에 신전의 세력을 피할 곳이 있다는 말인가? 나바린의 최극단으로 얼음의 마왕 데바가 산다는 얼음의 궁전과 맞닿아 있는 랜수아에도 그 열 악하다는 사막의 나라 바칸의 중심부에도 신전이 들어서 있는 것이 현 대륙의 실정이었다. 그 런데 어디로 도망간다는 말인가? 그 때 사담이 말했다. "선택은 두 가지입니다." "두 가지 씩이나?" 반가운 표정으로 리밍스가 묻자 사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첫 번째는 하연이 지금 어둠의 신전 소속이니 어둠의 신전 편에 서서 빛의 신전 세력을 모두 쓸어버리는 겁니다." 하연은 즉각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무의미한 전쟁으로 소모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두번째는 하연의 말처럼 도망치는 거지요. 신전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요." 미루엘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런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리밍스도 동의했다. "맞는 말이야. 우리 드워프의 숲에도 빛의 사제가 있는데......" "있습니다." "네?" 사담의 단호한 말에 일행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러자 검은머리로 반쯤 얼굴을 가린 사담의 얼굴이 웃는 것처럼 보인 건 단순한 그들의 착각이었을까? "하연이 제의한 것처럼 혼 슈이센 왕립학교로 들어가는 겁니다." "뭐라고요?" 카리스마저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미루엘이 무언가 알겠다는 듯 손바닥을 내려쳤다. "그렇군요. 혼 슈이센 왕립학교는 치외법권지역이었지요." "치외 법권지역? 왕립학교가?" 의아해서 하연이 묻자 미루엘이 자세하게 설명했다. "원래는 슈이센 왕실에서 자금을 대고 만든 학교였지만 현자 제베르타를 초청 그 운영을 맡기 자 각 나라의 귀족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왕실에서 그 학교를 포기하고 치외법권지역으로 설정 했지요. 신전에서도 지금의 신성국가 그랑디아의 설립에 공헌한 현자 제베르타를 존중하는 뜻 에서 그리고 자유로운 학문활동을 위해서 혼 슈이센 왕립학교에서는 그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 겠다고 공포했었습니다." 일행들은 감탄한 표정으로 사담을 보았고 그들은 당장 내일 아침 일찍 혼 슈이센 왕립학교로 들어가기로 결정을 했다. 하연 일행이 차를 마시며 기다리는 가운데 갈색 머리로 염색을 한 쟈스란이 드레스 차림을 한 채 붉어진 얼굴로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지 않아도 여자 같던 쟈스란이 아니던가? 드레스까지 입혀놓자 그 누구도 쟈스란이 남자라고는 의심하지 못할 모습이었다. 창피해하는 쟈스란과는 달리 하연은 감탄하며 말했다. "잘 어울리는데? 역시 난 머리가 좋아. 슈마가 노리는 것은 남자인 쟈스란이지 여자인 쟈스란 이 아니니까. 게다가 머리까지 갈색으로 염색했으니 분명 찾아내지 못할 거야." 어색한 듯 갈색머리를 만지는 쟈스란을 보며 미루엘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매사에 몸조심하십시오." 그리고는 리밍스와 같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럼, 저희들은 용병길드로 가보겠습니다." 하연은 아쉬운 표정으로 그들을 먼저 떠나 보냈다. 드워프인 리밍스는 인간의 학교에 들어갈 수가 없었고 미루엘은 밖의 정보를 안에 있는 그들에 게 수시로 연락해주기 위해서라도 밖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사담의 주선으로 그 들이 용병길드에 머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그냥 현자의 안식처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신전에서 그들이 하연의 일행임 의 알고 그녀를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인질로 삼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미루엘과 리밍스와 헤어진 나머지 하연 일행들은 혼 슈이센 왕립학교로 갔다. 혼 슈이센 왕립학교장인 리켈만 트웰스는 그렇지 않아도 학생 수에 비해 선생 수가 모자라고 얼마 전에는 상급 마법부의 선생이 다쳐서 누워 있는 관계로 골치가 아팠었는데 갑자기 선생이 두명이나 그것도 실력이 굉장한 자가 둘이나 지원해 오자 하연과 쟈스란이 평민이라는 것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학생으로서 받아들여 주었다. 카리스와 사담은 물론 각기 상급의 마법부와 검술부의 선생을 맡았고 쟈스란은 평소부터 마법 을 배우고 싶었다며 기초 마법부에 들었다. 하연은 애초에 왕립학교에 들어오려던 이유가 브리 켄에 대해 알아보려는 것이었던 만큼 브리켄이 들어있던 중급의 전략부를 택했다. 중급의 전략부는 2층에 있었는데 학생 수는 대략 열 명 정도였고 선생은 크리온 빌르라는 중년 학자였다. 하연이 전략부로 들어서자 모든 시선들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학교는 크지만 학생들의 수는 겨 우 이백명이 조금 넘을 뿐이기 때문에 학생들끼리 서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처음 보는 여학생이 들어오자 당연히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연은 그런 학생들에게 싱긋이 웃어주고 교장이 발급해 준 수강신청서를 건내 주었다. 그걸 가볍게 훑어본 크리온 빌르는 하연의 옷차림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의외라는 눈빛으로 물 어보았다. "어둠의 사제인가?" "네." 그러자 잠시 웅성거리는 소리가 학생들 사이에서 들려왔으나 크리온 빌르 선생이 말을 꺼내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흠! 자네의 개인 신앙생활에 대해서 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자신의 신앙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일은 없었으면 하네." "물론이죠." 단호한 하연의 대답에 선생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창가 쪽 비어있는 자리에 앉은 하연은 학생들을 쭉 돌아보았다. 모두 귀족의 자제들인지 단정 한 생김새와 조금은 화려해 보이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모두 하연보다 어려 보이면서도 어 린아이답지 않은 삶에 대한 지루함과 따분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 특유의 오 만한 표정으로 선생의 말을 듣고 있었는데 선생도 그다지 가르치는 일에 열성을 보이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 모습들은 오만한 그들의 태도를 빼고는 일상적으로 하연이 봐온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왠 지 참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멋진 세상을 살아가면서 저런 태도와 표정이라니...... 하연은 벌떡 일어나서 크리온 빌르 선생에게 물었다.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뭔가?" "솔직히 전 전략에 대해선 잘 모르고 흥미도 없었어요. 그런 제가 이 전략부에 든 건 어떤 사 람의 한 마디 때문이었습니다." 모두 호기심을 갖고 쳐다보는 가운데 하연은 한자 한자 분명하게 말했다. "최고의 전략이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순간 크리온 빌르 선생은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으로 하연을 쳐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 다. "그,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군가?" '누구긴 즉석에서 지어낸 말이니 이 하연님이 하신 말씀이지.' 그러나 자신이 한 말이라고 하면 누가 알아주겠는가? 이런 말은 어디까지나 명성 높은 사람의 말이 한 말이라고 둘러대야 알아주는 법. "대 현자 갈루마님의 말씀이라고 들었습니다." 순간 와! 감탄 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내가 언제? 난 그런 소리 한적 없어! 난 현자지만 전략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항의도 들렸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하연의 머리 속에서일 뿐. 크리온 빌르 선생이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질문이란 게 무엇인가?" "현 대륙에 그런 전략가가 있습니까?"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기며 생각에 잠겨있던 크리온 빌르 선생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현재로서는 없는 것 같군. 예전에는 한 사람 있었지만." "누구입니까?" 은빛머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진하고 금빛 머리라고 하기엔 좀 빛이 바래 보이는 머리를 한 잘 생긴 소년이 호기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너희들도 한번쯤은 들어 봤을 거다. 나단 하인베르크라고." 그러자 학생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물론 그들은 나단 하인베르크에 대해서 들어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알고 있는 그는 썩 괜찮은 전략가이긴 했지만 최고의 전략가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의 마음 을 이해한다는 듯 크리온 빌르 선생이 말했다. "그가 뛰어난 전략가이면서도 그 이름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가 자신의 전략을 펼칠 수 있었던 전투가 모두 소규모의 전투뿐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진 거라고는 귀족작위밖에 없던 그의 집안 환경과 그 시대의 배경으로서는 아무리 뛰어난 전략가라도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지."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단 하인베르크가 살던 시대는 제 2차 빛과 어둠의 전쟁이 끝나고 신성국가인 그랑디아가 그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한 때로 소소한 전투가 빈번하게 일어나긴 했지만 국가와 국가간의 큰 싸 움은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각 국에서는 막 전쟁이 끝난 참이라 다른 나라와의 전쟁보다 는 국내의 안정을 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뛰어난 전략가라도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세세한 이 세계의 역사까지는 몰랐지만 나단 하인베르크가 혼 최고의 전략가임을 알아낸 하연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전 나단 하인베르크를 능가하는 전략가가 되고 싶습니다. 그것도 최단시간안에요. 어떻게 하면 가능하지요?" 선생도 학생들도 모두 놀란 눈으로 하연을 쳐다보았다. 최단시간안에 크리온 빌르 선생이 인정한 최고의 전략가인 나단 하인베르크를 능가하고 싶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말한다는 사실이 그들로서는 무엇보다 놀 라웠던 것이다. 자신을 말을 이루지 못했을 때의 창피함을 모르는 것일까? "나단 하인베르크를?" 되묻는 선생의 말에도 하연의 대답은 확고했다. "네. 그가 최고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전 그를 넘어 최고가 되고 싶으니까 그를 제 목표로 하겠습니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설령 이루지 못할지라도 전 목표는 높게 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높은 목표를 바라보는 사 람만이 크게 되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작은 산을 올랐을 때 보다는 높은 산을 올랐을 때 그 성 취감이 더 크지 않을까요?" 순간 묘한 정적이 장내에 감돌았다. 아르센 그라시엘은 슈이센의 황태자로서 보장된 앞날을 지니고 있었지만 왕으로서의 자질을 갈 고 닦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결코 어리석은 왕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어떤 왕이 되겠다는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하연 의 말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그렇다면 난 성왕 엘루아덴을 목표로 하겠다." 혼 대륙 역사상 가장 현명한 왕이었던 그래서 성왕이라고 불린 엘루아덴을 자신의 목표로 삼겠 다고 아르센이 선언하자 그의 호위기사로 왕립학교에 까지 따라 들어온 유트 뤼베아가 뒤를 이 어 말했다. "그럼. 전 드래곤 슬레이어인 슈바 크산티에를 그 목표로 삼겠습니다." 다른 학생들도 너도나도 각 부분에서 최고의 인물들을 목표로 삼을 것을 선언하자 아르센은 하 연을 이상한 여자라는 듯 쳐다보았다. 그들 또한 다른 스승들이나 사람들한테 하연에게서 들은 말과 비슷한 말을 이미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말은 기억도 나지 않는 반면 하연의 말 은 이상할 정도로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이다. 목표를 갖고 생기로 반짝이는 학생들의 눈을 보며 하연은 역시 아이들은 이래야 해 하는 듯 흡 족한 표정을 지었다. 크리온 빌르는 그런 학생들과 하연의 표정을 번갈아 보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전략 가가 최고의 전략가라면 하연이야말로 최고의 전략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문뜩 떠올렸다. 그럴 정도로 학생들의 태도는 적극적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이라 길게 올립니다.^^ 아침에 올리려니 좀 힘드네요. 제가 아침에 잠이 많아서...... 하품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유지가, 총총.. 수업이 끝나고 하연이 전략부를 나서는데 두 학생 아르센 그라시엘과 그의 호위기사인 유트 뤼베아가 그녀를 불러 세우며 말했다. "레이디 하연, 잠깐 실례하겠소." 그 말에 하연은 닭털이 날리는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눈에 비친 아르센 그라시엘과 유트 뤼베아는 아직 어린 소년들이었기 때문이다. 백금발의 에매랄드빛 눈동자를 한 아르센 그라시엘은 십 오륙세 정도로 보이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푸른 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한 유트 뤼베아는 18세 정도로 보이는데 그런 소년들이 다 큰 성인처럼 말하는 점잖을 빼고 말하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무슨 일이십니까......?" 마땅히 부를 호칭이 생각나지 않아 얼버무리자 유트 뤼베아가 나서며 소개했다. "이 분은 슈이센의 황태자이신 아르센 그라시엘 전하이시오." "......황태자님."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말을 끝내며 하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아르센을 쳐다보았다. 아르센은 좀 당황했다. 누구나 심지어 이 학교의 교장인 리켈만도 그의 신분을 알자 경의를 표해왔는데 눈앞의 이 여인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일 뿐 자신을 향해 경의를 표하는 기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무례한......!" 유트 뤼베아가 그런 하연을 향해 호통을 치려하자 아르센이 손을 저어 만류한 뒤 하연에게 물었다. "우리와 점심식사를 함께 하지 않겠소? 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니 부담 갖지 마시오." 잠시 생각해 본 하연이 물었다. "제 동생이 함께 가도 괜찮다면요." "동생? 아, 물론이오. 함께 오도록 하시오."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걸어 내려가는 하연의 뒷모습을 보며 아르센은 유트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평범한 여인은 아니듯 싶습니다. 평민으로 가장을 하고는 있지만 전하를 대하는 말투며 태도를 볼 때 분명 신분이 높은 집안의 영양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검은머리와 검은 눈도 예사롭지 않고 말이야! 혹시 바칸의 왕족이 아닐까? 바칸의 여인들은 밖으로 나갈 때 몸매와 얼굴을 들어내지 않게 로브를 깊게 눌러쓴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군요." "아마, 틀림없을 거야. 자, 우리도 가 보자고. 레이디를 기다리게 하는 것은 남자의 도리가 아니니까." "네, 전하!" 하연이 쟈스란과 식당으로 내려가자 아르센과 유트가 먼저 자리를 맡아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하연은 방긋 웃으면서 말하고는 그들에게 쟈스란을 소개했다. "이 쪽은 제 여동생은 쟈스란이에요. 쟈스란, 이 분은 슈이센의 아르센 그라시엘 전하이시고 이쪽은......" 유트의 이름을 모르는 하연이 말끝을 흐리자 유트가 직접 자신을 소개했다. "유트 뤼베아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레이디." 솔직히 쟈스란은 다른 때라면 몰라도 하연의 곁에 있을 때 레이디 취급을 받아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억지로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자리에 앉으면서 아르센의 시선은 시종 쟈스란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쟈스란의 부끄러운 듯 고개를 들지 못하는 모습과 안절부절 하는 모습이 그가 여태껏 만났던 여자들과는 달라서 호감이 생겼던 것이다. 그런데 그 시선의 의미를 오해한 쟈스란은 아르센이 자꾸 쳐다보자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을 들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더욱 안절부절못하는 것이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하연은 피식 피식 웃음이 세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어느새 다가와 주문을 기다리고 있는 작은 소녀에게 적당히 음식을 주문했다. 식사를 하면서 하연은 문뜩 생각났다는 듯 아르센에게 물었다. "우연히 소문을 들었는데 전략부에서 한 학생이 악마를 소환해 살인을 저지르다 처벌되었다는데 사실인가요?" 아르센은 순간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불쾌한 듯 말했다. "그 말은 별로 하고 싶지 않소." "아는 학생이었나요?" 노골적으로 불쾌한 시선을 보내는 대도 뻔뻔스럽게 계속 물어보는 하연에게 어이없어 하는 아르센을 보며 유트가 대신 말했다. "실은 그 학생은 브리켄이라는 학생으로 전략이 특출한 재능이 있어서 인재를 좋아하시는 전하께서 관심을 갖고 대했는데 일이 그렇게 되어서 속상해서 그러시는 겁니다, 레이디." 하연은 이번에는 유트에게 물었다. "그 일을 좀 자세하게 말해 주시겠어요?" "다 아는 예깁니다만...... 몇 달 전부터 이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하나둘씩 살해되는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모두 심장을 빼앗긴 채로 말입니다. 그러나 누구의 소행인지 알아낼 수가 없어 학생부에서도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다행이 상급 마법부의 선생이신 아켄 드레이드님이 마족의 퍼밀리어와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브리켄을 발견하고 그를 잡으려는데 그가 반항하자 즉석에서 처벌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족의 퍼밀리어?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손가락으로 지팡이를 두드리자 갈루마가 대답해 주었다. -보통 마족의 심부름꾼이라고 불리는 존재로 계약에 의해 맺어지는데 그 능력은 극히 미미하다고 들었다.- 하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그 브리켄이라는 학생이 마족과 계약을 했다는 건 아켄 드레이드라는 마법선생의 증언밖에는 없는 건가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전하께서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럼. 그 밖에 다른 증거가 있었단 말이군요?" 유트는 정말 이상한 레이디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보통 레이디들은 이런 화제를 두려워하며 피하기 마련으로 이렇듯 자세히 캐묻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궁금해하니 대답해 주지 않을 수도 없어 유트는 아는 대로 설명해주었다. "네. 무엇보다도 아켄 드레이드님이 브리켄과 계약을 맺은 마족의 공격을 받아 살이 썩어 들어가는 것을 그 증거로 들 수 있지요. 다행이 아켄 드레이드님의 마법 실력이 뛰어나고 브리켄과 계약의 맺은 마족의 힘이 약해서 그 정도로 끝났지 그렇지 않았다면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살이 썩어 간다면 그건 마족의 공격에 당한 상처가 확실해. 인간의 마법으로는 그런 상처가 날 수는 없으니까.- 그 말에 하연은 브리켄의 무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실 되고 정직하게만 보이던 그 눈이 사실은 살인자의 눈이었다니...... 하긴 용병왕으로서 수많은 사람을 죽인 사담의 눈 또한 그 누구보다도 맑고 깨끗했지 않은가? 하연이 자신의 사람 보는 눈을 의심하며 고민하고 있는데 아르센이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째서 최단시간 내에 나단 하인베르크를 능가하는 전략가가 되려는지 물어보아도 되겠소?" 하연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이기고 싶은 상대가 있어서요." "도대체 어떤 자이기에 나단 하인베르크를 능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오?" 놀라서 물어보는 아르센과 유트 그리고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쟈스란을 보며 하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자신이오." "뭐......?" "전 좀 게으른 인간이라서 작은 일을 성취하면 거기에 만족하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아요. 그러니 저의 가장 큰 적은 제 자신이 아니겠어요? 전 제 자신을 이기고 싶어요." 비록 그녀가 나단 하인베르크를 뛰어 넘는 전략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 건 나태함에 빠져 있는 듯한 학생들을 자극시키려는 의도가 컸지만 자기 자신을 이기고 싶은 것도 진심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갖고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이기고 싶었다. 이제는 거의 공포와 두려움에 질식되어 차츰 그 감정에 익숙해져서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할 때가 많았지만 그 대신 차츰 늘어만 가는 삶에 대한 강렬한 욕구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녀는 성자는 아니었지만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비록 살아있는 느낌이 이렇듯 정신을 몽롱하게 취하게 할 정도로 달콤하고 황홀한 느낌일지라도 그것을 갈구하다 비참하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작고 볼품없을 지라도 화사하게 피었다 지는 이 세계에서 처음 본 다이아스 꽃처럼. 그러면서 아련한 눈빛으로 생각에 잠겨 있는 하연을 아르센과 유트는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요즘 하연이 너무 오래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그래서 죽여볼까 생각중인데 다시 살릴방법이 안떠오르는군요. 뭐, 좋은 방법 없을까요? 식사가 끝나고 그들과 헤어진 하연은 쟈스란과 함께 이곳저곳 학교 안을 거닐다가 도서관으로 향하게 되었다. 책을 좋아하긴 했지만 이곳의 글을 읽지 못하는 하연으로서는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라 가고 싶지 않았지만 쟈스란이 꼭 봐야할 책이 있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가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도서관 안에 들어선 하연의 얼굴은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넓은 운동장 같은 넓이의 도서관 안에 빽빽이 들어차 있는 책장들과 책들은 그렇다 치고 이 세 계의 책들은 모두 두루말이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눈에 자신의 세계에서와 비슷한 책 들이 눈에 들어 왔던 것이다. 카리스의 레어에서도 트리엔시라의 지하 왕국에서 그녀가 본 책들은 모두 두루말이로 되어 있 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가까이에 있는 책 한 권을 빼어들고 펼쳐 본 그녀는 직접 쓴 듯한 이상한 부호 와 지렁이 같은 글씨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아직 인쇄기술은 발달해 있지 않은 모양이네. 대단해 이 많은 책들을 일일이 직접 쓰 다니......" -무슨 말이냐? 누가 그런걸 일일이 손으로 쓴다는 거야? 간단히 종이를 수북히 쌓아놓고 카피 마법을 사용하면 되는 것을.- "아! 그런가?" 이 곳에서는 기계가 할 일을 마법이 대신 한다는 것을 떠올리며 하연은 아쉬운 표정으로 수많 은 책들을 둘러보았다. 자신에게 조금만 더 시간이 허락된다면 글을 배워 이곳의 책들을 읽어볼텐데 하고 생각하면서. 쟈스란이 자신이 원하는 책을 찾았는지 들고 읽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하연은 슬쩍 도서관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한참을 걷던 하연은 문뜩 자신이 외진 곳에 이르렀음을 깨닫고 다시 발길을 돌려 돌아가려는데 그녀의 발 밑에 어느새 다가왔는지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갸 르랑 거리며 몸을 비비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 너는!" 본 적이 있는 고양이였다. 저번에 다친 브리켄에게 그들을 인도해준 그 고양이었던 것이다. "야옹! 야옹!" 서글프게 울어대는 고양이를 보며 하연은 연민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네가 브리켄의 고양이었던 모양이구나. 그동안 주인도 없이 어떻게 지냈지? 밥은 먹었니?" 부드럽게 고양이를 쓰다듬던 하연은 고양이를 품에 안고 기숙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호텔을 보는 듯 화려하게 꾸며진 기숙사는 방이 남아돌아서 하연은 아무 방이나 잡아 자신의 방으로 삼을 수 있었다. 고양이를 데리고 방으로 올라가는 하연의 뒷모습을 보며 이상하게 쑤근 거리는 소리가 들렸지 만 하연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먹을 것을 좀 가져다 달라고 일하는 한 여인에게 부탁했을 뿐. 잠시 후, 방으로 먹을 것이 날라져 오자 하연은 그 중 일부를 검은 고양이에게 내밀며 말했다. "널 뭐라고 부를까? 전 주인인 브리켄이 널 뭐라고 불렀는지 모르니까 내가 이름을 하나 지어 주마. 흐음! 그래, 검은 고양이니까 네로가 좋겠다." 고양이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건방진 눈초리를 보내왔지만 하연은 무시하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많이 먹어라, 네로야!"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음식을 먹는 고양이를 보면서 하연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가 네로를 기를 수는 없고 누구한테 주는 게 좋을까? 그래. 쟈스란한테 주자. 이 녀석과 쟈 스란이라니...... 같이 놓으면 한 폭의 그림 같은 광경이 될거야." 순간 네로가 못마땅하다는 고개를 들어 하연을 흘겨보았으나 하연은 눈치채지 못하고 일어나 침대에 가 누웠다. 아직 오후인지라 피곤하지도 잠이 오지도 않았지만 몸이 나른했다. 손을 쭉 뻗어보았다. 이렇게 손을 뻗으면 세상을 모두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이 세계이든 자신의 세계에서든 현실은 언제나 텅 빈 손 뿐인 것이다. 그 때였다. 똑!똑! "하연, 안에 있습니까?" 카리스의 목소리에 하연은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 주었다. "네. 무슨 일이에요?" "아! 역시 여기 계셨군요. 쟈스란이 갑자기 하연이 없어졌다고 걱정을 해서......" 그러다 하연의 뒤쪽에 있는 검은 고양이를 본 카리스의 눈이 번쩍 빛났다. "왠 고양이입니까?" "아무래도 죽은 브리켄이라는 학생의 고양이 같은데 떠돌고 있는 것 같아서 데려왔어요. 쟈스 란에게 줄까해요. 검은 고양이니까 그에게 잘 어울릴 거예요." "......그렇겠군요." 카리스는 왠지 그 검은 고양이가 불쾌하게 느껴져서 하연이 기르겠다고 하면 어떻게 해서든 가 져다 버리려고 했는데 쟈스란에게 준다고 하니 그냥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시간도 그런데 내려가서 동료들이랑 차나 한 잔 하지 않겠습니까?" "좋지요." 일행들과 차도 마시고 이것저것 예기하다 저녁 늦게 방으로 돌아온 하연은 검은 고양이가 보이 지 않자 조금 놀랐으나 창문이 조금 열려 있는 것을 보고 고양이가 잠깐 밖으로 산책이라도 나 갔거니 하고 생각하고는 문을 열어둔 채 그대로 누워서 자 버렸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하연은 대충 세수를 하고는 어느새 돌아와 있는 검은 고양이 네로를 안고는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당 안에는 이미 많은 학생들과 선생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도 복잡해 보이기는커녕 한산 해 보였다. 가끔 달그락거리는 그릇 부딪치는 소리 외에 너무 조용했던 것이다. 무슨 일인가 싶어 보니 쟈스란과 아르센 왕자가 함께 앉아 있었는데 모두 그들의 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하연도 호기심이 일어 그 자리에 서서 어떻게 하면 저들의 대화를 몰래 들어볼 수 있을 까 하 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 그녀의 마음을 짐작한 듯 어느새 다가온 카리스와 사담이 그녀를 식 당의 한 쪽 구석 쟈스란이 보이지 않는 쪽의 테이블로 이끌어 앉히더니 카리스가 그들의 귀에 청각기능이 증폭되도록 마법을 시전 해 주었다. 그러자 아르센과 쟈스란의 말이 바로 옆에서 하는 듯 잘 들려왔다. "......허락해 주십시오, 레이디 쟈스란. 제 파트너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하, 하지만 전......!" 쟈스란은 당황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연이나 카리스, 사담이 나타나 자신을 구해주기 를 바라면서. 그러나 그들은 행여 쟈스란의 눈에 띄일까봐 고개를 푹 숙인 채 속삭이고 있었다. "그런데 축제라니요?" 하연의 물음에 카리스가 말했다. "알고 보니 이 학교는 축제가 많더군요. 매 달이 돌아 올 때마다 축제를 여는데 이번에도 땅이 달이 돌아오는 것을 맞아 며칠간 축제를 연답니다." "호오!" 이 세계의 축제가 관심이 생긴 하연이 넌지시 물었다. "축제라니...... 보통 어떤 일들을 하는데요?" 순간 그녀의 물음에 아직까지 그녀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을 모르는 카리스와 사담은 이상 하다는 얼굴로 잠깐 그녀를 쳐다보았다가 그녀가 원래 좀 특이한 여자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 어 카리스는 작게 웃으며 말해주었다. "뭐 별다를 게 있겠습니까? 낮에는 각가지 행사들이 열립니다. 각 부에서 준비한 장기들을 펼 치는 것으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연극을 하고 그림을 전시하기도 하는 등 갖가지 볼거리 들이 제공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지막날 저녁에는 무도회를 엽니다. 춤도 추고 음식과 술도 마시고...... 그렇게요." "그럼. 우리 중급 전략부에서도 축제를 위해 무언가 준비를 하겠군요." "아마 그럴 겁니다. 저희 부에서는 일루젼 마법으로 신화 속의 신들의 모습을 재현해 보이기로 결정을 보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하연은 사담을 보며 물었다. "상급 검술부에서는 뭘 하기로 했어요?" "검술부 쪽에서는 따로 준비하는 것이 없습니다. 검술대회가 열리는데 거기에 참가하니까요." "검술대회요?" "네. 우승자에게는 축제에 동반할 파트너를 직접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고 들었습니 다." 그 소리에 하연은 아르센과 쟈스란 쪽을 돌아보며 생각해 보았다. 만약 이번 검술대회 우승자 가 쟈스란을 파트너로 지목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고. 그러나 아르센은 그것마저도 이미 생각해 둔 듯 말했다. "솔직히 이번 검술대회에 우승해 우승자의 특권으로서 레이디를 제 파트너를 삼을 까도 생각했 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레이디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미리 이렇게 허락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번 검술대회에 우승하면 제 파트너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망설이던 쟈스란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승하신다면......" 그 말에 아르센은 기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쟈스란의 손을 잡고 그 손에 입맞추더니 꼭 우 승해 보이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식당에서 나가버렸다. 그때서야 조금 전의 일 따위는 전혀 모른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쟈스란에게 다가간 하 연일행은 아직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쟈스란을 보자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말했다. "좋은 아침이지, 쟈스란?" "......안색이 나쁘군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카리스의 말과 묵묵히 쳐다보고만 있지만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듯한 사담의 태도에 쟈스란 은 불안한 얼굴로 조금 전의 일을 털어놓으며 물었다. "어떻게 하지요?" 하연은 도대체 무슨 걱정인지 모르겠다는 듯 태평하게 말했다. "뭐, 어쩌긴 그까짓 파트너쯤 해주면 되지. 인생이란 짧은 거라고. 언제 또 여장하고 남자랑 파티에 참석해 보겠어. 이 기회를 즐기라고." "하지만...... 그러다가 만약 들키면요?" "들키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최후의 수단을 써야겠지." "네? 그게 뭔데요?" 다급하게 묻는 쟈스란과 궁금한 얼굴을 하는 카리스와 사담을 보며 하연은 활짝 웃으며 말했 다. "이렇게 웃으면서 장난이었어요 라고 말하는 거야." "헉!" 그 말에 너무 기가 막힌 쟈스란은 숨을 들어 쉬었고 카리스와 사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 를 가로 저었다. 그러다 문뜩 카리스가 하연에게 물었다. "그 분, 쟈스란에게 진심이라면 사실을 알았을 때 상처받을 텐데...... 괜찮겠습니까?" 누군가 괴로워하는 것을 못 보는 하연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걱정이 되어 묻자 하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곧 잊게 되겠지요. 카리스의 말대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니까요." 그러자 왠일로 사담이 하연에게 묻는 것이었다. "만약 그의 마음이 진실해서 쟈스란이 남자임을 알았어도 포기하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 때는 어쩌시겠습니까?" 순간 더욱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쟈스란을 보면서 하연이 말했다. "그 때는 쟈스란의 마음에 달린 거지." "네?" 놀라는 쟈스란을 보며 하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디선가 들었는데 진실한 사랑은 반드시 상대에게 전해져서 서로의 색깔로 물들이기 마련이래. 그의 사랑이 진실하다면 쟈스란에게 전해질 거고 쟈스란도 그를 사랑하게 될 거야. 그러면 해피 앤딩이니 문제될 것 없는 거지." "해피 앤딩이라니 무슨 말입니까?" 처음 들어보는 말에 카리스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하연이 빙긋 웃으며 말해 주 었다. "행복한 결말이라는 뜻이야!" 쟈스란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행복한 결말이요? 어떻게 그것이 행복한 결말이겠습니까? 그는 왕이 될 사람입니다. 왕이 될 사람이 남자를 사랑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저 또한 남자를 사랑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그 답지 않은 단호한 말에 하연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글세. 수많은 운명이 얽히고 설킨 이 세상에서 자신의 운명이 누구와 엮일지 어떻게 알겠어? 상대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운명의 상대를 포기한다면 그거야 말로 바보 같은 짓이 아닐까?" "그래도 전......!" 버럭 고함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쟈스란을 막으며 하연이 말했다. "아! 지금 이건 모두 만약의 일이잖아. 보통은 상대가 남자라는 것이 밝혀지는 그만 두기 마련 이라고. 너무 깊게 생각하지마, 쟈스란." 순간 자신이 너무 앞서갔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이 벌개지며 다시 자리에 앉는 쟈스란을 보며 하 연은 그때까지 안고 있는 검은 고양이 네로를 내밀었다. "어? 이건." "아! 어제 주었어. 너라면 잘 돌봐줄 것 같아서. 이름은 네로야." 죽은 브리켄의 고양이 같다고는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알면 기분 나쁠지도 모르니까. "네로?" 쟈스란은 상기된 얼굴로 조심스럽게 고양이를 받아 안았다. "정말 제가 길러도 되는 겁니까?" 한번도 동물을 길러 본적이 없었던 쟈스란은 불안하면서도 기쁜 표정으로 물었다. "물론." 하연의 단호한 대답에 정말 뜻밖으로 환한 웃음을 짓는 쟈스란을 보며 하연은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 고양이가 쟈스란을 만나 행복하기를 그리고 쟈스란을 행복하게 해주길 바라면서. 네, 아르센과 쟈스란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되려나?(먼산을 보며) 될대로 되겠지 하고 무책임한 생각을 하고 있는 유지였습니다.^^ 전략부에 들어가자 아르센과 유트는 보이지 않았고 다른 소년들만이 모여서 축제에 대한 예기로 한창이었다. 그러다 하연이 들어오자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한 소년이 오물거리듯 입을 열어 물었다. "레이디 하연은 어떤 의견이 없으십니까?" 그러고 보니 그 소년은 어제 특이하게도 노르리에 보다도 더 유명한 화가가 되겠다고 했던 소년이었다. "글쎄요." 하연이 얼버무리자 약간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짓는 소년의 모습이 꽤 귀여워 웃고 있는데 한 소년이 퉁명스럽게 비꼬듯 말하는 것이었다. "오를레, 물어 볼 사람에게 물어봐라. 하찮은 천민 여자가 이런 행사에 대해 무엇을 알겠냐?" 그 말에 오를레는 당황한 듯 황급히 하연의 표정을 살폈다. 하연은 물론 불쾌했다. 하찮은 천민 여자라니...... 하지만 오를레를 생각해 애써 불쾌한 기색을 감추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그 소년이 기고만장한 듯 말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어둠의 사제라니 분명 어딘가의 창녀출신이겠지. 저런 여자를 왕립학교에 들이다니 이 혼 슈이센 왕립학교도 이젠 썩은 물이나 마찬가지야." 하연은 속에서 열이 확 받치는 느낌이었다. 원래 성급한 성격이면서 이 세계에 와서까지 참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자기 위안을 거듭하며 목거리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소환!" 그러자 목걸이에서 투명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그 형체를 들어냈다. "우앗!" 갑자기 나타난 여인의 모습에 부안에 있던 모든 소년들이 놀라서 기겁을 하며 물러났다. 정령이란 존재는 이제 거의 이 세계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정령이 소환되는 과정을 처음보는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주인님." 사이라가 다정하게 하연에게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저 정령이 입을 오믈거리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정령과의 친화력이 없는 이상 소환자의 능력으로 정령이 눈에 보일 수는 있지만 그 소리까지 들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하연은 자신에게 분노를 불러일으킨 레일러 커스터비를 가리키며 사이라에게 말했다. "저 녀석이 썩은 물맛을 보고 싶다는군, 사이라! 썩은 물을 잔뜩 뒤집어 씌워 줘!" "네, 주인님!" 사이라가 레일러 커스터비에게 썩은 물을 촤아악! 하고 부어주자 레일러 커스터비는 비명을 질러댔고 부 안에는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하기 시작했다. "우아아악! 이, 이 사악한 여자가 감히 마족을 소환해 감히 나에게 이따위 짓을 하다니......" 순간 모두들 두려운 표정으로 하연을 쳐다보았다. 정령을 본적이 없는 그들로서는 사이라는 마족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때 아르센과 유트가 들어오다 사이라를 보고는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져서 멈추어 섰다. 그런 그들에게 오를레가 다가가 조심스럽게 조금 전의 상황을 설명했고 레일러 커스터비는 썩은 물을 뒤집어 쓴 채 아르센에게 외쳤다. "전하! 저 여자를 당장 죽이십시오. 마족과 계약을 맺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아르센은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지 서서히 사이라에게 다가가며 가벼운 탄성과 함께 중얼거렸다. "내 생전에 정령을 보다니....... 정령이란 그저 이야기 속의 존재일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정령? 저 것이 정령이란 말입니까?" 유트가 사이라를 가리키며 말하자 아르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왕립도서관에서 있던 <잊혀진 전설>이라는 책에서 본 적이 있지. 이 세계에는 물, 불, 바람, 땅의 정령들이 있는데 그 중 물의 정령은 물처럼 투명하면서도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쓰여 있었어. 마치 물의 여신 엘레나의 모습을 본뜬 듯. ......하지만 그런 정령들을 소환할 수 있는 자는 지금은 사라져버린 엘프들 뿐이라고 들었는데......" 아르센은 하연이 엘프인지를 묻는 듯한 시선으로 쳐다보았지만 하연은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사이라에게 돌아가라고 명령하고는 불의 정령 로우를 소환했다. 붉고 커다란 도마뱀의 형상을 한 로우가 소환되어 나오자 아르센은 다시 멍한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불의 정령......" 하연이 로우에게 레일러 커스터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자식이 젖어서 불편할 것 같아서 말이야. 옷이 탈 정도로만 말려주겠어, 로우 아저씨." 순간 그렇지 않아도 창백해진 레일러 커스터비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변하더니 로우가 다가서자 기절을 할 듯한 표정으로 외쳤다. "으악!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 그만 둬!" 하연은 씨익 웃으며 다시 로우 아저씨에게 말했다. "아! 충분히 반성한 것 같으니 로우 아저씨, 그만 두고 돌아가도 좋아요." 로우 아저씨는 띠껍다는 표정으로 그런 하연을 노려보다가 다시 반지로 돌아갔다. "주인 잘못 만나 별일을 다 한다니까." 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레일러 커스터비는 너무 충격을 받았는지 오늘 수업은 못 듣겠다고 말하며 자신의 기숙사로 돌아갔고 아르센은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하겠는지 하연에게 물었다. "레이디 하연, 엘프였습니까? 그럼, 레이디 쟈스란도?" "아니에요. 저희들은 분명 인간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정령들을......" "인간이라도 정령과의 친화력만 있으면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데 그 책에 그런 예기는 쓰여있지 않은가 보지요?" "그렇습니까?" 아르센은 놀랍다는 듯 그러나 유쾌한 표정으로 하연에게 말했다. "정말 레이디 하연은 거듭 사람을 놀라게 하시는 분이군요. 이런 신비한 능력까지 지니셨다니. 그런데 어째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는지 그게 더 궁금하군요." 하연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하지만 아르센이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지금 대륙에서 가장 많이 그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사람이 바로 하연이라는 것이었다. 어둠의 사제인 마신 소환사라는 이름으로. 그것은 그들이 거의 폐쇄된 국가나 마찬가기인 혼 슈이센 왕립학교에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진정되자 그들은 다시 이번 축제에 전략부에서 할 행사에 대해 토의하기 시작했다. 저번처럼 유명한 전투의 모형을 만들어서 그 전투의 전략에 대한 설명회를 하자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축제에서까지 그런 따분한 전략강의를 하겠다는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하연이었지만. 그 때 오를레라는 소년이 다시 하연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저기, 다른 의견이 없으시면 이 의견을 채택할 생각인데...... 어떠신지?" 아무래도 이 전략부에 하나밖에 없는 여자라고 나름대로 신경 써주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하연의 반응은 시큰둥할 뿐이었다. "축제라더니, 재미가 없네요? 무슨 학술발표회도 아니고." 그러자 유트가 약간 화가 난 어조로 말했다. "그런 말은 좋은 의견이나 내 놓고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응, 미안!" 너무 쉽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하연의 태도에 유트는 일순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곧 본래의 표정을 회복했다. 하연이 말했다. "그럼, 이건 어떨까?" "뭡니까?" 오를레가 반색을 하며 물었고 다른 학생들도 모두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하연을 쳐다보았다. "우리 부는 전략부니까 전략으로 승부할 수 있는 대륙정복게임 대회를 여는 것이 어때요? 검술대회처럼 참가신청서도 받고 말이에요. ......우승자에게는 우승상품도 있어야겠죠? 흠, 뭐가 좋을까?" 모두들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으며 너도나도 하연의 의견에 찬성을 하는 가운데 우승상품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데 오를레가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저...... 만약 레이디 하연께서 아직 저녁 무도회의 파트너를 정하지 않으셨다면 그 파트너의 자격을 우승상품으로 내 놓는 것은......?" 말을 하면서도 오를레는 하연이 화를 낼까봐 불안한지 손을 떨고 있었다. 그러나 하연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그것 좋은 생각이네요. 재미있겠어요. 아! 그런데 내 파트너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적으면 내가 아주 기분이 나쁠 테니까 우리 부에서는 의무적인 참가예요, 명심해요." 부진한 대회를 걱정해 협박까지 하는 하연이었지만 그런 협박은 불필요한 일이었다. 그 순간 전략부의 학생들은 모두 대륙정복게임의 우승을 향해 불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아르센은 빼고. 하연을 죽이려고 했다가 오히려 제가 칼맞고 죽을 뻔 했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죽이지 않는 방안으로......ㅜ.ㅜ 이 름 유지 제 목 마신 소환사 -110- 저녁을 먹으면서 전략부에서 하기로 한 게임 예기와 그 상품내용을 들은 카리스와 사담은 얼굴이 굳어졌다. 학생들을 위한 축제이기 때문에 선생들은 축제준비를 도와 줄 수는 있지만 참여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쟈스란이 우물거리며 하연에게 말했다. "저도 참석해도 될까요?" 하연은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쟈스란을 보았다. "쟈스란은 왜? 아, 맞아! 너 일주일 내내 내 게임상대를 해 줄 정도로 대륙정복게임을 좋아했었지? 그래, 참가해봐. 쟈스란정도의 실력이면 우승할 수도 있을 거야." 일주일 내내 쟈스란이 자신의 게임상대를 해준 이유가 아직도 단지 그 게임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하연이었다. 때문에 하연의 그 말에 쟈스란은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하연이 원망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축제 준비로 부산하게 움직이며 학생들은 즐거워했지만 교장인 리켈만 트웰스는 땀을 뻘뻘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 빛의 사제이면서 성기사의 단장인 두 명의 사제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금 요구했다. "당신도 그녀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이해할 수 있을 거요. 그러니 그녀를 퇴학시켜 주시오. 그 뒤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소." 하지만 리켈만은 그녀를 퇴학시킬 생각이 없었다. 빛의 고위사제까지 죽인 마신 소환사라니...... 어쩌면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추천 입학시킨 자들이 누구인가? 5서클의 마법사와 용병왕 사담이 아니던가? 그녀를 이용할 수 없다면 그녀를 미끼로 그들을 이용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그녀를 절대 내줄 수 없다는 대에 마음을 굳힌 리켈만은 심히 난처한 얼굴로 학교의 전통을 들먹였다. "저희 학교는 초대 교장이셨던 제베르타님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외부의 강요에 의해 학생을 내어 준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갈로아와 바칸의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우리 슈이센 국의 우방이었던 갈로아의 대신이 전쟁에 쓸 인질로서 바칸국의 학생들을 요구해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다른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그녀를 퇴학시키고 싶다고 해도 하연 학생은 성실한 학생으로서 아직 어떤 교칙도 어긴 적이 없는데 강제로 퇴학시킨다면 그 날로 우리 혼 슈이센 왕립학교의 명성은 땅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난색을 표하고 있으면서도 결코 그녀를 내어주지 않겠다는 뜻이 분명한 교장의 태도에 두 빛의 성기사들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더니 뜻을 정한 듯 말했다. "며칠 내로 다시 오겠습니다. 그 때까지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빛과 정의의 신인 펠레아께서 당신과 언제나 함께 하심을 명심하십시오, 그럼." 그들이 나가버리자 교장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고민을 털어 버렸다. 일이 생기면 그 때 그녀를 퇴학시켜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땅의 달이 시작되자 날씨가 무척 쌀쌀해져 새벽이면 바람에 살이 에일 듯 했다. 하연은 멍하니 아직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휴우!" 몇 번의 한숨을 쉬었을까? 갈루마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도대체 왜 그래? 아까부터 잠은 자지 않고 한숨만 쉬다니......- "아?" 자신이 혼자가 아닌 갈루마가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던 하연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갈루마에게라면......" 하연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병을 아무도 모르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한번만 더 정신을 잃게되면 그 때는 끝이라는 것을 직감하자 누군가에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갈루마라면 영혼인 존재이고 언제나 자신이 들고 있으니 누구 다른 사람에게 말할 염려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털어놓고 싶은 욕구가 더욱 강해져 버렸다. "......갈루마, 너도 내게 병이 있다는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겠지?" -......그래.- "나 죽을병이래. 의사가 그랬어. 짧으면 삼 개월 길면 일년이라고. 그런데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갈루마는 너무 충격을 받아 말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생각이라는 것이 머리 속에서 빠져나가 텅 비어 버린 듯 했다. 그는 하연에게 병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이 죽을 정도의 병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아니, 애써 그런 사실로부터 외면하려고 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유일한 친구인 하연을 잃고 싶지 않아서. 그런데 그 사실을 마치 확인사살을 하듯 하연으로부터 확인을 받았으니...... 하연이 말했다. "조금은...... 그래 조금은 슬프지만...... 나, 행복했어. 행운이라고 생각해. 내가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이런 세상이 있는 줄도 몰랐을 거고 이런 모험도 해보지 못했겠지. 그저 대충 살다가 죽었을 거야. ......너희들도 만나지 못했을 거고. 그러니 난 괜찮아." -......뭐, 뭐가 괜찮아? 너 살고 싶은 거잖아? 죽고 싶지 않은 거잖아?- 마치 피를 토하기라도 할 듯 애절하게 고함을 지르는 갈루마의 목소리에 하연은 다시금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에휴! 하긴 네 앞에서 무슨 폼을 잡아보겠지. 불치병에 걸려 죽어 가는 비련의 여주인공 역할에 매진해 보려던 내가 잘못이지." -그럼...... 지금까지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 거짓말이야?- "응!" -뭐? 하지만...... 하지만 너 아팠잖아? 쓰러지기도 했고.- "헤헤! 이곳에 오기 전에 카이람이 말해주었는데 너도 알다시피 나 다른 세계에서 왔잖아? 그래서 이곳과는 맞지 않아 몸에 나쁜 증상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했어. 아무래도 그 증상이 더 심해지는 듯 해서 곧 카이람에게 부탁해 내 세계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 -정말 그런 거야?- "응, 나한테는 마법도 듣지 않는 것을 보면 몰라?" -그렇구나, 그런 거구나.- 너무도 안심을 하는 갈루마의 목소리에 하연은 심장이 지끈거리도록 아파 옴을 느꼈다. -그럼. 곧 떠나는 거냐?- "그래, 휴우! 너를 포함한 동료들에게 작별인사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그냥 잘 있어 라고 하기는 너무 싱겁고 뭐 어디 멋진 말없을까?" 그 소리에 갈루마가 기가 막히고 한심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너! 그 딴 걱정으로 매일 밤 잠도 안자고 이렇게 청승을 떠는 거냐? 그냥 잠이나 자!- "쳇! 역시 갈루마의 여자의 섬세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니까......" 하연은 투덜거리며 침대에 누워 잠이든 척 눈을 감았다. 그런 그녀의 귓가에 갈루마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만나자, 그 한 마디면 충분해.- 순간 하연의 눈꼬리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미안, 갈루마! 미안! 미안!' 방안 가득 퍼지는 다이아스의 향기와 함께 하연은 수도 없이 입속으로 사과의 말을 중얼거리며 잠이 들었다. 축제는 다음 회부터 시작될 것 같습니다. 내일 올릴게요.^^ 축제를 즐기는 것보다도 지나다니는 학생들을 구경하는 것이 더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하연은 카리스와 사담, 그리고 쟈스란과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자신들 또한 남들의 구경거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하고. 그러다 아르센의 경기를 보러 검술대회로 가려는데 누군가 하연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오를레가 이젤을 앞에 놓고 그림을 그리다가 하연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 어나 그녀를 부른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너무 큰 소리로 그녀를 불렀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금방 얼굴이 붉어지는 그를 보며 하연은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에요?" "저, 저 제가 레이디 하연의 초상화를 그려드려도 될까요?" 하연은 잠깐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상관은 없지만 제가 가만히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요." 하연의 찌푸린 얼굴에 승낙을 얻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 풀이 죽어 있던 오를레는 금방 얼굴이 환해지며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지금 잠깐만 안자 계시면 금방 그려드리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할까요?" 그러면서 하연이 동료들의 의향을 묻자 그들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기다려 주었다. 그래서 한 이십 분쯤 지났을까? 진지한 표정으로 그림을 그리던 오를레가 마침내 초상화를 완성했는지 종이 한 장을 들어 하연 에게 보여주었다. 보니 자신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왜일까? 그 밝게 웃는 모습이 눈 물이 핑 돌 정도로 슬퍼 보이는 이유는. 그래서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하연은 오를레의 성의를 생각해 웃으며 말했다. "정말 잘 그렸네요. 마음에 들어요." "레이디의 마음에 들었다니 정말 기쁘군요. 이 그림은 제 감사의 표시입니다. 레이디 하 연...... 사실 전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제 실력으로는 유명한 궁정화가인 노르리에처럼 된다 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포기하려고 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궁정 화가가 되지 않는 이 상 화가란 인정받지 못하는 직업이니까요. 그러나 레이디 하연의 말씀을 듣고 전 용기를 얻었 습니다. 떳떳하게 화가가 되고 싶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러면서 고개를 푹 숙이는 오를레를 보며 하연은 약간 어색한 마음에 방긋이 웃었다. 하연 일행은 검술대회장으로 가는 동안 오를레가 그린 하연의 그림을 번갈아 보면서 모두 감탄 했다. 정말 잘 그린 그림이었던 것이다. 그 때 마지막으로 하연의 그림을 보고 다시 하연에게 돌려주려던 카리스가 그림을 들고 약간 망설이면서 물었다. "하연, 이 그림 저에게 주시기 않겠습니까?" "예?" "값은 치르겠습니다." 진지한 카리스의 눈을 보며 자신의 초상화이기 때문에 갖고 싶어하는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하 연은 오를레의 그림이 드래곤이 소장하고 싶어할 정도로 가치 있는 그림인가하는 생각을 하며 어차피 자신에게는 필요없는 그림이라 흔쾌히 승낙해버렸다. "갖고 싶으면 갖으세요." 그 말에 카리스는 하연의 그림을 소중히 쥔 채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뜻밖의 수확에 기쁨을 감 추지 못했고 사담과 쟈스란은 먼저 그 말을 꺼내지 못한 자신들의 멍청함을 속으로 탓하지 않 을 수 없었다. 검술 경기장은 콜로세움과 같은 모양이었으나 크기는 그보다 작은 규모의 건축물로 벌써부터 학생들이 많이 와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중앙의 높은 단위에는 두 학생이 시합을 펼치고 있었는데 서로가 막상막하인 듯 연신 검 부딪 치는 소리로 장내가 요란했다. 그곳과 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하연은 사담에게 물었다. "아르센이 우승할 수 있을까요?" 사담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말했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순간 쟈스란이 반색을 하는 것을 보고 피식 웃으며 하연은 사담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왜요? 저번에 쟈스란에게 우승해 보이겠다고 장담을 하는 것으로 보아 실력이 뛰어난 것 같던 데요?" "그건 원래는 이번 시합에 참가를 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고급 검술부의 세르기아스 힐런과 질 리안 유페이가 갑자기 참가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왜 마음을 바꾸었데요?" 아쉽다는 듯 말하는 하연의 말투에 사담은 어색하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게...... 저의 부 학생들에게 처음 검술 수업을 할 때 검술은 가르쳐도 제자로 삼을 생각은 없으니 그렇게 알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굳이 세르기아스 힐런과 질리안 유페이라는 학생들 이 저를 스승으로 삼게 해달라고 간청을 하더군요. 그래서 저 학생들이 마음에도 들고 검에 상 당한 자질을 보이기에 이번 검술대회에서 우승하는 녀석을 제자로 받아주겠다고 하고 말았습니 다. 그랬더니......" 하연과 쟈스란은 그런 사담을 대단하다는 듯 존경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사담 이 슬쩍 얼굴을 붉힐 때까지. 그 때 단위에 아르센이 올라섰고 그에 따라 자동적으로 그들의 시선은 아르센에게 향했다. 그리고 아르센이 쟈스란과 하연일행이 있는 곳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그러면서 새 롭게 각오를 다지는 기색이 역력했다. "와! 아르센이 쟈스란을 위해 무슨 일이 있어서 이기려는 모양인데.......!" 놀리듯 말하는 하연의 말에 쟈스란은 얼굴을 찌푸리며 긴장한 기색으로 시합을 응시했다. 제발 져버리길 바라며. 그러나 예상외일지 예상대로일지 아르센의 실력은 뛰어났다. 처음부터 끝까지 상대를 밀어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사담이 말했다. "아르센 전하의 실력도 대단하군요. 우승을 자신할 만도 합니다. 상대는 저의 부에서도 꽤 실 력이 있는 학생인데 시종 밀어붙이다니 말입니다." 그 때 아르센의 대전 상대의 검이 그의 검에 의해 퉁겨져 나가고 아르센의 승리를 알리는 소리 가 들려왔다. 그러자 아르센은 그의 오랜 호위기사인 유트마저 처음 보는 기쁜 표정으로 쟈스란 쪽을 쳐다보 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 웃음을 본 쟈스란의 얼굴은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두 차례의 시합이 끝났을 때였다. "와아!" 경기장에 갑작스런 환호성과 함께 밝은 갈색머리를 길게 뒤로 묶은 단아한 생김새의 여인이 긴 장검을 들고 단위로 올라섰다. "여자잖아?" 하연이 놀라서 중얼거리자 사담이 말했다. "저 학생이 바로 질리안입니다." 질리안이라는 여학생의 상대는 드물게 보는 덩치의 학생이었는데 질리안의 무섭게 쏘아보자 겁 을 먹고는 뒤로 물러서는 모습이 보였다. 시작을 알리는 신호와 함께 질리안은 빠르게 상대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한 마리의 고 양이가 움직이듯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그러나 상대도 만만치 않은 상대였는지 조금전의 겁먹 은 모습은 온대간데 없고 진지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검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겨 힘으로 질리안 의 공격을 밀어냈다. 질리안도 그 정도의 공격은 예상했는지 가볍게 다시 퉁기듯이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재빠르게 파고들면서 왼쪽을 노렸다. 상대는 가볍게 한 발짝 물러나 검을 막아냈으나 조금전과는 다르게 손이 쩌릿한지 약간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게 몇 번의 질리안의 공격이 이어지자 상대는 단 끝에 다다라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 다. 그러자 그는 초조한 듯 힘으로 질리안에게 달려들었고 질리안은 가볍게 그의 검을 막았다. 그런데 정작 뒤로 날아간 것은 덩치의 학생이었다. 질리안의 승리를 알리는 소리가 들리자 대회장에는 일제히 환호성이 울렸다. 하연은 조금전의 그 인상적이던 광경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부드러운 것으로서 강한 것을 제압한다는 건가." 환호성 소리에 묻혀 겨우 들릴 듯 말 듯한 소리였는데 사담이 그 소리를 들었는지 놀라서 물었 다. "아니, 하연이 그 이치를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설마 검술을 배웠던 겁니까?" 순간 하연은 난처했다. 한가할 때 집안에 누워 만화책 몇 권만 보면 알 수 있는 이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어색하게 변명하고 말했다. "하하! 그냥 예전에 아는 어떤 검사가 흘리는 말을 들었을 뿐이에요. 강하면 부러진다나 뭐라 나 하면서요." 사담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랬군요. 사실 그 이치를 이해하고 실행하는 검사는 드뭅니다. 질리안의 경우 아마도 본인이 여자이기에 남자들과 대결할 때 힘이 없어서 지는 것을 분해하다가 각고의 노력으로 그 기술을 혼자서 터득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가 질리안에게 검술에 재능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군요." 별로 검술에 관심이 없었기에 건성으로 대충 대답하고 시선을 다시 대회장으로 돌리려고 하는 데 쟈스란이 그녀에게 물었다. "저, 하연. 이제 곧 전략부의 대륙정복게임시합이 시작될텐데 안가볼래요?" "아! 가야지. 그렇지 않아도 내 파트너가 누가 될지 무척 궁금하거든." 그러면서 냉큼 하연이 일어나자 카리스와 사담도 일어나 따라 나서려는 것이 아닌가? "어! 카리스는 그렇다 치고 사담은 왜? 여기서 검술시합 구경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오늘은 예선뿐이니 내일 본 시합이나 구경하겠습니다." 사담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하연은 일행들과 함께 전략부로 갔다. 그런데 하연 일행은 놀라 지 않을 수 없었다. 거의 백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전략부의 게임시합에 몰려들어왔던 것이다. 그것은 물론 이 시합을 제의한 하연조차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카리스가 중얼거렸다. "오늘이 가기 전에 시합결과를 알기는 틀렸군요." 매우 유감스럽다는 어투의 카리스의 말에 사담 또한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그들은 하연의 파트너가 누가 됐든 따끔한 경고를 해주어 우승상품을 포기하게 만들 생각이었던 것이 다. 그런데 그 뜻깊은 행사를 뒤로 미루게되어 심히 유감이었던 것이다. 쟈스란은 때문에 그 날 예선으로 네 번의 시합을 치렀는데 하연과 일주일 내내 게임을 했을 때 보다 더한 정신적인 피로를 느꼈다. 그만큼 한 시합 한 시합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축제의 시작으로 좀 길게 올렸습니다. ^^ 다음은 무도회 장면을...... 이 름 유지 제 목 마신 소환사 -112- 축제 이틀째인 다음 날. 검술시합 첫 번째 시합을 알리자 단위에는 백금발의 화사한 머리를 휘날리는 아르센과 키는 크지만 좀 마른 듯한 그러나 부드러운 인상의 미청년이라는 느낌을 주는 학생이 마주 섰다. 그러자 사담이 말해 주었다. "저 학생이 바로 세르기아스 힐런입니다." "아하!" 그러면서 하연은 쟈스란을 힐끗 보며 말했다. "그러면 이번에는 질 확률이 높겠군요." 그러자 어딘지 모르게 조금은 착잡해 보이는 쟈스란의 표정이 스쳐지나가면서 경기가 시작되었다. 긴장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던 아르센과 세르기아스는 좀처럼 먼저 선공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르센은 이미 세르기아스의 실력을 보았기 때문이고 세르기아스는 강하다고는 들었지만 아직 아르센의 실력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서히 공격자세를 취하던 그들은 어느 순간 동시에 공격해 들어갔다. 챙!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상대의 힘을 확인하듯 검을 밀어붙이던 그들은 다음 순간 동시에 떨어졌다. 그리고 연이어 빠른 공격이 이어졌다. 그러면서 그들 주위에 공기가 갈라지고 열기를 띄어가자 보는 사람들도 손에 땀을 쥐었다. 상대가 마른 체구에 비해 힘이 보통이 아니라 아르센의 얼굴에서는 어느새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에 아르센은 가볍게 검을 흘리며 상대의 중심을 흐트러트리려고 시도했으나 세르기아스는 마치 강한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힘에 자꾸만 뒤로 밀려날 뿐이었다. 그러자 아르센의 얼굴에 초조한 빛이 떠올랐고 그것을 본 세르기아스는 이 때다 싶게 아르센의 하반신을 공격해 들어갔다. 그런데 그것이 유인작전이었던 듯 아르센은 재빨리 파고들어 세르기아스의 가슴을 찔러 들어갔다. 이에 세르기아스는 비스듬히 몸을 비켜 검 끝으로 아르센의 텅 빈 등을 찍어 내렸다. 퍽! "윽!" 순간 장내의 학생들이 모두 일어나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우우! 우우!" 하연은 어리둥절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지요?" 사담이 안색이 변해서 말했다. "그건 상대의 등을 공격하는 것은 기사도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에?" 하연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싸움중이잖아요? 약점이 있으면 그걸 공격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요?" 물론 사담도 그렇게 생각했다. 용병들에게 그런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기사들은 예의와 형식을 중시하고 그것을 기사도라 하며 기사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한다. 그리고 그런 자야말로 진정한 기사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들이었다. 또한 레이디들은 그런 기사들을 숭배하기 마련이었다. 때문에 사담은 오히려 하연의 그와 같은 생각이 더 신기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하연은 레이디와는 거리가 멀다고...... 그 때 카리스가 말했다. "이해할 수 없군요. 저 학생의 실력이라면 남들이 비겁하다는 저런 수를 쓰지 않고도 충분히 아르센을 이길 수 있었을 텐데 왜 저런 수를 쓴 것인지." 사담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에게 보이기 위해서이리라. 그는 첫 수업에서 자신의 검술을 펼쳐 보이면서 말했었다. "내 검은 살인을 위한 검이지 보여주기 위한 검이 아니다. 상대를 죽이는 가장 빠른 길, 그것이 내 검이 가고자 하는 길이고 내가 가는 길이다. 때문에 기사들의 검처럼 예로 시작해 예로 끝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너희들을 내 제자로 삼지 않을 것이다. 단지 이런 검술도 있다는 것을 알아두는 것에서 그치도록." 그 예기를 듣고도 세르기아스 힐런과 질리안 유페이는 그에게 제자가 되기를 청했었다. 그리고 이 시합에서 그에게 보여준 것이다. 상대의 등을 찌르면서 자신은 기사가 되지 않겠다는 것을. 승리를 하고도 야유 속에서 단상에서 내려오는 세르기아스였고 잠시 단위에서 쟈스란이 앉아 있는 쪽을 멍하니 쳐다보던 아르센은 어깨가 축 쳐져서 내려왔다. 이 결과에 쟈스란이 안도한 것은 물론이었다. 다음 시합은 질리안과 같은 부의 학생이었는데 현격한 실력 차를 보이며 질리안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잠시 후 결승전이 벌어졌는데 사담의 예상대로 세르기아스와 질리안이 붙게 되었다. "누가 이길 것 같아요?" 하연의 물음에 사담은 잠시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승부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지만 실력을 보자면 세르기아스가 질리안 보다는 반수 위이니까 세르기아스가 이길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그래요? 그럼 전 질리안을 응원하겠어요." "네? 왜지요?" 카리스의 물음에 하연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실력이 좀 쳐지는 쪽을 응원해 사기를 고조시켜 승리에 이르게 하는 것이 실력이 있는 쪽을 응원해 승리하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보람차니까요. 그리고 질리안이 이기는 것이 더 재미있을 것 같거든요." "어떤 점이 말입니까?" "이 시합의 우승자에게는 무도회의 파트너를 고를 권한이 있다면서요? 질리안이 어떤 사람을 선택할지 궁금하지 않아요?" 카리스가 그럴 듯 하다는 듯 말했다. "그렇군요. 저번에 언뜻 보니 질리안이라는 아가씨가 사담을 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던데 사담을 선택할지도 모르는 일이군요." "그래요?" 하연은 놀랍다는 듯 사담을 쳐다보았고 사담은 얼굴에 나타나진 않았지만 당황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질리안이 자신을 파트너로 선택한다면 무도회에 참석해야 하고 그러면 여자와 춤을 춰야 한다는 말인데 그로서는 정말 사양하고 싶은 일이었던 것이다. 사담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럼 난 아무래도 세르기아스를 응원하도록 해야겠군." 그 말에 하연일행은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흥미진진하게 시합을 주시했다. 세르기아스와 질리안은 서로의 검술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세르기아스는 질리안의 기술을 질리안은 세르기아스의 힘을 상대로 서로 많은 대련을 해 보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시작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채쟁! 질리안의 검이 빠른 속도로 상대를 찔러 들어가는 반면 세르기아스의 검은 완만하고 느리게 보였다. 그러면서도 힘이 있어 질리안은 재빠른 공격과 후퇴를 반복해야 했다. 그렇게 검을 겨룬 지 얼마나 지났을까? 서서히 몸이 지쳐 가는 것을 느끼면서 질리안은 깨달았다. 세르기아스가 자신이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이를 악물고 다시 검을 고쳐 잡은 질리안은 자세를 가다듬고 이것이 마지막 공격이라는 생각으로 힘차게 돌진해 들어갔다. 그러나 세르기아스는 가볍게 공격을 흘리며 질리안의 기술을 이용해 그녀의 검을 날려버렸다. 순간 질리안의 눈이 놀라서 크게 떠졌다. 그녀는 그 기술을 익히는데 삼 년이 걸렸었다. 그런데 세르기아스는 자신과의 대련을 통해 상대한 것만으로 일년만에 그녀의 기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그 재능에 질리안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가슴속에서는 불이 타올랐다. 지금은 졌지만 다음 번에는 반드시 이겨 보이고 말겠다는 각오로. 세르기아스 힐런의 승리를 알리는 외침이 장내에 울려 퍼졌지만 아무도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은 없었다. 상대의 등을 찌른 비겁자에게 환호성을 지를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 교장인 리켈만이 세르기아스에게 우승자의 권한을 행사하도록 전하자 단상 위에 있던 세르기아스는 천천히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그가 누구를 파트너로 정할지 모든 사람들의 귀추가 주목되는 가운데 세르기아스가 걸어간 곳은 질리안의 앞이었다. 질리안은 왜 세르기아스가 자신의 앞에 서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세르기아스가 조용히 말했다. "질리안, 너는 나를 좋은 적수로만 생각했겠지만...... 나에게 너는 여자였어. 이렇듯 우승자의 권한으로 너를 내 파트너로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 아무리 존경하는 사담 선생님에게라도 널 양보할 수는 없어. 따라서 이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니 이런 내 마음을 이해해 주길 바래." 그리고는 아직도 멍한 표정인 질리안의 눈을 들여다보며 세르기아스는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는 모두에게 공포하듯 외쳤다. "나 세르기아스 힐런은 질리안 유페르를 파트너로 삼겠습니다." 제가 드디어 프랑스와의 5:0이라는 스코어를 극복하고.... 축구세계 최강국가와의 경기이니 그 정도의 스코어는 어쩔 수 없는 거라는 친구들의 위로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이제 축구는 잊어버리고 열심히 글만 쓸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 각오로 요 며칠 정신없이 쓴 것 모조리 올릴 생각입니다. 기대해 주세요.^^ 이 름 유지 제 목 마신 소환사 -113- 검술대회가 끝나자 하연일행은 게임대회를 보러 급히 전략부로 갔다. 준결승전에는 쟈스란을 포함한 세 명의 남자들이 출전했는데 거기에서 본 뜻밖의 사실에 하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세 명의 남자 중 레일러 커스터비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창녀취급한 자가 출전한 이유를 알 수 없어 의아해 하던 하연은 자신을 보면서 약간 겁먹은 듯 움츠려 드는 그의 표정에 자신이 전략부에서 모두 참여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했던 사실을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아마도 나중에 그녀의 협박을 듣고 겁먹어 나온 듯 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카리스와 사담에게 들려주자 나중에 따로 불러내어 정신 교육을 시킬 필요가 없다는 데에 만족해하던 그들은 어떤 사실을 떠올리고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그럼 참석하는 것으로만 끝낼 일이지 어째서 준결승전까지 올라온 거지요?" 하연도 그 이유를 아까부터 궁금하게 여긴 터라 유심히 레일러 커스터비가 게임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그 이유를 발견하고는 그들의 물음에 킥킥 웃으면서 그의 표정을 가리켜 보였다. 레일러 커스터비는 실로 지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호승심은 그가 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때문에 그의 얼굴에는 져버려야 한다는 생각과 이겨야 한다는 두 가지 생각이 번갈아 교차되면서 그를 왔다갔다 정신없게 만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카리스와 사담도 기가 막히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결국 레일러는 그의 호승심 때문에 불행히도 쟈스란과 함께 결승전에 올라오고 말았다. 이 사실에 하연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쟈스란이 이기면 그는 여장을 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무도회에서 같이 춤을 출 수가 없었고 레일러 커스터비가 이기면 서로 무슨 재미로 무도회를 즐길 수 있겠는가? 둘 중에 한 명을 고르라면 차라리 쟈스란이 낫겠다 싶어 쟈스란이 이기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는데 행운의 여신은 역시 그녀의 편이 아닌 듯 레일러 커스터비가 이겨버리고 말았다. 이에 한숨을 쉬면서 하연은 레일러 커스터비에게 승리를 축하한다고 말하고는 저녁때 기숙사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정했다. 레일러 커스터비도 떨떠름한 표정을 짖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데리러 오겠다고 말했다. 저녁이 되어 무도회의 준비를 하려던 하연은 문뜩 떠오르는 생각에 아차 하면서 카리스의 방으로 갔다. "무도회에 갈 준비로 바쁠 텐데 무슨 일이십니까, 하연?" 약간 비꼬듯이 카리스가 말했지만 이를 눈치채지 못한 하연은 자신의 걱정을 말했다. "큰 일 났어요. 무도회에 입고 갈 옷이 없어요." "예? 그럼 교내에 의상실이 있던데 거기서 옷을 구입하시지 그러십니까?" "그런 옷으로는 안돼요. 드래곤 스케일로 만든 드레스여야 해요." "네?" 카리스는 비꼬는 것도 잊을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드래곤 스케일로 만든 드레스가 필요하다니...... 자신의 비늘을 떼어 옷을 만들어달라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니, 어째서 그런 옷이 필요한 것이지요?" 해도해도 너무 한다고 생각하며 카리스는 물었다. 딴 남자와 무도회에 가는 것도 참을 수가 없는데 자신의 비늘을 떼어 만든 옷으로 치장을 하고 무도회에 가겠다니 정말 너무했지 않은가? "저번에 카리스가 제가 인간치고는 너무 정령과의 친화력이 강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요? 그게 실은 제가 비만 다이아스 정령을 먹었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그 뒤로 제 몸에서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다이아스 정령의 향기가 진동을 해서 드래곤 스케일로 만든 이 로브를 입지 않으면 사람을 미치게 만들더라고요. 하지만 무도회에 이 검은로브를 입고 갈 수는 없잖아요. 다행이 카리스가 드래곤이니까 카리스의 스케일로 제 무도회에 입을 드레스 좀 만들어 줘요." 카리스는 그 답지 않은 멍한 표정으로 하연의 말을 듣고 있다가 하연의 재촉에 순간 다시 정신을 회복하고는 이성적으로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헤루아 숲에서 하연이 눈물을 흘렸을 때 자신의 비롯한 동료들이 이성을 잃고 하연에게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일이 있었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것이 바로 다이아스 정령을 먹어 생긴 일이었다니...... 하지만 정령을 먹는다고 정령과의 친화력이 강해질 수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그런 예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어떻게 정령을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이해가 안 되는 것 투성이었지만 카리스는 이미 하연의 향기 때문에 드래곤인 자신조차 이성을 잃을 뻔한 경험이 있었으므로 자신의 스케일을 뜯어 드레스를 만들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공간이동으로 자신의 레어로 돌아가 본체로 돌아온 카리스는 자신의 비늘을 약간 뜯어낸 후 그 스케일로 무도회용 드레스를 만들었다. 그런 후, 다시 공간이동 해 돌아온 카리스의 손에는 아름다운 은빛 드레스가 쥐어져 있었다. 하연은 그 옷을 받아들고 환하게 웃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드레스는 그녀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고마워요, 카리스. 이렇게 멋진 선물은 처음 받아보네요." 절대 자신의 억지로 인해 얻은 물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카리스가 원해서 준 선물이라고 여기는 하연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기뻐하는 모습에 좀 전까지의 불쾌감은 싹 잊어버리고 자신 또한 기뻐하는 카리스였으니......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드레스를 입어 본 하연은 드레스의 아름다운 모습에 다시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온 몸을 드러낸 곳 없이 모두 천으로 겹겹이 휘감은 듯한 드레스였지만 섬세하면서도 고풍스런 우아함을 느끼게 해 주었던 것이다. 그런 드레스에 맞추어 검은머리를 틀어 올린 하연의 모습은 정말 우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 모습으로 나서자 모든 사람들이 넋을 잃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평소 그녀를 늘 지켜봐 왔던 카리스와 사담도 마찬가지였고 그녀의 파트너인 레일러 커스터비는 자신이 그녀를 창녀라고 매도했던 것도 잊고 떨리는 목소리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 "레이디 하연,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런 레일러의 모습이 카리스와 사담에게 다시 정신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시킨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하연은 레일러 커스터비의 손을 잡고 가면서 바짝 뒤따라오는 카리스와 사담에게 물었다. "쟈스란은요?" 카리스가 말했다. "무도회에는 안 가겠다더군요. 낮의 승부에 진 것이 큰 충격이었나 봅니다." "그래요?" 하연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쟈스란이 참석하지 않는 덕분에 놓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한숨의 의미를 오해한 레일러는 당황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레이디. 레이디에게 승부를 양보했어야 했는데 제가 그만 호승심을 이기지 못하고......" "아니에요, 승부는 냉정해야 하는 법이지요. 봐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랬다면 제 동생은 지금쯤 더 자존심이 상했을 거예요." 순간 레일러는 놀란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그는 설마 여자들이 승부의 세계를 이해하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무도회는 대강당에서 열렸는데 학교 축제라기보다는 왕성 파티를 방불케 하는 모습이었다. 부드러운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많은 학생들이 화려한 복장을 하고 술과 음료를 마시며 떠들어 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소리도 하연 일행이 들어서자 뚝 그치고 대강당 전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하연의 미모도 미모였지만 인간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외모를 지닌 카리스의 아름다움도 한목 단단히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동안 이어진 침묵도 다시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로 인해 끊기고 강당 안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그리고 몇몇 연인들이 음악소리에 이끌린 듯 무도회 중앙으로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검술대회에서 본 세르기아스와 질리안도 보였는데 가볍게 손끝을 잡고 움직이는 모습이 그 연인들보다 잘 어울렸다. 그리고 발그레하게 홍조가 띄어진 질리안의 모습이라니...... 도저히 검술시합에 본 그녀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모습이었다. 그 둘의 춤을 자세히 살펴 본 하연은 그 춤이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왈츠와 비슷하나 남녀의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하연은 안도했다. 비슷하게나마 춤을 출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무도회에 와서 춤도 못 추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한다면 너무 초라해 보이지 않겠는가? 그 때 레일러가 하연이 춤추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 춤을 추고 싶어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재빠르게 손을 내밀었다. "레이디,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그 말에 하연이 흔쾌히 응하려는데 갑자기 레일러가 안색을 바꾸며 하연의 손을 잡아주지 않고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닌가? 의아해서 돌아보니 그녀의 곁에서 호위하듯 서 있던 카리스와 사담이 죽일 듯한 눈초리로 레일러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연은 한숨을 쉬며 카리스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저와 춤 한 곡 추시겠어요?" 카리스는 그 말에 금방이라도 웃음이 세어 나올 것 같은 얼굴로 하연의 손을 잡고 중앙으로 나갔다. 하연은 그런 카리스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런데 나 이 춤은 추는 것 이번이 처음이에요." "제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솔직히 카리스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하연이 춤을 출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평소의 하연의 몸놀림은 좀 둔해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카리스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의 둔한 걸음과는 달리 그의 리드에 맞추어 하연은 아주 우아하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춤을 잘 추는군요, 하연." "그래요?" 기분이 좋아진 하연이 활짝 웃으며 카리스에게 말했다. "카리스가 춤을 가르쳐 주었으니까 이번에는 제가 아는 춤을 가르쳐 드릴게요." 그러면서 하연은 카리스가 대경해서 멍하니 서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한 손은 그의 어깨 위에 올려놓고 다른 손은 카리스의 손을 펴서 내밀게 한 다음 그 위에 살며시 자신의 손을 겹치듯 잡았다. 그리고 가슴이 마주 닿을 듯 가까이 다가갔고 멀어지고 그의 주위를 빙 돌면서 왈츠를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카리스는 시종 멍한 표정으로 정신을 차릴 줄 몰랐다. 하연은 카리스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 마치 안기듯 다가왔다 물러나기를 반복하는 왈츠의 그 유혹적인 몸놀림 때문이라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단순히 카리스가 춤을 못 추는 거라고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이제 보니 카리스는 보기보다 몸놀림이 둔하군요. 석상하고 추는 것 같아요." 음악이 끝나자 피니쉬로 하연은 몸에 익은 대로 드레스의 한쪽 끝을 가볍게 들어올리며 정중하게 카리스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로 인해 슬며시 그녀의 모양새 좋은 발목이 모두의 눈에 들어 났다는 것도 하연은 물론 몰랐다. 순식간에 왈츠로 강당 안의 거의 모든 학생들을 자신의 포로로 만들어 보린 하연이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누구와도 춤을 출 수 없는 벽의 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카리스와 사담이 상대를 안 해 주는 것은 물론이고 행여 다가오려는 이가 있으면 드래곤의 살기가 어떤 것인지 두눈으로 직접 목격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처음 가져보는 하연의 무도회는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끝나고 말았다. 하연이 벽의 꽃이라니...... 여러분들을 실망시킨 것 같긴 하지만 저는 이렇게 방구석에 틀어박혀 머리를 쥐어 뜯고 있는데 하연만 즐기다는 것은 너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고로 이건 어쩔 수 없는 신의 뜻인겁니다.(옆에서 카이람이 박수치는 소리가 들리는듯!) 이 름 유지 제 목 마신 소환사 -114- 축제가 끝나고 교장실로 향한 카리스와 사담은 리케만 교장의 뜻밖의 말에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어떤가?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는가?" 리켈만 교장의 말에 카리스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희에게 다른 선택의 기회라도 주셨습니까?" 그 말에 리켈만은 만족했다.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뜻과 함께 그들이 하연을 생각하는 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아.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 서둘러 주게." "그러지요. 하지만......" 섬뜩하게 느껴지는 눈초리가 금방이라도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듯 하자 리켈만은 공포에 떨면서 얼른 대답했다. "물론 그녀의 안전은 걱정 말게. 절대로 그녀를 내어 주는 일은 없을 테니까." "좋습니다." 카리스와 사담이 나가자 리켈만은 안도하며 무너지듯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이 편에서 약점을 쥐어 카리스와 사담을 이용하기는 하지만 마치 양날의 검신을 손안에 쥔 듯 언제라도 그 검에 자신이 찔릴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하연은 갑자기 어딘가 갔다 올 때가 있어서 가보아야겠다는 카리스와 사담의 말에 의아한 얼굴이었으나 이 학교에 있는 이상 쟈스란도 별 일 없을 거라는 생각해 알겠다고 하고는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말해 주었다. 그들이 공간이동으로 어디론가 떠나버리자 하연은 한 동안 멍한 표정이었다. 언제나 같이 있는 게 너무도 익숙한 그들이었기에 잠시지만 떠나있는 게 잘 적응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생각했다. 자신이 떠나버리면 그들 또한 자신과 같은 느낌일까 하고. 그녀는 그렇지 않길 바랬다. 처음에는 누구라도 자신이 살아있었다는 흔적을 기억해 주길 바랬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들이 자신을 손쉽게 잊을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랬다. 그 만큼 그들이 하연에게 소중해진 것이었다. 공간이동으로 카리스와 사담이 도착한 곳은 슈이센의 궁성 안 깊숙한 곳에 자리한 숲이었다. 그 곳은 있는 설사 황태자라고 해도 그 출입이 허락되지 않는 금지된 구역으로 마치 칠흑 같은 어둠으로 둘러 쌓인 듯한 높은 탑이 하나 솟아 있었다. 탐지 마법으로 탑의 이곳저곳을 살펴본 카리스는 탑 안에 사람이 한 명 있을 뿐 다른 위험은 없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이런 곳을 출입금지 구역으로 정해놓은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이었다. 탑 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두꺼운 철로 되어 있는 문과 그 문을 철 빗장으로 막아놓은 것을 보고 약간 긴장했다. 카리스의 마법으로도 탐지되지 않는 위험한 존재가 안에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조심스럽게 철문의 빗장을 벗겨내고 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 라이트 마법으로 빛의 구를 떠오르게 하고 낡아서 곧 무너져 버릴 것 같은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그러면서 그들은 조금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끊임없이 이어질 것 같은 좁은 계단을 얼마나 올라갔을까? 드디어 그들은 탑의 꼭대기에 이르렀고 눈앞에 낡은 나무문이 들어왔다. 사담이 검을 빼어 들자 카리스가 빛의 구를 사라지게 하고 옆으로 비켜서서 조심스럽게 그 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을 연 순간 사담은 멍한 표정이었다. 뜻밖에 안에 있는 사람은 아직 어린 소녀였기 때문이었다. 긴 백금발에 햇빛 한번 보지 못한 듯 창백한 얼굴의 표정이라고는 없는 소녀의 모습은 마치 인형을 하나 세워 둔 듯했다. 카리스 또한 그 모습을 보고 사담처럼 놀라고 말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요?" "모르겠습니다." 사담은 검을 다시 허리에 차고 천천히 소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가만히 소녀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이름이 뭐지?" "헤미아 그라시엘." 그라시엘이라면 슈이센 왕족이라는 뜻이 아닌가? 사담과 카리스는 그런 소녀가 왜 이 탑 속에 갇혀 있는 건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담이 물었다. "헤미아, 왜 여기 있는 거지?" 헤미아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중얼거렸다. "몰라." "누구랑 함께 있니?" "피엔." "피엔은 어디 있지?" "계속 자." "잔다고?" 사담이 카리스를 쳐다보자 카리스가 말했다. "이 탑 안에 살아있는 사람은 이 소녀뿐입니다. 아무래도 그 피엔이라는 여자는 죽은 듯 싶군요." 피엔이 계속 잔다고 하는 것을 보면 소녀는 죽는다는 것의 의미를 모르는 듯 했다. 그런 소녀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든 사담과 카리스였지만 그들은 리켈만으로부터 받은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리켈만이 도대체 이 소녀를 데려다가 무엇을 하려는지 불안하기는 했지만 이 소녀의 목숨보다는 하연이 그들에게는 더 소중했던 것이다. 사담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말했다. "헤미아, 우리와 함께 여기서 나갈까?" "밖에?" 순간 헤미아의 표정없는 눈에 일순 감정이 스쳤다고 느낀 것은 착각이었을까? "그래. 밖에." "갈래. 빛을 보고 싶어." "빛!" "응. 피엔이 그랬어. 밖에는 어떤 보석보다도 아름답게 반짝이는 빛이 있어서 세상을 환하게 밝혀준다고...... 그것은 불과는 다른 거래. 하지만 난 사악한 어둠의 자식이기 때문에 결코 밖에 나가지도 빛을 보지도 못하는 거라고." 어린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피엔이라는 여자가 아직 죽지 않았다면 죽여버리고 싶은 기분을 느끼며 사담은 헤미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가자! 가장 멋진 빛을 보여주마!" 그리고 카리스에게 눈짓을 하자 그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텔레포트를 시전 했다. "이동!" 그들이 도착한 곳은 슈이센의 동쪽 노르트 해가 보이는 바위 위였다. 밤이라 아직 세상은 어두워 해가 뜨려면 아직 먼 시간이었다. 그 모습에 헤미아는 어린아이다운 불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할 뿐이었다. "빛이 보이지 않아." 그러자 카리스가 부드럽게 헤미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기다려봐! 아주 멋진 빛을 보여줄게." "응, 헤미아는 기다릴 수 있어. 빛을 볼 수 있다면......" 어두운 침묵 속에서 그렇게 얼마를 있었을까? 서서히 노르트해에서 아침해가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바다를 온통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아침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성이 터져 나오게 만들었다. 헤미아는 마치 충격을 받은 듯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붉어. 예뻐." 마침내 해가 완전히 떠오르고 날이 환하게 밝아왔다. 어둠이 물러나고 빛의 세상이 찾아온 것이다. 헤미아는 처음으로 보는 낮의 세상에 완전히 넋을 잃은 듯 했다. 손으로 세상을 밝게 만든 그 놀라운 빛을 잡아보려고 애쓰기까지 했다. 그러다 마침내 손으로 그 빛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손을 축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더니 사담과 카리스에게 말했다. "이제 가. 날 데려가도 좋아." "무슨 소리지?" "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어. 나를 잡아 어떤 사람에게 데려가려고 왔지?" 카리스조차 놀란 듯 물었다. "그럼 지금 내 생각도 읽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응, 난 위대한 드래곤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잖아." 놀라는 그들의 표정을 보며 헤미아는 담담히 말했다. "난 사악한 어둠의 자식이니까."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아이라니 그들로서는 생각도 못해본 일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 이 소녀가 자신들의 마음을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들은 소름이 끼치고 두려워졌다. 또한 걱정이 되었다. 도대체 리켈만 교장은 무엇 때문에 이 소녀를 데려오라고 부탁했던 것일까? "어떻게 하지요?" 사담이 카리스에게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이에 잠시 생각해보던 카리스는 이윽고 마음을 정한 듯 말했다. "우선 하연에게로 데려가 이 소녀에 대해 상의해봅시다. 그녀라면 무슨 좋은 생각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하연에게 이 일을 알린다는 게 약간 꺼림직 하긴 했지만 지금의 상황으로는 이 소녀를 리켈만에게 데려가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사담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여 버리고 말았다. 삼연참이라니...... 이건 도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제가 드디어 도배를 해보는 군요.^^ 오늘 정말 멋진 날이군요. 여러분들에게도 오늘이 멋진 날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하연은 어디 갔다온다고 하고는 사담과 카리스가 어린 소녀를 데리고 오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리케만 교장과의 거래사실과 소녀에 대한 예기를 듣자 그녀는 표정이 굳어지면서 사담과 카리스를 노려보았다. 자신을 놓고 그런 거래를 했다는 게 너무 불쾌했던 것이다. 그 모습에 사담과 카리스는 고개를 들 줄 몰랐고 그래서 그 때까지 무표정하게 서 있던 헤미아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하연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헤미아는 하연의 몸에 손을 대보더니 중얼거렸다. "읽혀지지 않아." "응?" 하연은 갑자기 어린 소녀가 자신의 몸을 만지며 뭐라고 하자 의아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뭐라고?" "읽혀지지 않아." "뭐가?" "생각이." 순간 사담과 카리스도 놀라서 하연을 쳐다보았다. 하연은 그게 뭐 이상하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서 물었다. "왜 그런 표정들이에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없는 거야 당연한 일이잖아요. 초능력자도 아니고." 카리스가 하연의 말에서 무엇인가를 느낀 듯 물었다. "잠깐만 지금 그 말은 그럼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까? 그 초능력자라는 자들 말입니다." "그렇다고 들었어요. 왜요?" 사담이 말했다. "이 소녀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고 했습니다. 그 때문에 왕족이면서도 어둠의 자식이라고 불리며 탑에 유폐되어 있었던 것이고요. 그런데 이 소녀와 같은 사람들이 또 있었다니 그럼 그들도 어둠의 자식들인 겁니까?" "어둠의 자식, 그건 또 뭐지요?" "마족의 아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 아니에요. 그들은 마족이 아닌 인간이에요. 단지 다른 사람들과는 특별한 능력을 타고난 것뿐이지요. 다른 사람들도 개발하면 그런 능력들을 발휘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요?" "네에?" 사담과 카리스는 너무 놀라 입을 벌리고 말았고 헤미아 또한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헤미아는 하연의 손을 잡고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럼. 헤미아는 인간인 거야?" 하연은 가슴이 아팠다. 감정이 없어 보이는 소녀의 눈을 보며 그 동안 이 작은 소녀가 얼마나 아팠을지 추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연은 헤미아의 손을 꼭 잡아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물론이지. 그 어떤 인간 아이보다 예쁜 인간 아이지." 물끄러미 그 표정 없는 눈으로 하연을 올려다보던 헤미아는 하연이 마주잡아 준 자신의 손을 보며 중얼거렸다. "따뜻해. 마치 빛 같아." 순간 따뜻한 웃음이 하연의 얼굴에도 사담과 카리스의 얼굴에도 떠올랐다. 피곤했는지 금방 잠들어버린 헤미아를 자신의 침대에 눕힌 하연은 헤미아를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해 일행들과 상의했다. "우선 교장 리켈만이 무슨 일로 헤미아를 구해 달라고 했는지 그 이유부터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흠. 그렇군요. 그 문제에 대해서는 미루엘에게 연락해 정보길드에 알아보라고 하면 되겠군요." "그렇게 하지요. 그리고 그 때 다시 헤미아의 문제를 상의하도록 해요." 사담과 카리스는 대충 마무리 짓고 하연의 방을 나갔다. 그러다 문뜩 카리스가 뒤를 돌아보면서 하연에게 물었다. "그런데 오래 산 저도 아직까지 그런 초능력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는데 하연은 어떻게 그런 사실들을 아는 겁니까?" "훗! 비밀이에요." "네?" 그 말에 약간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카리스는 방을 나갔지만 하연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너무 골치 아픈 일이었으니까. 다음날 밤. 카리스의 연락을 받고 미루엘이 몰래 혼 슈이센 왕립학교로 스며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미루엘을 반갑게 맞으며 하연과 일행들은 서로 그 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예기했다. 용병길드에 있었던 미루엘과 리밍스는 사담덕분에 그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리밍스는 다른 인간들과도 많이 친해져 이제는 거의 허물없이 지낸다는 것이었다. 하연은 잘됐다고 생각하며 만일을 대비해 카리스에게 말했다. "카리스, 만약 리밍스가 다시 헤루아 숲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면 카리스가 무사히 돌려 보내줘요. 언젠가는 그도 자신의 동족들이 그리워질 테니까요." 카리스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미루엘에게 리켈만에 대한 조사를 부탁했다. "염려 마십시오. 신속하게 알아다가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요즘 용병 길드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사담이 관심을 갖고 묻자 미루엘은 약간 기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시 빛과 어둠의 전쟁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전쟁이? 왜? 어째서?" 하연이 놀라서 다급하게 묻자 미루엘은 난처한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하연의 일 때문인 듯 싶습니다." "저요?" 자신과 전쟁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연이 쳐다보자 미루엘이 빛의 사제 덴 와사프와 프레인 블로뤼시의 죽음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래도 아직까지 이해를 못했는지 하연이 묻는 것이었다. "그 일과 빛과 어둠의 전쟁하고 무슨 연관이 있는데?" "하!" 미루엘은 하연이 이렇게 어리석을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나 하나 찍어서 말해주었다. "죽은 그 두 사제는 빛의 사제였습니다." "......그렇지?" "그리고 하연의 어둠의 사제입니다." "실제로는 아니긴 하지만 겉보기엔 그렇지." "따라서 겉보기로는 어둠의 사제가 빛의 사제를 죽인 거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빛의 사제들이 이를 그냥 넘기겠습니까? 이제 이해가 가겠지요?" "그럼......" 하연은 꽤 충격을 받고 말았다. 실은 카리스와 사담의 빛의 성기사단이 교장에게 하연의 인계를 요구했다고 들었을 때도 별로 걱정하지는 않았었다. 따돌리면 된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해 전쟁까지 벌어질 상황이라니...... 하연은 결코 전쟁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일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죽음이라는 것 때문에 그렇게 고민하고 아파했으므로 충분히 피해갈 수 있는 죽음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이 그와 같은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하연은 자신이 직접 빛의 대사제 엘 노아를 만나 그 일에 대해서 해명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기 되었다. 엘 노아라면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주고 그것이 자신의 짓이 아님을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하연의 마음을 짐작한 듯 갈루마가 말했다. -이미 늦은 일이다. 생각하지도 말아. 그 프레인이라는 빛의 고위사제의 말 못 들었어? 그들은 전쟁을 원하고 있는 거야. 거기에 네가 계기가 되었을 뿐.- "싫어! 내가 계기가 되는 건. 그런 것은 참을 수 없어." 벌떡 일어난 하연은 방안을 왔다갔다하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해. 그래, 무슨 좋은 방법이 있을 거야. 반드시 방법이 있을 거야." 다른 때와는 달리 하연답지 않은 민감한 반응에 그녀의 보며 일행들은 조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그 상황을 즐길지도 모른다고 까지 생각했던 그들이었던 것이다. -하연 진정해! 그러면 우선 네 생각대로 엘 노아를 만나보자. 어쩌면 그가 전쟁을 막을 방안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겠지?" 그 때 카리스가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알고 갈루마와 예기하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물었다. "하연, 혼자서 뭘 그렇게 중얼거리는 겁니까?" "아!" 그제야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의식하지 않고 갈루마와 떠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하연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안색을 굳히며 일행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아무래도 빛의 대사제인 엘 노아님을 만나보아야겠어요." "네?" "뭐라고요?" 하연과 엘 노아가 서로 아는 사이라는 것을 모르는 미루엘과 쟈스란은 경악해서 외쳤다. 어둠의 사제가 그것도 빛의 성기사들에게 쫓기고 있는 어둠의 사제가 빛의 대사제를 만나겠다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치 적의 소굴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카리스와 사담은 미처 그 생각을 못했다는 듯 새삼 하연의 비상함에 감탄하며 말했다. "그거 좋은 생각인 것 같군요." 그리고 그들을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는 미루엘과 쟈스란에게 엘 노아와 그들이 알게 된 경위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친분이 있는 사이라는 말에 미루엘과 쟈스란은 어느 정도 안도했지만 그래도 왠지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연의 뜻대로 되지 않았던 일이 과연 있었던가? 그들은 결국 하연의 뜻대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미루엘은 다시 돌아가 리켈만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고 쟈스란과 사담은 그대로 학교에 남아 쟈스란은 마법을 공부하고 사담은 헤미아를 지켜주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리고 카리스와 하연은 그 날 새벽 그랑디아의 빛의 대 신전으로 출발했다. 새벽녘에 하연은 본체로 돌아 온 카리스의 등에 타고 그랑디아로 향했다. 무서운 속도로 창공을 가르는 카리스로 인해 마치 칼날같은 바람이 하연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녀는 머리 속이 너무 복잡해 추운 것도 모를 정도였다. 어떻게든 다른 빛의 사제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엘 노아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어느덧 그들은 그랑디아의 빛의 신전 상공 위에 도착했다. 카리스는 드래곤의 모습이라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머리 속으로 생각을 전하듯 웅웅거리는 소리로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이대로 내려갈까?- 뜻밖의 카리스의 반말에 하연은 좀 놀랐지만 인간으로 폴리모프할 때는 성격마저 변한다고 하던 그의 말을 떠올리고는 원래 드래곤으로 있을 때는 카리스는 이런 성격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의 다급한 상황에서는 꽤 한가한 생각이었지만 그런 생각들이 하연의 조급한 마음을 조금은 누그러트려 주었다. 그러면서 하연은 엘 노아를 은밀히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바로 카이람을 부르는 일이었다. '카이람!' 그러자 하연의 서클렛이 성스러운 빛을 발하며 카이람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카이람의 표정이 여느 때와는 달랐다. 진지하다고나 할까? 그리고 복장 또한 금방이라도 전투에 나가려는 전사의 복장이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야?" 불길함에 몸을 떨며 하연이 묻자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카이람이 둥둥 창공에 떠 있는 그대로 하연에게 검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제 곧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난다. 이 검날을 뜨거운 피로 적실 것이다.] 하연은 창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전쟁 막을 수는 없는 거야? 넌 신이잖아?" [모르는가? 신이지만 난 마신. 전투의 마신인 것이다. 전투란 내게 인간들의 축제와도 같은 것. 벌써부터 흥분으로 온 몸이 떨릴 지경이다. 그런데 그것을 막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그런 일을 벌인다면 하연 너라도 내 검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거야. 죽고 싶지 않을 텐데...... 살고 싶을 텐데...... 죽어야 하는 그런 일이 벌어질 거야." 하연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울고 싶지 않은데 저절로 눈물이 떨어졌던 것이다. 진한 다이아스의 향기와 함께. 그 모습에 카이람의 표정이 약간 착잡하게 변했지만 곧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듯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넌 네 자신이 인간임을 포기할 수 있는가?] 뜬금없는 물음이긴 했지만 하연은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나도 내가 마신임을 포기할 수 없다.] 순간 하연은 그것이 카이람 나름대로의 사과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전쟁을 막아달라는 자신의 부탁이 카이람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때문에 하연은 눈물 젖은 얼굴로 억지로 웃어 보이며 말했다. "미안. 내가 해서는 안 되는 부탁을 했어. 그럼, 그 부탁 말고 다른 부탁은 들어줄 수 있어?" [뭐지?] "빛의 대사제인 엘 노아와 단 둘이서만 만나고 싶어. 그렇게 해 줄 수 있어?" 카이람은 끝까지 어떻게 해서든 전쟁을 막아보려는 하연의 의도를 눈치챘지만 그런다고 막아질 전쟁도 아니기에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좋다. 이리로 그를 데리고 오도록 하지.] "고마워. ......고마워." 그것이 하연이 처음으로 카이람에게 한 감사의 인사였다. 잠시 후, 카이람이 한 손으로 대사제 엘 노아를 덜렁 주어들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엘 노아는 당황한 듯 주위를 둘러보다가 하연을 보자 기쁜 기색으로 말했다. "아니, 자네는. 여기서 자네를 보다니...... 그럼 날 들고 있는 이 분은 마신 카이람님이신가?" "네." 하연은 카이람의 태도에 민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엘 노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허허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나도 자네를 만나고 싶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만날 줄은 몰랐네, 그려!" "들어주십시오, 대사제님. 전 한번도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습니다." 그 말에 엘 노아는 카이람에게 덜렁 들려있으면서도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신 앞에 맹세할 수 있겠는가?" "솔직히 전 그 어떤 신도 믿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카이람이 제 앞에 나타났고 그는 절 구원해 주었습니다. 위험에 빠졌을 때 괴로울 때 제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존재. 그것이 신이라면...... 네, 카이람은 저의 신입니다, 유일한. 그 신 앞에 맹세하겠습니다. 전 한번도 사람을 죽인 적이 없습니다." 하연이 그를 자신의 유일한 신이라고 말하자 카이람은 그만 너무 놀라서 엘 노아를 떨어트릴 뻔했다. 누구나 이 세계에서 자신을 펠레아와 가란의 아들로서 존경하고 받들 뿐이지 자신의 유일한 신이라고 말해준 이는 하연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찌 보면 두 주신의 존재를 부정하겠다는 뜻도 담겨있는 것이었다. 카이람은 당연히 엘 노아가 격노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냥 여기서 떨어 트려버려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뜻밖에 엘 노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 카이람님이 자네의 신이라고 한다면 그 카이람님을 낳으신 두 주신 또한 믿어주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그리고 난 자네를 믿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들려줄 수 있겠는가?" 하연은 그 때의 일들을 아는 대로 설명해 주었다. 가만히 그녀의 예기를 듣고 있던 엘 노아는 침음성을 흘렸다. 하연은 눈치채지 못한 듯 하지만 프레인이 하연의 서클렛에 탐욕을 품었던 것을 눈치챈 것이다. 고위사제인 그가 그런 탐심을 품고 있었다니 이미 빛의 사제들 또한 많이 타락해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아니겠는가? 하연이 말했다. "그러니 제발 빛과 어둠의 전쟁을 막아주세요, 대사제님." 그러나 엘 노아는 깊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대사제님?" "나도 막고 싶네. 하지만 자네의 말을 증명할 어떤 증거가 있는가?" 어쩌면 증거가 있을지도 몰랐다. 하연의 말대로 라면 프레인의 시체에 분명 불의 빛의 힘에 의해 공격당한 흔적이 남아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고로도 신전에서 올라온 보고에 따르면 프레인 사제는 어둠의 힘에 의해 공격당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분명 누군가가 이 가운데에 수작을 부린 것이다. 누군가 빛과 어둠의 전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그러나 그 사실을 대사제는 하연에게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벌어진 결과는 같은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연이 다급히 말했다. "증거는 없지만 증인은 있어요. 카이람이 증인이잖아요?" 엘 노아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카이람님은 절대 증언하지 않으실 거네. 알지 않는가? 카이람님이 전투의 마신이라는 것을......" 하연은 이미 좀 전에 들은 말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럼...... 이대로 보고만 있어야 한단 말인가요?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요! 전 참을 수가 없어요. 전쟁! 일어나도 좋아요. 하지만 절 빌미로 삼아 전쟁이 일어나는 것만큼은 참을 수가 없단 말이에요!" 몸을 떨며 격렬하게 외치는 하연의 말에서 전해지는 감정에 그녀를 태우고 있던 카리스는 물론이고 엘 노아나 카이람마저 마음이 저려 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들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전쟁의 화살은 이미 그 시위를 떠나 있었던 것이다. 우어어어! 한 줄기 포효를 지르고 빛의 신전의 창공 위를 한바퀴 돈 후 사라져 가는 은빛 드래곤의 거대한 모습과 그 위에 올라탄 검은 로브의 여인의 모습을 멍하니 보며 대사제 엘 노아는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늙었음을 실감했다. 그녀 또한 사제라 할지라도 조금전의 그녀는 그저 비통함을 감추지 못하는 한 여자아이일 뿐이었는데 빛의 대사제로서 그는 결국 아무 말도 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 때 엘 노아와 같은 광경을 보고 있던 많은 빛의 사제들 중 한 명이 도대체 드래곤을 타고 다니는 저 여인이 누군지 그에게 물어왔다. 이에 엘 노아는 씁쓸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으며 말했다. "그녀는 마신의 레이디다." 원인이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전쟁을 불러일으킨 여인이라는 의미에서 엘 노아는 그렇게 말한 것이었지만 후에 그녀가 마신 소환사라는 것이 밝혀지자 그들은 그 말의 의미를 마신의 연인이라는 뜻으로 착각해버리고 말았다. 이번 편은 예전에 올리지 않은 새로 올리는 편입니다. 그래서 앞에 115라고 써 놓은 것이고요.^^ 따라서 이제부터는 분량이 좀 적어질 것 같지만 그래도 꾸준히 연재할 생각이니 계속 관심부탁드립니다. 언제나 유지라고 하다가 하이텔 아이디인 허풍선이라고 쓸려니 좀 이상하군요. 그래서 계속 유지라고 할 생각입니다. 책나오면 저자 이름도 유지라고 할까 생각중입니다.^^ 제 목 : 마신 소환사 -38(116)- 등록자 : 허풍선이(김소영) 등록일 : 06-13 조회수 : 241 마법수련은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새벽에야 말로 마나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아직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쟈스란으로서는 가장 수련을 하기에는 적당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쟈스란은 좀처럼 수련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하연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보다도 강하고 마신 소환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조차 그의 걱정을 덜어주지는 못했다. 하연과 함께 갈 수 없는 이유가 자신이 약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약함이 원망스럽게 여겨졌다. 강해지고 싶었다. 그녀를 지켜줄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고 싶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쟈스란의 말이 방안 가득 울려 퍼졌다. 그리고 뜻밖에 누군가 그의 말에 대꾸를 하는 것이 아닌가? "도와줄까?" 쟈스란은 놀라서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방안에는 그 자신과 그 대신에 침대 위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는 고양이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의아하고 놀라서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자고 있던 검은 고양이 네로가 몸을 일으키며 우아한 몸놀림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그의 무릎 위로 올라오며 말하는 것이었다. "원한다면 도와주지." 쟈스란은 두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지금 네로 네가 말한 거야?" "그렇다, 인간. 그리고 나를 그런 촌스런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라. 네로라니 하여간 그 인간여자 이름짓는 센스하고는......!" 그러나 쟈스란은 네로의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당황해 있었다. 너무 황당한 일이 아닌가? 고양이가 말을 하다니...... "어떻게 고양이가 말을...... 아니, 그 보다도 어떻게 날 도와준다는 거지?" "계약을 하는 거다!" "계약!?" 순간 쟈스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계약이란 말을 쓰는 존재는 마족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설마 네로가 마족?" 그러자 네로가 눈을 굴리며 비웃듯이 말했다. "어리석긴. 마족이 인간과의 계약없이 함부로 인간 세상에 돌아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럼." 의아한 듯 쟈스란이 묻자 네로는 의기양양한 듯 허리를 곧게 펴며 당당하게 말했다. "난 마족 서열 제 5위인 르카이네님의 퍼밀리어다!" "퍼밀리어?" "그래. 이 몸이 바로 그 위대한 르카이네님의 종이시다." "......종?" 자신이 르카이네님이라는 마족의 종인 것을 마치 어느 나라의 왕이라도 된 듯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네로의 말에 쟈스란은 어이가 없어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쟈스란의 표정을 읽은 네로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래서 무식한 인간들은 싫다니까. 지금 퍼밀리어를 우습게 여기는 거냐? 퍼밀리어는 마족과 계약을 해 그 마족의 종이 되지만 그럼으로써 계약한 마족의 힘을 일부분 쓸 수 있게 되는 거다. 따라서 계약한 마족의 힘에 따라 퍼밀리어도 차이가 생기는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마족 서열 5위인 르카이네님의 퍼밀리어로서 웬만한 마족들보다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단 말이다." 그래봤자 종일 뿐이지 않으냐고 말하려던 쟈스란은 현명하게 입을 다물고 다른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계약의 대가로 뭘 원하는데?" "간단해.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그것을 주면 된다." "설, 설마 하연을?" 소스라치게 놀라서 쟈스란은 외쳤다. 그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하연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뜻밖에 네로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순간 쟈스란은 다른 의미에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하연이외에 무엇을 더 소중히 여기고 있단 말인가? 그는 믿을 수 없었고 믿어지지도 않았다. 네로는 마치 그런 쟈스란의 동요를 두눈으로 빤히 들여다보는 듯 고양이 특유의 교활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바로 네 머리카락과 두눈이지." 순간 충격이 그의 머리를 내리치는 것 같았다. 자신이 하연보다도 이 머리카락과 두 눈을 소중히 여겼다니......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하연과 그녀의 동료들 곁에 있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머리카락과 두 눈이라는 것을 안 순간 자신의 머리카락과 두 눈은 그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충격으로 멍한 쟈스란을 보며 네로가 말했다. "강해지고 싶지? 그래서 그 여자 곁에 있고 싶지? 그렇다면 나랑 계약을 하자. 널 강하게 만들어 주겠다!" 그 소리는 달콤한 울림이 되어 쟈스란을 동요시켰다. 그러나 쟈스란은 기억하고 있었다. 하연이 자신이 그들에게 가치가 있다고 말해준 것은 바로 자신의 머리카락과 눈 때문이라는 것을. 따라서 아무리 강해지기 위해서라 해도 쟈스란은 그것을 버릴 수가 없었다. 네로는 쟈스란이 쉽게 응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미리 알았는지 독촉하지 않았다. "흥! 잘 생각해 보라고. 이런 기회가 흔치 않다는 걸 알게 될 테니...... 언제든 생각이 바뀌면 나를 불러라." 어슬렁거리며 네로가 창문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쟈스란은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자신이 문을 두들이지 않고 쳐다만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충분한 도움이 되어주고 있으니까." 하연의 말과 환한 웃음이 떠오르며 쟈스란은 조금 전 네로의 유혹을 머리 속에서 떨쳐내 버렸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강해지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정신이 산만해 일찍 수련을 끝내고 사담의 방으로 간 쟈스란은 벌써 사담이 헤미아란 소녀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쟈스란은 헤미아란 소녀가 두려웠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니...... 그녀에게 자신의 추악한 생각과 마음이 들키고 그 사실이 다른 누구도 아닌 하연에게 알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에게 공포로 질식할 것만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 때문에 헤미아란 소녀를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러나 행여 그런 자신의 마음이 들킬세라 쟈스란은 아무런 생각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헤미아와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사담에게 물었다. "저, 하연은 아직인가요?" 그 말에 헤미아란 소녀와 사담이 그를 잠시 돌아보았으나 둘 다 무표정하기 이를 데 없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담이 말했다. "대사제님과 말이 길어지나 봅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두려움에 떠는 쟈스란을 보며 사담은 언젠가 그들이 두려워할 때 카리스가 들려준 말을 떠올렸다. 그 때까지 그와 동료들의 두려움을 깨끗이 씻어 준. 그러면서 그는 무의식중에 그 말을 중얼거렸다. "신이 그녀의 편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쟈스란에게 했지만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다시 그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자신의 여동생을 잃은 것처럼 하연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하고 있는 자신에게. 그리고 그 말은 이번에도 그의 두려움을 사라지게 만들어 주었다. 또한 쟈스란에게도 효과가 미친 듯 그제야 쟈스란의 떨림이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며 사담은 한숨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참아야 했다. 하연은 그에게 뿐만 아니라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삶을 갈망하도록 만드는 것 같았다. 그것도 그녀와 연관지어서. 마치 그가 그녀를 지켜주기 위해 살고 싶어진 것처럼. 그런 그녀를 자신만의 하연으로 있어주었으면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욕심이었다고 생각하면서. 피로 벽을 칠한 듯한 검붉은 방이었다. 그 방에 온몸을 천으로 둘둘 감은 아켄 드레이드가 자신의 피로서 소환진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소환진을 그리는 일이 의외로 상당한 정신력을 소모하는 일인 듯 마지막 선을 잇는 그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마침내 소환진이 완성되자 아켄 드레이드는 진 중앙에 서더니 두 검지 손가락을 모으고 정신을 집중하며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주한 그의 두 검지 손가락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흘러나오더니 서서히 그 빛이 아래로 내려가 소환진의 선을 따라 조금 씩 조금 씩 흘러 나갔다. 그에 따라 아켄 드레이드의 몸에서는 천으로 몸을 둘둘 말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로 땀이 비어져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소환진 전체에 푸르스름한 빛이 돌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그 빛이 강렬하게 확 하고 빛의 기둥처럼 퍼져 올라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 빛이 다시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하자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지더니 검은 장막을 찢듯이 공간을 가르며 한 검은 피부에 귀가 뾰족한 붉은 눈의 마족이 나타났다. 그 마족은 아켄 드레이드를 보더니 있는 대로 인상을 찡그리며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 따라 주변의 공기마저 살기를 발하듯 붉게 변해 가는 느낌이었다. "이번엔 무슨 일인가, 인간?" 아켄은 상당히 지쳐 있었지만 결코 자신의 나약한 꼴을 보이지 않기 위해 꼿꼿이 등을 펴며 정중히 말했다. "마족 테이트론님께 인간 아켄 드레이드가 인사 올립니다." "간단히 말해라!" 귀찮은 벌레 보듯 자신을 쳐다보는 마족의 모습에 아켄은 자존심이 조각조각 잘려나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이를 악물고 그 치욕감을 참으며 다시 한번 다짐할 뿐이었다. 강해져서 자신이 인간임을 포기하게 만든 그 자에게 반드시 복수하고 말겠다고. "언제나 처럼 제 생명을 십년간 연장시켜 주십시오! 대가는 3서클의 마력을 지닌 인간의 신선한 심장입니다." 테이트론은 인간의 끊임없는 욕심에 비릿한 조소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인간이 그를 소환하기 시작한 것이 벌써 오십년 전이었다. 따라서 이제까지 모두 다섯 차례의 소환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그가 자신에게 요구한 것은 언제나 똑같은 것이었다. 그의 생명을 연장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래 살아야 만족할 것인지. 저런 썩어 문드러진 몸으로도 살려고 발버둥치는 인간을 애초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종족인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계약은 이루어졌다." 소환진 가운데 있던 심장이 빨려 들어가듯 테이트론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심장과 함께 그 속에 모여있는 3서클의 마력을 빨아들인 것이다. 테이트론은 포만감을 느끼는 듯 만족한 표정을 짓더니 두 손을 모르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의 두손에서 붉은 보석이 생겨났다. 그것이 마족이 자신의 무한한 생명력의 일부를 뭉쳐서 만든 보석인 생명의 보석이다. 아켄은 그 보석을 보자 눈이 번뜩이며 적의를 들어냈다. 비록 자신의 생명을 이어줄 수 있는 보석이지만 그로 인해 받을 고통을 생각하면 그 보다 더 저주스런 것도 없었던 것이다. 살면서 다시 살이 썩어나가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으니까. 서서히 그의 입 쪽으로 다가오는 보석을 보며 아켄의 눈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 자신에게 이와 같은 고통 속에서 살게 한 그 자를 향한 분노가 새삼 솟구쳤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테이트론은 자신도 생각지 못한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그런 추한 몰골을 하고도 살려고 발버둥을 치는 이유가 뭐지?" 그러나 아켄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물 한 방울도 없는 메마른 그의 육체에 갑자기 생기가 들어오자 그 충격에 육체가 새로운 고통 속에 비명을 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으아아악!" 그러면서 아켄은 끊임없이 머리 속으로 중얼거렸다. 용서하지 않겠다고...... 자신을 인간이 아닌 살아있는 시체로 만들어 놓은 그 자를! 어떻게 된게 요즘은 나른한게 잠만 자고 싶어지니... 글을 써야 되는데...ㅜ.ㅜ 혼 슈이센 왕립학교로 돌아온 하연은 그녀답지 않은 심각한 표정으로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를 않았다. 그러자 걱정이 된 일행들은 그녀의 방문 앞에서 서성이며 그녀가 나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저녁이 다 되도록 하연이 나오지를 않자 사담이 문뜩 입을 열어 말했다. "부수고 들어가 볼까요?" 카리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소리없이 눈물만 주르륵 흘리던 하연을 떠올리고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리라. "믿고 기다리지요. 분명 그녀라면 다시 환하게 웃으며 우리 앞에 설 테니 말입니다." 그 말에 걱정이 가득해 보였던 사담과 쟈스란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풀렸다. 그리고 그들은 하연이라면 분명 그럴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사담의 옷자락을 잡고 서 있던 헤미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제는 분명 읽을 수 없었던 하연의 생각이 다시 그녀를 보았을 때는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책처럼 선명하게 들어 났던 것이다. 막아야 한다고...... 나로 인해 사람들이 죽게 할 수는 없다고...... 그녀는 외치고 있었다. 헤미아는 도대체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가지만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지금 정신적으로 무척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는 걸. 그걸 아는 헤미아로서는 다른 이들처럼 하연을 믿고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담담히 사실을 받아들였다. 어둠이 오면 빛은 사라지듯 언제나 자신의 빛으로 존재하리라고 생각했던 하연이 더 이상 자신의 빛이 아님을...... 헤미아의 체념은 빨랐다. 그녀가 세상을 인식하기 시작할 때부터 그녀는 자신을 두려워하는 부모에게서 버림받고 탑 속에 유폐를 당했다. 때문에 그녀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유모인 피엔 뿐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전부 어둠과 고독뿐인 생활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책들을 읽었지만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왜 그녀의 부모가 자신을 버리고 이 곳에 가두어야 했는지...... 빛이란 무엇이고 사랑이 무엇인지......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챙겨주던 피네의 모습도 변해갔다. 신경질적으로 날카롭게 변해서 자신을 노려보고 소리를 쳐대기 시작하더니 마지막에는 그녀를 저주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왜 태어나서 자신에게까지 이런 고통을 주냐고 그녀는 애초에 태어나서는 안되었다고 소리치면서. 헤미아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 어떤 것도 영원히 결코 변하지 않는 존재란 것은 없다는 것을. 피넨도 변했고 주위의 어둠조차 갈수록 짙어지는 것 같았으며 책들도 낡아갔다. 그리고 심지어 자신마저도 변해갔다. 손이 커지고 키가 자라고...... 변하지 않는 것은 없었고 따라서 하연은 그렇게 변한 것뿐인 것이다. 그런 거라고 새삼 되뇌이는 헤미아였지만 아릿하게 가슴이 저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방안에 틀어박힌 하연은 자신에게 일어난 지금까지의 일들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 때의 정황에 대해서 갈루마에게 다시 묻기도 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지금까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 즉 빛의 신전과의 사이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자신을 이용해 빛과 어둠의 전쟁을 조장하고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갈루마도 하연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대체 누가 무엇 때문에 빛과 어둠의 전쟁이 일어나길 바란다는 말이냐? 어쩌면 그로 인해 이 대륙이 멸망할지도 모르는 일인데 이 대륙이 멸망하기를 바라는 자라도 있다는 말이냐?- "모르겠어. 하지만 누군가 나를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만약 네 생각대로라면?- 순간 하연의 눈에서 불꽃이 이는 듯 하더니 이를 갈며 말했다.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날 이용해 이런 일을 벌인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만들겠어." 언제나 긍정적이고 밝아 결코 남을 미워할 줄 모르리라고 생각했던 하연의 뜻밖의 일면에 갈루마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곧 차분하게 입을 열어 하연을 진정시켰다. -설령 그렇다해도 지금 중요한 것은 곧 이 대륙이 전쟁에 휩쓸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앞으로의 일을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 ......저번의 말을 들어보면 네가 사는 세계로 돌아가려던 것 같은데 내 생각에는 이번 기회에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괜히 전쟁이 휩쓸려 고생하는 것보다는......- 갈루마로서는 힘들게 꺼낸 말이었다. 그녀와 헤어질 생각을 하니 영혼이 무너져 내리는 듯 고통스러웠지만 그녀를 위해서라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하연은 일언지하에 그의 말을 거부했다. "싫어!" 그 말이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갈루마는 재차 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가는 것이 좋겠어.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아무리 네가 마신 소환사라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야. 게다가 넌 몸도 좋지 않잖아?- 하연은 갈루마의 말에 인상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에 갈루마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하연의 입에서 돌아간다는 말이 나오면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갈루마에게는 마치 수 십년이 지난 듯한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하연이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아. 이제는 싫어!" 하연은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무디어져서 더 이상 자신에게 두려움 따위는 없다고 죽음 따위 이제 친숙하기만 하다고 계속 자기 암시를 걸고 있었지만 아직도 죽음이 두려웠다. 그래서 도망친 것이다. 모험이라는 형태로, 이 다른 세계로.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빗겨 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도망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직도 심장이 조여들 정도로 두려웠지만 똑바로 두 눈을 뜨고 마지막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이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대륙이 아닌 이 푸르름으로 가득 덮인 대륙이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마지막을 보기 위해 싸우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도 좋을 것 같았다. 물론 그 속에는 하연 나름대로 자신이 언제 터질지 모를 화약에 불을 붙였다는 죄책감도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말이다. 하연은 단호하게 말했다. "난 끝까지 싸울 거야!" 갈루마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돌아가지 않으면 하연의 그 병을 어찌 되는 건지. 누구를 상대로 어떻게 싸우겠다는 건지...... 하지만 하연의 비장하게 까지 보이는 표정에 아무 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밤중까지 깊게 생각에 잠겨 있던 하연은 문뜩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밖은 어두웠지만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은 하연은 밥을 먹으러 식당으로 내려가기 위해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방문 앞에 자신의 동료들과 헤미아가 쭈그리고 앉은 채로 두눈이 반짝반짝 해서는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적으로 놀란 하연이었지만 곧 가슴을 진정시키고 물었다.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자 카리스와 사담, 쟈스란은 그 질문에 기가 막히다는 듯 하연을 쏘아보았고 헤미아는 무엇에 놀랐는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는 하연의 로브를 붙잡았다. 헤미아는 믿을 수가 없었다. 방으로 들어갈 때와는 다르게 그녀의 생각을 또 다시 전혀 읽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놀라서 쳐다보는 그러나 그저 눈만 더 크게 떴을 뿐 조금도 놀란 표정을 보이지 않는 헤미아의 얼굴을 보며 하연은 마치 감정이 없는 인형같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쟈스란도 처음 보았을 때 아무런 감정도 없는 표정이었지만 헤미아와는 달리 허무라는 감정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연은 활짝 웃어 보였다. 이렇게 웃는 거라고...... 웃으며 사는 거라고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헤미아, 안녕?" 활짝 웃으며 부드럽게 말하는 하연의 음성에 헤미아는 가슴이 심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처음 빛을 보았을 때처럼. 그리고 갈망하게 되었다. 나도 저렇게 웃고 싶다고. 어색하게나마 웃으려는 듯 입가를 일그러트리는 헤미아를 보고 하연은 엄청 기뻤지만 내색하지 않고 부드럽게 헤미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마치 신기한 일을 본다는 듯 그들을 쳐다보고 있는 동료들에게 다시 물었다. "왜 다들 여기 모여 있는 거예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카리스와 사담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하연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괜찮습니까?" 하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이제 괜찮아요. 걱정해 주어서 고마워요. 그런데 나 지금 배가 고파서 식당에 내려가는 길인데 식사 안 했으면 같이 할래요?" 그러자 쟈스란이 작게 한숨을 쉬면서 말해 주었다. "하연, 지금은 한밤중이에요." 순간 하연은 그 말에 굉장한 충격을 받은 듯 멍해졌다. "하연?" "왜 그래요?" 동료들이 물었으나 하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생각을 읽은 헤미아가 말해 주었다. "......지나간 한끼는 죽어서도 찾아먹을 수 없다는데 그 끼니를 세끼나 놓치다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요?" 그 말에 허탈하다는 듯 체념했다는 듯한 표정을 짖는 동료들을 보며 정신을 차린 하연은 놀란 표정으로 헤미아에게 물었다. "어? 너 내 생각은 읽을 수 없다더니 어떻게 된 거야? 금방 내 생각 읽지 않았어?" 모두들 놀란 표정으로 헤미아를 바라보자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헤미아는 두려운 표정으로 재빨리 하연의 얼굴을 살폈다. 피엔처럼 자신이 그녀의 생각을 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을 두려워하고 소름끼쳐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하연의 얼굴에는 호기심만이 가득했다. 이에 헤미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담담한 어조로 설명했다. "지금처럼 정신을 놓고있을 때는 읽을 수 있는 것 같아." "그래?" 하연은 자신의 정신상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보통 때 헤미아의 능력으로도 생각이 읽히지 않을 정도로 정신을 무장하고 있었던가 하는. 하지만 자신의 정신력은 그 정도로 강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그러나 곧 아무려면 어떤가 하는 생각에 고개를 내저으며 그 생각을 털어 버리고 말했다. "배고파요. 밥 먹으러 가자고요." 쟈스란이 아까 자신이 한 말을 못 들었나 싶어 조심스럽게 다시 말했다. "벌써 한밤중이라 식당 문 닫았을 텐데요, 하연?" 하연은 그런가 하는 표정을 짓더니 그대로 계단을 내려갔다. "저, 하연?" 쟈스란이 말리려 했으나 카리스와 사담은 말려도 소용없다는 듯 그런 쟈스란의 어깨를 툭툭 쳐주며 하연을 따라 내려갔다. 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 그 동안 몸이 좀 안좋아서요^^ 그러나 이제부터는 열심히 올릴게요. 그럼. 한 밤중이라 기숙사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 때문인지 발자국 소리들이 유난히 크게 울렸는데 하연과 그녀의 동료들은 그럴 때마다 흠칫흠칫 놀라며 조심스럽게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주위를 살피며 신중하게 행동하는 하연의 태도에 덩달아 하연과 같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딛고 있던 동료들 중 카리스가 속삭이듯 하연에게 물었다. "하연, 왜 이렇게 은밀하게 움직이는 거지요?" 그러자 하연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역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순간 하연의 동료들은 경직된 듯 온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단지 재미있을 것 같다는 이유로 도둑고양이처럼 움직이고 있었다니...... 자존심도 상하고 약간은 화도 났지만 그러나 그들은 감히 소리내어 움직일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철저하게 하연에게는 약자인 그들이었던 것이다. 식당 문은 닫쳐있었다. 쟈스란이 속삭였다. "그냥 돌아가서 내일 아침에 다시 오지요?" "무슨 소리야? 사람이 한번 칼을 뽑으면 무라도 잘라야 한다는 말도 못 들어 봤어?" "못 들어 봤는데요?" 단호하기까지 한 쟈스란의 말에 하연은 약간 문화적 충격 속에 허우적거리다가 간신히 카리스가 내미는 밧줄을 움켜잡았다. 카리스가 말했다. "그것도 하연이 살던 곳에 있는 말입니까?" "뭐, 그렇지요." 쟈스란은 하연으로부터 그녀가 살던 곳에 대한 예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궁금해서 의문을 들어내며 하연을 쳐다보았나 하연은 모르는 척 하며 자신의 반지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소환!" 그러자 반지에서 불의 정령 로우가 나와 모습을 들어냈다. "무슨 일이가, 주인?" 건방진 말투의 로우를 보며 하연은 싱긋싱긋 웃으며 부탁했다. "저 문 좀 열어주세요, 로우 아저씨!" "난 불의 정령이다. 문이나 열어주는 정령이 아니라고. 어쩌다가 주인 한번 잘못 만나서 이게 무슨 짓이야!" 로우는 투덜거리면서도 하연의 명대로 식당 문을 열어 주었다. "됐지?" "네, 이제 돌아가셔도 되요." 로우가 반지 속으로 다시 사라지자 하연은 앞으로 나서며 식당 문을 슬며시 열었다. 그러자 텅 비어 있던 식당 안에 갑자기 확! 하고 불이 밝혀졌다. 깜짝 놀라는 하연에게 카리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마법이군요. 문을 열면 마법으로 불이 들어오게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연이 풀이 죽은 듯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은밀함이 없어. 한밤중에 몰래 부엌에 숨어들어서 음식 물 훔쳐먹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데......!" 그런데 그런 하연에게 카리스가 더욱 충격적인 말을 던졌다. "저어, 하연! 이 곳 주방장은 그 날 한 요리를 남겨두는 일이 절대 없다고 들었습니다. 안됐지만 아마 훔쳐먹을 음식이 없을 겁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돌아가겠지 하고 일행들이 생각하고 있는데 하연이 한숨을 쉬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요. 내가 직접 요리를 해서 먹을 수밖에......!" 순간 하연의 요리실력을 아는 카리스와 사담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고 쟈스란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요리를 할 줄 알아요?" 쟈스란은 하연이 비록 평민이긴 하지만 부자집 딸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의 그 막무가내 같은 행동이나 자기 중심적인 사고 방식, 그리고 한번도 돈걱정하는 것을 본적이 없는 것 등으로 볼 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요리를 할 줄 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하는 하연의 모습에 쟈스란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연이 직접 한 요리를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연이 한 요리를 먹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는 사담과 카리스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이 위기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사담은 그답지 않은 순발력을 발휘해 헤미아를 보며 빠르게 지껄였다. "이런! 어린아이는 일찍 자야지요. 이런 시간까지 깨어 있어서는 안됩니다. 자, 저랑 같이 위로 올라가지요." 헤미아는 물끄러미 사담을 올려다보았다. 하연의 요리를 먹느니 차라리 독약을 먹는 것이 낫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는 사담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창백하게 질린 표정을 보고는 말없이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위로 올라갔다. 그런 사담과 헤미아의 뒷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카리스는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말했다. "하연! 저도 좀 피곤해서 이만 자러 올라가야겠습니다." 사담의 변명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던 하연이 카리스까지 갑자기 돌아가겠다고 하자 이상하게 생각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드래곤이 그 정도로 피곤을 느낀단 말이에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카리스는 애써 웃어 보이며 말했다. "지금은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상태라서 인간과 똑같이 피로를 느낀답니다." 변명아닌 변명이었지만 하연에게는 먹힌 듯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였다. 그 모습에 건성으로 인사를 하며 도망치듯 계단을 올라가는 카리스를 보고도 아직까지 상황의 위급함을 눈치채지 못한 쟈스란은 오히려 오랜만에 하연과 오붓한 시간을 즐기게 되었다고 속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국인가 뭔가를 끓인다면서 냄비에 물을 한 가득 붓고 보이는 야채를 아무 것이나 듬성듬성 썰어 넣더니 양념 통 하나를 아주 들이붓듯이 넣는 하연을 보자 쟈스란은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먹으라고 그 음식을 쟈스란의 앞에 떠놓았을 때는 수저를 들기가 꺼려질 정도였다. 무슨 음식색깔이 희한했던 것이다. 탄 건지 거무죽죽한 건더기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하며 늪지대의 물을 떠놓은 듯한 녹색의 진득한 스프라니...... 물론 하연은 그것을 국이라고 만들어 떠놓은 것이지만 쟈스란은 그것을 스프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망설이는 쟈스란을 보며 하연은 기대에 찬 눈으로 먹으라고 재촉했다. 그러자 쟈스란은 어쩔 수 없이 한 술 떠서 그 정체불명의 스프를 입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쟈스란의 얼굴이 이상야릇하게 일그러지며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구역질이 나서 토해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하연의 시선을 의식해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들자 하연이 물었다. "어때? 맛있지?" "......처음 느껴보는 맛인데요." 그냥 좀 맛이 없는 정도만 같았어도 쟈스란은 정말 맛있다고 칭찬하면서 하연이 만든 음식인만큼 모조리 먹어 치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도저히 먹고 죽으라는 독약이지 음식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도망치듯이 올라가 버린 사담과 카리스를 쟈스란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연은 쟈스란의 말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방긋 웃으며 자화자찬했다. "흠! 내가 좀 한 요리하거든. 나도 내가 이렇게 요리를 잘 할 줄은 몰랐다니까! 어서 많이 먹어!" 그러더니 자신도 한 수저 떠먹으려는 것이 아닌가? 놀란 쟈스란은 급히 말리려 했다. 먹어보고 맛이 없으면 얼마나 실망할 것인가? 그러나 하연은 그 맛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음미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미원이 조금 많이 들어갔나? 아까 설탕인 줄 알고 왕창 넣었던 것이 이제 보니 미원이었던 모양이네. 그래도 뭐, 먹는데는 지장이 없으니까...... 안 그래, 쟈스란?" 그러나 쟈스란에게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눈이 커다래져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한 요리를 먹어대는 하연을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리켈만 트웰스. 47세. 현 혼 슈이센 왕립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며 역사 학자. 아직 미혼. 트웰스 백작가의 셋째 아들로 그의 누이동생 제이린 트웰스가 현 황제인 무라크 그라시엘의 첫 번째 왕비로 있었으나 딸인 헤미아 그라시엘 공주를 낳은 사년 후 사망. 헤미아 그라시엘 공주는 현재 슈이센 왕성의 북쪽 금지된 숲에 있는 탑에 갇혀 있음. 그 외에...... 하연과 동료들은 미루엘이 가져 온 리켈만 트웰스 교장에 대한 자료를 자세히 읽어보았으나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헤미아를 납치해 오라고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미루엘이 말했다. "이 자료를 보니 헤미아는 리켈만 교장의 조카가 분명합니다. 그냥 단순히 자신의 조카가 혼자 탑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안타까워서 구해내려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좋겠지만......" 사담은 미루엘처럼 그렇게 순진하게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는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카리스나 쟈스란도 마찬가지인 듯 그들 또한 꺼림칙한 표정이었다. 생각다 못해 하연은 나직한 한숨을 쉬며 헤미아에게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안돼요!" 하연이 헤미아를 교장에게 그냥 넘겨버리려는 줄 안 쟈스란이 놀라서 외쳤다. 그러나 하연은 상관하지 않고 계속 헤미아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결정해!" "네!?" 쟈스란은 순간 멍청해져서 헤미아와 하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헤미아에게 결정하라니...... "넌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잖아. 그러니까 네가 리켈만 교장을 만나서 그의 생각을 읽어 본 후 그에게로 갈건지 아닌지를 결정하라는 거야." 그 말에 모두 좋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데 잠시 생각해 보던 헤미아가 물었다. "내가 그에게 가지 않으면 안돼는 것 아니었어?" "응? 아! ......훗! 리켈만 교장이라는 사람. 무얼 한참 모르더군. 나를 성기사단에 인도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담과 카리스를 협박하다니...... 난 전혀 상관없어. 내가 이 학교에서 나가면 위험한 건 내가 아니라 밖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아아!" "하긴!" 사담과 카리스, 미루엘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를 표했다. 확실히 위험한 건 하연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었다. 하연의 위험은 곧 마신 카이람의 분노로 이어질 테니까. 하연이 말했다. "그리고 이 기회에 미리 밝혀두겠는데 난 싸우기로 결심했어." "뭐......?" "뭐라고요?" 미루엘과 쟈스란은 그야말로 비명을 질렀고 어느 정도 그런 하연의 결심을 짐작하고 있던 사담과 카리스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하연을 보았다. 앞으로의 험난한 여정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난 정말 남에게 이용당하는 건 질색이야! 그런데 누군가 나를 이용해 전쟁을 일으킨 것 같아. 그자가 기뻐하는 모양을 두고 볼 수는 없잖아? 반드시 날 이용한걸 후회하도록 만들어 줄 셈이야." 두 눈을 번뜩이며 말하는 하연의 무서운 표정에 어떻게 해서든 말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미루엘과 쟈스란은 그 표정에 질려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때 사담이 물었다. "어떻게 싸울 생각입니까?" "응?" "아직 우리는 상대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싸우겠다는 겁니까?" 사담의 말에 미루엘이 그제 서야 할 말이 생각났다는 듯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그렇고 말고요. 게다가 하연! 이 전쟁은 빛과 어둠의 전쟁입니다. 이 혼 대륙이 두 개로 나뉘어 전면전을 벌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렇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어. 하지만 우리가 아닌 모두라면?" "네?" "이 전쟁을 막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우리뿐만이 아닐 거야. 이 대륙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전쟁보다는 평화를 원할 거라고 생각해." 사담이 반박하듯 말했다. "하지만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힘없는 평민들이지요. 그들이 검을 들고 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하연은 피식 웃었다. "난 그들에게 검을 들고 싸우라고 하지는 않을 거예요. 나도 검을 들고 싸우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들에게 검을 들고 싸우라고 하겠어요." "그럼?" "한 줄기 바람이 되어 그들에게 노래하겠어요. 우리는 평화를 바란다고...... 우리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아 모두 함께 노래하겠어요.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고. 그러다 보면 그 노래 소리가 커져 이 대륙을 뒤흔들 정도가 되지 않겠어요? 그러면 그들도 그 노래를 듣고 전쟁을 멈추겠지요." 그들은 말문이 막혔다. 묘한 감동이 그들의 전신을 뒤흔들었던 것이다. 미친 짓이라고 가능성이 없는 일이라고 이성적으로는 생각했지만 그들은 떨려오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연의 환한 웃음이 오늘따라 빛의 주신인 펠레아의 축복처럼 성스럽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재촉해주시는 분들의 메일이 두려울 정도로 요즈음은 글을 쓰지 못하겠지 뭡니까? 아! 언제나 다시 속도가 오를지...... 그래서 기분 전환이라도 해야할까 생각중이랍니다. 그럼.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제 목 : 마신 소환사 -41(119)- 등록자 : 허풍선이(김소영) 등록일 : 07-16 조회수 : 11 사담과 카리스의 손에 이끌려 헤미아는 그녀의 삼촌인 리켈만 교장을 만나러 가게 되었다. 뒤에서 하연이 잘 다녀오라는 듯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왠지 그 모습을 보는 것도 마지막인 것 같다는 생각에 헤미아는 자꾸 뒤를 돌아보았고 그런 헤미아의 모습이 불안해서 그런다고 생각한 사담과 카리스는 그녀의 손을 더욱 꼬옥 잡아 주었다. 교장실 앞에 이른 그들은 잠깐 멈춰 서서 헤미아에게 다시 한번 당부했다. "원하지 않으면 그에게 가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니 그의 생각을 잘 읽고 신중히 결정하십시오. 그와 함께 살고 싶으면 제 손을 놓고 싫으면 제 손을 꽉 쥐는 것입니다. 알겠지요, 헤미아?" 헤미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말라 입을 열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긴장해 있었던 것이다. 이제 만나게 될 사람이 그녀의 삼촌이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형제이니 만큼 어쩌면 이제는 기억 속에 희미하게 그 잔상만이 남은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게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이윽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흰머리가 드문드문 보이는 갈색머리의 인상이 차가운 중년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았다. 바로 혼 슈이센 왕립학교의 교장인 리켈만 트웰스였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 헤미아의 긴장감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기억에 남아 있던 어머니의 인상과는 전혀 닮아 있지 않은 얼굴이었던 것이다. 리켈만은 은빛머리의 유난히 안색이 창백해 보이는 소녀가 자신의 조카인 헤미아 그라시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야 빼앗겼던 자신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현 슈이센인 왕인 무라크 그라시엘에는 여러 부인들을 거느렸지만 유폐시켜버린 딸 헤미아 그라시엘을 제외하고는 후사가 없었다. 때문에 장조카인 아르센 그라시엘을 양자로 맞아들여 후계자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리켈만은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엄연히 왕의 친딸이자 자신의 조카딸이 있지 않은가? 설마 헤미아가 마족의 아이로 오해받아서 유폐 당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리켈만은 단순히 헤미아가 내쳐진 이유가 누이 제이린과 왕과의 생전의 불화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 왕인 무라크가 지금 기력이 쇠하여 침대에 누워 있는 형편이니 만큼 헤미아를 내세워 그 정통성을 주장한다면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 헤미아를 왕위에 세우고 자신이 그녀를 조종하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한 자신의 권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누이가 살아있다면 자신은 이따위 왕실 학교의 교장이 아닌 슈이센의 재상이 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그런데 누이가 죽고 누이를 좋아하지 않던 현 국왕이 그마저 미워해 이런 한직으로 내 친 거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헤미아를 통해 자신의 빼앗겼던 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리켈만은 생각했다. 그런 생각들을 단숨에 읽어버린 헤미아는 왠지 기분이 나빠졌지만 결코 표정에서는 그런 느낌을 드러내지 않았다. "헤미아, 무사했구나! 그 동안 네가 금지된 숲에 유폐되어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삼촌으로서는 능력이 안돼 구해주지 못하고 있다가 이 분들의 도움으로 드디어 너를 구하게 된 거란다. 이제 안심해라. 이 삼촌이 널 돌봐주마! 이제는 결코 그 어두운 탑 속에 갇혀 있지 않아도 된단다. 내 하나뿐인 누이가 마지막 죽어 가는 순간까지 부탁한 네 행복을 내 반드시 지켜주마." 어머니...... 순간 헤미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리켈만의 누이라면 자신의 어머니를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그 어머니가 자신의 행복을 부탁했다니...... 왜 그런 거짓말을...... 헤미아는 리켈만의 마음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거짓말을 믿고 싶어하는 자신의 마음도. 진실을 읽을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이 저주스러웠다. 차라리 속을 수만 있다면 그 거짓 속에 묻혀 살고 싶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이윽고 헤미아는 마음을 결정했다. 사담과 카리스의 손을 놓아버리고 리켈만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하연일행하고 같이 있으면 안전하기야 하겠지만 지금 이대로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버려진 왕녀 헤미아 그라시엘로서. 하지만 리켈만의 손을 잡으면 비록 그가 자신을 이용하기야 하겠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가질 수 있는 여왕이라는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것이었다. 헤미아는 그 자리를 원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자로서 세상의 그늘 속에 묻혀버리고 싶지 않았다. 헤미아의 손을 잡으며 리켈만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네게 세상을 보여주마!" 그것이 리켈만의 진심임을 읽은 헤미아는 자신의 지금 이 결정을 결코 후회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사담과 카리스로서는 헤미아의 결정이 뜻밖이었다. 결코 리켈만이 좋은 의도로 헤미아의 구출을 부탁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것이 헤미아의 결정이고 보니 그들로서도 승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켈만이 그들에게 말했다. "위험을 무릎 쓰고 헤미아를 구해줘서 정말 고맙네. 지금에 와서야 밝히지만 이 아이는 내 조카이자 현 왕실의 정통 후계자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왕이 이 아이의 어머니이자 내 누이인 제이린을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이 아이마저 지금까지 유폐되어 있었던 거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다를 걸세. 내가 돌보아 줄 테니까." 카리스가 물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왕이 알면 교장께서도 위험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왕이 병중이라 침상에 누워 오늘내일 한다는 것은 아직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고 리켈만도 그 사실을 말할 생각이 없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이 헤미아를 데려왔다는 것을 헤미아가 알게 해 그녀가 자신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내 조카의 행복일세. 이 일로 인해 국왕이 군대를 파견한다고 해도 난 결코 헤미아를 내어주지 않을 것이네. ......십이년 전에는 지켜주지 못했지만 이번만은 반드시 지켜줄 거네." 그 말에 사담과 카리스는 리켈만에게 헤미아를 맡기는 것에 대해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그가 헤미아를 왕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은연중 그런 일이 벌어지면 자신들이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럼. 행복하길 바라겠습니다, 헤미아." 카리스가 말했다. 헤미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사담이 말했다. "펠레아의 축복이 언제나 함께 하길......" 그러면서 사담은 쑥스러운 얼굴로 속으로 생각했다. 자신의 생각이 헤미아에게 전해지리라 여기면서. '사제는 아니지만 당신이 좋아하는 빛의 축복이 언제나 당신과 함께 하길 기도하겠습니다, 헤미아!' 헤미아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들은 바로 그녀를 어둠 속에서 빛으로 이끌어 준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빌어주는 축복만큼 앞으로 그녀의 인생에서 힘이 되어주는 말도 없을 것이다. 헤미아는 그런 그들에게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곁에서 그들의 인사를 듣고 있던 리켈만은 약간 얼굴을 찌푸렸다. 그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것을 괜찮지만 그렇다고 한 나라의 여왕이 될 자가 고개까지 숙여가면서 인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담과 카리스가 교장실을 나가자 리켈만은 그 점을 분명히 했다. "헤미아, 아니 공주님!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지 마십시오. 그것은 스스로의 존엄을 깎는 일입니다." 처음으로 들어보는 공주라는 호칭에 헤미아는 자신이 앉을 자리를 얻은 기분이었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자리를...... 헤미아는 겨우 얻은 그 자리를 절대 빼앗기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리케란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이야! 불이야!" 슈이센의 수도 라마드의 밤하늘이 환하게 밝혀질 정도의 불길이 어둠의 신전인 코와스에서 일어났다. 후에 혼 대륙의 역사서에 제 3차 빛과 어둠의 전쟁의 첫 시발점으로 기록되는 사건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코와스 신전을 신전의 늙은 장로인 루터와 어둠의 사제들은 물론 코와스 주변의 빈민가의 사람들이 모두 나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빛의 사제들이 볼 때 어둠의 신전은 인간을 타락시키는 곳이었지만 어둠의 사제들이나 이 신전을 찾는 빈민가의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곳이었던 것이다. 어쩔 줄 모르고 멍하니 불타는 신전만 쳐다보고 있는데 그 때 한 사람이 물을 퍼와서 끼얹자 그것을 신호로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너도나도 물을 퍼와 불을 끄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소중한 곳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불은 모두 끌 수 있었으나 신전은 거의 폐허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 모습에 늙은 장로 루터의 얼굴에 주르륵 피눈물이 흘렀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고아로 이 신전에 버려진 그는 그 때부터 평생을 이 신전에 바쳤다. 그런데 그 신전이 불타 없어진 것이다. 그런 그의 뒤로 젊은 사제 하나가 흥분해서 외쳤다. "좀 전의 저 여인들이 이 곳을 지나는 빛의 사제들을 보았답니다. 분명 그 자식들의 짓이 분명합니다. 복수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고도로 신전으로 가 불을 질러 버리자고요." 복수! 그 말에 늙은 장로 루터는 정신이 번쩍 든 듯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두 손을 불끈 쥐었다. 어둠의 사제들에게 복수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것이 그들의 생활신조였으니까. "가자!" 루터는 젊은 사제들을 이끌고 빛의 신전인 고도로 신전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은 고도로 신전까지 갈 수가 없었다. 막 빈민가를 나가 대로로 들어서려는데 빛의 성기사단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선 것이었다. "네 녀석들은......!" 성기사단 단장인 페이런이 물었다. "코와스 신전의 분들이십니까?" "그렇다. 네 놈들이냐? 코와스 신전에 불을 지른 녀석들이. 감히 빛과 어둠의 협정을 깨트리겠다는 것이냐?" 빛과 어둠의 협정은 두 번째 빛과 어둠의 전쟁이후 빛과 어둠의 대사제들끼리 맺은 협정으로 서로의 신전의 활동에 대해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이 그 주요사항이었다. 장차 있을 지도 모를 세 번째 빛과 어둠의 전쟁에 대한 방지책으로서는 유약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지만 그 협정을 맺기 위해 빛과 어둠의 신전에는 오년간의 숙고를 거쳐야 했다면 그것조차 얼마나 어렵게 맺은 협정인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협정이 지금 깨지고 있는 것이다. 페이런이 냉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먼저 그 협정을 깬 것은 어둠의 사제들이 아닙니까?" "뭣이라고?" 아직 빛의 고위사제 프레인의 죽음을 모르는 늙은 장로 루터에게 그 말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너무 기가 막히고 화가 나서 몸을 부들부들 떨던 루터는 이윽고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애초에 어둠의 사제들에게 참을성이란 미덕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둠의 주신 아버지 가란의 이름아래 땅의 신 부탄의 이름으로 그 분의 성스러운 축복을 내려주소서! 어스퀘이크!" 순간 땅이 쩌억 쩌억 갈라지며 그 땅의 파편이 솟구쳐 성기단들을 공격해 들어갔다. 파바바팟! 그러나 성기사단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은 채 바리어를 쳤다. 성기사단원들답게 이런 싸움에는 익숙한 듯 각개의 바리어를 서로 모아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는 완벽한 하나의 방어막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 루터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의 실력으로 저들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허무하게 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루터는 자신의 모든 신성력을 끌어 올려 그들에게 저주를 퍼붓기로 작정했다. 땅의 저주인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져서 언제나 굶주린 상태에 있도록 만드는 저주를 말이다. "아버지 가란의 이름아래 땅의 신......" 그러나 페이런은 이미 그것을 짐작한 듯 저주의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섬광과 같은 속도로 재빨리 검을 내리쳤다. 파앗! "크으......부탄의...... 이름으로......" 늙은 장로 루터는 채 기도를 완성하지 못하고 억울한 눈을 부릅뜬 채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뒤를 따르던 다른 어둠의 사제들도 반항한번 못한 채 다른 성기사들에 의해 그 자리에서 피를 뿌렸다. 순식간의 슈이센의 수도 라마드의 모든 어둠의 사제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것이었다. 하연일행은 며칠 동안 혼 슈이센 왕립학교에 남아 헤미아의 안전을 확인 한 후 떠나려고 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슈이센의 국왕이 서거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귀족회의에서 과반수 이상의 찬성을 얻어 황태자인 아르센 대신에 헤미아가 여왕으로서 추대되었다. 실로 그 일은 하연일행으로서도 얼떨떨한 일이었다. 비록 헤미아가 국왕의 친딸이라고는 하지만 태어난 이후 거의 금지된 숲에서 유폐생활을 해서 나라안의 사정을 모르고 아직 나이도 어렸다. 하지만 아르센은 일찍부터 왕의 후계자로서의 수업을 받은 대다가 거의 성년이 되었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헤미아가 그런 아르센을 제치고 여왕으로서 추대될 수 있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것이 모두 교장인 리켈만의 수완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일이었지만 나라를 말아먹으려고 작정하지 않은 이상 귀족회의에서 헤미아를 여왕의 자리에 앉히는데 동조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나름대로 귀족들의 야심이 작용하고 있었으니 즉 아르센이 왕위에 오르면 왕권이 강화되어 귀족들의 세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게다가 현 왕비인 사반느 임페이드 또한 이상할 정도로 아르센을 싫어하고 있어서 사반느 왕비의 세력이 모두 헤미아를 지지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로 인해 헤미아가 왕의 정통 후계자라는 기치아래 사반느 왕비와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 여왕의 자리에 추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그들은 아르센의 반란을 걱정해 왕의 시신이 채 땅에 묻히기도 전에 여왕 즉위식을 거행했다. 여왕의 즉위식치고는 좀 초라한. 그리고 그 날 처음으로 헤미아는 주검이나마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부드러운 인상이 유약하다는 느낌을 주는 무라크 선왕은 도저히 자식을 내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헤미아는 묻고 싶었다. 아무리 자신을 어둠의 자식이라고 생각했다 할지라도 어떻게 자신의 자식을 버릴 수 있었는지......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그런 아버지의 시체를 보며 헤미아는 다짐했다. 아버지가 나에게 물려주길 원하지 않았던 이 자리를 반드시 지켜 내리라고...... 설령 그것이 자신의 두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이 될지라도. 헤미아는 일부 귀족의 세력들이 아르센을 주축으로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헤미아는 그 일을 모르는 척 모든 것을 이번에 재상으로 임명한 리켈만에게 맡기고 그에게 한 가지를 명했다. 하연 일행을 불러달라고. 리켈만은 헤미아가 자신만을 의지해 주길 바랬다. 그래야 자신의 힘이 더욱 강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하연 일행에게 의지하는 듯 보이자 그들의 존재가 신경에 거슬렸다. 그렇다고 헤미아가 자신에게 처음 한 명이고 보니 듣지 않을 수도 없고 해서 잠시 고민하던 그는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슈이센의 제 25대 여왕이신 헤미아 그라시엘이시여!" 오랫만에 올립니다.^^ 제 목 : 마신 소환사 -42(120)- 등록자 : 허풍선이(김소영) 등록일 : 07-17 조회수 : 270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사담이 물었다. 방문밖에는 리켈만의 승인아래 학교까지 들어와 그들을 왕궁으로 모시고 가겠다는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하연일행은 쉽게 그들을 따라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입구에 하연을 처벌하기 위해 진을 치고 있는 성기사단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찌 왕실기사단을 대동한 채 밖으로 나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하연은 밖에서 진을 치고 있는 성기사단을 잊은 듯 태연히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가 보도록 해요. 아르센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궁금하고요." 헤미아의 즉위식이 있기 전 아르센은 군사들에 의해 방에 강금되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즉위식도 끝났으니 정적인 아르센을 리켈만이 살려두지 않으려 할 것은 뻔한 일이었고 그렇다고 아르센을 구해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분명 탈출한 아르센은 왕위를 되찾기 위해 내란이 일으킬게 분명하니...... 때문에 지금 상태로서는 헤미아와 아르센 중 어느 누구의 편도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이것은 정치의 문제지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그로 인해 복잡한 안색이 된 하연의 얼굴을 살피며 쟈스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르센 왕자님을 구해주실 거죠? 그 분을 죽게 둘 수는 없잖아요?" 하연은 그렇게 말하는 쟈스란의 불안해 하는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희죽 웃으며 말했다. "하긴. 쟈스란의 님을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겠지?" 순간 쟈스란은 당치도 않은 하연의 말에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화를 냈다. "하, 하연!" 그러나 쟈스란이 얼굴을 붉힌 이유를 착각한 하연은. "이런 부끄러워서 그래? 이미 다 알고 있는 일인데 새삼 부끄러워할게 뭐야. 안 그래요, 카리스?" 카리스도 부드럽게 웃으며 그 말에 동조했다. 이 기회에 쟈스란이 감히 하연을 넘보지 못하도록 만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물론이지요. 그리고 아르센의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꼭 구해드리겠습니다." 쟈스란은 정말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하연인데 하연은 자신이 다른 사람을 그것도 남자인 아르센을 좋아하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으니...... "하연, 분명히 말해 두지만요......." 그러나 쟈스란의 어눌한 변명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사담이 그의 말을 잘랐던 것이다. "그럼. 밖에서 진을 치고 있는 성기사단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입니까, 하연?" 역시나 하연은 미처 그 점을 생각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어눌한 표정으로 물었다. "왕의 명을 받고 왕궁으로 들어가는 길인데 설마 막아서려고 들지는 않지 않겠어요?" "그런걸 따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데요?" 카리스의 말이었다. 하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실버 드래곤인 카리스와 용병왕 사담, 트레져 헌터인 미루엘과 쟈스란. 그리고 자신의 지팡이인 현자 갈루마. 또한 여기에는 없지만 부르면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는 사이라와 로우, 마신 카이람. 이들과 함께라면 어떤 어려움도 헤쳐나갈 수 있다는 자신이 하연에게는 있었다. 따라서 하연은 동료들에게 활짝 웃으며 자신있게 말했다. "저도 별로 그들이 막아선다 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확실히 말해주고 싶군요." 카리스와 사담, 그리고 미루엘은 피식 웃음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사담이 허리에 찬 검을 툭툭 치며 말했다. "그럼, 나가 볼까요?" 그 말에 하연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며 우르르 밖으로 나갔고 멍한 표정으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쟈스란은 아직도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하연의 생각을 고쳐주지 못한 것에 미련이 남은 듯 그게 아닌데 하고 중얼거리다가 축 쳐진 어깨를 한 채 일행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문밖으로 나서니 슈이센의 왕실 기사단이 일렬로 쭉 서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청색 기사복에 검마다 가지각색의 수실을 달고 있었다. 그들은 절제된 몸가짐으로 대기하고 있다가 하연 일행을 보자 놀란 표정이었다. 하연 일행이 모두 빼어난 용모를 지닌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그들은 정신을 수습하고 예의를 표하더니 하연 일행을 호위하며 앞서 걸었다.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정문에 이른 하연 일행은 그들을 막아서는 일단의 무리들을 볼 수 있었다. 빛의 사제를 뜻하는 흰 사제복 앞에 검이 정교하게 수 놓여진 법복의 모습은 누구나 그들이 성기사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게다가 그들 대부분이 붉은 색과 푸른 색의 서클렛을 하고 있는 것이 불의 사제와 바람의 사제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연 일행을 호위하던 왕실 기사단은 갑자기 그들을 막아서는 자들이 성기사단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희들은 왕실기사단 소속으로 여왕폐하의 명으로 이분들을 모시고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성기사 여러분들이 무슨 일로 저희들의 앞을 가로막으시는 겁니까?" 그러자 성기사 단장인 페이런이 왕실 기사단과 하연 일행을 쓸어보다가 하연에게 시선을 멈추더니 말했다. "저 어둠의 사제를 우리에게 건내 주시오. 그것밖에 우리의 볼일은 없소." 순간 그 왕실기사는 난처한 표정으로 하연과 성기사단을 번갈아 보았다. 하연은 마치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라는 듯 뻔뻔한 얼굴로 자신을 쏘아보는 페이런의 얼굴을 무심하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왕실기사는 하연이 무슨 죄를 지어 성기사단이 그녀를 잡으러 왔는지 몰라도 기사로서 레이디인 그녀를 넘겨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페이런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저희에겐 레이디와 그 일행들을 여왕님께 모시고 가야하는 임무가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그녀를 내어줄 수는 없습니다." 페이런은 심하게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 여인은 어둠의 사제로 빛의 고위 사제님이신 프레인님을 살해한 자다. 우리에게 넘겨라!" 왕실기사들은 그 말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생김새로 보아 그런 짓을 한 여인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사담과 카리스, 미루엘은 싸움을 준비했다. 왕실기사들이 하연을 성기사들에게 넘길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왕실기사들이 눈으로 서로 예기를 주고받더니 페이런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성기사단에게 신의 명령이 그 무엇보다 우선하듯 저희들은 왕실 기사단인 만큼 왕의 명령이 그 무엇보다 우선합니다. 왕께서 저희들에게 저 레이디와 일행들을 모셔오라고 명하신 만큼 저희들은 그 명을 따를 뿐입니다." "......할 수 없군." 페이런이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며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자 다른 성기사들과 왕실기사들 또한 일제히 검을 빼어들었다. 잠시 긴장된 대치상태가 흐르는 가운데 막 페이런이 공격해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하연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성기사단이 신의 명령을 무엇보다 우선시한다고......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순진한 사람이군. 그런 바보같은 말을 믿다니......" 페이런이 화가 나서 더욱 가라앉은 목소리로 하연을 쏘아보며 물었다. "지금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 성기사들이 신의 명령을 우선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하연은 그런 페이런의 얼굴을 요모조모 살펴보더니 말했다. "역시 찔리는 구석이 있나보지요? 그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걸 보니. ......하긴 찔리지도 않으면 그건 인간이 아닌 거지, 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분노를 억누르며 페이런이 다시 물었다. "......무슨 뜻인지 설명을 해 보시지요." 하연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신을 보았나요? 신의 음성을 들어 보았나요?" 페이런과 성기사들은 순간 움찔하며 아무 말도 못했다. 하지만 실제로 신의 음성을 듣거나 본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들은 말도 안돼는 물음이라고 생각했다. 신은 보거나 듣는 게 아니라 느끼고 믿는 존재가 아니던가? 페이런이 말했다. "실제로 그 분의 음성을 듣지는 못했지만 그분이 남기신 말씀을 따르는 것이니 그 분의 뜻을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성기사들도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전 신이 직접 성서를 썼다고는 들어보지 못했는데요? 결국 그 성서도 인간이 쓴 것. 인간의 명을 따르고 있던 것 아닌가요? 게다가 대부분의 사제들이 신의 말이라도 자신에게 이로운 말만 듣지요, 안 그런가요?" 충격을 받은 성기사들을 보며 하연일행은 연민에 찬 눈길을 그들에게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연의 언변에 말려 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여태껏 보지 못했으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페이런이 뒤늦게 억지로 쥐어짜듯 반론했으나 그의 말속에 들어있는 당황하는 빛을 감추지는 못했다. 하연은 그런 성기사들의 표정을 보며 속으로 집으로 방문하는 전도사들에게 유달리 많은 시간을 할애한 보람이 있다고 느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왜 여기 있지요? 여러분은 무력으로 절 없애기 위해 여기 있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잊으셨나 보지요 제가 마신 소환사라는 것을. 제가 원하지 않는 이상 여러분들은 저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불의 고위사제인 프레인님의 죽음은 제 뜻이 아닌 신의 뜻이었습니다. 아니면 어린 나이인 제가 프레인님의 신성력을 능가해 그 분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성기사들은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연의 일행들은 하연이 나이에 비해 동안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모르는 성기사들은 하연의 나이를 열 여섯에서 일곱정도로 보고 그녀의 나이에 고위사제인 프레인님의 성력을 능가할 수는 없다고 단정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신 카이람님이 자신의 신자인 프레인님을 죽였다고는 것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로서도 상부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려는데 그것을 미리 짐작한 하연이 말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저를 처단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여러분들은 명을 받았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신의 명이 아닌 인간의 명. 따라서 여러분들은 신의 도구가 아닌 인간의 도구일 뿐이라는 겁니다." 페이런은 창백한 안색으로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자신이 한낱 인간의 도구라니 그는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페이런의 모습이 안되어 보인 하연은 그를 위로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인간이겠지요?" 무슨 뜻인지 몰라 모두 어리둥절한 채 하연을 쳐다보자 하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의 신이신 마신 카이람님은 전쟁의 신이십니다. 그래서 전쟁을 무엇보다 좋아하지요. 따라서 그 분의 신도인 저로서도 마땅히 그 분을 쫓아 전쟁을 일으켜야 하겠지만 저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 분을 뜻을 쫓을 수가 없었답니다. 오히려 인간이기 때문에 그 분의 뜻에 반기를 들고 그 분에게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빛과 어둠의 전쟁을 막고야 말겠다고......" 하연 일행을 제외한 모두가 놀라서 숨을 들이키는 가운데 하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페이런과 성기사들에게 말했다. "돌아가세요. 여러분들은 저를 어떻게 할 수 없어요." 성기사들 사이에 무거운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한 성기사가 날카로운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지금 어둠의 사제께서는 저희에게 마신 카이람님에게 대항을 선포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더 이상 마신 소환사가 아닌데 어째서 저희가 사제님을 모시고 갈 수 없다고 하시는 겁니까?" 순간 미루엘과 쟈스란의 얼굴이 흑색으로 변해갔다. 하연이 괜한 말을 하는 바람에 이제 어쩔 수 없이 성기사단에 의해 잡혀가게 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하연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다만 한탄하듯 중얼거렸을 뿐. "이래서 정보가 빨라야 한다니까. 그래야 저렇게 멋모르고 아무에게나 덤벼들지 않지." 그러면서 그녀는 은근슬쩍 목걸이와 반지를 만지며 두 손을 높이 치켜들고는 외쳤다. "소환!" 역시 이런 것은 폼이 멋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러자 불의 정령 로우와 물의 정령 사이라가 그 신비한 모습을 장내에 들어냈다. 처음 정령을 접하는 성기사들과 왕실기사들은 정령들의 신비한 모습에 감탄보다는 공포를 느끼는 모습이었다. "무슨 일인가, 주인?" 로우가 따분하다는 투로 장내를 돌아보며 물었다. 하연이 말했다. "아! 이번에는 그냥 과시용으로 불러봤어." 순간 로우의 도마뱀 형상주위로 불기운이 쫘악 퍼져 나가는 듯 하더니 로우가 으르렁거렸다. "......그냥 과시용으로 불렀단 말이냐?" 그 때였다. 성기사들 사이에서 웅성거림과 함께 외침이 들려왔다. "마, 마족이다!" "젠장! 이제는 나 불의 정령 로우가 마족이라는 매도까지 당하다니...... 주인 한번 잘못 만나 내 꼴이 정말 우습게 변했군." 하지만 그런 로우의 투덜거림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하연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고 하연은 로우의 투덜거림이 재미있을 따름이었다. 그 투덜거림 속에 담긴 로우의 기분 좋아하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 또한 그렇게 좋은 감정을 마치 귀찮은 일인 듯 싫어하고 있는 듯이 말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로우가 삐딱하게 말하는 반면 사이라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다. "과시용이라 해도 불러주신 것만으로도 기쁜걸요. 주인님이 제 이름을 불러주시는 게, 제 목소리를 들어주시는 게 제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어 사이라는 무엇보다 기쁘답니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말하는 사이라의 말에 하연은 더욱 자주자주 그들을 불러주고 이름을 불러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성기사 단장인 페이런을 쳐다보았다. 페이런은 굳어진 얼굴로 정령들을 보더니 말했다. "마족이라니...... 아무리 어둠의 사제라고 할지라도 신을 모시는 사제의 본분으로서 어떻게 마족을 소환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마족이 아니라 정령이었지만 그 사실을 말해주고 확인시켜 주려면 귀찮을 거라고 생각한 하연은 건성으로 대꾸했다. "뭐, 마신도 소환하는데 마족이라고 소환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그리고 그 말에는 어느 정도 하연의 진심이 담겨있었다. 마족을 소환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렇지 알고 있다면 서슴없이 소환했을 것이다. 마족이라고 해 보았자 결국 마신이나 마왕 같은 것 들보다는 한참 아래의 녀석들이 아닌가? 그 동안 마신이나 마왕들만 상대하다보니 마족이라는 존재가 하연에게는 상당히 우습게 생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페이런은 물론이고 하연의 일행들마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은 채 하연을 보았다. 페이런이 말했다. "좋습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지요. 하지만 다음 번에는 이렇게 쉽게 물러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신 소환사이고 같은 사제로서 존경하는 바가 없지 않아 오늘은 이렇듯 정중하게 모시고 가려고 했습니다만 마족까지 소환한다는 것을 안 이상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제부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할 것이니 말입니다. 그럼, 곧 다시 찾아 뵙지요." 물러가는 성기사들을 보며 하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렸다. "마음대로!" 그래봐야 저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갈루마는 생각이 다른 듯 중얼거렸다. -앞으로 상당히 피곤해 지겠어.- 늦었지요? 낮에 올리려고 했는데......^^ 즐거운 시간 되세요. 전날 여왕의 즉위식이 있었던 만큼 축제 분위기가 되어야 마땅할 슈이센 왕궁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비록 왕의 친딸이라고는 하지만 왕이 정한 계승자도 아니었고 그저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나 귀족들에 의해 추대된 왕이고 보니 백성들이 모두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백성들의 인망을 얻고 있던 아르센의 처리문제를 둘러싸고 연일 귀족회의가 벌어지고 있었으니 자연 궁성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연 일행은 접객실로 안내되었다. 그들의 만남을 다른 귀족들이 모르게 처리하려는 리켈만의 의도였다. 하연 일행이 헤미아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고 그들에게 붙으려는 귀족들의 움직임을 막으려는 계산이라고나 할까? "손님들께서 듭십니다." 헤미아는 슈이센 왕실에서 편찬한 왕실역사에 대한 책을 읽고 있다가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고 명했다. "들여라!" 의젓하게 창을 등지고 앉은 헤미아의 백금발이 지는 석양으로 인해 화사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헤미아의 힘찬 목소리에 안심하며 안으로 들어섰던 하연일행은 그런 헤미아의 모습에 잠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앉는 것이 그녀의 운명인 듯 너무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처음 그들이 보았던 헤미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기에 앉아 있는 것은 한 나라의 여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연은 정중하게 고개숙여 인사했다. "하연이 슈이센의 여왕 헤미아 그라시엘님께 인사올립니다." 이어 다른 일행들도 모두 정중하게 헤미아에게 인사하자 일순 헤미아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의자에서 일어나려다가 다시 앉았다. 그녀 자신은 변했지만 그녀가 원한 것은 예전에 자신을 거두어 주겠다던 하연 일행이었지 지금의 정중한 인사를 올리는 하연일행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받아들여야 했다. 이게 자신이 선택한 길임을. 하연이 물었다. "무슨 일로 저희들 찾으셨는지요?" 순간 헤미아는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쉽게 말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리켈만이 들어섰다. 귀족회의에 참여하고 있다가 하연 일행이 들었다는 소리에 급히 달려온 것이었다. "폐하, 반가운 손님이 오셨다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들었습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의 모습에 헤미아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연일행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나를 도와줘. 내 그대들에게 지위와 영지를 하사하겠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리켈만은 그 말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급히 말했다. "하지만 폐하, 그런 일들은 가볍게 결정지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귀족회의에 안건을 올리고......" 하지만 그의 말은 하연의 말에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싫은데요!" 하연이 단호하게 거부했던 것이다. 놀라서 리켈만이 입을 다물지 못하는 가운데 헤미아가 어두어진 안색으로 물었다. "......왜지?" "다른 할 일이 있어." 정말 할 일이 산재해 있었다. 빛과 어둠의 전쟁도 막아야 하고 로베인도 구해야 하고 고대 마법왕국 트리엔시라의 슈마왕의 야망도 막아야 하는 등 과연 그녀의 힘으로 할 수 있을지 장담조차 못할 큰일들이 널려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헤미아로서는 자신을 도와주지 않겠다는 하연의 말이 불쾌할 따름이었다. "못하겠다고? 내가 명령을 해도? 여왕인 내 말을 거역하겠다는 거야?" 차갑게 살기마저 실린 듯한 헤미아의 음성에 미루엘과 쟈스란은 몸을 움찔 떨지 않을 수 없었다. 헤미아에게서 그런 음성이 흘러나올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리켈만마저도 놀란 모습이었다. 그러나 하연이나 사담, 카리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그 정도의 살기에 눌릴 그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연이 말했다. "헤미아는 왕이지만 나의 왕은 아니니까. 그러니 따를 필요가 없지. 나의 왕은 오직 한 사람 뿐이니까." 헤미아가 이제는 표정까지 차갑게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하연은 왕은 아르센 뿐이라는 건가?" "응? ......푸하하하하!" 하연은 너무 웃긴 예기를 들었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설마, 아르센이 어떻게 나의 왕이 될 수 있겠어? 난 이 슈이센의 사람이 아닌데......" "그럼, 하연의 왕은 누구지? ......어떤 왕이지?" 모두 궁금하다는 얼굴로 쳐다보는 가운데 하연이 말했다.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시고 백성들을 위해 일생을 사셨던 아주 훌륭한 왕이셨지, 세종대왕이라고. 내 나라의 긍지이신 그 분만이 나의 유일한 왕이야." 헤미아는 그 때 처음으로 하연의 생각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에 짜증이 치밀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인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백성들을 위해 사는 왕이라니...... 그 어떤 역사서에도 왕을 위해 백성들이 있는 것이지 백성들을 위해 왕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혼란스럽기만한 헤미아였으나 그런 헤미아의 마음을 모르는 듯 하연은 그저 자랑에 부픈 얼굴이었다. 그 때 카리스가 물었다. "그런데 폐하의 사촌이신 아르센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왕궁에 온 김에 좀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순간 헤미아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면서 리켈만이 물었다. "무슨 이유인가?" 카리스는 마치 왜 그 물음에 신경을 곤두세우지는 모르겠다는 듯 태연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유는요? 뭐, 특별한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저 알고 지내던 사이이니 잘 있는지 궁금하기 때문이지요." "그럼, 굳이 만날 필요가 없겠군요." 리켈만이 딱 잘라 거절하자 쟈스란은 불안한 표정으로 카리스를 보았다. 이제 아르센을 구하기는 틀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카리스는 리켈만을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헤미아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생각으로서 자신의 뜻을 전하려는 것이었다. '인간, 내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잊은 거냐? 슈이센 왕국이 하루 아침에 날아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내가 하는 일을 막지 마라!' 그 생각을 읽은 헤미아는 고민에 빠졌다. 쟈스란, 미루엘, 사담의 생각을 읽어 보건데 아르센을 구해 그를 왕위에 올리려는 계획은 없고 그저 단순히 아르센의 목숨을 걱정하는 것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의 생각은 다를 것이다. 그가 지금 살아남는다면 분명 제기를 노려 세력을 모을 것이고 그러면 그를 죽이기가 더욱 어려워 질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죽이자니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망설이고 있는데 생각에 잠긴 헤미아의 모습에 그녀가 하연 일행이 아르센을 만날 수 있게 해 주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고 생각한 리켈만은 다급해졌다. 카리스가 마법사인 이상 그가 어떤 방법을 써서 아르센을 탈출시킬지도 모르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리켈만은 어쩔 수 없이 귀족회의에서 내 놓은 제안을 그로서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제안이었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모두 리켈만을 쳐다보는 가운데 그가 말했다. "실은 귀족회의에서 지금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갈로아에 군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했답니다. 그리고 그 총사령관에는 아르센님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저도 나라안의 사정이 고려할 때 아르센님이 잠시 다른 나라에 가 있는 것이 나라안의 안정을 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만......." 하연은 어리둥절했다. 아르센은 나이가 아직 어린데 어떻게 총사령관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교활하게 빛나는 리켈만의 눈빛을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아르센을 죽이려는 수작임을. 리켈만이 계속 말했다. "하지만 걱정되는 것은 그 결정을 아르센님이 받아 들이실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나서 그 결정을 받아들이도록 아르센님을 설득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면서 리켈만은 헤미아를 보았다. 헤미아는 리켈만의 생각을 읽고는 고개를 끄덕여 하연 일행이 아르센을 만나는 것을 허락했다. 전쟁 중에 전사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설령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그 때쯤이면 왕실도 안정을 되찾아 그가 쉽게 반란을 도모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니까. 카리스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신의 축복이 슈이센 왕실과 언제나 함께 하길 바라겠습니다." 그러자 하연 일행도 우르르 각기 인사의 말을 올리고는 물러나려는데 헤미아가 문뜩 입을 열어 하연을 불러 세웠다. "......하연!" 하연이 뒤를 돌아보았다. "한가지만...... 내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순간 하연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하연의 기색을 느낀 갈루마가 설명해 주었다. -너희를 떠나 리켈만을 따라가 여왕이 된 것이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하는지 묻는 거다.- "......아니. 잘못된 선택은 없는 거니까. 후회하는 선택은 있을지라도...... 네가 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날이 무지무지 덥군요.^^ 그래서 하루종일 자다 일어나니 별이 다 보입니다. 하아~ 벌써 저녁이라니... 시간 참 무지 빠르게 흘러가는 군요. 글은 진척도 없고만....ㅜ.ㅜ 아르센은 소년에서 청년으로 변해 있었다. 갇혀 있으면서 고민이 많았으리라고는 짐작했지만 그것이 사람을 한 순간에 이렇게 변화시켜 버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한 하연일행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한참 만에야 하연이 입을 열어 말했다. "멋있어졌군요. 고민이 인간을 성숙하게 만든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나도 이제부터 고민 좀 많이 해야겠어요." 그 말에 아르센은 쓴웃음을 하연 일행을 보았다. 그 가운데 힐끗 쟈스란을 쳐다보았으나 그의 눈에는 별다른 동요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철없는 풋사랑의 시간이 지나간 듯. 그리고 물었다. "여긴 어떻게 오신 겁니까?" "시간이 별로 없어서 간단히 말하겠네." 그러자 카리스가 나서서 설명했다. 그와 사담이 리켈만의 협박으로 헤미아를 북쪽의 탑에서 구한 것과 헤미아에게서 그들이 아르센을 총사령관으로 파견하는 문제를 설득해 달라는 부탁 받았다는 것 등을. 하연 일행은 어찌되었든 헤미아를 구한 일로 결과적으로 순조롭게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아르센의 길을 방해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만큼 어느 정도 아르센의 원망을 들을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르센은 전혀 그들을 원망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미루엘이 의아해서 물었다. "저희를 원망하지 않습니까?" "원망이요? 전 지금 과거의 일이나 따져서 원망하고 있을 시간이 없답니다. 그러기에는 앞날이 너무 암담하거든요."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아르센의 말에 하연은 대단하다는 듯 어깨를 두들이며 말했다. "그래요. 그렇게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걸어요. 그러다 보면 살길이 보이겠지요." 그 때 잠자코 있던 사담이 물었다. "어떻게 할 겁니까? 사령관으로 가실 겁니까?" 아르센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 또한 자신이 사령관으로 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그들이 갈로아의 요청에 따라 파병군을 조직해 보냈을 때 갈로아의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찌되었든 바칸은 문명도 발달하지 않은 야만인들의 국가였고 병사들 또한 훈련되어 있지 않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실상은 달랐다. 그들의 패배였다. 살아 돌아온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들의 정보에 따르면 바칸의 기후가 너무 무더워 풍토병에 걸려 죽는 사람이 속출했고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그곳의 지형 때문에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싸움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런 곳에 아르센이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보내는 것은 결국 그에게 그곳에서 죽으라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물론 그곳에 가지 않겠다고 거부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왕족으로서 그 정도의 권리는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에 남아있는다고 해 보았자 그가 여기서 살아남는 다는 보장 또한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고민하던 아르센은 하연이 나단 하인베르크를 넘어서겠다고 호언할 정도의 지략가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물었다.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연은 왜 아르센이 자신에게 조언을 구하는지 몰랐지만 잠시 생각해 보다가 말했다. "저라면 총사령관이 되는 것을 선택하겠지요. 어렵고 괴로운 길이 되겠지만 그 길에 더 많은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어쨌든 그것은 제 경우고...... 선택은 아르센님이 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아르센은 그 말에 자신의 마음을 결정했다. 그 또한 괴로워도 더 많은 가능성이 있는 길을 선택하고 싶었으니까. "총사령관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전해주십시오." 하연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 때 아르센이 하연을 보며 다시 물었다. "레이디 하연, 제게 더 많은 가능성을 만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하연과 그 일행들은 그 말에 의아한 표정으로 아르센을 주시했다. "......저랑 같이 가 주시지 않겠습니까? 제 작전참모로서 말입니다." 그러자 하연이 미처 그 말에 대꾸를 하기도 전에 쟈스란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무슨 헛소리예요? 여자인 하연을 전쟁터로 데려가겠다니...... 기사가 맞는지 의심스럽군요." 그것은 사담과 카리스도 마찬가지인 듯 그들은 험악한 눈초리로 아르센을 노려보았다. 그들의 말에 아르센은 민망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자신의 말을 취소하지 않은 채 하연에게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하연이 자신의 군대에 합류해 준다면 살아 돌아 올 수 있는 확률이 그만큼 커질 것이 분명하다는 믿음이 그의 가슴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믿음이었다. 그녀의 지략이 뛰어나다는 확신 때문은 아니었으니까. 언제 그녀가 자신의 지략을 펼쳐 보이기나 했었는가? 그런데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뚫고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그래서였다. 무리인 줄 알면서도 그녀에게 자신과 같이 가줄 것을 권유한 것은. 하지만 그녀의 동료들의 반응에 반쯤 체념하고 있는데 하연이 방긋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좋군요. 가겠어요. 어차피 대륙을 모두 돌아야 하니 이 기회에 갈로아에 가보는 것도 좋겠지요." "하연!" "미쳤습니까?" "말도 안돼는 소리를!" 모두의 격렬한 반대의 목소리 속에서 아르센은 기적을 만난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며 감격해했다. 아직 신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아르센의 방에서 나오자 하연의 일행들은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연, 제 정신입니까?" 미루엘은 이래서 철부지 아가씨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하연을 노려보았다. "전쟁이 애들 장난일 줄 아는 겁니까?" "애들 장난이 되어가고 있지. 열다섯살 자리 총사령관이라니......" 정말 웃기는 일이라는 듯 이죽거리는 하연의 말에 미루엘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쟈스란이 말했다. "하지만 그는 남자입니다. 게다가 기사로서 교육을 받은 자고요. 그렇지만 하연은 아니잖아요? 죽을지도 모른다고요." "안 죽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결국 모두 죽게 되어 있는 것 아닌가? 좀 일찍 죽는다고 나쁠 것은 없지 않아?" 희죽 웃으며 말하는 하연의 말에 동료들은 어이가 없어서 잠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사담이 말했다. "견디지 못할 겁니다. 같이 밥을 먹고 웃고 떠들던 동료들이 잠시 후에는 죽은 시체로 널러져 있고 단지 적이라는 이유로 사람을 죽여야 하는 상황을 하연이 견딜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나직한 말이었지만 아픔이 섞여있어서 하연은 그것이 사담 자신의 일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용병이었으니 그런 상황이 빈번했으리라. 하지만 빈번하다고 그런 상황에서 일어나는 아픔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하연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에 사지를 비틀며 몇 번이나 기절을 하면서 이제는 그런 고통에 익숙해 졌다고 해도 다시 그 상황이 닥치면 똑같은 고통스러웠으니까. "괜찮아요. 견딜 수 없으면 울어버리면 되니까요." 그러면서 하연은 카리스에게 슬쩍 윙크를 보냈다. "아마, 그러면 분명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겠지요, 안 그래요?" 하연이 자신에게 윙크를 보내자 붉어지려는 얼굴을 가다듬느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카리스는 하연의 말이 머리 속에 들어오자 순간 얼굴이 해쓱해졌다. 전쟁 중에 하연이 눈물을 흘린다면? 그러면 분명 그 즉시로 싸움은 멈출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적군과 아군 할 것 없이 모두 하연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을 벌일 것이고 그것은 그와 일행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혼란을 떠올린 카리스는 하연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어대며 외쳤다. "안됩니다. 절대 울어서는 안 된다고요. 아셨습니까?" 그 격렬한 카리스의 반응은 이유를 모르는 하연 일행은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지었고 하연은 그저 피식 웃었다. 그러자 카리스는 불안해졌다. 어쩌면 하연은 전쟁을 멈추기 위해 일부러 울어서 사람들의 욕정의 목표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재차 다짐하듯 카리스는 하연에게 말했다. "명심하십시오, 하연.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전 인간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대륙의 모든 인간들을 죽여버릴지도 모릅니다." 섬뜩한 살기를 발하는 카리스의 눈초리에 미루엘, 쟈스란, 사담은 순간적으로 겁에 질려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러나 하연은 그 말속에 긷든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에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이에 카리스가 눈빛을 풀며 물었다. "정녕 갈 생각입니까?" "네. 비록 그 전쟁이 내 인생의 가장 비통한 기억일지라도 그 기억을 갖고 싶거든요." 하연의 일행들은 그런 하연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비통한 기억을 굳이 갖겠다는 건지. 하지만 그녀의 단호한 기색에 그들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연이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같이 가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정말 오랫만에 올리는군요.^^ 그 동안 더위 때문에 고생을 하느라고......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두편을 올릴 생각이고요. <마신 소환사> 아마 다음 주 쯤에는 출판이 될 것 같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리고요. 아마 곧 삭제에 들어가야 겠지요? 하이텔에서는 37회까지고요. 인터넷에서는 115회까지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여러분에게 행운이 깃들기를 바라며.... "지금 그 말이 무슨 말입니까?" 유트 뤼베아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아버지인 뤼베아 백작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비해 뤼베아 백작은 냉정한 눈으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못 들었느냐? 이번 귀족회의에서 내 너를 여왕님의 호위기사로 천거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님! 제겐 이미 주군이 있습니다." "아르센님이라면 잊어라. 죽은 자가 어찌 네 주군이 될 수 있겠느냐?" 유트의 얼굴이 굳어지며 말았다. "그분은 죽지 않습니다." "모르겠느냐? 그 분이 살아 계심은 혼란만을 가중시킬 뿐 슈이센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아버님께서 하신 말씀이었지요. 한번 주군을 정하면 그분과 죽음을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기사이다. ......전 그런 기사로 남을 것입니다." 쾅! 소리가 날 정도로 거세게 문을 닫아버리고 나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뤼베아는 백작은 착잡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모두 널 위해서다! 가문을 위해서란 말이다!" 그 소리를 들었지만 유트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솔직히 가문보다 자신의 목숨보다 아르센님이 중요하다고는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기억 속에 처음 아르센님을 만났던 그 순간이 지워지지 않는 한 아르센님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 날 유트는 무척 기분이 불쾌했었다. 훈련시간에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검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검이 아니라 무작정 상대를 죽이기 위해 휘두르는 살인 검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사가 목표였다. 주군에게 충성하며 레이디와 약자를 보호하는. 그런데 자신의 검이 누군가를 지킬 수 있는 검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으니 그것은 결국 그가 기사가 될 수 없다는 말이 아닌가? 답답했다. 어떻게 해야 자신의 검이 누군가를 지킬 수 있는 검이 될 수 있는지 그 방법조차 모르기 때문이었다. 무작정 집을 뛰쳐나가 거리를 거닐던 유트는 대 광장과 근접해 있던 루보아 숲에서 아직 황태자로 책봉되기 전의 아르센을 만났다. 백금발의 짧은 머리에 예쁘장한 얼굴로 자신보다 더 큰 목검을 땀이 범벅이 된 채 휘두르고 있는 소년을 본 유트는 자신도 모르게 발길을 멈추고 한참을 쳐다보았다. 분명 검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소년인 듯 엉성하기 이를 데 없는 자세와 휘두르기였다. 하지만 검에는 그 검을 휘두르는 자의 마음이 긷들기 마련이라고 했던가? 유트는 그 말이 진정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소년의 검은 비록 엉성하긴 했지만 누군가를 공격하기보다는 자신을 지키려고 애쓰는 마음이 전해져 왔던 것이다. 지키기 위한 검. 유트가 자신의 검과 소년의 검을 비교하면서 얼마 동안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을까? 잠깐 검 휘두르는 것을 멈춘 소년이 그런 유트를 보고는 놀란 듯 물었다. "넌 누구지?" "......유트 뤼베아!" "아! 네가 뤼베아 백작의 그 검의 천재라는 아들이구나!" 유트는 순간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이었다. 검의 천재라니...... 평소에는 당연하게 들었던 그 말이 눈앞의 소년에게서 나오자 갑자기 부끄러워졌던 것이다. 그와 함께 유트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신분을 알면서도 태연하게 반말을 하는 이 소년의 신분이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점이었다. 그런 유트의 의문을 눈치챈 듯 소년이 말했다. "난 아르센. 아르센 그라시엘이다." 유트는 두 눈을 휘둥그레지며 곧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이름은 곧 황태자로 책봉될 거라는 소문이 들렸던 왕족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신 유트 뤼베아가 아르센 그라시엘님께 인사 올립니다." "쳇! 우스운 꼴을 들켰군. 검의 천재라는 네 눈으로 보기엔 정말 한심한 모습이지? 왕족이라는 녀석이 검 하나 제대로 휘두를 줄도 모르니 말이야." 아르센은 겸연쩍은 듯 유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도 자신이 검에 재능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열심히 연습하기는 했지만 별 진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검사부를 잘못 두어 그렇다고 생각한 그의 부모는 검사부를 닦달하기 시작했고 이에 아르센은 검사부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짐짓 검에 흥미가 없는 듯 검술에 열성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듯 남들의 눈을 피해 혼자서 연습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들켜버렸으니...... 그 때 유트가 물었다. "한가지...... 아르센님은 검을 쥘 때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아르센은 지금 유트가 자신을 가르치려고 하나 하는 생각에 약간 불쾌해진 기분으로 유트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자신이 검에 재능이 없다고는 해도 자신보다 얼마 나이가 많지 않아 보이는 소년에게 검을 배운다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유트의 얼굴은 그것이 아닌 듯 진정 이유가 궁금하다는 빛만으로 가득해있었다. 이에 아르센은 의아하면서도 진지하게 대답해주었다. "내가 처음 검을 잡을 때 검사부가 내게 말했었지. 검을 드는 이유는 남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야 된다고. 자신의 생명과 명예를...... 검사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순간 유트는 강한 충격을 받았다. 아르센의 말은 분명 그도 처음 검을 잡을 때 아버지에게서 들었던 말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어느새 상대를 더 빠르고 정확하게 죽일 수 있는 검술수련에만 의존해 그와 같은 검의 기본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인 유트는 진정으로 아르센에게 고개를 숙여 말했다. "대답 감사합니다. 저에게 귀중한 것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 뒤 유트의 검술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공격위주였던 검이 공격과 수비가 완변하게 이어진 형태로 변한 것이었다. 얼마 후, 아르센이 황태자로 책봉되자 유트는 그의 호위기사로서 다시 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기사로서의 자신을 일깨워준 아르센에게 그는 주군으로서의 충성을 맹세했다. 그런 아르센을 배반하고 다른 주군을 섬긴다는 것은 유트에게 기사로서의 자신을 버리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말이었다. 그 길로 유트는 파병군에 자원했다. 다음 날 그걸 안 아르센이 화가 난 얼굴로 유트의 얼굴에 그의 자원서를 던지며 말했다. "유트, 너의 자원서는 받을 수가 없다. 그러니 그런 줄 알아라!" "어째서 입니까?" 유트는 전혀 동요 없는 얼굴로 물었다. "몰라서 그러느냐? 넌 뤼베아 가문의 장남이자 외아들이다. 가문의 문을 닫겠다는 것이냐?" "전 제 가문의 이름이 불명예스럽게 남겨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제가 명예를 지킬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아르센님." 그 말에 아르센은 더는 유트의 자원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가 함께 한다면 그의 전력에 큰 힘이 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유트는 혼 대륙에 얼마 없는 비록 초입이긴 하지만 그레이트 소드의 경지에 이른 검사였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전례가 없을 정도로 빠른 귀족회의의 통과를 거쳐 여왕의 명령서가 군에 전달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군자금을 비롯한 여러 가지 군수품과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하연 일행은 연일 용병길드에 모여 소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리밍스는 오랜만에 만나는 하연의 옷자락에 달라붙어 한시도 떨어지려 들지 않았다. 용병길드는 매우 북적거리고 있었다. 라마드에서 어둠의 사제들이 모두 사라지고 빛과 어둠의 전쟁이 대륙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자 불안한 귀족가와 상인가에서 너도나도 용병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몇몇 용병들은 한가한 표정으로 하연일행들을 둘러싸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 용병들은 모두 하연 일행과 함께 갈로아로 떠나기로 계약된 용병들이었다. 비전투 인원인 하연과 쟈스란 그리고 미루엘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미루엘도 트레져헌터 치고는 검술에 능해 소드 스킬러에 들 정도의 실력자이긴 하지만 아직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는 만큼 그녀도 전쟁터에서는 비전투 인원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 때 갑자기 얼굴이 좀 까무잡잡하고 귀여운 용모의 여자 용병이 용병길드가 떠나가라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 보였다. "푸하하하하!" 그 괴상한 웃음소리에 무슨 일인가 싶어 길드에 모인 모든 용병들이 한번씩 그들 쪽을 힐끔거리며 쳐다 볼 정도로 큰 소리로. 때문에 하연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일 파병군과 함께 갈로아로 떠나게 되니 저녁때 다 같이 모여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한 것밖에는 없는데 갑자기 그녀가 미친년처럼 웃어대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모습에 일명 바람의 용병이라고 불릴 만큼 명성 있는 바람둥이 미남 용병 웨이가 말했다. "놀라지 마십시오, 레이디. 술 먹으러 가자는 소리에 좋아서 저러는 것 뿐이니." 그리고는 차마 못 봐주겠다는 표정으로 율리아에게 말했다. "율리아, 그렇게 술을 좋아하다 가는 언젠가는 몸이 술로 변해서 비론트에게 잡아먹힐걸." 그 말에 사담보다 장신에 근육이 상당히 발달해 있으면서 깊이 패인 검 자국이 가슴에서 턱까지 나 있는 소시언이라는 용병이 말했다. "그럴 리가! 율리아라면 비론트를 보자마자 이게 웬 횡재냐 하면서 오히려 잡아먹으려고 들걸." 순간 주위의 용병들이 그 말에 동감한다는 듯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이자 율리아는 눈을 부라리며 그들에게 말했다. "뭐야? 내 미각을 모욕해도 유분수지. 내가 비론트따위를 먹을 것 같애." 율리아는 방방 뛰었으나 모두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라는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 때. "비론트가 뭐지요?" 하연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율리아가 놀랍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지며 말했다. "아니, 어떻게 어둠의 사제가 비론트를 몰라? 너 진짜 어둠의 사제 맞냐?" -참내. 아주 나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광고를 하지 그러냐? 그런건 나중에 나에게 따로 조용히 물어도 되잖아? 그렇게 눈치가 없어서......- 머리 속에서는 한참 갈루마의 잔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카리스가 조용히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비론트는 술을 좋아해서 늘 술을 입에 달고 다닌다는 하급 마족을 이르는 말입니다." 하연은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율리아가 그 비론트를 잡아먹을 정도로 술을 좋아한다는 사실에 무언가를 떠올린 하연은 율리아와 용병들에게 확실하게 말해 두었다. "계산은 각자 알아서 하도록 하지요." 순간 다른 용병들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율리아만은 울상이 된 불쌍한 표정으로 하연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하연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밑 빠진 독에 물을 아니 술을 붙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지금 여기는 비가 오거든요. 비가 더위까지 깨끗이 쓸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그 동안 메일로 독촉장 보내주신 분들 그리고 재미있었다고 감상 보내주셨던 분들 모두 너무 너무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더위로 인해 먹은 스트레스가 많이 가라앉았었거든요. 일일히 감사인사 못드려 죄송하고요. 그럼.여러분들도 건강하세요.^^ 그 때였다. 갑자기 용병길드의 입구 쪽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지요?" 미루엘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이유를 알아보러 가려하자 소시언이 황급히 말류하며 얼굴을 붉힌 채 말하는 것이었다. "아, 아닙니다, 레이디. 제, 제가 가서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그냥 앉아 계십시오." 미루엘은 거북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한번도 여자로 대우받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소시언이 자신을 레이디로 대접해 주는 것이 불편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사담이 어떻게 생각할지도. 하지만 그런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사담은 미루엘과 소시언의 관계에 대해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여전히 검 손질하는 일에만 온 정신을 쏟고 있었을 뿐이었다. 잠시 후 소시언은 라마드의 길드 마스터와 함께 두 남녀를 데리고 들어왔다. 뜻밖에도 그들은 하연 일행이 익히 아는 사람들로 바로 세르기아스와 질리안이었다. 이리저리 길드안을 둘러보던 세르기아스와 질리안은 사담을 보자 얼굴이 확 밝아지며 달려왔다. "스승님!" 사담은 의아한 얼굴로 검을 거두어들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너희들이 여긴 어쩐 일이냐?" 그러나 세르기아스와 질리안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길드 마스터가 사담에게 물었다. "이들이 정녕 사담님의 제자 분들이십니까?" 사담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검술 경기에서 우승한 자는 제자로 받아 주겠다고는 했지만 지금 상황이 제자를 받아 가르칠만한 상황도 아니었고 세르기아스는 맞다고 쳐도 질리안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사담은 길드 마스터의 말에 동의해 달라는 듯 애처로운 눈길로 자신을 보는 두 남녀의 시선을 무시하지 못하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말았다. 그러자 길드 마스터인 토인스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세르기아스와 질리안을 보더니 말했다. "귀족신분에 용병이 되려 하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긴 하지만 사담님의 제자분들이라니...... 그럼 전 곧 이 분들의 용병길드 가입서류를 작성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사담은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감추지 못하고 세르기아스와 질리안에게 물었다. "용병이 되려고 왔느냐?" "네!" 세르기아스와 질리안은 동시에 크게 대답했다. 사담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왜?" 그도 그럴 것이 용병이란 천한 직업이었다. 비록 사담이 그 명성이 널리 퍼져 용병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용병계에서의 일일뿐 기사들은 그를 여전히 사람취급도 하지 않는다. 돈만 주면 얼마든지 고용해 부릴 수 있는 하인취급을 할 뿐. 그것이 용병이란 존재였다. 그런데 귀족의 신분으로 그런 천한 용병일을 하려 한다니 사담은 묻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세르기아스가 말했다. "저희들은 한 주군을 섬기기보다는 저희의 검을 필요로 해주는 보다 많은 사람들 편에 서서 살고 싶습니다. 그것이 설령 빵 한 조각밖에는 얻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순간 용병 길드 안은 조용한 침묵에 휩싸였다. 모두 저런 귀족들도 있었구나 하는 얼굴들이었다. 이에 그들의 결정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안 사담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 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으려는데 질리안이 물었다. "이번에 스승님과 동료분들이 아르센님의 파병군과 함께 갈로아로 가신다면서요? 저희도 동행하고 싶습니다." "......뭐?" 사담은 순간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었다. 아무리 검술을 익혔다고는 하지만 한번도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고 실전 경험도 전무한 자들이 용병이 되자마자 전쟁터로 가겠다니...... 하지만 자신 또한 열 세 살 때 집을 나와 용병이 되자마자 전쟁터로 갔다는 것을 떠올리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귀족가에서 자란 저들이 그 일을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 된 사담은 자신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말하고 말았다. "용병이 된 후 너희들이 무슨 일을 하건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행여 내 도움을 받을 생각이라면 잊어버려라! 난 지금 고용되어 임무에 매여 있는 몸. 너희들에게 신경 쓸 겨를 따위는 없다!" 그 차가운 말에 세르기아스와 질리안은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결코 스승님께 폐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저희 또한 용병으로서 고용되면 그 일에 최선을 다할 생각이니까요." "좋아요. 그렇다면 제가 두 분을 고용하지요. 어때요?" 그 때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하연의 말이었다. "네?" 그러자 세르기아스와 질리안은 물론이고 사담마저도 놀란 표정으로 하연을 돌아보며 외쳤다. "하연!" 질리안이 대충 하연이 사담의 동료라는 것은 눈치챘지만 정확히 어떤 일로 고용하는 건지 알아야두어야 한다는 생각에 물었다. "어떤 일이지요?" "여기 다른 용병들과 같이 저와 제 일행들을 지키는 일입니다. 제가 갈로아에서의 일이 끝날 때까지요. 전쟁터에서 사람을 지키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하시겠습니까?" "좋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기꺼이......" 자신들의 계획대로 사담과 함께 갈로아로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세르기아스와 질리안을 보며 가볍게 한숨을 쉰 사담은 하연에게 잠깐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자신을 생각해 하연이 그들을 배려한 것이라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하연은 그런 그에게 가볍게 웃어 보이고는 율리아에게 물었다. "그래, 어느 술집으로 갈까요?" 그러자 율리아는 역시 술꾼답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재빨리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엔리시크의 심장>이지." 거대한 나무 한 그루를 끼고 사방이 탁 트이게 지은 이층의 작은 술집인 <엔리시크의 심장>은 율리아가 추천한 집답게 그 명성이 자자한 듯 북적거리고 있었다. 하연 일행과 용병들은 이층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층은 일층의 반밖에 되지 않아 아래를 내려다보면 일층이 다 내려다보였고 고개를 들면 지붕이 없어서 밤하늘에 별들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와! 멋지군요." 처음으로 와 보는 하연과 쟈스란은 절로 탄성을 터트렸다. 그 가운데 율리아는 즐거운 표정으로 주문을 했다. "여기 술 세 통만 우선 갖다 주세요!" 점원으로 보이는 어린 소년은 익히 율리아를 알고 있는 듯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카리스나 쟈스란 그리고 세르기아스와 질리안은 놀란 듯 눈이 크게 떠졌으나 하연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술 세 통을 맥주 큰 컵으로 세 컵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 장정 몇 사람이 큰 술통을 각자 이고 들어오자 그녀의 눈 또한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그 술 세 통이 진짜 큰 통으로 세 통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자, 잠깐 율리아...... 아까 우선이라고 하지 않았어?" 율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하지. 저 정도야 입가심 아니겠어?" "하!" 하연은 새삼스럽게 자신이 고용한 용병들의 수를 세어보았다. 세르기아스와 질리안은 제외하더라도 율리아, 웨이, 소시언. 그리고 단검이 특기라는 조르, 쌍둥이인 헌스와 이너드. 이렇게 여섯 이었다. 그런데 술 세 통이 입가심이라니...... 그러나 하연의 놀람은 그것이 시작에 불과했다. 율리아가 술 한 통을 들고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하더니 얼마 후 술 한 통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그럼에도 율리아는 마치 시원한 물 한잔을 들이킨 듯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아! 좋다!" 하연이 넋을 잃고 율리아의 체격에 그 많은 양의 술이 다 어디로 들어가는지를 과학적인 접근방법이 통하지 않을 듯 싶자 신비주의 학설마저 동원해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하는 동안 어느새 그녀의 앞에도 술 한잔이 따라져 나왔다. 율리아가 술 한 통을 물처럼 마셔 버렸기 때문일까? 하연은 미처 그것이 술이라는 생각을 잊어버리고 벌컥 물 마시듯 들이켜 버리고 말았다. 순간 가슴에서 불이 확 치밀어 오르고 얼굴에 열이 확 오른 하연은 그 뜨거운 기운을 식힐 요량으로 웨이가 따라 준 술을 다시 벌컥 들이켰다. 그렇게 몇 잔을 마셨을까? 벌컥 벌컥 술을 들이키는 하연의 모습에 쟈스란이 괜찮으냐고 물었지만 하연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머리가 멍한 것이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던 것이다. 술에 취하고 기분에 취한 하연은 벌떡 일어나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방에서 팡파레를 울리게 했던 그 큰 목소리로. "희망이여! 빛이여! 아득한 하늘이여! 나의 백마가 울부짖는다.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바람을 가르는 갈기. 나 소리 높이 외친다. 나 소리 높이 외친다." 크게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었을까? 어느 정도 술이 가신 하연은 소란스런 분위기가 가시고 조용해진 상태에서 자신의 노래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자 번뜩이는 생각에 하연은 가사를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 "위대한 이 대륙의 평화를 위해! 오늘도 달린다. 오늘도 달린다." <엔리시크의 심장>에 모인 사람들은 하연의 노래에 가슴에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하연은 다시 노래를 불렀다. "어둠이여! 빛이여! 아득한 희망이여! 우리의 대륙이 울부짖는다. 지축을 흔드는 통곡. 강 되어 흐르는 눈물. 나 소리 높여 부른다. 나 소리 높여 부른다. 위대한 이 대륙의 평화를 위해! 오늘도 부른다. 오늘도 부른다." 목이 터져라 하연은 몇 번이나 불렀다. 그러자 차츰 술집에 모인 사람들이 따라 부르기 시작했고 그 노래 소리에 길 가던 사람들도 발길을 멈출 정도였다. -이게 네가 말한 평화를 부르는 노래인 거냐?- 비꼬는 듯 하면서도 약간 목이 메인 목소리로 갈루마가 물었다. 분명 따라 부르기 쉬운 곡인 것은 분명했지만 그 곡이 유치하게 이를 데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노래를 멈추고 다른 사람들이 부르고 있는 노래를 듣고 있던 하연은 갈루마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보다는 이 대륙의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이 평화를 부르는 노래가 아닐까?"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 노래 소리, 웃음소리가 술집 안을 가득 채웠다. 하연의 일행들도 분위기에 취한 듯 용병들과 같이 술잔을 기울이며 노래했다. 흥청망청 엔리시크의 심장의 흥겨운 분위기가 여러분과 함께 했으면 좋겠군요.^^ 제 목 : 마신 소환사 -47(125)- 등록자 : 허풍선이(김소영) 등록일 : 08-27 조회수 : 271 그 때 점원 소년이 보라색을 띈 맑은 액체의 술 한 잔을 들고 오더니 하연에게 말했다. "손님들 중 한 분이 사제님의 노래를 들은 보답으로 <엔리시크의 심장>에서 가장 오래된 라미엘력 563년산 <러페어>를 사셨습니다." "와아!" 순간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러페어는 루보아 숲에서 나는 에베나라는 열매로 맺은 술 중에서 가장 맛이 달콤한 술로 그 중 라미엘력 563년산이라면 한 나라의 왕조차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다고 알려져 있는 최고급 술이었다. 그렇게 비싼 술을 노래 하나를 들은 대가로 사다니...... 율리아는 너무 부러운 나머지 입에서 침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러페어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세계의 인간인 하연이 그런 것을 알리 없었고 갈루마 또한 술에는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이라 그 술의 가치를 알지 못했다. 때문에 하연은 그저 술 색깔이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기분 좋게 그 술을 받아 마셨다. 그런데 다음 순간 갑자기 머리 속이 핑 도는 듯한 느낌과 함께 하연은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하연,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하연!" "하연!" 놀란 하연의 동료들이 급히 그녀를 받아 안으며 소리쳤다. 그 가운데서도 침착하고 재빠르게 하연의 상태를 살핀 카리스는 곧 이상하다는 표정을 짖다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다시금 허탈한 표정을 짖고 말았다. 사담이 초조한 어조로 물었다. "왜 갑자기 쓰러진 것입니까?" "쿡!"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린 카리스는 긴장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동료들과 용병들의 얼굴을 천천히 둘러보고는 한자한자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잠.들.었.습.니.다." "에?" "잠든 것뿐이란 말입니다." 다들 허탈하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는데 리밍스가 말했다. "술 먹고 노래하다가 쓰러져 잔다. 다른 인간들에 비하면 그런 대로 봐 줄만한 술버릇이군." 그 동안 용병들과 지내면서 별 이상한 술버릇들, 술 먹고 옷을 벗어 제키고 춤을 추지 않나, 엉엉 대성통곡을 하지 않나, 갑자기 물건들을 깨부수지 않나 등 괴상한 술버릇들에 비하면 상당히 양호한 술버릇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 소리에 정신이 든 용병들은 다시 흥청거리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 사담이 하연을 안아들며 말했다. "그럼. 전 먼저 여관으로 돌아가 있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가겠어요." 미루엘이 따라나서며 말했다. 그 때였다. 그들이 술집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율리아가 쿵! 하고 쓰러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술집은 침묵의 마법이 걸린 듯 조용해졌다. 그들은 모두 율리아의 주량을 알고 있었다. 이 정도로 율리아가 갑자기 쓰러진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카리스는 재빨리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고른 숨소리와 혈색 등을 살핀 카리스는 율리아 또한 하연과 마찬가지로 잠이 든 것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카리스의 안색은 심각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율리아마저 잠들었다는 것은 하연이 잠든 것이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찌 된 것입니까?" 늘 쌍 율리아와 싸우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굴던 웨이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주변을 살피던 카리스는 율리아의 옆에 떨어져 있는 술잔을 보았다. 그것은 분명 조금 전 하연이 마신 러페어의 술잔이었다. "이것을 율리아가 마셨습니까?" "아, 네! 이번이 아니면 평생가야 맛볼 수도 없을 거라면서 술잔에 남아있던 술을 손가락으로 찍어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용병들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짖고 있는 가운데 카리스는 술잔을 들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강렬한 술 향기 이외에 미미한 약초의 향기가 느껴졌다. "......이건!" "뭡니까?" "수면초입니다. 죽을 때까지 절대 깨어나지 않는다는......" 충격을 받은 웨이는 멍하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 때 미루엘이 점원 소년을 붙잡으며 다그쳤다. "누구냐? 저 술을 하연에게 가져다주라고 시킨 사람이 누구지?" 점원 소년은 자신이 가져다 준 술 때문에 두 사람이나 문제가 생기자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며 두려움에 떨었다. "그, 그것은......" "누구냐니까?" 어느새 웨이도 다가와서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어떤 다급한 상황아래에서도 웃음을 지우지 않던 얼굴에 마치 검 날 같은 광기를 번뜩이면서. 웨이는 엔리시크의 심장에 자주 들리는 손님이었기에 소년은 그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번도 웨이는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소년은 더욱 당황해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런 소년의 모습에 카리스는 웨이에게 살기를 띄며 말했다. "그만 하시지요. 이 소년이 당황해서 말을 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정신이 나갔어도 카리스의 살기는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에 웨이는 움찍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카리스는 애써 부드럽게 웃으며 소년에게 물었다. "누구지요? 잘 기억해 보십시오." "그, 그러니까 사제님이셨습니다. 빛의......" "빛의 사제?!" 카리스와 일행들은 소년이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아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던 성기사단의 단장인 페이런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빛의 사제라는 자가 이런 비겁한 수까지 쓰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카리스가 중얼거렸다. "수면초는 독이 아닙니다. 때문에 마법으로 해독할 수 없습니다." "그럼?" 자신의 품에서 잠들어 있는 하연을 힐끗 내려다보며 사담이 물었다. "방법은 한가지 뿐. 신성력으로 몸 속을 정화시키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현재 이 대륙에서 하연에게 신성력을 써 줄 빛의 사제가 있을지 의문이군요." 그 말에 미루엘이나 쟈스란, 리밍스는 낙심한 표정이었지만 사담은 언제나 그렇듯이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방법이 없는 듯 말하면서도 카리스의 표정이 의외로 담담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그의 의도는 다음 웨이의 말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웨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고문이나 협박을 해서라도 신성력을 쓰게 만들어야지요." 카리스와 사담은 그 말에 서로를 바라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웨이가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그럴 작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령 그로 인해 이 대륙의 모든 빛의 사제들을 죽이게 될지라도 하연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그들은 서슴없이 그 일을 할 생각이었다. 그 때 생각에 잠겨있던 리밍스가 문뜩 입을 열어 말했다. "......그러고 보니 하연이 지금과 같은 상황의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어." "지금과 같은 상황의 이야기라니요?" 궁금하다는 듯 미루엘이 리밍스의 말을 재촉했다. 은연중 하연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자신과 율리아를 구할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사악한 마녀에 의해 잠들어버린 공주의 이야긴데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에게서 키스를 받고 깨어났다고 들었어." 하연이 어린 드워프들에게 해주던 예기를 기억해 낸 리밍스가 의기양양하게 한 말이었다. 그것이 지어낸 예기가 아니라 사실이라고 믿고 있던 리밍스와 하연의 말이라면 분명 믿을만한 방법일거라고 제멋대로 생각한 동료들에 의해 이제 키스는 유일하게 하연과 율리아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되어 버렸다. 물론 카리스가 그 방법이라는 것에 대해서 언뜻 의심을 품은 것도 사실이였지만 그 의심은 어쩌면 하연에게 키스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심에 의해서 다음 순간 깨끗이 지워져 버리고 말았다. 일행들은 침묵 속에서 서로의 눈치를 보며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누가 그녀들에게 키스를 하는가를 놓고. 그 때 웨이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흐흠! 이런 일은 무엇보다도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했다가는 한 여인의 인생을 망치게 될지도 모르는 문제이니까 말입니다." 여자인 미루엘은 제외하고 모두 옳은 말이라는 듯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도 이미 짐작하고 계셨겠지만 전...... 흠, 율리아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였지요." 순간 소시언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어? 그럼 율리아와 만난 뒤에 사귀었던 로나, 프릴, 베로니 등의 여자들은 다 뭐냐?" 웨이는 소시언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다가 동료들의 황당해 하는 눈빛에 변명하듯 말했다. "그, 그거야...... 율리아의 질투심을 좀 불러 일으켜 볼까하고 그랬지, 흐흠!" 그러자 헌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게 무슨 사랑이냐? 넌 단지 율리아가 너에게 넘어오지 않으니까 자존심이 상해서 그녀를 좋아한다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뿐이다. 나야 말로 첫눈에 반해서 오직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율리아에게 키스할 수 있는 건 나뿐인 셈이지." 둘이 서로 노려보는 가운데 이너드가 율리아를 일으켜 안으며 키스하려는 동작으로 말했다. "미안하다. 이해해라! 이 모두는 율리아를 살리기 위해서다." "멈춰!" "안돼!" 웨이와 헌스는 비명같은 소리를 지르며 이너드를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이너드의 입술이 율리아의 입술에 막 닿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였다. 휙! 하고 단검이 이너드와 율리아의 사이를 지나쳐 벽에 팍! 하고 박히는 것이었다. "누구야?" 결정적인 순간을 방해 당해서 화가 난 이너드가 버럭 단검이 던져진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조르였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 주시당한 이너드는 굳어진 안색으로 물었다. "너도냐?" 조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연 일행과 세르기아스와 질리안은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그런 용병들을 바라보았다. 설마 소시언을 뺀 하연이 고용한 남자 용병들 모두가 율리아를 좋아하고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렇게 경쟁자가 많을 때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혹시 하연이 말해 주지 않았습니까, 리밍스?" 미루엘이 묻자 잠시 생각하는 듯 했던 리밍스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많은 남자들이 공주를 얻기 위해 공주가 잠들어 있는 성으로 가려고 했지만 끝도 없는 숲이 가로막아서 누구도 공주를 만날 수 없었다고 했어. 그러나 간혹 뛰어난 장인들이 나무들을 잘라 길을 만들면서 공주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마지막에 마녀의 드래곤 환영마법에 걸려 겁이 질려 달아나곤 했데 그런데 한 용감한 장인만은 그 환영마법에도 불구하고 드래곤도 무찌를 수 있는 신검을 만들어내어 결국 마녀의 환영마법을 물리치고 성에 들어가 공주에게 키스할 수 있었다고 들었어." 사담이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용기를 시험하는 관문을 만들어 통과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준다는 말이군. 그렇다면......" 사담은 카리스에게 무슨 말인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카리스가 재미있겠다는 듯 빙긋 웃으며 율리아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저에게서 율리아를 빼앗아가실 수 있는 분에게 율리아에게 키스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뭐?" "에!" 용병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직 카리스의 정체를 모르는 그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비록 카리스가 5서클의 마법사라고는 하지만 이 좁은 공간에서는 케스팅이 긴 마법사보다는 검을 든 그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카리스가 살기를 피어 올리자 어째서 이것이 용기를 시험하는 관문인지 그들은 이해할 수 있었다. 카리스의 눈을 응시하자 갑자기 온 몸이 굳어지며 손끝하나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조금만 움직여도 마치 그 자리에서 목이 잘릴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두려움과 긴장감에 등뒤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가운데 웨이는 어떻게 해서든 시선을 카리스에게서 돌리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죽음이 눈앞에 있다보니까 쉽지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율리아를 얻기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각오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렇듯 두려움에 떨다니...... 웨이는 아예 눈을 감아 버린채 앞으로 걸어갔다. 차가운 얼음벽이 그의 살갗을 에이고 그를 밀어내는 듯 했지만 검날에 목을 들이대는 기분으로 걸음을 옮겼다. 설령 죽음에 이른다해도 율리아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고 싶었으니까. 어느새 카리스의 살기가 가신 장내에는 웨이의 품에 안겨있는 율리아가 보였다. 그 모습에 조르와 헌스, 이너드는 율리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또한 율리아를 사랑하긴 했지만 자신들이 뚫을 수 없었던 관문을 뚫고 갈 정도로 율리아를 사랑하는 남자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쓴웃음을 지으며 그들이 물러서는 동안 웨이는 떨리는 손으로 부드럽게 율리아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며 웨이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 시각 <엔리시크의 심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페이런은 하연일행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심정은 찹찹하기 이를데 없었다. 과연 자신이 잘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하연의 노래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둠의 사제가 그것도 카이람을 받드는 사제가 평화를 바란다고 했을 때는 믿지 않았었는데 하연의 노래를 듣자 어쩌면 그것이 그녀의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가 믿어왔던 가치관이 한순간 뒤흔들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페이런은 그런 느낌들을 떨쳐버리기 위해 애썼다. 어찌되었던 그녀는 마족과 계약을 했고 그런 어둠의 사제를 처단하는 것이 바로 성기사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키스를 한 후 고개를 드는 웨이를 보며 그들은 율리아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그러나 좀처럼 율리아는 깨어나지 않았고 이에 카리스는 슬쩍 하연의 지팡이를 들었다. 어찌된 일인지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크윽! 큭! 우하하하하!- 갈루마는 웃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뭐지? 어떻게 된 거냐?' 전달마법으로 생각을 전하자 갈루마는 그제야 웃음을 그치고 비웃으며 말했다. -너 도대체 진짜 드래곤이 맞기는 맞는 거냐? 다른 인간들이라면 몰라도 이성적인 종족으로 타고난 드래곤인 네가 드래곤으로서의 자부심은 어디다가 팔아먹고 하연의 그 얼토당토 안은 말을 믿고 이런 웃기지도 않은 일을 벌이냐? 큭큭!- '그러면......?' 믿고 싶지 않은 듯 카리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바보야! 다, 하연의 사기였지. 진짜로 키스한다고 먹어버린 수면초가 제거되겠냐?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의 키스만이라니......- '그럼, 어떻게 해야 되지?' -어쩌긴. 빛의 사제를 찾아봐야지. 아! 빛의 대사제 엘 노아를 찾아보면 되겠군. 그 분이라면 하연을 고쳐 줄 거다!- '그렇군. 그 인간이 있었지.' 어느새 자신이 하연의 말장난에 끌려 들어가 웃기는 짓을 했다는 것도 잊고 카리스는 하연을 구할 방법을 찾았다는 것에 희색을 띄며 동료들과 용병들에게 말했다. "자, 자 장난은 이쯤에서 그만두고......" 그 말에 모두 경직된 표정으로 카리스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채 하면서 카리스는 말했다. "하연과 율리아를 이리로 주십시오. 빛의 대사제 엘 노아께 치료를 부탁드리러 가보겠습니다." 그러면서 카리스는 멍청히 있는 웨이와 사담으로부터 율리아와 하연을 받아들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 광경을 멍청히 지켜보고 있던 일행들과 용병들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웨이가 말했다. "부탁이 있어. 조금 전에 여기에서 있었던 일을 부디 율리아에겐 비밀로 해 주시지 않겠나?" 모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또한 그 일에 어느 정도 동참을 했기에 그 일을 비밀로 하고 싶은 것은 같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리밍스는 고개도 들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날씨가 좀 누그러지는 것 같더니 다시 더워지네요.^^ 즐거운 생각을 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기 바랍니다. 그럼. 제 목 : [공지] 마신 소환사 등록자 : 허풍선이(김소영) 등록일 : 08-27 조회수 : 275 이제 곧 책이 나온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 올린 것 중에서 115회까지만 삭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마신 소환사 많은 관심부탁드립니다.^^ 제 목 : 마신 소환사 -48(126)- 등록자 : 허풍선이(김소영) 등록일 : 08-30 조회수 : 121 밤이 깊었지만 빛의 대사제 엘 노아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책상 위에는 연일 빛과 어둠의 세력 싸움에 관한 보고서가 올라오고 있는데 벌써 그랑디아의 북부인 하센 지방과 웨덴 지방에서는 빛의 세력이 모두 패해 어둠의 세력에 의해 점령당했고 슈이센의 수도 라마드는 하루밤 사이에 빛의 세력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그 아래 블리앙스에서는 지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빛과 어둠의 세력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어느 한쪽이 치우치거나 강세를 보여도 그것은 곧 전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빛의 대사제인 엘 노아와 어둠의 대사제 바스카는 서로 두 세력의 균형의 추로서 그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균형이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빛과 어둠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이제 곧 이 대륙의 멸망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빛의 대사제라고 할 수 있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넋 놓고 이렇듯 이 대륙이 멸망에 이를 때까지 지켜보는 것 뿐. '하지만 그녀라면......!' 밤하늘의 별들이 지독히도 청명하게 반짝인다고 생각하면서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는데 창문 가에서 내다보이는 신전의 뒤쪽 숲에서 무언가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사람의 형체를 한 자가 양쪽에 두 사람을 끼고 서서히 날아서 다가오더니 창가에 내려 서는 것이었다. "누구?" 엘 노아는 긴장한 채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빛의 대신전인 이 하나브 주위를 도는 경비들은 고위사제는 못되어도 하나같이 그에 준 하는 신성력을 지닌 사제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때문에 그런 그들에게 들키지 않고 이 안쪽까지 들어섰다는 것은 그 만큼 이 자가 대단한 능력을 지녔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적은 아닌 듯 그자는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얼마 전에 뵈었지요, 대사제 엘 노아님! 전 실버드래곤인 칼링스타라고 합니다." "아! 위대한 존재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엘 노아는 그 대단한 존재인 드래곤이 아무리 자신이 빛의 대사제라 할지라도 한낱 인간에게 존칭을 쓴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해 하며 무의식중에 대꾸했다. "하연의 일 때문입니다. 그 쪽에서 저지른 일이니 책임져 주실 거라 믿고 왔습니다." "에?" 무슨 말인지 몰라 멍한 표정을 짖고 있는 그를 보며 카리스는 하연과 율리아를 내려놓았다. 엘 노아는 낯익은 한 얼굴에 깜짝 놀라서 황급히 하연을 살폈다. 어쩌면 그가 생각하고 있던 이 대륙의 유일한 희망이 될 수 있는 여인. 그 여인이 지금 정신을 잃은 채 그의 앞에 놓여 있었으니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곧 잠자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어느 정도 진정을 하고 카리스에게 물었다. "하연 사제에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카리스는 그런 엘 노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수면초에 당했습니다. 성기사란 놈에게요." 순간 엘 노아의 안색이 더욱 어둡게 변했다. 그 말에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즘의 성기사단은 예전의 성기사단과는 달랐다. 거의 암살자나 마찬가지였다. 상부에서 죽이라고 명한 자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이는 것이. 어둠의 세력과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빛의 세력도 힘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단지 빛의 힘인 치료의 힘과 축복의 힘만으로는 어둠의 세력에 맞설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성기사단만이라도 어둠의 세력에 맞설 수 있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도록 교육시킨 것이었는데...... 엘 노아는 가만히 하연의 배 위에 손을 올려놓고 기도했다. "빛의 주신 어머니 펠레아의 이름아래 불의 마신 카이람의 이름으로 그 분의 성스러운 축복을 내려주소서, 블래스!" 그러자 하연의 배 위에 밝고 화사한 붉은 빛이 일렁이더니 하연의 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하연의 눈이 살며시 떨어졌다. 그 모습에 카리스는 하연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연은 눈을 뜨자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엘 노아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어, 이 곳엔 어쩐 일이세요, 엘 노아님? 대사제님도 한 잔 하시겠어요?" 순간 카리스와 엘 노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카리스가 말했다. "주위나 둘러보고 그런 말을 하는 게 어때요, 하연?" "어?" 주위를 둘러 본 하연은 자신이 생전 처음 보는 곳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왜......?" 그런 하연을 내버려두고 카리스는 율리아를 가리키며 엘 노아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엘 노아는 다시 한번 율리아에게 축복을 내려주었다. 그러자 잠시 후 잠에서 깨어난 율리아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어, ......내 술!?" 엘 노아는 피식 웃으며 그런 율리아를 보다가 하연에게 말했다. "성기사들에게 자네에 대한 살인명령이 떨어졌네. 앞으로 이번 같은 일들이 빈번히 반복될 걸세." 씁쓰름한 엘 노아의 표정에 하연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엘 노아가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마음도. 이에 하연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심심하지는 않겠군요. 게다가 이제부터는 늘 절 주시하는 시선이 생길 테니...... 스타가 된 기분이네요." 오히려 즐겁다는 듯한 하연의 표정에 엘 노아와 율리아는 물론이고 카리스까지 어이가 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속에서 엘 노아가 문뜩 궁금한 점이 떠올라 물었다. "......스타라니 그것이 무언가?" "별이요. 한 번 시선을 주면 그 빛에 빨려 들어서 결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 없게 만드는 저 별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그렇군! 더구나 자네는 스스로 빛을 내는 사람이니 충분히 별이라고 할 수 있지." 농담으로 한 말에 엘 노아가 진지하게 대꾸하자 하연은 조금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으나 곧 그녀 특유의 뻔뻔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정말 옳으신 말씀만 하시는군요. 역시 대사제이십니다." "허허허허!" 결국 너털웃음을 짖고 마는 엘 노아였다. 그 때였다. "슬립!" 카리스가 율리아에게 수면 마법을 걸어 어깨를 걸치는 것이었다. "왜......?" 하연이 의아한 듯 쳐다보니 카리스가 개면 적은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드래곤이라는 것이 인간들에게 알려지면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 일어나거든요." 그 귀찮은 일이 무엇인지 잘 이해가 안가는 하연이었지만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엘 노아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펠레아의 축복이 언제나 함께 하길 바라겠습니다." "그대에게도 가란의 축복이 함께 하길......" 하연 일행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엘 노아는 진정 기도했다. "어머니 펠레아여! 부디 그녀의 앞길을 밝게 비추어주소서." 짧게 올리게 되네요.^^ 펠레아의 축복이 언제나 함께 하길...... 제 목 : 마신 소환사 -49(127)- 등록자 : 허풍선이(김소영) 등록일 : 09-04 조회수 : 232 다음날 여왕인 헤미아로부터 총사령관의 지휘를 뜻하는 검을 받아들은 아르센은 파병군의 선두에 서서 높이 검을 빼어들었다. 말끔하게 빼어 입은 군복과 등뒤로 물결치는 백금발의 머리, 햇살을 받아 번쩍이는 광택을 뿌리는 검날.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아르센의 모습은 마치 이야기 속의 기사를 보는 듯 했다. 하지만 그의 뒤를 따르는 병사들은 그야말로 한숨을 나올 정도로 엉망진창 이였다. 그들은 모두 채 군인이 된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신병들이나 노예출신들을 돈으로 사들인 병사들이 대부분이었고 기사들도 거의가 몰락 귀족가의 자제들이나 서출 출신으로 실전 경험이 전무한 상태이고 보니 통솔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제대로 된 기사는 유트 정도라서 혼자서 버럭버럭 고함을 질러대며 어떻게든 통제를 해 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짐마차에 올라앉아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하연 일행들과 용병들이 보기에는 영 요원한 일로만 보였다. 조르가 희죽 웃으며 말했다. "우리 내기하지 않을래? 난 사령관과 그 부관만 빼고는 갈로아에 도착하기도 전에 모두 죽는 다에 이번에 받은 고용비를 모두 걸지." 웨이가 말했다. "나도 사령관과 부관만 빼고 모두 죽는 다에 걸겠어." 그러자 이번에는 헌스와 이너드가 말했다. "이런. 그럼 내기가 안되잖아?" "우리도 그쪽에 걸려고 했다고. 율리아, 너만은 다른 쪽에 걸겠지?" 율리아는 미쳤냐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싫어. 나도 너희와 같은 쪽에 걸겠어. 내 술값을 되지도 않는 쪽에 걸어서 탕진할 수는 없잖아?" 그러면서 장난을 치는 용병들을 소리를 들은 파병군의 사기는 뚝 떨어지고 말았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겨우 숫자나 채우기 위한 것이라는 이 자리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들이라고 죽고 싶을 리가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눈치를 살피며 어떻게 해서든지 갈로아에 도착하기 전에 도망을 치려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병사들의 마음을 눈치챈 부관인 유트는 더 이상 지껄이지 못하도록 용병들에게 따끔하게 한 마디 하려는데 그 때 하연이 말하는 것이었다. "난 갈로아까지 모두 무사히 도착하는데 내 전 재산을 걸겠어." 모두들 놀라서 하연을 쳐다보는 가운데 그녀가 계속 말했다. "분명히 말하는데 난 지는 걸 아주 싫어해. 그래서 만약 내가 진다면 무슨 짓을 할지 나도 잘 모르겠어. 저주하는 것은 물론 기본이겠고......" 그러면서 환하게 웃는데 일행들은 물론이고 파병군의 병사들마저 왠지 모를 오싹함에 몸을 떨어야했다. "그러니 내가 이기도록 모두 최선을 다해 주리라고 믿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용병들이었다. 그 모습에 만족한 듯 웃는 하연에게 유트는 말없이 고마움의 표시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녀의 말에 병사들이 어느 정도 안정감을 찾아가는 게 보였던 것이다. 그 때 하연 일행이 있는 쪽으로 한 로브를 뒤집어 쓴 사람이 다가왔다. 그의 전신에서는 죽음의 향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듯 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험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그 모습에 사담과 카리스가 슬쩍 하연의 앞을 가로막았고 용병들은 관심이 없는 듯 하면서도 언제든지 무기를 날릴 수 있는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런데 죽음의 향기가 가득한 자에게서 뜻밖에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연님이십니까? 아르센님의 참모시라고요. 전 아켄 드레이드라는 보잘 것 없는 마법사로 이번 갈로아의 파병군에 지원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켄 드레이드?" 어디선가 들어 본듯한 이름에 하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카리스가 나서며 말했다. "아! 혼 슈이센 왕립학교 상급 마법부의 선생으로 계시던 분이 아니십니까?" "아니, 어떻게?" 아켄 드레이드는 자신을 알아보는 카리스에게 놀랍다는 듯 물었다. 그러나 놀라기는 하연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상대는 브리켄의 죽음에 대해서 살인자로 의심을 품고 있던 마법사가 아닌가? "카리스라고 합니다. 제가 바로 선생의 후임으로 잠깐 아이들을 가르쳤었지요." "아, 그러셨군요." 그러면서 카리스와 예기를 나누는 아켄 드레이드의 모습에서는 처음의 그 음산한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법사로서의 능력은 둘째치고 어딘지 좀 맹해 보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누군가 옆에서 이것저것 챙겨주지 않으면 밥 먹는 것조차도 잊어버릴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 모습에 하연은 아켄 드레이드가 실제로 마족과 계약을 해 브리켄을 죽인 자 일거라고 의심했던 자신이 바보 같이만 느껴졌다. '하긴 현실이 추리소설 같을 수만은 없겠지. 추리소설에서는 피살자를 최초로 목격한 자가 반드시 범인이기 마련이었는데 말이야.' 덜커덩거리는 짐마차에 올라타고 하연 일행이 파병군을 따라 라마드의 수도를 벗어나고 있을 때였다. 피난민들을 보이는 사람들이 등에 짐을 잔뜩 지고 손에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수도로 몰려오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아르센은 즉시 부관인 유트에게 무슨 일인지 알아오도록 명령했다. 유트는 재빨리 말을 몰아 짐을 지고 오는 한 청년의 옆에 멈추어 서서는 물었다. "무슨 일인가? 어디에서 오는 길이지?" 청년은 유트와 파병군대를 잠시 보더니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재빨리 땅에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블리앙스에서 왔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어서 가셔서 저희 마을을 좀 지켜주십시오. 빛과 어둠의 사제들의 싸움으로 저희 마을은 이미 거의 폐허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뒤쪽에서 오던 다른 사내도 얼른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마을엔 아직 제 노모가 살아 계십니다. 죽어도 마을을 떠날 수 없다고 하셔서 저 혼자 떠나오긴 했지만...... 제발 저희 어머니를 구해주십시오." "제발 도와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피난민들이 너도나도 입을 모아 외치며 그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에 아르센은 스스로가 비참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 마치 그 자신이 무릎을 꿇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던 것이다. "일어서라!" 아르센의 말에 피난민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그의 험악한 얼굴에 곧 정신을 차리고 허둥대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들을 훑어보며 아르센은 병사들에게 외쳤다. "가자! 블리앙스로 간다!" 빨리 블리앙스에 가지 못해서 아르센은 초조하기 그지없었지만 병사들의 발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병사들은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상대는 사제들이었다. 혼 대륙에서 사제들의 위치는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으로 왕은 힘으로 그들을 통치하지만 신전은 그들을 통치하진 않아도 그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제들에게 이제 막 노예에서 병사가 된 파병군대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블리앙스에 도착하면 죽음밖에 반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그들의 발걸음은 자연 느려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르센은 타고난 특유의 오만과 왕의 후계자로서 신전세력을 견제하도록 교육받아온 것 등으로 인해 빛과 어둠의 세력싸움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해서 분노하고는 있었지만 병사들의 두려움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더불어 블리앙스를 구할 수 있는 방법도 생각해 두지 않은 채 이렇듯 무작정 블리앙스로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옆에서 그런 아르센을 지켜보던 유트는 점차 블리앙스가 가까워 오자 그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들을 막을 생각이십니까?" "......뭐?" "아르센님의 힘으로 어떻게 빛과 어둠의 싸움으로부터 블리앙스를 구할 것인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순간 아르센은 달리던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제서야 자신의 처지가 떠오른 것이었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이 황태자가 아닌 이름뿐인 병사들을 지휘하는 사령관이라는 것을. 그런 자신이 나선다고 싸움을 멈출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아르센은 자신이 참모로 삼은 하연을 떠올렸다. '그녀라면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아르센은 유트에게 말했다. "잠시 병사들에게 휴식을 명한다. 그리고 레이디 하연에게는 내가 잠깐 뵙기를 청한다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유트가 명령을 전달하러 말머리를 돌려 사라진 후 얼마 안되어 하연이 얼굴을 찡그린 채 터벅터벅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런 하연을 보며 아르센은 이상하게 처음 보는 사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녀의 검은머리 검은 눈, 하얀 피부, 검은 로브와 이상한 지팡이까지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성스러운 힘을 지닌 듯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는 것이 곤혹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아르센은 곧 그 이상한 느낌을 떨쳐버렸다.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렇게 느끼는 것뿐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레이디 하연." "제가 레이디란건 누구나 보면 다 알 수 있는 일이니 레이디는 빼고 그냥 하연이라고 부르세요." 애써 떨림을 감추고 말하는 아르센의 말에 하연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평소 하연은 낯간지럽긴 했지만 아르센의 이 레이디 하연이라고 부르는 말투를 좋아했었다. 존중받고 배려 받고 있다는 느낌이 물씬 풍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것이 귀찮기만 했다. 긴장 때문이었다. 이제부터 그녀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 그건......" 기사도가 몸 속에 깊숙이 베어있는 아르센으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하연의 노려보는 눈초리에 어쩔 수없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 네, ......하연." "무슨 일로 찾으셨어요?" 아르센은 수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물었다. "어찌하면 좋을지 레이디, 아니 하연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블리앙스의 싸움을 우리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겠습니까?" "아! 그것 때문이었군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우리가 들어가기만 하면 전쟁은 곧 끝날 테니까요." "아니, 어떻게?" 아르센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실상 그는 기대 반 체념 반으로 묻긴 했지만 별 방도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리도 쉽게 전쟁을 끝낼 방법이 있다고 말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그게 무엇입니까?" 다급하게 묻는 아르센의 말에 하연은 장난기 어린 듯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글세, 가보면 다 안다니까요." 그러면서 웃으며 돌아서는 하연의 모습에 아르센은 어리둥절하면서도 한편으로 안심이 되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너한테 무슨 방법이 있다는 말이야? 설마 마신 카이람을 소환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 분은 전쟁을 막아주시기는커녕 전쟁을 더 확산시키려 들것이다.- 갈루마의 말에 하연은 피식 웃었다. "알아. 카이람을 소환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럼? 네가 어떻게 전쟁을 막는다는 거야?- 버럭 고함을 지르는 갈루마의 목소리를 귓전으로 흘리며 하연은 중얼거렸다. "때로는 막강한 적이 강력한 우군이 될 수도 있거든." 날씨가 좋지요?(딴청)-너무 오랫만에 올려 미안한 마음에...- 하하^^ 책나온 것 보셨나요? 표지가 멋지게 나온 것 같은데... 야하다는 분들도 있고요.^^ 재미있게 봐 주세요.^^ 제 목 : 마신 소환사 -50(128)- 등록자 : 허풍선이(김소영) 등록일 : 09-06 조회수 : 285 땅이 쩌억 갈라지고 집들은 부서져있었으며 여기저기 화광이 치솟아 있는 것이 블리앙스는 거의 마을이라고 할 수도 없는 모습이었다. 그 참상에 파병군과 하연 일행은 말을 잃어버릴 정도였다. 발길을 옮길 때마다 발에 치이는 새카맣게 탄 시체들과 그 조각들에 파병군들은 먹은 것을 토하기에 바빴다. "이럴 수가! 어떻게 사제라는 사람들이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거지요? 어떻게!" 질리안은 세르기아스의 손을 꼭 잡은 채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 하연에게 외쳤다. 더 이상 그녀의 눈에는 하연이 보이지 않고 그녀의 검은 로브만이 보였던 것이다. 사제를 상징하는. 분노에 가득 찬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질리안을 보면서도 하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이런 일들이 벌어지게 된 원인은 자신한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때 미루엘이 질리안에게 외쳤다. "닥쳐요! 사제들의 탓이라니요. 그래서 하연의 탓으로 돌릴 생각입니까?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 대륙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책임입니다. 사제이기 전에 그들도 인간이고 그런 사제들을 만든 것은 바로 우리들의 책임이니까 말입니다." 그 말에 질리안은 말문이 막힌 듯 멍한 표정으로 미루엘을 보다가 충격을 받은 듯 멍해 있는 하연의 표정에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미, 미안해요, 하연! 미처 하연의 기분을 생각지 못했어요. 하연의 잘못도 아닌데......" 그러나 그런 미루엘의 말에도 질리언의 사과에도 하연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애써 웃는 표정을 지으려고 해보았지만 오히려 울상이 될 뿐이었다. 미루엘의 감싸주는 말도 질리안의 사과도 자신은 받을만한 자격이 없었으니까. 차츰 어둠이 밀려들고 있는 블리앙스의 땅위에서 하연은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날 원망하세요. 저주하세요. 내 작은 행복과 여러분들의 목숨을 바꾼 날 용서하지 말아요.' 그 때였다. 검은 로브의 사제들이 이곳저곳에서 하나둘씩 앞으로 나와 파병군의 앞을 가로 막아섰다. 그러자 유트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어둠의 사제분들이 어찌하여 저희 앞을 가로막아 서는 것입니까? 저희는 보시다시피 갈로아로 갈 파병군입니다만." 사제들 중 좀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사제가 말했다. "저희들은 블리앙스의 로이라 신전 사제들로 전 파샤라고 합니다. 여러분들 중 혹시 하연이라는 사제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하연은 그들이 자신을 찾자 의아한 표정으로 짐마차에서 내려 그들에게 걸어갔다. 물론 그 뒤를 사담과 카리스가 바짝 따른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저에게 무슨 볼일이 계신가요?" 파샤라는 여사제는 하연의 얼굴을 보더니 의외로 어려 보이는 나이에 잠시 놀란 표정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마신 소환사이신 하연님이 맞습니까?" "네." 길게 말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하연은 단순하게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었다. 그러자 파샤라는 여인이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것이었다. "하연님! 며칠 전 빛의 사제들이 저희 로이라 신전에 갑자기 들이닥치더니 신전을 파괴하고 사제들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그 때 신전밖에 있었던 저희들은 다행이 무사히 살아남았지만 신전 안에 있던 다른 사제들은 모두...... 도대체 저희 어둠의 신전과 사제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요?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것은 당연한 진리. 그 어둠 속의 진리를 사랑한 것이 죄입니까? 부디 마신 카이람님을 소환하셔서 저들을 응징하여 주십시오." 하연은 멍청한 표정으로 그 말을 듣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솔직히 그녀는 이들이 자신에게 이런 부탁을 하리라는 것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단지 자신이 블리앙스에 들어오면 스토커 모양 자신을 죽일 기회를 노리고 따라붙어 다니는 성기사단도 따라 올 것이고 그러면 자연히 어둠의 사제들이 물러나 싸움이 끝날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복잡하게 돌아가는 사태에 나직이 한숨을 쉬던 하연은 문뜩 떠오르는 생각에 바짝 긴장했다. 아르센의 참모로서 자신에게는 전략을 짜야할 막중한 책임이 있는데 그 때도 이렇듯 변수가 생길 경우를 생각지 않는다면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멸 당할지도 모른다는. 그 생각에 순간 오싹한 하연은 자신이 참모자리를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더욱 깊이 한숨을 내쉬며 파샤에게 말했다. "카이람님을 부를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어째서지요?" 마치 믿었던 자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듯한 표정으로 파샤사제는 하연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어둠의 사제들도 마찬가지였다. "난 아직 죽고싶지 않고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네?" 하연의 엉뚱한 대답에 파샤사제는 물론 하연일행들마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에 하연은 비꼬듯 물었다. "전 분명 마신을 소환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신 소환사라고 불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마신 카이람을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설마 불러서 명령하면 따르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순간 어둠의 사제들은 충격을 받은 듯 멍한 표정이었다. "불러서 저 빛의 사제들을 응징하라 라고 하면 네, 주인님의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존재?" "......계, 계약을 하면. 그리고 위도프의 정보길드에서도 하연님은 단지 마신 소환사임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마신을 소환하신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닌가요?" "그랬지요. 덕분에 피 같은 대가를 치렀었는데 그것은 알려지지 않았나 보지요?" 파샤는 그래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 대가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제 목숨을 내 놓아야 하는 일이라면 내 놓겠습니다. 부디 소환하여 주십시오." 하연은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자신을 희생해 다른 사람을 구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복수를 하겠다니....... 그녀는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자신의 목숨을 걸고 계약을 할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않았었다. 그런데 저 여인은 어떻게 저렇듯 쉽게 자신의 목숨을 내 놓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 따위 복수가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하다는 말인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행복 따위는 내 던져버릴 수 있을 정도로. 도저히 하연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단호히 말했다. "싫어요!" "왜...... 왜지요? 많은 저희 신전의 사제들이 빛의 사제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연님도 어둠의 사제인데 그들의 복수를 원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 그런 가치 없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자 어둠의 사제들은 일제히 충격을 받은 듯 멍한 표정이었다. 이 시점에서 그들에게 복수란 너무도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복수를 않겠다니...... 게다가 가치 없는 일이라지 않는가? 그들은 분노한 눈으로 하연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파샤만큼은 끝까지 이성을 잃지 않고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왜 가치 없는 일이라는 겁니까? 그들의 목숨은 복수의 가치도 없다는 말인가요?" 그렇게 말하는 파샤의 눈 속에는 진한 슬픔의 빛이 어려 있었다. 그것을 본 하연은 그녀가 자신과 아주 가까운 누군가를 잃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때문에 화가 좀 가라앉은 하연은 보다 자세하게 말했다. "내 작은 복수의 기쁨을 위해 이 혼 대륙 모든 사람들의 미래를 저당 잡힐 수는 없잖아요? 제가 카이람님을 소환한다면 그 분이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파괴일 뿐입니다. 전 어둠의 사제이니까요. 여러분들은 그걸 원하나요?" 물론 하연이 말한 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짜 어둠의 사제도 아니었고 카이람이 아무리 싸움을 좋아한다고 해도 이 대륙을 파괴할 리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연이 그렇게 말한 것은 아예 그녀에게 소환을 부탁할 가능성을 모조리 제거해 버리자는 생각에서였다. 과연 그녀의 생각대로 파샤나 어둠의 사제들은 더 이상 하연에게 소환을 부탁하지 않았다. 그들 또한 혼 대륙이 파괴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희망마저 빼앗긴 듯한 표정으로 망연히 서 있는 어둠의 사제들을 보며 하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마음을 강하게 먹고 말해버렸다. "조금 있으면...... 절 제거하려는 성기사단이 이리로 올 것입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도록 하세요." 순간 충격을 받은 어둠의 사제들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하고 말았다. 성기사단이라고 하면 빛의 신전의 기사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빛의 사제들이면서 빛의 교리를 따르지 않는 그들은 조금의 악도 용서치 않고 검을 휘두른다. 때문에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 어떤 어둠의 사제들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풍문이 돌 정도였다. 그런데 그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니...... 어둠의 사제들인 그들로서는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파샤사제가 말했다. "저희는 이 곳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이곳에서 최후를 마칠 것입니다. 먼저 간 친우들을 위해서라도 한 사람의 빛의 사제라도 더 죽이고 말입니다." 비장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 파샤사제는 그의 뒤에 있는 젊은 어둠의 사제에게 말했다. "아이들을 데려와라!" 그러자 젊은 사제가 아직 무너지지 않은 것이 용하다고 생각될 정도의 초라한 건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검은 로브를 입은 열 명 안팎의 아이들을 데리고 걸어 나왔다. 파샤사제가 말했다. "저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아이들로 어둠의 사제가 되는 것밖에는 다른 선택의 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어둠의 사제가 된 아이들입니다. 그런 아이들을 성기사들에게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부디 하연사제께서 저들을 맡아주십시오." 간절히 호소하는 파샤사제를 보며 하연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데려가고 싶지만 지금 그녀가 가는 곳은 전쟁터였다. 그런 곳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난처한 표정을 짖고 있는데 아이들이 파샤사제에게 몰려들어 로브를 부여잡고 외쳤다. "싫어요, 사제님. 사제님과 같이 있을래요. 더 이상 저희들이 버림받지 않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저희들도 이곳에 남겠어요. 가란님께서 지켜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남게 해주세요." "사제님과 함께 있고 싶어요." 파샤사제는 어두운 표정으로 그런 아이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져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 그녀는 더 이상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어서 가란님의 품에 안겨있을 그에게로 떠나고만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끊임없이 미안하다는 말을 중얼거리면서도 아이들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파샤사제를 보며 하연과 일행들은 가슴이 답답해 올 정도로 무거운 슬픔을 느꼈다. 그러나 하연이 느끼는 것은 오직 분노뿐이었다. 남겨진 자들이야 어떻든 자신만 편하면 된다는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 아픔마저 감수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짜증이 치밀어 있는 대로 인상을 찡그리며 하연은 자신도 생각지 못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좋아요, 아이들은 제가 맡지요. 죽든 말든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나 곧 후회했다.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이 어떻게 저 아이들을 책임진단 말인가? 하지만 이대로 저런 무책임한 여자한테 아이들을 맡기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에게 괴로운 일이 생기면 얼마든지 아이들을 내팽개쳐 버릴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러자 사담과 카리스는 물론 용병들마저 나서서 하연을 말리기 시작했다. "하연, 우리는 지금 전쟁터로 가는 것입니다. 잊은 것은 아니겠지요?" "맞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위험합니다." 그 때 생각에 잠겨있던 미루엘이 말했다. "저 아이들. 그냥 검은 로브만 벗어버리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더 이상 어둠의 사제가 아니니 성기사들도 저들을 해치지는 않을 거고...... 데리고 가 다음 마을의 고아원에 이 아이들을 맡기면......" 좋은 생각이라고 하연과 일행들은 감탄했다. 왜 그런 단순한 생각을 진작 못했던 것일까 하고 한탄하면서.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게 해결되지 만은 않았다. 아이들이 모두 검은 로브를 벗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왜지?" 미루엘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아이들에게 물었다. "그 검은 로브만 벗으면 살 수 있는데 왜 벗지 않는 겁니까?" 아이들이 겁을 먹은 듯 주저하며 말했다. "우리는 가란님의 아이들이니까요." "......뭐?" "저희가 버림받았기 때문에 가란님이 따뜻한 어둠으로 거두어 주신 거예요. 그런 가란님을 버릴 수는 없어요." "맞아요." "가란님이 슬퍼할 거예요." 아이들의 말에 하연일행은 차마 강제로 아이들의 로브를 벗겨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던 젊은 어둠의 사제가 앞으로 나서며 다른 어둠의 사제들에게 말했다. "제가 죽음이 두려워 도망치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전 살아남겠습니다. 그래서 저 아이들을 돌보겠습니다." 케슨은 비난을 각오하고 나선 것이다. 다른 어둠의 사제들이 보기에 그는 분명 죽음을 두려워하는 비겁자일 테니까. 하지만 가란님을 버릴 수 없다고 말하는 저 순수한 아이들을 케슨은 외면할 수가 없었다. 평생 비겁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살아야 한다고 할지라도 저 아이들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런데 뜻밖에 아무도 그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 어둠의 사제가 말했다. "아니, 오히려 우린 살아남겠다고 말하는 자네의 용기에 감탄하는 바이네. 우린 그런 용기가 없거든." 다른 사제도 말했다. "모든 것을 잃은 우리에겐 오히려 살아남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힘이 든다네." 케슨은 언뜻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말없이 자신을 이해해 준 그들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후 하연일행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아이들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돌보겠습니다." "어떻게?" 삐딱한 표정으로 하연은 빈정거리듯 물었다. "네?"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에요. 곧 있으면 성기사단이 들이닥칠 거예요. 그들로부터 저 아이들을 어떻게 지키겠다는 거지요?" 순간 케슨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에게는 분명 성기사단으로부터 아이들을 지킬 힘이 없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하연은 나직이 혀를 차면서 갈루마가 일러준 방법을 카리스에게 말했다. "카리스, 마법으로 한 장소에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게 결계를 칠 수 있다는데 사실이에요?" "그래. 그 방법이 있었군." 그러면서 카리스는 케슨과 결계를 칠만한 장소를 상의했다. 그리고 곧 마을 우물을 포함한 그 주위를 결계를 칠 장소로 선정하고 병사들을 시켜 식량과 생활용품, 목재 등을 날라 놓았다. 마지막으로 아이들과 케슨이 그 속에 들어가자 카리스가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마치 은색의 빛 가루가 뿌려지는 듯한 마법진은 한번도 끊어지지 않고 길게 이어져 기이한 도형을 이루었다. 대부분 마법진이 그려지는 모습을 처음 보는지라 모두들 신기한 듯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대단하군. 10서클의 방어 마법진을 저렇게 간단히 그리다니...... 역시 인간의 마법은 드래곤에게 미칠 수가 없는 것인가?- 갈루마가 허탈한 듯 한 말이었다. 이윽고 마법진이 완성되자 갑자기 빛이 번쩍이더니 순식간에 눈앞의 공간이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와!" "이럴 수가!" 모두 놀랍다는 표정으로 카리스를 보았다. 그러나 카리스는 일이 끝나자 그저 부드럽게 웃으며 하연의 곁에 가 서는 것이었다. 그런 카리스를 보며 아르센은 어떻게 해서든 그를 자신의 수하로 삼아야겠다고 작심했고 아켄 드레이드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가 알고 있던 카리스는 5서클의 마법사인데 지금 그 마법진은 5서클의 마법사가 그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도대체 저 자의 정체가 무엇일까? 설마 그 자와 관련이 있는 것은......!' 문뜩 떠오르는 생각에 아켄의 등줄기로 긴장감이 치달렸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다면 그가 자신에게 아는 척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켄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감돌았다. 그만큼 그는 무서운 존재였던 것이다. 그 때 유트가 아르센에게 말했다. "어서 출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마을에서 오래 지체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언제 빛과 어둠의 싸움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에서 오래 머물렀다가는 그들 또한 싸움에 휘말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병사들도 유트의 말에 동의하듯 어서 출발했으면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아르센은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떠나면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 뻔한 어둠의 사제들 때문이었다. 하연일행과 용병들도 그런 아르센의 마음을 짐작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파병군의 대장인 그의 선택이었으니까. 이윽고 마음의 결정을 한 듯 아르센이 말했다. "......출발합시다." 묵묵히 파병군은 아르센의 뒤를 따라 블리앙스를 떠났다. 그런 그들의 뒤로 어둠의 사제들이 쭉 늘어서 그들을 배웅하는 모습과 몇몇 빛의 사제들이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는 모습이 언뜻 비치고 있었다. 그에 따라 파병군과 아르센의 마음에는 자괴감이 가득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제 목 : 마신 소환사 -51(129)- 등록자 : 허풍선이(김소영) 등록일 : 09-11 조회수 : 143 블리앙스를 떠나 얼마쯤 가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파병군은 육체적인 문제보다 정신적으로 지친 듯 유트가 이곳에서 쉬다 가자는 신호를 보내자 모두 털썩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때문에 그들을 위해 용병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저녁식사를 준비해야 했다. 그 모습을 잠시 보고 있던 아르센이 유트와 사담을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보초병을 선별하고 있던 유트가 재빨리 다가와 묻자 아르센이 병사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들의 실력을 어떻게 보는가?" "거의 모두가 신병이라서...... 검이나 제대로 잡을지 의심스럽습니다." "식사 후에 병사들을 좀 훈련시키게. 최소한 자신의 몸은 지킬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 같은 일이 있을 때 몸을 사리고 도망치는 일은 다시는 없었으면 하네. 사담님도 부탁드립니다." 사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승낙을 표했다.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것이 하연을 위해서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대강 식사를 마친 병사들은 유트의 지시에 따라 한 자리에 모였다. 우선 유트는 검을 한번도 잡아 본 적이 없는 자들과 검을 다루어 본 적이 있는 자들을 두 무리로 나누어 검을 다루어 본 적이 있는 자들로 하여금 검을 잡아 본 적이 없는 자들에게 검을 잡는 법에서부터 휘두르는 기본적인 방법에 대해 가르치게 했다. 대체로 일인당 스무 명씩이었다. 그리고 기사 자격을 지닌 자들은 유트와 사담이 직접 대련 형식을 통해 가르쳤는데 그 방법이 짧은 시간동안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훈련장으로 변해버린 장내의 모습에 세르기아스와 질리안도 그들의 곁에서 훈련을 시작했고 병사들은 이 훈련이 자신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모두 필사적인 모습들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검을 휘두르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며 하연은 그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삶을 향해 끝없이 도전하는 그들의 모습이, 운명을 개척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그것은 하연 자신이 전혀 할 수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에 더 한지도 몰랐다.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지금의 하연에게는 더욱더. 점점 우울한 생각이 들어 가슴이 메이는 듯 하자 하연은 세 그릇째 먹고 있던 스튜그릇을 도중에 내려놓고 말았다. 그 스튜는 용병계에서도 비위가 좋기로 유명해 한 때 오크 고기조차 씹어 보았다는 이너드가 겨우 한 그릇을 간신히 비울 정도의 요리였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런 하연에게 쟈스란이 걱정스럽다는 시선으로 용병들을 충격 속으로 몰아 넣을 만한 말을 입에 담는 것이었다. "하연, 식욕이 없습니까?" 하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허걱! 하고 숨을 몰아쉰 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던 율리아가 조심스럽게 하연에게 물었다. "......맛은 있었어?" "응? 응. 맛있었어." 용병들이 모두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아켄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하연은 맛을 모르는군요?" "에?" 하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맛을 모르다니...... 그러자 하연 일행들은 물론이고 용병들까지 아켄을 노려보았다. 눈치도 없이 그런 말을 하다니 라는 눈총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이에 카리스가 사태를 수습하듯 말했다. "하하! 하연의 입맛이 워낙 좀 독특하거든요." "정말 그렇군요. 원래 입맛이야 나라마다 좀 다른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 웨이가 얼른 맞장구를 치며 대화의 방향을 바꾸려고 하는데 아켄이 자신의 짐 가방에서 부스럭거리며 무언가를 꺼내 드는 것이었다. 보니 얇은 빛의 막을 조각 내어놓은 듯한 것으로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져 있는 칼롭트라는 것이었다. 칼롭트는 서드우스의 식물 줄기를 얇게 자른 것으로 머리를 맑게 해주는 약효가 있어서 정신을 혹사하는 마법사들에게 많이 쓰이는 약재 중에 하나인데 그 중 이 칼롭트는 무색무취무미로 잘 알려져 있었다. 아켄은 그 칼롭트를 하연에게 건내며 말했다. "먹어보고 어떤 맛이 나는지 좀 말해 주시겠습니까?" 하연은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집어들고 먹어보았다. 입속에서 사각사각 씹히는 것이 청량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며 늘 달고 다니던 두통마저 조금은 가시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에 기분이 좋아진 하연은 감탄한 듯 말했다. "최고예요. 이렇게 상큼한 맛이 있었다니...... 이건 도대체 뭐예요?" 귓가에서 갈루마가 더듬거리며 묻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그게 맛이 있단 말이야! 정말?- "......정말 맛있었는데......" 당황한 듯한 갈루마의 목소리와 왠지 일그러져 보이는 카리스의 얼굴에 조금 머뭇거리며 하연이 말했다. 그러자 아켄이 칼롭트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무색무취무미의 약재라는 것을. 설명을 들은 용병들과 하연의 동료들은 걱정스런 시선으로 하연을 쳐다보았다. 맛을 모르다니...... 하연은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맛있었는데......" '설마 병 때문에 미각이 사라지고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자 하연은 갑자기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 듯해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아켄이 말했다. "아마 맛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낀 것이지 정말 맛을 느낀 것은 아닐 겁니다." -맛까지 못 느낄 정도라니...... 너, 어서 너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이 세계와 너는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런 부작용이 발생할 정도면 곧 생명까지 위험할 수도 있어.- 갈루마의 침중한 말에 하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직은 돌아갈 수 없어. 힘들어도 가야할 길이 있으니까. 그 길이 내게 보이는 한 난 걸어 갈 거야.' 그런 하연의 표정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카리스는 망설이다가 물었다. "하연, 맛을 모르게 된 이유를 알고 있는 거지요? 우리는 하연의 동료가 아닙니까? 저희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하연이 숨기고 있는 게 무엇인지...... 우리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지금 이 물음을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카리스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하연이 가지고 있는 병이 무엇인지 자신은 물론이고 동료들도 확실히 알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 말에 미루엘, 쟈스란, 리밍스도 하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을 재촉했다. 그들의 시선에서 따뜻한 관심을 느낀 하연은 일순간이라도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불행하게 생각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와 함께 하연은 그들을 걱정시키지 않을 만한 말을 떠올리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모르겠어......" 애써 떠올린 하연의 변명이었지만 곧 카리스의 단오한 말에 의해 무의미한 말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연, 거짓말은 안 좋습니다. 솔직한 사람이 되어야지요." 순간 머쓱해진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그런 하연의 반응에 동료들과 용병들은 간신히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흠...... 뭐, 그 동안 돌아다니며 너무 맛있는 것들만 먹었으니 그저 입맛이 둔해진 건지도 모르지." 그 말에 카리스를 제외한 하연의 동료들은 어느 정도는 납득하는 바가 없지 않았다. 물론 하연의 이유와는 반대되는 이유로. 그 동안 하연이 한 이상한 요리들을 떠올리며 그런 요리들을 맛있다고 먹었으니 어쩌면 입맛이 둔해진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하연은 묘하게 납득한 듯한 동료들의 표정에 계속 말했다. "더군다나 잘된 일이잖아? 아켄씨의 말을 들으니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어떤 요리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말인데 그 얼마나 행복한 일이야. 마치 마법 같은 일이잖아?" 그러면서 환하게 웃는 하연의 모습에 동료들은 하연이 맛을 모른다는 사실을 안 순간 걱정부터 한 자신들이 오히려 바보 같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연이 행복하다는 대야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율리아는 탄성을 터트리며 말했다. "와!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행복한 일이잖아? 왜 우린 하연같이 생각을 못했을까?" 순수하게 감탄하며 존경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율리아의 모습에 하연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그 정도로는 부족해요. 좀 더 존경하도록 하세요, 율리아. 이 몸은 물을 마시며 이것은 술이다 라고 생각하면 술맛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순간 율리아는 헉! 하고 놀람에 부릅떠진 시선으로 하연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하연의 로브를 부여잡고 외쳤다. "하연, 부탁이야! 날 제자로 삼아 줘! 어떻게 하면 하연과 같은 입맛을 가질 수 있는지 가르쳐 줘." 그 말에 모두들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율리아를 보며 나직이 혀를 찼지만 율리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하연에게 매달리며 애원했다. "제발 가르쳐 줘! 내 평생의 소원이다, 하연!" "율리아, 이런 말 하기는 힘들지만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 하긴 하연 또한 어떻게 미각을 잃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듯 하니 그건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하며 모두 고개를 끄덕이는데 하연이 다시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훌륭한 재주를 아무에게나 가르쳐 줄 수는 없는 일이잖아? 생각해봐! 내가 이런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율리아처럼 나를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것이고 그들에게 모두 이 재주를 가르쳐 준다면 이 대륙은 그야말로 실업자들로 우글거리게 되고 말걸." 율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왜? 그런 훌륭한 재주라면 많은 사람들이 배울수록 좋은 것 아니야?" "이런이런. 그거야 말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지. 많은 사람들이 내 재주를 배운다고 생각해봐. 그러면 우선 대륙의 많은 이름 난 음식점들이 문을 닫게 될 거야.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고 음식점을 찾지 않게 될 테니까. 두 번째로는 고급 음식 재료를 거래하는 상인들이 문을 닫게 되겠지. 아무거나 먹어도 맛이 있는데 특별히 그런 고급 음식들을 찾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야. 그런 식으로 관련 된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졸지에 일을 잃고 실업자가 된다고 생각해봐 대륙의 경제는 붕괴되고 말 것이고 결국 이 대륙이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 아니겠어?" 어느새 하연의 말솜씨에 말려든 율리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에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하연의 터무니없이 과장되어 가는 말에 모두 피식피식 웃고 있는 대에 반해서 말이다. "그래서 나로서는 함부로 이 재주를 남에게 가르쳐 줄 수가 없어. 그랬다가 나중에 이 혼 대륙의 간접적인 멸망의 원인으로서 내 이름이 오른다면 그 얼마나 치욕스럽겠어?" -벌써 올라있지 않냐? 그것도 직접적인 원인으로서?- 들려오는 갈루마의 비아냥을 한 귀로 흘리며 하연은 열정적으로 외쳤다.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도 난 이 재주를 무덤 속까지 가지고 갈 생각이야. 비록 나의 이런 희생 따위는 전혀 사가에 알려지지 않겠지만......" 말끝까지 흐리며 비장한 표정을 짖는 하연의 모습에 감동한 율리아였지만 그래도 술을 물처럼 마음대로 마실 수 있다는 유혹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는지 다시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어떻게 나한테만 가르쳐 주면 안될까? 절대 다른 사람들한테는 가르쳐주지 않을게." 이 정도 말했으면 더 이상 가르쳐달라고 조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가 율리아의 끈질긴 집념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하연은 잠시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두 주신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 있겠어?" 하연이 허락해 줄 듯 보이자 율리아는 얼굴이 환해져서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맹세해. 맹세하고 말고. 나 율리아는 두 주신인 펠레아와 가란의 이름을 걸고 절대 그 어떤 사람에게도 하연에게 전수 받은 재주를 가르쳐 주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그러면서 두 눈을 반짝이는 율리아의 모습에 하연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좋아, 가르쳐 줄께. 그럼 지금부터 난 율리아의 스승이지?" 율리아는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으로서 말할게. 제자야, 이 스승이 온 몸이 찌뿌둥한게 안 쑤시는 대가 없구나. 어깨 좀 주물러 주겠느냐?" 순간 율리아는 벙찐 표정으로 몸을 굳힌 채 서 있었다. 재주를 가르쳐주겠다더니 웬 어깨는 주무르라는 말인가? 그러자 하연은 짐짓 삐진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야? 제자가 되겠다더니...... 겨우 어깨도 못 주물러 준단 말이야? 쳇, 제자로 받는 것 무르고 만다." "아, 안돼!" 무른다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율리아는 황급히 굳은 표정을 풀고 억지로 웃으며 하연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스승의 말씀인데 무엇인들 못 따르겠어요. 말만하세요, 스승님. 이 제자 율리아가 뭐든지 다 해드리겠습니다." "오냐!" 하연은 편안한 표정으로 지긋이 눈을 감으며 율리아의 안마를 즐겼다. 그 모습에 하연의 일행들과 용병들은 두 여인을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카리스는 그런 하연을 우울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생각했다. '아직은 우리에게 말해줄 수 없는 것입니까? 그래도 우리를 믿고는 있는 거지요?' 하하^^ 여러분들에게 즐거운 일이 가득하기를... 더불어 저에게도 빌어주세요. 여러분들의 기도 하나 하나가 모이면 제게 커다란 행복으로 다가올 것 아니겠어요? 욕심많은 유지가.... 등록자 : 김소영(허풍선이) 조회수 : 168 등록일 : 2001-09-12 19:13:41 관련자료 : 없음 본문크기 : 5113 bytes 이른 새벽 눈을 뜬 하연은 양옆에서 자고 있는 미루엘과 율리아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나 천막을 빠져 나왔다. 얼굴에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면서 야영지 여기저기에 꺼져 있는 모닥불과 아무렇게나 널 부러져 자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한 눈에 들어오는 사령관 아르센의 천막에는 아직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잠을 이루지 못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 또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처음일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천천히 야영지를 벗어나 나무숲을 헤치고 나아가던 하연은 작은 호수에 이르렀다. 순간 하연은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너무 아름답고 신비로운 풍경이었던 것이다. 물 가에 살며시 드리워져 있는 나뭇잎에 맺혀 있는 이슬이 호수 위에 떨어져 작은 파문을 일게 하고 있었는데 그 속에서 물의 요정이라도 튀어나올 듯이. 그 때 문뜩 물의 요정에 대해 생각하니 물의 정령 사이라가 떠올랐다. 사이라에게도 이 광경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하연은 목걸이를 만지며 사이라를 소환했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사이라! 봐! 정말 아름다운 호수지?" 사이라는 그 말에 하연에게 주시되었던 시선을 호수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한 동안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천천히 우울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네. 정말 아름다운 호수군요." "......왜 그래, 사이라?" 하연은 좋아할 줄 알았던 사이라가 뜻밖에 어두운 안색을 하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태어난 곳도 이런 호수였거든요." "돌아가고 싶어? 아니, 바보 같은 질문이었어. 당연히 돌아가고 싶겠지." 하연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녀 또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동물도 죽을 때가 오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 죽는다는데 그녀인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아쉬웠지만 하연은 사이라에게 말해 주었다. "돌아가도 좋아, 사이라! 네가 태어난 곳으로." "네!?" 사이라는 놀라서 자신의 주인인 하연을 바라보았다. 돌아가라니...... 자신을 놓아주겠다는 말인가? 마왕이나 인간들이나 자신을 이용할 생각만 했지 놓아주겠다는 존재는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사이라는 일순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갈루마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하연의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듣지 않고 이렇듯 함께 새벽 산책을 즐겨서 좋아하고 있던 갈루마의 귀에 그것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던 것이다. -하연,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미쳤어? 정령을 놓아주다니...... 그것도 곧 전쟁에 참여하게 될 이 시점에서. 지금은 저들이 네 유일한 힘이라는 것을 모르는 거냐?- 하연도 물론 그것은 알고 있었다. 마신을 소환할 수 없는 지금 정령들이야 말로 자신의 유일한 힘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너무 정령들에게 의지해서 결코 정령들을 돌려보내지 못할 것 같았다. "사이라는 나를 많이 도와줬잖아? 그러니 이제 됐어. 이젠 사이라가 행복해졌으면 해." 사이라의 눈에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니...... "감사합니다, 주인님. .......감사합니다, 주인님." 하연은 사이라의 말에 따라 목걸이를 부수고 계약 해제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하연의 힘으로는 목걸이를 부술 수 없어서 불의 정령 로우를 소환해냈다. 그리고 자신의 뜻을 말하자 로우는 감격한 눈으로 하연을 쳐다보았다. 이에 하연은 빙긋 웃으며 목걸이와 반지를 뽑아 손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로우 아저씨도 고향으로 돌아가 행복해야 해!" 로우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되었다. 틈만 나면 문여는 것 정도로도 어려워 자신을 부르곤 했는데 자신이 없다면 얼마나 불편할 것인가? 그래서 로우는 결심했다. 어차피 인간의 생명이란 무한한 시간을 가진 불의 정령인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찰나의 시간일 뿐이니 정령계의 법칙에 따라 태초의 계약을 실행하기로. 손위에서 결코 뜨겁지 않은 불길아래 순식간에 타올랐다가 재가 되어 사라져버리는 목걸이와 반지를 보며 이제 정들었던 정령들과 헤어질 시간이 왔다는 생각에 어색한 이별의 말을 준비하며 고개를 들었던 하연은 갑작스런 로우의 말에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와 태초의 계약을 맺겠는가, 인간이여?" 하연은 의아한 표정이었으나 로우의 뜻을 안 사이라는 웃으며 그의 말을 따라했다. "나와 태초의 계약을 맺겠습니까, 인간이여?" 떨리는 갈루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럴 수가! 오랜 세월 신비 속으로 사려졌던 정령과의 계약의식을 내가 보게 되다니......- 그 말을 듣자 하연은 더욱 의아한 표정으로 로우와 사이라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나와 계약을 맺으려는 거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거야?" 사이라는 하연이 무언가 오해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하연은 정령들의 고향이 어디라고 생각하세요?" "응?" "정령들의 고향은 정령계랍니다. 계약의 의식을 맺어도 저희들은 정령계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연이 부르면 이곳 인간계로 나올 수 있는 거지요." "아?" 하연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그럼 계약하겠어." 그러자 로우가 말했다. "태초의 맹약에 따라 나 불의 정령 로우는 인간 하연이 살아있는 동안 그녀의 의지에 따라 소환에 응할 것을 서약한다. 하연, 한 손을 내밀어라!" 마치 수많은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이 순간을 지켜보는 듯한 엄숙한 분위기가 흐르는 느낌이라고 생각하면서 하연은 한 손을 로우에게 내밀었다. 로우는 그 손에 자신의 힘의 일부를 부여했다. 그러자 하연의 손안에는 아름다운 불꽃문양이 생겨났다. "이건......!" "계약의 인이다. 언제든 내가 필요하면 나를 불러라, 하연!" 그러면서 로우가 사라지자 이번에는 사이라가 의식을 행했다. 그에 따라 하연의 손등에는 불꽃문양과 어우러진 푸른 링 모양의 문양이 생겨났다. 사이라가 사라진 뒤에도 하연은 계속 자신의 손등에 생겨난 문양을 바라보았다. 손등이 묘하게 뜨겁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를 누군가 지켜보는 자가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연속으로 또 올렸습니다. 그래서인지 요번편은 좀 짧네요?^^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사흘쯤 지났을까? 파병군은 마르텐에 이르렀다. 슈이센에서도 제법 큰 도시에 드는 마르텐은 아스리아 강을 중심으로 한 수상 도시로 상업이 발달해 있었다. 그들이 도착하자 성문이 열리며 병사들이 나와 맞았다. "갈로아 파병군입니까? 마르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성문을 들어서자 그들의 시야에 아스리아 강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다리들과 강위를 떠다니는 각양각색의 꽃배들이 들어왔다. 아이들은 활기차게 꽃배들을 따라 뛰어다니고 있었고 여인들은 바구니 가득한 꽃잎들을 강가에 뿌려대고 있었다. 블리앙스에서는 전쟁으로 인해 가는 곳마다 시체가 즐비한데 이 곳은 마치 축제라도 벌어진 듯 화사한 분위기이자 파병군은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르센도 마찬가지인 듯 마르텐의 병사에게 물었다. "이곳은 빛과 어둠의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단 말인가?" 병사가 그들이 놀라는 이유를 알아챈 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 곳 마르텐은 용사 수므카와 대 마법사 비욤님께서 계시는 곳입니다. 빛과 어둠의 사제들도 감히 이 곳에서는 싸우지 못한 답니다. 아마 대륙에서 우리 마르텐이 가장 평화로운 곳일걸요?" 자랑과 긍지가 섞인 병사의 말에 아르센은 그들이 만나보고 싶어졌다. 과연 어떤 자들이기에 전쟁으로 어수선한 이 상황 속에서 백성들이 조금도 불안해하지 않고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들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트에게 먼저 영주의 성으로 가 오늘 저녁 그들이 이 곳에서 머물기를 원한다고 말과 함께 저녁식사에 용사 수므카와 대 마법사 비욤을 초대하도록 이르라고 명했다. 용사 수므카와 대 마법사 비욤! 영주의 성을 향하면서 아르센이 언급한 이름에 하연 일행은 순간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용사 수므카라는 말은 억지로 구겨 넣으면 그런 대로 머리 속에 인식이 될 것 같았지만 대 마법사 비욤이라니...... 리밍스의 도끼에 맞아 머리가 부서져 죽은 자가 어떻게? 혼란스러워 하는 그들에게 미루엘이 다른 가능성을 내어놓았다. "동명이인인 거겠지요. 비욤이라는 이름이 아무래도 마법사들 사이에서 흔한 모양입니다, 하하하!" "맞아. 그런 걸 거야. 수므카란 이름과 같이 들어서 우리가 좀 어이없는 생각을 떠올린 것이겠지, 하하!" 리밍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리자 하연 또한 그렇게 생각했는지 충격을 지우고 싱글벙글 웃으며 지나가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이 곳의 대 마법사 비욤님도 눈이 애꾸눈인가요? "......맞습니다, 혹시 비욤님을 아십니까?" 순간 그들은 벼락을 맞은 듯이 표정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잠시 뒤 정신을 차린 카리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혹시 그 마법사가 애꾸눈이라는 것을 이용해 수므카가 그 마법사를 비욤으로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6클레스의 대 마법사로 말입니다." 그 말에 하연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로서는 그것밖에는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들을 아켄이 아까부터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무시하고 서로 쑤근거리며 상의하던 하연 일행은 아르센에게 자신들은 근처 여관에서 머물겠다고 말을 전했다. 비욤의 정체는 확실히 모른다고 할지라도 수므카의 눈에 띄어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르센은 그들이 왜 그러는지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마법의 아침>이라는 여관에 짐을 풀고 내려 온 용병들은 우중충한 분위기로 모여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하연 일행들을 보자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 보면 전쟁터에 가는 게 아니라 어디 놀러 라도 가는 듯 태평했기에 더욱 그랬다. 가까이 가니 하연일행이 말하는 것이 들렸다. "이 비욤이 그 비욤일리는 없습니다." 카리스의 말에 동의하듯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아니지. 퍼석! 하고 그 자의 머리 깨지는 소리와 모습을 이 귀와 눈으로 똑똑히 듣고 보았는데......." 리밍스가 그렇게 부연설명을 하자 쟈스란은 끔찍하다는 표정이었으나 자신도 본 사실이라 자연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미루엘은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이 비욤이 애꾸눈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사담이 동의하자 미루엘이 기쁜 듯 두눈을 반짝였다. 그 때 용병들 중 웨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제야 용병들의 존재를 눈치챈 듯 하연은 멍하니 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백지장도 맛들면 낫다니까." 그러면서 하연은 용병들에게 쟈스란이 납치된 이유라던가 하는 중요한 예기는 뺀 채 그가 해적들에게 납치 당해 비욤이라는 마법사에게 팔려갔고 마법사의 마법재료가 되려는 순간 그들이 구했다는 식으로 말을 대충 꾸며서 해 주었다. 그 말을 들은 용병들도 과연 이 비욤이 그 비욤일까 라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확인을 해 보자 라는 결론에 도달한 그들은 과연 누가 가 그 사실을 확인할 것인가를 놓고 또 한 차례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몰래 영주의 성으로 들어가 간단히 사람 얼굴만 확인하고 올 것이니 유즈베리아의 왕성은 물론 혼 슈이센 왕립학교 마저 제집처럼 출입한 경험이 있는 미루엘이 가는 편이 좋겠다는 쪽으로 결론이 나서 결국은 미루엘이 가게 되었다. 물론 소시언만은 레이디인 미루엘에게 너무 위험한 일이라서 안 된다고 항의했지만 그들 중 아무도 그의 의견에 공감하는 사람은 없었다. 미루엘이 여관을 나서자 하연은 그녀를 마중하며 말했다. "안자고 기다릴 테니 되도록 빨리 와요. 늦으면 아무래도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내가 직접 가게 되는 사태가 벌어질 것 같거든요." 이리저리 둘러 말하긴 했지만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아는 미루엘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빠른 몸놀림으로 날 듯이 영주 성 쪽으로 향했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미루엘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지켜보고 있던 하연은 다음 순간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비욤이 그 비욤이다에 10골드 걸겠어요." "뭣!" "......뭐라고요?" "아니, 왜요?" 일행들과 용병들의 황당해하는 표정을 즐기면서 하연은 말했다. "바보소리를 들어도 좋으니 갑자기 불가능한 일에 도전해보고 싶어져서요." 그 말에 돌연 하연 일행들과 용병들 사이에서는 다시 내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 동안 안 올려서 저장분이 많아 며칠 동안 계속 올릴 생각입니다. 기대해 주세요.^^ 영주의 성이 넓기는 하지만 거의 천명에 가까운 파병군대가 머물기에는 어려운 일이었다. 때문에 파병군은 영주성의 넓은 정원에서 야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유트는 그들에게 오늘 저녁의 훈련은 쉬어도 좋다고 말했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쉬려는 사람은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힘을 키워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한편 아르센은 유트, 아켄을 동반하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약간 신경질적이게 생긴 마르텐의 영주가 웃으며 그들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아르센님. 사령관으로 임명되신 걸 경하드립니다. 그리고 이렇듯 저희 성에 방문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반갑게 맞이하긴 했지만 슬쩍 올라간 그의 입 꼬리로 보아 왕위를 빼앗기고 파병군 사령관으로 전쟁터에 갈 수밖에 없게된 아르센을 비웃고 있는 것이 영역했다. 그 모습을 본 아르센은 모르는 척하고 지나갔지만 유트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며 불쾌한 빛을 감추지 않았다. 이에 영주는 흠칫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서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그들을 식당으로 안내했다. 식당에서는 세 남자가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맞았다. 영주가 그들을 소개했다. "이 쪽은 용사 수므카 님이시고 이 분은 대 마법사이신 비욤님. 그리고 저 자는 이 마르텐의 상인길드 장인 토르베라는 자입니다. 아르센님을 꼭 한번 뵙고 싶다고 간곡히 청하기에 어쩔 수 없이 초대했습니다만 아르센님이 불쾌하시다면 지금이라도 물리겠습니다." 아르센은 상관없다는 표시로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용사 수므카와 대 마법사 비욤라는 자들을 살펴보았다. 커다란 덩치에 상처자국이 즐비한 용사 수므카라는 자의 모습은 용사라기 보다는 한 몇 년 전쟁터에서 찌든 용병같이 보였다. 그리고 음침한 얼굴의 애꾸눈 마법사라니...... 아르센과 유트는 어떻게 저들이 백성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비욤을 본 아켄의 눈이 무섭게 흔들리는 것도 그런 그를 보며 비욤의 날카로운 한쪽 눈이 번쩍거리는 것도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치고 말았다. "수므카라 합니다!" 커다란 목소리로 식당 안이 쩌렁쩌렁 울리게 수므카가 외치자 이어 비욤이 헤죽 웃더니 고개를 깊숙이 숙이면서 말했다. "비욤이라는 보잘 것 없는 마법사입지요." 마지막으로 상인길드장인 토르베가 호감을 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곳 마르텐의 상인길드장인 토르베라 하옵니다. 마르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전하." 아르센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곧 하녀들이 차례로 음식을 가져오기 시작했고 아르센은 묵묵히 잠시 식사에 열중하다가 지나가는 투로 영주에게 현 마르텐의 실정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영주는 잠시의 그 침묵이 답답했던지 아르센의 물음에 곧장 세세하게 대답했다. 그런 영주의 말에 따르면 현재 마르텐은 용사 수므카와 대 마법사 비욤이 빛과 어둠 두 신전의 수장들을 인질로 잡아 두어 직접적인 전쟁의 피해는 막긴 했지만 이번 전쟁으로 인해 물건의 수출입이 어려워지고 피난민들이 늘어나 물가가 오르고 있어서 걱정이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더 이상 물가가 오르기 전에 피난민들의 유입을 막아야 할 것 같다는 것이 영주의 의견이었다. 그러자 토르베가 말했다. "솔직히 저희 상인들 입장에서는 이번 파병군에 대해서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전하. 나라가 빛과 어둠의 전쟁으로 어지러운 이 때에 나라를 지키기에도 모자라는 군대를 다른 나라에 파병하다니요." 유트는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르센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외부의 적보다는 내부의 적이 더 무서운 법 아니겠는가?" 토르베는 설마 아르센이 그들을 비호하는 말을 할 줄은 몰랐던지 흠칫 당황한 빛을 띄더니 곧 얼굴을 굳히며 침착하게 말했다. "마르텐의 상인길드 장으로서 또한 슈이센의 상인들을 대표해 아르센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말하시오." "저희 슈이센의 상인들은 아르센님을 지지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아르센님이 왕위에 오르도록 하는 대에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유는?" "저희 상인들이 쫓는 것은 명분이 아닌 이익입니다. 힘이 없는 헤미아 여왕보다는 아르센 왕의 집권이 저희 상인들에게 더욱 이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누가 보아도 당연한 일이었다. 왕권이 약하면 귀족들의 세력이 강해지니 상인들로서 상권을 얻기 위해 귀족들에게 뇌물을 마쳐야 하고 왕권이 강하면 귀족들의 세력이 약해지니 왕에게 뇌물을 바쳐야 하는데 수가 많은 귀족들에게 뇌물을 바치는 것보다는 왕에게 바치는 것이 상인들에게 더 이익일 테니까. 아르센 또한 당연히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이 그들에게는 이익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헤미아 여왕의 능력을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슈이센에서 가장 강력한 왕권을 이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여왕이 바로 헤미아였으니까. 그 때 비욤이 말했다. "저 또한 아르센님의 힘이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때가 되면 잊지 말고 불러주십시오, 전하" 유트는 그 마법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뱀같이 교활한 눈매가 언제든지 기회만 되면 아르센님을 배반할 것 같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눈치를 주었지만 아르센은 흔쾌히 비욤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겠소." 식사를 마치고 그들이 나가려고 할 때였다. 비욤이 아켄을 힐끗 보며 아르센에게 요청했다. "제가 듣기로 아켄 드레이드님이 혼 슈이센 왕립학교 상급부 마법선생이라고 들었습니다. 오늘 저녁 아켄님과 더불어 마법에 대해 토론을 해보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는지요." 순간 아켄은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충격을 받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아르센은 아켄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 가볍게 허락했다. "뜻대로 하시오." 그러자 비욤은 마치 먹이를 본 뱀같이 희죽 웃으며 아켄에게 말했다. "시간 좀 내어주시겠습니까?" 만약 자신이 여기서 허락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아켄은 어쩔 수 없이 허락하고 말았다. "그럼, 저와 함께 제 방으로 가시지요. 오랜만에 같은 마법사 동료분을 만나 토론을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흥분이 되는 군요." 유난히 동료라는 말을 강조하는 비욤이었다. 그 말에 아켄은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하녀의 안내로 손님실로 향하며 유트는 아르센에게 말했다. "그 비욤이라는 마법사는 믿을 만한 자가 못되어 보입니다. 그런데 왜 그를 받아들이신 겁니까?" "지금 내게 너 이외에 사람이 없다. 한 사람이라도 아쉬운 이 때에 그런 것까지 생각한다는 것은 우습지 않느냐?" "이런 때이기 때문이라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아르센은 유트의 고지식함을 잘 아는 만큼 한숨만 내 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용만 하고 버릴 생각이라는 말을 하면 충격을 받을 테니까. 슈이센 왕성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아르센은 왕위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아직 어린 여왕이라고는 해도 헤미아에게는 명분이 있었고 주위에는 귀족들이 그녀를 받치고 있었으니 그녀가 나라를 다스리는 편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블리앙스를 보면서 서서히 생각이 바뀌었다. 그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도 증오스러웠다. 자신이 검을 들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바로 그들을 지켜주기 위해 검을 들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이름뿐인 왕족일 뿐 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였다. 그는 왕이 되고 싶었다. 그 날 전략부에서 호언했던 대로 성왕 엘루아덴을 능가하는 왕이 되는 것을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 진정으로 갈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왕이 되어야 했다. 사촌인 헤미아를 몰아내고. 그가 생각하기에 헤미아로서는 빛과 어둠의 전쟁으로 혼란해진 대륙의 정세 속에서 슈이센을 지킬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아르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왕위에 오를 결심을 한 것이었다. 자신의 검으로 자신의 백성을 지키겠다고...... "이곳에서 나와 같은 그 분의 의지체를 볼 줄은 몰랐소." 비욤은 술잔을 아켄에게 건내며 말했다. '의지체 좋아하시네, 단순한 그 자의 인형이지.' 속으로 비웃으며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킨 아켄은 평소의 그 어벙함이 없어진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말이 있으시면 어서 하시지요. 전 6서클의 마법사와 마법에 대해 토론할만한 수준은 못되어서요." 그 말에 비욤은 술잔을 소리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좋아. 간단히 말하지. 네가 지금 마신 소환사 일행과 같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 중 쟈스란이라는 아이가 있을 것이다. 그 아이를 내게 대려와라! 빠른 시일 내에." 생각도 하기 전에 싫다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아켄은 억지로 참으며 비꼬듯이 말했다. "제게도 처리해야 할 그 분의 명이 있습니다. 자신의 일을 남에게 미루어서는 안되지 않습니까?" 비욤은 아켄을 비웃으며 말했다. "몰랐나 보군. 하긴 지금까지 왕립학교에만 있었으니...... 며칠 전에 우리 의지체들에게 그 아이를 수중에 넣는 일을 모든 일에 우선하라는 그 분의 명령이 있었다. 너라고 예외는 아니지, 죽고 싶지 않다면." 아켄은 순간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어볼 뻔했다. 도대체 그 자가 쟈스란을 원하는 이유가 뭐냐고. 마신 소환사인 하연이라는 여자라면 몰라도 그가 보기에 쟈스란은 전혀 쓸모가 없어 보였던 것이다. 마법사의 소질은 있어 보이지만 아직 마법사가 되려면 멀고 먼 아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비욤에게 그 이유를 묻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았다. 괜한 호기심으로 목숨을 잃을 수는 없었으니까. "......제겐 지금 일행이 있습니다. 그들 모르게 어떻게 그를 데려올 수가 있겠습니까?" 비욤은 미리 그 방법을 생각해 두었던 듯 그에게 반지 하나를 내밀었다. "이 반지에 공간이동 마법을 저장해 두었네. 시동어인 워프를 외치면 바로 작동될 거다." 그러니까 이 반지로 쟈스란이란 아이를 그에게 보내라는 말이군. 아켄은 말없이 반지를 빼앗듯이 받아 쥐고는 더 이상 비욤과 한 공간이 있기 싫은 듯 서둘러 그의 방에서 빠져 나왔다. 그러면서 아켄은 과연 자신이 그의 명령을 따라야 할지 고민했다. 그가 그 아이를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편이 그에게 더 큰 복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를 얻지 못함으로 인해 그가 어떤 피해를 입는 다는 것은 그로서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그는 비욤의 말대로 쟈스란을 그에게 넘겨주기로 마음먹었다. 아직은 확실한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켄이 나가자 비욤은 다시 술을 들이켰다. 솔직히 비욤은 그 일을 아켄에게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녀석들은 그냥 죽이더라도 자신의 머리에 도끼를 박은 그 드워프와 하연에게는 반드시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들 일행 중에 유희 중인 드래곤이 있고 하연이라는 여자가 마신 소환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자신이 직접 쟈스란을 납치하는 일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렇듯 아켄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기다려라! 반드시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서 까마귀의 먹이로 내어 줄 테니......" 두번째 입니다. 그리고 계속 됩니다.^^ 그 시각 미루엘은 영주의 성에 은밀히 잠입하긴 했지만 비욤의 방이 어디 있는지 몰라 아직 그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그녀의 눈에 하녀 하나가 물병을 들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잠깐 망설이던 미루엘은 이내 그 하녀가 자신을 볼 수 있게 벽에 붙이고 있던 몸을 앞으로 내밀며 하녀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 하녀는 갑자기 눈앞에 사내 하나가 나타나자 놀란 듯 했으나 곧 너무도 당당해 보이는 미루엘의 모습에 손님들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는지 황급히 걸어오며 물었다. "부르셨습니까?" "아르센님의 전언으로 비욤님을 급히 만날 일이 생겼다. 비욤님의 방이 어디지?" 그 말에 하녀는 미루엘을 아르센의 호위기사들 중 한 명으로 알았던지 전혀 의심하는 기색 없이 비욤의 방을 가르쳐 주었다. 물론 그 가운데 미루엘의 사내처럼 잘생긴 용모가 한 몫 단단히 한 것은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비욤의 방을 알아낸 뒤에도 문제는 있었다. 어떻게 하면 비욤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성에서 빠져나가는 가 하는 점이었다. 고민하며 비욤의 방으로 가던 미루엘은 비욤의 방에서 아켄이 나오는 것을 목격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같은 마법사이니 서로 할 말이 많았으리라고 짐작한 것이다. 아켄과 카리스가 만나자 곧 마법에 관한 예기로 열을 올렸던 것처럼. 아켄이 그녀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때쯤 미루엘은 비욤의 방을 확인하고는 복도 끝에 있는 창문으로 빠져나가 성의 지붕으로 올라간 뒤 몸에 밧줄을 걸고 비욤의 방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비욤의 방 바로 위가 수므카의 방이었던 모양이다. 창문으로 한 예쁘장하게 생긴 하녀와 정사를 벌이고 있는 수므카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미루엘은 눈살을 찌푸리며 벽을 발로 차고 더 아래로 내려가려다가 문뜩 창가에 놓여져 있는 작은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언젠가 그녀가 직접 감정한 적이 있었던 바람의 성자 루페이론의 의지가 긷든 성물 엘 루아가 든 상자가 분명했다. 역시 그녀에게도 그녀의 할아버지인 검은 다이아스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일까? 그 상자를 본 순간 미루엘은 훔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면 수므카도 분명 눈치채지 못할 것이니 손만 뻗으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미루엘은 온 몸을 휘감으며 충동질하듯 도는 흥분을 제어하지 못하고 슬쩍 그 상자를 훔치고 말았다. 그리고 밧줄을 타고 재빠르게 아래로 내려 간 미루엘은 비욤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낡은 두루말이 몇 개와 시약 병들 여러 개, 그리고 촛불이 놓여 있는 방안에는 마법사로 보이는 한 노인이 며칠 전 카리스가 그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는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카리스에 비해서는 너무 늦고 힘겨워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 얼굴을 확인하지 못한 미루엘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어서 그 마법사가 등을 돌리기를 기다렸다. 매달려 있느라 서서히 손에 힘이 빠질 무렵이었다. 드디어 마법사가 미루엘이 있는 창 쪽으로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루엘이 본 적이 있는 한쪽 눈에 안대를 한 그 음침한 얼굴이 들어 났다. 그 비욤은 이 비욤이었던 것이다. 언제인가 난 잠에서 깨기가 두렵기 시작했었지. 하루하루 변해 가는 어두워져 가는 세상을 보며 내가 바란 어린 날의 세상은 이런 게 아냐. 얼마나 더 살아가야 하나요. 웃음 져요. 이 세상은 혼자서 사는 게 아니잖아요. 평화롭게 잠든 어린아이들의 순수한 모습 아무 것도 모르고 살던 시절이 그리워 눈물 흘려보지만 후회하기엔 너무 늦어 버릴지 몰라. 지금 우리들이 지키지 못한다면 그들의 삶을 생각해봐요. 우리가 느꼈던 세상의 아름다움을 그들도 똑같이 느끼게 해줘야만 해. 가끔씩은 이런 내가 안쓰러워 보이긴 해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해요. 산다는 건 힘이 들죠. 모두 뜻대로는 안되니까요. 우리들의 아이에게 떳떳한 사람이 되어야겠죠. 이 세상은 잠시일 뿐. 모두 행복하게 살아야해요. 다들 들어요. 서로 힘을 합쳐서 평화로운 세상 만들어가요. 우리들의 아이에게 떳떳한 사람이 되어야겠죠. 이 세상은 잠시일 뿐. 모두 행복하게 살아야해요. 모두 행복하게 살아야해요. <마법의 아침>안에 울려 퍼지던 하연의 노래가 끝나자 모두 숙연한 표정이었다. 비록 음정, 박자 모두 맞지 않은 엉터리 노래였긴 했지만 그걸 아는 사람이 이 자리에 있을 리가 없었고 하연은 나름대로 자신의 편곡실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노래에 감동하여 생각했다. '나, 이 기회에 가수로 나갈까봐! 저 감동한 눈빛들...... 대성할 조짐이 벌써부터 보이잖아?' 그러나 그런 그녀의 생각도 머리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 속에서 지워버려야만 했다. 희망이나 꿈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한 단어가 아니라고 자조하면서. 이럴 때야 말로 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하연은 일어나서 외쳤다. "자, 제 노래가 좋았다면 노래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술 한잔씩 사세요. 어때요?" 그러자 율리아가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야호! 하연이 최고다!" 순간 숙연해 있던 장내는 웃음바다로 변했고 잠시 후 술이 가득 찬 수십 개의 술잔이 하연 앞에 놓여졌다. 여관의 손님들 대부분이 하연에게 술을 한 잔 산 것이었다. 그중 서너 잔은 하연이 마셨지만 나머지는 모두 율리아의 입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하연은 그것만으로도 취해버렸다. 아니, 사람들에 취했던 걸까? 그들의 웃음소리에 취했던 걸까? 기분 좋은 웃음이 하연의 가슴속에서부터 흘러나왔다. "후후...... 하하, 하하하하!" -하연, 너 왜 그래? 괜찮아?- 갈루마의 놀란 음성이 들려왔지만 하연은 계속 끊임없이 웃어댔다. "하하하하!" 왠지 비통하게만 들리는 그 웃음소리에 카리스와 사담은 마음이 아팠지만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그녀를 부축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후후! 사담, 카리스! ......우리 모두 다 같이 행복하게 살자고요. 행복이 별건가요? 이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잖아요? 그래서요, 사담, 카리스? 나는...... 정말이지, 행복해요." 취해서 잠이 든 하연을 가만히 침대에 눕히고 그녀의 방을 나오면서 사담은 카리스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위대한 존재여! 당신은 무언가 알고 있지요? 하연이 왜 저렇게 괴로워하는지 알고 있지요?" 그러나 카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 또한 하연이 괴로워하는 이유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맨 처음에서 그저 자신이 원인이 되어 벌어진 빛과 어둠의 전쟁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요즘들어 그것만은 아니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혹시 그 병때문에......?' 순간 괴로운 듯 일그러진 카리스의 표정에 사담은 더 이상 그를 다그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말했다. "만약, 하연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전 당신을 원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하룬산에서 하연이 사라졌을 때, 당신은 제일 먼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저희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서 그녀를 찾아 나섰던 걸." 카리스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 사담을 씁쓰름한 표정으로 쳐다보면서 생각했다. '원망하고 있었던가? 하긴 나라도 원망했겠지......' 마지막 세번째군요. 행복한 시간 되셨으면 합니다.^^ 다음 날. 아픈 머리를 쥐어 잡고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하연은 아침을 먹고 있는 동료들 중 미루엘이 있는 것을 보고 황급히 다가가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미루엘?" 미루엘은 그런 하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중얼거렸다.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고 해놓고는 먼저 잠들어 버린 사람에게 꼭 그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 겁니까?" 하연은 그제야 미루엘에게 기다리고 있겠다고 한 말을 떠올리고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얼버무렸다. "술 몇 잔 마셨는데 그만 취해 버려서...... 그래도 미루엘은 마음이 고우니까 이해해 주겠지요?" 그 뻔한 아부에 미루엘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내기는 하연이 이겼습니다." "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른 동료들과 용병들을 바라보자 그들은 하연의 시선을 피하는 기색이 영역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미루엘에게 고개를 돌린 하연은 그녀답지 않게 우물거리며 물었다. "......지금 그 말뜻은?" 미루엘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비욤이 이 비욤이었습니다. 즉 비욤은 살아있다는 말이지요." 하연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비욤이 살아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하연보다 더 기막힌 사람, 아니 드워프가 있었으니 바로 리밍스였다. 그의 손으로 직접 죽인 자가 버젓이 살아났으니...... "잘못 본 것 아니야?" 결국 하연은 미루엘을 의심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며 하연이 오기 전까지 미루엘이 벌써 수십 번도 넘게 일행에게 받았던 그 질문을 던졌다. 이에 미루엘은 한숨을 쉬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뱀같이 차가운 눈, 음침한 분위기. 그런 외모를 지닌 자가 또 있을 리 있겠습니까?" "쌍둥이라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용병들 중 헌스와 이너드가 쌍둥이라는 점을 떠올리며 기대에 찬 시선으로 말해보았으나 미루엘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의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다고는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담이 차분한 어조로 그들 사이의 긴장을 깨며 물었다. 하연은 멍하니 사담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하다니, 뭘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녀의 머리 속은 온통 머리가 깨져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었는지 그 궁금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를 죽인 것은 우리입니다. 복수를 하려들 테니 미리 그를 제거해 후환을 막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사담은 닥치면 닥치는 대로 상대하는 성격이지 그 뒤를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이 있었다. 따라서 그 사람인 하연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자라 해도 하연에게 위해가 될 자는 미리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카리스 또한 마찬가지인 듯 사담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하연은 죽은 사람을 또 죽이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도대체 비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났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호들갑스럽게 묻는 하연의 물음에 대꾸한 것은 미루엘과 리밍스 그리고 용병들 중에서는 세르기아스와 질리안 정도였다. "궁금합니다." "맞아, ......어떻게 살아난 거지?"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있는 그들을 보며 쟈스란이나 용병들은 그런 태평한 고민이나 하고 있는 그들이 오히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최하의 계층을 전전한 그들에게는 살아남기 위해서 적이 된 자는 죽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연은 지팡이를 두들이며 갈루마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갈루마도 어떤 방법으로 살아난 것인지 알 수가 없는지 그답지 않은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리치가 되는 마법은 9서클의 마스터만이 펼칠 수 있는 마법으로 겨우 6서클의 마법사가 펼칠 수 있는 마법이 아니기 때문에 애초에 제외되어 버렸던 것이다. 사담과 카리스는 그런 하연을 보면서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나중에 하연 몰래 비욤을 처리해버리자고 결심을 굳혔다. 아침을 먹고 시간이 남자 하연은 일행들에게 마르텐 시장을 구경하자고 말했다. 디온 기라이스라는 기사가 와서 정오가 지난 뒤에 출발할 것이니 그 때까지 출발 준비를 갖추고 있으라는 아르센의 말을 전해주었던 것이다. 그러자 용병들과 쟈스란, 리밍스는 그냥 여관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나머지 일행들과 소시언만이 하연을 따라나섰다. 시장 구경을 가는 것뿐이니 수므카와 비욤을 만날 가망성이 없기는 했지만 신중을 기하자는 의도였다. 마르텐의 시장은 놀랍게도 바로 강위였다. 도시 한가운데를 흐르는 그 강위에 한 사람이 탈만한 작은, 수많은 배들이 지나다니면서 장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연은 별로 사고 싶은 것은 없었지만 그들과 부대껴 보고 싶은 마음에 이것저것 사면서 일부러 값을 깎는 흥정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연의 눈에 한 어린 남매가 색색의 기이한 구슬 같은 것들을 팔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세계에도 유리구슬이 있나 싶어 확인 차 하연은 물었다. "저 아이들이 팔고 있는 건 뭐예요, 미루엘?" "아! 저건 작은 돌에 꽃잎 물을 들인 것입니다. 목걸이로 만들기도 하고...... 여자아이들이 좋아하지요." 하연은 그 어린 남매의 배가 있는 곳으로 가 예쁜 색으로 물들인 돌들을 구경했다. 그러자 여자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예쁘지요? 새벽 이슬을 먹은 꽃잎으로 물들인 돌들이에요. 소원을 이루어 줄 거예요. 사시겠어요?" 미루엘이 거들어 말해주었다. "새벽 이슬을 먹은 꽃잎들로 물들인 돌에는 신성한 능력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연은 희미하게 웃었다. 아마 그 말은 자신의 세계에 있는 천 개의 학을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과 비슷한 소리일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래? 그럼, 이 돌들 내가 다 살게." "네!?" 어린 남매는 물론 하연 일행들도 모두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하연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내 소원은 아주 크거든. 그래서 돌 하나로는 이루어지지 않을 거야. 모두 얼마지?" 소년은 행여 하연의 마음이 변할까 염려되는 듯 재빠르게 가격을 불렀다. "1실버요." 그러나 막상 말을 해놓고는 너무 비싸게 불러 사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기색이 영역했다. 그 모습에 하연은 피식 웃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안돼, 그 가격으로는 살 수 없어." "에? 그럼 25코퍼요." 30동화가 1실버이니까 가격을 낮춰 부른 것이었다. 그러나 하연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동료들은 하연이 다시 흥정을 시작했다고 생각했는지 피식 웃으며 지켜볼 뿐이었다. 이에 두 남매가 울상을 짖자 하연은 금화 1개를 꺼내 소년의 손에 쥐어 주며 말했다. "내 소원을 이루어 줄 돌들인데 이 정도는 받아야지." 소년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금화를 보자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고 여자아이 또한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 그것은......" 언제까지 그 금화만을 바라보고 있을 것 같은 남매를 보자 사담이 그들 앞에 놓인 바구니를 들어 하연에게 들려주면서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만 돌아가지요, 하연?"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구니를 들고 돌아섰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남매는 돌아서 가는 하연에게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소원 꼭 이루세요." 돌아가는 길에 카리스가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데 그 큰 소원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훗! 비밀이에요. 소원은 입으로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요." 하연은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만족스럽게 자신의 손안에 든 돌들을 어루만졌다. 그런 하연을 보며 미루엘은 문뜩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하연이 하고 다니며 가끔 그렇게 만지곤 했던 목걸이와 반지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연, 목걸이와 반지는 어떻게 했어요?" 그 말에 카리스도 놀라서 하연의 목과 손을 보았다. 그만은 그것이 정령의 목걸이와 반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진짜 목걸이와 반지는 어떻게 하신 겁니까?" 다그치듯 묻는 카리스의 말에 하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향으로 가고 싶어하는 친구들에게 주었어요." 그 말뜻을 파악한 카리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하연을 쳐다보면서 인간이 정말 욕심이 많은 종족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하연의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미루엘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언제 이곳에서 친구를 만났던 겁니까? 그런데 왜 우리에게는 소개시켜 주지 않았던 거지요?" 그 말에 하연은 그저 웃어 보였다. 그러자 미루엘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품속을 뒤져 상자 하나를 꺼냈다. "하연, 그럼 이걸 줄게요. 목걸이로 만들어 걸도록 하십시오. 하연에게 정말 잘 어울릴 겁니다." 갑자기 무슨 선물인가 해서 하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것은 푸른색의 보석, 바로 성자의 보석인 엘 루아였다. 물론 미루엘은 하연이 성자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엘 루아를 보았을 때 제일 먼저 하연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마치 그녀가 그 보석의 원래 주인인 듯. 그래서 하연에게 그 보석을 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 보석의 가치를 모르는 하연에게 그것은 단지 특별한 의미의 돌일 뿐이었다. 미루엘의 선물이기에...... 기쁜 표정으로 보석을 바라보고 있는 하연을 보자 카리스는 역시 하연도 보석따위를 좋아하는 여자구나 싶은 생각에 어떤 의미로는 안심해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줘 보십시오. 제가 목걸이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하연이 그에게 엘 루아를 건내주자 카리스는 아름다운 은색의 가는 줄로 되어 있는 목걸이를 꺼내 가운데 보석만을 엘 루아와 바꾸어 끼워 하연에게 돌려주었다. 그렇게 즉석에서 만들어진 목걸이가 너무 마음에 든 하연은 카리스와 미루엘에게 다시 한번 인사했다. "고마워요. 하지만 이곳에 와서 제가 얻은 가장 소중한 것은 언제나 바로 여러분들일 거예요." 그러면서 하연은 환하게 웃었다. 후에 그들은 그 때만큼 하연의 얼굴이 빛나 보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하하^^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칭찬해 주세요!! 정오가 지나자 파병군이 여관 앞을 지났고 그 때에 하연 일행들과 용병들은 파병군에 다시 합류했다. 떠나는 그들에게 하연의 노래를 들었던 여관에 머물렀던 손님들이 모두 나와 마중하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런 그들에게 마주 손을 흔들며 하연 일행들은 무사하게 마르텐을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아르센은 마르텐의 상인길드장인 토르베부터 받은 군자금을 생각하며 반드시 살아 돌아오리라고 다짐했다. 그들의 뜻대로 갈로아에서 전사하지는 않으리라고. 얼마나 갔을까? 마르텐을 떠난 뒤부터는 비교적 잘 닦인 길을 가던 파병군은 날이 어두워오자 진군을 멈추고 주위에 천막을 쳤다. 간단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병사들은 훈련을 시작했다. 그리고 사담과 유트가 그들을 지도하는 모습을 하연이 멍하니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아켄 드레이드가 다가와 물었다. "세르기아스와 질리안에게 들으니 비욤이라는 마법사를 알고 계시다고요?"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자의 이름을 들은 하연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뭐, 네. 어쩌다보니......" "어떤 사람인지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그건 왜?"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아켄 드레이드는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같은 마법사다 보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군요. 더군다나 그는 6서클의 마법사가 아닙니까? 영주 성에 있을 때 잠깐 얼굴은 봤지만 대화는 나누어 보지 못해서요.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순간 미루엘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 그가 비욤의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대화를 나누어 보지 못했다니...... 그러면서 유심히 아켄의 표정을 살피려 했으나 얼굴을 칭칭 천으로 감고 있고 또한 눈을 피하고 있는지라 그가 지금 어떤 표정인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하연이 말했다. "제가 본 그는 교활하고 야망에 가득 찬 자였어요.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요." "그렇습니까?" 아켄은 나직이 한숨같은 것을 쉬는 듯 하더니 문뜩 생각난 듯 시간이 날 때마다 마법을 공부하고 있는 쟈스란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저 아이 남자더군요. 그럼 여동생은 아니겠고 하연님과는 어떤 사이인 겁니까?" 그 말에 모두 놀라서 아켄을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쟈스란이 남자라는 것을 눈치챈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아니...... 어떻게?" 아켄은 가단히 대답했다. "서서 볼일을 보더군요." 쟈스란을 비욤에게 넘겨줄 생각으로 그를 따라 다니며 기회를 엿보다가 그 사실을 목격했을 때 그 또한 충격을 받았었다. 설마 그 얼굴에 남자일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아켄은 대답을 재촉하듯 하연을 눈을 응시했다. 그러자 그녀의 일행 역시 하연이 무슨 대답을 할지 궁금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들도 쟈스란이 하연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를 일행으로 받아들인 것은 그녀의 결정이었으니까. 하연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말했다. "쟈스란은 내게는 가족과 같아요. 그를 보면 그의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볼 수가 있거든요." 그들은 하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쟈스란에 대해 말하면서 짖는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로 알 수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그런 미소를 짖게 할만큼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아켄은 저녁내내 하연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비욤을 싫어했던 이유를 알아낼 수가 있었다.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 또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했으니까. 그날 밤. 아켄은 인비저빌리티 마법을 걸어 자신의 몸을 감춘 후 몰래 쟈스란의 천막으로 들어갔다. 잠들어 있는 쟈스란의 얼굴은 평온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 모습에 잠시 망설이던 아켄은 쟈스란에게 반지를 던지며 중얼거렸다. "워프!" 순간 쟈스란은 어디론가 이동해 갔고 아켄은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왔다. 그 때 카리스는 깨어 있었다. 그리고 쟈스란의 천막 쪽에서 일어나는 마나의 유동현상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쟈스란을 구하기 위해 달려가지 않았다. 하연의 얼굴에 그런 부드러운 미소를 짖게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라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그가 내일 아침 죽어있기를 바리는 카리스였다. 짜악! 쟈스란은 갑자기 뺨에서 불이 나는 듯한 느낌에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언젠가 한번 본 적이 있는 마법진 위에 자신이 또 다시 양팔과 발목이 묶인 채 누여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큭큭큭큭!" 몰골이 송언 해질 정도로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순간 쟈스란은 두려움에 온 몸이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예전의 그 끔찍한 고통이 다시 시작되리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몸이 두 쪽으로 분리되는 듯한 그 끔찍한 고통이...... '하연!' 두번째입니다.^^ 다음 날. 미루엘로부터 쟈스란이 없어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하연은 어리둥절했다. "쟈스란이 없어지다니요? 이 근처를 모두 찾아봤어요?" "모두 찾아봤습니다." 그러나 도대체 하루밤사이에 쟈스란이 어디로 간단 말인가? 하연은 용병들에게 주변을 좀 더 찾아봐 달라고 부탁하고는 자신은 지난 밤 쟈스란의 천막으로 가 보았다. 그곳에는 쟈스란이 소중한 여기던 <마법의 기초에서부터 그 응용>이라는 책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러고 보니 쟈스란에게는 짐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하연은 자신의 무심함을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나 그렇게 멍하니 서 있었을까? 웨이와 소시언이 들어와 그런 하연의 어깨를 가볍게 치자 그녀는 쟈스란을 찾았냐고 눈으로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다. 지난 밤 경비를 선 보초병들에게도 물었지만 출입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 때 어느새 사담이 들어와 말했다.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구의 소행인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게 누구지요?" 하연이 급히 물었다. "분명 비욤이라는 그 마법사의 소행이겠지요." "아!" 하연도 그의 짓이라고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쟈스란을 납치할만한 자는 그 자밖에 없었으니까. "그럼, 구하러 가야지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찾아 나서려는 하연을 막아선 자는 뜻밖에도 부사령관인 유트였다. "비켜요. 쟈스란을 구하러 가야해요." "갈 수 없습니다, 레이디. 지금 레이디는 우리 파병군의 군사라는 잊지 마십시오. 자신의 신분을 자각하란 말입니다." "뭐라고요? 하지만 쟈스란은......" 그 때 하연의 눈에 아르센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순간 아르센이라면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주고 쟈스란을 구하러 가자고 해 줄 거라고 생각한 하연은 아르센이 오기를 기다려 재빨리 쟈스란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나 그 사실을 들은 아르센의 반응은 유트와 다를 바 없었다. "하연은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레이디 쟈스란을 구하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요. 게다가 아직 마법사 비욤이 쟈스란양을 납치한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고 단지 추측일 뿐이지 않습니까?" 하연은 그런 아르센에게 배신감마저 들었다. 쟈스란은 그가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을 때 그를 걱정하며 구해 달라고 자신에게 애원했었는데 정작 그 상대는 쟈스란의 어려운 처지를 놓이자 나 몰라라 하다니...... 뭐라고 욕이라도 한바탕 퍼붓고 싶었지만 쟈스란이 어젯밤에 사라졌다면 어쩌면 벌써 그 슈마왕에게 육체를 빼앗겼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이에 하연은 초조한 얼굴로 얼른 카리스와 사담, 미루엘을 불러 부탁했다. "여러분들이 먼저 가서 쟈스란을 구해줘요. 미루엘이 그 성에 가 보았으니까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그 장소로 카리스가 텔레포트할 수 있지요? 빨리 가세요. 이건 대륙의 운명이 걸린 일이에요." 사담과 미루엘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고 카리스는 어젯밤에 쟈스란이 사라진 것을 방관한 죄도 있고 해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한없이 어리석어 지는 자신에게 눈살을 찌푸렸다. 왜 쟈스란의 육체를 빼앗으려는 자가 있다는 것을 어제는 떠올리지 못했단 말인가? 사담은 떠나면서 용병들 특히 세르기아스와 질리안에게 하연을 부탁했다. 그런 사담을 향해 하연은 문뜩 입을 열려다가 다물었다. 새삼 말하지 않아도 그 곳에 로베인이 있다면 그들이 로베인을 구해 낼 거라고 생각하면서. 이윽고 텔레포트로 그들의 신형이 장내에서 사라지자 아르센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쟈스란양이 걱정되기는 하겠지만 대륙의 운명이 걸린 일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대륙을 정복하려는 사악한 대 마법사가 부활하게 될 테니까요." 하연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네!?" "뭐라고요?" 용병들의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대륙을 정복하려는 사악한 대 마법사의 부활이라니...... 이 무슨 음유시인의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말이란 말인가? "지금 장난하십니까?" 유트는 하연이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인상을 팍 찡그리며 말했다. 그러나 하연은 도대체 누가 이런 문제로 장난하느냐는 듯 도리어 그를 한차례 쏘아주고는 아르센에게 말했다. "저는 지금 당장 마르텐으로 가보아야겠어요. 일이 해결되면 여러분들을 뒤따라 갈 테니 걱정하지 말고 먼저 출발하도록 하세요." 그러나 아르센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하연이 간다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연은 그런 아르센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자신 또한 이성적으로는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아니었다. 가서 확인을 해야했다. 무사한 쟈스란과 로베인의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그 모습을. 그 때 아켄이 나서며 말했다. "저도 같이 가게 해주십시오." 그 말에 하연은 물론이고 아르센마저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아켄이 왜 따라간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켄은 결심을 굳혔다. 가지 못하게 한다면 파병군을 탈퇴하고 혼자서라도 갈 생각이었다. 그는 쟈스란을 비욤에게 보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하연이 말해주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 자가 부활할 육체로서 쟈스란을 원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결코 그렇게 쉽게 쟈스란을 내어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된 지금 그 자가 쟈스란의 육체를 차지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복수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켄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박동 했다. 그 자가 원하는 그 육체를 자신의 손으로 죽인다면 그 자가 어떤 표정을 할지 너무나도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 그의 생각을 모르는 아르센은 단순히 마법사의 호기심일 거라고 생각하고는 말했다. "아켄님은 마법사니까 하연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함께 가도록 하십시오. 그럼,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겠습니다."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리밍스와 아켄, 그리고 용병들과 함께 다시 마르텐으로 방향을 돌렸다. 오늘의 마지막이군요. 즐거운 시간 되셨기를 바랍니다. 저도 요즘 즐겁군요. 이렇게 매일 연재를 하게 되다니... 제가 너무너무 마음에 들었거든요.^^ 제 목 : 마신 소환사 -59(137)- 등록자 : 허풍선이(김소영) 등록일 : 09-22 조회수 : 155 영주 성의 꼭대기 방은 천장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하늘이 잘 보이도록 지어져 있었다. 때문에 달빛을 필요로 하는 어둠의 마법을 시전하기에는 최고의 장소였다. 그 속에서 쟈스란은 마법진 위에 양 팔목과 발목이 묶여진 채 누워 있었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자신이 납치된 것을 아무도 모르는 이상 하연이라해도 자신을 구해주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때였다.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들어왔다. 금발머리에 푸른 눈을 지닌 그 사내는 고생을 많이 한 듯 해쓱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는 들어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묶여있는 쟈스란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모습에 쟈스란은 망설이다가 하연의 두들이지 않으면 문은 열리지 않는다는 말을 떠올리고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제발, 저를 좀 구해주세요. 살려주세요, 네?" 하지만 그 말이 사내에게는 들리지 않는 듯 초점이 없는 멍한 표정이었다. 이에 쟈스란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이제 다시는 하연의 곁에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그의 심장을 옥죄는 듯 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있었을까? 갑자기 그 사내가 쟈스란에게 다가오더니 부드럽게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놀라서 쳐다보니 그 사내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보며 중얼거렸다. "울지마, 울지마라. 네가 울면 하연이 우는 것 같아서...... 그래서 내가 너무나 아프다." 쟈스란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그치고 물었다. "하연을 알아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 떠오르는 부드러운 미소가 그가 하연을 알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혹시 당신이 로베인?" 사내는 순간 얼굴이 확 밝아지며 물었다. "하연이 내 예기를 하더니? 그녀가 나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니?" 쟈스란은 너무 당황했다. 그가 로베인이라면 저번 나바린에서 보았던 그 사람이 분명한데 이건 너무도 다른 모습이 아닌가? 그러나 로베인은 당황한 쟈스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듯 다그쳤다. "하연은 요즘 어떠니? 아직도 장난을 많이 치니?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지는 않았니?" 쟈스란은 그런 로베인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하연을 좋아하는군요." 그 말에 로베인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쑥스러워 하는 기색 없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응, 좋아해!" 순간 쟈스란은 로베인이 부러웠다. 자신의 감정에 이처럼 솔직할 수 있다니...... 그도 하연을 좋아하지만 결코 누구에게도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가슴에 두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죄를 짖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기분이었으니까. 그런데 로베인은 그와는 달랐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하연의 일행들에게 인정을 받았던 것이리라. 쟈스란은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로베인에게 질투가 났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쟈스란이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을 내뱉은 것은. "하연은 저를 책임지겠다고 말했어요. 그것은 절 좋아한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 말에 로베인은 충격을 받은 듯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버리더니 다음 순간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쟈스란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 두려워진 나머지 쟈스란은 몸을 떨었지만 결코 로베인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날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어쩌면 로베인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쟈스란은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로베인은 살기를 거두고 긴 한숨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그럼. 이제 그녀가 너를 구하러 이리로 오겠구나." 그 말에 쟈스란은 하연은 아직 자신이 납치된 줄도 모르고 있을 거라는 말을 꿀꺽 삼켜야 했다. "울지 말아야 할텐데...... 하연은 남모르게 혼자서 잘 울거든." 순간 쟈스란은 놀라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녀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대도 그녀를 걱정하단 말인가? "미안. 하연을 위해서라도 너를 구해줘야겠지만 난 너를 구해줄 수가 없어, 미안."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쟈스란을 바라보며 로베인이 말했다. "왜지요?" 잠긴 목소리로 쟈스란이 물었다. "왜 구해줄 수 없다는 거지요?" 로베인은 힘없이 말했다. "그가 이 방 주위에 결계를 쳤어. 그래서 아무도 나갈 수가 없어." "그?" "그래. 내 몸을 지배하고 있는 그 자." 쟈스란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 로베인으로 있잖아요? 어떻게 그가 당신을 지배한다는 거지요?" "나도 잘 모르겠어. 낮에는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데 밤이 되면 내 몸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가 않아. 뻔히 두 눈을 뜨고 보고 있으면서도 말이야." 쟈스란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그저 그의 우울한 얼굴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 "미안!" 로베인은 그 말을 끝으로 방에서 나가 버렸다. 쟈스란은 그런 로베인의 뒷모습을 보면서 곧 자신이 그랑 같은 처지가 된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어졌다. 이제는 자신 대신 하연의 옆에 있을 그의 모습도. 따라서 더 이상 자신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 쟈스란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네로, 네로!" 처음에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두려웠지만 이제는 혹시 그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러나 다행이 잠시 후 그의 눈앞의 공간이 갈라지더니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튀어나와 그의 배 위에 올라앉았다. 네로는 갸르릉 거리며 기지개를 켜더니 투덜거렸다. "너, 왜 이런 결계 속에 갇혀 있는 거지? 내가 공간을 자유로이 이동해 다니는 퍼밀리어가 아니었다면 들어오지도 못했잖아." "그럼, 네 능력으로도 날 여기서 구해줄 수 없다는 말이야?" 쟈스란은 당황한 듯 물었다. "그래. 이 결계는 보통 결계가 아니야. 언령으로 이루어진 결계라고." 언령이라면...... 기초라지만 마법을 배우고 있는 학생으로서 쟈스란은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언령마법은 바로 드래곤의 마법이라는 것을...... 그는 머리 속이 복잡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그 슈마라는 마법사가 사실은 드래곤이었단 말인가? 드래곤이 잠깐의 유희로서 대륙을 정복하려고? 그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설령 하연이 자신을 구해주고 싶어도 구해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또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억지로 참고 쟈스란은 네로에게 말했다. "계약을 해줘." "흠, 좋아! 뭘 원하지?" "그녀. 하연의 모든 기억을 지워 줘. 그리고 나만을 바라보고 나만을 사랑하도록 만들어 줘. 내가 어떤 존재로 변해 버리든." 쟈스란은 독한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그녀를 누구에게도 줄 수 없었다. 바라만 보더라도 그녀를 자신의 곁에 두어야 했다. "인간들이란......" 네로는 뭐라고 중얼중얼 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계약은 성립되었다. 그녀가 너를 본 순간 그녀는 모든 기억을 잃고 너만을 바라보고 너만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조건은 알고 있겠지?" 쟈스란은 자조하듯 웃으며 말했다. "물론." 웅! 오늘은 하나네요.^^ 드디어 쟈스란과 로베인의 정식 만남의 장! 그런데 귀여운 쟈스란이 점점 이상해져서 ㅜ.ㅜ 슬프군요. 마신 소환사 -60(138)- 한편 그 때 카리스와 사담, 미루엘은 영주의 성에 와 있었다. 갑자기 세 사람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나타나자 영주성의 하인과 하녀들이 우왕좌왕하며 경비병을 불러라, 침입자다 라며 난리를 쳤지만 그들은 신경 쓰지 않고 비욤의 방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이미 그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사담이 그들과 좀 떨어진 곳에 숨어서 그들을 감시하고 있던 하인 하나를 붙잡아 와 목을 움켜쥐고는 살기가 가득한 음성으로 물었다. "여기 있던 비욤이라는 마법사는 어디 갔지?" "그, 그분은......" 사담의 목소리에 얼은 듯 그 하인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오늘 아침에 성을 나가셨......"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하인을 던져버린 사담은 카리스에게 물었다. "그 자를 찾을 방법이 없겠습니까?" 방안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카리스는 책상 위에 손을 대고는 중얼거렸다. "미러!" 그러자 환영이 모였다. 비욤이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번에는 문에다가 손을 대고 미러를 외쳤다. 그러자 비욤이 쟈스란을 들쳐업고 방을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사담의 짐작대로 그 자가 쟈스란을 납치한 것이 확실하군요." 그 때였다. 병사들을 이끌고 영주가 들이닥쳤다. "너희들은 누군데 감히 본 영주의 성에 무단으로 침입해 소란을 피우느냐?" 그 말에 미루엘이 영주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희들은 아르센 전하의 기사들입니다. 급한 일인지라 감히 영주님께 인사도 들이지 못하고 이렇듯 소란을 피웠습니다." 영주는 미루엘의 말을 믿지 못 하겠다는 표정이었으나 그녀의 신분은 일전에 미루엘에게 비욤의 거처를 가르쳐 주었던 하녀가 증명해 주었다. "맞습니다. 제가 전에 전하의 명을 수행하고 있던 저 기사 분을 본 적이 있었는걸요." 그러나 영주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그렇지. 기사로서 이렇듯 무례히 행동할 수 있는 것인가?" "죄송합니다. 부디 주군을 둔 수하로서의 입장을 헤아려 주십시오." 다시 한번 미루엘이 고개를 숙여 정중히 청하자 그제야 영주도 표정을 풀며 물었다. "그래, 그 급한 일이란 것이 무엇인가?" "급히 비욤님께 도움을 청할 일이 있으시다면서 비욤님을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비욤님이 보이지를 않는군요." "흠흠! 비욤님은 오늘 아침 일찍 말도 없이 어디론가 가셨다네. 자주 있는 일이지. 하지만 여기서 그 분이 돌아오실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면 만나 뵐 수 있을 것이네." 그러면서 거드름을 피우며 돌아가는 영주와 병사들을 보며 미루엘이 카리스에게 물었다. "어디로 갔을까요?" 그 말에 카리스는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그것은 모르지만 분명한 건 오늘 밤 달이 뜨기 전에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영혼이체마법은 오늘 같이 달이 한 가운데 뜨는 밤에 이루어지는 마법이니까요." 그 말에 사담과 미루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빨리 흩어져서 비욤이 있을만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사담은 우선 마법사 길드를 찾아보았다. 마법사 길드의 마법사들이라면 비욤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 또한 비욤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해서 몹시 아쉬워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대륙에서 6서클의 마법사가 흔하지 않은 만큼 그와 마법에 대해서 토론하면서 마법에 대한 지식을 넓히고 싶은 욕심에서일 것이다. 미루엘은 트레져 헌터답게 비욤의 방문에서부터 그의 흔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성을 나간 흔적까지는 발견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어디로 갔는지 흔적이 깨끗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의아해서 여러 명의 성의 하녀들을 붙잡고 물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비욤이 나가는 것은 보았지만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카리스는 비행마법을 이용해 허공에 떠올라 마르텐의 시내 전역을 내려다보며 마나의 분포가 불균형하게 이루어진 곳을 찾아보았지만 그런 곳은 쉽게 눈이 띄지 않았다. 저녁때쯤 포기하고 사담이나 미루엘이 찾았을까 싶어 다시 성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문뜩 성의 위쪽을 보았을 때였다. 그 부분의 마나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보통 마나는 유동한다. 그런데 그 부분의 마나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 곳에 어떤 결계가 쳐져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찾았다!' 속으로 그렇게 외친 카리스는 재빨리 성으로 이동했다. 그 때 미루엘 또한 생각했다. '그래. 성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면 혹시 성안으로......?' 서둘러 성안으로 들어간 미루엘은 성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성으로 돌아와 급히 위로 올라가던 카리스와 부딪치고 말았다. 카리스가 외쳤다. "위쪽입니다. 성 위쪽에 결계가 쳐져 있습니다." 미루엘은 역시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고 생각하면서 카리스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이층에서 더 위로 올라가니 다락방으로 통하는 듯한 낡은 계단이 보였는데 그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나무문이 나타났다. 그런데 카리스가 문을 열고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그 문을 노려보고만 있는 것이 아닌가? 곧 달이 뜰 시간이 되어 가는지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미루엘이 말했다. "제가 열어 볼까요?" "안됩니다. 이 문에는 언령으로 된 결계가 쳐져 있습니다. 함부로 문을 열었다가는 그 즉시 재가되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순간 미루엘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서긴 했으나 언령마법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카리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드래곤인 카리스가 마법으로 된 결계를 깨지 못하고 보고만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런 미루엘의 의문을 이해한 듯 카리스가 말했다. "언령으로 된 결계를 칠 수 있다는 건 상대가 11서클 즉 드래곤에 맞먹는 마법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상태의 저로서는 상대가 되지 않지요." 그 말에 미루엘은 충격을 받은 듯 멍한 표정이었다. 드래곤조차 상대가 되지 않는 마법사라니...... 그 때쯤 하연들과 용병들은 간신히 마르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영주의 성으로 갈 수가 없었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수므카와 그 부하 해적들 때문이었다. 수므카는 하연을 보더니 희죽 웃으며 말했다. "비욤님이 지금쯤 네 년이 돌아 올 거라고 하더니 사실이었군." 하연이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역시 쟈스란을 납치한 것이 너희들이냐?" 수므카가 그런 하연을 비웃듯이 말했다. "이런, 말은 똑바로 해야지. 원래는 네 년이 그 남창자식을 우리한테서 빼돌린 것이 아니냐? 어때, 밤에 잠자리에서는 쓸만하던가? 별로 힘을 쓸 것 같지는 않던데 그런 쓸모없는 놈을 납치하다니. 원한다면 내가 상대해 줄 수도 있는데 말이야, 크하하하!" "푸하하하!" 그 말에 수므카의 부하 해적들이 재미있다는 듯이 크게 웃어댔다. 그리고 용병들은 쟈스란이 남창이었다는 몰랐다가 그 말을 듣고 놀란 표정이었지만 하연을 모욕하자 금방 분노해서 그 해적들을 쳐죽이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하연은 별로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 모습에 아켄이 이상해서 그녀를 다시 돌아볼 정도였다. 하연은 침착하게 물었다. "쟈스란은 어디 있지?" 수므카는 침착한 하연의 모습에 당황하면서도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이런, 이런. 그 계집애 같은 녀석이 뭐가 그리도 좋다고. 사내라면 적어도 나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나?" 그러면서 자신의 근육을 과시하는 수므카의 모습에 용병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공격을 하기도 전이었다. 하연이 차가운 시선으로 노려보며 외쳤다. "그렇게 시간을 끌려고 노력 해봤자 소용없어요, 소환!" 그러자 장내에 물의 정령 사이라와 불의 정령 로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불렀냐, 주인?" 정령들을 처음 보는 용병들은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정령들과 하연을 번갈아 쳐다보았고 수므카와 해적들은 순식간에 얼굴을 구겼다. '제길. 저런 여자를 나더러 어떻게 상대하라는 거야!' 속으로 하연 일행을 막으라고 자신에게 명한 비욤을 새삼 원망하고야 마는 수므카였다. 하연이 정령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지나갈 때까지 저들을 이 자리에 묶어둬 줘." "네." "알았다." 사이라와 로우는 충실히 하연의 명령에 따라 각기 물과 불로 이루어진 끈으로 마치 미라가 온 몸에 천을 두른 것처럼 그들의 몸을 묶어버렸다. "으악!" "으아아악!" 해적들의 비명이 길게 울려 퍼지고 있는 가운데 하연은 용병들을 데리고 재빨리 성으로 향했다. 왠지 모르게 너무 불안했던 것이다. 성이 그녀의 시야에 보일 때쯤이었다. 갑자기 성이 무너져 내리며 엄청난 굉음이 들리는 가운데 은빛의 드래곤이 그들의 눈앞에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냈다. 순간 용병들의 입이 쩍 벌어지면서 조르가 허탈한 듯 말했다. "눈이 너무 나빠진 것 같아. 내 눈에 드래곤이 보이는 것 있지?" 헌스가 말했다. "그러냐? 내 눈도 엄청 나빠진 것 같아. 나도 드래곤이 보이거든." 용병들이 그렇게 넋이 빠져있는 동안 하연과 리밍스는 초조해서 발을 굴렀다. 카리스가 갑자기 본체로 돌아간 이유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보니 빨리 올려야 겠군요. 아무래도 곧 3권이 나올 것 같은데... 빨리 빨리 서둘러 올리겠습니다. 마신 소환사 -61(139)- "으아아아악!" 쟈스란은 있는 힘껏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머리가 두 쪽으로 깨지는 듯한 엄청난 고통이 밀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로베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슈마를 저주에 가득 찬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자신에게 이런 고통을 준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곧 마족과의 계약으로 인해 변해버린 자신의 머리색과 눈 색을 보며 분노할 그의 모습을 떠올리자 기절을 하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그의 눈에는 작은 만족의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러나 슈마는 그런 쟈스란의 눈빛을 보지 못했다. 드디어 왕의 상징을 지닌 육체를 손에 넣게 되었다는 기쁨에 들떠 있었던 것이다. 그 때였다. 갑자기 성이 무너져 내리며 은빛의 드래곤이 마법진 위를 내리비추고 있는 달빛을 가려버린 것이었다. 그러자 달빛에 의해 영혼이 이어지고 있던 영혼이체마법이 깨어지고 로베인의 육체가 퉁겨 나감과 동시에 슈마의 영혼이 채 쟈스란의 영혼을 점령하지 못하고 반쯤만 들어간 상태에서 스러지고 말았다. 쟈스란에게는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신의 영혼을 온전히 지킨 상태에서 슈마의 마법지식까지 고스란히 소유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머리위로 성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지금, 그 무한한 지식도 고통속에서 정신을 잃고 있는 쟈스란에게는 별 소용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날이 밝았다. 하연은 무너진 성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쟈스란도 로베인도 아무도 구하지 못했던 것이다. 두 사람이 무너진 성에 깔려 죽었으리라고 생각한 카리스, 사담, 미루엘도 그런 하연을 보며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들의 안전을 부탁한 자신들이 오히려 그들을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렸으니...... 그 때였다. "우허어어엉!"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영주의 통곡소리가 들려왔다. 졸지에 자신의 성이 무너져 내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에 하연 일행들과 용병들은 피해 보상이라도 요구할 새라 급히 넋을 잃고 있는 하연을 끌고 그 자리를 피했다. 하연들이 간 곳은 <마법의 아침>이었다. 하연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몸을 좀 추스르자는 생각에서였다. -하연, 그들의 명이 그것뿐이었다고 생각해라. 네 탓이 아니다.- 갈루마의 위로도 지금의 하연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인 것 같았다. 자신이 이 세계에 오지만 않았다면 전쟁이 벌어지는 일도 쟈스란과 로베인이 죽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그 때,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이 세상은 잠시일 뿐. 모두 행복하게 살아야 해요. 라는 자신이 불렀던 그 노래가. 그리고 그 익숙한 가사가 새삼 가슴에 와 닿았다. 잠시라도 행복하고 싶어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던가? 이기적일지라도 나만의 행복을 생각하자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하연은 눈물이 나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일행들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잠시 산책 좀 하고 올게요." 하연이 여관을 나서자 사담이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랐다. 밖으로 나온 하연은 사담이 멀찍이 떨어져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모르는 척 하고 강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강을 따라 걸었다. 잠시 그렇게 아무런 생각도 없이 걷고 있을 때였다. 한 낯익은 소년이 그녀가 있는 쪽으로 달려오다가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하연은 즉시 넘어진 소년에게 다가가 붙잡아 일으켜 주며 물었다. "다치지 않았니?" 어린 소년은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하연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 네. 고맙습니다." "너, 나한테 누나와 같이 소원을 이루어주는 돌을 팔던 소년이지? 남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착한 일을 하니 매일 매일이 행복할 텐데 왜 울고 있지?" 하연은 가만히 허리를 굽혀 눈 높이를 소년에게 맞추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소년이 눈물을 왈칵 쏟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흑! 엄, 엄마가......?" "너희 어머니가 왜?" "......아파요, 많이. 의사가 곧 죽을 거래요. 하지만 난 엄마가 죽는 거 싫어요." 그 말에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소년을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래. 누군가 죽는 건 정말 싫은 일이야." 한동안 소년을 안고 있던 하연은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이윽고 소년의 손을 잡고 여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카리스에게 소년의 처지를 말하고 도와줄 수 있는 지 같이 가 봐달라고 부탁했다. 카리스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소년과 하연을 번갈아 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 쉬었다. 마법으로 모든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마치 자신이 가면 모든 일이 해결될 거라는 눈빛이라니...... 하지만 하연의 그런 시선을 무시할 수 있는 배짱이 카리스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카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따라나서고 말았다. 소년은 하연이 말한 카리스가 뛰어난 의원이라는 말을 믿었는지 얼굴에 함박 웃음을 띄고는 날듯이 앞서 달려갔다. 소년의 집은 변두리에 위치해 있었는데 낡아서 금방 부서져 내릴 듯 했고 통풍도 잘 되지 않는 듯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방안에는 소년의 어머니라기 보다는 노파로 보이는 여인이 다 죽어 가는 표정으로 누워 있었고 곁에는 일전에 보았던 어린 소녀가 그녀를 간병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들을 보자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녀는 혹시 하연이 소원을 이루어주는 돌로 소원을 이루지 못해서 불평을 하고 돈을 돌려 받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 왔다고 생각했는지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러자 소년이 외쳤다. "누나, 저 분의 동료가 뛰어난 의사래. 그래서 모셔왔어." 소녀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윽고 눈가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카리스는 고생에 찌든 듯한 노파를 보며 어린 남매가 눈치채지 못하게 회복마법을 걸었다. 은빛이 노파의 몸 속에 스며들면서 노파의 얼굴이 점점 생기를 띄어 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카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우울한 심정이 되어 하연 또한 이처럼 자신의 마법으로 건강해 질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혈색이 돌아온 어머니의 얼굴을 보면서 기뻐하는 어린 남매를 보며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하연의 얼굴에 자신도 머르게 기쁜 얼굴이 되고 마는 카리스였다.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거지 한 명이 하연과 카리스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제발, 제발 조금만 적선해 주세요. 배가 너무 고파서 그래요." 카리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 거지를 밀쳐내려고 했으나 하연이 품속에서 돈을 꺼내려는 모습에 피곤한 듯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거지에게 돈을 주면 그 거지로 끝나지 않고 수많은 거지들이 몰려들기 마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더 기막힌 일어나고 말았다. 하연이 그 거지에게 금화를 던져 준 것이었다. 카리스는 물론 그 거지조차 놀라서 눈이 부릅떠진 얼굴로 얼른 금화를 깨물어보고 다시 빼앗을 새라 얼른 챙겨 넣는 모습이었다. 세상에 거지에게 적선을 한다고 금화를 던져주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연, 지금 금화를 던져 준 것 압니까?" 하지만 하연은 자신이 던져 준 돈이 금화였다는 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어깨만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카리스의 예측대로 그들은 곧 수많은 거지들에게 둘러 쌓였다. 하연은 돈을 달라는 사람들 모두에게 일일이 금화를 하나씩 주었다. 조금도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곧 그녀에게 돈은 필요없는 물건이 될 테니까. 자신에게 필요없는 그 돈으로 그들이 조금이라도 행복해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하연의 모습을 본 용병들은 그녀가 여관으로 들어오자 우려의 빛을 띄며 물었다. "하연, 그렇게 나누어주다가 우리 고용비는 어떻게 되는 거야?" "응? 아, 걱정 마. 돈이 없으면 내가 드래곤 레어라도 털어서 줄 테니까." 용병들과 카리스는 그 말에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보았지만 그 말뜻을 짐작한 사담, 미루엘, 리밍스는 킥킥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연의 말은 즉 카리스의 레어에 있는 돈을 꺼내 쓰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저도 모르게 입이 한발은 나와 투덜거리는 카리스였다. "젠장, 나 같이 가난한 드래곤이 이 대륙에 또 어디 있다고. 차라리 트롤의 간을 빼 먹을 것이지......" 두번째... 아! 이런 정안 홈피의 제 독자분들. 늘 첫번째다 두번째다 하시는 것들을 보니 제가 물들어 버린 것 같습니다.ㅜ.ㅜ 마신 소환사 -62(140)- 마라브르 강위에는 검은 배 한 척이 유유히 마르텐을 떠나고 있었다. 수므카와 그 부하 해적들, 그리고 마법사 비욤이었다. 비욤은 검은 안대로 가린 한 쪽 눈을 어루만지며 수므카와 그 부하들에게 말했다. "절대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된다. 당분간은 해적질도 삼가라. 우리는 곧 벨라스카 해안을 통과하게 된다. 그 해안만 통과하면 우리의 새로운 왕국인 트리엔시라가 나온다. 트리엔시라 왕국은 곧 이 대륙의 통일을 이룰 것이다. 너희들은 바로 그 왕국의 기사로 대륙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전사들인 것이다. 그러니 부디 지금은 자중하고 때를 기다리길 바란다." 우왓! 격렬한 환호성을 터트리며 해적들은 기쁨에 발을 굴렀다. 백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해적으로 반평생을 보낸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언제까지나 해적이라는 멸시뿐이었다. 비록 나바린의 백성들이 그들을 이해해 준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그것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벨라스카 해안을 통과하게되면 그들은 한 나라의 기사가 되는 것이었다.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해적들의 모습을 만족스럽게 보던 비욤이 수므카에게 새삼 당부했다. "설사 나바린의 해적들을 만나다해도 싸우지 말고 피해라. 아직은 싸울 때가 아니니까." 수므카는 그 말에 비릿한 조소를 띄우며 말했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하시오. 나바린을 무너트리는 것은 나 용사 수므카의 몫이라는 것을." "물론이지." 비욤은 수므카의 커다란 등을 툭툭 쳐주고는 자신의 선실로 들어갔다. 선실에는 양 벽으로 두 개의 침대가 놓여있데 그 위에는 각기 쟈스란과 로베인이 누워 있었다. 극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성 속에서 그들을 구출하기는 했지만 어느 누가 그 분인지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번 영혼이체마법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를 알 수 없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했다. 실패했다면 로베인에게 그 분의 영혼이 있는 것이고 성공했다면 쟈스란에게 그 분의 영혼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호도 비욤은 그 분이 소멸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정신 속에는 그의 의지가 심어져 있었다. 따라서 그 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의 정신이 파괴되어 그 또한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자신이 무사한 것으로 보아 그 분의 영혼은 무사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쟈스란이나 로베인이 눈을 뜨면 누가 그 분인지 곧 알 수 있을 테니까. 하연은 다시 파병군에 합류하기 위해 아르센의 뒤를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가 없고 앞으로의 일에만 집중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로베인이나 쟈스란에 대한 죄는 곧 자신의 죽음으로서 갚을 수 있을 테니까. 결정을 하고 여관을 나서던 하연 일행과 용병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여관 앞에 빽빽이 모여든 사람들 때문이었다. 모두 안색이 초췌한 것이 대부분이 이번 전쟁으로 인해 유입된 피난민들 같아 보였다. 그들은 하연을 보자 일제히 손을 내밀며 도움을 청했다. 하연은 그들을 무시하고 지나갈 수 없었다. 결국 그 자신으로 인해 집을 잃고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아닌가? 결국 그녀는 주머니를 열어 그들에게 일일이 금화를 한 개씩 나누어주었다. 모자란 돈은 사담과 카리스에게 빌려서라도 주었다. 그렇게 그들에게 단 한 개의 금화조차 남아있지 않게 될 때까지. 용병들은 그런 하연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결국 밑 빠진 독에 물 붇기가 아닌가? 하지만 용병들 중 어느 누구도 하연이 하는 일을 말릴 수가 없었다. 너무나 행복해 하는 하연의 표정 때문이었다. "성자님, 여기요. 저에게도 금화를 주세요." "저도요. 며칠 째 아무 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성자님." "아이들이 굶고 있어요, 성자님." 누구의 입에서부터 흘러나왔는지는 몰랐다. 하연에게 몰려든 사람들은 누구나 그녀를 성자라고 불렀다. 그들은 그녀의 목에 걸린 엘 루아를 보고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하연의 부드러운 미소 때문이었다. 그녀의 미소를 보고 있으면 아픈 상처가 가시는 듯 하고 이런 고생쯤은 아무 것도 아니니 노력하면 행복해 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결국 좀처럼 마르텐을 벗어나지 못한 일행들은 저녁 늦게 하연을 검은 로브로 머리끝까지 숨기고 몰래 마르텐을 도망치듯 떠나야 했다. 저녁 늦게 모닥불을 피우고 한 가운데에 둘러앉은 그들은 간단한 스튜를 만들어 먹으며 허기진 배를 달랬다.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도망치느라고 제대로 먹지도 못했던 것이다. 모두 허겁지겁 먹기에 바쁜데 하연은 별로 먹지 않았다. 미루엘이 걱정되는 듯 말했다. "하연, 고생이 심했을 텐데 든든하게 먹어 두어야지요." 하연은 피식 웃었다. "저 때문에 고생은 여러분이 했지요. 저는 하나도 고생하지 않았는 걸요. 게다가 행복을 가득 먹어서 엄청 배가 부르다고요." "네?"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일행들을 보며 하연은 더욱 활짝 웃었다.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었으니까. -멍청이! 바보!- 갈루마의 욕을 들어도 헤실 거리며 나오는 웃음을 그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 하연을 보며 소시언이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레이디 하연이 좋은 일을 하신다는 건 알겠지만 전 평범한 용병이라 선뜩 도와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 돈이면 제가 무엇을 살 수 있고 무엇을 먹을 수 있을지 그런 것만 떠올라서......" 율리아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 돈이면 술을 얼마나 마실 수 있는데...... 그런데 그 많은 돈을 뿌리다니 나 같으면 아까워서 잠도 못 잘 거야." 그런데 뜻밖에 하연마저도 그 말에 동의를 하는 것이 아닌가? "당연하지. 그게 잠만 못 잘 일로 끝날 일이야. 나도 내가 번 돈을 아까처럼 쓴다면 너무 울화통이 터져서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길로 당장 죽겠다고 날뛸걸." "에!" "뭐라고요?" 모두 어이가 없다는 듯 하연을 쳐다보자 하연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까 그 돈은 내가 번 돈이 아니었거든." "그럼?" "드래곤 레어에서 훔친 돈이었어. 내 돈이 아니었던 거지." 순간 용병들과 아켄은 경직된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웨이가 튀어나오려는 심장을 움켜쥐며 애처롭게 물었다. "그럼...... 여관에서 드래곤의 레어라도 털어서 돈을 마련해 준다고 했던 것이 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단 말입니까?" 제발 아니라고 말해주길 바라는 용병들의 표정을 보면서도 하연은 발음에 정확성까지 기하면서 확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응!" 그러면서 덧붙이길. "말만해. 언제든지 드래곤의 레어를 구경시켜 줄게. 처음이야 어렵지만 두 번째는 쉽기 마련이거든. 게다가 이번에는 트레져 헌터인 미루엘도 있고 말이야." 곁에서 카리스가 식은땀을 흘리는 것을 즐겁게 구경하면서 말이다. 그러자 어쩌면 하연이 정말 성자 비슷한 어떤 존재인지도 모른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용병들은 단숨에 그 생각을 날려버렸다. 저런 여자가 성자라면 자신은 빛의 여신 펠레아의 사자일거라고. 그런데 그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아켄이 말했다. "그래도 대단합니다, 하연님. 저라면 아무리 훔친 것일지라도 제 것이 된 이상 다른 사람에게 그렇듯 쉽게 내어 주지는 못할 겁니다." 미처 그런 점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용병들은 그제야 그 점에 생각이 미친 듯 놀란 표정으로 다시 하연을 보았다. 하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가치의 문제겠지요. 제게 돈은 펼 가치가 없는 물건이거든요." "그럼 하연에게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이지요?" 뜻밖에 이번에는 사담이 물었다. 그 말에 하연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과연 지금 내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대답은 한가지밖에 없었다. "시간이요." 그러면서 하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누가 나에게 1년, 아니 반달만이라도 준다면 그를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을 정도로요.' 오늘은 일요일이지요? 여러분들에게 즐거운 일요일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제 목 : 마신 소환사 -63(141)- 등록자 : 허풍선이(김소영) 등록일 : 09-24 조회수 : 4 그렇게 말하는 하연의 표정이 너무 어두워 보여서 일행들과 용병들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리고 사담과 카리스는 왜 하연에게 시간이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인지 그 이유를 생각하기에 골몰했다. 그러나 그들이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단지 하연에게 시간이 없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 이외의 것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니 마음 한편 어느 곳에서는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을지라도 애써 생각을 떠올리기 싫은 것일지도 몰랐다. 화제를 돌리려는 듯 하연이 이번에는 아켄에게 물었다. "아켄에게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이지요?" 아켄은 당황하는 듯 하더니 말했다. "......제가 가장 가치를 두는 것은 복수입니다." 그 말에 장내에는 정적이 흘렀다. 하연은 그런 아켄을 유심히 응시하더니 말했다. "소중한 것을 잃었군요. 아켄씨에게 가장 소중한 것. 그것을 잃어서 지금 복수가 가장 소중하다고 말하는 거지요? 그러지 말아요. 그러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슬퍼해요." 아켄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절 사랑하는 사람따위 없으니까요." "지금은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만약 생긴 다면요? 앞으로의 일은 모르니까 그런 사람이 생겼는데 아켄씨가 복수에 미쳐서 그 사람을 잃어버리게 된 다면요? 그래도 상관없어요?" 아켄은 무슨 웃기는 소리냐는 듯 하연을 보았다. 그런 사람이 생길 리도 없겠지만 그 사람을 왜 자신의 복수로 인해 잃어버리게 된단 말인가? 이에 하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저희 영지에서 그런 불행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에요. 그 당시, 저희 할머니 때 일인데요. 저희 영주는 그렇게 현명하지는 않았지만 온후한 성품의 비교적 좋은 영주였다고 들었어요." -또 시작됐군. 너 그거 아냐? 너 같은 사람을 가리켜 사람들이 사기꾼이라고 한다는 걸.- '사기꾼은 무슨...... 이런 걸 두고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하는 거다.' 하연은 갈루마의 말을 속으로 반박하며 계속 말했다. "그런데 어느 날 전쟁이 나서 그 영주가 국왕의 명령에 따라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지요. 그런데 몇 년 후, 전쟁이 끝나도 영주는 돌아오지 못했어요. 전사했다는 통보 한 장만 도착한 거지요. 그 영주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전사했다는 통보에 그런 줄로만 알았어요. 그리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주가 되기 위해 수도에 가 국왕에게 영주임명장을 받고 그 날 저녁에는 왕실에서 여는 무도회에 참석했지요. 그 곳에서 그는 한 여인을 만나 첫 눈에 사랑에 빠지고 말았어요.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그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그리고 그 여인도 마찬가지였지요. 며칠 동안 열리던 왕실무도회에서 그 둘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고 결혼까지 약속했지요." 잠시 말을 끊은 하연은 정말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 쉬었다. "왜, 왜요?" 미루엘과 율리아는 하연이 갑자기 한숨을 쉬자 마음을 졸이며 물었다. "그런데 그 여자의 아버지가 둘의 결혼을 반대하고 나선 거예요. 그 쪽도 영주의 가문이라 둘의 결합은 남들이 보기에도 그렇게 나쁜 결합이 아니었는데도 말이에요." 그러자 다들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하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여자의 아버지의 허락을 받으려고 수도에 남아서 미적거리던 그가 우연히 자신의 아버지가 전사한 것이 아니라 피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 버리고만 거예요." 순간 모두 긴장된 마음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는 복수에 불타기 시작했어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자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그 피 값을 갚겠다고 다짐했지요." "당연한 일입니다." 용병들과 아켄은 그런 상황에서 복수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연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는 그 말을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했어요. 여인도 당연하다고 그의 마음을 이해해 주었지요.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그 원수를 찾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결국 알아내게 되었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 원수는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 아버지였어요." 미루엘과 율리아는 안타깝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실을 안 그는 무척 번민했어요. 하지만 복수를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요.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남자들은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결국 선택을 해야 한다면 사랑보다는 복수를 선택하는 것이 그들의 신념에 어울리는 행동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그 영주에게 결투를 신청했어요. 그 날 초조한 표정으로 그 둘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이 보였지만 남자는 복수가 우선이라고 생각해 그 여인에게서 등을 돌렸지요. 결투가 벌어졌고 사실 그는 그 영주의 상대가 되지 못했어요. 어쨌든 영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정도의 실력을 지닌 기사였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영주의 손에 죽게 되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어느 정도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지요. 사랑하는 여인의 아버지를 죽이지 않게 되어서요. 하지만 결국 죽은 것은 그 영주였어요. 죽으면서 영주는 말했지요. 딸이 사랑하는 남자를 죽일 수는 없었다고. 딸의 눈에서 눈물이 나게 만들 수는 없었다고요. 그러면서 자신이 그의 아버지를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아버지가 중상을 입고 고통스럽게 죽는 것을 보다 못해 단숨에 죽여버린 거라고 말했지요. 그리고 딸을 부탁한다 고도요." 모두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결말이 그렇게 날 줄은 아무도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그는 망연자실해 버리고 말았어요. 자신의 복수가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는 행동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요. 여인은 아버지의 시체를 끌어안고 울다가 자신 또한 자결하고 말았어요.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사랑하는 것도 죄스러운데 그와 살수는 없다고 하면서요." 아켄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면서 그 남자의 경우정도만 되었더라도 자신은 이렇듯 복수에 미치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에게는 죽는 그 순간까지 그를 사랑해준 여자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등뒤에 칼을 찔러 넣은 동료와 그에게는 그의 심장을 먹음으로서 복수를 했다. 자신의 영혼마저도 구속해 이용하려는 자가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 남자는?" 율리아가 궁금한 듯 물었다. "보나마나 다른 여자 만나서 잘 살다 죽은 거 아니야? 남자들이야 다 그렇잖아?" 남자에 불신이 진한 율리아의 말에 웨이가 당황한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어? 아니지요, 하연?" 제발 아니라고 말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웨이의 표정에 일순 잘먹고 잘 살았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이 무럭무럭 피어올랐지만 하연은 스토리를 매끄럽게 진행시키기 위해 그 유혹을 떨쳐버리고 말았다. "그 남자는 그 여인을 그리며 평생을 후회하면서 혼자서 살았어요." "에, 정말이요?" 못 믿겠다는 율리아의 표정이었고 웨이는 안도하면서 말했다. "그렇게 헌신적인 사랑을 하는 남자도 있는 거라고." "흠, 그렇군요. 웨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사랑이지만." 그 말에 웨이의 얼굴은 무참하게 일그러져 버렸고 용병들은 땅을 치며 웃어댔다. 밤이 깊어 모두 잠이 들었지만 하연은 그저 눈을 감고 잠든 척하고만 있었다. 어떤 사람은 평생을 후회하면서 살았지만 후회할 시간조차 없는 자신. 하지만 그에 비하면 그녀는 행복한 사람이 아니던가? 비록 죽음이 일찍 찾아오긴 했지만 그것도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한번쯤은 해보기 마련인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니까. 이르던 늦던 말이다. 오후 두시 조금 넘었는데 꼭 이른 아침인듯한 기분이네요.^^ 시작은 즐겁게! 출발하겠습니다.^^ 제 목 : 마신 소환사 -64(142)- 등록자 : 허풍선이(김소영) 등록일 : 09-24 조회수 : 306 다음 날. 하연일행과 용병들은 일찍부터 일어나 출발을 서둘렀다. 파병대를 따라잡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스산한 날씨와 자욱하게 펼쳐지는 안개의 바다로 인해 그들의 발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그러다 점심때가 되어 어디서 점심을 먹을만한 데가 없을까 하고 이러 저리 주위를 살피고 있을 때였다. 조르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갑자기 단검을 던졌다. 휘익! 날아간 단검은 한 나무에 틀어박혔다. 웬 사람의 옷가지 비슷한 천과 함께. 그들이 가까이 가보니 분명 사람이었다. 몸이 말라 재빠르게 보이나 소심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넌 누구냐?" 헌스가 험악한 얼굴로 이를 갈 듯 물었다. 그러나 그는 부들부들 떨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 산적인데요." "산적?" 하연은 호기심을 짙게 들어내며 물었다. "혹시 그거 지나가는 사람들 앞을 가로막으며 가진 것 다 내놔 라고 말하는 사람들?" "네? 네." 청년은 갑자기 들이밀어진 하연의 얼굴에 순식간에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말했다. "어? 그런데 왜 우리 앞을 가로막지 않고 이렇게 숨어서 지켜보기만 한 거지? 너무 하잖아? 사람 차별하는 거야? 우리가 가진 게 없어 보였던 거야?" 하연은 벌컥 화를 내며 외쳤다. 모험에 목숨을 건 하연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모험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메뉴 중에 하나인 산적을 만나서 물건을 털리기가 산적들의 외면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상황에 처해있으니 그녀의 분노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산적청년은 갑자기 화를 내는 하연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이었다. 그런 산적청년을 대신해 미루엘이 차분하게 하연에게 설명해 주었다. "차별을 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어느 간 큰 산적들이 저희 일행들을 보고 덤빌 생각을 하겠습니까? 드래곤의 심장을 빼먹은 다음이라면 모를까요." "그래도 그렇지. 일단 한 번 직업을 선택했으면 자신의 직업에 충실해야지. 사정이 여의치 않다고 일을 안 한다면 그걸 어떻게 직업이라고 할 수 있겠어?" "부업으로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부업은 일이 아니야? 일단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어떤 일이든 제대로 해야지." 갈수록 이상해져 가는 하연과 미루엘의 대화에 용병들마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 때 카리스가 하연을 진정시키려는 듯 말했다. "더군다나 우린 진짜 가진 것도 없지 않습니까? 저 산적이 보는 눈이 있었던 거지요." 그러나 그 말은 하연에게 어떤 생각을 떠올리게 하고 말았다. "맞아. 그러고 보니 우린 정말 가진 게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었어." 혼자서 중얼거리던 하연은 산적청년에게 말했다. "저희를 산적소굴로 좀 안내해 줄래요?" "에?" 비명을 지르듯 외친 것은 용병들이었다. 산적청년은 아직까지도 하연이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왜 그들이 산적소굴로 들어간단 말인가? 빤히 쳐다보는 일행들을 보며 하연은 태연히 설명했다. "산적들이 우리를 상대해 주지 않으니까 우리가 산적들을 상대해 주어야지요. 게다가 여행경비도 필요하잖아요? 산적들을 털어서 충당하도록 하자고요." 얼빠진 듯 멍하게 쳐다보는 용병들과 산적청년을 다그쳐 하연 일행들은 산적소굴로 갔다. 산적소굴은 마치 작은 마을을 보는 듯 했다. 옹기종기 붙어있는 작은 집들과 빨래하는 여인들. 울어대는 아기들. 하연은 흥미롭게 그 모든 것을 보면서 산적청년에게 물었다. "여기가 정말 산적소굴?" "에, 뭐, 마을이나 마찬가지지요. 단지 좀 가난한. 이 곳은 경작할 땅도 없는 대다가 돈이 되는 일은 약초를 캐거나 사냥을 해 짐승가죽 벗겨서 도시로 나가 파는 일밖에는 없거든요. 그래서......" "그런데 산적들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산적처럼 생긴 인상의 남자들이 왜 빨리 안 나타나는지 초조해 하는 하연을 보며 산적 청년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아! 남자들은 지금 모두 사냥을 나가고 없습니다. 저만 남아서 망을 보고 있었던 거지요." "쳇!" 하연은 기분 나쁘다는 듯 투덜거렸다. 오면서 산적청년을 다그쳐 배운 산적 멘트가 모두 소용없게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런 하연을 보며 산적청년은 땀이 나는지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그래도 혹시 다른 곳에 가서는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럴까?" "그럼요. 아주 멋지게 잘하시니까." "하긴. 내가 뭘 하든 다 잘하거든. 그러면서 하연은 산적 폼까지 잡으며 거만하게 외쳤다. "모두 꼼짝 말아라. 움직이는 자들은 그 자리에서 베어 버리겠다. 자, 가진 것 다 내어놓아라. 그럼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산적청년과 하연일행들은 잘했다는 듯 박수를 쳐주었으나 용병들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하연일행들과 용병들은 산적소굴을 털러 갔다가 산적들과 오손도손 모여 앉아 맛있게 점심을 먹고 손까지 흔들며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렇게 산적소굴을 떠난 그들은 하연에게는 몹시 유감스러운 일이었지만 아무 일 없이 무사하게 파병군이 주둔해 있던 자오린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그들이 본 광경은 며칠을 굶은 듯 눈동자만 번뜩이는 길거리에 나 앉은 사람들과 죽은 부모의 시체를 끌어안고 울고 있는 아이들, 자식들의 시체를 어루만지며 소리 죽여 오열하는 노인들의 모습들이었다. 하연은 차마 그런 그들을 볼 수가 없어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었다. 아무리 뻔뻔한 그녀라도 이런 상황에서 고개를 들고 다닐 배짱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때였다. 휙! 누군가 던진 돌이 하연의 얼굴을 스치고 날아갔다. 그리고 들려오는 고함 소리. "죽어버려! 이 사악의 어둠의 사제야! 너희 때문에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단 말이다. 저주받을 것들." 그러자 여기저기서 잇달은 고함소리와 돌들이 날아왔다. "우리에겐 빛도 어둠도 다 필요없어. 이 사악한 것들아!" "너희가 사제냐? 너희들은 살인자야!" "죽어라!" 퍽! 퍼퍽! 돌들이 하연의 몸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사담이 검으로 쳐내고 카리스가 실드로 막아 하연의 몸에 맞는 돌들은 없었다. 맨 처음 돌만이 하연의 볼을 스치고 지나가 뺨에 가볍게 피가 날 뿐이었다. 그 피를 손으로 닦으며 하연은 씁쓰름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항의와 욕설은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결과적으로 그녀로 인하여 일어난 전쟁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녀의 피를 본 카리스는 흥분해서 눈에 불을 켰다. 그녀의 몸에 피를 내다니...... 브래스를 뿜어 그들을 모두 태워 죽이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하연이 그런 그의 마음을 눈치챈 듯 가볍게 고개를 가로 저었던 것이다. "하지 말아요. 저들이 분노는 당연해요. 제가 저들의 가족을 죽였거든요. 수천 명의 목숨을 헤친 살인자가 그들 앞에 서 있는 거거든요." "하지만......!" 용병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그녀가 그들의 가족을 죽인 살인자란 말인가? 그들이 아는 그녀는 결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여인이 아니었다. 장난기 많고 웃음이 많으며 또한 정이 많은 여인이었다. 그런데 살인자라니...... 그러나 하연의 일행들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로 인해 벌어지게 된 빛과 어둠의 전쟁이었으니 죄책감이 없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그들 또한 저들이 그녀에게 이런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것을 참고 견딜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은근히 카리스를 종용해서 살기를 뿜도록 했다. 이에 카리스는 군중들에게 드래곤 피어를 뿜어냈고 군중들은 그 눈초리에 질린 듯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굳어져서 식은땀을 흘리다가 슬금슬금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갑자기 사람들이 도망치는 모습에 하연도 그것을 눈치채고 카리스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카리스와 일행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듯 딴청을 피웠고 그 모습에 하연은 그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혼 대륙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적으로 돌릴지라도 이들만은 언제나 자신의 편에 서 주리라고 자신하면서. 그래서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파병군이 진영을 치고 있는 선착장으로 향하자 아르센과 유트가 그들을 마중 나오며 그간의 경과를 물었다. 하연은 마르텐에서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성이 무너져 내리고 쟈스란은 그 속에 파묻혀 죽었다는 것을. 순간 아르센은 씁쓰름한 표정이었다. 어찌되었든 쟈스란은 그의 첫사랑이었으니까. 날씨가 참 멋지네요.^^ 글을 쓸데 처음 시작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게 가장 고민이에요. 오늘 처럼 날씨가 멋지다면 그런 고민 다 날려버리고 상쾌한 날이었다. 라고 시작하지만요. 그래서 전 좋은 날씨를 정말 좋아합니다.^^ 제 목 : 마신 소환사 -65(143)- 등록자 : 허풍선이(김소영) 등록일 : 09-24 조회수 : 347 자오린은 슈이센에서 가장 큰 항구 도시이나 빛과 어둠의 전쟁으로 인해 선박 역시 많이 파괴되어 버려서 천명이 넘는 파병군을 수송할만한 여건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아르센은 파병군을 둘로 나누어 수송하기로 결정했다. 때문에 그들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병사들의 탈주를 막기 위해 믿을 수 있는 자들 그래봐야 하연일행이나 용병들뿐이었지만 그들을 둘로 나누어 병사들을 감시하도록 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누다보니 일차로는 카리스, 미루엘, 소시언, 율리아, 웨이, 헌스, 이너스가 아르센과 함께 강을 건너게 되었고 그 다음으로 하연, 사담, 리밍스, 아켄, 조르, 세르기아스, 질리안이 유트와 함께 강을 건너게 되었다. 카리스으로서는 하연과 떨어지는 것이 불만이었지만 하연이 짐짓 작전참모로서의 위엄을 보이며 '이건 군령이에요' 라고 말하는데 그녀의 말을 듣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어서 하연은 사담, 리밍스들과 더불어 수송선이 왕복할 시간동안 자오린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아르센이 카리스들과 떠나자 사담과 유트는 병사들을 훈련시키기에 바빴다. 그래서 사담은 하연에게 꼭 천막 안에만 있으라고 당부했다. 밖으로 나갔다가 하연이 괜한 봉변을 당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하연도 요즘 들어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그 편이 좋았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왠지 초조해지고 무언가 아까운 시간을 버리고 있는 기분이라 결국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바람이라도 쐬기 위해 선착장으로 나갔다. 마라브르 강. 몇 만년이 흐른다 해도 결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그 도도히 흐르는 강을 바라보면 마음이 모두 그 속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슬픔도 기쁨도 모두 그 속에 빨려 들어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것이었다. 그 공허한, 머리 속에 아무 것도 없는 것 상태가 하연은 좋았다. 그렇게 몇 시간을 마라브르 강만을 바라보고 서 있었을까? 문뜩 마르텐에서 산 돌들이 떠올랐다.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그 돌들을 가지고 나온 하연은 그 돌들을 하나 씩 하나 씩 마라브르 강위로 흘려보냈다. 작고 반짝이는 돌들이 강위를 떠내려 갈 때마다 하연은 기도했다. 전쟁으로 인해, 아니 자신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의 영혼에 평온이 깃들기를...... 물론 그것이 얼마나 유치한 짓인지 하연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유치한 짓거리라도 해보고 싶은 것이 지금 그녀의 심정이었다. 그래야만 이 무거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돌들을 모두 떠나보내며 하연은 그 돌들이 마라브르 강 끝에 닿기만을 기원했다. 그러면 자신의 소원도 하늘에 닿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 때 강 저쪽에서 사람의 시체 같은 것이 둥둥 떠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순간 하연의 심장이 마구 고동치기 시작했다. 뭔가 놀란 만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기이한 예감 때문이었다. 하연은 생각할 틈도 없이 얼른 강속으로 뛰어들어 그 시체를 끌어냈다. 물에 젖은 사람의 몸이라서 그런지 너무 무거웠다. 간신히 그 시체를 끌어올린 하연은 온 몸의 기운이 쫙 빠진 듯이 느낌이라 헉헉대며 그 시체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멍한 표정으로 눈물만 뚝뚝 떨구고 말았다. 로베인이었던 것이다. 떨어지는 하연의 눈물이 강속에 녹아 내리고 항구에는 온통 다이아스의 꽃향기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향기를 맡은 사람들은 갑자기 일어나는 따뜻한 마음에 자신의 아내를, 남편을, 아이들을 껴안으며 속삭였다. "사랑한다." "사랑해." 얼마나 그렇게 소리 없이 울고 있었을까? 문뜩 떨리는 손끝에 느껴지는 심장의 고동 소리에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환희에 차서 외쳤다. "살아 있어." 밤새도록 로베인의 곁을 지키는 하연을 보며 용병들은 사담과 리밍스에게 로베인와 하연과의 관계를 물었다. 하지만 사담과 리밍스라고 해서 그들의 관계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보면 로베인의 짝사랑이 분명했지만 어떻게 보면 서로 사랑하는 사이처럼 보이기도 한 이상한 관계가 바로 그들의 관계였으니까. 로베인이 깨어난 것은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였다. 깨어나자마자 하연의 얼굴을 본 로베인은 잠시 멍하니 바라만 보다가 중얼거렸다. "......또 꿈인가? 그래도 좋아. 하연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이대로 영원히 꿈속에서 있고 싶어." 하연은 기껏 깨어나서 하는 로베인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투덜거렸다. "바보, 어서 일어나. 너 간호하느라고 난 한 잠도 못 잤다고. 나 잠 못 자면 발광하는 거 알지?" 으름장을 놓듯 말하는 하연의 말에 로베인은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갑자기 깨달은 듯 벌떡 일어나 하연의 어깨가 으스러지도록 움켜쥐며 외쳤다. "정말, 정말 하연이야?" "그래, 이 바보야! 어깨 부서지겠다. 어서 놔!" "어, 어떻게......?" 어떻게 자신이 하연에게 와 있는지 로베인은 어리둥절하고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무엇인가가 떠오르듯 얼굴을 굳히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 영혼이체마법이 성공했다는 것을 알고 비욤이 이제는 내가 필요없다면서 날 강에다 던져 버렸었지. 그래도 한 때마다 모시던 분의 육체였으니 자신의 손으로 죽이기는 그렇다면서." "맞아. 너 강에서 떠내려왔어. 처음엔 나 네가 시체인 줄 알았다고." 울먹이는 하연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 로베인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정말 보고 싶었어. 너무 보고 싶었어. 너에게로만 가고 싶었어. 이것이 마지막이라면 내 시체라도 너에게로 가게 해달라고 애원했었어." 로베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연은 가슴이 메어지는 듯 했다. "......나도 보고 싶었어, 로베인." 결국 하연은 결코 입밖에 내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그 말을 입에 담고야 말았다. 어차피 로베인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챌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녀의 생각대로 로베인은 하연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로베인은 정말 기쁜 듯 활짝 웃었다. 비록 하연이 자신을 동료로만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을 생각했다는 뜻이 담긴 그 말이 너무도 기뻤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녀가 좋아하고 있고 지금 가장 보고 싶을 게 분명한 쟈스란의 얼굴이 떠오르자 우울한 얼굴이 되어 하연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 "저, 쟈스란은......!" "......응." 하연은 로베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았다. 그 대신에 쟈스란이 슈마의 육체가 되어버렸다는 말이리라. 그런데, "......너무 괴로워하지마, 하연. 그리고 포기하지도 마. 넌 하연이잖아? 연인을 반드시 구할 수 있을 거야." "에? ......연인이라니?" 쟈스란 예기하다가 갑자기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싶어 로베인을 바라보았지만 로베인은 그런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나도 도와줄게. 네가 행복하다면...... 난 그걸로 충분해." 하연은 뭔가 대화의 초점이 어긋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다행이 쟈스란도 살아있는 것 같고 아무려면 어떠냐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서로 어긋나기만 대화를 하고 있자 밖에서 그들의 말을 엿듣고 있던 세르기아스와 질리안으로서는 기가 막혀서 땅에 머리를 박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사담과 리밍스가 그들의 관계에 대해 확실히 말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저렇게 대화가 서로 맞지 않은데 어떻게 마음인들 제대로 맺어질 수 있겠는가? 이에 확실히 저 둘이 이어지려면 주변사람들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세르기아스와 질리안은 서로의 손을 마주잡고 적극 로베인과 하연 이어주기 추진위원회를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하연-카이람 커플 지지자 여러분들. 하연-카리스 커플 지지자 여러분들. 저, 오늘부터 당분간 어디론가로 도망가 버려야 겠죠? ㅜ.ㅜ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두주먹 불끈 쥐는 유지) 하연 곧 죽을겁니다. 그러니 서로 좋아한다고해도 로베인이랑 잘될일 절대 없지요, 으하하하하! 따라서 안심하시고 ......저 좀 살려주세요.ㅜ.ㅜ 저도 살고 싶거든요.^^ 마신소환사 144 며칠 후, 자오린의 항구로 수송선이 들어왔다. 하연 일행들은 나머지 파병군과 함께 배에 올랐다. 그리고 그제야 그들이 가는 곳이 바로 갈로아와 바칸이 전쟁 중인 전쟁터라는 사실을 알게 된 로베인은 배가 떠나가라 비명을 질러댔다. "하연~!" 배 위에서 뿌루퉁한 로베인의 얼굴을 보며 하연은 달래느냐고 여념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는 조르와 세르기아스는 그야말로 남자가 저럴 수 있느냐는 듯 한심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사담과 리밍스는 그러려니 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들이야 예전에 자주 보았던 광경이었으니까. 그리고 질리안은 로베인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끔찍하다는 듯 시선을 피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로베인의 저주는 아직까지 그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다시 밤이 왔다. 마리브르 강의 수면은 어두운 밤하늘에 물들어 검은빛을 띄었고 하연은 그 검은 수면 속에 빨려든 듯 멍하니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어느새 그녀의 등뒤로 사담이 다가와 말했다. "하연, 내일이면 유파드에 도착할 겁니다. 그러면 쉬지 않고 강행군이 진행될 테니 오늘은 이제 그만 들어가 쉬도록 하십시오." 멍하니 사담의 말을 듣고 있던 하연은 그러고 보니 언제나 등뒤를 돌아보면 사담이 서 있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등을 바라본다는 것은 별로 즐거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 사람의 표정도 감정도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언제나 지친 등만을 바라보게 되니까. 그런데 사담은 늘 말없이 그 일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곳이라면 함께 가 주겠다고 했던 그 말이 왜 지금 이 순간에 떠오르는 것일까? 하연은 사담에게 미안하고 고마워서 말했다. "훗! 사담은 정말 오빠 같아요. 만약 누군가 나에게 누구를 오빠로 삼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난 서슴없이 사담이라고 대답하겠어요." 그러면서 잘 자라고 인사하고는 선실로 들어가는 하연의 뒷모습을 사담은 멍하니 굳어져서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기뻐해야 했다. 하연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죽은 여동생 대신이었으니까. 하지만 사담은 기뻐할 수가 없었다. 하연의 입에서 오빠라는 말이 나온 순간 그는 자신의 감정을 자각해 버린 것이다. 하연을 바라본 것이 결코 자신의 여동생 대신이 아니었음을. 한 여자로서 자신이 하연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트리엔시라 왕국. 그것은 놀랍게도 하라마르트 산의 그림자 속에 존재한다는 전설의 미궁 속에 지어져 있었다. 누구도 가 본적이 없다는 전설의 미궁으로 알려진 이 곳이 실은 마법왕국 트리엔시라의 또 다른 외궁이었다는 것이다. 왕족들만이 드나들었던. 처음 그 왕성을 보았을 때 쟈스란은 그 아름답고 세밀하며 웅장한 모습에 얼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그 왕궁자체가 드워프들의 세공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왕국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쟈스란은 자신이 지금 꿈을 꾸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창이었던 자신이 하룻밤 새에 이 거대한 왕궁의 주인이라니....... 그러나 그가 놀란 것은 처음의 얼마 동안뿐이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왕으로의 생활태도를 몸에 익혀버린 쟈스란은 아름다운 여인들이 그의 몸을 씻기고 옷을 입혀주며 먹을 것을 넣어주고 비욤에게 턱으로 명령을 내리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쟈스란도 자신의 그런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눈이나 머리카락의 색깔 변화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은빛으로 변해버린 머리카락도 핏빛으로 변해버린 눈 색깔로 충분히 낯설기는 했지만 그것은 외형의 문제이지 내면을 변하게 만드는 요인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무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이질적인 존재가 자신 속에 섞인 듯한 느낌이었다. 그 느낌은 갑자기 자신이 모르던 지식들이 떠오르고 자신을 남창이라고 부르며 욕하던 자가 갑자기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며 황제폐하라고 불러도 전혀 놀람이 없이 받아들이는 자신을 볼 때 특히 더 했다. 변해버린 자신이 두렵기까지 했다. 그러자 당연한 듯 하연이 떠올랐다. 그녀라면 자신을 붙잡아 주리라고 생각하며. 어서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네로와의 계약이 아니라도 이렇듯 훌륭하게 변해버린 자신을 보면 그녀도 자신을 사랑하게 되리라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쟈스란은 서둘러 비욤에게 명령했다. "하연, 그녀를 찾아서 내 앞에 데려와라. 머리카락 하나 다치게 하지 말고!" 비욤은 그가 갑자기 하연을 찾는 이유가 궁금하긴 했지만 감히 그에게 그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그저 말없이 그의 명령에 복종할 뿐이었다. 그는 그의 의지체일뿐이었으까. 순풍을 타고 수송선은 빠르게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다. 바람이 차갑긴 했지만 하연은 느끼지 못하는 듯 그 바람에 몸을 내맡기고 서 있었다. 그런 하연의 모습을 로베인은 불안한 듯 바라보았다. 곁에 있지만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는 여인이 바로 하연이였으니까. 로베인은 하연을 볼 수 없는 날들이 계속되는 동안보다도 지금이 더욱 불안한 느낌이라 자신도 모르게 하연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하연!"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본 하연은 로베인을 보더니 활짝 웃었다. "로베인?" 그녀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이 좋았다. 비록 그녀가 자신을 증오하는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한은 결코 그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무슨 일이야, 로베인?" "아? 곧 도착할 거야. 어서, 내려와." "그래." 멀리서 유파드의 항구가 보였다. 유파드는 슈이센이 아닌 갈로아의 땅이었다. 하지만 이국의 땅이라고 그렇게 슈이센과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 뭐라고 해도 강 하나를 사이에 둔 도시일뿐이니까. 그러나 역시 나라가 다른 만큼 항구로 들어가는데도 복잡한 절차가 따랐다. 그들이 슈이센에서 온 파병군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신분을 확인하는 등 쉽게 들여 보내주려고 들지를 않았던 것이다. 이에 약 한 시간동안 지체하다가 아르센이 와서 뭐라고 하자 비로소 그들은 항구의 문을 열고 배를 정박시킬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선착장에는 카리스와 미루엘, 그리고 용병들이 그들을 마중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가 하연일행이 배에서 내리는 것이 보이자 기쁘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 마주 손을 흔드는 하연과 로베인, 사담들에서 로베인에게 시선이 멈추자 카리스와 미루엘은 온 몸이 경직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 그들을 보며 하연은 재빨리 로베인을 이끌고 가 카리스와 미루엘의 코앞에 그를 들이밀었다. 로베인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로베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한참동안 경직된 표정으로 있다가 마침내 로베인이 실물이라는 것을 확인했는지 입을 쩌억 벌리며 다급하게 물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로베인이 분명 한 겁니까?" 그 말에 하연은 능청스럽게도 말했다. "네, 맞아요. 왜 일전에 제가 새벽이슬을 받은 꽃잎으로 물들인 돌들을 산 것 기억해요, 미루엘? 정말 소원을 이루어 주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그 돌을 마라브르 강에 떠나보내며 소원을 빌었지요. 로베인을 돌려달라고요. 그러자 놀랍게도 진짜로 로베인이 떠내려오는 것이 아니겠어요?" 용병들은 하연의 장난스런 말에 킥킥 웃었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던 미루엘과 카리스는 그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고는 말하는 것이었다. "그 돌들이 진짜 하연의 소원을 이루어 주었군요." "새벽이슬을 받은 꽃잎으로 물들인 돌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더니 진짜였단 말이에요?" 이에 결국 용병들은 물론 하연과 로베인, 사담까지 폭소를 터트렸다. "까르르르!" "푸하하하!" 얼마 후에야 자신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미루엘과 카리스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너무 놀라다 보니......" "이런 상황에서 하연의 그 말을 믿지 말라고 하는 것이 더 어렵지 않겠습니까?" 아르센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는 로베인이라는 인물을 둘러싸고 하연이 일행들과 함께 웃고 떠들고 있자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져서 유트에게 하연을 불러오라고 명령했다. "군사에게 잠깐 보자고 말씀드려라.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할 것이 있으니......" "네." 유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하연일행들에게 걸어가 하연에게 아르센의 명령을 전달했다. 하연은 곧 알겠다고 말하고는 일행들에게 말했다. "그럼. 먼저 가서 쉬고 있어. 난 아르센과 예기 좀 하고 갈게." "그래." 하연이 부사령관인 유트를 따라가는 모습을 보며 로베인은 불안한 표정으로 일행들에게 물었다. "하연이 정말 작전참모란 말입니까?" 일행들 역시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인 듯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일행들을 보며 로베인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누르며 물었다. "하연이 혹시 아주 자신만만하게 자신은 전략에 대가라거나 뭐 그런 말을 한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카리스의 말에 다행이라는 뜻 안도의 한숨을 쉬던 로베인은 다음의 카리스의 말에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팍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최고의 전력가인 나단 하인베르크를 능가하는 전략가가 되고 말겠다고 호언장담했을 뿐이지요."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군요. 시작은 언제나 상쾌하게...^^ 마신소환사 -67(145)- 아르센은 자신들이 그들의 나라를 구해주기 위해 파병해 온 만큼 갈로아의 국민들이 그들을 기쁘게 맞아 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오니 그것이 달콤한 착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파드의 백성들은 결코 파병군의 존재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에게 파병군은 세금을 더 내야 한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전쟁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지역은 바칸과 가까운 호얀지방으로 유파드와는 갈로아만을 놓고 볼 때 서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지역에서 일어나는 전쟁 때문에 세금은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파병군이 올 때마다 그들을 먹이고 재워야 하니 어찌 시선이 고울 수 있겠는가? 차라리 빨리 전쟁을 끝내고 호얀지방을 바칸국에 넘겨줘 버리는 것이 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갈로아 국민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때문에 파병군은 유파드 사람들의 냉대 속에서 채 유파드에서 피로도 회복하지 못하고 계속 다음 지방을 향해 진군을 해야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갈로아가 곡창지대라는 말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에 모두 곡식이 심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걸 보면서 하연은 언젠가 갈루마가 땅의 엘프들이 산다는 황금의 땅에 대해 말하던 것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황금의 땅이라면 아마 이런 곳을 두고 가리키는 말일 거야." 그 날밤이었다. 어느 때처럼 군대가 야영준비를 모두 마치고 몇 명만이 보초를 서는 가운데 그들은 훈련을 시작했다. 이제 어느 정도 검이 손에 익었는지 어설프기 그지없던 병사들의 검 휘두르는 모습에는 익숙함과 절도가 베어 나오고 있었다. 그 중 특히 검술에 빠른 진전을 보이고 있는 인물이 있었는데 디온 기라이스라는 기사였다. 디온 기라이스는 기라이스 남작가의 서자로 형인 디칸 대신에 파병군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지라 검술을 익히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여자가 있다면서 항상 훈련에 열심히 임했었던 것이다. 사담은 그의 검술의 진전을 칭찬하면서 어떻게 이처럼 빠른 진전을 보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다른 병사들에게도 가르쳐 주라고 말했다. 그러자 디온은 쑥스러운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저 늘 제 손에 검이 없을 때도 검을 휘두르는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머리 속으로 계속 생각하고 있었더니 어느새 제 생각대로 검이 휘둘러지더군요." 하연은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했다. 바라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의 좋은 예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세상에는 아무리 바래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그녀가 살고 싶어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고 해도 살수는 없는 것처럼. 그렇다면 과연 어느 쪽이 옳은 말인 것일까? 원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그 말이 옳은 쪽이기를 하연은 바랬다. 그런 세상에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니까. 그날 밤도 하연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희미한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주어요. 주어요. 행복을 주어요. 자루 하나 가득 행복을 주어요. 나눠요. 나눠요. 행복을 나눠요. 자루 가득한 행복을 나눠요." 흥얼흥얼 즐거운 노래 소리에 이끌려 하연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그 노래 소리를 따라갔다. 그러자 달빛이 내리비치는 넓은 들판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땅에 떨어져 있는 곡식의 알들을 자루에 주어 담고 있는 난쟁이들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열심히, 열심히. 일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히싱이 화를 낼 거예요." 그러더니 난쟁이들이 일하던 것을 멈추고 머리를 맞대고 히싱이 화내면 얼마나 무서운지에 대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히싱이 저번에 화가 나서 집을 날려보냈지. 굉장했어." "마을에 회오리바람이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니까." "저번에는 할아범이 아끼는 플리아스 나무 잎사귀들을 모두 떨궈 버렸어." "히싱은 무서워." "히싱은 무섭지." 언제까지 일은 안하고 수다만 떨고 있을 것 같은 그들을 보며 하연은 진짜 그 히싱이라는 자에게 혼이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그들에게 말했다. "일은 안해?" 그러자 그들은 말을 뚝 그치고 일제히 하연을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당황한 듯 분주하게 하연의 주위를 돌아다니며 떠들어댔다. "히싱이 아니야." "그런데 우리를 봤어." "우리에게 말했어." 그 모습에 하연은 그들에게 일을 맡긴 히싱이라는 사람에게 동정표를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저들이 제대로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보였던 것이다. 그 때 한 난쟁이가 하연에게 다가와 이리저리 하연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검은머리를 만지고 잡아당기고 이윽고는 코를 박고 냄새를 맡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다른 난쟁이들도 다가와 하연을 만지고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뭐야? 아파! 그만해!" 하연이 소리쳤으나 난쟁이들은 떨어지려고 하지를 않았다. "정령의 냄새가 나." "냄새가 나." "달콤한 냄새." 처음 냄새를 맡던 난쟁이가 하연에게 물었다. "너 정말 인간이야?" "인간이야."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보이지?" 고개를 귀엽게 갸웃거리는 난쟁이를 보자 하연은 저도 모르게 웃으며 말했다. "내게도 정령 친구가 있거든." "아직도 인간들 중에 정령술사가 있었단 말이야?" 놀랍다는 듯 하연을 중심으로 빙빙 돌던 난쟁이들은 이윽고 하연에게 말했다. "너. 우리랑 가자." "그래. 우리랑 놀자." 난쟁이들이 제안했다. 생각해 보던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잠깐이라면." "좋아." "가자. 우리 마을을 구경 시켜 줄께." 난쟁이들은 하연을 잡아끌더니 어느 커다란 나무 앞으로 갔다. 그 나무는 덩굴 풀들로 뒤덮여 있었는데 난쟁이들이 그 풀들을 헤치자 작은 구멍이 보였다. 난쟁이들은 그 구멍 속으로 하연을 밀어 넣었다. 끝없이 이어질 듯한 구멍 속으로 정신없이 떨어지면서 하연은 소리쳤다. "으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싫어!" 정신없이 바쁜 하루였으면 좋겠어요. 그런 저녁이면 충만한 기쁨이 넘칠테니까요.^^ 마신소환사 -68(146)- 하연이 눈을 뜬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 지난 뒤였다. 그녀가 눈을 뜨자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난쟁이들이 희희낙락하며 기뻐했다. 아마도 그녀가 눈을 떠서 기뻐하는 듯. 그런데 뜻밖에 그녀가 눈을 뜬 곳은 나무 창살로 막혀져 있는 감옥 안이었다. "여기는?" 하연이 묻자 난쟁이들 중 하나가 대답했다. "여기는 황금의 땅." 다른 난쟁이들이 말했다. "엘프들의 마을." "잊혀진 전설의 땅." "믿는 자에게만 보이는 곳." 노래하듯 말하는 그들의 말에 하연은 이 곳이 바로 땅의 엘프들이 산다는 그 황금의 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혼대륙의 사람들이었다면 자신이 지금 황금의 땅에 와 있다는 사실에 놀라서 제정신이 아니었겠지만 하연은 그저 그러려니 하는 표정이었다. "여기가 너희들이 사는 곳이란 말이지?" 하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엘프들이 사는 마을이라서 인지 드워프들이 사는 마을과는 다르게 모든 것이 자연 상태 그대로였다. 나무를 깎아 무엇을 만든다든 가 하는 개념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왜 이 안에 있는 거지?" 하연이 난쟁이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난쟁이들이 미안한 듯 시선을 피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나쁘데." "초대하면 안된데." "죽인다던데?" 하연은 기가 막혔다. 오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니고 초대에 응한 것뿐인데 죽이겠다니...... "너희들이 초대해서 온 거라고 말했어?" 난쟁이들이 당황해서 왔다갔다 거리면서 말했다. "응." "아니." "하지만 우리들을 볼 수 있는 인간이라고 말했어." 하연은 소란스럽게 떠들어대는 그들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날 여기다 가둔 엘프를 만나고 싶은데?" 난쟁이들이 재빨리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러더니 잠시 후, 화가 난 듯한 엘프 한 명을 데리고 왔다. 긴 초록색의 머리카락에 초록빛 눈, 그리고 약간 뾰족한 귀에 도자기처럼 하얀 피부의 그 엘프는 아름다운 것은 둘째치고 하연의 눈으로는 도저히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해 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 엘프는 하연을 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난 히싱이다. 무슨 일로 찾았지?" "아? 그 화가 나서 집을 날려버렸다는?" 순간 그 엘프의 볼이 약간 붉어지며 난쟁이들을 노려보았다. 히싱은 땅의 정령들이 인간이라고 그녀를 데려와 처음 보여 준 그 순간부터 그녀에게 반해버리고 말았다. 인간이라고는 처음 보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신기해서 그런 것뿐이라고 생각했지만 기절해 있는 그녀의 얼굴을 계속 내려다보고 있는 동안 결국 인정해 버리고 말았다. 그녀를 사랑하고 말았음을. 하지만 그녀는 인간이었다. 분명 이 곳을 떠나려 할 것이다. 그러나 히싱은 그녀를 떠나 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였다. 그녀를 감옥에 가두어 둔 것은. 그녀를 붙잡아두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하연이 불평하듯 말했다. "날 죽인다면 서요? 난 그저 저 난쟁이들의 초대에 응한 것뿐이라고요." 히싱은 난쟁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저들은 땅의 정령들이야. 난쟁이라고 부르는 종족이 아니다." "땅의 정령?" 그 말에 새삼 난쟁이들을 바라보던 하연은 그제야 무엇인가가 떠오른 듯 히싱에게 물었다. "아? 당신 남자?" 히싱은 자신의 성별을 확인하는 하연에게 그것도 몰랐냐는 듯한 눈초리로 쏘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날 보내줘요. 난 돌아가야 해요." 떠나려고 할 것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직접 그 말을 들으니 역시 가슴이 아파서 히싱은 더욱 퉁명스럽게 말했다. "못 가. 인간은 죽인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인간이라도 하연은 정령을 다루는 인간이다. 엘프들이 인간에게 적대감정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정령을 다루는 인간까지 헤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히싱은 하연에게 두려움을 주고 떠난다는 말을 다시는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짐짓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하연으로서는 정말 황당할 뿐이었다. "난 그저 저 정령들의 초대를 받아서 온 것뿐이라는 까요?" ".....죽기 싫으면 떠나지 않으면 돼. 여기서 살겠다고 말해라. 그러면 죽이지 않겠다." 히싱의 그렇게 무뚝뚝하게 말하고는 황급히 돌아가 버렸다. 하연으로서는 정말 기가 막힐 뿐이었다. 졸지에 엘프들의 마을에 갇혀있게 생겼으니...... 한숨을 쉬며 새삼 자신을 이런 처지에 놓이게 만든 땅의 정령들에게 화가 나서 노려보자 정령들도 미안했던지 물구나무를 서기로 재롱을 피우며 노래했다. "화내지마. 화내면 못생겨져. 이렇게 활짝 웃어봐. 예뻐진 너를 보게 될 거야." 노래하며 흥겹게 춤을 추는 정령들을 보자 하연은 더 이상 그들에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때 히싱이 아닌 다른 아름다운 엘프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 마치 어린 소녀처럼 생긴 그 엘프는 하연을 흥미 있는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누구?" 하연의 물음에 그제야 누가 왔다는 사실을 알아챈 정령들이 춤과 노래를 멈추고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엘프를 보자 정령들은 환호하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할아범." "할아범이다." "우리랑 놀자 할아범." 그 할아범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은 하연의 존재는 눈치채지 못하고 말이다. 그 엘프는 그런 정령들을 떨어트리며 말했다. "먼저 저 인간이랑 할 말이 있단다. 그 일부터 해결하고 놀자꾸나." 그러자 뜻밖에 정령들이 쉽게 떨어져나갔다. "응." "조금 뒤에 놀자." 엘프가 하연을 보며 말했다. "인간을 보기는 정말 오랜만이군. 그것도 정령을 다루는 인간은." "저어...... 나이가?" "허헛! 그러고 보니 인간이란 보여지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존재였었지. 하도 오래 전의 일이다 보니 잊고 있었네. 내 나이가 올해 천육백하고도 두살이라네. 땅으로 갈 때가 다 되었지." 그러면서 뭔가를 생각하는 하더니 물었다. "인간이여! 이 엘프들의 땅에서 살 생각이 있는가?" "......없습니다. 저는 인간이니까요." 하연은 히싱의 말을 믿었기에 자신이 여기서 살지 않겠다고 하면 엘프들이 자신을 죽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살기 위해 구차한 거짓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솔직히 하연은 이런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살 수만 있다면 뭐든지 못할 것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때가 바로 얼마전이지 않는가? 그런데 정작 그런 상황이 닥치자 이런 하찮은 거짓말조차 하기 싫다니..... 인간이란 정말 모순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비웃는 하연이었다. 그러자 할아범이라는 엘프가 등에서 활을 빼들었다. 그리고 하연을 향해 화살을 쏘는 것이 아닌가? 결국 이렇게 죽게 되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며 하연은 눈을 감았다. 팍!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조금의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이상해서 눈을 뜨니 자신은 조금도 다치지 않았고 그녀를 가두고 있던 나무창살이 벗겨져 내려가 있었다. 의아해서 그 엘프를 쳐다보자 엘프가 말했다. "자, 돌아가세. 인간은 역시 인간들과 살아야 하겠지?" 하연은 그 엘프가 자신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려 한다는 것을 알게되자 어색하게 입을 열어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 말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후에 은혜를 갚을 수도 없는 처지였고 보답으로 무언가 줄만한 것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 엘프는 하연의 그 말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 표정이었다. "자, 날 따라오게." 그렇게 하연이 그를 따라 간 곳에는 그녀가 이곳에 떨어지기 전에 보았던 것과 같은 구멍이 있는 곳이었다. 하연은 아득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다시 저 구멍을 통과하는 것밖에는 돌아갈 길이 없나요?" "있긴 하지만 그건 다음 불의 달까지 기다려야 한다네." 이에 하연은 할 수 없이 그 구멍 속으로 다시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일행들에게 둘러 쌓여 있었다. 로베인이 놀라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이런데서 기절해 누워 있는 거야?" "응? 그냥 달빛에 취해서 잠이 들었네." 어이없어하며 쳐다보는 일행들을 보며 하연은 말했다. "꿈을 꾸었어. 한 여름밤의 꿈같은 그런 꿈을." 흠~ 곧 3권이 끝날거 같네요. 마지막을 향해 출발~ ^^ 제 목 : 마신 소환사 -69(147)- 등록자 : 허풍선이(김소영) 등록일 : 09-26 조회수 : 349 날이 밝자 하연일행은 파병군과 다시 길을 떠났고 그런 그녀를 멀리서 바라보는 히싱의 눈에서는 눈물이 어른거렸다. 할아범 엘프가 그런 히싱의 어깨를 두들이며 말했다. "잊어라, 히싱! 인간은 인간들과 살아야 하는 거란다." 하지만 히싱은 그녀를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이렇듯 숨이 멎을 듯이 괴로웠으니까. 그날 밤, 히싱은 짐을 싸서 몰래 마을을 떠났다. 인간들의 세상으로 하연을 찾아서. 지금까지의 안전하고 평온한 마을을 떠나 낯선 인간들의 세상으로 나가는 만큼 그에게 두려움이 없을 리 없었다. 어떤 위험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는 하연과 만나고 싶었다. 며칠 후 파병군은 사만스에 도착했다 사만스는 갈로아의 중앙 평원에 위치한 가장 큰 도시로 갈로아의 수도인 바이샨트와도 가까운 도시였다. 아르센은 도착하자마자 사만스의 영주와 만나 여러 가지 갈로아의 수도 사정이나 전쟁의 경과에 대해서 물었다. 영주의 말에 따르면 지금 수도에서는 호얀지방을 바칸에 넘겨주자는 주장과 그럴 수 없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이 어느 한 쪽으로 기울기전에는 이 전쟁은 계속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호얀지방에는 그랑디아의 파병군은 물론이고 빛의 성기사들과 다렌의 파병군까지 참전해 있지만 좀처럼 바칸인들을 물리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아르센의 마음은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랑디아의 파병군은 물론이고 빛의 성기사들, 그리고 다렌의 파병군까지 가세한 상황에서도 이기지 못하고 있는 전쟁이라니...... 그런 전쟁에 훈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그들 군대가 합류한다고 해봐야 상황이 나아 질 리가 없었던 것이다. 영주가 마련해 준 숙소로 돌아온 아르센은 유트에게 하연을 불러오라고 명령했다. 아르센이 허리에 찬 무거운 검을 풀고 의자에 잠시 누워 피로를 풀고 있을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하연이 들어섰다. 그녀의 모습에 자리에서 일어난 아르센은 하연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리 앉으시지요, 레이디." 하연은 의자에 앉으며 어두운 아르센의 안색에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어린 나이가 저게 뭔 고생인가 싶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에요, 아르센 사령관님?" 아르센은 언제나 하연이 칭하는 이 아르센 사령관님이라는 말이 왠지 놀리는 듯 들리는 것은 왜 일까 하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물었다. "이번 전쟁이 승산이 있다고 보십니까?" 하연은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기고 싶은가요?" 그러자 아르센은 오히려 그렇게 묻는 하연이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왕 하는 전쟁, 이기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하지만 이 전쟁은 이기던 지던 갈로아의 영광과 굴욕일 뿐. 우리는 그저 살아남아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었나요?" 그 말에 아르센은 충격을 받은 듯 멍한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조금은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맞습니다. 우리는 그저 살아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곧 그는 안색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지만 전쟁이 길어지면 살아서 돌아갈 확률도 적어집니다. 확실히 이기든 지든 해야하는데 지금으로서는 그 어느 쪽도 아니니......" "그렇군요. 그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전략을 세워 볼까요?" "네?" 아르센은 휘둥그레진 눈을 뜨고는 하연을 바라보았다. 이길 수 있는 전략을 세우다니 그럼 이번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이길 수 있단 말입니까?" 하연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물론이지요. 이길 수 있는 전략을 세우면요." 순간 아르센은 어이가 없었다. 당연한 말이 아닌가? 그럼 전략가가 언제는 지는 전략을 세우는 경우도 있었단 말인가? 허탈해하는 아르센을 보며 하연이 말했다. "전 제 일에 책임을 다할 거예요. 전략가로서 반드시 이길 수 있도록 전략을 세우도록 노력할거라는 거지요. 아르센도 아르센의 일에 책임을 다하면 되는 거예요. 병사들은 병사들의 일에 책임을 다하게 하고요. 그러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생길 거라고 난 믿어요." 평범한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르센은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일이 잘 될 거라는 긍정적인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이에 아르센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지금 사령관으로서 이곳에 온 것이다. 사령관의 일만을 생각하자. 아르센의 숙소를 나온 하연은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보가 있어야 전략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따라서 하연이 정보길드로 가 정보를 사러 나가려고 하자 일행들과 용병들이 모두 따라나섰다. 일부는 하연의 보호를 목적으로 일부는 사만스의 구경을 목적으로. 사만스는 빛과 어둠의 전쟁에 따른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듯 대체적으로 평온한 분위기였다. 이에 이상해서 하연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그는 하연의 검은 로브를 보며 궁금해하는 점을 알겠다는 듯 설명해주었다. 그 이유는 지금 갈로아에 들어와 있는 빛의 성기사들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들 때문에 어둠의 사제들이 몸을 사리고 도발을 피하고 있어서 아직까지는 평온하다는 것이었다. 하연은 그 말을 들으니 어쩐지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서 즐거운 기분으로 새삼 사만스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사만스 여인들의 짧은치마를 보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갈로아가 농업국가인만큼 하연은 자신의 나라처럼 예의를 따지는 그런 국가를 상상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자유분방한 분위기라니...... 남자용병들은 침을 흘리며 짧은치마를 입은 여자들의 다리를 쳐다보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율리아와 질리안에게 머리를 얻어맞았지만 그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우리 돈벌면 반드시 갈로아에 정착하자!" "물론이야. 갈로아만큼 좋은 나라가 없다는 것을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되었다." 사만스의 정보길드에 찾아간 하연 일행과 용병들은 곧 하연이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었지만 그 정보가 너무 많아서 골치가 아플 지경이었다. 언제 이 많은 정보들을 다 읽고 전략을 세운단 말인가? 하연은 왜 지금까지 전략가들이 이길 수 있는 전략을 세우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전략에 필요한 정보들이 너무 방대해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하고 대충 전략을 세웠기 때문이리라. 용병들과 리밍스는 구경을 더 하겠다고 해서 내버려두고 다른 일행들과 함께 숙소로 돌아 온 하연은 망연한 표정으로 정보길드에서 가지고 온 책상 위에 가득 쌓인 서류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뜩 떠오른 생각에 하연은 지팡이를 툭툭 치며 말했다. "갈루마, 미안한데 대 현자인 너의 그 탁월한 식견이 필요해." -흠~ 뭐,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어. 네가 아르센에게 이길 수 있는 전략을 세운다고 할 때부터 알아보았지. 네가 바로 나를 염두에 두고 그런 호언장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래, 무엇이 알고 싶지?- "이 서류들 속에서 어떤 정보가 진짜고 어떤 정보가 가짜인지 가려 줘. 분명 이렇게 정보가 많은 건 바칸 측에서 허위정보를 흘리고 있기 때문일 거야. 하지만 나 같은 범인이 어떻게 그런 허위정보를 가려낼 수 있겠어? 역시 이런 건 탁월한 식견을 가진 대 현자 갈루마님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잖아?" -하긴. 그건 그렇지.- "그러니 갈루마 좀 부탁해. 난 아무래도 밖에 나가서 갈로아의 문화와 정치적 상황에 대한 정보를 더 모아야겠어서...... 그럼." 그러면서 휙 하니 도망치는 밖으로 나가는 하연을 느끼면서 갈루마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내가 속아주지.- 그리고 그 때 밖으로 나온 하연도 화창한 날씨에 기분이 좋아져서 크게 기지개를 켜면서 중얼거렸다. "뭐, 갈루마라면 속아주겠지?" 그날 저녁. 하연 일행들은 숙소로 돌아온 용병들에게서 경악할만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거리에서 리밍스가 노예상인들로 보이는 자들에게 납치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미루엘은 기가 막힌 듯 용병들에게 소리쳤다. "아니, 어떻게 리밍스가 납치를 당하도록 내버려 둘 수가 있습니까?" "그게......!" 용병들이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있자 율리아가 뻔하다는 듯 이죽거리며 말했다. "분명 여자다리나 쳐다보느라 리밍스가 납치 당하는 줄도 모르고 있었겠지, 아니야?" 그 말에 하연일행들은 설마 그렇기에 하겠냐는 표정으로 용병들을 바라보았지만 어느 정도 그 말도 사실인지라 그들은 아무런 반박도 못하는 기색이었다. "이래서 남자들에게는 중요한 일을 맡길 수가 없다니까. 그저 조금만 예쁜 여자를 보면 헬렐레 해서는......" 그러자 웨이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는 듯 율리아를 쏘아보며 물었다. "그러는 너는? 너는 리밍스가 납치 당하는 동안 뭐하고 있었어? 보나마나 술이나 진탕 퍼마시고 있었겠지. 아니지. 혹시 네가 술값대신 그 자식들에게 리밍스를 팔아 넘긴 것 아니야?" "뭐라고? 말이면 다야?" 서로 싸우느라고 정신이 없는 어이없다는 듯 보고 있던 카리스가 물었다. "그 노예상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아냈습니까?" 조르가 대답했다. "아니요. 제가 바로 그들의 뒤를 쫓았지만 그들이 마차를 타고 도망치는 바람에......" 그 말에 하연일행들은 암담한 기분이었다. 그러면 도대체 어디에 가서 리밍스를 찾는단 말인가? 그 때 조르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무엇입니까?" 미루엘이 다급히 재촉하듯 물었다. "그들이 타고 도망친 마차가 바로 이 곳 영주의 문장이 달린 마차였습니다." "이 곳 영주의 문장이라고요?" 하연은 화들짝 놀라서 되묻고 말았다. 그렇다면 노예매매상인들과 이 곳 영주가 어떤 관련이 있다는 말이 아닌가? 생각 같아서는 당장 영주의 성으로 처 들어가서 리밍스를 내어놓으라고 다그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들은 지금 슈이센의 파병군으로 와 있는 처지였다. 함부로 동맹국인 갈로아내에서 소란을 피워 사령관인 아르센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에 그들은 노예경매장에서 그들이 리밍스를 사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물론 경매에 필요한 돈은 카리스가 마련해 오기로 했다. 공간이동으로 자신의 레어에 쌓여 있는 금화를 가져오는 것으로. 그러나 솔직히 하연일행으로서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돈이 충분하다고 해도 언제 그 노예경매가 열리지는 지도 모르고 그 경매에 참가할 방법조차도 그들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좋은 기회가 그들에게 찾아왔다. 사만스 영주가 귀족들을 불러 무도회를 여는데 아르센도 초청을 받았다면서 하연에게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하연은 아르센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무도회에 참석해 영주나 귀족들에게서 노예경매 날짜와 장소를 알아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로베인이나 카리스는 잔뜩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하연이 아르센의 파트너가 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나도 가겠어. 어떻게 하연만 그런 위험한 곳에 보내?" 로베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무도회가 위험한 장소였단 말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하연이 물었다. "어떻게?" 초대도 받지 않은 로베인이 무슨 수로 파티에 참석할 수 있단 말인가? "난 로베인 볼트라인이야. 내가 참석하겠다면 하는 거지 누가 감히 날 막는다는 거야?" 그 말에 하연을 비롯한 일행들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결국은 사담이 끝까지 따라가겠다고 떼를 쓰는 로베인의 뒷덜미 낚아채어 방으로 끌고 가 버리는 것으로 사태는 마무리 지어졌다. "어, 어? 사담, 날 놓아줘요. 소설들을 보면 대부분이 무도회에서 일이 벌어진다고요. 난 하연을 지켜야 한단 말이에요." 그런 로베인의 모습을 보며 카리스는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하려던 말을 로베인보다 먼저 꺼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흠! 어찌되었든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그리고......" 망설이는 듯 하던 카리스가 이윽고 확실하게 말했다. "저번 무도회에서 제게 가르쳐 준 춤은 제발 추지 말아주십시오." 하연은 그 말에 멍한 표정으로 저토록 카리스가 질색할 정도로 그 때 자신의 춤이 형편없었던가 하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연은 혼 슈이센 왕립학교의 무도회에서 입었던 카리스가 만들어 준 드래곤 스케일로 된 드레스를 입고 방에서 나왔다. 아르센은 그 때 세르기아스에게 등을 공격당해 치료를 받고 있었던 관계로 무도회에 참석하지 못했기에 하연의 드레스 차림은 이번에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아르센은 눈앞에 인간이 아닌 요정이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정도면 아르센님의 파트너로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르센은 떨리는 손으로 하연이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부끄럽지 않기는커녕 과분한 모습입니다. 오늘 무도회에 참석한 모든 남자들이 절 부러워 할겁니다." 하연은 그 말에 활짝 웃었다. 그런 하연의 웃음을 아르센은 눈이 부신 듯 한동안 멍하니 쳐다보다가 그녀의 손을 다시는 놓치 않겠다는 듯 꽈악 잡고는 무도회로 향했다. 사만스의 영주관에서 벌어진 무도회는 사치스럽기 그지없었다. 테이블마다 가득 차려진 고급 요리들과 술들, 새로 치장한 듯한 요란한 분위기의 무도회장, 그리고 마치 보석으로 온 몸을 두른 듯한 여인들의 옷차림하며 도저히 한쪽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나라라고 볼 수가 없었다. 그 모습에 하연은 속으로 망조가 들려도 단단히 든 나라라고 욕을 하면서도 얼굴에는 연실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들의 호감을 사서 알아낼 정보가 있었으니까. 무리하게 웃어 보인 보람이 있었던 것일까? 하연의 곁을 떠나지 않고 노골적인 추파를 보내는 어떤 귀족 남자로부터 마침내 노예 경매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더 이상 그 무도회장에 있기가 괴로울 정도였다. 그래서 아르센에게 말하고 먼저 그 자리를 뜨려는데 마침 아르센은 여자들에게 둘러 쌓여 있었다. 그래서 옆의 예의 그 남자에게 아르센에게 자신이 먼저 돌아갔다고 예기해 달라고 부탁하고는 자리를 떠버렸다. 그런데 뜻밖에 그 남자가 하연의 뒤를 쫓아오는 것이 아닌가? "왜 그러시지요?" 하연이 묻자 남자는 다 알면서 묻느냐는 듯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후후, 일부러 저에게 먼저 간다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서 뒤따라오라고 신호를 보낸 것 아닙니까? 이렇듯 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연은 기가 막혔다. 어떻게 자기 멋대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가 말이다. "이래서 남자들이란......" 어느새 율리아의 말투를 흉내내며 고개를 내 젖던 하연은 그냥 그를 내버려두고 가려고 했다. 그러자 그 남자가 하연의 팔을 잡아채며 자신의 품속으로 끌어 들이려하는 것이 아닌가? 그 때였다. 여자들에 둘러 쌓여 있으면서도 한시도 하연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던 아르센이 하연의 뒤를 쫓아 나오다가 그 광경을 보고는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그 남자의 얼굴에 주먹을 휘둘러버리고 말았다. 퍽! 한 대 맞고 뻗은 남자를 설마 죽은 것은 아니겠지 하는 심정으로 발로 툭툭 치며 하연이 아르센에게 물었다. "왜 벌써 나왔어요?" "그러는 하연은요?" 마치 추궁하는 듯 매섭게 노려보는 아르센의 표정에 잠시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서 있던 하연은 이내 두통이 이는 듯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피곤해요. 저는 이만 돌아가 쉬어야겠어요." 정말 지친 듯한 하연의 표정과 음성에 아르센은 좀 전까지 화가 났었다는 것도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어 말했다. "정말 피곤해 보이는군요. 제가 바래다드리겠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아르센의 호위를 받으며 숙소로 돌아온 하연은 카리스와 사담, 로베인이 초조한 표정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연을 발견한 그들은 금방 환한 얼굴이 되어 그녀를 맞았고 그런 그들의 모습에 왠지 기분이 좋아진 하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 정말이지 무도회에는 두 번 다시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을 정도로 따분한 시간이었어요." 요즘 일교차의 변화가 심하네요. 모두 감기 조심하세요. 몸이 찌뿌둥한게 전 좀 감기기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같은 날은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고 목욕을 한 다음, 뜨거운 차 한잔 하는게 좋겠지요?^^ 제 목 : 마신 소환사 -70(148)- 등록자 : 허풍선이(김소영) 등록일 : 09-26 조회수 : 296 갈로아에서 노예경매는 분명 불법이었다. 하지만 그 불법적인 일이 버젓이 도시의 마을회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갈로아의 현실이기도 했다. 다음 날 오후 하연 일행은 숙소를 나와 노예경매가 이루어진다는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그 때쯤 벌써 회관으로 가는 길은 마차들로 붐비고 있었는데 그들 대개가 경매에 참가하려는 귀족들의 마차였다. 그리고 회관 앞에서는 한 중년인이 탁자를 놓고 앉아서 일일이 귀족들이 지니고 있는 경매권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에 미루엘은 그런 귀족들 중 한 명의 경매를 슬쩍해서 하연에게 주었다. 그래서 하연은 당당하게 호위기사들을 거느린 귀족으로서 회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경매장안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는데 각 테이블마다 음료수와 술, 그리고 약간의 과자가 준비되어 있는 것이 마치 티파티를 즐기러 온 사람들의 분위기였다. 잠시 후, 요란한 종소리가 울리고 장내가 어두워지는 가운데 한 순박하게 생긴 사내가 무대로 올라왔다. "여러분, 지금부터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대륙을 돌아다니며 모은 특상품들입니다. 부디 여러분의 많은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그럼 먼저......" 첫 번째로 나온 사람은 놀랍게도 빛의 여사제였다. 그녀는 구경거리가 되어 버린 자신과 눈을 번들거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모습에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부들부들 떨며 서 있었다. "빛의 여사제로 아직까지 순결한 여인입니다. 처녀를 원하시는 분들에게 만족할만한 품목이라고 자신합니다." 그러자 한 보석으로 온 몸을 치장한 듯한 노인이 경매권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50골드!" "네, 50골드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여사제의 안색이 창백하다 못해 시커멓게 변해 가는 것을 보며 연민을 느낀 하연은 자신의 경매권을 들며 외쳤다. "60골드!" 여사제의 얼굴이 60골드를 부른 하연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녀가 검은 로브를 입은 어둠의 사제라는 사실을 알자 눈이 휘둥그레지고 더욱 두려운 표정으로 변하고 말았다. 지금 대륙이 빛과 어둠의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만큼 자신을 사서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 때 노인이 외쳤다. "65골드!" 그 소리에 하연은 쩨쩨하게 겨우 5골드 올리냐고 생각하며 통크게 외쳤다. "80골드!" 그러자 노인은 분한 듯 하연을 노려보며 더 이상 가격을 올려 부르지 않았고 하연은 승리에 가득 찬 표정을 그에게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 여사제는 삶을 체념한 듯한 표정을 짖고 있었다. 그 뒤로 어린 소년, 소녀에서부터 아름다운 중년 미부까지 다양한 노예들이 무대위로 올라왔는데 하연은 그때마다 가장 높은 가격에 그들을 사들였다. 옆에서 카리스가 일일이 그 가격을 계산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건 말건 말이다. 그러나 좀처럼 리밍스의 모습은 경매에 보이지 않았다. 이에 하연일행들은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리밍스가 다른 곳에 벌써 팔려 버린 것은 아닌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 때 무대 위로 한 검은머리에 초록빛 눈을 한 장신의 사내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사회자가 그에 대해 설명했다. "이 자는 바칸국의 사내로......" 그런데 그 사내는 지금까지 무대위로 올라온 다른 노예들과는 틀렸다. 다들 두려움에 떨거나 상처 입은 짐승 같은 눈으로 장내를 노려보던 다른 노예들과는 달리 그는 마치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자신과는 하등 관계도 없는 일이라는 듯 나른하고 따분한 표정을 짖고 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눈빛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육식동물 마냥 번뜩이고 있었다. 결코 이런 곳에 있을만한 사내가 아니었다. 그런 사내의 모습에 경매장의 열기는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하연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명령을 내리는 자였지 이처럼 노예로 누군가에게 끌려올 만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혹시 그럼 저자도 나와 같은 과?' 하연은 그를 자신과 같은 모험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모험을 위해서는 노예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그 때 차분히 장내를 둘러보던 사내의 시선이 그런 하연에게 이르렀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그의 눈이 먹이를 본 동물처럼 번쩍였다. 그러더니 이내 사내를 하연을 향해 나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하연을 유혹하는 듯 했다. 이에 로베인을 비롯한 카리스와 사담의 얼굴에 불쾌감이 노골적으로 들어 났다. "100골드!" 한 뚱뚱한 중년여인이 그런 사내의 모습에 침을 흘리며 외쳤다. 사회자가 말했다. "100골드 나왔습니다. 오늘 최고의 가격이군요. 더 이상은 없으십니까?" 그러면서 그 사회자는 하연을 바라보았다. 이 때쯤이면 언제나 하연이 더 높은 가격을 불러 상대를 누르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하연은 이번에는 가격을 올려 부르며 그를 사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바칸의 사내는 웃음까지 지어 보였는데도 상대가 자신을 사려고 하지 않자 불쾌한 표정을 지었고 로베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새어나오려는 것을 참아야했다. 그만큼 하연이 그를 사지 않는 것이 기뻤던 것이다. 그 때 한 젊은 여인이 경매권을 들고 외쳤다. "110골드!" "자, 더 없으시면 이번에도 저 여성분께......" "120골드!" 다시 그 중년여인이 돈을 더 올려 불렀다. "130!" 치열한 경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바칸의 사내는 하연만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마치 그 시선은 하연에게 자신을 사라고 명령하는 듯 했다. 하지만 하연은 남의 놀이에 끼어 들어 장단을 맞추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140!" "150!" "160!" 중년여인의 얼굴에 점점 초조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고 마침내 젊은 여인이 확 가격을 올려 불렀다. "200골드!" 그러자 탐욕에 가득 찬 표정으로 사내를 보던 중년여인이 이를 갈며 그 젊은 여인을 노려보았고 젊은 여인은 마침내 눈앞의 사내를 손에 넣었다는 만족감에 희열에 들뜬 듯한 표정이었다. "더 없으십니까? 그러면 이번 노예는 저 레이디께서 사신 것으로 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마지막 순서입니다. 이번의 가장 특별한 상품. 놀라지 마십시오. 이제는 대륙에서 거의 볼 수 없는 종족, 바로 드워프입니다." 마침내 마지막으로 리밍스가 무대 위로 올라왔고 기다리고 있던 듯 장내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 그들은 모두 오늘의 특별한 상품인 드워프를 사려고 모여든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환호성을 지르며 탐스러운 먹이를 보듯 자신을 보는 인간들의 모습에 리밍스는 움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드워프의 용사 중에서도 용사인 그였지만 알지도 못하는 인간에게 노예로서 팔리게 되어버린 지금 두려움이 없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들이 모두 사악한 괴물로 보일 정도였다. 처음의 그 뚱뚱한 중년인이 제일 먼저 가격을 불렀다. "300골드!" 그러자 키가 크고 과묵해 보이는 인상의 마치 누군가의 호위기사로 보이는 사십대의 사내가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400골드!" 순간 장내에는 놀라움에 찬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100골드나 높여서 부를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자 뚱뚱한 중년이니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가격을 더 불렀다. "450골드!" 사회자가 말했다. "여러분 드워프는 유명한 장인들입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세공품이 보석상에도 최고의 가격으로 거래된다는 것을 잘 아실 겁니다." 그러자 장내의 많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가격을 불러댔다. "460골드!" "470골드!" "480골드!" 미루엘이 초조한 표정으로 하연의 옆구리를 찔렀다. "어서 하연도 불러요. 이러다가 리밍스를 다른 인간한테 빼앗기겠어요." 이에 느긋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하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경쟁에 끼어 들었다. "600골드!" 순간 장내에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 소리에 하연과 일행들의 모습을 확인한 리밍스가 안도감에 눈물을 글썽였다. 하연과 일행들이 그를 구해주러 온 것이었다. 그 때 경매장에 있던 귀족들은 서로 수근거리며 하연의 신분에 대해 추측하기에 바빴다. 600골드라니...... 그렇게 많은 노예들을 사들여 놓고도 아직 그런 큰돈이 남아 있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사제복장으로 위장을 하고는 있지만 하연이 대공작가인 슬리언가나 테이트론가의 영양일거라고 추측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많은 돈을 지니고 있을 리 없었던 것이다. 이에 그들은 감히 하연과 경쟁할 생각을 못하고 리밍스를 하연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경매권과 함께 노예상인들에게 거의 2000골드가 넘는 돈을 넘겨주면서 카리스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얼마나 아끼던 돈이었던가? 금화 하나 하나에 추적마법을 걸어둘 정도였지 않은가? 그런데 그 돈을 리밍스는 제외하더라도 생판 모르는 인간들을 사는데 써 버리다니...... 후에 반드시 그 금화들을 회수하고야 말겠다고 생각하며 카리스는 하연이 사들인 하찮은 인간들을 쏘아보았다. 리밍스는 벌써 하연들과 함께 얼싸안고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그 때 미루엘이 하연에게 물었다. "하연, 저 노예들은 어쩌실 생각입니까?" 카리스는 물론 노예들도 하연의 입에서 나올 말을 관심을 갖고 기다렸다. 하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쩌긴. 당연히 놓아줄 거야. 내가 저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기야 하겠어?" 그 말에 노예들은 풀려나게 되었다는 생각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으나 사담의 다음 말에 얼굴이 어두워지고 말았다. 사담이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저들을 풀어 준다면 다시 노예상인들에게 끌려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점을 미처 생각지 못한 하연이 인상을 찡그리며 고민하자 자신도 그들도 같은 처지였던 지라 동정심이 생긴 리밍스가 하연에게 부탁했다. "하연, 저들을 데리고 가자. 나중에 안전한 곳에서 풀어주자." 하연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안전한 곳이 어딘데? 대륙은 빛과 어둠의 전쟁으로 혼란하고 우 리는 지금 전쟁터로 가고 있어. 어디에서 저들을 놓아주어야 안전하다는 거지?" 리밍스는 아무 말도 못했다. 사실이었다. 이제 더 이상 이 대륙에 안전한 곳은 없었던 것이다. 어두운 안색으로 하연 일행이 묵묵히 서 있기만 하자 빛의 여사제가 긴장한 표정으로 하연일행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정말 저희들을 풀어주실 생각인가요? 전 빛의 사제인데 절 죽이지 않으실 건가요?" 하연이 그 여사제에게 물었다. "당신을 죽여서 뭐하라고요?" "하, 하지만 전 빛의 사제고 당신은 어둠의 사제인데?" "빛이 있으니까 어둠이 있고 어둠이 있으니까 빛이 있는 것 아닌가요? 전 그렇게 배웠는데요? 빛과 어둠은 서로가 없으면 존재하지 못한다고요. 그런데 왜 그렇게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려고 애쓰는 걸까요? 그건 자신의 존재마저 부정해 버리는 슬픈 일이잖아요?" 순간 여사제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한 표정이었다. 그런 식으로는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었던 것이다. 빛과 어둠은 그저 서로를 견제하고 대립하는 존재로서만 생각해 왔던 것이다. 하연이 계속 말했다. "전 빛의 사제인 당신의 존재를 인정해요. 당신이 존재하길 바래요. 그래야 내가 존재할 수 있으니까요." 여사제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하연은 그런 여사제에게 밝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존재해서 기뻐요. 살아있어서 기뻐요. 당신을 통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왜 당신을 죽이겠어요?" 왠지 여사제는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사제가 된 것은 자신의 힘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신을 믿음으로서 그들을 행복의 길로 인도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었고 사람들은 행복해 했지만 차츰 그것은 신의 힘이지 자신의 힘이 아니라고 어쩌면 자신은 아무런 존재도 아닐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데 하연이 말해 준 것이다. 그녀의 축복을 받은 것도 아니면서 그녀의 존재자체만으로도 자신은 행복하다고. 진정 자신의 힘으로 처음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 듯한 느낌에 여사제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전, 전 당신을 따라 가겠어요." "네?" 갑작스런 여사제의 말에 하연 일행들은 놀라서 그 여사제를 바라보았다. 하연을 따라 가겠다니 전쟁터로 가는 길이라고 했던 말을 못 들었던가? 이에 미루엘은 그들이 지금 한창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호얀지방으로 가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여사제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전 물의 빛의 여사제 에스페라고 합니다. 전쟁터로 간다면 더욱 여러분들에겐 제가 필요할거예요. 여러분들을 따라 가겠습니다." 일행들이 막무가내로 따라나서려는 에스페라는 여사제를 기가 막힌 표정으로 보고 있는데 카리스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들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데려가지요. 어차피 물의 사제라면 치료의 힘을 지녔을 테니 짐이 되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사담은 어둠의 사제인 하연과 빛의 사제가 어떻게 동행할 수 있냐는 생각에 말도 안돼는 헛소리라고 반박하려다가 문뜩 하연의 건강에 생각이 미쳤다. 요즘 들어 강행군 때문인지 지쳐 있는 표정을 자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카리스 또한 그 점을 생각한 한 것이리라. 마법은 듣지 않는 하연이지만 신성력만는 듣는 듯 했으니까. 물의 사제의 치료를 받을 수 있을지도. 이에 사담은 카리스의 용의주도한 생각에 가볍게 감사를 표하며 그의 의견에 찬성이라는 뜻을 밝혔다. "그렇게 하지요." 사담도 찬성하고 본인도 간절히 원하는 듯 하자 하연은 어쩔 수 없이 그녀가 따라오는 것을 승낙했다. 애초에 그녀의 머리 속에는 자신이 어둠의 사제이니 빛의 사제와 동행한다는 것은 때가 때이니 만큼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 따위는 조금도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나머지 노예들은 갈로아의 수도인 바이샨트로 가는 길에 보이는 마을 중 한 곳에서 모두 풀어주기로 결정한 그들은 우선 자신들의 숙소로 노예들을 데리고 갔다. 그런 그들의 뒤를 쫓고 있는 자가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그날 밤. 귀족 가의 한 저택에서 젊은 여자가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 여자는 바로 오늘 경매에서 바칸국의 사내를 산 여자였다. 그 여자를 간단히 죽여버리고 저택을 나온 사내는 사만스의 최고급 여관 중에 하나로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방으로 올라가자 벌써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던 맨 처음 리밍스를 사려고 했던 무뚝뚝한 인상의 사십 대 사내가 재빨리 한쪽 무릎을 꿇으며 사내를 향해 말하는 것이었다. "람이시여! 존체에 이상은 없으신 지요?" "응. 도착하자마자 엉겨 붙는 게 정말 지긋지긋해서 그냥 죽어버렸어. 그런데 알아보았나?" "네. 슈이센의 파병군으로 따라 온 것 같습니다만 정확한 신분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의 어떤 점이 주군의 관심을 끌었는지요? " 위울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간단한 웃음만으로도 여자들을 달려들게 만들 수 있는 자신의 이 주군이 실은 여자들에게 무척 담담한 편이라는 것을. 때문에 그 어둠의 여사제에 대해서 조사해보라고 했던 것도 남자로서의 관심이 아니라 다른 어떤 목적이 있어서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그가 빙긋 매력적인 웃음을 흘리며 말하는 것이 아닌가? "마음에 들어서." 순간 위울의 얼굴에 놀람이 떠올랐다. 자신의 주군의 마음에 든 여자라니...... 그렇다면 그녀에 대한 조사에 조금의 소홀함도 있을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라모아가 될지도 모르는 여인이었으니. "지금 즉시 상세한 조사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굳은 얼굴로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서는 위울을 보며 람이라고 불린 사내는 만족스런 미소로 경매장에서 자신의 미소를 보고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던 하연의 눈빛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그래. 정말 마음에 들었어." 지금 저녁 7시. 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오네요. 식사 시간은 정확히 지키는 것이 건강에 좋답니다. 물론 저도 그리 식사 시간을 잘 시키는 사람은 못 되지만 오늘은 제 시간에 식사를 해 보는 것도 좋겠지요? 제 목 : 마신 소환사 -71(149)- 등록자 : 허풍선이(김소영) 등록일 : 09-26 조회수 : 346 로베인들과 용병들, 그리고 노예들로 인해 하연의 방은 아침부터 북적거리고 있었다. 뭐라고 떠들어대는 지는 잘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저 그들의 각양각색의 표정들과 살아 움직이는 그 생동감 있는 몸짓들이 하연의 눈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너무 사랑스러웠다. '아! 살아 있다는 것은 저렇게 아름다운 것이구나!' 저도 모르게 그런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 하연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자 심정이 부서져 내리는 심정이었다. 더 이상 이 자리에 있다가는 눈물을 흘리고 말 것 같자 하연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고 그런 하연의 뒤를 사담이 뒤따라나갔다. 물론 로베인도 하연이 나가는 것을 보았고 뒤따라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왠지 하연이 혼자 있고 싶은 것 같아 참은 것이다. 자신은 사담처럼 하연이 혼자 있고 싶어한다고 가만히 참고 그녀를 지켜보기만 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참견하고 싶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끊임없이 알고 싶어하는 자신을 잘 아는 만큼 따라갈 수 없었던 것이다. 멍하니 그렇게 하연이 나간 문을 보고 있던 로베인은 혹시 그녀가 볼일까 싶어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하연이 보였다. 그녀는 거리를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 속에 그냥 그렇게 서 있었다. 마치 길 잃은 아이처럼 그렇게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면서. 그런 하연의 모습을 보자 로베인은 가슴이 아팠다. 그녀가 편안히 쉴 수 있는 그런 안식처가 되고 싶었다. 그녀를 위해 넉넉한 마음의 남자가 되고 싶었다. 그 때였다. 누군가가 그런 하연을 낚아채듯이 붙잡아 달아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너무 놀란 로베인은 입이 벌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다 사담이 재빠르게 그 뒤를 쫓아가는 것을 보고 그제서야 입을 벌려 소리쳤다. "하, 하연! 잡아라! 하연!" 방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갑자기 로베인이 소리를 지르자 어리둥절해하다가 로베인의 창백한 표정에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얼굴이 굳어져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하, 하연이...... 납치를 당했어요!" "헉, 헉......" 하연은 자신이 왜 이렇게 도망쳐야 하는지 그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오랜만이 이렇게 무작정 달려 보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냥 그렇게 끌려갔다. 얼마 안가 정신을 잃을 때까지. 하연이 다시 깨어났을 때 그녀는 자신이 어느 공원처럼 보이는 숲속의 나무아래 누워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곁에서 자신을 지키듯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의 그림자도. 하연은 그가 당연히 사담이라고 생각하고 물었다. "나 얼마나 누워 있었어, 사담?" 머리카락이 검은 색깔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하연은 그가 사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긴 검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보이는 그의 짙푸른 녹색의 눈동자 때문이었다. 그는 화가 난 듯 하연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번이 처음이니 용서하지만 다음부터 네 입에서 다른 사내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용서하지 않겠다. 넌 나 베가 람의 것이니까." 오만하게 내뱉는 그 말에 하연은 어리둥절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웬 처음 보는 사람이 다짜고짜 자신을 그의 것이라니 당연한 반응일지도 몰랐다. 그러다 그가 누구인지 떠오른 하연이 외쳤다. "아, 노예 놀이를 하던 그 사람!" 그는 경매장에서 보았던 그 바칸의 사내였던 것이다. 하지만 하연이 스치듯 지나친 그 말. 베가 람. 만약 이 세계의 사람들이 들었다면 놀라서 경악할만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람이란 즉 바칸에서 대 족장을 칭하는 말로 갈로아로 따지면 갈로아의 국왕에 해당하는 지위였다. 즉 그는 바칸의 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의 의미를 모르는 하연에게 그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물론 알았더라도 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자신을 모르는 듯한 하연을 보자 베가 람은 의아했지만 그녀가 자신의 신분을 알든 모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녀는 자신의 것이 될 테니까. 하연이 물었다. "그런데 왜 날 납치하듯 데려 온 것이지요?" 순간 베가 람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왜 데려왔냐니? 그거야 뻔하지 않은가? 이미 그녀를 내 것이라고까지 말한 이 상황에서. 그가 대답이 없자 고개를 갸웃거리던 하연이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알겠다는 듯 말했다. "아! 노예 놀이에서 이 번에는 납치범 놀이인가요? 정말 재미있게도 사시는 군요. 그럼, 재미있게 노세요. 전 이만 돌아가 보아야 하거든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을 못하고 있는데 하연이 정말 갈 듯 보이자 그는 급히 그녀를 잡아 세웠다. "못 가!" "왜요?" 주위를 둘러보며 하연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길을 잃어버린 건가요?" "아니. 내가 널 보내주지 않을 테니까!" 하연은 뜻밖의 말에 놀란 듯 그를 쳐다보았다. "보내주지 않을 거다. 내가 말했지 않나? 넌 내 거라고." 검은 표범. 그를 보면 떠오르는 단어였다. 관능적이라는 말 또한. 따라서 다른 남자한테서 그런 물건 취급하는 듯한 말을 들었더라면 당연히 화를 냈겠지만 그한테는 하연도 여자인지라 화를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속은 정확히 해야하는 법. "저기여! 미안하지만 전 제건 데요. 누군가의 것이 될 생각은 전혀 없어요." 그러나 그는 요지부동 한 채 하연을 놓아주지 않았다. 순간 하연의 얼굴에 씁쓰레한 빛이 떠올랐다. 그를 보니 문뜩 마르세이가 떠오른 것이다. 자신을 사랑했던 남자. 하지만 그녀는 그를 사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서 도망치듯 떠나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람도 나와의 미래를 꿈꾸는 것일까? 하연은 그의 얼굴을 뚫어질 듯이 쳐다보았다. 그 또한 결코 하연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하연은 그가 강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사실을 그대로 예기해 주는 것이 그에게 좋은 일일지도. 그렇게 생각한 하연은 이 혼 대륙에 온이래 처음으로 자신의 병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았다. 어차피 그와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인연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연의 말은 들은 베가 람은 그녀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여인이 곧 죽게 된다니......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녀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눈은 거짓을 말하는 자의 눈이 아니었으니까. 망연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 베가 람을 보며 하연은 속삭이듯 말했다. "나,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아요. 설령 나에게 이런 아픈 운명을 준 신이 있다고 해도 그 신을 원망하진 않을 거예요. 원망한다면 그 운명 속에서 나를 사랑해주고 행복하게 해 준 그 사람들의 마음 또한 원망하는 것일 될 테니까요." 하지만 그는 그 신을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왜 하필이면 그녀인지, 이러려면 좀 더 빨리 그녀를 만나게 해 줄 수는 없었던 것인지.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베가 람, 당신처럼 멋진 남자를 만나 이렇듯 로맨스 영화에서나 나올 듯한 장면도 연출해 보고 말이에요." 로맨스 영화라니?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자신을 멋진 남자라고 생각한다는 것만은 이해할 수 있어서 그 원망이 조금은 가시는 듯 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한 욕심이 솟았다. "내 곁에 있으시오. 마지막까지 내가 당신을 지켜주겠소." 그의 마음은 고마웠지만 하연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돌아가야 해요.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리고 난 지킴을 받는 것보다는 지켜주는 게 더 좋아요. 지켜주고 싶은 사람들도 있고요." 그 때였다. 숲을 헤치면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연! 어디 있습니까, 하연?" 얼마나 그녀의 이름을 불렀는지 목이 쉬어버린 사담의 목소리였다. "이제 가야겠어요. 만나서 즐거웠어요, 베가 람." "하연, 가기 전에 어떻게 알았는지 알려주겠소?"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하연에게 그가 덧붙였다. "내가 노예 놀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말이오." 하연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그 노예 놀이 해 봤거든요. 그래서 알았어요." 그러면서 돌아서 가버리는 그녀를 베가 람은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노예인 자신을 사지 않았을 때 그 대가로 그녀를 자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결심했었는데 결국은 끝까지 자신만이 그녀의 노예였던 것 같았다. 그래도 불쾌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바칸의 대족장인 자신을 노예로 만들어 버린 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묘하게 유쾌하기까지 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공허한 그의 웃음소리가 숲 속에 넓게 울려 퍼져나갔다. 사담과 함께 무사히 숙소로 돌아왔을 때 하연은 완전 넋이 나가버린 로베인을 볼 수 있었다. 창백한 안색에 마치 모든 것을 잃은 듯 절망에 빠져 있는 그의 표정에 오히려 하연이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 그에게 자신의 의미가 이렇게나 컸었다니...... 기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찬물을 뒤집어 쓴 듯한 느낌이었다. 자신이 죽으면 로베인은 완전히 폐인이 되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연은 마음은 아프지만 그와의 정을 미리 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죽었을 때 그가 충격을 덜 받을 수 있도록. 때문에 하연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기뻐서 달려드는 로베인을 하연은 매섭게 뿌리쳤다. "하, 하연!" "귀찮게 달라붙지마! 애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이야?" "나, 나는 그저 하연이......!" 로베인은 당황해서 더듬거렸다. "피곤해! 쉬어야겠으니까, 나가 줘!" "아, 알겠어." 시무룩해서 나가는 로베인을 보며 다른 일행들과 용병들은 하연에게 너무했다는 표정이었다. 심지어 카리스조차도 로베인의 편을 들어 줄 정도였다. "너무 하지 않습니까, 하연? 그래도 하연을 걱정해서 그런 건데?" "알아요." "그런데 왜 그랬습니까?" "내 걱정할 시간 있으면 자신이나 걱정하라고 전해줘요. 저주 풀 방법이나 생각해 보라고요. ......피곤한데 여러분들도 이제 좀 나가 주시겠어요? 내일 떠나려면 전 지금부터 좀 쉬어야겠어요." 하연의 정말 피곤하듯 낮고 지친 목소리에 일행들과 용병들은 아무 말 없이 하연이 쉴 수 있도록 방에서 나가주었다. 그들이 모두 나가자 하연은 털썩 침대에 들어 누어버렸다. 잠시 그렇게 꼼짝 않고 누워 있던 하연은 이윽고 몸을 일으켜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갈무마를 집어들었다. "서류 다 읽고 정보 분류했어?" 갈루마는 하연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른 말을 했다. -로베인 상처받았을 거다. 그 녀석 마음이 여리니까.- 하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알아. 그래서야. 알잖아, 갈루마? 나 곧 떠날 거라는 것. 로베인에게 그렇게 대한 것은 가슴이 아프지만 로베인이 아프면 나도 행복하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로베인이 더 상처받지 않도록......" 그러나 점점 줄어드는 울 듯한 하연의 목소리에 자신이 괜한 말을 했다고 자책하며 갈루마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애썼다. -내가 말이야. 아니지, 이 대현자 갈루마님께서 말이야. 길드에서 가지고 온 정보들을 이틀만에 모두 분류했다는 것 아니냐. 대단하지. 그치, 그치? 존경심이 무럭무럭 생기는 것 같지 않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하연은 갈루마의 그 말에 존경심이 무럭무럭 생기는 게 아니라 웃음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려고 하는 것을 느껴야 했다. '아이고, 이 푼수 지팡이야!' 속으로 그렇게 외치면서. 다음 날. 파병군과 함께 하연 일행들도 갈로아의 수도인 바이샨트를 향해 가는 출발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이번에는 노예들도 있어서 그들을 태우고 갈 마차도 몇 대 사야만 했고 식량과 필수품들도 따로 준비를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노예들이 좀 불안한 표정이었다. 어제 하연과 로베인 사이에 그런 일이 있고 부터 왠지 하연 일행들의 분위기가 냉랭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모든 준비가 끝나고 하연이 막 짐마차에 오르려는 때였다. 병사들의 헤치고 한 소년이 그들 쪽으로 달려오면서 소리치는 것이었다. "잠깐만요, 어둠의 사제님!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하연은 웬 모르는 소년이 자신을 간절히 부르자 무슨 일인가 싶어서 소년이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소년은 거칠게 숨을 헉헉 몰아쉬면서 물었다. "사제님이, 하연님이신가요?" "그런데 무슨 일이지?" 이 소년이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알까 싶어서 하연이 물었을 때였다. 갑자기 소년이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들더니 그대로 하연의 배에 찔러 넣는 것이 아닌가? 퍽! "큭!" 하연은 물론이고 하연의 일행들 또한 갑작스런 소년의 공격에 넋을 잃어버렸다. "......왜?" 입가에 피를 흘리며 하연이 물었다. 죽어 가는 이 순간에도 이 소년이 왜 자신을 죽이려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소년은 하연이 피를 흘리자 당황하다가 그제야 자신이 칼을 찔러 넣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두려움에 가득 찬 표정으로 울먹이면서 말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그렇지만 어머니가 저를 미워하는 것은 더 이상 싫은 걸요. 그 사제 분이 당신을 죽이면 어머니가 절 미워하는 저주도 풀릴 거라고......" 하연은 도대체 이런 어린 소년을 시켜 자신을 죽이려 한 그 사제가 누구일까 궁금했다. 어차피 죽을 운명인 자신의 시간을 조금 앞당기는 일일뿐인데. 이 일로 인해 이 어린 소년이 받을 고통을 생각하자 하연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다가 애써 얼굴에 웃음을 떠올리고는 소년을 위로하며 말했다. "괜찮아. 난 아프지 않아. 이제 돌아가 보렴. 어머니가 걱정하시겠다." "하, 하지만......" 소년은 어쩔 줄 모르고 땅바닥에 주저앉았고 그런 그들 사이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빛의 물의 여사제인 에스페가 달려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어머니 펠레아의 이름 아래 물의 여신 엘레나의 이름으로 그 분의 성스러운 축복을 내려주소서, 큐어!" 그러나 하연의 피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렸다. 그런 가운데 뒤늦게 창백한 표정의 하연 일행들과 용병들이 그녀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아직도 뭐가 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이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에스페는 몇 번이고 신성력을 하연의 배에 퍼부었다. 그렇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왜지? 왜 힘이 듣지 않느냔 말이야! 그렇지, 카리스씨? 카리스씨는 마법사지요? 어떻게 좀 해봐요? 지금 하연이 죽어가잖아요? 동료잖아요?" 비명 같은 에스페의 외침이 장내에 울려 퍼졌지만 카리스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마법으로도 하연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인간이란 그에 비해 터무니없을 정도로 짧은 생을 사는 종족이다. 그래서 이미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다. 하연을 잃을 그 때를. 하지만 이렇게는 아니었다. 이렇게 빨리는. 그 때 석상처럼 굳어져 있던 사담의 험악하게 일그러지며 복수에 불타기 시작했다. 하연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려고 했는데 그의 생명과도 같은 하연을 누군가가 빼앗아 가 버린 것이었다. 누군가 하연이 어린아이들에게 약하다는 것을 알고 그 점을 노려 하연을 공격한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미루엘과 리밍스는 눈물을 뚝뚝 떨구며 하연을 내려다보았고 용병들도 그 동안 하연과 정이 들어서인지 그녀의 죽음에 침울한 표정이었다. 로베인만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이제 죽는구나!' 하연은 멍하니 혼미해져오는 머리 속으로 생각했다. -하연, 정신차려! 제발, 날 버리지 마!- 갈루마의 목소리가 하연의 머리 속에 어지럽게 울려댔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연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때 죽음이란 단어와 함께 하나의 이름이 아스라히 떠올랐다. '카이람!' 이제는 결코 부를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 이름을. 그러자 카이람이 그녀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죽어 가는 하연의 얼굴을 슬픈 표정으로 빤히 내려다보더니 하연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을 달싹이자 자신의 기를 조금 불어넣어 주었다. 그로 인해 조금 정신이 든 듯 하연이 간신히 입을 열어 말했다. "......고. 마. 워. 그리고...... 정말은, 살고...... 싶었어......" 카이람은 그녀의 말뜻을 이해했다. 호기롭게 모험을 하고 싶었다고 외치긴 했지만 그녀가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은 살고 싶다는 바로 그 말이었다는 사실을. 카이람은 하연을 둘러싸고 있는 그녀의 일행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스르르 무너져 내리는 하연의 신형을 받아들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인간처럼 장내에서 사라져 버린 하연의 모습에 그녀의 동료들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전 있었던 일이 모두 꿈인 듯 느껴질 정도였다. 만약 땅에 떨어져 있는 피묻은 단검과 아직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어린 소년을 보지 못했다면. 그리고 그 때 마침내 로베인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자각을 한 듯 절규를 토해냈다. "으, 으...... 으아아악, 하연!" 여기까지가 3권 끝이랍니다. 저도 몰랐는데 오늘 대여점에 책을 빌리러 갔다가 제 소설이 나온 것을 알았답니다. 아무리 양이 많아도 진작 다 올려 버릴 걸 하고 후회를 많이 했습니다. 출판 삭제는 5일 후로 해주세요. 일 주일 드려야 하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 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일찍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즐거운 저녁 보내세요. "그녀가 죽다니......!" 페이런을 비롯한 성기사단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녀를 죽이려고는 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어떤 수단을 써서 죽이려들던 그녀는 죽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며 안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어린 소년의 검에 찔려 그 창백한 얼굴에 웃음마저 띄우며 쓰러지자 그 믿음이 깨어짐과 동시에 그들의 가슴속에서는 알 수 없는 분노가 타올랐다. 신이 있다면 어떻게 그녀가 죽음에 이르도록 내버려 둘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보았던 것이다. 하연이 거지와 부랑자들에게 돈을 나누어주는 모습을. 돈을 나누어주었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그것은 단순히 돈을 나누어주는 행위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웃음을, 위안을 나누어주는 듯 보였었다. 그러면서 행복해 하는 하연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 또한 행복을 느꼈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죽다니...... 정의를 실현하는 성기사단으로서 세상의 정의가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만드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 때 분노에 가득 차 있는 성기사단을 돌아보며 페이런이 말했다. "가자." 한 성기사가 넋을 잃은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로 말입니까? 저희에게 가야 할 곳이 진정으로 있는 것입니까? 장로들께서는 알고 계셨겠지요? 저희에게 죽이라고 명한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오면서 사람들이 그 분을 뭐라 불렀는지 들으셨습니까? 검은 로브의 성자라고 했습니다. 그 분은 진정 성자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죽인 소년을 걱정할 정도로. 그런데 그런 분을 죽이라고 명한 신전으로 우린 돌아가야 하는 겁니까?" 성기사들이 모두 페이런을 주시하는 가운데 페이런은 그들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래도 지금으로선 우리가 돌아갈 곳은 그 곳 뿐이다. ......그 분의 죽음 또한 알려야 하니까." 점점 낮아지는 페이런의 말속에 포함된 그 분이란 말로 성기사들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또한 그녀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들은 성기사였고 그들이 돌아갈 수 있는 곳도 신전뿐이었다. 어둠의 신전 뿐 아니라 빛의 신전에도 버려지는 아이들은 있었다. 단지 어둠의 시전과의 차이라면 그들의 신분이 대부분 귀족들의 사생아로 많은 헌금과 함께 빛의 신전에 맡겨진다는 것이었다. 그런 아이들 중 자질이 뛰어난 아이들이 커서 성기사가 된다. 때문에 아기 때부터 신전에서 자라며 대사제나 고위사제들의 명에 충실히 따르도록 교육받은 그들에게 위의 명령을 거부한다거나 신전을 떠난 생활이라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륙 어느 곳에 가 신전의 명령을 수행하던 결국에는 신전으로 돌아가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들의 머리 속에 뿌리깊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런 그들의 생각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자신들이 신전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지 의문을 품으면서. 그러면서도 무의식중인 듯 성기사들은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페이런의 뒤를 따라 빛의 신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오랜 습관이란 역시 고쳐지지 않는 것이었다. 사만스의 빛의 신전인 퓨하라 신전에 도착한 성기사들은 곧장 성전으로 향했다. 퓨하라 신전은 땅의 신 부탄을 받드는 신전으로 그 성전에는 풍요를 약속한다는 플리아스 나무가 무성한 나뭇잎을 자랑하고 있었다. 사르륵! 사르락! 금빛의 잎들이 부딪치면서 마치 음악과도 같은 아름다운 소리가 신전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퓨하라의 빛의 사제 한 명이 성기사들 중 땅의 신을 받드는 몇몇 성기사들에게 그 플리아스 잎을 하나씩 따서 건내주었다. 그러자 성기사들은 그 플리아스 잎에 살며시 잎을 맞추고는 그 잎을 다시 땅위에 올려놓았다. 땅에서 태어나 땅으로 돌아가리라는 짧은 기도문과 함께. 기도를 마친 성기사들은 곧 성전에서 나와 통신용 구가 있는 곳으로 가 빛의 대신전인 하나브에 연락을 취했다. 구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바람의 고위사제인 딜리언이었다. 그는 페이런의 어두운 얼굴을 보자 임무에 실패했다고 생각한 듯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 임무를 완수하기 전까지는 연락하지 말라고 한 말을 잊었는가?" "잊지 않았습니다." 페이런은 무뚝뚝한 어투로 잘라 말했다. 그 말뜻을 깨달은 딜리언은 순간 숨을 헉 들이키며 재빠르게 물었다. "그럼. 그 여사제를 처리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 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럴 수가! 어, 어떻게......" 솔직히 딜리언이 페이런에게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은 성기사단이 마신 소환사인 하연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무슨 힘으로 마신이 보호하는 여인을 처리할 수 있겠는가? 딜리언은 현 빛의 대사제인 엘 노아를 밀어내고 자신이 대사제의 위에 오르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엘 노아는 신성국가인 그랑디아 국왕의 형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를 몰아내려면 엘 노아가 신전에 치명적인 잘못을 범해 스스로 물러나게 만드는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잘못을 대사제인 엘 노아가 저지를 리가 없었고 그가 늙어 죽기만을 바라고 있어야 하는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때 상인길드에서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이었다. 빛과 어둠의 전쟁을 불러일으켜 달라는. 물론 처음에는 그도 망설였었다. 아무리 대사제의 자리가 좋다고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빛과 어둠의 전쟁을 벌이는 것은 분명 너무나 엄청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말하길 전쟁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이미 그들과 손을 잡고 있는 이번에 어둠의 신전에서 대사제 위에 오를 자와 평화협상을 맺으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 평화협상의 빛의 사제 쪽의 협상자로서는 딜리언 그가 맡게 될 것이고 그러면 대륙의 평화를 가져온 그는 대륙을 구한 영웅이나 마찬가지이니 대사제가 되는 것은 문제도 아니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이에 그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전쟁이 일어나도록 분위기를 조성했던 것이다. 그리고 상인길드에서 부탁을 받은 대로 빛과 어둠의 세력이 서로 치우치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바로 성기사단이 그 일에 방해가 되었다. 그래서 성기사단을 제거할 셈으로 마신소환사를 처리하라는 그런 터무니 없는 임무를 명했던 건데 그들이 정말 마신 소환사를 처리했다니...... 때문에 일시 당황한 딜리언이었으나 곧 그것이 지금까지 마신 소환사라는 존재로 인하여 어둠의 신전에 대해 위축될 수밖에 없었던 빛의 신전의 공격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딜리언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이 모든 것은 필시 빛의 주신이신 펠레아님의 은총이 틀림없어. 마신 소환사가 죽다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란 말인가? 그렇지. 난 이 사실을 빨리 대사제님께 알려야겠네. 자네들도 이제 신전으로 복귀하도록 하게." 허둥지둥 통신을 마치고 사라지는 딜리언의 모습을 보면서 페이런은 중얼거렸다. "......다행한 일이란 말인가?" 복잡한 기분이었다. 확실히 지금 이 시점에서 빛의 신전으로서는 마신 소환사인 하연의 죽음은 다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말 그녀의 죽음이 빛의 주신 펠레아님의 은총이란 말인가? 어쩌면 그 분의 분노는 아니었을까? 퓨하라 신전을 떠난 성기사단은 갈로아의 북쪽에 위치한 포이스 신전으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면 그랑디아로 순식간에 이동해 갈 수 있는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가는 도중 성기사단은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전쟁으로 인해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마을도 있었고 빛의 신전에 의해 점령된 마을도 어둠에 신전에 의해 점령된 마을도 있었지만 공통적인 것은 모든 마을 사람들이 전쟁의 상처로 인해 아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삶의 희망마저 잃은 듯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길거리에 나 앉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성기사단은 하연의 웃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웃음을 보면 저들도 희망을 가질 수 있을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그들은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애초에 빛과 어둠의 신전을 구분해 세운 인간의 어리석은 실수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뜩 문뜩 치미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그런 생각은 후에 혼 대륙에 자유 성기사들을 탄생시킨다. 빛과 어둠 그 어떤 곳에도 속하지 않는 그저 신을 믿고 그 믿음을 행하는 기사들을. 글렌은 서둘러 스마인가에 도착했다. 창백한 안색으로 서재를 박차고 들어간 글렌은 서류더미 속에 파묻혀 일에 열중하고 있는 네이브를 볼 수 있었다. 순간 글렌은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연사제가 죽은 일을 아직 모르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라 문가에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가 들어온 것을 알아챘는지 네이브가 고개도 들지 않은 상태에서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으니 나가 주지 않겠나?" "......그녀가......" 쾅! 네이브가 글렌의 말을 막듯 책상을 내리쳤다. 그러자 서류들이 이리저리 사방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것을 보며 네이브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알고 있어. 그러니 더 이상 말하지 말고 이만 나가주게. 보다시피 난 지금 처리할 서류가 많아 바쁘다네." 이에 글렌은 잠자코 서재를 나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연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면서 어떻게 저렇게 태평하게 일에만 매달릴 수 있는지. 하지만 네이브는 글렌의 생각처럼 그렇게 태평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일에 열중해 있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던 것뿐이었다. 이 대륙의 하늘아래 그녀와 같이 살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수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까. 가슴이 타들어 갈 듯한 분노를 억누르고 차가운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면서도 네이브는 새삼 어둠의 사제들을 향한 복수를 불태웠다. 갈로아에서 온 정보에 의하면 하연을 죽이도록 사주한 자 또한 바로 어둠의 사제인 것이 틀림없었으니까. "결국 어둠에 내 빛을 모두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게 되어버렸군.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차근차근 내가 빼앗긴 것의 몇 배를 너희에게서 반드시 빼앗아 줄 테다, 으드득!" 네이브는 손에 들린 펜대가 부러지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오랫동안 기다리셨지요.^^ 저는 그 동안 독촉메일 받는 재미로 살았다는....(험험!) 가 아니고 피곤이 쌓여서 좀 쉬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차분하게 하나씩 올릴 생각입니다. 저장분이 없는 관계로 많은 분량을 올리지는 못하겠지만 아직 쓰여지지 않았으니 그 때 그 때 여러분들이 의견을 주시면 그 의견을 글에 반영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의견부탁드립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행운이 있기를...... "며칠 전에 한 어둠의 여사제분이 이곳에 와서 놀고 있는 저와 친구들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저에게 저의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를 만나게 해 드렸는데 그 때부터 어머니께서 저를 미워하시고 때리고...... 더 이상 저를 보고 싶지 않다면서 저더러 집을 나가버리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슬퍼서 집을 나와 울고 있는데 그 여사제분이 오더니 파병군과 함께 있는 어둠의 여사제가 있는데 그 사제를 죽이면 어머니가 더 이상 저를 미워하지 않으실 거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긴 붉은 머리에 보라색 눈동자를 한 아주 아름다운 여자분이었어요. 제 손에 단도를 쥐어 주면서 간단할 거라고...... 이제 집에 돌아갈 수 있다고 해서......." 머리 속으로 몇 번이나 소년이 한 말을 떠올리면서 사담은 손에서 피가 나도록 검을 움켜쥐었다. 죽은 여동생 대신에 지켜 주리라고 맹세했었는데 눈앞에서 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살아가는 이유인 존재의 죽음을 보면서도 말이다. 이제 더 이상 그가 살아야 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복수만이 남아 있을 뿐. 이 대륙 어디에 있든 반드시 찾아서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하며 사담은 빠르게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런 사담의 뒷모습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쫓는 시선이 있었으니 바로 미루엘이었다. 사담이 하연의 복수를 위해 그의 제자들인 세르기아스와 질리안를 비롯한 용병들에게 로베인을 부탁하고 파병대에서 나오자 그녀 또한 사담의 뒤를 쫓아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사담의 그 누구도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분위기에 이렇듯 다가갈 용기조차 내지 못하고 그의 등만을 바라보며 멀리서 뒤쫓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 사담은 그런 미루엘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오직 앞만 보고 걸어갈 뿐이었다. 파병대의 분위기는 변해버리고 말았다. 은연중 그들의 정신적 지주 노릇을 하고 있던 하연이 죽자 삶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아침, 저녁으로 하던 검술훈련도 유트의 독촉에 의해 그저 마지못한 듯 시늉만 낼뿐이었고 처음에 느껴졌던 그들의 열의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사령관인 아르센마저도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다 취해서 잠이 들 정도였다. 용병들도 어딘지 맥이 빠진 모습이었다. 동료를 잃은 것이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지만 마치 오랫동안 함께 했던 동료를 잃은 듯 상심해 있었다. 더군다나 그들이 존경하던 용병왕 사담이 하연의 복수를 하겠다고 떠나버린 상태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들 중 로베인의 상태가 가장 최악이었다. 그는 마치 의식이 없는 인형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이리로 끌면 이리로 끌려가고 저리로 끌면 저리로 끌려가는. 밥조차 먹여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입에 넣지 않았다. 때문에 카리스는 자신의 레어로 돌아가 버리고 싶은 것을 참고 로베인의 곁에 있어 줄 수밖에 없었다. 야영지에서 좀 떨어진 나무아래에 앉아 초점이 없는 눈으로 멍하니 달을 바라보는 로베인의 모습에 나직이 한숨을 쉬던 카리스는 천천히 그의 등뒤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처음 하연을 보았을 때 내가 느낀 것은 그저 한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 전부였다. 지루한 그런 날들 속에서 뭔가 신선한 것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발견한 장난감이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녀에 대해 알수록 난 그녀의 존재에 대해 불쾌했다. 그래, 불쾌했어."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며 카리스는 말을 이었다. 로베인에게 들려주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듯. "존재하는 그 무엇이 정해진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드래곤인 나조차도 드래곤이라는 이 운명의 굴레를 벗어 던질 수 없어서 때로는 고통스러워하고 발버둥치는데 그녀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듯 보였다. 마치 자신에게 정해진 것은 그 아무 것도 없다는 듯. 그래서 그녀의 존재가 불쾌하면서도 또한 부러웠다. 드래곤인 내가 하찮은 인간 따위에게 말이다. 그러나 차츰 알게 되었지. 그녀에게도 그녀 자신만의 운명의 굴레가 있었다는 것을...... 그것을 감추지 위해 그녀는 남몰래 얼마나 고통스러워하고 발버둥쳤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그녀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사랑스러웠지." 순간 움찔하는 로베인의 등이 보이자 카리스는 피식 웃으며 계속 말했다. "마법은 바램을 현실로 만들려는 강한 의지라는 말이 있다. 하연은 마법이 통하지도 않고 펼치지도 못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난 그녀가 뛰어난 마법사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바래서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 없었으니까. 죽기 전 하연이 카이람님에게 말했지? 살고 싶다고. 때문에 난 그녀가 살아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녀는 자신의 바램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진짜 마법사였으니까." 잠시 후 등뒤에서 멀어지는 카리스의 발소리를 들으며 로베인은 그제서야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연, 반드시 살아 있어 줘. 나 언제까지나 널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짧지만 한편 올립니다. 그 동안 감기때문에 글을 전혀 못썼었거든요.ㅜ.ㅜ 여러분들도 부디 감기 조심하세요.^^ 등록자 : 김소영(허풍선이) 조회수 : 35 등록일 : 2001-10-22 02:03:42 관련자료 : 없음 본문크기 : 6119 bytes 다음 날. 정신을 차린 로베인을 본 용병들과 리밍스는 놀랍고도 반가운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있던 카리스가 문뜩 입을 열어 말했다. "이제 저도 떠날까 합니다." "네?" "뭐라고요?" 모두 놀라서 카리스를 돌아보았으나 로베인만은 어느 정도 짐작을 한 듯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 어째서?" 리밍스는 당황해서 물었다. 하연도 없고 사담과 미루엘도 떠난 지금 그의 보호자는 당연히 카리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마저 떠난다니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카리스는 그런 리밍스를 보며 말했다. "전에 하연이 만약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리밍스 당신을 제게 부탁한다고 말했었습니다. 하연은 자신이 리밍스를 지켜주지 못하는 때가 오면 제가 리밍스를 고향 마을로 데려다 주기를 바랬던 것이지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연의 뜻대로 고향에 데려다 줄까요? 한번 가본 곳이고 하니 간단히 텔레포트 마법을 시전하면 되니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만." 리밍스는 하연이 자신을 걱정해 미리 카리스에게 그런 부탁을 했었다는 말에 가슴이 뭉클해 잠시 그녀의 생각에 잠겼었으나 이내 그녀의 생각을 떨치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다. 고향을 떠나 올 때 그 각오대로 이 곳에서 우리 종족의 지위 회복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종족에게 미래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카리스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하연도 리밍스의 뜻을 알면 기뻐할 겁니다, 그럼......" 그러면서 작별의 인사를 하고 떠나려고 하자 율리아가 화가 나서 쏘아붙였다. "카리스님의 보호대상은 하연만이 아니라 로베인도 있지 않나요? 그런데 지켜야할 대상인 로베인을 이곳에 버려 두고 떠나겠다니요? 용병으로서 그럴 수가 있는 것입니까?" 다른 용병들도 그녀의 말에 동의하듯 비난에 가득 찬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카리스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저 슬픈 눈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때 카리스가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달려온 아르센과 유트, 아켄이 그를 말렸다. "저희들을 도와주십시오, 카리스님. 죽은 하연에게는 카리스님이 필요없으신 분일지도 모르지만 저희에게는 카리스님이 필요합니다." 아르센이 무릎이라도 꿇을 듯한 간절한 표정으로 부탁하자 마침내 카리스는 피곤에 지친 듯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이번 여행은 내겐 너무 힘든 여행이었습니다. 마법의 펼치기 위해선 무엇보다 정신력이 중요한데 지금 전 제정신을 유지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정신적으로 지쳐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여러분들을 따라간다고 해도 별로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떠나려는 것이니 말리지 말아주십시오." 그 말에 아르센과 유트, 아켄은 더는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마법을 제대로 펼칠 수 없는 마법사를 전쟁터로 데려갈 수는 없었으니까. 한편 로베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카리스를 쳐다보았다. 그는 단순히 카리스가 드래곤이고 그의 목표였던 하연과의 유희가 끝난 이상 돌아가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카리스의 말은 마치 자신이 정신적으로 지쳐있지 않았다면 계속 그들과 함께 여행을 했을 거라는 듯이 들리지 않는가? 그의 짐작대로 카리스가 만약 지금 심하게 정신적으로 지쳐있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로 로베인의 곁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하연이 살아있다고 믿었고 그녀가 살아있다면 반드시 로베인의 곁으로 돌아 올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떠나려는 것이었다. 살아있다면 하연이 돌아오고 싶어하는 존재가 자신이 아닌 바로 로베인의 곁이라는 것이 그를 미칠 정도로 괴롭게 했던 것이다. 그 생각에 이 곳에 더 있다가는 자신이 미쳐서 로베인을 죽여버릴 지도 모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나려는 것이었다. 카리스는 아픈 눈으로 로베인을 바라보며 그가 헤루아 숲의 드워프의 마을에서 했던 말, 인간은 인간하고만 맺어져야 한다는 말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만약...... " 하지만 카리스는 결국 그 마지막 말을 입에 담지 못했다. 만약 자신이 인간이었다면 하연을 포기하지 않았으리라는. 그 말을 입에 담기에는 아직은 드래곤으로서의 자존심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로베인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멈춘 것인지 언뜻 깨달을 수 있었다. 똑같이 하연을 사랑하는 존재였기 때문이었을까? 그리고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감사했다. 하연을 만날 수 있게 해 준 신에게 감사했다. 갈루마를 들고 떠나는 카리스를 배웅하고 난 파병대와 로베인, 용병들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바이샨트로 길을 향했다. 뒤에 무엇을 남겨두었든 그들은 그들의 길을 가야했으니까. 파병군을 떠난 카리스는 한동안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했다. 그 때 하연이 죽고 사라진 이래 처음으로 갈루마가 입을 열었다. -칼링스타!- 순간 카리스는 흠칫 놀랐다. 드래곤으로서의 그 이름을 듣는 것이 왠지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몇 천년을 드래곤으로서 들은 이름보다 이 몇 달간 들었던 카리스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게 느껴지다니......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피식 웃던 카리스는 하연의 얼굴이 떠오르자 조금 잠긴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새삼스럽게, 그냥 카리스라고 불러라!" 갈루마도 카리스의 마음을 짐작한 듯 잠시 말이 없다가 다시 말했다. -카리스, 부탁이 있다.- "뭔데?" -이제 그만 날 이 봉인에서 풀어주지 않겠나?- "뭐?" 카리스는 놀라서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넌 죽게 된다는 걸 알고나 하는 소리냐? 어쩌면 시간이 너무 오래되어 너의 영혼은 그 수정에서 빠져 나오는 순간 소멸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알아. 각오한 일이다. ......난 두려워. 하연이 살아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돌아온다고 해도 그녀는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날 거야. 지금도 이렇게 영혼이 아픈데 그 고통을 또 다시 겪어야 한다면 난 견딜 수 없을 거다. 차라리 지금 소멸해 버리는 것이 나아. 그러니 날 풀어 줘!- 그것은 카리스 또한 마찬가지라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갈루마의 봉인을 풀어 준다면 이제부터 누구와 하연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하연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어버리고 누구도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때가 온다해도 인간처럼 망각의 축복을 받지 못한 드래곤인 그는 언제나 하연을 기억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때 갈루마마저 없다면 그는 루보아 숲에 봉인 당한 그린 드래곤인 엔리시크처럼 미쳐버릴 것이다. "싫어. 하연이 돌아왔을 때 네가 없다면 그녀가 날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을 중얼거리며 카리스는 마음을 정했다. 슈이센에 있는 루보아 숲으로 가 보기로. 예전에는 어리석은 드래곤이라고만 생각했던 그린 드래곤 엔리시크를 만나 예기해 보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 긴 세월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아직도 그 인간여인을 사랑하고 있는지...... 어떻게 다른 인간여인을 사랑할 수 있었는지 알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으~ 약먹기를 싫어하니 감기가 좀처럼 떨어지지 않네요. 이 좋은 가을날 집안에 틀어박혀서 감기 떨어지기나 기다리고 있어야 하다니... 하지만 여러분들에게는 즐거운 주말이었기를 바라겠어요.^^ 텅 빈 공간 속에 몸이 둥둥 떠 있는 듯한 기분이랄까? 하연은 마치 엄마의 배속에 들어 있는 아기 같은 느낌이었다. 때문에 몸은 오랜만에 정말 편안했지만 마음은 괴로웠다. 죽었다는 사실보다도 보고 싶은 이들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그 사실 때문이었다. '이제는 그를 다시 볼 수 없겠지? 기억조차 하지 못하게 되겠지?' 싫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를 잊는다는 것은. "하아~"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한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였다. 검은 투구에 가슴과 양 팔목만을 드래곤의 비늘과 같은 갑옷으로 감싼 카이람이 장검을 들고 나타났다. "카이람! 도대체 어디에 갔다가 이제서야......?" 그러나 하연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장검에서 길게 떨어지는 붉은 핏방울을 보고 어느 정도 카이람이 뭘 하다 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처연한 표정의 하연을 보며 카이람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난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날 평가하지 말아주기 바란다.] "......혼 대륙에 전쟁이 심해졌나 보지?" [한마디로 피의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얼마만의 일인지 오랜만에 정말 즐거웠다. 그 짜릿한 기분이라니......, 큭큭큭!] 그러면서 흡족한 표정으로 웃는 카이람을 보며 하연의 기분은 더욱 가라앉았다. 피로 축제를 벌일 정도로 대륙에 넘쳐흐르는 그 피가 모두 그녀 자신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었으니까. 한동안 크게 웃던 카이람은 나중에서야 하연의 우울한 얼굴을 알아채고는 민망한 마음을 얼버무리려는 듯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그런데 역시 삶에 미련이 많이 남았나 보군.] "무슨 소리지?" [너는 몰랐겠지만 보통 신이 아닌 이상 이 공간 속에 들어오는 존재들은 이 공간에 의해 자아를 빼앗겨 스스로를 잊어버리게 되기 마련이지. 그런데 너는 아직까지 너 자신을 유지하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하연은 화들짝 놀라서 외쳤다. "뭐라고? 그런 위험한 곳에 나를 내버려두었단 말이야?" [무슨 소리야? 죽은 자라면 당연히 오는 곳일 뿐이다. 우주의 법칙에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존재자로서 태어나게 되는 것이지.]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이 곳에 있는 것이 자신이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허탈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는 하연을 보며 카이람은 안타까운 듯 말했다. [이제 그만 인정해라! 넌 죽었다. 그러니 편안히 그 공간 속에 몸을 맡기고 너 자신을 잊어라. 날 소환할 정도로 정신력이 강했던 널 존경하는 의미에서 하는 내 마지막 충고다.] 잠시 아무 말이 없던 하연이 이윽고 중얼거리듯 입을 열어 말했다. "내 이름은 하연이고...... 스물 셋이야. 내 꿈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해서 그의 아이를 낳고...... 아침에 일찍 못 일어나 남편을 굶겨 보내기도 할거고 아이 도시락도 제대로 못 싸 주는 그런 아내이자 어머니가 될게 틀림없지만...... 그래, 분명 현모양처는 못 됐을 거야. 하지만 그냥 평범한 주부면 족했어. 남들이 사는 그런 평범한 인생을 나도 살게 될 거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살고 싶었어. 그런데......" 연민이 드는 카이람이었지만 그는 짐짓 냉정하게 말했다. [미련은 버려라! 너보다 더 일찍 죽은 인간들도 많다.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은 인간들에 비하면 넌 많은 시간을 살지 않았나?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네 말은 사치일 뿐이다.] 그 말에 하연은 피식 웃었다. "그렇겠지? 하지만 말이야. 난 인간이거든. 인간이란 끊임없이 자신에게 없는 것을 바라게 되어 있잖아? 미련이 드는 것을 나 자신도 어쩔 수가 없어."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카이람이 하연에게 물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지금 가장 큰 소원이 뭐지?] 하연은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가 보고 싶어." [그!? 설마 로베인, 그 녀석은 아니겠지?] 하연은 일순 말문이 막힌 듯한 표정이었고 이에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알게 된 카이람은 기가 막혀서 물었다. [도대체 그 녀석의 어디가 좋은 거냐? 카리스는 드래곤이었으니 그렇다고 치도, 네 주위에 뛰어난 남자 인간들 많았잖아? 내가 일일이 꼽아볼까? 대륙 최고의 부를 자랑하는 상인 길드 장인 네이브라는 인간, 나바린의 국왕이자 해적왕인 마르세이라는 인간, 얼마 전에 만난 바칸의 우두머니 족장인 베가라는 인간도 있었고 또한 가까이에는 용병왕인 사담이라는 인간도 있었는데 왜 하필 그런 철부지에 별 볼일 없는 인간을 좋아하는 거냐?] 그러자 하연은 머쓱한 듯한 얼굴로 우물거렸다. "그, 그거야......" [이유가 뭔데?] "......나도 몰라. 모르는데 어떻게 대답해! 나도 알고 있어. 그 녀석, 삐지기도 잘 삐졌고 툭 하면 징징거리기나 하고...... 정말 남자답지 못했지. 게다가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고 말이야." [그렇게 잘 알면서!] "하지만 나도 모르게 시선이 그를 향해. 기쁜 일이 있을 때 슬픈 일이 있을 때 그가 제일 먼저 생각나. 나도 그를 좋아하고 싶진 않았어. 그가 아닌 누구라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런데 정신을 차려 보니까 그를 좋아하고 있는 거야. 그에게로 향하는 내 감정을 나조차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러면서 우울하게 웃는 하연을 보자 심술이 부글부글 끓어오른 카이람은 자신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잘됐군. 그렇지 않아도 넌 곧 그를 보게 될 거다.] 어리둥절해 하는 하연의 모습에 카이람은 비릿한 조소를 띄며 말했다. [혼 대륙이 멸망할 시기가 멀지 않았으니 곧 그를 보게 되지 않겠느냐 그 말이다.] 아침에 올리네요. 지금 비가 오거든요.^^ 비소리를 음악삼아 듣는 기분도 참 그만이네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뭐?" 순식간에 하연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분명 로베인이 보고 싶기는 했지만 그런 식으로는 아니었던 것이다. "나, 나 때문이야. 모두 다 나 때문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저앉은 하연을 보자 카이람은 곧 자신이 괜한 말을 했다고 자책했다. 그러나 이미 내 뱉은 말을 주어 담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연이 벌떡 일어나서는 카이람의 눈을 똑바로 주시하며 따지듯 묻는 것이었다. "카이람, 너는 알고 있지? 어떻게 하면...... 내가 어떻게 하면 혼 대륙의 멸망을 막을 수 있는지 가르쳐 줘!" 순간 카이람은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를 내리치는 듯한 강한 충격을 받았다. 마신인 자신마저도 하연이라는 한 인간의 운명 속에 휘말려 들고 있다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혼 대륙의 멸망은 자연스런 순리였다. 인간이 나이를 먹으면 죽는 것처럼 혼 대륙도 수명이 다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하연은 그 순리를 거역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인간이라는 존재와는 달리 운명을 거역한다는 것이 존재의 파멸이나 마찬가지인 마신인 자신한테. 하지만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하연의 눈을 보자 카이람은 도저히 그녀의 말에 거부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하연을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자신이 바래왔었던 일지도 모른다는 것도 함께. 우주에는 많은 차원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곳에서 신은 단지 존재하는 것 그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였다. 특히 마신인 그로서는. 어느 차원에서도 마신인 그를 믿고 받들어주지는 않았으니까. 때문에 그는 인간 세상에 간섭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고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그런데 오직 혼 대륙에서만이 마신인 그를 믿어주고 받들어 주었다. 그런 혼 대륙이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것은 그 자신도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마신인 그로서는 순리를 거역할 수 없기에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는데 그 때 하연이 그를 소환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모험을 하고 싶다는 소원을 말한 순간 카이람은 어쩌면 이 것이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혼 대륙을 구할 수 있는. 오직 인간만이 운명을 거역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유일한 존재이니까. 그러나 카이람은 하연과의 만남이 거듭될수록 그 생각을 지워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자신이 파멸되는 것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인간과는 달리 신인 그에게는 생에 대한 집착이 없었으니까. 단지 그로 인해 받아야할 하연의 고통이 싫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고통스러워하는 하연을 보며 그녀에게 더욱 큰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을 소환할 정도로 강한 정신력을 지닌 하연만이 혼 대륙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뭔데?" 환한 얼굴로 하연이 다급히 물었다. 그런 하연의 얼굴을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외면해 버린 카이람은 빠르게 말했다. [영혼을 불태워 대지에 뿌리는 방법이다. 그럼 그 땅은 정화되어 새로 태어나게 되는 거지.] 하연은 혼 대륙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그곳에 살고 있는 로베인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혼을 태워야 한다니...... 하연은 머리 속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그런 가운데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확히 어떻게 해야 된다는 거지?" 망설이는 듯 하던 카이람은 분명히 설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전에 고로도 신전에서 보았지? 성전에서 타오르던 불길 말이다.] 하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태초의 불인 지화의 흉내를 낸 것이다. 혼 대륙의 사람들은 내가 그 지화의 신이라고 알고 있지. 그러나 내가 어느 정도 지화의 힘을 이용해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태초의 불인 지화를 생성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인 펠레아 뿐이다. 그 불의 조각이 혼 대륙의 하라마르트 산 정상에 자리해 있는데 그 불의 조각이 지금 꺼져가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혼 대륙이 멸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단적인 예이지. 그 지화를 살리는 길은 오직 하나 가장 순수하고 강한 바램을 담은 영혼을 불태우는 것이다. 바로 하연 네가 날 부를 때처럼 그런 강한 바램을 담은 채 지화의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지.] 불 속으로 뛰어든다고? 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에 머리 속이 아득해지는 기분인데 설상가상으로 카이람이 덧붙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경우엔...... 환생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들었다.] 순간 하연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애초에 하연은 환생을 믿지 않았었다. 하지만 카이람의 말을 듣자 환생을 해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기대가 가슴속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혼 대륙을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환생마저도 포기해야 한다니...... 고뇌하는 하연의 모습을 보며 카이람이 말했다. [그래,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로베인을 보고 싶다고 했지? 만나게 해 주겠다. 너에게 시간을 주지. 바람의 달이 시작되는 그 날까지. 하라마르트 산으로 갈지 안 갈지는 네가 결정해라.] 바람의 달이 시작되는 날까지라면 지금은 불의 달이니 앞으로 6개월 뒤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6개월 뒤, 그 때까지 어느 쪽으로든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카이람은 하연의 심장에 자신의 생기를 불어 넣어주었다. 무한한 그의 생에 비추어 볼 때 너무도 보잘 것 없는 양을.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히 하연은 6개월의 생명을 이어 나갈 수 있으리라. 그리고 카이람은 하연을 다시 혼 대륙으로 보내버렸다. 눈앞에서 사라지는 하연의 모습을 보며 카이람은 중얼거렸다. [나는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던 네 선택에 따를 것이다. 명심해라, 하연.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던 네 선택을 비난할 존재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이 부진한 연재 속도라니...... 제가 생각해도 정말 제 자신이 한심하군요.ㅜ.ㅜ 루보아 숲의 안쪽 깊은 곳에서는 불의 달이 가까워 오는 때라 벌써부터 에베나의 꽃향기로 진동하고 있었다. 진홍빛 작은 에베나 꽃잎들이 화사한 아름다움을 뿌리고 있는 가운데 은빛머리의 아름다운 미청년이 지팡이를 들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여기쯤인데?" 카리스는 탐지 마법으로 마법의 기운이 감지되는 곳을 찾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이 근처 어딘가에 그린 드래곤 엔리시크를 봉인한 마법진의 기운이 감지되어야 하는데 그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혹시......!" 문뜩 어쩌면 봉인이 깨어졌거나 누군가가 봉인을 잘못 건드려 봉인이 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카리스는 창백한 안색으로 재빨리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봉인에 사용되었을 봉인석을 찾았다. 하지만 봉인석은 눈에 띄지 않고 길고 하얀 수염을 한 온화한 인상의 노인이 허공에 둥둥 뜬 채 바구니 가득 에베나 열매를 따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가 자신의 동족, 그것도 고룡에 속하는 존재임을 눈치챈 카리스는 정중히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실버 드래곤 칼링스타가 일족의 어른에게 인사드립니다." 노인은 천천히 허공에서 땅으로 내려서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손님이 오셨군. 차나 한잔하겠나? 얼마 전에 따서 말려둔 에베나 꽃잎이 있다네."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허허 웃으며 앞장서 걸어가는 노인의 뒤를 따르며 카리스는 의구심을 감추지 못했다. 이 근처에 봉인되어 있었던 그린 드래곤 엔리시크 외에 또 다른 드래곤이 살고 있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라면 엔리시크를 만나게 해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카리스는 잠자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뜻밖에 고룡이 안내 한 곳은 드래곤의 레어가 아닌 인간들이 사는 작은 오두막이었다. 놀라는 카리스를 보며 고룡은 한 손을 오두막을 향해 펼치고 가볍게 허리를 숙인 채 말했다. "엔크와 지이나의 집에 온 것을 환영하네." 집안은 마치 인간들의 신혼집을 보듯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유희중인 드래곤이었나 하고 생각했지만 안쪽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작은 집안에는 고룡이외에 다른 인간의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하며 작은 나무 의자에 앉아 있자 조금 뒤 고룡이 차 한잔과 술 한잔을 내 오더니 차는 카리스 쪽으로 놓고 자신은 술잔을 드는 것이었다. 그것을 본 카리스의 얼굴에 약간 의아하다는 기색이 스치고 지나가자 고룡이 말했다. "흠흠! 내가 비록 마음이 넓은 드래곤이긴 하지만 먹고 죽을 술도 없는 상황에서 손님에게 술을 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 황당한 카리스는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드래곤이 술을 먹고 죽으려면 얼마나 많은 술이 있어야 하는데 그럴만한 술이 없어서 못 주겠다니...... 고룡이 물었다. "그래, 이 루보아 숲에는 무슨 일로 왔는가?" 그제야 자신의 용건이 생각난 카리스는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광룡 엔리시크를 만나러 왔습니다. 그 분이 봉인된 장소를 좀 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고룡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술을 마시더니 중얼거렸다. "광룡이라...... 그는 왜 만나려고 하는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흠~ 인간을 사랑하기라고 했나보군.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도 그 문제 때문에 나를 찾아온 드래곤이 있었지. 레드 드래곤으로 바블라드라고 했던가?" "넷!" 자신도 모르게 경악의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섰던 카리스는 침착한 실버드래곤종족 답지 않게 경망스러운 행동을 한 자신의 모습에 민망해져서 다시 어색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러면서 속으로 자신이 놀랄 이유는 전혀 없다고 자위했다. 어차피 그 바블라드라는 녀석은 드래곤 슬레이어의 검인 룬블러드를 도난 당할 정도로 멍청한 녀석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곧 자신 또한 그 멍청한 녀석과 별로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우울한 표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고룡이 계속 말했다. "성정이 급한 레드 드래곤답게 그녀는 내 수염을 움켜잡고......" "자, 잠깐! 지금 그녀라고 했습니까?" 카리스는 급히 고룡의 말을 막으며 물었다. "그렇네만." "하!" 그 바블라드가 여성으로 폴리모프를 했다니...... 몸을 움직여 싸우는 것을 좋아하고 약한 것을 싫어하기에 보호받는 입장인 여성으로의 폴리모프를 극도로 싫어하던 그 녀석이! 기가 막혀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며 카리스가 물었다. "그래서 도대체 그 녀석이 사랑에 빠진 인간은 어떤 인간이랍니까?" "오래 전에 도난 당했던 검, 룬블러드를 찾는 과정에서 만난 인간이라고 하더군. 그에게 본래의 자신을 밝히고 드래곤으로서 영원한 사랑의 맹세를 하고 싶지만 그 인간은 드래곤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긴 후 드래곤이라는 종족 자체를 증오하고 있어서 고백조차 할 수가 없었다고 했네." "하아~!" "아마, 그 인간이 해적왕 가라프라고 했었지?" "네에?" 카리스는 더 이상 놀란 기운도 없었다. 해적왕 가라프라니...... 그렇다면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하연이고 그녀를 빼앗은 드래곤은 자신이 아니겠는가? 아마 그 사실을 바블라드가 알면....... 순간 카리스는 등줄기가 오싹해 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 녀석에게 엔리시크를 만나게 해 주었습니까?" "그랬지." "저에게도 그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고룡은 빙그레 웃으며 장난스럽게 술잔을 흔들더니 말했다. "못 들었나보군. 이 집은 엔크와 지이나의 집이라네. 엔크는 바로 엔리시크의 애칭이고 즉 내가 바로 자네가 찾는 엔리시크라고 할 수 있지." 넋이 나가 버린 카리스는 멍하니 자신을 엔리시크라고 밝힌 고룡을 쳐다보다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혼란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어, 어떻게...... 광룡이 되어 드래곤 로드에게 봉인 당한 것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봉인이야 되었지. 우리 드래곤들에겐 약속이야말로 바로 봉인이 아니겠는가? 난 이 곳 루보아 숲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드래곤로드에게 약속했네.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영원의 약속을 한 인간이 죽자 다른 인간을 사랑했다는 것이 거짓이었단 말입니까?" 고룡은 씁쓰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말은 사실이기도 하고 거짓이기도 하지. ......자네는 환생을 믿는가?" "환생이요?" 갑작스런 질문에 카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문뜩 저 아래 남쪽에 위치한 다렌이라는 나라에서는 환생을 믿어 죽은 자의 무덤을 만들지 않고 화장을 해서 바다에 뿌렸던 것을 떠올렸다. 다시 그 바다로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그는 드래곤이었다. 게다가 아직은 젊은. 영원이라고 할 정도로 오래 사는 드래곤인지라 아직은 죽음조차 직접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데 더 나아가 환생이라니...... 하지만 분명한 건 인간으로 유희중일 때로 그는 다렌 사람들이 말하는 그 환생을 믿지 않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자 엔리시크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환생을 믿네. 직접 경험했으니까." "직접 경험하다니요?" "내가 인간을 사랑하고 그녀에게 영원의 맹세를 했다는 사실은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카리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죽은 후 레어로 돌아 온 나는 망각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것을 그 때처럼 원망하고 저주한 적도 없었다네. 차라리 그녀를 잊어버릴 수만 있다면 이라고까지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난 결코 그녀를 잊을 수 없었고 그녀의 흔적이나마 부둥켜안기 위해 레어를 떠났었네. 그리고 이 루보아 숲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지. 난 첫눈에 알았네. 그녀가 바로 내가 사랑했던 그 여인임을...... 영혼이 서로를 부르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다시 한번 그녀에게 영원을 맹세함으로서 내 느낌이 착각이 아니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지. 내 눈앞에 있는 여인이 내가 사랑했던 여인의 환생체임을. 난 결코 미치지 않았으니까. 그 순간의 환희와 기쁨이 아직도 이 가슴에 생생하다네. 그 후 행복한 몇 십 년이 지나자 그녀는 다시 죽었지만 그 때 난 결코 슬퍼하지 않았네.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래서 오늘도 난 이렇게 집안 구석구석을 깨끗이 청소하며 그녀가 날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네." 그 말에 카리스는 왜 집안이 마치 신혼집 같은 분위기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랜 기다림 속에서도 행복해 보이는 엔리시크를 감동과 부러움의 감정으로 바라보고 있다가 문뜩 떠오르는 생각에 물었다. "그런데 왜 드래곤 로드는 우리에게 이런 사실을 숨긴 거지요?" "아! 그거야. 드래곤들이 인간을 반려로 선택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모두 인간의 짧은 생명 탓이 아니겠느냐? 그런데 인간들이 환생을 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아마 상당수의 많은 드래곤들이 인간들을 반려로 선택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드래곤의 종족 수가 줄어들 것이고, 지금도 드래곤의 종족 수가 줄어서 걱정이라는데 말이다. 그래서였다." "그런데 왜 저희에겐 사실을 말씀하신 거지요?" "그건 광룡인 나를 찾아올 정도면 벌써 사랑에 빠져도 깊이 빠진 것이 아니겠느냐? 드래곤 로드도 이런 경우엔 사실을 예기해 주어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카리스의 마음은 점점 부풀어올랐다. 그가 하연의 곁을 떠나려고 했던 것은 그녀가 로베인을 마음에 두고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그녀와는 다른 종족인 드래곤이기 때문에 인간인 그녀와의 관계는 한때의 유희밖에는 될 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수많은 세월을 어쩌면 기다림으로 보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환생을 하고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이제는 결코 그녀를 포기하지 않으리라고 로베인에게 보내지 않으리라고 카리스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힘으로라도 하연을 빼앗고야 말겠어!' 요즘 날씨가 많이 추워졌지요? 수능때라 그런가요? 감기 조심하세요.^^ 모래, 모래...... 사방을 둘러보아도 온통 모래뿐이었다. 그와 더불어 발 밑에서 느껴지는 이 뜨거운 열기라니...... 드래곤 스케일로 된 로브를 입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타 죽고 말았을 것이다. 너무 기가 막혀 한참 동안을 망연자실하게 서 있던 하연은 이윽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으아아악! 카이람, 어서 나오지 못해!" 그러자 마치 그녀가 부르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카이람은 어깨에 검을 가볍게 두른 채 금방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화가 난 하연의 모습을 보더니 히죽히죽 웃어댔다. "너, 너 이게 무슨 짓이야! 날 사막 한가운데에 던져 놓다니!" 분노에 떨리는 목소리로 하연이 고함을 지르자 카이람은 잠시 딴청을 부리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로베인을 만나고 싶다고 했지 않나? 이 사막의 끝에 그가 있을 거다. 만나고 싶으면 어디 네 발로 걸어가 보라고, 흥!] 코웃음을 치고 사라지는 카이람의 모습에 하연은 황당하기만 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심술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 사막의 끝에 로베인이 있다고 한 말이 떠오르자 하연은 카이람의 심술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무의식중에 걸음을 앞으로 내딛고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그런 하연을 내려다보고 있던 카이람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는 설마 그녀가 진짜로 자신의 발로 사막을 걸어 갈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곧 그녀가 자신을 부르며 사막을 벗어나게 해 달라고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늘 그렇듯 당당한 모습으로. 그것이 하연이니까. 그런데 그녀는 자신을 부르지 않았다. 순간의 그 실망감과 함께 밀려드는 복잡 미묘한 감정이라니...... 한동안 기묘한 표정으로 묵묵히 뜨거운 모래 위를 걸어가고 있는 하연을 내려다보던 카이람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카이람은 모래로 지은 거대한 성 앞에 서 있었다. 바로 불의 마왕 바토르의 성이었다. 그가 성문 앞에 내려서자 그의 기운을 느낀 듯 성문이 활짝 열리며 마왕 바토르가 뛰쳐나왔다. "대마신 카이람님의 현신을 뵙습니다." 무릎을 꿇으며 떨리는 음성으로 외치듯 말하는 바토르의 모습을 잠자코 노려보던 카이람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처에 하연이 있다. 그녀를 지켜라. ......부탁한다.] 솔직히 카이람은 다른 누군가에게 그녀의 보호를 부탁하기보다는 자신이 하연의 곁에서 그녀를 지켜 주고 싶었지만 이제는 자신이 서지 않았다. 하연의 곁에 있으면서 그녀가 자신을 희생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는. 그것도 다른 누군가 때문도 아닌 로베인이라는 한 별 볼일 없는 남자로 인해서라면 말이다. 그래서 바토르에게 하연의 보호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연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싶었지만 문뜩 바토르 또한 혼 대륙의 마왕이라는 사실이 떠오르자 그 말들을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바토르가 그 사실을 안다면 혼 대륙의 멸망을 막기 위해 하연이 자신을 희생하도록 유도할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덧붙이듯 한 말은 고작 부탁한다는 그 말뿐이었던 것이다. 부탁한다는 말을 끝으로 사라져 버린 카이람의 기운을 느끼며 바토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머리를 벅벅 긁으며 투덜거렸다. "그 망할 인간 때문에 내가 이 무슨 고생이야! 도대체 이 사막에는 왜 온 거야? 가려면 구경할 것 많은 데바 녀석이 있는 얼음의 궁전으로나 가면 좀 좋아?" 그러면서 바토르는 하연을 찾기 위해 허공 위로 치솟아 올랐다. 부탁이라고 하긴 했지만 마신의 입에서 나온 말인 만큼 명령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허공에 둥실 떠서 아래를 쭉 둘러본 바토르는 저 멀리에서 그의 성이 있는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는 한 작은 인영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인영의 앞쪽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모래의 돌풍들도. 귀찮은 자들의 방문을 저지할 생각으로 성 주위에 풀어놓았던 주우들이 자신들의 지역에 침입한 인간을 공격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모래의 마정인 주우는 어둠의 정령으로 그의 명령에 따라 모래바람을 일으켜 침입자들을 공격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잘못하면 카이람님의 부탁의 말이 채 식기도 전에 그 보호 대상자인 인간이 죽어버릴지도 모르는 사태가 벌어지자 바토르는 허둥지둥 외쳤다. "이동!" 재빨리 하연의 곁으로 이동한 바토르는 하연이 모래바람 속에 휩쓸리기 전에 간신히 그녀를 구해내 주우들의 지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바토르는 품안의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하연은 어느새 기절한 듯 의식을 잃고 있었다. 그런 하연의 모습에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던 바토르는 우선 그녀가 깰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는 망토를 벗어 모래 위에 펼친 후 그녀를 그 위에 뉘여 놓았다. 해가 지면서 사막의 날씨는 좀 전의 더위가 믿어지지 않게 쌀쌀해졌다. 때문에 하얗게 질린 듯 보이는 하연의 얼굴이 추워서라고 생각한 바토르는 불을 피웠다. 그러나 그 불은 사막의 거친 바람에 의해 꺼질 듯 말 듯 위태롭게 보였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눈을 뜬 하연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넋을 잃었다. 마치 별들이 눈 속으로 쏟아져 내리는 듯 아름다운 밤하늘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을까? "이제야 깨어났냐?" 익숙한 목소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낯선 목소리도 아닌 그 소리에 벌떡 몸을 일으킨 하연은 모래 속에 불을 피우고 있는 거대한 체구의 불의 마왕 바토르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기 전 돌풍에 휩쓸릴 뻔했던 일을 떠올리고 그가 자신을 구해주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긴 어떻게?" 우연이라기엔 뭔가 석연치 않아서 묻자 아니나 다를까? "흠! 카이람님의 부탁을 받고 이 몸이 특별히 행차하신 것이니 영광으로 알아라, 인간." 바토르의 잘난 척 하는 말에 문뜩 장난기가 치솟은 하연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아하! 그렇군. 그러면 이왕 부를 거 인간이 아니라 주인님이라고 불러 줘, 바토르." "뭐? 주인님이라니! 난 시종이 아니라 엄연히 카이람님의 부탁을 받은 거라니까!" 흥분해서 버럭 고함을 지르는 바토르를 보며 하연은 의심스럽다는 듯 그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자 왠지 어색한 기분이 든 바토르는 그녀의 눈을 피하고 말았고 그런 바토르의 모습에 하연은 더욱 의심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이에 바토르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 정말이라니까! 정, 의심이 나면 카이람님을 소환해 물어보면 되잖아!" 그러자 하연은 마치 자신이 크게 인심을 쓴다는 듯 말했다. "뭐, 그렇게 까지야. 좋아, 믿어주지. 그럼, 이제부터는 주인님이 아닌 하연이라고 불러." 순간 무언가 자신이 크게 밑지는 장사를 한 듯한 기분이 드는 바토르였지만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것 보아야 낫다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바토르를 보며 하연은 애초의 자신의 의도대로 되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의도는 바토르로 하여금 자신을 인간이 아닌 하연으로 부르게 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바토르가 말했다. "그런데 인간, 아니 하연. 이 사막에는 무슨 일로 온 거지?" "오고 싶어 온 것이 아니야. 카이람이 여기다 날 던져 놓은 거지." 인상을 쓰며 하연은 바토르에게 물었다. "혹시 이 사막의 끝으로 빨리 갈 수 있는 방법 같은 거 없어?" "아? 그거야 마법으로 이동해 가면......" 바토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에게는 마법이 듣지 않아." "아, ......뭐?" 바토르는 그야말로 대경해서 펄쩍 뛰어 오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말도 안돼! 마법이 듣지 않는 인간이 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하연과는 고대 트리엔시라의 지하 왕국에도 함께 들어갔었고 그 뒤에 하연의 뒤를 한 동안 따라다니기도 했었지만 그녀에게 마법이 듣지 않는 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안 것이었다. 게다가 도대체 마법이 듣지 않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예외 없는 법칙이란 없다 잖아." 위로하듯 말하는 하연의 말도 바토르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 직접 시험해 보기로 마음먹은 그는 다짜고짜 마법을 걸었다. "슬립!" 그러나 잠들어야 할 하연은 잠이 들지 않고 말똥말똥 그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아니야! 괜히 마신 소환사겠어? 분명 다른 인간들보다는 마법에 대한 내성이 강할거다. 마나를 더 끌어 올려보자.' 그렇게 생각한 바토르는 모든 마나를 끌어올려 하연에게 마법을 시전했다. "슬립!" 마왕이란 존재가 1서클밖에 되지 않는 수면마법을 펼치기 위해 자신의 모든 마나를 사용했지만 하연은 여전히 멀쩡한 모습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허탈해진 바토르는 하늘한번 보고 한숨이요 땅 한번보고 한숨이더니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듯 환해진 얼굴로 하연의 어깨를 두손으로 집아 흔들며 말했다. "그래. 이제야 알겠다, 인간. 네게 마법이 듣지 않는 것은 네가 마신 소환사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 그 밖에 다른 설명은 있을 수 없어." 이 비현실적인 현실을 설명하자니 다른 비현실적인 방법이 필요했고 그 방법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마신 소환사라는 존재를 떠올리게 된 것이었다. 마신 소환사가 존재하는데 마법이 통하지 않는 인간 하나 쯤 존재하지 말라는 법도 없었던 것이다. "으하하하! 그래, 그런 것이었어!" 자기 나름대로 확신에 차서 외치는 바토르를 보자 하연은 그 확신을 흔들어 놓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애써 꾹 참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직도 하연이 아닌 인간이라고 부르다니 차라리 카이람을 불러서 주인님이라고 부르도록 시켜버릴까?" 그 말을 들은 바토르는 순간 웃음을 뚝 그치며 기겁한 표정으로 외치듯 말했다. "하, 하연! 이제 출발할까?" 하연은 그런 바토르를 잠시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며 물었다. "......이 밤에?" 하늘엔 여전히 별이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다음 날. 하연은 바토르가 소환해 낸 거대한 크기의 머리에 왕관을 쓴 듯한 기이한 뱀을 볼 수 있었다. "이, 이게 뭐야?" 파랗게 질린 얼굴로 하연이 물었다. 그러나 바토르는 하연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듯 자랑스럽게 그 뱀을 소개했다. "비질리스크라는 마수다! 어때, 굉장하지? 내가 이 비질리스크를 키우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다고. 데바 녀석이 물의 마수 이슈케를 보여준 후로 마계의 숲으로 들어가 사흘 밤낮을 고생해 비질리스크의 알을 훔쳐낸 뒤 그 알을 품어 주고 내 마나까지 먹여가면서 이 정도의 크기로 키워 놓았지." "......혹시 코브라라고 하지는 않아?" 암만 생각해도 거대한 코브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마수를 보며 하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코브라라니? 그런 괴상한 이름이 아니라 비질리스크라는 멋진 이름이 있다니까!" "그래? 그런데 이 뱀, 아니 비질리스크는 왜 보여주는 건데?" "왜긴. 어제 네가 그랬잖아? 이 사막을 빨리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냐고? 그래서 이 현명한 마왕님이 생각해 냈지. 저 녀석을 타고 가자고. 어때 좋은 생각이지?" 순간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 하연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난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드래곤까지 타고 날았으면서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하연이었다. 하지만. "아? 그거라면 걱정 마! 이 비질리스크는 모래바닥을 기어서 가는 마수니까." 그 말에 막다른 골목에 몰린 듯 하연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빠져나갈 구멍을 찾았다. "......아! 미, 미끄러지지 않을까? 잡을 대도 없잖아?" "그런가?" 바토르가 그 문제를 고민하는 듯 보이자 하연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떨어져 다칠게 틀림없어. 차라리 그냥 걸어가자. 다시 생각해보니 별로 서두를 필요도 없는 것 같고." 그러나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하연의 말을 흘려들은 바토르가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안장과 고삐가 필요하겠군. 마침 내 창고에 좋은 안장과 고삐가 있었어. 그걸 소환해 오지 뭐." 말이 끝나자 마자 안장과 고삐를 소환해 낸 바토르는 비질리스크의 허리라고 추정되는 부위에 안장을 올리고 입에는 고삐를 물렸다. "자, 이제는 안전하겠지?" 그리고는 칭찬을 바라는 듯 두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는 바토르의 모습에 하연은 어색하게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하! 정말 멋진데......?" 기어이 저 뱀을 타고 가야한단 말인가? 암담한 기분으로 비질리스크의 매끈하게 잘빠진 몸체를 쳐다보고 있던 하연은 그래도 안장덕분에 몸에 닿지는 않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 아니겠냐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바토르가 이끄는 대로 비질리스크 위에 올라탔다. 스스스스! 비질리스크는 모래 위를 마치 빙하를 미끄러져 내려가듯 빠르게 나아갔다. 그러자 더운 바람이 채찍처럼 하연의 얼굴을 때리고 지나갔다. 다시 밤이 오고 낮이 오고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 때였다. 두꺼운 로브로 온 몸을 비롯해 얼굴까지 두르고 겨우 두 눈만을 밖으로 내민 바칸 족의 전사들이 이십여 명에 가까운 남녀노소의 포로들을 밧줄로 길게 묶어서 낙타와 비슷하지만 이마에 두 개의 뿔이 달린 루이타라는 동물을 타고 끌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건 뭐지?" 하연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바토르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부족간에 싸움이라도 있었던가보지, 뭐. 여기선 흔한 일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부족이 진 부족을 포로로 잡아 노예로 부리는 거지." 포로가 된 자들은 여인이나 어린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로브로 덮어쓰지 않았다. 때문에 그들의 눈에는 적에게 끌려간다는 굴욕감뿐만 아니라 더위와 피곤함에 지친 듯한 기색마저 감돌았는데 그런 그들의 이마에는 노예의 증표인 붉은 낙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짐승처럼 끌려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하연은 한 시대의 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듯 아무 감정이 없는 자신에게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금까지도 자신은 그저 혼 대륙을 여행하는 여행자일 뿐이라는 것을. 대륙의 사람들이 자신으로 인해 전쟁으로 고통받는 것을 보고 그녀 또한 고통스러워하긴 했지만 그녀의 안쪽 깊은 곳에서는 어디까지나 그것을 남의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때문에 그녀는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는 생각했지만 적극적으로 그들의 삶에 개입해 무언가를 바꾸려고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슈이센에서 어린 헤미아를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고 했던 리켈만 교장의 일을 막지 않은 것도. 사만스의 영주가 불법인 노예 경매를 주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버려 둔 것도 실상은 파병군의 사령관인 아르센의 입장을 생각해서가 아닌 그녀 자신이 그 모든 일을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노예로서 끌려가는 사람들을 보고도 그녀는 그저 이 일도 역사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무언가 바뀌어야 한다고 하연은 생각했다. 더 이상 자신은 혼 대륙의 이방인도 여행자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러면서도 망설여지는 것은 두렵기 때문이었다. 자신으로 인해 한 대륙의 역사가 바뀐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이 대륙의 일에 깊숙이 관여했다가 이 대륙을 사랑하게 되고 그로 인해 이 대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해. 그러나 이미 그녀 자신으로 인해 혼 대륙의 역사는 전쟁이라는 가장 나쁜 쪽으로 변해 버렸다는 사실을 떠올린 하연은 각오를 다졌다. 어디 이 혼 대륙의 사람들과 함께 뒹굴어 보자고. '이런 미적지근한 태도는 나와는 어울리지 않아! 어차피 멸망해 버릴 대륙이라면 화끈하게 멸망시켜 주는 것도 좋겠지. 어디 한번 해 보자고.' 며칠 여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기분전환에 좋을 것 같아서요. 여행 후에 뵙기로 해요^^ 하연이 그렇게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였다. 비질리스크를 타고 그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바토르와 하연의 모습을 본 루이타를 탄 전사들이 거대한 비질리스크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낀 듯 각기 허리에 찬 대거를 뽑아 들었던 것이다. 하연은 생각에 잠겨 있던 터라 미처 그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쭉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던 바토르는 그것을 보았고 그 즉시 그의 얼굴에서는 노기가 피어올랐다. 하찮은 인간주제에 감히 마왕인 자신 앞에 무기를 빼어들다니 용서할 수 없었다. "훗!" 차가운 비웃음이 바토르의 입에서 흘러나오며 그는 즉시 비질리스크에게 명령했다. "저 인간들을 쓸어버려라!" 그러자 비질리스크가 상체를 일으켜 세우더니 입을 쩍 벌렸다. 그 통에 하연은 하마터면 손에 쥐고 있던 고삐를 놓치고 땅으로 굴러 떨어질 뻔했다. 그래서 인상을 찡그리며 뭐라고 하려는데 뜻밖에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놀라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파파파팟! 비질리스크의 입에서 거대한 해일 같은 불덩어리가 튀어나오더니 루이타를 탄 전사들은 물론이고 그 뒤에 밧줄에 묶여 끌려오고 있던 노예들마저 흔적도 없이 녹여 버린 것이다. 일순 하연은 조금 전에 본 광경이 모두 사막의 신기루가 아니었을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착각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바토르의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흥! 하찮은 인간들이 어디서 감히......" 분명 바토르가 벌인 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자 그 많은 사람들을 이처럼 이유도 없이 순식간에 죽여 버린 대에 대해 하연은 어이없음과 동시에 벌컥 화가 치밀어 외쳤다. "왜 그런 거야? 왜 저들을 죽인 거냐고?" "왜냐니? 못 본 거냐? 저들이 감히 마왕인 내 앞에서 무기를 빼든 것을?" 너무도 당당하게 말하는 바토르의 말에 순간 하연은 그의 행동이 정당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저들은 네가 마왕인 것을 몰랐잖아? 게다가 이 비질리스크의 모습을 보면 누구나 무기를 빼어 들려고 할걸?" 바토르는 단호하게 말했다. "모르는 것도 죄다!" 그리고 하연의 순진함이 가엽다는 듯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더구나 내 비질리스크를 보고 무기를 빼어든다면 그것은 네가 생각하듯 그런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탐욕 때문이다. 어찌 이 사랑스러운 비질리스크를 보고 탐욕이 일지 않을 수 있겠어?" 그러면서 귀여운 애완동물을 쓰다듬듯 비질리스크의 머리를 쓰다듬는 바토르를 보면서 하연은 비로소 그가 인간이 아닌 마왕이란 사실을 절실하게 자각할 수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괴상한 취향을 가진. 한참을 허탈한 표정으로 그런 바토르를 쳐다보던 하연은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참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지금 모든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토르, 전 인간입니다. 조금 전 당신이 말 한마디로 죽여버린 저 하찮은 인간들과 같은." 정중하게 바뀐 하연의 말투와 비난이 섞인 그 말에 바토르는 저도 모르게 당황해서 외쳤다. "뭣이? 어찌 네가 저따위 하찮은 인간들과 같다는 거냐? 넌 마신 소환사다. 저들과는 달라!" "아니, 같아요. 때문에 전 바토르가 인간들을 하찮게 다루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하! 용납할 수 없으면? 네가 날 막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비웃음이 가득한 바토르의 표정에 하연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이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요. 그럼, 우리 이대로 각자의 길을 가도록 하지요. 서로 보기 싫은 모습 안 보게요." 순간 바토르는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휘둥그래 떴다. 그런 바토르의 표정을 못 본 척하며 하연은 비질리스크의 몸체에서 굴러 떨어지듯 내려서더니 로브를 탁탁 털고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면서도 하연은 속으로 은근히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토르가 자신을 쫓아오지 않고 자존심이 상해 떠나버리면 어쩌나 하고. 멍하니 한참동안 걸어가는 하연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던 바토르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하연의 뒤를 쫓아갔다. 뒤에서 달려오는 바토르의 발소리에 하연이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무섭게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인간, 아니...... 하연! 잊었나? 난 카이람님께 네 보호를 부탁받았다. 카이람님의 부탁씩이나 받은 이 몸을 감히 거부하겠다는 거냐?" 건방지기 이를 데 없는 인간이라고 속으로 이를 갈며 바토르가 외쳤다. 그 말에 하연의 발길이 뚝 멈춰졌다. 갑작스런 그녀의 멈춤에 얼떨결에 따라 멈춘 바토르는 자신을 돌아보는 하연의 표정에 순간적으로 움찔 하고 말았다. 무표정한 얼굴에 입술 끝만 살짝 올린 무미건조해 보이는 미소를 띄우고 있는 하연을 보자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마왕주제에 말이다. "네. 아주 기쁘게요." 너무도 쉽게 자신의 말에 긍정하는 하연으로 인해 자존심을 넘어서 자만심으로 가득 찼던 마음에 상처를 입은 바토르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뭐라고?"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위험한 일이 생기면 카이람님을 부르면 되니까요. 물론 이 사태를 안 카이람님이 바토르님에게 좀 실망하시기야 하겠지만 제가 잘 설명하도록 할게요. 바토르님이 제 말을 안 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요. 아! 어쩌면 카이람님이 바토르님의 후임으로 데바님을 불러 그 부탁이란 것을 할지도 모르겠군요. 데바님은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바토르님이 못해낸 일을 하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면서 싱긋 웃는 하연을 바토르는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것 같은 표정으로 노려보았는데 그런 그의 주위에는 붉은 기운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하연이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때였다. "절대 그럴 수 없어! 카이람님께 부탁받은 것을 그 녀석에게 자랑할 생각이었단 말이다!" 그 어린아이 같은 투정의 말에 순간 휘청거리려는 몸을 간신히 다잡은 하연은 마왕의 정신수준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끼면서 물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저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함부로 인간들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시겠어요?" 하연의 말에 동의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잠시 괴로운 표정을 짖던 바토르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약속하지." 그 말에 하연은 환하게 웃으며 말해 주었다. "고마워!" 순간 방금까지의 불쾌한 감정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바토르는 멍하니 하연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 곳이 사막의 왕국인 라세드다." 바토르가 그의 앞쪽에 있는 로브를 푹 덮어쓴 불룩한 곳을 향해 그렇게 말하자 그 물체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하연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하연은 눈앞의 광경에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와!" 사막 위에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가운데 어스름 보이는 도시의 모습은 마치 신기루를 보는 듯 환상적이었던 것이다. 그런 하연을 보며 바토르가 말했다. "물의 정령 나이아스의 슬픔이 긷든 곳이지." "......물의 정령?" "그래. 예전에는 이 곳이 대륙의 그 어느 곳보다도 더 풍요롭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정령들이 인간들과 더불어 이 곳에 터전을 잡고 살아갈 정도로. 그런데 누구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인간들 사이에서 하나의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지. 물의 여신 엘레나의 눈물이 떨어져 물의 정령이 탄생했다는 학설이었다. 일부의 학자들은 그 학설이 증명되지도 않았고 누구의 학설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병이 있거나 죽음을 눈앞에 둔 인간들에게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지. 때문에 수많은 물의 정령들이 인간들에게 사로잡혀 먹이가 되었고 그 만행이 얼마나 심했던지 물의 여신께서는 정령계를 만들어 정령들과 인간들을 분리시켰다. 그 후부터 인간들의 눈에는 정령들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물론 예외적인 인간들이 있어 정령 소환사가 되기도 했지만 그건 극히 일부였고 어쨌든 그 때부터 이 땅에는 물의 정령들이 자취를 감추어 물이 마르고 사막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오직 하나의 정령인 물의 정령 나이아스만이 이 곳에 남았었다고 하지. 그녀는 한 인간을 사랑하고 있었는데 그 인간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그 인간도 나이가 들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고 죽기 싫은 그는 자신을 사랑해준 나이아스를 잡아먹어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그리고 사랑을 저버린 그 인간에 대한 슬픔으로 흘린 나이아스의 눈물 때문인지 이 사막에서 유일하게 저 곳 라세드에서만은 언제나 차가운 물이 솟아났고 라세드는 저렇듯 물안개가 자욱하게 번지는 슬픔의 도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인간은?" 하연은 무슨 그런 나쁜 인간이 있느냐고 하려다가 자신 또한 다이아스의 정령인 다이아를 먹은 일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그 말을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저 위안이라면 자신의 경우 그 과정에 있어서 정령의 자발적인 행위동참 정도랄까? "물론 죽었지. 그 학설은 그저 떠도는 소문이었거든." 그러면서 비질리스크를 몰아 라세드를 지나쳐 가려는 바토르를 하연이 멈춰 세우며 말했다. "잠깐, 바토르. 우리 잠시만 라세드에 들렀다가 가자." "뭐?" 바토르는 놀라고 황당한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호얀지방으로 빨리 가야 하는 것 아니었냐?" 지난 며칠 동안 동행하면서 하연이 입에 달고 다닌 말이 바로 빨리 빨리 였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느릿하게 행동하면 그 얼마나 닦달을 해댔던가? 그런데 정작 그 말을 한 당사자가 갈 길을 늦추게 만드는 말을 하다니 실로 그 뻔뻔한 얼굴을 다시 한번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연은 그런 바토르의 황당함을 전혀 모르는 척 하며 말했다. "뭐, 어때? 잠시 둘러보고 가는 건데. 그 사이 호얀지방이 사라지기야 하겠어?"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면 그 호얀지방이 사라질 것처럼 몰아 붙였던 게 누군데?' 속으로 피눈물을 삼키는 바토르였다. 결국 하연의 뜻대로 그들은 비질리스크를 돌려보내고 라세드로 들어섰다. 물안개 덕분에 더욱 앞이 안보인 하연은 바토르의 손을 잡고 성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의아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진흙으로 만든 듯한 엉성한 모양의 성벽만이 보이고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 나라의 수도로 들어가는 관문이 이렇게 허술한 적이 있었던가? 어리둥절하면서도 하연은 뭐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도시이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무심하게 넘기고 말았다. 그러나 실상 경비병들은 사막의 혹독한 기후를 피해 성벽 속에 웅크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연과 바토르가 성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경비병들은 길게 호각을 두 번 불었다. 피--익! 피--익!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였지만 마왕인 바토르의 예민한 청각에는 벗어날 수 없었기에 그것을 들은 바토르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숨어서 무슨 짓거리를 도모하는 족속들을 가장 싫어했다. 특히 그 족속들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데바를. 때문에 당장 달려가 숨어 있는 인간들의 머리를 때려부수려고 하는데 문뜩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자신의 손을 잡고 무엇이 그리 신기한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는 하연을 보자 왠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그런 자신의 마음에 당혹해하던 바토르는 곧 그 이유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일순간의 화풀이를 위해 두고두고 자랑할 거리를 빼앗길 수는 없는 일이지, 암. 크크! 두고봐라, 데바! 곧 네 그 잘란 얼굴에서 웃음을 싹 지워줄 테니까.' 그렇게 즐거운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일까? 그는 미처 자신들을 쳐다보는 인간들 모두 남자들이었는데 그들의 시선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뭐, 알았다해도 인간들의 시선 따위에 그가 신경이나 썼을지 의문이긴 했지만. 그도 그럴 것이 바칸에서 여자는 전사를 낳는데 필요한 하나의 재산쯤으로 여겨진다. 때문에 바칸의 남자들은 자신들의 소유인 여자들을 함부로 밖에 돌아다니게 하거나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 밖에 데리고 나갈 일이 있으면 꼭 얼굴을 비롯한 온 몸을 전부 가리게 하는 것이 전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연은 어떤가? 로브를 쓰긴 했지만 얼굴이며 그 검고 탐스런 머리카락이 밖으로 흘러 나와 출렁거리고 있지 않은가? 그 때문에 하연을 보는 남자들의 시선에는 놀라움과 탐욕이 어려있었다. 하연이 아직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여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비록 곁에 동행인 듯한 바토르의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상처하나 없이 미끈한 그의 생김으로 보아 강한 자는 아니라고 판단하고 그를 쓰러트린 후 여자를 차지할 생각들인 것이다. 강한 자만이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는 나라가 바로 바칸이었으니까. 흥분에 들떠있던 하연은 차츰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도시에 그 흔한 음식점이나 여관, 상점 등도 보이지 않았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포위하듯 몰려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래 기다리셨지요? T.T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을 지경이라...... 재빨리 사라집니다.^.^ 등록자 : 김소영(허풍선이) 조회수 : 89 등록일 : 2001-12-21 16:45:09 관련자료 : 없음 본문크기 : 9788 bytes 하연은 저도 모르게 바토르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응, 왜?" 내려다본 하연의 얼굴이 굳어 있자 심상치 않음을 느낀 바토르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사태를 짐작하고는 흥미진진한 듯 눈을 빛냈다. 분명한 적의와 탐욕. 바토르는 그들의 노골적인 시선에 기분이 유쾌하기까지 했다. 예의라는 것을 앞세워 마음을 감추는 그런 것들보다야 확실히 저들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마왕인 자신한테 투지를 불태우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겉모습이 인간같이 보인다고 해도 자신에게 느껴지는 힘을 무시하기란 힘들 텐데 말이다. 하연이 분명 함부로 인간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패면 안 된다고 한 적은 없었기에 오랜만에 몸을 좀 풀어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한 바토르의 얼굴에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웃음이 떠올랐다. "칸 부족을 치고 돌아오던 전사들로부터 갑자기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람이시여?" 나른한 고양이처럼 가슴을 풀어헤치고 비스듬히 누워서 술을 들이붓고 있던 베가 람은 그 말에 입에 가져가던 술잔을 잠깐 멈추고 힐끗 위울을 쳐다보더니 무뚝뚝하게 말했다. "알아서 처리해!" 그리고는 계속 술을 따라 마시기 시작하는 람을 보며 위울은 한숨이 세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는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나왔다. "퍽!" 등뒤로 술잔이 벽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를 들으며 위울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사만스에 다녀온 이래로 람께서는 변해버리셨다. 아무 여자나 심지어 부하들의 여인들까지 침실로 끌어들이지를 않나 육체를 혹사시키려는 듯 몇 날 몇 일을 먹지도 자지도 않고 훈련에 매달리지를 않나 이제는 또 하루종일 술만 마시고 계신 것이다. '그 여인의 죽음 때문인가?' 문뜩 람께서 관심을 보였던 한 여인이 떠올랐으나 곧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그녀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전했을 때 보였던 베가 람의 무심한 표정 때문이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위울은 그를 향해 급히 달려오는 한 사내의 모습에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위울님!" "무슨 일인가?" "호각이 울렸습니다!" "호각이?" 위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호각이 울렸다는 것은 분명 외부인이 라세드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인데 지금 이 시기에 라세드로 들어올 외부인이라면 이미 그들이 사막으로 들어섰을 때부터 그가 알고 있어야하는 일이었다. 호얀지방에서 벌어지는 전쟁으로 인해 바칸으로 들어오는 외부인들에 대해서는 철저한 검색을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검색을 뚫고 라세드 안으로까지 들어온 외부인들이 있다니...... 분명 갈로아의 첩자들이 분명하다는 생각한 위울은 긴장한 표정으로 말을 전한 사내에게 말했다. "내가 직접 가보겠다, 준비해라!" "네!" 퍽! 퍼벅! 온 몸으로 열기를 발산하며 달려드는 사내들과 싸우는 바토르의 얼굴에는 희열이 가득 했다. "큭!" "이 곱상하게 생긴 애송이가!"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자들을 보면서도 사내들은 투지를 불태우며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들의 주먹은 휙! 하고 허공만을 칠 뿐 바토르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하연은 그런 바토르의 모습을 보면서 멍하니 생각했다. 인간의 육체가 저처럼 아름다운 것이구나 인간 또한 자연의 한 일부분이구나 하는 것을. 바토르가 마왕이긴 하지만 그의 육체의 모습은 어디까지나 인간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연은 처음으로 운동을 잘하는 사람들에 대해 부러운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저처럼 세상을 느끼는 방법도 있는 것인데 그녀로서는 느껴볼 수 없는 즐거움이니까. 그 때 한 사내가 멍하니 바토르만을 바라보고 있는 하연의 뒤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들이 정신없이 싸우는 동안 하연을 납치해갈 생각인 듯. 하지만 그런 움직임쯤은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바토르였다. 슬쩍 하연의 로브를 잡아당겨 품으로 끌어당긴 다음 그 사내를 발로 돌려 차버렸다. 퍽! "허억!" 내장이 파열되는 고통과 함께 사내는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바토르에게 달려들려던 사내들이 주춤하는 것이 보였다. 비로소 바토르가 곱상한 생김새와 달리 강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냉정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바토르의 빈틈을 찾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날카로운 시선 속에서 바토르는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 그의 실력을 보고서도 겁도 없이 덤벼들려는 그들이 가소롭기도 했지만 인간답지 않은 그들의 투쟁심에 감탄한 것이다. 그런데 그 때였다 휘이이익! 이번 대의 람을 배출한 고르이 부족의 붉은 깃발이 날아와 바토르의 발 밑에 내려 꽂혔다. 바토르는 조금도 피하지 않고 날아오는 깃발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 깃발이 그에게 닿지 않으리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침착한 바토르와는 달리 깃발을 본 바토르에게 싸움을 걸었던 사내들은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점차 바토르로부터 거리를 두고 물러났다. 조금 전까지의 전의는 싹 사라진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약간 실망한 바토르는 이윽고 그 깃발이 던져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곳에서는 루이타를 탄 한 사내가 달려오고 있었는데 그 사내의 절제되고 차분한 인상이 마치 전사라기 보다는 기사같았다. 바토르에게 휘둘려 어지러운 속에서 하연도 그를 보았다. 어디서 본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데 그는 하연을 알아본 듯 두눈을 부릅떴다. 위울은 믿을 수 없었다. 그 또한 하연이 죽음에 이르는 광경을 본 사람들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여인이 멀쩡히 살아있는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다니...... 하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어떻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있겠는가? 그저 닮은 사람인 것뿐이라고 애써 자위하며 위울은 장내의 전사들을 둘러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명했다. "뭣들 하는가? 위대한 람의 깃발아래 복종하지 않을 셈인가?" 그 말에 전사들은 흠칫한 표정으로 천천히 떠나갔다. 미련이 남는지 하연을 힐끗 쳐다보면서. 바칸은 여러 부족들로 이루어진 나라로 각 부족에서는 자신들의 깃발을 걸고 대족장 즉 람을 뽑는다. 모든 부족의 전사들 가운데 가장 강한 전사가 람이 되는데 람이 뽑히면 람을 배출한 부족의 깃발아래 모든 전사들은 복종해야한다. 그리고 그 부족의 깃발이 걸린 곳에서는 그 어떤 싸움도 해서는 안 된다. 만약 싸움을 한다면 그것은 곧 람에 대한 도전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아무리 여자가 탐이 나도 람에게 도전할 수는 없는 일인지라 전사들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거리가 텅 비다시피 하자 루이타에서 내린 위울은 다시 한번 하연을 쳐다보면서 바토르에게 말했다. "외부에서 오신 분들이라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우리 바칸에서 신체의 일부를 드러낸 여인은 주인이 없는 여인으로 간주됩니다. 따라서 누구든 가질 수 있는 여인으로 여기지요." 그 말에 하연은 조금 전 싸움이 자신 때문에 벌어졌던 것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고 바토르는 아차 하는 얼굴이었다.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기색에 하연은 바토르를 무섭게 쏘아보았고 바토르는 민망한 듯 시선을 피하고 있는데 위울이 물었다. "그런데 두 분께서는 라세드에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하연이 말했다. "사막을 지나다 라세드의 신비한 모습에 반해 잠깐 구경하러 들렀을 뿐이에요. 이제 곧 돌아갈 생각이었지요. 괜한 분란을 일으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모두 제 동료의 무지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전부 바토르의 탓으로 돌리는 하연이었다. 정중하게 그에게 인사를 하고는 바토르에게 돌아가자고 말하는 하연을 보며 위울은 왠지 그녀가 떠나간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저 여인과 연관이 되면 불행한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제가 성문 앞까지 호위해 드리겠습니다." 위울이 깃발을 뽑아들고 루이타의 고삐를 움켜쥐며 그들에게 말했다. "친절에 감사합니다." 나름대로 바토르의 싸움 구경을 하는 것도 좋았지만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피하고 싶었기에 하연은 고맙게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바토르 또한 인간의 호위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하연을 생각에 참았다. 하연이 표정관리를 한다고 했지만 조금 전 싸움에 휩쓸렸을 때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두려움을 감출 수는 없었던 것이다. 바토르는 두려움에 찬 하연의 표정 따위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위울의 호위에 한결 차분한 마음으로 하연은 라세드를 바라보았다. 뜨거운 격정에 못 이겨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듯 하다고나 할까? 슈이센에 비하면 화려함은 한참 떨어지지만 대신 소박한 열정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라세드는 강한 생명이 느껴지는 곳이군요. 그런데 바칸에 필요한 것은 풍요로운 땅인가요? 아니면 전쟁인가요?" 하연의 물음에 위울은 잠시 의심스런 시선으로 그녀를 보다가 말했다. "둘 다입니다. 신은 우리 바칸에 살고 싶다는 강한 열정은 주셨지만 정작 살 수 있는데 필요한 것들은 주시지 않았으니까 말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들 사이에서는 침묵이 감돌았고 어느새 그들은 라세드의 성문 앞에 이르렀다. 그러자 망설이던 위울이 하연에게 물었다. "......혹시 슈이센의 파병대에 있던 어둠의 사제인 하연님을 알고 계십니까?" 뜻밖의 질문에 잠깐 놀란 표정으로 위울을 바라보던 하연은 이내 방긋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즉 자신이 바로 하연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밝힌 것이다. 그러나 위울은 즉시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한참 만에야 간신히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린 위울은 충격으로 온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그럼."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그에게 인사하며 돌아서는 하연과 바토르를 보면서도 위울은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들이 저만치 멀어지기 시작했을 때 겨우 정신을 차린 위울이 외쳤다. "자, 잠깐만!" 의아한 듯 고개를 돌리는 하연과 바토르를 보며 위울은 복잡한 머리 속을 억지로 굴리며 말했다. "사제님이시라고요, 어떻습니까? 이렇게 저희 라세드를 방문하신 것도 인연인데 잠깐 저희 라세드궁의 신전을 둘러보시지 않겠습니까?" 위울은 하연에 대해 조사해 그녀가 파병군의 작전참모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그녀가 마신 소환사라는 정보도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녀가 마신을 소환해내는 것을 본 바가 없다는 것으로 볼 때 그 정보는 별 신빙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작전참모라는 것만으로도 위울은 그녀를 라세드에 묶어두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작전참모가 없는 군과 있는 군을 상대하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었으니까. 하연은 그런 위울의 의도는 생각지도 못했다.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각이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단지 그녀가 어둠의 사제이기 때문에 신전을 구경시켜 주려는 것으로 생각하고 가볍게 거절해버렸다. "아니에요. 저희가 지금 좀 바빠서요." "잠깐 만이면 됩니다. 라세드 신전은 솔직히 저희 나라 자랑이 아니라 대륙 최고의 신전이라고 자부할 만한 곳입니다. 그런데 사막에 위치하다 보니 현재 신전에 사제 분이 한 분도 계시지를 않습니다. 성전의 불꽃 또한 꺼진지 오래이지요. 부디 들러보시고 성전에 불을 피워 주시지 않겠습니까?" 다급하고 간절하게 말하는 위울의 말에 하연은 진짜 사제는 아니지만 사제복을 입은 자로서 그의 부탁을 거절하기가 난감했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잠시만요." 그래서 그들은 다시 길을 돌려 라세드로 들어갔다. 그 동안 방을 옮기느라 인터넷이 안 ‰獰享윱求? 그래서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여기는 오늘 눈이 왔었거든요. 어디 나갈 때는 따뜻하게 목덜이와 장갑 잊지 마세요.^^ [48023] 마신 소환사 -81(159)- 첨부파일 : 등록자 : 김소영(허풍선이) 조회수 : 73 등록일 : 2002-01-10 18:58:20 관련자료 : 없음 본문크기 : 6576 bytes 라세드 궁은 불꽃을 조각한 것과 같은 적색의 웅장한 궁으로 궁 안으로 들어서는 하연은 마치 붉은 산호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바닥과 벽, 기둥마저도 붉은 라세드 궁의 긴 복도를 지나가자 사자 형상을 한 거대한 두 마리의 기이한 동물이 새겨진 문이 나타났다. 그 동물들의 꼬리는 뱀과 같이 생겼는데 서로 꼬리가 얽혀 문고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연이 그 동물들을 유심히 바라보자 위울이 설명했다. "바칸의 수호성수인 키마이라입니다. 전사들의 수호신으로 알려져 있지요." 끼이익! 얽힌 꼬리를 떼어내고 녹이 슨 듯 잘 열리지 않는 문을 위울이 힘으로 밀어 열자 먼지가 잔뜩 쌓인 성전이 보였다. 불이 꺼진지 오래인 듯한 성전은 어둠침침하고 쾌쾌한 냄새마저 났다. "뭐야? 이 곳은 무덤 속인가?" 바토르는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으며 성전 안을 둘러보았다. "하하! 너무 오랫동안 비워 두었던 곳이라......" 개면 적은 표정의 위울은 그 자신도 성전 안을 처음 보는 듯 신기한 눈으로 둘러보더니 말했다. "곧 노예들을 시켜서 청소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위울이 나간 후 쾅! 하고 문이 닫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하연이나 바토르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성전 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먼지가 쌓여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재만 남은 성화자리와 재단이 보였는데 단 위에는 낡은 가죽 두루말이가 놓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그 가죽 두루말이를 펼쳐보자 금으로 세긴 듯한 이 세계의 기이한 글자들이 보였다. 하연이 물었다. "뭐야?" 바토르는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 "성서로군. 고대에는 이렇게 가죽에다가 글을 썼었지." "흠, 고대어란 말이지?" 고대어라니까 무언가가 떠오르는 하연이었다. 하연은 다급히 자신의 청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뜻밖에 종이가 두 장 나왔다. '어! 이 다른 한 장은 뭐지?' 두 개를 모두 펼친 하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개가 서로 조각 퍼즐처럼 딱 들어맞았던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 짝이 맞는 지도가 내 손안에 들어 온 된 것일까 하고 하연이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자 바토르가 그런 하연의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그 종이 조각들을 빼앗아 들고는 살펴보았다. 지도였다. "아직도 이런 고대 지도가 남아 있었나?" 지금과는 지형이 확연히 달라서 쓸모없는 종이 조각일 뿐이었다. 역사학자라는 인간들에게는 아주 소중한 자료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거기에 쓰여진 글자를 무의식중에 소리내어 읽던 바토르의 눈은 점점 커다래지고 말았다. "엘레나의 눈물?" 경악한 바토르의 표정에 하연은 의아한 듯 물었다. "그게 뭔데? 보석이야?" 그 지도를 보물지도라고 생각하고 있던 하연이기에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듣는 바토르로서는 어이가 없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이 대륙의 인간이 그것도 사제가 엘레나의 눈물을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당연히 농담이라고 생각한 바토르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난하지마, 하연! ......엘레나의 눈물이 있는 곳이 그려진 지도가 있었다니 정말 뜻밖이야. 어떻게 우리 마족들도 모르는 비밀이 인간들 세상에 알려져 있는 거지?" "그거야 인간들은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니까." 퉁명스럽게 대꾸한 하연이 다시 엘레나의 눈물이 뭐냐고 물으려는데 바토르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흠, 이 곳은 하라마르트 산인 것 같은데 이 근처라면 전설의 미궁이 있는 곳 아니었나?" 순간 하연의 머리 속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라마르트 산이라니...... 잊고 싶은 이름이었다. 결국 어떤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지금은 도망치고만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마치 그녀가 도망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그 이름이 따라 다니는 것이었다. 잊을 수 없도록. 잊지 말라는 듯. '그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면 결코 후회하지 않도록 생각하고 또 생각하겠어. 그 끝이 설령 나를 지옥의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될지라도.' 지도에 표시된 곳이 어디쯤일까 짐작해보고 있던 바토르는 문뜩 하연을 돌아보다가 뜻밖에 그녀가 처연하게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나 강해 보이던 인간이 갑자기 약한 모습을 보이자 불안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토르는 조심스럽게 두 장의 지도를 돌려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왜 아직 그 인간 안 돌아오는 거야?" 신전을 청소할 노예들을 부른다고 나간 위울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 말에 생각에서 깨어난 하연은 대충 주머니에 두 장의 지도를 챙겨 넣으며 말했다. "그러네? 나가 보자, 바토르." 먼저 문 쪽으로 다가간 바토르가 문을 잡아 당겼다. 그런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잠긴 모양인데?" 재미있다는 듯 싱글거리던 바토르가 하연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게 할까?" 노을이 붉게 물든 유파드의 항구는 출항해서 돌아오는 배들과 선원들의 고함소리, 물건을 사기 위해 나온 사람들로 인해 시끌벅적했지만 사람들의 얼굴은 그리 밝지가 못했다. 빛과 어둠의 전쟁으로 인해 물자도 풍족하지 못했고 호얀지방의 전쟁까지 겹쳐서 나라에서는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생활이 궁핍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이 많은 노인들이나 어린아이들까지 저녁 늦게까지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항구로 나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 사이로 한 검은 로브를 깊게 눌러쓴 어둠의 사제가 걸어가고 있었다. 사제를 본 사람들은 흠칫 놀라며 두려운 듯 몸을 피했다. 때가 때이니 만큼 사제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둠의 사제는 그런 사람들을 지나쳐 골목 안쪽에 있는 술집으로 익숙하게 길을 찾아 들어갔다. 술집에 들어서자 사제를 본 술집 안의 사람들이 모두 조용해졌다. 그런 사람들을 쭉 둘러보던 사제는 사람들의 눈에 잘 안 뜨이는 구석진 자리에 가 앉았다. 그리고 간단한 먹을 것과 술을 주문했는데 그 목소리로 사람들은 그 어둠의 사제가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술집 안의 그 어떤 사람들도 그 여사제에게 딴 마음을 품지는 못했다. 평소 사제들의 신성력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 살던 사람들조차 이번 빛과 어둠의 전쟁은 그 두려움을 뼈저리게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차츰 술집 안은 조용하게 혼자서 먹고 마시며 주위를 신경 쓰지 않는 사제의 모습에 조금씩 활기를 띄어가기 시작했고 얼마 후에는 시끌벅적하게 소란스러워지고 말았다. 충분히 먹고 마신 듯 사제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사제의 귀에 뜻밖의 소리가 들려왔다. "엘프라니...... 아직도 엘프가 남아있었단 말인가?" 그 소리는 사제가 앉아 있는 곳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테이블에 자리한 사람들 사이에서 흘러나온 소리인데 놀랍게도 사제가 그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그런가 보더라고. 린크셔남작이 사만스의 무도회에 갔다오는 길에 엘프 하나를 사냥해 왔다고 하더군." 사제는 그들의 말을 더 들어보려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와! 그 남작 정말 운도 좋아." "글세 말이야." "그런데 듣자니 엘프들은 하나같이 아름답게 생겼다고 하던데 그 엘프도 그렇겠지?" "그렇겠지." "......한번만 보고 싶군." "아마 불가능할걸. 내 처제가 남작가의 하녀로 일하고 있는데 처제의 말로는 남작이 그 엘프를 얼마나 아끼는지 방안에 가두어 놓고 누구도 보지 못하게 엄중한 감시를 한다더군. 심지어 식사도 손수 들여보낼 정도라고 하던데?" 아쉬움의 한숨이 그들의 입에서 연이어 터져 나오더니 그들의 화제는 어느새 이번에 있을 수확제로 향했다. 갈로아의 수확제는 불의 달과 바람의 달에 두 번 있는데 이번 돌아오는 수확제는 바로 불의 달에 있는 수확제였다. 그러자 사제는 더 이상 그들의 대화에 관심이 없는 듯 몸을 일으켜 슬며시 그곳을 빠져나갔다. 때문에 술집 안의 누구도 그 사제가 나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48024] 마신 소환사 -82(160)- 첨부파일 : 등록자 : 김소영(허풍선이) 조회수 : 61 등록일 : 2002-01-10 19:00:12 관련자료 : 없음 본문크기 : 6536 bytes 불의 달에 있는 수확제에는 바람의 달에 있는 수확제와는 달리 땅에 불을 놓는다. 넓게 퍼진 밭에 불을 놓으면 그 불길이 마치 썰물처럼 밀려나가 밭은 더 이상 땅이 아닌 붉은 바다를 이루게 된다. 한참동안 타오르던 불길이 꺼지고 땅이 검게 그을게 되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씨를 뿌린다. 어린아이서부터 노인들까지 각자 한 바구니의 씨앗을 들고 검은 밭에 물을 뿌리듯 춤추고 노래하며 씨를 뿌리는 것이다. 저녁이 오면 제단에 음식과 술을 쌓아놓고 땅의 신은 부탄에게 다음 수확제에도 풍성한 수확이 있기를 기도한다. 지위에 관계없이 유파드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는데 그것은 린크셔 남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시각 은밀히 남작가를 숨어드는 그림자가 있었다. 남작가를 지키는 사람들은 린크셔 남작이 고용한 몇몇 용병들이 전부였기에 그 그림자는 쉽게 저택 안으로 숨어들 수 있었다. 하지만 넓은 저택 안에서 엘프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관계로 그 그림자는 이리저리 저택 안을 헤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였다. 필리리리! 피리리아! 플리아스 나뭇가지를 깎아만든 피리인 프라하의 소리가 청아하게 밤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순간 그 그림자의 눈빛이 번쩍였다. 플리아스 나무를 깎아 악기를 만드는 종족, 그리고 프라하를 불 수 있는 종족은 지금은 사라졌다고 알려진 엘프가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그 소리를 따라 그림자는 재빠르게 신형을 날렸다. 그림자가 이른 곳은 벽과 구분이 잘 가지 않을 정도로 은밀히 숨겨져 있는 방 앞이었다. 문이 잠겨져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림자가 슬쩍 방문을 밀자 의외로 문은 쉽게 열렸다. 그와 동시에 프라하의 소리가 뚝 그치더니 뜻밖의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방안의 반을 차지할 듯한 거대한 침대와 그 옆에 놓인 작은 테이블. 그것이 전부인 방안이었지만 방안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화사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한 사람 아니 엘프로 인해서였다. 갓 새잎이 돋기 시작한 어린 나무의 잎을 보는 듯 푸르른 색의 머리카락과 눈을 지닌 엘프가 작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는데 손에는 조금 전 그가 불었던 프라하가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검을 빼어든 검은머리로 절반쯤 얼굴을 가진 용병이 야수와도 같은 투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용병왕 사담이었다. 그를 본 순간 그림자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알 수 있었다. 콰쾅! 처참하게 부서져 나간 신전의 문을 바라보며 하연은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문과 함께 예술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수호성수 키마이라의 정교한 조각까지 부서져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련한 마음이 더 큰 것도 사실이었다. 어딘가에 갇혀 있는 것보다는 예술작품을 그것이 설령 아주 고가의 골동품이라고 할지라도 부수는 것이 더 나았으니까. "그럼, 이제부터 우리를 가둔 그 빌어먹을 녀석을 찾으러 가볼까, 크크?" 광기가 서린 듯한 바토르의 웃음에 하연은 약간 이마를 찡그리며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시간이 아까워. 그냥 가자!" "그건 안돼. 마왕으로서의 임무를 소홀히 할 수는 없지." "마왕의 임무라니? 그게 뭔데?" "으드득! 받은 것은 그 열 배로 값아 주는 것이지." 이를 갈며 바토르는 채 하연이 말리기도 전에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바토르로 인해 하연은 당황했지만 곧 그보다 먼저 위울을 찾아야한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단순히 그들을 가두어 두었다는 이유로 죽는다면 그가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그러나 낯선 이 왕궁에서 어떻게 그를 그것도 바토르보다 먼저 찾는단 말인가?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몰라 막막한 마음에 잠시 멍하니 서 있던 하연은 무작정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한 자리에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녀의 체질상 맞지 않았던 것이다. 가다 보면 한 사람쯤은 만날 수 있겠지 하고 걷고 있는데 오 분이 지나고 십 분이 지나도 사람의 그림자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연이 들어간 구역은 람의 사적인 공간으로 정해진 곳으로 베가 람의 허락이 없이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던 것이다. 한참을 헤매던 하연은 마침내 인기척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벽 저쪽에서 무엇인가 부서지는 소리가 언뜻 들렸던 것이다. 기쁜 마음에 서둘러 모퉁이를 돌아간 하연은 살짝 열려있는 문을 볼 수 있었다. "쨍그랑! 퍽!" 안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하연은 순간적으로 이 안이 주방이고 어떤 어설픈 하녀가 설겆이를 하다가 그릇들을 깨고 있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소리가 들릴 리가 없지 않은가? '훗! 이곳까지 와서 나의 경이적인 설겆이 솜씨를 발휘하기 생겼군.' 설겆이를 해주고 왕궁의 지리에 대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슬며시 안으로 들어서는데 뜻밖에 안은 그녀가 생각한 주방이 아니었다. 사냥한 동물의 뿔이나 발톱들과 무기들이 보였고 커튼과 바닥, 방 한가운데 비스듬히 걸쳐 있는 커다란 의자에는 동물의 가죽이 덮여 있었다. 하지만 사냥꾼의 방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천장에 무수히 빛나는 별처럼 반짝이는 보석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뜻밖의 남자. 상처 입은 짐승처럼 초췌한 모습으로 의자에 반쯤 들어 누어 붉게 충혈 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베가 람을 볼 수 있었다. 이 곳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생각지 못한 하연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게다가 저렇듯 폐인이 된 것 같은 모습이라니...... 얼마나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을까? 결코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베가 람의 입술이 살짝 떨리면서 이윽고 말이 흘러나왔다. "술에 취하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군. 너의 환상이 다 보이고 말이야. ......잊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니, 잊어야만 했다. 난 베가 람이니까. 그런데 너의 얼굴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를 않아. 시간이 지날수록 너를 원하는 마음이 갈수록 커져서 나를 통제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처음이라서,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서 그런 거겠지. 이렇게 심장이 부서진 듯 아픈 것도 한 순간이겠지." 하연으로서는 그의 말이 충격이었다. 그가 그녀를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베가 람이 계속 말했다. "왜 신은 나에게 너를 만나도록 한 것일까? 차라리 일생 하연, 너라는 여자가 존재하는지 조차도 모르고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니다. 한 순간이라도 너를 만나게 해 준 것이 다 카이람님의 축복인 것을......" 순간 하연은 움찔했다. 베가 람이 다른 신들을 제쳐두고 굳이 카이람을 언급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곧 자신이 카이람의 사제이기 때문에 그녀가 받드는 신을 존중해서 카이람의 이름을 언급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너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안고 싶어. 하지만 ......참겠다. 너를 만지는 그 순간 넌 사라져버릴 테니까." 그는 하연에게 다가가고 싶은 욕구를 참기 위해 의자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얼마나 꽉 움켜쥐었는지 그의 양손이 새하얗게 변해버릴 정도였다. "이렇게 라도 널 볼 수 있다면 늘 취해 있어도 상관없을 것 같다니, 후후후!" 스스로가 생각해도 그런 자신이 어처구니없는지 베가 람은 등받이에 머리를 젖히고 낮게 실소했다. 그런 베가 람의 모습에 하연은 그가 자신을 환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지금 이 자리를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슬며시 그 자리를 떴다. 하연이 그 자리를 떠난 직후 베가 람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앞에 더 이상 하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환상이라고 치부하기엔 무언가 이상했던 것이다. 바로 발소리였다. 환상이라면 절대 들릴 수 없는 소리가 아닌가? "......하연!" 비틀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난 베가 람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하연의 뒤를 쫓았지만 이미 하연의 모습은 그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지끈지끈거리는 가슴을 부여안고 하연은 멍하니 걸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렇게 걷다보니 어느새 다시 신전 앞에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위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잊어버린 하연은 부서져 버린 문 안쪽의 먼지가 가득 쌓인 신전 안을 망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버려지고 그 누구도 찾아주지 않는 곳. 왠지 그 모습이 눈에 거슬린 하연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대한 화로가 놓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재만 남은 화로를 잠시 바라보던 하연은 그제야 불을 붙이려고 해도 자신이 진짜 사제가 아니기에 불을 붙이는 방법을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망설이던 하연은 카이람을 부르기로 했다. 어찌되었던 이것은 카이람의 신도들을 위한 일이니 당연히 카이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카이람!' "카이람!" 그의 이름을 부르기가 무섭게 카이람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마치 금방이라도 핏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거대한 핏빛의 날개를 단 모습으로. "어? 카이람? 웬 날개야? 그리고 어딘지 좀 해쓱해 보이는데?" 그 말에 카이람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더 멋있어 보이지 않냐? 장신구를 좀 달았지, 뭐.] 그러나 하연은 따라서 웃을 수가 없었다. 전에 카이람이 자신의 모습은 각 차원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모습이 반영된 것이라고 했던 말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혼 대륙의 사람들이 카이람을 핏빛의 날개를 단 피의 마신으로 여기고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 핏빛 날개가 마치 카이람의 주홍글씨처럼 느껴져 하연은 가슴이 아팠다. 웃지 않은 하연의 모습에 카이람은 개면 적은 듯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 이번에는 무슨 일로 불렀지? 너에게 붙여준 호위인 바토르는 어디 있고?] 바토르가 하연의 곁에 붙어 있지 않는 것이 심히 마음에 걸린 듯 눈살을 찌푸리는 카이람을 보며 하연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 심부름. 그리고 널 부른 이유는 이 화로에 불을 좀 지펴달라고." 불을 지펴달라고 그를 불렀다는 말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짖던 카이람은 하연이 가리키는 화로를 보고서야 자신이 소환된 곳이 신전임을 알아챘다. [아하!] 카이람은 즉시 화로에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화로에는 금방 성화가 타올랐다. 화르륵! 성화의 불길이 신전 안을 환하게 밝히는 가운데 하연은 카이람의 핏빛날개가 불타오르듯 느껴졌다. 그 모습을 신기한 듯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라보고 있자 카이람은 무엇인가에 쫓기듯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아? 이만. 난 좀 바빠서 말이야!] 그러면서 사라져버리는 카이람의 모습에 하연은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불연 듯 들었지만 애써 그 생각을 떨쳐버리고 말았다. 카이람은 마신이 아닌가? 그에게 잘못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 때였다. 끄르르릉! 성화의 불길이 거세지면서 갑자기 땅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성단이 두 쪽으로 쩌억 갈라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하연은 이윽고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너무 식상해! 도대체 이게 몇 번째 지하계단이야? ......이럴 때 갈루마가 있었다면 뭐라고 했을까?" 분명 짜증난다는 듯 인연이 위대한 현자를 가만두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갈루마를 하연은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갈루마가 보고 싶었다. 지하계단 앞에서 하연은 망설였다.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어두운 계단을 혼자 내려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이런 상황에서 언제나 자신을 지켜주던 정령들인 사이라와 로우가 떠올랐다. '아! 내가 그들을 잊고 있었다니......' 하연은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계약의식의 증표. 살며시 손등을 어루만지던 하연은 정령들을 불렀다. "사이라! 로우!" 그러자 불꽃과 물길이 확 치솟아 오르더니 사이라와 로우가 그 모습을 나타냈다. 사이라가 얼굴에 물기가 그렁그렁한 채 하연을 쳐다보았다. "주인님, 살아 계셨군요." "......너!" 로우는 화가 났는지 불길이 확 피어 올리기를 반복하면서 외쳤다. "이렇게 살아있으면서 왜 진작 우리를 소환하지 않았어? 갑자기 너와의 연결고리가 사라져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하하! 그랬어?" "그래. 그랬다, 이 바보 주인아?"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죽기보다 괴로운 듯 버럭 고함을 질러대는 로우 아저씨를 보며 하연이 피식 웃기만 하자 사이라는 그런 하연이 원망스러운 듯 말했다.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주인님." "하지만 이렇게 만났잖아. 더욱 반가운 마음으로." 넉살좋은 하연의 말에 사이라와 로우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로우가 띠겁다는 말투로 물었다. "무슨 일로 불렀냐?" "아? 그렇지. 저 지하계단 좀 같이 내려가 달라고. 그래 줄 거지?" "또냐?" 귀찮다는 얼굴로 로우는 자신의 뜻과는 반대되는 말을 내뱉었고 사이라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주인님이 원하시는 대로요." 로우에게서 나는 빛으로 인해 하연은 조금도 어려움이 없이 지하계단을 내려갈 수 있었다. 하연이 내려가는 동안 사이라가 함정을 대비해 그녀의 주위에 방어막을 쳤지만 하연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이곳이 집이라면 수도꼭지를 제대로 잠그지 않았다고 생각할 소리가. 의아해하면서 지하로 내려선 순간 그녀의 눈은 커다랗게 떠지고 말았다. 지하광장에는 거대한 호수가 있었던 것이다. 맞은 편의 계단식 벽에서 겨우 한 방울 정도의 물이 쉴새없이 몇 천년동안 떨어져 내리며 이 거대한 호수를 만들어낸 듯 보였다. 그 웅장한 광경에 하연은 세월의 위대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초라함 또한. 저 거대한 호수에 비하면 그녀는 고작 한 방울의 물방울밖에는 되는 못하는 존재가 아니겠는가? 어느새 처연한 표정이 되어버린 하연을 보며 로우와 사이라는 안절부절못했다. 무언가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고 싶지만 갑자기 하연이 우울해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곧 하연은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똑! ......똑!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결국 이 거대한 호수를 이루어 내지 않았던가? 그녀 또한 보잘것없는 작은 물방울 같은 존재일 뿐이지만 세상이라는 이 거대한 톱니바퀴를 이루는 한 부분임이 분명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평안해져서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천천히 호수에 다가간 하연은 목을 축이기 위해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물을 떠 입으로 가져가려 했다. 그런데 그 때 호수의 물이 갑자기 요동치더니 차가운 물기둥이 하연을 내리치는 것이었다. 촤아악! 뜻밖의 일에 경계를 풀고 있던 사이라와 로우는 화들짝 놀라서 막으려했지만 이미 늦어 하연의 몸은 물기둥에 의해 저만치 나가 떨어진 후였다. "주인아!" "주인님!" 로우는 날카로운 눈길을 번뜩이며 다시 하연을 공격하려는 호수를 향해 맞대응 했고 그 동안 사이라는 황급히 하연에게 다가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그녀의 괜찮다는 말처럼 다행이 몸 상태는 멀쩡해서 하연은 곧 벌떡 일어나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곧 자신이 멀쩡했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드래곤 스케일로 만들어진 이 검은 로브 덕분임을. 하지만 나가떨어지면서 손을 잘 못 딛었는지 그녀의 손에서는 피가 흘렀다. "아!" 그 모습에 하연은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방울방울 땅에 떨어지는 붉은 핏방울을 타고 진한 향기가 지하광장을 가득 채워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자 그 향기에 매섭게 요동치며 로우를 공격하던 물의 기둥이 다시 잠잠하게 호수 안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더니 잠시 후, 사이라의 물빛 투명한 모습과는 달리 형체가 흐릿한 유령 같은 모습의 정령이 호수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딘지 모르게 요사한 분위기를 흘리며. 순간 로우와 사이라의 표정은 무섭게 굳어졌지만 이를 눈치채지 못한 하연은 익숙한 정령의 모습에 그 정령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그러자 급히 로우와 사이라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다가가서는 안됩니다, 주인님. 저건 요령이에요." "요령?" 하연이 의아한 듯 그 정령과 사이라를 번갈아 보면서 묻자 로우가 대답했다. "정령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크게 둘로 나누어서 대부분의 인간들이 정령이라고 부르는 빛에 속한 정령들인 물, 불, 바람, 땅, 나무 등의 정령들과 어둠의 정령들인데 그들은 어둠 속에서 인간의 나쁜 감정이나 두려움을 먹고산다. 그 중에서는 인간의 목숨까지 취하는 정령들이 있는데 저 요령이 그런 정령들 중에 하나이다. 인간을 유혹해 호수로 끌어들인 후 잡아먹는 거지." "먹어?" 저 실체도 없어 보이는 몸으로 어떻게 자신을 먹는다는 걸까 하는 황당한 고민을 하연이 하고 있는데 그 요령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면서 그들을 향해 말했다. "흥, 지금 나를 어디다가 비교하는 거야? 내가 인간 따위나 잡아먹는 하급요령인줄 알아? 벌써 몇 천년 전부터 인간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작은 입술을 달싹이며 투덜거리는 그 요령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하연은 자신이 남자였다면 당장 끌어안아 버리고 말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로우와 사이라는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그 요령을 노려보았다. 사이라가 물었다. "그렇다면 왜 저희 주인님을 공격했던 거지요?" 그러나 요령은 사이라의 질문을 무시한 채 하연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살짝 눈웃음치며 말했다. "정령사를 보긴 정말 오랜만이야. 그것도 이렇게 진한 달콤한 정령의 향기를 지닌 정령사는 말이야." 그러자 평소 온순하던 사이라의 얼굴이 화가 난 듯 화르륵 붉어지며 외쳤다. "저희 주인님을 유혹하지 마세요." 뜻밖의 사이라의 모습에 황당해서 쳐다보는 하연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듯 사이라는 계속 외쳤다. "쳐다보지도 말아요. 그리고 빨리 저희 주인님을 공격한 이유나 말해 주세요." 그 모습에 로우가 하연을 힐끗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주인 잘못 만나 정령하나 망가지는군." 그러자 요령의 얼굴이 진지해지며 말했다. "나는 요령 나이아스. 이 호수는 나의 분신. 허락된 자 외에는 이 호수의 물을 마실 수가 없다." 그렇게 말하는 요령의 형체주위에 물안개가 사르르 퍼져나갔다. 요령의 슬픔이 물안개로 화하는 듯 하다고나 할까? 그 모습에 하연은 저절로 물안개에 잠겨있던 라세드를 떠올렸고 라세드로 들어오기 전에 바토르로부터 들었던 이야기 또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물의 정령 나이아스의 이야기를. 그리고 이름이 같은 것이 우연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 하연은 나이아스에게 물었다. "나이아스. 허락된 자란 누구를 말하는 거지요? 설마 당신을 먹어버린 그 인간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순간 요령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로우와 사이라 또한 요령의 이름을 듣고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챈 듯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요령이 말했다. "나에 대해 알고 있는가 보군. 맞아, 그는 죽기 직전 나를 먹으려고 했지.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서. 하지만 나 나이아스가 그런 죽어 가는 인간 하나 감당 못할 것 같아? 그는 결코 날 먹을 수 없었어. 대신 나를 배신한 대가로 내 손에 의해 앞당긴 죽음을 당해야만했지." 로우가 물었다. "그럼, 널 배신한 인간에게 복수하기 위해 요령이 된 거냐?" 나이아스는 피식 웃었다. "복수? 그럴지도 모르지. ......그가 환생을 해서라도 내게로 다시 돌아오기를 이렇게 요령이 되어서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으니까." 로우와 사이라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환생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기에 그녀의 기다림이 터무니없는 기다림으로만 생각되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요령에게 기다리지 말라고도 말할 수가 없었다. 하연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졌을 때 그들 또한 하연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녀가 자신들을 불러주기를 기다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으니까. 한참 말없이 그들이 서로의 감정에 젖어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그들 뒤쪽에서 공간의 문이 열리며 바토르가 손에 온 몸이 피투성이로 짓이겨진 시체 하나를 달랑 들고 나타났다. "......바, 바토르! 설, 설마......!" 하연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손가락으로 시체를 가리키고 있자 바토르가 더없이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응. 우리를 가둔 그 버릇없는 놈이지!" "죽, 죽었어?" 침을 꿀꺽 삼키고 하연이 묻었다. "크크, 설마 의리가 있지. 너도 분풀이를 하고 싶을 것 같아서 목숨만은 살려둔 채 가져왔다. 자, 마음대로 분풀이 해." 그러면서 하연의 앞에 바토르는 위울의 몸을 툭! 던져 주었다. 하지만 하연은 설래설래 고개를 가로 저었다. 살짝만 건드려도 죽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 유감이라는 듯 입맛을 다시며 바토르가 직접 위울의 숨을 끊으려고 다가가는데 갑자기 호수에서 물기둥이 치솟아 오르더니 상처투성이 위울의 육체를 낚아채듯 휘감아 올렸다. "뭐냐?" 졸지에 먹이를 빼앗긴 바토르는 으르렁거리며 요령에게 외쳤다. "용서해주십시오, 불의 마왕이시여! 저는 물의 요령 나이아스. 이 인간은 전생에 저를 잡아먹으려 했던 인간입니다. 제게 복수의 기회를 허락해주십시오." "뭣?" 그 말에 바토르는 물론이고 하연과 로우, 사이라 조차 놀라서 멍하니 요령을 쳐다보았다. 위울이 전생에 나이아스가 사랑했던 인간이었다니...... 망설이는 바토르의 표정에 하연은 재빨리 말했다. "나이아스에게 넘겨주자, 바토르. 이럴 때는 마왕다운 관대함을 보여야 하는 거야." 하연의 달래는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바토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다. 난 관대하기로 이름 높은 마왕이니까 이 인간 하나쯤은 너에게 주지." "감사합니다, 위대한 마왕이시여!" 요령 나이아스는 정중히 바토르에게 감사의 예를 표했다. 그런 나이아스를 보며 하연은 그녀가 위울에게 복수를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흥미진진하게 나이아스가 인간에게 복수하는 광경을 지켜보려는 듯 눈을 빛내고 있는 바토르의 팔을 잡아 끌고 지하계단으로 향했다. "어, 하연! 왜 이래?" "서둘러. 이 라세드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고." 그러다 문뜩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고개를 돌려 그들을 쳐다보고 있는 나이아스에게 물었다. "후회하지 않아?" 나이아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후회한다면 이미 사랑이 아니겠지요." "훗! 그런가?" 하연이 일행들을 이끌고 지하광장에서 떠나자 나이아스는 곧 위울의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본래의 모습을 회복해 가는 위울의 모습을 처연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나이아스가 중얼거렸다. "이제 이 기다림도 끝이군요. 기다리는 동안 정말 행복했는데......" 치유가 끝나자 나이아스는 위울을 땅위에 내려놓고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얼마나 그렇게 위울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을까? "......으음!" 신음소리를 내며 깨어난 위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무엇을 보았는지 눈이 크게 부릅떴다. 그의 시선은 요령 나이아스를 비껴 호수로 향해있었다. 사막에서 유일하게 물이 나는 도시이긴 했지만 그래도 물이 부족하긴 나라였다. 그런데 이런 거대한 호수가 존재했었다니 위울은 졸지에 황금광산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우아앗! 크하하하하!" 환호성을 지르며 호수로 뛰어든 위울은 물을 높이 높이 두 손으로 차올렸다. 물이 위울의 머리 위로 비처럼 쏟아져 내렸고 그의 웃음소리는 광장 안을 가득 메웠다. 그런 그의 모습을 나이아스는 슬프면서도 행복한 미소로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이제 정말 안녕이군요. 안녕, 나의 사랑." 점점 나이아스의 형체는 물방울로 변해 호수로 떨어져 내리며 사라져갔다. 하지만 정령사가 아닌 위울은 나이아스의 존재를 눈치채지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로우와 사이라를 정령계로 돌려보낸 하연은 바토르와 함께 라세드를 떠났다. 밤이 오고 밤하늘에 별들을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하자 하연은 비질리스크 위에 올라서서 양팔을 벌리고 바람을 맞았다. "뭐하는 거냐?" 돌연한 하연의 행동에 바토르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바람을 맞고 있어. 난 다시 태어난다면 바람이 되고 싶었어. 어디든지 갈 수 있고 어디든지 머물 수 있는." "바람의 정령이 되고 싶다는 거냐?" 인간주제에 정령이 되고 싶어하다니 역시 특이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면서 바토르는 물었다. 하지만 하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 정령도 말고, 그냥 바람. 정령들의 삶이라는 것도 꽤 고달프더라고. 너는 어때?" "뭐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바토르가 물었다. "너는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어리석은 질문이로군. 난 마왕이다. 그 외에 어떤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다." 단호하게 말하는 바토르의 말이 뜻밖인 듯 하연은 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어이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언제 비질리스크 위에 차 테이블을 소환해 냈는지 바토르가 태평하게 테이블의자에 앉아서 차와 과자를 먹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동안 그런 바토르를 망연히 보고 있던 하연은 이윽고 입을 열어 말했다. "......과자보다 난 케익이 좋아." 국경이 가까워 오자 하연은 바토르에게 비질리스크를 돌려보내라고 말하고 걸어서 국경의 관문이 있는 쪽으로 갔다. 그들의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치 바늘로 찌르는 듯한 강렬한 시선이 등뒤에서 따라 붙었지만 하연과 바토르는 그 시선을 무시한 채 앞만 보고 걸어갔다. 관문에 들어서자 갈로아의 국경 수비대의 병사들이 놀라서 그들을 막아섰다. "누구시오?" "너희들은 누구냐?" 병사들은 전쟁터에 그것도 적국의 사람이 당당하게 적지로 걸어 들어오자 당황해서 물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하연은 머리에 뒤집어 쓴 로브를 벗어 내리며 말했다. "슈이센 파병대의 군사 하연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호위기사고요." 멍청한 표정으로 그녀을 바라보는 병사들을 보며 하연은 활짝 웃었다. 아르센은 한 천막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이번에 그의 호위기사가 된 디온 기라이스가 가만히 서 있었다. 생각할수록 아르센은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화가 났다. 적들이 그를 유인하게 위해 도발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참지 못하고 적진 깊숙한 곳으로 추격해 갔으니...... 그로 인해 하마터면 그는 적들이 유인한 함정에 빠져 죽을 뻔했고 유트는 그런 그를 구하기 위해 피투성이가 된 채 적들과 싸우면서 도주의 길을 열어야만했다. 겨우 탈출에는 성공했으나 그들이 진지로 돌아왔을 때 유트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려 그 자리에서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혼절한 채 쓰러진 유트를 보고 용병들과 빛의 여사제 에스페가 서둘러 그를 조심스럽게 안고 천막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아르센은 멍하니 서서 지켜보기만 했다. 왜 좀더 침착하지 못했는지 좀더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는지 스스로를 자책하며 아르센은 유트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미안한 마음에 보러 갈 수가 없었다. 그러다 겨우 용기를 내 유트가 누워있는 천막 앞에 이른 아르센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윽고 천막을 들추고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안에서 에스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지요? 빛의 사제로서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사제답지 못한 일이라는 것은 알지만 정말로 궁금해서요. 어떻게 그렇게 자신의 주군을 위해서 서슴없이 목숨을 던질 수 있는 거지요? 기사들은 다 그런 건가요?" "......아르센님이기 때문입니다." "네?" "기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분이 아르센님이기에 제 목숨을 던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르센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하연의 죽음으로 인해 잠시나마 나약해졌던 자신이 싫어질 정도였다. 그에게는 아직도 그를 위해 목숨을 맡기는 수하가 있었는데 마치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사람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었으니...... 아르센은 말없이 발걸음을 돌리며 다짐했다. 유트가 그 누구에게든 자신 있게 아르센님이 나의 주군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야 말겠다고. 이제 더 이상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겠다고. 사령부에 도착한 아르센은 갈로아의 국경수비대장인 호마르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까무잡잡한 사막인의 피부에 긴 얼굴을 한 호마르는 아르센을 보더니 고개를 숙이며 급히 물었다. "하연이라는 여사제를 혹시 아십니까?" 막 그녀에 대해서 이제는 잊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다시 그녀의 이름을 듣게되자 아르센은 참 공교롭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이미 죽은 여인인데 그녀에 대해서는 왜 묻는가?" 호마르가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방금 전 어떤 여사제가 국경을 넘어오면서 자신을 슈이센의 군사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죽은 여인을 사칭한 첩자였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처리하죠." 그러면서 고개를 숙이고 나가려는 호마르를 아르센은 자신도 모르게 붙잡았다. "잠깐. 나도 같이 가겠네." 호마르는 약간 당황하는 것 같더니 곧 얼굴 표정을 풀고 앞장서 걸으면서 말했다. "이런 일까지 일일이 사령관님이 신경 쓰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로 번거롭게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국경경비대숙소로 들어서자 호마르는 첩자주제에 느긋하고 편안하게 앉아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 여사제와 그의 호위기사라는 자를 볼 수 있었다. 기가 막힌 그는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당장 저 자들을 끌어내 지하감옥에 쳐 넣어버려라. 적들의 첩자다!" "옛?" 호마르의 말에 병사들은 당황해하면서 하연과 바토르를 끌어내려고 했다. 적국의 첩자인지도 모르고 그들은 손님대접을 한다고 차까지 내오지 않았던가? 그 때 그들 쪽을 돌아본 하연이 아르센을 보고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와! 오랜만이에요." 아르센은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죽어버린 하연이 어떻게 여기에 웃으며 앉아있을 수 있겠는가? 한동안 굳어진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아르센은 병사들이 하연과 바토르를 끌어내려다가 바토르의 주먹에 나가떨어지는 모습을 보고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하, 하연!" "잘 있었어요?" 아르센과 함께 파병군 사령부로 온 하연과 바토르는 아르센으로부터 우선 그간의 전투상황에 대해서 들었는데 바칸은 그야말로 소수의 정예로서 치고 빠지는 전략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은 이쪽의 상황을 너무도 잘 파악하고 있는데 비해 이쪽은 적들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는 대에 있었다. "먼저 적들에 대해 알아내야겠군요." 중얼거리듯 말하며 하연은 사만스의 정보길드에서 입수했던 서류들을 떠올렸다. 그 때 갈루마에게 맡기고 않고 자신이 직접 처리했다면 새삼 지금 적들에 대해 파악해야할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하고 생각하면서. "그게 어려운 일입니다. 바칸과 갈로아의 전쟁은 벌써 오래 전부터 이어져왔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바칸의 군사력은 물론 적의 기지가 어디에 있는지, 보급경로는 어떻게 되는지 알려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연이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다 못해냈다고 해서 나도 못 해내리라는 법은 없잖아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웃는 하연을 보자 아르센은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왠지 모든 일이 잘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오랜만에 편안하게 웃을 수 있었다. "우리 쪽의 전력은 어떻게 되요?" 하연의 물음에 아르센은 다시 어두운 표정으로 설명했다. "우리 슈이센 파병대의 전력에 대해서는 익히 하연도 아시겠지요? 거기에 유즈베리아의 파병대 2천 5백, 갈로아의 병사들 3천, 용병대 천, 빛의 사제들 오백, 그래서 8천 정도입니다만 빛의 사제들이야 전투병이라기보다는 병사들의 치유를 담당하는 쪽이니까 그들을 빼면 7천 5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7천 5백도 숫자상의 전력일 뿐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전력은 3천을 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더군다나 심각한 문제는 파병군내의 내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 사령부의 수뇌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고 있거든요." 갈수록 태산이라 더니...... "이기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할만한 상황이군요. 그래, 왜 수뇌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고 있는 거지요?" "시작은 아주 사소한 문제였습니다. 알다시피 이곳 갈로아의 남부지역은 교역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지역이라 식량은 풍족한데 비해 생필품은 턱없이 부족하지요. 때문에 생필품을 어느 나라가 더 많이 배정 받느냐 하는 문제로 각 나라의 병사들끼리 싸움이 일어났는데 그게 나라사이의 갈등으로까지 번져버린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던 하연이 물었다. "각 사령부의 수뇌들은 어떤 사람들이에요?" "갈로아의 사령관은 갈로아 삼대 공작가 중에 하나인 테이트론가의 둘째 아들인 브리앙 테이트론이라는 자로 그레이트 소드라고 추정될 만큼 뛰어난 기사입니다. 유즈베리아의 사령관은 그레이븐 빌쳐라는 문관출신의 사령관이고 빛의 사제들의 우두머리는 아이론이라는 물의 고위사제로 치유능력이 대단한 사제라고 들었습니다. 아직까지 그가 제대로 치유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은연중 아르센 또한 아이론이라는 고위사제에게 감정이 좋지 않음을 느끼게 해주는 말이었다. 나직이 혀를 차던 하연은 그때까지 망설이기만 했던 질문을 머뭇거리며 던졌다. "제 동료들은...... 지금어디 있나요?" 왜 이 질문을 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건지 쑥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돌리는 하연을 보며 아르센은 난처한 표정으로 그들에 대해 설명했다. 한참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하연은 씁쓰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카리스와 사담, 미루엘이 떠났단 말이군요?" 그들이라고 언제까지나 자신의 곁에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빨리 자신을 떠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울한 얼굴의 하연을 보면서 바토르가 아르센에게 물었다. "로베인도 떠났소?" 하연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인간이 로베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바토르가 그녀를 대신해 물은 것이다. 그 말에 하연은 눈을 빛내며 아르센을 쳐다보았다. "로베인은 용병들과 숙식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디온, 자네가 하연님을 용병들의 숙소로 안내해 드리게." "네, 알겠습니다." 디온은 아르센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하연과 바토르에게 말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급히 디온을 따라나서는 하연의 모습을 잠시 처연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아르센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제는 정말 당신을 마음속에서 지워야겠군요, 하연." 시끌벅적한 용병들의 숙소가 하연과 바토르가 들어섬으로 인해서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하연과 같은 미인이 이런 전장에 그것도 용병들의 숙소에 들어오는 일이란 거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빛의 사제들이 입는 흰 로브가 아닌 검은 로브이기에 더욱 그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하연을 알아 본 율리아와 웨이, 소시언 등이 경악한 표정으로 환호성을 지르듯 외쳤다. "하연!" "하, 하연!" 그러나 하연의 눈에는 그들의 모습이 들어오지 않았다. 숙소 구석진 곳에서 검에 기댄 채 잠이 들어 있는 어딘지 모르게 얼굴이 초췌하고 날카로워진 로베인의 모습만이 한가득 눈에 들어왔다. 하연은 자신을 향해 다가서는 용병들을 밀치고 로베인에게 다가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일까? 잠에서 깨어난 듯 살며시 눈을 뜬 로베인은 고개를 들어 하연을 올려다보았다. "......하연?" 하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로베인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빛이 몰려든 듯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믿었어. 살아있을 거라고...... 나에게 돌아올 거라고 믿었어." 거칠고 메마른 음성이 로베인에게서 흘러나오자 그들을 지켜보던 용병들의 얼굴에는 놀라움의 빛이 떠올랐다. 지난 몇 달 동안 로베인의 입에서 말 한마디 흘러나오는 것을 듣지 못했기에 그들은 당연히 로베인이 벙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베인의 말을 듣는 순간 하연은 로베인의 품속으로 달려가 안기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아야만했다. 사랑한다는 말이 입속에서 계속해서 맴돌았다. 그렇지만 정작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언제나처럼 엉뚱한 말이었다. "많이 컸네, 로베인?" 그 말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로베인이 말했다. "정말 돌아왔구나, 하연." 마주보며 그들이 그렇게 웃고 있을 때였다. "적이다! 적들이 쳐들어왔다." 밖에서 소란스런 병사들의 발걸음소리와 비명소리가 잇달아 들려오자 용병들은 서둘러 무기를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연도 그들의 뒤를 따라 나가려고 하는데 로베인이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말렸다. "어디 가려는 거야? 위험하니 여기에 있어." "잠깐만 보고 올게. 그리고 로베인이 지켜줄텐데 뭘." 그 말에 혹한 로베인은 자신도 모르게 하연의 팔을 놓아주고 말았고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하연은 밖으로 나가버린 뒤였다. 서둘러 뒤를 쫓아나간 로베인은 하연이 곳곳에서 치솟고 있는 화광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마치 그림자처럼 바토르가 지키고 서 있었다. 로베인은 바토르에 대해 알지 못했지만 아까부터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 그가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자 그 불쾌감은 더욱 강렬해지고 말았다. 그를 밀쳐버리고 자신이 하연의 옆자리에 서 있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렇지 않아도 그를 어리게만 보는 하연에게 더욱 어리다는 확신을 심어줄 것 같아서 그 감정을 눌러 참으며 대신 하연이 보고 있는 것들을 같이 쳐다보았다. 그녀가 보는 것을 그 또한 보고 싶으니까. 바토르는 마왕이기에 인간의 감정에 대해서는 민감했다. 때문에 로베인이 자신을 질투에 차서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무시해버리고 말았다. 하연과 로베인이 서로 좋아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들을 이어주기 위해 노력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나 할까? "도대체 어디에 불이 난거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하연의 말에 대답한 사람은 로베인이었다. "식량창고일거야. 적들이 노리는 곳은 언제나 식량창고와 무기창고 그 둘 중에 하나인데 무기창고는 벌써 며칠 전에 습격 당했었으니까." "그렇게 빈번하게 습격 당한다면 차라리 창고를 옮겨 버리지 않고?" "옮겼지. 그것도 습격 당할 때마다." "그런데도 또 식량창고와 무기창고를 습격 당했단 말이야?" 놀라서 하연이 묻자 로베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늘." "그렇다면 내부에 첩자가 있는 것 아니야?"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고 첩자를 색출해 보려고 했지만 누군지 알아낼 수가 없었어." "그렇군." 우왕좌왕하는 병사들의 발걸음 소리가 부산한 가운데 차츰 불길이 가라 앉아가고 있었고 더 이상 비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이게 끝이야?" 마치 실망했다는 듯 들리는 하연의 말투에 바토르는 이게 정말 인간인가 하는 표정이었고 로베인은 익숙하다는 듯 대답했다. "습격과 후퇴가 신속해. 그래서 제대로 적들과 싸운 사람이 드물 정도야." 생각을 정리한 끝에 하연은 우선 첩자가 누군지 밝혀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선결문제라고 결론지었다. 적의 전력을 파악해 내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였다. 어떻게 하면 적의 첩자를 밝혀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골몰해 있는데 갑자기 커다란 소리가 들려와 하연의 생각을 헤집어 놓았다. "하연! 재회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우리 오늘 저녁은 신나게 마셔보자고요." 숙소로 돌아오던 용병들 중 율리아가 외친 소리였다. 그날 저녁. 용병숙소 앞마당에 거대한 모닥불을 피워놓고 하연 일행들을 비롯한 많은 용병들과 슈이센의 파병단 병사들이 쭉 둘러앉아서 먹고 마셨다. 하연을 생환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아르센이 슈이센 파병단 몫으로 배정된 창고의 술을 모두 풀었던 것이다. 그들 중에는 마법사인 아켄과 빛의 사제 에스페도 있었는데 아르센과 와병중인 유트만이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한창 흥이 돌고 있을 때였다. 사담의 제자들 중에 하나인 질리안이 무엇을 보았는지 갑자기 율리아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뭐야?" 술 마시는데 방해를 하는 질리안이 불쾌한 듯 율리아가 인상을 찡그리며 묻자 질리안이 재빨리 하연이 있는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율리아, 로베인과 하연 이어주기 추진위원회의 회원으로서 이럴 때 무슨 일인가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응?" 게슴츠레한 눈으로 하연이 있는 쪽을 바라본 율리아는 질리안의 말을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하연이 바토르인가 뭔가 하는 그녀의 호위기사와 무엇인가를 속삭이면서 로베인을 완전히 제쳐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속이 상한 로베인은 그런 하연과 바토르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고. 율리아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큰 소리로 하연을 부르며 외쳤다. "하연! 노래 한 곡 불러봐! 너 노래 잘 부르잖아?" "......에?" 갑작스런 율리아의 말에 하연이 당황해서 고개를 들자 다른 용병들도 호응하듯 하연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외쳤다. 어정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하연은 잠시 밤하늘을 보다가 힐끗 로베인을 보더니 다시 모닥불을 쳐다보고는 목소리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런 하연의 모습에 장내는 조용해졌고 이윽고 하연의 목소리가 청아하게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말아. 후회하지 말아. 아~ 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말아.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율리아와 질리안은 그녀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환호성을 질러댔다. "우우~" "와!" 그들은 그것이 로베인을 향한 하연의 고백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었다. 그 소리에 분위기에 취해 노래를 부르던 하연은 자신의 노래가 어떻게 들릴지 그 때서야 눈치채고는 아차 하는 심정으로 로베인을 보았지만 둔한 로베인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그저 노래에 감탄한 표정이었다. 이에 하연은 곧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런데 율리아가 외치는 것이 아닌가? "로베인, 하연의 고백에 대한 답을 해야지?" "뭐!?" 멍해있던 로베인은 그 말에 벌떡 일어나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마구 떨리는 눈으로 하연을 응시한 채 물었다. "저, 정말 그 노래가 고백인 거야?" 순간 장내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하연과 로베인에게 집중되었고 그 때문에 바토르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졌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하연은 로베인의 떨리는 시선에 가슴이 마구 뛰고 머리 속이 텅 빈 듯 멍해져서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마치 금기의 주문을 입에 담은 것 같은 두려움이 그녀의 가슴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저 눈에 눈물이 흐르는 것은 정말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손톱이 손바닥에 박혀 피가 날 정도로 꽉 손을 움켜쥔 하연은 억지로 웃음을 띄우며 행여 자신의 목소리가 떨릴 새라 천천히 신중하게 발음하면서 말했다. "아? 이 노래. 좋은 노래지? 내 어머니가 자주 부르시던 노래야. 문뜩 생각나서 불러봤어. 어때?" 로베인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중얼거렸다. "응, 조, 좋아." 그 모습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는 하연과는 달리 기대에 가득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용병들은 실망이 가득한 표정으로 야유를 해댔다. 그렇게 밤이 깊어가고 새벽이 가까워서야 하연은 아르센이 마련해준 객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겨우 침대하나 밖에 없는 방이었지만 전장에서 이런 방을 마련해 주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아는 만큼 하연은 아르센에게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빛의 여사제인 에스페조차도 다른 여사제들과 함께 천막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들은 뒤이기에 더욱. 침대에 누운 하연은 저녁때 있었던 일을 되새기며 후회를 곱씹었다. 물론 로베인에게 솔직히 자신의 마음을 밝히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 하필 그 노래를 불렀던 것인지 그것을 후회하는 것이었다. 마치 그녀의 운명을 예고하는 듯한 그런 노래를. 그런 생각들로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는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톡톡! 기다리고 있었던 듯 벌떡 일어난 하연은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바토르가 허공에 둥실 떠 있었다. "알아봤어?" 바토르는 못마땅하다는 듯 하연을 노려보며 투덜거렸다. "내가 네 부하도 아니고, 젠장." "알아봤냐니까?" "그래, 알아봤다." "그 국경수비대장인 호마르가 맞지?" "맞아. 그 자가 바칸인과 접촉하는 현장을 목격했다. 그런데 그 자가 첩자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지?" 하연은 피식 웃으며 솔직하게 말했다. "이럴 때는 미리 알고 있었다고 말하면 좋겠지만 내가 무슨 예언자도 아니고 그저 첩자가 있다면 그가 가장 가능성이 높겠다 싶었던 것 뿐이야." "그런데 운 좋게 그가 진짜 첩자였다?" "그렇지." 어이없어진 바토르가 물었다. "어째서 그가 첩자로서의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거지?" 이상야릇하게 눈을 빛내던 하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자가 날 보는 눈빛이 마음에 안 들었거든." 순간 바토르는 망연자실해지고 말았다.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첩자로 지목했다니...... 한참을 멍하니 있던 바토르가 이윽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마, 마왕으로서 배워야 할 자세로군." 그 말에 하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인간이 아니라니까.' 하지만 바토르 또한 속으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모르는 하연이었다. "그래, 바칸인과 만나서 그 자가 무슨 말을 했어?" "별말 없었어. 내일 서쪽 국문의 경계가 좀 허술할 거라는 말뿐." 하연은 두 눈을 번뜩이더니 바토르에게 말했다. "알아봐 줘서 고마워, 바토르. 덕분에 일이 잘 풀릴 것 같아." 만족스럽게 웃는 하연의 모습을 보자 바토르는 묘한 기쁨이 가슴속에서 녹아 내리는 듯 했고 조금 전까지 수하 부리듯이 그를 부리는 하연에게 느꼈던 불쾌감은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별거 아니다. 그리고 오늘 피곤했을 텐데...... 잘 자라!" 그 말을 하면서 쑥스러운 듯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바토르를 보면서 하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바토르도 잘 자고, 내 꿈꿔!" 순간 서둘러 몸을 돌려 허공으로 사려지려던 바토르의 신형이 누군가 밑에서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 추락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연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쿡! 아하하하!" 새벽 밤하늘에 하연의 웃음소리가 넓게 퍼져나갔다. 제 목 : 마신 소환사 -88(166)- 등록자 : 허풍선이(김소영) 등록일 : 02-16 조회수 : 156 몇 시간밖에는 자지 못했지만 잠에서 깨어났을 때 하연은 마치 오랜 시간 충분한 잠을 잔 듯 상쾌한 기분이었다. 호얀지방으로 오기까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던 그 시간들과 비교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로베인이 곁에 있다는 것에서 오는 정신적인 안정감 때문이 이토록 컸다니......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하연은 로브를 챙겨 걸치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방문을 나서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로베인의 모습에 그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인형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그녀의 방문을 바라보고 있던 로베인의 눈에 그녀의 모습이 비치자마자 순간적으로 돌아오기 시작하는 생기에 그녀는 하나의 기적을 보는 듯 했다. 그와 동시에 가슴이 저리는 듯한 아픔이 물결처럼 밀려들었다. 어쩌면 자신은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의 지극한 사랑의 감정에 물들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잘 잤어, 하연?" 방긋 웃는 로베인을 보며 하연이 물었다. "응, 언제부터 기다린 거야?" "아? 조금." 정말 조금이었다고 로베인은 생각했다. 트리엔시라의 대마법사인 슈마왕에게 정신을 지배당한 채 하연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희망 하나를 붙잡고 살아갈 때보다 하연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죽은 그녀가 살아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때보다 진짜 조금이었다. 하지만 새벽부터 내리 그녀의 방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린 이 시간이 그 때보다 더욱 길게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문을 열고 그녀를 깨우러 들어갈 수도 없었다. 혹시 이 문을 연다면 그리고 그녀가 없다면...... 그녀가 다시 돌아온 것이 꿈이었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릴 것 같았던 것이다. 하연은 로베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고 말하면서도 눈으로는 너무도 긴 시간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하는 듯 했기 때문이었다. 미안하고 미안했다. 왜 자신은 로베인에게 이런 아픔을 주어야만 하는 것인지 왜 하필 로베인에게......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 급히 그에게서 등을 돌리며 하연은 등뒤로 로베인에게 말했다. "우리 좀 걸을까?" "그래." 등을 보며 중얼거리듯 대답한 로베인은 용기를 내어 하연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연을 기다리는 동안 결심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더 이상 그녀의 등만을 바라보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녀의 곁에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볼 거라고. 나란히 서서 숙소를 나섰을 때 그들은 훈련하는 병사들과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로 인해 북적이는 전장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기저기서 밤새 태운 모닥불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올라와 하늘로 치솟고 있었고 타다가 반만 남은 천막사이로는 부상병들이 시커먼 붕대를 감은 채 앓고 있었다. 하지만 성력을 베풀어야 할 사제들은 보이지 않았고 그들을 돌보는 것은 같은 부상을 당한 처지의 다른 병사들이었다. 그런 전장의 모습을 보며 하연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고 그런 하연의 모습에 로베인은 안절부절못하다가 그녀의 생각을 돌리려는 듯 말했다. "아차! 리밍스. 하연, 아직 리밍스 못 만나봤지?" "뭐? 리밍스가 아직 이곳에 남아있다는 말이야? 카리스가 집으로 데려다 주지 않았어?" 카리스가 떠나면서 리밍스를 그의 고향인 헤루아 숲으로 데려다 주었으리라고 생각했던 하연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리밍스는 종족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남아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나봐." "그래서 리밍스는 여기서 뭐하고 있어?" 도무지 하연으로서는 이런 전장에서 리밍스가 종족의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였다. "훗! 리밍스가 여기서 얼마나 바쁜데. 모두들 리밍스가 자신의 무기를 손질해 주기를 바라고 있거든." 그제야 알겠다는 듯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워프 종족이 뛰어난 대장장이라는 것을 떠올린 것이다. 로베인이 그녀를 안내한 곳은 마을의 한 대장간이었다. 그곳에는 이 곳 호얀지방의 모든 대장장이들이 다 모여있는 듯 망치 두드리는 소리로 요란했다. 로베인이 그들 중 한 대장장이에게 물었다. "리밍스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힐끗 로베인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그 대장장이는 턱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호얀지방은 사막의 나라인 바칸과 인접해 있는 곳답게 더운 지방이었다. 그런데 대장간 안으로 들어서자 뜨거운 용광로의 열기까지 더해져서 사막의 기후를 방불케 만들었다. 그로 인해 로베인과 하연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하연은 눈앞에 김이 서린 듯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망설이던 하연은 로베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로베인, 좀 잡아 줘!" 자신을 더듬어오는 하연의 손길에 로베인은 순간 심장이 멈추는 듯 했다. 하지만 곧 넘어지려고 하는 하연의 모습에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붙잡아 품안에 가두었다. 심장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는 듯 했다. 이것이 심장소리인지 대장간 안에 가득한 망치 소리인지 그들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로베인의 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하연은 생각했지만 차마 몸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기회가 아니면 로베인에게 안겨볼 기회가 영원히 없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 때 로베인이 그녀의 손을 잡아왔다. 흠칫 하연이 당황해서 손을 빼려고 하자 로베인은 더욱 그녀의 손을 꽉 움켜잡으며 말했다. "잘 못 하면 넘어져. 내가 잡아 줄께." '그래, 난 눈이 나쁘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위험 상황이기 때문이야. 다른 뜻은 전혀 없는 거야.' 스스로에게 변명하듯 중얼거리면서 하연은 살며시 로베인에게 기대었다. 이 시간이 영원하길 바라면서...... 하지만 그 시간은 너무도 빨리 끝나버렸다. 몇 분이 되지도 않아 그들은 작은 체구로 단금질에 열중해 있는 리밍스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아쉬운 몸짓으로 로베인에게서 떨어진 하연은 그 아쉬움을 떨쳐내려는 듯 크게 리밍스의 이름을 불렀다. "리밍스!" 하지만 리밍스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듯 규칙적인 동작으로 망치를 내리칠 뿐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고 숭고한 장인의 혼이 느껴졌다. 두 번 더 리밍스의 이름을 부르다가 포기한 하연은 이윽고 그가 두들이고 있는 것에 시선을 주었다. 그것은 단검이었다. 우유 빛의 아름다운 검신을 지닌. 그 단검을 본 순간 하연은 정신이 멍해지며 마치 그 검 속에 자신이 빨려들어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탐욕이 치밀어 올랐다. 죽음을 선고받은 이후로 하연의 최고의 욕망은 바로 삶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삶을 이어가기 위해 발버둥쳐 살아오던 날들이었다. 그 때문에 그녀의 마음에 물질에 대한 욕망은 들어설 틈이 없었다. 그런데 리밍스의 손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단검은 그런 하연의 마음에 물질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것도 검에 무지한 하연에게 말이다. 새삼 드워프 종족을 명공이라고 칭하는 이유를 깨달은 하연은 쉬이 리밍스의 작업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명검이란 쉽게 탄생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로베인에게 다음에 다시 들리자고 말하려고 돌아보았다가 이상한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검에 무지한 하연 조차도 리밍스의 단검을 본 순간 탐욕이 일었는데 정작 검사인 로베인은 그 단검에 대한 탐욕이 없는 듯한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연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로베인, 검사로서 저 단검이 갖고 싶지 않아?" 로베인은 하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검사이기 때문이야. 검을 가장 사랑하면서도 가장 두려워하는. 난 오히려 저 검이 두려워. 저 검을 다스릴 수 없는 자가 저 검을 쥐었을 때 일어나게 될 혈풍이 말이야." 하연은 로베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가장 사랑하면서 가장 두려워할 수 있다는 말인가? 검은 그저 검일 뿐이지 않은가? 검사가 되지 않는 이상 로베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하연은 좀 분했다.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로베인의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이. 하연이 말했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자, 로베인. 지금은 잘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그러자." 로베인과 함께 대장간을 나선 하연은 마을을 둘러보았다. 부서진 건물이 몇 채 보일 뿐 마을은 비교적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전쟁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도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일반인보다는 병장기를 휴대한 병사들과 용병들이라는 것 정도였다. 그들이 한 식당 앞을 지날 때였다. 퍼벅! 우당탕탕! 갑자기 식당문짝이 부서지며 한 용병이 밖으로 퉁겨져 나왔다. "뭐야?" 놀라서 쳐다보니 나 산적이오 하고 말하는 듯 한 사내가 특이하게도 앞치마를 두른 채 손에는 부엌칼을 휘두르며 고함을 질러댔다. "야, 이 빌어먹을 자식아! 내 요리가 어디가 어떻다고 개지랄이야! 저 안에 아무 말 없이 잘 먹고 있는 손님들이 네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냐? 네 놈 입맛이 잘못된 것을 지금 누구 요리 탓을 거야?" 그러면서 욕을 해대는 요리사의 모습에 식당 안의 손님들은 모두 민망한 듯 고개를 숙이거나 시선을 피했다. 그들 또한 그 요리사의 요리가 얼마나 맛이 없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그 요리사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차마 맛이 없다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나가떨어졌던 용병이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쓰윽 소매로 닦아내며 울화가 치민다는 얼굴로 요리사에게 외쳤다. "그게 요리냐? 마물의 허파요리도 그것보다는 먹을 만 하겠다. 그런 주제에 돈을 내라니 지금 누구한테 사기를 치려는 거냐, 이 도적놈아! 그리고 잘 먹고 있어? 다른 손님들한테도 물어봐라. 그 요리가 맛이 있나?" 분노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요리사는 식당 안의 손님들을 향해 물었다. "너희들이 말해줘라. 내 요리가 맛이 있나 없나?" 순간 식당 안은 숨쉬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해졌다. 빈말로 라도 차마 맛있다고는 할 수 없는 요리였던 것이다. "저것 봐! 맛이 없으니까 아무도 말을 못하는 거잖아?" 의기양양해서 용병이 말하자 부들부들 떨던 요리사가 칼을 마구 휘두르며 식당 안의 사람들에게 외쳤다. "젠장맞을! 모두 나가! 어서 꺼져, 장사 안 해! 안 한다고!" 그러자 식당 안의 친분이라는 이름아래 억지로 끌려와 먹고 있던 용병들이 이때다 싶었는지 모두 우르르 도망치듯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려던 하연은 패배감이 짙게 배인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있는 요리사를 보자 연민의 정을 느낀 나머지 웃을 수가 없었다. 그녀 또한 요리를 똑같이 못했으니까.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그 요리사를 도울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로베인이 재촉하듯 말했다. "어서 가자, 하연. 사령부 회합이 있다고 했잖아?" "아? 그래." 어제 아르센에게 사령부 회합의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일러두었던 것이다. 적과 싸우기 전에 우선 내부의 화합을 다지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때문에 아쉬움을 뒤로한 채 하연은 로베인을 따라 사령부 회합이 있는 갈로아의 파병군 사령관으로 갔다. 제 목 : 마신 소환사 -89(167)- 등록자 : 허풍선이(김소영) 등록일 : 02-16 조회수 : 129 사령관실의 문 앞에는 각 나라의 보초병들이 갑옷에 서로의 문장을 단 채 서로를 경계하며 서 있었다. 그들을 보며 하연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슈이센의 군사 하연이라고 합니다. 회합에 참석하려고 왔습니다." 그러자 슈이센의 청색문장의 보초병들은 구십 도로 고개를 숙이며 문에서 비켜섰지만 다른 보초병들은 날카로운 눈으로 하연을 주시한 채 안으로 들여보내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우선 그녀의 정확한 신분을 확인할 수도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녀가 어둠의 사제였기 때문이다. 각 나라의 파병군끼리 반목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상대 나라에서 어둠의 사제를 이용해 그들의 사령관에게 저주를 내릴지 어떻게 알겠는가? 하연은 그런 그들의 표정을 알아채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잠시 짖다가 슈이센의 보초병에게 말했다. "아르센 사령관님을 불러줘요.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느니 사령관님을 불러서 제 신분을 확인 받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그 말에 다른 나라 보초병들은 안심한 표정이었고 이에 슈이센의 보초병 하나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아르센 사령관을 불러내었다. 사령관실에서 나온 아르센은 보초병으로부터 사정을 들은 듯 하연을 보자마자 사과부터 했다. "제 실수입니다, 군사. 처음부터 제가 군사를 동반하고 왔어야 했는데." 그 말에 다른 나라의 보초병들은 그제야 약간은 안심이 된 듯한 표정이었고 하연은 군사라는 색다른 자신의 호칭에 눈을 빛냈다. 이렇듯 공식적인 자리에서 아르센에게 군사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마치 제갈공명이라도 된 듯 가슴이 들뜨고 새로운 도전의 길이 눈앞에 펼쳐진 듯한 기분이랄까? 신선한 기분에 활짝 웃으며 하연은 아르센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이렇게 마중 나와 준 것으로 충분해요." 하연은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로베인은 유즈베리아 사람이고 지금은 용병으로서 슈이센의 파병군에 합류해 있는 중이라 사령관실 안으로는 들어설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하연이 아르센을 따라 사령관실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해야했다. 그런 로베인의 표정은 하연을 바라볼 때와는 다르게 누구의 접근도 불허하듯 싸늘하게 변해있었다. 하연이 안으로 들어서자 사령관 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그리고 그들 중 진짜 제갈공명이 있다면 저렇게 생겼으리라고 생각될만한 자가 하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아르센에게 물었다. "저 숙녀 분이 누구인지 우리에게 소개해 주지 않겠소?" 아르센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분은 저희 슈이센 파병대의 군사이십니다. 혼 슈이센 왕립학교출신이지요." 그 말에 좌중의 사람들은 모두 하연의 존재를 인정하는 표정이었다. 그만큼 혼 슈이센 왕립학교라는 이름이 지닌 영향력은 지대했다. 하지만 아르센은 일부로 하연이 중급반에 있었다는 것과 아직 졸업하지 못했다는 말은 언급하지 않았다. 하연의 군사로서의 역량을 의심받는다면 일이 더 어려워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하연은 아르센에게 차례차례 그들을 소개받았다. 사십대의 긴 콧수염에 입매가 딱딱한 장대한 체구의 기사가 브리앙 테이트론이라는 갈로아의 사령관이고 준수하고 이지적인 외모의 중년인으로 제갈공명을 연상시키는 자가 유즈베리아의 그레이븐 빌쳐라는 정치가이며 흰 로브에 은색 서클렛을 한 육십대의 노사제가 바로 아리론 사제였다. 그 외 험악한 인상의 피묻은 낡은 갑옷을 걸친 두 용병 솔트와 디론이 용병들의 대표로 회의에 참석해 있었고 국경수비대장인 호마르가 자리해 있었다. 하연이 말했다. "인사드립니다. 슈이센의 군사 하연이라고 해요. 잘 부탁드립니다." 서로 상견례를 나눈 그들은 이윽고 회의석상에 다시 착석했다. 그레이븐 빌쳐가 말했다. "어제 옮긴 무기창고가 다시 습격 당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와 무기를 옮긴 몇 명의 경비대밖에는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솔트씨?" 솔트라는 용병은 그레이븐은 그를 걸고넘어지자 인상을 쓰며 말했다. "쳇! 당신 말대로 우리 중 첩자가 있는 것이겠지? 그렇다고 우리 용병들을 의심하지는 마시오. 바칸인들에게 우리 용병들을 고용할 만한 돈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니까. 그 돈이 있으면 바칸인들은 갈로아를 쳐들어오지도 않았을 테고 말이요." 그 말에 그의 동료인 디론은 옳은 말이라는 듯 킥킥 거렸다. 갈로아에서는 그만큼 용병들을 고용하는데 많은 돈을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레이븐은 솔트의 말이 옳은 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용병들을 의심하는 눈길은 거두지 않았다. 그 때 물의 노사제 아이론이 입을 열어 하연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슈이센의 군사께서 이 자리에 참석하신 만큼 무슨 좋은 방안이 있으리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러자 모두의 기대에 찬 시선이 하연에게 향했다. 하지만 정작 말을 꺼낸 장본인인 아이론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바로 하연의 입에서 방안이 없다는 말이 흘러나오자마자 아르센에게 부탁해 그녀를 이 자리에서 물릴 생각을 말이다. 현재 혼 대륙은 빛과 어둠의 세력으로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지역마다 격렬한 전투는 거의 마무리되고 빛의 세력과 어둠의 세력의 경계가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작은 불씨만 하나 떨어져도 전면전으로 치달을 수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런 때이니 만큼 아이론은 어둠의 사제인 하연의 존재가 몹시 불편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하연이 말하는 것이 아닌가? "네, 제게 방안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협력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절 도와주시겠습니까?" 순간 아이론은 깜짝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 마음속으로 그녀가 빛의 신인 펠레아의 뜻에 어긋나는 사악한 방안을 제시할 경우 무슨 일이 있어도 이를 저지할 각오를 다졌다. 다른 사령관들 또한 하연이 어둠의 사제라는 것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녀가 어리고 여자라는 점 때문에 그녀에게 어떤 좋은 방안이 나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슈이센의 입장을 생각해 들어는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그레이븐이 말했다. "우선은 그 방안이라는 것을 들어보아야 도와줄지 않을지를 결정할 수 있지 않겠소?" "제가 듣기로 적들은 무기창고와 식량창고를 교대로 습격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닌가요?" "맞소. 다음번에는 식량창고를 공격하겠지. 그건 우리들 모두 이미 짐작하고 있는 일이오." 그레이븐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하지만 하연은 개의치 않고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식량창고의 위치를 공개하고 병사들에게 지키게 하는 거예요." "하! 우리라고 그 방법을 생각해보지 않은 줄 아시오? 병사들에게 식량 창고 주위를 몇 겹이나 둘러싸게 하고 창고 안에도 숨어있게 했지만 모두 소용없었소." 아이론이 빈정거렸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모두 정보가 새는 이유가 다른 나라에 첩자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계시지요? 유즈베리아의 사령관께서는 용병들 중에 첩자가 있다고 생각하고 계시고 아르센님께서는 첩자가 갈로아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며 갈로아의 사령관께서는 슈이센이 내란을 막을 목적으로 일부러 전쟁을 길게 끌기 위해 정보를 유출시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맞지요?" 하연의 당찬 발언에 아르센은 숨을 헉 들이키고 말았다. 지금 하연이 그들의 곪은 상처를 건드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 사령관들이 아니라고 반발하려는데 하연이 그들의 말을 막듯이 재빨리 말했다. "어때요, 이번 기회에 어느 나라에 첩자가 있는지 알아내는 것은?" "허!" "그걸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단 말이오?" 놀란 좌중의 사람들을 보며 하연이 말했다. "식량 창고의 식량을 넷으로 나누어 각 나라의 병사들에게 지키게 하는 거예요. 그들 중 식량을 빼앗긴 나라에 첩자가 있는 것이 분명하지 않겠어요?" "그렇군." "아!" 모두 좋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용병 솔트가 말했다. "그렇다면 저희 용병들이 북쪽 창고를 맞겠습니다. 우리가 제일 수가 적지 않습니까?" 순간 각 나라의 사령관들의 얼굴에 불만의 빛이 떠올랐다. 북쪽 창고는 삼면이 절벽으로 이루어져서 가장 경비하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 적인 불리함을 그런 식으로라도 만회해 보겠다는 그의 말을 단호히 거절하기에는 그들의 자존심이 또한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묵묵히 있는데 그레이븐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러면 저희 유즈베리아는 남쪽에 있는 창고를 맡도록 하지요." 남쪽에 있는 창고 또한 북쪽보다는 못하지만 경비가 수월한 곳이었다. 그러자 아르센과 브리앙이 강하게 반발했다. "뭐요?" "왜 유즈베리아가 남쪽 창고를 맡는단 말입니까? 저희 슈이센이 맡겠습니다." 서로 경비하기 쉬운 쪽을 맡겠다고 다투는 사령관들을 재미있다는 듯이 보던 하연은 문뜩 그 산적같이 생긴 요리사의 일이 떠올라서 그들에게 제안했다. "싸우지 말고 이러면 어떻겠어요?" "무슨......?" "어떤!" 방법이 있겠느냐는 얼굴로 쳐다보는 좌중의 시선에 하연은 바토르가 보았다면 소름이 오싹 돋았을만한 미소를 씨익 지어 보였다. 제 목 : 마신 소환사 -90(168)- 등록자 : 허풍선이(김소영) 등록일 : 02-16 조회수 : 138 요리사이자 전직 용병출신인 우르바의 산적 같은 얼굴은 반드시 오늘이야말로 최고의 요리를 만들어 사람들을 감격시키고야 말겠다고 각오로 빛나고 있었다. 그것만이 그의 요리를 마물의 허파요리만도 못하다고 한 비난에 대한 불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일명 하연의 많이 먹기 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얼굴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호얀지방에서 우르바의 식당과 그 요리의 맛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요리의 먹기대회에 참가하게 되었으니...... 더군다나 그들의 뒤에는 자신들이 속한 곳의 명예가 걸려 있었다. 아무리 먹기 싫어도 억지로라도 입속으로 꾸역꾸역 요리를 집어넣어야 할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어찌 긴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들과는 달리 슈이센의 대표인 하연이나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맛을 모르는 그녀에게 못 먹을 요리란 없었으니까. 우르바의 땀과 함께 지글지글 요리가 볶아지고 있었다. 장내의 모든 사람들은 우르바의 요리에 쏟는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 요리를 먹어야 하는 각 나라의 대표들과 용병 대표의 얼굴에는 두려움을 넘어선 공포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르바가 한층 심열을 기울인 특별식을 먹고 어떤 사내가 한 시간 내내 토하기만 하다가 결국은 기절해 버린 사건은 아직도 그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장내의 긴장이 점점 고조되어 가고 있을 때였다. 우르바의 우렁찬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완성이다!" 순간 여기저기서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것이 요리에 대한 식욕으로 인해서 발생한 소리가 아님은 너무도 분명했다. 우르바가 사인분의 요리를 각기 참석자들의 앞에 올려놓았다. 스튜처럼 보이는 그 요리는 수저로 한 숟가락 뜨자 위액처럼 끈끈한 것이 수저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마치 누군가 토해놓은 토사물을 보는 듯해 누구도 감히 먹어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하연이 그 스튜를 한 숟가락 떠서 입어 넣고는 씹어 먹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서는 하연에게 고정되었다. 그들은 하연이 곧바로 쓰러져 버릴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하연은 이보다 더 맛있는 것은 먹어본 적이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부르르 떨며 말하는 것이 아닌가? "너무 맛있다!" 순간 우르바의 그 산적 같은 얼굴에 함박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는 불신의 빛이 가득했다. 도저히 그들이 보기에 맛이 있을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맛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제일 맛에 둔하다는 평가를 받고 용병단의 대표로 뽑힌 용병이 천천히 수저를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용병은 입에 거품을 물로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맛에 둔하긴 했지만 맛을 모르는 자는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그를 보고 하연은 스튜를 입속에 넣고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음, 기절할 정도로 맛있었나 보내?" 그 말에 놀랐던 우르바의 표정이 다시 풀어졌고 유즈베리아와 갈로아의 대표들은 하연의 말을 믿지 못하겠지만 어찌되었든 이겨야 한다는 사명감에 울며 겨자먹기로 요리를 먹어야 했다. 동료 병사들 중에서 가장 많이 우르바의 요리를 먹어보았다는 이유만으로 대표로 선발된 유즈베리아의 대표는 경험상, 겨우 두 번일 뿐이었지만 씹지 않고 삼키면 많이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저 꿀꺽 삼키고 있었다. 몇 수저 먹었을까? 아무리 삼켜도 입 안쪽의 천장과 가에 닿아오는 맛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그는 결국 입 밖으로 먹은 것을 모조리 토해내고 말았다. 그 모습에 갈로아의 대표는 창백하게 질려서 입가로 가져가던 수저마저 벌벌 떨고 있었지만 하연은 마치 코믹영화라도 보는 듯 우스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정말 맛있게 요리를 먹고 있었다. 우르바는 그런 하연의 모습에 생애 처음으로 요리사로서의 행복감을 맛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다른 사람들, 기절한 용병대표나 토하고 있는 유즈베리아의 대표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그 때 먹지도 않고 멍하니 스튜만 바라보고 있는 갈로아 대표가 이상해 그의 동료 병사 하나가 등을 툭 치며 눈치를 주었다. "야! 빨리 먹지 않고 뭐해?" 그러나 갈로아 대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상해서 쳐다보니 그는 벌써 눈뜨고 기절해 있는 상태였다. 결국 하연이 우르바의 요리 많이 먹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한번도 스튜를 입에 대지 못한 갈로아 대표가 꼴지를 해버렸다. 제일 먼저 선택권을 부여받은 아르센은 용병대표에게 제일 경비하기 좋은 북쪽 창고를 양보하고 남쪽 창고를 맡았다. 그리고 유즈베리아가 서쪽 창고를 갈로아에서 제일 경비하기 어렵다는 동쪽 창고를 맡게 되는 것으로서 대회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밤이 되면 호얀지방의 기후는 가까이 있는 사막의 영향인지 급속도로 떨어진다. 그래서 보초병들에게 밤의 경비는 추위와의 싸움과도 같았다. 하지만 서쪽 경비를 보는 두 보초병들은 추위와 싸울 생각이 전혀 없는 듯 모닥불을 쬐면서 히히덕 거리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적들의 존재를 알아챌 수가 없었다. 서쪽 국문의 안팎으로 숨어있는 용병들의 존재들 또한. 그러나 그런 그들의 모든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는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바토르였다. 그는 하연의 부탁으로 행여 용병들에게 있을지도 모를 불상사나 실패를 막기 위해 허공에 높이 떠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점점 깊어 가는 어둠 속에서 이윽고 은밀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온 몸을 검은 천으로 덮고 두 눈만을 들어낸 바칸 전사들 둘이 빠르게 모닥불을 쬐고 히히덕 거리는 보초병들의 뒤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대거로 그들의 목을 그어버렸다. "......컥!" "크윽!" 목이 떨어져나간 두 보초병들의 몸을 발로 툭 차서 쓰러트린 바칸의 전사들 중 한 명이 성벽위로 갈고리가 달린 밧줄을 던져 올렸다. 타당! 성벽위로 밧줄이 걸린 것을 확인한 바칸의 전사가 밧줄을 잡고 벽을 타고 넘어갔다.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한 명이. 하지만 성문은 좀처럼 시간이 지나도 열리지 않았고 이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눈치챈 바칸의 전사들은 서로 눈짓을 하고는 재빠르게 뒤로 물러갔다. 그러자 국문밖에 숨어있던 일단의 용병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중 세르기아스가 국문 안쪽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됐어, 질리안? 잡았어?" 그러자 문 안쪽에서 질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웨이와 소시언이 잘 처리했어." "좋아!" 세르기아스는 의외로 일이 쉽게 풀렸다고 생각하면서 몇 명의 용병들을 시켜서 주변을 둘러보게 했다. 혹시 아직 바칸의 전사들이 주위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벌써 바칸의 전사들은 멀리 후퇴한 듯 그 종적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안도하면서 세르기아스는 동료들에게 말했다. "저는 먼저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아침까지 국문의 경비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네." "알겠습니다." 바칸 전사들의 용맹함을 익히 알고 있기에 죽음을 각오하고 임했던 임무가 의외로 싱겁게 끝나자 용병들은 너도나도 기분 좋은 얼굴로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었으니 원래 바칸의 전사들은 진짜로 후퇴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물러나는 척하면서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기를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용병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채고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그 모든 상황들을 지켜보고 있던 바토르가 막 그들이 용병들을 공격하려는 순간 소리도 없이 모두 처리해버린 것이다. 흔적조차 남지 않게. 왜냐하면 이 일은 결코 하연에게 알려져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인간을 죽이는 문제가 그에게는 그저 개미를 짓밟아 죽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지만 하연에게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미 하연에게 함부로 인간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하연이 모르는 이상 난 약속을 지킨 거나 마찬가지지.' 그렇게 생각하며 희죽 웃어대던 바토르는 모든 일이 마무리되자 하연에게로 이동해갔다. 하연은 잠들어 있었다. 바토르는 그런 하연을 깨우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했다. 하연은 너무나 평온한 얼굴이었다. 지난 몇 주 동안 사막을 횡단하면서 종종 자신의 품에 안겨 잠들었을 때의 그 불편한 표정과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그것이 그녀가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로베인이라는 존재와 함께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바토르는 자신도 모르게 짜증이 치밀고 심술이 났다. 그래서 막 그녀를 흔들어 깨우려고 하는데 갑자기 하연이 번쩍 두 눈을 뜨더니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몸을 비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얼굴은 괴로움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고 식은땀마저 흘러내렸다. "하아! ......윽!" "하연, 왜 그래?" 다급하게 묻는 바토르의 그 큰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듯 그녀의 두눈은 초점이 잡히지 않은 채 몽롱하기만 했다. "무슨 일이야?" 답답한 마음에 바토르는 더욱 큰 소리를 질렀지만 하연은 여전히 괴로워할 뿐 바토르의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듯 했다. "크윽! 아아, 하......"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는 하연의 모습에 바토르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자신이 이처럼 초조해하는 것은 그녀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기면 카이람님에게 자신이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애써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인간 따위 하나가 고통스러워한다고 그 또한 괴로워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마왕답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젠장, 마법도 듣지 않는 몸이면서 아프긴 왜 아픈 거야? 아! 의사를 불러와야 할까?" 허둥대던 바토르는 혹시 성력이라면 받아들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물의 장로인 아이론이란 자를 끌고 오려고 나가려는데 고통이 약간 가셨는지 어느 정도 정신이 든 하연이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아, 안돼."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이를 들은 바토르는 하연이 정신이 들었다는 생각에 안도하며 애써 퉁명스럽게 물었다. "흠, 괜찮냐? 어디가 아픈 거야?" "윽! 그냥 좀 머리가 아픈 것 뿐이야! 쉬면 괜찮아져." "......아이론을 대려올게." 하연의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조심스럽게 쓸어주며 바토르가 말했다. 그러자 하연이 다급히 말렸다. "안돼! 가지마, 바토르. 불러 올 필요없어. 내가 아픈 것은 신의 뜻이니까." "뭐?" 하연은 그저 모든 것이 운명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었지만 바토르는 그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였다. 하연의 신은 카이람님이니까 그녀가 아픈 것은 모두 카이람님의 뜻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카이람님의 뜻이라면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어 바토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카이람님이 왜 이런 일을...... 그렇게 하연을 아끼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바토르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카이람님에게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질렀는지 물으려는데 하연이 말했다. "부탁이 있어, 바토르. 내가 아팠다는 것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아 줘.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내 고통으로 인해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아. 그렇게 해 줄 수 있지?" "......알겠다." 안도하는 하연의 얼굴을 보며 바토르는 생각했다. '그래, 특히 로베인이 알아서는 안되겠지? 그가 걱정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을 테니까.' 왜 이렇게나 서로를 생각하면서도 하연과 로베인은 서로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것일까? '로베인은 너를 사랑해. 너도 로베인을 사랑하고. 알고 있니, 하연?' 입속에서 그 말들이 맴돌았지만 정작 바토르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다른 말이었다. "좀 전 서쪽 국문에서 용병들이 두 명의 바칸 전사들을 생포했어. 네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우리 쪽의 피해는?" "훗! 물론 없었지. 마왕인 나 바토르가 지켜보고 있는데 무슨 피해가 있을 수 있겠어? 게다가 바칸인들이 침투 조가 실패하자 그냥 물러가 버려서 말이야. 실망스럽게 끝나 버렸지." 바토르가 실망하던 말던 하연은 큰 전투가 없었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간밤에 서쪽 국문에서 두 바칸 전사를 생포했다는 소문이 은밀히 진영 내에 퍼지기 시작하자 호마르는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의 진위여부를 판단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간밤 서쪽 국문의 경비가 허술해서 바칸인들이 침입하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전투의 흔적조차 없이 몇 명의 용병들이 그들을 생포했다는 사실은 믿기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호마르의 아버지는 바칸인이었다. 예로부터 바칸의 침입은 종종 있어왔던 일로 갈로아에 침입했던 바칸 전사 한 명이 그의 어머니를 강간해서 그가 생긴 것이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바칸인이라면 무조건 증오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그는 그의 아버지가 바칸인이라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국경 하나를 사이에 둔 차이지만 두 나라의 기질은 너무나 달랐다. 갈로아인들은 농사를 짓기 때문인지 온후하고 폭력을 싫어하는 기질을 지녔지만 바칸인들은 사냥을 하는 민족이어서 인지 전투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호마르는 그런 아버지의 피를 더 많이 이어받았는지 전투적인 성향이 강했다. 경비병이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단지 귀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지배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바칸인들처럼 태생과는 상관없이 그 개인의 능력에 따라 강한 자가 모든 것을 가지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칸이라는 나라를 동경하던 그는 자주 바칸인들과 접촉을 가졌고 그들이 전쟁을 일으키자 첩자가 되었던 것이다. 호마르는 우선 소문이 정확한지를 확인하기 위해 바칸인들이 생포되어 있을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호얀성내를 제 손바닥 보듯 잘 알고 있는 그조차 포로들이 있을만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으나 분명 감옥으로 쓰이는 곳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그곳으로 향했다. 외관은 허름한 창고처럼 보이는 그 곳은 빗장마저도 부서져 덜렁거리고 있었고 보초병은 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삐걱거리는 문을 열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어둠침침하고 먼지와 거미줄로 가득한 지하계단을 보며 호마르는 횃불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자 먼지 위로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선명하게 찍혀 있는 발자국들을 볼 수 있었다. 분명 누군가가 지나갔음을 알려주는. 서둘러 지하계단을 내려가자 쇠사슬로 몸통이 묶인 채 의자에 앉아 있는 두 바칸 전사를 볼 수 있었다. 그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는지 두 바칸 전사가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횃불 사이로 호마르의 얼굴을 확인한 두 바칸 전사는 안도하는 눈빛이었다. 호마르가 그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묶은 쇠사슬을 풀어주려고 할 때였다. 계단을 내려오는 여러 개의 발자국 소리들이 들려왔다. 당황한 호마르는 저도 모르게 도망치려고 하다가 곧 저들이 자신을 첩자로 여길 만한 아무런 까닭도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평온한 얼굴로 그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각 나라의 사령관들과 용병 대표들이 그 모습을 들어냈다. 그 중에는 물론 하연도 있었는데 호마르를 본 그녀는 어느 정도 짐작했다는 듯 방긋 웃으며 말했다. "어, 경비대장님. 벌써 와 계셨군요. 그래, 포로들에게서 무슨 정보라도 얻었나요?" "아니오. 좀처럼 입을 열지 않더군요." 자신이 먼저 감옥에 와 있는 것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에 안도하면서 호마르가 말했다. "하긴 바칸의 전사들은 입이 무겁기로 유명하니까요." 그러면서 하연은 갈로아의 사령관인 브리앙 테이트론을 보며 말했다. "기회는 오늘 하루예요, 갈로아 사령관님. 내일까지 알아내지 못한다면 제 말대로 따라주시겠다고 하신 약속 잊지 마세요." "알았소." 브리앙은 재차 다짐을 받는 하연의 말이 신경에 거슬렸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 그럼 우리는 여기서 물러나도록 하지요." 그 말에 다른 사령관들과 용병들은 무슨 말인지 아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뒤를 따라 나섰지만 호마르만은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의 뒤를 따라 갔다. 그리고 다음 날. 사령부 회합이 다시 열린 가운데 호마르는 하연이 브리앙 테이트론에게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온갖 고문을 했으나 두 바칸 전사에게서 그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었던 브리앙 테이트론이 하연의 전략에 따르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었다. 이에 하연이 호마르에게 말했다. "이 전략은 경비대장인 호마르님에게 모든 것이 달려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경비대장님. 경비대장님께서 하실 일은 두 바칸인 전사들을 이곳에서 탈출시키는 것입니다." "네?" 놀라고 혹시 자신이 첩자라는 사실을 들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당혹해하고 있는 호마르에게 하연은 그를 안심시키듯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알다시피 갈로아 사령관님께서도 시도해 보셨지만 바칸 전사들에게 어떤 정보를 얻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래서 차라리 그들에게 거짓 정보를 주어서 살려보내기로 했어요. 그러자면 우리 쪽의 배반자가 한 명 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그쪽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경비대장님이 그 역에 제일 적당한 것 같아서요. 해주실 수 있지요?" "물론입니다." 호마르는 내심 이 일을 자신이 맡게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런 호마르에게 하연이 말했다. "그들을 탈출시키는 방법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경비대장님께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전해줄 정보는 이번에 바뀐 식량창고의 위치입니다. 저희 슈이센이 지키고 있는 남쪽 창고의 위치를 가르쳐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호마르였다. 회합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르센은 하연에게 물었다. "그 경비대장이 이 일을 잘 해내리라고 봅니까?" "잘 해낼 거예요.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는 이런 일이 경험이 많다고 하니까요." 그녀의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는 아르센을 보며 하연은 실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암, 첩자가 첩자의 일을 하는데 잘 못해낼 리가 없지.' 폭풍전의 고요라고나 할까? 며칠 동안 호얀성내는 고요하기만 했다. 그 동안 하연은 리밍스가 작업하는 광경을 구경하기도 하고 용병들과 어울려 떠들기도 하면서 평안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생포했던 포로들이 탈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드디어 시작인 것이다. 하연은 우선 마법사 아켄을 찾아갔다. 아켄은 새로 온 몸에 붕대로 감고 있었다. 더운 기후로 인해 몸에서 썩은 냄새가 심하게 나기 때문에 자주 붕대를 새로 감아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썩어 들어가는 그의 몸은 그에게도 수치였으니까. 그런데 마침 안으로 들어서던 하연이 그 모습을 보고 말았다. 붕대로 감지 않은 썩어 들어가고 있는 그의 맨몸을...... 자신을 바라보며 놀라고 있는 하연의 얼굴을 본 순간 아켄의 얼굴은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너, 너......! 나가, 나가라고!" 갑작스런 고함소리에 놀란 하연은 허둥지둥 아켄의 방을 나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곧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자신을 복수에 미친 자라고 서슴없이 말하면서도 언제나 고지식할 정도로 예의를 잘 차리던 아켄이 아니었던가? 그런 그가 그녀에게 반말을 내뱉으며 고함을 지르다니...... 누구에게나 아킬레스건은 있는 것이니 화를 낼 수도 있는 것이지만 저처럼 인격까지 변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연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이런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도 그녀에게는 고민할 문제가 널려 있었으니까. 잠시 아켄이 진정되기를 기다린 하연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안쪽에서 아무런 대꾸가 없어 하연은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켄이 문을 열어주었다. "......조금 전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너무 놀라서......" 하연은 괜찮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제가 부탁한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려고요." 아켄은 신중한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군사께서 명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각 식량창고의 식량들은 모두 실어서 호얀성내 밖으로 옮긴 후 잘 숨겨 놓았고 각 식량창고에는 일루젼 마법으로 식량이 가득 찬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그런데 각 창고를 지키는 병사들에게 어떻게 들키지 않고 식량들을 실어 나를 수 있었던 거지요?" 그 물음에 아켄의 눈이 웃는 듯 보이더니 말했다. "제가 마법사 아닙니까? 수면 마법으로 잠시 잠들어 있게 한 뒤 일행들에게 식량을 나르게 한 것이지요." 하연은 그렇구나 하고 감탄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겐 아직까지도 마법이란 신비로운 것이기 때문이었다. 혼 대륙에 와서 마법이 펼쳐지는 것은 여러 번 보았지만 그녀 자신은 마법을 펼칠 수도 마법에 걸리지도 않기에 마법은 여전히 그녀에게 낯선 것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칸에 대한 정보를 모으던 중 바칸인들 중에 마법사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알아낸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전사의 핏줄을 타고나서 단순히 마법에 재능이 없는 것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이번 하연의 전략은 그들이 마법에 대해 그녀 자신과 마찬가지로 무지하다는 전제하에 세워진 것이었다. 적들에게 마법에 대해 아는 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이 전쟁은 그들의 패배로 돌아갈 것이다. 새삼 얼굴을 긴장시킨 하연은 아켄에게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는 그의 방에서 나왔다. 그런 그녀의 눈에 헐레벌떡 뛰어 다니며 그녀를 찾고 있는 로베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를 찾은 로베인이 환하게 웃으며 하연을 향해 달려왔다. 그런 로베인의 모습을 보며 하연은 후에 아무리 찾아도 그녀가 없는 때의 그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슬픔이 밀려온 하연은 저도 모르게 로베인의 얼굴을 외면하고 말았고 그 모습에 로베인의 얼굴에서는 순식간에 웃음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하연이 어디론가 걸어가자 마치 그림자가 본체를 따르듯 그녀를 뒤따라 걷기 시작했다. 하연은 마을로 내려갔다. 그 때쯤 마을에서는 벌써 어느 곳의 창고가 털리고 어느 곳의 창고가 가장 안전할 것인지에 대해서 한창 내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하연도 그 내기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수중에는 돈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그녀는 저도 모르게 리밍스의 대장간으로 향했다. 검의 단련에 열중해 있는 리밍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녀의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이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대장간은 고요한 것이 망치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의아해서 안을 들여다보니 대장장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있고 그 중앙에는 리밍스가 막 단련을 끝낸 단검을 조심스럽게 손에 쥔 채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말했다. "드디어 완성했구나! 검아, 이제부터 네 이름은 하연이다. 하연, 아름다운 이름이지?" 그렇게 리밍스가 한 여인을 떠올리며 감상에 젖어 있을 때였다. "확실히 아름다운 이름이긴 하지만 검의 이름이 하연이라는 것은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자신이 만든 검에 자신이 좋아하는 이름을 붙인다는데 누가 감히 토를 단다는 것인가? 화가 난 리밍스는 그 말을 한 인간을 야단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하연의 모습을 본 확인한 순간 리밍스는 입을 쩍 벌린 채 한동안 굳어 있다가 이윽고 두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그 동안 너무 무리를 했어. 그러니 저런 헛것이 보이지." "풋! 뭐야, 리밍스. 드워프 종족은 본질을 꿰뚫어보는 눈을 지녔다고 자랑했으면서 날 이렇게 헛것으로 취급해도 되는 거야?" 하연이 약올리며 말하자 리밍스가 변명하듯 말했다. "하지만 난 너무 오랫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고 검의 주조에만 매달렸었어. 헛것이 보여도 이상할 게 없지." "흠! 환상을 보는 드워프라....... 그거 드워프 역사에 이름을 남길만한 일이네, 리밍스." 그제야 하연의 존재가 현실임을 인식한 듯 리밍스는 떨리는 걸음으로 천천히 하연에게 다가왔다. "설마, 설마 진짜 하연?" "그래. 나 돌아왔다, 리밍스." 마치 잠깐 이웃집에 놀러갔다 돌아왔다고 말하는 듯한 하연의 말에 리밍스는 어이없어 하면서 하연의 두 다리를 꼭 껴안았다. 허리를 껴안고 싶었지만 키가 작아 다리를 끌어안는 것이 다였던 것이다. 그런 리밍스의 머리를 토닥여주면서 하연이 말했다. "그런데 그 검의 이름 진짜 하연이라고 할거야?" 그 말에 하연의 다리에서 고개를 든 리밍스가 물었다. "왜 싫어? 이 검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야?" "아니, 검을 모르는 내 눈에도 네가 만든 검은 아주 멋진 검으로 보여. 하지만 내 이름이 검에 붙는 것은 좀 그래서......" "하연이 싫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럼, 이 검의 이름을 하연이 지어줄래?" "좋아." 완성된 검을 자세히 살펴 본 하연은 마침내 검의 이름을 정했다. "설화. 설화가 어때?" "설화? 무슨 뜻이야?" "눈꽃이라는 뜻이야." "눈꽃. 정말 예쁜 이름이다. 이 검과 잘 어울려." 그러면서 리밍스는 이제 설화가 된 그 검을 하연에게 내밀었다. "어, 왜?" "너를 위해서 만든 거야. 그러니까 이 설화는 이제 네 것이다." "하지만......." 하연에게 검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눈꽃처럼 섬세하게 세공 된 단검을 보자 마음이 동하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연은 그 검을 받아들고야 말았다. 그런데 검의 손잡이를 잡았을 때였다. 마치 정전기가 이는 듯한 찌르르한 느낌이 손바닥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이게 무슨 일이지?' 순간 의아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정전기야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고 보니 하연은 그 느낌을 무시하고 리밍스에게 말했다. "고마워. 소중히 간직할게, 리밍스. 내가 살아있는 그 날까지." 그 말에 리밍스는 만족한 얼굴로 그 자리에서 쓰러져버렸다. 누적되어 있던 피로가 그 때서야 발동한 것이다. 그런 리밍스를 로베인에게 안아들게 한 하연은 에스페를 찾아갔다. 보다 빨리 리밍스의 기력을 회복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에스페의 천막에는 에스페는 보이지 않고 질리안과 율리아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하연이 그들에게 물었다. "에스페는 어디 갔어?" "에스페요? 늘 가는데 갔지요. 에스페가 가장 사랑하는 환자한테 말이에요." 장난스러운 질리안의 말에 무엇인가를 눈치챈 하연은 그녀와 더불어 씨익 웃었다. "아하!" 율리아가 투덜거렸다. "쳇! 그 무뚝뚝한 기사녀석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 하루종일 붙어있는 건지. 저번에는 둘이 도대체 무엇을 하기에 하루종일 붙어있는지 궁금해서 같이 붙어있어 봤거든. 세상에! 하루종일 말 한마디 서로 안 하더군. 에스페는 그 기사녀석만 하루종일 쳐다보고 그 기사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고......." 하연은 그런 사실을 알아보기 위해 하루종일 붙어있었다는 율리아가 더 어이없게 느껴졌지만 현명하게 그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에스페도 없는데 질리안과 율리아는 왜 여기 이러고 있는 거야?" "여기 있으면 귀찮게 하는 것들이 없거든." 퉁명스런 율리아의 말에 하연은 의아한 듯 물었다. "귀찮게 하는 것들?" 질리안이 부끄러운 듯 웃으며 대답했다. "세르기아스가 좀 이것저것 참견이 심해서요. 게다가 제가 다른 남자 동료들과 말이라도 한마디하는 날에는 그게 더 심해져서......" 세르기아스와 질리안이 약혼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하연이기에 그라면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율리아 쪽은 누가? 의아한 눈빛으로 율리아를 빤히 쳐다보자 그 시선이 거북했는지 그녀도 결국은 입을 열었다. "그, 웨이 그 녀석이...... 예전에는 술 좀 많이 마시지 말라는 정도였는데 요즘은 술을 많이 마시면 임신에 지장이 있다느니, 피부가 푸석푸석해 졌다느니...... 황당하게도 어제는 내가 얼마나 자주 씻는지에 관해서 까지 간섭을 하더라니까." 그 말을 들은 하연은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할 일이 꽤나 없나보군." "그렇다니까." 하연의 말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율리아를 보자 질리안은 기가 막힌 표정이었다. 그리고 웨이와 로베인에게 깊은 동정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질리안과 율리아에게 편안히 쉬라는 말을 남기고 에스페의 천막에서 나온 하연과 로베인은 슈이센의 부사령관인 유트 뤼베아의 천막으로 갔다. 에스페의 헌신적인 간호덕분인지 유트는 의자에 앉아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지만 에스페는 그런 유트를 마치 중병환자라도 되는 양 얼굴을 닦아주고 먹을 것을 입에 넣어주는 등 부산을 떨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유트는 그런 에스페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에스페!" 하연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누가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 에스페는 당황해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는 여전히 유트를 닦아주던 손수건을 움켜쥔 채로. "하, 하연!" 그러자 이번에는 유트가 반응을 보였다. 작전 참모인 하연이 그의 천막으로 온 것은 그에게 무슨 중요한 부탁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로베인이 의식을 잃은 상태의 리밍스를 에스페의 앞에 내려놓는 것으로서 유트는 하연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에스페를 찾아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곧 관심을 거두었다. 그런 자신을 안도의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는 에스페의 시선을 모른 채. 하연이 말했다. "리밍스가 갑자기 쓰러져버려서 에스페에게 회복을 부탁하려고 왔어." 리밍스를 살펴본 에스페는 그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완전히 탈진해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곧 성력을 일으키며 기도했다. "어머니 펠레아의 이름아래 물의 여신 엘레나의 이름으로 그 분의 성스러운 축복을 내려주소서. 레스토어!" 그러자 은빛의 가루가 리밍스의 몸 위에 뿌려지더니 몸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정신이 든 리밍스가 눈을 떴다. 눈을 뜬 리밍스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하연을 찾았다. 좀 전에 하연을 만난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그를 바라보고 있는 하연을 발견할 수 있었고 리밍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렸다. "배고파!" 한 차례 따뜻한 웃음이 천막 안을 지나간 후에 하연과 로베인이 리밍스와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천막을 나가자 에스페는 다시 유트의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유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에스페의 얼굴은 상당히 행복해 보이는 듯한 얼굴이었다. 마신 소환사 -93(171)- 첨부파일 : 등록자 : 김소영(허풍선이) 조회수 : 49 등록일 : 2002-02-25 10:20:03 관련자료 : 없음 본문크기 : 9899 bytes 꿈속에서 로베인은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커다란 나무그늘아래에서 오수를 즐기는 듯 평온한 모습으로 누워있는. 어쩌면 그는 기대했는지도 몰랐다. 누군가가 불러주길, 깨워주길.......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고 그는 혼자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아버지인 오벤 성주이자 볼트라인 백작은 그레이트 소드에 이르는 뛰어난 기사였지만 정작 그의 아들인 로베인은 기사로서의 소질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일찍이 로베인을 가르치기를 포기한 볼트라인 백작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죽은 아내를 그리며 지냈다. 때문에 로베인은 늘 혼자였다. 낮에는 서재에서 책을 읽었고 밤에는 어두운 화원에서 남모르게 새벽이 올 때까지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간절히 염원하면서. '뛰어난 기사가 되게 해 주세요. 그런 기사가 되어서 아버지의 관심을 받게 해 주세요.' 오랜만에 어린 시절의 꿈을 꾸다 잠에서 깨어난 로베인은 정신을 차리자 자신이 하연의 방문 앞에서 웅크린 채 잠이 들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굳게 닫친 하연의 방문을 바라보던 로베인은 새벽의 차가운 공기에 자신의 온몸을 양팔로 꼭 끌어안으면서 중얼거렸다. "다시는 혼자이고 싶지 않아. 널 잃고 싶지 않아, 하연." 그날 저녁, 적들이 침입해 들어왔다. 동서남북의 모든 창고에 동시에. 하지만 마왕인 바토르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언제 어떻게 그들이 침입했는지 몰랐기 때문에 바토르만이 바쁘게 돌아다녀야만 했다. 그에게 이런 시련을 안겨준 마신 카이람님과 하연을 욕하면서. 하지만 덕분에 바토르는 적들이 어떻게 그처럼 감쪽같이 창고를 공격해 들어올 수 있었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뭐? 지하 관개수로를 타고 들어온 거라고?" "그렇다니까. 이 곳 일대의 지하 관개수로는 성인 남자 하나가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크더군." 허탈해진 하연이 중얼거렸다. "이제 보니 바칸의 전사들은 두더지들이었군. 뿅망치로 머리를 내리쳐야만 하나?" 그 소리를 들은 바토르가 희색을 띄며 말했다. "내가 할게. 불의 망치 코도르로 내리치면 그냥 가루가 되어 부서질 거다." 순간 트리엔시라의 지하왕국에서 바토르가 망치로 내리치자 스켈레튼이 가루가 되어 부서지던 광경을 떠올린 하연은 사람이 그렇게 된다고 생각하자 소름이 끼쳐서 얼른 말했다. "아니야! 네가 수고 할 필요까지는 없어. 보다 좋은 생각이 있으니까." 다음 날 다시 사령부 회합이 있었다. 하지만 회합장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들로서도 충격을 받은 것이다. 설마 네 창고 모조리 습격을 당하리라고는 짐작도 못했던 것이다. 이윽고 유즈베리아 사령관인 그레이븐이 하연에게 물었다. "그래, 이 상황에서 어떻게 첩자를 알아낼 것인지 물어보아도 되겠소, 슈이센의 군사?" 하연은 피식 웃었다. "첩자라면 이미 누군지 알고 있습니다." "뭐요?" "누구입니까?" 놀라서 묻는 사령관들에게는 대답도 없이 하연은 되려 물었다. "우리 쪽의 군량이 모두 바닥이 났습니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정이라니요?" 용병대장인 솔트가 물었다. "대대적인 공략을 하느냐 아니면 후퇴하느냐 하는 결정 말입니다." 그 말에 갈로아의 사령관인 브리앙 테이트론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후퇴라니요. 후퇴는 있을 수 없소." 그레이븐이 말했다. "흠! 하지만 승산이 없는 싸움을 하는 것보다는 후퇴가 낫지 않겠소? 쓸데없이 군사를 소모할 필요가 없이 말이오." "지금 무슨 말도 안돼는 헛소리를 하는 것이오? 자기 나라 땅이 아니라고 이렇듯 함부로 말을 해도 되는 것이오? 호얀성은 절대 넘겨 줄 수 없소." 하연이 그를 위로하듯 말했다. "걱정 마세요. 바칸은 인구가 적어서 이 넓은 호얀성을 오래 지배할 수는 없을 거예요. 힘을 다시 길러 빼앗으면 되잖아요?" 하지만 그런 하연의 위로도 브리앙에게는 먹히지 않았는지 그는 도리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하연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아르센이 말했다. "하연, 더 이상 갈로아 사령관님을 약올리지 말고 어서 방법을 예기해 봐요. 무슨 생각이 있는 거지요?" '약올리다니, 진심이었는데......' 하지만 하연은 그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 말은 생략한 채 싱긋 웃으며 말했다. "식량이 모두 불타버린 이 상황에서 제게 무슨 방법이 있겠어요. 우선 이 호얀성을 버리고 호얀성 바로 위쪽에 위치한 도린치성으로 군을 이동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곳에서 다시 군량을 확보한 후에 호얀성에 있는 적들을 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적어도 지리적인 불리함만은 면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지금까지 그것이 문제였잖아요?" 그렇다. 바칸은 사막의 나라로 기후가 덥고 지형이 변화무쌍해서 외국인들이 지리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 때문에 바칸으로 공격해 들어가려 해도 지리를 몰라 계속해서 실패를 맛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적들을 자신들의 지형으로 끌어들인 후 친다면 지리적인 불리함만은 없는 것이 되는 것이었다. 모두 괜찮은 생각이라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갈로아의 사령관만은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한시라도 이 호얀성을 적에게 내어준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회합을 마치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물의 장로인 아이론이 빈정거리듯 하연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직 그 첩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군사?"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하연에게 고정되었고 하연은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가지만 말하자면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이에요." 호얀성에 주둔해 있던 모든 병사들은 도린치성으로 이동해 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을 백성들도 대부분이 짐을 싸서 그들을 따라 나섰다. 바칸의 법은 강한 자들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으로 그렇지 않은 자들은 노예가 되기 마련으로 그들은 가난할 망정 노예가 될 마음은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짐을 바리바리 싸서 등에 지고 손에 든 사람들을 보며 하연은 고생하는 그들이 안쓰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이 없는 도린치에서 안전하게 있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안도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도린치로 가는 길은 비교적 평탄하고 잘 닦여 있어서 그들은 출발한지 한나절만에 성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 미리 소식을 전해들은 도린치 성주가 성밖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는데 그는 브리앙 테이트론에게는 마치 왕이라도 되는 듯한 예우를 하면서도 다른 나라의 사령관들은 그저 무시하지 않는 정도였다. 이에 다른 나라의 사령관들은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둔한 도린치 성주는 그것조차 눈치채지 못했지만. 성내에 도착한 브리앙 사령관은 도린치의 식량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식량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부터 파악해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결과 그 양은 그들이 하루를 지내기도 턱없이 부족한 양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그러자 병사들 사이에서 불온한 움직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같이 후퇴해 온 호얀 백성들의 식량을 빼앗거나 다른 나라 병사들과 잦은 싸움을 벌이는 등의 일이 바로 그 것이었다. 때문에 사령관들은 불안해하며 되도록 빨리 호얀성을 공략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하연의 의견은 달랐다. 적들의 경계가 좀 더 허술해 졌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지금 공격한다면 미리 경계를 하고 있던 적들은 달아나 버릴 것이고 그러면 애써 이 곳까지 후퇴해 온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유즈베리아의 사령관 그레이븐이 말했다. "하지만 식량이 없지 않소? 이곳에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우리측의 자멸만을 부를 것이오." 다른 사령관들과 용병 대표도 같은 의견인 듯 그레이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하연은 여유만만 했다. 그녀는 아르센의 호위기사인 디온에게 아켄을 이 곳으로 불러와 달라고 청했다. "여러분들도 저희 슈이센의 마법사 아켄 드레이드님을 아시지요?" 마법사라는 것이 흔한 것은 아닐뿐더러 아켄은 인간들 사이에서 꽤 고위마법사로 알려졌기 때문에 그들은 당연히 그를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은 그 분이 여러분들에게 설명해 줄 것입니다." 잠시 후, 디온을 따라 온 아켄은 그들에게 하연의 지시를 받아 그가 처리한 일들에 대해 설명했다. 식량들이 모두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은 사령관들과 용병대표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한 표정들이었다. 그들은 이 뜻밖의 소식에 기뻐해야 할지 그들도 모르게 이런 일을 한 하연에게 항의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곧 그들은 기뻐하기로 결정한 듯 환호성을 외쳤다. "우와아!" 하연이 말했다. "군사들을 정비해 주세요. 적들의 동태를 파악한 후 곧 호얀성을 포위해 들어갈 것입니다." 각 사령관들과 용병대표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합이 끝나자 하연은 아켄과 함께 식량을 숨겨 논 곳으로 용병들과 함께 찾으러 나갔다. 그 동안 내내 아켄의 안색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어두웠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켄?"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아켄의 내심은 복잡하기만 했다. 미처 생각지 못하다가 갑자기 떠오른 어떤 생각 때문이었다. '테이트론이라...... 내가 소환해 내곤 했던 그 마족의 이름 또한 테이트론이었는데 그 자가 갈로아의 공작가인 테이트론가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우연히 같은 이름인 것뿐인 걸까?' 그러나 그런 아켄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하연이 물었던 것이다. "여기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하지요?" "아? 이 쪽입니다." 나중에 생각하기로 한 아켄은 앞장서서 하연과 용병들에게 식량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 곳은 호얀성과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일루젼 마법으로 숨겨져 있었다. 웃긴 것은 아켄이 일루젼 마법을 해제하자 듬성듬성 나 있는 나무들 사이에 식량들이 아무렇게나 쌓여있다는 것이었다. 용병들은 미리 준비해 온 수레에 식량들을 실어서 날랐다. 차곡차곡 성의 식량창고에 쌓여 가는 식량들을 보면서 병사들은 환호했고 그날 밤 도린치 성의 분위기는 완전 축제 분위기였다. 그 중 율리아가 가장 기뻐 보였다. 술이 넘치도록 돌아다녔기 때문이었다. 그런 율리아를 본 웨이가 물었다. "너, 그렇게 술이 좋으냐?" "응!" 생각도 않고 바로 대답하는 율리아로 인해 웨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망설이며 물었다. "율리아, 만약 내가 평생 너의 술값을 대어 주겠다고 하면 나랑 결혼할래?" "좋지." "그래, 조...... 뭐?" 너무 순순히 대답하는 율리아로 인해 웨이는 당황해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한 말 정말이야?" "그래. 특급용병은 못되지만 너 일급용병이지? 그러면 고용비가 평균 금화 2개니까 술이 얼마나 되려나?" 중얼거리듯 말하는 율리아의 말에 웨이는 기가 막혀서 고개를 푹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보다 몇 배나 술을 좋아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술값을 위해서 그와 결혼까지 하겠다니......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웨이는 고개를 번쩍 들고 율리아에게 외쳤다. "그래. 우리 결혼하자, 율리아! 너와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깟 술값이 문제겠냐?" 비장하게까지 느껴지는 웨이의 모습에 율리아는 슬며시 고개를 돌리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율리아는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수면초를 마셨을 때 웨이가 그녀를 구하기 위해 카리스의 살기를 견디어 냈던 일을...... 그가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을...... 때문에 두말 않고 허락한 것이었다. 하지만 율리아는 웨이가 그녀가 결혼을 허락한 이유를 오해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재미있었으니까. 두 사람이 결혼한다는 소식에 장내는 흥분의 도가니로 변해버렸고 너도나도 축하의 인사를 건네기에 바빴다. 하지만 그런 소란 속에서 하연은 마음이 텅 빈 듯 외롭기만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칼라화면 속에 있는데 그녀만은 흑백화면 속에 외롭게 서 있는 느낌이랄까? 하연은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현재만을 생각하자. 미래는 떠올리지 말자. 미래는 없지만 내겐 소중한 현재가 있으니까.' "지금 호얀성에 입성해 있는 바칸 부족들은 사카 부족과 타코아 부족으로 그들의 족장은 아만과 마가라는 자들이다. ......하연, 네가 부탁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내가 그들을 간단히 처리해 버릴 수 있는 일인데 왜 내게 부탁하지 않는 거지?" 바토르의 말에 하연은 한심하다는 듯 그를 보며 물었다. "자신이 할 일을 남에게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말, 들어본 적 없어?" "없어. 내가 할 일이라도 남에게 미룰 수 있다면 언제라도 넓은 마음으로 양보할 수 있는 미덕의 소유자가 바로 이 마왕 바토르님이시거든." "훗! 그럼, 그 미덕을 발휘해 이제부터는 내가 하는 일을 지켜만 봐줘." "......원한다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하연이 원하니 우선은 지켜보고 나중에 상황이 안 좋아지면 그 때에 끼어 들면 된다고 생각하는 바토르였다. 여러 날에 걸쳐 사령부 회합을 가지며 작전을 짜고 군사들을 정비한 그들은 마침내 공격 날짜를 잡았다. 그 날은 바로 불의 달이 지는 마지막 날이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은 물의 달이 오기 전에 이 작전을 실행해야 했던 것이다. 물의 달이 오면 지하 관개수로가 열리고 수로에 물이 흐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블리앙스에서의 실수를 번복하지 않기 위해 하연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변수를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대처방안을 마련하느라 다시 혼자서 며칠 밤을 지새우며 고심한 후에야 편안히 잠이 들었다. 드디어 마지막 불의 달의 날이 밝았고 7천 5백의 병사들이 호얀성을 포위해서 들어갔다. 바토르가 알아낸 적의 전력인 260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많은 숫자였지만 그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들은 오합지졸인데 비해 바칸의 적들은 모두 일당백의 전사들이었기 때문이다. 한낮이 되어서 완벽하게 호얀성을 포위한 하연은 적들에게 전령을 보냈다. 그 사자로는 용병 소시언이 자원했다. 소시언은 미루엘이 사담을 따라 그들을 떠난 이후로 마치 죽고 싶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위험한 일이라면 어디든지 끼어 드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하연이 전령을 보내야겠다는 말을 꺼내자마자 자신이 그 일을 하겠다고 자원한 것이었다. 하연은 소시언에게 아르센이 쓴 전서를 전해주면서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 이 일을 할 거예요, 소시언? 그들은 당신을 죽일지도 몰라요." "......상관없습니다, 하연. 제게 삶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요." 하연은 그런 소시언이 안타까웠다. 사랑 하나를 잃었다고 그의 삶이 의미가 없다니...... 사랑이외에도 삶에는 소중한 것들이 많지 않은가? 친구, 부모, 일 등. 하지만 하연은 아무 말 없이 전서를 건네주었다. 삶의 소중함이란 그 자신이 느껴야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대신 느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리고 바랬다. 그가 다시 자신의 삶을 소중함을 발견하기를...... 소시언이 떠난 후 전령으로 떠난 후 하연은 초조해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즈베리아의 사령관인 그레이븐이나 갈로아의 사령관인 브리앙은 내심 적들이 항복하지 않기를 바랬다. 그 동안의 고생을 생각하면 그들을 모두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들의 바램이 이루어진 것일까? 한 시간이 지나도 소시언은 돌아오지 않았고 이에 하연은 용병대장인 솔트에게 호얀성으로 침투할 것을 명했다. 그러자 솔트는 용병들을 이끌고 지하 관개수로를 이용해 호얀성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그 동안 적들이 했던 방법 그대로. 다른 것이라면 용병들은 적들의 목숨을 노렸고 적들은 그들의 창고를 노렸다는 점이랄까? 그 용병들 중에는 소시언의 동료들인 율리아와 웨이, 조르, 헌스, 이너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시언이 살아있을 경우 그를 구해내기 위해서였뉼봉?쏟아져 나왔다. "와!" 함성소리와 함께 병사들이 일제히 호얀성 안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그와 함께 바칸 전사들의 얼굴은 새하얗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사카 부족의 족장인 아만과 타코아 부족의 족장인 마가는 이에 전사들에게 탈출을 명령했다. 그 동안 호얀성에 있으면서 그들은 이 호얀성이 그들이 지배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에 이 곳을 버리고 떠나는 것에는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병사들을 상대하면서 도주로를 확보하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아만과 마가 족장들은 그들이 늘 이 곳 호얀성으로 침투해 들어오곤 했던 지하 관개수로로 향했다. 하지만 이미 그곳은 용병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이에 그들은 손에 든 대거를 더욱 꽉 움켜쥐었다. 사막에서 뼈를 묻지 못하고 이 곳 갈로아의 땅에 묻히게 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전사로서 싸우다가 죽는 것은 그들에겐 하나의 영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영광된 죽음을 맞을 수가 없었다. 그들을 생포하라는 하연의 지시가 있었던 것이다. 족히 스무 명의 병사들과 싸우고 나서 지친 그들이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병사들이 달려들어 그들을 생포했다. 이에 그들은 모욕감을 느끼며 외쳤다. "죽여라! 너희들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 "전사로서 최후를 맞게 해다오." 하지만 병사들은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그들을 하연과 사령관들이 있는 곳으로 끌고 갔다. 그 곳에는 이미 생포되어 온 많은 다른 전사들과 그들을 위해 첩자로 활동했던 호마르의 모습이 보였다. 하연을 제외한 다른 사령관들은 경비대장인 호마르가 첩자라고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듯 그의 배신행위에 치를 떨었다. 그 중 갈로아의 사령관인 브리앙 테이트론이 가장 심했는데 그는 두 눈에 핏발을 세우고 분노에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물었다. "왜냐? 왜 갈로아를 배신한 것이냐?" 호마르는 잠시 그런 브리앙 사령관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윽고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갈로아를 배신한 것이 아니오. 내 피의 조국인 바칸에 충성을 다했을 뿐." "뭐라고?" "난 갈로아인이 아닌 바칸인이라는 말이오." 순간 허탈해진 브리앙 사령관은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갈로아의 국경경비대장이 바칸인이었다니...... 그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겠는가? 그러나 다음 순간 브리앙 사령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검을 빼어들고는 살기를 띄우며 호마르에게 다가갔다. "그렇다면 넌 배신자는 아닐지 모르지. 그러나 너로 인해 죽은 우리 갈로아와 동맹국들의 수많은 병사들의 죽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죽음으로서 갚아라!" 파앗! 순식간에 호마르의 목은 땅에 떨어졌다. 눈앞에서 사람의 목이 잘려나가는 광경을 처음으로 본 하연은 정신이 아득해 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은 브리앙 사령관의 검에 맺힌 붉은 핏방울들이 두 눈을 부릅뜬 채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린 호마르의 얼굴위로 한 방울씩 떨어지는 광경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런 하연의 정신을 돌아오게 한 것은 로베인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였다. 그 온기에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느끼며 하연은 이런 장면에 충격을 받는 자신이 참으로 가증스럽게 여겨졌다. 이 곳 호얀성으로 들어오면서 벌써 많은 수의 병사들이 싸우다 죽는 광경을 보았으면서 새삼 사람의 목이 잘려나갔다고 충격을 받다니...... 한참을 그렇게 로베인에게 손을 맡긴 채 서 있는 하연은 장내에 생포되어 있는 전사들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여러분들 중 누가 아만과 마가 족장이지요?" 순간 생포된 전사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나라의 사람이 그것도 여인이 자신들의 족장의 이름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호기심이 인 아만과 마가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우리가 아만과 마가 족장이오. 여인은 어찌 우리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인가?" "......혹시 우리 중에 첩자가 있다면 죽기 전에 알려주면 고맙겠다." 하연이 그들에게 말했다. "우린 여러분들을 살려줄 의향도 있습니다. 협상만 체결된다면 말이지요." "협상?" 아만과 마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당돌한 여인이었다. 한낱 여인의 몸으로 전사인 그들과 협상을 맺으려 하다니...... 이윽고 아만이 말했다. "우리들은 전사요. 전사는 목숨을 구걸하지 않소." 순간 하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언제 목숨을 구걸하라고 했나요? 전 협상을 하자고 했지 목숨을 구걸하라고 한 적은 없는데요?" 마가가 말했다. "협상을 하자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구걸을 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전사들은 협상을 하지 않는다 이거군요." 잠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하연이 말했다. "참! 아까 어떻게 제가 두 족장분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 물었었지요?" 그 말에 마가가 재빨리 물었다. "그렇다! 우리들 중에 첩자가 있었던 것이냐?" "먼저 제 신분부터 밝히도록 하지요. 전 슈이센 파병군의 군사 하연이라고 합니다. 군사의 신분으로 전 여러분들을 상대하기 위해 많은 정보를 모아 보았습니다만 바칸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어서 별 소득을 얻지 못했었지요. 한 가지 알려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칸이 전사들의 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하다는 듯 생포된 바칸의 전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도 바칸이 전사의 나라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으리라. 하연이 계속 말했다. "그런데 이런 말도 알고 계신가요? 마법과 검은 길이 다르다라는 말이요. 즉 검을 쥔 자는 뛰어난 마법사가 될 수 없고 마법사는 결코 뛰어난 검사가 될 수 없다는 말이지요. 길이 다르니까요. 그래서 한 가지 착상을 떠올렸지요. 전사의 나라라면 마법에는 무지하리라는." "마법?" 마법에 대해서는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듯 아만이 되물었다. "맞아요. 마법이요. 마법에는 수십 가지의 종류가 있는데 그 중에는 일정한 시간동안 몸을 투명하게 만들어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게 하는 마법도 있지요. 우리는 그 마법을 사용했어요." 그런 마법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전사들은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사람을 눈에 보이지 않게 만들 수 있다니...... 그러다 무엇을 떠올렸는지 마간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러니까 그 마법이란 것으로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한 다음 이곳으로 와 우리들에 대한 정보와 이름을 알아냈다는 말인가?" "맞아요. 간단하지요?" 말은 간단했지만 그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적들이 그들의 목숨을 빼앗았을 수도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의 의혹을 부추기듯 하연이 말했다. "만약 여러분이 협상을 하지 않겠다면 저희들은 바칸과 대대적인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습니다. 적들의 약점을 공격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니까 물론 마법을 사용해야겠지요." 순간 섬뜩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듯한 느낌에 아만과 마가는 오싹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그런 마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외지인인 그녀가 그들 족장의 이름을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만이 말했다. "어떤 협상을 말하는 것이오?" 하연은 일이 거의 성사된 것이나 다름없기에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간단한 협상입니다. 불가침과 상인들의 교역을 승인하겠다는 협상입니다." 어두운 표정으로 잠시 생각해보던 아만이 하연에게 말했다. "잠깐 마가 족장과 상의를 했으면 하오만." "좋아요. 충분히 상의하도록 하세요." 두 족장이 서로 상의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유즈베리아의 사령관인 그레이븐은 하연에게 감탄의 시선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절대 바칸의 전사들이 그들과 협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렇듯 빨리 그들을 협상의 테이블로 끌어내다니...... 잠시 후 상의를 마친 듯 아만 족장이 말했다. "아무래도 이 협상은 나라 사이의 일인만큼 저희 대족장이신 람의 승인을 얻어야 하오. 우리 전사들 중 한 명을 라세드로 보내 사정을 설명하고 람의 승인을 받아왔으면 하오만." 그 말에 하연은 그녀의 뒤에 포진해 있는 사령관들과 용병 대표들에게 눈짓으로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그녀의 뜻대로 하라는 듯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하연은 족장들에게 말했다. "좋아요. 람의 승인을 얻어 오도록 하세요." 람의 승인을 얻으러 간 자는 타코아 부족의 족장인 마가였다. 그가 떠난 뒤 나머지 다른 전사들은 모두 감옥에 가두어졌다. 그리고 그들을 지키는 자들은 전령으로 왔다가 감옥에 갇혀 있었던 소시언을 비롯한 그의 동료들이었다. 이 곳 호얀성에 와서 처음으로 얻은 그것도 완벽한 승리에 병사들은 광란하듯 기뻐했다. 하지만 하연은 그 동안의 정신적 피로 때문에 곧 바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쓰러지듯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달콤한 잠은 처음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음 날 생각보다 아침 일찍 눈을 뜬 하연은 산책을 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방밖에는 언제나 처럼 로베인이 지친 표정으로 벽에 등을 기대고 잠들어 있다가 하연이 나오자마자 눈을 번쩍 떴다. 하품을 하며 주위를 둘러 본 로베인은 아직 이른 아침이라는 사실에 놀라며 물었다. "하연, 일찍 일어났네. 잘 잤어?" "응. 로베인은?" 물어볼 필요도 없이 그의 푸석한 얼굴을 보면 그가 별로 잘 자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하연은 로베인의 다음 말을 듣고 싶어서 언제나처럼 물었다. "물론. 하연과 함께니까." 자신의 뒤를 따라 걷고 있는 로베인을 의식하면서 하연은 천천히 호얀성 주위를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뜩 더 이상 삶의 의미가 없다고 말하던 소시언이 떠올라 그가 있는 감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살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어떤 생각이 떠올라 문뜩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로베인에게 물었다. "로베인, 너라면 뭐라고 말해주겠어?" "뭐가?" 로베인은 하연이 그를 쳐다보자 기분이 좋은 듯 반갑게 물었다. "소시언이 미루엘이 없는 자신의 삶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하니까. 어떻게 하면 그가 다시 삶의 의미를 되찾게 될까? 그가 다시 살고 싶어지게 만들려면 무슨 말을 해주어야할까?" 너무도 진지해 보이는 하연의 표정에 로베인도 진지하게 그 문제를 고민해 보기 시작하더니 한참 후 말했다. "미루엘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삶이 의미가 없다고 한다면 소시언은 미루엘을 정말 사랑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겠어. 진짜 사랑했다면 이 땅도 하늘도 공기도 모두 사랑할게 분명하니까. 그녀가 걸었던 땅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가 바라본 하늘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가 마셨던 공기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사랑스럽고 아름다워서 더욱 오랫동안 살고 싶어질게 분명하니까." 잠자코 로베인의 말을 듣고 있던 하연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도 그 말을 꼭 기억해 줘. 내가 사라진 뒤에." 감옥으로 간 하연은 소시언에게 로베인이 들은 말을 그대로 옮겨주었다. 그러자 소시언은 굵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하연에게 말했다. "나, 정말 오래 살 겁니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그녀를 사랑하기 위해서. 더 오래 행복하기 위해서." 감옥을 나오며 하연은 망설이다가 로베인에게 물었다. "로베인, 이 혼 대륙을 사랑해? 대륙의 반이나 되는 인간이 너를 증오하고 있고 네 손을 피로 물들게 했는데? 차라리 이런 대륙 따위는 깨끗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지 않아?" "응?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뜬금없는 하연의 질문에 뒤따라오던 로베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말해봐. 이 대륙이 존재하기를 원해? 이 대륙을 사랑해?" "......그래." "왜?" "날 존재하게 한 땅이니까. 널 존재하게 한 땅이니까 사랑해." 순간 하연은 멍한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그래, 그렇구나." "넌 이 혼 대륙을 사랑하지 않아?" 하연은 잠시 묘한 표정으로 걱정스러운 듯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로베인을 보더니 고개를 돌리고는 중얼거렸다.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널 존재하게 한 땅인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산책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보니 뜻밖에 유즈베리아의 사령관인 그레이븐이 호위기사 둘을 거느리고 와서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오시오. 한참을 기다렸소이다." 하연이 의아해서 물었다. "무슨 일인데 절 기다리고 계셨나요, 그레이븐 사령관님?" "듣기로 군사께서는 슈이센인이 아니라고 하던데 그것이 사실이오?" "네. 그런데요?" "그렇다면 우리 유즈베리아로 오시는 것이 어떻소?" "유즈베리아로요?" 하연은 이것이 스카웃 제의라는 것을 깨닫자 기분이 유쾌해졌다. 그것은 그만큼 그녀가 군사로서의 역할을 잘 해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슈이센의 재상인 리켈만 트웰스는 이번 파병군이 살아서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소. 돌아간다면 그 즉시 목숨을 잃게 될 거요. 똑똑한 군사께서 그것을 모르지는 않겠지요?" 솔직히 하연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있었다. 하지만 군사의 체면에 어찌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겠지요." "하지만 우리 유즈베리아로 온다면 군사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지위를 약속하겠소. ......군사의 친구인 로베인이라는 분이 우리 유즈베리아인이더군요. 그것도 볼트라인 백작가의 후계자인. 훗날 백작부인이 되려면 미리 유즈베리아로 가서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하연은 유즈베리아의 사령관인 그레이븐이 뛰어난 정치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약점이 로베인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그 점을 노리다니...... 그녀에게 미래가 있었다면 분명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로베인과의 장래를 생각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게 침울해지는 마음을 느끼며 하연은 조용히 말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레이븐님. 하지만 지금은 좀 쉬고 싶군요." 그레이븐은 잘 생각해보라는 말을 남기고 호위무사들과 함께 방에서 나갔다. 그러면서 그가 방문 앞에 서 있는 로베인에게 하는 말이 들렸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되겠군요, 로베인 볼트라인경." 순간 하연은 당혹스러웠다. 어쩌면 로베인이 그들이 나눈 대화를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가 가질 기대와 그 기대를 저버려야 할 자신의 처지가 안타까웠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어째서 이렇게 계속 생각하게 되는 것인지. 이제 포기했다고 생각했던 미래가 왜 이렇게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것인지. 멍하니 그렇게 몇 시간이나 넋을 놓고 앉아 있었을까?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하연은 그때까지의 생각을 모두 떨치듯 세차게 고개를 가로 저으며 일어나 방문을 활짝 열었다. "누구세요?" 방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갈로아의 사령관인 브리앙 테이트론이었다. "잠깐 실례해도 되겠소?" 하연은 그의 어깨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로베인의 시선을 느끼며 말했다. "네, 들어오세요." 안으로 들어선 브리앙은 천천히 초라한 방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침에 벌써 유즈베리아의 사령관이 찾아왔었다고 들었소. 그러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쯤은 알고 계실 것이오. 난 정치가가 아니라서 화려한 말로 설득하는 재주 따위는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말하세요." "우리 갈로아로 와 주시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테이트론가로 와 주시오. 사실상 우리 갈로아의 정치는 거의 썩었소. 왕은 유약하고 왕비라는 여자는 탐욕과 사치로 가득 차 있으며 귀족들은 부패해 있는 실정이오. 이 호얀성으로 오는 길에 군사께서도 갈로아를 돌아보았으니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래서 우리 테이트론가는 백성들을 위해 반정을 일으키기로 결정했소. 그러자면 군사처럼 뛰어난 머리가 필요하오. 반정에 성공하면 군사께는 공작의 지휘를 주겠소. 어떻소? 우리를 도와주겠소?" 브리앙 사령관의 말을 듣는 순간 하연은 앞이 캄캄해졌다. 그 다음 그가 할 말을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신중하게 선택하도록 하시오. 만약 우리 테이트론가로 오지 않는다면 난 이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당신을 죽일 수밖에 없으니까." 이에 하연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직 제가 슈이센 파병대의 군사라는 것을 잊으셨군요. 하지만 생각해보겠어요. 그리고 바칸과의 협상이 체결된 후에 제 결정과 요구사항을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브리앙 사령관은 그녀의 요구사항이 있다는 말에 자신의 말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여겼는지 흡족한 표정을 지은 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에서 나갔다. 그가 나가자 하연은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지 몰라 방안을 왔다갔다 거렸다. 그런데 또 다시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똑똑! 순간 하연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이번엔 또 누구지?' 문을 열자 초조한 표정의 아르센과 그의 호위기사인 디온가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에요, 아르센님?" 얼떨떨한 표정으로 하연이 물었다. "방금 다른 사령관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유즈베리아와 갈로아에서 하연을 자신들의 나라로 와 주기로 청했다고요." "아? 그 예기요?" "그 제의를 받아들이실 겁니까?"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거절할 작정이긴 했지만 그 말이 다른 사령관들의 귀에 들어가면 안되기에 우선 그렇게만 말했다. 그러자 아르센이 희색을 띄며 말했다. "그렇다면 제 제안도 생각해 주십시오. 제가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솔직히 지금 현재로는 하연에게 그 어떤 약속도 해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왕위에 오른다면 하연이 원하는 그 어떠한 지위라도 드리겠습니다. 설령 왕비의 자리를 원하다고 할지라도요." 하연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전 잘 모르겠군요. 제가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군사로서 겨우 단 한번의 승리일 뿐인데 그것만 가지고 저를 각 나라에서 끌어들이려고 하고 아르센님은 왕비의 자리까지 내어 주겠다니 뭔가들 잘 못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연. 다른 나라의 사령관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전 그렇습니다. 제가 하연을 원하는 것은 군사로서의 재능도 재능이지만 그 어떤 불가능한 일이라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이거든요. 가능할 거라는 믿음이요. 솔직히 말해 제가 왕위에 오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 않습니까? 분명 포기하고 싶어 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하연이 곁에서 제게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을 주었으면 합니다." 아르센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하연은 그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심하고는 창 밖을 살피면서 중얼거렸다. "바토르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여기 있는데, 왜?" 돌아보니 어느새 바토르가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고기 덩어리를 뜯으며 서 있었다. "언제 왔어?" "지금." 잠시 방안을 걷던 하연이 이윽고 바토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협상이 벌어지는 동안 이 곳에서 도망쳐야겠어." "뭐?" 갑작스런 말에 바토르는 의아한 듯 물었다. 그녀가 왜 도망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 인기가 너무 좋더라고. 오늘 각 나라의 사령관들이 모두 나에게 자기 나라로 와 달라고 제의를 했어. 하지만 난 그들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도망을 칠 수밖에." 바토르는 그 말에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하연의 뜻은 이해를 하겠지만 그렇다고 도망을 친다는 것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마차를 좀 구해 줘, 바토르." "알겠다." 못마땅한 듯 말하며 바토르가 사라지고 나자 로베인이 방문을 벌컥 열며 들어섰다. 그리고 빤히 하연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하연, 설마 나를 두고 떠날 생각은 아니겠지?" 사실 하연은 그럴 생각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로베인을 본 것으로 만족하고 혼자서 떠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로베인의 눈을 보자 마음과는 다른 말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물론 아니지. 지금 네게 같이 가자고 말하려고 했었어. ......같이 가 줄 거지?" 그제야 로베인은 안도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네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같이 갈 거야." '태평한 말 하고있네. 그래서 걱정인 사람한테......'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하연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라세드로 갔던 마가 족장이 마침내 호얀성으로 돌아왔다. 고르이 부족의 위울과 함께. 협상의 테이블에 마주 앉은 하연을 보면서 위울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그녀가 이번 전쟁을 주도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번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하연님. 그런데 하연님의 동료 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군요." 그러면서 그는 긴장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토르를 찾는 것이리라. 하긴 바토르로 인해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같으니 그가 어디 있는지 살피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하연은 사람들의 관심이 바토르에게 쏠리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지금 바토르는 그녀의 탈출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연은 서둘러 말했다. "저희 쪽의 협상조건은 대강 들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브리앙 사령관 측에서 작성한 협상조약에 관한 서류를 위울에게 내밀었다. 서류를 받아든 위울은 각 조항을 세세하게 살펴보았다. 다른 조항들은 별도로 하더라도 문제의 조항이 두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포로 한 사람 당 금화 세 개를 몸값으로 내라는 것과 전면적인 시장의 개방이었다. 그 조항에 위울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하연과 갈로아 사령관인 브리앙을 번갈아 보았다. 전면적인 시장의 개방은 바칸의 경제를 붕괴시키겠다는 것이고 그러면 바칸은 망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조항에 승인을 하라고 하다니...... 더군다나 바칸은 가난한 나라였다. 그런 나라에 포로 한 명당 금화 세 개의 몸값을 지불하라니 가능하기나 한 말인가? 위울은 벌떡 일어나 서류를 찢으며 말했다. "이런 조항들은 받아들일 수 없소. 차라리 전쟁을 하도록 합시다." 글을 모르는 하연이기에 그 협상 조약의 내용은 알 수가 없었지만 협상 대신 전쟁을 택하겠다는 위울의 말에서 그 협상조약이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임을 알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나는 것만은 막고 싶었기에 하연은 위울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전쟁을 선포하기 전에 우리에게 어떤 조항을 왜 받아들일 수 없는지 부터 설명해 줘야 하는 것 아니에요? 그래야 어느 정도 조정이 가능하지요. 갑자기 이렇게 나오면 우리측으로서도 당혹스럽군요." 그 말에 위울은 다시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여전히 무섭게 굳어진 표정이었다. "지금 조정이라고 했습니까? 전면적인 시장 개방을 요구한 것은 이미 조정 협상 따위는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것은 갈로아의 사령관인 브리앙의 생각과 일치하는 말이었다. 솔직히 그는 이런 협상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하연의 군사로서의 능력을 믿기에 전쟁을 해 바칸을 치고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바칸의 약점은 벌써 드러났지 않았던가? 따라서 이길 수 있는 전쟁을 그만 두고 협상 따위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사령관으로서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전쟁을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던 하연은 위울에게 잠시 그들에게 의논할 시간을 달라고 청했다. 이에 위울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하연은 브리앙 사령관을 청해 밖으로 나갔다. 브리앙 사령관은 무슨 의논이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상대가 전쟁을 하겠다면 그에 응하면 그만이 아닌가? 하연은 천천히 주위를 걸으며 말했다. "제가 슈이센 파병대에 들어가면서 아르센 사령관님에게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반드시 그 분을 이 전쟁에서 살아남도록 해 주겠다고요. 하지만 지금 바칸과 전면전을 벌이면 전 그 약속을 지킬 수가 없게 됩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승리할 거라는 장담 또한 할 수가 없고요." "무슨 소리인가? 우리는 적들이 마법에 무지하다는 약점을 알고 있네. 그런데 어째서 우리가 이길 수 없다는 것인가?" 브리앙 사령관은 이제 완전히 하연이 자신의 부하가 된 듯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연은 어떻게 하면 전쟁을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골몰하느라고 그의 말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바칸의 지형을 모른다는 약점이 있어요. 게다가 병사들은 사막의 기후를 견뎌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사막을 건너 그들의 왕성인 라세드를 찾아갈 수나 있다고 생각해요? 이번에 우리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적들을 우리의 지형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라고요." 브리앙은 그 점을 미쳐 생각하지 못하다가 하연의 말에 비로소 자신이 큰 실수를 했음을 인정했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협상 조항을 조정해 주세요. 바칸은 가난한 나라예요. 그들에게 포로들의 몸값으로 그렇게 큰 돈을 지불할만한 능력이 있을 리가 없어요. 또한 그들에게 전면적인 시장 개방을 요구한다면 그들은 당장 전쟁을 일으키려고 할거예요. 차라리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해 차츰차츰 많은 것을 개방하도록 만드는 것이 현명한 일이지요." 잠시 생각해 보던 브리앙은 하연의 생각이 옳다고 여겼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네. 협상조약을 조정하도록 하지." 그 말에 하연은 내심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브리앙 사령관이 협상서류를 새로 작성하는 동안 하연은 지금이야말로 도망칠 순간이라고 생각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잠시 실례 좀 하겠어요." "어디 가는......?" 아르센이 묻자 하연은 대답대신 살며시 쑥스러운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 미소에 하연이 가려는 곳이 어디인지 짐작한 사람들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하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장내를 빠져나가자 로베인이 그런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갔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들은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마구간 앞에는 벌써 바토르가 준비한 사륜마차가 서 있었다. 하연과 로베인이 마차에 올라타자 마부석에서 고삐를 쥐고 있던 바토르가 물었다. "어디로 갈까?" "하라마르트 산으로!" "뭐?" 놀라서 바토르와 로베인이 동시에 묻자 하연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우리는 신의 유산을 찾아 하라마르트 산으로 가는 거야." "이것으로 협상은 체결되었습니다." 바칸을 대표해 위울이 갈로아를 대표해서는 브리앙 사령관이 각기 세 장의 협상문서에 서명을 하고 나자 그 공증인으로서 빛의 사제인 아이론이 서명을 하면서 말했다. 박수 소리에 장내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위울이 갈로아 사령관에게 물었다. "그런데 하연님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잠깐 그 분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만." 브리앙과 다른 사람들도 그제야 그녀가 보이지 않는 사실을 깨닫고 의아해했다. 그 때 유즈베리아의 사령관 그레이븐이 무엇을 떠올렸는지 그의 호위기사들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로베인 볼트라인경이 어디 있는지 찾아봐라!" "네!" 로베인을 찾아 밖으로 나간 그들은 잠시 후 다급한 걸음으로 장내에 뛰어들며 외쳤다. "하연님이 로베인 볼트라인경과 함께 마차를 타고 호얀성을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뭣?" "누가 그것을...... 아니, 어디로 갔다고 하던가?" 그레이븐이 물었다. "마구간 지기의 말을 들어보면 하라마르트 산으로 신의 유산을 찾아 떠난다고 했다고 합니다." 각 사령관들은 기가 막힌 표정이었다. 설마 그녀가 도망을 칠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위울은 그녀가 하라마르트 산으로 갔다는 소리에 어느 정도 안심이 되는 마음이었다. 그는 아직까지 람에게 하연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언제 그 사실이 알려질지 모르지만 마지막까지 그 사실을 숨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갈로아가 협상을 청한다는 말에 베가 람이 직접 오려고 했지만 그 협상의 배후에 하연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위울은 그녀와 람이 만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대신 이 곳에 오겠다고 간절히 청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녀가 하라마르트 산으로 떠났다고 하니 더 이상 그녀와 람이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았던 것이다. 위울이 일어나 말했다. "그럼, 이제 우리 전사들을 풀어주십시오. 이만 저희들의 땅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알겠네. 그럼, 잘 돌아가도록 하게." 브리앙은 인사를 마치고 새로 임명된 경비대장에서 지금 즉시 포로들을 인계하라는 명령을 내린 다음 서둘러 자신의 사령부로 돌아갔다. 그런 브리앙 사령관의 표정은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 때 유즈베리의 사령관 그레이븐이 휘하 기사들에게 즉시 하연을 잡아오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었고 이에 아르센은 하연과 친분이 있는 용병들인 율리아와 웨이, 조르, 소시언 등에게 다른 나라에서 그녀를 찾기 전에 먼저 그녀를 찾아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마법사 아켄이 아르센에게 말했다. "저도 가겠습니까?" "아켄님도요?" "네, 하연님이 찾으러 가셨다는 그 신의 유산이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그 말에 아르센은 그제야 그녀가 떠났다는 사실이 아닌 그녀가 신의 유산을 찾으러 떠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아켄이 그녀를 따라 가고 싶어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또한 신의 유산이라는 말에 그것이 무엇인지 호기심이 치미는데 하물며 마법사인 아켄이야. 사령부로 들어간 브리앙은 그를 보좌하기 위해 가문에서 딸려 보낸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 즉시 도망친 슈이센의 군사 하연을 찾아서 죽여라! 필요하다면 가문의 모든 힘을 동원해도 좋다. 떠나라!" "네, 알겠습니다." 일제히 고개를 숙여 대답하며 서둘러 사령부를 나서는 수하들의 뒷모습을 보며 브리앙은 이를 갈았다. "감히 이 브리앙 테이트론을 우롱하다니...... 비밀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나를 우롱한 대가를 반드시 받아내고야 말 것이다." 마신 소환사 -97(175)- 첨부파일 : 등록자 : 김소영(허풍선이) 조회수 : 106 등록일 : 2002-03-02 10:11:14 관련자료 : 없음 본문크기 : 13503 bytes 그 시각. 한창 마차를 타고 도주 중이어야 마땅할 하연, 바토르, 로베인은 한 곁에 마차를 세워놓고는 가위, 바위, 보에 열중해 있었다. 하연이 그들에게 가위, 바위, 보를 가르쳐 주면서 삼세판으로이긴 사람이 마차를 몰자고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로베인은 하연의 마차 모는 실력을 익히 알고 있기에 이기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가위, 바위, 보도 처음이고 운이나 눈치도 없는 로베인인지라 하연과 바토르를 이길 수가 없었다. 따라서 내리 먼저 두 판을 져버린 로베인은 결전을 벌이는 하연과 바토르의 모습을 긴장된 얼굴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모든 운은 자신의 것이라는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하연과 위대한 마왕의 자존심을 걸고 그 어떤 싸움에서든 결코 질 수 없다는 각오로 덤비는 바토르의 결전은 팽팽하기만 했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결전 속에서 하연이 은근한 어조로 바토르에게 말했다. "바토르, 마왕의 체면에 마부노릇은 좀 그렇지 않아?" 그 말에 체면이나 자존심이냐를 놓고 고민하던 바토르는 하연이 먼저 가위를 내자 슬며시 보를 내는 것으로 자존심보다 체면이 우선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결전의 막이 내리고 하연이 마차를 몰게 되자 로베인은 원망스런 눈길을 바토르에게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연이 마차를 몰기 시작하자 역시나 그 광란의 질주가 다시 시작되었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로베인은 토할 것 같은지 한 손으로는 입을 틀어막고 다른 한 손으로는 마차의 창문을 꼭 틀어쥔 채 온 몸으로 엉덩이에서 전해져 오는 고통을 견디어야만 했다. 그와는 달리 바토르는 처음에만 약간 놀랐을 뿐 곧 마법으로 엉덩이 밑에 공기 쿠션을 넣어 자리에서 조금 뜬 상태로 평안히 광란의 질주를 즐기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렇게 달렸을까? 거의 로베인이 기절 직전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였다. 마차가 갑자기 급정거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퉁겨져 나간 로베인은 마차 천장에 머리를 부딪쳐 기절해 버렸고 바토르는 그런 로베인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창 밖을 내다보았다. 순간 그의 눈이 커다랗게 떠지고 말았다. 예전엔 분명 황금의 곡창지대였음이 분명한 넓은 지형의 땅이 모두 시커멓게 변해있는 것이 아닌가? 마왕인 그로서도 이런 현상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급히 마차에서 내린 바토르는 손가락으로 그 검은 땅을 가리키며 원을 그렸다. 그러자 푸르스름한 기운이 손가락을 따라 땅위에 원이 그려지더니 다음 순간 원안의 흙이 모두 솟구쳐 오르며 공기 중에서 흩어져버렸다. 원안을 들여다본 바토르는 깊이 파인 땅속까지 검게 변해있는 것을 보고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가 흙을 한 움큼 쥐어 만져보더니 중얼거렸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생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아!" 하연은 그 광경에서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카이람의 말대로 이 혼 대륙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하연은 카이람으로부터 대륙이 멸망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한 순간에 혼 대륙이 갈라지고 파괴되어 버리는 그런 것을 상상했었다. 그런데 그 멸망한다는 것이 이런 것이었다니...... 땅위의 모든 것들이 심지어 바위마저도 그 생명을 빼앗기고 죽어서 나뒹굴어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그 모습이 처음 갈로아에 왔을 때 보았던 그 넓은 황금벌판과 그 속에서 춤추고 노래하던 땅의 정령들의 모습과 겹쳐 보이자 더욱 가슴이 메이는 것 같았다. 충격을 받아 넋을 잃은 듯한 하연의 모습에 바토르가 말했다. "하연, 마차 안으로 들어가라! 이제부터는 내가 마차를 몰겠다." 하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저히 계속 보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차 안으로 들어가자 정신을 잃고 있는 로베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창백하게 질려 있는 표정으로 보아 분명 그녀가 너무 거칠게 마차를 몬 탓이리라. 미안한 마음에 로베인이 편안하도록 무릎베개를 해 주며 하연은 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듯한 머리 결이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덜컹 덜컹. 마차가 움직이는 가운데 하연은 고즈넉이 노래를 불렀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그들은 한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천천히 마을을 한바퀴 돈 바토르는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여관 앞에서 마차를 세웠다. "오늘은 여기서 쉬었다 가자!" 마차의 문을 열며 바토르가 말하자 하연과 로베인이 피곤한 얼굴로 마차에서 내려섰다. 그들이 여관으로 들어서자 여관주인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이런 마을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미남미녀들이었기 때문이다. "깨끗한 방을 세 개 준비하고 식사를 내와라!" 마치 자기 집 하인을 대하듯 바토르가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여관주인은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즉시 그 명령을 수행하기에 바빴다. 간단한 식사를 마치자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듯 로베인이 하연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제부터 진짜 어디로 가려는 거야, 하연?" 여자의 몸으로 그 험악한 하라마르트 산에 오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에 로베인은 하연이 탈출할 때 추적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한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무슨 말이야? 내가 하라마르트 산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나?" 하연이 어리둥절한 듯 로베인에게 반문하는 것이었다. 순간 로베인은 놀라서 굳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뭐야? 지금 진짜 하라마르트 산으로 가겠다는 말이야?" "물론이지." "왜? 무엇 때문에?" 바토르는 소리치는 로베인이 도리어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하연이 말했잖아? 신의 유산을 찾으러 간다고? 너는 못 들었냐?" 그 말에 로베인은 이를 갈 듯 으르렁거리며 바토르에게 말했다. "들었어! 하지만 그게 말이 돼? 신의 유산을 찾으러 하라마르트 산으로 가다니...... 하연이 그 험악한 하라마르트 산에 오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거야?" "못 오를 건 또 뭐야? 정 힘들면 우리가 교대로 업고 오르면 되지." 로베인은 기가 막혔다. 사람을 업고 오를 수 있는 정도의 산이라면 애초에 자신이 이렇게 화를 내겠는가? 그 때 하연이 말했다. "그리고 가는 김에 대현자 갈루마도 찾아보고. 저주를 풀 수 있을 거야." 저주를 풀 수 있다는 말을 은근히 강조하는 하연이었다. 순간 로베인은 흠칫 놀랐다. 저주를 풀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그 때까지 저주를 푸는 문제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었던 자신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전에는 그토록 그를 괴롭히던 문제가 이처럼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변해버리다니...... 그것은 모두 하연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녀만 곁에 있어 준다면 세상의 모든 여인들이 그를 증오한다고 해도 상관이 없었으니까. 따라서 로베인은 진심으로 말했다. "저주를 풀지 못해도 상관없어. 난 하연만 곁에 있어주면 되니까. 그러니 하라마르트 산으로 가는 것은 그만 두자." 순간 이번에는 하연이 말문이 막힌 표정이었다. 하지만 곧 피식 웃으며 로베인의 진심을 외면한 채 말했다. "하긴 대현자 갈루마가 하라마르트 산에 있다고 보장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러나 신의 유산은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거야. 내게는 보물지도가 있으니까. 너도 그 신의 유산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바토르는 하연이 왜 마치 그 신의 유산이 무엇인지 모르는 척 하는 것인지 의아했지만 무슨 사정이 있겠지 하고 생각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짜 그 신의 유산인 엘레나의 눈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다. 로베인은 어떻게 해서든 하연이 하라마르트 산으로 가는 것만은 막으려는 듯 말했다. "하지만 그 보물지도는 반쪽밖에 없잖아? 어떻게 그 신의 유산을 찾겠다는 거야?" 그러자 하연은 네이브 스마인을 만났던 일과 그의 동생의 저주를 풀어준 일 그리고 그의 가문의 마법사이자 집사인 아스탄으로부터 나머지 그 반쪽의 지도를 받았던 일을 들려주었다. 그 말을 다 들은 로베인은 참으로 이상한 우연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그 두 장의 지도가 모두 하연에게 모이다니 마치 그 어떤 운명이 그녀를 하라마르트 산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듯 하지 않은가? 이에 로베인은 더 이상 하연을 말릴 수가 없었다. 하라마르트 산으로 가는 것이 그녀의 운명이라면 그 운명을 함께 하는 것이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밤늦게까지 여행 일정에 대해 의논하던 그들은 저도 모르게 나온 하연의 하품소리에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고 심신이 지친 하연은 침대에 눕자마자 곧장 잠이 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날 밤이었다. 여관 주위로 일단의 인영들이 조금씩 간격을 좁혀서 접근해오고 있었다. 순간 잠들어있던 바토르의 눈이 번쩍 뜨였다. "살기! 도대체 어떤 놈들이야!" 이를 으드득 갈던 바토르의 신형이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여관을 포위한 인영들 중 한 인영이 공격 신호를 하자 나머지 인영들이 재빠른 몸놀림으로 여관 안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그들은 누군가를 찾는 것인지 여관방을 모조리 뒤지고 있었다. 그러다 그들이 하연일행이 들어 있는 방을 뒤지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들려오는 음산한 목소리에 그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누구냐?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라!" 당황한 그들은 서로 눈짓을 하며 목소리가 들려온 위치를 파악하려고 했지만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목소리의 말대로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그들은 그 소리를 무시하고 계속 방을 수색하려고 했다. "흥! 이대로 물러나면 목숨만은 살려주려고 했더니 감히 내 말을 무시해." 음산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더니 그와 함께 뜨거운 열기가 그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으아아아악!" 순식간에 형체도 없이 그들이 사라져버리고 나자 바토르가 섬뜩한 웃음을 지으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감히 나 불의 마왕 바토르가 보호하는 인간을 노릴 정도로 살기가 싫다는데 어쩌겠어? 귀찮지만 죽여줄 수밖에......" 마치 한없는 관용을 베풀기라도 한 듯 중얼거리던 바토르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수확제가 끝난 후 린크셔 남작가의 사병들과 용병들이 연일 유파드의 구석구석을 수색했다. 그로 인해 비밀로 한다고는 했지만 유파드 전체에 남작가에 사로잡혀 있던 엘프가 사라졌다는 소문이 퍼져나갔고 엘프를 사냥하려는 사냥꾼들이 대거 유파드로 몰려들었지만 누구도 엘프의 종적조차 발견하지 못한 채 거의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엘프가 인간들의 세상에서 떠나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고 엘프와 사담은 그들이 생포한 어둠의 사제인 휠리아와 함께 아직 유파드에 있었다. 항구에서 허름한 배 한 척을 빌려 그곳에 숨어서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낮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배를 몰고 강으로 나가고 밤에만 다시 항구로 돌아오는 시간들을 반복하면서. 처음에 사담은 휠리아를 보는 즉시 죽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녀가 눈앞에 서 있자 이렇게 쉽게 죽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서히 죽음에 대한 공포를 뼈 속 깊숙이 맛보게 한 뒤에 죽여야만 분이 풀릴 것 같았다. 그래서 우선 그녀의 이마에 있는 푸른색 서클렛을 검으로 갈라버렸다. 저주를 받지 않기 위해 미리 엘프가 그들의 몸 주위에 방어막을 쳐주기는 했지만 언제까지 방어막을 친 채로 있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휠리아의 이마에 엑스자형의 칼자국이 생겨났다. 죄인의 낙인같은. 그런 그녀를 밧줄로 묶은 채 배의 창고에 처박아놓고 사담은 한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엘프만이 가끔 들러서 그저 죽지 않을 정도의 먹을 것을 갖다 줄뿐. 뱃전에 나와 강바람을 맞으며 사담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바람에 휘날리던 긴 검은머리, 별빛처럼 반짝이는 눈, 하얀 꽃이 피어나듯 아름다운 미소의 하연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던 것이다. 그녀가 했던 말도. "훗! 사담은 정말 오빠 같아요. 만약 누군가 나에게 누구를 오빠로 삼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난 서슴없이 사담이라고 대답하겠어요." 오빠라는 이름으로라도 그녀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는데 왜 그에게 소중한 사람들은 모두 그를 떠나가 버리는 것일까? 처음부터 자신은 누군가를 사랑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인간!" 갑작스런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사담이 돌아보자 엘프 히싱이 무뚝뚝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담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정신을 놓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가 부를 때까지 곁에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니...... 엘프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경계심을 풀어놓고 있었던 것일까? 사담은 처음 히싱을 만났던 때의 일을 떠올렸다. 하연의 복수를 위해 범인을 추적하는 동안 애써 무시하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미루엘이 신경 쓰였었다. 그래서 그녀를 따돌리기 위해 그는 일부로 험악한 산길로 들어갔다. 울창한 숲속으로 들어서면서 혹시 미루엘이 길을 잃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트레져 헌터인 만큼 길을 잃어도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걸어 들어갔던 것이다. 결국 그렇게 그녀를 따돌린 뒤, 숲의 밤이 깊어지자 그는 야영을 했다. 혹시 불빛을 보고 미루엘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을 피우지도 못하고 나무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은 채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어디선가 프라하의 선율이 고요한 밤의 대기를 깨트리는 것이 아닌가? 피리리리! 피리리리! 영혼을 뒤흔드는 듯한 그 아름다운 소리에 사담은 잠시 복수의 불길이 가라앉고 평온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 소리를 더 가까이 에서 듣고 싶은 마음에 그는 나무에서 내려와 소리를 따라 걸어갔다. 숲을 헤치고 얼마쯤 갔을까? 허공에 둥실 떠 있는 빛 덩어리 하나가 보였다. 그 빛 덩어리를 따라가자 가느다란 나뭇가지 하나에 걸터앉아 프라하를 불고 있는 요정과 그 요정의 주위를 떠다니는 빛 덩어리들을 볼 수 있었다. 그 신비로운 광경에 사담은 멍하니 넋을 잃고 말았다. 용병생활을 오래 하면서 많은 기이한 광경들을 보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 신비하고 아름다운 광경은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인기척을 느낀 것인가? 피리연주가 멈추고 요정의 눈이 사담을 향했다. 싱그러운 초록빛 눈. 어둠 속에서도 그 눈을 보는 순간 사담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모든 죽어있던 감정이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때 요정이 말했다. "이곳에서 남자 인간을 만날 줄은 몰랐군. 넌 혹시 여자인간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 "......여자 인간?" "그래. 검은머리에 검은 눈. 붉은 서클렛을 한 정령의 냄새가 나는 여자 인간 말이다." 순간 사담은 그가 아는 한 여인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입에 올리기도 가슴 아픈 그 이름을 조심스럽게 불러 보았다. "......하연?" 사담의 말에 요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름은 몰라. 아무튼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아?" 사담은 그 요정이 하연을 찾는다는 말에 얼굴이 굳어지면서 물었다. "넌 누군데 그녀를 찾는 거지?" "난 히싱. 황금의 땅에서 왔다." "설마...... 엘프?" 그 때까지 사담은 엘프란 가냘프고 우아하며 아름다운 존재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며칠 동안 히싱과 지내면서 그는 그런 고정관념들을 모두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는 엘프인 히싱은 파괴적이고 덜렁대기 잘하며 성질 또한 괴팍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복수에 동참해 린크셔 남작의 포로가 되었을 정도이니...... 그 때 히싱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게 매서워지는 것을 본 사담은 자신이 생각에 잠겨 있느라 아직까지 그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말했다. "왜?" 일전에 한번 히싱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가 그렇지 않아도 허름한 배가 전복되어 수장될 뻔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히싱은 그런 사담을 못마땅하다는 눈초리로 노려보더니 말했다. "먹을 것이 떨어졌다." 그 말에 사담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오늘밤에 먹을 것을 구해오마." 그날 밤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갔다 돌아온 사담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뭐야?" 희한하게 밝은 사담의 얼굴에 적응이 되지 않는지 히싱이 당황해서 물었다. "당장 떠난다." "어디로?" "하라마르트 산으로." 마신 소환사 -98(176)- 첨부파일 : 등록자 : 김소영(허풍선이) 조회수 : 90 등록일 : 2002-03-02 10:12:42 관련자료 : 없음 본문크기 : 12235 bytes 호얀지방에서 일어난 전쟁의 결과로 인해 대륙은 뒤흔들리고 있었다. 몇 년 동안이나 길게 끌어오던 전쟁이 갈로아의 승리로 끝나리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더 충격적인 일은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낸 어둠의 사제라는 존재였다. 죽었다고 알려진 그 어둠의 성자가 다시 재림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혼 대륙의 사람들이 모두 그녀에 대해 떠들어댔고 마침내 그 소문은 오랜만에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루보아 숲에서 나왔다가 잠시 엔리시크의 심장에 들러 술을 마시고 있던 카리스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그녀의 이름을 들은 순간 카리스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죽었다고는 믿지 않았기에 다시 살아 돌아오리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돌아오다니...... 더욱이 그의 짐작대로 로베인이 있는 호얀지방에 처음으로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고 하지 않는가? 역시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는 로베인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그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처연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술만 들이붓고 있는 카리스의 귀에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갈루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었지? 너도 들었지? 하연이 살아있대. 어서 가 보자. 하연을 만나야지. 살아있었을 줄이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 기적이야. 대현자로서의 내 모든 지혜가 그 기적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듯 해. 빨리 가 보자, 카리스. 어서!- 그러나 카리스는 갈루마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술만 마셨다. -카리스, 이 못생긴 도마뱀! 어서 가지 않고 뭐 하는 거야? 하연이 살아 있다 잖아. 너라면 금방 그녀의 앞에 서 있을 수 있잖아? 왜 이러고 있는 거야?- 답답하다는 듯 외치는 갈루마가 지겨워졌는지 카리스가 차갑게 한 마디 내뱉었다. "더 이상 떠들면 부셔버린다." 부셔달라고 할 때는 안 들어주더니 하연이 되살아난 지금에 와서야 이런 식으로 협박을 하다니...... 갈루마는 속으로만 투덜거리며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지금에 와서 하연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소멸할 수는 없었으니까. 카리스의 눈치를 살피면서 갈루마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연이 살아있다는 소식에 그 누구보다도 기뻐하며 달려가야 할 카리스가 왜 이런 반응인지. 그런데 그 때였다. 술꾼들 중 한 명이 하는 말이 그들의 귀에 들려왔다. "어둠의 성자가 이번에 신의 유산을 찾아 하라마르트 산으로 가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는가?" "들었지. 그 곳이 얼마나 험악하고 위험한 곳인데 그 곳으로 가겠다는 것인지. 그렇지 않아도 요즘 마물들이 극성이라 마을을 습격하는 일도 다반사이지 않은가? 그런데 하필이면 마의 산 다음으로 마물이 많기로 유명한 하라마르트 산은 들어가겠다니......" "글세 말이야. 전쟁에서 이긴 후, 여러 나라에서 초청까지 받았다고 들었는데 여인의 몸으로 왜 굳이 하라마르트 산으로 가겠다는 것인지. 더군다나 신의 유산을 찾아서라니...... 허, 참! 그런데 정말 그 신의 유산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건가?" 그 소리에 카리스는 저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의 산인 하룬 산에서 그 위험을 당하고도 또 하라마르트 산으로 들어가려 하다니...... 하연이 자신이 없는 곳에서 위험한 일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카리스는 미칠 것만 같았다. 그와 함께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로베인은 그녀를 지켜줄 수 없지만 그는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이다. 하연에게 그가 가장 소중한 존재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카리스는 마음이 들뜨고 다급해 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의 곁에 가고 싶었다. 그녀가 있는 하라마르트 산으로. 하라마르트 산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벨라스카 해안을 통과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벨라스카 해안은 물살이 빠르고 암초가 많은 지역이라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선원들이 아니면 절대로 통과할 수 없는 위험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 곳이 그나마 가장 안전한 산행길이기에 하연일행은 한 항구마을에 이르자 배를 구하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그 어떤 배도 하연일행을 실어다주기를 거부했다. 벨라스카 해안을 통과할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하연일행이 실망하며 다른 항구 마을로 가려는데 뱃사람 중에 한 사람이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내일 우리 마을에 카라반의 상선이 들어옵니다. 그들이라면 벨라스카 해안을 통과하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지요. 그러니 내일까지 기다렸다가 그들에게 부탁을 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하연은 얼굴에 희색을 띄며 말했다. "잘됐다. 카라반의 상선이라면 우리를 태워 줄 거야. 네이브가 내 부탁을 거절할 리가 없잖아?" 로베인은 얼마 전에 하연이 카라반인 네이브의 동생을 저주에서 풀어주었었다고 했던 말을 떠올리며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토르도 잘됐다는 듯 말했다. "그러면 오늘은 이 마을에서 하루 푹 쉬어 볼까?" 바다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여관에 짐을 푼 그들이 간단히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할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자 여관주인이 말했다. "오늘부터 모래까지 우리 마을에 일년에 한번 있는 야시장이 열린답니다. 볼만할 테니 한 번 가보시지요?" 그 말에 하연일행은 마땅히 할 일도 없고 심심하던 차라서 구경이나 해보자고 나갔다. 그리고 야시장을 본 하연과 로베인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 마치 밤의 고속도로 가로등을 보는 듯한 등불이 양쪽으로 쭉 늘어서 있었는데 그 등불은 바다로 이어져서 마주한 섬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바로 그 등불이 늘어서 있는 바다위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멋지다! 바다위로 걸어다니다니......." 흥분한 하연은 로베인과 바토르를 제치고 먼저 야시장으로 뛰어들어갔다. 천천히 야시장을 걸으며 하연은 갈라진 홍해 바다를 걷는다면 이런 기분일거라고 생각했다. 모래 바닥에 발자국이라도 새기려는 듯 신중히 발자국을 디디는 하연을 보자 그녀를 뒤따라 걷고 있던 로베인과 바토르는 피식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항구마을이라서 일까? 시장에서 파는 물건들은 대부분이 바다생선들이었다. 하지만 하연으로서는 처음 보는 생선들이 많아서 무척 구경하기 재미있었다. 밤늦게까지 구경한 그들이 다시 여관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검은 로브를 깊숙이 눌러쓰고 수정 구슬을 쥐고 있던 한 노파가 하연을 보더니 손짓해 불렀다. "거기 아가씨, 내 아가씨가 미인이라 공짜로 미래를 좀 봐줄까 하는데 어떤가?" 지금의 하연으로서는 미래 따위는 조금도 보고 싶지 않았지만 공짜라는 말에 하연은 재빨리 그 할머니 앞에 다가가 앉았다. 그런 하연의 모습에 로브에 감추어진 노파의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이에 하연이 개면 쩍은 듯 헛기침을 하자 할머니가 말했다. "그럼, 이 수정 구슬에 손을 올려놓아 보게." 할머니의 말대로 하연이 수정구슬에 손을 올려놓자 할머니가 무언가 이상한 말들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하연의 손안에 있던 수정구슬이 뜨거워지는 듯 하더니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닌가? '마법인가?' 하연은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했지만 그것을 보는 바토르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있었다. 상대가 단순한 점술가가 아닌 예언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진짜 예언자의 말은 예언을 현실로 만드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령 그것이 잘못된 예언일지라도. 따라서 할머니의 입에서 무슨 말인가 흘러나오기 전에 그 입을 틀어막으려고 하는데 다음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온 몸이 마치 석상처럼 굳어진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왕인 그를 제압하는 힘이라니...... 도대체 저 할머니는 누구란 말인가? 바토르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가운데 할머니의 입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아가씨의 앞에는 그 누구도 관여할 수 없는 선택의 길이 보이는군. 삶과 죽음의 길이......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그 어떠한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행복한 삶이 아가씨 앞에 놓이게 될 걸세." 그 말에 바토르와 로베인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하연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행복한 삶이 놓일 거라니...... 그녀가 죽음을 선택하지 않으면 사랑하는 사람도 죽고 이 대륙도 멸망하게 될텐데 어떻게 행복한 삶이 놓일 수가 있단 말인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할머니의 예언에 기대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여관으로 돌아온 하연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결국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하연은 다음 날 아침 피곤한 몸으로 식당으로 내려왔다. 그러자 바토르와 로베인이 이미 일어나 기다리고 있었던 듯 하연을 맞았다. 초췌해 보이는 듯한 하연의 얼굴에 로베인이 물었다. "하연, 어디 아픈 것 아냐? 얼굴이 안 좋은데?" "아냐. 잠을 좀 못 잔 것 뿐이야." "잠을 못 자다니, 왜?" "본격적인 모험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니 흥분이 되어서 말이야." 그제야 안심한 듯 로베인은 활짝 웃었다. 그들이 느긋하게 아침을 먹은 후, 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여관 문이 열리며 푸른 머리의 네이브 스마인과 글렌이 선원들과 함께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하연은 네이브를 보자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했다. "여! 안녕하세요?" 순간 네이브의 차가운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다 하연의 옆에 있는 로베인과 바토르를 보고는 순식간에 미소를 지우고는 천천히 하연에게 다가와 물었다. "다른 일행들은 어디로 가고 못 보던 얼굴들이오?" "아! 이쪽은 로베인이고 이쪽은 바토르예요." "로베인, 바토르, 이 쪽은 네이브예요." 너무도 간단한 서로의 소개에 그들은 모두 하연의 얼굴만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하지만 하연은 그런 그들의 시선을 모르는 척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네이브에게 말했다. "부탁할 것이 좀 있는데 들어주실 거지요?" "부탁?" "네." "그 부탁이란 것이 무엇이오?" "저희를 하라마르트 산까지 좀 실어다 주었으면 해서요." 네이브는 잠시 아무 말 없이 하연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이었소? 신의 유산을 찾아서 하라마르트 산으로 간다는 것이?" "네."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하연으로 인해 네이브는 어이가 없었지만 원래 이런 여인이었다고 새삼 되새기며 말했다. "좋소. 당신에게는 빚이 있으니 하라마르트 산까지 실어다 주겠소." 그러자 그의 곁에 있던 글렌은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리는 지금 한시라도 빨리 그랑디아로 가야 한다고. 빛의 대신전인 하나브 신전이 어둠의 사제들에 의해 포위공격을 당하고 있잖아? 우리가 식량을 보내주지 않으면 하나브 신전은 무너지고 말 거다. 그것은 곧 이 혼 대륙에서 빛의 신전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는 걸 모른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글렌의 시선은 시종 하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하연일행을 하라마르트 산까지 실어다 줄 수 없는 이유를 그녀가 이해해 주었으면 해서였다. 하지만 하연은 별로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이에 글렌은 혹시 하연이 어둠의 사제이기 때문에 빛의 신전이 무너지는 것을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말했다. "빛의 신전이 무너지면 지금 당장에는 어둠의 신전이 성세 할 것 같지만 결국은 어둠의 신전 또한 무너지는 일이 될 거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까?" 하연은 그런 글렌을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러면 빛과 어둠의 신전이 모두 무너진다고 해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에는 별 상관이 없듯이 내게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그 순간 글렌을 비롯한 모든 여관 안의 사람들이 황당하고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빛과 어둠의 신전은 혼 대륙의 모든 사람들의 정신의 양대 기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신전을 마치 없어도 충분히 살 수 있는 사치품정도로 말하다니...... 그 때 네이브가 여관 안의 충격을 깨트리듯 말했다. "이미 내가 결정한 일이야. 하연일행을 하라마르트 산으로 실어다 준 뒤에 간다해도 충분해. 하나브 신전은 그때까지 버틸 여력이 있어." 그 말에 글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불만이 가시지 않는 표정이었다. 네이브가 하연에게 말했다. "아침식사 후 출발할 테니 짐을 챙겨 내려오도록 하시오." "알았어요." 하연일행이 짐을 챙기러 위로 올라가자 글렌이 네이브를 다그치듯 말했다. "정말 어쩌려는 거야? 하나브 신전의 일은 그렇다 쳐도 그녀가 신의 유산인지 뭔지를 찾겠다고 그 위험한 하라마르트 산을 헤매고 다니게 놔둘 생각이야? 벨라스카 해안을 지나갈 수 있는 배는 그렇게 흔하지 않아. 우리가 거절하면 그녀도 어쩔 수 없이 하라마르트 산으로 가는 것을 포기할 거다." 하지만 네이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번 결심한 것은 포기할 여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배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갈 여인. 그것이 바로 하연이었다. 그러니 괜히 하연의 부탁을 거절했다가 벨라스카 해안으로 가는 길에 좌초되어 죽었다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는 자신이 안전하게 그녀를 하라마르트 산까지 실어다 주는 것이 나았던 것이다. 네이브가 아무 말도 없이 자리에 앉아 여관주인이 가져다 준 음식을 먹기 시작하자 글렌은 더 이상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은 깨달은 듯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잠시 후 하연일행이 짐을 들고 내려오는 모습에 글렌은 깜짝 놀라서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도대체 그 짐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 짐만으로 하라마르트 산으로 오를 생각은 설마 아니겠지요?" 그 말에 하연과 로베인, 바토르는 모두 자신들의 짐을 쳐다보았다. 간단한 옷가지와 돈주머니.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도무지 왜 글렌이 저렇게 펄쩍 뛰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하연일행들의 표정을 보자 네이브는 나직이 한숨을 쉬면서 글렌에게 말했다. "배에서 쓸 식량을 사는 길에 자네가 하라마르트 산행에 필요한 것들도 좀 준비를 해 주게. 저들에게 일일이 말하는 것도 귀찮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글렌은 두 세명의 선원들을 거느리고 필요한 물품들을 사러 밖으로 나갔다. 그 동안 하연은 익히 알고 있는 선원들과 인사를 하면서 자신의 주방보조인 빌스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선원들은 배 위에서 하연이 했던 요리를 떠올렸는지 저마다 일그러진 얼굴에 어색한 미소를 띄우며 빌스는 배 안에 남아있다고 말해주었다. 얼마 후, 글렌과 선원들이 돌아오자 네이브와 하연일행들은 여관을 나섰다. 여관 문을 나서자마자 보이는 거대한 카라반 상선의 모습에 감탄을 터트리는 로베인을 보며 하연은 마치 자기 배를 자랑하듯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저 배가 바로 내가 처음 밀항했던 배야!" 마신 소환사 -99(177)- 첨부파일 : 등록자 : 김소영(허풍선이) 조회수 : 98 등록일 : 2002-03-02 10:15:54 관련자료 : 없음 본문크기 : 14216 bytes 배가 출항한 이후, 하연은 갑판을 거닐거나 빈둥거리는 등의 따분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생각이 많아지게 되었다. 하필이면 왜 내가 그런 병에 걸린 것인지. 어쩌다가 마신 카이람을 소환해 버렸는지. 로베인을 만나게 되었는지...... 그렇지만 않았다면 환생조차 할 수 없는 영혼의 소멸을 당해야 할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 그렇다고 그 모든 것들을 단지 운명이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하기에는 뭔가 억울했다. 운명이라면 지금까지의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게 되니까. 그렇지는 않지 않은가? 선택은 언제나 그녀 자신이 한 것이니까.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이루어져 지금의 자신이 만들어 진 것이니까. 로베인이 사랑하고 있는 소중한 자신이. 답답해진 마음을 풀기 위해 하연은 크게 바닷바람을 들이마시며 선원들에게 말했다. "좋아, 기분이다. 오늘은 내가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들릴게요!" 순간 갑판 위에 있던 로베인을 비롯한 선원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그런 가운데 한 선원이 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갑자기 돛 하나를 길게 찢어버린 후 그것을 내려 하연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저, 돛 하나가 찢어져서 그러는데 좀 꿰매주실 수 있겠습니까? 요리야 요리사가 충분히 할 수 있지만 저희들 중 이 돛을 꿰맬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말입니다, 아가씨." "그래요? 맡겨만 주세요." 하연은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돛을 들고 그녀의 선실로 들어갔다. 그런 그녀의 등뒤에서는 선원들이 너도나도 임기웅변을 발휘해 그들을 구한 그 선원을 향해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로베인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하연이 그 돛을 제대로 수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뒤를 따라 선실로 들어간 로베인은 황당한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하연이 바느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토르가 바느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바토르가 바느질을 하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입을 쩍 벌린 채 다물지 못하고 있는 로베인을 본 바토르는 스스로도 좀 민망한 듯 말했다. "하연이 너무 바느질을 못하더라고. 숙녀가 바느질도 제대로 못한다고 소문이 나서야 되겠냐? 그래서 이 훌륭하고 못하는 것 없는 호위기사가 대신 도와주고 있었던 거지, 흠흠!" 실상 로베인은 하연이 돛을 제대로 수리해 가지고 가면 오히려 선원들이 더 놀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토르의 입장을 생각해 그 말은 할 수가 없었다. 하연이 말했다. "바느질 정도 못해도 괜찮아. 그 대신 내가 요리를 얼마나 잘하는데...... 잠깐만 기다려봐. 내가 바토르를 위해 오늘 내 최고의 요리를 선보이도록 할게." 그러면서 벌떡 일어나 선실을 나가는 하연의 모습에 놀라서 멍하니 서 있던 로베인은 다음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서 급하게 그녀의 뒤를 쫓아갔지만 그 때는 이미 주방으로 들어간 뒤였다. 그래서 허탈한 표정으로 주방밖에 서 있는데 그런 로베인을 갑자기 선원들이 둘러싸기 시작했다. "어? 왜, 왜 이러는 거요?" 로베인이 놀라서 묻자 선원들은 결심을 굳힌 듯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저희들을 구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맞아주십시오." "저희로서는 이제 이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면서 선원들은 로베인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퍽! 퍼버버벅! "윽! 크윽!" 로베인은 자신이 왜 맞아야 하는지 그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얻어맞고 갑판 위에 뻗어야 했다. 그런 그의 귀에 희미한 선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동료 분이 갑판 위에서 넘어져 크게 다치셨습니다. 어서 나와 보세요." "몇 주 동안은 곁에서 간호를 해 줄 사람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하연이 요리를 못하게 하려고 자신을 두들겨 팬 다음 옆에서 간호를 하도록 만들려는 음모였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로베인은 그런 선원들을 원망할 수가 없었다. 하연의 요리를 먹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덕분에 그는 몇 주 동안이나 하연의 간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지 않은가? 정신을 잃기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로베인의 입가에는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밤늦게까지 로베인을 간호하던 하연은 밤바람을 좀 쐬기 위해 갑판으로 나왔다. 바닷바람이 상쾌했다. 기지개를 켜며 고개를 젖힌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하연은 다음 순간 멍하니 넋을 잃고 말았다. 별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가 없을 지경이던 것이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누군가 그녀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려놓았다. 순간 정신이 돌아온 하연은 고개를 돌려 누군지 확인했다. 네이브였다. 네이브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요?" "......아무 생각도요." "아무 생각도?" "네. 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을 때가 가장 편하거든요." 잠시 생각해보던 네이브가 말했다. "나도 그렇소." 하연은 어두운 밤바다를 보며 네이브에게 물었다. "언제쯤이면 하라마르트 산에 도착하게 될까요?" "내일이면 벨라스카 해로 들어설 거요. 그곳은 암초가 많아서 신중하고 천천히 운행해야하기 때문에 통과하는데 한 사흘은 걸릴 거고, 그 곳만 통과하면 바로 하라마르트 산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보일 거요."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사흘이라.....!" 그렇다면 두 달이 약간 넘는 시간이 남아있는 셈이었다. 영혼이 소멸하기까지. 그 시간동안 로베인과 함께 그토록 원했던 모험을 하면서 보낸다면 자신의 생은 그야말로 해피앤딩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곧 하연은 씁쓰름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마지막을 로베인과 함께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었다. 그에게 자신이 죽는 모습 따위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의 눈앞에서 죽는다면 그것은 로베인의 인생을 비극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이 될 테니까. 네이브가 떠나는 길에 로베인도 함께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네이브가 물었다. "진짜 신의 유산이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 말에 하연은 다시 천천히 네이브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꼭 있어야 찾나요?" "무슨 뜻이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열심히 살려고 노력해요. 왜 그럴까요?" 네이브는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하는 하연을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하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명예를 얻기 위해서 또 어떤 사람들은 권력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산다고 하지만 결국 그것은 부와 명예, 권력을 통해서 그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요. 모두 행복해지기 위해 열심히 사는 것이지요.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행복을 손에 넣을까요? 행복을 손에 넣었다 해도 과연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아마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거예요. 행복은 손에 넣는 것보다도 만들어 가는 그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 도요. 내게 신의 유산은 행복과 같은 거예요. 결코 찾을 수 없다고 해도 찾으려고 노력하는 순간들로 인해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그런 거요." 그 말에 네이브가 설득하듯 말했다. "그런 것이라면 다른 곳에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지 않겠소? 위험한 하라마르트 산이 아니라도 말이오. 지금이라도 배를 돌린다면 내가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소." 그러자 하연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도망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아서요." 네이브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행복을 찾았다 해도 죽은 다음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또 다시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그것만은 결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둠의 사제들을 이 혼 대륙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녀가 이 땅에서 살아 숨기는 것 또한 그에게는 중요했다. 그것만이 네이브가 가질 수 있는 작은 행복이었으니까. 아무리 해도 하연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을 것 같자 네이브는 마음을 결정했다. 그녀와 함께 하라마르트 산으로 가기로. 그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갑자기 눈앞에서 사담이 사라지자 미루엘은 당황했다. 그가 자신을 따돌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복수에 눈이 멀어 그 무엇도 그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그녀를 따돌릴 만큼은 자신을 신경 쓰고 있었다는 사실에 미루엘은 가슴이 벅차 오를 만큼 기뻤다. 그러다 어쩌면 이렇게 헤어져서는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곧 정신을 차린 미루엘은 다시 숲을 헤치며 사담을 찾아다녔다. 늘 사담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하연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담같은 사람은 한 번 누군가를 마음에 두면 절대 다른 사람은 바라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그렇지만 하연은 죽었다. 설령 그가 죽은 사람만을 바라보며 평생을 산다고 해도 그의 곁에서 지켜보아 줄 수는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바라보아 주지 않으면 부서져 버릴 것만 같은 그를...... 며칠이나 그렇게 숲 속을 헤매고 다녔을까? "아앗!" 갑자기 비명을 지른 미루엘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사냥꾼이 쳐 놓은 덫에 걸리고 만 것이다. 밤이라 너무 어두워서라고 하기에는 그녀 자신이 생각해도 변명이 너무 치졸했다. 그녀는 트레져 헌터가 아니었던가?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놓고 다녔기에. "하아." 스스로가 한심해서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의 별들이 마치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시선을 끌어당기려는 손짓 같이 느껴졌다. 자신을 보아달라고. 자신이 존재하는 것을 알아달라고. "이렇게 죽는 건가?" 발목에서 피가 많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일 아침까지 누군가 그녀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렇게 죽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산중에 사람이 어디 있어 그녀를 찾아내겠는가? 한 가지 희망이라면 이 곳에 덫을 설치한 사람인데 갈로아의 사냥꾼들이란 대게 게을러서 한 번 덫을 설치하면 보름에서 한 달 가까이는 덫을 살펴보지 않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잘 아는지라 기대하기도 힘들었다. "사담의 눈을 꼭 한번은 보고 죽고 싶었는데......" 이제는 이룰 수 없는 소원이겠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들어 누우려는데 어디에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미루엘은 사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시각, 이 산에 있을 만한 사람은 그녀가 아는 한 사담과 그녀 자신뿐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그녀의 기대는 그녀의 눈앞으로 횃불을 들이대고 있는 한 노파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노파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미루엘을 보며 물었다. "아가씨,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뜻밖에 요즘은 자신을 여자로 보아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생각하면서 미루엘은 말했다. "하하! 별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그럼, 계속 별 구경해요." 그러면서 노파가 진짜 몸을 돌려 가려하자 미루엘은 다급하게 말했다. "아앗! 농담이었습니다. 덫에 걸려서 움직일 수가 없어서 그러니 좀 도와주십시오." 이에 노파는 고개를 돌려 지혜로 가득 차 보이는 눈을 장난스럽게 반짝이며 말했다. "나도 농담이었어요, 아가씨." 그러면서 노파는 미루엘의 덫을 제거해 주며 말했다. "이 곳에서 가까운 곳에 내 오두막이 있으니 거기로 가서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좋겠어요. 걸을 수 있겠어요?" 미루엘은 힘들게 한쪽 발만을 이용해 서더니 조심스럽게 발을 옮기며 말했다. "힘들어도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살려면 기어서라도 갈 수 밖에요." 그 말에 노파는 미루엘이 대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장서 횃불을 높이 들고 길을 안내했다.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미루엘은 고통으로 인해 식은땀을 주르륵 흘렸다. 그리고 가까스로 오두막에 도착했을 때는 고작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마치 백년도 넘게 흐른 느낌이라 노파가 의자를 내어주자마자 그 의자에 주저앉아버렸다. "어디 상처를 좀 보여 주세요." 상처를 살핀 노파는 발목의 상처를 닦아주고 약초가루를 상처에 뿌린 뒤에 천으로 잘 동여매 주었다. "대단치 않은 상처이니 며칠만 푹 쉬면 다 나을 거예요." 미루엘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노파를 쳐다보았다. 덫으로 인해 발목에 뼈가 들어 나 보일 정도였는데 대단치 않은 상처라니...... 하지만 이런 숲 속에서 무슨 대단한 치료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아 미루엘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노파는 주방으로 들어가 간단한 먹을 것을 가지고 나와 미루엘의 무릎 위에 올려 놓아주었다. "자, 들어요. 저녁식사 전이지요?" "고맙습니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사담을 잃어버린 뒤, 정신없이 산을 헤매느라 아무 것도 먹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 허겁지겁 저녁을 먹고 있는 미루엘을 빤히 쳐다보던 노파가 물었다. "아가씨, 사랑하는 사람이 있군요?"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놀라서 들고있던 수저까지 떨어트리며 미루엘이 물었다. "노인 혼자서 이런 깊은 숲 속에 사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요?" 그 말에 미루엘은 충격을 받아서 멍하니 노파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하지만 그녀가 놀란 것은 자신이 그 점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너무도 담담히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예전에 비해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이 많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미루엘은 자신이 그렇게 된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하연이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녀가 내민 손을 잡았던 그 순간부터.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다시 수프를 먹기 시작하는 미루엘을 보며 노파가 계속 말했다. "난 예언자예요.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의 미래가 보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살수가 없답니다.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 모습이 보여서요. 아마 아가씨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미루엘은 솔직히 노파가 예언자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었다. 얼마나 많은 거짓 예언가들이 이 대륙을 돌아다니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저 듣고만 있으려는데 그런 말을 하자 미루엘은 자신도 모르게 격하게 말을 내뱉고 말았다. "아니요.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 그 고통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서 죽어가던 하연의 모습이 아직도 밤마다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노파는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미루엘을 가만히 보더니 말했다. "미안하구료, 아가씨. 생각하기 싫은 일을 들춰낸 것 같군요. 사죄하는 뜻에서 내 특별히 아가씨의 미래를 보아주지요. 잠시 기다려요." 그럴 필요없다고 미래 따위는 알고 싶지 않다고 말하려는데 노파가 침대 밑의 상자에서 커다란 수정구 하나를 꺼내드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이상하게 미루엘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신비한 기운이 그녀의 입을 막고 있는 듯 하다고나 할까? 그런 미루엘에게 천천히 수정구를 들고 다가온 노파가 말했다. "이 수정구 위에 손을 올려봐요." 미루엘은 마치 최면에라도 빠진 듯 자신의 손을 수정구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노파가 주문 같은 이상한 말들을 중얼거렸다. 순간 수정구에서 빛이 나더니 미루엘의 손바닥에 뜨거운 기운이 어리는 것이었다. 이에 놀라서 미루엘이 손바닥을 떼자 노파가 말했다. "다리가 낫는 대로 하라마르트 산으로 가세요. 그곳으로 가면 아가씨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걸예요. 그리고 또 한가지 아가씨가 생각지 못한 뜻밖의 만남이 있을 것 같군요. 그 여인이 아가씨의 운명 또한 결정하게 되어 있어요." '하라마르트 산이라고...... 그곳에 사담이......' 멍한 미루엘의 얼굴을 본 노파가 망설이듯 중얼거렸다. "이걸 말해주어야 할지......" 그러다 이윽고 결심을 한 듯 노파가 말했다. "그 여인을 만났을 때 한가지 주의할 것이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아가씨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될 거예요." "그것이 무엇이지요?" 긴장한 얼굴로 미루엘이 물었다. "그 여인이 하라마르트 산의 정상에 오르는 것을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그 여인이 죽는 것은 물론이고 아가씨가 사랑하는 사람 또한 영원히 잃게 될 것입니다. 명심하세요, 아가씨." 미루엘은 마치 노파의 말이 머리 속에서 새겨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서서히 눈을 감았다. 피곤에 지쳐 있다가 공복이 가시자 잠이 들어버렸던 것이다. 잠이 든 미루엘을 바라보는 노파의 눈에는 하나가득 슬픔이 어려 있었다. "아이야, 용서하지 말아라! 너희들을 버리는 날 용서하지 말아라!" "그녀가 오고 있다. 나의 그녀가." 갖가지 보석으로 세공 된 화려한 대전 안에서 흥분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하드리옵니다, 폐하!" 애꾸눈 마법사 비욤의 말에 긴 은빛머리의 핏빛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소년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전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곧 너희들의 황후가 이곳으로 온다. 황후를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라." 와! 와! 대전 안에는 함성이 가득 울려 퍼졌다. 드디어 황제께서 그토록 기다리던 그들의 황후가 왕국으로 오고 있는 것이다. 우르릉! 우르르 쾅쾅! 천둥번개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폭풍우가 쏟아져 내리고 거센 파도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선원들은 물론이고 로베인까지 밖으로 나가서 배에 들어오는 물을 퍼내고 돛을 내리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선실에 있던 하연은 배가 움직이는 것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몸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어어! 으앗!" 그러자 언제 나타났는지 바토르가 슬쩍 그녀의 뒤로 다가와 몸을 꽉 잡아주었다. 흔들림 없는 안정감이 자신을 붙잡은 손에서 느껴지자 하연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등을 기대었다. 그리고 투덜거리듯 말했다. "어젯밤만 해도 날씨가 좋았는데 갑자기 웬 폭우야?" "글세. 바람의 정신 디아스님이 변덕이라도 부리나 보지 뭐." 바토르의 말에 하연은 피식 웃으며 밖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콰르르 쾅쾅! 천둥소리가 두렵다고 몸을 떠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하연은 천둥소리가 좋았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답답한 마음이 뻥 뚫리는 것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편안한 표정의 하연을 보며 바토르가 말했다. "이런 날씨가 두렵지 않은 것 같군." "두렵지 않아." "도대체 네가 두려워하는 것은 뭐지?" 이 인간의 약점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물은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물으면서도 바토르는 하연이 대답해 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누가 자신의 약점을 선뜻 말해주겠는가? 그런데 뜻밖에 하연이 말하는 것이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나 자신을 증오하게 되는 일이야.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않고 도망치는 나 자신을 보게 될까봐 그것이 두려워. 너무 두려워." "훗! 그렇다면 네가 두려워할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겠군. 넌 누구보다도 용기가 있으니까. 마신 카이람님의 선택을 받은 인간답게 말이야. 이거 좀 실망이 되는데. 네가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한번쯤은 보고 싶었는데......" 그것이 자신을 위로해주기 위한 말이라는 것을 깨달은 하연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바토르. 넌 최고의 호위기사야. 내 마음까지도 지켜주니까." 뜻하지 않은 하연의 칭찬에 멋쩍은 표정을 하던 바토르는 배가 너무 심하게 흔들리는 기색이자 안색이 굳어지고 말았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잠깐만!" 바토르는 행여 하연이 흔들리는 배에 몸이 부딪쳐 다칠 것을 염려해 침대시트를 찢어서 그녀를 침대의 한 기둥에 묶으며 말했다. "잠시 밖을 살펴보고 올게. 그때까지는 이렇게 하고있어. 금방 돌아올 테니까. 괜찮지?" 하연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토르가 곁에 없다는 것이 좀 불안하긴 했지만 잠깐이라는데 그 동안에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바토르가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진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콰쾅! 갑자기 배에 커다란 충격이 가해졌다. 어딘가 암초에 부딪친 모양이었다. 그와 함께 배의 밑바닥이 갈라지며 하연의 선실 밑으로 점차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연은 다급해져서 몸을 묶은 끈을 풀려고 했지만 바토르가 얼마나 단단히 동여맸는지 좀처럼 끈은 풀리지 않았다. 점점 많이 들어오던 물이 이제는 하연의 가슴까지 차 올랐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이렇게 허무한 죽음을 맞을 수는 없어. 카이람! 도와줘, 카이람!' 그러나 물이 하연의 목에까지 차 오를 때에도 카이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다급해진 하연은 묶인 끈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 손등을 어루만지려고 노력했다. 물의 정령 사이라라면 이 위기에서 그녀를 살려줄 수 있으리라. 눈 깜짝할 사이에 물은 하연의 머리끝까지 차 올랐고 침대 기둥과 함께 배의 한 쪽으로 머리를 부딪친 하연은 정신을 잃는 그 순간에 간신히 자신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소환이라는 말에 입에 올릴 수 있었다. [으아아악! 풀어 줘! 풀어달란 말이다!] 핏빛날개에 이마에는 못 보던 죄인의 낙인을 한 카이람이 가시나무로 되어 있는 감옥 속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울부짖고 있었다. [......하연이, 하연이 기다린단 말이다! 풀어 줘!]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그의 가시나무 감옥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그의 비통한 외침에 공명하듯 떨리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 전까지의 폭풍우가 마치 거짓말이었던 듯 날씨가 맑게 개어 있었다. 그 가운데 카이람의 상선이 반쯤 부서진 채 암초사이에 걸려 있었다. 잠시 하연의 곁을 떠나 있다가 돌아온 바토르는 그 광경에 넋을 잃었다. 부상당한 선원들의 신음소리와 동료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울음소리가 간간이 배 안에서 들려왔지만 몇 명의 선원들이 죽고 다쳤는지에 대해서는 그의 관심 밖이었다. 문제는 하연의 기척이 부서진 배 안 그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하연의 선실 앞에 모습을 드러낸 바토르는 그 답지 않게 두려움에 떨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바토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 하연이 물의 정령 사이라가 만든 바이어 속에서 안전하게 떠 있었던 것이다. "사이라,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바토르를 알아본 사이라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바토르님. 주인님이 절 소환하셨을 때는 거의 몸이 물에 잠겨 있는 상태였습니다. 때문에 서둘러 바이어를 쳐 더 이상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막긴 했는데 이상하게 아직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러자 다시 바토르의 가슴속에서 두려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두려운 것은 사이라도 마찬가지인 듯 바토르가 짜증을 버럭 낼 정도로 바이어에 둘러 쌓인 하연의 주위를 연신 맴돌고 있었다. 불안함 속에서 조금만 더 하연이 깨어나길 기다리려던 바토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사이라에게 말했다. "바이어를 풀어라!" 바이어를 풀자 바토르는 조심스럽게 하연을 받아들고 그녀의 심장부근에 손을 올려놓았다. 다행이 심장은 뛰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바토르는 하연을 침상에 눕히려 하다가 침상이 젖어있는 것을 보고는 약간의 마력으로 침대를 뽀송뽀송하게 만든 다음 그녀를 그 위에 눕혔다. 하연이 깨어나길 기다리며 바토르와 사이라는 마치 지금까지 그들이 살아온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들이 흐른 듯한 느낌이었다. 얼마 후 드디어 하연이 눈을 떴다. 그 순간 바토르와 사이라는 긴 악몽에서 깨어난 듯 했다. 그러나 눈을 뜬 하연은 멍하니 그들을 바라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모습에 무언가 잘 못된 것 같은 느낌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바토르는 서둘러 물었다. "하연, 왜 그래? 어디가 아픈 거야?" 하연은 그런 바토르를 잠시 바라보더니 물었다. "......누구?" "뭐?" 기가 막히다는 듯 잠시 그런 하연을 쳐다보던 바토르는 설래설래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하연, 장난 좀 그만해. 하나도 재미없으니까." "맞아요, 주인님. 저와 바토르님이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아세요?" 하지만 하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이라를 보며 물었다. "주인님? 내가 아가씨의 주인인가요?" 그러다가 사이라의 투명한 몸체에서 무언가를 느낀 듯 더듬거리며 물었다. "유, 유령?" 사이라와 바토르는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있다가 잠시 후,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지금 뭐라고 그랬어요?" "하연,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하연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장신의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걱정스런 표정으로 볼 때 자신을 잘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전혀 그에 대해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모르겠어. 기억이 나지 않아." 순간 선실 안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한참 후에야 사이라가 물었다. "주인님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기억나세요?" "아니. 하지만 아까 날 하연이라고 부르지 않았어? 내 이름이 하연이야?" 오히려 되묻는 하연의 말에 사이라는 그만 눈물을 뚝뚝 떨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풍랑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다가 깨어난 로베인이 급하게 하연에게 들이닥친 것은. 그는 다른 존재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 듯 하연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물었다. "괜찮아? 어디 다친 곳은 없어, 하연?" 그러다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는 하연이 이상했는지 로베인은 의아한 얼굴로 하연에게 물었다. "왜 그래, 하연?" "누구세요?" 하연이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이 배 안에 쫘악 퍼지자 연민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정작 당사자인 그녀는 전혀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모든 것이 신기하고 흥미진진하게 보일 뿐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여자인지 궁금하다는 생각도 별로 들지 않았다. 단지 자신이 누구세요 라고 했을 때 충격을 받은 듯한 로베인이라는 사람이 약간 신경이 쓰일 뿐. 뱃전에 앉아서 부서진 배를 수리하고 있는 선원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연은 문뜩 자신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그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도 도와드리고 싶어요. 뭘 하면 되지요?" 그 말에 선원들은 놀란 표정으로 하연을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이구동성으로 선원들이 말했다. "레이디께서 어떻게 이런 험한 일을 하신다는 겁니까? "맞습니다. 그냥 쉬고 계십시오." 이에 하연이 불만스런 표정으로 항의하려고 하는데 그런 하연을 글렌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디 하연, 잠깐 저와 예기 좀 하시지 않겠습니까?" 딱딱한 표정의 글렌의 모습에 하연은 자신이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느낌이 기가 죽어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글렌이 하연을 안내한 곳은 그의 선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선실은 잠을 자기 위한 곳이라기 보다는 집무실로 보였다. "차 드시겠습니까?" "아니요. 필요없어요." 하연이 자리에 앉자 책상을 뒤져 술병하나와 잔 하나를 꺼내 든 글렌은 잔에 술을 따라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열었다. "호위기사인 그 분이 레이디에 대해 얼마나 말해주던가요?" "저에 대해서요? 흠, 그러니까. 제가 어둠의 사제고 두 개의 정령의 주인이며 로베인이라는 동료와 함께 신의 유산을 찾아서 하라마르트 산으로 가고 있다는 정도?" 술잔을 내려놓으며 글렌이 말했다. "그러면 레이디가 이 배의 선장이자 제 친우인 네이브 스마인의 약혼녀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까?" "네에?"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하연이 소리쳤다. 자신이 누군가와 약혼을 했다니...... 누군가와 사랑을 해서 결혼을 약속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정말이지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던 것이다. 멍한 표정의 하연을 보며 글렌은 한심하다는 듯 물었다. "그렇지 않다면 가난한 사제가 어떻게 이 카라반의 상선에 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솔직히 하연은 그 점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주머니에 두 장의 낡은 지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도. 하지만 곧 이 배의 선장이라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자 글렌의 말을 믿기가 힘들어졌다. 선장이라고 나타났던 차가운 얼굴의 그 사내는 하연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잠시 쳐다만 보고는 나가버렸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자신의 약혼자라니...... 그런 하연의 의문을 알아챈 듯 글렌이 말했다. "네이브가 좀 무뚝뚝하기는 하지만 속마음까지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연의 걱정을 많이 하고 있고 미안해하고 있습니다. 이 배의 선장으로서 하연이 기억을 잃은 것을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에 하연은 그 네이브라는 사람이 좀 안돼 보였다.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충격일텐데 기억을 잃은 이유가 그 자신 때문이라면 더욱 괴롭지 않겠는가? 글렌이 말했다. "하연이 그 녀석을 좀 살펴주십시오. 하루종일 배를 수리하는 대에 매달려서 몸을 혹사시키고 있으니 이러다가는 병이라도 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하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일으켜 글렌의 선실을 나갔다. 그런 하연의 뒷모습을 보면서 글렌이 중얼거렸다. "미안합니다, 하연. 하지만 난 그 녀석의 친구이고 그 녀석이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해졌으면 합니다. 이렇게 거짓말을 한 것을 용서해주시오." 하연은 뱃전으로 나아가 바다를 바라보았다. 철썩 철썩. 파도 소리가 그녀의 마음에까지 부딪쳐오는 듯 했다. 솔직히 자신에 대해 궁금하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자신을 모르는 지금 마치 백지를 부여받은 느낌이었다.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그래서 들떠있던 그녀의 마음은 새롭게 등장한 약혼자라는 존재로 인해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과거의 자신과 완벽하게 결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한숨을 쉬던 하연은 이제부터는 과거의 자신과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마주서기로 결심했다. 하연은 우선 네이브를 찾았다. 그러나 좀처럼 어디 있는지 알아낼 수 없자 지나가는 청년을 붙잡고 물어 보았다. "저, 선장님 혹시 어디 계신지 아세요?" 청년은 자신을 처음 보는 사람 대하듯 하는 하연에게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제 이름은 저가 아니라 빌스입니다. 빌스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리고 선장님은 배의 밑창을 수리하느라 창고에 들어가 계십니다." 그러면서 그녀를 스쳐 지나가는 빌스라는 청년을 하연은 머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청년이 자신이 알아보지 못해서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바토르와 사이라도 자신의 동료인 로베인이라는 사람도 그렇게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지켜보기만 했었다. 그녀가 과거의 자신에 대해 묻지 않으면 굳이 대답하지 않았고 서운하다는 표정조차 비치지 않았었다. 오직 그녀 곁에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어쩌면 동료라서 그런 것일까? 약혼자인 그 네이브라는 사람은 다를까?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리며 하연은 배의 밑에 있는 창고로 내려갔다. 어두운 창고 안에는 네이브와 몇 명의 선원들이 횃불을 밝힌 채 부서진 바닥에 판자를 대고 망치를 두들기고 있었다. 그들 중 한 선원이 하연의 모습을 보고는 네이브에게 눈짓을 했다. 의아한 듯 고개를 돌린 네이브는 하연을 보고는 일순 눈이 커진 듯 하더니 곧 무표정한 표정으로 일어나 하연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오?" 하연은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너무 반듯한 외모에 이지적인 생김새라 언뜻 보기에 차가워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이었다. '내가 이런 얼굴을 좋아했단 말이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녀를 이상하다는 듯 보는 네이브에게 하연이 말했다. "잠깐 저와 예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좋소." 네이브와 함께 창고에서 나온 하연은 아무 말 없이 갑판을 거닐기 시작했다. 그런 하연의 뒤를 따르며 그녀의 말을 기다리고 있던 네이브는 좀처럼 하연이 입을 열지 않자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예기요?" 하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우리 어떻게 만났어요? 약혼, 했다면서요?" 네이브는 갑작스런 말에 속으로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들어내지 않은 채 말했다. "약혼이라니 무슨 말이오?" "부선장인 글렌으로부터 들었어요. 우리가 약혼했다고요. 아닌가요?" 네이브는 복잡한 표정으로 하연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맞아, 약혼했지." "그런데 왜 말하지 않았어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여인에게 대뜸 할 말은 아니잖소?" 그 말에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그래서 우리 어떻게 만나게 되었던 거지요?" 생각을 정리하듯 머리를 가볍게 쓸어 올리며 네이브가 말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건 그러니까 당신이 내 배에 밀항을 하면서부터요." "내가 밀항을 했다고요?" "그렇소. 당신 동료들과." "동료들?" 네이브는 그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고 하연이 해적들에게 잡혀갔었던 일 그래서 그가 황금 세관을 주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나바린으로 갔던 일 등을 모두 예기해 주었다. 사실만을 예기하면서도 그 외에 무언가가 그들 사이에 있었다는 듯. 그 말을 들은 하연은 자신이 그런 멋진 사랑을 했었다는 사실에 기쁘면서도 졸지에 그런 소중한 사랑을 잃어버려야만 했던 네이브를 생각하자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미안해요. 기억하지 못해서." 네이브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오. 살아있어 준 것만으로도 내게는 다행한 일일뿐이오. 사랑의 감정이야 이제부터라도 얼마든지 키워나갈 수 있는 일이니까." 저 차가워 보이는 얼굴에서 설마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던 하연은 당혹스런 기분이었다. 그리고 약혼을 했다는 것이 곧 결혼을 의미한다는 것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낯설기만 한 사람과 어떻게 결혼을 한단 말인가? 그 생각에 하연이 얼굴을 찌푸리고 있자 네이브가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 말했다. "기다리겠소. 당신의 마음에 내가 들어설 때까지." 하연은 그의 그런 배려가 기뻐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이만 할 일이 많아서......" 등을 돌리고 다시 창고로 들어가려는 네이브를 보고 있던 하연은 문뜩 글렌의 말이 떠올랐다. 그가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는 듯 일만 하고 있다는 소리를.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그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하연이 말했다. "네이브, 좀 쉬어가면서 일해요. 그렇게 일만하다가는 쉽게 늙는단 말이에요." 순간 네이브는 자신을 붙잡은 하연의 손과 얼굴을 묘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소. 잠깐 글렌만 만나보고 오늘은 쉬도록 하겠소." "좋아요." 하연은 웃으면서 네이브의 옷자락을 놓아주었다. 돌아서 가는 하연을 보면서 네이브는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세차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약혼녀가 되다니...... 한참을 그대로 서 있던 네이브는 빠른 걸음으로 글렌의 선실로 향했다. 문을 박차듯이 들어간 네이브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는 글렌을 보고는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고개를 든 글렌이 그런 네이브를 보고는 입가에 떠오른 희미한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너무 고마워 할 필요는 없어. 네가 한 여자에게 매여 사는 것을 보는 것도 꽤 재미있을 것 같아서 한 일이니까." 네이브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똑똑한 여자야. 곧 내가 자신의 약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낼 거야. 그녀의 동료들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그렇겠지." 아무렇지도 않게 긍정해버리는 글렌의 태도에 화가 난 네이브가 외쳤다. "뭐야? 그걸 알면서 그런 거짓말을 했단 말이야? 그녀가 그 사실을 알아봐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글렌은 흥분한 네이브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사랑에 빠지면 사람이 변한다고들 하지만 평소의 그 침착하고 냉정한 네이브가 저렇게 변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의 화를 가라앉히듯 글렌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이라는 것이 알려 진다해도 상관없어. 아니, 오히려 그녀가 그 사실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내가 밝힐 생각이다." 그러자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쓰며 네이브가 물었다. "이유가 뭐냐?" "그래야 네가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지 그녀가 알아줄 것 아니냐?" 네이브는 글렌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속인 일이 어떻게 그가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려줄 수 있단 말인가? "그녀가 기억을 잃어버린 틈을 이용해 거짓말로 그녀의 약혼자 자리를 차지하려고 할만큼 넌 그녀를 사랑하고 있잖아? 아니냐." 사실이었다. 모든 것을 글렌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을 정도로 그는 하연이 자신과 약혼한 것이 사실인지 물었을 때 천연덕스럽게 맞다고 했던 것이다. 글렌이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 그녀가 어떻게 만났는지에 대해 예기하면서 그들이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었던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네이브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글렌이 말했다. "여자란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에게로 마음이 끌리게 마련이라고 들었다. 더구나 너처럼 잘생기고 능력도 있는 남자가 비열한 수를 써서라도 얻으려고 할만큼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어떠한 여자라도 받아주지 않을 수 없을 거다." 순간 네이브는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면서 머리 속이 텅 비어 가는 것을 느꼈다. 하연이 그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금씩 그의 이성을 잠식해 가면서 그로 하여금 아무런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럴까?" "물론이지." 글렌은 자신만만하게 단언했다. 멍한 표정으로 선실을 나서는 네이브를 보면서 글렌은 피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여태까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부인하고 있던 네이브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오자 생각도 하기 전에 그 기회를 붙잡고 있었다. 그가 카라반이 되기 전부터 느낀 것이지만 역시 네이브는 기회에 강한 녀석이었다. 하연과 네이브가 갑판을 거닐면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멀리서 보면서 로베인은 심장이 찢겨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네이브가 하는 말에 웃는 하연이라니...... 그런 하연의 모습은 로베인으로서도 생각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고 그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만족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그녀가 이렇듯 누군가에게 빠진 모습을 보이자 숨이 멈출 것만 같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의 하연은 마치 남을 대하듯 무심하기만 했었는데...... 예전의 하연의 그 다정한 눈빛이 너무나 그리웠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자신과의 인연이 사라져버린 것이 이처럼 커다란 아픔으로 다가올 줄이야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살아있기만 하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어떻게 해서든 그녀의 기억을 되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처연한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로베인은 자신의 선실로 들어갔다. 선실에서는 바토르가 차와 과자를 먹고 있다가 그를 보고는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우거지상이냐?" 로베인은 도대체 어떻게 바토르가 상선 안의 물품 목록에도 없는 차와 과자를 먹고 있는 건지 의아해 하다가 어쩌면 그에게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물었다. "어떻게 하연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그 말에 바토르는 먹던 과자를 내려놓으며 신중한 안색으로 말했다. "한가지 방법이 있지." "그게 뭡니까?" 로베인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애초의 예정대로 신의 유산을 찾으러 가는 것이다." "그럼, 바토르는 그 신의 유산이 무엇인지 알고 있단 말입니까?" 궁금함을 감추지 못하고 로베인이 묻자 바토르가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몰랐단 말인가? 그 신의 유산이 바로 엘레나의 눈물이라는 것을?" 순간 로베인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엘레나의 눈물이라니...... "설마 그 신화 속에 나오는...... 그 엘레나의 눈물이 실재로 존재한단 말입니까?" "지도가 있는 것을 보면 존재한다는 증거겠지." 모든 병을 치료해준다는 엘레나 눈물, 그것이 존재했다니...... 로베인은 가슴이 설레었다. 그 엘레나의 눈물을 찾으면 하연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로베인은 서둘러 하연에게 가 그 사실을 말해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런 로베인을 바토르가 붙잡았다. "잠깐,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 "하연에게요. 어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어야지요. 기억을 잃어서 하연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것 아닙니까?" "서둘 것 없다. 어차피 배가 수리되기 전에는 가고 싶어도 아무대도 가지 못하니까." 그 말에 로베인은 다시 털썩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하연이 그 신의 유산을 찾아 하라마르트 산으로 갈지 그것도 의문이다." "아니, 어째서요?" 로베인이 불만스러운 듯 물었다. "기억을 잃은 후 하연의 행동에서 무엇인가 느껴지는 것이 없었냐? 기억을 잃은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과거를 궁금해하기 마련인데 하연은 그런 것이 없었어. 오히려 기억이 사라진 뒤가 더 편안한 표정이었지. 그런 그녀에게 과거의 모험을 계속 하자고 한다면 과연 들을까?" "하지만, 그래도 기억을 찾으려면 모험을 계속 해야......"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리는 로베인을 보며 바토르는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우선 그녀가 과거의 기억을 찾고 싶도록 만들어야지." "어떻게 요?"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지." 태평하게 느껴지는 바토르의 대답에 로베인은 더욱 초조해질 뿐이었다. 이러다가는 언제 하연이 네이브를 사랑하게 되어서 결혼하겠다고 말할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미적거리고 있어야하다니...... 그런 로베인을 보며 바토르가 말했다. "인간이란 스스로에 대해 끊임없이 반문하는 존재이지. 가만히 내버려두면 하연도 곧 자신에 대해 알고 싶어질 거야." 잠시 생각해본 로베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는 기다려 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한창 예기에 열중해 있던 네이브는 하연의 반응이 없자 이상해서 고개를 돌려보았다가 멍하니 딴 생각에 빠져있는 하연의 모습에 씁쓸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하연과 있을 때 온통 하연 이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는데 그녀는 그 이외에도 다른 생각을 할만큼의 마음의 여유가 있다는 것은 그 만큼 그와 그녀의 마음의 차이가 다르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 때 한 선원이 네이브에게 다가와 말했다. "선장님! 아래에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잠깐만 내려와 보시겠습니까?" "알았소." 네이브는 그 선원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하연에게 말했다. "하연, 일이 있어서 난 가보아야겠소. 바닷바람이 차니 하연도 그만 선실로 들어가 쉬도록 하시오." "그래요. 그렇게 해야겠어요." 조용히 속삭이듯 말하는 하연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고 어딘지 피곤해 보였다. 그 모습에 네이브는 혹시 어디 아픈 것은 아닌가 해서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의 뒤에서 재촉하는 선원으로 인해 물어보지도 못하고 몸을 돌려야만 했다. 네이브가 가고도 하연은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그대로 서 있었다. 간밤에는 한잠도 잘 수가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머리를 망치로 내리치고 깨어 부수는 듯한 고통이 밀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아팠던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두려웠다. 기억 속에는 없지만 자신의 몸이 그 고통에 익숙한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누구도 그녀가 아픈 것을 모르는 듯 하지 않은가? '차라리 죽고 싶은 고통이었어. 전의 나는 이런 고통 속에서 어떻게 살아있었던 것일까? 왜 이렇게 아프게 된 것일까?' 너무나 궁금했다. 전의 자신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그런 하연의 눈에 멀리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로베인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 볼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그를 보면 왠지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하곤 했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라면 자신이 아픈 이유를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의 앞에 걸어 가 서긴 했지만 하연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로베인은 하연이 자신의 앞에 서서 한참동안이나 바라만 보고있자 긴장해서 물었다. "왜, 왜 그래?" "저, 우리가 알고 지낸 지 얼마나 되었어요?" "응? 한 일년쯤 되었을 거야. 왜?" "일년이라......" 생각에 잠겨 있는 하연의 모습을 보면서 어색한 기분으로 서 있던 로베인은 드디어 하연이 바토르의 말대로 스스로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희색을 띄며 물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뭐든 물어봐. 다 대답해 줄게, 하연." "그럼......" 도대체 어떤 어려운 질문이기에 저렇게 뜸을 들이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며 로베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기억을 잃기 전에 나는 로베인이 보기에 어떤 사람이었어요? 똑똑했어요? 착했어요? ......건강하고 활발했어요?" "에?" 너무도 평이한 질문에 로베인은 맥이 빠져서 대답했다. 하연의 눈빛에 긷든 초조함은 눈치채지 못한 채. "그럼. 똑똑하고 착...... 착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뭐, 그런 대로 착한 쪽에 속하는 인간이었지.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너를 어둠의 성자라고도 불렀으니까." 하지만 속으로 로베인은 하연과 성자처럼 어울리지 않는 단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건강하고 활발했어요?" 하연이 다시 물었다. "응. 모험에 정신이나가 있을 정도로." 로베인의 대답에 하연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일년이나 같이 지냈던 동료조차도 모르고 있는 병이라니...... "그렇군요." 맥이 빠진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하연은 발길을 돌렸다. 그런 하연의 등뒤에 대고 로베인이 무언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하연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선실로 돌아온 하연은 그대로 침대에 들어 누어버렸다. 머리 속에 어둠이 꽉 들어차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과거의 자신은 무슨 마음으로 병을 숨기고 살았던 것일까? 남에게 숨겨야 할만큼 위중한 병이었던 것일까? 끊임없는 의문들이 머리 속을 맴돌면서 그녀로 하여금 절망에 빠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일을 마치고 올라온 네이브는 곧장 자신의 선실로 들어가려다가 하연과 헤어질 때 그녀의 낯빛이 좋지 않았던 것이 떠올라 그녀의 선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막 선실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선실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흐윽! 아, 아악! 으......" 그 소리에 놀란 네이브는 문을 벌컥 열어제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그의 시야에 침대 위에서 온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고 있는 하연의 모습이 보였다. "하연, 무슨 일이오? 어디가 아픈 거요?" 창백해진 얼굴로 네이브는 다급히 하연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나 하연에게는 네이브의 말에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으아아악! 하악!" 뇌가 잘게잘게 찢겨 나가는 느낌이었다. "하연!" 어쩔 줄 몰라하던 네이브는 그런 대로 치료술에 능한 선원인 마로위를 떠올리고 그를 부르러 나가려는데 하연이 그런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가, 가지마!" "......하연?" "아파. 너무 아파. ......죽을 것만 같아, 하윽! 으으...... 나 좀 살려줘. 누구 나 좀...... 허억!" 눈을 하얗게 치켜 뜬 채 기절할 듯이 보이는 하연의 모습에 네이브는 심장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차크가 아플 때도 이처럼 불안하지는 않았었는데...... 네이브는 하연의 손을 꽉 움켜잡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괜찮아, 하연. 아프지 않을 거야. 곧 괜찮아 질 거야. 내가, 내가 아프지 않게...... 꼭 아프지 않게 해 줄게. 어디에도 널 보내지 않을 거니까." 차츰 통증이 가라앉는 듯 호흡이 가라앉히는 하연을 보면서 네이브는 그제야 자신의 심장이 다시 뛰는 것과 같은 안도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하연, 이제 괜찮아?" 하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런 하연은 지켜보며 네이브는 망설이다가 조용히 노래를 불러주었다. "잘 자라 우리 아가. 앞뜰과 뒷동산에 새들도 아가양도 다들 자는데 달님은 영창으로 은구슬 금 구슬을 보내주는 이 한밤. 잘 자라 우리 아가. 잘 자거라." 노래가 끝나자 선실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네이브는 민망해서 하연의 얼굴을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녀를 잡은 손만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하연이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한번만 더 불러줄래요? 왠지 귀에 익숙한 게 마음이 편안해지네요." "좋아, 얼마든지." 세네 번 노래를 불렀을까? 어느새 하연은 잠이 들어 있었다. 잠든 하연의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던 네이브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밖은 어느덧 가란의 세상이었다. 그 어둠 속에 묻히듯 조용히 선 네이브는 생전 처음으로 신에게 기도했다. 제발 자신에게 하연을 구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그러다 문뜩 하연이 찾으러 간다는 신의 유산이 떠올랐다. 아스탄의 말대로 라면 그것은 신화 속에 나오는 엘레나의 눈물이 아니었던가? '그래, 엘레나의 눈물이라면 하연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아스탄이 엘레나의 눈물에 대해 말했을 때 네이브는 전혀 그것에 대해 믿지 않았었다. 존재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엘레나의 눈물은 존재해야 했고 그는 그것을 찾을 생각이었다. 그것만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으니까. 그러자 다급해진 네이브는 서둘러 도구를 찾아들고 배를 수선하기 시작했다. 한시라도 빨리 배를 수선해야 하라마르트 산으로 갈 수 있고 하라마르트 산으로 가야 신의 유산인 엘레나의 눈물을 찾을 수 있었으니까. '반드시 내가 널 아프지 않게 해줄게, 하연. 반드시 내가 널......' 네이브의 독촉에 배의 수리는 생각보다 일찍 끝날 수 있었고 수리가 끝나자 배는 즉시 하라마르트 산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속도를 높인다고 했지만 암초와 거센 급류로 인해 그들이 벨라스카 해를 통과한 것은 이틀이나 훨씬 지난 후였다. 배가 해안에 닿자 하연일행과 네이브, 그리고 네이브가 특별히 지정한 선원인 마로위가 내렸다. 글렌은 네이브가 하연을 말리기는커녕 그녀와 함께 모험을 하겠다는 말에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정말 가려는 거냐?" "그랑디아의 일은 네가 충분히 처리할 수 있잖아?" 네이브는 이것저것 챙긴 짐을 하연을 제외한 일행들에게 나누어 들게 하며 말했다. "그런 그렇게 한다 치고 다른 산재해 있는 일들은? 신의 유산인지 뭔지를 찾는 일이 하루 이틀에 끝나는 일도 아니고 말이야." 답답한 듯 외치는 글렌의 말에 네이브는 간단히 대답해 주었다. "집사인 아스탄한테 모두 처리하라고 해." "......그러지." 이를 갈 듯 말한 글렌은 곧 배로 올라가 출항을 소리 높여 외쳤다. 배가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본 후 네이브는 하연일행들에게 말했다. "자, 갑시다!" 각자의 짐을 챙겨지고 하라마르트 산을 오르려는 일행들을 보며 하연이 머뭇거리면서 물었다. "어디로 요?" "당연히 신의 유산을 찾아서지." 바토르, 로베인, 네이브가 동시에 말했다. 그 말에 하연은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또 물었다. "그건 찾아서 뭐하게요?" 이에 로베인과 네이브가 또 다시 동시에 대답했다. "하연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야." "하연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지." 그리고는 그들은 놀라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연이 병이라니......?" "기억을 되찾는다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만 보고 있던 그들은 일제히 하연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무슨 말입니까?" 하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로서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오히려 되묻고 싶을 정도였던 것이다. 도대체 그 신의 유산이 무엇이 길래 자신의 기억을 되찾는 것은 물론이고 병을 고쳐준다는 말인가? 그 모습에 네이브와 로베인이 서로를 다시 쳐다보았다. 로베인이 물었다. "하연의 병이라니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하연이 어디 아프기라도 하단 말입니까?" 네이브는 그 말에 속으로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알기에 로베인은 하연의 동료인데 어떻게 그녀에게 병이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어쩌면 하연이 그에게 자신의 병을 숨겼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자신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는 여인이었으니까. "그 동안 하연이 자신의 병을 숨기고 있어서 무슨 병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소. 하지만 엘레나의 눈물을 찾는다면 그것이 어떤 병이든 씻은 듯이 나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그러나 뒤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로베인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하연을 보고 있었다. 하연에게 병이 있었다니...... '그래서였나? 언제나 내 곁을 떠날 사람처럼 굴었던 것은?' 솔직히 그런 기색을 하연이 들어낼 때마다 로베인은 그녀가 야속하고 불안했었다. 때문에 그녀의 방문 앞을 늘 지키고 서 있었던 것이었다. 그가 자고 있는 사이에 그녀가 눈앞에서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그녀가 지닌 병 때문이었다니......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는 것이라면 그 운명에 순응하며 자신 또한 죽어서 그녀를 만날 날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니까. 그런 생각들로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바뀌는 로베인과는 다르게 네이브의 표정은 갈수록 복잡해져만 갔다. 미쳐 엘레나의 눈물이 하연의 기억까지 되살려 놓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이야 기억이 없어서 자신의 말을 믿고 자신을 의지하고 있지만 기억을 되찾는다면 자립심이 강한 하연은 그를 떠날 것이 분명했다. 또 다시 그 어떤 모험을 찾아서. 그런 생각이 들자 차라리 이대로 병이 있는 채 자신의 곁에 두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병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하연의 모습 또한 보고 있을 자신이 없는 네이브였다. 바토르는 네이브가 무언가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알기로 하연의 고통은 병으로 인한 것이 아닌 카이람님의 힘이지 아닌가? 그러나 그 오해를 바로 잡아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알아보았자 인간인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 때 네이브가 조금 전의 그 결의에 찬 목소리가 아닌 기운이 빠진 듯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어서 출발하도록 합시다. 여기서 미적거리다가는 마물 사냥꾼들의 먹이가 되기 십상입니다." 하라마르트 산은 예로부터 마의 산 다음으로 마물이 많은 곳이기에 마물헌터들이 많이 찾는 산이었다. 때문에 식량이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너무 오래 산에 머무르고 만 헌터들은 갓 산에 오르는 모험가들이나 다른 헌터들의 식량을 훔쳐가기도 했다. 따라서 그런 헌터들의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산을 오르려던 네이브의 발길은 하연의 다음 말로 인해 멈추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길은 아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몰라 의아해하는 네이브의 눈을 보며 하연이 분명한 어조로 설명했다. "저 높고 험한 산 어디로 가야 신의 유산이 있는지 길을 알고 있냐고요." "아!" 그제야 자신이 길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은 네이브는 스스로의 덤벙거림에 놀라서 눈이 커지면서 말했다. "지도가 하연에게 있었지. 지도 좀 이리 줘보시오. 어디로 가야 할지 알아보게." 네이브의 재촉에 하연이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려는데 바토르가 말했다. "지도를 봐봐야 소용이 없다. 그 지도는 벌써 예전에 사라진 대륙의 지형도이니까."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오?" 네이브가 퉁명스럽게 묻자 바토르가 말했다. "그냥 무작정 올라가 보는 거지,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바토르는 대충 어디쯤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네이브가 속타하는 모습을 보려고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그 말에 그 때까지 잠자코 그들의 말을 듣고만 있던 선원 마로위가 말했다. "하라마르트 산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헌터를 고용해 신의 유산이 있을만한 곳 몇 군데를 우선적으로 뒤져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모두 좋은 생각이라고 마로위의 의견에 찬성을 표했다. 따라서 그들은 우선 마물 헌터를 찾아보기로 결정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이 채 마물헌터를 찾아다니기도 전에 그들의 눈앞에 한 마물헌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한 일주일은 굶은 듯한 괭한 모습으로. "먹을 것을 내 놓아라!" 다짜고짜 말하며 마물헌터는 손에 쥔 검에 힘을 주었다. 여차하면 힘으로라도 음식을 빼앗겠다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마물헌터는 힘들여 싸우지 않아도 되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하연이 일행들의 가방을 뒤져 그에게 먹을 것을 건네주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주니 허겁지겁 먹기는 했지만 마물 헌터인 에드릭은 의심의 눈초리를 그들에게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라마르트 산에 오르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식량을 지키는 일이다. 그런데 그 식량을 이렇게 달라는 말 한마디에 서슴없이 건네주다니 미친 자들이거나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하연은 허겁지겁 먹어대고 있는 마물헌터가 어느 정도 허기를 채울 때를 기다렸다가 물었다. "며칠 동안이나 굶었어요?" "사흘." 에드릭은 음식을 입안 가득 문 채로 우물거리며 대답해주었다. "하라마르트 산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어요?" "한달." "그럼, 산의 지리에 대해서 잘 알겠네요?" "물론." 음식을 삼키며 에드릭이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하연은 잘됐다는 듯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잘 안대요. 이 분에게 안내를 부탁하는 것이 어때요?" 일행들은 하연이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기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릭은 그녀의 말에 이들이 자신한테 산의 안내를 부탁할 생각으로 식량을 나누어 준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제안은 그에게도 나쁘지만은 않은 제안이었다. 어차피 마물을 사냥하기 위해서는 산을 돌아다녀야 했고 그 길에 이들을 안내해주며 식량을 나누어 받는다면 그에게도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드릭은 선뜻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어둠의 사제가 분명한 여인과 해적이나 용병들로 보이는 이들 일행들의 모습에서 무언가 위험한 일에 끼어 들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헌터들 사이에서 하라마르트 산의 제 일 금지구역이자 푸른 계곡이라고 불리는 곳 주위를 지나던 자들이 간간이 실종되거나 살해당한 채 발견되는 사건이 벌어져서 분위기가 어수선한데 이들이 그곳으로 안내해 달라고 할지 누가 알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며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는데 이를 눈치챈 바토르가 성큼성큼 에드릭의 팔을 잡아끌며 말하는 것이었다. "자, 다 먹었으면 어서 안내해라! 먹은 값은 해야지. 설마 떼어먹을 생각은 아니겠지?" "자, 잠깐. 아직 다 안 먹었다고." 에드릭은 어떻게든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에 힘을 주고 버텼으나 믿어지지 않게도 너무나 간단히 그의 몸은 바토르의 손에 이끌려 끌려가고 있었다. 이에 도저히 힘으로는 당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깨달은 에드릭은 자신에게 친절하게 이것저것 물어봐 주었던 여인인 하연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제발, 사제님! 나 좀 살려주시오. 난 절대 푸른 계곡으로는 갈 수가 없단 말이오?" "푸른 계곡?" 하연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그에게 묻자 에드릭은 속으로 아차 싶었다. 왠지 이들에게 괜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말을 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그런 생각은 맞아 떨어졌다. 그를 잡아끌던 바토르가 걸음을 멈추며 물었던 것이다. "그곳이 이 하라마르트 산에서 가장 신비로운 곳인가?" 그 물음에 에드릭은 아니라는 거짓말을 하고 싶었지만 바토르의 눈을 보자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눈동자 속에 긷든 광폭함과 무시무시한 살기는 도저히 인간인 그로서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럼, 푸른 계곡으로 가자!" 바토르의 입에서 그들의 목적지를 확정짓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에드릭은 참담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의 인생은 여기에서 끝났다고 확신한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굶어죽고 마는 건데.......' 마물헌터인 에드릭의 안내로 산을 오르면서 로베인과 네이브는 시종 하연의 안색을 살피며 걱정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거친 호흡과 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보아 많이 힘들어하는 것이 분명했지만 산에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벌써부터 바토르에게 쉬어가자고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로베인과 네이브의 안타까운 시선을 눈치챈 하연은 힘들었지만 그들에게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여 주었다. 그 모습에 로베인은 순간 하연이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잊을 정도였다. 기억을 잃기 전 언제나 웃고 있던 하연의 그 얼굴 그대로였으니까. 그리고 깨달을 수 있었다. 언제나 저렇게 아팠으면서도 그들에게는 웃는 모습을 보여왔었다는 것을. 그러자 로베인은 가슴이 아파서 차마 하연의 얼굴을 쳐다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자신의 시선을 외면하는 로베인의 모습에 하연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너무 힘들어서 더 이상 신경 쓸 수가 없었다. 호흡이 가빠오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이 그냥 이대로 주저앉고만 싶었던 것이다. 이에 결국 얼마 가지 못해서 하연은 바토르에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바토르, 쉬었다가 가요. 너무 힘들어요." 순간 바토르는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그 자리에 멈추어 서며 하연을 돌아보았다. 하연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곧 그녀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서 걷는 에드릭에게 말했다. "쉬었다 간다." 그 말에 에드릭은 얼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로서도 죽을 자리나 마찬가지인 푸른 계곡에 빨리 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창백한 안색으로 쓰러지듯 자리에 주저앉는 하연과 그녀를 부축하며 편안히 누울만한 자리를 만들어 주고 있는 네이브를 보며 바토르에게 물었다. "체력도 상당히 약해 보이는데 왜 무리하게 산에 오르게 하는 거요? 이 산은 여자의 몸으로 오를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이오? 이러다가 마물이라도 나타나보시오. 사제의 저주가 통할 리도 없고 마물의 먹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일거요." 그러나 바토르는 그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분명 지금의 하연은 기억을 잃기 전과는 어딘가가 달랐는데 어디가 다른 것인지 잘 모르겠던 것이다. 그 때 네이브가 하연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하연, 좀 괜찮습니까?" 하연은 투정부리듯 말했다. "......아니오. 꼼짝도 못할 것 같아요." 그러자 네이브가 하연의 팔다리를 주물러 주기 시작했고 로베인은 불쾌한 듯 그런 네이브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에 바토르는 무엇이 기억을 잃기 전과 다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예전과는 다르게 그녀는 괴로우면 괴롭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변화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찌되었든 계속 산을 올라가야 하기에 바토르는 하연이 좀 더 편히 오를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야만 했다. 쉬운 방법은 비질리스크를 소환하는 방법이었는데 그러자면 하연과 일행들이 놀랄 것 같아서 그 방법은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문뜩 바토르는 보다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안고 가면 되는 문제였던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희희낙락해진 바토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왕인 나한테는 별로 힘들 것도 없는 일이지, 크크큭! 게다가 저 빌어먹을 네이브 녀석의 인상 찌푸린 얼굴도 구경할 수 있고.' 그런데 그 때였다. 크륵! 크륵! 갑자기 나타난 오크떼가 그들을 포위하며 다가서고 있었다. 그러나 하연의 일행들 중 그녀를 제외한 누구도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귀찮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들은 등뒤로 하연을 보호한 채로 각기 검을 빼어들었을 뿐이었다. 파앗! "......크르륵!" "케엑!" 그들이 검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어김없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오크들을 보며 하연은 멍하니 넋을 잃었다. 기억을 잃기 전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어찌되었든 처음 보는 오크는 인간의 형상은 아니었지만 인간과 비슷한 동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동물들이 눈앞에서 처참하게 죽어가고 있었으니...... 무언가의 죽음을 본다는 것조차 처음이기 때문일까? 하연은 몸이 마구 떨리고 두려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 아...... 으아아악!" 갑작스런 비명소리에 놀란 하연의 일행들은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쓰러지고 있는 하연의 모습에 그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이 정도의 광경에 하연이 기절할 줄은 아무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연을 모르는 에드릭은 벌써 짐작했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러니까 이런 위험한 곳에 여자를 데리고 오는 것들이 정신이 나간 것이지, 저 불쌍한 여자가 무슨 죄가 있겠어?" 일행들은 눈앞의 오크조차 잊은 채 쓰러진 하연에게 몰려들었다. 때문에 에드릭은 혼자서 그 오크들을 상대해야 했다. 기절해 있는 하연을 지켜보며 네이브와 로베인, 바토르는 속으로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연의 기억을 되찾아 주고야 말겠다고. 하연이 깨어났을 때 그녀는 누군가의 품에 안겨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순간 하연은 자신은 모르게 한 존재의 이름을 입밖에 소리내어 말했다. "카이람!" 그러자 하연을 안고있던 자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그가 물었다. "기억이 난 건가, 하연?" "......바토르?" "그래, 나다." 하연은 바토르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스락거렸지만 바토르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몸부림치던 것을 멈추고 하연이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그 말에 바토르는 아직 하연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기억이 돌아왔다면 그한테 높인 말을 쓰지는 않았을 테니까. "쓰러졌었다. 기억나지 않아?" 그제야 일행들이 괴물들을 죽이던 광경과 자신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었던 일들을 떠올린 하연은 두려움에 다시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품안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하연을 느낀 바토르는 왠지 화가 치미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하연이 이렇게 두려움에 떠는 것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결국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하고 말았다. "전의 하연은 이런 일로 떨지 않았다. 설령 마신의 앞에서라도 당당하게 서서 끝까지 할말은 모두 했단 말이다." 격하게 흥분한 듯 내뱉는 바토르의 말에 하연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저 멍하니 듣고 있을 뿐. "울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울 때도 크게 웃을 줄 알았고 누구에게도 기대는 말은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강하고 누구보다도......" 그러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바토르의 음성은 점점 작아지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자 하연이 속삭이듯 물었다. "그리고요? 또 하연은 어땠는데요?"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결코 물러서거나 피하지 않았다. 자신의 일을 남에게 미루지도 않았고." "난 모르겠어요. 기억이 나지 않는 걸요. 바토르가 말하는 하연이라는 여인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아요." 순간 말문이 막힌 바토르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나직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 그렇겠지." 바토르의 품에서 빠져 나온 하연은 다른 일행들이 모두 그녀를 보호하듯 그녀의 침낭 주위를 빙 둘러싼 모양으로 각자의 침낭을 펼쳐놓은 채 잠이 들어 있고 바토르만이 깨어서 불침번을 서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뿐인 밤이었지만 하연은 어둠이 두렵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래된 친구인 냥 익숙한 어둠을 느끼며 하연은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안으며 웅크리고 앉았다. 이렇게 자신은 두려웠는데 정말 과거의 자신은 두렵지 않았었던 것일까? 기억을 되찾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연은 빨리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 모두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지금의 자신이 아닌 과거의 하연이었으니까. 과거의 하연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 때였다. 바토르가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안으며 말했다. "하연, 그만 자라. 내일 또 강행군해야 되는데 벌써 지치면 안되잖아." "그래요. 여기서 지치고 물러서면 안되겠지요? 기억을 되찾아서 하루라도 빨리 여러분들이 사랑했던 하연으로 돌아가야 되니까." "하연, 그건......!" 그런 뜻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바토르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의 내심은 하연의 말 그대로였으니까. 바토르가 아무 말이 없자 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침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잠을 청하려고 노력했다.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하연은 울지 않았다잖아. 그러니까 나도 울지 않아. 울지 않을 거야.' 다음 날. 일찍 일어난 하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모두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러자 모두 놀라서 하연을 쳐다보며 물었다. "괜찮아, 하연?" "괜찮소?" 하연은 방긋 웃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배고파요. 우리 빨리 밥 먹어요." 그 말에 모두 기뻐하며 서둘러 음식을 꺼내 놓았다. 어제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하연이 처음으로 마물이 죽는 광경을 보았으니 좀처럼 충격에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이렇게 멀쩡한 모습을 보이자 기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침을 다 먹은 그들은 다시 짐을 챙겨 산으로 오를 준비를 했다. 그 때 바토르가 하연에게 말했다. "업혀라, 하연. 이제부터는 내가 업고 갈게." 순간 네이브와 로베인이 경직된 표정으로 바토르를 보았다. 하연을 업고 가겠다니...... 그러나 다행이 하연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거절했다. "싫어요. 걸어 갈거예요. 이 모험은 나를 위한 것이니까 내가 직접 내 발로 걸어가겠어요." 그러자 바토르는 어제 자신이 하연에 대해서 했던 말들을 떠올리고는 그 말에 하연이 자극을 받은 것이라고 짐작하고는 당황해서 말했다. "하연! 저 산을 네가 어떻게 걸어서 올라간다는 거야? 빨리 업혀! 기억을 잃기 전의 하연이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업혀서 갔을 거다. 아니, 오히려 나 괴롭히려고 더 업혀가려고 했을걸. 그러니 사양하지 말고 업혀라." 하연은 그 말에 피식 웃으며 물었다. "하연이 바토르를 많이 괴롭혔어요?" "훗! 아주 많이 괴롭혔지. 날 부려먹지 못해 안달이 난 인간이었거든." 하연이 마치 자신을 남인 것처럼 예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바토르는 그 점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억에 없는 자신이란 어차피 남과 같은 존재일 테니까. 결국 하연을 업은 바토르와 일행들은 에드릭의 안내로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렇게 산 속으로 들어갔을까? 며칠 째 가도 가도 끝이 없어 보이는 숲을 헤치고 들어갔지만 그들은 좀처럼 푸른 계곡으로 보이는 곳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에 그들은 의혹이 어린 시선으로 에드릭을 바라보았으나 에드릭은 모르는 척 딴청을 하며 휘파람을 부는 것이었다. 그러자 네이브가 한기가 불어닥칠 듯한 차가운 눈으로 에드릭을 쏘아보며 말했다. "내일까지다! 내일까지 푸른 계곡에 도착하지 못하면 너를 결코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던 그였다. 왜 자신이 아닌 저 자식이 하연을 업고 가는 것이란 말인가? 그것만으로도 분통이 터질 일인데 길 안내를 하는 놈까지 시간을 지체하면서 바토르가 하연을 더 오래 업고 가도록 만들고 있었으니...... 에드릭은 네이브의 눈초리에 찔끔하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이 놈의 일행들은 왜 이렇게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놈들뿐인 거야?' 솔직히 그는 푸른 계곡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부러 우회하면서 푸른 계곡과는 좀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하지만 나름대로 하라마르트 산에서도 가장 위험한 곳들 중에 하나인 절망의 땅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좀 고생을 하면 이 하라마르트 산이 지긋지긋 해서라도 그냥 떠날 거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들은 하라마르트 산이 초행이었으니 그곳이 푸른 계곡인지 절망의 땅인지 알아채지 못할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따라서 절대 그들이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에드릭은 큰 소리를 쳤다. "무슨 소리요? 내일까지라니...... 이래서 초행자들 하고는 말이 통하지를 않는다니까. 하라마르트 산이 뭐 당신네들 뒷산 정도 되는 줄 아시오? 혼 대륙에서 제일 높은 산이 바로 이 하라마르트 산이란 말이오. 게다가 푸른 계곡은 하라마르트 산에게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곳이고. 그런데 어떻게 내일까지 푸른 계곡에 도착하란 말이오? 날아서라도 가란 말이오?" 그 말에 네이브는 이성적으로는 에드릭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짜증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런 그의 짜증을 더할 생각인 것일까? 로베인이 바토르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바토르, 힘들지 않아요? 좀 쉬도록 하세요. 이제부터는 제가 하연을 업고 갈게요." 그러자 바토르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아니, 하연이 가벼워서 별로 힘들지 않다. 이대로 한 백년은 업고 가도 문제없을 거다." 그러면서 바토르는 짜증으로 인해 한층 무뚝뚝하고 차가워진 네이브의 표정과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로베인의 표정을 즐기고 있었다. 또한 마로위는 그런 일행들의 기분을 가장 민감하게 느끼며 왜 자신이 이 일행 속에 끼여야 했는지 그 운명을 탓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4권 끝 유지 판타지 장편소설 마신소환사5 대지의 여신 완결 제30장 절망의 땅 "여기가 바로 푸른 계곡입니다." 시큰둥하게 들리는 에드릭의 말을 무시한 채 하연 일행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주위 를 둘러보았다. 발 디딜 틈도 없응ㄹ 만큼 빽빽이 그들의 키보다 높이 자란 풀들과 까마득히 올려다보아 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라 있는 나무들. 그아래에 서자 얽히고 설킨 나뭇가지들 로 인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또한 땅 위에는 갖가지 화사한 색깔의 아름다운 꽃 들이 무수히 많이 피어 있었다. 역시 하라마르트 산에서 가장 신비하다는 푸른 계곡이라고 불릴 만한 곳이라고 생각하며 에드릭을 제외한 일행들은 탄성을 터뜨렸다. 그 꽃들 중에 한 송이 꺾으려고 하연이 손을 내밀고 있을 때였다. "손대지 마십시오!" 묵묵히 네이브의 뒤를 따르고만 있던 마로위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하얗게 질 린 얼굴로 하연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순간 그 소리에 놀라 내밀어진 손을 멈춘 하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왜, 왜 그래요?" "그 꽃들은 마화임이 분명합니다.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 "마화요?" 모두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마로위를 바라보자 그는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했 다. "이곳의 지형을 자세히 보십시오. 이상하지 않습니까? 햇살도 비치지 않는 이런 음습한 곳에 이처럼 화사한 꽃들이 피어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일행들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선 하연은 머뭇거리며 마로위에게 물었다. "마화란 것이 무엇인데 그래요?" 그말에 마로위를 대신해 바토르가 설명해 주었다. "동물들 중에 마물이 있는 것처럼 식물들 사이에는 마화가 있다.이 마와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어떤 것은 손만 대어도 독에 의해 녹아내리거나 잡아먹히기도 하고, 또한 어떤 것은 환상에 빠지게 만드는 등 위험하기 그지없는 것들이다." 하연은 놀라서 입을 벌린 채 물었다. "그럼, 여기 피어 있는 이 많은 꽃들이 모두 마화란 말이에요?" "그런 것이지." 바토르는 얼굴을 굳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머리 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그 혼자라면 충분히 저 푸른 계곡 속으로 걸어 들어가도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다른 일행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마왕인 그로서도 저토록 많이 피어 있는 마화들의 능력을 모두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다른 일행들을, 특히 하연을 보호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에드릭은 그들의 말을 통해 왜 이곳이 절망의 땅이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수많은 헌터들이 이곳으로 들어가 죽거나 미쳐서 나오기에 절망의 땅이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그 정 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 모두 포기하고 돌 아가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순간 불길한 감탄사가 뒤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아니, 저것은 만드라고라스가 아닙니까? 그리고 저기 언뜻 보이는 것은 사약으로 쓰이는 햄록이고.... 아! 저쪽에 보이는 저것은 사랑의 미약이라는 바곳이며 그주위에 있는 것들은 악마의 파슬리군요. 세상에! 이렇게 귀한 독재들이 널려 있다니, 한 몇 년 이곳에 살면서 이 곳의 시굴들을 연구해 보고 싶군요!" 흥분된 머로위의 말이었다. 그러자 기가 막힌 일행들은 모두 마로위를 노려보듯 쳐다보았고 이에 마로위는 어색한 헛기 침과 함께 중얼거리듯 말했다. "마화들 때문에라도 푸른 계곡으로 들어가는 것은 매우 위 험한 일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에드릭의 의도대로 포기하고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하려던 마로위는 그랬다가는 금 방이라도 그를 때려죽일 듯힌 네이브와 로베인, 그리고 바토르의 눈초리에 얼른 말을 바꾸 지 않을 수 없었다. "험, 여기서 무언가 좋은 방법을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머로위에게서 시선을 거둔 네이브와 로베인, 바토르는 각자로 들어가 수 있을지를 .... 그런 일행들을 보며 하연은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모두 그녀의 병을 고치지 위해 저 위험한 푸른 계곡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하연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 여기 말고 다른 곳부터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요? 꼭 여기에 우리가 찾는 그 신의 유산이 있다고는 할 수 없잖아요?" 그말에 로베인과 네이브는 언뜻 마음이 움직인 듯한 표정이었지만 바토르는 아니었다. 그 는 전에 하연이 보여준 지도르 통해서 그 신의 유산이 저 푸른 계곡안의 어디쯤에엔가에 있 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머왕인 그도 여기가 에드릭이 말한 진짜 푸른 계 곡이 아닌 다른 곳으로 유인해 내기 위한 곳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지만 고대의 지형도와 현재의 하라마르트 산의 지형을 비교해 볼 때 이 근처가 틀림없이 지도에 표시된 신의 유산 이 위치한 곳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때문에 바토르는 강경하게 주장했다. "아니, 우리는 들어간다." 단호한 바토르의 말에 에드릭과 하연의 얼굴은 해쓱하게 변해 버렸고 로베인과 네이브는 다시금 각오르 다지는 표정이었다. 그 어떤 위험한 곳일지라도 하연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둘어가지 못할 곳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들이었다. 그러자 마로위가 조심스럽게 바토르의 눈 치를 살피며 물었다. ."....어떻게요?" 문제는 바로 그것이 아니었던가? 저 마화들이 가득한 곳을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는 것. 그러나 바토르 또한 이렇다 할 명확한 대책은 없었던 듯 버럭 화를 내며 내뱉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순간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마치 떼쓰는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갑자기 로베인이 손벽을 치며 외쳤다. "맞다. 그러면 되겠구나!" "뭔데?" 바토르가 급히 다가와 묻자 로베인이 빠르게 말했다. "식물들은 블에 약하니까 불에 태우면 되지 않을 까?" "그래! 어째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지?" 자신이 불의 마왕이면서도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의아할 정도인 바토르였다. "태워 버리면 될 것을?" 독에도 불은 상극이나 마찬가지가 아니었던가? 그러면서 기특하다는 시선으로 로베인을 바라보자 로베인은 약간 낯을 붉히면서 고백했다. "실은 이럴 때 하연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생각하니까 그 방법이 떠오르더라고." "아!" 네이브와 바토르는 무의식 중에 탄성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연이라면 분면 그런 생각을 떠올렸을 거라고 그들도 생각한 것이다. 그런 그들을 보며 네드릭과 마로위는 새삼 스러운 시선으로 하연을 보았고 그런 모습들로 인해 하연은 가슴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분명 여기 있는데 그들의 눈에는 그녀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으니까. 서서히 바토르가 일으킨 블길이 풀들과 마화들을 태우면서 절망의 땅 안쪽으로 번져 들어 갔다. 그러자 마화들이 불타면서 끔직한 비명 소리가 하늘 높이 올려 퍼졌다. 끼익! 크아아아악! 그 소리에 일행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상체를 비틀며 귀를 틀어막았다. 고막이 터져 나갈 것 같았던 것이다. 그때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네이브가 의문이 가득한 시선으로 바토 르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기사가 아니라 마법사였습니까?" "하핫! 마법사가 아니라 마....!" 일행들의 집준되는 시선에 의기양양해진 바토르는 마법사가 아닌 마왕이라고 밝히려다가 기억을 잃은 하연이 자신의 정체를 알면 그를 두려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버무리듯 말 하고 말았다. "...마검사야, 으하하핫!" 그러나 일행들은 그 말에도 충분히 놀란 시선으로 바토르를 바라보았다. 마검사가 무엇인다? 마법과 검을 동시에 펼칠 수 있는 자를 이르는 말이 아니었던다? 하 지만 마법을 펼치는 마나와 검술을 펼치는 기는 서로 반발하기 때문에 이 마법과 검을 동 시에 이룬 자는 혼 대륙의 역사를 통틀어서도 세 사람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토르가 바로 그마검사라니... 그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마검사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르는 하연은 그저 다른 사람들이 놀라니까 어색하게 놀라는 시늉을 할 뿐이었다. 혼자만이 바보가 된 듯한 기분으로.그런 그들의 눈에 산을 온통 태울 듯한 불길이 서서히 가라앉아 가는 것이 보였다. '이럴 수가 ! 내 불길이 꺼져 가다니... 마법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았단 말인가?" 그러나 그런 버토르의 우려는 마로위의 음 말로 인해 깨끗이 지워져 버렸다. "이런! 저 안쪽에 늪지대가 있는 모양이군요." 늪지? 그 말에 바토르는 다시금 자신만만한 시색을 회복한 채 말했다. "그럼 그렇지. 내 불은 불 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지화나 마찬가지라고. 그런데 이렇게 쉽게 꺼질 리 없지." "그렇습니다. 마법의 불길이 그렇게 쉽게 가라앉을 리가 없지요. 아무래도 늪지대가 가로막 혀 더 이상 타오르지 못하고 꺼진 것 같습니다." 마로위의 조용한 설명에 바토르는 그가 무척 마음에 든 듯 그의 어깨를 부서뜨리려는 것같 이 세게 내려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크하하하! 맞는 말이야! 맞는 말이고 말고." 다른 사람들은 바토르의 그런 잘난 척하는 모습에 은근히 눈살을 찌푸렸으나 하연은 곤혹 스런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바로 조금 전에 바토르가 한 지화라는 말 때문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가슴이 심 하게 두근거리며 자신이 무언가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머리만 아플 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허탈한 표정으로 그녀가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있자 로베인이 불안한 표정으로 그녀 에게 물었다. "왜 그래, 하연? 어디가 아픈 거야?" "예? 아니에요. 그저 무언가 떠오를 듯하다가 떠오르지 않아서요."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띠며 말하는 하연의 모습에 로베인은 안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는 서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하는 존댓말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그녀의 반말이 자신을 존중해 주지 않 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반말이 자신에 대한 친근감의 표시였다는 것을. 때문에 로베인은 하연에게 요구했다. 지금의 그녀에게는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하연, 말놔. 우리는 동료잖아." "아? 아, 네." 대답은 했지만 하연의 표정은 로베인의 생각대로 그렇게 밝지 못했다. 이에 로베인은 한숨 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불길이 가라앉자 그들은 안쪽으로 길게 만들어진 불에 그슬려진 길 을 볼수 있었다. 바토르가 먼저 그길에 발을 떼어놓으며 말했다. "내가 지나가고 난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아무 이상이 없으면 그때 지나오도록 해 라!" 그러자 다른 일행들은 모두 긴장한 얼굴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는 길을 자청해서 앞서 걸어가는 그의 용기에 감탄하면서. 천천히 걸어가면서 바토르는 세심하게 주위를 살폈다. 마화들은 대부분 생명력이 강해서 사 막에서조차 그 꽃을 피울 정도였다. 때문에 보통 마화가 가득한 곳에서는 나무들도 양분을 빼앗겨 잘 자라지 못하기 마련인데 이곳의 나무들은 너무 울창하고 크게 자라 있었다. 그래 서 바토르로서는 더욱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일행들이라면 몰라 도 하연이 다치면 큰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꽤 사간이 지난 뒤에도 아무 일이 없자 바토 르는 자신이 너무 소심했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고는 뒤로 돌아 일행들에게 말했다. "안전한 것 같다. 걸어와라.!" 그런데 그말이 막 끝나는 순간이었다. 파앗! 갑자기 땅속에서 굵은 가시 덩글 줄기가 바토르의 발 밑에서 빠르게 솟아오르더니 그의 온 몸을 친친 감아 돌아가기 시작했다. "윽!" 덩굴 줄기의 가시가 몸을 뚫고 들어와 그 고통에 미약한 신음을 내뱉은 바토르는 곧 온몸에 서 마기를 뿜어내어 파고들어 오는 가시를 몸 밖으로 밀어애고는 그줄기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젠장, 마화의 생명력리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줄이야...." 그는 자신의 마력으로 불태운 마화들이 다시 살아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본 네이브의 눈빛은 서서히 차갑게 가라앉아 갔다. 바토르의 정체가 새삼 의심스러 워졌기 때문이다, 비록 그 자신은 마법을 펼치자 못하지만 대륙 제일의 마법사인 아스탄을 집사로 두고 있는 그였다. 따라서 마법에 대한 기초 상식만큼은 그들 중 누구보다도 풍부했 다. 때문에 그는 한눈에 바토르가 마화를 불태운 것이 평범한 마법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몸안에서 그처럼 손쉽게 마력을 뿜어낼 수 있는 마법은 인간들 사이에서는 존재 하지 않았으니까. 또한 바토르의 몸속 깊숙이 박혀 들어간 가시를 분명히 보았음에는 불구하고 그의 몸에는 가시가 박혔던 흔적조차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런 의심이 가득한 네이브의 시선이나 놀라고 있는 다른 일행들의 시선들은 바토르 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순간 그는 분노에 휩싸여 오직 일순간이나마 그에게 고통을 준 마화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이다. 화르르륵! 그에 따라 그의 주위로 불기둥이 거대한 회오리를 일으키며 높이 치솟아올랐다. 주위의 모 든 것들을 그 회오리 속으로 끌어들이면서. 하연 일행들은 그 광경에 공포에 휩싸인 채 다 급히 뒤로 도망쳤다. 그 엄청난 불길에 휩쓸려 그들마져도 불타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간신히 안전한 지역으로 피한 그들은 넋을 잃은 듯한 표정으로 바 토르가 일으키는 파괴의 현장을 지켜보았다.거대한 해일이 모든 것을 쓸어가고 있는 듯하다 고나 할까? "굉장하다.!" 무의식 중에 로베인은 감싸듯 하연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탄성을 터뜨렸다. 순간 하연은 흠 칫 놀라서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어깨를 감싼 로베인의 손길 이 신경 쓰이고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던 것이다. 하지만 하연은 그런 감정에 대해 심각하 게 생각하지 않았다. 바토르가 불러일으키고 있는 천재지변도 같은 광경보다도 자신의 어깨 를 감싸는 로베인의 손길이 더 신경 쓰이는 데도 말이다. 애써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하연의 모습과 손 아래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떨림에 로베인은 하 연이 두려워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화가 나서 겁도 없이 미친 듯 불의 광풍을 일으키 고 있는 바토르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멈춰1 그만두라고! 하연이 무서워하잖아!" 바토르는 로베인의 멈추라는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다가 하연의 이름이 들려오자 그제 야 이성을 회복한 듯 힘을 멈추었다. 그러자 주변의 모든 것들이 선명히 드러나고 마치 뜨 거운 모래사막과도 같은 광경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한참을 모래 위에 서 있던 바토르 는 자신이 이성을 잃었었다는 사실에 부끄러워 약간 민망해하는 표정을 지은 채 하연에게로 다가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흠, 어서가자. 신의 유산을 찾아야지." 하지만 하연은 바토르가 내민 손을 거부하듯 뒷걸음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런 하연의 얼굴 에는 바토르에 대한 두려움이 역력했다. 순간 바토르는 충격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하연이 인간이기 때문에 이런 모습을 보인 자신을 무서워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내심으로는 알고 있 었다. 하지만 기억을 잃기 전의 하연이라면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아도 절대 자신의 손을 거부하지 않았으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기에 그는 서운하고 상처받은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 다. 그런 바토르에게 네이브가 물었다. "도대체 당신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설마 저런 일을 하고서도 자신이 인간이라고는 말 못하 시겠지요.?" 모두의 시선이 바토르에게 향한 가운데 로베인은 바토르에게서 하연을 보호하려는 듯 그녀 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그모습과 좀 전까지만 해도 친근한 눈빛을 던지던 인간들의 눈 빛에 어린 적대감에 바토르는 가슴이 쑤시듯 아팠다. 마치 가시에 찔렸을 때처럼. 그러나 그는 마왕이었다. 가슴을 편 바토르는 비웃듯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중얼거렸다. "역시 하찮은 인간들은 어쩔수가 없다니까" 네이브가 다시 물었다. "정체가 무엇입니까?" "...마왕. 난 불의 마왕 바토르다!" 잠시 정적이 그들 사이로 흘러갔고 한참 만에 네이브가 망설이듯 물었다. "하연은 마왕님의 정체를 알고 있었습니까?" "물론." 당연하지 않느냐는 투로 가볍게 말을 던진 바토르는 가만히 하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더 이상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던 그 하연은 없었다. 그의 시선을 피 해 고개를 숙인 하연의 작은 입술은 두려움으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던 것이다. 에드릭이 그 런 하연과 바토르를 번갈아 보더니 중얼거렸다. "도저히 마왕을 호위 기사로 데리고 다닐만한 여인은 못되어 보이는데...." 그가 보기에 하연은 곱게 자란 귀족 아가씨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런 여인이 상대가 마왕 이라는 사길을 알면서도 호위 기사로 데리고 다녔다니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로 베인과 네이브위 머리 속에는 그와는 반대되는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 '하연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어찌 되었든 하연은 마신 소환사가 아니었던가? 마왕을 호위 기사로 데리고 다녀도 전혀 이 상할 것이 없는 여자였다. 이에 네이브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결정을 내렸다. 그들에게는 위 험한 존재였지만 어찌 되었든 그는 이 위험한 하라마르트 산에게 그들 누구보다도 하연을 안전하게 보호해 줄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네이브는 그의 존재를 묵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하연이 알고 있었다면 정체가 무엇이든 상관없지." 네이브는 마치 그가 마왕이라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고, 로베인 또한 생 각보다는 본능으로 하연에게 그의 존재가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듯 동의하며 말했다. "맞아! 하연이 동료로 인정했으면 우리의 동료도되는 거다."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바토르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방금 전까지는 자신을 적대시하 더니 이렇게 금방 태도를 바굴 수가 있다니.... 역시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인간이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며 자신이 얼음의 마왕 데바와 손을 잡으면서까지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드는 순간이기도 했다. 어째서인지 하연은 알 수가 없었다. 기억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마왕이 인간이 결코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무서운 존재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전의 자신은 어 째서 그런 마왕을 동료로 받아들였고, 그런 자신을 다른 이들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그마신 카이람이라는 신의 소환자였기 때문일까? 약혼자인 네이브의 옷자락을 붙잡고 성큼 성큼 앞서 가는 바토르의 등을 훔쳐보면서 하연은 생각했다. 혹시 자신 또한 카이람을 부를 수 있지 않을 까 하고. 그런 생각이 들자 하연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왠지 그를 부를 수만 있다면 모든 것ㅇ 이 제자리로 돌아갈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슬쩍 주위를 살핀 하연은 일행들이 묵묵히 바토르를 따라 걷고 있는 것을 보고 소리 내어 그를 부르지는 못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카이람! 카이람....!" 수십 번도 넘게 카이람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역시나 그는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 았다. 마신을 불러내기 위해서는 무언가 특별한 방법이 필요한 듯. 이에 하연은 약간의 실망과 함께 카이람 부르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어다. "왜 아무도 안 지나가는 거지?" 작은 항구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서로 등을 마주한 채 도끼 자루를 돌리고 있던 헌스와 이너드는 동료들에게 푸념하듯 투덜거렸다. 그러자 단검을 닦고 있던 조르가 중얼거리듯 말 했다. "누군가는 지나가겠지." "어느 세월에나..." 한심하다는 듯 소시언은 아까부터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쪽 구석에서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줄을 긋고 있는 율리아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 말에 다른 일행들인 세르기아스 , 질리안, 웨이. 마법사 아켄도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 이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율리아가 고개를 발딱 들며 외쳤 다. "그럼 어쩌자는 거야?! 돈이 한푼도 없는데! 강도 짓이라도 해서 뱃삯을 마련해야 할 것 아 냐?" 그런 율리아의 모습에 소시언은 기가 막혀서 외쳤다. "지금 이게 누구 때문인데 되려 큰소리야? 네가 술만 먹지 않았으면....!" 그러나 율리아는 어디까지나 뻔뻔했다. "내가 술 먹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야? 너희들이 비겁하게 술값 좀 줄여보겠다고 나 몰래 술만 먹지 않았으면 내가 화가 나서 다른 때보다 좀 더 술을 마시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 았을 거 아니야!" "좀더... 그래서 우리 용병비를 몽땅 털어먹냐?" 허탈하다는 조르의 말에 약간 목소리가 줄어든 율리아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설마 술 취해서 막마셔댄 술 중에 그 비싼 러페어가 들어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어? 나도 아까워 죽겠다고, 그 귀한 러페어를 무슨맛인지도 모르고 다른 술들과 한꺼번에 막 마셔댔 다니...쳇!" 그들이 그렇게 서로 싸우자 세르기아스와 질리안은 아켄을 붙잡고 신세한탄을 늘어놓기 시 작했다. "우리는 용병 일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스승님과 같이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는 빵 한 조 각으로 의뢰를 받아들이는 그런 용병 말입니다. 그런데 동료 한번 잘못 만나서 강도 짓응ㄹ 하게 되다니 이럴 수가 있는 겁니까?" '이제 무슨 낯으로 스승님의 얼굴을 본단 말이지.... 돈 앞에 이처럼 무력해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이란 것을 새삼 깨달았어요." "스승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었는지도 말입니다." 조르들과 싸우는 중에도 용케 그들의 말을 들은 율리아가 그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시끄러워! 그럼 하라마르트 산까지 어떻게 가겠다는 거야? 용병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의야. 너희들 사담님께 하연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지? 그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 연을 지켜주기 위해가야 할 것 아니야?" 바락바락 악을 쓰며 쏘아대는 통에 목이 아픈지 캑캑대는 율리아의 모습에 웨이가 골치가 아픈지 한 손으로는 자신의 머리를 짚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등을 두들겨 주고 있을 때였 다. 이너드가 외쳤다. "손님이다." 그말에 모두 조용해지며 앞쪽을 응시했다. 이너드의 말대로 한 사람이 빠르게 걸어오고 있 었다. 그러다 그 사람은 그들의 모습을 발견했는지 갑자기 걸음을 늦추며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제발 돈이 많아야 할 텐데...." 소시언의 기대에 찬 중얼거림과는 반대로 세르기아스는 침중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제발 강도를 당해도 별 피해를 보지 않는 사람이어야 하는 데..." 그러나 잠시 후 그 사람의 모습을 확인한 용병들은 모두 두 눈이 커다래지며 강도 짓을 하 기 위해 들었던 무기를 슬그머니 내려놓지 않을 수 없었다. 긴 금발 머리를 뒤로 가볍게 묶 은 미소년같은 얼굴의 그 사람은 그들이 익히 알고 있는 미루엘이던 것이다. 경험을 통해 배운다는 것은 그들 용병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바로 얼마 전에 술값으로 모든 돈을 잃고 강도 짓을 해야 했던 그들이었건만 미루엘을 만났다는 기쁨 에 모든 것을 잊고 바로 항구 마을에 있는 술집으로 들어가 진탕 퍼마신 그들은 미루엘이 가진 돈마져 모조리 써버리고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때문에 뱃삯이 없는 그들은 멍하니 항구에 나와 지나 다니는 배들과 선원들의 모습만 바라 보고 앉아 있어야 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초조한 듯 보이는 미루엘의 눈치를 보며 우울하게 중얼거리는 소시언의 말에 웨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비장하게 외쳤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잘생긴 내가 희생할 수 밖에!" 그러면서 웨이는 율리아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위기 상황, 율리아, 모두 잘생긴 애인을 둔 죄라고 생각해." '무슨 짓을 하려고?" 의혹이 가득한 율리아의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웨이는 사명감에 불타서 외쳤다. "이 잘생긴 얼굴을 이용해서 여자들에게 돈을 뜯어내는 거야!" 그말에 율리아는 더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 웨이의 뒤통수를 내려쳤다. 퍽! "으악!"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웨이를 무시한 모두는 다시 처량한 표정으로 마라브르강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율리아가 말했다. "배를 훔치자!" 순간 세르기라스와 질리안은 자신들의 귀가 정상인지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지, 지금 뭐라고?!" "네?" 용병들이야 적극 찬성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반응이었고,미루 엘과 아켄은 시종일관 방법이야 어찌 되었든 한시라도 빨리 하라마르트 산에 올라가고 싶은 마음뿐이기에 율리아의 말에 전혀 이의를 달지 않았다. 때문에 율리아는 세르기아스와 질리 안만을 상대로 본격적인 포섭 작업에 들어갔다. "잘 생각해 봐, 세르기아스, 질리안, 하라마르트 산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알아? 마물들이 발길에 채일 정도로 많은 곳이 바로 하라마르트 산이라고, 너희는 걱정도 되지 않아? 난 너무 걱정되어서 인간의 양심따위는 쓰레기 더미 속에 던져 버릴 수도 있을 정도라고," '설마 아직까지 남아 있는 양심이나 있을라고.' 말로는 못하고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애써 세르기아스와 질리안의 시선을 피하는 용병들이 었다. 얼굴이 마주쳤다가는 자신들이 비웃고 있다는 사실을 들켜 버릴 테니까. "더군다나 사담님이 그렇게 간곡하게 부탁했다는 사실을 우려먹고 있는 율리아였다. 그리고 그 말에 또다시 넘어가고 있는 세르기아스와 질리안이었으니.... "게다가 사람 목숨과 배, 둘 중에 어느 게 더 중요해?" "...목숨." 결국 항복을 해버리고 마는 세르기아스와 질리안이었다. "그럼 잔말 말고 훔칠 배나 물색해 봐!" 그렇게 해서 그들은 항구에 쭉 늘어앉아 강을 바라보며 훔칠 배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배들이 하나같이 그들 일행이 모두 타기에는 너무 작아 보였다. 그런데 얼마 후 그 들의 눈에 마침 낡긴 했지만 그들 모두가 타기에 넉넉하게 큰 배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 보 였다. "저 배다!" 서로를 바라보는 용병들의 입가에는 공범자들끼리만 통하는 끈적끈적한 미소가 감돌았다. 목표가 정해지자 율리아가 아켄에게 물었다. "마법으로 저 배를 이쪽으로 불러올 수 있겠어 요?" 잠시 생각해 보던 아켄이 말했다. "바람을 일으켜 배가 이쪽으로 오게 할 수는 있을 것 같군요." "그것으로 충분해요." 웃으며 말하는 율리아의 말에 아켄은 정신을 집중하면서 주문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거스트 오브 윈드 !" 그러자 아켄의 주위로 마나가 이지러지며 강위로 돌풍이 일어나더니 그들이 목표로 한 배의 강 수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일이 두세번 반복되자 그들 쪽으로 움직여 오기 시작했다. 그런 배를 보며 율리아가 일행들에게 말했다. "온다! 어서 숨어!" "잘해" 율리아의 등을 쳐준 웨이는 다른 동료들에게 눈짓을 해 몸을 숨기게 했다. 그들을 따라 작 은 나룻배 뒤로 몸을 숨기며 세르기아스가 질리안에게 속삭였다. "처음이 아닌 것 같지?" "응, 너무 익숙해 보여." 그때 배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율리아가 배가 오는 쪽을 향해 활짝 웃는 얼굴로 두 손을 마구 흔들면서 외쳤다. '이봐요!어디까지 가세요? 저 좀 태워주면 안 될까요?" 그러나 그런 율리아의 활짝 웃는 얼굴도 가까이 다가온 배의 난간위에 걸터앉아 있는 긴 초 록빛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엘프를 보는 순간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봐. 헛것이 보여." 이제는 사라져 버린 종족인 엘프가 보이다니.... 율리아는 자신이 제 정신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것은 숨어 있던 다른 용병들과 미루엘, 아 켄도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조차 잊어버리고 멍한 표정이었다. 그때 엘프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 인간들! 이게 지금 무슨 수작이지?" 마치 그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모두 알고 있다는 듯 숨어 있는 그들을 훑어보며 하는 엘 프의 말에 율리아를 비롯한 용병들은 속으로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직 저지르지도 않는 범죄로 인해 고개를 숙일 자는 그들 중 아무도 없었다. 따라 서 율리아는 뻔뻔한 얼굴로 호들갑스럽게 동료들에게 외쳐 대고 있었다. "이것 봐! 엘프야 ! 진짜 엘프라고!" 그말에 숨어 있던 용병들과 세르기아스, 질리안, 아켄,미루엘까지 모두 나와서 빤히 엘프인 히싱을 쳐다보았다. 졸지에 구경거리로 전락한 히싱이 화를 내려고 할 때였다. 일행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선 아 켄이 정중하게 히싱에게 인사를 건넸다. "위대한 어머니 펠레아 여신의 온전한 축복을 받은 이를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히싱은 이채를 띠며 아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인간 세계에 와서 이렇듯 정중한 인사를 받 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곧 그의 얼굴은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 것은 아켄의 겉모습때문이 아니었다. "더러운 어둠의 자식과 계약을 한 자로군." "헉!" "허억!" 순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은 세르기아스와 질리안의 입에서 경악한 음성이 쏟아져 나 왔다. 그리고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켄의 붕대 안쪽의 얼굴이 당황으로 일그러졌다. "그, 그렇다면 마족과의 계약의 제물로 쓰기 위해 학생들을 죽이고 그 심장을 빼어간 자가 브리켄이 아니라 선생님이셨단 말입니까?" 세르기아스가 배신감에 치를 떨며 물었다. 질리안 또한 차갑게 가라앉은 눈이 그녀가 얼마 나 분노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아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복수를 위해서라지만 분면 자 신이 한 일이었고 그 가운데 브리켄이라는 엉뚱한 소년이 누명을 덮어쓴 것에 대해서는 그 자신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세르기아스와 질리안은 아켄이 한 일이라는 것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지만 차원에 서 질리안은 히싱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인가요, 이자가 마족과 계약을 한 것이?" 히싱은 그녀의 질문처럼 어리석은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는 듯 말했다. "난 펠레아 여신의 온전한 자식이다. 그런 내가 마족과 계약해 어둠에 물든 자를 알아보지 못할 것 같은가?" 이에 세르기아스는 더 이상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아켄을 향해 검을 빼어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얌전히 세르기아스의 손에 죽어줄 생각이 없던 아켄은 방어 주문을 빠르게 외우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싸움이 벌어질 듯한 그들의 모습에 당황한 다른 용병들은 다급하게 그들의 사이 를 떼어놓으며 물었다. 이미 무슨 일인지 대충 짐작을 하고 있는 미루엘은 빼고. "갑자기 왜 그래 ? 무슨 일이야?" 가까스로 살기를 가라앉힌 질리안이 설명했다. "세르기아스와 제가 혼 슈이센 왕립학교 출신이라는 것은 여럴분들도 아시지요? 그 학교에 서 잇따라 마법부 학생이 죽어 시체가 되는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었어요. 그것도 심장을 빼앗긴 채로요,.그래서 학교에서는 그것이 마족과의 계약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범인을 찾기 시작했지요. 그러다 브리켄이라는 평민 소년이 갑자기 마족의 퍼릴리어로 f보 이는 고양이를 기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범인으로 지목받게 되었어요. 그러던 중 그 소년이 죽는 일이 발생했고 그곳에는 바로 상급 마법부 선생이었던 이자가 함께 있었어요. 썩어가는 자신의 한쪽 팔을 드러낸채로 말이에요. 때문에 우리는 이자의 간악한 거짓말, 브 리켄의 공격에 당해 살이 썩게 되었다는 말에 속아 여태까지 브리켄을 범인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알고보니 이자가 마족과 계약을 한 자라는군요." 용병들 또한 놀란 표정으로 아켄을 쳐다보았다. 그 가운데 웨이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물었다. " 그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던 겁니까?" 아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전 마족과 계약한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습니다. 지금 다시 그 순간이 온다 해도 전 또다시 마족과 계약을 할 것입니다." "이, 이.... 당신의 그 개인적인 복수심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학생들이 참혹한 죽음 을 당했는데도 전혀 후화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담담하기까지 한 아켄의 말에 세르가아스와 질리안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그들로서 는 도저히 아켄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용병들과 미루엘은 아켄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기에 인간적인 분노를 느끼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세르기아스와 질리안이 아켄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것만은 막을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아켄은 그들을 배신한 것이니까. 때문에 용병들은 멀찍이 물러나서 그들이 싸우는 것을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때였다. "멈춰라!" 막 시작되려는 세르기아스와 질리안, 아켄의 싸움을 단호한 음성이 갈라놓았다. 그리고 그 음성의 주인을 확인한 모든 이들은 다시 한 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바로 용병왕 사담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그들이 훔치려는 밴에서 나오는. "사담!" 미루엘은 그렇게 찾던 사담을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 반가움에 어쩔줄을 몰라 했다. 하지만 사담은 그런 미루엘을 한번 힐끔 쳐다보고는 세르기아스와 질리안에게 물었다. "너희는 무슨 자격으로 그를 죽이려는 것이지?" "네?" "이자는 마족과 계약을 한 자예요. 스승님. 인간이라면 당연히 처단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질리안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사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그들이 미쳐 생각지 못 한 질문을 던졌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하연은 마족들의 신인 마신 소환사이다. 그렇다면 하연도 당연히 인간 으로서 처단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하, 하지만..." 질리안이 다시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하자 그 말을 끊듯이 사담이 말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의 죄를 심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세르가아스와 질리안은 사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다른 인간의 죄를 심판할 수 없단 말인가? 그렇다면 법이 왜 만들어졌게는가? 하지만 그들은 스승인 사담의 매서운 눈 초리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그들은 자연히 불만 어린 시선으로 아켄을 볼 수밖에 없었고 사담은 그런 어켄을 보면서 언젠가 들었던 하연의 말을 떠올렸다. "인간이란 태어날 때부터 모두 죄를 짓고 태어나는 거래. 그리고 살아가면서 또어쩔 수 없 이 모두 크든 작든 죄를 짓는 거지. 때문에 아무리 큰 죄는 지은 사람이 있다고 해도 인간 이라면 그를 벌할 수는 없는 거야. 왜냐하면 누구나 작은 죄는 짓고 살기 마련이니까. 그러 니 사담, 너의 눈이 더럽고 추악하다는 생각은 버려. 어차피 깨끗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또 널 욕하고 벌할 수 있는 사람도." 지나온 길을 모두 불태우면서까지 절망의 땅 그들은 푸른 계곡이라고 생각하는 곳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하연 일행은 눈앞의 광경에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찾던 신의 유산인 엘레나의 눈물이 있을 만한 곳은 보이지 않고 썩어가고 있는 듯한 거대한 검푸른 늪지만이 그들의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저, 혹시 찾으시는 게 이 늪지 속에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에드릭이 더듬거리며 그들을 향해 물었다. 혹시라도 그 물건을 찾기 위해 저 썩은 내가 모락모락 나는 늪지 속으로 자신이 들어가야하 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단순한 기후가아 니었다. 마력을 일으켜 늪지 구석구석까지 그의 마력과 반발하는 신력의 존재를 찾아내지 못하자 바토르는 마지막으로 에드릭을 늪지 속으로 집어넣어 엘레나의 눈물을 찾아볼까 하 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늪지 속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다. 몸도 마음도 지친 하연이 갑자기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기 때문이다. "하연!" "하연!" 바토르, 네이브, 로베인이 모든 신경이 하연에게 쏠린 가운데 마로위는 어두운 표정으로 하 연의 상태를 진찰했다. 창백하리만큼 새하얀 하연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숨을 거둘 듯 보였다. "어떤가?" 네이브가 긴장한 표정으로 마로위에게 물었다. 마로위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병은 제쳐두고 지금은 그저 단순히 피로에 의해 쓰러진 것입니다. 이대로 쉬게 놓아두면 될 것 같습니다. 하긴 기억을 잃은 레이디에겐 지금의 상황이 감당하기 힘들었겠지요." 그말에 모두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하연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기억까지 잃은 그녀가 얼 마나 힘들지 생각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정신을 잃고 쓰러질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이 아는 하연은 절대 이 정도로 쓰러질 여인이 아니었으니까. 잠시후 그들은 여전히 서로 아무 말도 없었지만 불을 피우고 잠자리를 마련하고 음식을 만 드는 등 야영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하연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움직이면서. 새벽에 일어난 하연은 흐린 눈으로 멍하니 주위르 둘러보았다. 아직도 꺼지지 않고 환한 불 을 피우고 있는 모닥불과 그 주위에 아무렇게나 누워 자고 있는 네이브와에드릭.마로위, 그 리고 그녀가 있는 쪽을 바라보며 잠들어 있는 로베인이 보였다. 하연은 잠든 로베인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흐릿하게 안개에 휩싸인 듯이 보이 는 그의 얼굴은 너무도 평온하고 신성해 보였던 것이다. 마치 대천사 미카엘을 보는 것같이. 얼마나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을까? 갑자기 들려오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든 하연이 고개를 돌려 본 것은 흰 눈같이 새 하얀 작고 통통한 동물이 루비같이 붉고 큰 눈을 또르르 굴리며 하연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광경이었다. 양쪽으로 작은 귀를 쫑긋거리는 그 동물이 너무 귀여워서 하연은 저도 모르게 바로 며칠 전 에 한 바토르의 경고, 즉 밤에는 야영지 주위에 결계를 쳐놓을 테니 절대 결계밖으로 나가 서는 안 된다는 그 경고를 잊고 결계 밖으로 걸어나가 버린 것이었다. 그 동물은 하연이 걸어나오자 고개를 갸우뚱하며 피우피우하는 소리를 내었다. 피우는 작고 귀여운 모습으로 사람들을 안심시킨 뒤 잡아먹는 그 자체가 위장이나 마찬가지인 잡식성 마 물이었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는 하얀은 피우피우 소리를 내는 그 마물이 너무 귀엽다는 듯 안아주려고 손 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피이잉! 어디서 화살이 날아와 하연이 안으려던 피우의 몸체를 꿰뚫었다. 퍽! "캬악!" 하연의 비명소리에 놀란 일행들은 일제히 눈을 번쩍 뜨며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그리고 하연이 결계 밖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한 바토르는 놀라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하연! 어째서 결계 밖으로 나간 거야?! 위험하니까 함부로 나가지 말라고 경고했잖아!" 그 고함 소리에 흠칫 놀라서 경직되어 버린 하연의 팔을 잡아 다시 결계 안쪽으로 끌어당기 며 바토르는 살기 가득한 시선으로 앞쪽을 노려보았다. 얼굴만 보면 용병이나 해적 같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입고 있는 갑옷으로 볼 때 분명 기 사인 그들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면서 한차례 하연 일행을 훑어보더니 하연에게 시선이 머물 자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그 위에 검을 올리며 깊이 고개를 숙인 채 외쳤다. "황후 마마를 뵈옵니다." 순간 하연을 비롯해 막 공격을 하려던 바토르까지 그 자리에서 굳은 채 움직일 줄을 몰랐 다. 황후 마마라니.... "...누가?" 가까스로 입을 연 로베인이 그들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런 로베인의 말을 무시한 기사들은 하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모시러 왔습니다. 황후 마마!" 하연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서 일행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일행들 역시 이 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바토르가 물었다. ' 너희들은 누구냐? 하연을 어디로 데려가려는 것이지?" 바토르에게서 일어나는 무시무시한 살기에 감히 그를 무시하지 못한 한 기사가 대답했다. "트리엔시라 제국의 황성으로 황후 마마를 모실 것입니다. 트리엔시라 제국이라면 바로 고대 마법 왕국의 이름이 아니던가? 바토르와 로베인은 일찍이 하연과 함께 하룬 산에 있는 고대 트리엔시라 지하 왕국에 들어 가 본 적이 있었다. 그로 인해 로베인은 슈마라는 대마법사에게 육체를 빼앗기기도 했었지 않은가? 때문에 그들에게 트리엔시라는 이름은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 이름이 여기서 다시 거론되다니... 설마 그 트리엔시라 마법 왕국이 다시 부활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들이 충격 속에 굳어져 있을 때 하연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곳이 어디에 있는데요?" 다른 사람도 아닌 그들의 황후가 될 하연의 질문이었기 때문일까? 그는 정중히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푸른 계곡 안쪽에 위치한 전설의 미궁입니다." 순간 하연을 비롯한 일행들의 분노의 시선은 일제히 에드릭에게로 향해졌다. 푸른 계곡이라 니! 그럼 그들이 지금까지 헤맨 이곳은 어디란 말인가? 애써 그들의 시선을 피하며 에드릭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흠, 전설의 미궁이라니.... 그럼, 그 푸른 계곡 안에 전설의 미궁이 있었다는 말이네. 아! 그 래서 그곳이 하라마르트 산에서 제알 위험한 곳으로 알려졌던 것이군." 그러나 그제야 이 모든 것이 그의 수작을 알게 된 바토르와 로베인, 네이브는 더 들어볼 것 도 없다는 듯 무차별 공격으로 에드릭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으아악!" 에드릭의 비명소리가 한동안 절망의 땅 깊숙한 곳에서 울려 펴져 나갔다. 제31장 사랑에 빠진 하연 하연일행은 결국 기사들을 따라갔다. 어차피 푸른 계곡으로 가려고 했으니 그곳에 대해 잘 아는 이 기사들을 따라가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또한 왜 하연에게 황후라고 부르는 것인지 그 이유도 알아볼 겸 해서 말이다. 험악한 산길을 따라가면서 바토르는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제국이라면 이동 마법진 정도는 있을 텐데 왜 이렇게 걸어가고 있는 거지?" 그 물음에 귀찮은 듯한 표정으로 기사가 대답했다. "황후 마마께는 마법이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간 하연 일행은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놀라운의 의미는 서로 달랐다. 네 이브나 에드릭, 마로위가 놀란 것은 마법이 듣지 않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고 로 베인이나 버토르가 놀란 것은 어떻게 저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본 로베인은 트리엔시라의 황제가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거라는 결론 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머리속에는 그의 뒤를 이어 슈마라는 자에게 육체를 빼앗겼다 고 생각되어지는 쟈스란의 얼굴이 더올랐다. '그러고 보니 하연이 그를 좋아했었지?' 아직까지 그런 오해를 하고 있는 로베인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 자연 그의 발걸음은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기억을 잃어서 그조차 알아보 지 못하는 하연이었지만 쟈스란은 비록 그의 정신은 다른 사람일지라도 얼굴만은 그녀가 좋 아하던 사람이니 그를 보면 자연히 무언가 떠오를지도 몰랐다. 따라서 그녀의 기억이 돌아 올지도 모르는 일이니 기뻐해야 마땅한 일이었지만 그는 조금도 기쁜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연을 빼앗겨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저 곁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좋은데 쟈스란의 모습을 한 트리엔시리의 황제 슈마가 하연을 황후로 원한다면 곁에서 지켜볼 수 조차 없게 될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때문에 로베인은 푸른 계곡으로 가는 길에 마치 이번이 마지막이라도 되는 듯 하연의 얼굴을 보고또보았다. 그로 인해 하연의 얼굴이 남모르게 부끄러움으로 화끈해질 정도로 . 기사들을 따라 한 반나절을 걸었을 때였다. 하연은 눈앞에 겨우 두 사람 정도만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고 깎아지른 듯 높이 솟아 잇 는 계곡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계곡의 벽에는 왜 이곳이 푸른 계곡인지를 알려주듯 푸른 보석들이 바위틈마다 드러나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앞에 선 기사 하나가 품속에서 단검을 하나 빼어들어 한 바위틈에 꽂아 넣었다. 그러자, 휘이익!휘리릭! 계곡 사이를 지나는 바람 소리가 마치 휘파람 서리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것일까? 갑자기 갈라져 있던 계곡이 서서히 좁혀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한치의 틈도 없이 꼭 맞물려 버리는 것이었다. 하연들이 갑자기 눈 앞에서 사라져 버린 계곡의 모습에 당황해하자 그들을 안내하던 기사가 말했다. "실상 전설의 미궁은 모두 보석을 훔치기 위해 계곡으로 들어갔던 인간들에 의해 붙여진 이 름입니다. 그들은 그 보석들이 모두 땅속에있는 진짜 보석들이 반사되어 보이는 허상일 뿐 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 가사가 꽂아 넣었던 단검을 다시 뽑자 계곡으로 들어가는 입구 쪽의 바닥이 쩌 억 갈라지면서 거대한 동굴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기사들의 재촉에 의해 동굴 속으로 들어간 하연들은 허상이 아닌 진짜 보석들이 채취하지도 않은 원석의 상태 그대로 있는 것을 볼수 있었다. 그에 따라 가공되지 않은 그 보석들은 어둠을 밝히는 별빛처럼 어두운 동굴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와!" 하연들은 그 신비한 광경에 탄성을토해냈고 네이브는 상인답게 이 광산을 개발하게 되었을 때의 투자 자본과 순이익을 머리 속으로 계산하고있었다. 행여 길이라도 잃게 될까 봐 그런 네이브의 옷자락을 꼭 쥔 채 따라가던 하연이 연신 주위르 두리번거리며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했다. "마치 우주 속을 걸어가고 있는 것 같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하연 일행이었지만 그들은 각기 자신들의 생각만으로 꽉 차 있어서 하연에게 그 의미를 묻지는 않았다. 물었더라도 기억을 잃은 하연이 대답해 주었을지도 의문이지만. 한참을 그렇게 걸어 들어갔을 때였다. 갑자기 그들의 시야에 대낮처럼 환한 밝은 빛이 들어오면서 아름답고 웅장한 황궁이 눈에 들어왔다. 활짝 열린 궁문 앞에는 수백 명의 기사들이 쭉 늘어서 있다가 하연 일행이 들어 서자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황후 마마를 뵈옵니다!" 그 장엄한 광경에 하연은 할말을 잃고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렇게 많은 이들이 자신을 황후라고 부르 니 혹시 자신이 진짜 황후인데 네이브에게 그런 사실을 속이고 그와 약혼한 것은 아닌가 하 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하연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갑자기 아름다운 시녀들 대 여섯명이 우르르 나타나서는 하연을 둘러싸고 그녀를 황궁 안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황후마마,어서 드시지요." "마마를 위해 새로이 황후전을 꾸몄답니다." "어, 저, 전...." 당황한 하연은 눈으로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그들은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뿐 이었다. 어차피 그들이 하연을 황후라고 부르는 이상 목숨은 위험은 없을 거라고 단순히 생 각했던 것이다. 하연이 여인들에게 이끌려 황궁 안으로 들어가자 그들을 안내했던 기사가 말했다. "방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우선은 좀 씻고 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황후마마께서도 오늘 은 쉬고 내일 폐하를 뵈오실 것이니 여러분들도 그때 함께 폐하를 뵙는 것이 나을 것입니 다." 그 말에 일행들은 각기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렇지 않아도 요 며칠 정신적으로 매우 피곤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시녀들에게 이끌려 황후전에 안내돤 하연은 그곳의 화사한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말았다. 어떻게 이렇게 화려한데도 천박하지않은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그런 하연의 모습에 시녀 들은 작게 웃으면서 그녀를 재촉했다. "황후 마마. 우선 목욕부터 하시지요." "아!" 그러면서 그들이 하연을 안내한 곳은 마치 작은 연못같은 크기의 꽃향기가 짙은 온천 욕탕 이었다. 그곳에 들어서자 시녀들은 하연의 로브를 벗기고 그녀의 팔을 들어 옷가지를 벗기려 들었 다. 이에 당황한 하연은 그녀들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저... 내가 할게요. 나 혼자 씻을 수있어요. 그러니 이만 나가주세요." 그러나 시비들은 막무가내였다. "아니에요, 황후마마! 마마는 가만히 있으세요." "물론입니다. 황후마마. 이것은 저희들의 일인걸요." "하, 하지만,...." 하연이 거부를 할 새도 없이 그녀의 옷을 벗겨 버린 시비들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몸 을 온천 욕탕으로 이끌고는 자신들도 옷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서는 그녀를 씻겨주기 시작했 다. 처음에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던 하연도 차츰 적응이 되어가자 그녀들의 손길을 즐 기게 되었다. 힘든 여행으로 지친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주물러 주는 여인들의 손길에 어느 덧 피곤이 풀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드세요,마마. 요리사가 특별히 정성을 다해 만든 차와 과자랍니다." 별로 식욕이 없던 하연이었지만 그 말에 어쩔 수 없이 차와 과자를 입으로 가져가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몸이 너무 피곤해서라고 생각하면서 작게 그녀 가 한숨을 쉬자 시녀들이 깜짝 놀라면서 당황한 듯 물었다. "저...마마, 어디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니에요, 그저 좀 피곤해서요." 그러자 안도한 듯 시녀들의 얼굴이 펴지면서 그녀를 얼른 침대로 안내했다. 열 사람 정도는 누워서 잘 수 있을 것같이 커다란 침대는 너무 푹신하고 편안했다. 이에 하연은 정말 오랜만에 침대에서 자본다고 생각하며 드러눕자마자 눈을 감고 잠들어 버 리고 말았다. 쟈스란은 사방이 거울로 되어 있는 방에 우뚝 서 있었다. 거울에는 여러가자 모습들이 비쳤다. 트리엔시라의 기사단의 모습이라든지, 애꾸눈 마법사 비욤이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 수므카가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는 모습, 또한 하연 의 일행들이나 그녀의 모습. 그 가운데 쟈스란의 시선은 시종 하연의 모습이 비치는 거울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는데 그 는 그 거울을 통해서 하연이 황궁에 들어서면서부터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그 의 표정에는 비욤이나 그 밖의 대신들은 한 번도 보지 못한 부드러움이 감돌고 있었다. 평안한 표정으로 잠든 하연의 얼굴을 쓰다듬듯 거울을 쓰다듬으며 쟈스란이 중얼거렸다. "하연,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구나. 이제는 절대 놔주지 않을 거다. 똑똑이 보게 해주겠어, 로베인에게. 네가 누구의 것인지. 그러자면....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싸늘한 표정이 된 쟈스란은 누군가에게 명령했다. " "가서 황후의 일행중에 바토르란 자를 침묵의 방으로 안내해라." 그러자 쟈스란의 그림자가 스윽 일어나 사라져 가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쟈스란은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의 방을 나가면서 중얼거렸 다. "누구도 날 방해할 순 없어,. 그것이 설사 신이라 할지라도." 바토르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먼저 그와 단독으로 만나고 싶다고 청했다니. 하지만 그렇다고 거부할 이유가 없었기에 바토르는 이를 받아들여 시종장이라고 하는 자를 따라나섰다. 설령 그 어떤 음모가 있다고 해도 마왕인 그를 한낱 인간이 어떻게 할 수는 없 을 거라고 자신만만해 하면서. 그리고 그는 한 문 앞에 이르렀다. 굳건하게 닫힌 녹이 슨 듯한 철문의 앞에. 그문의 모습에 바토르는 순간 어리둥절했다. 여태까지 그가 본 황궁의 모습은 그어디를 보 아도 모두새로지은 듯한 모습뿐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낡은 문이라니.... '진짜 어떤 음모가 있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자 바토르의 입가에는 비릿한 조소가떠올랐다. 그리고 당당하게 명령했다. "문을 열어라!" 시종장은 그 말에 그 낡은 문을 힘차게 열고는 조요히 옆으로 비켜섰다. 안을 들여다본 바 토르는 그곳이 여느 접객실과 마찬가지의 모습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곳이 문 만을 새로 달지 못한듯했다. 이에 바토르는 어깨를 쭉펴고는 힘차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막 한발을 내딛는 그 순간 이었다. 갑자기 방 안의 모든 풍경이 사라지더니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허공만이 그의 앞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뭐지? 어떻게 된 거야?" 조금 당황해서 그가 입을 열었을 때였다. 그의 말들이 거미줄처럼 그를 옥죄어오기 시작했 다. 그러면서 그의 모든 힘들이 서서히 몸속에 겹겹이 봉인되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바토르는 눈치 챌 수 있었다. 이방이 침묵의 방이라는 사실을. 침묵의 방은 고대 트 리엔시라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마법의 방으로 대마법사들을 봉인하기 위해 말 한마디라 도 내뱉으면 그말로 인해 언령 봉인이 되도록 만든 곳이었다. 그로인해 모든 힘을 봉인당하고 침묵의 방에 갇힌 바토르는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 의 경솔함에 대해서. 다음날 오후가 다 되어서야 일어난 하연은 눈을 뜨자마자 시녀들에의해 빙 둘러싸인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 무슨 일이지요?" 당황해서 묻는 하연의 물음에 시녀들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황후마마!" "시간이 없어요, 황후마마. 서둘러 준비하지 않으면 환영 파티에 늦어요." "환영 파티라니요?" 그러나 시녀들은 하연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양팔과 다리를 붙잡아 들어 올리 더니 그대로 향기가 가득한 욕조 안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몇 시간이 넘게 그녀를 씻기고 향유를 마르고 마사지를 하더니 이번에는 또 몇 시간이 넘게 수십 벌이 넘는 옷을 입히고 벗기고 화장을 하고 고치고 보석을 달고 빼고 치장에 열을 올렸다. 그 때문에 하연은 처음에는 정신이 없어 멍하니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지만 나중에 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자 짜증이 나서 말했다.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거예요?! 이제 대충 끝내요!" 그러자 시녀장인 듯한 중년의 여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황후 마마께서 처음으로 대신들 앞에 그모습을 드러내는 날입 니다. 때문에 가능한 화려하게 치장해 황후 마마의 위엄을 드높이라는 황제 폐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연은 거울을 통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 다. 화려하게 치장되어지고 있는 그녀의 모습 그 어디에도 위엄이란 단어는 찾아볼 수가 없 었던 것이다. 간단한 수프와 작은 과일 몇 개만으로 가신히 허기를 면한 채 오후내내 가만히 앉아만 있어 야 했던 하연의 치장이 모두 끝난 것은 저녁 늦게 파티가 시작되기 바로 몇 분 전이었다. 천천히 시녀들의 안내를 따라 대전으로 향하는 하연의 두손은 너무꽉 움켜뒤어서인지 하얗 게 질려 있었다. 이제 곧 트리엔시라 제국의 황제를 만나게 된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되어서 였다. 혹시 자신을 보고는 모르는 여자라고 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포함된. 이윽고 활짝 열린 대전의 문 앞에 하연이 서자 시종이 외쳤다. "황후 마마 듭시오!" 순간 대전은 침묵의 마법이라도 펼쳐진 듯 조용해졌다. 그 가운데 하연은 떨리는 마음을 진 정시키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으며 대전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대전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해졌고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사람들은 넋이 빠진 듯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분면 제국의 황후로서 어울리는 그런 아름다운 여인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처럼 아름답 고 신비한 여인일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것은 그녀를 황궁으로 안내한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검은 로브를 입고 있을 때는 미처 몰랐던 아름다운이 아름다운 드레스를 차려입으니 드러났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걸을 때 마다 풍겨져 나오는 이 매혹적인 향기라니.... 대전안에 있던 머든 사람들은 순식간에 그녀에게 빠져버리고 말았다. 시각으로 후각으로 영 혼으로. 그것은 이미 대전 안에서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로베인과 네이브, 마로위와 에드릭 도 마찬가지 였다. 하지만 그런 대전안의 사람들의 마음을 모르는 하연은 오직 한곳만을 바 라보고 있었다. 황좌에 앉아 있는 은빛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지닌 여인보다 더 아름다운 한 사내에게. 그를 본 순간부터 하연은 그에게서 시선을 뗄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도, 대전 안을 가득 메운 사람들과 동료들의 모습도 모두 머리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그의 아름다운 외모 때문만은 분명 아니었다. 로베인과 바토르도 그와 같은 아름다움은 아니지만 충분히 아름다웠으니까. 영혼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랄까? 도저히 그에게로 향하는 감정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치 그 어떤 운명이 그녀를 이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멍하니 하연이 서 있자 의자에서 일어난 쟈스란이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서더니 가만 히 손을 내밀었다. 하얗고 긴 그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하연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채 마치 그 손이 그녀의 구원이라도 되는 양 꼭 움켜쥐었다. 순간 쟈스란의 얼굴에는 보기 드문 환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네로와의 계약이 완벽하게 이 루어졌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지금 •Ž잡은 이 손을 앞으로는 절대 놓지 않을 거다, 하연.'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맞춘 쟈스란은 하연을 이끌고 자신의 옆지리인 황후의 자리에 앉혔 다. 그러자 침묵 속에 가라앉아 있던 대전 안이 폭팔하듯 울려 퍼지는 함성 소리로 인해 진동하 기 시작했다. "트리엔시라 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황후 마마 만세!" 그 속에서 로베인과 네이브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서 있었다. 역시나 트리엔시라 황제는 로베인의 짐작대로 쟈스란이었다. 뜻밖에도 그의 검은 머리와 눈 은 은색과 적색으로 바뀌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로베인이 몰라볼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설마 하연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조차 의식하지 않은 채 쟈스란에게 빠진 모습을 보 일 줄은 몰랐던 로베인이었다. 때문에 그는 심장이 부서지는 듯한 기분을 맛보아야 했다. '하연, 그는 쟈스란이 아니야! 쟈스란의 모습을 한 슈마라는 대마법사라고1' 하지만 그 말은 그의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한채 입속에서 맴돌뿐이었다. 기억을 잃은 하연에게는 어차피 소용이 없었으니까.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함성 소리를 뒤로한 로베인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천천히 대전을 빠져나갔다. 사랑에 빠져 넋이 나간 하연의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네이브들도 묵묵히 그런 로베인의 뒤를 따라 나갔다. 그들 또한 자신들도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처럼 무시하는 이곳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들을 유일하게 지켜보고 있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쟈스란이었다. 하연이 악마와의 계약 때문에 그를 좋아하게 되기는 했지만 실재로 좋아하는 사람이누구인지 잘알고 있는 그 로서는 로베인에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종 그를 경계하고 있다가 어깨가 축 처진 채 대전 밖으로 걸어나가는 로베인과 그의 일행들의 모습에 쟈스란은 회심 의 미소를 지었다. '다시 로베인, 너의 입에서 하연을 좋아한다는 말이 나온다면 그때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하연은 나의 것이니까.' 다음날. 황후전에서 눈을 뜬 하연은 눈을 뜨자마자 무의식 중에 쟈스란의 모습을 찾았다. 어제 밤늦 게까지 함께 있었으면서도 지금 그가 옆에 없자 상실감이 느껴지고 그가 너무 보고 싶어졌 던 것이다. 그런 하연의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 황후전의 문이 열리고 두 손에 쟁반을 받쳐 든 쟈스란이 시녀들을 거느리고 들어섰다. 그 순간 하연은 눈부시도록 따뜻한 햇살이 자신을 쓰다듬는 것 같은 포근함을 느꼈다. "쟈스란!" "하연, 잘 잤어?" 하연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쟈스란은 사랑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겠는 표정으로 성 큼 다가와 그녀의 무릎 위에 쟁반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하연을 위해 요리사에게 명해서 준비 했어. 맛있을 거야, 먹어봐." 쟁반 위에는 몇 개의 꽃잎이 떨어져 있는 부드러운 수프와 바삭하게 구운 크래커, 그리고 과일 푸딩이 놓여져 있었다. 하연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한 나라의 황제인 그가 손수 그녀의 시중을 들어주다니.... 그의 사랑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 었다. 감격해서 좀처럼 하연이 식사를 못하고 있자 쟈스란은 침대 가에 다가앉아 한 손으로 하연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이 정도에 감격하면 곤란하다고 ,하연. 난 너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 설사 이 혼 대륙을 원한다고 할지라도 말이야. 하지만 넌 전쟁을 싫어하지? 그래서 이 혼 대륙을 정복하고 싶은 것도 참고 있는 거라고. 자." 그러면서 쟈스란은 손수 수저로 수프를 떠 하연의 입가로 가져갔다. "아∼ 해." 어린아이도 아닌데 아이 취급을 받자 민망해진 하연은 얼굴을 붉히기는 했지만 그런 쟈스란 의 행동이 싫지는 않은 듯 조심스럽게 입을 벌려 수프를 받아먹었다. "어때?" "...맛있어. 너무 맛있어." 하연의 말에 쟈스란도 기쁜 듯 활짝 웃으며 계속 식사 시중을 들었고 이를 지켜보고 있던 시녀들은 쟈스란의 이런 다정한 모습에 너무도 놀라운 듯 시종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자 쟈스란은 하연에게 산책을 가자고 청했고 하연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나란히 정원을 거닐면서 하연은 지금의 이 행복을 믿을 수가 없었다. 누구군가를 바라본다 는 것만으로도 이처럼 행복할 수 있다니.... 가장 소중한 보석을 선물로 받은 느낌이었다. "쟈스란." "응?" "쟈스란."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느낌이 이토록 감미로울 수가 없었다. "왜?" 의아한 듯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는 쟈스란의 모습에 하연은 저절로 벌어지는 입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헤헤, 그냥 불러봤어." 그러자 쟈스란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더니 가만히 하연의 얼굴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부드럽고 뭉클한 느낌이 입가에 닿아오자 하연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쟈스란은 정 원이 내려다보이는 방의 창가에 서서 그들 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로베인을 향해 싱 긋 웃어 보이고는 눈을 감고 더욱 깊은 키스를 나누기 시작했다. 키스가 끝나고 눈을 뜬 쟈스란은 로베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더욱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발그레한 표정의 하연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가 처음 만나기 전에 들려주었던 노래 기억해? 그노래 다시 듣고 싶어. 불러주지 않을 래, 하연?" 순간 하연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만나기 전에 들려주었던 노래라니? "무슨 노래? 우리 전에도 만난 적이 있었어?" 그 말에 이번에는 쟈스란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연이 전의 자신을 모르는 듯했기 땜문이다. "하연, 나바린의 해적선에서 처음 만났던 그때가 기억아지 않아?" "아?, 저...." 그때서야 하연은 자신이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쟈스란을 만난 뒤 그 이외의 생 각은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 스스로에게 놀라고 또 쟈스란에게 좀 더 일찍 그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는 것에서 오는 죄책 감에 미안해진 하연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 모습에 쟈스란은 설마 하연이 기억을 잃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어쩌면 악 마와의 계약 때문에 그전의 자신에 대한 것은 모조리 잊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 다. 그래서 서둘러 하연의 말을 막으며 말했다. "상관없어.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네가 내 곁에 있어주면 그것으로 나는 충분히 행복하니 까." 그러면서 쟈스란은 소중히 하연을 안으며 생각했다. '그래. 그러니까 하연, 너에게 미안해하지 않을 거야. 악마와의 계약 따위로 너를 묶어둔 것 을...난 정말 행복하고 싶으니까.' 로베인과 네이브, 에드릭, 그리고 마로위는 한 방 안에 모여 앉아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었 다. 그 가운데 에드릭과 마로위는 은근히 로베인과 네이브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이 너무 어두웠기 때문이다. 로베인의 머리 속에는 조금전 창가에서 본 쟈스란과 하연의 키스하는 모습이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 행복해하는 모습이라니.... 그녀가 행복하면 그 또한 향복하리라고 언제나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사람과 키스하며 향복해하는 모습을 본 그순간, 그는 자신 안의 모든 것이 부서져 나가는 듯한 심정이었다. 차라리 자신이 죽어서 이 모든 것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으면 하는 생각 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죽으면 다시는 하연을 볼 수 없기에 그는 죽는 것마저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멍하니 로베인이 차를 입가에 가져가는 동안 네이브 또한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는 로베인과는 달리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연의 이번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많았던 것이다. 자신이 그녀의 약혼자라고 알고 있을 텐데 어떻게 아예 그를 잊은 듯이 그 렇게 쟈스란을 바라볼 수가 있는가? 하연이 그럴 수 있는 여자였던가? 지금까지 그가 알고 본 하연은 절대 그럴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설사 쟈스란에게 마음이 있다고 해도 약혼자인 그의 입장을 생각해 그런 마음을 드러내지 않을 여자였던 것이다. 그때였다. 에드릭이 그런 그들에게 이상하다는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어제부터 바토르님니 보이시지 않는군요, 언디 가셨습니까?" 그말에 로베인과 네이브는 놀라서 에드릭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니 어제부터 바토르가 보 이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그 사실졸차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하연의 일이 그들에게는 충격이었던 것이다. '여자 하나로 인해 나 세이브 스마인이 이성이 이처럼 흔들리다니...." 네이브는 스스로에 대해 어이없어하면서도 재빨리 머리 속을 정리했다. 분명 바토르의 실종은 어딘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한시도 하연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던 그가 갑자기 이곳 트리엔시라왕국에 온 뒤 사라져 버 린 것이다. 하지만 바토르가 마왕이라는 점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자신의 우려에 피식 실소 를 터트리며 말했다. "마왕인 그를 누가 어쩌겠소?" 그러나 로베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쟈스란의 육체에 깃든 슈마라는 대마법사의 마법이 얼마나 엄청난지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어쩌면 그가 어떤 술수를 부여 바토르를 구속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확실하게 이렇다 하고 단정 지을 수도 없는 일이기에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데 그때 생각에 잠겨있던 마로위가 고개를 갸 웃거리며 물었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에 로베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바토르는 이렇게 쉽게 하연 곁에서 떨어져 나갈 자가 아니오." 마로위의 말에 모두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마로위가 설명했다. "그분의 표정이나 행동 등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무슨 말인가 했던 로베인은 그 말에 실망한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럴 수밖에 . 사랑에 빠졌으니까." "아니 그런 것 말고 말입니다. 어딘지 몽롱한 눈빛이나 시야에 오직 한 사람밖에 보이지 않 는 듯한 태도등 하며, 이런 말하기 좀 뭐합니다만 꼭 환각제라도 먹은 듯 보이지 않습니 까?" "그러고 보니..." 네이브 또한 마로위의 말대로 어쩌면 하연이 환각제를 복용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는 하연이 약혼자인 자신조차 안중에 두지 않고 쟈스란에게 빠져들 리 가 없었던 것이다. 로베인 또한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마로위를 보며 물었다. " 환각제를 복용했는지 안 했는지 어떻게 하면 알아낼 수 있겠소?" 마로위가 말했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환각제로 가장 많이 쓰이는 약은 이소르라 는 꽃의 열매를 가루로 만든 것인데 이 약을 복용하면 혓바닥이 초록색으로 변한답니다. 그 러니 하연님의 혓바닥을 살펴모면 환각제를 복용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말에 에드릭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방법이군. 어떻게 여자의 ,그것도 황후의 혓바닥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네이브와 로베인은 그런 에드릭의 투덜거림이 들리지 않는 듯 어떻게 하면 확인 할 수 있을지 그 방법을 떠올리기에 골몰해 있었다. 마치 그 사실을 확인하는 것에 그들의 목 숨이라도 걸려 있는 듯. 제33장 드레곤의 이름으로 하라마르트 산으로 텔레포트한 카리스는 곧 본체로 돌아갔다. 드래곤의 시야로 찾아야 빨리 찾기 때문이다. 거대한 은빛 드래곤으로 화한 카리스는 하라마르트산위의 창공을 날아다니 며 인간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 몇몇의 인간들의 기척을 찾아냈 을 때였다. 쿠와와아앙! 하늘을 가르는 듯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순간 카리스는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소리는 모든 드래곤 종족들의 회합을 알리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젠장! -왜그래,카리스.? 빨리 하연을 찾아봐! _안 돼 ! 지금 그 소리 들었지? 우리 종족의 긴급 회합을 알리는 소이다. 가봐야 돼! -으악! 그럼, 하연은? 이제야 만날 수 있게 됐는데 여기서 돌아가자고? 싫어! -나도 싫지만 어쩔 수 없어. 이 소리는 우리 종족의 존망이 걸린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상 울리지 않는 소리니까 반드시 가봐야 해. 하지만 갈루마의 불평은 멈추지 않았다. -왜 하필 이때 이 시간이란 말이야! 게으른 드래곤들이니 그런 문제가 생겼다면 벌써 오래 전에 생긴 문제였을 텐데 왜 꼭 지금 이때..... 그러나 정작 갈루마가 불평하고 싶은 상대는 자신이었다. 이렇게 지팡이에 영혼이 봉인되어 스스로는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자신의 상태를 말이다. 안타까운 듯 하라마르트 산위를 한 바퀴 돈 칼링스타는 긴 울음소리를 내며 혼 대륙의 남쪽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혼 대륙의 남쪽에는 두 개의 섬이 있다. 자바와 노바, 모두 다렌국과 연결된 섬들로 안개와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그섬들 사이에는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마법의 결계로 둘러쌓인 신비한 섬이 있었는데 바로 사바 섬이었다. 그사바 섬에는 대부분 엘프들이 살고 있었으나 예외적으로 드래곤이 한 마리 살고 있었다. 바로 드래곤들의 로드이자 골드 드래곤인 샨스트리아였다. 때문에 종족의 모임을 알리는 소 리가 혼 대륙 위를 가르자 사바 섬으로 드래곤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실버 드래곤 칼링스타도 있었다. 사바 섬에 내려선 칼링스타는 다른 드래곤들이 대부분 엘프로 폴리모프한 데 비해 인간으로 폴리모프했다. 그것은 하연과 같은 종족인 인간이고 싶은 그의 마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칼 링스타처럼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드래곤이 또하나 있었는데 그는 레드 드래곤 바블라드였 다. 비블라드는 붉은 머리의 여전사 모습으로 폴리모프해 있었다. 그녀를 본 카리스는 곧장 바블라드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여어! 바발라드 ,암컷으로 변한 모습이 정말 볼 만한데?" 바블라드는 카리스의 조롱에 가볍게 눈살을 찌뿌리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흥!" 그리고 카리스를 무시하고 지나쳐 안개가 자욱한 바위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바블라 드를 보며 카리스는 마치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빙긋빙긋 웃으면서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많은 드래곤들이 모여 있었는데 동면에 들어가 있었던 어린 드 래곤들이나 헤츨링마저도 모여 있었고 아직 부화되지 않은 자신의 알을 들고 온 드래곤도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긴급 소집을 한 거야?" 그러나 다른 드래곤들도 모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한참 드래곤들끼리 안부 인사를 주고 받으며 웅성웅성 떠들고 있을 때였다. 그들 눈앞에 한 공간이 열리며 긴 금발 머리에 엘프의 모습을 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그러 자 드래곤들이 모두 일어나 그녀를 반갑게 맞았다. "로드!" "로드, 무슨 일입니까?" 그녀가 바로 드래곤 로드인 샨드트리아였다. 하지만 반갑게 로드를 맞던 드래곤들은 샨드트리아의 굳어진 안색에 그들 또한 안색을 귿히 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그들의 로드인 샨드트리아가 어떤 드래곤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지혜롭고 침착 하며 그 어떤 드래곤들보다 배나 낙천적인 드래곤, 그것이 바로 샨드트리아였다. 그런데 그 런 샨드트리아의 굳어진 얼굴이라니. 게다가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으니 막상 입을 연 샨드트리아가 말을 더듬는다는 것이었 다. "에, 그러니까... 몇 주 전에 신께서 흠... 신의 계시가 있었습니다." 이에 모두들 더욱 긴장된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는 가운데 샨스트리아는 긴 한숨을 내쉬었 다. 그리고 몇번 목을 가다듬더니 침착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신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이 혼 대륙은 멸망의 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 드 래곤들에게 죽음을 준비하라는 명입니다." 순간 동굴 안은 침묵 속에 잠겼다. 혼 대륙의 멸망이라니... 그러니 처음의 충격이 지나자 대부분의 드래곤들은 곧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분위 기였다. 신의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종족으로서 신의 뜻이라면 죽음마져도 담담히 받아들 일 수 있는 것이 드래곤 종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드래곤도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바블라드와 칼링스타였다. 바블라드는 충격을 받아 새하애진 얼굴로 외쳤다. "싫습니다. ! 받아들일 수 없어요! 이제야 겨우, 간신히 함께할 수 있는 존재를 발견했는데 이렇게 헤어질 수는 없어요! 이렇게빨리는 절대 안 돼요!" 그 심정에 있어서는 카리스도 마차가지였다. 더군다나 그들의 상대는 인간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죽음과 환생의 사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림으로 보내야 할지 할 수 없는 일인데 이제는 그것마저도 불가능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그들에게 그들 스스로의 죽음보다도 더한 충격이었다. 샨스트리아는 그런 바블라드와 칼링스타를 연민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며 위로하듯 말했다. "받아들이세요. 신의 뜻입니다. 함께할 구는 없어도 함께 죽을 수있으니 그 또한 신의 자비 로움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바를라드와 칼링스타의 귀에는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 었다. 혼 대륙의 멸망도, 그들이 사랑하는 인간들의 죽음도, 그 자신들의 죽음도. 샨드리아가 모든 드래곤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조용히 각자의 레어에서 멸망의 때를 기다리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우리를 창조 하신 신의 뜻에 따르는 길입니다." 그러자 드래곤들은 묵묵히 샨스트리아의 레어를 떠나 각자의 레어로 돌아갔다. 그 가운데 바블라드와 칼링스타만이 마지막까지 남아 넋을 잃은 채 앉아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 을까? 갈루마가 그런 칼링스타가 답답한 듯 소리쳤다.- -야! 왜 그렇게 넋을 잃은 채 앉아 있는 거야? 빨리 하연에게 가야지! 이것이 설령 마지막 이라도 사랑한다면 마지막까지 하연의 곁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니야? 마지막. 그말에 칼링스타는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그래, 이게 마지막인데 이렇게 헤어질 수는 없어. 마지막까지 그녀를 사랑하면서 그녀와 함 께할 거야." 그러면서 눈앞에서 순식간에 텔레포트해 사라지는 칼링스타의 모습에 그제야 바블라드 또한 정신을 차린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젠장! 내가 칼링스타보다도 못하다니... 훗! 하지만 마지막에 승리하는 것은 나일거다. 너의 사랑보다는 내가 가라프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깊으니까. 기다려, 가라프! 우리 죽음의 그 순간을 함께 맞이하자." 마로위는 뜨거운 차를 끓여 황후전으로 향했다. 그를 막는 병사들이 길목마다 있었지만 그 가 황후에게 고용된 의사로 약을 가져가는 길이라고 하자 모두 길을 열어주었다. 마침내 황후전 앞에 이른 마로위는 시녀들에게 그가 약을 가지고 왔다고 좀 전해달라고 부 탁했다. 그러자 시녀들 중 한 명이 안에 들어가 사실을 고했고 잠시 후 그는 황후전 안으로 안내되었다. 하연은 햇빛이 드는 창가에 작은 테이블에 멍하니 인형처럼 앉아 있다가 마로 위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아! 잘 있었어요, 마로위. 그런데 약이라니 무슨 약이에요?" 마로위는 자신이 들고 온 차를 한 잔 따라서 하연의 앞에 놓아주며 말했다. "여전히 머리가 많이 아프지요? 머리를 맑게 해주는 차입니다. 드셔보세요," 그말에 하연은 기쁜 듯 차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렇지 않아도 간밤에 머리가 아파 고통에 사달렸었기 때문이다. "앗! 뜨거워!" 물이 너무 뜨거워서 아연은 그만 혀를 데인 듯 입을 감싸 쥐었다. 그러자 마로위가 미안하고 놀란 표정으로 하연의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어디, 상태가 어떤지 입 좀 벌려보십시오." 하연이 입을 벌리자 마로위는 희색을 띤 눈빛으로 재빨리 하연의 혓바닥을 살폈다. 그리고 색을 확인한 마로위의 표정은 굳어지고 말았다. 그가 볼 때 하연의 상태는 환각제를 복용한 상태가 분명한데 혓바닥은 초록색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이지?" 그런 마로위를 보면서 하연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래요? 많이 데었어요?" "아, 아닙니다. 그냥 내버려 두어도 괜찮을 것 같군요. 아무래도 차가 뜨거운 것이니 조심해 서 드십시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연님." 서둘러 나가는 마로위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하연은 다시금 햇살이 부서지는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그곳에 쟈스란이 있기라도 한 듯. 황후전을 나온 마로위는 서둘러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을 방으로 향했다. 방안에는 로베인과 네이브가 초조한 표정으로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가 마로위가 들어서자 황급히 물었다. "어떻소?" "확인해 보았습니까?" 마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초록색은 아니었습니다." 절만적인 표정을 짓는 로베인과는 달리 네이브는 어두운 안색이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환각제를 복용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군요." 마로위는 그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단정 지을 수만은 없습니다. 환각제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네이브와 로베인은 하연이 환각제를 복용한 것은 아니라고 단정했다. 사랑에 빠진 것이 분명하다고. 단지 그 상대가 자신이 아니라서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은 것 뿐이라고. 한편 그 시각, 에드릭은 왕궁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며 바토르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곳곳에 마법 탐지 아이템이 발동해 들어갈 수 없는 곳이거니 병사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 는 곳투성이라 에드릭은 제대로 왕성 안을 살펴볼 수가 없었다. '분명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어." 그렇지 않다면 왕성 안에 경비가 이렇듯 삼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왕성 밖 경비라면 또 모르지만. ~ 다시 하라마르트 산으로 텔레포트해 온 카리스가 막 본체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그가 있 는 쪽으로 일단의 인간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혹시 그들 중 하연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카리스는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인간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카리스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바로 그가 잘 아는 인간들이었던 것이다. 사담,미루엘, 율리아, 웨이, 소시언.... 그를 향해 달려오는 그들의 모습에 카리스는 자신조차 놀라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반 기고 말았다. "카리스!" "여∼여기서 만나는 군요." "소식 들었군요? 하연을 만나러 가는 거지요? 저희들도 하연을 만나러 왔어요." "카리스님!" 수선스런 용병들의 모습에 카리스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 하연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그리고는 사담에게 가볍게 눈으로 인사를 하고는 처음 보는 일행인 엘프와 그 앨프에게 두 손이 묶인 채 끌려오고 있는 붉은 머리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카리스의 존재를 눈치챈 듯 두 눈에 두려움과 경외를 가득담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 다. 그런 그들에게 카리스는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는 뜻의 경고가 담긴 눈빛으로 희미하게 웃으며 사담에게 물었다. "이들은 누구입니까?" 사담이 간단히 그들을 소개했다. "이쪽은 히싱, 저 어둠의 사제는 휠리아, 바로 아연을 죽이도록 사주한 여자지." 순간 카리스의 몸에서 강렬한 살기가 피어 올랐다. 저 여자가 바로 그들에게서 하연을 빼앗 아간, 죽음에 이르는 그녀를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넋을 잃고 있게 만들었던 바로 그 여자라는 생각이 들자 분이 풀릴 때까지 그 자리에서 그녀를 갈가리 찢어 죽이고 만 싶었다. 그 살기에 직접적인 살기에 대상인 휠리아는 물론이고 보고 있던 용병들마저도 두려움에 떨 어야 했다. 카리스가 음산한 목소리로 사담에게 말했다. "저 인간을 왜 아직까지 살려둔 거지? 네가 죽이지 못하겠다면 내가 죽여주마." 그러나 사담은 허락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를 죽일 수 있는 것은 하연 뿐이다." 그말에 카리스는 살기를 약간 누그러뜨리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사담에게 물었다. "하연이 저 여자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은가? 자신을 죽인 꼬마가 울고 있으니까 오히려 자 신은 아프지 않으니 괜찮다고 위로하던 여자다.분명 이상한 핑계를 대서라도 저 갈아 마셔 도 시원치 않은 인간을 용서해 주고 말겠지. 그러니 차라리 지금 내가 죽여 버리겠다는 것 이다." 사담은 카리스의 말에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하연은 카리스의 말대로 할 테니까. 망설이고 있는 사담을 보며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휠리아가 입을 열었다. "왜 그녀를 죽이려고 했는지 물었었지요?"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휠라에게로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들 모두 그 점이 궁금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네이를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네이라니? 모두 어리둥절해하는 가운데 휠리아는 자신이 사랑하는 네이가 하연에게 마음이 기울자 그녀가 증오스러워서 죽이려고 했다고 고백했다. 사담과 카리스는 처음에는 그 빼문에 하연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에 기가 막힌 심정이었지만 곧 그런 일이 아직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 더욱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 렀다. 하연이 얼마나 많은 남자들에게서 사랑을 받았었던가? '그런데 네이라니 ,그 자식은 또 누구지?' 카리스와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듯 미루엘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네이라면 혹시 네이브 스마인을 말하는 것입니까?" 휠리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휠리아를 보며 웨이는 허탈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사랑이라는 것이 참으로 무섭다고 생 각했다. 그러면서 궁금한 점이 떠올라 물었다. "어둠의 사제로 보이는데 그럼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그를 저주할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러 지 않았습니까?" 잠시 쓴 웃음을 짓던 휠리아는 카리스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인간들은 모르겠지만 위대한 분께서는 이해하실 수 있겠지요? 제 나이 육십이 넘어 처음으 로 만난 진정한 사랑이었습니다. 너무도 소중해서 참아 저주할 수도 없는. 살려달라고는 하 지 않겠습니다. 다만 마지막으로 단 한 번만 그를 만나도록 해주세요. 그에게 사랑한다고 정 말 사랑했다고 말해 주고 싶어요." 카리스는 휠리아에게 동병상련의 심정을 느꼈다. 그 또한 하연이 사랑하는 자인 로베인을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가 죽을 경우 슬퍼할 하연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 참아 죽 이지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또한 인간들은 모르지만 곧 혼 대륙은 멸망해 어차피 그녀를 포함한 이 대륙의 모든 존재들 이 죽음에 이르게 되어있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인사를 하고 싶다는 그녀 의 말을 카리스는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카리스는 나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뜻대로 해라, 인간." 그러자 휠리아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며 보랏빛 눈동자에 눈물이 글썽였다. "고맙습니다, 위대한 s분이여! 정말 고맙습니다." "무슨 일인가, 비욤?" 집무실에 앉아서 연일 대륙 전역에서 보내어지는 서류들을 들여다보면서 쟈스란은 얼굴도 들지 않은 채 물었다. "쥐새끼 한 마리가 왕궁 안을 뒤지고 다니고 있습니다, 폐하! 어떻게 처리할까요?" 비욤은 간사한 눈빛을 빛내며 아주 확실히 그 쥐새끼를 죽여 버리겠다는 뜻을 담아서 말했 다. 하지만. "...황후의 일행이었지? 내버려 둬라!" "그,그렇지만..." 비욤은 자신도 모르게 말대꾸를 하고 말았다. 그것은 쟈스란의 뜻에 불복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의지체로서 그에게 어떤 위험의 씨앗 이 될 만한 것도 남기고 싶지 않다는 그의 마음의 발로였다. 그가 죽으면 그 자신 또한 죽 는 것이니까. "어차피 그자의 힘으로는 마법 결계 안쪽으로는 들어가지도 못해! 그러니 내버려 둬!" "알겠습니다,폐하. 그리고...." 그때였다. 갑자기 쾅쾅! 문이 울리며 밖에서 다급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황후께서, 황후께서....!"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시녀의 목소리에 서류에서 고개를 든 쟈스란은 비욤이 문을 열려 고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먼저 달려나가 문을 열며 외쳤다. "무슨 일인가?" 시녀는 갑자기 들이밀어진 황제의 얼굴에 깜짝 놀라며 말했다. "황후 마마께서 아프신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좋을지...." 그말에 쟈스란은 시녀를 밀치듯이 하고느 황후전으로 달려갔다. 황후전의 문은 활짝 열린 채 시녀들이 그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며 근심 어린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제치고 안으로 들어선 쟈스란은 고통스러운 듯 입술을 악물며 신음을 흘리고 있는 하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 하연 , 왜그래? 어디가 아픈 거야?" 하연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쟈스란은 무척 당황했다. 그가 아는 하연의 모습은 언제나 웃는 유쾌한 얼굴뿐이었기 때문에 이처럼 괴로워하는 모습을 볼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 다. "으, 하아.... 으윽! 아악!" "하연! 아, 그래!" 마법, 마법을 펼치면.... "힐!힐! 힐... 젠장!" 전혀 마법이 먹히지 않자 그제야 하연에게 마법이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린 쟈스란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때 그런 그를 지켜보던 시녀 하나가 말했다. "저, 의사를 부르시면..." "그렇지, 의사! 여봐라 ! 당장 황후와 함께 온 의사를 데리고 오너라!" "네!" 밖에 서 있던 병사 하나가 재빨리 대답하고는 다급하게 의사를 데리러 갔다. 의사를 기다리는 동안 쟈스란은 심장이 바싹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하아, 쟈스란 ... 아파, 나 너무 아파!" "하연!" 저도 모르게 쟈스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대신 아플 수만 있다면 자신이 아프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째서이지? 하연, 너를 원한 것이 내 욕심이었니? 그래서 신께서 나를 벌하시는 걸까? 하 프지마 하연... 네가 아픈 것보다 날 증오하는 널 보는 것이 나을 것 같아. 흑흑!"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의사 마로위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서는 쟈스란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급히 하연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상태가 많이 안 좋았다. "어떤가? 어디다 아픈 거지?" 쟈스란의 물음에 마로위는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하루빨리 신의 유산인 엘레나의 눈물을 찾아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그말에 쟈스란은 멍한 표정으로 마로위를 바라보았다. 신의 유산이라니... 물론 그도 하연이 그가 있는 하라마르트산으로 온 이유가 신의 유산인지 뭔지를 찾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엘레나의 눈물이고 하연의 병을 고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 은 그도 모르고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는 단지 그 일이 언제 나와 같은 하연의 보물찾기 정도하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니.... 그렇다면 하연은 그전에도 병을 갖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행복하 게 웃을 수 있었던 거지? 복잡하기만 한 쟈스란의 생각을 끊어버린 것은 하연의 고통스런 신음성이었다. "하악...." 쟈스란은 햐연의 이마에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올려주며 말했다. "하연, 조금만 참고 기다려. 내가 반드시 엘레나의 눈물을 구해올테니까." 그러나 하연은 머리 속이 깨질 것 같은 고통에 그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저 신을 향 해 저주하듯 중얼거릴 뿐이었다. '왜 저만 이렇게 아파야 하는 거지요? 살고 싶어요. 저 좀 살려주세요, 신이여! 제발, 저를 구원해 주세요!' 하연의 눈가에서는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루엘의 뒤를 따라 용병들과 사담들, 그리고 카리스는 하라마르트산 깊은 곳으로 계속 들 어갔다. 그리고 한 계곡 앞에 이르자 그들은 멈춰 섰다. 미루엘이 말했다. "길드의 정보에 따르면 이곳이 푸른 계곡으로 근래 이 근처에서 수상한 사람들의 움직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연이 신의 유산을 찾으러 하라마르트산으로 들어왔다면 제일 먼 저 이곳을 거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병들에게는 미루엘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그들의 눈앞에 보이는 계곡의 양 벽으로 수많은 푸른 보석들이 빽빽이 자라나 있었던 것이다. 카리스 또한 드래곤다운 탐욕으로 가득 차서 그 보석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때 조심스럽게 벽 주위로 손을 휘저어보던 히싱이 말했다. "이곳에 마법이 펼쳐져 있는 것 같은데요?" 마법? 그말에 정신이 번쩍 든 카리스는 마나 탑지를 시작했다. 하긴 이렇게 보석들이 늘어 선 계곡이라면 그들처럼 다른 인간들도 이미 발견했을 텐데 아직까지 그대로인 것이 이상했 던 것이다. 그러자 히상의 말대로 마나의 배열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이 느껴졌다. "계곡을 보호하기 위한 마법인가? 함부로 들어가면 위험할수도 있겠는 데요?" 하지만 모두 기대에 찬 눈으로 카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라면 마법을 해제하고 그들을 들어 가게 해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그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 는 방법으로 보답받았다. 갑자기 카리스의 모습이 눈앞에서 흐릿하게 사라지는 듯하더니 은빛의 거대한 빛무리로 화 하면서 어느덧 그들의 눈 앞에 거대한 실버드래곤 한 마리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그의 정체를 몰랐던 용병들과 마법사 아켄의 눈이 더 이상 커질수 없을 만큼 크 게 떠진 가운데 칼링스타가 입을 쩌억 벌리며 주변의 모든 마나를 끌어모으는 듯 숨을 크게 들이쉬는 것이 보였다. 이에 사담이 다급하게 외쳤다. "피해! 브래스를 쓰려는 모양이다!" 그 소리에 얼굴빛이 헬쓱해진 용병들과 히싱, 그리고 마법사 아켄은 엉덩이에 불이 붙은 것 처럼 칼링스타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몸을 날렸다. 쿠와아앙! 산이 들썩여지는 듯한 거대한 굉음이 울리더니 차가운 불길이 한차례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 다. 어느 정도 열기가 가시자 고개를 든 그들은 거대한 석벽이 한순간의 환상인 듯 사라져 버리고 없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광경에 새삼 그래곤의 무서움을 느낀 그들은 몸속에서 치밀어오르는 한기에 부들 부들 몸을 떨었다. 뚜벅, 뚜벅. 쟈스란은 침묵의 방문 앞에 이르자 걸음을 멈추었다. '설마 내가 이 방문을 열게 될 줄은...' 그자신조차도 생각지 못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하지만 하연을 구하기 위해서는 신의 유산 이 꼭 필요하고 현재 그 신의 유산이 있는 곳을 아는 자는 마왕인 바토르뿐이라고 들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그를 꺼내주기 위해 침묵의 방 앞에서 있는 것이었다. 저절로 찌푸려 드는 눈살을 어쩌지 못하고 방문을 연 쟈스란은 먼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그라도 침묵의 방의 마법에 걸리면 다시는 나올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크,크으윽!"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가 방구석에서 들려오자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쟈스란은 언령 바 법으로 옥죄어오는 결계 때문에 온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는 바토르를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에 쟈스란은 어이가 없었다. 분명 말을 하면 결계가 더욱 강해 질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분노를 참지 못해서 계속 소리를 지르다니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쟈스란을 본 바토르는 이를 들어내듯 날카로운 눈초리로 매섭게 그를 쏘아보며 으르렁거렸 다. "크아아아∼ ! 이 망할 인간! 어서 날 풀어주지 못해!!" 그 말로 인해 바토르의 몸은 더욱 고통스러워져 온몸의 살이 뜯겨져 나갈 지경이었다. 하지 만 바토르는 쟈스란을 향한 분노를 멈추지 않았다. "가만두지 않겠다. 이 빌어먹을 인간! 무슨 수작으로 날 여기다가 가둔 것이냐?" 하지만 쟈스란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한 듯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며 품속에서 마법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그 모습에 쟈스란이 자신을 죽이려는 것이라고 확신한 바토르는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다가 이윽고는 체념을 한 듯 두눈을 감아버렸다. '불의 마왕인 나 바토르가 이렇게 최후를 맞이하다니...' 쾅! 그런데 뜻밖에 폭발하는 소리가 들리고 한참이 지나도록 자신의 몸에 아무 이상이 없는 것 이 아닌가? 이상해서 눈을 뜬 바토르는 자신의 몸이 아닌 그의 뒤쪽의 벽이 무서져 허물어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육체를 억압하던 결계 또한 사라져 있음을. "크, 어째서지?" 몸에 서서히 힘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바토르가 물었다. 그러자 묵묵히 바토르의 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쟈스란이 말했다. "하연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다." 바토르와 침묵의 방을 나온 쟈스란은 우왕좌왕 뛰어 다니는 병사들과 하인들을 보고 얼굴을 찡그리며 외쳤다. "무슨 일인데 이렇듯 소란이냐?" 병사들은 쟈스란을 보자 눈에 띄게 안심하는 표정으로 그의 앞에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말 했다. "큰일 났습니다. 폐하! 일단의 용병들과 마법사가 왕성 외부의 결계를 파괴하고 지금 내성 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뭐라고?" 외성의 결계를 파괴하다니... 그것은 11서클인 마법사가 들어왔단 말인가? 그러다 하연의 일행 중에 드래곤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쟈스란은 곧 외부의 결계를 파 괴하고 들어온 존재가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쳇! 카리스까지 나타나다니 갈수록 하연을 지키기가 힘들어지겠군.' 쟈스란이 바토르를 침묵에 방에 가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가 마왕인 만큼 하연을 모면 그녀가 악마와의 계약으로 인해 쟈스란에게 빠져 있다는 것을 랄아챌 수 있을 것이 분면햇 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신의 유산을 찾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빼내오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그가 하연을 만나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카리스가 나타났으니... 드래 곤인 그가 악마와의 계약을 눈치 채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 아니겠는가? 한숨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쟈스란은 그의 뒤에 서 있는 바토르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실버 드래곤인 칼링스타님인 것 같은데 나가서 맞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왕 이시여. 그분이라면 하연을 위해 신의 유산을 찾는 데 도움이 될 테고 말입니다." 솔직히 바토르는 신의 유산을 찾는 일은 그 자신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 간이 촉박하다소 하니 드래곤의 힘을 빌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고 말 았다. 그러자 쟈스란은 그들을 곧장 성문 밖으로 텔레포트시켰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 성문으로 들어서던 카리스 일행들과 마주쳤다. "헉! 쟈스란?" 그를 본 미루엘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서리쳤다. 놀라기는 그를 익히 알고 있던 카리스와 사 담 ,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그를 보게 될 줄이야. 잠시후,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은 카리스가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넌 쟈스란인가, 슈마인가?" 그러니 r그말에 대꾸한 것은 쟈스란이 아닌 바토르였다. "하연을 위해 신의 유산을 찾겠다고 나섰으니 슈마가 아닌 쟈스란인 것이 분명하겠지," 제 33장 물의 여신 엘레나 "소환!" 쟈스란은 자신을 ,아니, 하연을 찾아온 카리스와 그 일행등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마법을 사용했다. 그러자 성문과 그 안쪽으로 이어지는 길 위에 가벼운 티타임에나 어울리 만한 여러개의 우아한 탁자와 의자들이 나타났다. "앉으시지요." 친절하게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처러 부드럽게 웃으며 쟈스란은 그들에게 의자를 권했다. 이 에 카리스를 비롯한 일행들은 어찌 되었든 불청객의 입장인지라 주인의 뜻에 따라 자리에 앉을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자리에 앉자 쟈스란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도 자리에 앉았으나 바토르는 카리 스와 그 일행들을 노려보면서 불쾌한 심사를 여지없이 드러내며 그대로 서 있었다. 아픈 하연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엘레나의 눈물을 찾아야만 하는 이때 뜻밖의 방해꾼들이 나타났 기 때문이다. 쟈스란은 가만히 냉정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카리스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꽤 늦으셨군요." 그랬다. 쟈스란으로서도 미처 생각지 못했었는데 드래곤인 카리스가 하연이 살아 있다는 소 식이 전해진 지가 꽤 되었는데도 지금에서야 그녀를 찾아온 것은 확실히 의외의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일이 좀 있었다." 짧게 대답하는 카리스의 어조에서 풍기는 위협에 쟈스란의 안색은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유희를 나온 인간 마법사 카리스가 아닌 실버 드래곤 칼 링스타라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 하연을 만나고 싶군." 더 이상 여기서 지체하기 싫다는 듯 카리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데 뜻밖에 쟈스란이 고개를 가로젖는 것이 아닌가? "안 되겠는데요." "뭐라고?" 사담과 미루엘마저 어이가 없어져서 쟈스란을 험악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아닌 그들이 하연을 만나겠다는데 안 된다니... "어째서냐?" 저도 모르게 발해지는 드래곤 피어를 느껴 카리스가 이를 악물며 물었다. 그에 따라 공포를 느낀 다른 사람들은 카리스의 주위에서 모두 한두 걸음씩 뒤로 물러섰으나 쟈스란은 담담한 표정으로 받아들이며 말했다. "하연이 아픕니다. 하지만 마법이 듣지 않는 하연에게 여러분들이나 나나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지요. 아,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하연을 위해 도움이 될 만한 방법이 있으니까요." 카리스는 쟈스란의 등 뒤에서 인상을 잔뜩 쓰며 그를 노려보고 있는 불의 마왕 바토르를 보 며 물었다. "그것이 고작 신의 유산을 찾는 일이란 말인가?" 하연이 아프다는데 고작 보물 찾기 놀이나 하자니... 어처구니가 없어하는 카리스를 보며 쟈 스란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 신의 유산이 무엇인지에 따라 다르겠지요," 그말에 흠칫한 카리스와 그 일행들이었다. 그들은 하연이 신의 유산을 찾는다는 소리는 들 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마법사 아켄을 제외하고는 . 때문에 모구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쟈스란을 주시하는 가운데 쟈스란은 잠깐 뜸을 들이 며 말했다. "그것은... 바로 엘레나의 눈물입니다." 엘레나의 눈물이라니... 그것은 신화에나 나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것이 실제로 존재했단 말인가? 그런 그들의 의문을 알아챈 듯 쟈스란이 설명했다. "이미 불의 마왕 바토르님께서 그 지도의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엘레나의 눈물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 말에 사담, 미루엘, 용병들은 하연이 그어떤 병에 걸렸든 반드시 나으리라는 확신에 환호 하듯 기뻐했다. 하지만 카리스는 무슨 생각인지 전혀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았고 마법사 아켄의 눈빛은 그어느 때보다 격렬한 감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러자 쟈스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 그럼 지금 출발하도록 하지요. 한시라도 빨리 엘레나의 눈물을 구해야 하니까요." 이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카리스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모습에 모두 의아힌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카리스가 냉담하게 말했다. "너희들끼리 가라. 난 여기 하연의 곁에 있을 것이다." "지금 그말은 하연을 살리는 데 협조하지 않겠다는 뜻입니까?" -너, 지금 제 정신이냐? 너무나 뜻밖의 말에 쟈스란과 갈루마가 동시에 소리쳤다. 그리고 사담과 미루엘의 얼굴에는 카리스를 향한 비난의 빛이 어려 있었다. 그렇지만 카리 스는 아무런 대꾸도 그렇다고 변명도 하지 않았다. 하연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엘레나의 눈물이 필요하다는 것은 그만큼 하연의 졍이 인간의 의술로서는 고치기 힘든 병이라는 뜻이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 때문에 엘레나의 눈 물을 찾아 돌아다닌다 해도 신의 유산을 찾는 일이 그 어디 쉽겠는가? 또한 찾는 다고 해도 어차피 곧 혼 대륙이 멸망할 것이니 얼마 살지도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그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엘레나의 눈물을 찾는 데 소비하기보다는 하연의 곁에서 그녀와 함께 있고 싶은 것이 카리스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쟈스란의 입장에서는 그가 하연과 함께 있는 것을 허락할 수가 없었다. 그가 하연의 지금 모습이 계약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반드시 그 계약을 깨뜨리려고 할 것이고 그 렇다면 하연은 더 이상 그를사랑하지도, 그렇다고 그를 용서하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에 와 서 하연이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그에게 큰 형벌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지금 로베인과 함께 있습니다. 그래도 만나시겠습니까?" 은연중 하연이 사랑하는 사람은 로베인이니 포기하는 것이 어떠냐는 뜻이 담겨 있는 말이었 다. 순간 카리스의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 하연이 살아난다면 제일 먼저 로베인을 만나러 갔을 테니 지금쯤 같이 있다 해도 이상할 것 이 없는 일이었지만 그 사실을 직접 전해 들으니 마음이 허전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카리스의 입장에서 이제는 그녀가 누구를 사랑하든 상관이 없었다. 그가 그 녀를 사랑하고 마지막 시간을 그녀와 함께 보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으니까. 그래서 카리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물론." 카리스의 말에 쟈스란은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잠시 기다리시지요. 하연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그가 가는 것이 더 빠른데 왜 아픈 하연을 이리로 데려오겠다는 것인지 의아해서 물으려는 데 쟈스란은 순식간에 그들의 눈앞에서 이동마법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워프!" 카리스와 일행들은 하연을 기다리면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드디 어 하연을 만나게 된 것이다.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반겨줄 하연의 모습을 떠올리며 어서 빨리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리 고 있는데 잠시 후 왕궁 안에서 누군가 뛰어나오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연인가 하는 생각에 목을 빼고 쳐다보던 그들은 하연이 아닌 로베인과 네이브, 그리고 마 물헌터 인 듯 보이는 처음보는 한 사내의 모습에 내심 실망하면서도 표정을 바꾸어 반갑게 맞았다. "아니? 사담, 카리스, 미루엘!" 로베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어떻게 여기에...!" 쟈스란으로부터 그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뛰어나온 것으로 생각했던 카리스 일행드 은 로베인의 너무도 놀라는 표정에 의아해서 r그 이유를 물으려는데 그때 그들을 둘러보던 로베인이 시큰둥하게 서있는 바토르의 모습을 보고는 버럭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바토르, 도대체 어디 있었어? 우리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그건 그렇고 하연을 좀 살펴 봐 줘. 마로위의 말로는 하연이 환각제를 복용한 것 같다는데 우리 생각에 그건 아닌 것 같 고, 그렇다고 또 아니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석연치가 않아서 말이야." "뭐? 어디가 어떻게 이상한데?" 바토르는 물론이고 카리스, 사담, 미루엘, 히싱 등 모두가 로베인의 곁으로 몰려들어 궁금증 을 들어냈다 로베인은 그들에게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 하연이 기억을 잃었고 쟈스란과 만나자마자 돌연 히 사랑에 빠진 일 등을 설명해 주었다. 그말에 그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 다운데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네이브의 옷자락을 누군가가 잡아당겼다. 의아 해서 돌아본 네이브는 생각지도 못했던 여인이 자신에게로 안겨들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네이!" 네이브는 휠리아의 어깨를 잡아 자신에게서 떼어놓으며 차갑게 물었다. "여긴 어떻게 왔지?" "네이가 보고 싶어서요. 네이는 내가 보고 싶지 않았어요?"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하듯 묻는 휠리아를 잠시 내려다보던 네이브는 곧 그녀를 외면하듯 고 개를 돌리고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나중에 얘기하지." 그런 네이브의 모습에 순간 휠리아의 눈 속에서는 차가운 분노가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리 다른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다지만 한때 품에 안고 즐기던 여인에게 어찌 이리 대할 수 있단 말인가? 예의상이라도 그녀의 서클렛이 보이지 않는 이유나 이마에 난 엑스 자 형의 칼자국 에 대해서 물어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그녀의 서클렛이 없다는 것도, 이마의 상처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말인가? 그렇게 휠리아가 분노에 몸을 떨고 있을 때였다/ 쟈스란이 하연과 중년의 사내 마로위를 데리고 왕성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하연." "하연." 반가운 마음에 그녀에게 달려가려던 카리스와 그 일행들을 하연에게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느낌에 주춤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마치 그녀의 얼굴을 하고는 있지만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도 그럴 것이 하연은 그들이 두려운 듯 쟈스란의 옷자락에 매달려 훔쳐보듯 그들을 쳐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연?" 바토르는 하연에게 왜 그러고 있으냐는 황당한 표정으로 물어 보았다. 기억을 잃은 뒤 그녀를 잘 알고 있는 듯 행동하는 사람들을 낯설어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누군가의 뒤에 숨어 있을 만큼 무서워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연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이 옷자락을 놓으면 쟈스란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으로 알겠다고 해서 , 아 쟈스란을 절대 싫어하지 않거든." 그때 하연에게서 느껴지는 낯익은 마기의 느낌에 흠칫놀란 바토르는 곧 어찌 된일인지 깨달 은 듯 쟈스란에게 무지막지한 살기를 들어냈다. 쟈스란은 그런 바토르에게 싱긋 웃어보이고 말했다. "알아채신 것 같군요, 하지만 경고하건대 섣부른 행동은 삼가 달라고 충고하고 싶군요. 지금 의 전 말 한마디로도 하연을 죽일 수 있으니까요." "이, 이...." 치솟는 화를 어찌하지 못하고 분기충천해 있는 바토르를 보며 로베인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 고 다그치듯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혹시 하연에게 나쁜일이야?" 바토르는 여전히 쟈스란을 노려본 채 말했다. "나쁜 일이냐고? 나쁜일을 넘어선 잔인한 짓이지. 저 녀석이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하얀을 자신의 마리오네트로 만든 것이니까." 충격이 모두의 머리를 내리치는 듯했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자 네이브와 마로위는 하연이 왜 그렇게 변했는지 이제야 그 이유 를 이해할수 있겠다는 표정이었고 로베인과 카리스, 사담, 미루엘, 히싱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자를 보는 듯 쟈스란을 노려보았다. "악마와의 계약을요?" 세르기아스와 질리안이 아켄과 쟈스란을 번갈아 보며 저런 인간이 여기 또 있었구나 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는데 믿을 수 없다는 듯 율리아가 바토르에게 물었다. "하지만 계약을 하려면 인간의 심장을 필요로 한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쟈스란이 사람을 죽이고 그 심장을 꺼내 계약을 했단말인가요?" 율리아는 지금은 좀 자신감이 붙은 것 같지만 예전의 그 심약해 보이던 쟈스란을 떠올리고 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 질문에 대답한 것은 카리스였다. "악마들이 요구하는 계약의 조건은 모두 다르다. 저 은빛 머리카락과 붉은 눈을 보니 머리 색과 눈 색으로 계약을 한 것이겠지. 하연이 그렇게 좋아하던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바꾸 어서 말이야." 조소하듯 말하는 카리스의 말에 쟈스란의 얼굴은 일그러질 수 밖에 없었다. 그 또한 내심 하연이 자신에게서 좋아한 것은 그검은 머리와 검은 눈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쟈스란의 마음을 알아챈 카리스가 일부러 그 상처를 후비 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쟈스란은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 하연을 끌어다가 자신의 품에 가두어 버려Tf 다. 마치 그들에게 하연은 자신의 것이아고 시위하듯 그 모습에 바토르의 분노는 더욱 커졌지만 카리스는 어느 정도 쟈스란의 심정을 이해하는 지라 사태를 냉정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그 자신 또한 할 수만 있다면 하연을 마리오네트로 만들어서라도 자신의 곁에 붙잡아두고 싶었으니까. 잠시 씁쓰름한 생각을 하던 카리스는 바토르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말했다. "바토르, 지금은 엘레나의 눈물을 찾는 것이 먼저 아닌가?" 그말에 정신이 든 듯 바토르는 살기를 가라앉혔지만 쟈스란에게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 았다. "어디 두고 보자, 인간. 정신을 차리면 나보다는 먼저 하연이 너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 다." 그것은 쟈스란 또한 충분히 생각했던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달콤한 행복을 손에서 놓 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쟈스란은 자신의 품에서 만족해하는 하연을 더욱 꼭 껴안으며 중 얼거리듯 말했다. "그래도 아무 생각없이 날 바라보는 하연보다는 나으니까?" 신의 유산을 차자기 위해 나선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인원의 제일 앞에선 자는 바토르였다. 카리스와 바토르는 지도를 보고 고대의 지형이 긴 하지만 이 지도에 표시된 곳이 하라마르 트 산의 어디쯤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고대의 지형과 지금의 지형에는 만ㄴㅎ은 차이가 있어서 지도에 표시된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바토르는 그의 마력에 반발하는 신력을 찾으면 되기에 카리스보다는 쉽게 찾아낼 수가 있어 그가 앞장서게 된 것이었다. 바토르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내내 하연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그들 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하연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카리스의 손에 들린 갈 루마마저도 하연이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에 그 시끄러운 수다를 그쳤을 정도이니.... 묵묵히 걷던 그들은 갑자기 바토르가 손을 번쩍들어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자 얼떨결에 그 자리에서 멈추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 멈추라고 했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곧 사담과 카리스, 쟈스란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풀잎과 흙 냄새에 약간의 인간 냄새가 섞여 있는 것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담이 일행들에게 외쳤다. "모두 그림자를 조심해!" 순간 위기 대처 능력에 강한 용병들은 각자의 무기를 뽑아 자신의 그림자를 향해 내려쳤다. 윽!...큭!" 그러자 땅속에서 미약한 비명 소리가 들리며 피가 솟구쳐 올랐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갑자기 검은 복면인들이 공격해 들어왔다. 그모습에 쟈스란은 재빨리 하연과 자신의 주위에 바리아를 쳤다. 카강! 복면인들의 무기가 바리어에 막혀 튕겨져 나갔다. 그러자 복면인들중에 한 명이 땅속으로 스며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에 쟈스란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밑에서 공격하면 마법이 듣지 않는 하연을 위로 떠오르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바리어를 제거해 서 도망치려고 해도 남아 있는 복면인들이 공격해 들어올 테니 이도 저도 할 수가 없는 상 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가만히 쟈스란의 품에 안겨 있던 하연이 중얼거리듯 말하는 것이아닌가? "소환." 그러자 불의 정령 로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불렀어, 주인?" "네, 땅속에서 저희들을 공격하려는 자들을 좀 막아주시겠어요?" "알았다." 대답을 하며 곧장 땅속으로 들어가 암살자들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땅속에 뜨거운 불길을 흐 르게 하면서 로우는 내심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기억을 잃었기 때문인지 더 이상 그를 로우 아저씨라고 불러주지 않는 것이나 친근하게 반 말을 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하지만 그때 쟈스란은 자신의 마리오네트가 되었어도 하연은 역시 하연이구나 하고 생각하 고 있었다. 다른 여인들처럼 가만히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지켜주기를 기다리지않고 오히 려 자신이 지켜주려고 하는 것이 말이다. 복면인들을 공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연의 안전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던 사담, 카리스, 버토르는 하연이 한전해진 것을 확인하자 복면인들을 향해 무섭게 공격해 들어가기 시작했 다. 도대체 왜 그들을 공격하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하연을 위험하게 만든 것만으로도 충 분히 그들은 용서받을 수 없으니까. 마법과 검기가 난무하는 가운데 더 이상 암살자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화풀이였던 가 그들은 장내가 완전히 폐허로 변한 뒤에야 공격을 멈추었다. 그런 그들을 약간 황당하다 는 표정으로 보던 미루엘이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모두에게 물었다. "누구를 죽이려고 했던 걸까요?" 짐작 가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만큼 그들의 일행 중에는 대단한 신분을 지인 자들이 많 았던 것이다. 적들도 그만큼 많은. 바토르가 말했다. "하연을 노린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요?" 쟈스란이 불쾌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도대체 하연이 암살자까지 고용해서 죽이려고 할 만 큼 원한은 가지게 만들 사람이던가?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하는 말일다." 그말에 모두 로베인에게 정말이냐고 묻는 시선을 던졌고 로베인은 모르는 일이라는 듯 고 개를 가로 저었다. 그도 그럴것이 바토르가 일행들 모르게 그 복면인들을 모두 불태워 죽이 지 않았었는가? "하지만 왜 하연을 ...!" 그때 단서를 찾기 위해 복면인들의 복면을 벗기고 시체를 확인해 나가던 아켄이 그들의 이 마에 공통적으로 표시되어있는 오망성을 보고는 사담에게 물었다. "이 오망성은 암살자들에게서 흔히 볼수 있는 표식입니까?" 사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보통 일급 암살자들은 팔뚝에 푸른 새의 표식을 한다고 들었습니다만 오망성의 표식을 한다는 암살자들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말에 아켄이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바토르가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 "테이트론!" "네?" "아! 우리 마족들 중에 테이트론이라는 마족이 있는데 그녀석이 유난히 저 오망성의 표식을 즐겨 사용하곤 했었지. 하지만 그 녀석이 왜 인간 하나를 죽이려고 암살자들을 파견했겠어? 직접 죽이러 나타난다면 또 몰라도." 순간 아켄은 떠올리기 싫은 한 마족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어디 에선가 그 오망성 표식을 또 본 적이 있었다는 사실도 떠올릴 수 있었다. "어디에서 봤을까?"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왔다 갔다 하던 아켄은 드디어 떠오른 듯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 려치며 말했다. "그래! 브리앙 테이트론의 소매!" 바토르가 다급히 물었다. "갈로아의 사령관인 브리앙 테이트론을 말하는 것인가?" '네 ,맞습니다. 그의 소매에저것과 똑같은 오망성의 표식들이 둘러져 있는 것을 본 적이 있 습니다.' 그 말에 바토르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흠! 그렇단 말이지? 테이트론과 브리앙 테이트론이러... 분면 뭔가 연관이 있는 것이 분명 해. 이일이 끝나면 알아보아야겠군. 그리고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하연을 죽이려는 자들과 관 련이 있다면 테이트론 네녀석은 한 천년 동안은 불구덩이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하루 종일 걷기만 했기 때문일까? 바토르는 유난히 창백해 보이는 하연의 인색에 일행들에 게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도록 ! 내가 먼저 이 주변을 좀 살펴보고 오겠다." 빠르게 사라지는 바토르의 모습을 보던 쟈스란은 몸에 힘이 풀렸는지 휘청다리는 하연을 급 히 부축해 앉히며 말했다. "힘들지, 하연?" "아니, 쟈스란과 함께 있으니까 피곤한 줄도 모르겠어." 언제나 그가 좋아할 만한 말만 하는 하연이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기뻤지만 지금은 왠지 이 게ㅣ 아닌데 하는 생각이 문뜩문뜩 들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때 하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히싱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하연, 나 정말 기억나지 않아? 우리가 만났던 곳도, 땅의 정령들도, 할아범도?" 점점 격해지는 히싱의 말에 하연은 e두려운 듯 쟈스란의 품에 파고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기억나지 않았다. 자신이 언제 어디서 엘프를 만났다는 것인지... 그러자 히싱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말했다. "땅의 정령들을 난쟁이라고 불렀었잖아. 그것도 기억나지 않는 거야? ...나 인간 세상에 나오 면서 알았어. 인간들은 더 이상 엘프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이렇게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모두들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는 거야. 하지만 그래도 하연이 있으니까, 이렇게 나 히 싱이라는 엘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참을 수 있었어. 그런데 하연마저 날 잊 은 거야?" 슬프게 돌아서며 뛰어가는 히싱의 모습을 본 하연은 왠지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손을 뻗었 지만 그 손을 쟈스란이 그러모아 쥐며 시선을 맞추어오자 순간 히싱에 대한 생각을 모조리 잊어버리고는 쟈스란을 향해 방긋 웃어 보이고 말았다. 그런 하연을 보며 쟈스란이 마주 웃 어주는 사이 슬며시 일어난 사담이 히싱의 뒤를 쫓아갔다. 엘프의 빠르기는 사담으로서도 따라잡기 힘든 것이라 히싱을 따라잡을 수 있을 지 걱정하고 있던 사담은 얼마가지않아 보이는 히싱의 뒷모습에 그가 내심 하연이 잡아주기를 바랬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히싱!" 사담의 목소리에 히싱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물었다. "떠나려는가?" "응! 그동안 고마웠다. 사담." 그에게서 처음 들어보는 자신의 이름이라고 사담은 생각했다. 언제나 인간이라고 칭했었는 데 헤어지는 이 순간에야 자신을 친구로 여긴다는 것일까? "지금은 잊었지만 하연은 반드시 널 다시 기억할 거다." 말재주가 없는 사담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위기였다. 그말에 히싱은 처음으로 평소 사담이 생각해 왔던 엘프의 모습 그대로 평화로운 미소를 입가에 띠며 말했다. "날 기억하게 되면 하연에게 말해줘. 황금의 땅에서 내가 기다리고 있겠다고, 언제까지라도, 하지만 끝내 기억하지 못한다면 우리 엘프들은 영원히 인간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겠지?" 그렇게 말하며 떠나는 히싱의 뒷모습을 보면서 사담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히싱이 더나고 사담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때까지 장내는 고요한 침묵 속에 잠겨 잇었고 그 모습에 하연은 그들이 참으로 조용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바토르가 돌아온 것은 저녁때가 다 되어서였다. "드디어 신의 유산이 있을 만한 곳을 알아냈어. 오늘 밤은 여기서 야영하고 내일 아침에 출 발하자!" 다음날. 바토르를 따라 그들이 이른 곳은 한마디로 말해 바위 산이었다. 층암 절벽에 여기저기 창문 같이 동굴들이 나 있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에드릭은 이곳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불안한 눈빛으로 바토르 에게 물었다. "설마.... 설마 저 바위 산으로 들어가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맞는데." 대뜸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바토르의 말에 에드릭은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진 얼굴로 소 리쳤다. "저 산은 가고일들의 서식지란 말입니다." "아! 그래?" 열이 올라 소리치는 에드릭과는 달리 바토르의 대답은 너무나 평이했다. 그 때문에 더욱 화 가 나 에드릭이 뭐라고 소리치려 하는 데 네이브가 간단한 말로 그를 진정시켰다. "그는 마왕입니다. 뭐가 걱정입니까?" "아, 그렇군/" 에드릭은 잊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지만 그 말의 파장은 엄청난 것이었다. 바 토르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던 용병들의 정신이 반쯤 나가 버렸으니까. "...드래곤에 이어서 이제는 마왕까지..." 헌스가 망연자실해서 중얼거리자 이너드가 그의 등을 치며 말했다. "야! 마신 소환사도 있다는 것을 잊지마라." "거기다 용병왕에 황제에 상인 길드장인 카라반도 있지." 조르가 덧붙였다. 휘이익! 웨이가 감탄해서 휘파람을 불며 중얼거렸다. "진짜 대단하군." "대단하지." 율리아가 동의하듯 말하다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눈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우리 이 기회에 용병단 하나 만들까? 혼 대륙 최강의 용병단이 될테니 무적 용병단이라고 이름을 짓고 말이야. 어때 ,하연?" 그리고 하연을 돌아보던 율리아는 순간 조용해진 분위기에 자신이 실수를 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산적을 털거나 드래곤 레어를 털자고 종용하던 하연은 더 이상 이곳에 없었으니까. 바토르가 그 침묵을 깨듯 말했다. "들어가자 .우선 하연을 구해야지." 모두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을 찾는 일은 나중이었다. 지금은 우선 하연의 목숨을 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바위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무척 많은 동굴들이 있었다. "어디로 들어가지?" 중얼거리듯 묻는 바토르의 말에 곁에 있던 카리스가 가장 왼쪽에 있는 동굴을 가리키며 말 했다. "저곳으로 들어가자!" "이유는?" "그거야 가장 내 미적 감각에 어울리는 동굴 모양이니까." 그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인 바토르는 가장 오른쪽에 있는 동굴로 들어가 버렸다. "너,너...!" 황당해서 키리스가 말을 못 잇고 있는 사이 용병들은 그런 카리스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힐 끔 보며 바토르를 따라 동굴로 들어갔다. 한낱 인간 따위에게 동정을 받고 만 카리스가 막 발작을 하려는데 그때까지 조용하던 갈루 마가 말하는 것이었다.- -참어라 ,참어. 조금이라도 교양이 있는 네가 참아야지 저 어린아이같이 유치한 마왕과 상 대를 해서야 되겠냐? 더군다나 저 녀석이 우리 일행중에 가장 빠르고 민감하게 신력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으니까 그때까지는 아니꼬워도 네가 좀 양보해야지. 하연을 위해서. "옳은 말이다. 내가 참아야지 누가 참겠어?" 혼자서 중얼거리는 카리스의 모습에 미친 것 아닌가 하는 동료들의 우려의 시선이 스쳐 지 나갔지만 갈루마의 말을 듣느라 카리스는 다행히 그것을 보지 못했다 결국 맨 마지막으로 동굴에 들어간 카리스는 제일 먼저 하연의 위치부터 파악하기 시작했 다. 하연은 쟈스란과 함께 용병들의 중간쯤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이어 동굴 안을 살펴본 카 리스는 이 바위산의 동굴들이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잘 다듬어진 내부와 천장에 보이는 빛을 내는 돌 때문이었다. '드워프들의 솜씨인 것 같은데 어째서 이곳이 가고일들의 서식지가 된 것이지?' 의아해하면서 얼마쯤 걸었을까? 쿵쿵! 쿵쿵쿵! 동굴이 무너질 듯 커다란 바위 떨어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오더니 그들 키의 배나 되는 가 고일 네 마리가 나타났다. "누,구,냐?" 바위 가는 듯 크르릉거리는 소리가 맨 앞 가고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자 바토르가 오만하게 명령했다. "비켜라! 이 바위 산을 좀 뒤져 봐야겠다." "남.의. 집. 함.부.로. 예.의. 없.다." 바토르와 일행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가고일을 바라보았다. 마물 주제에 예의를 찾다니... 하지만 하연은 전혀 황당함을 느끼지 못한 듯 쟈스란에게 속삭였다. "나갔다가 노크하고 다시 들어와야 하는 것 아냐?" 쟈스란은 그런 하연이 귀엽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누구든 나의 황후인 하연을 나와서 맞이해야 옳은 거야. 그런데 이렇게 집안에서 맞이하며 예의를 운운하다니 절대 용서해서는 안될 마물들인 것이지." "그렇구나." 쟈스란의 말은 무조건 옳다는 듯 생각도 해보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이는 하연을 보면서 바토르, 사담, 로베인, 네이브는 각기 무기를 빼어들었다. 바토르는 불의 망치 코도르를 ,사 담과 로베인.네이브는 검을 들고 무작정 달려들어 가고일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카캉! 검이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가 나면서 네이브와 로베인은 가고일의 힘에 밀려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로 인해 네이브의 검은 이빨이 모두 빠져 버려 검날이 울퉁불퉁하게 변해 버렸고 로베인은 비록 드워프인 리밍스가 검을 손봐준 덕분에 검날은 아직까지 멀쩡했지만 단 한 번의 공격만으로도 어깨가 빠질 듯이 아파서 더 이상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자신 들의 힘이 미치지 못함을 안 네이브와 로베인은 뒤로 물러나 속으로 한숨만 삼키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사이 바토르가 코도르로 천둥이 내리치는 듯한 소리를 내며 가고일 두 마리를 자갈로 만 들어 버렸고 나머지 두 마리는 사담이 가볍게 도약해 검기로 가고일들의 목을 잘라 버렸다. 솔직히 그들은 그동안 모른 척하고는 있었지만 하연과 쟈스란의 다정한 모습을 보거나 말들 을 들을 때마다 상당힌 화를 가슴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 화를 풀 수 있는 대상이 눈앞에 나타났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화를 풀 속셈으로 무작정 가고일들을 공격해 들어갔던 것이다. 비록 그것이 로베인과 네이브에게는 별 성과가 없는 일이었지만. 순식간에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잠시 멍해졌던 카리스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소리를 버럭 질 렀다.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들이야? 다짜고짜 죽여 버리다니. 물어봐야 할 것이 얼마나 많았는 데? 예의를 치린 것으로 보아 어쩌면 어떤 지성체에게 교육받은 가고일들이었는지도 모르 고..." 하지만 그런 카리스의 잔소리는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쿵쿵! 쿵쿵! 쿵쿵! 다시 가까이서 울리는 가고일들의 발소리 때문이었다. 이에 카리스는 바토르와 사담을 노려 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정보를 얻기 전에 절대로 죽여선 안 돼." 그러자 바토르와 사담은 자신들은 뒤로 물러서 있겠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린 채 뒤로 물러 섰고 그와 때를 같이하여 열 마리가 넘는 가고일들이 손에 검을 들고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험악한 기세에 왠지 짜증이 난 카리스는 마법으로 그냥 죽여 버릴까도 했지만 어찌 되었 든 먼저 정보를 얻어야 한다고 설교를 한 입장인지라 애써 웃음을 띠며 물었다. "물어볼 것이 있다. 이 바위 산과 너희에게 주인이 있는가?" 가고일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파앗! 바위 날개를 퍼덕이며 날카로운 손톱으로 카리스를 공격했을 뿐. 본능적으로 옆으로 피한 카리스는 하마터면 옷자락이 갈라질 뻔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마법을 펼치고 말았다. "윈드 커터!" 휘익! 바람이 칼날이 되어 가고일의 명치 부분에 박히더니 그곳을 중심으로 쩌억쩌억 갈라지며 일 순간에 가고일이 형체가 없는 자갈로 무너져내렸다. 그러자 아직 화를 다 풀지 못했던 바토 르와 사담이 마주보고 씨익 웃더니 망치와 검을 빼어들고 가고일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콰쾅! 쓰윽! "라이트닝 볼트!" 그때 용병들과 에드릭은 한창 내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세 마리에 10실버." "네 마리에 1골드." "말고 안돼! 바토르님과 카리스님 때문이라도 별로 많이 못 죽일걸. 난 두 마리에 1골드." 그들은 사담이 몇마리의 가고일을 죽일 수 있을지를 놓고 내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래서일까? 이번에는 세르기아스와 질리안마저 참가했다. "스승님이 다섯 마리 처리한다에 2골드 걸겠습니다." "저도요." 그에 따라 내기에 참가한 용병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전투를 응시하는 가운데 막 사담이 세 마리째의 가고일을 처리하는 모습이 보이자 환호성과 실망의 한숨이 교차하기에 이르렀 다. 질리안이 소리쳤다. "사부님, 두 마리만 더요!" 하지만 사담이 죽일 수 있는 것은 한 마리뿐이었다. 그들의 내기를 들은 것인지 갑자기 카 리스가 마법으로 검을 만들어 두 마리 가고일을 동시에 관통시켜 죽여 버린 것이었다. 이에 질리안과 세르기아스는 낙담해서 어깨를 떨구었고 네 마리에 걸어 승리를 얻어낸 에드릭은 기뻐서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가고일들을 모두 처리하고 다시 앞으로 전진한 그들이 이른 곳은 동굴 안의 한 공터 같은 곳으로 사방에 또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보였다. "어디로 들어갈까?" 바토르가 카리스에게 물었다. 그렇지만 카리스는 대답하지 않고 코웃음만 쳤다. "흥!" 어차피 그의 말을 들을 바토르가 아니지 않는가? 카리스가 대답하지 않자 바토르는 다시 사 담에게 물었다. 그러자 사담은 곧장 그들이 나온 통로에서 마주 보이는 통로를 가리켰다. "이유는?" "없어" 그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바토르는 사담이 가리킨 통로로 걸어 들어갔다. 그 모습에 내심 바토르가 사담의 말을 들을 리가 없다고 믿고 있던 카리스는 어이가 없어서 잠시 멍해 졌고 그런 카리스를 위로하듯 갈루마가 말했다. _그냥 무시해 버려라. 고상한 네가 참아야지. 사담이 선택한 통로로 한두 시간 정도를 걸어 들어갔을까? 그들은 갑자기 몰아닥치는 열기 에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동굴 안쪽은 바위마저도 빨갛게 달아올라 열을 발산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바토르야 불의 마왕이니 아무리 뜨거워도 상관이 없었고 카리스와 쟈스란은 마법으로 보호 하면 된다지만 다른 일행들은 아니었다. 이에 쟈스란은 하연의 로브를 더욱 꼭 여며주며 바 토르에게 말했다. "바토르님이 혼자 안으로 들어가셔서 앞에 뭐가 있는지 보고 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정도의 열기로 보아 앞에 더 이상 길이 있으리라고는 보기 힘든데 말입니다." 쟈스란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은 몹시 불쾌한 일이었지만 현재로써는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기에 바토르는 아무 말없이 안쪽으로 휘익 몸을 날렸다. 똑! 똑! 바위가 녹아 떨어지는 소리를 잇따라 들으며 동굴의 끝에 이른 바토르는 리저드맨들이 옹기 종기 모여 앉아 무엇인가를 바라보며 수군거리고 있는 것을 볼수 있었다. "젠장!" 쟈스란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하자 바토르의 입에서 저절로 튀어나온 욕설이었다. 그리고 그 욕설을 들은 리저드맨들이 하나하나 고개를 돌려 바토르를 바라보았다. 리저드맨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서로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누, 휘익!구?휘익!" 가고일들의 목소리보다는 그래도 듣기가 좋지만 말을 할 때마다 뿜어대는 불덩어리에 바토 르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난 불의 마왕 바토르다. 너희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하는 것이지?" 상대가 불의 마왕이라는 말에 리저드맨들은 그 도마뱀 눈을 더욱 크게 치켜뜨며 놀라다가 모두들 황급히 바토르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애걸하기 시작했다. "도, 휘익!와, 휘익!주...." "그만!도와달라고?뭘?" 그러자 제일 뒤쪽에 있던 리저드맨들이 한 얼음으로 되어 있는 듯 한사람 머리만한 바위를 들고 와 바토르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냐?" 자세히 들여다보지도 않고 가볍게 손바닥 위에서 던져 올렸다가 받으며 묻는 바토르였다. "휘익!녹,휘익!여...." "그러니까 녹여달라고? ...왜 내가?" 순순히 그들의 부탁대로 그 얼음을 녹여주려고 하던 그는 문뜩 마왕인 자신이 왜 이따위 마 물들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리저드 맨들을 노려보며 물었다. "녹, 휘익!여, 휘익!줄,휘익!수, 휘익!있,휘익!지, 휘익!않,휘익! 습,휘익!니,휘익1까?휘익!" 바토르는 오랜만에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해 리저드맨들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는 말했다. "흠! 물론 녹여줄 수야 있지. 이 동굴의 화기를 보니 너희들이 이얼음의 결정을 녹이기 위해 불을 피운 것 같은데 이 위대한 불의 마왕이 보기에는 장난 같은 불길일 뿐이지 자, 이 얼 음 결정을 녹이려는 이유가 무엇이지?" "주, 휘익!인, 휘익!명, 휘익!령, 휘익!" "잠깐! 너희들의 주인이 명령한 것이란 말이냐? 그러니까 너희에게 주인이 있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리저드맨들을 보며 바토르는 또 한차례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카리스의 생각대로 먼저의 그 예의를 찾는 가고일들은 물론이고 이 리저드맨들까지 이 바위 산의 마 물들에게는 주인이 존재했던 것이다. 인간의 언어를 교육할 정도로 지성을 지닌 주인이. "그래, 너희들의 주인이누구냐?" 바토르의 질문에 리저드맨들이 대답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들이 있는 곳에 공간의 문이 열리며 바토르에게는 정말이지 뜻밖이자 절대 보고 싶지 않았던 존재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희고 투명한 긴 머리채를 휘날리며. "네, 네놈이 여긴 어떻게...!" 얼음의 마왕 데바는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불의 마왕바토르를 보며 비웃듯 화 사한 웃음을 떠올리며 말했다. "역시... 카리람님의 명으로 하연이라는 인간의 시종이 되었다더니 그 소문이 사실리었군요, 바토르님. 저런, 쯧쯧!" 순간 발끈한 바토르가 소리쳤다. "누가 그 따위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닌다는 말이냐? 난 엄연히 카리람님의 부탁을 받고 하 연의 호위를 하고 있을 뿐이란 말이다." 그말에 데바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이런, 머리가 나쁜 것은 정말 어쩔수가 없군요. 변명을 하셔도 그렇게 밖에는 못하시다 니." "뭣이? 변명이라니 ? 어디까지나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더 더욱 큰소리를 치는 바토르르 보며 데바는 가만히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조로 말했 다. "생각해 보십시오, 바토르님. 카리람이 누군가에게 부탁이라니... 명령이라면 또 몰라도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으...!" 바토르로서는 너무도 억울한 일이었지만 데바의 말대로 카리람님이 누군가에게 부탁을 했다 는 것은 확실히 누구라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이에 바토르는 억지로 화를 꾹꾹 눌러참으며 이를 갈 듯 물었다. "그래서 ... 여긴 어쩐 일이지?" "훗! 바토르님과는 달리 엘레나님의 부탁을 받은 것이 좀 있어서요." "엘레나님이?" 물의 여신 엘레나님이 왜 데바 따위에게 부탁을 한단 말인가? 데바는 자신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부드럽게 쓸어 올리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하연이라는 인간이 엘레나의 눈물 찾는 것을 돕고 건강을 되찾으면 한가지 말 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바토르는 팍 하고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런데 왜 하필 너에게 그런 부탁을 하신 거지?" "아마 아셨던 거겠지요?" "뭘?" 퉁명스럽게 묻는 바토르의 말에 데바는 더없이 상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엘레나의 눈물을 제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뭐....!?' 이때만큼 바토르가 놀란 때가 또 있었을까? 그렇게 하라마르트 산을 돌아다니며 찾던 엘레 나의 눈물이 데바의 손에 있었다니... 너무 놀라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바토르였다. 데바는 처음 엘레나 여신의 부탁을 들었을 때는 자신에게는 소용이 없지만 남 주기는 아까 운 마음에 화가 나서 방 안에 있는 거울 이란 거울은 모조리 깨뜨리며 광분하긴 했었다. 한 데 지금의 바토르 표정을 보니 여신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라는 생 각이 들어 흐뭇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겨우 놀람에서 회복한 바토르는 떠오르는 의문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아니, 어떻게?" 이에 데바는 의기양양해서 말했다. "오래전에 엘레나의 눈물이 존재한다는 얘기를 듣고 호기심에서 하라마르트 산을 뒤진 덕에 찾은 적이 있었지요. 그리고 그것을 얼음으로 만들어 빙정 속에 넣어두었었는데 엘레나님의 말을 듣고 꺼내보니 지금처럼 단단해져서 좀처럼 눅일 수가 없어졌더군요. 그래서 이 바위 산에 살던 드워프들이 생각나 녹여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왔는데 드워프들은 없고 이 마물들 만 있더군요. 뭐, 어쩔 수 없이 리저드맨들에게 일주일의 시간을 줄테니 녹여놓으라고 말해 놓았었지요." 그리고는 벌벌 떨고 있는 리저드맨들에게 고개를 돌린 데바가 물었다. "그래? 병정은 다 녹였겠지?" 순간 리저드맨들의 붉은 얼굴이 퍼렇게 보인 것은 단순히 바토르의 착각만은 아니었을 것이 다. "아, 휘익!아, 휘익! 직,휘익!" "뭐? 벌써 일주일이 지났는데 아직도 녹이지 못했다는 말이냐?" 화가 난 데바의 살기에 리저드맨들은 자신들의 몸이 얼어붙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바토르에 게 애원의 시선을 보냈다. 이 위기에서 그들을 구해줄 수 있는 존재는 바토르뿐이었던 것이 다, 하지만 바토르에게 리저드맨들의 생사 따위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그는 휘파람을 불며 느긋이 몸을 붉게 달아오른 동굴 벽에 기대며 리저드맨들과 데바가 하 는 양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때 리저드맨들의 표정에서 무엇인가를 깨달은 데바는 휘파람을 불며 구경하고 있는 바토 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불의 마왕 바토르! 그라면 분명 이 빙정을 쉽게 녹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그에게 부탁을 해 야 하는데 그것은 소멸하기보다 싫은 일인지라 데바는 인상을 쓰고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 다. 그러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자 데바는 인상을 풀고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바토르님은 여기서 무얼 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카이람님의 명령으로 하연이라는 인간을 보호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순간 바토르는 데바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없어 의아한 표정으로 쳐 다보았다. 그의 힘을 빌리고 싶다고 부탁이나 할 것이지 왜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묻는단 말 인가? "병을 고치지 못해 하연이라는 인간이 죽으면 카이람님이 바토르님을 가만두지 않을 텐데... 엘레나의 눈물, 필요없으신가 보지요?" 환하게 웃으면서 말하는 데바의 말뜻을 s이제는 바토르 또한 모를 수가 없게 되었다. 엘레 나의 눈물을 얻고 싶으면 힘을 보태라는. "젠장!" 우거지상이 된 바토르는 리저드맨들에게 빙정석을 빼앗듯이 들고는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빌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그런 바토르의 뒤를 데바가 희죽희죽 웃으면서 뒤따라가기 시작했다. 사람 머리만한 크기의 얼음 결정석은 특이할 것도 없는 그저 커다란 얼음덩어리일 뿐이었 다. 그런데 이 얼음덩어리가 엘레나의 눈물이라니.... 새삼 침을 꿀꺽 삼키며 쟈스란은 바토르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이 방정석이 엘레나의 눈물이란 말입니까?" 바토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공터에 모여있던 모든 사람들은 놀라움과 경이, 그리고 마침내 엘레나의 눈물을 찾아냈다는 감동에 몸을 부르르 떨며 함성을 질렀다. "우와! 드디어 찾았다.!" "엘레나의 눈물을 찾았다!" 잠시 뒤 장내의 흥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로베인은 서둘러 하연의 병을 고치고 기억을 되 찾게 하고 싶은 마음에 바토르에게 말했다. "그럼, 어서 빨리 그것을 하연에게 먹이지 않고 뭐 하는 거야?" "지금 이 상태로 어떻게 먹이냐? 녹여야지." "녹이면 되잖아?" "지금은 안돼 이 빙정석을 녹이려면 아무리 나라도 이틀은 걸린다고." "뭐?" 로베인과 다른 이들은 모두 안타까워서 어쩔 줄 몰라 했지만 그들중 유일하게 안도하는 자 가 있었으니 바로 아켄이었다. 그 가운데 데바가 말했다. "고작 이틀일 뿐이다. 그동안 우리는 축하 파티나 하면서 기다리자고." 그말에 제일 먼저 기뻐한 사람은 율리아였다. "축하 파티요? 그것 좋지요. 그런데 축하 파티에 술이 없으면 파티분위기가 전혀 나지 않을 텐데/..." 그러면서 말끝을 흐리는 율리아의 속셈을 눈치 채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 중 아무도 없었다. 이에 데바는 씨익 웃으면서 손가락을 퉁겼다. 탁! 그러자 공터의 한가운데에 큰 테이블이 나타났고 그위에 갖가지 먹음직스러운 음식들과 과 일들, 그리고 투명하리만큼 아름다운 보라색의 액체가 들어 있는 작은 유리 병이 놓여졌다. 그러나 데바가 자신만만하게 웃은 것과는 달리 테이블 위 그 어디에도 술잔만 보일뿐 술은 s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에, 술은...요?" 실망힌 율리아는 기대한 것이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데바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데바는 신경 쓰지 않고 하연에게 말했다. "이봐! 물의 정령 좀 소환해 봐라." 하연은 의아한 표정이었으나 곧 데바의 말대로 물의 정령을 소환해 주었다. 사이라는 하연 을 보자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주위를 돌아다녔다. "주인님, 주인님! 부르셨어요? 여기는 어디예요?" 그 푼수 같은 모습에 데바는 자신과 있었은 때의 그 고상했던 물의 정령의 모습을 떠올리며 잠시 회한에 잠겼다가 말했다. "네 주인은 나중에 찾고 이 술잔들 속에 물이나 부어라! 그리고 얼음도 좀 만들어놓고." 하지만 사이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하연이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기가 막힌 데바는 사이라를 쏘아보았다. 아무리 주인이 바뀌었다지만 고작 정령 따위가 마왕의 명을 거부하다니..... 그 때문에 막 데바가 발작을 하려는데 때맞춰 하연이 말 하는 것이었다. "사이라, 저분의 말대로 해줘!" "네, 주인님!" 그제야 대답하며 술장에 물을 따르고 얼음을 만드는 사이라의 모습을 계속 불쾌한 눈으로 좇으며 쏘아보던 데바는 하연이 사이라를 정령계로 보내고 나서야 얼굴을 풀고는 장내의 사 람들에게 말했다. "자, 잘 봐라!" 그러면서 데바는 물이 따라진 술잔에 작은 유리 병에 든 보랏빛 액체를 한 방울 떨어뜨렸 다,. 그러자 순간 동굴 안에는 믿을 수 없게도 달콤한 술 냄새가 진동을 하기 시작하는 것 이 아닌가? 모두 놀라서 쳐다보는 가운데 술잔 위에 사이라가 만든 얼음 몇조각을 떨구었 다. "설마...?" 그때 무엇이 떠올랐는지 벌떡 일어나 외치는 율리아의 말에 데바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 다. "맞다. 이건 천 년간 숙성해 만든 술의 주정이지." 순간 율리아의 눈에서는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천 년간 숙성한 술의 주정이라니... 다른 술잔 에도 데바가 한 방울씩 떨어뜨려 주는 것을 보면서 율리아는 부서질 듯 세차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이윽고 그녀의 차례가 오고 물잔에 한 방울의 그 보랏빛 액체가 떨어지자 사르륵 보랏빛으 로 물드는 물을 보며 율리아는 경외감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술잔을 들어 올린 그녀는 먼저 냄새를 맡아보았다. 진한 술 향기가 그녀의 콧속을 자극하고 정신마저 몽롱하게 만드는 듯했다. 조심스럽게 입가에 가져가자 천상의 과실을 맛보는 듯 달콤하면서도 그윽한 정취가 몸안 가 듯히 퍼져 나갔다. "아아! 너무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아!"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리며 몸을 떠는 율리아의 모습에 다른 용병들은 피식 웃으며 자신 들도 술잔을 들어 맛보았다. 그러자 그들 또한 율리아만큼은 아니지었지만 술맛에 감탄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좋은 술을 맛보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네이브가 예의를 차려 감사를 표하자 데바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 아? 뭐, 그쪽이 감사할 필요는 없다. 단지 바토르님이 고생하는 것을 최상의 축하주를 마 시며 즐기고 싶었을 뿐이니까. 그리고 카리스님을 다시 만난 것도 축하할 겸 말이야." 그러면서 데바가 카리스를 보는데 그 눈은 마치 훌륭한 예술 작품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 었다. 용병들은 그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카리스와 데바를 번갈아보더니 카리스에게 설명해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카리스는 묵묵히 술만 마실 뿐 용병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았다. 술이 몇잔 돌아가자 장내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그에 따라 율리아는 열띤 술 예찬론 을 펼치기 시작했지만 이미 들을 데로 들어 신물이 난 용병들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 런데 뜻밖에 그에 동조해 주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얼음의 마왕 데바였다. "이런! 인간의 여인 중에 이렇듯 고상한 취미를 지닌 여인이 있었다니 놀랍군." 몇천 년의 세월 동안 바토르가 그 지루함을 먹고 부수는 것으로 달랬다면 데바는 자신의 미 모를 가꾸는 일과 술 마시는 일로 달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런 그가 인 간의 여자이긴 했지만 취미가 같은 자를 만났으니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그러자 신이 난 율리아의 목청은 더욱 커져 갔고 곧 파티는 흥청망청해져서 소리 높여 노래 부르는 인간에, 훌쩍이는 인간들에 가관이었다. 그런 인간들 때문에 고생하는 것은 가고일들 과 리저드맨들이었는데 처음에는 바토르와 데바가 술 시중을 시킨 것을 시작으로 해서 이제 는 다른 인간들까지 이 음식 데워와라 술 따라라 하는 등 마치 하인 부리듯 부려먹고 있는 실정이었다. 밤새도록 먹고 놀자 판이 펼쳐지자 피곤한 하연은 그날 밤 일찍 잠들어 버렸지만 다른 사람 들은 , 심지어 쟈스란마저 새벽까지 먹고 마시며 흥분에 취해 버렸다. 그래서 다음날 하연이 일어났을 때는 모두들 아직 술에 취해 곯아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동굴 안은 천장에서 빛나는 돌에 의해 환했지만 하연에게는 어둠침침할 뿐이었다. 그속에서 하연은 가만히 자신의 옆에서 누워 자고 있는 쟈스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쟈스란이 거기에 있다는 것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심장이 뛰는 것으로 서. 하지만 그의 눈이 보이지 않아서 일까? 평소와는 다르게 그의 옆에 있으면서도 복잡한 생각 이 마구 떠올랐다. 왜 그가 자신을 한시도 그의 곁에서 떨어지지않게 하는 것인지... 왜 다른 이들을 바라볼 때 불안해하는 것인지, 그가 원하는 것도 다른 이들처럼 전의 하연이 아니었 을까 하는 것 등등. 그때 고요한 동굴 안의 한쪽통로 속에서 작게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누군가 싶어 몸을 일으켜 자신도 모르게 쟈스란의 말을 어기고 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한 하 연은 환한 붉은 빛 속에 싸여 있는 바토르의 보습을 볼 수 있었다. 어제부터 빙정석에 마력 을 계속 부어 녹이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의 이마에는 땀이 비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마왕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왜 보잘것없는 인간인 자신을 보호해 주고 살리기 위해 저 렇게 애를 쓰고 있는 것일까? 하연은 바토르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무척 초라하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도 저렇게 자신 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녀 자신은 아프다고 외치기만 할 뿐 살기 위해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있으니.... 아니, 더 나아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짐이 되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하아!"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한숨을 쉰 하연은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다 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눈을 감고 계속 자는 척하다가 사람들이 하나둘씩 술에서 깨 어나고 마침내 깨어난 쟈스란이 하연을 흔들어 깨우자 그제야 일어난 척 하연은 방긋 쟈스 란에게 웃어 보였다. 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그들은 하릴없이 빈둥거리고 있었다. 바토르가 빙정석을 다 녹일 때 까지는 기다리는 일밖에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내내 그들은저러다 카리스의 얼굴에 구멍이 뚫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정도로 얼음의 마왕 데바가 카리스를 탐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다. "이야! 곧 있으면 잡아먹겠다고 달려들 것 같은데?" 조르가 능그맞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r그 소리에 소름이 끼친 카리스는 흠칫 몸을 떨더니 하연을 힐끔 바라보고는 사담들에게 말 했다. "난 잠시 레어에 갔다 오겠다." 그리고 도망치듯 텔레포트를 해 사라지는 카리스의 뒷모습에 데바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 셨다. "쩝!" 그 모습에 남자가 뭐 그런 정도의 시선 좀 받았다고 비겁하게 도망을 치는가 하고 생각하던 용병들은 카리스가 도망친 것이 백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을 고치지 않을 수 없었다. 카리스가 없자 이 자리가 재미없었던 것일까? 데바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흠, 그러면 나도 내 성으로 돌아갔다가 내일 다시 와 여신님의 말을 전하도록 하지." 그러면서 사라지는 데바의 모습에 용병들은 카리스가 점점 불쌍해지는 기분이었다. 내일 다 시 오겠다는 것은 카리스가 올때를 맞추어 그 또한 다시 오겠다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아무 래도 카리스의 시련은 이제부터가 그 시작인 듯 보였으니까? 바토르가 빙정석을 다 녹인 것은 이틀째가 되는 날 밤의 일이었다.녹여진 빙정석이 은빛 투 명한 물이 되어 작은 유리 병안에 넣어진 모습을 보며 바토르는 마음이 뿌듯했다. 비록 빙 정석을 녹이느라 마력은 거의 고갈되었으나 이제 건강해진 하연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생 각하니 마력의 고갈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던 것이다. 유리 병에 든 엘레나의 눈물을 소중하게 들고 하연에게 먹이기 위해 가져가던 바토르는 다 른 일행들은 물론이고 하연또한 쟈스란에게 기대어 잠이 들어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천 진한 어린아이 같은 모습으로. 그모습에 깨우기가 미안해진 바토르는 유리병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자신 또한 소진한 마력 을 채우기 위해 휴식에 들어갔다. 예전처럼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고 놀리듯 웃는 하연의 얼 굴을 떠올리며. 바토르가 눈을 감고 한 시간쯤 지났을까? 살며시 눈을 뜬 아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모두 잠든 것을 확인한 그는 애써 발 걸음 소리를 죽여가며 천천히 엘레나의 눈물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가는 도중 앉아서 마력을 채우고 있는 바토르를 지나야 하기에 아켄의 발걸음은 더욱 신중 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이틀 내내 마력을 쏟아 부었다고는 해도 마왕인 그가 자신 이 다가가는 기척을 느낀다면 그순간 모든 것이 끝장이니까. 하지만 다행히 떨리는 손으로 엘레나의 눈물이 든 유리 병을 손에 쥘 때까지 바토르는 눈을 뜨지 않았다. '이것만 있으면 난 다시 인간이 될 수 있어. 이것만 있으면,...!" 탁! 너무 흥분한 탓일까? 아켄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탁자에 부딪쳐 소리를 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바토르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그 모습에 아켄은 서둘러 떨리는 손으로 품 속에서 이동 마법 스크롤을 꺼내 바닥에 던졌다. 퍽! 스크롤이 깨지면서 아켄의 발 아래 순식간에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경악한 바토르가 채 다가 오기도 전에 아켄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안 돼!!" 동굴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처절한 바토르의 외침을 뒤로한 채. 다음날 동굴에 도착한 데바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보다 먼저 도 착해 있던 카리스는 물론이고 모두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입니까, 카리스님?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하지만 카리스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의외로 그의 말에 대답한 것은 바토르였다. "으드득! 아켄이라는 마법사 인간이 엘레나으리 눈물을 훔쳐 달아났다. 그것도 s내 코앞에 서!" 데바는 기가 막혀 한동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엘레나의 눈물을 도둑맞았다니... 그것도 10서클의 마법사와 마왕, 용병왕 등 화려한 파티를 자랑하는 이들이 어떻게 눈앞에서 엘레 나의 눈물을 도둑맞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때 로베인이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넋두리처럼 중얼거리듯 물었다. "이제 어쩌면 좋지? 하연의 병은....?" 그러자 네이브가 쟈스란에게 물었다. "지금이라도 그자를 추적해 엘레나의 눈물을 찾아올 수는 없겠습니까?" 쟈스란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마법 스크롤로 이동하는 것은 시전자의 고유 마나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서 마나를 추적 할 수가 없소. 또한 그가 엘레나의 눈물을 마시지 않고 지금까지 지니고 있다고도 생각하기 힘든 일이고,." 그때였다. 퍽! 세르기아스가 주먹으로 바닥을 내려치며 외쳤다. "젠장! 그때 죽여 버렸어야 하는 건데. 그대 그자가 악마와 계약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죽여 버렸으면..." 그 말에 얼굴이 창백해진 사담을 본 질리안이 세르기아스의 옆구리를찌르며 눈치를 주었지 만 분노한 세르기아스는 그것을 눈치 못하고 계속 말했다. "스승님의 만류가 있기 전에 재빨리 죽여 버렸더라면 이런 배신을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정 말 후회가 클 뿐입니다."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사담은 동터를 나가 그들이 들어왔던 동굴쪽으로 들어갔다. 비록 세르기아스들이 그를 원망하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차마 하연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던 것 이다.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하연이 죽음에 이르게 되다니... 그런 사담의 뒤를 미루엘이 쫓아 나갔고 그 모습에 질리안은 세리기아스에게 퉁명스럽게 한 마디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바보1" 꽤 멀리 갔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담은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의 동굴 벽에 머리를 기대 고 서 있었다. 순간 울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에 미루엘은 당황해서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진 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데 그녀의 존재를 눈치 챈 것일까?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사담이 말하는 것이었다. "알고 있다. 분명 하연은 내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지. 하지만 하연이 죽게 되면 난 날 용 서하지 못할 거다. 그녀가 살 수 있는 기회를 나 때문에 놓친 것이니까." "...포기한 겁니까?" 무슨 말인지 의아해 사담이 돌아보자 미루엘은 다시 한 번 물었다. "하연을 살리는 것을 포기한 것입니까?" 사담은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담담히 물었다. "포기하지 않으면 나더러 어쩌라는 거지?" 미루엘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레나 여신의 목을 졸라서라도 눈물을 받아내야지요. 하연이라면 그렇게 하려고했을 겁니 다. 그리고 저도 그렇게 할 작정이고요.' 순간 벙찐 듯 입을 다물지 못하는 사담의 모습에 미루엘은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사담도 그 일에 동참해 줄 거지요?" 한편, 엘레나의 눈물을 들고 도망친 아켄이 이른 곳은 예전의 그가 혼 슈이센 왕립학교에 만들어두었던 실험실이었다. 그곳은 아직도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굳건히 닫혀 있었 다. 아켄은 떨리는 손으로 작은 유리 병에 든 엘레나의 눈물을 보았다. 투명한 물빛의 그 눈물 은 너무나 성스러워서 계속 눈으로 보고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 있는 죄책감이 엘레나의 눈물을 보기 힘들게 만들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에게 복수가 얼마나 허망한지를 얘기해 주던 하연, 단지 어둠의 사제라는 이유만으로 사 람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했을 때도 웃으면서 그들을 이해해 주던 하연, 그녀야말로 진짜 이 성스러은 엘레나의 눈물을 먹을 만한 유일한 자격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그 또한 알고 있 었다. 하지만 이것만 있으면 다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엘레나의 눈물을 향한 탐욕을 그 자신 또한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작은 유리 병의 마개를 연 아켄은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꿀꺽! 한입에 엘레나의 눈물을 삼킨 아켄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으아아악!" 갑자기 아켄이 몸을 뒤들며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몸에서는 검은 마기가 무럭무럭 피어올랐고 그 마기가 다 빠져나가자 지친 듯 아켄은 바닥에 쓰러졌다. 얼마 후 정신이 들었는지 몸을 일으킨 아켄은 자신의 손을 보고 깜짝 놀랐다. 썩어 문드러 졌었던 그의 손은 어느새 새하얗게 새살이 돋아있었던 것이다. 놀라움으로 거울 앞에 다가간 아켄은 온몸을 감았던 붕대를 천천히 풀었다. 그러자 그의 몸 에서 썩었던 살들이 붕대와 함께 후드득 떨어져 나가고 마치 갓 태어난 아이 같은 새살이 돋아 있는 것을 확인 할수 있었다. 그 순간 아켄은 새로 태어난 듯한 환희를 맛보았다. "내가, 내가 다시...." 거울 속에는 사십재의 준수한 외모를 지닌 중년인이 비치고 있엇다. 그 얼굴은 아켄이 고대 의 마법을 연구하기 위해 파티를 만들어 하라마르트 산에 올라갔다가 대마법사 슈마에게 이 끌려 그의 의지체가 되어버렸던 바로 그때의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아켄은 저도 모르게 주먹으로 거울을 내려쳤다. 퍽! 쩌억 갈라지는 거울과 피가 떨어지는 자신의 손을 보며 아켄은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제 시작이야! 날 이 정도로까지 타락시킨 너희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내게 엘레나 여신을 불러달라는 말이지?" 얼음의 마왕 데바는 비웃음을 띤 채 사담과 미루엘을 보며 물었다. 하지만 사담과 미루엘은 끄덕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어째서 내가 앨레나 여신을 불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이지?' 아무리 마왕이라고 하지만 신을 마음대로 소환할 순 없다. 그저 신이 강림해서 그에게 명령 을 내릴 뿐. 그런데 엘레나 여신을 소환해 달라니..." "엘레나 여신의 전언을 부탁받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전언을 전하지 못할 상황이 니 엘레나 여신이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요?" 미루엘의 말에 데바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일뿐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한 가닥 희망을 갖게 된 인간들은 막무가내였다. "어서 기도해 보세요, 데바님!" "그래요, 기도해 보세요. 오실 수도 있잖아요?' "맞아 죽기 싫으면 어서 기도해라!" 바토르는 험악한 얼굴로 협박했고 율리아는 이럴 때야말로 미인계가 필요하다는 듯 눈웃음 을 치며 말했다. "아름다운 마왕님의 기품있는 기도가 너무 듣고 싶어요." 바토르의 협박과 율리아의 아부에 데바는 어쩔 수 없다는 투로 풋! 웃더니 동굴 벽 쪽을 향 해 우아한 자태로 무릎을 꿇으며 노래하는 듯 한 목소리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엘레나 여신이여! 여신님의 전언을 부탁받은 사자 얼음의 마왕 데바가 간절히 청하옵니다. 부디 이곳으로 강림하여 주십시오." 얼마나 기도했을까? 하지만 그 어디에도 엘레나 여신이 강림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에 마지막 한 가닥의 희망마져 포기해 갈 즈음이었다. 희미한 빛 가루가 한 지점으로 점점 모여들더니 거대한 빛무리로 화해 번쩍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물빛의 투명한 아름다운 물의 정령의 모습을 한 여인이 그 성스러운 모습을 드러냈 다. 순간 장내의 모든 이들이 너도나도 할 것없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엘레나 여신님!" "여신이시여!" 엘레나 여신은 자신의 앞에 모여 있는 인간들과 마왕들, 드래곤인 키리스를 쭉 보다가 쟈스 란의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검은 머리에 유난히 하얀 피부를 지닌 여인인 하연에게 시선 이 멈추자 약간 의아한 표정이 되어 데바를 돌아보았다. ( 어떻게 된 일입니까,데바? 저 인간의 병이 낫지 않은 듯 보이는 군요.) 부드러운 말이었지만 순간 데바는 자신이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듯 하여 몸을 떨며 중얼거 리듯 말을 우물거렸다. "그, 그것이..." 그러자 카리스가 나서며 말했다. "제가 말씀 드리지요." 그러면서 그는 아켄이라는 마법사가 간밤에 엘레나의 눈물을 훔쳐 달아난 일을 설명해 주었 다. 엘레나 여신은 감히 무엄하게도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상황을 설명하는 드래곤의 모 습에서 그리고 그의 눈빛에서 자신을 향한, 아니, 신들을 향한 원망을 읽어낼 수 있었다. 하긴 어떤 살아 있는 존재가 자신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신이 가장 축복한 존재인 드래곤이라는 사실에 엘레나여신은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 었다. 드래곤마저도 저런데 인간들이 죽음에 이른다면 그 얼마나 자신들을 원망하며 죽어가 게 될 것인가? 슬픈 눈으로 엘레나 여신은 장내를 둘러보며 물었다.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순간 로베인, 사담, 미루엘,쟈스란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여신님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엘레나 여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곳에 와서 하연을 본 순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녀 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 따라서 굳이 그녀의 병을 고쳐주지 않아도 그녀는 혼 대륙을 구하기 위해 하라마르트산의 정상에 올라가 몸을 던지지는 않을 것이니 이대로 병에 걸린 채 고통받으며 죽어가도록 내버려 두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망설여지는 것일까? 혼 대륙의 멸망은 두 주신의 뜻이고 그분들의 뜻에 따르면 되는 것을... 따라서 다시 돌아가려는 그때 여신의 머리 속에 울부짖고 있던 카이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물방울이 되어서 본 그 모습 때문일까? 차마 떠나지 못하고 머물고 있던 엘레나 여신의 귀 에 다시 기도하듯 말하는 인간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신님, 제발 하연을 살려 주십시오,. 수중한 친구인 그녀를 잃지 않게 해주십시오," 미루엘의 말을 시작으로 로베인이 그뒤를 이었다.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녀를 제게서 빼앗지 말아주십시오. 평생을 바라만 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녀를 살려주십시오." 이번에는 쟈스란이 말했다. "그녀가 아파서 우는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괴롭습니다. 살려달라고 하는데도 아무것도 해 줄수 없는 제 자신이 이처럼 증오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부디 여신이시여! 저 가엾은 여인 의 고통을 덜어주십시오." 다음에는 사담이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하연이 아닌 그 자신을 구원해 달라는 뜻밖의 말에 여신은물론 모두 어리둥절해서 쳐다보았 다. "소주한 이를 지켜주지 못하는 슬픔을 아십니까? 눈앞에서 짐장을 빼앗겨야 하는 그 고통이 어떤 것인지. 저는 벌써 두 번이나 그런 고통을 받았습니다. 두 번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세 번째나 그런 고통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절 데려가시고 그녀를 지키도록 해주십 시오." 인간들의 간절한 기도에 엘레나 여신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저들의 이 런 사랑은 물론 카이람의 사랑까지 받는 하연이라는 여인이 대단해 보이고 질투라저 일었 다. 저 하연이라는 여인은 과연 이들과 카이람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여인일까? 엘레나 여신은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연을 시험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인 간들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기회를 주도록 하지요, 제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도록 만 들어보십시오. 그 눈물을 드리겠습니다.] 그말에 모든 이들은 환호했다. 자비심에 가득한 엘레나 여신인만큼 그녀가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일쯤은 간단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맨 처음으로 카리스가 나섰다. "여신님께서도 한번은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드래곤 슬레이어인 슈바 크샨티에와 그의 연인인 베이샤의 이야기를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진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는 없더군요. 저는 지금 그 진실에 대해서 들 려 드리고자 합니다." 여신은 그저 가만히 듣고만 있었지만 장내의 모든 인간들은 깜짝놀라서 카리스를 쳐다보았 다. 그들의 불행한 사랑 이야기는 잘 알려진 이야기였지만 그 뒤에 어떤 내막이 있었다고는 생각지 못했었던 것이다. 단지베이샤의 사치와 향락이 한 위대한 드애곤 슬레이어를 파멸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했을 뿐. "분명 슈바 크샨티에는 뛰어난 기사였고 베이샤에게는 헌신적인 연인이었습니다. 때문에 여 려분들이 잘 알고 계시는 슈바 크샨티에와 베이샤의 운명적인 만남은 많이 왜곡된 사실을 수밖에 없었지요." "예?" 아무것도 모르는 하연을 제외한 모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분명 그 들이 알기로는 베이샤가 나쁜 악당에게 희롱당하는 것을 구해준 것이 그들의 첫 만남이었 다. 그런데 그것이 왜곡된 사실이라니... 그렇다면 어떻게 왜곡되었단 말인가? 그 의문의 해 답을 풀어준 것은 카리스였다. "실상 그 나쁜 악당은 베이샤의 오래된 연인으로 모든 것은 슈바트샨티에의 독선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던 것입니다." 기가 막히고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전설의 로멘스로 알려진 슈바 크샨티에와 베이샤의 만남이 그저 단순한 착각에서 벌어진 일이었다니... 황당해하는 장내를 들러보며 카리스가 설명했다. "아무리 착각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연인을 죽인그를 베이샤는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복수를 하기를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는 슈바 크샨티에를 유혹하기 시작 하지요." 그러면서 카리스는 마치 그 과정을 직접 본 사람처럼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고 이에 듣는 이들은 숨을 죽인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결국 그녀를 사랑하게 된 슈바 크샨티에는 그녀에게 청혼을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 처럼 평범한 여인을 훌륭한 기사인 그가 사랑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며 그의 사랑을 증명 해 보이라고 요구합니다. 그 유명한 세가지 조건을 통해서요. 첫째는 다이아스 꽃을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드래곤의 보물을 ,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얼음의 방패인 카르 마시아였지요." 순간 미루엘의 눈속에 아픔이 스쳐 지나갔다. 베이샤가 슈바 크샨티에에게 요구한 그 세 가 지 조건은 후세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모험가들이나 트래져 헌터들이 가장 노리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얼음의 방패인 카르마시아가 되어버렸다. 그 때문에 미루엘의 아버지 또한 카 르마시아를 훔치러 얼음의 마왕에게 갔다가 팔 하나를 잃고 돌아오지 않았던가? 카리스의 얘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슈바 크샨티에는 베이샤의 사랑을 얻기 위해 먼저 드래곤의 래어를 찾아가고 고 생 끝에 마침내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명예를 얻게 되지만 다이아스 꽃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끝없이 혼 대륙을 방랑하던 그가 마침내 다이아스 꽃을 찾게 된 것은 끝없이 혼 대륙을 방랑하던 그가 마침내 다이아스 꽃을 찾게 된 것은 그의 나이 육십이 다 되어서였지요. 하지만 다이아스 꽃은 찰나의 순간에 피다 지는 꽃이라 그가 기뻐하며 그 꽃 을 꺽었을 때는 벌써 져버렸고 결국베이샤에게 보여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이아스꽃에 관련된 전설은 사실이었던 걸까요? 평생에 거친 슈바의 구애에 배이사 또한 그를 사랑해버 린 자신을 깨닫게 되지요. 그러나 옛 연인이 원수에게 어떻게 사랑한다고 말할수 있겠습니 까? 결국 그녀는 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사치와 향락에 젖은 악녀라는 평판을 안은 채 숨을 거두고 맙니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서둘러 달려온 슈바 크샨티에는 죽어버린 그녀의 시체 앞에 시들어버린 다이아스 꽃줄기를 바치며 마치 그녀를 따르듯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영원히 그녀를 사랑할 것이라고 말하며." 그 이야기에 여인들은 물론이고 소시언, 조르등의 용병들도 눈물을 찔끔거렸다. 하지만 뜻밖에 엘레나 여신은 조금도 슬픈 표정이 아니었다. "어째서...?" 왜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인지 궁금해하는 카리스의 표정에 엘레나 여신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그처럼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어째서 눈물을 흘리겠어요?] "향복한 이들이라고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묻는 카리스의 말에 엘레나 여신은 단정하듯 말했다. [그래요. 그 슈바라는 인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사랑을 했고 베이샤는 그런 사랑 을 받았어요. 세상에 그런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응ㄹ 수 있는 사람들이 흔하다고 생각하나 요? 그들은 선택받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슬프다는 것이지요?] 여신의 말에 카리스를 비롯한 일행들은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여신의 말처럼 그렇게 생각 한다면 그들은 정말 한평생 행복한 사람들이었으니까. 잠시 할 말을 잃고 있는 그들을 보며 여신이 물었다. [왜 그러고 있는 것이지요? 제 눈물을 얻는 것은 포기한 건가요?] "아닙니다.!"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루엘이 큰 소리로 외치며 빛과 어둠의 전쟁으로 인해 난민이 된 사람들과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린 블리앙스의 아이등 얘기를 했다. "... 때문에 그 아이들은 빛이 아닌 어둠을 선택한 것입니다. 자신들은 버림받았으나 자신들 을 거두어준 신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순수하기 까지 한 아이들의 마음에 모두들 눈시울을 붉히며 감동했고 그 전쟁을 일으킨 것 이나 마찬가지인 네이브의 심장은 죄책감으로 인해 타 들어갈 듯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이 번에는 반드시 눈물을 보이리라고 생각했던 엘레나 여신의 반응 만큼은 별로 신통치가 않았 다. 여전히 그 조용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왜?" 도대체 왜 이번에도 울지 않는지 모두들 원망섞인 시선으로 엘레나 여신을 바라보자 여신이 말했다. [그 아이들은 고아라고 할 수가 없지요. 거룩하신 아버지 가란을 아버지로 둔 축복받은 아 이들인걸요. 그런 아이들을 어찌 가엽게 여길수가 있겠어요?] 이에 모두들 할 말을 잃고 엘레나 여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망설이듯 사담이 말했다. "그럼... 저는 아는 이야기가 없으니 제 누이의 이야기를 하도록하겠습니다." 그말에 모두들 사담에게 호기심 어린 시선을 돌렸다. 그가 자신에게 관련된 얘기를 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미루엘의 눈빛은 장난 아니게 빛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사담은 주정꾼 아버지에 의해 은화 한 닢에 팔려간 여동생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그리고 여동생을 찾기 위해 어린나이에 용병으로서 전쟁터에 뛰어들었던 자신 과 결국 찾은 동생은 메음굴이나 마찬가지인 한 어둠의 신전 구석에서 시체로 발견되어졌던 이야기도. 그 얘기에 좌중의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여신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여신도 눈물 을흘리리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여신은 눈물을 떨구지 않았다. "슬프지 않습니까. 여신이시여!" 의아하다는 듯 묻는 웨이의 말에 엘레나 여신은 되려 싱긋 웃으며 물었다. [무엇이 슬픈가요? 그 여인은 이미 죽지 않았나요? 죽어서 깨끗이 과거를 잊고 지금쯤 환생 해 있을 여인을 위해 왜 울어야 한다는 건가요? 오히려 축복해 줄 일 아닌가요?] 그 말에 사담은 무거웠던 마음의 짐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나 여동 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그의 마음 한켠을 짓누르고 있었는데 여신의 말을 들으니 이제는 더 이상 죄책감을 지니고 있을 필요가 없는 일이 되어버렸으니까. 그때 사담의 얘기에 온통 얼굴을 눈물로 적시고 있던 미루엘이 엘레나 여신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사담을 위해서 울어주십시오.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 나가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그를 위해서, 은화 한 닢을 벌기 위해 사람을 죽인 그를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엘레나 여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진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것을 ?고자 한 평생 노력했고 요. 그 간단한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나요? 그리고 그에게는 그를 위 해 울어주는 미루에 씨 같은 사람도 있지 않나요? 저분은 행복한 분이에요.] 그 순간 그들 모두는 엘레나 여신이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 고 말았다. 그러나 하연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들은 이것저것 자신들이 슬프다고 생각하느 얘기를 꺼냈고 그때마다 어김없이 엘레나 여신은 슬픈 얘기를 행복한 얘기로 바꾸어놓았다. 이에 차츰 지친 그들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만 싶을 때였다. "율리아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예전의 하연이라면 이럴 때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을 텐데...!" 모두들 아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율리아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정도로 하연은 말을 잘했으니까. 그러면서 은연중 모두들 하연을 쳐다보자 하연은 그만 고개를 푹숙였다. '예전의 하연이라면...!' 그말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하연의 손을 마주 잡으며 엘레나의 눈물을 얻지 못하게 될 것 같자 안절부절못하는 표 정으로 쟈스란이 물었다. "하연, 뭐 생각나는 얘기 없어? 하연을 슬프게 했던 얘기 같은 것말이야." 하연은 그런 쟈스란을 가만히 마주 보다가 엘레나 여신을 향해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한 여인이 있었어요." 쟈스란이 상처받을 까봐 차마 자신이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하연은 그저 한 여인이라고만 말했다. "모든 사람들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지니고 있지만 그녀에게는 오직 현재뿐이었어요. 그런 데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과거의 그녀를 얘기하고 과거의 그녀를 사랑해요. 아무 도 현재의 그녀를 보아주지 않았어요. 그녀가 존재하는데, 보고 있는데 아무도 그녀를 보아 주지 않는 거예요.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 소중하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어요. 그들이 사랑하고 소중히 하는 것은 과거의 그녀라는 것을요. 어떻게 해도 현재의 그녀는 과거의 그 녀가 될 수 없는데도 말이에요. 그리고 이제 그들은 미래의 그녀에 대해 얘기해요. 미래의 그녀를 사라지게 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을까요? 미래의 그녀 또한 현재의 그 녀는 될 수 없다는 것을 ." 순간 장내의 모든 이들이 충격을 받아서 하연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일들을 하연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특히 쟈스란의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무의식 중에 자신이 현재의 하연이 아닌 과거 기억 속의 하연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녀에게 들켰다는 사실 또한.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보던 엘레나 여신은 하연에게 물었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지 않은가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고 그를 사랑하는데?] 그것만으로고 충분히 행복하지 않냐는 엘레나 여신의 물음이었다. 하지만 하연은 모르겠다 는 듯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것이 사랑일까요? 쟈스란의 눈을 보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그만을 보고 생각하게 되지요. 다른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요. 처음에는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뛰고 비로소 내가 있을 곳을 발견했구나 하는 충만감이 들었어요. 그런데 차츰 거기에 내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 그것만이 존재한다는 것을요. 자신이 포함 되지 않는 사랑이 과연 사랑일 수 있을까요?" 엘레나 여신은 차분한 하연의 말을 들으며 철저히 버려진 한 여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과거도 미래도 없고 오직 현재만이 있는 그녀. 그런데 그 현재의 그녀를 보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녀의 과거와 미래만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엘레나 여신에게 하연은 다시 속삭이듯 물었다. "그녀는 과연 존재하는 걸까요? 아무도 그녀를 보아주지 않고 그녀도한 아무도 볼수가 없는 데... 그녀는 행복한 걸까요?" 그제야 쟈스란은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하연의 모든 행복과 그녀의 존재 자체마저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서 쟈스란은 하연을 부둥켜안고 외쳤다. "미안해, 하연 용서해줘. 아니, 절대 용서하지마. 하연! 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널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너와 함께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크흐흐흑!" 격하게 통곡하는 쟈스란의 울음소리가 동굴 안을 진동했지만 그것을 보는 이 중 누구도 그 를 동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살길에 찬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는 그들이었다. 하연을 곁에 두 기 위해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그였기에. 그 가운데 하연은 여전히 초점이 없는 멍한 눈으로 대답을 구하듯 엘레나 여신을 바라보았 고 그 모습에 여신은 불쑥 치미는 연민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나직이 한숨을 쉰 엘레나 여신은 그녀에게 말했다. [스스로 존재함을 증명해 보이세요, 여인이여! 그리고 가장 더러운 곳에 피는 성스러운 꽃을 찾아보세요. 과거와 미래를 모두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엘레나 여신은 순식간에 한줄기 빛이 되어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엘레나 여신이 사라진 후 장내에는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지만 그 침묵은 곧 발광하듯 외치 는 바토르의 음성에 깨어지고 말았다. "그 따위 의미 모를 말만 남기고 사라지면 어쩌라는 거야, 이 치사한 여신아!" 여신을 향한 말치고는 불경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었지만 장내에 있던 그 누구도 바토르를 꾸짖는 이는 없었다. 그들 또한 내심으로는 바토르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때 자칭 여성 신봉자인 웨이가 여신에게 쏠린 화를 돌리려는 듯 일행들에게 물었다. "도대체 여신의 말이 무슨 뜻일까요?" 하지만 누구도 그말에 확실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하연의 과거와 미래를 얻게 된다는 것으로 보아 분명 엘레나의 눈물을 얻기 위한 방법을 가리키는 말이 분명할 텐데 가장 더러 운 곳에서 피는 성스러운 꽃을 찾으라니... 모두들 의아해하고 있을 때 하연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연꽃!" "응?" 쟈스란이 가장 가까이 있었기에 누구보다 선명하게 하연의 말을 들었지만 그는 하연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서 되묻고 말았다. "연꽃? 꽃 이름인가? 그런 꽃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데?" 그도 그럴것이 혼 대륙에 연꽃이라는 이름의 꽃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말에 하연은 약간 이마를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런 사실이 떠올랐는지 그녀 로서도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떠올랐어요. 가장 더러운 곳에 피는 성스러운 꽃은 연꽃이라고." 순간 모두들 놀라움의 시선으로 하연을 보았다. 그것은 하연이 엘레나 여신의 말뜻을 알고 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혹시 기억이 돌아오고 있는 것인 아닌가 해서였다. 하지만 그것은 아닌 듯 하연의 멍해보이는 표정에 그들은 다시 연꽃이 무엇이냐를 놓고 대화의 초점을 모으기 시작했다. 내내 은근히 하연을 신경 쓰면서. 그러나 시간이 꽤 흐른 뒤에도 그들은 연꽃이 무슨 꽃인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때 그런 카리스의 귀에 갈루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어떤 책에서 본 기억이 나는군. 그 말에 카리스는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기대에 차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도 그는 현자가 아니던가? -가장 더러운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 그러니 혹시 그 성스러운 꽃이라는 것은 인간의 심 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연꽃이란 심장에 대한 어떤 상징적인 표현이고. 그렇다면 엘레 나 여신은 인간의 심장이라는 재물을 원한다는 말인데... 카리스는 갈루마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일례로 곧잘 시인들은 심장을 성스러 운 꽃으로 비유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카리스는 마치 갈루마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인 듯 그 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모두 말은 안 했지만 카리스의 말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한 듯 고뇌에 찬 표정들이 었다. 그렇다면 누구를 제물로 바쳐야 하는가 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바토르가 막 아무 인간 이나 하나 잡아올까라고 말하려 할 때였다.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던 쟈스란이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물이라면 내가 되지. 하연을 저렇게 만든 것은 나이니 그녀를 살릴 제물은 내가 되는 것 이 옳아!" 그러자 로베인이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안 돼! 차라리 그런 제물이라면 내가 될게. 하연에겐 누구보다 네가 필요하니까. 그리고 우 리들 중 하연에게 가장 도움이 되지 못하는 사람도 나잖아." 그말에 쟈스란을 비롯한 하연과 로베인의 감정을 알고 있던 모두는 허망한 표정으로 그런 로베인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저렇게 눈치가 없을 수 있는지. 정작 자신이야말로 가장 하연 에게 사랑받고 필요한 존재인데 그것을 모르고 있다니... 쟈스란은 나직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넌 자격미달이다. 로베인." "어째서?" "...넌 마음이 더러운 인간은 못 되니까." 시선을 피하며 하는 쟈스란의 말에 로베인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그 는 마음이 더러운 인간이니까 자격이 된다는 말인가? 그때였다. 벌떡 일어난 하연이 쟈스란을 비롯한 일행들을 노려보며 외쳤다. "필요없어요! 모두 필요없다고요! 어째서 내가 누군가의 생명의 대기로 살아야 한다는 거 지요? 그러면 내가 기쁠 것 같아요? 행복할 것 같아요?!" 비통해하는 하연의 모습에 장내에 있던 이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연이 듣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던 것이다. 그런 말은 하연이 없는 곳에서 했어야 했다고 그들이 자책하고 있을 때였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쟈스란이 차가운 눈초리로 하연을 쳐다보더니 말하는 것이었다. "하연, 너의 말이 맞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의 네가 아니라 우리를 기억하는 그 하연 이다. 따라서 너에게는 거부할 권리가 없어. 네가 상처받든 않든 우리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야." 순간 충격을 받은 하연의 얼굴은 새하얗다 못해 시퍼렇게 변해 버렸다. 쟈스란의 말대로일 거라고 생각하곤 있었지만 생각하는 것과 막상 그렇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천지 차이였던 것이다. 무너지듯 그대로 쓰러져 버리는 하연의 몸을 재빨리 부축한 로베인은 험악하게 쟈스란을 노 려보며 외쳤다. "너, 지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우리를 기억하든 하지 못하든 하연은 하연이라고! 그게 중요한 것 아니야?" 하지만 쟈스란은 로베인의 말을 무시한 채 데바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밖에 제단을 마련하고 제를 주관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동굴 안에서도 제를 올릴 수는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어두울지라도 하늘을 보고 싶었기에 쟈 스란은 그렇게 부탁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저절로 하연에게로 향하려는 시선을 막기 위해 그 길로 성큼성큼 동굴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런 쟈스란의 얼굴에는 처연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짧은 시간이나마 하연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지금을 위한 신의 은총이었는 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달빛이 환하게 비치는 바위 산 앞 높이 쌓아 올린 제단 위에는 새벽 이슬을 모아 만든 신성 수와 단검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제의 주관자인 데바가 얼음의 마왕이러는 이름에 걸맞게 차가운 표정으로 서서 쟈스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쟈스란은 흰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의 은빛 머리와 새하얀 얼굴, 그리고 달빛 때문인지 그 는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정령같이 보였다. 천천히 제단에 이른 쟈스란은 문뜩 하연을 돌아보았다. 하연은 그때까지 기절한 채 쟈스란은 눈물이 흐르려고 하자 흐르는 눈물을 막 기위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수놓여진 듯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난 어둠이 싫었었어. 밤의 색인 내 머리카락과 눈의 색깔마저도. 그런데 너를 만나고 나서 야 알게 되었어. 밤하늘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하연, 오늘도 정말 밤하늘이 아름답다.' 제단 위에 놓인 단검을 쥐어 드는 쟈스란을 보며 로베인이 외쳤다. "제발 그만둬! 네가 죽으면 하연은 어떻게 해! 하연은 널 따라서 죽을지도 몰라!" 그 말에 쟈스란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러면 네가 말려줘. 알잖아? 하연이 날 사랑하게 된 것은 계약 때문일 뿐이라는 것을.내가 죽으면 계약도 깨져서 하연은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그 뒤는 너에게 부탁 할게, 로베인. 부디 하연을 행복하게 해줘." 그러면서 쟈스란은 망설이지도 않고 단검을 가슴에 찔러 넣었다. 푹! 피가 튀어 쟈스란의 옷과 얼굴은 엉망이 되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떠올라 있 었다. '하연, 너의 노래를 다시 한 번 듣고 싶었는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더듬듯이 갈라진 배를 뒤져 심장을 꺼내든 쟈스란은 간신히 그 심 장을 데바 쪽으로 내밀더니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얼마후 쟈스란의 은빛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는 검은 머리와 검은 눈으로 변해 버렸다. 계 약은 깨어진 것이다. 더불어 혼 슈이센 왕립학교에서 복수를 불태우고 있던 아켄과 트리엔 시라 왕궁에 남아있던 마법사 비욤 등 대륙에 깔려 있던 그의 의지체들은 쟈스란의 죽음과 함께 모구 한 줌의 재로 화해 버리고 말았다. 한편 쟈스란으로부터 심장을 받아 든 데바는 그 심장을 신성수에 넣었다. 그러자 신성수의 물은 순식간에 핏물로 화해 버렸고 그 위에 푸른 기운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데바는 엘레나 여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그 모습을 망연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로베인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일행들에게 피를 토하듯 외쳤다. "왜? 왜 말리지 않았어? 나는 몰라도 너희들은 쟈스란의 죽음을 말릴 수 있었잖아? 그런데 왜?' 그 말에 용병들이나 사담, 미루엘, 네이브. 바토르 등 모두들 로베인의 시선을 외면해 버리 고 말았다. 분명 말리지 못했을지는 모르지만 한마디 그만두라는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은 사 실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이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알 면 하연은 상처받을 텐데... 그것도 마음 놓고 울지도 못하고 웃으면서 말하겠지요. 모두 자 신 탓이라고. 자기 때문이라고..." 목이 메인 듯 울먹이는 로베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하연을 대 신해 자신이 울기라도 하려는 듯. 그런 로베인의 모습을 보면서 장내에 있던 모든 이들은 어쩌면 아무래도 그 성스러운 꽃이 라는 것이 어떤 꽃의 이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들어서 그 꽃에 대해서 좀 알아보겠다고 말이야." "아아!" 그 말에 안도의 한숨과도 같은 탄성을 발한 하연은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쟈스란과 함께 있을 때는 몰랐던 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닫혀 있던 시야가 갑자기 넓어진 느낌이랄까? 그 새로운 느낌에 하연은 약간 당혹스럽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그런 하연의 마음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장내의 모든 이들은 하연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 모습에 용기가 생긴 듯 하연은 가까이 있는 카리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이름을 물어도 실례가 안 될까요?" 뜻밖의 말에 카리스는 순간 놀랐지만 곧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실버 드래곤 칼링스타라고 한다." 이것은 유희 따위가 아니라는 듯 자신의 정체를 확실하게 밝히는 카리스의 모습에 바토르와 로베인 사담 등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하연은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미 알고 있는 여섯명인 네이브, 마로위, 에드릭, 바토르, 로베인, 데바를 제외한 사담, 미루엘, 율리아, 웨이, 조르, 헌스, 소시 언, 이너드, 세르기아스, 질리안, 휠리아, 모두들 그녀로서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휠리 아만 빼고 모두 과거의 그녀와는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하연은 새삼 과거와 미래가 미 칠 듯이 갖고 싶어졌다. 이런 사람들과 알고 지낸 과거가 특히. -나도 하연과 인사하고 싶다고. 왜 나는 소개시켜 주지 않는 거야? 네가 드래곤이라는 것까 지 밝힌 이 마당에 내가 에고 스틱이라는 것쯤 밝혀져도 전혀 상관없는 일이잖아! 시끄럽게 외쳐대는 갈루마의 말에 카리스 또한 동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감한다고 해도 소개시켜 주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분명 카리스 또한 알고 있었다. 상대는 고작 지팡이라는 사실을 . 하지만 그 지팡이가 자신도 받지 못한 하연의 관심을 받 는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카리스는 하연에게 갈루마를 소개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미묘한 카리스의 심리 상태를 알지 못하는 갈루마로서는 답답해서 미칠 노릇이었지만. 그때 네이브다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하연에게 물었다. "연꽃은 어디에서 피지?" 그 말에 하연의 입에서 생각지도 않은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거야 늪에서지요." 순간 모두의 눈에서 빛이 번쩍였다. 해답을 얻었다는 기쁨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이렇게 쉽게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을 한 순간의 착각으로 인해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버린 결과가 되었기 때문이 다. "늪, 늪이란 말이지?" 하연이 어떻게 자신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당황하고 의아해하는 동안 바토르는 그 자신이 하라마르트 산을 돌아다니면서 간략히 그려놓은 지도를 꺼내놓고 이곳저곳 표시 하면서 늪지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목표 지점은 어느덧 한곳으로 좁혀지고 있었다. "이곳이 어디입니까?" 바토르의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던 카리스가 물었다. 그 물음에 바토르느 약간 인상을 쓰면 서 대답했다. "절망의 땅이다." "오, 이런!" 바토르의 말이 끝나자마자 튀어나온 에드릭의 한탄이었다. 또다시 그 절망의 땅으로 들어가 야 하다니... 아무리 바토르의 무력 시위로 인해 거의 폐허가 되었다시피 한 곳이었지만 정 말 두 번 다시 발걸음을 하고 싶지 않은 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에드릭의 마음과는 달리 일행들은 거의 다 벌떡 일어나서는 출발을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이에 할 수 없이 뭉그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던 에드릭은 다른 이들을 따라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하연 때문에 마법을 쓰지 못하고 천천히 절망의 땅으로 걸어 들어가던 이들은 단 한 명 네 이브를 제외하고는 모두 하연의 이상한 행동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네이브 에게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그의 뒤를 다소곳이 따르며 죄스러워하는 하연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 모습에 네이브는 하연이 드디어 쟈스란의 계약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약혼녀라는 자각을 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만족스러웠지만 그저 묵묵히 앞으로 걸아가기만 할 뿐 그런 눈치를 보이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를 채고 꼬치꽃치 묻는다면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또한 눈치 채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휠리 아가 그런 그의 감정을 눈치 챘다는 것이었다. 네이브의 하연에 대한 짝사랑이 아닌 둘 사이에 심상치 않은 무언가가 있다고 느낀 휠리아 는 질투로 거의 몸이 불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휠리아는 그 질투심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먹이를 노리는 짐승처럼 눈을 빛내며 때를 기다렸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속으로 계속 중얼거리면서. 절망의 땅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마치 아치 형의 가로수를 심어놓은 정원같이변해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마치 정원을 거니는 기분으로 절망의 땅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들의 머 리 위에 겹겹이 비리어를 친 채로.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검푸른 늪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끼 낀 늪지 그 어 느 곳에도 꽃의 형태를 띤 식물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 어떤 식물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로 인해 모두의 시선은 저절로 하연에게 모아졌으나 하연은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 늪지 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그 연꽃이라는 것을 보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 문이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연꽃은 없었고 하연은 그저 멍하니 늪지만 바라보고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모두들 연꽃 찾기를 포기하고 야영 준비를 할 때까지도. 밤이 되어 달이 밝았지만 과거를 포기할 수 없었던 하연은 늪가에 넋을 잃은 듯 앉아 있었다. 간절히 바란다고 뭐든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손을 내미는 것이 과연 잘못된 일일까? 바라고 또 바라기에 이렇게 가 슴이 아픈데 아무것도 하지 말라면 그것이 더 나쁜 일은 아닐까? 꼭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좋았다. 바라고 또 바라는 일이니 몇번이고 손을 내밀어 이루어지기를 원할 것이다. 과 거를 찾게 해달라고.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달라고. 그렇게 끊임없이 바라고 또 바랬기 때문일까? 늪의 중간쯤에서 무엇인가가 힐끔 보였다. 그러자 하연은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늪 속에 발을 디밀었다. "하연!" 제일 먼저 그 광경을 목격한 사담이 달려갔을 때는 벌써 하연의 몸이 반쯤 늪에 잠긴 채 깊 숙한 곳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당황한 사담은 손을 내밀며 외쳤다. "뭐해, 하연? 빠져 죽고 싶은 거야? 어서 내 손을 잡아!" 그러나 하연은 마치 무엇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손으로 늪지를 헤치고 있었다. 그럴수록 그녀의 몸은 더욱 빠르게 늪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하연!" 어느새 다가온 일행들이 일제히 소리쳤지만 그녀의 귀에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막 하연의 어깨가 잠기어가자 바토르는 망설이지 않고 늪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하연 의 몸을 잡아채서는 늪을 차고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더니 가볍게 늪밖의 땅에 내려섰다. 무사한 하연의 모습에 다른 일행들이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였지만 바토르는 하연의 양 어깨를 세게 부여잡고 마구 흔들면서 외쳤다. "도대체 뭐야? 자살이라도 하려는 거야? 왜 늪에 들어간 거야? 늪에 발 하나라도 잘못 디디 면 빠져 죽는다는 것을 몰라? 도대체 너 왜 그런거야?" 그 말에 하연은 희미하게 웃으면서 간신히 손에 쥔 것을 바토르의 앞에 내밀어 보여주었다. "...응?" 그것은 아직 채 봉오리도 피지 않은 작은 꽃이었다. "설마 이 꽃이 바로...?" "네, 연꽃이에요." 순간 하연의 일행들은 우르르 그녀와 바토르의 곁으로 몰려들어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그 연꽃을 쳐다보았다. "와!" 모두들 탄성을 터뜨리면서 구경하느라고 정신이 없는데 늪에 빠졌던 바토르와 하연에게서 나는 냄새 때문에 그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데바가 퉁명스럽 게 외쳤다. "이봐들, 아직 기뻐할 때가 아니야. 모든 것은 여신에게 제를 올려봐야 아는 거라고. 그 연 꽃이 과연 여신께서 말하신 그 성스러운 꽃인지 아닌지 말이야." 그 말에 연꽃으로부터 시선을 돌린 일행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눈빛은 기대감으로 빛나 고 있었다. 무의식 중에라도 하연이 선택한 길인데 틀릴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시 제단이 만들어지고 데바의 기도 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그리고 얼마 후 산성수 위의 연꽃 봉오리가 허공에 둥실 떠오르더니 은빛 물방울들이 점점이 연꽃 주위를 둘러싸며 하나 의 형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엘레나 여신이 다시 강림한 것이었다. 강림한 여신은 두 손에 연꽃을 올려놓고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듯 입김을 불어넣었다. 그러 자 연꽃 봉오리가 스르륵 퍼지며 꽃이 활짝 피어났다. 그 연꽃을 둥실 띄운 엘레나 여신은 그것을 하연의 가슴 쪽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연꽃은 그대로 하연의 가슴속으로 스며들 듯이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아?" 놀라서 하연이 엘레나 여신을 쳐다보자 여신은 자애로운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자신의 존재를 찾아낸 것을 축하드립니다. 하연. 이제는 과거와 미래를 찾을 시간인가요?] 도대체 언제 어떻게 내가 존재를 찾게 되었다는 것인지 하연은 이해할 수 없어서 의아해했 지만 그것은 곧 이제 과거와 미래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녀를 비롯한 모두가 엘레나 여신만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엘 레나 여신은 하연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위에 손을 올려놓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축복을...!] 그러자 순간 하연의 온몸에서 은빛 섬광이 번쩍이더니 하연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 러져 버렸다. "하연!" "레이디 하연!" 놀라서 하연의 일행들이 달려드는 가운데 바토르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엘레나 여신에게 따 지듯 물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왜 하연이 쓰러진 것입니까?' 바토르의 안하무이에 화를 낼 만도 하건 만 엘레나 여신은 그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과도한 신성력으로 잠시 정신을 잃은 것뿐입니다. 깨어나면 그녀는 과거 를 되찾은 후가 되겠지요.] 그러면서 엘레나 여신은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바토르는 엘레나 여신이 사라진 자리를 향해 가만히 고개를 숙 였다. 진정으로 여신에게 감사하고 싶었던 것이다. 밤이 지나 아침이 밝혔다. 하지만 하연의 일행들은 간밤에 한잠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지 새우고 말았다. 분명 엘레나 여신이 하연이 과거와 미래를 찾게 되리라고 했지만 그들로서 는 그 사실을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편안히 잠들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아침이 오고 얼마나 지났을까?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하연의 눈꺼풀이 살짝 떨리는 듯하더니 그녀가 마침내 눈을 떴다. 그리고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는 하연을 보며 그들은 침을 꿀꺽 삼키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하연은 눈을 뜬 순간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도. 마치 한순간 의 꿈처럼 스쳐 자나가는 그 모든 광경에 하연은 잠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기억이 없었던자신이 훨씬 더 솔직한 자신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랑하고 싶 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솔직히 드러낸. 그것은 기억이 되살아난 하연으로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더니... 자조적으로 웃던 자신의 일행들을 둘러보았다. 긴장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일행들을 보자 하연은 튀어나오는 웃음을 어쩌지 못하고 활짝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안녕? 다시 만나서 정말 반가워." 그 말에 굳어 있던 하연의 일행들은 피식피식 웃으면서 너도나도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 안녕이다." "기억이 돌아왔구나, 하연?" 그들과 이것저것 인사를 나누는 하연을 보던 로베인이 가만히 하연의 로브 자락을 잡아당기 며 물었다. "이제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거지, 하연?" 하연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로베인 또한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 였다. 서로를 마주 보며 행복한 듯 그들이 웃고 있을 때였다. 데바가 하연에게 말했다. "이제야말로 엘레나 여신의 전언을 전할 시간이 된 것 같군." 그 말에 하연을 비롯한 모두는 의아한 듯 데바를 바라보았다. 데바는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흐흠! 엘레나 여신께서 너를 도와 엘레나의 눈물을 찾으라고 하시면서 너에게 전하라고 하 셨다. 이제 모험은 끝이 났으니 고향으로 돌아가 행복한 미래를 만들어보라고. 그리고 고향 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이 섰으면 그분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셨다. 그러면 고향으로 돌려보 내 주시겠다고. 이상이다." 하연은 순간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결코 자신에게는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미래가 주어졌다는 것을비로소 자각했기 때문이다. 건강해진 몸으로 집으로 돌아가 결혼을 하고 아 이를 낳고.... 그런 하연의 모습에 로베인은 불안한 듯 물었다. "하연,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 사는 것이 아니고?" 하연은 로베인을 보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사담, 미루엘, 카리스, 바토르 등 일행들의 모습 을 하나하나 머리 속에 새기듯이 쳐다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과연 자신이 이들을 버리고 떠날 수 있을지.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하연의 머리 속으로는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고 결론적으로 자신은 결코 이들을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에게 받은 것이 너무나 만았 던 것이다. 사랑, 우정, 행복, 기쁨, 슬픔 등등. 또한 이들을 버린다면 그것은 햐연 자신의 과거를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는 것을 깨 달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과거를 잃은 자신은 더 이상 지금의 자신이 될 수 없을 것이기에. 때문에 하연은 장난스럽게 로베인에게 말할 수 있었다. "고향엔 돌아가지 않아. 나에겐 아직 해보고 싶은 모험이 무궁무진하거든." 그 말에 로베인은 물론이고 모두가 기쁜 듯 호탕하게 웃었다. 다만 혼 대륙의 운명을 알고 있는 카리스만이 씁쓰름한 미소를 지었을 뿐. 밤샘을 해서 그런지 아침을 먹자마자 피곤한 듯 잠니 들어버인 일행들을 둘러보며 하연이 바토르에게 물었다. "이제 바람의 달까지 얼마나 남았지?' "응? 한 20일 정도 남았을 걸. 왜?" "20일이라...!"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해 주던 바토르는 문뜩 하연이 사막을 지날 때부터 이상하게도 바람의 달이 얼마나 남았는지에 신경을 쓰던 모습이 떠올라 물었다. "그날이 무슨 특별한 날인지 물어보려던 바토르느 하연의 우울한 얼굴에 저도 모르게 말문 을 닫고 말았다. 왠지 물어보면 하연이 울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연이 울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때 하연이 말했다. "저들이 깨어나면 트리엔시라 왕궁으로 가자. 쟈스란을 만나야겠어." 순간 바토르는 당황해서 카리스를 쳐다보았다. 카리스가 저번처럼 무슨 변명이든 해주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곧 어떤 식으로든 알게 될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로 인해 바토르만 안절부절못하고 있었고 데바는 그런 바토 르를 비웃듯 카리스의 옆에 바짝붙어 앉은 채 희죽희죽 웃고 있었다 하연은 그런 그들의 모 습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카리스가 들고 있는 지팡이에 시선이 가자 큰소 리로 외쳤다. "앗! 내 지팡이!" 그리고 잽싸게 카리스 의 손에서 갈루마를 빼앗듯이 들자 갈루마의 속사포 같은 수다 소리 가 들려오기 시작했다.-하연, 너, 나 같은 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지? 어떻게 이 대현자 갈루 마님을 잊을 수가 있는 거야? 그동안 내가 얼마나 너를 걱정했는데 넌 내 걱정 같은 것은 조금도 하지 않았지? 그러니까 기억을 찾아놓고도 한참이나 지나서야 나를 생각했지. 그동 안 내가 저 드래곤의 비위를 맞추며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동안 넌 태평하 게 나 따위는 잊은 채... 좀처럼 멈출 것 같지 않은 갈루마의 수다 소리를 들으며 하연은 잠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 었다. 다시 모르는 척하고 갈루마를 카리스에게 넘기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고. 오후가 다 되어서야 깨어난 일행들과 간단한 점심을 먹으면서 하연은 자신이 건강해졌음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음식의 맛이 느껴졌던 것이다. 왜 식욕이 인간의 삼 대 욕구 중에 하나에 포함되는지 그 이유를 새삼 느끼면서 하연은 일 행들에게 앞서 바토르에게 했던 말을 전했다. 식사 후에 트리엔시라 왕궁으로 갈 거라고. 그 말에 굳어진 일행들이나 갑자기 침묵하는 갈루마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하연은 굳이 그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다. 뭔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알아야 될 일이라면 굳이 물 어보지 않아도 말해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때문에 하연은 모르는 척하고 천천히 맛을 음 미하면서 식사에만 열중했다. 마침내 식사가 끝나고 하연 일행들은 트리엔시라 왕궁으로 향했는데 그들의 발걸음은 더디 기 이를 데 없었다. 이에 하연은 그들을 재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이리 느린 거야? 시간이 없단 말이야. 모두 서둘러!" 그 말에 유독 느린 걸음을 자랑하던 로베인이 물었다. "별로 서두를 필요는 없잖아? 뭐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거야?" 그러자 잠시 걸음을 멈춘 하연이 이를 으드득 갈고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면서 말했다. "물론 있지. 감히 이 하연님을 악마와의 계약 따위로 마음대로 가지고 놀다니... 쟈스란 . 너 어디 두고 보자!" 얼른얼른 가서 쟈스란을 패주어야 한다는 듯 손마디를 주무르는 하연의 모습에 그녀의 일행 들은 가슴이 저리듯 아팠다. 쟈스란은 이미 그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죽어버려서 더 이상 그녀가 때려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제34장 마신 구하기 어둠침침한 감옥 안에서 시체 썩어 들어가는 냄새와 갖은 오물의 더러운 냄새가 코를 찌르 고 있었다. 그 가운데 빛의 대사제 엘 노아와 어둠의 대사제바스카는 초췌한 몰골로 쇠사슬에 묶인 한 쪽 벽에 걸려 있었다. 각기 오망성 문양의 검을 심장에 박은 채. 따라서 마땅히 죽었어야 할 그들이건만 이상하게도 그들의 육신은 꿈틀가리면서 아직까지 살아 있음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심장에 박힌 오망성의 단검이 단순히 그들의 신성력만을 빨아들일 뿐 인체에 는 전혀 해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한기가 가득한 음성이 바스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으드득! 내 여기서 나가면 반드시 그자의 심장을 빼어 짓이겨 놓고야 말겠다. 보았는가, 엘 노아여! 너희 사제들이 얼마나 위선자들인지? 적어도 우리 어둠의 사제들은 욕심이 없는 척 은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니까. 그런데 너희 빛의 사제들은 마치 자신들만은 순 결한 척 모든 욕심에서 초탈한 척 위선을 떨어대더니...봐라, 결국은 뒤에서 칼을 꽂아대지 않았더냐?' 엘 노아는 회한이 깃든 눈으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미안하네 모두 내가 못난 탓이야." "흥! 알긴 아는군 그래, 자네는 눈뜬 장님이었나? 저 정도 세력을 모은 것은 보면 그동안 꽤 나 분주하게 움직였을 텐데.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니..."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바스카 또한 어리석기는 자신도 엘 노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적과 협상을 하러 오면서 적들의 내부 사정에 대해 이렇게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니 말이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면서 바스카는 말했다, "후∼ 이제 와 후회해 보았자 다 무슨 소용인가? 내 가란님의 품으로 돌아갈 때가 얼마 남 지 않은 듯하군." 그 말에 엘 노아는 순간 두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아니, 난 아직 펠레아님의 품으로 돌아갈 수가 없네. 이 어둠과 빛의 전쟁이 모두 상인 길 드의 음모였다는 것을 밝히고 배신자를 처단 하기 전까지는 ." "어쩔 수 없지 않은 가? 이렇게 잡혀 있어서는 그리고 우리 둘이 상잔했다고 알려진 이상 빛과 어둠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일일세. 어둠의 사제들은 결코 복수를 피하지 않으니까. 지 금쯤 대륙은 벌써 전쟁터로 변해 있을걸."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바스카의 말에도 엘 노아의 눈에 깃든 한줄기 희망의 빛은 꺼지지 않았다. "아니, 난 기다릴 걸세. 그녀가 이 전쟁을 막아주기를 ...." "그녀가 누군가?" 엘 노아가 이렇게까지 믿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니... 호기심 어린 바스카의 표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짐작한 엘노아는 희미한 미소를 입가 에 띠며 말했다. "자네도 아는 여인이야,.곧 만나게 될 걸세." 트리엔시라 왕궁에 도착한 하연 일행들은 황후를 알아본 경비병들덕분에 편안히 성안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성안에 들어선 하연은 그녀를 맞아 달려나온 시녀장에게 제일 먼저 쟈스란의 행방부터 물었 다. 그러자 시녀장은 의아한 듯 물었다. "폐하와 같이 가지 않으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는 보이시지 않는군요. 어디 가셨습 니까?" "뭐?" 하연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연꽃에 대한 정보를 찾기 위해 쟈스란이 먼저 왕궁 으로 갔다고 카리스가 말하지 않았던가? 자연 하연은 카리스를 쳐다보며 눈으로 그 이유를 물었다. 그 모습에 카리스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말했다. "잠깐 나와 따로 얘기 좀 할가?" 그 말에 로베인을 비롯한 일행들은 화들짝 놀라서 카리스에게 물었다. "도대체 하연에게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러는 겁니까?" "쓸데없는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둘이서 따로 할 만한 얘기는 없는 것 같은데요?" 카리스가 쟈스란에 대해 하연에게 말하는 것을 무슨 일이 있어도 막겠다는 의도가 역력한 일행들의 모습에 잠시 얼굴을 찌푸리던 카리스가 말했다. "물론 하연을 위해서는 그게 좋겠지. 하지만 쟈스란은? 그렇게 의미없는..." 로베인은 황급히 그런 카리스의 말을 막듯이 말했다. "쟈스란도 하연이 슬퍼하는 것은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긴장된 눈빛이 로베인과 카리스의 사이에서 오고 갔고 그 모습에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하연은 애써 불안감을 떨치며 카리스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지? 있는 사실 그대로 말해줘. 들어야겠어." "하연, 들을 필요도 없는 얘기야!" 당황해서 로베인이 외쳤지만 그런 그를 무시하듯 하연은 카리스의 손을 잡고 황후전으로 끌 고 갔다. "하연!" 그런 그들의 뒤에서는 로베인의 안타까운 외침이 들려오고 있었다. 황후전에 든 하연은 가만히 앉아서 카리스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얘기는 카 리스로서는 힘든 얘기였기에 그는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나 하연은 끈기있게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고 마침내 카리스는 하연이 기절해 있는 동안 쟈스란이 무슨 일을 했는지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아무 의미없는 죽음이었지만 적어 도 그가 목숨을 바쳐 사랑했던 하연의 기억 속에는 그를 남겨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같은 하연을 사랑하는 자로서 그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으니까. 카리스의 얘기를 듣는 하연은 머리속이 텅 비어가는 듯했다. 쟈스란이 죽었다니... 그 소리만이 머리 속에서 윙윙거리고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창백하게 질려서 금방이라도 끄러질 듯이 보이는 하연의 모습에 카리스는 덜컥 걱정이 되었 다. "괜찮아,하연?" 하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힘없는 모습에 카리스가 로베인의 말대로 사실을 밝히 지 말았어야 한 것은 아닌가 해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자 하연이 말했다. "카리스, 나 잠시 혼자 있게 해줄래?' "왜, 또 혼자 아프고 혼자 울려고? 우리는 뭐야? 너의 동료아니었어?" 격한 카리스의 반응에 하연은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쟈스란은 .그는 우리 동료 아니었어? 그래서 그가 죽는 것을 보고만 있었던 거야?' 순간 잠깐 동요하던 카리스였지만 이윽고 그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 "그하고 너는 달라." "뭐가 다른데? 그의 피는 나와 달리 붉은 색이 아니었어? 그의 심장은 내 심장처럼 뛰지 않 았던 거야?' "그렇지는 않았지. 하지만 그가 죽는다고 생각할 때와 네가 죽는다고 생각할 때 내 슬픔의 무게는 분명히 달랐다." 그말에 하연은 멍하니 카리스를 올려다보았고 그사이 카리스는 천천히 황후전을 걸어나갔 다. 혼자 남은 하연은 기억을 잃었을 때 매일 앉아서 바라보곤 했던 창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 았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젠장, 날 가지고 놀았지. 쟈스란? 널 보면 실컷 때려주려고 했었는데 그거 알고 도망친 거 지? 그런거지?,..... 나 너에게 빚을 졌어. 마음의 빚 말이야. 그러니 나 널 위해서라도 반드시 혼 대륙을 구하고 말거야. 다음 생에서는 네가 너의 소원을 이룰수 있도록.사랑하고 사랑받 는 그 작은 행복을 이룰 수 있도록 말이야. 그것이 너의 유일한 소망이라는 것 나 알고 있 었거든 .넌 날 닮았으니까." 똑똑! 얼마나 오래 그렇게 창밖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던 것일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 린 하연은 그제야 밖이 벌써 어두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황후 마마,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문밖에서 들리는 시녀의 목소리에 하연은 잠긴 목소리가 말했다. "알았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욕실로 들어간 하연은 대충 거울을 보고 눈가의 눈물 자국을 닦아낸후 갈루마를 챙겨 들고 방문을 나섰다. 시녀는 그런 하연의 모습에서 잔과는 갈라진 분위기를 느낀 듯 약간 놀라는 표정이더니 곧 그녀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식당에 들어서자 이미 자리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일행들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식당 문 쪽을 바라보다가 하연이 들어서자 모두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쟈스란의 죽음에 대해 듣고 충격을 받아서 식사도 안 하고 방안에 처박혀 울고만 있으면 어쩌나 걱장하고 있 었던 것이다. "하연, 괜찮아?" 율리아와 질리안이 조삼스럽게 하연의 안색을 살피며 묻자 하연은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담 담하게 말했다. "응. 어차피 인간은 모두 죽는 거잖아. 괜찮지 않을 것도 없지 뭐."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하연이 지금 괜찮다고 생각하느 사람은 없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한 하연의 눈 때문이었다. 이에 그들은 화제를 돌리듯 다른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고 자리에 앉은 하연은 식사하는 내내그들의 얘기를 그저 스쳐 지나가듯 멍하니 듣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방으로 돌아온 하연은 가만히 속으로 카리람을 불렀다. 그녀의 신인. '카이람'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카이람은 나타나지 않았고 기억을 잃었을 때도 아무리 카이람을 불러 도 나타나지 않았었던 것을 떠올린 하연은 불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마신인 그에게 무슨 일이 있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전적으로 그녀가 더 이상 마신을 소환해 낼 수 없어졌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이제 더 이상 카이람을 소환해 낼 수 없다고 생각하자 그것은 쟈스란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 었을 때보다 더 큰 충격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카이람..." 맥이 빠진 하연은 털썩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자 갈루마가 물었다.- -왜그래? 무슨 일인데 그래?" "카이람이 소환되지 않아." 그말에 갈루마도 놀란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지만 곧 어떤 생각이 떠오르자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하라마르트 산은 비교적 평온하지만 지금 대륙은 빛과 어둠의 전쟁으로 인해 말이 아닐 거다 , 분명 그 때문에 카이람도 전쟁을 즐기느라고 정신이 없는 거겠지. "그럴까?" -분명하다니까, 이 대현자님의 말씀을 믿으라고. "그래, 그런 것이겠지." 하지만 말은 그렇게 했어도 어쩐지 안심이 되지 않은 하연은 방안에 있는 줄을 잡아당겨 시 녀를 불러들였다. "찾으셨습니다. 황후마마." 공손히 절하며 묻는 시녀에게 하연은 빠르게 말했다. "바토르님을 좀 불러다 주세요." "알겠습니다." 밤늦은 시간에 사내를 불러달라는 하연의 말이 이상하기도 했으련만 시녀는 즉각 대답하고 는 밖으로 나갔다. 초조하게 방안을 몇 바퀴나 돌았을 때였다. 아무런 노크도 없이 바토르가 문을 열고 성큼성 큼 방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날 찾았다고 ,하연?" "어서 와, 바토르. 너, 혹시 카이람이 지금 뭐 하고 있는 지 알아봐 줄 수 있겠어?" 바토르는 뜬금없는 하연의 말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카이람님을 말이야?' "그래." "하! 하연, 난 카이람님에 비하면 고작 마왕일 뿐이야. 그런 내가 어떻게 미신님이 지금 어 디서 뭐 하는지 알아볼 수 있겠어?" 하지만 하연은 막무가내였다. "그래도 어떻게 알아볼 방법이 없을 까?'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바토르의 물음에 하연은 우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카이람이 소환되지를 않아." "뭐?" 그럴 리가라는 표정으로 바토르는 하연을 바라보았다. 카이람이 하연을 얼마나 아꼈던가? 그런데 그런 하연의 부름에 카이람이 응하지를 않았다니... 확실히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느낀 바토르는 심각한 표저으로 하연에게 물었다. "부르기는 제대로 불렀던 거야?" "그래. 언제나처럼 똑같이 불렀었다고." 그말에 곰곰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바토르가 하연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엘레나 여신을 불러 물어보면 어떨까? 널 고향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으니 네가 부르면 나타나실 것 아니야." 확실히 옳은 말이라고 생각한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길로 곧장 엘레나의 이름을 불 렀다. "물의 여신 엘레나님, 제 부름에 답해주십시오." 그러자 공기 중에 물방울들이 하나둘씩 모여들더니 물의 정령과도 같은 아름다운 여인의 모 습인 엘레나 여신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불렀나요, 여인이여?] "네 여신님." 짤막하게 대답하는 하연을 보며 여신이 물었다.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었나요?] 당연하게도 엘레나 여신은 하연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신을 불렀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던 하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그 말에 엘레나 여신은 순간적으로 당혹해서 물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를 불렀지요?] 하연은 진지한 눈으로 엘레나 여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 있을 때만 부르라고 했는데 마치 자신의 소환자라도 되는 양 함부 로 불러내더니 궁금한 것이 있다니... 화가 나려고 했지만 자신을 불러내면서까지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컸기에 엘레나 여신은 애써 감정을 누르고는 하연에게 물었다. [그것이 무엇이지요?] "카이람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가를쳐 주세요." 그 말에 엘레나 여신은 놀란 듯 하연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신의 총애를 받는다고 하여도 상대는 신이 분명한데 인간의 몸으로 함부로그의 이름을 불러대다니... 저런 무모함 때문에 카이람의 선택을 받은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엘레나 여신은 하연을 새삼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 도 그저 흔히 볼수 있는 평범한 인간의 아이일뿐 특별한 것도 특이한 것도 없어 보였다. 때문에 엘레나 여신은 알아도 상관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로인해 죄책감이 들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면 더욱 좋은 일이고 말이었다. [카이람은 지금 두 주신의 뜻을 거스른 죄로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순간 하연은 멍해져서 물었다. "카이람이 갇혀 있다고요?' [그래요, 인간이여. 모두 그가 이 혼 대륙을 구하기 위해 순리를 거역하려 들었기 때문입니 다. 따라서 만약 혼 대륙이 부활한다면 그는 존재를 소멸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한동안 하연은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고 그런 하연을 엘레나 여신은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그녀가 현명한 선택을 하기를 바라며. 하지만 마침내 하연이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질문은 엘레나여신으로서도 뜻밖의 물음이었 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지요?" [그것을 알아서 무얼 하려고요?] 엘레나 여신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를 구하러 갈 거예요." 순간 정적이 방 안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토르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린채 하연을 쳐다보았다. 한낱 인간이 마신을 구하겠다니 가당키나 한 말인가? 엘레나 여신 또한 그렇게 생각한 듯 갑자기 물방울 떨어지는 듯한 고운 웃음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얼마나 그렇게 웃었을 까? 웃음을 멈춘 엘레나 여신은 물었다. [왜 카이람이 아가씨를 선택했는지 알 것도 같군요. 아무리 인간이 불가능에 도전하는 존재 라지만 마신을 구하겠다니.... 정말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나요?] 그러자 하연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몰라요. 구할 수 있을 지 없을 지. 하지만 전 포기할 수 없어요. 시도조차도 하지 않 고 주저앉지는 않겠다고 이미 결심했거든요. 그는 내게 자신의 소멸을 걸고 행복을 주었으니까, 나에게 자유를 주었으니까 이번에는 내 가 할 거예요. 그를 위해서." 단호해 보이는 하연의 표정에 엘레나 여신의 표정도 엄격하게 변해 버렸다. [말했다시피 그것은 두 주신을 거역하는 일이랍니다. 한낱 인간인 당신이 우리들의 어버이 를 거역하겠다는 것인가요? 그런가요?] 갑자기 해일이 덮쳐드는 듯한 공포가 하연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렇지만 하연은 주저앉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고 서서 이를 악물며 소리를 끌어내었다. "네, 나의 신은 카이람이니까요. 내 신은 내 손으로 구할 겁니다." 그러자 해일이 가라앉으며 마치 그녀의 앞날을 축복하듯 따뜻한 빛줄기가 그녀를 감싸 안았 다. 그 가운데 엘레나 여신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카이람이 부럽군요. 이제는 왜 카이람이 자신의 존재를 걸었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어째서 두 주신이 그를 r그 감옥에 가두었는지도. 어쩌면 두 주신께서는...' 하지만 엘레나 여신은 더 이상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두 주신의 뜻을 그녀 마음대로 짐작한 다는 것은 불경한 일이었으니까. [후! 그는 빛이자 어둠인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혼돈의 감옥 안에 갇혀 있습니다. 인간의 여인이여.] "그곳이 어디지요?" 하연은 다급하게 추궁하듯 물었다. [가깝게는 바로 곁에, 멀게는 가장 먼 곳에....] 상당히 먼 곳에서 울리는 듯한 엘레나 여신의 목소리를 끝으로 그녀는 나타났을 때와 마찬 가지로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여신이 떠난 후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며 하연은 아무리 생각해 보았지만 여신의 말뜻을 이 해할 수가 없었다. 빛이자 어둠인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감옥이며 가깝게는 바로 곁에 있 고 멀게는 가장 먼 곳에 있다니... 그런데 그때 바토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빛이자 어둠인 자, 그것은 인간을 지칭하는 말이다. 빛과 어둠을 모두 지닌 유일한 존재는 인간뿐이니까." 순간 하연은 깜짝놀라 버렸다. 생각에 몰두해 있느라 바토르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 었기 때문이다. -맞아. 그래서 신들은 인간을 혼돈의 존재라고도 불렀지. 그제야 생각난 듯한 갈루마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하연은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구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 그것만큼 인간을 강 하게 만드는 것이 또 있을 까? 저도 모르게 희미하게 웃으며 하연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럼 인간만이 들어갈 수 있는 감옥이라는 소리인데.." 갈루마가 말했다.- -예전에 현자 제베르타가 말하기를 자기 자신의 마음속이야말로 자신에게서 가장 가까운 곳이자 가장 먼 곳이라고 했었지. " 내마음 속?" 하연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마음 속이라니? 어떻게 마음속에 들어간단 말인가? 카이람을 구 하는 일이 어려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난해한 일이었다니... 나직이 한숨을 쉬며 하연은 방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차라리 몸으로 때우는 일이 더 쉽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바토르가 돌아가고 난 후에도 하연은 계속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카이람을 구할 수 있을지. 생각을 너무 했기 때문일까? 병이 있을 때만큼이나 머리가 아파 온 하연은 이윽고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었다. 하지만 좀처럼 잠을 이룰 수는 없었다. 이제 카이람을 불러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마치 벌 거벗은 채 세상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카이람!'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보고 싶을 때 언제나 볼 수 있는 존재였던 그가 세상 끝까지 걸어 간다고 해도 볼수 없을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저려왔다. 눈물이 흐르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하연은 새벽이밝아올 때에야 잠이 들 수 있었다. 여기는 어디지? 하연은 이상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텅빈 세상에 혼자 버려져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자신이 이런 곳에 있는 것인지 하연도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곧 그녀는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카 이람을 찾기 위해서라는 걸.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하연의 주위 풍경이 바뀌었다. 끝없이 이어질 듯한 뜨거운 사막으로, 그리고 그것이 사막이라는 것을 인식하기도 전에 하 연의 몸은 묵묵히 그 사막을 걸어나가고 있었다. 미칠 듯한 더위에 하연은 몸이 타 들어가는 것 같았다. 예전에도 사막을 걸었지만 그때도 이렇게까지 덥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신은 분명 드래곤 스케일로 된 로브를 입고 있어 서 이렇게 더울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도 생각하면서 그녀는 연신 얼굴의 땀을 소매로 닦아 냈다. "더워...너무 더워..." 하지만 하연은 결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것보다 더한 고통. 즉 숨이 끊어지는 고통도 이미 겪어본 그녀였으니까. 치지지직! 살이 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하연은 이를 악물고 앞만 바라보고 걸었다. 그러다 시야가 뿌 옇게 흐려지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을 때였다. 갑자기 사막이 사라지고 얼음으로 만든 거대한 빙산이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순간 하연은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빙산을 어떻게 올라간단 말인가? 추위도 추위였지만 그녀는 운동 신경이 영 아니었기 때 문이다. 허탈한 표정으로 빙산을 바라보던 하연은 그러나 곧 감옥에 갇혀 있을 카이람이 생각나자 새롭게 각오를 다지듯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외쳤다. "나는 할 수 있다. 할수 있다!" 등산은 하연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얼음을 붙잡은 하연의 손은 이미 시퍼렇게 변해서 더 이상 감각을 느낄 수 없을 지경이었도 그녀의 온몸 여기저기는 살이 터져서 피가 흐르고 있 었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얼마쯤 올라갔을까? 문뜩 얼마나 올라왔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하연은 머리가 핑 도는 듯 한 공포감을 느꼈다. 떨어지는 즉시 죽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감각은 죽어본 적 이 있어도 또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소하기는커녕 더욱 커지는 것이 었다. 식은 땀이 주르륵 흐르는 가운데 하연은 힘이 빠지려고 하는 손에 더욱 힘을 주어 얼음을 꽉 움켜잡았다. 차라리 몸으로 때우는 일이 더쉽겠다고 했던 생각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면 서. 하지만 하연은 힘들어하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카이람은 결코 그녀에게 있어서 포기 할 수 없는 존재였으니까. "헉! 헉!" 숨이 차서 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다시 아래를 쳐다보고 그 추락하는 것에의 공포를 다 시 느낄 것만 같아 하연은 쉴 수도 없었다. 위를 바라보니 아직 정상은 까마득했다. 그 때문에 이대로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문뜩 들곤 했지만 하연의 몸은 포기를 거부한 채 계속 위로 오르고 있었다. 손 마디에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빙산에 튀어나온 얼음을 집고 또 집고 위로 오르던 어 느 때였다. 그만 실수로 발을 헛디딘 하연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으아아악!" 떨어지고 또 떨어지면서도 하연은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목숨은 혼 대 륙을 구하기 위해 쓰여져야 하니까. 차라리 이것이 꿈이었으면 하고 생각하다가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것은 꿈일지도 모른다고. "그래, 이건 꿈이야!" 마지막으로 자신은 방에서 잠들었다는 것을 떠올린 하연은 단언하듯 외쳤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맨 처음의 아무것도 없던 그곳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 또한 아무 상처도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있었다. "역시 꿈이었구나!" 안도와 탄성이 섞인 하연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멍하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이것이 나의 꿈속이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던 하연은 문뜩 떠오르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꿈을 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라는 말이. 그렇다면 카이람이 갇혀 있는 그 혼돈의 감 옥이라는 것은 이 꿈속에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어쩌면 무의식 중에 그것을 깨닫고 있 던 자신은 이곳에 처음 도착하자마자 카이람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고 말이다. 또한 꿈속에서는 무엇이든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법이 아니었던가? '카이람!카이람!' 강하게 마음으로 카이람을 부르며 하연은 자신의 눈앞에 카이람이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 다. 그러자 눈앞의 광경이 확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숲이었다. 작은 연못이 있고 그 주위를 부드러운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가시나무 넝쿨들이 이리저리 엉켜 있는. 그리고 그 가시나무 넝쿨 속에는 하연이 그렇게나 보고 싶어하던 카이 람이 쇠사슬에 묶인 채 갇혀 있었다. 그의 이마에 새겨진 낙인 때문에 낯설기는 했지만 카이람이 분명한 그 모습에 반가운 나머 지 하연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카이람!" 하지만 카이람은 하연을 보지 못한 듯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다시 가시나무 넝쿨을 잡아 마 구 흔들며 누군가에게 외쳤다. [제발 절 여기서 꺼내주십시오! 하연이 부릅니다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른다고요. 하연이 날...] 피눈물을 흘리며 외치는 카이람의 모습에 하연은 더 이상 흘리지 않겠다던 눈물을 뚝뚝 흘 리고 말았다. 저렇듯 카이람이 상처받고 울부짖는 것은 모두 그녀 때문이었으니까. 그녀가 부를 때마다 그에 응할 수 없어서 혼자서 얼마나 괴로워했을까. 천천히 카이람에게 다가간 하연은 가시 넝쿨 사이로 카이람의 피투성이가 된 손을 잡았다. 자신의 손을 잡는 존재에 깜짝 놀란 카이람은 비로소 고개를 들어 하연의 모습을 확인하고 는 믿어지지 않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물었다. [하, 하연?] 하연은 울던 얼굴 그대로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응, 카이람 나야. 아무리 불러도 카이람이 안 오잖아. 그래서 내가 왔어. 잘했지?' [어. 어떻게...?] 카이람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하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바보. 찾아다니게 만들고." 투덜거리며 화를 내는 척하는 하연을 보자 그제야 정신이 든 카이람은 얼굴 가득 미안함을 담아 말했다. [미안 , 미안, 하연.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 얼마나 간절하게 자신을 불렀던 하연이던가? 그런데 그녀의 신인 그는 그녀를 지켜주지 못 했던 것이다. 하지만 하연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됐어. 카이람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 그리고 지금까지 줄곧 카이람이 날 구해주 었으니 이번 한 번쯤은 내가 카이람을 구해주는 것이 옳지." 딴에는 그렇지만 카이람은 자신이 하연을 구해주었던 일과 하연이 자신을 구하는 일은 다르 다고 생각했다. 그가 한 일은 그의 능력에 비하면 극히 미미한 일이었고 하연이 하려는 일 은 그녀의 능력에 비해 너무 과한 일이니까. 카이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하연은 가시 넝쿨을 손으로 잡아당기기도 하고 이빨로 잘근잘근 씹어보기도 하면서 끊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잘 되지 않자 하연은 이럴 때 검 이라도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마침 리밍스가 알려준 설화가 떠올랐 다. 하지만 이곳은 꿈속이니 검이 있을 리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품 속을 뒤지던 하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손에 단검이 잡혔던 것이다. 기쁨을 감추지 못 하고 검을 빼어 든 하연은 가시 넝쿨을 손쉽게 잘라내고 카이람을 묶은 쇠사슬마저도 간단 히 잘라내 버렸다. 그 모습에 카이람은 이채를 띠고 하연의 손에 들린 검을 바라보았다. 그를 묶었던 쇠사슬은 분명 현체는 쇠사슬로 되어 있었지만 신의 의지로써 형상화되어 있는 것이기에 보통 평범한 검으로써는 절대 잘릴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감옥을 나온 카이람은 하연의 손을 잡았다. 그 고운 손이 이리저리 가시에 찔려 피가 나고 있었던 것이다. [치유.] 부드러운 목소리로 카이람이 속삭이자 어느새 하연의 손에서 빛이돌며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예전의 고운 손으로 돌아왔다. "훗! 고마워 카이람. 넌 언제나 내게 최고의 신이야." 순간 그 말에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카이람은 환하게 웃어 보였다. 눈물보다는 웃음을 좋아하는 하연이기에... "이제 돌아가자, 카이람. 나랑 같이 갈 거지?" 하연은 카이람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고 남아 있겠다고 할 것이 두려워 조심스럽게 물었 다. 비록 두 주신의 뜻을 거역한 카이람이긴 했지만 그들이 그의 부모인만큼 그들의 뜻에 따라 이곳에 남아 있겠다고 말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연의 그런 걱정이 모두 쓸 데없는 일이었다는 듯 카이람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돌아가자,하연.] 그 말에 하연은 기뻐서 저도 모르게 방긋 웃으며 카이람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그들 이 막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강한 돌풍이 그들 사이로 스쳐 지아가더니 얼굴과 몸을 아랍의 여인들처럼 푸른 베 일로 두른 한없이 고독해 보이는 한 사내가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넌?] 경악한 듯 카이람이 외쳤다. 그는 바로 바람의 정신 디아스였던 것이다. 카이람은 가끔 불어오는 바람 소리와 기시나무 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로 바람의 정신 디아스와 물의 여신 엘레나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짐작했지만 그들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신경은 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디아스가 지금 이때 모습을 드러내다니... 나를 막겠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될 까 하는 생각들로 카이람이 골몰해있을 때였다. 하연이 디아스를 넋을 잃은 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에 심통이 난 카이람은 가볍 게 하연의 머리를 때리며 말했다. 탁! "정신 차려, 하연. 그의 눈을 보지마. 달리 바람의 정신인 줄 알아? 그의 눈을 보면 사랑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 말에 하연은 얼른 디아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다시는 자신의 감정이 누군가에 의해 조 종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까. 그러면서 하연은 불안한 눈으로 카이람을 감싸듯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 모습에 디아스는 처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심하십시오 레이디 두분의 앞길을 막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레이디. 하연이라고 불 러도 되겠습니까?" 무심해 보이는 디아스의 표정 때문일까? 그가 친절하게 하연의 이름을 부르자 마치 그의 유 일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신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하연은 마음이 설레지 않을 수 없 었다. 때문에 무의식중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자 카이람은 얼굴을 찡그리며 디아스를 무 섭게 노려보았다. 그런 카이람을 무시하며 디아스는 하연에게 말했다. "부탁이 있습니다. 하연. 혼 대륙의 멸망을 막지 말아주십시오. 인간에게 생로병사가 자연의 이치이듯 혼 대륙 또한 죽음의 때에 이른 것뿐입니다 순리를 거역하려 들지 마십시오. 카이 람 또한 그 순리를 거역했기에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니겠습니까?" 처음에 하연은 디아스의 말에 무의식으로 고개를 끄덕이려고 하다가 카이람과 감옥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서 다아스를 노려보듯 쏘아보며 물었다. "그래서 아들의 이마에 죄인의 낙인을 새겼다고 하던가요?" 순간 다아스는 놀란 듯한 표정으로 하연을 쳐다보았다. 비록 그가 하연에게 행사한 신성력 이 미미하다고는 하지만 웬만한 인간들은 그정도에도 그의 말에 무조건적으로 고개를 그덕 였었는데 하연은 아니었던 것이다. 역시 혼 대륙을 구할 만한 대단한 정신력을 지닌 인간이 라고 새삼 감탄하며 디아스는 진지하게 말했다. "죄인의 낙인은 누가 새긴 것이 아니랍니다. 하연 ;그의 의지가 두주신의 뜻을 거스르는 순 간 그의 몸에 새겨진 것이지요.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서 , 신이란 그런 것입니다. 순리를 거역할 수 없는 존재이지요," 그말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하연은 이윽고 단호하게 말했다. "분명히 말하지요. 저의 신은 두 주신이 아닌 카이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순리를 거역한 죄 인의 낙인을 달았어요, 그러니 그의 신도로서 저 또한 죄인이 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닐까 요?" 그러자 다아스는 슬픈 눈으로 하연을 바라보며 신성력을 높였다. 하연이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어 뜻을 이루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의도는 신성력이 높아짐에 따라 하연의 목에서 갑자기 빛나며 대응하는 성자의 돌 엘 루아로 인해 신성력을 거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빛을 보며 디아스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한낱 인간의 사랑이 사랑의 신인 나 디아스의 사랑보다도 더 순수 할 수가 있다니.... 그래 서 인간은 빛과 어둠 두 수신의 사랑을 모두 받을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때서야 디아스가 하연을 유혹했던 사실을 알아챈 카이람은 무섭게 분노하며 디아 스를 노려보았지만 디아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카이람의 그런 분노의 시선을 피했 다. 한동안 디아스를 쏘아보던 카이람도 그의 유혹이 본능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곧 분 노를 누그러뜨리며 하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 "돌아가자, 하연." "응." 그말이 끝나자마자 하연은 정신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꿈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고나 할까? 그사이 시야에 비친 디아스의 얼굴을 본 하연은 어쩌면 바람의 정신은 다 른 인간들에게는 사랑을 느끼게 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은 절대 사랑할 수가 없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디아스의 눈은 삭막하고 메말라 보였던 것이다. 눈을 뜬 하연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녀의 방을 지키고 있는 일행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 은 하연이 눈을 뜨자 각기 안도의 한숨을 쉬거나 눈물을 글썽이는 등으로 기쁨을 표시했다. "뭐, 뭐야? 왜그래?" 하연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그저 자다 일어났을 뿐인데 일행들이 너무 기뻐하고 있지 않 은가? 그런 하연의 표정을 눈치 챈 듯 로베인이 말했다. "이제 걱정 좀 그만 시켜, 하연. 너 지금 삼일 만에 깨어난 거란 말이야1" "뭐?" 하연으로서는 놀라고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다 일어나니 삼일 뒤라니... "정말이야?" 다른 일행들을 둘러보며 묻는 하연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자 하연은 기가 막힌지 다 시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버렸다. 그러다 꿈속에서 카이람을 구했던 일을 떠올린 하연은 혹 시 그것이 정말 꿈이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급히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카이람!" 하연의 그런 모습에 일행들은 모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하연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자 걱정하는 일행들에게 바토르가 하연이 더 이상 카이람을 불러낼수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 아서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깨어나자마 지 카이람을 찾는 모습에 그들은 바토르의 말이 맞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믿을 수 없게도 카이람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등에는 거대한 핏빛 날개를 달 고 이마에는 낙인이 새겨진 채로. [불렀냐?] 거만하게 묻는 카이람의 손에는 하연이 보지 못했던 게임팩이 여러개 들려 있었다. 순간 하연은 어이가 없어져서 물었다. "그게 뭐야?" [아! 이거 새로 나온 게임팩이라더군. 이것들 중에서 하나를 가지고 승부하기로 했는데 어떤 것이 좋을 지 몰라서 고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 마신박멸단이 아직 해체가 안 됐단 말이야? 그런 이상한 이름을 쓰고도?" 짜증을 부리듯 묻는 하연에게 카이람은 그럴 리가 있겠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해체라니? 이 게임의 세계는 실력이 모든 것을 우선하는 세계다. 이름이 아니라고. 게다가 내가 그 핏빛 천사 그놈을 이길 때까지 해체라니 말도 안 되지.] 하지만 하연은 더 이상 카이람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슬픈 눈으로 카이람의 핏빛 날개 와 이마에 찍혀진 죄인의 낙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하연의 모습에 카이람은 하연의 일행들에게 말했다. [모두 나가라. 하연에게 할 말이 있다.] 그 말에 카이람과 하연의 대화에 황당해서 표정 관리를 못하고 있던 바토르와 데바는 물론 이고 시종 벙 찐 표정이던 다른 일행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모두 하연의 방을 나갔다. 그러자 잠시 방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고 갑자기 돌변하듯 굳어진 카이람의 얼굴에 하연은 긴장감을 풀려는 듯 말했다. "왜 그래? 설마 너 나한테 그 게임팩들 중에 하나를 고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너, 그랬다가 지면 나한테 모든 책임을 돌릴 것 아니야. 미리 말해 두지만 난 절대 싫어." 하지만 카이람은 전혀 표정의 변화 없이 하연에게 물었다. [ [...갈 거냐?] 어디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카이람의 표정을 미루어 하연은 그곳이 어디인지 짐작할 수 있 었다. 하라마르트 산의 정상에 대한 얘기라는 걸. 하지만 지금은 거기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아서 어디를 이라고 하연이 장난스럽게 물으려는데 카이람의 진지한 표정에 하연은 차마 말을 돌릴 수 없어서 대답하고 말았다. "응." 담담히 말하는 하연의 표정에 카이람은 망설이다가 물었다. [내가 가지 말라고 해도?] 그런 카이람의 말에 하연이 좀 놀란 듯 물끄러미 쳐다보자 카이람은 멋쩍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를 믿어주는 유일한 인간들이 있는 곳이라 사라지길 바라지는 않지만 네가 계속 내 신도 로 남아준다면 그래서 날 불러주고 구해준다면 이 혼 대륙이 사라진다 해도 상관없을 것 같 다.] 하연은 피식 웃다가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이 몇 년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살아도 길어야 사오십 년이야. 하지만 이 혼 대륙이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너를 부르거나 구해주는 인간은 반드시 또 나타날 거야. 그때는 닐 기억해 줘. 널 부르던... 널 유일한 신으로 생각했던 한 여인이 있었다는 걸." 그러자 카이람은 화가 난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날 위로하려 들지마. 어치피 날 위해서가 아니라 로베인을 살리고 싶은 거잖아.]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네말이 맞아. 하지만 로베인뿐만 아니라 다른 나의 동료들이나 죽은 쟈스란을 위해 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야 난 인간이거든.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그런데 이 사랑 이란 감정은 곧잘 지워지고 퇴색되어 버려. 내가 만약 살아서 노인이 된다면 가끔 로베인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하겠지, 그때 왜 난 그를 내 전부라고 생각했을까? 그를 위해 영혼이 소 멸되는 것을 감수하려 했다니 정말 바보 같잖아? 나뿐만 아니라 로베인도 그럴 거야. 지금 이 누군가를 사랑했던 감정들은 모두 잊혀지고 그렇게 변하는 거지. 젊은 날의 추억으로. 하 지만 난 싫어. 로베인뿐만 아니라 s내 동료들에게 그리고 너에게 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어. 그래서 그런거야. 내 욕심이지." 카이람은 나직한 한숨을 쉬더니 하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올려주며 말했다. "그래, 넌 욕심이 많은 인간이니까." 하연이 잠에서 깨어난 지 이틀이나 지났지만 하연과 그 일행들은, 그들 중에서 에드릭과 마 로위 바토르, 데바만 빼고 여전히 트리엔시라 왕궁에 머물러 있었다. 마물 헌터인 에드릭은 안내역인 그의 일이 모두 끝났기에 약간의 식량만 챙겨서 떠난 것이고 마로위는 마화들을 연구한다고 에드릭을 따라갔으며 바토르와 데바는 하연이 깨어난 날 마신 카이람의 그만 돌 아가 보라는 단 한 마디에 아쉬운 마음을 접고 돌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각기 나름대로 짧은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한 밤중까지 식당에 모여 앉아 떠들면서, 그렇게 동료들 속에서 웃고 있는 하연을 보는 네 이브의 눈은 겉으로는 냉정해 보였지만 속은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어제 저녁 지나치면서 한 하연의 말 때문이었다. "거짓말쟁이." 그의 귀에만 들리게 속삭인 그 말은 그의 심장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었었다. 하연이 기억을 되찾았으니 그것에 대해 자신에게 어떤 말이든 할 거라는 걸 알았고 글렌의 말대로 그것이 모두 하연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였다는 변명의 말도 연습해 두었지만 그 순간 그런 것은 아 무 소용이 없었다. 그저 머리 속이 하얘지는 것이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하연을 포기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에 씁쓸한 표정으로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난 네이 브는 천천히 식당을 나왔다. 그런 그의 모습을 휠리아가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복도를 걸어가던 네이브는 저편에 살짝 열려져 있는 한 방문을 볼수 있었다. 주인이 없다 는 생각 때문인지 아무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간 네이브는 그 방이 서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쪽 벽면을 모두 차지하고 있는 책들과 거대한 책상으로 인해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다른 곳과는 다르게 책상만은 지저분했는데 그 이유는 여기저기 아 무렇게나 쌓여 있는 서류들 때문이었다. 그것들 중에는 아직 쟈스란이 보지않은 것으로 보 이는 서류들도 있었다. 무의식 중에 그 서류들을 들춰 보던 네이브의 얼굴은 점점 만족스럽 게 변해갔다. 서류의 내용으로 그랑디아로 간 글렌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처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서재로 따라 들어선 휠리아가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네이." 그 목소리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휠리아를 바라본 네이브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 다. "무슨 일이지?"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가느한 한 감정을 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휠리아가말했다. "말해봐." "...날 조금은 좋아했나요?" 뜻밖의 휠리아의 말에 네이브는 잠시 놀란 표정이었지만 곧 침착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조금도." 물론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조금의 끌림도 없었다면 그녀를 안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 만 하연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알 고 있는 지금 어쩌면 이렇게 깨끗이 단념하게 만드는 것이 휠리아를 위해서라도 좋으리라고 생각해서 한 말이었다. 처음으로 보여주는 그의 휠리아에 대한 배려였다. 설마 그것이 그를 파멸로 이끌어 버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채. "그렇군요.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 허탈하다는 듯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이는 휠리아의 눈에서는 싸느란 한기가 서리서리 뿜어 져 나왔다.그동안 참고 눌러왔던 네이브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폭발해 버린 것이다. 그렇지 만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네이브는 그것을 볼 수 없었다. 어떻게든 기회를 잡아 하연에게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다음 순간 그의 몸이 크게 한번 휘청거리다가 저재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런 네 이브의 심장에서는 가느다란 구멍이 뚫린 채 피가 분수처럼 솟아오르고 있었다. "왜 이런,,,!" 네이브는 흐릿하게 감겨오는 눈으로 휠리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의 손에는 피묻은 가느 다란 실과도 같은 암기가 들려 있었는데 암살자들이 자주 쓰는 암기로 네이브도 여러번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휠리아는 소리없이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서 있다가 그 말에 속삭이듯 말했다. "나, 한때일망정 네이가 품에 안고 즐기던 여자였잖아? 그런데 왜 나한테 말해 주지 않은 거야. 빈말이라도 어디 갔었냐고, 그동안 잘있었냐고 왜 보아주지 않은 거야. 내 서클렛은 어떻게 된 거냐고. 이 이마의 상처는 어떻게 된 거냐고. 한마디만 . 그 한마디만 해줬으면 이러지는 않았잖아! 그 한마디만...." 그 말에 네이브는 휠리아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돌아봐 주지 않는 그에 대한 복수였으리라.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던가? 네이브는 연민에 가득한 시선으로 휠리아를 바라보다 서서히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하연 에게 못다한 말을 중얼거리면서. "미안, 하연..." "흑흑흑흑!" 잠을 자기 위해 식당을 나온 하연과 일행들은 어두운 복도를 걷다가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 오는 여인의 울음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이게 무슨 소리지?" 떨리는 하연의 목소리에 일행들은 그녀가 겁먹은 것은 아닌가 해서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녀의 얼굴을 본 순간 그들은 그럼 그렇지 하는 체념이 담긴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말았 다. 하연의 얼굴은 그야말로 재미있는 먹이를 발견한 짐승의 표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방문 앞에 선 하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 여기는 쟈스란의 서재인데?" 그 말에 질리안과 율리아는 화들짝 놀라서 뒤로 물러서며 동료들에게 말했다. "우, 우리는 여기서 기다릴께요." "맞아. 망을 보는 사람도 있어야지." 하연이 이곳이 황후로 알려져 있는데 굳이 망을 볼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그들을 질리안과 율리아의 창백한 표정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 또한 내심으로는 혹시 저 안에서 쟈스란의 영혼을 본다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열린 문으로 제일 앞서 들어간 카리스와 사담은 눈앞의 광경을 보더니 하연이 들어가지 못 하게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들어오지마!" "보지마, 하연!" 하지만 보지 말라면 더 보고 싶은 것이 인간의 호기심이 아니었던가? 말치듯이 그들을 제치 고 앞으로 나선 하연은 휠리아가 싸늘한 시신이 되어버린 네이브를 부둥켜안고 우는 광경을 볼수 있었다.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굳어진 하연을 보더니 사담이 로베인에게 말했다 "데리고 나가라."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로베인은 하연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그녀를 이끌어 서재를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방 안에 짙게 감도는 혈향에 정신을 차린 하연은 로베인의 손을 쳐 내며 카리스에게 다급히 말했다.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몰라. 그래. 살아있을 거야. 카릿스. 빨리 마법으로 치료해봐!" 하지만 카리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네이브의 숨이 끊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 다. 그런 사실을 카리스의 표정에서 알게 된 하연은 낙담한 듯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른들이 말하길 사람의 생명은 그렇게 쉽게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어. 질긴 것이 사 람의 목숨이라고. 그런데 이렇게 허망하게 죽는 수도 있다니.... 쟈스란도 그렇고 네이브도 그렇고." 그때였다. 울고 있던 휠리아가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하연을 노려보더니 실같은 암기를 들고 하연에게 달려들었다. "너 때문이야! 너만 없었으면 네이는 죽지 않았어! 너 때문에...!" 하지만 휠리아는 하연에게 채 다가가기도 전에 사담의 검에 의해 몸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사담은 망설이지도 동정하지도 않았다. 한번의 실수로 아켄에게 엘레나의 눈물을 빼앗긴 것으로 충분했으니까. 게다가 하연의 목숨을 또다시 노리다니 하연이 용서해 도 이번에는 그가 용서할 수가 없었다. "허억!" 서글픈 미소를 띤 휠리아의 몸체가 서서히 기울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하연은 휠리아의 미 소가 단순히 눈앞에서 벌어진 살인의 광경에 놀라서 보인 착각일 거라고 생각했다. 누가 죽 어가면서 웃을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 하연은 멍한 가운데 중얼거리듯 로베인에게 말했다. "로베인 너 이제 저주 풀기는 다 틀렸다." "그래." 대답을 하면서도 로베인은 그때까지 자신의 몸에 걸린 저주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터라 그렇구나라는 생각만 들 뿐 조금도 안타까운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단지 하연이 네이브 와 휠리아의 죽음을 그녀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 아파할까 봐 그것이 걱정될 뿐이었 다. 네이브와 휠리아의 시체가 치워진 뒤에도 하연 일행들은 서재를 나설 수가 없었다. 죽기 전 에 네이브가 보던 서류를 세르기아스가 읽고 어떤사실을 하연에게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바로 빛의 대사제 엘노아와 어둠의 대사제 바스카가 수돈 신전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한참 동안 말이 없던 하연은 단호하게 일행들에게 말했다. "두 분을 구해야 해. 그것도 십오 일 이내에." 그 말에 용병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 했다. 빛의 대사제 엘 노아는 율리아와 하연의 목 숨을 구해준 적도 있었으니까. 그러자 사담이 세르가아스에게 물었다. "그분들이 갇혀 있는 곳의 정확한 위치나 수돈 신전의 현 상황등을 알 수 있을까?" 세르기아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이 서류에는 대략적인 상황만이 적혀 있을 뿐입니다. 현재 갈로아에서는 테이트론 가에 의 해 반정이 일어났으며 유즈베리아의 꽃인 아이린느 공주는 가출했고 슈이센의 새로운 재상 이었던 리켈만은 암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또한 대외적으로 빛과 어둠의 사제들이 모두 그 랑디아에 모여들고 있다고 합니다. 드디어 전면전이 시작되려는 것입니다." 그 말에 하연 일행들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지고 말았다. 갈로아의 반란이나 공주의 가출 사 건이야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빛과 어둠의 점면전이 일어나는 것은 곧 혼 대륙이 a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하연이 말했다. "우선 수돈으로 가서 대사제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부터 찾아보자. 대사제들을 구하고 나면 전면전만큼은 어쩌면 피할 수 도 있을 테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용병들 사이에서 세르기아스가 말했다. "여기서 수돈까지 가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입니다. 그때쯤에는 벌써 모든 것은 끝나 있을 것이고요." 그러자 걱정으로 물드는 일행들의 얼굴을 보며 하연은 전혀 문제될것이 없다는 얼굴로 말했 다. "걱정마! 다 방법이 있으니까." 의아한 얼굴로 그런 하연을 쳐다보며 로베인이 물었다. "어떤? 하연은 마법이 듣지 않아서 텔레포트 마법도 쓸 수 없잖아?" 로베인의 그 말에 하연은 씨익 웃으면서 카리스를 쳐다보았고 그런 하연의 표정에서 그 방 법이 무엇인지 이내 알아챈 카리스나 사담, 미루엘은 나직이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차라리 걸어가겠다고 발버둥 치는 조르와 소시언을 끌고 본체로 화한 카리스의 등에 오른 하연 일행은 그길로 곧장 수돈으로 떠났다. 그렁디아의 항구 도시인 수돈은 빛의 대신전이 있는 하나브와 가까운 지방으로 그 신전은 성자 루페이론의 뼈를 깎아 만든 보석 엘 루아의 보관 장소로 유명했다. 때문에 하나브가 어둠의 사제들에게 공격을 받게 된 최악의 상황에서 빛과 어둠의 협상 장소로써 수돈 신전 이 선택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협상을 위해 신전 안으로 들어간 두 대사제들이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나오지 않더니 그들의 휘하에 있던 각 두 명의 고위 사제들이 협상 결렬과 함께 두 대사제들의 동 사를 알리자 수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고 말았단 것이다. 그 가운데 하연 일행들이 수돈으로 들어서자 살기가 가득한 눈빛이 여기저기서 하연 일행들 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론 하연의 어둠의 사제임을 뜻하는 검은 로브 때문이었다. 그것을 인식한 미루엘 은 서둘러 일행들을 이끌고 가까운 여관으로 들어갔다. 그 여관의 이름은 <성자의 보석>이었다. 여관 안은 한산해서 몇몇의 용병들이 다 였는데 그들은 문열리는 소리에 긴장한 표정으로 시선을 문 쪽으로 돌렸다. 그러다 하연 일행이 들어서자 그들의 긴장감은 더욱더 팽배해지 고 말았다. 그들 일행 중에 어둠의 사제가 끼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경험 많은 용병들의 눈으로 보기 에 지금 들어선 일행들 하나하나가 절대 만만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리라. 따라서 혹시나 있을 지도 모르는 아습에 대비해 그들이 무기를 빼어들려고 하던 때였다. 띠리링! 아까 전부터 계속 류트만 조율하고 있던 음유 시인이 드디어 조용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 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한 신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한 인간의 여인을 사랑한. 하지만 여인은 다른 인간을 사랑했고 신에게 청했습니다. 죽어가는 연인을 살려달라고, 사랑하는 여인의 부탁에 그 신은 그녀의 연인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줘버립니다. 그로 인해 그 신은 다른 신들을 배신한 대가로 배신자의 낙인과 함께 신들의 감옥에 갇힙니다. 그리고 간절히 들리 는 자신을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에 울부짖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의 곁으로 가고 싶 은 마음에. 신의 이름을 불러주십시오. 인간들에게 오고 싶어도 올수 없는 신이지만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해 주십시오. 인간을 사랑한 한 신이 있었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다정히 속삭이는 듯한 그 노래는 눈물이 나도록 따뜻하게 들려서듣는 이들로 하여금 부드러 운 얼굴이 되게 만들었다. 하지만 하연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다. 그 노래가 자신과 카이람을 가리키는 것 같았기 때문 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료들도 마찬가지인 듯. "어? 그러고 보니 저 노래. 어쩐지 하연의 상황과 비슷한 것 같은데?" 로베인의 말에 하연은 문뜩 어떤 생각이 떠올라 물었다. "저 노래 아는 노래야, 로베인?" 하지만 대답한 사람은 율리아였다. "어? 하연은 저 노래 몰라? 성자 루페이론이 살아생전 즐겨 부르던 노래로 유명하잖아." "성자 루페이론의 ..../?" 고개를 갸웃거리던 하연은 이내 생각을 털어버리고 말했다. "예언자가 아니고서야 과거의 사람이 어떻게 미래의 일을 알겠어? 그러니 나와 카이람의 얘 기는 아닐거야. 저 노래가 카이람과 내 얘기라면 그야말로 더욱 웃긴 일이지. 사랑에 빠진 카이람에 죽어가는 내 연인이라니...." 그말에 하연의 일행들도 어이가 없다고 느꼈는지 피식 웃었다. 단지 망각의 축복을 받지 못 한 카리스만이 무엇인가를 떠올리고 얼굴을 굳혔을 뿐. 성자 루페이론이 한때 예언자로 불 리었다는 사실을 그때 피식피식 웃고 있는 하연일행들을 향해 중년의 여관 주인이 물었다. "손님들, 식사하시겠습니까?" 그러자 미루엘이 말했다. "아니오. 저희들은 여기서 며칠 묵었다가 가려고 합니다. 넓은 방 하나만 주십시오." 그 말에 여관 주인은 물론 여관 안에 있던 몇몇 용병들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빤히 하연 일행들을 살펴보았다. 비록 이 언제 터질지 모를 전쟁의 와중에 여관을 운영하고 있는 여관 주인도 주인이었지만 일부러 전쟁터까지 찾아와 여관에서 편히 묵어가려는 용병들이 있을줄 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허참, 방은 많으니 아무 방이나 하나 정해서 쓰시구려." 그러면서 주방으로 들어가는 여관 주인을 보며 하연 일행들은 여관주인이 왜 저런 표정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평범한 인간의 관점에 서 약간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자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여관에서 가장 넓은 방 하나를 정해 그곳에 모여 앉은 하연 일행은 대사제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선 대사제들이 붙잡혀 있는 정확한 장소 와 수돈 신전 내부 지도가 필요하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숨 막힐 듯한 빛과 어둠의 대치 상황 속에서 신전 내부 지도를 구하는 일이 어디 그리쉽겠는가? 때문에 머리를 쥐어 뜯어가며 그들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여관 창문을 통해 밖을 살 피던 사담이 그들이 묶고 있는 여관의 이름을 보고는 무엇인가 떠오른 듯 말했다. "엘 루아." "응?" 갑작스런 사담의 말에 모두들 쳐다보자 사담은 검으로 하연의 목을 가리켜 보였다. 그리고 금방 그 뜻을 알아차린 미루엘이 외쳤다. "맞다! 우리에겐 엘 루아가 있었지!" "무슨 소리야. 미루엘?' 하연이 궁금한 듯 미루엘을 독촉하자 그녀는 하연에게 방긋 웃어보이며 말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수돈 신전 최대의 귀빈으로서 신전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연일 수돈 신전에서는 회의가 벌어지고 있었다. 수돈 신전의 장로들은 물론이고 빛과 어둠 의 고위 사제들이 모여서 협상을 시도하고 있었지만 거의 모든 사제들은 협상보다는 전쟁을 원하는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양쪽의 대사제들이 죽임을 당한 이 마당에 어둠의 사제 들은 복수 이외의 길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빛의 사제들이 살아남으려면 어둠의 사제들 을 선제공격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회의장이 그 어느 때보 다도 격렬한 분위기로 치닫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회의장 문이 벌컥 열리며 한 견습 사제가 뛰어들더니 소리쳤다. "엘 루아가 돌아왔습니다.!" "뭐라고? 그게 정말인가?" "엘 루아가 돌아왔단 말인가?" 수돈 신전의 장로들은 놀라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견습사제의 뒤를 따라나갔다. 그 모습에 다른 신전에서 온 빛과 어둠의 고위 사제들도 의아한 표정으로 장로들의 뒷모습 을 보다가 그들을 따라 나갔다. 신전에 보관되어 있어야 할 엘 루아가 돌아왔다니 도대체 무슨 말인지... 신전의 문 쪽으로 달려나간 장로들은 일단의 용병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엘 루아를 가지고 온 분이 누구십니까?" 수돈 신전의 최고 장로인 리하인은 서둘러 그들을 향해 물었다. "이분입니다." 용병들은 모두 하연을 가리켰고 리하인은 엘 루아가 돌아왔다는 사실보다도 더욱 놀라 버렸 다 바로 엘 루아를 지닌 사람이 여인에 그것도 어둠의 사제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망연자실해서 그 자리에 서 있는 장로들의 모습에 웃음이 나온 하연은 활짝 웃어버리고 말 았다. 그 웃음 때문이었을까? 겨우 정신을 차린 리하인이 물었다. "저, 이름이...?" 상당히 나이가 들어 보이는 리하인의 질문에 하연은 공손히 대답했다. "하연이라고 합니다." 수돈 신전의 장로들을 뒤따라 나온 빛과 어둠의 고위 사제들은 그 이름에 놀라움의 탄성을 터뜨렸다. "아!" 그리고 어둠의 고위 사제들은 앞 다투어 그녀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존경어린 시선으로 쳐다 보며 외쳤다. "하연님이라면 혹시 마신 소환사인 그 하연님이 아니십니까?" "암살당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했다가 얼마 전에 다시 호얀 지방에 나타났다는 소식에 r 긴가민가했었는데 정말이셨군요?" "이렇게 검은 로브의 성자님을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그들의 말에 수돈 신전의 장로들은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검은 로브의 성자라니요?" 그러자 한 어둠의 사제가 자신의 자랑이라도 하듯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직 성자님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하셨군요. 처음 성자님에 대해 알려진 것은 미르텐에서 였습니다. 성자님이 전 재산을 털어 빈민들을 구제해 주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조금이라도 먹고 살 여유가 있는 자가 성자님의 돈을 받은 경우 얼마 안 가 그 돈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 돈은 평범한 돈이 아닌 성자의 돈으로서 알려져 있지요." 그 말에 하연은 빤히 카리스를 쳐다보았다. 어떤 수단을 써서 그 돈을 쥔 자가 여유가 있는 자인지 아닌지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그 돈을 회수할 만한 자는 카리스뿐이 었으니까. 그러자 카리스는 딴청을 부리듯 하연의 시선을 피했고 그 모습에 더욱 확신을 가 진 하연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생각했다. 누군가 드래곤의 돈을 훔치 려고 할 때 서너 번은 더 생각해 보기를 충고해야겠다고. 어둠의 사제의 검은 로브의 성자에 대한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빈민들의 성자님께 받은 것은 돈만이 아니었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성자님께 돈 을 받았다고 하지 않고 희망을 받았다고 하니까요. 돈을 받지 않은 자들까지도 말입니다. 그 일이 점점 대륙에 소문이 나자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성자님의 행적들이 차츰 드러나기 시작했지요. 어떤 소매치기 아이는 그분이 번 소중한 돈을 받았다고 했고, 어떤 여인들은 해 적들에게 잡혀가던 중 성자님께 구원을 받았다고 했으며,, 어떤 이들은 성자님께 노래를 들 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얼마전에 호얀 지방의 전쟁을 멈추게 만들어 많은 연합군 병사들의 목숨을 구했다고도 했지요. 유즈베리아에서 슈이센 갈로아까지 많은 사람들이 성자님을 칭 송하고 있답니다." 그 어둠의 사제의 말이 이어질수록 그곳에 모여 있던 사제들은 물론이고 하연의 일행들과 하연까지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하연의 감탄은 자신의 행적 S때문이 아닌 다른 것에 있었지만/ 하연이 혼 대륙을 돌아다니면서 실상 잘한 일도 있었지만 잘못한 일이 더 많았다. 그 첫 번 째가 고대 마법의 왕국인 트리엔시라 제국의 대마도사 슈마를 부활시킨 것을 들 수가 있고, 슈이센의 왕이 바뀐일도 결국 그녀 때문이었으며 빛과 어둠의 전쟁이 이처럼 빠르게 확산된 것도 모두 그녀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즉, 혼 대륙의 큰 문제들은 모두 그녀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그녀가 잘한 일들만을 나열하며 그녀를 성자라고 창송하고 있었으니 그녀로서는 실로 낯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하연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물었다. "저... 그런데 이 수돈 신전의 책임자가 누구신지?" 그러자 최고 장로인 리하인이 말했다. "제가 이곳의 최고 장로인 리하인입니다. 성자님. 잠깜만 저희와 말씀 좀 나누실 수 있을까 요?" 조심스러운 최고 장로의 부탁에 하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돈 신전의 사제들과 함 께 장로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러면서 일행들에게 눈짓으로 일을 시작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일행들도 알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연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자 그때까지 시종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바람의 고위 사제 딜리언은 무섭게 표정을 굳히며 그의 옆에 있던 빛의 사제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잠깐 나좀 보지." "예, 딜리언 사제님." 그들이 은근슬쩍 사라지는 사이 하연의 일행들은 다른 빛과 어둠의 사제들에게 둘러싸여 하 연에 관한 질문을 받아야만 했다. "성자님은 어디 출신이십니까?" "정말 성자님이 마신 소환사이신 것이 맞습니까?" "여러분들도 성자님이 소환하신 마신 카이람님을 보셨습니까?" 대충 이것저것 사제들의 궁금증에 대해 대답해 준 하연의 일행들은 하연이 돌아올때까지 수 돈 신전을 좀 구경시켜 달라고 그들에게 부탁했다. 대사제들이 갇혀 있을 만한 곳을 알아보 기 위해서였다. 그런 그들의 의도를 눈치 채지 못한 사제들은 성자님의 일행이라는 이유만 으로도 그들에게 충분히 호의를 느꼈는지 너도나도 자신들이 나서서 신전을 안내해 주겠다 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신전 내부를 이곳저곳 구경하고 돌아 다니는 사이 바람의 고위 사제인 딜리언은 그 의 측근인 바론과 함께 그가 임시로 쓰고 있는 숙소로 들어갔다. 그곳은 사제의 방답게 경 건한 분위기가 풍기는 단정하고 깔끔한 방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바닥에만은 오망성이 가득 그려진 태피스트리가 깔려 있어서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방 안에 들어선 딜리 언은 잠시 바닥에 깔려진 태피스트리 위를 걸어보더니 근심 어린 표정으로 바론에게 말했 다. "앞으로 내 방의 경계를 더욱 강화해 주게." "네? ,...알겠습니다." 바론은 왜 갑자기 방의 경계를 강화하라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어찌 되었든 대사제 마저 죽임을 당한 이때에 딜리언 사제마저 절못되면 큰일이기에 그의 명령을 곧 수행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바론이 나가자 딜리언은 더욱 초조한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젠장, 그 여사제가 지금 이때 나타나다니.... 설마 내가 한 일을 알아챈 것인가? 아니야, 그 럴 리가 없지. 그럴 리가 없어." "잠깐 엘 루아를 보여주시겠습니까?" 말없이 자신을 둘러싸고 눈빛을 빛내고 있는 장로들을 보며 하연은 목에서 엘 루아를 벗어 리하인의 손에 올려놓아 주었다. 은은히 손 아래 느껴지는 바람의 성력에 리하인은 금방 그 것이 진짜 엘 루아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확인을 마친 리하인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다른 장로들에게 엘 루아가 진짜라는 것을 알려주었고 이에 장로들은 탄성을 터뜨리며 기뻐했다. 그 가운데 리하인은 엘 루아를 다시 하연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엘 루아다 도난당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저희 사제들은 기쁘기 이를데가 없었습니다." "네?" 하연은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자의 보석을 도난당했는데 기뻐했다니....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는 듯 다른 장로들고 모두 고개를 끄덕였도 리하인은 곧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 었다. "그것은 루페이론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했던 예언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의 사후 엘 루아는 도난당하지만 새로운 성자와 함께 돌아오리라는 예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엘 루아는 성자님과 함께 돌아왔군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성자라고 말하는 듯한 리하인의 얼굴에 하연은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자신이 성자가 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사고 뭉치라고 한다면 또 모 를까? "저기, 전 성자가....!" 성자가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리하인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짐작이라도 하는 듯 그녀의 말을 끊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허허허! 성자가 아니시라고요. 루페이론님도 스스로는 자신이 성자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 시답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을뿐. 성자라는 칭호는 스스로 내릴 수 있는 칭호가 아 니니까요," 다른 성자들도 동의 하듯 말했다. "만약 스스로를 성자라고 칭했다면 저희들은 성자님을 의심했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영락없이 성자 칭호를 듣게 되었다는 생각에 하연이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데 그런 하연에게 리하인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전대 성자이신 루페이론님의 말씀을 엘 루아를 지니신 새로운 성자님께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잘 들어주십시오." 이에 다른 장로들은 물론이고 하연도 긴장된 얼굴로 리하인의 말을 기다렸다. "성자여! 희생하려 들지 마십시오. 희생은 결코 강한 마음이 될 수 없습니다. 순수하고 강하 게 바라십시오. 당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그말을 듣는 순간 하연은 충격 속에 멍해지고 말았다. 희생하려 들지 말라니... 그렇다면 성 자 루페이론은 그녀가 혼 대륙을 구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카이람이 말하기를 지화에 뛰어들 때 가장 순 수하고 강한 바람이 필요하다고 했었지 않은가? 그렇다면 희생이 강한 마음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그 일에 대한 충고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확실한 의미를 파악할 수 없어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하연을 보며 리하인이 말했다. "이제 엘 루아는 성자님의 것입니다. 부디 성자님의 성력이 혼 대륙 곳곳에 미치기를 기도 하겠습니다." 리하인의 말에 이어 다른 장로들도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지만 하연은 그런 장로들의 말을 듣는 듯 마는 듯했도 리하인은 그런 하연의 모습에 생각 할 시간이 필요하리라 여기곤 다른 장로들을 이끌고 살며시 자리를 피해주었다. 한편 하연의 일행들은 사제들에게 이끌려 수돈 신전의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있었지만 좀처 럼 f대사제들이 갇혀 있을 만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수돈 신전이 성자의 보석이 있는 곳으로서 유명하기는 했지만 그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고 거의 모든 곳이 개방되어 있어 서 사람을 숨길 만한 곳은 없어 보였던 것이다. 때문에 난처해하고 있을 때 율리아가 웃으 며 사제들에게 묻는 것이 아닌가? "사제들도 인간인 이상 죄를 짓기도 할 텐데 그럴 때는 어떻게 해요? 감옥에 가두나요?" 너무 직접적인 질문에 행여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해서 다른 용병들이 긴장하고 있는데 한 빛의 사제가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신전을 찾는 다른 손님들에게서도 많이 듣던 질문이군요. 수돈 신전에는 다른 신전과는달 리 감옥이 없답니다. 이곳은 성자의 보석이 보관된 장소이니까요. 대신에 사제들이 죄를 짓 는 경우 성전에서 금식을 하면서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써 죄를 대신한답니다." "아! 그렇군요." 그렇게 대답하는 율리아의 표정에 아쉬움이 가득하자 사제들은 오히려 그 때문에 의아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이에 웨이가 율리아의 옆구리를 찌르며 눈치를 주자 그때서야 율리아는 애써 표정을 수습했다.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자 로베인은 황급히 그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 해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성전을 좀 구경할 수 없을까요?" "실례는요." 사제들은 기뻐하며 그들을 안내했다. 성전이란 어느 신전에서나 사제들이 가장 자랑하고 싶 어하는 곳이었으니까. 성전으로 가는 길에 카리스는 왼쪽으로 이어진 복도 끝에 많은 성기사들이 한 방문을 지키 고 있는 곳을 볼 수 있었다. 그에 따라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든 카리스는 지나가듯 사제들에 게 물었다. "저곳이 어디이기에 저렇듯 성기사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입니까?" 한 빛의 사제가 카리스가 가리키는 곳을 힐끔 보더니 어둠의 사제들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 다. "아? 저곳은 빛의 고위 사제 딜리언님이 임시로 머물고 있는 처소입니다. 때가 때이니만 큼..." "그렇군요." 카리스는 그 빛의 사제가 난처해하며 말을 잇지 못하자 재빨리 알았다는 듯 대답하고는 말 을 끊어버렸다. "성전에 이른 일행들은 대충 안을 둘러보고는 밖으로 나와서 하연을 기다렸다. 몇분 정도 기다렸을까? 하연이 그들을 향해 걸어나오는 보습이 보였다. 그둘을 보자마자 하연은 그들에게 찾았냐고 눈짓으로 물었고 그들이 못찾았다고 고개를 가 로저어 보이자 잠시 생각하던 하연은 리하인에게 물었다. "혹시 신전에서 묵어갈 수 없을까요? 아무래도 이 수돈은 전쟁 지역이라 여관에서 묵기가 좀 불안해서요." 리하인은 빛과 어둠의 협상으로 인해 손님들로 꽉 들어차 있어서 더 이상 손님이 머물 만 한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 성자가 머물다 가겠다는데 그냥 보낼 수가 있겠는가? 따라서 리하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곧 방을 마련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눈치로 보아 그들이 머물 만한 곳이 없다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는 하연이었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반가운 기색만을 내비쳤다. 대사제들을 구하기 전에는 수돈 신전을 나갈 수 없 으니까 어쩔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날 밤 카리스는 일행들에게 투명 마법을 걸어주고 자신에게도 투명 마법을 건 채 신전안을 다시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밤새도록 뒤졌지만 좀처럼 대사제들이 있는 곳을 찾아낼 수가 없 자 그들은 혹시 대사제들이 수돈 신전에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대사제 들 찾기를 포기하고 다음날 수돈 신전을 떠나려고 했다. 그때 카리스가 문뜩 떠오르는 듯 입을 열어 말했다. "그러고 보니 한 군데 의심나는 곳을 아직 뒤져 보지 않았군," "어딘데요?" 화급히 묻는 세르기아스의 말에 카리스가 말했다. "빛의 고위 사제 딜리언의 방." 다음날 밤. "불이야!" 벼락같은 외침 소리와 함께 딜리언이 자신의 방에서 뛰쳐나왔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연일 방문을 지켰기 때문인지 졸린 듯한 표정으로 성기사들이 뛰쳐 나오는 딜리언 사제에게 물었다, "불이야, 불! 어서 들어가서 불을 꺼라!" "예? 예?' 성기사들은 불을 끄기 위해 방 안으로 뛰어들었지만 방 안에는 이미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크게 번져서 그들의 힘만으로 끌 수 없어 보였다. 이에 그들은 물을 길러 밖으로 뛰쳐 나갔고, 그 소란에 다른 방에 있던 사제들까지 모두 나와보기에 이르렀다. 그사이 하연 일행들은 슬며시 딜리언의 방으로 숨어 들어가서 불길이 번지는 속을 아무렇지 도 않게 돌아다니며 대사제들을 찾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불길은 단순히 하연이 불러낸 불의 정령 로우가 보여주는 환상이었기 문 이다, 이곳저곳 살펴보던 중 미루엘이 외쳤다. "잠깐만 여기를 좀 보십시오!" 모두가 미루엘의 곁으로 모여들자 그녀는 바닥을 가리켜 보였다. 바닥에는 그들이 자주 보던 오망성의 수가 놓여진 태피스트리가 깔려 있었다. "이것은!" 카리스가 태피스트리를 걷어내자 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이곳 같은데?"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카리스가 하연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 하연은 직접 들어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마법이 듣지 않기에 들어가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에 하연이 말했다. "알았어. 난 여기서 기다릴게,. 모두 갔다 와." 그러자 사담이 말했다. "아니, 나와 카리스만 간다, 너희들은 여기서 하연과 함께 있도록." 로베인과 미루엘 용병들은 남아 있을 하연을 걱정하는 사담의 마음을 알기에 그들 또한 들 어가 보고 싶었지만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마법진을 통해 사담과 카리스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기다렸을까? 밖에서 성기사들이 안으로 물을 퍼붓는 소리가 잇따라 들려오고 있었다. 때문에 혹시 이 불 이 환상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들키지 않을까 하여 하연 일행들이 초조해하고 있을 때 마법 진에서 다시 카리스가 그 모습을 나타냈다. "어떻게 되었어?" 초조한 표정으로 묻는 하연에게 카리스는 얼굴을 굳힌채 말했다. "우리 생각이 맞았어. 이 마법진은 한 감옥과 연결되어 있는데 그 감옥안에 두 분 대사제가 갇혀 있더군 , 그런데..." "그런데?' 좀처럼 말을 못하는 카리스를 다그치자 카리스는 난처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두 사람을 묶은 쇠사슬은 사담이 검기로 잘랐지만 단검이 심장에 박혀 있어 함부로 몸 을 움직여도 될지 어떨지 선택을 할 수가 없어서." 잠시 생각해 보던 하연은 이윽고 선택을 정한 듯 카리스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분들은 지금 어떤 산태야? 정신은 멀쩡해?' "음, 심장에 검이 박혀 있는 사람들치고는 말도 잘하더군," 약간 불쾌한 듯 보이는 카리스의 표정에서 무언가 안좋은 말이 그들 사이에서 오갔었다는 것을 눈치 챌수 있었지만 시간이 없기에 하연은 모르는 척하고 말했다. "그럼 그분들에게 물어봐. 본인들이 결정해야 할 문제 같으니까/"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카리스는 다시 마법진을 이용해 사라져 버렸고 얼마후 긴장한 채 마법진만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는 하연 일행들의 시야에 각기 한 명의 대사제를 품에 안고 있는 카리 스와 사담의 모습이 들어왔다. 카리스의 걱정과는 달리 심장에 검이 박힌 채로도 대사제들의 상태가 그리 나쁘게 보이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쉬던 하연은 대사제들에게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셨어요.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리하인이 내어준 하연의 방으로 돌아온 그들은 차분히 앉아서 대사제들의 말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 딜리언 사제가 프레인 사제의 죽음을 계기로 빛과 어둠의 전쟁을 불러일으켰 고 결국에는 두분을 암습해서 그 감옥에 가두어놓고 협상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말인가 요?" 하연의 차분한 질문에 바스카는 대뜸 노기로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그놈이라고 불러! 사제는 무슨 놈의 사제! 아무나 사제라는 이름을 갖다 붙이면 다 사제가 되는 줄 아냐? 그런 놈은 그저....!" 이를 으드득 갈며 당장이라도 딜리언을 씹어 먹을 듯이 보이는 바스카를 무시한 채 엘 노아 가 계속 말했다. "맞아. 그런데 문제는 그 일을 딜리언 사제 혼자서 한 일이 아니라는 거야 그의 뒤에는 상 인 길드가 버티고 있는 모양이더군. 그들이 딜리언 사제의 야망을 부추겨서 이번 전쟁이 크 게 확산되도록 만든거겠지." 그 말에 하연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빛과 어둠의 전쟁이 크게 확산되다 보면 빛과 어둠 양쪽이 모두 무너지게 되어서 대사제 의 위에 오르더라도 결국에는 백성이 없는 왕이 되는 것과 같을 텐데 딜리언 사제는 왜 그 들의 사주를 받아들인 것이지요?" 엘 노아가 말했다. "상인 길드 쪽에서 노린 것은 어둠의 신전이었던가 보더군. 빛의 신전이 아닌 . 때문에 이번 전쟁 중에 빛의 신전에서 입은 피해에 대해서는 전면적인 지원을 약속받았고 또한 어둠의 신전에 어느 정도 타격을 입힌 뒤에는 빛과 어둠의 협상을 체결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원 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더군. 일례로 상인 길드의 힘이라면 어둠의 신전으로 들어가는 식 량을 모두 차단하는 것만으로도 어둠의 신전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겉으로 보기에 그 협상의 주 제자는 딜리언 사제가 되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바스카는 그런 딜리언 사제나 엘 노아의 생각을 비웃듯이 말했다. "모두 어둠의 사제들을 모르고 하는 헛소리지 굶어 죽는다고 해도 그들은 항복하지 않아. 그것이 어둠의 신전의 자존심이니까. 그런데 상인 길드에서 빛과 어둠의 전쟁을 막아? 하! 그것도 우리가 동사했다는 소문을 퍼뜨려 놓은 이 마당에? 이제는 상인 길드가 아니라 드레 곤이 와서 협박을 해도 빛과 어둠의 전쟁을 막기는 불가능해." 그렇게 말하는 바스카의 안색은 어둡기 이를 데 없었다. 비록 그들을 죽이려 했고 어둠의 신전에 원한을 갖고 있는 자들이긴 했지만 그 들의 힘을 빌어서라도 빛과 어둠의 전쟁을 막 고 싶은 것이 솔직한 그의 심정이었으니까. 하연의 머리 속은 상당히 복잡했다. 상인 길드라면 네이브가 카라반으로 있는 곳이 아니었 던가? 그렇다면 네이브가 어둠의 신전에 원한이 있어서 빛과 어둠의 전쟁을 불러일으켰단 말인데 . 무엇 때문에 어둠의 신전에 원한을 품게 되었다는 말인가? 그때 하연의 머리 속에 는 네이브의 동생인 차크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저주 때문에 고통 받았던 그 아이.... '설마 그 때문에...?' 하연은 어느 정도 자신의 짐작이 맞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것을 직접 확인해 보고 싶 었지만 이제는 확인할 수 없다는 것도 떠올릴 수 있었다. 네이브는 이미 죽었으니까. 저도 모르게 나직이 한숨을 내쉰 하연은 엘 노아와 바스카를 향해 말했다. "우선 대사제님들의 심장에 박힌 검부터 해결하지요. 언제까지 검을 박은 채 살 수는 없잖 아요." 그 말에 엘 노아와 바스카는 반가운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 검을 어떻게 뽑아낼 수 없을까 하고 생각하던 중이었던 것이다. 심장에 박힌 그들의 육체에는 전혀 고통을 주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들의 몸속에 있 는 신성력을 빨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평생을 노력한 신성력이 모두 빨 려 들어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방법이 있겠는가?" 바스카가 기대에 차서 물었다. 그때 유심히 그들의 심장에 박힌 검을 살펴보고 있던 카리스가 일행들에게 말했다. "이 검의 손잡이를 좀 봐." 모두 손잡이를 보자 익숙항 문양을 볼 수 있었다. 오망성의 문양을 . 그 문양을 본 하연은 좀전 딜리언 사제의 침실 바닥에 깔려 있던 태피스트리에서도 같은 문양을 보았던 것을 떠 올리며 중얼거렸다. "갈로아의 테이트론 가와 딜리언 사제가 어떤 연관이 있단 말인가?' 그 말에 엘 노아가 자신의 심장에 박힌 검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 "이 검이 테이트론 가의 검이란 말인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손잡이의 문양이 테이트론가의 문양이라고 하더군요." 하연의 말에 잠시 생각해 보던 엘 노아는 얼마 전 갈로아에서 일어났던 반정을 떠올리며 말 했다. "그러고 보니 갈로아에서 반정을 인정해 달라는 사신이 다녀간 적이 있었지. 그때 딜리언 사제가 제일 적극적으로 찬성을 했었는데 아마 그때 사신으로부터 받았던 물건인가 보군." "중요한 건 누구한테 받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신중한 표정으로 말하는 카리스의 모습에 모두 의아한 듯 그를 쳐다보자 카리스는 검의 손 잡이에 손을 대어보더니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건 마족의 물건이다." "뭐?" "마족?" 놀라서 외치는 일행들과 하얗게 질려 있는 대사제들의 얼굴을 보며 카리스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의 몸에는 전혀 이상이 없으면서도 신성력만을 빨아들이는 검이 있을 수 있겠어?' "아!" 모두 그렇구나 하고 탄성을 터뜨리고 있는 가운데 카리스의 말이 이어졌다. "이 검은 함부로 뽑을 수가 없어. 분명 마족이 이 검에 신성력을 빨아들이는 대가로 사제의 심장을 걸었을 거야; 즉, 검을 뽑느 순간 심장이 부서져 버리도록 말이다." 그 말에 두 대사제들은 충격을 받은 듯 멍한 표정이었고 하연과 일행들은 어깨를 으쓱해 보 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네." "그래. 이대로 둘 수밖에." 평생 검을 심장에 박은 채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두 사제들이 넋을 잃고 있을 때 사담이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군. 어째서 살려둔 거지?" "응?'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하연이 반문하자 사담은 그들이 그때까지 전혀 생각지 못했던 문제를 들추어냈다. "그의 입장에서는 대사제들을 살려둘 이유가 없다는 말이지 오히려 이들을 깨끗이 죽여 버 리고 증거를 남겨두지 않는 편이 낫지 않겠나? 그런데 왜 굳이 이들을 살려둔 것일까?' 순간 모두의 머리속에 그와 같은 의문이 떠오르는 가운데 카리스가 조용히 대답했다. "아마도 힘을 원한 것이겠지. 이들의 신성력을 말이야. 인간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것이니 까." 순간 방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고 모두의 표정이 너무 우울해 보이자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율리아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무슨 걱정을 하는 것이지요? 우리에겐 마족보다 높고 마왕보다 높은 위대한 마신님을 소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말이에요." "아!" 그때서야 마신 카이람을 떠올린 방 안의 모두는 활짝 웃을 수 있었다. "카이람!" 하연의 부름에 어김없이 소환되어 나온 카이람은 긴장된 표정으로 주위를 잊은 듯 하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아직 며칠 더 시간이 남았는데...] 하라마르트 산 정상에 데려다 달라고 불렀다고 생각한 듯한 카이람의 말에 하연은 피식 웃 으며 그의 뒤쪽에 있는 두 대사제들을 가리켰다. 자연스럽게 하연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카이람은 대사제들의 심장에 박힌 마기가 느 껴지는 검을 보고는 곧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볍게 검을 당기는 시늉을 했다. 스윽. 그러자 저절로 검이 빠져나오더니 땅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탕!탕! 그리고 두 대사제들의 가슴을 보니 언제 검이 박혔냐는 듯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러고 나자 카이람은 마치 무슨 급한 볼일이라도 있는 듯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하연에 게 넌지시 물었다. [나 이제가도 되지?] "응!" 그 말에 이제는 그 어떤 대가도 원하지 않는 채 눈에 띄게 안도하는 표정으로 재빨리 사라 지는 카이람의 모습에 하연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 다. 대마신인 카이람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모두 그녀 때문이었으니까. 때문에 하연은 경 탄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두 대사제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기쁘지가 않았 다. 그저 카이람을 위해서라도 하라마르트 산 정상에 오르는 일은 내 스스로 걸어서 올라가 야겠다고 가만히 생각할 뿐이었다. 다음날 이른 시각, 딜리언은 성기사들이 화제를 진압했다는 말에 황급히 자신의 방으로 달 려 들어갔다. 그리고 약간의 그슬린 흔적만 있고 무사히 깔려 있는 태피스트리를 보고는 안 도해서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누군가 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본다면 의아 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때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측근인 바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딜리언 사제님, 안에 계십니까?" "무슨 일인가?' 어느새 침착해진 목소리로 딜리언이 물었다. "회의 시작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알았네." 자리에서 일어난 딜리언 사제는 새하얀 로브를 가지런히 정리하며 오늘에야말로 협상을 체 결할 때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빛과 어둠의 전쟁을 종결 지은 자로서 빛의 대사제의 위에 오를 시간이 된 것이다. 바론과 함께 회의장으로 들어서는 딜리언의 벌걸음은 가볍기 이를데 없었다. 가만히 회의 석상을 훑어보던 딜리언은 그와 함께 곧 어둠의 대사제 위에 오를 아트라 사제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자 수돈 신전의 최고 장로인 리하인이 탁자에 한 손을 짚고 일어서며 말했 다. "지금까지 양쪽의 입장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 같습니다. 그에 따른 요구 조건도요. 양쪽 대표자들의 공식적인 사과와 피해 보상에 관해서는 우선 아무래도 현재 양쪽 대사제들이 없 는 관계로 공식적인 사과가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양쪽에서 임시로라도 대표자들 뽑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그 말에 회의 석상에 있던 모든 사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어둠의 사제들 측에서는 아 트라 사제가 당연하다는 듯 임시 대사제의 위에 올랐다. 어둠의 사제들에게는 모든 것이 힘 으로 결정되는데 현재 가장 d강한 힘을 갖고 있는 것이 아트라 사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빛의 사제들 측에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다가 바론이 강력하게 딜리언 사제를 추천하 자 모두 딜리언 사제를 임시 대사제 위에 올리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었다. 그때였 다. 벌컥! 갑자기 회의장의 문이 활짝 열리며 뜻밖의 두 인물이 성기사들과 하연 일행들을 대동한채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헉! 대사제님?!" "대사제님!" 회의 석상에 있던 모든 사제들이 놀라서 외쳤고 딜리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창백한 얼 굴이 되어버렸다. 어째서 저들이 여기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인지 그러서는 도저히 알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 방긋 웃는 하연의 일행들 속에 있는 마법사 카리스의 모습에 딜리언은 어제의 화제 사건과 이 모든 것이 그들의 짓이라는 것을 깨닫고 곧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 었다. 그들을 속일수는 있을지 몰라도 마신 소환사에게 어찌 그가 신성력으로 대항할 수 있 겠는가. 엘 노아는 무섭게 노여운 표정으로 그런 딜리언을 쏘아보고는 자신의 뒤를 따르던 성기사들 에게 명했다. "저자의 신성력을 봉하고 끌어내어 하나브로 압송하라!" "네!" 손목에 신성력을 봉하는 팔찌가 채워진 채 성기사들에게 끌려 나가는 딜리언을 보고 있던 하연은 문뜩 물었다. "참, 상인 길드의 글렌은 지금 어디 있지요?" 딜리언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힐끔 하연의 얼굴을 보며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하나브에 있소." 엘 노아와 바스카의 출현, 그리고 새로운 성자인 하연의 주재로 빛과 어둠의 전쟁은 단시일 에 끝을 맺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은 끝났어도 그 뒤의 여러 가지 처리 문제가 남아 있 어 엘 노아와 바스카는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그 때문에 채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다시 성자의 보석으로 돌아온 하연 일행들은 앞으로 일정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다. 율리아는 용병단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었고, 미루엘은 은근히 얼음의 마왕 데바의 방패인 카르마시아를 훔치러 갔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었으며 웨이는 아르센 사령관 에게 돌아가 그를 도와주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이었다. 그렇게 의견이 분분할 때 하연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나브라,...." 그곳에 글렌이 있다면 그에게 네이브의 소식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제이브의 어 린 동생 차크를 위해서라도. 때문에 직접 하나브로 가려던 하연은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즐 거이 의논하고 있는 일행들을 보고는 어쩌면 이 기회에 일행들 몇을 떨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하려는 일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으니까. 그래서 하연은 사담을 제외한 용병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먼저 하나브로 가주지 않겠어요? 아무래도 상인 길드의 글렌에게 네이브의 죽음에 대해 알리는 것이 이번 전쟁을 확실히 끝맺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그럼 하연은요?" 하연의 말을 이해는 하지만 용병들은 왜 함께 갈 수 없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었다. 그러자 하연은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설명했다. "실은 내가 이번 바람의 달이 되기 전까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카이람과 한 약속이거든." 그 말에 용병들은 물론이고 사담, 미루엘, 카리스 로베인 까지 그 약속이 어떤 약속인지 궁 금해했지만 하연은 그저 희미하게 웃으면서 대답을 회피했다. 이에 율리아가 나직이 한숨을 쉬면서 하연에게 말했다.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리고 용병단을 만드는 문제에 대해서 꼭 생각해 보기다." "알았어, 율리아. 그런데 그 용병단의 대장은 당연히 나겠지?' 자기 아니면 그 누가 대장이 되겠느냐는 듯한 하연의 표정에 모두들 기가 막혀서 벙찐 표정 이다가 다음 율리아의 말에 그들은 모두 크게 웃고 말았다. "뭐? 용병단을 만들자고 한 건 나니까 당연히 내가 대장이 되는 것아니었어?" 율리아도 하연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용병들이 하나브로 떠나고 난 뒤 하연은 지팡이인 갈루마, 로베인 사담, 카리스, 미루엘만이 남자 잠시 회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혼 대륙에 왔을 때 일행이었던 이들만이 지금 자신의 곁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 기 때문이다. 가장 자신이 상처 주고 싶지 않은 이들만이. 그런 하연을 보며 로베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생각해, 하연?" 하연은 로베인이 걱정하지 않도록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다섯이 모두 만났을 때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어. 우리 그때 악수했었잖아. 생각나?" "응, 생각나." 사담, 카리스, 미루엘도 생각이 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뒤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지, 서로 헤어지기도 하고 다시 만나기도 하면서." 중얼거리듯 말하는 하연의 말에 모두들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그들을 보던 하 연은 머뭇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우리 다시 한 번 악수 할까?' 이에 로베인은 얼른 하연의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앞으로도 서로 힘든 일들을 함께하자는 의미에서지?" 그러나 하연은 대답없이 미소만 짓고는 카리스, 사담, 미루엘, 그리고 마음속으로 악수를 할 수 없어 투덜거리는 갈루마와 악수를 나누며 생각했다. 악수의 또다른 의미를. "안녕, 나의 소중한 이들이여!" 제35장 부활한 대륙 "은빛 드래곤으로 화한 카리스를 타고 다시 하라마르트 산으로 돌아온 하연 일행은 트리엔 시라 왕궁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트리엔시라 왕궁의 분위기는 그들이 떠나기 전과는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황제는 실종되어 돌아오지 않고 마법사 비욤마져 사라져 버리자 수므카가 왕궁을 장악하고 는 자신이 황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모습에 하연 일행들은 기가 막혀 수므카를 바라보았고 떡 벌어지게 차려놓고 여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식사하고 있던 수므카는 하연 일행들의 모습에 기겁을 해서는 먹던 고기마저 떨어뜨리며 당황해했다. "어, 어떻게...." 그는 애꾸눈 마법사 비욤이 죽었을 때 이미 황제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하연 일행들이 돌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하고는 왕궁을 장악해 황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연 일행들이 돌아오다니.... 하연은 쟈스란이 돌아오지 않으면 얼마 후에 누군가가 황제가 되어 트리엔시라 왕국을 다스 리게 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인물이 수므카는 절대로 아니었다. 때문에 황당한 표정으로 하연은 수므카의 머리에 쓰여진 왕관을 기리키며 일행들에게 물었다. "저게 어울린다고 생각해?" "아니." "아니요." 당연하게도 로베인과 미루엘이 대답했고 하연도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야말로 오크 머리에 왕관을 씌운 거지." "이,이....!" 그 말에 수므카의 안색은 순식간에 시뻘게져서 분노했다. 자신을 한낱 오크에 비교하다니.... 이제 그의 머리에 이성은 남아 있지 않았다. 자신을 우롱한 저 계집을 죽이겠다는 생각뿐이 었다. 이에 수므카는 단검을 빼어 들어 하연을 향해 던졌다. 쌔앵! 하지만 그 단검은 미쳐 하연에게 닿지도 못한 채 바닥에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사담이 검 으로 단검을 미리 쳐내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연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카리스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저자가 여기에 있다가는 이 왕궁 사람들이 너무 고생할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혹시 그곳의 좌표 알아?" "어디?" 호기심에 가득항 얼굴로 카리스가 묻자 하연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왜, 전에 수므카가 종사하던 곳 나바린 왕국 말이야." "아하 , 당연히 알지. 맡겨만 둬." 순간 수므카의 얼굴은 흑색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나바린이라면 그가 배신을 하고 떠나 온 곳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곳으로 보내 버리겠다니... "아, 안돼!!" 수므카의 비명소리가 트리엔시라 왕궁 안을 가득 울리는 가운데 다음 순간 그의 모습은 흔 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연은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도 정말 좋은 일을 한 것 같아." 그런 하연의 모습에 미루엘은 세상이 속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저런 여인을 성자라고 생각해 받들 수가 있는 것인지. 다음날 아침 일찍 흠뻑 땀에 젖은 채 꿈에서 깨어난 미루엘은 황급히 하연의 방으로 달려갔 다. 왠지 꿈이 너무 불길했던 것이다. 방문을 연 미루엘은 이것저것 가방을 챙기고 있는 하연의 모습에 일순 놀라지 않을 수 없었 다. 어제저녁 하연으로부터 어디에 간다는 말은 듣지 못했었으니까. "뭐 하는 겁니까, 하연?' 미루엘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일까? 하연은 미루엘의 목소리에 깜짝놀라서 돌 아보았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수습한 하연은 웃으며 말했다. "아, 미루엘, 좋은 아침이지? 잘 잤어?" 하지만 미루엘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은 채 물었다. "그 짐은 다 뭡니까? 어디 가십니까?' 하연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응, 잠깐 갔다 올 곳이 있어서." "혼자서 말입니까?' "그래. 그러니까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미루엘." 장난하듯 말하는 하연의 말에 왠지 맥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미루엘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딘데요?" "산꼭대기." 순간 미루엘은 자신의 피가 싸늘히 식어가는 느낌이었다. 불안했던 어젯밤의 꿈과 아직도 생생히 떠오르는 예언자 할머니의 말 때문이었다. 하연을 산 정상에 오르게 하면 그녀는 물 론이고 사랑하는 사람마저 잃게 될거라는 그 말이. 때문에 어떻게든 말려야 한다는 생각에 미루엘은 하연에게 말했다. "그래요? 그런데 하연, 가기 전에 저와 잠깐 대화를 나누지 않겠습니까?" 혹시 자신을 말리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너무나 심각해 보이는 미루 엘의 표정에 하연은 차마 싫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런데 나 별로 시간이 없어." 그러자 미루엘은 무척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럼 우리 천천히 산을 오르면서 대화를 나눌까요?' 그 말에 하연이 눈에 띄게 싫은 표정을 지었고 이에 미루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러면 그냥 이 왕궁 주위나 돌면서 말하도록 하지요." "그게 좋겠다." 재빨리 대답한 하연은 행여 미루엘의 생각이 변할세라 급히 가방을 챙겨 들며 방문을 나섰 다. 그런 하연을 보던 미루엘은 늘 하연이 손에 들고 다니던 지팡이가 보이지 않자 물었다. "지팡이는요?" "아? 지팡이?" 하연은 약간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얼버무렸다. "병도 다 나았는데 무슨 지팡이." 그 말에 미루엘은 그냥 그렇구나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미루엘의 말에 침대 가에 놓여 있는 갈루마를 바라보는 하연의 표정은 착잡하기만 했다. 오랜만에 밤새도록 갈루마와 많은 얘기 를 나누었지만 결국 작별 인사는 하지 못했던 것이다. '부디 좋은 주인 만나, 갈루마. 나와는 다르게 너와 오래도록 함께 있어줄 수 있는' 왕궁을 나온 하연은 잠시 주의를 좀 걷자는 미루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물의 달이라서인지 아침인데도 날씨가 더웠기 때문에 하연은 조금만 걸어도 금방 지치는 것 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미루엘의 입에서 한마디 말이 없자 약간 짜증이 난 하연이 말했다. "도대체 무슨 말이데 그렇게 머뭇거려? 빨리 해, 미루엘." "....여자끼리의 대화입니다." 그말에 하연은 대충 미루엘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사담에 관한 얘기이리 라. 자신의 일에는 둔한 하연이지만 다른 사람의 일에는 눈치가 빠른 그녀였기에 이미 미루 엘이 사담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쯤은 눈치 채고 있었다. 때문에 하연은 그 후 얼마 동안은 미루엘이 아무 말을 안해도 기다려 줄 수가 있었지만 그 래도 답답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간혹 뒤를 돌아보던 미루엘은 하연의 지친듯한 표정에 미안한 듯 바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에 잠깐 앉을까요?" "그래." 곧장 대답한 하연은 미루엘보다 먼저 바위에 올라가 다리를 뻗었다. 그러면서 이 정도 걷는 데에도 힘든데 산 정상까진 어느 세월에 올라가나 하는 생각에 앞이 캄캄할 뿐이었다. 그런 하연에게 미루엘이 나무로 깎아 만든 물통을 내밀었다. "자, 마십시오." "어?" 하연은 약간 놀랍다는 표정으로 미루엘을 보다가 물을 마시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출발할 때 잠깐 가져올 것이 있다고 하더니 이 물통이었어?" "네, 물의 달이라 더울 것 같아서요." 하연은 물을 마시며 시원하기보다는 약간 씁쓸하다고 생각했지만 미루엘의 성의를 생각 그냥 마셨다. 반쯤 마시고 물통을 돌려주자 미루엘은 그 병을 말했다. "미안합니다. 하연." "응? 뭐가?" 어리둥절해하는 하연에게 미루엘이 말했다. "여러 가지로 말입니다. 저, 실은 하연이 죽었은 때 슬프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안도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이제 사담이 하연이 아닌 저를 보아줄 것 같았으니까요." 하연은 그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여자들은 우정보다는 사랑이라니까." "하지만 사담은 저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한번도." 그렇게 말하는 미루엘의 표정이 너무 가슴 아파 보역서 하연은 저도 모르게 사담을 원망하 는 마음이 생길 정도였다. "그렇지만 전 사담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연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저를 좀 도와달라고요." 그 순간 하연은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오려는 하품을 억지로 참으며 미루엘에게 말했다. "좋아 . 그런데 어떻게 도와주면 돼?" "그건...." 하지만 채 미루엘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하연은 스르륵 스러지듯 미루엘의 어깨에 기댄 채 쓰러져 버리고 말았고 미루엘은 그런 하연을 안아 들며 말했다. "...깨어나면 그때 말해 줄께요. 미안합니다.하연." 그 물병 속에 수면 약을 타놓아서 하연은 잠이 들었던 것이다. 하연을 들쳐 업은 미루엘은 그 길로 천천히 하라마르트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조금이라 도 산의 정상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 조금 있으면 하연과 자신이 없어진 사실을 알고 카리스, 사담, 로베인이 찾으러 나설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이런 미루엘의 행동은 어리석은 행동일 수도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번다면 그것으로 좋다고 미루엘은 생각했다. 사담과의 사랑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이제는 하 연을 위해서... 험악한 산이라 한 사람을 업고 내려가기에 너무도 힘든 길이었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된 채 얼마나 내려갔던 것일까? 미루엘의 눈이 흐려진 것인지 흙으로 지은 듯한 그림같은 집한 채 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런 곳에 집이라니...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너무 힘이 든 미루엘은 그 집으로 다가갔다. 문은 살짝 열려져 있었 다. 하지만 함부로 들어갈 수 없어서 우선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누구 안 계십니까?'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에 미루엘은 살짝 문을 열고 안 으로 들어갔다. 조심스럽게 침대 두 개와 작은 탁자가 있었는데 그 탁자 위에는 신선한 과일이 바구니 가득 들어있었다. 조심스럽게 침대 하나에 하연을 뉘인 미루엘은 목이 칼칼한 느낌에 과일 하나를 먹었다. 달 고 시원한 맛이 났다. 그리고 잠깐 쉬어야겠다는 생각에 나머지 침대에 몸을 뉘인 미루엘은 너무나 편안한 느낌에 그만 들어버리고 말았다. 날이 저물고 밤이 되었으나 하연과 미루엘은 깨어나지 않았고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야 하연이 먼저 눈을 떴다. 눈을 뜬 하연은 자신이 이상한 곳에 와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곧 맞은 편 침 대에 누워 있는 미루엘을 보고는 약간 안심하면서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미루엘~! 일어나, 미루엘!" 하지만 미루엘은 좀처럼 깨어나지 않았고 이에 하연은 덜컥 겁이 났다. 혹시 미루엘이 잘못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살며시 미루에의 코에 귀를 대어본 하연은 고르게 들리는 숨소리에 잠이 들었을 뿐 이라는 것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 하연은 작은 탁자 밑에 놓여진 자신의 가방을 찾을 수 있었다. 가방을 챙긴 하연은 잠든 미루엘을 잠시 바라보다가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막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눈앞에서 문이 사라져 버리고 대신 벽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놀라서 벽을 더듬어본 하연은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어 당황해하다가 카이 람의 이름을 불렀다. "카이람!" 하지만 카이람은 나타나지 않았고 행여 또다시 카이라에게 전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은 아 닌가 하여 하연은 애가 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것은 아닌 듯 집 밖에서 카 이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거이 아닌가? [하연! 어디 있어? 그 안에 있는 것 맞지?] "카이람, 나 여기 있어! 좀 꺼내줘!" 반가움과 안도감에 하연이 소리쳤다. [빌어먹을 ! 알았다. 하연! 잠시만 기다려!] 하연이 부르는 소리에 곧장 소환되어 가던 카이람은 갑자기 몸이 튕겨져 나가는 바람에 하 연에게 이르지 못하고 그녀가 부른 곳에서 가까운 곳에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산중 에 세워져 있는 흙 집과 그 흙 집에서 느껴지는 강한 신성력에 이 모든 것이 땅의 신인 부 탄의 수작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부탄, 어서 나와라!] 공간을 뒤흔들 듯 엄청난 소리로 으르렁거리며 부르는 카이람의 목소리에 서서이땅이 움직 이더니 그 땅이 사람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투박한 흙으로 빚은 듯한 인간의 모습이 된 땅의 신 부탄은 카이람을 보고는 정중하게 말했다, [부르셨습니까, 카이람님.] [불렀으니까나온 것이 아닌가,부탄?] 이죽거리는 카이람의 말에도 부탄은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공손히 말할 뿐이었다.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카이람님.] [내 소환자인 하연을 내놓아라,] 부탄은 그 말에 단 한 마디만 했을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그 말에서 절대 하연을 내어줄 수 없다는 부탄의 강경한 뜻을 읽은 카이람의 안색은 절로 찌푸려 들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 말을 거역하겠다는 것인가?] 언제나 공손한 태도로 자신의 억지를 모두 받아주던 부탄이었기에 카이람의 불쾌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카이람님의 말을 거역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두 주신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고개를 푹 수이고 정중히 말하는 부탄의 모습에 더 약이 오른 카이람은 이를 갈며 힘을 일 으키려다가 흙 집의 안에 있을 하연을 떠올리고는 억지로 화를 참으며 다시 한 번 부탁하듯 말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에게는 두 주신보다도 내 소환자인 하연이 더 소중하다. 그러니 곱게 그녀를 내놓아라!] 하지만 부탄의 흙으로 빚어진 얼굴에는 그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있는 듯 없는 듯 그 저 그렇게 카이람의 얼굴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것은 땅의 신인 부탄이 태어난 이래 한 번도 변하지 않은 표정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 만 지금만큼은 그 표정을 카이람은 참아낼수가 없었다. [어째서냐? 두 주신의 뜻은 잘 알고 있다. 이 혼 대륙이 순리에 따라 멸망하기를 바라신다 는 것을 . 하지만 너는 어떠냐? 너 또한 바라느냐? 너의 일부가 사라지는 그 고통을?] 격렬한 카이람의 외침에 부탄은 뜻밖에 입을 열어 말했다. [하지만 또다시 만들어집니다.] 카이람은 비웃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지. 또 생기기야 하지. 그렇지만 그것은 더 이상 네 자신이라고 할수 없지. 너의 일부 가 d사라지고 또생겨나고. 계속 변화하는 가운데 네 자신이라고 온전하게 말할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지게 되니 그게 문제지.] 다른 신들이었다면 분명 화를 내도 크게 냈을 텐데 부탄은 담담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오히 려 카이람이 허탈해질 지경으로. [모든 것은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랬었지. 넌 그런 녀석이었는데 잊고 있었다. 괜히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했어.] 그러면서 카이람은 그의 주위에 붉은 어둠을 일으켰다. 츠츠츠츠! 검붉은 기운이 점점 부탄을 향해 압박해 가지 부탄은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그의 앞에 흙 으로 만든 방어막을 세웠다. 하지만 카이람은 그런 벙어막 따윈 신경 쓰지 않는 듯 그대로 방어막을 자신의 기운으로 밀어내었고 그에 따라 흙으로 빚은 사람의 형상을 한 부탄의 몸 은, 서서히 밀려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마신 카이람과 땅의 신 부탄의 힘이 차이가 확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러더니 다음 순간 부탄의 몸이 검붉은 기운에 휩싸이더니 화르륵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딱딱하게 굳어진 부탄의 몸을 카이람은 핏빛 날개를 펼쳐 날아올라서는 지그시 밟아주었다. 푸푸푸푹! 그러자 마치 불기운 속으로 땅의 기운이 모두 빨려 들어가듯 부탄의 몸은 사라져 버렸고 그 와 동시에 하연과 미루엘의 가두어두었던 흙 집 또한 한 순간에 무너지듯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집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일까? 놀라서 멍하게 있는 하연에게 다가간 카이람은 이죽거리듯 말했다. [잘한다.! 곧 죽을 여자가 이 정도에 놀라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연은 카이람을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응, 난 감정이 넘칠 만큼 풍부해서 말이야!" [그저 말은 잘하지.] 놀리는 카이람에게 웃어 보인 하연은 그때 마침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일어나려 하고 있는 미루엘에게 다가가 재빨리 그녀의 몸을 부축해 주며 물었다. "괜찮아, 미루엘?" "아, 네. 괜찮습니다. 하연.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지요?' 미루엘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모습에 하연은 속으로 오히려 그말은 자신이 묻고 싶 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왜 자신이 이런 흙집에 갇혀 있게 되었는지, 잠이 들었는지에 대해 서. 하지만 하연은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모르겠다는 표시를 했다. 그런 하연의 모습과 그녀의 등 뒤에 서 있는 카이람을 잠시 보던 미루엘은 하연이 가방을 챙기며 금방이라도 떠날 듯 보이자 다급히 하연을 붙잡으며 말했다. "잠깐 하연. 사담과의 사랑이 이루어지도록 날 도와준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산 정상에는 올라가지 말아주십시오,"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지?" 하연은 물론이고 카이람마저도 정색을 한 채 미루엘을 주시하자 미루엘은 나직이 한숨을 쉬 면서 그녀가 만났던 예언자 노파의 이야기를 말해 주었다. "물론 확실히 그녀의 예언을 믿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연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하 니까." 민망한 듯 말하는 미루엘을 보며 카이람은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엘레나로군. 그런 수작까지 부리다니 참으로 바빴겠어.] 미루엘은 카이람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하연은 금방 알아듣고는 말했다. "그 노파가 엘레나 여신이었단 말이야?'... 그러고 보니 나도 예언을 해주던 할머니를 만난 적이 있었어." [뭐라고 그러든?] 궁금한 듯 카이람이 물었다. 하연은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말했다. "포기하지 않으면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될 거라고." 그 말에 카이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슬픈 눈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그런 카이람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린 하연이 말했다. "나 좀 데려다 줄래, 카이람. 그곳으로." [...그래, 그것이 네가 바라는 일이라면.] "응, 내가 바라는 일이야." 그말에 카이람은 하연에게 손을 내밀었고 하연이 그손을 잡고 눈앞에서 사라질 듯이 보이자 그때까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듣고만 있던 미루엘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안 됩니다. 하연 듣지 못했습니까. 엘레나 여신의 예언이었다고 하지 않습니까?가서는 안 됩니다. 목숨이 위험하다고요." 하지만 하연은 미루엘의 말에도 불구하고 카이람의 손을 잡은 채 천천히 미루엘을 돌아보더 니 방긋 웃으며 말했다. "걱정마 , 죽으러 가는 거니까. 안녕, 미루엘." 하연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미루엘은 머리 속이 텅 빈 듯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그녀의 머리로는 하연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죽으러 가다니,,,, 갑자기 왜? 때문에 그녀가 넋 놓고 앉아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그녀의 눈앞에 카리스, 사담, 로베인이 나타나더니 미루엘을 보고는 화급히 달려들며 물었다. "도대체 며칠 동안 어디에 있었던 거야? 하연은 ?" "하연은?" 불안한 표정으로 묻는 로베인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며 미루엘이 중얼거렸다. "갔어요." "어디를?" "산꼭대기." 그 말에 손에 쥔 갈루마를 부서질 듯 세게 내려치며 카리스가 소리쳤다. "그건 들었다. 때문에 산 정상에는 이미 올라갔었고. 하지만 하연은 없었어." 로베인이 이어 말했다. "그러다 카리스가 이곳에서 강력한 힘이 느껴진다고 해서 급히 이곳으로 텔레포트해 온 거 란 말이야." 하지만 미루엘은 그들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멍한 표정이었고 이에 사담이 미루엘의 뺨을 찰싹 때리며 말했다. 짝! "정신 차려!" 갑자기 뺨에 느껴지는 아픔에 놀란 듯 잠시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던 미루엘은 곧 정신을 차 린 듯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어서 산꼭대기로 가야 해요! 빨리요!" "무슨 일인데?" 걱정스러운 일행들의 얼굴을 보며 미루엘이 말했다. "하연이 죽으러 간다고 했습니다." "뭐?" "....설마!" "장난이겠지." 사담, 로베인, 카리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전혀 웃을 수가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심장을 세차게 내려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즉시 허겁지겁 산 정산으로 텔레포트한 그들은 하연이 느긋하게 카이람과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광경을 보자 일제히 고개를 돌려 미루엘을 쏘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그 들의 시선은 말하고 있었다. 저게 어디 죽으려는 여자의 분위기냐고. 하지만 미루엘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분명 그때의 하연의 눈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게다가 엘레나 여신의 예언까지 있었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이 광경이라니.... 역시 날 놀린 것이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한 미루엘은 허탈하기도 하고 안도감도 들어서 어색하게 일해들에게 웃어 보이 고 말았다. "하연!" 하라마르트 산의 정상 분화구가 보이는 용암 지대 위에서 마치 피크닉을 나온 사람처럼 카 이람과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하연은 자신을 부르며 달려오는 일행들의 모습에 난처한 표 정을 지었다. 미루엘에게 죽으러 가는 거라고 말한 이상 그들이 곧 올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막상 오고 나 니 차라리 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마지막 인사를 하다가 눈 물이라도 난다면, 그래서 로베인이 말리기라도 한다면 죽을 수 없을 것만 같았으니까. 로베인은 왠지 자신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카이람의 눈치를 보며 하연에게 물었다. "우리한테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서는 이곳에 온 이유가 뭐야, 하연? 피크닉 오려던 거면 같이 왔으면 좋았잖아." 갈루마로부터 하연이 떠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이 얼마나 놀라고 그녀에 대한 걱정으로 피가 마르는 듯했던가>? 하지만 막상 그녀를 만나자 로베인은 하연에 대한 화가 눈녹듯이 녹으며 투정을 s부리는 듯한 말밖에는 할 수가 없는 자신을 느낄 수가 있었다. 투정 부리는 로베인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사담과 카리스를 보면서 하연은 떨리 는 손을 감추기 위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네. 그럴 걸 그랬지?" 사실 하연이 카이람과 차를 마시고 있었던 것은 다른 일행들이 생각하듯 피크닉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떨리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약간 목이 잠긴 듯한 하연의 목소리에 그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듯 사담이 물었 다. "왜 이곳에 온거지?" "응? 그거야 하라마르트 산이 이 혼 대륙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며? 그래서 올라와 보고 싶 었던 것 뿐이야." 너무나 태평한 그 말에 그녀의 동료들은 허탈한 표정을 짖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긴 그녀는 위험하다는 말에 하룬 산에도 올라갔었지 않은가? 그러나 하연의 생각을 뻔히 알고 있는 카이람은 곧 알게 될 일을 몇시간이라도 뒤로 미루어 보겠다고 변명하는 그녀에게 화가 나서 외쳤다. [말해! 어차피 알게 될 일이잖아?! 네 목숨을 걸어서라도 구하고 싶은 소중한 동료라며! 그 러니 저들에게도 알 권리가 있다.!] 그 말에 로베인과 일행들은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하연을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지요? 분명히 말해 주십시오." 난처해진 하연은 카이람을 쏘아보며 뭐라고 해명해 주기를 바라는 눈빛을 던졌으나 카이람 은 모르는 척하고 고개를 돌려 버리는 것이아닌가? 이에 하연은 웃음으로 상황을 때우려는 듯 방긋 웃으며 말했다. "별일 아니야. 내가 혼자서 여행을 좀 해보겠다니 저러네?" "뭐라고요?' "뭐?" 하연의 말에 카리스 로베인,. 사담, 미루엘은 합창을 하듯 고함을 질렀다. 혼자서 여행이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데 여자 혼자서 , 하지만 그들 의 놀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카이람의 말 때문이었다. [하긴 죽음이란 누가 대신해 줄 수도 없는 일이니 혼자 하는 여행이 맞긴 맞지.] 하연의 일행들은 충격으로 멍한 표정이었다. 죽음이라니... 그렇다면 미루엘에게 했던 말이 장난이 아니었단 말인가? 로베인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하연에게 따지듯 물었다. "도대체 지금 카이람님이 하신 말이 무슨 말이야, 하연? 더 이상 감추려 들지 말고 솔직하 게 말해봐!" 그 어떤 말로 속이려 들어도 소용없다는 듯 노려보는 일행들의 모습에 하연은 한숨을 쉬면 서 모든 것을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곧 있을 혼 대륙의 멸망과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 한 방법에 대해서. 카리스를 제외한 로베인, 사담, 미루엘은 곧 혼 대륙이 멸망하게 되었다는 말에 모두 넋을 잃은 듯한 표정이다가 이 혼 대륙을 구하기 위해서 하연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말에는 카리 스조차도 기절할 듯한 표정으로 변해 버렸다. "말도 안돼!" 새하얗게 얼굴이 질린 로베인의 비명같은 말을 시작으로 카리스와 사담, 미루엘도 말했다. "그런 허무맹랑한 말이 어디 있어?" "허락할 수 없다." "우리가 살기 위해 하연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카리스는 매섭게 카이람을 쏘아보며 물었다. "하연에게 자신의 죽음으로 혼 대륙을 구할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심어준 것이 카 이람님입니까? 빨리 하연에게 사실대로 말해 주십시오. 혼 대륙을 구할 수 있는 방법 따윈 애초에 없다는 것을요. 겨우 인간의 정신력으로 지화의 불길을 살릴 수가 있다니 말이나되 는 겁니까?" 그 말에 로베인과 사담, 리루엘도 카이람을 무섭게 쏘아보지 않을수 없었다. 그들이 생각하 기에도 하연의 죽음으로 혼 대륙을 구할 수 있는 말은 너무도 터무니없게 들렸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카이람은 무표정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럼 인간 주제에 마신을 소환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것은 터무니없는 일 이 아니란 말인가?] "하지만...!" 반발하려던 카리스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카이람의 말대로 였으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사담이 살기가 가득한 얼굴로 카이람을 노려보며 말했다. "설령 하연의 죽음으로 혼 대륙을 구할 수 있다 해도 상관없는 일입니다. 하연은 우리가 지 킵니다. 절대 내줄 수 없습니다." 마치 그가 하연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기라도 하듯 말하는 사담의 말에 카이람은 어이가 없 어서 말했다. [이것봐, 인간. 분명히 말하건대 난 하연에게 죽으러도 말한 적 없다. 오히려 너희 따위를 위해 하연이 죽으려는 게 이해가 안 될 지경이라고.] 빈정거리는 카이람의 말을 들은 사담은 놀라서 하연을 쳐다보았다. 그것이 하연의 선택이었다니.... 누구보다도 삶을 사랑하고 살기 위해 애를 쓰던 하연이 아니 었던가? "정말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사담의 말에 하연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응, 내가 한 선택이야." 순간 격하게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며 사담은 확실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선택을 바꿔! 네가 죽고 우리가 산다고 해서 우리가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너의 죽음으로 살아남았다는 생각에 우리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카리스와 미루엘도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사담의 말에 동의하듯 말했다. "그래. 하연. 마지막까지 너와 함께 하고 싶어. 그것이 나의 행복이야." "동료지않습니까, 하연? 그렇다면 죽음도 함께 해야지요," 하연은 그들의 말에 사슴이 벅차도록 기쁘면서도 피식 웃으며 빈정거렸다. "혼 대륙의 다른 존재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아니잖아! 그들의 죽음까지 너희들 멋대로 결 정하지는 마." "하연! 그들은 혼 대륙이 멸망 할거라는 사실 조차 몰라. 네 덕분에 살아도 너에게 감사할 사람 아무도 없다고. 그런데 왜 그들을 구하려는 거야?" 답답하다는 듯 외치는 카리스의 말에 카이람이 말했다.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정정해라. 혼 대륙의 사람들이 아니라 너희들을 구하려는 거다. 그런 데 로베인이라 했던가? 넌 왜 아무 말이 없는 것이지?] 아까 전부터 조용한 로베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불쾌한 표정으로 카이람이 물었다. 하연 이 정작 구하려는 장본인은 바로 로베인이아니었던가? 그런데 그런 그는 한마디 말리는 말 이 없다니.... 그러자 하연도 서운하면서 의아한 듯 로베인을 바라보았다. 누구보다도 가장 날뛰며 하연을 말리리라고 생각했던 로베인이 아니었던가>? 그런 하연의 의문을 알아챈 듯 로베인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난 상관없어, 이미 결정했으니까. 하연이 어떤 선택을 하든 언제나 하연의 곁에 있기로... 그러니까 하연이 죽으면 나도 죽어. 그뿐이야." 설마 로베인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하연을 비롯한 일행들은 멍하니 조용히 웃고 있는 로베인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하연은 문뜩 떠오르는 생각에 로베인에게 물었다. "로베인, 나 사랑해?" "응, 사랑해!" 너무도 쉽게 나온 그 말에 하연은 한동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로베인을 바라보았다. 하지 만 그것은 사랑한다는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앞에서 일어난 이 기적같은 사 실이 믿어지지않아서였다. 그러나 이윽고 로베인의 사랑한다는 말은 하연의 가슴을 따뜻하 게 적셔가기 시작했고 충만한 기쁨으로 전신을 가득 채워 주었다. 하연은 어쩌면 신은 공평한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죽음을 내리는 대신 사랑을 얻게 해주었으니까.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하연은 일행들을 쭈욱 둘러보며 물었다. "아프기 전 내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알아?" 하연의 소원? 그 말에 로베인들의 머리속에는 갖가지 상상이 스쳐 지나갔다. 평소에 황당한 짓을 많이 하 던 하연이었으니 소원도 황당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하연이 말하는 것이었다. "아프기 전 내 소원은 말이야,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거였어." 순간 모두들 놀라서 하연을 쳐다보았다. 하연의 소원이란 것이 그런 것이었다니.... 부러울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그녀가 아니었던가? 그러자 하연은 쑥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예전의 나는 지금과 같지 않았었거든. 내성적이고 말도 없는 그저 그런 평범한 소녀였었어. 때문에 누구도 날 보아주지 않고 사랑해 주지 않는 것 같아서 외로웠었어. 가족이 있었는데 도 불구하고 말이야. 그렇게 보면 네 외로움은 평범한 것이었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 는.... 그래도 외로워서 나, 사랑받기 위해 무척 노력했었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슬픈 일ㄹ이 있어도 언제나 웃어 보였으며 갖고 싶은 것이 있어도 다른 사람에데 양보했고 정말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지. 본래의 나는 누구도 사랑해 줄 것 같지 않아서 성격도 좋은 쪽으로 바꾸 려고 노력했고... 외로운 것은 싫었으니까."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또한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줄 알았던 하연의 말이었기에 로베인 들의 놀라움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휘둥그레진 일행들의 눈을 보며 하연은 계속 말했다. "노력하니까 되더라고. 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았었거든. 하지만 외로운 것은 변하지 않았었어. 그래서 알게 k되었지.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고 외롭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정말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나만 의 행복을 꿈꾸게 되었는데 그때 내게 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야. 얼마 살지 못할 거 라는 걸. 그래서 사랑받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싫어졌어. 남겨질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싶 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사랑을 하게 되어버린 거야." 그 말에 이르자 모두들 로베인을 쳐다보았으나 로베인에게는 그것을 알아챌 만한 신경이 남 아 있지 않았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도대체 하연이 d사랑하게 된 사람이 누굴까를 떠올리고 있었으니까. 그러다 죽은 쟈스란의 얼굴이 떠오르자 얼굴이 창백해진 로베인은 으스러질 듯 두 주먹을 꽉 쥐고는 물었다. "쟈스란이야? 그 때문에 그가 죽어서 너도 더 이상 살 의미가 없다고 우리에게 말하려는 거 야? 그렇게 잔인한 거야, 하연? 널 사랑해 날 사랑해 달라고 말하는 게 아니야. 그저 너와 함께 할 수만 있다면 죽음도 행복하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거야. 그런데 그것도 안 돼? 그것도 싫은 거야?" 피를 토하듯 부르짖는 로베인의 말에 하연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굳이 로베 인의 그녀가 쟈스란을 사랑한다는 오해를 풀지않은 채. "들어봐, 로베인. 그를 사랑하고부터는 전혀 외롭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일 거야. 외로울 때도 있었어. 하지만 사랑을 하지 않을 때보다는 그 외로움이 확실히 덜해서 내가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게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지. 그렇지만 난 그 의 사랑을 바랄 수도 사랑한다는 말조차 할 수가 없었어. 난 결국엔 그를 혼자 남겨두게 될 테니까." "사랑한다는 말을 안 했어?" 로베인은 그녀를 위해 힘겹게 자신의 심장을 꺼내 들던 비장한 모습의 쟈스란을 떠올리며 물었고 그에 하연은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응, 못했어. 죽을 때까지 못할 거야. 언젠가 로베인이 말했지? 진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녀가 걸었던 땅이라는 이유만으로, 바라본 하늘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셔본 공기라는 이유 만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될 거라고. 나도 그런 의미로 이 혼 대륙을 사랑하고 지키고 싶어. 그리고 그 속에는 로베인, 너도 포함되어 있는 거야. 너를 지키고 싶어. 이런 내 마음 이해하지 못하겠어?" 속삭이듯 말하는 하연의 눈과 목소리에는 로베인을 향한 애정이 가득 들어 있었다. 어째서 그 훤히 보이는 감정을 로베인이 눈치채지 못하는지 기가 막힐 정도로, 때문에 그런 하연을 보는 카리스와 사담, 카이람의 마음은 새삼 치졸한 질투로 불타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가운데 그들의 시야에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로베인의 모습이 보였다. "응, 이해하지 못하겠어. 난 하연이 지켜주어야 할 존재가 아니야. 모르겠어? 하연이 지켜주 길 바라지도 않아. 너의 곁에 서서 너의 기쁨도 슬픔도 두려움도 모두 함께하고 싶은 거야, 죽음까지도. 그것이 내 행복이고 난 그렇게 할 거야, 하연이 원하지 않아도." 단호하게 들리는 로베인의 말에 카리스들은 이제 질투보다는 감탄이 섞인 시선으로 로베인 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저런 마음 때문에 하연이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 하면서. 하연은 마음속으로는 초조해서 어쩔 줄을 몰랐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웃음을 잃지 않 은 채 말했다. "고마워. 하지만 나와 함께 로베인이 죽는다면 내 마음이 편치 않아서 싫어. 이기적이라고 말해도 좋아. 난 원래 그런 인간이니까. 그러니 로베인, 살아줘. 그리고 가끔 날 기억해 주면 돼." "미안. 미안, 하연." 아무리 하연의 부탁이라 해도 그것만은 들어줄 수 없다는 듯 미안하다는 말을 계속 중얼거 리는 로베인이었다. 잠시 그런 로베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하연은 점점 어두워오는 하늘을 보며 이제 거의 때가 다가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자 두려움이 다시 하연의 온몸을 돌며 그녀의 손발을 떨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차라리 로베인의 말대로 그와 함께 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일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로베인 그를 지키려고 하는 일이 아니었던가? 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로베인 을 마주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엘레나 여신이 병을 고쳐 주었을 때 잠시 난 다시 행복을 꿈꿨었어... 사랑 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그러자 카이람이 재빨리 끼어들어 말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하연. 이 혼 대륙 따위는 모두 잊고 네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사랑도 하고...] "아니, 나에게 두 번의 사랑은 없어. 내 심장은 하나뿐이듯." 처연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듯 말한 하연은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으로 말했다. "하지만 혼 대륙이 멸망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죽는 거니까. 다신 누구도 사랑할 수 없 는 난 그가 죽으면 또 혼자 외롭게 살아야겠지? 그것만은 견딜 수가 없어. 외로움 속에서 그렇게 평생을 살아야 한다니 너무 가혹한 형벌이잖아? 그러느니 내가 죽어 그를 구하는 게 나아." 무의식 중에 사랑하는 사람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한 하연이었지만 장내의 누구도 그 것을 깨달은 이는 없었다. 그 정신만은 누구보다도 강해 보였던 하연의 뜻밖의 약한 모습 때문이었다. 하연은 간절하게 애원하듯 로베인에게 말했다. "하지만 나 정말 살고 싶었어, 로베인. 그러니까 너는 물론이고 이 대륙의 사람들을 그냥 죽 게 둘 수가 없는거야. 산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니까. 내가 못 본 미래, 로베인이 봐주지 않을래? 내 대신 너의 눈으로, 너의 코로, 너의 귀로... 내가 사랑했던 혼 대륙의 미 래를 봐 주지 않을래? 그런 다음 내게로 와도 되잖아! 날 사랑한다고 했으니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응?" 무릎이라도 끓을 듯이 부탁하는 하연의 모습에 로베인은 차마 다시 거절의 말을 할 수가 없 었다. 그래서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자 하연은 그에게 더 없이 환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돌아섰다. "하연!" "하연!" 카리스, 사담, 미루엘이 부르는 소리가 그녀의 등 뒤에서 들려왔지만 하연은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미안, 작별 인사는 안 할거야. 난 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혼 대륙과 하나가 되려는 거니까. 이 혼 대륙이 살아 숨 쉬는 동안 나도 살아서 숨 쉴 테니 우린 헤어지는 것이 아니 잖아?" 천천히 분화구로 가까이 다가가는 하연의 모습을 보며 그들은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멈 출 수가 없었다. "하연... 하, 하연!" 로베인의 비통한 외침이 쩌렁쩌렁 하라마르트 산에 울려 퍼졌다. [다시 생각해봐, 하연. 사랑 좋지, 하지만 사랑 따위 없어도 살아가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잖아. 원한다면 내가 너의 기억속에서 로베인을, 아니, 이 세계로 온 기억까지 싹 지워줄 게.] 어째서 지금에야 그런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는 듯 그녀를 따라붙으며 기쁘게 말 하는 카이람의 모습에 하연은 어이없게도 죽으러 가는 이 상황에서 웃음이 흘러나오는 것을 경험해야 했다. 갈수록 카이람이 사탕 달라고 조르는 어린아이 같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응? 그렇게 해줄게.] 하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싫어. 난 잊고 싶지 않아." 정말이었다. 이 혼 대륙에서의 한순간도 한 사람도 잊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설령 삶과 바 꾸는 일이 될지라도. [하연!] 버럭 고함을 지르는 카이람의 소리에 귀를 막으며 하연은 드디어 거대한 용암 분화구가 내 려보이는 곳에 섰다. 까마득해서 끝이 어딘지도 모를 분화구 속을 내려다보며 하연은 눈앞이 하얘지는 기분이었 다. 저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다니... 가냘픈 하연의 몸이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카이람은 다시 한번 말했다. [돌아가자, 하연. 부모님이 보고 싶지 않아?] 그 말에 하연은 부모님과 남동생의 얼굴을 머리 속에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 소 중한 이들. 하지만 그들이 빛 바랜 사진 같은 형상으로 그녀의 머리 속에 떠올랐다면 로베 인의 모습은 너무도 선명하게 그녀의 머리속에, 가슴에 자리 잡아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로베인을 이계로 오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새삼 카이람이 고 마워지는 하연이었다. "카이람,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생각나?" [생각난다.] 부모님이 보고 싶지 않냐는데 왜 갑자기 엉뚱한 소리냐는 듯 카이람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런 카이람의 말에 하연은 슬며시 떠오르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그때 내가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 [내가 너 같이 엉뚱한 인간의 생각을 어떻게 아냐?] 오 ㅐ그때 살려달라는 것이 아닌 모험을 하고 싶다는 황당한 소원을 말해서 지금과 같은 상 황을 만든 것인지 원망스런 마음이 들어 카이람은 쏘아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카이람에게 하연은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쓰면서 놀리듯 말했다. "아! 저렇게 거대한 짐승이 있다니 하고 생각했지." [뭐야? 감히 이 위대한 대마신을 짐승 따위에 비교했었단 말이냐?] 이제는 하연이 어떤 말을 해도 별로 화가 나지 않는 경지에 이른 카이람이었지만 그는 짐짓 화가 난 듯 소리쳤다. 그러자 하연은 즐거운 듯 싱긋 웃으며 말했다.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그 순간이 내 인생 최고의 기적의 순간이었던 것 같아." 그 말에 카이람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순간은 카이람에게 있어서나 최 고의 기적의 순간이었지 하연에게는 최악의 순간이 되어버렸으니까. 그 증거로 이제 하연은 환생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소멸 속으로 뛰어들려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카이람의 모습을 힐끔 쳐다본 하연은 다시 분화구 구멍 속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분명 나 혼 대륙 역사서에 이름을 남기게 되는 거 맞지?" [...뭐?] "빛과 어둠의 전쟁도 막았고 이렇게 혼 대륙도 멸망으로부터 구해주는데 역사서에 이름 한 줄 오르지 않는다면 너무 억울하잖아?" 한동안 말이 없던 카이람은 이윽고 한숨을 쉬듯 말했다. [그래, 억울하지 않도록 내 반드시 역사서에 이름이 오르게 해주마. 나 카이람의 소환자로 서, 대륙을 구한 영웅으로서, 그리고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았던 여인으로서.] 그런 카이람의 말을 흘려들으며 하연은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것이 내가 보는 최후의 하늘인가?' 그렇게 생각해서일까? 눈물이 나도록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한참동안 하늘을 쳐다보던 하연은 다시 분화구 속을 들여다보았다. 이제는 뛰어들어야 할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자 문뜩 성자 루페이론이 남겼다는 말이 떠올라 중얼거렸다. "순수하고 강한 마음으로, 가장 원하는 것을...!" 그리고 채 카이람이 뭐라고 다시 설득의 말을 하기도 전에 하연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분화 구 속으로 뛰어들었다. 간절히 단 한 가지를 소원하면서. [하연-!] 카이람의 경악에 찬 목소리가 허공에 가득 울리는 가운데 분화구 속에서는 푸르른 섬광이 번쩍였다. 마치 가엾은 한 영혼의 소멸을 슬퍼해 떨구어진 신의 눈물인 듯. 하연의 소멸을 본 카이람은 넋을 잃은 채 분화구 속을 바라보았다. 뒤늦은 후회가 이런 것인가를 절실히 깨달으면서. 애초에 하연에게 혼 대륙을 구할 방법 따 윈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었다고 한없이 자책하면서. 다음날. 넋을 잃은 채 앉아 있던 하연의 일행들은 다시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면서 하연의 죽 음으로 인해 혼 대륙이 부활했음을 알 수 있었다. 유난히 생기를 띠고 있는 꽃들과 풀들, 나 무들을 보면서도. 하지만 생기를 띠는 혼 대륙과는 달리 그들의 마음은 어둠속으로 떠밀려 가고 있었다. 한 여인의 희생으로 살아났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것도 그들이 너무도 사랑한... 얼마나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그들의 머리 위로 마신 카이람이 그 형체를 들어내더니 하연과 있을 때와는 다르게 상대를 공포에 질리게 만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연에게 약속했다. 역사서에 이름을 남겨주겠다고...마신 소환사로서, 대륙을 구한 영웅으 로서,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았던 여인으로서. 그러니 지금부터 마신의 사자로서 하연의 이름 을 대륙에 널리 알리도록 하라!] 그렇게 말하고 사라져 버린 마신의 모습에 한동안 멍하지 앉아 있던 카리스, 사담, 미루엘, 로베인은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차례차례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길을 떠났다. 대륙에 하연의 이름을 전하기 위해. 그로부터 10년 후, 라미엘력 764년. 대륙에는 새로운 이름의 여신이 탄생했다. 대지의 여신 하연이라는. 녹색의 영롱한 보석을 서클렛으로 하는 대지의 사제들은 신전들 중 유일하게 빛과 어둠의 구분이 없었고 자연의 마나를 신성력으로 전환하여 사용할 수 있었으며 대륙에서 가장 많은 신도수를 자랑했다. 그것은 여신으로 추앙되기 전 하연이 검은 로브의 성자로서 대륙에 이 름을 떨쳤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대지의 신전 초대 대사제로는 로베인 볼트라인이 임명되었는데 독실한 대지의 여신 의 신자인 그는 일 년의 거의 반을 성전에서 생활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것은 대지의 성전에는 다른 성전과는 다르게 현재 슈이센의 궁정 화가로 있는 오를레가 그린 여신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기 대문이었다. 뚜벅, 뚜벅! 성전으로 향하는 어느덧 중년인이 된 로베인의 발걸음은 경건하기 이를 데 없었고 그런 그 를 보는 사제들의 시선에는 흠모의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물론 그에게 걸린 저주 때문에 여사제들은 제외되었지만, 대사제의 지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빼놓지 않고 손수 성전을 쓸고 닦으니 모든 사제들의 귀감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날도 성전에 들어선 로베인은 청소를 시작하기에 앞서 하연의 초상화 앞에 조용히 서더니 연인에게 속삭이듯 다정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알고 있니, 하연? 네가 죽은 후 혼 대륙에는 수많은 다이아스 꽃이 피고 지고 있어. 마치 모든 대륙 인들에게 기적을 선물하려는 것처럼. 그리고 나에게도 기적은 찾아왔어. 이렇듯 다이아스 꽃이 피고 지는 매순간마다 너를 떠올리고 너를 사랑하는 나를 느낄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마, 하연. 사랑을 하면 외롭지 않다고 했지? 너의 말이 맞았어. 난 널 사랑해서 외 롭지도 않고 충분히 행복하니까." 에필로그 환한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내 모든 것이. 하지만 공포를 느끼기보다는 그것은 충만한 기쁨으로 내게 다가왔다. 이제야 드디어 내 영혼의 반쪽을 찾아 완전해지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리고 얼마나 그 빛 속에서 잠이 들었던 것일까? [깨어나라! 깨어나라!] 누군가 귓속에서 속삭이듯 나를 깨웠다. 그렇지만 깨어나기 싫었다. 깨어나면 이 빛 속에서 추방되어 추워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깨어나야 한다는 자각이 계속 나를 두드렸고 그럴수록 이제는 어쩌면 이 빛 속 너머로 누군가 반가운 얼굴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그 런 기대감으로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그러자 참을 수 없을 만큼 빨리 이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어졌고 그 생각과 동시에 어느새 빛 속에서 벗어나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인의 목소리였다. [깨어났구나, 아이야!] [누구시지요?!] [다른 아이들은 날 어머니 펠레아라고 부른단다. 너도 그렇게 부르거라.] '펠레아? 설마 그 주신 펠레아?' [그렇단다, 아이야!] 생각을 읽은 듯 말하는 펠레아의 말아 아! 진짜 주신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도 당 연하게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도 의아할 정도로. 그리고 그와 함게 드는 생각. [제가 왜 이곳에 있는거지요? 전 영혼조차 소멸되어 버렸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네가 걸고 있던 성자의 목걸이를 기억하느냐?] [네.] 그러면서 내 목을 확인한 순간 난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목은커녕 내 몸조차 보이지 않 았던 것이다. 대신 보이는 것이라곤 초록색의 작은 빛덩어리라고나 할까? [이, 이게 어떻게 된...?]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내가 초록색의 빛덩어리가 되다니... [놀라지 마라, 아이야. 너의 영혼의 빛일 뿐이니.] [영혼의 빛이요?] [네가 걸고 있던 성자의 목걸이에는 성자 루페이론의 영혼이 들어있었단다. 그러다 네 강한 바람에 그 영혼이 대신 소멸을 선택했던 것이지.] [그럼...!] 허망했다. 그렇다면 결국 로베인을 비롯한 혼 대륙을 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 가? 그런데... [걱정하지 마라. 혼 대륙은 다시 부활했단다.] [정말이요? 정말이지요?] 너무 기뻤다. 로베인이 살아있다니... 그러나 얼마 후 곧 그 기쁨은 더 이상 그를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서글픔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왜 아직 영혼으로나마 존재해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펠레아님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펠레아님이 물었다. [어떠냐? 대지의 여신이 되어보지 않겠느냐?] [예?] 황당했다. 대지의 여신이라니... 대지의 여신이 나와 어울리기나 한단 말인가? 더군다나 신이 되면 환생을 할 수도 없고 로베인을 만날 수도 없게 될 텐데. 막 싫다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지금 혼 대륙은 너의 정신력으로 유지되고 있단다. 때문에 네가 신이 되지 않으면 혼 대륙 은 금방 멸망해 버리고 만단다. 그래도 좋으냐?] [...아니요. 그럴 수는 없어요.] 혼 대륙을 멸망하게 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살린 곳이었던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제안에 원망스런 마음을 담아 펠레아님에게 보내자 펠레아님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신이 된 후 네가 네 힘을 제어할 수 있게 되면 그를 만날 수 있단다.] [정말이에요? 로베인을 만날 수 있어요?] 기쁜 나의 마음을 읽었는지 기분 좋은 목소리로 펠레아님이 물었다. [물론이다, 아이야. 신이 되겠느냐?] [네!] 분명하고 단호하게 나는 대답했다. 혼 대륙도 지킬 수 있고 로베인도 만날 수 있다니 일석 이조가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러자 갑자기 거대한 힘 같은 것이 내게로 빨려 들어오는 것 같았다. 영혼이 고통스럽다는 것은 이런것인가? 정신이 조각조각 갈라지고 엄청난 자아 붕괴가 연이어 이어지는 듯 했다. 얼마나 그 고통을 견뎠을까? 펠레아님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어느덧 희미해져 가는 의식을 놓고 말았다. [어머니의 이름으로 만물을 풍요롭게 하는 대지의 여신이 되리라!] 다시 눈을 떴을 때 난 내가 커다란 초록색의 공간 속에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런 내 주위를 신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중에는 카이람고 있었다. [...카이람?] [하연? 하연이지? 그렇지?] 초록색의 빛일 뿐인 나를 알아본 듯 카이람은 환호하듯 소리쳤고 그 소리에 나도 기쁘게 대 답했다. [응! 나야, 카이람. 다시 만나 정말 반가워.] [어떻게 된 일이냐? 너, 소멸된 것 아니었어?] 카이람의 물음에 다른 신들, 엘리나 여신과 땅의 신 부탄, 그리고 바람의 정신 디아스도 궁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말이야. 나도 소멸될 줄 알았는데 여기 이렇게 있더라고. 죽기 전의 내 강한 바람 때문에 목걸이에 있던 성자 루페이론의 영혼이 대신 소멸했다나?] [무얼...바랫었는데?] 머뭇거리듯 카이람이 물었다. 그거 묻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난 대 답해주었다. [살고 싶다고.] [뭐?] 경악한 카이람의 목소리가 초록색 공간을 가득 울리는 가운데 나는 똑똑히 대답해주었다. [살고 싶다고 바랬어. 그런 죽는 순간이었는데 인간인 나한테 뭘 더 바랬던 거야?] 그러자 허탈한 웃음소리가 신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더니 카이람이 중얼거리듯 말하는 것이었다. [역시 하연답다.] 나답다고? 나다운 것이 뭔데? 의아했지만 난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야?] [네 공간이다.] [내 공간?] 그 말에 의아한 듯 주위를 둘러보자 엘레나 여신이 말해주었다. [펠레아님께 만물을 풍요롭게 하는 대지의 여신으로 임명받았지요? 그 공간입니다. 당신의 힘이 가장 자유로운 곳. 이곳에서 당신은 대지의 여신으로서의 모든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아?] 싱그러운 초록색의 마치 봄을 맞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공간이 나의 공간이라고? 설 레는 기분이었다. 그런 나에게 카이람은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우리의 공간도 있다. 네가 혼 대륙에서 본 대로 각 신을 받드는 사제들의 서클렛 색이 그 것이다. 난 붉은색, 여기 엘레나는 은색, 부탄은 황색, 디아스는 푸른색의 공간이지.] 그렇게 신들로부터 여러 가지 설명을 들은 난 가지 않으려는 카이람을 억지로 그의 공간으 로 돌려보내고는 그날부터 내 공간에서 힘을 제어하는 방법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 빨리 다른 신들처럼 내 의지에 따라 형체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 정도가 되면 제대로 힘을 제어해 로베인을 만나러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매일 혼 대륙에 다이 아스 꽃을 피우는 일뿐이었다. 로베인에게 내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못다 한 한마디를 전하기 위해서. [사랑해, 로베인!]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