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동옥녀(魔童玉女) -1- 1. 설산 내 이름은 천인문(天麟文) 성은 천이 아니라 천인 이다. 나이는 13세. 아니 누가 꼬마라고 하는 거야. 이래뵈도 이 몸은 이미 결혼을 했단 말이야. 넌 결혼도 못했겠지만 난 이미 결혼까지 한 어.른. 이라고. 마누라 자랑은 팔불출이라고 하지만 나의 마누 라는 충분히 자랑 할 만하지. 저 아리따운 자태, 새하얀 피부, 호선으로 이어진 아미에 세류같은 허리, 오똑한 콧날에 도톰한 입술. 삼백(三白), 삼흑(三黑), 삼소(三小), 삼대(三大), 삼세(三細)의 완벽한 미녀의 조건에다 무공으로 다져진 완벽한 몸매. 나이는 이팔청춘 20세지. 물론 이 정도 되는 미녀는 아주 가끔씩 나온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지.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마누라정도 되는 미녀들의 성격 이란 말이야. 얼굴이 반반한 것들은 꼭 인물값을 한다는 옛말 따라 성격이 꼭 XX같다니깐. 그건 당신들도 충분히 알꺼야.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내 마누라는 저어언혀 그렇지 않지. 음화화화화. 일단 내 색시는 이정도로 끝내지. 많은 것을 알려고 하면 다쳐. 그러니 조용 히 내 얘기나 들어. 일단 내 취미는 마누라한테 업히기지. 안어울린다고? 하지만 사실인데 뭐. 어쨋든 일단 그건 넘어가고. 일단 난 나의 사랑스런 색시와 4년전에 결혼을 했지. 쉽게 말해 내가 9살 때였어. 음? 첫날밤은 제대로 치뤘냐고? 당근.... 아니지 ㅡ.ㅡ;; 그럼 왜 그렇게 일찍 결혼을 했냐고? 이제부터 천천히 얘기해 주도록 하지. 일단 4년하고도 5개월 전의 일이었지. ....... ...... ..... .... ... .. . 새하얀 눈이 쌓인 천산의 겨울은 상당히 매서웠다. 엄청난 눈에 덮혀 파란 풀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산 속에 세 명의 사람이 나타났다. 젊은 남자와 그의 아내로 보이는 젊은 여인. 그리고 그녀의 등에는 귀엽게 생긴 아이가 업혀 있었다. 그 세 명은 모두 가죽으로 된 덧옷을 입었으나 안쪽에는 흰 옷으로 통일되어 하얀 눈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빨리 가도록 합시다. 지금은 눈이 멎었지만 한 시진 내에 또 강풍이 치 겠구려. 힘들지는 않소?" "제 걱정은 안하셔도 되요. 이래뵈도 무공으로 단련된 몸이에요. 소첩은 오히려 성랑이 걱정됩니다. 아침에도 각혈을 하셨는데" 젊은 소부는 걱정스런 얼굴로 사내를 쳐다봤다. "걱정 안하셔도 되오. 아직은 버틸 만 하오. 흠 그건 그렇고 소문(小文)이 녀석은 제 애미가 힘든 줄도 모르고 잠만 잘 자고 있군 그래" "흥 자긴 누가 잔다고 그래" 여인의 등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소동이 고개를 쳐들었다. "허허, 이 애비가 잘못 봤구나. 그래 춥지는 않느냐" 너털웃음으로 얼버무리는 그의 얼굴엔 문이 알아보기 힘든 슬픔의 느낌이 담겨 있었다. 그녀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응. 하나도 안추워. 그런데 이거 어디까지 가야 되는 거야?" "응 이제 다 왔어. 저기만 넘으면 되" 미소부는 손으로 얼마남지 않은 고개를 가르켰다. 소동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미소부의 등에 고개를 파묻었다. 사내와 여인은 하늘의 구름을 보더니 다시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넘어 어느정도 갔을까, 사면에는 조그만 마을이 나타났다. 부부는 여기 자주 왔는지 아무런 꺼리낌없이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의 중앙쯤 되 는 곳에 가장 큰 초가집이 나타났다. 눈이 마당에 쌓여 있어 문을 열자 눈이 쓸린다. "누가 왔소?" 안방의 문이 열리며 흰 백발의 노인이 나왔다. 문에 서 있던 부부를 본 노 인은 맨발로 눈이 쌓인 마당으로 내달았다. "어이구 약선 어르신 오셨습니까요?" 나이 많은 어른의 더할 수 없는 공대에 사내는 머쓱해 졌다. "촌장 어르신. 이러실 것 없습니다. 올 때마다 이러시니 상당히 불편하 군요. 그래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밝은 미소로 사내도 인사를 했다. "엄마 여기가 어디야? 첨 보는 곳이네" 그제서야 고개를 다시 드는 소문. "아니 이 소공자는 미령 아씨의 자제분이신가 보군요. 허허 미령 아씨 닮아 잘 생기셨네요" 그제서야 미령이란 미소부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궁 아저씨도 참, 이제 그렇게 부르지 말라 했는데" 단목 미령은 단목세가의 금지옥엽이었다. 무림 삼대 미녀의 한명에 속할 정도로 뛰어난 미모에 시, 서, 금, 화에 조예가 깊어 무림인들의 사랑을 얻 었다. 무림에서 갓 출도했을 때 지금의 남편인 천인성을 만났다. 무인이 아니었던 천인성과 오해가 생겨 상처를 입힌 그녀는 그를 간호하던 중에 싹튼 사랑으로 집에서 정해준 혼처를 마다하고 그와 도피행각을 벌였다. 궁씨라 불린 노인은 단목세가에서 하인으로 일하다 나이가 들자 천산에 몸 을 담았다. "자, 여기 서 계시지 마시고 일단 방으로 들어가죠" 궁노인은 몸을 돌려 방문을 열었다. 그들은 신발을 벗고 궁노인을 따라 방에 들어갔다. "아 따뜻해" 방중앙에는 화로가 붉은 빛으로 타고 있었다. 소문은 미령의 등에서 내려 화로에 손을 내밀었다. 궁노인의 손짓에 자리에 앉은 그들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다시 온게 2년만인가요" "왜 그동안 오시지 않으셨는지요" "이제 제 나이 29입니다. 준비를 할 때가 되었지요" 천인성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쳐다 보았으나, 문은 따스한 화로에 정신을 쏟고 있었다. "아직 6년정도 남지 않았습니까?"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던 궁노인의 말에 천인성은 단목미령의 손을 잡았다. "몇년 남았는가는 별 중요하지 않죠. 전 미령을 만나 충분히 행복하게 살았고 또 이렇게 멋진 녀석도 두었지 않습니까" 미령과 천인문을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입을 연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일단 남은 일도 처리하고 우리 문이 녀석 뒷 일도 준비를 해야겠지요" "상공, 식사하세요" 앗 마누라가 밥 먹으라고 하네. 저렇게 뛰어 오다니, 저러다가 한줌밖에 안되 는 허리 다치면 어쩌려구. 빨리 잡아줘야겠네. 자 오늘은 이만 하자구. 얘기는 내일 다시 하도록 하세. 그럼 내일 보세나. 어이구 예쁜 마누라. -2- 흠 잘 지냈나? 그럼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구 어디까지 했더라. 아 그래 부모님이 오셨던 것까지 했지 그럼 시작하자구 우리 부모님께서 천산에 다시 오신 것은 지금의 마누라 때문이지. 또한 이몸 의 문제도 있었지. "어떻습니까, 어르신" 24개의 대침을 놓고 한숨을 돌린 천인성이 땀을 닦고 몸을 돌리자 허름하 지만 깨끗한 옷을 입은 한 중년 아낙이 근심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진 아주머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 남은 약만 제대로 먹인다면 확실히 병은 다 낫게 될 껍니다." 그제서야 진아주머니라 불린 아낙은 한숨을 돌렸다는 듯 안심하는 듯 했다. 이런 산골에 있기 아쉬울 정도의 미모를 지닌 그녀도 세월은 막을 수 없었는지 희끗한 흰 머리와 주름살이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남편이었던 서상문은 천산에서 이름난 사냥꾼이었다. 첫 아내는 아이를 낳다 아기와 함께 죽어버렸고, 그 뒤로 그는 사냥으로 호피나 표피를 팔아 돈은 모 았지만 쓸 줄은 모르게 되었다. 다행히 28이 되어 물러나는 퇴기였던 지금의 아내를 만나 딸 하나를 나아 잘 기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행동이 기생답지 않 게 정숙하여, 처음에 곱지 않은 눈으로 보던 마을 사람들도 너그럽게 받아들여 주었다. 하지만 좋은 시절도 얼마 가지 않았다. 사냥을 나갔다가 천산 백호를 만나 그만 목숨을 잃은 것이다. 하지만 벌어둔 돈이 제법 되어 그리 어렵지 않게 생활을 꾸려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딸인 서혜령이 10살이 넘자 비실대기 시작했다. 영약이란 영약도 이름난 의 원들도 소용이 없어 거의 포기하다 시피 했을때, 천인성이 나타났다. 그의 거처가 그리 멀지 않아, 부근에서 약초를 캐는 그녀를 만난 인연으로 혜령을 치료하기로 했다. 그도 쉽지는 않았지만 서서히 그녀를 치료해 나갔고, 4년만 에 완치되었다는 말을 듣게 된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허, 울지 마십시요. 이 기쁜 날에 왜 눈물을 보이십니까" 손을 털며 일어나는 천인성을 보며 그녀는 무릅을 꿇고 절을 했다. "이 은혜를 어찌 다 값겠습니까" "일단 일어나시지요." 그녀의 뒤에 얌전히 서 있던 단목 미령이 그녀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일단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예 어떤 분부라도 다 듣겠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요" 천인성의 얼굴에 씁쓸한 기운이 떠올랐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 알고 있지만 그녀를 막기는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방에 널린 침과 재료들을 서서히 챙겼다. "예?" 더 이상 커지면 빠져 버릴 정도로 눈을 키운 그녀를 보는 단목미령은 진씨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왜요. 저희 아기가 나이가 너무 어려서 그런가요. 아니면 혜령이의 짝으 로 어울리지 않기 때문인가요?" "그..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지 시집을 보내기엔 너무 어리고, 배운것도 부족하고, 또 아직, 또...."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이 꼬이기 시작하는 그녀를 보며 미령은 웃음을 지 었다. "우리 아이가 부족한 게 아니라면 저의 부탁을 들어주시겠어요?" 마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니, 부족하다니요. 저희 애가 부족할 따름이죠. 그런 귀엽고, 훌륭하신 아기씨에게 흠집이 있겠습니까. 소인은 다만...." "부족한 것 때문이 아니라면,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아이만한 애는 아직 본 적이 없었어요. 꼭 며느리로 삼고 싶습니다." 단목 미령의 말은 부드럽기 짝이 없으나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들어 있었다. 진씨는 그녀의 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확실히 그랬다. 아프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어릴 적보다 훨씬 더 예뻤다. 자신의 과거로 인해 욕을 듣게 하기는 싫었기에, 그녀의 행실에 대해서 더 욱 철저히 교육을 했었고, 머리도 나쁘지 않아 자신이 가르칠 때 아주 쉽게 배우는 것 같았다. 이제 병은 나았으니 몸을 추스리기만 하면 어떤 아가씨도 부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흐뭇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 이 청혼에 대해 추호의 불만도 없었지만 딸과 행복하게 보낸 시간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미치자 거절을 했던 것이다. 하지 만 이제는 그녀의 말을 거절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했다. 혼인은 어쩔 수 없다. 남은 시간이라도 즐겁게 보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되었소?" "그녀가 허락했어요" 치료를 마친 천인성과 단목 미령은 문을 나섰다. 미령의 말에 천인성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남은 생은 겨우 4개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장(掌)에 입은 상처로 인해 그의 생은 5년이나 줄었다. 천인 가문에 내려오는 절맥증으로 인해 천인 가문의 사내들은 겨우 35까지 살 수 없었다. 무공은 커녕 이 절맥을 치료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더 어려웠다. 32대손인, 천인성의 조부때 드디어 치료법을 찾았으나 약재가 부족했다. 그 이후로는 의술의 연구보단 약재의 수집에 열을 올렸다. 천인성의 조부와 부친, 그리고 천인성의 대에 이르러 필요한 약재를 다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약재들은 겨우 한명에게 쓸 분량밖에 되지 않았다. 이에 천인성은 아들에게 쓰기로 결정을 내렸다. 자신은 얼마 살 날이 남지 않았다. 하지만 문아에게 쓴다면 우리 가문을 괴 롭히던 절맥증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명은 어찌되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가 죽고 나면 천인문은 어찌 될 것인가. 너무 어리 다, 너무 어려.... 미령도 그를 따르겠다고 한다. 이젠 막을 수 없다. "너무 고민하지 마세요, 성랑. 다 잘될 거에요" 촌장집 문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천인성은 그들이 오는 것을 보고는 폴짝대며 문을 나섰다. "엄마, 늦었네." 미령에게 매달리는 문을 들어 올렸고, 그 모습을 보던 천인성은 입을 열었다. "그래요. 잘 될 것이오" 그의 눈에서 단호한 결단의 빛이 떠올랐다. -3- 3. 달콤한 신혼 생활 겨울은 거의 끝자락에 다다랐고 봄의 기운이 서서히 산을 휘감고 있었지만 쌓 인 눈은 사라지지 않아 하얗게 덮인 낮은 야산의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사람들 이 있었다. 바로 천인문과 서혜령이었다. 마을을 떠난지 3주. 천산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엄마의 품을 떠난 어린 소동과 몸이 아파 거동도 못했던 한 소녀가 가기엔 너무 험한 길이었다. 일반 인 같으면 오일 정도 걸릴 거리를 3주에 걸쳐 온 그들의 몰골은 거지중에 상 거지나 다름 아니었다. 두리번 거리던 천인문이 무언가를 찾았는지 어디론가 뛰어가고 서혜령이 그 뒤를 따랐다. 쌓인 눈이 얼어 굳어버린 얼음으로 뒤덮힌 돌무덤과 절벽이 사방에 펼쳐진 곳이었다. 혜령은 만면에 웃음을 띈 문을 쳐다 보았다. "여기가 어딘가요. 상공?" 혜령의 질문에 천인문은 가슴을 펴고 얘기했다. "여기가 대(大) 천인세가(天麟世家)의 정화가 모여있는 곳이요. 음 어디보자. 여기 이 부근에 입구가 있을 텐데" 10살도 안된 어린아이가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모습을 보자 그녀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아니, 하늘같은 남편의 말이 우습다는 말이요?" 영락없이 심통이 난 꼬마의 투정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녀는 웃음을 싹 거두 고 고개를 숙였다. "상공, 천한 것이 상공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였나이다. 용서해 주세요" 2개월전 혼인식 전 날 진씨의 말이 혜령에게 떠올랐다. [너의 생명을 구해주신 분들의 자제분이시다. 그분들이 신분 차이 무시하고 널 거두어 주실 줄 누가 예상을 했겠냐. 나이는 어리지만 중요한 건 너의 부군 (夫君)이란 거야. 남편을 하늘처럼 모시거라. 이제 넌 천인 가문의 귀신이 되 야 해] 눈물을 감추며 얘기하시는 어머니의 과거에 대한 얘기를 듣지 못한 그녀가 아 니었다. 그러기에 더욱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그녀의 몸가짐은 남달랐다. 이 꼬마 신랑의 장난스런 말투에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공손하게 사죄를 한다. "음 좋소. 그럼 부인은 잠시 기다리시오. 문을 열때까지 말이오" 제법 어른스런 어투로 입을 연 문은 입구를 열 기관을 찾기 위해 몸을 돌렸 다. 조그만 돌무덤이 쌓인 곳에서 붉은 돌이 박힌 조그마한 비석.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말을 했지만 비석은 보이지 않고 시간만 무심히 흐르고 있었다. 아빠한테 들었을 때는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 쉽게 찾아지지 않 자 문은 당황 하기 시작했고, 뒤에서 지켜보는 혜령의 모습에 마음만 성급해진 꼬마 신랑이 울먹대기 시작했다. 이미 혜령은 시아버지 되는 천인성에게 얘기를 들어 입구를 열수 있는 방 법을 알아차렸지만,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천인문이 찾기는 커녕 눈물만 보이려하자 문에게 다가서는 척 하다 문을 여는 입구를 누르며 쓰러졌다. "마누라, 색시야, 여보야..." 눈물이 어디로 쏙 들어갔는지 금새 표정을 바꾼 천인문이 넘어진 혜령에게 부를수 있는 호칭이란 호칭은 다 부르며 뛰어 오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 개를 돌렸다. "엥 열렸네" 멍한 얼굴로 열린 석문을 바라보는 문을 보며 혜령은 손을 잡았다. "상공, 시아버님께서 보우하시나 봐요. 일단 들어가죠" "응 그래" 이미 세상을 뜬 아버지가 생각나는지 낮은 어투로 대답하며 문을 향했다. 열린 석문을 통해 들어가자 어두침침한 통로가 나타났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석문이 있었다. 제법 무거울 것 같은 석문은 천인문의 얄팍한 힘에 도 쉽게 열렸다. 둘이 들어간 곳은 그리 크지 않은 석실이었다. 야광주 두개가 천장에서 어슴프레 석실을 비추고 있었고, 석실은 서고인 양 많은 책장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우와. 엄청난데" "......" "역시 우리 집은 대 천인세가(天麟世家)야. 이 엄청난 무공서적하며, 수많 은 보물들하며..." "상공, 죄송하지만 이 책은 모두 의학서학입니다만" "....." 책장에 다가가 책을 꺼내보는 혜령의 말에 얼어버린 천인문. 하지만 이성 과 위엄을 되 찾았다. "흠흠, 가끔 실수 할 때도 있지. 암 그렇고 말고. 안그래 마누라?" 죽어도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으려는 귀여운 천인문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따스한 빛이 흘렀다. "예. 그렇지요" "그건 그렇고, 뭔 책이 이렇게 많아" 놓인 책장만 해도 40개는 되는데다 각 책장마다 빽빽히 들어찬 책이 무려 150권은 넘을 정도로 엄청난 책이 좁은 석실에 모여 있다는 사실에 두명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상당히 오래된 책들이 석실에 오랫동안 잠자고 있 었슴에도 퀘퀘한 냄새가 나지 않는 것도 신기했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오천권이 넘는 책들의 대부분이 천인세가의 조상들이 직접 집필한 것이라는 사실은 그들을 경악시켰다. 끝에 있는 3개의 책장에 꽂힌 책이 일반 의학 서적이 아닌 무공 비급이란 것을 알아차리는데는 얼마의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일단은 대충 살펴보고 그 다음 석실로 넘어가기로 했다. 다음 석실의 문이 열리자 역시 천장에 붙은 야명주 두개가 처음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내부를 비춘다. 이 석실은 돌로 된 침상과 탁자가 있는 걸 로 봐서 잠자리를 해결할 수 있게 한 곳이었다. "흠 상당히 깔끔하군. 맘에 들었어" 기분좋게 돌아보던 천인문의 눈에 탁자위에 놓인 서찰이 보였다. 쓰여진 지 오래 된 것인지 색은 누렇게 바래 있었다. 문은 서찰을 뜯어 읽기 시작 했다. - 나의 아들에게 이렇게 들어와서 이 서찰을 읽고 있을 나의 아들아 이름을 무엇으로 지었을 지 몰라 그냥 아들이라 부르는 것을 용서해 다오 이제 이 서찰을 보는 순간 너는 천인세가의 35대 가주가 되었다. 하지만 세상의 그 누구도 우리 가문을 알지 못한다. 그 이유는 너도 알다시피 우 리 가문의 고질적인 절맥증 때문이었다는 것은 너도 잘 알 것이다. 35세 가 되면 죽음으로 치닫는 이 고질병이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격리 시켜 놓았지. 그 결과 우리는 뛰어난 의술만을 계승하며 이 절맥을 치료하기 위해 원치않는 은둔 생활을 했단다. 하지만 너의 증조부이신 32대 가주 께서 다행히 치료법을 찾으셨지. 그 후로는 의술의 증진보단 약제를 찾아 돌게 되었단다. 내가 여기서 의술을 배우고 난 이후에 아직 찾지 못한 약 제를 찾아 떠나기 전에 이렇게 편지를 쓰는구나. 나의 대에서 약을 찾지 못 한다면 너도 여기서 의술을 익힌 후에 약을 찾아야 할 것이다. 언젠가는 이 악업이 끊어지겠지. 그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구나. 여기에 있는 책중에 우리 조상들께서 쓰시지 않은 책들은 너의 증조부와 조 부께서 밖에서 약을 구하시다 얻은 것들이다. 넌 그것들까지 모두 익히도록 하여라. 그럼 이만 줄이마. 아들의 앞날에 복이 있기를 이 아비가 기원하마 - 편지에는 사실적인 내용만 적혀 있었다. 하지만 천인문은 그 글에서 아버지 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덧 눈물이 흘러 떨어진 눈물은 편지를 적시고 있었다.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신 것인지 천인문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 지 억지로 울지 않고 버텨 왔는데 이 편지를 읽자 그의 마음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혜령이 다가와 문을 껴안자 봇물 터지듯 울음을 터트렸다. '상공, 제가 있자나요. 제가 곁에 있어 드릴께요' 혜령의 머리속에 문을 처음 만났던 그날이 떠올랐다. 왠 꼬마가 은인 부부 의 손을 잡고 문을 들어오더니만 마루에 앉아 있던 자기에게로 쪼르르 다가 와 이리 저리 살피더니 대뜸 한다는 말이 "너 예쁘게 생겼네. 내 마누라나 해라" 상당히 어이가 없는 말이었지만, 귀여운 꼬마가 하는 말이라고 웃어 넘겼다. 하지만 알고보니 정말 신랑이 될 인물이란 사실에 상당히 놀랐었다. 아직 16세로 결혼을 하기엔 이른 나이였지만, 뭔가에 쫓기듯 후다닥 준비된 혼인 으로 정신이 없었던 그녀는 조금씩 귀여운 꼬마신랑에게 마음을 뺏기고 있었다. 한참을 혜령의 가슴팍에 뭍혀 옷깃을 적신 천인문은 다시 울음을 그치고 편지를 보았다. 이미 눈물에 젖어 읽기 어렵게 된 서찰이었지만 다시 볼 수 없는 아버지의 유품이기에 고이 접어 가슴에 넣었다. "색시야, 근데 넘 울었더니 배고프다" 눈은 퉁퉁 붓고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말하는 문을 본 혜령은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게 하기 위해 상당히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찾아 볼께요" 하지만 일각 후. "이이잇.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빠란 거 모두 취소닷" 천인성이 먹다 남은 벽곡단 한알만 덩그라니 독에서 잠자고 있었다. -4- "색시야, 이것 좀 먹어봐" "아이 참♡, 상공~~" "아유 기여븐 내 각시~~잉 +.-" 천인문의 기분이 하늘을 날 듯 하다. 이렇게 신혼의 재미가 꿀맛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하늘을 다 쥔 것 같고, 더 이상 부러운 것 없었다. 헌데 이 기분이 와작 하고 깨져 버렸다. "상공 그만 일어 나세요" 팔을 흔드는 느낌에 눈을 뜬 천인문은 지금까지 좋았던 기분이 꿈때문이 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에휴 ㅠ.ㅠ 하고 실망은 했지만 뭐 상관은 없었 다. 이 꿈속의 대상은 자기 말이라면 꺼뻑 하고 죽는 시늉까지 내는 다름 아닌 자신의 마누라였으므로. 뭐 언젠가는 그렇게 해 볼 수도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일어났다. "무슨 기분 좋은 일이시길레 그렇게 꿈속에서 입맛을 다시며 침을 흘리 세요?" "치...침이라니. 쓰윽" 순식간에 소매로 입을 닦는 천인문의 행동에 살짝 미소를 짓는 혜령이었 다. "식사하세요" "흠 이번엔 뭐지?" "예, 저번에 사냥했던 사슴 뒷다리에 오늘 잡은 호랑이 간을 같이 버무려 볶은 요리에요" 이미 시간이 많이 흘러 이 석실에 살게 된지 4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먹을 것이 없어, 석실 밖의 풀뿌리나 캐어 먹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익힌 무 공으로 사냥을 하면서 고기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무 려 4년이란 세월동안 계속 고기만 먹을 수는 없었던지 나물과 고기를 섞어 만든 요리를 선보였지만 그것도 몇 년. 그들의 요리는 조금씩 옆길로 새버 렸고 그 결과 엽기 아닌 엽기 요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몸에 좋다는 웅담 볶음부터, 남자의 생명이라는 정력탕(^^;;)까지 등장하지 않은 요리가 없을 정도였다. (흠 옆길로 샜군 다시 턴해서) 석실의 모든 책의 숫자는 5138권이었다. 그중에 4725권이 의술에 관 한 책이었고, 나머지 413권은 무공 비급과 진서, 병법서 같은 책들이었다. 산 속의 약초를 찾다 발견된 시체에서 주운 것과 꼭꼭 숨겨져 있던 책들이었다. 천인문은 가문의 업인 의술을 익히기 시작했다. 가문의 천형이였던 절맥증 은 제황절맥(帝皇絶脈)이라 불렸다. 뭐 이 이름도 그 병에 걸린 사람들이 그들 밖에 없었으니 그 이름도 천인세가에서 멋대로 지은 이름이었다. 일반적으로 절맥들을 타고 난 인물들의 오성이 뛰어났던만큼 천인문의 오성도 남달랐다. 아니 남다르다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한권씩 꺼내 천천히 읽었지만 한번 꺼내 읽었던 것은 다시 꺼낼 필요가 없었다. 천인성과 함께 다니며 배운 것이 있어 의술에 대해서 어느정도는 알고는 있었지만 기초가 잡히지 않은 그 에겐 필요하지 않은 책이 없었다. 이렇게 천인문이 식사를 하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책에만 투자하게 되자 심심해 진 것은 혜령이었다. 혜령의 경우엔 100년에 한번 볼까말까한 구음절맥(九陰絶脈)이었다. 20세 가 되면 모든 맥이 얼어붙으며 음기로 가득차 죽게 되는 무서운 절맥. 하지만 그에 따라 엄청난 오성을 지니고 태어나게 된다. 당연히 그녀도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었고 시간도 많이 남으니 그냥 놀기 보단 무공 비급들을 익히기 시작 했다. 413권 중에 이 삼류의 무공을 빼고 일류나 절정 무공 비급의 숫자는 겨 우 15권밖에 되지 않았다. 그 중에서 여자가 익히기 적당한 것은 겨우 4권으로 세류검법(細柳劍法), 천인시령심법(天人是領心法), 은하잠류연(銀霞潛流燕), 옥소탄지(玉簫彈指)였다. 이 네가지의 무공은 모두 무림을 호령했던 여인들의 무공이었다. 세류검법과 은하잠류연은 사백년 전의 음약후(音藥后) 진서희(鎭逝禧)의 무공이었다. 그녀 의 심법(心法)과 나머지 무공은 없었지만 이 두가지로도 충분했다. 천인시령심 법은 누구의 무공인지는 알수 없었지만 여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무공임은 틀림 없었고 은하잠류연도 원류를 알 수 없는 무공이었지만 '은하' 라는 이름으로 보아 오백 여년 전의 은하성궁의 무공일 것이라 생각되었다. 혜령은 병석에 있을 때 이미 많은 영약들을 먹었다. 함부로 쓴 약이라 위험할 뻔 했지만 천인성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약효는 모두 흡수 되었고, 이제 8년이 란 시간동안 4권의 무공을 완벽하게 익히는데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요리외엔 할 일이 없던 그녀는 무공을 다 익히자 새로운 무공을 만들기 시작 했다. 여기엔 천인문의 많은 도움이 있었다. 천인문도 의술을 익히곤 있었지만 무공을 소홀히 하진 않았다. 마누라에게 쥐어살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이 약해선 안된다는 생각에 더욱 심혈을 기울 였다. 무공의 수련에 이 의술들은 엄청나게 도움이 되었고 그녀가 그 네권 의 무공을 다 익혔을 때 즈음 천인문의 무공은 모든 비급을 다 익히고 있었다. 처음에 혜령이 무공을 만들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고 화를 내며 그녀가 모 르고 있던 것을 가르쳐 줄때까지만 해도 혜령은 그가 무공에 대해 아무것도 모 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왠걸 이건 그녀보다 훨씬 높은 경지가 아닌가. 단순히 논검을 한 것이라 실제는 별 것 아니라 생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냥을 할 때 문의 솜씨를 직접 보고는 더 이상 생각하진 않았다. 식사하란 그녀의 소리에 일어선 문은 사슴과 호랑이 고기란 말에 고개를 돌 리며 미간을 지푸렸다. 석실을 나서 숲 속으로 나온 천인문의 눈에는 희디 흰 세상과 눈으로 얼어붙 은 시내, 그리고 꼬챙이에 꽂혀 다 익은 고기와 숯 위에 놓여 김을 내뿜는 솥 이 보였다. "으윽, 또 고기(ㅠ.ㅠ) 이제 고기 먹기 싫은데" "봄이라곤 하지만 아직 눈이 녹지 않아 나물은 구하기 힘들어요" 구하지 못한다는데 어쩌겠는가. 문은 한숨을 내쉬며 허탈해 했다. "호남성(湖南省) 동정호(洞庭湖) 부근에 잉어를 기가 막히게 하는 곳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혼잣말로 아쉬움을 달래며 침을 삼키다 뭔가 떠올랐다는 듯 벌떡 일어섰다. "그래, 바로 그거야" "네?" 저 고기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잘 했다고 칭찬 들을지만 생각하던 혜령은 천인 문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이제 중원으로 나가는 거야" "....." "여기서 이렇게 계속 있을 순 없지. 이렇게 세월만 보내고 있다고 뭐가 되겠 어? 결혼식은 이미 했는데 아직 신혼 여행은 해 보지도 못했잖아. 이번 기회에 중원으로 여행을 가는거야. 좋지? 응?" 천인문은 '신혼' 이란 말에 살짝 얼굴이 붉어지는 그녀를 보자 너무 사랑스러 워 혜령의 허리를 잡고 돌렸다. 하지만 키가 더 큰 혜령으로선 무릎을 굽혀야 하고 잘 돌아가게 내공을 모아 몸을 가볍게 해야 하는 곤혹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유 귀여버 (^^;;), 이 세류같은 허리하며 새하얀 목덜미.흠 하지만...' 혼자서 별별 생각을 다 하던 천인문이 그녀를 내려놓았다. 혜령은 왜 그런가 싶어 그를 쳐다보자 그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그 무언가를 보았다. 그녀는 그 눈에서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또요?" "어허어~" 살짝 빼는 그녀와 어르신 모드의 그. "너무 자주해서 힘든데요." "어허어어" "....네~" 저 어르신 모드엔 항상 약해지는 그녀는 자신을 원망하며 고개를 숙이고 석실로 들어가는 그를 따랐다. 조금 후 석실에선 '가위바위보' 소리와 함께 수북히 쌓인 고기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며 혼자 석실의 끝으로 가서 가위바위보 특별 연습에 들어가 는 천인문이었다. -5- 두 부부는 석실에서 나와 산을 내려갔다. 처음 입고 왔던 옷은 이미 작고 오래 되어 입을 수 없었던 그들은 옷에다 사냥으로 잡은 가죽으로 덧을 대 입고 있었다. 일단 산을 내려가기로 하자 가장 가까운 마을인 혜령의 집 으로 가기로 했다. 처음에 올땐 3주나 걸렸던 길이 이제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산을 넘어선 그들의 눈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마을이 눈에 띄었다. 떠날 때와 별 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녀는 모친을 뵐 수 있다는 생각에 더욱 서둘렀고, 천인문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 "누구요?" 싸릿문이 열리는 소리에 안방문을 열고 나오는 한 아낙의 목소리. 한달음 에 문으로 들어온 혜령은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그녀를 보자 울음을 터트려 버렸다. "어머니" "엥 이게 누구야. 너 혜령이 아니냐. 아이구 혜령이 맞지"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서둘러 뜰로 내려온 그녀를 혜령은 달려가 끌어 안았다. "네. 저 혜령이에요. 흑흑" "그래 어디 얼굴좀 보자. 흑흑" 서로 끌어 안고 그냥 울어버리는 그녀들을 본 천인문은 조심스레 다가가 인사를 했다. "장모님. 혜령이만 보이고 전 보이지도 않나 봐요" 능글맞은 문의 말에 진씨는 고개를 돌렸다. "에구, 자네도 왔구만. 그래 이렇게 서 있을 것이 아니라 어서 들어가자" 열린 문으로 진씨가 들어가자 그들도 뒤따랐다. 방에 앉을 새도 없이 진씨 는 입을 열었다. "이렇게 온게 얼마만인가. 이제 4년정도 됬나. 무심키도 하지. 집도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면서 그동안 한번도 안온단 말인가" "에, 죄송합니다 장모님. 할 일이 많다보니...." 찔리는 게 있는지 머리를 끍는 천인문을 보자 진씨의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떴다. "일단 여기에 왔으니 충분히 있다가 가도록 하게나. 이번에 가면 또 오랫동안 못 볼 것 아닌가" "네 알겠습니다" 그녀의 부탁에 천인문은 거절할 수 없었다. 다음날 마을 어귀에 있는 천인성과 단목 미령의 무덤을 찾았다. 천인문은 4년만에 찾은 무덤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단목 미령의 경우는 오랫동안 살 수 있지만 외로운 아버지를 홀로 두지 않은 것이 더 잘 됬다고도 생각을 한 천인문이다. 자신은 외롭지 않았다. 그에겐 이제 서혜령이란 짝이 있다. 단목미령은 아버지인 천인성의 짝이 아닌가. 저 하늘에서 못다한 사랑을 나누실 거라 생각하며 산을 내려왔다. 가지 마라 계속 잡는 진씨에 의해 삼일을 더 잡혀 있었던 천인문과 혜령은 눈물로 배웅하는 진씨를 뒤로 하고 산을 내려왔다. 아직 흰 눈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밑으로 내려올 수록 눈은 녹아 없어지고 파릇파릇한 풀이 곳곳에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내려왔으니깐 이제는...' 어느정도 산을 내려온 천인문이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색시야" "네?" 천인문의 음흉한 속도 모르는 혜령이 고개를 돌렸다. "나 다리아퍼. 업어줘" "....." "어서" "하..하지만 상공은 너무 크고, 무겁고..." 어이가 없다는 듯 더듬는 혜령의 말에 천인문이 맞받아 쳤다. "내가 너무 크다면 줄이면 되겠지? 그리고 남편이 힘들다는데 마누라가 좀 업어주면 안되?" 줄인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는 혜령에게 천인문은 직접 행동으 로 보여주었다.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다섯 자 여섯 치 정도 되는 그의 키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처음 천산에 오를 때의 아홉 살 정도로 몸이 줄어버렸다. 자신의 모습을 보던 그가 길어보이는 팔과 다리부분을 접어 올렸다. "흠 옷이 좀 크네. 이정도면 되겠지. 이제 됬으니깐 업어줘" 천인문의 무공 수준을 모르는 그녀가 아니었지만, 그 어렵다는 축골신공 을 단지 업히기 위해 쓰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업어 줘야지. 옆집 아주머니이 어머니한테 하던 남편때문에 꼭 애 하나 더 키우는 것 같다는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 남편은 귀엽기라도 하지. 옆집 아저씨 의 수염난 얼굴이 떠올라 소름이 돋는 그녀였다. 등을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폴짝 그녀의 등에 매달렸다. 얼굴엔 성공했다 는 승자의 미소가 가득했다. 천산에서 가장 가까운 파밀 고원을 지나 천산에서 중원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인 타클라마칸 사막. 사막을 넘나드는 대 상인들을 위해 각 사막의 양쪽 끝에는 마을에 숙박 시설이 있었다. 마을 인구에 비해 월등히 큰 숙박 시설이 존재하는 이유는 상인들이 한번 이동을 할때 아주 많은 사 람들을 고용하여 지나가기 때문에 한번 묵을 때 30명은 거뜬이 넘어가 는 숫자를 맞추기 위해 일부러 크게 짓기 때문이었다. 새외(塞外)에서 위 험한 곳이 한 두군데겠냐만은 이 타클라마칸 사막은 중원의 또 다른 사막 인 고비 사막과는 달리 초원이 없으며 또한 혹한, 혹서로 유명했다. 제대로 된 안내자가 없이는 꿈에도 건너 갈 생각을 못 할 정도로 위험한 곳이었다. 서령촌. 이 타클라마칸 사막의 서쪽에 있는 조그만 마을은 위구르 족과 투르크 족, 중원인들이 한 달에 한번씩 모여 장을 열며 생긴 마을이었다. 위구르 족과 투르크 족은 유목, 목축으로 살아가는 종족이었다. 철이 나지 않았기 에 중원에서 넘어오는 상인들에게 솥과 같은 생필품을 사기 위해 목축으로 나오는 고기와 우유, 술 등을 내다 팔았다. 명나라에서는 철에 대해 상당한 관리를 했다. 가장 심하게 관리를 한 것은 화약이었지만 역시 원과 같은 유목 민족에게 지배를 당한 기억이 있던 명으 로선 철도 밀 반출 감시 대상이었다. 이런 이유로 유목민들에겐 철은 필수품 이었지만 가격은 엄청났다. 하지만 이 유목민족들은 다행히도 황하(黃河)강 의 발원지인 뤄부포호(羅布泊;큰 염호(鹽湖)로 그 물이 땅 밑으로 흘러 황허 강을 이룬다)에서 사금을 구할 수 있었다. 황금 무게와 철의 무게가 비슷 할 정도였지만 충분히 필요한 만큼은 구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한달에 한 번씩 모이며 서서히 커지기 시작한 마을은 사람 수가 늘어남에 따라 장도 오일에 한번 씩 열리게 되었다. 이 서령촌에서 가장 큰 주루이자 여관인 서한루(暑寒樓)는 오늘도 역시 많은 사람들로 소란스러웠다. 일, 이층의 탁자는 이미 상인들에게 고용된 무 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술을 마시며 웃고 즐겼다. 사막의 열기로 열어 둔 문에 한 명의 그림자가 나타났을 때 서한루는 갑자기 쥐 죽은 듯 조용해 졌 다. 여자였다. 그것도 엄청난 미녀. 침 넘어가는 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렸다. "어서 오십시요" 꿈 속에서나 볼까말까한 미녀를 본 주인장이 넋을 잃고 서 있었지만, 문 앞 에서 옷을 터는 그녀를 보고 이성을 차리고는 다가왔다. "방 있죠?" 그녀의 등 뒤에서 귀여운 목소리의 주인공이 솟아 올랐다. 바로 천인문과 서혜령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주인은 갑자기 나타난 소동(小童) 때문에 섬칫 놀랐지만 고개를 굽혔다. "네,네 꼬마 도련님. 방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방은 상당히....." "상당히 뭐에요. 빨리 말해요. 전 질질 끄는 건 싫어하거든요" "아 상당히 비쌉니다. 지금 중방과 하방은 모두 나가고 없습니다. 남은 건 상방이라서 가격이..." "얼만데요?" "상방은 하루에 은자 10냥입니다. 식사와 목욕은 모두 무료입니다." 거의 산에만 살던 천인문과 서혜령이었기에 은자 열냥이 얼마만한 가치를 지니는 지 전혀 모르는 그들이었다. 일단은 수중에 돈 한푼 없는 천인문이었 다. 내일 열릴 장으로 인해 이미 이 부근의 방들이 다 나갔다는 것을 안 천 인문은 지금 있다는 그 방이라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그 방으로 할께요. 그리고 이 부근에 의원이나 약방 같은 곳은 어디 있는지 말해 주실레요?" 문과 혜령은 주인의 대답에 바로 몸을 돌려 나갔고,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와 그녀와 등에 매달린 소동과의 관계로 서한루는 후끈 달아올랐다. 산에서 캔 약초를 팔아 노자로 쓰기 위해 문을 나선 문 일행은 주인이 가르 쳐 준 약방을 찾았다. 서한 약방이란 간판이 걸린 약방으로 들어가자 머리가 흰 노인이 안에서 나왔다. 눈은 쭉 째졌고, 쥐꼬리 같은 수염이 코 밑에 붙은 노인이 혜령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이 마을에 들어올 때부터 저런 시선을 많이 본 천인문은 눈을 찌푸렸다. "이봐요. 일 안해요?" "일하고 안하고는 내 맘이고, 그래 일단 여기 온 걸 보니 무엇을 사러 온 건 가?" 퉁명스런 말투였지만 당황하지 않고 대꾸를 했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할 일 은 해야 하는 법. 천인문은 다시 말했다. "뭘 사러 온게 아니라 팔 게 있어서요" 말이 끝나자 천인문을 업고 있던 혜령이 천인문의 종아리를 잡은 손을 풀고 허리에 달린 허름한 주머니를 열었다. 거기서 나온 산삼 두 뿌리와 서장의 특 산품인 대황(大黃; 쌍떡잎식물로 여러해살이풀. 원산지는 중국 서장·청해 지방 으로,소량은 건위작용(健胃作用)으로 다량은 완하제(緩下劑)로 사용. 상습 변 비나 소화불량, 지혈 작용을 한다. 보통 3~7년정도 되면 5Kg정도 된다)을 보 자 눈에서 잠깐 빛이 났다. "금화 10냥 줄 수 있네"(금자 한 냥은 은자 100냥. 은자 1냥으로 5인 가족 이 일주일정도 살 수 있다. 은자 1냥은 쌀 반가마를 살 수 있다.) "흠 좋아요. 팔도록 하죠" 물건 값에 대해 잘 모르는 천인문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 말에 노인은 쾌재를 불렀다. '이 산삼은 90년정도니 은자 750냥정도고, 이 것은 한 240년 정도 되는구 만. 삼천냥은 거뜬하겠어. 엥 이 대황은 뭐가 이렇게 크지. 한 오십년 되나. 한 15냥이면 되겠지. 금화 37냥은 받고 팔 수 있겠군' "그렇게 팔면 상당히 손해 보는 걸세. 그러지 말고 나한테 팔지. 내 금화 25냥 줌세" 누군가 갑자기 문으로 들어왔다. 흰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오고 백의를 입 은 노인이었다. 만면에 미소를 띈 노인이 제안을 하자 약방 노인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저...저 놈의 영감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찢어 죽일 놈. 또 중요한 순간 에 나타나 초를 치는구만' 속으로 엄청 욕을 하며 약방 주인은 긴 수염의 노인을 쳐다 보았다. -6- -뭐라고라고라. 25냥 (@.@)- "어 정말요? 그렇다면 할아버지한테 팔께요" 더 높은 가격을 쳐 주겠다는 데 마다할 천인문이 아니었다. 그러자 느 긋하게 보고 있던 약방 노인이 후다닥 뛰어 나왔다. "헤헤헤, 이보게나 소공자.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랬다고 그냥 그 렇게 파는게 어디있나. 내가 10냥이라고 불렀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네가 올려 부를 때를 위해 깍아서 부른 거네. 당연히 팔때는 지금보다 많이 주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그럼 얼마나 주실려구 하신 거죠?" 약방 노인은 조금 생각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내 28냥 줌세. 어떤가 이정도면 상당하지 않나" 그러자 되받아치는 백의 노인. "29냥 주지. 어떤가" -오 드디어 불 붙었다. ^^;;싸워라. 싸워라. 이기는 편 우리편- 약방 노인은 속에서 불이 나기 시작했다. 뭣때문에 잘 되가는 장사에 초를 친단 말인가. 이제 이건 싸움이다. 여기서 밀릴 수는 없다. 이렇게 생각한 약방 노인은 자기를 어떻게 보든 상관 없다는 듯 눈에 불을 켜고 침을 튀기 며 말했다. "내가 서른 냥 주겠네. 이정도 물건으로 서른 냥은 좀 과한 감이 있지만 뭐 오늘 내가 인심 쓰는 셈 치지" "허허 안타깝군. 내가 졌어. 이렇게 좋은 물건을 자네에게 뺏기다니. 자네 축하하네. 이렇게 좋은 물건을 얻다니" 하지만 전혀 아쉽지 않은 듯한 얼굴로 몸을 돌려 나갔다. 천인문은 당장 대금을 받고는 밖으로 나간 노인을 뒤쫓았다. 속았다고 외치는 약방 노인 을 뒤로 하고. "거기 앞에 가시는 할아버지. 잠시만요." 천천히 걸어가던 백의 노인은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약방에서 한 여인의 등에 업혀 있던 그 소동이었다. "그러세나. 나한테 볼 일이 있는가. 음 그러고 보니 아까 약방에서 본 소동이구만." "네, 전 천인문이라 하고요. 이쪽은.." 자기 소개를 하고 혜령을 소개하려고 하자 노인은 안다는 듯 손을 앞으로 흔들며 말을 끊었다. "알고 있네. 자네 누나 아닌가. 정말 좋겠구만. 이렇게 아름다운 누님을 두 고 또 업힐 수도 있으니 말일세" ".....아닌데요. 이 쪽은 누나가 아니라 제...." "아하 이 노부가 실수 했구만 그려. 누님이 아니라 유모였나 보군. 허허허 자네 정말 좋겠군. 이렇게 젊고 아리따운 유모를 두다니" -아니 무슨 이런 영감탱이가 다 있어 (ㅡ.ㅡ++)- 혼자서 아는 척은 다 하는 노인을 보자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천인문. 서혜 령의 목을 감고 있던 손을 뻗혀 그녀의 유방을 콱 잡고 주물럭 거리는 행동 으로 직접 보여주었다. "아학" 아무리 나이 많은 노인이라지만 그의 앞에서 가슴을 주무를 줄 몰랐던 서혜 령은 낮은 비명을 지르며 얼굴과 목덜미를 붉혔다. 하지만 천인문은 멈출 생 각이 없었다.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서 남은 한 손으로 다른 가슴까지 꽉 쥐었 다. 멍하니 이 장면을 쳐다 보던 노인이 알았다는 듯 오른손으로 이마를 쳤다. "아 노부가 엄청 실수를 했구만 그려" 그제서야 얼굴이 밝아지는 천인문. 슬그머니 손을 풀어 혜령의 목을 감쌌다. "자네의 어머님 되시는 분이시구만. 엄청나게 일찍 결혼하셨나 보군요. 부인 이 늙은이가 몰라뵙고 실없는 소리를 했습니다." -띵~~(ㅡ.ㅡ++)- 천인문은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돈에는 좀 밝은 눈을 가지고 있는진 몰라도 사람 보는 눈은 없는 것 같았다. 기분이 나쁜데 좋은 말 나갈리 없었다. "이쪽은 내 마누라요." 그제서야 눈이 동그래지는 노인. "흠..흠.. 그런가. 노부는 석숭(碩崧)이라 하네. 조그만 상업을 하고 있지. 그런데 소형제는 어디서 이렇게 아름다운 부인과 함께 와서 어디로 가는 가?" 서혜령과 천인문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석숭을 쳐다봤다. 말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말이 안되는 말을 하는 석숭이 우스웠다. '저 놈의 노친네. 꼴에 자기도 남자라고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감히 내 마 누라를 넘봐. 아까 돈 많이 받게 해줘서 좋게 봐 줬더니만.' 이런 노친네하고 더 이상 얘기 하기 싫은 천인문. 흥 하는 콧방귀만 날리며 고개를 돌렸다. "여보 마누라야. 그만 가자" 서혜령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발길을 옮겼다. 한참을 걷던 혜령 은 갑자기 우뚝 서 버렸다. "왜 그러는거야" "어쩜 그러실 수 있어요. 상공. 일면식도 없는 남자 앞에서 제 가슴을 그렇 게.... 흑흑 ㅠ.ㅠ" 갑자기 서러운지 어깨를 들썩이는 혜령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굽히고 들어가긴 싫었다. 한참을 고민, 고민, 고민 하면서 머리를 쥐어짜 던 천인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색시야, 미안해" 애교 모드는 '부인' 이나 '마누라' 보단 '색시야' 가 잘 통한다는 걸 이미 꿰뚫 고 있었기에 한마디 던졌고, 솔직히 별 기대 하지 않았던 그녀는 천인문의 반 응에 대 만족이었다. "그런데 이쪽은? 서하룬가 뭔가 하는 곳으로 가는 길이 아니잖아" "그렇네요. 그럼 돌아 가죠" "아니. 돌아가기 싫어. 아까 그 영감탱이 눈빛이 맘에 안들어. 그쪽으로 가 면 또 봐야 할 껀데. 감히 내 마누라를 넘봐" 낭군이 질투하는 모습을 본 그녀는 상당히 기분이 좋고 또 귀엽다는 생각 도 들었다. "색시야 이쪽으로 가자" "네~" 그녀는 그가 가르키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장은 내일이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곳이 문을 열고 있었다. 하지만 열었다곤 하나 실제로 거래를 하는 사 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천인문은 혜령의 등에 매달린 채 주위를 둘러보며 눈을 번뜩였다. '저기도 한명 있고, 흠 에구 이번엔 저쪽이네.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야. 짜증나게시리. 헛 사람이 이젠 없다? 좋았어 때는 이때다'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는지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자 천인문은 바로 손을 뻗혔다. "어헉. 뭐하는 거에요 지금" "뭐하냐고? 아까 색시가 그랬잖아. 한번도 본 적 없는 사람 앞에서 가슴 만지 지 말라고. 그래서 지금 만지잖아." 능글맞은 말투였다. "그 말이 아니잖아요" "뭐가 아냐. 분명히 색시는 그렇게 말했어. 그리고 남편이 마누라 가슴 좀 만 지는게 뭐가 잘못 됬어?" "안되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렇게 하는 것은 잘못 된 거에요" "저..정말?" "네" 상당히 단호한 어투. "지..진짜?" "네" "흐..흑.흑흑. 우에에에에에엥" 천인문은 그녀의 등에서 내려 땅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 울기 시작했다. 내공 을 조금 실었기에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고, 삽 시간에 거리는 엄청난 인파로 북석 거렸다. "꼬마를 울리다니. 쑤근쑤근" "저런 싸XX 없는 X. 쑥덕쑥덕" "역시 인물값. 쏙닥쏙닥" 장난일 거라 생각했는데 울음은 그치질 않고 눈물이 후두두둑, 사람은 복작 복작. 서혜령은 정신이 없다. 사람은 자꾸 더 몰려드는데 천인문은 멈추지 않 고, 안달나기 시작한 혜령. 앞 뒤 가릴 것 없이 그냥 제안을 했다. "죄송해요. 상공. 제가 잘못했어요. 소첩이 죽을 죄를 졌어요. 용서해 주세 요" "정말?" 당장 울음을 그치는 천인문. 그제서야 당했다는 느낌의 서혜령. "그럼 업어줘" 당했다는 걸 알지만 어쩌겠는가. 그냥 포기하는 서혜령. 사람들은 구경거리 사라졌다는 듯 우르르 몰려가고 천인문은 다시금 전용 좌석에 앉았다. 모든 사람이 사라지자 이제 다시 당당히 그녀의 가슴으로 손을 뻗는다. '키키킥 드디어 작전 성공이다' -7- 7. 시장에서 한 사내아이가 여인의 등에 업혀 시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바로 천인 문과 서혜령이었다. 오늘은 장이 선 날이라 그런지 시장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이쪽 저쪽에서 노점상들이 땡볕 아래 자리잡고 술, 고기 같은 것을 팔았으며 조그만 악세사리를 파는 곳도 군데군데 보였다. 노점상이 아닌 건물로 지 어진 곳에서 파는 것도 있었는데 어제 시장에서 보지 못한 물건들이 많 이 나와 있었다. 그곳은 거의 옷이나 가죽, 마구(馬具)와 같이 무거운 물품 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은 마치 인종 전시장 같았다. 일반적인 중원인들은 겨우 2할에도 미 치지 못했으며, 그 나머지는 일할을 이룬 색목인들을 제외한 비슷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었다. 바로 투르판 족, 위구르족, 서하족, 몽고족 등이었다. 이 지방은 원래 치안이 유지되기 힘든 곳이었다. 생각과 행동이 다른 여러 민족이 모이다 보니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항상 피를 보는 싸움에 심하면 목숨도 잃었다. 하지만 제대로 무공을 배운 사람들은 거의 없었기에 일방 적인 학살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되다 보니 불안을 느낀 사람들이 장에 오길 기피하게 되고 자연스 럽게 장의 크기가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자치 치안대가 생 기고 그 결과 장의 크기는 예전처럼 되었다. "저쪽으로 가자. 색시야" 색시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은지 자연스럽게 말이 나왔다. 그녀도 맘에 드는지 미소를 띄며 그쪽을 향했다. 그 곳에는 사람들이 많이 북적대고 있 었다. 일반 시장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하지만 여기선 보기 어려웠던 호객 행위를 하는 곳이었다. "자, 쌉니다. 싸요. 이런 물건들을 이정도의 가격에 살 수 있는 곳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한 사내가 침을 튀기며 물건을 선전하고 있었다. 생긴 것은 꼭 산적처럼 수염이 더부룩 했고, 왼쪽 뺨에는 긴 흉터가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실없이 웃는 모습은 영락 없는 장삿꾼이었다. 그가 팔고 있는 물건들은 모 두 귀걸이나 반지 같은 장신구들이었는데 얼핏 보기에도 고급의 물건들이 었다. 그는 사방을 매우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떠들다가 인파를 가르고 들어오는 혜령을 보자 순식간에 절을 했다. "아이구. 정말 아름다운 아가씨군요. 이리 와서 이걸 보십시요. 정말 아름다 운 장신구들이죠. 아가씨께서 하신다면 정말 잘 어울릴 겁니다. 한번 보십 시요." 천인문이 보기에도 상당히 좋은 물건들이었다. 재료는 제쳐 두고서라도 일 단 그 세공이 상당했다. "색시야, 하나 사 줄까?" "아네요. 괜찮아요" 살짝 웃으며 말하는 혜령을 보며 천인문은 그럴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자고로 여자는 시집을 갔으면 머리를 올려야지. 색시 처럼 축 늘어뜨리면 안돼." 확실히 그녀의 칠흑같은 머리는 그냥 허리까지 늘어져 있었다. 그게 더 예 쁘게 보일 때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업혀 있을 땐 걸리적 거리기 일쑤였던 천인문은 머리를 올리게 하려고 궁리를 했던 것이다. 빤히 바라보는 사람들 의 시선을 무시하고 노점판 위의 장신구를 보던 그의 눈에 한 가지가 걸렸다. 그것은 비녀였는데 옥으로 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옥이 옅은 녹색을 띄고 있 으나 그것은 연한 파란색을 지녔다는 것이 좀 색다르긴 했지만, 멋진 세공이 되있었다. 한 마리의 새가 날아가는 듯 날개를 쭉 펼친 모양이 세공이 되 있 었는데 상당히 고가품일 것 같았다. "아저씨 저 비녀 좀 보죠" 혜령을 빤히 쳐다 보는 상점 주인이 눈을 반짝이다 그 말을 듣자 냉큼 물건 을 가져 왔다. "부인께 선물하시게요.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이 물건으로 말씀 드릴 것 같 으면 산동...." 더 놔두면 귀찮아 질 거라 생각한 천인문은 손을 흔들어 말을 끊고 비녀를 살핀 후에 물었다. "이거 얼마죠?" "...이건 조금 비쌉니다. 한 은자 5냥은 주셔야 되겠습니다만..." 은자 30냥까진 예상하고 있던 천인문은 겨우 5냥이란 말에 실소하며 말했 다. "색시야, 돈 좀 줘. 이거 사야겠다. 예쁘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혼자서 말하곤 그녀의 등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업혀 있어도 돈을 꺼내는 데 무리가 없던 그녀는 그가 내리자 이상하게 생각은 했 지만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대금을 지불하고 물건을 받은 천인 문은 다시 비녀를 그녀에게 전했다. "자 색시야. 이거 빨리 해 봐" "여기서요?" "그래. 어서어서 해 봐" 어색하다는 듯 망설이는 그녀에게 닥달을 해서 비녀를 차게 하자 그녀는 어 쩔 수 없다는 듯 머리카락을 위로 땋아 올린 후 비녀를 꽂았다. 그녀가 머리를 올리자 사방에서 <우와~, 헉!> 하는 소리와 넋이 빠진 남자들의 침 떨어지는 소리가 뚝뚝 하고 들렸다. 머리를 올린 그녀의 모습은 이루 말하기 힘들었다. 머리카락에 가린 가늘고 흰 목선이 고스란히 드러났고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마치 선녀 같았다. 그녀의 모습에 같이 넋이 나간 천인문도 평소 같으 면 사방의 남자들을 째려 보았겠지만 그도 이미 그녀의 모습에 넋이 나가 버린 상태.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다시 그녀의 등에 업히려고 하던 찰라 무언가 빛이 천인문의 눈을 찔렀다. 그것은 햇빛에 반사되어 빛난 장신구 중 하나였 는데 바로 귀걸이였다. 그냥 보기엔 별거 아니었지만 찬찬히 살피니 일반적 인 귀걸이와는 달리 음각으로 봉황이 새겨져 있었다. "아저씨 이 귀걸이는 얼마죠?" "예? 아 그거요. 그건 은자 한냥이면 됩니다." "이것도 살께요" "아 그러시다면 이것도 잠깐 봐 주십시요. 이건 여기 있는 이 팔찌와 한 쌍 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알았어요. 알았으니 그 팔찌도 같이 주세요" 주저리 널어놓기 시작하는 말을 끊고는 바로 두개를 구입했다. 바로 몸을 돌 려 그녀에게 팔찌와 귀걸이를 채웠다(?). 그녀는 팔을 덮은 옷을 끌어올린 뒤 팔찌를 차고 귀걸이를 했다. 다행히 귀걸이는 귀를 뚫을 필요 없이 찰 수 있었 기에 바로 찰 수 있었다. 뭔가 좀 어색하다는 생각이 든 천인문은 그녀를 차 분히 살폈고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옷이었다. 허름한 옷이란 게 문제가 아 니라 그녀와 그가 입은 옷은 추운 곳에서 입는 품이 작은 옷이었다. 거기다 군데군데 동물 가죽으로 기운 부분이 눈에 거슬리기도 했다. 이 더운 지역에서 그들과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남자들은 어 깨 쪽이 아예 없는 옷을 입고 있었고, 여인네들은 비록 팔목까지 덮는 옷을 입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품이 상당히 넓어 바람이 통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떤가. 비록 천인문의 옷은 반팔 처럼 되 있다고는 하지만 그 옷은 자신의 몸에 맞게 잠시 접은 것이고, 그녀의 옷은 그렇지 않았다. 비록 그와 그녀가 심후한 내공으로 더위를 못 느낀다고는 하지만, 어색한 건 어쩔 수 없 었다. 이 기회에 옷이나 사야겠다고 맘 먹은 천인문은 다시 그녀의 등에 업히어 포목점(布木店)을 살폈고 바로 눈에 띄는 한 가게로 갔다. 그들의 뒤에 시 기와 한 숨 섞인 소리를 뒤로 한 채. -8- 가게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이 마을과 인근 부락에 사는 사람들 대다수는 옷가지들을 집에서 만들어 입다 보니 이런 옷 가게가 클 필요가 없다. 심지어 옷 가게란 개념이 없는 곳도 있다. 그래도 서쪽 지방에서 제법 큰 도시였기에 이정도의 가게라도 있는 것이었지만, 옷 뿐만 아니라 옷감과 같은 다양한 것을 파는 한마디로 말해 잡화점이나 다름 없었다. "어서 오세요" 가게 구석에 앉아 부채로 땀을 식히던 중년 아낙이 일어나 다가왔다. 상당 히 풍성한 몸집에 넉넉한 인상을 지닌 여자였다. 천인문은 혜령의 등에서 폴짝 뛰어 내린후 진열된 옷들을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거의 모두 다 대동 소이 했고, 거기다 모두 흰색이었다. "흰 색 말고 딴 건 없나요?" "있긴 하지만 몇가지 않되요. 함 보실라우?" 그녀는 잠시 뒤쪽의 쪽문을 열고 나가더니 몇 벌의 옷을 가지고 왔다. 옅은 파란 색깔과 회색의 옷들이다. 모양은 앞에 보았던 것과 유사했고, 질도 그리 양호한 것은 아니었다. 아낙이 가지고 나온 것도 역시 마음에 쏙 드는 것이 없기에 천인문은 사야될지를 고민했다. 그러나 남편의 고민은 아내가 아는 법. 역시 천인문의 고민을 해결한 것은 혜령이었다. "이걸로 하면 안될까요?" 어디서 가져왔는지 서혜령의 품에는 한벌의 옷이 들려 있었다. 천인문은 그 녀가 먼저 무언가를 이야기 한 적이 별로 없었기에 잠시나마 흠칫했지만 그 저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하며 그녀가 가져온 옷을 보자 왜 그녀가 이 옷을 골랐는지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녀가 든 옷은 마치 천산 지방에서 입던 옷과 유사한 점이 몇군데 있었다. 자신이 입을 것도 아니었고, 또 혜령이 마 음에 들어 하는 것 같자 천인문의 고민도 끝이 나버렸다. 서혜령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옷값을 계산하고는 가계 문을 나섰다. 왜 당신 옷은 안사느냐는 혜령의 질문에도 천인문은 그냥 '헤헤' 거리며 얼버 무릴 뿐이었다. 장을 돌던 천인문과 혜령이 서한루에 들어 간 때는 막 해가 서쪽으로 기울던 4경 초였다. 그들이 객잔에 들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서령촌을 뜰 차비를 하 고 있었다. "어서 오게나. 그래 구경은 잘 했고?" 객잔 이층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천인문의 눈쌀이 찌푸려졌다. 목소리의 주인 공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어제 만났던 석숭이다. "빨리 자네도 준비 하도록 하게나. 이제 반 시진이 지나면 우리도 출발해야 할 터이니" "네 알겠습니다. 어르신" 천인문의 속을 잘 알던 서혜령이 답을 하고는 잡아 둔 방으로 들어갔다. "빨리 갈아입고 준비하자, 색시야" 그녀의 얼굴이 달아오르며 옷을 갈아 입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 천인문은 어 제 서하루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서하루에 들어가자 낮에 객잔에서 본 그 사람들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마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다. 모든 남자 가 혜령을 훔쳐가려는 도둑으로밖에 보이지 않는지라 그리 기분이 좋지 않은 천인문은 속으로 비꼬며 방으로 올라가고 있을 때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 보시게 천공자. 다시 보는구만. 이쪽으로 좀 앉지 않겠나" 낮에 속을 다 뒤집었던 석숭을 다시 보는 순간 열이 머리 끝으로 치솟아 올랐지만, 석숭의 자리에 놓여진 음식을 보는 순간 그것은 머리에서 싸그리 사라지는 천인문이었다. 음식에 눈이 먼 천인문으로선 성이 천인이라 말 해 야겠다는 생각도 다 사라져 버렸다. 석숭의 옆에는 사십대 중반의 멋진 수염을 기른 황의(黃衣)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눈은 크고 뚜렷하며, 턱은 각이 져서 한눈에 사내다운 기세를 느낄 수 있는 인물이었다. 탁자 위에는 3치의 폭에 2자가 조금 넘는 중도(中刀)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서혜령과 천인문이 석숭과 중년 사내의 맞은 편에 앉자 석숭이 다시 손을 들어 중년인을 가르키며 입을 열었다. "내 소개하도록 함세. 이쪽은 쾌도난마(快刀亂魔) 송원기(宋遠箕) 대협이시 네" "반갑네, 천공자" 천인문이 오기 전에 이미 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는지, 자연스럽게 인 사를 보냈다. "네, 이렇게 뵙게 되니 정말 반갑군요" 중원의 인사법을 잘 모르는 천인문으로서는 이것이 다였다. 혜령은 그냥 고 개만 까딱임으로 자신이 천인문에 속해 있음을 밝혔다. -쾌도난마(快刀亂魔), 흥 쾌도난마가 아니라 쾌도난무(快刀亂武)겠네- 기분이 좋지 않은 천인문. 당연히 그가 소개 시킨 송원기에게도 좋은 감정이 생길 수 없었다. "자네도 여기 묵는 줄 몰랐네. 그러고 보니 상당히 인연이 깊은 모양일세 그려 허허허허허" "자네가 부럽군. 이렇게 아리따운 부인을 맞아 여행이나 하고" 넉살이 좋은지 석숭과 송원기는 웃으며 얘기를 꺼냈다. 하지만 관심도 없는 천인문은 그냥 앞에 놓인 음식이나 깔짝대고 있었고, 그 모습에 석숭과 송원 기는 머쓱해 졌다. "자네도 여기서 계속 머무를 것은 아닐테고, 아마 중원으로 들어갈 모양이군" 실없는 소리는 듣기 싫다는 무언의 시위를 하던 천인문의 귀가 솔깃해졌다. "네. 당연히 여기까지 온게 중원에 들어가기 위해서 온거죠. 안그러면 왜 왔 겠어요" "그럼 자네도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지나가겠구만. 내일 장이 끝나고 나면 우 리도 중원으로 갈텐데 같이 가지 않겠는가" 당연히 같이 가고 싶지 않은 천인문. "아니요. 그냥 서장으로 해서 구경을 한뒤에 중원으로 갈려구요" "하지만 지금 서장으로 가기엔 너무 위험할 텐데" "아니 왜요" "지금 서장에는 포달랍궁(布達拉宮; 包達拉宮로 쓰기도 하는 곳으로 서장(티벳) 황교의 법왕 달라이대라마 거주하며 집무하던 궁전으로 서장 무예의 총본산이 다)과 뇌음사(雷音寺;천축에 있던 밀교 사찰로 대승불교적인 곳이다)간에 한창 싸움이 한창이라 지금 가면 위험할 껄세." "싸움이요" 천인문은 싸움이란 말에 귀가 솔깃했는지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그래. 상당히 치열하다고 들었네. 그런데 지금같은 때 서장으로 들어간다는 것 은 상당히 위험하지. 거기다 자네는 이렇게 아름다운 부인을 두고 있지 않은가 만약 포달랍궁에서 나온 라마들을 보게 되면 어쩌려구 그러는가" "라마들이 왜요?" 라마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천인문으로서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 었다. "라마들이 결혼을 한다는 것도 못 들어봤는가. 자네 부인같이 아름다운 여자는 그들에게 걸리면 그날로 끝장나는 걸세" 석숭이 보기 싫어 서장으로 가겠다고 한 천인문은 석숭의 말에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서장이 보기 싫은 것은 아닌데. 하지만 그 땡중들이 내 마누라를 보고 침 흘 리는 것은 더욱 못봐주지. 에구 그래도 저 놈의 영감탱이가 내 마누라 보는 것도 싫은데. 그냥 서장으로 가버려. 가서 침 흘리고 덤비는 놈들은 그냥 다 때려잡 으면 되지 않을까. 아니야 그렇게 귀찮은 짓을 어떻게 계속해. 우와~~~ 머리 아퍼- 앞에 놓인 물잔을 들고 마시던 서혜령은 갑자기 혼자서 머리를 쥐어 뜯기 시작 하는 천인문을 뜯어 말렸다. 하지만 이미 손에는 두뭉치의 머리카락이 수북히 잡혔고, 머리에는 구멍이 두군데 생겨 버렸다. 천인문은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손에 있던 머리카락을 탁탁 털고는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럼 노인장과 같이 가도록 하지요." "잘 생각했네. 서장으로 가서 고생을 하는 것보단 나하고 같이 중원으로 들어 가는 것이 훨씬 편할껄세. 우리는 내일 장이 끝나고 오경 쯤 여기서 출발 하도 록 할 것이네" 석숭은 천인문에게 내일 준비할 것과 떠날 시각을 얘기했고, 더 이상 들을 것 이 없다는 듯 천인문은 서혜령의 손을 잡고 방으로 올라갔다. "상공 준비 다 됬어요" 혜령의 부르는 소리에 다시 정신이 든 천인문은 앉아 있던 침대에서 벌떡 일 어섰다. 옥비녀와 귀걸이, 팔찌에 새로 산 옷까지 입은 혜령을 본 천인문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자 그럼 내려갈까" 함박 미소를 입에 건 천인문은 다시 혜령의 등에 매달렸다. -9- 작열하던 태양이 그 기세를 다하고 서쪽 지평선으로 사라질 즈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사막의 입구에 나타났다. 아지랭이를 뿜어 내며 이글거리는 모래땅은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고, 그 위로 지나가는 낙타는 무엇을 맛있게 먹어대는지 열심히 우물거리며 걸어가고 있다. 백삼을 입은 삼십 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낙타 위에서 꺼덕대는 모습은 술취한 사람들 마냥 불안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떨어지는 사람도 없 었고 그리 불안에 떠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천인문과 서혜령 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절대로 혜령의 등에서 내리지 않겠다고 우기던 천인문도 사막을 지 배한다는 자칭 사사객(沙似客)이라 우기는 투르판 안내자 타센(투르 판 말로 운수 대통이란 뜻)의 말에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등에서 내 릴 수 밖에 없었다. 자기와 그녀를 합친 무게는 얼마 안나간다고 우 겨도 봤지만 두명이 타면 낙타가 죽는다는 말을 듣자, 낙타에 대해 서 아무것도 모르는 천인문으로서는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둘 사이를 시기와 질투어린 눈으로 쳐다보던 일꾼들과 호위병들은 타센의 조치에 날아갈 듯 기쁜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 어쩔 수 없이 천인문 혼자서 낙타의 등에 올라탔다. 하지만 그 씁쓸 했던 기분은 높은 곳에서 바라본 새로운 세상으로 인해 훨훨 날아가 버렸다. 오랫만에 천인문으로부터 해방된 혜령의 기분도 마찬가지였 다. 그런데 아뿔사. 그들은 낙타같은 탈것에 대해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 었다. 오른쪽으로 휘청. 왼쪽으로 휘청. 낙타의 한 발짝 걸음에 머리는 앞뒤 로 휘청. 엉덩이 쪽에 천을 대어 두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일각 쯤 지나자 허벅지며 엉덩이며 안아픈 곳이 없었다. 거기다 어찌나 흔들 리는지 머리는 아프고 속은 메쓰꺼웠다. "서두르게나. 오늘 계획으론 아직 이 십여리는 더 가야만 하네" 이 행렬의 호위를 담당한 송원기의 목소리가 행렬 사이로 울려 퍼졌 다. 호위 무사들은 비록 송원기에게 몸을 의탁한 것은 아니었지만 강 한 자를 최 우선으로 하는 사막의 법칙에서 그의 말을 거스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조금씩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송원기는 말을 끝내자 마자 천인문과 혜령의 사이를 가르며 낙타를 몰고 왔다. "어떤가. 첫 사막 여행인데 제법 힘들지 않은가" 어딘지 모르게 떠오른 송원기의 비웃음 같은 얼굴을 본 천인문이 기 분이 좋을 리 없었다. 꼭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은 얼굴이다. 지고 싶 지 않다는 생각이 머리를 꽉 채우기 시작했다. 한 바탕 푸닥거리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긴 했지만 뒤에서 혜령의 눈치로 인해 속으로 삭힐 수 밖에 없었다. "아직 그리 어려운 것은 없군요. 그러고 보면 별로 어려운 것 같지도 않네요" "그렇게 생각하는가.솔직히 우리야 일년에 두번 정도 사막을 가로지 르다 보니 이 사막에 대해선 어느정도 알고 있지. 다행히 4월에다 용 권풍도 불지 않고 있고, 니아(尼雅) 부근만 잘 지나가면 별 고생 없이 끝날 듯 하네. 하지만 편하게 간다고 사막을 우습게 여기지 말게나. 이 타클라마칸 사막은 이름이 위구르 말로 빠져 나갈 수 없다는 뜻이지. 그정도로 무시무시한 사막이네. 경험도 없는 사람이 함부로 들락 거릴 만한 곳은 아니란 말이지" "흥. 사막이 뭐 별건가요. 그냥 모래만 쌓인 곳인데. 그냥 물하고 음식 만 많이 준비하고 안내자 한명 데리고 가면 되지...." 둘 만의 달콤한 여행을 기대하고 있던 천인문에게 이 일행은 방수(幇 手)가 아니라 웬수로 보였다. 한 자나 삐죽 튀어나온 입에서 나온 말도 험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험지에서 별별 일을 다 겪은 송원기에겐 잔뜩 삐진 아이가 투정을 부리는 것과 다름 아니었다. 큰 소리로 웃음 을 터트리며 맞장구를 쳤다. "우하하하하. 그래 소형제의 호기가 맘에 드네. 그렇지. 물과 음식 안 내자 한명이면 충분하고 말고" "그런데 아까 니아라고 하셨는데 니아가 어디죠?" 딴 남자에겐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것 같던 혜령이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새로 산 옷과 팔, 귀에 한 장신구는 이미 모래 먼지로 더럽혀 져 있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는 송원기였다. "니아라는 곳은 여기서 100여리 쯤 떨어진 곳에 있는 수연(水淵;오 아시스)이죠. 이 타클라마칸 사막에도 여러개의 수연이 있는데 그런 것들은 보통 바람과 유사(流沙)들로 인해 한 곳에 가만 있는 경우는 드물죠. 하나 이 니아는 크기도 상당히 클 뿐더러 계속 그 자리에 있 습니다. 그래서 이 사막을 돌아다니는 대상들은 보통 이 쪽을 이용하 고 있는 거죠." 해는 이미 사라지고 사방은 어두워 지자 이야기를 주고 받던 송원기 는 석숭쪽으로 몸을 향했다. 석숭은 낙타를 타고 짐마차 옆에서 이동 하고 있었다. "석대인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정도면 상당히 좋긴 하군. 오늘은 이쯤에서 쉬도록 하지" 석숭의 결정에 송원기는 목소리를 높혀서 휴식을 외쳤다. 곧 일행은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일꾼들은 천막과 가져온 땔감으로 모닥불을 피웠고, 이십여명의 호위무사들은 송원기의 지시에 따라 불침번을 나누었다. 한 시진씩 4명이 각각의 방위를 책임 질 수 있는 곳을 찾 아갔다. 일반적으로 사막을 떠도는 사람들은 천막과 같은 무거운 것은 잘 이 용하지 않았다. 무리가 많을 땐 별 문제가 안되지만 두,세명이 가는 길 에 무거운 천막은 쓰지 않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냥 모래를 파고 그 속으로 들어가 밤을 세우던지 모래바람을 막을 수 있는 긴 이불로 몸 을 둘둘 말고 불 옆에서 밤을 나는게 대부분이었다. 다행히 천인문은 석숭에게 긴 천을 받아서 불 옆에 몸을 뉘울 수 있었다. 양 사방에서 쳐다보는 무시무시한 눈빛을 모두 무시하면서 천인문은 혜령과 함께 천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두 시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동안 낙타 위 에서 엄청 고생을 한 천인문은 뱃 속 거지들의 아우성에도 굴복하지 않고 잠을 청했다. 모닥불이 있다고 하지만 슬슬 엄습해 오는 추위에 서로의 몸을 꼭 끌어안고는 잠 속으로 빠져 버렸다. 잠시 후 천인문이 완전히 잠이 든 것을 느낀 혜령은 이불에서 살짝 빠져나와 식사 준비를 하는 곳으로 갔다. 남자들만의 요리에 여자가 그것도 눈부신 미모의 소유자가 해준 음식은 그들 생의 최고의 요 리였다. 무사들과 일꾼들은 고개를 돌려 모닥불 옆의 천인문에게 원 독에 찬 눈초림을 마구마구 보냈고, 그 댓가로 꿈속에서 엄청난 칼 질을 당하는 천인문이었다. 타클라마칸 사막 한편에 서 있는 암산. 높이는 십 장 정도 밖에 되지 않으나 그 길이가 육십 여장의 암반으로 되 있는 산이라 부르기 뭐한 암벽이었다. 북서쪽에서 밀어 닥치는 모래 바람을 막아주는데다 암 반 밑에서 솟아오르는 조그만 샘으로 인해 이 험한 사막에서 살아갈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이다. 거기다 그 위치가 워낙 교묘해 아는 사람 도 거의 없었다. 이 곳에 누가 살고 있는지 네 개의 큰 천막과 낡은 돌 집이 드문드문 놓여 있다. 원래 이곳은 삼 백년 전에 사막의 지배자로 통했던 광혈사(狂血沙) 가 거주하던 곳이었다. 사막에서는 무적의 단체로 통했던 그들이었 으나 중원으로 향하던 포달랍궁의 대 달라이라마였던 마불승(魔佛僧) 에 의해 무릎을 꿇은 후 그들의 주구가 되었다. 그 결과 당시 중원의 제 일 고수였던 천존무제(天尊武帝)와 무림맹에 의해 괴멸되어 버렸다. 그 이후로 주인이 없이 방치되어 있던 이곳에 사람이 든 것은 팔 년전 이었다. 영락제(永樂帝)가 치세한 이후로 발 붙일 곳이 없던 섬서성(陝西 省)의 마적단들이 옥문관(玉門關)을 넘어 자리를 잡은 곳이 이곳이었 다. 삼백이 넘던 수도 관군에 쫓길 때 거의 다 잃고 이제 남은 수는 오 십이 조금 넘는 숫자만이 남아 이곳으로 도망쳐 왔다. 이곳을 찾은 것은 하늘의 은혜에 다름 아니었다. 비록 수는 엄청 줄 었지만 더 이상 피신 생활을 할 필요도 없었거니와 이젠 부활의 날개 짓을 하기 시작했다. 채광(寨曠)은 요즘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것은 광혈사의 주인 인 비발도(飛髮刀) 요금(窯錦) 때문이었다. '으이구 내가 미쳤지. 왜 하필 구한 책들중에 그런 게 섞여 있는 거 야' 그의 고민은 간단했다. 쓸 때 없이 충성한답시고 구해준 물건 때문 에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소린고 하니.... 팔 년전에 여기 들어 앉기 전까지만 해도 이들은 그냥 마적단들이었 다. 일반 양민들에겐 무시무시한 위용을 뽐낼 수는 있었지만 이 사막 에 들어오고 보니 안전한 반면 그만큼 장사는 되지 않았다. 현 상황으 로는 장사를 하긴 어렵다 생각한 요금은 남은 오십 여명으로 광혈사 를 새로 개편을 하기로 했다. 당시 채광은 이 마적단에 들어온지 두달 밖에 되지 않는 신참이었 다. 무공은 그리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머리는 제법 잘 돌아가는 인 물이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이번 개편에서 한 자리 잡아 볼 생각이었던 채광은 도피 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진급에 도움이 될 만한 물품들을 모으고 있었다. 정력에 좋다는 여러 약재들과 제법 반반한 여자들. 이렇게 요금의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갖다 바쳤지만 그 중에 제일 압권이었던 것은 바로 춘화였다. 무공과 밤기술은 비례하는 것이 아니었던지 오십이 넘은 요금의 도법 솜씨는 상당히 매서웠다. 하지만 그만큼 강해야 할 정력은 완전히 반대였는데. 한번은 잡아 온 유부녀를 요금에게 받쳤는데 제발 살려달라며 눈물을 흘리며 울부 짖던 그 여인이 그다음날 방 에서 '야이 토끼 xx야. 왜 사냐. 나가죽어라' 하는 말을 하고 뛰어 나온 일도 있었다. 그 이후로 요금의 별명은 '토끼' 가 되어 버렸다. 당연히 남자의 자존심은 꺽여 버렸고, 밤을 무서워하는 사내가 되 버린 요금. 채광은 이런 요금의 약점을 잘 파고 들었다. 밤을 지배 할 수 있는 기술의 원천을 제공한 것이었다. 딴 수하들도 여자와 약 같은 것을 선물하긴 했지만 그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 아니었고, 요금에게는 또 다른 여자에게 토끼란 말을 들으라는 말 밖에 안들렸다. 그런데 이 채광이란 녀석이 간지러운 곳을 시원하 게 긁어 주듯이 춘화 같은 것을 제공하자 귀여워 할 수 밖에 없었 던 것이다. 당연히 채광은 눈부신 직위 상승을 했고 신참일 때 보기 힘들었던 여자들을 매일 옆에 끼고 잘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무언가 잘못 된것인지 갑자기 여자들이 죽 어 나가기 시작했다. 요금의 신임으로 바로 이 인자의 위치에 오른 채광. 평소 같았으면 요금이 싫증난 여자들은 채광의 손을 거쳐 그 밑으로 나누어 지는데 이건 자기의 손에 들어오기도 전에 요금의 손에서 죽어 나가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채광이 비록 여자를 광적으로 밝히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도 남자였다. 가끔 여자가 생각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자 구 경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 없게 되 버린 것이다. 이렇게 있을 순 없다 생각한 채광은 살짝 요금의 뒷 조사를 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그가 요금에게 준 춘화중에 하나가 춘도유(春導柳)의 쾌락도원(快樂 桃園)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춘도유(春導柳). 이백 여 년 전 나타난 채화음적으로 천여명이 넘어가는 여자들을 농 락한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자기만의 조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삼불(三不)이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안되고, 세번 이상 만나지 않고, 무림인과 관계된 여인은 안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음적들이 끝맺음이 암울했던 반면 그는 이 법칙으로 인해 자신의 수명대로 살다 갈 수 있었다. 아무리 무림인이 아닌 인물들만 건들였다고는 하지만 그의 기술이 워낙 좋았고 두번만 보고는 헤어지니 남편들도 부인의 불륜을 몰랐 고, 여인들도 신고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의 일을 추억 으로 삼고 사는 여인들뿐이었다. 채음보양(採陰保陽)의 수법으로 무 공도 상당했고 무림의 인물들과 관련된 여인들은 건들지 않으니 무림인 들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죽하면 그를 대 협객으로 아는 인물 들도 있었으니 더 이상 말할 것이 있겠는가.... 자신이 요금에게 준 춘화중에 춘도유의 채음보양 수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채광은 목숨을 걸고 요금을 찾았다. 자기 밑의 수하들도 쌓 인 욕구가 심했기에 어쩔 수 없이 찾은 것이다. 자신의 힘이 약하다 생 각한 것인지 아니면 적은 수하들을 다독거리기 위해선지는 몰라도 다행히 대화는 잘 되었다. 그들에게 잡힌 여자들 중에서 1일부터 20일 까지는 요금이 여자를 가지고 그 나머지 날들은 채광과 수하 들이 가지기로. 하지만 여자는 적고 사람은 많으니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채광으로서도 쌓이는 욕구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서령촌에 나간 엽궁 녀석이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엄청난 희소식 을 들고 말이다. "이건 상급중에서도 최상급. 아니 특.특.급 입니다" 침을 무섭게 튀기며 얘기하는 엽궁을 보며 채광은 생각했다. '여자를 안아 보지 못해 눈이 뒤집어 졌구만. 하지만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제법 반반하긴 한가 보군. 내일은 24일이니 이번 계집은 우리 것이군' "특.특.급까진 아니되도 상관 없다. 지금 우리에게 일급, 이급 가리게 생겼냐? 어디로 올 것인지 정확하게 알아 보도록 해라. 절대로 놓쳐서 는 안돼"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걱정 마십시요. 제가 확실히 알아 놓겠습 니다" "그럼 이만 나가 봐라" 몸을 돌려 나가는 엽궁을 보며 채광은 침상에 몸을 뉘었다. 내일 통과 할 곳을 예상하며 채광은 잠을 청했으나 마치 시집가는 새색시의 첫날 밤처럼 가슴이 벌렁거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10- 떨어지는 뙤약볕아래 한 무리의 낙타 행렬이 줄지어 이동하고 있 었다. 중천까지 뜬 해는 일행을 지켜보고 있었고, 쑥쑥 빠지는 사막 의 모래에서 찌는듯한 열기를 내뿜었지만 사람들은 뭐가 그리 좋은 지 입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분위기에 전혀 동참하지 못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천인문이었다. 오늘 천인문에 겐 최악의 날이였다. 해가 뜨기 전에 일찍 출발하지 않으면 낮에는 더욱 힘들다는 것을 모 르는 천인문은 해도 안 떴는데 출발한다고 짜증을 부릴 수 밖에 없었 다. 이동을 멈췄을 때 식사를 하는 것도 모르고 밥도 안준다고 투정이 다. 하지만 이것보다 천인문을 더욱 짜증나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 것은 바로 혜령의 술냄새였다. 아침에 심한 짜증을 내자 편안히 해 줘야겠다 생각한 혜령이 살포시 그를 안아줬다. 평소같으면 더욱 안으로 파고 들 천인문이 코를 쥐고 빠져 나가 버렸다. 그 이후론 아예 얘기를 하지 않는다. "상공 이제 그만 화 푸세요" 낙타의 배를 살짝 차서 앞서가던 천인문을 따라잡은 혜령이 입을 열 었지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냉소뿐이었다. 술기운에 붉어져 있던 혜 령의 얼굴은 더욱 붉어지는 것 같았다. 보다 못한 송원기가 앞으로 나섰다. "이보게 천공자. 이제 그만 화 풀도록 하게나. 솔직히 자네 부인에 겐 잘못이 없다네. 그냥 우리가 억지로 마시게 한 것 뿐이지. 자네 부 인은 마시기 싫다는 것을 우리가 억지로 마시게 하였네. 욕을 하려면 우리에게 하고, 화를 내려면 우리한테 내게나." "흥. 아저씨가 그렇게 말하니 저도 말 좀 해야겠어요. 왜 우리 색시야 한테 술 먹여요? 내가 지켜보지도 않는데 그 위험한 곳에서 술이나 먹이다니. 저기도 늑대, 저기도 늑대. 온통 늑대들 뿐인데 내 예쁜 색 시를 함부로 끌고 가요? 아참 그리고 난 천공자가 아네요. 내 성은 '천인' 이라고요. 다음부턴 천공자라 부르지 마세요. 흥" 그제서야 토라진 이유를 알게 된 송원기. 고개를 살짝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 -마누라를 끔찍히도 사랑하는 건가. 하지만 저건 사랑이 아니라 광기 어린 집착이구만. 어쨋든 저 부인만 괴롭게 생겼군- 송원기는 어젯 밤의 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무식한 남정네들만의 식사 준비에 어디선가 나타난 선녀같은 여인 이 솜씨를 부리자 그 인기는 말할 수 없었다. 혜령을 개똥 위에 떨어 진 꽃 한 송이라 생각하고 있던 그들은 그녀가 식사를 마치고 저 소악 마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잡고야 말았다.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술이란 얘기는 전염병처럼 삽시간에 퍼졌고 그 주인공은 바로 서혜령이었다. 성격이 모질지 못한 혜령은 그냥 잡혀서 이쪽에서 한잔, 저쪽에서 한잔 한다는 것이 몸을 가눌 수 없 을 정도까지 취해 버린 것이다. 다행히 송원기가 옆에 있었고 침을 흘리는 늑대들에게서 고이 천인문에게 양도를 한 것이다. 아쉬운 것 은 송원기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오늘 정오의 목표였던 니아까지 십 리도 남지 않았을 무렵 저 남쪽 에서 한 줄기 먼지 바람이 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행렬의 중앙에 서 있던 석숭은 고개를 들어 먼지가 이는 곳을 바라 보았다. -이상하군. 지금은 용권풍이 일 때가 아닌데- 이 상황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역시 송원기였다. 무공은 천인 문과 혜령보다 낮았지만 많은 경험으로 무슨 일인지 가장 먼저 알아 차린 것이다. "적이다. 모두 전투 태세로" 그의 말과 함께 호위무사들은 모두 낙타에서 내려서 사람을 태우지 않은 낙타는 맨 뒤로 보내고 짐을 맨 낙타와 석숭을 중심으로 빙 둘 러쌓다. "무슨 일이에요?" 천인문은 석숭과 송원기가 있는 중앙쪽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마적단들이네. 원래 이쪽에는 마적단들이 없었는데 언젠가부터 나타났다는 소문은 듣긴 했지만 설마하니 우리한테도 나타날 거라 곤 전혀 생각지 않았는데" 석숭이 눈쌀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어떡하실 건가요?" "그리 걱정 하진 말게나. 보통 이런 경우엔 조금 예물을 주면 보통 원만하게 잘 풀린다네. 거기다 쾌도난마 송대협도 있지 않은가" 송원기는 자기를 공중에 띄우는 석숭의 말에 너털 웃음을 터트리며 "하하하하. 어르신께서는 절 너무 띄우십니다. 하지만 저도 칼질 은 좀 하니 저정도 녀석들 쯤이야 그리 걱정 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 요. 저 먼지를 보아하니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닐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동안 저 멀리서 피어오르던 먼지구름은 순 식간에 다가 섰다. 말을 탄 사내들은 석숭 일행의 오 장 앞까지 다가 와서야 말을 세웠다. 송원기는 말 투레질과 함께 멈춰 선 일단의 인물 들을 차분히 바라 보았다. 대략 오십 여 명 남짓 되었는데 모두 도(刀)나 검(劍), 추(錐), 곤(棍)에 활까지 별별 무기를 다 들고 있었다. 하지만 무 기는 달라도 공통점이 있었는데 모든 사람이 흰 상의에 왼쪽 가슴에 붉 은 도(刀)의 그림이 있다는 것이다. -어!? 우리는 모두 낙타를 타고 있는데 저사람들은 전부 말을 탔네- 천인문의 사소한 생각은 마적단에서 터진 목소리로 인해 끝나 버렸 다. "흐흐흐! 우리는 이 사막의 지배자 광혈사의 어르신들이다. 겁도 없 이 광혈사 어르신들의 영역에 함부로 들어 오다니. 목숨이 아깝다면 가진 것을 내놓고 싹싹 빌도록 해라.그렇게 한다면 목숨만 살려 줄 것은 고려해 볼 수 있지." 마적단 내에 있던 갈색 말을 탄 한 사내가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앞 으로 나왔다. 그의 얼굴은 강도의 표본 그 자체였다. 칼자국이 왼쪽 눈에서 턱 밑까지 길게 그어져 있었고 무성한 수염이 얼굴의 반을 덮고 있었다. 말을 타고 앞으로 나선 사내를 보자 혜령은 그가 누구인지 바로 알 아 볼 수 있었다. 바로 서령촌의 장에서 귀금속을 팔던 장사치였다. 혜령은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며 천인문에게 말을 건넸다. "상공 저기 저 남자 어디서 본 적 있지 않나요?" "엥!? 산에서 내려온지 얼마 됬다고 벌써 딴 남자에게 눈을 돌리는 거야?" 술 먹은 것에 대한 화풀이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구분이 안가는 말을 톡 쏘아 붙였지만 혜령은 계속 말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저 사내 서령촌에서 귀금속을 팔던 장사꾼이잖아 요. 기억 안나세요?" "그래? 난 모르겠는데. 뭐 그래도 상관없어. 내가 까먹지 않아야 할 얼굴은 아버지하고 엄마, 그리고 우리 색시야 얼굴 뿐이야" "확실해요. 그런데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요. 시장에서 실실 웃던 모 습은 영락없는 장사치였는데 저렇게 웃으니 이번엔 확실한 도적이군 요" "사람은 직업이나 생각 같은 것들이 그의 얼굴과 몸에 나타난다고 울 아버지가 말했는데 그 말하고 같은 뜻인가?" "호호호. 그런가 보네요" 천인문과 서혜령은 계속 이야기를 하며 웃고 있었지만 석숭의 마음 은 그렇게 편하지 못했다. 산적들의 18번을 듣고 나자 중앙쪽에 서 있던 석숭이 낙타에서 내려 앞으로 나섰다. 그는 두 손을 마주잡으며 앞쪽에 선 인물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광혈사 나으리들. 나으리들의 높으신 명성은 잘 듣고 있었습니다. 오늘 제가 이렇게 나으리들을 뵙는 영광을 가지게 될 줄 은 정말 몰랐습니다. 저희가 나으리들께서 지배하고 계신 곳을 함부 로 들어올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부디 이 예물을 받으시고 화를 푸시 어 저희를 보내 주시겠습니까." 이런 일을 자주 경험했던지 석숭의 말은 그리 비굴하지도, 그렇다고 그들의 기분을 거스르지도 않는 적당한 수준이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다고 이런 말과 함께 예물을 바치면 보통 산적들은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를 한다. 그리고 석숭은 지금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말과 동시에 뒤쪽에서 큰 상자를 든 일꾼 두 명이 낙타 사이를 가 르며 앞으로 나섰다. 상자를 땅에 놓고 열자 그 안에는 작은 호피(虎皮) 한 장과 호피(狐皮) 두 장. 여러 약초와 향료, 귀금속들이 보였다. 채광은 광혈사의 뒤쪽에 서 있었다. 수하들이 열린 상자에 든 물건들 을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의 관심은 거기에 있 지 않았다. 엽광이 말한 천하절색(天下絶色)을 찾기 바쁜 그는 천천히 석숭 일행들 을 둘러보았다. 반쯤 둘러봤을까! 그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 저 년이 엽광이 말한 그 계집이구나. 이건 두목이 가지고 있던 그 계집 들하곤 비교가 안되는구만. 어디서 저런 계집이 숨어있다가 이제서야 나 타난 거지. 흐흐흐흐 오늘 밤 저 년이 외롭던 나의 밤을 밝혀 준다 이말 이지!? 크크큭 기분 좋군. 하지만 만약에 저 년이 두목의 눈에 들어간다 면 당장 뺏겨 버릴 텐데. 그리고 나한테는 두목이 싫증난 계집들을 주겠지. 숫자는 많지만 저런 기막힌 계집을 그냥 넘겨줄 순 없지. 어떻게 한다?! 옳지 들어갈 때 좀 못 생기게 꾸며서 데리고 가면 되겠군- 혼자서 김칫국을 벌컥벌컥 마시며 채광은 앞쪽에 서 있던 수하들에게 눈치를 보냈다. 신호를 받은 엽광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석숭 일행 을 다시 쳐다 보았다. "너희들이 우리 영역에 함부로 들어온 것은 용서 할 수 없지만 처음이 고 하니 우리가 원하는 것 한가지만 내 준다면 저기 물건들과 함께 고이 사라져 주지" "무엇입니까?" "저기 저 계집을 내 놔라" 엽광의 손이 혜령을 가르키고 있었다. 엽광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된 석숭은 그제서야 고개를 흔들었다. "안됩니다. 그녀는 저의 손님이나 다름 없는데...." "시끄럽다. 목숨이 중요하냐, 계집이 중요하냐. 하나만 결정해라. 뭐 거 절해도 좋다. 네놈들을 다 죽이고 완전히 물건을 다 가져가면 되니" 그제서야 사태를 완전히 파악한 석숭. 어색하지 않은 모습으로 발을 한발짝 뒤로 뺐다. 그와 동시에 어떻게 될지 짐작하고 있던 송원기는 왼 쪽 허리에 달린 중도를 뽑으며 외쳤다. "공격" 이미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있었던 무사들은 그의 말이 떨어지자 칼을 뽑았다. 제법 훈련이 되어 있었는지 십 여 명의 호위 무사는 송원기와 함 께 마적단 쪽으로 몸을 날렸고, 그 나머지들은 짐을 철통같은 태세로 둘 러싸며 다가올 공격을 대비하고 있었다. 사태가 어찌 돌아가는지 알고 있는 것은 채광 쪽도 마찬가지였다. 송원 기의 외침 소리와 동시에 채광의 입에서도 공격이란 명령이 떨어졌다. 마적단들은 과거 관군과의 전투에서 익힌 전술을 쓰기 시작했다. 곤(棍] 이나 창(槍) 같이 긴 무기를 든 인물들은 정면에 서고, 검이나 도를 쓰는 인물들은 좌우로 넓게 퍼졌다. 송원기는 지금 상황이 나쁘지는 않다고 여겼다. 비록 다수의 전투에선 장병(長兵)을 쓰는 쪽이 유리하다고는 하나 이런 모래 사막에서 더군다 나 말을 타고 저렇게 가까이 붙어서는 장병은 큰 효과를 보일 수 없다. 모래 위에서는 발로 뛰는 게 더욱 효과적이라 생각한 그는 십 여 명의 무사들을 독려하며 적의 중앙으로 파고 들었다. 긴 창을 쥐고 있던 두 명의 마적단들이 그들에게 다가오는 송원기를 향 해 창을 찔러 들어갔다. 절묘한 호흡으로 가슴과 허벅지를 찔러오는 창이 라 막기 힘들다 생각한 송원기는 왼쪽으로 몸을 돌리며 창을 피했다. 선극 참(仙極斬)의 초식으로 왼쪽에 있는 마적단의 빈 옆구리를 향해 도를 휘 둘렀다. 필사의 각오로 베어나갔지만 정작 벨 수는 없었다. 뒤쪽에서 들 려온 세찬 검 소리로 인해 자신도 끝까지 벤다면 등 뒤에 상처를 입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는 몸을 공중으로 뽑아 뒤쪽으로 내려 섰다. - 이거 생각보단 쉽지 않겠는걸. 개개인은 무공이 그리 높지는 않은데 상당히 훈련이 잘 되어 있군. 연수 합격이 상당히 멋져- 적이긴 하지만 좋은 모습을 보았을 때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 송원기였 다. 하지만 현재는 칭찬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자 신과 흡사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 쪽은 자신까지 12명. 적도들은 거의 삼십 여 명이다. 한 명에 세 명 이 들러 붙는 경우였다. 그렇다면 나머지 이십 여 명은? 이런 송원기의 생각은 마적단의 다음 행동에 의해 바로 풀려 버렸다. 채광을 중심으로 해서 뒤 쪽에 서 있던 이십 여 명의 마적단들은 그의 말 에 달려 있던 활을 꺼내 활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 붙은 화살 촉은 이십 여 명의 호위무사들이 지키고 있던 짐과 낙타를 향하고 있었다. '발사' 라는 채광의 명령과 함께 이십 여 발의 화살이 날아갔다. <쐐애액> "으악" "억~" 십 장 남짓 되는 거리에서 쏘아진 불 붙은 화살을 피하기란 쉽지 않았는 지 몇 명의 무사가 쓰러졌다. 살아남은 무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 지만 그 시간도 아주 짧았다. 불을 머금고 날라간 그 다음 화살들이 남 은 무사들을 꿰뚫었다. 쓰러진 무사들의 옷에서 검은 연기가 조금씩 피어 오르더니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불로 무사들의 몸을 태워 버린 다. "빨리 불을 꺼" 재수 없이 호위 무사들을 빗겨 간 화살이 낙타의 등에 매어둔 짐에 꽂히 자 바로 검은 연기와 함께 불에 휩싸였다. 일꾼들은 석숭의 지시에 마시 기 위해 준비한 물을 들어 부었다. 하지만 많은 물을 부어도 꺼지기는 커녕 불통만 이리 저리 튈 뿐이었다. '뭐지?' 하고 생각하던 석숭의 머릿속에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바로 '흑유 (黑油)였다. 이 타클라마칸 사막의 땅 속에서 솟아올라 샘을 형성하고 있는 검은 기름. 이렇게 물로 꺼지지 않는 것이 흑유 때문이란 것을 알아 차린 석숭은 곧바 로 외쳤다. "흑유다. 물은 안돼. 모래를, 모래를 끼얹어" 숨 넘어 갈 듯 다급한 석숭의 목소리에 일꾼들도 머뭇거리지 않고 발 밑의 모래들을 불 붙은 짐 위에 뿌렸다. 사막에 살다시피 하던 그들도 흑유에 의 해 타는 불은 물로 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하하하. 잘 알고 있구만. 그래 흑유지. 자 이제 어떻게 하겠느냐. 빨리 결정을 내려라." 완벽한 승리라 생각하는 채광의 입에서 최후통첩이 떨어졌다. 고개를 돌린 석숭의 눈에는 십 여 구의 불타는 시체와 송원기를 따라 마적단과 싸우는 십 여 명의 호위무사들이 잡혔다. 석숭은 이제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11- "좋소. 드릴테니 그만 하시오" 석숭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 찌푸린 얼굴로 대답하자 채광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그렇다면 물건은 두고 지금 당장 꺼져라" "말도 안됩니다. 지금까지 동행으로 같이 왔는데 이런 상황이 됬다고 그대로 내빼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석숭의 말을 들은 송원기는 싸우다 말고 몸을 돌려 석숭을 바라 봤다. "안되긴 뭐가 안되는가. 지금 우리쪽의 피해를 보게. 대 다수의 무사들이 죽고 다쳤네. 그렇다고 우리의 승리를 확신 할 수도 없 네. 그런데 그들을 지켜야 한다고? 그건 우리의 목숨을 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네" 맞는 말이었다. 송원기는 그의 말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거기 다 그는 상인이었다. 의리나 친분 같은 것은 상인의 이익에 앞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켜보던 혜령은 석숭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있을 땐 도움을 주고, 조금이라도 위험하다면 몸 을 사리는 평범한 사람. 석숭은 바로 평범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상공. 저들은 우리를 저 도적들에게 넘기려고 하나 봐요" "차라리 잘 됬네. 꼴 보기 싫었는데" 배신감에 치를 떨 거라 생각했던 혜령은 속 시원하다는 천인문을 이해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화를 내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자 혜령 도 다행이라 생각 했다. 천인문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이렇게 자기들을 버리고 가는 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혜령에게 군침만 흘리는 늑대들이었지만 자기에 게 조금 잘 해 준 석숭도 있었고, 그 비스무리한 송원기도 있었기에 패 버릴 수도 없었는데 이제 그들이 뜬다니 앓던 이가 쏙 빠진 느낌 이었다. 이젠 저기 대 놓고 군침을 흘리는 녀석들만 손봐주면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석숭은 일꾼들을 독려해 짐을 챙기고 낙타에 몸을 실어 휭 하니 내빼 버렸다. 이미 완전히 타 버려 알아보기 힘든 시체를 뒤로 하고 달아나는 석숭을 보며 송원기는 어쩔 수 없다는 표 정으로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이렇게 마적단들에게 그들을 넘기고 간다는 것이 미안한지 자꾸 뒤돌아 보고 있었다. "계집을 이리 대리고 오너라" 석숭 등의 모습이 저편으로 사라지기도 전에 채광은 부하들를 향해 명을 내렸다. "흥! 누구 맘대로" 천인문이 낙타위에서 몸을 날려 모래 위에 서자 바로 혜령도 그 옆으 로 내려 섰다. "꼬마야. 넌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오너라. 네 누나는 우리가 데리고 가마" 곤를 빗겨 든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지금까지 쌓인 게 많은 천인문이었다. 언제 이런 기회를 다시 잡아 보겠냐는 듯 아주 빠른 속도로 몸을 앞으로 내달렸다. 한 낱 꼬마가 이렇게 엄청난 속도를 보일 줄 몰랐던 마적단은 고사 리 같은 주먹에 가슴을 맞고 모래 위로 꼬구러졌다. 눈 깜박할 사이에 한 사내가 쓰러져 버리자 도를 들고 있던 네 명의 사내들이 앞으로 말을 몰고 뛰어 나왔다. "이런 꼬마 녀석이!" "죽어랏" "하늘에 가거든 저승 사자한테 오승 어르신께서 보냈다고 고하거라" 나머지 한 명은 앞에서 할 말을 다 해 버린 탓인지 그냥 칼만 들고 달 려 왔다. 천인문은 땅에 쓰러진 인물의 손에서 떨어진 곤을 주워 내공을 일으 키고는 달려오는 중앙의 인물에게 내던졌다. "에라이! 호랑이 꼬챙이다" 호랑이 꼬챙이란 천인문이 천산에서 호랑이나 사슴, 멧돼지를 잡는 방법 중에 하나였다. 처음에는 호랑이를 잡을 때 썼는데, 이 천산에 사는 호랑이는 대부분의 녀석들이 그렇듯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사냥 감에게 겁을 주고는 그 큰 아가리를 쫙 벌리고는 그대로 사냥감의 목 을 물어 뜯어 죽인다. 천인문을 공격했던 녀석도 마찬가지였는데 사냥을 위해 들고 갔던 나 무창을 그 큰 입을 향해 던져 꿰뚫은 적이 있었다. 요령을 터득하자 사 냥을 나가서 잡은 사냥감을 불에 굽기 귀찮을 땐 힘 조절을 해서 창을 살짝 던져 꿰뚫게만 해서 그대로 불 위에 올려 굽기도 하는 유용한 방 법이었다. <휘잉> 무시무시한 굉음을 내며 날아오는 곤을 보자 왼쪽의 두 번 째 사람은 도를 들어 내려 쳤다. 하지만 충분히 막아낼 거라 생각했던 곤은 그냥 가슴을 뚫어 버렸다. 그는 가슴에서 피 분수를 내 뿜으며 억 소리와 함 께 땅으로 굴렀다. 가슴을 뚫은 곤은 기세를 잃지 않고 그대로 뒤쪽에 서 있던 또 다른 한 사내의 배를 뚫고 빠져 나와 버렸다. 그제서야 힘이 다 했는지 바로 땅에 꽂혀 버렸다. 겨우 두 자 정도 되는 귀여운 꼬마의 힘이 이렇게 무서울 줄 예상을 못 한 마적단들. 천인문을 공격하려 나왔던 네 명 중 한 명을 잃어버리자 남은 세 명은 그냥 넋이 빠졌다. 하지만 싸우는데 인정 봐 주고 있을 천 인문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 뒤쪽을 쳐다보고 있던 세 명 중 왼쪽에 서 있는 사내를 향해 몸을 날렸다. "조심해라" 그래도 대장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지 채광이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경고를 했다. 하지만 얘기를 듣는다고 바로 막을 수 있 을 정도로 허술한 공격이 아니었다. 마적단 한 명이 또 다시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말 위에서 떨어졌다. 그제 서야 남은 두 명이 도를 들고 천인문을 향해 말을 몰며 달려왔다. <쓍> 바람을 가르며 내려친 도는 천인문의 머리와 어깨를 향해 떨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잘못 생각 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천인문의 키 였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장도로는 성인을 상대하는데는 별 무리가 없었지만 지금 천인문의 키는 겨우 두 자 정도였다. 당연히 마상용 장도 가 아닌 그들의 도에 맞을 리 없었다. 천인문은 그들의 도가 비껴가는 것을 보며 씩 하니 웃고는 말의 뒤쪽 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몸을 뛰어 올려 말 엉덩이를 한번 짚고는 양 쪽에 서 있는 그들의 뒤통수를 세게 갈겨 버렸다. 두 명이 앞으로 쓰 러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제서야 무림에서 소동과 여자, 노인을 조심하란 말이 떠 오른 채광 은 모두에게 명을 내렸다. "모두 저 녀석을 죽여" 남아 있던 마적단들은 모두 말을 몰아 둥글게 천인문을 둘러 쌌다. 그러자 뒤쪽에 서 있던 혜령도 은하비성(銀霞飛星)의 초식으로 마적단 의 머리를 뛰어 넘어 천인문의 옆에 내려섰다. "조심하세요" "응. 색시야도 조심해" "걱정 마세요. 저 정도 쯤은 그리 문제 되지 않아요" 사랑스런 대화가 오가는 동안 그들을 둘러 싼 마적단 중에 창과 곤 같이 긴 병기를 든 마적들은 뒤로 물러서고 짧은 검과 도를 든 마적들은 말에 서 내려 천천히 원을 유지하며 다가 서기 시작했다. 원형이란 일반적인 진법 중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형태였다. 가장 수비 를 하기 쉬운 형이기도 하지만 공격에도 유리한 방법이다. 서서히 다가 서다 천인문과의 거리가 약 이 장 정도 되자 걸음을 멈췄다. 천인문이 '너희들이 오기 싫다면 내가 가지' 하는 심정으로 몸을 날리려 는 순간 뒤쪽에 서있던 장병을 든 마적들이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섰다. 미리 약속이 되 있었는지 동, 서, 남, 북 사방에서 말을 모는 그들에게 통로를 열어주듯 사방에 작은 틈이 생겼고 그 사이로 말을 몰고 들어온 마적들은 천인문과 혜령을 향해 곤과 창을 내려쳤다. 그리고는 다시 자 신의 맞은 편에 열린 틈으로 다시 빠져 나간다. 천인문과 혜령은 다수와의 천투는 처음이었다. 아니 사람과의 싸움은 이번에 처음 경험 하는 것이니 더 말 할 나위가 없었다. 사방에서 짓쳐 드는 곤과 창을 피하니 뒤쪽에서 또 다른 곤과 창이 날라들거나 아니면 둘러싸고 있는 마적들의 칼이 날아오기 일쑤였다. '안되겠어. 이대로 계속 피할 수만은 없지' 천인문은 자기들을 둘러 싼 그들을 한 명도 잡지 못하자 특단의 방법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에라이. 이거나 받아라" 사방에 깔린 것이 모래였다. 천인문은 그대로 발을 땅에 파 뭍었다가 사 방으로 차 올려 모래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윽. 내 눈에..." "앗 이게 뭐야!" 이런 치사한 방법을 쓸 줄 몰랐던 마적들은 눈을 부여잡고 몸을 휘청대 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은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상인 천산에서 살 아 왔던 천인문에게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사방에서 찾아 볼 수 있던 눈 을 뿌리고 사냥감을 잡는 것은 비겁한 방법이 아니었다. 오히려 천인문 은 이렇게 머리를 써서 사냥하는 인간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 었다. 뿌옇게 날린 모래 때문에 한 쪽의 대형은 이미 사분오열(四分五裂)되다 시피 흩어져 버렸다. 더욱이 땅에 무릎을 꿇고 눈을 비비는 그들은 천인문이 땅을 박차고 뛰어 오르지 않아도 되도록 알맞은 높이를 맞춰 주어 힘도 아낄 수 있게 했다. - 퍼퍼퍽. 우당탕- 천인문의 작은 손과 발에 마적들은 피를 내 뿜고 뒤로 나동그라졌다. 한 쪽이 다 무너지자 천인문은 고개를 들어 혜령을 쳐다 봤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혜령은 천인문과 같은 방법을 쓰지 않고도 더욱 잘 싸우 고 있었다. 한가지만 빼면 말이다. 혜령은 자신의 다리를 향해 날아오는 곤보다도 그 곤을 휘두르는 자의 입에 걸린 음흉한 눈빛이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꼭 송충이가 몸위를 기 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란... 바람에 날리듯 가볍게 몸을 피한 후 지나가는 마적의 등 뒤로 뛰어 올라 대추혈(大椎穴)과 명문혈(命門穴)을 집었다. 그러다 보니 뒤에서 꼭 껴안 는 모습이 되어 버렸다. 자기들의 밥이라 생각했던 여자에게 도리어 밥이 되 버린 사내는 자신의 말을 고스란히 자기들의 동료들을 향해 몰아주었고 그의 곤으로 동료의 턱이며 가슴과 배 가릴 것 없이 때려 주었다. 동료들은 방패가 되어버린 그 를 피하며 공격할 능력이 없었다. 복날에 개 맞듯 아작이 나 버린 그들의 기 분은 당연히 최악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 의해 움직이는 인형이 된 자의 기분은 하늘을 나를 듯 했다. 등 뒤에서 살포시 날리는 그윽한 향기와 등을 가볍게 압박하는 가슴의 느낌은 이루 말할 수 없었기에 그의 입은 함지막하게 벌어졌다. 천인문이 이미 한 쪽을 쓰러 뜨렸을 때 혜령도 훌륭한 방패를 통한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혜령은 손속에 사정을 두어 쓰러져 신음하는 사람들은 있어도 죽은 사람 은 보이지 않았지만 천인문이 상대 했던 쪽은 절반 정도가 이미 움직임이 없었다. 무방비의 상태로 급소를, 그것도 화가 잔뜩 나 있던 천인문이 인정 사정 볼 것 없이 때려 이미 움직임이 없는 자도 상당수였다. 다행히 반 수가 넘는 인물들을 혜령이 상대했기에 희생자가 그리 크지 않 았다. "빨랑 내려와." 요상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혜령을 보자 당장 천인문이 뛰어 왔다. 혜 령은 이미 상황 종료라 생각하고 말에서 살짝 뛰어 내렸다. 다친 곳은 없냐고 물어보기 위해 천인문을 향해 몸을 돌렸지만 천인문은 그냥 싹 무 시하고 말 위에서 동상이 되어버린 마적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는 그대 로 뒤통수를 때려줄까 하다가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는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퍽- "히히히힝~" 매서운 발길질에 두 다리 사이의 급소를 맞은 말은 먼지와 모래 바람이 날리는 저편 사막을 향해 달려가 버렸다. 그의 주인을 싣고서.... "이제 끝내야겠지?" 천인문은 혼자 말 위에 타고 있는 채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미 채광 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선녀라 생각했던 아름다운 여인은 그 모습 같이 산뜻한 무공을 선보 였고 저기 저 조그만 꼬마녀석은 악마답게 지저분한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자신은 어느 쪽도 상대할 수가 없었다. 몸을 돌려 도망을 치자니 요금이 무서웠고, 싸우자니 그냥 목숨을 내버리는 것과 같았다. 채광의 머리는 태어나 그 어느때보다 더욱 빨리 돌아가기 시작했다. -12- "이봐 너..." 천인문의 손가락이 자신을 가르키는 것을 보자 채광은 그대로 말 위에서 뛰어 내렸다. "옛.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채광은 다시 첫 마적단에 입단 할 무렵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저 손가락의 주인은 나보다 고참이다. 까라면 깐다! 이렇게 생각하니 삿대질을 하는 손가락의 주인이 자신보다 훨씬 어리다는 것도 그리 불만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혜령은 살포시 입을 가리고 웃었다. 팔자 수염이 파르르 떨리는 모 습이란 천인문의 어른 흉내와 흡사 닮은 점이 보였기 때문이다. "용서해 주십시요. 이건 제가 원했던 것이 아니라 이 마적단의 주인 인 요금이 요구했던 사항입니다." "계속해봐" "일단 저기 쓰러져 있는 엽궁 녀석이 지금 사막에서 아주 예쁜 계집.. 아, 아니 선녀같은 아가씨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요금 녀석에게 전했 습죠. 그 말을 듣자 이 미친 녀석이 반드시 선녀분을 잡아 오라고 명 령을 내리는 바람에 그만 이렇게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채광이 앞에 쓰러진 한 사내를 손으로 가르키자 천인문의 눈이 그 쪽으로 돌아갔다. 거기에는 입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구렛나 루의 사내가 넘어져 있었다. 이미 절명했는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 다. "저 녀석은 우리한테 비녀와 귀걸이를 팔던 녀석이잖아?" 혜령이 그 사내에게 다가가 코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흔 들었다. 채광은 얼씨구나 했다. 자신의 계획이 들통이 날 확률이 더욱 줄어든 것이다. "네! 그렇습니다. 그 녀석이 귀금속 같은 것을 마을에 가지고 나가서 파는 척하며 마을에서 떠 도는 정보 같은 걸 가지고 오면 그걸로 요금 녀석이 약탈을 결정하는 것입죠. 이번에도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요금이라고 했어?" 천인문의 눈쌀이 파르르 떨렸다. 불끈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어깨 가 부르르 떨린다. 채광은 자신의 말이 먹혀들었다 생각했다. "그렇습니다." "앞장서" 채광은 예! 하고 대답한 뒤 말 위로 훌쩍 뛰어 올랐다. 혜령은 멀쩡하게 생긴 말 한필을 끌고 왔다. 그리고는 천인문을 뒤에서 살짝 끌어안고는 말 위로 올랐다. "윽!" 갑자기 천인문이 엉덩이를 쥐고 펄쩍 뛰어 올랐다. "왜 그러세요?" "엉덩이 밑에 이거 뭐야?" "네? .... 음...." 천인문과 혜령은 이번 하산행에서 처음으로 낙타를 보았다. 당연히 말도 처음이다. 말 위에 얹혀 있는 것은 안장이었는데 한 사람이 타기에 알맞 은 크기였다. 물론 서령촌에서 안장을 본 적은 있지만 무슨 용도인지도 모르고 있었으니.... 안장의 앞 부분은 위로 살짝 올라가서 말을 탄 사람이 앞으로 밀리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거기에 엉덩이를 사정없이 놓았으니 엄청 아플 만도 했다. "나도 이 뒤에 탈래" 하지만 이미 중앙엔 혜령이 앉아 버렸다. 혜령이 머뭇머뭇 하자 천인문 이 바로 입을 열었다. "나보고 딴 말 타라고 하지마. 딴 말 타러 가기 싫어. 그냥 색시하고 같 이 탈꺼야." "그러다 말이 죽으면요?" 낙타와 마찬가지로 말도 두 명이 타면 죽는 줄 아는 혜령. "그래도 싫어. 만약에 죽으면 그 땐 색시 등에 업히면 되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여긴 두 명이 앉을 곳이 없어요." 이 말을 기다렸는지 천인문은 실팍한 웃음을 흘렸다. "방법이야 있지. 아까 색시가 그 죽일 놈 뒤에 붙어서 꽉 끌어 안았잖아. 그것처럼 앉으면 돼" 혜령은 아까 말 뒤쪽에 앉았을 때와 지금 안장 위에 앉았을 때를 비교 해 보았다. 지금의 느낌이 훨씬 편하고 안정감이 있었다. 혜령도 슬그머 니 자리를 양보하기 싫다는 생각이 떠 올랐다. "하지만 상공~. 이 안장은 생각보다 넓어요. 만약 상공께서 앉으신다면 말이 달릴 때 덜컹대다 밖으로 튕겨 버리실 걸요. 거기다 상공께선 말도 못 모시잖아요. 저 아까 보셨죠. 말 모는 솜씨. 그냥 상공께서는 제 뒤쪽 에 앉으셔서 절 잡으시면 되지 않을까요? 아~잉 -.+ 상공~~" 혜령의 생전 첫 애교. 혜령에겐 느끼하고 이상한 느낌으로 다가왔지만 그 효과는 아주 대단했다. "@.@ 좋아 좋아. 까짓것 내가 뒤에 앉지 뭐" 쉽게 허락을 받아 낸 혜령은 입이 벌어지는 것을 참기 위해 이빨을 꽉 깨물었다. 처음으로 천인문의 고집을 꺾은 것이다. 무진장 기쁘긴 했지 만 아까같은 애교는 다시는,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고 또 하 는 혜령이었다. 천인문이 한방에 넘어 간 것은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녀의 '아~잉' 때 문이었는데 석실에서 생활 할 때 꿈에서 '아이 참 상공~~' 하고 살짝 꼬 는 콧소리와 같은 소리에 그만 정신이 뿅 하고 가 버린 것이다. 아까 그 육시랄 놈이 혜령이 뒤에서 살짝 끌어 안을때 정신 없이 헤롱대 는 모습을 보자 자신도 그 느낌을 맛보고 싶었던 천인문이었다. 하지만 뒤에서 끌어 안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을 했다. 천인문은 다시 혜령의 등 뒤로 가서 그녀를 끌어 안았다. "자! 출발하자고" "지금 쓰러져 있는 사람들은...?" 채광은 부하들이 걱정 되는지 살짝 운(韻)을 띄어 보았다. 하지만 돌아 온 것은 싸늘한 반응 뿐이었다. "죽은 놈은 모래에 뭍힐 거고 산 놈은 기어서라도 오겠지." 그제서야 채광은 말을 앞으로 몰고 나갔다. 큰소리는 쳤지만 말을 몰줄 모르는 혜령은 조심스레 채광을 바라보고 있 다가 그가 하는 모양대로 따라 고삐를 쥐고 살짝 쳤다. 그러자 말이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어기적대며 일어난 십여명의 수하들도 말을 타고는 곧장 그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바람은 매섭다. 어느 사막의 모래바람이 그렇지 않으랴 만은 지금 부는 바람도 상당히 강했다. 모래를 동반한 바람이 살결에 맞으면 상당히 따갑다. 채광은 조금씩 말의 속력을 올리기 시작했다. 불어오는 강풍에 이미 십여장 이 넘는 곳은 알아 보기 힘들 정도였다. 처음엔 어색하게 몰던 혜령은 그새 말을 제법 다룰 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속력을 올린 채광을 따라 잡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낙타로 인해 단 련된 엉덩이였지만 말도 만만치는 않아서 고생은 되었지만 천인문에 비해 선 그리 고생은 하지 않는 편이었다. 처음에 말을 타고 갈때까지만 해도 상당히 기분이 좋았던 천인문이었다.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은 향긋한 혜령의 내음에다 고삐를 잡은 혜령의 가슴 을 아무렇게나 만져도 상관이 없었다. 거기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뱃 속에 서 끓어 오르는 이상한 느낌이란..... 하지만 속력을 서서히 올리자 좋았던 기분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혜령의 등에 얼굴을 팍 파뭍었지만 모래는 이쪽저쪽에서 뺨을 때리고 목덜미로 날아 들어 좋은 기분을 잡쳐 버렸다. 거기다 안장도 없는 말 엉덩이 쪽에선 엄청난 요동을 쳤다. 머리도 아 프고 멀미까지 나는 천인문으로선 멈춰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다. 하지만 그 말이 나오기도 전에 먼저 채광이 입을 열었다. "다 왔습니다" 채광이 바라 보는 곳을 쳐다보자 그 곳에는 몇 채의 천막에 돌로 쌓여 진 석집 몇 채가 놓여 있었다. 고요한 무풍지대가 눈 앞에 보이자 혜령 은 말에 박차를 가했다. -13- 화려하게 꾸며진 방안. 사면은 모두 화사한 녹색으로 꾸며져 있고 한 쪽에는 고서화폭(古書 畵幅)이 걸려 있다. 그러나 방안에 떠도는 육향(肉香)과 '쌕쌕' 거리는 소리는 방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못하고 있었다. 침상에는 한 명의 사내와 한 명의 여인이 벌거벗은 채로 뱀처럼 뒤엉 켜 있었다. 사내의 이마에서 비 오듯 땀방울이 굴러 떨어져 침상의 이 불을 적시고 있었고, 그의 구릿빛 피부는 번들거리고 있었다. 여인의 원색적인 소리가 서서히 높아지다가 뚝 끊기고 사내는 여인의 어깨 넘어로 얼굴을 쳐박고는 숨을 헉헉대기 시작했다. 일단의 행위가 끝난 것이다. '아까 채광 녀석이 녀석들을 끌고 나가던데. 이제 사냥이 끝날 무렵이 됬지. 나가기도 전에 제법 왁자지껄 하던데 혹시 오늘 사냥감 중에 계 집이 있는 것 아닐까?' 요금은 품에 한 여자를 끼고 있으면서도 이번 약탈에서 새로운 여자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흠! 이년도 이제 싫증 나기 시작했어. 이젠 감옥에 있는 계집을 한번 시식 해야 할 때가 됬는데' 요금의 머리 속은 감옥에 갇혀 있는 여자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요금 은 지금까지 그런 여자는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중원에서는 본 적은 있 었을지라도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이다. 삼십 줄에 접어든 완 숙한 여인의 상에 아름다운 용모. 비단으로 감추어진 그 속의 몸매와 자신 앞에서도 당당하던 그 모습에서 풍기는 고귀한 자태와 위엄은 요 금의 몸을 달아 오르게 하고 있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요금의 신세는 비참하기 그지 없었다. 밤마다 여자 들을 휘돌려쳐도 부족한 판에 토끼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다행히 채광이 구해준 춘화 속에 채음보양(採陰保陽)의 수법이었던 쾌락도원 (快樂桃園)이 그를 구해 주었다. 잡아 온 계집들은 많았다. 그는 별 걱정없이 이 수법을 쓰기 시작했다. 과연 명품(?)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한 명에게 흡수를 했는데도 이미 효과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력도 강해지고 내공도 자꾸 올 라가는 일석 이조의 효과를 보기 시작하자 그는 망설임 없이 여인들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인들은 한 명, 두 명씩 죽어서 방을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문제가 없었던 것 처럼 보였으나 며칠이 지나자 하루에도 서 너 명의 여자가 죽어 나자빠지게 되었다. 밑빠진 독에 물붓기라고 했던가! 여자의 수는 한정되어 있는데 하루에 도 수 명씩 죽어 나가니 여자가 남아날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떨어진 여자가 다 죽자 급기야는 부하들의 여자에게까지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것도 며칠, 이젠 이 곳에는 그 누구도 여자는 구경도 못하게 되어 버 린 것이다. 그제서야 요금은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를 잡아 와도 그 다음 여자가 확실히 잡혀 오지 않는 이상 지금의 여자는 그냥 즐기기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도 한 달 전에 잡혀왔던 여자가 무려 일곱이나 되어 지금까진 잘 버티고는 있었지만 이제 그녀들도 남은 수는 겨우 둘이었다. 침상의 여자와 감옥속의 그녀. 요금은 이제 이 계집을 마지막으로 즐긴 뒤에 채음보양을 시전할 생각 이었다. "으..응" 어디를 건들였을까? 다시 여인의 코맹맹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요금의 손과 허리는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삼 십 여장 밖에서 울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그의 귀에 잡혔다. '오호! 이제 돌아 오나 보군. 이 계집을 처치하고 난 다음에 밖에 나가 봐야겠다. 계집을 잡아 왔을까?' 그의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을 무렵 공터에 말이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요금의 방을 나서면 왼쪽에는 부하들의 숙소와 식당이 있다. 오른쪽에 는 돌로 지어진 허름한 일 층 건물이 있다. 그 곳은 광혈사의 중죄인을 넣어두는 감옥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마적단들이 들고 나서부터는 여자 들을 가두는 곳으로 바뀌어 버렸다. 입구를 들면 그 안에는 나무로 만 든 창살이 있는 여섯 개의 감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감옥을 채우 고 있는 것은 한 여인 뿐이었다. 감옥 안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횃불이나 화로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천장 쪽에는 사람이 드나들 정도의 크기로 된 환기구가 있었다. 두치 정 도의 큰 쇠창살이 가로 막고는 있지만 빛이 드나드는 대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오랫만에 시끄럽군. 그들이 나갔다가 들어 왔나 보군. 혹시 또 여자를 잡 아 온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 내 차례인가?' 화사하던 분홍색 비단 옷은 군데군데 찢어져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고, 풀어 헤쳐진 긴 머리는 푸석거리며 어깨로 축 늘어져 있는 것이 죄인과 다를 바 없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상당히 아름다웠을 것 같은 자태는 이미 초췌한 얼굴만 남아 있었다. '나 대신 죽은 그녀들에게 미안하구나. 반드시 살아날 수 있다고 희망을 가지라며 나 대신 그 악당 놈에게 몸을 바쳤으니. 이제 곧 너희들을 보러 갈 수 있을 것 같구나' 그녀의 깊은 눈에는 우수가 잠기어 있었다. 이윽고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제법 묵직한 발자국 소리로 보아 그 악당 놈의 부하가 자신을 대리러 온 것일게다. -끼이익- 귀에 거슬리는 고음과 함께 열린 녹슨 철문 뒤로 한 인영의 그림자가 나 타났다. 고개를 든 그녀의 눈에 부리부리한 눈망울의 사내가 잡혔다. 바로 자신이 있던 감옥을 지키는 사내였다. "여긴가요?" 옥구슬 흐르는 목소리가 사내 쪽에서 들리자 사내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 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가 몸을 돌린 뒤쪽에 또 다른 인영이 나타났다. 적당한 중키에 날렵한 몸매와 머리 위로 올려진 비녀의 그림자로 보아 여자였다. 처음에는 잡혀 온 여자를 다시 가둔다는 생각을 한 그녀였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잡혀 온 여자에게 저렇게 공손하게 굴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 의 경우에만도 그랬으니까.... 요금의 몸놀림은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그가 채음보양의 수법을 쓰고 있 는지 그의 밑에 깔린 여자의 얼굴은 점차 파리해 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미닫이 문이 벌컥 열리고 시원한 바람이 그의 등을 식혔다. 요금은 흠칫 놀 라 고개를 뒤로 돌렸다. 거기에는 채광의 씁쓸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니 저 녀석이 미쳤나? 고하지도 않고 함부로 이 방에 들어와?' 평소 같으면 화를 버럭 내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채음보양의 수법으로 인해 입을 열 수 없었던 요금은 인상을 찌푸림으로써 채광을 내 보내려 했다. "우와~. 이 녀석하고 이 젖퉁이 아줌마 하고 벌거 벗고 뭐 하는 거지?" 한 소동이 쪼르르 요금의 침상 옆으로 다가 섰다. 바로 천인문이다. 천인 문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이 동그래졌다. 저렇게 땀을 뻘뻘 흘리고 숨소리가 너무 거친 모습은 처음이었다. 저렇게 힘들고 괴로운 것을 왜 하는지 궁금했다. '흥 네 녀석이 요금이지? 너 왜 내 마누라 대리고 오라고 그랬어? 죽어 볼래?' 이런 말을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이 신기한 광경에 바로 다 잊어 버렸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이렇게 힘든 것을 왜 하는 거지? 넌 대장이잖아. 힘 든 것은 부하들녀석한테 맡기면 되지 왜 대장이 하는 거야?" 대답을 기대하고 있는 천인문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뒤에 서 있는 채광은 웃음이 나오는 것을 꾹 참느라 얼굴이 붉어 졌다. '그럼 그럼. 명답이네. 힘든 것은 우리한테 맡기면 되지 킥킥 ^^;;' 하지만 요금은 울화통이 터졌다. 자신의 방에 무단 침입하여 뭐 하는 짓 인가. 거기다 채광은 저 조그만 녀석을 왜 놔 둔단 말인가. 요금의 머리통 은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기대하던 대답이 들려 오지 않자 천인문으로서도 서서히 배알이 꼴리기 시작한다. "야 대답 안해?" 붉게 물든 요금의 얼굴에서 땀이 떨어졌다. 하지만 묵묵부답. 천인문은 다시 한번 묻는 대신에 조그만 발을 들어 요금의 옆구리를 차 주는 친절 을 배풀었다. "윽" 침상위로 벌렁 나자빠진 요금은 입술을 꽉 깨물더니 주먹을 불끈 쥐고 벌떡 일어 섰다. 여기서 한 방 먹여주고 나면 제법 상처는 입겠지만 그거 야 천천히 치료하면 된다. 요금은 이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날아 드는 치명타. "우와. 내 거보다 엄청 크잖아. 앗 저 놈이 꺼떡꺼덕거리네. 나한테 인사 하는 건가" 안그래도 들끓는 기혈이었다. 천인문의 마지막 공격에 요금은 그만 '헉' 하고 숨을 내쉬고 말았고, 바로 침상에 피를 토해 버렸다. 그리고는 침상 으로 쓰러져 버렸다. 침상의 여자는 침상 구석으로 도망가 이불로 몸을 가렸다. "이것봐. 지금 이것들이 뭐 하는 거지?" 요금이 기절하자 천인문은 고개를 돌려 채광에게 물었다. 채광은 숨을 들이키며 붉어진 얼굴을 가라앉혔다. "그...그것은.. 어른들끼리 노는 것입니다요" "놀아? 저렇게 노는 것도 재미 있어?" "재미 있으니 저렇게 놀겠죠" 천인문은 고개를 갸웃대더니 다시 물었다. "너도 저렇게 놀아 봤어?" "남자라면 모두 저렇게 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나도 남잔데 그럼 저렇게 놀 수 있겠네?" "다...당연.. 하지요" 천인문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다시 침상으로 고개를 돌 렸다. "이봐. 젖퉁씨. 그만 옷 입지 그래. 뭐 난 보기 좋지만 옷 입는게 좋지 않겠어?" 그제서야 침상의 여인은 이불을 잡고 있던 손으로 바닥의 옷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어깨에서 이불이 흘러 내리고 하얀 어깨와 하얀 등이 다시 들어 났다. 빤히 그녀의 동작을 보고 있던 천인문의 복부에서 이상한 기분이 끓 어 올랐다. 아까 혜령의 등 뒤에서 그녀를 끌어 안고 있을 때도 느낀 이상한 감정이였다. 가슴이 갑자기 쿵쾅대기 시작했고, 얼굴도 벌겋 게 달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 입으면 나와" 그녀의 모습을 쳐다 보기 민망했는지 천인문은 그냥 대충 얼버무리며 방을 나서기 위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채광은 나갈 생각이 없는지 벌겋 게 달아 오른 눈을 조금이라도 더 크게 뜨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뭐해?" "....." ㅡ.ㅡ++;; -퍽- "윽" 정강이를 차인 채광은 펄쩍 뛰어 올랐다. "따라와" 천인문은 무릎을 잡은 채광의 귀를 잡아 끌고 밖으로 나섰다. 밖에는 이 미 온 몸에 멍이 들어 있는 마적단 십 여 명이 서 있었다. 천인문은 앞에 서 있는 한 명을 보고 말했다. "넌 들어가서 저 방에 있는 녀석 묶어 둬" 지적을 받은 사내는 우렁차게 대답을 하고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방 에서 옷을 다 입은 여자가 요금의 방에서 나왔다. 그녀가 나오는 것을 본 천인문은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 때 오른쪽에 있던 한 석실에서 철문이 열리고 안색이 나쁜 여인을 부축한 혜령이 나타났다. 천인문의 옆에 서 있던 여인은 혜령이 부축한 여인을 보자마자 바로 그 쪽으로 몸을 내달렸다. "아씨" "매향아" 혜령의 옆에 있던 그녀도 자신에게 뛰어 오는 그녀를 보자 바로 앞으로 나섰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그녀들은 서로 껴안고 펑펑 눈물을 흘렸다. "저 둘이 잘 알고 있나 보네?" "그렇네요" 어느 새 천인문의 옆으로 다가온 혜령이 답했다. "어떻게 됬어요?" 마적단 소굴에 도착했을때 요금의 방에서 들리는 이상한 신음으로 인해 낯이 붉어진 그녀는 그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응. 그 요금 녀석 잡아 뒀지. 그런데 색시야" 천인문은 혜령을 보며 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왜요?" "응. 내가 저 방에서 이상한 것을 봤는데." "뭘 보고 그러세요" 좀 이상한 느낌이 드는 혜령이었지만 공손히 물었다. "저기 저 아줌마하고 그 요금이란 녀석이 벌거벗고 땀을 뻘뻘 흘리며 누 워 있지 뭐야. 채광 녀석은 저건 남자들이 하는 놀이라고 하던데" 그 말을 들은 혜령은 고개를 푹 숙이며 난처해 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서로 부둥껴 안고 신파극을 벌이던 그녀들 중에 매향 이란 여인도 갑자기 허둥대고 있었다. "저..저도 잘.. 모르..겠네요" 혜령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색시도 몰라? 흐으~~~음. 좋아. 결정했어." "....." "색시도 모르고 나도 모르니깐. 우리 둘 다 열심히 배워보자. 어때?" -14- 혜령은 요즘 죽을 맛이었다. 미인의 피부엔 숙면이 필수인데 요즘 은 아예 잠을 들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불면증은 아니었다. 그것 은 단지 천인문 때문이었다. 잠이 들기가 무섭게 살그머니 다가와 옷을 벗기려하니 그녀는 자꾸 잠을 깨는 것이다. 얼마전까지 잠이 라면 당할 자 없었던 천인문이다. 하루에도 다섯 시진 이상을 꼬박 자는 천인문이, 이틀 째 아예 잠을 안자고 이렇게 옷 속으로 파고 든 다. '부부니 뭐 어때' 하고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이긴 했지만 당사 자인 혜령은 어색하기만 했다. 분위기가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그러 는 것이 꼭 장난 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혜령이었다. 그녀가 감옥에서 구한 여인의 이름은 궁소미(窮蘇美)였다. 그녀는 얼핏 보기에 중원인 같지만 자세히 보면 눈에서 파란 빛이 돌았다. 서역인의 피가 섞여 있는 그녀는 어딘가 모르게 고귀한 자태가 흘렀 다. 천인문도 혜령이 궁소미의 등 뒤로 피하면 장난을 걸기 힘들 정 도로 근엄한 느낌을 주었다. 방금 쳐들어온 천인문을 다시 방 밖으로 내 보낸 혜령은 낮에 궁소미 가 다가와 한 얘기가 떠올랐다. '동생은 아직 남자를 잘 모르는 것 같아. 남자란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늑대와 같은 기질이 있지. 아직 동생의 남편은 어리니 그렇게 걱 정 할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도 언제까지나 어리지만은 않을꺼야. 내가 볼땐 지금 그는 이제 여자에게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어. 동생 의 행동을 보아하니 그에게 너무나 순종적이더군. 어떻게 보면 최고의 조강지처가 될만하지. 하지만 남자들은 모두 늑대야. 지금은 동생 하나 한테만 관심을 보이지만 동생처럼 계속 순종만 한다면 그가 어느 정도 컸을 땐 또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게 될 껄' '그렇다면 어떻게 하죠' '걱정마. 이 언니가 잘 가르켜줄께. 일단 여자는 변신을 할 줄 알아야 되. 남자는 잡은 고기에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지. 손에 넣기 힘든 것 일 수록 더욱 힘을 낸다 이말이야. 그가 딴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 도록 하기 위해선 동생도 새로운 모습을 자주 보여 줘야 되' '새로운 모습이요?' '그렇지. 일단 낮에는 정숙한 아내가 되어야 하지. 이것은 모든 남자들 이 자신의 아내를 바라 볼 때 남편의 기분을 우쭐하게 해 줘. 하지만 이 런 모습을 밤까지 가져 가선 안 돼. 밤에는 남편을 미치게 만드는 요부가 되야한다는 말이지. 딴 여자에게 눈길을 돌리지 못하게 말이야. 요부의 첫 조건은 달콤한 애교지' 궁소미의 말에 멍해지는 혜령이었다. 갑자기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것 같고 소름이 쫘~ㄱ 끼치는 느낌이 들었다. '이 언니가 볼 땐 동생은 애교를 부리기 힘들 것 같아. 하지만 이것도 노력에 따라 바뀔 수 있지. 동생은 남편을 주무르고 싶어? 아니면 평생 쥐어서 살 꺼야?' '......' '동생도 남편을 꽉 쥐고 살고 싶지?' '아....아니에요. 어떻게 남편을 쥐고 흔들어요?' 평생 어머니한테 가르침 받은 것과 위배되는 얘기에 그녀는 정신이 멍 해 졌다. 남편은 하늘이고, 자신은 땅이다. 어떤 일에도 남편을 거슬러 서는 안되고, 무조건 순종하며, 흠 잡힐 곳을 없애라는 어머니의 말씀. 궁소미와 같은 생각을 한번도 해 보지 못한 혜령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 색이 역력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궁소미는 조심스레 웃으며 입을 가 렸다. '호호호. 동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어. 하지만 이 언니가 하 는 말은 동생이 악처가 되란 말은 아니야. 남편을 쥐고 흔들며 하고 싶 은대로 하는 여자는 악처지.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남편을 억누르라는 것은 아니라 단지 남편의 눈이 딴 여자를 향하지 않도록 미리 막자는 거지.' 그제서야 그녀의 마음이 편해 졌다. 그 뿐만 아니라 솔깃해지는 느낌까 지 들었다. 혜령과 소미의 이야기는 이렇게 계속 한 시진 동안 계속 되었 다. 하지만 그 얘기를 실제로 써먹어 보려니 어색한 것은 역시나였다. 오늘 도 역시 잠자기는 글렀다 생각한 혜령은 다시 고민 속으로 잠겨 버렸다. 고민과 괴로움에 잠겨 있는 것은 요금과 채광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틀 전 요금의 방에서 본 그 장면을 써 보기 위해 혜령에게 침투를 했지 만 굳건한 방어로 점령에 실패한 천인문은 관람을 하며 배우기로 했다. 그 대상은 침실에서 본 매향이었다. 요금과 한 침실에 다시 붙여 놓으려 했지만 궁소미의 눈빛에서 확 쫄아버린 천인문은 매향을 대리고 가겠다 는 말을 목구멍에서 다시 삼킬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궁금한 걸 어쩌겠 는가! 고민 고민을 한 끝에 천인문은 요금과 채광을 불렀다. 그리고 둘의 옷을 벗기고는 그 때 그장면을 다시 재현 하라고 명령했다. 주화입마에 빠진 요금으로선 어쩔 수 없는 명령이었다. 몇 번의 거절로 눈자위의 시퍼런 멍만 가진 채, 채광의 몸 위에 올라 탔던 것이다. 두 남자의 몸에는 더 이상 생길 수 없을 정도로 빽빽히 닭살이 돋아 났 고, 이마에선 식은 땀이 줄줄 흘렀다. 그리고 자세히 이렇게, 저렇게 하면 여자가 요렇게, 고렇게 된다는 식으로 설명을 했다. 한 번으로 넘어 갈 줄 알았던 엽기적인 장면은 혜령의 공략에 실패한 천인문이 다시 오면 또 반복되었다. 이렇게 다섯 번이나 반복되자 더 이상 못하겠다 생각한 요금이 채광에게 물었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냐' 때려 죽여도 시원 찮을 채광이었지만 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채광 의 머리가 필요했다. 요금과 마찬가지로 지금을 넘겨야 할 채광은 또 다시 필살의 의지로 머리를 굴렸다. 한가지 떠 오른 생각을 요금에게 이야기 하 자 듣고 있던 요금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고개를 열심 히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찾아 온 천인문에게 요금이 실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제가 아는 것은 다 말씀 드렸습니다요. 지금 부터는 직접 실습을 하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말 했잖아. 지금도 마누라한테 쫓겨 나온 거라고. 네 말대로 했는데 왜 우리 색시는 왜 안놀아 주는 거지?" 천인문의 인상이 상당히 구겨져 있자 요금은 딴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면 이 놀이는 잠시 뒤로 미루어 두시고, 새로운 것을 배워 보십시 요" "새로운 놀이?" 새로운 것이란 말에 호기심이 동했는지 눈에서 광채가 났다. "일단 제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요. 그 이상의 높은 수준의 것들은 책을 보시고 직접 배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만" "책...?" 책이란 말에 흥미를 가지는 천인문을 보자 요금은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요금의 뒤를 따라 천인문도 방을 나섰다. 공터로 나선 요금과 천인문은 뒤 쪽으로 돌아 갔다. 그 곳에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모래 바람을 막아 주는 큰 바위 암벽이 있었다. 그곳으로 다가선 요금은 암벽 맞은 편에 있는 조그마 한 바위를 밀고는 그 밑에 있던 철문을 열어 올렸다. "여기가 어디지?" "예 옛날 광혈사에서 만들어 둔 비밀 장소인 것 같더군요." "비밀 장소라.... 그런데 이렇게 허술하게 관리 해도 되?" "그 때야 비밀 장소인지 몰라도 지금은 그렇지도 않습니다요. 저희가 여 기 왔을 때 이미 안은 텅 비다시피 했거든요. 일단 들어가시죠" 요금은 말을 끝내자마자 바로 앞장서서 철문으로 난 길로 내려갔다. 계 단 밑의 지하는 상당히 어두웠다. 조심스레 벽을 더듬으며 십여 개의 계 단을 내려간 요금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탁, 탁' 하고 치는 소리가 불꽃과 함께 지하실에 울려 퍼지며 지하실은 환하게 밝혀졌다. "우와" 천인문이 바라본 내부는 상당히 컸다. 사막에 있는 지하실이라 그런지 습기나 이끼 같은 것은 거의 없었다. 벽에는 화려한 색깔로 그려진 화폭 이 여러 점 걸려 있었는데, 그 그림의 모습을 본 천인문은 얼굴이 달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체의 남자와 여자가 여러 모습으로 정사를 나누는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천인문이 그림을 보며 얼굴을 붉히고 있는 동안 요금은 벽에 걸린 등잔 마다 불을 다 붙이고 있었다. 환하게 밝아질수록 더욱 적나라하게 다가오 는 그림에 천인문은 더욱 넋이 빠져 버렸다. 요금은 그 모습이 당연하다는 듯 쳐다본 후 입을 열었다. "여기는 보통 이런 그림이 걸려 있습죠. 그리고 그 밑에는 그 그림에 대 해서 설명이 되 있습니다. 그리고 저 쪽 구석에는 책이 몇권 꽂혀 있습니 다. 제가 설명 드리는 것보단 여기 있는 것들이 훨씬 좋으니 이걸 보십시 요." 요금은 설명이 끝나자 몸을 돌려 슬며시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천인문 은 그가 나가는 것을 보지 못하고 계속 그림들만 쳐다 보고 있었다. 천인문이 지하실에서 그림을 보고 있는 동안 혜령은 궁소미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시간이 많았기에 궁소미로부터 꼼꼼하게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심지어 얼굴을 붉힐 정도로 적나라한 이야기까지 하나씩 설명했다. 혜령은 처음에는 재미가 없었지만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때마 다 귀가 솔깃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두 시진 동안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천인문이 방문을 열고 들어 왔 다. 그제서야 궁소미는 일어 났다. "동생 재미 있었지?" "네. 언니 말씀 잘 들었어요" 그제서야 궁소미는 고개를 돌려 천인문에게 살짝 미소를 보인 뒤 몸을 돌 려 방을 나섰다. 며칠 전과는 다른 피곤한 눈빛으로 들어온 천인문에게 혜령은 살짝 다가 서며 말했다. "어디 갔다 오세요. 상공?" "아. 책좀 읽고 왔어" "책이요?" "응. 상당히 재미 있는 책이었는데. 아함~ 피곤해. 잠이나 자야겠어." 천인문은 바로 침상에 몸을 던졌다. 그러자 혜령은 다시 천인문을 일으켰다. "제가 이불을 깔아 드릴께요. 잠시만요" 혜령이 침상을 단정하게 정리하자 천인문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침상에 누워 버렸다. 그리고는 바로 잠이 들어 버렸다. 혜령은 오늘 밤은 궁소미에게 들은 방법 대로 해 보려고 했지만 솔직히 그건 천인문의 공격 때 어떻게 유연하게 대처하며 상대하는 방법이었다. 지금처럼 바로 쓰러져 버린 남자를 공략하는 법은 듣지 못한 혜령은 그냥 손가락만 빨 수 밖에 없었다. 천인문도 아직 잠이 들지는 않았다. 화폭에 그린 그림에서 남녀간의 관계에 대해서 너무나 확실히 알아 버린 것이다. 거기다 뒤쪽에 있던 책에서는 '여자 의 심리 확실하게 안다', '여자에게 사랑 받는 법', '이런 여자는 이렇게 꼬셔 라' 와 같은 주옥같은 책들로부터 크나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지금까지 혜령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확실히 알게 된 천인문은 혜령을 볼 면목 이 없어 그냥 잠이 든 것처럼 한 것이다. 이렇게 한 침상에서 동상이몽 하는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 속으 로 천천히 빠져 들고 말았다. -15- 다음날 혜령이 눈을 떴을 때 침상에 엎드려 빤히 자신을 쳐다보는 천인문을 보았다. "이제 일어났어?"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 지 당황해하던 혜령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 천인문의 인사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네. 상공도 편히 주무셨나요?" 살짝 웃으며 묻자 천인문도 환한 미소로 답했다. "자 이제 색시가 일어났으니 나가 봐야지" 천인문은 침상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어제밤 옷을 입고 잠을 잤기 때문 에 입고 있던 옷은 엄청 구겨져 있었다. '헤헤헤' 하고 실실 웃으며 혜령 을 돌아 보자, 그제서야 혜령도 어젯밤 옷을 입고 잤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녀는 손을 뻗어 천인문의 옷을 잡고는 '탁' 하고 쳤다. 약한 내공이 들 어가서인지 옷은 쫙 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혜령도 그녀의 옷매무시를 다듬었다. 천인문과 혜령은 정리가 다 되자 손을 잡고 방문을 열었다. 방 앞에 있 던 공터에는 몇 명의 사내가 이미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미 해는 제법 떠 있었다. 그제서야 혜령은 아침식사 준비를 서둘러야겠다고 생각 했다. 부엌을 향해 가려고 하는 혜령은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돌 집 앞에서 궁소미가 자신을 손으로 부르고 있었다. "동생. 천인 공자. 식사 준비가 다 됬어요. 이쪽으로 와요" 천인문과 혜령은 궁소미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아! 언니께서 식사 준비를 하셨나요?" "며칠동안 얻어 먹기만 했잖아. 이번엔 내가 솜씨를 좀 부려 봤지" "별 어려운 일도 아니었어요. 거기다 언니께선 몸이 불편하셨잖아요." "하지만 사람이 도움을 받았으면 갚을 줄 알아야 되지." 궁소미는 살짝 웃으며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이미 탁자에 몇 가지의 음식이 탁자위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쪽 편에는 매 향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공손히 서 있었다. 매향은 방으로 들어오는 천인문과 혜령을 보자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어, 이런 방도 있었나?" 방의 크기는 천인문이 머물고 있던 방과 비슷했다. 하지만 내부에는 침상과 중앙의 탁자 뿐이었다. 벽의 색은 누렇게 변색 되어 있었으나 자세히 보면 연한 파란색이 은은히 비쳐 나오고 있었다. "상공께서는 보신 적이 없으실 꺼에요. 구석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전까진 사람이 살지 않았으니깐요. 소미 언니와 매향 언니가 이 방 을 찾고는 참 열심히 치우셨죠." "호호호호. 동생하고 매향이가 수고 했지 뭐 내가 한 게 있나!" 궁소미가 입을 가리며 살짝 웃었다. "음식이 더 식기 전에 식사를 하시지요" "아! 내 정신 좀 봐. 자 앉으라구" 매향의 말에 정신을 차린 듯 궁소미는 의자에 앉으며 자리를 권했다. 그제서야 천인문과 혜령도 그녀의 맞은 편에 앉았다. "매향 언니도 이쪽으로 앉으세요" 매향이 궁소미의 뒤쪽에 꼿꼿이 서 있자 혜령이 안스러웠는지 입을 열 었다. "아니에요. 전 따로 식사를 하면 됩니다" 공손하지만 단호한 거절이었다. 이렇게 딱 부러지게 거절할 줄 몰랐던 혜령은 흠칫했다. 그런 그녀를 보기 미안했던지 궁소미가 다시 말했다. "매향아. 그렇게 거절할 것이 못된다. 여기 앉도록 해라." 그제서야 매향은 궁소미의 옆 자리에 살짝 앉았다. 천인문은 그녀가 앉자 바로 젓가락으로 음식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혜령도 그제서야 저를 들었다. 그녀가 음식 한 점을 들어먹자 궁소미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에게 바로 물었다. "맛이 어때?" 오물거리며 먹던 혜령은 자신을 보며 묻는 궁소미에게 살짝 미소를 지 었다. "맛있군요 언니." "아 다행이다. 솔직히 맛 없다고 하면 어쩔까 걱정도 했거든" 그제서야 궁소미의 얼굴에 제법 화사한 기색이 돌았다. 이렇게 계속 이야 기를 하는 동안 탁자의 음식은 조금씩 줄어 갔다. 몇 개 차리지 않은 음식 들이 거의 다 사라질 무렵 그들은 젓가락을 놓았다. "이제 어떻게 할 꺼야? 계속 여기 머물 이유가 없잖아." "언니의 몸도 좋아진 것 같으니 슬슬 준비하도록 해야겠네요." "좋아 좋아. 솔직히 이젠 여기 있는 것도 지겨워. 배울 것도 거의 다 배운 것 같은데 출발을 해야겠죠. 길은 모르지만 좋은 안내자가(?) 있잖아요." 궁소미의 질문에 혜령과 천인문이 동시에 대답 했다. 그러자 매향은 의자 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전 먼저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말릴 새도 없이 문을 나서버린 매향을 보던 혜령은 천인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상공. 저도 그럼 준비 하러 갈께요." "나도 같이 갈래" 그녀가 나갈 것 같자 천인문도 뒤따라 일어 섰다. "잠깐만. 천인 공자" 궁소미가 천인문을 불렀다. 혜령은 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다 궁소미가 그 를 부르자 인사를 하고 나갔다. "상공. 언니께서 하실 말씀이 있나 봐요. 전 이만 나가서 준비를 할께요. 언니 나중에 봐요." 혜령이 방을 나가자 천인문은 자신을 부른 궁소미쪽으로 몸을 돌려 다가 갔다. "저....저기..."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궁소미의 입이 잘 열리지 않았다. 천인문은 그 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궁금해졌다. "말씀하세요." "......" "왜 그러세요? 말씀하시라니깐요" "아...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무언가를 말하려 하다 그만 두어 버렸다. 그녀가 말하기 힘든지 멈칫거리자 천인문은 그녀의 입을 빤히 쳐다 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그 의 머리에 무언가 반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항. 혹시 그 놈 때문에?' "알겠어요. 할 말씀이 없으시면 그냥 나가 볼께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방문을 나서서 밖으로 나갔을 때 천인문은 다시 몸을 휙 돌렸다. "아참. 우리 색시한테 '동생' 하고 부르는데 저도 '문아' 하고 불러주세요. 저도 큰 누나라 부를께요. 하지만 소문(小文)이라고는 부르지 마세요. 그 건 우리 엄마 밖에 못 불러요" 귀엽게 한 마디를 남기고는 총총거리며 사라져가자 궁소미는 입을 살짝 가리며 웃었다. 천인문이 집을 나서 다시 공터로 나오자 큰 소리로 외쳤다. "요금아. 당장 튀어 나와라"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어린 아이답게 아주 높은 고음이었기에 가까이에 서 분주히 돌아다니던 몇몇 마적단들은 귀를 막으며 눈을 찌푸렸다. 천인 문의 말이 다 사라지기도 전에 방에서 한 물체가 구르다시피 나와 천인문 의 앞에 섰다. 요금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조금 있다가 우리들은 여기를 뜰꺼야. 그러니 네가 준비좀 해 줘" 자신이 할 만한 심부름은 아니었지만 그가 뜬다는 말에 엄청 기분이 유 쾌해지는 요금이었다. 그는 요 며칠 동안 천인문을 대한 것중 가장 공손한 자세로 대답했다. "당연히 제가 준비 하도록 합죠. 말은 네 필 하고 물하고 건량과 모포를 확실히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을 돌려 뛰어갔다. "왜 네 필이야 다섯필이지. 넌 안내자도 안 붙여 줄꺼야?" 뛰어가던 요금의 몸이 흠칫 하며 서 버렸다. "죄..죄송합니다. 제가 깜빡 했군요. 다섯 필로 준비 하겠습니다." 다시 말을 정정한 요금이 마굿간 쪽으로 뛰어 갔을 때 천인문의 뒤로 누 군가 걸어 오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궁소미다. 자세히 살펴 보면 눈 에 무언가를 바라는 빛이 보였지만 천인문도 모르는 척 했다. 그때 제법 큰 보따리를 든 매향이 저 편에서 걸어 오고 있었다. 그녀가 궁소미의 앞에 다가와서 보따리를 땅에 놓자 궁소미가 물었다. "그건 뭐니?" "이건 처음 잡혀 올 때 빼앗겼던 아씨의 옷과 패물들입니다." 매향의 동작이 빠르기도 했지만 어디에 이것들이 있었는지 확실히 알고 있 었던 것이다. 여기를 뜬다고 했을 때 바로 이것들을 챙겨서 나왔기에 이렇 게 빨리 끝났다. 이야기를 하고 있던 궁소미와 매향을 보고 있던 천인문은 그들의 뒤쪽에서 요금이 말들을 끌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 요금도 그들을 빨리 떠나 보내기 위해 엄청난 속도로 준비를 했다. 두 마리 의 검은 말과 세 마리의 갈색 말을 끌고 다가 왔다. 뒤에는 채광과 또 다른 한 명이 짐을 각각 들고는 요금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수고했다. 그 짐들은 모두 말에 실어 놔" 천인문의 말에 채광과 마적단원은 두 마리의 검은 말에 짐을 올렸다. "아 참! 채광이 그러던데 요금 네가 쓰고 있는 도가 좋은 거라면서. 그거 나 주면 안돼?" 사악하게 웃으며 칼을 달라는 천인문을 보자 요금의 기분은 저 편 나락으 로 떨어져 버렸다. '아니 왜 저 녀석은 쓸 때 없이 그런 소리를 해 가지고 저 소 악마 녀석에게 나의 칼을 뺏기게 하는 거야.' 채광을 흘겨 보는 요금의 눈에 불꽃이 피어 올랐다. 그 눈빛을 받은 채광은 슬며시 고개를 숙이며 딴청을 피웠다. '저 녀석이 가기만 해 봐라. 넌 나한테 죽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요금은 그의 허리에서 무언가를 풀었다. 허리띠 같이 보 이던 흰 끈이 풀리자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바로 연도였다. 연도를 처음 보는 천인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히 모양은 도였지만 그 길이나 도폭은 영락없는 검과 같았다. 세 자가 조금 안되는 길이에 한 치 반의 도폭. 천인문은 요금의 손에게 도를 받아 자세히 살폈다. 햇빛에 반짝 이며 뿜어내는 도의 예기는 상당했다. 도신에 특별한 그림이나 글자는 없었 지만 상당한 명인이 만든 것 같았다. 하지만 도를 볼 줄 모르는 천인문으로 서는 그냥 한 마디 던질 뿐이다. "이게 도긴 도야? 거기다 이렇게 휘청여서야 어떻게 써?" "아닙니다. 그냥 쓰는 것이 아니라 내공을 밀어 넣으면 휘청이질 않지요. 지금까지 칠 년을 쓴 도이긴 하지만 이빨도 빠지지 않을 만큼 강합니다. 거기다 날카롭기도 이루 말할 수 없죠" 이것이 뺏기는 마지막 물품이 되길 간절히 바라며 요금은 친절하게 답했다. 천인문은 그의 말을 듣고는 내공을 살며시 불어 넣었다. 그러자 휘청이는 도가 바로 서기 시작했다. 천인문은 그제서야 요금의 주위를 빙빙 돌며 도를 자세히 살폈다. "날카롭다고 했지? 한 번 시험해 봤으면 좋겠는데" "제가 다른 검을 가져다 드릴까요?" 채광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아니. 뭐 그럴거야 있겠어? 그냥 이렇게 해 보면 바로 알 수 있지" 천인문은 말을 끝내자 마자 요금의 허벅지를 그어 버렸다. 그의 허벅지에 서 튄 피는 하얗게 빛나는 모래를 붉게 적셨다. "악!" 요금의 몸이 쓰러졌다. 천인문은 다시 도를 들어 고개 숙인 요금의 목을 향 해 내려쳤다. "커~~억" 외마디 단말마와 함께 쓰러져 버리는 요금. 엄청난 피가 하늘로 치솟았다. 궁소미와 채광 등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궁소미의 입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음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천인문은 피가 옷에 뭍을 까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요금의 비명에 소굴에 있던 마적단 삼 십여명이 모두 몰려 왔다. 목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요금을 보자 모두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때였 다. 웅성거리며 몰려 있던 일행의 중앙이 갈라지며 한 인영이 나타났다. 바로 혜령이다. "무슨 일이에요?" 서둘러 왔는지 손에는 봇짐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천인문의 안위가 걱정 이 되었는지 천인문을 살폈지만 별 이상이 없어 보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다시 주위를 살짝 살피는 그녀의 눈에 그제서야 죽은 요금의 시신 이 잡혔다. "아니 저 사람이 왜...?" "내가 죽였어" "....아니 왜요? 저 사람이 무슨 잘못이라도?" "이유는 별 거 없어. 저 놈은 죽을만한 짓을 했으니깐 내가 죽인 거야. 그 리고 이건 궁 누나도 바랬던 거고" 천인문이 궁 누나라 하자 혜령은 흠칫 놀라며 궁소미를 쳐다 봤다. 궁소미 의 눈은 피를 본 탓인지 흥분해 있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뻐하는 느 낌도 받을 수 있었다. "채광! 너는 우리가 이 사막을 벗어 날 때까지 우리 길 안내를 맡아. 그리고 너는 요금의 시체를 치워." 천인문이 지시를 하자 지적받은 마적대원은 바로 요금의 두 다리를 끌고 뒤 쪽으로 사라졌다. 목에서 흐르는 피는 반짝이는 모래에 한 줄기 흔적을 남기 며 사라져갔다. 채광은 바로 몸을 갈색 말에 실었다. 자기의 목도 서늘해 지는 느낌을 받았 지만 어쩔 수 없었다. 채광이 말에 타는 모습을 보자 여인들도 모두 말에 올 라 탔다. 천인문도 말에 오르는 채광을 유심히 살폈기에 그리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었다. 단지 발의 길이가 좀 짧아 하늘로 발을 치켜 드는 게 힘들었 지만.... "야~ 출발이다." 그들은 모두 천인문의 말에, 말의 배를 살짝 차며 앞으로 나갔다. 말들은 그리 빠르진 않았지만 조금씩 광혈사를 뒤로 한채 멀어지고 있었다. 어느정도 갔을까. 천인문은 아직 허리에 묶지 않아 휘청이는 도를 다시 눈 앞으로 들었다. 얼굴의 모습이 환하게 비쳐 천인문은 자신의 모습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조그만 얼굴에 짙은 눈썹. 반짝거리는 검은 눈동자와 살짝 다문 입술. 바람에 살짝 흩날리는 검은 머리는 그의 얼굴과 잘 조화가 되었다. 전체적으로는 귀 여운 형태였다. 자신의 얼굴을 계속 보던 천인문은 도에 한 방울의 붉은 핏방울이 또르르 굴 러 내리는 것을 보자 옆을 향해 도를 휙 하고 휘둘렀다. 이번에는 말끔 하게 빛났다. "확실히 좋은 도인가 봐" 옆에서 걸어가던 궁소미는 천인문의 입에 걸린 미소에 온 몸이 싸늘해 지는 것 같았다. "채광. 좀 속력을 올리는 게 어때?" 안그래도 뒤에서 들린 도의 소리에 등에서 식은 땀이 한 방울 흐른 채광이다. 바로 대답을 하고는 말의 고삐를 다잡았다. 천인문 등을 실은 말들은 뿌연 먼지를 흩뿌리며 사막의 모래 위를 질주해 나갔다. -16- 사막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그것은 천인문 일행에 게 있어 상당한 고통으로 다가왔다. 비록 그들이 준비를 철저히 했다 고 해도 이런 더위는 그들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사막을 잘 아는 채광의 존재는 그들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낮에는 말을 달리고 밤에는 모래 속에 몸을 묻고 잠을 청했다. 첫날 과 둘째 날은 너무도 피곤해 얘기를 할 여유도 없이 모래속에서 바로 잠이 들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그들도 여유가 생겼는지 밤 에는 조금씩 이야기도 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천인문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은 바로 혜령이 하고 있는 비 녀에 관한 것이었다. 새 모양의 옅은 청색 비녀는 궁소미가 광혈사에 잡히기 전까지 하고 있었던 비녀였다. 그녀의 부모가 그녀의 생일 선 물로 준 것이라 했다. 그 말을 들은 혜령은 비녀를 돌려 주려고 했지만 궁소미는 받기를 거절했다. 자기에게 소중한 물건이지만 혜령과의 만 남은 더 소중하기 때문에 선물 하겠단다. 낮에는 이동하고 밤에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들은 옥문관(玉門關) 에 도착 할 수 있었다. 팔일 만의 일이었다. 옥문관(玉門關) 바로 중원(中原)과 새외(塞外)를 가르는 중요한 거점이다. 과거 한나라 무제(武帝)는 돈황이라는 서쪽의 오아시스 도시를 전진기지로 삼고 돈 황군[敦煌郡]을 두고 부근에 두 개의 관문을 설치 했는데 그 중에 하나 가 바로 옥문관[玉門關]이다. 감숙성(甘肅省)에서 유명한 곳을 이야기 하라고 한다면 공동파가 있는 공동산과 난주(蘭州) 등과 함께 손꼽히 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천인문 등이 옥문관에 있는 한 주루에 도착한 것은 이미 오후가 한참 지난 때였다. 고비사막을 지나서 중원으로 들어가는 것은 이미 타클라 마칸에서 충분히 괴로움을 겪었던 천인문이 강하게 반대를 했기 때문 에 그들은 여기서 하루를 쉬고 난 후 곤륜과 청해를 통해 중원으로 들 어가는 방법을 택했다. '삼원루(三元樓)' 라는 간판을 내 걸고 있는 허름한 주루에 다섯 필의 말이 도착하자 소리를 들었는지 안에서 한 점소이가 뛰어나왔다. "어서 오십쇼!" 점소이의 인사를 받으며 그들은 말에서 내렸다. 말을 받아 끌고 가는 점소이를 뒤로 하고 천인문 등은 주루로 들어갔다. 길가에 놓인 좌석 이 먼지로 덮혀 있기에 별로 장사가 안 될 것 같은 곳이었지만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식사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이 들어가자 사람들이 그들을 돌아 봤지만 먼지를 엄청 뒤집어 쓴 그들이 별 볼일 없어 보이자 관심을 거두었다. 그들은 비어 있던 구석의 한 탁자로 걸어가 자리를 잡았다. 곧 중년의 사내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무얼 드시겠습니까?" "생각보단 사람이 많군. 여기는 뭘 잘하지?" 궁소미가 물었다. 그러자 중년인은 바로 침을 튀기며 입을 열었다. "손님께선 여기는 잘 모르시나 보군요. 저희 주루는 세 가지를 잘 하지 요. 그래서 이름도 삼원루입니다. 그 첫 째는 오향장우육입죠. 대파와 생 강, 팔각 등을 익힌 쇠아롱사테에 넣고 살짝 졸여내는 그 맛이 일품입죠. 그리고 둘 째는 마파두부입죠. 방법이야 잘 아실테니 말씀 드리진 않겠 지만 이 마파두부야말로 저희 가게의 이품이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론 요리가 아니라 소흥주(紹興酒)입죠. 이것이 바로 삼품입니다." 이런 요리들은 생전 처음 듣는 천인문과 혜령이었다. 그냥 말똥말똥 눈 만 깜박이며 궁소미가 하는 것만 보고 있었다. "흔해 빠진 오향장우육과 마파두부가 일품과 이품이라.... 어디 맛이나 볼까. 일단 오룡차부터 가져다 주고 차례대로 내 오도록 해 줘요." "술은 안 하십니까?" 별로 술 생각이 없던 궁소미는 그냥 거절 하려 했으나 눈을 반짝이며 자 신을 보는 채광을 보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소흥주 한 병 좀 가져다 줘요" 궁소미가 말하자 채광이 얼른 말을 이었다. "기왕이면 소흥주보단 여아홍이나 가져다 주게. 소흥주 같은 술은 먹어 서 뭐하나. 마실려면 노주(老酒)를 마셔야지." 주인장은 채광의 말에 눈을 찌푸렸다. "죄송하지만 여아홍은 없는데요" ".....그렇다면 고량주(高梁酒)는 있겠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주인은 몸을 돌려 주방으로 갔다. 곧 점소이가 차주전자와 잔을 들고와 그들의 앞에 놓고는 물러갔다. 그제서야 그들은 자신들의 앞에 놓인 잔에 차를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정말 힘들었어. 여기서부터 중원이겠지?" 천인문은 고개를 들어 채광을 바라보았다. 채광은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대답했다. "일반적으로 여기서부터 중원이라 부르긴 하지요. 하지만 아직 솔직히 중 원이라고 말하긴 힘든 것이 여긴 아직도 중원의 중심에선 상당히 먼 외곽 지역이기 때문에 그렇게 사람들이 많지를 않습니다요"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도 사람이 적다니... 중원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인지 정말로 궁금해지는 천인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점소이가 고량주 한 병과 마파 두부를 들고 왔다. 다른 이들은 모두 마파두부로 먼저 손이 갔지만 채광은 바로 고량주를 잔에 가 득 부어 들이켰다. '커~' 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닦는 채광을 보자 천인문 도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맛있어?" "한 잔 해 보시겠습니까?" 딴 사람들이 거절할까 바로 잔에 조금 따라 천인문에게 내민다. 천인문도 사양치 않고 한 모금을 마셨다. 바로 목구멍에서 불덩이가 치밀어 올랐다. 쿨럭거리며 기침을 하는 천인문을 보자 혜령은 바로 등을 두드려 주었다. 채광은 조금씩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한 천인문을 보며 고소하다는 미소 를 살짝 지었다. "천인 동생은 아직 술마시기 힘들어. 꼭 마시고 싶다면 소흥주나 해보는게 어때? 향기도 좋고 약한 술이니 여자도 쉽게 마실 수 있거든" 한 잔의 술에 정신 없던 천인문은 그냥 거절하려 했지만 향기가 좋다는 말에 다시 관심이 갔다. 다시 점소이를 불러 소흥주를 시키자 잠시후 오향 장우육과 함께 가져왔다. 술을 내려 놓자 병목에서 흐르는 향기가 코 끝을 간지르기 시작했다. 천인문은 이미 식어버린 마파두부보단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오향장우육을 한 점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우와~ 이거 정말 맛있는데." "맛있어? 그럼 내가 나중에 동생한테 잘 가르쳐 놓을께." 궁소미가 혜령을 보며 말하자 천인문도 씩 하니 웃으며 혜령을 바라 보았 다. 혜령도 살짝 웃으며 소홍주를 들어 천인문의 잔에 술을 따랐다. 갑자 기 코 끝을 간지르던 향기가 갑자기 짙어진 느낌이 들었다. "흐음" 천인문은 살짝 소흥주를 입술로 가져갔다. 독한 술을 먼저 마셔서 그런지 소흥주는 상당히 달콤했다. "이~야. 이거 상당히 맛있는데. 항상 이것만 먹었으면 좋겠다" 천인문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킥킥킥" 갑자기 웃음 소리가 천인문의 귀에 잡혔다. 혜령과 궁소미, 채광은 웃긴 했지만 소리내며 웃지는 않았다. 그 웃음은 분명히 자신의 뒤에서 들려온 웃음이었다. "누구야?" 천인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몸을 돌렸다. "...여기야...여기" 천인문이 엉뚱한 곳을 보고 있자 한 사람이 손을 들어 흔들었다. 천인문을 부른 사람은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붉은 색과 흰 색이 아주 예쁘게 조화된 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옷보다는 훨씬 더 예쁘게 보였다. 그녀의 앞에는 하얀 옷에 죽립을 쓴 한 사내가 그녀의 맞은 편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천인문을 향해 손을 흔들며 부르자 천인문은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네가 날 보고 웃었냐?" "응. 네가 술 마시는 모습이 너무 우스웠거든" "우습긴 뭐가 우습다고, 흥! 꼬마주제에... 여자가 남자를 보고 웃다니 참" "꼬마라고? 너도 꼬마잖아." 그러더니 그녀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천인문의 앞으로 다가와 키를 제려 는 듯 손을 머리 위로 든다. "나보다 한 치나 작은 주제에 꼬마라니. 앞으로 누나라 불러. 안그러면 혼낸 다" 두 손을 옆구리에 턱 하니 놓고 째려보는 그 모습이 상당히 귀여웠다. 하지 만 여자에게 지는 것은 더 못 참는 천인문이었다. "웃기고 있네. 네가 왜 내 누나야? 너 몇 살인데 나보고 누나라 부르라는 거 야?" "이래뵈도 난 아홉살이야. 넌 척 보니 한 여덟 정도 먹었겠구나?" "겨우 아홉살!? 난 이래뵈도 열 세살이나 먹었어. 너보단 훨씬 많이 먹었단 말야" 그제서야 천인문은 우습다는 듯이 소녀를 쳐다 봤다. 하지만 기가 죽긴 커녕 바로 맞받아치는 소녀였다. "그래. 너 열 세살 먹었다는 거 인정해 줄께. 하지만 요즘은 나이를 거꾸로 먹나? 자꾸 키가 줄어 드는 걸 보면 말이야" 한 방 먹은 천인문. 주먹이 살짝 쥐며 부르르 떨었다. 계속 이렇게 두면 안 되겠다 생각한 궁소미가 천인문을 부르려 할 때였다. 그 녀의 뒤쪽에 앉아 있던 죽립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만해라 미랑아." 그 말을 들은 미랑이란 소녀는 네 하고 대답하며 몸을 돌려 사내쪽으로 다가갔 다. -17- 식사를 마쳤는지 죽립의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다가온 미랑 을 번쩍 들어올리고는 몸을 돌려 주루 안쪽에 나 있는 문으로 들어갔다. 사내의 품에서 두손으로 사내의 목을 감은 미랑은 고개를 내밀고는 혀 를 쏘옥 내밀고는 사라져갔다. '저게..' 하며 째려보는 것도 그녀가 문밖으로 사라지자 그만둘 수 밖 에 없었다. 천인문은 다시 일행이 앉아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천인 동생, 계속 생각해 봤는데 고비사막을 통해 넘어가는 것이 좋 을 것 같아. 고비사막은 타클라마칸 사막하곤 달라서 초원이 상당히 많아. 그래서 유목하면서 살아가는 부족도 많고, 볼것도 많아. 그리 힘들 지도 않은데다가 거리는 훨씬 가까워."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궁소미가 입을 열었다. 천인문이 혹 할수 있는 것 들만 이야기를 만들어서 얘기를 했다. 그러자 천인문은 눈을 살짝 깔고는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 시간도 잠시 뿐. "좋아요. 누나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렇게 하죠" 흔쾌히 동의하자 옆에 앉아 있던 혜령의 얼굴에도 조금 화색이 돌았다. 그녀도 마음이 맞는 궁소미와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언제 출발할 건데요?" "이틀 쉬고 그 다음날 출발할 생각이야. 며칠동안 여행을 했으니 충분히 피로는 풀어야 하지 않겠어?" 궁소미의 말에 천인문은 채광을 돌아봤다. "너도 같이 갈 거지?" 채광은 그만 소굴로 돌아가고 싶었다. 냄새나고 잘 씻지도 않는 그 녀석들 이 눈앞에 아른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천인문의 눈길에 목구멍까지 올라 온 말은 다시 삼킬 수 밖에 없었다. "...다..당연히 같이 가야죠" 그의 속을 짐작했을까? 혜령은 채광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냈다. "이 사막만 지나고나면 돌아가실 수 있을 거에요. 그때까지만 수고좀 해 주시겠어요?" 채광은 혜령의 부드러운 어투에 위로를 받긴 했지만 어째 손해를 보는 느 낌이었다. 더 앉아 있을 이유도 없었다. 천인문 등은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인이 다가 왔다. 식사 대금을 지불하고 난 뒤 궁소미는 이틀간 머물 숙소를 주인에게 물었고, 주인은 이 곳은 옥문관 최고의 숙소를 가지고 있다는 말로 그들을 붙잡았다. 여행비 관계로 처음에는 방을 두개만 잡으려고 했지만, 이것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고 우긴 천인문에 밀려 상방 두개와 중방 하나를 잡았다. 주인은 점소이를 불러 그들을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일층밖에 없었던 주 루의 숙소는 아까 미랑이란 소녀가 사내와 함께 나갔던 그 문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바로 문을 나서자 제법 아담한 크기의 집들에 둘러싸인 정원이 나타났다. 정원이라고 했지만 아름다운 관목이나 연못이 있는 정원은 아니었다. 단 순히 희귀하게 생긴 돌 등을 조화롭게 배치해 둔 것이 다였다. 정원에 들 어서자 점소이는 중앙의 두 방과 옆에 붙은 방을 주고는 공손히 절하며 물 러 갔다. 처음 이 정원에 들어 왔을 때 눈길을 사로잡힌 것은 궁소미였다. 그녀의 하녀였던 매향도 주인을 닮았는지 정원에서 눈길을 때지 않았다. 천인문은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흔히 보이는 돌들을 이리저리 놓은 것이 다인데 뭐가 그렇게 좋은 것인지. 그것은 혜령이나 채광의 경 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너도 여기서 자니? 열. 세. 살!" 갑자기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천인문은 흠칫하며 돌아봤다. 그곳에는 아 까 주루에서 본 미랑이란 소녀가 서 있었다. 뒤쪽에는 죽립의 사내가 좀전 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검을 등에 매고서 정원을 배회하고 있었다. '이놈의 계집애는 아까부터 내가 모르는 곳에서 불쑥 나타난단 말이야. 꼭 귀신 같잖아.' 귀신이란 생각이 떠오르자 어렸을 때 단목미령에게 들었던 귀신의 모습 과 미랑을 같이 겹쳐서 떠올렸다. 조그맣고 귀여운 얼굴에 피를 입술로 흘 리며 노려보는 모습을 연상하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미랑은 천인문이 자신을 보고 웃자 기분이 좋아졌다. 아까 주루에서 만난 작은 꼬마. 자기보다 키도 작은 아이가 자신에게 딱딱거리며 대드는 모습 이 너무도 귀엽게 느껴졌다. 그녀의 가슴에 살며시 파랑이 일게 된 것은 그 때부터였다. 그런데 지금 자신을 보고 웃어주는 것이다. "우리 밖에 나가서 놀자. 요 앞에 보니깐 조그만 시장이 있더라." 천인문은 갑작스런 제안에 어깨를 움찔했지만 그녀의 제안에 혹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저 놀러갔다 올께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천인문의 손을 잡고 문으로 내달렸다. 사내는 그녀를 쳐다 보긴 했지만 가타부타 하지 않았다. "나갔다 올께. 먼저 들어가 있어" 천인문도 미랑에게 질질 끌려가면서 한마디 남겼다. 혜령은 약한 한숨 을 내쉬고는 정원에서 눈을 돌린 궁소미를 한번 보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궁소미도 매향과 함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고, 혼자 남아 머쓱해진 채광 도 자신의 방을 찾았다. 혼자 남은 사내는 무엇을 하는지 정원을 배회하다 혜령이 사라진 방을 쳐다 보고 있었다. 밖으로 나간 천인문과 미랑은 주루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시장을 찾을 수 있었다. 주루 앞을 나설 때 주인장이 요즘 좀도적이 설치고 있 으니 조심하라고 했지만 그들은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돈 같은 귀중품들 은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장은 한적했다. 호객 소리 같은 것은 없었고, 천막 아래 물건을 놓고 파는 상인들은 심심찮게 지나가는 손님들을 잡을 생각도 없는지 그냥 앉아서 고개만 끄덕이고 있을 뿐이다. "여기 볼 것이 어디있다고 날 불렀어?" 천인문은 미랑을 톡 쏘아 붙였다. "흥! 꼭 볼 것이 있어야 불러내나? 넌 열 세살이나 먹었다면서 그것도 몰라?" "...." "나도 여기 볼 게 없다는 걸 알아. 난 이틀 전부터 여기 와 있었단 말이야. 이미 아빠하고 같이 여기도 와서 먹을 거, 살 거 다 해봤어." "...그럼 왜 여기 간다고 했어?" "그거야 여기 간다고 해야 우리 아빠가 보내 주니깐." 천인문은 미랑의 말에 허탈해졌다. "에잉! 그럼 난 돌아갈래. 볼 것도 없는 여기서 뭘 해? 서령촌 장 보다 더 못하잖아" 천인문은 더 볼것도 없다며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미랑은 그제서야 다급해 졌는지 천인문을 잡는다. "아...아냐. 나도 보고 싶은게 있어. 안그래도 아빠한테 거기 보러 가자고 했는데 아빠는 안 간데. 그래서 너하고 갈려고 불러낸 거야" "흐으응 그~래?" 천인문이 실눈을 하고 입꼬리를 올리자 미랑은 얼굴이 화끈해지는 느낌 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있을 순 없었다. 안그러면 계속 놀림을 당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대신 천인문의 손 을 잡아 끌고는 시장의 중앙을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강 한 힘에 딸려간 천인문이었지만 곧 균형을 잡고는 그녀와 함께 앞으로 몸 을 내달렸다. 얼마를 갔을까? 양쪽으로 길게 늘어진 상인들의 행렬도 끝나고 모래가 사방을 덮고 있는 사막이 시작되었다. 천인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는 말도 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내달렸다. '이놈의 계집애. 아까부터 지 하고싶은데로 하네. 으음 좋아 맛을 보여줘 야 될텐데. 어디 좋은 건수가 없을까?' 그녀의 뒤를 따르며 배알이 꼴리는지 뭔가를 열심히 생각한다. 그것을 아 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열심히 앞을 보고 내달렸다. "저기야" 무언가 보이는지 그 자리에 선 미랑은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르켰다. 그제 서야 생각에서 빠져나온 천인문은 그녀의 손을 따라 눈을 돌렸다. 흰 모래 바람이 휩쓸고 간 곳에는 제법 높은 큰 돌이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크기 는 광혈사에 있던 암벽보단 작았지만 우뚝 솟은 그 모습은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저게 바로 토루(土壘)야." "....저걸 보러 온 거야?" "응. 멋지지?" "멋있긴 뭐가 멋있어? 어떤 할일 없는 놈이 저걸 지은거지?" "그건 나도 몰라. 아마 한나라나 당나라 중에 하나가 지었겠지" 저 토루때문에 귀찮게 끌려왔다고 불만으로 한 말의 뜻도 모르고 그녀는 정말 누가 지은 것인지 궁금해서 물은 것인줄로만 알았다. "저 딴 거나 보러 오다니. 난 돌아갈래" 실망했다는 듯 몸을 돌리는 천인문에게 미랑은 한마디 말을 날렸다. "야! 남자가 쫀쫀하게 자꾸 그럴래? 칼을 뽑았으면 뭐라도 베어야 할 거 아 냐. 여기까지 와서 저걸 보지도 않고 돌아간단 말이야?" 건수만 잡으면 뜨거운 맛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이 거의 사라졌던 천인문. 그 녀의 한 마디에 잊어버린 것을 깨닫게 해 준 것이 고맙다는 듯 말했다. "좋아. 내가 실수했어. 남자가 한 번 한다고 했으면 해야지. 가, 가자고" 천인문은 말을 끝내자 바로 몸을 날렸다. "같이 가~" 그녀도 바로 뒤따라갔다. 일각도 안되어 그들은 토루 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미랑은 토루 밑에 도착하 자 열심히 돌아다니며 구경을 했지만 천인문은 열심히 땅만 보고 다녔다. 미 랑이 무얼 하냐고 물었지만 천인문은 대충 얼버무렸다. 그렇게 그녀가 거의 토루의 한 바퀴를 돌며 구경을 다 하고 돌 위에 앉아 쉴 무렵 천인문도 그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천인문은 손에 무언가를 쥐고 돌아왔다. 미랑이 앉아서 쉬고 있는 곳으로 다가온 천인문은 손에 쥔 것을 앞으로 내밀며 입을 열었다. "이것좀 봐. 이게 여기 있을 줄 몰랐네." "뭔데?" 천인문이 내민 것은 조그맣고 연한 녹색의 잎에 엄지손톱만한 주홍색의 열 매 다섯 알이 달린 풀이었다. "예쁘다~" "예쁘기도 하지만 이거 정말 맛있다! 한번 먹어 볼래?" 천인문은 살며시 풀을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는 잠시 갈등하는 듯 했 다. 고심하던 그녀는 아빠가 낯선 것은 먹지 말라고 했다며 거절을 했다. 그 녀가 거절을 하자 다급해진 천인문은 '먹기 싫음 내가 먹을래' 하며 주홍색 의 열매를 따서 입으로 가져갔다. 한 알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본 미랑은 입맛 을 살짝 다시더니 바로 열매 한 알을 따서 입에 넣었다. "맛있네" 생각보다 맛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된 미랑은 남은 열매를 천인문이 따 먹을까 후다닥 따서 입에 넣었다. 그제서야 천인문은 살며시 미소를 입술에 걸었다. 이미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천인문 은 그녀의 옆에 앉았다. "내가 먹은 열매 이름이 뭐지?" "나도 몰라. 그냥 우리 마을 뒷 산에 많이 있었는데, 산에 놀러갈 때마다 자주 따 먹었어. 그런데 미랑아, 네 성은 뭐야?" 천인문의 질문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녀의 성은 진(鎭)이라 했다. 아빠의 이름은 진무릉(鎭茂陵)이었다. 서장쪽 에서 아빠와 단 둘이 살고 있었는데 이번에 같이 나왔다고 했다. 왜 죽립을 쓰고 있냐는 질문에 진미랑은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특별히 상처 같은 것도 없고 못 생긴 것도 아니라 했다. 진 미랑의 말에 따르면 아빠처럼 멋있 는 사람은 본적이 없다고 했다. 아빠만 보면 너무 좋다는 말에 천인문도 엄 마인 단목미령이 떠올랐다. 솔직히 천인문도 아빠보단 엄마가 더 좋았다. 그래서 계속 업히길 좋아했고 지금도 혜령에겐 엄마와 같은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아마 진미랑도 아빠와 같이 살았으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였다. 진미랑의 눈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바로 천인문이 기다리고 있던 반응이 온 것이다. -18- 진미랑은 아려오는 배를 잡았다. "아 배아퍼" 울상을 지은 그녀의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그 모습에 쾌재를 부르는 천인문이었다. 진미랑은 천인문에게 잠시 기다리라 한 후 암벽쪽 의 가려진 곳으로 어기적거리며 걸어갔다. 잠시후 천인문이 기대하던, 하 지만 우아하지 못한 소리가 들려왔다. 천인문은 배를 잡고 입을 막은 채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웃음도 얼마 가지 못했다. 그의 배도 아파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제서야 뭔가 잘못 됬 다고 생각했다. 그 열매를 한 알 정도는 먹더라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야 한다. 그녀처럼 네 알이나 먹으면 제법 복통은 오게 될 것이지만 그것도 한 시진이 안가 멈추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지금 한 알을 먹었는데도 이렇게 반응이 올 정도라면 그녀의 상태는 심각한 것이다. 그는 잘못하면 송장 치우는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쿡쿡 쑤시는 배를 잡고는 아까 풀을 캤던 곳으로 걸어갔다. 자연은 참으로 오묘한 것이라 독초 같은 것을 내렸다면 그 반대의 해독초도 같이 내린다. 천인문은 이 풀을 제압할 그 무언가가 그 부근에 존재할 것이라 생각했다. 과연 그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짙은 녹색의 풀이 그 옆에 소담히 자 라고 있었다. 그는 확실한지 살펴볼 겨를도 없이 한 줄기 잎을 떼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 맛은 아주 씁쓸했지만 약효는 탁월한지 바로 복통이 가라앉 았다. 그는 눈에 보이는대로 그 풀을 모았다. 미랑에게 이대로 먹으라고 주 긴 힘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즙을 모을 병도 풀을 섞을 약탕도 가진 것이 없는데.... 의원이라는 사람이 침과 같은 도구들을 하나도 가지고 다 니지 않는다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비웃겠지만 천인문은 그런 것에 는 관심이 없는 인간이었으니 말이다. 천인문은 그 뽑은 풀들의 잎에 뭍은 흙과 먼지들을 다 털어낸 후에 그녀 가 사라진 곳으로 걸어갔다. 진미랑은 치마를 위로 걷어 올리고 땅에 쪼그리 고 앉아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구토까지 했는지 그녀의 앞에는 누런 오물 까지 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죽기 일보직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모 습을 기대하고 있었던 천인문이었지만 실제로 보니 가슴이 아려왔다. "저리 꺼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채 외치는 그녀의 말에서 서슬이 느껴졌다. 하지 만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그를 다리를 붙들었다. "이거 먹으면 당장 아픈 배가 멈출꺼야. 나도 먹었어" 그러자 그녀는 그가 내민 풀을 봤다. 짙은 녹색의 작은 잎이다. 이미 그의 입 주위에는 푸른 물이 든 것이 이 풀을 먹은 듯 했다. 그녀는 배를 누르고 있던 손을 내밀어 풀을 받았다. 그리고는 입으로 가져갔다. 위에서 올라온 신물과 함께 씹히는 그 맛은 엄청 시큼하게 느껴졌지만 다행히 효과는 빠르 게 나타났다. 그녀의 안색이 좋아지는 것을 본 천인문이 물었다. "좋아졌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임으로 답을 했고 그제서야 천인문의 가슴도 한 시름 놓 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본다면 정말 이상하게 쳐다볼 만한 모습이었다. 누런 구토물을 사 이에 두고 남녀 아이가 이야기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직접 당한 일이라면 엄청난 수치심에 시달릴 만한 일이였지만 이 당사자들에겐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단지 아픈 배가 멈추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기뻐하고 있었으니 깐 말이다. "....그런데" "....왜?" 아픈 배는 멈추었지만 아직 남은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한 줄기 바람은 구 토물이 아닌 다른 냄새를 천인문에게로 밀어주었고 그제서야 확실히 이번 문제의 해결책은 더 까다롭게 생각되는 천인문이었다. 혜령은 방안에서 이리저리 서성거리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많이 흘러갔는데 밖으로 나간 사람은 소식이 없다. 안절부절 못 한 그녀는 방을 나서 주루로 걸어갔다. 주루의 안쪽 문을 통해 밖으로 나온 혜령은 주루의 탁자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던 그 죽립의 사내를 볼 수 있 었다. 아마 그도 진미랑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어린 딸이 밖으로 나가서 사위 가 어두워 지고 있음에도 돌아오지 않는데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는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녀만의 생각이었을까? 그녀는 주루의 문 앞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디 나가서 무슨 일이나 당한 것은 아닐지... -히히힝, 푸르르- 말의 투레질 소리에 그녀는 깜짝 놀란 가슴을 살며시 쓸어 내렸다. 그녀는 왜 이렇게 자신의 마음이 소심해 진 것인지 심히 부끄러웠다. "이쪽으로 오시지 않겠소?" 뒤쪽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움찔한 혜령은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 공을 찾았다. 바로 진무릉이다. 그녀는 이렇게 서 있는 것이 머쓱했는지 살 며시 발을 옮겨 진무릉 앞으로 다가갔다. 진무릉이 권한 자리에 혜령이 앉 자 술을 권한다. 그녀는 살짝 거절했고, 그도 당연한 반응이라는 듯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진무릉이라 하오" ".....제 성은 '서' 예요" 죽립으로 가려진 그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녀의 허리에 감긴 저 흰 천과 같은 것은 분명 연검일 것이다. 그것으로 보아 그녀는 무림인일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녀의 몸놀림과 발걸음 소리로 보아 무공을 익힌 것이 확실했다. 나정도 되는 수준의 인물이라면 확실히 알 수 있다. 대체로 무림인이란 것들은 여인이라 해도 자신의 이름 을 밝히는 것은 어려워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녀는 무림인이 아니란 말 인가? 진무릉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때 혜령은 진무릉을 차분히 살피고 있었 다. 비록 죽립으로 가려져 얼굴의 전반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용모는 차 분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술에 젖어 반짝거리며 빛나는 입술과 호선으 로 꺽인 뺨과 턱의 모습은 군자같은 느낌이다. 그의 눈은 보이지 않지만 아 마도...충분히.... 그녀는 무엇이 떠올랐는지 살포시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졌음을 느꼈을까? 진무릉은 들고 있던 술잔을 입 으로 가져가 목을 축였다. "동생을 기다리는 것이오?" ".....예.." 혜령은 말을 하고 나자 화들짝 놀랐다. '오늘은 자꾸 왜 이러는 거지?' 그녀는 극도의 혼란감 속에 잠겨 버렸다. 지금까지 이런 느낌은 한 번도 없 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녀가 원하던 그녀의 행동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겠다. 천인문을 기다리는 불안감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진무릉을 보았다. 보이진 않지만 그녀의 상상 속에서는 보이는 그 눈동자. 지금 차분히 생각해 보면 그녀가 불안에 잠기게 된 것은 주루의 문 앞에 서 있을 때 부터였다. 아니다, 그게 아니었다. 불안한 느낌이 든 것은 진무 릉이 정원을 배회하던 모습을 본 그때부터였다. 어딘지 모르게 안정되지 못 하고 무슨 생각에 잠겨 있던 그 모습이 나를 이렇게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상당히 껄끄럽게 느껴졌다. 그만 자리에 서 일어나고 싶은데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혜령은 이 자리가 좌불안석(坐不安席)이었지만 진무릉은 조용히 생각에 잠 기고 있었다. 그와 함께 앉아본 경험이 있던 사람들 중에 여자들은 이런 반 응을 보인다. 그 반응 정도는 여인들의 기질에 따라 달랐다. 지금처럼 고요히 있을 때는 성격이 차분하고 부드러운 여자들일수록 반응이 심했다. 하지만 그 힘을 완전히 개방했을 때는 쾌활하고 다혈질적인 여자들이 더욱 크게 반응 을 보였다. 이 여자는 아마 전자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놀란 것은 이것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완벽하게 힘을 숨기고 있을 때 이렇게 심한 반응 을 보이는 여자는 이 여자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평소의 이 여자는 아주 정 숙하고 확고한 신념 같은 그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녀의 남편이 될 남자가 부러워졌다. 그는 과거의 아내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지금 앞의 여자처럼.... 자기만을 영원히 사랑해 줄꺼라 믿었던 그녀는 결국 그를 남겨두고 떠나 버렸다. 9년 전에.... 진무릉이 혼자만의 생각에 잠기자 혜령은 더욱 자리가 불안해졌다.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때였다. 그녀를 구원해 줄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왔어" "아빠~" 주루 안으로 들어온 천인문과 진미랑은 서혜령과 진무릉을 보자 후다닥 다가왔다. 그제서야 마음이 놓인 혜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보자구" 혜령이 다가오자 손을 잡으며 미랑한테 인사를 하고는 안쪽 문으로 걸어 갔다. 혜령과 함께 사라지는 천인문을 보며 손을 흔들던 진미랑은 그의 모습이 다 사라지기도 전에 진무릉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오늘 말이야. 내가 토루에 갔는데 거기서 배가 아파서..." 천인문은 뒤에서 이야기를 꺼내는 진미랑의 이야기를 들으며 싱긋 웃음 을 보였다. 방으로 돌아온 천인문도 씻지도 않고 오늘 벌어진 이야기들을 주저리주 저리 꺼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어줄 혜령은 정작 이야기엔 관 심이 없었다. 그녀의 머리속엔 그 진무릉의 모습만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술잔을 들고 있는 모습하며, 살짝 다문 입술, 등에 맨 붉은 수실의 검 등 모든 모습이 머릿속에 헝클어지듯 풀려 나오기 시작했다. 이래서는 안되 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녀는 자신이 더러운 여자라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의 이런 모습은 곧 천인문에게도 감지 되었다. 오늘따라 그녀는 유 난히 이상했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고 항상 재미있다는 얼굴로 열심히 들어주던 이야기들도 한귀로 듣고 흘려버리고 있었다. "색시야?" "....." "색.시.야?" 어깨를 잡고 흔들고 나서야 그녀의 정신이 돌아왔다. "....네?" "오늘 그 애 이름을 알았어. 바로 진미랑이래. 그 죽립을 쓴 사내가 미랑 의 아빠인데 이름은 진무릉이고..." "진.무.릉?" 아까 분명히 들었던 이름이다. 하지만 어딘지 낯설면서도 가슴 깊숙히 들 어오는 이름. 그녀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진.무.릉" 그제서야 천인문은 그녀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계속 저 렇게 멍한 얼굴로 그 이름만 부르고 있다. 거기다 그녀의 눈은 꼭 단목미령이 천인성을 바라 보고 있을 때의 그 눈이다. 그리고 혜령이 석실에서 엄마를 보 고 싶다고 하며 장모를 생각하고 있을 때의 눈이었다. 천인문은 갑자기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 왜 그녀가 저러는 걸까? 내가 나간 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천인문은 저 뱃속 아래로부터 치밀어 오 르는 그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그 기운은 너무도 커 주체할 수 없었다. "으아~" 엄청난 소리를 지르고는 천인문은 방을 세차게 열고는 정원으로 뛰어나갔다. 숙소에는 궁소미와 매향, 채광만이 있는지 다른 방에는 불이 켜져 있지 않았 다. 천인문은 엄청난 속도로 정원을 가로질러 주루로 나 있는 쪽문으로 몸을 날렸다. 천인문의 소리에 놀란 궁소미 등도 방에서 나와 천인문을 따라 가고 있던 혜령과 함께 주루로 나왔다. 천인문은 주루에 도착하자 아까 그들이 있던 장소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어 디로 갔는지 술병과 잔만이 탁자위에 남아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천인문 의 눈에 주루의 입구 밖에 서 있던 진무릉과 미랑이 보였다. 후다닥 거리며 주루의 입구로 뛰어나온 천인문을 보자 진무릉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소형제. 오늘..." 하지만 그의 말은 천인문에 의해 잘려버렸다. "닥쳐. 이자식 너 혜령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우리 색시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귀여웠던 천인문의 얼굴은 엄청 일그러져 있었다. 그 말을 듣던 진무릉의 얼 굴도 찌푸려졌다. 죽립 밖으로 보이는 매끄러운 입술이 경련을 일으켰다. "말을 함부로 하는군"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천인문이 맞받아쳤다. "함부로 한다고? 웃기지마라. 너같은 녀석에겐 존대같은 건 필요없어. 말해 내 색시한테 무슨 짓을 했어?" 침을 튀기며 삿대질까지 하는 천인문을 보고 있던 진미랑도 깜짝 놀랄 수 밖 에 없었다. 조금전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좋은 분위기였는데 왜 이렇게 됬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진무릉의 왼손이 떨리고 있 었다. 저 반응은 진무릉이 사람을 죽이기 전에 나타나는 반응이었다. 미랑이 좋아하기 시작한 아이를 아빠가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사과하고 당장 꺼져라.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웃기는 자식. 그런 말에 내가 겁먹고 사과할 줄 아느냐. 너부터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해야할걸. 않그러면 내가 널 죽여버리겠다." 하지만 진무릉은 천인문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단지 옆에 서 있던 미 랑을 뒤로 밀어내었을 뿐이다. "...아...아빠" 울상을 하고 있는 진미랑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지만 진무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밀어낼 뿐이었다. 하지만 천인문은 미랑의 안전 같은 것을 고려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녀가 안전한 곳까지 물러서기도 전에 진무릉을 향해 몸을 날렸다. 몸집은 상당 히 왜소했지만 그 속도는 아주 빨랐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 진무릉의 왼 팔 밑으로 보이는 명치를 노리고 뻗었다. -19- 진미랑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기도 전에 공격을 받은 진무령은 눈을 찌 푸리고는 오른손을 들어 명치를 노리는 손을 받아쳤다. -퍽- 손을 받은 진무릉은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천인문의 몸은 뒤로 튕겨져 오 장 밖으로 날아갔다. 천인문은 날아가는 몸을 앞으로 숙여 둥글 게 만 후에 땅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진무릉쪽으로 뛰었다. 천인문이 다시 공격해 온 시간은 찰나였지만 진무릉에게는 충분한 시간 이었다. 진미랑을 주루의 입구쪽으로 밀어버린 후에 다시 손에 기를 모았 다. 아까는 창촐지간이라 반도 안되는 기로 받아쳤지만 그것만으로도 천 인문의 내공이 얼마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내공은 강한 것 같지만 혼 탁하고 바르지 못한 기운으로 가득차 있을 뿐이었다. 거기다 제대로 된 운기법으로 발출한 공력도 아니었다. 막말로 우격다짐으로 쥐어짜낸 내 공인 것이다. 이정도면 별 어려움 없이 막을 수 있었다. 진무릉은 자신이 가진 공력의 절반을 손에 넣었다. 천인문의 손이 다시 그의 가슴을 향해 찔러왔다. 진무릉은 왼손을 들어 배를 찔러온 손을 덮 어씌우듯이 누른 후에 옆구리에 붙어 있던 손을 천인문의 옆구리를 향해 뻗었다. -퍼퍽- 진무릉의 손에 옆구리를 맞은 천인문은 뒤로 나뒹굴더니 전혀 상처를 입 지 않은 것처럼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또다시 뛰어들어와 그의 옆구리 를 향해 발을 들어찼다. 진무릉은 왼손으로 천인문의 발을 잡고는 확 돌려 버렸다. 공중으로 들려버린 천인문은 얼굴부터 사정없이 땅에 박혀버렸다. 이렇게 다시 일어나서 덤비고 쓰러지고를 몇번 하자 천인문의 얼굴은 벌 겋게 달아 올랐고, 흙과 모래로 범벅이 된 천인문의 얼굴엔 몇개의 상처가 생겼다. 천인문의 속에선 불이 오르고 있었다. 이렇게 열심히 공격을 했는데 저 놈의 옷깃 하나도 건드려보지 못한 것이 분한 것이다. 거기다 자신은 이 렇게 숨이 가빠오는데 저녀석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거기다 저 녀석 은 죽립조차 그대로 쓰고 있지 않은가! 나 같은 것은 벗지 않고도 상대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더욱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천인문은 조심해서 공격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까는 너무 흥분 해서 그냥 되는데로 공격했지만 이제는 그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 다. 마적단을 상대할 때처럼 뿌릴 모래도 없다. 손에 든 무기도 없다. 이 제 공격할 방법은 석실에서 본 무공들 뿐이다. 천인문은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강한 무공을 생각했다. 초식의 이름은 없었지만 현란한 동작으로 그려져 있던 한 무공이 떠올랐다. 그림없이 구 결만 쓰여진 무공비급이 더 강하다는 것은 혜령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지 만 지금 천인문이 알고 있는 무공은 그림이 그려져 있던 무공들 뿐이었다. 진무령에게 슬금슬금 다가간 천인문은 오른손으로 진무령의 태양혈을 노 렸다. 진무릉은 왼손으로 가볍게 막아왔다. '됬다' 천인문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천인문의 첫 초식은 허초였고 예상대로 진무릉은 그 손을 막으러 온 것이다. 천인문은 곧장 내공을 실은 왼발을 진무릉의 오른발목을 향해 강하게 쳤다. 오른발목을 쳐 올거란 생 각을 못한 것인지 아니면 맞아도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인지 진무릉은 오른 발목을 그대로 맞았다. 진무릉의 몸이 휘청 하고 흔들리며 고개가 앞으로 숙여지는 것을 보자 곧 장 두 손가락을 세워 진무릉의 죽립이 씌여진 얼굴의 눈부위를 향해 찔러 갔다. 그 모습을 보고있던 혜령과 진미랑은 입을 가리고 비명을 질렀다. 천인문은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분명 이공격은 적절했고 절묘했 다. 하지만 실패했다. 진무릉은 허리를 뒤로 눕힌 후에 뇌려타곤의 수법 으로 피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전혀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진무릉 이 얼굴에 쓰고 있던 죽립이 날아갔던 것이다. 천인문은 예상보단 효과가 없음을 한탄했지만 그의 면상을 보게 된 것만으로 만족스럽다 생각했다. 몸에는 이상이 없는지 땅에 넘어진 진무릉은 가볍게 몸을 튕겨 벌떡 일어 섰다. 짙은 눈썹에 우뚝한 콧날과 두툼한 입술. 전체적으로 조화가 잘 되어 보는 사람이 준수하다 여길만한 얼굴이었다. 그의 눈자위는 유난히 하얗고 반대로 검은 눈동자는 유난히 반짝거리며 빛났다. 그의 얼굴은 서서히 찌푸 러지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검은 눈동자는 더욱더 빛이 난다. 지금까지 천인문의 공격만 수비를 하며 반격을 하고 있었지만 이런 시정잡 배나 하는 금기시된 공격을 할 줄은 예상을 못했다. 그는 속에서 치밀어오르 는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했다. 진무릉은 엄청난 속도로 몸을 날려 천인문에 게 다가섰다. 그의 속도는 이미 천인문의 눈으로 감지할 수 있는 수준이 아 니었다. -퍼퍼퍽- 진무릉의 손은 석자도 안되는 천인문의 몸에 꽂히기 시작했다. 막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고, 억 하는 비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번개가 무색하게 빠른 진무릉의 손은 얼굴이며 가슴, 배, 등 할 것 없이 모조리 천인문의 몸에 들어 박혔다. 운좋게 팔로 막은 것도 있었지만 팔도 뒤로 튕겨 버렸다. 얼마를 때렸을까. 진무릉은 숨을 들이 쉬고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그 리고 지금까지 서 있던 천인문은 무릎을 꿇고 앞으로 쓰러졌다. 혜령은 천인문이 진무릉의 죽립을 벗길때까지만 해도 자신 때문에 이런 일 이 벌어진 것이 너무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일어선 진무릉의 눈빛을 본 이후 엔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못했다.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반짝이는 진 무릉의 눈빛에 마치 자신이 벌겨벗겨진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그래서 천 인문이 사정없이 맞고 있을때도 전혀 말릴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혜령을 따라 나왔던 궁소미와 매향의 경우 는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 오르며 몸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 진미랑의 경우 는 아직 나이가 어려선지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냥 땅에 쓰러진 천인문을 보 며 울먹이고 있었다. 그의 공격은 단순히 아프기만 했다. 이정도라면 기절을 해야 당연한 것인데 그럴수도 없었다. 천인문은 몸을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입에선 한 줄기 피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쓰러진 것이 혜령에게 너무 미안했다. 아니 부끄 러웠다. 그러나 그녀는 천산에서처럼 자신을 위로해주고 안아줄 것이다. 하지 만 고개를 들어 혜령을 쳐다본 천인문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넋을 잃고 진무릉만 보고 있다. 딴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것 은 별 상관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혜령만이 중요한 존재였음으로. "건방진 녀석. 내 딸을 살려줬으니 이정도에서 그만두겠다." 진무릉의 목소리는 얼음속에 잠겼다 나온 것처럼 싸늘하기 이를데 없었다. 천인문은 다시 천천히 진무릉을 쳐다 보았다. 잘 생긴 얼굴. 자신감에 차 있 는 저 모습. 천인문은 가슴이 답답해져옴을 느꼈다. 그가 미워 죽을 것 같았 다.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네 딸 때문에 살려준다고? 우~하하하하. 웃기지 마라. 내가 왜 너한테 고 맙다고 인사를 받아야 되지? 네 딸 배 아픈 것을 치료해 줬다고? 그렇게 아프게 한 것은 누군데. 바로 내가 독초를 먹여서 그런거야. 그런데 고맙다 고 했냐? 정말 우스워 죽겠군. 크크크큭" 그 말을 듣고 있던 진무릉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다시 눈이 빛나기 시작 했다. 천인문도 이대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눈이 빛나기 시작함과 동 시에 그는 자신의 몸을 줄이고 있던 공력을 풀어 버렸다. 우두둑 하는 소 리와 함께 걸치고 있던 옷이 늘어나다 쭉 하고 찢어지며 그의 팔다리와 몸 은 여섯 자가 안되는 크기로 커져 버렸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궁소미와 채광 등은 깜짝 놀라고 있었다. 자기들은 천인문의 모습이 일부러 변형된 것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진무릉도 마음속으론 놀라고 있었다. 분명히 축골공을 쓸 정도라면 내공은 상당할 것이다. 공격은 아까같은 비겁한 공격들만 조심하면 되지만 저 내공 을 그대로 쏟아낸다면 승부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그는 선제공격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천인문의 생각도 진무릉과 마찬가지였다. 몸이 다 커지자 바로 손에 기를 모으며 진무릉의 앞으로 뛰었다. 손과 손이 부딛히자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발 밑의 모래가 피어올랐다. 내공 은 비슷한 듯 두 명은 두 걸음씩 뒤로 밀려났다. 하지만 전투 경험은 진무릉 이 월등 앞서고 있었다. 그는 뒤로 밀리자 마자 다시 몸을 날려 천인문의 뒤 쪽으로 날아갔다. 먼지가 걷히기를 기다리고 있던 천인문은 뒤에서 무슨 소 리가 나자 바로 발을 돌려 찼지만 진무릉은 제자리에서 살짝 뛰어 오른 후에 땅에 내려서면서 천인문의 가슴을 사정없이 차버렸다. 커헉 하는 소리와 함께 천인문의 입에서 피분수가 튀어오르고는 굴러버렸다. 허나 천인문의 사정을 봐 주지 않겠다는 듯 바로 다가서는 진무령. 쓰러진 천 인문의 멱살을 잡고 일으키더니 팔꿈치와 손목으로 배와 얼굴을 연속으로 때 렸다. 넘어지면 일으키고 일어서면 다시 때렸다. 매달려 있던 천인문은 손과 발로 기습을 했지만 진무릉은 너무도 가뿐히 피한 후 다시 때렸다. 속도는 조금전 보단 느렸지만 힘은 더 강했던지 맞을 때 마다 천인문의 입에선 피가 튀었다. 진무릉은 한참을 때린 후 천인문의 의식이 끊어진 것 같이 보이자 멱살을 잡 은 손을 풀었다. 털썩 하고 천인문이 땅바닥에 쓰러지자 진무릉은 한마디를 남기고는 진미랑의 손을 잡고는 주루로 들어가버린다. "네 색시 때문에 살았다고 생각해라." 천인문은 몸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아직 정신은 잃지 않았다. 이미 폐부와 위 등의 내장도 상당히 상했다. 하지만 그를 아프게 하는 것은 그런것이 아 니었다. 마지막 그가 남겼던 한마디 '네 색시 때문에 살았다고 생각해라'. 그 말 한마디는 천인문의 가슴을 후벼파는 칼날이었다. 내가 인정이 많아서 살려준다는 것도 아니다. 내 딸의 안면을 봐서 살려준 다는 것도 아니다. 단지 나의 색시 때문에. 내 색시를 보고 살려준다는 것이 다. 땅에 쓰러진 천인문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너무도 서글펐 다. 자신이 익혔던 무공 자체에 대해 회의가 생겼다. '색시도 내 무공이 강하다고 했어. 천산에 있던 대빵 호랑이도 내 손에 죽었 고, 마적들도 내 손에 죽었어. 그런데 이게 뭐지? 내가 졌어. 져서 이렇게 땅 에 뒹굴고 있어. 그럼 난 지금까지 뭘 한 거지?' 혜령은 사방을 흔드는 천인문의 비명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왜 싸 움을 말리지 않은 것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진무릉이 주루로 들어가서 야 천천히 천인문에게로 다가갔다. "상공" 혜령이 쓰러진 천인문을 흔들자 천인문은 고개를 들었다. 혜령을 쳐다보 는 천인문의 눈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배신감에 떨고 있던 눈이었다. 무섭게 인상을 찌푸리더니 가슴을 잡고는 일어선 천인문은 원망스런 눈빛 으로 혜령을 바라보다 그냥 몸을 돌려 소리를 지르며 저 편으로 뛰어가 버 린다. "으아~" 혜령도 멈칫하다 천인문이 사라진 곳으로 뛰어갔다. "우리도 쫓아가 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혜령이 사라지자 매향이 궁소미에게 물었다. 그러자 궁소미가 다시 한 마 디 했다. "아서라. 지금 저렇게 맞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줬는데 우리가 가서 뭐라고 할건데? 내가 볼땐 천인 동생은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 중심적이야.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은 보통 다 그렇지만 천인 동생은 좀 유별나지. 거기다 우리 일행을 끌고 다닌 중심 인물이야. 지금까지야 내가 나이로 밀어부쳐서 천인 동생을 따라오도록 했지만 실제로는 그가 일행을 끌어 간 거지. 그런데 우 리들 앞에서 저렇게 박살이 났어. 그의 자존심은 부서졌겠지. 거기다 혜령 동생은 우리처럼 그에게 정신이 빠진 것처럼 보였어. 그런데 천인 동생의 마음이 어떻겠어? 우리가 간다면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꼴일껄." "허허허.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는지요?" 한 쪽 옆에 서 있던 채광이 웃으며 궁소미에게 물었다. "제 직업상 사람을 좀 볼 줄 알지요" "직업이라? 우리 마적단에 잡혀 왔을 때 그냥 부잣집 마나님이신 줄 알았는 데 직업을 가지고 계셨나 보지요?" "물어보는 사람도 없는데 왜 제가 일부러 답하겠어요. 그나저나 혜령 동생 이 천인 동생을 잘 대리고 와야 할 텐데...." 그녀는 말을 하기싫은 듯 슬며시 딴데로 방향을 돌렸다. "솔직히 말이 났으니 말인데, 아까 천인 꼬맹이..." 말을 듣고 있던 궁소미가 채광을 쳐다보자 헛기침을 하던 채광이 다시 말 을 이었다. "그가 맞는 모습을 보니 좀 불쌍하더군요." 불쌍하다고 말했지만 전혀 그런 느낌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깊은 밤이 됬 기에 표정을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궁소미는 채광의 말투에서 아쉽기는 커 녕 오히려 통쾌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다시 고개 를 돌려 천인문과 혜령이 사라진 곳을 바라 보고 있었다. -20- 천인문은 쉬지 않고 달려가고 있었다. 눈에서 흘러 내린 눈물은 뒤쪽 으로 흩날리면서 떨어지고 있었다. 커진 육체로 인해 옷은 몸을 죄어왔고, 기혈은 솟구쳐 올랐지만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모두 보고 싶지 않아. 색시가 보기 싫어. 미워 죽겠어' 한 없이 자신만의 생각에 잠긴 천인문은 뒤쪽에서 쫓아오며 자신을 부르 는 혜령의 목소리를 놓치고 있었다. 그는 방향이 어딘지도 모르고 무작정 앞으로 내달릴 뿐이었다. 혜령은 천인문의 뒷모습만 보며 뒤쫓아갔다. 아무리 불러도 들리지 않 는 것인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은하잠류연(銀霞潛流燕)의 경공술로 뒤쫓았지만 거리는 줄어들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쫓기고 쫓자 그들은 이미 옥문관을 넘어서 타클라마칸 사 막의 초입까지 도달했다. 저만치 앞서 달리던 천인문이 가슴속의 울분을 토해내듯 소리를 지르더 니 공중에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혜령은 급했다. 천인문이 하늘로 피분수를 뿜으며 쓰러지자 그녀는 어느 때보다 빠르게 천인문의 곁에 다가섰다. "상공" 혜령은 손을 뻗어 쓰러진 천인문의 몸을 끌어안았다. 너무나 급해 몸의 상태가 어떤지 확인도 않고 그냥 흔들어 댈 뿐이다. 하지만 천인문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너무 슬픈 나머지 혜령은 천인문의 작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눈물을 흘리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 천인문의 가슴 기복이 느껴진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천인문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는 이렇게 있어서는 안된다 는 생각이 들었다. 혜령은 천인문의 맥박과 숨결에서 목숨이 경각에 달 린 것은 아니란 것을 알게 되자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 급하지 않 으니 여기서 치료한다고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곳이 지만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른다. 혜령은 쓰러진 천인문을 일으켜 그녀 의 등에 업었다. 그의 몸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평소처럼 키가 작은 것도 아니었고, 천인문이 내공을 올려 몸을 가볍게 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자신들이 머물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천인문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별들이 하늘에 반짝이고 달은 하늘 중 천에 떠 있는 것이 눈에 잡혔다. 그제서야 자신이 누군가의 목에 팔을 감 고 업혀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색시야?" 혜령은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반색하며 물었다. "일어나셨어요?" ".....색시 미워" 동문서답이었다. "색시 보기 싫어. 모두 미워 죽겠어" 그녀의 가슴이 아려왔다. "엄...마가 보...고 싶어. 엄...마.... 어엄..마..." 혜령의 목덜미에 뜨거운 물이 떨어져 등으로, 가슴으로 흘러내렸다. "....죄..송해요" 그녀의 목소리도 다시 잠겼다. 그들은 그렇게 걸어갔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 때였다. "그런데 훌쩍, 왜 따라왔어 킁? 그 녀석 따라가지 않고" "왜라뇨. 당연히 상공이 걱정되서..." "거짓말 하지마. 내가 걱정이 됬으면 아까 싸울때 왜 그냥 보기만 했어?" "그...그거야.." 혜령은 입이 막혔다.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나도 알아. 그 희멀건 녀석 보니깐 뿅 간가지? 이상하게 눈도 반짝반짝 거리고, 말도 나처럼 조잡하지 않고 멋지게 하니깐 반한 거지?" 말에 힘은 없었지만 뼈가 담긴 듯 그녀의 가슴에 콱 들어박혔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도 왜 그런지 몰랐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사람눈이 그렇게 빛날 수 있지?" 확실히 어리긴 어렸다. 조금 지나고 나니 궁금한 게 떠오르는지 지금까 지 서먹한 말투는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혜령은 그제서야 진무릉의 눈이 왜 그렇게 빛났는지 궁금해졌다. 거기 다 그 눈을 보고 난 후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칫! 분명히 사술일꺼야. 눈으로 아무 힘도 못쓰게 해 놓고 패는 나쁜 놈일껄. 내가 싸울 때 그 눈만 안 봤으면 분명히 이길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그의 말에 그렇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을 말 할 수는 없었다. 천인문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자신의 상대가 아니었다는 걸 알고 있었 다. '나보다 한수, 아니 두 수는 셌어. 칫! 억울해. 모래만 있었어도 내가 이 길 수 있었을 텐데. 이번엔 졌지만 다음번엔 절대 안 질꺼야. 그 호랑이 녀석처럼 힘이 안되면 머리를 써서라도 이길꺼야.' 천인문은 혜령의 등에서 굳은 결심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기고 보겠다고, 절대로 지지 않겠다고 말이다. 한 시진이 넘게 걸어오자 그들이 머무는 주루가 조금씩 보였다. 그녀 는 이제 천인문을 치료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발을 빨리 움직였다. 그때였 다. 어디선가 주루쪽으로 두명의 인물이 나타나더니 마굿간으로 사라졌 다. 혜령은 주루에 머무는 인물들이 어디론가 나가는 것이라 생각 했다. 하지만 곧 그들이 끌고 나온 네 필의 말을 봤을때 그들이 말 도둑인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이 끌고 나온 것은 바로 그들이 타고 왔던 말이었기 때 문이었다. "야 이 도둑놈들. 거기 서지 못해!" 혜령의 등 뒤에 매달린(?) 천인문이 큰 소리로 외쳤다. 부상으로 인해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밤이라 그런지 사방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천인문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숙소 쪽에서 불이 켜졌다. 말 도둑들도 '어마 뜨거라' 하며 말 위로 휙 하니 올라타 말을 짓쳐 나 갔다. 끌고 나온 말 중 두필은 놔 두고 각각 한마리씩 말을 타고 천인문 과 혜령이 오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나가자 혜령은 급해졌다. "상공. 제가 가서 잡아 올테니 숙소로 들어가세요" 하지만 돌아온 것은 콧방귀였다. "흥! 싫어. 색시는 얼마나 됬다고 또 나를 두고 가려는 거지. 죽어도 안돼. 무조건 같이 갈꺼야. 놔두고 가면 장모한테 일러 바칠꺼야" 완전히 어린애 투정이었다.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 이런 초강수를 둘 줄 몰랐던 혜령은 천인문이 상공이 아니라 원수로 보였다. 그냥 확 집어 던지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고는 상냥히 말을 건넸다. "상공께선 지금 상처를 입으셨잖아요. 제가 모시고 뛰면 가슴이 울려 서 위험해요. 여기서 기다려주시면..." "싫어 싫어. 같이 갈꺼야. 여기 놔 두고 가면 나 콱 죽어버릴꺼야. 내가 죽으면 귀신이 되서 계속 괴롭혀 줄꺼야" 엄청난 고집이었다. 애들이 아프면 고집이 세진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떠오르는 혜령이었다. 이렇게 계속 실갱이를 벌이면 말도둑들을 더욱 잡기 힘들어진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할 수 없이 그냥 천인문을 업고 뛰기로 했다. 혜령은 온 몸에 공력을 모아 사라진 말도둑을 쫓아갔다. 조금 후 주루 의 문이 열리고는 채광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도둑이라고? 어디에 도둑이 있다는 거지? 나 말고 다른 도둑이 있었 나?" 사방을 둘러보던 채광은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옆에 풀린 말들이 마굿간 주위를 배회하고 있던 것을 보지 못한 채광 이었다. -21- 혜령은 천인문을 등에 업고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는 두 필의 말을 탄 인영을 쫓아가고 있었다. "좀더 빨리 뛰어. 저 앞에 보이는데 잡지 못하는게 말이 돼?" 뒤에 업힌 천인문이 더 급했다. 오는 동안 쉬지 않고 그녀를 닥달했다. 더 빨리 뛰고 싶은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보다 더 빨리 뛴다면 등 에 업힌 그에게 무리가 올 거라 생각해 뛰지 못하는 혜령은 닥달하는 천인문 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따라갈 수만도 없었다. 거리는 이 삼 십여장. 그들이 탄 말은 마적단 말에서 최상급의 그것이라 삼십 여리를 쫓았음에도 아직 지치지 않고 있다. 그녀도 지치진 않았지만 시간이 걸리면 천인문의 상처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더 빨리 뛰어 잡 는다면 분명 그 충격에 더 악화될 수도 있다.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 고 있었다. 하지만 천인문의 상처는 그녀의 생각과는 다르게 조금씩 치료가 되고 있었 다.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 그런 것인지 이유는 불분명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이렇게 편한데 괜히 얘기해서 자신도 뛰긴 싫었다. 그녀에게 잡으라고 하긴 했지만 엄마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따뜻한 등은 너무도 편안해 이제 말따 위는 어찌되도 상관 없었다. 말도둑과 말주인의 추격전은 이미 달이 서쪽으로 넘어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미 평지는 사라지고 나무가 우거진 산들이 첩첩히 놓여 있다. 어두침침한 산으로 도망간 말의 속력은 자꾸 느려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들의 말이 사라졌다. 혜령은 그들이 사라진 모퉁이로 다가갔지만 그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리둥절해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그들은 내공을 모아 주위를 경계했다. 사방에서 들려야 할 곤충들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분명히 이 주위에 있 다는 확신이 들었다. 사람의 숨소리는 들리지 않더라도 말의 호흡은 들릴 것이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이럇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달려 나갔다. 천인문을 업은 혜 령은 번개같이 몸을 돌려 뒤를 쫓았다. 그리고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람 키까지 치솟아 있는 수풀에서 두 명의 사내가 고개 를 내밀었다. 무슨 옷을 입었는지 보이진 않지만 그 생김새는 멀쩡하게 생 긴 인물들이다. "갔나 보군." "죽는 줄 알았다. 야 임마! 너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냐?" 한 사내의 추궁을 받은 인물은 쑥쓰러운 듯 간사한 웃음을 짓는다. "그럴수도 있지 뭐. 다행히 잘 해결 됬잖아" "다행? 웃기고 있네. 철기주(鐵旗主)어르신께서 오신 뒤에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한번 보자구"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던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혜령이 사라진 곳 에서 키가 크고 마른 한 사내가 나타났다. 눈꼬리가 위로 치켜 오른 것이 상 당히 매서운 얼굴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가 나타나자 수풀 속의 두 사내는 앞으로 나서서 고개를 숙였다. "기주 어르신" "어서오십시요" 하지만 그 인사를 듣는 기주란 사내는 편히 인사를 들을 기분이 아니었다. 안그래도 사나운 얼굴은 인상을 찌푸리자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 저런 인물들을 끌고 오다니" 그제서야 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사과를 듣겠다는 게 아니다. 빨리 자초지종이나 말해라" 그제서야 더 송구한 얼굴로 입을 연다. "강상 녀석이 저들이 가진 말을 보자 훔치자고 하는 바람에..." 사내는 바르르 떨리는 입술로 힘겹게 말을 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강상 이란 사내는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철기주는 강상을 쳐다 보 았다. "강상!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가? 내려준 돈 만큼만 말을 사면 되잖느냐 그런데 저런 인물들이 가진 말을 훔쳐?" 강상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떨어졌다. "저...그...그게. 말을 사라고 주셨던 돈을 빼앗겼습니다" "뭐라 빼앗겨? 누구한테" 강상의 숨소리가 커졌다. "얼마전에 요 뒤쪽에서 어떤 노인장을 만났는데 그가 갑자기 우리를 보 고는 공격하더니만 돈이란 돈은 싹쓸이 해 갔습니다요." 철기주의 입에서 우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그렇다고 그걸 그냥 빼앗겨. 안되면 나에게 연락이라도 했어야지" "폭죽을 올리고 자시고 할 시간도 없었습니다요. 그 노인네가 저희들을 보자 바로 공격해 오는 바람에 그만...." "아무리 그래도 너희 둘을 동시에 쓰러트릴 수는 없지 않느냐" "아닙니다. 거리가 십 여장이었는데 저희 둘을 허공섭물(虛空攝物)로 들 어 올렸습니다요. 반항할 여지조차 없었습니다요." 강상이란 사내가 옆의 사내를 변호하며 나섰다. 상당히 억울하다는 듯 입에서 침이 튄다. 철기주는 허공섭물로 십여장을 끌어당겼다는 말에 섬뜩해졌다. 그 정도 의 공력이라면 철검비웅(鐵劍飛熊) 나웅겸(羅熊鉗)의 수준이었다. 나웅겸 그가 누구인가. 현 무림맹(武林盟)을 이끄는 사람이 아닌가. 몸집이 크고 수염을 기른 모 습이 꼭 곰을 연상시키지만 그 몸집에 걸맞지 않는 엄청난 경공의 소유자 였다. 검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지만 정작 자신이 쓰는 검은 평범한 철검 이었다. 성격도 좋아서 날으는 곰이란 별호가 붙었지만 자신의 이름에 들 어 있는 곰이란 글자가 별호에도 들어갔다고 기뻐할 정도니, 정파의 모든 인물들이 그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돈을 뺏어간 인물이 그 정도의 솜씨를 가지고 있다면 자신 도 대적하기 힘들었다. 아니 대적은 커녕 빨리 꼬리를 말고 도망쳐야 할 정도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저 말을 훔쳤다?"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대답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 금기주(金旗主)께서 이 사실을 들으신다면 화를 내실텐데. 일단 그 들은 쫓아버렸고, 내가 입만 다문다면 아무도 모르겠지. 그런데 그 노인 은 누굴까. 우리의 대업에 영향을 끼치면 안되는데....' 한참을 생각하던 철기주는 고개를 들며 몇가지 지시를 내리고는 어디론 가 사라졌다. 지시를 받은 두 사내는 재갈을 물린 말을 타고는 어디론가 사라져갔다. 그리고 바람만이 그 곳에 남았다. 한편 말을 뒤쫓던 혜령은 이미 추격을 포기하고 있었다. 빽빽히 우거진 수풀은 말과 그 무엇의 침입도 용서치 않겠다는 것 처럼 앞을 가로막았 다. 분명히 이쪽으로 도망을 친 것도 같은데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혜령은 등에 업은 천인문을 내려놓고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위급한 상 태는 아니었지만 시간이 많이 지난 관계로 더 악화됬을지도 몰랐다. 그 녀는 천인문의 맥을 짚었다. 이상하게도 상처를 입은 사람의 맥이 아니 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혜령이 쳐다보자 천인문은 슬쩍 웃으며 대답했 다. "그렇게 보지마. 왜 이런지 나도 잘 모르거든" "가슴은 아프지 않으세요? 혹시 기침이 난다던가, 머리가 어지럽다는가 그런 것은 없나요?" 그녀의 말에 천인문은 그렇지 않다며 싱긋 웃었다. "내가 비록 환자가 토끼하고 색시 뿐이었다지만 그래도 의원이란 말이 야. 내 몸 내가 모를까? 걱정마" 조금만 아파도 바로 매달리던 천인문이 아닌가. 혜령은 그 말에 안심했 다는 듯 웃을 수 있었다. "그런데 옷이 너무 죄네. 다시 줄여야겠어."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던 천인문은 몸의 기를 모았다. 완벽하게 나았다 고는 했지만 기를 돌리자 뻐근해지는 것을 느끼는지 눈쌀을 찌푸렸다. 혜령은 그제서야 축골공을 쓰지 말라고 말렸다. 하지만 계속 쓰겠다고 천인문이 우기자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던 혜령은 입을 열었다. "그냥 업히셔도 되니, 무리하지는 마세요" 몸이 큰 상태라면 자신이 업어주지 않을거라 생각한 것일게다. 역시 그 녀의 생각은 맞았는지 천인문은 더 이상 우기지 않고 그녀의 등에 업혔 다. "음.....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등에 업힌 그의 말에 혜령은 주위를 살폈다. 정신없이 숲으로 들어오다 보니 이미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이미 달은 서쪽으로 넘어가 빛이라고는 겨우 반짝이는 별 뿐이다. 눈에 익은 것도 없었다. 길을 잃은 것이다. "미아 됬나 봐" 하지만 천인문의 말은 전혀 미아 답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어투 였다. 혜령은 날이 밝은 때까지 여기 머물며 기다리는게 좋을 거라 생각했다. 천인문도 계속 업혀 있고 싶었지만 그녀의 등에서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날 밤 그들은 말을 쫓느라 지쳤지만 모기와의 격전으로 인해 전혀 쉬지 못했다. -22- 다음날 아침 둘은 해가 어슴프레 산 속을 밝혀 올때 이동을 시작했다. 한번도 먼저 나서지 않는 혜령이 오늘따라 천인문에게 먼저 업히라고 했 다. 혜령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를 업고는 자신들이 왔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한참을 헤매어도 길은 나타나지 않았다. 밤새 모르는 곳을 뒤지다 보니 이미 아주 깊은 산속까지 들어온 것이다. "색시야 저기 꼭대기로 올라가자. 거기라면 잘 보일꺼야" 그녀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눈 앞에 보이는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일각 여 쯤 지나자 그들은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방으로 탁 트인 넓은 시야엔 주위를 빙 둘러싼 높은 산들과 구름들만 가득 잡혔다. "이상하네. 분명히 우리가 저쪽에서 왔던 거 같은데." 무언가 이상한 듯 천인문이 웅얼거렸다. 혜령도 그가 보고 있던 방향을 바라봤지만 그 곳에는 많은 산들 뿐이었다. 그들이 들어왔던 곳은 사방 이 평지로 되 있던 곳이다. 분명히 말도둑을 쫓아 들어온 곳에서 멀지 않을 것이 분명함에도 왜 보이지 않는 것인지.... 얼마동안 사방을 둘러보던 그들은 이곳보다 더 높은 산으로 오르기로 했다. 자신들이 왔던 곳이라 여겨지는 곳에 서 있는 아주 높은 산을 목 표로 잡고 이동을 시작했다. 한참을 걸었지만 둘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들의 서먹한 분위기를 바 꿀 그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반시진이란 긴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서야 그들은 비로소 정상이라 여겨지는 곳에 오를 수 있었다. 정상에 오 르자 처음으로 그들을 반긴 것은 매서운 바람이었다. 쉬익 하고 귓바퀴 를 울리며 돌아가는 바람은 답답한 느낌을 사라지게 하는 그 무엇이 있 었다. 옅은 안개로 인해 아까처럼 맑게 보이는 시야는 아니었지만 더욱 멋진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모습에 그들은 잠시 감상에 젖어버렸 다. 조금후 이곳에 오른 이유를 깨달은 그들은 다시 사방을 기대에 찬 눈으로 돌아보았다. 다행이 그들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 산의 뒷쪽으로 난 조그만 소롯길이 보였다. 그리고 그 끝에는 그들이 찾고 있던 거대하고 광활한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천인문과 혜령은 다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찾은 소롯길은 아까 그들이 올랐던 산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다보면 만날 수 있었다. 사방에서 울리는 새소리와 곤충소리, 바람에 나부끼는 수풀 소리를 들 으며 천천히 하산하고 있던 그들의 귀에 낯선 소리가 잡힌 것은 산을 거의 다 내려왔을 무렵이었다. "무슨 소리지?" 혜령도 그 소리를 이미 들었다.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얏 하고 호통치는 남자의 목소리임은 확실했다. '혹시....' 혜령은 어젯밤에 쫓던 말도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행방을 알 수 없어 포기하다시피 했지만 만약 그들이라면 포기할 수 없었다. "가보자구" 천인문이 짤막하게 말하자 혜령도 즉시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이 지금 가는 방향은 서쪽이었다. 이쪽은 아까 산 위에서 보 았을 때 높은 산이 있긴 했지만 나무가 그리 우거진 곳은 아니었다. 다시 높은 황토산을 오르기 시작한 그녀는 앞을 막는 수풀을 헤치며 전진했다. 그들이 전진할 때마다 조금씩 목소리는 커지고 있었다. 얼마쯤 올랐을 때 갑자기 목소리가 뚝 끊겨 버렸다. 어느 정도 방향은 잡고 있었기에 천천히 산을 오르고 있을때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들렸다 끊겼다 하기를 몇 번 쯤 하자 그들은 숲이 끝나는 지점까지 올 수 있었다. 목소리는 바로 앞쪽에서 들리고 있었다. "분명히 난 싫다고 말했어"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야 이 할망구야. 하기 싫으면 넌 빠지면 될 거 아니야." 까랑까랑한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 말을 듣고 있자 천인문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할망구? 이상하네. 분명 젊은 여자 목소리인데 왜 저 남자는 할망구라 하는거지?' "이놈의 영감탱이가! 내기를 하는 것은 네놈이지만 죽어나는 것은 나란 말이야" "하하하. 걱정하지 마. 이번엔 돈도 두둑하게 있지. 그 녀석도 분명히 동전도 받아줄꺼야" "웃기고 있네. 네가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이길 수 있을까? 그 괴물 놈한테" "흐흐흐. 이걸 들어 보라고" 그 남자는 무언가를 꺼내 흔들었는지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전 이 얼마나 많은지 촤르륵 거린다. "이 정도면 충분히 그 괴물을 쓰러트릴 수 있을 걸" 남자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고 과연 그 말이 사실인지 젊은 여자 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계속 듣고 있던 천인문과 혜령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손을 뻗쳐 수풀 을 살며시 헤쳤다. 십 오장 남짓 되는 거리에는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마주보며 앉 아 있었다. 예상대로 젊은 여자의 목소리는 삼십대 중반의 호리호리한 몸 매를 가진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반대로 남자는 홍안백발의 노인이었다. 얼굴만으로는 사십대 후반이었지만 검은 머리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백 발은 칠십대나 마찬가지였다. "할망구도 동의하지?" 홍안백발의 사내가 여인을 향해 물었다. 그녀가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 있자 사내는 그녀가 동의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앞으로 나서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봐 다 들었을 테니 당장 나오라구" 그가 서 있던 곳은 두 산이 마주보고 있던 곳이었다. 그 사이로는 깍 아지른 절벽이 입을 벌리고 있었고 그 사이를 튼튼해 보이는 줄다리가 서 로를 연결하고 있었다. 줄다리가 끝나는 곳에는 제법 사내가 서 있는 곳 과 같은 큰 공터가 나 있었고 그 공터의 한 쪽 끝에는 사람 한 명이 드나들 크기의 동굴이 뚫려 있었다. 그의 말이 끝날 무렵 동굴 안에서 한 사내가 웃음을 터트리며 밖으로 나왔다. 검은 색 복장에 구렛나루를 기른 사내였 다. "물론 다 들었으니 더 이상 내가 무슨 말을 하겠소. 당신이 원한다면 그렇 게 합시다." 그러자 백발의 사내가 동전을 주머니에서 싸그리 꺼냈다. 손바닥에 모든 동전을 올리며 준비를 하는 사내를 보던 흑의인은 잠시 손을 흔들더니 말했다. "당신 부인께서도 당연히 동의하시겠지요?" 그러자 백발 사내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당연한 것 아니겠나. 부부는 일심동체라 했네. 내가 찬성이면 그녀도 찬 성이지" "하하하하.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난 소인이라서 당신의 아내가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믿을 수가 없어서..." 그 말에 백발 사내의 뒤쪽에 서 있던 중년 여인이 입을 열었다. "당연한 말이지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그제서야 흑의인은 권유하듯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좋습니다. 그럼 한번 해 보도록 하지요" -23- 흑의인은 출렁대는 줄다리를 가뿐히 건너 그들이 서 있던 곳으로 넘어왔 다. 삼 장 앞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백발사내에게 시작하라는 듯 손을 내 밀자 백발인은 기다렸다는 듯 아무런 말도 없이 손에 든 동전을 흑의인에 게 날렸다.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세 개의 동전이 머리와 목, 명치로 날아갔다. 흑의인 은 살짝 웃으며 손을 돌리며 날아온 동전을 막았다. 동전이 땅에 떨어지기 도 전에 바로 네 개의 동전이 사나운 기세로 날아왔다. 흑의인은 여전히 움 직일 생각도 하지 않고 한 손으로만 동전을 막았다. 백발 사내는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십 여 개의 동전을 흑의인에게 쏘 아 보냈다. 그제서야 흑의인은 두 손을 돌리며 동전을 막았다. 백발 사내는 이제 양 손으로 동전을 나눠쥔 후 공중으로 동전을 던지며 외 쳤다. "만천화우(滿天花雨)" 하늘을 빽빽히 뒤덮은 동전들이 제각각의 속도로 흑의인을 향해 날아갔다. 이리 꼬이고 저리 휘며 날아가는 동전은 흑의인의 눈을 어지럽게 할 법도 했지만 그의 입꼬리는 여전히 하늘로 치밀어 있었다. 가장 먼저 다가온 두개의 동전을 잡자 바로 하늘로 던진 후 다시 손을 휙휙 돌리기 시작했다. 수천개의 수장(手掌)이 팔방(八方)을 가득 매우기 시작하 고 뒤이어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며 동전들이 땅으로 떨어졌다. 숲에서 숨어 있던 천인문과 혜령은 이 엄청난 광경에 눈이 커졌다. 하지만 그들이 보고 있던 백발인은 오른손에 기를 모아 마지막으로 남은 동전 하나 를 오른발 무릎을 향해 쏘았다. 비록 아무런 소리도 없이 날아갔지만 지금까 지의 동전들 중에 가장 빠르게 날아갔다. 마지막 이 한수를 기대하고 있었는 지 백발인은 확신의 눈빛을 띄우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게 되면 막기 보단 피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인 것이다. "하하하" 흑의인이 갑자기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모든 동전들을 무시하고는 무릎을 향해 날아오는 동전을 막기 위해 손을 뻗 쳤다. 마지막 동전은 그의 손에 맞고 떨어졌지만, 사방을 채우고 있던 장영 (掌影)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흑의인을 향해 날아가던 모든 동전들이 흑 의인의 몸을 꿰뚫을 듯 박혔다. 까깡! 흑의인의 몸에 부딪친 동전들은 무언가에 막힌 듯 쇳 소리와 함께 모두 땅으 로 떨어져 버렸다. 통쾌하게 웃고 있던 흑의인의 몸에 흐릿한 호신강기가 떠올라 있는 것을 본 백발인의 얼굴은 찌푸려졌다. "어...어떻게..?" "하하, 만천화우 정도를 당신의 비장의 한수라 한다면 너무 나를 무시하는 게 아니겠소? 거기다 십 년이 넘도록 계속된 대결에서 거의 내 수준을 알고 것인데 그런 수법으로 내 두 발을 땅에서 때도록 할 수는 없지 않겠소?" 분명히 그랬다. 자신의 공력이 심후하다 해도 저렇게 많은 동전에 넣은 공 력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백발인은 자신의 머리가 원망스럽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자 약속대로 오늘 밤 잘 부탁드리겠소" 흑의인은 중년 여인에게 살짝 인사를 하고는 다시 몸을 날려 반대쪽으로 건너갔다. 흑의인이 사라지는 것을 본 천인문과 혜령은 가공할 실력의 소유자들을 보게 되자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것보단 사건의 전모가 더 궁금해졌다. 백발인은 어떤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한 숨 소리를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더 볼게 무어 있다고 숨어있느냐." 백발인의 뒤에 서 있던 중년 여인도 이미 알고 있는지 그들이 숨어 있던 수 풀을 쳐다 보고 있었다. 천인문과 혜령은 자신들이 들켰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움찔했지만 숨을 크 게 들이키고는 앞으로 나섰다. 혜령이 천인문을 업고 나서는 것을 보자 백발인은 입에 미소를 걸치며 입을 열었다. "그래 재미있게 봤느냐?" 그들을 부르던 목소리에 화난 기색은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처럼 다정스럽 게 반겨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들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 다. "왜 그렇게 놀라느냐? 내가 이렇게 너희들을 대하니 이상한가 보군" "무례하게 엿듣게 되어 정말로 죄송합..." "할아버지 왜 싸웠어요?" 혜령이 고개 숙이며 사과 하는 와중에 천인문이 톡 끼어들며 물었다. 혜령 은 만면에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지만 백발인과 중년 여인은 무엇이 그리 좋 은지 얼굴에 미소가 그득했다. "고녀석 참 귀엽구만." 백발인이 천인문을 보며 말을 하자 천인문도 마주보며 씽긋 웃었다. "이렇게 있을 것이 아니라 집으로 가시지요" 중년 여인은 아까의 말투는 어디 팔아먹었는지 공손히 백발인에게 입을 열 었다. 그러자 백발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섰다. 중년 여인과 혜령도 그의 뒤를 따랐다. 아침 해가 한 발이나 떠오른 늦은 아침 나절이었다. 백발인을 따라 간 곳은 절벽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숲속을 빠져 나와 산을 오르내리던 백발인이 도착한 곳에는 조그만 묘옥이 한채 지어져 있었 다. 나무가 우거진 곳에 아담히 자리잡고 있는 터라 찾기가 쉽지는 않은 곳 이었다. 하지만 백발인과 중년 여인이 자주 절벽쪽으로 왔다갔다 했는지 나무와 잡풀들이 쓰러져 자연스런 길이 나 있었을 뿐이었다. 백발인이 그 묘옥의 문을 열고 방 안으로 사라지자 중년 여인은 부엌일 것 같은 곳으로 걸어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던 혜령은 백발인이 방안 에서 쳐다보자 그냥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방에는 낮임에도 불구하고 등불을 켜야만 할 정도로 어두침침했다.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백발인은 그들에게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사 양치 않고 자리에 앉자 중년 여인도 뒤따라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진흙으 로 만든 병과 잔을 들고 왔다. "자네들은 누군가? 어떻게 이곳으로 왔지?" 중년 여인이 따른 잔을 든 백발인이 물었다. "저는 서 혜령이라고 하옵고, 이쪽은 저의 부군이신 천인 문이라고 하옵니다" 잔에서 피어오르는 향긋한 냄새에 코를 들이밀고는 정신이 없는 천인문을 대 신해 혜령이 입을 열었다. "저희는 이번에 중원으로 내려가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잘못하여 옥문관에서 도둑을 맞은 바람에 그들을 쫒아 오고 있었답니다" "그래? 난 백운호(白雲虎)라고 하지. 이쪽은 여미릉(餘美綾)이라고 하지. 궁금 한 게 많겠지만 이것부터 마시고 얘기하게나" 백운호와 여미릉은 자신들의 소개를 했지만 천인문과 혜령은 전혀 놀라지 않 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무림의 인물들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천인문과 혜령이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지 그 들은 그냥 슬쩍 웃을 뿐이었다. 백운호. 육십 여년 전에 무림에 초출한 이래 세 가지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 첫 째가 내기요. 둘 째는 도벽이요. 셋 째는 싸움이었다. 하루에 한 번이라도 싸움을 하 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것이 비록 비무가 됬든 뒷골목 패거리의 드잡이질이 됬 든 그는 매일 싸웠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좋아한 것은 바로 내기였다. 보이는 사람들마다 한가지를 걸고 내기를 했다. 그가 무엇을 내기로 걸었는지는 알려 지지 않았다. 그 내기에 참가한 사람들이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없어진 것도 없으니 사람들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거기다 그는 한 번 내기를 했던 사람과는 다시는 내기를 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러다 보니 삼십 년이 안되서 내기는 끝나 버렸다. 마지막으로 그를 유명하게 한 도벽은 실제로는 그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었다. 왜 그런지 그는 항상 하루에 한가지를 훔쳤다. 그리 값어 치가 나가는 것이 아니었고 값에 맞는 돈도 남겼기에 그를 뒤쫒는 이도 거의 없 었다. 하지만 도벽때문에 여미릉을 만나게 될 줄은 그도 예상을 못했다. 여미릉은 오 십 여년전에 무림에 나타났다. 첫 출도부터 무림의 이름난 고수들 을 찾아 비무를 하며 승승장구(乘勝長驅)하자 모든 무림인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 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 당시 천하제일인이던 천승도(天承刀) 진천(鎭踐)을 이기 자 무림은 발칵 뒤집혀졌다. 지금까지 천하제일인에 여인이 오른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즉시 이름난 모든 무림인들이 그녀를 찾아 비무를 시작했고 그 녀는 자신을 찾아온 백 여명의 절정고수를 꺽음으로서 천하제일을 인정받은 최초의 여인이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백운호가 그녀의 옷고름 중에 한 개를 훔쳐갔고 그녀는 그를 뒤쫒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중년 여인이 잔을 들이밀자 기다리고 있었는지 천인문은 사양도 없이 바로 입으로 가져갔다. 혜령도 술은 별 생각이 없었지만 너무 좋은 향기에 한 모금 을 마셨다. 입을 알싸하게 달구며 퍼지는 맛과 코를 간지럽히는 향기가 너무 나 좋았다. 천인문은 한 번에 다 마셔버리곤 새로 한 잔을 더 따르고 있었다. "맛이 좋은가?" 술 마시기 바쁜 천인문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당연히 좋겠지. 후아주(喉兒酒)가 술 중에 최고라는 것은 마셔본 사람만 알지." "흐미, 이게 후아주란 건가요?어째 맛이 좋다 했다." 석실에서 읽은 곳에 후아주를 본 적이 있었던 천인문은 잔에 담긴 술을 경이 롭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백운호가 입을 열었다. "자네들은 무림인이 아닌가?" 무인이 아니라니? 천인문과 혜령은 슬며시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느꼈다. "왜요?" 되바라진 말투로 묻는 천인문을 보자 다시 백운호가 대꾸했다. "자네들은 지금 우리를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함부로 술을 마실 수 있는가? 만약 자네들이 무림인이라면 그러지는 못했을 것일세." 백번 맞는 말이다. 하지만 지기 싫어하는 천인문이 그대로 있을 리가 없다. "할아버지를 믿고 안믿고가 중요한 게 아니죠. 중요한 것은 제가 봤을 때 이 술에는 독 같은 게 없었다구요" "어떻게 그리 확신 할 수 있는가?" "제가 의술을 배웠거든요" 우쭐해 하며 말하는 천인문을 보는 백운호와 여미릉의 눈에 웃음이 그득했다. "그런데요? 아까 왜 할아버지는 저 아줌마한테 할망구라 했어요? 아무리 봐 도 할머니는 아닌데" 그 전부터 궁금했던 것이 많았던 천인문은 기회가 나자마자 바로 물었다. "그럼 할망구를 할망구라 부르지 뭐라 부르겠냐. 저렇게 젊어 보여도 실제 로는 나이 칠십이 넘었다." 웃긴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말하는 백운호. 본성이 숨긴다고 어디 가겠는가. 바로 대꾸하는 여미릉이다. "저놈의 영감탱이. 제 놈은 구십이 다 되가면서 못하는 말이 없어" 째려보는 여미릉의 눈빛에 기가 팍 죽어버린 백운호였다. -24- 그렇게 시작된 그들의 설전은 시간이 흘러 대낮이 됬음에도 끝날 줄 몰랐다. 그들이 싸우던 말던 상관치 않던 천인문은 아예 술병을 들고 홀짝대기 시작 했고, 중간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혜령은 그냥 고개만 숙이고 싸움이 멈추기만을 기다렸다. 다행히 싸움은 칼부림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천인문이 방바닥에 쓰러지자 궁지로 몰려 있던 백운호는 이것이 기회인 양 호들갑 대 며 천인문을 살폈다. "이녀석 후아주가 얼마나 독한 술인지도 모르고 그냥 다 마셔버렸네" 백운호는 쓰러진 천인문을 들어 방의 한 구석에 눕히고는 이불로 살며시 덮 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혜령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까 그 분과는 왜 그렇게 싸움을 하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싸움이라. 그건 싸움이 아니라 단지 내기일 뿐이었어" 별거 아니라는 듯 콧구멍을 파며 대답하는 백운호. 탁 하고 건더기를 튕기 며 혜령을 바라보자 못 볼 걸 봤다는 혜령은 소태 씹은 인상이 떠올랐다. 여미릉은 백운호의 탁 하고 뒤통수를 때렸다. "야 이놈의 영감탱이가 손님이 왔는데 지저분한 짓거리 계속 해 댈거야?" 백운호의 눈 앞에 별이 번쩍했다. 그는 뒤통수를 한번 쓰다듬고는 고개를 돌 리며 군시렁댄다. "아 빨랑 밤이 되야 저 놈의 할망구가 그 쪽으로 넘어갈텐데" 아주 낮은 목소리였지만 혜령도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여미릉이 못 들었을 리가 없다. 그녀는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댔다. "뭐라구 다시 한번 말해봐. 내가 저 쪽에 가는게 그렇게 좋다는 말이야?" 그녀는 갑자기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통곡을 했다. "아이구. 내가 미쳤지. 이놈의 영감탱이를 남편으로 알고 따라다니다니. 자기 마누라를 내기로 걸어서 보내는 남편이 어디있단 말인가. 어이구우" 그제서야 백운호는 설설 기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여보, 마누라야. 제발 내가 잘못했어. 울지마라구" 혜령은 어떻게 된 것인지 헛갈리기 시작했다. 분명히 영감, 할망구 하고 부르 고 지금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부부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내기로 자기의 아내를 남에게 보내는 백운호나 그렇다고 울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리 슬퍼보이 지도 않는 여미릉이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겨우 나오지도 않는 울음을 그친 여미릉은 두고보자는 듯 백운호를 째려봤 고 백운호도 배째라는 양 능글맞은 미소를 띄웠다. 그때였다. "으...으.. 가지마. 색시야 가면 안돼. 아아... 색시야 제발 날 두고 가지마. 아. ...안돼... 으악.. 가지마" 갑자기 구석에서 자고 있던 천인문이 손을 쳐들고는 소리쳤다. 그 모습에 앉아 있던 그들이 모두 정신을 차리고는 천인문을 둘러 쌌다. "상공! 왜 그러세요." 혜령이 천인문을 잡고 흔들어 댔다. 하지만 일어날 줄 모르는 천인문은 계속 헛소리만 해댔다. "가지말라구. 날 버리지 마.." 술에 취해 잠든 천인문의 눈에서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혜령은 천인문을 잡 고 흔들었지만 깨어날 생각을 못했다. "비켜봐라" 백운호는 혜령을 밀어내고는 천인문의 혈을 몇 군데 쳤다. "아악" 숨넘어가듯 급박한 소리를 지르며 깨어난 천인문의 이마엔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천인문은 일어나자마자 바로 혜령을 찾기 위해 사방을 둘러봤다. 바로 옆에 있던 혜령은 그가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자 바로 그에게 다가 가 꼬옥 안았다. "색시야 가지마. 무섭단 말이야. 제발 가지마아" 혜령의 앞에서 항상 강한 모습만 보이려고 했던 천인문의 입에서 그 나이또 래의 말이 나오긴 처음이었다. 눈물을 흘리던 천인문은 더욱 혜령의 품으로 파고 든다. "어디 안가요. 제가 상공을 놔 두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요" 혜령의 목소리도 잠겨 있었다. 혜령은 자신이 할 수 있던 최대한의 힘으로 천인문을 꽉 껴안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백운호와 여미릉은 살짝 마주보 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문을 조용히 나섰다. 얼마 지났을까. 혜령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백운호는 그녀가 나타나자마자 바로 다가섰다. "저 녀석이 왜 저러냐?" 혜령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상당히 난처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았을 까. 여미릉이 바로 구원의 손을 날렸다. "아니 이 놈의 영감탱이. 지금 그런 질문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보다 그 애는 어때?" 손을 들어 백운호의 뒤통수를 친 여미릉은 걱정된다는 얼굴로 혜령을 쳐다 봤다. 혜령은 혹시 백운호의 뒤통수가 튀어나온게 저렇게 맞은 것 때문이 아 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일단 다시 잠 들었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혜령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해 하자 백운호는 다시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이 놈의 할망구, 나보곤 평소 하는 짓거리 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기는 할 거 다 해요" 불만을 터트린 백운호는 자신을 노려보는 여미릉을 보자 다시 꼬리를 내려버 렸다. "에구. 벌써 이렇게 시간이 됬나? 난 저녁 거리나 잡으러 갔다 와야지" 한 마디 남기자 마자 바로 숲속으로 몸을 날려 버린다. 여미릉은 사라지는 백운호를 보고 있던 혜령을 끌고는 묘옥의 뒤쪽으로 끌고 갔다. 아무말 없이 끌려간 묘옥의 뒤편에는 예쁘게 꾸며진 조그만 탁자와 나무 의자가 놓여 있었다. 여미릉과 혜령이 한 자리를 잡고 앉자 여미릉도 살며시 무슨 일인지 물었다. 정말 닮은 부부(?)라고 생각하면서 혜령은 입을 열었다. 조금이라도 더 산 사람들에게 물어본다면 좋은 조언을 얻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사실은 요 얼마전에 옥문관에서 한 사내를 만났답니다. ......" 혜령은 진무릉을 만났던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차분히 듣고 있던 여미릉은 혜령이 이야기를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고개 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언가 떠 올랐다는 듯 무릎을 탁 쳤 다. "알았다." "....?" "그 사내의 눈이 이상하게 빛나고 있었다고 했지? 거기다 갑자기 그 눈을 보 니 정신이 몽롱해졌고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지?" "예." 여미릉은 혜령이 대답하자 확신에 찬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 사내가 익히고 있는 무공은 아마도 천마심안(天魔心眼)이란 걸꺼야. 나 도 말로만 들었는데 그 무공을 익히고 있는 사람은 눈에서 광채가 난다고 하 더군. 평소에는 반짝거리기만 하다가 실제로 공력을 모으면 그 눈에서 파르 스름한 빛이 나온다고 했어. 그 눈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신을 못 차리게 되지. 거기다 여자들 같으면 아예 그 사내가 무슨 명령을 내리더라도 따르게 되겠지. 한마디로 엄청난 무공이지" 혜령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히 그 무공이 심력(心力)을 제압한다는 묘 용이 있긴 하지만 사내들에겐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 같았다. 천인문의 경우만도 그랬으니까. 쌍방간의 대결에서 여자와 싸우게 될 가능성은 거의 희박한 무림의 상황에서 그런 무공이 정말 최고의 무공일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게 된 것이다. 혜령의 얼굴에 궁금함이 떠오른 것을 본 여미릉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로 말을 이었다. "이 무공은 두 가지의 묘용이 있다고 들었어. 한 가지는 바로 싸움에서 기 선을 제압할 수 있다는 건데, 여자들의 경우는 말 할 것도 없지만 천마심안 을 8성 이상 익히게 된다면 그 때부터는 남자라도 정신을 차리기 힘들게 되지. 아무리 일류나 절정 고수가 눈을 필요치 않는 경지라 해도 소리나 느 낌 만으로 자신과 비슷한 경지의 인물과 자웅을 겨누기 힘들다는 것은 알 고 있겠지? 그와 다투는 인물은 자신의 한 가지 기능을 버려야 한다는 말 과 똑같지. 거기다 항상 써 오던 눈이 갑자기 봉사가 된다는데야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 그리고 두번째는 그 천마심안이 천마흡마공(天魔吸魔功)을 익히는 기초 무공이란 거지. 천마흡마공은 일반적인 채음보양과는 달라서 천마심안으로 제압하지 않는 인물의 공력을 뺏지는 못하지만 제압한 인물 같은 경우엔 엄청난 공력을 흡수할 수 있다고 하더군. 일반 채음보양 같은 무공들은 자신의 본원진기와는 합체가 어렵다고 하지만 이 천마흡마공은 그런 위험이 없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하겠어? 그런데 내가 듣기로는 이 무공은 분명히 절전 됬다고 들었는데. 천마심안이 나타났다고 하면 천마 흡마공도 어딘가에 있을 가능성이 높겠군. 혹시 그 남자가 익히고 있을 지도 모르겠어" 혜령은 여미릉의 말에 자신이 왜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린 것인지 알 수 있 었다. 천마심안을 보게 되면 어떤 여자라도 정신이 없어지게 된다. 그를 사랑하는 것도 아닌데 망각의 세상에 빠져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혼자서 고민을 하기 시작한 혜령을 보자 여미릉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 섰 다. 저 멀리서 사냥감을 잡은 백운호의 발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할망구 이거 빨리 요리나 해라" 그새 묘옥까지 왔는지 사냥감을 묘옥 앞에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 미릉은 분위기를 깨는 백운호더러 들으라고 큰 소리로 떠들었다. "영감탱이가 직접 하면 어때서 그래?" "아아 할망구야. 내가 사냥을 했으면 당연히 마누라인 네가 요리를 해야 할 것 아닌가. 내가 한 가지 했으면 당연히 할망구가 한 가지 해야지." "웃기고 있네. 안그래도 너때문에 오늘 그 깜둥이한테 가야 하는데 뭘 잘했 다고 큰 소리야? 지금 일을 하나라도 더 해서 내 비위를 맞춰도 내가 봐줄까 말까한데 어디서 큰소리만 치고 있어" 하지만 날아온 대답은 느긋했다. "허허허. 내가 할망구더러 내 마누라 해달라고 사정하기라도 했나? 할망구 가 붙들고 늘어진 거 아닌가. 내 말 듣기 싫다면 마누라 그만 하고 포기하면 될 거 아니겠어. 그 깜둥이 녀석이 할망구가 나이 칠 십이 넘은 걸 모르고 겉 모습만으로 쫓아다니는 것 같은데 그냥 그 놈한테 안겨버리면 어때?" 으드득 하며 이빨을 깨물던 여미릉은 분했지만 할 말이 없는지 그냥 입을 다물곤 앞마당으로 나갔다. 혜령은 그 둘의 이야기에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들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 는 그들의 말에 호기심이 생겼다. 조금 지나자 이번에는 백운호가 뒷 마당으 로 나타났다. "헛소리 지껄이면 가만 안둬" 앞마당에서 여미릉의 서슬퍼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운호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띄며 대답했다. "별 걱정 하고 있네. 요리나 맛있게 해라 저번처럼 고기 홀랑 태워먹지 말고" 말을 끝내자 백운호는 혜령의 맞은 편에 자리를 정하고 앉았다. "무슨 일 때문에 그랬는 것인지는 묻지 않겠네. 대충 봐도 느낌이 왔었으니 말일세" -25- 백운호는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 었다. "그 아이가 아까같은 꿈을 꾸는 것은 무슨 불안감이 있었기 때 문이겠지. 허허 얼마나 좋은가. 자네처럼 남자 복이 많은 것은 거의 보지 못했는데..." "이 영감아 죽어라" 갑자기 뒤에서 여미릉이 나타났다. 그녀의 손에는 갓 잡은 듯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사슴의 뒷 다리 한 쪽이 들려 있었다. 숨쉴 틈도 없이 달려온 그녀는 뒷다리로 뒤돌아보는 백운호의 면상을 향 해 인정사정없이 내려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백운호는 나가떨어졌다. "어따 대고 사슴 뒤따리를 휘두르닌기아" 코맹맹 소리를 내며 일어선 백운호의 코에서 코피가 흘러내리고 있 었다. 그것도 쌍코피였다. "내가 분명히 헛소리 말랬지. 내가 지켜 봤기에 망정이지, 그런데 도 죽고 싶어서 그런 소리를 해?" 여미릉은 다시 뒷다리를 쳐들며 간신히 일어선 백운호를 향해 달 려갔다. 백운호는 코를 막을 생각도 못한채 어마 뜨거라 하며 도망 쳤다. 한참 도망가던 백운호는 묘옥의 모퉁이에 서서 고개만 살짝 내밀고는 한소리 했다. "내가 무신 허쏘리를 해따고 그래. 분명히 난 칭차늘 해따고." 여미릉의 손에서 사슴 뒷다리가 날아가 고개만 내민 백운호의 안면 에 틀어박히자 꽥! 하는 소리가 난 후 뒤따라 쿵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가쁜 숨을 내쉰 여미릉은 손을 털고는 혜령을 향해 돌아봤다. "신경쓰지 마라. 저 영감이 하는 말은 하나도 들을 것이 없어" 혜령은 백운호의 마지막 말을 듣자 이미 심각해지고 있었다. 남자 복이 많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좋은 남자 만나서 백년해로하며 행 복하게 산다면 그것도 남자 복은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가 한 말은 그런 뜻이 아닌것 같았다. 혜령은 심각한 얼굴로 여미릉에게 물었다. "어르신께서는 아시겠죠? 남자 복이 많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 요? 대답해 주세요 네?"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여미릉도 마음 한 구석이 찔려왔다. 대답 을 해야할 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됬지만 곧 혜령의 눈빛에 그만 입 을 열었다. "자리에 앉아라." 혜령과 여미릉이 자리에 다시 앉자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 신경 쓸 이야기는 아니다만, 네가 원한다니 말해 주지. 너의 두상(頭相)을 보아하니 미간 사이가 반듯하고 너의 볼에 윤기와 붉은 기운으로 봐서 남자가 따를 상이다. 과거 양귀비가 너와 같은 그런 상을 가지고 있었지. 다행히도 너의 그 꼬마신랑이 그 기운을 많이 약 화시키곤 있지만 그래도 조금은 남아 있긴 하구나. 뭐 특별히 신경쓰 지 않아도 좋은 것이니 마음 편히 가져라. 신경 쓰면 너만 손해란다." 여미릉은 따뜻한 말로 혜령을 위로했다. 신경쓰지 말라니! 어찌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자 복이 많다고 했는데 만약 또 다른 곳에서 다른 남자에 의해 그때와 같은 일 이 또 벌어진다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벌써 크게 한번 당했던 그녀는 또 그런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혜령은 여미릉이 자신을 걱정스런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자 그러겠노라 대답하 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부엌을 향해 걸어갔다. 바로 후다닥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야기 잘 했냐. 이제 요리좀 해주면 안돼?" 한쪽 눈을 잡고서 부엌 앞에 앉아 있던 백운호가 일어서며 말했다. "자기가 좀 하면 잘못되나?" 여미릉이 톡 쏘며 말했다. "내가 사슴을 잡아 왔으니 요리는 할망구가 해야 한다고 말했을 텐 데" "뭐, 뭐시라..." 백운호는 아니꼽다는 얼굴로 쏘아보는 여미릉이 무섭지도 않은지 맞 받아 째려보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분위기 하강에 보다 못한 혜령이 자신이 하겠다고 하며 말렸다. 잘 됬다고 희희낙락한 백운호를 뒤로 하고 혜령은 썰어져 있던 사슴을 준비 되어 있던 불 위에 놓고 굽기 시작했다. 이윽고 사슴은 노린내를 내며 익기 시작했다. 고기가 다 익을 무렵 여미릉은 잘 익은 뒷다리 한짝을 들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숲속으로 걸어갔다. "어디로 가시는 거죠?" 혜령이 백운호에게 물었다. "별거 아냐. 너도 봤겠지만 그 검둥이 녀석한테 가는거야. 평소 같으 면 밤에 가서 아침 밝을 무렵에 오겠지만, 오늘은 아마 읽찍 오겠군" 혜령은 그 이야기가 나오자 정말 이 부부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상한 말과 행동들은 전혀 어울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 다. 처음 보았을 때는 별 이상한 점이 없었지만 지금은 뭔가 하나가 빠 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혜령은 물어보기 어려운 질문이었지만 백운 호가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이 보이자 살짝 물어 보았다. 역시 백 운호는 별 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별거 아냐. 그 검둥이 녀석하고는 십여년 전에 그 절벽앞에서 만났 었지. 그런데 그 놈이 가진 검이 정말 멋지더군. 그래서 내가 내기를 하자고 했지. 그 놈은 검을 걸고 난 할망구를 걸었지. 지금까지 백번 쯤 붙었는데 한번도 못이겼지. 그래서 오늘도 할망구가 간거야" "...." 혜령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어찌 자신의 아내를 걸고 내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내기였기에 그녀는 그를 다시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구. 난 그 할망구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한 적은 없어. 할망구가 나를 쫓아다닌거지. 거기다 내기로 건 것은 나지 만 그녀는 거절한 적이 없었다구. 나보다 센 여자란 건 너도 봤으니 알겠지만 할망구가 싫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냐." 변명같지 않은 변명을 하고 난 후 백운호는 몸을 돌려 먼산을 바라 보기 시작했다. 혜령은 여미릉을 사랑하지 않는다며 몸을 돌리던 백운호의 눈빛에서 흐릿했지만 사랑의 감정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랑하는데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며 내기 대상으로 걸 정도로 검이 중요한 것인가. 반드시 그 검을 얻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 검에 대단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인가. "그만 정신 차리고 안에 문이 녀석이나 깨우도록 해라. 고기 식으면 맛 없으니" 몸을 돌린 백운호가 정신없이 생각에 빠져 있던 그녀를 불렀다. 혜령은 움찔 하며 정신을 차린 후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퉁퉁 부은 눈으로 잠에 빠져 있던 천인문을 깨워 같이 나왔다. "잘 잤느냐. 이리와서 이것 좀 먹어 보거라" 백운호가 하품을 하며 나오는 천인문에게 말하자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천인문이 말했다. "왜 후아주는 없어요? 그거 맛있던데" "이놈아. 후아주가 얼마나 귀한 것인데 그렇게 자주 내 놓을 줄 알았느 냐. 택도 없는 소리 말고 고기나 먹어라" 뭔가 찔리는 듯 흠칫거린 백운호가 호통을 쳤다. 그 말에 천인문은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냥 자리에 앉자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할머니는요?" 천인문은 고기를 먹다 뜯다 말고 여미릉의 행방을 물었다. "그 까만 녀석한테 갔다. 뭐 나중에 올테니 신경쓰지 말고 먹기나 해 라. 내일 되서 산을 내려가려면 많이 먹어 둬야지" 그 말에 천인문은 뭔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고기를 뜯었 다. 밤이 깊어지기 전에 돌아온 여미릉은 잠자리를 손보기 시작했다. 산이 높은 만큼 빨리 밤이 찾아오기에 자리를 깔자 백운호는 바로 누워버렸다. 주인이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자 남아 있던 천인문과 혜령은 자리에 누 울 수 밖에 없었다. 방은 단 하나였기에 백운호와 여미릉의 사이에 자리 를 잡았다. 조금 지나자 낮은 코고는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났다. 갑자기 중앙에 누워있던 천인문이 슬며시 눈을 뜨고는 누워 있던 이들을 쳐다 봤다. 모두 잠이 들었는지 조심스레 살피던 그 는 소리나지 않게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때였다. 잠자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혜령이 몸을 일으켰다. "그냥 놔둬라. 저녀석 후아주 있나 보러 부엌에 갔을 거다" 자는 줄 알았던 백운호가 몸을 한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깜짝 놀란 혜 령은 다시 살며시 바닥에 등을 붙이고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옆에 누 워있던 여미릉이 살며시 손을 뻗어 혜령의 손을 잡아주었다. 백운호의 말마따나 천인문은 부엌에서 후아주를 찾고 있었다. 얼마전에 마셨던 소흥주는 저리가라 할 정도였기에 분명히 어딘가에 고이 숨겨 두 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하던 천인문은 검은 옷을 입고 있던 사람이 생각났다. '할머니가 아까 그 사람한테 갔다고 했지? 다리 한짝이 안보이는 걸 보 니 할머니가 그 사람한테 가져다 준게 틀림없어. 그래 그렇게 주고는 후 아주를 받아 오는 걸꺼야. 그런데 왜 오늘은 안 가져 온거지. 아 모르겠 네' 그녀가 가져 오지 않은 이유는 풀리지 않았지만 상관 없다 생각했다. 그 냥 몰래 가서 가져오면 되겠다 생각한 천인문은 부엌을 나서 그 절벽쪽 을 향했다. 달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어 걸어가기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숲 속으로 난 길로 조심스레 걸어가자 흔들다리로 이어진 절벽이 눈앞에 나타났다. 갈라진 절벽 사이로 귀곡성 같은 소리가 울려퍼지고 줄로 묶인 다리는 이리저리 휘청대고 있었다. 갑자기 몸이 떨려왔지만 아랫배에 힘을 팍 주고는 다리를 잡고 건너기 시작했다. 몇 걸음 걸어갔을까. 갑자기 어떤 세찬 기운이 천인문을 옆에서 쳤다. 줄잡은 손에 힘을 꽉 줬지만 엄청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놓쳐 버렸다. "아악" 두려움을 이기지 못했던 천인문은 비명을 질렀다. 땅이 보이지 않는 절 벽 아래로 떨어질 줄 알았던 천인문은 눈을 질끔 감았지만 떨어지는 느낌 이 들지 않자 실눈을 뜨고는 아래를 내려보았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떨어지기는 커녕 둥실 떠서 반대쪽으로 천천히 날아가고 있었다. 그제서야 한숨을 돌린 천인문은 자 신이 날아가고 있던 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낮에 보았던 검은 입을 벌리 고 있던 동굴 방향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번쩍이는 무서운 눈동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 인상 좋던 그 검은 옷의 사내일 것이다. 하지만 저 무서운 눈빛에 천인문은 압도되고 있었다. 얼마 안 있으면 방으로 돌아 올 거라 생각한 천인문이 상당한 시간이 지 났음에도 들어오지 않자 혜령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안절부절하는 모습 에 여미릉도 몸을 일으켰다. 바로 그때 천인문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구석에 누워 있던 백운호가 번개같이 몸을 날려 문 밖으로 나섰다. 혜령과 여미릉은 그 뒤를 따라 비 명 소리가 들려온 것으로 짐작되는 곳으로 향해 경공을 펼쳤다. 절벽쪽에 도달하자 그들은 천인문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건너가기 전의 천인문의 흔적은 보이나 그 반대쪽에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흑객(黑客) 그대는 분명히 어떻게 된 것인지 보았을 텐데 사실을 말해 주지 않겠소?" 어떤 사고라도 난 게 아닌가 하고 걱정을 하던 혜령의 귀에 백운호의 말 이 들려오자 정신을 차리고 그가 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낮에 들었던 그 흑의 사내의 말이 들려왔다. "하하하. 당신이 묻고 싶은 것은 내가 보았는가 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 아이를 데리고 있느냐는 것 아니오?" "당신이 그렇게 묻는다면 나도 사실대로 말하겠소. 분명히 당신 코 앞에 서 벌어진 일인데 당신이 모를 리는 없겠지. 내 사견으로는 당신이 이 일 과 상관이 있지 않은가 생각하는데..." 그러자 흑객이 다시 말했다. "하하하. 당신의 말대로요. 이 아이는 내가 지금 대리고 있소." 그러자 백운호는 눈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짓이오? 어른이 되서 함부로 납치를 하다니. 당장 그 아이를 이쪽으로 보내시오" 다시 호쾌한 웃음이 들렸다. "납치라... 내 집에 처들어 온 것은 이 아이요. 내 집에 들어오는 녀석을 잡은 것인데 납치라니 말도 안되오. 거기다 아까 낮에 보니 재미있게 노시 더구료. 당신들만 그렇게 놀면 난 외롭지 않겠소? 이 아이와 조금 놀다 돌 려 보낼테니 그만하고 돌아가도록 하시오" 흑객의 말에 혜령은 다리를 건너가려고 했다. 하지만 여미릉은 그녀의 손 을 잡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백운호도 불끈 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지만 그냥 몸을 돌릴 수 밖에 없었 다. -26- 혜령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고개를 흔드는 것인가. 그 자리에서 바로 물어 보려 했지만 여미릉은 고개를 흔들며 말을 하지 않는다. 혜령은 그만 그녀의 뒤를 따라 묘옥을 향할 수 밖에 없었다. 어느정도 걸어가자 혜령은 더 못참겠다는 듯 바로 물었다. "왜 절 건너가지 못하게 말리시는 거죠? 지금 상공은 어떻게 될 지도 모르 는데 이렇게 물러날 순 없어요" "그래서 네가 건너가겠다고? 건너가서 어떻게 할 건데. 당장 문이를 내 놓 으라고 할까? 안 내놓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이라도 할레?" 뒤따라오던 백운호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당연히 그렇게라도 해야지요. 우리 세 명이 같이 가서 사정하면 그 사람도 들어줄 거에요. 안되면 우리 셋이 나서서 덤비면 그 사람이 어쩌겠어요" 혜령의 말에 백운호는 불에 댄 듯 자리에서 펄쩍댔다. "이 계집애가 죽으려고 환장했나. 그 깜둥이가 어떤 녀석인줄 알고서 하는 말이냐? 그 녀석은 괴물이란 말이다. 우리 셋이라고 했느냐? 우리들 같은 인물이 삼십이 가도 몸 성히 나올수 있는지 모르는데 협박하고 공격하자고? 난 죽고 싶지 않아." "그럼 아깐 왜 그렇게 죽일 듯 공격하셨죠?" "그거야 내기를 할 때 그가 저 사람을 공격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랬지. 단지 그 사람의 두 발 중 한 발이라도 땅에서 떨어지기만 하면 이기는 게 내기였거 든" 잠자코 있던 여미릉이 입을 열었다. "하루만 참아라. 그 녀석이 그래도 지금까지 거짓말은 한 적이 없으니, 이번에 도 하루정도면 풀어주지 않겠느냐?" 백운호가 걱정말라는 투로 말했다. 그리고는 앞서 그녀를 지나가 버렸다. 그리 곤 조그만 말로 혼잣말을 했다. "미쳤군. 나도 후아주에 뿅 가버리긴 했지만 저 녀석처럼 몰래 들어갈 생각은 꿈 도 못꿨는데, 나보다 더 미친 녀석을 보긴 이번이 처음이군" 여미릉은 그 말에 백운호를 째려봤지만 혜령은 천인문을 걱정하느라 아무런 말 도 듣지 못했다. 그들이 사라지자 동굴 속에 흑객은 등 뒤에 놓여 있던 천인문을 다시 자신의 앞 으로 끌어들였다. 이미 아혈이 제압되어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던 천인문은 갑자 기 자신의 아혈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으아아. 이 까만 녀석아, 당장 날 풀어주지 못해...요" 그의 번쩍이는 눈에 압도 당한 천인문은 끝이 쥐꼬리처럼 줄어들며 경어를 붙였 다. 천인문을 보고 있던 흑객은 능글맞은 얼굴로 물었다. "풀어주지 못하겠다면?" 죽여버리겠다는 말을 하려다 혈이 잡힌 상태론 죽이기는 커녕 먼저 죽겠다는 생 각에 말을 바꾸었다. "흥. 안풀어주면 우리 색시가 용서치 않을껄요. 아까 할배하고 아줌마에다 우리 색 시까지 같이 덤비면 너 따윈 그냥 죽어요" 이번엔 어설프게 '요' 를 미루진 않고 바로 가져다 붙였다. "하하하. 가능하다면 해보라고 해라. 난 죽고 싶어 환장한 녀석인데 아직도 이렇게 살아 있다. 누가 날 죽여줬으면 좋겠는데도 아무도 날 죽여주지 않더구나." 흑객은 재미있다는 얼굴로 천인문을 바라 보았다. 천인문의 얼굴에 이상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자신의 가문의 어른들은 더 살고 싶 어 별 짓을 다 했는데 죽고 싶어 환장한 사람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말도 안되요. 이 세상에 죽고 싶다는 사람이 어디있어요?" "여기 있지 않느냐?" 그는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르켰다. "그럼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세요? 죽고 싶다면 아까 그 할배한테 가슴을 인정 사정 없이 쳐 달라고 하세요. 그럼 한 방에 저세상으로 가실껄요." 천인문은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고민하는 그가 불쌍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 러자 흑객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우하하하. 그 녀석이 날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말도 안되는 소리. 내 가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놈이라고는 해도 나보다 한참 하수의 손에 죽고 싶은 생각 은 없다. 적어도 나 정도의 인물이거나 아니면 하늘에서 불러줘야 가지" 천인문은 그의 말에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이 강해봤자 얼마나 강하다고 그런 말을 해요? 나이도 겨우 삼십 정도 밖에 안 먹은 것 같은데" "삼십 이라고 했느냐? 웃음이 나와 말을 못 하겠군." 하지만 하나도 우습지 않은 얼굴이었다. 천인문은 그의 말에 눈을 찌푸려가며 그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눈에 주름도 없고 머리도 다 검은 것 같고, 아무리 봐 도 삼십 이상은 보기 어려운데요?" 그제서야 흑객은 무릎을 쳤다. "아 너무 어두워서 네가 잘 알아볼 수 없나 보구나. 잠시만 기다려라 불을 켜 줄테 니" 그 말이 끝나자 천인문의 뒤에서 무엇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천인문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제서야 이미 혈도가 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날아오던 것은 갑자기 양쪽으로 갈라지더니 동굴 벽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는 달 그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들려오는 물 흐르는 소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흑객이 두 손을 양 벽으로 뻗치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동굴안은 환하게 밝아졌다. "너 때문에 사십 여 년 동안 켜 보지 않은 불을 켜게 될 줄은 몰랐구나" 하지만 천인문은 공중에 떠 있는 것을 보느라고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바 로 벽에서 타고 있던 등잔 두 개와 기름병 두 병이 둥실거리며 떠 있었다. 오늘 천인문은 엄청나게 놀라고 있었다. 하늘을 덮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암기 수 법에다 허공섭물까지. 지금 이 허공섭물 같은 것은 보도 듣도 못한 것이었다. 일반적인 고수가 하나의 물건을 진기로 들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무 게가 천인문 정도 되는 것을 삼십 장 밖에서 들기란 요원한 일이었고, 지금처럼 네 가지 물건을 자유자재로 조정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물론 천인문은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기에 놀라긴 했지만 멋지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절정 고수가 본다 면 입을 쩍 벌릴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등잔이 공중에서 불을 밝히며 떠 있고 기름병은 뒤쪽으로 다시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던 천인문을 재미있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흑객이 다시 말했다. "이 녀석아. 그만 보고 내 말도 들어봐라" 그제서야 천인문은 고개를 돌렸다. "자세히 봐라. 이래도 내가 삼십 대 같으냐?" 천인문은 그의 말에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천인문이 대충 본 그대로였다. "똑 같은데요" 흑객은 천인문이 그렇게 말하자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그렇게 보이는 것도 당연하지. 내가 바보지, 내가 바보였어" 갑자기 한탄하는 그가 불쌍하게 보였는지 천인문이 다시 물었다. "왜 그러세요?" 한숨을 쉬던 흑객이 다시 말했다. "넌 내 나이가 삼십처럼 보인다고 했지만 실상은 0 이 하나 빠졌다. 그래서 내가 이러는 거지" 천인문은 그의 말을 듣자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0 이 하나 빠졌다고 그렇다면 삼 백이란 말인가? 에이 설마, 사람이 삼백까지 산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우리 할아버지들이 쓴 책에 적혀 있었는데' 천인문이 못 믿겠다는 눈으로 바라 보자 흑객이 다시 말했다. "못 믿는 것도 당연하다. 나도 믿을 수 없으니까. 하지만 이건 사실이다. 분명히 난 삼백 년 정도 살았지. 정확하게 몇 년이 지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만 삼백이 넘은 것만은 확실하지" "못믿겠는데요? 우리 할아버지들이 써 두신 책에 보면 삼백년을 살 수 있다는 말은 없었어요. 미친 할아버지만 가능하지 않을까 하며 책에 써 두시긴 했지만 그 밑에 할아버지들이, 꼴에 조상이라고 욕은 하지 못하고 그냥 장난 치신 거니 믿지 말라고 써 두셨어요" 천인문의 말에 흑객이 다시 물었다. "미친 할아버지라니?" "우리 할아버지 들 중에 이름이 광(光) 할아버지가 계셨거든요. 그런데 그 할아 버지가 하신 말씀들이 너무 황당하다 보니 전 그냥 광(狂) 할아버지라 불러요. 그 할아버지 말 중에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그 말이 가능할 리가 없죠. 만약 그렇다면 그게 인간이에요? 괴물이지. 거기다 정말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왜 우리 집 남자들은 그렇게 빨리 죽을 이유도 없었 잖아요. 영원히 살지는 못해도 칠십까지라도 살게 했어야지. 자신도 서른 다섯 에 죽었으면서..." 천인문은 천인광이란 할아버지에게 불만이 많은지 투덜거렸다. 하지만 흑객은 천인문의 말에 작살을 맞은 듯 정신이 없었다. "처...천인..광. 천인광" 천인문은 흑객이 천인광만 계속 되뇌이고 있자 왜 그러냐는 얼굴로 쳐다 보고 있었다. 갑자기 흑객이 천인문을 째려보며 말을 했다. "천인광이라 했느냐? 넌 어떤 아이인데 천인광을 아느냐?" 흑객의 눈에 다시금 불덩어리 같은 광채가 빛나며, 가공할 기세가 천인문을 둘 러싸며 압박해오자 그는 숨이 턱턱 막히기 시작했다. 천인문은 기세를 이기기 힘든 지 이마에 땀이 조금씩 맺히기 시작했다. 그런 변화에 흑객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는지 바로 기운을 감추며 물었다. "미안하다. 내가 너무 흥분했던 것 같구나. 자 이제 진정하고 다시 말해보도록 하자. 천인광과 너의 관계는 어떻게 되느냐?" 다시 인자한 얼굴로 물어오는 흑객이었지만 이미 겁을 먹은 천인문이었다. 쉽 게 말하긴 어려웠기에 되물어 보기로 했다. "무엇때문에 자꾸 물어보시는 거에요?" 흑객은 천인문이 되 묻자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곤 웃음을 보였다. "네 녀석이 꽁수를 쓰는구나. 내가 그 사람과 원수지간인지 친구사이인지 알아 보고 말하려고 하는 모양인데, 그리 걱정 할 것 없다. 난 그와 친구사이니깐. 네 녀석의 말에 할아버지라 부르는 걸 보니 그의 손자뻘 되는 모양이구나" 천인문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아요. 천인광 할아버지는 구대조 되세요" "허! 벌써 그렇게 시간이 흘렀나?" "그런데 할아버지는 그 분과 무슨 관계시죠?" 천인문의 말에 흑객은 다시 입을 열었다. -27- "아마 삼백년 정도 된 거 같구나. 태행산이었던 것 같은데 내 원수 녀석에게 쫓기고 있었지. 지금이야 무공이 강해 어디가서 맞아 죽을 걱정은 안해도 되지만 그 당시만 해도 내 무공은 정말 약했거든. 겨우 도망치긴 했지만 하루도 못 버틸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었 지. 쓰러져 그냥 죽음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때 네 녀석의 할애비가 나타났단다. 그가 빤히 누워 있던 나를 바라보고 있기에 내가 이렇게 말했지. '뭘 봐 죽는 사람 처음 봤나?' 그러니 천인광 그녀석이 이렇 게 답하더구만. '너무 많이 봐서 그리 놀랄 것도 아니지만 당신처럼 죽는 사람은 처음 봤기에 그렇소'. 나도 우스웠지. 하루에도 나처럼 죽는 무림인들이 백은 충분히 될텐데 나같이 죽는 사람은 처음봤다고 하니 말이야. 그래서 내가 허탈하게 웃자 그녀석이 무슨 뜻인지 알고 먼저 말하더구만. '춘약에다 산공분까지 뒤집어 쓴 사람이 내장은 찢 어져 뱃속에 피가 그득해 죽어가는 사람은 처음 본다는 말이요' 난 그 의 말에 정신이 들었지. 그래서 난 옥조영(鈺朝永)이라 소개를 했지" "옥조영이요? 할아버지 이름이 흑객 아니었나요? 아까 백운호 할아 버지가 흑객이라 불렀잖아요." 천인문이 바로 끼어들었다. 옥조영은 눈쌀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에겐 엄연히 옥조영이란 부모님께서 붙여주신 이름이 있다. 비 록 검은 옷을 입었기에 지금은 그 녀석이 흑객이라 부르기는 하지만 옥조영이라 하면 밖에선 껌벅 죽는다. 그래서 그 녀석한테도 내 진짜 이름을 밝히지 않은거지. 그래서 그 녀석이 제멋대로 흑객이라 붙였 지만." 천인문은 옥조영의 말에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거리며 말했다. "난 한번도 옥조영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 없어요." 그러자 옥조영은 흥분한 것 처럼 길길이 날뛰었다. "옥조영을 모른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마라. 내 이름 석자를 말 했다 하면 모든 무림인들이 벌렁 뒤집어질껄." "왜요?" 천인문의 물음에 웃음을 띄는 옥조영이었다. "천인광 녀석이 날 살려준 뒤에 난 내 원수들을 모조리 죽이고 다녔지 수천의 무림인들이 내손에 쓰러졌거든. 그래서 날보고 사람들이 혈수마인 (血手魔人)이라 부르며 무서워했지." 그제서야 천인문은 실눈을 뜨고 웃음을 지으며 꼬투리를 잡았다. "헤 아깐 엄청 약했다고 했으면서 어떻게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죽일 수 있죠? 그거 거짓말 아네요?" "거짓말이라니! 난 거짓말 따위는 안한다." "그럼 어떻게 수천명을 죽여요?" "내가 부상을 당했을때 천인광 그 녀석이 날 치료해줬지. 어떻게 날 살린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내가 부상에서 회복한 뒤에 내 공력이 갑자기 불어났 다. 그것도 가공할 정도로 말이다.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만 이상한 약초 를 가지고 날 살렸는데 그것이 아마 날 이렇게 바꾼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약초란 말에 궁금해진 천인문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약초요? 어떻게 생겨 먹은지 아세요?" 옥조영은 천인문의 질문에 눈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한참을 그렇게 있더니 생각났다는 듯 무릎을 탁 쳤다. "황금색 꽃이 달린 거였는데 그 꽃잎은 7장에다 항아리 모양의 풀이 밑에 서 받쳐 올린 모양이던데." 그말을 들은 천인문의 두눈이 커질대로 커졌다. 머리를 몽둥이로 맞은 것 처럼 띵 했고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라면 바로 그것은 전설속의 우담화(優曇華)인 것이다. '마...말도 안돼. 우담화는 전설일 뿐이야. 삼천년에 한번 피어난다는 꽃 이 실제로 있을 리는 없어. 저 사람이 잘못 본 걸꺼야. 아니 아니. 잘못 기억하고 있는게 틀림없어. 그 꽃이 정말 우담화였다면 지금까지 우리 가문 의 절증을 단번에 치료하고도 남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걸 보면 그건 우 담화가 아니야' 옥조영은 혼자서 고개를 흔들고 있는 천인문을 보자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정신차려라. 뭘 그렇게 혼자서 생각하고 있냐" "그 꽃이 우담화일리 없어요. 할아버지가 잘못 본, 아니 잘못 기억하고 있 는게 틀림없어요." 정신을 차린 천인문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대들 듯 말했다. 그 모습을 귀 엽게 바라보던 옥조영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누가 그게 우담화라더냐. 나도 그 녀석에게 물어 봤지만 꽃의 이름을 말해 주진 않았다. 그런데 너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구나." 그제서야 그렇다는 느낌에 머리를 긁적이는 천인문이었다. "어쨋든 그 이름모를 약초로 날 살렸는데 이상하게 공력이 몇 십배나 증가 했지. 그에 따라 내 무공도 급증했고 말이야. 그 뒤에 난 십년동안 떠돌며 복수를 했지. 뭐 혈수마인이라는 기분나쁜 이름을 얻긴 했지만 한 이십년 정도 죽어 지내다 나와서 다시 한번 벌컥 뒤집으려 했었지. 근데 저 서쪽 오랑캐 녀석들이 들어왔길레 내가 죽여 놨더니 뭐 천존무제(天尊武帝)라는 듣기 좋은 이름을 붙여 주더구나. 그래서 뒤집으려던 생각은 그만 뒀지." 과거의 화려했던 날들이 떠오르는지 그의 눈빛은 멍해지고 입에는 바보같은 웃음이 걸렸다. 천인문은 천존무제란 이름을 듣자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 고민하던 중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던 중 채광이 했던 이야기 중에 천존무제란 이름을 들어봤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 채광은 광혈사를 이끌고 간 마불승을 단신으로 죽였다고 했다. 비록 무림맹이 광혈 사를 치기는 했지만 광혈사의 반수도 천존무제에게 죽었다고 했다. 채광은 마치 자신이 그 현장에 있었던 것 처럼 침을 튀기며 말을 했었다. 천존무제 의 검은 휘황찬란한 유성을 닮았다느니, 하늘의 태양을 가를 정도로 쾌속무 비했다느니 하며 말이다. 천인문은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옥조영이 그런 인물이었다는것에 대해 엄청 존경심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옥조영의 다음 말에 의해 박 살나고 말았다. "어떠냐. 너도 무공을 좀 익혔으니 천존무제는 들어 봤겠지?" 천인문은 자신을 우쭐한 웃음을 담고 내려다보는 옥조영이 갑자기 보기 싫 어지는 느낌이었다. "아~뇨. 전혀 못 들어봤어요. 제가 몇 백년 전 사람을 어떻게 기억하겠어요. 우리 집 책에도 전혀 없었고, 제가 아는 사람들도 그런 사람에 대해서 얘기하 는 걸 못들어 봤는데요" 전혀 아니라는 듯 당당하게 고개를 젓는 천인문의 모습에 옥조영은 이상해 할 수 밖에 없었다. 적어도 자신이 다시 무림에 나갔던 백년 후에도 자신을 잊은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그럼 만승불패(萬承不敗)는? 광검마(光劍魔)는?" 옥조영은 자신의 명호를 모두 다 들먹였다. 밖에 나가서 말한다면 모든 무 림인들이 까무러칠 이름들이었지만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천인문으로서는 고개만 절레절레 할 뿐이었다. 만승불패, 광검마 천존 무제가 나타난 후 백년 단위로 나타난 무인들이었다. 검과 도 한자루씩을 등에 매고 나타난 만승불패는 하루에도 수십번씩 비무 (比武)를 하면서도 단 한번의 패배도 기록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정확히 만 번의 비무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강호를 떠돌던 이십 년 동안 쉬지 않 고 비무를 행했던 옥조영을 사람들은 만승불패라 불렀다. 다시 백년이 지난 후 옥조영은 검 한자루만 들고 세상에 나섰다. 이번에는 엄청난 쾌검으로 상대방을 제압했다. 더 이상 빠를 수 없는 쾌검에 모든 무 인들은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죽지 않았다. 가공할 쾌검 도 무서웠지만 검으로 전혀 상처를 입히지 않고 마혈만 제압하는 그 능력에 더욱 찬사를 보냈다. 그가 다시 무림을 떠난 이후 사람들은 천존무제와 만승불패, 광검마 중 누 가 가장 강했을까 하는 논쟁을 벌였다. 혈수마인이 천존무제란 사실은 이미 오래전에 다 알게 되버린 사실이라 논쟁에는 제외됬지만 만승불패와 광검마 , 천존무제가 같은 사람인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누가 최강인지는 누구도 명확하게 단정할 수는 없었지만 그 인물들 앞에는 모두 천하제일 이란 명호가 붙었다. 그래서 모든 무림인들은 그들을 존경하 면서도 두려워했다. 그런데 이 천인문은 아무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니 옥조영으로선 열불이 터질 지경이었다. 옥조영은 눈에 힘을 바짝 주고 천인문을 바라보기 시작했 다. "정말로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느냐?" 천인문은 그의 눈빛에 압도되었다. 입이 절로 열리며 들어봤다고 말할 것 만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여기서 밀리게 되면 보이는 것은 지옥이요, 남는 것은 시체뿐이라는 생각을 한 천인문은 아랫배에 숨을 밀어 넣고는 대답했 다. "무..물론 한번도 못 들어봤어요." "우하하하하. 뭐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들어봤든 못들어봤든 중요한 건 아 니니깐." 눈에 들어간 힘을 확 풀어버리곤 너털 웃음을 터트리는 옥조영. 그 모습에 천인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정도면 내가 네 할애비와는 무슨 관계인지 잘 알겠지. 그건 그렇고..." 말을 중간에 끊은 옥조영이 갑자기 천인문의 전신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 했다. "왜 그러세요?" 천인문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옥조영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슬그머 니 입을 열었다. "너 지금 축골공 하고 있냐? 네 몸뚱아리 대충 봐도 열 두 세살 정도 먹은 것 같은데 지금 그딴 축골공 쓰면 너 스무살이 되도 지금 그대로밖에 안돼. 당장 그 축골공 풀도록 해라." 천인문은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축골공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아차린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는데 옥조영에게 바로 들켜버린 것이다. "어떻게 알아보신 거에요?" 궁금한 것은 참지 말자는 평소의 신념대로 바로 물어보았다. "뭐 어려운 것도 아니지. 네 몸속에 기가 사방으로 퍼져 있고 특히 관절 사 이에 많이 퍼져 있더구나. 거기다 두상에 비해 몸이 너무 작지. 그정도면 충 분히 알아 볼 수 있지. 그건 그렇고 빨리 안 풀꺼냐?" 천인문은 옥조영의 말에 바로 축골공을 거두었다. 온 몸에서 우두둑 거리는 소리와 함께 뼈가 커지기 시작했는지 키와 몸체가 다시 한 자가 넘게 커지고 는 곧 산을 내려 오기 전 상태로 돌아왔다. "그래 그래야지. 명심해 둬라. 몸 성장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런 축골공을 계속 쓰게되면 몸 버린다. 안쓰는게 제일 좋고 쓰더라도 한 시진을 넘기진 마라. 알겠냐?"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옥조영에게 천인문은 고개를 끄덕임으 로써 화답했다. "그건 그렇고. 너 왜 이 동굴로 왔냐? 심심했던 나에겐 잘 된 일이지만" "후아주 가지고 계시죠?" "후아주?" 천인문은 의아해하는 옥조영이 답답했는지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아까 아줌마가 고기 들고 왔잖아요. 그럼 할아버지가 분명히 고기 받는 대 신에 후아주를 줬을 거잖아요." "내가 궁금한 건 네가 왜 후아주를 찾는가 하는 거야. 그리고 여미릉이 고기 를 가져와서 후아주를 받아가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천인문은 상세히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후아주를 찾긴 왜 찾겠어요. 제가 마실려고 그러는 거지. 향기도 죽이는데 다 맛도 뿅 갈 정도던데요. 여 아줌마 집 부엌에 후아주가 없는 걸 보니 할 아버지가 줬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제서야 옥조영은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28- "후아주 남은게 조금 있긴 하다만 내 마실 것도 부족해. 그리고 꼬맹이 녀석이 술은 무슨 술? 그냥 조금 놀다 그냥 가." "싫어요. 그냥 갈꺼면 아예 오지도 않았어요. 안그래도 여할머니가 안가 져 온걸 백 할아버지가 섭섭해 하던 것 같던데 그냥 갈 순 없잖아요." 그 말을 듣고 있던 옥조영은 따분한 듯 목을 북북 긁으며 말했다. "안그래도 없는 술 너 줄 게 어딨냐? 그리고 뭐? 백가 녀석이 섭섭해 해? 말도 안되는 소리 마라. 제 마누라가 딴 남자 한테 안기는 줄 아는 녀석이 딴 남자한테 받아온 술을 그리워해?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마라." 그러자 천인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옥조영을 바라보았다. "여 아줌마가 할아버지한테 안기다뇨? 그게 정말인가요?" 난처한 곳을 찔린 옥조영이 아니라는 듯 손사레를 쳤다. "그...그런 건 넌 몰라도 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별걸 다 알려고 해. 그런건 나중에 다 큰 뒤에 알게 되니깐 쓸때없는 생각 하지 마" 뭐 뭍은 개가 겨 뭍은 개 나무란다는 꼴로 옥조영은 목소리만 높이며 천인 문을 짓눌렀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천인문이 아니다. "어! 왜 절 무시하세요? 저도 알건 다 안다고요. 여자는 가슴이 크고 어쩌 구 저쩌구..." 천인문은 마적단 소굴에서 본 춘도유(春導柳)의 쾌락도원(快樂桃園)을 상기 하며 여자에 대해 자신이 기억하는 것들을 주절거리며 꺼내 놓았다. 별거 아 닐 꺼란 생각에 깔보듯 쳐다 보고 있던 옥조영의 입이 점차 벌어졌다. 이건 알아도 자신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솔직히 무공에 빠져 여자 는 모르는 옥조영이었기에 얼굴 붉히는 얘기를 더 이상 듣고 있기 어렵자 바 로 손을 들며 항복했다. " 내가 얘기해 줄테니 그만해라. 뭐 얘기 할 것도 없지. 계속 백가 녀석에 게 매달리는 그 애가 불쌍해서 질투라도 한번 내게 해 보려고 자꾸 동굴로 불러들였는데 진짜 사랑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바보라서 그런건지 전혀 질 투 하는 기미도 안 보이더라." "아하 그래서 여 할머니가 왔다갔다 한 건가요?" 천인문은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면 할머니고 아줌마면 아줌마지 왜 정신 사납게 자꾸 왔다갔다 해?" 말싸움에서 진 거나 다름 없던 옥조영이 꼬투리를 잡으려는 건지 엉뚱한 것 을 들먹였다. "얼굴이 젊으니까 아줌마고 나이가 많다니깐 할머니죠. 뭐 지금부턴 아줌마 로 통일해서 부를께요." 아니꼽게 바라보는 옥조영의 모습을 보자 천인문은 애교스런 어조로 말을 맺 었다. "아 후아주요. 좀 주세요. 네~?" "정말 없다니깐 그러네." "그럼 이젠 정말 후아주 맛도 못 보는 거에요?" ".....너 그렇게도 후아주 맛 보고 싶냐?" "넹~ *^^*" 후아주로 티격태격 하던 두 사람의 설전은 천인문의 애교스런 말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후~. 할 수 없지. 후아주는 정말 나에겐 없다. 하지만 엄청 많이 있는 곳 을 알고 있으니 없다고도 할 수 없지." "엄청 많은 곳요?" 그런곳이 있냐며 황당해하는 천인문을 귀엽게 바라보며 옥조영은 다시 말을 이었다. "야 이놈아. 후아주(喉兒酒)는 원숭이들이 먹는 술이다. 이 산에는 얼마나 되는지 모를 수많은 원숭이 녀석들이 살고 있지. 멍청한 녀석들이라 자기들이 놔 둔 것도 모르고 잊어버린 곳도 많거든. 그런 것 좀 가져오면 되는거지. 알 겠냐?" (작가 주: 일설에 의하면 요순시대 (堯舜時代)때부터 술의 역사가 시작되었 다고도 한다. 황제(皇帝) 순(舜)은 원숭이가 담구었다는 후아주(喉兒酒:원숭 이가 먹기 위해 저장해 둔 과일이 저절로 발효된 것)를 마셔보고는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아 매일같이 술독에 빠져있 다시피 했다. 그러다보니 정사(政事)를 돌볼 틈이 없었음은 물론이거니와 매사가 엉망진 창이 되고 말았다. ) "원숭이들이 만들어요?" 뭔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옥조영이 다시 말했다. "뭐가 이상하냐?" "바보같은 원숭이가 만드는 술이 그렇게 맛있다면 왜 사람들은 그 술을 못 만 드는 거죠?" "못만들긴 왜 못 만드냐. 만들줄은 알지만 원숭이들이 만든 만큼 맛이 안나 니깐 문제지. 너도 밖에 나가보면 알겠지만 후아주라 하며 파는 술도 제법 된다. 하지만 여기서 먹는 것만큼 맛이 나는 것은 거의 없지." 천인문은 계속 놔 두면 하루종일 후아주 자랑만 할 것 같은 옥조영을 말리 고는 빨리 가자며 조르기 시작했다. "그 녀석 성질도 급하네. 지금 밤이다. 너 그건 알고 있냐? 왜 쓸데 없이 어 두운 밤에 갈려고 그러냐. 내일 해 뜨면 천천히 가서 퍼오면 되지." 급할 거 없다며 느긋한 태도의 옥조영이었다. 하지만 이 노인 같지 않은 노 인과는 더 보고 싶지 않은 천인문은 빨리 서두르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솔직 히 혜령을 빨리 보고 싶은 느낌이 더 강했다. "별로 어둡지도 않은데 뭘 그래요. 낮에 가서 조금 퍼오지 말고 지금 가서 왕 창 가져와요. 네~? 할아버지 혼자 하는 것보다 저하고 같이 하면 더 많이 퍼 올 수 있잖아요." 칭얼대는 천인문의 고집에 두손 두발 다 든 옥조영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자리 에서 일어섰다. "좋다. 그럼 가 보자. 하지만 우는 소리 해대면 가만 안둔다." 단단히 다짐을 받아둔 옥조영은 몸을 돌려 동굴 입구로 나갔다. 술 담을 그릇 을 안 가져가느냐고 물으려던 천인문은 등 뒤에서 무언가 날아오는 소리에 움찔 하며 동굴 벽 쪽으로 붙어 섰다. 날아 든 것은 제법 큰 여섯 개의 독이였다. 안 에서 찰랑 거리는 소리와 코끝으로 풍기는 냄새로 보아 후아주를 담던 독이 틀림 없었다. "빨리 나오도록 해라." 동굴 입구에 서 있던 옥조영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의 말에 천인문은 바로 입 구 쪽으로 달려 나갔다. 옥조영의 앞에 다가서자 그는 다시 몸을 돌렸다. "너도 도와 준다고 했으니 저 독 두개는 네가 책임져라." "네~" 폴짝거리며 기뻐하는 천인문을 뒤로 한채 옥조영은 줄다리를 옆으로 한채 걸어 갔다. 옥조영의 뒤에 둥실대며 따라오는 여섯개의 독과 그 뒤로는 깡총대는 천인 문이 뒤따르고 있었다. 공터를 뒤로 한 채 계속 걷던 옥조영은 공터가 끝나는 지점에 오자 경사길을 오 르기 시작했다. "왜 자꾸 이상한 곳으로 가요?" 이상한 곳으로 간다 생각한 천인문이 의문을 제기했다. "뭘 그렇게 군시렁 대냐. 그냥 잔말 말고 따라와라. 얼마 안 남았으니까"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가는 옥조영을 따르던 천인문은 짜증나는 얼굴로 그를 바라 보다 무엇을 봤는지 눈을 크게 떴다. "저...저 절벽을 오르..겠다는 건 아니죠?" 옥조영은 갑자기 나타난 절벽을 보자 할 말을 잃어버린 천인문에게 맞다며 고개 를 끄덕였다. "왜 아니겠느냐? 저 절벽 중간쯤에 보면 쑥 들어간 곳이 있지? 어떻게 원숭이들 도 오르기 힘든 저 곳에서 후아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상당히 오래되서 맛은 죽이지. 자 가볼까?" 천인문은 옥조영이 가르키는 곳을 자세히 살폈다. 자신이 있는 곳에서 거의 십 오 장 정도 되는 곳에 안으로 움푹 패인 곳이 보였다. 옥조영은 별 거 아니라는 것처럼 말했지만 천인문에겐 분명 별거였다. 도끼로 찍은 듯 깍아지른 절벽은 상당히 거칠었다. 뾰족하게 튀어나온 곳은 잡을 곳 도 많게 했지만 천인문의 어쭙잖은 경공 솜씨로는 찔려 죽기 좋을 뿐이었다. "시..싫어요. 뭐하려고 저 위험한 곳에 가요?" 옥조영은 그의 말에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뭐하려고 올라가다니. 네 녀석이 미쳐있는 후아주 가지러 가지." "제 말은 그게 아니고 꼭 저기 있는 것만 가지러 가야하는 것은 아니다는 말이죠. 저거 말고 딴데는 없어요?" "왜 겁나느냐?" '안되는 것을 되게하라' 는 교훈 따윈 쓸모 없음을 진무릉에게서 받은 교육으로 충 분히 깨닫고 있는 천인문이었다. 쓸데 없는 호기따윈 부리지 않기로 마음 먹은 천인 문은 쪼~금 부끄럽지만 말을 하기로 했다. "..네. 두려워요. 그러니까 딴 데로 가요" 지금까지 모습으로 보아 두렵다는 말을 전혀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옥조영은 의 외의 말을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허...허허허허. 우습구나. 네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 하지만 솔직해서 보긴 좋 구나." "갈꺼에요. 말꺼에요?" 자신의 아픈 곳을 찌르는 옥조영이 밉게 느껴진 천인문이 톡 쏘듯 말했다. 옥조영은 진정하라며 손을 내밀었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딴대로 가자. 가까운 곳이 있긴 한데 가도 될지 몰라..." ".....?" "거긴 원숭이 녀석들이 지키고 있는 곳이거든. 그래서 가면 위험할 것 같아서 말이 야." 원숭이라니. 나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겨우 원숭이 때문에 위험하다고? 저 절벽이야 내가 좀 봐주긴(?) 했지만 원숭이 따위야. 천인문은 자신을 깔보는 것같은 옥조영에게 걱정말라는 말 한마디를 던지며 앞장섰 다. 옥조영은 그런 모습이 우습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29- 길도 모르면서 앞장선 천인문을 붙잡은 옥조영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려 아래로 난 길로 내려갔다. 얼마 가지 않아 나무가 우거진 숲의 경계 지점에 도착했다. 숲은 옥조영의 동굴마냥 어둠침침했다. 오장이 넘는 큰 나무들은 엄청난 가지와 나뭇잎으로 달빛을 차단하고 있었다. 옥조영은 뒤따라오는 천인문을 흘깃 바라본 후에 입을 열었다. "이 숲속 중앙쯤에 원숭이들이 모여 있는 지점이 있다. 그 안쪽으로 들어 가면 원숭이들이 과일을 모아둔 곳이 있지. 거기에 후아주가 있다. 노파심 에 한마디 하겠지만 조심해라." "걱정 마세요. 그깟 원숭이들 상대하는 게 뭐가 힘들다고 그러세요." 큰 소리만 치는 천인문을 못믿겠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옥조영은 다시 몸 을 돌려 숲을 헤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어둠속에서 옥조영을 놓치지 않겠다 는 듯이 그의 뒤를 바짝 따르던 천인문의 귀에 낯선 소리가 들린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소리를 들었는지 말았는지 앞을 막는 나무들을 밀치며 계속 걸어가던 옥조 영이 흠칫하며 자리에 섰다. <저기다. 보이느냐?> 전음이었다. 천인문은 나무를 들며 몸을 돌린 옥조영의 손 뒤로 드러난 공 터를 바라보았다. 듬성 등성 서 있는 나무와 제법 큰 바위들이 놓여 있는 그 곳엔 수많은 원숭이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있었다. <저 녀석이 우두머리지> 옥조영은 손으로 중앙의 바위에 있던 원숭이를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 간 천인문은 바위에 걸터 앉아서 졸고 있는 원숭이를 보았다. 다른 녀석들보다 몸집이 좀 더 큰 녀석이었다. 그 주위로는 새끼를 품에 안고서 자고 있는 원 숭이들이 그 큰 원숭이를 빙 둘러싸다시피 했다. 그 밖으로는 작은 녀석들이 나 몸에 털이 숭숭 빠진 녀석들이 나무에 매달려 잠을 자고 있다. 옥조영은 볼건 다 봤다는 식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천인문에게 손짓을 했다. 뒤따르던 천인문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얼핏 봐도 백은 넘지 않는 수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조심 해야 한단 말인가. 천인문은 속에서 불길이 이는 느낌이 들었지만 잠자코 그를 따라갔다. 옥조영은 가볍게 몸을 날려 공터로 나갔다. 가볍게라곤 했지만 이 장씩을 소리 없이 내려서는 모습은 흡사 땅에서 솟아오르는 귀신같았다. 몇 발짝 뛰 지 않아 공터의 중앙에 내려선 그는 몸을 돌렸다. 천인문도 역시 소리내지 않고 옥조영을 잘 따라가고 있었다. 비록 거리는 일 장도 되진 않았지만 자세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 보였다. 천인문이 그의 옆에 내려서자 옥조영은 다시 손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저 바위를 넘어 가면 그 밑에 안쪽으로 쑥 들어간 부분이 있지 그 안에 후아주가 있다.> 그의 말을 듣던 천인문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떠 다니던 독을 땅 에 내려 놓은 옥조영은 바위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일 장 반 정도 되는 높이 의 바위는 그리 심한 경사가 아니었기에 몇 마리의 원숭이들이 잠을 자고 있 었다. 옥조영은 한번에 바위 위로 올라선 후 천인문을 기다렸다. 역시 천인 문도 몸을 날리며 그를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좋은(?) 일에는 마(魔)가 끼이는 법. 천인문이 바위에 내려섰을 때 오른 발에 물컹 하는 느낌을 받았다. '물렁 바윈가?' 얼토당토 않은 생각은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막을 내렸다. 갑자기 몸을 말고 자고 있던 원숭이 한마리가 공중으로 펄쩍 뛰어 올랐다. 그리고는 꼬리 를 잡고 사방으로 날뛰었다. 그제서야 천인문은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난장판을 만들며 돌아다니던 원숭이 덕분에 조용히 자고 있던 원숭이 무리 들은 전부 눈을 뜨고 말았다. 무슨 일인가 하고 사방을 둘러보던 원숭이들은 중앙의 바위에 서 있던 한밤의 침입자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옥조영은 손으로 이마를 치며 눈살을 찌푸렸다. '윽. 저녀석 원숭이 꼬리를 밟았구나. 그러면 이제...' 그의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대장 원숭이의 높은 소리가 공터에 퍼졌다. 원 숭이들은 모두 그 소리에 주위에 있던 나무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끽 끽' 하는 소리가 나자 원숭이들의 행동이 부산해졌다. '뭐 하는 거지?' 천인문은 처음 보는 원숭이들의 행동을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곧 쉭 하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퍼졌다. "아. 이게 뭐야" 무언가 눈두덩이와 입술 부근을 때렸다. 도토리였다. 엄지 손가락 만한 크 기의 도토리들이 갑자기 엄청나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도토리들은 희미한 달 빛만으로 피하기엔 너무나 작았다. 천인문은 온 몸으로 도토리들을 막을 수 밖에 없었다. 도토리들이 타닥 거리며 몸을 치고는 땅으로 떨어졌다. 작은 도토리들이라 아프진 않고 따끔 거리기만 했지만 천인문은 열불이 치솟았다. "가만 안 둬" 두주먹 불끈 쥐고 아직 나무에 오르지 않은 원숭이 녀석들을 쫓아간다. 하지 만 원숭이들이라고 그냥 있겠는가. 땅에 있던 녀석들이 가까운 나무로 뛰어 오르자 나무 위 원숭이들은 다시 도토리를 던졌다. 나무를 발로 차고 손으로 때리던 천인문은 고스란히 도토리들을 뒤집어 썼다. 열받은 천인문이 다시 차면 또 쏟아지는 도토리들. 오장의 나무위로 뛰어 오를 능력이 안되던 천인문은 결국 네 차례의 도토리 사례를 받고는 물러 섰다. "우씨. 짜증나. 저 놈들 확 다 죽여버렸으면 좋겠네." 투덜대는 천인문을 바라보며 웃어버리는 옥조영. "그래도 다행인 줄 알아라. 밤이라 저 녀석들이 저정도만 하는 것 같구나. 일 단 저 녀석들이 모두 나무위로 올라갔으니 쉽게 가져갈 수 있겠구나. 이게 모 두 네 덕분이다." 한참 웃던 옥조영은 자신들이 왔던 방향을 바라보았다.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숨겨둔 여섯 독이 빠르게 날라왔다. 옥조영은 바로 바위 아래로 몸을 날렸다. 천인문도 그를 따라 내려갔다. 과연 그곳에는 후아주가 있었다. 땅에 내려서자 코를 후비는 후아주의 냄새가 사방에 진동하며 그를 반겼다. 아직 원형을 보전하고 과일들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철렁대는 액체로 있었다. 옥조영은 여섯개의 독을 조정해 액체를 퍼올렸다. "자. 도와준다고 했으니 두개는 네가 들어라." 충분히 혼자서도 들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는 옥조영이 독 두개를 날려 보내자 천인문은 냉큼 받아 든 후 찰랑대는 독에 입술을 대고 훌쩍 맛을 본다. "윽. 더럽게시리. 뭐하는 짓이냐?" 인상을 팍 쓰고 물어보는 옥조영에게 천인문은 눈웃음을 쳤다. "왜요. 잠깐 맛만 보는 건데. 뭐 안그래도 다 제 뱃속에 들어갈 건데요." "웃기지 마라. 두 독을 혼자서 다 먹는다고?" "못할 껀 뭐 있어요. 지금 기분같아선 한 번에 다 마셔버릴 것 같은데." 옥조영이 그 말을 듣자 뭔가 속샘이 있는지 내기를 걸어왔다. "좋다. 그럼 네가 독 하나를 다 마실 수 있는지 내기해 볼까?" "뭘 거실건데요?" 사양의 미덕을 모르는 천인문, 바로 승낙한다. "걸게 무어 있겠느냐. 그냥 내기면 됬지" "말도 안되죠. 아무것도 없이 하는 내기가 무슨 내기에요. 그런 내긴 안해요." "에구, 좋다 좋아. 일단 내기에 걸 물건은 돌아가서 생각해 보기로 하고 빨리 나가도록 하자. 원숭이 녀석들이 뭘 할지 잘 모르는 이 판국에 계속 남아 있어 좋을 거 없다." 옥조영은 그 말을 끝으로 바위 위로 뛰어 올랐다. 하지만 천인문은 올라 갈 수 없었다. 일 장 반은 뛰어 내릴 수 있는 높이는 됬지만 뛰어 오를 수 있는 높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왜 안올라오냐?" 바위 위에서 옥조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못...올라 가겠어요" 천인문은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었던지 사실대로 말했다. 옥조영은 할 수 없다는 식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기를 모았다. 그리곤 아랫쪽에 있던 천인문을 끌어 올렸다. 갑자기 줄다리에서 자신을 감싸던 것과 똑 같은 느낌에 둘러 쌓인다는 생각을 하던 천인문은 자신이 공중으로 떠 오르자 입 이 함지박만큼 벌어졌다. 둥실 떠오른 천인문이 바위 위에 올라 서자 옥조영과 저 멀리 땅에 내려와 있던 원숭이들을 볼 수 있었다. "헤헤헤. 후아주도 됬고 이제 저 원숭이 녀석들만 뚫고 지나가면 상황 끝인가요." 천인문은 벌써 끝났다는 식으로 웃음을 보이며 옥조영을 바라봤다. 하지만 옥조 영의 눈빛은 좀 달랐다. 뭔가 이상하다는 눈빛이었다. 원숭이들은 천인문에게 뚫고 갈 기회를 주지 않았다. 바위 위에 나타난 그들을 보자 바로 나무위로 뛰어 올라 가 버린 것이다. 천인문은 자기들을 알아서 피해주는 원숭이들이 너무 고마웠다. 독 두개를 하나 씩 옆구리에 끼고는 바위 아래로 달려갔다. "가지마라." 생각에 잠겨 있던 옥조영이 갑자기 소리쳤다. 천인문이 의아해 하며 고개를 돌 렸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빠른 것이 있었으니. 돌이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엄청 난 양의 돌맹이들이 날아들었다. "악" 천인문은 사방으로 날아드는 돌맹이를 피할 수 없었다. 한 돌맹이가 이마를 때리 자 천인문은 정신을 잃고 넘어졌다. 옥조영은 뒤에서 바라보고 있다가 원숭이들이 돌을 던지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말투는 시건방진 데다가 예의 같은 것은 눈 씻고 찾으면 조금 보이는 천인문이었 지만 오랫만에 만난 귀여운 녀석이다. 거기다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사람의 혈육 이다. 마치 자신의 손자 같은 느낌까지 받았었기에 천인문이 쓰러지자 연기처럼 그의 옆에 내려섰다. 그리고 바로 호신강기를 내뿜으며 쓰러진 천인문을 살폈다. 천인문의 이마에서 한 줄기 피가 흐르고 있었다. 옥조영의 눈이 치켜올랐다. 전혀 화를 내지 않을 것 같던 그의 얼굴이 찌푸려 지고 불끈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이 녀석들' 옥조영은 단전에 기를 모은 후 사자후(獅子吼)를 터트렸다. "우우~" 그의 사자후는 하늘을 떨어 울리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나무 위에서 돌을 던 지던 원숭이들은 갑자기 들려온 사자후에 모두 정신을 잃고 땅으로 떨어졌다. 나무들도 갑자기 밀려온 충격에 흔들거리고 나뭇잎도 우수수 땅으로 떨어졌다. 조금씩 울어대던 풀벌레들도 갑자기 울음을 멈추자 그곳은 마치 죽음의 숲처럼 고요해 졌다. 사방에 움직이는 것들이 모두 잠들자 옥조영은 후아주에 흠뻑 젖은 천인문을 안고는 동굴을 향해 걸어갔다. 남은 네 개의 독만이 그의 뒤를 따라 갔다. "저게 무슨 소리죠?" 백운호, 여미릉과 함께 돌아온 혜령은 그냥 돌아온 것이 못내 아쉬웠던지 그 만 자라던 여미릉의 말도 무시한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태어난 이후 이렇게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보내던 혜령은 갑자기 들려온 사자후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 섰다. "흑객 녀석의 사자후다" 백운호가 안색을 굳히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 났나 봐요." 혜령이 문을 박차고 나갈 기세다. 가만히 앉아 있던 여미릉이 그녀를 잡았다. "별일 아닐테니 앉아라. 그 사람이 그 아이를 해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사람 곁에 있는 그 아이를 다치게 할 만한 것도 없으니 그리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 혜령은 그녀의 말에 불안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정말 그럴까요? 혹시 뭔가 잘못 된 거라면." "실제로 그렇다고 해도 우리 손으론 그 사람한테서 그 아이를 뺏아 오지도 못 한다." "그래도 한번 가 봐요. 꼭 대려올 필요는 없잔아요. 그냥 잠시 안전한지 보기 만 해도 되요." "야 이 계집애야. 넌 저 소리도 듣지 못했냐. 저 사자후는 십리 쯤 밖에서 들 린 거란 말이다. 이 세상에 그 누가 저렇게 먼 곳에서 사자후만으로 들리게 할 수 있겠느냐." 백운호의 목소리엔 울화가 섞여 있었다.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상대인 줄로 만 알았다. 조금 운이 나빴을 뿐이다. 항상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백운호로서 는 옥조영의 사자후를 듣게 되자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속은 것 이다. 아니 철저히 자신을 가지고 논 것이다. 백운호의 속은 이글대는 불로 새까 맣게 타버렸다. 심기가 불편한 백운호의 말에 혜령은 그냥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은 한숨을 내 쉬었다. -30- 천인문이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의 등 뒤에서 웅혼한 기운이 들어오 는 것을 느꼈다. 그 힘은 강대무비(强大無比)하여 자신의 기운을 억누 르며 온 몸을 휘젓고 다녔다. "깨어났으면 가만히 있어라." 귀로 옥조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던 천인문은 가만히 자신을 휘감는 기운에 몸을 맡겼다. 그러자 온 몸이 나긋해지고 편안해졌다.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에 젖어버린 것이 얼마만인가. 천인문은 조금씩 잠에 취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편안한지 코까지 골기 시작했다. 하지만 옥조영은 울화가 치밀었다. 머리에 피까지 흘리고 쓰러졌길레 불쌍해서 상세를 살피봐 주고 있는데 이 녀석은 편히 잠이나 자다니. 옥조영은 등에서 손을 거둔 후 고개를 끄덕이는 천인문의 뒤통수를 세 차게 갈겼다. "입에서 꼭 욕나오게 해요. 야 이놈아. 지금 잠이 오냐? 난 열심히 치 료해 주는데 넌 그냥 잠이나 자?" 앞으로 꼬구라질 듯 쓰러졌던 천인문은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앉았다. "좀 잘수도 있죠. 뭘 그것 가지고 그래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였다. 옥조영은 말도 못하고 입만 벌리곤 버끔거렸다. "그리고 또 왜 잠오게 내공을 넣어요. 그냥 잠안오게 치료하면 됬지." 고개를 쳐들고 또박또박 대드는 천인문의 모습이 보기 싫은 옥조영이였 기에 천인문의 말을 바로 끊었다. "잠 안오게 내공을 넣으면 된다고? 좋아 다음엔 잠안오는 내공 확실히 넣 어 주지. 그건 그렇고 너 아까 내기한 거 기억하지?" 얼굴에 사악한 미소를 띄우며 말하던 옥조영을 바라본 천인문은 바로 동 굴을 둘러보았다. "아참 어딨어요? 제 후아주." "깨졌다. 깨져도 왕창 깨졌다. 네 옷에 푹 절었으니 먹고 싶으면 옷 짜서 먹어라." "그런게 어딨어요." "어딨긴 여기 있지. 뭐 원숭이 상대가 쉽다고? 도토리는 커녕 그 커다란 돌맹이도 못 피하는 녀석이 큰소리만 엄청 쎄요." "그...그거야 너무 어두워서 못 피한거에요." "변명하지 마라. 어찌됬든 넌 졌어. 원숭이한테도 지는 녀석이 나중에 커서 딴 남자놈들한테 제 마누라는 어떻게 보호하려고 하냐. 아 근데 그 큰 처 자가 정말 네 마누라 맞냐?" 코웃음치며 말하는 옥조영에게 한마디라도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그냥 고개만 끄덕이는 천인문이었다. "일단 넌 나와의 내기에서 졌으니 내 말을 들어야 해. 알겠지?" "이상한 거면 절대로 안 따를 거에요." "걱정마라. 네 놈한테 절대 손해가는 일은 아니니" 손해가 없다는 말에 천인문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옥 조영의 머릿속에 든 생각을 보았다면 그러진 못했을 것이다. 옥조영은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입을 막으며 웃자 천인문은 왜 그런가 하 고 의아해하며 바라봤지만 옥조영이 말하지 않는 이상 알 도리가 없었다. 아침 해가 산 위로 솟아 올랐다. 높은 산이 많은 곳이라 더욱 늦은 아침을 맞이한 혜령은 식사를 하는둥마는 둥 하며 옥조영의 동굴로 가려 했지만 여미릉의 손에 의해 잡히고 말았다. 그가 하루라고 하면 정확한 하루를 이야기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던 여미릉 이었기에 그녀를 잡은 것이다. 할 수 없이 혜령은 조용히 뒷 마당의 나무 의자에 앉자 시간만 죽일 수 밖 에 없었다. "힘 좀 내라. 뭘 그딴 거 가지고 그래 고민하고 있냐. 그 녀석이 장난이 많아 보이긴 해도 거짓말 따윈 안하는 녀석이니 딱 하루가 되면 무사히 돌 려 보내 줄 거야." 언제 왔는지 백운호가 뒤에 서 있었다. 그가 워낙 편하게 말하는지라 혜령도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백운호가 자신의 맞은 편에 앉자 혜령은 조심스 레 궁금한 것들을 물어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선배님?" "응?" 왜 그러냐는 듯 백운호가 쳐다 보았다. "흑객이란 사람을 그렇게 믿으시나요? 제가 볼땐 상당히 미워하실 듯 한데." 백운호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든다. "미워할 이유가 없지. 약속 잘 지키고 그렇다고 술까지 잘 주는 녀석을 왜 미워해?" "하...하지만 부인께선 밤에 그 사람하고...." 말하기가 거북한지 혜령은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백운호는 박장 대소를 하며 말했다. "별거 아니야. 이래뵈도 여자에 관해선 내가 한 수, 아니 두 수는 위일껄. 그들이 날 속이려고 해도 절대 안되지. 잠을 잤다고 하면 내가 바로 알아볼 수 있는데 그녀에겐 전혀 그녀석하고 자진 않았어." "그런 걸 알아보실 수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믿어지지 않는다는 어조로 혜령이 묻자 백운호는 실눈을 뜨고 혜령을 바라 보며 웃었다. "아직 너도 처녀구나. 뭐 꼬맹이 녀석이 아직 사내구실을 못하니 당연한 거 지만. 어때 이정도면 믿을 수 있겠냐?" 그의 말을 듣고 있던 혜령의 낯이 새빨갛게 달아 올랐다.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녀석도 나중에 고생이 심하겠어. 이렇게 예쁜 마누라한테 꼬이는 파리들 쫓으랴, 마누라 먹여 살리랴. 정신 없겠군." 혜령은 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었다. 그때도 그런 말을 들었던 그녀였기에 명확히 해 두고 싶었던 것이다. "저한테 남자들이 정말 많이 붙게 되는 건가요?" 백운호는 그녀의 질문에 왠 말이냐는 듯 혜령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많이 생긴다니까 기분 좋아서 그러냐? 이상하군 넌 그럴 것 같은 두상은 아닌데." "그런 건 아네요. 아니 그렇게 되선 안되요." 혜령은 정색을 했다. "네 인물로 봐선 분명히 남자들이 많이 붙을 얼굴이다. 부드러운 얼굴선에다 미간 사이가 적당하고 곧게 뻗은 콧날하며 입술도 붉은게 척 보면 남자 붙을 얼굴이지." 백운호는 자신의 말이 확실하다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그럼 막을 방법 같은 것은 없나요?" 천인문은 이미 머릿속에서 싸그리 사라진 혜령. 백운호에게 열심히 매달렸 다. "막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 하지만 꼭 막을 필요 있을까? 남자도 여자를 대 여섯씩 끄는 세상인데 여자라고 남자들 골라가며 선택하는 게 왜 안되? 안그래?" 백운호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말을 맺자 바로 웃기 시작했다. "아 농담이야. 그렇게 알고 싶다면 말해주지." 혜령이 화를 낼 듯하자 반색하며 백운호가 입을 열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심법중에 있지. 바로 옥소심공(玉蘇心功)이란 것인데 딴 이름으로 옥녀심공(玉女心功)이라고 불리기도 해. 그런 걸 익히면 되지." "옥녀심공이요?" 혜령은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이는 느낌이었다. "어디서 익힐 수 있나요? 혹시 백 선배님께서 아시는 건 아닌가요?" 그러자 백운호는 열심히 손을 내저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 여자만 익힐 수 있는 건데 어떻게 내가 알고 있냐." "그럼 소용이 없는 것 아닌가요?" 혜령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 슬퍼하지 않아도 되. 할망구가 알고 있으니 말이야." 그녀의 실망한 모습에 바로 백운호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잘못 말했는지 바로 입을 막았다. "여 선배님께서 아신다 말씀하신 건가요?" "아...아니야. 내가 잘못 말했어." 갑자기 빼기 시작하는 백운호였다. 하지만 이렇게 물러설 혜령이 아니었다. "제발 말씀해 주세요." "....." "제발요 선배님." 그녀의 간절한 애원에 백운호는 그만 손을 들었다. "에....그..그게 말이지. 아 나도 모르겠다. 확실히 그 할망구가 알고 있기 는 해. 하지만 말해도 절대 안 가르쳐 줄꺼야. 그러니 포기하라구." 백운호는 안절부절하며 말을 꺼냈다. 절대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혜령의 모습에 가슴 한 구석이 불안해지는 백운호 였다. -31- 인간이란 존재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편한 것을 좋아한다. 뛰면 서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것이 인간이다. 그것은 옥조영의 앞에서 지금까지 익히고 있던 무공을 선보이고 있던 천인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혼자서 낄낄대며 웃고 있던 옥조영을 놔 두고 잠을 자고 있던 천인문은 갑자 기 자신을 깨운 옥조영을 띠꺼운 눈빛으로 바라 보았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싹 무시하는 옥조영은 단순히 알고 있는 무공을 펼쳐보라는 말 밖에 하지 않 았다. 군중들 앞에서 묘기 부리는 곰이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 천인문이었지만 내기를 들먹이는 옥조영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침해가 떠오른 동굴 밖으로 내몰린 천인문은 한참을 야단법석을 떨어야 했 다. 열심히 손발을 휘두르다가도 뒤통수로 날아드는 주먹과 발길질에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어야 했던 천인문,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자꾸 때리는 거에요?" "너 지금까지 그걸 무공이라고 익히고 다녔냐? 지금까지는 어떠했는지는 몰라 도 그 딴 무공으로 중원에 들어가면 그날로 사망이야. 돈털리고 마누라 뺏기는 거 장난이지. 눈뜨고 코 베이기 싫으면 내가 가르쳐주는 것 열심히 익혀." 부리부리한 눈을 들이밀며 말하는 옥조영의 기세에 밀린 천인문은 다시 몇 가 지 동작을 취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 둘 수 밖에 없었다. "못 봐주겠네, 당장 때려치워라. 넌 처음부터 새로 배우는게 낫겠다."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선 옥조영은 처음부터 천인문의 자세를 잡아주기 시작했 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포기 할 수 밖에 없었다. 다리 힘을 키우 기 위해 시킨 기마자세를 일각도 버티지 못하고 포기해 버리는 천인문을 일으켜 세우기엔 천인문의 고집이 센 탓이었다. 몇분간 계속된 실랑이 끝에 편한(?) 고통을 주는 것을 포기한 옥조영은 원래 생각했던 계획을 밀어붙이기로 했고 그 다음부터는 기본기를 포기하고 일반 대 련으로 들어갔다. 초식 따위는 무조건 무시하고 치고 받는 싸움처럼 되자 피보는 쪽은 천인문이 었다. "그만...그만해요." 천인문은 몇 대 맞자마자 바로 항복해 버렸다. 그러자 옥조영은 손을 멈추고 천인문을 바라보았다. "가르쳐 준다는 무공은 안 가르쳐주고 왜 자꾸 때리기만 해요?" "넌 기초도 제대로 못 익히고 있으면서 무공은 무슨 놈의 무공이냐? 넌 그냥 이렇게 맞으면서 익히는 게 낳겠다." "그딴 기초 따위는 안 배워도 되요. 그냥 초식만 가르쳐 달라고요." "그딴 기초라고? 이거 정말 웃기는 녀석이네. 기초도 안되 있는 녀석한테 초식 을 가르쳐 준다고 뭐가 되냐? 잔말말고 그냥 맞으면서 배워. 그게 나한테나 너 한테나 여러모로 편해." 그 말을 들은 천인문은 기가 막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게 왜 편해요. 한번만 탁 가르쳐 주면 그 담엔 바로 제가 알아서 익힐테니 그게 더 편하죠. 할아버지도 계속 절 보고 있으려면 더 힘들죠." "네가 무슨 천재라고 한 번만 가르쳐? 한 번 말해준다 해도 알아 듣지도 못할 녀석이." "할아버지 또 날 무시하시네. 우리 집안을 아신다는 것은 완전 거짓말인가봐." "이녀석도 천인광 녀석하고 똑같구만. 제 집안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건 그녀석 이나 네 녀석이나 똑 같애. 미안한 말이지만 넌 그리 천재는 아니니 내가 말해 주는 것 들어봐야 한번에 익히지도 못해. 두들겨 맞아가며 익히는 편이 더 빠 를 게다." 말을 마친 옥조영은 더 이상 듣기 싫다는 것처럼 바로 천인문에게 다가서며 오 른 손을 쳐들었다. 말을 하려던 천인문은 목까지 올라온 말을 되삼키며 피하기에 급급했다. 백운호와 이야기를 마친 혜령은 백운호가 자리에서 일어서 집 앞으로 걸어 가 버리자 천천히 사방을 둘러보며 귀를 귀울였다. 백운호가 부엌으로 들어갔는지 백운호와 여미릉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혜령은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되자 조 심스레 절벽 쪽으로 걸어갔다. 자신의 앞을 막는 숲을 헤치며 걸어가던 혜령은 백운호와 옥조영이 싸우던 공터까지 얼마 남지 않은 곳까지 오자 다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혜령은 그때부터 정신없이 뛰어가기 시작했다. 옷이 가지에 걸려 찢어지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달린 혜령은 절벽 앞의 공터 에 나서자 구타(?) 당하는 천인문을 볼 수 있었다. 혜령은 아무 생각 없이 공 터를 잇고 있던 줄다리로 몸을 날렸다. 절벽의 거리는 십 오장 정도 되었다. 평소 같으면 절대 건너지 않을 다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평소가 아니었다. 사랑 하는 남편이 잡혀서 두들겨 맞고 있는 모습을 본 지금 그녀는 줄다리의 중앙을 발로 차며 한번에 넘어 왔다. 갑자기 나타난 혜령을 보는 옥조영의 얼굴엔 의외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옥조 영은 이미 공터에 그녀가 나타났을 때부터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 의 공력과 무공실력으로 보아 절벽을 저렇게 가뿐하게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저렇게 날아 넘어오자 놀랐던 것이다. 옥조영은 나타난 혜령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우아앙, 색시야." 전혀 눈물이라곤 보이지 않던 천인문이 혜령이 나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두 눈에 눈물을 달며 그녀에게로 뛰어갔다. 그리고는 자신을 맞이하는 혜령의 가슴 에 매달려 눈물과 콧물을 닦기 시작했다. "색시도 봤지? 저...저... 사람이 날 때렸어." 혜령은 과거 진무릉에게 맞던 천인문을 본 적이 있었다.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던 과거의 아픈 기억을 가진 그녀였기에, 싸울때는 도움을 청하던 경우가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 혜령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신의 몸을 낱 낱이 살피던 옥조영을 매섭게 쳐다 보기 시작했다. -32- "이봐요. 왜 우리 낭군님을 때리시는 거에요?" 매서운 눈으로 옥조영을 바라보는 혜령이었지만 옥조영은 그런 그녀가 귀엽 게 느껴졌다. "네가 저 녀석의 아낙 되는 아이인가 보구나. 그런데 내가 녀석을 때리고 있 다고 했냐? 난 때린 건 아닌데. 네가 잘못 봤나 보구나."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코만 후비는 옥조영이다. "분명히 제 눈으로 봤습니다만 그건 폭행이었고 구타였습니다." 그러자 옥조영은 혜령의 뒤에 숨어 있던 천인문을 바라 보았다. 천인문은 그녀의 등 뒤에서 혀를 내밀며 그를 놀리고 있었다. 그러다 옥조영이 자신 을 바라보자 혀를 쏙 집어 넣는다. "문이 이녀석. 계집 뒤에 숨지 말고 당장 나와 봐라. 내가 널 때렸냐?" "때...때렸잖아요." "정말 때.렸.느.냐?" 안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쳐다보는 옥조영에게 그만 기세로 눌려 버린 천인문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 선다면 끝장이다는 생각에 혜령까지 끌어들일 생각을 했다. "때렸죠. 그게 때린게 아니면 뭐가 때린 거에요?" "이 녀석이!" 옥조영은 혜령의 뒤에 숨어 있는 천인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줄다리 에서 자신을 잡아 당기던 그 힘이 다시 자신을 감싸며 끌어 당기는 것을 알 아차렸다. 천인문은 손에 쥐고 있던 혜령의 옷자락을 꽉 쥐었지만 그렇다고 끌려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한손으로는 버티기 힘들어 두손으로 잡았지만 공중에 붕 뜬 천인문을 당기는 힘은 강했기에 옷이 찢어지기도 전에 그만 손 에 힘이 빠진 천인문은 혜령의 옷자락을 놓치고 말았다. 옥조영의 앞으로 끌려가자 옥조영은 날아오는 천인문의 허리를 잡고는 엉덩 이를 때리기 시작했다. 퍽퍽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자 혜령은 더 이상 참지 않고 몸을 날렸다. 장법 따위는 알고 있지 못했던 터라 닥치는 대로 공력만 실은 손을 앞으로 뻗었다. 쉬익 하는 소리가 담긴 주먹은 가공해 보였지만 옥조영의 눈에는 가소롭기만 했다. 옥조영은 천인문의 허리를 잡은 손도 풀지 않은채 허리를 숙이거나 고개만 까딱이며 혜령의 손을 피헀다. 혜령은 이렇게 해서는 별 소득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자 뒤로 펄쩍 뛰었다. 땅에 내리자마자 허리에 감겨 있던 연도를 풀었다. 휘청거리며 허리를 빠 져 나온 도는 혜령이 공력을 불어넣자 꼿꼿이 일어섰다. 혜령은 자신이 도를 뽑는 것을 기특하다는 듯 바라 보는 옥조영을 향해 짓 쳐 들어 갔다. 연도는 자신이 아는 유일한 검법인 세류검법(細柳劍法)을 쓰기 엔 맞지 않았기에 절반밖에 펼치지 못했다. "유운비천(流雲飛天)" 그녀의 손에 들린 도는 부드럽지만 빠른 속도로 옥조영의 가슴을 향해 찔러 들어 갔다. 옥조영은 자신을 찔러 들어오는 도를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바라 보았다. 그러다 가슴앞까지 도가 다가오자 팔에 잡고 있던 천인문을 돌려 자 기의 가슴을 막았다. 혜령은 갑자기 도가 날아가는 길목에 천인문이 나타나자 도를 멈추려 했다. 하지만 모든 공력을 집어 넣은 도를 멈출 수 있는 능력은 아직 혜령에게는 부족했다. 도는 조금 느려진 속도로 천인문의 가슴을 향해 밀려 들어갔다. 자신의 눈앞까지 다가온 도에 천인문의 얼굴은 그만 사색이 되었다. 전혀 멈 출 기색없이 찔러오는 도에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하지만 푹 하고 가슴으로 밀고 들어올 것이라 생각했던 도는 시간이 지나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천인문은 실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혜령의 손에 들린 도는 자신의 가 슴 앞에서 반치를 남기고는 멈추어 있었다. 그제서야 천인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 다행이다. 색시가 그래도 겨우 멈추긴 했나보네. 하마터면 마누라 손에 죽은 칠칠맞은 녀석이 될 뻔 했네.' "네 남편이 나이 어리다고 불만있냐. 내가 피하지 않았더라면 네 꼬마신랑은 벌써 하늘로 갔겠다." 천인문은 그제서야 옥조영이 뒤로 피했기에 자신이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 다. "그...그게..." 혜령은 분명히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 지 몰랐기에 그냥 떠듬거리기만 했다. "그만 물러가거라. 남편을 죽이려 하는 악녀는 그냥 둬서는 안되겠지만 그래도 예쁘게 생겨서 봐준다." 혜령은 옥조영의 입에서 그만 악녀가 되어버렸지만 반박할 자신이 없었다. 그 러나 아내의 아픔을 그냥 두고 볼 남편이 아니었다. 천인문은 옥조영의 손에 매달린 채 떠들기 시작했다. "우리 색시한테 무슨 시비에요. 할아버지가 그냥 도에 찔렸으면 끝났잖아요. 그런데 절 들어 도를 막아놓고서는 왜 우리 색시를 악녀로 몰아붙이는 거에요." "허 너 알고 있었냐?" "절 바보로 아는 거에요? 우리 색시야 너무 착한 선녀표라서 아무런 말도 못 하는 거지만 전 그런 바보는 아니라고요." "오! 네 색시는 바보라고 하는 거냐?" "할아버지야말로 바보군요. 우리 색시는 착해서 말 못했다고 했지, 몰라서 말 못했다고는 않했어요." 천인문은 옥조영의 팔에 매달린 채 설전을 시작했다. 하지만 말만으로는 천인 문을 이기기 힘든 옥조영이었다. 그만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삭이지 못해 옆구리 에 끼고 있던 천인문을 내 던지고 말았다. 천인문은 기회라는 듯 혜령의 옆에 내려서자 바로 혜령에게 입을 열었다. "지금이야. 우리 같이 공격해." 그리고는 다시 옥조영을 향해 뛰어들었다. 하지만 혜령은 멍하니 보고 있었고, 혼자서 뛰어든 천인문은 옥조영의 손에 마혈이 찔리고 말았다. "색시야. 왜 같이 공격 안했어?" 억울하다는 얼굴로 혜령을 향해 이야기 했다. 혜령은 그만 고개를 숙이며 미안 해 했지만 천인문도 마혈이 짚혔기에 그녀를 보지 못하고 있긴 마찬가지였다. 저편 절벽에서 부스럭 거리며 백운호와 여미릉이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숲속에서 나타난 그들은 절벽 맞은 편의 사태를 보자 상황을 알아차리고는 바로 절벽을 넘어 건너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옥조영은 아무 일 없다는 것처럼 뒷짐을 지고 쳐다보기만 했다. "어서오시오. 그런데 오늘은 왠 일로 다 넘어 오신 건지?" "이 아이가 보이지 않아 찾으러 나왔는데 이렇게 폐를 끼치게 됬네요." 옥조영을 보기 싫은 듯 백운호는 고개를 돌려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기에 여 미릉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폐라니요. 뭐 무리한 것은 없으니 그만 저 아이를 대리고 가시지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고민중이던 옥조영으로선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 (固所願)이었다. 고개를 숙이는 옥조영을 뒤로 한 여미릉은 혜령의 앞으로 다가섰다. 하지만 이 대로 갈 수는 없었다. "선배님, 이렇게 가면 저의 낭군은 저 사람한테 맞습니다. 제발 같이 갈 수 있 게 해주세요." 여미릉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애원하는 혜령이었지만 여미릉은 그럴 생각은 없 었다. 하루면 풀어줄 거라 생각하는데 왜 꼭 이렇게 와서 설치는지 그녀는 이해 가 되지 않았다. "저 분께서 문아를 때릴 리가 없단다. 걱정말고 가도록 하자." "아니에요. 제가 제 눈으로 똑똑이 봤습니다. 분명히 저 사람이 때리고 있었습 니다." 혜령은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며 말했다. 그러자 여미릉은 고개를 돌려 옥조영을 바라보았다. 옥조영은 그녀의 눈빛에 천인문을 바라보았다. "대답해봐라. 내가 널 때리던?" 천인문은 만약 세명이 덤비면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 렇다고 대답했다. "아까 절 때렸잖아요." 그러자 하늘만 바라보던 백운호가 바로 몸을 돌렸다. -33- 돌아서는 백운호의 눈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왜 상대도 안되는 아일 잡아서 때리는 것이오? 그냥 풀어주고 나하고 정 식으로 한 번 붙어 봅시다." 그 말을 들은 옥조영은 미소를 지었다. "평소 같이 하시죠. 그렇게 무게 잡으니까 어색하군요." 백운호는 잠시 흠칫 했다. "하하하하. 그러니깐 바로 말하도록 하겠소. 그 아이를 잡아 둬 봤자 좋을 것은 없지 않소. 깨끗하게 그 아이도 풀어 주고 나하고 한 번 싸워 봅시다." 말하는 것이 평소 같아 졌지만 끝에 와서는 갑자기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 했다. 숨이 가빠져 목소리가 갈라지기도 했다. "그러고 싶지는 않군요. 이 녀석은..." 옥조영은 손을 들어 천인문을 가르켰다. "저하고 내기를 했답니다. 그 결과 저렇게 되긴 했지만 결코 때렸다는 것 은 거짓말입니다. 그러니 저하고 특별히 붙어 보실 필요는 없겠지요." 대답하는 옥조영의 모습은 능글맞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열받는 것은 백운 호였다. 충분히 자신을 농락할 수 있는 무공 수준에다 공손한 것 같은 저 말 투도 이젠 꼭 자신을 비꼬는 것 같았다. 느낌이란 중요한 것이다. 특히 다혈질적인 인물은 생각보다는 느낌에 잡혀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백운호는 다혈질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생각을 실현 시킬 수 있는 무인이었기에 옥조영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자 슬 슬 화가 솟아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의 얼굴도 서서히 이그러지고 있었다. "지금 말 장난 하자는 겁니까? 난 분명히 당신에게 비무 신청을 했는데 왜 자꾸 거절하는 거요?" "때리지 않았다니깐요. 저 녀석이 거짓말 하는 겁니다. 그러니 특별히 저하 고 비무를 하실 필요는..." 웃으며 비무 신청을 거절하는 옥조영이었지만 이미 백운호는 싸우기로 마음 을 다졌다. "누가 저 녀석 때린 것 때문에 그런다더냐. 저딴 녀석이야 맞아죽던 말던 나 하고 상관 없어. 그냥 너하고 붙어 봐야겠단 말이다." 말을 마치자 백운호는 몸을 튕기며 옥조영의 앞으로 다가섰다. 백운호는 손끝 을 모아 옥조영의 명치로 날카롭게 찔러 들어갔다. 옥조영은 가볍게 몸을 날려 피했다. "이러실 필요는 없지 않소. 무엇때문에 그리 화가 나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사과하도록 하죠." 옥조영도 어느정도 화가 난 것 같았지만 공손하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백운호 는 더 이상 대꾸할 마음이 없었는지 그냥 공격을 퍼부었다. 퍼퍼퍽! 옥조영은 백운호의 공격을 가볍게 막았다. 역시 하는 얼굴로 백운호는 경탄했 지만 공격은 더욱 날카로와졌다. 옥조영도 얼굴빛을 바꾸며 진지한 자세를 취 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치고 받는 그들의 공격은 과연 무시무시했다. 사방에서 먼 지가 일기 시작했고, 숨막히는 가공할 기세가 사방으로 퍼졌다. 여미릉은 그들의 싸움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한쪽이 잘못 하면 죽을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대결이었다. 이런 장면은 별로 보기 힘들었 기에 그녀도 안력을 모으며 열심히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별로 걱 정은 하지 않고 있었다. 백운호는 자신보다 무공이 조금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옥조영의 무공 실력은 정확히 몰랐지만 숨도 안쉬고 눈을 굴리 는 백운호보다 느긋한 모습으로 대결하고 있는 옥조영의 모습은 그가 백운호보 다 수준이 더 높은 고수임을 명백히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여미릉과 같은 고수나 알아볼 수 있었다. 혜령은 그들의 싸움 에 입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희미한 잔영만 눈에 잡힐 정도로 그들의 몸놀림 은 빨랐기에 넋을 잃고 바라 보고 있었다. 손이나 발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던 혜령은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는 뻣뻣하게 굳어 있는 천인문에게 다가갔다. 천인문은 이미 죽을 맛이라는 듯 찡그리고 있었다. 혜령이 다가가자 환하게 밝아지긴 했지만 혜령이 여기저기를 만져도 움직일 수 없자 다시 찌그러졌다. 옥조영은 자신을 핍박해오는 백운호의 공격속에서도 사방을 열심히 보고 있었 다. 혜령이 천인문의 혈을 풀려고 하는 것도 알았다. 그는 몸을 뒤로 빼는 듯 하다 벼락같이 다가서며 백운호의 옆구리를 짚었다. 그리고는 옥조영은 자신들 을 보고 있던 여미릉 쪽으로 다가서더니 앞으로 손을 떨쳐 냈다. 여미릉은 자신을 갑자기 밀어내는 힘에 밀려 그만 반대쪽 절벽으로 날아갔다. 아무런 말도 없이 저렇게 무음의 공력으로 자신을 밀어낼 줄 몰랐기에 놀라긴 했지만 아무 상처도 입지 않은 것 같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받으시오." 저 편 절벽에서 옥조영의 말이 들려오자 여미릉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갑 자기 하늘을 날아 오는 백운호의 몸이 눈에 잡혔다. 그녀는 몸을 낮추며 두 손 에 공력을 모아 꼼짝 없이 날아오는 백운호의 몸을 받쳤다. 안전하게 백운호를 내려 놓기도 전에 또 무언가 날아 드는 소리에 질겁했다. 혜령이었다. 정신없이 그녀까지 받아 내려 놓자 저편에서 옥조영이 큰 소리로 껄껄 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역시 대단하시오. 제 기대를 져버리지 않으시군요. 그리고 백형, 오늘은 무 슨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만 화를 푸시지요. 그래야 다음번에 편히 만날 수 있지 않겠소. 그리고 문이 녀석의 안사람 되는 아이야. 이 녀석은 나하고 내 기를 했다. 그래서 조금 주무르는 모습을 본 것 같은데 그건 분명히 때린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라. 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이 녀석이 거짓말을 해서 오늘 하루만 잡아 두려고 했던 것이 제법 길어질 것 같구나. 그건 내 잘못은 아니니 나중에 이 녀석한테 화풀이 하도록 해라. 그럼 다음에 봅시다." 말을 마친 옥조영은 손을 들어 줄다리를 내려 쳤다. 절벽을 잇고 있던 한쪽 줄 끝이 끊어지며 반대쪽 절벽으로 축 늘어 졌다. 옥조영은 껄껄 대며 천인문을 옆구리에 끼고는 동굴 안쪽으로 사라져 갔다. 그 모습에 백운호가 머리를 갸웃댔다. "왜 줄을 끊지? 저 정도 거리면 한 번에 넘을 수 있는 거린데." 여미릉은 그 말에 한심하다는 듯 그를 봤다. "당신이 절벽을 뛰어넘는다 해도 저사람이 절벽끝에 서서 맞받아치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럼 우리 두사람이 동시에 넘어가면 되지." "정말 한심하군요. 동시에 뛰어 넘는다 해도 한 명이 그렇게 공격 받고 나면 그 뒤에 남은 한 사람만으로 어떻게 하라는 거죠? 당신은 아무 상처 없이 저 절벽까 지 날 밀어낼 수 있나요?" 그제서야 백운호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자신도 절벽까지 밀어낼 수는 있었다. 하지만 멀쩡한 몸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은 이 갑자 의 내공을 가진 자신도 불가능했다. 옥조영이 자신뿐 아니라 그녀까지 같이 덤비더라도 승부를 점칠 수 없을 정도의 무공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자 검을 뺏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렇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그는 통쾌하게 웃으며 몸을 돌려 걸어갔다. 여미릉이 그의 뒤를 따르자 혜령도 쫓아갔다. "선배님, 어쩌면 좋죠?" "나도 잘 모르겠구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가 저렇게 말한 걸 로 보아 아마 그 아이가 스스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겠구나. 그건 그렇고 그 아이가 왜 그렇게 커 진거냐?" 혜령은 나중에 돌아가서 말씀드리겠다는 말로 넘어갔다. 혜령도 열심히 그녀의뒤 를 쫓아가며 머리를 굴렸지만 전혀 왜 그렇게 된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나중 에 만나면 물어봐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천인문을 옆구리에 끼고 들어온 옥조영은 동굴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그를 내던졌 다. 천인문은 눈 앞으로 땅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냥 찔끔 눈만 감았을 뿐이다. 쾅! 눈에 별이 번쩍였다. 이마가 화끈한 것이 상처가 다시 터진 것 같았다. 천인문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옥조영을 바라 봤다.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던지는 것이 어딨어요? 움직이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옥조영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돌아봤다. "내가 혈도 풀어준 지가 언젠데 그런 소릴 하느냐. 그리고 넌 그런 꼴 당해도싸" 천인문은 그제서야 자신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잘 알고 있겠지. 뭐 이 할아버지의 넓으신 아량으로넘 어 가겠지만, 너와 한 내기는 계속된다. 그 기간은 흠...흠..." 천인문은 뭔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아까도 들었지만 돌아갈 기간이 길어질것이 라니. 그 말은 천인문에게 너무나 섬뜩하게 다가왔다. "길어지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한 마디로 네 녀석이 여기서 나가려면 내가 가르쳐 주는 완성해야 한다는말이지. 그 기간이야 네 녀석이 하는 것에 따라 빨라질 수도 늦어질 수도 있지." 천인문은 그의 말에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이거 장난이 아니잖아. 우왕 죽었다. 뭐 이런 영감탱이를 만나서 꼬이게 될줄이 야. 어쩌면 좋아. 엄마 나 좀 살려줘요.' 하지만 이렇게 엄마를 찾는다고 해결 될 일은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는천인문이 었기에 멍하니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진 않았다. 무공을 익혀야했다. 천인문은 그 어느때보다 더욱 무공에 목숨을 걸게 된 것이다. 천인문은 그 다음부터는 옥조영보다 더욱 열의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많던 잠도 줄이고 밤낮 없이 옥조영을 귀찮게 했다. "야 잠좀 자자, 잠좀 자." 옥조영은 잠자던 자신을 깨운 천인문이 너무 미웠다. "그러니깐 저한테 구결만 쭉 읊으시면 되죠. 제가 쫙 기억하고 나면 할아버지를 귀찮게 하지 않을테니깐요." 옥조영은 그 말에 잘 됬다는 듯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너 그 말 잘 기억해 둬라. 만약 한번에 못 외우기만 해 봐라." 옥조영의 얼굴을 보고 있던 천인문은 가슴의 한 편이 썰렁해지는 느낌이었다. 하 지만 이대로 물러 설 순 없었다. 나중에 어떻게 되도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가슴을 치며 말했다. "절 뭘로 보시는 거에요. 말만 해 보세요." 옥조영은 그 모습에 좋다 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말하는 내공심법은 천류심공(天流心功)이란 것이다. 내가 만든것이지. 딴 사람들은 뭐 천류신공이라 하기도 하지만 신공은 무슨 신공.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한 사람이 멋지게 펼치는 걸 보고 부러워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지. 일단 무공에 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내공이다. 그러니 이 내공부터 말해 주겠다. 잘들어라. " 말을 마친 옥조영은 구결을 읊었다. 천인문은 처음부터 정신을 집중하고 들었다. 평소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그도 정신을 집중하니 하나하나 기억을 다 할 수 있었 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옥조영이 검법이나, 도법, 지법 등의 여러 무공으로 넘어가기 시작하자 머리가 휭휭 돌기 시작했다. 어지럽고 속까지 매쓰꺼 워졌다. 나중에는 옥조영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하나도 알아 들을 수없었다. '그러면 그렇지. 네 녀석이 무슨 천재라고 그걸 다 외운단 말이야. 그건 진짜 절 맥이라 불리는 태양절맥(太陽絶脈)이나 구음절맥(九陰絶脈) 같은 녀석들만 그런거 야. 네 집안에 내려온 절맥 같지 않은 절맥은 아니지. 그러고 보니 이 녀석 마누 라가 분명히 구음절맥이었던 것 같았는데. 아쉽군 그 아이를 가르쳤더라면 제법 재미있었을 건데.' 이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의 입은 전혀 멈춤이 없었다. 옥조영은 천인문을 다 시 바라보았다. 천인문은 이미 기억하는 것은 포기했는지 사방을 둘러 보고 있었 다. 옥조영은 멈출까 생각도 했지만 이제 남은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끝 까지 외우기로 했다. 그렇게 한 시진이 않되는 시간동안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구결을 말한 옥조영은 그냥 열심히 외워라 하고는 구석으로 걸어가 잠을 청했다. 분명히 외우지 못할 것 은 뻔했다. 이제 내일부터 열심히 닥달 할 수 있을 것이다. 옥조영은 기쁨에 잠겨 웃음을 띈 얼굴로 잠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34- 혜령은 묘옥으로 돌아오자 여미릉과 마주앉았다. 그리고 그녀가 묻 는 말에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산 속에서 처음 만났던 일부터 산 속의 일들과 마을로 내려온 일들을 꺼내놓았 다. 구석에서 투덜대고 있던 백운호도 언젠가부터 귀를 세우며 듣고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은 천인문의 축골공이 었다. 여미릉은 혜령의 이야기에 정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축골공이란 것이 생각보다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시전하기에 충분한 내공이란 것이 일갑자란 점은 까다롭다 할 수 있었다. 천인문 이 축골공을 쓰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일갑자의 내공이 된다는 것이 다. 어린 나이에 일갑자의 내공이 된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여미릉은 왜 혜령이 천인문보다 못한 것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대충 봐도 그녀 의 신체 자질이 천인문보다 뛰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고민하 지 않았다. 이유야 어찌 됬건 상관없었다. 자신이 충분히 가르치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여미릉은 지금까지 제자를 둔 적이 없었다. 자기가 익혔던 무공들을 전해 줄 만한 인재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뛰 어난 자질을 갖춘 혜령을 보자 그녀의 마음도 설레기 시작했다. 처음 볼땐 몰랐지만 혜령의 말을 듣고 난 후 그녀를 자세히 살피자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여미릉은 잘못 해서 혜령을 놓쳤으면 어찌 될 뻔 했나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여미릉은 천천히 혜령의 의사를 물었다. 그것은 정말 혜령에게는 한 모금의 감로수와 다름 없었다. 어떻게 말을 꺼낼까 고민하고 있던 혜 령은 제자가 되지 않겠느냐는 여미릉의 말에 생각할 틈도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보고 있던 백운호도 기쁘게 축하한다 말했다. 옥녀심공을 혜 량에게 이야기 했던 그로서는 어떻게 하면 무사히 넘어 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조금씩 해결책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혜령은 방을 나서는 여미릉의 뒤를 따라 집앞 공터에 섰다. 구배지례 를 올리라는 백운호의 말에 여미릉이 그럴 필요 없다며 손을 내저었기 에 그들은 바로 수련으로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이 사부의 무공은 두 가지 정도로 나뉜다. 하나는 심의공(沈意功)의 계열이고 또 하나는 천황사기(天皇四技)이다. 심의공이란 나의 독문 심 공이 포함된 내공심법을 총칭하는 말이다. 네가 익혔던 천인시령심법(天 人是領心法)도 심의공 중에 하나지. 심의공은 선천지기(先天之氣)를 모 으는 것도 있고, 후천지기를 수련하는 것도 있다. 사람마다 그 효용이 야 서로 다르니 어느쪽이 좋다 나쁘다는 말하기 힘들겠지만 이 사부가 전수할 내공은 선천지기를 다루는 것이다. 네가 익혔던 것도 선천지기 를 다루는 것이니 별 어려움 없이 익힐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부는 그 것을 태의진경(太意眞境)이라 이름 지었단다." 그 말을 듣고 있던 혜령은 옥녀심공에 대해서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이 솟아났다. 하지만 여미릉은 계속 말을 하고 있었기에 그저 꾹 참 고 듣고만 있었다. "천황사기는 이 사부가 익힌 운신법(運身法)이나 병기를 다루는 것들 을 말한다. 사부가 강호를 떠돌때 강호의 동도들이 그 중에 네 가지를 높이 치며 천황사기란 이름을 붙여 주었단다. 그것들은 풍신검법(風迅 劍法)이란 검법(劍法)과 뇌영각(雷靈脚)이라는 각법(脚法), 만화가무 (萬化歌舞)라는 편법(鞭法) 마지막으로 비매천영(飛梅天影)이라 불리는 보법이 있다. 이것 말고도 지법이니, 신법이니, 조법이니 많긴 하지만 이 네가지를 능가하긴 어렵다. 그러니 넌 이 네가지를 익히는것을 최우 선으로 하여라." 여미릉의 말이 끝나자 혜령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사부님께서 알고 계시는 옥녀심공(玉女心功)은 왜 말씀하지 않으시 는지요." 그 말에 여미릉의 신형이 부들거렸다. 그녀의 손이 혜령의 어깨를 꽉 잡아 왔다. "어디서 들었느냐. 그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말해라." 혜령은 깜짝 놀랐다. 단지 이름을 말했을 뿐인데 왜 이런 반응을 보이 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그...그게." 그녀는 백운호가 했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방을 쳐다 볼 뿐이었다. 여미릉은 그녀의 고개가 돌아가자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차 릴 수 있었다. "영감탱이... 당장 튀어 나오지 못해요." 그러자 문지방에 뚫려 있던 구멍에 검은 자위가 휙 하고 사라진다. 여미릉의 불끈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는 당장 방 안으로 뛰 어 들어갔다. 그리고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와 둔탁한 타격음은 방안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혜령은 살며시 눈을 감고는 백운호의 명복을 빌어주고 있었다. * * * 혜령이 백운호의 안녕을 빌고 있을 때 천인문도 역시 고통속에 몸부 림치고 있었다. 달콤한 잠에서 깨어난 옥조영은 한쪽 구석에서 머리를 숙이고 있던 천인문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얼마나 정 신을 집중했으면 물어도 못 알아 들을까 하며 천인문을 바라보던 옥조 영은 낮게 들려오는 코고는 소리에 확 뒤집어져 버렸다. 옥조영의 얼굴 은 일그러졌고 갸냘픈 천인문의 몸뚱이를 잘근잘근 밟아주기 시작했다. 열심히 밟힌 천인문은 얼마후에 일어났지만 이어진 옥조영의 암기 시 험에 불합격하여 또 밟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분명히 네 입으로 말했지? 다 외울 수 있다고. 그런데 겨우 내공 하 나 외우면서 잠을 자. 죽자사자 외워도 다 외기 힘든데 지금 잠잘 시간 이 있냐 없냐 응?" 그리고는 다시 밟아대기 시작했다. "으악, 꽥, 꺅, 윽윽, 그만 그만해요." 천인문의 입에선 나올 수 있는 말은 모조리 흘러 나왔다. 하지만 옥조 영은 요지부동이었다. "항복, 항복이에요. 무조건 항복~" 결국 천인문은 백기를 들고 말았다. 그제서야 옥조영은 만족했다는 듯 손바닥을 털며 돌아섰다. 그 모습을 본 천인문은 긴 한숨을 내 쉬었다. '이게 무슨 꼴이람. 왜 쓸때 없이 내기는 걸어가지고 이런 꼴을 당하는 거지. 그런데 가만. 이상하다. 분명히 내기는 내가 술 두독을 마실 수 있 는가 없는가였는데. 내기는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왜 내가 졌다고 하는 거 지.' 천인문은 그제서야 내기에 졌다는 것이 잘못 된 것임을 알아차렸다. 천 인문은 반박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냐?"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는 옥조영에게 천인문은 얼어 버렸다. 목까지 올라 온 말은 다시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어휴. 이젠 정말 죽었다. 우앙' 천인문의 어깨는 더 이상 처질 수 없을 정도로 처져 버렸다. -35- 그 뒤로 천인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매 맞는데 장사 없다고 계속되는 구타(?)에 천인문은 두 손을 들고 마음을 비운지 오래였다. 하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조영의 주먹질은 계속되었다. 대들어 보지 않은 것 은 아니었다. 암습에다가 도망까지 쳐 본적도 있었다. 그 결과는 육체의 고 통이었다. 다섯 번의 반발을 끝으로 천인문은 잠잠해 졌다. 눈물로 호소를 해볼까 하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첫날 수련아닌 수련이 끝난 후 동굴에서 울먹이며 잠자다 옥조영에게 맞은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 록 떠올랐기에 눈물 따위는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천인문이 옥조영의 수중에 떨어진 지 십일 째가 되는 날이다. 오늘도 천인 문은 옥조영에게서 호된 수련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어허 자세가 흔들린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먹이 가슴과 배 허벅지에 틀어 박힌다. '윽!' 천인문은 목으로 솟구친 비명을 굳센 의지로 삼키며 숨을 골랐다. 바로 자 세를 취하지 않으면 다시 날아올 주먹은 더욱 매서울 것이다. 지금 천인문이 취하고 있던 자세는 마보참춘(馬步站椿)이었다. 양발을 좌우 로 벌리고, 무릎을 굽혀 반쯤 쪼그려앉는 자세다. 중심을 아래로 두기 때문에 다리의 힘을 증가 시킬 뿐만 아니라, 혈기(血氣)가 뜨는 것을 막고 호흡(呼吸) 을 안정시키는 등의 효능이 있다. 아주 쉽게 보이는 듯 하지만 상당히 힘들다. 열 세살의 천인문에게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세를 취하고 있던 천인문의 이마에서는 땀이 비오듯 했고 등줄기는 흐줄근하게 젖어 있었다. 온 몸은 물먹 은 듯 나긋했지만 전혀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자 그만. 일각 후 다시 와라."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던 옥조영이 천인문을 향해 말하고는 할 말 끝냈다는 듯 뻥 뚤린 동굴로 걸어갔다. 일 각의 휴식은 천인문에겐 꿀맛같은 휴식이다. 천인문은 망설이지 않고 동굴 뒤의 원숭이 숲으로 뛰어 들었다. 일 각이란 시간은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짧은 시간을 정말 유용하게 써야만 했고, 이미 그것을 몸으로 깨우치 고 있던 천인문으로서는 허투루 낭비할 순 없었다. 옥조영의 주먹이 무서워 이 각으로 늘여달라는 등의 말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잘못되어 일 각이 반으로 줄 어들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일조했다. 숲 속에 들어오자 파릇한 풀섶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프지 않은 곳이 없 기에 앉자마자 팔뚝과 다리의 옷을 걷어 올렸다. 하지만 용하게도 몸 어디를 보 아도 멍든 곳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 참 이상하네. 뼈가 나긋나긋해 질때까지 맞았는데도 멀쩡한 걸 보면 내 몸이 딴딴한 거야? 아니면 할배가 잘 때리는거야?' 이럴 리 없다는 생각에 옷까지 홀딱 벗었지만 역시 상처따윈 보이지 않는다. '흐음. 진짜 깨끗하네.' 천인문은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움직일 수 있는 걸 보면 뼈엔 이상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허나 자신의 의학 지식으로는 이 정도의 타격엔 핏줄이 터져 피 부가 벌겋게 혹은 시퍼렇게 멍들어야 정상이었다. 이런 신기한 일에 정신이 빠져 있는 동안 살판 난 것은 모기들이었다. 모기들 은 뾰족한 침을 앞세워 정신 나간 천인문을 향해 돌진했다. -찰싹!- 천인문의 손이 사정없이 허벅지를 때렸다. '앗 따거!' 하지만 천인문의 손바닥은 헛되이 허벅지만 때렸을 뿐, 모기를 잡지는 못했다. 천인문은 다시 옷을 입으며 옥조영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동작 하나를 취하게 하고는 어디가 잘못 된 것인지 전혀 말해 주지도 않고 주먹을 날리는 옥조영은 천인문에게 악마나 다름 아니었다. '에휴. 정말 이렇게 살아야 하나.' 천인문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할 뿐이었다. 도망을 친다 해도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처럼 나타나는 옥조영에게 또 잡혀갈 것이 뻔했기에 그저 풀어 줄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는 편이 좋았다. 천인문의 머리는 알고 있지만 가슴은 인정할 수없는 이 사실을 놓고 갈등할 때 즈음 자신을 부르는 옥조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아." "에, 옛! 가요" 도망을 의심할까 소스라치게 놀란 천인문은 크게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 섰다. 하지만 곧 다가온 무한의 고통. "아이구 다리야. 아이구 허리야." 쑤시지 않고 아프지 않은 곳이 하나 없다. 요 며칠간 익히 느껴온 고통이었지 만 익숙해지엔 아직 요원한 모양이었다. 온갖 인상을 쓰며 아픈 곳을 주무르 는 천인문이었지만 다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언제 아팠느냐는 듯 펄쩍 뛰며 동굴을 향해 달렸다. 천인문이 동굴 앞 공터에 다다를 즈음 옥조영은 두 팔을 허리에 올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헉헉 대며 달려온 천인문이 숨을 고르기도 전 바로 입을 연 다. "마보참춘 한 시진. 시~작." 그 말에 천인문은 자동반응처럼 동작을 취했다. 하지만 아직 그의 얼굴은 확 찌푸려졌다. "왜 못하겠느냐?" 천인문의 얼굴을 본 옥조영이 고개를 갸웃대며 물었다. "아...아니요. 누가 못한데요." "그럼 왜 그렇게 얼굴에 힘을 주느냐?" "아 이건 다시 힘내서 또 해보자 뭐 이런 거죠. 헤헤헤." 천인문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 열심히 해라." 옥조영은 천인문의 주위를 돌며 자연스럽게 말했다. '이젠 아파서 얼굴도 못 찌푸리겠군.' 옥조영의 신형이 뒤로 돌아가자 천인문은 얼굴을 다시 팍 찌푸렸다. 그러다 다시 천인문 앞으로 옥조영이 돌아오자 씽긋 다시 웃는다. '헤헤헤' 천인문의 웃는 모습을 본 옥조영 한마디 안 할 수 없는지 "그만 쪼게고 자세나 잘 취해." 그리고는 다시 뒤로 돌아갔다. '함부로 웃지도 말라는 건가? 엄마 나 이제 어떻게 해요.' "자세 바로 하라고 했지." -퍼퍼퍼퍽! 팍팍 푹- 생각하느라 조금씩 뒤틀린 천인문에게 쏟아지는 옥조영의 주먹들은 역시나 무서웠다. 한참을 때리던 옥조영은 다시 손을 거두고 뒤로 물러섰다. "자세 다시 취해." 엎어지다시피 쓰러진 천인문은 후다닥 일어서며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에 옥조영은 살며시 웃음을 머금었다. '죽을 맛이겠지? 하지만 이놈아 넌 이렇게 해야 돼. 이게 네 무공을 올리는 최고의 방법이야. 넌 무공을 가르쳐 줘 봤자 열심히 하지도 않을꺼고 전신타 혈로 속성시키는게 가르치는 나한테도 편해.' 한차례 주먹질을 한 옥조영은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선 후 엉덩이를 붙이고 앉 았다. '기본도 안된 녀석이 무슨 무공은 무공이야. 이제 한 주가 지났으니 넌 아직 세 주는 더 해야된다. 큭큭큭.' 한참을 웃고 있던 옥조영은 다시 일갈했다. "더 맞을래. 바로 할래." 자세가 높아져 있던 천인문은 그제서야 다시 몸을 팍 낮추었다. '꼭 이렇게 해야 말을 들어요.' 옥조영은 천인문을 그렇게 바라보다 다시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한 조각 구 름이 물결치듯 바람에 휘날리며 사라져 가고 있었다. * * * 수련에 열중인 것은 혜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확실히 천인문과는 달랐다. 잠까지 줄여가며 혜령은 수련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오히려 혜령의 사부인 여미릉이 죽어날 판이었다. 혜령은 첫날 태의진경(太意眞境)을 전수 받았다. 옥녀심법도 같이 전수 받았 는데 이것은 순전히 혜령의 고집 때문이었다. 무려 두 시진이나 쫓아다니며 여미릉을 괴롭히자 여미릉의 속에서 불이 났다. "이것아. 왜 옥녀심법을 배우려는 거야. 그건 여자가 익혀선 안되는 것이야." "옥녀심법은 여자만 익히는 거라고 백사부(師夫)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것이 틀린 것인가요? 틀린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제발 가르쳐 주세요 사부님." 혜령은 열심히 머리를 조아렸다. 여미릉은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했다. 쓸데 없이 입을 놀린 백운호가 너무도 미웠다. 방에 뻗어 있는 그를 한 번 더 때려 주고 싶기까지 했다. 별별 생각을 다 하던 여미릉은 나직히 한숨을 쉬고는 입 을 열었다. "옥녀심법이 어떤 것인지 내 말해줄테니 잘 들어 보도록 해라. 옥녀심법이 어 떤 것인지 알려면 그 역사부터 알아야한다. 이것은 과거 송나라때 섬서성에 있 던 보신사(寶申寺)에서 생겨난 것으로 처음 만들어질때 내공을 수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마음 수련을 위해 만든 것이란다. 보신사는 비구니(比丘 尼)들만을 위해 세워진 절이었는데 거기에 오는 여인들은 세상에서 버림 받았 거나 세상을 버리기 위해 들어왔단다. 송 말기였기에 세상은 어지러웠고 많은 흉적들에게 가족을 잃은 여인들이 특히 많았는데 그렇게 모여든 여인들로 인해 보신사는 상당히 커졌지. 솔직히 그들중에선 먹을 게 없어 중이나 되자며 든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러다보니 불공보단 젯밥이나 주변에 어슬렁거리는 남정네 들한테 관심이 더 많은건 당연했단다. 남자하고 눈맞아서 도망가는 비구니들도 제법 됬으니 보신사가 절이 아니라 시장같이 된 것도 당연한 거지. 네가 만약 보신사의 주지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말을 하던 여미릉은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바라보던 혜령에게 가볍게 물었 다. "저 같으면 당연히 그런 사람들 같으면 아예 받아주질 않을 거에요." 혜령의 말에 여미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누가 그런 사람인지 아니면 정말로 가슴 아픈 사연이 있어 온 것인지 알겠느냐. 또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가지 않는다는 보장은 있느냐?" 혜령은 그 말에 살며시 고개를 떨군다. "보신사의 주지였던 연은사태는 이 사실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끝에 한가지 방법을 떠올렸단다. 바로 그게 옥녀심법이었다. 이 옥녀심법을 익히게 되면 사람의 감정은 차가워지고 점차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에 반응하지 못하게 되지. 한마디로 감정에 족쇄를 씌우는 방법이었다. 이후 연은사태는 누 구든지간에 보신사에 들어온다면 그 이후엔 나갈 수 없다는 확답을 받고는 이 옥녀심법을 익히도록 했지. 그렇게 되자 그 전과 같이 도망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게 되었다."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르던 여미릉은 싸늘한 눈빛으로 혜령을 내려다 보 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줄 알겠느냐? 이 옥녀심법은 사람의 감정을 없애버리 는 사악한 방법이다. 사람을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만드는 그런 방법이란 말이다. 그런데도 넌 이걸 익히겠다는 말이냐? 대답해라 어서." 그 말을 듣고 있던 혜령의 눈가에 파르르 잔물결이 일었다. -36- 혜령은 여미릉의 다그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옥녀심법을 익혔던 그들은 모두 감정이 매말라 버렸다. 더 이상 여자, 아니 인간이라 부를 수 없게 되 버렸다. 보신사는 지금 남아 있지 않다. 원나라의 침공으로 완전히 불타 버렸기 때문이지.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느냐. 보 신사란 이름에 원나라 병사들이 모두 눈에 불을 켜고 보물을 찾으려 했단다. 이름은 보신사(寶申寺)임에도 불구하고 보물따윈 없었던 그곳은 화가 난 병사 들에 의해 기왓장 하나 남지 않고 싸그리 불타 버렸지. 그리고 그들은 사백이 넘는 비구니들을 모두 간음해 버리고 목을 베었단다. 그런데도 죽음을 앞둔 그 비구니들은 어떤 희노애락의 감정도 보이지 않았었다. 담담하게 받아 들였다는 것이지. 그게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강간을 당하고 목이 떨어지는데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비명하나 지르지 않는다는게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여미릉의 목소리는 점차 격양되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혜령 역시 아무말 없 이 어깨만 움찔거리고 있었다. "제발 함부로 생각하지 마라. 사람의 형상만 하고 있다고 사람인줄 아느냐? 사 람은 사람답게 살아갈 때야말로 정말 사람인게다. 왜 네가 옥녀심법에 그렇게 목을 매는건지는 모르겠다만 이 사부는 전해 줄 수가 없구나." 격양된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여미릉은 손을 뻗어 혜령의 어깨를 살포시 잡았다. 혜령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사부님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만 저에게는 필요합니다. 제발 가르쳐 주시옵 소서." "이 멍청한 것이! 안된다면 안되는줄 알아라." 여미릉의 목소리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울화통으로 인해 앙칼지기 그지 없었다. "제...발...!" "...." 혜령의 어깨는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제발...사부님!" "...말해 보거라. 왜 그것이 필요한지 이야기 해 보아라." 여미릉의 목소리는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채 혜령의 귓가를 맴돌았다. 혜령 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혜령은 옷 깃으로 눈가를 매만지며 옥문관 앞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진무릉 부녀와 만났던 이야기와 그때 받았던 충격들. 백운호가 했던 남자복이 많다던 이야기. 천산에 사시는 어머니의 신세 내력. 혜령은 보태지도 빼지도 않 고 남김없이 말해 버렸다. 아무말 없이 듣고 있던 여미릉은 먼 하늘만 바라보다 다시 혜령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 이지. 허나 모든 사람이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문이 녀석이 널 믿 지 못한다 하더라도 너의 마음만 바르면 별 상관 없지 않겠느냐?" "상공의 얘기가 아니옵니다. 제가 제 자신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다시 그런 일 이 벌어질까, 제가 또다시 흔들릴까 두렵습니다. 사부님 제발 가르쳐 주십시오." 말을 마친 혜령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여미릉은 슬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넌 나를 처음 보았을 때 어떤 느낌을 받았느냐?" 혜령은 갑작스런 여미릉의 질문에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 보았다. "...아...아름다우시고 상당히 강해 보이신다는..." "그런 말 말고 정말 네 속으로 느꼈던 것은 없느냐?" 혜령과 눈높이를 맞추며 바라보는 여미릉의 눈동자에 혜령은 그녀를 보았던 그 날을 떠올렸다. 그녀는 참 앙칼지며 사나웠다. 아름답기는 했지만 백운호를 보는 눈은 상당히 매섭고 차가웠다. 옥조영을 바라보는 그 눈빛도 역시 그러했다. 살짝 다문 입술 은 마치 북풍한설(北風寒雪)을 떠올리게 했다. "사...부님께서는..." 말을 하다 말고 혜령은 움찔했다. 존장을 모욕하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상관 없다. 떠오른대로 말해 보거라." 여미릉은 긴장한 것 같은 혜령에게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웃음 에 혜령은 마음을 풀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사부님께서는 너무 차가우...셨어요. 어딘가 모르게 사람을 싫어하는 것 같고, 원수를 바라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어요." 혜령의 말에 여미릉은 자조섞인 미소를 띄웠다. "그래 그랬었지! 넌 내가 방에 쳐박힌 영감탱이나 그 검은 옷의 사내를 싫어하 는 것 같으냐?" "아...아니요. 검은 옷의 그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백사부님은 싫어하시지 않는 다고 생각합니다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지만 혜령은 생각나는데로 공손히 답을 올렸다. "네 말이 맞다. 난 저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다. 아니 사랑하고 있다는 편이 맞 겠지. 그런데 왜 난 그 사람을 바라볼때 그렇게 바라 봤을까?" 말을 하던 여미릉은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혜령은 무슨 말인가 하고 곰곰히 생각을 하다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크게 떴다. "호...혹시 사부님께서도...?" 그러자 여미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생각이 옳다. 이 사부도 옥녀심법을 익혔다. 이 사부가 열 살 때의 일 이었지. 사부가 살고 있던 마을에 한 마적단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모든 것을 훔 쳐가고 사람들을 죽였다.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앞을 막던 모든 남자 들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여자들은 노리개로 전락해 버렸다. 눈물? 그딴 건 아 무 소용 없었다. 그들에게 인정따윈 전혀 없었단다." 여미릉은 과거를 떠올리는지 먼 산을 바라보며 감상에 빠졌다. 혜령은 왜 이 이 야기를 말하는지 몰랐지만 잠자코 듣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본론으로 들어 갈 것이기 때문에. "이 사부는 가마솥 밑에 숨어서 겨우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이 사부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바라 볼 밖에..." 여미릉은 목이 잠기는지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끊었다. 잠시 그렇게 있던 그녀 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들이 가고 난 후 난 세상을 떠돌았다. 그들에게 복수 할 무공을 익히기 위해 사부를 찾아 다녔단다. 하지만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았다. 가진 것 하나 없는 가난한 거지계집을 받아주는 곳은 전혀 없었단 말이다. 나는 세상을 원망했다. 가르쳐 주지 않겠다면 스스로 익히겠다고. 그후 나는 해 보지 못한 일이 없었다. 소매치기도 했고, 월담도 했다. 홍등가에 몸을 담아 무림인의 품에 안긴 뒤에 잠 자는 무인들의 무공 비급을 필사해 스스로 익혔지. 약으로 무인들을 쓰러트려 죽 이기도 했다." 말을 듣고 있던 혜령의 입은 서서히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아픈 과거를 가지 고 있었을 줄 전혀 몰랐기에 여미릉을 바라보는 혜령의 눈에는 아픔이 깃들고 있 었다. "열 일곱이 되었을 때 난 그 마적단을 찾아 돌아다녔다. 삼 년을 하루같이 찾아 돌아 다녔다. 하지만 난 그들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비록 무공은 약했지만 악인 들은 절대 용서 하지 않았다. 내가 죽일 수 없는 고수들은 음모를 꾸며서라도 잔 인하게 죽여 버렸다. 그러는 동안 나는 혈수가인(血手佳人)이란 명호(名號)도얻었단 다. 그러던 어느 날 난 흔적만 남은 보신사에서 옥녀심법을 찾았다. 난 아주기뻐했다. 나만의 독보적인 무공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무공 비급인지 아닌 지도 모르고 옥녀심법을 찾자 난 미친듯이 익히기 시작했다. 내 평생 그렇게 몰입한적 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마음만 싸늘해 졌을 뿐 다른 효과도나타나지않았다. 실 망하긴 했지만 사람들을 죽일때 생기던 일말의 망설임이 생기지 않자 신공이라생각하 며 더욱 열심히 익힐 뿐이었다. 그때 저 사람을 만났다." 여미릉은 방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그는 나에게 내기를 걸며 접근했지. 난 항상 품 속에 어머니의 옷을 입고 있었 는데 그 옷을 걸라고 하더구나. 난 그를 처음 보았을때 건달이나 강도 같은 사람 인 줄 알았단다. 단순히 옷을 뺏기 위해 내기를 한 거라고 생각한 거지. 별로 좋 은 옷은 아니었지만 어머니가 남기셨던 몇 안되는 유품이었기에 나에겐 아주 중요 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날 그와 크게 싸웠지. 내가 이기긴 했지만 그건 머리로이겼을 뿐 실제 무공으로는 진 거였다. 그래도 이기긴 했으니 옷은 안 뺏겼지만 이후그는날 열 심히 따라다녔지. 그렇게 다닌 하루가 이틀이 되고, 한달이 되고 일년이됬단다.그는 날 열심히 지켜봤었고, 일년이 지났을때 내가 익히고 있던 무공에 잘못이 있다는 걸이야 기 해 주었단다. 처음엔 도둑이라 생각해서 그의 말을 듣지 않았지만 계속이야기하니 믿지 않을 수 없더구나. 그래서 난 옥녀심법을 멈추었다. 하지만 이미 8성이나 익힌후 라 멈추어도 내 감정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구나." 혜령은 여미릉의 과거를 듣자 가슴이 여미었다. "일 년 후 그가 일이 있다고 떠날때 나에게 몇 권의 비급들을 넘기더구나. 지금 나를 있게 한 그 무공들이지. 난 옥녀심법대신 그것들을 열심히 익혔다. 다시 오 년이 지났을 때 그가 돌아왔지. 바로 그 마적단의 위치를 알아 왔던 거야. 난 그 날로 당장 뛰어가 마적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죽여버렸다. 그 후에 난 살아갈 이유가 없어졌다. 그렇게 멍하니 있던 나에게 그는 비무를 하라고 했지. 난 그 의 말마따나 나의 무공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고 싶었단다. 그래서 이름이 나 있던 고수들을 향해 비무를 시작했지. 면사로 얼굴을 가리던 과거와 달리 맨 얼 굴로 나섰기에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단다. 난 별로 신경은 안썼단다. 나에 게 줄 무공이라 해 봤자 별거 아니라 생각했었지. 하지만 나에게 준 비급들은 정 말 대단했던 거였다. 그 당시 이름났던 고수들은 모두 쓰러졌지. 당시의천하제일인이 라 불리던 천승도(天承刀) 진천(鎭踐)까지 이길 수 있었으니 말 다한거지. 난 정말놀랐 단다. 그가 이렇게 뛰어난 비급을 왜 나에게 준 것일까. 나에게 무얼 바 라는 걸까. 별 생각이 다 떠올랐지. 하지만 의심은 얼마 후 풀리고 말았단다. 그 가 나에게 한가지 물건을 훔쳐갔다. 바로 옥비녀였단다. 사람들은 옷고름을 빼앗 겼기에 내가 따라다녔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옥비녀를 뺏겼었지." 혜령은 이제 옥녀심법에서 완전히 샛길로 빠진 여미릉의 말에 정신이 빠져 있었 다. 여미릉도 평소 이야기하지 않던 이야기를 꺼내자 속에서 북받쳐 오르는 것이있었던 지 정신없이 주절대고 있었다. "값어치는 없었지만 나에겐 소중했던 옥비녀였기에 그를 무려 십년이나 쫓아다 녔단다." "찾으시긴 하셨는지...?" 옥비녀의 행방이 궁금했던 혜령은 살짝 물었다. "찾았지. 어디다 그 옥비녀를 쓰려고 했는지 아느냐? 여자 꼬시는데 그 옥비녀 를 쓰더구나. 자기 어머님께서 돌아가시면서 며느리 될 사람한테 주라고 한 가보 라나 뭐라나. 그러면서 나의 옥비녀를 뺏어가?" 말하다 말고 여미릉은 또 끓어오르는지 눈을 부릅뜨고 방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또 방안에서 후다닥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왜 옥비녀가 옷고름이라고 소문이 났던 걸까요?" 여미릉은 혜령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구나. 뭐 알고 싶지도 않고 알아야 할 이유도 없으니 상 관하지 않는다. 아참 이거 이야기 하는게 아니지. 그래 그래. 어쨌든 난 그를 쫓 아다녔지만 솔직히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더 많았단다. 나에게 뛰어난 무공을 익히게 해 주었고,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인 마적단도 가르쳐 주었으니 말 이다. 하지만 난 머리로는 감사를 했지만 가슴으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 했다. 정이 들었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가슴에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 내가 인간인가 하는 회의가 드는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다. 내 말투, 내 행동 모든 것은 다 이성에 따를 뿐 감정은 하나도 없다." 여미릉은 갑자기 또 북받치는지 말을 끊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혜령은 그녀의 말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이 없다면서 왜 저렇게 감정 에 휘둘리는 모습을 자주 보이는 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사...사부님 그런데 왜 그렇게 열받으세요?" 너무나도 궁금했기에 혜령은 오랫동안 생각하다 참지 못하고 물어 보았다. 여미릉은 그녀의 질문에 이렇게 감정에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어떻게 된거야. 내...내가 정말." 여미릉은 자신을 정신없이 내려다보더니 빼꼼 쳐다보는 혜령의 눈을 의식 한 듯 헛기침을 해댄다. 그러다 딴 곳으로 주의를 돌리려는 듯 입을 열었 다. "어쨋든 옥녀심법따윈 익혀선 안된다. 그걸 익히면 너도 나처럼 된다. 알 겠느냐?" 하지만 이미 망가진 여미릉의 모습을 본 혜령이다. 그녀처럼 된다는 것이 감정이 없어진다는 것인지 저렇게 가끔 바보같은 모습을 보이게 된다는 것 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여미릉의 모습에선 이미 사부의 위엄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었다. 혜령은 여미릉의 말을 가볍게 무시해 버린다. "사부님, 제발 가르쳐 주세요." "안돼. 안된다고 말했다. 죽어도 못 가르쳐 줘." "제발요. 사부님~" 그들의 싸움은 끝간데 없이 계속 되고 있었다. -37- 서혜령이 사부인 옥미릉을 괴롭히고 있는 동안 천인문은 사부에게 고통을 받고 있었다. 요 며칠간 계속된 수련이 상당히 괴롭긴 했지만 이젠 얼마정도 적응이 된 후라 옥조영 몰래 요령도 부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아차린 것인지 옥조영은 한 가지 수련 방법을 더 추가했다. 사실 수련이라기 보단 대련 에 가까웠다. 그것은 바로 백타(白打)였다. 처음에 옥조영으로부터 한 가지 수련 을 더 추가한다는 말에 기겁하던 천인문이었지만 그것이 백타라는 것을 알게 되 자 소리만 못 질렀다 뿐이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뻐했었다. 매일 지겹게 도 한 자세로만 있으려니 미치고 펄쩍 뛸 지경이었는데 움직일 수 있는 백타를 수련한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매마른 사막의 단비요, 어둠을 밝히는 한 줄기 광 명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천인문을 바라보는 옥조영은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지금은 좋아서 죽을 것 같겠지. 하지만 하루만 지나 봐라. 눈물을 쏙 빼며 나 에게 싹싹 빌게 될 거다.' 혼자서 이런 생각을 하며 비웃었지만 기쁨에 잠겨 흐느적대는 천인문을 부르지 는 않았다. 그것이 천인문에게 잠시나마 기쁨을 만끽하게 하려는 그의 자상한 배 려(?)였던 것이다. 잠시후 천인문이 정신을 차리자 옥조영은 그를 불렀다. 옥조영 은 천인문에게 자리에 앉게 하고는 일장 연설을 풀기 시작했다. 옥조영은 항상 ' 모든 것은 기초부터' 라는 생각을 하던 사람이었고, 이번 설명도 그에게 있어 빠 트릴 수 없는 너무도 중요한 과정중의 하나였다. "백타라는 것은 무기 따위를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신체만을 이용해 싸우는 기술 을 말한다. 원래 무공이란 것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던 것이 몇몇 문파에 의해 신체를 단련하고 정신을 수련하는 것으로 바뀌었지. 그러 나 언젠가부터 무공은 사람을 살상하고 물건을 빼앗는 것 같은 사악한 수단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러나..." 말을 시작한 옥조영은 어느순간부터 자신의 말에 심취해 버렸다. 먼산을 바라보 기도 하고 뒷짐을 지고는 빙글빙글 돌기도 했다. 팔다리를 주무르며 이야기를 듣 던 천인문은 그런 옥조영의 모습에 웃음을 머금고 바라보고 있었다. "...무공을 익힌 사람이 많지만 최후까지 강자로 남는 사람이 적은 이유가 여기 에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기초가 중요한 것이다. 알겠느냐?" 옥조영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물어오자 흠칫 놀란 천인문이 웃음을 감추며 공 손히 대답했다. "예, 잘 알겠습니다." 그런 모습에 옥조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기초가 중요하지 않은 일이 무어 있겠느냐만은 특히나 무공에선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공에선 어떤 것이 기초가 되겠느냐?" 옥조영이 다시 질문을 하자 미리 준비를 하고 있던 천인문이 차분히 대답했다. "음 아마도 마보참장(馬步站椿)이 아닐까요?" 옥조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도 맞긴 하지만 그건 기초중에 기초이니 기초라 할 수도 없지. 기초라 칭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지금부터 시작할 백타이다. 무공이란 것은 수많은 무기들을 사용하는데 그 종류에는 검(劍)부터 시작해서 도(刀), 봉(棒), 저(杵)..." '정말 짜증나네. 자기가 기초라고 해 놓고는 또 기초가 아니래. 뭔 말을 자꾸이랬다 저 랬다 하는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며 투덜대는 천인문의 원독에 찬 눈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옥조영 은 고개만 끄덕이며 계속 말을 했다. "...그 중에서도 보통 궁(弓), 노(弩), 창(槍), 도(刀), 검(劍), 모(矛), 순(盾),부(斧), 월 (鉞), 극(戟), 편(鞭), 간, 고(稿), 수, 차(叉), 파두(파頭),금전탈색(錦錢奪索;투승), 백타 (白打)를 일컬어 십팔반병기라 한다.(십팔반 병기는 문파나 책마다 다르며 이내용은 중 국 명대(明代) 작자 미상의 수필집 5잡조(五雜俎)에서 발췌했음을 알려드립니다)들어 서 알겠지만 백타도 병기중에 하나로 꼽힐 만큼 중 요한 것이다. 대저 무기란 것이 내공이든 외공이든간에 인간의 힘을 바탕으로사람 을 상해하는 것이라 한다면 백타가 뒷받침되지 않는 병기의 휘두름이란 한낱 몸부 림에 지나지 않는 것이야. 이렇게 백타는 효과적으로 인간의 육체를 수련시킬 수있는 최고의 기초가 되니 어찌 수련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옥조영은 말을 마치며 천인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천인문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옥조영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옥조영의 눈꼬리가 하늘로 치켜 올랐다. "맞냐, 아니냐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냐? 그렇게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으면 어 떻게 하겠다는 거야?" 울화통이 터진 듯 화를 내는 옥조영을 보던 천인문은 그제서야 황급히 대답했다. "맞습니다. 맞다구요. 수련 해야죠. 수련해야 되구 말구요." 한대 맞을까 목을 자라처럼 넣고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대답하는 천인문을 바라 보던 옥조영은 그제서야 미소를 지었다. '분명히 수련해야 된다고 했겠다. 좋았어.' 옥조영은 미소를 들킬새라 황급히 근엄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좋다. 네가 백타가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 따윈 없겠구나. 그럼 이제 수련으로 들어가도록 하자. 일어서거라." 천인문이 몸을 일으켜 넓은 곳으로 나가 서자 옥조영은 오른발과 오른손을 앞쪽 으로 내밀며 자세를 취했다. "덤벼라." 기다리고 기다렸던 대답이었다. 천인문도 자세를 낮추며 옥조영의 위아래를 살 피기 시작했다. 눈에는 온통 헛점밖에 안 보였지만 뛰어들 수는 없었다. 과거 호 되게 당한 기억이 천인문의 발길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기 만 할 뿐 들어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옥조영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들어오기 싫다면 내가 들어가마." 옥조영의 몸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탁하고 튕기며 천인문에게 접근했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천인문도 정신을 차리고는 손으로 가슴을 보호했다. 순식간에 접 근한 옥조영은 늘어뜨린 왼손을 말아올리며 왼쪽 옆구리를 향해 들어 올렸다. 천 인문은 옆구리를 베다시피 들어오는 옥조영의 손을 왼손으로 덮어누르며 막았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그 이후는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 러나 옥조영의 명문쪽이 훤히 비어 있는 것이 보이자 평소때처럼 아무 생각 없이 오른손을 들어 찔러갔다. 예상하고 있다는 듯 옥조영은 바로 몸을 핑글 돌리며 찔러온 천인문의 손을 잡고는 내던져 버렸다. 쿵! "윽" 때굴거리며 굴러간 천인문이 인상을 쓰며 일어섰다. 허리가 삐긋했는지 이리저 리 돌려본 후 눈을 들어 옥조영을 바라 보았다. "그렇게 집어 던지는 기술을 솔(率)이라 부른다. 백타 중에 한 기술이지. 중요 한 것이니 잘 배워 두거라." 능글맞은 어조로 말하는 옥조영이 너무나도 미웠던 천인문은 말이 끝나기도 전 에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옥조영이 한 방법 그대로 공격했다. "이녀석 달아올랐군." 옥조영은 가소롭다는 듯 천인문의 왼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몸을 휙 돌렸다. 자 신을 던질거라 예상하고 있던 천인문은 몸을 눕다시피 뒤로 제쳤다. 그러나 이것 도 옥조영의 예상속에 그대로 있었다. 돌았다 싶은 그의 몸이 되돌아오며 잡고 있던 천인문의 손을 그대로 밀어버렸다. 쿵! "아야!" 엉덩이부터 나가떨어진 천인문이 손으로 엉덩이를 만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게 미는 것이 바로 추(推)라는 것이다. 당연히 이것도 기술중에 하나겠지. 기억하도록 해라."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천인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런거 말고요. 박투하면 좀 손으로 때리고 그런거 있잖아요. 그런 걸 가르 쳐 주셔야지 왜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것들만 자꾸 하는 거에요." 같잖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옥조영이 실실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천인문 의 마음 한 구석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네가 고급기술인 타(打)를 배우고 싶은 게구나. 역시 내 친구의 손자 답군. 배 우고 싶다는데 그럼 가르쳐 줘야지, 암!" 혼잣말 하듯 중얼거리는 옥조영의 말에 천인문은 자신의 입이 원망스러워졌다. '요놈의 방정맞은 입 때문에 되는 게 없어. 어떻게 하지.' 하지만 천인문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말을 끝낸 옥조영이 다시 몸 을 날리며 접근했기 때문이었다. 아까보다 배 이상 빠른 몸놀림에 천인문은 아무 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퍽! 쿵! 푸다다닥! 비명따위 지를 새도 없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주먹들이 온 몸에 꽂히기 시작했다. 천인문은 머리를 손으로 가리고 엎어질 듯 몸을 숙일 뿐이었다. 옥조영은 아무 생각도 없는지 팔, 다리, 무릎, 어깨를 가리지 않고 가격했다. "잘 배워라. 고급 기술이다. 이렇게 빨리 들어가선 안되지만 네 성의가 대단하 니 가르쳐 주지 않을 수 없구나." 옥조영은 이렇게 고급기술을 가르쳐 주는 것이 기쁘다는 듯 하염없이 미소를 보 일 뿐이었다. 맞고 있던 천인문은 어서 빨리 끝났으면 하는 마음만 가득했다. -38- 중천 위에 떠 있던 해가 사정없이 내리쬐는 한 이름없는 산 속의 바위. 정면이확트이 어 거칠 것 없이 한눈에 다 들어오는 그 바위 위에 한 사람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바로 서혜령이었다. 이미 여미릉에게 옥녀심법을 전수 받은 서혜령은 편안한마음으로태의진 경(太意眞境)을 수련하고 있었다. 수련을 시작한 서혜령은 그제서야 자신이 익혔던 천인시령심법에 대해 너무도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기 스스로 익힌 부분에서 잘못된 것은 없었지만완벽하 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해졌다. 여미릉에게 전수받은 태의진경은자 신이 익히고 있던 천인시령심법을 능가하는 심법이었다. 당연히 더욱고절했고, 알아듣 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혼자서 무공을 익혔던 석실때완 달리 지 금은 사부라는 존재가 있었다. 여미릉은 상세한 설명까지 곁들여가며 그녀를이해시켰 다.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그녀가 직접 물었고 여미릉이 다시말해줌으로써 문제는 어렵지 않게 극복 할 수 있었다. 신이 난 그녀는 자신이 이해하지못했던천인시 령심법까지 묻기 시작했다. "네가 알아서 나쁠 것은 없다만 특별히 천인시령심법을 익힐 것이 아니라면 이태의진 경을 익히도록 해라. 사부가 자신하건데 태의진경은 천인시령심법보다 두 단계는위다. 천인시령심법이 나쁘다거나 사악한 것은 아니지만 이왕 익힐 바엔 더욱 강한 걸익히는 게 낮지 않겠느냐?" 그랬다. 확실히 태의진경을 알면 알수록 천인시령심법을 능가한다는 것이확실해졌다. 두 가지를 동시에 하기보단 한 가지에 매진하는 편이 위력이나 내공의 정순함에있어 유 익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기에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먹은 서혜령은익혔 던 천인시령심법을 포기하기로 했다. 한참을 돌리던 공력을 단전에 갈무리한 서혜령이 자리에 일어선 것은 저녁노을이사방 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저녁 무렵이었다. 석양이 나뭇잎에 부딛혀 사방으로흩어지는 아 름다운 장면에 시선을 뺏긴 그녀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서 있었다.사방에 서 들리는 곤충들의 합창에 정신을 되찾은 서혜령은 아쉬운 얼굴로 묘옥을 향해돌아왔 다. 묘옥 앞에선 여미릉과 백운호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오느냐?" 백운호가 할 말이 있었는지 입을 들썩였지만 여미릉이 잘라버리며 먼저 입을열었다. 백운호가 사나운 눈초리로 여미릉을 바라봤지만 그녀는 무시하고 몸을 돌렸다. "이쪽으로 와 봐라." 서혜령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묘옥 뒤의 공터로 걸어갔다. 서혜령은 고개를숙 이는 백운호를 뒤로 한 채 여미릉을 따랐다. "마음에 드느냐?" 그곳에는 이미 새로운 묘옥 한채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있던 나 무 탁자와 의자는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서혜령은 아무 말도 못하고 눈을 깜박거릴뿐 이었다. "우리하고 자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계속 어떻게 같이 자겠느냐? 그래서 이렇게하나 지 었지. 마음에 드는지 한번 들어가 보거라." 너무나도 뜻밖의 선물(?)에 놀란 서혜령은 일렁이는 눈빛으로 여미릉을 향해고개를 돌 렸다. 여미릉은 그렇게 바라보는 서혜령이 부담스러운지 먼산을 향해 고개를돌렸다. "빨리 들어가 보거라.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 있으면 고쳐야지." "사부님...감사합니다." 말을 마치고 몸을 돌린 여미릉은 서혜령의 말에 흠칫했지만 아무말 없이 걸어갔다.여 미릉이 사라지자 서혜령은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열자 나무내음이확 풍 겨왔다. 반경 일 장남짓 되는 방엔 이불 두개와 황촉불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여 미릉이 미리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 서혜령은 불을 켜고 방을 둘러 보았다.반나절만에 만들어진 것 치고는 상당히 꼼꼼했다. 이음새도 튼튼해 보였고 걸어도 삐걱대는소리도 나지 않는다. 다시 밖으로 나온 서혜령은 여미릉을 찾아 감사의 뜻을 전했다. 여미릉은 별 것아니란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사부가 널 아끼니깐 저렇게 좋은 집도 쉽게 뚝닥거려 만들지." 어딘지 모르게 비아냥거리는 투로 주절거린 백운호는 몸을 돌려 숲속으로 들어가버렸 다. 그의 모습이 거의 시선에서 사라질무렵 여미릉은 낮은 웃음을 흘렸다. "저 사람이 토라졌나 보군.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엉뚱한 곳에서 받았으니말이야." 서혜령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을 요구했다. "저 집을 지은 사람은 바로 저사람이지." 그녀는 숲으로 사라진 백운호를 향해 손을 가르켰다. "그런데 넌 나한테 인사를 하지 않았느냐? 이것이 바로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받은 거나 뭐가 다르겠느냐?" 그제서야 서혜령은 왜 백운호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나중에 오면 수고했다고 그래라. 안그러면 토라져서 말도 안할껄. 어이구나잇살이나 먹은 사람이 어린애도 아니고...쯧쯧!"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차던 여미릉은 부엌으로 사라졌다. 그제서야 서혜령은무심한 눈 길로 백운호가 걸어갔던 곳을 바라볼 뿐이었다. * * * 평생에 맞을 것을 한 번에 다 맞았던 천인문은 더 이상 일어설 기력조차 없었다. '내일은 절대 못일어나겠군. 하.하..하...' 명치에 마지막 통증을 느끼고는 쓰러져 버린 천인문은 옥조영의 손에 이끌려동굴속으 로 사라졌다. 그러나 생각과 현실은 달랐다. 그 다음날 동녘 하늘이 서서히 밝아올무렵 천인문의 눈은 번쩍 떠지고 말았다. '하루가 지났나? 아닌거 같은데.' 천인문은 살며시 눈을 들어 사방을 살폈으나 악마같은 옥조영은 보이지 않았다.마음 이 편안해진 천인문은 온몸을 비틀며 상태를 살폈다. 그러나 잘못되도 한참잘못되야 정 상일 육체는 아무런 이상이 보이질 않았다. 오히려 더욱 힘이 넘치고 있었다.그렇게 온 몸을 구석구석 살피고 있던 천인문의 귀에 발소리가 들렸다. 천인문은 눈을 뜰 당시자 세대로 몸을 눕히고는 자는 척 했다. "이녀석 아직도 자는가? 해가 훤하게 뜨고 있는데 무인이 될 녀석이 이렇게게을러서 야..." 안으로 들어온 것은 천인문의 예상대로 옥조영이었다. 어디를 갔다 왔는지다리쪽의 옷 이 축축히 젖어 있었다. 천인문은 옥조영의 말을 듣자 서혜령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상공께선 잠을 자실때 너무 중얼중얼 하세요. 그래서 한 숨도 못 잤어요.' 붉게 충열된 눈을 비비며 이야기하던 서혜령의 말이 떠오르자 천인문은 잠자는척을 하 더라도 그럴싸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여기서 잘 때도 그렇게 중얼거렸을것 이 분명했고 그것은 옥조영쯤이면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우어우엉...우아암" 자신이 평소에 하는데로 웅얼거려야겠다고 생각한 천인문은 입을 벌리고중얼대기시작 했다. 하지만 그것이 탈이었다. 평소 듣는 옥조영으로선 평소와는 다른 웅얼댐에미간 을 모으고는 옆으로 걸어왔다. '호! 이녀석 봐라. 깨어났는데도 자는 척 하겠다 이거지. 좋아.' 감고있던 눈꺼플이 파르르 떨리고 숨소리가 잠잘때와는 역력히 다르다는 걸로천인문 이 이미 잠에서 깨어났음을 알아본 옥조영은 입꼬리를 사정없이 쳐올렸다. 그는동굴 안 으로 들어가며 입을 열었다. "이녀석이 오랫만에 깊이 자는데 그럼 깨기 전에 후아주나 좀 마셔야겠군. 저 녀석온 뒤로 한 번도 마셔보지도 못했는데 지금 아니면 또 언제 마음놓고 마셔 보겠어." 술독 뒤에 덮힌 종이를 들어내자 알싸하고 향긋한 후아주의 냄새가 동굴 안에진동했 다. 옥조영은 조그만 그릇을 들어 한가득 퍼담은 후 쭉 들이켰다. "커~ 죽이는구만. 음 한 잔만 마시면 아깝지. 언제 이런 기회가 또다시 오겠어." 옥조영은 혓바닥을 내두르며 쩝쩝대고는 다시 한 가득 후아주를 퍼올렸다.그리고는 다 시 벌꺽벌꺽 마셔버렸다. 자는 척 하고 있던 천인문은 코를 간지르는 후아주 냄새에 입맛을 다셨다.그리고들려 오는 옥조영의 목소리. 후아주는 한 그릇 두 그릇 계속 옥조영의 입으로 사라졌고,목울 대를 떨며 넘어가는 소리는 천인문의 이성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허나 천인문은 두주 먹을 불끈 쥐며 참아야했다.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일어서면 완전히 계획은물거품 이 되는 것이다. '한 순간의 유혹에 빠져 하루종일 고생할 순 없다. 조금만 참으면하루 가 편안하다. 술은 다음에도 먹을 수 있다.' 이런 생각으로 후아주의 유혹을 겨우참아냈 다. 그러자 천인문의 마음은 편안해졌다. 옥조영은 게속 술을 마시며 한눈으로 천인문을 흘깃거렸다. 팔이 떨리고 침을꿀꺽대 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일어나지 않는 천인문을 보자 옥조영은 의외라는 눈빛으로바라 보았다. 의지가 가상하다 생각은 했지만 수련을 위해 깨워야만 했다. 특단의방법으로. 이미 여섯 잔을 마신 옥조영은 얼큰하게 취한 듯 멍한 눈을 들어 천인문에게로다가왔 다. "일어나. 깬 거 벌써 알고 있어." 허리를 숙이고 천인문을 흔들었다. 하지만 무반응이었다. "지금 일어나면 봐준다. 빨리 일어나." "우우우웅..." 천인문은 여전히 잠꼬대만 날렸다. "좋아. 네가 정말 잔다면..." 천인문이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자 옥조영은 눈 사이를 모았다. 그리고는 카~악 하고 가래를 모았다. 그리고 천인문의 입을 향해 길쭉한 액체를 천천히 떨구었다. 누워서 주위를 살피던 천인문은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무언가 사르르 내려오자실눈을 떴다. 누런 액이 천천히 입을 향해 내려오자 구역질이 올라왔다. 하지만 참아야했다. 저 건 분명히 자신을 시험하는 것이었으니까. 한 자만 참으면...다섯 치만참으면...세치... 두치... "으아아악." 천인문은 순식간에 옆으로 뒹굴었다. 그리고는 입을 막고 헛구역질을 했다. "어떻게 사람한테 그런 걸 먹여요?" 구역질이 끝나자 눈을 부릅뜬 천인문이 옥조영에게 으르렁댔다. 하지만 옥조영은여전 히 능글대며 바라봤다. "잠 안잤냐? 난 자는 줄 알았는데..." "..." 할 말 없는 천인문은 조용해졌고 옥조영은 그제서야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요녀석 수련하기 싫으니까 꾀부리는 것 좀 봐라. 내가 그 꾀병 싹 사라지게 해주지." 한바탕 웃고 난 옥조영은 웃음을 거두고 천인문의 귀를 잡고 동굴밖으로 끌고나갔다. "아아아." 귀를 잡힌 천인문은 질질 끌려 나갔고 얼마후 동굴 밖에선 개잡는 소리가 들리기시작 했다. -39- 산들바람이 대지를 스치던 봄은 여름에 밀려 북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녹의로갈아 입은 산들은 더욱 풍성해지고 있었고 들판은 새파랗게 물들어 갔다. 바람 한 점불지 않 는 땡볕 밑에서도 들판을 누비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남경(南京). 금릉(金陵), 백하(白下), 응천부(應天府) 등의 수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강소성(江蘇 省)의 성도(省都). 오나라 손권(孫權)이 건업(建業)이라 칭하며 도읍을 정한 이후강남 (江南)의 중심지로 줄곧 그 위치를 유지한 배도(陪都)였다. 이 대 황제인 건문제를 폐하고 황제가 된 영락제는 도읍을 북경(北京)으로옮기고, 그 중앙에 자색이 금지된 성, 자금성(紫禁城)을 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완성되지않 았기에 영락제는 아직 명의 도읍지인 남경에서 거취를 유하고 있었다. 해진(解縉)은 서둘러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영락제의 호출이있었기 때 문이었다. 황성의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자 환관의 복장을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어서 오시지요.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해진의 출현에 사내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앞으로나갔다. 혜진은 아무말 없이 그를 뒤따랐다. '폐하께서 부르신다? 무슨 일이 있길래...' 해진은 머리가 복잡했다. 자신을 부를 만한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그러나결국 그는 나라의 녹을 먹는 인물이었다. 비록 생각은 나지 않지만 그저 따르기만 하면되는 것이다. 해진은 정신 없이 걸어가는 환관을 따라 계속 걸음을 옮겼다. "폐하! 시독학사(侍讀學士) 대령하였나이다." 어느 새 영락제의 집무실에 도달한 환관은 허리를 숙이며 크게 외쳤다. 안에서근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들라하라." 언제 들어도 사람을 압도하는 소리였다. 해진은 크게 숨을 들이키고는 문이 열린방 안 으로 걸어 들어갔다. 안에는 자색 용포를 입은 한 중년인이 수염을 쓰다듬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들어 오 는 해진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던 사내는 혜진이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 인사를하자다시 자세를 바로했다. "만세만세 만만세!" 해진이 자세를 갖추고 인사를 하자 용포 사내는 무심한 눈을 들어 앞에 놓인글을읽었 다. "어서 오시오. 해진 학사!" 해진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폐하 어인 일로 찾으셨는지요." 폐하라 불린 사내는 당금 황제이자 명을 세운 홍무제(洪武帝)의 넷째로 태어나조카였 던 건문제(建文帝)를 폐위시키고 옥좌에 오른 영락제였다. 해진의 인사에 내려보던시선 을 들었다. "별 일이야 있겠소? 그저 얼굴을 본지 오래 됬으니 이렇게 한번 볼까 해서불렀소이다. 그래 요즘은 편히 쉬신다고요?" 너그러운 얼굴로 해진을 바라보는 영락제의 눈에선 반짝이는 빛이 쉼없이흘렀다.하지 만 해진은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렇게 자신을 부를 이유가 얼굴만 보기 위해부른 것 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신에게 관심을 보여주시는 폐하의 은혜, 소신이 감당하기 어렵나이다." "하하하, 편하게 합시다. 이렇게 힘들게 하려고 오시라 한 것은 아니니깐요." 머리를 조아리는 해진을 보던 영락제는 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간 그렇게 웃던영 락제는 다시 웃음을 거두었다. "이렇게 부른 것은 한 가지 물어보기 위해서요." 다시 입을 연 영락제의 음성은 아까와는 천양지차였다. 누군가 들을까 목소리를낮춘 영락제의 음성은 아주 싸늘하게 들렸다. 해진은 온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느꼈다. "이번에 태감 정화가 다시 남해 원정을 떠났소. 작년 겨울에 떴으니 이제 거의 남사군도와 천축을 지나 서역에 도달했을 것이오." 그제서야 해진은 영락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바로 남해 원정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다. 해진은 목 언저리가 서늘해 지는 느낌에 숨을크게 들이 쉬었다. "그대도 알겠지만 이번이 네 번째 원정이오. 지금까지는 별 이상이 없다고는 하나원래 백성들의 아버지인 짐의 입장에서는 걱정되지 않을 수 없구려." 해진은 고개를 더욱 숙였다. "폐하!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무려 이 만이 넘는 군사가 태감을 따라갔습니다.그 리고 금의위(錦衣衛)의 정사흠(鄭査欽) 첩형(貼刑)과 이규(李奎), 부순(部淳) 두당두(당 頭)가 그의 좌우에서 지키고 있습니다.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이번에도 문제없이 회 군할 것입니다." 해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으나 목소리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럴까?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해. 해 학사는 아는게 없소?" 해진의 신형이 부르르 떨렸다. "제가 아는게 무엇이 있겠사옵니까? 원정에 대해서는 저보다 왕식(枉識) 도독이 더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자신이 없는지 목소리는 떨려 오고 있었다. "그럴거요. 학사인 그대가 알고 있을 리가 없겠지. 그렇지 않소?" 영락제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해진의 몸이 흠칫했다.그는 고개를 더욱 푹 숙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사옵니다. 제가 아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태감 정화가..." 영락제가 손을 들어 해진의 말을 저지했다. "됐소. 더 이상 들을 필요는 없소. 짐은 단지 그대의 식견을 듣고 싶었는데 다른신하들 이 하는 말과 똑같은 말만 하는구려. 그만 물러가 보도록 하시오." 영락제는 다시 탁자 앞에 놓여있는 문서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해 진은 다시 큰 소리로 인사를 드리고 뒤로 서서히 물러났다. "요즘 날씨가 덥다고 하더구려. 하지만 더위가 심해지고 땀을 많이 흘린다면 감기들 수 도 있소. 몸 조심 하구려." 문서를 읽던 영락제가 다시 고개를 들어 해진을 바라보며 웃었다. 허리를 굽히고물러 서던 해진의 몸이 움찔했다. 그는 다시 인사를 드리고 방을 빠져 나왔다. 이미 등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방을 빠져 나온 해진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식은 땀을 닦으며 그는 조금 전의 상황을 곱씹었다. 분명히 황제는 이번 원정에서무언가를 느끼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말을 할 리가 없을 것이다. '몸 조심 하라니...' 그 말이 단지 감기만 조심하란 뜻은 아닐 것이다. 무언가가 있었다. 자신이 모르고있 는 그 무언가가... 해진은 아파오는 머리를 잡으며 밖으로 나왔다. 황궁은 너무나도 숨이 막혔다.그는 빨 리 황궁을 빠져 나가고 싶었다. 그는 옆에서 인사를 하는 사람들을 본체만체 하고는빠 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 한 사람이 사라지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사라지 자 사내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옆구리엔 조그만 검 한 자루가 걸려 있었다.그러 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잡거나 제지하지 않았다. 그가 걸어간 곳은 해진이 영락제를 알현한 바로 그 방이었다. 사내가 다가오는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환관은 그가 자신의 앞에 서자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한 후 방을향해 고했다. "폐하! 송원호(訟院浩) 첩형 대령하였나이다." 이번에는 아무런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환관은 고개를 숙이고는 방문을열었다. 사내는 검을 차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환관은 그런 모습이 익숙한지 아무런제지 도 하지 않았다. "어서오게." 영락제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송원호는 영락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영락제는 아무 말 없이 탁자위의 문서를 보고 있었다. "알아 봤느냐?" 한참이 지난 후 영락제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예!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아직 없습니다. 단지..." 영락제의 눈에서 빛이 났다. 문서에서 눈을 때고 송원호를 바라봤다. "단지...?" "몇 군데에서 흔적 같은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흔적?" 영락제의 손가락이 탁자끝을 쳤다. "하지만 그것들이 너무나도 선명합니다. 아마도 누가 일부러 남겼다거나 꾸며진 것같 은 느낌입니다." 영락제는 낮은 침음성을 토했다. 무언가를 한참동안 생각하던 영락제는 다시송원호를 향해 눈을 돌렸다. "어느 쪽이지?" "사천성(四川省)과 강소성(江蘇省) 두 군데 입니다." "사천과 강소?" 멀어도 너무 멀었다. 사천성은 그렇다 치더라도 강소성엔 토비가 많다. 충분히숨어 있 기는 양호한 곳이다. 하지만 거리가 먼 만큼 어려움도 많았다. 이름모를 질병에독충과 독사들이 득실대는 곳이다. 그런 점에선 거의 숨는다는 것은 죽음과 같은 위험을가져야 만 하는 도박과 같은 것이다. 영락제는 머리가 아픈지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다 시 인상을 풀며 입을 열었다. "강소성은 다시 한번 조사해 보도록 하라. 그리고..." 말을 하던 영락제는 무언가 떠오른 것이 있는지 말을 맺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강(江)? 사천은 황하강, 강소는 장강이지. 그래 바로 강이야. 그런데 강하고그들하고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거지?' 한참을 고민하던 영락제는 송원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했다. "아니다. 다음에 부르도록 하지. 나가 보도록 하게나." 송원호는 영락제의 말에 다시 고개를 숙인 후 밖으로 걸어갔다. 문이 열리고그가사라 지는 모습에 영락제는 다시 고민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40- 본격적인 화왕지절(火王之節)의 계절이 시작되자 논과 들은 푸르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만큼 소주의 농꾼들의 손놀림은 바빠지고 있었으나 그들의 표 정에선 전혀 불평 따윈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덩실거리는 어깨춤과 노래가 락은 성밖 외곽의 경작지에선 흔히 보고 듣는 소주의 명물이 된 지 오래였다. 오늘도 구슬땀을 흘리는 농부들은 한 줄기 가락을 멋드러지게 뽑아내고 있 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곧 말발굽 소리에 파뭍히고 말았다. 한 이십 대 후 반의 화복 청년이 검은 오추마(烏騶馬)를 몰아 논 옆으로 난 관도를 내리닫 고 있었다. 솜씨를 뽐내는 양 관도를 종횡무진하며 내달리던 청년은 농부들 이 일하는 곳 앞까지 오자 고삐를 잡아 말을 세웠다. "워~워!" 말은 순식간에 멈추어섰고 뽀얀 먼지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먼지가 어깨 위로 떨어지는지도 모르는지 청년은 환한 미소를 지은 후 큰 소리로 외쳤다. "왕씨, 힘들지 않소? 쉬엄쉬엄 하시구랴." 그제서야 집단 속에 파뭍혀 허리를 숙이고 있던 한 사내가 허리를 펴며 고 개를 돌렸다. "도련님! 안녕하셨습니까요?" 왕씨라는 사내는 기쁜 웃음으로 청년을 반겼다. "무어 별일이야 있었을까만은 오늘은 어째 어깨가 결리구료. 그래서 이 녀석 과 외출이나 하러 나왔소. 왕씨도 너무 무리하진 마시오. 열심히 한다한들 소 출이 느는 것도 아니고." 화복 청년은 타고 있던 말의 목을 두들기며 농을 지껄이고는 다시 말을 몰아 앞으로 내닫는다. 겨우 가라앉았던 모래구름은 또다시 관도위를 뒤덮으며 나 부끼기 시작했다. 환한 웃음을 짓고 있던 왕씨 사내는 청년이 사라지자 미간을 모았다. "저런 놈팽이 같은 녀석 보게. 일하는 사람 앞에서 저렇게 농이나 지껄이다 니. 거기다 꼭 고양이가 쥐 생각 해 주는 것처럼 생색까지 내는 꼴이란." 왕씨 사내 옆에서 허리를 숙이고 묵묵히 일만하던 한 사내가 허리를 폈다. 콧잔등이 치밀어 올라간 모습이 잔뜩 화가 난 모양이다. 왕씨는 사내의 말에 가타부타 말도 없이 관도 끝만 바라봤다. "그런 말 말게. 진씨! 허대인댁 허상(虛床) 공자 이야기도 못 들었는가? 그 놈에게 비한다면 저정도는 양반이지. 우리는 복 받은줄 알아야 해." 그의 말에 키 작은 한 사내가 몸을 일으키며 맞받아쳤다. 그 말에 진씨는 고 개를 끄덕였다. 그도 허상에 대해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 석(無錫)의 거부인 허건(虛建)은 강소성(江蘇省)을 대표하는 오 대 거부 중 의 하나였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더욱 유명하게 한 것은 바로 무뢰배로 이 름 높은 그의 아들 허상 때문이었다. 수많은 날건달을 몰고 다니며 유부녀건 처녀건 가리지 않고 욕보이는 허상의 이름은 이미 강소성에 사는 사람치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허상에 비하면 화복 청년은 성인이나 다 름 없었다. "우리 마을이 왜 잘 사는줄 모르는가? 바로 인품좋은 담대인 어른 때문이 아 닌가? 그 분이 없었다면 우리 마을은 이미 허건의 손에 넘어간 지 오래야. 그 럼 자네 딸도 끝장 났을지 모르지." 키 작은 사내의 놀림에 벌겋게 달아오른 진씨는 주먹을 휘두르며 분통을 터트 렸다. "요 놈의 쥐방울만한 운가 녀석아.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일꺼야? 내 오 늘 네 녀석의 키를 반으로 줄여주마." 운씨라는 사내는 진씨가 휘두르는 망치같은 주먹을 피해 돌아다녔고, 그 소란 에 논 안의 벼는 이리저리 넘어지고 있었다. 소주(蘇州) 태호(太湖)의 동쪽에 자리잡은 강소성(江蘇省)의 중심지. 항주(杭州)와 더불어 '천상천당 지하소항(天上天堂 地下蘇杭)’라 불리울 정도로 번영 했던 이곳은 여인과 음식으로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더욱 소주를 크게 번창시킨 것은 바로 수로였다. 소주의 양 옆은 물론 시내까지 뻗어있는 운하망(運河網)은 바로 소주를 번영 시킨 젖줄이나 다름 없었다. 사방에 가뭄이 든 그 어떤 여름철에도 소주의 사람 들은 이 운하로 인해 물부족을 느끼지 못했고 운하는 그런 그들의 기대를 져버 리지 않고 풍성한 가을을 맞이하게 했다. 사람들은 이런 소주에 살고 있음을 천운으로 여겼다. 매년 드는 풍년, 웃음을 파는 기루의 여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가장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은 바로 담대인이 이 소주에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삼 할밖에 안되는 아주 싼 지대와 봄에 무이자로 빌려주는 곡식들은 담대인의 인품을 잘 드러내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가지에 대해서만은 고개를 내저었는데, 바로 담대인의 아들인 담공우(潭恭郵)때문이었다. 올해 서른을 맞 은 그는 별 문제가 없는 그런 평범한 인물이었다. 유부녀들 농락하거나 사기를 치는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를 놈팽이라 불렀다. 항상 집안에 만 있는 그가 이런 악평을 듣는 것은 별 이유는 아니었다. 단지 담대인의 저택 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입방아 때문에 그가 공부는 하지 않고 멍하니 있다는 것 을 알게 된 것이 그 이유일 뿐이었다. 담대인의 나이 이제 육순을 넘었다. 그런 그가 죽고나면 그 엄청난 재물들은 분명 담공우가 가지게 될 것은 분명했고, 놀기 좋아하는 담공우가 아무 노력도 없이 그런 큰 재물을 얻게 되는 것은 분명 농사꾼들의 입담에 오르내릴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질투로 인해 배 아픈 사람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꾸며내기 시 작했고, 그렇게 꾸며진 말은 순식간에 소주를 떠돌았다. 하지만 담대인은 그런 사람들의 비난에도 눈 하나 까딱 하지 않았다. 단지 무시할 따름이었다. 송(宋)집사는 어디론가 뛰어가고 있었다. 거래처의 명부를 관리해야 했고, 대 금관리도 혼자서 할 정도로 바쁜 그가 이렇게 뛰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그는 다급했다. 너무도 다급하여 길을 가던 사람들이 모두 고개 숙여 인사를 해도 본 체만체 하고 뛰어갈 뿐이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소주 중앙에 자리한 큰 저택이 었다. 바로 담대인의 저택이었다. 사람을 불러 문을 열게 할 틈도 없다는 듯 손으로 밀고 들어온 송집사는 대뜸 안으로 들어갔다. 너무도 길을 잘 아는 듯 그는 순식간에 세 개의 작은 문을 거쳐 아름다운 정원에 도착했다. 정원은 연못을 끼고 있는 정자가 아름답게 세 워져 있는 곳이었다. 그 정자 안에는 이미 두 명의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 었다. 송집사는 순식간에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어서오게. 송집사." 한참을 이야기하던 그들은 뒤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이야기를 멈추었다. 등을 보이고 있던 한 사람이 고개를 돌리며 송집사에게 인사를 하자 송집사는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맞인사를 했다. "담어르신! 부르셨습니까요?" 송집사의 인사에 고개 돌린 그 사람이 등을 돌렸다. 백발의 머리와는 달리 오 십이 되어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바로 담대인이었다. "그래! 인사드려라. 자네도 알지? 방효겸(方孝謙) 대인이시네." "대인이라니요. 허허허. 담대인께서 저의 얼굴에 금칠을 하시는군요. 이거 너 무 민망해서 앉아 있지도 못하겠습니다." 담대인의 손짓에 듣고 있던 백의 문사는 너털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내저었다. 정자 밖에 서 있던 송집사는 얼른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어서오십시요! 방대인. 오늘 또 뵙게 되는군요. 오셨을때 인사를 드렸어야 했 는데, 이렇게 늦게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게 되니 송구스럽습니다." 절도 있는 인사에 방효겸은 빙긋 미소로 대답을 했다. "방대인은 오늘 집에서 유(留)하실 것이니 상방으로 치워두도록 하게나." 담대인은 인사를 마친 송집사에게 명을 내리자 송집사는 허리를 숙이며 응답을 하고는 물러서려 했다.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는 것인지 방효겸도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잠깐! 그런데 공우는 어디 갔는가? 아까전부터 보이질 않는군." 몸을 돌려 나가던 송집사는 움찔 몸을 떨고는 다시 허리를 돌렸다. "저...고...공자께선 낮에 외...외출을 하신다고..." "외출?" 더듬거리며 말하던 송집사를 보던 담대인의 눈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송집사는 당황하며 변명을 늘어 놓는다. "나...나가신지 반 시진도 안 됬습니다. 한 시진 안에 돌아온다 하셨으니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오실 겁니다." 송집사는 미치고 환장할 것 같았다. 분명 나가기 전에 부친이 묻는다면 서가에 들린다고 이야기하라 당부했건만 그새 잊어버리고 생각도 없이 대답한 자기의 입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분명 들어온다면 또 담공우는 깨질 것이 분명했고 그 원망은 자신이 쓸 것은 분명했다. "그만 돌아가서 방대인의 방이나 봐 두게." 잔뜩 미간을 모으고 있던 담대인이 고개를 돌리며 손을 내젓자 송집사는 그저 인사를 한 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일은 터진 것이다. 꾸중 듣는 것은 필수였고 이젠 얼마나 적게 들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고민해야만 하는 것이다. 송집사가 정원을 나서자 담대인은 고개를 숙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 자 방효겸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그 분도 자신의 자리를 되찾으신다면 옛 모습을 다시 찾으실 것이옵니다." 그 말에 담대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도 그렇게 되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하고 있소. 하지만 문제는 지 금이오. 만약 그 분께서 밖으로 나돌다 관원들이 혹 알아보게 되면 어떻게 되 겠소. 난 그것이 더욱 걱정이오." "그리 걱정하지 마시지요. 역모가 난지 이제 십 사년이 지났소. 그 분을 알아 볼 사람은 거의 없다는 말이지요. 이 부근에 돌아다니더라도 그 분을 알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지요." 방효겸의 말에 담대인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댔다. "그렇긴 해도 천려일실(千偃一林)이라 하지 않았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안다는 말이오. 그저 제일 좋기론 안전한 집에 계속 계시는 것이 좋지요." 담대인은 말을 마치자 목이 마른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한 모금을 들이 키고 다시 잔을 놓자 방효겸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분도 이제 서른입니다. 이제 가장 왕성한 때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런 분을 이 집에만 계속 모신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하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빙긋 웃는 방효겸의 웃음은 마치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을 보는 듯 했다. 담대 인은 웃음짓는 방효겸을 보자 싱거운 웃음을 날렸다. "그걸 제가 모르겠습니까? 다만 그 분의 짝은 함부로 맞을 수는 없지 않습니 까? 그래서 머뭇거리고 있을 뿐이지요." "저희들이 황후를 맞이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일단은 그 분을 집에 붙어 계시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죠." 담대인은 맞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담대인은 말을 하다말고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 보았다. 아무런 인적도 보 이지 않음을 확인한 후 그는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소리도 아주 낮아 바로 앞에 앉아 있는 방효겸도 고개를 가져가야 했다. "일은 잘 되고 있습니까?" "일단 들어오는 연락은 별 무리 없는 것 같습니다. 한 군데를 제외한 곳은 모 두 성공했다고 하더군요." "..." "그리고 장강수로연맹((長江水路聯盟)에서 배를 만든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모 아 이미 배를 만들고 있소. 아직 크게 위험한 징후는 보이지 않으니 그리 걱정 마시지요." 방효겸의 낮은 말에 담대인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대인께서 주도하시는데 별 무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담대인은 말을 맺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방효겸은 담대인의 궁금증이 무엇인지 몰라 눈만 깜박거렸다. "너무 많은 준비가 아닐지..." 방효겸은 그제서야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모습이 부끄러웠던지 방효 겸은 금방 정색하며 웃음을 거두었다. "돈이 많이 나가서 아까우신지요?" 듣고 있던 담대인은 그런 그의 놀림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의 말이 농담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벼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제가 말씀드린대로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다시 기회는 오지 않습니다.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무림맹과 무황성을 부추길 준비도 차곡차곡 진행되고있습 니다." 방효겸은 목이 마른지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성공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어떤 길로 올지 아무도 모 른다는 거지요. 그런 이상 우리들은 모든 길을 다 고려해야 합니다. 바다던지, 관도던지 말입니다." 그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던 그때 송집사의 신형이 정원에 다시 나타났다. 그들 은 말을 멈추었다. 송집사는 이야기를 방해한 것이 미안했던지 고개를 푹 숙이고 다가왔다. "방대인이 쉬실 방이 준비 되었습니다." 하지만 담대인의 얼굴에는 의아한 표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그 정도의 일 로 이야기를 하는 자신을 방해할 바보는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그의 생각이 맞았음을 곧 알 수 있었다. "그...그리고 공자께서 오셨습니다." 송집사는 말을 끝내자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듣고 있던 담대인은 어떻게 해 야 할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고민을 풀어준 것은 방효겸이었다. "송집사! 나의 방으로 안내해 주게나." 방효겸은 옷을 털며 일어선 후 담대인을 다시 쳐다봤다. "담대인! 공자를 그리 꾸중 하진 마십시요. 요즘 그 나이 때의 젊은이라면 당 연히 밖으로 나돌아 다니고 싶어하지 않겠습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 가시지요." 그는 웃음을 머금으며 말을 끝내고는 다시 송집사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는 앞장선 송집사를 따라 정원을 나섰다. 담대인도 그가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서 있다가 정자를 나서 담공우의 방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41- 담대인의 걸음이 멈춘 곳은 담공우의 방이 있던 뒷마당이었다. 그가 모습을 나타내자 담공우의 잔 신부름을 맡고 있던 시녀 한 명이 대청 에서 뛰어 내려 인사를 했다. 담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녀의 인사 를 받았다. 시녀가 방 안으로 기별을 고하려 하자 담대인은 손가락을 들어 입으로 가져간 후 시녀더러 마당밖으로 나가라 손짓을 했다. 시 녀는 방을 찾는 담대인이 담공우를 찾으면 항상 자신을 내보냄을 알 고 있었기에 별 생각 없이 인사를 한 후 몸을 돌려 나갔다. 담대인은 그녀가 완전히 사라짐을 확인한 후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는 젊은 청년 한 명이 탁자에 손을 괸 후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 다. 담대인은 담공우의 맞은 편에 오체투지를 했다. "폐하!" 폐하라니! 중원을 지배하는 황제가 영락제 말고 또 있단 말인가? 아 버지가 아들 앞에 오체투지한 것만 해도 기이한 일이거늘 황궁에 있 는 황제 이외에 또다른 황제를 찾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담공우는 머리를 바닥에 숙이고 있는 담대인을 씁쓸하게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제 더 이상 그런 말은 하지 마시오. 이미 난 황제가 아니오. 그 저 민(民)에 파뭍혀 살아가는 한 백성에 불과하오." 담대인의 신형은 담공우의 말이 길어질수록 더욱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는 고개를 제끼더니 비분강개한 눈빛 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담공우를 바라보았다. "폐하가 아니라니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세상에 폐하말고 그 누 가 천자의 보위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담공우는 담대인의 울분에 찬 언변에 압도되어 돌렸던 고개를 바닥으 로 떨구었다. "지금 세상은 모두 태평성대를 노래하고 있소. 그런 점으로 본다면 지금 숙부는 황제의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오. 백성들이 원하는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이오. 이젠 더 이상 날 폐하라는 말 로 부르지 마시오. 폐하는 내가 아닌 숙부란 말이오." 그 말은 불붙은 담대인의 가슴에 기름을 부은 겪이나 다름 아니었다. "폐하라 하셨습니까? 태평성대라 하셨습니까? 그 사악한 연왕 녀석이 폐하의 옥좌를 훔친 역적이란 사실은 세상의 만백성이 다 아는 사실이 옵니다. 수많은 백성들이 길에서 피를 토하며 울었고, 고고한 선비는 붓을 꺾고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들로 산으로 전쟁을 치르는 터에 아 들을 둔 어미는 자식의 싸늘한 시신을 봐야했고, 남편을 잃은 아낙은 아이를 잡고 울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태평성대라 하셨습니까? 하늘이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황자란 곧 바로 천자(天子). 그 누구도 하늘의 뜻을 어기고 그 자리를 탐낼 순 없습니다. 그 역적은 이제 곧 피눈물을 흘리며 진정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피를 토하듯 열변을 내뿜던 담대인은 곧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는 잠 잠해졌다. 타오르듯 이글거리는 담대인의 눈빛에 압도된 담공우는 할 말을 못다한 듯 침을 꿀꺽 삼킬 뿐이었다. "소신이 너무 과하였나이다. 무례를 용서하시오소서!" 담대인은 다시 고개를 처박고는 예를 차렸다. 그때까지 고개만 숙이 고 있던 담공우는 무슨 말이냐는 듯 당황해하며 손을 내뻗었다. "아니오. 그대가 무례하다니 그 무슨 말이오." 담공우의 손에 이끌려 몸을 일으킨 담대인은 다시 고개를 숙인 뒤 말을 이었다. "오늘은 이만 쉬시도록 하시오소서. 소신은 이만 물러 가도록 하겠나 이다." 가장 공손한 자세로 절을 한 담대인은 뒷걸음질 치며 방문을 열고 밖 으로 나섰다. 그리곤는 다시 살며시 문을 닫았다. 담대인이 나간 후 담공우는 닫힌 문을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 다. '그대가 날 위하는 마음은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이젠 나의 시대가 아 니오. 나에게도 눈이 있고 귀가 있단 말이오. 누구나 사람들은 숙부를 말하지 날 말하진 않소. 이미 세상 사람들은 날 잊었단 말이오. 나는 이제 역사에서나 존재하는 사람일 뿐. 다시 세상을 뒤집을 순 없소. 역 사를 바꿀 순 없단 말이오. 황제? 폐하? 그딴 건 다 소용 없소. 나에겐 소용 없단 말이오. 난 그냥 쉬고 싶소. 지금처럼 아무 부담없이 편하게 살고 싶소. 그러니 이젠 그만 좀 두시오.' 속으로만 외치는 공허한 외침이었다. 이런 자신이 못내 미웠던지 담공 우는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는 탁자위에 머리를 파묻어 버렸 다. 그는 바로 이대 황제인 건문제(建文帝)였다. 황태자였던 부친 의문태 자(懿文太子)가 병사한 후 황태손에 책봉된 그는 홍무제 사후 16세의 나이로 황제의 위(位)에 올랐다. 황권의 강화 정책으로 많은 견제를 받 던 그는 연왕의 정난(靖難)때 궁성에서 불타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았 지만 사실은 많은 신하들의 도움으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을 속이며 소주에서 몸을 가누고 있었다. 밖으로 나선 담대인은 아쉬운 눈빛으로 방문을 보고 있었다. 오늘도 제대로 할 말을 못했다. 항상 들어갈 때마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하 려던 말은 오늘처럼 이렇게 딴 길로 빠져 버렸다. 담대인은 크게 한숨 을 내쉬고는 정원을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는 문 앞 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녀에게 담공우의 외출시엔 반드시 알리라 말하 고는 송집사를 찾았다. 송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담대인은 방효겸의 방 을 찾았다. "들어가도 되겠소?" 입구에서 묻는 담대인의 말을 들은 방효겸은 큰 소리로 웃으며 그를 반겼다. "허허허! 빨리도 갔다 오셨군요. 어서 들어 오시지요." 담대인은 눈빛으로 송집사를 보낸 후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방 안에는 그 혼자가 아니었다. 흰 백삼을 깔끔하게 차려 입은 한 사내가 앉아 있다 자신을 보며 일어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딘지 문사형의 사내는 아니었다. 각진 얼굴에 꽉다문 입술과 사나운 독수리를 연상시 키는 사내의 눈빛은 마치 잘 다듬어진 한자루의 칼과 마찬가지였다. 담대인의 눈은 예상치 못한 인물을 보자 가늘어졌다. "허허! 그리 놀라지 마시지요. 보신 적이 있으실텐데." 낯선 인물을 경계하는 담대인을 본 방효겸은 얼른 둘 사이에 끼어들 며 얼버무렸다. 그제서야 백삼 사내는 허리를 수그리며 인사를 했다. "황요진(黃謠眞)이라 합니다." 담대인은 그제서야 의뭉스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리 쉽게 알아보진 못했다. 그런 모습이 안스러운지 황요진이 다시 나섰다. "황세운(黃世韻)이라 하면 아실런지요?" 그제서야 담대인의 얼굴에 웃음이 묻어났다. "아! 그럼 네가 황자징(黃子澄) 어르신의...?" "예! 바로 증손입니다." 방효겸이 역시 거들고 나섰다. "정말 오랜만이구나. 널 본게 얼마만이지? 십 오년은 넘은 것 같은데. 그런데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담대인은 오랜만에 지기를 만난 양 눈시울을 붉히며 기뻐했다. 무공으 로 다져진 황요진은 자신의 어깨를 잡는 담대인의 손아귀의 힘을 느끼 고는 그가 얼마나 격동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서 계실 것이 아니라 자리에 앉으시지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서 있던 그들을 잡아끈 것은 방효겸이었다. 그 제서야 정신을 차린 그들은 모두 자리를 잡으며 앉았다. "그런데 어떻게 오게 된 것이지요? 지금까진 꿈에도 이 아이가 살아 있 는 줄은 몰랐소만?" 담대인은 붉어진 눈시울을 가릴 생각도 없는지 바로 방효겸을 향해 물 었다. 그는 정말 기뻤었다. 마지막으로 만날때만 해도 자신의 허리춤에 닫는 어리디 어린 소동이었다. 거기다 반짝거리는 눈망울에 앙징맞은 손 으로 자신을 끌었었던 그 모습은 지금도 있을 수 없는 추억속에 하나였 던 것이다. "그 날이 있기 삼 년 전에 무당에 들어갔죠. 그래서 충분히 몸을 보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사문에서 자리도 잡았지요." 방효겸이 자랑스런 얼굴로 황요진을 바라보자 황요진은 쑥스러운지 고 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아까 말씀하셨던 무림맹쪽을 담당한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이 아이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담대인의 질문에 방효겸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폐하께선 어떠신지요?" 이어진 방효겸의 질문에 담대인은 비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대로시오. 전혀 생각이 바뀌시질 않은 것 같소." 듣고 있던 황요진의 표정도 극도로 침울해졌다. 허나 방효겸은 예상하 고 있었는지 담담하기 그지 없었다. "걱정 마십시오. 지금은 그러실지 몰라도 몇 가지 계기만 마련된다면 야 충분히 바뀌실 수 있으시지요." "계기라니요?" 해결책이 보였을까? 죽을 상이었던 담대인의 얼굴에 다시금 화색이 돌 았다.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겠는다는 생각을 다시 하시도록 하는 것은 상당 히 어려운 일이지요. 하지만 그 무소불위의 권력을 필요로 하는 장면이 생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어떻게?" "걱정하지 마십시요. 제가 다 생각해 두도록 하죠." 자신 넘치는 얼굴로 담대인을 안심시킨 방효겸은 다시 입술을 핥은 후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 의미를 알았을까? 황요진은 귀를 세우며 주위 를 살폈다. 아무 이상 없다는 황요진의 끄덕임에 안심한 방효겸은 그들 에게로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연왕이 고비사막을 넘어 오이라트 족을 평정하러 간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이번 기회를 반드시 놓쳐선 안됩니다." 방효겸은 계속 목소리를 낮추며 설명을 했다. 듣고 있던 담대인과 황요 진은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42- 여름철의 날씨는 사람을 지치게도 하지만 미치게도 한다. 바로 어제 같 은 날씨는 정말 천인문에게는 미치고 펄쩍 뛸 날씨였다. 작열하는 태양 은 쉴 새 없이 뛰어야 하는 천인문에게 있어 옥조영보다도 더 미운 상 대였다. 끝없이 계속 될 것 같던 기본 수련은 옥조영의 만류만화상심법(萬流滿和 上心法)을 익힌 후부터 자꾸 줄어들어 이젠 하루에 두 시진 정도만 남게 되었다. 왜 이름을 이렇게 길게 쓰느냐고 트집만 잡지 않았더라도 이 시 간은 더 줄어 들 수도 있었다. 허나 천인문은 트집을 잡았었고 수련은 계 속 남아 그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처음 이 수련이 계속 될 땐 천인문이 기절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았을 정 도로 가혹했다. 피하기도 했고, 맞붙기도 했었다. 그러나 얻어맞긴 마찬가 지였다. 그 모든 것이 소용없음을 깨달은 이후 천인문은 한가지 결론을 내 리게 되었다. 맞을 때 맞더라도 옥조영의 손과 발의 변화를 보아야 한다 는 것이다. 처음 몇 일 동안은 순조롭게 되어갔다. 일주일이 안 되어 옥조영의 투로 (鬪路)를 거의 깨닫게 된 것이다. 옥조영의 공격이 눈에 익은 천인문은 가 뭄에 콩 나듯 피해내던 것이 여름에 장마지듯 피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눈 치채지 못할 옥조영이 아니었다. 이후 그는 그전까지 쓰지 않던 변칙 공 격을 하기 시작했고 천인문의 손발은 다시 어지러워졌다. 그러나 여기서 그만둘 천인문이 아니었다. 드디어 방법을 찾았는데 그저 맞고만 있을 순 없었다. 또 다시 천인문은 새로운 공격을 맞아가며 습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까지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옥조영의 기분은 상당히 좋았다. 지금까지 제자를 키운 적이 없었던 그 는 비록 재능이 없다고 주절대긴 했어도 천인문이 생각보다 잘 따라오는 것 갖자 가르치는 재미가 솔솔 붙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는 얼굴은 차 갑게 공격은 매섭게 했다. 강호무림은 이 정도로 기뻐할 수 있는 호락호락 한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의 삼 백년이란 세월은 매서웠다. 조금씩 박투술(拍鬪術)에 익숙해져 가던 천인문도 처음 보는 수법이 무수히 나오자 속수무책이었다. 기막힌 순 간에 파고드는 변칙공격은 천인문을 사정없이 나뒹굴게 했다. 그러나 천인문 도 조금씩 달라져 가고 있었다. 처음처럼 똑같은 수법에 서너 번씩 당하지도 않았고, 옥조영이 펼쳤던 수법을 배워 써먹기도 했다. 가끔 섬뜩한 살수 같 은 매운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이젠 약점을 포착할 수 있는 집중력과 그 안 으로 뛰어들 용기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제일 좋아진 것이라면 바로 침착 해진 대응이었다. 옥조영은 자신의 공격이 자꾸 강력해지자 자신의 독문심법인 만류만화상심법 (萬流滿和上心法)을 전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천인문의 내공이었다. 비록 수련을 빌미로 밤낮 을 가리지 않고 타혈을 하여 혈도를 다지고 공력을 전수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미진한 감이 없잖아 있었던 것이다. 그정도로는 제대로 된 자신의 공격을 한번 받기도 전에 골로 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분명 천인문의 내공은 나이에 비해서는 상당히 막강했다. 그러나 천인문은 그 런 강한 내공을 정순하게 단련하지도 못했고, 더군다나 제대로 쓰는 것도 못하 고 있었다. 공격과 방어에 있어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없느니 못하다는 생각을 하던 옥조영은 한참을 고민하다 잠자는 천인문에게 다가가 내공을 산 공(散功)시켜 버렸다. 다음날 눈을 뜬 천인문은 내공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되자 천 인문은 옥조영을 의심에 찬 눈초리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지레 놀라버린 옥 조영은 공력을 없애버렸다 말하지 않고 다만 수련의 일환으로 점혈해 둔 것 이라 얼버무렸다. 그러나 천인문이 그렇게 쉽게 속아넘어갈 위인이 아니었 다. 그렇게 되자 다급해진 것은 옥조영이었다. 천인문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 고는 하나 분명 허락도 받지 않고 해 버린 것은 자기의 잘못이었던 것이다. 천인문은 쉬지 않고 자꾸 캐묻기 시작했고 당황해하던 옥조영은 천인문을 향 해 일격을 날리는 것으로 그 날의 일과는 모두 끝이 나버렸다. 다음날 옥조영은 천인문에게 만류만화상심법을 전수했다. 자신이 전수한 심법을 차츰 익혀 가게 되면 자신이 점혈한 곳이 서서히 풀리게 된다고 설 명하며 그렇게 되면 원래대로 내공을 쓸 수 있게 된다는 말을 했다. 지금 당장 풀어줄 수도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옥조영은 내상을 입은 경우 싸울 수도 있음을 상기시키며 그때를 대비한 수련이라 꾸 며냈다. 겨우겨우 이해를 시킨다고 땀을 흘리던 옥조영은 그 날 밤부터 정 신이 없었다. 처음부터 탈태환골(脫胎換骨)을 시켜 내공을 올려버린다면 상 관없지만 그렇게 되면 점혈이 되어 있었다는 말을 증빙하기 어려웠다. 자고 일어났더니 탈태환골을 했다? 내공만 원래대로 돌아간다면 별 문제 없겠지 만 육체까지 커지는 것은 자신도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기도 믿기 어 려운 말을 안 그래도 영악한 천인문이 넘어갈 리가 없었던 것이다. 한참 을 고민하다 한가지 방법을 찾아낸 옥조영은 그 날 밤 온 산을 뒤져서 만년 삼왕 한 뿌리를 캐야만 했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생겼다. 이번에는 그 잠 많던 천인문이 잠잘 생각을 하 지 않는 것이다. 천인문이 잠을 자야 만년삼왕을 먹이고 내공을 올려주던 지 할텐데 전혀 그럴 기색이 보이지 않자 옥조영은 눈살을 찌푸린 것이다. 천인문은 자고 일어나서 또 맞아야 한다는 사실에 질겁했다. 보지 못한 수 법이라면 몰라도 환히 눈에 보이는데도 맞아야 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 참 을 수가 없었다. 옥조영이 점혈을 풀어줄 생각이 없다면 자신이 스스로 풀 어야 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육체의 고통은 줄어들 것이다. 그런 생각에 천인문은 잠도 자지 않고 심법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날 아침 천인문은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던 옥조영의 주먹 한방에 나가 떨어졌다. 잠을 못 자 몸이 피곤한 것도 있었지만 옥조영이 과하게 힘을 쓴 탓이었다. 쓰러져 버린 천인문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던 옥조영은 천인문 의 몸을 번쩍 들고 동굴로 들어갔다. 안으로 든 옥조영은 동굴 바닥에 천인 문을 눕혔다. 그리고는 손에 든 만년삼왕을 터트려 천인문의 입에 떨구었다. 입안으로 방울방울 사라져 가는 만년삼왕을 아쉽게 보고 있던 옥조영은 껍 질만 남은 만년삼왕을 동굴 벽에 집어던진 후 숨을 크게 들이키고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천인문의 몸이 석자 가량 둥실 떠올랐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던 옥조영은 눈에서 빛을 내뿜으며 낮은 기합을 토했다. 그 순간 옥조영의 손은 수많은 환영(幻影)을 일으키며 사라지고 퍼 퍽 하는 소리만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손 은 천인문의 전신 혈도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일 수유(須臾)정 도 흘렀을까? 그의 손이 멈추더니 천인문의 단전과 천령혈에 달라붙었다. 만년삼왕의 기운을 흡수하고 내공을 모으게 도와주는 것이다. 옥조영은 서 서히 정신을 집중했다. 완벽하게 탈태환골 시키는게 어려운건 아니었다. 어 떻게 하면 반쯤 탈태환골 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천인문 이 깨어 있을 때 몸이 변해야 했고 그래야 자신의 말이 거짓이 없었다고 둘 러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노력하여 반탈태환골을 시켜놓은 옥조영 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거의 끝나갈 무렵 옥조영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 한가지. '에구! 그냥 내공을 없앴다고 말하고 당당하게 했다면 얼마나 편할까? 그럼 이녀석도 나한테 고마워 할텐데...' 옥조영은 이런 생각을 지금 떠올린 자신의 머리가 한스러웠다. 이런 머리로 어떻게 무학(武學)의 종사(宗師)가 된 것인지 자신도 궁금했다. 잠시 딴 생각에 잠겨 멍하게 있던 옥조영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일을 마 무리지었다. 그리고는 다시 손을 들어 천인문의 혈을 짚었다. 이것은 일주 일 정도 지나면 풀릴 것이고 그때 바로 탈태환골이 시작될 것이다. 이제야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던 옥조영은 편히 발뻗고 잠을 잘 수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처음 며칠 간은 사라진 공력으로 인해 천인문은 흐느적대 며 얻어맞기 일쑤였다. 분명히 다 아는 수법이고 눈에도 어느 정도 보이는 데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거기다 너무나도 아픈 주먹이었다. 눈물 이 쏟아질 듯 아픈 주먹에 천인문은 밤을 세워서라도 빨리 점혈을 풀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고생하긴 옥조영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의 일 할도 되지 않는 약한 힘으로 때리고 있었으나 그것마저도 자신이 해둔 점혈이 풀릴까 혈을 때리지도 못 하고 살만 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천인문으로선 아프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 한 천인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잠까지 줄여가며 만류만화상심법을 익혀가던 천인문은 갑자기 혈도가 풀리 며 기운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이제 자신의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쁨에 잠긴 천인문은 멈추지 않고 계속 운기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실수였다. 내공을 찾았다는 기쁨에 잠겨 있던 천인 문으로선 과거와는 다른 엄청난 기운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한참 을 운기조식하던 천인문은 돌기 시작한 기가 제멋대로 폭주하는 것을 느끼 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과거 석실 내에서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천인문은 그 즉시 단전으로 기운을 몰아 넣으며 운기를 멈추려 했다. 하지만 이번은 과거 의 그때와는 전혀 달랐다. 전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천인문의 숨은 가빠져만 가고 온 몸은 사시나무 흔들리듯 떨리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천인문은 옥조영을 불러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말은 입안에서 맴 돌뿐 헛바람만 자꾸 새어 나올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도 천인문의 내부에 서 들끓던 기운은 서서히 커져가더니 사정없이 온 몸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이판 사판이었다. 죽음이냐 삶이냐는 자신의 의지로 결정되는 것임을 깨달 은 천인문은 옥조영이 말했던 구결대로 기운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 운은 전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지 백배 로 흩어지던 공력은 어느샌가 오장육부(五臟六腑)를 갈기갈기 찢어발길듯 뱃 속을 헤집기 시작했고, 머리끝으로 피는 솟구쳐 얼굴은 피로 세수를 한 듯 붉 어지고 있었다. 정신은 이미 몸을 뜨고 있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 생각한 천인문은 다시 한번 기운을 끌어모으기 위해 아랫 입술을 깨물어 몽롱해져가던 정신을 되돌렸다. 그러나 이젠 이미 늦어 버렸다. 깨물고 있던 입술 사이로 핏방울이 점점이 배어나오더니 어느샌가 턱 밑으로 흘러 내렸다. '컥!' 입안에 가득찬 피를 뿜어낸 천인문이 옆으로 쓰러졌다. 그때였다. 넘어가 던 천인문을 잡는 손 하나가 있었다. 바로 옥조영이었다. 천인문이 이렇게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옥조영은 동굴 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일주일은 가리라 생각했던 혈도가 삼 일만에 풀려 버린 것이 다. 거기다 그냥 놔두면 환골탈태는 아니라 하더라도 원래 공력은 찾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몰랐던 천인문은 사정없이(?) 운기를 해버 린 것이었고, 그 결과 이렇게 주화입마에 들어 버린 것이었다. 잠을 자고 있던 옥조영을 압박해 들어오는 한줄기 기세에 그는 그만 눈을 떠 버렸다. 분명 자신을 짓누르는 이기운은 자신의 내공이 틀림없었다. 그 제서야 사태를 깨달은 옥조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섬전같이 밖으로 나간 그의 눈에 하늘로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천인문이 들어왔다. 꺼지듯 사라진 옥조영은 순식간에 천인문의 몸을 받쳐들고는 가부좌를 취 하게 했다. 그리고는 천인문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야 이놈아! 정신 차려라. 마음을 가다듬고 구결에 따라 운기해라." 뇌령음(雷靈音)이었다. 그러나 천인문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옥 조영은 자신의 기운을 장심으로 끌어올려 천인문에게 몰아 넣기 시작했다. 이미 천인문의 내부는 엉망이었다. 사방에 또아리를 틀고 있던 거대한 잠력 은 밀고 들어오는 옥조영의 공력을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시 천인문 의 입에서 피가 터지며 비산했다. 천인문의 토혈은 옥조영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옥조영은 아무 상관 없 는 듯 계속 기를 불어 넣고 있었다. 내부의 잠력과 한참을 실갱이하던 옥조 영의 기운이 서서히 압도하며 천인문의 내부로 밀고 들어가기 시작한지 얼 마 되지 않아 옥조영은 하나씩 내부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모든 장기를 제압한 기운은 다시 옥조영의 의지에 따라 천인문의 임맥을 따라 치 솟아 독맥을 타고 주천하기 시작했다. '이그 이렇게 되면 탈태환골은 날아갔구나.' 위험한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나자 옥조영은 천인문이 살았다는 것만으로 만 족할 수 없는 듯 한숨을 토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만년삼왕을 이렇게 쓰려고 구해 온 것은 아니었기에 아쉬워 하는 것이다. 천인문이 알았다면 또다시 토 혈하며 쓰러질 일이었지만. 옥조영은 창백하게 변한 천인문을 들고는 연신 한숨을 토하면서 동굴로 들 어갔다. '에휴! 이렇게 되면 영락없이 삼일은 또 쉬어야겠군. 이녀석은 왜 이렇게 복 이 많은 거야?' 정말 복인지 화인지 알 수 없지만 그의 걸음은 어느때보다 축 늘어져 있었다. -43- 천인문의 고생스런 내공 수습은 결국 화였음이 들어났다. 그 다음날 몸을 일으키던 천인문은 가슴을 후비는 고통에 신음을 토했다. 아스라이 일렁거리던 사물들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 아직 살아 있었나?' 살아있다는 실감이 나지 않아서일까? 천인문은 담담히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다 보고 있던 천인문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 러자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윽!" 망치로 맞은 듯 가슴을 들어엎는 통증에 숨이 막히고 시야가 흐려졌다. 반 쯤 일어서던 천인문은 가슴을 부여잡은 채 앞으로 쓰러지듯 무너져 내렸다. 옆에서 자고 있던 옥조영은 신음 소리에 눈을 떴다. 앞으로 거꾸러지는 천 인문을 보자 그는 매가 병아리를 나꿔채듯 가볍게 잡아냈다. "오늘은 그냥 쉬어라." 씁쓸한 미소를 띤 옥조영을 바라본 천인문은 그제서야 자신이 살아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누구인지도 말이다. "어떻게 내가 살아 있는 거죠? 어젠 분명히 죽은 줄 알았는데..." "어떻게라니? 아직도 모르겠느냐? 네 녀석이 저 공터 앞에 나가서 쉬지 않 고 만류만화상심공을 익히는 바람에 그렇게 주화입마 한 것이 아냐.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했다면 몰라도 함부로 그렇게 익혔으니 이렇게 되는 것은 당연했던 거다. 그나마 내가 당장 달려오지 않았더라면 넌 정말 저승행이었 어." 제 딴에는 이번 일을 잘 무마시켜 보려고 꺼낸 말이었겠지만 그 말은 하지 않은 것만 못했다. 옥조영은 천인문을 몰라도 너무나 몰랐던 것이다. 일반적 인 사람들이라면 그 정도면 그냥 고맙다고 하며 넘어갈 일이었지만 천인문은 그러질 못했다. "할아버지는 혼자서 익히면 위험하다는 말은 안하셨잖아요. 그러니깐 내가 이렇게 무리해서 익힌 거죠. 혹시 할아버지? 혼자서 익히면 위험한 걸 알면 서도 절 그냥 내버려 둔 거 아네요?" "그...그럴 리가 있겠느냐? 내가 내 친구 손자녀석한테 왜 위험한 것을 가 르치겠냐? 너...너도 알겠지만 내 무공이 얼마나 대단하냐? 거기다 문이 널 살린다고 내가 얼마냐 고생했냐. 그런데 널 내버려 두다니 그...그런 말이 어디 있겠느냐! 하하하하!" 천인문의 질문은 옥조영의 아픈 곳을 정곡으로 찔렀다. 난처한 질문에 비지 땀을 흘리던 옥조영은 입으로는 말을 더듬거리며 머릿 속으로는 뒷말을 만들 고 있었다. 허나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천인문은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 다. 옥조영과는 달리 이미 천인문은 그의 언행을 파악한지 오래였던지라 평소 와는 달리 더듬는 말에다 상황에 맞지 않는 억지스런 웃음을 짓는 그를 가늘 게 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지 무공이 대단한지는 아직 다른 사람하고 붙어보지 못해서 모르겠 고요, 내공도 안 써봐서 모르겠어요. 근데요. 할아버지! 만류만화상심공이 안 전하다면은 왜 난 이렇게 주화입마에 빠져 버린 거죠?" 그제서야 옥조영의 얼굴에는 알아보기 힘든 미약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미 이 질문에는 미리 해둘 말을 생각했던 터라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건 말이지! 나의 예상을 뛰어넘는 너의 출중한 재질 때문인 거야. 이 할 아버지가 널 봤을 때 별로 좋은 재질은 아니라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넌 이 할아버지의 예상을 훨씬, 훠얼씬 뛰어넘는 자질을 가지고 있었더구나. 넌 내 가 아마 일주일은 걸릴 거라 생각한 경지를 무려 삼일로 단축시킨 거란다. 그것만 봐도 너의 자질을 알 수 있지 않느냐? 음화화화!" 천인문이 아무리 영악하다 해도 아직은 어리디 어린 아이였다. 그는 자신을 칭찬하는 옥조영의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첫느낌이 좋지 않았다는 말에 는 서운하기도 했지만 자질이 훌륭하다 계속 이야기하자 천인문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근데 언제쯤 일어날 수 있는 거죠?" 웃음으로 인해 통증이 왔는지 다시금 이마를 찡그리던 천인문이 희미한 음 색으로 물었다. "어제 내가 적당히 치료했으니 아마 삼 일 정도 지나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걱정 하지 말고 푹 쉬도록 해라." 옥조영은 다시 잠을 자려 하는지 말을 끝내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얼 마 지나지 않아 코를 고는 옥조영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천인문도 다시 눈 을 감고 잠을 청했다. 삼 일 간의 휴식은 아주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간간히 찾아오는 통증만 아 니라면 거의 지상낙원이였다. 때가 되면 가져오는 식사에다 아무 근심 없는 생활은 평생 이렇게 누워있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게 했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뿐이었다. 하루가 지나자 슬슬 누워있는 것이 지겨워졌다. 밖으로 나가 고 싶은 욕구가 물씬거리며 피어났고 혼자서 동굴 안에 있는 것이 괴롭기까 지 했다. 몸이 피곤하자 자꾸 서혜령도 보고 싶어졌다. 이틀이 지나자 이젠 잠도 오지 않았다. 식사때가 되면 식사를 하고 잠이 오 면 자고 이렇게 살다보니 이미 새벽녘이 되어도 눈이 감기질 않았다. 옆에서 는 옥조영이 무슨 꿈을 꾸는지 한껏 웃음 띤 입술 옆으로 침을 흘리며 자고 있었다. 삼일이 지나자 이미 천인문의 인내심은 바닥이 드러났다. "이씨! 이 할방구는 어디 간거야? 분명 삼일이 지나면 움직여도 된다고 해 놓고 이렇게 못 움직이게 해 놓고 나가면 어떻게 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천인문은 눈꼬리를 사정없이 올리고는 욕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옥조영이 나가기 전에 혈을 짚고 나갔던 것이다. 어젯밤에 몰래 밖으로 나가다가 걸려버린 후 옥조영에게 점혈 당해 버린 천인문은 아침이 되어 밖으로 나갈때도 혈을 풀지 않고 나간 이후로 정오가 지난 지금까지 계속 이렇게 누워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욕이란 욕은 사정없이 퍼부으며 저주를 하고 있을 무렵 옥조영은 기쁜 마음으로 하수오 한뿌리를 들고 오던 중이었다. 밤새도록 만 년 삼왕을 찾던 그때와는 달리 아주 쉽게 하수오를 찾았기에 그의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막 동굴 앞에 내려 섰을 때 동굴 안에서 들려오 는 욕들은 정말 지금까지 좋던 기분을 확 날려버린 폭풍이었다. 봄날 햇살처럼 따스한 얼굴엔 순식간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알 고 있고 평생 들어본 욕보다 심한 욕들이었다. "할방구 빨랑 돌아오란 말이야. 이 거짓말쟁이야! 날 풀어줘. 풀어달란 말 이야. 삼일이면 된다고 해 놓고 못 움직이게 해 놓으면 어쩌자는 거야. 우 리 아빠가 그랬어. 세상에서 거짓말하는 사람이 제일 나쁘다고! 그런데 할 방구가 거짓말을 해? 으아아! 빨랑 풀어 달라구." 한 숨도 쉬지 않고 내뱉던 천인문은 목이 칼칼해지자 말을 멈추고는 숨을 가다듬었다. 어찌나 악을 썼던지 눈물까지 흘러 내렸다. 그러나 손을 들 수 는 없었기에 그냥 뺨을 적시게 그냥 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휴식을 취하 자 어느정도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휴 이제 좀 살 것 같네. 하지만 소리 지르면 뭘 해? 할방구는 올 생각도 없는 것 같은데.' 속으론 투덜거렸지만 더 이상 욕은 하지 않았다. 이미 마음은 편안해졌고 목까지 쓰라린 이 판국에 떠드는 것은 자신만 손해였기 때문이었다. 정오때 까진 시간이 남아 있기에 지금부턴 마음 편히 지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 자 다시 머릿속에 서혜령이 자신을 보며 웃는 것이 떠올랐다. 천인문은 살짝 눈을 감고는 상상 속으로 빠져 들기 시작했다. 동굴 입구에서 불평을 듣고 있던 옥조영의 몸은 이미 얼음처럼 굳어 있었 다. 어느 순간 들리던 소리가 들려 오지 않았음에도 그의 몸은 풀릴 줄 모 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어느순간 처마밑의 고드름이 떨어지듯 사정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옥조영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놈의 자슥이! 내가 어떻게 대접했는데 그런 말을 하다니. 밥도 해서 가져다 주고, 나의 최고 무공까지 가르쳐 주는데 뭐 할방구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그는 분노에 찬 목소리를 토해놓으며 주먹을 흔들며 동굴로 들었다. 그러나 곧 그는 흠칫 자리에 섰다. 몸을 웅크리며 잠을 자 는 천인문을 본 것이다. 뺨에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은 분노에 차 있던 옥 조영의 이성을 다시 찾게끔 했다. 그는 서서히 옆으로 다가가 천인문의 옆 자리에 살며시 앉았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천인문의 눈물을 살며시 닦았 다. 무언가가 얼굴에 닫는 느낌이 들자 잠결에 취해 있던 천인문은 눈을 떴다. "앗 할방구!" 입에 익어버린 말을 무의식중에 내뱉어버린 천인문은 그제서야 아차 하고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 막으려 했으나 손이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옥조영의 미간이 사정없이 모여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옥조영의 손이 서 서히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본 천인문은 눈을 감았다. 머리 위로 알밤 하나가 떨어질 것이라 예상했던지 천인문의 감은 눈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러 나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 반응이 없자 서서히 실눈을 떴다. -콩!- 그제서야 눈 앞에 별이 번쩍였다. 옥조영은 눈을 파르르 떨고 있던 천인문에게 손을 쓰지 않았다. 안스러워 서가 아니었다. 그냥 때려버리면 너무 쉬운 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손만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떨리던 눈이 슬며시 떠지기 시작하자 이때를 기다리고 있던 옥조영은 그냥 내려쳤다. 그리고는 다시 혈도를 풀 어 주었다. "아야!" 혈도가 풀리자 천인문은 이마에 솟는 혹을 밀어 넣기라도 할 듯 사정없이 두손으로 잡으며 뒹굴었다. "이녀석아 할방구가 뭐야! 그딴 소리 한번만 더 해봐라." "더 하면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던 천인문은 머리를 감싸 쥐면서도 눈을 흘겼다. "해 봐라. 해 보면 어떻게 되는지 알게 될 거다."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겁을 주자 천인문은 다시 고개를 휙 돌렸다. "당장 일어나. 할 일이 있어." "뭔데요?" 오싹할 정도로 싸늘한 말을 듣자 천인문은 입을 한자나 내밀면서도 자리 에서 일어났다. "치료는 끝내야지. 언제까지 누워서 뒹굴고 있을 거냐?" 그리고는 가지고 온 하수오를 꺼내었다. 이마를 잡고 있던 천인문은 하 수오를 보자 휘둥그레진 눈으로 호들갑을 떨며 다가왔다. 대충 봐도 오백 년은 족히 될 만했다. "먹어라. 그리고 내가 말해 준 구결이 있지. 그걸 잘 기억해 둬."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가 하수오를 내민 옥조영은 천인문의 뒤로 돌아 갔다. 그리고는 자세를 잡고 앉은 천인문의 등에 손을 붙였다. "정신 바짝 차려라. 안그러면 저번보다 더 크게 다친다." 천인문은 입으로 넘어가는 쓴 맛을 음미할 새도 없이 등으로 밀려 들어 오는 잠력을 느끼자 바로 정신을 모았다. 그리고는 머릿속으로 만류만화 상심공을 끌어올렸다. 한참을 그렇게 하자 단전에 틀어박혀 있던 기들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 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의지와 옥조영의 강력한 기력에 밀려 기경팔맥(奇 經八脈)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세류(細流)같던 기운은 어느새 급류처럼 끓어올라 대하(大河)처럼 경맥을 타고 온 몸으로 흘렀다. 천인문의 몸은 급살맞은 풍병 환자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삼일전에 느껴 본 고통과 별반 차이 없는 괴로움에 천인문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정신 차려! 정신이 흩어지면 꼼짝 없이 죽는다." 몸 속의 기가 흩어지는 느낌이 들자 옥조영은 다시금 뇌령음을 토해 천 인문을 다잡았다. 그러자 다시 기운이 순조롭게 흐르기 시작했다. -쾅!- 옥조영은 자꾸 커져가는 기를 모아 단숨에 천령혈을 향해 들이밀었다. 그 러나 주화입마로 인해 막혀버린 혈들은 쉽게 뚫리지 않았다. 이정도면 충분 할 것이라 생각했던 옥조영은 재도전을 하기로 했다. 다시 천인문에게 경고 를 하며 더욱 강한 힘으로 밀어 붙였다. -쾅!- 이번에는 뚫렸는지 순조롭게 기운이 독맥을 따라 내려갔다. 드디어 생사현 관이 타통된 것이었다. 그러나 저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탈태환골을 시도할 수는 없었다. 며칠전의 상처가 너무도 컸었던 터라 이정도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천인문은 경고도 없이 임맥을 따라오른 공력이 정신없이 치달아 천령혈을 때리자 벼락을 맞은듯이 뇌리가 멍했다. 그러나 소리따윈 입으로 새 나오지 않았다. 공력은 다시 옥조영의 기력에 이끌려 밑으로 내려가더니 다시 한번 치달렸다. 그리고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천인문의 뒤에 앉아 있던 옥조영은 천인문이 기절한지도 모르고 흐뭇해 하 다가 다시 기력을 모아 십이경맥(十二經脈)으로 몰아 넣었다. 그리고는 이십 사 주천(周天)을 시킨 후 서서히 공력을 단전으로 밀어넣었다. 기절해 있는 천인문을 다시금 자리에 눕힌 옥조영은 싱긋 미소를 짓고는 밖 으로 나갔다. 점심 식사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일어난 천인문은 전의 공력보다 더욱 커져버린 자신의 힘을 주체할 수 없는지 사방으로 내달렸다. "그만 날뛰고 이쪽으로 오너라. 지금 네가 단련을 하지 못한 것이 이미 나 흘이야, 나흘!" 옥조영이 더이상 봐 줄수 없다는 투로 주먹을 휘두르는 바람에 겁을 먹은 천 인문은 다시 맛본 자유를 더이상 음미하지 못하고 옥조영의 앞으로 다가갔다. 천천히 자세를 잡는 천인문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어려 있었다. 같잖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옥조영은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투로들을 시험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흘씩이나 쉬어서 어색할 것이라 생각했던 거와는 달 리 천인문의 대응은 부드러웠다. "좋았어!" 옥조영은 서서히 힘을 실으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공격들을 손과 발 로 막아내던 천인문도 어느듯 익숙해 졌는지 반격까지 시작했다. 그때부터 옥 조영은 박투술에 유투술(流鬪術)까지 추가했다. 마주보며 손속을 나누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치고 빠지는 옥조영의 공격에 천 인문의 손발은 또다시 어지러워졌다. "자...잠시만요." 더 이상 버티기 어렵던 천인문은 뒤로 물러서며 사정했다. "웃기고 있네. 넌 딴 놈들하고 싸울때 사정 봐준다냐? 그런게 어딨어. 그냥 맞던지 싸우던지 알아서 해." 옥조영은 천인문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대꾸했다. 그 리곤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천인문의 몸쪽으로 다가서며 손을 뻗었다. "커헉!" 뱃속에 틀어박힌 주먹에 숨을 내뱉은 천인문은 눈을 희뜩 뒤집힌채 쓰러졌다. "엇! 내가 너무 열을 냈나? 뭐 할 수 없지. 오늘은 여기서 끝인가?" 얼마동안 몸이 근질근질 했던 대다가 욕까지 들었던 옥조영은 오랜만의 싸움 에 힘조절을 하지 못했다. 한방에 뻗어버린 천인문을 안스러운 얼굴로 바라보 던 옥조영은 그를 번쩍 들쳐 업은 뒤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44- "자! 부어라, 마셔라! 음하하하!" 찻잔만큼 둥그런 달이 그 어느때보다 밝게 빛나는 밤이었다. 그 달빛 아래서 술을 대작하는 세 사람이 있었다. 바로 서혜령과 백운호 내외였다. 자리에 앉 기 전까지만 해도 어슴프레 끼어있던 달무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깨끗이 걷 혀 있었고 사방에서 울어대는 풀벌래 소리도 지금은 쥐 죽은 것 처럼 조용하다. 그들은 나무집 앞에 있던 공터에 자리를 깔고 앉아 고즈넉한 이 밤을 즐기는 양 흐뭇한 미소를 가득 품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몇 되지 않지만 정갈한 음 식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미 세 항아리 중에 두 개는 비웠는지 사방으 로 뒹굴고 있었고, 남은 한 항아리도 반쯤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미 얼마나 마 셨는지 안색이 붉은 백운호를 걱정스런 눈으로 보고 있던 여미릉이 보다 못해 톡 쏘듯 말을 걸었다. "적당히 하세요. 오늘같은 날 쓰러지면 방 안에는 들이지도 않을 거에요." "어허! 당신은 주도(酒道)를 몰라. 오늘같은 날에 쓰러지게 마시지 않으면 언 제 마시라는 거지? 난 말야, 오늘을 위해 석 달간을 금주를 했다 이말이야. 그 런데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늘이 왔는데도 술맛만 보라고? 그렇게는 못하지. 오 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음이야. 죽음! 자 다시 한잔!"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듣지 못한 것인지 백운호의 말은 호탕하기 짝이 없었다. 잔을 들자마자 한 입에 털어 넣었다. -꿀꺽꿀꺽- "당신이 주도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래요? 함부로 떠들다가 망신이나 당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마시다가 취하기 전에 들어가서 자요." 백운호의 술주정을 익히 보아 알고 있는 그녀로선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 다.몇 잔 마시지 않았을 때면 별 상관은 없었지만 정도가 지나치게 되면 별별 괴상한 소리를 다 하는 백운호였기에 걱정이 되는 것이다. 만약 저러다가 서혜 령에게 무슨 망측한 소리라도 한다면 나중에 어떻게 볼까 심히 두려웠다. "커 맛 좋다! 그런데 뭐? 떠들지 말라고? 아니 이 아줌마가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야? 내가 주도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 해 볼테니 틀렸는지 들어보라고. 흠흠! 술자리에서 사람이 갖추어야 할 도리를 가리켜 주도(酒道)라 부르니 그 주도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지. 송나라의 주자가 쓴 소학(小學)을 보면 어 른이 만류하기 전까진 자리에서 일어서 주기(酒器)가 놓인 곳으로 가서 절하고 술을 받아야 하며 어른이 마시기 전까지 술을 입에 대어선 안되고, 어른에게 술 을 먼저 올려야 되며, 두 손으로 술잔을 들어야 한다고 되어 있지. 또한 술 속 의 팔선(酒中八仙)으로 불린 이태백은 술은 최고의 벗이라 일컬었지. 하지만 이 런 주도는 나에겐 맞지 않아. 죽림칠현(竹林七賢)의 두령이던 완적(阮籍), 이사 람의 주도야말로 나에게 맞는 주도인 게야. 암! 마시고 또 마셔서 없어질 때까 지 마셔버린 그의 주도는 절정에 달한 주도라 할 수 있지. 허나 이 고상한 내가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있겠는가? 달 밝고 바람 부는 이 선선한 중추절(仲秋節)날 술 마시는 사람 옆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여자라! 자 혜령아! 너의 곱디 고운 손으로 나긋나긋하게 한 번 부어..." -퍼퍼퍼퍽 팍팍팍- "아.니. 이 영감탱이가 뭐라고 나불거리는 거야. 그냥 참고 들어주니깐 겁대가 리를 상실했어." 결국 그녀가 염려하던 것은 터지고 말았다. 완전히 눈이 돌아간 백운호는 아마 서혜령을 술집 기생으로 여긴 것인지 남사스런 미소를 보내며 술잔을 내밀었다. 아직까지 이름을 기억하는 걸 보면 용했지만 결국은 그것도 별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이대로 둔다면 그녀를 아예 방으로 끌고 갈 것은 명약관화 한 일이었다. 그녀는 결국 손을 들었다. 폭풍처럼 휘몰아친 여미릉의 공격은 사 정없이 그의 몸으로 꽂혀 들어갔고 거품을 문 백운호는 작살맞은 토끼마냥 그녀 의 발 앞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혜령아! 오늘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자꾸나. 이 영감이 했던 건 잊어버리도록 해라. 알았지?" 인사불성인 백운호를 가뿐하게 들어올린 그녀는 뒤에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 고 있는 서혜령에게 말을 하는둥마는둥 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되지 않아 웃음을 멈춘 서혜령은 난장판이 된 앞마당을 치우기 시작했다. 부엌으로 마당으로 부산하게 움직이던 그녀는 정리가 끝나자 고개를 들어 숲 속 을 보았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몸을 날렸다. 머리위로 떠오른 휘영청 밝은 보름달로 인해 사방은 환히 드러나 있었다. 이미 이 부근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몸놀림엔 머뭇거림이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일보에 석 장 정도 나아가는 솜씨도 과거보다 배 이상 빠르고 유연했다. 긴 경장을 아름답게 펄럭이며 숲을 가로지르는 모습이 마치 선녀가 숲 속을 배회 하는 선녀유림도(仙女遊林圖)라 부를만 했다. 한참을 그렇게 신법을 펼친 그녀가 도착한 곳은 바로 산 허리에 놓여 있는 큰 바위가 있던 곳이었다. 매일 아침 일출을 보던 곳에서 이렇게 보름달을 보게 되 는 것은 처음이었다. 달빛에 빛나는 곤륜산의 야경은 천산과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장엄한 느낌이 숨어 있었다. 그렇다고 곤륜이 천산보다 더 크게 보인다는 것은 아니었다. 무언가 표현하기 힘든 기운이 산을 가득 메우고 있다 는 것이었다. 맞바람에 백의 경장을 나부끼며 서 있던 서혜령은 손을 들어 머리춤으로 가져 갔다. 머리를 고정시킨 비녀를 빼자 쪽을 올린 머리가 바람에 나부끼며 흐트러 졌다. 서혜령은 달빛에 반짝이는 옥비녀를 조심스레 눈으로 가져갔다. 서령촌 에서 천인문이 선물한, 그리고 궁소미가 다시 선물한 그 비녀였다. 하염없이 바 라보던 서혜령의 눈이 일렁거렸다. '상공께선 어떻게 계실까? 고생하시는 것은 아닐까? 그래 분명 고생하고 계시 겠지. 저번에도 그렇게 맞고 계시던데.' 가슴이 아렸다. 얼굴 한번 보지 못한 것이 벌써 삼 개월 남짓. 너무도 긴 시간 이었다. 그러나 눈물 따윈 나지 않았다. 가슴이 쓰리고 답답하지만 눈물은 전혀 흐르지 않는다. '벌써 시작된건가?' 그녀는 처연한 눈으로 사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여미릉이 과거 옥녀심 법을 이야기할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일단 옥녀심법을 익히게 되면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은 사라진다. 그러 나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조금씩 천천히 사라지게 되지. 그 순간이 어느때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단지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보통 슬픈 감 정이 먼저 사라지게 된다는 거지. 듣기론 즐거움이 먼저 사라진다고 하던데 난 별로 그런 것을 못 느꼈구나. 그리고 그 다음으로 화나는 감정이 사라지게 되 지. 마지막으로..."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지금 서혜령은 옥녀심법을 사 성 정도 익히고 있었다. 가면 갈 수록 그 속도는 줄어들고 있었지만 다음 달 안으로 오 성의 경지로 들어갈 것은 확실했다. 그런 데 오늘 처음으로 감정의 표현이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될 거란걸 알 고는 있었지만 직접 대하고보니 그 충격은 너무나 크게 다가왔다. 마치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오금이 풀린 듯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도 드디어 바뀌기 시작하나 보다. 이젠 예전처럼 웃고 즐기고 슬퍼할 수 있 을까? 상공을 다시 뵐때는 웃어야 할텐데 웃지도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난, 난 이제 사람이 아니게 되는 건가?' 그녀는 과거의 기억들과 미래들로 인해 헝클어진 머리를 부여잡았다. 크게 통 곡이라도 해 보고 싶었다. 이렇게 아려오는데, 이렇게 괴로운데 눈물도 나지 않 는다. 먼 발치에서 그렇게 쓰러져 있는 그녀를 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여미릉이었 다. 그녀는 눈물이 나는지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가리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지금 그녀가 겪는 고통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 다. '그러길레 내가 뭐랬느냐? 이건 사람이 익힐 게 못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녀의 마음도 괴로움으로 찢어지고 있었다. 당장 나가서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것은 서혜령이 원 했던 것이고 그런 그녀를 이미 포기한 것은 자신이었다. '이겨내야 한다.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안된다.' 이렇게 속으로 외칠 수밖에 없는 자신이 미웠다. 그녀의 눈에 물방울이 차 올 랐다. 겨우 만난지 석 달 가량 됬지만 너무도 착실했던 서혜령이었다. 어떤 부모라도 원하는 딸처럼, 며느리처럼 조숙하고 단정하게 행동했다. 거기다 자신의 무공을 그렇게 열심히 익힐 수가 없었다. 한시도 쉬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안쓰럽기도 했지만 엄청난 속도로 익혀 가는 그 모습은 너무나도 바라던 제자의 모습이었다. 그런 제자가 슬퍼하고 있었다. 그런데 달래주긴 커녕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고 만 있어야 했다. 그런 자신이 너무도 한심했다. 아니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 이렇게 있어서는 안돼. 어떻게 해서라도 저 아이를 더욱 수렁에 넣을 수 는 없어!' 여미릉은 결국 마음을 정했다. 이것이 안된다면 어떤 것도 될 수 없는 마지막 방법이었다. 그것은 바로 천인문이었다. -45- 여미릉은 그렇게 마음을 정하자 바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소리 없이 물 러나다가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마음이 급한 그녀는 나무 위를 밟으며 달려나갔다. 앞을 막는 나무들을 피 해나갈 시간마저도 아쉬웠다. 나무 끝은 그녀의 발이 닫자 잠깐 휘어졌지만 곧 다시 원 상태로 돌아왔다. 나무의 탄력을 이용해 십 여장씩 나아가는 그 녀는 시위를 떠난 화살마냥 일직선으로 내달렸다. 그저 한 달음에 달려가 천인문을 만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 아이를 만나야 돼! 그래서 그 아이를 데리고 와야만 해! 그 아이가 말 하면 혜령이도 멈출거야. 이대로 둔다면 나중엔 더 크나큰 괴로움을 맛보게 될 것이야!' 그녀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찌푸려진 눈은 그녀가 얼마나 다급해 하는지 잘 보여 주고 있었다. 밝게 떠 있는 보름달로 인해 숲 속은 어두웠지만 그녀가 내달리는 나무 위 는 환하게 비치고 있었다. 얼마 달리지 않은 그녀의 눈에 멀리 절벽끝이 보 였다. 그녀는 더욱 힘을 내었다. 숲이 끝나는 시점에 도착한 그녀는 나무를 박찬 뒤 허공에서 회전하며 가볍 게 내려섰다. 그리고는 머리를 들어 맞은 편 절벽으로 걸어갔다. 절벽 사이는 지옥보다도 더 어두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귀곡성(鬼 哭聲)을 동반한 바람이 그녀의 귀밑머리를 흔들고 지나갔다. "이봐요!" 그녀는 공력을 모아 가볍게 외쳤다. 목소리는 절벽에서 솟구치는 바람 소리 를 타고 크게 울렸다. 그러나 동굴에선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댔다. 분명 이 정도 목소리라면 동굴안에선 얼 마든지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옥조영의 실력이라면 소리를 지르지 않 아도 알고 있을 것이다. '없는 건가? 그렇게 늦은 것은 아니지만 이 밤중에 어딜 간 모양인데. 문이 도 같이 데리고 갔나 보군.' 옥조영을 불러도 별 반응이 없자 그녀는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는 얼 마 동안 절벽 끝에 서 있던 그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공중으로 솟구쳤다. 땅을 박찬 그녀는 절벽 사이를 가볍게 건너갔다. 아래에서 불어오는 새찬 바 람에 그녀의 옷은 유난히 펄럭거렸지만 그녀는 아무 두려움도 없는 듯 했다. 맞은 편 절벽에 내려선 그녀는 동굴쪽을 향해 걸어갔다. 동굴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동굴 안을 휙 둘러 본 그녀는 다시 밖으로 나왔 다. 그가 이 밤중에 갈만한 곳을 알고 있지 못하던 그녀로서는 그냥 갸웃댈 수 밖에 없었다. 너무도 급한 마음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달려온지라 그녀는 동동 발을 굴 렀다. 그리곤 고개를 돌리며 사방을 쳐다봤다. 그러나 별 뾰족한 수는 없었다. 기다리면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녀는 그냥 동굴 앞에서 서성 대기 시작했다. 시간은 흘러 보름달은 이미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기다리던 사람들은 전혀 나타날 줄 몰랐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안 오는 거지? 혹시...'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그녀는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정신을 모으고 동굴을 살폈다. '흠! 뭔가 이상한데. 온기가 없어. 다른 것들은 다 있는데 온기는 없다? 무슨 뜻이지?' 그녀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충분히 온기가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곳은 전혀 그런 느낌이 없었다. 그 전에 왔을때 남아 있던 물품들은 다 그대로였지만 온기가 없다는 것은 이미 그들이 여길 나간지 제법 오래 됬다는 말이었다. '이사를 한 것인가? 하지만 저렇게 물건들을 놔 두고 갈 리는 없을텐데.' 그녀는 생각속에 빠져 드는지 눈을 내리 깔며 침음성을 내뱉었다. '할 수 없지. 오늘은 이대로 가는 수밖에. 오늘은 그냥 간다만 내일부터는 계속 와야겠군.' 그녀는 돌아가기로 했다. 언제까지 기다린다고 그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 라 생각했는지 다시 절벽을 가볍게 뛰어 넘어 숲으로 사라졌다. * * *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움직이는 인영이 있었다. 사방은 큰 수목들이 빽빽히 둘러싸고 있었으나 그 인영이 뛰는 곳은 나무가 없는 공터였다. 그러나 그렇 다고 뛰기 편한 곳은 아니었다. 사방에 흩어져 있는 돌덩이와 바위들은 그 공 터를 가득 매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인영은 조금도 멈칫대지 않았다. 너무나 도 익숙하게 빠져 나가는 것이다. 바로 천인문이었다. <비켜줘라> 천인문의 귀로 낯익은 목소리가 전음이 되어 들려왔다. 옥조영의 목소리였 다. 천인문은 가볍게 미소를 지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몸을 돌린 후 뒤쪽으로 달려갔다. 달려 가는 곳에는 땅 속에 몸을 뭍은 큰 바위 하나가 일부의 육체를 드러내 놓고 있었다. 천인문이 바위 위로 올라갈 즈음 나무 위에서 끽끽 대는 소리가 나며 무언가가 공터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바로 원 숭이들이었다. 원숭이들은 조심스레 내려오더니 다시 돌을 쥐기 시작했다. 옥조영은 나무 꼭대기에서 그 모습을 내려보고 있었다. 원숭이들이 돌을 쥐 는 모습을 보고 있던 그는 다시 천인문에게 전음을 보냈다. <준비 됐으니 다시 소리 질러> 말이 끝나자 멀리 바위 위에 서 있던 천인문이 큰 목소리로 숲을 떨어 울리 고는 다시 바위 밑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다시 공터를 향해 뛰어왔다. 소스라치게 놀란 원숭이들은 다시 나무위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는 공터에 서서 미소 띤 얼굴로 원숭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천인문을 향해 돌을 집어 던 졌다. -후두두둑- 수십 마리가 한꺼번에 내던진 돌은 무서운 기세로 떨어졌다. 그러나 천인문 의 얼굴엔 놀람따윈 보이지 않는다. 그저 가벼운 미소만 띠고는 이리저리 피 해 버렸다. '이젠 좀 잘하는군. 저정도면 다음으로 넘어가도 될 것 같은데.' 옥조영은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뇌리엔 천인문이 원숭이들 에게 돌을 맞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 후아주를 훔치러 왔을때 원숭이들에게 돌세례를 받은 천인문은 이 수련 에 별 호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옥조영이 그냥 있을 위인은 아니었다. 가볍게 뒷덜미를 잡은 후 원숭이들의 소굴에 떨어뜨려 버렸다. 호들갑을 떨었 지만 낮이고 해서 별 위험은 없다 생각했는지 천인문은 곧 안정을 되찾았다. 사방에서 떨어지는 돌들은 천인문에게 좋은 수련이 되었다. 옥조영에게 경공 을 배운 후 익히는 것은 여기가 처음이었지만 낮에는 쉽게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밤에는 사정이 달랐다. 삼일이 지난 후 어느 정도 경공에 익숙해 졌다 고 생각한 옥조영은 천인문을 대리고 밤에 원숭이들을 찾아갔다. 그러자 다시 천인문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님이 눈을 감고 길을 가듯 앞으로 엎어 지고 뒤통수가 깨졌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매일같이 터지는데 어느정도 익숙해진 천인문은 조금씩 솜씨를 부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달 이 지난 지금은 거의 완벽하게 피해 내고 있었다. '당연하지! 한달이나 했는데 그것도 못 피한다면 말이나 돼. 당연히 피해야 지.' 옥조영은 다음 단계를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동굴이 있는 쪽으 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왜 온 거지? 무슨 일이 있나? 아니면 술 얻으러 왔나? 흠!' 옥조영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때 밑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이 녀석들 돌 다 떨어졌나 봐요. 또 해요?" 그때서야 옥조영은 흠칫 정신이 든 듯 고개를 내려 깔았다. "아니다. 오늘은 그만하고 돌아가자." 그는 나무위에서 가볍게 발을 찬 후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자 천인 문은 쪼르르 달려와 옆에 섰다. "어땠어요? 역시 잘 피하죠?" 싱글벙글대며 물어오는 천인문에게 옥조영은 나오지 않는 미소를 억지로 지 으며 웃었다. "그...그래! 이제 그만 해도 되겠구나. 내일부터는 다른 걸 하도록 하자." 그리고는 역겹다는 듯 입술을 늘이며 고개를 돌렸다. '에고. 재능 있다는 말 한마디에 꼭 이렇게 말도 못해야 하는건지 원.' 그리고는 다시 동굴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럼 이젠 여기서 살 필요는 없겠네요? 우와 한 달만에 지긋지긋한 원숭이 소굴에서 나가는군요." 뒤를 쫄레쫄레 따라오던 천인문이 말을 마치자 바로 숲 속을 달려나갔다. "야 멈춰! 동굴로 갈 게 아니란 말이야. 서! 서란 말이야!" 옥조영은 큰 소리를 지르고는 앞서 간 천인문을 따라 달렸다. -46- 다음으로 천인문이 끌려간 곳은 바로 천명(天鳴)이라는 이름을 가진 폭 포였다. 이름과는 달리 그리 크지 않은 폭포는 원숭이 소굴과는 사십 여 리가 넘게 떨어져 있었다. 옥조영의 손짓 한 번으로 공중에 떠 오른 천인 문은 아무 반항도 못하고 눈만 찔끈 감은채 끌려갔다. 너무나도 빠른 속 도로 달리는 옥조영때문에 바람이 눈을 세차게 치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한차례 눈물을 쏟고 난 후에 천인문은 붉어진 눈을 뜰 수 있었다. 아직 사위는 어두컴컴했지만 이제 내공이 어느정도 경지에 오른 천인문이 었기에 거의 물체들은 다 보이고 있었다. 단지 너무도 빨라 휙휙 스치고 지나갔지만 말이다. '이야 어떻게 해야 이렇게 빨리 달릴 수 있는 거지? 내가 배웠던 걸로는 안되는 것 같은데.' 한참을 매달려가던 중 그런 생각에 잠긴 것은 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옥 조영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배우고 싶으냐? 배우고 싶다면 가르쳐 줄 수도 있지." "좋아요. 할아버지가 말해 준다면 당연히 배우죠." 조손이 죽이 잘 맞아들어간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옥조영은 흐뭇한 미소를 가득 띄우며 입을 열었다. "네가 배울 생각이 있다면 나도 당연히 가르쳐주지. 이번에 수련하는 것 이 너의 기초수련을 장식할 마지막 단계다. 이것을 잘 한다면 다음 본 수 련에 들어가서는 아주 쉽게 익힐 수가 있다. 하지만 못한다면 뭐 말짱 도 루묵이지." "어려운 건가 보죠?" "아니!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야. 지금까지 네가 해 왔던 수련들의 연 장선상에 있다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삼 일로 끝날 수도 있고, 한 달이 걸려도 불가능할 수도 있지." 두려운지 넌지시 물어오는 천인문을 향해 가볍게 응답한 옥조영은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번 수련이 끝나지 않으면 다음 번에 익힐 것들은 진도를 나가기 어렵다는 거지. 그리고 부수입도 있으니 열심히 해라." 그 말이 끝나자 옥조영은 다시 고개를 돌리며 앞을 보았다. '어렵지도 않고, 다음번을 위해서 반드시 익혀야 된다? 그리고 부수입? 무슨 부수입이 있다는 거지? 흠!' 옥조영의 오른팔에 뒷덜미를 잡힌 채 끌려가던 천인문은 부수입이란 말 에 귀가 솔깃했다. "다 왔다." 달리던 옥조영의 눈이 빛나며 속도를 줄였다. 무슨 말인가 하고 의아해 하던 천인문의 귀로도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리가 잡혔다. -우르르- 소용돌이 치듯 부서지는 굉음이 서서히 커져갔다. 무슨 소리인가 하고 귀를 종끗 새우고 있던 천인문의 눈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숲이 끝 나는 지점에 나타난 새하얀 물보라와 안개, 그리고 그 뒤로 굉음의 주인 공인 폭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리고 폭포를 중심으로 반짝 이는 반디불이들의 모습은 한마디로 장관이라 할 수 있었다. "아!" 옥조영의 손에서 풀려난 천인문은 크게 입을 벌리며 이 아름다움을 만끽 했다. 너무나도 신비스러운 모습이었다. "폭포 처음보냐?" "아...니요.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건 못 봤어요." 언제까지 그렇게 입을 벌리고만 있을 것 같던 천인문은 옥조영의 질문에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높이는 십 장 남짓에다 폭도 한 장도 되지 못하는, 더군다나 천명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조그만(?) 소리를 지르는 폭포다. 그러나 천인문의 가슴은 울렁거리고 있었다. 천산에서만 본 폭포도 여럿 된다. 그리고 그것 모두 이 천명폭포보다는 더 욱 크고 웅장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폭포를 보고 이런 감동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랬기에 천인문은 물안개에 옷이 젓어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그렇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입 다물어라. 조금만 더 기다리면 더 아름다울텐데 벌써 넋이 나가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조금 더 기다리면 더 아름답다고요?" "그래. 이제 시간도 다 되가니 일단 저쪽으로 가서 앉아서 기다리자." 무슨 말인지 설명을 해 주지 않고 옥조영은 폭포 옆의 바위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았다. 천인문은 여전히 폭포 앞 수연(水淵)에 서 있을 뿐이다. 옥조영이 말한 더한 아름다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바닥의 조약 돌이 환하게 드러난 물 속에 손을 넣고 차가움을 만끽하고 있던 천인문의 눈에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색깔이 들어왔다. 해가 뜨고 있는 것이었다. 동 쪽은 큰 산이 막고 있지 않아 붉은 태양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며 사방 을 온통 붉은 색으로 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은 수연까지 붉게 빛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은 옥조영이 말한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해가 더욱 치솟고 그때서야 물안개는 서서히 색을 갖추어 가기 시작했다. 일곱가 지 무지개 색이었다. 천인문의 입은 더이상 커질 수 없을정도로 벌어졌다. 언제 다시 이런 아름 다움을 볼 수 있겠는가? 반디는 서서히 사라져가지만 아직도 남아 빛을 흩뿌 리는 저 속에 더 이상 깨끗할 수 없는 일곱가지 색이 나부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더욱 볼 수는 없었다. 바위에 앉아 있던 옥조영이 소 리친 것이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멍하게 있을 거냐? 빨리 수련 시작해야지." 말을 마치자 바위 위에서 풀쩍 뛰어 내렸다. "무슨 수련을 벌써 한다는 거에요? 그냥 좀 쉬었다가 해요. 그리고 아직 밥도 안먹었잖아요." 이런 아름다움을 벌써 포기하란 말이 너무도 아쉬웠던 천인문은 입을 쑥 내 밀고 대꾸했다. "밥을 안먹었으니 수련을 해야지. 군소리말고 당장 준비해. 늦어지면 늦어 지는 만큼 배는 더 고플테니 빨리 준비 해라고." 옥조영은 더 이상 들어줄 수 없다는 투로 말하며 손을 흔들었다. "어떻게 준비하면 되는 건데요?" "흠! 그건 말이지." 서서히 다가온 옥조영은 손을 뻗었다. 그러자 천인문의 몸이 공중으로 둥실 떠올랐다. 그리고는 폭포수가 떨어지는 곳으로 날아갔다. "거기 바위가 있을 거다. 그 위에 서라." 정신없이 날아가던 천인문의 귀로 그의 말이 들리자마자 바로 엄청난 수압을 가진 물이 머리위로 떨어졌다. 천인문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물속으로 떨어 졌다. -어푸 어푸푸- 물 속에서 한참을 소용돌이에 휘말려 물을 마신 천인문은 가까스로 물에 떠 밀려 밖으로 나왔다. 그의 몸은 쫄딱 젖어 몸에 달라 붙어 있었고, 이빨들이 사정없이 부딪히고 있었다. "왜 말도 없이 던지는 거에요. 아 추워 죽겠네." 오돌오돌 떨던 천인문은 몸을 떨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옥조영은 한 술 더 떴다. "아직도 정신 수련은 안 되어 있군. 자고로 무인이란 언제 어느때 무슨 상황 이 오더라도 대응을 할 준비가 되 있어야 한다. 알겠냐? 그리고 너 물 속에 들어갔을 때 뭐 본 거 없냐?" "뭘요?" "물 속에서 물고기들 못 봤냐는 말이야." "물고기를 보든 못 보든 그게 무공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에요?" 온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는 천인문의 말투는 격앙되어 있었다. 눈을 부릅 뜨고 옥조영을 바라봤다. "무공하고 상관은 없지만 우리 아침하곤 상관 있지! 네가 못 잡으면 굶어야 하니깐 말이야." 넋을 빼고 있던 천인문을 말이 끝남과 동시에 들어올린 그는 다시 집어 폭포 중앙으로 집어 던졌다. "이번엔 바위 위에 잘 서 봐." "으악!" 외마디 비명을 토하며 날아간 천인문은 바위위에 올라섰으나 머리위로 꽂히는 수압을 이기지 못하고 굴러떨어졌다. 그렇게 시작된 수련은 하루가 끝날때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47- 여미릉이 동굴 앞을 지키고 있음을 전혀 모르는 그들은 원숭이 무리들 사이 에서 한달을 보냈을 때와 마찬가지로 폭포수에서 살기 시작했다. 삼 일동안은 식사 준비는 모두 옥조영이 해야 했다. 전혀 물에 적응을 못하 던 천인문은 물로 배를 채웠고, 그 결과 물고기는 옥조영이 다 처치했다. 그 동안 옥조영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강조하는 말이 있었다. "그러니깐 물 속에서 눈을 뜨라고. 눈 뜨는게 그렇게 어렵냐? 그냥 눈에 살 짝 힘만 주면 다 되는데." "그게 어떻게 쉽다는 거에요? 눈을 뜨면 물이 눈으로.... 으악! 난 그런 끔 찍한 고통은 하기 싫다고요." "으이그! 그럼 넌 그냥 계속 물이나 처먹어." 이런 실갱이는 그들 사이에 삼 일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결국은 아쉬운 쪽 이 질 수밖에 없었다. 물 속으로 들어간 천인문은 바닥으로 침잠한 뒤 공력을 돌려 중심을 잡았다. 등 뒤로 소용돌이 치는 물길이 사정없이 몸을 흔들었지 만 이젠 어느정도 균형도 잡을 수 있었다. '자! 이제 서서히 눈을 뜨는 거야! 뜨는 거야! 힘내자 천인문. 이압!" 한참을 그렇게 다그친 후 눈을 와락 떴다. 그러자 차가운 물이 눈으로 들어 왔다. 너무도 당황했는지 입 밖으로 숨이 뽀글대며 세어 나갔다. '읍!' 가까스로 손으로 입을 막은 후에 정신을 다잡았다. 그러자 일렁이는 앞쪽의 모습이 환하게 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또 양 옆으로 노니는 물고기들의 모 습도 보였다. 천인문은 그렇게 한참을 보고 있다가 다시 앞으로 서서히 손을 뻗었다. 물고 기를 잡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물 속에선 손이 빠르지도 않았고 물고기들도 그저 가만히 손이 닫는 것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손 밖으로 고기가 몸을 뒤집으며 빠져나가자 천인문은 다시 발을 옮겼다. 그 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쪽으로 휘청, 저쪽으로 흔들 하는 것이 어색 하기 그지 없었다. 한참동안 물 속에서 균형잡는데 시간을 보내다 숨이 막힌 천인문은 바닥을 차 고 다시 물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 "고기는 봤냐? 혹시 또 못 본거냐?" 옥조영이 물 가에서 소리를 질렀다. 천인문은 콧방귀로 응답하고는 다시 숨 을 들이켜 물 속으로 들어갔다. "어? 이젠 좀 하나 보네. 하지만 이녀석아 물 속에서 고기 잡는다는게 그리 쉬울 줄 아냐. 좀 더 고생을 해야지." 천인문이 다시 물 밑으로 사라지자 그는 바위 위로 몸을 옮겼다. 다시 물 속으로 내려온 천인문은 이제 무턱대고 손을 뻗지 않았다. 수공(水 功)을 익히기 위해 이것을 하는게 아님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음 분명히 물 속에선 움직이기 쉽지 않아. 수압에 밀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일단 하체에 중심이 제대로 서야하고 그렇게 하면서 또 돌들을 피하는 것처럼 원활하게 움직여야 돼.' 생각을 마치고는 서서히 다리를 움직였다.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조금 만 정신을 흐트리면 몸이 위로 떠올랐고, 땅에 철썩 붙어버리면 발이 제대로 놀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수는 없었다. 여기서 그만둔다면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할 것은 분명했다. 몇 번을 물 위아래를 들락 날락 하는 동안 그렇게 움직이는데만 신경을 쓰게 되자 서서히 물에 적응이 되어갔다. 그리고 제법 안정된 움직임을 보일 수 있 었다. '좋아! 이정도면 시도 해 볼 수도 있겠군.' 흡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정도는 된 것 같다고 생각되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벼락치듯 손을 뻗었다. 그러나 물고기는 아슬아슬하게 손아귀를 벗 어났다. '아! 아깝다. 조금만 손을 더 확 쥘껄. 그랬으면 팍 잡을 수 있었을텐데 말 이야.' 속으로만 입맛을 다시던 천인문은 다시 사방을 둘러 본 뒤 물살을 헤치고 이 동했다. 수많은 고기들은 별 두려움도 없는지 천인문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느 순간 기회만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그는 한 순간을 포착하고 손을 뻗었다. '얍! 앗 잡았다.' 손아귀에서 빠르게 벗어나던 물고기의 꼬리를 잡은 것이다. 그러나 물고기는 한번 몸을 비틀며 바로 손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아...안돼! 넌 오늘 내 밥이야.' 필사적인 얼굴로 고기를 바라보던 천인문은 남은 손으로 고기의 머리를 잡아 갔다. 그러나 물고기의 생존에 대한 열망이 밥에 대한 열망보다 더 컸었다. 다 른 손이 머리를 잡아 채기도 전에 물고기는 아름다운 비늘만 떨구며 손을 빠져 나갔다. '흑! 또 실패다. 이...이씨! 내가 이렇게 물러 설 줄 알고.' 다시 물 위로 뛰어오른 천인문은 숨을 들이키기가 무섭게 다시 물 속으로 잠 수해 들어갔다. 그리고는 다시 물고기를 잡아갔다. 그렇게 십 여번을 계속하게 되자 이제 어떻게 해야 잡을 수 있는지 확실히 깨 달을 수 있었다. 기를 모은 뒤 한 번에 튕기듯 앞으로 다가서며 두손으로 머리 와 꼬리쪽을 잡아채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렇게 방법을 깨닫자 물고기를 잡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다. 다섯 마리를 잡아 물 밖으로 던져 낸 후 기쁜 마음 으로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어서와라. 이젠 잘 잡는구나." 옥조영이 불 앞에서 무언가를 씹으면서 천인문을 반겼다. "뭘 드시는 거죠?" 푹 젖은 몸에서 물을 뚝뚝 떨구며 밖으로 나온 천인문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물었다. "네가 잡은 고기!" "......" 분명히 잡은지 일각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다섯 마리중 남은 것은 겨우 두 마리였고, 그 중 한마리도 이미 옥조영의 입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안돼요." 재대로 수련을 했는지 벼락치듯 옥조영에게 달려간 천인문은 옥조영의 손에 들린 물고기를 낚아 챘다. 그러나 한 입 가득 배어 문 자국이 여실히 남았다. "이게 뭐야. 앙!" 울상을 한 천인문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그냥 너 들어가서 몇 마리 더 잡으면 안되겠냐? 그럼 무공도 수련할 수 있고 일석이조(一石二鳥) 아니냐." 옥조영은 번들거리며 빛나는 입에 미소를 배어 물었다. "싫어요. 물고기 잡는게 쉬운 줄 아세요? 한 번 잡으려면 얼마나 귀찮은데." 단단히 삐진 듯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옥조영은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 어났다. "귀찮은 것은 잘 알고 있지. 하지만 말이야. 한 번 더 하면 그만큼 더 강해진 단 말이야. 알겠지?" 옥조영은 등을 보이고 있던 천인문에게 다가서더니 몸을 잡아 그냥 냅다 집어 던져 버렸다. 그러자 천인문은 허무한 손짓을 공중에 그리며 물 속으로 빠졌다. 그리고 다시 물에서 나온 건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의 손에는 예의 고 기 한 마리가 들려 있었다. "봐라! 시간이 좀 줄어들잖냐. 그렇게 하면 될 걸 가지고. 에이 요즘 젊은 것 들은 꼭 힘든 건 안하려 해요." 젖은 몸을 털며 다가오는 천인문을 보며 옥조영이 한 마디 했다. 펄떡이는 물 고기를 두손으로 소중하게 쥐고 다가오던 천인문의 눈이 커졌다. "어엇! 고기 한 마리 남은 건 어디갔어요?" 천인문은 옥조영이 자신에게 한 마디 한것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치 않았다. 단 지 마지막 남아 있던 고기 한 마리가 사라졌음이 더 중요했다. "그거? 이 뱃속으로 사라 졌지." 그러면서 손으로 불룩 튀어 나온 배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럼 난 뭘 먹으라는 거에요?" "저기 남아 있잖냐?" 옥조영은 천인문의 발치에 떨어진 물고기를 가리켰다. 그 입자국이 남아 있던 물고기였다. "저걸 나보고 먹으라는 거에요? 우욱 더러워." "더럽다니? 이 할아비가 먹은 건데 뭐가 더러워." "더럽죠. 왜 안더러워요. 저렇게 입 자국이 남아 있는데." 그들은 티격태격 목소리를 높혀가며 입싸움을 시작했다. "너처럼 작은 녀석은 조금만 먹어도 되는 거야. 먹기 싫으면 먹지마. 참 별 이상한 소리 다 듣겠구만." 옥조영은 땅에 떨어져 있는 고기를 다시 주워 가볍게 후후 불고는 다시 낼름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천인문이 물고기를 그냥 뺏어 버렸다. "나 같이 어린 애는 더 커야 되기 때문에 더 많이 먹어야 한단 말이에요." 그리고는 반대쪽의 깨끗한 면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잡아온 고기를 나무 에 꽂아 굽기 시작했다. * * * 며칠간을 동굴 앞에서 기다렸던 여미릉은 그만 묘옥으로 돌아가야 했다. 요 며칠간 서혜령의 무공을 보아주지 못했던 것이다. 처음에 무공을 익힐때 스스 로 익혔던 서혜령이었기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아도 알아서 잘 익히는 것 같 았지만 그래도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른다. 집에 돌아온 그녀는 집안 곳곳을 뒤졌다. 하지만 방 안에서 뒹굴대며 누워 있 는 백운호의 모습만 보일 뿐 묘옥 어디에도 서혜령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 바위에 간 것이리라. 그녀는 바로 바위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역시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맞바람을 맞으며 서 있던 서혜령은 휘황찬란 빛나는 도를 풀 어 가슴 앞에 내밀고 있었다. "견인배례(見人拜禮)" 두손으로 받쳐들듯 하늘로 밀어올리던 도를 수평으로 뉘면서 허리를 숙였다. 기수식이었다. 그러더니 도로 앞을 베어갔다. 풍신검법(風迅劍法)이었다. 검법을 도로 펼치는 모습은 상당히 아름다웠다. 사방으로 너울거리며 도를 갈라가는 그 모습은 마치 춤을 추는 기녀의 모습이었다. 빙글빙글 돌며 사방 으로 충천하는 도광만 아니라면 그 누구도 그것을 무공이라 하지 않을 것 같 았다. 한동안 그렇게 도를 휘두르던 서혜령이 서서히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숨을 골랐다. "수고했다. 많이 늘었구나." 뒤에서 보고 있던 여미릉이 앞으로 나섰다. 목소리에 놀란 듯 고개를 돌리던 서혜령이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사부님, 오셨습니까?" 그러나 목소리에는 반가움이 있어도 얼굴은 별 변화가 없었다. '벌써 오성의 경지로 들어갔나 보구나.'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여미릉은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얼굴엔 전혀 그런 생각따윈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 이제는 어느 정도 풍신검법에도 익숙해 진 것 같구나. 비록 검으로 펼쳐야 하는 것이지만 네 도도 얇으니 그리 어색하진 않다만은 단지 찌르는 것을 활용할 수 없다는 것은 아쉽구나." 여미릉은 자신이 본 것들 중에 어색한 점과 고쳐야 할 것들을 이야기했다. 서혜령도 가만히 그 말을 듣고 있었다. 여미릉은 긴 말을 마치고는 몸을 돌려 내려갔다. 서혜령은 수련을 계속 하 려는지 바위위로 다시 올라갔다. '빨리 그 아이를 찾아야 저 아이가 멈출 수 있을 거야. 안되겠다! 오늘 부 터는 동굴 앞에서 기다리지만 말고 돌아다녀야겠어. 이러다간 더 큰 사단이 벌어질 수도 있겠어.' 산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더욱 바빠졌다. 묘옥에서 점심을 안 차리느냐는 백 운호의 투덜거림도 그냥 무시해 버렸다. 그녀는 온 산을 헤집으며 돌아다니 기 시작했다. 산에서 산 지 십 여년이다. 왠만한 곳의 지리는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번처럼 목적지 없이 돌아다닌 것은 처음이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보는 곳도 아주 많았다. 길이 없는 곳을 헤치고 나가다 보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소롯 길도 나타났고, 산 속에 사는 회족이나 우즈벡족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목표였던 옥조영과 천인문은 보이질 않았다. 중양절이 삼일도 남지 않자 그녀는 포기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돌아 다니느라 십 여일도 넘게 묘옥으로 돌아가지도 못했던 것이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나왔던지라 아마 서혜령과 백운호의 걱정이 태산같을 것이라 생 각했다. 피로도 피로였지만 그들을 찾지 못했다는 생각에 그녀의 발걸음은 더할 나위 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열심히 찾으려 했던 옥조영과 천인문은 이미 동굴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폭포 수련은 십일 만에 끝나버린 것이다. 동굴 안에 누워 있던 천인문은 만면에 기쁨의 미소를 가득 짓고 있었다. 수 련을 한 지 처음 가져보는 휴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잔소리꾼 옥조영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욱 기쁜 천인문이었다. 천인문은 눈을 감 고 며칠 전 했던 수련을 생각하고 있었다. 물고기를 잡아 배를 채운 후 옥조영은 다시 폭포수를 뒤집어 쓰고 있는 바위 아래로 그를 집어 던졌다. 폭포 아래 자리한 바위는 겨우 반 장 남짓 되는 바 위였다. 그러나 왠일인지 전혀 깍이지 않고 평평하게 남아 있었다. 바위 위로 처음 올라 갔을 때만 해도 서 있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나 물 속에서 균형잡던 경험을 살리자 반나절도 되지 않아 뛰어 놀아도 문제 없을 정도로 달라졌다. 그렇게 되자 이젠 옥조영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폭포수를 가르 며 날아온 돌은 천인문의 무릎쪽으로 파고 들었고, 충분히 천인문을 물 속으 로 빠뜨리기 좋은 수법이었다. "이동 하기 전에 중심을 잡는 다리쪽으로 기를 모아야지. 무작정 그렇게 움 직이니까 그렇게 빠지는 거 아냐!" "그럼 할아버지가 해 봐요. 이렇게 빠르게 날아오면서도 소리도 없고, 물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는데, 그리 쉽게 피해 지는 줄 아세요?" "야이 입만 살아서 쫑알대는 녀석아. 그렇게 떠들시간에 어떻게 피해야 할지 한번 더 생각 해 봐라." 그렇게 쉬지 않고 물 속에서 살던 때가 엊그제였다. 그렇게 그들은 하루도 쉬 지 않고 싸우기 바빴다. 천인문의 얼굴에 피식 싱거운 미소가 스쳐갔다. 분명 그랬다. 원숭이하고 수련 할 당시만 해도 힘들다 생각했던 것들은 지나고 보면 너무도 쉬웠던 것들이었다. 이번 수련만 해도 별 어려운 것은 없었다. '당연하지. 이 몸이 어떤 인물인데. 그정도를 못하겠어?' 꼬고 누운 천인문의 발가락이 까딱거렸다. "야 그만 일어나라. 언제까지 그렇게 누워 있을 거냐? 빨리 다음 수행을 계속 해야지." 언제 들어왔는지 기척도 없이 나타난 옥조영이 천인문을 불렀다. "그런게 어딨어요? 수련 끝내고 어젯밤에 들어왔잖아요. 그냥 한 며칠 좀 쉬어 요." 움찔하고 놀라며 자리에 앉더니 옥조영을 띠껍게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석 달 이상 제대로 된 휴식 한 번 없이 이렇게 수련만 하려니 몸살이 날 지경이 었다. 그런데 또 수련을 시작한다는 것은 그로서는 참을 수 없는 고행임은 당연 했다. "휴식? 휴식이라고 했냐? 허, 웃기고 있네. 네가 한 것은 수련도 아니야. 그런 데 휴식이라고?" 눈을 부릅뜬 옥조영이 사방을 둘러보다 동굴 한 편에 놓여있던 몽둥이를 휘두 르며 달려 왔다. 천인문은 어마 뜨거라 하며 자리에서 일어서 동굴 밖으로 도망 쳤다. 그리고 뒤로 옥조영이 달려 나왔다. "늙은이가 이렇게 팔팔하게 움직이는데, 어디서 젊은 것이 꾀나 부리고 누워 있는 거야 앙?" "꾀라뇨? 할아버진 아무것도 하는 게 없잖아요. 그러니깐 피곤하지도 않지. 그 런데도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아니 그래도 이 놈이!" 옥조영이 번개같이 날아 들었다. 그러나 이젠 천인문도 어느정도 예상하고 피할 수 있었다. 뒤로 피하긴 커녕 가볍게 몸을 돌려 옆으로 피했다. "어쭈! 이젠 피한다 이거지." 옥조영은 놀랬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천인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심각한 얼굴로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몽둥이를 가슴쪽에 세우더니 왼 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리고는 몸에서 스물거리며 강한 기운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천인문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돌았다. 지금까지는 저런 기운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내 실력이 올라간 건가? 아니면 할아버지의 공격이 가공한 것인가?' 입 안은 이미 바짝 말라 있었다. 그러나 나오지도 않는 침을 꿀꺽 삼키며 숨을 죽였다. 옥조영은 몽둥이를 뒤로 서서히 물리더니 갑자기 외마디 소리와 함께 천인문의 신형을 향해 득달같이 치고 나왔다. "아! 잠깐 잠깐!" 수평으로 베어오는 몽둥이의 기세에 눌려버린 천인문이 허리를 푹 숙이고는 소 리 질렀다. "뭐냐?" 옥조영이 뒤로 물러나며 짧게 반문했다. 천인문은 옥조영의 발을 보고 있다가 그가 뒤로 물러서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들었다. "비겁하잖아요! 전 아직 무기 쓰는 걸 배우지도 못했는데. 그렇게 치고 오시면 제가 어떻게 대항한단 말이에요." "비겁하긴 뭐가 비겁해? 저번에도 너 나한테 맞으면서 배운 거 아냐? 이번에도 이 몽둥이로 맞으면서 피하다보면 배울 수 있어. 그리고 그게 제일 빨라." "저번에는 그래도 죽지는 않을 정도였잖아요. 근데 지금 몽둥이는 얼핏 봐도 한 방이면 골로 갈 것 같은데 맞으면서 배우라뇨?" 천인문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대꾸했다. "죽긴 왜 죽어. 내가 천류심공(天流心功)하고 만류만화상심법(萬流滿和上心法) 을 그냥 전해 준 줄 알아? 그걸로 몸을 보호하면서 맞으면 절대로 한방에 죽진 않으니깐 걱정 안 해도 돼." "그래도 할아버지가 지금 하려는 게 무슨 무공이고 구결 정도는 말해 줘야 할 것 아닌가요?" 천인문은 그저 이 순간을 모면하기만을 원했다. 그러나 전혀 옥조영이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포기하고 화제를 돌렸다. 이렇게 이야기를 끌어 가면서 시 간을 벌다보면 벗어날 기회가 올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옥조영도 그리 쉽게 넘어가지는 않았다. "너한테 내가 쓰는 검법은 한 번 이야기 해 준 적이 있는 걸로 아는데. 분명히 너도 들었고 기억을 하고 있을 줄로 아는데 천재씨. 안그래?" "하...하지만 까먹었단 말에요." "까...까먹어?" 옥조영의 눈꼬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흥흥! 까먹었단 말이지? 좋아. 까먹었다면 할 수 없지." 옥조영은 뒷짐을 지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천인문은 안도의 한 숨을 내 쉴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까먹었다면 다시 기억이 나도록 해야지. 먹은 것은 어쩌겠어. 그냥 다시 뱉어 내도록 하는 수밖에. 맞다보면 뱉어 내겠지." 옥조영은 악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얼굴로 천인문을 내려다 보았다. 천인문은 오금이 풀리는지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옥조영을 기쁘게 했다. 과거 강호에 출도했을 때 모든 무림인들이 자신을 볼때 두려워하는 그 모습이었던 것이다. 오랫만에 느껴보는 통쾌한 기분에 크게 웃어제끼고는 말 을 이었다. "자 간다." 옥조영은 다시 몽둥이를 들고는 천인문을 향해 다가갔다. -48- 천인문은 숨을 크게 들이키며 일어섰다. 지금 상태로 보아 그냥 물러설 것 같 지는 않았기에 기를 끌어 모아 급소들을 보호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면서 손으로 가슴과 배를 막았다. 옥조영은 천인문이 자세를 갖추기를 기다렸는지 느긋하게 서 있었다. 충분히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되자 몽둥이를 휘두르며 다가왔다. "춘야비접(春夜飛蝶)" 오른 발을 들고 서 있던 옥조영은 검을 베어 내리며 다가왔다. 조금 전 몽둥이에 서 피어오르는 가공할 기세는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내가 잘못 봤나? 아까는 무시무시하더니만.' 빠르기는 했지만 전혀 매서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기를 모은 손으로 가슴을베어 오는 몽둥이를 조심스레 막아갔다. 아무 변화 없이 짓쳐들던 몽둥이가 손에 닿기 직전이었다. 몽둥이는 환영만 남긴 채 엄청난 빠르기로 십 여군대의 급소를 노리고 날아왔다. 나비같이 너울거리며 혈도를 노리고 들어오는 기세에 안색이 변한 천인문은 어떻게 막아야할지 몰라 그냥 뒤로 몸을 빼며 피했다. 그러나 그것은 더욱 악수였다. 몽둥이는 더욱 많은 환영을 남기며 천인문을 압박해 들어왔다. 한 번 피함에 공 격받는 곳이 무려 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그냥 이렇게 피하기만 해서는 안되겠 다는 생각에 천인문은 정신을 집중하며 찔러오는 그림자들을 모두 손으로 막았 다. -타닥 퍼퍼퍼퍽- 혈을 찔러오는 것 중 손으로 막아낸 것은 겨우 하나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꺼 지듯이 사라지며 급소를 치고 갔다. "아야." 기를 모으고 막았건만 몸을 때리고 가는 몽둥이보다 손끝이 더 아팠다. 몽둥이 를 어깨 위에 올린 옥조영이 다시 뒤로 물러섰다. "그냥 그렇게 대뜸 막는게 어디있냐? 넌 장법도 안 배웠잖아." "그럼 어떻게 막으라는 거에요? 그냥 피하기만 한다고 될 것도 아니고." 고개를 쳐들고 대드는 모습을 한심하다는 꼴로 보고 있던 옥조영이 한 마디했다. "원숭이하고 수련 한 것 벌써 다 잊어버렸냐?" "그건 그냥 암기 피하기나 보법을 익힌다고 한 것 아닌가요?" "보법만이 아니다. 넌 잘 모르겠지만 몽둥이가 네 몸으로 다가가는 속도에는 분 명 차이가 있었다. 이제부터는 그걸 눈만 아니라 온 몸의 감각으로 알아차려야 된 다. 그리고 또 상대가 장병을 쓸수록 품안으로 파고들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언제 까지나 상대에게 주도권을 내 주게 된다. 알겠느냐?"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열심히 듣고 있던 천인문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자세를 잡았다. 그 모습에 옥조영도 다시 몽둥이를 들어올렸다. 옥조영을 상대하기는 쉽지 않았다. 말이 속도차이였지 거의 눈으로는 알아차릴 수도 없는 미세한 것이기에 많이 맞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품속으로 파고든다 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그나마 힘을 줄이지 않았으면 한방에 나가떨어져 버렸을 것이다. 한 시진이 지나자 이번에는 서로 몽둥이를 들고 붙었다. 이번 수련은 앞서손으로 만 막았던 것에 비하면 월등히 편했다. 어느 정도 동작이 눈에 익었던 것도있었지 만 길이가 대등해졌던 것이다. 일단 천인문은 다가오는 옥조영에게 아까 당했던 방법 그대로 공격을 했다. 그러 면서 눈에익숙해졌던 동작들을 서서히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초식명 따윈 상관없었다. 이름을 모른다고 공격을 못하거나 방어가 안되는 것이 아니었 다. 그저 어떻게 하면 더욱 효과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지가 더욱 중요할뿐이었다. '그래 바로 그거다.' 속으로 맞장구를 치던 옥조영은 몽둥이가 가슴과 배를 동시에 노리고 들어오자 막 는 대신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자 몽둥이가 놓치지 않고 찔러 왔다. 옥조영은 손 목을 돌리며 몽둥이를 밖으로 쳐내며 다시 한 발 물러났다. 지금이 천인문에게 얼 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계속 밀고 들어와라.' 옥조영은 너무도 기분이 좋았다. 오늘까지 수련을 해 왔지만 천인문이 이 정도로 몰입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 있는 것이다. 역시 천인문은그 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밀고 들어왔다. 몸에서 풍기는 기운이 조금씩 거세어지 고 있었다. 아마 그 자신도 모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렇게 수련을 계속한다면무 공 실력은 몇 단계를 가볍게 뛰어 넘을 수 있을 것이다. 옥조영은 그런 기세를 꺾 어 버리고 싶지 않았기에 뒤로 물러서며 천인문의 기세를 올려주고 있는 것이었 다. 과연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천인문의 기세는 점점 커져갔고, 동작에서보이 는 어색한 느낌은 계속 사라지고 있었다. 거기다 자신이 펼치지 않은 투로도 펼쳐 내고 있었다. 옥조영은 그런 천인문을 말릴 생각은 없었다. 대결에서 정해진 초식 그대로 펼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고양이란 쥐만 잘 잡으면 되지 색깔을 따질 이유는 없는 것이다. 처음에는 서로 공격을 주고받다 옥조영이 뒤로 후퇴를 시작한 이후 천인문은 쉬 지않고 몰아쳤다. 그렇게 공격하던 천인문은 이제 모든 것을 잊고 있었다. 초식도 무시했고, 운기법도 잊었다. 다만 자신의 기분에 모든 것을 내 맡긴 채 팔이 가고 다리가 이끄는 대로 놔 둘 뿐이었다. * * * 너무 허전한 마음에 기운없이 돌아오던 여미릉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무슨 소리 가 귓가에 들려온 것이다. 고개를 든 그녀는 자신이 어디까지 온 것이지 그제야 알 수 차렸다. '그들이 왔나 보군. 드디어 볼 수 있겠어.' 언제 그랬냐는 듯 여미릉의 몸은 부유 같이 떠서 날아갔다. 눈앞을 가로막는나뭇 잎을 손으로 쳐내며 내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절벽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곳에 서 그녀는 옥조영과 천인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니...' 여미릉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수련을 하고 있던 천인문의 모습이 너무나도 달라 졌기 때문이었다. 서혜령보다 자질도 떨어지고 끈기 같은 것이 보이지도 않았었기 에 별로 달라질 거라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완전히 자신의생각 은 오판이었다. 단순했지만 군더더기 없는 공격은 어딘가 매섭기까지 했다. 자신 의목적을 망각한 그녀는 그렇게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그녀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절벽 끝으로 걸어갔다. 천인문을 상대하고 있던 옥조영은 다급해졌다. 그녀가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을 때부터 알고 던지라 눈꺼플이 떨렸다. '왜 하필 이때 나타난단 말인가.' 지금은 안된다. 이런 기회는 평생 한 번 오기 힘든 기회였다. 그런데 그녀가훼방 을 놓는다면 이 깨달음은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도 나쁘진 않았지 만 될 수 있다면 최대한의 성과를 얻는 것이 좋은 것이다. 조금만 더 천천히를 열심히 외치는 옥조영의 심정과는 달리 여미릉은 절벽 끝에 당도하자 바로 몸을 날려 절벽을 뛰어 넘었다. 그제서야 천인문의 눈에 다시 생기 가 돌았다. 어지럽게 휘날리던 손놀림도 어느새 멎어 버렸다. '내가 뭘 한거지?' 멍하게 서서 과거를 더듬던 천인문의 귀로 여미릉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동안 잘 계시었소." "어서 오시오. 이렇게 뵌 것이 얼마만인지, 하하하!" 옥조영은 기분과는 달리 얼굴에 호탕한 웃음을 머금으며 그녀를 반겼다. "그래, 이렇게 찾아오신 연유라도 있소?" 여미릉의 얼굴에 시름이 가득함을 알아본 옥조영이 물었다. -49- 그녀는 가볍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오늘은 저 아이를 뵈러 왔습니다." "문이 녀석을요?" 옥조영의 안면에 의아함이 가득해졌다. 그러나 물어 볼 순 없었다. 묻기도 전에 이미 그녀는 천인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문아!" 천인문은 헝크러진 머리를 어느정도 정리해 나가고 있었다. 자신 의 몸놀림과 행동, 손짓 하나하나가 조금씩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 었다. 그렇게 정신을 빼고 있던 천인문은 그녀의 부름에 다시 정신 을 차릴 수 있었다. '앗 다시 까먹었다. 아니 누가 날 부른 거야?'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자신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는 여미릉이 보였다. 어딘지 싸늘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흠칫 겁을 먹은 그는 인상을 풀며 물었다. "어쩐 일이세요?" "너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왔다." "부탁이요?" 천인문은 호기심을 담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미릉은 뒤 를 따라오는 옥조영에게 싸늘한 눈빛을 준 후 어깨를 잡아끌며 동 굴 쪽으로 걸어갔다. 동굴 안에 들자 그들은 마주보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널 보는 것이 이제 넉 달 정도 된 것 같구나." 여미릉은 가벼운 인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 서혜령이 어떤 심법을 익히고 있으며 그 부작용은 어떤 것인지, 또 지금 그녀가 얼마나 익혔는지를 하나씩 꺼냈다. 워낙 급한 마음에 두서 없이 말 했지만, 듣고 있던 천인문은 너무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럼 왜 안 말리는 거에요?" 이야기를 듣던 천인문은 그녀의 멱살을 잡고 주먹이라도 내지를 듯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말리기도 해 봤다. 그러나 요지부동(搖之不動)이구나." "방법이 있겠죠? 분명 다른 방도가 있을 거 아네요." 눈물이라도 흘러내릴 듯 인상을 찌푸린 천인문이 그녀에게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이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그녀는 눈을 들어 천인문 을 향했다. "방도는 있다." "....?" "그건 바로 너다." 숨을 죽이며 그녀를 보고 있던 천인문을 향해 단정적인 대답을 했 다. "저요?" "그래 바로 너. 너말고는 그 아이를 말릴 방도가 없다. 이게 마지 막 방법이다." "마지막 방법이요?" "그래, 이것이 정말 마지막 방법이다. 이건 가다가 말해 줄테니 일 단 가도록 하자." 여미릉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인문도 황급히 일어났다. 그 들이 동굴 앞으로 걸어 나갈 때였다. 옥조영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어디로 간다는 말인지..." "동굴 앞에서 듣지 않았나요? 이미 다 들었으면서 뭘 그렇게 다시 묻는 거죠?" 특별히 그 이야기를 못할 것도 아니었고 그의 실력이라면 어떻게 해 서라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그가 엿듣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그를 제지하지 않았었다. 옥조영은 들켰다 생각되자 난처한 얼굴로 딴청을 부릴 수밖에 없었 다. 여미릉은 천인문의 손을 잡고 그를 비켜갔다. 싸늘한 얼굴로 자신 의 앞을 지나갔지만 그들을 제지할 수는 없었다. 분명 무어라고 말을 해서라도 잡아야 했는데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여미릉은 천인문과 함께 가볍게 절벽을 넘어갔다. 그리고는 다시 급하 게 숲으로 달려갔다. 급하게 달려가던 그녀는 어딘지 손이 가볍다는 생 각에 천인문을 돌아보았다. 끌려오다시피 달려왔던 처음과는 달리 제법 열심히 보법을 밟고 있었다. 아니 보고 있을수록 더욱 능수능란해져 가 고 있었다. 천인문도 처음에는 거의 끌려가다시피 한 터라 그녀의 속력을 따라 잡 는다는 것이 상당히 어려웠다. 그러나 처음과는 달리 시간이 지나자 조 금씩 익혔던 경신술을 쓸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거의 완벽에 가까 워졌다. "네가 일단 그 아이를 본다면 말리도록 해야겠지만 그래도 그 아이가 듣지 않을 땐 특단의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다." 여미릉은 자신의 걸음을 잘 따라오는 천인문에게 말을 걸었다. 천인문 은 열심히 따라오다 그녀를 보며 반문했다. "특단의 방법이요?" 말을 하자 기가 흩어지는지 바로 속도가 떨어졌다. 여미릉은 힘을 주어 천인문의 손을 잡아 끌며 속도를 늦추었다. "그래, 옥녀심법은 한번 올라가면 시간이 지나더라도 끌어내리기는 상 당히 어렵다. 그렇다고 계속 두고 볼 수만도 없지. 일단 멈추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그렇게 해서라도 더 이상의 폐해는 막아야지. 비록 그 아이가 네 말을 듣고 멈춘다고 하더라도 이 것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거다." 그러면서 그 방법을 하나씩 설명했다. 듣고 있던 천인문은 얼굴이 빨갛 게 달아오르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 방법이란 것은 바로 같이 잠을 자 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수준을 떨어뜨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더 이 상은 익혀도 상승의 효과는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여미릉의 설명이었다.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천인문과는 달리 여미릉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 을 하며 천인문을 이끌었다. 이렇게 된 것도 분명 옥녀심법 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다. 백운호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은 얼음보다 차가운 여인 이 되 있었을 것이다. 과거를 떠올리던 그녀는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내 달리던 그들은 곧 묘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방에서 뒹굴고 있는 백운호만 보일 뿐 서혜령은 보이지 않았다. 여미릉 은 바위 쪽에 그녀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는 천인문의 손을 잡고 다시 몸을 날렸다. 뒤에서 여편네라 욕하는 백운호의 욕이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곧 그들은 큰 바위에 도달했다. 그리고 여전히 그 위에 앉아 있는 서 혜령을 볼 수 있었다. "난 돌아가겠다. 저 아이를 말릴 수 있는 것은 너뿐임을 명심해라." 어느새 천인문의 얼굴에선 붉은 빛이 사라졌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 후 되돌아가는 그녀를 배웅했다. 그녀가 저 멀리 사라질 무렵 천인문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앞을 막는 나뭇가지를 살며시 밀치고는 서혜령 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내공 수련 중인지 가만히 앉아 있었다. 과거 석실부터 잘 알고 있었던 일이었기에 천인문은 그녀의 뒤에 살짝 앉아 그녀의 수련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바위에 앉아 있던 서혜령은 뒤에서 들리는 걸음 소리에 흠칫 놀랐다. 분명히 자주 들었던 여미릉의 발자국 소리와는 사뭇 다른 것이 있었다. 그러나 운기를 멈추진 않았다. 억지로 멈추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 었기에 그저 다가오는 사람이 기다려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다행히 그쪽도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마음이 편해진 그녀는 정신을 모으고 기 를 모았다. 완전히 단전으로 기를 모은 후 눈을 떴다. "색시야 일어났어?" 천인문이 그녀에게 얼굴을 내밀며 물었다. 서혜령은 눈을 믿을 수 없 었는지 크게 떴다. "상공 어떻게 된 건가요? 지금 여기 계시고?" 말을 하고는 천인문의 몸을 낱낱이 살폈다. 그러고 보니 넉 달 전과는 완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키도 상당히 커진 것 같았고, 눈빛이나 목소 리도 좀 굵어진 듯 했다. 안 보는 사이 많은 변화가 일어난 지라 그녀는 계속 그렇게 천인문을 보고 있었다. "색시야! 옥녀심법인가 뭔가 하는 걸 익힌다면서. 그거 익히지 마. 날 생각한다면 그냥 그만 둬." 서혜령은 처연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천인문을 내려다보았다. "상공! 그럼 제가 딴 남자를 바라보는 것이 화가 나지 않으세요?" "화가 나. 화가 난다구! 하지만 색시가 이상하게 되는 건 더 화나. 그 때 그 이상한 녀석을 보고 있는 색시가 싫었지만 색시가 저 여 아줌마처 럼 날 싸늘하게 바라보는 건 더 싫어. 그러니깐 제발 그거 그만 익혀. 알았지?" 제법 커진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그 모습에 서혜령은 자 신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마음을 정하기 어려웠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천인문은 계속 그녀를 졸라댔다. "뭐 그렇게 고민할 게 있어. 그냥 당장 안 익히겠다고 말하면 되지. 무 조건 익히지 마. 안 그러면 나 정말 색시 안 볼 꺼야." 서혜령은 다시 천인문을 보았다. "그럼 상공께선 제가 그때처럼 되면 어쩌실려구요?" "상관없어. 그땐 내가 바보 같아서 그 녀석을 때려주지 못했지만 이번 에는 내가 정말 색시를 지켜줄꺼야. 이젠 나도 강해졌다구. 그때처럼 때리지도 못하는 일은 더 이상 없어." 그녀의 마음이 조금 돌아선 것 같자 천인문은 다시 으스대었다. 그 모 습을 보고 있던 서혜령의 눈에서 자신도 모르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 다. "어 색시야 울지마라구. 내가 제일 싫은 게 우는 거야. 그러니깐 당장 그쳐." 그제야 서혜령은 자신의 뺨이 젖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얼른 손을 들 어 뺨을 닦고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네! 안 익힐게요. 이젠 더 안 익힐 테니 걱정 마세요." 그녀의 말에 천인문의 얼굴이 활짝 폈다. "정말! 우와 색시야 고마워." 만세를 부르듯 두 팔을 번쩍 든 후 서혜령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녀 도 천인문을 가볍게 끌어 앉았다. 숲 속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한 그림자가 입을 가리고 울고 있었다. 여미릉이었다. 돌아가는 척 하다 되돌아온 후 숲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 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줄곧 그들을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번 일이 예상외로 쉽게 끝나 버리자 너무도 기뻤다. 진작 이렇 게 하지 못한 자기가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한참을 그렇게 울다가 눈물을 거두고는 다시 묘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혜령의 방에 준비해야할 것 이 몇 가지 있었던 것이다. 비록 더 이상 익히지 않는다고 했지만 훗날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아예 첫날밤을 확실히 보내게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이제 이번 일은 완전히 종 결짓게 되는 것이었다. 천인문과 서혜령은 바위에 앉아 그렇게 한참을 끌어안고 있었다. 산들바 람이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고, 푸른 하늘은 너무도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 다. 어디선가 바람에 날린 낙엽 하나가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 벌써 단풍이 들었네.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갈 줄 정말 몰랐어." 서혜령의 품에 안겨 있던 천인문이 벌떡 일어섰다. 옆에 떨어진 낙엽을 주워 그녀에게 내밀었다. 천인문의 손에서 넘겨받은 단풍을 서혜령은 어 딘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쳐다봤다. "그렇군요. 정말 아름다워요. 이렇게 빨간 물이 든 단풍이라." "내가 볼 땐 색시가 더 예뻐." 천인문은 그녀의 얼굴에 바짝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확실히 그녀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어딘지 모르게 고아한 미소와 서늘한 기품이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그 둘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조화가 되어 있어 예전보다 더욱 그녀를 아름답게 보이게 하고 있었다. 한참을 웃고 놀던 그들은 바람이 차가워지자 바위를 내려왔다. 서로의 손을 맞잡고 묘옥으로 내려온 그들은 예상치 못한 광경에 깜짝 놀랐다. 앞마당에는 중추절 때 본 음식이 한 가득 차려져 있었고, 그 옆으로는 침을 흘리는 백운호와 여미릉이 얼굴에 불만이 가득한 옥조영과 함께 그 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너라. 좀 늦었구나." 여미릉이 가볍게 인사를 하며 그들을 맞았다. "사부님! 이게 어떻게 된 건가요? 왜 며칠동안 보이지 않으셨어요? 그 리고 이건 또 뭐죠? 오늘이 무슨 날인가요?" "숨 넘어 가겠다. 일단 어서 와 앉아라. 여기 기다리시는 분들이 계시 지 않느냐?" 여미릉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서혜령을 웃으면서 자리에 앉혔 다. 그들이 자리에 앉자 그 직후 식사는 시작되었다. 백운호는 식사를 하느라, 서혜령은 여미릉과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천 인문과 옥조영은 신경전을 펼치기 바빴다. '요놈 좀 보게. 한 마디도 없이 나가더니 이젠 저렇게 뻣뻣하게 날 쳐 다 봐.' 천인문은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아이 참 배고파 죽겠는데 날 왜 저리 째려보는 거지? 그냥 먹고 이야 기하면 안되나?' '어쭈 날 그렇게 바라본다 이거지. 오냐 알았다. 나중에 너 호되게 한 번 당해 봐라.' 천인문의 불만에 찬 눈빛에 옥조영은 서슬이 퍼렇게 눈을 째려보았다. 그제야 천인문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저런 눈빛을 했을 땐 그저 쥐 죽은 듯 지내는 게 제일 좋다. 천인문은 고개를 푹 떨구었지만 그의 눈빛 은 여전히 목덜미를 따갑게 찌르고 있었다. 분위기를 알아차린 여미릉이 옥조영에게 음식을 밀자 한 숨을 놓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인데 오늘 이렇게 거나하게 차린 것인 지요?" 옥조영은 고기를 한 입 가득 물어뜯으며 물었다. "별 일은 없답니다. 단지 오늘 이 아이들에게 뜻 깊은 날이 될까 해서 이렇게 차린 거지요." 그러면서 그녀는 서혜령을 보았다. 식사를 하고 있던 서혜령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여미릉은 말을 마친 후 궁금하 게 바라보는 그들을 놔두고 천인문을 살짝 한 번 본 후 식사를 시작했다. 그들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묵묵히 식사를 했다. 저녁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백운호는 이미 여미릉에게 말을 들은 것인지 그저 입을 닦고는 숲으로 사라졌다. 사라지기 전에 살짝 서혜령을 보며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그가 사라지자 여미릉은 마당에 놓인 음식 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서혜령도 먹던 것을 그만 두고는 그녀를 도왔다. "오늘은 치우지 않아도 된다. 그냥 네 방에 들어가서 쉬도록 해라." "하지만 사부님!" 서혜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 식사가 끝나면 뒷정리는 자신이 했기 때문이다. "그냥 들어가래도. 어서! 그리고 대협은 절 잠시 보죠." 서혜령을 방으로 밀어 넣다시피 하고는 아직도 입을 우물거리는 옥조영을 끌었다. 여미릉의 손에 끌려 그는 더 이상 마당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서혜령은 그들이 사라지자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천인문이 그녀를 끌었다. "색시야. 여 할머니가 그냥 들어가라잖아. 그럼 들어가면 되지." 그리고는 발을 돌렸다. "상공! 그쪽이 아닌데요." 손을 잡힌 서혜령이 말을 하자 천인문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보았다. "어? 그럼 어딘데." "이쪽으로 오세요." 이번에는 그녀가 천인문을 끌고 마당뒤로 돌아갔다. 그러자 그 곳에는 작 고 예쁘게 지어진 조그만 묘옥이 나타났다. "우와 이거 새로 지은 집이네. 할머니가 색시를 위해 지어준 건가?" 입을 벌리고 감탄을 하던 천인문이 방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서혜령 도 그를 따라 바로 방으로 들었다. 방 안에는 이미 금침이 펼쳐져 있었고, 맞은 편에는 조그만 술상이 놓여 져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서혜령은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방이 이상하게 되어 있자 방을 휭 하니 둘러 보았다. 이미 알고 있던 천인문이었지만 이렇게 꾸며진 방 때 문에 쑥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는 어쩔 줄 몰라했다. "음... 색...시야... 이거... 할머니가...." 말을 하다 말고 다시 그녀를 조심스레 쳐다 본다. 그러다 서혜령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푹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 모습에 서혜령은 머릿속에 무엇 인가 떠올랐는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럼... 이게 혹시..." "으...응! 색시도 뭔지 알겠지?" 천인문도 그제야 다시 머리를 들었다. 두 말더듬이들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 천인문이 먼저 술상의 앞에 앉았다. 그러자 서혜령도 상기된 얼굴로 맞은 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 이거 후아주잖아. 이야 맛있겠다." 천인문은 바로 술병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잠깐만요 상공! 제가 따라 드릴께요." 그녀는 손에 든 술병을 뺏었다. 천인문이 잔을 드는 것을 보자 술병을 든 손을 내밀어 잔에 따랐다. "야! 이거 정말 맛 좋다. 이렇게 맛있는 걸 넉 달이나 못 마시고 있었다 니. 오늘 왕창 취해 봐야지." 천인문은 다시 술잔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미 아까의 긴장은 온데간데 없다. 그런 모습에 그녀는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천인문의 아내가 된 이상 언젠가는 그에게 안길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오늘 이런 일을 당하자 상당히 당황한 것이었다. 서혜령은 긴장이 풀리자 살짝 미소를 짓고는 다시 천인문의 잔을 채웠다. 그리고 입으로 가져가는 천인문을 말렸다. "상공! 저도 한 잔 주시겠습니까?" 그녀도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그러자 천인문은 손으로 자신의 이 마를 쳤다. "아차! 내 정신 좀 봐. 색시야 미안해." 쑥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그녀의 잔에 술을 부었다. 잔이 다 차자 그들 은 살며시 잔을 부딪힌 후 입으로 가져갔다. 알싸한 술맛을 즐기는 천인 문과는 달리 서혜령은 쓰디쓴 약을 마신 듯 눈살을 찌푸렸다. 잔을 다 비 운 천인문이 입을 열었다. "맛있지? 이런 맛에 술을 먹는 거야." "맛...있네요." 억지 웃음을 지으며 천인문을 바라보며 대답하는 서혜령이었다. 그 모습 에 웃음을 짓던 천인문은 다시 잔을 내밀었다. 그녀는 다시 술병을 들었다. 그러나 안에는 술이 더 남아 있지 않았다. 첫날밤을 위한 여미릉의 배려였 다. "상공! 술이 다 떨어졌네요. 오늘은 그만 드시는게 어떠신지." "벌써? 에이 술맛이 막 나려는 참인데. 할머니도 이게 뭐야. 좀 채우려면 꽉 채우지. 감질나게 말이야." 술잔을 탁 하고 상위에 내렸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다. 서혜령이 상을 위로 밀어 올리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천인문은 그녀가 다가오 자 멋쩍은 듯 고개를 돌렸다. -훅- 방을 밝히던 초가 서혜령의 손에 의해 꺼졌다. 그리고 사르륵 거리는 소 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천인문은 아내의 옷은 남편이 벗겨주는 거라는 단 목미령의 말이 떠올랐다. "색시야 잠시만 내가 벗겨 줄게." 천인문은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갔다. -헉- 어디를 만졌는지 그녀의 숨 가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시 조용해 졌다. "어서 오시구랴." 숲의 한적한 공터에 술상이 제법 거나하게 차려진 곳에 앉아 있던 백운 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미릉과 함께 나타나는 옥조영에게 함박 웃음 을 띄고 맞이하자 옥조영도 크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 백형도 이미 알고 계셨나 보군요." "당연하지요. 저 여편네가 말 해 주지 않았을 리가 있소?" 웃음을 띤 그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서로 잔을 들어 마시기 시작했다. 이미 여기까지 오는 동안 여미릉에게 이야기를 들었던 옥조영은 무슨 일 로 자신을 끌고 갔는지 알게 된 것이다. "전 잠시 집에 갔다 다시 오겠습니다. 많이 들고 계세요." 여미릉은 그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후 몸을 돌려 묘옥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그녀가 가던지 말던지 상관하지 않고 그냥 술을 마실 뿐이었다. 이미 옆에는 몇 동의 술이 놓여 있었다. "이 술은 어디서 난 건가요? 상당히 맛있군요." "그럼 저 마누라가 술 하나 담지 못하는 쑥맥으로 알고 계셨소? 지금까 지 아깝다고 여편네가 꺼내주지 않았다 뿐이지 십 년 전에 만들어진 거 란 말이오. 마셔보면 알겠지만 전혀 후아주에 떨어지는 술은 아니오. 근 데 오늘 십 년 만에 이렇게 마실 수 있게 되다니 우하하하. 자 오늘 미 친 듯이 마셔봅시다." 술은 사람을 친하게 해 주는 능력이 있다. 과거 그들의 사이에 있던 감 정의 골은 술을 마시기 시작한 지금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안주도 먹지 않고 그저 한잔씩 주거니 받거니 하던 그들은 여미릉이 다시 숲으로 왔 을 무렵 머리를 땅에 처박고 꼬꾸라졌다. -50- 그들을 한참동안 고민스런 눈으로 보고 있던 여미릉은 양쪽 에 하나씩 들었다. 그냥 둘을 옥조영의 동굴에 떨구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동굴에 도착한 그들은 후아주의 냄새에 잠을 깼고, 이번에는 여미릉까지 잡아서 같이 술을 비웠다. 동 굴 안에 있던 후아주는 무려 6독. 안주도 없이 그저 퍼부은 술 은 한 시진도 되지 않아 다 동이 났고 고주망태가 된 셋은 수 마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들이 다시 깨어난 것은 다음날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제일 먼저 일어난 것은 여미릉이었다.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 그녀였 지만 어제는 무려 한 독이나 비워야 했다. 어찌나 둘이 손발이 맞는지 전혀 도망칠 구석이 없었기에 마음을 다잡고 술을 마시며 공력으로 술기운을 빼내긴 했지만 그래도 쓰러지고 만 것이었다. 아픈 머리를 흔들며 밖으로 나갔다. 이미 하늘의 해는 서쪽으로 많이 기울고 있었다. 맑은 공기를 마시니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시 다듬고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아까는 맡지 못했던 술내음이 동굴안에 진동하고 있었다. 그리 고 어처구니 없는 모습으로 동굴 벽에 쳐박혀 잠을 자고 있는 두 사내들도 보였다. 한심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 흔들던 그녀는 그들에게 다가가 서 흔들며 깨웠다. 그러나 전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럴 만도 했다. 그들은 운기를 해서 술기운을 밖으로 빼낸 그녀와 는 달리 그저 마시기에만 열중했다. 그 결과 인사불성이 되어 쓰 러졌던 것이다. 그녀는 다시 머리가 흔들며 동굴 밖으로 나와 버렸다. 안그래도 동굴 안에 찌들린 술냄새로 인해 머리가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거 기에다 깨워도 일어날 줄 모르는 남자들의 작태들로 인해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삼일 쯤 쳐박아 두면 알아서 일어 나겠지. 그건 그렇고 저 아이 들은 잘 잤나 몰라.' 찌푸려진 얼굴에 다시 슬그머니 화색이 돌았다. 하늘에 떠 있는 해 를 본 후에 동굴을 떠나 묘옥으로 발길을 옮겼다. 가는 길에 토끼 한 마리와 이름 없는 새 두 마리를 잡았다. 아침이라고 부르기 뭐한 것이었지만 식사거리라도 가지고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가 도착했을 땐 묘옥은 아주 조용했다. 서혜령의 방으로 가볼 까 하다 쓴웃음만 지으며 돌아섰다. 그녀의 방에는 아무런 기척 따 윈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벌써 수련하러 갔나? 하긴 이렇게 늦게 일어날 아이가 아니지. 그 래도 오늘 같은 날이면 그저 쉬는 게 좋을 텐데.' 여미릉은 사냥감을 부엌에 가져다 놓은 후 바위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바위에도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간 거지? 특별히 갈 곳도 없을텐데.'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그녀가 갈만한 곳을 하나씩 떠올렸다. 그러나 사냥을 위해 돌아다녀야 한다는 것말고는 특별히 그녀가 갈만한 곳은 떠오르지 않았다. '돌아가 있자. 그러면 돌아오겠지.' 다시 발길을 묘옥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 그녀는 토끼와 새들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냥 기다리는 것보단 요리라도 하는 편이 나을 듯 해서다. 이리저리 손을 보아 찜통에 올린 후 그녀는 다시 한숨을 돌렸다. 이제 다 되기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니 심심해졌 다. 무엇을 할까 하고 생각하던 그녀는 서혜령의 방에 들어갔다. 방은 예상대로 엄청나게 어지러져 있었다. '쯧쯧! 좀 치워두기라도 하지.' 생각은 했지만 방안은 마굿간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여미릉의 얼굴엔 희미한 미소만 떠오르고 있었다. 이불을 정리하다 무 엇을 본 것인지 얼굴이 달아오른 그녀는 숨을 내쉬고 이불을 놓았다. 손을 털고 밖으로 나온 연후에야 안색을 가라앉혔다. '이제 모든 일이 다 잘됐음이야. 그저 이젠 마음 편히 지낼 수 있겠 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어지러진 방을 다 치운 후에 편히 쉴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해가 떨어졌 음에도 그들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서서히 걱정이 되기 시작 했다. 이미 식사시간이 지났음에야 당연한 일이었다. '식사시간에 늦은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안절부절못하며 방안을 돌아다니다 방밖으로 나왔다. 이미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 팡질팡했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할지, 찾으러 나가야 할지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더욱 지나자 마냥 기다릴 수만 없다고 생각 했다. 기를 온몸에 돌린 후 그녀는 산을 타기 시작했다. 평소 잘 가는 사냥터 를 중심으로 그들을 찾았다. 많은 동물들이 그녀에게 놀라 흩어졌지만 그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혼자서는 찾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 그 녀는 바로 동굴로 내달렸다. 순식간에 도착한 그녀는 동굴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여전히 두 남자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여 미릉의 눈꼬리가 하늘로 올라갔다. '누구는 발에 땀이 나게 돌아다니는데 아직도 자고 있단 말야?' 화가 하늘로 치민 그녀는 바로 발을 들어 백운호의 옆구리를 냅다 차 버렸다. -억- 단잠을 자다 날벼락을 맞은 백운호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동굴 바닥을 굴러다녔다. "뭐야! 누가 내 옆구리를..." "나다!" 충열된 눈을 비비며 인상을 쓰던 백운호는 여미릉의 서슬퍼런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지금 애들이 없어졌는데 그렇게 잠이 와?" "내가 잠자고 있었는데 애들이 없어졌는지 있는지 어떻게 알아? 그리 고 깨워도 어떻게 발로 차냐? 손으로 깨우지." "잔말 말고 일어나서 빨리 애들이나 찾아." 머리를 돌리며 군시렁대는 백운호의 귀를 잡아 일으켰다. 백운호가 투 덜대며 일어나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시끄러운 소리에도 동굴 구석 에 처박혀 있던 옥조영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고 있었다. "저 사람도 깨워서 같이 찾아 봐. 나도 더 찾아 볼테니깐." 백운호에게 협박하듯 이야기 한 후 그녀는 밖으로 나왔다. 얼마 되지 않아 옥조영은 백운화와 같이 밖으로 나왔다. 눈이 동그랗게 떠진 것이 상당히 놀란 듯 했다. "애들이 없어졌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집에 있지 않았소?" "집에도 없어요. 혜령이 그 아이가 갈 만한 곳은 다 가봤어요. 하지만 보이지 않더군요. 아마 문이 녀석이 가는 곳에 갔는지도 몰라요. 일단 그쪽으로 뒤져봐야겠어요." "알겠소! 일단 내가 몇 군데를 알고 있으니 그쪽으로 가 봅시다." 말을 마치자마자 그가 벼락처럼 앞으로 내달렸다. 옥조영의 뒤를 따라 그들도 같이 몸을 날렸다. 옥조영이 예상한 곳은 그가 무공을 가르쳤던 곳들이었다. 그러나 원숭 이들이 모인 곳이나 천명 폭포에도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간 거지? 분명히 여기 말고는 갈 곳이 없는데." 따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여미릉에 떠밀려 사방을 둘러본 옥조영은 머 쓱함을 이기지 못하고 뒤통수를 긁었다. "이제 그 아이들도 어른인데 별 일 있겠소? 무공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그 아이들 정도면 웬만한 고수들 아니면 손도 못 댈텐데. 혹시 애들이 그냥 돌아다니다가 멋진 곳을 발견해서 거기에서 잠을 자는 게 아니겠 소?" "그럼 지금 손놓고 지켜보자는 말이에요?" "혹시 지금 아이들이 집에 와 있지 않을까?" 기를 못 피는 옥조영이 불쌍했던지 백운호가 끼어 들었다. 그 말도 일 리가 있다고 생각했던지 아무 말도 없이 그녀는 묘옥 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들도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나 묘옥에는 아무도 없었다. "진짜 무슨 일이 생겼나 봐요. 이렇게 늦게까지 오지 않을 애가 아닌 데..." 안색이 변한 여미릉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제서야 그들도 제법 사 태가 심각하다 생각했는지 눈이 가늘어졌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듯 하오. 일단 제대로 찾아보도록 합시다. 그 리고 한 시진 후에 여기서 모이기로 하지요." 옥조영은 백운호와 여미릉의 방향을 정해 준 후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사라지자 백운호와 여미릉도 자신이 맡은 곳으로 달려갔다. 한 남자가 가슴에 작은 여자아이를 들고 달리고 있었다. 앞으로 내달 리는 모습이 일견하기에도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했 다. 그가 입고 있던 옷은 비를 맞은 듯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연신 달려가다 무언가 불안한지 뒤를 돌아보기를 그치지 않았다. "상공! 좀 쉬었다 가세요. 이제 밤이 늦었는데..." 가슴에 안겨있는 여자아이가 자신을 품고 있는 사내에게 말했다. "안 돼! 색시는 그 할배를 몰라서 그래. 그 괴물 같은 사람이 얼마 나 끈질긴 줄 알아? 내가 두 손을 다 들어버릴 정도라니까. 지금쯤 찾기 시작했을 거고, 여기까지 오면 들키는 건 시간문제란 말이야. 난 다시는 그런 생활은 안 할거야." 사내는 바로 쉬지 않고 달려갔다. 그들은 바로 천인문과 서혜령이었다. 그러나 평소와는 무언가 다른 점이 있었다. 달리고 있는 것은 천인문이었고, 그의 품에 안겨있는 것은 서혜령이었다. 그것도 키가 엄청 줄어든 모습이다. 서혜령은 할 수 없다는 식으로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이젠 모두 포기할 생각이었 다. 그녀는 그저 천인문의 목에 손을 둘러 꽉 붙잡았다. 머리를 들자 제법 준수해진 천인문의 얼굴이 보였다. 아직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은 그의 얼굴에서는 땀이 연신 흘러내리고 있었다. 안 보던 사이에 천인문은 상당히 많이 달라져 있었다. 무공이며 얼굴이며 헤어질 때 와는 완연히 달랐다. 납치 당하듯 끌려온 아침과는 달리 화가 풀렸는 지 그녀의 입에는 빙그래 웃음이 떠올랐다. 아침이 되었을 때 먼저 잠에서 깬 사람은 천인문 이었다. 몸이 천근 만근 무거웠던지 연신 하품을 해대던 그는 벌거벗은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밀치고 일어나자 새우잠을 자고 있던 서혜령의 아름다운 등이 환하게 드러났다. 그 모습에 천인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동안 그렇게 바라보고 있던 그는 서혜령을 흔들어 깨우 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피곤한지 일어날 줄 몰랐다. 그 와중에 서혜령은 몸을 뒤틀었고 천인문의 눈이 더욱 휘둥그래졌다. 그녀의 벌거벗은 몸이 가리는 것이 하나도 없이 드러난 것이다. 그녀의 가 슴에는 어젯밤의 뜨거웠던 자신의 흔적이 완연히 남아 있었다. 천인문이 부끄러운 지도 모르고 빤히 바라보고 있던 그때였다. 서혜 령의 눈이 꿈틀거렸다. 잠에서 깬 것이다. 따스하게 덮어주던 느낌이 사라지고 시원한 느낌에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깨...깼어?" 넋을 놓고 있던 천인문이 머쓱한 미소를 짓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일어나셨어요?"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너무도 피곤했던지 라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잤음에 몸을 일으키는 지금 너무도 부끄러웠 다. 그러나 이젠 각오한 것이라 생각했는지 얼굴을 붉히면서도 머리 를 돌려라는 말 따윈 하지 않았다. 단지 머리맡에 놓은 옷을 당장 입을 뿐이었다. 그녀가 옷을 입는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바라보 고 있던 천인문은 자신도 옷을 입기 시작했다. "색시야! 우리 뭐 할까?" 옷을 다 입은 천인문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옷 매무시를 정리 하던 서혜령이 머리를 들었다. "일단 어른들게 인사를 드려야 하겠죠? 그 다음에 식사 준비를 할께 요. 뭐 드시고 싶은 게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그녀의 말에 천인문은 고개를 돌렸다. 어른들이란 말에 떠오른 두 려움이 가득한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옥조영과 의 수업이 그만큼 싫었고, 또 계속해야할 날이 지옥같은 느낌이었다. "상공 제가 이불을 치울테니 나가 계시겠어요?" 문을 활짝 열고는 이불을 개기 시작했다. 시원한 바람이 방안으로 확 밀려 들어왔다. 차가운 바람을 쐬던 천인문은 나갈 생각이 없었 다.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색시야! 우리 중원으로 나갈까? 여기 있으면 겨울엔 엄청 추워. 그러니깐 우리 중원으로 내려가자." 그 말에 서혜령은 손을 멈추었다. "네? 산을 내려가자고요?" 천인문이 이런 말을 할 줄은 정말 몰랐다. 평소 같으면 어떤 일이 라도 당장 따를 그녀였다. 그러나 사부가 생긴 이후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할지 결정할 수 없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녀는 일 단 사태를 보기로 했다. "네 상공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사부님께 산을 내려가겠다고 먼저 고한 뒤에 내려가도록 하죠." 이 정도면 충분한 답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녀의 생각이었 지 천인문에게는 아니었다. 만약 그녀의 사부인 여미릉에게 고한다 면 옥조영이 알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였고, 그렇게 되면 허락이 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머리를 흔들던 천인문의 눈 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이불을 정리하고 있던 서혜령의 뒤로 살금살금 다가간 천인문은 그 녀의 요혈을 쳤다. 그녀의 몸이 움찔했고 이불은 다시 바닥으로 떨 어졌다. "상공! 왜 이러시는 거에요?" "색시야! 미안해. 하지만 허락을 받을 순 없어. 그렇게 되면 난 다 시 지옥으로 들어가야 한단 말이야." 변명을 늘어놓으며 그녀에게로 다가선 천인문은 그녀를 뒤에서 끌어 안았다. 그리고는 번쩍 들어 올렸다. 그녀의 몸은 워낙 가벼워 종이 를 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보다 키가 컸다. 그만큼 운신 하기는 어려웠다. "상공! 그냥 내려가면 어른들께서 걱정하실 거에요. 그냥 말씀을 드 리고 내려가도록 해요. 네?" 서혜령은 사정하듯 말을 했지만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던 천인문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몇 번을 이야기했지만 아무 반응을 보 이지 않았다. 그녀는 한 숨을 내 쉰 후 아무 말 없이 그냥 기다렸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군. 좋아.' 천인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 졌다. 무슨 확신이 든 듯 손뼉을 치 고는 그녀의 앞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번개같이 손을 놀려 그녀의 혈을 쳤다. "색시야 조금 아플지도 모르겠어. 실수는 없겠지만 처음 해 보는 거 라서 말이야." 천인문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서혜령의 무슨 말인 지 몰라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때였다. 자신의 몸에 반응이 왔다. -우두둑- 자신의 몸이 뒤틀어지고 비틀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는 키가 줄어들 었다. 축골공이었다. 서혜령의 눈과 입이 켜졌다. 이런 것이 가능하 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조금 통증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 보다는 놀람이 컸다. 그녀의 몸은 계속 줄어들었다. 입고 있던 옷은 상당한 크기로 줄어 든 몸을 뒤덮다시피 하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천인문은 그제야 안심했다는 표정이었다. "잘 된 것 같은데. 잘못 될까 좀 겁이 나긴 했지만 뭐 잘난 내가 틀 린 적은 없었으니깐." 우쭐해하던 천인문은 서혜령의 늘어진 옷을 접어 올렸다. 그리고는 다시 그녀를 번쩍 들었다. 그 모습에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상공!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일단 어른들께..." "안되긴 뭐가 안 돼. 내가 한다면 하는 거야. 그냥 색시는 내 말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거야." 천인문은 말을 마치고는 바로 그녀를 품에 안고 밖으로 나왔다. 그 리고는 멈추지 않고 단풍이 울긋불긋 들어 있는 산을 내려오기 시작 했다. 천인문의 무공은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고개도 돌릴 수 없었 던 서혜령이었지만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옆에 있던 나무들이 아주 빠른 속도로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거기다 흔들림 따위는 없었다. 겨우 넉 달 떨어져 있었는데 이렇게 달라져 있을 줄은 몰랐다. '상공께서 노력을 많이 하셨나 봐. 이렇게 달라지실 줄은 전혀 몰랐 는데. 그건 그렇고 이렇게 가면 사부님께서 상당히 진노하실텐데 어 쩌면 좋지. 표시도 남길 방법도 없고 어떻게 하면 좋지?' 천인문의 품에 안겨 있던 서혜령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지금 은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매달려 갈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움직이게 된다면 그때 생각해 볼 문제였다. -51- 매서운 겨울이 가을을 밀고 내려온 것처럼 겨울은 다시 봄에 밀려 북방으로 사라져갔다. 물은 얼고 땅도 얼었던 겨울동안 사람들은 모두 저만의 집에 들어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겨울이 지나가고 다시 봄이 오자 사람들은 하나둘씩 밖으로 나와 모두 봄 농사 준비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다. 바빠진 것은 농군들만이 아니라 장사치들의 경우에도 마찬가 지였다. 소주나 항주는 불야성을 이루기 시작했고, 중원오대 호(中原五大湖)중 하나이자 가장 크다고 하는 동정호(洞庭湖) 도 인산인해를 이루기 시작했다. 안개가 자욱히 덮여 있는 동정호는 해가 중천에 뜨자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면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는 햇살 사이로 수많은 배가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며 떠다니고 있 었다. 봄을 즐기러 나온 서생들이 기녀들을 옆에 끼고 대낮부 터 술잔을 드는 모습도 보이고 그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사공의 모습도 보였다. 옆으로 그물을 던지는 어부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다 눈이 마주칠라치면 황급히 고 개를 돌리기도 했다. 한 나룻배가 동정호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배였지만 중앙 부분에 대나무를 세우고 천막을 덮은 것이 달랐다면 달랐다. 배 안에는 술병과 잔이 놓인 상을 마주보며 앉아 있는 두 명의 사내가 아름다운 궁장을 한 여인을 나란히 끼고 앉아 있었는데 천막 아래서 한낮의 햇살을 피하고 있었 다. 도(掉)를 잡은 사공은 두건을 머리에 묶은 채 연신 팔을 젓고 있었다. "이보게 사공! 저쪽으로 좀 더 몰게나." "예엣 어르신 알겠습니다요." 옥색의 난삼에다 머리에 연건(軟巾)을 쓴 사내가 손짓을 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서생이었다. 사공은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열심히 도를 저었다. 그의 얼굴에서 비굴하다는 생각은 전혀 보 이지 않았다. 이렇게 열심히 도를 젓고 나면 수중에 떨어지는 은자가 두 냥이었다. 사내의 기분이 좋은 날이면 더 받을 수도 있다. 그러려면 저 옆에서 술을 따르는 기녀들이 잘 해야 했다. 남자들이란 다 그렇고 그런 녀석들. 자기 옆에 앉는 기녀의 자 태가 빼어날수록 배포가 커짐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아양도 잘 떨고 가슴팍에 폭폭 파묻히기만 해준다면 하루에 다섯 냥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저기 저 배에서 하루종일 그물을 당겨봐야 동전 열 푼도 얻기 힘들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 기에 매일 이렇게만 살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 다. '으이그, 저 호박 같은 년들을 빨리 어떻게 좀 떨구고 나도 기 가 막힌 계집들을 한번 엮어 봐야 되는데.' 사공은 쉬지 않고 도를 저으면서도 머리로는 딴 생각만 하고 있었다. 자기하고 같이 이 일을 시작했던 노삼은 어떻게 된 것 인지 회양루의 매화 년하고 같이 영업을 해서 백 냥도 넘게 벌 었다고 했다. 자신처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겨우 사십 냥밖 에 손에 쥐어 보지 못한 것은 저 박색들인 춘월이와 매향이 탓 이 큰 것이다. '얼굴도 못난 것이 노래를 잘하나 애교를 잘 떠나. 하다 못해 밤 기술이라도 좋아야 하는데 그것도 못한다 빼기만 하고. 그 래서 너희들은 글러먹었어.' 얼굴을 찌푸리며 사내들 옆에 앉아있던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기녀는 옆에 앉은 사내에게 술을 따르고 잔을 든 사내는 잔이 차기가 무섭게 비웠다. "昔聞洞庭水석문동정수 今上岳陽樓금상악양루 吳楚東南坼오초동남탁 乾坤日夜浮건곤일야부 親朋無一字친붕무일자 老病有孤舟노병유고주 戎馬關山北융마관산북 憑軒涕泗流빙헌체사류 옛날부터 동정호를 들었는데 이제야 악양루에 오르는구나. 오와 초가 동남으로 갈라졌고 하늘과 땅이 밤낮으로 떠 있다. 친한 벗은 소식 하나 없고 늙고 병든 몸은 외로운 배에 있는데 관산 북쪽은 아직 전쟁 중이라 난간에 기대어 눈물만 흘린다" 한 사내가 소리 높여 시를 읊자 맞은 편의 사내가 호탕하게 웃 음을 터트렸다. "두보의 등악양루(登岳陽樓)라! 정말 멋진 장면에 멋진 시로구 먼. 황제께선 오랑캐를 정벌하러 북쪽으로 가셨는데, 우리들은 이렇게 동정호에서 술잔을 나누니 두보가 시를 지었던 그때와 다 른 것이 무엇인가. 하하하!" "암! 우리가 두보고 두보가 우리지. 자 술 한잔 받게." 그렇게 사내들은 술잔을 주고받으며 대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야기의 초점이던 악양루가 동정호 한편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 고 있었다. 적색과 금색이 아름답게 조화된 삼층 누각은 처마가 하늘로 쳐 오른 모습이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었다. 술잔을 들 고 마시던 서생들은 악양루가 자태를 드러내자 그 모습에 취해 버린 듯 빈 잔을 내릴 줄 몰랐다. '우쭐대긴 엄청 우쭐대더니만 역시 촌에서 올라온 티를 내는구먼.' 사공은 그런 모습을 자주 보았는지 넋을 잃고 있던 그들을 비웃 었다. 그러나 서생들은 시간이 지나도 정신을 차릴 줄을 몰랐다. 오히려 입이 더욱 벌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뭘 볼게 있다고 저렇게 넋이 빠진 거지?' 사공의 눈도 그들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들이 보고 있던 것을 본 사공의 눈도 왕방울처럼 커졌다. 그들이 보고 있던 것은 악양루가 아니었다. 악양루의 이층 누각 창문 안으로 보이는 한 여인에게 정 신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헉! 저렇게 예쁜 여자가 악양(岳陽)에 있었던가? 저런 기녀 하나 면 노삼이 그 콧대를 팍 꺾어줄 수 있을 텐데.' 사공도 넋이 빠져 손에서 도가 빠져나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 삐진 것인지 서생의 옆에 있던 기녀 하나가 코방귀 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그 바람에 정신을 차린 한 서생이 헛기침 을 하더니 사공을 불렀다. "이보게 사공! 빨리 우리를 나루터에 내려주게나." 다급한 부름이었지만 사공은 전혀 듣지 못한 듯 했다. 서생은 더 욱 크게 사공을 불렀고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서생을 보았다. "뭐하고 있나? 빨리 저 편 나루터에 내려 달라고 했네." "아....알겠습니다요." 사공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도를 잡아 열심히 저었다. 땅에 오르 자마자 서생들은 품에서 은자 몇 개를 던지다시피 하고는 악양루를 향했다. "자네도 봤나? 그 선녀 같이 생긴 여자 말일세." "자네가 봤는데 나라고 못 봤겠는가? 세상에 그런 미녀는 난생 처 음이네. 한 은자 열 냥이면 될까 모르겠군." "자네 정신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여기가 비록 소주나 항주는 아 니지만 그래도 그 정도 여자라면 하룻밤에 무려 백 냥은 나갈 걸세. 그냥 우리 같으면 술 한잔 받아 마시기도 힘들걸. 그냥 얼굴만 보 고 온다고 생각하세 그려." 그들은 정신 없이 이야기를 나누며 발길을 서둘렀다. 악양루의 점소이 소귀의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오늘따라 손님 들이 많이 찾았지만 아무도 그를 다그치지 않았다. 서 있는 손님들 이 자리가 없다고 투덜대지도 않았고 요리를 빨리 내오지 않는다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또 잠시라도 쉬고 있을라치면 날라 오는 솥뚜 껑 같은 주인장의 손바닥도 잠잠했다. 그 악귀 같은 주인도 자기처 럼 넋을 빼고 한 곳을 보고 있었다. 소귀도 그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넋을 빼버린 한 선녀 같은 여인 때문이었다. 그 여인은 지금 이층에 창문 가에 앉아 용봉탕을 먹으며 밖을 내다 보고 있었다. 일층과 삼층은 자리가 있음에도 그 여인이 앉아 있는 이층만 남은 자리가 없다. "이봐. 여기 용봉탕 하나 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도 소귀는 아무 반응 없이 꿈속을 헤맬 뿐이 었다. 화가 난 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는 주위 를 둘러보았다. '그냥 조용히 먹고 앉아서 선녀나 보고 있을 것이지 누가 감히 이 어르신의 단꿈을 깨우는 거야?' 소귀는 사방을 살폈으나 누가 자신을 부르는지 알 수 없었다. "여기라고 여기." 다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목소리의 주인공이 이 층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 선녀 같은 여자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소귀는 번개같이 이층으로 올랐다. 그를 부르는 사람 을 찾자 소귀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그를 찾던 사람은 바로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동이었다. 그리고 그 소동은 바로 그 선 녀와 함께 앉아 있었다. 누런 이를 드러내며 연신 웃고 있던 소귀 는 앞으로 다가가서 굽실거렸다. "여기 용봉탕 작은 거 하고 홍초양육(紅椒釀肉) 한 접시 부탁해." 소귀는 연신 대답하면서도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미모의 여인을 보고 있었다. 그러자 주문을 시킨 소동의 눈이 치밀어 오르 더니 소귀의 발등을 사정없이 밟아 버렸다. 소귀는 큰소리를 지르며 발을 잡고 날뛰었다. 곧 소귀와 비슷한 상 태의 뚱뚱이가 올라오더니 여인을 흘깃 보고는 소귀의 귀를 잡고 내 려갔다. 그들이 내려가자 다시 이층은 조용해 졌다. "전부다 도둑놈들 밖에 안보이니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소동은 사방을 살쾡이 같은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고 그 모습에 눈 을 살짝살짝 돌리며 그녀를 보고 있던 사람들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요리를 먹었다. 사방이 조용해진 그때였다. 악양루 문 앞에서 말 투레질 소리가 나 더니 한 사람이 모습을 나타냈다. "이봐요. 왜 아무도 안 나와 있는 거죠?" 푸른 경장에 날씬한 모습을 한 젊은 여자가 앙칼진 목소리를 내며 들어섰다. 붉은 수실이 달린 검을 쥐고 있는 모습이 무인임을 한눈에 알게 했다. 귀를 어루만지던 소귀는 당장 그 여자 앞으로 달려가서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일단 말은 제가 마구간에 묶어 두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일행이 있으신지요?" "조금 더 기다리면 한 명이 더 올 거예요. 일단 자리나 주세요." 상당한 미녀였지만 소귀의 눈에는 별 볼일 없다는 반응이었다. 일층 의 빈자리로 그녀를 안내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소귀가 돌아 오자 그녀는 몇 가지 요리를 주문했다. 요리를 가져온 소귀는 바로 뒤로 물러났다. 여인의 눈에 의아한 빛 이 떠올랐다. 평소 다루(茶樓)나 주루의 사내들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보던 것과는 달리 소귀는 깔끔하게 물러났기 때문이다. '호! 역시 이름난 곳이라 그런지 교육이 잘 되어 있군. 마음에 들었 어.' 사내들의 눈빛이 지겨웠던 그녀로선 기분이 상당히 좋았지만 한편으 로는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여인이 젓가락을 들고 요리를 먹기 시작했을 무렵 말 몇 필의 울음소리가 문 밖에서 들렸다. 소귀 는 바로 문밖으로 내달렸다. '총관이 왔나?' 여인은 고개를 살짝 들었다가 다시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나타난 인물은 왼쪽 눈에 칼자국이 남아있었 는데 턱 밑으로 호랑이 같은 수염을 기른 사내였다. 일견하기에도 무 뢰배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손에는 가시가 삐죽 솟은 낭아봉을 들 고 있었다. 그 뒤로 머리칼이 헝클어져 삐죽 솟은 사내와 대나무처럼 빼빼 마른 사내가 그를 따라 들어 왔다. 그들은 검과 간( )을 들고 있었다. 그 뒤로 퉁퉁 부은 뺨을 잡고 눈을 흘기는 소귀의 모습도 보 였다. "흐흐흐! 기가 막히는 계집이군. 평생 처음으로 보는 진품이야." 여인의 눈이 치켜 올라갔다. 수염을 기른 사내는 그 눈을 맞받아 치 며 그녀의 맞은 편에 털썩 자리를 잡았다. "우리 같이 술이나 한잔하는 게 어때? 이봐 여기 홍루주(紅淚酒) 한 독 가져와라." 사내는 큰 소리로 외치고는 다시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의 눈에서 화톳불 같이 이글거리는 불꽃이 피어올랐다. "당장 내 앞에서 꺼져." "하하하! 생긴 것 같이 입도 한 가닥 하는구나. 이보게 동생들!" 호쾌하게 웃어제끼던 사내가 오른 손을 들며 말하자 뒤에선 두 사내 가 그의 뒤로 다가와서 큰 소리로 대답했다. "소개하도록 하지. 난 왕충(王衝)이라 하고 저 더벅머리 녀석은 곽 순(郭淳)이라고 하며 저 말라깽이는 호영제(號英醍)라고 하지. 사람들 은 우리를 일컬어 황산의 세 영웅(黃山三雄)이라 부르네. 어떤가? 아 가씨와 하루쯤 즐겁게 보내기엔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어때?" 여자는 탁자 밑에 내려져 있던 손을 들어 탁자를 쳤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검이 쾅 하고 소리를 냈다. "당장 꺼지지 않으면 내 손에 들린 차가운 검 맛을 보게 될 걸." 서늘하고 단호한 어조에도 놀라지 않고 왕충은 그저 능글맞은 미소 만 짓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가슴에 불을 질렀고, 바로 검을 뽑아 들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일직선으로 앞에 앉은 왕충의 가슴을 갈라 왔다. 허나 왕충도 그리 호락한 인물은 아니었다. 고개를 숙여 번쩍하 며 날라온 검을 가볍게 피해버렸다. 그리고는 낭아봉을 휘두르며 그 녀를 제압해갔다. 동생이라 불리던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이제나저제나 하며 가슴을 조리던 사람들은 칼부림이 나자 바로 내뺐 다. 그러자 울상이 된 것은 주인장이었다. 안 그래도 살이 쪄 얼굴형 을 알아보기 힘들었던 그의 얼굴은 더욱 울상이 되었다. 평소 악양루 는 다른 곳과는 달리 찾아오는 손들의 대부분이 서생과 귀족들이었던 지라 이런 일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다툼이 일자 다른 곳들처럼 호위무사를 두지 않았던 것이 후회가 되었다. 손님들의 음식값에 물론 기물 파손까지 합한다면 오늘은 엄청난 손해인 것이다. 당장 나가서 싸우라고 말하고 싶지만 검이 무서워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이층과 삼층의 인물들은 도망치고 싶었음에도 계단을 내려가지 못했 다. 그냥 내려갔다가 눈이 없는 무기에 한 대라도 맞는다면 바로 죽음 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그들은 누가 이기던지 빨리 이 싸움이 끝나기 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들의 싸움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여인의 눈빛은 상당히 다 급해져 있었다. 저런 쓰레기 같은 녀석의 무공이 자신과 비슷할 거란 생각은 해 보지 않았기에 첫 수로 쉽게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 상외로 강한 것이었다. 아니 자신보다 더 능숙한 점도 보이는 걸로 보 아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한 것은 자신이라 생각했다. 조급한 생각 때 문이었을까. 그녀의 손은 어지러워졌다. 왕충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 고 바로 낭아봉을 휘두르며 다리를 냅다 후려갈겼다. 그녀는 상당히 급하게 다리를 들어 피했다. 그러나 그 순간 몸의 균형이 무너져 버렸 고 한쪽으로 기울며 쓰러졌다. 가까스로 몸을 굴리며 중심을 잡은 후 검을 들어 가슴 앞에 세웠다. 그러나 기습을 해올 거라는 생각과는 달 리 왕충은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 자 신의 상대가 안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왜 총관은 이렇게 늦는 거야.' 평소 한시도 놓치지 않고 자신을 따라다니던 총관이었다. 그런 총관 이 귀찮아서 몰래 몸을 빼서 이곳으로 놀러 온 것이지만 그는 귀신같 이 알아서 찾아 올 것이다. 보통 그 시간은 반 시진도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가 나타나지 않자 그녀는 더욱 조급해진 것이다. -52- 화가 난 여인과 느긋한 왕충의 다툼을 자세히 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이층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소동이었다. 소동은 신기한 것을 보았다는 듯 식사를 하다 말고 아래 를 내려보고 있었다. "무얼 그렇게 보세요?" 맞은 편에 앉아 식사를 하던 여인이 손을 놓고 물었다. 그 러자 소동이 아래로 손을 가리켰다. "색시야! 저 여자 좀 봐. 누구 닮은 것 같지 않아?" 그 말에 여인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동이 가리키는 사람은 조금 전 악양루에 들어온 푸른 경장의 여인이었다. 궁지에 몰린 듯 연신 땀을 흘려가며 힘겹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보고 있던 여인의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확실히 자 신이 알고 있던 사람과 많이 닮았다. 몇 년이 지났지만 잊을 수 없는 사람. 바로 단목미령의 얼굴이었다. "예! 정말 많이 닮았군요. 아직 어려 보이지만 몇 년 후면 어머님과 거의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네요." 그들은 천인문과 서혜령이었다. 그들은 산에서 내려온 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리고 또 달렸다. 서녕(西寧)과 난주(蘭州) 를 거친 그들은 성도(成都)를 지나 목적지인 동정호에 도 착했다. 길고 긴 여정이었지만 그들은 별 탈 없이 도달했다. 물론 편했던 길은 아니었다. 서혜령에 업혀 가던 천인문은 그녀를 바라본다는 이유만으 로 수많은 남자들을 때려 눕혔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드는 것 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때리는 것이라 는 변명에 그녀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만 때리라는 말 을 해 본 적도 몇 번 있었으나 요즘은 그 말도 그만 두었다. 그 때마다 맞는 사람들은 몇 대에서 수십 대를 더 맞아야 했 던 것이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맞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하루도 주먹을 쓰지 않고 길을 간 적이 없게 되자 속도는 자 꾸 느려졌다. 무려 석 달이면 도착할 곳을 여섯 달이나 걸린 것이다. 겨울이란 추운 계절을 핑계로 삼기엔 너무나 긴 시간 이었다. 그러나 이득도 있었다. 손 봐 준 사람들에게 교육비 명목으로 돈을 걷었던 것이다. 제법 짭짤한 금액이었고 입고 먹고 쉬는 것에 대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지금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나 여기서 먹는 것들도 모두 거기에서 나온 것 이다. "저런 쓰레기 같은 놈들을 봤나? 대낮부터 여자를 괴롭혀? 내 가 따끔한 맛을 보여 줘야겠군. 색시야! 나 좀 내려갔다 올게." 단목미령을 쏙 빼 닮은 여자가 밀리자 의협심이 발휘된 것인 지 천인문은 난간을 잡고 일어섰다. 그러나 서혜령은 천인문의 얼굴에서 그들에게서 돈을 뜯어야겠다는 욕망을 엿볼 수 있었 다. 아래쪽으로 펄쩍 뛰어내리려는 천인문의 허리를 잡은 후에 입을 열었다. "그냥 자리에 앉아 계세요. 제가 내려가 볼게요." 천인문을 자리에 앉히고는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나풀거리 는 치마를 입은 관계로 뛰어 내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사람들은 닭 한 마리 못 잡을 정도로 약해 보이는 여인이 내려가자 탄식을 토하며 아쉬워했다. 불안하 긴 천인문도 마찬가지였다. 저 부리부리한 눈을 시퍼렇게 뜬 녀석이 그녀를 보고 침을 흘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뭐 안되면 내가 내려가서 교육 좀 시켜주면 되지.' 서혜령을 믿지만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교육을 하 겠다고 생각하며 느긋하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천인문의 예상대로 아래로 내려오는 서혜령을 본 왕충의 눈 이 커졌다. 여인의 요혈을 노리던 낭아봉이 멈칫거리자 순간 을 노려 여인의 검이 목을 찔러 갔다. 왕충은 급하게 몸을 뺐 다. 그제서야 위험에서 벗어난 여인이 자세를 잡으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면면이 이어지던 공격이 끊어진 것이 이상했지만 그것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단지 총관이 올 때까지 버텨내 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등뒤에서 자신의 어깨를 잡는 손 에 움찔 놀란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여긴 제게 맡기고 잠시 쉬도록 하세요." 싸늘하지만 환한 미소에 넋을 잃은 여인을 뒤로 물린 서혜령 이 왕충의 맞은 편에 섰다. 왕충도 역시 정신이 없는 것 같았 다. 그 모습에 서혜령은 눈시울을 찌푸렸다. 여기까지 오는 동 안 저런 눈으로 바라보던 남자들을 수 없이 보았다. 왜 천인문 이 그렇게 남자들을 패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자신에 대 한 소유욕이 강한 천인문으로선 참기 어려운 것이었을 것이다. "없었던 일로 할 테니 빨리 배상하고 돌아가세요." 왕충은 자신를 향해 이야기하는 서혜령을 보자 정신을 차렸 다. 그리고는 다시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완전히 복 받은 날이군. 저 정도로도 모자라서 이렇 게 선녀 같은 여자까지 내 품에 안기려고 찾아 왔나." 그 말에 서혜령은 온 몸을 기어다니는 벌레들을 느꼈다. 소름 이 쫙 돋는다. 더 이상 놔두었다가는 무슨 낯뜨거운 소리를 들 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옆 계산대에서 울상을 하고 있던 주인을 보았지만 문 밖으로 나갈 생각은 없었다. 한 수면 해결 될 것이다. 서혜령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허리에 감긴 도 를 뽑았다. 그녀의 허리에 감긴 도는 번쩍이는 광채를 내뱉으 며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그녀의 허리에서 처음으로 뽑힌 도는 나긋하게 휘청거리다 서혜령의 공력이 주입되자 바로 꼿꼿이 몸을 일으켰다. 그 찰 나 도는 번쩍이는 빛을 남기며 왕충의 목을 베어갔다. 너무도 빠르고 깔끔한 솜씨였다. 왕충은 헉 하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눈동자에 죽음의 기운이 역력히 나타났다. 왕충의 손에 든 낭아봉이 깡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을 토해 냈다. 운 좋게도 도를 막아냈지만 자신이 막은 것이 아니었다. 들고 있던 낭아봉에 도가 틀어박힌 거나 다름없었다. 사색이 된 왕충은 목이 무사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렇게 기뻐할 시간이 그에게는 없었다. 서혜령은 자 신의 공격이 막히자 다시 도를 가슴으로 끌어들인 후에 몸을 낮추며 목을 찔러갔다. 워낙 빠른 수라 왕충의 얼굴은 다시 한 번 사색이 되었다. -까깡- 그녀의 공격은 다시 한번 막혔다. 왕충의 뒤에 서 있던 곽순 과 호영제가 검과 간으로 막은 것이다. 왕충은 다시 한 번 한 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섰다. 그에 맞춰 곽순과 호영제도 물 러났다. "동생들! 우리 같이 반원진(半圓陣)을 펼치세나." 곽순과 호영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세를 잡 았다. 곽순이 중앙에 자리를 잡고 왕충과 호영제가 그 옆에서 거리를 벌리며 반원을 만들었다. 그들이라고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쁜 여자만 보면 껄떡대는 사람인줄 알았다면 의형제 따윈 맺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맺은 것을 끊겠다고 할 정도로 모질 지 못한 그들이었고 이렇게 살기로 마음먹은 적이 있는 이상 그를 살려야 했다. 서혜령은 그들이 자세를 잡자 아차 했다. 수많은 경험을 가졌 던 천인문과는 달리 경험이 일천했던 서혜령으로선 좋은 기회 를 놓친 것이 후회가 됐다. 허나 이미 지난 일. 이내 정신을 가 다듬으며 다음을 대비했다. 반원진은 서로를 방어하며 공격하는 가장 기본적인 진법(陣法) 이었다. 진법이란 것이 일정한 수의 사람들이나 기물로 공격 과 수비를 하는 방법이다. 그만큼 진법은 다양했고, 수많은 변화를 가지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많은 변화를 가질수록 진의 위력은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반원 진은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었고 구 성하는 사람도 적은 진법이었다. 그만큼 실전에서 반원진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반원진은 그 무엇 보다 뛰어난 진법이었다. 이 진법으로 무인들과 수많은 대결을 해서 목숨을 유지했던 그들인지라 이 반원진을 펼칠 때는 누구 보다 자연스럽게 손발을 맞출 수 있었다. 다른 진법을 배울수도 없었지만 그럴 기회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거절할 그들이었다. 그만큼 그들의 공격은 일반 반원진보다는 강력했다. 곽순이 검을 검집에 넣자 바로 공격이 시작됐다. 낭아봉과 간 이 찢어발길 듯 서혜령에게 날아오자 몸을 눕히듯 피하며 곽순 의 다리를 베어갔다. 곽순은 가볍게 다리를 들어 공격을 피했다. 그 순간 바로 낭아봉이 두 개로 나눠지듯 흩어져 머리를 노리 고 들어왔다. 호영제는 등 뒤로 돌아가 간을 눕히며 서혜령의 퇴로를 봉쇄했다. 곽순의 장기는 경공과 장법이었다. 검도 쓰긴 했지만 더욱 자 신 있는 것은 장법이었기에 검을 꽂았던 것이다. 또 그렇게 검 을 꽂으면 상대는 반드시 자신을 노렸었다. 그 맹점을 노린 공 격이었다. 그들은 이 방법으로 쉽게 상대를 제압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녀를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항상 그들의 생각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서혜령은 앞이나 뒤로 피하지 않았다. 낭아봉을 내려치는 왕충의 앞으 로 다가서며 손목을 베어갔다. -억- 왕충은 손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났다. 손에서 떨어진 낭아봉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을 부수며 나뒹굴었다. 소리로 보아 손 목이 부러진 것 같았으나 칼등으로 내려쳤기에 손은 잘리지 않 았다. 인정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검법을 도로 펼치다 보 니 그렇게 된 것이다. 서혜령은 바로 무릎을 낮추며 왕충의 혈을 짚었다. 왕충이 나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몸을 돌렸다. 반원진의 한쪽이 무너지자 결 과는 싱겁게 나버렸다. 왕충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죽일만한 이유가 없었다. 배를 공격 한 호영제의 간을 쉽게 막아낸 후 가슴을 냅다 후려쳤다. 뒤로 나가떨어지자 뒤에 서 있던 여인이 그의 요혈을 쳤다. 경공이 장기였던 곽순의 저항은 길게 이어졌다. 그러자 치마를 날리기 싫어 경공을 펼치지 않았던 서혜령이 참지 못한 듯 몸을 빠르게 날렸다. 그러자 윽 하는 소리와 함께 어디를 제압당했는 지 인상을 찌푸린 곽순이 나가떨어졌다. 서혜령은 상황이 종결되자 떠오른 치마를 잡아 내리고는 몸을 돌려 계단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이층에서 떨고 있던 사람들이 환호를 지르며 그녀를 반겼다. 아리따운 여인의 안위를 걱정하 던 그들을 본체 만체하며 그녀는 천인문의 맞은 편 자리에 앉았 다. "색시 잘 싸우네. 그건 그렇고 너무 교육이 적어서 안 돼. 일단 내가 내려가서 좀 더 교육을 시켜주고 올게." 자리에 일어선 천인문은 자신을 잡는 서혜령의 손을 뿌리치고 계단으로 걸어갔다. 그때였다. 아래쪽에서 퍽퍽 하는 소리가 악 양루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천인문은 무슨 소린가 하고 의아한 눈으로 내려갔다. 엄마를 닮 았던 여인이 발을 들어 왕충의 배를 걷어차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단목미령을 닮아 있지 않았다. 거기다 그 입에서 나오는 욕은 천인문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경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모습에 통쾌한 느낌을 받은 것은 천인문만이 아니었 다. 식사하는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진 않았지만 그가 맞고 있는 모습이 기쁜 듯 얼굴에는 웃음이 완연했다. 그러나 구타가 일각을 넘어 반 시진에 가까워지자 천인문은 오 싹한 느낌이 들었다. 왕충의 얼굴은 이미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 다. 비록 맞을 짓을 했다곤 하지만 저렇게까지는 아니었다. 그냥 죽여버리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든 천인문은 그냥 고개를 흔들며 계단을 다시 올랐다. 그때 입구에서 누군가 한 사람이 모 습을 드러냈다. 긴 수염에 백포 장의를 걸친 중년 사내였다. 흔히 볼 수 있는 복장이었지만 그 사람의 모습은 흔해 보이지 않았다. 어딘지 싸늘한 눈매는 그의 얼굴을 차갑게 보이게 했다. 마치 그 를 글자로 설명할라치면 법(法) 한자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경 직되었다고 할까. "수령 아가씨! 그만 하십시오. 사람 죽겠습니다." 여인을 발견한 중년인은 바로 그녀를 잡고 말렸다. "이 총관, 이거 당장 놓아요. 이런 녀석은 오늘 죽어야 돼." 팔을 휘둘러 손을 떨치고는 다시 발을 들었다. "그럼 제가 한 수에 보내겠습니다. 저런 더러운 녀석의 피를 묻힌 다는 것은 아가씨한테 좋은 일이 아닙니다." 중년인은 바로 옆구리에서 검을 뽑았다. 잘 다듬어진 청강검이었 다. 그러자 여인은 두 손을 들어 그를 말렸다. "아녜요, 죽이지는 말죠. 그냥 관에 보내서 콩밥이나 먹이도록 하죠." 그리고는 주인장을 불러 몇 가지 지시를 했다. 주인장은 순식간에 상황이 끝나자 바로 점소이를 불러 심부름을 보냈다. 중년인은 여인이 알아보지 못하게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지었다. 과연 자신의 생각대로였다. 자신은 여인이 태어날 때부터 총관을 했었고 누구보다 이 수령이라 불리운 여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 다. 말린다고 될 일이 아닌 일은 이렇게 역으로 치고 들면 아가씨 는 바로 자신을 말리는 것이다. -53- 그렇게 기억을 더듬는 총관을 깨운 것은 수령이란 여인이었다. 그녀는 계단을 오 르다 뒤를 돌아보며 그를 불렀던 것이다. "또 어디 가시려고 그러십니까? 오늘 할 일은 벌써 다 하셨잖습니까?" 이 총관은 안색을 굳히며 물었다. 하루라도 조용히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그녀 를 이해는 하지만 자기가 편하려면 빨리 세가로 돌아가는 편이 나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올라오던지 기다리던지 알아서 해." 그녀는 말을 끝내고 바로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이 총관은 바로 고개를 흔들었 다. 수령은 이층에 오르자 자신을 도와준 여인을 찾았다. 그녀는 한 소동과 함께 볕 이 드는 창문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수령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혜령 을 향해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잠시 앉아도 될까요?" 천인문은 엄마를 쏙 빼 닮은 그녀가 인사를 하며 다가오자 좋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은 감사하다는 듯이 머리를 까딱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아까 도와 주셔서 감사했어요. 전 단목 수령이라고 해요. 언뜻 봐도 저보다나이 가 한 두 살 정도 많아 보이는데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넉살이 좋은 건지 단목 수령은 처음 보는 서혜령에게 별 어려움 없이 첫인사를했 다. 그러자 서혜령도 자신의 소개를 했다. "뭘 그 정도로 그러세요. 서로 어려울 땐 도와야죠. 참 전 서혜령이라고하고..." 천인문은 서혜령의 말을 자르며 끼어 들었다. 뭔가 궁금한 점이 생기자 바로해결 하려고 한 것이다. "전 천인문이라고 해요. 그런데 누나 성이... 참 누나라고 불러도 되죠? 허락한걸 로 알고, 누나 성이 단목이라고 했나요?" "으...응. 단목씨야. 그런데 왜?" "아...아니에요. 제 성도 복성이라서요. 그래서 한 번 물어본 거예요." 천인문이 대충 얼버무리며 손을 내젓자 단목 수령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 였다. '단목씨에다 엄마 얼굴을 많이 닮은 여자라... 혹시 나하고 친척 사이 아닐까?친 척이라면 외숙부 쪽인가 아니면 이모 쪽인가?' 그렇게 생각하던 천인문은 외가 쪽의 계보(系譜)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 실이 떠올랐다. 천인문이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단목 수령의 머리도 열심히 굴러가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게 머리를 굴리면서도 단목 수령은 서혜령과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옆에 그림자가 그들에 게 드리웠다. 이 총관이었다. 아래층에서 기다리다 지쳤는지 이층으로 올라왔다. 단목 수령은 빙긋 웃음을 지으며 소개했다. "여기는 이모화(李芼化)아저씨. 우리 집에서 총관을 맡아 주시고 계시죠. 인사하 세요. 여긴 서혜령이라고 제가 언니 삼기로 한 사람이에요." 단목 수령은 연이어 천인문까지 소개를 했다. 인사가 끝날 때까지 별 말 없이 허 리만 숙이던 이 총관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양 감탄을 토했다. "혹...시." "왜요 총관 무슨 일이라도?" 이 총관의 머뭇거림에 단목 수령이 거들고 나섰다. "아...아닙니다. 잠깐 딴 생각이 나서요." "딴 생각이라뇨? 아 참 총관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아요." 그러면서 단목 수령은 자신의 옆에 있던 의자를 내밀었다. 총관도 사양치 않고자 리에 앉았다. "뭐가 생각나서 그런 거예요 총관? 네, 말해봐요. 으응?" 어디 기녀들이나 할 법한 애교를 떨어가며 팔을 잡고 흔드는 단목 수령에게 못이 긴 총관이 난처한 기색을 역력히 보이며 대답했다. "이 두 분을 뵈니 요즘 강호에 나타난 신진 중에 명호가 떠올라서 말이죠." "기인?" "아가씨도 조금 생각해 보시면 아실텐데요. 옥과 같이 아름다운 여인에게 업혀다 니는 키작은 꼬...소동 말입니다." 이 총관은 당사자를 앞에 두고 꼬마란 말을 붙이는 것이 실례라 생각했는지 바로 말을 바꾸었다. 천인문이 그 말을 놓쳤을 리가 없었다. 바로 정정해 주며미안하다 는 눈빛을 보이는 이 총관 이였기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을 뿐이다. 기억력이 나쁜 탓인가! 단목 수령은 한참 동안 눈동자를 굴려대며 고민에 잠겨 있었다. 보고 있 던 서혜령이 안스러울 정도였다. "아 생각났어." 한참동안 통박을 굴렸던 효과가 나타났다. 그녀는 대뜸 환한 웃음을 보이며 손뼉 을 쳤다. "마동옥녀! 마동옥녀 맞죠? 아 언니하고 천인 동생이 마동옥녀였다니. 그래서 무 공이 그렇게 센 거군요." 가타부타 말도 없이 혼자서 중얼거리자 서혜령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마동옥녀라니요? 처음 듣는 말인데요. 그게 뭐죠?" "못 들어 봤어요? 요즘 제법 시끌시끌하던데." 눈빛을 빛내며 단목 수령은 차근히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의 강호는 잠잠하기 그지없다. 너무도 조용한 게 마치 폭풍전야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기간이 너무도 길었다. 무려 삼 십년 동안 정과 사는 별 대립 없이 지냈다. 그런 찰라 강호에 새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은 워낙 미약했으나 너 무도 조용했던 강호였기에 떠들썩하게 울려 퍼진 것이다. 그 첫째 바람은 광협(狂俠)이었다. 미친 협객! 어디서 나타나는지 꼭 "내 정의의 검을 받아라!" 하고 외치며 오두방정을 떠는데 낄 곳 안 낄 곳을 구분 못하는바보 였다. 그 실력으로 일년을 버텨왔다는 것이 신기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얼마지 나지 않아 죽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꿋꿋이 살아 남아 동분서주(東奔西走)하 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진짜 실력을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생각 도 했다. 두 번째는 마동옥녀였다. 어딘지 고귀한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여자와 그녀에게 항상 업혀 다니는 작은 꼬마아이. 비록 그 상대가 삼류 무사들뿐이었다고는 하지 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싸움질을 해대는 귀여운 꼬마나, 차가운 얼굴에 맞지 않게 그만 때리라고 말리는 여인의 부드러운 마음씨.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마동과 옥녀라 부르기 시작했고 곧 그것은 그들의 별호가 되었다. 마지막은 요즘의 강호에 가장 큰 소식이었다. 바로 죽립무언객 이었다. 항상자신 의 품에 귀여운 여자아이를 안고 다니는 사내. 빛 바랜 죽립을 푹 눌러쓰고 "민예 진(珉睿眞)이란 여인을 아시오?" 라는 말 밖에 하지 않는 사내. 그는 무인이었으되 무인이 아니었다. 그가 찾는 곳은 무림방파나 세가가 아니었 다. 고관 대작이 사는 집이나 상인들이 사는 곳이 그의 목적지였다. 배첩이나공손 한 방문 따윈 그에게 기대할 것이 못되었다. 그냥 문을 밀고 들어가 큰 소리로 떠 드는 것이다. 그래서 집을 지키는 호위무사들과 많은 충돌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은 박살이 났다. 그의 무공도 무공이었지만 더욱 큰 문제가 된 것은 여자들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죽립을 벗지도 않았는데 그를 본 여인들이 모두 그에게 정신이 빠져 해롱댄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악독한 마공이나 사공을 익혔을 거라 했다. 그렇게 그를공 적으로 몰아댔음에도 불구하고 무림인들은 그를 방관하고 있었다. 무공이 강한 것 도 껄끄러운 것이었겠지만 그가 특별히 여인들을 농락하거나 괴롭히는 것은 없었 기 때문이다. 물론 그를 본 후 정신을 못 차리는 여자들은 이미 집에서 소박맞아 쫓겨났지만 그건 무림인 들에겐 별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이야기를 마친 단목 수령은 이제 알겠냐는 뜻으로 가벼운 미소를 보냈다. 그러나 천인문과 서혜령의 얼굴은 상당히 굳어져 있었고, 그걸 본 그녀도 당황해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단목 수령은 조심스럽게 운을 떠보았다. "아...아니에요. 별 거 아니니 걱정할 건 없어요." 서혜령은 굳은 얼굴을 풀며 대답을 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여전했다. 듣고 있던 단목 수령은 별 거 아닌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천인문의 얼굴도 역시나마 찬가지였다. 단목 수령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우리 집이 있어요. 같이 가도록 해요 언니." 그리고는 당연히 허락할 거라 생각했는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 계단으로 내려갔 다. 천인문은 어이가 없다는 듯 멍하게 있다가 서혜령과 같이 내려갔다. 난장판이 되었던 일층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깨끗해져 있었다. 부서진탁 자와 의자는 사라졌고, 새로운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 이유를 제공했던자 칭 황산삼웅은 어디론가 끌려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계산은 제가 했어요. 그냥 가면 되요." 먼저 내려갔던 단목 수령이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앞장을 서서 밖으로 나섰다. 내가 계산했는데 자기가 했다니! 허허허! 그러나 탓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탓할 것이 못되는 일이다. 자신이 계산 한 것은 단목 수령이 계산한 것과 같은 것이었 기 때문이다. 이 총관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언제 업혔는 지 서혜령의 등에 천인문이 올라 타 있었다. -54- 악양루를 나선 그들은 나란히 서서 관도를 걷기 시작했다. 악양루로 올 때 말을 타고 왔던 단목 수령과 이 총관은 다 시 돌아가는 길에도 말을 타고 있었다. 바로 옆에는 천인문 을 업은 서혜령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관도는 넓었기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관도를 걸어다니고 있었으나 그들이 피 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단목 수령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말로 만 듣던 소문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을 때의 기쁨이랄까. 정 말 소문대로 서혜령은 천인문을 업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지만, 항상 천인문을 업고 다녔을 거 란 생각이 떠오르자 서혜령이 안쓰럽게 보이기도 했다. 단 목 수령과 이 총관의 말에 한 명씩 나누어 타자고 제안을 하 기도 했지만 서혜령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어 그들의 말을 거 절했다. 서혜령의 목에 매달려 있던 천인문은 잔잔한 흥분속에서 몸 을 떨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자신의 엄마인 단목 미령이 태 어나고 자랐던 집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항상 외가에 대 해 물었어도 단목 미령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었다. 그 래서 천인문도 별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젠 경우 가 달랐다. 어딘가 비밀에 덮여 있던, 그래서 신비스러운 느 낌을 가지고 있던 외가가 원하던 원치 않던 자신의 눈에 나 타나게 된 것이다. 서혜령을 바라보는 타인들의 뜨거운 눈을 못 느끼는 것인지 천인문은 가만히 있었다. 평소 같으면 발작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의 시선이었음에도 왜 가만히 있는지 의아하긴 했지만 한 편으로는 사고 없이 지나칠 수 있었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얼마간 걸어가자 한 채의 장원이 보였다. 그 모습에 기대에 차 있던 천인문의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졌다. 세가라고 했지 만 거의 반 폐허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였던 것이다. 부서지고 망가진 곳이 있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세가라고 부르기엔 너무 허술했다. 무성히 자란 잡초가 장원 앞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기와는 빛이 상당히 바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현 무림에서 단목 세가가 차지하고 있던 위치를 쉽게 알 수 있게 했다. "좀 어지럽죠. 하지만 저래 봬도 있을 건 다 있어요." 손님에게 자신의 집을 보여준다는 것이 머쓱했는지 단목 수령 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서혜령은 무슨 말이냐 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정말 크고 멋진 집이에요." 자신이 살던 천산의 집과 비교하며 말했던 것이었기에 사심 따윈 없었다. 자신을 놀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던 단목 수령도 서혜령의 표정을 보고서는 옹졸한 마음을 품었던 자신 이 부끄러웠다. "들어가요 언니. 제가 오늘 확실히 대접할게요." 마음을 푼 단목 수령이 그들을 안내하여 장원의 문으로 다가갔 다. 몇 명의 하인들이 문을 열고서 고개를 숙이며 그들을 맞이 했다. "아가씨. 그럼 전 이만..." 한 마디 말도 없이 따라오던 이 총관은 장원에 들어서자 말에서 내리며 인사를 하고는 물러갔다. 단목 수령도 말에서 내렸고 말 을 하인들에게 건냈다. 말을 인도 받은 하인들은 장원의 뒤쪽으 로 사라졌다. "언니 제 방은 저쪽에 있어요." 그리고는 왼쪽에 난 문으로 몸을 돌려 걸어갔다. 서혜령도 말 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장원 내부는 어지러운 장원 밖과는 대조적이었다. 생각했던 것 과는 달리 깔끔하면서도 단정한 것이 상당히 보기 좋았다. 아마 도 저 하인들 덕분일 것이다. 하인들의 수는 상당히 적었지만 일 하는 모습이 노련해 보였다. 아마 집이 깨끗한 것은 그들 때문인 것 같았다. 단목 수령은 방에 들어서자 침상에 검을 풀어놓았다. "언니! 잠시만 기다려요." 간단히 말을 끝내고는 방문을 열고 나섰다. 천인문은 서혜령의 등에서 내려서며 방을 휘 둘러보았다. 그녀의 방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름답게 꾸며진 여느 여인의 방과는 달리 단정 한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서혜령도 자리를 잡고는 방을 둘러보 고 있었다. 잠시 후 기다리던 단목 수령이 손에 무언가를 한 상 들고 나타 났다. 그러자 서혜령이 냉큼 자리에 일어서서 그녀를 도왔다. "차린 것은 얼마 없지만 많이 드세요." 그녀는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으며 말했다. "누나! 뭘 이렇게 많이 차린 거에요?" 냉큼 자리를 잡고 앉은 천인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랬다. 상에는 술인지 차인지 모를 무언가가 담긴 주전자와 잔들, 그리고 많은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다 차렸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비록 고급 음식은 아니었지만 한눈에 봐도 정성이 담긴 음식들이었다.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래. 자 어서 들어." 멋쩍은 듯 얼굴을 붉힌 그녀가 대답했다. 천인문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음식은 상당히 맛있었다. 비록 배는 불렀지만 하나씩 맛을 보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조금씩 음식은 비워져가고 있었다. 백삼에 긴 수염을 늘어뜨린 중년 사내가 제법 수려하게 꾸며진 방안에서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얼굴엔 온통 잔주름이 심하게 진 사내였다. 바로 이 장원의 주인인 단목 인성이었다. 그는 지금 자 신의 방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조금 전 이 총관으로부터 단목 수령이 돌아 왔다는 말을 들은 직후부터였다. 그러나 손님들 과 같이 왔다는 말에 꾸중을 하러 가지도 못하고 그저 이렇게 망 설이는 것이다. 평소 성격으로는 이렇게 참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큰 소리 한번 치고 풀어버리는 게 훨씬 나았다. 그러나 지금은 손이 계시 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어째 생긴 것부터 꼭 미령을 닮은 것이 하는 짓도 똑 같은 게 야.' 속으로 불만을 가득 쌓아 둔 것인지 연신 투덜거렸다. 그럼에도 얼굴은 화난 것 같이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 전 소 주에서 알아주는 부자에게 혼례 건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단목 세가의 가세가 기울게 된 것은 단목 인성 대부터였다. 그런 것이 황보세가의 혼약을 파기하고 도망친 단목 미령으로 인해 회 복 불능의 상태로 빠져들었다. 그로 인해 둘째와 셋째인 단목 진 령과 단목 예령은 이름 없는 가문으로 보내야 했다. 그 모습에 단 목 인성은 쓰라린 눈물을 흘려야 했다. 황보 세가와 이어지기만 했 더라도 지금처럼 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단목 미령을 미워한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아내인 상옥경(常鈺暻)이 계속 화를 풀 어주지 않았다면 아마 홧병으로 이 세상을 뜨고 없었을 것이다. '하는 수 없지. 그 아이가 도망간 것도 제 팔자려니 해야지. 어디 서 뭘 하고 있는지 연락이라도 하지 무정한 것.' 이젠 별 화도 나지 않았다. 다만 아무 연락도 없는 단목 미령이 너무도 야속할 뿐이다. 아마 자신이 이 정도로 풀린 것도 이번에 들어온 혼례덕분일 것이다. '이번엔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성공해야 돼. 어떤 일이 있어도.' 이번 혼례만 성공시키면 가세를 예전처럼 회복할 수 있다. 그 길 만이 가문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불끈 쥔 두 주먹에 힘 이 들어갔다.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수히 많다. 보통 재물 이나 권력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 다. 그러나 사람들이 평소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 중에서 중요한 것도 있으니 그것은 바로 자유란 것이었다.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 은 그 자유란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바로 그 자유의 소중함을 삼 일만에 뼈에 사무치게 새겨 넣은 사 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자칭 황산 삼웅 이었다. 어둠에 잠긴 감옥은 너무나도 어두워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냄새는 또 얼마나 심한지 처음 들어오는 사람은 머리가 띵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젠 여기 있기 싫어. 밥도 맛없고 습기는 왜 이리 많은 거야." 지푸라기에 앉아 있던 왕충이 벌떡 일어서며 감옥문을 발로 차며 떠들었다. 단목 수령에게 맞은 눈은 푸르딩딩한 색으로 물들어 있 었지만 뼈는 상하지 않았는지 발광을 다 떨었다. 그 모습에 맞은 편 감옥에 갇혀 있던 곽순이 고개를 떨구었다. 저런 병신! 네가 아무리 발광을 해 봐라. 풀어줄 사람이 누가 있 는가. 곽순 옆에 있던 호영제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 보게 아우들. 분명히 방법이 있을 걸세. 우리 같이 좀 고민해 보자구." 왕충은 감옥 나무 사이로 난 틈에 머리를 들이밀며 떠들었다. 그러 나 곽순과 호영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말에 아무 반응 도 보이지 않는 것이 화가 나는지 그는 더 큰 소리로 떠들었다. 그렇게 떠들어 봐라. 한 대 더 맞지. 호영제의 생각을 알아 차렸을 까 감옥 문이 열리고 안으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관병인 듯 했다. 그는 손에 든 창을 거꾸로 들어 지랄을 떠는 왕충을 푹푹 찔러댔다. "이 새끼! 좀 조용히 하라구 분명히 말했을 텐데. 넌 내일 밥 없는 줄 알아." 그런 밥 줘도 안 먹겠다 대들려던 왕충은 감옥에 든 첫날 이렇게 떠 들다 밥을 못 받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군소리 없이 맞았다. 기가 실 리지 않은 그런 공격은 맞아도 하나 아프지 않았다. 관병이 나가고 감옥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왕충도 힘이 다했는지 조용하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고개를 숙이고 있던 곽순이 머리를 들었다. "나갈 방법이 있으니 그렇게 멍하게 있지 말고 힘이나 모아 두쇼." 그러자 왕충이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호영제도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누가 우릴 구하러 오는 건가?" "목소리 낮추쇼. 그리고 구하러 오긴 누가 온다는 말이오. 우리가 빠져나가야지." 곽순은 왕충을 째려보며 오른 쪽 신발을 벗은 후에 신발 밑창을 뜯 기 시작했다. 그러자 무언가가 톡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금까지 이런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십 년 가까이 붙어 다녔 으면서도 신발 밑창에 저런 것이 들어 있는 줄 전혀 예상치 못했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호영제가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그게 뭐냐?" "우리 탈출을 도와줄 귀중한 물품이죠." 간단하게 말을 마친 곽순이 바닥에 떨어진 검은 색의 반 자 정도 되 는 물건을 주워 들었다. 그것은 꼭 비수 같았다. 하지만 옆으로 난 많은 이가 톱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곽순은 나무를 자르기 시작했다. 사각대며 나무 잘리는 소리가 감옥 에 울려 퍼지고 톱밥은 아래로 나부꼈다. 그렇게 한참을 톱질하던 곽 순은 나무를 잘라 내고 밖으로 나왔다. 뒤따라 나온 호영제가 밖의 동향을 살피는 동안 곽순이 다시 왕충을 가둔 감옥 나무를 자르기 시작했다. 곽순이 비수톱으로 감옥을 부수자 더 이상 안에 있다는 것이 끔찍하 다는 것처럼 몸을 털고 밖으로 나왔다. 왕충이 완전히 탈출을 했다는 식으로 느긋하기 짝이 없자 감옥 입구에 선 호영제가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나가면 어떻게 하실 거요?" "일단 나가서 무기를 찾아야지. 그리고 또 고 계집년을 찾아서 복수 를 해야지." 원독에 가득찬 목소리로 눈을 빛내던 왕충이 눈꼬리를 올리며 대답 했다. 듣고 있던 곽순이 한심한 말하지 말라는 투로 손을 내저었다. "지금 무기를 찾으러 갔다가는 관병 수십에 둘러 쌓여 죽도 밥도 안 되오 형님! 무기는 포기하시오. 그냥 여기서 조용히 물러가는 게 상 책이요." "곽 아우의 말이 맞소. 쓸 모 없는 무기에 신경 쓰지 마시구랴." 호영제도 맞장구를 쳤다. 그 말에 속이 타는지 왕충은 눈을 부라리 며 둘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바라보던 그가 어쩔 수 없는지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좋아. 무기는 포기하지. 하지만 계집을 그냥 둘 순 없어. 내가 씹 어 먹어 버리지 않고선 이 울분을 참아 넘길 수 없단 말이다." "아,알았소. 씹어먹든 삶아 먹는 알아서 하시구랴. 그러니깐 소리 좀 낮추시오." 너무 큰 소리에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호영제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까지 가만있던 곽순이 손을 들어 호영제를 부르자 다시 동향을 살핀 후 바로 다가왔다. "여기서 나가려면 일단 저 밖의 세 놈을 제압해야 하오. 그러려면...." 곽순은 목소리를 낮추며 그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고 듣고 있던 왕충과 호영제는 올타쿠나 하고 미소를 지었다. -55- 왕충 일행이 감옥을 탈옥하는 그 시각, 단목 인성의 집에 선 또 다른 탈출이 준비되고 있었다. 바로 단목 수령의 탈 출이었다. 며칠 동안 단목 세가의 분위기는 싸늘하다 못해 오싹했다. 단목 인성이 단목 수령의 혼약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기 때 문이었다. 비록 손이 있다고는 하나 그에 구애받을 단목 인 성이 아니었기에 그날 저녁 이후 세가엔 찬바람이 불었다. 무조건 하라고 우기는 단목 인성과 싫다고 뻗대는 단목 수 령 사이에서 이도 저도 못하고 허둥대던 천인문과 서혜령은 그 날 저녁 악양루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자 단목 수령이 가 지 말라며 그들을 잡았다. 그녀의 입장에서 바람을 막아 줄 방패막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며칠 간 좌불안석(坐不安席) 같은 시간을 보내던 그들에게 구조의 손을 뻗은 것은 바로 단목 수령 본인이었다. 그녀는 한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과 혼인을 맺는다는 게 상 당히 껄끄러웠다. 정략적인 냄새가 다분한 이 결혼에 자신 을 희생하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가지지 않았던 그녀는 서혜령에게 한가지 제안을 했다. "언니. 저 집을 나갈 꺼에요. 저 좀 도와 주시겠어요?" 제안이라기보단 부탁에 가까웠다. 듣고 있던 서혜령은 천 인문에게 도움을 청했고 천인문도 기꺼이 허락을 한 것이다. 원래 천인문의 생각은 결사 반대였다. 단목 미령도 그렇게 집을 나갔는데 막내 이모인 단목 수령까지 집을 가출한다면 단목 인성이 어찌 될지 걱정 된 것이다. 단목 세가와 천인문 의 관계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니 별 문제야 있겠냐는 생각도 해 봤지만 끝까지 지켜지는 비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 각을 한다면 단목 수령의 가출을 돕는것은 또 다시 단목 미 령을 욕되게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저렇게 또 애처 럽게 바라보는 그녀를 보니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두 가지 갈등 상황에서 고민을 하던 천인문이 결정을 내린 것 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탈출(?)을 도와주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후 축시(丑時; 오전 1~3시)가 다가오자 야행복 같이 검은 옷을 입은 단목 수령이 어디서 구했는지 흑 의 두벌을 가지고 왔다. "준비 되셨어요?" 단목 수령이 옆에 선 서혜령에게 말을 걸자 고개를 끄덕거린 다. 옆에 나란히 서 있던 천인문이 말문을 열었다. "이봐요. 이모..." 천인문은 말을 하다 말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며칠 동안 계속 생각했던 이모란 말이 무의식중에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서혜령의 낯빛도 확 변해 버렸다. 단목 수령이 의아 한 얼굴로 바라보자 천인문은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 대답했 다. "이 모습이 잘 어울리냐고요? 헤헤헤." 워낙 표정연기가 좋았던지 단목 수령은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돌렸다. "자 가요. 제가 안내할게요." 말을 마친 단목 수령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천인문은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며 그녀의 뒤를 따랐 다. 마당으로 내려선 그녀는 사방을 둘러 본 뒤 손짓을 했다. "일단 제가 평소 집에서 빠져나가는 곳으로 가죠. 거기는 이 총관도 몰라요. 이쪽이에요." 뒤를 돌아본 그녀는 다시 한번 사방을 둘러보며 자세를 낮추 고 걸음을 옮겼다. 정원을 가로지른 그들은 담에 바짝 붙은 후 담장 그림자에 몸을 감추고 걸어갔다. 잠시 후 그들이 도착한 곳은 우물가였다. "여긴 우물 아네요?" 천인문이 궁금한 듯 질문을 하자 단목 수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마른 우물이지. 사람들은 전부 우물이 말라버렸다는 것 만 알지 이 곳이 집 밖으로 통해 있다는 건 모르거든?" "누나는 어찌 알았는데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천인문에게 단목 수령이 대답했다. "내가 워낙 탐험심이 많아서 모르는 곳이 없지. 내가 열 네 살이 될 때 이 우물에 내려 온 적이 있어. 그때 꼬박 이틀을 보낸 후에 빠져 나올 순 있었지만 그 결과 이렇게 멋진 비밀 통로도 알게 된 거 아니겠어." 어깨가 으쓱대는 것이 상당히 기쁜 듯 했다. 하지만 그 기분 은 얼마 가지 못했다. "탐험심은 뭔 탐험심? 쉽게 말해 많이 까부는 철부지였다는 거 아네요?" 면전에 대고 확 깍아 내리는 천인문의 발언에 그녀는 면상을 확 일그러뜨렸다. 그녀가 손가락을 냅다 찌르며 입을 벌리자 서혜령이 급히 손을 들어 그녀의 입을 막았다. "지금 소리 지르면 들켜요. 화가 나도 참으세요." 그녀의 말에 자신의 상황을 깨달은 그녀는 천인문을 째려 본 후 우물가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우물 밑으로 내려진 두레박줄 을 잡았다. "그럼 저부터 내려가도록 하죠. 조심해서 내려오세요." 말을 마친 그녀는 누가 볼세라 줄을 잡고 밑으로 하강했다. 뒤 이어 서혜령도 내려갔고 마지막으로 천인문이 줄을 잡았다. "내가 틀린 소리 한 것도 아니잖아. 뛰어 내리는 걸 보니 완전 선머슴 망아지 탄 것 같던데 뭘." 그러자 밑에서 이빨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하하! 내려갈게... 내려간다구." 천인문은 멋쩍은 미소를 지은 후 줄을 잡고 아래로 내려갔다. 바닥은 완전히 메말라 있었다. 습기는 전혀 없었고 우물 벽엔 이끼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팍 하는 부싯돌 소리와 함께 사방 이 밝아졌다. "내 뒤만 따라와요. 그러면 가뿐하니." 차갑기 그지없는 말투로 내뱉은 단목 수령은 바로 걸음을 옮기 기 시작했다. 아마 화가 풀리지 않았나 보다. 그 모습에 서혜령 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천인문을 바라봤지만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역시 아무 말도 못한 천인문. 그녀의 뒤를 따라 열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우물 밑에서 한쪽으로 이어진 통로. 누가 만든 것인지 불에 비 치어 환해진 벽엔 사람의 손길이 드러나 있었다. "여긴 옛날에 누가 비밀 통로로 사용했던 것 같더라구요. 제가 옛날에 왔을 때 여기서 일기를 몇 권 찾았는데 원 나라 때 관병 을 피하던 사람들이 쓴 거더군요." 아무 말 없이 걷는 게 어색했는지 앞서가던 단목 수령이 말문 을 열었다. 뒤를 따르던 서혜령이 맞장구를 쳤다. "네 그렇군요." "뭐 저도 처음에 보았을 땐 비급 같은 게 없나 설레기도 했죠. 다 치기 어린 소시적 얘기지만요." "그렇군요." "지금까지 이 통로로 나간 적은 겨우 두 번 밖에 안돼요. 그런 데 제가 처음 왔을 땐 상당히 놀랬었죠." "아니 왜요?" "해골이 있었거든요." 서혜령은 궁금해하는 빛이 역력해지자 단목 수령은 굳었던 얼굴 을 펴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천인문에겐 지겨운 이야기였다. 우물 밑 통로는 볼거리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길이도 무진장 길 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한 시진동안 주절대던 여자들도 조 금 전부터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야기 거리가 떨어진 모양이다. 이야기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천인문은 이젠 지겹다 못해 잠 까지 오고 있었다. -56- 또 다른 얘깃거리가 생겼는지 주절대며 걷는 두 여인을 뒤따 르던 천인문의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단목 인성... 그 사람이 내 외할아버지라..." 천인문의 머릿속에 단목 인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단목 세가 에 들어와 첫날 만났던 그의 얼굴은 천인문에게 충격을 던져 주었다. 허연 수염으로 덮인 얼굴위로 가득 들어찬 잔주름. 누 가 봐도 여든이 훌쩍 넘었다 믿어 버릴 얼굴. 그러나 어딘가 단목 미령을 닮은 듯 보이는 부분도 있었다. 꼭 집어 말하긴 어려웠다. 단지 저 분이 외할아버지라 생각하고 보니 닮은 부 분이 있어 보이는 건지도... "아! 빛이다. 언니 출구에요." 앞서 가던 단목 수령의 목소리에 천인문의 의식도 돌아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저 멀리 빛줄기가 보였다. 지겨운 땅 밑 여 행이 끝난 것이다. 씩 미소를 짓고는 앞으로 내달렸다. "색시야 나부터 나간다." 서혜령을 지나치며 한 마디 남겼다. "같이 가요." 자신을 부르는 소리. 하지만 천인문은 못 들은 척 그저 달려 갈 뿐이었다. 멀리 비치던 빛이 서서히 커져 가는가 싶더니 어 느새 폭발하듯 밝아졌다. 엄청난 눈부심에 눈을 잠시 감았던 천인문은 서서히 빛에 적응되는 것을 느끼자 눈을 떴다. "아~!" 새파란 초원 사이를 가르며 꿈틀꿈틀 기어가는 장강의 모습 은 과연 장관이었다. 동쪽에서 떠 오른 햇살에 반짝이며 빛나 는 장강 위로 떠다니는 배들과 그 옆으로 우뚝 솟은 악양루. 그리고 그 사이로 난 길을 부산히 움직이는 사람들. 한폭의 그림같은 모습에 천인문은 넋을 잃고 바라 볼 뿐이었다. 언제 나왔는지 천인문 옆으로 서혜령과 단목 수령이 같이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있었다. "언제 봐도 멋있네. 오늘따라 더 멋있는 것 같아." 단목 수령이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 마디 했다. "갈 곳은 생각하고 나온 건가요?" 천인문의 물음에 그녀는 안색을 바꾸며 대답했다. "일단 어머니부터 뵙고 그 다음엔 청혼 넣은 집이나 찾아가 서 거절하려구. 나둬도 상관없겠지만 그렇게 되면 아버지 뵙 기도 미안하고..." "그쪽에서 안 받아 주면 어쩌려구요?" "안 받아 주면 협박이라도 해야지. 돈 좀 많다고 우리 집을 무시하는 것 같은데 상인 집안에 제대로 된 무사들도 없을 테 니 까불면 그냥 한 주먹에 콱."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불끈 쥐어흔들던 단목 수령은 어이없 다는 듯 바라보는 주위의 눈빛에 주먹을 슬금 내렸다. "헤헤 말이 그렇다는 거에요. 정말이에요." 그녀는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자기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천인 문은 못 믿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슬며시 돌려 버렸다. "빨리 가요. 여기서 멀진 않지만 그래도 놀 시간은 없다구요." 말을 마친 단목 수령은 냅다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천인문 과 서혜령도 그녀의 뒤를 따라 내려갔다. 검은 옷을 입은 세 명의 인영은 순식간에 사라져갔다. 악양으로 향하는 관도 위 세 명의 남녀가 걸음을 바삐 옮기고 있었다. 한 중년 여인과 중년 사내 그리고 한 백발 노인이었 다. 바로 옥조영 일행이었다. "요놈 내 손에 걸리기만 해 봐라. 아작을 내 주지." 선두에서 연신 투덜거리던 옥조영이 큰 소리로 외쳤다. 무슨 억하심정이 그리도 큰지 불끈 움켜 쥔 주먹에서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인문이 도망치듯 산을 내려간 그 날 옥조영은 여미릉과 백 운호를 동행하여 뒤를 쫓았다. 여미릉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아 무 말 없이 동행했지만 백운호는 달랐다. "왜 나까지 따라가야 한단 말이오. 난 여기서 쉴라우." "그럼 그러시오. 그럼 여 부인. 갑시다." "그러죠." 옥조영은 권유하는 짓 따윈 하지 않았다. 그냥 동굴에서 검 한 자루를 들고나섰을 뿐이다. 그러자 안 간다 못을 박은 백 운호가 뒤를 따라 왔다. "백형께선 안 가신다 하셨지 않소?" "마...말이 그렇다는 거지 진짜 안 가겠소." 뒤통수를 긁으며 대답하는 백운호에게 별 말은 안 했지만 옥 조영은 그가 왜 따라 왔는지 어느정도는 알고 있었다. 바로 허 리춤에 걸린 이 붉은 검집에 감추어진 검이 그 이유였다. 자 신이 마지막으로 강호에 출도했을 때 얻은 별호, 광검마((光 劍魔). 엄청난 쾌검으로 이름을 날렸던 그 당시 썼던 검이 바 로 이 검이었다. 그런데 바로 백운호가 그 검을 알아보고 탐 을 내는 것이다. '검은 알아보면서도 그 검의 주인은 못 알아보다니 눈이 있 는 건가? 없는 건가?' 어이가 없다는 식으로 고개를 내 젓던 옥조영은 그를 뒤로하 고 산을 내려왔다. 산을 내려온 그들은 바로 사막의 옥문관을 향했다. 처음 천인문이 나타났을 때 입고 있던 복장이 중원의 그것이 아닌 사막 부족들의 것이었기에 그랬던 것이다. 그러 나 그곳에서 그들의 흔적을 찾지 못했던 그들은 다시 중원쪽으 로 발길을 옮겼다. 그 이후는 일사천리(一瀉千里)였다. 천인문 의 흔적을 찾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마을 마을마다 천인문의 손찌검에 당해 앓아 누운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천인문 에게 응어리가 진 마을 사람들은 묻지 않는 것까지 대답해 주 며 꼭 그 악동 녀석을 잡으라 기원까지 해 주었다. 한 두 번도 아니고 들르는 마을마다 그러하니 처음에 무심코 넘겨버린 옥 조영도 슬슬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그 아이는 마음대로 하셔도 좋지만 우리 혜령이는 건들이지 말아요." 뒤를 따르던 여미릉의 싸늘한 목소리에 옥조영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 보았다. "걱정 마시오. 그 아이가 뭐 잘못 한 것은 없을테니 말이오. 문이 녀석이 나쁘지 안 그렇소 백형?" 옥조영은 동의를 구하는 듯 백운호를 향해 물었다. 하지만 대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백형!" 옥조영이 목소리를 높여 다시 부르자 백운호는 정신이 들었는 지 몸을 흠칫 했다. "그...그렇소. 당연한 말이오. 하하하하." 옥조영과 여미릉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던 백운호는 웃음을 터 트렸다. "뭘 보는데 그렇게 정신을 놓고 있소?" "보...보긴 뭘 봤다고 그러시오. 옥대협께서는 이...이상한 트집을 잡으시는구료." 백운호는 먼 산을 바라보며 딴청을 부렸다. 그러나 옥조영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백운호가 왜 저러는지 잘 알고 있었다. "옥대협이라 부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흑객이라 부르던지 정 어색하면 옥형이라 부르쇼. 그리고 이 검에 눈독 들여봤자 절대 주지 않을 것이니 관심일랑 끊으시오." 그러면서 허리춤에 걸린 검을 뒤로 돌렸다. "과...관심을 가졌다니 별 말씀 다 하시오. 분명히 말씀 드 렸지만 이제 그 검에 신경 끊었으니 옥형은 걱정 안 하셔도 되오." 어딘지 찔리는 게 있는지 백운호는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그 모습에 옥조영은 의심에 찬 눈으로 백운호의 전신을 노려본 후 발길을 돌렸다.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여미릉도 아무 말없 이 옥조영을 따라갔다. 그제서야 백운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 었다. '눈치 한 번 빠르네. 무공으로 뺏을 수 있는 상대도 아니고. 그건 그렇고 저 여편네는 누굴 편드는 거야. 낭군이 곤혹을 당 하는 판국에 저렇게 바라보다니. 에잉 역시 여자는 아무 소용 이 없다는 옛말이 딱 맞다니깐.' 백운호는 앞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군시렁 댔다. 그러나 큰 소리 칠 용기는 없었다. 옥조영의 신분에 대 해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싸워오던 십 년간 옥조영 을 그저 자신보다 한 단계 높았던 고수라고만 생각했던 것은 여행 며칠만에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다. 광검마. 백년 내 무 림 제일인이라 불릴 만한 인물. 자신이 무림에 출두했을 때 이미 은거해버린 인물이다. 손버릇이 나쁜 그로서는 보물을 알아보는 눈은 있어도 사람 알아보는 능력이 없음을 연신 한 탄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보복 같은 것은 없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켕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같이 갑시다." 연신 투덜거리던 백운호는 거리가 멀어지자 황급히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들은 곧 악양성 관내로 들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바삐 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오랜만에 큰 도시에 온 그들은 사방 을 휘휘 둘러 봤지만 그 옆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전혀 이방 인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한다? 아무나 잡고 물어 볼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천인문을 찾을 수 있을지 슬슬 고민이 되던 옥 조영이 지나가는 말투로 입을 열자 여미릉이 바로 뒤를 이었 다. "일단 돌아다녀 보죠. 그러면 단서라도 나올지 모르잖아요." "이 넓은 곳에서 그냥 돌아다니자는 말이오? 으음... 참 여기 서 갈 수 있는 곳이 어디오?" "무한(武漢)을 거쳐 소주(蘇州)나 항주(杭州)로 갔을 수도 있 고, 남창(南昌)일 수도 있죠. 남경(南京)도 있고요." "북경도 있잖소." 백운호가 불쑥 끼어들자 여미릉이 대답했다. "북경으로 가려면 이곳으로 올 리가 없죠. 서안(西安)을 거치 는 게 빠르죠." "일단 식사부터 합시다. 여기까지 왔으면 다 쫓은 거나 다름 없지 않겠소. 뭐 밥 먹는 동안 도망 가 봤자 어디까지 가겠소. 안 되면 개방 녀석들이나 붙잡아서 물어 보면 되겠지."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하던 옥조영은 머리가 아픈지 고개를 휘 젓고는 퉁명스런 말투로 말을 마쳤다. "그것도 맞네. 개방 녀석들을 잊고 있었어. 허허." 왜 그 생각을 못했는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 백운호는 가볍 게 웃어넘기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걸어가자 인산인해의 물결이 옆으로 갈라졌다. 한눈에 도 검을 옆으로 빗겨 찬 것이 무림인임을 말해주는 인물들의 앞을 막아서 봤자 좋을 것이 없다 생각한 것인지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나 옥조영 등의 관심 은 그들에게 있지 않았다. 지나가며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어 느 한 명 거지라 부를 만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할 뿐이었다. 강을 따라 난 길을 한참 걸어 내려가던 그들의 앞에 악양루의 거대한 간판이 나타났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안으로 들어 갔다. "어서 오십시오." 한 점소이가 나와 그들을 반겼다. 일견하기에도 먼지를 뒤집 어 쓴 그들의 모습에 돈이 없다 판단한 것인지 점소이는 일층 의 구석자리로 안내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그들은 단 순히 그의 뒤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여기 잘 하는 걸로 세 개하고 백건아(百乾兒) 한 병."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주문을 하는 백운호의 말을 들은 점소 이는 고개를 내저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어째 거지 새끼 하나 보이지 않냐." 백운호가 볼을 실룩대며 입을 열었다.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 지만 정오때가 아직 멀어서인지 한산한 식당안에 우렁차게 울 려 퍼졌다. 몇 안 되는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돌 려 바라 봤지만 곧 무림인들임을 알아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주루의 분위기는 싸늘해져 가고 있었다. 계산대에 앉아 있던 주인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지를 쫓 아내는 사람은 많이 봤어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주인장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악양루의 주인은 그 누구보다 거지를 싫어하던 사람이었다. 악양루는 악양을 대표할만한 곳 이었기에 입구를 막는 거지들은 장사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거지들의 등살에 머리를 싸맸던 주인은 저녁에 남는 음식은 모두 주는 대신 장사 시간 에는 오지 않겠다는 거래를 한 후에야 한 시름 덜 수 있었다. 비록 음식을 많이 주기는 했지만 거의 손님들이 먹고 남긴 것 들이었기에 아깝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지만 거지가 싫은 것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거지를 찾는 사 람이라? 주인장은 가슴속에 호기심이 생기는 것을 느끼고는 자 리에서 일어났다. 어딘지 긴장된 주루의 분위기도 풀겸해서 그는 천천히 백운호의 등뒤로 다가갔다. "손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예상치도 못했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백운호는 고 개를 돌렸다. 왠 비루먹은 당나귀를 바라보듯 눈을 부라리던 백운호는 그가 이 주루의 주인임을 알아보고는 입을 열었다. "귀 먹었냐? 거지가 왜 하나도 안 보이냐고 말했다." 퉁명스런 말투였지만 주인은 인상 관리에 철저한 인물이었 다. 솔직히 이런 손님들을 상대한지 하루 이틀인가. 나이도 나이였지만 특히나 무림인들을 건드려서 좋은 꼴을 보기 어 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주인장은 속에서 부글거리는 화를 꾹 눌러 삼키며 웃음을 지었다. "거지가 없는 것은 저희 악양루만의 자랑으로서 무엇보다 손 님들의 위생과 편의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그만 닥치고 이 곳에 거지가 있는지 없는지만 말해."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한 마디는 주인의 주절대는 입을 다물게 해 버렸고 동시에 싸늘한 주루의 분위기를 겨울로 바 꾸어 놓았다. "이..있습니다요. 예 있구 말구요." "거기가 개방 악양 분타인가?" "그...그것까진 소인도 잘..." "위치는?" "이...이곳에서 나가셔서 왼쪽으로 관제묘가 있습니다요. 거 기에..." "그래? 알았으니 가 봐." 눈을 부라린 백운호와 잔뜩 주눅이 든 주인의 대화가 끝나자 주인장은 뒷걸음질치며 물러났고 다가오지도 못하고 기다리던 점소이가 음식을 놓고 부리나케 도망쳤다. "일단 먹고 가보면 알겠지. 식사나 합시다." 옥조영이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음식을 보며 군침을 다셨다. "술 한잔 받으시오. 백형" "좋습니다. 내 술도 한잔 받으시오." 옥조영과 백운호는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음식을 먹기 시 작했다. 부드러운 웃음이 흐르고 호탕한 웃음소리가 주루 안 을 휘젓자 다시금 주루는 화기애애해져 갔다. 그러나 그 분위 기도 얼마 가지 못했다. -쾅!- 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동시에 네 명의 사내가 주루 안으로 들 어왔다. 겁을 주기 위함인지 문을 박찬 사내가 깨어지는 목소 리로 물었다. "주인 어딨냐." "예...옛." 주인장은 벌렁거리던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또 이런 일이 벌어지자 사색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간신히 후들거리던 다리 를 진정시켜 앞으로 걸어 나오던 그의 얼굴이 뭐 씹은 것처럼 바뀌었다. '윽! 저 놈이 또 오다니. 돈을 먹인 건가? 어떻게 이렇게 빨 리 풀려 날 수 있지?' 그는 며칠 전에 와서 난동을 부렸던 왕충이었다. 그리고 그 뒤 로 곽순과 호영제의 모습도 보였다. 비록 무기들은 보이지 않았 지만 얼굴이 일그러진 것이 단단히 벼르고 온 듯 싶었다. 그 뒤 로 한 낯선 인물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용모를 길게 늘 어뜨린 머리로 감추었지만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눈빛은 그리 녹녹한 인물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뭘 그리 걱정 하셔? 걱정 할 거 없어. 우리가 뭐 부수고만 다 니는 사람들인가? 긴장할 것 없다구."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음을 짓던 왕충의 손이 주인의 어깨를 툭툭 치자 주인장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그럼 어쩐 일로..." "그때 그 일은 내가 잘못 한 거지. 그래서 말야. 사과를 하려 구 하는데 그 여자 집을 모르겠더란 말이야. 자네가 좀 가르쳐 주겠나." 웃음을 흘리며 이야기하긴 했지만 왕충의 손은 주인장의 턱을 슬슬 만지고 있었다. 언제라도 목울대를 움켜 쥘 것 같은 느낌 에 주인장의 등 뒤로는 땀방울이 흘러 내렸다. 거기다 곽순과 호영제가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공포스런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망설일 것이 없었다. "그...그 아가씨는 ... 다..단목 세가 집이...입니다요." 헛바람이 세어 나오는지 말을 엄청 더듬으며 대답하자 왕충은 수고했다는 식으로 주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왜 이렇게 땀은 흘리시나. 거기다 다리도 후들거리시고. 이렇 게 따스한 봄날에 어쩌자고 감기는 걸려 가지고. 쯧쯧! 어쨌든 수고했네." 그 말에 죄를 용서받은 죄수가 이렇게 기뻤을까. 주인장은 부 르르 떨리는 입술을 미소를 짖느라 고생은 되었지만 안도의 한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흥! 단목세가... 단목 세가라... 단목세가가 단목장이 된 게 언제 적 일인데." 어깨에서 손을 내린 왕충이 눈을 아래로 깔며 서슬 퍼런 목소 리를 흘리자 다시 주인장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아! 혼잣말일세. 그리 긴장 안 해도 되네. 그럼 우린 가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몸을 돌려 주루 밖으로 걸어갔다. 주루 안을 돌아다니던 곽순 등도 싸늘히 주위를 돌아보며 밖으로 나 갔다. <저녀석 겁주는 데 소질이 있구만> 왕충 일행이 들어왔을 때부터 조용히 지켜보던 옥조영이 전음 을 날리자 백운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입만 산 녀석치고 제대로 된 녀석은 없잖수> <마을 내에서 주먹질로 먹고사는 녀석들 같네요. 뭐 긴 머리 사내는 제법 한 수 있는 것 같지만 말예요> 여미릉도 한 마디 했다. <그런 것 같군. 근데 우리는 재미있었지만 저 주인장은 안됐구 먼. 백형 때문에 간이 덜컹. 저 녀석 때문에 간이 덜컹. 오늘밤 에 악몽이나 꾸지 않을지...> <그러게 말이에요> 주인장의 아픔을 안주 삼아 잔을 비워가던 그들의 귀로 왕충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참. 주인장! 잊어버릴 뻔 했군." 겨우 심장을 안정시키던 주인은 문 앞까지 나갔던 왕충이 다시 몸을 돌리자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네...넷!" "뭘 그렇게 놀라나. 내가 자네를 가지고 노는 것 같냐?" 누가 봐도 가지고 노는 것 같은 모습에도 주인은 고개를 내 저 을 수밖에 없었다. "아...아닙니다. 가지고 놀다뇨.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 그렇지? 그건 그렇다 치고 내가 봤던 그 선녀 같은 여 자하고 꼬맹이도 그 단목장으로 갔냐?" 그 말에 옥조영 이하 두 명의 눈이 커졌다. 선녀와 꼬맹이. 바 로 그들이 찾고 있는 서혜령과 천인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번 쩍 떠오른 것이다. 그들의 눈에서 싸늘한 눈빛이 흘러나오기 시 작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왕충과 주인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 다. -57- "그...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고마워. 이제 내 볼일은 끝났으니 볼일들 봐." 왕충은 다시 주인의 어깨를 툭 쳐준 뒤 몸을 돌려 문을 향 했다. 그러나 곧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자네 볼일이 끝났으니 이번엔 내 차롄가?" 그 말에 왕충의 신형이 흠칫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저런 말 을 들을 대상이라고는 자기뿐이란 것을 모를 정도로 왕충은 바보가 아니었다. "누구냐? 감히 누가..." 왕충은 몸을 휙 돌리며 큰 소리를 내뱉었다. "날세. 내가 자네를 좀 보자고 했네." 그제서야 왕충은 자신을 부른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홍 안(紅顔)이지만 하얗게 새어버린 백발의 노인. 눈에서는 광채 가 쏟아지는 것이 누가 봐도 무림인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지만 슬슬 열이 오른 왕충의 눈에는 그저 힘없는 노인으로 밖에 보 이지 않았다. '이거 뭔가 잘못 된 것 같은데.' 곽순의 눈초리에 힘이 들어갔다. 아까의 싸늘한 분위기에도 전 혀 주눅들지 않던 유일한 일행들. 곽순은 왕충처럼 말만 떠벌리 는 인물은 아니었기에 그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던 것이다. 아 무리 봐도 이름난 고수들 같아 보였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 은 없었지만 기인이 어디 한둘인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길래 제발 무사히 넘어가기를 기원했다. '다행히도 별 충돌 없이 넘어가나 했더니만 역시 이렇게 되는 구만.' 곽순은 눈을 찌푸리며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안타까워했다. 말아 쥔 손에 땀이 맺히고 있었다. '우리 솜씨로는 안되는 것 같고, 결국 믿을 것은 저 사람 뿐인 가?' 곽순은 눈을 슬며시 돌려 긴 머리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긴 머리의 사내. 곽순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알아도 너무 잘 알았다. 팔비 절혼(八飛絶魂) 유운기(柚暈氣). 몸 속 깊숙이 숨겨둔 여덟 개의 비도가 날음에 날아가는 혼백까지 자른다는 인물이다. 강호의 인 물치고 그럴싸한 별호 하나 가지지 못한 사람이 어디있겠냐만은 팔비절혼이란 별호는 결코 허명이 아니었다. 사파의 십대 고수까 지는 아니었지만 상대하기 가장 껄꺼로운 열 명에는 결코 빠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명호가 팔비절혼이라 했지만 실상 그의 품 속 에 얼마나 많은 비도가 있는지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만큼 그는 비도 모으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번 청부 아닌 청부도 그의 비 도 한 자루를 내 주며 이루어낸 것이 아닌가. '참절도(斬絶刀)가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참절도. 탈옥을 도와 주었던 고마운 물건이다. 그러나 곧 수중 을 떠날 물건이다. 자신의 참절도를 알고 있던 유운기에게 청부 가 끝난 후 넘기기로 한 것이다. 보검 같은 귀한 것도 아니었기 에 아쉽기는 했지만 쉽게 내어 주기로 결정했었다. "영감탱이. 헛 수작 부릴려면 그냥 집에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 지." 왕충은 얼굴을 가능한 무섭게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그의 예상 과는 달리 날아온 것은 손바닥이었다. -짜짝- 왕충의 눈에 불이 번쩍했다. 언제 어떻게 날아온 것인지도 모르 고 맞은 뺨 두 대. 귀 속으로 웅웅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런 고얀 녀석 봤나. 어른이 묻는데 공손하게 대답을 할 것이 지." "이...이익. 죽어." 왕충은 이빨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손에 기를 모아 앉아 있는 백운호의 얼굴을 향해 내질렀다. 그러나 백운호는 싸늘한 미소를 흘리고는 손을 내 뻗었다. 거기까지였다. 무언가 손을 휘감는다 싶더니 어느샌가 천장이 휙 눈앞을 스치 고 지나갔다. 그리고 보이는 마루 바닥과 탁자. -우당탕- 왕충의 몸집은 가볍게 날아가 구석에 있는 탁자 하나를 부수며 떨어졌다. 의식이 끊어 진 것인지 움직임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형님." 호영제가 앞으로 뛰어 나가 넘어진 왕충의 몸을 잡고 흔들었다. "버릇없는 놈. 죽이지는 않겠다만 벌로 넌 얼마동안 좀 조용히 있어라. 가만 있자. 저 놈은 기절했으니." 백운호는 그제서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남은 세 명의 사내 를 향해 눈을 돌렸다. "어이 한 가지 물어보자." 백운호의 손가락이 곽순을 가리키자 곽순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물어 보시지요. 제가 아는 것이라면 대답 드리겠습니다." "허! 넌 저 무식한 아해보단 예절이 있구나. 혹시 저 녀석이 말 한 선녀같은 여자애하고 꼬맹이가 서혜령과 천인문을 말하는 것 이냐?" "이름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저희는 단지 용모 파기만 확실히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일단 여자분은 아름다운 이십대 초반의 용모를 가지고 있었고, 어린 아이는 갓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데 장난기가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더군요." "그래 그 아이들이다. 드디어 찾은 것 같군." 백운호의 얼굴에 잠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갑시다. 백형."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옥조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계산 대 앞으로 걸어갔다. 왕충이 당하는 모습을 히죽히죽 웃으며 바라 보던 주인에게 계산을 치른 옥조영은 주루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 을 돌렸다. 그러나 곧 눈을 찌푸려야 했다. 말 없이 서있던 유운기 가 백운호의 앞을 막고 선 것이다. "우린 바쁘다. 그만 물러 서 주겠나." 옥조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지만 다시 돌아온 것은 그보 다 훨씬 싸늘한 대답이었다. "그쪽의 볼일이 끝났으니 이젠 내 볼일도 마저 봐야 하지 않겠소?" "이 늙은이하고 아무 관계가 없을 텐데." 백운호가 눈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별 관계는 없었지만 청부자가 저렇게 됐으니 이젠 관계가 있지 않겠소?" 슬슬 사태가 심각해져가자 옥조영이 앞으로 나섰다. "우린 급하다. 저 녀석은 두 시진만 지나면 깨어날 것이니 양보 해 주지 않겠는가?" 솔직히 아쉬운 소리 할 필요는 없었다. 한 눈에도 고수임이 분명 했지만 백운호의 실력에는 못 미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굽 히고 들어간 것은 그와 승부를 겨루면 그 만큼 시간 낭비라 생각했 기 때문이었다. 분명 그도 실력이 제법 되었고 그런 만큼 우리의 실력을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쉽지만 이정도면 그도 양보를 할 것이다. 그런데... "분명 어른들의 실력이 나보다 뛰어남을 잘 알지만 할 일은 해야 지 않겠소?" 그 말뜻을 못 알아들을 옥조영이 아니었다. 그러나 싸울 시간이 없었다. 옥조영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백운호가 손을 내저었다. "옥형. 더 이상 말할 것 없소." 백운호는 옥조영을 말리고는 긴 머리 사내를 향해 다시 몸을 돌 렸다. "한 놈은 실력도 없는 것이 무식하기만 하고, 또 한 놈은 예절 은 있는데 용기가 없는 듯 한데 넌 예절도 있고 실력도 있는 것 같구나. 아해야. 손을 쓰거라." 백운호는 자세를 낮추었다. "그럼 손을 쓰겠소. 조심하시오." 말이 끝나자 유운기가 손을 내뻗었다. -파팍- 벼락이 무색할 정도로 빠른 손놀림은 백운호의 견정혈(肩井穴) 을 찍어갔다. 그러나 백운호의 손길도 만만찮았다. 독문의 수법 인 운룡장(雲龍掌)으로 반격을 했다. 수초의 공방이 진행되자 슬슬 백운호 쪽으로 승기가 기울었다. 백운호는 기세를 살려 더 욱 압박해 들어갔다. 백운호의 특기랄만한 무공은 경공과 검법이 었다. 경공은 도벽이 있던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무공이었다. 수십년간 실전에서 갈고 닦여진 무공이었음으로 거의 경지에 다 다랐다. 검법은 절간에서 훔쳤던 옥불(玉佛)속에서 나온 무공을 익혔던 것인데 이름은 운룡검법이라 쓰여 있었다. 지금 백운호가 시전하는 장법은 검법을 장으로 변화시켜 전개하는 것이었지만 그 날카로운 기세는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특기인 경공을 살려 사방에서 압박해 들어가는 모습에 곧 승리가 눈앞에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옥조영은 뭔가 불안했다. 분명히 승부는 결정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속에서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 다. '뭔가 이상해.' 수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옥조영은 유운기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저 손에 잡힌 굳은살은 무기를 썼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무기는 보이지 않는다? 검(劍)도 아니고 도(刀)도 아니라... 뭐 지? 뭘까?' 그러나 곧 그 궁금증은 풀렸다. 연신 위기에 몰려 있던 유운기 는 뒤로 풀쩍 물러서면서 가슴으로 손이 들어갔다 나왔다. -팟- 반짝 하는 빛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엄청난 속도로 두자루의 비 도가 미간과 유문혈(幽門)을 향해 날아왔다. "헛!" 예상치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백운호도 이미 유운기의 실력이 이 정도는 아닐 것이라 예상하고 대비는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속도 가 예상밖이었다. 가까스로 철판교의 수법으로 피해낸 백운호는 흩 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후~. 몰랐다곤 하지만 대단해. 노부를 긴장시킬 정도라니." 백운호는 씁쓸했지만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유운기 의 놀람에는 미치지 않았다. 솔직히 자신의 무공에 대해 전혀 모르 는 사람치고 이 두자루의 비도를 피해 낸 사람은 아직 한 번도 만 나지 못했던 것이다. "어르신께서 더 대단하시군요. 그걸 피하실 줄 예상치 못했습니다. 이번엔 최선을 다할테니 어르신께서도 조심하시지요." 말투만 듣고는 전혀 놀랐다는 것을 짐작할 수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연 유운기는 천천히 가슴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여덟자루의 비도술(飛刀術). 저거라면 못 피하겠지.' 긴장된 눈으로 대결을 지켜보던 곽순은 유운기의 필살기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것은 여미릉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여미릉도 확실히 백운호가 이길 것이란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불끈 쥔 주먹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있었다. -탓!- 가슴속으로 사라졌던 손이 밖으로 나오자 그 사이로 반짝 하는 빛 이 뿌려졌다. 그와 동시에 남은 손이 다시 가슴을 스치고 지나며 반짝 하는 빛을 뿌렸다. 사방으로 흩어진 빛은 공중에서 선회하여 백운호의 연신 혈을 노렸 다. 그러나 비도술에 대해 이미 준비를 마친 백운호였다. 날아오는 비도가 마치 뱀처럼 꿈틀거렸지만 구름을 타고 노니는 신룡처럼 이 번에는 가볍게 피해 냈다. 그러나 유운기의 비도술은 달랐다. 왠만 한 무인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날아간 여덟 자루의 비도는 갑자기 방향을 바꾸며 백운호를 뒤쫒았다. "웃" 안색이 변한 백운호는 황급히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는 옆에 놓인 의자를 들어 따라오는 비도들을 내려쳤다. 깡 하는 소리와 함께 여 덟 자루의 비도가 땅으로 떨어졌다. "자네 대단하군. 오늘 노부를 두 번 씩이나 놀라게 하다니. 정말 대단해." 그러나 유운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이번에는 내 한 수를 받아 보게나." 백운호는 말을 마친 후 서서히 자세를 잡았다. "아닙니다. 제가 졌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유운기가 패배를 인정하자 백운호의 눈이 커 졌다. "아니 지긴 뭘 졌다고 그러는가?" "더 해 볼 필요도 없습니다. 저의 솜씨는 어르신을 따르지 못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후회가 남진 않겠는가?" "후후훗. 후회라니요. 제가 가진 솜씨는 이미 다 보여드렸습니 다. 충분히 만족 할 만 하지요. 다만..." 유운기는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지 말을 맺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다만 뭔가?" 백운호는 유운기를 닦달하기 시작했다. "아...아닙니다." 대충 얼버무리며 말을 멈춘 유운기는 곽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게 됐네. 내 청부를 다 하지 못했네." 대답을 듣지도 않고 유운기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 했다. 곽 순도 아무 말 없이 멍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유운기가 어떤 자인가? 곽순이 알기로도 그와 다투어 상처를 입 지 않았던 사람이 전무할 정도의 고수가 아니었던가. 비록 유운기 가 백운호를 향해 자신보다 뛰어난 고수임을 말했지만 곽순은 믿 지 않았었다. 아니 믿지 않았다기보단 적어도 어느 정도의 상처는 입힐 수 있을 거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저렇게 맥없이 물러나다니. 유운기가 몸을 돌려 밖으로 나설 때 백운호가 큰 소리로 그를 불 렀다. "이보게 잠시만 멈추게나." 그 말에 유운기는 흠칫 하더니 몸을 돌렸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자네 비도는 그대로 두고 갈건가?" 그제서야 정신이 든 듯 유운기는 땅에 떨어진 비도를 바라보았 다. '무림인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무기를 저렇게 놓고 나가다니. 이 번 결투로 타격이 심한 것 같군.' 옥조영은 앞날이 창창한 고수가 한 장애물에 걸려 미래를 잃어버 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알아서 잘 하겠지. 이번만 넘어서면 제법 튼튼히 뿌리를 내릴 수 있겠구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옥조영의 귀로 백운호의 전음이 들려왔다. <옥형. 저 녀석 어떻게 보시오> <무슨 뜻이오?> <난 갑자기 저 녀석이 탐나기 시작했소. 할 말도 다 하는 배짱에 다 제법 기초도 튼튼한 것 같고 아직 젊지 않소. 저 녀석을 키워 보고 싶은데> <그럼 뭘 망설이는 거요. 저 녀석에게 말하면 되지> <그런데 왠지 쉽게 넘어 오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오> <그럼 일단 같이 동행 의사나 물어 보시오. 근데 내가 생각해도 쉽진 않을 것 같소. 저 녀석이 청부 받았다는 게 뭔진 몰라도 그 아 이들에게 좋은 것은 아니었을 거요. 그런데 갑자기 의사를 바꿔 동 행한다라... 조금 어렵겠구료> <그...그럼 나보고 어쩌란 말이오. 먹기도 힘들고 뱉기도 아까운 데... 으... 이거 완전히 계륵이구만> <음... 나는 모르겠소. 제자로 키우고 싶다는 건 백형 의사니 알 아서 하시구료> 옥조영은 슬며시 꽁무니를 뺐다. 먼 산 바라보듯 딴청을 부리는 옥조영을 꼬운 눈으로 바라보던 백운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유운기 를 향했다. 그런 음모가 오갔음을 모르는 유운기는 그저 멍하게 바 라보다 손을 놀려 비도를 하나씩 주워 들었다. "이...이보게 자네." "네?" 비도를 주워 가슴으로 갈무리하던 유운기가 고개를 들었다. "이보게 자네... 혹시..." "...." "혹시... 몇 살인가?" 지켜보던 옥조영은 자꾸 웃음이 터져 나와 고개를 돌리며 입을 막았다. 무공은 딱 부러지게 하면서 저렇게 말은 못하다니. "서른 하나입니다. 그런데 왜 그러시는지요." "혹시 자네..." 한참을 뜸을 들이던 백운호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 며 물었다. "자네 우리하고 같이 동행 하지 않겠나?" 그 말에 멍해지는 유운기와 곽순이었다. -58- "뭘 그렇게 멍하게 서 있는 거야?" 아무 말 없이 멍하게 보내는 시간이 아까웠을까? 백운호는 참 지 못하고 손을 들어 유운기의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그러자 유운기의 정신이 돌아왔다. "뭘 생각하고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청부 대상자와 안면 이 있는 사람과 동행할만큼 얼굴이 두껍지는 않습니다. 죄송하 지만 그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너무도 당당한 어투에 백운호는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 유운기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려 주루를 나섰다. 그러 나 그 걸음도 몇 발자국 걷지 못해 멈추어야 했다. 옥조영이 몸 을 날려 그의 앞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왜 그러시는지요?" "자네의 무공이나 청부를 받는 것으로 보아 자네는 사파에 몸 을 담은 것 같구만. 하지만 할말 다 하고 하는 행동 모두 내 마음에 쏙 드는구만. 어떤가? 자네에게 기회가 온 거네." "기회? 어떤 기회란 말씀이십니까?" "사파에서 몸을 뺄 수 있는 기회. 그리고 더 높은 무공을 배울 수 있는 기회." 옥조영은 긴 머리 사이로 빛나는 유운기의 눈빛을 맞받아치며 대답했다. 그러나 대답이 들려 오지 않자 옥조영이 계속 말을 이 어갔다. "자네에게 동행하자고 말했던 저 사람의 의도를 모르겠는가? 그 는 자네의 그 능력을 더욱 깊이 키워 보고 싶어하는 것일세." 그 말에 백운호는 너무도 기뻤다. 조금전만 해도 빼기 바빴던 그 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을 위해 이야기해줄 줄은 전혀 예 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유운기가 문을 향해 걸어갈 때 거의 포기 하고 있었던 백운호는 다시 한 줄기 지푸라기라도 잡은 느낌이었 다. 그러나 곧 들려온 유운기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져 버렸다. 그 것은 억눌린 내부에 잠재된 분노의 폭발과 다름 아니었다. "사파라... 후후후 어르신. 어디까지가 사파라고 금이라도 그어 놓은 곳이 있단 말이오? 문파를 만들고 가문을 세우고 오랜 역사 를 가진 무공이어야만 정파입니까? 패도적이고 잔인한 무공으로 함 부로 사람을 죽이면 사파입니까? 정파라고 부르는 것들도 이문(利 文)을 취하고 백성을 억압하며 사파를 잔인하게 죽입니다. 그들이 정파입니까? 아! 가문도 없고 문파도 세우지 않으신 어르신이라면 사파에 가까우시군요. 안그렇소이까 광검마 선배님!" 유운기는 말미에 옥조영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까지 잊지 않았다. 그러나 옥조영은 그 말에 대해 별로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 말이 사실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어딘가에 억매인다는 것을 극히 싫어 했던 옥조영이었다. 그것이 가족이 됬건 문파가 됬건간에 말이다. 단지 놀랐던 것은 은거한지 수십년이 지났음에도 바로 자신을 알 아 본 유운기의 관찰력이었다. 유운기는 자신이 옥조영의 역린을 건들였다고 생각했다. 그거 놀 라는 눈빛을 보이자 아무 말 없이 가로막은 옥조영의 몸을 피해 앞으로 걸어갔다. "멈추게." 옥조영의 말에 유운기는 제자리에 서 버렸다. 유운기는 옥조영 이 불편한 심사를 들어내기 위해 자신을 세운 거라 생각했다. 하 지만 곧 그 생각이 오판이었음을 알아차렸다. "하하하하. 자네 볼수록 마음에 드는군. 지금까진 저 친구 때문 에 자네 앞을 가로막았지만 이젠 아니야. 내 마음에도 드는 녀석 을 그냥 보내긴 싫군. 같이 가지 않겠는가?" 옥조영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유운기를 붙잡았다. 할말 다 하 는 배짱. 그것은 옥조영의 마음에 쏙 와 다았다. 솔직히 유운기 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옥조영 스스로도 자신은 정파가 아닌 사파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남의 눈을 가리지 않았 고, 하고 싶은 것을 망설여 본 적도 없다. 남에게 특별히 피해를 입힌 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나서서 남을 도와준 기억도 별로 없 었다. 무공이 강하긴 했지만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세상 을 살아가는 낭인의 한 사람이었기에 사파로 분류되지 않았을 뿐 이지 자신의 마음은 곧 사파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사실 은 자신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천존무제(天尊武帝)라 불렸던 기억도 있었지만 그것은 솔직히 개인적 원한 때문에 정파 쪽을 도왔던 것일 뿐이었지 그 나머지 혈수마인(血手魔人), 만승 불패(萬乘不敗), 광검마(狂劍魔), 이 별호들은 모두 자신이 사파 에 가까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유운기는 의아한 기색으로 옥조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옥조영 의 눈을 본 유운기는 그 말이 꾸며진 게 아니었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좋습니다. 어르신들을 따라 가지요.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옥조영의 생각을 읽었을까. 한참을 고 민하던 그는 가볍게 동의를 표시했다. 그러자 가장 기뻐한 것은 다름아닌 백운호였다. "이 봐. 망구. 나에게도 이제 제자가 생겼단 말일세. 망구가 가 르치는 혜령이보다 절대 떨어지지 않을걸." 여미릉의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말을 마친 백운호는 유 운기의 바로 옆으로 날아오듯 내려섰다. "그래. 잘 생각했네. 우리하고 같이 다니면 좋은 일은 있어도 나 쁜 일은 없을 걸세. 노부는 백운호라 하네." 처음 백운호의 말에 유운기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동행하겠다 는 말을 가지고 어찌 저렇게 확대 해석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곧 백운호란 이름을 듣자 그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천하 제일이 라 부를 수 없을진 몰라도 당대 십대 고수 안에 들만한 능력의 소 유자다. 희희낙락 웃음을 지으며 큰 소리로 외치는 백운호를 보고 있던 여 미릉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흥. 그래도 우리 혜령이에겐 못 미칠걸. 좀 수련이 제대로 되 있 는 것 같지만 십 년만 지나 봐라. 영감탱이." 싸늘한 어투로 내뱉은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유운기의 앞으로 왔 다. "난 여미릉이라 하네. 근데 자네 이름은 무언가?" 이번엔 여미릉. 유운기의 입이 잠시나마 살짝 벌어졌다. 여미릉 이 누군가. 혈수가인(血手佳人) 여미릉. 마적단을 필두로 천승도 (天承刀) 진천(鎭踐)까지 수많은 비무에서 많은 피를 뿌리며 여인 최초로 천하제일이라 칭송받았던 여인이다. 유운기는 옥조영의 신분을 알았을 때부터 같이 있던 두 사람의 신 분이 평범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은 했었지만 이정도일 줄을 예상치 못했다. 당대 최고의 인물들이라 부르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인물 들이란 생각에 잠시 정신이 흔들렸지만 유운기는 곧 평소처럼 침착 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예. 저는 유운기(柚暈氣)라 합니다. 부끄럽게도 강호의 동도들 이 팔비절혼(八飛絶魂)이란 명호를 붙여 주었지요. 일단 제가 쓰 는 무기는 아시겠지만 비도를 쓰고 있습니다." 낮은 목소리에 절제된 어투. 일반인이라면 시비거리가 될 법도 했지만 칼날 위에 목숨을 얹은 무림인들에겐 그보다 멋진 소개는 없을 듯 했다. 듣고 있던 백운호와 여미릉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 자 옥조영이 입을 열었다. "일단 소개는 끝난 듯 하니 이제 갈 길이나 가도록 하세." 옥조영이 말을 마친 후 관도를 걷자 그 뒤로 백운호 등이 뒤따르 기 시작했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자 곧 겁먹은 주인이 밖을 내다 보고는 점소이를 시켜 관부로 보내었고, 곽순과 호영제는 기절한 왕충을 업고 저잣거리로 부리나케 뺑소니 쳐 버렸다. "흐음. 그러니까 그 녀석들하고 시비가 붙었는데 그녀석들이 져 서 관부로 잡혀갔고 그것 때문에 앙심을 품고 너에게 청부를 넣었 다 이말이냐?" "예. 선배님. 그렇다고 하더군요. 비록 제가 보진 못해서 정확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마 도 맞을 것입니다." "에잉 그럴 줄 알았으면 좀 더 패 주고 나오는 건데." 길을 걷던 옥조영 일행은 무엇 때문에 이 사태가 벌어졌는지 유 운기로부터 상세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유운기가 왕충 일행으 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는 꾸밀 것은 꾸미지고 빼버릴 부분은 빠져 버린 왜곡된 이야기였지만 유운기는 다년간의 경험으로 어느 정도 진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어느 정도 바로 잡 힌 상태로 옥조영 일행에게 전달 되었다. "뭐 상관 없소. 다음번에 그 녀석들 보면 몇 대 쥐어박아 주면 되 지 않겠소?" "그럽시다 뭐!" 백운호와 옥조영이 시덥지 않은 원한을 묵혀두기로 합의 했을 때 저 멀리 단목 세가의 담이 눈에 잡히기 시작했다. "저건가 보군요." "그런 것 같소."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앞으로 뛰어 나갔다. 유운 기도 아무 말 없이 그 뒤를 따라갔다. 그들은 순식간에 문 앞에 도착했다. 짙은 흙갈색 나무문이 그들 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문지기도 없고, 그렇다고 문이 열린 것 도 아니었다. 집 앞으로 무성한 잡초 풀과 벗겨진 지붕, 빛 바랜 칠. 왕충이 말했던데로 이건 세가가 아니라 장이라 불리워도 할 말 없을 정도였다. 눈살을 찌푸리며 사방을 둘러보던 그들은 곧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옥조영은 슬슬 심기가 불편해졌다. 자신이 이렇게 서서 누군가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심정 같아선 콱 문을 박살내고 뛰어 들어가 당장 천인문의 멱살을 쥐고 몇 대 쥐어박아 주고 싶었지만 옆에서 보는 사람들의 눈도 있고 해서 그 저 꾹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유운기의 강한 주먹이 다시 한번 크게 대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기척이 흘러 나왔다. "누구쇼?" 한 구부정한 노인이 문을 살짝 열며 물었다. 거의 찾아오는 사람 들이 없었기에 노인의 눈에는 의문이 가득 차 있었다. "여기가 단목 세가가 맞느냐?" 옥조영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노인이 척 보기에도 찾아온 사람 들이 무림인 같자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만. 왜 그러시는지요." "여기 세가주를 만나 뵈러 왔네." 일반적으로 다른 가주를 만나는 장소에서 소개장이나 배첩을 내밀 지 않는 경우는 드물었다. 특히 모르는 인물들이나 비무의 경우는 필수 조건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거의 이름없는 곳이 되어버린 단목 세가의 경우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것이 되어 버렸다. 물론 옥 조영 일행은 모르는 것이었지만 노인은 별 의심없이 고개를 굽히며 문을 열었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누구라고 전해 드릴까요?" "얼마 전 찾아온 아이들의 사부들 된다고 전해 드려라." "기다리시죠.." 노인은 굳어버린 다리를 바삐 놀리며 안채로 사라져갔다. 그의 모 습이 사라지자 옥조영은 주위를 유심히 살피며 입을 열었다. "요 녀석이 우리가 온 걸 알면 도망칠 수도 있으니 잘 살펴야겠소." 여미릉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기다려보면 알게 되겠죠." 그들은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가주를 기다렸다. 방 안. 이름만 남은 단목 세가의 가주인 단목 인성이 거주하는 방이었다. 그 안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벼루며 산수화며 어느 하나 멀쩡한 곳 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범인은 지금 침상 위에서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바로 단목 인성이었다. "아직도 못 찾았는가? 아직도?" 단목 인성의 불끈 쥐어진 주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렇게 단 목 인성이 이성을 잃은 것은 단목 수령의 도주 때문이었다. 오늘 아침. 식사 준비가 끝나고 손님들과 단목 수령을 부르러 갔던 하녀가 행 방이 묘연해진 그들의 이야기를 꺼낸 직후 단목 세가에는 한풍이 몰 아치고 있었다. 이 총관 이하 모든 식솔들에게 떨어진 불호령은 유일했다. 사라진 단목 수령의 행방을 찾는 것. 그때부터 모든 사람들은 만사를 제쳐 두고 그들의 행방을 찾는데 온 힘을 쏟아야 했다. 이 총관의 경우 가장 많은 질책을 들어야 했다. 단목 수령의 수 많은 도주 사건(?) 을 해결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도 별 뾰족 한 수는 없었다. "가주님. 막내 아가씨의 도주로는 제가 파악한 것만 해도 여덟 군 데입니다. 하지만 그 어느쪽에서도 아가씨의 흔적은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말이 끝나자 바로 날아든 목침으로 인해 이 총관은 하인의 손 에 실려가야 했다. 그 후 아무도 그 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가주님."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좌불안석(坐不安席) 하던 단목 인 성은 벌떡 일어나 튀어 나갔다. "찾았느냐?" "...그게 아니옵고..." 사정없이 떨고 있던 노인이 손님이 찾아 왔음을 고하자 단목 인 성의 눈이 커졌다. "손님?"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을 찾을만한 객(客)은 생각나지 않았다. 단 목 인성은 떠오른 의문을 뒤로하고 노인의 뒤를 따라 그들을 맞으 러 밖으로 나갔다. 그 곳에는 전혀 안면이 없는 사 인의 인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림이 그리 빼어나지는 않았지만 몸밖으 로 솟구치는 기세는 단목 인성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어느 하 나 자신보다 하수는 없어 보였다. '무슨 일이지. 저 정도의 고수들이?' 단목 인성은 공력을 모아 주위를 살피고는 다른 기척이 들리지 않 음에 안도하며 입을 열었다. "가주 단목 인성이라 합니다. 뉘신데 저를 찾아 오셨습니까?" 그의 인사를 받은 일행 중 백발 노인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 다. 백운호였다. "여기 천인문이란 꼬마와 서혜령이라는 아이가 있소?" 시비 거는 듯 퉁명스런 질문에 단목 인성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 갔다. 그러나 자신의 응징은 필요치 않았다. -퍽- 보다 못한 여미릉의 손이 백운호의 뒷통수를 강타했다. 그리고 는 공손히 손을 모았다. "죄송합니다. 갑작스럽게 찾아 뵙고 실례가 아닐는지." 단목 인성은 뒷통수를 긁어대는 백운호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지 만 표정을 바로 하고 대답했다. "아...아닙니다. 그런데 말씀 중에 천인문이라면..." "예. 그 아이들의 사부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 아이들이 이쪽으로 왔다는 소리에 이렇게 찾았습니다만." "그 아이들이 분명 이 곳으로 오긴 왔습니다. 그런데..." "예?" "제가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실례를 범한 것 같습니다. 일 단 안으로 드시지요." 이번 일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단목 인성은 얘기를 중단하고 옥조영 등을 방으로 안내했다. 물론 자신의 망가진 방 이 아닌 곳이었다. -59_1- 그들은 곧 탁자 주위로 마주보며 자리를 잡았다. "어떻게 듣고 오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아이들이 제 딸의 손님으로 이곳 을 오긴 왔습니다. 한 오일 전쯤이었나, 밖으로 도망, 아니 놀러 갔던 애가 올 때 같이 왔더군요. 그런데 어제까지만 해도 잘 있던 녀석이 오늘 아침에 보니 감쪽같 이 사라졌더군요." 단목 인성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옥조영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어제 밤까지만 해도 있었던 애들이 오늘 아침에 보니 없어졌다? 납치 쪽은 아닙니까?" "이런 말 드리기 민망스럽지만 그 아이는 항상 저렇게 나돌아다니길 좋아했죠.제 가 살펴봐도 특별히 납치 같은 것은 아닌 것 같소이다. 하기야 바랄 만한 게 있어 야 납치라도 하겠지만 보시다시피 이곳은 그리 값나가는 것은 없소이다." 그 말을 인정한다는 듯이 백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내가 봐도 뭐 훔칠 만한 건 보이지도 않더구료." 싸가지 없는 말투에 단목 인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도 손님이라고 말은 못 하고 그저 불편한 심기를 눈에 띄울 뿐이었다. 여미릉이 그것을 알아차린 듯 서둘 러 입을 열었다. "일단 납치가 아니라면 뭐 어디 갈 만한 곳이 있겠습니까?" 그제서야 단목 인성은 눈을 돌리며 대답을 했다. "특별히 갈만한 곳이라곤 없습니다. 그 아이가 돌아다닌다고 해도 겨우 악양안에 서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쪽도 아닌 것 같고..." 말소리가 서서히 잦아들던 그는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는지 고개를 쳐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한 군데 생각이 나는군요. 세운사(洗雲寺)라고 무한(武漢)으로 가는 길에 있는 조그만 암자가 있습니다. 그 아이의 모친이 그곳에 자주 가죠. 아 마 그쪽으로 갔을 듯 싶습니다." 말은 대충 했지만 확신이 있는지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침에 나갔다면 지금쯤 충분히 도착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럼 그쪽으로 가도록 하죠." 옥조영 등도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단목 인성은 큰 소리로 하인을 불렀다. "마굿간에 가서 내 말을 끌고 오너라." 하인은 허리를 굽히더니 부리나케 뒷문으로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백 마 한 필을 끌고 나타났다. 하인의 손에서 말을 넘겨받은 단목 인성이 말 위로 오 르려다 자신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옥조영 등에게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죄송하게 되었소이다. 보다시피 가세가 기울어 말이 이거 하나밖에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훤히 알고 있던 백운호가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혼자만 달랑..." -퍽-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말투에 돌아온 것이라곤 여미릉의 손바닥 뿐이다. 뒤통수를 갈겨버린 여미릉은 앞으로 고꾸라지는 백운호를 쳐다보지도 않 고 입을 열었다. "신경쓰지 마십시오. 저희는 경공을 쓰면 됩니다." "그래도 그렇지...어떻게..." 뾰족한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송하다는 표시를 열심히 해대는 단목 인성의 말에 뒷통수를 문지르며 일어서는 백운호가 한 마디 했다. "할망구. 망구는 걸어도 좋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다고. 주인이 주겠다는데 사양 한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암 아니고말고." 그러나 이번에 날아온 것은 손바닥이 아니라 발이었다. -퍼퍽- "가기 싫으면 말어. 뭘 그렇게 말이 많아." 싸늘한 눈빛으로 백운호를 찌그러트린 여미릉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단목인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상관 없습니다. 저희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예의만 차릴 일이 아니군요. 그럼 절 따라 오십시오." 길게 한숨을 내쉰 단목 인성은 하인이 열어준 대문을 향해 말을 박차며 튀어나갔 다. 그 뒤로 옥조영과 여미릉의 신형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유운기는 잠시배 를 문지르는 백운호를 흘깃 본 후 고개를 살짝 젓고는 그 뒤를 따랐다. "이봐 같이 가자고." 그제서야 일어선 백운호는 부리나케 발을 놀렸다. 그들은 곧 먼지만 뿌옇게 남기 며 관도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 무렵 단목 인성의 예상대로 천인문 일행은 세운사가 있는 호산(虎山) 끝자락 에 도착하고 있었다. 새벽녘에 도망쳤던 그들은 악양에 잠시 들러 새 옷으로 갈아 입은 뒤 출발했다. 그 결과 조금 도착이 느려졌지만 별 문제 없이 그들은 산에 오 를 수 있었다. "여기서 반 각 정도 오르면 되요." 단목 수령은 이제 곧 어머니를 만난다는 생각에 부풀어서인지 발이 점차 빨라지 고 있었다. 순식간에 산을 타고 오르는 그녀를 보던 천인문이 신기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까 까지만 해도 죽겠다고 그러더니 이제는 힘이 남아도는가 봐." 숨을 한번 고른 천인문은 서혜령과 함께 열심히 발을 옮겼다. "빨리 빨리 좀 올라오라구요." 앞서가던 단목 수령이 몸을 돌리고는 손을 흔들었다. 잠시 쉬는가 싶더니 다시열 심히 앞으로 전진해갔다. 그렇게 점차 멀어져가던 그녀의 모습이 어느 샌가 갑자 기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뒤를 열심히 따르던 천인문은 그녀가 사라진 곳으로 올 라갔다. 얼마쯤 올랐을까. 저 멀리 사찰의 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안으로 들어갔는 지 단목 수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라... 할머니는 어떤 분일까? 엄마하고 많이 닮았을까? 닮았겠지? 닮았을 꺼야.' 문이 가까워질수록 천인문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인 단목 인성을 볼 때보다 그 강도가 훨씬 심했다. 이것은 꼭 아기가 엄마의 품을 찾는 것과 같았다. 진정해라 진정해라 아무리 외쳐봐도 그 기세는 줄어들 줄을 몰랐다. 그저 얼굴에 상기된 기색이 자꾸 역력해 질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서혜령이 그런 그의 심정을 알았음인지 살짝 웃으며 천인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미소는 어색해 보 였지만 천인문의 가슴은 서서히 진정되어 가고 있었다. 조그만 암자. 반경 십 여 장 되는 담벼락에 둘러 쌓인 그곳은 수많은 세월의 풍파를 그대로간직 한 채 고즈넉이 서 있었다. 중앙에 걸린 갈라진 대웅전 아래로 빛 바랜 불상이 덩 그러니 놓여 있었고 그 옆으로 조금만 문이 두 개 있는 것이 보살들이 머무는 방 인 듯 했다. 불상 밑에는 한 명의 승포를 입은 사람이 조용히 불상을 마주보고 앉 아 있었다. 그때였다. "엄마. 엄마 어디 있어요?" 서둘러 문을 넘어 들어온 단목 수령은 불상 아래로 뛰어 들며 암자라는 것도 잊 고 큰 소리로 엄마를 외쳐댔다. 그제서야 앉아 있던 승인이 의아한 기색으로 고개 를 들었다. 비구니였다. 오십 줄에 다다른 세월의 흔적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있 었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비구니의 미소는 따스해 보였다. "수령이가 아니냐? 어서 오너라." 승인의 신분으로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단목 수령과 아주 친 한 듯 했다. 단목 수령도 빙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도고(道姑) 할머니 정말 오랜만이에요. 거의 사 년 만 인 듯 싶네요. 그런데 저희 어머니는 어디 계시죠?"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단목 수령은 모친을 찾았다. 그러자 뒤쪽에서 한미 약한 음성이 들려왔다. "뭐가 그리도 급한 게야?" 목소리가 들리자 단목 수령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갈포의(褐胞衣)를입 은 백발의 여인이 가볍게 미소를 띄고 있었다. 바로 상옥경(常鈺暻)이었다. 오십 줄에 가까운 그녀는 나이는 속일 수 없는지 아름다운 얼굴에 잔주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단목 수령은 냉큼 달려가 그녀의 품에 안겼다. 안 본지 겨우 두 달도 되지않았는 데도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래 잘 지냈느냐? 아버지는 건강하시고?" "네. 그런데 왜 집에 안오셨어요? 아버지도 보고 싶어하시던데." 그러나 상옥경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등만 어루만질 뿐이었다. 단목 수령도그것 이 좋은지 그녀의 품에 안겨 있었다. 도고라는 비구도 그런 다정한 모습을 기쁜눈 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단목 수령의 눈에 열린 암자 문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사방을 살피는 천인문의 모습이 눈에 잡혔다. "동생 거기 서서 뭐해 어서 들어와." 품에 안긴 채로 손만 까딱 흔들어대는 단목 수령을 본 천인문이 암자 안으로 발 을 들여 놓았다. 긴장은 어느 정도 풀렸다고 하지만 아직도 그 얼굴에는 긴장된느 낌이 남아 있었다. 서혜령이 천인문 뒤를 따르며 안으로 들어섰다. 상옥경은 단목 수령이 무언가를 보고 손을 흔드는지 의아해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에 한명의 귀여운 아이와 아름다운 여인이 들어왔다. "어서 오게나. 우리 수령이의 손님이신가?" 언제 나타났는지 도고 비구가 앞으로 걸어 나오며 손을 모으고 인사를 했다.주인 의 입장에서 맞이하는 예를 보자 천인문도 덩달아 손을 모았다. "아...안녕하세요." "어서 오십시오." 어느 정도 인사가 끝나자 도고는 다시 상옥경에게 고개를 돌렸다. "손님들이 오셨으니 안으로 드셔서 이야기들을 나누시지요." 도고는 빙긋 웃는 모습으로 인사를 하더니 왼쪽으로 난 문으로 나가버렸다. 그모 습을 보고 있던 상옥경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손님들도 오고 했으니 내 방으로 가자꾸나." 그 말에 단목 수령은 그녀의 품에서 일어났다. 상옥경은 천인문 등을 이끌고오른 쪽 문으로 들어갔다. 방은 수수했다. 가난해서였을까? 조그만 탁자가 하나 있을 뿐 침상이며 무엇 하 나 제대로 있는 것이 없었다. "이쪽으로들 앉으시오. 별로 볼 것도 없지만..."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권하는 상옥경의 미소는 넉넉했다. 말은 부끄러워하는 듯 했지만 이미 명리와는 담을 쌓은 수도자의 모습을 갖춘 그녀의 웃음에는 전혀 부 끄러움 같은 것은 묻어 나오지 않았다. 연신 긴장된 표정의 천인문은 가볍게 대답을 한 후 자리를 잡았다. 맨 바닥에 앉 는 것이 상당히 어색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그녀의 얼굴을 본다는 것이 더욱 긴 장되고 어색했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이리 저리 방을 둘러보는 모습이 참으로 어 색해 보였다. "뭐가 불편한 거요?" 그런 모습이 신기했을까? 상옥경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천인문을 향해 물었다. 너무도 부드러운 말투. 천인문은 용기를 내서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 았다. 단목 미령이 늙었으면 저렇게 될까? 그녀의 얼굴은 참으로 수려하고 부드러워 보 였다. 어머니의 자애로운 마음을 간직한 얼굴.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따뜻한 미소. 부드럽게 흘러 나오는 사랑스런 눈빛은 천인문의 마음을 단목 미령에게 안 겼던 그 어린 시절로 돌리고 있었다. "아니에요. 할머니." 어느덧 눈이 촉촉이 젖어들며 목이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는 천인문이었다. 갑자 기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그 고요함이란. 분위기가 이상하 게 변함을 알아차린 천인문이 재빨리 소매를 들어 눈두덩이를 훔쳤다. 웃고 있던 상옥경의 안면에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천인문 을 바라보던 상옥경은 조심스레 천인문을 살피기 시작했다. 반듯한 이마에 영민 한 눈동자. 무엇보다도 그 눈매는 누구를 떠올리는데 충분했다. "넌 내가 아는 누군가를 닮았구나." "..." 천인문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이 파르르 떨렸지 만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닮았어. 정말... 닮았어." 상옥경의 눈에 일렁이는 빛. 그것은 격동이었다. 흥분이었다. "어...엄마. 누구를 닮았다고 그러는 거에요?" 상옥경과 천인문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단목 수령은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하다 여 기고는 상옥경에게 조심스레 입술을 열었다. 자기의 눈에는 전혀 알 수 없는데 누 구를 그리 닮았다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상옥경은 아무 말 없이천인 문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지긋이 상옥경을 바라보던 천인문. 숨을 들이킨 후 말문을 열었다. "제...가 누구를 닮았다는 것인가요?"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음인가? 천인문의 말에는 전혀 흔들림 같은 것은 보이지않 았다. "네가...혹시." 자신이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자꾸 머뭇대는 상옥경. 그러나 끝내 묻어 두진 못했다. "미령이 그 아이와 무슨..." 힘들게 말문을 다시 연 상옥경은 마주 보던 천인문의 눈이 붉어짐을 보고는 입술 을 지긋이 깨물었다. "맞느냐?" 눈물을 감추려 했음인가? 천인문은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할...머니!" 터져 나오는 울음을 꾹 참으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그것은 상옥경의 질문이 맞 았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평생 처음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는 친족을 만났음에 기 뻤지만 세상에 없는 부모의 그리움이 솟아나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59_2- 반대로 상옥경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손자를 봄에 기뻐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천인문 을 살며시 끌어 당겨 품에 안았다. 천인문은 아무 거부 없이 그녀의 품에 안겼다.그녀 의 품은 마치 단목 미령을 연상케 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천인문은상옥 경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그들은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그러나 단목 수령은 어리둥절해 할 뿐이었고,서혜령은 가슴 한쪽이 아려왔지만 눈물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끌어안고 있던 상옥경이 다시 품에서 천인문의 머리를 들며 뺨을쓰다듬 었다. "다시 한번 보자. ... 그래 확실히 닮았구나. 어릴 때 그 아이 그 모습그대로구나." 다시 그녀는 천인문을 끌어안았다. 한참동안 상봉의 기쁨을 맛본 상옥경은 다시품에 서 천인문을 놓아주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런데 왜 어미는 보이지 않니? 같이 오지 않은거냐?" "...할..머니. 엄마는... 아빠하고 같이 갔어요." 갔다? 밑도 끝도 없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상옥경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처연한 미 소를 지었다. "그래... 네 아빠하고 갔느냐. 그래." 그녀는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가슴은 찢어 질 것이다.천인문은 그 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의 뒷모습만바라 보고 있었다. 한참동안 그렇게 고개를 돌리고 있던 상옥경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물자국은보이 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시울은 상당히 붉어져 있었다. 그녀는 잠긴 목을 깨우며 입을열 었다. "행복했느냐?" "...네 엄마는 정말...편안한..." 목이 매이는지 천인문은 말을 끊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상옥경은 고개를살 며시 끄덕였다. "그래... 정말 다행이다. 잘 됐어. 잘 되고 말고." 방안은 다시금 침묵에 휩싸였다. 단목 수령도 서서히 무슨 일인지 알게 된 것인지슬픈 눈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분위기가 너무도 축 쳐져버린 것을 깨달은 상옥경은 다시 얼굴에 미소를 담으며말문 을 열었다. "그래 그건 그렇고, 수령이 넌 왜 이곳까지 온 거냐?" 갑작스런 화제의 변화로 인해 아직까지 분위기에 적응이 되지 못한 단목 수령은황급 히 고개를 들어 상옥경을 바라보았다. 묻기는 물으시니 대답은 해야겠는데 분위기는이 상하고. 평소 같았으면 그녀의 성격에 단목 인성이 강제로 청혼을 받아 정략 결혼을시 킨다고 불같이 화를 내야 했지만 지금은 그러기엔 너무도 어색했다. 단목 수령은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아빠가 절 시집 보내시겠대요." "그래? 그거 잘됐구나." 상옥경의 대답은 단목 수령을 놀라게 했다. 평소 그런 정략결혼은 결사 반대하시던어 머니가 아니던가? 단목 미령의 가출 이후 두 딸을 그렇게 보내놓고 하염없이 눈물을흘 리던 어머니. 그런데 저런 말씀을 하시다니. 단목 수령은 기대에 못미치는 상옥경의대 답에 당황했다. 저것은 어머니의 진심이 아닐 것이다. 분위기 때문에 저렇게 정신못 차 리시는 것일게다. 단목 수령은 답답한 마음을 누르며 입술을 때었다. "어...엄마." "수령아. 여자는 나이가 차면 시집을 가야 된다. 너도 이제 스물이 다 되어 가지않니? 이제 어미의 품을 떠나야 할 때가 온거야." 처연한 미소. 상옥경의 미소에는 그 무언가가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무엇인지 단목 수령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그것이 그녀의 진심이 아닐 것이라는 것 외에는말이 다. 그녀의 그런 생각은 맞았다. 상옥경도 단목 수령을 그렇게 정략적으로 보내고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늘 충격이 너무도 컸음일는지 그녀는 아무 생각도 없는 말을 뱉어버 리고 말았다. 이제 와서 돌릴 가능성은 희박했다. 하지만 단목 수령은 그 희박한가능성 을 붙잡고 싶었다. "엄마. 진심이 아니라고 말해 줘요. 예? 그건 엄마 생각하고 다르잖아요. 내가아무 곳이 나 시집가서 그렇게 사는 거 엄마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잖아요. 네? 엄마." 단목 수령의 손이 상옥경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상옥경은 서서히 손을 들어 단목수령 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령아. 네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아빠를 좀 이해해 주렴. 아빠는 널위해서." "듣기 싫어요." 단목 수령은 상옥경의 손을 뿌리치고 문을 차고 밖으로 나갔다. 이 상황에 난처해진 것 은 천인문과 서혜령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던 두 사람은시간이 점차 흘러가자 일단 단목 수령을 데리고 와야겠다는 생각에 미쳤는지 자리에서일어서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지?" "일단 주위를 한 번 찾아보도록 하죠. 흔적이라도 보일지 모르잖아요." 서혜령의 말에 천인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암자 밖으로 나갔다. 천인문의 반대편을서혜 령이 담당했다. 천인문은 허리를 낮추고 사방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아무 곳에도 흔적은 보이지않 았다. "이거 까다로운데. 어디서 찾는단 말이야."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천인문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솔직히 그녀를찾는 것 은 풀밭에서 바늘 찾기나 마찬가지였다. 추적술을 제대로 배운 적이 한 번도 없었던천 인문으로선 단순히 과거의 사냥 경험에서 얻었던 추적 방법을 떠올려 찾아댔지만그것 으로는 무공을 익혔던 사람을 쫓기란 엄청 어려웠다. 한참을 찾아 돌아다니던천인문의 눈에 짜증스런 기색이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행운은 다른 곳에서 왔다. 저반대 쪽에서 자신을 부르는 서혜령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상공. 이쪽이에요." "찾았어?" 설마 하는 심정으로 달려간 천인문은 북동쪽 담 벼락 아래 서 있는 서혜령을 볼 수있었 다. 그녀의 손은 담 밑에 찍힌 발자국을 가리키고 있었다. 담에서 뛰어 내릴 때생긴 것 이라 밑으로 파인 흔적이 역력하다. 유심히 살피던 천인문은 단목 수령이 사라졌다생각 되는 곳으로 서둘러 내달렸다. 그리고 그 뒤를 서혜령이 따라 갔다. 담을 뛰어 넘은 단목 수령은 자신이 어디로 내달리는지도 생각지 않고 그저 달릴뿐이 었다. 눈물은 뺨을 타고 흩날리듯 뒤로 뿌려졌다. 머릿속은 텅 비었지만 몸은위험을 감 지하는 듯 앞을 가로막는 수풀들을 쉽게 비켜 달리고 있었다. '엄마가 그럴 줄은 정말 몰랐어.' 원치 않은 결혼을 밀어대는 단목 인성. 적어도 상옥경만은 자신의 바람막이가 되어줄 줄 알았다. 그만큼 상옥경의 말은 그녀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온 힘이닫는 대 로 내달릴 뿐이었다. 한참을 내달리던 단목 수령은 숨이 턱에 붙이자 천천히 속도를 늦추었다. 눈물은말라 붙어 흐르지 않았다. 서서히 멈추어선 그녀는 굵은 나무에 등을 붙이고 주저앉아버렸 다. 수령아. 여자는 나이가 차면 시집을 가야 된다. 너도 이제 스물이 다 되어 가지않니? 이 제 어미의 품을 떠나야 할 때가 온거야. "싫어 싫다구." 상옥경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자 그녀는 생각을 지워버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그녀 의 목소리가 메아리 되어 산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을 때까지멍하게 있던 단목 수령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저녁 무렵이 다 되어 감에푸른 하늘에 드리워진 붉은 기운 사이로 떠다니는 한 조각 구름이 눈에 잡혔다. '좋겠구나. 넌 그렇게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있고.' 구름이 부러웠다. 자신의 삶에 비해 부평초같이 떠다니는 구름이 그리 부러울 수가없 었다. 말로만 듣던 큰언니, 단목 미령의 이야기는 단목 수령의 동경의 대상이었다.자신 도 그녀처럼 되고 싶었다. 그러나 가문은 그렇게 두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정략의도구 로만 사용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녀는 그런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단목 수령은 한참동안 서늘한 바람을 쐬며 그렇게 멍하게 시간을 보냈다. 머리가시원 해지자 그녀는 슬슬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감정에 휩싸인 순간 아무것도 생각나지않았 던 것들이 자신의 가슴을 죄어오기 시작했다. '돌아가야 하나.' 단목 수령의 마음은 두가지 갈등으로 심란해지고 있었다. 솔직히 돌아가봐야 남는것 은 그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정략 결혼이었다. 그러나 그저 자신의 생각대로밀어붙이 자니 또 처연한 눈빛의 상옥경이 걸리는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은 다시 고민으로복잡해 지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가 혼란스런 상황에 빠져 있을 무렵 그녀의 뒤쪽으로 그림자가드리워지고 있었다. 사라졌던 단목 수령을 쫓아 온 천인문과 서혜령이었다. 한참을 흔적을 찾고 다시 달리기를 반복하던 그들은 멀리서 단목 수령의 메아리를듣 자 바로 소리의 발원지를 찾아 달려갔다. 백 여장을 달려갔을까? 한 나무에 기대어고개 를 숙이고 있는 단목 수령의 모습을 발견 할 수 있었다. "고민이 많아 보이네." "그렇네요." 안타까운 눈빛으로 단목 수령을 바라보던 천인문의 말에 서혜령도 힘없이동의했다. 그 들은 그렇게 멍하니 서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있을 수만은없었다. 아니 기다리는 것은 천인문에게 맞지 않는 일이었다. 뭐가 되든지 간에부딛혀보자는 생 각으로 천인문은 단목 수령을 향해 걸어갔다. 바로 뒤쪽에서 들려온 발자국 소리에 흠칫 정신을 차린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일어서 며 사방을 경계했다. "놀라지 말라구. 나야 나." 벌떡 일어서서 더욱 놀라버린 천인문은 손을 들어 그녀의 경계를 풀었다. 그러자상대 를 알아차린 단목 수령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사라졌다. "이제 이...이모라 불러야 하나?" 입에 익숙치않은 말을 올리자 쑥스러워진 천인문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모습에 속상해진 그녀의 마음은 잠시나마 개운해졌다. "너... 어쩜 그렇게 날 속일 수가 있니? 단단히 기억해 두도록 하겠어." 장난기어린 말투로 투정을 부리는 단목 수령의 말에 천인문은 당황한 표정으로입을 열 었다. "속이진 않았잖아. 말을 안 했을 뿐이지." "...그래. 속인 건 아니지. 아니구 말구. 후~" 근심을 덜어내려는 듯 긴 한숨을 내쉰 단목 수령의 옆으로 천인문과 서혜령이다가왔 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어머니께서 기다리시고 계세요." 서혜령의 걱정스런 말투에 단목 수령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모르겠어요. 가야 할지, 말아야할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더라구요. 큰언니때문 에 마음 아파하신 엄마, 아빠를 생각하면 돌아가야 되겠지만 그렇게 되면 내 인생은어 쩌죠?" 단목 수령의 질문은 서혜령의 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정작 서혜령에게직 접 묻는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솔직히 서혜령은 이런 생각을 하는 단목 수령을 이해 할 수 없었다. 부모님의말씀을 거 역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 말에 따라천인문과 결혼했다. 자신에게 답변을 요구한다면 돌아가는게 최선이라고 말하고 싶은서혜령이었 지만 이렇게 갈등에 빠진 단목 수령이 원하는 것은 자유임을 알고 있었기에 말할 수없 었을 뿐이다. "잘 해결 될 거에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심각하게 고민에 잠긴 그녀에게 해줄 말은 그것뿐이었다. "고마워요. 언니." 단목 수령은 싱거운 미소를 던지며 화답했다. "잘 해결 될거야. 이모. 그건 그렇고 이젠 어떻게 한다?" 단목 수령이 어느정도 힘을 되찾은 것 같자 천인문이 끼어들며 둘을 쳐다봤다.그러나 그 문제는 다른 쪽에서 해결되어 버렸다. -히히힝! 푸르륵- 어디선가 가늘게 들려오는 말 울음 소리. 그리고 간간히 들려오는 사람의 목소리는그 들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셋은 귀를 쫑긋 세우기 시작했다. "왠 말 울음?" -60- 한적한 산 속에서의 말 울음 소리는 천인문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는천천히 소리가 들렸다 생각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 명의 여인들도 아무 말 없이그의 뒤를 따랐다. 소리가 들린 곳은 그리 멀지 않았다. 한 십 여장 정도 걸어가자 가끔씩 들리던목소리 도 뚜렷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네가 빠져 나가려 해도 내 손에선 못 벗어날걸!" -히히히힝- 말소리와 그 뒤로 들려오는 말의 울음소리. 듣고 있던 천인문의 얼굴에 호기심이그득 담겨 있었다. '무슨 일이지?' 천인문은 조심스레 앞으로 전진했다. 목소리는 점차 점차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 순간 전진하던 천인문이 제자리에 우뚝 서며 손을 들었다. 조심스레따라 오던 그녀들도 멈춰 섰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서혜령이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천인문이 손가락을 들어입 앞에 세웠다. "쉿!" 그리고는 손가락을 들어 앞쪽을 가리켰다. 서혜령과 그 뒤를 따라온 단목 수령이조심 스럽게 고개를 들어 전방을 살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한 명의 사내와 한 마리의 말이 서로 마주보며 서있었다. 이 십 대 중반의 황의 경장을 걸친 사내의 손에는 긴 동아줄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맞 은 편에는 검은 말 한 필이 늠름하게 서 대치하는 국면이었다. "이제 너하고 나하고 안면 튼지도 한 달이 넘었지 않느냐? 네가 아가씨도 아니고뭘 그 렇게 자꾸 빼는거야. 제발 좋은 말 할 때 잡혀 주라. 그러면 내가 맛있는 것도 많이사주 고 좋은데서 재워 줄테니깐 말이다." 여자를 유혹하듯 살살 달래던 사내는 손에 든 동아줄을 서서히 돌리기 시작했다.그러 자 검은 말이 다시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휙- 빠르게 날아간 동아줄. 그러나 줄이 떨어진 곳에는 이미 말은 없었다. 탁 하며떨어진 줄은 그저 낙엽들만 잔뜩 끌어 올 뿐이었다. 그 모습에 사내가 갑자기 온 몸을부르르 떨 기 시작했다. "으아악. 이젠 못 참겠다. 이판 사판이다." 사내가 울분을 토하자 말이 놀랐는지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사내의신형이 더욱 빨랐다. 타닥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을 박찬 사내의 몸은 이미 말 위에 올라타고있었 다. -히힝- 사내가 몸 위로 오르자 말이 화가 났는지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 올랐다. 사내는떨어지 지 않기 위해 팔을 뻗어 말의 목을 감싸 안았다. 하지만 말이 다시 뛰자 사내는공중에 서 붕 뜨더니 머리를 땅으로 처박으며 떨어졌다. 그러나 조금 전 보여주었던 신법이우 연이 아니라는 듯 사내는 손으로 땅을 짚은 뒤 가볍게 돌아 일어섰다. 이미 이런 경험을 몇 번이나 한 것인지 사내는 일어서자마자 말의 도주로를 막기에여 념이 없었다. 말은 뒤로 한 발짝씩 물러설 뿐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상황을 즐기고있 는 듯 했다. 그렇게 말과 사람의 대치국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천인문이 천천히 고개를돌렸다. "색시야 여기서 기다려." 말을 마친 천인문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보던 서혜령이불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디 가시게요?" 그러자 천인문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도 저 말 가지고 싶어." "그러지 마세요. 저 말은 이미 저 사람이 발견했잖아요. 그냥 저 사람이 가지게 놔두세 요." 서혜령은 천인문이 또 무슨 사고라도 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말해 도 소용없을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역시 그녀의 생각대로 천인문은 아무상 관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저 사람이 먼저 발견했다고 주인은 아니지. 잘 보고 있기나 하라구." 말을 끝낸 천인문은 조심스럽게 나무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나무는 둘레가한아름 을 가뿐히 넘길 정도로 두꺼웠지만 천인문은 별 무리 없이 타고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밑에서 쳐다보고 있는 두 여인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미끄러질 라치면 기겁을 해댔다. 이윽고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중간쯤 올라간 천인문은무사 하다는 표시로 손을 흔들고는 아래를 살폈다. 사내와 말은 아직도 서로 마주보고만 있었다. 제법 소리가 났음에도 주위를 살피지않 는 것은 그 둘이 얼마나 서로에게 집중을 하고 있는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것이었 다. 좋아. 그렇게만 계속 하고 있어라! 천인문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나뭇가지를 타고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나뭇가지는 천인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서서히 밑으로 쳐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두여인 의 눈은 커져가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움켜쥔 손에 땀이 흥건해지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걸어가던 천인문은 반장쯤 나아가자 중심을 잡기 어려운지자세 를 낮추었다. 그리고는 다시 아래를 한번 쳐다보고 조금씩 앞으로 나갔다. 그러기를몇 차례. 충분히 왔다 싶은지 천인문은 숨을 고르고 아래쪽을 내려다 보았다. 기회를기다 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얏! 이때다 싶었는지 간당간당 매달려 있던 천인문이 나무 위에서 소리를 지르며뛰어내렸 다. 그 소리에 사내는 물론 말까지 놀라 버렸다. 히히힝! 긴 울음을 터트린 흑마는 제빠르게 자리에서 물러섰다. 그리고 그 자리로 떨어지는인 영. 퍽! 천인문은 사정없이 땅으로 얼굴을 쳐박아 버렸다. 그 모습에 서혜령은 질끔 눈을감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단목 수령은 그런 장면을 놓친다는 게 너무도 아쉬웠는지눈을 부릅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고 아파 죽겠네."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천인문이 얼굴을 연신 문대며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에서혜령 이 얼른 나무를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상공! 다치신 곳은 없나요?" "으응. 얼굴 말고는 별로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아. 으응?" 주루룩! 무언가 코밑으로 타고 흐르는 느낌에 천인문은 얼른 소매를 훔쳤다. "이게 뭐지? 어. 코피닷." 정말 오랜만에 보는 코피에 천인문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사방으로돌아다녔다. 한 참을 그렇게 돌아다니던 천인문은 땅에 떨어진 나뭇잎을 주워 코를 틀어막았다.그때였 다. "너...너희들은 누군데 내 말을 훔치려 드는게냐?"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정신을 놓고 있던 사내가 정신을 차리고는 앞으로 나서며삿대질 을 해대기 시작했다. 이마위로 몇 줄의 핏대가 선 것이 상당히 화가 난 듯했다.그러나 천인문은 별 소리 다 듣겠다는 투로 그를 노려보았다. "무슨 소리. 이게 왜 당신 말이란 말이야? 이 말이 당신 주인으로 인정이라도했어?" "꼬마야. 이 말은 분명 본인이 먼저 발견했다. 그리고 난 벌써 한 달째 저 말을따라다녔 단 말이다. 그런 고로 저 말은 본인에게 소유권이 있다." "그러셔? 그럼 저 말의 주인이란 걸 증명해 봐. 증명해 보이면 양보할게." "야, 양보라니, 주인에게 양보하는 게 말이나 되냐? 꼬마야." "나참. 흥! 주인도 아니면서 양보는 무슨 양보." 코를 나뭇잎으로 틀어막은 천인문은 말하기가 힘들어지는지 콧바람으로 나뭇잎을빼버 렸다. 한 마리의 말을 사이에 놓고 두 사람의 설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서서히목소리가 높 아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주먹다짐의 양상까지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험악한분위기는 단목 수령의 한 마디로 끝나 버리고 말았다. "어! 말이 가나봐." "뭐!" 두 남자의 비명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흑마는 이미 나무 뒤로 돌아가고 있었다. "안 돼." 사내는 그제서야 이런 말다툼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는지 손에 들린줄 을 흑마쪽으로 집어 던졌다. 휙 소리를 내며 날아간 줄은 정확히 말의 목에 걸렸다. 깜짝 놀란 말이 앞발을한번 들 더니 엄청난 속도로 질주해 나갔다. "우아악!" 손에 들린 줄이 팽팽해짐과 동시에 사내의 몸이 날아갔다. 그리고는 땅을 파헤치며질 질 끌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내는 놓치면 끝이라는 생각에 열심히 줄을 잡고있었 다. 천인문도 덩달아 가세했다. 뛰어가는 도중 옆으로 끌려가는 사내를 본 천인문은풀쩍 뛰어 줄을 잡았다. "상공!" "천아야!" 천인문이 끌려가는 모습에 서혜령과 단목 수령이 그를 쫒기 시작했다. 그러나흑마의 속도는 그녀들이 쫓기엔 역부족이었다. 서서히 그녀들의 모습이 멀리 사라지기시작했 다. 그리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까지도. "이 줄 내 줄이야. 넌 놔라." 그런 와중에서도 천인문의 존재가 거슬리는지 사내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여기 까지 왔는데 포기할 천인문이 아니었다. "못 놔. 너 같으면 놓겠냐?" 그 말에 사내의 본성이 드러나기 시작하는지 슬슬 말투가 어린 아이처럼 바뀌기시작했 다. "너 빨랑 안 놓으면 그냥 콱 밟아버린다." "밟을 수 있으면 밟아봐." "야 빨랑 안 놔. 그냥 콱." "죽어도 못 놔." "이게 정말 날 화나게 했겠다." 눈을 왕방울처럼 크게 뜬 사내는 줄을 잡고 있던 오른손을 번쩍 쳐들었다. 그러나그것 이 실수였을 줄이야. 한 손으로 줄을 잡고 있기엔 너무나도 흑마의 속도가 빨랐다.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사내는 줄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자 흑마의 속도가 더욱빨라지 기 시작했다. 그러나 천인문은 경쟁자가 떨어지자 마음 편히 줄을 잡고 끌려갔다.그렇 게 아프지는 않았다. 숲 속은 온통 낙엽으로 깔려 있었기에 그리 큰 상처를 입지않을 수 있었다. 흑마는 영물이었다. 목에 감긴 줄을 풀 수는 없었지만 혼자 남은 천인문을떨구어낼 방 법은 있었다. 흑마는 서서히 속도를 죽이며 진로를 바꾸고 나무들 사이로 이리저리통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온갖 나무와 바위에 부딪히며 떨어져 나갈 것이틀림없었 다. 쿵! 과연 정답이었다. 질질 끌려오던 천인문의 몸은 사정없이 나무와 돌에 부딪히고있었 다. 옷은 찢어지고 살이 터져 나간 자리에는 피가 흘렀다. 그러나 한가지 잘못생각한 것 이 있었으니 바로 천인문의 오기였다. 오라. 네 녀석이 날 이렇게 떨궈버리겠다 이건데. 천인문은 서서히 불이 붙는 것을 느꼈다. 한번 부딪힐 때마다 뼈마디가 쑤셔오는것 같 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의욕에 불타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냥 이렇게 있을 수만도없었 다. 그렇게 되면 떨어져 나갈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천인문은 줄을 서서히 잡아 당겼다. 그리고 조금씩 전진했다. 한 자 두 자. 달려가는 흑마와의 거리는 점차 좁혀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도천인문 은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점차 좁혀진 거리는 이제 일 장 남짓 되었다. 그러나 거기가 끝이었다. 너무도빠른 속 도에 말 위로 뛰어 오르는 것은 용이치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계속 매달려 가는것은 죽음과 같은 고문이었다. '어떻게 한다?' 오기로만 버티기엔 이미 팔이 버틸 한계를 넘어섰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말 위로올라타 야 했다. 하지만 이 속도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눈 옆으로풍경이 아 른 거리는 것이 옥조영의 등에 매달렸을 때 본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빠르다. '놓아 버릴까?' 잠깐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천인문은 고개를 흔들었다. 벌써 일각이 넘는 시간을매달 린 것은 고사하고라도 지금 포기하기엔 몸에 난 상처가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할 수 없지. 끝까지 가서 목에 매달릴 수밖에.' 결론은 하나였다. 줄을 끝까지 당겨 흑마의 목에 매달리는 것. 그리고 목을 졸라매숨 을 막히게 하던지 눈을 가리던지 해서 세워야 하는 것이다. 천인문은 결정을 내린 후 더욱 빠르게 줄을 당기며 전진했다. 그렇게 조금씩전진한 결 과 흑마와 반 장의 거리를 남겨둘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했다.말 위 로 오르기엔 땅을 박차는 말의 발굽이 너무도 사나웠던 것이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고 후회를 해도 소용없었다. 그렇게 되자 방법은 단한가지 뿐이었다. '말 위로 올라타는 수밖에.' 천인문은 다시 한번 각오를 단단히 해야 했다. 땅을 박차고 뛰어 오르기로 했다.그러 나 성공 가능성은 희박했다.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땅을 박차 봤자 얼마의 힘이나겠냐만 은 이 기회를 놓치면 말짱 도루묵인 것이다. 천인문은 줄을 잡은 손아귀에 힘을 불끈 넣고 확 끌어 당겼다. 그리고는 땅을 박찬후 말 위로 뛰어 올랐다. 타앗! 하늘이 도왔을까. 팽팽했던 줄은 천인문을 확 끌어당겨 말 위로 가볍게 몸을안착시킬 수 있게 했다. 말 위로 내려선 천인문은 바로 목을 감싸 안았다. 그러자 흑마는속도를 늦추더니 제자리에서 풀쩍 뛰기 시작했다. "그, 그만 뛰라구." 눈을 찔끔 감은 천인문이 큰 소리로 외쳐댔지만 흑마는 그저 제자리에서 날뛸뿐이었 다. 세 번을 뛰지도 않아 목을 감고 있던 천인문의 손이 풀렸다. 그리고 네 번째도약때 천인문의 신형이 앞쪽으로 쏠리더니 휙 하고 날아갔다. "안 돼." 천인문은 결코 떨어질 수 없다는 식으로 손을 뻗어 걸리는 것을 움켜 쥐었다. 그러자 긴 울음 소리와 함께 흑마가 제 자리에 멈추어 서 버렸다. "휴 살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멈춘 거지?" 천인문은 날아가던 몸이 갑자기 서 버린 것이 손에 움켜쥐어진 것 때문이란 것을알아 차리자 고개를 들어 손을 쳐다 보았다. 그것은 바로 말의 귀 부위였다. '내가 말 귀를 잡았나 보네. 그래서 이 녀석이 아파서 멈춘 건가?' 천인문은 그제서야 흑마가 멈추어 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때였다. 손으로무언가 끈 적한 것이 타고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피였다. '엇!' 천인문은 그제서야 말의 귀가 찢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마 자신이 날아가다잡은 충격으로 인해 찢어진 듯 했다. "앗. 미안해." 천인문은 냉큼 귀를 잡은 손을 풀어 땅으로 뛰어 내렸다. 그제야 말은 긴 울음과함께 자유를 만끽했다. "도망 안 갈꺼지?" 천인문의 말에 말은 경계라도 하듯 뒤로 물러섰다. 두 발정도 뒤로 물러선 흑마는그 자 리에 서서 천인문을 바라보았다. "그래 잘했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치료해 줄게." 천인문은 함박 웃음을 짓고는 숲 속을 두리번 거렸다. 한 눈에 피를 멎을 약초가보이 지 않자 천인문은 천천히 숲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신 뒤돌아보기를 멈추지않았 다. 겨우 잡아 놓은 것인데 도망이라도 칠까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말은그 자 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찾았다." 연신 숲풀을 뒤지던 천인문이 가까스로 피를 멎게 하는 약초 하나를 발견하여 들고왔 다. 그리고는 입으로 으깬 후에 말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말은 겁을 먹은 듯뒤로 물 러섰다. "괜찮아. 안아프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 겁먹지 마." 말을 알아 들었을까. 뒷걸음질치던 흑마가 제자리에 우뚝 섰다. "자. 이거만 붙이면 피는 안 날거야." 약초를 말 앞으로 보여주자 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말 의 귀까지 손이 닫지 않는 것이다. "흠. 이걸 어쩐다. 말 위로 올라타야 하나."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는지 말이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그러자천인문의 눈 이 휘둥그래졌다. "혹시 너 내 말 알아 듣는 거야?" -히히힝!- 화답이라도 하듯 길게 울음을 터트리는 흑마. 천인문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말을 바 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찢어진 부위에 약초를 살짝 가져다 붙였다. 쓰라린 고통이엄습 하는지 말은 고개를 흔들었지만 곧 잠잠해졌다. "그래 착하지. 조금만 있으면 피가 멎을거야. 그래." 연신 말의 목을 쓸어내리던 천인문의 표정은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가득차 있 었다. 그러다 긴장이 풀렸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아!" 그제서야 몸 상태가 떠오른 것인지 온 몸에 고통이 짖누르기 시작했다. 천인문은천천 히 자신의 몸을 살폈다. 무릎과 팔꿈치 등 다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되 있 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뼈는 다치지 않은 듯 했다. "나도 일단 피를 멎게 해야겠네." 천인문은 다시 몸을 돌려 숲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아까와 같은약초들을 찾 아 피가 흐르는 곳에 붙였다. 피가 서서히 멎는 것을 느끼자 온 몸에 힘이 쭉빠져버린 천인문은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 비록 피는 멎었지만 온 몸 곳곳이 결리고쓰라 렸다. 거기다 힘까지 빠졌으니. 슬슬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은 느낌에 천인문은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뒤로 몸을 눕혔다. 너무도 편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며 온 몸을 스치고 지나가자 수마(睡魔)가몰려오기 시작했다. 천인문의 눈이 슬슬 감기기 시작했다. 시원한 바람이 살랑살랑 대더니차츰 서늘해지고 서서히 차가워지는 느낌이 몰려왔다. "아차!" 쌀쌀한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든 천인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렇게 누워 있을수만은 없 었다. 빨리 서혜령과 단목 수령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 보아야 했다. 천인문은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뼈마디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천인문의 인상이 팍찌푸려졌 다. 큭 하는 신음을 내뱉은 후 사방을 연신 살피자 한쪽에서 서 있던 흑마가 서서히다가 왔다. "아 안갔구나." 자신에게 다가오는 말을 보자 천인문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쓰라린 몸을이 끌고는 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자자자. 이제 우리 친구가 된 거야. 그렇지?" -히히힝- 인정한다는 것인지 흑마는 콧김을 내뿜으며 화답했다. "그래그래. 일단 내 친구가 됐으니 널 부를 이름은 있어야겠지? 뭐가 좋을까?" 아직까지 친구란 개념으로 부를 존재가 생기지 못했던 천인문은 처음으로 생긴친구를 그저 '말아' 하고 부르기엔 적합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미치자 이름을 지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땅하게 부를 이름이 없었다. 천인문의 작명 솜씨가 워낙떨어졌기 때문이다. 한참을 생각하던 천인문이 머리를 긁적대며 흑마에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저기 미안한데 말이야. 내가 이름 짓는데는 소질이 없어서 말이야. 일단 우리색시는 잘 지을거야. 지금 난 색시한테 가야 되거든. 일단 색시한테 말해서 멋진 이름을지어줄 게. 알았지?" 그러자 좋다는 것인지 흑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안도를 하던 천인문이자신 이 왔던 곳으로 걸음을 옮기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여기서 또 문제 발생. 왔던 길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천인문은 비록 방향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모든것들 을 기억해 낼 만큼 그리 사려 깊지는 못했던 것이다. 결국 믿을 것은 한가지뿐이었다. 왠만한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귀소본능(歸巢本能)을 믿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말아. 너 혹시 왔던 길을 기억하니?" 혹시라도 모른다 하면 어쩌나 하고 고민하던 천인문은 흑마의 반응에 안도를 할 수있 었다.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말 목덜미를 쓸어 내린 뒤 천인문은 다시 입을 열었다. "잘 됐다. 그럼 서둘러야겠어. 이미 달이 저렇게 뜬 걸 보면 시간이 많이 흘렀나봐." 하늘을 쳐다보던 천인문이 흑마의 위로 풀쩍 뛰어 올랐다. 그러자 흑마는 휙 하고옆으 로 비켜섰다. 그 바람에 공중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뛰어 올랐던 천인문은 머리를들어 중심을 잡아야 했다. "앗. 너 왜 그러는 거야? 날 태우기 싫다는 거야?" 그러자 흑마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천인문의 눈꼬리가 살짝 위로 쳐 올랐다. "그, 그러지 말고 좀 태워줘. 너하고 나하고 친구잖아." 목소리를 깔고 이야기했지만 흑마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인지 자꾸 뒤로 물러섰다.그러 나 여기서 천인문이 포기할 순 없는 노릇. 다시 한번 말 위로 뛰어 올랐다. 그러나역시 또다시 비켜섰다. 세 번째 시도마저 무위로 돌아가자 천인문은 포기하기로 했다.도망가 지 않은 것만도 어디인가? 이번은 포기하지만 언젠가는 타고 말겠다는 생각을불태우며 천인문은 걸음을 옮겼다. -61- 어둑어둑 밤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산길을 오르는 다섯의 인영이 있었다. 둥근 달이훤 히 비치는 곳이 아닌 숲 속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발놀림은 전혀 머뭇거림이없었다. 맨 선두에 선 사내는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연신 투덜거렸지만 그 뒤를따르는 사 람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가리는 나무가 사라지자 그들의머 리 위로 환한 달빛이 내려 비추기 시작했다. "여기만 넘어가면 바로 보이는 곳이 세운사(洗雲寺)입니다." 누가 봐도 일흔은 거뜬히 넘겨짚을 나이의 노인이 뒤따르는 젊은 사람들에게공손히 말 하는 모습은 기괴한 장면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비록 그 중에 한 사람은 예순이라불러 도 무방할 젊은(?) 백발의 노인이었지만 노선배님들이란 말을 붙이기엔 나머지는너무 도 젊어 보였다. 단목 세가를 떠난 옥조영 일행이 호산에 나타난 것이다. "일단 올라가 보도록 하죠." "그럽시다." 여미릉의 말에 옥조영이 맞장구를 치고는 서둘러 산을 올랐다. 남은 일행들도그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단목 인성은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말은 안 했지만 이미 그의 몸은 이런중노동을 견 디기 어려울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계속되던 백운호의 투정에그 만 말을 세가로 돌려보낸 것이 이유였지만 무엇보다 무인이면서도 무공을등한시했던 것이 이런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그렇다고 더욱 열심히 무공을 익혀 세가를 다시세우 겠다는 야망을 가질 정도로 독기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백운호에게 무슨소리 를 할 정도로 담이 큰 것도 아니었다. 오는 도중 유운기에게 그들의 정체를 들었던단목 인성이었다. 과거 단목 인성은 단목 세가가 약해질 무렵부터 무공 수련을게을리했고, 무림에도 그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머리라도 좋으면 인간관계를 돈독히 해 볼심 산이었겠지만 그는 특히 대인 기피증 같은 것이 있었던지라 은거 기인처럼 세가에만붙 어 지냈고 그 결과 무림에서는 잊혀진 존재와 비슷하게 되 버렸다. 그러나 그도무림인 이었던지라 세 노인들의 이름과 명호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었다. 그런 결과출발 당시 주도자격인 그의 위치는 이미 가장 밑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원한 것은아니었 지만 싫어하지도 않았다. 원래 그런 것에 미련이 없었던 그였음으로. 그들은 곧 세운사 입구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낡고 허름한 문짝을 밀자 귀를거스르는 소 리와 함께 세운사 앞마당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마당에 있던 한 비구니가 고개를 돌려 문 안으로 들어오는 그들을 영접했다.그러자 일 행의 뒤쪽에서 단목 인성이 나오며 합장을 했다. "도고 스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시주께서는 단목 시주가 아니십니까? 오늘은 이곳에 손님이 많이 오시는군요." 단목 인성을 알아보는 도고 비구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단목 인성은 이곳을찾 은 사람이 많다는 말에 단목 수령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혹시 여기 온 사람이." "예. 시주의 따님이신 단목 수령 아가씨지요. 일단 여기 서 계시지 말고 안으로드시지 요." 그녀가 맞다는 말에 단목 인성은 그녀가 지금 여기 있는지부터 묻고 싶었으나 이미몸 을 돌려 안으로 든 도고를 잡고 묻지는 않았다.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아내도 보지않고 볼일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단목 인성은 알겠다는 말과 함께 그녀의 뒤를따라 갔 다. 도고는 단목 인성과 그 일행을 상옥경이 앉아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상보살께서는 안에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인사를 끝낸 단목 인성이 방으로 들자 남은 일행들은 망설이다 그의 뒤를 따라방으로 들어갔다. "인간만사(人間萬事)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하였으니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문제라. 쯧쯧쯧." 닫힌 방문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도고는 다시 방문을 향해 합장을 한 후물러났 다. "아니..." "부인. 내가 왔소. 아니 그런데 무슨 일인데 눈물을 보이는 거요?" 방으로 들어서던 단목 인성은 눈물을 흘리며 앉아 있던 상옥경을 보자 단목 수령에대 한 말이 쏙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상옥경은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자리에서일 어섰다. "손님들께서 오셨군요.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상옥경은 한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방으로 들어서자 당황했지만 곧 안주인의모습 을 되찾았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여미릉이 그녀의 모습에 공손하게 대답을 했다. 나머지 일행도 인사를 한 후자리를 잡 았다. "그런데 부인은 무슨 일로 그렇게 울고 있는게요?" 단목 수령의 행방이 입에 근질거렸지만 두 달 가까이 보지 못했던 사람에게 바로용건 을 꺼낼 정도로 단순한 단목 인성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에 바로 본론으로들 어갈 수 있었다. 상옥경은 단목 인성을 한참동안 바라보다 말문을 열었다. "우리 미령이 아이가 왔었어요." "누, 누구 말이오?" 단목 인성은 휘둥그래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수령이 그 아이와 함께 왔더군요. 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혹시 이름이 천인문 아닙니까?" 가만히 앉아 있던 옥조영이 앞으로 나섰다. "천인...문? 그 아이 이름이 천인문입니까?" 처음 듣는 외손주의 이름에 상옥경이 옥조영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그리고 다시천 인문의 얼굴을 생각하는 듯 그녀의 눈빛이 흐려졌다. "미령이를 영락없이 빼 닮았더군요. 어렸을 때 그 아이 모습이 바로 떠오르는 게영락없 더군요." 감회에 젖은 듯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아이가 미령이 아이라구. 미령이 아이?' 단목 인성의 얼굴에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전혀 알아보지 못했던자신 의 눈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다시 한번 그 아이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상옥경의 어깨를 쥐었다. "그런데 왜 그 아이는 안 보이는게요? 그리고 수령이는 또 어디간거요?" "상공께서 수령이 그 아이의 혼처를 잡으셨습니까? 그 아이가 왔더군요. 자신은그런 혼 처 인정할 수 없다 하더군요. 화가 나서 뛰어 나간걸 문이 그 아이가쫓아갔습니다." "언제쯤 나갔습니까?" 연신 천인문의 이야기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옥조영이 고개를 들며끼어들었다. "이 각 남짓 되었습니다." 상옥경의 말에 옥조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그 아이들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께서는 이야기를 계속나누시지요." 그러자 여미릉과 백운호도 같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아 있을 이유가 없는유운기도 망설임없이 일어났다. "옥형께서만 가시려구 그러시오. 같이 갑시다." "저도 가겠습니다." 다 같이 일어서자 단목 인성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두 달만에 만난 아내를남겨 두고 그들과 같이 가겠다는 말은 꺼내기가 쉽지 않았는지 그저 머뭇거릴 뿐이었다.그 모습에 상옥경은 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리며 살포시 웃음을 지었다. "같이 가십시오. 나간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지금 가시면 바로 만나실 수 있을것입니 다." 그녀의 말에 단목 인성의 얼굴이 환해졌다. "부인, 고맙소. 그 아이를 찾으면 바로 돌아오도록 하겠소." 말을 마친 그는 문 앞에서 자신을 보고 있던 일행을 바라 본 후 밖으로 나왔다. 옥조영 등은 밖으로 나오자 바로 동쪽 담벼락을 뛰어 넘었다. 저 멀리 산아래서말소리 가 들려 오고 있었던 것이다. 목소리가 높은 걸로 보아 다툼이 일어난 듯 했다. 그들은 더욱 빠르게 신법을펼쳤다. "아,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난 인정할 수 없소. 분명히 당신들은 도둑들이오." "분명히 말했지만 그 말이 당신 말이라 인정 할 증거가 없잖아요." "하늘은 내 말이 사실임을 증명해 줄 것이오." "어디 증명 해 보라고 하세요. 증명되면 저희가 도둑이라고 인정하도록 하죠." 달려가던 일행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가장 뒤에서 쫓아오는 단목 인성이목소 리의 주인공을 증명해 주었다. "수령이 그 아이군요." "그럼 문이 녀석도 거기 있겠군요." 옥조영은 더욱 속력을 높였다. 그렇게 되자 일행과의 거리가 급격히 벌어지기시작했 다. 단목 수령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말과 천인문이 사라지고 나자 사내가 벌떡일어서 대 뜸 한다는 소리가 도둑놈들이라니. 무슨 도둑놈이냐고 따져 봐도 말이 안 통하는사내였 다. '생긴 건 꼭 뭐 같아 가지고. 말도 꼭 생긴대로 해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그녀에게 그가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솔직히 사내의용모는 그 리 못 생긴 것이 아니었다. 여자가 따르기에 조금 거북한 면이 없지 않아 보였지만그리 흠잡을 곳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미남자라도 좋게 보여지지 않을 것임을감안하 면 엄청난 추남자라 취급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가씨. 그냥..." "언니는 가만 있어요. 저런 사람하곤 대화할 필요가 없어요. 지가 뭔데 우릴도둑으로 모는 거야? 흥!" 단단히 화가 낫는지 단목 수령은 서혜령의 말문을 콱 닫아버리며 사내를째려보았다. 그 말에 사내의 눈이 치켜 올라갔다. "저런 사람? 아니 이 낭자가 여자라고 봐 드리니까 못하는 말이 없군." "흥! 안봐주면 어쩔 건데요? 손이라도 봐 주겠다는 거에요?" "그렇소. 어느 집안 출신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신 같은 여자 때문에 집안어르신들이 걱 정 꽤나 하시겠소. 그러나 버릇없는 사람을 보고 협객(俠客)이 그냥 지나칠 순 없는노 릇. 이 몸이 그대 부모님을 대신해 한 수 교훈이나마 내려야겠소." 사내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손을 명치 끝으로 들어 올렸다. 동작이부자연스러운걸로 보아 권술(拳術)을 익힌 사람은 아닌 듯 했다. 그 닭살 돋는 말에 단목 수령의 낯이하얗 게 변해 버렸다. 그때 한 줄기 파공성과 함께 한 인영이 벼락같이 땅으로 내려꽂혔다. "얘야 그동안 잘 있었느냐?"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서혜령과 단목 수령은 멍한 얼굴로 나타난 사람을 보고있었다. "나의 등장이 좀 거칠었나 보군." 그녀들이 넋을 잃고 바라보는 모습이 어색했는지 옥조영은 헛기침과 함께 농을지껄였 다. 그러자 정신을 차린 서혜령이 인사를 했다. "정말 오랜만에 뵙는군요. 어르신." "그래. 별 일은 없었겠지? 그런데 이 녀석은 어디갔느냐?" "아, 자, 잠시 어디로..." 인사를 했지만 그녀는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은 전혀 예상을못 했던 것이다. 그가 나타났다면 분명 여미릉도 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자신이야여미릉에 게 끌려온 것이라 말하면 무사할진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서 남편을 궁지로 몰수도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그런 말을 했다간 여미릉뿐만 지금 앞에서 눈을 벌겋게부라리고 있는 옥조영에게 목숨까지 위태로워 질 것이 분명했다. 옥조영의 질문에 대충둘러대긴 했지만 결국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일단은 조금이라도 옥조영의 화를가라앉히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한 서혜령은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가 고민에 잠겨 있을 때 단목 수령은 옥조영과 서혜령의 관계를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 그녀의 생각은 뒤따라 나타난 사람들로 인해 흐트러지고 말았다. "야 이놈의 계집... 험험! 수령아." 꿈에라도 듣고 싶지 않았던 단목 인성의 목소리에 정신이 없던 단목 수령의 눈이휘둥 그래졌다. 그녀의 머리가 돌아가자 눈에서 불길을 화르르 내뿜고 있는 단목 인성이보였 다. "아, 아빠!" "그래. 너의 아빠다. 왜 그러냐 내 딸 수령아." 보는 사람이 있어 대뜸 나오는 욕설을 삼키고 말을 조심스레 했지만 그렇다고 결코부 드러운 말투는 아니었다. "부녀간의 대화는 집에 가서 차근히 나눠보도록 하자꾸나." "시, 싫어요. 전 집에 안 갈 거에요." 집에 가자는 말이 오싹한지 몸을 부르르 떨던 단목 수령이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그러 자 단목 인성의 입이 쫙 벌어졌다. 평소 장난을 자주 치긴 했지만 이렇게 면전에서반박 한 적은 없는 아주 착한(?) 딸이었기 때문에 그 충격이 여간한 게 아니었다. 아무말도 못하고 숨만 껄떡껄떡대는 단목 인성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옥조영이 다시고 개를 돌렸다. "문이 녀석은 어디 있는지 말해 주겠느냐?" 질문을 받은 서혜령의 몸이 움찔했다. 낮은 목소리에 그득 실려 있는 살기. 어떤말을 해야 할지 연신 고민에 잠겨 있을 때 무언가 숲을 헤치고 다가오는 그림자가있었다. 그 리고 터져 나오는 목소리. "아앗. 하, 할방... 아니 할아버지!" 나타난 사람은 천인문이었다. 흑마 위에 타고 있던 천인문이 소스라치게 놀라며손가락 으로 옥조영을 가리키자 그 대상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문아!" 무럭무럭 피어나는 살기에 놀랐는지 천인문을 태운 흑마가 뒷걸음질 쳤다. "넌 할애비를 만났는데 안부 한 마디 없는게냐?" "뭐 안 물어봐도 잘 지내셨겠죠." "후후. 진실이다 보니 나도 할 말이 없구나."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무서운 살기를 내뿜는 자와 잔뜩 긴장한 자의 괴상한 인사가오 고 가는 모습을 잔뜩 긴장한 상태로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나 서혜령은 긴장을 늦출수 가 없었다. 비록 옥조영이 죽이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무사히 넘어갈 것 같지도않았 다. 그녀는 연신 사태를 주의 깊게 주시하며 공력을 끌어올려 손으로 모으기시작했다. 옥조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문을 열었다. "따로 이야기 하지 않아도 되겠지? 네가 뭘 잘못했는지." 한 걸음의 위세에 놀란 흑마가 한 걸음 뒷걸음질쳤다. "특별히 내가 잘못 한 건 없는 것 같은데요." "뭐? 잘못 한게 없다고? 아직 그걸 모르다니 실망이 크다." "실망이 커도 할 수 없어요. 난 잘못 한 게 없으니깐요." "그렇게 자꾸 물러서지 말거라. 내가 다가가는게 싫은거냐?" "싫긴요. 그런데 이걸 어째요. 제가 물러서는게 아니라 흑풍이 녀석이 자꾸물러서는 건 데요." "흠! 싫은 게 아니라면 이 할애비 쪽으로 오너라." "가, 가고 싶지만 이 녀석이 말을 안 듣네요. 할아버지가 양해하세요." "흠 미물 녀석이 우리 조손간의 대화를 막는다? 그럼 이 할애비가 해결하지." 말 한마디에 한 걸음씩 전진하던 옥조영. 그러나 속으로는 엄청 화가 끓어 오르고있었 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온 몸에서 풍기는 기운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기운에모든 사 람의 등에서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 할아버지. 일단 마, 말로 해요." "말 따위는 필요 없다." 탓! 말을 마침과 동시에 옥조영의 몸이 벼락이 내려치듯 쏘아져 나갔다. 십 장이 넘는거리 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그리고 옥조영의 손에서 내뿜어져 나가는 강맹한 기운은흑풍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미물이라 불리운 흑풍도 그리 호락호락 당하진 않았다. 자신에게 쏘아진기운 을 옆으로 살짝 비켜서며 피했다. 콰쾅! 손에서 뿜어져 나간 기운이 땅과 부딪히자 엄청난 굉음과 함께 모래가 터져올랐다. 그 리고 반경 오장이 넘는 곳이 움푹 파여 버렸다. "피했다? 정말 용서 할 수 없구나." 지금까지는 장난스런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이번에 들린 목소리는 전혀그렇지 않 았다.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것이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옥조영의 눈에서새파란 안광(眼光)이 피어오르는 것이 꼭 늑대의 그것과 같았다. "하, 할아버지. 왜 그러는 거에요?" 숨이 넘어갈 듯 더듬거리며 말하는 천인문의 질문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단 지 옆구리에 차여진 검을 잡았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백운호와 유운기 등은 잔뜩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쾌검으로 알려진옥조영 의 모습이 여기서 재현될 것인가 하는 긴장도 있었지만 묻어나는 살기가지금까지와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발검의 자세가 아닌 패도적인 기운을 내뿜는 걸로 보아 다른검술 인 듯 했다. '안 돼! 진짜 이건 안된다구.' 천인문은 옥조영의 모습이 자신이 아는 그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도망쳐야겠 다는 생각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흑풍은 그렇지 않았다. 저 기운이몰리는 곳 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타타탁! 연신 뒷걸음질만 치던 흑풍이 갑자기 몸을 돌려 달아났다. 그와 동시에 옥조영의눈이 커졌고 손에 쥔 검이 벼락같이 내뿜어져 나왔다. 파팍! 예상치 못했던 도주에 천인문은 뒤로 넘어졌지만 가까스로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그 러나 갑자기 자기 등뒤로 닥쳐오는 검기는 천인문이 고개를 돌릴 새도 없이 등을맞추 어 버리고 말았다. 컥! 천인문은 등을 화끈하게 달구는 기운에 그만 입에서 피를 토하며 앞으로 쓰러졌다.흑 풍은 검을 맞고 떨어지는 천인문을 물고는 더욱 속력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이 광경에 모두 넋을 잃어버렸지만 가장 정신이먼저 돌아온 옥조영과 서혜령이 급히 흑풍을 뒤쫓기 시작했다. 그러나 흑풍의 속력은그들의 경신술로도 쫓기에 무리가 있었다. 그들의 거리는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고 어느순간 천 인문을 문 흑풍의 모습은 저 멀리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62- 천하 제일 미녀라 부르리까?(1) 선구자(先驅者) 남보다 먼저 앞서 나간 자를 일컫는 말이다. 그 명칭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던 이 가 있었다. 비록 자의(自意)가 아닌 황명(皇命)을 받은 것 때문이기는 하지만 이 만(二萬)이 넘는 병사를 이끌고 새로운 해로(海路)를 개척한 사람.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정화(鄭和)라 불렀다. 영락제의 즉위를 도운 뒤 태감(太監)에 오른 그는 영락제에게 정(鄭)씨 성을 하 사 받았다. 그런 그가 현재 영락제에게 받은 명령은 남해 원정이었다. 훗날하서양 이라 불리우게 될 이 남해 원정은 이미 그 횟수로 사 회를 기록하고 있었다. 주갑(胄甲)을 걸친 사내가 절벽 끝머리에 서서 쪽빛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곱 자에 달하는 거구의 당당한 몸을 가진 사내였다. 불어오는 맞바람에 주갑 밑 에 입은 푸른 답호( 護)가 유난히 펄럭거렸다.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는 모습에말 을 잃고 서 있던 사내의 귓가로 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삼보태감(三保太監) 어르신. 준비가 끝났습니다." 삼보태감이라 불린 사내. 바로 정화(鄭和)였다. 감흥에 젖어 있던 정화는 자신을 부른 인물을 찾았다. 긴 장도(長刀)를 옆구리에 걸친 육 척의 키를 가진 남자가 석 장 뒤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 정사흠(鄭査欽) 첩형(貼刑) 아닌가. 준비가 끝났다고 하셨소?" "예! 모두 어르신의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만 내려 가시지요." "그럽시다." 정화는 정사흠의 안내를 받아 절벽을 내려갔다. 그들은 곧 큰 포구가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미 그 곳에는 깃대를 곧추 세운 오 천의 병력이 자신을 기다 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물경 사십 장이 넘는 거대한 선박(船舶) 십 여 척 이 웅장한 모습으로 바다 위에 떠 있었다. 이 오 천의 군사들은 본대와 떨어진 별 대였다. 정화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오와 열을 맞추고 서 있는 군사들을 살폈다. 비록 입은 옷과 든 무기는 색이 바래고 흉이 남았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더할 수 없는생 기가 떠올라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화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희망이 었다. 집으로 갈 수 있다는 목표 그것이 이제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는 것이다. "모두들 들어라." 자신에게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정화는 소리 높여 외쳤고 곧 그는 소기의 목적 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 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나를 따르느라 고생이 많았다. 이 머나먼 땅까지 와서 황제 폐하의 은덕을 만 천하에 떨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대들의 노고(勞苦) 덕 분이었다." 와 하는 함성이 온 포구를 떨어 울렸다. 오 천 군사들의 소리에 절벽에 자리한갈 매기들은 모두 후두둑 날개짓을 하며 하늘을 뒤덮었고 용솟음치는 파도는 더욱 기 승을 부렸다. 정화는 손을 들어 한참을 울부짖던 병사들을 진정시켰고 계속 말문을 이어갔다. "이제 긴 항해에 마침표를 찍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지막 항해다. 모두 힘 낼 수 있겠는가?" 예 하는 복창과 함께 큰 함성이 다시 일었다. "역시 삼보 태감 어르신께서는 다르시군요." 만면에 만족한 미소를 짓고 있던 정화의 뒤로 한 사내가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별 말을 다하는구만 이 당두." "아닙니다. 지난 혁명 때 수 만의 군사를 이끄시던 모습을 보지 못해 억울했던것 이 오늘 완전히 다 풀리는군요. 과거 어르신의 위용이 눈에 훤합니다." "하하하! 자네가 오늘 나를 너무 띄어주는구만. 그러다 떨어지면 얼마나아플꼬?" 간단히 농 짓거리를 건네는 정화였지만 그의 얼굴엔 자부심이 가득 넘치고 있었 다. 오랜만에 군사들 앞에서 크나큰 호령을 던지니 다시 한 번 그 때의 감흥이 떠 올랐던 것이다. "이제 가시는군요." 아련한 추억의 끝자락을 뒤지고 있던 그의 귀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화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차리자 바로 허리를 숙이며 공대를 취했다. "예 그렇사옵니다." 나타난 사내는 삼십을 가까스로 넘긴 사내였다. 화려한 직물로 된 복장에 휘황찬 란 빛나는 장신구를 단 사내. 바로 남사군도(南沙群島)의 한 섬을 차지한 왕이었 다. 십 여 년 전 이 곳의 왕이 인근 나쿠르 국과의 전투 중 독화살에 맞아 전사한 일이 있었다. 왕자의 나이가 너무도 어려 왕비는 왕의 복수를 해 주는 자에게나라 와 자신을 바치겠노라 공표를 했는데 그 후 한 어부가 왕의 복수를 하였다. 그 결 과 어부는 왕비와 혼약을 맺고 노왕이라 칭하며 국정을 맡았다. 그런데 얼마 전장 성한 전왕의 아들이 이 의붓아비인 노왕을 죽이고 그의 동생과 전투가 벌어진 것 이다. 정화는 이 선왕의 아들을 도와 그를 왕위에 올렸고 지금 왕이 된 그는 무한의 조 공을 약속하며 금, 은, 세공품과 차 등의 사치품을 배 한 가득 채울 정도로 바쳤 다. "돌아가시거든 황제 폐하의 은덕을 입은 이 사람. 영원히 변치 않는 조공을 약속 드리겠노라 전해 주시오." 치렁치렁 매달린 장신구들을 매단 사내가 연신 이별을 아쉬워하자 정화는 간단 명료한 답변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전하의 충심. 폐하께 확실히 전해 드리겠나이다." 가볍게 고개를 숙였던 정화는 다시 몸을 세우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 승선." 그의 말을 받은 정사흠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자 늘어선 군졸들은 모두 희망 에 부푼 얼굴로 배에 승선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정화가 다시 몸을 돌려 왕을 바라 보았다. "전하. 이제 헤어질 시간이군요. 몸 건강히 계십시오." 간단한 목례로 작별의 인사를 마친 정화는 보무도 당당하게 자신을 기다리는 선 박 위로 몸을 올렸다. "출항!" 선장의 큰 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지자 돛이 하늘로 솟아올랐고 옆으로 난 도(櫂) 들이 힘차게 물길을 가르기 시작했다. 포구에 나온 왕과 신료들은 모두 십 여 척 의 큰 배가 항(港)을 벗어나는 장관을 쳐다보았고 곧 그들의 눈에는 배가 떠난 뒤 떠오르는 흰 포말(泡沫)만 한 가득 들어왔다. '이제 끝났군.' 하늘을 뒤덮을 듯 떠 있던 갈매기 때들이 서서히 눈에서 멀어짐을 느끼고 있던정 화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들을라 큰 소리는 내지 못했다. 길고 긴 항해였다. 비록 본대를 먼저 보내긴 했지만 예정보다 육 개월이나 늦어 져 버렸다. 그러나 얻은 것도 많았다. 자신이 타고 있는 이 배에만도 명나라 일 년 예산의 절반이 넘는 조공품(租貢品)이 실려 있었다. 그래서 불안한 것이다. '특별한 일은 없겠지. 지금까지도 별 일 없었는데 별 일이 있겠는가? 부순(部淳) 당두가 이미 도착했을 테니 군사들을 준비해 두었을 것이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고개를 내저으며 자신에게 말을 건넸다. 그런 그의 귓가로 갑판을 두드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이 찬데 왜 나와 계십니까?" 이규였다. "시원하기만 한데 뭘 그리 걱정하시오. 그래 무슨 일이오?" "선장이 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요? 그럼 가 봅시다." 얼굴 한 가득 의문을 띈 정화는 이규의 뒤를 따라 선두(船頭)로 나아갔다. 그곳에 는 초로(初老)의 한 인물이 연신 사내들을 호통하고 있었다. 기다리던 사람이나타 나자 노인은 하던 일을 멈추고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그래 무슨 일로 날 보자 하였소?" 정화가 말을 건네자 노인은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이런 말씀드리긴 죄송하게 되었사옵니다만 한 달 반에 도착하긴 어려울 듯 싶습 니다. 예상했던 신풍(信風)이 불지 않다 보니..." 노인의 말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정화는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이상하구료. 지난 세 번의 항해에선 한 달 반이면 충분히 도착하고 남았는데 말 이오." "그때는 남서풍(이 불었습니다요. 하지만 지금은 북동풍이 불고 있고 있죠. 돛을 쓰기가 어렵습죠. 도(櫂)만을 이용하여 가기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듯 싶습니 다." 혼쭐이 나리라 예상했던지 노인의 이마엔 연신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이렇게 간다면 얼마쯤 걸릴 것 같소?" "지금은 북동풍이 불지 않는 계절이옵니다. 그런데 불다 보니... 얼마라 확실히단 정짓긴 어렵습니다요. 하지만 아무리 길게 잡아도 육 개월을 넘기진 않을 듯 싶습 니다." "육 개월이라..." 눈살을 찌푸리던 정화는 손을 들어 턱을 매만졌다. 너무도 길었다. 그런데 더욱 늦춰지다니. 속에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화를 낼 순 없었다. 바람이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육 개월에 다시 운하를 타는 시간까지 합하면 거의 일 년 가까이 늦어진다는 말 인가?' "알겠네. 일단 최선을 다해 주게나." 치미는 화를 삭이며 말을 했지만 딱딱하게 굳은 음성은 어쩔 수 없었다. 연신 굽 신거리며 비위를 맞추는 선장의 발 밑으로 땀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정화는 안 면을 굳힌 채 밖으로 나섰다. 바다 내음을 가득 실은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 고 지나가자 들끓는 화가 다시 가라 앉았다. 연신 노니는 갈매기들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의 표정엔 이미 어떤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배 뒤를 따르던 여러 배 중에서 한 마리 전서구가 떠오른 것은 바로 그때였 다. 갈매기들과 전서구는 쉽게 구별이 갈 법도 하건만 귀향의 기쁨에 젖어 있던선 원들과 군졸들에겐 그런 것이 뜨일 리가 없었다. 물론 그것은 정화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좀 그만 울어요." 단목 수령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원래 기분으로는 하늘이 날아갈 듯 기뻐해야 마땅했다. 자신의 결혼 건에 대해 두 손을 높이 들어버린 단목 인성 이 세가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기쁨을 표시 할 수 없었던 것은 울음바 다가 되어 버린 서혜령 때문이었다. 세 시진 남짓 울음을 이어가고 있는 서혜령을 달랠 방도를 찾지 못했다. 원체 남 자처럼 커왔던지라 눈물을 보인 적이 한 손으로도 꼽을 수 있을 정도였던 그녀였 다. 상옥경이 워낙 자주 울어 충분히 적응이 되었다 생각했건만 서혜령의 경우를 만나고 나니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어찌 사람이 세 시진이란 긴 시간을 울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쉬지 않고 계속눈 물이 흐르다니. 기가 차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지만 그것보다는 계속 귀로 파고드는 소음 때문에 머리가 아팠던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서혜령의 울음을 멈추게 해야만 했다. '좀 도와 주면 안되나? 사부란 사람도 제자가 이렇게 울어대는데 어찌 저렇게 무 심하게 서 있을 수가 있지?' 단목 수령의 눈이 고양이처럼 날카로워졌다. 단목 수령은 그녀의 일행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기 맨 앞에서 앞장을 선 옥조영이며 그 뒤를 무심히 따르는 백운호. 게다가 서혜령의 사부라 칭한 여미릉 까지. 어느 하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다. 차가운 외모를 가진 유운기의 눈은 꼭 독사의 그것을 보는 듯 했다. 당연히 말을 찾겠다 따라 나선 우문교(于文驕)도 마음에 찰 리 없었다. 이래 저래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단목 수령이었지만 그렇다고 나 몰라라 하며 일행을 벗어 날 수 없었던 것은 단순히 서혜령 때문만은 아니었다. 단목 인성이여 미릉에게 받아냈던 약조 그것이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단목 인성이 여미릉에게 그녀의 딸인 단목 수령의 혼인건을 취소하는데 한 팔 도 움을 주겠노라 약속을 받은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단지 조금의 자존심을 굽히 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면(裏面)에는 단목 수령이 여미릉의 두 번째 제자로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꿍꿍이 속이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데는 서혜령이란 존 재가 있었기 때문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었다. 외손주의 아낙이 여미릉의 수제자이 고 보니 잘 말해 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비록 그 사실을 단목 인성에게 들어 알고 있는 단목 수령이었지만 이렇게 울고있 는 서혜령을 두고 냉정하게 걸음을 재촉하는 여미릉을 보니 제자고 뭐고 확 다 때 려 치워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 그만 울라 했죠. 좀 그치란 말에요. 그쳐!" 치미는 짜증을 참다 못한 단목 수령이 두 손 불끈 쥔 채 소리를 버럭 질렀다.어찌 나 큰지 수십 장 앞선 옥조영도 흠칫 하며 뒤를 돌아 볼 지경이었다. 두 눈 동그랗게 뜬 서혜령이 순식간에 눈물을 거두고 단목 수령을 향해 고개를들 었다. "울기만 한다고 일이 해결이라도 된다는 말이에요? 방도를 찾아야 할 거 아네요 방도를. 그리고 사부라 했죠?" 단목 수령의 눈은 이미 돌아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잠자코 지켜보던여미릉 에게도 불똥이 날아갔다. "제자가 계속 울기만 하는데 그렇게 있기만 할 거에요? 어떻게 사부란 사람이 그 럴 수가 있어요 예? 입이라도 있으면 말 좀 해 보란 말이에요." 단목 수령의 말이 효험이라도 본 것인지 여미릉이 몸을 돌려 서혜령에게로 다가 왔다. "그래 이제 좀 풀렸느냐?" "......예." "한 번 울음이 터지니 멈추기 어렵지? 나도 그랬다. 그토록 터지지 않던 울음이 한 번 터지니 무려 다섯 시진을 가더구나. 너의 경우도 그 이상 갈 법 했는데 잘 된 건지 못 된 건지 벌써 그쳤구나. 그 동안 쌓인 걸 풀라고 내 너에게 아무 말하 지 않았지만 이젠 그만 그쳤으니 마음을 가다듬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여미릉과 서혜령의 이야기가 오고 가자 무슨 뜻인지 모르는 단목 수령으로선 계 속 둘을 바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그 아이는 별 탈 없을 게다. 등에 큰 상처가 남긴 하겠지만 목숨에는지장 이 없을 게다." "하지만 이대로 두 손놓고 있을 수만도 없지 않겠어요?" "너도 알잖느냐? 이미 그 아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그 검은말 을 쫓기엔 실력이 안 되는 걸 어쩌겠느냐." 서혜령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찌나 빠른지 옥조영과 백운호 가 뒤를 쫓았음에도 말은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한 시진 넘게 찾아 봐도 보이지 않는 터에 무슨 수로 찾는단 말인가. "조만간 나타날 게다.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자꾸나." 가볍게 어깨를 다독거린 여미릉이 다시 앞으로 나서자 서혜령은 단목 수령과 함 께 그녀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언니. 무슨 말이에요? 하나도 못 알아 듣겠어요." 화를 다 푼 단목 수령이 서혜령의 눈치만 실실 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설명할 좋은 방도가 없는 서혜령으로선 웃음을 지으며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별 것 아네요. 신경 쓰지 마세요. 아가씨." "쳇! 하기 싫음 관 둬요. 그거 안 듣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삐져 버린 단목 수령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앞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 모습 을 보던 서혜령은 싱거운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63- 천하 제일 미녀라 부르리까?(2) 하늘에서 수많은 별들이 아름다운 빛으로 수(繡)를 놓은 밤이었다. 구름에 얼굴 을 감추고 있던 달이 그 모습을 드러내며 아름다운 자태를 온 사방으로 흩어 놓자 사방에서 울어대던 풀벌레 소리가 제 할 일을 다했다는 듯 잦아들었다. 하지만 그 것도 잠시 뿐. 다시 달이 얼굴을 감추면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풀벌레들과 개구리 들의 울음이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가끔 들려오는 밤새 소리와 늑대 소리에 또 다시 쥐 죽은 듯 고요해지는 산. 그곳 에 금(琴)의 탄주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 것은 하늘을 뒤덮은 구름이 완전히 사라진 늦은 밤 무렵이었다. 하늘 위로 둥실 떠오른 둥근 만월(滿月)이 뿜어낸 빛무리 속에서 석 자 반 가량되 는 검은 금을 타는 한 여인이 있었다. 금색의 봉황이 수놓인 순백의 배자(褙子)를 걸친 여인은 갓 이십을 넘은 듯 보였 다. 칠흑같이 검은머리를 높이 틀어 올려 비녀로 꽂은 맵시하며 촉촉이 젖은 눈망 울을 살짝 내려 닫는 긴 속눈썹. 해말간 피부에 살포시 나타나는 발그레한 홍조는 뭇 사내의 넋을 잃게 만들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좁은 소매 밑으로 드러난 가는 섬섬옥수가 금(琴) 위로 노니는 모습은 나비의 그 것을 연상케 했고, 가끔씩 열리는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음색은 옥주(玉珠)가 구 르는 듯 하다. 산을 타고 흐르는 그녀의 음률(音律)에 사방에서 동물들이 몰려들어 여인의 주위 로 몰려들었다. 비록 산새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어디선가 몰려온 미물들이 옹기종 기 모여 앉은 모습은 꿈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한 상처 입은 사내를 태운 검은 말 한 필도 그 음색(音色)에 매혹되었는지무의식 중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천인문을 등에 실은 흑풍이었다. 연신 주위를 경계하 는 것이 천인문의 안전을 염려하는 듯 했으나 별 이상이 없다 여겼는지 숲을헤치 고 조심스레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흑풍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그녀의 눈에 희미한 광망(光芒)이 어렸다. 연주 때마 다 새들이 이렇게 모이는 것은 자주 있었기에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 나 타난 적은 없었다. 그것도 흔해빠진 말도 아니라 보마(寶馬)라 불릴 정도의말이었 다. 흑풍에 간당간당 매달려 있던 천인문이 땅으로 떨어진 것은 그녀의 탄주(彈奏)가 멈춤과 동시였다. 쿵 소리와 함께 멈춘 연주에 사방으로 새들이 비상(飛翔)하고여 기 저기 깃털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그와 동시에 하얀 빛줄기가 벼락치듯 그녀의 앞으로 내려섰다. 잡털 하나 섞이지 않은 새하얀 백묘(白猫)였다. 잔뜩 등을 곧추 세우고 노려보는 것이 흑풍과 천인문을 경계하는 듯 하다. 흑풍은 갑자기 나타난 백묘에 놀랐는지 한 발 뒤로 물러섰으나 천인문을 보호할 생각인지 제자리에 우뚝 서 백묘와 대치했다. 너만 영수(靈獸)냐 나도 영수(靈獸) 다 하는 식으로 불꽃튀는 대결이 두 동물사이에 벌어졌다. 번뜩이는 살기가 섞인 두 마리의 영수가 대치한 숲 속은 갑자기 싸늘하게 식어버 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곧 그 대결은 싱겁게 끝나 버리고 말았다. 금을 타던 여 인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외친 것이다. "일묘(日猫)야 물러서." 그녀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일묘라 불린 백묘는 낑 하는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낸 뒤 그녀의 어깨 위로 가볍게 내려앉았다. 일묘를 목에 태운 여인은 조심스레흑 풍의 앞으로 걸어갔다. '이 말도 대단하구나. 어떻게 일묘의 살기를 받아 낼 수 있지?' 여인의 아름다운 옥용(玉容)에 한 줄기 호기심이 서렸다. 그리 길지 않은 세월동 안 일묘의 살기를 제대로 받아내는 동물을 본 기억이 없었던 그녀로선 더욱 흑풍 을 가까이서 바라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히히히힝!" 그녀가 다가오자 위기감을 느꼈는지 흑풍은 앞발을 살짝 드는 위협을 넣어가며 긴 투레질을 토했다. 그러자 여인의 어깨 위에 있던 일묘도 덩달아 발톱을 세웠 다. "그만해 일묘!" 차가운 음성에 일묘의 기세가 한 풀 꺾여 버렸다. 일묘를 진정시킨 여인은 가벼 운 웃음을 지으며 흑풍에게 다가섰다. "걱정마. 저 사람을 다치게 하진 않을 테니깐." 조심스레 살피던 흑풍도 그녀의 눈에 서린 진심을 읽었는지 고개를 아래로 떨궜 다. 그러나 그녀의 접근은 거부한다는 것인지 그녀가 몇 발 남지 않은 곳까지다가 오자 몸을 돌려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기색이 떠올랐다. 말이 주인을 내버리고 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을 눈앞에서 겪은 여인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 "으음!" 낮은 신음 소리에 번뜩 정신이 든 여인은 땅에 뒹굴고 있던 천인문을 향해 몸을 굽혔다. "아이잖아?" 땅에 쓰러진 사람이 겨우 열 서넛쯤 되어 보이는 어린 아이란 것을 알아차린여인 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누가 이런 어린 아이를 다치게 했다는 말인가? 여인은서서 히 상처를 입힌 미지의 대상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자신도 무림인이지만 어린 아이와 힘없는 여자와 노인들에겐 손을 쓰지 않는다. 그것이 비록 가문의 철칙이 긴 해도 자의로서도 그럴 생각 따윈 없었다. 그랬기에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는 천인문의 상처는 그녀를 화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숨을 고르며 끓어오르는 화를 삭인 그녀는 조심스레 천인문의 몸을 살피기 시작 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서서히 커져갔다. 천인문의 옷은 완전히 피로 절어 붉 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피가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등판을 대각선으로 가르다 시피 한 긴 상처 자국이 눈에 들어온 탓이다. "이, 이건 검기(劍氣)?" 상처를 살피던 여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폭이 일 촌(寸)을 가뿐히 넘어가는 상 처가 무려 한 자나 길게 나 있었다. 분명 자신도 검기를 내뿜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과거 자신의 검기를 나무에다시험 해 보았을 땐 가늘지만 매끄러운 표면이 남았지 지금처럼 뜯기어 나간 것 같은 흔 적을 남기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럼 검강(劍 )인가?" 그녀의 머리는 더욱 혼란에 잠기었다. 검강이 어떤 단계인가? 자신의 아버지도그 토록 오르고 싶어하는 경지의 무공이 아니던가? 그런 단계를 이런 곳에서 볼 수있 다니. 내심 중원의 무공을 얕보던 여인으로선 인정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 다. '아냐. 이건 검강이 아니야. 내가 검강을 본 적 없어서 착각을 하는 걸 거야. 이게 검강이라니 말도 안 돼.' 여인은 쉬지 않고 머리를 흔들며 자아최면(自我催眠)을 걸기 시작했다. "으으으." 다시 한번 천인문의 신음이 터져 나오자 넋을 빼고 고개를 흔들던 여인이 정신을 차렸다. "내 정신 좀 봐.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지. 이 아이를 살리면 검기인지 검강인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거야." 여인은 옷에 피가 묻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피범벅이 된 천인문을 가볍게 들어어 디론가 사라져갔다. 여인이 사라진 자리에는 타다 만 금만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그녀가 향한 곳은 낡은 묘옥이었다. 버려진지 오래 된 것인지 군데군데 거미줄이 쳐져 있었고 마당엔 온통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엉성하다 못해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초가(草家)에 들어간 여인은 문짝부 서지는 소리를 내는 문을 급히 연 뒤 천인문을 바닥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는 등롱에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가 방으로 퍼지고 방안이 환하게 밝아오자 여인은 밖으로 나가 이가 빠진 놋그릇에 물을 담아 들고 왔다. 상처가 심한 관계로 계속되는 출혈(出血)을 막아야겠다 생각한 여인은 손을 놀려 천인문의 상의를 벗겼다. "으윽." 정신을 놓고 있던 천인문이었건만 살에 붙어버린 혈의(血衣)를 때어내는 고통이 느껴졌던지 신음을 토했다. "이래선 안되겠는데." 고개를 절래 흔들던 여인은 무언가 떠오른 것인지 품속에서 소도(小刀) 한 자루 를 꺼냈다. 봉황이 그려진 검집 밑으로 풍운록(風雲錄)이란 글자가 아름답게 새겨 진 비수였다. 여인은 새하얀 검신을 뽐내는 비수를 들어 조심스레 옷을 잘라 나갔 다. 그리고는 물에 젖은 천을 들어 천인문의 몸을 닦아 내었다. 소지한 금창약(金瘡藥)을 상처에 뿌리고 깨끗한 천으로 상처를 묶고 나자 여인은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잘 된 건가? 잘 되겠지 뭐." 누가 들으면 무책임하다 들을 말을 서슴없이 내뱉은 여인은 천인문을 바닥에 엎 드려 놓은 채 핏물이 된 놋그릇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릇에 든 핏물을 숲으로 확 뿌린 여인은 손을 털고 놓아둔 금을 가지러 갔다. 왜 이런 비천한 짓을 해야 하는 거지? 뭐가 아쉬워서.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지워 지지 않았지만 그 답은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 상처에 대한 호기심 그것이 워낙 큰 것이다. 세면과 목욕을 제외하고 손에 물뭍일 경우라곤 없을 정도로 고귀하게 큰 여인답게 작은 수고에 심기가 불편해졌던 그녀였지만 바로 머릿속을 다잡으며 정리했다. 바람을 맞으며 놓여 있던 금을 들어 올리던 그녀의 눈에 무언가 검은 그림자하나 가 잡혔다. 목을 휘감고 있던 일묘도 소리를 들었는지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숲에서 나온 물체가 달빛에 비치자 그녀는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조금 전 사라졌던 흑풍이 다시 되돌아 온 것이다. 그래 주인을 버리고 도망갈 막되 먹은 녀석은 아닌 게야. 여인은 조심스레다가오 는 흑풍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흑풍은 이 장 앞까지 다가선 뒤 입에 물고 있던 무언가를 떨구더니 다시 뒤로 물러섰다. 뭐지? 궁금증이 인 그녀는 떨어진 물체를 들어 달빛에 비추었다. 그러자 그녀의 눈이 다시 커졌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현삼의 한 종류인 숙지황(熟地黃)이었 던 것이다. 보혈(補血)작용이 강한 숙지황은 근골을 돋우고 혈맥을 통하게 하는데 탁월한 효 능이 있는 걸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연유로 지금 천인문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특 효를 볼 수 있는 약이었다. '어, 어떻게 이 약초가 필요 한 걸 알고 가져온 거지?' 어안이 벙벙한 여인은 우두커니 서서 흑풍을 바라보고 있었다. 약초 공부라도 한 건가 하는 우습지도 않은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무리 뛰어난영수(靈獸) 라도 이 정도라면 영수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녀는 이런 저런 생각에 넋을 빼 놓고 서 있었고, 그런 시간이 아까웠는지 흑풍은 다시 한 번 긴 투레질로 그녀 를 깨웠다. 정신을 차린 여인은 다시 부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인은 금과 숙지황을 들고 서 묘옥을 향했고 그 뒤로 흑풍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렇냐? 그건 그렇고 왜 자꾸 물러서는 게냐? 내가 다가가는 게 싫은 거냐?" "싫긴요. 그런데 이걸 어째요. 제가 물러서는 게 아니라 흑풍이 녀석이 자꾸물러 서는 건데요." "흠! 싫은 게 아니라면 이 할애비 쪽으로 오너라." "가, 가고 싶지만 이 녀석이 말을 안 듣네요. 할아버지가 양해하세요." "흠 미물 녀석이 우리 조손 간의 대화를 막는다? 그럼 이 할애비가 해결하지." "하, 할아버지. 일단 마, 말로 해요." "말 따위는 필요 없다." 벼락치듯 떨어지는 강맹한 기운과 사방으로 비산(飛散)하는 흙먼지. "하, 할아버지. 왜 그러는 거에요?" '제, 제발 할아버지 갑자기 왜 그러시는 거에요. 무섭잖아요.' 앗 흑풍 지금 달려선 안 돼. 나 떨어진다구. 으악 하늘이 거꾸로 돈다. 구름이보 이고 나무가 보이고 저건 뭐지. 엄청난 빛무리가 쏘아져... 퍼퍽! "으아아아악!" 깊은 나락으로 빠져 있었던 천인문이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오일이 지난 늦은 오 전 무렵이었다. 연신 땀을 흘리며 손을 내젓던 천인문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몸 을 일으켰다. 꿈이었구나. 다행이야, 다행. 연신 다행이라 외치던 천인문은 흠뻑 젖은 이마를 닦기 위해 손을 들었다. 그러나 손이 이마에 닫기도 전에 찾아오는 극심한 고통이 있었다. "아악! 이게 뭐지?" 폐부를 찌르는 듯한 고통에 가쁜 숨을 몰아쉬는 천인문. 고통을 참기 위해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벌려 숨을 들이켰다. 어찌나 힘이 드는지 땀이 뚝뚝 떨어졌 다. 간신히 고통을 감내한 그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온 몸을 칭칭감다시 피한 천이 눈에 들어왔다. '그, 그럼 결국 꿈이 아니었다는 말이네.' 천인문의 눈에서 힘이 사라졌다. "깨어났네." "누, 누구?"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천인문은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환한 빛을 등지 고 선 한 여인이 방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래 이젠 좀 살 것 같애?" "무, 무슨 말..." 말을 하다 만 천인문의 입이 쫘악 벌어졌다. 숨이 막혔다.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못 볼 것을 본 탓이다. '서, 선녀다. 이, 이럴수가 그럼 난 죽었단 말인가? 그 빛에 맞아서?' 선녀를 본 기쁨과 죽었다는 슬픔이 교차하여 머릿속이 헝클어져 버린 천인문은 기이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여인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이, 이봐 정신 차려." 갑자기 정신에 이상이 온 것은 아닐까 심히 염려되기 시작한 여인은 천인문의 눈 앞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천인문의 눈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제가 죽은 건가요? 죽어서 하늘에 온 건가 봐요." 그리고는 귀여운 두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떨어졌다. 여인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 들어갔다. 여인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용모가 얼마 나 뛰어난지를. 뛰어나도 너무도 뛰어나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자기 집의 수 많은 시녀들부터 귀가 아프게 들어왔다. 그것 뿐이라면 말도 안 한다. 집을 찾아 오는 사람들 특히 남자들은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듣기 좋은 말도 정도가 있었 다. 한 번 두 번 들을 땐 기분도 좋았지만 몇 십번을 들으면 그저 그렇고 수 백 수 천을 듣게 되면 짜증나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그건 그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 다. 처음에는 그 말이 긴가민가 했던 그녀도 너무 자주 듣는 말에 자신이 아름다 운 사람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계속 같은 말이라니. 수없이 많은 사내들이 자신에게 청혼을 해 왔다. 가문의 후광도 있었겠지만 그보 다 자신의 용모가 더욱 큰 영향을 미쳤다. 자신을 보는 사내들마다 넋을 빼고바라 보았다. 침까지 흘리던 사내도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사내란 추잡하고 더러 운 동물이었다. 자신의 일묘보다 못한 동물들. 무수한 사내들로부터 추파를 받았 던 기억이 있던 여인으로선 좋은 기억이란 눈 씻고 봐도 없었다. 어린 아이라 다를 거라 생각했던 것이 와장창 깨어져 나간 느낌일까. 최고의바람 둥이나 생각해 볼 만한 능숙하고 숙련된 말투였다. 그런 말이 저런 어린 아이에게 나오다니. 그녀의 얼굴에 실망감과 함께 역시 너도 남자구나 하는 기색이 떠오르 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들려온 말에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 있었다. "우리 색시 남겨 두고 죽으면 안돼요. 선녀님 저 좀 다시 살려 주세요. 네?" 다 큰 사내가 그런 말을 했으면 놀린다 생각했을 법한 말.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렁그렁 매단 눈물을 보이며 처절하게 빌어대는 모습에서 전혀 거짓을 찾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제발 다시 좀 살려 달라구요." 멍하게 앉아 있던 여인은 다시 열심히 비는 천인문을 보자 흠칫 하며 정신을 차 릴 수 있었다. "아 잠깐 내가 정신이... 미안. 그건 그렇고 넌 죽은 건 아냐." "네? 죽은 게 아니라뇨?" "말 그대로야. 여긴 선계(仙界)도 아니고 지옥(地獄)도 아냐. 한 마디로 넌 살아 있다는 말이지." 차근차근 설명을 한 여인의 말을 듣자 천인문은 넋이 빠진 얼굴이 되어 버렸다. "다, 다행이다. 내, 내가 죽지 않았다니. 안 죽었...다...니." 그제야 안도감이 찾아 온 것인지 숨이 고르게 된 천인문은 방바닥으로 피식 쓰러 져 버렸다. 넘어지는 천인문을 가볍게 받은 그녀는 다시 조심스럽게 천인문을 눕 혔다. 천인문의 안색을 조심스레 살피던 그녀는 천을 들어 이마 가득 땀을 닦아내 었다. "색시? 열 셋 정도 되 보이는데 색시라니. 그럼 이 아이가 결혼을 했나?"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잠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입을 막긴 했지 만 손가락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모습은 마치...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든 것인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여인은 황급히 문을 열고방 을 나섰다. -64- 천하 제일 미녀라 부르리까?(3) 기절해 쓰러진 천인문이 다시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세 시 진(時辰)이 지날 무렵이었다. 잠(?)에서 깨어나 아름다운 여 인과 대면한 천인문은 얼마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와 친 해질 수 있었다. 배꼽 시계의 처절한 소리에 배고픔을 깨달 은 천인문이 화제를 돌렸다. "누난 그럼 뭘 먹고살았어요? 이 산중에서." "뭘 먹긴. 내가 준비해 둔 건량이나 육포. 또 일묘(日猫)가 잡아온 새 같은 것도 먹었지." "전혀 안 어울린다. 고상하고 우아한 누나가 그런 것만 먹 고 살았다곤 믿기 어려운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어대는 천인문에게 가벼운 징벌(懲罰) 로 알밤을 먹여준 여인은 무시하지 말라는 투로 대답했다. "이래 봬도 나도 무림인이야. 그런 것엔 신경 쓰지 않아." 머리에 알밤을 맞은 천인문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 다. "아야. 환자한테 이게 무슨 짓이에요."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지만 맞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 다. 올라가지 않는 두 손을 억지로 올리다보니 등이 당기는 것 때문이었다.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땀이 가득한 얼굴을 내미는 천인문 을 보자 여인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미안해. 내가 실수했구나." "됐어요. 그건 그렇고 난 환자라구요. 고기 같은 건 먹으면 안 되요. 누나가 죽 좀 해 줘요." "꼭 의원(醫員)처럼 말하네. 미안한 말인데 난 죽 같은 건 할 줄 몰라." "나 의원 맞아요. 그리고 할 줄 몰라도 해 봐요. 조금 있으 면 시집 갈 사람이 그런 것도 못하면 어떻게 해요. 지금 배 울 겸해서 한번 해보라구요." 그 말에 여인이 무슨 말이라도 할 듯 했지만 그녀의 말을 막 아버리기라도 할 듯 천인문의 뱃속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 왔다. "며칠동안 살펴서 겨우 살려 놨더니 이젠 죽까지 시키고. 하 녀도 아니고 이게 뭐야." 불평을 토로하긴 했지만 그녀는 더 이상 군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런 그녀의 뒤에서 화를 더욱 끓어오르게 하는 소 리가 들려왔다. "죽은 묽을수록 좋아요. 소금도 잊지 말구요." 천인문은 몸을 돌려 나가는 여인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 다. 여인의 이름은 조기혜(曹琦慧)라 했다. 기이할 정도로 슬 기롭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천인문이 볼 땐 슬기롭기는커녕 자신의 손바닥에서 노는 손오공(孫悟空)같다는 생각이 들 뿐 이었다. 조심스레 몸을 뉘운 천인문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죽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한편 밖으로 나온 조기혜는 한참을 골머리를 싸매야 했다. 요 리를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마땅한 재료도 없는 것이다. 고기는 안 된다 하니 풀뿌리로 할 수밖에 없나. 연신 머리를 싸 매고 궁리하던 그녀는 풀뿌리란 생각이 떠오르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승려들이 솔잎으로 연명을 한다는 말이 떠오른 것이다. '그래. 솔잎으로 푹 삶아 버리면 되겠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양 기쁨에 젖어 폴짝거리던 그녀는 가까 운 소나무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가볍게 손으로 소나무를 때렸다. 쿠웅 하는 전혀 가볍지 않은 소리가 울려 퍼지고 우수수 떨어지 는 잎. 파공성을 동반한 손바닥이 순식간에 두 주먹 가득 솔잎을 거머쥐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마음에 바로 부엌으로 간 그녀는 먼지가 그득한 솥에 솔잎을 넣었다. 물을 얼마만큼 부어야 하는 지 몰라 고민하던 그녀는, "묽으면 묽을수록 좋다고? 그냥 왕창 넣으면 되겠지?" 하는 혼잣말과 함께 솥에 물을 채웠다. 부싯돌로 불을 붙인 그 녀는 그제야 손을 털고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은 다시금 뾰루퉁해졌다. "묽으면 묽을수록 좋아요." 천인문의 말투를 흉내내던 그녀는 방안을 뚫어보기라도 한 듯 원독 서린 눈을 들어 벽 쪽을 바라 보았다. "내가 부엌대기도 아니고 이게 뭐야." 화가 치밀자 불만을 내뱉는 그녀였다. 중원에 들어올 때까지 만 해도 수많은 무공 고수들과의 결투나 생각했던 그녀였다. 목숨을 건 비무(比武)에서 당당히 이기고 찬란한 가문, 빙궁 (氷宮)의 명성을 전 중원에 알리겠다는 야망에 들끓고 있던 그녀였다. 비록 여기까지 오는 동안 자신의 미모를 노리던 이 들로 인해 조금 피곤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지금 같이 짜증 이 난적은 없었다. 한참동안 군시렁거리던 그녀는 물이 팔팔 끓는 소리가 나자 충분히 시간이 됐음을 알고는 솥을 열었다. 그리고는 나오는 탄성. "드디어 맛있는 솔잎...죽이 아니라 차가 됐네." 한참을 바닥에 엎드려 있던 천인문은 아려오는 배를 달래기 위해 침을 삼키고 있었다. 침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삼켜대던 천인문은 인상을 찌푸렸다. 밖에서 푸닥푸닥 하던 소리가 조금 후 부엌에서 군시렁거리는 소리로 바뀔 때까지 만 해도 만면에 승리의 미소만이 가득했었던 그였다. 그러나 또 다시 밖에서 푸닥거리는 소리가 들려 올 땐 서서히 기다리 기 짜증이 났다. 다시 부엌에서 소리가 들리자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렸지만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분명히 소리가 나는 걸로 보아 부엌에 있는 것 같긴 하다. 빨리 달라고 닦달이나 해볼까. 다시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한 천인문은 능글맞은 어 투를 위해 헛기침을 토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죽 만들러 간 사람, 어디 갔나?"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세 번째 빈정거림이 나가기 전 에 방문을 차다시피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어서 와 누나. 난 또 누나가 산을 내려간 줄 알았지." 빙긋이 미소를 짓는 천인문을 본 조기혜의 굳은 얼굴이 서서 히 풀렸다. 화라도 내야 할텐데 이게 뭐지? 자신의 마음을 자기도 알지 못하자 그녀는 내가 왜 이러나 하고 멍하니 방 입구에 서 있 었다. "누나 뭐 하고 있어? 내려놓고 이쪽으로 와서 앉아." "으응 그래." 조기혜는 손에 든 그릇을 내려놓고 앞으로 밀었다. "이게 뭐야?" 죽이라 들고 온 것을 본 천인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건 죽이 아니라 솔잎으로 만든 여물이었다. "아...하하하. 만든다고 수고 많았어 누나. 하지만 조금만 더 신경 썼으면 좋았을 걸. 칼로 송송 잘라서 넣고 끓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천인문은 자신이 알고 있는 방법을 천천히 설파했다. 그러나 조기혜는 그런 천인문의 마음을 알아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 었다. "칼이 어디 있다고 그래? 그리고 그 정도만 해도 어디야." 자기가 한 말이었지만 부끄럽기는 했었나 보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모습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살며시 돌렸다. 그런 모 습에 천인문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입 을 열었다. "칼이 왜 없어. 그럼 저기 검은 금(黑琴) 옆에 세워둔 건 몽 둥인가?" 그러자 조기혜는 천인문의 얼굴이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붉은 수실이 나비 모양으로 매달린 붉은 검 집에 든 봉황 모양의 손잡이를 가진 검이 보였다. "저건 검이지 부엌칼이 아냐. 넌 그것도 모르니?" 민망함을 없애려 한 말이었지만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검이든 부엌칼이든 자르고 베라고 있는 거 아냐? 쓰임새가 없는 것은 뒷간의 대변보다도 못한 거야." 누가 들어도 비웃음을 살만한 말이었건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대답을 못했을까? 그녀는 자신이 이상해져 간다 생각을 했다. 너무나도 당당하게 그리고 당연하다는 말 투로 말하는 천인문의 모습에서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인 가? '그럴 리가 없지. 내가 요즘 좀 피곤해서 그런 가보네.' 일주일 가량의 고생 때문에 잠을 못 잔 그녀는 그 이유를 피 로 탓으로 돌렸다.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를 놓아 두고 천인문은 눈앞의 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 먹어 말어?' 천인문은 연신 고민에 잠기기 시작했다. 먹기엔 너무나도 어 색하다. 그렇다고 포기하자니 배는 고프다. 결국 조기혜의 성 의를 생각해서라도 어쩔 수 없다 생각한-솔직히 배가 고픈 것 이 주된 이유였지만-천인문은 먹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곧 자 신의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쿨럭." 들어갔던 것이 다시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간신히 손으로 입 을 막은 천인문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금은 얼마나 넣은 거야?" "솔잎 넣은 것만큼. 왜 맛이 없어?" 으흐흐흑! 이래저래 눈물만 흘리는 천인문이었다. "색시가 해준 죽이 먹고 싶다." 혼잣말이지만 그녀가 못 들었을 리 없었다. 갑자기 그녀의 얼 굴이 시무룩해졌다. 비록 자신이 요리를 배운 적이 없다고는 하나 다른 여인과 비교되자 기분이 상한 탓이다. 천인문이 그 런 그녀의 변화를 읽자마자 바로 다른 말을 꺼내며 화제를 돌 렸다. 다행히 그녀도 쉽게 풀어지는 듯 했다. 주린 배를 움켜쥔 천인문은 일단 물 몇 잔을 마셔 잠시간의 시 간을 번 후 천천히 조기혜에게 자신만의 비장의 요리 수법을 전 수하기 시작했다. 물은 얼마, 솔잎은 얼마, 소금은 얼마. 이래저 래 아는 것을 모두 전수한 후 천인문은 흐르는 땀을 닦으며 자 리에 누웠다. 조금 후 다시 조기혜가 죽을 들고 왔다. 이번에는 생각보다 더욱 화려했다. "이게 뭐지? 이건 칡 같은데." "그거 검은 말이 뜯어 왔길래 그냥 넣은 거야." "흑풍이요?" 천인문은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 말 이름이 흑풍이야? 이름 좋네. 그건 그렇고 어떻게 말 이 그렇게 약초들을 잘 알지? 네가 쓰러져 있을 때 쓰인 약초 들 모두 흑풍이 따 캐온 거야. 넌 알고 있었니? 아니 알았다 면 그런 표정 지을 리 없겠네." 천인문도 모른다는 것을 표정에서 읽어버린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멍하니 앉아 있던 천인문이 갑자기 밝은 웃음을 지었다. "역시 훌륭한 의원 밑에 훌륭한 말이 나온다는 말이군. 하하 하. 으윽."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소리를 내뱉고는 웃음을 터트리던 천인 문은 다시 찾아오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얼굴은 찌푸려져 있을지언정 눈만은 기쁨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좀 가만있어. 이상한 표정 짓지 말고. 그건 그렇고 흑풍을 어떻게 손에 넣은 거야?" 그러자 천인문은 며칠 전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만났던 곳, 간신히 목에 건 줄에 끌려가던 모습. 그리 고 귀를 치료하고 친구가 된 장면.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기 분이 좋았던 것은 처음으로 흑풍의 등에 올라탔을 때였다. 간신히 친구가 된 후 다시 세운사(洗雲寺)쪽으로 방향을 잡 았던 천인문은 얼마 가지 못해 쓰러졌다. 다리의 힘이 쫙 풀 린 탓도 컸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왔던 곳을 찾을 수가 없었던 탓이 컸다. 어두운 밤, 돌로 된 바닥에 바람에 쓸려 흩어진 낙 엽들이 흔적을 완전히 씻어버렸다. '이거 어떻게 한다.' 풀썩 쓰러져 자신이 방향치임을 비관하던 천인문. 옆으로 흑풍이 지나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흑풍은 방향 을 알고 있었다. 계속 앞으로 걸어가던 흑풍은 천인문이 자 신의 뒤를 따르지 않고 있자 다시 되돌아 와 소매를 입으로 끌었다. "가자고? 어디로 가자는 말이야." 이미 온 몸에 힘이 쫙 빠진 천인문은 탈진한 표정으로 고 개를 저었다. 갈 곳이 없다. 아니 갈 곳은 있었지만 가는 길 을 모른다. 그것이 문제였다. 그것을 해결 할 수 있다면 이 렇게 죽치고 앉아 있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흑풍은 포기 할 줄 몰랐다. 웬 말이 고집은 그리도 센지 쉬지 않고 소매 끝을 물고 늘어졌다. "미안해. 너무 힘들어서 못 가겠어. 쉬었다 갈래." 그 말을 끝으로 천인문은 서서히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나 흑풍은 천인문이 땅에 눕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았 다. 소매를 잡고는 확 끌어 당겨 쓰러지지 않게 했다. "좀 그만 하라구. 너무 피곤하단 말이야." 천인문은 힘들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짜증을 부리던 천인문을 보고 있던 흑풍이 고개를 돌려 등을 가리켰다. 그 모습을 찬찬히 보고 있던 천인문이 기 이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무슨 생각이라도 들었는지 조심 스레 물었다. "혹시 네 등에 타라는 말이야?" 긴 흑풍의 투레질과 끄덕임. 그제야 천인문의 얼굴에 화 색이 돌았다. "정말 타도 되는 거야?"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천인문이 얼굴 을 들이밀며 물었다. 너무도 무서운 얼굴로 다가섰는지 흑풍은 살짝 물러섰지만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후다닥 엉덩이를 털어 낸 뒤 흑풍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풀쩍 뛰어 올랐다. 처음으로 사람을 태운 흑풍. 요란한 소리를 내지르며 앞으로 내닫는다. "으악. 너무 빨라. 좀 천천히 가자구."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숲의 정경(情景). 긴장으로 두 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천인문은 몸을 바짝 낮추어 낙마(落馬)에 대비했다. 끌려갈 땐 몰랐지만 말 위에 타 고 보니 이건 빨라도 너무 빨랐다. 언젠가 옥조영의 등에 업혀 있었을 때보다도 더욱 빠르다. "좀 천천히 가자구. 이러다 떨어지겠어." 처음으로 내딛는 질주인양 쉼 없이 내닫던 흑풍도 그제 야 서서히 속도를 늦추었다. 그러자 다시 천인문의 창백 했던 안색이 되돌아왔다. "너 엄청나게 빠르구나. 그래 네 이름을 흑풍(黑風)이라 하자. 검은 바람. 흑풍(黑風) 그게 내 이름이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천인문이 갑자기 떠오른 흑풍의 이 름을 크게 외치자 흑풍도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크게 울음 을 터트렸다. "이렇게 된 거에요." 천인문은 자신이 떠올렸던 생각들을 낱낱이 이야기했고 듣 고 있던 조기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그건 그렇고 네 등에 난 상처는 뭐야? 누가 그 랬어? 언제? 어디서?" 한가지 의문이 해결된 그녀는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러 나 이번 답은 쉽게 들려오지 않았다. 천인문의 얼굴에 수심 이 짙어졌기 때문에 다시 닦달하려 한 그녀의 입이 멈칫했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아픈 기억을 건드렸다 생각했는지 그녀는 슬며시 천인문에 게서 고개를 돌렸다. "아뇨. 그렇게 나쁜 기억은 아네요. 말할게요." 천인문은 또 다시 과거의 기억을 머릿속으로 되살려 나가 기 시작했다. -65- 천하 제일 미녀라 부르리까?(4) "강한 빛이 번쩍 하고 날아왔다?" "뭐가 잘못 됐어요? 그냥 내가 기억나는 것 그대 로 말한 것뿐인데." 자신이 기억하는 것을 하나하나 이야기하던 천인 문을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조기혜는 머 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눌렀다. 절대 믿을 수 없 는 이야기다. 검기를 날린다는 말은 들어 봤어도 검강을 날린다? "확실히 검기(劒氣)가 맞는 것 같아. 좀 색다른 검기." 천인문의 등에 난 상처를 검기로 단정한 조기혜 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검기로 보기엔 너무 큰 상처이긴 하지만 검강을 날린다는 것은 자신의 지 식으로는 결코 이해 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 다. 검강을 뽑아 올린다는 것만 해도 절정(絶頂) 을 넘어 선 경지다. 그런데 검강을 날려? 자신의 부친도 해 내지 못한 일을 다른 사람이 해내었다 믿기 어려웠던 조기혜는 조금의 가능성마저도 거 부한다는 듯 고개를 연신 저어댔다. 그렇게 자신 만의 사색(思索)에 빠져 있던 그녀의 귀로 천인 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기(劒氣)가 뭐에요?" 혼잣말을 들었는지 천인문이 궁금하다는 표정으 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조기혜의 얼굴에 어 이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넌 검기도 모르니? 그 할아버지가 안 가르쳐 주 던?" "그런 게 있다고 한 번도 들은 적 없어요." 모른다는 천인문의 말에 방 한 구석에 세워진 검 을 들고 온 그녀는 천인문의 앞에서 검을 뽑아 들 었다. "잘 봐." 말을 끝내자 그녀는 숨을 한번 내 쉬더니 검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후 검이 서서히 광채를 내뿜기 시작했다. 하얀빛이 서서히 검을 감싸며 위쪽으로 흰 빛이 솟구쳐 올랐다. "멋지다 정말." 천인문은 더할 수 없는 아름다운 모습을 본 것처 럼 눈이 커졌다. 다물어지지 않은 입으로 긴 탄성 을 토하던 그는 조심스레 검기를 향해 손을 내밀 었다. 그러자 조기혜의 신형이 갑자기 부르르 떨 렸다. "손대면 위험해." 그녀의 말이 들리기가 무섭게 광채를 뿌리던 검 에서 빛이 사그러들었다. 입을 벌리자 바로 기가 흩어져 버린 탓이다.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검기에 손을 대 면 잘려 버린다고. 그건 그렇고 내 실력이 미천해 서 이 정도 밖에 안 되는구나. 하지만 내 할아버 지한테 말해서 배우도록 해. 엄청난 고수이신 것 같은데 배워서 나쁠 건 없지." 그러자 천인문은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도 말라 는 듯 고개를 돌렸다. "누나도 한 번 생각을 해보라고요. 날 이 꼴로 만 든 영감탱이한테 조른다고 가르쳐 줄 것 같아요? 패서 죽이려 들지 않으면 다행이지." 사탕을 뺏긴 아이가 삐진 모습이 이럴까. 천인문 의 모습을 보던 그녀의 얼굴에 아름다운 웃음 한 조각이 살짝 걸렸다. "배우기 싫으면 말고. 그거야 네가 결정할 문제 지. 그건 그렇고 이제 쉬도록 해. 너도 빨리 낫 고 싶지?" 자신이 방에 있으면 휴식을 못 취할 거라 생각 한 것인지 그녀는 천인문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밖 으로 나갔다. 천인문은 그녀가 몸을 돌려 나가는 모습을 보다가 다시 자리에 몸을 엎드렸다. 밖으로 나온 조기혜는 초가의 뒤쪽으로 난 비탈 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얼마 걷지 않아 그녀의 눈에 달빛에 반짝이는 초원이 들어왔다. 산 정상 에 있는 그리 넓지 않은 들판이었다. 폐부(肺腑)로 깊이 숨을 들이 쉰 그녀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들판을 배회했다. '역시 아버지 말씀이 맞았어. 중원에는 알려지 지 않은 고수가 무수하다더니 이런 곳에서 만나 게 될 줄은 몰랐네.' 많은 고수들과의 비무를 해 보겠다는 자신의 목 적이 허무해지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든 그녀는 빙 긋 웃음을 머금었다. 오랜 기간동안 혈투(血鬪) 가 없었던 중원. 그만큼 많은 인재들이 무공을 갈고 닦았을 것이다. 자신의 무공 수위를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펼쳐진 듯 했다. 비록 승리하든 패하든 간에 이 기회는 그만큼 자신에 게 도움이 될 것이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든 것 인지 다시 얼굴을 굳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설령(雪玲) 게 있느냐?" 목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백삼을 걸친 사람 하나가 그녀의 앞에 솟구치듯 나타났다. 등에 한 자루 검을 맨 형색에 사내들이 입는 경장을 입고 있었지만 그 몸의 굴곡이 완연한 여인의 그것이다. 얼굴을 가린 면포(面布)위로 드러난 눈으로 보아 상당히 아름다운 여인인 듯 하다. "부르셨습니까?" 여인의 그것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싸늘한 음색이 울려 퍼졌다. "넌 지금부터 그 옥조영이란 사람의 행적을 추 적하도록 해라. 듣기론 악양(岳陽)에서 무한(無限) 으로 가기 전에 세운사란 절이 있다는데 거기서 부터 시작하면 될 거다." "말살(抹殺)이옵니까?" 그녀의 말에 조기혜는 코웃음을 쳤다. "네가 우습게 여길 상대가 아니다. 어쩌면 아 버지보다 더 강한 상대일지 모른다. 그냥 어디 로 가는 지만 파악해라." 설령이란 여인은 가볍게 몸을 흠칫했다. 조기 혜의 아버지가 누구던가? 빙궁의 현 주인이며 자신을 가르친 사부가 아닌가? 빙궁 최고의 무 공인 설백신공(雪白神功)을 무려 팔 성이나 익 힌 초 고수. 그런 그보다 더욱 뛰어난 고수라니. 설령은 믿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명을 받들었다. "존명!" 허리를 가볍게 숙인 설령은 바로 자리에서 꺼 지듯 사라졌다. 그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던 조 기혜는 다시 한 사람을 불렀다. "빙령(氷玲)!" 설령과 똑같은 복장의 여인이 설령이 사라진 곳에 나타났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허 리를 숙였다 일으켰다. "넌 지금부터 수십 장 밖에서 날 보호해라. 그 아이에게 들켜선 안 된다. 특별히 부르지 않으면 나올 필요 없다." 빙령이란 여인은 대답도 없이 고개를 숙여 그 명을 접수했음을 알렸다. "설령에게 연락이 오는 것은 네가 받아 두도 록." 빙령은 말을 끝맺기가 무섭게 허리를 숙인 후 환영을 남기며 사라져갔다. 모든 일이 끝났는지 조기혜는 하늘에 뜬 달을 멍하게 바라 보다 몸 을 돌려 산을 내려갔다. 한낮의 푸른 들판. 푸른 들판 위를 노니는 바 람에 천지(天地)를 뒤덮는 풀잎의 융단(絨緞) 이 사방으로 하늘거렸다. 각양각색의 나비들이 사방에서 춤을 추고 그에 맞춰 산새들은 저마 다의 목소리로 산을 꾸몄다. 저 멀리 우뚝 솟 은 소나무 한 그루 밑에서 흑풍은 조용히 풀을 뜯었고 그 위에 올라탄 일묘는 고개를 끄덕이 며 졸며 따스한 햇살을 만끽한다. 이런 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그곳을 정겨운 눈으로 바라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조기혜였 다. 조그만 나무 밑 그늘을 찾아 자리를 붙이 고 앉은 그녀는 푸근한 미소를 띈 채 초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십 수년간을 빙궁(氷宮)에서 살아왔던 그녀에 게 있어 이곳은 지상 낙원이었다. 극한 자연과 의 대립, 이것이야말로 그곳을 한 마디로 표현 하는 말이다. 그곳에는 목숨을 건 투쟁만이 있 을 뿐, 자연의 아름다움이란 찾을 수 없다. 사 시사철 몰아치는 북풍한설(北風寒雪), 어디를 봐도 눈 덮인 모습 그것 하나 뿐이었다. 가끔씩 하늘을 수놓는 극광(極光)과 혹은 아무도 밟지 않은 설원(雪原)이 그녀의 눈을 풍족하게 하였 지만 이런 아름다움은 본 기억이 없던 그녀로선 탄성을 자아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항시 중원 으로 진출하려는 부친의 말이 이해되는 순간이 었다. 그러나 어디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녀의 기분은 확 구겨지고 말았다. "누나~ 배고프다." 크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귀에 여지없이 잡히 는 목소리. 옥용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그녀는 긴 한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쉬운 마음을 접으며 그녀는 묘옥으로 내려갔 다. 그녀가 있던 산정상의 들판에서 묘옥까지는 이십 여장도 되지 않는 곳이었다. 급하지 않은 걸음이었지만 순식간에 초가에 도착한 그녀는 허름하고 낡은 방문을 조심스레 당겼다. 귀에 거슬리는 무거운 소음과 함께 문이 열리고 그녀 는 안으로 발을 넣었다. "잘 왔어 누나. 나 배고파." 더 없이 처량한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은 천인 문이었다. 한 소리 할 생각으로 내려왔던 그녀 는 그런 그의 모습에 말을 할 수 없었다. 하지 만 이렇게만 있으면 힘드는 것은 자기뿐이다. 결국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자신 을 보고 있는 천인문에게 한 말을 건넸다. "너도 이제 슬슬 움직일 수 있지 않니? 너도 조금씩 움직이도록 해 봐." 무려 이십일이다. 그 동안 온갖 수발을 다 들 어야 했던 조기혜로선 견디기 어려운 기간이었 다. 무공도 제대로 펼쳐보지 못했고, 자신의 사 생활도 망가져 버렸다. 그러나 화를 낼 순 없었 다. 언제나 화를 내려하면 들리는 것은 '에이 누나 같은 미녀가' 나 '우리 색시는 말이야' 였 다. 항상 조숙하고 자중하는 모습만을 강요(?) 받은 그녀로선 조심스러워 질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지만 누나. 난 의원이야. 내 몸 상태는 내가 잘 안다고. 지금 내가 입은 상처는 견갑 골(肩胛骨)과 등의 중앙을 잇는 근육들이라구. 함부로 움직이면 팔도 못 드는 병신이 되 버려. 한 달은 꼼짝 말아야 돼." 그 말에 속된 말로 뚜껑 열리는 조기혜였다. 화장실도 혼자서 해결하는 녀석이 뭐 병신이 된다? 그 동안 얼굴 씻기는 거며 밥도 입까지 가져다 주는 것도 참았다. 그런데 뭐라? 움직 이면 안 돼? 그녀의 얼굴은 서서히 차가워져갔다. 꽉 다 문 입과 턱에 근육이 바짝 일어섰다. 그러자 그 반응을 바로 알아차린 천인문이 한 마디 던졌다. "누나야. 얼굴에 힘 주면 얼굴형 망가진다. 누나 같은 미녀가 얼굴이 사각이면 보기 싫 다." 얌체 같은 말투지만 어찌나 처량한 모습으 로 말을 하는지 조기혜는 다시 안색을 풀 수 밖에 없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랴 싶어 휴 하는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천인문은 그녀가 나가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 다. 이미 조기혜의 성격이나 특성 등을 파악 한 것이다. 삼 주 동안의 대화로 천인문은 그녀가 남성 혐오증과 모성 본능이 강한 여인임을 알아차 렸다. 남성혐오증이 외부로 드러난 것이라면 모성 본능은 내부에 잠재되어 있었다. 이런 여인에겐 남성으로 다가가면 좋은 반응은 얻 기 어렵다. 이런 여인에겐 아주 어린 모습을 보여 남성으로서의 느낌을 주는 대신 모성 본 능을 자극하는 편이 좋은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그녀는 천인문의 밥이었다. 약한 모습, 처량한 모습 등등 모 든 방법을 동원한 천인문 앞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백기(白旗)를 들 수밖에 없었다. 가끔 씩 여인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존심을 건 들이기도 했고, 색시 이야기도 꺼내 비교를 하 기도 했다. 너무 자주 하면 반발이 생길 수 있으므로 가끔씩 쓰긴 하지만 최고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슬픈 표 정만 지으면 만사형통(萬事亨通)이었다. 이미 그녀에 관해 책 한 권을 써 낼 수 있을 정도로 알아차린 그였기에 이렇게 손쉽게 그녀 를 조종(?)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결코 알려져 선 안 된다. 안 그러면 자신에게 호시절(好時 節)은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혼자서 킥킥거리며 기쁨을 만끽하는 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분명 상처가 깊긴 했 지만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천인문이다. 거기다 삼 주가 넘 는 기간동안 거의 움직이지 않다 보니 좀이 쑤셔왔다. 그런 그의 귓가에 쉬쉭 하는 파공 성(破空聲)을 동반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만한 소리에 천인문은 조심스레 귀를 기울였다. 이건 분명 무공을 펼칠 때 나는 소리였다. 서서히 궁금한 느낌 이 든 천인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등에서 밀려드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가볍게 문을 밀고 나간 천인문의 눈으로 무 공을 펼치는 조기혜가 들어왔다. 그것은 검무 (劍舞)였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봉황검에서 반짝이는 빛이 연신 뿜어져 나오고 바람에 팔랑이듯 가볍게 움직이는 조기혜. 너무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천인문을 감탄시킨 것은 그 무엇보 다도 빙그레 웃는 얼굴로 검무에 몰두한 조 기혜의 모습이었다. '정말 아름다워. 어쩜 저렇게 아름다울 수 가 있지? 우리 색시보다 더 예쁜 여자가 있 으리라곤 전혀 생각도 못했는데.' 그렇게 천인문은 정신 없이 자신만의 생각 에 빠져 들었다. 얼마동안 검무를 추던 조기 혜가 숨을 내쉬며 검을 거두었다. 몸을 돌 리며 땀을 닦던 그녀가 밖에 나와서 멍하게 앉아 있는 천인문을 보자 그의 옆으로 걸어 왔다. "뭘 봤기에 이렇게 멍하니 있는 거야?" 그러자 천인문의 정신이 다시 돌아왔는지 그 녀를 보며 빙긋이 웃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걸 봤어." 그러자 조기혜의 얼굴이 다시 삭막해졌다. "갑자기 또 왜 얼굴을 굳히고 그래? 혹...시 제 일 아름다운 게 누나라고 착각하는 거 아냐? 난 그런 말 한 적은 없는데." 그 말에 차가웠던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 어졌다. "너하고 말 안 해." 그녀는 화가 났는지 몸을 확 돌리며 앞으로 걸어 갔다. 천인문은 그제야 화들짝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나 미안미안. 내가 잘못 했어." 그러자 조기혜는 다시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네가 뭘 잘못 했는데?" "누나 놀린 거 내가 잘못 했어. 사과할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말하 는 모습에 그녀는 붉힌 낯을 가라앉혔다. "너 함부로 사람 놀리고 그러지 마. 다음부터 그 러면 나도 가만 안 있을 거야." 천인문도 그 말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다음부턴 조심할게. 하지만 누나도 고 칠 게 있어." "뭔데?" "누나는 무조건 남자가 예쁜 걸 칭찬하면 화부터 내는 모양인데 그런 거 고쳐. 사람은 진심으로 이 야기하는데 왜 화를 내는 거야? 타인의 진심을 받 아줄 줄 아는 배려가 누나한테 필요해." 천인문의 조목조목 따지는 말에 조기혜도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알았어. 하지만 잘 안 되는 걸. 어쨌든 고 치도록 노력해 볼게." "잘 생각했어." 천인문은 그제야 빙긋이 웃음을 머금었다. 갑자 기 무슨 생각이 난 것인지 조기혜는 천인문의 옆 에 자리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 남자가 돼서 함부로 다른 여자 얼굴 을 평하면 안 되는 거 아니? 특히 아내가 있는 사 람은 더욱 말이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넌 맨날 색시 자랑만 하잖아. 그런데 왜 내 미 모를 칭찬하고 그래? 너 혹시 호색한이니?" 그제야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의도를 파 악한 천인문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내가 호색한이냐구? 솔직히 남자 치 고 예쁜 여자 싫어하는 사람 없지. 나도 인정해. 하지만 나한텐 우리 색시 밖에 없어." 너무도 당연한 표정으로 말하는 천인문이 이상 한지 조기혜는 까탈스럽게 파고들었다. "그럼 왜 넌 자꾸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사람은 사실은 사실 그대로 인정할 줄 알아야 돼. 분명히 누나는 예뻐. 그 누구보다도. 우리 색 시도 예쁘긴 하지만 사실 누나한테는 상대가 안 돼.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난 우리 색 시를 그 누구보다 사랑하거든. 누나가 아무리 예 쁘다 해도 내가 사랑하는 건 우리 색시지 누나가 아냐." 그러자 조기혜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낮은 한숨 소리와 함께 숨을 몰아 쉬었다. 그러나 다시 활달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너 사랑이 뭔지나 알고 말하는 거야?" "몰라. 그냥 내가 아는 건 안 보면 보고 싶고, 지켜주고 싶고, 안아주고 싶은 거야." "그건 좋아하기만 해도 생기는 거야." "좋아하든 사랑하든 상관없어. 나에겐 색시가 제 일 소중하다는 거 그게 제일 중요한 거야." "그래? 그러면 다행이다." 조기혜는 말을 마치자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 을 쳐다보았다. 하얀 구름이 하늘을 뒤덮으며 떠 다니고 있었다. 연신 감흥에 젖어 있던 그녀가 고 개를 내리며 입을 열었다. "그만 들어가자. 나온지 제법 됬잖아. 너도 들어 가서 빨리 쉬어. 그래야 빨리 낫지." "알았어. 들어갈게."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선 천인문이 다시 방안 으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조기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천인문을 따라 방으로 들어 갔다. -66- 시작되는 음모(陰謀) (1) 건문제의 복위군(復位軍) 군사를 맡고 있는 방 효겸은 담대인이 내어준 상방(上房)에서 서찰(書札) 을 읽고 있었다. 연신 편지를 읽어 가던 그의 눈 에서 광채가 일기 시작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소 식이 온 것이다. 편지를 와락 움켜쥐며 자리에서 일어선 그의 얼 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내심이야 하늘이 떠나가 라 웃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자신이 모 르는 간세(奸細)가 자신을 지켜 볼 수도 있는 것 이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 조심해서 나쁠 것은 전혀 없다. '드디어 복수(復讐)의 길에 한 걸음 다가섰구나. 기다려라 연왕(燕王). 반드시 네 놈의 목에 칼을 꽂아 주겠다.' 불끈 말아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나 그 것도 잠시. 방효겸의 눈에서 공허한 빛이 떠올랐 다. 형이었던 방효유(方孝孺)가 떠오른 것이다. '형님! 군자(君子)의 복수는 십 년도 늦지 않다 고 했던가요. 우습게도 내년이 정확히 십 년이 되 는 해이군요. 형님의 한을 풀어 드릴 날이 얼마 남 지 않았습니다.' 그의 분노가 커져감에 따라 그의 눈은 더욱더 이 글거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가. 방효 유는 즉위의 조(詔)를 거부하여 목이 달아났다. 연 좌(緣坐)되어 죽은 사람만도 팔 백이 넘었다. 잠을 잘 때마다 꿈속에서 가족과 친우들이 울부짖었고, 십 년을 하루같이 피눈물을 되 삼켰다. 어느새 그 의 두 눈이 축축이 젖어 들고 있었다. 울어선 안 된 다 다짐하고 또 다짐했건만 한 번 울음이 북받히자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방대인. 담성운(潭星雲)이오." 소리 없이 울고 있던 방효겸이 흠칫 놀라며 얼굴 을 닦았다. 그리고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들어오십시오. 담대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방문이 열리고 담성운이 안으로 들었다. 느긋하게 걸어와 방효겸의 맞은 편 에 자리를 잡던 그의 눈이 살짝 치켜 올랐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게요?" 그러자 방효겸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사레를 쳤다. "아닙니다. 눈에 무엇이 들어갔는지 좀 따가울 뿐 입니다." "아 그렇소? 그런데 어쩐 일로 날 보자고 하셨소?" 담대인은 그저 그런 듯 화제를 바꾸었다. 다 알고 있 는 사실이었기에 더 이상 캐묻기가 뭐했던 것이다. 그 런 사실을 알고 있기는 방효겸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조용히 넘어가는 담대인에게 감사하다 생각하며 방효 겸은 말문을 열었다. "드디어 연락이 왔습니다." "그, 그게 사실이오?" 사실을 확인하듯 물어오는 담대인의 격동 어린 목소 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너무 목소리가 크다 싶었 는지 주위를 연신 둘러본다. 그러나 여기가 자신의 저 택임을 깨달은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허 나 그 소리도 방효겸이 귀를 기울여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줄어 있었다. "계속 하시오." "별대가 남해에서 출발한지 삼 주가 흘렀습니다. 이 제 곧 복주(福州)에 다다를 겁니다. 원래 늦어 질 듯 하더니 신풍(信風)이 다시 일었다는군요." "계획은 제대로 세워져 있는 게요?" "아시다시피 복위군(復位軍)은 십 년 전부터 준비를 해 왔습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방효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담대인은 그런 그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듯 혀 를 입술로 적셨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낸 그가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오?" 담대인을 보고 있던 방효겸이 빙긋 웃음을 지었다. "불안하신 모양이군요. 뭐 제가 아직 한 번도 말씀 드리지 않았으니." "아니오. 그런 작전이야 방대인이 잘 알아서 하지 않 겠소. 나야 군자금이나 열심히 대면되는 거지." 담대인은 필요 없다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방효 겸은 담담히 웃고 있을 뿐이었다. "아닙니다. 지금까지 말씀 못 드린 제가 죄송하지요." 머리를 숙여 사죄를 한 방효겸은 방 한쪽 구석에 놓인 지도를 들고 와 탁자 위에 펼쳤다. "보시지요. 그들 은 지금 이렇게 남명해(南明海)를 따라 올라 오고 있습 니다. 여기가 그들이 처음으로 쉴 향항(香港), 그리고 여기가 두 번째 휴식처인 복주(福州)이지요. 아마 향항 에선 잠시 보급만 하고 여기 복주에선 이틀 정도 쉴 겁 니다. 그 후 이렇게." 방효겸은 손으로 지도 위에 선을 그었다. "주산군도(舟山群島)를 거쳐 소주(蘇州)를 거쳐가겠지 요." "여기서 치겠다는 말이오?" 화들짝 놀라며 묻는 담대인. "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여기서 이틀을 쉰 그 들은 이렇게 장강(長江)을 따라 양주(揚州)에 도착합니 다." "배의 크기가 물경 오십 여장에 달한다 들었소. 그런 큰배가 장강(長江)으로 들 수 있겠소?" "대인. 지금은 여름이옵니다. 겨울이라면 그 큰배가 드나들 수 없겠지만 여름인 지금은 충분히 가능하오이 다." 궁금증이 풀렸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담대인이 다 시 의문점이 생겼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왜 해적들과는 연락을 끊어 버린 게요? 그들 의 손을 빌어 약탈하는 것이 더욱 안전하지 않겠소?" 방효겸은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궁금하신 게 많으신 모양입니다. 제가 그들과 연락을 취했던 건 그들의 손을 빌겠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 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한 번 손에 들어 온 것은 결코 놓지 않는 승냥이 같은 자들이올시다. 그런데 저희들이 도와 주었다고 반을 잘라 주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일 이지요." "그럼 왜 연락을 취했던 것이오?" "대인! 제가 그들에게 연락을 주었던 것은 정화(鄭和) 의 군단(軍團)을 치라는 뜻으로 연락을 한 것입니다. 대 인께서 한번 해적이라 생각을 해 보십시오. 호위함(護衛 艦)을 포함한 배가 스무 척, 병사가 오 천(千)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황금 수 백 만냥이 넘는 물건이 있습 니다. 대인께서 해적이라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질문을 받은 담대인이 눈을 연신 굴리기 시작했다. "내가 만약 해적이라면 목숨을 걸고라도 한 번 덤벼 보겠소이다. 성공한다면 평생을 놀고 먹을 양이오. 목 숨 걸고 해 볼만하지 않겠소이까?"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하자 방효겸은 그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분명 해 볼만한 일이지요. 하지만 성공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이번에는 어려운 질문이었는지 담대인의 눈살이 찌푸 려졌다. 고개를 숙이고 고민에 잠겨 있던 담대인이 결 론을 내렸는지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인원에다 우리 측 군사도 동원한다면 가능하 지 않겠소?" "해적단이 가진 배는 첨저형(尖底形)이지요. 배 밑바 닥이 뾰족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저희 측의 배는 강 에서나 놀 수 있는 평저형(平底形)으로 이런 배는 바 다에 나가면 단숨에 물고기 밥이 될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담대인의 이맛살이 살짝 찌푸려졌 다. "그럼 우리 측 배는 쓸모가 없다는 뜻이 아니오. 그 럼 쓸 데 없이 왜 만든 거요?" 그러자 방효겸은 빙긋이 웃었다. "다 말씀드릴 테니 진정하시지요. 정화(鄭和)의 인원 은 오 천이지만 해적단은 천이 넘습니다. 배는 스무 척 대 열 두 척입니다. 거기다 정화 측에는 함포(艦砲) 까지 있습니다. 이 정도라면 분명 해적들이 열세란 것 을 그들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군대에 대해 모르는 내가 봐도 그렇구려." "분명 이 정도라면 해적들이 아무리 욕심이 많아도 쉽 게 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제가 손을 썼습니다. 그들이 덤비지 않을 수 없는 계책 말입니다." 방효겸의 눈에서 빛이 났다. "어떤...?" "해적들로서는 부족한 인원으론 덤비지 않습니다. 계 란으로 바위를 치는 거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 문이죠. 하지만 만약에 보물을 실은 배만 공략할 수 있 다면?" 자신의 말을 음미하기라도 하는 양 방효겸은 말을 끊 으며 숨을 돌렸다. 입꼬리를 말아 올린 걸로 보아 쾌감 을 느끼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그것은 방효겸의 경우 에만 해당되었을 뿐 담대인의 입장에선 애간장을 태우 는 일밖에 되지 않았다. "답답하구려. 어서 빨리 좀 말해 보시오." 다급한 어조로 묻자 방효겸은 다시 미소를 짓더니 입 을 열었다. "배에 밀정들을 심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해적들에게 연락을 주었습니다. 우리 측 밀정이 보물이 실린 배에 표시를 해 두겠다. 그러니 너희들은 그 배만 낚아채면 되는 거다 하고 말입니다." 방효겸의 눈에서 광채가 나기 시작했다. 안달복달하 는 담대인이 침을 삼키며 물었다. "어, 어떤 방법으로 그 배만 잡겠다는 거요." 방효겸은 그 질문을 듣지 못했는지 눈만 반짝거리며 지도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세워 지 도의 한 지점을 내리 찍었다. "향항(香港) 앞 바다 만산군도(万山群島) 바로 여기. 여기서 배를 침몰시킬 겁니다." 더 이상 빛날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방효겸. 자신 을 바라보는 방효겸의 눈을 본 담대인은 갑자기 오싹 한 느낌이 들었다. "그, 그럼 그 밀정은?" "죽을 겁니다. 그의 임무는 빈배에 표시를 하는 것 입니다. 만약 해적들이 직접 배에 구멍을 내지 못하 면 직접 침몰시키란 명까지 받아놓은 상태입니다. 그 런 그가 살 가능성은 희박하지요." "수 천 명이 죽겠군요." 담대인은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 내며 물었다. 그러나 방효겸은 상관하지 않는다는 말투로 싸늘하게 대답했다. "대인! 큰 일에는 자고로 많은 피를 필요로 하는 법 입니다. 이미 거사(巨事)는 시작되었습니다. 마음을 굳게 드십시오." 다짐을 받으려는 듯 강압적인 어조로 말하는 방효겸 의 어투에 담대인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사 실 담대인은 상인이지 군인은 아니었다. 건문제에게 무한의 충성을 바치는 그였지만 피를 보는 일을 좋아 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무고한 백 성들로 이루어진 병사들이든 해적이든 말이다. 그러나 그도 알고 있었다. 피를 흘리지 않고선 그들이 도모하 는 일을 이루어낼 수 없음을. '미안하게 되었네. 내 죽은 뒤 지옥에 가거든 그대들 앞에서 사과하겠네.' 씁쓸한 표정을 짓던 담대인은 다시 말문을 여는 방효 겸의 손을 따라 눈을 돌렸다. "해적들이 여기서 배를 침몰시키면 정화의 군단에게 공격을 받을 것입니다. 두 개의 대 부대가 부딪히면 그 결과는 뻔합니다. 해적들은 몰살. 정화의 군대도 상 당한 피해를 받겠지요." 그러자 담대인은 다시 궁금한 게 생겼는지 질문을 던 져왔다. "만약 해적들이 여기 해남도(海南島)에서 나오지 않 는 경우는 어떻게 하겠소?" "나오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만약 정화의 선박(船舶) 이 종주해협(琮州海峽)을 지난다면 해적들로선 숨을 곳 도 많고 해서 나오지 않고도 공격과 방어가 가능합니다 만 정화의 군단은 이렇~게 남명해(南明海)를 거쳐 들어 옵니다. 표식이 보이려야 보일 거리가 아니지요. 그들 이 그 표식을 보려면 만산군도(万山群島) 앞까지 나와 서 기다려야 합니다." "해적들이 몰살하려면 그들이 도망가면 안될 텐데. 스 무 척으로 포위를 할 수도 없고... 도망치지 못하도록 할 계략이라도 있소?" "포위 따윈 필요 없습니다. 십 중 십 몰살하는 필살의 계략이 있지요." 방효겸은 '흐흐흐' 하는 낮은 웃음을 토했다. 워낙 싸 늘한 웃음소리에 담대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웃음을 멈춘 방효겸이 다시 지도로 눈을 돌렸다. "아까 하다 만 설명을 계속 드리죠. 여기 양주(楊洲)에 서 그들은 도형강선(櫂型江船)으로 바꾸어 탈 것입니다. 아마도 몇 몇의 동물들과 큰 물건들은 다 남경(南京)으 로 가져가겠지만 금, 은, 보화(寶貨)는 연왕부(燕王府) 로 올라 갈 겁니다. 운하(運河)를 따라 초주(楚州), 제 령(濟寧)을 거쳐 양곡(陽谷)에서 내릴 것입니다. 거기서 부터는 도보로 운송하겠지요." "그럼 우리는 그 위쪽에서 덮칠 것이오?" 그러자 방효겸은 불가능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거긴 연왕부와 가까워 병사가 미리 대기하고 있을 겁 니다. 그 전에 쳐야 합니다. 바로 여기 운하(運河)를 지날 무렵에 말입니다." 그러자 담대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 왔다. "오! 그래서 배가 필요한 거였구려." 스스로 배의 쓰임새를 알아차린 담대인인지라 아주 큰 일을 해냈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웃음을 보였 다. 그러나 곧 무슨 생각이 떠오른 것인지 시무룩해졌 다. "하지만 군사가 상당히 많아야 할텐데. 우리측의 인 원만으론 거의 불가능 할 듯 싶소만." 방효겸은 그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때문에 무림맹(武林盟)과 무황성(武皇城)이 필 요한 것이지요. 한 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다시 미소를 머금으며 던지는 질문에 담대인은 그만 손사레를 쳤다. "아니오. 지금까지 들은 것만 해도 머리에서 쥐가 날 지경이오. 일단 내가 할 일만 열심히 하려오. 군사 쪽 은 방대인께서 알아서 하시구려." 생각만 해도 끔찍한 듯 담대인은 몸을 떨더니 한숨을 내 쉬었다. 미소를 머금고 담대인을 바라보는 방효겸 이 낯을 굳히며 말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길어야 이 년. 그 안 에 모든 일이 끝이 나겠지요." "이제부터 바빠지겠구려." "지금이야 그리 바쁠 일이 뭐 있겠습니까? 저야 머 리만 쓰면 되는 것을." "그럼 오늘 시간이 나시오?" "예! 몇 개의 전서구(傳書鳩)만 날리면 오늘 일은 끝납니다." 그 말에 이번에는 담대인이 눈을 반짝 빛냈다. "그럼 오늘 저녁 술 한잔 어떻소? 이제 쉼 없이 뛰셔 야 할 분인데 그 전에 술맛은 보셔야 하지 않소?" 방효겸도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하. 술이라 거 좋지요. 담대인께서 사신다는 데 어찌 제가 거절하겠소이까?" 방안은 곧 화기애애한 웃음으로 뒤덮였다. 바로 그 때 밖에서 발소리와 함께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 다. "담대인 어른. 밖에 손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담대인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손님? 날 찾을 손님이 없을 텐데.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연 신 갸우뚱댔지만 떠오르는 사람이 없던 담대인은 밖에 선 사내에게 큰 소리로 되물었다. "송집사! 그래 어떤 분이 찾아오신 게냐?" 질문을 받았지만 대답하기가 까다롭던지 연신 머뭇거 리던 송집사는 담대인이 다시 한 번 채근하자 입을 열 었다. "무림인 인 듯 싶습니다." "무림인 이라고?" 담대인의 얼굴에 다시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67- 시작되는 음모(陰謀) (2) 담대인 저택의 쌍둥이 노복 중 둘째인 노이(盧二) 는 부지런하기로 따를 자가 없는 사람이다. 어찌나 부지런하던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이곳 저곳 나타 나지 않는 곳이 없다. 나타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일감이 보이면 그냥 두고 보지 않는 천 성적인 일꾼이다. 그런 그를 가리켜 하인들은 모두 신출귀몰(神出鬼沒) 노이(盧二)라 불렀다. 같이 일하는 하인들과 하녀들이 그만큼 그를 좋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가진 것은 없는 그 들이었지만 동질감과 동료 의식 하나로 똘똘 뭉쳐 있 었던지라 노이가 조금이라도 도와줄라치면 떡 한 조 각이든 밥 한 술이든 주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다. '전국 최강의 일꾼이 되자' 는 신념을 가진 노이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호의(?)를 받고 또 그냥 있을 순 없는 일이 아닌가. 또 한번 힘 좀 쓰 는 노이. 이래저래 몸은 피곤했지만 그는 소임을 다 하는 자부심 넘치는 일꾼이었다. 오늘도 부지런히 뛰어 다니던 노이의 귀로 문을 두 드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조금 전이었다. 상당히 문과 떨어진 거리에 있던 그였지만 문소리를 듣고 그냥 있을 그가 아니었다. 가까이 있던 하인을 제치 고 후다닥 달려간 그는 순식간에 문을 열어제쳤다. "어떻게 오셨습니까요?" 허리를 공손히 수그려 인사를 한 후 고개를 드는 노이의 눈으로 일곱의 사람이 눈에 잡혔다. 남자 넷 에 여자 셋, 정확히 말해 노인 하나와 중년 남녀, 젊은 사내 둘과 아리따운 여자 둘이었다. 상당히 먼 길에서 온 것인지 온 몸에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 다. '할아버지가 아들 내외를 거느리고 출타했나? 그리 고 저쪽은 손자, 손녀들인가?' 짧은 시간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의 귀로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담성운(潭星雲) 대인을 뵈러 왔다 전하시오." 한 중년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그 순 간 노이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말끔히 씻어 버 렸다. 풍기는 기질로 보아 무림인들이다. 무림인들에 게 잘못 보이면 좋을 것 하나 없음을 잘 알고 있던 노이였기에 공손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엡. 어디서 오신 분들이라 전해 드릴까요?" 그러자 이번에는 젊은 여인이 앞으로 나섰다. "단목 세가라 하면 아실거에요." 단목 세가? 단목 세가라면 이번에 소가주와 혼약이 오갔다는 그 집안? 노이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 끼고는 서둘러 허리를 숙였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노이는 손님들을 안으로 들인 후 자기가 생각해도 빠르다 싶을 정도로 발놀림을 서둘렀다. 몇 개의 문 을 통과하여 담대인이 있는 곳을 찾아가던 그의 옆 으로 한 사람이 지나갔다. 워낙 빠르다보니 누군지 파악도 못했지만 그쪽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보게 노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노이는 다시 발을 멈추며 몸을 돌렸다. 그 곳에는 자신이 찾는 사람은 아니었 지만 자신을 부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중의 한 명이 서 있었다. "송 집사 어르신." "어디를 가는데 그리 급한가? 내 평소에도 자네가 빠르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완전히 날아다니 는구먼."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묻는 송집사에게 부끄러운 표 정을 짓던 노이는 다시 일이 생각났다는지 서둘러 입 을 열었다. "담대인께 손님이 오셨습니다요." "손님? 오실 만한 손님들이 없을 텐데." 송집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목 세가에서 오셨다 하시더군요." "단목 세가?" 송집사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분명 연락을 넣었으니 어떤 연락이 올 것은 예상했지만 인편으로 올 것이라 생각을 못했던 그였다. "빨리 그 분들을 대청으로 모셔다 드려라. 대인께는 내가 연락을 드리마." 말을 마치자 송집사도 노이의 발놀림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사라져갔다. 그 모습에 노이는 빙그레 웃음을 머금었다. '아마 내 표정도 저랬겠지? 그런데 집사 어르신도 저 렇게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었나?' 소가주의 일이 아니고는 결코 서두르는 법을 보이지 않았던 송집사였다. 그런데 저렇게 서두르다니. 자신 이야 항상 저렇게 뛰어 다닌다 했지만 송집사는 그럴 위치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허둥대던 송집사의 모 습을 생각하던 노이는 갑자기 송집사의 지시가 떠오 르자 얼굴에 머금었던 웃음을 지워버렸다. "아참.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지." 노이는 또다시 발걸음을 돌려 문 앞에 기다리는 손 님들에게로 돌아갔다. "조금 있으시면 대인께서 나오실 겁니다. 일단 대청 으로 가시지요." 노이는 손님들을 대청으로 안내하였다. 대청(大廳)은 말 그대로 대청이었다. 반경 이 십장 이 넘는 커다란 마루 중앙으로 큰 주단목(朱丹木)으 로 된 커다란 탁자가 놓여 있었고 스무 개가 넘는 의 자들이 그 옆을 둘러싸고 있었다. 맨 끝에는 담대인 이 앉는 자리인 듯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의자가 위 용 넘친 모습으로 놓여 있었다. 옥조영과 백운호, 여미릉이 모두 한 자리를 차지하 고 앉았다. 그러나 나머지는 자리에 앉지 않고 그저 대청을 살필 뿐이었다. "우와 죽여주는구만. 역시 돈 많은 놈들은 다르다니 깐. 이렇게 꾸미려면 돈을 얼마나 쳐 발랐을까? 있는 놈들이 더 한다고 이렇게 꾸미려면 얼마나 백성들을 족쳐댔을까?" 젊은 사내, 우문교(于文驕)가 대청을 둘러보더니 싱 긋 웃으며 한 소리 했다. 그러나 은연중 뼈가 있는 소리를 내뱉는 그의 눈은 곱지 않았다. 그를 좋아하 지 않는 단목 수령으로선 그 말이 사실이라 생각되었 지만 맞장구를 쳐줄 생각은 없었다. "남이야 돈으로 바르던 금으로 바르던 무슨 상관이 에요? 자기는 이런 집도 없으니깐 배가 아프니깐 그 런 건가?" 마지막을 콧방귀로 장식한 단목 수령은 목이 부러져 라 휙 돌려 버렸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오른 우문교 가 한 소리를 터트리려 하자 서혜령이 중재에 나섰다. "충분히 그렇게 보이네요. 그리고 아가씨 말씀에 신 경 쓰지 마세요. 요즘 심기가 불편하셔서 그런지 좀 신경이 날카로운 듯 하네요." 서혜령이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어딘가 모르게 차가운 용모에 그 미소가 너무도 잘 어울렸다. 그 모습을 보던 우문교의 얼굴이 멍해졌다. 아니꼬운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던 단목 수령이 다시 톡 쏘아 붙였다. "언니는 뭐가 좋다고 저런 사람한테 잘 해 주는거에 요? 남편 없다고 딴 남자한테 잘 해 주는 거에요? 내 나중에 문이 녀석한테 다 말해 버려야지." "아가씨..." 서혜령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자 이번 에는 인상이 찌그러진 우문교가 다시 반격을 날렸다. "흥! 싸가지가 많아서 좋겠군. 밥 말아먹어도 달포는 넘게 먹을 정도야. 오늘이 달거린가? 왜 저렇게 신경 질이야 신경질이." "뭐에요?" 눈이 치켜 올라간 단목 수령이 앙칼진 음성으로 그를 보았다. 불을 뿜어내는 둘의 신경에 대청이 화끈 달아 올랐다. "그만하고 앉거라." 이미 두 사람의 수작질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 던 여미릉이 한 소리를 하자 단목 수령은 씁쓸한 표정 을 지었다. "하지만 사부님." "어허. 네가 제자가 된지 며칠 됐다고 벌써 내 말을 안 듣는 게냐? 듣기 싫으면 안 들어도 좋아. 그냥 내 치면 되지." 제자란 말을 듣자 단목 수령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맞 은 편에 자리를 잡으며 앉았다. 단목 수령이 그녀의 제자가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산을 내려오면서 안면을 튼 단목 수령은 부지런히 여미릉을 공략해 들어갔다. 서혜령도 열심 히 그녀를 도왔다. 그런 단목 수령의 노력을 가상히 여겼는지 여미릉은 얼마 전 단목 수령을 제자로 받아 들였다. 이 결정을 가장 기뻐했던 것은 바로 백운호였다. 서 혜령과는 다르게 단목 수령은 활달하고 재미가 있었 으며 애교도 만점이고 할아버지 하면서 그를 잘 따르 기도 했다. 워낙 차가운 여미릉이나 그녀의 영향을 제법 받은 서혜령과는 다른 모습을 자주 보이는 단목 수령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몰 랐다. 여기서 한가지 문제에 봉착(逢着)했다. 바로 항렬(行列) 문제였다. 나이로 보나 먼저 문하에 든 순서로 보나 서혜령이 사자(師姉)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단목 수 령은 서혜령의 남편인 천인문의 이모였다. 단목 수령 의 질부(姪婦)가 되는 서혜령이 사자(師姉)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위계질서(位階秩序)가 완전히 무너지는 꼴이다. 옥조영 일행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싸 매야 했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포기하 기 시작했다. 맨 처음 나가떨어진 것은 옥조영이었 다. 그 뒤를 이어 유운기와 우문교가 떨어졌다. 그 들이야 자신과 상관도 없는 일에 머릴 굴릴 필요가 없었기에 그랬지만 여미릉과 백운호는 달랐다. 특히 열렬히 환호했던 백운호로서는 포기하겠다는 여미릉 을 붙잡고 늘어져야만 했다. 하지만 결과는 나와 있 었다. 결국 '너희끼리 알아서 불러' 라는 말만 내리고는 여미릉과 백운호도 나가 떨어졌다. 하는 수 없이 서 혜령과 단목 수령은 처음에 불렀던 아가씨, 언니로 부르기로 합의했다. "꼬리를 마시겠다? 그게 여러모로 당신한테 좋을 거요. 크크크크!" 우문교가 마지막으로 다시 놀려대자 자리에 앉아 있던 단목 수령이 울그락불그락 달아올랐다. 고개를 휙 돌리면서 혼잣말을 했다. "누가 붙였는지 광협(狂俠) 참 잘 붙였다. 협(俠) 만 없으면 더 좋았을 텐데." "광협이 아니라 정협(正俠)이오. 난 바른 일만 하고 바른 소리만 한다는 말이오. 어느 미친 녀석이 붙였 는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늘에 부끄러 운 짓은 하나도 해 본적이 없소. 이 대청만 해도 그 렇소. 이 부(富)가 백성들의 피고름으로 이루어졌단 말 분명 틀리진 않았을 것이오." 말을 끝낸 우문교는 우쭐한 표정을 지었으며 단목 수령은 패배의 아픔을 곱씹는 쓰디쓴 인상을 지을 뿐 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공평한 모양이었다. 쓰라린 패배를 환호로 바꾸어줄 방수(幇手)가 나타난 것이 다. 우문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자국 소리와 함 께 한 사내의 말이 들려왔다. "그렇게 의심나거든 밖에 나가서 아무나 잡고 물어 보시오. 내 이날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아직 욕들을 만 한 짓은 해 본적이 없다고 자부하는 바요." 대청에서 안쪽으로 난 문이 열리며 담대인과 방효겸 이 나타났다. 앉아 있던 옥조영 등이 자리에서 일어 서며 그를 맞이했다. 설마 들으랴 해서 한 말인데 들 었다니. 우문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고거 쌤통이다.' 단목 수령은 혀를 쏙 내밀며 우문교의 약을 올렸다. "물론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소. 그렇기에 저 소협께서도 그런 말을 한 것일 게 요. 하지만 내가 이렇게 산다고 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말할 수 있는 자격 같은 건 나에게도 없 소." 말은 신랄했지만 얼굴에 떠오른 미소로 보아 화가 난 것은 아닌 듯 했다. 민망해 어쩔 줄 모르던 우문교는 포권하며 허리를 수그렸다. "제가 말이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소 생 정협(正俠) 우문교라 합니다." 사죄를 받은 담대인은 그러지 말라며 손을 흔들었다. "사람이 실수도 할 수 있는 게요. 뭘 그 정도를 가지 고... 담성운이라 하오. 그런데 귀가 짧아서 그런지 이름을 못 들어 본 것 같구려. 용서하시오." "유명무실(有名無實)한 존재보단 이름 없이 살아가 는 바람이고 싶습니다. 심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화자찬(自畵自讚) 비스무리한 말을 꺼내고는 화통 하게 웃는 우문교. 듣고 있던 단목 수령은 구역질이 난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백운호부터 하나씩 포권하며 자 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듣고 있던 담대인은 무반응이 었으나 뒤에서 듣던 방효겸의 표정은 서서히 굳어 들 어갔다. '저 여자가 혈수가인(血手佳人) 여미릉이라고? 거기 다 저 노인이 삼광(三狂) 백운호? 어떻게 몰락한 단 목 세가따위가 저런 초고수들을 대동할 수 있는 거 지? 이번엔 팔비절혼(八飛絶魂) 유운기(柚暈氣)까지? 그런데 저 옥조영이란 사람은 누구지? 백운호가 말을 높여 주는 걸로 보아 무명소졸(無名小卒)은 아닌 듯 한데.' 거사(巨事)를 준비하며 모든 변수들을 생각해야했던 방효겸이었다. 그랬기에 웬만한 무림인들의 이름과 신분, 소속 등은 훤히 꿰차고 있었다. 하지만 옥조영 의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었던지라 이리저리 눈만 굴릴 뿐이었다. 방효겸이 머리를 굴리는지 마는지 담대인은 미소를 머금고 화답을 받았다. "제 짧은 눈으로도 여러분들이 강호에서 이름을 드 날리는 분들이라 사려되는군요. 제가 눈이 나빠 알아 뵙지를 못했습니다." "상계(商界)에서 활약하시는 대인께서 몰라보는 건 당연한 일이오. 신경 안 써도 되오." 이해한다는 듯이 빙긋 웃음을 짓고 대답하는 백운 호. 그 웃음을 받았는지 담대인도 웃음을 머금었다. "제 심정을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일단 소개 하죠. 이쪽은 제 친우..." 막 고개를 돌리며 방효겸을 바라보던 담대인이 갸 우뚱거렸다. "방대인 왜 그러시오?" "아, 아닙니다. 잠시 실수를..." 흠칫 정신을 차린 방효겸이 고개를 숙였다. "피곤하셨던 모양이오. 인사를 끝내고 들어가서 쉬 도록 하시오." 멍한 모습을 보이는 방효겸이 안쓰러웠던지 걱정스 런 말투를 건넨 담대인이 다시 좌중을 향해 몸을 돌 렸다. "다시 소개하죠. 제 친우인 방효겸이라 합니다." 다시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은 그들이 담대인의 손 짓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들어가서 쉬시게나." 담대인이 다시 안으로 들 것을 권유하자 방효겸이 머리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 평생 이런 영웅들을 모신 자리에 참 석하는 게 몇 번이나 되겠습니까? 조금 피곤해도 있 겠습니다." 방효겸이 자리를 뜰 것을 거부하자 담대인은 무언가 있나 보다 하고는 더 이상 권유하지 않았다. 다시 옥 조영 일행을 향해 고개를 돌린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찾아 오셨는데 이거 대접이 소 홀하군요. 여봐라." 담대인이 밖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자 하인 하나가 바삐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대인?" "그래. 일단 여기 다과상과 차를 내오거라. 그리고 주방에 연락해서 귀한 손님들이 오셨으니 오늘 저녁 은 거나하게 차려 두라고 해라. 그리고 오늘 이 분들 유하실 곳을 치워놓도록 하고. 알겠느냐?" "괜찮습니다. 우리는 용건만 마치고 바로 갈 것입니 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옥조영이 그럴 필요 없다고 나섰지만 담대인은 고개 를 저었다. "아니오. 내 집에 왔으면 응당 손님이고 손님 대접 을 못하는 건 주인의 불찰이오. 그런 걱정은 마시고 이 집에서 며칠 간 푹 쉬도록 하시오. 넌 뭘 하느냐? 빨리 가서 말하지 않고." 담대인이 다시 한번 호통을 치자 하인은 밖으로 나갔 다. "단목 세가에서 오셨다고 하셨습니까?" 하인이 완전히 사라지자 담대인이 낮은 목소리로 물 었다. "그렇습니다." "흐음. 그냥 서신으로 보내시든지 하실 것이지 왜 이 렇게까지 찾아 오셨는지 여쭈어봐도 될는지요?" "그건 제가 말씀드릴게요." 이제나저제나 기회를 엿보던 단목 수령이 이때다 하 고 끼어 들었다. 아까 소개할 때 단목 수령이란 이 름을 들어 알고 있던 방효겸은 조용히 머리를 굴리 기 시작했다. '일단 생긴 것은 상당히 곱군. 헌데 기질은 어떨지. 아까 들어올 때 들리던 목소리로 봐서는 웬만한 남자 면 깔아뭉개 버릴 듯 한데. 이거 쉽지 않겠군.' 이런 생각을 하던 방효겸의 귓가로 그녀의 목소리 가 들려왔다. "일단 이런 말씀드리기 뭐하지만 제가 이렇게 찾아 뵌 것은 저희 집에 넣으신 혼약 건을 거절하기 위해 서입니다. 저희 집이 아무리 몰락한 가문이라 하나 무림인의 가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께 들은 말이 있습니다. 권력과 친하지 말라는 것이 첫 째요, 재물에 눈이 어둡지 말라는 것이 둘째요, 몸 의 평안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이 셋째입니다. 무사 의 검은 이 세 가지를 가질 때 그 날카로움을 잃는 다 했으니 그것을 바라는 자는 검을 버려라 배웠습 니다. 어르신의 가문은 분명 상인의 가문입니다. 이 런 가문과 혼약이 맺어지면 분명 우리 단목 세가는 지금보다는 분명 부유해 질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입니다. 지금 저희 집안은 몰락하여 무림 에 그 이름을 알리지 못한지 십 여 년이 넘었습니다. 저는 이런 가문을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어떻게든 집안을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다행히 그 기회가 저에게 닿았습니다. 이런 때에 제가 만약 혼 약을 맺는다면 제 검은 녹이 슬고 말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이번 혼약을 거절하려 합니다. 혼약 건은 없 었던 일로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말을 끝낸 단목 수령은 깍듯이 고개를 숙여 사죄를 했다. 서글픈 표정을 짓던 담대인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오. 아가씨께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면 어쩔 수 있겠소? 이 늙은이야 그런가 보다 하고 물러설 수밖 에." "감사합니다." 희미한 긴장감을 띄고 있던 단목 수령의 안색이 환 히 펴졌다. 안색을 굳히고 있던 옥조영이 대화가 끝 남을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일이 끝났으니 이만." 담대인이 급하게 일어서는 그를 만류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그냥 가시면 섭하지요. 혼약은 혼약일 뿐, 그 이상 다른 일과 연관지을 필요는 없지 않겠소? 이제 밤도 다 되어 가는데 여기서 머무십시 오." "차가 나왔습니다." 두 명의 하녀가 차와 다과를 내 왔다. 별 관심 없이 주위만 둘러보던 백운호가 눈을 빛내며 군침을 삼켰다. "마침 차도 나오는군요. 그만 자리에 앉으시지요." 재차 권유하는 터라 옥조영은 자리에 앉았다. "잠시 할 일이 있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아니 왜 그러시오?" 담대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처리하다 만 일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대인께서는 나오지 마십시오. 일을 마치면 다시 오죠." 일이라니. 갑자기 무슨 일이... 곰곰이 생각하던 담 대인은 방효겸의 얼굴을 보더니 생각났는지 손으로 머리를 쳤다. "그렇구려. 내가 늙으니 기억이 오락가락 하는 것 같소. 그런데 일은 저녁 식사 전까진 가능하겠소?" "한 시진도 걸리지 않을 겁니다." 차를 마시던 와중에 일어선 방효겸은 가벼운 목례 와 함께 대청을 나섰다. 옥조영은 방효겸의 뒷모습 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방효겸은 여섯의 서찰을 급 히 작성했다. 휘갈기듯 쓴 글을 곱게 접은 후 일어 선 그는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네 마리의 전서구가 든 새장이 눈에 잡혔다. 각각의 편지를 다리에 묶은 그는 유심히 주위를 살핀 후 밖으로 날렸다. 두 마 리는 남동쪽, 두 마리는 서북쪽을 향해 세찬 날개 짓 을 했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방효겸이 나지 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웅(霧雄)!" 짧게 부르는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나타 난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무나도 평범하여 어 디서나 볼 수 있는 사내였다. 이름 그대로 안개처럼 나타난 그를 보던 방효겸이 남은 두 장의 편지를 앞 으로 내밀었다." "이것은 금기주(金旗主)에게 전해라. 그리고 나머지 편지는 금기주에게 편지를 전달하고 난 후 네가 직접 읽어보고 그 안에 적힌 대로 실행해라. 난 너의 경공 솜씨가 무림의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생각한 다. 첫 번째는 내일 아침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전달 되어야 한다. 알겠느냐?"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무웅이란 사내는 가볍게 대 답한 후 허공에서 흩어지듯 사라져갔다. "이제 거대한 회오리가 몰아치겠지. 살아 남는 자 는 그 누가 될 것인가?" 방효겸은 낮은 한숨과 함께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68- 시작되는 음모(陰謀) (3)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 "이게 차린 게 없다 하시면 제법 차렸습니다 하고 말 할 땐 얼마나 될까요?" "아마 마당 위를 음식으로 덮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는 겁니까? 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방. 그곳은 평소 담 대인이 귀한 손님들을 모시고 대접을 하는 접대실이 었다. 상위에는 종류도 각양각색에 김이 모락모락 나 는 맛깔스런 음식들이 한 가득 놓여 있었고 그 앞으로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는 옥조영 일행과 담대인 방효겸 이 보였다. 그 주위로 하인, 하녀들이 분주히 돌아다 니며 새로운 요리를 내 놓았고, 그럴 때마다 백운호 등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음식을 맛보고 있었다. 음식 위로 잔이 한 동안 오고 갈 무렵 밖에서 인기척 이 들려왔다. "아버님 공우이옵니다." "들어오너라." 삼십 대 초반을 갓 넘긴 듯 젊은 사내가 안으로 들었 다. 머리를 뒤로 빗어 넘긴 모습이 의외로 말쑥한 모 습을 보이는 사내였지만 얇은 입술에 갸름한 얼굴선은 어딘지 유약해 보이게 만들었다. 담성운의 아들이란 대 외적인 신분 밑에 건문제(建文帝)란 감춰진 신분을 가 진 자. 바로 그것이 그의 진면목이었다. "인사 드리거라." 담성운이 좌중을 향해 손을 내밀자 담공우가 허리를 숙였다. "소생 담공우(潭恭郵)라 합니다." 인사를 받은 옥조영 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를 마친 담공우가 담대인의 옆자리에 앉았다. 공허한 눈 빛으로 주위를 둘러본 담공우가 입을 열었다. "이 분들은?" 담대인이 흠칫 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 애비의 손님들이시다. 넌 신경 쓸 필요 없다." 담대인은 대충 상황을 얼버무리며 고개를 살짝 옆으 로 돌렸다. 그곳에는 조용히 식사를 하는 방효겸의 모 습이 보였다. '왜 방대인이 이 자리에 폐하를 부르라 한 거지? 소 개 할만한 자리도 아닌데 말이야.' 그러나 눈빛을 받은 방효겸은 담담히 식사에만 열중 하고 있었다. 의문이 생긴 것은 담공우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손님 앞에 자신을 부른 경우엔 자신을 상대에게 소개 하는 것은 물론 상대도 소개시켰었다. 상대를 배려하 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먼 미래를 생각하고 안면을 터 둔다는 뜻이 강했던 것이 그 주된 이유였 다. 그랬기에 신경 쓰지 말라는 그의 말이 심상치 않 게 다가왔던 것이다. 좌중의 분위기가 이상해짐을 느낀 것은 옥조영 등도 마찬가지였다. 백운호와 우문교는 먹기에 바빴지만 그 나머지 인물들은 모두 유심히 담대인 등을 보고 있었 다. 음식을 조용히 먹던 단목 수령이 저를 놓으며 입 을 열었다. "아니에요. 아드님도 아실 건 아셔야겠죠. 일단 제 소 개부터 해야겠네요. 전 단목 세가의 셋째 딸 단목 수령 이라 합니다. 이번에 담 소가주의 혼약건이 있었다는 건 알고 계시겠죠?" "아! 예에." 듣고 있던 담공우가 눈을 끔뻑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단목 수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단목 세가, 정확히는 제 앞으로 그 혼약이 날아왔죠. 전 그것을 거절하러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기가 죽은 것인지 낮게 얼버무리는 담공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단목 수령의 인상이 더욱 찡그려졌다. 어찌 남자가 돼서 저렇게 유약하고 패기가 없을까? 원래 혼약 에 대해 별 좋은 생각이 없었던 단목 수령으로선 더욱 화 가 났다. 아니 자신의 결정이 탁월했음을 확신하는 순간 이었다. '남자가 저렇게 박력이 없어서 어찌 살까? 저러니 결혼 도 못하고 있지. 돈만 많으면 뭘 해? 좀 남자답게 확실히 보여 줄건 보여 줘야지.' 속으로 팍팍 욕을 해대는 단목 수령. 남이 듣지 못하게 낮고 긴 한숨을 내뱉자 속이 풀리는 것 같았다. 분위기가 더욱 가라앉는 것 같자 담대인이 나섰다. "자자! 음식이 식겠습니다. 어서 드시도록 하지요." 그러자 긴장이 풀리는 듯 모두 저를 들었다. 그러나 풀 린 듯 하면서도 그렇지 못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 고 사방에 그릇과 저가 달각거리며 부딪히는 소리만 사 방에 흩뿌려질 뿐이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백운호와 우문교는 담대인과 이 야기를 나누며 웃음을 보이는 등 다시 방안은 훈훈한 기운이 돌았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담 공우는 자신의 앞에 놓인 음식을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먹고 있었다. "이봐요." 담공우를 살피던 단목 수령이 다시 그를 불렀다. "네?" 담공우가 눈을 들며 대답했다. "보고 있으려니까 한심해서 못 참겠군요. 어르신께서 계신 자리지만 한 마디 해야겠어요." "아, 아가씨!" 옆에 앉아 있던 서혜령이 다급히 단목 수령의 팔을 잡았다. 단목 수령은 서혜령을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언니는 좀 가만있어 봐요. 할 말은 해야지 않겠어요?" 담대인을 보는 것으로 보아 그의 허락을 받으려는 것 같았다. 담대인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무언중에 허 락을 했다. 그 미소에 자신감이 생긴 단목 수령은 다 시 담공우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남자란 모름지기 배포가 있어야 되요. 무엇을 하던 간에 매사에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당신은 지금 어때요? 밥은 깨작깨작 먹고 고개는 축 늘어뜨려 아래만 보고." 너무도 신랄한 비판에 담공우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 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아까 들어올 때 보니깐 걸음도 어기적거리더군요. 왜 자신감이 없죠? 그렇게 자신감이 없어서야 어디 남 자라고 하겠어요? 지금 대충 봐도 당신 나이가 삼십은 된 것 같은데 그런 성격 고치지 못하면 평생 결혼 못할 걸요. 아니 당신이 담대인 사후 돈을 물려받으면 여자 가 생길지는 모르죠. 하지만 그 여자도 당신의 돈을 사 랑해서지 당신의 모습을 사랑하진 않을 것 같군요." 너무도 정곡을 찔렀기 때문일까. 좌중은 모두 얼어붙 어 버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사과 드릴게요." 옆에 있던 서혜령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 어섰다. 그리고는 단목 수령을 바라보았다. "세상 그 누구라도 흠이 없는 사람은 없어요. 잘못 된 것을 충고하는 것은 좋지만 면전에서 면박 주듯 그 래서는 아니 되죠. 아가씨. 사죄하세요." "어, 언니!" 단목 수령은 갑자기 서혜령이 저렇게 돌변하여 자신 을 꾸짖자 당황했다. 그러나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심 했다 싶었는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말을 심하게 한 것 같네요. 용 서하세요." 얼굴을 못 들고 사죄를 하는 모습을 본 담공우가 어 쩔 줄 몰라했다. "아닙니다. 사죄까진..." "빨리 용서한다고 하세요. 안 그러면 언니한테 혼나 요. 저 인상 쓴 것 안 보여요?" 갑자기 돌변한 그녀의 태도에 더욱 당황한 표정의 담 공우. 알았다는 듯 바삐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소. 용서하겠소." 그러자 단목 수령은 살았다며 혀를 날름거렸다. 조심 스레 서혜령의 눈치를 살피던 단목 수령이 또 한 마디 던졌다. "하지만 제 말이 틀린 건 아니란 건 알죠? 고치도록 하세요." 단목 수령은 말을 끝마치자 이젠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겠다는 듯 저를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불만스 런 표정을 짓던 서혜령도 고개를 한 번 젓더니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폭풍이 한차례 지나간 그 곳엔 다시 정적이 찾아 왔다. 밤은 어김없이 찾아와 소주(蘇州)를 뒤덮었다. 담대인 의 가택에도 밤은 스며들었고 달이 중천에 자리할 즈음 환하게 저택을 밝히던 불들도 하나씩 꺼져갔다. 그러나 모든 이가 휴식을 취할 때에도 꺼지지 않은 곳이 있었 다. 그 중 하나가 손님의 자격으로 찾아 온 옥조영 일 행의 숙소였다. 옥조영의 방. 화려한 비단으로 덮인 침상 위에 옥조영이 앉아 있고 그 앞 탁자에 여미릉과 백운호가 앉아 있었다. 연신 하 품을 해대던 백운호가 짜증나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옥형! 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부른 건지 말을 하셔야 할 것 아니오." 하지만 미간을 좁히고 앉아 있던 옥조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운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자리 에서 일어섰다. "하실 말 없으면 그만 가서 자야겠소. 아함. 배도 부 르고 목욕도 해서 딱 자기 좋은데." 잠이 오는지 크게 하품을 하며 손을 머리위로 치켜든 백운호가 몸을 돌렸다. "할망구. 그만 자러 갑시다."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나지 않소?" 몸을 돌려 나가는 백운호의 등뒤로 옥조영의 말이 들 렸다. 밖으로 나가려던 백운호가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 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계속 의자에 앉아 서 생각에 잠겨 있던 여미릉이 가세했다. "저도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해요." "뭐가 말이오?" 문 앞에 엉거주춤하니 서 있던 백운호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뭔지는 모르겠어요." 고개를 흔들며 모른다하자 옥조영이 자신의 생각을 말 했다. "담공우란 그 아이를 왜 부른 것 같소? 혼약이 거절되 었으면 나오게 할 필요는 없지 않소. 솔직히 나와봤자 좋은 모습 보기 어렵다는 건 담대인이란 자도 충분히 알 건데." "수령이가 그 아이와 대면하면 충분히 마음이 바뀔 거 라 생각한 것 아니겠소?" 백운호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자 옥조영이 머리를 저 었다. "그런 이유도 있었을 진 모르지만 다른 게 있었을 것 같네요. 솔직히 그 아이를 처음 봤을 때부터 유약해 보 이더군요. 뭔가 꼭 자포자기한 것 같은 느낌 그런 게 있었어요. 수령이가 그걸 모를 리도 없구요. 그런데 수 령이가 마음이 바뀔걸 기대한다는 건 어불성설(語不成 說)이죠. 분명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 같네요." 듣고 있던 백운호는 논리 정연한 여미릉의 말이 그럴 듯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 하지만 그것만 가지 고 이상하다 말하긴 그렇지 않소?" "......"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백운호는 턱을 긁어댔다. "또 다른 이상한 것이라도 있소?" "...아니오. 없는 것 같소." 옥조영이 고개를 저었다. "나 같은 석두는 뭐가 뭔지 모르겠군. 내가 보기엔 두 분 다 그냥 과민 신경일 뿐이오. 신경쓰지 말고 잠 이나 자는 게 속 편할거요. 난 그만 가려오. 옥형! 내 일 봅시다." 백운호가 건성으로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가자 여미 릉도 따라 인사를 하며 나갔다. 그들이 나가자 옥조영 은 닫힌 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분명히 뭔가가 있어. 방효겸, 그자가 바로 열쇠인 것 같은데.' 그 즈음 서혜령의 방에서 두런두런 목소리가 흘러나 오고 있었다. "아가씨 처음에 하신 세 가지 이야기란 말. 그 말 정 말 시할아버님께서 하신 말씀이 맞나요?" 서혜령이 조심스레 묻자 듣고 있던 단목 수령이 배를 잡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한참을 웃어 제끼던 단목 수 령은 기운이 빠졌는지 웃음을 그쳤다. "하긴요 뭘? 그냥 제가 멋드러지게 지어낸 거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서혜령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터졌다. 하는 행동으로 보아 멋있는 말은 전혀 못할 줄 알았던 그녀가 저런 면모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 이다. 혼자 실실 웃어대고 있던 단목 수령이 갑자기 뾰 루퉁한 얼굴이 되더니 서혜령을 째려 보았다. "그런데 언니. 어떻게 다른 사람 있는 앞에서 그렇게 무안 줄 수 있어요? 나 낯 뜨거워 죽는 줄 알았잖아요." "죄송해요 아가씨. 하지만 아가씨도 이제 다음부터 조 심하셔야겠죠?" 서혜령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는지 단목 수령은 쑥스럽다는 표정으로 혀를 쏙 내민다. "알았어요. 아차! 아까 언니 봤어요?" 뭔가 갑자기 떠오른 것인지 단목 수령은 호들갑을 떨 었다. "네?" "아까 식사 때 소가주란 남자 자꾸 언니를 흘깃 흘깃 쳐다보던데 언니는 못 느꼈어요?" "아, 아니요. 전......" 서혜령이 갑자기 쑥스러워하자 단목 수령은 기회다는 듯 집요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언니 조심해야겠다. 그 남자 흑심 품고 이상한 짓 하 면 어쩔란가 몰라. 킥킥킥." "서, 설마 그럴리가요." 난처해진 서혜령이 더욱 몸을 비틀어댔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 했어요. 언니 밤에 조심해야겠어 요." "아가씨하고 잘 건데 걱정은 뭘요." "정말 그럴까요? 내 유심히 봐 뒀다가 문이 녀석한테 왕창 꼬발라야지." "아, 아가씨!" "뭐라 하셨소? 폐하께서 아가씨라 불렀던 그 여자에게 관심이 있으셨다 이 말씀이오?" 담대인의 턱 밑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그 위의 큰 눈은 더욱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담대인의 시선을 받고 있던 방효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가 유심히 살폈는데 폐하께서 그 여자 에게 관심을 보이시는 것 같더군요." "허허!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분위기가 싸늘해 진 것만 걱정했구려." "......제가 폐하를 모시라 한 것은 원래 그 단목 세가 의 아가씨가 폐하를 보고 마음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막연 한 추측 때문이었습니다. 별반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그 래도 사람 마음은 간사한 것이라고 어떻게 바뀔지 모르 지 않습니까? 저도 그 난리를 쳐대는 걸 보고는 물건너 갔다 생각 했죠. 전 폐하께서 더 상처를 입지나 않으실 까 유심히 살폈죠. 그랬더니 폐하께서 그 여자에게 눈길 을 주시더군요." "이상하군요. 전 한 번도 못 봤는데." 뭔가 이상한지 담대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효겸은 그럴 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인께선 옆에 계신 폐하를 보기 힘드셨을 겁니다. 거기다 손님들까지 신경 쓰셨으니 당연한 일이지요. 저 야 계속 폐하만 바라 봤으니 겨우 볼 수 있었던 거지만 요." "흐음! 그렇구료. 그런데 그 여자의 신분은 어떻게 될 까요? 아가씨라 호칭하는 걸 보면 하녀 같은 건 아닐런 지......" 솔직히 현 입장에선 하녀든 귀한 집 자녀든 별 상관은 없었다. 집에 붙어 있게 할 수 있는 여자면 충분한 것이 다. 그러나 또 사람 마음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왕이 면 신분이 나쁘지 않은, 그리고 기왕이면 건문제가 자신 의 자리를 회복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수 있는 여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랬기에 담대인은 서혜령의 신분을 걱 정한 것이다. 하지만 방효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여자를 찾는 이유는 폐하께서 집 밖으로 나다니시는 것을 막기 위함일 뿐이지 신분과는 아무 상 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듯 방효겸은 머리를 저어 담대인 의 말을 잘랐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지는 압니다. 대인께서도 보셨겠 지만 그 말괄량이 아가씨가 그 여자를 보고 언니라 불렀 지요. 게다가 그녀가 사과하라 하자 불만이 가득한 것 같으면서도 사과를 하지 않았습니까? 대인께서 걱정하시 는 그런 천한 신분은 아닌 것 같으니 걱정은 접으셔도 될 것입니다." 천한 신분은 아닐 것이다? 방효겸의 설명을 듣자 비로 소 안색이 풀어지는 담대인이었다. "폐하께서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신 건 처음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여자를 잡아둬야 할 겁니다." "어, 어떻게 말이오?" 담대인이 궁금한 표정으로 되묻자 방효겸은 빙그레 웃 으며 그를 보았다. "남녀 사이는 시간이 해결해 줄 뿐이지요. 일단 그 일 행을 계속 여기에 묵게 하는 수밖에요. 그 이후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어떻게 되겠지요." 방효겸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서서히 몸을 돌렸다. -69- 해상에서의 전투, 그것은 피의 서막(序幕)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 새벽이었다. 불빛 한 점 보이지 않는 관도 위를 한 사내가 열심히 뛰어가고 있 었다. 단번에 사 오장씩 나가는 것이 귀신도 탄복할만 큼 대단한 신법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 은 그렇게 달려가면서도 어떤 소리도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끔 고인 물을 밟아 철벅거리는 경우를 제외 하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런 경신술(輕身 術)을 가진 자들은 보통 몇 가지로 귀속된다. 하나는 암행(暗行)과 요인 암살을 전문으로 하는 자객(刺客) 무리들이고 또 하나는 귀중한 물건을 슬쩍하는 무리, 바로 도둑들이다. 지금 달리고 있는 인물은 바로 두 번째 경우에 속했 다. 그의 이름은 당우양(唐牛羊)이었다. 중원 최고의 신투(信偸)로 알려진 당우양은 꿈에서 견우성(牽牛星) 을 본 부모가 상스러운 일이라는 이유로 지어준 이름 이다. 이름에 걸맞게 당우양은 어렸을 때부터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하루도 쉬지 않고 도둑질을 해대는 것이다. 그의 부모는 제법 알려진 부자였기에 다행히 피해자들에게 손해 배상은 철저히 해 줄 수 있었다만 어느 부모가 자식이 도둑이 되는 것을 원하겠는가. 얼러도 보고 때려도 보았지만 당우양의 손버릇은 나 아질 줄 몰랐다. 결국 십 년이 지난 어느 날 그의 부 모는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허나 포기했다고 그냥 놔 둘 수도 없었다. 결국 그의 아버지는 교육을 포기하는 대신 투도(偸盜)에 대해 가르치기로 했다. 그가 가르 친 건 부자의 물건을 훔쳐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는 흔 해 빠진 투도가 아니라 물건을 훔칠 땐 그 물건의 값어 치만큼을 지불하라는 전에 없던 투도였다. 그러나 당우 양은 이런 새로운 투도(偸盜)에 대해 거부감 같은 것은 없었다. 아니 더욱 철저히 지켰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 이 훔쳐왔던 물건들의 보상금(補償金)을 지불하던 아버 지를 보아 왔던 당우양이었기에 항상 아버지의 신투도 (新偸盜)를 마음에 품고 다녔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당우양은 신투(神偸)가 아닌 신투(信偸)가 되었다. 항상 물건의 값을 그 옆에 놓아두고 오는 그였는지라 피해자들도 그에게 심한 불만 같은 것은 품지 않았다. 처음에는 피해자들이 너무 적은 액수가 놓아두었다고 해서 추적한다 뭐 한다 하며 난리를 핀 경우도 있었지 만 실상 도둑맞은 물건이 드러나면 '피해자가 억지를 썼구나' 하며 사람들이 매장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기에 요즘은 그런 불평 따윈 들리지 않았다. 아니 당우양이 가지 않는 집은 부자가 아니라는 소문까지 퍼져 그가 찾아 왔으면 하는 말도 안 되는 바램을 가진 부자도 있을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당우양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도둑, 가장 직업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도둑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이렇게 가면 늦겠군. 그냥 산을 넘자." 혼잣말을 지껄이던 당우양이 갑자기 관도를 따라 난 산을 타기 시작했다. 이름 없는 산이지만 울창한 숲으 로 덮힌 그 산은 상당히 가파르고 험했다. 비까지 와 서 더욱 위험했지만 당우양은 전혀 그런 것에 구애받 지 않았다. 불빛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곳을 아주 매끄 러운 솜씨로 빽빽한 나무 사이를 이리저리 샤샥 빠져 나갔다. 얼마 후 정상에 도달한 당우양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쓰펄. 이래서 광동성(廣東省) 쪽은 오기 싫다니깐.' 주위를 둘러보던 당우양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묘강 (苗疆)만큼은 안되지만 그래도 많은 독충(毒蟲)과 독 초(毒草), 어디 도사리고 있는지 모를 죽음의 늪지. 사철 내내는 아니지만 북부 지역에 비해 배나 내리는 비. 특히 우기에 접어드는 초반인 유월에 접어든 지금 같은 때는 항상 이렇게 후덥지근하면서도 찝찝하다. 이런 이유로 광동성(廣東省)은 같은 성을 쓰는 사천당 문(四川唐門)과 함께 기피 지역의 첫 머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가장 오기 싫은 곳을 그것도 가장 오기 싫은 때에 오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이유 가 있었다. 그것은 이태 전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호북성(湖北省)에 있던 그가 강서 성(江西省)으로 간 것은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이성 (李成)의 교송평원도(喬松平遠圖)가 강서성 대상(大商) 인 임호령(任虎怜)에게 넘어갔다는 첩보를 잡은 탓이었 다. 하던 일 다 팽개치고 강서성으로 내려 갈 때만해 도 기뻐 어쩔 줄 모르던 그였지만 강서성에 도착한 직 후 그의 마음을 뒤흔들 일이 벌어져 버렸다. 장강(長 江)과 포양호( 陽湖)가 만나는 구강(九江)에 막 도착 했을 무렵 그는 수적에게 쫓기는 한 사람을 구했는데 알고 봤더니 관군인 것이다. 관군인 줄 알았다면 결코 구하지 않았을 테지만 일단 구한 이상 살려야겠다는 생 각에 그는 수적이 오지 않을 산 쪽으로 내빼 버렸고 수 적들은 그의 예상대로 추적을 포기했다. 하지만 웬걸 관군이 덜컥 죽어버린 것이다. 허탈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던 당우양은 산에 관군을 묻기로 했다. 하지만 조금의 직업 의식이 발휘되어 그 의 품을 뒤진 게 문제였다. 그의 품속에서 나온 서찰 을 본 당우양은 그만 눈이 돌아 교송평원도(喬松平遠圖) 고 뭐고 다 때려 치워 버렸다. 묻기로 한 시체도 내버 려둔 채 한 숨도 자지 않고 광동성으로 내달린 지 하 루만에 여기까지 온 것이다. '괜히 그 따위 편지를 봐 가지고 이 고생이람.' 연신 비를 맞으며 서 있던 당우양의 입이 삐죽댔다. 하지만 얼굴엔 그런 불만 따윈 없어 보였다. 오히려 어떤 희망 같은 빛이 어려 있었을 뿐이었다. 그만큼 편지에 쓰여 있던 글귀의 힘은 대단했다. 구룡옥배(九龍玉杯) 술을 따르기만 해도 공력을 올려주고 최고의 맛을 내 는 술로 바뀌게 해 준다는 보물(寶物). 비록 그것이 사실이 아닐지는 몰라도 가지고 있는 그 이름만으로도 엄청난 값어치를 가진 보물이다. 현재 황실에 하나 있 다는 소문이 있지만 황실에 숨어들어 훔쳐올 자신이 없 는 당우양으로선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두고두고 후회 할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끝은 봐야겠지?' 당우양은 흘러내리는 비를 닦으며 다시 사방을 살폈 다. 벌써 동녘이 희뿌옇게 밝아오기 시작한지라 얼마 살피지 않고도 관도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당우양은 다시 숨을 깊이 들이 마신 후 신형을 뽑았다. 얼마간 쉰 터에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라 더욱 빨랐다. 숨을 한 번 내뱉기도 전에 산자락에 도착한 당우양은 기억 해 둔 대로 관도를 향해 내달렸다. 해가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리던 비는 그치기 시 작했다. 하늘을 뒤덮고 있던 먹구름도 시간이 지나자 흩어져 버렸고 사방은 내렸던 빗방울로 인해 연신 반 짝이며 빛났다. 눈앞에 예쁜 무지개가 떠올랐지만 갈 길 바쁜 당우양의 눈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무 지개는 한 시진 남짓 자신을 뽐내다가 아무도 봐주는 사람 없는 게 서글픈지 서서히 하늘에서 사라져갔다. '드디어 다 온 것 같군.' 쉼 없이 달려온 당우양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어디선가 밀려온 향긋한 바다 내음이 코를 자극한 탓 이다. 당우양은 흐트러지는 몸을 다잡으며 더욱 속력 을 내었다. 그러자 곧 파란 하늘보다 더 푸른 바다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저 멀리 만산군도(万山群島)가 보이고 그 옆으로 보 이는 새파란 바다 위엔 하늘을 하얗게 수놓는 갈매기 들과 가끔 더 하얀 모습을 드러내는 작은 흰 물결이 멋들어지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세찬 바람 에 머리를 뒤로 흩날리며 서 있는 당우양의 눈은 그 런 아름다움을 간직하지 못한 채 불안과 초조에 젖어 있었다. '혹시 늦은 거 아닐까?' 당우양은 불안했다. 관군의 서찰에 친절하게 날짜까 지 써 있었지만 당우양은 혹시라도 배가 지나가지나 않았을까 걱정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침이니깐' 하 고 위안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그것도 뜬 해가 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점점 다 급해지기 시작했다. 돗단배 하나 보이지 않는 바다. 더럽게도 푸른 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 (茫茫大海). 결국 당우양은 분통을 터트릴 수밖에 없 었다. '제기랄!' 몇 날 며칠을 잠도 자지 않고 달려왔던가. 그런데 허 탕이라니. 당우양은 뒤에 선 고목을 향해 냅다 발길질 을 해버렸다. 때려도 보고 차기도 했다. 하지만 화가 풀리지 않자 고래고래 고함도 질렀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당우양은 한바탕 소란을 떨고 난 후 몸을 세웠다.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닌 것이다. 비록 여기서는 놓쳤지만 다음 목적지인 복주(福州)에선 반 드시 잡아야했다. 만약 항주만(杭州灣)까지 간다면 놓 칠 가능성이 다분하다. 무시무시한 인상을 쓰고 있던 당우양은 다시 한번 몸 을 추스렸다. 그때였다. 숨을 크게 들이키던 당우양의 눈이 서서히 커져갔다. 그리고는 피어나는 웃음. "하, 하하하! 왔다 왔어. 우하하하하. 왔다 드디어 왔 어." 무엇을 본 것인지 갑자기 당우양은 펄쩍 뛰며 웃기 시 작했다. 한참을 웃던 당우양이 다시 몸을 세우더니 눈에 힘을 주고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다시 봐도 보이는 그것은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배, 그것이었다. 거대한 배 십 여 척이 웅장하게 떠 있고 그 옆으로 작지 만 날렵한 선박(船舶) 몇 채가 따른다. 비록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앞선 배 위의 돛 끄트머리에는 붉은 기 (旗)는 황실의 그것일 것이다. "좋았어. 오늘밤이다. 오늘 밤." 기쁨에 젖어 있던 당우양은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 다. 그의 외침은 절벽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 소리에 묻혀 사라져 버렸다. 한 차례 소리를 지른 그는 천천 히 향항(香港)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나무 위를 찾아 그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마음을 풀며 밀려드는 수마(睡魔) 에 몸을 내맡겼다. "항구다. 육지다~." 앞장 선 배의 첨탑 위에 선 한 선원이 긴 목소리를 내 뿜자 바다 위의 모든 배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토록 기다렸던 중원(中原)이 이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조 금만 더 있으면 자신을 기다리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찬 병사들은 기쁨에 가득 찬 얼굴로 함성을 질렀고, 배 밑에서 열심히 도를 젓는 인부들은 더욱 힘을 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화(鄭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대장이 란 직함(職銜)에 얽매여 웃음을 짓거나 소리칠 수는 없 었지만 그도 내심 피어오르는 함성에 흐뭇해지고 있었 다. 그렇게 기쁨을 만끽하던 정화의 귀에 묵직한 발소 리가 들려왔다. "삼보태감(三保太監) 어르신. 이제 곧 도착하겠군요." 정화는 가볍게 몸을 돌려 자신에게 향한 목소리를 찾 았다. 비록 자신보다는 키가 작지만 당당한 체구의 인 물이 들어왔다. "그렇구려 정첩형." 정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정사흠(鄭査欽)은 흥분된 목소리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곳을 언제 볼까 걱정이 됐는데 결국 이렇게 다시 보게 되는군요." "그대의 풍모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구려. 하하하!" 갑자기 정화가 자신을 놀리자 정사흠은 무안해진 듯 낯을 붉혔다. 그러다 무엇이 생각 났는지 안색을 바로 하며 입을 열었다. "이제 두 시진 정도면 당도할 것 같습니다." 분위기가 바뀌자 정화도 인상을 굳혔다. "일단 도달하면 먼저 물과 보급부터 신경 쓰게나. 우 리야 편안히 도착했지만 선원들은 많이 피로할 걸세. 내일까진 푹 쉬고 모레 출발하도록 할 테니 알아서 준 비하도록 하게." "네! 걱정 마십시오 어르신." 멋들어지게 대답을 뽑은 정사흠은 머리를 절도 있게 꺾었다. 갑자기 안 하는 행동을 하는 정사흠이 이상한 지 정화는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잘 못 먹은 거라도 있소? 갑자기 왜 그러오." "아, 아닙니다. 갑자기 멋진 모습이라도 한 번 잡아 보려고..." 정사흠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런 모습을 보고 있던 병사 몇 몇이 구석에서 킥킥대기 시작했다. 눈을 부릅뜬 정사흠이 세차게 고개를 돌리자 병사들은 오금이 저린 듯 머리를 숙이며 사라져갔다. 그 모습을 보고만 있던 정화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 니 한 마디 던졌다. "일단 다 왔다고는 하지만 긴장은 풀지 마시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하하하하. 걱정 마십시오. 해남도(海南島)를 지날 때 도 조용하지 않았습니까. 그 녀석들도 가만히 있는데 어떤 간 큰 녀석들이 덤비겠습니까." "하지만 말이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떻..." "예예 걱정 마십시오. 절대 긴장 풀지 않겠습니다. 두 눈 부릅뜨고 지키도록 하죠." 무엄하게도 상급자의 말을 끊은 정사흠. 허리를 푹 숙 이며 알았다는 표시를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표정에는 긴장감은 찾을래야 볼 수가 없었다. 정화도 그런 기분을 이해한다는 듯이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 었다. 배 밑창에서 열심히 도(棹)를 젓고 있던 웅원휘(熊元煇) 는 주위에서 숙덕거리는 소리에 천천히 도를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수부(水缶) 총괄인 한 병사가 연신 힘내 라 호령했지만 그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는 듯 했다. 그 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주위를 둘러보던 병사가 그의 곁 으로 다가왔다. "원휘! 왜 일어나는건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웅원휘는 선원들 중 가장 열심히 도를 젓는 사내였기에 병사들이 모두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웅원휘는 얼굴 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띄며 병사를 바라보았다. "모, 몸이 좀 불편해서 좀 쉬었으면 하는데요." "자네가 몸이 불편하다니 놀랠 노자구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병사는 알겠다는 듯 밖으로 나가 한 명의 선원을 대리고 와 그와 자리를 교체시켰다. 웅 원휘는 손바닥을 비벼대며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조용 히 밖으로 나왔다. 선수창(船首倉)에서 갑판으로 나오던 웅원휘는 조심스 레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지나는 사람이 없음 을 안 직후 재빠르게 선미창(船尾倉)으로 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선미창은 그가 도를 젓던 선수창에 비해 크기가 적었 다. 말이 선미창이지 거의 전투선으로 만들어진 선박에 창고 따윈 필요 없는 터라 선미창은 팔을 쭉 뻗으면 닿 을 정도로 좁았다. 하지만 그는 들어가자마자 전혀 낯 설지 않은 곳처럼 한 쪽 구석 바닥을 더듬기 시작했다. 얼마 더듬지 않아 조금 솟아 있는 판자를 잡은 그는 소 리가 나지 않게 판자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겨우 몸이 통과할만한 틈이 생겼다. 무엇이 불안한지 다시 한번 주위를 살핀 그는 조용히 틈 아래로 몸을 숨겼다. 밑으 로 내려온 그는 내려온 틈을 다시 판자로 막고 조심스 레 숨을 골랐다. 이제는 끝났다. 두 시진 내에 모든 일 은 끝나는 것이다. 자기의 마지막 임무를 조용히 상기 하는 웅원휘의 얼굴에는 비장감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70- 해상에서의 전투, 그것은 피의 서막(序幕) (2) 파도가 우뚝 몸을 세운 바위에 부딪혀 산산이 부셔지 면 또 다른 파도가 세차게 부딪혀 오는 곳. 그곳에는 크지는 않지만 무성한 숲으로 뒤덮인 조그만 섬 하나가 외로이 서 있다. 그곳에 한 사내가 울창한 나무 숲 사 이로 몸을 가린 채 숨어 있었다. 쉬지 않고 하품을 해 대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사내는 갑자기 홀연히 나타 난 배가 시야에 잡히자 손으로 이마를 가리며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확실한 것 같군. 됐어." 낮은 소리로 쾌재를 외친 사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 서서 뒤쪽으로 달려갔다. "두목. 두목. 옵니다요." 사내는 사방이 떠나가라 외쳐대며 달렸다. 사람이 살 지 않는 섬이라 그런지 무성하게 자란 수풀이 앞을 막 아섰지만 사내는 긁히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내였지만 저 도 모르게 흥분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반각도 아니 되어 사내는 무리가 기다리는 섬 뒤쪽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곳에는 이미 천 명에 가까운 인원 들이 이곳 저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이야기 를 나누기도 하고 자신의 무기를 꺼내어 닦기도 하는 등 군기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옵니다. 배가 와요." 한 번 소리를 내지르자 앉아 있던 주위가 조용해지며 온 시선들이 사내에게로 쏠렸다. 어색할 법도 하건만 사내는 전혀 그런 주위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지 연신 큰 소리 로 대장을 찾았다. 사내가 무리로 달려가자 중앙이 쫙 열리며 길 하나가 생겨났다. 그 길의 끝에는 볼품 없는 탁자에 앉아 있는 두 명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두목. 왔습니다요." "드디어 왔구만." 헐레벌떡 달려온 사내가 숨을 헐떡이며 말하자 앉아 있 던 한 사내가 벌떡 일어섰다. 키는 겨우 오 척(尺) 반 정 도밖에 안 되는 단신(短身)인데다 머리칼은 망나니의 그 것처럼 헝클어져 있었고, 뻗친 수염은 장비의 그것을 연 상시킬 정도로 삐죽 솟구쳤다. 부리부리한 눈과 엄청 큰 주먹코, 간간이 입술 사이로 보이는 누런 이빨. 원숭이 를 떠올리게 하는 기다란 팔. 얇은 홑옷 하나로 간신히 가린 웃통엔 온통 불그스름한 자상(刺傷)들이 가득 눈에 뜨인다. 그런 사내의 모습은 한 마디로 '볼품 없다'였다. "군사! 이제 어떻게 해야 하오?" 사내가 옆에 앉아 있는 삼베옷을 입고 있는 영준한 사 내에게 질문을 던졌다. 군사라 불린 사내는 미소를 지 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다의 제왕께 소인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외모에 열등감이 심했던 사내는 이런 칭찬을 좋아했다. 항상 민망해 하면서도 그런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은 하 지 않는 걸 보면 확실히 아부에 약한 인물이었다. 지금 도 군사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자 사내는 웃음을 보이 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배가 항구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항구로 들어간다면 우리 배가 여기 정박되어 있는 것을 그들도 알아차릴 것이니 공격은 완전히 허사가 되지요. 일단 그 배들이 항구에 닫기 전에 우리가 먼저 나가서 맞이해야 합니다." "저쪽은 오 천이고 우리는 겨우 천이오. 어떻게 공격하 란 말이오." "제왕이시여!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지난 세 번에 걸쳐 우리들은 모두 계획만 세웠을 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 않습니까. 하 지만 다행히도 이번엔 별대가 본대와 떨어졌습니다. 오 천이 분명 많은 인원이기는 하나 이 만이란 수보단 훨씬 적습니다. 다시 오지 않을 기횝니다." "물론 그러니 나도 치자 한 것 아니오. 허나 방법이 없 잖소 방법이." 답답한지 사내는 가슴을 콱콱 치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군사는 여전히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제가 설명을 드리지요. 일단 각 선대(船隊) 대장들은 이쪽으로 오시오." 군사가 머리를 돌려 뒤에 도열한 십 여명의 사내들을 부르자 모두 그의 주위를 둘러쌌다. "일단 배는 이쪽으로 해서 이렇게 들어 올 것입니다. 다른 쪽은 바다가 얕고 암초가 많아 힘들 겁니다. 배가 일단 여기까지 왔을 때 우리는 밖으로 나서며 이렇게 하는 겁니다. 일단 저 배들이 이 섬의 이 리 정도 되는 지점까지 왔을 때..." "......" 설명을 듣고 있던 둘러친 사내들의 눈이 서서히 커져 갔다. 곧 이어 놀랍다는 감탄성까지 터지기 시작했다. "우하하하! 역시 군사는 대단하오. 대단해." 설명을 듣고 있던 두목이 군사의 어깨를 두드리며 기 뻐했다.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 디서 이런 복덩이가 굴러 들어오겠는가. 이것도 다 전 생에 많은 복을 쌓았기에 그런 거라 생각하는 두목이었 다. 그러나 군사는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머리를 저었다. "과찬이십니다. 이 정도는 누구나 다 생각할 수 있는 겁니다." "다 생각할 수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여기 있는 이 돌대가리 녀석들은 전혀 그런 걸 생각하지 못하는 무식한 놈들이오. 단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피 터지 게 쌈박질이나 해 대는 것뿐이지. 안 그렇냐?" 뒤에서 돌대가리라 욕하는 두목을 째려보며 궁시렁거 리던 사내들은 갑자기 두목이 고개를 돌리며 묻자 황급 히 머리를 숙였다. "맞습니다. 저희야 무식해서 그냥 칼질 밖에 못하지요." 한 사내가 급히 말하자 옆에 서 있던 사내들도 바로 맞 장구쳐대기 시작했다. "그렇습죠."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여기저기서 말이 들려오자 그것 보라는 듯 두목은 고 개를 끄덕이며 군사를 바라보았다. 군사는 허탈한 웃음 을 보이더니 다시 말문을 이었다. "일단 이 리 앞까지 오려면 시간이 좀 있습니다. 마지 막 점검이나 하시지요." "그렇군. 각 선대 대장들은 들어라." "옛!" 도열(堵列)한 사내들이 우렁차게 외치자 두목이 몇 가 지 지시를 내렸다.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대답한 사내들 이 모두 자신의 무리 쪽으로 걸어가자 탁자 앞에 서 있 는 군사를 바라보는 두목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죽거 렸다. "이제 할 일도 없을 것 같은데 배가 올 동안 나하고 얘기나 합시다." "그러지요." 그들은 부산히 움직이는 해적들 사이를 빠져나가기 시 작했다. 서서히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자 닫혀 있던 두목 의 입이 열렸다. "군사를 만난 지 이제 사 년인가? 그런데도 참 많은 일이 있었어." 아련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지 두목의 두 눈이 몽 롱해졌다. "처음 볼 때 난 군사가 거지인줄로 알았지. 걸레 같은 옷에다 머리는 완전히 헝클어져 가지고 말이야. 큭큭큭!" 자신의 모습은 생각나지도 않는지 두목은 그저 킥킥댈 뿐이다. "그게 나의 시작이었지. 내가 그대를 얻지 못했다면 지 금 이 자리는 꿈도 못 꾸고 있었겠지." "아닙니다 제왕이시여. 제왕께서 다 죽어가던 제 목숨 을 구해주지 않았다면 지금 저는 땅에 묻혀 썩어 문드 러졌을 것입니다. 살려주신 것만도 고마운데 거기다 제 능력까지 쓸 수 있게 해 주셨으니 이 은혜 다 갚을 길 이 없지요." "뭐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 아니겠소. 난 그대 목숨 을 구해줬고 그대는 날 두목으로 만들어 줬고." "제가 없었어도 제왕께서는 언제라도 그 자리에 오르 셨을 겁니다." "아 거참 제왕이란 말은 그만 빼쇼. 민망해서 못 듣 겠구먼. 그냥 두목이라 하쇼." 말투까지 바꾸며 넌덜머리난다는 듯 고개를 젓는 두 목이었지만 군사는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는 아니 되지요. 한 번 두목은 영원한 두목. 한 번 제왕은 영원한 제왕입니다. 처음부터 그 격을 낮 추면 한없이 낮아지게 되고, 그 격이 높으면 영원히 높 아질 뿐입니다. 부하들에게 최고로 인식되어야만 언제 있을지 모를 일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지요." "그, 그렇소? 험험! 그럼 군사의 말이 지당한 것 같구 려. 알겠소. 내 노력해 보리다." "그러셔야죠. 아 참. 그리고..." 말을 끝냈던 군사가 갑자기 무엇이 떠올랐는지 다시 우물거렸다. "왜 그러시오?" "제 식솔들을 잠시 만나 봐야겠습니다." "식솔?" 군사의 말을 들은 두목의 머리에 몇 명의 얼굴이 떠올 랐다. 군사를 처음 만났을 때 그를 보필하던 십 여명의 가솔(家率)들. 그들 모두를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개중 에 싸움을 잘 하는 몇몇은 그도 기억하고 있었다. "무슨 일로 말이오?" "이제 곧 큰 전투가 벌어질 겁니다. 그 누가 어떤 일 을 당할지 모르지 않습니까? 미리 얼굴이라도 한 번 봐 둬야지요." 두목은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우하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소? 내 알기로 그들은 상당히 실력도 뛰어난데다 군사의 기묘(奇妙)한 용병 까지 합쳐졌으니 죽을 리가 없소. 너무 걱정하지 마시 오." "하지만 자다가 덜컥 죽을 수도 있는 게 사람이죠. 별 일 없을 거라 믿긴 하지만 그래도 한 번쯤 봐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러도록 하시오. 난 먼저 내려가 있을 테니 다 만나고 나면 내려오시오." 두목이 몸을 돌려 내려갔다. 사라져 가는 두목의 등 뒤를 바라보는 군사의 눈이 유난히 빛났다. 그가 완전 히 사라지자 군사는 멀리 보이는 해적 하나를 불러 자 신의 식솔들 이름을 불러주며 그들에게 연락을 해 달 라고 지시를 내렸다. 지시를 받은 해적이 밑으로 내려 가자 군사는 다시 자리에 앉아 그들을 기다렸다. 얼마 안 있어 식솔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 작했다. 사내들은 동료들이 나타나도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하나씩 나타날 때마다 인사를 건네던 군사 는 열 다섯의 식솔들이 모두 모이자 조용히 입을 열었 다. "이제 시간이 되었다. 육 년이 걸린 일을 마무리지을 때가 드디어 온 것이다. 우리는 죽겠지만 그 피는 혁명 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내들의 얼굴에 비장감이 어렸 다. 그들도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이 일을 시작할 때부터 목숨 따윈 안중 에도 없던 그들이다. 아니 처음부터 목숨을 버려야 한 다는 사실을 알고 시작했다. 처음부터 목숨을 걸고 시작한 그들이었기에 어떤 치 욕도 감수했다. 빌어먹을 해적 질도 해 봤고, 아무 죄 없는 양민들을 죽이기도 했다. 살려달라고 그들이 얼 마나 빌었던가? 하지만 그들은 눈물을 머금고 칼을 들 어야 했다. 손에 느껴지는 살이 베어지는 느낌. 그것 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때마다 피눈물을 삼켰 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음에 안 든 다고 멋대로 행동하면 그 결과는 뻔했기 때문이다. 다 음을 기약하며 분노의 눈물을 감추던 그들. 이제 바라 마지않던 그 날이 온 것이다. "이제 곧 전투가 시작된다. 너희들이 맡은 임무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모두 최선을 다해 주기 바란다." 군사의 마지막 말이 끝나자 비장한 얼굴의 사내들은 서로를 한 번씩 둘러보았다.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한 번 보자는 듯.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사내들은 모두 자신의 배를 향해 흩어져갔다. 군사는 처연한 눈망울로 사라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 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옥에서 보자꾸나 나의 형제들이여!' 가슴이 아려오는지 군사의 불끈 쥐어진 주먹이 파르 르 떨렸다. 그렇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마음속에 띄워 보낸 군사는 천천히 일어선 후 자신의 배를 향해 걸음 을 옮겼다. 거대한 용머리의 선수상(船首像)을 단 배가 미끄러지 듯 물살을 헤치고 나타났다. 먼 바다를 항해할 때 올렸 던 돛도 이미 내려지고 있었다. 뒤따라오던 십 여 척 의 거선(巨船)들도 돛을 내리기 시작했다. 저녁 노을이 서서히 물들어 가는 바다를 세차게 가로 지르던 그 배도 돛이 내려지자 서서히 속도가 죽기 시 작했다. 그러자 큰 소리로 선원을 독려하는 목소리가 바다 위로 흘러 나왔고, 뒤이어 용을 쓰는 함성도 들 렸다. 주위를 호위하던 작은 배들은 돛을 내리지 않았 지만 그들도 큰배의 속도를 맞추느라 돛을 이리저리 조 정하기 시작했다. 정화는 배의 앞머리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항상 이렇게 선두에서 바라보기를 좋아했다. 항구에 들 때마다 이렇게 서 있노라면 어떤 말못할 감동이 찌르르 밀려오는 것이다. 비록 자신의 앞에도 세 대의 배가 있 어 시야는 탁 트이지 않았지만 배 사이로 보이는 육지 만 봐도 충분했다. 그렇게 서 있던 정화의 뒤쪽에서 선실 문이 열리는 소 리가 났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정화의 시선에 정사흠과 이규가 잡혔다. 그들은 정화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옆에 서기를 기다려 정화의 손이 바다 한 쪽을 가리켰다. "저기를 보시오. 정말 멋지지 않소?" "......!" "난 말이오. 감옥에도 갇혀 보았고 폐하와 함께 대륙을 달리며 천군만마를 질타(叱咤)도 해 봤소. 홍등가에서 계집을 끼고 술 마시며 놀았던 적도 있었고, 산에서 노 숙을 하며 말고기도 씹어도 보았소. 하지만 말이오. 기 억에는 남을망정 그 어떤 것도 내 마음에 와 닫는 건 없 더구려. 하지만 이제는 찾은 것 같소. 이 바다가 바로 내 고향인 것 같소. 저번 항해까지는 인정하지 못했는데 이젠 인정해야만 하겠소." 정사흠과 이규는 서로 마주보며 당혹해했다. 갑자기 무 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 은 그저 정화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멀뚱히 서 있었다. 정화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난 천성이 뱃놈인 듯 하오. 노 젓는 기술 따윈 하나 없는 가짜지만 그냥 바다만 바라보고 있자면 가슴이 뭉 클해지는 게 천생 뱃놈으로 태어났어야 하는 건데. 그 대들은 그런 적 없소?" 어리둥절해 하며 서있던 그들은 정화가 고개를 돌려 묻자 머쓱해했다. 하지만 정화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 는지 그저 빙긋 웃을 뿐이었다. "다음 출정이 언제인지는 모르나. 내가 살아 있는 한 계속 나갈 것이오." 말을 마친 정화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 게 감정에 젖어 있던 그가 문득 고개를 돌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나도 주책이구려. 갑자기 이런 말이나 하고 말이야. 신경 쓰지 마시오. 갑자기 육지가 보여 나도 모르게 향수병(鄕愁病)이 도졌나 보오." 멋쩍은 미소을 짓던 정화가 정사흠과 이규의 어깨를 두들겼다. "들어갑시다." "옛! 태감!" 정화의 말에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일어선 그들은 정 화의 양쪽으로 서서 그를 호위하고 선실로 향했다. "오늘밤엔 술이나 거나하게 한 번 마셔 봅시다." "태감께서 원하신다면 같이 대작(對酌)해 드리지요." "좋소. 오늘 누가 먼저 쓰러지나 한 번 해 봅시다." 안으로 들던 그들은 흥겨운 미소를 지었다. 끝났구나. 드디어 끝났어. 정화의 마음은 더할 수 없 는 뿌듯함으로 가득 들어찼다. 한참을 웃고 떠드는 정 사흠과 이규를 바라보는 정화의 눈에 따스한 정감이 흘렀다. 또 한 번의 남해 원정이 이제 그 막을 내리는 중이다. 이번 항해도 대 성공이었다. 특히나 이번 항해 는 그 역사상 기록 될 만한 점이 많았다. 저 멀리 서역 땅까지 배를 이용하여 다녀왔다는 점, 남해 원정의 궁극적 목적인 조공 무역의 새로운 전기 를 마련했다는 점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업적이 이번 항해에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기록의 중앙에 위치 할 인물이 바로 정화 그 자신이고 보면 그의 기분이 흐뭇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돛대 꼭대기에 서서 사방을 감시하던 병사는 서서히 지루해져가기 시작했다. 이미 저 멀리 보이던 육지가 훤히 잡힐 정도까지 된 마당에 이 위에서 계속 이렇게 죽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더욱 짜증이 날 뿐이다. 한 시진마다 교대하기로 되어 있던 지침도 무용지물(無 用之物)이 되어 버렸다. 이미 다 도착했으니 남은 시간 동안 머물라는 말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 었다. 에이 무슨 일이야 있겠어 하고 푹 퍼질러져 버린 병사 는 하늘의 갈매기 때만 세고 있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고 있던 병사는 갑자기 갈매기 때가 부산하게 움직이 자 의아해졌다. 무슨 일이지 하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 킨 병사는 아무 생각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한 눈에 들어오는 십 여 척의 배. '저게 뭐지?' 병사는 어둑어둑해진 밤바다에 떠 있는 배를 살피기 시작했다. 조금씩 다가오는 배를 유심히 살피던 병사 의 눈이 조금씩 커져갔다. 그리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 어섰다. "서, 설마!" 병사는 점점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말문이 콱 막혀 버린 듯 했다. 우왕좌왕 하던 병사는 가쁜 숨을 몰아 쉬더니 두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아래쪽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해적이다." 병사의 목소리는 사방으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71- 해상에서의 전투, 그것은 피의 서막(序幕)(3) 안개 속에서 튀어나온 것 마냥 홀연히 나타난 십 여 척 의 배. 아니 그곳에 원래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처럼 떠 있던 배들은 병사의 외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미 상당 한 거리까지 접근해 있었다.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해 적의 깃발을 돛대 머리에 꽂고 내달리는 배들은 일견하기 에도 상당히 작아 보였지만 워낙 마주보며 선 배들이 크 다보니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병사의 외침이 사방으로 퍼지자 마주선 해적선에서도 '돌격' 하는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한 줄 로 다가오던 배들이 사방으로 퍼지며 더욱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그러나 병사의 외침이 퍼졌건만 원정대(遠征 隊)의 함선들은 깊은 잠에 빠진 듯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소수의 인물들이 이리저리 움직일 뿐이었 다. "해, 해적이라고? 어떻게 해적이...?" 막 선실 문을 열던 정화 일행은 바람을 타고 흘러든 목 소리에 우뚝 자리에 서 버렸다. 망연자실하여 서 있던 그 들 중 가장 정신을 먼저 차린 정사흠이 빠르게 뱃머리로 다가갔다. 날은 이미 저물어 가는 터라 주위를 잘 알아보 기는 어려웠지만 이미 백 여장도 남지 않은 거리까지 다가 온 배를 알아보는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 눈을 찌푸리며 앞을 바라보던 정사흠이 재빨리 돌아와 보고했다. "해남도의 해적들입니다." "어, 어떻게 해남도의 그 놈들이 여기까지 온단 말인가? 그리고 이렇게 다가오는 동안 우리 병사들은 무엇했단 말 이야?" "저 앞쪽에 보이는 섬 뒤편에 숨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벌을 내려 주십시오." "흥! 지금은 저들을 멸하는게 먼저다. 이규! 뭐 하고 그 렇게 서 있는 거야. 빨리 가서 전투 대형을 갖추지 않고." 정화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손을 놓고 있던 이규가 정신을 차렸는지 순식간에 뒤쪽으로 사라져갔다. "병사들은 무기를 갖춰라. 해적이다. 모두 무기를 들고 갑 판으로 나서라." 내공이 실린 이규의 목소리는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이번 에는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 각각의 배에 부산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선실문이 열리며 병사들이 창과 활, 쇠뇌를 들고 뛰어 나왔다. 처음에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던 병사들이었 지만 이미 훈련이 잘 된 병사들이었다. 하나같이 자신의 위 치를 알고 그 곳을 찾아 자리를 매웠다. 뒤를 따라오던 호위선(護衛船)들은 이규의 소리가 들리자 그 속도를 높여 앞쪽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작은 배라서 그 런지 함선들보다 더욱 빠르게 전진했다. 갑판 위를 메운 백 명 남짓 되던 병사들은 이미 완벽한 대형을 갖추고 있었다. 선실에서 주갑(胄甲)을 걸치고 나온 정화는 자신의 배를 지 나쳐 앞으로 나가는 호위선들을 보자 한 시름 놓았는지 안색 을 풀었다. 호위선의 맨 선두에서 병사를 지휘하던 대장 안당(安棠)은 자신만만하게 뱃머리에 서서 지휘를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별로 공을 세우지 못했던지라 그 동안 우울했던 안당이었다. 그렇다고 억지로 없는 공을 만들 수도 없지 않은가. 배정된 작은 선실에 틀어 박혀 그냥 한숨만 푹푹 내쉬던 그에게 들 려온 이규의 목소리는 광명(光明)이나 다름 아니었다. 순식 간에 방을 박차고 나온 안당은 부하들을 닦달하여 배를 몰 았다. 어찌나 서둘렀는지 그의 배만 앞으로 돌출해 나섰다. 안당의 배가 유독 앞으로 나서자 공을 뺏길 것을 염려했는지 나머지 배들도 덩달아 빨라지고 있었다. "준비하라!" 허리에 걸려 있던 긴 장검(長劒)을 뽑아든 후 하늘 높이 외치자 명을 받은 부대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사정거 리가 짧은 활이 앞에 서고 그 뒤를 쇠뇌가 받쳤다. 다시 한번 해적과의 거리를 가름하던 안당이 병사들을 향해 잠 깐 고개를 돌렸다. 몇 번이나 실전을 겪었던 병사들답게 이미 패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흐뭇한 마음을 그대로 얼굴 에 드러낸 안당은 다시 고개를 돌려 해적선을 바라보았다. 이미 거리는 삼십 여장으로 가까워져 있었다. 바람을 등에 진 터라 이 정도면 충분하다 생각한 안당은 높이 쳐든 칼 을 앞으로 내치며 외쳤다. "쏴라!"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화살들이 하늘을 뒤덮기 시작 했다. 나무 위에서 피로에 젖은 몸을 기대어 잠을 자고 있던 당 우양은 귓가를 스치는 소리에 눈을 떴다. 한 시진 남짓 잠 을 잔 터라 피로가 채 풀리지 않았던 그로선 더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심상치 않은 소리에 감기는 눈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켰다. 벌건 눈을 비비며 바다 쪽을 내려다보 던 당우양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저게 무슨 일이지? 왠 해적들이." 졸린 눈을 다시 비비고 봐도 분명 저것들은 해적들이다. 갑자기 조급한 마음이 솟구친 당우양은 나무에서 뛰어 내 려 절벽 끝으로 내달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다 된 밥에 코 빠트리는 것도 아니고 뭐야 이게. 속에서 부글부글 끓 어오르는 화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 던 당우양으로선 그저 함선이 무사하기만을 빌 수밖에 없 었다.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해적들이 몰이를 시작했 을 겁니다." 소주(蘇州)의 담대인 저택에서는 한창 담대인과 방효겸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될 것 같소?" 담대인의 질문에 방효겸은 미소를 짓는다. "일단 빠르고 날렵한 호위선들이 앞서며 화살을 쏠 것입 니다. 그럼 가볍게 막아낸 해적들이 반격을 하겠지요." 안당의 명을 시작으로 모든 호위선들이 화살을 쏘아 붓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화살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었다. 일 장 남짓의 목판(木板)들을 들고 있던 해적들이 우루루 앞으로 나서 일렬로 늘어섰다. 그러자 세차게 날아간 화살 들은 나무판에 틀어박히거나 튕겨져 나갔다. 가끔 탄력이 강한 쇠뇌로 쏘아진 화살들은 두 치가 넘는 목판을 뚫고 뾰족한 화살촉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 차례 화살 공격이 끝나자 궁수들은 모두 재장전을 하 고는 또 다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번째 공격을 시 작했다. 이번 공격도 역시 무위로 돌아갔다. 병사들은 또 다시 화살을 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이 십 여장으로 가까워진 해적선에서 먼 저 화살 공격이 날아온 것이다. "아악!" "큭!" 사방에서 화살에 쓰러지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별다른 화 살 준비를 하지 못했던 병사들로선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앞쪽에 선 대다수의 궁수들이 쓰러지자 쇠뇌를 든 병사들이 두려움을 느끼는지 한 발짝 씩 뒤로 물러섰다. "물러서지 마라. 피하면 이 칼로 목을 베어버리겠다." 도망치는 병사들을 독려하려 돌아선 안당이 칼을 휘돌리 며 위협을 가했으나 한 번 두려움을 느낀 병사들은 쉬 정 렬되지 않았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공격을 가했 음에도 전혀 피해를 주지 못한 대다가 적의 한 번의 공격 에 거의 모든 병사들이 쓰러졌으니 겁을 먹는 것은 당연 한 일이었다. "물러서지 말라고 했다." 이렇게 가다가는 전멸이겠다는 생각이 든 안당은 본보기 로 하나를 참하기로 하고 도망치려 등을 보이는 한 병사 를 발견한 그는 득달같이 달려가 칼을 쳐 올렸다. 그러나 그는 칼을 내려칠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등을 맞은 그는 장검을 떨구며 쓰러져 버린 것이다. 그가 쓰러지는 것을 시작으로 무수한 화살이 다시 하늘을 뒤덮 었고 안당의 병사들은 모두 화살꽂이가 되어 버렸다. 담대인이 물었다. "어떻게 반격 한단 말이오?" "세작(細作)의 말에 따르면 호위선에는 백 명에서 백 오십 정도가, 함선에는 이 백에서 이 백 오십 정도 되 는 병사들이 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일단 해적들이 이 기려면 호위선들을 순식간에 끝장내야 할겁니다." "무슨 방법으로 순식간에 끝장낸단 말이오?" "손쉬운 방법이 있지요. 바로 화공(火攻)!" 안당의 병사들이 전멸하자 주인을 잃은 배는 중심을 잃 고는 갈팡질팡했다. 그 뒤를 따르던 호위선들은 모두 급 하게 선로(船路)를 바꾸기 시작했다. 바로 뒤를 따르던 두 척의 배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느라 속력이 엄청 줄어 버린다. 그러자 그 뒤에 있던 나머지 배들도 급히 속력 을 줄여야 했다. 가까스로 충돌을 면한 그들이지만 그들 은 안도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해적들이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화살을 준비해라. 창과 검을 준비해라. 방패를 꺼내 라." "해적들이 배로 오르게 해서는 안 된다." "닻을 던지거든 칼로 잘라 버려라." 일직선으로 늘어선 해적선들이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자 갈팡질팡하던 호위선단은 모두 방어 준비에 여념이 없었 다. 절반의 병사들이 뱃전에 몸을 감추고 화살을 먹인 활 을 들어 쏠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 뒤엔 칼과 창을 든 병 사들이 혹시나 있을 해적들의 난입을 막기 위해 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해적선들이 일제히 호위선들의 옆을 통과했다. 쿠쿵 하는 거대한 굉음이 선수(船首)에서 들려왔다. 좁은 공간을 비 집고 들어오는 터라 부딪히는 것은 당연했지만 부서지거나 뒤집히는 배는 없었다. 모든 병사들이 준비를 하고 있는 터라 휘청거리는 이는 있어도 쓰러지는 이는 없었다.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 후 서서히 옆을 통과하는 해적 선. 끼익 하는 나무 휘어지는 소리가 병사들의 마음을 불 안하게 했다. "발사!" 발사 명령이 떨어지자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던 병사 들이 몸을 드러내며 화살을 먹인 시위를 놓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무용지물이었다. 이미 안당의 화살을 막았던 목 판들이 자리를 이동하여 옆쪽을 튼실히 막고 있었던 것이 다. 쇠뇌의 공격에 십 여명의 해적이 쓰러지긴 했지만 죽 지도 않았다. 자신들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는 것을 본 병사들이 쓰라린 신음을 토하자 해적선의 한 쪽에서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얘들아! 멋진 대접을 받았으니 그대로 돌려 드려라." "옛!" 함성이 터짐과 동시에 목판이 아래로 내려졌다. 그리고 는 화살을 든 해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닻이 날아올까 대비하고 있던 창칼을 든 병사들이 후다닥 뒤로 물러서 고 방패를 든 병사들이 앞으로 나서 방패를 쳐들었다. 한 번 화살을 쏜 병사들은 두 번째 시위를 당긴 후 해적 의 공격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불을 붙여라." "옛!" 그 말에 당황한 병사들이 방패 사이로 난 틈으로 정면 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해적들이 화살촉 끝에 불을 붙이 고 있는 게 아닌가. 대장 하나가 화들짝 놀라 외쳤다. "물! 물을 준비해." 하지만 그의 다그침이 끝나기도 전에 해적 쪽에서 명 이 떨어졌다. "쏴라." 불붙은 화살이 빗발치듯 호위선으로 쏟아졌다. 병사들 은 모두 눈을 찔끔 감고 방패를 쳐들었다. 하지만 그 화 살들은 모두 돛이나 뱃전에 떨어졌다. 기름을 먹인 것인 지 돛과 갑판에 떨어진 화살은 엄청난 기세로 불을 붙여 나가기 시작했다. "불을 꺼. 어서 불을 끄란 말... 컥!" 병사들을 이끌던 대장의 등에 화살 하나가 꽂히며 쓰러 졌다. 우왕좌왕하던 병사들은 대장이 쓰러지자 손도 쓸 틈도 없이 쓰러졌다. 활을 든 병사가 가끔 화살을 날렸으 나 더 많은 화살이 틀어박혀 쓰러져갔다. 다행히 다치지 않은 병사들은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는 불을 피해 바다 로 몸을 던졌다. 여덟 척의 호위 선단은 그렇게 손 쓸 틈도 없이 화마(火魔)에 휩싸여갔다. 해적 두목은 엄청난 기세로 타오르는 호위선단을 보며 기쁨에 잠겨 있었다. 이제 완전히 다 이긴 것이나 다름 없다 생각했다. 물론 겨우 천 명도 안 되는 병사를 죽인 것이고 아직 사천에 가까운 병사가 남아있긴 하지만 군사 의 용병술이라면 충분히 승리할 것이라 생각했다. 쇠뇌에 몇 십이 다쳤지만 우리는 천에 가까운 숫자를 죽 였다. 승리가 목전(目前)에 보이는 듯 하자 두목은 자리 에서 우뚝 일어서 당당하게 외쳐댔다. "승리가 눈앞이다. 돌격!" 와 하는 환호성과 함께 불타는 호위선단을 빠져 나온 해 적선들은 다시 빠른 속도로 함선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 다. "만약 화공으로 호위선이 모두 불타면 해적들이 이기는 것 아니오?" 당황한 담대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방효겸은 그렇지 않다 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리는 없지요. 아직 사 천에 가까운 병사들이 남아 있는 대다가 해적들의 군선에도 우리 쪽 인물이 있으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어떻게 말이오. 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소." "범의 아가리로 들어간 생쥐가 다리가 부러지면 결국은 죽습니다. 후후후." 아리송한 방효겸의 대답이었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정화의 이맛살이 하늘로 치켜 올랐 다. 어떻게 저렇게 허무하게 무너진단 말인가. 전혀 다른 배들과 연계를 이루지 못하고 쓰러져 가는 배들을 보고 있 던 정화는 죽어버린 대장들이 야속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 미 끝난 전투는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부터는 새로운 전투가 시작되는 것이다. "화포(火砲)를 준비하고 쇠뇌를 준비해라. 그리고 화공에 대비해서 물도 준비하도록." 마음을 다잡은 정화는 뒤에 서 있던 정사흠에게 한 마디 던졌다. 명을 받은 정사흠은 뒤쪽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 에게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어떻게 된 것이 고작 해적 놈들에게 당한단 말인가." "모두 소인의 불찰이옵니다." 정사흠이 고개를 숙이자 정화는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이게 첩형의 잘못이겠소. 다 쓸모 없는 호기나 부려댄 그 대장 놈들의 잘못이지. 일단 저 놈들부터 제압 하고 봅시다." 과거 수만의 병사를 지휘하던 장군의 모습을 되찾은 정화. 늠름한 모습으로 뒤로 돈 뒤 도열한 병사들을 바라봤다. "모두 위치로." 정화의 명이 떨어지자 도열한 병사들은 일제히 자신의 위치 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72- 해상에서의 전투, 그것은 피의 서막(序幕) (4) 병사들의 발소리로 인해 시끄러워진 함선의 갑판이 다 시 적막으로 잠겨들 무렵 정화는 다시 옆에 서 있는 정 사흠에게 명을 내렸다. "활과 쇠뇌는 십 오장 이내가 되기 전엔 쏘지 말게." "예?" 명을 받드느라 허리를 굽혔던 정사흠의 신형이 흠칫하 더니 놀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거리가 너무 가깝습니다. 바람까지 도와주는 판국에 그렇게까지..." "십 오장도 만만한 거리가 아니네. 아까 보니 쇠뇌의 화살이 목판을 겨우 뚫는 것 같던데 특수한 목재를 쓴 모양일세." "아, 알겠습니다." "배 두 척은 돛을 다시 올리게. 물살을 일으켜 저들의 함선을 흐트러지게 하게나. 그리고 나머지 배들은 이 배 를 선두로 방추형(紡錐形)으로 포진한다. 조공선(租貢船) 은 두 번째와 세 번째에 서게 한다. 저들을 뚫고 지나간 뒤 향항(香港)까지 전속 전진하도록 하고 두 척은 저들 을 돌파한 뒤 뒤를 막도록 해라." "너무 위험합니다. 중진(中陣)을 담당하시는 편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화는 봉목(鳳目)에서 불길을 내뿜기 시작했다. "전투에서 선진(先陣)이 어디 있고 중진(中陣)이 어디 있단 말인가. 잔소리말고 시키는 대로 하게." 단단히 화가 났는지 정화의 언성이 높아졌다. 더 이상 할말이 없는지 몸을 돌리자 정사흠은 씁쓸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정화의 눈은 이미 저 멀리 바다의 해적 선에 닿아 있었다. 먼저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한 탓인지 다가오는 해적선의 기세가 사뭇 거세 보였다. 바라보는 정화의 눈이 초조감으로 물들어갔다. '당당하게 펼친 학익진(鶴翼陣)이군. 쉽지 않겠어.' 정화의 대 함선들이 서서히 전투의 긴장감으로 물들어 갈 무렵 벌써 거리를 삼십 여장까지 좁힌 해적선에서도 함성이 터지고 있었다. 사기를 높이기 위해 터진 해적 두목의 목소리가 이미 피를 맛본 해적들을 광기에 잡히 게 했던 것이다. 언뜻 보기에도 이미 피 맛에 젖어 버린 듯 붉은 눈을 번뜩이는 해적들의 손에는 조금 전의 해전 을 승리로 이끈 활들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다수가 칼 이나 창과 같은 무기를 들고 있는 것이다. 목판을 들라 지시를 받은 이를 제외한 나머지들 중 활을 쥔 자는 수십 도 안되어 보였다. 하지만 그들도 활을 버릴까 갈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해적들의 선박(船舶)은 정화의 함선보다 그 높이에서 만도 삼 장이나 낮았다. 활이나 투석 무기가 아니면 해 적들은 공격방법이 전무한 것이다. 그럼에도 두목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미 전반적인 전술에 대해 군사 로부터 들은 바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군사가 아직까지 별 말이 없다는 것이 그를 안심케 한 것이다. 하지만 앞 으로 치고 나온 두 척의 배 위쪽의 갑판에서 화살촉이 반짝이자 두목의 낯빛이 서서히 변해갔다. "군사!" 당황한 목소리로 묻는 두목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군 사는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나무를 든 사내들에게 지시를 했다. "목판 두 장을 겹쳐서 방어해라." 그의 지시를 받자 옆에 선 식솔 하나가 내공을 일으켜 사방으로 외쳤다. 소리가 다 사라지기도 전에 십 여 척 의 해적선들은 두 개의 목판을 겹쳐 방어를 하기 시작했 다. 그러나 예상을 벗어난 공격이 먼저 다가왔다. 무슨 일인지 해적선들이 조금씩 울렁거리는 것이다. 거친 바 다를 누비는 해적들은 별 이상을 못 느끼는 듯 했으나 군사는 이미 이상을 파악한 것이다. 당황한 빛이 떠오 른 군사가 급히 사방에 외쳤다. "빨리 저 두 척의 배에서 멀어져라. 물길에 휩싸여선 안 된다." 하지만 무공을 익히지 않았던 탓에 그의 목소리를 들 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갑작스런 명에 당황한 식 솔이 급히 외쳤으나 이미 한 척의 배는 파도의 여파에 출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눈으로 본 해적선들은 그 제야 모두 흩어지기 시작했다. 허나 너무 당황했던 탓일까? 휘청거리던 해적선은 두 함선의 사이에서 우왕좌왕 하더니 거대한 몸집을 밀고 들어오는 거선(巨船)에 그만 깔리고 말았다. 우지직 하 는 소리와 함께 배의 선수가 사정없이 부서져 나가기 시작하자 해적들은 모두 낯빛이 변해 버렸다. 해적들은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빠른 속도로 밀고 오던 함선의 속도는 갑자기 줄어들 었지만 그 기세는 여전했다. 설마 여기까지야 하고 머 뭇거리던 해적들은 해적선의 절반 이상이 파편으로 부 수어져 나가자 바다로 뛰어 들기 시작했다. 백에 가까 운 해적들이 물 속으로 뛰어 들자 그 장면을 바라보던 해적선들이 물에 빠진 해적들을 건지기 위해 방향을 돌 렸다. 하지만 그것이 악수였다. 급히 옆으로 다가간 두 척의 배가 엄청난 높이의 파도에 휩싸여 버렸다. "다가가지 마라. 파도에 휩싸이면 끝이다." 두목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를 들어서인지 파도 에 휩싸인 모습을 본 탓인지 나머지 해적선들은 모두 더 멀리 피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간신히 물살을 피 하는가 싶었으나 이번에는 엄청난 화살들이 빗발치듯 날아왔다. 간신히 물살에 휩쓸리지 않은 해적선들은 급 히 목판을 든 해적들을 앞세워 화살을 막아 나갔다. 하 지만 쏘아진 화살은 그들이 목표가 아니었다. 이미 정 신을 못 차릴 정도로 일렁거리는 두 척의 해적선에 탄 해적들은 날아드는 화살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고 있었 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군사의 안색이 퍼렇게 변해갔다. 해적들이 죽는 게 아쉬워서가 아니다. 그들이야 이번 전 투에서 몰살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그냥 죽는 게 아니라 많은 군사들을 지옥으로 같이 동반 해 가야 하는 것이 문제였다. 시체말로 볏단 쓰러지듯 죽어선 안 되는 것이다. 군사는 일단 중앙을 치고 들어 온 저 두 척의 배부터 처리해야겠다 생각했다. "화살에 불을 붙여 쏴라." 그의 작은 목소리를 대신해 식솔이 높은 소리로 외쳤다. 별로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방법. 이미 함선에는 화공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황하는 해적들 을 진정시킬 방법이기도 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 자 그의 예상대로 혼란에 빠져 있던 해적들이 무기를 활 로 바꾸고는 화살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타오 르는 화살들이 두 함선을 향해 날아갔다. "불을 꺼라." 돛이며 갑판에 화살이 날아들자 함선의 지휘관은 당장 병사들을 재촉하여 불길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준비해 둔 물을 뿌려 빠르게 진화(鎭火)를 해 나갔다. 그 사이 해적들은 다시 진형을 갖추었다. 그러나 이번 에는 방추형으로 대오(隊伍)를 형성한 함선들이 거세게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장 선두에 선 배의 진형에서 내려다보던 정화가 하늘로 치켜 들린 손을 힘차게 내렸 다. "발사!" 기다렸다는 듯 화살의 비가 어둑어둑한 바다 위를 수 놓기 시작했다. 간신히 진형을 갖추었던 해적들은 매서 운 공격이 날아들자 다시 혼란에 빠져들었다. 정화의 배는 머뭇거리는 해적선들의 중앙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다시 한 척의 해적선이 정화의 함선에 그대로 깔 린 후 우지직거리며 나무의 파편으로 분해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군사는 불끈 쥔 주먹을 바들거렸 다. 이 난국을 해결할 해결책을 요구하는 두목의 눈빛을 보지 못했는지 군사는 그저 옆에 서 있던 식솔에게 빠르 게 명을 내렸다. "표식이 된 배를 찾아라. 빨리!" 이젠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인지 군사는 구상한 작전들을 실행할 시간을 앞당겨야겠다 생각했다. 명을 받은 가솔이 매섭게 눈을 번뜩이며 지나가는 함선들의 배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 무엇을 찾았는지 눈이 빛 내며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군사의 눈이 그곳을 따라가자 배 한쪽에 작게 그려진 흰 깃발의 모습이 보였 다. 기다리던 표식을 확인한 탓일까. 군사의 얼굴에 회 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군사! 뭐 하는 게요? 빨리 수습을 해야 할 것 아니오." 옆에서 발바닥에 불이 난 듯 조급함을 내비치던 해적 두목이 침을 튀기며 군사를 닦달하자 군사의 몸이 흠칫 했다. "걱정 마십시오. 방책을 찾았습니다." "그, 그렇소? 그럼 빨리 시행하시오." 살짝 고개를 돌려 얼굴을 내비친 군사의 얼굴에 미소 가 보이자 두목은 안심한 모양이다. 군사는 다시 식솔 에게 몸을 돌렸다. "활을 준비해라." 그 말에 식솔은 바로 뒤편으로 돌아가더니 땅에 떨어 진 활과 몇 대의 화살을 들고 부리나케 달려왔다. 그 리고는 화살을 시위에 재더니 표식이 된 배의 선미(船尾) 로 세차게 날렸다. 피웅! 가공할 위력을 머금은 화살이 파공성을 내며 날아가 더니 파팍 하는 소리와 함께 배 나뭇결을 파고들었다. 배의 밑창에 조용히 앉아 있던 웅원휘는 갑작스런 혼란 에 기다리던 일이 시작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숨을 고르 던 그는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몰래 감추어 둔 비수 한 자루가 딱딱한 감촉과 함께 손끝에 걸렸다. 손에 걸린 비수의 손잡이를 힘주어 잡은 그는 천천히 비 수를 품에서 끄집어내었다. 일 척 반에 달하는 비수(匕首) 는 투박한 비수집에 들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비수를 집에서 꺼내었다. 빛이라곤 전혀 없는 곳이었지만 오싹 한 느낌과 함께 번쩍하는 빛을 내뿜는다 느낀 것은 그만 의 느낌이었을까. 그렇게 숨을 죽이고 있던 그의 귓가로 선창의 벽을 뚫 고 드는 소리가 잡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 소리가 들린 곳으로 몸을 이동했다. 어두운 암흑 사이를 향해 손을 내뻗자 선창을 뚫고 들어온 화살촉의 따끔한 느낌 이 손끝으로 전달되었다. 미소를 짓는 그의 귓가로 두 번째 화살이 날아들어 파고드는 소리가 잡히자 바로 몸 을 뒤돌아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대업을 이루시옵소서.' 그는 하늘을 향해 한 줄기 고변(告變)을 가슴속에 외치 고는 번쩍 쳐든 비수를 세차게 내리쳤다. 콰콱 하는 소 리와 함께 비수가 나뭇결을 자르며 들어갔고 그 옆으로 물이 세차게 뿜어져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 하지 않고 비수를 아래로 확 그어 내렸다. 그러자 엄청 난 자국이 바닥에 나며 세찬 물줄기가 위로 치솟았다. 가슴이 물로 흠뻑 젖었건만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 질 줄을 몰랐다. "가라 앉고 있습니다." 화살을 날렸던 식솔이 화살을 맞은 배의 이상을 느끼자 마자 군사에게 고했다. "됐어!" 기쁨에 잠겨 불끈 쥔 주먹을 가슴으로 말아 올린 군사 의 눈에도 그 이상이 감지된 것은 순식간이었다. 화살을 맞은 배가 뒷 부분부터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한 것이다. "저 배가 조공물품이 든 배요?" 두목도 가라앉기 시작한 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군사는 그 질문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머 쓱해진 두목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입을 삐죽였다. "돌진하여 함선 사이로 들어간다." 군사의 명에 식솔은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몇 몇 해적선을 제외한 해적선들이 그 명을 받아 속도 를 높이기 시작했다. "자, 잠깐! 이렇게 들어가면 함포(艦砲)의 밥이 될 거 요. 군사! 어떻게 하려는 게요?" 너무도 당당히 함선을 향해 돌진해 들어가는 해적선들 을 우려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두목이 군사의 어깨를 확 잡아챘다. 그러자 식솔이 두목의 뒤편으로 슬며시 돌 아갔다. 그러나 군사의 손짓에 기를 모으던 손에 힘을 풀고는 서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함포를 쏠 각도가 나지 않습니다. 깔 리지만 않으면 별 무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계획은 그게 아니잖소. 그냥 저 조공선 만 가라앉히면 그냥 도주하기로 하지 않았소. 그런데 왜 이렇게 무리를 해서 자꾸 위험한 곳으로 드는 게요?"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던 두목이었지만 이렇게 접근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던지 다급하게 군사를 독촉했다. 군사의 얼굴에 짜증스런 기 색이 잠깐 내비쳤지만 아직 완벽히 해적선이 접근하지 못했기에 시간을 더 끌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인지 두목을 향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무리이긴 하지만 확실하게 하는 게 좋지요. 저기를 보 십시오. 그래도 모르시겠습니까?" 군사의 손짓에 일그러져 있던 두목의 얼굴이 서서히 펴 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저것이었구려. 역시 군사는 그냥 생각 없이 움직일 사람이 아니지. 암 그렇고말고." 두목의 웃음이 큰 소리로 퍼져 나갔다. 그 무렵 정화의 함선들은 큰 동요에 잠겨 있었다. 몇 척의 해적들을 거의 몰살하다시피 하여 사기가 충천하 던 함선들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갑자기 네 번 째 배가 뒷부분부터 가라앉기 시작하더니 이젠 완전히 직각으로 서서 가라앉고 있었다. 그러나 사태를 파악할 시간 따윈 없었다. "빠, 빨리 방향을 바꿔. 부딪힌다." 지휘장(指揮將)이 급히 손짓을 해대며 지시를 내렸다. 그 뒤를 곧장 뒤따르던 함선은 급히 피한다고 하였으나 이미 거리는 너무도 가까웠다. "으아아!" 함선의 갑판에서 바라보던 병사들이 다급한 소리를 내 뱉었다. 우지지직! 함선이 해적선을 깔아뭉개는 소리보다 훨씬 큰 소리가 울려 퍼지며 함선의 앞머리가 바스라져 나갔다. 병사들 은 다급히 뒤로 물러섰지만 함선은 그대로 부서지며 앞 으로 돌진했다. "무슨 소린가?" 해적선을 돌파한 정화는 갑자기 뒤쪽에서 들려오는 소 리에 이규를 향해 물었다. "저, 저도 잘." 선수에 서 있던 그들인지라 사태를 모르는 건 당연했다. 당황한 이규를 향해 정화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보게나." 이규는 후다닥 선미로 돌아갔다. 그러나 안절부절못하던 정화도 이규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선미로 뛰어갔다. 그 러자 바로 사태가 눈에 잡혔다. 하늘로 치솟아 가라앉는 배의 모습. 그리고 그 옆으로 튕겨져 나온 선박. 정화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저, 저게 뭐냐? 어떻게 된 거야?" 정화의 손이 부들부들거렸다. 이럴 수는 없다. 아니 이 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어찌 한낱 해적 따위가 이렇게 한단 말인가. 정화는 치미는 화를 삭이지 못하고 큰 고 함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아!" 언제 왔는지 이규의 옆에 서 있던 정사흠이 흠칫 하며 몸을 돌렸다. "배를 멈추고 저 해적선을 향해 함포를 쏴라." 눈에 독이 오른 정화가 소리 높여 외쳤다. 병사들은 바 득바득 외치는 정화의 명에 성급히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정사흠은 그런 병사들을 말린 후 정화를 향해 입을 열었 다. "태감! 지금은 함포를 쏠 수 없습니다. 진정하십시오." 그의 말이 통한 탓일까? 정화는 헐떡이는 숨을 몰아쉰 후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내, 내가 너무 흥분한 것 같소. 미안하구려. 그건 그 렇고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소?" "일단 작전을 변경해야 할 것 같습니다. 뒤의 배들은 모두 저 배와 충돌을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다고 싸 울 여력이 없습니다. 일단 이 세 대의 배들로 반전(反轉) 해서 연합하는 편이 좋을 듯 싶습니다." 그 말에 정화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밤 바다. 이미 해는 저 바다 밑으로 사라졌고 붉은 노을도 서서히 잠겨들고 있었다. "너무 어두워. 이런 밤에 계속 전투를 해봤자 좋을 리 는 없을 건데." 혼잣말로 지껄였지만 가까이 있던 정사흠이 듣지 못했 을 리 없다. 다급히 간청을 넣는다.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대로 가다간 더욱 위험해 집니다. 빨리 결정을 내리시옵소서." 정사흠이 말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정화였 다. 마음을 다잡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사방으로 외쳤 다. "반전한다. 병사들은 들으라. 모두 횃불에 불을 붙여라." 그의 말이 떨어지자 엉거주춤 서 있던 병사들이 다시 부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화의 배는 다시 천천히 방 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제 승리는 따논 당상인 것 같소. 그런데 계속 이렇 게 있을 거요? 우리 측 배로는 저 배들을 다 포위할 수 도 없소. 빨리 도주하는 편이 좋을 듯 싶구료." 두목은 거의 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워지 자 불안한 듯 입을 열었다. 그러나 군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해적선들이 모두 함선의 주위를 둘러 싼 것을 확인한 군사는 옆의 가솔에게 한 가지 지시를 내렸다. "시작하라 해라." "옛!" 가솔은 허리를 굽히더니 다시 한번 소리를 높여 외쳤다. "모두 시작해라." 그러더니 그는 군사를 남겨두고는 바로 배의 뒤쪽으로 뛰어가 버렸다. 무슨 지시를 내렸는지 알 수 없는 두목.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군사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군사. 이번 건 뭐요? 도주하라는 거요?" 그의 질문에 군사는 씩 미소를 짓더니 두목을 향해 고 개를 돌렸다. "제왕이시여. 이제 그대와 나의 인연은 끝난 것 같구려." "그, 그, 그게 무슨 말이오 군사? 끝나다니." 얼토당토않은 말에 두목은 당황한 듯 했다. 그러나 군 사는 별 설명 따윈 할 생각이 없는지 한 쪽을 가리킬 뿐 이었다. 두목은 대답을 하지 않는 군사를 일그러진 얼굴 로 바라보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의 손가락이 닫는 곳은 아무런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 다. "저게 뭐란 말이오?" 다시 고개를 돌리며 물었지만 군사의 얼굴엔 그저 가 득한 미소만이 떠 있을 뿐이었다. "모두 화살에 불을 붙여 저 간악한 놈들을 벌집으로 만 들어 주어라." 간신히 가라앉는 배를 피해낸 함선들은 독이 오른 지휘 장의 소리에 서둘러 화살을 재었다. 어느 한 쪽에서 불이 붙은 화살이 떠오르자 그 뒤를 따라 사방에서 불이 붙은 화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냥 당할 순 없다. 우리도 불을 붙여." 해적들도 함선에서 불화살을 준비하던 모습을 보자 바로 준비한 화살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사방은 대낮처럼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공격!" 누군가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병사들과 해적들의 불화살 들이 양쪽으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아악! 컥! 사방에서 화살에 맞은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온 몸에 불이 붙자 날뛰던 사람들은 다급히 물 속으로 뛰 어 들기도 하고 연신 갑판위를 뒹굴며 불을 끄는 사람도 보였다. 그러나 대다수는 바삐 화살을 재어 재공격을 퍼 붓는다. "물을 가져와. 당장!" 돛에 불이 붙자 한 장수가 급히 명을 내렸다. 몇 명의 병사들은 급히 활을 버려 둔 채 준비해둔 물을 들어 돛 에 끼얹었다. "공격!" 팽팽하던 전투는 뒤에서 나타난 정화의 세 함선에 의해 깨어져 버렸다. 갑자기 양쪽에서 화살 공격을 받던 해적 들은 급히 몸을 움추렸다. 여기 저기서 화살에 맞고 쓰 러지는 해적들의 수가 상당히 늘어났다. "도주합시다. 이미 배는 가라앉지 않았소?" 각각의 해적선들의 선대 두목들은 사방에서 빗발치듯 들어오는 요구에 정신이 없었다. "군사한테 연락이 안 왔단 말이다." "언제까지 군사에게 맡겨 둘 꺼요? 우리가 다 죽고 난 뒤에? 그럴 순 없소." 해적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그의 얼굴에 고뇌의 빛이 떠올랐다. 확실히 그들의 요구가 맞긴 했다. 지금도 충분히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거기다 조공품을 실었던 배는 확실히 가라앉지 않았는가. 나중에 도주한 것에 대한 추궁이 있을지라도 지금은 살고 봐야겠다는 생 각을 든 그는 크게 외쳐댔다. "도주한다. 빨리 배를 빼라." 그의 말에 해적들은 환하게 웃음을 짓더니 사방으로 흩 어졌다. 그러나 사라졌던 해적들이 얼마 후 다급한 목소 리를 내뱉으며 달려왔다. "배, 배가 안 움직입니다." 또 다른 한 해적이 급히 달려왔다. "수부들이 전멸했습니다." 그 말을 듣던 선대 두목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갔다. "몰살하겠소. 빨리 후퇴 합시다." 두목은 사방에서 날아드는 화살과 터져 나오는 비명에 안절부절 하더니 군사를 향해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여전히 군사는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무 언가 섬뜩한 미소. 두목은 갑자기 가슴 한 구석이 오싹 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그 미소의 의미를 물을 시간 따 윈 없었다. 미소의 의미를 나중에 추궁하기로 한 두목 은 다급히 몸을 돌렸다. "후퇴한다. 당장 배를 돌려." 군사만 믿고 있기엔 너무 다급하다 생각한 두목이 급 하게 외쳤다. "소용없을 것이오."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군사의 말에 두목은 황급히 몸 을 돌렸다. "소용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두목의 질문에 다시 미소를 한번 내비친 군사는 천천 히 입을 열었다. "배가 움직이지 못한다는 뜻이오." "그, 그게 무슨?" 두목의 낯빛이 확 변해 버렸다. "다시 한 번 말하리까? 배가 못 움직인다 했소." "......!" "이미 키가 나갔소." "키, 키 따윈 없어도 상관없어." 부들부들 떨리는 두목의 손가락이 군사를 향해 치켜 올랐다. 그러나 군사는 희미한 미소만 짓고 있을 따름 이었다. "도(悼)를 믿는 거라면 그것도 포기하라 말하고 싶구 려." "......" 군사의 말이 끝나자 멍하니 서 있던 두목은 몸을 돌 려 선창으로 이어진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간 두목의 눈이 커지더니 뻗친 수염이 파르르 떨렸 다. 그 안에는 이미 가슴과 칠공(七孔)에서 검붉은 피 를 뿜고 쓰러진 수부 서른 명이 사방을 메우고 있었다. "으으으아아아아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쳐 받는 울분에 괴성을 토하는 두 목.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을 번뜩이던 두목은 옆구리에 걸친 기이한 도(刀) 한 자루를 뽑아 들더니 갑판으로 다 시 뛰어 왔다. 그 곳에는 군사가 여전히 서 있었다. "너, 넌 뭔데 날 이렇게 만드는 것이냐?" 치켜든 도로 군사를 가리키는 두목. 군사는 천천히 몸 을 돌렸다. "미안하게 됐구려." "할 말이 그것 밖에 없단 말이냐? 우리를 이렇게 만들 어 놓고?" "사람 목숨 어느 하나 가치 없는 게 있겠소만, 큰 일을 위해 어쩔 수 없었소. 내 사죄는 지옥에 가서 하겠소. 용서하시오." "이이이익! 죽여 버리겠다." 군사의 담담한 어조에 화가 치민 두목이 번쩍 도를 치켜 올리며 군사에게로 내달렸다. 그리고는 번뜩이는 도를 군 사의 목으로 내려쳐갔다. "컥!" 한 줄기 터지는 비명. 그러나 그것은 군사의 소리가 아 니었다. 어느센가 나타난 식솔 하나가 내려치는 두목의 등판을 갈라버린 것이다. 두목은 손에 든 도를 떨구더니 입으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왜 그냥 두지 않았느냐?" 두목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있던 군사가 씁쓸한 표정 을 짓더니 물었다. "......" 아무런 말이 없는 그를 보던 군사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 들었다. "됐다. 이미 모든 것은 끝난 것. 조금 일찍 가나 늦게 가 나 매한가지지." 그는 다시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미 상당수 해 적선들은 불에 타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남아 서 반항하는 해적들도 있었다. 그들은 이미 자신의 목숨 이 사라지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 들였는지 독기 오른 화살을 엄청나게 쏟아 붓고 있었다. 구석으로 몰린 쥐새 끼의 반항에 고양이는 상처를 입는다 했던가? 이미 해적 들에 의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던 것은 정화의 군단도 마 찬가지였다. "조금만 힘을 내라. 이제 모두 끝이다." 뒤에서 독려하는 정화는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이규를 바라보며 머리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구려." "들어가서 쉬시지요." 정사흠이 말을 건내자 정화는 그럴 수 없다는 듯 고개 를 저었다. "아직 전투가 끝난 게 아니오." "이 정도면 끝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만약 이런 곳에 서 상처를 입으시면 폐하께서 진노하실 것입니다. 그만 들어가십시오." 강한 어조로 말하는 정사흠의 말에 정화는 어이없는 표 정을 짓더니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잔당들의 공격이 매섭구려. 너무 급하게 밀어붙이 지 마시오. 천천히 우리 측 병사들의 피해가 없게 처리하 시오." "알겠습니다." 정화가 마지막 명을 내리고 몸을 돌려 사라지자 정사흠 은 다시 전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수 많은 배들이 불 에 타고 사라졌다. 함선은 피해가 그리 크지 않았다곤 하 나 상당수의 병사들이 피해를 입었다. 정사흠도 그것을 알기에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자! 마지막이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정사흠은 큰 소리를 내질러 오를 대로 오른 사기를 더욱 고취시켰다. 사방에서 큰 함성이 들려 왔다. 병사의 함성 을 듣던 정사흠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73- 침투, 그리고 조우 "뭐라? 다시 한 번 말해 보게. 피해가 얼마라고?" "그, 그것이..." 향항(香港) 부두(埠頭) 안쪽으로 삼십 여장 떨어진 곳 에 세워진 허름한 군막(軍幕) 안. 한 사내가 낡은 탁자 앞에 앉아 그를 둘러싸고 서 있는 십 여명의 사내들을 매섭게 바라보고 있다. 사내는 바로 정화였다. 해시(亥時)를 훌쩍 넘긴 밤. 이미 전투는 끝나 붉은 횃 불로 뒤덮였던 밤바다는 어느새 어둠에 잠겨 있었다. 부 두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들려오는 병사들의 신음이 없었 더라면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있었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십 여 개의 군막의 중앙에 세워 진 그곳은 독이 오를 대로 오른 한 사내의 분노로 가득 차고 있었다. "전사(戰死) 천 이백 오십에 경상과 중상 모두 합쳐 천 팔백 십 구명. 완침(完沈) 아홉, 반파(半破) 둘입니다." 듣고 있던 정화의 낯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건 심각해도 보통 심각한 게 아니었다. 호위함(護衛艦) 여덟 척이 별 소득도 없이 가라앉았을 때 이미 피해가 커 질 것을 예상했던 정화였지만 이건 예상을 뛰어 넘어도 훨씬 뛰어 넘는 것이었다. 정화의 안색이 붉어지다 못해 퍼렇게 물들어가자 한 함선의 대장이 앞으로 나서며 주절 거렸다. "마지막에 그 놈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한 탓에 그 피해 가 심각." 쾅! 사내의 말을 더 채 끝나기도 전에 정화의 불끈 쥔 주먹 이 탁자를 내려쳤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게요? 전투에서 궁지에 몰리 면 악착같이 저항하는 것은 당연한 일. 장군이라면서 그 딴 것도 생각 못한다는 게 말이냐 되냔 말이오." 이마에 푸른 핏줄을 세운 정화가 앞으로 나선 장군을 향해 고함쳤다. 말문을 열었던 장군은 정화의 추궁에 아무런 말도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일 따름이었다. 하지 만 다른 장군들도 마찬가지였다. 너나 할 것 없이 고개 를 숙인 채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있었다. 정화의 말은 자기들이 생각해도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지만 그것보단 자기들이 나서서 그의 꾸중을 감당할 용기가 없다는 게 더욱 큰 이유였다. 쓸데없이 나서서 그 화를 뒤집어쓰 기보단 지금 꾸중듣고 있는 장수가 계속 끝까지 들으라 는 장군들의 무언의 약속인 것이다. "폐하께서 그대들의 처분을 하실 것이니 도착할 때까 지 자중하도록." 더 이상 보고 있어 봤자 짜증만 날 거라 생각했는지 정 화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장군들을 밖으로 내쳤다. 고개 를 숙이고 있던 장군들은 등을 보이고 있던 정화에게 군 례(軍禮)를 취한 뒤에 조심스레 물러났다. 군막이 열리 던 소리를 듣고 있던 정화가 낮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 첩형은 잠시 남도록." 마지막으로 몸을 돌려 나가던 정사흠은 흠칫 하더니 자신을 돌아보는 이규에게 눈짓을 한 뒤 다시 정화의 탁자 앞으로 걸어왔다. 모두가 밖으로 나간 듯 하자 정화가 다시 몸을 돌렸다. "앉게나." 서 있는 정사흠에게 맞은 편의 자리를 권하는 정화. 그러나 정사흠은 가볍게 머리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앉으라면 앉게나. 자꾸 말하지 않게." 칼날이 벼린 듯 차가운 말에 정사흠은 조용히 맞은 편 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는 묵묵히 정화의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정화의 입은 열릴 줄 몰 랐다. 그저 둘 사이에 놓인 탁자만을 뚫어져라 내려 볼 뿐이었다. 정사흠은 갑자기 입이 바짝바짝 말라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손에서 땀방울이 맺히는 것도 같 았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기다릴 뿐. 멀리서 들리던 발자국 소리와 웅성거리던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고 사방에서 풀벌레 소리가 들려올 무렵 정화의 입이 열렸다. "흐음!" 긴 한숨 소리를 내뱉은 정화가 슬며시 고개를 들더니 정사흠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그의 눈길이 옆으로 돌아갔다. "이번 전투 어떻게 보는가?" 무엇을 묻는 것일까?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정사흠 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상관의 질문을 받았으 면 대답을 해야 하는 것. 정사흠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한 점이 있기는 합니다. 첫째는 해적들이 어떻게 폐하의 배를 공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조공품(租貢品)을 싣고 가는 배를 말입니다. 지 금까지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흐음!" 듣고 있던 정화의 눈이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 가늘어 졌다. 그러다 다시 빛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둘째는?" "두, 둘째는..." 다시 질문을 받은 정사흠은 갑자기 더듬거리기 시작 했다. 그러고 보니 둘째라. 무심코 말할 때 첫째를 붙 였는데 둘째라니. 정사흠의 낯이 서서히 붉게 달아올 랐다. 바짝 말라버린 입술에 침을 발랐지만 그런다고 없던 '둘째'가 떠오를 리 없었다. 눈을 찌푸려도 보고 숨을 크게 들이키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 생각도 떠오 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화의 굳은 얼굴에 가벼운 미소 가 떠올랐다. 아무 생각 없이 한 정사흠의 말이 심란 했던 그의 마음을 풀어 준 것이다. 피식 웃음을 터트 린 정화는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정사흠에게 말문을 열었다. "됐네. 안 떠오르는 걸 억지로 생각할 필요는 없지. 그냥 내 말이나 들어보게." "옛!" "일단 자네 말도 맞네. 무슨 이유로 갑자기 해적들이 우릴 습격했을까? 지금까지는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 는데 말이야. 거기다 해적 녀석들의 배는 상당히 조직 적으로 움직였어. 공격들도 상당히 매섭더군. 병법(兵法) 에 조예(造詣)가 있는 자가 아니고선 그렇게 하긴 어렵 지. 자넨 해적들이 그 정도로 병법에 조예가 깊다고 생 각하나?" "마, 말도 안 됩니다. 해적들이 어찌." "그렇지. 말이 안 되지. 안 되고 말고. 그럼 분명히 해적들이 아닌 다른 인물이 그들을 조종했다는 말인데 그게 누굴까." 하나의 의문이 떠오르자 정화는 가늘어진 눈 사이의 미 간(眉間)을 손가락으로 긁적이기 시작했다. "이상한 것은 또 있지. 무엇 때문에 우리측의 네 번째 함선이 왜 그렇게 쉽게 가라앉았을까?" 정화는 다시 질문을 날리며 그를 바라봤다. 아 하고 무 릎을 쳤지만 다시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입을 다문 정사 흠을 조용히 보던 정화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떠올랐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우리 함선에 문제가 있어서 공격 을 받자 바로 가라앉아 버렸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그 배는 이미 세 번이나 남 해 원정을 갔다온 배입니다. 문제가 있었다면 가라앉아 도 벌써 가라앉았을 겁니다." 절대 그럴 리 없다는 투로 펄쩍 뛰는 정사흠.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정화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네. 그랬다면 이미 가라앉았어야 마땅하 지. 하지만 지금 가라앉아 버렸어. 왜? 무엇 때문에 지 금 가라앉아 버렸을까? 그 배는 제대로 공격다운 공격 도 못 받았어. 가라앉을 이유가 없다는 말이지." 듣고 있던 정사흠의 눈이 가늘어지며 서서히 탁자로 내려갔다. 무의식중에 탁자결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던 그의 눈에 갑자기 생기가 떠올랐다. 번쩍 고개를 쳐든 그의 눈에 마주보던 정화의 미소 띤 얼굴이 눈에 들어 왔다. "호, 혹시?" 정사흠이 떠올린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듯 정화 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로 간세(奸細)야. 간세(奸細)가 침투해 있었 다면 말이 되지." "그럼 혹시 지금도 남아 있는 병사들 중에..."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지. 아니 충분히 있다고 봐야겠 지." 정사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당장 조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끝마치자마자 벌떡 일어선 정사흠은 바로 뛰어 나갈 듯 몸을 돌렸다. 하지만 정화는 그럴 필요 없다 며 그를 잡았다. "가 봐야 소용없네. 조사한다고 쉽게 나올 거면 시작 하기도 전에 들통났을 걸세." "그렇지만 해 보지 않고선 모르는 일입니다. 반드시 색출해 보이겠습니다." 이번 전투에서 별로 한 일이 없어서 정사흠은 정화에 게 미안한 감이 없지 않았다. 직접 전투에 뛰어 들어 칼부림을 하지 않는 이상 그의 힘이 필요 없음은 당연 지사였고,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비록 승리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겨우 명목상일 뿐 거의 패배 나 다름없는 전투였다. 해적 천 여명을 죽이는 데만 해 도 그 만큼의 병사가 사망했다. 그것뿐인가? 그 배나 되는 부상자들이 발생했다. 자신이 할 일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큰 피해를 입은 데 대해 자괴감이 없지 않은 그였기에 이렇게 자신이 할 만한 일을 찾자 바로 나선 것이다. 단호한 어조로 말을 꺼낸 정사흠은 정화가 다른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인사를 하고는 군막을 나섰다. 앉아 있 던 정화는 등을 보이고 사라져 가는 정사흠을 보며 고 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화는 다시 몸을 돌려 손을 턱에 괴고는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말을 못했지만 아직 의문점이 남아 있던 탓이다. '그들이 왜 그렇게 마지막에 허무하게 당했을까?' 전투의 마지막 부분은 그가 생각하기엔 너무도 허망 했다. 전투가 압승으로 끝나고 아군의 피를 전혀 흘리 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실제로 해적들은 몰살 을 하고 아군도 엄청난 피를 흘려야 했을 정도로 치열 한 전투였다. 그가 생각한 허무함이란 왜 해적선들이 전혀 도주를 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분명 패배 로 끝날 것이었음은 그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양쪽 에서 포위되어 싸웠을 때, 더군다나 병력의 차이도 압 도적인 상태에서 무슨 이유로 도망을 가지 않았을까. 이것이 정화가 지금 고민하는 것이었다. 앞의 두 가지 의문은 그나마 해결이 되었다지만 이번 의문점은 전혀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해적들이 조공품을 털기 위해 병법을 잘 아는 사람 을 초빙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준비해서 우리 쪽에 간 세를 심었다? 그 간세가 우리 함선에 구멍을 내서 가 라앉혔다?' 가만히 생각하던 정화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분명 이 생각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뭔가가 허전했다. 분명 생각지 못한 그 무언가가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왜 하필 네 번 째 배지? 조공선을 가라 앉혔다면 이 해라도 가지만 아무 것도 싣지 않은 배를 그냥 가라앉 혀 버렸다? 왜지? 무엇 때문에? 그리고 왜 도주를 하 지 않고 그냥 죽어 버렸을까?' 정화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을 하나씩 나열해 나 갔다. 그러나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이 날 것 같지 않자 정화는 자리에서 일어서 군막 안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 될 리 만무했다. 정화는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군막을 나섰다. "충(忠)!" 정화의 기분이 최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인가? 군막의 입구에 양쪽으로 도열한 두 명의 병사가 밖으 로 모습을 드러낸 정화에게 군기 서린 인사를 했다. 정화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하고 병사들이 있는 곳 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두 쪽으로 다가갈수록 정화의 귓가로 신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드문드문 경상자들의 모 습이 보이더니 갈수록 그 부상 정도가 심한 병사들이 누워 있었다. 옆에서 간호를 하는 병사들의 모습도 흔 해졌다. 걸음을 옮기던 정화의 눈이 찡그려졌다. "오셨습니까?" 수많은 부상자들 옆에서 서성거리던 장군 하나가 정 화를 보고선 급히 달려와 인사를 했다. 정화는 까딱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은 후 용건을 말했다. "정 첩형은 어디 있나?" "무슨 할 말이 있던 모양인지 아까 대장들을 불러모 으더군요." "그럼 그는 놔두고 이 당두나 불러 주게." 정화는 용건만 마치고는 다시 몸을 돌려 군막을 향해 걸어갔다. 명을 받은 장군은 부리나케 이규를 찾으러 달려갔다. "부르셨습니까?" 군막으로 돌아온 정화는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군막으 로 들어온 이규의 인사를 받았다. 정화는 별반 인사도 건네지 않고 바로 용건을 꺼냈다. "얼마면 부서진 배의 수리가 끝나지?" "넉넉잡아 오일은 걸릴 듯 싶습니다만." "오 일이라... 오 일." 이규의 대답에 정화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다 다 시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여기서 일 주일간 쉰다. 그리고 그 사이 어떤 일이 벌 어질지 모르니 감시를 철저히 하도록. 특히 조공품들을 유의해서 관리해라." "옛!" 이규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허리를 숙였다가 몸을 일으 킨 뒤 밖으로 나갔다. 이규가 사라지자 정화는 탁자 위 에 올려진 주먹을 불끈 쥐었다. 꽉 다물어진 입술에서 쓰라린 신음이 토해졌다. "좋다. 네가 원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다만 붙고 싶다면 붙어주지." 정화의 눈에 살기 어린 광망(光芒)이 번뜩였다. 정화가 향항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한 그 날부터 부 둣가엔 살기가 쉴 새 없이 흘렀다. 이미 큰 전투가 벌어 진 터라 병사들이 잔뜩 긴장한 탓도 있겠지만 정화의 노 여움에 몸이 달아오른 장군들이 더욱 그들을 닦달한 탓이 컸다. 부상병들이야 몸이 아프다는 것 외에는 그리 큰 불편함 이 없었다. 가끔 정사흠의 지시를 받은 병사들이 무엇을 취조하듯 캐 물어댔지만 그리 불편한 것도 없었다. 오히 려 죽어나는 것은 멀쩡한 병사들뿐이었다. 약 이 천에 가 까운 병사들이 무사했다고는 하지만 바다 쪽을 감시하랴, 산 쪽도 감시하랴, 무엇보다 조공품을 싣고 있던 두 척의 큼지막한 배 위에서 쉼 없이 순찰을 돌아야 하는 것은 엄 청난 고역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루 열 두 시진 중 열 시 진이라는 긴 시간동안 순찰을 돌아야 하는 것이다. 나머 지 두 시진만으로 식사와 취침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은 전쟁터에서도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비록 단련이 되어 있던 병사들이라고는 하나 하루, 또 하루 이렇게 시간이 자꾸 흘러가자 피로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 피로에 젖은 사내가 또 한 명 있었으니 바 로 그의 이름은 당우양이었다. 전투가 끝날 때까지 열심 히 구경을 했던 그는 전투가 끝나자 서서히 침투할 준비 를 하기 시작했다. 야밤을 틈타 구룡옥배를 가져오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충분히 일을 성사 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갑자기 그 날 밤부터 엄청난 횃불이 배를 뒤덮은 뒤 개미 한 마리 빠져 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감시가 심해진 것이다. 그의 경공 솜씨로도 침투할 엄두를 못 낼 정도였다. 하지만 여기까 지 온 판국에 감시 때문에 포기하고 돌아갈 순 없지 않겠 는가. 그는 필사적으로 숨어들 곳을 찾기 시작했다. 한 발짝 내딛는 것이 중원을 한 번 횡단하는 것 보다 힘들었다. 한 시진도 넘게 걸려서야 겨우 배 위로 올라탈 수 있었 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절벽에서 볼 때도 심각했 지만 가까이 와서 보니 이건 접근이 완전히 불허된 거 나 다름없었다. 대낮보다 더 밝은 배 위. 다섯 걸음마 다 한 명씩 서 있는 병사들. 당우양은 한숨만 푹푹 내 쉬며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날이 하루 이틀 지 속되다 보니 어느 덧 그의 체력도 서서히 한계에 다다 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여섯 째 되는 날. 당우양 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만큼은 침투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74- 침투 그리고 조우 (2) 일단 야음을 틈타 배에 침투할 작정으로 당우양은 낮 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어스름이 지고도 한 참을 더 숲 속에서 보낸 그는 자시(子時) 무렵이 되 자 서서히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접근해 봐서 알고 있지만 오늘도 역시 경비가 심했다. 그러나 문제는 침투가 아니었다. 오 늘만큼은 그냥 돌아갈 수 없다 생각한 그였기에 수 면초까지 숲에서 준비해 둔 그였다. 배 위에 올라가 수면초를 피워 두면 병사들을 완전히 잠재울 수는 없 다 할 지라도 반응을 둔감하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히 안전하게 돌아다닐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두 척의 배 중 어디에 구룡옥배가 있는 가 하는 것이다. 게다가 배를 찾는다고 해도 그 많은 조공품들 안에서 어디에 있는지 알고 찾는가. 모두 다 뒤져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반드시 조공품 안에 있다고 장담도 못하는 판국이다. 구룡옥배처럼 중요한 물품을, 거기다 크기도 작지 않은가. 특별히 다른 곳에 보관할 수도 있다. 게다가 까딱 잘못하면 들켜서 아무 것도 못한 채 그냥 도망 칠 수도 있는 것 이다. '그 딴 거 생각하면 아무 것도 못하지.' 당우양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잡생각을 지우려 고개 를 흔들었다. 준비는 끝났다. 이젠 실행 만 남은 것 이다. 당우양은 자신의 독문 신법인 선운만변(仙雲萬變) 으로 아무 기척 없이 접근해갔다. 속도에서는 최고라 할 수 없지만 그 변화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 다는 보법이 펼쳐지자 그의 신형은 모래가 바람에 흩 날리듯 사라졌다. 비록 아무도 자신을 볼 수 없다고는 하나 안전한 게 좋은 것이다. 당우양은 군막의 그림자가 져 있는 곳만 을 스쳐 지나갔다. 일단 목표는 정화의 군막이었다. 한 곳에 몸을 숨겼다가 사방을 한번 둘러본 후 또 다 시 앞쪽으로 나가길 몇 번. 그는 막사의 중앙에 놓인 목표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미 밤이 깊어서 그런 지 그 곳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당우양은 입가에 부드 러운 미소를 떠올린 후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하지만 안으로 든 직후 당우양의 몸이 섬칫하고 흔들렸 다. 정화가 아직 잠에 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탁자 에 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지 가만히 앉아 있었 다. 그는 당우양이 들어 온 것을 모르는지 그 자세 그대로 였다. 곧 침착해진 당우양은 겉옷이 아닌 하얀 속옷만 입고 있는 정화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만약 정화 가 가지고 있다면 상자 같은 곳이 아닌 몸 속에 감추고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곧 그는 실망할 수밖 에 없었다. 어디 한 곳 불룩 솟은 곳이 보이지 않는 것 이다. 당우양은 입을 이죽거리더니 조심스레 밖으로 나 갔다. 시간은 많지만 서두르는 편이 신상에 이롭다는 것 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 기척도 없이 밖으로 나온 당우양은 다음 목표인 조공선을 향해 신형을 뽑았 다. 많은 병사들이 지키고 있지만 몇 번이나 이곳에 왕 래를 한 적 있는 당우양을 찾아 낼 순 없었다. 곧 그는 배에 오르는 선창가까지 다가올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그의 한계였다. 배까지의 거리는 무 려 오 장. 단번에 오를 수는 있지만 문제는 수많은 병 사들이 그가 내릴 곳에서 지키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그는 결코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만반의 준비 를 해 온 탓이다. 그는 일단 병사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동했다. 마 지막 배가 정박된 곳으로 온 당우양은 사방을 조심스럽 게 살폈다. 병사들이 거의 보이지 않자 당우양은 입고 온 옷을 훌훌 벗기 시작했다. 속옷만 남기고 모조리 벗 어버린 그는 벗어둔 옷에서 수면초와 부싯돌을 흰 천에 싼 후 머리에 묶었다. 일단 그는 다시 사방을 살핀 후 천천히 바다 속으로 발을 담그었다. 생각보다 물은 차갑지 않았다. '수공(水功)을 배워두길 잘했군.' 그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싱거운 미소를 지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터라 가능한 많은 것을 익 혀두려 했던 당우양이었다. 그런 이유로 수공까지 익혀 둔 그였다. 물 속에 들어갈 이유라곤 목욕을 제외하곤 없었던 그였기에 수공 따윈 결코 필요 없다 여겼지만 이번에 익혔던 수공을 써먹게 되자 과거의 생각이 떠올 라 멋쩍어진 것이다. 그는 천천히 팔과 다리를 이용하여 물살을 가르며 헤 엄쳐갔다. 소리 없이 헤엄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특히 수공을 배웠다고는 하나 기본만 습득한 그로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위쪽에서 감시하는 병사들까지 신경을 쓰느라 더욱 녹초가 되 버린 그는 십 여장을 헤 엄친 후 배의 한편에 몸을 기대었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다시 앞으로 나갔다. 그렇게 몇 차례 휴식과 전진을 반복하자 목표로 잡았 던 두 대의 조공선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비록 시간 은 상당히 흘렀지만 당우양은 거의 일이 성사 된 듯 환 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방심은 화를 부르는 법. 당우양은 미소를 거두 고는 숨을 크게 들이킨 후 천천히 내뱉었다. 그리고는 팔을 물 속에서 꺼내 천천히 벽을 짚었다. 침투를 시작 하려 하자 온 몸에 긴장감이 찌르르 흘렀다. 그는 항상 이런 순간에 찾아오는 긴장감이 좋았다. 무언가를 목표 로 하여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물건을 꺼내 오는 것. 아마 그가 한 평생 도둑질을 하는 것은 이런 긴장감이 좋아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팔과 다리에 공력을 끌어 모은 당우양은 배를 타고 오 르기 시작했다. 수면에서 배의 갑판까지 높이만도 팔 장 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 배. 거기다 배는 위로 올라갈수 록 넓어지기에 수직의 절벽을 오르는 것보다 더욱 힘들 다. 수공으로 배까지 접근하는 시간의 배를 소비하고서 야 겨우 올라간 당우양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어 주 위를 살폈다. 역시 예상대로 상당한 수의 병사들이 주위 를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천히 병사들을 살펴본 당 우양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생각한 대로 병사들은 이미 피로에 젖어 있었다. 그 중 상당수가 졸기까지 하 고 있다. 며칠 전에 끝난 전투 이후로 쉬지 않고 감시 를 해댔는데 피로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누가 감히 배 를 침범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할 것이 분명하다. 더군 다나 처음 해적과의 전투 이후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 았다는 게 그들의 생각을 뒷받침할 것이다. 당우양은 함포를 쏘기 위해 뚫어둔 구멍에 몸을 고정 시킨 후 머리에 묶어둔 천을 풀어 부싯돌과 수면초를 꺼 내들었다. 수면초는 출발 전에 미리 바짝 말려둔 것이었 지만 바다를 건너오는 동안 습기를 머금었는지 조금 눅 눅해져 있었다. 부싯돌을 꺼내어 서로 탁 하고 부딪히자 반짝 불꽃이 튀었다. 특별히 소리가 나지 않게 주의했다 고는 했지만 자기 귀에 들리기엔 벽력처럼 울려 퍼졌다. 그는 등판 위로 한줄기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것 같은 느 낌이 들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사방을 살폈지만 들킨 것 같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간이 떨려서 안되겠군. 들키더라도 그냥 한 번에 해버 려야겠다.' 당우양은 손을 들어 얼굴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낸 후 부싯돌을 세차게 부딪혔다. 아까보다 더욱 큰 불꽃이 일더니 수면초 위로 떨어진다. 향불을 피운 듯 희미한 불과 함께 푸르스름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당 우양은 조심스럽게 불붙은 수면초를 배의 갑판 그늘에 올려놓았다. 밤이라 그런지 무거운 공기가 아래로 쫙 깔 려 있었기에 수면초의 연기는 공중으로 흩어지지 않고 사방으로 쫙 깔려서 퍼지기 시작했다. 이제 준비는 끝난 것이다.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비록 병사들 모두가 잠 에 빠지지는 않겠지만 정신이 혼미해 지기는 할 것이다. 일단 그는 병사들이 수면초에 취할 때까지 배의 끄트머 리에 매달려 기다렸다. 이미 시간은 자정을 넘기고 있었 다. 함포 구멍으로 병사들의 상태를 계속 살피던 당우양 은 충분히 병사들이 취했다 여겨지자 아주 재빠른 동작 으로 갑판 위로 올라섰다. 역시 그를 알아차리는 병사들 은 없는 듯 했다. 타오르는 불은 사방을 환하게 밝히고 있지만 이미 병사들은 피로와 수면초에 취해 고개를 제 법 앞뒤로 끄덕거리고 있었다. 당우양은 아주 빠른 동작으로 갑판의 선창을 향해 내 달렸다. 이미 며칠 전에 몇 번 와 둔 탓에 그 위치는 잘 알고 있었다. 병사들이 서 있는 곳에서 사각지대만 을 골라 내딛던 그는 곧 선미창으로 갈 수 있었다. 그 곳은 다른 배들과는 달리 상당히 앞쪽에 지어져 있었다. 다른 배들은 많은 수부들이 배를 젓게 선수창을 넓게 지 은 반면 이 배는 조공품을 싣기 위한 목적으로 선미창이 상당히 크게 설계된 듯 했다. 당우양은 선미창의 입구에서 사방을 한 번 둘러본 후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 간 당우양은 바로 코를 자극하는 강한 향을 맡을 수 있 었다. 밖은 별빛과 달빛으로 사물을 식별할 수 있었지만 여긴 아무런 빛도 없어 사물 식별이 불가능했다. 일단 그는 부싯돌을 부딪혀 빛을 뿜었다. 그러자 바로 옆에 있던 등이 눈에 잡혔다. 그는 손을 뻗어 등에 불을 붙였 다. 사방으로 빛이 환하게 퍼져 나가며 주위를 밝혔다. 천천히 주위를 살피기 시작한 당우양의 눈이 사방에 널 린 물건에 닿자 휘둥그래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엄청 난 광경이 펼쳐진 것이다. 엄청난 금, 은 세공품과 이상 한 병에 든 -아마 술과 향유 등으로 생각되는- 액체들. 무엇보다 그를 놀라게 한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한 기묘 한 동물들이 우리에 갇혀 있는 것이었다. 또 물 속에서 헤엄치는 이 장 정도의 긴 괴물은 무시무시한 눈을 번 뜩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 했다. "저게 뭐지? 괴상한 동물이군. 날 꼭 잡아먹을 듯 바라 보잖아." 소름이 돋는 듯 당우양은 몸을 한 번 부르르 떤 후 천 천히 주위를 살폈다. 일단 자신의 목표인 구룡옥배를 손 에 넣은 후에 나머지를 살피기로 한 것이다. 손에 든 등 잔을 높이 쳐 든 후에 사방을 유심히 살피며 앞으로 전 진했다. "이건 목걸이고, 으응? 이건 용정향이잖아. 이 냄새였 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상자에 든 것들을 하나씩 살펴보던 그는 자신이 찾고 있 는 물건을 찾지 못하자 다시 다른 상자를 살폈다. "이 상자는 술만 모은 건가? 응 저게 뭐지?" 술병을 들어 살피던 그의 눈에 술병에 비친 무언가가 번뜩였다. 병에 비친 물건을 찾기 위해 고개를 든 그의 눈에 정면의 벽걸이에 놓인 푸른 곽이 들어왔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이게 뭐지?" 푸른 곽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그는 등을 내 려놓고는 조심스럽게 열었다. "허억! 이...이건 비급이잖아." 그 곽 안에는 두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당우양은 심 상치 않은 이름이 적힌 비급을 천천히 들어 올려 넘겼다. 흔히 볼 수 있는 낡은 종이책자. 하지만 그 위에 쓰여진 글은 그 책들을 흔한 책으로 남게 하지 않았다. 파혈마혼(破血魔魂), 천존무급(天尊武 ) 세상에 흔한 게 고수라지만 이 비급들의 주인은 흔한 고수가 아니었다. 바로 오 백년전의 살성인 마후혈영(魔 后血影)이 남긴 최후의 심득(心得)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바로 파혈마혼인 것이다. 거기다 천존무급은 어떤 것인가. 바로 삼 백년 전 고수였던 혈수마인(血手魔人) 이자 천존무제(天尊武帝)의 무공이 기록된 비급이 아닌 가. 두 권의 책자들을 들고 있던 당우양의 손이 부들거리 기 시작했다. 구룡옥배를 훔치러 왔다가 그보다 더한 보물을 얻었다. 이건 기연(奇緣)도 보통 기연이 아닌 것이다. 어디서 이런 비급을 구할 수 있겠는가. 모든 무림인들이 목숨을 걸고 찾아 돌아다니는 것들을 이렇 게 손쉽게 얻다니. 당우양의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이미 그의 뇌리에는 구룡옥배란 단어는 남아 있지 않 았다. 귀밑까지 찢어진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려 한다. 그 러나 웃고 싶다고 웃어서는 안 된다. 만약 여기서 웃다 간 그냥 죽음인 것이다. 그는 두 손으로 귀밑까지 찢어 지는 입을 감싸쥐어야 했다. 한참을 그렇게 웃더니 웃음을 멈춘 후에 두 권의 책자 를 가슴속에 집어넣었다. 원래 교송평원도(喬松平遠圖) 의 대금으로 지불하기 위해 가져온 삼 만냥의 환을 푸 른 옥함 속에 집어넣은 그는 등불을 끈 후 문고리를 당 겼다. 파팟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던 그의 머리 위에서 작은 암기 들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왔다. 헉! 몇 개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암기들이 몸을 찔 러오자 당우양의 낯이 확 변했다. 그는 공격을 받은 순간 앞쪽으로는 피할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로 뒤쪽으로 몸을 튕겼다. 그의 몸이 사라진 갑판 위에 흰 은침들이 빼곡이 틀어박혔다. 다시 어두운 선창으로 들어온 당우양은 두 손으로 가 슴과 허벅지 앞을 막으며 자세를 잡았다. '누구지? 분명히 들어올 땐 없었는데.' 당우양의 이마를 타고 땀이 흘러 내렸다. 분명 문을 연 직후 바로 암기가 날아왔다. 한 번에 날아온 숫자가 거의 수십에 달할 정도이면 암기에 대한 조예가 상당한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당우양은 공격한 사람이 누구인 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보통 암기를 잘 쓰는 사람은 흔 치 않아 당우양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 사람들은 보 통 자기만의 독특한 암기를 쓰는 반면 지금 날아온 암 기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세침(細針)일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당우양은 활짝 열린 문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자신 을 공격한 사람은 문안으로 들어올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계속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다. 무조건 빠져나가야만 한다. '그런데 왜 병사를 부르지 않는 거지?' 잠깐 이런 의문이 스치고 지나가자 그는 조심스레 앞 으로 다가갔다. 분명 침입자를 봤으면 크게 외쳐야 정 상이다. 그런데 암중의 인물은 전혀 그러질 않았다. '그도 나처럼 뭔가를 훔치러 온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들자 당우양은 문 앞에서 전음으로 외쳤다. <이보시오. 누군지 모르겠지만 무엇 때문에 공격하는 거요? 당신도 여기를 털러 왔다면 우린 동업자인데 이 렇게 싸울 필요는 없지 않소.> 그러자 변조된 듯 투박한 전음이 귓가로 들려왔다. <동업자라... 좋아.> 목소리에 살기가 들어있지 않는 것을 느낀 당우양은 충분히 말이 통할 거라 생각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무엇을 원하는 거요? 난 이미 내가 원하는 것을 챙겼 으니 같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대가 원하는 것만 찾으면 되겠구려.> 당우양은 상대가 자신보다 더욱 고강한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저 사람과 붙는다면 십중팔구 질 것이 다. 재수 없어 그가 두 개의 비급을 원한다면 잠깐 그 를 속인 후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밖으로 나설 수만 있다면 충분히 내뺄 수는 있을 것이라 생각 했다. <난 구룡옥배를 가지러 왔다. 혹시 당신도 그것을 원 하는 것은 아닌가?> 당우양은 그의 말에 잠깐 놀랐지만 다시 쾌재를 불렀 다. 잠깐 놀란 것은 자기만큼 정보가 빠른 사내가 있다 는 것이 놀라웠던 것이고, 쾌재를 부른 것은 그도 역시 파혈마혼(破血魔魂), 천존무급(天尊武 )에 대해 모른 다는 것이다. <난 구룡옥배에 관심이 없소. 아직 손을 대지 않았으 니 그대가 원한다면 가져 가시오.> <그래? 그거 다행이군. 그런데 왜 도둑이 구룡옥배에 관심이 없다는 거지?> 상대의 집요한 질문에 당우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뭘 그렇게 묻느냐 쏘아붙이고 싶지만 그럴수록 불리한 것은 자기 뿐이라 생각한 그는 북받치는 울분을 삭이며 말을 이었다. <난 돈만 있으면 되오. 충분히 챙겼으니 이만 가려는 것이오.> 그 말에 암중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전음이 아닌 그냥 웃음이기에 당우양은 다급해졌다. <미쳤소? 그렇게 웃으면 당신이나 나나 다 들킨단 말이 오.> 그의 말에 암중인은 웃음을 거두고는 다시 한 마디 말 을 던졌다. <천하의 신투(信偸)가 돈이나 훔친다? 개가 웃겠군.> 그 말에 당우양의 안색이 확 변했다. <당신이 누군데 날 아는 거요?> <그건 상관없지. 뭐 어쨌든 당신이 그걸 챙기는 게 아 니었다면 내가 손을 쓸 필요는 없겠군. 일단 뒤로 물러 서게.> 그의 말에 당우양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왜 그러는 거요. 난 내 볼일을 마쳤으니 그만 나가야 겠소.> <그대가 나간 후에 병사들에게 들키면 나만 바보 되는 것 아닌가? 일단 내가 일을 끝낼 때까지 기다려.> 당우양은 그 말에 속에서 치받는 불길을 억누르려 안 간힘을 써야 했다. 허나 힘이 없는 걸 어쩌겠는가. <알겠소.> <알았으면 물러서.> 그의 말이 떨어지자 당우양은 천천히 물러섰다. 그러 자 선창 위쪽에서 한 인영이 바닥으로 뛰어 내렸다. 갈 색 장의(長衣)를 걸친 사내였다. 얼굴엔 검은 면포를 뒤집어 쓴 터라 전혀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었다. '흠 병사들의 복색(服色)과 똑같군. 저걸로 병사들처 럼 꾸며 침투한 것인가?' 당우양은 선창 안으로 들어오는 사내를 보며 이런 생 각에 잠겼다. 그가 자기 쪽으로 다가오자 그가 통과할 수 있게 옆으로 비켜섰다. <기다릴테니 빨리 찾으시오.> <구룡옥배를 봤나?> 옆을 통과하다 말고 사내는 자리에 멈춰 서며 당우양 에게 물었다. <나도 아직 보지 못했소. 워낙 많다보니 못 찾았소.> 당우양은 모르겠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를 마주보고 서 있던 사내의 눈이 살짝 빛나기 시작했다. <너무 많아서 못 찾았다? 나도 못 찾겠군. 그러면 어 쩐다? 할 수 없지. 자네의 품속에 있는 비급을 내가 가 지는 수밖에.>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두 손으로 당우양의 가슴 팍을 잡아왔다. '헉!' 너무도 갑작스런 공격에 당우양은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하고 가슴의 옷을 잡혀 버렸다. 사내는 두 손으로 가 슴의 옷을 콱 틀어쥔 후 밑으로 찢어 내렸다. 그러자 품에 넣은 두 권의 책자가 아래로 떨어졌다. 당우양은 급하게 두 손을 뻗어 책을 나꿔채 갔다. 하 지만 사내의 동작이 더욱 빨랐다. 내뻗는 당우양의 손 을 안쪽에서 밖으로 밀어 낸 후 떨어지는 책자를 먼저 낚아챈 후 붕 떠올라 발로 그의 가슴을 쳐 버렸다. -퍼퍽!- 가슴을 맞은 당우양은 그대로 선창 문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하지만 전혀 내상이라곤 입지 않았는지 나 가떨어진 당우양은 벌떡 일어서서 암중인을 바라보았 다. "이이잇......" 자신을 무섭게 바라보는 당우양을 미소로 반긴 사내 는 두 권의 책을 가슴 쪽에 집어넣으며 갑판으로 나왔 다. 그리고는 자신의 얼굴을 가린 천을 확 벗어 버렸 다. 생전 보지 못한 인물이었다. "지금 그렇게 있을 때가 아닐텐데. 병사들이 올 거야." 사내는 싸늘한 미소를 짓더니만 사방에 대고 엄청난 목소리로 외쳐댔다. "침입자다. 도둑이야." "너...넌?" 갑자기 안면을 바꾼 그가 크게 외쳐대자 당우양은 손 을 들어 그를 가리키며 안면을 찌푸렸다. "자네가 알 필요는 없어. 그건 그렇고 이렇게 기다리 다간 도망도 못 가고 잡혀 버릴 거야. 빨리 도망가라고." 사내는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선창 문 옆에 놓여진 긴 창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완전히 병사들과 똑같은 복장 이 되었다. 그가 변해가는 모습을 보고 있던 당우양의 입에서 뿌드득 하는 이빨 갈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침입자라고. 어디야 어디?" 갑자기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도망가지 않나? 자네가 도망가야 나도 안전하게 도망갈 수 있지 않겠나? 어서 서두르게." 사내는 능글맞은 미소로 당우양을 놀려댔다. 당우양은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공격하기엔 자신의 실력이 너무 뒤떨어졌다. 더군다나 지금 병사들이 몰려오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당우양은 결코 그를 잊지 않겠다는 듯 그 의 얼굴을 바라 본 후 신형을 뽑아 올렸다. 그가 돌려 날 아가는 곳에는 어김없이 병사들이 경계를 하며 다가오다 가 그를 잡으러 달려 왔다. "이익! 비켜라." 당우양은 손을 쓰기보단 그저 더욱 빠르게 몸을 놀려 빠 져나갈 뿐이었다. 그가 배에서 뛰어 내리자 더욱 많은 병 사들이 그를 막았다. "이얍!" 당우양은 필생의 공력을 모아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의 신형이 안개처럼 흩뿌옇게 흩어져갔다. 그러나 병사 들 치고 그를 잡을 만큼의 실력을 가진 자는 없었다. 당 우양은 별 어려움 없이 몸을 내뺄 수 있었다. 그가 수많은 병사들을 헤치며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고 있던 갈의의 사내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빨리 가서 알려라. 이제 여기의 일은 모두 끝난 것인가. 후후후!" 사내는 그렇게 낮은 웃음을 흘리다 가벼운 동작으로 사 라져갔다. -75- 침투, 그리고 조우 (3) "조심해!" "흥! 이쯤이야 문제없지." 중천에 떠 오른 해가 사방을 환하게 비출 무렵 완연한 푸 른 잎으로 단장한 초원 위에서 한창 칼부림을 벌이고 있는 두 남녀가 있었다. 바로 천인문과 조기혜였다. 천인문의 손 에 들려 있는 검은 바로 조기혜의 봉황검(鳳凰劍)이, 조기 혜의 손에는 봉황검의 검집이 들려 있었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비무(比武)는 이미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됐는지 두 사람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특히 천인문의 경우는 콧잔등을 타고 흐르는 땀에 다 쌕쌕 하는 숨가쁜 소리도 들려왔다. 천인문이 완벽하게 부상에서 벗어난 것은 겨우 일 주일 전 이었다. 조기혜는 무슨 생각인지 천인문이 자리를 털고 일 어서자마자 바로 비무를 신청해 왔다. 천인문도 그녀의 비 무 신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검무(劍舞)와 검 술(劍術)을 몇 차례 관전한 적이 있었기에 걱정 따윈 하지 도 않았다. 허나 천인문의 생각과는 달리 그녀의 공격은 거 셌다. 솔직히 그것은 말이 비무였지 조기혜의 일방적인 가 르침이나 다름이 없었다. 비무란 것이 일반적으로 어떤 한 사람이 다른 인물에게 그 강함을 서로 비교하기 위해 도전 하는 것이라면 지금과 같이 실력이 완연히 차이나는 경우 엔 비무란 말 대신 한 수 가르침을 내린다는 말을 써야 할 것이다. 솔직히 그녀에게는 다른 생각이 있었다. 천인문의 무공을 통해 중원의 무공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파악하는 것이 원 래 진의(眞意)였다. 그녀는 천인문을 가르쳤다는 할아버지 란 사람이 엄청난 고수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검기(劒氣) 혹은 검강(劒 )으로 추정되는 상처 자국만 봐도 확실했다. 비록 천인문이 그에게 제대로 배우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그의 무공 중 일반적이지 않은 그 무언가를 어느 정도는 습 득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고 아마 비무 도중에 어느 정도 그 모습이 드러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 정도만 해도 대충은 파 악해 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다 른 중원의 고수들과의 비무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혜택을 줄 것이 분명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그녀의 오산 이었음이 바로 밝혀졌다. 훌륭한 공격은커녕 그럴싸한 공격 이라 칭할 만한 것도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다만 시정 잡배들보다 조금 나은 듯한 공격과 가끔씩 나오는 추잡한 공격이 다였다. 지금도 그랬다. 천인문의 검이 머리를 향해 찔러온 검집을 막은 후 빙글 돌아 그녀의 가슴을 찔러 왔다. 조기혜의 얼굴은 잠깐 붉 어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천인문의 그런 공 격을 여러 차례 맛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추잡 하고 금지된 공격법이었지만 자신의 미모에 혹했던 사파의 무리에게 그런 공격을 받았던 적이 있었던 그녀로선 '무공 이란 칼을 들고 사람의 목숨을 노리는 것인데 왜 상대의 약점을 찌르지 않느냐'는 천인문의 말에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내 몸을 옆으로 빼며 월녀검법(月女劒法)의 오성 유관(五星流貫) 초식으로 인당(印堂), 염천(廉泉), 양쪽 중 부(中府) 그리고 거궐(巨闕) 다섯 혈도를 빠르게 찔러 왔다. 이런 공격에서 몸을 뒤로 빼면 상대에게 주도권을 내어준 다는 사실을 옥조영에게 배워 알고 있던 천인문은 두 손으 로 검 자루를 콱 틀어 쥔 후 세차게 위로 그어 올렸다. 그 러자 인당(印堂)을 제외한 네 군데의 공격은 차례로 막혀 버렸다. 하지만 인당혈을 향한 그녀의 검집은 더욱 빠르게 목표 지점으로 날아갔다. 천인문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철판교(鐵板橋)의 수법으로 완전히 뒤로 넘어가 인당을 향한 그녀의 공격을 무산시킨 뒤 두 손으로 땅을 짚은 뒤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천인문이 다 일어서기도 전 그녀는 땅에 붙은 다리 를 향해 검집을 휘둘러왔다. 바람을 베는 소리가 들리자 천 인문은 바로 나려타곤(懶驢打滾)의 수법으로 바로 뒤로 뒹 굴었다. 한 바퀴 돌아 일 장 여 거리를 확보한 천인문이 자리를 박 차고 일어서자 그녀의 아름다운 옥용에 걸린 미소를 볼 수 있었다. 천인문도 그녀에게 미소로 화답을 보낸 후 검을 치 켜세웠다. 그녀는 곧추세운 검집을 아래로 떨구며 입을 열었 다. "오늘은 그만 하도록 하자." 그녀의 말에 천인문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왜 그만해요. 이제 몸이 좀 풀리는 것 같은데." "됐다. 네가 나려타곤(懶驢打滾)을 시전 했으니 오늘은 여 기서 끝이다. 그나저나 오늘 네가 나려타곤(懶驢打滾)으로 피한 시간이 일 각이 조금 넘는구나. 많이 좋아졌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는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천인문 이 전혀 그녀의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무공을 익혀 나가는 것이 상당히 빨랐던 것이다. 뭐랄까 바짝 마른 모래가 물을 빨아들이듯 천인문은 그렇게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와 천인문의 비무는 항상 천인문의 패배로 끝이 났다. 물론 천인문은 거의 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단지 과거 옥조영에게 배웠던 무공의 기초만으로 검술에 대입시키는 방도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분명 그에게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일 초식을 못 받 아내던 첫날과는 달리 둘째 날은 일 수유나 버텨냈다. 삼일 째는 그 배나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갈수 록 그의 실력은 나아지기 시작했고 일 주일 째가 되는 오늘 은 거의 일각이나 버틴 것이다. 검이란 어찌 보면 참으로 신기한 것이었다. 가장 쉽게 배 울 수 있으면서도 가장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검이었 다. 천인문이야 뭔가를 들고 다닌다는 것이 귀찮았기에 검 을 싫어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요즘은 슬슬 검술에도 재미가 들고 있었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그 열의가 상당히 중요하다. 그것 이 문(文)이건 무(武)이건 간에 어떤 목표 의식이 없다면 아 무리 해도 배우기 힘든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과거 석실에서 무공을 익혔던 것은 재미보단 서혜령에게 무시를 당하지 않 기 위해 익혔었던 것이었고, 옥조영에게 무공을 배울 때는 단순히 맞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가 히 천하 제일의 미녀라 부를 만한 여인에게, 그것도 그리 아 프지도 않고 조금씩 재미있게 배우다 보니 검에 대해서도 관 심이 가는 것이었다. 재미가 있다보니 스스로 파고드는 열의를 보이는 것도 당연 한 일이었다. 물론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 다. 필요하다면 나려타곤(懶驢打滾)이 아니라 상대의 가랑이 밑으로 피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천인문이었다. "됐어. 오늘은 그만하고 내일 다시 하자. 너도 이젠 실력 이 올라갔으니 내일부터는 난 내공을 쓰도록 할거야. 아마 각오해야 될 걸." 조기혜는 계속하자는 천인문에게 으름장을 놓고는 몸을 돌 려 묘옥 쪽으로 내려갔다. 천인문은 그녀가 사라져 가는 모 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손에 쥔 봉황검을 들어 올렸다. '내공을 쓴다고? 흠 내공을 쓰면 누나가 불리할 텐데.' 천인문은 그녀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자신의 내공이 그녀보다 더 강하고 또 그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 다. 내공만 강하면 무조건 승리한다고 믿고 있는 천인문으 로선 당연히 고개를 갸웃거릴 만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 해도 그녀가 자신만만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분명 뭔가 있을 거야. 안 그러면 내공을 쓸 리가 없지.' 과거 진무릉과의 싸움에서 진 것이 내공의 문제가 아니었 음을 이미 사그리 잊어버린 천인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얼 굴에 떠오른 알 수 없는 자신감을 상기한 그는 천천히 고 개를 끄덕이고는 검을 앞으로 내밀어 자세를 잡았다. 비무 가 끝났으니 이젠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조기혜의 검무(劍舞)를 펼치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녀의 아름다운 춤을 본 탓에 단지 따라하고 싶 었을 뿐이었다.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현재 그녀가 쓰는 검술은 그녀의 검무와 동일했다. 어떻게 검무가 검술 이 될 수 있었는지 처음에는 그에게 아리송한 것이었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바로 그녀에게 이야기를 들어 알 수 있 었다. 치료 도중 항상 봐 왔던 그녀의 검무는 이미 천인문의 머 릿속에 간직되어 있었다. 몇 번이고 봐왔으니 충분히 외울 수 있었다. 천인문은 서서히 들쳐 올린 검을 옆으로 휘두르 며 그녀의 동작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검이 슬슬 속도를 붙 여가며 빛을 뿜어내었고 다리와 팔의 움직임도 아름다웠던 그녀의 동작과 전혀 틀림이 없었다. 허나 얼마 시간이 지나 자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했는지 검무가 펼쳐지는 속도가 자 꾸 느려지고 있었다. '헉헉!' 결국 천인문은 숨을 헐떡이며 그녀가 펼쳤던 검무를 완전 히 다 펼쳐 보이지도 못한 채 멈추어 버렸다. 검을 땅에 푹 박아 버린 후 그 자리에 앉아 버렸다. '무엇 때문에 다 못 펼치는 거지? 분명 내공도 내가 많은 데 말이야.' 오늘은 그녀의 검무를 펼친 지 삼일 째 되는 날이다. 분명 모든 동작은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결국 그녀를 따라하는 것은 실패해 버렸다. 이유야 간단했다. 독특한 내공 심법을 필요로 하는 검무를 심법도 모르는 채 따라한 것은 어불성설 이었다. 그래서 그녀도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천인문은 계속 실패를 거듭할 뿐 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쉬자.' 골똘히 생각하던 천인문은 머리가 지끈거리자 바로 포기하 고 들판에 대자로 누워 버렸다. 그러자 요즘은 느껴보지 못 했던 자연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풀잎 내음을 머금은 살랑거리는 바람과 사방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 작지만 독특한 풀벌래 소리 그 모두가 노곤한 심신을 풀어주는 활력 소로 다가왔다. 벌판에 누워 있던 천인문의 얼굴에 기분 좋 은 미소가 걸렸다. "각오 단단히 해야 돼." 다음날 그녀는 공인한대로 내공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미 그녀의 공격 성향은 잘 알고 있던 천인문인지라 공력을 끌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기혜는 바로 검집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더니 일직선으로 머리를 베어 왔다. "타앗!" 공격이야말로 최선의 방어. 천인문은 바로 검을 들어 검집을 막은 후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그녀의 품으로 뛰어 들어갔 다. 그녀의 인후(咽喉)를 찔러 가는 검이 세차게 울음을 터 트렸다. 조기혜는 바로 옆으로 비켜서는가 싶더니 한 바퀴를 핑그르 돌며 바로 천인문의 찔러온 팔 쪽의 곡지혈(曲池穴) 을 노렸다. 그럴 것이라 예상했는지 천인문은 찔러 가는 팔을 거두며 그녀의 팔의 양곡혈(暘谷穴)을 노렸다. 그녀는 검집을 거꾸 로 잡아 돌리며 검을 막아냈다. "역시 많이 좋아진 것 같아." 한 발짝 뒤로 물러선 그녀가 입을 열자 천인문도 웃는 낯으 로 그녀에게 화답했다. "뭘 이 정도야 가뿐하지." "그래? 그럼 이제부터는 달라질 걸." 그녀는 짧게 말을 끝낸 후 검집을 수평으로 들어올렸다. 그러자 검집을 중심으로 막강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천인문 도 안색이 바뀌었다. 달라진다 했지만 설마 했는데 정말 장 난이 아닌 것 같았다. 바로 온 몸의 공력을 끌어 모아 검으 로 모으고는 그녀의 검집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온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듯 무서운 기세를 내뿜던 그녀 가 어느 순간 검집을 내갈겼다. 그녀의 검집은 세찬 바람을 머금은 채 천인문의 목을 베어갔다. 빠르긴 했지만 단순한 변화만 보이는지라 거리낌 없이 검으로 앞을 막았다. 그 순 간 뿌옇게 환영을 남기고 사라져 버린 검집은 다시 복부 앞 에서 그 모습을 나타냈다. 갑자기 검집이 노리는 반경이 바뀌자 천인문은 경악의 외 마디를 내지르며 물러섰다. 그러자 그녀의 검집이 몇 배로 나뉘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분명 옥할배가 몽둥이로 날 때릴 때 당했던 방식 같 은데.' 연거푸 찔러오는 검집을 피하며 천인문은 생각했다. 분명 한 번 피하면 더 공격이 강해질거라 했는데 그걸 잊어버리 다니. 천인문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으나 일단 지금은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라 생각하고는 정신을 집중해서 그녀 의 공격을 받아넘기기 시작했다. 하나를 막으면 둘이 더 늘었지만 처음에 몇 배로 늘었을 때보단 부담이 줄어들었 다. 그렇게 그녀의 공격을 받아넘기기만 했지만 그것도 얼 마 가지 못해 그녀의 공격은 거의 전면의 모든 혈도를 찌 를 듯 늘어나 있었다. 이렇게는 안되겠다 생각한 천인문은 뒤로 펄쩍 뛰었다. 단 번에 일 장 여 거리를 물러서며 자세를 잡았다. 조기혜는 한 번 밀어붙인 기세를 놓치지 않겠다 생각하고는 거리를 바로 좁히며 검집을 내질렀다. 천인문은 다리에 힘을 주고 서서 온 몸의 공력을 검에 모 았다. 분명 그녀보다 나은 것은 공력 밖에 없다 생각한 탓에 검집에 강한 충격을 주어 날려버리기로 했다. "얍!" 강력한 내공이 담긴 검은 광풍을 몰고 찔러오는 검집을 향 해 날았다. 그러자 수백으로 보이던 검집의 모습이 공중에 서 꺼지듯 사라져 버린다. 천인문은 깜짝 놀랐다. 자신을 찔러오는 모든 검집의 모습이 사실인 듯 했는데 거짓이라 니...... 그러나 그것이 환영검(幻影劍)의 일종임을 깨닫는데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의 검집이 몇 개만 남기고 사라 져가자 그는 더욱 자신감을 가지고 그녀를 향해 검을 찔러 갔다. "이젠 내 차롄가? 조심하라고." 그녀의 검집을 쥔 손을 강한 공력으로 충격을 줘서 떨구기 로 생각한 천인문은 그녀의 몸을 노리지 않고 몇 개만 남은 검집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그의 생각과는 달리 검은 바 로 검집을 잘라버렸다. 천인문의 눈이 살며시 커졌다. 자르 긴 했으되 잘린 느낌이 손에 느껴지지 않은 탓이다. 그런 그 의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다시 검집의 모습이 모래 흩어지 듯 사라지더니 이번에는 다리 쪽을 노리며 날아왔다. 천인문은 바로 오른쪽 다리로 검을 내려 막았다. 그러자 다 시 검집이 희뿌연 연기처럼 흩어져 버리더니 이번에는 왼쪽 팔꿈치를 노리고 날아왔다. 이번에도 검으로 막기 전에 검집이 다시 사라져 버리자 불 평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칫! 왜 자꾸 피하기만 하는 거에요? 좀 제대로 하자고요." "좋아." 그녀가 바로 동의하자 천인문은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가 장 빠른 속도로 그녀의 명치에서 이마 쪽으로 검을 쳐 올려 갔다. 그녀는 검집을 아래로 눕혀 쳐 올라오는 검을 막아갔 다. '내 강한 공력이 실린 검을 막겠다?' 이젠 이겼다 생각했는지 천인문의 얼굴에 웃는 기색이 역력 했다. 쳐내다 못해 아예 검집까지 잘라버리겠다 생각하고는 더욱 힘을 강하게 넣었다. 그러나 그 미소가 사라져 버리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퍽 하는 투박한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그의 검이 검집에 완 전히 붙어버렸는지 그 자리에서 멈춰 버린 것이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눈이 찻잔만큼 커져버린 그는 이빨을 질끈 깨물고 더욱 강 하게 내공을 일으켰다. 그러나 여전히 검은 요지부동이었다. "이익! 이 까짓......" 화가 나서 검에 더욱 공력을 밀어 넣으며 낮게 외치던 천인 문은 입을 열자 바로 공력이 빠져나감을 느끼고는 입을 다물 었다. 조기혜는 빙긋이 웃더니 검집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 녀의 검집에는 전혀 힘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자석처 럼 붙어버린 검을 가볍게 위로 들어 올렸다. 천인문의 얼굴 에 경악이 어렸다. 분명 필생의 공력을 다 밀어 넣고 잡아당 기는데도 결코 그녀의 힘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다. 완전히 머리위로 검이 끌려 올라가자 그녀는 화사한 미소를 지은 후 낮은 기합성과 함께 검집을 뿌리쳤다. 그러자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아무런 저항 없이 빠져 나갔다. "앗!" 경악성을 토하는 천인문의 머리 위로 그녀의 검집이 벼락치 듯 내려쳐졌다. 검집이 머리 바로 앞까지 다가오자 천인문은 두 눈을 찔끔 감았다. 그러나 머리에 타격이 느껴지지 않자 그는 천천히 실눈을 떴다. 그녀의 검(劍)은 머리 위 반 치를 남기고 멈춰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쪽으로 깊숙이 박혀 버린 봉황검이 바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생각보단 괜찮은 것 같구나." 머리 위에 멈춰진 검집을 아래로 내린 그녀가 땅에 박힌 검을 뽑으며 말을 던졌다. "어떻게 된 거지?" "뭐가?" "왜 내 검이 누나 검집에 붙어 버린 거냐고? 그게 무슨 수 법인지 좀 말해 봐 바." 한번도 보지 못했던 것을 겪은 천인문은 그녀를 잡고 늘어 졌다. "아! 그거. 별건 아닌데."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으로 천인문을 내려다보던 조기혜 는 그를 살짝 째려보며 되물었다. "내공이 최고라며? 그런데 왜 그런 게 알고 싶을까?" 천인문은 그녀가 자신을 놀리는 것을 알아차리자 잠시 짜 증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상대는 옥조영이 아니 라 여자였다. 그것도 엄청난 미녀다. 천인문은 귀여운 미소 를 지으며 몸을 배배 꼬았다. "뭘 모르는 동생이 부탁하는데 빼지 말고 좀 가르쳐 줘~." 그 모습에 그녀는 입을 가리고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 을 웃고 난 후에야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 "이건 이화접목(移花接木)이야. 들어 봤을 텐데?" "이.화.접목?" 이름을 조용히 되뇌던 천인문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한 번도 못 들어 봤는데." "흐음! 이상하네. 못 들어 봤을 리가 없을 텐데." 덩달아 조기혜도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대충 머리를 정리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북해빙궁(北海氷宮)의 독문 절학 중 하나야. 상대의 힘을 빌어 그 공격을 되돌리는 방법이라 말하면 쉽게 설명이 될까. 일단 나의 힘이 약해도 충분히 적을 상대할 수 있기 때문에 아주 유용한 방법이지." 그녀는 아주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좀 가르쳐 줘. 누나!" 하늘을 보며 생글거리고 있는 조기혜의 옆구리를 푹 찔러 정신을 차리게 한 천인문은 그녀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미안하지만 안 돼. 이건 함부로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아 냐. 아버지께서 아시면 경을 치시려고 하실 거야." 그녀는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이 고개를 저었다. "좀 가르쳐 주라. 으응?" 애교 섞인 음성으로 졸라댔지만 그녀는 여전히 요지부동이 었다. "안 된다고 했지." 단호한 어조로 말을 맺고는 그녀는 몸을 돌렸다. 천인문 은 한 번 더 그녀를 졸랐지만 더 말하기 싫은지 그녀는 바 로 등을 돌리고 사라져 버렸다. "흥! 그래 그까짓 것 안 배워. 안 배우면 될 거 아냐. 칫." 천인문은 몸을 돌려 사라져 가는 그녀의 등에 대고 큰 소리 로 외쳤다. 바로 땅에 놓인 돌을 발로 차버리고는 몸을 돌렸 다.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달아오른 그가 소리 높혀 휘파람을 불 었다. 그러자 저 멀리서 일묘(日猫)를 태우고 있던 흑풍이 소리 높여 투래질을 하더니 순식간에 달려왔다. 천인문은 앞 으로 다가온 흑풍의 몸 위로 번쩍 날아 올라 가볍게 안착했 다. "흑풍아. 정말 오랜만이야. 근데 내 기분이 오늘 말이 아니 야. 귀여운 동생이 뭔가를 좀 가르쳐 달라는데 어떤 마녀 같 은 여자가 완전히 무시해 버렸어." 기분이 나빠 툴툴거리는 천인문을 등에 태운 흑풍이 기분 풀라는 듯 길게 울음을 터트렸다. "그래 내 기분 알아주는 건 너 뿐이다. 치이! 흑풍아 기분 도 더러운데 한 번 달려 보자." -히히히힝!- 길게 화답을 한 흑풍이 번쩍 다리를 쳐들었다가 앞으로 힘 차게 질주를 시작했다. 오랜만의 달리기라 그런지 흑풍은 더욱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엄청난 속도로 질주해 가자 긴 머리가 온통 뒤로 흩날렸다. 바람은 아플 정도로 얼굴에 와 닿았고 눈은 따끔거려 뜰 수가 없었다. 천인문은 몸을 앞으로 수그렸다. 엄청난 속도로 지나가는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슬몃 겁이 나는지 흑풍의 목갈기 털 을 와락 움켜쥐었다. "그래 달리는 거야. 오늘 죽어라고 한 번 달려 보자구." 천인문이 고개를 숙인 채 외쳐대자 흑풍도 신이 나는지 더 욱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아가씨!" 방 안에 들어가 자리에 앉은 조기혜는 밖에서 자신을 찾는 목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들었다. "설령(雪玲)에게 연락이 온 게냐 빙령(氷玲)?" 자신을 부른 이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린 그녀는 자기가 내린 명령을 떠올리고는 되물었다. 그러나 생각하는 대답과 는 달리 다른 답이 들려왔다. "그것이 아니옵고 아가씨와 같이 있던 그 아이가 지금 말 을 타고 산을 내려가고 있어서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뭐야?" 그녀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 빙령이란 여인에게서 들려오자 바로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뛰어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빙령은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바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뭣 때문에 내려간단 말이야?" 너무 당황했던 나머지 결코 그녀에게서 들을 수 없는 질문 을 던진 조기혜는 그저 묵묵히 서 있는 빙령을 보고서야 자 신의 질문을 바꾸었다. "어, 어디로 가더냐?" "동남쪽 산길을 따라 가고 있습니다." "알았다. 데리고 올 테니 넌 일단 여기서 기다려. 설령에 게 연락이 올지도 모르니." 지긋이 아랫입술을 깨물던 그녀가 빙령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녀는 바로 몸을 돌려 신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뒤에서 가 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빙령의 옆으로 흰 빛 한 줄기가 섬전 (閃電)같이 뿜어져 나갔다. 바로 일묘(日猫)였다. 일묘는 엄청난 속도로 산을 내려가는 조기혜를 순식간에 따 라잡더니 팔짝 그녀의 어깨 위로 뛰어 올랐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산을 내닫는데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산길은 꼬불꼬불하다. 비록 흑풍이 명마라 하지만 용이한 길 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분명 길이 없는 곳으로 내달리는 것 은 아닐 것이다. 분명 그쪽을 통해 내려갔을 것이고 그렇다 면 산 속을 통과해 내려간다면 충분히 앞을 막아설 수 있으리 라. 그녀는 이런 생각으로 숲 가운데를 가로질렀다. 울창한 숲과 나뭇가지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지만 그녀는 아무 거리낌없이 검집으로 내려치며 내달렸다. '무엇 때문에 도망가는 거지? 무공을 안 가르쳐 줬다고 삐진 건가? 가르쳐 달랠 걸 가르쳐 달래야지 어떻게 남의 독문 수법 을 그렇게 뻔뻔스럽게 말해.' 그녀는 속으로 심한 불평을 늘어놓았다. 생각하는 와중에 도 그녀의 속도는 전혀 느려지지 않았다. 이윽고 산의 가장 자리까지 내려온 그녀의 눈에 숲 바깥쪽에 난 하나의 소롯 길이 들어왔다. 사뿐히 길에 내려앉은 그녀는 찬찬히 길을 훓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지나가지 않았는지 말발굽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 다. 바로 그때 저 산마루 한편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 는 바로 흑풍의 발굽 소리임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천천히 몸을 돌리자 바로 천인문을 태우고 엄청난 속도로 달려 내 려오는 검은 흑풍의 모습이 잡혔다. "멈춰!" 그녀는 자신의 앞쪽으로 달려오는 흑풍의 앞을 막아서며 손을 들었다. 허나 흑풍은 오랜만에 시작한 달리기를 멈추 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앞까지 다가선 흑풍은 더욱 세차게 내달린다. "누나 비켜 밟혀도 몰라. 어서 비켜." 자꾸 거리가 좁혀지자 천인문이 불안한 듯 그녀에게 외쳐 댔다. 그럼에도 그녀는 결코 피할 생각이 없는지 그 자리 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그녀와 거리가 거의 일 장까지 좁혀졌다. "흑풍아~." 흑풍이 그녀를 덮쳐 버릴까 걱정이 된 천인문. 바로 고개를 푹 숙이며 눈을 질끔 감았다. 하지만 흑풍은 역시 명마였다. 그 자리에 벼락같이 멈추어 서는 대신 뒷발로 땅을 박차며 단 번에 그녀의 키를 훌쩍 뛰어 넘어버렸다. 파팍! 앞발이 땅을 내려 밟는 충격에 온 몸이 붕 뜨는 느낌을 받았 던 천인문은 천천히 눈을 뜨고 앞을 살폈다. 그러나 우려했던 그런 참사가 벌어지지 않았음을 깨닫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조기혜는 흑풍이 자신을 가볍게 뛰어 넘어버리자 다시 몸 을 돌려 흑풍을 쫓기 시작 했다. "문아! 왜 도망가려고 하는 거야?" '도망? 내가 도망간다고? 왜 내가 도망가야 하는데? 누나 는 무슨 생각하는 거지?' 갑자기 그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의문이 생긴 천인문 은 흑풍 위에서 잠시나마 고민에 휩싸였다. 허나 그에게도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내가 삐쳐서 도망간다 생각한 건가? 그냥 기분 나빠서 한 번 달려 보는 것뿐인데 누나가 쓸 데 없이 고민하는군.' 잠시나마 웃음을 머금었던 천인문은 다시 얼굴에서 웃음을 감추었다. 갑자기 이 상황을 잘 이용할 방법이 떠오른 것이 다. "누나가 싫어서 도망가려고 한다. 왜?" 흑풍이 너무 빨라 그녀가 따라오지 못하자 천인문은 흑풍 의 속도를 조금 늦춘 후에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려 큰 소 리로 외쳤다. "내가 뭘 잘못 한 거 있니?" "흥! 몰라몰라. 그냥 싫어." 큰 소리로 코방귀를 뀌며 그녀를 무시해버린 천인문은 다 시 흑풍의 배를 발로 툭툭 찼다. 다리가 짧아 겨우 옆구리 까지밖에 닿지 못했지만 흑풍은 천인문의 의사를 바로 알아 채고는 다시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조기혜는 좁혀져가던 거리가 다시 멀어져가자 다시 한 번 소리를 높여 외쳤다. "내가 무공 안 가르쳐 줘서 화가 난 거니? 가르쳐 줄 테니 깐 멈춰 서." 그녀는 일단 잡고 보자는 생각에 거짓말로 외쳤다. 그러자 바로 흑풍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정말? 진짜 가르쳐 줄 거지?" 다시 고개를 돌린 천인문이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쳐 줄 테니깐 일단 서." "알았어. 누나 한 번 믿어 볼게." 천인문은 흑풍의 목덜미를 툭툭 쳐 흑풍을 자리에 세웠다. 흑풍은 달리기가 끝이 나는 것이 아쉽다는 투로 투래질을 했 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 멈춰 섰다. 조기혜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와 바로 천인문의 뒷자리 로 뛰어 올랐다. 흑풍의 몸에 가볍게 내려앉은 그녀는 천인 문을 뒤에서 끌어 앉는 듯 하더니 바로 등뒤의 마혈을 움켜 쥐었다. "뭐 하는 거야?" 갑자기 그녀에게 마혈을 제압 당한 천인문이 인상을 와락 찌푸리더니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너 무엇 때문에 도망치는 거야? 사실대로 이야기 해." 그의 큰 소리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전혀 주눅듦이 없었다. 꾸지람을 하듯 매섭게 질문을 던지자 천인문은 유일하게 놀 릴 수 있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내가 도망쳤다고 누가 그래? 난 도망간다는 말 안 했어." "그럼 이게 도망가는 게 아니고 뭐야?" "산을 내려가는 건 무조건 도망이야? 누가 그런 법을 정하 기라도 했데? 난 그냥 화가 나서 우리 풍이 하고 열심히 달 렸을 뿐이라고." "그럼 저 위에 고원(高原)에서 달리지 왜 내려 온 거니?" "꼭 거기서 달려야 하나? 그냥 산밑으로 달릴 수도 있 는......" 볼이 퉁퉁 부은 채 열심히 투정을 부리던 천인문이 어떤 생 각이 들었는지 말을 끊으며 실눈을 뜨고 물어 왔다. "그런데 누나는 왜 날 따라 왔어? 내가 도망치든 말든 상관 없잖아." 뒤에서 듣고 있던 그녀의 눈이 다시 휘둥그래졌다. "정말 상관없다고 생각해?" "그럼 상관없지. 누나가 내 색시도 아니고 그냥 산에서 우 연히 만난 것뿐이잖아." "어,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는 거니? 난 네가 죽어 가는 걸 보다 못해 살려 줬는데 아무 상관이 없다니." 천인문은 고개를 돌릴 수 없어 말하는 그녀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만약 보았다면 자신의 말이 먹혀 들어갔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얼굴엔 왜 자신이 그렇 게 달려 왔는지 자신도 모르겠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던 것 이다. '이상하네. 정말 왜 따라왔을까? 분명 이 아이에겐 별로 얻 어낼 것도 없는데.' "웬만한 약초꾼들도 다 해줄 일 가지고 생색내긴." 천인문은 입을 이죽이며 뒤에 앉은 그녀에게 군시렁거렸지 만 그녀는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대답은 들리지 않고 단순히 고른 숨소리만 들리자 갑 자기 민망해진 천인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대답이 없어?" "......!" "누나야~!" "으응. 왜 불러?" 큰 소리로 자신을 부른 소리에 정신이 들었는지 조기혜가 말문을 열었다. "왜 날 따라 온거냐구? 혹시 누나가 나에게 사랑을 느껴...... 아얏!" 듣고 있던 조기혜는 갑자기 생각해 보지도 못한 말을 듣게 되자 바로 주먹을 들어 천인문의 머리를 내려쳤다. "조그만 녀석이 못 하는 말이 없어." "조그맣긴. 난 이래 뵈도 결혼도 한 몸이라고. 누나보단 훨 씬 어른이야." 머리가 아파도 결코 쓰다듬을 수 없는 천인문. 울컥 솟구치 는 느낌에 소리를 바락 질렀다. "그래? 그래 넌 어른이다. 인정 해 줄게." 그녀의 한 마디에 할 말이 없어져버린 천인문은 씁쓸한 표 정으로 입맛을 다시더니 짜증나는 어투로 말을 받았다. "일단 이거나 풀어." 그러나 그녀는 그럴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안 돼. 너 풀면 도망가려고 하지?" "도망 안 가." "거짓말!" "진짜야. 안 간다면 안 가. 그리고 내가 도망가는데 누나 는 왜 자꾸 날 잡으려 하는 거야?" "그냥." 그녀는 생글거리며 대답했다. 천인문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 지만 고개를 돌릴 수도 없어 그저 한숨만 푹 내쉴 뿐이었다. 그때였다. 그들이 서 있던 소롯길의 앞쪽 숲 속에서 호탕한 웃음이 들 려왔다. 갑자기 들려온 웃음소리에 말 위에 앉아 있던 두 명 의 남녀는 황당하다 못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엄청난 미녀가 가슴까지밖에 안 오는 꼬마 녀석을 잡고 가 지 말라? 이거 정말 보기 어려운 장면이구먼." 들려온 목소리는 늘그막한 노인의 그것이었다. -76- 천하기학(天下奇學) 영웅장(英雄掌)을 배우다 (1) 목소리의 주인공은 무성한 숲을 헤치며 그 모습을 드러냈 다. 가벼운 녹색의 경장을 걸치고 있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노인이었다. 비록 천인문과 조기혜가 이야 기를 나누고 있었다고는 하나 바로 옆까지 올 때까지도 알 아차릴 수 없었음에 그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 습을 본 노인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허! 그리 긴장하지 않아도 괜찮네. 자네들에게 해 를 끼칠 사람은 아니니까." 요혈이 제압 당한 터라 고개를 돌리지는 못하고 단지 눈 만 살짝 돌려 노인을 바라본 천인문은 길게 뻗은 흰 수염과 하얀 백발이 잘 어울리는 한 노인을 볼 수 있었다. 푸근한 할아버지의 인상을 지닌 노인을 보자 궁금증이 솟구쳤다.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정면을 바라보며 입은 노인에게 물었다. "소개하는 순서가 뒤바뀐 것 같으나 노부가 먼저 밝히도 록 함세. 노부는 이름은 이세직(李世 )이라 하지. 그런데 네 이름은 무엇인고?" 빙그레 웃음을 머금고 자신을 소개한 노인이 천인문에게 되물었다. "전 천인문이라 해요. 그리고 이쪽은 뭐 제 생명의 은인 이라고 해 두죠." 이미 두 사람 사이에는 긴장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서로 거리낌 없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허나 조 기혜는 그러지 못했다. '내가 아무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곤 하나 결코 누가 다 가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는데. 저 노인은 숨은 기인이란 말인가?' 조기혜는 나타난 노인의 정체를 밝히려 머리를 싸매야 했 다. 조기혜의 굳은 안색을 본 이세직이 머리를 흔들었다. "저 아가씨는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는가? 내 이름 따위론 날 알아챌 수 없을 걸세. 그러니 쓸데없이 머리를 고생시키 지 말게." 정곡을 찔린 그녀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녀의 놀란 표정 을 보자 노인은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어떻게 다가왔는지 궁금한 모양이구먼." "그, 그걸 어떻게." "얼굴에 훤하게 써 뒀더구먼. 노부가 그걸 못 읽으면 지금 까지 허투루 산 게지. 그건 그렇고 아까는 정말 재미있었네. 혼자 보기엔 너무 아쉬웠어." 그 말에 그녀의 얼굴은 홍시처럼 달아올랐다. "누나 이것 좀 풀어 줘. 움직일 수 없잖아." 요혈을 제압된 터라 움직일 수 없었던 천인문이 불평을 토 하자 조기혜는 바로 손을 등에서 땠다. 마비가 풀리자 천인 문은 흑풍의 등에서 풀쩍 뛰어 내려 이세직의 앞으로 걸어 갔다. "어떻게 할아버지는 저희 몰래 다가오실 수 있었죠? 누나하 고 이야기한다고 정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내 귀는 상당히 밝 거든요. 그런데 할아버지 발소리는 전혀 못 들었어요." "못 듣는 게 당연하지. 난 원래 저 숲에서 계속 있었는데 너희들이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온 게야." "숲 속에서 뭐 하셨는데요?" "별 건 아니고 요 부근에서 요즘 독사가 자주 보여서 찾으 러 왔지." 이 노인은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허리춤에 묶여 있던 보 자기를 꺼내어 입을 벌리며 천인문에게 내밀었다. 천인문이 고개를 내밀고 보자기의 안을 들여다보자 흰 머리 에 알록달록한 무늬를 가진 뱀 한 마리가 또아리를 틀고 있 는 것이 보였다. "정말 예쁘네요." 천인문이 환하게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자네가 보는 눈이 있구만. 이 녀석의 이름은 설두사(雪頭蛇) 라 하지. 흰머리가 꼭 산신령의 그것을 닮았다 해서 신령사 (神靈蛇)라 부르기도 하네. 예쁘기는 하지만 물리면 그걸로 끝이지." 천인문은 찬찬히 설두사의 모습을 살폈다. 머리가 뾰족한 삼 각형 꼴로 한 눈에도 독사임을 알 수 있었다. "누나도 좀 와서 봐. 정말 예뻐." 그녀를 생각해서 해준 말이었지만 조기혜는 말만 들어도 오 싹하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시...싫어." "정말 예쁜데." 천인문은 정말 좋은 구경거리를 놓치는 그녀가 아쉬워 보였 는지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그는 곧 아쉬움을 거두고는 이 노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근데 이 희귀한 걸 어디서 잡으셨어요? 혹시 땅꾼이세요?" "뱀에 대해 좀 아는 게 있나?" "조금은요. 의술에 대해 공부를 하다 보니 좀 알게 됐어요." 천인문이 의술을 공부했다 하자 이세직은 대견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의술을 공부했어? 그렇다 이거지." 중얼거리던 그가 눈을 번뜩였다. "아 참! 땅꾼이냐 물었느냐? 노부가 땅꾼처럼 보이느냐?" 그는 팔을 쭉 펴며 자신의 몸을 쭉 살폈다. "그건 아닌데요. 그냥 뱀을 잡고 다니시니깐 물어보는 거에 요." 이세직은 천인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땅꾼이 아니라 독(毒)을 만지지." "독이요?" 천인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래. 넌 독도 모르느냐?" "아뇨. 잘 알죠. 근데 독은 왜요? 쓸모가 있나요?" "독에 대해 잘 모르나 보구나. 그럼 내가 독에 대해 말해 주지. 일단 독은 모르는 사람은 상당히 위험하게만 생각하 지. 하지만 독도 잘 쓰면 약이 된단다. 그리고 독을 사용 하는 무공도 있지." "독을 약처럼 쓴다는 것은 저도 알죠. 근데 독이 무공에 쓰인다는 것은 금시초문이네요." "그럼 이젠 알았겠지. 이렇게 독도 생각보다 쓰일 곳이 많 지." "혹시 할아버지도 독공 익히신 분인가요?" "독공은 익히지 않았지만 알고는 있지. 왜 독에 관심이 생기느냐?" "네! 독공은 싫지만 그래도 독을 이용한 의술은 관심이 가 네요." "그래? 그럼 우리 집에 가 보겠느냐? 거긴 노부가 모은 독 이 상당히 많지." "여기서 먼가요?" "그렇게 멀지도 않아. 한 이 십리 정도 될까?" 천인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정도가 멀지 않다뇨. 상당히 멀잖아요." "젊은 녀석이 그 정도가 멀다고 하면 되나. 노부도 하루에 백 리씩 돌아다니는데 말이야." 이세직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그러자 천인문은 바 로 표정을 삭 바꾸며 대답했다. "아! 결코 멀지 않군요. 정말 가까워요. 그러니 할아버지 앞장서세요." 이세직은 고개를 끄덕인 후 몸을 돌렸다. 천인문도 그의 등뒤로 바짝 붙어 걸음을 옮겼다. 흑풍의 위에 타고 있던 조기혜는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가는 천인문을 멍하 니 바라보다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그냥 가면 어떻게 해." 멀리 사라져가던 천인문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돌아가 있던지 따라오던지 알아서 해." 손만 달랑 흔들며 사라져가는 모습에 조기혜는 인상을 확 구기며 어찌할 줄 몰랐다. 그러나 곧 그녀는 결정을 내렸 다. "같이 가." 그녀는 흑풍의 배를 살짝 차 그들이 사라진 곳으로 방향 을 잡아 흑풍을 몰고 나갔다. 그들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거리는 비록 이 십리밖에 안되었지만 도착할 때까지 거의 네 시진이나 걸렸다. 독충 이나 뱀 등이 나타났다 하면 항상 길을 멈추고 그것들을 잡 는 데만 몰입하는 이세직이었기에 몇 배나 시간이 더 걸렸 다. 이세직의 거처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해가 그 모습을 감 출 오후 늦은 때였다. 그의 뒤를 따라 언덕을 올라가자 따 스한 햇살이 항상 비추는 위치에 오붓하게 자리한 진흙집 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쪽으로 오게. 내 소중한 귀염둥이들을 보여주지." 이세직은 초가집이 너무 아담하게 자리잡은 터라 정경에 흠뻑 빠진 천인문과 조기혜를 부르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 들도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볼 때 상당히 작아 보였지만 실제로 내부는 생각보다 상당히 넓었다. 흔 히 볼 수 있는 탁자 같은 세간은 전혀 보이지 않아 더욱 넓 어 보였다. 이세직은 안으로 들어오자 바로 허리춤의 설두 사가 들어 있는 자루를 손에 들고는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도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어떤 역한 내음이 확 풍겨왔다. 둘의 반 응은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 천인문의 얼굴은 새로운 것에 상당히 관심을 보이는 듯 했고, 조기혜는 끔찍한 것을 보았 다는 듯 확 찌푸려졌다. 거의 반경 이 장 남짓 되어 보이는 그곳에는 글이 쓰여 있 는 푸른 자기병이 한쪽 벽을 가득 매우고 있었고 맞은 편에 는 대나무로 만들어진 망태기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서 쉭 쉭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지 않아도 뱀이 가득 들어 있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난 나갈게." 안색이 시퍼렇게 변해버린 조기혜는 바로 몸을 돌려 나갔 다. 천인문은 그녀가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자기병이 가득한 쪽으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는 병에 쓰여져 있는 글 을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군자산(君子散), 단혼산(斷魂散), 오독사(五毒砂), 공작 담(孔雀膽), 학정홍(鶴精紅), 염백음분(炎魄陰粉) 뭐가 이 렇게 많지?' 듣도 보도 못한 독이 수없이 담겨져 있는 병을 몇 개 세어 보지도 못한 채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이세직은 빙긋이 웃었다. "일단 앉게나. 내가 아끼는 녀석들을 보여주지." 그는 등을 돌려 사방 오 척 정도 되는 상자의 뚜껑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몇 개의 조그만 상자들을 꺼내어 천인문이 앉은 탁자 위에 올렸다. "독의 종류에는 여러 개가 있다네. 보통은 광물독(鑛物毒) 과 생물독(生物毒)으로 나뉘는데 병에 든 것들은 보통 광물 독이 많지. 어떤 것이 강하고 약하다 비교하긴 어렵지만 그 중에 특별한 것들이 있지. 내가 보여 줄 것은 생물독에 속한 다 할 수 있지." 그가 가지고 온 상자는 모두 여섯 개였는데 제각각 모양이 달랐다. 제법 큰 것도 있고 납작한 모양의 상자도 있었다. 그는 품에서 아름다운 봉황이 그려진 자기병을 꺼내 마개를 열었다. 그러자 가슴이 확 트이는 듯 상쾌한 향기가 사방으 로 진동했다. 자기병을 탁자에 대고 기울이자 안에서 노란 색의 가루가 흩뿌려졌다. "이게 뭐에요?" 천인문은 손을 앞으로 내밀며 질문을 던졌다. "이건 내가 만든 약인데 이 녀석들을 다루는데 필수지. 나 만 있으면 상관없다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뿌려 두 는 게 좋아." 가슴속에 병을 집어넣은 그는 위가 탁 트여진 대나무 망통 을 꺼내 탁자에 올렸다.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다섯 개의 상자를 그 안에 넣고 열어 제쳤다. 뭔가 스믈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각각의 상자에서 다섯 개의 물체가 기어 나왔다. 그것은 흔히 보지 못했던 독충들이었는 데 지네, 거미, 전갈, 뱀과 두꺼비였다. 천인문은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뺐다. 이세직은 아무 소리하 지 않고 손을 망통 안에 넣어 다섯 마리의 독물들을 방위별 로 하나씩 자리에 놓았다. "이 녀석들을 키울 때 내가 항상 이 약을 뿌리고 만졌지. 그래서 이 냄새가 나면 날 알아보고 이 녀석들도 물지 않는 게야." "물리면 어떻게 되죠?" 스스럼없이 독물들을 잡아가는 그의 모습에 천인문은 오싹 해졌지만 궁금증이 생기자 입이 저도 모르게 열렸다. "물리면 어떻게 되냐고? 내가 왜 이 녀석들을 귀염둥이라 부르는 줄 아나. 이 녀석들은 독에 있어서 만큼은 가히 제왕 이라 부를 만 하기 때문이지. 웬만한 독엔 면역이 된 나도 좀 부담이 생길 정도니 말이야. 일단 이 전갈 녀석은." 그는 손으로 손가락만큼 작은 검은 전갈을 가리켰다. "오보절명갈(五步絶命 )이라 하는데 이름 그대로 쏘이면 오보(五步)를 넘기기 힘들지. 뭐 다른 녀석들도 그 위력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겠지." 그의 말에 천인문은 천천히 다섯 마리의 독물들을 유심히 살폈다. 다리와 몸통 부분에 긴 털이 숭숭 나있는 거미, 붉 은 색의 머리 위로 두 개의 조그만 뿔을 가진 한 척 길이의 뱀, 갈색의 몸통을 길게 늘어뜨린 지네와 새하얀 몸을 가진 두꺼비. 거미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럭저럭 예쁘다 부를 만 큼 특이하게 생긴 녀석들이었다. "근데 이 녀석들 상당히 얌전하네요. 서로 그저 바라보기 만 하고." 천인문이 자신의 생각을 밝히자 노인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 트렸다. "허허허! 이 녀석들이 얌전한 게 아니라 워낙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공격을 못하는 것 뿐이야. 저들이 모두 자기의 종족에선 제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더라도 상대에 게 쏘이면 그냥 그걸로 끝이거든. 그러다 보니 이렇게 같이 있어도 서로 공격을 하지 않지." 설명을 들은 천인문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녀석들이 최고의 독인가요?" 이세직은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최고란 게 그렇게 쉽게 얻어질 수 있겠느냐? 이 녀석들의 독 한 방울로 소 백 마리를 가뿐하게 죽인다고는 해도 물리 지 않으면 그만 아니냐." "그럼 공기를 타고 흩어지는 독이 최고인가요?" "그럴 리가 있겠나. 비록 장독이나 천리독무 등이 강하다 고 해도 공기를 맡지 않으면 그만이지." "그럼 뭐예요? 안 물리고, 안 맡으면 모두 안전한데 최강 의 독이 없잖아요." 정답이 나오지 않자 천인문이 투덜거렸다. "고 녀석 성질 한 번 급하구나. 노부의 말을 들어 봐라. 일 단 노부는 아까 말한 데로 그런 단점들이 있는 독들이 최강이 라 인정할 수 없었단다. 그래서 노부는 생각했지. 최고의 독 이 무엇일까 하고 말이야. 독을 다루는 이들은 무형지독을 최 고라 칭하는데 노부는 솔직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독 중에 최고의 자리를 차지할 만 한 것을 찾아보기로 했지. 하지만 결국 무형지독과는 비교가 안되더구나. 노부는 절망했 지. 정말 무형지독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것은 없을까 하고 말 이야. 결국 찾지 못한 노부는 스스로 무형지독을 뛰어 넘을 수 있는 독을 만들기로 했다." "그래서 만드셨어요?" "당연히 만들었지. 비록 이 십 년이 걸렸지만 만들 수 있었 다. 그 결과가 바로 이 녀석이지." 이세직은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선 아직 열리지 않은 상자에 손을 올렸다. 손이 닿은 상자는 앞서 열린 다섯 개의 상자와 는 달리 옥으로 만들어진 상자였다. "그래서 이 녀석이 정말 최고의 독이다 이 말인가요?" 천인문은 손을 들어 옥함을 가리키며 물었다. "당연하지. 어떤 독도 당할 수 없을 만큼 위력이 강하다. 물 려도 즉사하고 공기를 타고 흐르는 독을 맡기만 해도 즉사한 다." "얼마나 퍼지는데요? 한 만리(萬里)정도?"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어찌 독이 만리나 퍼지겠느냐. 한 이 십장 정도 퍼진다." "그럼 삼십 장 밖에 서 있으면 중독 안 된다는 거 아네요." "그렇게 따지면 모든 독이 무용지물이란 말이 아니냐.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일단 독 중에 최강을 가리자면 우선적 으로는 중독이 되었다고 가정을 해야지." "그것도 말이 안되잖아요. 아까 요 다섯 녀석들은 안 쏘인다 고 해 놓고선." 한번 의문이 들자 천인문은 계속 꼬투리를 잡고 늘어졌다. "그래그래 노부가 졌다. 하지만 이 녀석들도 솔직히 말하면 쏘인다 해도 살아날 수 있긴 하지. 특히 고수들은 내공으로 배출하거나 태워버릴 수도 있으니 두말할 나위가 없지. 지금 까지 무형지독이 최강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중독되더라 도 그 기미가 보이지 않고 발작하게 되면 치료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지. 하지만 발작하기 전에 치료하면 치료가 가능하니 최고라 말할 수는 없단다." "그럼 이 상자에 든 녀석은 결코 막지 못한다는 말인가요?" "그래 바로 그것이다. 결코 막을 수 없는 독. 중독되면 어떤 일로도 결코 치료할 수 없는 독." 그는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다. "물려도, 공기를 맡아도 죽는다. 허나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물리지 않아도, 공기를 맡지 않아도 죽을 수밖에 없다 는 것이다." 천인문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물리지 않고 호흡하지 않아 도 죽는다니. 그럼 부근에만 있으면 무조건 필사(必死)한다 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공기가 싸늘히 식 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호탕하게 웃던 이세직이 고개를 떨구 어 천인문을 바라보았다. "보고 싶냐?" 이세직의 손이 옥함을 열려 하자 창백해진 천인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 뒤로 물러섰다. "여...열지 마요. 난 아직 죽기 싫다고요." "이 녀석. 보기 보다 겁이 많구나." 만면에 미소를 그득 떠올린 그가 실눈을 뜨며 바라보자 천인 문은 아니꼽다는 투로 대답했다. "당연하죠. 공기를 안 맡아도 죽는다는데 누가 두렵지 않겠 어요." "그래 맞는 말이다. 하지만 봐도 죽지 않는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봐도 죽지 않는 방법이 있다고요? 그럼 당연히 보죠." "그럼 좋다." 그는 말을 끝맺고는 품속에서 검은 색의 병을 꺼내었다. 그 안에서 두 개의 알약을 꺼낸 그가 하나를 천인문에게 내 밀었다. 엄지손톱 만한 연녹색의 알약이었다. "이걸 먹어라. 이건 이 녀석의 독을 막아주는 것이니." "해독약인가요?" "해독약은 없다. 단지 이 녀석의 독 기운을 몸으로 들어오 지 못하게 막아줄 뿐, 중독이 되면 이걸로도 치료는 불가능 해." "그럼 잘못되면 죽는 다는 말 아닌가요?" 그가 내민 알약을 받기 두려운지 천인문은 손을 내밀다 거 두어 들였다. "사내 녀석이 뭐가 그리 두려운 게냐. 걱정 안 해도 되니 어서 받거라." 그의 얼굴에 잠시 비웃음이 떠오르자 경멸당했다는 느낌을 받은 천인문이 울컥해서 손을 내밀었다.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이리 줘요." 마음이 변할까 천인문은 약을 받는 즉시 눈을 감고 약을 꿀 꺽 삼켰다. 새콤하면서도 어딘지 짭짤한 맛이 났다. 그가 약 을 삼키는 것을 본 이세직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호탕해서 보기 좋다. 일단 잠시 기다려라." 그는 망통 안에 있는 다섯 마리의 독물을 각각의 집으로 집 어넣은 후 밖으로 들고 나갔다. "여기 있는 녀석들은 이 녀석을 보기 위해선 치워 둬야지. 안 그러면 이 녀석들도 죽어버리거든." 방안에 든 모든 독충이 든 대나무 상자들을 하나씩 옮기며 말했다. 서서히 대나무 상자들이 방에서 나가자 낮게 들리던 쉬쉭 거리는 소리가 사라졌다. 최고의 독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천인문은 온 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조기혜는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자 바로 밖으로 나 왔다. 밖은 이미 어스름이 깔려 앞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 다. 그러나 집에 들어가기는 싫었다. 솔직히 여자 치고 그런 독물을 좋아할 리 없었다. 조기혜도 여자였고 당연히 그런 독충들이 좋을 리 없었다. 처음에 천인 문과 함께 올 때만 해도 돌아가자 말하고 싶은 느낌이 없지 않 아 있었지만 말을 하지는 못했다. 그게 지금은 엄청나게 후회 가 되기 시작했다. 혼자서 이렇게 청승맞게 서 있어야 하는 사 실이 너무도 싫은 것이다. 아니 왜 자기가 이렇게 천인문에게 휘둘려 다니는 것인지 그것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다. 그녀가 화를 내고 있자 흑풍의 등에 올라타고 놀던 일묘가 펄쩍 뛰어 그녀의 어깨 위로 올라왔다. 야옹! 일묘가 낮게 울음을 토하며 그녀의 목을 비벼대자 그녀도 손을 들어 일묘의 몸을 어루만졌다. "괜찮아! 내가 잠시 기분이 나빴어." 그녀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일묘도 기분이 좋은 듯 꼬리를 살랑거렸다. '어떻게 하지? 여기 있을까 아니면 그냥 돌아갈까.' 서서히 떠오르는 별을 보며 갈등에 잠겼다. 일단 여기 있어 도 할 일은 없었다. 안에서 기다리자니 너무 끔찍한 집이라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가자니 천인문을 남겨두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상당히 정이 든 탓인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문아! 거기 계속 있을 거야?"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자 그녀는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 자 곧 천인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 기다려. 지금 지독(至毒)을 보고 있거든." 천인문의 말에 그녀는 호기심이 떠올랐다. '지독? 지독이 뭔데 저렇게 놀라는 거지?' 그녀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독의 이름을 듣자 상당히 궁 금해졌다. 비록 빙궁이 독을 다루는 문파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독에 대해서 기본적인 지식은 가지고 있었다. 밖에서 독을 쓰 는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 떤 독이 어떤 증상을 보이는가 하는 기본적인 것은 알고 있었 다. 허나 아직 지독(至毒)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없었다. 지독(至毒). 분명 이름만 들어서는 최고의 독이 맞을 듯 했다. 하지만 들어가서 보고 싶지는 않았다. 분명 또 끔찍한 독물일 것이다. 갑자기 또 뱀의 차가운 피부와 날름거리는 혀가 떠오르자 그녀 는 인상을 찌푸리며 몸서리쳤다. "안 나올 거면 나 혼자 갈 거야." 머리에 떠오른 뱀의 영상을 지워버리듯 그녀는 머리를 흔들 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알았어. 지금 나가." 안에서 투덜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천인문의 모습 이 나타났다. "왜 그렇게 짜증내는 거야? 누나도 들어와서 보면 될 거 가 지고." 천인문이 밖으로 나오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흑풍 의 곁으로 갔다. 그러나 흑풍 위에 올라타려 하자 이번에는 흑풍이 거부하며 뒤로 물러섰다. "이 녀석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올 때까지만 해도 잘 태우고 왔던 녀석이 반항을 하자 짜 증이 난 그녀가 불만을 토로했다. 천인문은 흑풍의 옆으로 가서 목을 툭툭 친 후 위에 올라탔다. "내가 안 타고 누나만 타려고 그러니깐 그러는 거지." "그래 네 말이다 이말이지?" 조기혜가 입을 한번 이죽이더니 흑풍의 뒤에 올라탔다. 이 번에는 흑풍도 아무 반항을 하지 않는다. 둘이 흑풍의 위에 올라타자 방안을 정리한 이세직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가? 재미있었나?" 그의 물음에 천인문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일 다시 와도 돼죠? 보고 싶은 게 아직 많은 것 같 아서요." "노부도 요즘 심심했었는데 네가 와 준다면 대 환영이지." 그가 쌍수를 들어 환영하자 천인문은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했다. "그럼 할아버지. 내일 봬요." 인사를 마친 천인문이 흑풍의 배를 쳤다. 흑풍은 앞으로 순 식간에 달려갔다. "그 지존이란 독은 어떻게 생겼던?" 초가집이 저 멀리 사라져가자 천인문의 등뒤에서 그를 끌어 안고 있던 조기혜가 물어왔다. "음! 생긴 것은 꼭 전갈인데 다리는 겨우 세 쌍밖에 안 되고, 그리고 꼬리에 침이 없어. 그 대신 입에 뱀처럼 이빨 한 쌍이 멋지게 나 있더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보았던 지존의 모습을 떠올린 천인문은 갑 자기 뒤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왜 보고 싶지 안타며? 말은 그렇게 했는데 진짜로는 보고 싶 었던 거지?" "이...이게." 갑자기 천인문이 자신을 놀려대자 조기혜는 얼굴을 굳히더니 주먹을 쥐어 천인문의 머리를 내려쳤다. "아야! 왜 때려?" "날 어떻게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머리를 한 대 맞은 천인문이 낯을 확 구기더니 자세를 낮추었 다. "흑풍! 달려." 배를 차인 흑풍이 길게 투레질을 하고선 속도를 높였다. 그 바람에 조기혜는 뒤로 몸이 훌렁 넘어졌다. "꺄악! 뭐, 뭐하는 거야? 속도 늦춰." 비명을 지른 그녀는 간신히 천인문의 허리를 틀어쥐었다. 천 인문은 대답을 하는 대신 더욱 속도를 높일 뿐이었다. 그녀는 더욱 높은 비명을 질러댔고 그 소리는 온 산에 우렁차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서혜령은 날이 저물자 손에 든 채찍을 거두어 들였다. 벌써 소주의 담대인 저택에 머문지도 한 달이 넘었다. 원래대로라 면 이미 여기를 떠야했지만 그들은 떠나지 않고 있었다. 특별 히 갈 곳이 없기도 했지만 담대인이 떠나려는 그들을 극구 만 류했던 탓이 컸다. 그냥 기다린다고 천인문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방도가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백운호가 밖으로 나 가서 개방(  )의 인물들에게 의뢰를 부탁하고 왔던 것이다. 조금 피를 보긴 했지만 별 무리 없이 그 일은 끝났다. 일단 그 들에게 맡겨둔 이상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들은 연락이 오면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두고 기다렸다. 그러나 기다리던 연락은 오지 않았고 그들은 마냥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하루하루 허송 세월만 보 내던 그들은 지쳐갔다. 그 와중에 여미릉은 서혜령과 단목 수 령에게 무공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단목 수령은 여미릉을 사부로 삼았다고는 하나 하나도 배운 것이 없었고, 서혜령도 제법 오랜 시간 배웠다고는 하나 아직 미숙한 것이 많았다. 특히 내공심법을 제외한 천황사기(天皇 四技)는 거의 손도 못 대다시피 하지 않았는가. 그녀는 개방에서 찾는 시간이 오래 걸릴 듯 하자 아예 마음 을 고쳐먹고 서혜령과 단목 수령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단목 수령이야 처음이다 보니 거의 붙어살다시피 해야 했지만 서혜 령의 경우엔 초식은 이미 다 말해 주었던 관계로 초식을 펼치 는 등 몇 가지만 전하면 되었다. 요즘 서혜령이 익히고 있는 것은 만화가무(萬化歌舞)였다. 편(鞭)은 원래 상당히 익히기 어려운 무공이다. 무기의 길이 가 길어 편을 조정하기가 상당히 까다롭기 때문이었다. 거기 다 장병(長兵)기에 속하는 탓에 상대와의 거리도 중요했다. 대적하는 인물이 만약 거리를 좁히고 들어오면 몸을 지키기 가 까다로워지는 것이다. 그런 관계로 편(鞭)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채찍이 무림인들에게서 홀대를 받았지만 여미릉은 그런 생각을 완전히 종식시켜 버렸다. 요즘이야 무기를 쓰 지 않는 그녀였기에 채찍도 별로 쓰이지 않았지만 과거 그 녀의 독문 무기하면 무림인들이 가장 먼저 채찍을 떠올릴 정 도였다. 서혜령은 거두어들인 채찍을 허리에 감고는 그녀가 머무는 방으로 발을 옮겼다. 그녀의 환하게 밝혀진 방안에 한 그림자 가 서 있는 모습이 문 밖으로 보였다. "사부님!" 서혜령은 문 앞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냈다. "들어오너라." 낮은 목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서혜령이 안으로 들어 가자 바닥에 앉아 내공을 수련하는 단목 수령이 눈에 들어왔 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구나. 난 이만 가 봐야겠다. 일단 저 아이는 깨우지 말고 놔두도록 해라." 단목 수령을 보고 있는 서혜령에게 여미릉이 말을 던진 후 방문을 열고 나갔다. 서혜령은 등을 보인 그녀에게 공손히 인 사를 하며 배웅했다.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터라 그녀는 일단 목간(沐間)을 하기로 했다. 그녀는 겉옷을 벗고 그녀의 방 안쪽에 마련된 곳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뿌연 김이 확 흩어졌다. '역시 돈이 많으니 좋긴 하네.'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담대인의 저택에 와 서 가장 많이 변한 것이 바로 이 목욕하는 습관이었다. 과 거 산 속에 살 때는 목욕을 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었 다. 천인문처럼 일 년에 한 두 번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렇다고 매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는 그 렇지 않았다. 매일같이 따뜻한 물이 있다. 무공을 익힌 후 땀에 젖은 몸을 씻기엔 너무도 좋은 조건이다. 그렇다보니 이젠 매일 목욕을 하지 않으면 뭔가 찝찝한 느낌까지 받는 것이다. 그녀는 남은 옷을 벗어 한 곳에 놓아두고는 물을 받은 통 안으로 몸을 담갔다. 정말 따뜻한 느낌. 이 느낌이 정말 좋 아 그녀는 목욕을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머리를 틀어 올린 비녀를 살며시 뽑아 땋은 머리 를 풀었다. 치렁치렁한 머릿결이 물 위에 사르르 풀렸다. 그녀는 뽑은 비녀를 보자 머리 속이 헝클어졌다. 천인문이 보고 싶기도 하고 비녀의 원 주인인 궁소미의 행방도 궁금 해졌다. 그녀의 안색이 잠깐 굳어졌다. 단목 수령은 온 몸을 휘감으며 사지백배로 흩어졌던 공력 을 단전으로 갈무리하며 눈을 떴다. 이제 몇 주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상당히 만족하고 있었다. 자기가 생각해 도 실력이 쑥쑥 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쁜 빛이 역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여미릉 이 보이지 않자 사방을 둘러보았다. 곧 시간이 많이 흐른 것을 알아차린 그녀는 여미릉 대신 서혜령이 방에 들어왔음 을 알 수 있었다. "언니! 왔어요?" 그러자 안쪽에서 서혜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잠시만요." 목소리가 들린 후 얼마 되지 않아 서혜령은 다시 옷을 걸 치고 밖으로 나왔다. 따뜻한 물 탓인지 얼굴엔 홍기(紅氣) 가 올라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자 단목 수령의 얼굴인 새침해졌다. "나도 같이 하려고 했는데. 씨!" 그녀의 어리광을 보자 서혜령은 싱긋 웃음을 머금었다. "물이 따뜻하네요. 일단 씻고 오세요." 그녀는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침상에 앉았다. "그럼 씻고 올께요." 단목 수령은 몸을 돌려 안쪽으로 사라졌다. 침상에 앉은 서 혜령은 머리를 완벽히 말렸다 싶자 바닥에 자리를 잡고 운기 를 시작했다. 그러자 목욕을 할 때보다 더욱 편안한 기운이 온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운기에만 몰입하지 않았다. 얼마 후 단목 수령이 나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몰두 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단목 수령이 밖으로 나왔다. 머리에 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닦을 생각은 하지도 않고 오늘 수련 에서 만족했던 것들만 종알거렸다. "팔 다리에서 힘이 불끈 솟는 게 정말 나도 고수가 다 된 것 같더라구요. 언니야 나보다 더 오래 했으니 나보단 낳겠 지만 그래도 난 요즘같이 기분 좋은 때는 없었어요." "그런가요?" 서혜령은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쳤지만 속마음은 그리 편치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 잠깐 그늘이 진 것을 놓치지 않은 단 목 수령이 입을 열었다. "언니! 또 문이 생각하는 거죠?" "......" "걱정 안 해도 돼요. 그 녀석 아무 문제없을 거에요. 그 녀 석 같으면 돌아 올 때 어디서 여자 한 명 꿰차고 나타나서 '색시야! 내 둘째 마누라다. 인사해.' 이럴 녀석일걸요." 농담이라 말한 것 같지만 서혜령은 웃을 수 없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여자 한 명이 아니라 두 명 아니 세 명이라도 당 장 만날 수 있으면 상관이 없을 것만 같았다. 곤륜에서는 행 방이라도 확실히 알고 있었으니 넉 달 넘는 기간을 참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불안 한 것 은 당연했다. "아가씨! 이제 그만 자죠. 내일도 열심히 수련하려면 피로 를 풀어야죠." 계속 말을 열려는 단목 수령의 입을 한 마디로 막아버린 서 혜령은 바닥에서 일어나 침상 위로 올라 이불을 펴고 자리에 누웠다. 말문이 막혀버린 단목 수령도 볼을 잠깐 씰룩이더니 군소리 없이 침상 위로 올라갔다. "잘 자요. 언니." "잘 자세요. 아가씨." 그들의 인사가 끝나고 한 쪽 벽에 걸린 초롱의 불이 바람에 꺼졌다. -77- 천하기학(天下奇學) 영웅장(英雄掌)을 배우다 (2) 천인문은 이세직을 만난 그 날부터 매일 그를 찾아갔다. 처음에는 감시 명목으로 조기혜도 따라다녔으나 삼일이 되던 날부터 더 이상 따라 오지 않았다. 같이 가 봤자 이 야기하기도 껄끄러운데다 혼자서 마냥 기다리는 것이 싫 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자 천인문은 혼자서 그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를 만나서 할 일은 뻔했다. 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 이것이 둘의 공통 화제였다. 하루 종일 이야기하는 것 이 상당히 따분할 법도 하건만 둘에겐 전혀 그렇지 않았 다. 독에 관한 지식이라고는 전무하다고 말할 수 있는 천인문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 좋았고, 이세직은 자 신의 독에 관한 지식을 들어주는 상대가 생겨 기쁠 따름 이었다. "아니지. 비록 복어의 독이 강하긴 하지만 반 시진이 지 나야 발작을 시작하니 치료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 말 이야." "물론 할아버지 말씀도 맞겠지만 일반인들이라면 얘기가 다르죠. 그 사람들이야 잘 모르고 먹는 경우도 있지 않겠 어요? 그러면 치료를 늦게 해서 죽는 경우가 생길걸요." "네 말도 맞지만 웬만한 어부들이라면 복어의 내장과 눈, 피부에 독이 있는 것은 다 안다. 실제로 잘 못 될 경우는 드물다고 할 수 있지." 그들은 이처럼 독의 전반적인 이야기를 놓고 설전을 펼치 기도 하고 상대의 지식에 경탄하기도 했다. 물론 거의 천 인문이 배우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날도 아침이 밝아오자 천인문은 흑풍을 타고 이세직을 만나러 산을 내려갔다. 그가 집에 없자 필시 독물을 사냥하 러 나갔으리라 생각한 천인문은 그를 찾아 집 주위를 배회 하기 시작했다. 역시 예상대로 그는 집에서 오 리 정도 떨 어진 곳에 있었다. "다행이 오늘도 몇 마리 건졌구나. 일단 돌아가자." 흑풍의 발굽 소리에 뒤를 돌아 본 이세직이 허리를 폈다. 말은 안 했지만 천인문이 와 준 것이 기쁜 듯 보였다. 그 가 옆구리에 대나무 상자를 들고 일어서 걸음을 옮기자 천 인문도 흑풍을 몰아 그의 뒤를 따랐다. "뭘 잡으셨나요?" 천인문이 궁금한 듯 물었다. "그냥 지네 두 마리하고 두꺼비 한 마리란다. 오늘은 생 각보다 별로 잡히질 않는구나. 이제 이 부근도 다 됐나 보 구나. 그만 자리를 옮겨야 할 것 같다." 이세직은 아마 날씨가 뜨거워지자 습기를 좋아하는 독물 들이 그늘이 지는 곳을 찾아 이동을 했을 거라 말했다. 천 인문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몇 십장 걷지도 않아 앞장서서 걸어가던 이세직이 무엇을 발견했는지 갑자기 걸음을 멈추어 섰다. 덩달아 흑 풍도 그 자리에 멈췄다. 평소 길을 가다가도 독물을 찾았 다 하면 멈춰서는 그였기에 천인문은 별 다른 말을 건네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세직은 왼쪽 숲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천인문은 흑 풍의 등에서 뛰어 내렸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흑풍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 후 천인문은 조용 히 이세직을 따라갔다. 일 장 앞에서 걸어가던 그가 갑자 기 몸을 푹 낮추더니 고개를 돌려 천인문에게 손짓을 했다. <조용히 오거라.> 갑자기 한 줄기 전음이 날아오자 천인문의 신형이 흠칫 했 다. 무공을 모르지는 않을 거라 생각은 했었지만 한 번도 그가 무공을 쓰는 모습을 보지 못한 터라 무공을 모르는 것 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없지 않아 있었던 탓이다. <멍하게 서서 뭐 하는 게냐?> 다시 전음이 날아와 정신을 놓고 있던 천인문을 깨웠다. 천인문은 정신을 차린 후 몸을 낮추어서 기다시피 하여 그 의 옆으로 붙었다. "무엇을 보셨는데 그러세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묻자 이세직이 멀뚱히 천인문을 바라 봤다. <너 전음 못 하냐?> 천인문은 정곡을 찌르는 그의 질문에 '예' 라 대답은 못 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난 네 내공을 보니 충분히 가능할 거라 생각했 는데...... 일단 그건 나중에 이야기 하도록 하고 저 쪽 을 한 번 봐라.> 이세직은 앞을 막고 있는 수풀을 살짝 젖힌 후 고갯짓을 했다. 그의 턱이 가르킨 방향을 따라 눈을 돌린 천인문의 입이 갑자기 쩍 벌어졌다. "저...저게 뭐에요?" <목소리 낮춰라. 그리고 저게 뭐냐니. 넌 뱀도 모르느냐? 뭐 지네도 보이고 두꺼비도 보이지만 거의 뱀이군.> 이세직은 전음으로 호통친 후 고개를 돌려 천인문이 바라 보는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얼핏 봐도 수 백 마리는 되 어 보이는 뱀들이 무언가에 올라타고 둘러싼 채 흐느적거 리고 있었다. 그 옆으로 지네, 거미 등의 독물들도 간간이 보였다. 그렇게 수많은 뱀들이 온통 꿈틀거리며 한 곳에 모여 있 는 모습은 징그럽기 짝이 없었다. 그것은 천인문의 얼굴 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세직의 집에서 충분히 뱀을 봤었 던 그였지만 이렇게 야생의 뱀들이 그것도 한 두 마리가 아닌 수백, 수천이나 되는 녀석들이 모여 있는 모습은 소 름이 쫙 오를 정도로 끔찍했다. 허나 이세직은 그렇지 않았다. 십 여 일을 굶은 거지가 먹음직스런 음식을 잔뜩 앞에 쌓아놓았을 때 지을만한 표 정을 연신 얼굴에 드리운 채 뱀들이 모여있는 곳을 바라 보고 있었다. "뱀들이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다 모여 있었구나. 저 놈 은 홍혈사(紅血蛇)고, 엇! 복사(腹蛇)도 있구나." 혼자서 중얼거린 이세직은 팔 옷을 걷어올린 후 품에서 품속에서 바짝 마른 잎 몇 장을 꺼내어 손으로 비벼대자 가 루처럼 부서졌다. 그는 다른 손을 품에 넣어 푸른 자기병 을 꺼내 들었다. 병을 살짝 기울이자 투명한 액체가 가루 가 된 잎에 뿌려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인문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뭐 하시는 건가요?" 이세직은 병을 품에 넣으며 대답을 했다. <붕산(硼酸)과 담배 잎을 섞으면 뱀들이 아주 싫어하지. 이러면 뱀들이 날 물지도 않을 거고 저 녀석들을 잡기도 아 주 쉽지. 일단 여기서 기다려라.>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선 그는 허리에 묶어 둔 자루를 꺼 내 든 후 천인문을 뒤로 한 채 뱀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 다. 천인문은 그가 뱀을 향해 걸어가자 갑자기 두려운 마 음이 생겼다. 워낙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이는 그였지만 어 딘지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천인문은 뱀들이 뭉쳐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 주 보다보니 징그러운 느낌은 조금씩 사라졌다. 그러자 무 엇 때문에 저 곳에 뱀들이 저렇게 모여든 것인지 궁금증이 솟구쳤다. 허나 일단은 이세직의 안위가 먼저였다. 천인문 은 머리에 떠오른 궁금증을 일단 접어둔 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세직은 천천히 뱀이 뭉쳐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거의 일 장 남짓까지 다가가자 서로 꼬여 있던 뱀들이 반응을 보이 기 시작했다. 머리를 쳐드는 녀석도 있었고, 슬금슬금 자리 를 벗어나는 녀석들도 있었다. 이세직은 그 모두를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몇 마리 특이한 녀석들만을 목표로 삼고 있었기에 빠져나가는 녀석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일단은 온 몸이 붉게 타오르 는 홍혈사가 목표였다. 그는 두 자가 안되어 보이는 홍혈사를 향해 걸어갔다. 자 꾸 거리가 가까워지자 머리를 쳐들며 경계를 하는 뱀들도 자꾸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몸에서 나는 붕산이 너무 독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그러나 홍혈사는 달랐다. 독 하기로는 황소 힘줄 못지 않고 사납기론 몇 날을 굶은 겨울 늑대가 겁낼 정도인 홍혈사는 더욱 사납게 혀를 낼름거리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그런 위협도 이세직에겐 어린 아 기가 재롱을 떠는 것처럼 비칠 뿐이었다. 홍혈사와의 거 리가 거의 석 자 남짓 될 무렵 수많은 뱀들은 모두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그러자 핏자국이 난자한 낡아빠진 옷을 걸 친 채 쓰러진 한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홍혈사만 신경을 쓰고 있던 이세직은 갑자기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전혀 몸에 반응이 없는 걸로 보아 시체일 거 라 생각한 그는 홍혈사에게 시선을 돌리려 했다. 홍혈사란 녀석은 생각보다 위험한 녀석인지라 물려도 죽지는 않는다고 해도 분명 며칠 고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쓰러져 있던 사내의 얼굴을 본 순간 이세직은 무언가로 한 대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흠칫 하고 떠는 모습을 보이자 홍혈사는 화살이 무색 한 속도로 쏘아져 날아와 그의 손을 꽉 깨물어 버린다. "윽!" 그는 갑자기 손에 느껴진 통증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털었다. 평소 같으면 이 정도로는 절대 떨어지지 않을 홍혈 사였지만 이번에는 아주 쉽게 떨어져 나갔다. 아마 역한 냄 새가 싫었던 모양이다. 땅에 패대기쳐진 홍혈사는 꿈틀꿈틀 허리를 내돌리며 바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손까지 깨물린 이세직이 그렇 게 홍혈사가 도망치게 놔 둘 리가 없었다. 엄지와 검지를 세 워 도망치는 홍혈사의 목을 콱 눌러 버린다. 그리고는 다른 손에 든 자루의 입을 벌려 홍혈사를 집어넣어 버렸다. 그는 순식간에 입을 둘러 묶어 버린 후 저 멀리 던져 버리 고는 물린 손을 들어 올렸다. 두 개의 작은 구멍이 가지런 히 난 손에는 시꺼먼 피가 손등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뱀들이 거의 모습을 다 감추자 뒤에 숨어 있던 천인문이 바로 달려 나왔다. "괜찮다. 해약을 먹으면 상관없으니 그리 호들갑 떨 필요 는 없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미소를 짓고는 피가 나는 손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퉷!" 검붉은 피를 빨아낸 직후 바로 뱉어내기를 수 차례. 피는 조금씩 원래의 붉은 색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걷어 올린 옷 밑으로 보이는 팔은 시퍼렇게 변해 있었다. 그렇게 수 십 차례 피를 내뱉자 다시 붉은 피가 솟구쳐 올랐다. 그 제야 그는 품속에서 백색 자기병을 꺼내 마개를 열고 상처에 대고 뿌리기 시작했다. 노란 가루약이 피가 솟는 상처에 뿌 려지자 부글거리는 거품을 일어났다. 약이 뿌려지자 고통이 이는지 그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천인문은 불안했다. 보통 뱀에게 물리면 물린 곳에서 먼 쪽, 다시 말해 심장쪽과 가까운 곳을 먼저 묶고 난 후 칼 로 상처 부위를 찢어 피를 빼야 했다. 그러나 그는 칼로 찢 기는커녕 상처 위를 묶지도 않았다. 당연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독은 자신보다 그가 많이 알고 있으니 알아서 하겠 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자위했다. 그는 상처를 천으로 묶지도 않은 채 쓰러져 있던 사내에 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쓰러진 사내의 얼굴을 다시 확인했 다. 분명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세직은 손을 급 히 뻗어 사내의 목에 갖다 대었다. 그러자 아주 미약한 맥 이 손에 잡혔다. 이세직은 피가 손을 타고 흐르는 것도 전 혀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의 몸을 번쩍 쳐들어 업었다. "누구에요?" 옆으로 다가온 천인문이 그에게 물었다. "노부의 친구다. 분명 날 찾아 온 것 같은데...... 일단 빨리 돌아가야겠다. 앞장서라." 그는 내던진 자루를 챙기지도 않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떴 다. 천인문도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이건?" "왜 그러세요?" "아니다. 일단 기다려 봐라." 사내를 들쳐 매고 날아오다시피 한 이세직은 집안에 놓인 침상 위에 그를 눕히자마자 옷을 벗겼다. 드러난 그의 몸 은 끔찍했다. 수 십 군데 뱀이 문 흔적이 역력했다. 게다 가 독사들의 독이 퍼진 탓인지 온 몸은 푸른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 정도면 시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벽장에 걸린 몇 가지 병을 가지고 돌아와 마개를 하나 씩 열기 시작했다. "피가 부족한 것 같은데 넌 약초 좀 캐 오겠느냐? 무엇이 필요할지는 말 안 해도 알겠지?" 이세직이 고개를 돌려 천인문에게 부탁하자 천인문은 고개 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왔다. 일단 밖으로 나온 천인문은 바로 흑풍을 불렀다. 흑풍을 부른 이유는 간단했다. 흑풍이 자신보다 훨씬 약초를 잘 캐기 때문이다. 그의 목소리가 퍼지자 바로 흑풍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인 문은 다가온 흑풍의 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흑풍아. 네 힘 좀 빌려야겠다. 약초를 캐려고 하는데 좀 찾아 줄 수 있겠니?" 천인문이 부탁을 하자 흑풍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 렸다. 천인문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숙지황(熟地黃)하고 당귀(當歸), 작약(芍藥), 천궁 (川芎)이 필요하거든. 근데 이렇게 얘기한다고 네가 알아들 을 수 있을까." 천인문은 아무리 똑똑한 흑풍이라도 자기가 말한 약초를 다 알아들었으리라 자신 할 수 없었다. 불안한 표정을 짓는 천인문의 걱정을 떨쳐버리듯 흑풍은 길게 울어 젖힌 후 몸 을 돌려 숲 속으로 나아갔다. 천인문도 흑풍을 뒤따라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다. 아니 흑풍은 천인문 이 말한 것보다 더 많은 약초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가 말한 것 외에도 육계(肉桂), 복령(茯笭) 등 피가 부 족한 환자에게 필수인 약초들과 박하(薄荷), 독활(獨活) 등 혈액의 순환에 도움을 주는 약초들, 해열 작용이 있는 지모 (知母), 시호(柴胡), 지골피(地骨皮), 황금(黃芩) 등 항균 작용을 하는 약초까지 찾아 낼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약초들을 잘 아는 것인지 정말 신기하게 생각 된 천인문이지만 일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거의 반 각 정도밖에 걸리지 않아 돌아온 천인문은 방으로 돌아가 약탕을 끓일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세직은 기다 릴 생각이 없었는지 바로 천인문의 손에 들린 약초들을 뺏 어가 버린다. "언제 그걸 끓이고 있을 거냐? 그냥 이리 다오." 그는 약초들을 하나씩 살피더니 뭍은 흙을 털어 낸 후 그 릇을 받쳐 놓고 바로 쥐어짜기 시작했다. 그러자 손가락 사 이로 액이 그릇으로 뚝뚝 떨어졌다. "독활은 그렇게 많이 넣으면 안 되요. 앗! 시호도 줄여요." 약초을 쥐어짜 그릇에 받는 모습을 보고 있던 천인문이 호 들갑을 떨었다. 급한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약초의 배합이 틀리면 상처가 더 위험해 질 수도 있는 탓이다. "그...그렇구나." 이세직은 솔직히 자신의 과오를 인정했다. 천인문에게 약 배합을 맡긴 그는 다시 침상에 누워있는 사내에게 다가갔 다. "자 여기 있어요." 약초들을 알맞게 다시 배합한 천인문이 그릇을 이세직에게 내밀자 그는 후다닥 받았다. 창백한 얼굴의 사내를 살짝 들 어올린 그는 약이 담긴 그릇을 조심스럽게 그의 입을 향해 가져갔다. 천천히 약을 먹인 그는 다시 그를 눕혔다. "해독은요?" 자기가 구해온 약초가 독을 치료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됨 을 알고 있던 천인문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걱정 마라. 네가 나갔을 때 다 처리했으니." 사내를 계속 살피던 이세직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천인 문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왜 뱀들이 이 아저씨한테 모여든 거죠?" 한 시름 돌리자 천인문은 아까 떠올랐던 의문을 상기했다. 솔직히 뱀들이 죽은 사체를 먹는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터 라 그런 의문은 당연했다. 이세직은 질문을 받자 숨을 돌리 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 사내가 노부의 친구란 말은 했지? 이 친구의 이름은 당 우양이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는 모르지만 독에 중독이 되어 있더구나." "독이요?" 독에 중독되었다 해서 뱀들이 모여든단 말인가? 그게 무슨 독이길래. 천인문이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이세직은 바로 그의 의문을 풀어주겠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낙락생(落落生)이라고 들어 봤느냐?" 낙락생(落落生)? 분명 들어 본 적이 없다. 천인문은 못 들 어 봤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세직도 그럴 줄 알았다며 고 개를 끄덕였다. "낙락생은 그리 흔한 독은 아니다. 솔직히 독이 사람을 죽 이기 위해 쓰는 것이라면 이건 독도 아니지. 왜냐하면 이 독 은 거의 한 달 정도 지나도 중독된 대상이 죽지 않기 때문 이지." 천인문의 눈이 동그래졌다. 죽지 않는 독?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는 천인문의 귓가로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일단 중독되면 삼 일 쯤 지나면 그 증상이 나타난다. 일단 온 몸이 무기력해지고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지. 그리고 한 일 주일 정도 되면 양귀비에 중독된 듯 몸이 나른하고 헛것 이 보인다. 이 주 정도 되면 팔다리에 힘이 떨어지지. 그리 고 한 달 정도 지나면 온 몸에 힘이 쭉 빠져 버린다. 거의 걷지도 못하게 되지. 하지만 그렇다고 죽지는 않는다. 그렇 지만 중독된 사람은 자기가 죽어간다는 것을 알지. 나무에 달 린 잎이 가을이 되면 서서히 말라 죽어가는 것처럼 이 독에 중독이 되면 낙엽이 지듯 천천히 생명이 꺼저가는 것 같은 느 낌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낙락생이지. 이 낙락생은 그런 특 징이 있기도 하지만 또 다른 기이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뱀 들을 유인하는 데 쓰는 좋은 미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거지." 이세직의 설명을 듣고 있던 천인문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 였다. "근데 누가 이 독을 이 아저씨한테 썼을까요?" "그건 노부도 잘 모르겠다. 일단 이 친구가 깨어 나 봐야 알 겠군." 다시 당우양의 얼굴을 살핀 이세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 섰다. "일단 나가자." "네." 이세직은 천인문을 불러 함께 밖으로 나왔다. 78. 천하기학(天下奇學) 영웅장(英雄掌)을 배우다. (3) 천인문은 밖으로 나와서 볕이 잘 드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 았다. 그리고는 그가 말했던 낙락생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 다. 낙엽이 지듯 생명을 서서히 꺼져가게 만드는 독. 중독 될 당 시엔 중독 됐는지도 모르는 독.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 죽지 않는다는 말에 천인문은 피식 웃음보를 터트렸다. 독을 쓴 사 람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저런 독을 쓴다는 말인가. 그를 죽일 목적이었다면 막강한 독을 써야 했다. 비록 구하기 는 까다로울지 모르지만 낙락생만큼 아닐 것이다. "뭘 그렇게 생각하는 게냐." 이세직이 옆으로 다가오며 질문을 던지자 천인문이 고개를 들었다. "아 그냥 재미있는 생각이 들어서요." "무슨 생각이 그리 재미있더냐?" "음! 사람을 죽이려면 저런 독은 안 쓸 걸요. 왜 하필 구하 기도 어려운 독을, 그것도 잘 죽이지도 못하는 독을 쓴......" 이세직을 보며 말을 하고 있던 천인문은 갑자기 그의 얼굴이 굳어들어가는 것을 느끼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이세 직이 곧 얼굴을 펴며 대답했다. "괜찮다. 그건 그렇고 네 말에도 일리가 있구나."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천인문의 의견에 동의하자 천인문은 탄력을 받은 듯 다시 말을 이었다. "일단 저 같으면 엄청나게 강한 독을 쓸 거에요. 아니 다른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걸요." 천인문은 계속 자기의 의견을 피력했다. 계속 고개를 끄덕이 며 동의를 하던 이세직이 입을 열었다. "일단 네 말이 맞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저 친구가 중독되었 다는 것이다. 일단 다른 것은 신경 쓰고 싶지 않구나. 네가 말했던 것은 그 친구가 깨어나 보면 알 수 있겠지." 이세직이 말을 마치자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천인 문은 그가 다시 사라지자 여기에 있어 봤자 이야기를 나누기 가 쉽지 않을 거라 생각되었다. 집에 들어가서 잠깐 인사를 마친 후 흑풍을 타고 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중원 무림은 이십 년 간 잔잔한 바다같이 고요한 침묵에 빠 져 있었다. 중원을 대표하는 두 곳은 바로 무림맹(武林盟)과 무황성(武皇城)이었다. 정파를 대표하는 무림맹은 소림(少林) , 무당(武當), 화산(華山), 아미(峨嵋), 청성(靑城)과 개방(   )의 오파일방(五派一幇)을 필두로 정(正)을 표방하는 단 체들이 모여 만든 집단이었다. 이에 반해 무황성(武皇城)은 수 십 년 전 몰락했던 혈교(血敎)와 사천성(邪天城) 등의 잔 존 세력들이 다시 힘을 모아 만든 단체였다. 이 두 단체는 서서히 쌓인 거대한 힘을 주체하다 못해 이십 년 전에 서로 검을 맞대고 피를 흘리게 되었다. 후에 정사대 전(正邪大戰)이라 불릴 이 사건은 어쩌면 예고된 일이었다. 거대한 힘을 가진 집단이 두 개나 있다는 것은 한 산에 두 마 리의 호랑이가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항상 서로 으르렁대는 사이가 아닌가. 그렇게 예정되어 있던 정사대전은 삼 년이란 긴 시간동안 계속 되었다. 정사대전 동안 정파와 사파 양쪽은 모두 상당한 인적 자원의 손상을 입었다. 그 후 양쪽이 모두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은 힘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새로 등장한 강력 한 인물이 정파와 사파를 휘어잡았기 때문이었다. 정파에는 나웅겸(羅熊鉗)이란 걸출한 검의 고수가 등장했다. 철검비웅(鐵劍飛熊)이란 별호를 쓰는 인물로 그를 보면 누구 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뚱뚱한 곰 한 마리가 웃음을 지으면 어찌 재미있지 않겠는가. 허나 그가 화가 나면 그의 검은 사정없이 피바람을 부른다. 그는 무림에 나타난 지 오 년이란 짧은 시간만에 절정의 고 수가 되었고 사람이 부족한 무림맹을 대표하는 맹주의 자리에 까지 취임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것에는 그의 노력도 무시할 수 없었겠지만 그의 아내였던 선옥련(宣鈺戀)의 도움이 있었 기 때문이었다. 빼어난 미모와 남다른 지모로 그녀는 남편을 무림 맹주로 등극시켰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도울 수 있게 했다. 이렇게 그녀는 그를 도와 정파를 과거 이십 년 전의 모 습으로 되돌리는데 큰 일조를 했다. 그렇게 나웅겸이 이끄는 현 무림맹은 백 년 내 가장 튼실한 시기라 평가받을 정도로 호시절을 맞이하고 있었다. 반면 무황성(武皇城)을 틀어 쥔 인물은 금도(金刀) 희욱(姬 昱)이란 인물이다. 그는 살수였다. 하지만 살수답지 않게 무 공이 고강했다. 살수답지 않게 강한 그는 자신의 무공을 십분 발휘하여 조금씩 지휘를 향상시켜 나갔고, 대 다수의 사파 인물이 죽어버린 정사대전 이후 전격적으로 성주의 자리에 앉 았다. 그가 무사히 그 자리에 앉은 것은 아니었다. 사파의 인물들 대다수가 강함만을 추구하는 전형적인 무인이었다. 당연히 ' 살수 나부랭이가 어떻게 성주위(城主位)를 차지할 수 있단 말 인가' 하는 생각을 가진 자가 많았다. 대저 살수란 남의 뒷통 수를 때리는 직업이라 생각하던 사파의 인물들은 당연히 그에 게 반발을 했다. 그들은 전대 성주의 아들이었던 마풍(魔風) 진승람(陳勝覽)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태. 누가 봐도 희욱이 진승람에게 대항하다 죽음을 당할 거라 생 각했다. 희욱의 힘을 몇 배나 앞서는 세력이 진승람에게 모인 것을 보고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 았던 무인들도 서서히 진승람의 세력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허나 결론은 아주 싱겁게 나왔다. 희욱이 진승람을 눌러 버 린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희욱에게는 있는 것이 진승람에 겐 없었던 탓이다. 희욱에게는 있고 진승람에겐 없었던 것. 그것은 바로 머리였다. 세력의 싸움이란 힘만으로는 승리를 쟁취할 수 없다. 세력을 어떻게 조율하고 이끄느냐에 따라 승리와 패배가 달라진다. 그리고 그것은 세력을 이끌 지모자(智謀者)의 몫이다. 희욱은 세력은 비록 진승람보다는 약했지만 대신 그에게는 없는 장자방이 있었다. 매서운 눈매를 상시 번뜩이는 인물. 그러나 전혀 속내를 알 수 없는 안개 같은 인물. 독면무웅(禿 面霧雄) 금영악(金令嶽). 바로 그것이 희욱을 도운 장자방의 이름이었다. 금영악은 별호에서 알 수 있듯이 대머리였다. 대머리라고 이 상할 것은 전혀 없었다. 다만 문제는 그가 아주 어릴 때부터 대머리였다는 것이다. 다른 또래의 아이들은 그런 그를 놀려 대고 비웃어댔다. 그렇게 되다 보니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해야 했고 누구에게도 자신의 속을 말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친구도 없고 말도 하지 않는 인물 이 되어 버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몇 년 후 그에게도 유일한 친구가 생겼으니 그가 바로 희욱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살수로 키워진 희욱, 누구에게나 따돌림을 당한 금영악. 어찌 보면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평소 아무런 관계도 없던 그들은 어느 한 날 같은 장소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날 이후 그렇게 둘은 서로의 아픔을 나누기 시작했고 훗날 성장한 둘은 무황성의 역사를 한 순간에 바꾸어 버리게 되었다. 강북 안휘성(安徽省) 합비(合肥). 강남과 중원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자 안휘성의 성도.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하지만 이것말고도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중원 무림을 양분한 양대 세력 중에 하나인 무림맹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낮은 야산을 끼고 도는 장원. 크기는 크기에 비해 상당히 낡 아빠진 건물. 그러나 장원 입구에 걸린 현판은 결코 그곳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실려 있었다. 무림맹(武林盟). 일필휘지(一筆揮之)의 글자는 그렇게 현판을 장식하고 있었 다. 무림맹의 내부에는 사십이 넘는 전각들이 있다. 그 전각들 중 몇 개는 무림맹의 주력부대인 검천대(劍天隊)와 정보 담당 의 집정대(集情隊)가 항상 쓰고 있으나 대다수는 무림맹을 구 성하는 오파일방과 사대세가(四大世家) 등을 위해서 비워두고 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들은 자파에서 생활을 하다가 상황이 돌변하거나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바로 무림맹으로 와 서 이곳에 투숙하게 된다. 평소 같으면 텅 비워져 있어야 할 그곳이 오늘은 웬일인지 많은 사람들로 들어차 있었다. 바로 맹주의 소집령이 떨어진 탓이다.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맹주의 집무실에는 소집령에 응 한 각 파의 장문인들과 세가의 가주들이 자리에 앉아서 초조 한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정기회의 같은 것은 무림맹에 따로 마련된 회의실을 이용하겠지만 이번처럼 극비 사항은 보통 맹주의 집무실에서 행해지곤 했다. 이십 개가 넘는 눈이 모이 는 그곳에는 오늘 회의를 소집한 주인공이 뚱뚱한 몸을 가누 며 앉아 있었다. 바로 그가 무림맹주 철검비웅(鐵劍飛熊) 나 웅겸(羅熊鉗)이었다. 살집이 두둑한 얼굴에 푸근한 미소를 연 신 드리운 채 주위를 살펴보던 그가 드디어 좌중의 침묵을 깨 트렸다. "이렇게 참석해 주셔서 고맙소이다. 오늘 이렇게 여러분들을 소집한 것은 새로운 정보 하나가 잡혔기 때문이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끝자리에 앉아 있던 앞니 하나가 빠진 거지 차림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크에헤헤! 사파 아해들이 일이라도 벌인 게요? 그랬으면 우 리 개방에 먼저 잡혔을 텐데 이상하군. 안 그래도 몸이 근질 근질 했는데 이젠 몸 좀 풀 수 있으려나?" 개방(  ) 방주 불수개(不受 ) 형지(荊枝)였다. 말을 하는 와중에 빠진 이 사이로 침이 사방으로 튀자 옆에 앉은 도관 차림의 중년 도사는 연신 낯을 찡그렸다. 나웅겸은 넉넉한 웃 음을 지어 보였다. "형방주께서는 조용히 지내셨던 것이 싫으셨던 모양이오. 근 데 이거 실망을 끼쳐 드려서 죄송하군요. 이번 일은 그들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아미타불. 사파와의 일이 아니라니 다행이오. 피를 보지 않 아도 된다함은 부처님의 공덕이구려." 나웅겸의 말을 받은 인물은 현 소림의 방장인 백오(白誤) 대 사였다. 평소 산사 밖을 밟지 않기로 유명한 백오가 산을 내 려온 것은 기변(奇變)이라 여겨질 만큼 특이한 일이었다. 하 얀 눈썹으로 인해 백미 대사라 불리기도 하는 그는 무공도 강 했지만 깊은 불심으로 더욱 이름이 드높았다.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푸근하게 하는 불심(佛心)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리자 모두들 경건한 자세를 취했다. 나웅겸도 백오 대사에게 고개 를 숙이며 공대를 취했다. "중생을 생각하시는 대사의 마음에 부끄러워지는군요." "부끄럽다니요. 맹주께서 무림을 위해 힘쓰시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두 사람이 서로의 공을 치하하기 시작하자 좌중의 인물들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여기 모인 것이 공이나 칭찬하자고 모 인 것이 아니지 않는가. 시간이 흘러도 한번 엇나간 대화는 끊길 줄 몰랐다. 이야기가 진전 될 것 같지 않자 형지 방주가 헛기침으로 다른 사람들이 기다림을 상기시켰다. "아! 죄송합니다. 잠시 이야기가 딴 곳으로 새 버렸군요." 머쓱한 표정을 지은 나웅겸은 바로 좌중을 둘러보며 본론으 로 접어들었다. "장문인께서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나웅겸의 시선을 받은 사람은 무오 대사의 맞은 편에 앉아 있던 계피학발(鷄皮鶴髮)의 노도사였다. 천양(天陽)이란 도호 를 쓰는 인물이자 현 무당파의 장문으로 나이가 상당함에도 전혀 힘이 떨어지지 않아 열정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검의 고 수였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자 그는 퀭하게 들어간 두 눈을 들어 좌우를 살핀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번에 천수(天水) 사제의 제자 하나가 한 가지 정보를 가 지고 왔었습니다. 일단 그 일이 사실인지 확인은 되지 않았으 나 심상치 않은 내용이라 그냥 있을 수 없어 이렇게 맹주께 부탁하여 여러분들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입이 마르는지 혀로 입술을 적셨다. 좌중이 눈빛을 번 뜩이며 숨을 죽이자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빈도가 말씀드릴 수도 있지만 그것보단 제자 녀석에게 직접 들으시지요." 그는 아주 짧게 말한 후 입술을 우물거렸다. 말이 들리지 않 는 걸로 보아 전음을 날린 듯 했다. 그의 입이 닫히고 얼마 되지 않아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들어오게." 나웅겸의 말이 울려 퍼지자 한 젊은 사내가 문을 열고 안으 로 들어왔다. 그는 매서운 용모에 번뜩이는 눈매를 가진 사내 였다. 사내는 안으로 들어오자 주위를 둘러보며 포권을 취했 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수고롭겠지만 그 때 한 말을 다시 들려주겠나?" 모두가 숨을 죽이고 문 앞에 선 사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가벼운 인사와 함께 말문을 열었다. "황요진이라 합니다. 어르신들께 말씀드릴 일은 제가 소주에 서 황석(黃石)으로 가던 길에 구강(九江) 부근에서 겪은 일입 니다. 제가 강을 따라 올라 가고 있을 때 강변에서 죽어가고 있던 관군 하나를 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대명장군부(大明將 軍府)로 가는 중이던지 가슴에 발령서 하나와 승상부(丞相府) 로 갈 친서 한 장이 들어 있더군요. 잘못된 일인지는 알았으 나 궁금함을 참지 못해 열어보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 사실이 부끄러웠던지 고개를 잠시 숙였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 친서는 정화라는 사람이 쓴 것이었습니다. 언제쯤 남경 에 도착할 것 같으니 호위할 군대를 보내 달라는 내용이더군 요. 그런데 문제는......" 그는 갑자기 긴장이 되던지 말을 끊어 버렸다. 그렇게 되자 열심히 이야기를 듣던 장문인들과 세가의 가주들은 눈살을 찌 푸렸다. 허나 아무도 독촉하지 않았다. 지위도 지위였지만 함 부로 나서서 경박함을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체면과는 거리가 있던 형지 개방주는 바로 침을 튀기며 황요 진을 닦달했다. "누구 숨 넘어 가게 할 일 있냐? 빨리 말해." 속으로는 바라마지 않던 말을 해준 그가 고마웠지만 겉으로 는 모두 경멸하는 얼굴로 그를 노려본다. 그러나 형지는 그런 시선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뭐하냐? 어서 말하지 않고." 그가 다시 한 번 보채자 황요진은 다시 입을 열었다. "조공품의 목록 중에 두 권의 비급도 들어 있었다는 것이 문 젭니다." "비급?"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던 도관을 쓴 화산파의 장문인 상청 자(常淸子)가 눈을 번뜩였다. 그는 무공에 미친 도사였다. 무 공의 실력은 소림과 무당에 비해 뒤떨어졌지만 그 열의만큼은 결코 뒤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지금도 비급이란 말이 나오자 마자 바로 안광을 번뜩이며 호기심을 보였다. "도우(道友)는 계속 들어 보시게나." 천양자가 미소를 짓자 대청자는 잠깐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 다. "제가 본 조공품의 목록에 적혀 있던 비급의 명칭은 파혈마 혼(破血魔魂)과 천존무급(天尊武 )이었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좌중의 모든 인물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오 대사도 벌떡 일어설 정도이니 황요진의 말이 던진 충격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겨우 나웅겸 과 천양자 등 이 사실을 미리 들었던 몇 사람만 겨우 자리에 붙어 있었다. "네가 본 게 사실이냐?" 호걸형으로 생긴 황보세가(皇甫世家)의 가주 신권(神拳) 황 보언(皇甫彦)이 거구에 걸맞는 우렁찬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 찌나 목소리가 큰지 실내의 공기가 떨릴 지경이다. 비급의 명 칭이 준 파급한 효과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파혈마혼( 破血魔魂)과 천존무급(天尊武 )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 들의 비급이었으니 그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그 말에 추호도 거짓이 없으렷다." 이번에는 남궁세가(南宮世家)의 가주인 천검(千劍) 남궁무외 (南宮武畏)가 황보언의 말을 뒤따랐다. 그는 턱 밑으로 긴 수 염을 길러내린 푸근한 노인의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가전 무 공을 십 성이나 익힐 정도로 자질이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무 공을 익히면 익힐수록 어렵고 두렵다 하여 이름까지 무외(無 畏)에서 무외(武畏)로 바꾼 특이한 인물이다. "어느 앞이라고 허튼 말을 고하겠습니까?" 황요진은 추호도 거짓이 없다는 듯 자신감 있게 가슴을 폈다 . 그의 눈을 바라보던 황보언은 그의 말이 사실임을 인정한다 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뒤쪽에 앉아 있던 천양자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솔직히 이 사실을 그가 말해도 되지만 이렇게 정파를 이끄는 세력의 수장들에게 직접 이야기하게 만든 것 은 그들에게 눈도장을 받게 하자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 생각 은 맞아 떨어졌다. 분명 그들은 이렇게 큰 일을 고한 황요진 을 잊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천양자는 다른 이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끄덕 거렸다. "됐다. 이만 나가 보도록 해라." "네. 장문인!" 황요진은 몸을 돌려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좌중의 인물들은 모두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한 번 어수선해 진 분위기는 다시 가라앉을 줄 몰랐다. 비록 말소리는 전혀 들리진 않았지만 모두들 자신의 생각에 빠져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험험! 일단 사태는 들으셨으니 이젠 대책을 한 번 논의해 보도록 하지요." 나웅겸이 헛기침을 토한 후 말을 꺼내자 이번에도 형지 개방 방주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크헤헤. 무당 장문께선 좋으시겠소이다. 저렇게 훌륭한 녀 석이 나중에 무당을 빛낼 테니 말이오." "......?" 엉겁결에 기대하지도 않던 칭찬을 듣자 천양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다시 방주가 말을 이었 다. "실력은 모르겠지만 일단 운이 좋지 않소이까? 저런 녀석이 나중에 큰 일을 한다니깐 그러오." 그의 이상한 설명이 끝나자 천양자는 입가에 가만히 웃음을 걸었다. 그러나 듣고 있던 화산의 장문인인 상청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듣다보니 화산을 무시하는 듯한 느낌이 든 것이다. "그 따위로 운이 좋다 할 수 있겠소? 비급을 손에 넣었다면 몰라도 그런 소식이야 누구라도 들을 수 있는 것이오." "우헤헤헤. 우리 개방도 알아 내지 못한 사실을 가지고 올 정도면 보통 운으로는 안되지. 암 안되고말고." "끄응......" 상청자와 형지의 언쟁이 벌어지자 나웅겸이 급히 중재에 나 섰다. "두 분 진정하시지요. 지금은 운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가 아 닙니다. 한시라도 빨리 대책을 마련해야지요." "대책? 무슨 대책 말이오?" 형지 개방주의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남청색 도관을 정갈히 차려 입은 중년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는 청성의 현 장문 인으로 일지(一志)라는 도호를 쓸 정도로 외길만을 추구하는 무인이자 도인이었다. 보통 도교 문파의 장문인이 된 사람은 황색이나 자색의 도관 을 차려 입고 간단한 건(巾)을 쓰면 되지만 그는 결코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올바른 행동만이 올곧은 정신을 받을 수 있다 하여 그는 자신부터 낮은 신분의 도사나 걸치는 남화 건(南華巾)에 남청색의 득라(得羅)도복을 걸쳤다. 법 의례의 식이나 관건(冠巾)의 예와 같은 특별한 날이 아니고는 항상 이 복장을 입고 다니니 그 아래 사람들도 멋을 부릴 수가 없 었다. 평소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긴 했지만 그런 그의 생각이 맞았는지 현재 청성은 거의 무당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입지를 넓힐 수 있었다. "다행이 이번 일을 먼저 무당에서 알아 왔다고는 하지만 얼 마 걸리지 않아 무황성에도 들어갈 것입니다. 분명 대책이 있 어야겠지요." 나웅겸의 왼쪽 옆에 앉아 있던 무림맹의 군사이자 제갈세가( 諸葛世家)의 가주인 귀제갈(鬼諸葛) 제갈무(諸葛務)의 말이었 다. 모두들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황성이 어떤 단체인가. 무림맹과 맞먹을 정도로 힘이 있는 사파의 총 연합 체가 아닌가. 과거 무림맹은 많은 수의 무림인들을 통합하여 거대한 단체 를 만들었다. 그것은 항상 힘만을 앞세우는 사파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덩치는 커졌으나 빠른 상명하복(上命下服 )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것은 아주 당연했다. 무림맹에 몸 을 담은 무인들은 서로 다른 파에서 차출되어 온 사람들이었 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이란 같은 깃발 아래 서 있는 그들이 라 할지라도 결국 그들이 몸담은 문파는 세력을 다투는 단체 이다 보니 보이지 않는 알력과 경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내려 진 명령이 자신이 적(籍)을 둔 문파에 반(反)하는 경우엔 머 뭇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흔히 정파에서 비일비재 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이런 이유로 새로이 맹주에 취임한 나웅겸은 무림맹의 살빼 기에 들어갔다. 그 이유는 이러한 고질같은 명령 체계의 불합 리성을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원로원(元老院), 호법원(護法院 ) 등의 몇 몇은 남기고 나머지 육당(六堂), 팔단(八壇) 등의 무림맹의 구성체를 완전히 뜯어 고쳐 검천대(劍天隊)와 집정 대(集情隊) 단 두개로 바꾸어 버렸다. 부족한 인원은 처리할 안건이 있거나 급한 일이 생겼을 때 바로 각 문파와 세가 등 에서 지원을 받는 것으로 했다. 이것은 본래 그의 아내였던 선옥련이 그에게 말해 시작된 일 이었다. 보통 뒤로 빠져 앉은 여자가 사내를 통해 조정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무림인들이었지만 이 사안은 아주 빠르게 통과가 되었다. 무림맹의 크기가 줄어든다는 것은 각 문파의 세력이 커지는 데도 도움이 되지만 무엇보다 무림맹주의 권 한이 더욱 축소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장문인들이 반대를 할 이유가 없던 것이다.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반대로 무림맹이 몸집을 줄일 때 무황성은 도리어 그 모습을 크게 부풀렸다. 무림맹이 이십 여 년 전 무황성과 무림맹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지 못한 이유를 명령 체계의 불합리성으로 판단한 반면 무황성은 힘만을 맹신하는 사파의 특성에 그 이 유를 두었다. 수도 월등히 많고 힘도 더욱 강한데 왜 항상 정파에게 져야 만 하는가 하는 의문. 그것은 항상 사파인들에게 풀리지 않는 화두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희욱이 무황성의 성주에 오른 직후 금영악은 무황성이 과거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정파를 이기지 못한 이유를 힘만 맹종하는 그들의 습성이라 결론지었 다. 금영악의 뛰어난 지모를 익히 알던 희욱은 그의 도움을 받아 무황성을 개편하기 시작했다. 사파의 최고 장점인 강한 통솔력을 발휘하는 곳은 그대로 두고 정보를 수집하는 대이단 (大耳檀)과 적의 세력과 작전 등을 종합, 판단하는 병참단(兵 站檀) 그리고 자금을 확보하는 득화단(得貨檀)이 새롭게 편성 되었다. 가장 크게 변모한 부분은 정보와 모략에 관한 것들이었다. 정파에는 개방이라는 훌륭한 정보통이 있던 반면 무황성은 제 대로 된 정보 단체가 하나도 없었다. 그것뿐이던가. 오직 믿 는 것은 힘뿐인지라 무식함을 자랑하듯 오직 돌격밖에 없었던 그들이다. 제대로 된 정보 하나 없이 싸움에 임한다면 항상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무식한 힘만 믿고 그냥 돌격해대 는 터에 진법이고 뭐고 걸리면 목숨을 내주는 바보 같은 짓거 리는 더더욱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결과로 금영악은 다른 일 은 제쳐 두고 정보의 습득을 최우선으로 놓고 대이단을 편성 했다. 과거 같았으면 무식하게 싸움만 할 줄 알았던 그들이 이 정 보를 얻을 수 있으리라 결코 믿지 않을 정파의 인물들이지만 금도 희욱이 무황성을 새롭게 변천시켰다는 정보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이까?" 온통 주름이 가득한 얼굴을 가진, 좌중에서 가장 늙어 보이 는 노인이 가슴까지 내려오는 수염을 파르르 떨며 물었다. 겉 보기에는 너무도 늙어 보여 닭 한 마리라도 잡을 힘도 없어 보이는 그였지만 무림인 중 그 누구라도 그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이라면 두려워 할 인물. 바로 그가 사천당가(四川唐家)의 가주 당영민(唐英民)이다. 독과 암기를 쓰는 당가의 인물답지 않게 언제나 그는 따스한 인품을 자랑했다. 그러나 그도 화가 나면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힘차게 암기를 내둘렀다. 그래서 무림인들은 그를 천 수불영(千手佛影)이라 칭하며 뇌리에 심기를 게을리 하지 않 았다. 천수불영 당영민이 칼칼한 목소리로 묻자 일지가 자신의 생 각을 피력했다. "빈도의 생각으로는 그 비급을 가진 정화라는 관인에게 찾아 가서 비급을 가지고 있으면 사파의 인물들이 목숨을 노릴 수 도 있으니 양보를 해 달라고 설명을 하고 받아내는 것이 가장 안전할 듯 합니다." "아미타불! 정말 훌륭하신 생각이십니다. 빈승도 장문인의 생각에 찬성하는 바입니다." 소림의 백오대사가 합장을 하며 찬동했다. 그러나 듣고 있던 상청자는 미간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열 살 먹은 아이도 생각을 다시 해 볼 의견을 어찌 저렇게 당당하게 말한단 말인가.' 산사(山寺)에만 처박혀 살아가는 고리타분한 불제자와 원리 원칙만 따지는 인물인지라 그럴 것이다고 자인(自認)했지만 불편한 속은 영 풀릴 줄 몰랐다. 그러나 바로 뒤따라 들린 목 소리에 그의 안색이 확 풀렸다. "아미타불! 일지 선인(仙人)의 곧은 마음씨와 신승께서 보이 신 생명을 아끼시는 마음에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리 하기는 어렵습니다." 입을 연 사람은 이곳에서 유일한 여인이자 아미의 장문을 맡 은 현의(賢意) 사태였다. 어딘지 비꼬는 듯한 말이었지만 워 낙 편안하고 자애로운 말투에 사방은 그런 느낌을 받지 못한 듯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삼십을 갓 넘은 듯 젊은 외모를 가진 그녀는 일진도장과 백오대사의 시선이 자기에게 몰리자 싱긋 웃음을 띄우며 말을 이었다. "그 관인이 가지고 있는 비급은 분명 조공품 속에 있는 것일 겁니다. 달라고 해서 함부로 내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럼 사태께서는 어찌 하자는 말씀이시오?" 황보언이 급히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러나 질문을 받은 그녀 는 단순히 미소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무당의 천양자를 향해 눈길을 던졌다. 현의사태의 시선이 그 에게 돌아가자 다른 이들도 모두 천양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 다. 갑자기 좌중의 시선이 쏘여오자 천양자는 갑자기 가슴에서 한 가닥 불안감이 치솟아 올랐다. 고개를 돌려도 봤지만 그들 의 시선은 사라질 줄 몰랐다. 바라보는 그들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현의사태가 천양자 를 본 것은 분명 그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음이 분명할 것이 다. 그러나 그 해답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곧 현의사태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던 제갈무가 그녀의 속 내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현양도장께서 황제에게 부탁할 용의가 없으신지요?" 황제에게 부탁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의 말에 모두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그 말이 지닌 의 미를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확신에 찬 눈으로 천 양자를 바라보았다. 그런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천양자의 얼굴 은 모래를 씹은 듯 구겨져 있었다. 그들이 그런 시선을 보내는데는 이유가 있었다. 삼 년 전 영 락제가 칙명으로 현천옥허궁(玄天玉虛宮), 태현자소궁(太玄紫 蘇宮), 흥성오룡궁(興聖五龍宮), 대성남암궁(大聖南巖宮)외 다섯 개의 도관을 세우고 많은 전답 그리고 면세의 특권까지 내린 일이 있었다. 이 사실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조카 를 폐하고 수많은 피를 흘리며 황제에 오른 영락제가 꿈속에 귀신들이 나와 무당의 도력(道力)으로 물리치려 한다느니 호 북성(湖北省)의 인심을 끌기 위해서라느니 별 별 말이 다 나 올 정도였다. 하지만 일단 중요한 것은 황제가 무당파에 많은 것을 내렸다 는 것이고 그것은 황제가 얼마나 무당파를 소중히 여기는지 잘 보여 주는 일이었다. 만약 현 무당의 장문인인 천양자가 황제에게 직접 그 비급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무당을 아끼는 황제이다 보니 충분히 내어줄 가능성도 높은 것이다. 아무리 고개를 갸웃거려도 별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은 천양자는 결국 그러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무황성에서 그 전에 손을 쓰면 어쩔 것인가 하는 건 데 거기에 대한 대비책은 있는게요?" 갑자기 들려온 남궁무외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좌중 은 다시 눈을 찌푸렸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들을 미리 막는 것만이 최선의 수였다. "어쩌긴 어쩌겠소. 그냥 그 놈들이 오면 두들겨 패서라도 막 아야지." 황보언이 눈을 부라리며 떠들었다. 형지도 침을 튀기며 동의 했다. "그럼그럼. 당연히 말을 안 들을 테니 미리 패 버리는 것도 좋지." "제갈 군사의 생각은 어떻소?" 나웅겸이 제갈무를 바라보자 제갈무는 그와 눈을 맞추며 대 답했다. "별 도리는 없습니다. 그들이 이 사실을 모르기만 바랄 뿐이 지만 만약 그들이 비급에 눈독을 들인다면 어쩔 수 없이 막아 야겠지요. 일단 급한 것은 그 정화라는 관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관과 관계가 없는 저희가 가진 정보 라고는 아주 단순한 것 들 뿐인지라 지금은 확실한 방도를 내 기는 좀 까다롭군요." "크헐헐헐. 역시 우리의 똑똑한 군사라도 정보가 없으니 까 막눈이구먼. 이제 우리 개방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겠느냐?" 장난 걸 상대도 없건만 형지 개방방주는 좌중을 둘러보며 어 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사방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연 신 웃어젖히더니 한참이 지난 후에야 웃음을 거두었다. "그럼 우리 거지들이 한 번 나서볼까?" "부탁드리겠습니다." "맡겨 두라구." 제갈무가 고개를 숙이며 부탁하자 형지는 거드름을 피우며 대꾸했다. "그럼 오늘은 이만 회의를 마치도록 하죠. 회의는 개방에서 정보가 잡히는 대로 계속하겠습니다." 나웅겸이 회의의 종료를 선언하자 장문인들과 세 가주는 모 두 인사를 나눈 후 집무실을 나섰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오! 문이구나. 왜 어제는 안 왔느냐?" "그냥 할아버지 바쁘실 것 같아서 관뒀어요." 둥근 해가 둥실 떠오른 진시(辰時) 무렵 흑풍을 타고 내려온 천인문을 본 이세직이 그를 반겼다. 천인문은 흑풍의 등위에 서 폴짝 뛰어내리며 물었다. "친구분은 깨어 나셨나요?" 질문을 받은 이세직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어제 늦게 깨어났다." "아! 그거 정말 다행이네요." 천인문은 자기 일 마냥 기뻐했다. "일단 들어가자꾸나." "제가요?" 천인문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만나게 해 주겠다는 의도가 궁금해진 탓이다. "그래 너 말야. 왜 만나기 싫으냐?" "껄끄럽잖아요. 솔직히 알지도 못하는 분 만나기가 쉬운 게 아닌데......" 천인문은 핑계를 대며 난처하다는 어투로 망설였다. 이세직 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걸었다. "누군 태어날 때부터 아는 사람 있겠느냐. 다 만나서 친해지 는 게지. 망설이지 말고 들어가자." 그는 말을 마치자말자 바로 몸을 돌려 안으로 사라졌다. 천 인문은 혼자 남게 되자 잠시 눈을 찡그렸지만 바로 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79. 천하기학(天下奇學) 영웅장(英雄掌)을 배우다. (4) 안은 이틀 전에 보았을 때와는 완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얼기설기 꼬아 묶어둔 넝쿨 새기(!)줄은 조잡하게 천정에서 아래 로 늘어져 있었고, 죽은 나무의 밑둥을 잘라내어 만들었는지 흙갈색 탁자가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다. 뒤쪽 산자락이 훤히 보이는 뒤쪽 창문 아래에는 급히 만들어진 새 침상 하나가 나 무내음을 풍기며 놓여 있었다. 아마도 이세직이 쓰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이세직을 따라 다시 독물이 있던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 그곳도 역시 달라져 있었다. 벽과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던 자기병과 대나무 바구니 등이 완전히 치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 대신 잘 꾸며진 침상 하나가 방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 고 그 위에는 며칠 전에 보았던 창백한 안색의 사내가 누워 있었다. 당우양은 이세직과 천인문이 방으로 드는 것을 보고는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 모습에 이세직은 급히 당우양의 어깨 를 붙잡았다. "왜 일어나려고 하는가. 그냥 누워 있게." 힘이 드는지 이마에 땀이 맺힌 당우양은 이세직의 손에 밀려 다시 자리에 누웠다. "헤에. 이제 괜찮으세요?" 이세직의 등뒤에 있던 천인문이 고개를 쏙 내밀며 그의 얼굴 을 살폈다. 한 눈에도 그의 상태가 호전되었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어 있었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거의 시체나 다름없을 정도로 하얗던 얼굴이 지금은 미약하나마 핏기를 조 금 머금고 있었다. 혈색이 제법 돌아온 당우양. 안부를 묻는 천인문에게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네가 천인문이냐? 고맙구나. 네 덕에 살았다고 들었다." "네?" 천인문은 예상치 못한 칭찬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 슨 소리냐며 이세직을 보았지만 그는 그냥 웃을 뿐이다. "네가 밖에 나가서 약초를 구해 왔잖느냐. 그것 때문에 내가 살 수 있었으니 고맙다고 해야지." "아!" 그제야 말뜻을 알아차린 천인문은 빙그레 웃었다. "의원이라면 그 정도는 기본이죠." "의원이라고? 네가?" 당우양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천인문을 쳐다보았다. 천인문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한 번도 치료를 해 본적은 없으니 진짜 의원이라 말 하긴 좀 뭐하지만요." "아니다. 의원이라 해 봤자 꼭 치료를 해야 의원이냐. 그냥 약초를 구해주고 환자를 긍휼히 여기면 그것도 의원이지. 게 다가 넌 그렇게 많은 약초를 순식간에 구해오지 않았느냐. 웬 만한 의원들도 그렇게 빨리 약초들을 구해오지 못할 거다. 그 정도면 훌륭한 의원이라 할 수 있지." 그의 열렬한 칭찬에 천인문의 낯이 살짝 붉어졌다. 약초를 구해 오긴 했지만 실제로 찾은 것은 흑풍이었기 때문이다. 비 록 천인문의 얼굴 가죽이 두껍긴 했지만 하지도 않은 일로 칭 찬 받기엔 조금 무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난처한 마음을 알았을까. 이세직이 둘 사이에 끼어 들었다. "피곤할 텐데 그만 쉬도록 하게." 당우양은 그 말에 숨을 고른 후 잠을 청하는 듯 눈을 감았다 . 이세직은 당우양을 한 번 바라보더니 천인문에게 나가자는 눈짓을 보냈다. 천인문은 밖으로 나가는 그를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온 이세직은 새로 만든 탁자의 한 쪽에 자리를 잡 고 앉았다. 천인문도 그의 맞은 편에 놓여 있던 통나무 의자 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로 얼굴만 마주볼 뿐 어느 누구도 먼저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그런 침묵의 끈을 먼저 끊은 것은 천인문이었다. "괜찮으시겠죠?" "그런 것 같구나. 이젠 한 숨 돌려도 될 것 같다." "다행이네요." 간단한 말만 건넨 둘 사이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이세직이 그 끈을 끊었다. "그런데 그 아가씨는 요즘 보이지 않는구나. 둘이 싸운 건 아닐 테고 어디 간 게냐?" 조기혜를 말하는 것일 게다. 천인문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입 을 열었다. "아시잖아요. 누나가 뱀 싫어하는 거. 뭐 다른 여자도 마찬 가지겠지만." 말을 하던 천인문의 머리에 서혜령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녀 는 과거 천산에서 뱀을 만났을 때 그냥 '꺅' 하는 소리만 지 르고 그러지는 않았다. 싫어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돌을 던져 죽일 정도로 담력도 있었다. 그녀가 생각나자 갑자기 그녀를 보고싶다는 생각이 든 천인 문. 빙긋 웃던 얼굴에 살짝 그늘이 드리웠다. 그런 것도 모르고 이세직은 계속 질문을 던져댔다. "혼자 있으면 할 일도 없고 심심할 텐데 집에 들어오지 않는 다고 해도 같이 내려와서 있으면 좀 낫지 않겠느냐." 천인문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그의 질문에 답을 했다. "누나야 저 없을 때도 혼자서 잘 놀았는데요 뭘. 요즘이야 저하고 비무한다고 재미있었겠지만 저 없을 땐 혼자서 금도 타면서 놀겠죠. 아니면 고양이 녀석하고 놀던지." "비무?" "뭐 비무라고 말하기엔 좀 그렇네요. 솔직히 시작할 때만 해 도 비무라 하고 시작했지만 지나고 보니 비무가 아니라 제가 배우는 것처럼 되어 버렸거든요." 이세직은 천인문의 말에 더욱 호기심을 보였다. 몇 일 전에 도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요 며칠간은 당우양의 치료 때문에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탓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항상 말을 하는 쪽은 그였던지라 천인문의 이야기를 듣자 재미있 게 느껴진 탓이다. "그래 뭘 배우느냐?" "검이죠." "검? 검 같은 건 안 보이는데." 이세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인문의 몸을 살펴댔다. "전 검 같은 건 안 가지고 다녀요. 귀찮거든요. 검술을 배울 땐 누나가 쓰던 검은 제가 쓰고 누나는 검집으로 저하고 상 대하죠." "그래 배우고 나니 실력은 올라가는 것 같더냐?" "처음에는 좀 나아지는 듯 하더니 요즘은 제자리걸음이에요. " "그래? 손 좀 내밀어 봐라." 뭔가 이상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던 이세직이 천인문이 내 민 손을 낚아챈 후 진기를 밀어넣기 시작했다. 손으로 한 줄 기 뜨거운 기운이 밀고 들어오자 자연스럽게 천인문의 몸에서 진기가 피어올라 그의 기운을 막아갔다. 그는 천인문의 공력 이 대항해오자 바로 손을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가 본 대로구먼." "......?"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겠는지 천인문이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넌 네가 어떤 무공을 익히는 것이 좋은지 모르느냐?" "그게 무슨 말인데요?" "모른다고? 쯔쯧 의원이라면서 그것도 모른다니." 이세직은 고개를 흔들며 혀를 찼다. "모른다면 노부가 설명해주마. 무공은 그 종류에 따라 쉽게 익힐 수 있는 사람들도 있고 그게 어려운 사람들도 있지." "그건 자질에 따라 다른 것 아닌가요?" 중간에 천인문이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이세직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자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무공을 익히면 어떤 것은 쉽게 익히고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어렵지." 그는 잠시 말을 끊더니 다시 설명해 나갔다. "그래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빠르겠구나. 네가 무공을 익힐 때 쉽게 익힐 수 있는 것도 있고 어렵게 익혀야만 하는 것도 있다는 거다." "잘 모르겠는데요." 천인문이 고개를 갸웃대자 그는 다시 설명을 했다. "일단 계속 들어보거라. 이렇게 습득에 차이가 나는 것은 사 람의 특성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넌 의술을 알고 있으니 쉽 게 설명할 수 있겠다. 보통 사람들을 태음(太陰), 태양(太陽) , 소음(少陰), 소양(少陽)으로 나누지?" "네." "그것처럼 무공을 익히는 사람들도 그렇게 구분을 할 수 있 다는 말이다. 약이나 침을 쓸 때 그 사람의 특성에 맞게 써야 하는 것처럼 그 사람의 특성에 맞는 무공을 익히는 것이 훨 씬 그 성과가 좋다는 말이지. 보통 일반 문파에서는 그렇게 나눈 뒤에 가르치진 않지. 하지만 이렇게 확실히 사람의 형( 形)을 구분하고 거기에 맞는 무공을 익힌다면 더욱 빠르고 좋 지 않겠느냐." 그제서야 천인문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어디에 속하는데요." "넌 경락이 상당히 굵고 넓어서 권법(拳法)이나 장법(掌法) 같은 것이 어울리겠다. 혈맥이 가늘면 보통은 검 같은 무기들 을 쓰는 편이 좋고 혈맥이 굵으면 그냥 몸으로 싸우는 무공이 좋다는 거지." "그렇군요. 정말 오늘 좋은 것을 배우네요. 고마워요 할아버 지." 천인문이 빙긋 웃으며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의 귀 여운 모습에 이세직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네 자질은 나빠 보이지는 않는데 검술을 습득하기 어렵다 해서 살펴본 것뿐이니 고마워 할 것 없다. 그래 익힐 만한 무 공은 있겠지?" "으음......" 그의 질문에 천인문은 자기가 알고 있는 무공을 떠올렸다. 과거 많은 무공들을 옥조영에게 배웠던 천인문. 역시 머릿속 에 상당한 수의 무공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천인문은 나이에 맞지 않게 한숨을 내 쉬었다. 들었던 무공 중에 어느 하나도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게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니 한 조각 구결이라도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면 다행이었다. 분명 구결도 다 들었던 천인문이다. 하지만 전혀 이해가지 않는 말뿐인 구결을 계속 기억할 천인문이 아니었다. 거기다 옥조영에게 들을 때 잠까지 자지 않았던가. 조금 머릿속을 뒤지던 천인문은 바로 포기해 버렸다. "왜 그러느냐? 생각이 안 나는 게냐?" "그...그게 아니고요. 제가 배웠던 무공 중에 권법 같은 건 없는 것 같아서요." 배울 때 잠을 자 버려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고 말하기가 부 끄러워진 천인문은 달아오르는 낯을 감추며 거짓말로 이세직 을 속이려 했다. "그래? 그럼 어디 보자. 노부가 아는 괜찮은 무공이 있나." 이세직은 별 다른 의심을 하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양 한 무공들을 머릿속에 떠올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빙그레 웃 음을 짓던 그가 손뼉을 쳤다. "좋은 게 있구나." "뭔데요?" 초롱초롱 눈빛을 빛내던 천인문이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영웅장(英雄掌)이다." 이세직은 아주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영웅장이요? 영웅장이면 장법인가요?" "장법이지. 과거 칠백 년 전 옥면괴협(玉面怪俠) 탁형(卓亨) 이란 자가 자신의 독문 장법으로 쓸 정도로 뛰어난 무공이다. 어떠냐. 한 번 배워 보겠느냐?" "물론이죠. 배울게요." 천인문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세직은 빙긋 웃고는 자 리에서 일어섰다. "여기선 하기 어려우니 일단 밖으로 나가자꾸나." "넵!" 천인문은 우렁차게 대답하고는 그 보다 더 빠르게 밖으로 나 가 버린다. 그 모습에 이세직은 다시 한 번 웃더니 밖으로 나 섰다. -80- 천하기학(天下奇學) 영웅장(英雄掌)을 배우다. (5) 무림맹이 강북에 자리를 잡은 반면 무황성은 강남 호남성(湖 南省)에 자리를 잡고 있다. 호남성(湖南省) 형양(衡陽). 장강(長江)의 한 지류이자 동정호(洞庭湖)로 내려드는 상강( 湘江)과 내수(來水)의 합류점에 자리한 이 곳은 현 사파의 거 두인 무황성의 본거지였다. 무황성은 형양의 외각 이십 여 리 밖에 위치하고 있었다. 흰 색과 갈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무황성은 그 크기에서부터 무 림맹의 수십 배를 넘어가는 거대한 건축물이다. 내성과 외성 으로 나누어진 이 건물의 최고의 자랑거리는 동서남북으로 열 린 대문이었다. 한 자가 넘는 두께의 철문 위에 옻을 덧발라 더욱 번쩍이는 멋진 모습을 보이는 대문은 높이가 삼 장이 넘 을 정도로 거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또 다른 자랑거리는 사방으로 뻗은 대로(大路)였다. 사통팔 달(四通八達)의 대로(大路)는 거대한 대문을 지나 내성의 안 쪽까지 이어져 있다. 사두마차 여덟 대가 동시에 달릴 수 있 을 정도로 큰 대로는 무황성의 현 성주인 희욱이 취임한 후 첫 번 째로 시작된 공사였다. 과거 흐트러진 무황성의 기강을 바로 잡고 권력을 정비하기 위해 보통 무황성의 성주가 하는 일은 하나 뿐이었다. 정파를 치는 일,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희욱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황성을 이끌고 정파를 치기엔 그 당시 무황성은 너무도 피폐해져 있었다. 비록 진 승람을 포함한 핵심 간부들만을 제거하여 무황성의 힘을 보전 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힘을 간직하기엔 좋은 방법이었 을지 모르나 그를 따르지 않는 인물들까지 안고 가야할 위험 까지 내포하고 있었다. 금영악은 이런 위험을 서서히 풀어낼 방법으로 도로 건설을 제안했다. 무황성의 위용을 높일 기회와 중도파를 반대파와 구별해 낼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는 방법으로 선택된 토목 공사는 삼 년이란 기간이 걸려서야 끝이 났다. 그 기간동안 숙청록(肅淸錄)을 작성한 금영악은 공사가 끝나는 당일 모든 반대파를 제거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날 이후 희욱은 탄탄 한 독주 체제를 갖출 수 있었다. 무황성 내성의 가장 심처에 위치한 전각(殿閣).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무황성 내에서도 가장 화려하게 꾸 며진 전각은 무황성의 성주가 기거하는 곳이다. 그곳은 금역 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드나들 수 있는 인물이 제한되어 있었 다. 허락되지 않은 사람이 접근할라치면 암중인의 손에 의해 언제 목이 떨어지는 지도 모르고 죽어 가는 곳이다. 그 곳을 향해 한 대머리 사내가 당당히 걸어가고 있었다. 매 섭게 보이는 눈매에선 연신 번뜩이는 안광이 뿜어져 나왔고 날카로운 콧날과 꽉 다문 입술은 그의 성격이 녹록치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성주의 방으로 들어갔다. 밖 은 상당히 밝았지만 내부는 상당히 어두웠다. 불빛이 거의 들 어오지 않아 어두운 그곳을 그는 전혀 망설임 없이 걸어갔다. 안쪽으로 난 통로를 따라 가장 내부에 있던 침실 문을 연 그 는 바닥에서 내공 수련을 하고 있는 평범한 외모의 희욱을 볼 수 있었다. 사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는 짧은 턱수염에 중 키를 가진 인물이었다. 과거 자객 경험이 있었던 그인지라 어 느 순간에도 평범하게 보이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희욱의 옆에 보이는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희욱의 수련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눈을 살며 시 뜬 희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친구 소리 좀 내고 다니게나." 앉아 있던 대머리 사내는 별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퉁명스 런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 같이 무공이 낮은 사람도 겁나는 건가?" "후후! 천하의 금영악이 무공이 낮다하면 세상에 무공이 강 한 사람은 열 명도 안될 걸세." 희욱이 금영악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금영악은 얇은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이 친구 오늘 날 완전히 잡아먹으려 드는구먼." 희욱은 금영악의 맞은 편에 비어 있던 의자에 몸을 내맡겼다 . "언제는 항상 자네가 날 잡아먹지 않았는가. 그래 갑자기 웬 일인가?" 희욱이 빙긋 웃으며 묻자 장난을 걸던 금영악이 안색을 바꾸 며 대답했다. "첩보가 들어왔네." "첩보?" "무림맹에 든 첩자가 연락을 보냈네. 이번에 정파의 우두머 리들이 회합을 가진 모양이야." "회합이라니...... 무슨 회합?" 희욱의 눈에 광망이 번뜩였다. 아직 별 일은 없다고 하나 정 과 사는 언제나 불과 물, 물과 기름의 사이. 항상 긴장을 늦 출 수 없는 사이이고 보면 그가 긴장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 다. "두 권의 비급이 나타났네. 천존무급(天尊武 )하고 파혈마 혼(破血魔魂)이라고 하더군." 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희욱의 손이 탁자를 내려쳤다. "그게 사실인가?" 희욱의 질문에 금영악은 그저 고개만 끄덕여 답했다. "혹시 함정은 아니겠지?" 그래도 의심이 가시지 않은 희욱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 다. 금영악은 그렇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대이단(大耳檀)에서도 잡힌 내용일세. 정화란 관원이 황제 에게 가는 조공품 중에 가지고 있는 모양이야." "으으음!" 희욱은 자리에서 일어서 뒷짐을 지고 방안을 돌기 시작했다. 그가 정신 없이 방안을 배회하자 금영악은 그저 바라만 볼뿐 이었다. 저 모습은 항상 무언가를 생각할 때 나오는 그의 버 릇임을 잘 알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무슨 말을 꺼낼 것이다. "우리도 나서야겠군." 역시 그의 생각대로 잠시 침묵을 지키던 희욱이 입을 열었다 . 금영악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야겠지." "어디서 시작해야 되지?" "그건 상황을 봐 가면서 결정해야겠지. 문제는 정파에서 어 떻게 나올 것인가 하는 것인데 내 생각은 그들이 함부로 손을 쓸 것 같지는 않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얼마 전에 황제가 무당에 전답과 건물을 지어 준 일이 있지 . 그걸 두고 사람들이 말이 많았지. 만약 정파가 손을 직접 쓴다면 황제는 그걸 용납하지 않을 걸." 금영악의 말에는 확신하는 어조가 다분히 들어있었다. 희욱 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모습을 보일 때 금영악의 말은 결 코 틀린 적이 없었던 것이다. "분명 내 생각이지만 정파는 일단 조용히 지나간 후 황제에 게 비급을 요구할 거야. 충분히 그들이 생각해 볼 방법이지." "우리는 그럴 수 없지 않는가." "당연한 말이지. 일단 확실한 정보를 얻은 후에 방법을 구상 해 보도록 하지. 자네는 아수라파천대(阿修羅破天隊)와 검마 당(劒魔堂)을 준비해 주겠나?" "외성의 모든 세력을 동원하지. 그 정도면 되겠지?" 그러자 금영악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네. 이번 일이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수가 많 다고 될 문제가 아닐 걸세. 이번 일은 수가 아니라 정예가 필 요하네." 희욱은 신음을 토하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일단 내일 당주 이상 간부들을 소집해 주겠나?" 할 말을 거의 끝냈는지 금영악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마지막 말에 희욱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부탁하네." "그럼 난 가보겠네." 금영악은 발을 놀려 희욱의 침실을 벗어났다. 다시 문이 닫 히자 희욱은 자리에 앉으며 고민에 잠겼다. '분명 이번 일로 피바람이 불겠군.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기회에 정파를 눌러 버릴 기회를 잡아야 할 텐데.' 그는 각오를 단단히 하듯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좀 알겠느냐?" "예 동작은 거의 다 외웠어요. 그런데 언제 쓰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술시(戌時)가 지난 그 시간, 해는 이미 산자락을 따라 모습 을 감추고 있었다. 마당에서 계속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천인 문은 숨이 턱 밑까지 차 오르자 숨을 고르며 자리에 섰다. 보 고 있던 이세직이 조용히 묻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얼굴을 타 고 흐르는 땀을 닦았다. 몇 시진에 걸쳐 영웅장의 동작들을 배운 천인문의 옷과 머리카락은 흠뻑 땀에 젖어 있었다. 비록 숨은 가빴지만 무언가 제대로 된 것을 배웠다는 것이 그를 기쁘게 했다. "오늘 하루 배우고 다 배웠다는 게 말이나 되냐? 일단 그건 나중에 가르쳐 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동작이나 잊어버리지 않게 연습을 해 두거라." "네 알겠어요." "오늘은 그만 늦었으니 돌아가거라. 내일은 구결과 언제 써 야 하는지 가르쳐 주마." 해가 진 곳을 바라보던 이세직은 늦었다며 귀가를 종용했다. 천인문은 바로 휘파람을 높이 불어 흑풍을 불렀다. 휘파람이 울려 퍼지자 어디선가 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안개 속에서 나 타나듯 흑풍이 검은 육체를 드러냈다. 천인문은 흑풍의 목덜 미를 쓰다듬더니 사뿐히 흑풍의 위에 올라탔다. "할아버지 그럼 내일 봐요." 천인문은 손을 한차례 흔든 후 흑풍을 몰고 튀어 나갔다. 이 세직은 천인문이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집 안으 로 사라져갔다. 달빛이 내리는 숲 속은 상당히 고즈넉했다. 사방에서 풀벌레 가 울어대는 그곳에 갑자기 한 마리 말이 물을 휘젓듯 젓고 지나가자 그 곳은 적막만이 가득찼다. 그러나 말이 지나간 그 곳은 또다시 울음소리로 가득 들어찬다. 흑풍의 위에 타고 있던 천인문은 세찬 바람이 귀밑을 때리자 눈을 감고 조용히 명상에 잠겼다. 처음 몇 번은 이렇게 늦게 돌아가는 것이 무서울 때도 있었지만 요즘은 그런 상황을 즐 기기까지 했다. 시원한 바람에 땀이 식어가자 오싹한 느낌을 받은 천인문은 눈을 뜨고 주위를 살폈다. 이미 산 위까지 거의 다 와가고 있 었다. '훗! 내가 이렇게 말을 잘 타게 될 줄 정말 몰랐는데.' 사막을 건널 때만 해도 엉덩이가 아파서 말이나 낙타 같은 것은 다시는 타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이렇게 타고 있다 는 것이 신기했다. 말이 좋아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확실히 그의 기마술(騎馬術)은 향상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엉덩이에 오는 충격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 것도 그가 이렇게 편하게 느낄 수 있는 요인이었다. 이런 생각에 잠겨 있던 천인문은 순식간에 흑풍이 집 앞에 도착한 것도 모르고 그저 멍하게 넋을 빼고 있었다. 히히힝! 천인문의 정신을 되돌린 것은 흑풍이었다. 천인문은 바로 정 신을 차린 후 흑풍의 등에서 풀쩍 뛰어 내렸다. "수고했다. 그럼 내일 보자." 천인문의 인사를 받은 흑풍은 다시 한 번 투레질을 한 뒤 뒤 쪽 산으로 사라져 갔다. 흑풍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던 천인문은 발길을 돌려 집 앞으로 걸어갔다. 집 안에서 불빛이 깜빡거리고 한 사람의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이제 오니?" 안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천인문은 문을 열고 안으 로 들어갔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조기혜가 안으 로 들어오는 천인문을 바라보았다. "응. 누나도 잘 놀았어?" "오늘은 늦었구나." "재미있는 걸 배웠거든." 재미있는 것을 배웠다는 말에 조기혜는 고개를 갸웃댔다. "그게 뭐니?" 하지만 천인문은 대답을 할 생각이 없었다. 후에 그녀를 깜 짝 놀라게 해 줄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게 있어." 말을 마친 천인문은 그녀가 계속 물고 늘어질까 두려워 잠이 오는 표정을 지었다. "아~함! 잠이 오네. 누나 나 잘 거야. 내일 아침에 보자." 천인문은 하품을 크게 하며 입을 막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 입을 우물거리던 그녀는 나가는 천인문의 뒷모습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냥 간다 이거지? 그래 좋아. 마음대로 해." 그녀는 툴툴거리며 입을 놀린 후 침상 위에 몸을 던졌다. 한 줄기 바람이 일렁인 후 초롱의 불이 꺼지며 사방은 적막에 잠겨 버렸다. -81- 이제부터 시작이다.(1) 아침부터 촐랑거리던 천인문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식사를 마치자 바로 흑풍의 등에 올라타고 산을 내려갔다. 어딘지 들 뜬 모습에 조기혜가 넌지시 물어 봤지만 대답하지도 않았다. 천인문의 달라진 모습에 그녀는 조금 호기심이 떠올랐다. 하 지만 같이 내려가기도 뭐했다. 내려가 봤자 뱀이 싫은지라 집 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혼자서 집 밖에서 시간을 보내야 할 것 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누나야 나 할아버지 집에 갔다 올게. 나중에 봐." 천인문은 가볍게 인사를 마치고 흑풍을 득달같이 몰아 산을 내려갔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흐음! 안되겠어. 좀 알아 봐야지.' 그녀는 사라져가는 천인문을 보며 그런 생각에 잠겼다. "빙령!" 그녀의 부름에 멀찍이 떨어져 있었던 빙령이 그녀의 앞에 모 습을 드러냈다. 계속 산 속에서 생활하는 그녀였건만 옷에는 전혀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부르셨습니까?" 나타난 빙령은 깍듯이 인사를 했다. 조기혜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가 왜 저렇게 기뻐하는 지 한 번 알아보도록 해라. 가 까이 가지는 말고 멀리서 감시해 봐." "존명." 빙령은 명을 받자 허리를 숙인 후 옷깃을 펄럭이며 사라졌다 . 그녀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자 조기혜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 안에서 금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따가운 햇살을 피해 나무 그늘 밑으로 들어갔다. 요 즘은 이렇게 시간이 나면 다시 금을 탔다. 마음을 편안히 하 는 데 금 만한 것이 없었다. "乘日下月變世相(승일하월변세상) 往春來夏無常間(왕춘래하무상시)  記林間如緋緞(당기임간여비단) 何我更見其春景(하아갱견기춘경) 해가 뜨고 달이 지니 세상이 뒤바뀌네 봄은 가고 여름이 오니 세월이 무상하다. 그 수풀은 아직도 비단 같음을 기억하노니 다시 한 번 그 봄을 볼 수 있으랴." 그녀는 자리에 앉은 후 검은 금(黑琴)을 무릎에 얹고는 한 줄기 감흥을 그대로 내뱉었다. 옥구슬처럼 아름다운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아무렇게나 기분 내키는 대로 부른 시였지만 영롱한 목소리로 울려 퍼지는 소리는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시 하나를 내뱉은 그녀는 다급히 고개를 들어 빙령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돌렸다. "왜 안 오는 거지?" 빙령이 내려 간지 반각도 되지 않았음에도 너무 늦는다고만 탓하는 그녀. 상당히 마음이 급한 듯 했다. 그러나 곧 그녀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자신이 성급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시 숨을 들이키고는 천천히 내뱉으며 금에 손을 얹 었다. 간단히 금을 조율 한 뒤 그녀는 또 다른 시를 부르며 금을 탄다. "綠葉陰濃(녹엽음농) 遍池地亭水閣(편지지정수각) 偏 凉多(편진량다) 海榴初綻(해류초탄) 妖艶蹙紅羅(요염축홍라) 老燕雛鶯弄語(노연추앵롱어) 對高柳鳴蟬相和(대고류명선상화) 驟雨過(취우과) 似瓊珠亂撒(사경주란살) 打遍新荷(타편신하) 人生百年有幾(인생백년유기) 念良辰美景(염량진미경) 休放虛過(휴방허과) 窮通前定(궁통전정) 何用苦張羅(하용고장라) 命友邀賓玩賞(명우요빈완상) 對芳樽淺酌低歌(대방준천작저가) 且酩酊(차명정) 任他兩輪日月(임타량륜일월) 來往如梭(내왕여사) 녹음은 짙게 깔려, 연못과 수각에 두루 퍼져 있고. 벽지라서 더욱 더 서늘하다. 석류꽃 갓 피어나는 모습, 요염한 향기 뿜는 비단 같고. 어미 제비는 새끼와 즐겁게 지저귀고, 높다란 버들에선 매미가 화창한다. 소나기 지나자, 진주알처럼 어지럽게 흩어져, 갓 피어난 연꽃을 때린다. 인생 백년은 과연 얼마나 될까?, 좋은 날 아름다운 경치를 생각하라, 한바탕 꿈은 지나가고. 곤궁과 영달은 날 때부터 정해진 것, 고생하며 계획한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친구와 빈객을 초청하여 함께 보고 즐기며, 미주를 잔뜩마시고 나직이 노래한다. 잔뜩 취하여, 저 두 바퀴 해와 달 가는대로 맡기니, 베틀북처럼 서로 왕래하더라." 그녀는 멋들어지게 한 곡조 음을 뽑았다. 그녀의 소리는 금 과 아주 어울려 사방으로 퍼졌다. 눈 아래로 보이는 푸르른 여름산의 경치에 그만 푹 젖어 버린 그녀는 저도 모르게 이 노래를 불러버렸다. 이 시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몇 개 되지 않는 시가 중에 하나였다. 취우타신하(驟雨打新荷)라는 제목을 가진 이 시는 원호문(元好問)이라는 금원(金元) 양대에 걸친 유명한 시인이 지은 시였다. 그녀가 한 여름의 경치를 묘사한 이 시를 좋아 하는 이유는 중원의 아름다운 모습을 동경하던 어린 시절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시를 외 웠던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금으로 노래로 만들기도 했다. 바로 지금 불렀던 노래가 그녀 스스로 만든 음이었다. 그녀가 또 다시 한 곡조를 더 뽑으려 했을 때 뒤쪽에서 누군 가 나타나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란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빙령이 그녀에게 허리를 숙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빙령을 내려 보냈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알아 봤느냐?" 그녀는 무릎에 놓인 금을 살며시 밀어내며 물었다. "예." "왜 이렇게 일찍 돌아 온 게지? 혹시 집으로 들어간 건가?" 그녀는 빙령이 내려 간지 일 각 만에 돌아오자 천인문이 이 세직의 집으로 들어갔다 생각했다. 자신이 멀리서 감시를 하 라 했으므로 집에 들어갔다면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음에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들려온 대답은 그녀의 생 각과는 달랐다. "아닙니다. 지금 무공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무공?" 무공을 배운다? 그녀는 뒷통수를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어 떻게 무공을 배운다는 말인가.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을 지었다. 솔직히 무공을 배운다는 것은 사부에게 또는 가족 간이 아니 면 전수하기 꺼리는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아무런 관계도 아 닌 사이에서 무공의 전수가 일어나는 것은 거의 찾아보기 어 려운 일이기에 그녀의 생각은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한 번 가 봐야겠어." 그녀는 무릎에 놓인 금을 살며시 들고 일어섰다. 일단 그녀 는 금을 방에 가져다 놓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을 내려가 기 시작했다. -82- 이제부터 시작이다. (2) "구결은 이제 외울 수 있겠느냐?" "외우기는 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어요." 그 날 아침 이세직을 찾아간 천인문은 아침부터 구결을 외우 느라 정신이 없었다. 보통 무공의 구결은 아주 난해하게 지어진다. 이런 이유로 구결만을 통해 무공을 익힐 경우 구결과 실제 사용법을 병행 하여 익히는 경우보다 배 이상 어렵고 시간도 걸린다. 이렇게 구결이 암호를 방불케 할 정도로 난해한 것은 구결이 외부로 유출됐을 때를 대비한 것이다. 지금 천인문이 열심히 외우고 있는 영웅장의 구결도 역시 난 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뜻을 알기도 어려울뿐더러 해석하더 라도 역시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뜻도 모르는 말은 외운다고 하더라도 그 시간은 한 시진을 넘어가기 어렵다. 이세직은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천인 문이 구결을 한 번 외우는 것을 보자 바로 뜻풀이에 들어갔다 . 그의 설명을 듣고 있던 천인문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 를 열심히 끄덕거렸다. 그러나 이것도 실용법문(實用法文)은 아니었다. "일단 쉽게 설명하기는 했는데 잘 알아듣긴 어렵겠지?" "네! 실제로 쓰려면 연구를 많이 해야겠어요." 천인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사실을 인정했다. "일단 기본은 됐으니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자. 영웅장은 너 도 알다시피 장법이다. 비록 이 장법만 가지고도 쓰는데는 전 혀 무리가 없지만 확실히 강해지려면 이것말고도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더 필요한 게 있다고요?" 천인문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세직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너는 영웅장을 배우고 나서 어떤 느낌을 받았느냐?" 천인문은 그 말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아무리 생 각해 봐도 떠오르는 것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더 이상 생각 해 볼 것도 없다 느껴지자 천인문은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하 며 입을 열었다. "일단은 재미있고요. 또 화끈한 것 같아요. 무엇보다 시원한 느낌이 드는 게 제일 좋아요. 짜증나게 이리 저리 변초를 쓰 는 것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것말고는 더 이상 안 떠오 르네요." "그래 잘 지적했다. 이름 그대로 영웅장은 영웅이 펼치는 것 같이 호쾌하지. 너도 알다시피 초식 이름부터 그렇지 않느냐 ." 천인문은 바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너도 곰곰이 생각에 잠겨 보면 알겠지만 이 무공만 가지고 강호독보 하기엔 좀 부족한 느낌이 없지 않지. 일단 영웅장은 계속 파고드는 초식들 위주다 보니 검이나 도 같은 무기들과 상대하려면 위험한 경우가 많다는 건데......" "아 맞아요. 그런 것도 있겠네요." 천인문은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을 이세직으로부터 지적 받자 무릎을 탁 하고 쳤다. 하지만 이세직이 자신 있게 말하는 모습에서 무슨 느낌을 받았기에 걱정 같은 것은 별로 일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이세직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이세직은 그런 천인문의 시선을 받자 바로 입을 열었다. "노부가 조금 전에 말했던 한 가지가 더 필요한 게 있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검(劍)이나 도(刀)와 같은 무공들과 상대 할 때 필요한 것인데 보통 무기도 없이 병기를 가진 자를 상 대하는 무인은 항상 병기를 피하며 싸워야 한다는 단점이 있 지. 하지만 영웅장을 쓰는 사람은 영웅답게 병기를 든 사람과 맞서 싸워야지 피하면 안되지 않겠느냐?" 듣고 있던 천인문은 그것이 사실이라 생각되는지 고무된 얼 굴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기 위해선 필수적인 것이 있는데 바로 손을 단단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지. 병기를 피할 수 없으면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 "아 그렇군요. 확실히 손이 단단해지면 도망 칠 필요 없죠." 천인문은 그 말에 가볍게 동의했다. "지금부터 가르쳐 줄 것이 손을 단단하게 하는 방법이다. 바 로 천옥신수(天玉神手)라는 것이지. 탁형(卓亨)이 영웅장을 쓸 때 손을 단단하게 했던 제왕신룡수(帝王神龍手)를 가르쳐 주었으면 좋았겠지만 그건 실전(失傳)되어 노부도 모르는지라 가르쳐 줄 수가 없구나. 하지만 천옥신수도 결코 떨어지진 않을게다. 일단 가부좌를 틀고 앉아 보거라." 빨리 천옥신수를 배우고 싶은 것인지 천인문은 바로 그 자리 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세직은 천인문의 등뒤로 돌아가 영대혈(靈臺穴)에 손을 올리고는 서서히 공력을 끌어 올려 천 인문의 내부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공력이 사지백배로 흩어 져 감과 동시에 천인문의 단전에서 한 줄기 잠력이 그의 공력 에 맞서기 시작했다. "대응하지 말고 기를 가라 앉혀라." 부드러운 음성이 천인문의 귀를 자극하자 천인문은 기를 조 정하여 단전으로 밀어 넣었다. "일단 공력의 이동을 잘 기억하도록 해라. 지금부터 하는 것 이 천옥신수의 운기법이다." 천인문은 한 줄기 부드러운 기운이 서서히 몸을 점유해 가는 것을 느꼈다. 따뜻하면서도 온화한 기운은 영대혈을 통해 들 어오더니 많은 혈을 거치며 공력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그러 다가 갑자기 소해(小海)를 거친 기운은 폭발적으로 커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두 팔이 팔꿈치 부분에서부터 느낌이 사라져가 기 시작했다. "확실히 기억할 때까지 계속 운기하도록 해라." 이세직은 나지막한 말을 건넨 후에 등에서 손을 거두었다. 천인문이 그렇게 운기에 몰입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갑자기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살짝 뒤를 돌 아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우거진 나무숲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만 가득 들어왔다. '웬 녀석이지?'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미약한 인기척이 느껴지자 그는 공력을 끌어올리며 주의를 기울였다. 허나 그 쪽도 무슨 느낌을 받았는지 그가 고개를 돌린 직후부터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내 이목에도 걸리지 않을 정도라니 제법이군.' 이세직은 자신의 이목에 걸린 인물이 경공에 상당한 조예가 있는 인물임을 알아차렸다. 이세직과 어떤 암중인의 대치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씩 흘러감에도 이세직은 그를 찾을 수 없 었다. 분명히 있는 것은 확실한데 그 위치를 찾을 수가 없었 다. 그는 조금씩 조바심이 일었지만 계속 그렇게 천인문의 등 뒤에 서 있을 뿐이었다. 직접 숲으로 뛰어 들어 찾아볼까 생 각도 했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정면에서 붙는다면 확실히 상대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암습을 받는다면 자신도 확실히 이긴다 보장할 수 없었던 탓이 컸다. 그런 이유로 그 는 천인문의 뒤에서 그렇게 서 있을 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을 때였다. 앉아서 열심히 운기를 하던 천인문이 공력을 갈무리한 뒤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 외웠어요. 으응? 할아버지 뭐 하세요?" 미소를 머금고 일어서던 천인문이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뒤 쪽의 숲 속을 보고 있던 이세직을 보며 물음을 던졌다. 그 바 람에 이세직은 잠시 눈을 돌려 천인문을 향했다. "일어 난 게냐?" 잠시 말을 던지고는 바로 눈을 숲 속으로 던지는 이세직. 그 러나 바로 그의 표정엔 틀렸구나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역시 도망쳤군. 쯔쯔쯧!' 이럴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 한 것인데. 이세 직은 혀를 차며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그러나 이미 일은 틀 어진 것. 이세직은 바로 아쉬운 표정을 감추며 몸을 돌렸다. 암중인은 이세직이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린 틈을 타서 사라 져 버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감시를 하다 사라지자 이세직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잡혔다. 그러나 별 일 아니겠 지 하며 애써 굳은 표정을 감추었다. "확실히 다 외운 거냐?"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천인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천인문은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손을 그의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혈색이 돌아 발그레한 손은 서서히 옥빛으로 물들며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됐구나.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하면 되겠다. 일단 집 으로 들어가자꾸나." 그는 천인문을 인도하여 허름한 초가로 들어갔다. 당우양에 게 방해를 하지 않기 위해 밖으로 나왔던 것이었으나 감시자 가 나타난 이 판국에 그런 것을 가릴 필요는 없다 생각했다. 안으로 들어온 그는 탁자 옆에 천인문을 앉히고 등뒤의 영대 혈(靈臺穴)에 다시 손을 올렸다. "자 이번에는 영웅장의 심법이다. 천옥신수와 혼동되지 않게 잘 외워야 한다." 이세직은 다시 공력을 천인문의 등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암중인이 집 안으로 들어와서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조금 전 살기를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을 변명거리로 삼았다. 그에게 인도된 공력은 천인문의 단전을 통한 후 온 몸으로 퍼져가기 시작했다. 천인문도 그의 공력이 향하는 방 향을 전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열심히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 었다. 이세직의 공력은 조금 전과는 달리 상당히 강차게 밀려 들어 갔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 급한 마음으로 끌어올린 공력이다 보니 과한 공력이 천인문의 몸을 타고 흘렀다. 거기다 그 속 도도 아주 빨랐다. 임독양맥을 타고 흘러다니던 기가 신봉혈(神封穴)을 지날 때 였다. 세찬 기류처럼 흘러다니던 기가 갑작스럽게 무언가에 부딪힌 것처럼 반으로 줄어들어 영허혈(盈虛穴)로 밀려들었다 . 갑자기 생각지도 않던 곳에서 이상을 발견한 이세직은 유심 히 그의 몸을 살폈다. 그러나 등의 손은 거두지는 않았다. 한참 동안 그렇게 살펴보던 이세직은 무언가 알겠다는 듯 고 개를 끄덕였다. 그는 몇 차례 똑같은 경락으로 운기하던 손을 거두어들이며 탁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턱을 손으로 괴며 생 각에 잠겼다. 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 자리를 털고 일어선 천인문은 이세직 이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는 묵묵히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눈앞이 일렁이는 것을 느낀 이세직은 눈을 들었다. "일어났구나." "무슨 생각하시는 거에요?" 표정이 굳어 있는 것을 보자 천인문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 이세직은 의자를 바짝 끌어 당겨 앉으며 말문을 열었다. "네 몸을 살피다보니 이상한 점이 있더구나. 혹시 과거에 내 상을 입은 경우가 있었느냐?" "내상이요?" 천인문은 고개를 갸웃댔다. 분명 그런 때가 있었던 것 같긴 한데 기억이...... "잘 생각 해 보거라. 혈맥이 크게 다쳐서 몇 곳이 막힌 듯 한데." 이세직은 사색에 잠긴 천인문을 급히 닦달했다. "생각났어요." 천인문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돌렸다. "한 번은 싸우다가 맞아서 다쳤구요. 또 한 번은 내공을 익 히다가 그랬던 것 같아요. 분명 그 두 번 말고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혈맥이 막혔다고요? 이상하다. 운기를 해 봐 도 별로 그런 느낌을 못 받았는데요." 혹시 잘못 본 것이 아니냐는 어투로 되물었다. 하지만 이세 직은 고개를 내저었다. 몇 번이고 확실히 확인 한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확실히 신봉혈(神封穴)과 거궐혈(巨闕穴), 심유혈(心兪穴), 양관혈(陽關穴)이 막혀 있었다. 네가 느낌 을 받지 못한 것은 노부도 잘 모르겠다만 아마 네가 쓰는 심 법에선 별로 쓰지 않는 혈이거나 네가 그쪽으로 공력을 돌리 지 않아서인지도 모르지." 워낙 자신있게 하는 말이라 천인문은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서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는 다시 운기를 하여 그가 말한 혈을 하나씩 되짚어 나 갔다. 그렇게 눈을 감고 운기를 하던 천인문의 신형이 갑자기 급살에 맞은 듯 몇 번 부르르 떨렸다. 그러더니 다시금 잠잠 해졌다. "확실히 이상하네요. 뭔가 혈맥을 콱 틀어막은 듯 기가 맴도 네요." 눈을 뜨자마자 천인문은 의자에 앉으며 입을 조잘거렸다. "너도 영웅장의 심법을 기억했으니 알겠지만 이 심법에선 그 네 혈도로 기가 운용된다. 저렇게 막혀 있으면 영웅장의 위 력이 상당히 반감되지." "그럼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뚫어야지." 별 소리 다 듣겠다는 듯 이세직은 혀를 내둘렀다. "일단 바닥에 앉아 보거라." 손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천인문이 그 자리에 앉아 이세직도 그의 뒤로 돌아가 앉았다. "네 공력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노부가 도와주면 더 빨리 끝낼 수 있겠지. 마음을 편히 먹거라." 그는 왼손은 명문혈(命門穴)에 바른손으로는 영대혈(靈臺穴) 에 갖다 붙이고는 천천히 운기에 몰입했다. 빙령에게 이야기를 듣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한 조기혜는 이 세직의 초가가 있던 곳을 기억해가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숲 속은 완연한 여름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건만 다 른 생각으로 가득한 그녀의 눈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아 름다운 수목들이 단지 장애물로만 여겨질 뿐이었는지 그녀는 봉황검으로 사정없이 잘라 버렸다. 얼마 가지 않아 이세직을 만났던 관도에 도착한 그녀는 기억 을 되살려가며 다시 발을 옮겼다. 눈에 익은 지형을 하나씩 더듬어가며 그녀는 계속 그렇게 전진했다. 그렇게 나아가던 그녀의 눈에 익숙하지만 섬뜩한 느낌을 주던 초가 하나가 쏙 들어왔다. '집에 들어간 건가?' 천인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천천히 집으로 다가갔 다. 얼마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녀의 걸음이 자꾸 늦어졌 다. 어딘지 다가가기에 찝찝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던 탓이 었다. 서서히 얼굴이 굳어 들어가던 그녀의 귀로 무슨 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무슨 소리지?' 그녀는 한 줄기 불안감을 억누르며 초가로 황급히 다가갔다. -83- 이제부터 시작이다. (3) 천인문의 등뒤에 붙어 있던 두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 손의 주인공인 이세직의 이마에서 땀 한 방울이 또르르 굴 러 떨어졌다. '제기랄!' 이세직은 당황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천인문 의 기는 순탄하게 그의 인도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 간부터 천인문의 공력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날 정도로 커져가 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세직은 당황하지 않았다. 거의 자신과 맞먹을 정도의 내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기 는 했지만 자신이 원했던 방향으로 기가 인도되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허나 갑자기 집 앞마당 쪽에서 들린 소리에 흠칫 놀라버린 것이 발단이었다. 간신히 통제하고 있던 천인문의 기가 놀라 버린 이세직의 인도를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치료를 한 것이 후회됐지만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천인문의 내공을 다스리는 것이 더 급했다. 그는 더욱 강한 내공을 끌어올렸지만 이미 몇 주천(周天)을 끝낸 천인문의 기운도 커져가며 반발하고 있었다. 천인문의 안면은 술독에 빠졌다 나온 사람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었고 근육들도 놀랐는지 계속 푸들거리며 떨려왔다. 그 느낌이 연 신 이세직의 손을 타고 전해져왔다. '제길 저 녀석은 뭐냐? 적이냐 아니면 아군이냐?' 천인문의 기가 거의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지자 이세직은 밖에 있는 미지의 인물에게 화풀이를 했다. 발소리는 들리는데 안 으로 들어오지는 않는 암중인. 그는 그렇게 계속 이세직의 신 경만 거스르고 있었다. 그의 귀를 간지르던 발소리의 주인공이 그의 기분을 알아 차 렸음인가? 발걸음 소리가 자꾸 가까워지더니 안으로 한 사람 이 들어왔다. 굳어진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돌린 이세직의 눈에 머뭇거리 는 조기혜가 들어왔다. 적이 아니었다는 안도감에 그의 표정 이 다시 편안해졌다. 주춤거리던 조기혜는 상황이 좀 이상하 다 느껴지자 바로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죠?" 하지만 그가 대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세직은 그 저 조기혜를 살짝 노려보며 무언으로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그녀도 바로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무엇이 잘못 된 것인가?' 붉게 물든 천인문의 얼굴, 땀으로 목욕을 한 듯 흠뻑 젖은 이세직. 확실한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일단 이 사태 부터 바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이세직의 뒤 로 돌아가 그의 등에 손을 붙였다. "도와 드릴께요." 그녀는 말을 건넨 뒤 그녀의 내공을 그의 등으로 불어넣었다 . 격체전공(隔體傳功)의 수법으로 온몸의 내기가 불어남을 느 낀 이세직은 곧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곧 그의 표정은 딱딱 하게 굳어졌다. '이...이게 어찌 된 일이냐?' 조기혜로부터 상당한 양의 내공을 전해 받을 때만 해도 충분 히 위험을 넘길 수 있으리라 여겼던 이세직이었다. 그러나 웬 걸 천인문의 기는 기하급수적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늘어나 버렸다. '어떻게 어린 녀석이 이렇게 많은 내공을 가지고 있을 수 있 지?' 나이에 맞지 않은 엄청난 내공이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자 다 시 그의 이마와 등줄기는 식은 땀으로 젖어 들었다. 위험을 감지하기는 조기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밀어 넣 던 내공이 갑작스레 벽에 부딪힌 듯 멈칫거리더니 바로 뒤로 되밀리는 느낌이 손끝에 느껴졌다. 그녀는 무언가 잘못 되어 간다는 느낌이 들자 안색을 바꾸고는 자신의 모든 내공을 끌 어 올려 그의 등으로 밀어 넣었다. 뒤에서 밀려오는 기가 급증됨을 느낀 이세직은 그녀의 생각 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도 자신의 모든 공력을 끌어 올려 그녀의 기와 함께 천인문의 등으로 보냈다. 푸쉬쉬쉬! 뜨거운 기운에 의해 세 명의 몸을 적시던 땀은 김으로 사라 졌다. 안개에 쌓인 듯 집안은 서서히 뿌옇게 흐려졌다. 천인문의 내부에는 한창 공력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과 거 옥조영이 가져다 준 만년삼왕을 통해 도달했던 반탈태환골 (半奪胎換骨)의 경지가 오늘 두 개의 다른 기운에 의해 깨어 지고 있는 것이다. 잘 조화를 이루고 있던 천류심공(天流心功 )과 만류만화상심법(萬流滿和上心法)이 새로 몸을 잠식해 들 어오는 두 기운에 의해 균형이 깨어져 버렸다. 위력을 목적으로 한 천류심공과 조화와 정순함을 목적으로 한 만류만화상심법. 새롭게 두 가지 다른 공력이 들어오자 만류만화상심법은 서 서히 두 가지를 조화시키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천류심공은 자신을 받치는 기운이 사라지자 그 위력을 드러내기 시작했 다. 처음부터 강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던 천류심공은 이제 자 신을 묶어둘 어떠한 제약도 없어지자 가히 여름철 홍수처럼 노도의 물결로 경락을 헤집고 다녔다. 가일층 강해진 위력으로 밀려드는 두 남녀의 공력은 천류심 공과 임맥(任脈)의 건리혈(建里穴)에서 충돌했다. 그러자 우 르릉 하는 가성(假聲)이 그들의 귓가로 들려왔다. 두 사람의 공력과 천인문의 공력은 서로 밀고 당기며 그렇게 전투에 들었다. 그러나 결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천류심공이 그 위력을 더해가며 두 사람의 공력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으으윽!' 이세직의 얼굴은 홍시처럼 달아올랐다. 두 사람의 공력으로 도 더 이상 천인문의 내공을 감당할 수 없었다. "커억!" 두 사람은 뒤로 튕겨져 나갔다. 이세직은 약 넉 자 남짓 튕 겼지만 그녀는 일 장 뒤로 나가 떨어져 버렸다. 그러나 상처 는 이세직이 더 심했다. 그녀는 나뒹군 뒤 바로 일어섰으나 그는 입에서 쉬지 않고 선혈이 뿜어졌다. "괜찮으세요?" 조기혜가 급히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온갖 인상을 다 찡그 리며 일어서던 이세직은 선지피를 토해내는 입을 닦았다. "노부는 괜찮네. 그것보단 그 아이는 어떤가?" 천인문을 걱정하는 이세직의 염려 어린 말에 조기혜는 고개 를 들었다. "이...이럴 수가." "왜 그러...!" 그녀의 휘둥그래진 눈을 따라 간 이세직의 눈도 덩달아 커졌 다. 천인문의 몸이 눈에 띄게 부들거리며 떨리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놀랄만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검붉게 달아오른 피부가 조금씩 갈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게 다가 온 몸에서 낮게 들리던 뚜둑 거리는 소리도 점차 커져가 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천인문의 육체가 서서히 커져가 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입고 있던 경장은 커지는 육체로 인해 팽팽해지더니 터지듯 찢겨져 나갔다. 그러자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는 전신이 드러났다. '허억!' 듣도 보도 못한 기사(奇事)에 그녀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경 악을 삼켰다. "무슨 일인가? 으응?"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자 집 안에서 누워 있던 당우양이 무거운 발을 이끌고 거실로 나왔다. 그러다 이 모습을 보자 휘청거리며 벽을 짚었다. "움직이지 말고 거기 서 있게나." 이세직이 급히 손으로 당우양을 제지했다. 당우양도 무슨 말 인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과 손, 발끝에서 시작된 갈라지는 현상은 이제 가슴과 배까지 번지고 있었다. 피부는 쩍쩍 갈라지고 있었고 다섯 자 반 정도 되던 키는 이제 여섯 자 반 성인의 키에 달했다. 거 기다 머리카락도 반 자 이상 자라났다. 쉬쉬쉭! 언젠가부터 천인문의 몸을 감싸고돌던 경풍(輕風)이 더 세차 게 일자 떨어지던 피부는 바람에 휩싸여 흩어졌다. 그러자 안 쪽에서 백옥 같은 흰 피부가 드러났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백설(白雪)보다 더 희던 피부는 서서히 제 본래의 빛 을 찾아 돌아왔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뼈소리도 잦아들고 경풍도 그 위세를 가라앉히고 있었다. 얼마 지나자 완전히 그 기세가 사라졌다 . 하지만 천인문은 여전히 한 자리에 앉아 움직일 줄 몰랐다. 말로만 듣던 탈태환골을 눈앞에서 본 조기혜는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허나 시간이 지나도 천인문이 일어서지 않자 조금씩 불안해졌다. "무엇이 잘못 된 걸까요?" "글쎄다. 별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 조금 더 기다려 보자꾸 나." 이세직은 안색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녀는 불안한 표정으 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벽에 기대어 서 있던 당우양도 천천 히 그들의 옆으로 걸어왔다. 보기엔 별 무리 없어 보이는 표정, 차분한 안색. 허나 천인 문은 과거의 앳된 모습과는 영판 달라져 있었다. 그렇게 천인문은 한 시진 남짓 앉아 있었다. 숨을 죽이고 지 켜보던 이세직 등이 서서히 지쳐갈 무렵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천인문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그러자 밤하늘의 별빛 처럼 영롱한 빛이 반짝였다. 잠시동안 멍하게 있던 천인문은 세 명이 나란히 서서 자신을 지켜보는 것을 보자 웃으며 일어 섰다. "아 왜 그렇게 서 있는...으악!" 벌떡 일어서던 천인문은 갑자기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느낌에 소리를 질렀다. 일 장도 되지 않는 낮은 천장에 머리 를 사정없이 박아버린 천인문. 우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먼지 가 가득한 나무와 지푸라기가 와르르 쏟아졌다. 뒤이어 천인 문도 땅으로 떨어졌다. 우당탕! "우웅! 이게 왜 이렇지?" 땅에 엎어진 천인문은 별일 없었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일 어섰다. 그리고는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세직 등에게 천 천히 다가왔다. 하지만 갑자기 커진 몸에 적응이 되지 않았는 지 걸음걸이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내 몸이 왜 이렇죠 할아버지?" 이세직의 앞에 선 천인문은 이상하다는 듯 자신의 팔다리를 연신 둘러보며 물었다. 거의 한 자 가까이 커져버린 탓에 말 하는 품이 그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얼굴도 그랬다. 바뀐 얼굴 어디에도 조금 전의 어린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전혀 열 다섯 살로 믿지 않을 듯한 외모였다. 날카롭지만 수려한 눈매, 오똑한 콧날과 야무지게 다물어진 붉은 입술, 조각같이 내려 뻗은 부 드러운 턱선과 숯 같이 새까만 눈썹. 한 마디로 영준한 젊은 이의 용모 그 자체였다. 부드러운 외모와는 다르게 목 아래 가슴과 팔 다리는 단단한 근육으로 뭉쳐 있었다. 완벽에 가까운 모습에 이세직도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천인문은 다시 조기혜 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어딘지 멍한 표정으로 서 있 었다. "누나 왜 그래?" 흠칫 놀란 조기혜. 갑자기 얼굴을 살짝 물들였다. 고개를 뒤 로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옷이나 갈아입어." "옷? 옷이 어디 있다고 갈아입으란 거야?" 천인문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럼 그렇게 계속 서 있을 거니?" "왜? 이 모습이 이상한가?" 자신의 몸을 살피는 천인문. 그러나 별로 이상한 것은 느껴 지지 않았다. 단지 옷이 조금 찢어졌고 살이 많이 보이긴 하 지만 그렇게 부끄러워 할 만큼은 아니었다. "에이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래? 내가 다쳤을 땐 목욕도 시켜 줬으면서." 천인문은 팔꿈치로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러나 예전 키가 작던 때 했던 것처럼 귀엽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 다. 그녀도 영 어색했는지 뒤로 성큼 물러서며 표정을 굳혔다 . "그, 그래도 빨리 옷 갈아 입어." 빨개진 얼굴로 그녀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옷 없다고 했잖아. 근데 어디서 갈아입어?" 콧등을 살짝 찌푸리며 불평을 토하는 천인문. 뒤에서 보고 있던 당우양이 손짓을 했다. "같이 가세나. 내 옷을 하나 주지." "그 옷이 네 옷이냐? 내 옷이지." 긴장이 풀렸는지 이세직이 싱거운 미소를 지으며 농을 던졌 다. 당우양도 싫지 않은지 미소로 화답했다. 당우양과 천인문이 방으로 들어가자 조기혜는 탁자 쪽으로 걸어와 자리에 앉았다. 이세직도 그녀의 맞은 편에 앉았다. "괜찮으신가요? 피를 토하셨는데." 그녀는 창백한 안색의 이세직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괜찮네. 내상약도 먹었으니 조금만 조심하면 상관없다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가요? 왜 저 아이가 저렇게 커 져 버린 거죠? 제가 본 게 탈태환골이 맞는 건가요?" 조금 머뭇대던 그녀가 뇌리를 스친 생각들을 하나씩 던져왔 다. "노부도 잘 모르겠네. 처음에는 내공이 별로 강하지 않은 듯 해서 시도한 것인데 갑자기 헛다리짚은 것처럼 되 버렸구먼. 일단 그 아이에게 직접 들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네." 이세직은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도 알겠다며 고개를 끄 덕인 뒤 천인문이 들어간 방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84- 이제부터 시작이다. (4) 조금 후 갈색 장삼을 걸친 천인문이 당우양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이세직이 입었던 옷이라 그런지 조금 낡은 흔적이 있었지만 입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소매와 다리 쪽이 조 금 짧긴 했지만 거동하는데 불편함은 없어 보였다. "잘 어울리는구나. 그건 그렇고 자리에 앉아 봐라." 천인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세직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된 거냐?" "뭐가요?" "네 몸이 어떻게 해서 그리 커져 버린 거냐 이 말이다. 노부 는 도통 이해가 되질 않는구나." 천인문은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표정이다.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옛날에 제가 만년삼왕을 먹은 적이 있 었는데 그것 때문일 것 같네요. 그거말고는 이 상태를 설명할 게 없거든요." 자신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온 몸을 둘러보던 천인 문은 조용히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확실하지는 않다? 그건 그렇다 치고 몸 상태는 어떠냐? 이 상한 곳은 없고?" "이상하긴요. 온 몸에서 힘이 불끈불끈 솟는 것 같은데요." 만족스럽다는 듯 천인문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 다.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조기혜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며 다가왔다. "잘못 된 게 있을까 얼마나 걱정 한 줄 알아?" "일단 별 일 없으니 된 거 아냐?"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이 따가운지 천인문은 고 개를 휘휘 내저으며 딴청을 부렸다. 손금을 보듯 손을 쫙 펼 치고 있다가 천천히 주먹을 쥐어 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한 행동에 천인문을 의아한 눈빛으로 보고 있던 이세직이 급히 물었다. "왜 그러는 게냐? 뭐가 좀 이상한 거냐?" "아뇨. 힘이 너무 넘치는 것 같아서......" 잠시 머뭇대던 천인문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웃는 얼굴로 조기혜를 바라보았다. 조기혜는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 낌이 들었다. 어딘지 섬뜩해 보인 그 미소는 바로 사실로 드 러났다. "누나 오랜만에 한 번 붙어 보자." 지금까지 한 번도 먼저 대결을 청한 적이 없던 천인문이다. 붙으면 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천인문이 먼저 결투를 신청한다? '이번에 배운 무공을 써 보고 싶다는 건가?' 머릿속에 번쩍 이런 생각이 들자 그녀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 다. 갑작스레 느꼈던 불안도 말끔히 씻겨졌다. 아무리 무공이 대단해도 겨우 일주일 배운 것으로는 자신을 못 이길게 뻔하 기 때문이었다. 미소는 떠오를 때보다 더 빠르게 사라졌다. 다시 무표정한 얼굴을 내보인 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좋아! 나야 거절 할 이유가 없지. 며칠 간 가만히 있어 몸 이 뻐근했었는데 잘 됐구나. 나가자." 그녀는 말을 맺고는 바로 몸을 돌려 초가를 나섰다. 천인문 에게 당당한 모습을 보일 필요도 있었지만 독물들로 인해 이 집에 대해 좋은 느낌이 없었던 탓에 서둘러 나간 것이다. 그 녀가 나가자 천인문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배짱이냐? 너 아직도 내공만 믿는 게냐?" 내공만이 최고라 생각했던 과거의 천인문을 떠올린 이세직이 급히 소매를 잡아챘다. 옆에 앉아 있던 당우양도 동의했다. "저 친구 말이 맞네. 요 며칠 배운 걸로 그녀를 이기긴 어려 울 걸세." 무공은 약했지만 오랜 기간 강호를 굴러먹던 경험은 그저 얻 은 게 아니었다. 당우양도 천인문이 아직 조기혜에게 밀릴 거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천인문은 그런 좌중의 걱정에도 불 안한 기미를 내비치지 않았다. "져도 손해는 없잖아요. 이왕 질 거 배운 거나 확실히 몸에 익히도록 하죠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천인문의 표정에는 어떤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소매를 걷어붙이며 밖으로 나서는 천인문을 불안하게 보던 이세직과 당우양은 급히 몸을 세워 따라 나섰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조기혜는 천인문이 나오는 것을 보고 는 봉황검을 들어 올렸다. 손잡이를 내밀자 천인문은 고개를 저었다. "검은 됐어. 난 두 손을 쓸 거야." 조기혜의 눈앞으로 손등을 내 보인다. 여자처럼 희고 곱상한 손. 그러나 손등이 투명하게 변해가기 시작하자 그 손은 더 이상 귀엽게 보아 줄 수 있는 손이 아니었다. 그녀의 표정은 삽시간에 굳어졌다. '저...저건?' 투명하게 물든 손. 분명 소수(素手)는 아니었다. 소수신공은 북해빙궁에 있던 절전된 무공 중 하나였기에 그녀는 소수의 특징을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그러나 소수는 아니라 해도 저렇게 투명하게 물든 무공이란 것은 함부로 경시할 수 없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는 바로 검집에서 검을 뽑 아 들었다. 채앵! 싸늘한 검명이 검에서 울려 퍼지며 빛을 뿌렸다. 싸늘한 예 기를 내뿜는 검은 그녀의 미간을 가리며 우뚝 몸을 세웠다. 천인문도 표정을 굳히며 바로 자세를 잡았다. 손을 가슴에 모으더니 하늘과 땅을 내미는 자세를 취했다. '저건 무슨 자세지?'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자세. 기 수식이 독특할수록 무공도 기상천외한 능력을 보임을 알기에 그녀는 더욱 신중해졌다. "간닷!" 그녀는 천인문과의 비무 중 처음으로 선수 공격을 가했다. 전혀 모르는 무공을 견식하기 위해서 더욱 유리한 고지를 선 점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내지른 검은 세찬 돌풍을 일으키 듯 빙글빙글 돌면서 천인문의 가슴을 찔러갔다. 검은 삽시간 에 십 여 개의 환영을 일으키며 가슴의 요혈을 노렸다. 항상 선수를 양보했던 그녀였기에 이번에도 자신에게 선수를 양보할 거라 믿었던 천인문은 가슴으로 밀려드는 환영검(幻 影劍)을 보자 천인문의 낯이 창백해졌다. 자신이 자신 없어 하던 환영검으로 기습을 당한 천인문은 급히 뒤로 물러섰다. '쯔쯧! 무기를 막으라고 천옥신수(天玉神手)를 가르쳐 줬는 데 저렇게 피하다니.' 뒤에서 보고 있던 이세직이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이 가르친 무공은 전진을 하는 것이지 후퇴를 하는 것이 아니다. 후퇴 하면 필패(必敗)하는 무공인 탓에 그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역시 그의 생각은 맞아 떨어졌다. 천인문은 몇 수 지나지 않아 바로 궁지에 몰렸다. 투명하게 물든 손은 몸을 피하느라 전혀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 저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처럼 무의미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 다. 그녀는 열심히 검을 휘두르며 천인문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나마 이젠 승리에 대한 확신이 섰는지 조금씩 매서운 공격 은 사라지고 있었다. 천인문이 겨우 버틸 수 있었던 것도 그 런 탓이 컸다고 할까. "저런! 보법은 하나도 모르는가? 왜 저렇게 무식하게 피하는 거야." 자신 있게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곤 보법과 신법 계통 밖에 없던 당우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갑자 기 한 가지 생각이 이세직의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일단 나중의 일. 이세직은 일단 천인문을 구제하기로 했다. 자신에게 무공을 배웠다는 것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이 무공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더 중요 한 것이다. <문아! 잘 들어라.> 그는 공력을 모아 전음을 날렸다. 예상치 못한 이세직의 전 음에 천인문은 잠시 몸을 흠칫 떨었다. 머리로 떨어지는 검을 가까스로 피해내는 천인문을 불안하게 보고 있던 이세직은 다시 전음을 보냈다. <정신을 흩트리지 말고 듣기만 들어라. 지금 그대로 나가면 넌 진다. 일단 노부가 초식을 불러 줄 테니 그대로 취하기만 해라. 일단 유일무이(唯一無二)!> 마지막 말에 담긴 초식을 듣자 천인문은 무의식중에 손을 앞 으로 내쳤다. 조기혜가 내질러온 검에 손이 맞다을라 치자 천 인문은 바로 손을 거두었다. <뭐 하는 게냐? 노부가 왜 천옥신수을 전해 준거라 생각하는 거냐?> 이세직의 호통에 천인문은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시 허 리를 베어오는 검을 뒤로 물러서며 피하는 천인문에게 이세직 의 전음이 날아왔다. <오른 쪽으로 피하며 용감무쌍(勇敢無雙)!> 이번에는 천인문도 전혀 멈칫함이 없이 몸을 앞으로 튕겼다. 그녀의 검이 사방을 베며 몸을 베어왔다. 자신의 몸을 완전 히 난도질 할 듯 베어오는 검풍에 천인문은 창백해져갔다. <무소불위(無所不爲)!> 또다시 들려온 전음. 천인문은 온 팔을 사방으로 내질렀다. 마치 겁쟁이가 싸울 때 눈감고 무작정 팔을 내돌리듯 사방으 로 팔이 휘돌렸다. 그러나 알기 어려운 비전(秘傳)이 숨겨져 있었는지 투명한 손은 눈이 달린 듯 번뜩이는 검을 하나도 남 김없이 막아갔다. 까가강! 철과 철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인문은 잠시 몸을 흠칫 떨었으나 조기혜는 일 장남짓 뒤로 밀려났다. 더욱 막강 해진 천인문의 내공을 잠시 염두에 두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 녀는 잠시 자신을 자책하더니 다시 검을 고쳐 잡았다. <이번에는 호기충천(浩氣沖天)!> 그녀를 공격할 호기(好機)를 잠시 멈칫거리며 놓쳐버린 천인 문을 바로 닦달하는 이세직. 천인문은 고개를 끄덕인 후 그녀 의 품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다 몸을 우뚝 세우며 왼손으 로 가슴 밑 갈비뼈의 천계혈(天谿穴)을 노렸다. 조기혜는 검 을 뒤집으며 손목을 베어왔다. 천인문의 얼굴에 승리의 미소가 떠올랐다. 조금 따갑긴 했지 만 보검이라 부를 만한 봉황검에도 전혀 상처를 입지 않았던 탓에 조금 남아 있던 두려움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천인문 은 천옥신수를 믿고서 더욱 빠르게 손을 내질렀다. '아까 내 손이 얼마나 단단한지 맛 봤을 텐데.' 조기혜의 검은 빠르게 날아왔다. 그리고 부딪히는 손과 검. 깡! 역시 됐어. 손에 전혀 상처를 입지 않자 천인문은 밝게 웃었 다. 그러나 곧 그 웃음은 사라졌다. 갑자기 손이 무거워진 것 이다. '왜 이렇게 손이 무거워?' 천인문은 눈을 들어 조기혜를 마주 보았다. 그러자 조기혜의 입에 걸린 싸늘한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미소를 짓는다?' 미소, 분명 저 미소는 분명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빙궁의 이화접목이다. 손이 완전히 붙기 전에 떨어트려.> 조기혜의 수법을 보고 있던 이세직이 그녀의 수를 알아챈 즉 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천인문은 어떻게 해야 손에 붙은 검을 떨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눈을 찡그리며 모른다는 표 정을 지을 수밖에...... 이세직은 바로 그 표정의 의미를 알 아챘다. <내공을 거의 다 거두어 들여. 그러다가 의기양양(意氣揚揚) 을 펼치며 최고의 공력으로 밀어 내버려라.> 바로 해결책을 전해주는 이세직. 천인문은 알겠다며 미약한 고갯짓을 한 뒤에 실행에 들어갔다. 세찬 내공을 갈무리하여 단전으로 몰아넣던 천인문은 폭발시 키듯 내공을 내뿜었다. 가슴을 우뚝 내밀며 손을 아래쪽에서 위로 올려 내치자 손에 달라붙었던 검이 파르르 떨리더니 팍 하는 미약한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갔다. 조기혜의 눈에서 섬뜩한 빛이 솟구쳤다. 이런 수법으로 떨어 질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예상치 못했던지 그녀는 잠시 머뭇거 리고 있었다. <지금이다. 안하무인(眼下無人)!> 이세직의 소리에 천인문은 급히 몸을 뽑아 공중으로 뛰어 올 랐다. 그런 후 몸을 뒤집으며 양손을 급히 내쳤다. 조기혜는 위쪽에서 밀려드는 풍압(風壓)에 정신을 차리더니 바로 몸을 뒤집으며 검을 위로 쳐 올렸다. <요지부동(搖之不動), 용기탱천(勇氣 天)> 두 초식이 연속으로 들려왔다. 천인문은 급히 내밀던 손을 양쪽으로 벌린 후 미간으로 찔러오는 검을 손바닥으로 잡아챘 다. 그리고는 몸을 소리나게 뒤집으며 그녀의 다리를 노렸다. 다리를 번개같이 빼낸 그녀는 옴짝달싹도 못할 정도로 꽉 쥐 여진 검을 놓으며 검집으로 천인문의 팔 다리의 다섯 요혈을 노렸다. 파공성이 급하게 밀려들자 검을 떨구며 손으로 막아 갔다. 그녀의 공격을 수월하게 막아가자 천인문은 점차 흥분하기 시작했다. 겨우 십 여 초를 상대했을 뿐이건만 이미 그녀와 맞대응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은 것이다. 상당히 자연스럽 게 그녀를 상대해내던 천인문은 빠르게 밀려드는 검을 무소불 위(無所不爲)의 초식으로 막아 냈다. 귀를 거스르는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강맹한 공력에 조기혜는 일 장 정도 뒤로 밀려났다. <호언장담(豪言壯談)이다.> 그녀가 밀려가는 모습에 더욱 자신감이 붙은 탓일까? 이세직 의 초식이 귓가에 들려 오자 천인문은 치밀어 오르는 호기를 참지 못한 듯 크게 소리쳤다. "호언장담!" 호랑이가 먹이를 습격하듯 자세를 낮춘 천인문은 그녀의 하 복부와 무릎 언저리를 노리고 들었다. 등이 훤하게 보이는 자 세라 상당히 위험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들려온 초식의 황 당함에 멍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어떻게 초식 이름이 저렇게......' 허탈하다 못해 우스울 정도의 초식명이었다. 그러나 비웃고 있을 시간 따윈 그녀에게 없었다. 이미 천인문의 손이 여러 개로 갈라져 혈해혈(血海穴)과 양관혈(陽關穴) 등을 노리고 있었다. 그녀는 검집으로 장(掌)을 쳐낼까 하다가 아무 소용 없음을 깨닫고는 천인문의 등위로 뛰어 오르며 등판을 노렸다 . <좋아 그거다. 이번에는 몸을 뒤집으며 박장대소(拍掌大笑)! > 그녀가 뛰어 오르는 것을 보자 바로 이세직이 전음을 보냈다 . 천인문도 알았다며 빙긋 웃은 뒤에 몸을 파락 뒤집었다. "박장대소!" 광성을 내지르며 손을 위로 쳐 올렸다. 그 손이 찔러 가는 곳은 그녀의 다리 밑이었다. 그러나 그 손은 그의 등을 찔러 온 검집과 부딪혀 갔다. '응? 저...저건?' 무엇을 본 것일까? 천인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녀가 입고 있던 것은 치마였다. 그런데 그녀가 위쪽에서 팔랑 하고 뛰어 오르니 그 밑에서 올려 보는 천인문의 눈으로 그녀의 속옷과 흰 속곳이 눈에 잡힌 것이다. "우하하하하하! 우헤헤헤헤." 갑자기 손을 내밀다 말고 천인문은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초식의 이름과도 같은 박장대소였다. 가슴으로 검집을 찔러가 던 그녀는, 갑자기 벌겋게 달아오르며 웃어대는 천인문을 어 리둥절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무엇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그녀는 시뻘게진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땅으로 내려 섰다. 공격을 하던 천인문은 이제 죽어라 하고 땅을 뒹굴고 있었다 . 어찌나 심한지 눈에 눈물까지 핑 돌고 있었다. "아하하하하하! 우하하하하." 싸우다 말고 갑자기 한 쪽은 웃어버리고 한 쪽은 벌겋게 달 아오르자 이세직과 당우양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서로 마주보며 상대를 바라보지만 둘 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그만 웃어." 홍시가 울고 갈 정도로 붉게 달아올랐던 조기혜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웃음에 파 묻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옥용이 창백히 굳어들었다. 그녀 의 눈이 파르르 떨리더니 투명한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에 들린 검집을 확 내팽개치더니 뒤로 돌아 뛰어가 버렸다. 그럼에도 천인문은 웃음을 멈출 줄 몰랐다. "아...아니 왜 저러는 거지?" 당우양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이세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세직은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눈을 찌푸리고 있었 다. 숨이 턱밑까지 차 오르자 숨을 컥컥거리던 천인문은 배를 잡 고 천천히 일어섰다. "아..하하하하! 너무 웃겼어. 아하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저렇게 놔 둬도 되겠느냐? 빨리 쫓아가 봐라." "아..하하! 네 알았어요. 우히히." 눈을 타고 흐른 눈물을 소매로 훔친 천인문. 바로 그녀의 흔 적을 찾아 뒤쫓기 시작했다. "왜 저렇게 웃었을까?" 손으로 턱을 긁적이던 이세직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나도 모르겠네. 오면 한 번 물어 보게. 근데 자네 보법은 안 가르쳤나?" 당우양의 질문에 이세직은 당연한 게 아니냐며 그를 바라 봤 다. "내가 아는 보법이 어떤 건지 자네도 잘 알지 않은가. 그딴 거 가르쳐 봤자 도움도 안 될 테니 가르칠 필요가 없지." "그럼 저렇게 엉성하게 놔 둘 건가? 저 정도면 조금만 더 가 르치면 확실히 몸은 지킬 수 있을 텐데 말이야." 무언가 아쉽다는 표정의 당우양. 이세직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당우양도 똑같이 생각해내자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한 번 가르치게나. 자네의 선운만변이라면 금상첨화 (錦上添花) 아니겠나? 거의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단 셈이 되겠 지." "허허! 그...그렇게 되는 건가?" 찔린 표정으로 머쓱한 웃음을 짓는 당우양이었다. "가르치던 말던 그건 자네 소관이고 배울 수 있는 지는 저 아이에게 달린 거지. 난 보법은 모르니 자네 마음대로 하게." 이세직은 내 소관이 아니라며 몸을 돌린 뒤에 조기혜가 떨군 검을 들어 검집에 꽂았다. 그러나 당우양이 천인문에게 보법 을 가르칠 것을 확신하는 듯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이세직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당우양은 이세직의 등을 보고 있다 가 다시 천인문이 사라져 간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누나 좀 서 봐." 조기혜를 쫓은 지 일 각 여만에 겨우 흔적을 찾은 천인문은 우거진 나무숲의 모퉁이에 앉아 있던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눈을 붉히고 앉아 있던 그녀는 천인문이 눈앞에 나타나자마 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더욱 속도를 올려 겨우 그녀의 어깨를 잡아챈 천인문. 급히 입을 열었다. "왜 도망가는 거야." 조기혜는 원독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무섭기 그 지없는 눈빛에 천인문은 가슴이 뚫리는 느낌이었다. "몰라서 묻는 거니?" 자기의 입으로는 말하기 어려웠는지 잠시 낯을 붉히며 되물 었다. "그...그게 아니라." 난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던 천인문은 갑자기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꼭 자신만 잘못한 것인가? 왜 하필 저 렇게 치마를 입고 내 위로 뛰어 오르느냔 말이다. 그러니 저 런 꼴을 보는 거지. 천인문은 살쾡이처럼 눈을 뜨고는 그녀의 차가운 시선을 맞받아 쳤다. "왜 나한테만 그래? 누나도 잘못 했잖아. 왜 하필 치마를 입 고 내 위로 뛰어 올랐느냐고. 그러니까 보이지. 그런데도 나 만 잘못 한 거야?" 자신보다 훌쩍 커버린 천인문이 자신을 똑바로 내려보며 따 져대자 그녀는 알 수 없는 위압감에 압도되었다. 어처구니없 는 표정으로 서 있던 그녀는 확 몸을 돌려 버렸다. "나 갈래." "그래? 그럼 안 잡을게." 내 알 바 아니다는 투로 천인문도 몸을 돌려 버렸다.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두고 초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다 시 몸을 돌렸다. "내가 신경 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인연이 있었으니깐 말해 준다. 그냥 가지말고 저 쪽에 떨어뜨린 검이나 챙겨서 돌아 가도록 해. 그럼 나간다." 조금의 머뭇댐도 보이지 않고 천인문은 몸을 돌려 걸어갔다. "너...너." 조기혜는 알 수 없는 배신감에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불끈 쥐어진 손이 풍에 걸린 마냥 떨리기 시작했다. -85- 양지 바른 곳에 세워진 초가 앞에서 서성대며 기다리고 있던 이세직은 느긋한 표정이었다. 상처에서 회복한 지 얼마 되 지 않은 당우양은 천인문이 오기를 기다리다 이세직의 염려 어린 언질을 받고 이미 안으로 들어간 지 오래였다. 앞마당을 배회하고 있던 이세직의 귀가 쫑긋했다. 숲 속에서 발소리가 들려오자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터덜터 덜 걸어오는 천인문이 눈에 잡혔다. 이세직의 미간이 살짝 찡 그려졌다. '아니 왜 저 아이만 오는 거지? 못 만난 건가?' 친한 사이라 별 문제 없이 돌아 올 수 있을 것이라 추측했던 것이 틀리자 만나지 못한 것이라 유추했다. 뾰루퉁한 얼굴로 돌아오는 천인문의 앞으로 다가갔다. "만나지 못했나 보구나." "아이 몰라요. 묻지 마세요." 인상을 팍 찌푸린 천인문은 고개를 내저으며 짜증나는 어투 로 대답했다. 말하지 않겠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 다. 이세직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묻지 않으마. 그건 그렇고 일단 안에 들어가 보거라. 그 친구가 네게 할 말이 있나 보더라." 이세직은 신법을 가르쳐 준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건 당 우양이 해야할 말이다. 천인문이 안으로 들어가자 이세직은 다시 숲 속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조기혜는 보이지 않았 다. 그는 한숨을 내쉰 후 고개를 저으며 초가 안으로 들어갔 다. 그 무렵 조기혜는 산 정상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배신감에 젖어 날카로운 눈빛을 발산하는 그녀. 나무 사이로 초가가 보이자 더욱 빠르게 달려갔다. "오셨습니까?" 갑자기 한 쪽 모퉁이에서 흰 인영이 솟아났다. 빙령인가 싶 었으나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에는 다른 사람의 모습이 잡혔 다. 설령이었다. "음 설령이구나. 다녀온다고 수고했다." 그녀는 말을 간단히 맺은 후 묘옥 안으로 들어갔다. 천인문 과 사이가 벌어지자 더 이상 옥조영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 기 싫었다. 그러나 설령은 달랐다. 맡은 임무를 완수했으니 일단 보고할 의무가 있었다. 설령은 바로 조기혜를 뒤따라 들 어갔다. "보고 드리겠습니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설령의 입이 열렸다. 그러나 조기혜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됐어." "하...하지만." 설령은 조금 의아해서 말을 늘이며 머뭇댔다. 그러자 조기혜 는 차가운 옥용을 더욱 굳히며 휙 소리가 나게 고개를 돌려 그녀를 째려 봤다. "설령! 죽고 싶은 게냐? 언제부터 네가 그렇게 나의 말에 토 를 달았지? 분명 내가 됐다고 했을 텐데." 살기가 묻어날 듯 차가운 말이 들리자 설령은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조기혜는 다시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나가 봐. 여기는 일 각 후에 떠날 테니 준비해 두도록." "존명!" 설령은 바로 몸을 돌려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조 기혜는 생각에 잠겼다. '가라고 했어? 흥! 그러면 못 갈 줄 알아?' 그녀는 화가 치미는지 주먹을 불끈 쥐며 옷을 움켜쥐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인지 옷이 든 봇짐을 구석에서 꺼내 들었다. 그리고 입고 있는 치마를 벗기 시작했다. "어떠냐? 쉬운 것 같으냐?" 당우양의 질문에 천인문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울 듯 보였는데 너무 쉽게 설명을 해주셔서 이해가 쉬 웠어요." "뭘 그것 가지고. 일단 처음에는 익숙해 질 때까진 실전에서 쓰진 마라. 그랬다간 그 전에 목이 날아갈 테니." 천인문은 당우양에게 신법과 보법을 전수 받는 중이었다. 처 음에는 어려웠던 것이 몇 번이고 상세하고 재미있는 설명을 듣다 보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 질 정도였다.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싶었는지 당우양은 마당에서 직접 그 수법을 전수했다. 이세직은 잠깐 자리를 비켜 주었다. 천 인문도 처음에는 당황해 하는 모습이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조금씩 익숙해지는 듯 했다. '왜 무공들이 전부 이렇게 쉽지 않을까? 이렇게 쉬우면 모두 다 배울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천인문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세직과 당우양 이 가르치는 무공들이 아주 쉽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분명 지금 배우고 있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 단지 가르 치는 사람이 배우는 사람에게 맞게 재미있고 알기 쉽게 설명 을 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었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바닥에 발자국을 찍어 선운만변을 전수한 당우양 은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한 마디를 남긴 후에 안으로 들어갔 다. "확실히 기억했다 싶으면 지우도록 해라." 당우양이 사라지는 모습도 보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던 천인문은 바로 발자국을 따라 발을 놀렸다. 발자국은 여기저 기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앞으로 가다가 갑자기 뒤로 돌기도 했고 옆으로 가다가 앞뒤로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있었다. 모 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누가 꼭 장난이라도 친 듯한 발자국. 그러나 천인문은 이 발자국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조금 전에 그 위력을 당우양이 직접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희뿌연 잔영만 남기고는 완전히 그 모습을 감추어 버리는 놀 라운 위력을 보여준 발자국인지라 천인문은 소중하게 생각했 다. 분명 이 발놀림을 익히면 더욱 강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 되었다. "좋아 시작해 볼까나." 팔뚝 위로 옷을 걷어올린 천인문은 눈을 반짝이며 앞으로 나 섰다. 그리고는 발자국 위로 뛰어 올랐다. 머리에 남아 있던 당우양의 모습을 상기하며 천천히 발을 놀렸다. 허나 그 모습 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손은 바람을 타듯 이리저리 흔들리 고 엉덩이는 기방의 여자 마냥 씰룩거리고 있었다. 한 발을 내딛고 다시 내딛을 발이 공중에서 머뭇거리기 일쑤였다. 결 국 천인문은 한 번을 다 따라하기도 전에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이거 보기보다 상당히 어렵네. 분명 보기엔 쉬웠는데 말이 야." 턱을 손으로 긁적이던 천인문은 한 쪽 옆으로 물러섰다. 멀 찍이 뒤로 물러선 연후에 머리를 싸매고 앉았다. '일단 앞으로 나가다가 발을 돌려서......' 눈을 살짝 내려감은 천인문은 처음부터 보았던 모습을 다시 상기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감겨진 눈이 떠졌다. 머릿속이 다시 환하게 정리된 것이다. 눈을 들어 바닥에 찍힌 발자국을 내려다보자 발자국의 움직임이 한 눈에 들어왔다. 만족한 듯 천인문의 입 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선 후 앞으로 나아가 발자국을 딛고 섰다. 그리고는 천천 히 발을 내뻗었다. 이번에도 어색한 동작은 여전했다. 그러나 결코 발은 멈추질 않았다.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나자 한 번의 시전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천인문은 결코 발을 멈추 질 않았다. 둔한 발놀림은 시간이 지나가자 조금씩 유연해져가고 있었다 . 두 번, 세 번...... 무려 다섯 번의 시전이 끝나갈 무렵에 는 조금씩 속도도 붙어가고 있었다. "그래 이제 좀 알겠다. 여기서 이렇게 옮기는 거군. 아! 이 건 이쪽이었네." 혼자서 머리를 툭툭 쳐가며 바보 도 터지는 소리를 내지르는 천인문이었다. 이제는 조금씩 응용까지 해 내는 신기(?)까지 해 보이며 기뻐하기 시작했다. 뒤쪽 숲 속에서 한 인영이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세직이었다. 혹시나 숲 속에 조기혜가 있을까 해서 갔다 온 것이다. 결국 그녀를 찾지도 못하고 발걸음을 되돌린 것이다. 열심히 무공을 수련하고 있는 천인문의 등뒤에 선 이세직은 손으로 입을 막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오셨어요?" 천인문은 흘깃 쳐다보고 인사를 건넬 뿐 발자국을 따라 하기 에 여념이 없었다. "잘 되어 가느냐?" "보시면 알잖아요. 이젠 확실히 좀 알겠어요." 대답만 던지기에 정신 없던 천인문을 싱긋 웃음으로 화답한 이세직은 집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리하지는 말거라." 힘 빠진 듯 미약하기 그지없는 말투다. 들었는지 못 들었는 지 대답도 않는 천인문을 뒤로 한 채 이세직은 문을 당겨 안 으로 사라졌다. 다시 조용해 진 마당에는 천인문의 신영(身影 )만이 번뜩거리고 있었다. "갔다 왔는가?" "......그래." 힘없는 말투.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당우양의 머리가 끄덕거 렸다. 화를 버럭 내고 가버린 조기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전혀 생각지 않았던 그였다. 그러나 별 일도 아닌 것을 가지 고 저렇게 실망하는 모습을 보일 것도 예상치 못했다. "왜 그렇게 우거지상인 게야? 누가 죽기라도 했어? 인상 좀 펴게나." 여자에 대해 관심을 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평소 그의 지 론이었다.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못한 것도 그런 생각이 앞서 기에 그럴지도 몰랐다. 여자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은 것 . 욕망을 풀고 싶으면 기방에 가면 되는 것이다. 쓸 데 없이 마음 속을 알기 힘든 여자를 잡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다 생각했다. 더군다나 이 여자는 이세직이 노리고 있는 여자도 아니지 않 는가. 단지 천인문을 위해서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 아이와 그 여자의 문제일 뿐 그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당우양의 생각일 뿐이었다. 이세직은 굳은 얼 굴을 들며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자네는 모르겠지만 그 여자애는 달라." "다르다고? 뭐가 다르다는 거지? 난 모르겠던데." 당우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그에게는 달라 보이지 않 았다. 특별한 점이라고는 평생 가도 볼 수 없을 만큼 빼어난 용모를 가졌다는 것뿐이었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당우양을 향해 답변이 날아들었다. "그 아이는 빙궁(氷宮)의 아이네." "비......빙궁이라고 했나?" 당우양의 눈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빙궁(氷宮). 듣기 힘든 단어, 그만큼 북해빙궁은 중원에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이 몇 안 되는 신비의 단체였다. 세외(世外) 의 세력 중 북쪽을 담당한 미지의 세력. 그만큼 사람들은 막 연한 두려움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알려지지 않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람들을 긴 장시키게 하기에 충분했다. 비록 과거에 한 번도 중원을 침공 하지 않았다 해도 말이다. "그래, 빙궁이라 했네. 자네도 알겠지. 이화접목을 말일세." "이화접목이라면......" 당우양의 생각이 옳다는 듯 이세직의 고개가 까딱거렸다. "맞네. 바로 빙궁의 독문 절학이지." "......그럼 이제 빙궁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말인가?" 실체를 알지 못하는 단체가 모습을 드러낸다는 데에 대한 두 려움이 몸에 스미는 듯 당우양의 몸이 잠깐이나마 떨렸다. 몇 번이고 침공을 당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중원을 세외의 세력에게 뺏긴 적은 없었다. 그 말뜻은 그만큼 중원 의 잠재력이 강하다는 것이다. 분명 이번에도 충분히 몰아 낼 수 있을 것이라 자위하는 당우양이었지만 불안하긴 마찬가지 였다. "모습을 드러낼지 그렇지 않을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하지 만 미리 조심해 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 당우양은 묵묵히 고개를 떨구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다. 그 모습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세직은 말을 계속 이 을 뿐이다. "그 아이가 무슨 목적으로 중원에 들어온 것인지는 모르겠지 만 자네나 내가 우려하는 일을 획책하려 한다면 일단 눈에 보 이는 곳에 두는 편이 더 안전할걸세. 그래서 내가 그 애를 찾 으러 갔던 것일세." 말을 끝마친 이세직의 시선이 당우양을 향했다. 그에 맞춰 당우양의 고개도 들려졌다. "그럼 혹시......" "뭔가?" "내가 이번에 당했던 일 말일세. 그걸 생각하니 빙궁에서 그 걸......" 뭔가 떠오르는지 당우양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아 그러고 보니 자네에게 그 이야기를 듣질 못했군. 어떻게 된 건지 좀 말해 보게나." 궁금증이 솟구치자 이세직이 급히 당우양의 맞은 자리에 자 리를 잡고 앉았다. 당우양이 하려는 이야기도 궁금했지만 더 욱 궁금한 것은 낙락생이었다. 재촉을 받은 당우양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에 내가 그림 하나를 구입하려고 했었네. 그런데...... "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던 당우양은 빤히 쳐다보는 따 가운 시선에 헛기침을 토했다. "험험! 그렇게 보지 말게. 자네도 알지만 내가 그냥 가져간 적이 있던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근데 재수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관인(官人) 하나를 구했 지. 근데 품에서 편지가 나오더란 말일세. 볼 생각은 그렇게 없었는데 어찌하다보니 보게 되 버렸지. 근데 뭐라고 적혀 있 는 줄 알겠는가?" 당우양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양인 듯 고개를 내밀며 물었 지만 대답하는 이세직은 시큰둥하기 짝이 없었다. "뭐 보나마나 자네 눈에 들 거라곤 보물 따위밖에 없을 테니 그냥 말이나 하게." 이야기는 호응하는 맛에 따라 기분이 오가는 법이다. 기대했 던 반응이 오지 않자 당우양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 만 과거 몇 번 그런 반응을 보았던 그는 바로 기색을 회복했 다. "놀라지 말게. 바로 구룡옥배가 운반된다는 소식이 적혀 있 더란 말일세." 이번에는 이세직의 표정도 잠시나마 변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구룡옥배는 독이나 약을 쓰는 사람들에게도 상당히 보물로 알려져 있는 탓이 컸다. 겨우 기대했던 반응을 잠시나마 볼 수 있었던 당우양은 상당 히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도 이제 관심을 보이는구먼. 역시......" "헛소리는 그만 집어치우고 하던 말이나 계속 해 보게." "아......알았네. 자네도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을 줄 아 는가?" 안색을 굳히며 죄여오는 기세에 눌려 당우양은 급히 손을 내 저었다. 뜸을 더 들이다간 사단이라도 날 듯 하여 황급히 대 꾸를 했다. "이번에 관인 하나가 조공품인 구룡옥배를 배로 나른다는 말 에 난 급히 달렸지. 재수 없어 황궁에 들어가 버리면 언제 구 경이라도 하겠느냔 말이야. 다행이 배를 놓치진 않았지. 근데 문제가 생긴 거야." "문제? 무슨 문제?" "......" 당우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난기 서려 있던 표정도 이미 굳어졌다. 자신을 놀린다 생각했던 이세직도 뭔가 다르 다는 느낌을 받자 할 말을 입 속으로 꿀꺽 삼켜 버렸다. "그토록 찾았던 구룡옥배는 배 안에서 못 찾았네." 한참을 뜸들이던 당우양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세직을 실망 시키기 짝이 없었다. 기대에 차 반짝이던 눈도 서서히 흐려졌 다. 그러나 곧 들려온 말은 그의 귀에 청천벽력(靑天霹靂)과 같이 들렸다. "하지만 그 안에서 두 권의 비급을 찾았네. 바로 천존무급( 天尊武 )하고 파혈마혼(破血魔魂)이었네." "뭐? 파혈마혼?" 사람의 목소리가 이렇게 클 줄 당우양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 그것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친구의 목소 리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에도 눈만 껌뻑 하고 말 것 같 은 친우가 소리를 지르며 호들갑을 떠는 모습에 거의 뒤로 나 자빠져 버릴 뻔했다. "예끼 이 사람. 간 떨어지겠네." 회복한 지 얼마 안된 탓인지 당우양의 낯이 퍼렇게 바뀌었다 . 가슴을 쓸어 내리며 크게 호통쳤다. 그럼에도 이세직은 미 안한 기색 따윈 없었다. 아니 더욱 안색을 굳히며 당우양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말해 보게. 분명 파혈마혼이라 했는가? 그게 사실이야?" 어깨를 쥐는 그의 힘은 엄청났다. 그만큼 격동하고 있다는 뜻이었지만 당우양은 가공할 힘에 짓눌려 인상을 찌푸릴 뿐이 다. "크으......!" 고통에 찬 신음이 토해지자 이세직은 상태를 알아차렸다. 너 무 흥분하여 친우에게 손을 과하게 써 버렸다. "미......미안하게 됐네." 사과를 급히 던지며 손을 놓았다. "이 사람 오늘 날 죽일 셈인가?" 고통에 찬 신음을 길게 뽑으며 어깨를 문지르는 당우양은 잔 뜩 찌푸린 눈으로 그를 노려 보았다. "내......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던 모양일세. 용서하게." 이세직은 어울리지 않게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그러나 눈빛은 그 다음을 기다리고 있음이 역력했다. 눈빛에 압도된 듯 당우양은 쏘아붙이려는 말을 접고 그 다음을 이야기하려 했다.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천인문이 급하게 안으로 뛰 어 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상당히 놀란 듯 들어서는 천인문의 표정도 굳어져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잠깐 이 할애비가 놀라서 그랬단다." 무안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이세직. 그러나 얼굴 표정은 단지 이 상황을 무마시키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놀랐다고?' 결코 놀랄 것 같지 않던 사람이 놀랐다고 하니 더욱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천인문은 앞으로 다가와 의자에 엉덩이를 붙 이고 앉았다. "근데 무슨 얘기 중이셨기에 그렇게 할아버지가 놀란 거죠? 저도 좀 들을래요." "그렇게 대단한 얘기는 아닌데......" 당우양은 별 것 아니라는 어투로 말하는 이세직의 말을 듣기 가 무섭게 잘라 버리며 끼어 들었다. "별 것 아니라니. 그 두 권의 비급이 장난이란 말인가? 세상 에 나가면 피바람을 몰아칠 물건들인데." "비급이요? 무슨 비급인데요?" 천인문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비급이라...... 피바람을 몰아칠 수 있는 비급이라면 분명 장난이 아닐 것이 다. 서서히 무공에 대해 관심이 높아져 가던 천인문도 귀를 쫑긋 세웠다. "흠! 들어 봤는지 모르겠구나. 마후혈영(魔后血影)의 최후 심득이 든 파혈마혼이란 비급하고 천존무제가 자신의 무공을 기록했다는 천존무급......" "자......잠시만요. 누구요? 천존무제라고 했나요?" 듣고 있던 천인문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분명 귀에 익은 명호가 들렸던 것 같았던 탓이다. 당우양은 또다시 당황했다. 이번에는 천인문이었다. 오늘따 라 이 두 노소(老小)가 약이라도 먹었는지 자신을 자꾸 화들 짝 놀라게 만들었다. "넌 또 왜 그러냐? 저 친구는 파혈마혼에 눈이 시뻘게져 날 놀라게 하더니 이번에는 너냐?" 그러나 역시 그의 질문은 천인문의 귀에 들리지 않았나 보다 . 천인문은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말만 이을 뿐이었다. "천존무제가 쓴 천존무급? 그럴 리가...... 이상한데...... 좀 이상해." 고개를 떨구며 갸웃거리는 모습에 당우양과 이세직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뭐가 없다는 게냐?" 한다는 소리가 계속 그럴 리 없다는 말뿐인지라 답답해진 당 우양이 내뱉듯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닌 질문 이었다. "천존무급이라고 했나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들 듯 물어오자 당우양은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도 못한 채 답을 했다. "그래 천존무급!" 답을 듣자마자 다시 고민에 잠기는 천인문. 혼잣말로 중얼거 리기 시작했다. "천존무급이라고? 이상한데 왜 난 못 들어 본 거지? 할아버 지가 말 안한 건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 자랑하기 좋아 하던 영감탱이가 그럴 리가 없을 건데 말이야." 대답은 하지 않고 그저 혼잣말로 자신의 생각에 빠져 있자 당우양의 심기가 슬 불편해졌다. 아까부터 두 노소가 하는 짓 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라 자꾸 밑에서 무언가가 치고 올라 오고 있었다. "그래 뭐가 이상한 게냐?" 당우양의 불편한 심기를 깨달은 이세직이 어깨를 잡고 흔들 며 질문을 던졌다. "아! 이상해요. 당 할아버지가 분명 천존무급이라고 하셨잖 아요. 근데 난 천존무급이라고는 들어 본 적이 없거든요." "그게 뭐가 이상한 게냐. 못 들어 봤을 수도 있지." 투덜거리며 고개를 휙 돌려버리는 당우양. 천인문은 그럴 리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있다면 못 들었을 리가 없죠." "왜 그렇게 자신하느냐?" 이세직이 물었다. 분명 나이도 어리고 무공도 많이 알지 못 하는 게 천인문을 보아온 이세직이 내린 결론이었다. 명문의 가문에서 태어났다면 또 모를까 의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천인문이니 분명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 할 만 하죠. 분명 할아버지가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 었거든요." "난 그런 얘기를 한 적 없는데......" 할아버지란 말이 자신을 가리킨다고 지레 짐작한 이세직이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가 아니라 옥 영감 말이에요." "옥......영감?" 이세직의 표정이 갑자기 멍해졌다. 덩달아 고개를 돌린 당우 양의 표정도 가관이었다. 아주 예의 바르게 보였던 천인문의 입에서 영감이란 말이 튀어나올 줄 전혀 예상치 못했던 탓이 다. "쿨럭쿨럭! 그, 그렇구나. 옥......이라. 그건 그렇고 그 옥 ......할아버지는 뭐 하는 사람인데 그런 얘기를 했다는 것이 냐?" 말하기 껄끄러운 듯 기침까지 토해내던 이세직은 차마 영감 이란 말을 붙이지는 못하고 할아버지란 말을 붙였다. "할아버지는 무슨 할아버지? 그냥 영감이라 불러도 돼요. 아 ! 누구냐고 물으셨죠? 뿌드득! 기분 나쁜 영감쟁이가 있죠. 날 막 패면서 가르친 영감탱이. 에잉 기분 나뻐. 우리 색시도 못 보게 만든...... 어쨌든 그런 맘에 안 드는 영감이 있어 요." 기분을 잡쳤다는 표정으로 사래를 치던 천인문은 더 말하고 싶지 않은 표정으로 얼버무렸다. 알겠다는 듯 이세직은 고개 를 한 번 끄덕였다. 하지만 당우양은 그것만으로는 천존무급 이 있다고 말한 적이 없다는, 아리송한 말을 이해 할 수 없었 다. 옥 영감이 누군데 그가 말하지 않았단 것으로 저렇게 확 신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옥 영감이고 옥 할아버지고 간에 그가 누구냐? 그 사람이 신이라도 된단 말이냐? 그가 말하지 않으면 없는 것이고 있다 면 있는 거냐? 노부는 믿을 수 없구나." 당우양이 불만을 토로하듯 거칠게 내뱉자 천인문은 고개를 들어 빤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멀뚱히 지켜보던 천 인문이 입을 열었다. "뭐 신은 아니에요. 하지만 천존무급인가 뭔가 하는 것에 관 해서만큼은 확실해요." "왜?" "그 영감이 천존무제니까요." 쿠쿵! 당우양의 머릿속에 뇌성이 울려 퍼졌다. 하얗게 머리가 비어 버린 느낌이랄까. 천존무제가 살아 있었다는 충격적인 말도 이유가 되긴 했지만 그보다는 어떤 확신에 찬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탓이 컸다. "자네 왜 그러나?" 이세직의 손이 망각의 사슬에서 그를 구해냈다. "이젠 확실히 알겠어. 이건 음모야 음모." "음모?" "그래. 성동격서(聲東擊西). 내 말을 한번 잘 들어 보라고." 당우양은 확신에 찬 어조로 침을 튀기며 입을 열었다. "분명 빙궁에서 두 권의 비급을 중원에 흘려 들인 거야. 무 림인들이 비급에 목숨을 건다는 것은 세 살 박이 코흘리개들 도 다 아는 사실이지. 그럼 어떻게 될까. 피 튀기는 지옥 꼴 이 나게 되지 않겠나?" 듣고 있던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게 있을 따름이었다. 당우양의 확신에 찬 어조는 계속되었다. "물론 그 비급들은 다 가짜지. 분명 진본은 빙궁에 있을 거 야. 일단 무인들이 모두 두 권의 비급을 쫓으며 피를 흘리면 그들은 뒤에서 그저 바라보며 웃고 있다가 몰살지경(沒殺之境 )이 되면 슬쩍 나와서 중원을 접수하려 할 게야. 분명해." 불끈 쥐어진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듣고 있던 이세직이 살 짝 고개를 흔들었다. 어딘지 맞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어 수룩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는 말 같긴 하지만 자네말고 그 비급이 들어 왔다는 것을 누가 알고 있는가?" 질문을 받은 당우양의 몸이 흠칫했다. 분명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정신을 잃고 쓰 러진 이후 헛소리를 하지 않았다면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 은 자신의 앞에서 이야기를 들은 이세직과 천인문 밖에 없는 것이다. 소문이 나려 해도 날 턱이 없었다. 당우양의 불끈 쥐 어진 주먹이 서서히 펴지며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배는 조공품을 실은 선박(船舶)이겠지. 그럼 어 떤 무인들이 그 배를 공격할까. 죽고 싶은 녀석이 아니면 결 코 못하지. 누가 함부로 황제한테 가는 배를 공격해. 빙궁에 서 일부러 중원 침공의 음모를 꾸민 것이라면 그냥 조용히 삼 류 무인에게 찔러 넣어 주기만 해도 될텐데 말이야." "하지만 무림의 소식이 얼마나 빨라? 나말고도 분명 그 사실 을 아는 녀석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그래 분명 그 배 안에서 날 공격해서 중독 시켰던 그 녀석이 떠벌렸을지도 몰 라. 그리고 또 황제에게 가는 배라고는 하지만 어떤 미친 녀 석이 들어가서 꺼내 올수도 있지. 내가 했던 것처럼 말이야." 조금 전까지 열변을 토하던 당우양이었지만 이번 변명에는 힘이 없었다. 이미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는 듯 했다. "자네도 힘들었던 일을 쉽게 해 낼만한 자가 몇이나 될까? 그리고 또 하나......" "됐어 그만해. 벌써 알아차렸으니 이젠 그만해도 돼." 당우양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더 안 들어도 벌써 잘 못 생각했다는 것을 충분히 알았다는 모습이다. 그 모습이 측은 했던지 이세직은 빙긋 웃은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생각이 틀리기는 했지만 맞는 것도 있지." 그 말에 당우양의 쳐진 어깨가 움찔했다. 고개가 서서히 하 늘을 향해 들리자 이세직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가짜 천존무급이란 게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벌써 누군가가 괴상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거지. 진본도 없는 판국에 가짜가 나돈다는 것인데......" "내가 잘 못 생각하긴 했지만 확실히 음모가 있는 것은 분명 해." 조금 힘이 살아난 모양인지 당우양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 있 었다. "분명 이 일이 무림에 파장을 미칠 거야. 누가 이런 일을 꾸 몄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한 번 알아 봐야겠어." "그럼 이제 산을 내려가는 거에요?" 가만히 듣고 있던 천인문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상당히 오 랜 기간 산에서 머무르다 보니 지루해 져 있었던 탓이 없지 않아 있었다. "산에 있는 게 싫었나 보구나." 눈을 살짝 내려 깔며 넌지시 떠보는 이세직. 그러나 쉽게 넘 어갈 리 없는 천인문이다. "그게 아니죠. 멋진 무공을 배웠는데 써먹어 보지도 못하면 얼마나 아쉽겠어요?" "하하하.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럼 내려가서 멋들어지게 한 번 싸워 봐라. 그래서 이름을 만 천하에 떨쳐 보거라." 당우양의 화통한 답에 천인문도 활짝 웃음을 머금었다. 모습 은 훌쩍 커버렸지만 아이같은 미소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애도 데려와야겠구나. 문아. 나하고 같이 가지 않겠느냐 ?" 이세직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일단 빙궁이 개입했 다는 확신이 없는 상태라 조기혜를 떨어뜨려 두는 것보다는 눈앞에 두는 것이 안전하다 생각했다. "에이 뭐 하러 올라가......" 군시렁거리며 불만을 토로하던 천인문은 날카로운 예기를 쏘 아내는 이세직의 눈에 압도 되어 입을 다물었다. "알았어요. 올라가면 될 거 아네요."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가서 검도 챙겨 오너라." 문 밖으로 나가는 천인문의 뒤에 대고 소리친 이세직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자네도 천천히 준비해 오게. 좀 피곤하겠지만 서둘러야겠네 ." 완전히 나았다고 생각지 않았기에 이렇게 서둘러 뜨려는 것 이 미안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당우양은 그렇지 않다는 표 정을 지었다. "상관 없어. 이미 나을 만큼 나았는데 뭐 하려고 계속 붙어 있겠나. 이젠 움직이지 않으면 없던 병도 날 판인데 뜬다고 하니 기분이 좋군." "그럼 준비하게. 나도 몇 가지 준비를 해야겠어." 이세직은 자신의 창고로 걸음을 옮겼다. 몇 가지 약과 독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고 있던 당우양도 자신의 물건이 놓여 있던 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86- 밤새 내린 비로 맑게 개인 아침 하늘은 청명하기 그지없다. 남경(南京)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대로는 흥건히 고인 물로 질퍽했지만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은 그런 것도 아랑곳하지 않 았다. 오히려 여름임에도 비가 오지 않았던 하늘을 원망하기 바빴던 그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그득했다. 해가 뜬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이미 땅바닥은 찌는 듯한 무더위를 내뿜고 있었다. 질퍽하게 젖어 있던 땅도 이미 서서 히 말라갔다. 그러자 사람들의 인적도 서서히 줄어들었다. 낮 시간이 되자 길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려웠 다. 낮 시간 땡볕 아래서 땀을 흘릴 이유가 없었다. 급한 일 은 모두 아침나절에 마쳐 버린 탓이다. 실제로 대다수의 농꾼 들은 모두 커다란 나무 밑에서 오수(午睡)를 즐기거나 술을 즐기고 있었다. 돈이 제법 있는 사내들은 모두 주루에 몰려 있었다. 살랑거 리는 바람과 집에서 빚은 술은 없었지만 농민들이 즐기는 투 박한 술 대신 그보다 더욱 맛이 좋은 술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영루(水瑛樓) 크기에서 남경의 네 번째를 차지하는 주루. 그러나 사람들이 찾아오는 수만으로 따지자면 남경에서 가장 크다고 말해야 할 정도로 성시를 이루는 곳이다. 세워진 지 백 년을 넘을 정 도로 오래된 건물에다 위치적으로도 찾기 아주 쉬운 곳에 세 워진 탓에 오랜 기간 동안 남경 사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런 이유에는 주인의 후덕한 술 인심도 한 몫 했지만 빼어난 술맛에 있었다. 아무리 술을 싼값에 많이 준다고 해도 맛이 없으면 찾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이 곳의 술은 누구도 핑계 잡지 못할 정도로 특급의 맛을 자랑했다. 그런데도 값이 싸니 대다수의 사내들이 수영루를 찾는 것은 당연했다. 지금도 수영루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여기 저 기서 술을 주문하는 사내들의 목소리와 부지런히 술을 나르는 점소이들로 내부는 왁자지껄했다. 주문은 간단했다. 파는 술 과 안주가 각각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옥로주(玉露酒)와 마파두부. 그것이 수영루의 유일한 음식이요, 안주며, 술이 었다. 그럼에도 사내들은 무언가에 미친 듯 수영루만 찾았다. 요즘 남경 사내들의 관심은 하나였다. 주산군도 앞바다에 떠 있는 정화의 원정선(元精船)이 언제 장강을 따라 들어올 것 인가 하는 것이었다. 여름치고는 너무도 적은 비에 장강의 수 위가 낮아 배를 정박시키고 있다고 하는 소식은 그들을 씁쓸 하게 했다. 정화의 선박이 한 번 원정을 갔다 오면 항상 남경은 경기가 살아났다. 조공품이 직접 백성들에게 풀리는 것은 아니지만 위에서 차곡차곡 혜택을 받고 내려오면 결국 백성들의 삶도 풍요해 졌기 때문이었다. 이미 들어오고 남았을 기간이었지만 이번 원정은 도착이 상당 기간 늦어졌다. 다행이 어제 큰비가 내렸고 이미 장강도 상당히 불어 있었다 . 이제 도착은 시간 문제라는 뜻이었다. 사내들이 정화의 선박을 안주 삼아 술을 들이키고 있을 무렵 이었다. 두 명의 여인과 차가운 외모의 사내 한 명이 수영루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나이가 든 듯한 여인과 그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여인. 둘 다 아주 빼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사내는 호위무사인 듯 허리에 청강검(淸江劍) 하나를 걸고 있었다. 값비싼 비단 자락으로 된 붉은 단삼을 단아하게 걸친 두 명 의 여인이 들어오자 주루는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제법 술기 운이 오른 사내들이 뚫어져라 그녀들을 바라보긴 했지만 차가 운 외모의 사내가 껄끄로운지 일어서서 다가오는 사내들은 없 었다. 나이든 여인, 그녀의 이름은 궁소미였다. 천인문과 헤어진 후 중원에 들어온 그녀는 얼마 안되는 짧은 기간동안 다시 재 기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 결과 어느 정도 기반을 잡을 수 있었고 이제는 화려한 비상을 위해 큰 도박 을 하려 이곳을 찾았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사방을 살피던 궁소미의 눈이 반짝 거렸다. 빈자리를 발견한 그녀는 앞장서 그 곳으로 걸어갔다. 궁소미의 맞은 편 자리에 그녀의 시녀인 매향이 앉았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점소이 하나가 달려왔다. "얼마나 시키시겠습니까?" 점소이 답지 않게 당당한 어투로 물었다. 그러나 궁소미는 그런 태도보다 묻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엇을 시키겠 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시키겠느냐라니. 그녀는 물어서 그 의 문을 해소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보이는 것은 모두 한 가지 뿐이었다. 갈색 병에 든 술과 널 찍한 접시에 든 두부. "두부 한 접시하고 술 한 병 가져다 주세요." 매향이가 주인을 대신해 주문했다. 주문을 접수한 점소이가 총총 걸음으로 물러갔다. "아직 안 왔나 보네요." "아직 시간이 이르잖니. 조금 더 기다리면 오겠지." 대답으로 미루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조금 후 점소이가 주문한 요리와 술을 가지고 왔다. 쪼르륵! 술병을 쥐어 잔에 채운 후 한 모금을 들이켰다. 향긋한 내음 과 부드러운 맛이 혀를 살짝 감으며 넘어갔다. 맛을 음미하던 궁소미는 다시 저를 들어 두부를 한 점 들었 다. 이번에도 아주 빼어난 맛이 혀를 자극했다. "괜찮군. 맛이 좋아." 그녀는 저를 놓으며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낮 시감임에도 사람들이 북적대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고급 식당에서나 볼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요리 실력이면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 때였다. 갑자기 숙덕거리던 주루가 조금 더 웅성거리는 듯 했다. 누군가의 호들갑이 들려온 탓이다. 궁소미의 시선이 주루의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계산대 앞에 앉아 있던 넉넉 한 미소의 주인이 허리를 굽신거리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 다. 주인의 앞에는 깐깐해 보이는 중년 사내가 무엇을 찾는지 고 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궁소미는 손에 든 잔을 내려놓았 다. "우리를 찾는 사람이 온 것 같다. 그만 일어서자꾸나." "누구를 찾으시는지요?" 수영루의 주인인 장홍(長弘)은 평소 모습과는 다르게 상당히 긴장해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볼 수 있을까 말까한 사람이 갑자기 방문한 탓이다. 수영루는 장홍이 주인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명의도 그의 것이었다. 그러나 실상 이 주점의 상당한 자본은 눈앞에 서 있는 사내의 주인이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가계의 후 견인이자 실주인은 다른 사람이라는 말이다. 장홍의 물음에 사내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입을 열었다. "여기 한 삼십 대로 보이는 여자가 들어오......" 말을 하던 사내가 우뚝 멈추어 섰다. 자리에서 일어서 다가 오는 궁소미를 발견한 것이다. "자네는 일 보도록 하게." 사내는 장홍을 돌려보낸 후 궁소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거 소인이 손님들을 기다리게 하였나 보군요." 절도 있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사내. 궁소미는 그렇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희도 지금 막 도착했는걸요." "찾는데 어렵지 않으셨습니까?"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어요. 거기다 음식 맛도 좋고 술도 아 주 좋은 게 아주 기분이 좋군요." "주인께서 혹시나 싫어하시지 않을까 염려하시던데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군요. 아 내 정신 좀 봐. 손님들을 이렇게 서 계시게 하다니. 그만 가시죠. 마차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상당히 유들유들한 사내의 환대에 궁소미는 기분이 좋은 듯 환하게 웃으며 그를 뒤따라 나섰다. 밖에 나서자 잡티 하나 섞이지 않은 하얀 백마 두 마리가 묶 인 화려한 마차 한 대가 수영루의 문 앞에 우뚝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르시죠." 작은 문을 열어제친 사내가 손짓을 했다. 사내의 안내에 따 라 궁소미는 마차에 가볍게 몸을 실었다. "매향이도 타도록 해라." 궁소미의 지시를 받은 매향이도 별 말 없이 마차에 몸을 올 렸다. 문이 닫히고 사내까지 앞 자리에 앉자 마부는 부드럽게 고삐질을 가했다. 백마 두 마리는 마차를 끌고 앞으로 나아 갔다. 마차는 남경의 관도를 가로질러 나갔다. 고관대작들이 사는 중앙로를 가로지른 마차가 도달한 곳은 더욱 화려한 위용을 자랑하는 대갓집이 즐비한 길이었다. 붉고 푸른 단청(丹靑)과 아름다운 풍경(風磬)이 멋들어지게 어울린 그곳. 마차가 한 채의 화려한 집 대문 앞으로 다가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활짝 열렸다. 마차가 안으로 사라지자 다시 문은 소리 없이 닫혔다. "아가씨 다 왔나 봐요." 마차가 조용히 서자 작은 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던 매향이 입을 열었다. "그래 이제 내려야겠구나." 마부가 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 러더니 문이 활짝 열리며 밖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궁 소미와 매향이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리자 안내했던 사내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주인께서 기다리십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으니 따르시지 요." "네 부탁 드리겠습니다." 궁소미는 그를 뒤따라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집은 상당히 컸다. 일견하기에도 너무나 큰데다 몇 번이나 돌아가야 하는 길은 처음 오는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에 충분할만큼 복잡했다. 일각이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몇 번 의 문을 통과하여 도착한 곳은 대가(大家)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소박한 건물이 있는 곳이었다. "들어가시지요." 사내는 고개를 한 번 숙여 인사를 한 후에 뒤로 물러섰다. "들어가자." 궁소미가 안으로 들어서며 매향과 사내를 둘러보았다. 그러 자 사내가 안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두 분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주인하고 주인 마님 뿐입니다. 아가씨께서는 손님이시 니 들어가실 수 있지만 저 두 분은 그 대상이 아니오니 양해 하시길 바랍니다." 무례하지도 않으면서 비굴하지도 않은 말투에 궁소미는 고개 를 끄덕였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일부러 주인의 심기를 어 지럽힐 필요는 없었다. "그럼 넌 여기서 기다려라. 들어갔다 나오마." 건물은 아주 낡았다. 하인이나 사는 집이 이럴까 싶을 정도 로 허름한 건물이다. 잠시 건물을 바라보던 궁소미는 매향이 를 떨구어 놓고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문을 살짝 잡아당기자 삐걱하는 낮은 소음이 들려왔다. 안은 어두웠다. 불이 켜져 있지 않은 탓이다. 그러나 그녀가 발을 들여놓자 팟 하는 소리와 함께 등롱에 불이 당겨졌다. 한 사 내가 안에서 불을 붙인 것이다. "어서 오시오. 이쪽으로 내려 앉으시구려." 삼십 줄에 접어든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녀를 맞이했 다. 잘 생긴 외모에다 부드럽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이 사람이 북경에서 최고의 부를 자랑한다는 백재홍(白載鴻 )이구나. 역시 소문대로 잘 생겼군. 근데 옷은 왜 저렇게 낡 게 입은 거지?' 그녀의 생각대로 백재홍의 옷은 너무도 허름했다. 하얀 백삼 이라 알아보기엔 너무도 때를 타서 검어진데다가 군데군데 기 운 자국이 역력한 옷이다. "뭘 그렇게 빤히 뚫어다 보시는 거요?"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대던 백재홍은 그녀의 시 선이 닫는 곳이 자신의 옷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하하하! 난 또 뭐라고. 이 옷 때문에 그러는 것이요? 별 거 아니요. 어렸을 때부터 입고 다니던 옷이라 너무 편해 입 고 있는 것일 뿐이니 그리 이상하게 보지 마시오." 나라에서 첫째 둘째를 다툴 만큼 부자였지만 말투나 옷차림 은 전혀 그런 부자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반짝이는 눈동자 며 얄팍한 입술로 인해 어딘지 지략가의 느낌이 더욱 강하게 풍겨왔다. '흥! 우습군. 그런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을 하다니. 알 것 다 아는 변명이 나한테도 통할 줄 아는가?' 궁소미는 속으로 백재홍을 비웃었다. 백재홍이 어떻게 부자 가 되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백 재홍이 뛰어난 상술과 여러 기방과 주루를 운영하여 부자가 된 줄 알고 있지만 궁소미는 달랐다.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된 부모에게 백재홍의 비밀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노예 매매. 바로 그것이 백재홍을 크게 한 이유였다. 빛을 진 사람들을 찾아가 아주 싼값에 딸을 사서 기루에 넘 기는 것은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궁벽한 마 을에 사는 여인들은 납치라도 해서 기방에 넘겼다. 영락제가 들어선 뒤 거의 없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암묵적인 매매는 이 루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확실히 백재홍의 부가 커져가는 속도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호호호! 제가 들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시네요. 부 자라서 상당히 건방질 줄 알았는데 이렇게 검소하신 모습을 보이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화를 돋굴만한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궁소미는 입을 가리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백재홍의 낯이 살짝 변했지만 이내 평 온해졌다. 신경전을 걸어오는데 일부러 걸릴 필요는 없는 것 이다. "별 말씀을 다 하시오. 일단 앉으시지요." 작은 탁자 앞에 놓인 방석에 자리를 내어 주었다. 궁소미가 자리에 앉자 그는 맞은 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탁자에 놓 인 다관(茶罐)을 들어 찻잔에 따른 후 앞으로 내밀었다. "그래 어쩐 일로 절 보자고 하셨소이까?" "별 일은 아니에요. 저의 짧은 귀에 대인께서 멋진 장사를 하실 예정이란 소문이 들려서 저도 함께 해 볼 수 있을까 하 고 이렇게 찾아 온 거에요." "멋진 장사?" 백재홍의 눈이 실처럼 가늘어졌다. 불안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 여자가 무슨 냄새를 맡은 것인가? 아니 설마 그럴 리가 없지. 그렇고 말고.' 백재홍이 그녀의 방문을 허락한 이유는 간단했다. 능력이 있 는 미지의 여인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삼십대의 나이에 그것도 여인의 몸으로 무섭게 성장하는 모습은 중원에 산재한 대상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풍부한 관록을 가 진 백재홍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만나 보고 나 니 역시 녹록치 않음이 단번에 드러났다. 일단 선수를 뺏기긴 하였지만 백재홍도 만만한 인물은 아니 었다. 얼굴을 가다듬고 운을 띄웠다. 속내를 한 번 떠보자는 것이다. "내가 하는 장사라곤 인삼 교역과 술장사뿐인데 무슨 말씀인 지 모르겠구료." "오호호호! 은근슬쩍 넘어가시는 모습이 구렁이 뺨치실 정도 군요. 이래봬도 알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입을 가리고 간드러지게 웃어 넘기는 궁소미는 웃음을 거둔 뒤 빤히 시선을 던졌다. "이번에 정화의 배가 들어온다지요. 그런데 무슨 먹이가 있 길레 그렇게 파리들이 꼬이는 걸까요?" 궁소미의 한 마디에 백재홍의 낯이 확 변해 버렸다. 걸려도 단단히 걸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여자가 어찌 그걸......' 잔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려 차가 튀어 흘렀다. 그 모습을 빤 히 지켜보던 궁소미가 천천히 차를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한 모금 차를 들이킨 연후에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정하시지요. 화를 내시면 몸에 해롭나이다." 병 주고 약 준 꼴이랄까. 생각해 주는 것 같지만 어딘지 약 올리는 기색이 역력한 탓에 백재홍은 울화가 치솟는 느낌이었 으나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이대로 가다간 더욱 크게 당할 수 있다 생각했다. "하하하! 그건 사실이 아니오. 일개 장사치 따위가 조공품을 어찌 탐낼 수가 있단 말이오? 무력으로 뺏아 올 수도 없고 상으로 받아 올 수도 없는데 말이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 오." "사실이 아니다? 호호호!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며 제가 아는 데도 그렇게 속이시려 하시나이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시는군요." 궁소미의 웃음이 방 안 가득 퍼져갔다. 그 소리가 커져갈수 록 백재홍의 안면은 뭐 씹은 듯 구겨지고 있었다. "......그만 하시오." 쾅쾅! 울분에 찬 목소리가 탁자를 치는 소리와 함께 터져 나왔다.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는지 얼굴은 울그락불그락했다. 그녀의 웃음이 뚝 끊어졌다. 화를 돋구어도 너무 돋군 것이다 . 당겼다 놓았다 하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지나치면 끈이 끊 어져 버린다.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릴 수는 없는 법. 그녀는 그를 다시 잡아야겠다 생각했다. "돈을 가진 사람은 명예까지 가지고 싶다지요? 하지만 명예 는커녕 가지고 있던 돈까지 날릴 수 있음도 아셔야지요." "......!" 이건 무슨 뜻이란 말인가.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에 백재홍 의 낯이 다시 한 번 변했다. "그, 그 무슨 말이오? 명예는 뭐고 돈은 뭐란 말이오?" 안색이 변해버린 백재홍, 이번에는 말투까지 떨려 나왔다. 하지만 궁소미는 들은 척 만 척 딴청만 부릴 뿐이었다. 그러 자 다급해진 것은 백재홍이었다. "뭘 원하는 게요? 날 보러 온 것일 진데 목적은 말도 안하고 약만 올리고 갈 셈이시오?" "그럴 리가요. 저는 다만 대인께서 관심을 보이지 않으시나 해서 그런 것 뿐이지요." "관심을 보이지 않을 리가 없지 않소? 그러니 말 해 보시오. " "그럼 소녀도 말을 할 터이니 대인께서도 속 시원하게 말씀 해 주시겠나이까?" "좋소. 내 먼저 말하겠소. 그 대신 당신께서도 감추는 게 없 어야 할 것이오." "그야 이를 말이겠습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궁소미는 이겼다는 확신의 미소를 지었다. 이미 자신의 생각 대로 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차가웠던 실내의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하게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뵐 때까지 건강하게 계시 길 기원하겠습니다." "멀리 나가지 않겠소이다. 살펴 가시오." 백재홍의 배웅을 문 앞까지 나와서 받은 궁소미는 타고 왔던 마차에 다시 몸을 실었다. 마차가 사라져 가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백재홍은 마차가 건물을 돌아가자 다시 몸을 돌렸다 . 안으로 들어가는 백재홍의 얼굴은 배웅할 때와는 달리 상당 히 굳어 있었다. '위험한 여자군. 이거 안 좋은 걸.' 끌려 다녔던 조금 전 협상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지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그의 신형이 흠칫 거렸다. 이미 누군가 자신의 방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누, 누구?" "저에요 예진." 목소리가 들리자 백재홍의 얼굴에 안도의 기운이 떠올랐다. 그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온 거요. 그냥 방에 있지 않고." 부드럽게 말을 걸며 다가간 백재홍은 탁자 위에 놓인 등잔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다시 방안이 환하게 밝아왔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여인 한 명. 어딘지 쓸쓸해 보이는 느낌이 얼굴에 뭍어나는 미녀는 백재 홍의 아내인 민예진이었다. 백재홍이 불을 붙이자 고개를 떨 구고 있던 민예진이 천천히 머리를 들어 올렸다. "손님께서 오셨다고 들었어요." 백재홍은 별 거 아니라며 미소를 떠올렸다. "그것 때문에 뛰어 온 것이란 말이오? 그거야 항상 있는 일 이 아니오?" 백재홍은 안심하라며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살짝 두들겼다. 고개를 다시 떨어뜨렸던 그녀는 처연한 눈을 껌벅이며 입을 열었다. "그 여자가 무슨 말을 했던지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전 다만 상공을 믿을 뿐입니다. 상공께서 해 주신 약속을 잊지 않으 셨겠지요? 분명 믿어도 되겠지요?" 그렁그렁 눈물을 머금고 있는 미녀의 모습은 탄식을 내뿜게 할 만 했다. 백재홍은 그녀를 와락 껴안으며 대답했다. "부인 믿으시오. 내가 당신에게 청혼했을 때 당신이 나에게 내밀었던 조건. 분명 이 백 모는 잊지 않고 있소. 내 반드시 당신에게 그 약속을 지킬 것이오. 믿으시오." 민예진을 껴안고 있는 백재홍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한 시진이 넘게 기다렸던 매향은 마차로 집을 뜨자마자 궁금 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평소 일 관계에 대해서만은 묻지 않았던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예외인 듯 했다. 오래 전부터 궁 소미는 이번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다 일을 끝 내고 밖에 나와서도 얼굴에 어떤 표정도 떠올리지 않았기에 더욱 그러했다. 어딘가 불안해진 매향은 조심스럽고도 부드러 운 어조로 물었다. "아가씨. 일은 잘 되셨나요?" 질문을 받자 궁소미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긴장이 풀리는지 힘이 없는 표정이다. "그래 다행이 잘 되었구나." 그러자 매향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궁소미 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심기를 많이 써서도, 그렇다고 생각보다 결과가 나빠서도 아니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그녀를 불편하게 한 것이다. 성공하면 공신이요, 실패하면 역적이라. 도 아니면 모 식의 결과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던 궁소미였기 에 어떻게 해서든 양쪽에 선을 다 대어 두고 싶었다. 그러나 영락제 쪽은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었다. 아는 연줄도 없 었고 특별히 도와 줄 방도도 없었다. 한 가지 있다면 이번 일 에 대해 알고 있는 전말을 일러 바치는 방도뿐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마지막까지 쓰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확실 하게 알지도 못하는 것을 일러바칠 수 없다는 사치스런 생각 같은 것은 아니었다. 도박이란 더 위험한 쪽에 거는 것이 그 만큼 배당이 높았다. 영락제에게 붙어도 별 댓가가 없을 것 같다는 느낌 그것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는 것이다. '상관없어. 결국 방법이 없으면 하는 수 없지. 그렇게라도 해서 댓가를 얻어낼 수밖에.' 그녀는 일단 더 깊은 곳까지 알아내야겠다 생각했다. 잔챙이 보다 월척을 엮어야 그 댓가가 큰 것임은 자명했다.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기며 다음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매향은 생각에 잠긴 그녀를 조용히 보고만 있었다. -87- 이글거리는 태양이 사방에 작열하는 7월의 오후는 습기 없는 사막에 비할 만큼 무덥기 그지없다. 강소성(江蘇省)에서 북 상하는 관도 위는 이미 타오르는 화덕 마냥 달구어져 있어 피 어오르는 아지랑이에 십 장 앞도 선명하게 바라보기 어려울 지경이다. 가끔 바람이 불어올라 쳐도 후텁지근한 바람이라 흐르는 땀을 식히긴커녕 불쾌감만 치솟는다. 게다가 바짝 마 른 관도는 흙먼지만 풀썩풀썩 피어 올려 바람이 불지 않은 것 만 못했다. 타오르는 관도 위를 화물 수레 삼십 여대가 부지런히 미끄러 져 가고 있었다. 먼지를 폭 뒤집어 쓴 채 나가는 수레는 말 두필이 열심히 끌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흰옷인지 갈색옷인 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먼지투성이 옷을 입은 십 여명의 사내들이 지친 모습으로 다리를 끌며 호위를 하고 있었다. 뿌 연 먼지 구름을 피어 올리며 나아가는 수레의 앞에는 축 늘어 진 붉은 깃발이 검은 깃대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바람에 가끔 펄럭이면 검게 쓰여진 글이 보이기도 했다. 강북표국(江北 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 표국이었다. 그런 관계로 몇 몇의 거대 표국들과는 달리 지척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작은 표국이다. 그럼에도 표국을 유지하는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 표국에서 가장 많이 나가는 돈은 당연히 표사들에게 지불하 는 임금이었다. 표국이 한 번 표행을 한 뒤 벌어들이는 금액 의 일부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만만찮은 금액이다. 게다가 한 번이라도 비적(匪賊) 떼에게 습격 당할라치면 표사들의 사망 위로금이며 치료비며 드는 돈이 장난이 아니었다. 화물 보상 비까지 갚아서 간판까지 내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영락제 즉위 후에 비적떼가 사라졌다. 완전히 박멸되 다시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서는 이 제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이렇게 되자 가장 신이 난 곳은 표국이었다. 항상 비적떼의 위협에 시달리는 표국이었기에 무 예가 뛰어난 표사들을 항시 고용해야 했다. 그만큼 값은 비쌀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비적들이 사라졌으니 이제는 그렇게 출중한 고수를 고용할 필요가 없었다. 평범한 몇 명의 무사들 만 있어도 충분히 호위가 가능했다. 오죽하면 짐꾼들을 몇 수 가르쳐서 호위하는 곳도 생겼을 정도였다. 강북표국의 수레가 싣고 가는 것은 목화솜이었다. 남쪽에서 생산된 목화는 북쪽 지방에서 아주 비싼 값에 팔리는 품목 중 에 하나였다. 추운 겨울을 나야 하는 북쪽에서 대갓댁 마나님 들의 따스한 밤을 보장하는 최고의 물건으로 인기가 높은 목 화. 그러나 목화는 부피가 상당히 많이 나가는 물건이었다. 원래 이런 물건은 보통 수로(水路)를 통해 실어 나른다. 값 도 싸고 편할뿐더러 빠르기까지 하니 배를 이용하는 것은 당 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수로를 관병 들이 지키기 시작한 것이다. 장강이나 황하 같은 강에서 군의 통제가 이루어 진 경우는 전쟁이나 폭동, 반란이 일어난 경우가 아니고는 찾아보기 어 렵다. 그만큼 강은 일반 민초(民草)들의 생활 터전이었다. 하 루 하루 목숨을 강에 의존하고 살아가는 수는 관청(官廳)에서 도 알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런 이유로 관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아예 물길을 통제하지 않았다. 아니 통제 할 수가 없었다. 통제를 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장강수로연맹과 같은 무림 단체가 세력을 넓힐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가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 관 에서는 남북을 잇는 수로들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완전히 통제하는 것은 아니었다. 남북을 잇는 핏줄이라 할 수 있는 수로가 막힌다는 것은 경제 자체가 마비된다는 뜻이 다. 거기다 수로로 목숨을 연명해 가는 사람들의 폭동도 우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관청에서는 몇 가지 예외를 두 었다. '고기잡이를 하는 작은 배들은 세 시진을 주고, 짐을 싣는 화물선은 화물이 뜨기 전 삼일 전에 신고를 하고 허락을 받아야 한다' 는 조항(條項)이었다. 불만이 완전히 사라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 정도만도 감지덕지였다. 어부들은 생계 가 어려웠지만 먹고 살 수는 있었고, 거대한 표국들도 얼마 정도의 금액을 관청에 찔러주면 쉽게 허락을 받아 낼 수 있었 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피해를 보는 곳은 강북표국과 같이 그리 크지 않은 곳들뿐이었다. 돈도, 인맥도 없기에 수로를 이용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보 니 관도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무더운 여름, 시원한 곳에서 술 한잔 들이켜도 모자랄 판국에 이 땡볕 아래를 걸어가는 것 이 좋을 리 없는 사내들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 없었다. 그럼에도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것은 이미 떠들 대로 떠들 어 녹초가 되 버린 탓이었다. 식은땀까지 말라 버린 사내들은 힘없는 표정으로 그저 발을 끌기 바빴다. 축 늘어진 깃발 아래로 선두에서 말을 타고 있던 중년의 사 내는 천천히 고삐를 당겼다. 반백의 희끗한 머리가 푸석푸석 해진 것이 며칠 째 편히 쉬어 보지 못한 듯 했다. 눈 밑이나 피부도 이미 빛을 잃었다. 남은 것은 이번 일을 빨리 끝내겠 다는 오기 서린 눈빛뿐이었다. 이번 표행의 책임자인 그는 말을 세우며 뒤로 고개를 돌렸다 . 그러자 지쳐서 간신히 몸을 추슬러 따라오는 표사들의 모습 이 눈에 들어왔다. '쯔쯧! 이거 지쳐도 너무 지쳤구먼. 길을 뜬지 겨우 사십 리 도 안 됐는데......' 사내는 인상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이해할 법도 했다. 이런 날씨에 길을 걷는다는 게 얼마나 힘드는 일인지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갑자기 사내의 가슴에 불이 붙는 느낌이 들었다 . 관에서 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화가 치민 것이다. 별 것 아니라는 생각도 했지만 이 더운 무더위로 치솟는 불쾌감 에 알 수 없는 노여움이 치미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빨리 도착해야겠군. 더 이상 걷다가는 쓰러질 수도 있겠어. ' 사내는 화를 삭히며 결정을 내렸다. 일단 가까이에 있는 어 느 객잔을 떠올리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자 이제 오 리도 안 남았다. 도착하면 내 시원한 술 한 턱 낼 테니 모두 힘내라." 사내의 힘찬 목소리는 바짝 달아오른 관도 위를 흔들며 울려 퍼졌다. 그 말에 사내들의 눈에 생기가 도는 듯 했다. "정말입니까요 안 표두님?" "시원한 술이래. 술!" "오 리? 그 것 밖에 안 남았다고? 좋았어." 갑자기 힘이 솟는지 사내들은 말라붙은 입술을 혀로 축이며 입을 열기에 바빴다. "그래 내 사겠다고 약속함세. 자네들이 자꾸 꾸물거리면 술 이고 뭐고 없을 줄 알게나." 중년인은 말을 끝내자 바로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갔다. 그러 자 뒤를 따르는 수레와 사내들의 속도도 덩달아 빨라졌다. 자신의 생각이 먹혀 든 것 같자 선두에 선 중년인의 만면에 미소가 떠올랐다. 중년인은 그렇게 흔들리는 말 위에 몸을 실 은 채 앞으로 나갔다. 이 각 정도 지난 후 일행의 눈에 하나의 객잔이 들어왔다. 당장 허물어진다 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을 정도로 허름한 객 잔. 이곳이 바로 중년인이 말한 곳이었다. 뜨거운 햇살을 피하는데 아름답고 훌륭한 건물이 필요할 리 없다. 그저 그늘만 있어도 감지덕지 할 판이다. 거기다 술까 지 있다면......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한 그들의 속도는 거리가 가까 워질수록 빨라졌다. 도착 할 무렵에는 거의 날고 있다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객점의 입구에 도착하자 선두의 중년인이 말을 멈춰 세우며 외쳤다. "일단 쉴 사람은 쉬고 씻을 사람은 씻게. 그리고......" 고개를 돌리며 사방을 둘러보던 중년인의 입에서 피식 바람 새는 웃음이 터졌다. 사내들의 눈에서 무언가 갈망을 읽었기 때문이다. "뭐 보니 씻을 녀석은 하나도 없군. 그래 마셔라 마셔. 그 대신 석 잔까지만 허락하지." 그러자 사방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푹 쉬면서 마시자구요." 구겨진 얼굴로 외쳐대는 사내들. 이번 표행이 시작 된 후 한 번도 쉬지 못했던 그들인지라 오늘은 푹 쉬고 싶다는 생각이 었다. "안 돼. 오늘 유시(酉時) 무렵에 다시 출발할 터이니 그 때 까지 취해서 해롱대는 녀석이 있으면 버려 두고 갈 줄 알아." 중년인은 말을 끝맺자마자 말에서 뛰어 내렸다. 그리고는 인 상을 구기며 찡그리는 사내들을 뒤로하고 객점의 안으로 발길 을 돌렸다. 안쪽에서 한 점소이가 튀어 나왔다.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나온 듯 했다. "저 녀석들 석 잔 정도 마실 술만 꺼내 주게. 더 이상 주면 계산 안 할 테니 알아서 하라고." 눈을 부라리며 으름장을 늘어놓은 중년인은 겁을 집어먹은 점소이를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이미 제법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평소 이 정 도까지 붐비지 않던 곳이었기에 그의 눈은 신기한 듯 사방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앉아 있는 탁자 밑으로 묶인 꾸러미 와 짐짝들이 보였다. 그러자 곧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사람들도 우리처럼 배를 타지 못한 사람들인가 보군.' 그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이쪽 길은 북상하는 사람들 중에 배를 타지 않고 육로를 이용할 때 쓰는 터라 거의 사람 들을 보기 어려운 곳이다. 그러나 요 며칠 째 수로가 통제되 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늘게 된 것이었다. 중년인은 일단 머리를 정리하고 이 층 계단으로 발을 돌렸다 . 이미 일 층은 자리가 없었다. 거의 계단에 발을 올려놓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그의 옷을 잡아 당겼다. "응 뭐야?" 사내의 눈이 일그러졌다. 생긴 것은 후덕하게 생겼지만 그도 결국은 무인이었다. 한 가닥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마찬 가지였기에 짜증나는 날 오후에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들을 그 냥 넘길 생각은 없었다. 사냥감을 노리는 살쾡이 마냥 희번뜩거리는 중년인의 눈에 들어 온 것은 바로 빼빼 마른 사내였다. 뭔가 불안한 듯 두 손을 꽉 마주 잡은 사내는 중년인의 매서운 눈빛에 압도 되는 지 어깨를 움츠리기 바빴다. "네가 지금 날 잡은 거냐?" 입술이 일그러지며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사내는 더욱 위축된 듯 했다. "그......그게 아니옵고." "그럼 뭐야?" "저, 저는 이 객잔의 주인이온데......" 사내의 목소리는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중년인의 눈이 찡 긋했다. '주인? 주인 녀석이 갑자기 왜?' 이 객점의 위치만 알고 있었지 한 번도 들어와 본 적이 없었 던 그였기에 주인을 알아 볼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 "그래 뭔 일인데 날 잡았느냐?" 일부러 주인이 시비를 걸 일은 없다 생각하자 그의 목소리는 조금 부드러워졌다. 주인의 얼굴에서도 두려움이 조금은 사 라지는 듯 혀로 살짝 입술을 적시면서 입을 열었다. "위로는 올라가시면 안 됩니다. 이미 몇 분께서 통째로 잡으 셨습니다요." "뭐라? 통째로 잡았다고? 그럼 일 층에 앉으라는 말인데.... .." 살짝 얼굴을 찌푸리던 중년인은 네 눈으로 한 번 봐라는 듯 사방을 휘휘 둘러보았다. 이미 내부는 꽉 찬 터라 앉을 수 있 는 곳은 아무 곳도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몇 분이 나가실 겁니다. 그 때...... "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 이 땡볕에 누가 나간단 말인가?" 중년인의 목소리가 조금 격양되었다. 확실히 나갈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느긋한 표정으로 술을 들이키는 것이 해가 지고 난 다음에 떠날 모습이었다. 거기다 밖에서 수레를 정리한 표사들 수만 해도 이 십여 명이다. 그 들보고 땅바닥에 앉으라는 소리가 아닐 바에야 할 수 없이 이 층을 이용해야 할 판국인 것이다. "내가 올라가서 양해를 구해 볼 터이니 자네는 빠져도 좋네. " 중년인은 소매를 움켜쥐는 주인을 뿌리치며 계단을 올랐다. "소, 손님 안 됩니다. 손님!" 울상 짓는 주인을 뒤로 한 채 올라간 이 층은 확실히 널찍했 다. 겨우 네 명의 사내와 두 명의 여자만이 그 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용모의 두 여인은 가장 중앙에 자리한 탁자에 서로 마주보며 앉아 있었다. 여자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채 앉아 있는 삼십 가까이 되 보이는 여인 과 이십도 넘기지 않고 갓 무림에 나온 듯 청순한 외모의 여 인이다. 둘 다 순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져 남자라면 누구나 군침 한 번 흘려 볼만했다. 연분홍 경장에 양옆으로 땋아 내린 긴 머리와 호리호리한 허리선, 풍만한 엉덩이는 어딘지 모르게 연약한 여인임을 뜻하는 듯 했다. 그러나 그들의 뒤에 서 있는 사내들의 모습은 잘 벼려진 칼 날과도 같았다. 한 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인상을 지닌 자들이다. 옆구리로 삐죽 솟아 오른 도(刀)는 단 번에 사람을 압도하는 매서운 기운을 연신 내뿜고 있었고, 감 은 건지 뜬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의 실눈에서는 어딘지 모르 게 홍색 안광이 흐르는 듯 했다. '저 사람들이 이 곳을 빌린 자들인가? 일단 조심해서 물어 봐야겠군.' 호위를 받는 모습이 꼭 대갓집 처자들이 유람 나온 듯 했다. 중년인은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잠시 실례해도 좋겠소?" 앞으로 다가선 사내의 입이 열리자 연분홍 경장의 여인이 고 개를 들었다. 그러자 십 대에 걸 맞는 초롱초롱한 눈빛이 사 내의 시야에 쏟아졌다. "뭔가요?" 눈빛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듯한 목소리. 마치 꾀꼬리가 노래하듯 청량하기 그지없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중년인의 눈이 잠시 흐릿해 졌으나 이내 빛을 내뿜었다. '호, 혹시 이 여자도 무림인인가?' 사내의 눈에 경계의 빛이 돌았다. 잠시 정신이 혼미해 진 것 을 깨달은 탓이다. 무공은 일천했지만 오랫동안 무림에서 몸 을 굴리며 밥을 먹었던 그였기에 이런 것은 보통 미혼술이나 섭심술 등에서나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잠시 자신의 경솔했던 판단을 자책하며 마음을 다잡았 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만큼 더욱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 며 포권을 취했다. "소생은 강북표국에서 표두를 맡고 있는 안낭(安廊)이라 하 오. 이 번에 표물을 옮기는 도중에 배를 이용할 수 없어 육로 로 왔소. 그런데......" 자신의 소개부터 한 중년인 안낭은 천천히 상황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장황한 말을 듣고 싶은 기분이 아니 었던지 앉아 있던 검은 망토의 여인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만하고 요점이나 말해요." 피부를 쏘는 따끔한 살기에 안낭의 표정이 흠칫 했다. 그리 고는 서서히 구겨지는 인상. '이 여자가 감히......' 품에 넣은 다절편(多節鞭)을 잡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지만 참아야 했다. 아쉬운 것은 자기쪽이었기 때문에. 안낭은 굳은 표정을 다시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일 층에는 우리 표국의 대 인원이 앉을만한 자리가 없소. 그래서......" 더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망토에 감추어진 하얀 손이 튀 어 나와 흔들렸다. "그러니까 우리 쪽에 있는 이 자리를 좀 양보해 달라?" "그렇소. 왜 이렇게 넓은 이 층을 다 빌렸는지는 모르겠소만 아직 그대들이 기다리는 일행도 오지 않은 것 같고 해서 이 렇게 부탁드리는 것이오. 그렇게 오래 머물 것도 아니고 몇 시진 후면 떠날 테니 양해해 주시면 고맙겠소이다." 안낭은 더할 수 없이 공손한 어투로 부탁했다. 이 정도면 충 분히 자리를 빌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돌아 온 것 은 싸늘한 코웃음 뿐이었다. "싫다면?" 안낭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갔다. 파르르 떨리는 눈 밑의 경련은 곧 얼굴 전체로 퍼져 나갔다. "분명 좋게 부탁 드렸소만 이렇게 나오는 것은 웬 심보요? 한 번 해 보자는 뜻이오?" 사납기 그지없는 말투임에도 연분홍 경장의 여인은 놀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무료하던 상황에서 돌변한 지금이 더욱 흥미가 있는 듯 했다. 무표정하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고, 입술 끝에는 미약한 웃음이 살며시 걸렸다. "붙어 보자면 어쩔 건데?" 망토 여인은 실실 웃음까지 보이며 놀려댄다. 마치 어린 아 이의 재롱을 보는 듯 느긋하기 그지없다. 울컥 하는 느낌에 안낭은 그만 품으로 손을 집어넣어 다절편 (多節鞭)을 꺼내 들었다. 촤르륵! 쇠구슬 구르는 소리와 함께 둥근 고리에 연결된 일곱 마디의 짧은 봉이 모습을 드러냈다. 끝에는 표창 같은 뾰족한 부분 이 유난히 반짝이며 빛났다. 독문 무기인 다절편이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 느껴지자 안낭의 기분은 자신감에 젖어 들었다 . 언제라도 믿음을 배신하지 않겠지 하는 느낌, 그것은 안낭 을 서서히 고무시켜 이제는 누구라도 무찌를 수 있다는 자만 감에 젖게 만들었다. "나와라. 박살을 내주마." 안낭은 여자라고 봐 주는 인물은 아니었다. 정의감에 불타는 병아리들이야 여자와 손을 섞을 수 없노라 하는데 안낭에게 있어 그 말은 우스개 소리나 다름 아니었다. 어찌 목숨을 내 건 강호에서 여자니 아이니 하는 것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하 는 것이 평소 그의 지론이었다. 오히려 여자와 아이들과 손속 을 겨룰 때는 더욱 잔인해 져야 한다고까지 생각했다. 안낭은 말을 내던지고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배려가 섞여 있는 듯 하 지만 실제로는 그에게 감추어진 꿍꿍이가 있었던 것이다. 절 편 무기는 장병기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좁은 객잔 에서 다투는 것보다 널찍한 밖에서 붙는 것이 더욱 좋다는 말 이었다. 하지만 망토 여인은 나갈 생각이 없었다. 몸을 돌리기가 무 섭게 자리에 앉아 버린다. 그리고는 던지는 한 마디. "나가긴 뭘 나간다는 거야? 한 수면 끝날 녀석이." 뒤통수로 들려오는 모욕 어린 말에 절편을 쥔 안낭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오호호호! 저 손 떨리는 것 좀 봐. 언니 겁나는 가 봐." 이번에는 연분홍 경장의 여인까지 합세해 놀려대기 시작했다 . "겁장이가 원래 위세만 대단하고 멋지게만 보이려 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니겠어? 응......? 이젠 손까지 울긋불긋 하네. 얼굴은 안 봐도 뻔하겠어." 놀려대는 말에 더 이상 참지 못한 안낭은 벼락같이 몸을 돌 리며 다절편을 내려쳤다. 윙 하는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사정없이 내려쳐진 절편. 그러나 여인의 머리를 향해 내려쳐 진 절편은 그녀의 얼굴에 적중하지 못했다. 아니 절반도 못 가 이미 그 움직임을 멈추어 버렸다. "어디서 함부로." 뒤에서 말 없이 서 있던 사내 한 명이 절편의 끝을 나꿔챈 것이다. 양쪽에서 당겨대는 통에 절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중앙에서 떨리고 있었다. "이 버릇없는 녀석에게 따끔한 맛을 좀 보여 줘야겠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절편을 쥔 손의 주인공은 망토의 여인에게 허락을 구했다. 여인도 별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교훈만 주라고. 쓸 데 없이 송장 치우게 하면 알지?" 여인의 허락에 사내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야차 가 미소짓는 양 섬뜩하기 그지 없는 미소가 떠오른 직후 사내 의 입에서 낮은 격음이 터졌다. 그 순간 팽팽하던 다절편의 중앙이 뚝 끊어졌다. 그리고 끌 려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버티던 안낭의 신형이 공중 으로 솟구쳤다. "커컥!" 날아오른 안낭의 눈앞으로 무언가 번뜩 하는 듯 하더니 이미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져 버렸다. 눈으로 알아보기도 힘들 정 도로 빠르게 다가온 사내의 손이 이미 그의 멱살을 움켜쥐어 버린 것이다. 두 다리는 이미 땅에서 한 자나 떠올라 바둥대 고 있었다. 안낭의 손에 쥐어진 절편이 땅으로 뚝 떨어졌다. 그리고 목 을 움켜 쥔 손으로 강하게 내려쳐 갔다. 퍼퍽! 두 손의 격타음이 퍼졌다. 그러나 목을 쥔 손은 풀어지지 않 았다. "어디서 모기가 무나?" 눈을 찡긋거리던 사내는 안낭을 들고는 이층의 난간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손에 쥔 안낭을 이 층 난간 밖으로 내밀 었다. "어이. 너 따위가 어디서 함부로 설쳐대는 거냐? 저 분께서 네 목이 필요 없다 하셨기에 살아 난 줄 알아라. 그리고 어디 가서 함부로 설치지 말고. 알겠느냐?" 고양이 쥐 생각해 주듯 몇 개의 충고까지 곁들인 사내는 멱 살을 쥔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안낭의 몸이 자유낙하를 시작했다. 일 층으로 떨어진 안낭의 몸은 밑에 놓여 있던 탁 자와 식기 위로 떨어졌다. 와장창 콰쾅! 탁자는 사정없이 바스라졌고 식기와 음식들은 사방으로 튀었 다. 이 층에서 들려 오던 소란에 달아올라 있던 일 층의 사람 들은 이 사태에 모두 혼비백산하여 밖으로 튀어 나가기 시작 했다. 막 수레를 정리하고 들어오던 표사들은 갑자기 물밀 듯 밀고 나오는 사람들의 인파에 밀려 어리둥절 해 하고 있을 뿐이었 다. 그 중 한 사내가 음식을 뒤집어 쓴 채 신음하는 안낭을 발견했는지 호들갑을 떨었다. "안 표두님!"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 십이 넘는 사내들이 순식간에 안낭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위쪽에서 조용히 사태를 바라보고 있던 망토의 여인이 사내 에게 눈을 슬쩍 흘겼다. 좋지 않다는 뜻이다. "쯔쯧! 쉽게 끝나진 않게 되 버렸잖아." "죄송합니다." 망토의 여인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대자 사내는 당황 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언니, 요즘 계속 심심했잖아. 할 일도 없이 계속 여 기서 죽치고 앉아 있기만 하려니까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는 데 잘 됐지 뭐. 오랜만에 건수가 생겼는데 그냥 넘어가면 안 되지." 연분홍 여인이 손뼉을 치며 대답했다. 이런 일이 기쁜지 더 할 수 없이 기쁜 표정이다. 망토의 여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요라 넌 끼어 들지 말고 그냥 보기만 해. 그리고......" 불만이 차는지 요라라 불린 연분홍 여인의 입술이 이죽거렸 다. 그러나 지적을 받은 사내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날아오는 무서운 그녀의 애완 동 물이 생각난 것이다. "옛! 말씀하십시오." 더욱 절도에 찬 목소리로 우렁차게 대답하며 허리를 숙였다. 여인은 그런 모습에도 별 생각 없이 간단한 지시만 내렸다. "넌 내려가서 저 떨거지들을 교육 좀 시켜. 다시 말하지만 죽여선 안 돼. 그리고 또 귀찮게 몰려와서 소란 떨게 해서도 안 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존명!" 밑에서 쓰러진 안낭의 상세를 살피던 표사들은 위에서 떠드 는 소리에 고개를 쳐들었다. 난간 뒤쪽으로 몇 명의 인영이 아른거리자 큰 소리로 외쳤다. "네 놈들이 표두님을 이렇게 만들었느냐?" "죽여 버릴 놈들. 당장 내려와라. 박살을 내 주마." 모든 표사들이 한 소리씩 퍼부었다. 말이 끝나지가 무섭게 한 사내의 인영이 난간을 뛰어 넘으며 아래로 뛰어 내렸다. 공중에서 한 인물이 내려오자 표사들은 바람에 휘날리는 낙 엽 마냥 흩어졌다. 한 표사는 쓰러진 안낭을 들쳐 매고 멀찍 이 물러섰다. "그래 원하는 데로 내려 왔다. 어떻게 할건지 한 번 들어나 볼까?" 사내는 비웃음이 가득한 얼굴을 들어 사방을 한 번 둘러보았 다. 일반인들 눈에는 한 수 한다 보일지 몰랐지만 그의 눈에 는 말할 건덕지도 없는 잔챙이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두 팔로 팔짱을 꼰 채 바라보는 것에 심기가 상했을까? 표사 들은 저마다 무기를 꺼내며 상대를 둘러쌌다. "나가서 싸워! 주인 어른 떠는 게 안 보여?" 언제 나타났는지 망토의 여인이 난간에 팔을 기대어 서 있었 다. 사내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허리를 수그렸다. "존명!" 공손하기 그지 없는 자세. 그러나 표사들에게는 두 번 다시 찾아오기 어려운 기회였다. 그들도 그것을 아는 것이었는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기를 쳐들어 등을 향해 내려쳤다. "흥 그런다고......" 허리를 숙인 사내의 입에서 비웃음이 터진 순간 사내의 발이 바닥을 박찼다. 비조처럼 치솟은 사내의 발이 벼락처럼 내돌 았다. 까까강! 쇠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두 명의 표사가 무기를 떨구며 물러섰다. 손목을 움켜쥐며 찡그리는 것이 충 격이 심한 듯 했다. 손에서 떨군 무기가 땅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사내는 다시 한 번 천장으로 솟구쳤다. 이번에는 풍차 가 돌 듯 발이 휘놀았다. 이 장 여 높이로 뛰어 오른 사내는 가볍게 공중돌기를 하며 표사들을 뛰어 넘어 객점의 문 앞에 내려섰다. "나와라! 상대해 주마." 말을 끝마친 사내는 바로 몸을 돌린 뒤에 밖으로 뛰쳐나갔다 . 표사들은 꿈에서나 볼 듯한 몸놀림에 잠시 어리둥절했던지 멍하게 넋을 놓고 있다가 사내의 충동질에 무기들을 꼬나쥐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주인장! 배상금은 저 녀석들에게 받으라고." 난간 위에서 턱을 괴고 보고 있던 망토의 여인은 안절부절못 한 채 서 있던 주인에게 미소를 보내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 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얼마 후 손을 털며 들어올 부 하를 기다리면서...... -88- 관도 위로 뽀얀 먼지가 사방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붉은 천 을 휘날리며 내달리는 말 한 필. 관부의 역마(驛馬)인 것이다 . 이미 상당한 거리를 달려 왔는지 혀를 쭉 내민 말은 당장이 라도 쓰러질 듯 하다. 말 위의 관복 사내도 편치는 않았다. 이미 온 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고 눈도 피로에 젖어 있었다. "비켜라. 목숨이 아까우면 당장 비켜 서." 관도 위에는 몇 사람 없었지만 관복 사내는 손에 든 방울을 연신 흔들어 대며 위협한다. 결코 부딪히지 않을 거리임에도 관도 위 사람들은 멀찍이 뒤로 물러섰다. 조금이라도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관에서 보내는 우편(郵便)과 수로를 통하는 우편선(郵便船), 조공선(租貢船) 등 관부의 일을 맡은 것들은 대부분 붉은 색 을 쓴다. 그런 때는 고관대작(高官大爵)이나 몇 높으신 분들 아니고서는 앞을 막아설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조금이라도 지체되었다간 당장에 관청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하기 때문이 다. 그러다 보니 역참(驛站)의 기세는 가히 하늘을 찌를 듯 했다 . 단지 그것이 평민에게 한해서였지만 말이다. 곱지 않은 시 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지만 눈앞에서는 그들도 설설 기는 것은 당연했다. 뿌연 먼지구름을 잔뜩 피어올린 마필이 지나가자 양끝으로 물러섰던 사람들이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사람들의 원망에 찬 시선을 잔뜩 받던 관원(官員)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친 말에 더욱 박차를 가할 뿐이었다. 마필이 곧 다다른 곳은 역참이 있는 곳이었다. 허름하지 않 게 지어진 건물 안으로 수십여 마리의 마필이 보였다. 사내는 헐레벌떡 숨을 내쉬는 말 위에서 풀쩍 뛰어 내리더니 발굽 소리에 뛰어나온 초로의 노인에게 패(牌)를 내 보였다. "말 좀 준비해 주구려. 급하게 내 달려야 하니 튼실한 녀석 으로 부탁하오." 노인은 아들 뻘 되는 관원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걱정일랑 접어 두십쇼. 여기서 제일 좋은 놈으로 준비하겠 습니다요." "여기서 다음 역참까지 거리가 얼마요?" 관원의 질문에 노인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자신 없는 어투로 답했다. "늙어서 그런지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적어도 오십 리 길은 족히 될 것입니다요. 중간에 말을 갈아 탈 만한 땅을 찾지 못해 멀리 떨어진 곳에다 지었다고 그러더군요." "뭐 땅이 없어? 둘러 봐도 산 같은 산은 보이지 않는데 왜 땅이 없다는 거요?" 관부(官夫)의 질문에 노인은 자기도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거야 저 같은 놈이 알 게 아니 됩죠. 그렇지만 작은 야산 들은 많습니다요. 일단 오시느라 힘드실테니 잠시 쉬시기라도 하시지요." "그럴 시간 없소. 그냥 허기나 채우고 갈 테니 간단하게 준 비해 주시오." 노인은 쭈글쭈글한 얼굴에 주름을 잡으며 웃고는 뒤를 가리 켰다. "맞은 편에 있는 객잔으로 가시지요. 관원들을 위해서 미리 거래를 터 둔 곳이오니 가시면 알아서 영접을 할 겁니다요." "그래요?" 관원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뒤를 돌아다보니 낡은 객 잔 하나가 역참의 맞은 편에 우뚝 몸을 세우고 서 있다. 불결 한 느낌이 없잖아 있었으나 급한 길에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던 관원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성큼 걸어 객잔으로 향했다. 안으로 드니 한 점소이가 그를 공손히 맞이했다. 급히 떠나야 했기에 관원은 목 좋은 곳으로 안내하겠다는 점소이의 제안을 거절했다. 국수 한 그 릇만 후딱 말아 달라 부탁하고 자리에 앉았다. 앉기가 무섭게 나오는 국수를 후루룩 들이키다시피 하고는 바삐 객잔을 뜬 다. 그의 모습이 입구에서 멀어질 때였다. 안쪽에 앉아 있던 무 리의 한쪽에서 삐죽 고개가 솟아올랐다. "저렇게 바삐 가는 걸 보면 우리가 찾는 그 배하고 연관이 된 게 아닐까요?" 깔끔한 외모의 청년,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앳된 모습이 남 아 있어 청년이라 부르기엔 좀 어색한 사내. 바로 천인문이었 다. "요즘 그것말고는 특별히 저렇게 관원이 바쁘게 설칠 일이 없으니 아마도 네 말이 맞을게다." 옆에 앉아 있던 당우양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럼 빨리 쫓아가요. 놓치면 안 되잖아요." 느긋하게 있을 때가 아니라 생각한 천인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그런 그를 잡는 손이 있었다. 이세직이었다 . "그렇게 서둘 필요 없다. 이 앞쪽으로 가는 길은 외길이니 조금 떨어진다 해도 놓치지 않을 게다. 일단 속이나 든든하게 이 위에 남은 거나 정리하자꾸나." 이세직의 손이 가리키는 곳에는 조금 전 주문했던 음식들이 한 상 가득 놓여 있었다. 아직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것으로 보아 시킨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했다. 천인문은 자리에 다시 앉으면서 저를 들어 음식으로 가져갔다. "누나야 빨리 먹자." 천인문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하늘색 궁장을 가느다란 붉은 허리띠로 맵시 나게 묶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같이 먹자는 말과 함께 구겨지기 시 작했다. "내가 돼지인 줄 아니? 이미 많이 먹었단 말이야." "왜 또 그래? 아직 화가 덜 풀린 거야? 내 사과했잖아. 그러 니까 이제 좀 풀어라." 톡 쏘아붙이는 여인은 조기혜였다. 천인문이 살짝 고개를 숙 이며 사과를 했지만 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 본 뒤 고개 를 돌렸다. 천인문 일행이 산을 내려온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지 만 천인문과 조기혜는 사사건건 부딪히고 있었다. 같이 동행하여 산을 내려오는 것부터 힘이 들었다. 무조건 동행시켜야 한다는 이세직의 압박에 천인문은 하루 종일 그녀 를 쫓아다니며 사과해야 했다. 눈물나는 공세에 마지못해 그 녀는 동행을 허락했지만 아직 앙금은 남아 있는지 조그만 일 에도 쏘아붙이기 일쑤였다. 쌓이는 것은 천인문도 마찬가지였 지만 이세직의 무언의 압력에 아예 반항하기를 포기한지 오래 였다. 일단 산을 내려온 그들은 구체적 목표는 있었으나 그 위치를 전혀 알지 못하는 관계로 사람이 많이 사는 강소성(江蘇省) 을 향해 나아갔다. 삼구파기(三口破器). 입이 셋이면 그릇도 깨지는 법. 사람이 사는 곳에 소문이 없을 리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강소성에 들기도 전에 이미 소문은 파 다하게 퍼져 있었다. 배가 이미 장강의 입구로 들어오고 있다 는 것이다. 급히 진로를 남경(南京)으로 돌렸으나 웬걸 이번에는 배가 이번에는 멈춰섰다는 소문이 들려 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판국에 급히 파발을 달리는 관원을 보았으니 물 만난 고기처럼 천인문이 설치는 것도 당연했다. 급히 저를 놀려 음식을 처리한 천인문이 모두를 재촉했다. "자 이제 처리 끝났죠? 그럼 빨리 일어서요." "자기 입만 입인가? 두 분은 하나도 못 드셨잖아." 조기혜가 눈을 일그리며 투덜댄다. 아닌게 아니라 이세직과 당우양은 엄청난 속도로 사라지는 음식만 바라보며 멍한 눈빛 을 보내고 있었다. 당우양은 괜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흔든다. "난 됐네. 입맛도 없었는데...... 그보다 이 친구가 하나도 못 먹었으니 문제지." 당우양의 눈빛이 이세직을 향해 돌아갔다. 이세직은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 사람아! 자네가 지금 내 걱정 해 줄 때인가? 자네 몸이 거의 다 나았다고는 해도 아직은 신경 써야 할 때야.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다니면 다시 쓰러질 수도 있다고." 두 사람의 실랑이에 앉아 있던 조기혜가 절충안을 내 놓았다 . "시간도 없고 그냥 몇 개 먹을 것을 들고 가죠. 그러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그녀는 두 사람의 대답도 듣지 않고 점소이를 불렀다. "전병하고 육포, 물 좀 챙겨 주세요. 대금은 이 정도면 되겠 죠?" 그녀는 품속에서 은덩이 한 냥을 꺼내 점소이에게 내 밀었다 . 점소이는 이렇게 큰 돈을 처음 보는지 잠시 얼이 빠져 있다 가 급히 물러났다. 조금 후 그녀의 주문대로 음식이 나왔다. "문아! 이건 네가 들어." "왜 나야?" "네가 혼자서 다 먹지 않았으면 이건 시킬 필요도 없었어. 그러니 네가 힘 좀 써야 하지 않겠어?" 천인문에게 봇짐을 내민 그녀는 이세직과 함께 밖으로 나갔 다. 당우양이 뒷모습을 보며 입을 이죽거리던 천인문의 어깨 를 툭툭 쳤다. "내가 들어 줄까?" 천인문은 당치도 않다는 듯 펄쩍 뛴다. "됐어요. 할아버지는 누나 화내는 것도 못 봤어요? 할아버지 가 짐 들고 있는 걸 보면 그날로 누나는 진짜 날 죽이려 할 걸요. 그리고 내가 장난꾸러기이긴 하지만 할아버지한테 짐이 나 맡길 나쁜 놈은 아니라구요." "그래! 됐다니 더 말은 안 하마." 당우양은 천인문과 어깨를 맞대고 걸어 나갔다. "문아!" "네?" 자기를 부르는 목소리에 천인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당우 양을 보았다. "여자에 대해 잘 모르는 나지만 한 가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있지. 여자는 자고로 갈대와 같다. 바람에 흔들흔들, 제 멋대로 흔들리지. 그럼 넌 여자를 어떻게 잡아야 되겠느냐?" "흐음! 바람이 돼서 막 흔들란 말씀이세요?" "아니지. 그렇게 해 봤자 또 다른 바람이 나타나면 흔들리기 는 매한가지지." "바람이 안 된다면 어떻게 하란 말씀이세요?" "넌 땅이 되어야 한다. 땅이 돼서 갈대가 흔들려도 꽉 붙들 어 매어야 하지." "......" 이해할 수 없는지 천인문의 고개가 갸웃거린다. 당우양은 그 럴 줄 알았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땅! 좋지. 그래 땅이야말로 흔들리는 갈대에 즉효약이지. 즉효약이고 말고. 하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당우양. 발이 붙어 버린 천인문을 뒤로 한 채 혼자서 입구 밖으로 나가 버렸다. 혼자 남은 천인문은 눈을 내려 깔며 혼잣말을 했다. "땅? 땅이 되어야 한다고? 무슨 말이지?" 잠시 혼자서 중얼거리는 천인문의 귀로 앙칼진 목소리가 들 려 왔다. "혼자서 뭐하는 거야? 당장 안 나올래?" 조기혜였다. 흠칫 놀란 천인문은 바로 외친 후 튀어 나갔다. "알았어. 나간다고." 문 밖에는 이미 네 마리의 일행들이 말 위에 올라 탄 채 천 인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흑풍은 천인문의 모습이 보이자 바 로 옆으로 걸어 왔다. 천인문은 짐을 흑풍의 옆에 걸고는 사 뿐히 위로 올라탔다. "많이 먹었냐?" 목을 두들기며 묻자 흑풍은 가볍게 투래질을 해댄다. "자! 그럼 준비도 다 된 것 같으니 출발해 봄세나." 조기혜가 한 차례 쏘아붙일 것 같자 이세직이 미리 선수를 쳤다. 뒤꿈치로 갈색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자 쏜살같이 앞으 로 내달린다. 당우양도 그의 뒤로 달려 나갔다. "누나 우리도 그만 가자." 천인문은 조기혜의 옆을 통과하며 대답했다. "너 일단 좀 있다가 보자." 어깨에 올라탄 일묘를 품에 안고는 그녀도 말을 출발 시켰다 . 땡볕이 내려 쬐는 관도는 식을 줄 몰랐다. 뿌옇게 피어오르 는 먼지에 사람도 말도 쉬 지치는 것은 당연했다. 유일하게 지치지 않는 것은 흑풍 뿐이었다. 이미 이 십리를 넘게 달렸 는데도 겨우 일각 앞서 나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슬몃 걱정이 되는 것은 모두 다 같은 생각이었겠지만 아무렇 지도 않다는 듯 담담한 이세직의 얼굴을 보니 틀린 게 아니냐 고 물어보기도 그랬다. 천인문의 뒤에서 달려가는 조기혜의 귀가 쫑긋했다. 무언가 신음 같은 것이 들린 것 같았다. 그녀는 말에 박차를 가해 흑 풍의 옆으로 달려 갔다. "문아! 너 혹시 신음 같은 소리 못 들었......" 고개를 돌려 질문을 던지던 조기혜의 말이 뚝 끊어졌다. 천 인문의 얼굴이 아주 창백해 져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자기가 신음을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그래? 너 어디 아픈 거야?" "으흥! 그...그게." 벌겋게 달아 올라 질문에도 답을 못하고 우물거리는 천인문. 앞서 가던 두 사람도 대화를 들었는지 말을 되돌려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왜 갑자기......" 질문을 던지던 당우양도 천인문의 낯을 보고는 말을 끊는다. "독인가?" 독에 대해서라면 당대 최고라 자부할 수 있는 이세직. 당우 양은 아무 생각 없이 이세직을 바라보았다. 이세직은 눈을 가 늘게 뜨고 천인문의 몸을 천천히 살피더니 빙그레 웃음을 머 금는다. "갔다 오너라. 기다리고 있을 테니." 밑도 끝도 없는 말에 당우양과 조기혜의 얼굴에 의문이 드리 웠다. 벌겋게 얼굴이 달아올라 있던 천인문은 흑풍의 등위에 서 풀쩍 뛰어 내리더니 아무 말 없이 숲 속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인가? 갑자기 왜?" 당우양은 의문을 풀어달라는 표정으로 이세직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의 의문은 곧 숲 속에서 들려온 괴상한 소리에 풀려 버렸다. 뿌드드득! 당우양과 조기혜의 얼굴이 계피 씹은 듯 구겨졌다. 화장실에 서나 들을 수 있는 아주 고약한 소리가 들려 온 것이다. 눈살 을 있는 힘껏 찡그리던 조기혜는 고개를 휙 돌렸다. "아까 그렇게 먹을 때 알아 봤어. 생긴 건 완전히 어른인데 하는 행동은 완전히 철부지 꼬맹이잖아." 냄새도 안 나는데 코까지 움켜쥐는 조기혜. 옆에서 웃고 있 던 이세직이 부드럽게 말문을 열었다. "육체야 컸지만 아직 나이는 어린애 아닌가? 그럴 수도 있지 뭐. 허허허!" 당우양도 맞다면서 맞장구를 쳤다. "당연하지. 나도 저만할 때는 별별 일이 다 있었는데 먹은 게 탈 난 것쯤은 일도 아닌 게야. 하하하하!" "그렇고 말고. 하하하! 그건 그렇고 문이 녀석이 잠시 볼일 을 마칠 때까지 우린 좀 쉬도록 함세." 이세직은 조금 떨어진 곳에 놓인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를 가리켰다. 그늘이 멋들어지게 드리운 것이 쉬어 가기에는 딱 안성맞춤이었다. 세 명은 지쳐 버린 말에서 뛰어 내려 그늘로 몸을 이동했다. 고삐를 놓자 세 마리의 마필은 모두 조금 더 안쪽으로 걸어 가서 풀을 뜯는다. 흑풍은 유일하게 천인문이 마지막으로 사 라진 곳 앞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시원한 바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당우양이 그런 흑풍을 보며 중얼거렸다. "대단한 녀석이군." "뭐가? 흑풍?" 당우양의 시선이 흑풍에게 가 있는 것을 본 이세직이 조용히 물어왔다. 옆에 앉은 조기혜도 귀를 쫑긋 세워서 경청하기 시작했다. "대단하지. 저 정도 말이면 중원 전체를 뒤져봐도 한 마리 찾아보기 힘들 걸." 당우양은 이세직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저렇게 화장실 앞까지 쫓아오게 만든 문이 녀석을 말하는 거야." "뭐라고? 하하하하!"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그들은 그늘의 쾌적함을 맛보고 있었다. 조기혜도 옆에서 입을 살짝 가리며 웃었다. 빙긋이 웃고 있던 당우양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한 마디를 던 진다. "그런데 왜 여자는 저렇게 못하는 걸까? 저 녀석 답지 않게 전혀 쑥맥이더구만." 누구를 이야기하는지 알아차린 조기혜. 낯이 조금씩 달아올 랐다. 이세직도 옆에서 같이 응대한다. "내가 보기엔 저 녀석이 연애질을 한 번 제대로 못해서 그런 거 같은데 자네가 한 번 가르쳐 보겠나?" "예끼 이사람아. 내 꼬락서니를 잘 알고 있는 자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여자 하면 그래도 나보다는 자네가 백 배 나으니 자네가 한 번 가르쳐 보게나." "하하하하! 그게 그렇게 되는가?" 저희들끼리 이야기하고 웃어대는 이세직과 당우양, 그 사이 에 끼어 있는 조기혜로선 난처하기 그지없을 따름이었다. 이렇게 있다가는 별 소리 다 나오겠다는 생각에 조기혜는 빨 리 화제를 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머릿속에 번 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아직 천인문이 없는 곳에서 이세직을 본 적이 없었던 조기혜 는 천인문이 없는 지금을 놓칠 수 없다 생각했는지 숲 속을 한 번 둘러 본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르신!" 웃고 있던 이세직은 조기혜의 부름에 웃음을 거두어 들였다. "왜 그러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궁금한 게 있다? 그래 뭐가 궁금한가?" "흐음......" "뭔데 그렇게 뜸을 들이는 건가? 그냥 말 해 보게." 바로 질문을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던 조기혜는 이세직의 말 에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저번에 문이가 쓴 무공이 영웅장이라 하셨습니까?" 그 말에 이세직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무공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은 무림에서 금기시된 사항이다. 특히 구결과 초식 등 요체에 관해서는 같은 동문이라도 묻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면전에서 묻는 것이 예의에 벗어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인지 같은 무공을 익혔다 하더라 도 될 수 있으면 묻지 않는 게 정론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런 데 조기혜가 당당히 물어 온 것이다. '무슨 뜻이지?' 이세직은 아무리 세외의 문파라 해도 알 것은 다 아는 빙궁 의 인물이 무공에 대해 물어온 것에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그러나 아무리 얼굴을 살펴도 그녀의 속 뜻을 알아 챌 수 없었다. 그녀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세직의 눈빛에 자신이 실수 한 것을 깨달았다. 별 의미 없이 물었던 것이 오해로 번 질까 걱정이 된 그녀는 먼저 설명을 하기로 했다. "별 뜻은 없습니다. 단지 제가 한 가지 무공이 떠오르긴 했 는데 그 무공과는 전혀 이름이 달라서 여쭙는 것이랍니다." "어......떤 무공을 말하는 것인가?" 잠시 말을 더듬대던 이세직. 얼굴에 무언가 의미 있는 표정 이 잠시 떠올랐다. 조기혜는 그런 이세직의 눈빛을 받아치며 대답했다. "승룡장(乘龍掌)이라고 하지요." 이세직은 그 순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조 용히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영웅장은 알겠는데 승룡장은 또 뭔가?" 옆에서 듣고 있던 당우양이 둘 사이에 끼어 들었다. 영웅장 이라면 이세직이 천인문에게 가르쳤던 장법이다. 거기다 천옥 신수(天玉神手)란 수법까지 가르쳤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 었다. 그러나 분명 승룡장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조용한 침묵은 얼마 후 이세직의 입에서부터 깨어졌다. "어떻게 그것이 승룡장인 줄 알았느냐?" 담담하기 그지없는 어조였다. 그러나 내부에는 어떤 일이 있 더라도 알아야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감추어져 있었다. 질문을 받은 그녀는 잠깐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가 천천히 내 렸다. "지금 말씀드릴 내용은 우리 빙궁의 비밀 중에 하나죠. 하지 만 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어르신의 의문을 풀어 드리 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네요." 그녀는 잠시 숨을 돌리더니 숲 속을 한 번 둘러 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과거 육백 년 전에 빙궁은 중원을 침략하려 한 적이 있었답 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중원을 침공하기도 전에 깨어져 버리 고 말았지요. 바로 지옥혈(地獄血)이란 단체 때문이지요." "지옥혈?" 당우양의 눈이 찡그려졌다.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문파 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그의 눈이 이세직의 얼굴을 한 번 슬쩍 살핀다. 그러나 듣고 있던 이세직의 표정은 상당히 상기되어 있었다. '놀랄 노자로구만. 어떻게 요즘 들어 저 친구가 놀라는 모습 을 자주 보는 거지?' 무언가 심심찮은 이야기가 나오겠구나 하면서 당우양은 조용 히 입을 다물고 경청하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 빙궁의 궁주셨던 조웅기(曹雄紀) 궁주께선 설백 신공(雪白神功)을 구 성이 넘게 익히셨죠.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신 선조(先祖)께서는 별 계획 없이 밀어 붙이기로 하셨죠. 그런데 웬걸 중원에 닿기도 전에 그만 패배 하고 말았어요." "그것이 바로 지옥혈이라 이 말인가?" 조기혜는 당우양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여 답 했다. "그 분은 패배한 직후 다시 빙궁으로 돌아가셨죠. 그리고 자 신을 패배시킨 자가 누구인지 알아보시기 시작했어요. 거의 십 년에 걸친 조사를 하고서야 드디어 한 가지 단서를 잡을 수 있었어요. 그 조사의 끝에서 드러난 것이 바로 지옥혈이었 어요." "빙궁의 궁주를 패하게 만든 고수가 지옥혈에서 나온 무인이 였다? 그런데 실제로 있긴 있었는가? 난 한 번도 듣지 못했는 데. 분명 그런 문파가 있었다면 소문이 퍼지지 않을 리가 없 지." 믿기 어렵다는 듯 당우양은 고개를 갸웃댔다. 그러나 바로 그 때 그의 귀로 이세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옥혈은 분명히 있었네." "그......그게 무슨 소린가? 진짜로 있었다고?" 당우양의 얼굴에 황당한 표정이 떠올랐다. -89- "그렇네. 분명 존재했던 단체지." 이세직이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존재했던? 그렇다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인가?" 당우양은 한 번 생긴 의문을 놓치지 않고 계속 묻기 시작했 다. 이세직은 담담한 어조로 그의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다. "그래.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 이미 사라진 지 몇 백년이 흘 렀는지 모르겠네." "......" 당우양의 질문은 거기서 멎어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자 이번에는 조기혜가 하던 말을 마저 꺼내기 시 작했다. "그 분께선 지옥혈의 위치를 조사하기 시작하셨죠. 그리고 십 년 후에야 지옥혈이 서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아 내셨어요. 후훗!" 이야기하다 말고 그녀는 웃음을 살짝 터트렸다. 어리둥절해 진 당우양이 눈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웃음을 멈추 고는 다시 답했다. "아! 죄송해요. 갑자기 우스워서 실수를 했네요." "뭐가 그렇게 우스웠던 거지?" "그냥 이름 때문이에요. 지옥혈 하면 어떤 느낌이 떠오르세 요? 피? 아니면 살육? 보통 사람들이 '지옥혈' 이란 이름을 들으면 아주 무서운 단체를 떠올리죠. 그런데 실제로는 그게 아니에요." "아......아니라니?" 당우양은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그녀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 은 것이다. 지옥! 명부(冥府), 명계(冥界), 음부(陰府)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 리며 나쁜 사람들이 죽은 이후에 간다는 고통의 형벌장. 당연 히 피와 죽음, 고통 등 암울한 느낌만이 가득한 이름인 지옥 혈이 무서운 단체가 아니다? 갑자기 그 뒷말이 궁금해진 당우 양이 입을 열었다. "실제로 그게 아니라면 무엇인가? 사람 답답하게 하지말고 빨리 하던 말 마저 하게." 조급해진 그의 재촉에 조기혜는 잠시 웃음을 머금었다가 입 을 열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세직이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 이후는 내가 말해 주지. 지옥혈은 원래 묘강에 있는 한 부족의 고대 무속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던 제단(祭壇)이었네. 그런데 그것이 송나라때 서장으로 들어가게 되었지. 그러면 서 조금 그 모양을 바꾸었다네. 그 제단의 가장 중요한 교리 가 무엇이었느냐면 고통이야말로 각성의 지름길이라는 것이었 지. 원래 그 묘강 부족의 신앙은 배화교(拜火敎)의 영향을 받 아 세워진 것이었는데 불교가 들어오면서 조금 변질되었어. 불교에서 말하는 십팔지옥(十八地獄)이니 팔열지옥(八熱地獄) 이니 하는 것들이 들어오자 묘강의 부족인들은 그 지옥이 모 든 사람들이 겪어야만 하는 환생의 윤회장(輪廻場)으로 생각 했단 말일세. 이게 서장으로 들어가면서 라마교와 한 판 붙게 생겼단 말이야.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여기서 붙어야 할까? 아니면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할까?" 갑자기 이세직이 질문을 던져오자 당우양은 별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별 시덥지도 않은 질문이군. 당연히 싸워야지 머리를 숙이 긴 왜 숙여. 그런 서융(西戎) 놈들에게 무엇 때문에 굽히겠는 가?" "물론 자네는 굽힐 수 없다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들은 남만 (南蠻)의 종교네. 당연히 굽힐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당우양은 그럴 수도 있 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렇기도 하겠군." "일단 계속 얘기하기로 하지. 뭐 답은 이미 나온 것이지. 그 들은 라마교와 타협하며 들어갔다네. 대부분 중요하지 않은 교리들은 라마교가 원하는 대로 조금씩 바꾸었다네. 그런데 문제가 생겼지. 웬만한 것은 라마교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었는데 가장 중요했던 교리인 고통의 문제에서는 지옥을 숭배하는 것을 바꾸라는 라마교의 요구를 따를 수 없었단 말 일세." "그럼......?" "그럼은 무슨 그럼인가? 더 볼 것도 없지. 라마교와 붙어도 이길 자신이 없으니 빠져 나올 수밖에." "그렇다면 어떻게 서장에 남아 있게 된 거지?" "더 설명해 줄 테니 보채지 말게. 일단 확실히 알아야 할 것 이 있네. 이건 라마교의 내부 문제인데, 라마교는 원래 황모 파(黃帽派)와 홍모파(紅帽派)가 있었네. 내가 라마교도가 아 닌 이상 정확히 어떻게 구분하는 지는 모르겠네만 일단 라마 교는 그 둘로 나뉘어서 싸우고 있었다네. 당시 세력이 강했던 황모파에 붙지 못한 그 무속신앙이 할 방법은 홍모파에 기대 는 것말고는 없었지. 홍모파는 새로운 사람들을 받아 들여 조 금이라도 황모파에 대항해 보려는 생각이었겠지. 그런데 우습 게도 강해진 것은 그 무속 신앙이었어. 무공은 전혀 없었던 무속신앙이 라마교의 무공을 받아들이게 된 거야. 그렇게 이 루어진 곳이 지옥혈이네. 실제로 이름은 무시무시하지만 실상 살펴보면 그냥 불교라고 보면 되네. 그렇다고 결혼을 못하는 것도 아니지. 라마교는 여자를 맞이해도 상관 안 하니까 말 일세." 장황한 설명이 끝나자 당우양은 잠시 머리를 정리하는지 잠 잠하게 있었다. "잘 알겠네. 그런데 말일세. 자네는 어떻게 사라진 지옥혈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고 있는겐가?" 사라진 지 몇 백년이 지났다는 단체. 거기다 그런 단체가 있 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빙궁도 비밀을 유지할만큼 지옥혈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도 상세히 알 고 있는 것인지...... 당우양이 의문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이세직도 그가 그런 질문을 던져올 줄 알았다는 듯 바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익힌 무공들 모두가 바로 지옥혈의 무공이라네." "뭣이라? 그게 정말인가?" 당우양의 눈동자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져갔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이세직의 무공. 분명 대단하다 생각은 했지만 특별한 무공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북해빙궁의 궁주를 쓰러트릴 정도로 강했던 단체의 절전된 무공이라 하니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마치 자 신이 그런 비전을 찾기라도 한 듯. "내가 태어나고 살던 곳이 어디었는가? 바로 청해성(靑海省) 아닌가? 약초꾼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이리 저리 많이도 돌아 다녔지.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운 좋게도 무너진 동굴 안에서 지옥혈에 대한 단서를 찾았다네. 나야 무공에 대해서 별 관심 은 없었지. 다만 돈이라도 주울 수 있을까 해서 그 단서로 조 금씩 찾아다닌 것뿐이었어." "그럼 승룡장도 그곳에서 찾으신 거군요." 조용히 듣고 있던 조기혜가 의문을 해결했는지 말을 건네 왔 다. "그렇지." "그런데 어떻게 그게 영웅장이 될 수 있죠? 승룡장은 승룡장 으로 말씀하시고 가르쳐도 되잖아요?" 조기혜가 풀고 싶었던 최후의 질문이 흘러나왔다. 그만큼 질 문하는 그녀의 어조는 격앙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세직은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알고 싶었던 게 그거였는가?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괜히 고민했구먼. 내 말해 줌세. 자네가 문이 녀석을 보면 어떤 녀 석이란 생각이 드는가?" 조기혜는 잠시 머리를 갸웃대며 생각에 잠겼다. 쾌활하지만 장난이 심하고 귀엽긴 하지만 미운 구석도 있는 녀석. 그러나 그것보다 먼저 떠오른 것은 게으름이었다. 한 달 가량 부상 이란 핑계로 뒹굴거렸던 그 기억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사라지 지 않고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세직이 이 대답을 기 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꼭 말하고 싶 다는 느낌에 잡혔다. "게을러요. 꼭 겨울잠 자다 일어난 곰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이세직은 그것을 기대했는지 얼굴에 미소를 듬뿍 머 금었다. "그래. 게으르지. 자기가 좋아하는 게 아니면 별 관심도 보 이지 않고. 보통 사내아이들은 다 그렇다네. 그래서 무공도 내공에 비해서 약해 빠졌지." 그녀는 머리를 내저었다. 과거 무공을 익히던 자신과 비교하 면 이건 누워서 거저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은 느 낌이었다. "그 녀석은 무공을 익힐 자격 따윈 없어요. 어떻게 무공을 그렇게 심심할 때 익혀대는 것으로 생각하는 걸까요?" 부아가 치밀자 좋은 말이 나올 리 없다. 그녀는 천인문을 상 당히 깎아 내려 평가했다. "하지만 말일세. 대다수의 아이들은 다 그렇다네. 그게 현실 이고 사실인 게야. 아무리 좋은 무공이 있어도 웬만한 각오가 없이는 끝까지 익히기 어렵지."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가?" 당우양이 끼어 들며 물어왔다. 이세직은 고개를 돌려 당우양 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나도 과거에 그랬거든. 경험해 본 일이니 잘 아는 건 당연 하지. 지옥혈의 무공을 익혔음에도 절정 고수가 못 된 것이 이제 이해가 가겠지?" 이야기가 끝나자 갑자기 그들 사이에 적막이 찾아왔다. 모든 의문들이 해결되고 나니 더 할 말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멀 뚱멀뚱 서로 바라만 보고 있기를 한참. 그런 공기가 어색한지 당우양이 얼굴을 찌푸리며 숲 속을 바라 본다. "문이 녀석은 무엇을 하는데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화장 실 가서 죽기라도 한 거야?"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던가? 숲 속의 나뭇가지가 흔들거리 더니 허리춤을 묶으며 튀어나온 천인문이 주위를 살피기에 여 념이 없었다. "이쪽이다." 당우양이 자리에서 손을 흔들자 천인문이 후다닥 뛰어왔다. "헤헤헤! 오래 기다리셨어요?" "관원 놓치면 너 때문인 줄 알아." 무표정하게 앉아 있던 조기혜가 톡 쏘아붙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서 숲에 풀려 있던 마필 셋을 끌고 왔다. 쫓아온 흑풍의 등위로 올라탄 천인문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말에 타기를 기다렸다. "생각보다 늦어 버렸구나. 서둘러야겠다." 모든 준비가 끝났는지 주위를 둘러 본 이세직이 말을 몰아 뛰쳐나갔다. 남은 이들도 모두 말을 출발시켜 그를 뒤따랐다. 가라앉은 먼지가 다시 말발굽에 채여 공중으로 뽀얗게 흩어 지기 시작했다. -90- 역시 햇살은 따가웠다. 이미 한 낮은 훌쩍 지난 시간이었음 에도 불벼락은 맹위를 떨치며 사람을 녹초로 만들기에 충분했 다. 이미 한 시진을 넘게 달려 왔기에 말은 흐느적흐느적. 사람 은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멈출 수 없는 것 은 조금 전 발견했던 말발굽 자국 때문이었다. 한 필은 타고 한 필은 끌었는지 두 마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선명하지는 않지만 조금 전 찍힌 것이 확실했다. 그제서야 왜 쫓아도쫓아도 보이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있었다 . 그러나 희망도 보였다. 발굽의 간격이 아주 좁아져 있었던 것이다. 지쳤다는 의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는 것이 이미 이 각이 넘었다. 그러 나 그들은 조금 남았다는 기대로 거품을 무는 말을 한 번 더 다그칠 수밖에 없었다. 조그만 야산 고개를 가까스로 올라서 자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한 번 스치고 지나갔다. 높은 곳에 서 바라보니 사방이 훤히 트여 보인다. 이제 야산들은 모두 끝나고 평평한 평지만 남아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천인문이 손을 들며 환호했다. "저기 가고 있어요. 이제 얼마 안 남은 것 같네요." 멀리 보이는 관도 위로 걷는지 뛰는지 알 수 없는 마 필 두 마리가 보였다. "빨리 쫓아가요." 천인문은 흑풍을 몰아 산을 내달릴 기세다. 그러나 이세직은 그렇게 급할 이유가 없는 듯 느긋하기 그지없다. "저 쪽을 보거라. 저 멀리 건물 하나가 보이는구나." 천인문의 눈이 이세직의 손을 따라갔다. 그러자 저 멀리 낡 고 허름해 보이는 작은 건물 하나가 허허벌판에 덩그라니 놓 여 있는 것이 눈에 잡혔다. "아마 객잔인 듯 싶은데 따로 쉴 곳이 안 보이는 걸 보니 오 늘은 저 관원이 저기서 쉴 것 같구나." "아하! 그렇겠네요. 조금 있으면 해도 질 것 같고 힘도 빠졌 으니 오늘은 이만 상황 종료네요." 천인문도 이제 느긋해졌다. 두 시진 넘는 추격전(?) 끝에 잡 은 관원이 이제 눈에서 벗어날 리가 없다는 확신이 든 것이다 . 당우양은 헐떡대는 말의 목갈기를 쓰다듬었다. "서둘 것은 없다 해도 일단 내려가기는 해야겠지?" "그래야겠지." 당우양과 이세직은 어깨를 맡대고 천천히 말을 몰아 내려갔 다. 천인문도 조기혜와 함께 그들의 뒤를 따른다. "일단 잡기는 잡은 것 같은데 그 다음은 어떻게 하실 거에요 ? 그냥 패 버릴 건가요?" 뒤에서 따르던 천인문이 이세직의 등에 대고 물었다. 조기혜 는 말도 안 된다며 핀잔을 주었다. "다 된 일에 코를 빠뜨려도 유분수지. 저 관원이 얼마나 안 다고. 두들겨 패도 정보 하나 구하질 못할 걸." "왜? 저 사람은 관원이고 배에 대해 모르지 않을텐데." "저 사람은 말단 중에 말단이야. 저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은 일반인도 다 안다고 봐도 무방할 걸? 진짜 중요한 정보는 아 주 고위 관리나 알고 있단 말이야. 그리고 이렇게 먼 거리를 달리는 사람 중에 높은 관원이 있을 것 같니?" 그제야 천인문은 알겠다는 표정이다. "그럼 저 사람이 가진 서류나 문서를 뺏어야겠지?" "그렇지. 그게 가장 쉽고 정확할 거야." "근데 어떻게 뺏어? 그냥 패서 뺏어야 하는 건가?" 그 말에 조기혜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앞서 가던 두 사람도 미소를 떠올렸다. "넌 어째 패는 것 밖에 몰라? 그리고 우리가 강도니? 패서 뺏게." "그럼 누나는 그 사람이 스스로 갖다 바치게 할 방도라도 있 다는 거야? 흐음 모르지. 누나가 미인계라도 쓰면 그 사람이 혹해서 갖다바칠지도." 계속되는 조기혜의 닦달에 부아가 치밀어도 속으로만 삭이던 천인문. 이번에는 못 참겠는지 그녀의 속을 한 번 살짝 긁어 버린다. 그리고는 먼 산을 바라보며 딴청을 부렸다. 약한 홍기(紅氣)가 떠오르던 그녀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우린 먼저 가마. 싸우던지 말던지 너희끼리 알아서 해라." 두 사람의 실갱이를 재미있게 바라보던 두 사람은 말을 박차 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같이 가요." 남아서 한 소리를 듣느니 빨리 사라지는 것이 신상에 이롭겠 다 생각한 천인문도 급히 앞으로 내달린다. 뽀얀 먼지 속에 홀로 남은 조기혜. 그녀는 분통만 터트리다 역시 말고삐를 움켜쥐며 그들을 뒤쫓았다. 야산위에서 바라볼 때와는 달리 객잔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한 시진 이상 버틸 거라 생각했던 태양도 이미 저 멀 리 서쪽으로 반쯤 고개를 감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 천 인문 일행의 눈에도 낡아빠진 객잔이 잡히기 시작했다. 객잔에서 이십여 장쯤 남았을까. 갑자기 어디에서 요란한 소 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두들기는 소리다. 가끔 우당탕 하는 소리도 들리고 간간이 비명소리도 들렸다. 꼭 돼지 멱 따는 듯했다. 이상한 소리에 천인문 등은 고삐를 잡아채며 속도를 늦췄다. 천천히 말을 몰아 나아가던 그들의 표정에 경악이 어렸다. 객잔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낡은 건물 앞에서 한 사내가 열심 히 쓰러진 사람들을 밟아대고 있었다. 사람들의 수는 이십 여 명에 가까워 보였다. 얼굴은 퉁퉁 부어 과거의 모습을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고, 옷도 흙먼지로 인해 원래 색을 알 아보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어디 한 곳에서 피가 튄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얼마나, 또 어떻게 맞아야 저렇게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일 수 없게 되는 건지 천인문은 궁금해졌다. 흑풍의 등위에서 눈을 반짝이며 사내의 주먹 놀림을 연신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세직은 찬찬히 시위를 살폈다. 짐을 한가득 실은 수레와 땅에 나뒹구는 깃발. 땅위에 나뒹군 깃발을 유심히 살피자 쓰 여진 글이 눈에 들어온다. '강북표국? 그럼 표사들인가 보군. 그건 그렇고 저 사내는 무림인인가?' 한 눈에도 사람을 다루는 법을 잘 아는 인물임을 알 수 있었 다. 어디를 때려야 아프지만 상처가 덜 남고 기절을 하지 않 는지는 많이 때려본 사람만이 안다. 이 사내는 그런 쪽으로는 거의 통달한 듯 했다. 이세직은 주먹을 휘두르는 사내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주변을 휙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자 흙이 떨어져 볼품 없는 객잔 벽 에 묶어둔 두 필의 말이 눈에 들어왔다. 엉덩이에 알기 어려 운 문신이 새겨진 두 마리의 흑마. 아마도 관청에 소속됨을 표시하는 문신인 듯 했다. '확실히 여기로 들어오긴 했나 보군.' 이미 날은 저물었다. 피곤한 몸으로 더 이상 파발을 달리지 않을 것이 분명해지자 이세직은 천천히 열린 입구 쪽으로 고 개를 돌렸다. 입구는 열려 있어 내부가 훤히 드러났다. 그리 고 안쪽으로 연신 짐을 꾸리며 떠날 채비를 갖추는 무리가 보 였다. 안을 둘러 본 이세직은 상인 무리들이 겁을 먹고 있음 을 알아차렸다. 하기야 무림인들에게 일반인이 덤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림인들에게 겁을 먹지 않는 것은 역시 무림인들 뿐이었다. 말리겠다고 나섰다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먼저 맞을 게 뻔한 노릇이고 보니 어쩔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짐을 다 꾸린 뒤에도 상인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 밖으로 나가다가 혹시라도 걸려서 경을 치는 것을 겁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드는 이세직. 그러나 곧 자신 이 착각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딘지 겁을 먹은 듯 보였지만 어딘지 힐끔거리며 두들겨 패 는 사내를 연신 바라보기 바쁜 것이다. 이세직의 입가에 씁쓸 한 기운이 감돌았다. '피를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인가?' 이세직은 그런 생각을 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자기들과는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쓸데 없이 남의 일에 끼어 들었 다간 본전도 못 찾는 게 허다한 법이다. 거기다 양쪽 다 무림 에서 칼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 자기와 상관이 있다 면 모르겠으나 굳이 필요도 없는 일에 끼어들 필요는 없었다. 이세직은 말 위에서 풀쩍 뛰어 내렸다. 그리고는 입구에서 서성대며 기다리고 있는 점소이에게 말고삐를 건넸다. 모두 말에서 내려오자 점소이는 차례로 하나씩 고삐를 손에 쥐었다 . "이 녀석들에게 좋은 걸로 좀 주게. 그리고 우리도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을 준비해 주고." "숙박은 하시지 않으실 겁니까요?" 시키는 것만 제대로 하면 될 것을 점소이는 요구하지도 않은 잠자리까지 물어왔다. 이세직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바로 옆에서 사람들을 두들기는 저 사내 때문에 여기서 숙박을 하 려는 손님들이 모두 겁을 먹고 숙박을 취소했기에 이번에는 자기 일행을 잡으려는 속내가 훤히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건 일단 식사를 하고 나서 결정할 거야. 그러니 자네는 식사나 신경 쓰라고." 뒤에 서 있던 당우양이 나서며 말했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동전 한 닢을 점소이의 손에 던져 준다. 점소이의 눈에 잠깐 광채가 솟구치더니 허리를 굽신거린 후 급히 말을 끌고 물러섰다. 내부는 상당히 널찍했다. 거기다 외견과는 달리 상당히 깔끔 한 편이었다. 거슬리는 것이라면 한 쪽에 쌓아둔 부서진 탁자 파편들이었다. 앉아 있는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짐을 꾸렸던 상인들도 급히 짐을 매고는 밖으로 나가 버린다. 이세직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목표로 삼았던 관원의 행방을 살폈다. 그러나 관원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앉으십시오." 나이가 조금 들어 보이는 점소이가 다가와 목에 걸고 있던 수건으로 탁자를 훔치며 손짓을 했다. 이세직은 자리에 앉는 대신 점소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조금 전 관원 한 명이 들어오지 않았는가?" "아 그분께서는 이 층으로 오르셨습니다만." 점소이는 이 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럼 우리도 이 층으로 가겠네." 당우양이 앞으로 나서며 계단으로 걸어갔다. 혼비백산한 표 정으로 점소이는 급히 달려가 이 층으로 오르는 당우양의 소 매를 잡아챘다. 밖에서 두들겨 맞고 있는 사람들도 억지를 부 리다가 저렇게 되지 않았는가. 지금도 송장을 치우는 게 아닌 가 하고 겁이 나는 판국에 더 늘어날지도 모르는 것만은 막고 싶은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손님! 그러실 수는 없습니다요. 이미 이 층을 통째로 빌리 신 분이 계십니다." 소매를 잡힌 당우양이 팔을 내쳐 손을 떨구어낸다. 뒤돌아본 눈이 마치 사대천왕의 그것처럼 이글대며 타오른다. "이 녀석이......! 감히 우리가 누구인 줄 알고 앞을 막는 게야?" 바늘같은 살기가 온 몸을 압박해오자 점소이의 낯이 창백해 졌다. 뭔가 잘못 건드린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온 몸을 엄 습해왔다. "어, 어떤 분들이신지......" "저 위에 있는 관원의 상관들이다. 너 같은 녀석 목 하나 따 는 것은 여반장이란 말이다. 알겠냐? 그런데 졸병 놈은 올라 갈 수 있고, 우리는 안 된다?" 무시무시한 살기에다 이번에는 위협까지. 점소이는 식은땀이 등뒤로 흘러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점소이 녀석의 눈이 일행의 행색을 슥 살피고 지나갔다. 관 과는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뿐이었지만 자신을 다 그쳐오는 중년인의 당당함은 결코 관원이 아니면 보일 수 없 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한 것뿐이었지만. 걸리는 것이 없지 않아 있었으나 점소이는 결국 물러설 수밖 에 없었다. 자기가 할 일이라고는 위 층 사람들에게 말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죽고 사는 것은 저들의 팔자소관이고 자 기는 자신의 일만 충실히 해야겠다 생각한 점소이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요. 일단 위층에 고해야 하니 잠시만 기다려 주 십시오." 점소이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우양은 바로 그 의 어깨를 잡아챘다. "됐네. 우리가 그냥 올라가면 되는 거지 귀찮게 고하긴 뭘 고해? 자네는 돌아가서 일이나 하게." "그,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당우양이 다시 한 번 다그치자 점소이는 울상을 지으며 대답 했다. "그렇게 되면 제가 주인 어른께 경을 칩니다요. 쫓겨날 지도 모른단 말입죠." 조금이라도 더 처량하게 보여서 자기가 맡은 일을 충실히 행 하려는 점소이. 그러나 당우양은 그런 점소이의 객잔에 대한 충심을 단 한마디로 싹둑 잘라 버렸다. "그럼 잠시 나하고 관으로 가겠느냐?" "......!" 단숨에 꿀먹은 벙어리가 되 버린 점소이. 그런 녀석이 무슨 토는 그렇게 다느냐며 핀잔을 주는 당우양. "빨리 가서 일이나 보게. 이쪽은 신경 쓰지 말고." 손을 흔들어 점소이를 친절(?)하게 배웅하고는 성큼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뒤쪽에서 조용히 보고 있던 이세직이 염려스 런 표정으로 그를 따라 올라갔다. <자네 무슨 배짱으로 그런 거짓말을......> 이세직은 전음으로 당우양을 불렀다. 그러나 당우양은 자신 만만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어 보인다. <일단 보고 있기만 하게. 나에게 좋은 방법이 있으니까 말이 야.> 이세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의 뒤를 따라 올라갔다. 막 계단을 다 오를 때였다. 검은 그림자 두 개가 번뜩이더니 당우양의 앞쪽에 도검을 든 사내들이 앞을 막아섰다. "누구냐?" 신출귀몰한 신법. 그러나 당우양의 눈에는 아기 재롱으로밖 에 보이지 않았다. "손님이 오셨다고 해라." 당우양의 목소리가 이 층에 울려퍼졌다. "손님?" 이 층 중앙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인의 목소리다. 당우 양의 시선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중앙으로 옮겨졌다. 이 층의 중앙 탁자에 두 명의 여인과 한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남자는 조금 전까지 쫓아 왔던 관원이었고, 여인들은 삼십이 조금 안된 여인과 이십대에 갓 든 듯한 여인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삼십 정도로 보이는 검은 망토의 여인이었 다. "당신이 누군데 함부로 우리의 손님을 자청하는 거죠?" 둥근 곡선의 아미가 살짝 찌푸려진다. 어투는 부드러웠지만 다분히 협박하는 느낌이 들어 있었다. 당우양은 그녀를 상대하기가 까다롭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자기의 뒤에는 믿을만한 친구가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에서 한줄기 호기가 솟아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아 주 자연스럽게 탁자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맞은 편까지 다가서자 조금 전 앞을 막았던 두 사내 들이 다시 몸을 날려 당우양의 앞을 막아섰다. 부리부리한 눈 에 살기까지 감도는 것이 당장이라도 칼부림이 날 듯 했다. "무엄한 것. 이 분이 누구신지 알고 함부로....." 무기를 쳐들어 내려칠 듯 하던 그들의 행동은 여인의 목소리 에 의해 멈추어져 버렸다. "그만 둬. 너희 녀석들이 항상 이렇게 과민반응을 보이니까 내가 너희들을 데리고 다니기 싫다는 거야." 여인의 앙칼진 목소리에 사내들은 한 발짝 물러섰다. 뒤로 물러서는 사내들의 뒤로 보이는 여인들과 관원을 흘깃 쳐다보 던 당우양의 눈에서 경악의 빛이 뿜어졌다. 그러나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급히 안색을 고쳤다. 관원의 눈에서 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생기는 온데간 데없고 단지 희미한 빛만이 공허하게 떠돌고 있는 것이다. 미혼술에 걸렸을 때 보이는 눈빛을 관원이 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사람이 지금은 그렇다면...... 당우양의 시선이 여인들을 향해 돌아갔다. 이번에는 망토 여 인의 옆에 앉아 있는 연분홍 경장을 나풀거리며 앉아 있는 여 인을 바라 봤다. 온 몸에 감도는 괴이한 요기와 아름다운 얼굴 밑으로 내비치 는 백치미. 거기다 그윽한 눈빛 속에 감도는 사이한 느낌까지 . 더 볼 것도 없이 그가 찾은 인물이 그녀임을 알아차렸다. '호오. 하늘이 돕는 것인가?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겠는걸 .' 이제는 들킬지도 모른다는 조금 남은 불안감도 완전히 사라 져 버린 당우양은 거만스럽게 머리를 쳐들며 대꾸했다. "일단 자리라도 하나 내어 주시구려. 어디 이렇게 서서 이야 기 할 맛이 나겠소?" 모르는 사람이라면 끔뻑 속아넘어갈 만큼 그의 연기는 완벽 했다. 그러나 망토의 여인도 녹록치 않았다.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소개를 하시는 게 먼저가 아닐까요. 그래야 제가 혹시라도 무례를 범하지 않겠죠?" 뒤쪽에서 당우양을 바라보는 세 명의 일행은 어안이벙벙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무런 상의도 없이 다짜고짜 이층으로 오른 것도 모자라 이젠 아예 손님으로 가장하다니. 무슨 생각 으로 그랬었는지는 모르기에 그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였다. 그들은 당우양이 품 속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꺼내 드는 것을 보았다. "저게 뭐죠?" 천인문이 이젠 자기보다 키가 조금 작아진 이세직의 뒤로 다 가가 속삭이며 물었다. "나도 모르겠군. 일단 지켜 보도록 하자꾸나." 말을 마친 이세직은 조용히 귀를 기울여 그들의 대화를 듣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들의 대화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것을 보면 모르겠소?" "그게 뭐죠? 나한테는 그냥 조그만 동패에 구강(九江)이라 쓰여진 것으로밖에 보이질 않는군요." 망토의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당우양은 말도 안 된다는 투 로 눈썹을 찡그렸다. "저 녀석은 손님으로 맞이하면서도 이 패를 가진 나를 홀대 하다니 그럴 수가 있는 거요?" 멍하게 앉아 있는 사내를 턱으로 가르키며 역정을 내뱉는 당 우양. 여인은 당치도 않다며 머리를 젓는다. "저 분이야 나라를 도우며 바삐 일을 하시는 관원이시니 제 가 백성으로서 존경의 표시로 이렇게 대접하는 것이긴 하지만 어르신께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군요." 그녀의 기세는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너무도 당당한 상대의 위세에 위축 된 듯 했다. 혹시라도 관원일까 두려워하는 듯 했다. '역시! 찔리는 것이 있었군. 이걸 챙겨두길 잘 했어.' 언제 무림인들이 관원의 패를 본 적이 있었겠는가. 과거 구 강쪽에서 죽었던 관원의 품에서 나왔던 패를 챙겨 둔 것이 다 행이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조금 더 당당하게 나가기로 마음 먹었다. "이래 봬도 난 강서성(江西省) 역참을 책임지던 관리요. 이 번에 새로운 임지로 발령을 받고 하북으로 가는 길이었소. 그 런데 말을 달리던 관원을 보니 그만 기쁜 마음을 주체 못하고 쫓아 온 거요만." 은근슬쩍 말을 맺은 당우양이 그녀의 앞으로 조금 더 다가섰 다. "이제 앉아도 되겠소?"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서며 손짓을 했다. "아! 그러셨군요. 앉으세요." 그녀는 뒤로 선 사내들에게 명을 내렸다. "이 분께 자리를 내 드리도록 해라." 여인의 지시에 사내 중 하나가 치워둔 의자를 들고 당우양의 등 뒤로 밀어 주었다. "저 분들께서는 어떤 분들이신지 소개하지 않으실 건가요?" 당우양이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그녀가 질문을 던졌다. "신경 쓰지 마시오. 무시해도 상관 없으니까." 갑자기 무시당해 마땅한 사람들로 전락해 버린 일행들. 천인 문의 왼쪽 볼이 조금씩 씰룩거린다. '갑자기 또 뭔 소리야?' 억하심정이 드는 통에 안면의 경련이 이는 것은 당연했다. 조기혜는 그런 말을 들어도 별 무반응이었고, 이세직은 오히 려 일꾼이나 지을 법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그러나 여인의 눈썰미는 대단했다. 일행을 한 번 흘깃 처다 보고는 다시 대답했다. "제가 보기엔 저 젊은 남자나 아름다운 여자분은 모르겠지만 저 노인 분은 아무리 봐도 무시할 수 있는 분은 아닌 것 같 군요. 몸에서 풍기는 기운이 너무 강한 것 같지 않은가요?" 어찌된 일이냐며 묻는 여인의 질문에 당우양이 화답했다. "저 노인은 이번에 내가 전출지역까지 가는 동안 호위를 맡 은 사람이오. 그리고 저 남녀 일행은 목적지가 같아서 잠깐 동행을 하는 거요."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속삭이기 시작했다. "여자가 월등 나은 것 같지 않소?" 이 사내가 갑자기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여인은 그 다음에 들려온 말에 재미있다는 표정이 되어 버린다. "사내 녀석이 대갓집 아가씨를 꼬셔서 야반도주를 한 것 같 은데 그렇지 않소?" "조금 그런 생각이 들긴 하는군요. 저 남자도 괜찮긴 하지만 여자에 비해서는 가히 봉 옆에 선 닭 밖에 안되는군요." 닭으로 전락해 버린 천인문. 그것도 알지 못한 채 멀뚱멀뚱 자기들만 바라보는 모습이 갑자기 우습게 느껴진 당우양은 빙 긋 웃음을 지은 뒤 다시 속삭였다. "내가 지금은 관리로써 녹을 먹지만 저런 시절도 한 때 있었 다오. 저 녀석을 보니 마치 그 당시가 떠올라 버려서 그냥 좀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오." "그렇군요. 어르신께서는 정말 대인이시네요." "하하하하! 별 것 아니오." 그의 웃음이 쩌렁쩌렁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여인의 얼굴에 도 미소가 걸렸다. "아차 내 정신 좀 봐. 소개를 하지 않았군요. 전 영은(營恩) 이라 해요. 그리고 이쪽은 제 동생 요라에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웃고 있던 진영이 소개를 한 그 때였 다. 그녀의 귓가에 한 줄기 전음이 꽂혀 들어온다. <언니! 뭣 때문에 이름을 밝힌 거야?> 연분홍 경장의 여인 요라였다. 동생의 추궁에도 영은이라는 여인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넌 가만히 있어. 뭔가 좀 심상치 않으니까?> <으응. 알았어. 하지만 조심해.> 요라도 무언가 느꼈는지 주의를 주었다. 알겠다며 다시 전음 을 날리는 영은. "그런데 그렇게 망토로 몸을 가리면 덥지 않소? 이런 여름에 검은 망토를." 넉살좋게 웃고 있던 당우양이 손으로 망토를 가리며 손짓했 다. 그 순간 그녀의 망토가 잠시 흔들린 것은 착각이었을까. "신경 쓰지 마세요. 이건 제가 좋아하는 복장이라서 남에게 간섭 받고 싶진 않군요." 그때쯤 조기혜는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이층으 로 올라 올 때부터 생긴 느낌. 그것은 그녀의 어깨 위에 앉아 있는 일묘 때문이었다. 어딘지 불안해 하면서도 경계를 하는 듯 상당히 긴장을 늦추지 않는 일묘의 느낌이 고스란히 그녀 의 어깨로 느껴졌던 것이다. "누나 왜 그러는 거야? 왜 그렇게 몸을 자꾸 떨어?" 옆에서 보고 있던 천인문이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감지했는 지 그녀에게 물어왔다. "으, 으응! 일묘 녀석이 좀 이상해. 갑자기 긴장하는 것 같 은데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어." "일묘가?" 천인문의 눈이 그녀의 어깨 위에 있는 일묘에게로 다가갔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일묘는 상당히 긴장을 하고 있었다. 마치 처음 흑풍을 보았던 그 때처럼. 이상한 느낌을 받고 있는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영은의 표정도 조기혜처럼 살짝 찡그려지고 있었다. '이 녀석이 왜 이러는 거지? 이런 적이 없었는데.' 품속에서 갑자기 그 녀석이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식사를 할 때나 보이던 살기를 온 몸에서 뿜어내는 통에 그녀는 녀석 을 진정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왜 이렇게 멍하게 있는 거요?" 아무것도 모르는 당우양이 옆에 앉아 멍하게 넋을 빼고 있던 관원을 툭툭 건들였다. 그러나 사내는 아무 느낌도 없는 듯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요라의 표정이 갑자기 상기되었다. "건들이지 말아요." 명주구슬 굴러가듯 상큼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터지자 당우 양의 손이 흠칫 했다. "왜......왜 그러시는 거요? 내가 뭔 잘못이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당우양은 아주 능청스럽게 표정을 관리 했다. 요라의 얼굴에 잠시 실수 했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아니에요. 그 분은 그냥....." 대충 얼버무리며 요라는 고개를 저었다. "알겠소. 뭐 만지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니오? 그냥 난 인사 라도 하려고 했을 뿐인데......" 씁쓸한 표정을 짓던 당우양이 영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찌 됐던 간에 일단 식사라도 합시다. 저 녀석에게는 이렇 게 진수 성찬을 차려 주고 나같은 관원에게는 안 차려 주신다 하시진 않겠지요?" 탁자 위에 올려진 엄청난 양의 음식들. 고급이라 부르기엔 조금 떨어지는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푸짐한 양만으로도 가히 입이 벌어질 만 했다. "아! 제가 실수를 했군요. 이미 음식이 식어 버린 것 같은데 새로 시켜 드릴게요." 품 속의 녀석을 진정시킨 영은이 머리를 손으로 두드리며 멋 쩍은 웃음을 지었다. 당우양은 그럴 필요 없다며 고개를 저었 다. "됐소. 음식이란 좀 식어도 먹을만 하면 그대로 먹는 게 좋 소. 쓸 데 없이 두 번 시켜 음식을 버리면 농민들의 땀이 아 깝지 않소? 그냥 두시오." 말을 마친 당우양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난 여기 아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 좀 해야 할 테니,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식사부터 하시구려." "알겠습니다. 맛있게 식사 하십시오. 저희는 이만......" 당우양의 말을 끝까지 들었던 이세직. 호위를 맡은 사람(?) 답게 공손하게 인사하고 물러난다. <친구야! 나중에 다 설명해 줄 테니까 일단 빨리 먹을 수 있 는 걸로 시켜.> <무......무슨?> <나중에 설명 해 준다니까. 그러니까 시키는 대로 좀 해. 부 탁해.> 함부로 저렇게 부탁하던 당우양은 아니었기에 이세직은 의문 이 구름처럼 피어올랐으나 그런 마음을 내색치 않고 허락을 한다. <알았으니 조심하게.> 전음을 끝낸 이세직이 천인문과 조기혜를 향해 말을 걸었다. "이만 내려갑시다." 한쪽 눈을 찡긋하며 이야기하는 이세직의 뜻을 알아차린 조 기혜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러죠. 그만 내려가요." 갑자기 조기혜가 천인문의 팔을 끼며 다정한 연인 흉내를 낸 다. 천인문의 표정이 삽시간에 상기되었다. 그녀의 물컹한 가 슴이 팔에 느껴진 탓이다. '뭐 하는 거야' 하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다가 쏙 들어 가 버렸다. 천인문의 입이 잠깐 열리는 것을 본 그녀가 급히 그를 끌어 일 층으로 내려갔다. 이세직도 재밌다는 표정으로 그들의 뒤를 따라 내려갔다.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탓에 아무말 하지 않고 있던 영은이 점소이를 불렀다. "저 밑에 계신 분들에게 이것하고 똑 같은 걸로 부탁해요." "아니오. 나만 해도 미안한데 뭐하러 똑같은 것을." 미안한 표정으로 당우양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영은은 그 럴 수 없다며 점소이에게 당부까지 곁들였다. "이분 말씀 들을 것 없어요. 그냥 내가 시킨 대로 하면 되요 . 그만 내려가 봐요." 점소이는 그녀의 말을 다 듣자 황급히 밑으로 내려갔다. "주문 받으시오." 이세직이 이층에서 내려오는 점소이를 불렀다. 그러자 점소 이는 고개를 저었다. "이 층에서 이미 여러분들의 주문을 하셨습니다만." 이 층에서 주문을 했다고? 잠시 당황한 이세직이었지만 곧 당우양의 당부를 떠올렸다. "됐네. 그건 무시하고 우리 주문이나 받아 가게." "그런......" "할어버지! 저 위에서 뭘 시켜줬다고 하잖아요. 그냥 그걸 먹어요." 점소이가 당황해서 아무 말 못하고 있자 천인문이 입맛을 다 시며 말했다. 그러나 이세직은 그럴 수 없었다. 무슨 일인지 는 모르지만 당우양이 신신당부까지 한 것이 아닌가. "안 된다. 그냥 국수 세 그릇으로 가져오게." "에이! 그러면 시킨 쪽이 무안해 하잖아요. 그리고 그건 우 리가 계산 할 것도 아니고. 일단 국수부터 가져오게 하고 그 다음에 천천히 가져 와요." 천인문은 뒤로 물러서던 점소이에게 크게 외쳤다. 점소이의 모습이 뒤로 사라지자 천인문은 자리에 앉았다. "이상하네. 오늘 따라 두 분 할아버지 속을 모르겠어요. 이 상한 말만 하고. 거기다 누나까지." 조금 전 상황이 떠올랐는지 천인문은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 었다. "그래서 넌 아직 멀었다는 거야. 아직 배워야 할 게 너무 많 아. 너처럼 그렇게 살다가는 무림에서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몰 라." 조기혜가 천인문의 머리를 쿡쿡 찔렀다. 그녀의 손을 내치며 천인문은 띠꺼운 표정을 지었다. "난 칼밥 먹을 생각 따윈 없어. 그러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해 줘도 된다고." 조금 후 세 그릇의 국수를 들고 온 점소이가 그릇을 탁자에 내려놓고 사라졌다. 그들은 저를 들어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그들이 한참 식사를 하고 있을 무렵 주방에서 식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국수를 다 먹어 버리고 입맛만 다시고 있던 천인문 은 요리가 새로 나오자 환하게 밝아졌다. "너 요즘 먹을 걸 너무 밝히는 것 같아." 국수의 반도 먹지 못한 조기혜가 음식을 꾸역꾸역 입 속으로 넣고 있는 천인문에게 한 소리를 한다. "남이사 얼마나 먹든 뭔 상관? 부러우면 누나도 많이 먹고 부럽지 않으면 그냥 가만히 있어." 천인문도 입 속의 음식을 튀겨가며 받아쳤다. 그런 모습을 빙긋이 웃으며 바라보고 있던 이세직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천 천히 이 층을 향해 눈을 돌렸다. -91- 시간이 상당히 지났다. 이미 탁자 위의 요리들은 거의 남아 있는 게 없었다. 그 중 대부분을 해치운 천인문은 등을 의자 에 기대고 부른 배를 연신 쓰다듬기 바쁘다. 축 늘어진 모습 하며 가끔 입이 찢어질 듯 터지는 하품이 마치 집에서나 맛볼 수 있는 편안함에 푹 절어버린 듯 하다. 꽃수를 놓은 손수건 으로 요조숙녀처럼 입을 닦아내는 조기혜도 식사 후 찾아온 포만감과 편안함에 젖었는지 느긋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유 일하게 이세직만 조금 근심의 표정을 짓고 있다. "꺼억! 흐음 배부르니까 이제 잠이 오네." 거의 하루 종일 말을 달렸다. 그것도 뙤약볕 아래서 제대로 쉰 적도 몇 번 없었다. 건물은 허름했지만 피로에 젖은 사람 들에게 그런 것은 배부른 투정에 불과한 것이다. 그저 몸 하 나 편히 눕히고 쉴 수 있는 곳이면 충분했다. 계산대에 앉아 있던 주인은 흘깃 일행을 살피며 희미한 웃음 을 짓고 있었다. 손님들이 모조리 떠나고 이제 남은 일행이라 고 해 봤자 겨우 두 무리 뿐이었다. 이 층을 통째로 빌린 무 리, 그리고 천인문 일행이다. 이 층의 무리는 이미 숙소를 잡 았으나 아직 천인문 일행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저렇게 피 곤하고 입이 쭉쭉 찢어지는 것을 보니 쉬고 갈 것이 거의 확 실했다. '그래 그래. 몸이 피곤하지? 그러니 어서 와서 방을 빌려. 싸게 해 줄게.' 주인은 연신 속으로 방 빌리기를 종용했다. 그런 그의 염원 이 통했던 탓인가? 안절부절하며 이 층을 바라보고 있던 이세 직이 천천히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그러나 주인의 기대와는 달리 이 층 계단 앞에서 서성거릴 뿐이다. '뭘 기다리는 거야? 그냥 쉬어라. 이 밤중에 갈 곳도 없잖아 .' 이세직의 등을 열심히 바라보던 주인은 속으로 열심히 외쳐 댔다. 한참을 그렇게 외쳐댔을 무렵 이세직은 고개를 절래절 래 흔들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래! 잘 생각했어. 어서 와서 방을 빌리는 거야. 두 개 아 니 편하게 쉬려면 방을 많이 빌리는 게 좋겠지? 방은 많이 있 어.' 주인의 입술이 귓가로 쭈욱 찢어진다. 바로 그때였다. 조용 하던 이 층 위에서 누군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세직의 시선이 위쪽으로 들렸다. 마악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당우양 의 모습이 보였다. "그럼 이만 가 보도록 하겠소. 내려오지 마시오." "급히 가셔야 한다니 잡진 않겠습니다만 그래도 일층까진 배 웅을 해 드리죠." 영은의 모습도 보였다.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시지요." 당우양은 겸양의 말을 거두고 계단을 내려왔다. 영은도 당우 양의 뒤를 따라 내려왔다. 막 내려온 당우양의 표정은 아주 흐뭇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 서두르는 경향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이세직이 앞으로 다가가자 연신 눈짓을 해대며 큰 소 리로 호들갑을 떨었다. "오! 식사는 많이 하셨는가? 오늘은 늦었지만 그래도 갈 길 이 급하니 빨리 떠야겠군. 수고 좀 하게." "알겠습니다." 이세직도 맞장구를 치며 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조기혜까 지 급히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냥 오늘은 쉬어가자고 이야기하 려던 천인문도 조용히 입을 닫고 엉덩이를 때었다. 마당에는 이미 말을 꺼내 온 이세직이 그들이 나오기만을 기 다리고 있었다. 일행은 급히 바로 자기의 말 위로 뛰어 올랐 다. "다음에 인연이 되면 한 번 더 뵐 수 있겠지요. 오늘 대접은 잊지 않겠습니다." 당우양은 인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고삐를 틀어쥐고 말의 옆 구리를 걷어찼다. "이럇!" 누가 봐도 너무 서두르는 느낌이다. 남은 일행도 대충 인사 를 한 뒤에 말을 몰아 당우양을 뒤쫓았다. 그들이 떠나는 것 을 조용히 바라보던 영은은 그들이 다 사라지기도 전에 급히 객잔의 이 층위로 뛰어 올라갔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서두르는 거에요?" 흑풍을 급히 다그쳐 당우양의 등 뒤로 바짝 붙은 천인문이 물었다. 오늘 밤 서류를 훔치려면 남아 있어야지 왜 이렇게 급하게 떠나느냐는 뜻이다. "일단 달려. 무조건 달리란 말야.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해 줄테니까." 천인문의 닦달에 짜증이 나는지 당우양은 거칠게 말하며 말 을 달리기에 여념이 없다. 천인문도 조용히 입을 닫고 뒤를 조용히 따라 갔다. 객잔을 나선 뒤 관도는 계속 평지였다. 바람도 시원하게 불 었다. 전혀 여름철의 무더위를 느낄 수 없는 밤이다. 그러나 말을 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의 이마에는 조금씩 땀방울 이 맺히기 시작했다. 말을 내 달린 지 이 각 여. 거의 이십 리는 족히 온 것 같다 . 벌써 말은 헐떡 헐떡 가쁜 숨을 내쉰다. 충분한 휴식도 못 취한 상태에서 이 정도라도 달려 온 것만도 용했다. 더 달리는 것은 좋지 않다 생각한 이세직이 급히 당우양을 잡았다. "일단 거리는 좀 확보된 것 같으니 잠시 쉬어 가도록 하세. 안그러면 말이 쓰러질 것 같네." "안 되네. 그렇게 되면 문제가 커질 거야." 당우양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래도 쉬어야 하네. 말이 쓰러지면 더 늦어지게 된단 말일 세." 이세직은 당우양의 의견은 듣지 않겠다는 듯 고삐를 잡아 당 겨 말을 세운다. 몇 걸음 더 튀어 나가던 당우양도 어쩔 수 없는지 말을 돌렸다. 김이 무럭무럭 솟구칠 듯 마필의 급한 숨소리가 밤하늘로 퍼 졌다. 이세직은 땅에 뛰어 내린 후 바닥이 깨끗한 곳으로 말 을 끌고 갔다. 그리고는 자리를 골라 한쪽에 엉덩이를 붙인다 . 천인문과 조기혜도 천천히 그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한 숨 돌릴 동안 어떻게 된 건지 말해 보게." 옆으로 다가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당우양을 종용하는 이세 직. 당우양은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는 표정으로 조바심을 내 더니 천천히 이야기를 했다. "내 처음에는 쉽게 일이 풀리는 줄 알았지. 몇 가지 계책도 있고 해서 자신 있게 올라간 거였어." "계책?" "왜 있잖은가? 저번에 구강에서 죽은 관원의 품에서 편지를 발견했다고. 그 때 품에서 패도 하나 나왔었어. 그걸로 관원 행세를 하면 될 줄 알았던 거지." "그랬군." 이세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 우양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상대가 여자들이라 간단하다 생각했었는데 제기랄 이건 대 충 봐도 여간내기가 아니더군. 분명 우리를 쫓아올게 뻔해." "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왜 그렇게 다급해하는 거야?" "내가 누군가? 도둑놈 아닌가 말이야. 관원이 이상하네 하면 서 슬쩍 한 번 몸을 훔친 적이 있었지? 그때 품에서 슬쩍 서 찰을 슬쩍 했다네." "슬쩍? 자네는 그냥 몰래 들어가서 훔치는 부류 아니었던가? " "이 친구가...... 내가 양상군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소매 치기를 못하는 것도 아니라고. 도둑놈은 뭐든지 못하면 안 돼 . 안 그러면 언제 죽을지 모르거든." "그래서 품에서 꺼내긴 꺼냈나?" "그래. 여기 있지." 당우양은 품에서 묶음 하나를 꺼내더니 앞으로 내민다. 중앙 에 붉은 천으로 묶어두고 불로 녹여 밀납을 붙인 자국이 역력 하다. 특급으로 분류된 서찰이다. 이런 것을 함부로 뜯었다간 바로 목이 달아난다. 그렇지만 이세직은 아무 거리낌도 없이 천의 중앙을 손으로 뜯어낸다. 양피지를 쫙 펼쳐 눈으로 가져간 이세직이 조용히 읽기 시작 했다. 궁금해진 천인문도 뒤로 다가가 같이 읽기 시작했다. <배는 현재 양주(揚洲) 앞 선해현에 닻을 내리고 있음. 배의 반은 남경으로 이미 출발. 운하를 거슬러 올라갈 선박(船舶) 십 오 척을 준비하기 바람.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사태에 대 비하여 군사 삼천 요망.> 수신자도 발신자도 보이지 않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딱하지 않은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군사를 요망한다니..." 읽고 있던 조기혜가 궁금한지 조용히 물었다. 누가 감히 황 제에게 가는 배를 습격이라도 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그냥 관 례상 하는 행사처럼 위세를 드날리며 입궁이라도 하겠다는 것 인가. "일단 관에서도 무슨 느낌을 받은 게 아닐까? 내가 볼 땐 아 까 그 여자들은 함부로 상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어. 무림인도 그냥 흔한 녀석들이 아니라 간간이 볼 수 있는 일류 고수였다고. 느낌이 대단했단 말이야. 그런데 그 정도라면 분명 소문이라도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아무리 봐도 누구인지 모르겠어." 뒤에서 앉아서 숨을 고르던 당우양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이미 조기혜는 산을 내려 올 당시 이미 두 권의 책에 대해 들었었다. 배에 있는 책을 보기 위해 간다는 사실은 그녀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랬기에 조금 어긋났던 마음이나마 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예상치 못했던 무림인들이 나타나다니. 무림인이 관심을 가질 것은 몇 되지 않는다. 그 럼에도 모여든다는 것은 그들을 끌어들일 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 무언가라고 해 봤자 두 권의 책자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다. 그녀는 막 떠오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이세직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그럼 무림인들도 이미 책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이 말이에 요?" "확실하진 않지만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닌 것 같군. 아까 본 사람들이 그 책 때문에 모여 든 것이라면 아마 이제부터 우리 앞에 상당한 수의 무림인들이 나타날 거야." "아니. 분명 그 책 때문에 모이고 있다는 게 확실한 것 같아 . 그렇지 않다면 아까 그 여인들이 미혼술까지 써 가면서 관 원을 그렇게 잡을 이유가 없지." 당우양이 확신한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겠군. 어떻게 소문이 퍼진 거지?" "모르겠어. 자자 많이 쉰 것 같으니 이만 일어나자고." 당우양이 일어서자 이세직도 일어났다. 천인문은 조금 더 쉬 었으면 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불평을 토로하진 않았다. 막 말을 끌고 관도로 나올 무렵이었다. 멀 리서 말발굽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안색이 상기된 일행 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혹시?" "일단 모르니까 먼저 숨어." 그들은 말을 황급히 끌어당기며 관도 옆 숲길로 몸을 숨겼다 .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는 조금씩 더 커져 갔다. 거의 다 왔 다 싶을 무렵 천인문이 나뭇가지를 살짝 밀치며 관도를 바라 봤다. 저 멀리서 다섯 필의 말과 그 위에 탄 흐릿한 인영이 다가오 고 있었다. 바라보고 있던 천인문의 눈이 조금씩 커졌다. <그들이 확실하군. 역시 예상했던 그대로군.> 다가오던 무리의 정체를 알아차린 당우양이 이세직에게 전음 을 던졌다. <우리가 떠나온 뒤 바로 그 녀석의 품을 뒤져봤겠지. 그리고 없으니까 우리를 쫓아 온 것일테고.> 말이 더욱 가까이 다가오자 그들은 전음도 멈춘 후 머리를 숙였다. 밤이 깊었는데도 먼지가 뿌옇게 흩어지는 게 보일 만 큼 그들은 빠르게 접근해오고 있었다. 그들이 숨어 있는 수풀 가를 막 통과할 무렵이었다. "멈춰!" 앞서 달리던 여인이 갑자기 손을 쳐들며 제자리에 선다. 남 은 일행들은 그녀를 그대로 통과했다가 말을 멈춰 되돌렸다. <어떻게 된 거지?> <제기랄 내가 알 게 뭐야. 어쨌든 들킨 것 같은데.> 당우양의 생각대로 영은은 그들이 숨어 있는 쪽을 한 번 휘 휘 둘러보더니 크게 외쳤다. "여기 숨어 있다는 거 다 알고 있다. 당장 나와라." 조금 전 예의 바른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살기와 오 싹한 느낌만이 물씬 풍기는 여자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그녀는 말을 끝맺으면서 땅으로 뛰어 내렸다. 다른 이들도 급히 그녀의 뒤를 따라 바닥으로 내려선다. 그리고는 눈을 부 라리며 살기를 피워 내기 시작했다. -92- "하하하하! 대단하오. 분명 숨까지 죽이고 있었는데 그걸 어 떻게." 이미 들켰는데 자리를 붙이고 있다는 것은 사내답지 못하다 생각했는지 당우양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앞으로 나섰다. 일행의 모습이 다 드러나자 표독하게 바라보는 영은의 눈빛 에 살기가 감돈다. "긴말 하지 않지. 당장 꺼내 갔던 걸 내 놔." 말을 들어 보니 이제 속이기는 틀린 듯 싶었다. 한 판 붙게 될 것은 뻔한 수순이나 마찬가지다. 저쪽은 다섯, 이쪽은 넷. 미혼술과 알려지지 않은 무공을 소유한 여인 두 명과 세 명 의 남자. 여인 둘은 이세직과 자신이 맡는다 치고 남자 셋은 천인문과 조기혜가 맡는다? 밀릴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조금 은 불안했다. 일단 빠르게 그녀를 제압한 뒤 천인문 등을 도 와주기로 마음먹고는 일단 그녀를 도발해야겠다 생각했다. "호오. 내가 무얼 가져갔다는 말이오. 당신에게 식사 한 끼 대접받은 거 말고는 빚 진 건 없다고 아는데." 능글맞은 어조로 약을 살살 올리는 당우양을 죽일 듯 보고 있던 영은의 소매깃이 부르르 떨렸다. "따끔한 맛을 좀 보여 줘야 정신을 차릴까." "히히히! 따끔한 건 싫고 뜨거운 맛은 얼마든지 환영하지." 듣고 있던 그녀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던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던 영은이 망토의 한쪽을 펄럭였다. 그러자 갑자기 무언가 검은 물체 하나가 그녀의 품속에서 잽싸게 튀어나왔다. 그 순간 조기혜의 목을 감고 있던 일묘가 낮게 일성을 토했다. "끼이."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큼 괴괴한 소리.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재빠른 속도로 무언가가 당우양에게 날아왔다. "웃!" 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미 피하기엔 늦어 버렸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몸을 옆으로 피했다. 거의 동시에 무언가가 그의 뺨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조기혜의 어깨를 박차고 뛰어 든 일묘. 하얀 선이 쭈욱 늘어나며 검은 선과 한 번 공중에서 부딪혔다. 땅에 내려선 일묘가 바로 몸을 돌리며 몸의 털을 세웠다. 그 러나 일묘와 부딪혔던 그 무엇은 떨어지지 않고 다시 하늘에 서 방향을 바꾸었다. "저게 뭐야?" 천인문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사방은 껌껌했고, 반짝이 는 별빛 만으로 알아보기엔 그 무언가의 속도는 너무 빨랐다. 다시 한 번 십자를 그리며 마주치는 일묘와 검은 물체. 이번 에도 서로는 아무 피해도 못 준 듯 했다. 그러나 검은 물체는 다시 몸을 돌려 공격하는 대신 영은에게 되돌아갔다. 그녀가 팔을 쭉 펼치자 그 물체는 그녀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그러자 그 물체의 정체가 드러났다. "저건 박쥐잖아." "박쥐? 윽!" 박쥐라는 말에 조기혜는 얼굴을 심하게 구겼다. 쥐란 글자가 들어가는 것은 모조리 싫어하는 모양이다. "내 놓기 싫다면 강제로라도 꺼내 갈 수밖에. 일, 이, 삼. 너흰 저 희멀건 녀석들을 맡아. 하나라도 놓치면 내 손에 죽 을 줄 알아." 싫어하는 만큼 호칭도 단순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사내들 은 아무 불만도 없는 듯 도검을 꺼내 조기혜와 천인문을 빙 둘러싼다. "오호! 한 판 해 보자 이거지? 기다리던 바다." 천인문은 영웅장을 배우고도 몇 번 써보지도 못한 게 못내 아쉬웠던지 당장 자세를 잡았다. 조기혜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봉황검을 꺼내 든다. 당우양이 그들에게 무슨 소리 를 던지려 할 찰라 영은의 팔이 다시 흔들렸다. 다시 비상하 는 박쥐. "그 쪽에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을 텐데." 머리 쪽으로 빠르게 덥쳐 오는 박쥐. 당우양은 급히 몸을 뒤 집으며 피했다. 그러나 순간 영은의 망토가 하늘로 날은 뒤 그녀의 신형도 번뜩인다. 퍼펑! 막강한 장력이 그녀의 손에서 뿜어졌다. 박쥐의 움직임과 조 화된 절묘한 공격이었다. 선기를 뺏긴 당우양은 선운만변으로 피하기에 급급했다. 뛰어난 경공 만으로 대부분의 대결을 유 리하게 이끌었던 그로서는 이런 공격의 경험이 적었다. '어디서 이런 계집이 나온 거지?' 당우양은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반격을 가할 여유라곤 전 혀 없었다. 그는 풀쩍 물러서며 이세직을 향해 눈을 잠시 돌 렸다. 이미 그도 요라와 손속을 나누고 있었다. 그는 선기를 잡았는지 열심히 밀어붙이고 있었다. 천인문과 조기혜 둘도 서로 협공하며 상대들을 쉽게 상대하고 있는 듯 했다. '좋아. 나만 제대로 밀리지 않으면 되겠군.' 조금만 버티면 되겠다 싶자 그는 공격에 대해서는 생각을 접 고 피하는데만 열중했다. 뛰어난 경공으로 피하는 것만 한다 면 별 무리 없이 버틸 수 있을 듯 했다. "이야옹!" 방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동물, 일묘였다. 박쥐 녀석이 설 치고 다니는 것이 못마땅한지 일묘가 이번에는 아주 빠른 속 도로 등을 덥치는 박쥐에게 달려든다. 박쥐의 매서운 공격에 간간히 위험을 넘기던 당우양은 갑자 기 공세가 약해지자 더욱 빠르게 몸을 놀릴 수 있었다. "호. 아이구 야옹아 고맙다. 내 나중에 생선 한 마리 사 주 마." 일묘를 칭찬하며 그는 빠른 경공을 살려 공격에 나섰다. 그 녀의 주위를 빙빙 맴돌기 시작하던 당우양은 그녀가 조금 혼 란에 빠진 듯 하자 바로 등뒤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손을 곧 추세워 그녀의 요혈을 찔러갔다. 그러나 그녀가 쓰러질 것을 확신했던 당우양은 급히 뒤로 물 러서야 했다. 갑자기 그녀의 머리카락이 길어지는 것을 보았 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길어진 머리칼이 생명이라도 든 듯 하 늘로 나풀거리더니 그의 손을 갈라 들어왔다. 매서운 경풍에 압박감을 느낀 당우양은 간신히 그녀의 공세 를 피했다. 뒤쪽에서 펑 하는 땅 패이는 소리가 울린다. '저건.' 강기를 머금은 듯 땅이 사정없이 패여지는 것을 본 당우양의 머릿속에 한 가지 무공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천발신후공(擅髮神后功)?' 사백 년 전 마교 교주의 부인이던 천발신후가 썼다는 독문 무공. 적운발천강기(積雲髮天 氣)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실제 로는 천발신후공으로 더욱 널리 알려진 이 수법은 모든 것을 사정없이 잘라버리는 무서운 무공이었다. 특히 이런 사물을 알아 볼 수 없는 밤에는 상대를 더욱 위험 하게 하는 무공이기에 무림인 대부분의 기피 대상 일호였다. 이 무공은 마교가 사라진 후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절전 되었다고는 알려지지 않았다. 마교의 뒤를 이은 무황성 에 남아 있다고 대다수는 예상했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무황성 출신인가?' 당우양의 미간이 꿈틀거리는 모습에 영은은 하얀 이빨을 드 러내며 깔깔 웃었다. "갑자기 예상치 못했던 게 나와서 놀랐나? 하지만 이 정도로 놀라선 안 되지. 아직 반도 못 보여 줬는데 말이야." 그녀는 손을 천천히 눈앞으로 들더니 손을 갈구리처럼 세웠 다. "응조수(鷹鳥手)!" 그녀의 외침이 한 차례 들리며 손이 쭉 뻗어 그의 가슴을 노 려왔다. 한 번이라도 걸리면 아작이 날 것 같은 위세다. 당우 양은 급히 피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상황이 반전되는가 싶었 으나 다시 그는 수세에 몰렸다. 세 개의 무기가 머리와 허리 다리를 노리고 들어오자 천인문 은 하얗게 변한 손을 들어 막아갔다. 파팍! 불꽃이 튀며 검, 도가 뒤로 튕겼다. 순간 조기혜의 봉황검이 한 사내의 허리를 냉큼 베어갔다. 사내의 검이 막아가던 순 간 그녀의 검이 십 여개의 환영을 남기며 요혈을 노렸다. 사 내의 표정에 당황한 기운이 흘렀다. 얼굴에 검상이 있던 사내 가 급히 그녀의 검을 막아갔으나 보고만 있을 천인문이 아니 었다. "호연지기(浩然之氣)!" 두 손이 합장하듯 모였다가 같이 앞으로 뻗어나가 텅 빈 옆 구리에 사정없이 박혔다. 사내의 손에서 도가 땅으로 떨어지 고 퍼렇게 안색이 변한 사내는 울컥 피를 토하더니 스르르 쓰 러졌다. 사내 하나가 떨어지니 두 사내는 더 이상 그들의 상대가 되 지 않았다. "위풍당당(威風堂堂)!" 천인문의 소리가 터져 나오자 사내 하나는 갑자기 온 몸이 거미줄에 묶인 듯 압박감을 느꼈다. 발이 땅에 붙어 버린 듯 구속감이 대단했다. 천인문의 흰 손이 번뜩이며 그의 복부를 노리고 날아왔지만 사내는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었다. "컥!" 피를 입가로 흘리던 사내는 천천히 넘어갔다. 남은 사내는 하나였다. 천인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사내와 아직 검을 나 누고 있던 조기혜를 바라보았다. "헤헤! 아직 멀었나 보네. 이젠 확실히 누나보다 내가 더 세 졌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아." "흥! 인정할 수 없어. 이런 것은 내가 한 수만 쓰면......" '이런 것'이 되어 버린 남은 사내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으 나 이미 침착함을 잃어버린 탓인지 발놀림이 영민하지 못했다 . 그녀의 검이 마치 사설(蛇舌)처럼 흐느러져 사내의 미간을 노렸다. 사내는 퍼렇게 변하니더 뒤로 풀쩍 뛰어 피했다. 그 러나 뒤에는 천인문이 있었다. 등판을 무방비로 노출한 사내 가 자기 앞으로 날아오자 천인문은 손을 휘돌리며 오른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심기일전(心機一轉)!" 뒤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사내는 급히 몸을 뒤집었으나 그렇 다고 천인문의 수를 피할 수 없었다. 등판을 그대로 맞아버린 후 사내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봐! 내가 세 명을 다 쓰러트렸다고. 누나보다 훨씬 세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저 녀석은 내가 다 쓰러트린 거나 마찬가지였어." "그래 누나도 세다고 인정할게. 하지만 세 명은 내가 쓰러트 렸어. 내가 누나보다 조금 더 세다는 거야. 나도 인정했으니 누나도 인정해 줘." "그럴 수 없어. 내가 쓰러트린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녀는 펄쩍 자리에서 뛰며 화를 냈다. 천인문은 그런 그녀 를 상대하지 않고 이세직과 당우양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쪽이 가볍게 적을 상대했던 것과는 달리 둘의 상태는 그렇 게 좋지 못했다. 눈을 감고 싸우는 이세직. 위급해 보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이길 것 같지도 않다. 또 피하기에 급급한 당우양은 언제 패 퇴할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이다. '당 할아버지부터 도와드려야겠군.' 천인문은 선운만변을 펼쳐 그녀의 등뒤로 소리없이 다가갔다 . 일 장여를 남겨두고 몸을 세운 후 손을 하늘로 쳐들었다. "호기충천(浩氣衝天)!" 가슴쪽 요혈을 공격하는 초식이었으나 천인문은 상관치 않고 그녀의 등을 향해 손을 내질렀다. 갑자기 끼익 하는 괴음이 터졌다. 그녀는 잠시 흠칫 하더니 머리를 한 번 휘익 돌렸다. "문아! 조심해라." 당우양의 목소리가 들리기가 무섭게 쉬익 하는 세찬 소리가 왼쪽에서 들려왔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것이 그의 신형을 노 리고 날아들고 있었다. 천인문은 천옥신수로 두 손을 하얗게 변화시킨 후 무언가를 막아갔다. 깡! 불꽃이 튀며 어두운 사방이 환하게 비쳤다. 막강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천인문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아야! 이게 뭐야." 눈을 하늘로 치켜 올리며 인상을 쓰던 천인문은 천천히 손을 살폈다. 어떤 무기라도 다 막는다는 천옥신수 답게 그 무언 가를 막아내긴 했었지만 그렇다고 손도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 오히려 채찍에 맞은 것처럼 붉은 자국이 또렷하게 남았다. 동그래진 천인문의 눈이 앞으로 들렸다. 그의 앞에 서 있던 그녀의 눈도 커져 있었다. 두 손으로 머 리칼을 막을 때부터 손을 잘라버릴 거라 생각했던 영은. 그러 나 예상과는 달리 손에 겨우 흔적만을 남기고 말 줄이야. "야 이 계집애야. 너 뭘로 공격했어? 그게 뭔데 내 손에 상 처를 남기는 거야?" 천인문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보검이라 할 수 있는 조기혜의 검도 멀쩡하게 막아낸 두 손이 이렇게 달아오를 줄은 전혀 몰랐기에. 천인문의 질문이 끝날 때 쯤 뒤에서 환하게 밝아오기 시작했 다. 조기혜가 등롱을 켠 것이다. 등불 하나로 사방을 밝히기 엔 무리였지만 그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무언가가 하늘에서 휘휘 떠다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으응? 저......저건." 천인문의 눈이 더욱 커졌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마치 살 아있는 것처럼 공중을 유영하고 있는 게 잡힌 것이다. "문아! 저건 천발신후공이다. 걸리는 것은 모두 잘라버리는 무서운 무공이니 조심해라." 한 숨 겨우 돌린 당우양이 천인문에게 외쳤다. "다 잘라 버린다고요? 내 손은 안 잘렸는데......" 두 손이 벌겋게 달아오르긴 했지만 큰 상처가 아니란 느낌에 천인문은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고개를 들며 자신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내 손도 못 자르는 무공이 무슨...... 이제 넌 끝났다고 복 창해라." 승리의 확신이 담긴 미소를 띄며 앞으로 한 발짝 걸음을 내 밀었다. 그러나 그녀는 놀라기는커녕 더욱 차가운 미소를 지 을 뿐이었다. "끝났다라...... 오히려 끝난 것은 너 같은데." 그녀의 말이 끝나자 그녀의 모발이 하늘로 뻣뻣하게 치솟았 다. 그러더니 천인문을 향해 구부러졌다. 갑자기 무엇을 느낀 것일까. 당우양의 얼굴이 다급함으로 물 들었다. "빨리 피햇."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 그녀의 머리에서 무언가 파팍 하고 튀어 나갔다. 머리카락 몇 개가 암기처럼 천인문의 요혈을 노 리고 든 것이다. 천인문은 눈을 질끔 감고는 두 손을 앞으로 내치며 휘돌렸다 . "무소불위(無所不爲)!" 앞에서 날아드는 모든 공격을 막아내는 수비형 초식답게 수 십 개가 넘는 머리카락은 투명한 손에 틀어 막히며 땅으로 떨 어졌다. 그러나 몇 개의 머리카락은 그 세찬 손의 장막을 헤 치고 천인문의 몸에 틀어박혀 버렸다. 가는 머리카락이지만 그 안에 든 공력은 막강했는지 천인문의 신형이 공중에 떠오 른 뒤 나가 떨어진다. "문아!" 뒤에 서 있던 조기혜와 쉬고 있던 당우양이 급하게 달려들어 땅으로 쳐박을 듯 하던 천인문을 받아냈다. 등롱을 들이대고 천인문의 상세를 살피던 조기혜는 그제야 안도의 한 숨을 내 쉴 수 있었다. 다행이 요혈에 박힌 것은 없었던 것이다. "이 계집. 내가 목을 베어 주마." 조심스럽게 당우양에게 천인문을 넘긴 조기혜가 검을 뽑아들 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쓰러져 있던 세 사내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급히 한 소리를 외쳐대며 뒤로 물러섰다. "요라야. 더 싸울 것 없다. 당장 피해." 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선수를 잡아가고 있던 요라라는 여인 은 그녀의 말을 듣기가 무섭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타고 왔던 말 위로 풀쩍 뛰어 올라 이미 기다리고 있던 영은과 함 께 말을 몰아 도망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동생이라 하더라도 갑자기 피하자 는 말 한마디에 저 렇게 망설이지 않고 피할 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행들은 그 저 멍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평생 도망만 다니던 사람들 같구먼. 어떻게 저렇게 피할 수 있지?" "흥! 그런다고 놔 둘 줄 알아요? 쫓아가서 아작을 내 버릴 거에요. 일묘 그만 이쪽으로 와." 박쥐와 싸우다 갑자기 박쥐도 사라지자 멍하게 있던 일묘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의 어깨 위로 올라 탄다. 말을 끌 고 오기 위해 급하게 숲으로 달려가던 그녀의 발을 잡는 목소 리가 들렸다. "쫒아가 보았자 소용없어." "왜요? 어르신들만 도와 주시면 충분히 잡을 수 있어요." "위험해. 아까 못 보았느냐? 머리칼이 암기로 쓰이는 것. 그 리고 또 그것만 있다고 생각하냐? 저런 무공엔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은 한 수가 남아 있다고. 우리가 쫓아 간다 해도 확실 히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기껏해야 양패구상(兩敗 俱傷)할 뿐이다. 그리고 문이는 다치지 않았느냐? 빨리 상처 를 치료해야지." "그, 그렇군요." 그녀는 인정하듯이 고개를 끄덕인 후 천인문의 옆으로 다가 왔다. 이미 이세직이 그의 상처를 살피고 있었다. 머리칼을 다 뽑아낸 이세직이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독 같은 것은 없고, 위험한 혈에 찔린 것도 아니네. 한 이 틀 정도 요양하면 가뿐히 일어나겠어." 눈을 감고 있던 천인문의 눈이 떠졌다. "이거 엄청 따갑네. 어떻게 머리카락이......" 상처에 가져가는 손을 이세직이 급히 잡았다. "만지지 마라. 만졌다간 균에 감염된다. 일단 기다려 봐라." 이세직은 급히 짐을 뒤져 흰 천을 꺼내 상처를 싸매기 시작 했다. 팔과 다리 등을 천으로 묶고 난 후 그들은 천인문을 숲 으로 옮겼다. "제길. 이렇게 노숙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 았는데 말이야." "그래도 할 수 없지. 모기 때문에 오늘은 고생이 좀 심하겠 지만 움직여서 상처가 덧나는 것보단 낫지." 불만을 내뱉은 당우양의 어깨를 툭툭 쳐 준 이세직은 잠을 자고 있는 천인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조기혜를 조용히 응시 했다. "자네도 그만 자게. 불침번은 내가 볼 테니." 뒤에서 당우양이 조용히 말하자 이세직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나부터 자겠네. 나중에 깨우게." "잘 자게나." 둘은 인사를 한 뒤에 헤어졌다. 이세직이 바닥에 깐 낙엽 위 로 몸을 뉘자 숲 속 나뭇가지 위로 반짝이는 별이 그의 눈으 로 쏘아져 내렸다. 하나 둘...... 별을 세던 그의 눈이 스르르 감겨 내렸다. 휘익! 숲은 다시 적막에 잠기고 사방은 곤충들의 합창으로 뒤덥혀 버렸다. 술시가 다 될 무렵 사방은 어스름에 잠긴 하늘은 반짝이는 별들이 수를 놓기 시작했다. 작열하던 태양에 달아올랐던 땅 은 식지도 않고 아직까지 열기를 후끈 내뿜고 있었건만 소주 의 거리는 어디선가 밀려나온 사람들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 었다. 홍등가의 밤거리는 포주들의 손님 유치 열기로 뜨거워지고 있었다. 아직 밤이 깊지 않았기에 이런 곳을 찾는 것은 이른 느낌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 뿐. 하나 둘씩 술에 절 은 사내들이 휘청대며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 사람들을 포주 는 결코 용서치 않았다. 은근슬쩍 다가가 무슨 이야기라도 할 라치면 술 취한 사내들은 더 망설일 것도 없이 포주들의 뒤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성미 급한 사내는 오히려 포주 를 잡아끌며 앞장서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곳이 이렇게 흥청망청 하지는 않았다. 아니 실 제로 이런 곳은 이 할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런 곳은 돈 많은 사내들이나 찾을 수 있는 곳이다. 한 번 들어오는데만도 무 려 은자 열 냥은 족히 내야 할 곳이기에 아무나 발을 들여놓 을 수는 없는 곳이다. 대다수의 평민들은 그저 가볍게 술 한 잔하고 소주를 가로지르는 뻥 뚫린 중앙 관도 위에서 시원한 밤바람을 쐬는 것으로 만족하는 편이다. 마차 네 대가 동시에 달려도 무난한 그 큰 길 옆으로 상당수 의 사내들이 대 자로 퍼져 앉아 있다. 여름철에는 항상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워낙 덥다 보니 관에서도 이해하며 상관을 하지 않았다. 해시 무렵이 되자 서문의 수문장이 문을 닫기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소주는 통하는 길이 많다 보니 아주 늦은 시 간에 문을 닫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두 성내로 들어왔는 지 이제 서문을 통해 드나드는 사람들은 거의 찾을 수 없었다 . 막 문을 밀어붙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늘그막한 목소리가 귓가로 들렸다. "잠깐만 기다려 주쇼." "누구......?" 수문장은 귀에 익은 목소리에 문을 닫다 말고 고개를 내밀었 다. 그러자 한 거렁뱅이가 눈에 잡혔다. "이게 누구야? 삼웅이 아냐?" 소주의 외곽에 자리한 관제묘를 차지한 개방의 분타주의 오 른팔 노릇을 하는 거지인 삼웅을 잘 알고 있는 수문장이 기쁘 게 그를 반겼다. "이런 밤에 무슨 일이야?" "잠깐 급한 일이 있어서 들어가려고." "일?" 밤이 되면 거의 드나들 일이 없는 사람들 중 하나가 거지다. 이미 밥이니 뭐니 필요한 것들은 낮 시간 동안 해결해 두기 때문이다. 수문장은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그의 머리로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는 더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문을 살짝 밀어 삼웅을 안으로 들였다. "뭔 일인지는 모르지만 일 잘 보게. 아차 사고 치지 말라는 건 말 안 해도 되겠지?" "걱정 말게. 내가 안에서 사고치는 것 본 적 있나?" 삼웅이 빙긋 웃음을 짓고는 바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바쁘게 걸음을 놀렸다. 크고 널찍한 길을 바쁘게 걸어가던 그가 도착한 곳은 소주의 제일부자라 알려진 담대인의 저택이 었다. 쾅쾅쾅! 머리통만한 주먹이 문짝을 두드리자 엄청난 소리가 울려퍼졌 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람의 발소리가 문가로 들려왔다. "아씨! 이 밤에 누구야? 오려면 내일 오지." 잠을 자다 일어났는지 투덜거리는 목소리다. "누구요?" 문이 열리고 한 늙지도 젊지도 않은 중년인이 고개를 내밀었 다. 삼웅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에게 물었다. "여기 백운호라는 분 안 계신지요?" 중년인은 잠시 고민을 하던 것 같더니 일단 문을 열어 주며 삼웅을 안으로 들였다. "기다려 보쇼. 근데 뭔 일이오?" "그 분이 찾던 사람에 관해서 전해 드릴 게 있어서라고 말씀 드려 주시겠습니까?" 삼웅의 말투는 아주 공손했다. 삼웅은 개방에 속한 인물임에 도 무공을 배우지는 않았다. 무공을 배웠다 하더라도 소주의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는 담대인의 집에 와서 말을 막 내뱉을 수는 없었다. 삼웅의 말을 듣고는 중년인이 몸을 돌려 사라져갔다. 먼 산 바라보듯 멀뚱히 서 있는 삼웅. 한참이 지나자 안쪽에서 급한 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중년인과 한 백발의 사내가 급 히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찾았다고? 그게 정말이냐?" 그의 우렁찬 목소리에 질려 버린 삼웅은 아무 말도 못하고 급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자세히 설명을 해야 할 것 아니냐. 그리고 먹을 것하고 마실 것 좀 내 주겠소? 부탁하오." 백운호는 삼웅의 어깨를 움켜쥐고 안으로 들어가며 중년인에 게 부탁을 던졌다. 둘이 사라지자 중년인도 귀찮은 표정으로 다시 요리사를 부르기 위해 몸을 돌려 나갔다. -93- "그게 정말이에요?" 사방이 어둠에 잠든 시각. 환하게 켜진 방안에서 앙칼진 목 소리가 터져 나왔다. 벌떡 일어서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단목 수령의 눈이 아래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묵묵히 앉아 있 지만 더욱 상기된 표정으로 백운호를 주시하는 서혜령이 보였 다. 밤 깊은 시각. 갑자기 부르는 백운호의 전갈에 가벼운 차림 으로 그의 방을 찾은 그녀들은 생각지도 않았던 천인문의 소 식을 듣자 마음이 조급해지는 느낌이었다. "일단 앉아 봐라. 아직 할 말이 더 있단 말이다." 무언가 캥기는 것이 있는지 백운호의 표정이 그렇게 밝지는 않았다. 이상한 느낌이 드는 단목 수령. 급히 자리에 앉으며 무언의 압력을 가했다. 따가운 시선에 안절부절 못하던 백운호는 결정을 내렸는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야.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단 말이지." "그,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사부(師夫)님. 분명 지금 문이 녀석이라고 했잖아요?" 서혜령 대신 단목 수령이 급하게 닦달했다. "확실한 게 아니라고. 분명 생긴 것은 비슷, 아니 거의 똑같 이 생겼다고 하던데 키나 몸이 달라. 헤어질 때만 해도 겨우 오 척이 겨우 넘었을 녀석인데 지금은 육 척에 가깝다는데." "에이! 그거야 뭐 축골공 때문이겠죠. 그거 풀면 그 정도 될 걸요." 그러나 듣고 있던 옥조영과 서혜령의 표정을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축골공을 푼다고 하더라도 키가 더 커 질 수는 없는 노릇. 무언가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든 단목 수령 은 조용히 입을 닫고 백운호의 말을 기다렸다. "개방에서 찾아 낸 사람 중에 문이처럼 생긴 사람은 이 사람 말고는 없다고 하더구만. 일단 확실한 게 아니란 말 무슨 뜻 인지 알겠지?" 백운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혜령이 자리에서 벌떡 일 어섰다. "언니! 어디 가려고......" 단목 수령이 급히 그녀를 잡았다. 서혜령은 고개를 돌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가야죠. 빨리 준비해서 갈 거에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문을 나섰다. 너무도 서두르는 그녀의 모습에 잠시 어리둥절 해 있던 단목 수령도 그녀를 뒤 따라 방을 나선다. "만약 아니라면 어쩌죠?"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있던 여미릉이 조용히 물었다.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안 가볼 수도 없잖아. 일 단 무조건 나가고 보는 거야. 여긴 더 이상 머물기 싫단 말이 야." 한 달이 넘도록 한 곳에, 그것도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도시 에서 머무는 것이 얼마나 고역이었던지 백운호는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성문을 닫았을 텐데." "경공 놔두었다가 어디 써 먹으려고? 당장 나가는 거야. 옥 형 생각은 어떻소?" 자기의 말에 힘을 받고 싶은지 옥조영을 흘깃 한 번 바라보 며 묻는다. 옥조영도 찬성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그럼 나도 준비해서 오겠소." 옥조영도 자리에서 일어서며 방을 나섰다. 백운호도 급하게 짐을 꾸리러 서둘렀다. 혼자 남은 여미릉은 가만히 앉아 있다 무언가 생각났는지 붓을 들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몇 줄 휘갈긴 후에 붓을 내려놓은 그녀는 종이를 반으로 접 어 탁자 위에 올려둔 후 방을 나서는 백운호를 따라 나섰다. 이미 밖에는 서혜령과 옥조영이 준비를 마쳤는지 기다리고 있 었다. 조금 후 단목 수령도 헐레벌떡 달려왔다. "자! 이제 가자고." 일행이 다 모이자 백운호가 앞장서서 담을 뛰넘는다. 단목 수령은 여미릉의 도움을 받으며 담 너머로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날은 어김없이 밝아왔다. 하인들이 분주히 움 직이는 것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으나 어딘지 조금 서두르 는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어제 새벽 무렵 손님이 찾아 든 관 계로 그들의 발놀림이 바빠진 것이다. 불평 같은 것은 있을 리 없었다. 무슨 이유로 찾아오는지, 왜 꼭 올 때마다 새벽에 들어오는 것인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이 손님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그들도 잘 알았다. 처 음 그가 방문했을 때 불만을 토로했던 하인 하나가 치도곤을 당했던 그 쓰라린 기억이 아직도 뚜렷한 그들이다. 항상 새벽에 왔다가 새벽에 돌아가는 손님. 그러나 오늘은 이상하게 날이 밝았는데도 아직 갈 것 같은 느낌이 없다. 뭔 가 이상하네 하면서 고개를 갸웃대는 그들의 귀로 담대인의 식사를 준비하라는 말이 들려 왔다. 얼마 후 두 하녀가 푸짐하게 차려진 상을 들고 방안으로 들 어갔다가 빈손으로 나왔다. 담대인의 수수하면서도 정갈한 방안에는 두 사내가 마주보고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 방의 주인인 담대인과 멋있게 생긴 삼십대 중년인이다. 바로 백재홍이었다. "방대인은 그쪽으로 가셨다지요?" 백재홍이 담대인을 주시하며 물었다. 상인이라 그런지 정보 가 빠르다는 생각을 하며 담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삼 일 전에 나갔지요." "방효겸 대인이야 누구보다 머리가 뛰어난 자이니 믿고 맡길 수 있겠지요." "하하하! 당연한 말씀이오.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요. 십 수일이 지나면 아마 좋은 소식이 날아올 게 분명하오." "폐하께선 안녕하신지요?" "요즘 들어 조금 활기를 되찾으시는 듯 하오이다. 이래저래 기쁜 일만 가득한 것 같으니 이 늙은이도 기분이 하늘을 날아 갈 듯 하구려." "대인께서 좋으시다니 이 백모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 갑자기 무슨 말을 하려는지 백재홍이 머뭇거렸다. 담대인은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묻지는 않았 다. 물어보지 않아도 분명 말을 할 게 뻔했다. 지금까지 그래 왔으므로. 생각대로 잠시 후 그의 입이 열렸다. "문제가 생겼소." "......?" "시독학사(侍讀學士) 해진(解縉)에게 연락이 되지 않고 있소 ." 그 말에 담대인은 조금 난처하다는 듯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헛기침을 해댔다. 무언가 알고 있다는 것 같은 표정에 이번 에는 말문을 연 백재홍에게 궁금증이 생겼다. "흠흠! 해진은 이미 끝났다고 봐도 무방할 거요." "끝나다니요? 아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징조 같은 게 느껴지지도 않았는데......" 그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 은 당연했다. 담대인도 그런 징후를 전혀 느끼지 못했었다. 시독학사가 군병력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주 미미한 부분 들뿐이다. 당연히 그 정도로는 특별히 잡아넣을 만한 증거를 찾아내기도 어렵다. "나도 모르겠소. 갑자기 잡혀 들어갔다고 세작들이 연락을 해 온 거요." "잡혀 들어가다니요? 무슨 극비 정보라도 빼내던 중이었습니 까?" 백재홍은 콧등을 찡그렸다. 남해 원정단이 도달할 시점은 얼 마 남지 않았다. 그만큼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군 력의 이동 같은 것은 거의 천금과도 바꿀만한 정보다. 그러나 이런 정보가 흘러 다니는 곳은 저 위쪽의 높으신 분들이 사 는 곳이다. 빼 내올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시독학사라 해도 그 정보를 쉽게 구할 수는 없다. 아니 더욱 어렵다고 보아야한다.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이 군력의 극비 정보를 꺼낸다면 더욱 의심을 받을 수 있다. "정보를 꺼내다 들킨 것이 아니오. 나도 확실하게는 모르겠 지만 역적의 무리와 연관이 된 사건에 연루 된 것 같소." "역적?" 역적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영락제의 입장에서 본다 면 자기들은 모두 역적이다. 영락제의 황위를 노리는 사람들 이므로.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옴짝달 싹 할 수 없는 증거가 해진의 입에서 나온다면 그들은 일을 시작해 보기도 전에 이미 끝나게 될 것이다. 백재홍의 얼굴은 삽시간에 하얗게 물들어갔다. 건문제에 대 한 충성? 솔직히 그에게 그런 아무 감흥도 주지 못하는 단어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 은 돈이었다. 이미 쓴 돈만 해도 수십 만냥에 가깝다. 그런데 어떤 수확도 얻지 못한 채 끝나 버린다면 손해도 이만저만한 손해가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담대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를 다시 밝아지 게 하기에 충분했다. "방대인은 떠나기 전에 이번 일이 우리 쪽에 신경이 쏠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며 잘 된 일이라 했소." "그......럼?" "일단 그 역적 무리라는 게 우리는 아닌 듯 하오. 뭐 그 연 왕 녀석이야 마음에 들지 않는 쪽은 그냥 역적이란 명목으로 목을 베어 버릴 녀석이오." 다시 안색이 돌아온 백재홍은 긴장으로 인해 목이 매었던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마셨다. 그런 후 찻잔을 내려놓고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그렇군요. 우리는 아니었다 이 말이군요." 그 때 즈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담대인은 인상을 찌 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분명 이 사람이 있을 땐 아무도 접근시키지 말라 했거늘... ...' 잠시 얼굴에 노여움이 솟아올랐으나 그는 백재홍의 앞에서 화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표정을 바꾸었다. "무슨 일이냐?" 그가 물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그 아가씨 일행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가씨?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담대인은 화들짝 놀라며 자 리에서 일어섰다. "뭐라? 없어지다니?" 문으로 달려간 그의 손이 문을 세차게 열어 제쳤다. 조금 조 바심이 나서 몸을 움찔거리는 하녀 하나가 흠칫 놀랐다. 그러 다 곱게 접은 종이 하나를 조심스럽게 앞으로 내밀었다. 담대인은 묵묵히 종이를 바라보다 낚아채듯 뺏은 뒤 문을 닫 았다. 종이를 두 손으로 펼치자 부드러운 글씨체가 눈에 들어 왔다. - 갑자기 인사도 못 드리고 이렇게 떠나게 되어 송구한 마음 금할 수 없군요. 다음에 뵙게 되면 이 불공을 사죄하도록 하 겠습니다. - 담대인은 종이를 왈칵 움켜쥐었다. "이......이럴 순 없는데." 일행을 찾아 떠나간다니? 그렇다는 것은 건문제가 마음에 두 고 있는 여인도 같이 떠나갔다는 말이 아닌가? '무엇 때문에 한 달이 넘도록 그들을 잡아 둔 것인데.'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가 이렇게 발생하자 담대인은 머 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요즘들어 건문제가 조금씩 활기 를 띄는 것이 그 여인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던 담대인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여인과 건문제를 이어주고 싶었다. 워낙 소 극적이다 보니 그 여자를 보기만 하면 도망가고 낯을 붉히긴 했지만 그래도 분명 과거와는 달라지고 있었다. 뭐라고 말하 긴 어렵지만 삶에 대한 생기가 돌아온다는 느낌, 그런 것이 그에게 느껴졌다. 그는 잠시 머리를 굴리다 문을 벌컥 열어 송집사를 불렀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송집사는 귓속말로 무슨 말을 전해 듣고 는 바로 도망치듯 달려갔다. 다시 문을 닫고는 백재홍의 맞은 자리에 앉는 담대인. "무슨 일이라도......?" "아, 아니요. 그냥 계시던 손님들께서 잠시 어디를 가셨다는 군요. 백대인께서 신경 쓰실 것은 없소이다. 자자! 이러다 식 사가 식겠소. 어서 드시구료." 별일 아니라는 듯 담대인은 이미 식어가는 요리들을 내밀며 식사를 종용했다. 백재홍은 궁금한 표정이었으나 더 이상 묻 지 않고 담담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그 무렵 집을 나온 옥조영 일행은 한참 북쪽으로 난 관도 위 를 따라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워낙 급한 관계로 말을 사지 않고 소주를 벗어난 것이다. 솔직히 말을 타고 가는 것 이 더 빠르다 할 순 없지만 오랜 시간 지치지 않고 계속 나갈 수 있으므로 장거리 여행엔 필수 조건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을 살 시간마저도 아쉬운 것이 그들의 입 장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 서혜령에게만 그랬다. 서글서글 한 봉목이 시퍼런 열기로 활활 타오르는 것이 마치 이 일에 목숨을 건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 누가 함부로 딴 소리를 하 겠는가. 나이, 신분 이런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저 조 용하게 그녀와 동행할 뿐이다. 처음에는 신법 실력이라도 알아 볼 양인지 엄청난 속도로 달 려가던 그들이다. 그러나 그것도 한 시진이 넘어가면서부터 지쳐가기 시작한 단목 수령을 필두로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고 지금은 걷는 지경까지 달했다. 그렇지만 걷는다 해도 결코 느긋한 여행객의 그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점점 정오를 향해 달려가자 뜨거운 햇살에 일행들은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했다. 이미 단목 수령은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파김치가 된 상태였다. "좀 쉬었다 가요. 이러다간 나부터 죽겠어요." 우는 소리를 아직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단목 수령이 작은 목 소리로 외쳤다. 앞만 보고 가던 서혜령이 고개를 돌리더니 미 안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열중한 나머지 다른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미......미안해요 아가씨! 사부님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만." "우리야 괜찮으니 신경 쓸 것 없다. 그런데 수령이가 조금 힘들어 하는 것 같구나. 일단 조금 쉬었다 가야겠다." 단목 수령을 보고 있던 여미릉이 주위를 살피더니 쉴만한 곳 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땅히 쉴 곳은 눈에 띄지 않았다. 여름 철 땡볕 밑에서 함부로 쉴 수는 없는 노릇. 그들은 다 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쉴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저기 저기가 좋아요. 저기서 쉬어요." 가장 피곤해하던 단목 수령이 손짓을 했다. 봄철 수확을 끝 낸 보리 볏단을 세워 그늘이 진 곳이다. 일행 다섯이 쉬기엔 조금 작은 느낌이었으나 없는 것보다는 좋았기에 아무도 불평 하지 않고 그쪽으로 갔다. "히유. 이제 좀 쉬는가 보군. 말은 안 했지만 죽는 줄 알았 네."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백운호가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훔 치며 한숨을 쉰다. 그러다 무언가 이상한지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 손뼉을 치며 안타까워했다. "왜요? 뭔가 잘못 된 거라도 있나요?" "내 제자 녀석을 그냥 두고 왔잖아. 으아악!" 그제야 유운기와 우문교가 아직 그 곳에 남아 있음을 알아차 린 일행들이다. 워낙 서둘러 떠난 탓에 아무도 연락을 할 생 각을 못했던 것이다. "흥! 유사형 같은 경우엔 뭐 그렇다 쳐도 그 광협 녀석 떨구 고 온 것은 정말 마음에 드네요." 볏단에 기대 땀을 식히던 단목 수령이 입술을 이죽거렸다. 매일 보았다 하면 싸우기만 하는 관계로 특별한 일이 없으면 아예 보지를 않는 것이 나았다. 단목 수령의 옆에 앉은 서혜 령도 인정한다는 듯 미약하게 머리를 끄덕인다. "저도 아가씨 생각하고 같아요. 그 사람이 상공을 보면 그 검은 말을 돌려 달라고 그럴 텐데, 그럴 바엔 같이 가지 않는 게 제일 좋죠." 말을 하긴 했지만 부끄러운지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잠시 동안 이야기를 주고받던 그들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 누런 황토길을 다시 바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94- 휘이익! 갈색과 푸른색이 멋들어지게 조화된 갈대밭은 바람에 휘날리 며 아름다운 음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양산 포구에서 오 리 정도 떨어진 이곳은 수로에서 다시 갈라져 나온 작은 물길이 뻗어 나온 줄기의 하나였다. 적당한 이름은 붙지 않았지만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지룡천(地龍川)이라 불렀다. 물길 이 마치 지렁이가 기어간 것처럼 꾸불꾸불하여 붙은 이름이다. 논답에 물을 대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든 것이라 그 런지 조잡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크기는 상당했다. 폭은 무려 사 장이 넘고 깊이만도 삼 장에 달할 정도였기에 작은 배들 은 쉽게 드나들 수 있다. 그래서 할 일 없는 사람들은 나무로 만든 배를 띄우며 고기도 잡았다. 갈대밭 뒤로는 아담하고 작은 야산 하나가 우거진 숲을 만들 고 있다. 무성하게 우거진 나무숲이었지만 통풍이 잘 되는 관 계로 마을 사람들이 더운 여름나절을 보내는 곳이다. 그러나 지금 그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마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적색 옷으로 온 몸을 휘감은 백 여명의 사내들과 흑색 경장 을 입은 삼십의 사내들이 조용히 앉아 있다. 사방은 살기로 온통 뒤덥힌 듯 하다. 일반인이라면 한 순간도 버티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들이 둘러앉은 중앙에 두 명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희욱 과 금영악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항상 무황성의 주력을 끌 고 나서는 것은 희욱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돕는 것은 금영악의 몫이었다. 희욱이 항상 앞에서는 것은 사기 진작이라는 면도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내부의 반대 세력에 대해서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비록 그것을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이번에 같이 나온 곳은 아수라파천대(阿修羅破天隊)와 검마 당(劒魔堂)이었다. 무황성 개편시 대다수의 단을 내당 당주 직속으로 바꾸었으나 아수라파천대와 검마당은 성주 직속 기 관이다. 전투 무력 단체는 성주가 직접 관리하는 것이 조직 유지와 관리에 편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이곳에 온 것은 이틀 전이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조 공선이 통과할 곳이 이 수로쪽일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들은 미리 선수를 치기 위해 이곳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 다. "왜 그 아이가 오지 않는 거지?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조용히 앉아 있던 희욱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옆에 있던 대머리의 금영악이 따라 일어서 며 그를 주시했다. "네 녀석이 그 아이를 너무 과잉보호 하니까 그렇지. 오랜만 에 나왔을 때 뿌리를 뽑아 보자 하고 노는 게 아닌가?" "아니! 내가 아무리 그 아이를 심하게 보호했다 치더라도 그 건 사랑 때문이지. 그리고 그 아이가 아무리 천방지축이라도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고 있어. 함부로 약속을 어기고 놀 애는 아니란 말이야." "별 일이야 있겠어? 그 아이들 건들일 애들이 어디 있겠어. 그 애들이 건들이면 건들이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금영악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 고는 뒤로 돌아 등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두 사내를 바라본다 . 아수라파천대의 대주인 소위무(素威武)와 검마당의 당주 우 소(牛小)였다. 이미 기다리고 있었는지 금영악이 그들을 바라 보자 소위무가 앞으로 나섰다. "원정군이 이미 수로 앞쪽에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수로 앞에? 정확한 위치를 말해. 수로 안으로 들어 온 거야 ? 아니면 수문 앞에 있는 거냐?" "소식으로는 수문 앞이라고 들었습니다." "수문 앞이라...... 언제 들어온 소식이지?" "반 시진 전에 들어왔습니다." "반 시진이라...... 그럼 이미 수로 안으로 통과해 들어 왔 을 수도 있겠군." 금영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리자 이번에는 듣고 있던 우소가 나선다. "그렇다고 보기엔 조금 무리가 있습니다." "무슨 말이지?" 입이 무겁기로 소문난 우소가 입을 열자 금영악은 조금 신기 한 듯이 바라본다. 확신이 서지 않을 때는 전혀 말하지 않는 우소였다. 그렇다 보니 하루에 열 마디를 하지 않을 때도 있 었다. "나쁜 소식입니다만 지금 원정단에 정파 세력이 올라타는 것 이 목격되었습니다. 수는 많지 않지만 모두 절정의 고수들뿐 인 듯 싶습니다. 무당의 천양자와 개방의 불수개가 목격 되었 다 합니다." 한번에 한 말 중 가장 긴 말이 끝나고 그가 뒤로 물러서자 금영악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희욱의 옆에 섰다. "문제가 생겼어." "뭐지?" "정파 녀석들이 배에 올라탄 모양이야." "나쁜 소식이군. 하지만 우리에겐 자네가 있잖은가? 난 자네 를 믿네." 말은 나쁘다 했지만 표정에는 전혀 그런 느낌이 묻어나지 않 았다. 오히려 흥분과 설레임이 잔뜩 묻어나고 있었다. '천상 이 친구도 무인이구만.' 그는 잠시 비릿한 웃음을 짓다 몸을 돌렸다. "자네는 무조건 날 믿는군. 할 수 없지. 자네가 날 그렇게 믿는데 나도 자네의 믿음에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난 좀 생각이나 해 볼테니 자네는 자네 할 일이나 하게."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금영악을 잠시 보고 있던 희욱은 천천 히 몸을 돌려 야산으로 올라오는 길이 보이는 곳까지 나아갔 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그의 표정엔 초조함이 잔뜩 배어 있었다. 한참 동안 그렇게 서서 서성거리던 그의 눈에 광채가 떠올랐 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두 필의 말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모습을 드러냈다. 뽀얀 먼 지가 가라앉고 말 위에서 두 사람이 뛰어 내렸다. "어서 오너라." "아빠!" 영은과 요라였다. 그녀들은 말에서 뛰어 내리자마자 바로 폴 짝 뛰어 그의 품에 쏙 안겨왔다. "왜 이렇게 늦은 게냐? 혹시 놀다 온 건 아니겠지?"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으름장을 놓는 희욱. 그러나 영은은 별로 무섭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실례로 혀까지 내밀며 딴청을 부린다. "놀긴요. 그냥 편하게 온 것 뿐인데." "그래그래. 논 건 아니고 그냥 편하게 온 거겠지?" 다 안다는 투로 고개를 돌리는 희욱의 양옆에 찰싹 들러붙은 두 여인과 잠시 인사를 나누던 희욱은 그녀들과 함께 금영악 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미 생각을 정리했는지 금영악은 환한 표정으로 그들을 환대했다. "어서 오너라. 너희들이 늦어서 너희 아버지가 얼마나 걱정 했는지 아느냐? 보고 있기가 너무 딱해 보였다." 금영악은 가볍게 그녀들을 꾸중했다. 영은과 요라는 희욱의 딸이다. 비록 수양딸이긴 했지만 그 사랑은 친딸에 결코 떨어지지 않을 정도다. 희욱의 유일한 친 우라 할 수 있는 금영악이 꾸중을 던져도 그녀들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기에 여전히 싱글벙글 미소만 지었다. "너희들은 좀 쉬고 있어라. 그리고 자네는 날 좀 보세." 금영악은 둘을 떨어낸 후 희욱과 함께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슨 일인데 아이들까지 보내는가?" 아무리 비밀이 있다 쳐도 아이들까지 보낸 적은 거의 없었던 관계로 희욱은 상당히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중요해야만 그 아이들하고 같이 이야기 못하는 건 아니 잖은가. 일단 그것은 그렇다치고 일단 이것부터 이야기하세." "그래 말해 보게." "우리가 정보를 흘려 보내긴 했는데 실제로 많이 모이지 않 았어. 아마도 정파에서 자기쪽은 철저히 단속을 한 모양이야. " "그런 건 상관없어. 결국 그 놈들이야 뺏지도 못하지 않는가 ? 우리만 있어도 문제없어." 희욱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아네. 그렇지만 수가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뺏아 오더라도 황실이 우리를 견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보 를 흘린 것인데 그게 실패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게 문제지." "됐네. 시간이 촉박해서 그런 걸 어쩌겠는가? 이제 남은 일 만 생각하도록 하게. 그래 방법은 찾았는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결국 남은 것은 부딪히는 수밖 에 없지. 문제는 그 정파 녀석들이 배 위로 올라탄 것인데... ..." "뭐 신경 쓰지 말게. 우리가 진다는 생각은 안 드니까." 자신만만한 말투다. 금영악은 그런 희욱을 보며 고개를 살살 저었다. "우리가 지금 세력 다툼이라도 하는 줄 아는가? 우리 목표는 두 권의 비급이야. 이미 그들이 배 위로 올라탔는데 미리 그 것을 빼내갈지 어찌 아는가 말이야." 희욱의 신형이 잠시 흠칫했다. 듣고 보니 그 말이 맞다는 것 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잔뜩 머리를 굴려 봐도 별 뾰족한 수가 떠오를 리 없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금영악의 어깨를 두드렸다. "난 성주이고 자네는 군사야. 머리는 내가 쓰는 게 아니고 자네가 써야 한다는 거지. 그럼 부탁하네." 어안이벙벙한 표정을 짓는 금영악을 뒤로 한 채 희욱은 그들 의 딸을 보러 자리를 떴다. 혼자 남은 금영악은 절레절레 머 리를 흔들더니 다시 머리를 싸잡고 앉아서 고민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주기산(朱起山) 양주에서 팔 십리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산. 긴 산줄기가 수 로를 따라 길게 뻗어 있는 이곳에서 가장 높은 산이 바로 주 기산이다. 그러나 높다고 해 봤자 주위의 산들보다 높다는 것 이지 실제로는 그리 높은 산은 아니었다. 산 정상에 서면 사방이 탁 트여 길게 뻗은 수로가 한 눈에 들어온다. 푸른 물이 넘실거리며 둥실 뜬 배들이 한여름철의 운치를 더하고 있었다. 시간은 넘실 흘러 사방이 서서히 어두워지는 밤이 오고 있었 다. 수로 위는 불을 켠 배들로 반짝이며 빛나기 시작했다. 주 기산에도 어둠이 내려 사방에서 풀벌레 울음이 들려오고 있었 다. 그 무렵이었다. 갑자기 벌레 소리가 뚝 끊어지더니 어디 선가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숲 속이 몇 차례 흔들거리 더니 일련의 인물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갈색 복장을 한 사내들이 앞장서 나타났다. 그들은 주위를 한차례 살피더니 별 이상이 없다 생각되자 뒤의 숲 속으로 손 짓을 했다. 그러자 또 다른 인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 십이 넘는 숫자들이다. 대부분이 무공을 익힌 듯 단단해 보였으나 중앙에 있는 사내 한 명은 이런 곳을 찾아오기엔 조금 약해 보였다. 그는 소주 에 머물고 있던 방효겸이었다. "여기가 확실하오?" 주위를 한 번 슬쩍 훑어본 방효겸이 물었다. 그러자 가슴에 금색 휘장이 그려진 옷을 입고 있던 사내가 대답했다. 금기군 (金旗軍)의 대주를 맡고 있는 금기주(金旗主) 녹상운(鹿祥雲) 이다. "예!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확실합니다. 뒤쪽으로 무황성이 이미 자리를 잡았고 옆쪽 수로 포구 쪽에서 무림인들이 이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 확실히 이쪽에서 지켜 보고 있기만 하면 되겠군." 고개를 끄덕이던 방효겸은 천천히 앉을 곳을 찾기 시작했다. 상당히 먼 거리를 온 관계로 그는 벌써 한계를 느끼고 있었 다. 그의 생각을 알아차린 녹상운이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방대인!" 녹상운이 앞장서서 방효겸을 안내했다. 땅이 평평한 곳에 넓 은 천 한 장이 곱게 깔려 있다. 방효겸은 천천히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 본 후 말을 이었다. "금기주도 그만 쉬시오. 오늘은 할 일도 없을 테고 불침번을 세울 필요도 없을 거요."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잘못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 까?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방효겸은 금기주란 사내가 하는 말을 들으며 만족스런 미소 를 지었다. 이런 말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금기주가 몸을 돌려 사라지자 방효겸은 자리에 드러누웠다. 이미 모든 것은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마음이 푸근할 법도 하건만 가슴은 마치 첫날밤을 맞은 신랑처럼 콩콩 뛰고 있었 다. 그는 한참을 그렇게 누워서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뜨거운 공기가 차가운 대지에 부딪혀 식어 가는 깊은 밤이 되었을 때 그는 잠에 빠질 수 있었다. 다음날도 어김없이 해는 떠올랐다. 부드러운 아침 햇살에 반 짝이는 백사장을 넘실대는 파도로 부드럽게 애무하는 그곳은 강소성(江蘇省)의 자랑거리 중에 하나인 홍저호(洪渚湖)였다. 넓은 백사장은 모든 빛을 내뿜듯 반짝이며 빛났고 맞은 편에 자리한 갈잎들은 바스락거리며 바람의 인사에 밝은 미소로 화답한다. 수로의 한켠에는 축 늘어진 버들나무에 둘러 쌓인 관도가 시 원한 그늘을 만들며 긴 줄을 긋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 지나 자 그늘은 더욱 어둑해지고 있었다. 한창 빛나던 푸른 물의 반짝임이 삽시간에 흩어졌다. 그리고 대나무로 차양을 친 소형 어선 한 척이 저쪽에서 모습을 드 러냈다. 닻은 올렸지만 범선이라 부르기엔 너무 작고, 소형 선박이라 하기엔 탄 사람이 너무도 많은 배. 그 위에 있던 사 람들이 어수선해 진 것은 막 배가 나무로 만든 포구에 다다른 그 무렵이었다. "포향(捕響)입니다. 자 내리실 분들은 빨리 내리십쇼." 뜨거운 햇살에 검게 탄 얼굴의 사내가 노를 내려놓으며 외쳤 다. 사내의 말에 차양 밑에 앉은 사람들이 서둘러 땅으로 내 려섰다. 모든 사람들이 흩어지고 남은 것은 검은 말 한 필을 이끌고 있던 일행 넷이었다. 남녀노소 하나라도 빠지지 않는 일행들. 그 중 젊은 사내는 팔에 흰 붕대로 묶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천인문과 이세직 일행이었다. 며칠 전 입었던 상처 때문에 관도 여행을 수로여행으로 바꾸어 버린 그들은 이틀이 지난 후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자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이젠 무엇을 한다?" 사람들이 흩어지자 허허벌판처럼 비어 버린 강변을 휘휘 둘 러보던 당우양이다. 아직은 아침나절. "일단 배부터 찾아보죠. 나중에는 구하려고 해도 못 구할걸 요." 주위를 스윽 살피고 난 조기혜의 말이다. 무슨 말이냐는 눈 짓에 조기혜는 손으로 강변 쪽을 가리킨다. 그녀의 손을 따라 간 당우양의 시선에 일단의 무리들이 눈에 잡혔다. "저것들은......" "아는 사람이세요?" 조기혜의 반문에 당우양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사아귀(四餓鬼) 녀석들이군. 한 번 먹이를 물면 결코 떨어 지지 않으려는 살쾡이 같은 족속들이야. 녀석들도 냄새를 맡 았나 보군." 당우양은 기분이 상했는지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천인문은 그런 당우양을 바라보다 다시 사아귀를 향해 눈길을 던졌다. 피풍을 휘어 감은 빼빼 마른 네 명의 사내들이 눈에 들어왔 다. 마치 비루먹은 당나귀처럼 앙상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머리는 새가 집을 지은 것 마냥 푸석했으며 얼굴은 광대뼈가 툭 튀어 나왔다. 네 명이 모두 판에 박은 듯 닮아 있는 것이 한 눈에 형제 관계임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생겨 먹은 것부터 그러니 시선을 안 끌래야 안 끌 수가 없다 . 사람들은 모두 주위로 흩어졌지만 멀찍이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사아귀중 누가 눈을 부라릴라 치면 당 장 아무것도 못 본 척 하기 바쁘다. "재미있게 생겼네요. 그렇게 강해 보이지는 않지만 생긴 것 하나만은 정말 천하 무적이군요." 눈을 거둔 천인문도 싱긋 웃으며 한 마디를 던졌다. 당우양 은 눈을 돌리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아예 눈길도 주지 마라. 저 녀석들은 별 시덥지도 않은 걸 로 얼마나 시비를 잘 거는 줄 아느냐? 한 번 엉켜 붙었다 하 면 으......" 말하다 말고 당우양은 온 몸을 부르르 떨며 끔찍하다는 표정 을 지었다. "일단 배나 구하러 가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이세직이 말을 끝낸 후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곧 포구를 벗어나 상류를 따라 올라갔다. 그러자 눈앞에 잔모 래가 펼쳐지고 갈대가 우수수 흩어지는 광경이 보인다. 아름다운 모습에 눈을 사로잡혀 그들의 발걸음은 자꾸 느려 지고 있었다. 서두르자던 조기혜와 이세직도 흥이 겨운지 연 신 고개를 바삐 돌리고 있었다. 얼마를 올라갔을까? 그들의 눈에 한 척의 작은 배가 뭍에 난 나무에 묶여 있는 것이 잡혔다. 고깃배는 얕은 파도에 몸을 내맡긴 듯 이리 휘청 저리 휘청 흔들리고 있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저쪽 멀리 몇 채의 집이 보이는 게 아 마 배 주인이 살고있는 마을이 아닌가 싶었다. "저 배를 타면 되겠군요." 조기혜의 말이다. "그래. 저 정도의 배라면 우리 넷은 다 타고도 남겠구나. 그 럼 이제 남은 것은 주인을 만나는 건데......" 당우양이 마을 쪽을 한 번 살피더니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남은 일행도 그의 뒤를 따라 걷는다. 흑풍의 위에 타고 천천히 뒤를 따라오던 천인문이 무언가를 보았는지 손짓을 한다. "저기 누가 와요. 입은 옷을 보니 꼭 어부 같긴 한데." 높은 곳에서 보니 잘 보이는가 보다. 그들은 천인문의 말에 조금 더 발을 바삐 움직였다. 그러자 저 멀리서 다가오는 한 갈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보시게." 이세직이 큰 소리로 사내를 불렀다. 다가오던 사내는 자신을 부르는 이세직을 보고는 잠시 흠칫 했다. "저기 저 배가 자네 배인가?" 그러자 잠시 후 사내의 투박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렇소만 왜 그러는 거요?" "자네하고 이야기 좀 하고 싶은데 잠시만 기다려 주겠나?" 이세직은 말을 끝낸 후 사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쁜 걸음으로 사내에게 다가갔다. 역시 사내는 어부였다. 비릿한 비린내가 밴 갈의를 입고 있는 구릿빛 피부의 사내는 천인문 일행이 다가오자 등에 매고 있던 망통을 땅에 내려놓는다. "무슨 일로 그러는 게요?" "저기 떠 있는 배를 좀 빌리고 싶은데 얼마면 되겠소?" 당우양이 품에 손을 집어넣으며 물었다. 사내는 별로 흥미가 없는 듯 했으나 품에서 약지크기의 금덩이가 나오자 눈이 휘 둥그래졌다. 이런 곳에서 고기나 잡는 그가 언제 이런 금덩이 를 보기나 했겠는가? 빙그레 웃음을 짓던 당우양은 더 볼 것 도 없다는 듯 그의 손에 금덩이를 쥐어준다. "이 정도면 한 달 정도는 써도 별 문제 없겠지?" 충분히 허락을 얻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 그는 바로 몸을 돌려 강변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 어부의 목소 리가 들려 온다. "왜 저 배가 필요하신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습니다요." "뭐, 뭐야?" 눈이 치켜 올라간 당우양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 렸다. 보고 있던 이세직도 급히 나섰다. "그게 무슨 소리요. 이 정도면 저 정도 배 한 척은 사고도 남을텐데." 그러나 어부는 말도 안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요즘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배를 찾는 분들이 많습니다요 . 옛날 같으면 이 정도면 충분하다 못해 넘쳤겠지만 이제는 다릅니다요." "끄응!" 당우양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활화산이 막 폭발하기 직전처럼 분위기는 급격히 식어갔다. 그 순간 조기혜가 앞으 로 나서며 그를 막고 섰다. 그리고는 품에서 다시 한 덩이의 금을 꺼내 어부에게 내민다. 어부는 미모의 여인이 금을 내밀 자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으나 급히 그녀의 손에서 금덩이를 집어갔다. "더 이상은 안돼요. 안 그러면......" 그녀는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툭 내 보인다. 무지한 어부였 지만 그 뜻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다. 더 욕심을 부리 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목숨이 돈보다 더 중요한 것임 은 충분히 알고 있는 어부였기에 화색이 만면한 얼굴로 굽실 굽실 허리를 숙인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못해 넘칩니다요. 걱정 마시고 쓰십시 오. 그럼 소인은 이만." 어부는 당장 몸을 돌려 마을쪽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던 천인문은 흑풍을 돌려 앞장을 섰 다. "그럼 저 배는 이제 우리 거죠? 이야 신난다. 빨리 타러 가 야지." 혼자 할 말을 다하고는 달려가는 천인문. 사라지는 천인문을 보고 있던 조기혜가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저 혼자만 달려가는 건 또 뭐야? 몸은 어른이면서 어째 하 는 짓은 꼭 아기보다도 더 못해." "놔두거라. 저런 것도 보기 좋지 않냐?" "좋기는요. 어르신들하고 저는 전혀 생각을 안 하잖아요. 저 말만 해도 그래요. 우리들 모두는 저 때문에 말을 놔두고 배 를 탔는데 저 혼자만 부득부득 우겨서 말을 데리고 탔잖아요. 자기가 돈 내는 것도 아니면서." 요즘 들어 또 불만이 쌓였는지 연신 투덜투덜이다. 이세직과 당우양은 그저 빙긋 웃으며 불만을 토로하는 그녀를 바라볼 뿐이다. 그들이 강변 언덕 밑까지 다가왔을 때였다. 연신 웃고 있던 이세직의 얼굴이 갑자기 경직된다. 무언가 귀에 잡혔기 때문 이다. 당우양도 그 순간 무엇을 들었는지 표정을 바꾼다. "이, 이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신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계속 혼자서 중얼거리며 걸어가던 조기혜는 갑자기 두 사람이 내달리자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그러나 그녀도 곧 무언가를 느꼈는지 급히 안색을 바꾸고 경 신술을 펼쳤다. 언덕 뒤 강변에는 이미 두 무리의 패거리들이 서로 응시하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 중앙에 흑풍을 올라타고 혼자서 뭐 라고 외쳐대는 천인문도 보였다. 그들은 삽시간에 천인문을 향해 달려갔다. "이 날 도둑놈들 같으니라고. 어디서 우리가 산 배를 훔치려 드는 거야?" 혼자서 길길이 날뛰는 천인문을 아니꼬운 눈으로 보고 있던 왼쪽의 무리 중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선다. 오른 얼굴을 붉은 흉터로 가득 채운 사내는 무서운 인상을 쓰며 외쳤다. "야 꼬맹아! 넌 그만 빠져라. 할 일 없으면 가서 엄마 젖이 나 더 먹고 와." 그 말이 끝나자 다른 쪽 무리 안쪽에서 뒤이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게 싫으면 엄마 젖이나 더 만지던지 큭큭!" "우하하하!" "크크큭!" 삽시간에 강변 포구는 웃음 바다가 되었다. 서로 적으로 만 난 그들이었지만 갑자기 주인임을 자청하고 나타난 천인문이 미워 보였는지 한패거리가 되어 천인문을 놀려댄다. "이이익!"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천인문의 두 손이 하얗게 물들었다. 천옥신수가 발동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싸늘한 눈 빛으로 상대들을 바라보고 있던 천인문의 몸이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커억!" 갑자기 왼쪽에 서 있던 흉터의 사내가 비명을 토했다. 그리 고 등뒤로 피를 잔뜩 뭍인 채 튀어나온 손 하나. "뭐라고 했냐? 꼬맹이? 젖이나 더 먹으라고? 흥! 너나 더 먹 어라." 아수라의 웃음이 그러할까? 더할 수 없는 싸늘한 미소를 띈 천인문이 흉터 진 사내를 바라보며 오싹한 웃음을 날렸다. "컥!" 천인문의 손이 사라지자 사내는 앞으로 푹 꼬구러진다. 그가 쓰러지는 순간 피가 사방으로 분수처럼 치솟았다. 온 하늘이 붉게 물든 것 같았다. "아니!" 모든 사내들이 화들짝 놀라며 각자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 러나 천인문은 그들이 방어 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을 번뜩이며 사내들을 향해 살수를 펼쳤다. "죽어라!" 초식이고 뭐고 없었다. 그냥 하얗게 물든 손은 사정없이 팔 방을 가르며 날아갔고 막아 가는 검, 도는 사정없이 바스러져 나갔다. 머리는 터져 흰 뇌수를 내뱉었고, 팔 다리는 사정없 이 잘려 날아갔다. 사방은 삽시간에 지옥도를 그려내고 있었 다. "뭐, 뭐야?" 언덕 위에서 보고 있던 당우양과 이세직의 눈이 휘둥그래졌 다. 별 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들의 생각이 틀려 버린 것 이다. 일이 터진다 해도 충분히 말릴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 이 오산이었다. "저 놈들이 무슨 소릴 했길래 저 아이가 저러는 거야?" "낸들 알겠나. 그건 그렇고 빨리 저 아이를 말리기나 하게." 이세직이 얼굴을 찌푸리며 당우양을 종용했다. 그러자 당우 양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두 손을 내젓는다. "뭐야? 나보고 저 아이를 말리라고? 말이 되는 소릴 하게. 저 모습을 보라고. 검도 갈대 마냥 꺾여 나가는데 내가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다고 말려? 자네가 말려 보게. 자네야 승룡 장을 잘 알잖나." 이세직은 당우양이 빼는 이유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가 천인문보다 나은 것은 경공 뿐이다. 그것만으로는 지지는 않 을 수 있지만 제압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서 말리게. 저러다가 씨몰살 하겠구만." 당우양이 다시 한 번 재촉했다. 그러나 이세직도 별 방법이 없었다. 천인문이 쓰는 것은 자기가 가르쳤던 장법이 아니었 기 때문이었다. 이름을 붙인다면 막무가내 장법이라고 할까? 이성을 잃은 천인문은 그저 멋대로 손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럼에도 위력은 더욱 강했다. 아니 그저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 이는 것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도 막을 수가 없군. 저건 승룡장이 아니야." "뭐, 뭐야? 말도 안 돼. 그럼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단 말인 가?" "나보다 내공이 훨씬 강해서 혼자선 막을 도리가 없어. 하지 만 우리 셋이 협공하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겠지." "어떻게 하면 되지?" "자네가 일단 피하면서 유인하면 나하고 조낭자 하고 같이 혈을 제압하면 되는 거네." "좋아. 해 볼만하군. 이 봐 조낭자. 해 보겠는가?" 그러나 조기혜는 가부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그저 손을 들 어 천인문을 가리킬 뿐이었다. 무언가 이상한 느낌에 이세직 과 당우양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벌써 사람들 이 다 쓰러지고 난 후였다. 다른 한 무리는 꽁무니를 뺀 후였 다. 벌겋게 눈이 달아 올랐던 천인문은 더 이상 손을 쓸 상대가 없어지자 점차 차분해지는 듯 했다. 피로 물든 두 손을 물끄 러미 내려다보다 고개를 든다. 이미 눈을 잠식했던 광기는 사 그라진 듯 했다. 조기혜 등이 천천히 천인문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세직이 조 심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괜찮으냐?" "아 예. 다친 곳은 없어요." "그게 아니잖아. 너 갑자기 왜 그런 거니? 어떻게 사람들을 이 모양으로 만들 수 있어?"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사방을 둘러 보던 조기혜가 끔찍하다 는 표정으로 소리친다. 그녀도 무림인이었지만 이런 목불인견 (目不忍見)의 참상은 자주 접하지 못했다는 표정이다. 천인문 은 눈꼬리를 푸르르 떨었다. "그만해. 저 딴 놈들은 죽어도 별 상관없어. 그리고 무림인 들은 항상 칼 위에 목숨을 걸고 다니는 족속들이야. 내가 왜 저런 놈들 목숨까지 신경 써 줘야 하는 거지?" "너......너!" 그 말이 충격이었는지 조기혜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천인문 을 가리켰다. "내가 아니더라도 저런 놈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놈들이야 . 내가 조금 먼저 승천시켜 준 것 뿐이니까 나한테 욕하지 마 라구."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천인문은 말을 맺고는 바로 몸을 돌려 강둑으로 올라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조기혜는 몸만 떨고 있었고 이세직과 당우양은 사태를 파악 하기 위해 열심히 고심하기 시작했다. -95- 시간은 덧없이 흘러 해는 머리 위로 떠올랐다. 낮이 되자 수 로의 입구에 떠 있던 배들은 모두 그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 수로의 출구 쪽은 어부들이 상당히 좋아하는 곳이다. 수문 이 열리면 떠내려 오는 것이 많아 물고기들이 먹이를 먹기 위 해 북적대며 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수문 입구 쪽은 항상 고깃배들이 둥실 떠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수문 쪽도 한산해 지는 시간이 있으니 바로 정오 무렵부 터 미시(未時) 말까지다. 시간은 많고 고기는 도망가지 않는 법.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어부들이 고기를 잡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해가 다시 낮게 깔리는 오후 무렵이 되면 어 디로 숨었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배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며 바쁘게 목 좋은 곳을 선점하는 배들 위에서 작은 그물이 물 위로 던 져진다. "으싸으싸!" "어이야 으~쌰!" 절로 어깨춤이 나오는 흥겨운 콧노래가 들려오고 펄떡이는 고기를 한껏 붙든 그물이 배 위로 올려진다. "하하하!" 기대한 만큼의 호황인지 연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자! 매일 오늘 같으면 살 맛 나겠구나. 자 힘내자! 오늘도 내가 한 턱......" 우락부락한 팔뚝을 그대로 들어 내 논 사내가 침을 튀기며 말을 하다 그만 입을 다물었다. 눈앞에 우람한 선체(船體)가 잡힌 것이다. "저, 저게 뭐냐?" 사내의 시선에 그물을 끌어올리던 다른 사내들도 고개를 돌 렸다. 그 곳에는 십 장이 넘어 보이는 배 열 척이 물길을 가 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돛대 위에 붉은 천을 휘날리는 배. 바 로 정화의 선박이다. 보고 있던 어부들의 눈이 더욱 커졌다. 멀리서 볼 때는 십 장 남짓 될 것 같던 배가 가까이 다가오자 가히 삼 십 장은 거뜬히 넘겨 버릴 듯 하다. 잔잔하던 물도 폭풍을 만난 듯 요 동치기 시작했다. "이러다 죽겠다. 빨리 피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물가에 뜬 배들은 노를 저어 강가로 물러섰다. 고깃배를 덮칠 듯 다가오던 거선들은 수문 앞까지 다가오자 천천히 속도를 늦추며 멈춘다. 그러자 어디선가 작 은 배들 십 여 척이 나타나 함선을 둘러쌌다. 수로를 통과하 는 작은 선박이다. 도형강선이 거함에 바짝 붙어 서자 위쪽에 서 몇 개의 줄사다리가 내려졌고, 도열했던 병사들이 급히 사 다리를 타고 오르내린다. 칠 척의 거구 사내가 선상(船上)의 앞머리에서 푸른 환관의 피복(被服)을 바람에 펄럭이며 서 있었다. 바로 원정단의 제 독이자 대명의 태감(太監)인 정화다. 선상(船上)에서 바람을 쐬며 배들이 피하는 것을 보고 있던 그의 등뒤로 누군가의 목 소리가 들린다. "제독!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만 준비하시지요." 아래쪽을 내려다보던 정화는 고개를 돌려 상대를 찾았다. 이 번에 새로 편성되어 온 호위 병력의 장수 중 하나였다. 정화는 고개를 돌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제독이라...... 씁쓸하군.' 정화는 자신을 제독이라 부르는 장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직함에 너무 얽매이는 고지식함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제독! 정확한 호칭이긴 했지만 뭔가 어색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 앞에서도 편하게 이야기하던 정사흠과 이규는 병력을 통 제하기 위해 이미 배에서 내렸다. 그들이 떠난 뒤로는 어느 하나 편안한 게 없었다. 행동 하나까지도 모두 통제되는 생활 은 그에게 질색이었다. 이건 말이 제독이지 감옥의 죄수와 다 를 바가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거기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금은 세 공품을 작은 선박에 옮겨 싣는 동안 자신을 보러 온 무림인들 도 역시 그의 심기를 상하게 했었던 것이다. '흥! 우리를 보호해 주겠다고? 누구 앞에서 그런 시건방진 말을......' 다짜고짜 밀고 들어와 한다는 말이 보호해 주겠다는 것이다. 대가로는 듣도 보도 못했던 책 두 권이란다. 그 생각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르자 정화는 다시 울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무림인들이 비록 강하다고 해도 이렇게 관을 무시할 수는 없 었다. 건방져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었다. 무의식중에 화가 치솟은 정화가 이빨을 갈며 노기를 토했다. 이빨 가는 소리에 장수는 흠칫 놀란 모습이다. 정화는 자신 의 상태를 깨닫자 바로 안색을 고치며 대답했다. "알았다. 그만 내려가라." "옛! 그럼 소장은 이만." 사내는 인사를 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뒤 로 두 발짝 물러 선 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저것도 보호라는 거겠지. 후후.' 정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후 장수의 보호를 받으며 널빤 지를 통해 작은 배로 내려갔다. 막 소형선으로 내려가다 말고 정화가 우뚝 서 버렸다. 그의 눈에 몇 명의 사내들이 잡혔기 때문이다. 푸른 도복에 관을 쓴 도사와 거지 등등 자신을 거북하게 했던 무림인들이 그들 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무인들 중 육중 한 몸매를 자랑하던 사내가 정화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정파 를 이끄는 무림맹의 맹주, 나웅겸이다. "제독! 오랜만에 뵙습니다."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하는 나웅겸을 쓰디쓰게 보 고 있던 정화도 멋쩍은 웃음을 띄었다. "그렇구료. 그 동안 잘 지냈소?" "하하하! 제독께서 신경 써 주시는데 불편한 게 무어 있겠습 니까?" "하하! 그거 다행이구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화의 속은 그리 편치 않았다. 자신감 이 넘쳐흐르는 모습이 마치 관을 무시하는 느낌이었다. 그렇 다고 화를 낼 입장도 아니었다. 물론 못 할 것은 없었다. 아 쉬운 게 있어 손을 벌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약점을 잡힌 것도 아니다. 오히려 굽신거릴 쪽은 무림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못 하는 것은 눈 앞에 서 있는 무리의 중앙에서 담담 하게 서 있는 한 명의 도사 때문이었다. 현 무림의 양대 기둥 중에 하나이자 정파의 검을 대표하는 검수인 천양자. 그는 영락제의 사랑을 받는 무당파의 현 수장 인 것이다. "그래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잠시 딴 생각에 잠긴 정화의 귓가로 나웅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정화는 고개를 들어 나웅겸을 마주 보았다. 정화는 아 무 대답도 없이 그저 시선만 보낼 뿐이다. 나웅겸은 뜨거운 그의 시선에 잠시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제독의 수하에 많은 군사들이 있지만 무림인들을 막긴 어려 울 것이외다. 엄청난 피해가 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하오. 제독 께선 폐하의 병사를 최대한 보호할 의무가 있지 않소? 함부로 병사들이 목숨을 버리게......" 큰 소리로 정화를 설득하던 나웅겸은 그만 말을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정화의 눈이 활활 타오르는 것을 본 탓이다. "어디서 그런 시건방진......" 더 참지 못하겠던지 정화는 울분에 타오르는 목소리로 그를 위협했다. "감히 당신들이 지금 대명의 제독이자 태감인 날 위협하겠단 말인가? 폐하께서 오냐오냐 하시니까 이젠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오는가 보군." 서슬 퍼런 목소리에 나웅겸도 그만 뒤로 한 발짝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대군을 지휘하던 그 위세가 현재 무림맹의 맹주 인 자신을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웅겸은 잠시 자신이 사 자의 콧털을 건들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태감. 하늘을 나는 새도 떨굴 수 있다는 권세를 지닌 직위. 명나라의 대 권력을 가진 직위 중에 이 만한 것은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락제 시대부터 환관은 엄청난 위세를 떨치 며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세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정점 에 선 것이 환관의 최고 직위인 태감이다. 아무리 무당의 권 세를 등에 업고 있는 그라 해도 함부로 정화의 심기를 건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과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느낌을 받은 정파 인물들이 서둘러 그들의 옆으로 다가와 중재에 나서기 시작했다. "무언가 기분 나쁜 일이 있으신가 보군요. 태감께서 한 번 용서 해 주시겠소?" "크헬헬! 당당하신 태감께서 무슨 일로 그리 화가 나신 게요 ? 오오 우리 맹주가 말을 함부로 했나 보죠? 맹주 어서 사죄 하시오." 남궁세가(南宮世家)의 가주인 천검(千劍) 남궁무외(南宮武畏 )와 개방 방주 형지(荊枝) 등이 서둘러 중재에 나섰으나 정화 는 역시 노기를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싸늘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남궁무외와 형지는 슬슬 기분이 나빠졌다. 자신들의 신분에 이런 말을 한 것만도 쓰라린데 저런 시선까지 받을 줄은 꿈에 도 몰랐다. 기분 같아서는 눈앞의 사내를 확 갈아버렸으면 했 지만 그렇다고 화를 낼 순 없었다. 아무리 그들이 무공을 익 히고 있다 해도 수십만이 넘는 대명의 병력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다행히 묵묵히 서 있던 무당의 천양자가 말을 건네자 사태는 쉽게 진정 되었다. "태감께서는 노도의 얼굴을 보아 한 번만 용서를 하시지요." 마음 수련을 한 사람답게 담담하기 그지없다. 전혀 기분 나 쁜 것 같지 않은 말투에 정화도 화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 도 천양자가 껄끄러운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정화는 조용한 어조로 대답했다. "알겠소. 도장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이 몸도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겠소. 하지만 미리 말해 둘 것이 있소. 분명 이 배에 는 그대들이 말하는 책이 없다는 것이오. 그리고 있다손 치더 라도 내 선에서 그것을 넘겨줄 수 있느냐 없느냐 논할 수는 없다는 말이오. 무슨 뜻인지 알겠소?" "그 정도라도 충분하오이다. 그 건에 대해서는 노도가 폐하 께 말씀 드려 보겠습니다. 그리고 태감께서도 저희가 이 배에 타는 것을 양해해 주십시오." "좋소! 배 위에서 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나도 더 이상 신경쓰지 않겠소. 하지만 분명 말해 두건데 우리 쪽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조건이오. 알겠소?" "그리합지요." 정화는 말을 끝내고는 그들의 중앙을 가르며 앞으로 나갔다. 남은 인물들은 그런 그의 모습을 쓰디쓴 눈으로 바라보며 고 개를 저었다. "수문을 열어라." 선두에 선 배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터지자 십 장 크기의 철 문이 활짝 열렸다. 잠시 물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쳐 뱃전에 부 딪치다 사라진다. 완전히 수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십 여 척 의 선박은 충분히 배가 드나들 정도가 되자 서서히 앞으로 전 진해 나갔다. 뱃머리에 서 있던 나웅겸 등은 배가 다시 출발하자 가슴에 ' 맹(盟)' 자를 쓴 옷을 입고 있던 하급 무사에게 감시를 명하 고는 자신들의 선체로 들어간다. 그리 넓지 않은 선체 안에는 이미 세 명의 인물이 선점하고 있었다. 선풍도골(仙風道骨)이라는 말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한 노인과 삼십 대의 젊은 사내. 그리고 마지막 인물은 파르 라니 빛나는 머리에 가사를 걸친 아미파의 장문인인 현의(賢 意) 사태였다. 그녀는 염주를 연신 굴리다 들어오는 인물들을 보자 자리에 서 일어서 그들을 맞이했다. 그러나 인상이 그리 밝지 않음을 깨닫고는 조심스레 묻는다. "일이 잘 되지 않았나 보군요." "뭐 생각보단 쉽지 않았소. 그래도 어느 정도 얻은 것도 있 으니 완전히 실패했다고 볼 수도 없소. 일단 사태께서도 그리 아시고 행동에 만전을 기해 주시오. 그리고 천산신의께 이런 말씀을 드려 죄송하게 되었소만 신의께서도 행동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 주십시오. 함부로 돌아다니셔선 아니 됩니다." 나웅겸이 허리를 손을 모아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천산 신의는 허리까지 내려 뻗은 수염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맹주께서 노부를 신경 써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구려. 노 부도 맹주께 누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하겠소. 그리고 소 철아! 너도 쓸 데 없는 분란은 일으키지 말도록 해라. 알겠느 냐?" 천산신의의 눈빛에 옆에 앉아 있던 사내, 방소철은 알겠다며 공손히 답변한다. 그러나 속으로는 연신 불만이 그득했다. '흥! 우리 사부님께서 무어 아쉬울 게 있다고 저러시는 건가 ? 쓸 데 없이 이렇게 저들을 도와주더라도 좋은 소리는 하나 도 못 듣겠구나.' 그가 무림맹을 도와주었던 것은 개인적인 짝사랑에 얽매여 그랬다지만 천산신의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천산신의가 무림 맹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던가? 수천이 넘는 무림맹 인물 들의 생명을 구해준 인물이 아닌가 말이다. . 이번에도 천산신의는 자진해서 무림맹의 일행에 합류했다. 목숨은 정, 사를 가릴 것 없이 중요하다는 그의 말은 공감하 고 남았지만 평소 무림맹의 대접에 실망하던 방소철로선 이번 여행이 마음에 들지 않음은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아쉬우면 간이라도 빼 줄 듯이 굽신거리다가 별 소용이 없다 싶으면 항상 저렇게 뒷전으로 밀어내는 정파의 인물들이 밉 살스러웠지만 방소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붉은 깃발과 창칼로 무장한 조공선이 물살을 가르며 나가자 수로에 떠 있던 배들은 모두 뭍으로 도망치듯 붙이기에 바빴 다. 조금이라도 그들의 앞을 막는다면 치도곤 정도가 아니라 수십 개의 목숨이 있어도 부지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 한 번 손짓에 흩어지는 메뚜기처럼 사방으로 도망치는 고깃 배들의 사이를 당당히 가르며 나아가는 일곱 척의 배들은 서 서히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의 오후 무렵 갈대속에 몸을 감추며 둥 실 떠 있는 한 척의 고깃배에서 한 사내의 고개가 삐죽 내밀 어졌다. 사내는 갈대를 손으로 밀어내며 사방을 한 번 훑어 본다. 몇 날을 이랬는지 사내의 곱상한 얼굴은 이미 햇살에 벌겋게 달아 있었다. 아직은 기대하던 그 무엇이 보이지 않는 지 다시 고개를 갈대 밑으로 감춘다. "아직은 보이지 않는군." 엉덩이를 뱃머리에 붙이고 손으로 턱을 괴던 일장반골(一掌 半骨) 귀문소(鬼門沼)의 말이다. 맞은 편에 앉아서 날카로운 갈구리로 연신 공중을 찍어보는 구랫나루의 호반상(虎班祥)이 그를 한 번 흘깃 쳐다본다. "귀형! 아까도 말했듯이 아직 오려면 멀었다우. 계속 그렇게 고개만 내밀었다 넣었다 해 보았자 귀형에게만 손해요. 나처 럼 그냥 푹 쉬고 있으시오." "......"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귀문소는 고개를 저었다. 갈구리만 보고 있던 호반상이었으나 그의 속내를 알고 있는지 한 차례 웃음을 던졌다. "확실한 정보니 믿어도 상관없소." "흥! 그럼 왜 이렇게 일찍 나와서 오지도 않는 배를 기다려 라 한 거냐?" 귀문소는 주먹을 불끈 쥐며 호반상을 위협했다. 그러나 호반 상은 무섭지도 않은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한다. "귀형! 귀형이 무공으로 북쪽을 주름 잡았는지는 모르지만 물 위에선 그렇지 못할 거요. 내 도움이 없으면 꼼짝도 못한 다는 건 귀형이 더 잘 알 거요. 당장이라도 내가 여기서 뛰어 내리면 어떻게 할거요? 오도 가도 못하고 굶어 죽지 않겠소? 그리고 지금 그렇게 화를 내 보았자 좋아 할 녀석들은 따로 있단 말이오. 그냥 이 수귀(水鬼)나 믿고 있으면 만사형통일 테니 푸근하게 있으시오." 호반상은 자신있다는 표정으로 가슴을 퉁퉁 친다. 귀문소는 별 도리 없다는 식인지 콧방귀를 뀌면서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호반상은 권(拳)과 장(掌)으로 이름 높은 귀문소를 맞아서도 결코 주눅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당당한 모습이다.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상대는 뭍에서만 놀던 인물이다. 이런 물 위에서는 그 능력의 반도 못 쓰는 것 이 당연한 노릇이고 보면 지금의 귀문소는 그저 허명만 날린 인물과 다름 아닌 것이다. 거기다 먼저 자신을 찾은 것도 그 가 아닌가? 물에 대해 전혀 모르는 그로서는 믿을 곳이라곤 자기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호반상은 더욱 거드름 을 부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앉아서 기다리기 힘들면 그냥 누워서 쉬도록 하시오. 이제 부터는 무조건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이 부근에 먹이를 노 리는 승냥이들이 득실대는 것 같으니까." 주변을 휘휘 둘러보던 호반상이 눈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감히 누가 날 건들인단 말이냐? 죽고 싶은 놈들이면 얼마든 지 나서라 해. 다 받아 줄 테니까." 말은 그러했지만 그는 더욱 자세를 낮추며 호반상의 말을 따 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귀문소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미 이틀 밤낮을 이 좁은 배 위에서만 보낸지라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웠다. 뼈마디가 쿡쿡 쑤시고 숨이 턱턱 막히 는 게 미칠 것만 같다. 혼자서 숨을 할딱할딱 대던 귀문소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후아! 아 시원하다." 갈대 위로 고개를 쏙 내밀자 시원한 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 치고 지나갔다. 잔뜩 찡그렸던 그의 얼굴도 서서히 풀려갔다. 귀문소가 기분을 풀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의 늘어진 귀 가 무슨 소리를 감지했는지 숲 속 토끼 마냥 쫑긋거렸다. 시 원한 맞바람에 희색이 감돌던 그의 얼굴에 서서히 희열을 동 반한 긴장감이 떠오른다. "후후후! 드디어 나타났구나. 드디어 나타났어." "무어라? 귀형 뭐라고 했소?" "배가 온다고 했다. 알겠냐? 네가 했던 말이 틀렸다는 말이 다." 느긋하게 뱃전에 기대어 쉬고 있던 호반상이 벌떡 일어나 귀 문소가 보는 방향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자 멀리 붉은 깃발 을 앞세우고 세찬 포말을 일으키며 다가오는 조공선이 눈에 들어왔다. "그, 그렇구려. 뭔가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분명 저것이 맞 는 것 같소." "당장 준비해라. 쳐들어가서 당장 뺏어 오겠다." "이 낮에 쳐들어가겠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저 배 에만도 병사가 수천이오. 거기다 이 부근에 무인들이 얼마나 있는 줄 아는 거요? 당신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절대 불가 능하오." 호반상은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귀문소를 얼토당토않다는 말 로 말렸다. 솔직한 심정으론 '어찌되던 상관없다' 였으나, 자 기에게 떨어질 돈을 생각하면 또 그럴 수가 없었다. 귀문소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상황을 깨닫는데는 시간이 얼 마 걸리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여 사실을 인정하고는 조용히 사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성을 찾은 그는 곧 갈대밭에 번뜩 이는 수많은 살기와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기다려 봅시다. 아직 시간은 많이 있잖소. 역사는 밤에 이 루어진다 했는데 우리도 오늘 밤에 한 번 근사한 역사를 만들 어 봐야 하지 않겠소?" 귀문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호반상의 의견을 수용했다. 그는 다시 고개를 갈대 밑으로 숙였다. 시간은 서서히 밤을 향해 달렸다. 어둑어둑한 밤이 다가오자 호송선의 위에는 붉은 횃불이 타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 려 밤이 되자 더욱 속도가 붙는 듯 했다. 거칠 것 없는 전진 을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물살이 가르고 간 그 곳에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는 배들이 있었다. 지나간 배의 십 분지 일도 되지 않는 작은 크 기의 배였지만 그 속도는 전혀 뒤지지 않았다. 하나 둘씩 모 습을 드러내던 배들은 저 멀리 선체가 사라질 무렵부터 서서 히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각각의 배들마다 몇 명씩 되는 사람들이 타고 있다. 한 눈에 도 무인임을 알 수 있다. 그들 스스로도 상대들이 누구인지 알아차리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서로를 아는 척 하지 않는다. 지금은 서로 다툴 때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목적이 같으면 어제의 적도 오늘의 친구가 되는 법. 말은 없 었지만 그들은 하나의 목적으로 친구가 되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몰랐다. 먼저 습격하면 병력의 집 중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목적은 같았지만 그들은 서로를 견제하며 정화의 배를 따라가고 있었다. 반경 삼 장이 넘는 선실은 타오르는 촛불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 손에 찻잔을 들고 초를 응시하는 한 사내가 있었 으니 바로 원정단의 제독인 정화였다. 한 모금 차를 들다 말 고 탁자에 조용히 내려놓은 정화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무언가 느낀 것이 있었을까? 텅 빈 선실 안을 근심스런 눈으 로 보고 있던 정화가 선실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 서 있던 병사는 급히 자세를 가다듬으며 도열했다. 그러나 정 화는 본체만체 하고 선미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왜 이렇게 불안한 것이냐? 오늘 밤 무슨 일이 꼭 벌어질 것 만 같은데.' 초조한 만큼 발놀림도 부산했다. 그러나 막 선미의 한 선실 로 들어서려던 정화의 발이 우뚝 멈춘다. '아니지. 아니야. 이렇게 할 순 없지.' 정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갑자기 불안해진 탓에 그 만 그 꼴 보기 싫던 무림인들에게 도움을 청하려 하다니...... 정화는 씁쓸한 웃음을 지은 후 다시 자신의 선실로 발길을 돌렸다. 자신이 믿던 정사흠도 없고, 이규도 없었다. 이야기 할 만한 사람들이 없어지자 그만 마음이 잠시 흔들렸던 것이 라 자위하고는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선실문을 밀고 안 으로 들어갔다. -96- 하늘을 수놓은 달빛과 별빛이 은하수를 타고 흐르는 밤이다. 철벅이는 물소리만 약하게 들릴 뿐 사방은 쥐 죽은 듯 고요 하다. 이따금 들리는 물새 소리만이 조용한 그곳을 흔들어 놓 는다. 철썩 철썩! 조용하던 그곳에 파도 소리가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했다. 무 언가 다가오는 모양이다. 어두컴컴하던 사위(四圍)도 조금씩 빛을 더하며 밝아져왔다. 푸드득! 날갯짓 소리가 적막을 깨며 흩어지고 홀로 남아 반짝이는 물 결 위를 덮는 그림자가 있었다. 수로를 따라 북상하고 있는 정화의 선대(船隊)였다. 반짝이며 빛나는 물결의 보석을 사정 없이 깨부수며, 십 여 척의 선박은 거칠 것이 없다는 듯 나가 고 있었다. 뱃머리에 부딪히는 물살의 소리가 밤하늘을 가르고, 빛나는 횃불은 바람에 춤을 추며 이리저리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이 미 밤이 깊었음에도 속도가 조금 떨어졌을 뿐 배는 전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배를 총지휘하고 있던 선장은 연신 흐르는 땀을 닦을 시간도 없을 정도였다. 이런 늦은 밤에 배를 띄우는 것 자체만으로도 위험하기 짝이 없다. 완벽하게 지형을 숙지하고 있는 일류 선원이라도 그것 만은 피한다. 어떤 불상사가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정화의 선대를 이끄는 선장도 충분히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거기다 이 배는 관선(官船)이 아닌가. 아무 곳에나 정박(碇泊 )하고 쉬어도 말할 사람이 없다. 그리고 미친 녀석이 아니고 선 공격할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그는 쉴 수가 없었다. 위에 서 '밤에도 달려라' 는 명이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내려온 명 에 따라야 하는 군인인 그는 어쩔 수 없이 위험천만한 이 명 령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런 명령을 받은 직후 어떤 미친 녀석이 이런 명령을 내렸는가 하고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이 정화에게서 내려왔음을 알아차리자 그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일정이 늦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다른 이유라 할 만한 것은 없 었다. 남해안에서 해적과의 전투를 겪지 않았던 그로서는 당 연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배를 몰아 나아가는 것말고는 방법 이 없었다. 명에 죽고 명에 사는 군인으로선 당연한 수순이었 다. "이것 봐. 그쪽으로 너무 붙지 말라고 했지? 그렇게 붙었다 간 배가 뒤집힐 수 있단 말이다." 배가 너무 절벽 쪽으로 다가가자 선장은 큰 소리로 선원을 꾸짖었다. 선원은 연신 사죄를 하면서도 삐죽 입이 튀어나오 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달빛이 있다 해도 앞을 알아보기엔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꾸중을 하긴 했지만 선장도 그 사실을 아는지 미안한 표정이다. 연신 이마를 주무르던 선장은 자리 에서 벌떡 일어섰다. "잠깐만 쉴 테니까 자네가 좀 맡아주게. 잠깐이면 되네. 내 방에 가 있을 테니 일이 생기면 부르게." 너무 신경을 많이 썼던지라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팠다. 잠시 라도 쉬지 않으면 더 큰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느낌. 그는 믿을만한 선원에게 부탁을 하고는 머리를 싸매고 밖으로 나간 다. 밖으로 나서자 시원한 바람이 머리를 쓸고 지나갔다. 지끈거 리던 고통이 가라앉는 느낌이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선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선실로 걸어가던 선장의 눈이 흠칫했다. 몇 명의 병사들이 자신의 방 앞에서 꾸벅거리며 조는 것을 본 탓이다. 그는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저럴까? 별 일도 없는데 매일 저렇게 고 생만 해야 하다니. 제독께서 너무 민감하신 게 틀림없어.' 그는 머리를 슬며시 저으며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열고 안 으로 들어갔다. 선장이 안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병사들은 그저 머리만 꾸벅거릴 뿐이었다. 선장이 사라지자 자리를 이어받은 선원은 다시 지시를 내리 기 시작했다. 방향과 지형 등 이미 숙지한 지식을 풀어가며 통제를 한다. 그러나 경험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는지 속도는 조금씩 눈에 띄지 않게 느려지고 있었다. 조금 후 십 여 척의 선박들은 산을 가르며 지나는 수로의 중 앙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양쪽으로 높지 않은 절벽이 수로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곳은 우뚝 솟은 바위들이 삐죽 솟은 험한 지형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이름도 낙석협(落石峽)이 다. 낙석(落石)이 배를 위협하는 위험한 지형이라 지나다니는 배들이 극히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나 이곳만 지나면 그 이 후는 탄탄대로나 마찬가지다. 조용하던 낙석협의 정상 위에 검은 옷의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는 연신 두리번거리다 배가 다가오는 것을 보 자 눈을 번뜩였다. 사내는 첫 번째 배가 막 아래쪽을 통과하 자 품에서 거울 하나를 꺼내 들었다. 사내의 손에 들린 거울은 번쩍 번쩍 불빛을 토해냈다. 그러 자 저 쪽 멀리 숲 속에서 다시 불빛이 번쩍인다. 사내는 빛이 번뜩거리자 거울을 품에 넣고는 몸을 감추었다. "배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정말이냐?" 아수라파천대주 소위무(素威武)의 전언에 누워 있던 희욱과 금영악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일으켰다. 제대로 쉬지 도 못했는지 그들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옷은 구겨졌고 머 리는 부스스하다. 상관의 어이없는 행색에 잠시 고개를 돌렸던 소위무는 준비 가 끝나기를 기다려 다시 말을 이었다. "배가 낙석협(落石峽)을 막 통과했다고 합니다. 아마 새벽 무렵이면 충분히 도달 할 것 같습니다만." "뭐야? 벌써 그렇게 왔단 말인가?" 생각보다 이른 도착에 그들은 서둘러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 다. 이미 상관들의 눈치를 보고 있던 아수라파천대와 검마당 이 급히 대오를 정열했다. 갑자기 소란스러워지자 멀리서 휴 식을 취하던 영은과 요라도 급히 달려왔다. "모두 준비해라. 당장 출발한다." 말 위로 뛰어 오른 희욱이 손을 쳐들며 명을 내렸다. 이미 준비가 끝났던 그들이다.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숲 속을 벗 어나기 시작했다. 스스슥! 한낮에 안개가 흩어지듯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완 전하게 사라지자 희욱과 금영악은 두 여인과 함께 말을 몰아 달려갔다. 그 시간 다른 곳에서도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주기산의 정상 부근에서 휴식을 취하던 방효겸의 무리였다. 담요를 둘둘 말고 잠을 자던 방효겸은 누가 자신을 흔드는 느낌에 눈을 떴다. 금기주(金旗主) 녹상운이다. 눈에 별이 반 짝이는 것이 잡히자 밤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무......무슨?" "지금 배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뭐, 뭐야? 이런 밤에?" 잠이 글썽대던 눈이 번뜩했다. 그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녹 상운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떻게 이런 밤에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거지? 뭔가 잘 못 본 건 아닌가? 다시 말해 보게. 분명 자네가 잘 못 본 거겠지 ?" 방효겸은 자기가 예상했던 것이 틀리자 버럭 화를 냈다. 모 든 준비가 끝난 상태였음에도 짜증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예상에서 하나라도 벗어나지 않는 완벽한 상태 를 바랬던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다. 이미 녹상운의 눈빛 에서 그 말이 사실임을 알아차린 후라 방효겸은 답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계속 묻는 것은 그런 희망을 놓쳐 버리기 싫었던 작은 사욕(私慾)이 가슴속을 짓눌렀기 때 문이었다. 녹상운은 가볍게 머리를 저어 질문에 답했다. 그의 마지막 희망을 가벼운 머리저음으로 날려 버린 녹상운은 한 발 뒤로 물러서 그의 말을 기다렸다. "역시..." 방효겸은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머리를 떨구었다. 그러나 곧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지금은 그런 허무맹랑한 감정 에 얽매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시간을 놓치면 만사휴의(萬事 休矣)인 것이다. "모두 준비 해. 그리고......" 말을 하다 그는 준비가 모두 끝났음을 알고는 입을 다물었다 . "그만 내려가지." "예!" 지시를 받은 녹상운은 손짓을 해 금기대(金旗隊)를 출발시켰 다. 방효겸과 녹상운도 잠시 주위를 살펴 보다 그들을 뒤따르 기 시작했다. 그들이 떠난 주기산의 정상은 곧 적막에 잠겼다 . 정화의 선박은 아주 느린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뒤따르던 배들도 덩달아 속도는 늦어졌다. 많은 병사들이 선박을 호위 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들도 잠에 빠진 밤이다. 몇 몇 병사 들이 갑판에서 불침번을 서고는 있었으나 그들 역시 잠에 취 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혀 긴장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모 습이다. 큰배가 물살을 가르고 지나간 얼마 후 수십 척의 작은 쾌속 정들이 뒤따라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화의 선박을 따라 온 무 인들이었다. 피로에 젖을 법도 하건만 그들은 결코 그런 기색 을 보이지 않는다. 한 나절을 뒤쫓아 온 그들의 목표는 단 한 가지. 바로 두 권의 비급 때문이었다. 얼마 전 두 권의 비급에 대한 이야기가 무림을 진동하기 시 작했다. 어디서, 누가 퍼트린 이야기인지는 몰랐으나 그 이야 기는 가문 산에 산불처럼 삽시간에 무림을 뒤흔들었다. 이야 기를 들은 무림인들은 모두 광분했다. 특히 사파의 인물들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 목표가 이제 눈앞에 보이고 있었다. 저 배 안에 그들이 바라는 비급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누구도 먼저 공 격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조용히 따라 갈 뿐이다. "제길 누가 먼저 공격 좀 하지 않나? 언제까지 이렇게 뒤따 라 다니기만 할거야?" 한 쪽에서 이런 불만 어린 소리가 물 위를 타고 흘렀다. 배 를 몰아 나가던 호반상은 그 소리에 낮게 코웃음을 쳤다. '누가 먼저 공격한단 말인가? 가장 먼저 공격 했다간 당장 화살받이가 되어 죽어 버릴 텐데. 아무리 무식한 무림인들이 라도 그런 무모한 도박은 할 생각이 없을 걸. 나만해도 이런 생각을 하는데 누가 공격을 하겠어? 그저 기회만 보고 있을 뿐이지.' 호반상은 여전히 배를 몰아 나갈 뿐이었다. 귀문소도 그런 생각을 하는지 묵묵히 뱃전에 기대고만 있었다. 이제 배는 거의 백 여 척에 가까워졌다. 물경 수백의 인물들 이 배를 따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는 아닐 것 이다. 일이 터지면 어디 숨어 있었는지도 모를 인물들이 쏟아 져 나올 것이다. 아직 무림맹과 무황성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거의 확실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흥! 불나방 같은 녀석들. 자기들한테 그 떡고물이 떨어질 것 같으냐?' 슬며시 눈을 떠서 주위에 떠 있는 배를 둘러 본 귀문소가 낮 게 코웃음쳤다. 분명 무황성과 무림맹은 나타날 것이다. 그렇 게 되면 지금 쫓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닭 쫓던 개 지붕 보는 꼴이 되 버릴 것이다. '뭐 내가 상관 할 바 아니지. 난 그냥 조용하게 뒤쫓다가 그 들이 오기 전에 책을 가지고 도망치는 거야.' 모든 무림인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음을 모르는 귀문소는 혼자서 그런 생각에 잠겨 낄낄 거렸다. 쾌속정이 뒤를 쫓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송선은 느릿느 릿 물길을 거슬러 올라갈 뿐이었다. 배들는 곧 낙석협을 벗어 나 숲으로 뒤덮인 곳에 진입하고 있었다. 나무가 울창한 홍저호의 입구 쪽에 한 무리의 인물들이 모습 을 드러냈다. 먹이를 노리는 호랑이마냥 살기를 연신 내뿜는 사나운 인물들이다. 바로 무황성의 주력인 아수라파천대와 검 마당이다. "당장 모습을 감추고 숨는다. 그리고 우소 넌 당장 검마당을 이끌고 배를 띄울 준비를 해 두거라." 뒤따라 모습을 드러낸 희욱이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희욱의 지시를 받자 검마당의 당주인 우소는 흑색 복장을 한 삼십 여 검수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같이 온 금영악도 소위무를 불 러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소위무는 곧 백 여명의 대원들을 하나씩 배치시켰다. 그들이 모습을 감추자 금영악 은 영은과 요라와 함께 전면에 앉아 수로를 내려다보는 희욱 을 향해 걸어왔다. "흠! 일단 준비는 다 된 것 같군." 희욱이 옆으로 다가온 금영악을 향해 주절거렸다. 그러자 금 영악의 옆에 있던 영은이 한 마디를 던져 왔다. "아빠! 우린 뭐 해요? 그냥 여기 있으라는 말은 안하시겠죠? " "너희들이 특별히 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그냥 이 애비하 고 같이 있다가 가도록 하는 게......" "싫어요. 그냥 이렇게 있으려고 성을 나온 건 아니란 말이에 요." 영은은 말을 다 듣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희욱은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벌써 저렇게 고집을 부리다니. 누굴 닮아서 저렇게 왕고집인 지......! 그냥 성에 놔두고 올 걸 잘못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 나 이미 때는 늦어 버렸다. 이제는 이대로 마무리가 잘 되길 바랄 뿐이었다. 영은은 갑자기 희욱이 고개를 돌리고 아무 말을 하지 않자 답답해졌는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빠!" "그래그래. 너한테도 일을 맡길 테니 그만 좀 닦달해라. 음. ..... 뭐가 좋을까?" 막무가네로 종용하는 영은의 채근에 머리가 아파진 희욱이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일 이 갑자기 생각한다고 떠오를 리 없었다. 그는 한숨을 푹푹 내 쉰 후 입을 열었다. "요라하고 같이 우소 녀석에게 합류해라. 요 아래쪽에 있을 테니 찾긴 쉬울 게다." "와!" 그녀는 주위가 들썩할 정도로 소리를 지르며 기뻐했다. "그 녀석 말 잘 들어. 쓸데없이 네가 나서서 기강을 흩트리 면 돌려보내 버릴 테니." 희욱은 협박 비슷한 말을 하며 영은의 경각심을 깨웠다. 그 러나 그녀는 그것이 말 뿐이라 생각했는지 들뜬 감정을 가라 앉히지 않았다. "알았어요. 그런 말씀 안 해도 잘 알아서 할 테니 걱정은 접 어 두시라구요. 요라야 가자." 영은은 요라의 손을 잡고 후다닥 산을 뛰어 내려갔다. 그 모 습을 보고 있던 희욱은 걱정이 가라앉지 않는지 연신 고개를 저었다. "믿어도 될까 몰라." "후후후! 영은이가 조금 활발한 성격이긴 하지만 공사(公私) 는 구분 할 줄 안다는 게 누구 말이었더라?" 금영악이 희욱을 놀려댔다. 그러자 희욱은 얼굴이 달아오르 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 전 했던 말이 이렇게 되돌아 올 줄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 그거야......" "됐네. 우소 녀석이 바보는 아니니까 아무리 영은이 날뛰더 라도 통제할 수 있을 게야. 그렇지 못하다면 그 녀석은 검마 당의 당주 자격이 없는 거라 봐도 무방할 걸세." "그렇겠지?" 조금은 안심이라는 듯 희욱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금영악은 그의 옆에 털썩 주저 앉았다. "조금 서두른 감이 없잖아 있지만 일단 준비는 끝났어. 이 정도로 안심할 순 없지만 그래도 일이 일이니 만큼 어쩔 수 없지. 빠르게 처리하고 도망가지 않으면 더 위험해." 걱정이 서린 금영악의 말에 희욱도 동의했다. 처음에는 쉽게 생각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고수들이 너무 부족한 것 같군. 이럴 줄 알았으면 채염낙( 菜鹽珞) 배선(拜宣) 부부도 부를 걸 그랬나?" 희욱은 무황성에 남아 있던 두 명의 호법(護法)을 생각했다. 긴 무황성의 역사를 살펴봐도 이처럼 부부가 같이 호법을 맡 은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혼자서도 엄청난 무공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들의 합격술(合擊術)이 었다. 가히 무황성 최강이라 부를 만 하다는 게 공통의 지론 이었다. 아수라파천대 정도는 둘이서도 박살을 내 놓을 정도 였고, 무황성 최고의 무력단체라 할 수 있는 흑혈대(黑血隊) 와도 백여 초를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인물들이다. 이미 나이 가 백을 넘어가는 관계로 원로원(元老院)에 들어가야 했지만 아직도 호법으로 남아 있는 것은 희욱 때문이었다. 그들의 양 자인 희욱이 붙들었기에 아직 호법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아쉬워하는 희욱의 말을 듣자 금영악은 입술을 이죽거렸다. 아무런 불만이 없는 듯 보이는 금영악이었지만 그에게도 불만 은 있었다. 바로 희욱이 호법 부부에 얽매이는 모습, 그것이 불만인 것이다. 무조건 강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자리가 무황성의 성주다. 그리고 희욱은 충분히 강했다. 저런 약점을 가질 이유가 없 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약해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었다. 어 릴 적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쓰라린 아픔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충분히 가슴으로는 이해를 할 수 있어도 머리는 이해해 주지 않았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 다. "언제까지 그들을 붙잡고 있을 것인가? 불효도 이만 저만한 불효가 아니지 않나? 그만 그 분들을 풀어 드리게." 희욱과 그 부부의 관계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금영악이 다. 희욱이 살수로 막 초입했을 당시 채염낙과 배선이 그를 돌본 적이 있었다. 무황성에서 키워질 당시 재질이 뛰어난 인 물만을 엄선하여 다시 교육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호법이 던 두 부부가 교관(敎官)이 되어 그를 가르쳤다. 그리고 그 인연은 그들을 양부모라는 관계로 맺어 주었다. 아무도 모르는 비사(秘事) 하나가 금영악의 입에서 흘러 나 왔으나 희욱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아직은 안 돼. 두 분이 안 계시면 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라고는 자네 밖에 없어." "지금부터라도 키워야지. 소위무하고 우소 녀석도 자네가 키 운 녀석이야. 영은과 요라도 자네의 한쪽 팔을 감당할 만큼 컸어. 언제까지 어린애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그 분들께만 매 달릴 건가?" "......!" "언제까지 그렇게 마음을 닫아 두고 있을 건가? 그렇게 하면 평생 가도 자네 주위에는 사람이 없을 거야. 결국 과거 성주 들의 길을 그대로 걸어갈 수밖에 없을 거라고." 강해서 성주가 된 사람들. 그러나 그들은 강한 만큼 사람을 믿지 못했다. 무조건 의심하고 보는 사람의 최후는 항상 하나 로 일관되었다. 배신과 암살. 그것이 역대 무황성 성주의 최후였다. 지금 금 영악이 지적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만해. 나도 알고 있어." 희욱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금영악을 쏘아본다. 평소와는 다 른 모습이나 금영악은 그것이 변명의 여지가 없을 때 나오는 희욱의 버릇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해야한다. 더 이상 몰아 붙이면 터져 버릴 게 분명하다. "알고 있다면 됐네. 더 말하지 않지. 일단 이번 일이나 계속 생각하게. 어떤 일이 있어도 성공 시켜야..... 응?" 말을 하다 말고 금영악은 입을 다물며 눈을 크게 뜨기 시작 했다. 희욱의 시선도 그를 따라갔다. 저 멀리 백 여장 밖에 어슴푸레 나타나는 선박 십 여 척이 눈에 들어왔다. 금영악이 자리를 벌떡 박차고 일어섰다. "저기 나타난 것 같군. 확실히 맞아. 이런 밤에 배를 띄웠다 는 게 믿어지지 않았는데 진짜로 띄웠잖아." "상관없잖아. 일단 빨리 치고 빠질 수 있으니까 우리에겐 밤 이 유리하지. 그런데 저 뒤의 배들은 뭐지?" 중얼거리며 말문을 연 희욱이 눈을 살짝 찡그렸다. 선박의 뒤쪽에 나타난 수 십 척의 쾌속정들이 눈에 잡힌 탓이다. "흐음! 안 봐도 알겠군. 우리가 불러들인 녀석들이야." "한 이 백은 될 듯 한데 생각보다 적은 것 같군. 그런데 뭘 하는 거지? 저렇게 따라만 오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희욱이 불만을 토했다. 불끈 쥔 주먹이 떨리는 것이 한 대 패 버리고 싶은 듯 하다. "안 봐도 뻔해. 모난 돌이 정을 먼저 맞는 거야 당연한 일 아닌가? 먼저 정 맞기 싫으니까 누가 대신 먼저 공격을 해 주 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것뿐이지." "그렇다면 계속 저렇게 놔 둘 건가?" "누가 그냥 놔두겠다고 했나? 우리가 여길 선택한 것은 여기 서 끝장을 보겠다는 거잖아. 나한테 방법이 있으니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금영악은 웃음을 머금은 얼굴을 들어 주위를 살피다 한 대원 을 불렀다. 숲에 몸을 감추고 있던 그는 금영악의 전음에 후 다닥 달려 나왔다. 한 가지 지시를 받자 망설임 없이 바로 몸 을 날려 아래쪽으로 내달렸다. 대원이 사라지자 금영악은 만 족한 표정으로 뒤쪽의 나무에 등을 기댄다. "자!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네."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네가 다 끝났다 하니 믿을 수밖에." 희욱도 그를 따라 등을 기대며 편히 자세를 잡았다. 홍저호의 입구 쪽은 조금씩 살기가 팽배해져가기 시작했다. 찰싹거리는 호반가에는 오 장 남짓 되는 소형 쾌속정 이 십 여 척이 언제라도 튀어 나갈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위에는 흑색 복장을 입은 사내들이 자세를 낮추고 준비를 하고 있다. 홍저호의 입구 쪽으로 다가가는 정화의 선박들은 이런 느낌 을 받지 못하는지 그저 느긋하게 물살을 가르고 있을 뿐이었 다. 그렇지만 마지막 선실을 이용하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 다. 삼 장 남짓 되는 좁은 선실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 다. 바로 무림맹을 지휘하는 지휘부 고수들이었다. 그들의 모 습은 지위에 어울리지 않게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평소 같으면 한 사람이 하나의 선실을 써도 모자랄 정도로 호사(豪奢)를 누렸던 인물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 었다. 자기들이 빌린 배도 아닐뿐더러 이 배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들을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었다. 선실 두 개를 내 준 것만도 감지덕지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미파의 장문인인 현의(賢意) 사태와 황보세가(皇甫世家)의 딸인 황 보화(皇甫花), 제갈세가(諸葛世家)의 제갈문예(諸葛文藝) 등 은 남자들과 같이 잠을 자는 불상사가 생길 뻔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남자들이 잠을 자는 이쪽 선실은 북적거릴 수밖 에 없었다. 그러나 이 정도도 장문인 정도는 되야 쓸 수 있었 지 하급 무사들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뱃머 리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각각 침상마다 두 명씩 잠을 자고 있었다. 그 중 가장 구석 쪽에서 잠을 자고 있던 나웅겸이 무엇을 느꼈는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중앙 쪽을 차지했던 무당의 천양자도 자리 를 박차고 일어섰다. "천양자께서도 느끼셨소?" "그렇습니다. 맹주께서도 느끼신 듯 하니 이건 분명......" 뱀이 온 몸을 스믈스믈 기어가듯 느껴지는 이상한 느낌. 무 언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질 듯 하다. 그들은 몸을 일으켜 갑판으로 나왔다. 그러나 아직 깊은 밤인지라 보이는 것은 아 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확실히 그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조금씩 더 커져 가는 듯 했다. 그 때 선실 문이 열리며 소림의 백오(白 誤) 대사, 화산파의 상청자(常淸子)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미타불!" "맹주 어찌 된 것이요? 무언가 느껴지는 듯 한데." 남궁무외(南宮武畏)가 급히 다가오며 물었다. "분명 무언가 있는 듯 한데 아직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하 지만 긴장을 풀면 안 될 것 같군요."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무렵 선실이 열리고 하나씩 모습 을 드러냈다. 그 때였다. 뒤쪽에서 호통을 치는 소리가 그들 의 귀로 들려왔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잠을 자는 거냐? 불침번이라는 것들이. " 정화의 목소리였다. 그들은 급히 뒤쪽으로 달려갔다. 두 명 의 병사들이 정화에게 꾸중을 듣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 다. 오 장이나 떨어져 있음에도 벌겋게 달아오른 정화의 얼굴 이 한 눈에 들어온다. 화가 나도 단단히 난 듯 했다. <기분이 안 좋은 듯 하군요. 그냥 조용히 물러납시다. 우리 가 저런 모습을 본 것을 안다면 더 기분 나빠 할 거요.> 귀제갈(鬼諸葛) 제갈무(諸葛務)가 주변을 향해 전음을 날렸 다. <혹시 저 정화라는 사람도 우리가 느낀 것을 느낀 것일까요? > 일지(一志) 도장이 제갈무를 향해 전음을 날렸다. 그러나 제 갈무는 바로 머리를 저었다. <그럴 리는 없다고 봅니다. 아마 뭔가 알고 있는 것은 있겠 지요? 그렇지 않다면 병사들을 이렇게 불러와서 호위를 할 필 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조용히 몸을 돌리려 했다. 그 순간 불수개(不受 ) 형지(荊枝)가 무엇을 보았는지 천천히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 켰다. <저게 뭐요? 배 같은데.> 형지의 손을 따라간 그들은 곧 수 십 척의 배를 볼 수 있었 다. 먹이를 뒤쫓는 개미 때처럼 수로를 뒤덮으며 따라오고 있 었다. <저 녀석들이 이 배를 노리고 있다는 말인가?> 당영민(唐英民)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제갈무를 바 라본다. 자기가 느꼈던 암울한 느낌이 저 배들에게서 느껴진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저 배들이 이 배를 쫓아오는 것은 확실한 것 같군요. 먹이감이 있으니 당연한 거겠죠.> <우리도 준비를 해야겠소. 저 녀석들이 뭔 짓거리를 할 지도 모르니까 말이오.> <예. 준비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요. 하지만 저 녀석들이 바 보가 아니라면 먼저 공격은 못 할 겁니다.> <아니 왜 그렇게 보시오?> 주먹질밖에 모르는 황보언(皇甫彦)의 질문을 날렸다. 제갈무 는 별 것도 아니라는 어투로 대답했다. <우리 쪽은 미리 연락을 해서 이쪽에 끼어 들지 말라고 전언 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분명 저들은 무황성에서 불러들 인 녀석들일 겁니다. 그렇지만 저 녀석들은 그저 비급이 탐이 나서 덤비는 것 뿐 무황성의 명에 죽고 사는 녀석들은 아니 지요. 먹이감이 있지만 무조건 덤빌 이유가 없다는 거죠. 먼 저 덤볐다간 삼 천이 넘는 병사들에게 화살받이가 될 뿐이니 일단은 저렇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지요.> <아 그렇구려. 그리 간단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황보언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물러섰다. <그래도 준비해 둡시다. 어떤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르잖소.> 상청자(常淸子)가 말을 건넨 후에 몸을 돌려 사라졌다. 남아 있던 인물들도 한 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그를 뒤따라 앞쪽 으로 걸음을 옮겼다. -97- 정파군웅의 돌연한 움직임에 배는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졸던 병사들은 주위의 소란에 눈을 비비며 일어났 고, 잔뜩 긴장해서 경계를 서고 있던 하급무사들은 자파 장문 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부동자세를 취했다. 온 몸을 옥죄어 오 는 살기에 위축되어 있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오히 려 자신만만한 자파 고수들의 모습에서 힘을 얻는지 잔뜩 고 무되어 가는 느낌이다. 소림의 18 나한(少林十八羅漢), 무당의 십육검(武當十六劍 ), 청성 오수(靑城五首), 아미 팔약(峨嵋八略), 개방의 차기 방주 자리를 다투는 육결 제자 무개랑과 육무개, 남궁 세가의 소가주 남궁인(南宮認), 황보 세가의 여식인 황보화, 제갈 세가의 제갈문예 등도 갑판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차기 중원의 정파를 이끌어 나갈 인물들답게 담담한 모습이다. 느 긋하게 인사를 나누던 그들은 장문들의 눈치에 급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에잉! 이 정도로 긴장하고 있다니 아직 멀었군 멀었어. 돌 아가면 단단히 훈련 좀 시켜야지 안되겠어."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던 개방의 형지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웬만한 인물들이면 알아보지 못할 긴장감을 신진 고 수들의 모습에서 찾아낸 것이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신권 황보언도 맞장구를 친다. "맞소. 형방주께서 제대로 보셨구려." "황보 가주께서도 보셨소? 저 덜덜 떠는 모습이 우리 정파의 미래라니 정말 한심해서 울화통이 터지는구려." "후후후! 뭐 상관 할 것 있겠소이까? 아직 경험이 미천해 그 런 것을." 황보언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 그러나 형지는 그렇지 않았다. 겨우 이 정도에 긴장하고 있 다니. 그 동안 시켰던 강한 훈련이 전혀 쓸모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따위 모습을 보려고 우리가 심혈을 기울여 저 녀석들을 키운 것은 아니지 않소? 우리는 모르지만 저 녀석들 때엔 반 드시 무황성을 쓰러 트려 정파의 세상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젠 그것도 불가능해 보이오." 너무 염세적인 모습에 황보언은 살짝 눈을 찡그렸다. 자기도 조금 성격이 급한 것은 인정하는 황보언이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형지 만큼은 아니었다. 물론 그도 불만이 없는 것은 아 니다. 훈련을 강하게 했던 만큼 이 정도의 별 볼일 없는 살기 에는 이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데는 그도 동의했다. 그러나 신진 고수들이 강한 무공과 엄청난 훈련을 받아 왔다 고는 하나 실전이라고는 한 번도 치러보지 못한 점을 그는 관 과 하지 않았다.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려 형지의 얼굴을 피했 다. '형방주는 나보다 더 급하군. 아무리 급해도 우물에서 숭늉 을 찾을 수는 없는데 실전도 한 번 치르지 못한 녀석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원하는군.' 이런 생각에 잠겼던 황보언은 그 순간 흠칫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자기도 형지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벌써 화를 터 트렸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개방주가 먼저 화를 터트리다 보 니 평소답지 않게 침착해진 것이다. 우스워진 황보언은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소리를 들었을까? 형지가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황 보언은 웃음을 지우며 말을 이었다. "됐소. 들어가서 죽이든 살리든 알아서 하시구려. 그건 그렇 고 저 병사 녀석들도 이제 좀 정신이 든 모습이군요." 그의 말대로 병사들은 거의 모두 다 잠에서 깨어난 듯 했다. 여기 저기서 시끌벅적한 소음이 들린다. 바라보는 황보언의 눈은 차갑기 그지없다. "이 녀석들도 조금씩 살기를 느끼기 시작한 것 같군. 이런 살기를 못 느끼면 병시인이지." "그렇지요. 아기들도 느낄 것만 같은 살기인데 못 느끼면 말 이 안 되지요." 황보언과 형지는 나지막한 어투로 마지막 말을 내뱉은 후 천 천히 다른 장문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눈에는 병사들은 걸어다니는 시체로밖에 보이지 않았 다. 다만 아직은 생명이 붙어 있을 뿐 조금 후 벌어질 피 튀 는 사투에서는 예정된 수순을 밟아 나갈 것이 분명했다. 언제 끊어져 바닥에 쓰러질지 모르는 하루살이 목숨들을 바라보는 황보언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수두룩하게 쓰 러질 병사들의 목숨을 생각하니 측은하고 가엽다는 생각이 들 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군대의 별 볼일 없는 능력에 무림 인이라는 자신의 위치가 너무나도 자부심이 들었다. 강하지는 않지만 수로를 넓게 뒤덮고 있던 살기는 조금씩 커 져가고 있었다. 마치 살기의 호수에 몸을 담근 듯 온 몸을 옥 죄어 오는 느낌이 더욱 강해져 갔다. 병사들과 하급무사들은 물론 장문인들도 조금씩 얼굴에 긴장감을 더해가고 있었다. 형지와 황보언이 옆으로 다가가자 장문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귓가로 들려온 첫 목소리는 바로 소림 방 장 백오의 것이다. "남궁 시주와 상청자께서는 앞를 맡아 주시고 당가주께서는 일지 도장과 함께 배의 선미를 맡아 주시겠습니까?" "대사께서는......" "소승은 18 나한과 함께 저 뒤쪽의 배로 넘어가겠습니다." 백오의 손이 뒤쪽으로 따라오는 배를 향했다. 별 이상을 느 낄 수 없는 그곳도 잠에서 깬 듯 북적이고 있다. 그 말에 반 응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한 사내를 제외하고 는. 그 사내는 바로 귀제갈 제갈무였다. "대사! 그렇게 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저들이 노릴 배는 우 리가 타고 있는 이 배가 분명합니다. 저 쪽에 있는 배에 침투 해 들어갈 녀석들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요. 만약 여기서 병 력을 분산시켰다간 공격을 받게 되면 책을 손에 넣기는커녕 각개격파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황보언이 호탕하게 웃었다. 말이 너무도 우습게 여겨 졌던 탓이다. 대충 살펴봐도 자기들을 꺾을 고수들은 보이지 도 않는 이 판국에 저렇게 약한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다 생 각된 모양이다. 어찌나 웃음이 컸던지 주위에 배치되어 있던 병사들이 고개 를 휙 돌리며 그를 보기 시작했다. 황보언은 따가운 눈총에 웃음을 거둔 후 목소리를 낮추고 제갈무를 향해 속삭인다. "각개격파라 하셨소? 아무리 적의 숫자가 많다 하더라도 저 런 보리 볏단 같은 병사들보다 조금 나은 녀석들에게 목숨을 잃을 우리가 아니지요. 그런 걱정일랑 접어 두시오." 그는 다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에는 아까보다는 훨씬 적은 웃음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의 생각과 같은지 웃음을 머 금었다. 사방이 갑자기 화기애애해져 가는 느낌이다. 그러나 제갈무는 전혀 굳은 얼굴을 펴지 않는다. 아니 더욱 정색하며 반문했다. "여러분께서는 너무 일을 쉽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생 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진정한 적인 무황성은 아직 모습을 드 러내지도 않았습니다. 언제 무황성에서 공격을 해 올지 모르 는 이 형국에 우리가 흩어져 있다는 것은 기름을 끼얹고 불에 드는 형상입니다." "아직 무황성이 나타났다는 개방의 전언이 없는 걸로 봐서는 무황성에 대해 신경은 끊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만." 남궁무외의 말이다. "그게 이상하다는 말이지요. 어찌된 일인지 개방에서 아무런 연락이 없는데......" "신경 쓰실 것 없을 것 같소. 나타날 녀석들이라면 이미 모 습을 드러냈을 것이요. 그럼 벌써 개방의 이목에 걸려도 한참 전에 걸렸을 터이고. 아마 이 일에는 끼어 들지 않을 것 같 소만." 제갈무의 말을 자르고 들어온 것은 일지 도장이다. 그러나 제갈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런 생각이 얼마나 위험 한지 자신은 잘 알고 있었다. "도장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실 지는 모르지만 전 그렇게 생각 하지 않습니다. 개방에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고 해도 분명 무 황성은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그는 아주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확신에 찬 어투라 다른 이들은 모두 머리를 저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뒤쪽에서 듣고 만 있던 당영민이 끼어 들며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는 것인지 대답을 듣고 싶소만." 이 질문은 무림맹의 군사로서 위치를 생각해서 던진 질문이 었다.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는 것이 이상했지만 그들은 모두 개방의 능력을 믿고 있었다. 분명 나타나면 들킬 것이 확실하 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혼자서만 저렇게 맹목적인 모습을 보 이다니.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저 뒤에 쫓아오는 녀석들은 사파의 녀석들이지요. 먹이 냄 새에 따라온 족제비 같은 녀석들 쯤은 우리가 결코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해도 무황성은 다릅니다. 분명 위험한 존재들이 지요." "그래서요?" "저 녀석들이 그런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못 얻을 건 뭐가 있소? 우리 쪽 정파 인물들도 다 듣고 쫓 아왔잖소?" "분명 그렇긴 합니다. 그러나 그 쪽은 우리가 오지 마라고 부탁하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사파의 녀석들은 나 타나지 않았습니까? 분명 그 뒤에는 무황성이 있을 게 분명합 니다." "억측이 아니오? 사파 녀석들이 나타난 것과 무황성의 입김 이 닿았다는 것은 좀......" 상청자의 해석은 확실히 그럴싸했다. 나타난 것만으로 무황 성이 조정한 거라 보기엔 무리가 없지 않아 있다. 다른 이들 도 머리를 끄덕여 동의를 했다. 그 생각을 아는지 제갈무도 머리를 한 차례 끄덕거린 후 말을 이었다. "나타난 것만으로 무황성이 조정했다고 보기엔 좀 억지가 없 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동시에 그것도 저렇게 한 곳으로 모여 들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그들이 뒤에서 계 책을 세우지 않았다면 저렇게 쉽게 나타나지도 못했을 겁니다 ." "저 녀석들이 나타난 것과 무황성이 조정했다는 게 무슨 연 관이 있단 말이오? 저 녀석들은 무황성의 인물들이 아니오. 나타나라고 명령해 봤자 나올 녀석들도 아니고 배로 올라가서 책을 강탈해 오라고 명한다고 따를 녀석들이 아니란 말이오. " 황보언이다. 호탕한 목소리로 따지듯 묻자 사방은 삽시간에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뒤덮였다. "분명 황보 가주의 말씀이 옳소이다. 무황성이 무슨 재주로 저런 녀석들을 통제하겠소? 제갈 군사의 생각은 억측일 것 같 소." 남궁무외까지 동의하고 나섰다. 그러나 제갈무는 결코 소신 을 굽히지 않았다. "너무 쉽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무황성은 소싯적 그 무 황성이 아닙니다. 무황성이 소문을 듣지 못한 것은 분명 아닐 겁니다. 저 녀석들도 알아차릴 정도인데 말이지요. 무황성이 그 책들을 포기하겠습니까? 그것도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 럼 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일까요? 거기엔 몇 가지 이 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숨어 있다가 급습을 할 예정이라는 설 이 가장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동안은 저 녀석들을 살살 다 그쳐 일을 끌고 나갈 것이고요." "그, 그런......" "분명합니다. 무황성에서 저 사파 녀석들이 책을 강탈해 가 도록 놔 둘 이유도 없고 능력도 충분합니다. 분명 무황성이 나타날 겁니다. 금영악 그 사내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한다면 말이지요." 금영악. 무황성의 군사 이름이 흘러나오자 사위는 삽시간에 숙연해졌다. 멍청했던 과거 무황성을 한 순간에 뒤바꾸어 놓 았던 사내. 정파의 군사인 귀제갈 제갈무와 함께 쌍벽을 이루 고 있는 사파의 절정 고수. 과거 금영악에 대해 잘 모르던 시절 무림맹은 그에게 당한 적이 있었다. 그리 큰 피해는 아니었지만 오랜 기간 정파 천 하였던 무림의 역사에 한 줄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그리고 정파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생각할 정도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무황성은 과거와는 다릅니다. 너무 쉽게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그걸 잊으셨다간 이번 일도 참패로 끝 날 것입니다." 제갈무의 말이 끝나자 모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황성과 몇 번 붙지 않아 항상 정파의 위세가 그대로로 생각했던 무림 인들은 반성하듯 쓴맛을 다신다. 타성에 젖어 뒤돌아 볼 줄 모르는 모습에서 깨어나 다시 한 번 심사숙고해 봐야 할 상태 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조용한 분위기를 깨트린 것은 처음에 말을 했던 백오대사였 다. 그는 반장을 해 보이며 읍을 했다. "아미타불! 분명 제갈 시주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러 나 제가 저 배에 가겠다는 것은 책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지요 . 저 배들에도 사람은 타고 있습니다. 만약 공격을 받는다면 무고한 생명이 쓰러져 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도록 놔 둘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책이 중요하다 해도 생명의 소중함은 더욱 큰 것입니다. 그들이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불존(佛尊 )의 뜻은 아니올시다." 갑자기 숙연한 분위기에서 흘러나온 말에 좌중은 할 말을 잊 어버린 채 멍하게 있을 뿐이었다. 백오대사가 할 말이 분명 틀린 것은 아니었으나 현 상황이 상황인 만큼 저렇게 꽉 막힌 생각은 인정해 주고 싶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그렇게 하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98- 말은 입에서 맴돌지만 아무도 말문을 열지 않았다. 다만 가 장 똑똑한 제갈무를 바라볼 뿐이다. 시선을 받은 제갈무가 헛 기침을 토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대사의 말씀은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서 흩어졌다간 오늘 밤 우리......" 콰쾅! 선박의 앞쪽에서 불꽃이 치솟았다. 그와 동시에 배는 풍랑을 만난 듯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시뻘건 불길과 검은 뭉게 구 름이 하늘로 버섯을 그리며 피어올랐고 폭발음과 함께 후끈한 바람이 폭풍처럼 일어났다. 말을 하던 제갈무의 몸이 비틀거렸다. 그런 것은 그 혼자 뿐 이 아니었다. 대다수의 병사들은 급살을 맞은 듯 나뒹굴기 바 빴다. 심지어 물에 빠지는 병사도 보였다. 쓰러지지 않은 사 람들은 단지 무림인들 뿐이었다. 균형을 잃고 잠시 비틀거렸 던 그들은 자세를 낮추며 중심을 잡았다. "뭐야?" "무슨 일이지?" 갑작스런 사태에 그들은 상황을 깨닫지 못했다. 비단 당황한 것은 그들뿐이 아니었다. 갑판 위를 나뒹굴던 병사들도 사태 파악이 안된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기 바빴다. "불이다." 앞쪽에서 병사들의 외침 소리가 들리자 그들은 급히 불이 치 솟는 곳으로 내달렸다. 그러자 검붉은 화염에 휩싸여 타오르 는 선두(船頭)를 볼 수 있었다. 기름이라도 부은 듯이 타오르 는 불꽃은 더욱 위세를 더해가며 커져가고 있었다. 화끈한 열 기가 무림인들의 얼굴을 확 쓸고 지나갔다. 그들은 손으로 앞 을 가리며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 "어찌 된 일이냐? 누가 저 불을 질렀느냐?" 그들의 뒤쪽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정대의 제독 정화다. 좌불안석(坐不安席)이었던 정화는 귀를 울리는 굉음 에 선실을 박차고 튀어나온 것이다. "자,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엄청난 소리와 함께 불이 치 솟았습니다." 옆에서 병사들을 독려하고 있던 장수 하나가 급히 허리를 굽 히며 보고를 했다. 정화는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무림인들을 가로질러 갔다. "흐음!" 그는 눈살을 있는 데로 찌푸렸다. 소리를 들어 보니 분명 화 약무기였다. 전장터에서 뼈가 굵은 정화이기에 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알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화약 무기가 지금 나타나 관선(官船)을 공격한단 말인가? 화약은 황실과 관에서 특급으로 분류하고 관리하는 품목이다 .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 해도 화약 같은 것은 결코 외부로 유출이 되지 않는 것이다. 무림인들이 가지고 있다는 말이 들 려오긴 했지만 설마 했던 정화는 눈앞에서 벌어진 이 일에 믿 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당장 불을 꺼. 당장 끄란 말이다." 혼자서 중얼거리던 정화는 큰 소리로 내지르다 시피 외쳤다. 그러자 뒤에서 안절부절 해하던 장수가 다시 손을 쳐들어 올 렸다. 그의 명은 다시 멀리 퍼져 나갔다. 이도 저도 못하던 병사들은 그제야 급하게 몸을 움직였다. 우왕좌왕 하던 모습 은 사라지고 다시 정렬되고 다듬어진 군기 든 모습이 보인다. "불을 꺼라. 물을 가져 와." 부장(部將)인 듯한 장수 하나가 급히 병사들을 다그쳤다. 곧 이어 병사들이 나무물통을 지고 나타나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 물을 들고 나타나는 병사들의 수가 급증하자 갑판은 온통 시장처럼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도와 줄 게 아니면 당장 비키쇼." 장수들의 닦달에 짜증나 있던 병사들은 앞을 막고 서 있는 정파 고수들에게 볼멘 소리를 뱉었다. 그들은 급히 뒤로 물러 섰다. 그러자 다시 병사들은 찰랑이는 물통을 들고 달려갔다. "어떻게 된 걸까요?"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좋은 일은 아닐 것 같군요. 징조가 나 쁜 것이 미리 각오 해 두는 편이 좋을 듯 싶습니다." 남궁무외의 질문에 제갈무가 급히 대답했다. 나쁜 징조라는 말에 제갈무를 보고 있던 백오 대사 이하 여러 무림인들은 고 개를 끄덕거렸다. "제길 오려면 빨리 오지 왜 이렇게 꾸물거리는 게야." 개방주 형지가 투덜거렸다. 어떤 형태로라도 한 판 싸움이 벌어질 것은 확실했다. 발정 난 똥개 마냥 뒤를 쫓는 사파 무 인들과 주위를 감싸고 흐르는 살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다 만 그 시간이 문제였을 뿐 그들이 나타난다는 사실은 확실했 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쉬운 쪽은 그들이었기에. 배 위에서 불길이 치솟자 숲 속에 숨어 있던 한 사내가 급히 모습을 감추었다. 그는 산 위로 내달렸다. 손에 든 검으로 앞을 막는 나무들을 거침없이 베어내며 달려간 사내는 곧 자 신을 기다리고 있던 진지로 돌아갔다. 야산 중턱에서 서성거 리던 금영악은 사내를 보자마자 달려왔다. "수고했다. 그만 자리로 돌아가 대기하라." "존명!" 사내는 머리를 조아린 후 다시 몸을 돌려 사라졌다. 그가 사 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던 금영악은 다시 자신이 원래 서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이미 희욱이 산마루 밑으로 보이 는 물길에 눈을 던지며 앉아 있다. 그는 아래쪽에서 치솟는 불길에 조금 의아한 눈빛이다. "잘 타오르지 않나?" 금영악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희미한 미소를 띄며 물었다. 충천하는 화광(火光)은 모든 것을 삼킬 듯 사방을 밝히고 있 었다. 배 위에서 여기저기 분주히 물동이를 나르는 병사들도 보였다. 바람은 그리 심하지 않았으나 생각보다 불길은 쉽게 잡히지 않고 있었다. "저 불이 자네가 시킨 녀석이 해 낸 일이란 것은 알겠네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군." "후후후!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이라니." "아니, 모르는 건 정말 모르는 거야." 희욱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금영 악은 빙그레 웃더니 손을 아래쪽을 향해 가리켰다. "내가 설명해 주는 것보단 저 쪽을 보는 것이 더 빠를 걸세. " 희욱은 손을 따라 눈을 돌렸다. 그러자 뒤쪽에서 계속 꽁무 니만 따라오던 소형선박들이 서서히 정화의 선박 쪽으로 다가 가는 것이 눈에 잡혔다. 아마도 이제 습격을 할 모양이다. 한 두 척이 아니었다. 십 여대를 제외하고는 모든 배들이 다 조 공선을 향해 물살을 가르고 있다. "후후! 알겠군." "알았으면 됐네. 우리는 일단 조용히 앉아 있다가 사태가 진 정 될 즈음 나가서 한 번 휩쓸면 되는 걸세." "그런데 뭘 썼기에 저렇게 잘 타오르는 건가? 그냥 벽력탄( 霹靂彈)은 아닌 듯 한데 말이지." 희욱은 다시 궁금한 것을 물어 보았다. 이미 굉음이 들렸을 때부터 벽력탄을 썼겠군 하고 생각하던 희욱이었다. 그러나 과거 쓰던 벽력탄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위력 그 자체가 커 진 것은 아니었다. 위력은 과거의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물 을 부으면 쉽게 꺼졌던 과거와는 달리 동이째 들이붓는데도 꺼지지 않는 것이 달라졌다 할까? 말 그대로 벽력탄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벽력처럼 무시무시한 소리와 위력을 가진 무기였다. 무황성과 함께 해 온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로 그 만큼 위력도 대단했다. 한 번 폭발했다 하면 사방 이 장을 초토화 시켜 버릴 정도였다. 많은 정파 인물들은 무황성과의 싸움에서 가장 소름 끼쳤던 것이 벽력탄 이라고 할 만큼 대단한 무기였다. 그러나 오래된 역사와는 달 리 그리 많이 쓰이지는 않았다. 대병력들이 직접 맞부딪히는 경우가 아니면 쓰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한 번에 이 장은 가뿐하게 피해 내는 일류고수들과의 대결에서는 오히려 안 쓰 는 것만 못한 무기였다. 그러다 보니 오랜 기간 대 결전이 없 었던 정사 무림에서 자연스레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거의 이 십 년 만에 벽력탄의 위력을 재확인한 희욱은 화려했던 과거 가 떠오르는지 미소를 한껏 지었다. "으흠. 내가 오기 전에 장난 좀 쳐 놨지. 그런데 생각보다는 잘 된 것 같군." "장난?" 장난이라니. 무슨 장난을 쳤다는 말인가? 금영악이 화탄(火 彈)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희욱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내부에다 황린(黃燐)을 좀 넣었지. 불에 잘 타기도 하지만 맹독까지 내뿜지. 그 정도로만 알아두게. 더 설명해도 어려워 서 자넨 못 알아들을 테니 말이야. 그건 그렇고 이제 시작할 모양이군." 금영악의 설렘 어린 말에 희욱은 번뜩 눈빛을 발하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말대로 소형 쾌속정들은 거의 마지막 선 박에 도달해 있었다. 희욱이 보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소형 쾌속정들은 누가 먼 저라 할 것도 없이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앞쪽에서 치솟는 화염에 이미 어느 놈이 선수를 쳤다 생각했는지 배에 타고 있 던 사내들은 붉게 물든 눈을 이글거리며 배를 모는 선원을 닦 달해댄다. 백 여장 넘게 떨어져 있던 거리는 순식간에 십 여 장으로 좁혀 들었다. 아래까지 쫓아온 쾌속정에 타고 있던 사내들이 갈고리를 집 어 들어 조공선을 향해 집어 던졌다. 쉬익! 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갈고리는 뱃전을 향해 날아갔다. 하나 가 날아가자 뒤질세라 수 십여 개의 작살과 갈고리가 뒤를 따 랐다. 덜컹! 검은 빛을 발하는 갈고리가 선창에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땅에서 솟아난 듯 십 여명의 인영이 뱃전에 나타났다. "뭐, 뭐야?" "누구냐?" 근방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창을 내밀었다. 이미 앞에서 치솟는 불을 보았기에 그들도 상당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으흐흐흐! 알고 싶은 게냐? 하지만 가르쳐 주고 싶지 않은 걸." 느글느글한 말투다. 몸놀림이 범상치 않은 것이 무인들임을 바로 알아차린 병사들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는 뒤에 놓인 횃불을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검은 그림자들의 용모가 드러났다. 나타난 사내들은 험상 굳기가 상대 할 자 없을 정도로 엄청 난 인물들이다. 괴물도 이런 상괴물이 없었다. 불에 탔는지 시뻘겋게 달아 오른 자, 칼침으로 도배한 자, 한쪽 면상이 함 몰된 자 등등 각양각색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건 아예 안 본 것만 못했다. 욕지기가 올라오는지 병사들은 오만상을 다 찌푸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것들이... 어디서 인상을 찡그리는 거냐? 죽여 줄까?" 오 척 단구의 언청이 사내가 주먹을 휘둘러 보였다. 외모에 상당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지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바로 달려 나와 병사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다른 사내들도 그런 그를 말리지 않았다. 퍽! 한 방이었다. 가슴에 주먹을 맞은 병사는 비명도 지르지 못 하고 입에서 피를 토하며 뒤로 나뒹굴었다. 삼 장 뒤로 나가 떨어진 병사의 팔다리는 얼마간 푸득거리더니 뚝 멈추어 버렸 다. "크크크! 이런 내가 너무 심하게 때렸나?" 그는 혀로 주먹을 살살 핥으며 이죽거렸다. 그는 다시 남아 있던 병사들에게 눈길을 던졌다. 한 녀석으로는 성에 차지 않 는다는 표정이다. 그러나 막 튀어 나가기도 전에 뒤에서 부르 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해라. 그 딴 녀석들과 놀 때가 아니야. 다른 녀석들이 선수 치기 전에 빨리 서둘러야겠다." "그게 무슨 소리유? 누가 우리 보다 먼저......" "넌 눈이 없느냐? 저게 안 보인단 말이냐?" 한 쪽 눈이 없는 사내가 손가락으로 앞쪽 선창을 가리켰다. 그의 말에 오 척 사내는 흠칫 몸을 떨더니 앞으로 눈길을 던 졌다. 그러자 무림인들로 보이는 수십 명의 인물들이 신형을 날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부르르 몸을 떨던 사내는 바로 앞으로 내달렸다. 그 뒤로 십 여 명의 사내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나간다. 이미 그 들의 손에는 무시무시한 무기들이 횃불에 빛을 반사하며 번뜩 이고 있었다. "으아악!" "컥!" 병사들은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아직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 주원인이었다. 한 수 의 반항도 해 보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병사들. 삽시간에 배 안은 온통 병사들의 시체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배가 습격 당한 소식은 얼마 되지 않아 정화의 귀에까지 들 렸다. "뭐야? 무림인들이 배로 처들어 왔다고?" 설마 했던 일이 벌어지자 정화는 선실문을 박차고 나왔다. 뒤로 이글거리는 화광이 넘실거리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 정화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불끈 쥐어진 주먹도 파르 르 떨리고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남해쪽에서 해적에게 습격 당할 무렵부터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깟 무인들이 관을 습격하랴' 하 는 자만심도 없지 않아 있었다. 정화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과거 무림과 관은 절대불가침의 조약이 체결된 것처럼 서로를 멀리했다. 문서로 기록된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관행처럼 이루어졌고, 긴 역사동안 결코 깨어지지 않는 법칙처럼 존재해왔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아니다. 영원히 변치 않을 듯한 둘의 사 이는 산산조각 나 버리고 말았다. 그 가증스런 무림인들이 그 것도 황제에게 가는 조공품을 습격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무림이 관에 별 이상이 없다는 평가 를 내렸기에 지금까지는 무림을 묵인해 주고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 일은 묵과해 버릴 성질의 그것도 아니었고, 쉬쉬 덮어버릴 법한 일도 아닌 것이다. "장균(張均)! 어디있나? 장균." 정화는 정사흠 자리를 대신해 내려온 장수 장균을 호출했다. 헐레벌떡 달려온 장균.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었는지 그의 갑옷은 온통 그을린 자국이 역력하다. "부르셨습니까?" "지금 그 딴 불 끌 시간이 있나?" "예?"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정화를 바라보았다. 지금 저 불보 다 더 큰 일이 있다는 말인가? "당장 병사들을 대리고 습격해 온 녀석들을 잡아. 어떤 수단 과 방법을 쓰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 무조건 잡아넣어. 아니 잡을 필요 없어. 그냥 죽여 버리라고." 이성을 잃은 듯 정화는 말을 오락가락 하며 소리쳤다. 장균 은 알겠다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그가 사라졌음에도 정화는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불안감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림인들이 가진 능력과 잠재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명나라의 유명한 장수이고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이라 고는 하지만 그는 명리(名利)에만 관심이 있는 여타 관원들과 는 달랐다. 상대방의 약점과 장점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분석 을 한 후에 공격하는 것이 평소 그의 모습이었다. 당연히 무 림인들의 능력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고 있었다. 수장을 단번에 날아가는 능력과 한 주먹에 상대를 쓰러트리 는 가공할 위력. 언제나 칼을 들고 전장터에서 싸워야 하는 장군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신(神)적인 능력은 엄청난 매력 으로 다가오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지금은 단순히 가증스럽고 더러운 버러지 같은 녀석 들일 뿐이다. 쓰러트려 버려야 할 적인 것이다. 정화는 몸을 휙 돌려 선미로 걸어갔다. 막 갑판의 중앙을 통과하던 정화의 발이 우뚝 멈추어 섰다. 선실 쪽에서 서성거리는 한 무리의 무림인들을 본 것이다. '저것들은?' 눈살이 살짝 찡그려졌다. 자신을 보호하겠다며 배에 오른 무 림인들이다. 분명 좋은 뜻으로 만난 사람들이었지만 정화는 솔직히 그들이 싫었다. 허리가 뻣뻣한 것도 그렇지만 관과 무 림과의 어울릴 수 없는 기질도 한 몫을 차지했다. 거기다 지 금 한 가지 이유가 더 추가되다 보니 꼴 보기 싫은 것은 너무 도 당연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배를 지키고 병사들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병 사들은 배를 침투한 무림인들을 막을 능력이 없었다. 지금 저 기 보이는 사람들말고는 이 배에서 그들을 상대할 수 있는 사 람들이 없는 것이다. 감정은 감정이고 일은 일이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정화는 자신의 감정을 다독이며 그들의 앞 으로 걸어갔다. 자신들의 선실 앞에 서 있던 무림인들 중 정화를 가장 먼저 본 것은 무당의 천양자였다. "무량수불! 어서 오십시오." 천양자의 인사에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던 무인들도 몸을 돌린 다. 그리고는 정화의 눈엔 조금 건방진 듯한 인사를 건낸다. "당신들에게 할 말이 있소." "무엇인지 말씀하시지요." 나웅겸이 앞으로 나서며 포권했다. 정화는 감정을 다스리며 말문을 열었다. "당신들이 말한 데로 지금 무림인들이 쳐들어 왔소. 솔직히 말해 당신들이 싫소만 지금은 내 감정대로만 할 수 있는 상황 이 아닌지라 이렇게 부탁하는 바요." 무엇을 부탁하는지는 쏙 빼버리고는 말을 맺는 정화. 그러나 듣고 있던 사람들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나웅겸은 공손하게 말한 후 몸을 돌려 자신의 일행에게로 돌 아갔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속삭이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기다리는 정화는 다시 속이 불편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 을 비웃는 듯 자꾸 자신을 향해 눈을 살짝살짝 흘겨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렇게 와서 우리에게 부탁할 거면서 그때는 왜 그렇게 뻣뻣하게 굴었느냐 하는 것 같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나웅겸이 다가왔다. 모습을 보아 하니 도움을 주겠다는 결론이 난 듯 했다. "일단 위험하시다니 저희들이 도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대신......" 자신이 예상했던 대답이 나오자 정화는 조금 남아 있던 불안 감도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이상은 듣고 싶지 않 았다. 바로 말을 꺼내어 잘라 버린다.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고 있소. 일단 당신들이 도와 준다 면 폐하께 잘 말씀드리도록 하겠소." "그, 그럴 수는......" "분명 처음에도 말했소만 내가 함부로 책을 내어준다 안준다 따윌 결정할 수는 없소. 여기 이 배에 있는 모든 물품들은 다 폐하의 것이고 처분하는 것도 폐하께서만이 결정하실 수 있소. 알겠소?" 마지막 선은 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들어 있는 말이었 다. 나웅겸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알겠습니다. 일단 여기는 저희들에게 맡겨 두시지요. 저희 들이 알아서 해결하도록 하지요." "그럼 부탁하겠소. 그럼 이만......" 정화는 다시 몸을 돌려 사라졌다. 정화가 모습을 감추자 나 웅겸은 머리를 살며시 흔들더니 다시 일행을 향해 걸음을 옮 겼다. 그들은 다시 한참을 이야기했다. 그러더니 그들은 둘로 나누어 한 쪽은 남고 다른 한쪽은 수십의 자파 고수들을 이 끌고 뒤로 몸을 날려 사라졌다. 관도 뒤 한 야산에서 피어오른 모닥불 위에는 멧돼지 한 마 리가 노릇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충분히 익은 멧돼지 다리 하 나가 작고 고운 손 하나에 의해 찢겨져 나간다. "할아버지 고기 좀 드세요." 조기혜는 다리 한 짝을 이세직에게 내밀었다. "괜찮다. 저 친구에게나 주어라." 이세직은 고개를 저은 후 옆에 앉아 고기를 뜯는 당우양에게 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당우양도 바로 머리를 흔들었다. "나도 됐다. 그냥 문이한테나 줘." 손을 쭉쭉 빨며 천인문을 향해 턱짓을 했다. 조기혜는 한쪽 눈을 살짝 찡그리며 천인문을 응시했다. 두 손과 입에 번들거 리는 기름을 잔뜩 묻히고는 자신의 손에 들린 고기만을 바라 보는 천인문을 보자 조기혜는 정나미가 떨어진다는 듯 머리를 저었다. 요즘 들어 먹을 것을 너무 밝히는 천인문이었다. 얼마 전 음 식 때문에 혼쭐나고서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을 보면 확 실히 달라지긴 한 모양이다. "할아버지들이 안 드신다면 제가 먹을게요." 조기혜는 냉큼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다리를 두 손으로 고쳐 잡았다. 그러자 천인문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누나 왜 나한테는 안 물어 보는 거야?" "너한테 물어 볼 필요가 뭐 있어?" "왜 필요가 없어? 나도 먹고 싶단 말이야." "먹고 싶으면 네가 직접 뜯어먹으면 되지 왜 내가 뜯은 걸 탐내는 건데?" "탐내긴 누가 탐을 냈다고 그래? 그리고 누나는 벌써 많이 먹었잖아." "많이 먹긴 누가 많이 먹었다는 거야?" "평소엔 다리 하나도 잘 못 먹으면서 오늘은 왜 그러는 건데 ? 오늘은 벌써 그 정도 먹었잖아." "사람이 항상 똑같니? 배가 고픈 날도 있고 덜 고플 때도 있 는 거야. 그러니 내가 얼마나 먹든 넌 상관하지 마." 두 남녀는 갑자기 고기 하나를 놓고 설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 "누나가 얼마나 먹던지 내 알 바 아니지만 누나가 든 다리는 맛있는 부분인데 먹다 남기면 아깝잖아. 그럴 바엔 나한테 다리 넘기고 누나는 저 몸통이나 먹는 게 어때?" "흥! 다리 먹고 싶으면 네가 다시 한 마리 더 잡아 와. 그게 싫으면 그냥 네가 몸통을 먹던지." 이렇게 다투는 것은 산을 내려온 뒤부터 항상 보는 일이라 이세직과 당우양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 일쑤였다. 얼마 안되어 진정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아예 못 본 듯 그냥 고기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었다. "잡기가 얼마나 힘든지 누나가 더 잘 알잖아. 그런데 나보고 잡으러 갔다 오라고? 어째 오늘 누나 너무 쩨쩨하게 논다." "뭐 쩨쩨? 그래 말 잘했다. 난 쩨쩨해. 그러니 너한테 다리 넘겨주기 싫어 됐니?" 조기혜는 눈을 부라리며 천인문을 쏘아 봤다. "알았어. 내 참 더러워서. 내가 잡아 오면 될 것 아냐? 그 대신 절대 누나한텐 안 줄 거다." "누가 달래? 안 줘도 상관없으니 걱정말고 잘 갔다 와." 얄밉게도 조기혜는 방긋 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어 흔든다. 이빨이 빠드득 거릴 정도로 입을 꽉 다문 천인문. 벌떡 자리 에서 일어서 몸을 돌렸다. 그러나 걸음을 옮기지는 않았다. "왜 진짜 가려니까 귀찮니? 귀찮으면 나한테 잘 부탁해 봐. 혹시 아니? 내가 마음이 변해서 다리를 줄지도 모르잖아." 조기혜는 천인문의 등에 대고 살살 놀려댔다. 그러나 천인문 은 전혀 듣지 못했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가려면 빨리 가고 말려면 빨리 그냥 앉아서 몸통이나 뜯어. 귀찮게 자꾸 서서......" "좀 조용히 해 봐." 버럭 소리를 질러 조기혜의 입을 바로 다물게 해 버린 천인 문은 이세직을 응시했다. "할아버지. 저기 저쪽이 왜 저렇게 밝은 거죠?" "뭐 말이냐?" 이세직은 눈을 들어 천인문을 보았다. 천인문은 손을 들어 야산 뒤쪽을 가리켰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천인문의 손끝 이 향한 그곳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 산불이라도 난 건가 왜 저렇게 벌겋지?" 고기를 입에 물고 있던 당우양이 입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산불은 무슨. 저 쪽에는 수로가 흐르는데 불이 날 리가 없 잖아." 이세직의 말에 당우양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불이 난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빨간 거죠?" "노부도 잘 모르겠다. 멋부리고 싶은 관원이 등을 환하게 켜 고 수로 여행이라도 하는 걸지도 모르...... 관원?" 별 일 아닌 것처럼 말하던 이세직이 무엇이 떠올랐는지 자리 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손에 든 고기가 땅으로 떨어 졌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놀라는 거야?" 흠칫 놀란 당우양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이세직이 눈을 돌 리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야." "무, 무슨 일인데 그렇게 설치는 거야?" "당장 뜰 채비 해. 문이는 말을 끌고 오고 자네도 짐을 챙겨 빨리." 이세직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그저 다그칠 뿐이다. 일행들 은 갑작스런 반응에 잠시 당황하는 듯 했으나 그의 말을 묵묵 히 따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불은 꺼지고 주위는 깜깜한 밤의 어둠에 휩싸인다. 그러나 다가온 새벽은 막을 수 없는지 동녘은 서서히 밝아 오고 있었다. -99- 배 위는 이미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지옥이 펼쳐지고 있었다 .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스러져갔고 그만큼의 비명이 사방에서 난무했다. 밤이라 잘 보이지는 않지만 사방엔 시체 들로 산을 이루고 있었다. "으아악!" "컥!" 쉬지 않고 터지는 단말마. 대부분은 병사들에게서 들려왔다. 그들은 사정없이 내지르는 무인들의 검에 반격도 못하고 나 가떨어지고 있었다. 정화의 군단은 모두 합쳐 오천이 가까스로 넘었다. 남해에서 부상당하지 않은 병사 천 오백과 새로 지원되어 온 병력 삼 천 오백을 합한 숫자다. 그나마도 십 여 척의 배로 나누어 탄 관계로 한 번에 나설 수 있는 병사들은 겨우 오백이 안 되는 숫자였다. 각각의 배에 침투한 무인들은 삼십에서 백 정도밖 에 안 되는 숫자였지만 오백의 병사들은 한마디로 보릿단에 꿰어둔 허수아비나 다름 아니었다. 한 칼에 한 명씩 피를 내 뿜으며 갑판을 나뒹군다. "크하하하! 빨리 찾아라. 그 책만 찾으면 무림은 우리 손에 들어오는 것이다." 어디를 가나 꿈을 꾸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두 명의 병 사를 양손으로 짓이겨버린 사내 하나가 목청 높여 소리치기도 하고 싸움에는 관심 없이 욕망에 번들거리는 눈을 번뜩이며 선실을 뒤지기 바쁜 사내도 보인다. 피의 광기에 잡혀 버려 병사들만 찾아 돌아다니는 녀석들도 꽤 보였다. 조금씩 날이 밝아오자 배 안에도 희뿌연 빛무리가 조금씩 자 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빛이 들어오지 않은 것만 못했다 . 배 위는 한 폭의 지옥도(地獄圖)가 그려지고 있었다. 처절 해도 이렇게 처절할 수가 없었고 끔찍해도 이보다 더 할 수는 없었다. 끊어진 팔다리는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정도로 널려 있었으며 배는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사정은 다른 배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십 여 척의 배들은 모 두 공격을 받고 있었고 많은 병사들은 목숨을 뺏겨 갑판 위를 뒹굴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배가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단 두 곳에서는 상황은 완전히 반대로 흐르고 있었다. 무림맹의 세력이 닿은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무림맹주 철검비웅(鐵劍飛熊) 나웅겸(羅熊鉗)과 당문의 가주 천수불영(千手佛影) 당영민(唐英民)을 주축으로 한 정화의 지휘선박(指揮船舶)과, 소림의 방장인 백오(白誤)대사와 무당 의 장문인인 천양자(天陽子)를 필두로 한 군웅들이 타고 있는 배는 사정이 달랐다. 나웅겸과 당영민 등은 수비를 위해 남겨진 경우다. 그래서 침착하고 어떤 상황에도 대비할 수 있는 인물들로만 구성되었 다. 각각 오십으로 구성된 무림맹의 검천대(劍天隊)와 집정대 (集情隊)를 이끄는 나웅겸과 사천당문의 당영민과 당씨세가를 수호한다는 다섯의 수경팔수(守警八手)들은 그야말로 철통같 은 방어를 해내고 있었다. 누가 배 위로 올라올라치면 당씨 문중의 인물들이 암기를 내 던진다. 상대가 쓰러지면 검천대나 집정대가 물위로 내던진다 . 이것이 그들만의 방법이었다. 서로 의논하고 하는 것도 아 니었건만 그들의 수비는 가히 철벽이라 부를만했다. 불미스런 사고에 대비하여 나웅겸과 당영민이 경계를 펼치고 있지만 한번이라도 그들이 손을 써 볼 기회가 올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철저한 방어를 펼치고 있음에도 죽는 사파의 인물들은 보이지 않았다. 천수불영(千手佛影)이란 별호를 보 아도 알 수 있듯이 당영민은 소림의 백오와 더불어 가장 손속 이 부드러운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 밑의 인물들도 냉혹한 살 수 따윈 펼치지 않았다. 사천당문이 너무 유약해 진 것이 아 니냐는 비아냥도 많았지만 당영민은 그런 비난 속에서도 자신 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 현 당문은 소림과 함께 가 장 정파다운 정파로 인정받는 입장이었다. 그 결과 오늘 지휘 선을 침투해 온 사파 인물들은 모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 반대로 갈라진 다른 한 무리는 공격을 목적으로 구성되었다. 일부를 제외하고 남은 인물들은 모두 여기에 들었다. 그들은 모두 피에 절은 사파 무사들을 가차없이 베어 버리며 돌아다 녔다. 그러나 배는 너무 넓었고 쳐들어온 사람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찾아내기도 쉽지 않았다. "으윽! 이 녀석들 어디로 다 숨은 거야? 내가 나타나니까 겁 이 나서 다 숨었나?" 온 몸을 감싸오는 살기도 모자라 사방을 뒤흔드는 피 냄새가 이성을 마비시켰을까? 남궁세가(南宮世家)의 가주인 천검(千 劍) 남궁무외(南宮武畏)는 평소 그답지 않은 어투로 역정을 냈다. 발 밑으로 느껴지는 끈적거림과 질퍽함. 바로 옆에 쓰 러져 있는 병사들의 피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상기 된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 거리는 그의 귓가로 황보언의 목소 리가 들려왔다. "후후! 두 놈 찾았다." "어디어디?" 황보언의 혼잣말에 남궁무외가 고개를 돌리며 사방을 훑었다 .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인(南宮認)은 그런 부친의 모습에 심히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부렸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런 모습에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다. 그들도 정신 없이 사파 무리를 찾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녀석들은 내 거요. 그러니 신경 끄시오." "뭐, 뭐라? 둘이나 된다면서. 한 녀석 정도는 넘겨줘도 아무 상관 없잖아." "상관이 없긴 뭐가 없다는 거야. 둘도 아쉬운 판국에 하나 넘겨주면 하나밖에 못 잡잖아." 둘의 말다툼은 서서히 높아졌다. 그러나 그 싸움은 얼마가지 않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한 사내가 바다 위에서 뛰어 올라 오더니 검으로 황보언이 찍은 두 명을 단번에 베어버린 것이 다. "아, 아니 어떻게 된 거야? 내 먹이감이......" 설전을 하며 살짝 고개를 돌려대던 황보언이 깜짝 놀란 표정 이다. 어디서 나타난 녀석인지 자신에게 고하지도 않고 먹이 감을 낚아가 버린 게 화가 나는 모양이다. 남궁무외도 넋을 놓고 한쪽을 보고 있는 황보언을 따라 눈을 돌렸다. 그러자 선실 구석에 쓰러진 두 구의 시체를 볼 수 있었다. "우하하하! 네가 혼자 처리하려니까 벌받은 거잖아." "뿌드득! 어떤 녀석이......?" 황보언은 이빨이 나갈 듯 어금니를 깨물었다. 사내는 그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검을 시체의 옷에 닦아 낸 뒤 천천히 다 가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조금씩 눈에 선명하게 잡히기 시 작했다. "아니 저 녀석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을 보았을 때 그러할까? 남궁무외 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어떻게 여기 온 것인가? 그래 자네 이름이 뭐였더라? 으흠! " 얼굴은 기억이 나지만 이름은 이미 잊어버린 남궁무외. 사내 는 슬쩍 이름을 묻는 남궁무외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무당의 황요진(黃謠眞)입니다. 남궁 선배님." "그래 맞아 황요진. 나이가 들었는지 요즘은 이름 기억하기 가...... 하하하하! 이해하게나."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바로 무림맹을 잇는 유일한 끈이자 황제 복위 세력의 중요한 역을 맡고 있는 황요진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궁무외는 잘 왔다며 격려라도 하려는 듯 그의 어깨 를 툭툭 쳤다. "그래 갑자기 무슨 일로 나타난 거냐? 노부는 천양 도장께서 무당으로 널 보냈다고 알고 있었는데?" "사백님께 편지를 전해 드리러 왔습니다." "편지? 누구... 혹 네 사부 천수자(天水子)?" "그렇습니다." 천양자의 사제인 천수자가 편지를 보냈다? 잠깐 호기심이 솟 는 느낌이었으나 필요 없는 일에 관심을 쏟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그는 머리를 뒤흔든 뒤 말을 이었다. "도장께서는 이 배에 안 계신다. 저 쪽 배에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는 손을 들어 맞은편의 배를 가리켰다. 그 곳에서는 아직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 감사합니다. 그럼 소생은 이만." 황요진은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숙였다가 다시 몸을 솟구쳤 다. 박차고 오른 그는 공중에서 몸을 가볍게 뒤집더니 맞은편 배로 거뜬히 넘어간다. 황요진의 뛰어난 경공 실력을 흐뭇한 눈으로 보고 있던 남궁무외는 갑자기 들린 단말마에 고개를 확 돌렸다. 황보언이 주먹으로 사파 무사 하나를 날려 버리는 모습이 들어온 것이다. "아니. 저, 저것이 날 내버려두고. 야 이 넘아 너 혼자 재미 볼 거냐?" "흥! 넌 네 볼일이나 봐. 난 내 일이나 하면 되니까." "그래 좋다. 오늘 누가 많이 때려 잡나 한 번 보자." 그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몸을 날렸다. 뒤에서 씁쓸한 표정 을 짓는 두 남녀, 남궁인과 황보화는 서로 마주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천인문 등이 수로 앞까지 도달했을 무렵, 이미 날은 상당히 밝아 있었다.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지만 사위는 이미 새벽 의 빛에 물들어 있었다. 그 정도만 해도 천인문 일행은 쉽게 주변을 구별할 수 있었다. 그들은 더욱 속도를 높여 내달렸다 . 숲길을 헤치고 둑 위에 막 올라서자 붉게 물든 수로가 눈에 들어왔다. 환하게 타오르는 배 위에는 한창 칼부림이 일고 있 었다. "크억!" 칼을 든 사내가 날아온 작살에 가슴을 뚫리며 쓰러졌다. 그 옆에서는 다른 사내 하나가 병사의 배를 대도(大刀)로 쭉 갈 라 버린다. 내장과 피가 주룩 흘러내리며 병사는 앞으로 픽 고꾸라진다. 배 안은 완전히 피로 물든 지옥이었다. 지옥도 이런 지옥이 없었다. 사방에서 들리는 신음과 온통 피칠을 한 선체는 그야 말로 인세의 지옥을 보는 듯 하다. "으윽!" 조기혜는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입을 막으며 고개를 돌렸다. 구역질이 나는지 그녀는 고개를 처박으며 깩깩 거렸다. "이거 심각하군.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전혀 몰랐는데." 끔찍한 모습에 당우양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리 비급에 눈이 멀었다지만 관의 선박을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라 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공격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관과 전 면전(全面戰)치르겠다는 뜻이나 다름 아니었기에. 그러나 이 제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저 미친 녀석들이 일을 냈구만 일을 냈어. 쯔쯔쯧!" 이세직이 미간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아무리 무식해도 그렇 지 어떻게 관선(官船)을 공격한단 말인가? 심히 무림의 미래 가 암울해지는 느낌이다. "우린 누구 편을 들어야 하죠?" "편, 지금 편이라 했느냐? 이게 무슨 편 짜고 하는 놀이인줄 아느냐 편을 가르게?" 천인문의 질문에 당우양이 고개를 휙 돌리며 눈을 부라렸다. 그가 기분 나빠할 질문은 아니었지만 아침부터 끔찍한 모습 에 흥분한 듯 잔뜩 격양된 어조였다. 천인문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대꾸했다. "그럼 어떻게 해요? 아무나 죽여 버려요?" "그, 그건......" 되묻는 천인문에게 해 줄말이 없어진 당우양이 우물거리자 이번에는 이세직이 나섰다. "일단 기다려 보자꾸나. 시간이 지나면 어느 쪽을 도와 주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한지 드러날 거다." 천인문과 조기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 날 아침은 평소의 그 런 아침이 아니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로 나누어진 잔혹한 아 침이다. 아침이 막 시작될 무렵 전투는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사 파의 압도적인 우세로 시작되었던 전투는 한 무리의 정파 인 물들의 도움으로 관의 우위로 끝나가고 있었다. 챙챙! 커억! 아직 사방에서 병기 소리와 비명 소리가 들리긴 했으나 그 정도는 아주 미약해져 있었다. 막바지로 치닫는 전투, 그 끝 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온 사방을 뒤덮은 피의 흔적과 잘린 신체들. 이곳이 과연 인간이 사는 세상인가 싶을 정도로 그 모습은 끔찍했다. 그러나 그런 흔적은 관병들의 몸놀림과 함 께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빨리빨리 치워." "여기 물 가져와." 사방에서 명령을 내리는 소리와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가 요 란하다. 절반 가까이는 병사들의 시체다. 어제까지만도 한솥 밥을 먹던 동료가 오늘은 이렇게 갑판 위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어 버린 모습을 보는 병사들은 가슴이 아픈지 얼굴을 찡그 리며 고개를 돌렸다. 절친하게 지내던 병사가 시신이 되어 있 는 모습에 관병들은 시체를 치우다가도 훌쩍 자리를 뜬다. 다 른 관병들도 이해한다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심스레 병사들의 시신을 넣은 널을 운구(運柩)해 가는 병사들과는 달리 다른 한쪽에는 야만스런 행위가 자행되고 있었다. 사파 무림인들의 시신을 쌓아둔 곳이다. 그들의 시체는 이미 더 이 상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해져 있었다. 울분에 찬 병사 들의 창이며 칼 등이 그들의 몸을 한번씩 훑고 나온 것이다. 잘 다져진 고기처럼 되 버린 시체들은 침이며 온갖 오물세래 를 받고 강물로 던져졌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물거품과 시 뻘건 핏물이 강을 뒤덮고 뒤이어 물고기들이 사방에서 유영하 며 몰려든다. 그리고 조금 후 언제 그랬냐는 듯 강물은 다시 푸르게 물들었다. 이렇게 한쪽은 정리가 되어가고 있었건만 아직 피비린내 나 는 칼부림이 끝나지 않은 곳도 있었다. 맨 후미를 따르던 마 지막 배 한 척 위에서 대치하는 두 무리들이 바로 그곳이다. 정파와 사파의 인물들이 서로 격한 상태로 마주보고 있었다. 그러나 거의 결론은 난 것처럼 보인다. 야음을 틈타 침투해 온 사파 무리들은 온 몸에 잔뜩 피를 흘리며 구석으로 내몰리 고 있었다. 기백이 넘던 숫자는 이제 겨우 십 수명만이 남아 있었다. 이미 기백에서도 한풀 꺾인 듯 어떻게 하면 도망칠 수 있을까 고민하는 눈치다. 사방으로 눈을 굴리던 그들이었 지만 병사들이 불쑥 내밀고 있는 창날은 비웃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온 몸은 긴장감으로 무장되어 있는 것은 바 로 관병들 뒤로 보이는 무림인들 때문이다. 자신들을 모두 죽 음의 나락으로 내밀어버린 정파 무림인들. 그들이 있기 때문 에 오늘 그들은 모두 '실패' 라는 쓰라린 맛을 보게 된 것이 다. "그만 항복하지 그러냐?" 관병들의 뒤에서 한 거렁뱅이가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그러 자 그들의 눈에 잠시간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바로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웃기는 소리. 너희 놈들이 우릴 풀어주는 척 하곤 바로 목 을 베어 버릴 생각인 걸 모를 줄 알았더냐? 그런 개방귀 소린 저 병사들에게나 지껄여라." 왼쪽 팔을 움켜쥔 털보 사내다. 원독에 찬 눈빛을 번뜩이며 사내는 주위를 휙 둘러본다. 그의 눈빛에 남은 사파 인물들은 흠칫 놀라 움찔거리며 눈을 돌린다. 형지 개방주의 말에 갈 등을 일으키는 것을 한 마디로 싹을 잘라버리려는 의도였다. "네깟 것들 죽이는데 이런 말 하면서 죽일 필요 따위 있겠는 가? 너희들보다 더한 녀석들도 우리 손에 다 뒈졌어. 그런데 뭐가 아쉽다고 그런 말을 하겠나? 우린 진정 너희들을 죽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거다." 제갈무의 목소리다. 털보 사내의 의중에 끌려가던 사파인물 들은 곧이어 들려온 제갈무의 말에 갈등이 되는지 서로를 둘 러보기 시작했다. 이미 그들은 죽을 목숨이었다. 자신들보다 도 더한 고수들도 저들의 손에 죽었다. 그런데 살려주겠다니. 그들은 죽음의 절망에서 한 줄기 빛을 본 것이나 다름 아니 었다. 그들은 서로의 눈에서 갈등의 빛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로서로 둘러보던 그들은 곧 마음속에서 결론을 내렸는지 눈빛이 단호해졌다. 그러나 누구하나 먼저 말문을 열지 않는 다. 아마 뒤에 서 있던 털보 사내를 의식하는 듯했다. '항복한다 말해라 어서. 그럼 살려주지.' 제갈무는 아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살려 주는 댓가로 누구에게서 이 일에 대한 정보를 얻었는지 물어볼 심산이었다.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을 것 은 충분히 예상한 바였다. 그러나 또 혹시 알겠는가? 대어가 걸릴지도...... 속으로 외쳐대던 제갈무. 그러나 시간이 조금씩 흘렀음에도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서서히 기운이 빠지기 시작했다 . 저들이 왜 저러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다. 저 뒤에서 잡아 먹을 듯 보고 있는 털복숭이 사내가 무서운 것이다. 저 녀석을 베어 버릴까? 이런 생각이 잠시 제갈무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형지와 황보언 등의 몇 명도 그와 같은 생 각인지 눈에서 잠시간 살기가 감돌았다. 그때였다. 길쭉하게 생긴 얼굴의 사내 한 명이 더듬거리며 말을 했다. "지, 진짜 항보... 항복하면 살려 주는 거요?" 제갈무는 눈을 살짝 찡그리며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물론! 진정 항복한다면 그대는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항은 무림맹 맹주의 이름으로 이미 허가가 떨어진 상태이니 그대는 걱정할 필요는 없네." 실제로 그렇지는 않았지만 제갈무는 아무 거리낌없이 대답했 다. 몇 인물들이 제갈무를 응시했다. 함부로 그런 거짓말을 해대는 것이 개운치 않은 듯 했다. 그러나 몇 명은 더 잘되었 다는 듯 기쁜 얼굴이다. "아미타불! 눈을 돌리면 피안(彼岸)이라 하였소. 어서 빨리 마음을 고쳐 먹고 전향(轉向)을 하시오. 부처님의 가호가 그 대들을 보살필 것이오." 소림의 백오대사였다. 거짓말 따윈 그에게는 아무 상관없었 다. 다만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면 말이다. 이 밤의 전투에서 한 사람도 베지 않은 선승(善僧)의 마음이 여기서 또 한번 드러나는 순간이다. "네 녀석이 항복하게 둘 줄 아느냐? 이얍!" 보고 있던 털보 사내는 바로 손에 들린 도를 쳐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사내의 목을 향해 그어 내렸다. 전혀 예상치 못했 던 공격에 정파 인물들은 한 순간 넋을 잃은 듯 했다. 그러나 어디선가 하얀 빛이 반짝 하더니 털보 사내의 미간에 틀어 박혀 버렸다. "컥!" 눈이 동그래져 버린 털보 사내. 미간을 찡그리던 그는 숨이 가빠오는지 도를 떨구고 목을 두손으로 부여잡더니 숨을 가쁘 게 내쉬었다. 그리고는 앞으로 픽 쓰러졌다. "당대협께서 오셨...... 으응?" 반짝하는 빛에 당영민의 암기인가 했던 화산파의 장문인 상 청자(常淸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내의 등장에 어리둥절 한 모습이다. 사내는 멋드러진 신법으로 갑판 위에 착지했다. 그리고는 포 권과 함께 허리를 굽힌다. "아니 방소협 아닌가? 여긴 무슨 일로......" 정파 고수들은 갑자기 나타난 인물이 방소철임을 알아보고는 헛기침과 함께 인사를 건넸다. "저희 쪽은 끝났는데 어르신들은 어찌 되었나 알아보고 오라 는 나대협의 말씀에 불쑥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오오 그래요? 인명의 피해는 어떻소?" 백오대사에게 있어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는 듯하다. 반 장의 인사법도 빠트리고 바로 묻는다. 그 사실을 잘 아는 방 소철, 빙그레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입을 열었다. "별 피해는 없습니다. 단지 몇 몇 병사가 상처를 입었는데 저희 스승께서 치료를 하고 계십니다." "아미타불! 정말 부처님의 자비가 계셨구려. 다행이오." 방소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백오를 잠시 보다 제갈무에 게 할 말이 있는지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는 이미 항복을 받기 위해 사파 무사들에게 다가가 있었다. 잠시 옆에서 기다 릴까 하다가 조용히 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천양자를 본 방소 철은 그에게 다가갔다. "할 말이 있으시오?" 다가서는 발소리에 천양자가 몸을 돌리며 물었다. "예! 말학 후배 방소철이 인사......" "됐소. 그냥 바로 말씀하시오." 방소철의 인사를 잘라버린 천양자는 반짝이는 강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기를 무시한다 생각했는지 방소철은 잠시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달아올랐으나 숨을 몇 번 고른 뒤 말을 이었다. "나대협께서 피해를 입으신 분들을 한 곳으로 모아 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소? 알겠소."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하는 천양자. 방소철은 눈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나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다시 입을 열었 다. "아참! 그러고 보니 무당에서 황요진이란 청년이 찾아 왔습 니다. 장문인을 뵈러 왔던 것 같은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양자의 몸이 휙 돌았다. 바로 반응이 오자 방소철은 의기양양해졌으나 천양자의 표정에 별 변화가 없는 것을 보고는 다시 실망의 표정이 살짝 떠오른다. "그렇소?" "지금 나대협과 함께 있습니다. 그럼 소생은 이만......" 그는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포권을 취한 후 바닥을 박찬 다. 한 마리 비조처럼 몸을 뒤집으며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멋들어지게 옆의 배로 건너갔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뒤에 서 상청자가 비꼬는 말을 내뱉었다. "흥! 우스운 신법 가지고 저렇게 품이나 잡으려하다니." 그의 눈에는 아직 덜 여문 감이 붉은 고추 앞에서 색을 자랑 하려는 것으로밖에는 안 보였나 보다. "허허허! 저 정도면 잘 하는 거지요. 의술도 뛰어난데 무공 도 저 정도면 더 말할 것 있겠습니까?" 일이 끝났는지 제갈무가 옆으로 다가왔다. 상청자는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잘하긴요. 저 나이에 저 정도는 기본입니다. 거기다 아까 암기가 날아오는 모습 보셨습니까? 거의 굼벵이가 기어가는 듯 하더군요. 그 정도면 우리 화산에서는 열 두 살 먹은 녀석 들도 피할 수 있겠습디다." 도사의 말이라고 하기엔 너무 무뢰배 적인 어투로 지껄이는 상청자. 듣고 있던 제갈무는 그냥 빙긋 웃음을 던질 뿐이다. 분명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분명 저 정도의 경공 솜 씨는 흔했고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말 뒤에는 자 신들이 막지 못한 것을 방소철이 막아낸 것에 대한 자괴감을 감추는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만 갑시다." 황보언이 소리치자 제갈무도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 미 병사들은 상처를 입은 관병들을 서로 부축하며 이동하고 있었다. 항복한 사파인들을 끌고 사라지는 무림맹 무사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은 지옥 같은 그곳을 한 달음에 날아 옆 의 배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왜 지금 공격해선 안 된다는 건가? 지금이 적기인 것 같은 데." 산 속 숲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희욱이 볼멘 소리로 금영 악을 다그쳤다. 자기들이 불러 들인 사파 무리들은 이미 소 기의 목적은 달성한 듯 보였다. 소란을 피우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긴 정도면 충분했다. 거기다 생각보다 많은 병사들 이 목숨을 잃었다. 그 정도면 성공도 대 성공이다. 그러나 아 직 때가 아니라는 금영악의 말에 희욱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을 놓치면 안될 것 같은데." 아쉽다는 듯 희욱은 자꾸 금영악을 재촉했다. 그러나 금영악 의 모습은 아주 느긋했다. "괜찮아. 아직 시간은 많이 있어. 함부로 덤벼 봤자 좋은 결 과를 못 얻지. 그럴 바엔 확실히 계획을 세우고 들이쳐야 성 공할 수 있지."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예 오늘은 칠 것 같지 않다. 희 욱은 한숨을 소리 없이 내쉬더니 혼잣말을 한다. "그럼 그 아이들을 불러 올려야겠군. 지금 치지도 않을텐데 배 위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게 해 봤자 좋은 소리 듣지도 못 할 테니 말이야." 혼잣말은 혼잣말이었지만 어딘지 금영악 보고 들으라는 듯 했다. 그러나 희욱의 중얼거림에도 금영악은 별 반응 보이지 않았다. 희욱은 입을 살짝 이죽거리다 손을 하늘로 쳐들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하늘 끝까지 치솟지도 못하고 다시 떨어져 내려야 했다. 금영악이 손을 잡고 끌어내린 것이다. "왜 그러는 건가?" "불러 올릴 필요 없네. 조금 있다가 시작할 텐데 뭐하려고 귀찮게 부르려 해?" "친다고? 이런 밝은 시간에 말인가?" 희욱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고 다시 되물었다. 그러나 금 영악은 대답을 하는 대신 빙긋이 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다. 상큼하게 웃는다 했건만 보고 있던 희욱에게는 느끼할 뿐이었 다. "오늘따라 자네가 왜 이렇게 내 마음에 안 드는 걸까?" 희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 한 소리를 내뱉었다. 무황성의 누구라도 들으면 혼비백산할 말이 흘러나왔지만 금영악은 희 희낙락일 뿐이다. 금영악이 아니고선 아마 무황성의 그 누구 도 그러지 못할 것이다. "내가 여자도 아닌데 자네 마음에 들어서 뭐하겠는가? 그보 다 저 녀석들은 왜 저렇게 강둑에 서 있는 거지?" "누구?" 희욱이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금영악이 가리키는 손을 따라 강둑으로 눈길을 던진 희욱. 맞은 편 언덕에 서 있는 네 명 의 인물이 눈에 들어온다. 천인문과 일행들이다. 내공을 눈에 모아 유심히 살피던 희욱이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아닐까?" "지나가던 사람들이라면 왜 저기 서 있는 거지? 어느 쪽이든 길을 따라 왔었다면 이 앞쪽에서 서 있지 저기에 서 있을 순 없어." "흐음!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군." 듣고 보니 확실히 그러한지라 희욱도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 었다. "한 번 찔러 볼까?" "관두지. 아직 시간은 많아. 쓸 데 없이 자꾸 일을 벌여봐야 좋을 거 하나 없다고." "알았어." 금영악이 말리자 희욱도 신경을 끊고 배를 계속 살피기 시작 했다. 배는 여전히 수로를 따라 북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밤의 치열한 전투로 인해 배는 이미 상당히 큰 상처를 입고 있었고, 얼마 가지 않아 수리를 위해 잠시라도 정박해야 할 듯 보였다. '재미있겠군. 언제 붙게 될 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기다려지 는데.' 이미 배 안에 정파 고수들이 있음을 알고 있는 희욱이다. 정 말 오랜만에 정파 인물들과 칼을 섞을 기회가 다가온 것이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갑자기 온 몸을 타고 전율이 흘러 내렸 다. 입안이 바짝 마르고 손바닥이 축축해진다. 어서 빨리 습 격할 시간이 다가오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이것인가? 살아 있는 느낌이......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군.' 희욱은 입술을 살짝 말아 올리며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얼 마 만에 느껴보는 감정인가?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에 희욱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기뻐했다. 이 느낌이 오랫동 안 지속되기를 바라면서...... -100- 배들은 조금씩 조금씩 전진해 나가고 있었다. 길게 도열 한 채 나가던 십 여 척의 배들은 한 눈에도 고개를 내저을 정도로 심하게 파손되어 있었다. 그나마 앞쪽 배들은 거 의 상처가 없었으나 끝에 따라오는 배들은 고물선이 아닌 가 할 정도로 부서져 있다. 갈고리와 작살 등에 찍혀 난 상처다. 그러나 운행하는데는 별 지장이 없는지 순조롭게 전방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강둑에서 아침의 혈투를 보고 있던 천인문 일행은 관도로 이동했다. 유일하게 말을 탄 천인문은 뒤를 살피며 천천 히 달렸다. 이세직 등이 경공으로 충분히 따라 오는 것을 확인하자 조금씩 속도를 높였다. "저 혼자만 말을 타고...... 아 짜증!" 혼자 말을 타고 달려가는 천인문이 미웠는지 조기혜는 낮 은 목소리로 군시렁거렸다. 그러자 당우양의 입술꼬리가 한쪽으로 치솟았다. 중얼거리듯 한 말이었으나 바로 옆에 서 달려가고 있었기에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왜 혼자서 타고 가니 마음에 안 드는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순간 조기혜의 눈동 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 보는 그녀. "그, 그럴 리가요." 그걸 들었단 말인가? 분명 조용하게 말했는데...... 그녀 의 얼굴에 살짝 홍기가 떠올랐다. 고개를 다시 돌리는 그 녀를 보던 당우양의 눈에 장난스런 빛이 어린다. "왜 조금전에 혼자만 말을 탄다고 중얼거렸잖는가?" 궁지에 몰린 사람을 더욱 몰아가는 재미를 아는가? 당하 는 사람은 죽을 맛이지만 보는 사람은 정말 재미있다. 당 우양의 모습이 완전히 그 꼴이었다. 조기혜가 더욱 난처해 하는 것 같자 당우양은 멈추지 않고 더욱 놀려대기 시작했 다. "문이 녀석을 불러 줄까? 그래서 '짜샤 너 혼자 타냐. 숙 녀분도 지금 뛰고 있는데. 당장 내려' 해 버릴까?" "그, 그러지 마세요." 어쩔 줄 몰라하던 조기혜. 화들짝 놀라며 그를 돌아본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던 이세직도 사태를 파악했 는지 조용히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런 말도 하 지 않자 당우양은 더욱 기가 살아 놀려댄다. "왜? 혼자 타려니 성에 안 차는 거야? 그럼 문이하고 같 이 타면 되지."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세직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 다. 그도 재미 있는 모양이다. 조기혜는 얼굴이 벌겋게 달 아올랐다. 당우양은 아예 그런 그녀를 익혀 죽이려는지 큰 소리로 천인문을 불렀다. "문아! 잠시 이쪽으로 와 봐라." "예!?" 앞에서 달려가던 천인문은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흑풍을 세우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흑풍을 돌려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어 누나? 왜 얼굴이 벌게?" 잘 익은 홍시마냥 화끈하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보자 궁금한 듯 천인문이 물어 왔다. "아, 아무것도 아냐." 그녀는 변명 아닌 변명을 했지만 당우양이 바로 그녀의 말을 잘라 버렸다. "문아! 조낭자께서 너 혼자만 말을 타니 외로워 보이신덴 다. 웬만하면 같이 타고 가거라." "그래요? 누나 정말이야?" 천인문이 눈을 동그랗게 만들고 그녀를 응시하자 그녀는 호들갑을 떨며 부인했다. "아니야 아니라고." "에이 아닌 것 같은데...... 타고 싶으면 말하지 그랬어. " 입술을 살짝 말아올린 천인문. 말을 더 하지 않고 그녀의 옆으로 가더니 그녀의 손목을 잡아 확 잡아채 그녀를 자 신의 등 뒤로 끌어올렸다. "꽉 잡아." 그녀의 대답도 듣지 않고 흑풍의 배를 찼다. 똑똑한 흑풍 . 천인문의 명에 따라 바로 앞으로 내달렸다. "너, 너...... 꺅!" 눈을 부라리며 화를 내려던 조기혜는 몸이 훌렁 뒤집어지 려 하자 바로 천인문의 허리춤을 손으로 움켜 쥐었다. "할아버지 천천히 오세요." 저 앞으로 달려가는 흑풍의 위에서 천인문의 목소리가 바 람을 타고 밀려왔다. "그래, 잘 가." 당우양이 손을 흔들며 그들을 배웅(?)했다. "자네도 참 대단하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저 멀리 사라지는 둘을 보고 있던 이세직이 한 마디 건넸 다. "못 할 건 또 뭐 있겠나? 그리고 재밌지 않나. 매일 둘이 서 아웅다웅 다투기만 하는데 오늘 좀 풀라고 내가 신경 썼지." "자네 말대로 잘 되면 좋겠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별반 기대하지 않는 목소리다. 당우 양도 알고 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상관 없어. 잘 되면 좋고 싸우더라도 지금보다 더 나빠 지진 않겠지." "그렇군. 자 더 늦기 전에 우리도 쫓아가세." "그러지." 쉬지 않고 달려가며 이야기를 나누던 둘은 더욱 속도를 높였다. "멈춰. 빨리 멈추라고." 엄청난 속도에 천인문의 등에 머리를 파묻고 있던 조기혜 는 끌어안고 있던 허리를 잡고 흔들었다. "뭐라고? 안 들려." "멈추란 말이야 당장!" 발악을 하듯 소리쳤지만 천인문은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몸을 꼬옥 끌어안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속 도를 늦추겠는가. 여기서 멈추면 등뒤로 느껴지는 따스한 그녀의 감촉은 그 즉시 꿈에서 깨듯 사라져 버릴 게 뻔하 다. 이 좋은 느낌을 계속 느끼고 싶은 천인문 들리기는 하 지만 안 들리는 척 딴청만 부리고 말을 달리는데 열중한다 . "뭐라고 하는지 안 들린다." "이, 이게......" 그녀는 화가 났는지 인상을 쓰며 한 손을 허리에서 풀었 다. 천인문은 그녀의 손이 허리에서 떨어지는 것을 느끼자 바로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그러자 앞쪽에서 맞바람이 세차게 그녀의 얼굴을 들이쳤다. 머리가 파르륵 뒤로 흩날 린다. 어찌나 센지 눈을 뜰 수도 없다. 벌렁 몸이 뒤로 나 자빠질 듯 하자 그녀는 손을 풀다 말고 다시 천인문의 허 리를 와락 움켜쥐었다. "손놓으면 다친다. 그냥 가만히 있어." 뒤에 대고 크게 소리친 천인문은 흑풍의 속도를 더욱 높 였다. 그녀는 옴짝달싹도 못하고 천인문의 허리를 꾹 움켜 쥘 뿐이었다. 흑풍은 둘을 태우고서도 전혀 속도를 떨어트리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만에 달려보는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더 욱 발을 세차게 놀렸다. 외길이고 보니 놓칠 염려도 없다. 그러나 얼마 달리지 않 아 천인문은 서서히 흑풍의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느껴 지는 압박이 줄어들자 조기혜는 조금씩 머리를 들었다. "너 분명히 내가 세우라고 말 했어 안 했어? 그런데도 내 말을 허투루 듣는 거야 뭐야? 응 왜 대답을 안 해?" 다그치는 그녀의 물음에도 천인문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눈을 한쪽으로 계속 던지고 있을 뿐. "드디어 섰어." "서? 뭐가." 밑도 끝도 없는 말에 그녀는 빤히 천인문의 얼굴을 보았 다. 뭘 보고 있는 거지? 저 앞에 무엇이 있다고...... 앞 에 보이는 거라고는 겨우 수로와 호수 정도밖에 없다는 것 을 알고 있던 그녀는 별 생각 없이 천인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정화의 선박 십 여 척이 홍저호(洪 渚湖)의 목전에서 정박하는 모습이 눈에 띄였다. "정말이네. 여기서 수리 할 모양인가?" "그런 가 보다. 운행하는데 별 이상은 없는 것 같던데... ... 에이 몰라. 내가 신경 쓸 필요 있나? 우리에겐 더 잘 된 거 아냐?" "그렇지? 일단 여기서 잠시 기다리자." "아니 왜?" "그게 다 네가 너무 빨리 달려서 그런 거 아냐? 네가 보 조만 좀 맞추었더라도 이렇게 어르신들 기다릴 필요는 없 었어." "그, 그렇군!" 천인문은 심히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머릴 긁적였다. 그러 나 곧 기세를 다시 회복하고는 자신과는 별 상관없는 일인 듯 행동했다. "그럼 조금만 더 기다리자. 그 뒤에는......" "......?" "그 뒤에 무얼 하지?" 그의 말에 조기혜는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 낄 수 있었다. -101- 관군과 정파의 연합 세력이 승리한 피비린내 나는 새벽 전 투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럼에도 축배를 들 수 없는 것은 생각보다 치열했던 전투의 피해를 곱씹어야 했기 때문만 은 아니었다. 실제로 얼마 안 되는 장수들은 피해를 입지 않은 병졸들을 독려하여 병사들의 피해와 선박의 파손 정 도를 파악하느라 분주히 뛰어 다니고 있었다. 관병들의 피해는 예상보다 경미했다. 사망과 부상을 합쳐 이 천이 조금 넘는 숫자였지만 사망자는 겨우 이 백을 조 금 웃돌았다. 생각보단 피해가 심각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 었다. 거기다 배의 파손도 그리 심하지 않았다. 군데군데 파손 된 부위들이 눈에 띄긴 했으나 배를 띄울 수 없을 정 도로 심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배를 출발할 수 없었던 것 은 정화의 명령 때문이었다. 선실에 들어앉은 정화의 머릿속은 상당히 복잡하게 헝클어 져 있었다. 전투가 끝날 무렵 나웅겸은 '이렇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을 던졌다. 그 한마디가 그의 뇌리를 흔 들어 놓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만 해도 심각한 피해다. 그런데 아직 끝나지 않았 다니... 그럼 얼마나 더 계속 되어야 한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그 무엇이 우리를 이다지도 괴롭게 하는 것인가.' 정화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책들 때문인가? 불꽃에 제 살이 타는 줄 모르고 미친 듯 뛰어 드는 게 그 책 때문이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말고는 이 상황을 납득시킬 것이 없 었다.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책이다. 분명 배에 그런 책 은 없다고 자신하는 정화였지만 이젠 그런 확신도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런 책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던져 주고 싶은 게 솔직한 그의 심정이었다. 그러나 책을 찾으러 보낸 장수의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그런 책이 없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냥 책을 준 것처럼 해서 그들을 뭍에 내려 버릴까. 그 리고 소문을 내 버린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무인들은 아마 소문을 믿고 그들을 따라 갈 것이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정화는 곧 머 리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불확실한 계획이다. 게다 가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는 계획을 위해 엄청난 무 위를 가진 원군들을 그대로 내려버린다는 것은 너무도 위 험한 도박일 뿐이었다. 한참 고민을 거듭하던 정화는 잠깐의 휴식을 위해 선실 문 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텁텁한 선실 안과는 달리 시원한 바람이 그를 감싸고 지나갔다. 머리가 시원해지는 느낌이 었다. 고개를 돌리자 갑판 위에서 한창 부상병들을 옮기는 병사들이 눈에 잡혔다. 그 사이로 분주히 움직이는 노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한참 그 모습에 시선을 뺏겨 있던 정화의 뒤로 다가온 병 사 하나가 허리를 숙였다. "무슨 일이냐?" "예!! 자신을 의원이라고 소개한 자 몇 명이 배에 오르고 싶다 하더이다." "의원?" "예! 멀리서 배가 불타는 모습에 급히 달려 왔다며 지휘자 를 만나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흐음! 그래?" 정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생각 해 볼 것도 없었 다. 의원이라고 뛰어 다니는 사람은 겨우 저 멀리 보이는 노인 하나와 그의 제자라는 사람, 그리고 남해 원정단에 속해 그들과 함께 배를 탔던 의원 넷이 다였다. 그러나 그 중 하나는 죽어 버렸고 또 하나는 의원에게 치료받아야 할 환자가 된지 오래였다. 나머지는 다 의술이라고는 쥐뿔 도 모르는 무지렁뱅이 병사들뿐이다. 게다가 부상병들의 수는 상당히 많았다. 네 명의 의원으로는 상처 입은 병사들을 손보기엔 너무도 부족했기에 정화는 더 고민 할 것도 없다는 듯 머리를 끄 덕여 허락의 의사를 전했다. 병사가 사라지고 얼마 후 네 명의 인물이 배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천인문 일행이었다. 막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오 자 정화는 몸을 돌려 나타난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호! 저 사람들이 의원이라고? 의원들 같지는 않아 보이는 데……. 마치… 무사들 같은…….' 차디찬 눈으로 천인문 일행을 유심히 살피던 정화의 눈빛 이 살짝 빛났다. 그러나 순식간에 그런 기색을 감추고는 반갑다는 미소를 얼굴에 띄워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이렇게 도움을 주겠다니 정말 감사할 따름 이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일단 한시가 급하니 병사들의 상 태를 보고 빨리 치료를 했으면 하는데 어떠신지요." 정화의 환대에 이세직은 반색하며 말문을 열었다. "하하하!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저쪽으로 가 보시오. 이 미 치료를 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과 함께 부상자들을 손 보면 될 것이오. 그럼..." 말을 하던 정화는 손을 들어 병사하나를 호출했다. 다가온 병사에게 천인문 등을 부상자들이 있는 곳으로 모시고 가 도록 지시를 내린 정화는 할 일이 있는지 바로 몸을 돌려 사라져 버렸다. "생각보다 피해가 커 보이지는 않죠?" 병사의 등뒤를 조용히 따르던 천인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앞서가는 이세직에게 물었다. "글쎄다. 노부가 보기엔 큰 것 같은데......" "에이! 죽은 사람들은 별로 안 보이잖아요. 나머지는 다 부상자들뿐인데요." 그 말대로 사망자는 별로 없어 보였다. 시신들은 모두 한 군데로 모으고 있었는데 그 수가 별로 많아 보이진 않았다 . 그러나 천인문은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달을 수 있었다. 부 상이 심각하지 않은 병사들은 천으로 상처를 싸맨 채 배 위에 있었지만 생명에 지장이 있어 보이는 병사들은 이미 뭍 위로 올려진 상태였다. 둑 위 나무 그늘에 수많은 병사 들이 신음을 토하며 의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병사들이나 치료하죠. 그리고 책은 나중에 한 번 알 아 봐요." 조기혜의 말에 천인문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다시 뭍으로 올라 병사들의 상태를 살피던 천인문은 누구를 보 았는지 표정을 굳히며 자리에 서 버렸다. "으으윽!" "좀 가만있어. 제대로 안 묶였잖아." 왼쪽팔의 고통을 못 이기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병사 를 두 다리로 눌러 버린 방소철이 천을 다시 와락 쥐어 묶 었다. "으아아, 컥!" 산천이 떠나가라 울부짖는 호랑이의 울음이 그러할까? 병 사는 단말마의 비명을 토하더니 자리에 털썩 쓰러져 버렸 다. 병사가 기절하는 모습을 본 그는 소매로 땀을 훔치며 병사를 호출해 기절한 병사를 옮기도록 시켰다. '제길. 해도해도 끝이 안 나니.' 병사들을 치료한다고는 했지만 며칠 동안 속이 편치 못했 기에 그 치료 과정은 무지막지한 고통을 선사하는 극악의 수법을 동반하고 있었다. 고통에 떨고 있는 병사들이 측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이런 치료라도 감지덕 지해야 할 판이다. '두고 봐. 대가는 단단히 받아 낼 테니.' 이빨이 부서져라 깨물며 정박한 선박을 향해 시선을 던진 그는 다음 병사에게로 이동했다. 온 몸이 피로 물든 병사 는 중병기(重兵器)에 당했는지 팔과 가슴팍이 뭉그러져 있 었다. 떨어져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팔과 움푹 들어간 가 슴을 잠깐 살핀 방소철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안되겠군.' 이미 죽었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처였다. 살리려 하 면 살릴 수는 있겠지만 엄청난 노력이 필요해 보였다. 그 럴 바엔 그 시간에 병사 몇을 더 치료하는 게 편할 듯 했 다. 다음 환자나 봐야겠다는 심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의 귀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 살릴 수 있는 사람도 포기하겠다? 그런 게 무슨 의원 이라고." 잔뜩 비꼬는 말투에 방소철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세 명의 사내와 여인 하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아니지. 실력이 모자라니까 진짜 포기하는 건지도 모르겠 군." 제법 준수하게 생긴 젊은 사내가 입꼬리를 잔뜩 말아 올린 채 이죽거리는 모습에 방소철의 미간이 잔뜩 오므려들었 다. "무슨 말을 그 따위로 하시오?" 안 그래도 심통이 날대로 난 방소철이었기에 폭발하지 않 을 리가 없었다. 벌겋게 달아오르며 화를 버럭 내자 젊은 사내는 손가락을 세워 흔들었다. "왜 화를 내고 그럴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엄청 자신 만 만해 하던 의원이 이젠 실력이 떨어졌단 말인가?" "......?" 몇 년 전이라니... 자신을 아는 사람이란 말인가? 하지만 본 기억이라곤... 방소철은 눈을 찡그리며 눈앞의 사내를 바라 봤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저 사내를 만난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젊은 사내는 달랐다. 한 눈에 방소철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기억을 못한다 이거지? 흥! 내가 갑자기 커 버렸다 해도 어느 정도는 알아 볼 수 있을 텐데.' 시비를 건 사내는 다름 아닌 천인문이었다. 천산에서 본 이후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 중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방소 철을 결코 잊어버릴 턱이 없었다. 더욱 울화통이 치밀자 쓴 소리가 나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살릴 수 있는 사람도 그냥 내버리겠다? 그 따위로 하려거 든 의원이란 말은 때려 쳐." "으윽!" 가슴에 대못이 박힐 만한 소리를 들은 방소철은 달아오르 다 못해 피를 뒤집어 쓴 것처럼 되 버렸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기에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갑작스런 소란에 장수들 이하 멀쩡한 병사들이 웅성거리며 천인문 주위로 몰려들었다. 모여든 병사들과 치료를 받기 위해 기다리던 병사들의 시선까지 한 몸에 받은 방소철은 두 손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살릴 수 있는 사람을 내버리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말이지..."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방소철은 눈을 부릅뜨더니 황 급히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 그의 뒤로 수군거리는 목소리 가 더욱 커져 가고 있었다. "비켜 보시오." 모여든 병사들 사이를 가르며 죽어가던 병사의 옆에 주저 앉은 천인문은 그의 상처를 다시 살폈다. 여름이라 그런지 이미 상처는 덧나 고름이 상처에 잔뜩 터질 듯 했다. 잠 시 무언가 생각을 하던 천인문은 옆에 놓인 작은 소도로 상처의 몇 군데를 갈라 고름을 짜냈다. 그리고 자기 병에 든 약품을 하나씩 살핀 후 병사의 몸에 뿌리고 조심스레 붕대로 감았다. 병사들의 뒤에서 그런 모습을 살피고 있던 천산신의는 눈 을 반짝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고 녀석. 말버릇은 없지만 의원의 자세는 됐구먼.' 한참 상처를 치료하고 있던 천산신의는 웅성이는 소란에 무슨 일인가 병사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있었다. 자신의 제자 녀석과 젊은 사내의 다툼이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 니 살기 힘들어 보이는 병사의 치료 문제로 다투는 듯 했 다. 자신이 봐도 분명 살리기 쉽지 않은 병사였다. 하지만 사람의 생사(生死)는 하늘이 결정하는 것. 진인사대천명( 盡人事待天命), 의원이란 자신이 할 수 있는 데까진 최선 을 다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제자 녀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이 씁쓸한 것이다. 천산신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사라졌다. 가까스로 상처 치료를 끝낸 천인문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 다. 제대로 된 치료라곤 해 본 기억이 거의 없었던 관계로 자신이 한 치료가 바른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에구, 모르겠다. 살 수 있으면 살겠지. 그건 내 소관이 아니거든.' 어찌 보면 무책임하다 할 만한 생각을 함부로 떠올리며 흐 르는 땀을 닦았다. 이미 이세직도 병사들의 상처를 돌보고 있었고, 조기혜도 분주하게 움직이며 한 팔 거들고 있었 다. "의원님, 다음 환자입니다요." "아, 예!" 늙은 병사의 목소리에 숨을 돌릴 시간도 없이 천인문은 시 술에 몰입해야 했다. 어찌나 바쁜지 허리 한 번 제대로 펴 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자신의 의술이 이렇게 쓰이게 된 것이 그렇게 가슴에 와 닿을 수 없었다. 땀으로 젖어드는 천인문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천인문 일행이 한참 바쁘게 부상자들을 돌볼 무렵 맞은 편 숲 속도 분주히 돌아가고 있었다. "이제 시간이 되지 않았나?"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 진 희욱은 금영악을 향해 몇 번이 나 물었던 질문을 다시 물었다. "허어, 이거 우리 성주께서 왜 이리 급하실고. 조금만 더 기다리시게." 느긋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능글거리며 대꾸하자 희욱은 서 서히 뻗쳐오르는 노기에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다. 저 대답이 벌써 몇 번째인가? 기억하기에도 네 번은 넘었 다. 하지만 아직도 멀었다는 말인데……. 힐끗 옆을 돌아보는 금영악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유를 알 수 없다는 표정인데.' 놀리는 게 재미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먼저 일이 우선이 다. 그러기 위해서는 잠시의 인고도 감내 해야 하는 법. 그러나 희욱은 그런 점에서 많이 부족했다. "치료도 거의 끝나가잖아. 이러다 놓치면 어쩌려고……." 혼잣말인 듯 중얼거리지만 저렇게 목소리가 커서야 어디 혼잣말인가? 꼭 자신보고 들으라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금영악은 살짝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이보게. 지금이 좋은 시점이라 생각하는가?" "그럼. 처음에 그 쓰레기들이 침투했던 때보다는 좋지 않 겠지만 충분히 습격 해 볼만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말에 금영악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했다. "자네 말대로 좋긴 해. 하지만 우리가 생각할 문제는 그게 아니지. 병사들이야 한 주먹도 안 되는 녀석들이니 신경 쓸 건 없어. 문제는 저기 저렇게 두 눈 부릅뜨고 경계하는 무림맹 녀석들이야. 저 녀석들은 우리가 습격했을 때 신 속히 경계를 펼칠 거란 말이야." "그럼 어떻게 하자고? 그냥 기다려? 아니면 습격 해?" "기다리긴… 우리가 누구 좋은 일 시키려고 이렇게 달려 온 건 아니잖는가?" "그럼?" "조금만 기다려 보게. 곧 기회가 올 걸세." 말을 하는 금영악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저기 의원님." 한 시진 넘게 숨 돌릴 틈도 없이 병사들의 상처를 돌보고 간신히 휴식을 취하는 천인문의 앞으로 제법 중년의 느낌 이 나는 병사 하나가 다가와 우물거렸다. 시체 마냥 쓰러져 있던 천인문이 살포시 감은 눈을 떴다. "무슨 일인데요?" "저기 계신 의원 한 분께서 잠시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 천인문은 늙은 노인 하나가 자신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호! 누구지? 왜 나를 부르지? 할 말이 있으면 와서 할 것 이지.' 힘든 치료가 끝나고 간신히 얻은 휴식 시간을 방해한 노인 이 미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알 수 없는 호기심이 치솟았다. 천인문은 숨을 다시 한 번 고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병사의 안내를 받으며 자리를 옮긴 천인문에게 천산신의가 인사를 던졌다. "어서 오게." "할아버지가 절 부르셨나요?" "그래. 노부가 불렀다네." 퉁명스런 말투에도 노인은 수염이 그득한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일단 자리에 앉게나." 탁자가 있는 것도 아니건만 손짓을 했다. 천인문은 천산신 의가 앉은 맞은 편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자네 솜씨가 상당하더군. 어디 출신인지 알 수 있겠나?" "천산 출신입니다만." "천산이라… 좋은 곳이지." 천천히 머리를 끄덕인 후 다시 천인문을 응시한다. "자네 이름은 뭔가?" "…천인문이라 합니다." "천인문이라! 이름도 멋지구먼. 허허!" 가벼운 웃음으로 말을 끝낸 천산신의는 빙그레 웃으며 천 인문을 바라 봤다. 그러나 그런 미소가 천인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 소개가 끝났는데 어르신은 누구신지 말씀이 안 계셨습 니다만?" 화를 억누르며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에는 노기가 스며 있 었다. 천산신의는 그제야 미안한 표정을 떠올리며 대답했 다. "아차! 내 정신 좀 보게. 허허! 노부의 소개가 빠졌구먼. 미천하네만 강호 동도들이 천산신의라 불러 주고 있다네." 천산신의란 말에 천인문의 표정이 섬칫 굳어 들었다. 어렸 을 때 호칭의 문제로 방소철과 크게 한 판 붙었던 적이 있 었던 천인문이었다. 산을 내려올 때만 해도 그 문제가 중 점 과제였으나 얼마 되지 않은 강호 생활은 천인문의 생각 을 조금씩 바꾸어 버렸다. 당연히 지금 그 일에 대해 한 마디 추궁이 있을 법도 하건만 천인문은 특별히 그 일에 대해 꼬집고 싶은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 과거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자 허탈한 웃음이 얼굴에 떠올랐다. 몇 년 지나지도 않았건만 그때는 왜 그 렇게 화를 냈는지 참 우습기도 했다. "왜 그러나?" "아... 아닙니다. 그런데 천산신의라 하셨습니까?" "그렇네. 과분하지만 강호 동도들이 노부를 그렇게 불러 주더구먼." 호칭의 문제로 인해 강호에 내려 왔던 천인문이었으나 이 미 그 문제가 머릿속을 떠나 버린 것은 세월의 흐름이 천 인문을 많이 바꾸어 놓은 탓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것으 로 그냥 포기해 버리기엔 미진한 것이 없지 않아 있었다. "천산 가 보셨습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의아하면서도 천산신의는 고개를 가로 저 을 수밖에 없었다. "노부의 발이 짧아 천산에 발을 넣어 볼 기회가 없었다네. " 천인문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이야기 하나 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이야기? 무슨 이야기인가?" 해도 좋다는 말을 듣지는 않았지만 천인문은 그가 허락한 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허락하지 않는다 해도 그냥 꺼 낼 생각이었지만. "옛날에 한 사내가 천산에 약초를 찾으러 올라 왔었습니다 . 그런데 약초를 찾는다는 사람이 옷은 엄청 화려하게 입 고 왔더군요. 한 약초꾼이 그것을 보고 웃었습니다. '어떻 게 약초를 찾는다면서 저렇게 올라 왔을꼬' 하고 혀를 찼 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꾸 심통이 나는 게 아니 겠습니까? 심통이 난 약초꾼은 그를 놀려 주고 싶다는 생 각에 한 가지 계략을 짜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습죠." 천인문은 과거를 더듬으며 자신과 방소철의 이야기를 하나 씩 끄집어냈다. 먼 옛날 할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풀어 놓는 듯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씩 더듬는 이야기에 천산신 의는 물론 그 옆에서 오가던 병사들과 누워 있던 병사들도 하나씩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관심이 모이는 것을 모르는지 천인문은 주절주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병사들이 하나씩 모여드는 것을 본 이세직 등도 궁금한 듯 주변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언덕 뒤에서 혼자 화를 삭이고 있던 방소철도 병사들의 움 직임에 궁금해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병사들을 밀치고 안 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한 노인과 한 청년의 이야기가 들 려왔다. "그래서 그 사내는 얼굴을 붉히더니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는 물러났죠." "허허허! 참 재밌군." "그러실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 났죠. 그 약초꾼이 오해를 해 버린 게 아니겠습니까? '이 여자가 저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하고요. 솔직히 어 르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마누라가 함부로 딴 사내 에게 웃음을 흘렸는데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 "하하! 그거야 당연하지. 노부가 스님도 아닌데 어찌 화가 나지 않겠나? 당연히 화를 낼 만하네." 이제 두 노소는 손발이 맞는지 척척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 었다. "그래서 약초꾼은 화가 나서 아내 되는 여자한테 크게 화 를 냈죠. 술집에 나가냐, 어쩌냐 하면서 말이죠." "허어! 그거 참..." 천산신의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것을 아는 지 모르는지 천인문은 계속 이야기를 이었다. "말을 마친 약초꾼은 집으로 혼자 와 버렸죠. 그런데 조금 있으면 따라 올 거라 생각했던 아내 되는 사람이 밤이 깊 어가도 안 돌아오지 거지 뭡니까? 그래서 약초꾼은 슬 걱 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화가 나더라도 결국 자신의 아내인데." "그래서 그는 그녀를 찾으러 갔지요. 가서 보니 아내가 쓰 러져 있던 그 자리에서 한 발작도 움직이지 않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걸 보고 약초꾼은 정말 미안해졌죠.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는가?" 갑자기 숨을 돌리며 이야기를 끊자 천산신의는 궁금함을 내비치며 되물었다. 묻지는 않았지만 병사들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눈빛으로 이야기를 이으라는 듯 압박을 던 졌지만 천인문은 꼼짝 하지 않았다. "어서 말해 보게. 이러다 숨 넘어 가겠네." "하하하하! 어찌 되긴 어찌 되었겠습니까? 마누라를 사랑 하는 약초꾼이 할 일이라곤 하나밖에 더 있겠습니까?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비는 거죠." "허허허! 그렇구먼." "하하하!" "훗, 큭큭!" 천산신의를 비롯해 병사들은 이야기의 전말을 듣고는 웃음 을 터트렸다. 재미있게 이야기를 한다고 했지만 몇 명은 이 이야기의 주 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연륜이 많은 천산신의는 물론이고 조기혜와 이세직 등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 러나 그 보다 가장 확실히 알 수 있던 사람은 방소철이었 다. 끝 부분만 잠시 들었지만 그 이야기가 자신과 천인문의 이 야기임을 알 수 있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던 그는 병 사들의 웃음소리에 꼭 자신을 비웃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몸을 돌려 사라져 버렸다. 한참 웃음이 흐르고 있던 그 곳의 분위기는 연이은 천인문의 목소리에 끊어져 버렸 다. "그런데 그 약초꾼의 말이 맞을까요? 아니면 그 초보의 말 이 맞을까요?" "......" 천인문의 질문에 천산신의는 아무 말을 꺼내지 못했다. 질 문의 요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이야기가 이 청년과 자신의 문제에 상당히 연관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 었던 것이다. 원하던 답이 들려오지 않자 천인문은 다시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어르신. 그 심마니가 누구인지 알겠습니까?" 정확하게는 몰라도 어느 정도는 알 수가 있었다. 천산신의 의 문제로 싸움이 벌어진 것이 자신의 제자가 말을 꺼낸 탓이라면 그 상대는 이 청년의 가까운 사이일 것이라 생각 했다. 아마 형제와 같은……. "아마도……." 말을 꺼내다 천인문의 서늘한 눈빛을 본 천산신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의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이 번에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천인문은 씁쓸한 웃음을 지 어 보였다. "그 약초꾼은 바로 접니다. 그리고 어르신께서 예상하시다 시피 그 어른은 어르신의 제자이구요." "흐음! 역시..."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천산신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정말 화가 났죠. 왜 하필 천산신의일까? 천산에 살지도 않으면서 천산신의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까? 그 당시는 아무 생각 없이 산을 내려와 당장 뒤집어엎어 버렸 으면 하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서서히 무거운 이야기가 나오자 병사들은 하나 둘 서로 눈 치를 보며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천인문은 그런 사 람들의 반응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헌데 십 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은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 이 안드는군요. 후후훗!" 낮고 자조적인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머리가 커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이젠 그런 외호 따윈 아 무런 상관이 없다는 건지. 제 자신도 잘 모르겠군요." "......" 천산신의는 듣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솔직히 명호 따윈 강호의 친구들이 붙여주는 것이다. 자신 의 의지가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천산신의는 우습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별호 때문에 한 아이가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는 말에 묘한 느낌까지 받았다. 솔직히 기분 같아 서는 그래 내 별호가 잘못 된 것 같구나. 네가 좋은 것으 로 하나 붙여다오. 그러면 천산신의는 넘겨주겠다. 이런 말을 하고도 싶었다. 그러나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것인가? 천산신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인문은 그저 계속 중얼거렸다. "아버지나 할아버지께는 죄송하긴 하지만 그 분들께서도 별로 원하진 않으실 것 같네요." 할말을 다 했다는 듯 천인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냥 갑자기 떠들고 싶어서 그랬던 것뿐이니까요."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 천인문은 자리를 떴다. 잠시 천산 신의를 바라보던 조기혜는 시선을 거두고 천인문의 뒤를 따라 갔고, 이세직은 사라지는 천인문의 등을 바라보고 있 었다. "수공에 능한 수부들은 지금 출발한다. 목표는 세 번째 선 박이다. 순식간에 가라 앉혀선 안 된다. 처음엔 조용히 그 리고 빠르게 병사들에게 들켜야 한다. 물에 빠진 병사들은 반드시 살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알겠나?" 낮지만 단호한 명령이 떨어졌다. 몸에 달라붙는 잠수복을 걸친 네 명의 수부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 속으로 조용 히 사라졌다. 물고기가 유영하듯 물길은 부드럽게 회오리 치며 그들의 흔적을 감추어 버린다. "자 이제 시작이다." 검마당 당주 우소는 조용히 사라지는 그들을 보고 있다 몸 을 날렸다. "괜찮니?" "괜찮고 말고." 천인문의 뒤를 쫓아 온 조기혜가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천 인문은 별 일 아니라며 빙긋 웃어 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쉽게 물러서질 않았다. 몇 년 더 산 경험이 그냥 얻어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후후! 앙금이란 게 그리 쉽게 사라질까? 말해 봐. 정말 괜찮아?" "나 참! 뭘 자꾸 그렇게 묻는 거야?" 계속 아니라 말하지만 계속되는 추궁에 결국 천인문은 손 을 들어 버렸다. "그래그래.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어. 그 녀석은 마음에 안 드는데 사부라는 할아버지를 보고 나니 내가 그런 억지 를 부려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넘어가야 할지 헛갈리더 라구. 내심이야 막 억지라도 부려 봤으면 하는 심정도 있 었어. 그런데 정말 그렇게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 휴 모르겠어!" 고개를 숙이며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민에 잠긴 그의 모습 에 조기혜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너도 그렇게 하면서 조금씩 커 나가는 거야. 힘 내 .' 조기혜는 천인문의 늘어진 손을 살짝 움켜잡았다. 비록 큰 일은 아니지만 저렇게 고민도 하고 알 수 없는 일로 마음 속의 갈등도 겪으며 성장해 나갈 것이다. 조금씩… 조금 씩 말이다. -102- 병사들의 치료가 끝나고 잠시간의 휴식이 끝나자 병사들은 부상자들을 다시 배 위로 옮기기 시작했다. 어떻게 될지 몰라 부상자들을 세 번째 배와 네 번 째 배에 싣고 병사들을 지킬 인원을 배치 한 뒤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천인문 일행은 네 번째 배에 올랐다. 정화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첫 배가 좋 겠지만 다가갈 명분이 없었다. 부상병들을 위해 수고 좀 해 달라는 장수들의 요청에 고개를 끄덕이고 배에 올랐다. 이미 시간은 정오 무렵에 가까워졌다. 선실 안에 홀로 앉은 정화의 안색은 습 격을 받은 이후 한 번도 풀리지 않았다. 머리를 괴롭히는 것이 하나 둘이 아 니었다. 병사들의 문제, 무림맹의 인물들, 거기다 새로 들어온 의원들까지. 특히 의원들에 대해서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느낌이 들어 더욱 답답했다. "제독! 준비가 끝났습니다." 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잠시 정신을 놓았던 정화는 다시 가다듬은 뒤 소리 높여 외쳤다. "그럼 출발하세." "옛!" 그의 목소리와 발소리가 같이 멀어지는 것을 느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서서 히 배는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갔다. 배가 출발함을 느낀 정화는 자리에서 일어서 선실안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벌써 두 번째 습격이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미 관과 무림과의 협약은 박살 난 것과 다름없었다. '만약 이런 습격이 계속 된다면……?' 정화는 머리를 저었다. 그랬다간 상상하기도 싫은 결과만 나올 뿐이다. 그저 잘 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아버지! 잠시 들어가 쉬시는 게 어때요? 아직 별 반응은 없는 듯 한데." 다섯 번째 배에서 주위를 경계하던 무림맹 군사 제갈무는 뒤에서 들린 귀에 익은 목소리에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다. 이 정도 가지고 피곤하다면 어찌 무인이라 하겠느냐? 위험하니 넌 그만 들어가 보거라." 나타난 여인은 제갈문예였다. 제갈세가의 재간둥이로 소문난 그녀는 귀제갈의 딸답게 영특하고 재주가 많았다. 그래서 이번 일에도 투입되긴 했지만 할 일 은 별로 없었다. 어젯밤에 한 번 전투가 벌어지긴 했지만 그 일을 제외하곤 자기 또래의 황보화와 이야기를 나눈 것 밖에 없었다. "핏! 지금은 위험하지도 않잖아요. 그리고 위험해지면 저도 싸워야 하는 것 아닌가요?" "후후후!" 할 말이 없었다. 틀린 곳이 없었기에.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할 말을 대신해 버린 그는 조용히 수로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대답이 없자 제갈문예는 다시 종알거리며 아버지를 방해하기보다는 혼자서 주위의 산세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실에서 모습을 드러낸 황보화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고, 둘은 서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 누는지 간간이 웃음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경계를 서기보다는 아리따운 두 여인을 흘끔 둘러보며 눈을 호강시 키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제갈무는 다시 경계를 하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아직 별 반응은 없지만 분명 그리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얼마 가지 않아 사실로 드러났다. "저게 뭐지?" 한 병사가 배 아래쪽에서 이는 파문을 보며 뱃전에서 고개를 쭉 내밀었다. 물 고기가 튄 게 아닌가 싶어 살폈지만 잉어도 그리 큰 파문을 일으키지 않는 것 을 강에 사는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무언가 쑥 올라 왔다 사라지는 모습이 눈 에 파악되자 그는 의아한 빛을 띄며 중얼거렸다. "뭔데?" "잘 모르겠지만 뭔가 나타났다 사라졌어." "별 것 아니겠지, 자라 같은 것 아냐?" 밤새 전투로 피곤했던 병사는 더 귀찮은 일이 생기기를 원치 않았기에 처음 병사에게 별 일 아니라며 신경 끄기를 종용했다. 솔직히 그 말도 맞았기에 병 사는 별 일 아니겠지 하며 자위했지만 곧 이어 물 속에서 치솟는 공기 방울이 그런 생각을 확 날려 버렸다. "이상해. 저렇게 크게..." 무엇이 잘못 되었다는 생각에 병사는 급히 아래 칸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리 고 그의 예상에 맞게 물 속에 잠긴 부분에 팔뚝이 들어갈 만한 구멍 하나로 물이 콸콸 새 들고 있었다. "크...큰일이다." 그는 사색이 된 채 선실을 뛰어 나왔다. 그러나 그가 외치기도 전에 이미 배 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아래 칸에서 일하던 병사들과 인부들이 급히 물 이 샌다며 호들갑을 떨며 튀어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수로를 다니는 배는 배 밑바닥이 평평하다. 수로가 깊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바다보다 평온한 수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답이다. 그러다 보니 배 밑창은 그리 두껍지도 않았다. 얕게 뚫은 구멍으로 스며드는 물은 조금씩 불어났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무 는 밀려드는 수압에 이기지 못해 쫙 쪼개지듯 갈라졌고 물은 더욱 급히 불어 나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나무가 휘어지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거기에 이어 배가 한쪽으로 확 쏠 리는 느낌까지 들자 세 번째 배를 모는 선장은 다급히 배를 뭍으로 돌릴 수밖 에 없었다. 부상병들이 더욱 많이 탄 관계로 배가 침몰하면 거의 몰살할 것이 뻔했다. 삼호 선이 명령도 없이 항로를 이탈하자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 기 시작했다.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무슨 일이냐?" 선두에 서 있던 정화는 급히 장수를 불렀다. 그러나 호명 당한 장수도 알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에 이상이 생긴 것을 알게 된 것은 배가 반쯤 기우는 것을 본 이후였다. 폭이 좁은 수로다 보니 배를 쉬이 돌릴 방법도 없었다. 정화는 급히 배를 세 울 것을 명했다. 돛이 내려지고 남은 배들도 서서히 속력을 멈추었다. "좋아! 되었군. 그럼 우리도 출발해 보세." 멀리서 이 순간만을 기다렸던 희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우소가 기다리는 곳으로 신형을 뽑아 올렸다. 그가 이동하자 기다리던 아수라파천대 대원들은 급히 대주 소위무와 함께 그를 뒤따라 내려갔다. 우소 이하 검마당의 대원들이 기다리고 있던 배에 다가가자 영은이 짜증나는 어조로 불만을 내뱉었다. "왜 이렇게 늦으신 거에요?" 오래 기다린 것이 싫었던지 불만이 얼굴에 그득했다. "저 친구한테 물어 봐라." 싱글벙글 웃고 있는 금영악에게 책임을 떠넘기고는 훌쩍 배에 날아올랐다. 소 형 쾌속정이기에 열 명이 타기가 버거울 정도로 배는 작았다. 금영악은 영은의 불만에도 별 내색하지 않으며 배에 뒤따라 올랐다. 저 앞에 배가 선로를 이탈해 나가는 것이 보였다. 솔직히 아직 몇 가지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고려할 시간이 없었다. 이미 승부수는 던 져졌고 최대한 승부를 승리로 가져가야 한다. "모두 기억해라. 오늘 싸움은 누가 많이 죽이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최대한 신속하게 그리고 우리의 정체를 밝혀선 안 된다. 고립된 첫 번째 배를 노린다 . 알겠느냐?" 금영악이 그들만이 들릴 정도로 낮게 외쳤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답 따위 들었다간 저 멀리 있는 무림맹의 인물들이 알아차릴 것이 뻔했다. "출발!" 희욱의 손짓에 배는 순식간에 출발했다. 엄청난 속도로 물을 가르며 나가는 배는 순식간에 정화의 선단을 향해 돌진했다. 열 두 척의 선박들은 이미 모두 정지해 있었다. 세 번째 선박이 급히 물가로 나가는 모습에 우왕좌왕 하다 정화의 배가 서는 것을 본 직후 물 위에 세워 버린 것이다. 앞으로 나가던 배가 갑자기 서자 대열은 헝클어졌다. 무언가 불안한 듯 주위를 둘러보던 병사들의 눈에 아주 빠르게 다가오는 선박 이 보였다. 병사들은 혹시 아군이 아닐까 하여 멈칫댔지만 이내 적임을 알 수 있었다. 어디의 소속인지 알 수 없는 복장에다 모두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적이다." 병사 몇이 동시에 소리쳤다. 배마다 수백이 넘는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전날 치열하게 벌어진 전투가 승리로 끝났지만 이 승리는 무림맹에서 나온 사람들이 없었다면 패배로 돌아 갔을 것이란 사실은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던 그들이었다. 지금도 각 배마다 소림 십팔 나한(少林十八羅漢), 무당십육검(武當十六劍), 청성 오수(靑城五首), 아미 팔약(峨嵋八略) 등이 나누어 배치되어 있었다. 비 록 수는 적었지만 그들과 연합하여 싸운다면 어제 밤처럼 이길 수 있으리란 생각이었다. 창칼로 미리 공격을 대비하며 그들을 지켜보는 병사들은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완연하게 피어올랐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진행되었다. -휘익! 무언가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는 소리가 들린 직후 검은 물체가 배 안으로 날 아들었다. "폭탄이다." 한 병사가 급히 알아보고 외쳤다. 병사들의 사이로 알 수 없는 물체가 뛰어 들자 병사들은 삽시간에 흩어졌다. 그러나 폭탄이라 예상했던 병사의 말과는 달리 그것은 연막탄이었다. -푸쉬쉭! 기분 나쁜 소음과 함께 흑청색의 연기가 가득 배 위를 덮었다. 대낮임에도 짙 은 연기가 가득 들어차자 손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심한 안개가 깔려 버렸 다. "속았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어떻게 된 거요?" 각 배에 나누어 탄 정파의 인물들은 급히 서로를 바라 보았다. 선두의 배에서 연기가 치솟음과 동시에 자기들의 배에서도 연기가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선두로 가야하오." 자신들을 공격한 일단의 무리가 선두로 나아가는 것을 본 누군가 소리쳤다. 그러나 안개를 뚫고 선수(船首)로 나간 그들은 곧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배와 배 사이에도 연기가 그득한 것이다. 이렇게 짙은 안개 속에서 앞에 있던 배로 넘어간다는 것은, 일반 병사들은 물론이고 경공을 펼 칠 줄 아는 무림맹의 고수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 배와 마찬가지로 십여 채의 선체는 모두 차례로 연기에 휩싸여 가기 시작했다. 가장 선두에 있던 정화는 차례로 연기에 휩싸이는 배를 보며 아차 했다. 이번 공격은 생각보다 심기가 깊은 사람에 의해 이끌리고 있음이 분명 했다. "정신 차려라. 대명제국 병사들이 이렇게 흔들린다는 게 말이 되느냐?" 정화의 불호령에 어수선한 분위기는 삽시간에 불을 끄듯 가라앉았다. 비록 자 신의 배만 그랬지만 그 정도만 해도 일단 안심이었다. '이것들이 무작위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 이 배만 습격하겠지.' "검천대는 이들을 막아라." 멀리서 나웅겸의 목소리가 들리자 정화는 공격해 오는 인물들이 무림인임을 알아차렸다. 아마 그들은 재물을 노리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마도 그 알 수 없는 두 권의 비급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휘리릭!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무언가 수면에서 튀어 올라 자신의 옆으로 다가오는 듯 했다. "어딜!" -쨍! 불똥이 눈앞에서 튀어 올랐다. 섬뜩한 불꽃에 정화는 한 발을 물러섰다. 누군 지 모르는 방수( 手)가 자신의 어깨를 잡아 뒤로 당기고는 앞으로 나섰다. 고맙다는 생각이 머리에 떠오를 때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앞쪽에서 들 렸다. "흐흐흐! 이게 누구신가? 나 맹주 아니시오?" '나맹주? 무림맹의 맹주가 날 구했나?' 정화는 그제야 방수의 정체를 알아 차렸다. 이어 굵은 목소리가 쩌렁쩌렁 뱃 전에 울려 퍼졌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아마도 무림맹주의 목소리인 듯 했다. 정화는 조금 불안했던 마음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잘 될 듯한 느낌이었다. 당가 가주인 당영민과 함께 서 있던 나웅겸은 배 위에 떨어진 연막탄이 검은 연기를 내뿜자 주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연기가 배 위를 가득 들 어차자 머리에 불이 번뜩 하는 느낌이었다. '아차! 이 배만 노리는 것이구나.' 공격 방법이 새벽의 전투와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자 제갈무가 말했던 무황성 의 공격임을 순식간에 깨달았다. 조금 늦지 않았을까 불안한 마음에도 불구하 고 급히 정화가 서 있던 쪽으로 몸을 날렸다. 수 십 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 위로 뛰어 올라 오는 미약한 경공 소리가 그 의 귀를 간질렀다. '이거 솜씨가 보통들이 아닌데.' 그의 마음이 더욱 다급해졌다. 그래도 저들보다는 정화의 옆으로 빠르게 다가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검천대는 이들을 막아라." 단발마의 목소리로 크게 외치자 뒤에 도열했던 검천대의 검수들이 급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정화와 상대의 중앙으로 들어와 정화의 신변을 보호했 다. 그러나 상대들은 전혀 공격할 생각이 없는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막 나웅겸이 정화의 옆으로 내려설 때 정체 불명의 사내가 정화의 앞으로 다 가오는 것을 느꼈다. 검을 뽑기가 무섭게 세찬 바람과 함께 공격이 시작되었 다. 살기가 없어 조금 이상한 느낌이었지만 급히 검으로 상대의 공격을 막아 갔다. "어딜!" -쨍! 두 검이 부딪히자 하얀 빛무리가 눈앞에서 반짝였다. 짧은 순간에 상대가 복 면을 쓰고 있음을 알아차린 그는 정화의 앞을 가로막으며 섰다. "흐흐흐! 이게 누구신가? 나 맹주 아니신가?" 어디선가 귀에 익은 듯한 목소리. 그러나 누구인지 알 수는 없었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나웅겸은 큰 소리로 호통쳤다. 위협을 할 생각 따윈 없었다. 일검을 나누고 보니 위협이 먹힐 만한 사람이 아님을 바로 알아 차렸다. 이 배에 올라 온 사 람들의 무공 수위도 생각보다 뛰어났다. 비록 당영민이 이끄는 수경팔수와 무 림맹의 검천대(劍天隊), 집정대(集情隊)가 이 배에 있다지만 어찌 될지는 자 신할 수 없었다. 그저 시간을 벌면서 연기가 사라지기를 기다린다면 다른 배 에 가 있던 동료들도 넘어 올 것이다. 그럼 그 때 싸우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쉽게 그런 생각을 알아차린 듯 했다. "흐흐흐! 이거 맹주는 우리 성주께서 맡으셔야 하는데 내가 상대해서 상대가 될지 모르겠는데." 불안한 듯 말하지만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은 것은 자신감이 충만한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나웅겸은 조금씩 불안해졌다. 상대는 시간을 더 주지 않을 모 양이었다. "시작해라."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바로 안개 속에 몸을 감추고 있던 무인들의 칼이 날렸 다. -챙!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들과 검천대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짙은 안개라 알아 볼 수 없었지만 연이은 검소리와 신형이 날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퍼졌다. 양쪽 모두 훈련이 잘 되었는지 떠드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단지 무기가 부딪히 는 소리만 가득했다. 그리 좋게 돌아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으윽!" 칼과 칼이 부딪히는 소리와 신음 소리가 배를 타고 흘렀다. 단발마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호오! 역시 검천대의 실력이 대단하구료. 이렇게 우리 아이들과 잘 맞서 싸 우다니. 다시 봤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들리는 신음은 거의 대다수가 검천대의 소리였다. 크게 밀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제길. 조금만 참으면 당가주가 올 것이다. 그 때 까지 만이라도.' 나웅겸은 속으로 당영민이 빨리 오기만을 기원했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 리 이미 당영민은 그의 뒤쪽에 서 있었다. 사천의 유수한 세력 위에 군림하다시피 하는 당가는 암기와 독으로 널리 알려 져 있는 세가였다. 그러나 그만큼 일반적인 무공은 약한 편이었다. 그 중에도 특히나 당영민은 암기 외에는 젬병이라 할 만큼 솜씨가 없었다. 지금도 두 손 가득 암기를 들고 있었지만 짙은 안개에 가려 손을 써 볼 도리가 없었다. 재수 없으면 무림맹의 대원들까지 피해를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웅겸과 상대하고 있던 사내는 금영악이었다. 이미 올라오기 전에 이 배에 무림맹의 인물이 타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나웅겸이 있을 줄은 몰랐었다. 그러나 걱정 따윈 되지 않았다. 배 위에 던져진 연막탄은 청린탄(菁藺彈)이었다. 정사 대전 이후 무황성에서 특수 개발한 연막탄으로 다른 연막탄과 별 차이가 없었으나 그 정도가 아주 심했다. 뛰어난 고수라도 시각을 거의 상실할 정도다. 그러나 무황성의 성주 이하 모든 사람들은 이 청린탄의 아래에서 실전을 하는 훈련을 오랜 기간 해 왔었다. 절정고수는 시각이 필요치 않은 상태가 된다 하더라도 그리 큰 피해 를 입지 않는다고는 하나 그것은 상대하는 자의 실력 나름이다. 상대가 이런 상황에서 전혀 시각을 잃지 않은 것처럼 실력을 발휘한다면 절정고수라도 당 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상태가 지금이었다. "자! 그럼 이제 다시 시작해 봅시다." 금영악은 이번 일을 조용히 해결할 생각이었다. 비록 전날 사파의 떨거지들이 한 번 들쑤셔 놨기에 관과 무림의 관계가 예전과 똑같이 돌아갈 리는 없었지 만 그렇다고 무황성까지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다. 무황성이 가장 무림에서 가장 강한 세력이라고는 하나 수십만의 명친 어림군과 대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살상은 될 수 있으면 피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자신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실력의 소유자인 나 웅겸을 제압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시간을 벌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 지만 시간은 저들의 편이지 무황성의 편은 아니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불 리한 쪽은 자신들이었다. 금영악은 천천히 검을 머리 앞으로 끌어올렸다. 진기가 기경팔맥(奇經八脈)을 따라 세차게 흘렀다. 달라진 금영악의 기세에 나웅겸도 급히 검을 뽑아 들며 기수식을 취했다. 선수는 금영악의 몫이었다. 검풍이 가득 실린 금영악의 검이 부르르 떨린다 싶더니 유성을 닮은 네 개의 빛이 나웅겸의 어깨와 목덜미로 날아들었다. '헉!' 시각을 거의 잃다시피 하여 청력에 의존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순간 소리도 없이 밀려든 검의 압력에 놀란 나웅겸의 안색이 파랗게 물들었지만 가까스로 고개를 숙이며 어깨를 노린 검을 위로 쳐낸 후 금영악의 다리를 노 렸다. 그러나 금영악은 그런 것이 보이기라도 하는지 아주 쉽게 피해 버린다. 바로 몸을 돌리며 위에서 찔러 내려오는 공세에 앞으로 구르며 피해 내자 등 뒤로 강한 바람이 밀려 왔다. "진풍결(陣風訣)!" 수비 초식으로 만들어진 나웅겸의 독문 검법 진천검결(振天劍訣)이었다. 바람 이라도 막을 듯 세찬 검막과 함께 빛무리가 하얗게 흩어지듯 뿌려졌다. -깡! -웅웅 검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검신이 부르르 떨렸다. 손아귀가 찢어진 듯 얼얼 한 손바닥에 끈적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금영악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강하군!'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입에서 비릿한 피내음이 느껴졌다. 치솟는 기혈을 간신히 눌러 내리며 나웅겸을 찾았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 했건만 나웅겸은 쉽게 공격할 수 없었다. 상대는 이런 환경에서 공격하는 법을 제대로 익힌 듯 했다. 그러나 자신은 그렇지 못했다. 함부로 찔러가다 역습에 당할 위험이 더욱 높았기에 그럴 수 없었다. 짙은 안개는 살랑 부는 바람에도 흩어질 줄 몰랐고, 푸른 연기에 몸을 감춘 두 사내는 서로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103- 그 무렵 희욱은 영은과 요라를 이끌고 선실 내부를 뒤지고 있었다. 청린탄이 시야를 가리는 시각은 단지 이 각. 그 시간 안에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안 보여요." 정화의 선실 내부를 뒤지던 요라가 고개를 저었다. 뒤이어 영은도 고개를 저 었다. "여기엔 없는가 보다." 희욱도 찾기를 포기했다. 한참을 뒤져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도 배 아 래에 있는 창고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나가서 창고로 가 보자꾸나." 희욱의 말에 영은이 급히 선실 문을 열었다. "누구냐? 컥!"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바로 영은의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뱀처럼 휘어 져 날아갔다. 장수 인 듯 복장이 화려한 사내의 손에서 도가 떨어졌다. -털썩! 장수가 목숨을 잃고 나뒹구는 모습에 희욱이 세차게 고개를 돌렸다. "함부로 죽이지 말라 하지 않았더냐? 그렇게 아비 말을 듣기 싫으면 돌아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영은을 쏘아보자 그녀는 어쩔 줄 몰라했다. 무림에 살면서 어찌 사람을 죽이지 않겠냐만은 이 일은 관과 연관되어 있기에 희욱은 배를 탈 때부터 누누이 살수를 금했다. 그것을 잊어버렸던 탓에 호된 꾸중을 들은 영은은 고개를 떨구었다. 더 보고 싶지도 않다는 듯 희욱이 급히 열린 문으로 나가 버렸다. 뒤따라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급히 요라가 그녀를 달랬다. "괜찮아. 언니가 미워서 아빠가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잖아." "흑흑! 그래도..." 영은의 눈자위가 축축이 젖었다. 요라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앉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제부터 조심하면 돼. 알았지?" "응! 그래 알았어." "그럼 빨리 나가자. 아빠 이미 나갔어." "잠시만…." 얼마동안 눈물을 보인 그녀는 울음을 그치고는 요라를 뒤따라 밖으로 나섰다. 아직 짙은 청록색 연기가 가득 선창에 덮여 있었다. 쫑긋 귀를 세워 희욱이 사라진 방향을 가늠해 본 그녀들은 희욱이 열고 들어간 듯 보이는 문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내려가는 계단인 듯 아래로 뚫린 계단이 보이자 둘은 조 용히 내려갔다. "아빠! 여기 있어요?" 이미 찾는다고 정신이 없던 희욱은 요라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사방은 어두웠지만 이미 절정에 이른 그들에게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수많은 상자 들이 늘어서 있었고 이미 몇 개는 열려 있었다. 그 안으로 보이는 것은 엄청 난 보석과 금괴들이었다. "우와! 엄청나네." 그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림인이다 보니 재물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그 래도 이렇게 수많은 재물을 본 적은 없었다. 색다른 모습의 동물로 제작된 것 하며 영롱한 보석이 가득 박힌 물건 등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보물들이었다. "지금 그런 것 볼 시간이 어디 있느냐? 빨리 찾아보거라." 한참 상자들을 열어 보던 희욱이 그녀들을 재촉했다. 이 각이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음을 잘 알고 있던 그녀들도 흠칫 정신을 차린 뒤 열리지 않은 상자들 을 하나씩 열기 시작했다. 열 때마다 보물들이 영롱한 빛깔을 뽐내기 시작했 지만 그녀들은 감탄의 눈빛을 보내면서도 손을 쉬지 않았다. "못 찾겠군. 어디에 숨겨 둔 거지?" 시간이 자꾸 흘러감에도 불구하고 찾는 비급은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없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자 서서히 열 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최후의 보루가 번쩍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희욱의 눈이 반짝 빛났다. 네 번째 선박을 타고 있던 천인문 일행은 갑작스레 피어오른 연기에 안색이 변해 갔다. 비록 부상자들을 위해 배에 올랐다고는 하나 원래 목적은 비급 때 문이었다. 천존무급(天尊武急)은 없음이 확실하나 파혈마혼(破血魔魂)에 관해 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이미 속임수라 생각한 그들이었기에 이 일은 누군가의 음모가 아닐까 생각했다. "이거 재수가 좋았다고 해야하나?" 서서히 가라앉는 배를 보며 당우양이 한 마디를 했다. "어떻게 하죠? 도와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만있자니 그것도 미안하고..." 경공으로 뛰어 넘어 가기엔 너무 배의 간격이 멀었다. 게다가 세 번째 선박이 빠져나갔기에 거리는 더욱 멀었다. "네 마음대로 해라. 나야 그 비급에 관심이 없으니 누가 가져가든 상관없다." 당우양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조기혜는 빙그레 웃었다. 관 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실력이 없어서 가져 올 능력이 없는 것이겠지. '뭐 여기서 뺏는 것보다 나중에 훔치는 편이 더 쉬울지도...'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의 귀로 천인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는 어떻게 하시고 싶으세요?" 이세직에게 물은 질문이었다. 연기를 피해 뱃전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던 그는 툭 내뱉듯 대답했다. "알아서 하거라. 지금은 나도 별…" 갑자기 손을 들어 입을 막아 버렸다. 배 멀미가 나는지 잔뜩 찌푸린 모습이다 . 물어봐도 더 이상 대답을 듣기 어려울 듯 하자 천인문도 별 생각 없이 자리 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냥 있을 거니?" "그럼, 나보고 도와 주러 가라고?" "너 그러려고 온 것 아니었어? 그러다 운 좋으면 책이라도... 아차 책은 없지 ." 혀를 쑥 내민 채 자신의 실수를 무마하는 조기혜를 바라보던 천인문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연기는 가득했지만 독은 없는지 호흡에는 별 무리가 없었다. "기다리다 보면 누가 했는지 나오겠지. 뭐 안 나오면 말고." 그 누구보다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는 천인문이었다. -콰쾅! 선실 문이 박살나며 하늘로 날아 오르자 순식간에 싸움은 소강상태로 빠져 버 렸다. 보이지는 않지만 누군가의 묵직한 발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공격해 오던 금영악이 뒤로 풀쩍 날았다. 간신히 막아내던 나웅겸은 공격이 멈추자 뒤로 물러서며 땀을 닦았다. 그러나 마음속은 더욱 초조해져 갔다. "맹주! 괜찮소?" 언제 다가왔는지 당영민이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숨을 고른 나웅겸은 고개 를 끄덕였다. "후후후! 오랜 만이구려 나맹주." 평범하면서도 전혀 귀에 거슬리지 않는 목소리. 그러나 목소리에는 살기가 감 돌고 있었다. 자신을 찾는 목소리를 듣자 언뜻 한 사내의 용모가 머릿속을 스 쳐 지나갔다. '호...혹시!' 짙은 연기로 인해 표정이 읽힐 리는 없었다. 그러나 상대는 그런 것까지도 낱 낱이 읽고 있었다. "오랜만에 뵈오니 상당히 놀란 듯 하구려." "희...욱?" "후후! 역시 맹주시오. 바로 본좌인 줄 알아차리다니." 나웅겸의 입에서 침음성이 토해졌다. "무슨 일로 나타난 것이오?" "아니 그걸 정말 맹주께서 모르신단 말이오?" 이 각이란 제한된 시간이 흐르자 불어오는 바람에 청린탄의 푸른 연기는 서서 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장내의 모습이 환하게 드러났다. 검천대와 아수라파천대의 싸움도 막을 내리고 서로 양쪽으로 갈라서 있었다. 그 뒤로 검마당의 모습도 보였다. 맞은 편에는 수십 명의 검천대 대원들이 두 눈에 살기를 띄운 채 검을 들고 서 있었다. 패배의 증거인지 대다수가 온 몸 에 피를 뭍이고 있었다. 그러나 사망자는 없어 보였다. 나웅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비록 승부에서는 밀렸을지 모르지 만 결과를 놓고 살폈을 때 승리에 한 발 더 가까워진 것이다. 희욱은 그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내부를 아무리 뒤져봐도 비급은 나오지 않았다. 제독이란 자가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되자 골치가 아파왔지 만 여기까지 온 마당에 그냥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납치라도 할까 생각했지만 그렇게 되면 무림맹의 입을 막아야 했다. 비록 그 수가 적어 시도해 볼만도 하지만 잘못된다면 무림맹과 전면전에 들 수도 있다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관부의 공격까지 받아야 하는 것이다. 미친놈이 아니고선 꿈도 꿔 보지 못할 일이다. "…두 권의 비급 때문이 아니오이까?"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뒤 나웅겸의 입이 열렸다. 이미 알고 온 것, 모르는 척 해서 꼴불견이란 소리를 들을 필요는 없었다. 희욱도 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여 사실임을 증명했다. "그렇소. 우리가 찾아 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오." "그래 찾으셨소?" 순순히 사실을 인정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는 희욱의 머리가 저어졌다. "아니오. 아쉽게도 찾지 못했소. 그래서… 몇 가지 물어 볼까 하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저분한 입에서 나올 말이 거짓 밖에 더 있느냐?" 뱃전의 좌우측 아래에서 수십의 신형이 솟구쳐 올랐다.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 의 모습을 차분히 살피던 희욱이 눈이 반짝 하고 빛났다. "이게 누구신가? 화산의 상청자 아니시오?" "어떻게 된 거요?" "뭐가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그 무황성 녀석들이 맹주가 탄 배로 우르르 몰 려 간 게 뻔해. 안 봐도 뻔하지 뭐." 황보언의 질문에 한 가득 인상을 찌푸렸던 형지가 투덜대며 응답했다. 연기가 배마다 가득해지자 각 배에 나누어 타고 있던 무림맹과 각 문파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일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혹여 습격이라도 있지 않을까 주위를 경계하며 기다렸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모두 무언가 잘못 되었다 싶었다. 별 수를 찾지 못했던 그들은 곧바로 경공술을 써 제갈무 가 탔던 다섯 번째 배로 모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일단 연기가 서서히 걷히는 것 같은데 상황이 좋지 않은 듯 하니 빨리 옮겨가도록 하지요." 말은 안 했지만 모두 제갈무의 그런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바로 신형을 날 렸다. 각 배마다 거리가 십 여장도 되지 않아 그들은 순식간에 네 번째 배까 지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두로 달려 간 그들의 발길은 곧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건너갈 수 없잖아." 세 번째 배가 이탈하여 멀리 보이는 두 번째 선박과 거리가 이 십 여장이 넘 었다. 한 번에 뛰어 넘을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이거 어떻게 하지?" 분에 못 이긴 듯 형지의 손이 배를 두드렸다. 황요진의 눈에서 이채가 발했다 . '제길! 잘 되 가고 있는 듯 했는데.' 「선두로 모아라. 아니 선두가 아니라도 좋다. 무조건 한 곳으로 모으면 그것 으로 충분하다.」 방효겸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행이 그의 노력이 없이도 충분히 그대로 되어 가는 듯 하여 조용히 있었는데 갑자기 배를 뛰어 넘기 어렵다니.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생각한 그는 급히 생각이 난 듯 입을 열었다. "배에 달린 소형선을 이용하도록 하지요." 황요진이 급히 말하자 모두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서로 마주보며 고개 를 끄덕였다. 네 번째 선박에 타고 있던 천인문 일행은 갑작스레 다섯 째 배에서 넘어오는 삼십 여명의 인물들을 보았다. 멋들어지게 날아오는 사람도 있었고, 단순하지 만 깔끔한 경공으로 넘어오기도 했다. "와 역시 실력들이 대단하네요." 입 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천인문이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당우양이 한쪽 눈을 살짝 찡그렸다. "저 딴 게 뭐가 대단하다는 거냐? 노부의 경공으로 말하면 저 정도는 새 발의 피지." 열심히 가르쳐 주었는데 자신의 경공술은 칭찬하지 않고, 남의 경공술이나 보 며 부러워하다니……. 은연중에 자신의 경공이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받은 당우양은 바로 주절대며 그들을 폄하했다. 그것을 모를 천인문이 아니었다. "하하하! 그거야 당연하죠. 비교할 걸 비교 해야죠." "그렇지?" 두 노소가 맞장구치며 응답하자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조기혜가 끼 어들었다. "지금 저 앞에서 난리가 났는지도 모르는 판국에 그런 소리나 하고 있을 건가 요? 빨리 가 봐요." "흠하하하! 조낭자가 급한 모양이다. 문아 서두르자꾸나." "할 일도 없는데 그러죠 뭐." 당우양과 천인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두로 달려간 무림맹의 인물들을 따 라가려다 조기혜는 자리에 서 버렸다. "이 노선배님께선 안 가실 건가요?" 아직 멀미를 하고 있던 이세직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가능하면 노부는 여기서 쉬고 싶은데. 문이하고 같이 갔다 오시구려." "그럼 그렇게 할께요." 사양하는 그를 남긴 채 세 명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몇 발자국 걷 지도 못해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그들이 다시 되돌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저 무슨 일이죠?" "아 천의원이구려." 제멋대로 성을 바꾸어 버린 것은 남궁무외였다. 화가 조금씩 치미는 느낌이었 지만 그럴 수 있지 뭐 하는 생각으로 넘겨 버렸다. 솔직히 성이 틀렸니 하며 고치는 게 더 귀찮았다.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더 볼 것도 아니었으니. "네! 그런데 왜 되돌아오십니까?" "너무 거리가 멀어서 경공으로 뛰어 넘긴 어려울 듯 하오. 뒤쪽에 소형선이 있다고 하던데 그걸 타고 가는 편이 빠를 듯 해서 이렇게 돌아가는 길이오." 제갈무가 상세히 설명을 했다. "그렇군요. 그럼 일단 서두르지요. 남아도는 게 시간이라지만 서둘러서 나쁠 것은 없지 않겠습니까?" 중간에 끼어 든 당우양은 말을 마치고 바로 몸을 돌려 매달아 둔 소형선을 매 달아 둔 곳으로 걸어갔다. 무림맹의 인원이 모두 모이자 사십이 넘어 보였다. 한 척 당 십 오륙 명이 탈 수 있는 듯한 배가 십 여 척이 걸려 있었다. 당우 양은 품속에서 작은 소도 한 자루를 꺼내 줄을 끊었다. 줄이 잘려 나가자 소 형선은 호수로 추락했다. -촤아! 거센 물보라가 하늘로 치솟았다. 당우양은 두 개의 선을 더 잘라냈다. 그 순 간 물보라의 소리를 들은 병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연기를 뚫고 장수 하나가 다가왔다. "뭐 하는 거요? 왜 배를 마음대로 가져…." "제길! 무슨 소리 하나? 저 앞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줄 알아? 알지도 못하 는 주제에 끼어 들긴 왜 끼어 들어?" 일행 중 가장 무대포로 나가는 형지가 이번에도 방패를 자처하고 나섰다. 장 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잘라버리고는 위압적으로 몰아 붙이자 장수는 찍 소 리도 못하고 밀려났다. "도와 주러 가는 것도 이렇게 간섭받는다면... 쯧쯧!" "아미타불! 서두르지요." 일지 도장의 말에 백오 선사도 급히 말을 자르고는 수로에 추락한 배 위로 신 형을 날렸다. 이미 두 척의 소형선이 더 추가되어 수로에 던져진 직후였다. 백오선사를 필두로 제갈무 외 사십 여명의 인영들은 순식간에 배 위로 몸을 날렸다. 보고 있던 당우양과 천인문도 가장 사람이 적어 보이는 세 번째 배로 뛰어 내렸다. 조기혜도 천인문의 뒤를 따라 내려왔다. 바닥에 놓인 여섯 개의 노를 잡은 무사들이 급히 노를 저었다. 각기 십 여명 의 사람을 태운 배는 앞에 있던 선단을 지나쳐 정화의 기함으로 다가가기 시 작했다. "...두 권의 비급 때문이 아니오이까?" "그렇소. 우리가 찾아 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오." "그래 찾으셨소?" "아니오. 아쉽게도 찾지 못했소. 그래서...몇 가지 물어 볼까 하고..." 막 배로 다가가자 배 위에서 벌어지는 목소리가 그들의 귀로 들려왔다. 막 뱃 전에 소형선을 가져다 댄 상청자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리자 화가 버럭 치 솟는 느낌이었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발을 박차 갑판 위로 뛰어 올랐다. "지저분한 입에서 나올 말이 거짓 밖에 더 있느냐?" "이게 누구신가? 화산의 상청자 아니시오?" 마주 본 채 서 있던 희욱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104- 희욱은 만면에 가득 미소를 띄우며 상청자를 맞이했다. 그 뒤로 내려오는 사람들을 하나 둘 살피던 그의 얼굴에 점 차 미소가 사라졌다. '소림의 백오, 무당 천양, 개방 녀석도 있군. 그러고 보니 올 녀석은 거의 다 온 것인가?' 희욱은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미소를 지었다. 몸을 찔러오는 살기에 긴장감이 온 몸을 타고 흘렀지만 그보다 더욱 강한 승부욕이 짜릿하게 그의 몸을 감쌌다. "흥 그래도 눈은 있다고 빈도를 알아보기는 하는구나." "하하하! 무림에서 명성이 높은 상청자를 못 알아본다는 게 말이나 되겠소? 눈이 있다면 당연히 알아 봐야지" 무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공과 명성임을 생각한다면 희욱의 말은 상청자의 기분을 띄우기에 더 없이 적절한 말 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황성의 성주에게 그런 칭찬을 들었 다는 것이 치욕이라는 듯 미간을 모으며 코웃음을 쳤다. "웃기는군. 너 따위에게 그런 말 따윈 듣고 싶지…." 상청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말을 자르는 이가 있었다. "흥! 성주께서 자꾸 오냐오냐 하니 콧대가 하늘로 치솟은 모양이지?" 대머리에 부리부리한 눈동자의 험악한 인상을 가진 금영악 이 인상을 쓰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냉랭해졌다. 아수라파 천대와 검마당 대원들의 살기마저 흉흉하게 일어 사방은 삽시간에 전장을 방불케했다. 정파 사람들은 급격히 변해 버린 분위기에 자신의 무기를 고쳐 쥐며 있을지도 모를 위 기상황에 대비했다. 재미있게 지켜보던 희욱이었지만 지금 은 그럴 때가 아니라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 "됐네. 이제 그만하게 지금 이렇게 싸울 때가 아니잖은가?" "그럼 아빠는 저런 도사 녀석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도 그 냥 넘어가실 건가요?" 역시 화가 나 있던 영은이 소리를 질렀다. 상당히 커다란 음성은 쩌렁 함선을 울려 퍼졌고 그에 따라 정파의 분위기 도 싸늘하게 바뀌었다. 그 중 가장 심한 변화를 겪은 것은 다름 아닌 상청자였다. 얼굴은 화로에 달구어진 쇳덩이처 럼 씨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만 하라 하지 않았느냐? 상도우 내 딸년이 말을 함부로 했구려. 내가 일단 사과하리다. 이해하시오." 희욱의 사과에 정파의 인물들의 얼굴에 호기심과 함께 의 아함이 떠올랐다. 사파의 인물이라면 죽음이 눈앞에 다가 오더라도 결코 정파의 인물들에게 사과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그들이었다. 특히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현 사파 를 대표하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 사내가 적인 자신들에게 사과를 한다는 사실은 정말 신선하고 기괴한 충격이나 다 름 아니었다. 뒤에 서 있던 제갈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비굴하지 않으 면서도 당당한 그의 행동은 자존심과 명예심이 강한 정파 의 인물들의 호의를 끄는 좋은 방법이었다. 그 결과로 지 금 대화의 주도권은 그에게로 넘어가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고 있던 상청자가 발작할 듯한 느낌이 들자 그가 앞으로 나섰다. 화가 난 상청자가 지금 더 이상 나서서 말을 해 봤자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신경 쓰지 마시지요. 상청자 어르신께서는 저런 어린 아 이의 말에 화를 내실 분이 아닙니다." <정신 차리시지요. 지금 화를 내시면 대화의 주도권이 완 전히 저 쪽으로 넘어가 버립니다.> 제갈무는 희욱에게 변명을 하며 상청자에게 전음을 보냈다 . 그래도 열심히 수도했던 것이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된 듯 그의 전음에 상청자의 안색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감사하오. 그런데 본좌의 견문이 모자 라서 그런지 말씀하시는 분을 잘 모르겠구려. 죄송하오만 말씀하신 분은 누구신지……." 정파의 세력을 조율하는 두뇌 격에 해당하는 제갈무를 모 를 리 없는 희욱이었다. 그러나 정식으로 만난 적이 없었 기에 인사조로 말을 건넨 것이다. "미력하나마 군사직을 맡고 있는 제갈무입니다. 오늘 이렇 게 무황성의 성주를 보게 될 줄은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 었습니다만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 그대가 귀제갈 제갈 군사구려. 내 이야기는 자주 듣고 있었소. 그래 제갈군사께서 그리 말씀하셨으니 일단 믿어 도 될 것 같은데……." "믿으십시오." "그렇다면 믿겠소이다. 그럼 다시 분위기도 가라앉았으니 이야기를 계속 진행해도 될 듯 한데." "진행이라……. 여기서 더 이상 할 게 있습니까? 싸움도 끝났는데 남은 것은 헤어지는 것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만 ?" "하하하! 뭐 틀린 말은 아니군요. 그런데 한가지만 더 묻 고 싶소만." "한 가지라……. 제가 대답을 할 수 있는 질문이라면 좋겠 군요." "아마 그대가 대답하기엔 조금 어려울 듯 하오만." "그럼 누구를?" "여기 군부의 지휘자와 이야기하고 싶소." 정파 군웅의 뒤쪽에 서 있던 정화는 희욱이 자신을 찾는 듯 하자 인파를 가르고 앞으로 나섰다. 언제 왔는지 장수 장균이 그의 옆을 호위하며 따라 왔다. 정화가 앞으로 나서자 희욱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당신이 정화 장군이시오?" "네 이놈! 네가 아무리 무림인이라 하나 네 놈도 대명의 백성임은 자명할 터. 어디서 함부로 제독의 성함을 그렇게 부르느냐?" 희욱의 질문이 무례하다 생각되자 바로 장균의 노기 어린 음성이 터졌다. 그러자 바로 희욱의 사과가 뒤따랐다. "아 죄송하오. 노부가 그만 실수를 했구려. 제독 용서하시 오." 장균의 호통이 쓸모 없는 짓이라 생각했던 정화였다. 솔직 히 그의 입장에선 정파나 사파나 똑같은 무리일 뿐이다. 바라는 게 있다면 이 일이 빨리 마무리되는 것뿐이다. 예상치 못한 희욱의 사과에 잠시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잘 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말문을 열었다. "아니오. 신경 쓰지 마시오. 그래 본관에게 묻고 싶은 게 무엇이오?" 정화의 유사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공손하게 사과를 한 희욱이었다. 정화의 반응이 생각 외로 좋다 싶어 계속 질 문을 던졌다. "우리가 찾아온 이유야 제독께서도 잘 아시리라 생각하고 있소. 우리는 비급을 찾으러 왔소." "으음!" 예상이 맞아떨어지자 정화는 짙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 봐도 비급은 보이지를 않는군요. 묻 겠습니다. 혹시 제독께서 그 비급들을 가지고 계신지요?" 질문을 받은 정화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오. 가지고 있지 않소." 정화의 입에서 정파 인물들에게도 설명한 그대로의 답이 흘러 나왔다. 양쪽으로 갈라진 무리 사이로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그 말을 믿기엔 두 권의 비급이 주는 유혹이 너무도 상당했고 , 안 믿기엔 배를 뒤진 노력이 아쉬웠다. 그러나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비록 두꺼운 장수복을 걸치고 있다지만 갑옷 사이에 책 두 권을 넣을 만한 곳은 보이질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 때 배의 아래쪽에서 갑자기 한 사내가 훌쩍 뱃전으로 뛰어 들어왔다. 갑작스런 침묵 속에 한 사내의 난입에 분위기가 다시 흉흉해질 듯 했다. 하지만 사내는 올라오자마자 고개를 숙인 뒤 금영악에게 무언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냈다. 듣고 있던 금영악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열리는 그의 입. <이보게. 일이 생겼네.> <뭔가?> <그게 말이지…….>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잠시 갈등에 휩싸였던 희욱은 들 려오는 금영악의 전음에 다시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겼다. 얼마 후 생각이 정리 되었는지 그는 눈을 들어 정화를 차 분히 살폈다. 그의 눈동자는 싸늘했지만 아주 담담했다. 희욱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독을 믿지요." 믿겠다는 희욱의 말은 순식간에 양쪽을 혼란으로 내몰았다 . 웅성웅성. 양쪽에 낮은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단순히 정화의 말만으로 믿기엔 불가하다는 입장과 당당한 모습에 서 진실임을 알아본 군웅들의 소란이었다. "누가 떠드는가?" 듣다 못한 금영악이 호통을 내질렀다. 무황성의 무사들에 게 내뱉은 것이지만 사방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금영악 의 추궁에 무황성의 무사들은 순식간에 정열된 모습을 되 찾았다. 그런 모습에 무림맹과 정파의 고수들은 부끄러운 느낌을 받았다. 다시 주위가 조용해지자 희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독! 잘못된 오해로 이렇게 좋지 못한 만남을 가지게 된 점 정말 고개 숙여 사과하리다. 비록 걷는 길이 달라 서 로에게 피해를 입히게 되었으나 인명의 피해가 없는 점은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오. 본인의 허물을 덮어두시겠다면 이 몸 이대로 물러나고 싶소이다. 제독의 의향은 어떠신지 ?" 이대로 물러선다? 정화의 머리는 바르게 굴렀다. 시간이 잠시 지체되고 한 척의 배가 파손되어 항해를 하지 못하게 된 점은 분명 저들의 잘못이었지만 인명의 피해가 경미한 점은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이대로 싸운다면 피해는 더욱 심각해 질 것은 자명하다. 지금은 그들을 고 이 내 보내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빚은 훗날 천천히 갚 아도 될 것이다. 결론에 다다른 정화는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소. 그대의 말대로 합시다." "안됩니다. 제독. 어찌 이런 무뢰배들을 그냥 보내시겠단 말씀이옵니까?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장균이 울부짖으며 외쳤다. "그렇습니다. 제독. 저들을 잡으라 명하여 주시옵소서." "명하여 주십시오." 사방에서 장수들과 병사들의 외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심 지어 몇몇 정파의 장문인들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무림맹과 정파 연합이 병사들과 힘을 합친다면 무황성의 최고봉인 희욱과 금영악을 비롯한 주 전투 대원들을 몰살 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한 번 손을 섞어본 검천대 대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황성의 무사들은 청린탄이란 연막탄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력적이었다. 게다 가 그 연기를 뿌리고 싸우게 된다면 거의 십중팔구 패배할 것은 명약관화하다 생각했다. 손속을 나눌 때 봐준다는 느낌을 받았던 그들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 었다. "됐소 그만하시오. 제독으로 명한다. 더 이상 이 일에 왈 가왈부하는 자는 참형으로 다스리겠다." 서슬 퍼런 정화의 호통에 장수들은 입을 다물었다. 다시 주위가 조용해지자 정화는 희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본인은 할 말은 하는 인물이오. 그대에게도 미리 말을 해 두겠소만 폐하의 조공품에 손을 댄 점은 분명 대역죄이오 . 훗날 무황성에게 어떻게든 제재가 가해질 것이니 알아두 길 바라오." 단숨에 목을 잘라버릴 수 있는 실력자를 앞에 두고 큰 소 리를 치는 정화가 마음에 든 희욱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이다. 본인 측에서 잘못 한 점은 익히 알고 있소이 다. 벌은 달게 받아야겠지요." 수뇌부가 결말에 그럭저럭 도달하자 다시 무사들의 분위기 는 조금씩 풀어졌다. 그러나 정파와 사파 간의 오랜 갈등 때문인지 아니면 조금 전까지 칼을 섞고 있던 이유인지는 몰라도 쉽게 전처럼 풀어지지는 않았다. '쳇! 한 판 붙나 했더니 어떻게 된 게 시작해 보기도 전에 끝나냐.' 한바탕 휘저을 목적으로 간신히 선두의 배로 넘어온 천인 문은 손 한번 날려 보지도 못한 채 싸움이 끝나버리자 혀 를 차며 투덜거렸다. 다행이 본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못 내 아쉬운지 먼 산 바라보듯 멀찍이 떨어져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한 여인이 들어왔다. 아니 정 확히는 한 여인과 그 옆에 선 한 중년인의 모습이었다. 차 분한 옷차림에 그윽한 눈동자를 가진 여인의 모습은 아름 답기 그지없었다. 여인은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 다급한 눈빛으로 배 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분명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어 다시 눈을 끔벅였지만 분명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그리운 얼굴, 바로 서혜령이었다. 무언가를 찾는 듯 열심히 찾고 있던 서혜령을 보자마자 천 인문의 입이 옆으로 벌어졌다. "새...색시야." 그리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지만 가슴 한 구석에서 무언가 울컥 치솟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을 찾으러 온 게 분명했 다. 천인문은 갑자기 찾아온 충격에 머리가 멍한 느낌을 받았 다. 왜 그녀를 잊고 있었을까. 저렇게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을 왜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울컥 치솟은 느낌은 이 내 자괴감으로 바뀌어 그의 가슴을 후려 파기 시작했다. 온 몸을 휘감는 느낌에 정신을 놓아 버린 천인문은 배의 갑판을 박차고 올랐다. 뭍까지 거리가 십 여장에 가까웠지 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당장 그녀를 보고 싶었다. 눈앞 에서. 육 장 여를 날아간 후 물을 다시 박찬 뒤 풀쩍 뛰어 올랐 다. 그리고 발이 막 바닥에 닫자 다시 박차고 뛰어 올라 그녀에게로 뛰어나갔다. "색시야!" 배 위를 살피며 천인문을 찾고 있던 서혜령은 갑작스레 물 로 뛰어드는 청년을 보았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그 렇다고 낯선 것 같지도 않았다. 사내가 갑자기 몸을 날릴 때만 해도 신경이 곤두섰지만 귀에 익은 호칭에 섬뜩한 느 낌이 들며 몸이 굳어 버렸다. 사내가 땅에 내려서자마자 자신의 앞으로 달려오는 것을 보지도 못했는지 멍한 눈을 들어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분명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예 처음 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한 가 지는 확실했다. '색시야' 하고 부르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상공이세요?" 천인문은 땅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그녀의 앞으로 달려 왔 다. 그리고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색시야, 보고 싶었어." "상공!" 서혜령도 천인문의 등을 두 손으로 부여잡았다. 어디론가 도망치지 않을까, 당장이라도 날아가 버리지 않을까 싶었 다. "정말 상공 맞으세요?" "그럼 내가 문이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날 잊어 버린 거야?"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지 천 인문은 껴안고 있던 팔을 풀며 그녀의 얼굴 앞에 자신의 낯을 들이밀었다. 앳띤 모습은 사라지고 영준한 사내로 탈바꿈한 천인문의 얼굴을 두 손으로 맞잡고 바라보던 서혜령은 신기한 동물 이라도 보는 양 계속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어... 어떻게 이렇게 커 버리신 거에요?" "아, 그게 말이지. 운기 조식을 하는데 나도 모르게 이렇 게 되 버렸어." 생각나는 대로 읊어 대며 머리를 긁적이던 천인문은 갑작 스레 옆에서 밀려오는 살기에 눈을 돌렸다. 그러자 한 쪽 옆에서 부리부리한 눈을 들어 자신을 쏘아보는 중년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내가 누구인지도 알아 차렸다. 바로 자신의 천적인 옥조영이었다. 천인문의 낯에서 서서히 핏기가 사라지는 모습을 본 사내, 옥조영의 얼굴에 흐뭇하다는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천인 문에게는 더할 수 없이 사악한 마귀의 그것과 같아 보였다 . "후후후, 문.아. 정말 오래간만이로구나." 갑자기 물 속으로 사람이 뛰어 내릴 때부터 옥조영은 그가 천인문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손자 녀석과 다름없는 녀석이지만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아.주. 못된 녀석이니 호되게 교육을 시킬 요량으로 두 주먹을 불끈 틀어쥐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사랑하는 두 부부의 상봉을 방해할 정 도로 몰상식하고 몰인정하지는 않았기에 잠시동안 기다려 주었다. 그러나 천인문의 눈이 자신에게 돌아오고 자신이 누구임을 바로 알아차린 직후에는 자비로운 시간을 더 이 상 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하하! 하, 할아버지." "오호! 내가 누군지 아직도 잊어버리지 않았단 말이냐. 이 렇게 기특할 수가. 허허허!"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눈초리가 더욱 싸늘해져가고 있 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천인문은 자꾸 굳어져 가 는 얼굴 근육을 미소로 풀어가며 말문을 열었다. "이, 잊어버릴 리가 있겠어요." "그래? 그럼 나와 마지막으로 헤어졌을 때도 기억이 나겠 구나. 그렇지?" "그, 그럼요. 헤헤헤!" "그럼 벌을 받을 것이라는 것도 기억하겠지?" "서, 설마요." "그럼 그 사실은 잊어 버렸단 말이냐?" 옥조영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져가자 천인문의 창 백한 얼굴도 샛노랗게 변해갔다. 배운 솜씨가 얕을 때는 몰랐는데 영웅장을 배우고 난 이후에 느껴지는 옥조영의 느낌은 정말 거대하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꼭 천산에서 보 았던 호랑이를 다시 만난 듯한 느낌이랄까. "그럼 다시 한 번 말해주마. 너는 내 말을 어겼다. 그리고 도망쳤지. 날 힘들게 한 것은 물론이고, 너의 사랑스런 아내까지 괴롭게 만들었다. 그 정도면 충분히 벌을 받아 마땅하지." 옥조영의 두 눈에서 줄기줄기 매서운 기운이 쏘아지자 거 미줄에 걸린 나방 마냥 천인문의 몸은 굳어갔다. 옥조영의 손이 천천히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도망이라도 치고 싶 지만 온 몸을 휘감은 기운에 짓눌려 옴짝달싹도 할 수 없 었다. 등골에서 식은땀이 한 방울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 다. 천인문은 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찔끔 감아 버렸다. 바로 그 순간 앙칼진 목소리가 터졌다. "그만하세요." 옥조영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덩달아 천인문의 감긴 눈 도 부릅떠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서혜령이었다. 협박 아 닌 협박에 서혜령이 천인문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왜 자꾸 그이를 가만 두지 않으시는 거에요? 왜요?" "얘, 얘야!" "할아버님께서 자꾸 그렇게 하시니까 그이가 겁을 먹는 것 아니에요? 할아버님께서 그냥 넘어가시면 그이가 도망을 왜 쳤겠어요? 네? 말씀해 보세요." 평소 할 말을 가슴에 담아두는 서혜령이었다. 그러나 평소 에 옥조영에게 대한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 가 천인문을 아끼고 있음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만난 자리에서마저 저렇게 훈계나 하려 하다니. 쌓여 있던 화가 와락 폭발해 버린 서혜령은 쉬지 않고 옥 조영을 밀어 붙였다. 수 십 년이 넘도록 당황이라고는 해 본 기억이 없었던 옥조영이었지만 평소 얌전하던 사람이 갑자기 자신을 밀어붙여 오자 어쩔 줄 몰랐다. 그런 그를 구원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여미릉이었다. "얘야. 이제 그만하거라. 그 분께서도 충분히 아셨을 게다 ." 그녀의 뒤를 쫓아온 여미릉이 어느새 옆에 서 있었다. "사부님!" 자신을 말리는 여미릉의 목소리에 서혜령은 당황한 표정으 로 돌아보았다. 황당한 표정으로 밀리고 있던 옥조영을 통 쾌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백운호도 거들었다. "그래. 옥형께서도 충분히 잘못을 깨달으셨을 게다. 이제 그만 해도 될 거다." 솔직한 심정으로 서혜령이 더욱 밀어붙였으면 했었지만 여 미릉의 무언의 압력을 받은지라 울며 겨자먹기로 맞장구를 친 것이다. 그녀의 투정은 자연스레 사그라지었다. 천인문은 생각지도 않았던 서혜령의 도움을 받고는 살았다는 표정으로 싱글 벙글이었다. 그런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을 옥조영도 아니 었다. 표정은 관리를 하면서 전음으로 한 마디를 날렸다. <문아! 조용할 때 한 번 보자꾸나.> 천인문의 표정이 다시 살짝 일그러졌다. 잠시간의 소란이 끝난 후 천인문과 남은 일행들이 하나씩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 어떻게 된 거니? 갑자기 몸이 엄청 커져 버렸 네. 얼굴도 쉽게 알아볼 수 없을 정도야." 단연 화제는 천인문의 변화였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헤어 져 있긴 했지만 그렇게 극심한 변화를 가져올 정도로 긴 기간은 아니었기에 그러했다. 단목 수령이 궁금한 표정으 로 묻자 천인문은 고개를 갸웃댔다. "나도 정확히는 몰라. 그냥 운기조식을 했는데 갑자기 불 쑥 커져 버리지 뭐야." "이야! 정말 신수가 훤해 졌어. 그 땐 어린 티가 많이 남 았었는데 말이지." 이윽고 여미릉 등과도 인사를 끝낸 천인문은 자신의 일행 이 생각나 머리를 돌려 뱃전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조기 혜와 이세직 등이 남아 있을 것이다. "누굴 찾는 거냐?" 옥조영이 물어보자 천인문은 흠칫 몸을 떨었지만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을 했다. "일행이 있거든요. 아마 날 찾고 있을 텐데." "배 위로 올라가야 되는 거냐? 그러고 싶진 않은데. 쓸 데 없이 관부의 인물들을 만나긴 그렇구나." "그래도 가 봐야죠. 할아버지 무공 비급이 떠돈다는 소문 인데 할아버진 관심이 없으신가 봐요." "누가 장난 친 거라도 상관없다. 내 무공 따위가 나돈다는 소문이 돌아도 사실이 아닌데 상관 있겠느냐?" 옥조영은 별 관심 없다는 듯 머리를 살살 흔들었다. 확실 히 그럴 법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천인문은 정확히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색시야. 내가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거든. 같이 가 보자. " "소개요? 누굴 말씀하시는 건가요?" "가서 보면 알아." 그녀의 손을 잡고 물가로 끌고 내려가다시피 한 천인문. 그러나 결국 물 앞에서 서 버릴 수밖에 없었다. 저 배 위 까진 십 여장도 넘는 거리였고 물에 빠지지 않고서 올라갈 실력이 아직 부족했다. 배로 돌아갈 방법을 강구하고 있을 때 배 위에서 두 명, 정확히 한 명의 중년인과 한 여인의 신형이 솟구쳤다. 중 년인은 단숨에 날아 왔지만 여인은 소매 짓을 하며 날렵한 동작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땅에 내려서자 천인문이 빙그 레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할아버지는요?" 당우양이 네 번째 배를 턱으로 가리켰다. "너도 알잖느냐? 아직 게 있다." "색시야! 나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다 했지? 이리로 와 봐 ." 천인문이 그녀의 잡아끌었다. "이 분은?" 서혜령은 갑작스레 자신의 앞에 나타난 여인을 보며 조심 스레 물음을 던졌다. 바람을 피울지도 모른다던 단목 수령 의 농담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쪽은..." "됐어. 내가 할게." 조기혜는 천인문의 말을 끊으며 직접 입을 열었다. "문이 아내 되는 분이신가 보죠? 전 조기혜라고 해요." 문이! 문이라고 부르는 조기혜의 호칭은 정말 다정하게 들 리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서혜령은 가슴속 한 구석에서 불안한 느낌이 드는 느낌이었다. 자신과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다 온 몸을 감싼 도도한 기품까지. 어느 하나 자신보다 못 한 게 없는 듯한 느낌 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서혜령이라 합니다."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지만 속은 갑작스레 타오르는 질투의 불꽃이 이글거리는 느낌이었다. 얼굴에는 드러나지 않았 지만 호흡마저 가빠지는 듯 했다.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문이가 자랑할 만 해요."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조기혜도 그녀를 보았을 때 아름 답다는 생각을 했었다. 여인을 보고 아름답다는 느낌이 든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비록 차갑게 느껴지는 점도 있었 지만 천인문을 바라보는 두 눈에서 뜨거운 사랑도 확인할 수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부럽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조기혜의 가슴 이 욱신거렸다. 두 여인이 서로 다른 생각에 잠기자 그들 사이에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105-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언제라도 명을 내려 주시길." 푸르른 주기산의 봉우리에 몸을 감춘 한 무리의 중앙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죽옷을 입고 활을 든 수백의 인영들은 모두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의 전면에 서 있던 중 년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중년 사내는 천천히 무리를 훑어보던 중년인은 굳게 다물어진 입을 열었다. "나 방효겸, 주군을 모시며 이날 이때까지 쓰디쓴 고통의 시간을 감내해 왔다. 그대들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픔은 오늘로 끝이 날 것이다." 방효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바람 소리만이 뒤 흔드는 주기산에 모인 사람들은 결코 그의 말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빛을 번뜩이며 그를 보고 있었다. "결코 물러서지 마라. 그대들의 피 한 방울이 우리의 이상 을 이루어 줄 것이다. 죽음을 겁내지 마라. 그대들의 목숨 하나가 주군을 복위시킬 밑거름이 될 것이다." 잠시 말을 끊었던 방효겸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얼굴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대들의 목숨 값은 내세에서 내가 갚아 주겠다." 달콤한 미사여구 따윈 하나도 없는 밋밋한 연설이었지만 듣고 있던 무사들의 눈에는 불꽃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 다. 환호성 따윈 없었다. 이미 시작할 때부터 자신들의 목 숨은 버려질 것을 예상하고 시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환호 성을 능가하는 함성이 그들의 뇌리를 맴돌고 있음은 자명 했다. "출발!" 금색 휘장을 가슴에 단 금기주 녹상운이 손을 들어 내렸다 . 그의 지시에 모두 대오를 맞추어 종종 걸음으로 산 아래 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사라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방효겸은 쓰라린 눈빛을 하늘을 향해 던졌다. 그들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 을 게 분명했다. 자신이 꼭 그들을 사지로 밀어 넣는 것 같아 너무나도 괴로웠다. "괴로우십니까?" "......" 남아 있던 녹상운이 방효겸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방효겸 은 다시 눈을 내려 그를 바라보았다. 녹상운은 빙그레 웃 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시지 마십시오. 모두 기쁜 마음으로 행하는 일입니다 . 군사께서 저들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지 않으시면 누가 기억해 주겠습니까? 피하지 마십시오." "후~! 그대의 말이 옳소. 누가 저들이 걸어간 길을 기억해 주겠소. 나라도 보아야지. 나라도 기억해야지!" 자괴감에 빠진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그럼 저도 그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뒷일을 부탁드리 겠습니다." 녹상운은 고개 짓을 한 후 몸을 돌려 일행의 뒤를 따라 내 려갔다.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이 그리도 쓸쓸해 보일 수가 없었다.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방효겸은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이미 일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마음을 놓고 있 을 때가 아니었다. "은기주 철기주! 게 있는가?" "예! 부르셨습니까?" 등뒤에서 갑자기 든든한 체구의 사내와 마른 체구의 사내 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준비하게나." "존명!" 두 사내는 급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소이다." 뱃전에서 포권지례를 취한 희욱은 타고 온 소형선으로 풀 쩍 뛰어 내렸다. 뱃머리에서 내려다보던 정화 이하 정파 고수들은 무황성의 무사들이 배를 타고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는 서서히 멀어져가며 자취를 감추었 다. "운이 좋았습니다." 시야에서 배가 사라질 무렵 정화의 뒤로 누군가 다가왔다. 나웅겸이었다. 정화는 그 말에 검미(劒眉)를 찌푸리며 고 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뭔가 있어. 뭔가가...' 분명 무언가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도 자 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장군! 준비가 끝났습니다. 명을 내려 주십시오." 생각에 잠겨 있던 정화의 앞으로 장수가 다가와 고했다. "상태는?" "부상은 여덟 이옵고 사망자는 없습니다. 배도 파손된 부 분은 없사옵니다." 부하의 보고에 정화의 안색이 밝아졌다. '불행 중 다행이군. 더 이상 피해가 커졌더라면...'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정화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리 되었다면 섬뜩한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게 뻔하다. 아무리 자신이 황제의 총애를 받는 신하라 해도 용서받기 어렵다. '머리가 아프군. 출발이나 시켜야겠어.' 더 이상 생각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으며 생각을 접고는 장수를 향해 명을 내릴 생각으로 몸을 돌린 순간이 었다. -쾅! 갑자기 들려오는 폭음. 사방 천지를 진동시킬 소리와 함께 우박처럼 쏟아지는 돌덩이와 화살들이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었다. "아아악!" "컥!"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치솟았다. "뭐…뭐냐?" 막 소리칠 무렵 한 대의 화살이 매서운 기세로 정화를 향 해 쏘아져 오고 있었다. 피할 여지라곤 보이지 않았다. 정 화는 급히 안면으로 쏘아져 오는 화살을 왼손을 들어 막아 갔다. -퍽! 지릿한 고통과 함께 눈앞에 피가 튀었다. 피가 묻은 촉이 삐죽 팔뚝을 뚫고 나와 있었다. "제독!" "태감 어른!" 몇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서너 명의 방패를 든 병사들이 방패를 세워 정화의 앞을 가로막았다. 거대한 방 패 뒤에 몸을 세운 정화는 화살촉의 끝을 손끝으로 부순 뒤 잡아 당겼다. "크으..." 쓰라린 고통이 왼팔에 전해졌다. 피묻은 화살을 뽑아 들고 는 화가 나는지 와락 집어 던졌다. "제독 괜찮으신지요." 방패를 든 병사 하나가 머리를 돌려 묻는다. "괜찮다." 내뱉듯 말을 꺼낸 정화는 주위를 살폈다. 일견하기에도 수 십의 병사들이 꼬치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나머지는 그럭 저럭 방패나 배의 장애물을 이용해 생명은 건진 듯 했다. 그러나 무사들의 경우는 달랐다. 일사분란한 동작은 아니 었지만 저마다의 절기로 멋들어지고 가벼운 동작으로 화살 을 쳐내거나 피하고 있었다. 실력이 뛰어난 몇 몇 사람은 미처 화살을 피하지 못한 병사들의 안위까지 지켜내고 있 었다. 그 안에는 맹주와 무당의 도사도 있었다. '천양자… 그리고 나웅겸이라 했던가?' 자신이 보기에도 정말 그들의 솜씨는 대단해 보였다. 손을 놀릴 여지도 없어 보이는데 휘릭 하면 화살이 똑똑 부셔 져 나가는 것이다. 피할 생각 따윈 전혀 없어 보이는 듯 하다. 아니 피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다. '어느 놈들이 감히.' 병사들의 안전이 어느 정도 확보되자 정화는 방패 사이로 난 틈을 통해 전면을 살폈다. 그러나 화살은 앞에서 날아 오는 게 뻔한데 누가 쏘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먼 곳까지 쏠 수 있지?' 물경 사 십장도 넘어 보이는 숲 속에서 화살이 날아오고 있었다. 돌까지 날아드는 걸 보니 발석차(潑石車)도 있는 듯하다. '무슨 화살이 저렇게 멀리…….' 눈살을 찌푸리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엄청난 화살비 는 어느 새 멈추어 버렸다. 더 이상 피해가 나지 않자 화 살을 멈춘 모양이다. "맹주, 방법이 없겠소이까?" 방패를 든 병사의 보호를 받으며, 뱃전에 서 있던 나웅겸 에게 다가간 정화가 물었다. 나웅겸이 슬쩍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한 뒤 머리를 저었다. "저희도 별 수가……." "……." '방법이야 있지. 건너가서 확 때려잡으면 되니까.' 나웅겸은 씁쓸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정화를 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말을 하진 않았다. 일부러 적도들을 위 해 무력을 쓸 생각은 없었다. 그것이 사파의 고수들이 아 닌 이상 더욱 그랬다. 사 십 여장이라 해도 서 너 번만 뛰 면 가뿐히 건널 수 있다. 하지만 물을 건너는 도중에 공격 받는다면……. 아무리 그라도 쉽사리 피할 수 없다. 게다 가 지금 보았던 활은 위력마저 강하지 않은가 말이다. 활이 사 십 여장을 날아오다니... 화살엔 내력이라고는 거 의 들어 있지 않았다. 그 말은 일반인이 활을 쏘았다는 말 인데 중원의 활 중엔 바람을 타지 않고 사십 여장을 날리 는 그런 것은 없었다. 듣기론 몽고병이나 고려에서 그런 활을 사용한다던데 본 적이 없으니 믿을 수도 없었다. "누구냐? 누가 감히 대명의 관군을 향해 활을 쏘는가?" 정화의 우렁찬 목소리가 하늘로 퍼졌다. "그렇게 계속 쥐새끼처럼 숨어 있을 건가? 왜 나오지 못하 는가?" 그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하지만 역시 묵묵 부답. 나웅겸이 미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화의 목소리가 크다 한들 일반인의 기준일 뿐이다. 이런 강변에서, 그것도 수 십장을 격한 채 소리친다 한들 내공이 실리지 않은 소리가 전달될 리 없는 것이다. 정화의 말을 토씨 하나도 바꾸지 않은 채 나웅겸이 다시 외쳤다. 이번에는 강맹한 내력을 담은 듯 소리는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나웅겸의 목소리가 메아리로 반향(反響)되어 채 돌아오기 도 전에 맞은 편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하하하! 쥐새끼라니. 어디서 그런 소리를." "너희들은 누군데 감히 관선을 공격하는가? 법이 두렵지도 않은가?" 다시 정화의 말을 나웅겸이 외치자 답이 들려왔다. "법? 법 따위 두려워했다면 이런 일을 하겠는가?" "그대는 누구냐?" "나? 나의 정체를 알고 싶으면 자네가 먼저 밝히는 게 도 리 아닌가?" "나는 태감 정화다." 정화의 말을 받아 외치던 나웅겸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 다. 큰 소리로 자신이 정화라 했으니 이상할 법도 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할 새도 없이 계속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 이게 누구신가? 삼보태감 나으리 아니시오. 고명이 높으신 그대의 이름을 계속 들어오긴 했는데 이렇게 뵙게 될 줄 꿈에도 몰랐구려. 하하하! 일단 그럼 소인의 이름을 가르쳐 드리는 게 예의겠지. 소인은 방효겸이라 하오." '방효겸? 그게 누구지?' 고개를 갸웃대는 나웅겸. 그러나 정화는 벌써 안색이 싹 바뀌어 버렸다. 불끈 쥔 주먹이 부르르 떨린다. "방효겸! 뭘 하는 건가? 반역이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분노에 찬 정화의 소리가 터졌다. "반역…반역이라 했나? 어디서 반역이란 말을 함부로 담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군. 그대가 지금 반역이란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있는가? 누구 앞에서, 연왕의 개 따위가 함부로 반역이라 말을 하는가?" 정화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누가 누구의 옥좌를 탐했는데 반역이라 하나? 반역은 그 대들이 먼저 한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정화도 할 말을 잊었다. 확실히 그의 말이 맞았 다. 반역은 그들이 먼저 한 것이다. "크으..." 나직이 침음성을 토하는 정화. 상대의 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것인지 계속 강맹한 어조로 들려왔다. "우리는 반역도의 무리를 쳐부수기 위해 일어섰다. 자 모 두..." "잠깐! 이들은 대명의 백성들이다. 그들까지 죽이겠다는 것인가?" 나웅겸이 시간이나 잠시 벌어 보기 위해 소리쳤다. 그러나 들려온 답은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후후! 반역도의 무리들이라 칭할 땐 언제고 위급이 닥치 니 이젠 관군들까지 내미는군. 미안하지만 나도 잘 알고 있다네. 하지만 그들이 대명의 백성이라 해도 지금은 관군 , 우리의 적일 뿐이다. 백성들이 우리들을 욕해도 할 수 없지. 난 졸장부라 불려도 지금 해야할 것은 해야겠다. 자 ~! 모두 쏴라."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고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 고 하늘을 뒤덮으며 날아오는 화살들. 그 중 한 대가 강맹 한 소리와 함께 정화의 위치로 날아들었다. 멀리서도 보이 는 정화의 화려한 복장이 문제였다. 방패병(防牌兵)들이 급히 막았으나 방패와 함께 꼬치를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화살. 나웅겸은 급히 몸을 날려 쏘아오는 화살 들을 쳐냈다. "일단 피하시오." 연신 날아오는 화살들을 쳐내며 정화에게 외친 순간 또 한 대가 강하게 그의 몸을 향해 날아왔다. 강한 내공이 실린 듯 하다. -휘이잉! 위세만으로도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던 나웅겸이 급히 검 을 들어 화살을 막았다. "크윽!" 간신히 화살을 쳐냈지만 실린 경력이 상당히 강한지 팔이 욱씬거렸다. 아마 소리쳤던 방효겸이란 사내가 쏘아 보낸 화살일 게다. 아려오는 팔의 진통을 누르기도 전 우수수 쏟아지는 화살 들. 나웅겸은 가볍게 화살들을 쳐내며 정화의 앞을 막았다 . -휘익! 또다시 화살 한 대가 엄청난 위력을 품은 채 날아왔다. 아 직 팔에 힘이 돌아오지 않은 터라 이번 공격은 쉽게 막기 어려웠다. 나웅겸은 급히 몸을 돌려 정화의 몸을 끌어안고 굴렀다. 머리 위로 공기를 찢어발기며 날아간 화살은 두 명의 병사를 꿰뚫어 버린 뒤에야 멈춰 섰다. "속수 무책이군." 조금 전 기습을 당했던 것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무림인들이야 일반 화살은 쉽게 쳐내거나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그렇지 못했다. 방패로 막았 지만 조금씩 병사들은 쓰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넘어진 병 사들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사기 또한 떨어지고 있었다. "태감! 일단 복장이나 벗어버리시오. 푸른색이 놈의 목표 가 되는 듯 하오." 그 말에 정화는 급히 자신의 겉옷을 벗어 던졌다. 청색 옷 을 벗고는 갑옷을 다시 걸치는 모습을 보며 나웅겸이 입을 열었다. "후퇴하는 게 어떻습니까?" "후퇴? 어디로 후퇴하란 말이오." 솔직히 정화도 후퇴하고 싶긴 마찬가지였다. 전쟁은 쥐뿔 도 모르는 장수들이나 문관들 정도는 임전무퇴(臨戰無退) 니 하며 소리치긴 하지만 정화는 전쟁터에서 뼈가 굵은 장 수다. 지금은 후퇴해야 할 때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 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별 뾰족한 수가 보이질 않았다. "배를 몰아 옆에 세우면 될 것 아니오." "지, 지금 배를 버리고 도주하자는 말이오?" 배만 버리면 살 수 있다는 건 정화도 알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쉽게. 화살이 사십 여장 이상 날아온다지만 저편에 배를 대면 거 리는 오 육십 여장. 날아와도 그리 위험하지 않을 거리다. 충분히 도주할 수 있었다. "그렇소. 그것이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최선의 방책입니다." "불가하오. 이 배는 일반 관선이 아니오. 황제 폐하께 가 는 진상품과 조공들이란 말이오. 대명의 일년 치 조공을 훨씬 웃도는 것을 그냥 팽개치고 갈 순 없소."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열려 있다 생각했던 정화였지만 나웅 겸이 보기엔 그도 역시 꽉 막힌 필부(匹夫)일 뿐이였다. "그럼 어쩌자는 말씀이시오? 여기서 모조리 죽자는 말이오?" 나웅겸의 목소리가 서서히 높아져갔다. 솔직히 그들이 죽 건 말건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확 내키는대로 할 수 없는 것은 천양자의 황제에 대한 인연과 천존무제( 天尊武帝)의 비급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었 다 . 확신할 수 없지만 이미 그 비급이란 것도 거짓인 듯 하다. 아니 거의 확실하다. 분명 저 녀석들이 꾸민 것일 게다.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 무림인들을 끌어들여 관군들 을 상대케 해 피해를 준다는 것은 왠만한 병법서를 읽은 사람이라면 다 알 것이다. 그런데 이 막힌 녀석은. 울화통이 치밀었지만 간신히 억누르며 묻자 정화는 표정도 바꾸지 않은 채 대답했다. "여기서 옥쇄(玉碎)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이것들을 버릴 순 없소." "크윽! 좋소. 그럼..." '그럼 여길 그만 뜨겠소' 라 말하려 했던 나웅겸. 그러나 말이 채 나오기도 전 화살이 날아드는 게 눈에 띄게 줄었 다. 그리고 연후 들려오던 비명 소리가 저 맞은 편에서 들 리기 시작했다. "뭐지?" 나웅겸이 고개를 들어 숲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보았다. 맞은 편에서 활개를 치며 살수를 펼치고 있는 희 욱의 모습을…. 숲 속에서 활을 들어 쏘는 사람들을 뒤쪽에서 숨어 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희욱과 금영악이 이끄는 무황성의 인 물들이다. "크음! 그러니까 저 녀석들이 우리를 속였다 이 말이지?" 매서운 눈빛을 보내는 희욱이었다. 실상은 이랬다. 배 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희욱은 한 명의 수하가 우연히 발견한 방효겸의 일행을 발견한 후 급히 보고를 한 것이다. 보고를 받자 당장 사태를 알아차 린 금영악이 급히 희욱에게 후퇴를 종용했고 희욱도 그런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다행이 별 탈 없이 물러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냥 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분명 이 일을 가지고 황실에서 트집을 잡을 건 뻔했다. 그것뿐 만이 아니었다. 자기를 속인 무리를 그냥 두고 가기엔 너 무도 화가 난다. 꿩 먹고 알 먹고라 했던가. 이 녀석들을 쓸어버리면 자신 의 노화도 풀고 정화에게 잘 보일 수도 있었다. 한 번 대충 살펴봤지만 특별히 무공이 높은 녀석들은 보이 질 않는다. 몇 몇이 제법 고강해 보이지만 그래도 자신이 상대하기엔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저 녀석이 우두머리인가? 방효겸이라 했겠다.' 희욱은 상대를 찬찬히 살폈다. 상당히 큰 키에도 불구하고 잘 발달된 근육이 그를 멋지게 보이게 하고 있었다. "난 저 녀석을 맡지." "그럼 난?" "자네? 자네는 그냥 쉬게. 머리 굴리느라 오늘 고생했는데 더 할 것 있겠나?" "울화가 치미는데 쉬긴 뭘 쉬어? 나도 한 바탕 해야겠어." "후! 내가 어찌 말리겠어. 맘대로 해." 희욱은 금영악을 일견한 후 다시 자신의 먹이감을 노려보 았다. 활 쏘는 병사들을 독려하느라 전혀 자신들을 인식하 지 못한 모양이다. "병사들은 죽이지 마." "알고 있어." 금영악도 그를 주시하다 자신도 먹이감을 찾아 고개를 돌 리기 시작했다. 빼빼 마른 한 중년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 오자 그의 입에 찐득한 미소가 걸렸다. '병사들을 죽이지 마라!' 희욱은 자신이 수하에게 한 말을 떠올렸다. 무황성이 사파 라 불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살인마나 마두는 아니 다. 하루라도 피를 손에 묻히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였지 만 필요 없는 살상을 좋아할 리도 없었다. 그리고 대상이 무공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특히 그렇다. '잘 되겠지. 좋아 그럼 시작해 볼까.' 앞을 노려보던 희욱은 살짝 손을 들어 앞으로 숙였다. 기 다리던 공격 신호에 아수라파천대 대원들이 급히 신형을 뽑아 올렸다. "뭐… 엇!" 활을 연신 쏘아대던 병사 하나가 고개를 돌리다 몸이 굳어 버렸다. 그 소리에 옆에 있던 병사들의 시선도 그쪽으로 돌아갔다. 그 순간 하늘로 덮쳐 가던 아수라파천대원들의 몸이 땅을 딛고 내려섰다. 그리고는 빠른 몸놀림으로 병사 들의 사이를 누볐다. 스치고 간 병사들은 헛숨을 토하는 직후 우뚝 굳어졌다. 혈을 짚인 것이다. "누구냐?" 독려하던 사내가 소리쳤다. 희욱은 천천히 사내의 앞으로 걸어나왔다. "적인가?" "자네가 대장인 듯 하군. 난 희욱이라 하네. 이름이 방효 겸이라 했나?" "……?" 그제야 사내는 그의 목표가 방대인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금기주 녹상운이었다. 정화의 경우와 같이 내력이 없는 방 효겸을 대신해 소리쳤던 것인데 그런 자신을 희욱이 방효 겸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대는 관군이 아닌 듯 한데 왜 날 잡아가려 왔나?" "후후! 자네들이 우릴 끌어들인 게 아닌가?" "우리?" "아! 소개하지. 난 무황성의 성주라네." 녹상운의 눈이 살짝 찡그려졌다. 일견했음에도 상대의 실 력이 자신보다 월등 위였다. 그런데 무황성주라니. 그제야 자신들이 끌어들인 인사들이 이렇게 뒤를 노리고 온 것임 을 알아차린 것이다. "노림수가 있었는데 우리가 깨트려서 미안하게 됐군. 하지 만 내 코도 석자라서 자네의 입장을 생각해 줄 여력이 없 군." "상관없네. 자네들이 없었다면 확실히 성공할 수 있었겠지 만 말일세." 희욱과 대화를 나누던 녹상운은 자신의 검을 허리에서 뽑 아 들었다. 그러면서 방효겸의 옆을 지키고 있던 사내에게 전음을 날렸다. <철기주! 방대인을 모시고 빨리 자릴 뜨게.> <안 됩니다. 금기주 어른. 그럴 수는...> <그만! 더 말할 시간이 없네. 내 상대가 아니야. 어서 서 둘러.> 전음을 나누고 있던 녹상운을 보고 있던 희욱이 빙그레 미 소를 지었다. "전음을 나누나 보군. 뭐 걱정하진 말게. 자네는 할 수 없 지만 나머지는 고이 모셔 둘 테니." "풀어 주겠다는 건가?" "흐음! 풀어준다고 생각은 해 보지 않았는데. 그냥 조용히 저쪽에 넘길 생각이야." "풀어 줄 순 없는가?" "그거야 자네 손에 달린 게 아닐까? 날 이기면 자네가 생 각하는 대로 되겠지 안 그래?" "그렇군." "시작해 볼까?" 말을 마침과 동시에 희욱이 빠르게 녹상운의 몸을 향해 돌 진했다. 녹상운은 손에 든 검을 치켜들었다. "이얍!" "싸우나 봐요." "대단해. 어떻게 저렇게 멀리 활을 쏠 수가 있지." 강변에서 쉬고 있던 천인문 일행은 급히 들리는 소리에 둑 으로 내려와 배를 바라보았다. 비명 소리가 들릴수록 마음 이 아프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내려오는 것이야 높은 배 위에서 뛰어 내려오는 것이니 가능하겠지만 물을 딛고 위로 배 위로 올라가기란 쉽지 않다. 그것도 저런 화살들 을 피해가면서는.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 화살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완전히 멎어 버렸다. "끝났나?" 그 때 두 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화와 녹상운의 대화 였다. 방효겸의 이름이 나오자 듣고 있던 서혜령 등의 얼 굴이 변했다. "이게 무슨 소리...?" 단목 수령이 의아한 표정으로 서혜령을 보았지만 그녀도 역시 넋이 빠져 있긴 마찬가지였다. "후후! 우습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옥조영의 말에 천인문이 궁금한 듯 옥조영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대답은 백운호에게서 나왔다. "우리가 얼마 전에 있던 곳에서 저 사람을 본 적이 있단다." "에이 설마 그 사람이겠어요. 목소리도 다른 것 같은데..." 단목 수령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단목 수령이 기억하 는 방효겸의 목소리는 가늘고 힘이 없었다. 거기다 무공을 익힌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저런 내공이 잔뜩 실린 목소리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도 그런 것 같구나. 하지만 뭔가가 있어." 여미릉까지 합세했다. 듣고 있던 조기혜와 천인문은 무슨 소리를 하는 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일단 그들이 무슨 일을 꾸민 것은 분명해. 하지만 그게 나도 무언지는 잘 모르겠구나. 일단 확인을 해 보면 알겠 지만 꼭 해 봐야할지는 모르겠군." 옥조영이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투로 대답하 자 백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이 일과 자신들과 연관된 것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있다면 그들 이 있었던 담대인의 집에서 방효겸을 보았다는 것과 있지 도 않은 비급이 돌아다닌다는 소문뿐이었다. 한 마디로 아무 연관이 없는 일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 면서 돌아다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냥 갈 수도 없잖아요. 여기까지 온 김에 한 번 확인해 봐요." 단목 수령이 입을 열었지만 아무도 호응하는 사람이 없었 다. 단목 수령의 얼굴이 뾰루퉁해졌다. 아무 상관이 없다 고 그냥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무공을 익혔지만 한 번도 제대로 써 본 적이 없었던 그녀 다. 이런 기회에 한 번 칼을 뽑아 보지 않는다면 언제 제 대로 해 보겠는가. 강호의 절세 기협(奇俠)들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가지는 게 꿈 많은 소녀의 바램이었다. 그리고 단목 수령은 그런 소녀들 중에 하나였다. 그녀는 도움을 받기 위해 천인문을 바라봤지만 그는 이래 도 저래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딴청만 피웠다. 결국 여미릉 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역시 여미릉도 마찬가지였다. 강호에 나온 것은 천 인문과 서혜령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 일만 아니라면 아직 도 곤륜에서 계속 있었을 것이다.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 천인문을 잡았는데 다시 이번 일을 파헤친다며 계속 꾸물거리긴 싫었다. 거기다 단목 수령은 아직 무공을 제대로 배우지도 않았다. 서혜령은 그럭저럭 배웠다고는 할 수 있지만 아직 단목 수령은 멀었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게 많이 배운 아이는 조용한데 덜 배운 아이가 더욱 날뛰는 것인지 알 수가 없 었다. 그녀는 머리가 아파 왔다. 단목 수령의 뜨거운 눈빛을 피해 고개를 돌려 버렸다. '히잉! 아무도 안 도와주네.' 그 순간이었다. "그럼 문이는 이 형을 보지 않고 그냥 갈 거냐?" 당우양이 끼어 들자 단목 수령이 이것이다 싶었는지 역시 말을 잇는다. "그래! 너 어떻게 아는 어르신을 그냥 인사도 하지 않고 헤어질 생각을 하니?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인사는 절대 빼 놓으면 안 되는 것인 줄 몰랐어?" 갑자기 가슴 한 구석이 찔린 천인문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내가 설마 그러겠어. 갈 땐 가더라도 지금은 안 가잖아. 그러니 지금 꼭 인사 할 필요가 없어서 그렇지." "호오~! 네가 정말 그랬을까?" "이거 왜 이래. 나도 예의를 알고 있는 사내야." "그래?" "그, 그럼 당연하지. 당연하고 말고."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쏘아보는 단목 수령의 시선을 보다 못해 슬쩍 고개를 돌려버리며 말을 얼버무리 는 천인문이었다. -106- 산길을 걸어가는 무리가 있었다. 수 십 여명의 인물들은 한 사내를 보호하는 형식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걸었는지 중앙의 사내는 연신 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중앙의 사내는 주위를 둘러보고 온 사내들의 이야 기를 듣고는 입을 열었다. "잠시 쉬었다 간다." 그 말에 사내들은 모두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단단해 보이는 몸을 가진 사내가 중앙에 자리를 잡은 사내에게로 걸어갔다. "방대인 잠시 쉬었다 가지요." "그럽시다." 방대인, 방효겸은 소매로 이마를 훔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다 한 순간 그는 북받치는 가슴을 억누르지 못해 두 손에 얼굴을 묻어 버린다. "크으… 모두 내 잘못이다. 천려일실(千慮一失)이라더니 내가 세운 계획에 내가 무너진 꼴이구나." "방대인, 힘을 내십시오. 다시 기회는 올 것입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철기주는 방효겸을 달래기 위해 노력했지만 방효겸은 연신 눈물을 흘릴 뿐이다. "아니오. 내가 조금이라도 신경을 더 썼더라면 그렇게 그 들이 되었겠소? 모두 내가 부족한 탓이오." "철기주도 그런 모습에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끝난 목숨이다. 자신들을 이끌 사내가 이런 일로 계속 얽매여 있다면 남은 사람들도 역시 그렇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방대인! 방대인께서 얼마나 슬프신지는 저도 잘 알고 있 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슬퍼만 하신다면 대인을 따르는 나 머지 이 사람들의 목숨마저도 위험해 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금기주, 은기주, 그리고 무웅도 원치 않을 겁니다. 그만 눈물을 거두시지요." 눈물을 보이던 방대인은 무웅이란 이름에 흠칫 몸을 떨며 고개를 들었다. 금기주 녹상운이 밀릴 듯 하여 뛰어난 경공을 가진 무웅으 로 하여금 위급한 순간에 도와줄 것을 명하고 왔다. 그래 서 슬프다. 말은 없지만 누구보다 뜨거운 가슴을 가진 인 물이 무웅이다. 아마 동료를 돕지 말고 자신을 지키기 위 해 따라 오라 명하더라도 거기에 남을 인물이다. 그걸 알 기에 남아서 도우란 명을 했지만 분명 실패할 가능성이 높 았다. 그리고 그걸 알면서도 남아란 명령을 내린 자신이 더욱 슬펐다. 붉게 물든 눈으로 얼마 동안 철기주를 바라 보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렸 다. "흠 흠! 미안하구려 철기주. 잠시 못난 꼴을 보였소." "아닙니다." "운이 나빠 이렇게 되었다고는 하나 아직 우리에겐 충분히 힘이 있소. 폐하께서 복위하실 수 있을 것이오." "그렇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 동지들에겐 불가능이 란 없습니다. 방대인께서도 힘을 내십시오." "그럽시다. 이렇게 앉아서 쉬고 있을 때가 아니오. 한시라 도 빨리 돌아가야 할거요." 다시 힘을 낸답시고 단호하게 소리를 지르며 자리를 벌떡 일어섰다. 아직 다리가 후들거리긴 하나 가야할 길은 멀었 다. 언제 관군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일이다. '흐음!' 그는 주위를 잠시 살펴보다 현재 상태를 깨달았다. 모두 자신을 보호한다며 빙 둘러싼 형태로 앉아 있었던 것이다. '미안하군. 나만 아니었으면 쉴 필요도 없었는데.' 그랬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동료들과 떨어져 나온 그들 에게 아직 여력이 남아 있어 보였다. 다만 그 자신을 위해 잠시 쉬어간 따름이었다. "갑시다." 방효겸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하자 일행들은 모두 그를 둘 러싸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정화와 희욱은 다시 두 번째의 대면을 하고 있었 다. 이번에는 전보다는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한 쪽에는 희욱이 앉아 있고 그 옆으로 금영악과 영은, 요 라가 앉아 있었고 그 뒤로 아수라파천대와 검마당이 그를 호위하고 있었다. 맞은 편에는 정화 홀로 독좌한 채 희욱 을 보고 있었다. 뒤로는 장균 이하 장수들이 그를 호위한 채 서 있었다. "그래 다시 보자 한 까닭이 무엇이요?" "조금 전에 제가 물러간 연후에 습격을 받으신 것으로 알 고 있습니다. 다행이 저희가 손을 써 피해가 그리 크지 않 았다는 것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시오." 정화의 독촉에 희욱은 잠시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뒤에 서 있는 대원 하나에게 손짓을 했다. 사내는 허리에 묶인 보자기 하나를 탁자 위에 공손히 내려놓고는 뒤로 물러섰다. 조용히 모습을 보고 있던 정화가 보자기를 흘낏 본 후 입 을 열었다. "이게 무엇이오?" "제가 제독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선물이란 말에 정화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다시 보자기를 조심스레 살피는 정화. 한 눈에도 충분히 누군가의 머리가 들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탁자 밑으로 흥건히 흘러내리 는 핏방울이 눈에 띠였던 것이다. 정화가 부하 장수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한 명의 장수가 걸어나와 보자기를 풀었다. 그러자 눈을 부릅뜬 머 리 하나가 눈에 드러났다. 원한이 가득한 두 눈동자가 자 신을 바라보는 듯 하자 전장에서 뼈가 굵은 장수였지만 흠 칫 몸을 떠는 정화였다. "누구의 머리요?" "제가 뒤를 덮쳤을 때 그가 소리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름이 방효겸이라 하던가요? 상당히 강한 무공을 가지고 있 더군요. 장수의 기상이 가득했지요. 그래서 머리를 잘라왔 습니다. 이것이 제가 제독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그대의 말은 이 머리의 주인공이 방효겸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만..." 정화의 어투에서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희욱의 목소 리가 잦아들었다. "미안하지만 이 사람은 방효겸이 아니오." "아...아니 분명 그가 소리를..." "다시 말하지만 이 사람은 방효겸이 아니오. 난 그를 잘 알고 있소. 그의 형 방효유는 국가에서 녹봉을 받던 인물 이오. 그는 원래 전 황제를 섬기던 인물이었소. 그런 그는 폐하의 등극을 원치 않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폐 하께서는 그를 반역죄를 씌워 참하셨소. 그에게 가장 자랑 스러워 하던 게 있다면 바로 동생일 것이오. 어렸을 때부 터 신동으로 알려진 그를 본인은 여러 번 보아 왔소. 내가 그를 몰라 볼 이유가 없지 않겠소?" "……." 정화의 설명을 들은 희욱의 눈이 꿈틀거렸다. 무언가 잘못 되었다 싶은 생각이다. "아마도 그는 방효겸의 수하 중 하나일 거요. 뭐 그대가 이 사내가 소리치는 것을 봤다니 하는 말이지만 아마 방효 겸이 이야기하는 것을 대신 소리친 사내가 아닐까 싶소." 다시 정화의 설명이 이어지자 희욱의 안색이 붉어졌다. 자 신이 이런 실수를 하다니.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확인도 하지 않아 이런 결례 를 범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용서하시지요." "괜찮소. 비록 이 사람이 방효겸 그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에게 있어 중요한 사람이었을 것이오. 비록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손해는 아닐 것이오." "그럼 저희는 이만 일어서겠습니다." "일단 선물은 감사히 받겠소." 더 이상 앉아 있을 필요가 없어지자 희욱은 자리에서 일어 섰다. 정화도 그를 배웅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희욱이 다시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는 모습을 본 정화는 몸을 돌려 자신의 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쭉 늘어선 막사 들을 따라 가자 잡혀온 사람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원독어 린 눈빛을 보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후후! 그래도 죄 값을 덜어 볼 생각은 한 모양이군.' 성큼 포로들에게 걸어간 정화는 몇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 어대는 사람들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저 세 명이 잡힌 녀석 중에 가장 고위급 인물이 아닐까 하는 전언입니다." 장균이 금영악에게 들은 내용을 전했다. 천천히 고개를 끄 덕인 후 입을 열었다. "여봐라! 고개를 들어라." 독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정화를 쏘아보던 사내가 와락 소 리를 질렀다. "흥 웃기는 소리." "네 이 녀석. 감히…." "됐다. 장균은 그만 하고…. 그래 이름이 뭐냐?" "너에게 가르쳐 줄 이름은 없다." 안쓰럽다는 얼굴로 바라보던 정화가 혀를 차며 장균을 바 라보았다. 장균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이름은 모르오나 은기주라 불렀다 하옵니다. 그리고 이쪽 은 철기주라 했고, 마지막으로 무웅이라 했다더이다." "그래? 흠 재미있는 별칭을 쓰는군. 그건 그렇고 일단 고 개를 들어 보게." 정중한 태도로 말을 하자 장균 이하 장수들이 어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정화는 상관없다는 얼굴이었다. "너희들은 우리의 포로가 되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너희 들의 목을 다 베어 버리고 싶다. 하지만 영명하시고 관대 하신 황제폐하의 성총으로 너희들을……." "우하하하하! 자네가 멋대로 황제의 은총 따위를 고하면 자네 목도 간당간당할 건데 무슨 배짱으로 그런 말을 하는 가?" "거짓이 아닐세. 황제 폐하께선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흥! 개소리는 그만하게. 자네가 성총이니 어쩌니 하면서 우리를 회유하려 하는 것 같은데 그걸 우리가 모를 줄 알 았는가? 그만 꿈 깨시게나. 더 이상 말 하고 싶지 않으니 이만 목을 베어라." 은기주는 입을 닫으며 눈을 감았다. 씁쓸한 눈빛으로 보고 있던 정화의 눈이 철기주에 돌아갔다. 그러나 철기주는 은기주의 마음과 같다는 듯 바로 눈을 감았다. 정화의 눈이 다시 무웅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간 무웅 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날 무렵 그의 입이 열렸다. "무웅이라 했던가? 흠 너의 생각도 그러한가?" "나… 난…." 무웅의 눈빛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런 모습을 본 정화의 눈빛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 차례 전투가 벌어진 직후 정화의 선박은 다시 뭍 에 정박했다. 첫 번째 전투가 상당히 피해가 컸지만 두 번 째와 세 번째 전투는 다행이 별 피해가 없이 끝났다. 아마 끝까지 갔더라면 거의 몰살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정파 고수들이 없었다면, 무황성 고수들과 이야기가 잘 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다시 바빠진 것은 천인문과 방소철, 천산신의 등 의원들이 었다. 상당수가 화살에 피해를 입었지만 다행이도 화살엔 독이 묻어 있지 않아 피해가 더욱 늘지 않았다는 점은 다 행이라 할 수 있었다. 한 밤이 다 되고서야 천인문 등은 일을 끝내고 쉴 틈이 생 겼다. 정화가 배정해 준 네 개의 막사에 쉬고 있던 일행들 은 막 치료를 마치고 들어오는 천인문 등을 맞이했다. "안 자고 있었네." "상공께서 아직 안 오셨는데 잠을 잘 수 있나요." 서혜령이 가벼운 미소와 함께 천인문을 맞이하자 단목 수 령이 한마디를 던졌다. "아이구, 언니! 처녀 앞에서 너무 뜨거운 거 아냐?" 멋쩍은 미소를 보이며 놀려대는 단목 수령에게 천인문이 입을 열었다. "이모는 이 사람 놀리는 게 재밌어?" "어쭈 이젠 너도 언니 편 드는 거니? 내가 너 때문에 얼마 나 고생한 줄 알아? 이것 좀 봐. 피부가 완전히 쫙쫙 갈라 진 게 논바닥이잖아." "그게 왜 나 때문이야? 우리 색시 피부 좀 봐라. 얼마나 고와. 고생은 똑같이 했는데 이모 피부만 그렇게 갈라지는 건 이모가 관리를 잘못 한 거잖아." "어머어머. 얘 말하는 것 좀 봐." "됐어. 내가 이모한테 피부 관리법이나 가르쳐 줄 테니까 그걸로 관리를 하든 팔아먹든 알아서 해." "뭔데?" 피부 관리법이란 말에 단목 수령의 눈이 빛났다. "칡하고 산우(山芋) 뿌리를 잘 갈아서 섞은 뒤에 물에 잘 풀어서 나온 액체 있지? 그걸로 가볍게 얼굴을 씻어 봐. 그럼 피부 좋아질 거야. 단 조심할 건 너무 오래 하지 마 란 거지. 알았지?" "그러면 좋아져?" "그럼 좋아지지." "헤, 고마워." 한 방에 여자의 불만을 해결해 버린 천인문. 뒤에서 기다 리고 있던 이세직을 보자 소개를 시킨다며 그를 인도했다. "색시야. 여기 이 분이 나한테 무공 가르쳐주신 할아버지 야. 인사해." 천인문의 소개에 서혜령은 다소곳한 자세를 갖춘다. "서혜령이라 합니다. 저희 상공을 가르쳐 주신 점 잊지 않 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노부는 이세직이라 하네. 그런데 문이 녀석에게 이렇게 예쁜 아내가 있을 줄 정말 몰랐구먼. 허 허허!" 이세직의 칭찬에 서혜령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볼이 살 짝 붉어졌다 돌아오는 것이 그녀도 기쁜 모양이다. "일단 앉으세요." 단목 수령이 자리를 권했다. "그래 이젠 어쩔 생각이냐?" 자리에 앉은 이세직이 천인문을 돌아보며 물었다. "일단 색시도 만났고 비급도 별 무리 없이 끝난 것 같으니 여기서 할 일은 끝난 것 같네요." "그럼 여기서 헤어지는 것인가?" "꼭 헤어질 필요 있나요? 같이 다니면 되죠." "허허! 됐네. 늙은이 다리로 걷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느 냐? 노부가 따라 다녀 봤자 걸리적 거릴 뿐이지. 도움도 되지 못할 것 이왕 헤어질려면 여기서 갈라지는 게 낫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옥조영 등이 안으로 들어 섰다. 천인문 등이 들어서는 일행을 맞이할 때 조기혜가 막사 밖에서 서성거리는 모습이 눈에 잡혔다. 눈을 반짝 빛낸 천인문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나 안 들어오고 여기서 뭐해." 갑자기 천인문의 말이 들리자 조기혜가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아, 별, 별것 아냐." "별 것 아니면 빨리 들어와." 들어오란 말을 하고 다시 막사 안으로 들어가려는 천인문 의 뒤로 조기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아! 잠시만." "응?" "잠시만 시간 좀 내 줄래?" "뭔데?" "잠시만, 잠시면 돼." 잠시라는 말로 천인문을 끌고 막사에서 멀리 떨어진 숲으 로 걸어갔다. 풀벌레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숲 속 에 들어온 천인문. 발갛게 달아오른 조기혜를 보며 입을 열었다. "뭔데 여기까지 와서 이야기를 해? 그냥 막사 안에서 하면 안 되는 거였어?" "그, 그게 말이지… 저… 저기 있잖아." 갑자기 말을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답답해진 천인문 은 천천히 그녀의 앞으로 걸어갔다. 달빛에 반사되어 부서 지는 빛무리가 그녀의 얼굴에서 빛나고 발그스름하게 달아 오른 그녀의 얼굴이 천인문의 눈에 쏘아져왔다. "누나 정말 예쁘다." 예쁜 것을 모르지 않는 천인문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을 이 렇게 뚫어지게 본 적은 없었다. 그녀의 모습은 완연한 선 녀의 자태, 바로 그것이었다. 갑자기 천인문이 자신의 미모를 칭찬하자 그녀의 낯이 더 욱 붉어졌다. 갑자기 할 말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래 할 말이 뭐야?" "그게 나 너 따라 가면 안될까?" "같이 가자고?" "으응." 천인문은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같이 가자는 말이 그리도 힘든 것인가? "별 어렵지도 않은 말을 가지고 뭘 그리 어렵게 말하는 거 야? 설마." "으응?!" "누나 혹시……." 천인문이 따가운 시선으로 쏘아보자 그녀의 얼굴이 더욱 화끈 달아올랐다. "뭐, 뭘 내가 뭘 어쨌다고." 갑자기 이상한 분위기에 목소리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날 좋아하는 건가?" "뭐… 뭐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난데없는 질문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아니면 아닌 거지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화를 내?" "차…착각하지마. 그냥 너희 할아버지가 정말 검강을 쓰시 나 확인이나 하려고 따라가 보려는 거니깐… 알았지?" "알았어. 누가 뭐래." 천인문은 투덜거리며 숲을 빠져 나왔다. 천인문이 사라지 는 모습을 보고 있던 조기혜도 한숨을 내쉬더니 자신의 머 리를 콩콩 두들기며 숲을 빠져나갔다. 그 순간 숲 뒤쪽에 서 한 사람의 신형이 스르르 나타났다. 서혜령이었다. 갑자기 천인문이 누군가와 함께 밖으로 나가는 모습에 몰 래 따라온 것이었다. 둔한 천인문이야 몰랐겠지만 서혜령 은 알 수 있었다. 조기혜가 천인문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 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사랑의 감정이라는 것을. 서혜령은 조기혜를 처음 보았던 순간 느꼈던 그 어떤 불안 감이 현실로 다가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비록 그녀가 천인문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그녀를 인정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녀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무릎에 얼굴을 파 묻었다. 그리고 그 날 밤 세 명의 남녀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107- 다음 날 아침 그들은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간신히 충열 된 눈을 부비며 막사를 나오자 단목 수령이 그간의 회포를 풀었느냐며 놀려댔지만 그들은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지 그녀의 농담을 받아치지도 않았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정화는 장수들을 모았다. 비록 팔뚝을 꿰뚫은 상처로 인해 몸은 불편했지만 마음은 편한지 환한 얼굴로 나타나자 장수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번 일엔 많은 일이 있었다. 비록 사상자가 많이 나긴 했지만 폐하의 진상품들을 모두 보전할 수 있어 다행이 아 닐 수 없다. 게다가 적에 대해 어느 정도 소득도 얻었다." 좋은 얼굴에 좋은 말투로 이야기하자 장수들은 모두 자기 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장수들을 탓할 생각이 없는지 정화는 계속 말을 이었다. "조금 후에 출발하겠다. 더 이상 불행한 일이 벌어지진 않 겠지만 며칠 남지 않은 일정이니 만큼 모두 최선을 다해 주기 바란다. 이상!" 정화가 말을 끝내자 모두 군례를 취한 후 막사를 나섰다. 잠시 앉아 있자 부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독!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래 들라 해라." 아침 일찍 출발해야 했기에 정화는 이미 이세직과 천인문 을 호출한 바가 있었다. 늦게 일어났는지 부른지 한 시진 이 지난 후에야 왔지만 탓할 생각은 없었다. 안으로 들어오는 천인문과 이세직을 보자 정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으로 들어오던 천인문이 인사를 한 뒤 상태 를 물었다. "팔은 괜찮으십니까?" "괜찮소. 조금 팔이 불편하긴 하지만 움직여도 그리 아프 진 않구려." "다행입니다.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더운 여름철일수록 상 처가 쉽게 곪으니까요. 파상풍(破傷風)이 들면 목숨도 위 험하니 각별히 주의하십시오." "하하하! 본관도 그 정도는 알고 있소. 신경 써 줘서 고맙 소. 그래 그대들은 이제 어찌 하시겠소?" "예? 무엇을 말입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대자 정화가 계 속 이야기를 이었다. "별 거 아니오. 그대들이 할 일이 없다면 우리와 함께 북 경으로 가는 것이 어떤 가 하는 걸 묻는 거요." "……?" "그대들이 없었다면 많은 병사들이 죽었을 것이오. 이는 전장에서 수많은 병사들을 벤 장수와도 같으니 그대들의 공이 어찌 작다 할 수 있겠소. 공이 있으면 상이 있는 법. 내 폐하께 그대들의 공을 말씀드리고 상을 주청해 보리니 그대들의 의향을 묻고 있는 것이오." 정화의 권유에 천인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비록 할 일 은 없었지만 북경에 가긴 원치 않았다. 신혼여행 겸해서 나온 강호행에 자꾸 일이 생기는 것이 귀찮은 것이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생각은 어떠세요?> 이세직을 살짝 바라보며 전음을 날리자 이세직의 답이 곧 돌아왔다. <나쁘진 않은 것 같구나. 왜 가기 싫으냐?> <네!> <그럼 싫다고 해라. 공을 세웠다는데 상 받기 싫다한들 벌 이야 주겠느냐?> <그것도 그렇군요.> 머리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표현을 한 뒤 천인문은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정화의 얼굴에 실망감이 떠올랐다.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소. 본인이 싫다는데 어쩌겠소."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자 천인문은 더 이상 남아있기가 껄끄러워졌다. 가볍게 인사를 한 뒤 몸을 돌렸다. "잠깐!" 막사를 나서는 천인문을 세운 정화가 자신의 관복에 걸린 기린 모양의 옥차(玉釵)를 꺼내 내밀었다. "이…이건?"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아 든 천인문이 옥차를 만지작거리 다 고개를 들었다. "그저 나의 선물이니 하고 생각하면 될 거요." "휴! 그렇습니까? 그럼 사양치 않겠습니다." 감사의 표시로 머리를 조아리며 받아 들고는 막사를 나서 는 이세직을 뒤따랐다. '에구, 이걸 어디 쓰란 거야?' 선물이라기에 받긴 했지만 마지못해 받은 것처럼 불만의 기색이 역력하다. 옆에서 걷던 이세직은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자신의 막사로 걸어오던 중 천인문은 머리 뒤로 느껴지는 기이한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방소철이 자신을 보며 서 있는 게 아닌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게." 별 달리 할 말도 없었지만 다가서며 인사를 건네자 방소철 도 정겹게 답을 보내왔다. "자네들도 오늘 출발하겠군 그렇지 않나?" "일도 끝났으니 당연히 출발할 겁니다." "흐음! 그래…." "왜 그러시죠? 무슨 할 말이 있으신 듯한데." "자네… 아, 아닐세."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운을 때던 방소철이 말을 시작도 못 하고 자리를 떠 버렸다.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고 있던 천 인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를 떴다. 발소리가 멀어지 자 방소철이 고개를 돌렸다. 사라지는 천인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보고 있던 방소철이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너에게 한 수 배웠구나. 의술(醫術)은 인술(仁術), 정말 기본을 배웠어.' 살짝 고개를 까딱거려 인사를 한 후 그도 몸을 돌려 사라 져갔다. 막사로 돌아온 천인문은 급히 서혜령을 찾았다. 짐을 꾸리 던 서혜령이 다가오자 손에 들고 있던 옥차를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제독이란 사람이 그냥 선물이라면서 주더라. 근데 이런 장신구를 내가 어디 쓰겠어? 그냥 색시가 옷에 걸쳐. 그럼 보기 좋을 거야." 오랜만에 선물을 준 천인문은 멋쩍어 하며 막사를 나섰다. 옥차를 들고 있던 서혜령은 그저 빙긋 웃다 자신의 가슴 에 달린 수실 하나로 옥차를 살짝 묶었다. -딸랑! 옥차는 옷고름의 단추와 부딪힌 기린은 영롱한 울음을 토 했다. 듣기 좋은 소리에 그녀는 다시 빙그레 웃음을 지었 다. 중천에 높이 떠올라 사방을 내려보는 정오의 한때…… 이름 모를 산새들이 사방을 비산하며 나는 관도 위에 한 무리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서 보이던 인영들 이 서서히 커질 무렵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어디로 가죠?" 바로 정화의 관군과 헤어진 천인문 일행이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선두에서 말을 몰던 단목 수령이었다. 이세직과 당우양은 정화와 헤어질 때 같이 인사를 나누고 사라졌다. 항상 같이 다니던 사람들과 헤어진다는 것이 이 렇게 힘들 줄은 정말 몰랐던 천인문이었다. 비록 눈물은 보이지 않았지만 가슴이 저리는 게 정말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나올 때는 별 말 없이 나왔는데 실제 목적지를 정한 바는 없었다. 그런 고로 단목 수령의 질문은 시기 적절하다 할 수 있었다. "일단 여기서 제일 가까운 도시가 양곡(陽谷)인가?" "아뇨. 제령(濟寧) 쪽이 더 가까워요. 양곡은 하루 내내 달려야 하지만 제령은 서 너 시진이면 도착할 걸요." "그럼 그리로 가지. 거기서 행로나 정하던지 하세나." 옥조영의 의견에 모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단목 수령과 여미릉이 선두에서 말을 몰아 나가고 그 뒤로 백운 호와 옥조영이 뒤를 따랐다. 그리고 마지막을 서혜령과 천 인문, 조기혜가 뒤따라 나간다. 셋은 특히 말이 없었다. 축 늘어진 기분 때문에 아무런 말 을 하고 싶지 않은 천인문이었기에 두 여인들에게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서혜령은 그런 그가 특히나 야속했다. 가끔 눈을 들어 천인문을 바라 봤지만 그는 정신 없이 생 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보일 뿐이다. 그런 모습에 조기혜가 천인문의 허리를 쿡쿡 찔렀다. 무엇 인가 하고 고개를 들자 조기혜가 턱짓으로 서혜령을 가리 켰다. 그제야 서혜령의 상태를 알아차린 천인문이 흑풍을 몰아 서혜령의 곁으로 다가갔다. "미안해 색시야. 내가 신경을 못 썼지?" "아네요. 상공께서 무언가 생각하실 게 있어서 그런 것일 뿐인데요 뭘." 그런 그녀의 말에 빙그레 웃음 짓는 천인문이었다. 너무도 달콤한 그녀의 말에 나쁜 기분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고마워 색시야." "뭘요." 다시 이야기가 오갈수록 서혜령의 가슴도 서서히 풀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고 있던 조기혜의 가슴은 서서히 헝 클어지기 시작했다. 처음 서혜령을 볼 때부터 무언가 자신과 다른 느낌을 받았 던 그녀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다정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에 서 무언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애교였고 아양이었다. 바로 자신에게 없는 여 자로서의 모습이었다. 툭하면 주먹질을 하고 울컥하면 바로 손이 뻗는 자신은 결 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옛날에는 그런 여자들은 바보일 뿐이라 생각했다. 그런 것 은 촌부나 할 일이지 자신처럼 고귀하고 어여쁜 여자는 그 럴 필요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미모도 빼어난 여자가 저렇게 다소곳하고 부드럽다니. 정 말 여자다운 여자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런 여자가 아닌 자신에게 조금 부끄러운 느낌도 받았다. 그래서 부러웠다 . 부러워 미칠 것 같았다. '나도 저럴 수 있는데… 어멋! 내가 무슨 생각을…'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화들짝 놀라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 다. 하지만 모두 자신의 앞에서 달리는지라 그런 자신의 모습을 아무도 보진 못한 듯 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조기혜를 뒤로하고 서혜령과 어깨를 나 란히 달리던 천인문은 조기혜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처음에 만났던 것하며 그녀의 친구 중에 하나인 일묘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듣고 싶지 않았지만 서혜령은 서서히 천인문의 이야기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고양이는 안 보이는 걸요." "아마도 품속에 있을 걸. 그렇게 크지도 않으니 들어갈 거 야." "어느 정도로 작기에…" 아무리 작다 해도 그녀의 옷에 숨을 곳은 거의 보이지 않 았기에 궁금해진 그녀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생각 에 잠긴 조기혜의 모습만 보일 뿐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 '무슨 생각을 하기에.' 뒤로 처진 모습이 상당히 안쓰러워 보인다. 처음에는 밉게 보이기도 했지만 어느 덧 측은한 느낌이 더욱 드는 그녀 였다. "저기요." "네?"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조기혜가 고개를 들었다. 그 곳에는 자신을 보며 부르는 서혜령이 있었다. 서혜령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그렇게 외롭게 혼자 가지 마시고 이쪽으로 오세요." 부드러운 미소로 자신을 부르는 그녀의 모습에 조기혜도 씁쓸한 기분을 감추며 말을 몰았다. "고양이가 있다면서요." "아 네! 일묘라고 하죠. 보고 싶으신가요?" 서혜령의 질문에 옆으로 다가온 조기혜가 웃으며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빼 냈다. 그녀의 손에는 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골골거리며 잠을 자고 있었다. "정말 귀엽네요. 잠시 만져봐도 될까요?" "되죠." 조기혜의 손에서 일묘를 넘겨받아 살짝 쓰다듬었다. 일묘 는 그런 손이 편안한지 갸릉거리며 움찔거렸다. 제령(濟寧)은 크지 않은 도시다. 하지만 운하를 끼고 있는 곳이라 상당히 번화한 곳이다. 운하를 중심으로 수송되는 다양한 물품들과 사람들이 제령을 통과한다. 춘추전국시대이래 오랜 기간 발달해온 도시답게 화려한 도 시였다. 도로를 걷는 사람들은 연신 활기에 찬 모습이고 사방에서 상인들과 호객꾼들의 생명력 넘치는 목소리도 쉼 없이 들려왔다. 말을 타고 제령으로 들어간 그들은 모두 주위를 두리번거 리며 나갔다. 사람들은 흰 색과 녹색이 잘 어울리는 옷을 많이 걸치고 있었다. 화려한 복장은 아니지만 정말 산뜻하 고 깔끔해 보였다. 저녁은 아직 멀었지만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 둘씩 줄어가는지 거리엔 간간이 사람들이 보일 뿐이 다. "좋은데. 정말 마음에 들어." "일단 도시를 왔으니 한 번 둘러 봐야겠죠." 백운호와 단목 수령이 이리저리 둘러보며 환호를 질렀다. "일단 숙소나 잡죠." 여미릉이 그런 그들을 보며 빙긋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저기가 좋겠네요." 주위를 살피던 서혜령이 한쪽을 가리켰다. 생각보다 크지 않은 객잔 하나가 눈에 잡혔다. 사람들의 발길은 뜸했지만 내부는 깨끗해 보였다. "들어가지." 옥조영이 앞장서 걸음을 옮기자 모두들 그의 뒤를 따라 왔 다. 점소이 하나가 급히 달려와 그들의 고삐를 건네 받았 다. 안으로 들어서자 또 다른 점소이 하나가 급히 다가왔다. "이 층으로 하나 주게." "이쪽으로 오시죠." 점소이의 안내를 받아 이층 위로 올라간 그들은 자리하나 를 차지하고 앉았다. "홍소육(紅蘇肉) 두 접시하고 만두 세 개, 어채 하나, 잉 어탕 하나, 그리고 술은…" "고량주(高梁酒)!" "고량주 두 개 주게." 백운호의 주문을 적기가 무섭게 계단을 내려갔다. "내일은 뭐하죠?" "허허! 뭐가 그리 급해. 일단 배부터 채우고 그 다음에 이 야기하도록 해라." 주문이 상당했는데도 기다리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만두를 선두로 고량주가 뒤를 잇고 또 홍 소육과 어채, 잉어탕이 차례로 들어왔다. "빨라서 마음에 드는군." 백운호는 잔에 고량주를 따르고는 벌꺽벌꺽 들이켰다. "카~! 죽인다. 술맛은 바로 이거거든." 담대인의 집에서는 가끔 술을 마셨지만 백주(百酒)나 모대 주(茅臺酒) 등을 마셨다. 하지만 맛이 그의 입에 맞지 않 았는지 별로 마셔보지도 못했다. 톡 쏘는 알싸한 향이 입안에 감돌고 진한 주정이 그의 몸 을 감쌌다. 한 잔 두 잔 맛을 보던 고량주는 어느 새 바닥 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먼저 식사부터 해요. 술은 그 다음에 마시고." 보다 못한 여미릉이 싸늘한 눈빛으로 백운호를 바라보았다 . 백운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술잔을 내려 놓고 젓가락을 들었다. 요리는 상당히 맛있었다. 특히 잉어탕이 좋았다. 갓 잡은 듯 싱싱한 고기 맛이 향긋한 향에 감도는 게 압권이었다. 반 시진에 걸쳐 하나씩 이리저리 맛을 보던 그들도 서서히 배가 차자 젓가락을 놓기 시작했다. "잘 먹었다. 어째 배가 부르니까 잠이 슬 오는데." 하품을 하며 입을 가리는 백운호를 보던 여미릉이 점소이 를 불렀다. "방 있죠?" "상방, 중방, 특실까지 없는 게 없습니다. 말씀만 하시죠. " "특실 말고 별채는 없나요?" "별채는 있습니다만 상당히 비싼 관계로…" "그걸로 주세요. 그리고 이 분을 별채로 좀 모셔 주세요. 그리고 이건…" 여미릉은 작은 금덩이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점소이의 입 이 귀밑까지 걸려 올라갔다. "요리값하고 객실 대여료에요. 그리고 남는 것은 가지시구 요." 그 말에 점소이의 입이 원상태로 복귀했다. 요리값과 방값 을 빼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무림인들이 아니라면 이런 공돈을 내미는 사람들이 없는 관계로 점소이는 허리를 숙인 뒤 백운호를 안내해 나갔다. 그가 사라지고 난 뒤 여미릉이 입을 열었다. "옥대협께선 어쩌실 건가요?" "일단 그곳으로 가 보는 게 좋겠지요." 둘은 이미 이야기가 끝난 듯 했다. 단지 지금은 의견을 교 환한다기보단 그들의 결정을 나머지에게 알려주는 것뿐이 었다. "사부님! 무슨 말씀이에요?" 단목 수령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소주로 가기로 했다." "소주요? 아니 거긴 또 왜…" "너도 들었겠지만 방효겸이란 사람이 우리가 아는 사람이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그건 그렇지만 꼭 가봐야 하는 거에요?" 아무리 아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 다. 그 방효겸이란 사람이 실제 그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 가 말이다. "그 사람이 실제로 당사자라면 어쩌시려는지?" 궁금한 듯 귀를 기울이던 서혜령이 조용히 물었다. "솔직히 그 사람이 오늘 그 사람이라 해도 별 방도는 없단 다." "잠시만요. 아까부터 그 사람, 그 사람 하는데 그 사람이 누군데요."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한 천인문이 참지 못하고 끼어 들었다. "궁금해? 설명해 줘?" "응!" 해달라는 말에 단목 수령이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일단 네가 헤어졌던 그 때부터 할 까." "아니 소주로 갔다면서. 거기까진 아니까 거기에 간 뒷이 야기부터 하면 될 거야." "그래 소주. 처음 소주에 갔을 때 우리가 간 집이 있었지. 주인이 담대인이라던데 소주에서 알부자라 하던가 그랬을 거야…" 생각을 하면서 이야기를 하는지 그녀의 시선은 공허한 빛 을 자주 머금었다 사라진다. 이야기가 끝난 것은 늦은 밤이었다. 손님들은 모두 가버렸 는지 일 이층엔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그러니까 그 녀석이 혹시 이름이 같으니까 그 사람이 아 닐까 이 말이지." 고개를 끄덕이며 응답하는 단목 수령이었다. 그들이 대화를 끝내자 주위에는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더 할 말이 없으면 그만 들어가는 게 어떠냐?" 옥조영이 무거운 침묵을 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죠. 점소이!" "옙!"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던 점소이는 여미릉의 호출에 후다닥 달려왔다. "별채로 안내해 줘요." "그러문입쇼. 따라 오시죠." 자리에서 일어선 여미릉이 점소이의 뒤를 따르다 고개를 돌렸다. "너희들은 안 들어갈 거냐?" "아뇨. 저희도 갈 거에요." 단목 수령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할 말이 없는 천 인문으로서도 계속 죽치고 앉아 있을 필요는 없었다. 고개 를 돌리자 서혜령도 일어서는 듯 했다. 조기혜는 이미 일 어서 점소이의 뒤를 따라 들어가고 있었다. 별채는 일층 계단 사이로 난 뒷문과 이어져 있었다. 문을 나서자 조그만 정원 하나가 달빛에 환히 빛나고 있었고, 여섯 개의 방이 'ㄱ' 자 모양으로 놓여 있었다. 안내를 마친 점소이가 몸을 돌려 사라지자 옥조영은 잘 자 라는 말과 함께 불꺼진 방안으로 들어갔다. 여미릉도 불이 켜진 유일한 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언니!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다시 봐요. 일단 여길 지나긴 했지만 구경은 못했으니 내일은 구경이나 실컷 하는 거에 요. 어때요?" "구경? 모르겠는데. 일단 내일 일어난 뒤에 생각해 볼게." 천인문이 말을 받자 단목 수령이 입을 삐죽거렸다. "흥! 누가 너한테 물었니? 난 언니한테 물었는데. 그리고 조낭자라 했죠? 그 쪽도 좋은 밤 되세요. 언니도 잘 자요. " 그녀는 손을 살짝 흔들더니 불꺼진 방 하나를 선택해 들어 갔다. "그럼 저도 이만…" 조기혜도 인사를 하며 방으로 사라졌고, 뜰 안에는 서혜령 과 천인문만 남아 있었다. 서혜령은 무언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천인문을 살짝 잡아 당겼다. "상공 일단 안으로 들어가요." "으…응. 들어가자." 언뜻 정신을 차린 천인문은 그녀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 갔다. 가장 끝에 놓인 방이었다. 내실은 깨끗했다. 옅은 하늘색으로 벽을 바른 방안은 작은 탁자와 수려한 수묵화 한 폭이 달랑 걸려 있었다. 침상은 비단으로 놓여 있었다. 갑자기 침상을 보자 정말 오랜만에 신혼의 분위기가 나는 듯 했다. 서혜령은 고개를 푹 숙였다. 첫날 밤 생각이 든 것이다. "나부터 씻고 올게." 안으로 난 욕실로 먼저 들어간 천인문이 얼마 후 씻고 나 오자 다음 차례를 기다려 서혜령이 씻었다. 그녀가 나왔을 때는 이미 침상 위에 천인문이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 촉촉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은 그녀는 수건을 탁자에 걸고는 불을 끄고 침상위로 올라왔다. -쌕, 쌕! 부드러운 호흡 소리가 그녀의 귀로 들어왔다. 아니 벌써 잠드셨나? 칫! 혼자서 잠들다니… 이야기를 나 누고 싶었는데… 그녀는 입을 삐죽거렸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 도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녀가 잠을 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색시야 자?" "…아뇨." 갑자기 들려온 천인문의 목소리에 서혜령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기도 전에 천인문의 손이 그녀의 상체를 와락 껴안아 버렸다. 서혜령도 손을 들어 천인문의 목을 감쌌다. "색시야!" "네 상공!" "나 색시 많이 보고 싶었어." "설마요. 그럼 왜 절 찾지 않으셨어요?" "색시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잖아." "그 아가씨하고 있어서 절 잊어버리신 건 아니구요?" "마…말도 안 돼. 내가 색시를 얼마나 보고 싶어했는지 알 아?" 서혜령은 목을 감싼 팔에 힘을 주었다. 헛말인지 알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나 가기 싫다. 그 사람 집에…" "어디요? 담대인 댁에요?" "응! 혹시 흑풍이 주인이라고 우기는 사람 안 가고 있으면 어쩌지?" "설마요. 이미 몇 일이 흘렀는데 그냥 있을 리 없을 거에 요." "그래도 모르잖아. 혹시 안 가고 있으면…" 천인문이 망설이는 듯 하자 서혜령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상공! 그 말이 그렇게 좋으세요?" "그럼 당연하지. 얼마나 영특한지 알아? 거기다 얼마나 빠 르게 달린다고. 흑풍이는 내 거야. 아무도 건들일 수 없어 . 흑풍이도 나말고는 주인을 안 받을 걸." "후훗! 그럼 뭘 망설이세요. 그 사람이 없다면 다행이고 또 있다 한들 뭐가 그리 겁나시는 거에요. 당당히 내가 주 인이라 말씀하시면 되죠." "말도 안 돼. 그 사람이 그냥 그러시오 하겠어?" "말이 안 되긴요. 그럼 말이 되게 하시면 되잖아요. 말 안 들으면 패서라도요." "킥! 색시도 상당히 사악해진 것 같다?" "설마요. 상공만 하겠어요?" "우웅! 색시야 사랑해!"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던 천인문은 그녀를 꼬옥 껴안았다. 그런 그의 얼굴이 아기가 엄마 젖을 찾듯 그녀의 가슴으로 내려갔다.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던 천인문은 그녀의 몸에서 피어나는 향긋한 내음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잊 고 살았던 사내의 욕망이 오랜만에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상당히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지금 품속의 그녀는 자신의 아내. 자신의 욕망을 발산한다 하더라도 별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천인문의 손이 그녀의 옷고름을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덩 달아 그녀의 숨소리도 조금씩 가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둘은 그 날 밤 또 다시 하나가 되었다. -108- 다음날 천인문이 일어난 때는 늦은 오전이었다. 언제 일어 났는지 서혜령은 보이질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서 옷을 걸 치고 밖으로 나왔지만 별채 내엔 아무도 없었다. 뒷문을 통해 객잔으로 나오자 탁자에 앉아서 잔을 들고 있 는 백운호가 보였다. "언제 일어나셨어요?" "제법 됐다." "식사는 다 하신 거에요?" "지금이 언젠데 아침도 안 먹었겠느냐? 모두 다 먹었고 너 만 먹으면 된다." "그런데 왜 안 깨우셨죠?" "어젯밤에 힘 많이 썼던 모양인데 왜 아침부터 깨우겠느냐 ?" 그 말에 천인문이 얼굴을 숙였다. 뜨거웠던 어젯밤이 생각 난 탓이다. 조용히 한다 했는데 생각보다 소란스러웠나 보 다. 겸연쩍은 얼굴을 한 채 얼굴을 숙인 천인문을 보던 백운호의 기질이 발동되었는지 계속 말을 붙였다. "상당하더구나. 별채가 떠나가는 줄 알았다. 어떻게 했기 에 그 애가 그렇게 되냐? 노부에게도 좀 가르쳐 다오." 벌겋게 달아올랐던 천인문이 투덜거리며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하는 거에요? 그렇게 시끄럽게는 안 했단 말이 에요." "허허! 안 시끄러웠다라… 우리 방에서도 잘 들리던데. 그 게 안 시끄러웠다니. 나중에 오면 물어 보려무나, 어젯밤 에 얼마나 소란스러웠는지. 뜨겁다 못해 활활 타더구나. 잠자던 노부도 벌떡 일어나게 할 정도였으니." 더 이상 놔두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 줄 모를 판국이다. 활 활 얼굴이 타던 천인문은 급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갔나요? 아무도 안 보이네요." "마누라하고 옥형은 잠시 알아볼 게 있다고 나갔고, 네 색 시하고 그 예쁘장하게 생긴 소저하고 수령이는 구경 간다 하면서 나갔다. 아마 시장에 갔겠지." "그럼 저만 식사를 안 했네요. 어이 여기!" 손을 들자 점소이가 급히 달려왔다. "소면 하나!" "아침은 든든하게 먹어 두는 게 좋을 텐데." "아뇨. 더부룩해서 별로 먹고 싶은 생각도 없는데요 뭘. 대충 하나 걸치면 나아지겠죠." 주문을 받은 점소이가 급히 내려갔다. 그리고 어젯밤의 속도에 걸맞게 순식간에 소면 한 그릇을 내어 왔다. 요리는 확실히 맛이 좋았다. 가늘게 뽑은 면발에 담백한 국물이 입에 딱 맞았다. 순식간에 한 그릇을 비운 후 한 그릇을 더 시켜 먹고서야 젓가락을 놓을 수 있었다. "좋으네요." 두 그릇을 먹고 난 후 불룩해진 배를 어루만지며 의자에 등을 기대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의 눈에 다섯 명의 여 자가 객잔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으응?' 분명 세 명은 아는 여인이다. 바로 자신의 아내와 이모, 그리고 누나라 불렀던 여인들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나머 지 두 명은? 그러고 보니 낯도 익다. 그런데 누구였더라. 서혜령이 객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천인문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다가왔다. "상공! 식사하셨어요?" "으…응 했어. 그런데…" 눈을 찡그리며 조기혜의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분명 떠오를 듯 떠오를 듯 하면서도 가물거리는 여인의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서혜령은 천인문이 누구를 보고 있는지 알아차리자 환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누군지 모르시겠어요?" "그, 게 말이지. 으…"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잘 떠오르지 않는 것이 짜증만 났다 . 조기혜와 나란히 서 있던 여인이 천인문을 보자 눈을 크 게 뜬 채 다가왔다. 여인의 옷은 정말 화려했다. 붉고 푸른 궁장으로 된 치마 에 푸른 옷고름과 알록달록한 소매단까지. 한 눈에 부유한 집에서 자란 여인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차분한 걸음으로 걸어온 여인이 천인문의 앞에 섰다. "문이 맞지? 동생 말만 듣고는 못 믿었는데 정말 많이 컸 네." "누구…" 자신은 모르는데 상대는 자신을 알아보는 듯 하자 목소리 가 기어 들어갔다. "나 못 알아보는 거니? 나 궁소미야. 모르겠어?" 궁소미? 그 사막에서 만났던… 천인문은 그제야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헤어진 지 얼 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녀를 잊고 있었다니… "아! 누나." 천인문이 자신을 알아보는 듯 하자 궁소미도 빙그레 미소 를 지었다. "잘 있었어?" "그럼요. 일단 앉아서 얘기하죠." 궁소미는 서혜령이 내어준 자리에 앉자 조기혜와 단목 수 령도 같이 앉았다. "이 분은?" 천인문의 옆에 앉아 있던 백운호를 보며 묻자 서혜령이 소 개를 했다. "제 사부님의 부군 되시는 분이세요." "아 동생의 사장(師丈) 어르신이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궁소미라 합니다." "아 만나서 반갑소. 백운호라 하오."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인사를 주고 받았다. 평소의 모습과 는 다른 백운호의 모습에 단목 수령이 고개를 돌리며 혀를 내밀었지만 인사를 주고 받느라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한 백운호였다. "그럼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끼리 할 얘기도 많을 테니 이 야기들 나누시오. 노부는 이만 빠져야겠소." "같이 이야기 하셔도 되는데." 자신의 합류로 자리를 나가는 것 같은 느낌에 여미릉이 미 안한 기색을 지었다. "괜찮소. 안 그래도 안으로 들어가 쉬려 했으니. 그럼…" 간단히 인사를 건낸 백운호가 뒷문을 통해 별채로 나가 버 렸다. 사라지는 백운호를 보고 있던 천인문이 그녀에게 고 개를 돌렸다. "어떻게 지냈어요? 지금 보니 옷도 훤한게 장사가 잘 된 모양이죠?" "뭐 그럭저럭 괜찮았어." "근데 어떻게 만났죠?" "아 그게 말이지…" 궁소미는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장사를 하는 터라 많은 곳을 돌아다니는 입장이다 보니 이 곳 제령까지 흘러 들어오게 된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었 다. 하지만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정말 그녀도 생각지 못 했던 일이었다. 시장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구경을 하던 서혜령의 눈에 띄인 것이다. 정확하게는 궁소미의 하녀인 매향을 본 것이 었지만. "그럼 여기에 온 게 장사하러 온 건가요?" "그렇지. 여기서 비단이나 거래 좀 할까 싶어서 왔는데 우 연히 보게 된 거지." "우와. 돈 많이 벌었겠네요. 누나 한 턱 내요." "한 턱이라니. 많이 벌지도 못했어. 실제로 얼마 전에는 손해도 좀 봤거든." "손해요?" 천인문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예전에 볼 때 그녀는 전혀 손해라곤 입지 않을 것 같은 철두철미한 모습이 아니었던 가. "뭐 정확히는 손해라고 할 순 없지. 내가 투자한 건 없었 으니까. 하지만 기대했던 예상만큼 벌지 못하면 그것도 손 해 아냐?" "그래도 벌긴 벌었나 보네요." "아니 그 거래로 손에 얻은 건 하나도 없어. 그래도 아깝 진 않아. 나도 운이 좋게 얻었던 정보였고 그걸로 이득이 나 볼까 하고 시작한 거였거든." "후후! 아 그런데 매향 누난 왜 또 저렇게 서 있데? 누나 이리와 앉아요." 슬며시 웃음을 흘리던 천인문이 궁소미의 뒤에 서 있던 매 향이를 보고는 백운호가 남긴 자리로 손짓했다. "괜찮아요." "누난 괜찮을지 몰라도 난 괜찮지 않아요. 목이 아프거든 요." 천인문의 말에 궁소미도 고개를 끄덕여 그녀를 자리에 앉 혔다. 매향은 궁소미의 하녀였다. 평소에 다른 사람들이 없으면 같이 앉긴 하지만 궁소미가 손님이나 고객을 대면할 땐 항 상 저렇게 서 있었다. "잘 됐다. 네가 의원이라니 이번 기회에 저 아이 좀 봐줘. 요즘 들어 많이 피곤해 하는 것 같던데 내가 워낙 바쁘다 보니 신경을 못 썼어." "그러죠." 천인문이 손을 뻗어 매향의 손을 잡았다. 갑자기 뻗어온 손에 손목을 잡히자 매향은 움찔 몸을 떨었다. 손을 빼려 했지만 욱씬거리기만 할 뿐 빠지지도 않아 가만히 있을 도 리밖에 없었다. 손목의 진맥을 하는 천인문의 표정이 사라지고 얼마의 시 간이 흘렀다. 잡은 손을 놓은 뒤 입을 열었다. "별 건 아니에요. 확실히 누나 말대로 피로가 쌓여서 그런 것 같네요. 그래도 확실히 푸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안 그러면 나중에 힘들어지거든요. 일단 약이나 한 첩 지어먹 는 게 좋겠어요." "호호! 고마워."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여미릉과 옥조영이 돌아온 것은 늦은 오후 무렵이었다. 원 래 두 사람의 표정이 평소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었지만 오늘따라 조금 더 심각하게 보인 것은 웬 일인지. 그들은 돌아오자마자 별채로 사람들을 모았다. "일단 좋지 않은 소식부터 전해야겠구나." "뭔가요?" "운하 쪽 선박 통행이 제한되기 시작했다. 일단 신원이 확 실한 사람들만 탈 수 있고 나머지는 좀 어려운 모양이더라 ." "흐음! 역시 그렇군요. 이 번에 심하게 얻어맞았으니 보복 조치라도 내린 건가?" "보복이라기 보단 역도(逆徒)들이 검을 잘 썼다고 판단한 거겠지. 보통 신분을 따지지 않는 곳이 무림 아니더냐. 강 호인들을 막으면 아마 걸려들 게 분명하다 생각한 걸게다. " "하지만 다른 강호인들은요? 보셨겠지만 정파인들이 없었 다면 그 조공선은 완전히 박살나서 가라앉았을 걸요." "그건 문제가 되지 않지. 일단 자신들을 도와 주었던 정파 고수들 같은 경우엔 일반적으로 신분이 거의 확실한 사람 들이거든." "그럼 할 수 없죠. 일단 소주로 가는 길은 운하를 이용하 긴 어렵겠군요." 서혜령의 말에 옥조영이 동의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상관 있나요. 그냥 좀 빙 둘러서 간다고 생각하면 되죠. 시간도 많고 할 일도 없는데 천천히 가요." "그럼 내일은 마차를 구해야겠군요." "그래. 그건 내일 일이니 일단 오늘은 쉬자꾸나." 이야기를 끝낸 옥조영이 자리에서 일어서 별채로 걸음을 옮겼다. 여미릉 이하 다른 사람들도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 섰다. "폐하! 삼보태감 문후인사 드리옵니다." 어전의 한 내부. 강렬한 기운을 물씬 풍기는 사내 앞에 한 푸른 복장의 사내가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정화의 대 례를 받고 있는 그는 당금 황제인 영락제였다. 깊은 밤늦게 북경에 도착한 정화였지만 황제가 기다린다는 말에 급히 입궁하여 배알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미 소식이 그의 귀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머리를 들게." 차디찬 목소리가 들려오자 정화는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흐 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차분한 가운데 힘을 내포한 그 의 목소리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이다. 오늘 따라 저렇게 강한 어조로 내뱉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지라 정화 는 더욱 긴장하고 있었다. 아마도 생각보다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해 노기가 많이 치민 모양이었다. 정화는 조심스레 머리를 들었다. 곤룡포를 걸친 영락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 먼 길 다녀오느라 수고 많았소." "아니옵니다. 장병들의 고생이 더욱 심하였나이다." "그렇지. 그들도 수고했지. 그런데 말이오." 서서히 본론으로 들어갈 듯한 말이 흘러 나왔다. 정화는 침 한 모금을 꿀꺽 삼켰다. "동창(東廠)의 이야기를 듣자 하니 피해가 있었다고?" "그…그렇습니다." 정화는 기세에 억눌려 기어드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이야기 를 했다. 처음에 남해안에서 해적을 만났던 일이며 수로에 서 정파 무사들의 조우, 그리고 사파들의 공격과 반역의 무리들이 공격했던 일까지 하나도 남김 없이 고해 바쳤다. 그리고 마지막에 잡았던 포로들의 이야기까지도. 사실 이 런 이야기를 꺼내 놓은 것은 이미 황제도 알고 있으리란 예상 때문이었다. 그의 예상은 정확하였다. 이미 영락제도 자신의 소식통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이번에 정화에게 묻게 된 것은 단 지 확인의 차원일 뿐이었다. "생각보다 피해가 심각하였군 그래." "폐하의 성은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막대한 피해를 입힌 소 신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아니오. 그대의 노력은 누구보다 짐이 잘 알고 있소. 그 대가 없었다면 아마 피해가 더욱 커졌을 거요. 일단 불행 하게 된 병사들은 어쩔 수 없지만 가족들에게 확실히 보상 을 해 줄 터이니 그대도 그리 마음 아파하지 마시오." 정화와 영락제의 관계는 오랜 과거부터 시작된 것이다. 연 왕이란 신분을 가지고 있을 때 정화는 영락제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그 답례로 영락제는 무한한 신임을 보이기 시작 했다. 정병들을 단련할 때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나 논의 하는 대상에서 빠진 적이 없었다. 그만큼 그들의 신뢰 관 계는 대단했다. 환관의 역사 참여가 과거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 나 명나라가 들어선 이후 환관의 신분 상승이 시작된 것은 영락제 시대부터였다. 동창이 생긴 것이며 정치 전반에 강력한 힘을 과시하는 것도 모두 영락제의 신임 덕이었다. 그렇게 된 것은 영락제의 초기 연왕 시절에 믿을 만한 사 람들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능력 위주의 선임 방 식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영락제의 밑으로 들어오긴 했지 만 그래도 연왕 시절부터 수하였던 환관들에게 손과 시선 이 많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훗날 환관들의 행패가 시작되는 것이 이 무한한 권력의 노 른자를 내어준 영락제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는 하나 현재 로선 그리 별 무리가 없었다. "그래 그것은 됐고, 그 역적의 무리는 어떻게 됐는가?" "다른 조치는 취하지 않았사옵니다만 일단 수로 통행에 강 호인들을 어느 정도 통제하고 있사옵니다." "수로?" "예 그렇사옵니다. 이번 역도들의 무리는 확실히 무림인들 의 손을 탄 듯 싶사옵니다." "하지만 그들이 반드시 강호인이라 할 순 없지 않는가? 안 그래도 그들은 서로 편을 가르고 싸움을 하고 있다고 하 던데." "일단 정파 쪽은 아직 적도들이 끼어 들 여지가 보이지 않 는 듯 했사옵니다. 하지만 사파의 세력 내부에는 어떤 변 화가 있을지 모르옵니다." "흐으음! 무황성이라 했던가? 그 사파 무리는 어떤가?" "신이 판단하기론 그들에게선 특별히 문제가 될 것은 보이 지 않았사옵니다. 그들은 단순히 힘을 맹신하는 무리옵고, 현재 수장은 예전에 사파의 주인들과는 조금 달랐사옵니 다. 적도들이 무황성의 그늘 아래 숨었을 가능성도 없진 않겠지만 그렇게 되면 활동하는데 많은 제약이 있을 것입 니다. 역도들의 목적이 반역이라면 활동에 제약을 받는 그 런 단체 내부로 숨을 리가 없을 것이라 사려되옵니다." "확실히 그대의 말이 옳은 것 같군. 그래 이번 일을 어떻 게 처리했으면 좋겠는가?" "확실히 밝혀진 정황 같은 것은 없사옵니다만 일단은 몇 가지 얻었던 정보를 가지고 두 가지 정도로 나누어 처리할 까 합니다." "……?" "일단 공격을 한 무리들의 수가 수백에 이릅니다. 그만한 군사력을 가진 곳은 확실히 무림 쪽이 쉬울 것 같습니다. 아마 한 문파 정도로 살짝 위장을 한다면 쉽게 들통이 나 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만한 군사력을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도 엄청날 것입니다. 아마도 상인이나 그만한 재력을 가진 사람들 중에 조력자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무림인들도 찾아보고 상인 쪽도 알아본다?" "그렇사옵니다." "상인 쪽이야 관을 통해 세금을 걷으니 알아보기는 쉽겠군 . 하나 강호인 쪽은 그리 쉽게 될 문제가 아니군. 어떤 방 법이라도 있는가?" "예! 일단 끈을 얻어 둔 게 있사옵니다. 이번에 무황성 쪽 에서 진 빚이 하나 있는데 그쪽을 하나 사용할까 합니다. 그리고 정파의 무리들이 소신에게 언급했던 천존무급이란 비급을 이용하는 것이옵니다." "……?" 영락제의 싸늘한 눈빛이 정화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들이 혹 비급이 있으면 달라는 말을 언급하였나이다. 그들의 목적이 그 비급이었으니 일단 비급을 주겠다는 말 을……." 정화의 말은 끝을 맺지 못하고 영락제에게 잘려 버렸다. "잠깐! 짐이 듣기론 그런 비급 따윈 없는 것으로 자네가 이야기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그런 비급은 없사옵니다. 하지만 일단 운을 놓으 시고 그 연후에 그들에게 다른 사례를 하는 것이 나쁘지 않을 듯 싶사옵니다." 듣고 있던 영락제가 머리를 저었다. "불가하오. 대 명의 아비인 짐이 함부로 거짓을 말할 순 없는 것이오. 그리고 그것이 아무리 황실의 안위에 관련된 것이라도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만백성들에게 지탄의 대 상이 될 것이오. 그냥 동창에게 정보를 얻어 보라고 하는 게 좋을 듯 싶소." "폐하! 동창의 인물들이 무력이 높다 하나 관의 인물들이 옵니다. 무력을 쓰는 강호인들의 생리를 잘 알지 못하는 이상 정확한 파악이 어렵사옵니다. 최소한 정파의 인물들 에게 도움을 받지 않으면 파악이 불가능 할 수도 있사옵니 다." "그도 그렇군. 그럼 일단 짐이 무당에 첩지(牒紙)를 내릴 터이니 그들과 동조를 하는 것도 한 번 강구해 보시오."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그만 물러가 쉬도록 하시오." "만세 만세 만만세!" 다시 대례를 취한 정화가 조용히 뒷걸음질치며 대전을 물 러났다. 영락제의 입에서 긴 한숨이 토해졌다. 달은 둥실 떠오르고 밤은 자꾸 깊어져갔다. 북경에서 가장 힘을 발휘하는 곳인 동창(東廠), 그 중에서 가장 심처에 자리한 한 내실에 화려하게 장식된 서찰 한 통이 내려 온 것은 아침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런 연후 동 창은 평소와는 다른 분주함으로 부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영락제의 명을 받은 대신들의 저택부터 관군들의 감찰이 시작된 것이다. 사태를 모르던 몇몇 대소신료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가끔 걸리는 부정부패한 신료들의 몰락에 다시 입을 다물게 되 었다. 그 변화는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었다. 북경의 대로엔 관군들의 수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만 갔다. 일반 병사들뿐만 아니라 황실에서 고른 감찰사들이 각 대 신들의 저택을 들기 시작하자 백성들은 모두 무슨 일이 벌 어지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 락제의 엄명으로 백성들에게 피해가 돌아가지 않자 그들은 곧 이 변화를 무감각하게 받아들였다. 대신들의 감찰이 끝나게 되자 이번에는 북경 내부의 향리 를 포함한 유지들이 그들의 대상에 오르게 되었다. 실제 영락제의 목적은 그들이었다. 정화가 말한 많은 군자 금이 실제로 나올 만한 대상은 그들이었다. 대신들의 감찰 은 단순한 눈가림에 불과하였다. 반발이 예상되긴 했지만 이 정도로 하지 않는다면 각 지방의 유지들의 감찰은 아예 시행해보지도 못한 채 끝나 버릴 게 분명했다. 확실히 그 의 예상대로 얼마 되지 않는 부패한 관료들의 몰락을 바라 본 그들은 전전긍긍하며 이번 일을 맞이했다. 다만 이 일 로 아무런 피해가 없었던 백성들만이 영락제의 정치를 칭 송하며 만세를 불렀다. 상인들에 대한 감찰도 시행되었다. 명목은 세금의 누락 여 부를 확인하는 것이라 했다. 북경에 있는 거상들의 저택에 감찰관의 발길이 들어섰지만 찔릴 것이 없는 상인들은 그 저 그런가 보다 했다. 다만 여러 가지 비리를 가지고 있거 나 뇌물을 찔러 넣은 상인들은 낮처럼 새하얀 밤을 보아야 했다. 북경의 한 고루거각(高樓巨閣). 사람들이 백대인이라 부르 는 집에도 감찰관의 발길이 닿았다. 열 둘의 병사를 앞세 운 두 명의 감찰관이 들어오자 허름한 복장을 한 사내 하 나가 그들을 맞이했다. 처음에는 감찰관들이 그를 하인이 라 생각했던지 잠시 실례되는 행동을 했지만 이내 그가 이 저택의 주인인 백재홍임이 밝혀지게 되자 사죄를 했다. 명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이 지켜지는 성리학의 나라였다. 감찰관이 일개 상인 따위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백재홍은 북경에서도 알아주는 거 부였다. 거기다 연줄이 닿는 곳은 여러 높으신 분들이었다 . 실례를 한다 한들 별 말이야 있겠냐만은 그가 아무런 문제 가 없이 이번 일이 끝났을 때 그 뒷일도 생각해야했다. 아 쉬울 것 하나 없는 그들이었지만 일부러 미움을 사서 진급 에 차질이 생길 수 있게 될지도 모르는 일만은 막고 싶은 것이다. 가볍게 차 한잔을 마시고 난 후 정원을 산책하는 감찰관들 과 세상 돌아가는 얘기며 이런 저런 것들을 하다 보니 시 간은 이미 한 낮을 훌쩍 지나 저녁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쯤 병사들의 우두머리가 한 명에게 다가와 복명을 했다. "영감! 모두 챙겼사옵니다." "그래 수고했다." 장수가 말한 것은 백재홍의 거래 내역 장부들이었다. 다른 상인들과 달리 거부인 백재홍의 장부는 상당히 많았고 그 만큼 찾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 것이다. 두 명의 관리는 이제 일이 끝났다며 몸을 돌렸다. 백재홍 은 그런 둘을 잡아 품에서 작은 비단주머니를 내밀었다. "약소하지만 수고하셨는데 이걸…" "아니오. 이런 것은 받을 수 없소." 살짝 찔러주는 것이 뇌물임을 알아차린 관리 하나가 손을 저었다. 지금같이 황제가 눈을 부릅뜨고 살필 때 잘못 걸 리면 진급은커녕 자신의 모가지가 잘릴 판국이다. "얼마 되지 않습니다. 술값이라도…" "백대인의 뜻은 알겠지만 지금은 안 되오. 미안하지만 그 대의 마음만 가지고 가겠소이다." 웃는 낯으로 거절한 관리들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정원 을 가로질러갔다. 대문 앞에 서자 십 여 명의 병사들이 이 미 손에 가득 장부들을 들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소이다." "살펴 가시옵소서." "다음에 기회가 되면 술이나 한 잔 하십시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그대의 돈를 받고 싶다는 뜻이다. 그 런 뜻을 상인 세상에서 수십 년을 굴러먹은 백재홍이 모를 리가 없었다.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그 때는 제가 더욱 좋은 곳으로 모시겠나이다." "하하하! 그 때 기대 하겠소이다. 그럼…" 그들은 화통한 웃음을 남기고 병사들을 이끌어 사라져갔다 .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하인 하나가 급히 달려 왔다. 사색이 된 얼굴이 상당히 위급한 일인 모양이었다. 귀에 손을 가리고 조용히 말하는 그 무엇을 전해들은 백재 홍의 낯빛이 확 달라졌다. 그리고는 허둥지둥 옆으로 난 문을 빠져 나왔다. 그가 도착한 곳은 헛간이었다. 농기구 따위를 넣어두는 헛 간 문이 활짝 열린 모습이 그 안에 귀중한 무언가를 넣어 둔 모양이다. 이미 내부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안을 일견한 백재홍이 시퍼렇게 변한 얼굴을 구기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른 쪽은 일견하지도 않은 채 가장 내부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볏단과 새끼줄을 쌓아 둔 그곳은 완전히 헝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 구 멍 하나가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머리가 멍한지 두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곳간 안에 넣어 둔 비밀 장부까지 들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안 돼. 이러면… 이럴 순 없어.' 전혀 걱정은 하지 않았다. 감찰이라 해 보았자 단순히 뇌 물을 받는 수준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 오산이었다. 특별히 걸릴 만한 것은 일반 장부에는 없었다. 아니 있다 치더라도 세금을 더욱 많이 내면 충분할 줄 알았다. 하지 만 여기 있는 것이 뺏기게 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노예 매매며 자신이 바쳤던 뇌물의 장부까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보다 더욱 중 요한 것이 그 안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 은 바로 자신을 파멸로 이끌 것들뿐이었다. 자신의 엄청난 기반들이 와르르 무너지게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백재홍은 급히 곳간을 나섰다. 그리고 안채로 달려갔다. "어서오……!!?" 한 시녀가 인사를 한다 했지만 백재홍은 평소처럼 다정하 게 전갈을 넣어 달라느니 그런 말을 건낼 시간이 없었다. 장부의 모든 내역이 밝혀지는 것은 오늘 내일의 문제인 것 이다. 아마 늦어도 삼일 내엔 끝날 게 분명하다. 그 전에 조금이라도 멀리 도망치든지 해야 하는 것이다. 백재홍은 급히 자신의 부인이 있는 방문을 열었다. 그 곳 에는 한 여인이 고운 자태로 수를 놓고 있었다. "상공! 갑자기 어인 일로." "부인! 당장 옷가지며 패물들을 챙기시오." 갑자기 들어와 밑도 끝도 없이 짐을 싸라니. 이게 무슨 날 벼락 같은 소리인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바라봤지만 그는 여전히 서두르란 말 뿐이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는지요." "자…장부가 들통났소." "……?" 그녀의 낯도 하얗게 변했다. 장부가 들통났다니. 그럼…? "도망쳐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머리를 살살 저었다. "괜찮아요. 엄청난 피해를 입긴 하겠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잖아요? 그래도 따로 모아 둔 것이 있으니 재기하는데 는…" "그게 아니란 말이오." 처연한 표정으로 말을 하는 자신의 아내에게 백재홍이 소 리를 버럭 질렀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다시 그녀의 안색이 변했다. "그 안에는… 그 안에는… 당신의 복수에 관한 문제까지 걸려 있다는 말이오." "……?!" "당장 옷가지를 챙기시오. 일단 발바닥의 불부터 꺼야 할 것 같소. 서두르시오. 금앵아!" 서둘러 아내에게 말을 끝내고는 밖에서 대기하던 하녀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하고 기다리던 금앵은 급히 대답하며 뛰어들었다. "당장 마님의 옷을 챙겨라. 조금 후에 나가야 하니 서둘러 라." 그녀의 답을 듣지도 않고 그는 부리나케 달려나갔다.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고 한 시진도 되지 않아 백재홍의 저 택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화려한 사두 마차 하나가 달 려 나왔다. 그리고 얼마 후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삼두 마 차 하나가 그 뒤를 따라 나왔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거리의 한 사내가 눈빛을 발하더니 이채를 띠며 몸을 돌렸다. 이리 저리 돌아다니던 그의 발 이 도착한 곳은 관청이었다. 그가 막 관청에 도착했을 때 다시 저택의 문이 열렸다. 그 리고 나온 것은 식료품을 나르는 마차였다. 가득 볏단을 실은 마차는 천천히 굴러갔다. 그리고 그 마차를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백대인의 저택이 다시 문을 연 것은 그 날 오후 무렵이었 다. 평소 같으면 활짝 열려 있었을 문은 백재홍의 무단 외 출이 있던 그 때부터 꽉 닫혀 버렸고 아무런 출입이 없는 폐가처럼 인적이 끊겨 버렸다. 그런 그곳을 찾은 한 남자가 있었다. 푹 눌러쓴 삿갓에다 옆구리로 길게 뻗은 검 한 자루는 그의 신분이 강호인임을 한 눈에도 알아차릴 수 있게 했다. 등에는 작은 꼬마 여 자아이가 업혀 있었다. 삿갓을 살짝 들어 자신이 찾던 곳임을 확인한 그는 다시 삿갓을 고쳐 쓴 뒤 문으로 다가갔다. -쾅쾅! 불끈 쥔 주먹으로 굳게 닫힌 대문을 두드렸다. 그런 그의 귀로 등에 업힌 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여기야?" "그래! 여기가 확실한 것 같다." 그들은 진무릉 부녀였다. 천인문과 헤어진 후 중원을 샅샅 이 뒤지며 '민예진을 아시오?' 란 질문만을 던져대며 비무 행을 하는 부녀. 사람들이 죽립무언객이라 부르던 그들이 바로 진무릉 부녀였던 것이다. 일 년 가까이 쉬지 않고 그녀의 소식을 얻으러 다녔지만 아무런 단서 하나 잡지 못했던 그들에게 조그만 정보를 입 수된 것은 얼마 전 한 홍등가에서였다. 평소 딸을 데리고 다니는 터라 홍등가에 드는 것을 극도로 삼갔던 진무릉이었다. 그러나 그날 따라 이상하게 마음이 싱숭생숭 했던 그는 술이나 한 잔 걸치기 위해 객잔에 진 미랑을 재운 뒤 주루를 찾았다. 그런데 오랜만에 주루를 찾은 그 날이 바로 그 쪽에서 주 먹께나 쓴다는 녀석들의 수금일이었다. 평소 다른 일이 아 니라면 칼을 뽑는 일을 극도로 삼갔던 그답게 주루에서 행 패를 부리는 녀석들에게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않았었다. 저렇게 지저분한 짓거리를 하는 것도 먹고살기 위해서란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날 녀석들의 운수가 나빴던 것인지 아니면 천벌 이 내리려 한 것인지 녀석들은 주루의 수입이 적다며 더 가져오란 말을 했고, 그 바람에 주인이 직접 술값을 받기 위해 손님들을 찾아다니며 선불을 요구했던 것이다. 술이 알싸하게 오르기 시작했던 진무릉. 슬슬 기분이 나빠 졌지만 그래도 이해하는 심정으로 금덩이를 내밀었고, 그 것을 본 녀석들이 눈이 뒤집어지기라도 한 듯 그의 앞으로 다가와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더 이상 참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주먹 몇 대를 선사하면 상대의 실력을 알아차리겠지 하며 날린 주먹에 상대들은 꼬리를 말고 내빼듯 도망쳤다. 그러나 그 정도로 끝냈더라 면 됐을 것을 그 무식한 녀석들은 상대의 실력도 가늠하지 못했는지 수 십 여명을 이끌고 나타난 것이다. 그 사이에 주루의 주인에게 쓸 데 없는 짓거리를 했다며 푸념의 소리를 듣고 있던 그는 다시 찾아온 녀석들을 아예 박살 내 버렸다. 그리고 몇 놈을 끌고 그들의 본거지였던 한 홍등가를 찾아 완전히 묵사발 내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곳에 있던 여인들은 대다수가 인신매매나 노예 로 팔려온 여인들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한 남자가 주먹만 으로 휙휙 날아다니며 자신들이 두려워하던 것들을 박살내 기 시작하자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가 난 것이다. 모두 다 쓰러지고 홀로 우뚝 서게 된 진무릉이 칙사 대접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주루에서 한 잔 걸친 그는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을 무정히 팽개칠 남자는 아니었다. 비록 아내를 사랑하긴 했지만 남자로서 금욕을 할 수 있는 극단적인 감정을 지닌 자는 아니었기에 다시 한 잔 두 잔 걸치게 되었다. 여자들은 술이 들어가자 하나씩 자신의 인생을 탓하기 시 작했고 결국 인신매매단을 운영하는 사람들까지 다 싸잡아 서 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의 입에서 나 온 것이 민씨 여인이었다. 민씨 성을 가진 여인이란 말에 술이 확 깨 버린 그는 그것 을 이야기한 여인을 잡고 흔들 듯 다그치고서야 그 사람의 집이 북경쪽에 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길로 바로 북경으로 출발한 것이다. 다시 한 번 주먹을 들어 문을 두들기고서야 안쪽에서 목소 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누구시오?" "……" 아무런 대답 없이 그는 다시 한 번 주먹을 들어 문을 쳤다 . "나~참! 알았소. 나가요 나가." 사내는 성질 급한 손님을 속으로 탓하며 투덜거렸다. 굳게 닫힌 문을 한쪽으로 당기기 시작하자 바로 밖에서 상대가 문을 밀어젖힌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없이 불쑥 몸을 들 인다. "이… 이봐요. 당신 누구요?" 문을 연 청년은 이곳에서 일하는 한 하인이었다. 평소 이 런 곳에 드나드는 사람이 많았기에 엄청난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던 그였지만 지금 들어온 사람은 완전히 달랐다. 어 딘가 모르게 차가운 느낌에 옆구리에 걸린 긴 장검까지 보 니 분명 무림인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 슨 일이십니까?"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진무릉은 그런 그의 질문에 낮 은 음성을 토해냈다. "여기 민예진이라고 있나?" "민예진? 아니 당신이 누군데 함부로 주인 마님의 성함을 그리 부르는 것이오?" 그 순간 진무릉의 죽립 밑에서 번쩍 불이 뿜어졌다. 그것 은 충분히 하인도 알아볼 수 있었다. 물씬 풍기는 기세가 완연히 달라져 버린 것이다. "비켜!" 솥뚜껑처럼 거친 손을 들어 사내의 머리를 와락 밀어버리 고 안으로 들어가는 진무릉. 하인은 억센 손에 밀려 땅바 닥을 굴렀다. "아악!" 사내가 비명을 질렀지만 진무릉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안 으로 난입했다. 보통 안채는 건물의 뒤쪽에 있었다. 안채의 주인은 보통 저택의 주인이 가장 아끼는 사람이 사는 곳이다. 그것은 보통 사랑하는 아내나 총애 받는 첩이 살고 있을 것이다. 확신은 없었지만 상관은 없었다. 이미 여기가 확실한 것 같으니 박살이라도 내 버리면 알아서 나올 거라 생각했다. '흐음! 이상하군.' 분명 저택은 컸다. 몇 개의 문을 지났지만 아직 안채는 보 이지 않는다. 이렇게 큰 저택이라면 충분히 그 식솔도 많 을 것이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북경에서도 첫째, 둘째가는 부자라 했다. 그 소문에 맡게 으리으리한 고루거각이 즐비하다. 헌데 사람이 너무 없다. 문을 지나고 정원을 가로질러도 겨우 두 사람만 보일 뿐이다. 그나마 한 사람도 문 앞에서 본 그 사내가 다였다. 한참을 뒤지고서야 겨우 안채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응? 이상하다. 아빠! 왜 사람이 아무도 없어?" 등에 업힌 진미랑이 궁금한 듯 물어왔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자신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일단 안채가 확실한 듯 하자 진무릉은 안채에서 가장 화려 해 보이는 문 앞으로 걸어갔다. 계단을 밟고 올라가 아무 런 말도 없이 문을 버럭 열었다. 하지만 역시 사람의 모습 은 보이지 않았고 싸늘한 기운만이 남아 있었다. 이미 방이 비워진지 제법 된 모양이다. 사람이 살았다는 온기가 보이질 않는다. 그 때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쪽문에서 하인이 뛰어 들어왔다. "당신 뭐야? 어디서 행패를 부리는 건가?" 조금 전 자신에게 밀려 넘어졌던 사내다. "그녀… 그녀는 어디 갔지?" "그녀?" 하인의 눈초리가 하늘로 치켜 올랐다. 그러나 곧 눈동자가 휘둥그래졌다. 민첩한 몸놀림으로 다가온 진무릉이 한 손 으로 사내의 멱살을 잡아 쳐든 것이다. "컥! 이… 이것 좀 놓고…" "당장 말해! 그녀는 어디 갔느냐?" 진무릉의 몸에서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 공을 모르는 하인도 충분히 알아차릴 정도였다. 온 몸이 싸늘하게 식어버리고 다리가 덜덜 떨릴 정도로 강맹한 기 운이 육체를 휘감아 왔다. "그… 그것이…" "빨리 말해라. 안 그러면…" 진무릉은 으름장을 놓으며 하인을 쏘아 봤다. 숨이 막힌 듯 멱살을 잡은 손을 두 손으로 감싸고 목을 쳐돌리던 하 인이 쿨럭거리며 기침을 토했다. "저…전 모릅니다요. 정말로…" "모른다? 그럼 살 필요가 없군." 살 필요가 없다? 그건 죽인다는 뜻이 아닌가? 무림인들의 기행을 자주 들어왔던 하인은 얼마나 그들이 잔인한지 잘 알고 있었다. 술자리에서는 항상 그런 얘기 밖에 없었다. 누가 더 잘 날아다니고 누가 더욱 강한 장풍 을 쏘았다는 얘기들. 들을 때마다 허황된 얘기라고 웃어넘 기고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사람들의 잔인성을 끔직 하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그 정도가 아 니다. 이건 완전히 산중에서 호랑이를 만난 기분이다. 비록 주인에게 오랜 동안 봉사를 했다지만 그보다는 목숨 이 먼저였다. "잠…잠깐만요.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요." 당장이라도 검이 목에 틀어박힐까 싶어 몸이 부르르 떨리 지만 일단 살려면 말을 해야했다. 간신히 배에 힘을 넣어 목소리를 내자 진무릉의 손이 잠깐 떨리는 걸 느낄 수 있 었다. "정말인가? 그게 누구지?" "일단 이것부터…" 안색이 하얗게 변해가자 진무릉은 사내의 멱살을 놓아 버 렸다. 하인은 땅바닥을 구르며 나가떨어졌지만 몇 번 숨을 토하고서야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당장 안내해라." "이… 쪽으로." 덜덜 떨면서도 하인 녀석은 앞장을 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 작했다. 하인이 안내한 곳은 저택을 나와서 두 개의 대로 를 가로지른 후에 놓인 작은 집이었다. 주위에 으리으리한 저택들속에 홀로 떠 있는 외딴섬처럼 어울리지 않는 집. 무언가 조금 수상한 느낌을 받았지만 진무릉은 차분히 물 었다. "여기가 어디냐?" "저희 집사 어르신께서 사는 집이지요. 주인 어르신은 평 소 말을 잘 안 하시기로 유명하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 면 집사 어르신밖에 없을 겁니다요." "그래?" 집사라…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하인이야 당연히 모른 다지만 일단 그래도 행방을 알 수 있는 가장 큰 가능성을 가진 인물이 그 집의 대소사를 맡은 집사가 아닐까. "그… 그럼 소인은 이만." 머리를 미약하게 끄덕이는 진무릉을 보며 하인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 인간 같지 않은 사내에게서 한시라도 빨리 떨어지고 싶은 것이었다. "잠시 기다려!" 한 마디를 남겨놓고 진무릉은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 바 람에 하인은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안으로 들어갔으 니 당장이라도 내 빼고 싶은데 이상하게 다리가 말을 안 듣는 것이다. 사내는 자신의 머리의 명령을 거절한 다리가 원망스러웠다. 진무릉이 안으로 들었지만 역시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하 지만 따스한 느낌이 나는 것으로 보아 사람이 있는 것 같 긴 했다. -저벅저벅! 안으로 걸음을 옮기고 들어갔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무언가 귓가로 미약한 소리가 들려왔다. -텅!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였다. 그 순간 진무릉은 일이 잘못되 어간다는 생각에 급히 신형을 뽑아 지붕위로 올랐다. 소리 는 뒷 쪽 건물에서 들려왔다. 당장에 지붕을 뛰어 넘은 뒤 뒤뜰에 내려선 그는 눈앞에 놓인 문을 와락 열고 들어갔 다. 그 순간 그의 눈앞에서 한 사내의 몸이 천장 위에서 덜렁 거리며 매달린 모습이 들어왔다. "까아악!" 등 뒤에 업힌 진미랑의 입에서 비명이 토해지는 순간 진무 릉은 그녀를 내려놓을 틈도 없이 뛰어 올랐다. -휘익! 한 줄기 검광이 허리에서 뿜어져 나온 순간 새끼줄이 썩은 동앗줄처럼 뚝 끊어졌다. 땅으로 내려오는 순간 검은 사 라지고 두 손으로 떨어지는 사내를 받쳐들었다. 중년 사내의 안색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목숨이 간 당간당했다. 진무릉은 한 눈에 사태를 파악 할 수 있었다. 그 주인이란 사내에게 무언가 나쁜 일이 벌어졌고, 그는 자신의 아내 와 함께 어디론가 도주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이 사내는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남아 있다 가 죽음을 택한 것이다. 무언가 들어맞지 않는 사실들이 몇 개 보이기 시작했다. 왜 미리 도주하거나 자살하지 않았을까, 왜 주인과 같이 도망가지 않았을까. 저택에 남아 있던 하인은 무엇 때문에 홀로 남은 것인가. 생각할수록 이상했지만 일단은 무시하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이 사내의 목숨이었다. 그가 죽고 나면 다시 단서가 끊어지는 것이다. 무조건 살려야 하는 것이다. "미랑아 잠시만 내려와 볼래?" "응 알았어." 아비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그녀가 급히 그의 등 에서 내려왔다. 진무릉은 자유로운 몸으로 중년 사내를 앉히고서 그의 명 문혈에 장심을 붙였다. 강맹한 내력으로 그의 내부에 타격 을 주어 깨울 생각인 것이다. 그의 기운이 내부를 한 바퀴 돌고서 상대의 몸 속으로 밀 려 들어갔다. 몇 주천이나 끝냈지만 사내는 깨어날 줄을 몰랐다. 진무릉의 눈이 찡그려졌다. 충분히 깨어날 듯 한데 일어나 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더욱 강한 힘으로 상대의 몸을 훑 어 내리기 시작했다. 상대가 깨어난 것은 이각이 지난 후였다. 무슨 약이라도 먹은 것인지 사내의 눈빛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정신도 혼미한지 진무릉을 제대로 알아보질 못했다. "이 봐! 집사. 민예진과 백재홍은 어디갔지?" 더 이상 시간을 주기 싫은지 진무릉이 나지막한 음성을 토 해냈다. 사내는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입을 열었 다. "모… 몰라…" "당장 말해. 어디 갔는가?" 진무릉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왜 죽으려 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에겐 감추어야 할 비밀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밀이란 게 분명히 주인이 사라진 곳일수도 있었다. "나… 난 모…올라." 진무릉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목소리도 흐릿흐릿 하고 정신도 풀어지고 있었다. 약기운이 감도는지 자꾸 목 도 옆으로 꺾이고 있었다. 이제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진무릉은 최후의 방법을 쓰기로 했다. 바로 자신의 절기인 천마심안(天魔心眼)이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천마심안이란 일종의 섭심술이었다. 상대의 심력을 제압하고 초기의 정기를 흐트리는 묘용을 가진 무공. 거기다 천마흡마공(天魔吸魔功)을 발전하면 강 대한 내력까지 쌓을 수 있는 방법이라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아니 그 말이 틀린 것이 아 니었다. 다만 알려지지 않은 묘용 중에는 상대의 생각을 알려주는 것, 죽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법 등등 정파의 인물들이 보면 사술(邪術)이라 부를 여러 방법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진무릉이 쓰려는 방식도 그것들 중의 하나였 다. "미랑아! 고개를 돌려라." "으…응 알았어." 아비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진미랑이 몸을 휙 돌렸 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진무릉이 빙긋 웃더니 다시 표정을 바꾼다. 그리고는 잠시 눈을 감고 운기에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몸에서 붉은 광채가 흐릿하게 뿜어졌다 . 그 순간 눈을 뜬 진무릉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 "날. 보.아.라." 사내의 몸이 풍이라도 걸린 듯 부르르 떨리더니 고개가 천 천히 돌아왔다. 붉게 타오르는 두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사내에게 다시 진무릉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누.군.가?" "다…당신은…" 정신이 혼미했던 그는 순식간에 그의 정신을 제압당했다. 몽롱한 눈빛을 발하던 사내가 조금 전보다 생기있는 목소 리로 대답했다. "당신은… 당신은…" 사내의 말을 진무릉이 이었다. "나.는. 당.신.의. 주.인.이.다." "주인… 주인…" "그.렇.다." "당신은… 나의 주…인…" "주.인.이. 너.에.게. 묻.는.다. 민.예.진.과 백.재.홍.이 . 어.디.로. 갔.는.가?" "그…들은… 소주… 담대인…" 소주(蘇州)의 담대인? 진무릉의 입술이 지긋이 깨물어졌다.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진무릉. 딸을 와락 업은 채 다시 문을 향해 달려나갔다. 사내는 그가 떴음에도 계속 '소주… 담대인…'을 중얼거렸 다. 이미 목숨이 끊어졌어야 함에도 그는 중얼거리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 정오 백대인의 저택을 찾은 관군들이 집사의 집까지 찾은 것은 그 날 밤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죽었음에도 말을 하는 무시무시한 시체 를 관군이 구했다는 소문이 북경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오?" "대인! 실패했습니다. 크흐흐흑!" 북경에서 작은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소주의 담대인 저택 엔 또 다른 손님이 찾아 왔다. 바로 간신히 무황성의 손을 피한 방효겸 일행이었다. 밤을 도와 산길을 타며 남의 시 선을 피한 그가 소주에 도착한 것은 오일이 지날 무렵이었 다. 거리도 거리지만 산길을 타다보니 행색은 완전히 말이 아니었다. 새벽 녘 겨우 소주에 도착했지만 성문이 열리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 새벽일을 나서는 농사꾼들의 출입 시간이 되 어서야 겨우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그들은 바로 담대인 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실…패라니… 그럴… 수가…" 담대인의 넉넉한 얼굴이 하얗게 물들었다. 정치에도 관심 이 없었던 그가 믿고 살았던 것은 건문제의 복위 단 한가 지였다. 그런데 그것이 실패로 돌아갔다니… 담대인이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 다. 어찌 하면 좋단 말이냐. 이 일을 어찌하면… 한탄을 하는 그의 귓가에 노복 노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인! 담공자 드십니다요." 노이의 말에 정신을 다시 차린 담대인, 급히 소리쳤다. "그래 어서 들어오라 해라." "예!" 노이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방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창백 한 얼굴에 유약해 보이는 공자 하나가 안으로 들어오고 다 시 문이 닫혔다. 담성운의 아들이자 건문제인 담공우였다. "아버지." 담공우의 부름에 담대인의 얼굴이 더욱 찡그려졌다. "폐하!" 밖으로는 들리지 않을 듯한 작은 소리로 폐하를 외치는 담 대인. 그러나 보고 있던 담공우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 다. "하늘의 뜻이오. 하늘은 날 원하지 않는다는 뜻일 뿐이오. 그리 실망할 것은 없소." "어찌… 하늘은 어찌… 크윽!"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던 담대인의 신형이 털썩 주저앉는다 . "괜찮소. 나에겐 아직 두 분이 계시지 않소? 성공해도 주( 朱)씨 집안. 실패해도 주씨 집안. 명의 주인은 아직 주씨 성이니 그리 슬퍼할 건 없소. 허허허!" 부드럽게 미소를 흘리는 담공우. 그러나 보고 있던 방효겸 의 가슴은 더욱 찢어졌다. "폐하! 못난 소신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나이다. 크윽!" 고개를 숙이는 방효겸을 둘러보는 담공우. "됐소. 그대가 아무리 그렇게 말을 한다 한들 내 어찌 하 겠소? 당신을 참하리까? 아니면 귀향을 보내리까? 더 이상 말해 본들 나에게 남은 것은 두 분 뿐이오. 더 이상 자책 하여 몸을 상하지 마시오. 그건 내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 는 거일 뿐이오." 꾸중처럼 들렸지만 결국 그 말은 방효겸 자신의 몸을 아끼 란 말이었다. 방효겸은 더욱 슬프게 눈물을 흘렸다. 북경의 감찰이 거의 모든 상인들까지 조사를 시작했을 무 렵 타 성(省)의 성도(省都)들의 감찰이 시작되었다. 처음 에는 내부 자체 감찰을 실시했지만 삼 주 후 북경에서 내 려온 감찰들이 다시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 주 후 향 리를 포함한 유지들의 감찰이 시작된다 하였다. 담대인의 저택에도 서서히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이미 남 경과 항주 쪽은 시작을 했다는 소문이 나돌아 소주에도 그 바람이 닥칠 것은 분명한 일이다. 담대인이야 워낙 인망 높은 사람이라 소주 내부의 관료들은 별 걱정 없을 거라 말했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지 못했다. 오늘도 관청에 나가 사태가 어찌 돌아가는가를 지켜보던 담대인. 하루의 해가 가고 저녁이 찾아오자 다시 발걸음을 집으로 돌리고 있었다. 마차를 타고 천천히 나갈 무렵 교차로에서 둘둘 거리며 굴 러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차 소리였다. 그것도 한 대 이상 의. 무슨 일인가 싶어 마차 옆으로 난 창을 통해 고개를 내밀 자 지붕이 없는 마차 하나와 화려하고 아름다운 마차가 나 란히 굴러가는 모습이 보였다. '누구지?' 아름다운 마차의 옆에 난 창으로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 아직 밤이 깊지 않았지만 소주는 항주와 마찬가지로 밤 이 아름다운 곳. 비록 이곳이 유지들이 사는 곳이라고는 하나 거의 향락가의 거리만큼 환한 곳이었음에 담대인은 사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사내는 아주 젊어 보였다. 거기다 제법 빼어난 용모다. 준 미한 콧날에 검미도 뚜렷하다. 하지만 아직 치기와 장난기 도 눈가에 보인다. 한 번도 소주에 와 보지 못했는지 연신 사내는 고개를 이 쪽 저쪽 돌려 대며 바삐 시선을 옮기고 있었다. 누구일까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던 그의 귀로 여인의 목소 리가 들렸다. "상공! 그렇게 고개를 내밀지 마세요. 남들이 봐요." 목소리가 상당히 귀에 익었다. 언젠가 한 번 들어봤던 목 소리 같은데. 담대인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볼 테면 보라지. 난 남의 시선 따윈 신경 안 써. 그런 신 경 쓸 바에야 조금이라도 더 구경해야지." 소주에 처음 온 천인문으로선 당연히 신기한 것들밖에 없 었다. 거의 시골이나 관도, 숲 등만 돌아다니다 보니 이런 거대한 도시엔 처음 드는 시골뜨기처럼 두리번거리는 것 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서혜령도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한숨만 내쉬며 입을 다물었 다. 그러나 궁소미의 입장은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너 머리 집어넣어라. 안 그러면 내려 버릴 테니까." "누난 또 왜 그래요? 시끄럽게 하지도 않고 조용히 구경만 한다는데." "미안하지만 난 그런 것 용납할 수 없어. 알았지?" 솔직히 그녀는 천인문이 고개를 내밀고 주위를 두리번거리 는 자체가 싫었다. '나는 여기 처음 오는 사람이요' 하고 자랑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 못마땅한 것이다. 평소 품행이 바르고 고귀한 모습만을 보이던 그녀였다. 항 상 옷가지도, 행동거지도 바르고 정갈하게 하던 그녀는 요 몇 주간의 여행동안 정말 피곤한 입장이었다. 하루도 쉬 지 않고 여기 저기 기웃거리며 촌티를 내는 것에 완전히 질려 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뭐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넘어 가려 했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이제 볼 것도 다 보았을 텐데 아직도 저런 다는 것이 신기 한 노릇이지만 여기서는 아니었다. 소주는 거대한 도시고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을 게다. 분명 자신이 탄 마차 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마차에 남자가, 그것도 저런 무식한 티를 팍팍 풍겨대는 남자를 태우고 있다는 소문이 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 언니 말 들어. 조금 있으면 도착할 텐데 그렇게 바 보 티 계속 낼 거니?" 단목 수령이 맞장구를 쳤다. "칫 알았어. 알았다니까." 투덜거리며 천인문이 고개를 집어넣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천인문만이 아니었다. 일행의 마차을 뒤따르고 있던 담대인의 귀에도 들렸던 것이다. 단목 수령의 목소리는 조금 독특한 면이 있었다. 앙칼지면 서도 사람의 귀를 거슬리게 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한 번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아마 잊어버리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담대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단목 수령의 목소리를 들은 담대인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 고서야 처음에 들었던 여인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언젠가 자신의 집에서 오래 머물렀던 그들, 그 중에 자신 의 아들이자 황제인 담공우의 내자로 찍어 두었던 그 여인 인 것이다. 담대인은 다시 자신의 옆자리에 난 창을 통해 고개를 내 밀었다. 그리고 자신의 행색에 어울리지 않는 큰 소리로 소리쳤다. "잠깐! 그 앞에 가시는 분들은 잠시 멈추시겠소?"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마부는 고삐를 당겼다. 그리 고 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마차보다는 덜 화려 한 마차 한 대가 저쪽 뒤에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삐죽 고개를 내민 사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 다. 하지만 분명 저런 마차를 타고 이런 거리를 가는 사람 이라면 상당한 거부일 것이고 자신의 주인과도 안면이 있 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일단 주인에게 물어보기 로 했다. "주인님! 뒤에서…" "그래 나도 들었다. 일단 잠시 세워 보거라." 궁소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차를 세울 것을 종용했다. 자신은 상인의 신분이다. 천대받는 상인, 그것도 여인의 몸으로 상행위를 하는 것은 상당히 남사스럽고 꼴불견이 아닐 수 없었다. 그만큼 돈을 버는 것이라든지 모든 일에 서 남들보다 힘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점을 없애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력이 더욱 중요했다. 남의 용모를 기억하는 것이라든지, 상대의 습관, 행동, 좋 아하는 것 등등 하나라도 남보다 많이 알아야 했다. 그 중 에는 목소리도 들어간다. 하지만 지금 뒤에서 들려온 목소 리는 아직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는 것이다. 자신의 기억력이 떨어졌나 하고 머리를 탓하는 그녀의 귀 로 서혜령의 말이 들려왔다. "그 분이군요." "그분?" "지금 찾아가는 그 저택의 주인이죠." "그럼 담대인?" 단목 수령의 눈이 커졌다. 우연도 참 대단한 우연이다. 어 찌 이런 길에서 저렇게 탁 만날 수 있었을까 싶었다. 담대인의 마차가 허름한 마차를 지나 궁소미의 마차 옆에 세웠다. 조그맣게 열린 마차의 창이 열리며 둥글둥글한 담 대인의 얼굴이 내밀어졌다. "혹시 그 안에 타신 분들 중에 서씨 처자가 있는가?" '서씨 처자?' 들어보기 힘든 표현이 들려오자 천인문이 빙긋 웃음을 지 었다. 그러나 듣고 있던 서혜령과 단목 수령의 표정은 그 리 좋지만은 않았다. 나쁜 인연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좋 은 인연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질문을 받은 이 상 대답을 해야 하는 법. "혹시 담대인이신지요?" "허허허! 나의 예상이 맞았구려. 그렇소. 노부가 담모요. 그런데 무슨 일로 이 소주에 다시 들렀는가?" "호호호! 담어르신을 뵈러 왔죠. 저번에 무례하게 그냥 인 사도 안 드리고 그냥 떠났었잖아요. 그래서 사죄도 할 겸 해서 들린 거에요." 단목 수령이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호! 단목 소저도 계셨구려."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르는 척 인사를 건내자 단목 수령도 다시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럴 게 아니라 일단 나의 저택으로 갑시다." 이번에는 담대인이 앞장을 섰다. 그의 마차가 먼저 굴러가 자 그 뒤를 궁소미의 마차가 뒤쫓았다. 홀로 남겨진 허름 한 마차도 급히 뒤를 따라왔다. 예상치 못했던 손님들이 방문한 담대인의 저택은 다시 술 렁거리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며칠동안 주인과 작은 공자 의 무거운 분위기로 인해 가라앉았던 장원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하인 하녀들은 조용한 가운데서도 분주히 움직였다. 다시금 활기가 돌기 시작하자 그들의 입에 작은 미소가 돌았다. 하지만 찾아온 손님들은 어딘지 모르게 깔려 있는 암울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단지 눈치 없는 천인문을 제외 하고는 모두 그런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역시! 무언가 있어.' 조용히 눈을 빛내며 살피던 옥조영이 심증을 굳힌 듯 고개 를 돌려 여미릉을 보았다. 그녀도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인 모양이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그럴까요?" 담대인의 안내를 받아 대청으로 든 그들은 또다시 화려한 모습을 보게 되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떠날 때만 해도 다시는 여기를 보지 않게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처음 오는 천인문은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이 꿈인가 싶어 눈을 비비기까지 한다. "대단한데.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 정말 멋진 곳이야. 안 그래?" 그런 모습에 단목 수령이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옛 생각 이 떠오른 것이다. 처음 왔을 때 같이 왔던 우문교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 나갔다. '우와 죽여주는구만. 역시 돈 많은 놈들은 다르다니깐. 이 렇게 꾸미려면 돈을 얼마나 처발랐을까? 있는 놈들이 더 한다고 이렇게 꾸미려면 얼마나 백성들을 족쳐댔을까?' 같은 곳을 찾았건만 사람이 다르면 보는 관점도 달라지는 것인가? 누구는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는데 그 누구는 단순 히 아름다움만 볼뿐이다. 살아온 환경, 생각에 따라 정말 평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대청을 낱낱이 살피는 천인문을 제외하고 모두 붉은 의자 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조금 후 옷을 갈아입은 담대인이 대청으로 들어왔다. 그 뒤를 따라 하녀 셋이 간단한 다과 와 차를 내 왔다. 향긋한 차를 한 모금 마신 담성운이 차를 놓으며 입을 열 었다. "그래… 어떻게 다시 오실 생각을 하셨는지." 그렇게 도망치듯 사라지고 온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이었 다. 이번에는 답변이 옥조영에게서 나왔다. "그 전에 인사를 못 드리고 간 점은 사죄드리겠습니다. 저 희가 갑자기 일이 생겨 급히 떠나가게 되었는데 일이 무사 히 끝나게 되어서 다시 돌아온 것이지요. 게다가…" 잠시 눈을 돌려 백운호를 바라 본 후 계속 말을 이었다. "그 때 갈 때 제자 녀석을 놔두고 간 사람도 있고 해서 어 찌 되었나 싶어 겸사겸사 찾아뵈었습니다." 백운호는 인상을 팍 구기며 고개를 떨구었다. '칫! 핑계거리가 없나? 왜 하필 날 가지고…' 솔직히 그 말이 사실이긴 했다. 너무 정신이 없는 터라 유 운기를 그냥 두고 가지 않았던가? "허허허! 그러셨군요. 그런데 이걸 어쩌지요? 그 분들은 여러분들이 가신 그 날 정오쯤 여기를 나가셨는데…" 옥조영이 머리를 끄덕였다. 충분히 예상한 일이다. 안면도 없는 곳에 그냥 남아있기가 껄끄러웠을 것이 분명했다. 자신 같아도 그냥 나왔을 것이다. "어디로 간다는 말은 하지 않던가요?" "아니요. 그냥 인사만 하고 나갔습니다. 미리 약속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헤어질 때 서로 약속이 되어 있는 줄로만 알았던 담대인이 었다. 그렇지만 실제 헤어질 땐 아무런 언질도 주지 못한 상태였다. 그것을 알리 없는 담대인이었기에 별 생각 없이 물었던 것 이다. 백운호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조금 아 쉽긴 했다. 제법 실력도 있고, 가르칠 맛도 날 것 같은 녀 석이었는데… 하지만 넓디넓은 강호라 해도 어디선가는 만날 수 있지 않 겠는가? 아직 살날이 많고 보니 그리 걱정은 되지 않았다. 제법 강호에서 이름을 날린 녀석이니 어디 가서 맞아 죽 지는 않을 것이다. 옥조영도 머리를 끄덕였다. 원래 찾은 목적은 그것이 아니 었다. 바로 방효겸에 대한 정보 때문이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가 뭐해서 운을 때듯 유운기에 대 해 물었던 옥조영은 조심스레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저번에 보았던 그 손님 분은 안 보이시는군요." 그 질문에 담대인의 어깨가 움찔 했다. 감춘다고 했지만 그들의 눈을 벗어날 순 없었다. 여미릉 등의 이채를 띤 눈 으로 담대인을 살폈다. "아! 친우는 집으로 갔소만…" 송글송글 이마에 땀이 맺혔다. '여기 있군. 확실해.' "그렇습니까?" "그렇소. 그런데 그는 왜 찾는 거요?" 담대인은 그들이 갑자기 방효겸을 찾자 무언가 이상한 느 낌을 받았다. 혹시라도 관의 끄나플이 아닐까 싶은 생각에 운을 넣었다. 하지만 옥조영 등은 백년 먹은 여우였다. 그런 느낌을 함부로 풍길 리가 없었다. "아니 그냥 안 보이시기에 여쭌 것일 뿐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러시구려. 허허! 일단 저녁 시간이 되었는데 식사라도 하시지요." 그 순간 옥조영의 머리는 재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일 단 남아서 밤에 확인을 할 것인가? 아니면 객잔 등에 묵으 면서 염탐을 할 것인가? 바로 그때 대청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담대인의 아들 담공우였다. "아버님! 돌아오셨습니까? 그런데 이 분들은…?" 대청에서 인사를 넣던 담공우의 눈이 서혜령을 본 순간 반 짝였다. 서혜령은 그런 그의 눈빛을 본 순간 고개를 돌려 버렸다. "다시 오셨군요." 반가운 듯 환한 미소를 띠며 인사를 하자 단목 수령도 빙 긋 웃으며 인사를 한다. "샌님 공자님도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 그런데 확실히 좀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샌님이란 말에 잠시간 미간을 찡그렸던 담공우는 얼굴을 펴며 화답을 했다. "왈가닥 아가씨께서도 그간 잘 있으셨는지요?" 멋진 화답에 단목 수령의 미간이 내천자를 그렸다. "호.호.호! 그럼요. 잘 있었고 말고요." "서혜령 소저도 잘 계셨는지요? 그런데 몇 분은 못 보신 분 같은데." 서혜령 소저라니… 서혜령의 눈이 잠시 찡긋했다. 가슴 한 쪽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다. 황급히 시선을 감추고 슬며 시 천인문을 향해 바라보았다. 다행이 그는 다과와 차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모습은 어 른이지만 아직은 어린애인 것이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실제 그녀는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다. 흑풍을 주인이라 부르는 우문교를 볼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더욱 걱 정되는 것이 바로 이 담공자였다. 특별히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적은 없었지만 느낌이라는 것이 있다. 그는 분명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이 특별히 잘못 한 게 없어도 찔리는 때가 있다. 그리 고 바로 그 때가 지금이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그녀 였지만 천인문을 보기가 미안한 느낌이다. 그런데 다행이 그는 아무런 눈치도 못 챈 듯 하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착각이었다. 이미 천인문은 담공우 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찾았던 것이다. 그것을 본 순간 속 에서는 알 수 없는 기운이 부글부글 끓었다. 무언가 가슴 속에 답답하게 자리한 느낌이다. "소개를 시켜 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럼요. 이쪽은 조기혜 소저. 저 멀리 북쪽에서 유람차 오신 분이시죠."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숙였 다. 엄청난 미모의 여인이 웃자 대청은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이 든다. 잠시 그 모습에 취했던 담공우, 정신을 차리 고는 인사를 했다. "이쪽은 궁소미 언니. 유명하신 상인이죠." "아니 그럼 이 분이 바로…" 상인의 무리에서 요즘 들어 떠오르는 신성(新星)이 바로 그녀였다. 다른 이는 몰라도 담대인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호호호! 저의 보잘 것 없는 이름이 담대인의 귀를 더럽힌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입을 가리고 웃는 모습에 천인문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번에는 저런 모습을 보지 못했 는데 요즘 들어선 자주 보는 모습이었다. "정말 한 번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이 담모가 운이 좋군요." "아니 제가 운이 더 좋은걸요. 이렇게 소주에서 가장 유명 하신 분을 뵙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잘 부탁드릴께요. " 자리에서 일어서 손으로 옷고름을 만지작대며 날아갈 듯 절을 하는 궁소미, 그 모습에 담대인은 너털웃음을 터트렸 다. "허허허! 정말 빼어난 미모에 말재주로도 모자라 저렇게 바른 예절까지. 정말 대단하구려." "호호호호! 설마 그럴리가요." 둘이서 죽이 잘 맞는 사람들끼리 놀게 놔 둔 채 단목 수령 은 남은 하나를 소개 시켰다. "그리고 이쪽에 잘 생기고 늘씬한 남자는 천인문이라 하죠 ." 갑자기 엄청난 칭찬에 천인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목 수령의 소개가 계속되고 있었다. "저에겐 조카이자 서.혜.령. 소.저의 유일한 낭군이랍니다 ." 단목 수령의 눈이 사악하게 빛났다. 그 순간 담공우의 신 형이 눈에 띠게 흔들렸다. "나…낭군이요?" "호호호호! 그렇답니다. 이미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 요." 흔들리는 모습을 본 단목 수령이 날아갈 듯 갸녀린 웃음보 를 터트렸다. 왠지 사악한 마녀의 웃음 같은 느낌을 받은 천인문이었지만 역시 그런 담공우의 모습에 어딘지 우쭐해 지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사실 담공우는 서혜령이 처녀인 줄로만 알았다. 아무도 그 런 것에 관해 말을 하지 않았던 터라 당연히 처녀인 줄로 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처녀가 아니라니… 그렇다면 지금 까지 유부녀를 좋아하고 있었단 말이었던가. 난처해 진 것은 서혜령도 마찬가지였다. 담공우에게 상처 를 입힌 것 같아 미안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잘못한 것 은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 느낌을 받는 게 이상했지만 그녀 가 익혔던 특유의 옥녀심공은 그런 그녀를 무표정한 석녀 처럼 담담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는 그녀를 본 담공우는 애처러운 눈빛으로 서혜령을 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안타깝게 바라 보는 시선이 있었으니 바로 담대인이었다. 요즘 들어 무엇 하나 잘 되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처음으 로 찾아온 담공우의 사랑마저도 이렇게 끝날 줄이야. 담대인의 마음이 아픈 것만큼 담공우의 가슴에도 멍이 들 고 있었다. -109- 다음날 천인문이 일어난 때는 늦은 오전이었다. 언제 일어 났는지 서혜령은 보이질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서 옷을 걸 치고 밖으로 나왔지만 별채 내엔 아무도 없었다. 뒷문을 통해 객잔으로 나오자 탁자에 앉아서 잔을 들고 있 는 백운호가 보였다. "언제 일어나셨어요?" "제법 됐다." "식사는 다 하신 거에요?" "지금이 언젠데 아침도 안 먹었겠느냐? 모두 다 먹었고 너 만 먹으면 된다." "그런데 왜 안 깨우셨죠?" "어젯밤에 힘 많이 썼던 모양인데 왜 아침부터 깨우겠느냐 ?" 그 말에 천인문이 얼굴을 숙였다. 뜨거웠던 어젯밤이 생각 난 탓이다. 조용히 한다 했는데 생각보다 소란스러웠나 보 다. 겸연쩍은 얼굴을 한 채 얼굴을 숙인 천인문을 보던 백운호의 기질이 발동되었는지 계속 말을 붙였다. "상당하더구나. 별채가 떠나가는 줄 알았다. 어떻게 했기 에 그 애가 그렇게 되냐? 노부에게도 좀 가르쳐 다오." 벌겋게 달아올랐던 천인문이 투덜거리며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하는 거에요? 그렇게 시끄럽게는 안 했단 말이 에요." "허허! 안 시끄러웠다라… 우리 방에서도 잘 들리던데. 그 게 안 시끄러웠다니. 나중에 오면 물어 보려무나, 어젯밤 에 얼마나 소란스러웠는지. 뜨겁다 못해 활활 타더구나. 잠자던 노부도 벌떡 일어나게 할 정도였으니." 더 이상 놔두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 줄 모를 판국이다. 활 활 얼굴이 타던 천인문은 급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갔나요? 아무도 안 보이네요." "마누라하고 옥형은 잠시 알아볼 게 있다고 나갔고, 네 색 시하고 그 예쁘장하게 생긴 소저하고 수령이는 구경 간다 하면서 나갔다. 아마 시장에 갔겠지." "그럼 저만 식사를 안 했네요. 어이 여기!" 손을 들자 점소이가 급히 달려왔다. "소면 하나!" "아침은 든든하게 먹어 두는 게 좋을 텐데." "아뇨. 더부룩해서 별로 먹고 싶은 생각도 없는데요 뭘. 대충 하나 걸치면 나아지겠죠." 주문을 받은 점소이가 급히 내려갔다. 그리고 어젯밤의 속도에 걸맞게 순식간에 소면 한 그릇을 내어 왔다. 요리는 확실히 맛이 좋았다. 가늘게 뽑은 면발에 담백한 국물이 입에 딱 맞았다. 순식간에 한 그릇을 비운 후 한 그릇을 더 시켜 먹고서야 젓가락을 놓을 수 있었다. "좋으네요." 두 그릇을 먹고 난 후 불룩해진 배를 어루만지며 의자에 등을 기대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의 눈에 다섯 명의 여 자가 객잔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으응?' 분명 세 명은 아는 여인이다. 바로 자신의 아내와 이모, 그리고 누나라 불렀던 여인들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나머 지 두 명은? 그러고 보니 낯도 익다. 그런데 누구였더라. 서혜령이 객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천인문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다가왔다. "상공! 식사하셨어요?" "으…응 했어. 그런데…" 눈을 찡그리며 조기혜의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분명 떠오를 듯 떠오를 듯 하면서도 가물거리는 여인의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서혜령은 천인문이 누구를 보고 있는지 알아차리자 환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누군지 모르시겠어요?" "그, 게 말이지. 으…"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잘 떠오르지 않는 것이 짜증만 났다 . 조기혜와 나란히 서 있던 여인이 천인문을 보자 눈을 크 게 뜬 채 다가왔다. 여인의 옷은 정말 화려했다. 붉고 푸른 궁장으로 된 치마 에 푸른 옷고름과 알록달록한 소매단까지. 한 눈에 부유한 집에서 자란 여인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차분한 걸음으로 걸어온 여인이 천인문의 앞에 섰다. "문이 맞지? 동생 말만 듣고는 못 믿었는데 정말 많이 컸 네." "누구…" 자신은 모르는데 상대는 자신을 알아보는 듯 하자 목소리 가 기어 들어갔다. "나 못 알아보는 거니? 나 궁소미야. 모르겠어?" 궁소미? 그 사막에서 만났던… 천인문은 그제야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헤어진 지 얼 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녀를 잊고 있었다니… "아! 누나." 천인문이 자신을 알아보는 듯 하자 궁소미도 빙그레 미소 를 지었다. "잘 있었어?" "그럼요. 일단 앉아서 얘기하죠." 궁소미는 서혜령이 내어준 자리에 앉자 조기혜와 단목 수 령도 같이 앉았다. "이 분은?" 천인문의 옆에 앉아 있던 백운호를 보며 묻자 서혜령이 소 개를 했다. "제 사부님의 부군 되시는 분이세요." "아 동생의 사장(師丈) 어르신이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궁소미라 합니다." "아 만나서 반갑소. 백운호라 하오."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인사를 주고 받았다. 평소의 모습과 는 다른 백운호의 모습에 단목 수령이 고개를 돌리며 혀를 내밀었지만 인사를 주고 받느라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한 백운호였다. "그럼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끼리 할 얘기도 많을 테니 이 야기들 나누시오. 노부는 이만 빠져야겠소." "같이 이야기 하셔도 되는데." 자신의 합류로 자리를 나가는 것 같은 느낌에 여미릉이 미 안한 기색을 지었다. "괜찮소. 안 그래도 안으로 들어가 쉬려 했으니. 그럼…" 간단히 인사를 건낸 백운호가 뒷문을 통해 별채로 나가 버 렸다. 사라지는 백운호를 보고 있던 천인문이 그녀에게 고 개를 돌렸다. "어떻게 지냈어요? 지금 보니 옷도 훤한게 장사가 잘 된 모양이죠?" "뭐 그럭저럭 괜찮았어." "근데 어떻게 만났죠?" "아 그게 말이지…" 궁소미는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장사를 하는 터라 많은 곳을 돌아다니는 입장이다 보니 이 곳 제령까지 흘러 들어오게 된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었 다. 하지만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정말 그녀도 생각지 못 했던 일이었다. 시장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구경을 하던 서혜령의 눈에 띄인 것이다. 정확하게는 궁소미의 하녀인 매향을 본 것이 었지만. "그럼 여기에 온 게 장사하러 온 건가요?" "그렇지. 여기서 비단이나 거래 좀 할까 싶어서 왔는데 우 연히 보게 된 거지." "우와. 돈 많이 벌었겠네요. 누나 한 턱 내요." "한 턱이라니. 많이 벌지도 못했어. 실제로 얼마 전에는 손해도 좀 봤거든." "손해요?" 천인문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예전에 볼 때 그녀는 전혀 손해라곤 입지 않을 것 같은 철두철미한 모습이 아니었던 가. "뭐 정확히는 손해라고 할 순 없지. 내가 투자한 건 없었 으니까. 하지만 기대했던 예상만큼 벌지 못하면 그것도 손 해 아냐?" "그래도 벌긴 벌었나 보네요." "아니 그 거래로 손에 얻은 건 하나도 없어. 그래도 아깝 진 않아. 나도 운이 좋게 얻었던 정보였고 그걸로 이득이 나 볼까 하고 시작한 거였거든." "후후! 아 그런데 매향 누난 왜 또 저렇게 서 있데? 누나 이리와 앉아요." 슬며시 웃음을 흘리던 천인문이 궁소미의 뒤에 서 있던 매 향이를 보고는 백운호가 남긴 자리로 손짓했다. "괜찮아요." "누난 괜찮을지 몰라도 난 괜찮지 않아요. 목이 아프거든 요." 천인문의 말에 궁소미도 고개를 끄덕여 그녀를 자리에 앉 혔다. 매향은 궁소미의 하녀였다. 평소에 다른 사람들이 없으면 같이 앉긴 하지만 궁소미가 손님이나 고객을 대면할 땐 항 상 저렇게 서 있었다. "잘 됐다. 네가 의원이라니 이번 기회에 저 아이 좀 봐줘. 요즘 들어 많이 피곤해 하는 것 같던데 내가 워낙 바쁘다 보니 신경을 못 썼어." "그러죠." 천인문이 손을 뻗어 매향의 손을 잡았다. 갑자기 뻗어온 손에 손목을 잡히자 매향은 움찔 몸을 떨었다. 손을 빼려 했지만 욱씬거리기만 할 뿐 빠지지도 않아 가만히 있을 도 리밖에 없었다. 손목의 진맥을 하는 천인문의 표정이 사라지고 얼마의 시 간이 흘렀다. 잡은 손을 놓은 뒤 입을 열었다. "별 건 아니에요. 확실히 누나 말대로 피로가 쌓여서 그런 것 같네요. 그래도 확실히 푸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안 그러면 나중에 힘들어지거든요. 일단 약이나 한 첩 지어먹 는 게 좋겠어요." "호호! 고마워."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여미릉과 옥조영이 돌아온 것은 늦은 오후 무렵이었다. 원 래 두 사람의 표정이 평소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었지만 오늘따라 조금 더 심각하게 보인 것은 웬 일인지. 그들은 돌아오자마자 별채로 사람들을 모았다. "일단 좋지 않은 소식부터 전해야겠구나." "뭔가요?" "운하 쪽 선박 통행이 제한되기 시작했다. 일단 신원이 확 실한 사람들만 탈 수 있고 나머지는 좀 어려운 모양이더라 ." "흐음! 역시 그렇군요. 이 번에 심하게 얻어맞았으니 보복 조치라도 내린 건가?" "보복이라기 보단 역도(逆徒)들이 검을 잘 썼다고 판단한 거겠지. 보통 신분을 따지지 않는 곳이 무림 아니더냐. 강 호인들을 막으면 아마 걸려들 게 분명하다 생각한 걸게다. " "하지만 다른 강호인들은요? 보셨겠지만 정파인들이 없었 다면 그 조공선은 완전히 박살나서 가라앉았을 걸요." "그건 문제가 되지 않지. 일단 자신들을 도와 주었던 정파 고수들 같은 경우엔 일반적으로 신분이 거의 확실한 사람 들이거든." "그럼 할 수 없죠. 일단 소주로 가는 길은 운하를 이용하 긴 어렵겠군요." 서혜령의 말에 옥조영이 동의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상관 있나요. 그냥 좀 빙 둘러서 간다고 생각하면 되죠. 시간도 많고 할 일도 없는데 천천히 가요." "그럼 내일은 마차를 구해야겠군요." "그래. 그건 내일 일이니 일단 오늘은 쉬자꾸나." 이야기를 끝낸 옥조영이 자리에서 일어서 별채로 걸음을 옮겼다. 여미릉 이하 다른 사람들도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 섰다. "폐하! 삼보태감 문후인사 드리옵니다." 어전의 한 내부. 강렬한 기운을 물씬 풍기는 사내 앞에 한 푸른 복장의 사내가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정화의 대 례를 받고 있는 그는 당금 황제인 영락제였다. 깊은 밤늦게 북경에 도착한 정화였지만 황제가 기다린다는 말에 급히 입궁하여 배알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미 소식이 그의 귀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머리를 들게." 차디찬 목소리가 들려오자 정화는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흐 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차분한 가운데 힘을 내포한 그 의 목소리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이다. 오늘 따라 저렇게 강한 어조로 내뱉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지라 정화 는 더욱 긴장하고 있었다. 아마도 생각보다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해 노기가 많이 치민 모양이었다. 정화는 조심스레 머리를 들었다. 곤룡포를 걸친 영락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 먼 길 다녀오느라 수고 많았소." "아니옵니다. 장병들의 고생이 더욱 심하였나이다." "그렇지. 그들도 수고했지. 그런데 말이오." 서서히 본론으로 들어갈 듯한 말이 흘러 나왔다. 정화는 침 한 모금을 꿀꺽 삼켰다. "동창(東廠)의 이야기를 듣자 하니 피해가 있었다고?" "그…그렇습니다." 정화는 기세에 억눌려 기어드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이야기 를 했다. 처음에 남해안에서 해적을 만났던 일이며 수로에 서 정파 무사들의 조우, 그리고 사파들의 공격과 반역의 무리들이 공격했던 일까지 하나도 남김 없이 고해 바쳤다. 그리고 마지막에 잡았던 포로들의 이야기까지도. 사실 이 런 이야기를 꺼내 놓은 것은 이미 황제도 알고 있으리란 예상 때문이었다. 그의 예상은 정확하였다. 이미 영락제도 자신의 소식통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이번에 정화에게 묻게 된 것은 단 지 확인의 차원일 뿐이었다. "생각보다 피해가 심각하였군 그래." "폐하의 성은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막대한 피해를 입힌 소 신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아니오. 그대의 노력은 누구보다 짐이 잘 알고 있소. 그 대가 없었다면 아마 피해가 더욱 커졌을 거요. 일단 불행 하게 된 병사들은 어쩔 수 없지만 가족들에게 확실히 보상 을 해 줄 터이니 그대도 그리 마음 아파하지 마시오." 정화와 영락제의 관계는 오랜 과거부터 시작된 것이다. 연 왕이란 신분을 가지고 있을 때 정화는 영락제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그 답례로 영락제는 무한한 신임을 보이기 시작 했다. 정병들을 단련할 때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나 논의 하는 대상에서 빠진 적이 없었다. 그만큼 그들의 신뢰 관 계는 대단했다. 환관의 역사 참여가 과거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 나 명나라가 들어선 이후 환관의 신분 상승이 시작된 것은 영락제 시대부터였다. 동창이 생긴 것이며 정치 전반에 강력한 힘을 과시하는 것도 모두 영락제의 신임 덕이었다. 그렇게 된 것은 영락제의 초기 연왕 시절에 믿을 만한 사 람들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능력 위주의 선임 방 식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영락제의 밑으로 들어오긴 했지 만 그래도 연왕 시절부터 수하였던 환관들에게 손과 시선 이 많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훗날 환관들의 행패가 시작되는 것이 이 무한한 권력의 노 른자를 내어준 영락제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는 하나 현재 로선 그리 별 무리가 없었다. "그래 그것은 됐고, 그 역적의 무리는 어떻게 됐는가?" "다른 조치는 취하지 않았사옵니다만 일단 수로 통행에 강 호인들을 어느 정도 통제하고 있사옵니다." "수로?" "예 그렇사옵니다. 이번 역도들의 무리는 확실히 무림인들 의 손을 탄 듯 싶사옵니다." "하지만 그들이 반드시 강호인이라 할 순 없지 않는가? 안 그래도 그들은 서로 편을 가르고 싸움을 하고 있다고 하 던데." "일단 정파 쪽은 아직 적도들이 끼어 들 여지가 보이지 않 는 듯 했사옵니다. 하지만 사파의 세력 내부에는 어떤 변 화가 있을지 모르옵니다." "흐으음! 무황성이라 했던가? 그 사파 무리는 어떤가?" "신이 판단하기론 그들에게선 특별히 문제가 될 것은 보이 지 않았사옵니다. 그들은 단순히 힘을 맹신하는 무리옵고, 현재 수장은 예전에 사파의 주인들과는 조금 달랐사옵니 다. 적도들이 무황성의 그늘 아래 숨었을 가능성도 없진 않겠지만 그렇게 되면 활동하는데 많은 제약이 있을 것입 니다. 역도들의 목적이 반역이라면 활동에 제약을 받는 그 런 단체 내부로 숨을 리가 없을 것이라 사려되옵니다." "확실히 그대의 말이 옳은 것 같군. 그래 이번 일을 어떻 게 처리했으면 좋겠는가?" "확실히 밝혀진 정황 같은 것은 없사옵니다만 일단은 몇 가지 얻었던 정보를 가지고 두 가지 정도로 나누어 처리할 까 합니다." "……?" "일단 공격을 한 무리들의 수가 수백에 이릅니다. 그만한 군사력을 가진 곳은 확실히 무림 쪽이 쉬울 것 같습니다. 아마 한 문파 정도로 살짝 위장을 한다면 쉽게 들통이 나 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만한 군사력을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도 엄청날 것입니다. 아마도 상인이나 그만한 재력을 가진 사람들 중에 조력자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무림인들도 찾아보고 상인 쪽도 알아본다?" "그렇사옵니다." "상인 쪽이야 관을 통해 세금을 걷으니 알아보기는 쉽겠군 . 하나 강호인 쪽은 그리 쉽게 될 문제가 아니군. 어떤 방 법이라도 있는가?" "예! 일단 끈을 얻어 둔 게 있사옵니다. 이번에 무황성 쪽 에서 진 빚이 하나 있는데 그쪽을 하나 사용할까 합니다. 그리고 정파의 무리들이 소신에게 언급했던 천존무급이란 비급을 이용하는 것이옵니다." "……?" 영락제의 싸늘한 눈빛이 정화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들이 혹 비급이 있으면 달라는 말을 언급하였나이다. 그들의 목적이 그 비급이었으니 일단 비급을 주겠다는 말 을……." 정화의 말은 끝을 맺지 못하고 영락제에게 잘려 버렸다. "잠깐! 짐이 듣기론 그런 비급 따윈 없는 것으로 자네가 이야기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그런 비급은 없사옵니다. 하지만 일단 운을 놓으 시고 그 연후에 그들에게 다른 사례를 하는 것이 나쁘지 않을 듯 싶사옵니다." 듣고 있던 영락제가 머리를 저었다. "불가하오. 대 명의 아비인 짐이 함부로 거짓을 말할 순 없는 것이오. 그리고 그것이 아무리 황실의 안위에 관련된 것이라도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만백성들에게 지탄의 대 상이 될 것이오. 그냥 동창에게 정보를 얻어 보라고 하는 게 좋을 듯 싶소." "폐하! 동창의 인물들이 무력이 높다 하나 관의 인물들이 옵니다. 무력을 쓰는 강호인들의 생리를 잘 알지 못하는 이상 정확한 파악이 어렵사옵니다. 최소한 정파의 인물들 에게 도움을 받지 않으면 파악이 불가능 할 수도 있사옵니 다." "그도 그렇군. 그럼 일단 짐이 무당에 첩지(牒紙)를 내릴 터이니 그들과 동조를 하는 것도 한 번 강구해 보시오."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그만 물러가 쉬도록 하시오." "만세 만세 만만세!" 다시 대례를 취한 정화가 조용히 뒷걸음질치며 대전을 물 러났다. 영락제의 입에서 긴 한숨이 토해졌다. 달은 둥실 떠오르고 밤은 자꾸 깊어져갔다. 북경에서 가장 힘을 발휘하는 곳인 동창(東廠), 그 중에서 가장 심처에 자리한 한 내실에 화려하게 장식된 서찰 한 통이 내려 온 것은 아침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런 연후 동 창은 평소와는 다른 분주함으로 부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영락제의 명을 받은 대신들의 저택부터 관군들의 감찰이 시작된 것이다. 사태를 모르던 몇몇 대소신료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가끔 걸리는 부정부패한 신료들의 몰락에 다시 입을 다물게 되 었다. 그 변화는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었다. 북경의 대로엔 관군들의 수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만 갔다. 일반 병사들뿐만 아니라 황실에서 고른 감찰사들이 각 대 신들의 저택을 들기 시작하자 백성들은 모두 무슨 일이 벌 어지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 락제의 엄명으로 백성들에게 피해가 돌아가지 않자 그들은 곧 이 변화를 무감각하게 받아들였다. 대신들의 감찰이 끝나게 되자 이번에는 북경 내부의 향리 를 포함한 유지들이 그들의 대상에 오르게 되었다. 실제 영락제의 목적은 그들이었다. 정화가 말한 많은 군자 금이 실제로 나올 만한 대상은 그들이었다. 대신들의 감찰 은 단순한 눈가림에 불과하였다. 반발이 예상되긴 했지만 이 정도로 하지 않는다면 각 지방의 유지들의 감찰은 아예 시행해보지도 못한 채 끝나 버릴 게 분명했다. 확실히 그 의 예상대로 얼마 되지 않는 부패한 관료들의 몰락을 바라 본 그들은 전전긍긍하며 이번 일을 맞이했다. 다만 이 일 로 아무런 피해가 없었던 백성들만이 영락제의 정치를 칭 송하며 만세를 불렀다. 상인들에 대한 감찰도 시행되었다. 명목은 세금의 누락 여 부를 확인하는 것이라 했다. 북경에 있는 거상들의 저택에 감찰관의 발길이 들어섰지만 찔릴 것이 없는 상인들은 그 저 그런가 보다 했다. 다만 여러 가지 비리를 가지고 있거 나 뇌물을 찔러 넣은 상인들은 낮처럼 새하얀 밤을 보아야 했다. 북경의 한 고루거각(高樓巨閣). 사람들이 백대인이라 부르 는 집에도 감찰관의 발길이 닿았다. 열 둘의 병사를 앞세 운 두 명의 감찰관이 들어오자 허름한 복장을 한 사내 하 나가 그들을 맞이했다. 처음에는 감찰관들이 그를 하인이 라 생각했던지 잠시 실례되는 행동을 했지만 이내 그가 이 저택의 주인인 백재홍임이 밝혀지게 되자 사죄를 했다. 명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이 지켜지는 성리학의 나라였다. 감찰관이 일개 상인 따위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백재홍은 북경에서도 알아주는 거 부였다. 거기다 연줄이 닿는 곳은 여러 높으신 분들이었다 . 실례를 한다 한들 별 말이야 있겠냐만은 그가 아무런 문제 가 없이 이번 일이 끝났을 때 그 뒷일도 생각해야했다. 아 쉬울 것 하나 없는 그들이었지만 일부러 미움을 사서 진급 에 차질이 생길 수 있게 될지도 모르는 일만은 막고 싶은 것이다. 가볍게 차 한잔을 마시고 난 후 정원을 산책하는 감찰관들 과 세상 돌아가는 얘기며 이런 저런 것들을 하다 보니 시 간은 이미 한 낮을 훌쩍 지나 저녁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쯤 병사들의 우두머리가 한 명에게 다가와 복명을 했다. "영감! 모두 챙겼사옵니다." "그래 수고했다." 장수가 말한 것은 백재홍의 거래 내역 장부들이었다. 다른 상인들과 달리 거부인 백재홍의 장부는 상당히 많았고 그 만큼 찾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 것이다. 두 명의 관리는 이제 일이 끝났다며 몸을 돌렸다. 백재홍 은 그런 둘을 잡아 품에서 작은 비단주머니를 내밀었다. "약소하지만 수고하셨는데 이걸…" "아니오. 이런 것은 받을 수 없소." 살짝 찔러주는 것이 뇌물임을 알아차린 관리 하나가 손을 저었다. 지금같이 황제가 눈을 부릅뜨고 살필 때 잘못 걸 리면 진급은커녕 자신의 모가지가 잘릴 판국이다. "얼마 되지 않습니다. 술값이라도…" "백대인의 뜻은 알겠지만 지금은 안 되오. 미안하지만 그 대의 마음만 가지고 가겠소이다." 웃는 낯으로 거절한 관리들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정원 을 가로질러갔다. 대문 앞에 서자 십 여 명의 병사들이 이 미 손에 가득 장부들을 들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소이다." "살펴 가시옵소서." "다음에 기회가 되면 술이나 한 잔 하십시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그대의 돈를 받고 싶다는 뜻이다. 그 런 뜻을 상인 세상에서 수십 년을 굴러먹은 백재홍이 모를 리가 없었다.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그 때는 제가 더욱 좋은 곳으로 모시겠나이다." "하하하! 그 때 기대 하겠소이다. 그럼…" 그들은 화통한 웃음을 남기고 병사들을 이끌어 사라져갔다 .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하인 하나가 급히 달려 왔다. 사색이 된 얼굴이 상당히 위급한 일인 모양이었다. 귀에 손을 가리고 조용히 말하는 그 무엇을 전해들은 백재 홍의 낯빛이 확 달라졌다. 그리고는 허둥지둥 옆으로 난 문을 빠져 나왔다. 그가 도착한 곳은 헛간이었다. 농기구 따위를 넣어두는 헛 간 문이 활짝 열린 모습이 그 안에 귀중한 무언가를 넣어 둔 모양이다. 이미 내부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안을 일견한 백재홍이 시퍼렇게 변한 얼굴을 구기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른 쪽은 일견하지도 않은 채 가장 내부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볏단과 새끼줄을 쌓아 둔 그곳은 완전히 헝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 구 멍 하나가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머리가 멍한지 두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곳간 안에 넣어 둔 비밀 장부까지 들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안 돼. 이러면… 이럴 순 없어.' 전혀 걱정은 하지 않았다. 감찰이라 해 보았자 단순히 뇌 물을 받는 수준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 오산이었다. 특별히 걸릴 만한 것은 일반 장부에는 없었다. 아니 있다 치더라도 세금을 더욱 많이 내면 충분할 줄 알았다. 하지 만 여기 있는 것이 뺏기게 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노예 매매며 자신이 바쳤던 뇌물의 장부까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보다 더욱 중 요한 것이 그 안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 은 바로 자신을 파멸로 이끌 것들뿐이었다. 자신의 엄청난 기반들이 와르르 무너지게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백재홍은 급히 곳간을 나섰다. 그리고 안채로 달려갔다. "어서오……!!?" 한 시녀가 인사를 한다 했지만 백재홍은 평소처럼 다정하 게 전갈을 넣어 달라느니 그런 말을 건낼 시간이 없었다. 장부의 모든 내역이 밝혀지는 것은 오늘 내일의 문제인 것 이다. 아마 늦어도 삼일 내엔 끝날 게 분명하다. 그 전에 조금이라도 멀리 도망치든지 해야 하는 것이다. 백재홍은 급히 자신의 부인이 있는 방문을 열었다. 그 곳 에는 한 여인이 고운 자태로 수를 놓고 있었다. "상공! 갑자기 어인 일로." "부인! 당장 옷가지며 패물들을 챙기시오." 갑자기 들어와 밑도 끝도 없이 짐을 싸라니. 이게 무슨 날 벼락 같은 소리인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바라봤지만 그는 여전히 서두르란 말 뿐이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는지요." "자…장부가 들통났소." "……?" 그녀의 낯도 하얗게 변했다. 장부가 들통났다니. 그럼…? "도망쳐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머리를 살살 저었다. "괜찮아요. 엄청난 피해를 입긴 하겠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잖아요? 그래도 따로 모아 둔 것이 있으니 재기하는데 는…" "그게 아니란 말이오." 처연한 표정으로 말을 하는 자신의 아내에게 백재홍이 소 리를 버럭 질렀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다시 그녀의 안색이 변했다. "그 안에는… 그 안에는… 당신의 복수에 관한 문제까지 걸려 있다는 말이오." "……?!" "당장 옷가지를 챙기시오. 일단 발바닥의 불부터 꺼야 할 것 같소. 서두르시오. 금앵아!" 서둘러 아내에게 말을 끝내고는 밖에서 대기하던 하녀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하고 기다리던 금앵은 급히 대답하며 뛰어들었다. "당장 마님의 옷을 챙겨라. 조금 후에 나가야 하니 서둘러 라." 그녀의 답을 듣지도 않고 그는 부리나케 달려나갔다.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고 한 시진도 되지 않아 백재홍의 저 택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화려한 사두 마차 하나가 달 려 나왔다. 그리고 얼마 후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삼두 마 차 하나가 그 뒤를 따라 나왔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거리의 한 사내가 눈빛을 발하더니 이채를 띠며 몸을 돌렸다. 이리 저리 돌아다니던 그의 발 이 도착한 곳은 관청이었다. 그가 막 관청에 도착했을 때 다시 저택의 문이 열렸다. 그 리고 나온 것은 식료품을 나르는 마차였다. 가득 볏단을 실은 마차는 천천히 굴러갔다. 그리고 그 마차를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백대인의 저택이 다시 문을 연 것은 그 날 오후 무렵이었 다. 평소 같으면 활짝 열려 있었을 문은 백재홍의 무단 외 출이 있던 그 때부터 꽉 닫혀 버렸고 아무런 출입이 없는 폐가처럼 인적이 끊겨 버렸다. 그런 그곳을 찾은 한 남자가 있었다. 푹 눌러쓴 삿갓에다 옆구리로 길게 뻗은 검 한 자루는 그의 신분이 강호인임을 한 눈에도 알아차릴 수 있게 했다. 등에는 작은 꼬마 여 자아이가 업혀 있었다. 삿갓을 살짝 들어 자신이 찾던 곳임을 확인한 그는 다시 삿갓을 고쳐 쓴 뒤 문으로 다가갔다. -쾅쾅! 불끈 쥔 주먹으로 굳게 닫힌 대문을 두드렸다. 그런 그의 귀로 등에 업힌 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여기야?" "그래! 여기가 확실한 것 같다." 그들은 진무릉 부녀였다. 천인문과 헤어진 후 중원을 샅샅 이 뒤지며 '민예진을 아시오?' 란 질문만을 던져대며 비무 행을 하는 부녀. 사람들이 죽립무언객이라 부르던 그들이 바로 진무릉 부녀였던 것이다. 일 년 가까이 쉬지 않고 그녀의 소식을 얻으러 다녔지만 아무런 단서 하나 잡지 못했던 그들에게 조그만 정보를 입 수된 것은 얼마 전 한 홍등가에서였다. 평소 딸을 데리고 다니는 터라 홍등가에 드는 것을 극도로 삼갔던 진무릉이었다. 그러나 그날 따라 이상하게 마음이 싱숭생숭 했던 그는 술이나 한 잔 걸치기 위해 객잔에 진 미랑을 재운 뒤 주루를 찾았다. 그런데 오랜만에 주루를 찾은 그 날이 바로 그 쪽에서 주 먹께나 쓴다는 녀석들의 수금일이었다. 평소 다른 일이 아 니라면 칼을 뽑는 일을 극도로 삼갔던 그답게 주루에서 행 패를 부리는 녀석들에게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않았었다. 저렇게 지저분한 짓거리를 하는 것도 먹고살기 위해서란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날 녀석들의 운수가 나빴던 것인지 아니면 천벌 이 내리려 한 것인지 녀석들은 주루의 수입이 적다며 더 가져오란 말을 했고, 그 바람에 주인이 직접 술값을 받기 위해 손님들을 찾아다니며 선불을 요구했던 것이다. 술이 알싸하게 오르기 시작했던 진무릉. 슬슬 기분이 나빠 졌지만 그래도 이해하는 심정으로 금덩이를 내밀었고, 그 것을 본 녀석들이 눈이 뒤집어지기라도 한 듯 그의 앞으로 다가와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더 이상 참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주먹 몇 대를 선사하면 상대의 실력을 알아차리겠지 하며 날린 주먹에 상대들은 꼬리를 말고 내빼듯 도망쳤다. 그러나 그 정도로 끝냈더라 면 됐을 것을 그 무식한 녀석들은 상대의 실력도 가늠하지 못했는지 수 십 여명을 이끌고 나타난 것이다. 그 사이에 주루의 주인에게 쓸 데 없는 짓거리를 했다며 푸념의 소리를 듣고 있던 그는 다시 찾아온 녀석들을 아예 박살 내 버렸다. 그리고 몇 놈을 끌고 그들의 본거지였던 한 홍등가를 찾아 완전히 묵사발 내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곳에 있던 여인들은 대다수가 인신매매나 노예 로 팔려온 여인들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한 남자가 주먹만 으로 휙휙 날아다니며 자신들이 두려워하던 것들을 박살내 기 시작하자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가 난 것이다. 모두 다 쓰러지고 홀로 우뚝 서게 된 진무릉이 칙사 대접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주루에서 한 잔 걸친 그는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을 무정히 팽개칠 남자는 아니었다. 비록 아내를 사랑하긴 했지만 남자로서 금욕을 할 수 있는 극단적인 감정을 지닌 자는 아니었기에 다시 한 잔 두 잔 걸치게 되었다. 여자들은 술이 들어가자 하나씩 자신의 인생을 탓하기 시 작했고 결국 인신매매단을 운영하는 사람들까지 다 싸잡아 서 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의 입에서 나 온 것이 민씨 여인이었다. 민씨 성을 가진 여인이란 말에 술이 확 깨 버린 그는 그것 을 이야기한 여인을 잡고 흔들 듯 다그치고서야 그 사람의 집이 북경쪽에 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길로 바로 북경으로 출발한 것이다. 다시 한 번 주먹을 들어 문을 두들기고서야 안쪽에서 목소 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누구시오?" "……" 아무런 대답 없이 그는 다시 한 번 주먹을 들어 문을 쳤다 . "나~참! 알았소. 나가요 나가." 사내는 성질 급한 손님을 속으로 탓하며 투덜거렸다. 굳게 닫힌 문을 한쪽으로 당기기 시작하자 바로 밖에서 상대가 문을 밀어젖힌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없이 불쑥 몸을 들 인다. "이… 이봐요. 당신 누구요?" 문을 연 청년은 이곳에서 일하는 한 하인이었다. 평소 이 런 곳에 드나드는 사람이 많았기에 엄청난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던 그였지만 지금 들어온 사람은 완전히 달랐다. 어 딘가 모르게 차가운 느낌에 옆구리에 걸린 긴 장검까지 보 니 분명 무림인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 슨 일이십니까?"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진무릉은 그런 그의 질문에 낮 은 음성을 토해냈다. "여기 민예진이라고 있나?" "민예진? 아니 당신이 누군데 함부로 주인 마님의 성함을 그리 부르는 것이오?" 그 순간 진무릉의 죽립 밑에서 번쩍 불이 뿜어졌다. 그것 은 충분히 하인도 알아볼 수 있었다. 물씬 풍기는 기세가 완연히 달라져 버린 것이다. "비켜!" 솥뚜껑처럼 거친 손을 들어 사내의 머리를 와락 밀어버리 고 안으로 들어가는 진무릉. 하인은 억센 손에 밀려 땅바 닥을 굴렀다. "아악!" 사내가 비명을 질렀지만 진무릉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안 으로 난입했다. 보통 안채는 건물의 뒤쪽에 있었다. 안채의 주인은 보통 저택의 주인이 가장 아끼는 사람이 사는 곳이다. 그것은 보통 사랑하는 아내나 총애 받는 첩이 살고 있을 것이다. 확신은 없었지만 상관은 없었다. 이미 여기가 확실한 것 같으니 박살이라도 내 버리면 알아서 나올 거라 생각했다. '흐음! 이상하군.' 분명 저택은 컸다. 몇 개의 문을 지났지만 아직 안채는 보 이지 않는다. 이렇게 큰 저택이라면 충분히 그 식솔도 많 을 것이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북경에서도 첫째, 둘째가는 부자라 했다. 그 소문에 맡게 으리으리한 고루거각이 즐비하다. 헌데 사람이 너무 없다. 문을 지나고 정원을 가로질러도 겨우 두 사람만 보일 뿐이다. 그나마 한 사람도 문 앞에서 본 그 사내가 다였다. 한참을 뒤지고서야 겨우 안채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응? 이상하다. 아빠! 왜 사람이 아무도 없어?" 등에 업힌 진미랑이 궁금한 듯 물어왔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자신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일단 안채가 확실한 듯 하자 진무릉은 안채에서 가장 화려 해 보이는 문 앞으로 걸어갔다. 계단을 밟고 올라가 아무 런 말도 없이 문을 버럭 열었다. 하지만 역시 사람의 모습 은 보이지 않았고 싸늘한 기운만이 남아 있었다. 이미 방이 비워진지 제법 된 모양이다. 사람이 살았다는 온기가 보이질 않는다. 그 때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쪽문에서 하인이 뛰어 들어왔다. "당신 뭐야? 어디서 행패를 부리는 건가?" 조금 전 자신에게 밀려 넘어졌던 사내다. "그녀… 그녀는 어디 갔지?" "그녀?" 하인의 눈초리가 하늘로 치켜 올랐다. 그러나 곧 눈동자가 휘둥그래졌다. 민첩한 몸놀림으로 다가온 진무릉이 한 손 으로 사내의 멱살을 잡아 쳐든 것이다. "컥! 이… 이것 좀 놓고…" "당장 말해! 그녀는 어디 갔느냐?" 진무릉의 몸에서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 공을 모르는 하인도 충분히 알아차릴 정도였다. 온 몸이 싸늘하게 식어버리고 다리가 덜덜 떨릴 정도로 강맹한 기 운이 육체를 휘감아 왔다. "그… 그것이…" "빨리 말해라. 안 그러면…" 진무릉은 으름장을 놓으며 하인을 쏘아 봤다. 숨이 막힌 듯 멱살을 잡은 손을 두 손으로 감싸고 목을 쳐돌리던 하 인이 쿨럭거리며 기침을 토했다. "저…전 모릅니다요. 정말로…" "모른다? 그럼 살 필요가 없군." 살 필요가 없다? 그건 죽인다는 뜻이 아닌가? 무림인들의 기행을 자주 들어왔던 하인은 얼마나 그들이 잔인한지 잘 알고 있었다. 술자리에서는 항상 그런 얘기 밖에 없었다. 누가 더 잘 날아다니고 누가 더욱 강한 장풍 을 쏘았다는 얘기들. 들을 때마다 허황된 얘기라고 웃어넘 기고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사람들의 잔인성을 끔직 하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그 정도가 아 니다. 이건 완전히 산중에서 호랑이를 만난 기분이다. 비록 주인에게 오랜 동안 봉사를 했다지만 그보다는 목숨 이 먼저였다. "잠…잠깐만요.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요." 당장이라도 검이 목에 틀어박힐까 싶어 몸이 부르르 떨리 지만 일단 살려면 말을 해야했다. 간신히 배에 힘을 넣어 목소리를 내자 진무릉의 손이 잠깐 떨리는 걸 느낄 수 있 었다. "정말인가? 그게 누구지?" "일단 이것부터…" 안색이 하얗게 변해가자 진무릉은 사내의 멱살을 놓아 버 렸다. 하인은 땅바닥을 구르며 나가떨어졌지만 몇 번 숨을 토하고서야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당장 안내해라." "이… 쪽으로." 덜덜 떨면서도 하인 녀석은 앞장을 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 작했다. 하인이 안내한 곳은 저택을 나와서 두 개의 대로 를 가로지른 후에 놓인 작은 집이었다. 주위에 으리으리한 저택들속에 홀로 떠 있는 외딴섬처럼 어울리지 않는 집. 무언가 조금 수상한 느낌을 받았지만 진무릉은 차분히 물 었다. "여기가 어디냐?" "저희 집사 어르신께서 사는 집이지요. 주인 어르신은 평 소 말을 잘 안 하시기로 유명하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 면 집사 어르신밖에 없을 겁니다요." "그래?" 집사라…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하인이야 당연히 모른 다지만 일단 그래도 행방을 알 수 있는 가장 큰 가능성을 가진 인물이 그 집의 대소사를 맡은 집사가 아닐까. "그… 그럼 소인은 이만." 머리를 미약하게 끄덕이는 진무릉을 보며 하인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 인간 같지 않은 사내에게서 한시라도 빨리 떨어지고 싶은 것이었다. "잠시 기다려!" 한 마디를 남겨놓고 진무릉은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 바 람에 하인은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안으로 들어갔으 니 당장이라도 내 빼고 싶은데 이상하게 다리가 말을 안 듣는 것이다. 사내는 자신의 머리의 명령을 거절한 다리가 원망스러웠다. 진무릉이 안으로 들었지만 역시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하 지만 따스한 느낌이 나는 것으로 보아 사람이 있는 것 같 긴 했다. -저벅저벅! 안으로 걸음을 옮기고 들어갔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무언가 귓가로 미약한 소리가 들려왔다. -텅!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였다. 그 순간 진무릉은 일이 잘못되 어간다는 생각에 급히 신형을 뽑아 지붕위로 올랐다. 소리 는 뒷 쪽 건물에서 들려왔다. 당장에 지붕을 뛰어 넘은 뒤 뒤뜰에 내려선 그는 눈앞에 놓인 문을 와락 열고 들어갔 다. 그 순간 그의 눈앞에서 한 사내의 몸이 천장 위에서 덜렁 거리며 매달린 모습이 들어왔다. "까아악!" 등 뒤에 업힌 진미랑의 입에서 비명이 토해지는 순간 진무 릉은 그녀를 내려놓을 틈도 없이 뛰어 올랐다. -휘익! 한 줄기 검광이 허리에서 뿜어져 나온 순간 새끼줄이 썩은 동앗줄처럼 뚝 끊어졌다. 땅으로 내려오는 순간 검은 사 라지고 두 손으로 떨어지는 사내를 받쳐들었다. 중년 사내의 안색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목숨이 간 당간당했다. 진무릉은 한 눈에 사태를 파악 할 수 있었다. 그 주인이란 사내에게 무언가 나쁜 일이 벌어졌고, 그는 자신의 아내 와 함께 어디론가 도주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이 사내는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남아 있다 가 죽음을 택한 것이다. 무언가 들어맞지 않는 사실들이 몇 개 보이기 시작했다. 왜 미리 도주하거나 자살하지 않았을까, 왜 주인과 같이 도망가지 않았을까. 저택에 남아 있던 하인은 무엇 때문에 홀로 남은 것인가. 생각할수록 이상했지만 일단은 무시하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이 사내의 목숨이었다. 그가 죽고 나면 다시 단서가 끊어지는 것이다. 무조건 살려야 하는 것이다. "미랑아 잠시만 내려와 볼래?" "응 알았어." 아비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그녀가 급히 그의 등 에서 내려왔다. 진무릉은 자유로운 몸으로 중년 사내를 앉히고서 그의 명 문혈에 장심을 붙였다. 강맹한 내력으로 그의 내부에 타격 을 주어 깨울 생각인 것이다. 그의 기운이 내부를 한 바퀴 돌고서 상대의 몸 속으로 밀 려 들어갔다. 몇 주천이나 끝냈지만 사내는 깨어날 줄을 몰랐다. 진무릉의 눈이 찡그려졌다. 충분히 깨어날 듯 한데 일어나 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더욱 강한 힘으로 상대의 몸을 훑 어 내리기 시작했다. 상대가 깨어난 것은 이각이 지난 후였다. 무슨 약이라도 먹은 것인지 사내의 눈빛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정신도 혼미한지 진무릉을 제대로 알아보질 못했다. "이 봐! 집사. 민예진과 백재홍은 어디갔지?" 더 이상 시간을 주기 싫은지 진무릉이 나지막한 음성을 토 해냈다. 사내는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입을 열었 다. "모… 몰라…" "당장 말해. 어디 갔는가?" 진무릉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왜 죽으려 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에겐 감추어야 할 비밀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밀이란 게 분명히 주인이 사라진 곳일수도 있었다. "나… 난 모…올라." 진무릉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목소리도 흐릿흐릿 하고 정신도 풀어지고 있었다. 약기운이 감도는지 자꾸 목 도 옆으로 꺾이고 있었다. 이제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진무릉은 최후의 방법을 쓰기로 했다. 바로 자신의 절기인 천마심안(天魔心眼)이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천마심안이란 일종의 섭심술이었다. 상대의 심력을 제압하고 초기의 정기를 흐트리는 묘용을 가진 무공. 거기다 천마흡마공(天魔吸魔功)을 발전하면 강 대한 내력까지 쌓을 수 있는 방법이라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아니 그 말이 틀린 것이 아 니었다. 다만 알려지지 않은 묘용 중에는 상대의 생각을 알려주는 것, 죽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법 등등 정파의 인물들이 보면 사술(邪術)이라 부를 여러 방법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진무릉이 쓰려는 방식도 그것들 중의 하나였 다. "미랑아! 고개를 돌려라." "으…응 알았어." 아비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진미랑이 몸을 휙 돌렸 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진무릉이 빙긋 웃더니 다시 표정을 바꾼다. 그리고는 잠시 눈을 감고 운기에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몸에서 붉은 광채가 흐릿하게 뿜어졌다 . 그 순간 눈을 뜬 진무릉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 "날. 보.아.라." 사내의 몸이 풍이라도 걸린 듯 부르르 떨리더니 고개가 천 천히 돌아왔다. 붉게 타오르는 두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사내에게 다시 진무릉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누.군.가?" "다…당신은…" 정신이 혼미했던 그는 순식간에 그의 정신을 제압당했다. 몽롱한 눈빛을 발하던 사내가 조금 전보다 생기있는 목소 리로 대답했다. "당신은… 당신은…" 사내의 말을 진무릉이 이었다. "나.는. 당.신.의. 주.인.이.다." "주인… 주인…" "그.렇.다." "당신은… 나의 주…인…" "주.인.이. 너.에.게. 묻.는.다. 민.예.진.과 백.재.홍.이 . 어.디.로. 갔.는.가?" "그…들은… 소주… 담대인…" 소주(蘇州)의 담대인? 진무릉의 입술이 지긋이 깨물어졌다.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진무릉. 딸을 와락 업은 채 다시 문을 향해 달려나갔다. 사내는 그가 떴음에도 계속 '소주… 담대인…'을 중얼거렸 다. 이미 목숨이 끊어졌어야 함에도 그는 중얼거리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 정오 백대인의 저택을 찾은 관군들이 집사의 집까지 찾은 것은 그 날 밤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죽었음에도 말을 하는 무시무시한 시체 를 관군이 구했다는 소문이 북경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오?" "대인! 실패했습니다. 크흐흐흑!" 북경에서 작은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소주의 담대인 저택 엔 또 다른 손님이 찾아 왔다. 바로 간신히 무황성의 손을 피한 방효겸 일행이었다. 밤을 도와 산길을 타며 남의 시 선을 피한 그가 소주에 도착한 것은 오일이 지날 무렵이었 다. 거리도 거리지만 산길을 타다보니 행색은 완전히 말이 아니었다. 새벽 녘 겨우 소주에 도착했지만 성문이 열리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 새벽일을 나서는 농사꾼들의 출입 시간이 되 어서야 겨우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그들은 바로 담대인 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실…패라니… 그럴… 수가…" 담대인의 넉넉한 얼굴이 하얗게 물들었다. 정치에도 관심 이 없었던 그가 믿고 살았던 것은 건문제의 복위 단 한가 지였다. 그런데 그것이 실패로 돌아갔다니… 담대인이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 다. 어찌 하면 좋단 말이냐. 이 일을 어찌하면… 한탄을 하는 그의 귓가에 노복 노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인! 담공자 드십니다요." 노이의 말에 정신을 다시 차린 담대인, 급히 소리쳤다. "그래 어서 들어오라 해라." "예!" 노이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방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창백 한 얼굴에 유약해 보이는 공자 하나가 안으로 들어오고 다 시 문이 닫혔다. 담성운의 아들이자 건문제인 담공우였다. "아버지." 담공우의 부름에 담대인의 얼굴이 더욱 찡그려졌다. "폐하!" 밖으로는 들리지 않을 듯한 작은 소리로 폐하를 외치는 담 대인. 그러나 보고 있던 담공우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 다. "하늘의 뜻이오. 하늘은 날 원하지 않는다는 뜻일 뿐이오. 그리 실망할 것은 없소." "어찌… 하늘은 어찌… 크윽!"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던 담대인의 신형이 털썩 주저앉는다 . "괜찮소. 나에겐 아직 두 분이 계시지 않소? 성공해도 주( 朱)씨 집안. 실패해도 주씨 집안. 명의 주인은 아직 주씨 성이니 그리 슬퍼할 건 없소. 허허허!" 부드럽게 미소를 흘리는 담공우. 그러나 보고 있던 방효겸 의 가슴은 더욱 찢어졌다. "폐하! 못난 소신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나이다. 크윽!" 고개를 숙이는 방효겸을 둘러보는 담공우. "됐소. 그대가 아무리 그렇게 말을 한다 한들 내 어찌 하 겠소? 당신을 참하리까? 아니면 귀향을 보내리까? 더 이상 말해 본들 나에게 남은 것은 두 분 뿐이오. 더 이상 자책 하여 몸을 상하지 마시오. 그건 내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 는 거일 뿐이오." 꾸중처럼 들렸지만 결국 그 말은 방효겸 자신의 몸을 아끼 란 말이었다. 방효겸은 더욱 슬프게 눈물을 흘렸다. 북경의 감찰이 거의 모든 상인들까지 조사를 시작했을 무 렵 타 성(省)의 성도(省都)들의 감찰이 시작되었다. 처음 에는 내부 자체 감찰을 실시했지만 삼 주 후 북경에서 내 려온 감찰들이 다시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 주 후 향 리를 포함한 유지들의 감찰이 시작된다 하였다. 담대인의 저택에도 서서히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이미 남 경과 항주 쪽은 시작을 했다는 소문이 나돌아 소주에도 그 바람이 닥칠 것은 분명한 일이다. 담대인이야 워낙 인망 높은 사람이라 소주 내부의 관료들은 별 걱정 없을 거라 말했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지 못했다. 오늘도 관청에 나가 사태가 어찌 돌아가는가를 지켜보던 담대인. 하루의 해가 가고 저녁이 찾아오자 다시 발걸음을 집으로 돌리고 있었다. 마차를 타고 천천히 나갈 무렵 교차로에서 둘둘 거리며 굴 러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차 소리였다. 그것도 한 대 이상 의. 무슨 일인가 싶어 마차 옆으로 난 창을 통해 고개를 내밀 자 지붕이 없는 마차 하나와 화려하고 아름다운 마차가 나 란히 굴러가는 모습이 보였다. '누구지?' 아름다운 마차의 옆에 난 창으로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 아직 밤이 깊지 않았지만 소주는 항주와 마찬가지로 밤 이 아름다운 곳. 비록 이곳이 유지들이 사는 곳이라고는 하나 거의 향락가의 거리만큼 환한 곳이었음에 담대인은 사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사내는 아주 젊어 보였다. 거기다 제법 빼어난 용모다. 준 미한 콧날에 검미도 뚜렷하다. 하지만 아직 치기와 장난기 도 눈가에 보인다. 한 번도 소주에 와 보지 못했는지 연신 사내는 고개를 이 쪽 저쪽 돌려 대며 바삐 시선을 옮기고 있었다. 누구일까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던 그의 귀로 여인의 목소 리가 들렸다. "상공! 그렇게 고개를 내밀지 마세요. 남들이 봐요." 목소리가 상당히 귀에 익었다. 언젠가 한 번 들어봤던 목 소리 같은데. 담대인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볼 테면 보라지. 난 남의 시선 따윈 신경 안 써. 그런 신 경 쓸 바에야 조금이라도 더 구경해야지." 소주에 처음 온 천인문으로선 당연히 신기한 것들밖에 없 었다. 거의 시골이나 관도, 숲 등만 돌아다니다 보니 이런 거대한 도시엔 처음 드는 시골뜨기처럼 두리번거리는 것 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서혜령도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한숨만 내쉬며 입을 다물었 다. 그러나 궁소미의 입장은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너 머리 집어넣어라. 안 그러면 내려 버릴 테니까." "누난 또 왜 그래요? 시끄럽게 하지도 않고 조용히 구경만 한다는데." "미안하지만 난 그런 것 용납할 수 없어. 알았지?" 솔직히 그녀는 천인문이 고개를 내밀고 주위를 두리번거리 는 자체가 싫었다. '나는 여기 처음 오는 사람이요' 하고 자랑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 못마땅한 것이다. 평소 품행이 바르고 고귀한 모습만을 보이던 그녀였다. 항 상 옷가지도, 행동거지도 바르고 정갈하게 하던 그녀는 요 몇 주간의 여행동안 정말 피곤한 입장이었다. 하루도 쉬 지 않고 여기 저기 기웃거리며 촌티를 내는 것에 완전히 질려 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뭐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넘어 가려 했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이제 볼 것도 다 보았을 텐데 아직도 저런 다는 것이 신기 한 노릇이지만 여기서는 아니었다. 소주는 거대한 도시고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을 게다. 분명 자신이 탄 마차 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마차에 남자가, 그것도 저런 무식한 티를 팍팍 풍겨대는 남자를 태우고 있다는 소문이 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 언니 말 들어. 조금 있으면 도착할 텐데 그렇게 바 보 티 계속 낼 거니?" 단목 수령이 맞장구를 쳤다. "칫 알았어. 알았다니까." 투덜거리며 천인문이 고개를 집어넣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천인문만이 아니었다. 일행의 마차을 뒤따르고 있던 담대인의 귀에도 들렸던 것이다. 단목 수령의 목소리는 조금 독특한 면이 있었다. 앙칼지면 서도 사람의 귀를 거슬리게 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한 번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아마 잊어버리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담대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단목 수령의 목소리를 들은 담대인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 고서야 처음에 들었던 여인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언젠가 자신의 집에서 오래 머물렀던 그들, 그 중에 자신 의 아들이자 황제인 담공우의 내자로 찍어 두었던 그 여인 인 것이다. 담대인은 다시 자신의 옆자리에 난 창을 통해 고개를 내 밀었다. 그리고 자신의 행색에 어울리지 않는 큰 소리로 소리쳤다. "잠깐! 그 앞에 가시는 분들은 잠시 멈추시겠소?"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마부는 고삐를 당겼다. 그리 고 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마차보다는 덜 화려 한 마차 한 대가 저쪽 뒤에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삐죽 고개를 내민 사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 다. 하지만 분명 저런 마차를 타고 이런 거리를 가는 사람 이라면 상당한 거부일 것이고 자신의 주인과도 안면이 있 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일단 주인에게 물어보기 로 했다. "주인님! 뒤에서…" "그래 나도 들었다. 일단 잠시 세워 보거라." 궁소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차를 세울 것을 종용했다. 자신은 상인의 신분이다. 천대받는 상인, 그것도 여인의 몸으로 상행위를 하는 것은 상당히 남사스럽고 꼴불견이 아닐 수 없었다. 그만큼 돈을 버는 것이라든지 모든 일에 서 남들보다 힘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점을 없애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력이 더욱 중요했다. 남의 용모를 기억하는 것이라든지, 상대의 습관, 행동, 좋 아하는 것 등등 하나라도 남보다 많이 알아야 했다. 그 중 에는 목소리도 들어간다. 하지만 지금 뒤에서 들려온 목소 리는 아직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는 것이다. 자신의 기억력이 떨어졌나 하고 머리를 탓하는 그녀의 귀 로 서혜령의 말이 들려왔다. "그 분이군요." "그분?" "지금 찾아가는 그 저택의 주인이죠." "그럼 담대인?" 단목 수령의 눈이 커졌다. 우연도 참 대단한 우연이다. 어 찌 이런 길에서 저렇게 탁 만날 수 있었을까 싶었다. 담대인의 마차가 허름한 마차를 지나 궁소미의 마차 옆에 세웠다. 조그맣게 열린 마차의 창이 열리며 둥글둥글한 담 대인의 얼굴이 내밀어졌다. "혹시 그 안에 타신 분들 중에 서씨 처자가 있는가?" '서씨 처자?' 들어보기 힘든 표현이 들려오자 천인문이 빙긋 웃음을 지 었다. 그러나 듣고 있던 서혜령과 단목 수령의 표정은 그 리 좋지만은 않았다. 나쁜 인연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좋 은 인연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질문을 받은 이 상 대답을 해야 하는 법. "혹시 담대인이신지요?" "허허허! 나의 예상이 맞았구려. 그렇소. 노부가 담모요. 그런데 무슨 일로 이 소주에 다시 들렀는가?" "호호호! 담어르신을 뵈러 왔죠. 저번에 무례하게 그냥 인 사도 안 드리고 그냥 떠났었잖아요. 그래서 사죄도 할 겸 해서 들린 거에요." 단목 수령이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호! 단목 소저도 계셨구려."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르는 척 인사를 건내자 단목 수령도 다시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럴 게 아니라 일단 나의 저택으로 갑시다." 이번에는 담대인이 앞장을 섰다. 그의 마차가 먼저 굴러가 자 그 뒤를 궁소미의 마차가 뒤쫓았다. 홀로 남겨진 허름 한 마차도 급히 뒤를 따라왔다. 예상치 못했던 손님들이 방문한 담대인의 저택은 다시 술 렁거리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며칠동안 주인과 작은 공자 의 무거운 분위기로 인해 가라앉았던 장원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하인 하녀들은 조용한 가운데서도 분주히 움직였다. 다시금 활기가 돌기 시작하자 그들의 입에 작은 미소가 돌았다. 하지만 찾아온 손님들은 어딘지 모르게 깔려 있는 암울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단지 눈치 없는 천인문을 제외 하고는 모두 그런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역시! 무언가 있어.' 조용히 눈을 빛내며 살피던 옥조영이 심증을 굳힌 듯 고개 를 돌려 여미릉을 보았다. 그녀도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인 모양이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그럴까요?" 담대인의 안내를 받아 대청으로 든 그들은 또다시 화려한 모습을 보게 되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떠날 때만 해도 다시는 여기를 보지 않게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처음 오는 천인문은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이 꿈인가 싶어 눈을 비비기까지 한다. "대단한데.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 정말 멋진 곳이야. 안 그래?" 그런 모습에 단목 수령이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옛 생각 이 떠오른 것이다. 처음 왔을 때 같이 왔던 우문교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 나갔다. '우와 죽여주는구만. 역시 돈 많은 놈들은 다르다니깐. 이 렇게 꾸미려면 돈을 얼마나 처발랐을까? 있는 놈들이 더 한다고 이렇게 꾸미려면 얼마나 백성들을 족쳐댔을까?' 같은 곳을 찾았건만 사람이 다르면 보는 관점도 달라지는 것인가? 누구는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는데 그 누구는 단순 히 아름다움만 볼뿐이다. 살아온 환경, 생각에 따라 정말 평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대청을 낱낱이 살피는 천인문을 제외하고 모두 붉은 의자 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조금 후 옷을 갈아입은 담대인이 대청으로 들어왔다. 그 뒤를 따라 하녀 셋이 간단한 다과 와 차를 내 왔다. 향긋한 차를 한 모금 마신 담성운이 차를 놓으며 입을 열 었다. "그래… 어떻게 다시 오실 생각을 하셨는지." 그렇게 도망치듯 사라지고 온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이었 다. 이번에는 답변이 옥조영에게서 나왔다. "그 전에 인사를 못 드리고 간 점은 사죄드리겠습니다. 저 희가 갑자기 일이 생겨 급히 떠나가게 되었는데 일이 무사 히 끝나게 되어서 다시 돌아온 것이지요. 게다가…" 잠시 눈을 돌려 백운호를 바라 본 후 계속 말을 이었다. "그 때 갈 때 제자 녀석을 놔두고 간 사람도 있고 해서 어 찌 되었나 싶어 겸사겸사 찾아뵈었습니다." 백운호는 인상을 팍 구기며 고개를 떨구었다. '칫! 핑계거리가 없나? 왜 하필 날 가지고…' 솔직히 그 말이 사실이긴 했다. 너무 정신이 없는 터라 유 운기를 그냥 두고 가지 않았던가? "허허허! 그러셨군요. 그런데 이걸 어쩌지요? 그 분들은 여러분들이 가신 그 날 정오쯤 여기를 나가셨는데…" 옥조영이 머리를 끄덕였다. 충분히 예상한 일이다. 안면도 없는 곳에 그냥 남아있기가 껄끄러웠을 것이 분명했다. 자신 같아도 그냥 나왔을 것이다. "어디로 간다는 말은 하지 않던가요?" "아니요. 그냥 인사만 하고 나갔습니다. 미리 약속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헤어질 때 서로 약속이 되어 있는 줄로만 알았던 담대인이 었다. 그렇지만 실제 헤어질 땐 아무런 언질도 주지 못한 상태였다. 그것을 알리 없는 담대인이었기에 별 생각 없이 물었던 것 이다. 백운호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조금 아 쉽긴 했다. 제법 실력도 있고, 가르칠 맛도 날 것 같은 녀 석이었는데… 하지만 넓디넓은 강호라 해도 어디선가는 만날 수 있지 않 겠는가? 아직 살날이 많고 보니 그리 걱정은 되지 않았다. 제법 강호에서 이름을 날린 녀석이니 어디 가서 맞아 죽 지는 않을 것이다. 옥조영도 머리를 끄덕였다. 원래 찾은 목적은 그것이 아니 었다. 바로 방효겸에 대한 정보 때문이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가 뭐해서 운을 때듯 유운기에 대 해 물었던 옥조영은 조심스레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저번에 보았던 그 손님 분은 안 보이시는군요." 그 질문에 담대인의 어깨가 움찔 했다. 감춘다고 했지만 그들의 눈을 벗어날 순 없었다. 여미릉 등의 이채를 띤 눈 으로 담대인을 살폈다. "아! 친우는 집으로 갔소만…" 송글송글 이마에 땀이 맺혔다. '여기 있군. 확실해.' "그렇습니까?" "그렇소. 그런데 그는 왜 찾는 거요?" 담대인은 그들이 갑자기 방효겸을 찾자 무언가 이상한 느 낌을 받았다. 혹시라도 관의 끄나플이 아닐까 싶은 생각에 운을 넣었다. 하지만 옥조영 등은 백년 먹은 여우였다. 그런 느낌을 함부로 풍길 리가 없었다. "아니 그냥 안 보이시기에 여쭌 것일 뿐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러시구려. 허허! 일단 저녁 시간이 되었는데 식사라도 하시지요." 그 순간 옥조영의 머리는 재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일 단 남아서 밤에 확인을 할 것인가? 아니면 객잔 등에 묵으 면서 염탐을 할 것인가? 바로 그때 대청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담대인의 아들 담공우였다. "아버님! 돌아오셨습니까? 그런데 이 분들은…?" 대청에서 인사를 넣던 담공우의 눈이 서혜령을 본 순간 반 짝였다. 서혜령은 그런 그의 눈빛을 본 순간 고개를 돌려 버렸다. "다시 오셨군요." 반가운 듯 환한 미소를 띠며 인사를 하자 단목 수령도 빙 긋 웃으며 인사를 한다. "샌님 공자님도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 그런데 확실히 좀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샌님이란 말에 잠시간 미간을 찡그렸던 담공우는 얼굴을 펴며 화답을 했다. "왈가닥 아가씨께서도 그간 잘 있으셨는지요?" 멋진 화답에 단목 수령의 미간이 내천자를 그렸다. "호.호.호! 그럼요. 잘 있었고 말고요." "서혜령 소저도 잘 계셨는지요? 그런데 몇 분은 못 보신 분 같은데." 서혜령 소저라니… 서혜령의 눈이 잠시 찡긋했다. 가슴 한 쪽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다. 황급히 시선을 감추고 슬며 시 천인문을 향해 바라보았다. 다행이 그는 다과와 차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모습은 어 른이지만 아직은 어린애인 것이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실제 그녀는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다. 흑풍을 주인이라 부르는 우문교를 볼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더욱 걱 정되는 것이 바로 이 담공자였다. 특별히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적은 없었지만 느낌이라는 것이 있다. 그는 분명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이 특별히 잘못 한 게 없어도 찔리는 때가 있다. 그리 고 바로 그 때가 지금이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그녀 였지만 천인문을 보기가 미안한 느낌이다. 그런데 다행이 그는 아무런 눈치도 못 챈 듯 하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착각이었다. 이미 천인문은 담공우 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찾았던 것이다. 그것을 본 순간 속 에서는 알 수 없는 기운이 부글부글 끓었다. 무언가 가슴 속에 답답하게 자리한 느낌이다. "소개를 시켜 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럼요. 이쪽은 조기혜 소저. 저 멀리 북쪽에서 유람차 오신 분이시죠."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숙였 다. 엄청난 미모의 여인이 웃자 대청은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이 든다. 잠시 그 모습에 취했던 담공우, 정신을 차리 고는 인사를 했다. "이쪽은 궁소미 언니. 유명하신 상인이죠." "아니 그럼 이 분이 바로…" 상인의 무리에서 요즘 들어 떠오르는 신성(新星)이 바로 그녀였다. 다른 이는 몰라도 담대인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호호호! 저의 보잘 것 없는 이름이 담대인의 귀를 더럽힌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입을 가리고 웃는 모습에 천인문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번에는 저런 모습을 보지 못했 는데 요즘 들어선 자주 보는 모습이었다. "정말 한 번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이 담모가 운이 좋군요." "아니 제가 운이 더 좋은걸요. 이렇게 소주에서 가장 유명 하신 분을 뵙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잘 부탁드릴께요. " 자리에서 일어서 손으로 옷고름을 만지작대며 날아갈 듯 절을 하는 궁소미, 그 모습에 담대인은 너털웃음을 터트렸 다. "허허허! 정말 빼어난 미모에 말재주로도 모자라 저렇게 바른 예절까지. 정말 대단하구려." "호호호호! 설마 그럴리가요." 둘이서 죽이 잘 맞는 사람들끼리 놀게 놔 둔 채 단목 수령 은 남은 하나를 소개 시켰다. "그리고 이쪽에 잘 생기고 늘씬한 남자는 천인문이라 하죠 ." 갑자기 엄청난 칭찬에 천인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목 수령의 소개가 계속되고 있었다. "저에겐 조카이자 서.혜.령. 소.저의 유일한 낭군이랍니다 ." 단목 수령의 눈이 사악하게 빛났다. 그 순간 담공우의 신 형이 눈에 띠게 흔들렸다. "나…낭군이요?" "호호호호! 그렇답니다. 이미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 요." 흔들리는 모습을 본 단목 수령이 날아갈 듯 갸녀린 웃음보 를 터트렸다. 왠지 사악한 마녀의 웃음 같은 느낌을 받은 천인문이었지만 역시 그런 담공우의 모습에 어딘지 우쭐해 지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사실 담공우는 서혜령이 처녀인 줄로만 알았다. 아무도 그 런 것에 관해 말을 하지 않았던 터라 당연히 처녀인 줄로 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처녀가 아니라니… 그렇다면 지금 까지 유부녀를 좋아하고 있었단 말이었던가. 난처해 진 것은 서혜령도 마찬가지였다. 담공우에게 상처 를 입힌 것 같아 미안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잘못한 것 은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 느낌을 받는 게 이상했지만 그녀 가 익혔던 특유의 옥녀심공은 그런 그녀를 무표정한 석녀 처럼 담담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는 그녀를 본 담공우는 애처러운 눈빛으로 서혜령을 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안타깝게 바라 보는 시선이 있었으니 바로 담대인이었다. 요즘 들어 무엇 하나 잘 되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처음으 로 찾아온 담공우의 사랑마저도 이렇게 끝날 줄이야. 담대인의 마음이 아픈 것만큼 담공우의 가슴에도 멍이 들 고 있었다. -110- 어둠으로 물든 방 안. 실내는 고요한 적막을 가르며 들리 는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가득하다.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나갔던 천인문이 들어온 것은 제법 늦은 밤이었다. 어디 서 술을 걸쳤는지 몸에서는 향긋하면서도 알싸하게 코를 간질이는 주향(酒香)이 물씬 풍겨왔다. 아무런 말도 없이 털썩 침상에 누워 코를 고는 모습에 서 혜령의 마음은 콕콕 바늘로 쑤시는 듯 아파왔다. 천인문의 옆에 누워 잠을 청해 보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 아니 오히려 정신만 더욱 맑아질 뿐이다. 그래도 자야지 싶어 눈을 감고 한참을 보냈을 때였다. 잠 을 자고 있던 줄로만 알았던 천인문이 자신을 부른다. "색시야 자?" "아…아뇨!" 벌떡 일어나려는 그녀의 귀에 다시 그의 말이 들려왔다. "그냥 일어나지 말고 이야기만 해." "네… 네!" 그녀는 다시 몸을 눕히며 귀를 기울였다. "휴! 나 아까 나갔을 때 저택의 소공자 만났다." "……" "그런데 말이지. 그 녀석… 아니 그 사람이 뭐라 하는 줄 알아? 나보고 당신을 사랑할 자격이 없데." "네? 그… 그게 무슨…?" 화들짝 놀란 서혜령이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그를 보 았다. 천인문의 시선은 공허한 메어리처럼 천장만을 하염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는 색시를 정말 좋아한데. 아니 죽도록 사랑할 것 같 데. 처음에는 그냥 호기심하고 호감 뿐인줄 알았는데… 당 신이 가고 나니깐 정말 보고 싶었데." "……" "그런데 나보고 그러더라. 정말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말이 야. 당신을 사랑한다면 그렇게 내팽개치고 갈 순 없데. 아 니 헤어졌으면 어떻게든 만나려고 노력했을 거래. 그러면 서 딴 여자나 만나고 다니는 바람둥이래." "……" "그런데 말이지. 그 말 듣고 나 아무 말도 못 했다. 한… 마디…도 못… 했… 어." 목소리가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훌쩍! 코를 '킁'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뺨에서 반짝 하고 빛 을 발했다. 팔뚝을 얼굴에 가져다 대고는 잠시의 시간을 보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내 생각은 한 번이라도 해 봤냐고 묻더라. 그 땐 정말 가슴이 뜨끔했어. 그래서 아무 말도 못 하겠더라구." 서혜령의 얼굴에 처연한 웃음이 감돌았다. 그녀는 그의 옆 에 바싹 누워 목을 살며시 껴안았다. "그렇게 자책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래… 색시는 정말 그런 사람이야. 나한테는 과분한 것 같애. 난 말이지. 어제까지 그것도 몰랐어. 색시는 그냥 나하고 평생을 같이 보내 줄거라 생각했거든." "당연히 전 상공하고 같이 살 건데요." "내 곁에 언제나 있어 줄거라 생각해서 너무도 당연히 그 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어. 그런데 오늘 그 사람 말 듣고 나니까 정말 부끄럽더라. 난 아무것도 색시한테 해 준 게 없는데 왜 난 색시한테 바라기만 할까." "아니에요, 아니에요." 서혜령이 도리질을 쳤다.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를 한 손으 로 살며시 쓸어 올린 천인문이 그녀의 뺨을 살며시 쓸어 내렸다. "미안해 색시야. 그 동안 마음 고생 심했지?" "아…니요." 이번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잠겨 들었다. 울음이 섞인 목소 리로 말하다 천인문의 목을 와락 껴안고는 풀 줄을 모른다 . "나 이제부터 잘 할게. 다음부터는 정말 색시 마음 안 아 프게 할게. 울리지도 않고 힘도 안 들게 정말 노력할게. 알았지?" "…네!" "그럼… 날 안 떠날 거지?" "떠나긴요. 상공하고 천년 만년 같이 살 거에요. 죽을 때 까지 한 평생 안 떨어질 거에요." "그래! 나도 이젠 색시하고 안 떨어질 거야." 서로 사랑의 눈빛을 보내기 시작한 두 남녀. 한참을 그렇 게 바라 보던 그들은 상대의 눈에서 자신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는 다시 서로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다시 재 회한 그 날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되었던 그들의 사랑 은 오늘에 이르러 절정을 맞이하고 있었다. 무언가 따뜻한 느낌 속에 옹알이를 하듯 중얼거리던 천인 문. 옆구리가 시린지 무엇을 찾는 듯 손을 더듬거렸다. '으응?' 아무리 손을 뻗어 봐도 걸리는 게 없었다. 분명히 어젯밤에 그녀와 함께 잔 것 같은데… 허전한 느낌에 눈을 뜨고 깜빡이던 천인문이 자리에서 일 어나 서혜령을 찾았다. 그러나 그녀는 역시나 보이지 않았 다. 항상 그랬다. 언제나 일어나면 그녀의 모습은 보이질 않고 덩그라니 비워진 침상의 한 켠만 보일 뿐이다.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일어선 순간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온 몸이 비명을 지르듯 구석구석 쑤셔온 것이다. 어젯밤의 사랑이 과했던 탓인가? 다시 피로를 느끼고 침상 에 몸을 눕힌 천인문은 누워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분명히 어젯밤에…' 갑자기 어젯밤에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나자 부끄러운 느낌 이 온 몸을 감쌌다. 그런 말을 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소득도 얻었다 생각하니 가슴이 훈훈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빙그레 웃음을 지은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지개를 한 번 쭉 편 후에 옷을 입고 밖으로 나서자 중천에 떠오른 태 양을 볼 수 있었다. 아직 점심때는 아닌 모양이다. "어머! 이제 일어나셨어요?" 정원에서 꽃을 구경하고 있던 서혜령이 방긋 웃으며 다가 왔다. 그 모습에 온 정원이 꽃으로 뒤덮인 듯한 느낌을 받 았다. 천인문도 빙그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식사하셔야죠?"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른 사람들은 다 드셨어요. 상공께서만 드시면 되 요." 먹으란 말에 천인문은 도리질을 했다. "됐어. 조금 있으면 점심땐데 그 때 같이 다 먹으면 되겠 지." 얼마 후 점심 시간이 되자 모두 식사를 하기 위해 대청으 로 모였다. 원래 식사는 각자의 방에서 했었다. 하지만 사람도 많고 같이 먹기를 원하다 보니 대청에서 식사를 하기로 한 것이 다. 식사는 좋았지만 역시 분위기는 그렇게 좋지 못했다. 이미 주인 되는 담대인의 마음 속엔 한 줄기 불안함이 피어오 르고 있어 손님들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그 것을 알고 있는 천인문 일행도 특별히 요구하거나 말을 거 는 등의 행위는 삼가고 있었다. 식사를 막 마칠 무렵이었다. 대청 안으로 담공우가 발을 들여놓자 식사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쏠렸다 . 잠시 시선의 집중을 받았던 그는 겸연쩍은 표정을 짓다 가 자세를 가다듬고 서혜령의 앞으로 걸어왔다. 천인문의 살기 어린 눈빛이 발했지만 그는 전혀 아랑곳하 지 않고 입을 열었다. "서 낭자.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소?" 결국 저 녀석이… 천인문은 불타는 듯한 눈빛으로 담공우를 쏘아 봤다. 어젯밤 담공우는 무서운 기세로 천인문을 압박했다. 충격 적인 말들만 골라서 공격했었다. 그러나 가장 마지막에 던 져졌던 말은 그녀에게 고백하겠다는 말이었다. 술이 취한 김에 그녀에게 담공우에게 들었던 말을 거의 다 고백했던 천인문이었지만 결국 그 말만은 하지 못했다. 다행히 그녀의 확신어린 답변을 듣고서야 안도할 수 있었 지만 결국 고백하겠다는 담공우의 말이 현실로 다가오자 어딘지 모르게 두려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잠시면 됩니다." 할 말을 마치고는 그냥 뒤로 돌아가버리는 담공우…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서혜령은 잠시 천인문을 일 견한 후 그를 따라 나섰다. 뿌리칠 것이라 생각하던 천인 문이었기에 일말의 배신감도 느끼긴 했지만 그녀의 눈빛에 서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야 문아! 너 안 따라가 봐도 되니?" 단목수령이 손을 가리고 물어왔다. 천인문의 머릿속에 떠오른 두 가지 생각이 서로 승부를 가 리려 했다. 가보고 싶지 않다는 이성의 외침과 보고 싶다 는 호기심의 종용이 서로 맞부딪혔다. 결국 승리는 호기심 쪽으로 손을 들었다. 옆에서 보러 가자는 단목 수령이 조 른 것도 한 몫 단단히 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랑합니다." -쿠쿠쿵! 머리에 벼락이 떨어지는 느낌이랄까. 서혜령의 몸은 바람 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후들거렸다. 갑자기 데리고 가 한다 는 소리가 사랑한다라… 이건 예상을 뛰어넘는 고백이었다. 그가 어느 정도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이 있는지도 모를 때는 고백은커녕 눈도 제대로 못 맞추던 사내가 남편이 나타나자 이런 모습 이라니. 충격도 가히 태산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이미 결정된 바였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사랑하는 분이 계십니다." "인정할 수 없소. 그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소.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식으로 행동해선 안 된단 말이오. 나 같 으면 그렇게 하지 않소. 당신만을 위하고, 당신만을 바라 보며, 당신이 원하는 그 무엇이든 해 줄 자신이 있단 말이 오." 구구절절한 고백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 속엔 이미 한 남자가 들어있었다. 어떨 때는 아이같고, 또 어떨 때는 개구쟁이 같은 사람이지만 이미 그녀의 마음 속에 깊이 새 겨진 흔적을 밀어낼 수는 없었다. "나에게 한 번이라도 기회를 주시오. 내가 그보다 더 당신 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도록 기회를 달란 말이오. " "죄송합니다. 이 말 밖에 드릴 말씀이 없네요." 그녀는 머리를 살짝 조아렸다가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몸 을 돌리려는 순간 그녀의 팔을 와락 잡아채는 것이 있었으 니 바로 담공우의 손이었다. "안 되오. 가지 마시오. 나에게도 기회를 달라 하지 않았 소. 난 당신을 사랑한단 말이오." 갑자기 손을 잡히자 그녀의 눈꼬리가 밀려 올라갔다. 손을 뿌리치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요? 사내 대장부께서 여자에게 그것도 남편이 있는 사람에게 할 짓이옵니까?" 서슬이 퍼런 추궁에 담공우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기회를 달라고요? 어떤 기회를 말입니까? 당신하고 같이 몇 달을 살아 달라는 겁니까? 그래서 상공과 비교해 보란 뜻인가요? 착각하지 마세요. 제가 당신에게 부드럽게 대한 건 사랑이 아니니까요." 담공우는 서혜령이 몸을 돌려 나가는 것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넋이 빠졌다. 그런 그를 멀리서 보고 있던 천인문 도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렸고 홀로 남은 단목 수 령만이 그런 그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불쌍한 사람, 옛날에 그런 사내 같은 모습을 보였더라면 지금쯤은 멋진 아내가 있었을 것을…' 그녀도 결국 머리를 저으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방으로 돌아온 서혜령은 침묵 속에 잠겼다. 이유를 알고 있던 천인문은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단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의 입이 열린 것은 그 날 늦은 오후 무렵이었다. "상공! 이만 여기를 뜨는 것은 어떨런지요?" 천인문이 고개를 돌려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느 낌조차 떠 있지 않는 맑은 눈동자가 눈에 박혔다. "난 언제라도 떠나는 건 상관없어." 솔직히 여기에 머무는 것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었기에 서혜령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이미 일도 끝났고, 확인할 것도 없다. 하지만 실 권력자들 은 옆방에 머무는 어른들이다. 일단 이야기는 건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인문이 방을 나서자 그녀도 따라 나왔다. 옥조영 등의 생각도 그리 다르지는 않았는지 별 반대를 하 지 않았다. 결국 이곳을 뜨기로 했다. 결론이 나자 당장이라도 뜰 것처럼 모두 분주히 서두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장원의 분위기는 황량하다. 어제부터 하인들이 하나씩 그만두기 시작했다. 아마도 담대인이 미리 하인들을 그만두게 하는 모양이었다 . 그들도 며칠 내에 떠날 것 같아 그리 미안하지도 않았다 . 송집사를 통해 담대인에게 알리자 얼마 후 담대인이 그들 을 배웅하기 위해서 밖으로 나왔다. "조금 더 머무셔도 될 터인데 이리도 바삐 가시는지요." "하하하! 아쉬울 때 이별하는 것이 좋은 법이지요. 이번에 도 대인의 은덕을 많이 입고 갑니다 그려." 백운호가 모습에 어울리지 않은 인사를 건넸다. "별 말씀을요. 다음에 기회가 닿는다면 또 뵐 수 있겠지요 ." "그럼 이만…" 마지막 인사를 마친 그들은 자신들이 타고 왔던 마차를 받 아 몸을 올렸다. 마부가 고삐를 당겨 출발을 시키자 막 문 을 향해 이동해 갔다. 그 때였다. 다가가던 문 쪽에서 쾅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막 문을 열려던 노복 하나가 급히 달려가 문을 열며 신분 을 물었다. 그러나 상대는 대답도 없이 불쑥 안으로 난입 했다. 그리고는 외쳤다. "민예진은 어디있지?" -111- 죽립에 한 여아를 업고 나타난 사내, 바로 그는 진무릉이 었다. 갑자기 나타난 사내가 다짜고짜 밀고 들어와 사람을 찾는 소리에 모두들 어안이벙벙한 모양이었다. 그저 아무런 말 도 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느낌에 천인문이 고개를 내민 순간 그의 몸은 망치 로 맞은 듯 부르르 떨렸다. '저 녀석은…' 잊을 수가 없다.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저 모습은… 어떻게 잊을 수가 있는가. 자신에게 무참한 심정을 안겼고 쓰디쓴 패배의 맛을 보여준 사내를. "후후! 이렇게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문아! 무슨 말이니?" 고개를 내밀고 밖을 보더니 사악한 웃음을 얼굴에 걸고 킥 킥거리는 천인문을 본 궁소미가 덩달아 고개를 내밀었다. "아니 저 사람은?" 죽립을 쓴 사내를 본 순간 그녀도 그를 알아차릴 수 있었 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내. 한 번 그를 보면 눈을 땔 수 가 없어지는 이상한 능력을 가진 사람. 바로 그 사람이었 다. "넌 누군데 함부로 저택에 들어와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하인 몇이 빗자루나 큰 주먹을 휘두르며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어디 진무릉이 그런 허세에 눌릴 사람이던가. 죽 립 밑으로 웃음이 살짝 걸렸다. "다 알고 왔다. 그녀, 그녀를 내 놓거라." "무슨 되 먹지 않은 말버릇을… 썩 나가거라. 여긴 네 놈 같은 녀석이 올 곳이 아니다."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듯 주먹을 휘둘러 보였다. '민예진? 그건 백대인의 부인 아닌가? 저 사람은 누구이기 에 백대인의 부인을 내 놓으란 거지?' 담대인은 의아한 눈빛으로 죽립인을 보고 있었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왜 하필 남의 아내를 내 놓으란 것인지 궁금 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흥! 안 내 놓겠단 말이지? 그럼 스스로 걸어나오게 해 주 지." 죽립인은 콧방귀를 뀌며 몸을 세웠다. 듣고 있던 담대인은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옆구리에 찬 검을 보면 분명 이 사 내는 강호인이었다. 그런 그를 상대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식솔들이 아닌가. 무림인들과 상대를 하면 다치는 것은 예 사이고 심지어는 죽기도 한다. '이걸 어쩐다.' 담대인은 지끈지끈 아려오는 머리를 찡그리며 손을 가져갔 다. 막아야 했다. 막아서 피해가 나지 않게 해야만 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녀가 여기 있다고 말을 해야 하는가. 그럴 순 없다. 정 체도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에게 의탁해 온 자를 함부로 내 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관부의 끄나플이 아니라고 그 누가 장담하겠는가? 그렇다고 저대로 하인들이 상대하도록 해야 하는가. 그건 더욱 위험하다. 상대하는 하인들은 다 죽으라는 소리가 아 닌가. 이리저리 모순에 걸려 고민하던 그 순간 마차에서 목소리 가 흘러나오며 문이 열린다. "이 봐! 아저씨 손을 멈추지 그래."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천인문을 바라보는 진무릉. 아무리 봐도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저런 바보 같은 녀석…" 뒷 마차에 타고 있던 옥조영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죽립인이 나타났을 때부터 그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 그건 여미릉도 마찬가지였다. 천인문과 서혜령이 자신들을 만나기 직전 옥문관에서 보았 던 그 사람인 것이다. 저 사람 때문에 서혜령은 여미릉을 졸라 옥녀심공을 익히기까지 했다. "누구…지?" 아무리 보아도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던 진무릉은 나지막 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하하하! 날 잊어 버렸다고? 이거 너무 슬픈데. 난 아저씨 를 절대 잊지 않고 있었는데 말이야." 담담한 어조로 말을 하고 있지만 천인문의 가슴은 격동으 로 불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출수하고 싶은 심정이다. "난 확실히 널 모른다. 일단 좀 비켜 주겠나? 난 나하고 상관없는 사람에게까지 손을 쓰고 싶진 않군." "후후… 으하하!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 그런데 미안해서 어쩌지? 난 아저씨하고 상관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상관이 있다고? 훗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날 상대 하고 싶은 모양인데 나도 더 이상 시간 끌고 싶지 않으니 상대를 해 주지. 요행 따윈 바라지 마라." 시간을 더 이상 끌고 싶지 않은 진무릉이었다. 잘못하면 다 잡은 고기가 그물을 뚫고 도주할 수 있었다. 잔인하더 라도 단숨에 끝내 버릴 요량으로 온 몸의 기운을 하나로 끌어 모았다. "미랑이를 업고 싸울 거야?" "……?" 어, 어떻게 딸아이의 이름을 아는 거지? 진무릉의 눈이 휘 둥그래졌다. 그러나 이내 안정을 찾아갔다. "어 오빠는 누군데 내 이름을 아는 거에요? 난 오빠 이름 모르는데." 등에 업혀 있던 진미랑은 고개를 내밀어 천인문을 보았다. 평소 이런 곳에 왔을 때는 항상 아비의 신경을 덜 쓸 수 있게 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자 참지 못하고 불쑥 끼어 든 것이다. "이… 이거 참! 미랑이도 날 잊어버린 거야?" 천인문은 실망했다는 듯 얼굴 한쪽을 구겼다. 지금 천인문 은 자신의 몸이 커졌다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그 러나 고개를 떨군 순간 자신의 몸 상태를 알아차리고는 어 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차! 내 몸이 많이 변했지. 그래, 그래서 못 알아 본 거 군." 너털 웃음을 터트린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좋아좋아! 그럼 한 사람을 내 소개 해 주지. 색시야 나와 봐." "저, 저런…" 옥조영의 한쪽 눈이 꿈틀거렸다. '이젠 마누라까지 동원할 생각인가?' 옥조영은 진무릉이 나타날 때부터 그의 실력을 가늠하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진무릉은 진정한 실력자였다. 거의 백운호와 맞먹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해 보인다. 안 보던 새 천인문의 실력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그의 상 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둘이서 싸우면 가능성이 있겠다는 생각에 말릴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서혜령은 한숨을 내쉰 후 마차에서 내려왔다. 나타난 여인의 얼굴을 본 직후 진무릉은 그녀가 옥문관에서 보았던 여인임을 알아 차렸다. "이래도 모르겠어?" 그러나 대답은 진미랑에게서 흘러나왔다. "언니는 문이하고 같이 다니던 언니 아니었어요? 그런데 문이는 어디 갔죠? 왜 안 보여요?" 천인문이 진무릉을 잊지 못한 것처럼 진미랑의 경우도 천 인문을 잊지 않았나 보다. 서혜령의 모습을 보자 바로 그 의 행방을 묻는다. "내가 천인문이다. 너 배아프게 한 약 준 것도, 너희 아버 지하고 박 터지게 싸웠던 것도 다 나야." "뭐 니가 천인문이라고? 그… 런데 어떻게 그렇게 커져 버 린 거지?" 진미랑은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왔다. 헤 어진 지 겨우 일 년 남짓. 자신도 크긴 했지만 겨우 한 치 남짓이다. 아직은 아비의 등에 매달려 다닐 정도로 작았 다. 그런데 천인문은 거의 성인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만큼 자라 버렸다. 옛날의 말썽 부리던 아이 같은 모습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기에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냐. 중요한 건 네 아비하고 나하고 다 시 한 번 붙어야 한다는 거지." 살기 어린 시선으로 진무릉을 쏘아보자 그가 앙천광소(仰 天狂笑)를 터트렸다. "하하하하! 네 녀석이 이렇게 커 버릴 줄은 정말 나도 몰 랐구나. 그래 오랜만에 재회를 했으니 다시 한 번 붙어 보 는 것도 좋겠지." 진무릉은 미랑을 땅에 내려놓은 뒤 자세를 가다듬었다. "자 와라!" "좋아!" 천인문도 자세를 가다듬었다. 하얀 손이 더욱 광채를 발하 기 시작했다. "저 녀석 혼자 상대할 생각이었던가?" 일대 일 대결이 벌어지려 하자 옥조영은 급히 호통을 쳤다 . "문아 뭐 하는 거냐? 그는 너의 상대가 아니다." 천인문의 얼굴이 구겨진 것도 그 순간이었다. 어떻게 할아 버지라는 자가 손자 되는 아이의 사기를 올려주지는 못할 망정 저렇게 초를 친다는 말인가. "됐어요. 할아버진 빠지세요. 이건 제 싸움이란 말이에요." 단호한 어조로 말을 하자 옥조영은 말리기가 어렵다는 생 각이 들어 급히 전음을 날렸다. <문아! 일단 상대는 확실히 너보다 강하다. 조심해라.> 그거야 이미 잘 알고 있다. 그가 얼마나 강한지. 전에는 무조건 덤볐지만 이젠 다르다. 실력이 나아진 지금 그의 솜씨가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천 인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지를 흐리는 상 대의 눈은 어찌한단 말인가. 그런 천인문의 내심을 알아차렸을까. 다시 옥조영의 전음 이 들렸다. <천마심안은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호흡을 바르게 하고 정명(貞明)한 심기를 곧게 세워라. 오감(五感)으로 침습(侵襲)한 것, 그 모두가 미명(未明)이니 진실 된 심로 (心路)를 찾아라…> 들려오는 것은 천인문이 옥조영에게 처음으로 배웠던 만류 만화상심법(萬流滿和上心法)의 구결이었다. 헛갈리기만 하던 것이 갑자기 눈앞에서 광채를 뿌리기 시 작했다. 무언가 밝음을 제시하고 나아갈 길을 보여 주는 듯 광채는 온 몸을 부드럽게 감싸며 어둠을 하나씩 밀어내 기 시작했다. 공허한 메아리마냥 머릿속에 잔재되어 이리저리 나부끼던 것들이 하나씩 가닥을 잡아 나간다. 암흑으로 뒤덥혔던 세 상이 불타듯 하얗게 백열하는 순간 천인문의 눈빛은 맑은 광채를 뿌리기 시작했다. 상대의 몸에서 뿌려지는 기세가 달라지자 진무릉의 자세도 달라졌다. 우습게만 보던 사람이 한 순간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바뀌어 버렸다. 가슴으로 가져갔던 두 손 중 하나가 단전으로 내려가고 하 나는 죽립 위로 올라갔다. 자세가 바뀌고 그의 몸에서 풍 기는 기력도 엄청나게 강해졌다. 두 사내가 뿌려대는 가공할 기세는 부딪혀 더욱 강하게 흩 어졌다. 바람도 없건만 바닥은 회오리를 만난 듯 사방으로 모래가 휘날리기 시작했다. "언니! 어떻게 해요?" 서혜령의 옆으로 다가간 진미랑이 울상을 지었다. 불안하 긴 서혜령도 마찬가지였다. 진미랑의 손을 잡자 땀이 송글 송글 맺힌 게 느껴진다. 어느 한 순간 두 사내가 땅을 박차고 전진했다. 중앙에서 교차하는 순간 붉은 빛과 하얀 빛이 광채를 뿌린다. -파팍! 먼지가 나르고 붙었던 두 사내의 신형이 떨어지는가 싶더 니 다시 중앙에서 충돌한다. 강한 기류가 사방으로 흩날리 고 퍼퍽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긴장된 표정으로 주시하고 있었 다. 옥조영은 언제라도 출수할 수 있게 온 몸에 공력을 모 은 채 응시했다. 뒤쪽에 서 있던 담대인이 모두의 시선이 몰린 때를 틈타 한 발 두 발 물러서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뒤쪽의 쪽문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아무도 그가 사라진 것을 모 르고 있었다. 쪽문을 나온 그는 재빨리 백대인이 묵고 있던 상향채로 이 동했다. "백대인!" 상향채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백재홍을 찾자 방에 있던 백 재홍이 나타났다. 방효겸도 같이 있었는지 뒤이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신지요?" "지금 대문 쪽에 그대의 부인을 찾는 사내가 있소. 무림인 인 듯 한데 일단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준비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 했던가. 그는 후다 닥 방으로 뛰어들었다. 백대인이 안으로 사라지자 이어 담 대인은 방효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네도 폐하를 모시고 이만 뜨게." "예? 아직은……." "아니네. 이미 백대인을 찾는 사람이 오는 걸 보면 이제 여기도 들켰다 보면 될 걸세. 한시라도 빨리 뜨는 편이 안 전하네." "대인께서는 어찌 하실 생각이신지요?" "난 일단 남아 있을 걸세. 자네들이 간 후 틈을 보아 뜨던 지 하겠네." "… 알겠습니다." 잠시 담대인을 응시하던 방효겸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틈을 보아 도주하겠다 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아니 죽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들을 위해 희생을 하기 위해 남는다 했을 게다. 굳은 표정을 짓던 방효겸이 결심을 했는지 주먹을 쥐며 걸 음을 옮긴다. 초긴장 상태에 들어있던 터라 이미 그들은 언제라도 도주 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고 있었다. 급히 꾸려놓은 짐을 들고 백재홍과 민예진이 밖으로 나왔 다. 벽 너머로 박투(搏鬪)의 소리가 들려 왔다. 천인문의 하얀 손이 멱살을 잡아채듯 뻗어오자 진무릉의 손이 소해혈(少海穴)을 쳐올렸다. 그 순간 허리를 숙이며 일도양단(一刀兩斷)을 하듯 옆구리를 갈라가자 진무릉이 핑그르르 돌며 천인문의 뒤통수를 노렸다. 뒤로 피할 것이라 생각했던 천인문은 다급한 마음에 손을 들어 살기가 노리는 곳을 막았다. -퍼퍽! 파열하는 소리가 터진 순간 뇌려타곤의 초식으로 누우며 발끝으로 진무릉의 백회혈을 내려 찍었다. 진무릉이 한 발짝 물러서는 순간 천인문의 두 손이 땅을 짚은 후 반동으로 튀어오르며 두 무릎을 노렸다. 풀쩍 뛰어 오른 진무릉이 천인문의 등 뒤 대추(大椎), 영 대(靈臺), 명문(命門)의 삼대혈을 노리는 순간 천인문의 무릎이 굽어지고 발뒤꿈치가 다시 그의 삿갓을 노렸다. 발목을 장으로 막아내는 순간 바닥으로 내려선 천인문이 가슴 쪽 상완(上腕)을 노린다. 이미 장으로는 손해를 본 진무릉이었다. 한 번 부딪히자 철벽을 친 듯 손아귀가 얼얼해 손은 피하는 중이다. 천인문의 공격에 한 발 물러서는가 싶더니 더욱 빠르게 앞 으로 내달려 턱과 목덜미를 찔러왔다. 천인문이 발을 놀리는 순간 그보다 더욱 빠르게 물러섰다. 그리곤 또다시 전면으로 돌진한다. 이번에는 양손이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강한 힘을 동반한 주먹이 날아오자 가볍게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그물에 걸린 듯 온 몸에 강한 압력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가슴과 배에 주먹이 박힐 듯 하자 진무릉의 손이 허리춤으 로 떨어졌다. -챙! 서늘한 빛을 동반한 검명이 하늘을 가르며 나른다. 그 순 간 눈부신 불꽃이 양손에서 튀었다. 천인문이 급히 뒤로 몸을 날렸다. 뒤로 물러선 천인문이 그의 손을 들었다. 벌 건 줄 하나가 양손에 새겨져 있었다. 다시 눈을 들어 진무 릉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일 장 남짓 거리를 확보한 진무릉이 검집에서 뽑힌 검을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대단하군. 정말 일 년 밖에 안 됐는데 몸놀림하며 장을 쓰는 게 예전과는 비교할 수가 없어." 천인문의 얼굴에 득의의 웃음이 떠올랐다. 이제 그와 나란 히 대결할 수 있었던 것에 기쁨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다 음 말이 들린 순간 그의 얼굴이 빳빳이 굳어 들어갔다. "나도 이젠 제대로 해야겠어. 검은 쓰지 않으려 했지만 나 도 위험하니 어쩔 수 없군." 말을 마치고는 검을 앞으로 쭉 뻗었다. 검신은 순백의 설원처럼 차디찬 흰 빛이다. 보고 있던 천 인문의 가슴이 한 구석이 서늘해 지는 느낌이다. 양손이 더욱 하얗게 물들었다. 천인문은 천옥신수를 믿었다. 강맹한 자신의 내공까지 믿 었다. 단호한 표정으로 검신을 바라보던 천인문은 자신있 게 두 손으로 검을 잡아갔다. 그러나 폭발하듯 날아오던 검의 모습은 손앞에서 자취를 감추더니 미간을 찔러왔다.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라 급히 팔뚝으로 막아갔지만 다시 모습을 감춘 검이 이번에는 양다리를 노린다. 급히 선운만변의 신법을 펼쳤지만 검신이 양다리의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옷 위로 배어나온 핏방울이 붉 게 옷을 적셨다. 빠르게 뒤로 물러선 천인문이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살짝 살갗을 벤 정도였지만 그의 검술이 자신의 신법보다 더욱 뛰어난 듯 했다. "경공이 정말 좋아졌군. 그 전에는 돌진밖에 모르던데 이 젠 완연한 고수의 풍모를 풍기는군." 칭찬의 말이 진무릉의 입에서 흘러 나왔지만 기분이 좋아 질 리는 없었다. "제기랄! 이건 아니야. 이럴 순 없다고." 분노의 일갈을 토한 천인문이 다시 몸을 날리는 순간 그의 앞을 막는 인영이 있었다. 바로 옥조영이었다. "됐다 문아. 물러서거라." "할아버지!" "어서!" 단호한 음성에 천인문은 불만을 토하면서도 한 발짝을 물 러섰다. 옥조영이 몸을 돌려 진무릉을 주시했다. "검술이 멋지더군." "별 것 아니오." 진무릉의 삿갓이 좌우로 흔들렸다. 옥조영도 따라 머리를 저었다. "아니지 아니야. 천마십팔검(天魔十八劒)이 대단하지 않다 면 어느 검법이 대단하다 하겠는가." 그 소리에 좌중의 모든 시선이 옥조영에게 쏠렸다. 천마십 팔검이라니… 진무릉도 놀란 듯 어깨를 들썩였다. "어떻게 아셨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노부는 알지." "…당신은 누구요?" "옥조영!" 진무릉의 어깨가 다시 한 차례 흔들렸다.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 하다. 잠시간의 격동에 잠겨 있던 진무릉이 다시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가 천존무제요?" 옥조영의 머리가 끄덕거렸다. "그렇다. 노부를 그렇게 부르더군. 그럼 나도 한 가지 질 문을 하지. 그대가 마불승(魔佛僧)의 전인인가?" 다시 한 차례 충격이 좌중을 휩쓸고 지나갔다. 마불승. 광 혈사를 이끌고 중원을 침공했던 인물. 그리고 중원에서 옥 조영에게 패퇴할 때까지 수많은 피를 흘리게 만든 자. 그 전투에서 옥조영은 천존무제라는 명호를 가지게 된 것이다 .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사람들은 더욱 긴장한 기색으로 진무릉을 응시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진무릉의 머 리가 좌우로 저어졌다. "아니오." 순간 옥조영의 눈에서 이채가 발했다. "그럼 광천마교(光天魔敎) 출신인가?" 이번에는 진무릉의 머리가 끄덕인다. "그렇소." "그럼… 천마삼검(天魔三儉)을 아는가?" 격동에 찬 목소리로 옥조영이 물었다. "… 그렇소. 알고 있소." 잠시간의 침묵을 지킨 진무릉이 낮은 소리로 긍정의 답변 을 했다. 옥조영의 얼굴에 어떤 기대감이 떠오른 순간이었 다. "그랬군. 그대의 무공이 나이에 비해 강하다 했건만 역시 … 죽기 전에 천마삼검을 보게 될 줄은 몰랐어." "……." 잠시 흥분의 기운을 감추지 못하던 옥조영이 다시 진무릉 을 바라보았다. "한 번 천마삼검을 견식할 기회를 주겠는가?" -112- 부드러운 어조, 그러나 반드시 보고야 말겠다는 단호함이 말속에 깃들어 있었다. 죽립 속에 감추어진 진무릉의 눈은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시간이 없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시 간을 자꾸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옥조영이 물러서지 않으리란 것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한편으로는 자신의 진실된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란 무인의 본능 같은 호승심이 피어올랐다. "좋소. 대선배께서 원하시는데 후배가 어찌 따르지 않으리 오." "고맙군." 고맙다는 말로 말을 마치며 자세를 잡았다. "선배의 검은 어디 있소? 혹시 심검(心劒)을 논하며 두 손 으로 상대하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천마삼검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면 검을 들어 주었으면 고맙겠소만." 그런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던 옥조영이었다. 충분히 자신 의 두 손의 실력만으로도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미안하게 되었군." 손을 들어 마차를 가리키자 마차의 구석에 세워 둔 검이 검집 채 날아 손에 들어왔다. 손을 쥐고 흔들자 검집이 날 아가 마차에 놓였다. 태양의 광채처럼 눈부신 흰 빛이 검을 감쌌다. "좋은 검이요. 그럼 후배가 먼저 손을 쓰겠소. 조심하시길." "좋다!" 뽑아 든 검을 아래로 늘어뜨린 기이한 기수식을 취하더니 새하얀 백광을 뿜어냄과 동시에 검극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 나비가 날 듯, 표흘한 검식이 하나 둘 씩 늘더니 어느 순간 뿜어내는 광채와 함께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변화가 시작되었다. 옥조영의 눈에서 이채가 발했다. 옥조영이 천마삼검을 알게된 것은 삼백년 전의 마불승과의 인연 덕택이었다. 손쉽게 마불승을 궁지로 몰아넣었던 옥 조영에게 날린 최후의 초식이 바로 천마삼검이었다. 일초(一招) 팔식(八式), 일식 육로(六路), 무려 일검 당 마흔 여덟 번의 변화를 보이는 천마삼검은 날카롭기가 독 사의 독아(毒牙)같은 검법이었다. 하지만 마불승은 천마삼 검 중 일초를 익혔을 뿐이었다. 그것도 서른 여덟 번의 변 화가 끝이었다. 허나 이 사내는 정확히 마흔 여덟 번의 변화를 펼쳐내고 있었다. 옥조영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그 순간 옥조영의 검에서 불타는 듯한 광채가 줄기줄기 뿜어졌다. 그리고 달 을 갈라버릴 듯한 호선이 진무릉의 죽립을 갈라갔다. -파팟! 엄청난 빛무리가 중앙에서 터지고 둘은 급히 물러선다. 먼저 공격한 것은 진무릉이었다. 한 차례 충돌을 통해 자 신의 화후가 현격히 떨어짐을 알아차린 그는 선제공격만이 승리의 가능성이 높음을 알아차렸다. 땅에 발을 박차고 튀어 올라 미끌어지듯 옥조영의 가슴팍 으로 돌진하며 검의 신형이 더욱 빠르게 베어갔다. 마흔 여덟 방위를 갈라 가는 가공할 위세. 검에는 이제 누 가 봐도 알 수 있는 검기가 스며 있었다. 그러나 상대인 옥조영의 검은 더 심했다. 특히 조기혜가 볼 땐 저 빛이 검기인지 검강인지 구별이 안 갈 정도로 환 한 빛을 뿜고 있었다. 스치기라도 하면 당장에라도 무엇이 든 베어 버릴 듯한 광채가 쏟아내는 검이 이번에는 진무릉 의 미간에서 사타구니를 세로로 갈라갔다. 엄청난 쾌검에 또 다시 물러서며 검을 막아내는 진무릉이 몇 발을 물러섰 다. 검식을 다 펼치기도 전에 항상 역공을 받아 먼저 막아야만 했던 진무릉이다. 그 순간 마지막으로 펼치려던 삼검 대 신 또 다시 이검을 펼친다. 기이한 보법으로 가볍게 피해 버린 옥조영이 검을 눕혔다. "왜 삼검은 펼치지 않는가?" "누구 좋으라고 삼검을 펼치겠소. 이미 선배께서는 이 검 을 견식하지 않으셨소? 후배의 마지막 밑천까지 숫째 거덜 내려 함이오?" "하하하하! 이거 들켰구먼."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얼버무린 옥조영이 한 발을 물러 섰다. 사실 천마삼검 그 자체도 무섭지만 삼검의 연환식이 야말로 무섭기 그지없음을 잘 알고 있었던 옥조영이었기에 삼검을 마저 견식할 목적이었다. 그러나 진무릉도 별 탓을 할 생각은 없었다. 무인이라면 상대의 검초를 보고 배우길 원하는 족속이 아닌가. 능력이 된다면 보고 배워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있지 만 지금 상대는 자신의 초식을 낱낱이 파해할 수 있는 고 수였다. 함부로 초식을 날리는 것은 자제해야 하는 것이다. 쾌검만으로 자신의 천마삼검을 상대한다는 데에 대해 화가 났던 진무릉이었다. 천마삼검이 변화가 많은 검술이긴 하 지만 그렇다고 늦은 검도 아니었다. 왠만한 쾌검들을 아래 로 볼만큼 빠르기도 빠르다. 하지만 옥조영의 쾌검은 그런 자신의 검을 완전히 펼치지도 못할 정도로 빠르다. 후발선수(後發先手)! 무공의 상승무리(上昇武理)를 몸소 보여주는 실력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비록 강호에서 강호인들을 상 대로 싸우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실력이 딸리는 것도 아니 다. 사문인 광천마교에서도 다섯 손에 꼽히는 실력인 자신 이 이렇게 한 수에 물러선 경우는 본교에서도 없었었다. '과연 늙은 생강.' 나이는 허투루 먹은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듯 상대는 초 식이라 부를 만한 것도 없이 단순한 속력만으로 자신의 공 격을 물리치고 있었다. 그의 늦은 공격을 막지 않으면 그 에게 상처를 입히기 전 자신이 당할 뻔했다. 한 차례 숨을 고른 직후 다시 검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 의 검에서 엄청난 기운이 발산되기 시작했다. 쾌검을 상대 할 땐 중검(重劒)이 최선이었다. "더 이상 천마삼검은 펼치지 않는가?" 갑자기 검법이 바뀐 것을 알아차린 옥조영이 입을 열었다. "검을 나누다 보면 언젠가는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때가 선배의 마지막일 것이오.' 마지막 말은 속으로 되 삼켜 버렸다. 진무릉의 검이 옥조영의 미간을 향해 쭉 뻗어 나갔다. 중 검(重劒), 무거운 만큼 속도는 느리지만 그 속에는 가공할 만한 거력(巨力)이 들어 있다. 게다가 느리게 보이지만 이 것도 상당한 속도를 가지고 있었다. 가볍게 막다가는 큰 코 다치는 게 바로 이 검식이었다. 상대의 달라진 검법에 대항하여 옥조영이 검을 들어 올린 순간 그의 검신이 파르르 떨리는 듯 했다. 그리고 하나의 검은 둘, 넷, 여덟으로 서서히 나누어지더니 순식간에 진 무릉의 신형으로 폭사해 들어갔다. 검을 쥔 진무릉의 팔목이 기이한 변화를 일으키더니 온 몸 을 감싼 검광들을 하나씩 막아낸다. 그리고는 역습으로 다 시 옥조영의 명치를 향해 쏟아 붓듯 내질렀다. 그 때 옥조영의 검식이 다시 한 번 바뀌었다. 그리고 자신 에게 쏟아지는 검신을 뱀처럼 휘감아 찔러갔다. 검을 쥔 손에 엄청난 압력을 느낀 진무릉, 순식간에 자신 의 검을 날려버릴 듯한 압력을 손에 느끼고는 내공을 가일 층 밀어 넣었다. 그러나 그 순간 공허한 허공 속에 힘을 뺏긴 듯 아무런 힘을 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부르르 떨리 는 검이 자신의 손을 벗어나려 요동치기 시작했다. "합!" 외마디 호통을 지르며 한 발을 물러서기가 무섭게 옥조영 이 자신에게로 폭사해 날아든다. 그리고 그의 왼손이 자신 의 목을, 검은 자신의 허리를 베어왔다. 순간 진무릉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옥조영의 가슴과 다리 에 빈틈이 보인 것이다. 한 순간 난 빈틈. 함정일지도 모 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미 손은 그의 통제를 벗어나 가슴 을 노리고 검을 찔러넣고 있었다. 그것도 천마삼검의 연환 식을. 검이 더욱 길어지듯 쭉 늘어나며 백마흔 네 개의 변초들이 온 몸을 덮쳐갔다. 그러나 노림수는 단하나. 그의 자궁혈 (紫宮穴)이었다. 그 순간 옥조영의 눈이 섬광을 발했다. 밀려드는 검식의 현란함은 차처하고라도 어느 것이 더욱 빠르게 날아드는 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았다. 더욱이 어느 것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맹한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빈틈은 자신이 일부러 만들어 보인 것이었지만 되돌아 온 빚은 엄청난 부채를 가지고 있었다. 세찬 검풍이 밀려들었다. 과연 마불승이 죽기 직전에도 자 랑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삼검 뿐 아니라 일검과 이검이 군데군데 보인다. 이것이 삼검연환식이었던가. 쾌검으로 빈 곳을 먼저 찔러갈 틈도 없다. 완전히 삼검이 하나의 새로운 검초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옥조영은 이를 질끈 깨물며 검을 고쳐 쥘 새도 없이 휘둘 렀다. 다른 곳은 몰라도 자궁혈을 내어 줄 순 없었다. "이얍!" 일갈을 토하며 그의 검이 변화를 시작했다. 빙글빙글 돌 듯 원이 생기더니 서서히 커져갔다. 그리고 원은 방패처럼 날아오는 모든 검식들을 휩쓸며 낸다. 변식들이 하나 둘 사그라지고 마지막 남은 검 하나가 빛을 뿜으며 가슴을 노린다. 검끝에서 피어난 원이 하나의 점 으로 변해가듯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점이 된 순간 엄청난 빛이 폭발하듯 뿜어졌다. 모든 사람들이 눈을 돌리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 빛이 가라앉자 모두 눈을 깜빡이며 중앙을 바라 봤다. 두 사람은 모두 세 발씩 물러서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을 중심으로 한 자에 가깝게 땅이 꺼져 있었고 주위로 흙먼 지가 둥글게 퍼져 휘날리고 있었다. 옥조영은 표정은 안 변했지만 속은 서늘한 기운이 몸을 쓸 고 지나간 느낌이었다. 과연 천마삼검은 허명이 아니었다. 내공도 무공의 화후도 모두 앞섬에도 불구하고 동수를 이 룰 정도로 대단했다. 허나 그것은 진무릉의 충격에 비해 약소했다. 천마삼검이 어떤 검인가? 마의 본산인 광천마교의 창시자 천마가 만든 최후의 검법이자 마의 정점에 선 무공이다. 어떤 마공도 천마삼검 앞에서는 모습을 감춘다는 말을 가질 정도로 대 단한 검법인 것이다. 당대 광천마교의 백년 내 제일 기재라 불렸던 자신이, 뼈 를 깎는 수련으로 익혀낸 검법, 천마삼검. 그런 검법이 자 신이 노렸던 먹이를 잃고 사라진 것은 처음이었다. 광천마 교의 삼장로와의 협공에서도 부서지지 않았던 연환식이다. 그런 연환식이… "과연 마불승의 말이 헛된 말이 아니었군. 대단해. 자네 덕에 오늘 안계를 확실히 넓혔군." "별 말씀을… 진정 선배님의 수법은 후배의 눈을 개안시켜 주시는군요." 두 사람이 서로를 칭찬할 무렵 천인문의 눈은 화등잔만하 게 뜨여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엄청난 무위였다. 충분히 따라 잡았다 생각했던 그의 솜씨가 저렇게도 대단 할 줄을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만큼 더 노기가 솟는 다. 어깨를 누군가 잡아오자 뒤를 돌아 봤다. 백운호였다. 눈 이 찌푸려진 게 그에게도 대단한 장면인 모양이다. "대단하군. 가히 하늘이나 펼칠 무공이구만." 부러움이 한껏 배어 있는 어투다. 자신의 무공이 그만큼 부족함을 깨달은 모양이다. 백재홍은 아내를 이끌고 마당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벽 너 머 사방을 울리는 검식의 소리가 한껏 울려 퍼지고 있었다 . 무림인들이라면 당장이라도 보러 가겠지만 자신은 상인, 무공과는 상관없는 몸이다.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다 만 안전하게 빠져나가는 게 목적이다. 아내 민예진을 벽 쪽에 붙이고는 쪽문을 바라보았다. 뒷문 으로 빠져나가려면 대청이 있는 건물의 정원을 가로질러야 했다. 거리는 삼 장 여. 숨 한 번 참고 지나가면 갈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자신을, 아니 아내를 찾는 사내도 그 곳에 있다. 잘못하면 들킬 수도 있었다. 살짝 고개를 내밀어 살피자 죽립을 쓴 사내와 한 중년인이 검을 나누고 있었다. 빛이 사정없이 뿌리는 터라 무공을 알리 없는 그가 보기엔 왠 푸닥거리를 하나 싶은 심정이다 . 그는 말없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쉼 없이 검을 나누는 어 느 순간을 포착해 공터의 빈곳을 향해 냅다 달렸다. 그녀 도 그런 그의 발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재빨리 달려온다. 가까스로 정원을 통과했다. 다행이 들키지는 않은 모양이 었다. 한숨을 내쉬고는 쪽문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후원을 빠져 나오자 이미 마차 하나가 뒷문에 준비되어 있 었다. 두 필의 말을 묶어 둔 마부석에 기다리고 있던 사내 가 급히 문을 열었다. 그들이 자리에 앉을 때 방효겸과 함 께 담공우도 급히 나타났다. 그들까지 자리에 앉자 무섭게 마부가 말을 몰아 나갔다. 재갈을 물렸는지 채찍질에도 소리가 없다. 마부는 이미 지 시를 받았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들 갑자기 닥친 일에 정신이 없는 듯 넋을 놓고 있었 다. 특히 담공우는 자신이 살고 있던 소주를 떠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픈지 연신 고개를 내밀어 멀어지는 저택 을 바라보고 있었다. 뒷머리를 마차의 벽에 기댄 백대인은 전날 방효겸이 말했 던 광동성(廣東省)의 산두(汕頭)를 떠올렸다. 연안 교역의 요충지. 거기까지 간다면 한 숨 돌릴 수 있으리라. '두 달은 걸리겠군.' 쉼 없이 달려도 두 달이다. 힘든 여행이 될 것 같다는 생 각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려오는 느낌이다. 숨을 크게 내쉰 후 아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퍼렇게 질린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마차에 기댄 몸을 벌떡 일으켰다. "왜 그러시오 부인?" "아… 아닙니다. 그냥 우리를 쫓는다 해서 긴장되었던 것 뿐입니다." "그렇소? 일단 무사히 나왔으니 마음 편히 쉬시오." 빙긋 웃음을 지어 보인 후 백재홍은 다시 마차에 몸을 기 대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풀릴 줄 몰랐다. 당황해서 빠져 나올 때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을 못했던 문 제가 떠올랐다. 자신을 찾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아내 를 찾았던 것이다. '왜 그녀를 찾는 것인가? 관에서 찾던 것이 아니었던가?' 관에서 자신을 쫓는 게 아니라면 무슨 일일까? 그녀의 과 거 때문에? 아니면 그녀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 자꾸 생각 할수록 혼란에 빠질 뿐 명확해 지는 것이 없자 백재홍은 머리를 저으며 고개를 숙였다. 백재홍은 그녀를 팔 년 전에 만났다. 처음 본 후 그녀에게 빠져 버린 백재홍이었지만 그녀의 과거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무엇을 했는지 심지어 부모가 누군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녀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그의 삶은 의미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그녀에게 머물러 달라 했다. 그녀가 바라는 것, 원하는 것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져다 바쳤다.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놀랍게 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세상 모두를 얻은 것 같 은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자신의 품에 안기던 그 날 밤 그녀는 한 가지 부탁 을 해 왔다. 그 부탁이란 영락제의 파멸이었다. 백재홍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영락제의 파멸, 그것은 바로 반역을 하란 뜻이 아닌가. 그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건 해보나 마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도박인 것 이다. 그러나 그는 그걸 알면서도 지옥의 구덩이에 발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벗어나기에는 그녀를 너무도 사 랑했기 때문에. '그녀의 과거에 얽힌 사람이던가?' 그럴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그녀가 듣지 못할 정도로 낮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마차는 쉼없이 달렸다. 고루거각이 늘어선 대로를 빠져 나 온 마차는 평민들이 다니는 길로 접어들어 속력을 줄였지 만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성문까지 내달렸다. "멈춰어라." 성문 앞을 지키고 있던 장졸 하나가 급히 창을 든 손을 들 었다. 마차의 속력이 서서히 줄어 들었다. "괜찮을 거요." 백재홍은 달달 떨고 있는 민예진의 손을 움켜쥐었다. "아직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기만을 바래야지." 방효겸이 스산한 눈빛을 발했다. -뚜벅뚜벅 발소리가 들려 오고 마부와 병졸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 누는 소리가 들렸다. "어르신!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마부의 목소리가 들리고 마차의 문이 살며시 열렸다. 그리 고 부리부리한 눈동자를 가진 병사 하나가 머리를 들이밀 었다. "천마삼검을 보니 이제 내 죽어도 여한이 없군." "정말이오 옥형?" 만족한 듯 방그레 웃음을 짓는 옥조영에게 백운호가 정말 이냐며 물어왔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아직 보고 싶은 무공이 몇 개나 남아 있는데 죽으면 되겠소?" "아직도 볼 게 남았단 말이오?" "당연하지요. 천하에 무공이 얼마나 많은데 이 정도로 되 겠소? 혈수마폭(血手魔瀑), 천룡십팔검(天龍十八劒), 달마 삼검(達摩三劍)……." 손가락을 접으며 하나씩 주절거리는 옥조영의 사이로 천인 문이 끼어 들었다. "파혈마혼(破血魔魂)은 어때요?" "오호, 그래 그것도 있구나. 아직 볼 게 엄청나게 있군. 그런데 죽을 순 없지 않겠소? 하하하하!" 능글맞은 웃음을 터트리며 껄껄대는 옥조영을 한심한 눈으 로 바라보는 백운호였다. 평소엔 정말 묵묵하고 멋진 모습 을 보이다가 갑자기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럼 후배는 이만 실례하겠소." 이야기를 하던 옥조영에게 포권의 예를 취한 진무릉이 고 개를 들어 좌우를 살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보이던 주 인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옆에 서 있던 하인 하나의 멱살을 확 잡아채자 하인의 다 리가 땅에서 떨어졌다. "민예진은 어디있나?" "소…소인은 모릅니다요." 엄청난 무위를 보인 그에게 반항 따윈 전혀 생각지도 못하 고 하인은 덜덜 떨며 고개를 저었다. "네 놈이 모른다면 그럼 네 주인은 알겠군. 주인은 어디 갔느냐?" "저… 저쪽에… 헉!" 담대인이 서 있던 곳으로 눈을 돌리던 하인의 눈이 동그래 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던 주인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 것이다. 그 모습에 이 녀석도 모르는가 보다 한 진무릉이 팽개치다 시피 집어 던지고는 주위를 살폈다. "그녀는 왜 찾는가?" 백운호와 담소를 나누고 있던 옥조영은 어젯밤 들었던 여 인의 이름이 들리자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자신을 보며 묻는 말에 진무릉의 시선이 돌아갔다. "혹시 아시는 게 있으십니까?" 기대감이 섞인 목소리였다. "다행이 내가 좀 아는 바가 있네." "어디 있습니까?" 불쑥 달려들며 단숨에 물어 왔다. 옥조영은 눈이 잠시간 꿈틀댔다. 알려주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나. "무슨 일인지 알 순 없겠나?" 그 순간 진무릉의 죽립이 흔들린 것은 착각이었을까. 그 때였다. "우리 엄마에요. 그러니까 빨리 좀 말해 줘요. 아저씨." 서혜령과 같이 있던 진미랑이 높은 목소리로 외쳤다. 옥조영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엄마라니… 어젯밤엔 분명 그 사내는 민예진을 자신의 아내라 소개했 다. 그런데 여기선 엄마라는 것은… 옥조영은 안색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따라 오게." 그리고 몸을 돌려 한 켠에 나 있던 문을 보고 걸었다. 그 의 뒤를 빠르게 진무릉이 쫓았다. "여기네." 정원을 가로지른 그들의 눈에 한 채의 건물이 들어오자 옥 조영이 턱으로 가리켰다. 진무릉이 번개처럼 날아 문을 열 었지만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크으!'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여기를 뜬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어디로…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진무릉이 몸을 돌려 급히 방을 나섰 다. 담대인을 찾으려는 것이다. 담대인은 자신의 집무실에 있었다. 조용히 앉아 있던 그는 술이 든 잔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었다. 갑자기 밖의 소란이 줄어들었다. 아마도 대결이 끝난 모양이다. '곧 여기까지 들어오겠군.' 황제를 여기서 내 보낸 그는 이제 걸릴 게 없었다. 아들도 없었고 오직 하나 황제의 복권만이 자신의 목표였다. 그 런데 그 일이 말짱 도루묵으로 돌아간 이상 이제 살 이유 가 없어진 것이다. 그는 손을 들어 잔을 들었다.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가 잔 을 들어 입에 부었다. 입가에 처연한 미소만이 가득 걸렸 다. 그 순간 문을 박차고 누군가 뛰어 들었다. 삿갓을 쓴 사내 였다. "그녀, 그녀는 어디로 갔지? 말해!" 한 걸음에 달려와 담대인의 멱살을 잡아챘다. 달관한 표정 으로 그를 살피던 담대인의 얼굴이 확 구겨진 순간 그의 입에서 피화살이 튀었다. 새하얗게 변해버린 그의 몸이 부 르르 떨리었다. 진무릉이 급히 그의 명문에 손을 대고 진기를 불어넣었다. 허나 그의 목숨은 이미 꺼져가고 있었다. "말해! 그녀는 어디로 갔냐고. 말하란 말이다." "크으! 난 몰라. 모르…" 뒤따라 들어온 옥조영이 그의 눈을 살피더니 벼락같은 손 놀림으로 담대인의 몸을 스친다. 급살한 듯 몸을 다시 덜 덜 떨던 담대인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회광반조(廻光反照 )였다. "제발 말해다오. 내 아내가 어디로 갔는지 말해." "이보게. 그렇게 흔들면 더욱 생명이 빨리 꺼질 것이네." 옥조영은 흥분해 이성을 잃은 듯이 보이던 진무릉을 급히 말리고는 담대인을 살폈다. "이보시오. 그 여자는 이 사람의 아내요. 그 백가의 녀석 이 이 사내의 아내를 뺏은 것이란 말이오. 아내를 뺏긴 남 자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겠소?" 사정을 알지 못한 옥조영이 멋대로 추측한 사실을 말하자 담대인의 표정이 잠깐 일그러졌다. 그러나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틀린 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정정할 생각은 없었 던 진무릉도 그저 조용히 담대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 시 옥조영의 말이 들려왔다. "이보시게. 우린 당신의 황제 따위에게 손을 쓸 생각은 없 네. 그러니 말해 주게. 제발 부탁하네." 옥조영의 눈을 보던 담대인의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입에서 피를 흘리더니 얼마간 부르르 떨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남쪽! 남… 성문…" 간신히 마지막 힘을 다해 말을 내뱉은 직후 그의 목이 옆 으로 돌아갔다. 유언과도 같은 말을 들은 직후 진무릉의 신형이 급히 밖으 로 뛰어 나갔다. "휴! 이젠 안전한 것 같소." 가슴 떨리던 검문이 끝나고 간신히 성문을 빠져 나온 백재 홍 등은 문이 멀리 보일 때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 었다. 아직 중앙의 정보가 내려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대로 가는 것인지요?" 담공우가 물어보자 방효겸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아버님은…" 말을 하다 말고 담공우의 시선이 떨어졌다.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어떤 결론을 취했을진 훤했다. 시간만 많았더라면… 그렇다면 그도 충분히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천려일실로 중요한 꼬투리를 잡혀 버려 도망치듯 달아나야 했다. 이젠 자금도 없다. 나올 수 있는 모든 돈줄이 막혀 버렸다. 그러나 그것이 아까운 것은 아니었다. 단지 가짜 이긴 했지만 아비로 모시며 정이 든 담성운의 죽음이 쓰라 릴 뿐이다. "힘을 내십시오 폐하!" "알고 있소. 하지만…" 그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절망어린 표정을 지으며 고개 를 저었다. 진무릉이 급히 성문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병졸 하나가 급히 창을 들어 세운다. 그러나 진무릉은 검 문 따위를 받을 생각은 없었다. 검문을 받는다 해서 반 각 이상 걸릴 것도 없었지만 그 시간도 아쉬울 따름이었다. 병사 앞까지 다가가자 그는 풀쩍 뛰어 그의 머리 위를 넘 어 버렸다. "머…멈춰라." 크게 소리치자 병졸 몇이 후다닥 검문소에서 뛰쳐나왔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 그들은 허둥대다 몇 명이 급히 관 아로 달려갔다. 그 때였다. 대로에서 마차 두 대가 급히 뛰어 나오더니 그들에게 무서운 속도로 내달려 오고 있었 다. "멈춰!" 역시 소리쳤지만 그들은 들은 채도 않는다. 오히려 더욱 급히 말을 내 몰 뿐이었다. 엄청난 기세로 달려오는 마차 에 겁을 먹고 그들은 옆으로 줄랑행을 쳤다. 중앙을 통해 그들의 마차가 빠져나가자 그들은 호각을 부르며 난리를 쳤다. 그리고 또 다시 몇 명이 급히 관아로 달려갔다. -113- 병사들로 드문드문 보이는 소주의 관청(官廳)은 한참 북경 에서 찾아온 감찰관들의 방문에 부산하고 있었다. 북경이 예정에도 없던 감찰바람에 술렁거리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 지만 이렇게 급하게 찾아올 줄 몰랐던 현감이었다. 잘못 보이면 끝장이란 생각에 버선발로 뛰어 달려나온 그 의 눈에 네 명의 인물이 들어왔다. 그 중 두 명은 알 수 없는 인물들이지만 동창의 복장이다. 그리고 나머지 둘은 감찰관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게다가 한 명은 통령(統領)이다. "어서 오십시오." "하하하 ! 그동안 잘 있었소." "통령의 염려 덕에 무사히 잘 있었습니다." "그러오." "그런데 무슨 일로…" 내려 올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빠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북경에서 모든 도시마다 내려보내는 건 아 니라서 소주까지 오려면 아직 한 달은 더 걸릴 거라 예상 했다. 그 순간 한 동창인의 복장을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여기 담대인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다고?" 눈칫밥에는 천하 무적이라는 관인들답게 이번 감찰행에서 실세가 누구인지 바로 눈치를 채 버린 현감은 버릇없는 말 투에 기분이 상했지만 이내 표정을 관리하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안내하시게." "아니 정첩형! 벌써 가 보시려구 그러시는 겁니까? 잠시 쉬었다 가셔도……." 정첩형, 아니 정사흠이란 이름을 가진 그는 감찰의 권유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설마 아직도 도망치지 않은 것은 아니겠 지요. 하지만 그래도 확신할 수 없지요. 아직 도망치지 않 았을 수도 있으니 가 봐서 없다면 쫓기 시작하고 있다면 그저 주위에서 배회하려 합니다. 그럼 알아서 도망이라도 가겠지요." 쾅! 열심히 생각을 설파하던 중 관청의 문이 부서지듯 열리며 두 관졸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니 이것들이 어디서 함부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서 있던 현감은 호들갑을 떨며 들어 서는 병사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노기를 터트렸다. 그러 나 병사들은 그런 현감의 내심도 모르는지 그저 주절거릴 뿐이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뭐냐?" "감시를 받지 않고 몇 사람이 성문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런 거 신경 쓰지 마라. 가시죠." 문제 될 게 없다 생각한 그는 감찰들을 안내하여 담대인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 어떻게 된 거지?" 문을 두드려도 나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러자 현 감이 뒤로 물러서 병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 순간 정사 흠이 손을 들었다. "됐소. 일단 확실히 도망은 간 듯하니 천천히 해도 좋소." '아니 도망을 쳤다면 서둘러야지, 서두르지 않아도 좋다고 ? 그게 무슨 말이지.' 알아듣지 못할 말에 현감은 고개를 갸웃댔지만 정사흠은 그저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문이 열리지 않자 몸을 날려 담벽을 뛰어 넘었다. 그리고 문을 걸어둔 빗장을 열었다. 문이 활짝 열리자 관졸들이 우루 루 쏟아져 들어왔다. "찾아라." "어떻게 된 거냐?" 담대인의 시체를 발견한 그는 큰 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병사 하나가 급히 아뢴다. "얼마전 담공자가 급히 성문을 빠져나갔습니다." "아니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떻게 하자는 거냐?" 노기에 찬 현감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하필이면 감찰이 내려와 있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이제 승진은 물건 너 간 것인가… 현감이 절망에 잠겨 있을 때 정사흠이 조금 전 고별했던 병사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느 성문이냐?" "남문이옵니다." 정사흠이 고개를 끄덕이다 벌겋게 달아오른 현감을 바라보 며 묻는다. "현감! 소주에 병사들이 얼마나 되오?" "아 옛! 기병(騎兵)은 서른 이옵고 병졸(兵卒)은 사백 사 십이옵니다." 얼른 고하는 현감을 보며 다시 명을 내리는 정사흠. "그들 모두를 일각 내에 남쪽 성문에 모아 주시구려. 부탁 하오." 부탁이라 했지만 명령이나 다를 바 없는 말이다. 그는 말 을 끝낸 정사흠을 보다 일각은 짧다는 것을 깨닫고는 급히 대문으로 뛰어 나갔다. "이랴." 마차 하나가 관도 위를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마부는 쉬 지 않고 채찍을 가한다. "잠시 쉬었다 가지요. 부인께서 상태가…" 담공우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민예진을 보고 있던 담공우가 말을 걸었다. 그녀의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던 것이다 . 자신도 구토가 올라올 지경인데 그녀가 쉽게 견딜 수 없 을 건 분명했다. 하지만 백재홍은 아직 불안한 듯 했다. "아직은 안됩니다. 그들이 지금쯤 쫓아오기 시작했을 것입 니다." "잠시면 됩니다." 자신이 그런 것도 아니고 자신의 아내를 챙겨주는 것에 대 해 미안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이보게. 잠시 속력을 늦추게." "알겠습니다." 마부가 말을 듣고 속력을 늦추었다. 아직도 불안한 백재홍 이 고개를 마차 밖으로 내밀어 뒤를 살폈다. 그러나 피어 오른 먼지만 가득할 뿐 아무도 보이진 않았기에 한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저기다." 한참을 내달린 진무릉의 눈에 마차 한 대가 잡혔다. 그는 더욱 속력을 내었다. -쉬쉭! 마차 가까이 다가갔을 무렵 무언가 급속히 그의 목을 노리 고 날아들었다. 이채를 발한 그가 손을 들어 날아오는 무 언가를 쳐냈다. -팍! 암기였다. 작고 뾰족한 질려(疾藜)가 가슴을 노리자 손을 들어 암기를 쳐낸다. 그 때 그의 앞에 누군가가 막아섰다. "웬 놈이냐?" 진무릉이 물었지만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단지 그는 온 신경을 자신의 상대에게 쏟아 부을 뿐이었다. 그 순간 누군가가 나타났음을 알아차린 마부가 다시 채찍 을 말에게 가한다. 마차는 다시 먼지를 피어 올리며 내달 리기 시작했다. "비켜라." 마차가 다시 달아나는 모습에, 방해를 받은 게 짜증나는지 진무릉이 노기를 뿜어내며 검을 뽑았다. 단숨에 상대를 베어버리겠다는 의도인 듯 안개처럼 서서히 피어오른 검기 가 단숨에 상대의 목덜미를 노렸다. 그러나 상대는 검기가 날아들기가 무섭게 뒤로 몸을 빼 버렸다. 그러나 한 번 노린 먹이를 놓치지 않는 뱀처럼 검은 사라지는 상대의 몸 을 계속 쫓았다. 갑자기 들려온 소란에 마차가 출발하자 백재홍이 급히 고 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조금 전 담대인의 저택에서 보았던 사내가 무웅을 공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누구요?" "우리를 쫓아 온 그 강호인이요. 그 무웅이란 사람을 공격 하는 것 같소." 방효겸의 질문에 백재홍이 조급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렇다면 이미 담대인이 죽었단 말인가? 담공우와 방효겸 도 얼굴을 참담히 구기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멈춰라." 열심히 채찍을 내려치는 마부의 귀에 우렁찬 목소리가 들 리는 순간 누군가가 몸을 날려 넘어오며 손을 내질렀다. 파팍 하는 소음과 함께 말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히히힝! 두 필의 말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푹 쓰러진다 . 눈에서 피가 나는 모습이 눈을 공격당한 듯 하다. "웬 녀석이냐?" 마차가 공격당하자 방효겸이 소리를 치며 고개를 내밀었다 . "나? 당신도 알지 않소? 옥조영이오." 열심히 마차를 몰아 겨우 쫓아오고 있던 옥조영은 진무릉 과 누군가의 싸움을 보자마자 마차에서 몸을 날렸다. 그 때 마차가 순식간에 출발하는 것을 보고는 단숨에 쫓아와 말을 격살시킨 것이다. "무엇 때문에 길을 막는 것이오? 우리가 당신에게 잘못 한 게 있는 거요?" 안면이 있던 담공우가 말을 건넸다. "그렇지는 않소. 아, 전대 황제 폐하라지만 말을 놓는 걸 용서하시게." 그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어떻게 그걸…" "나는 다만 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길 바랄 뿐이오." "소원? 그 사람의 소원이 우리의 목숨을 뺏는다는 것을 모 르시오? 미안하지만 우린 그 소원을 들어드릴 여력이 없소 ." "목숨을 뺏는다? 그럴 수도 있겠구려." 옥조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방효겸이 다급히 부탁했다. "그럼 비켜 주시오." 그러나 옥조영은 느긋하기 그지 없었다. "급할 게 있소? 이미 말은 죽었소. 무공도 없는 몸으로 말 도 없이 도망이나 칠 수 있겠소? 이왕 이렇게 된 바에 한 번 만나 보는 게 어떻겠소?" "그… 그런…" 백재홍이 망설일 때였다. 고개를 숙이고 무슨 생각에 잠겨 있던 것 같은 여인, 민예진이 고개를 들며 자리에서 일어 섰다. "만나죠." 그녀는 백재홍의 대답을 듣지 않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 다. 그리고 눈을 돌려 진무릉을 찾았다. 그는 막 무웅의 몸을 갈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무웅의 경공술은 대단한 듯 가볍게 피해 내고 있었다. '역시 대단하군. 쉽게 승부가 나질 않겠어.' 실력은 확실히 진무릉이 위였지만 경공만으로 피해 다니는 터라 결론이 나지 않고 있었다. 거기다 이성까지 잃은 듯 마차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민예진이 막 그에게 발길을 돌릴 때였다. 뒤에서 다가오던 마차가 멈추더니 그 안에서 한 여아가 폴짝 뛰어 내린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보더니 서 있던 민예진을 보고 천천히 걸어 왔다. 그녀가 막 민예진의 앞에 섰을 때였다. 민예진이 무릎을 굽혀 진미랑의 시야를 맞춘다. "어…엄마야?" 혹시나 싶은 마음에 조심스레 묻는 진미랑. 민예진은 자신 의 딸인 진미랑을 낱낱이 살폈다. 둥근 얼굴에 오똑한 코, 도톰한 입술. 어렸을 때 봤던 그 아이의 모습이 아직까지 남아 있던 모습이 눈에 잡혔다. 그녀는 갑자기 가슴이 팍 쑤셔 오는 느낌이었다. 눈에 무 엇이 들어갔는지 동그란 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엄마!" 생각이 맞았다는 듯 미랑은 민예진의 품에 와락 안겨 버렸 다. 그녀를 따라 내렸던 백재홍의 신형이 부르르 떨렸다. '아이가 있었어. 그녀에게 아이가.' 왜 자신을 쫓아 왔을까 궁금했던 그것이 풀렸다. 그녀의 아이가 엄마를 보고 싶어 쫓은 것이었다. 미랑의 외침에 정신이 들었는지 진무릉의 공격이 차분하게 변했다. 강맹 일변도로 공격해가던 검식이 화려하지만 매 섭게 변하더니 무웅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갑작스레 변 해 버린 공격에 이리 저리 부평초처럼 흔들리던 무웅의 옷 깃이 터지기 시작했다. . 무웅의 목숨이 위험하다 생각된 방효겸이 소리쳤다. "죽이지 마시오."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던 진무릉은 우뚝 서버린 무웅의 몸 을 일견하지도 않은 채 모녀가 앉아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장 앞으로 걸어온 그가 민예진을 찬찬히 살폈다. 얼마간 의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입은 열리질 않았 다. 만나면 할 말이 많았는데… 왜 떠났냐고 묻고도 싶었는데 … 보고 싶은 만큼 미움도 깊었다. 갑자기 찾아온 두 가지의 감정이 혼탁하게 섞여 어쩔 줄 몰랐다. 한참을 울며 진미랑을 끌어 앉고 있던 민예진이 눈물이 가 득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진무릉을 바라보았다. 진무릉은 턱 아래 묶여 있던 줄을 풀었다. 그리고 삿갓을 벗었다. 그러자 새하얀 얼굴에 가는 턱선이 굳게 보이는 얼굴이 드러났다. 검푸른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나고 있었 다. 갑자기 가슴속이 울렁거린 민예진이 입술을 파르르 떨며 일어섰다. -쫙! 갑자기 진무릉의 손이 올라가 그녀의 뺨을 향해 날았다. "아…아빠!" "이게 무슨 짓이오?" 보고 있던 백재홍이 버럭 화를 내며 끼어 들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이엔 그런 말이 들리지 않았는지 아무도 반응 이 없다. 뚫어져라 보고 있던 진무릉의 입에서 험악한 말이 흘러 나 왔다. "그래 딸을 버리고 떠나니 속이 시원하더냐? 눈물을 흘릴 정도로 슬펐다면 왜 떠난 거냐고?" "……" 그녀는 눈물만 흘릴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진무릉의 입에서 더욱 험한 말이 흘러 나왔다. "상인과 결혼한 걸 보니 돈이 급했나 보더군. 그래 살아보 니 돈맛이 어떻더냐?" 말이 거칠어지자 서혜령이 다가와 진미랑의 손을 잡아끌었 다. 순순히 그녀의 손에 끌려오는 진미랑이었지만 고개는 연신 두 남녀에게 돌아갔다. "썩을 년. 그래 딸을 버리고 간 곳이 겨우 상인이었나?" 눈을 떨구고 있던 그녀의 고개가 팩 돌아왔다. 독기 서린 눈빛이 그의 눈에 꽂혔다. "그래요. 난 돈이 필요했어요. 돈이 있으니 정말 편했어요 . 누구나 나의 앞에서 머리를 굽히고 왕비처럼 존경해 줬 어요. 뭐든지 할 수 있더군요. 이게 당신이 원하는 대답이 겠죠. 안 그래요?" 진무릉의 눈에서 기이한 푸른색이 더욱 일렁거렸지만 백재 홍이 아내를 바라보는 눈에는 기이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는 그녀의 행동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삶은 절약과 소박(素朴) 그 자체였다. 돈이 많다고 결코 낭비하지 않 았고, 함부로 사람들을 부려먹지도 않았다.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던 진무릉이 고개를 하늘로 쳐들 었다. "으아아아아~!" 엄청난 울음을 토해내며 소리치던 진무릉, 갑자기 손을 놀 리기 시작하자 사방이 펑펑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나자 소요가 가라앉고 사방을 휩쓸던 기운도 가라앉았 다. "아니, 아니야. 당신이 그럴 리가 없어. 난 당신을 알아. 당신이 돈을 밝힐 여자가 아니라고. 말해! 무엇 때문에 날 버렸어? 무엇 때문에 당신 딸을 버렸느냐고? 말해, 말해 봐 어서." 그의 목소리는 잠겨가고 있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결코 그녀가 말한 대로 살아갈 여인이 아님을. 그녀를 처음 만났던 곳은 광천마교가 있던 서장의 한 사찰 이었다. 한참을 울고 있던 그녀를 본 순간 너무도 가슴아 팠던 그는 그녀를 광천마교의 총타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광천마교의 교주와 삼장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원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다. 그러나 그녀는 일년만에 아이를 낳고는 소리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의 울음소리만 가득한 곳. 진무릉이 천천히 울고 있는 그녀에게로 다가가 자리에 앉 아 눈을 맞췄다. "말해 봐. 왜 감추려고만 하지? 난 당신의 남자야. 나에게 감출 게 뭐가 있다고 말을 하지 않는 거지?" "… 알려 주면 뭘 어쩌려고요? 당신이 날 도와주기라도 했 을 것 같아요?"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풋! 그래요? 무공만 아는 당신이, 날 도와 주었을 것이라 고요? 당신 사부였던 교주가 뭐라 했는 줄 알아요? 팔 백 년만의 처음 나온 초기재라 하더군요. 마교를 다시 한 번 세울 수 있는 공전절후의 인물이니 방해를 하지 말라더군 요. 당신도 똑같았어요. 당신이 나에게 준다던 사랑이 겨 우 매일 자랑했던 무공인가요? 아니면 소교주의 아내란 지 휘였나요? 나에겐 그런 건 소용없어요. 내가 필요했던 건 복수를 할 수 있는 힘이었지 당신의 알량한 교주 부인 자 리가 아니었다고요." "몇 십 년, 아니 몇 년만 참았다면 마교는 다시 중원에 왔 을 거야. 그 시간을 못 기다렸나?" "기다려요? 나에겐 그런 참을성이 없었어요. 당신은 매일 무공에 미쳐 살아가면서 매일 의무적으로 들어오는 잠자리 만 기다리면서 수십 년을 기다리기엔 나에겐 너무나 깊은 원한이에요." "후후후! 그랬나? 단지 그 뿐이었나?" "그것뿐이라고요? 당신에겐 그것뿐인지는 몰라도 나에겐 피맺힌 원한이에요. 당신의 무공이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황제를 죽여 줄 수 있나요? 아뇨. 당신은 못 죽여요. 당신 은 무공밖에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죠." "……"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이 정곡을 찌른 탓이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백재홍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는 달랐어요. 당신처럼 무공에 미치지도 않았고, 나에 게 사랑도 주었죠. 하지만 그보다 그는 날 위해 복수의 칼 을 뽑아 들었어요." "복수가 그렇게도 중요했었나? 당신의 딸을 놔두고 갈 정 도로?" "당신에겐 복수니 뭐니 해도 아무 소용없는 것이겠죠. 하 지만 난 달라요. 아버지가, 어머니가 내 눈앞에서 돌아가 시는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단 말이에요. 돌아가실 때 그 눈빛, 그 절망에 찬 눈빛. 당신이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요? 내 슬픔을 알고 있냔 말이에요." "크!" 그녀의 질책에 진무릉이 눈을 감는 그 순간 멀리서 말발굽 소리와 병사들의 달음박질치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 옥조영과 천인문 등이 고개를 돌리자 물경 오 백에 가까 운 병사들이 달음박칠 치며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중에서 선두에 달리는 사람은 정사흠이었다. 그는 멀리 세워진 마차를 둘러싸고 서 있는 인영이 눈에 들어오자 더욱 말을 내달렸다. "할아버지. 이걸 어쩌죠?" 도망을 치라 할 것인지, 아니면 여기서 그들을 맞이해야 할 것인지 천인문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모르겠다. 이 문제는 저들의 것인데 우리가 어쩌겠느냐?" "하지만 우리까지 이상하게 얽히는 것은 싫은데요." "그래도 기다려 봐라." 모두 갑자기 몰려오는 병사들의 모습에 좌불안석인 듯 심 각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방효겸이 안절부절이다. 그들의 모습이 더욱 가까워지자 그는 급히 담공우에게 고개를 돌 렸다. "폐하! 일단 몸을 피하셔야겠사옵니다." "아니오. 이미 가까이 온 것, 이대로 있겠소이다." "안됩니다. 저들의 손에 들어간다면 폐하의 정체가…" "됐다지 않소. 나만 살겠다고 달아날 순 없는 노릇이오. 그렇다고 나 혼자 달아나서 성공할 리도 없겠지만." "……" 맞는 말이다. 여섯 필의 말이 일행에서 오장 여 떨어진 곳에 세우고 뒤 따라온 병사들이 그들의 주위를 감싸며 둥근 원진을 그렸 다. "백대인! 여기서 뵙는군요." 감찰관이 웃으며 내려다보았다. "그렇구려." 감찰관과 백재홍은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다. 하지만 친분 을 내세우기엔 일의 경중이 시급했다. "이렇게 일이 돌아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소. 여기서 친함을 논하기엔 좀 그렇구려. 일단 청으로 가시지요." 백재홍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결국 모든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다. 그 결과는 뻔하다. 자신의 목숨과 아내의 목숨, 그리고 나머지들도 모두 참형에 처해질 것이다. "아내의 목숨은 구할 수 있겠지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에요. 당신?"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눈을 부릅뜨는 민예진. 그러나 감찰관은 잠시 고개를 돌리더니 대답을 미루었다. "… 확실히 대답하기엔 좀 그렇구려." 자신 없다는 소리였다. 반역이란 죄는 삼대가 참형에 처해 진다. 결코 그의 신분으로도 생명의 보장을 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백재홍은 자신의 부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만 끌고 갈 순 없소?" 그러나 이번에도 그의 입에선 원하는 답이 흘러나오지 않 았다. "불가능하다는 것 그대도 잘 아시리라 생각하오만." 말하면서 슬쩍 고개를 돌려 정사흠을 바라보는 것이 심상 찮았다. 백재홍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앞으로 걸 어나갔다. 순간 민예진의 손이 그의 어깨를 잡아왔다. '안돼요. 당신만 갈 순 없어요." 그는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얼굴 을 쓰다듬었다. "자책하지 마시오 부인! 난 당신을 사랑했소. 그리고 당신 이 행복하게 살아가길 원하오." 빙그레 웃음을 지어 보이던 백재홍이 고개를 돌려 진무릉 을 바라보았다. "부탁을 하나 해도 되겠소?" "무엇이오?" "나의 아내이자 당신의 아내를 보살펴 주실 수 있겠지요? 아니 이런 부탁을 하지 않더라도 당신이 잘 알아서 하리라 생각하오만." 난 잡히더라도 상관없으나 그녀만은 반드시 대피시켜야겠 다는 생각이었다. 진무릉의 고개가 끄덕였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정사흠이 급히 외쳤다. "반항하겠단 말인가?" 진무릉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생각해라. 하지만 그녀는 내 줄 순 없다." "후후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모두 쳐라." 오백의 병사들이 급히 쳐든 창을 내려 앞으로 겨누었다. "경고하지. 난 피를 보길 좋아하진 않지만 이번만은 다르 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사람은 덤벼도 좋다." 그는 검을 뽑아 자세를 취했다. <할아버지 어떻게 해요?> 천인문의 전음이 들렸다. <네 생각은 어떠냐?> <도와 주고 싶어요. 아니 도와 줄 거에요.> <필요 없다면서?> 살짝 놀리듯 말하자 화가 난 천인문이 전음도 잊고 소리쳤 다. "미랑이가 불쌍하잖아요." 두 눈이 동그랗게 된 것은 옥조영만이 아니었다. 민예진과 진무릉, 심지어 정사흠마저도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천인문이 화가 난 것은 이유가 있었다. 과거 천인성이 죽 었을 때 단목 미령이 따라 죽었던 일은 어린 천인문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서혜령과 함께 지내는 동안 상처는 조 금씩 아물었지만 상처의 흔적은 천인문도 모르게 흉터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서로 사랑했던 것은 어린 천인문의 입장에서도 이 해가 갔다. 하지만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그 느낌은 너무도 싫었다. 마치 지금도 혹 진무릉에게 이상이 생길까 두렵다. 민예진 에게 문제가 생길까 두렵다. 홀로 남겨져 울고 있는 진미 랑이 꼭 자신과 닮아갈까 두렵다. 온갖 생각이 가슴에서 들끓어 올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 다. "핫!" 다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손을 들어 가장 가까이 서 있던 병사의 목을 쳐갔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입에서 피를 내뿜으며 병사 하나가 날아갔다. "막아랏!" 감찰관이 큰 소리로 소리치며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모두 손을 쓰기 시작했다. 단목 수령은 서혜령에게서 받았던 편을 썼다. 일행이 모두 무기를 들고 싸우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피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천인문의 일행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손을 쓰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급히 창을 들어 그들의 공세를 막아 갔다. 하지만 일반인에 가까운 병사들이 강호인의 손속을 막을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병사들의 몸에서 피가 튀기 시작했다. 채찍이며 도(刀)와 장이 난무하자 병사들의 목숨은 하나 둘 땅을 나뒹굴었다. 서혜령과 여미릉은 살수를 극도로 자제하며 단순히 병사의 공격력을 없애는 것만 열중했다. 그러나 천인문과 백운호 는 사정없이 상대의 몸을 날려 버렸다. 그러나 가장 무시무시한 손속을 펼치는 것은 진무릉이었다 . 찬란한 검광이 빛을 뿜으며 허공을 베고 지나갈 땐 하나 의 머리통이 하늘로 치솟았다. 목이 갈라졌는지 검붉은 피가 뭉클 솟구치며 나가떨어지는 모습에 병사들의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다. "멈추시게." 목소리와 함께 무엇인가 날아와 다른 병사의 목덜미에 찌 르는 검을 때리고 떨어졌다. 정사흠의 말에 진무릉이 그를 잠시 노려본 후에 검을 다시 거두었다. 세 치 앞에서 번 쩍이는 검을 본 병사가 오싹한 살기에 후들후들 떨다 창을 떨구고 뒤로 물러섰다. "모두 물러서라. 어서." 병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급히 물러났다. 천인문 등도 그들 의 무리로 돌아왔다. 두 개의 무리로 나누어진 그들은 서 로 노려보며 대치에 들어갔다. <어떻게 하죠? 다 죽여야 하는 게 아닌가요?> 이대로 물러설 생각은 없었던 천인문이다. 그냥 물러선다 면 분명 그들은 또 쫓아오기 시작할 것이다. 그럴 바엔 아 예 온전히 몰살시켜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 <그럴 필욘 없다.> <아니 왜요? 그냥 두면 우리가 위험해져요.> <아니 지금이 좋다. 내가 일단 이야기해 볼 테니 기다리거 라.> 더 이상 들어볼 생각이 없는지 말을 자르며 한 발 앞으로 나선다. 앞으로 나선 사내가 대표격이란 것을 알아차린 정 사흠이 그를 응시하자 옥조영의 입이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 얼마간 듣고 있던 정사흠의 고개가 바로 끄덕였다. 그러더 니 그가 다시 말에 올라탔다. "모두 돌아간다." 그 말에 감찰관과 현감이 혼비백산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이대로 물러선다니요?" "안됩니다. 그냥…" "됐소. 본인이 책임을 질 테니 그만 돌아갑시다. 모두 돌 아간다." 갑작스레 떨어진 명령에 병사들은 모두 어느 장단에 맞추 어야 할지 몰라 허둥댔지만 감찰관과 현감이 포기하는 듯 한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어디 그들이 무림 인들과 싸워 본 경험이 있었겠는가? 상급자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창을 내밀긴 했지만 이제는 살았다는 표정을 지 을 수 있었다. 떨어진 창을 챙기고 쓰러져 있던 병사들을 챙겼다. 얼마간 의 시간이 지난 후 완벽하게 주변을 수습한 병사들이 서둘 러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이 조금씩 멀어지자 천인문의 몸에서 힘이 빠 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었지만 이 렇게 많은 사람을 죽인 것은 처음이다. 사방에 핏자국이 흥건히 고여 있고 피 내음이 사방에서 진 동했다. 뒤에서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손이 어깨를 짚었다. 고개 를 돌리자 진무릉의 매끈한 얼굴이 눈에 잡혔다. "고맙군." 그 말이 어색한지 말을 하고 고개를 딴 곳으로 돌려버린다 . "아뇨. 당신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그 말만으로도 진무릉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했던 미랑이가 불쌍하다는 말이 번뜩 머리를 스치 고 지나갔던 것이다.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다시 어깨를 툭툭 두들긴 것으로 감 사의 뜻을 대신하고는 몸을 돌렸다. 서혜령은 갑자기 벌어진 전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매일 같이 천인문과 동침한 것 때문인지 아니면 쉴 새 없 이 벌어진 일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던 것인지 요즘 들어 몸이 상당히 피곤했다. 비록 목숨을 거두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람의 몸을 베어 가는 것이 끔직하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사방 을 진동하는 피냄새까지… 갑자기 하늘이 하얗게 변하고 온 몸에서 힘이 빠지더니 속 까지 미식거린다. 구토가 올라 올 듯 하다. "읍!" 피비린내를 참지 못한 그녀가 급히 구토를 했다. 손을 들 어 막고 숲 언저리로 달려갔다. -114- "아니 왜 갑자기 물러서신 것이오 정첩형?" 말을 몰아 내달리는 정사흠의 뒤를 따라오던 감찰이 궁금 한 듯 물었다. 비록 병사들의 피해가 좀 있다고는 하나 열 명도 안 되는 자들이라면 충분히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 한 터였기에 갑자기 후퇴를 명한 정사흠이 더욱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마 그 중년인이 뭐라고 한 것 때문이 아닐런지요." 현감이 둘 사이에 끼어들며 말하자 감찰관이 잠시 눈을 끔 벅였다. "아 그런 거였소? 그런데 그들이 뭐라고 하더이까?" "후후! 별 말은 없었소이다. 그저 두 명의 남자가 소주 지 부를 완전히 몰살시키겠다는 말만 하더군요." "뭐...뭣이?" "헉!" 현감과 두 감찰은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봤다. "그건 역적이나 다름 없지 않소이까?" "그렇지요. 내 지금이라도 당장 그들을…" "됐습니다. 그 사람들을 쫓아가더라도 막을 수 있습니까? 제가 언뜻 보았지만 거기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저보다 강 해 보였습니다. 두 사람이 아니라 한 명만 오더라도 우리 모두는 물론 소주 지부를 다 죽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 그정도였소?" 감찰은 그제야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오히려 정첩형께서 저희 소주 병사들과 저를 살려주 신 거로군요. 하…하하하!" 다행이라는 듯 현감도 급히 맞장구를 쳤다. 그런 그들을 경멸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정사흠이 고개를 저었다. '바보들, 너희들을 살려 주려 물러선 게 아니다.' 얼마동안 그들을 노려보던 정사흠이 말을 세우며 천인문 일행이 사라진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후후! 선황(先皇)이여. 그리고 방효겸이여. 며칠 후에 다 시 보도록 합시다.' 정사흠은 사악한 웃음을 짓더니 말을 돌려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틀 간 쫓아오긴 어렵겠네요." "그렇지. 항주나 남경에서 병사들을 지원 받으려면 적어도 그 정도는 걸려야 할 게다." 피 흐르는 관도를 벗어난 것은 서혜령이 돌아온 직후였다. 마차를 타고 한참을 달린 그들이 다시 휴식을 취하기 위 해 마차에서 내린 것은 노을이 지는 저녁 무렵이었다. 숲 속에 마차를 숨기고 공터를 찾은 그들은 급히 사냥해온 토 끼 등을 다듬어 불에 올렸다. 한참 저녁을 해결하고 휴식 을 취할 무렵 단목 수령이 병사들이 조금 전에 물러섰던 이유를 물었고 옥조영은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단목 수령이 말을 이 었다. "그런데 뭐라고 하셨기에 저들이 별 말 없이 물러선 거죠?" 관과 무림의 관계나 들먹여서는 물러설 이유가 되지 않는 다. 옥조영은 가볍게 한 번 웃어 보인 후 입을 열었다. "별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두 남자가 소주의 관청을 몰 살시킬 것이라 했지." "헉! 그건 역모 아닌가요?" 단목 수령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역모라……. 맞는 말이지. 맞는 말이고 말고." "그런데 그렇게 협박을 하셨단 말씀이세요?" "무에 상관 있겠는가? 이미 이들은 반역의 무리로 내몰렸 네. 이미 그렇게 된 것 한 번 더 협박한다 한들 문제될 건 없다 생각하는데." "하지만 어르신께서도 죄인이 되지 않겠어요?" "상관없네. 내가 그런 병사들에게 잡힐 몸도 아니고 문제 될 건 없지. 쫓기다 안 되면 다시 산 구석에 몇 십 년 틀 어박히면 제까짓 녀석들이 어떻게 찾겠느냐?" 걱정할 것 없다며 손을 흔들던 옥조영이 천인문에게 고개 를 돌렸다. "문아! 무슨 일이 있느냐? 왜 그런 표정이냐?" 그러나 천인문은 그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서혜령을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색시야. 아까 구토했지?" "네! 그런데 왜 그러세요?" "그거 혹시 입덧 아니야?" 입덧이란 말에 모두들 화들짝 놀란 표정이다. 그러나 서혜 령은 별 표정의 변화 없이 대답했다. "설마요. 그냥…" "그냥 뭐? 설마 피 냄새가 역겨워서 그랬다는 말을 할 생 각은 아니겠지?" "맞아요." 확실히 피 냄새를 맡은 직후 구토가 올라오긴 했지만 그것 은 단지 피곤해서 그럴 거라 생각했다. 서혜령이 표정 변화도 없이 대답하자 천인문도 잠시 잘못 짚은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한 번 진맥이나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 내봐! 어서." "싫…어요." 별 일이야 있겠냐 생각은 했지만 손을 내 보라는 말에 서 혜령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 말 반복하게 하지말고 어서 내밀어봐." "……" 대꾸 없는 그녀의 손을 강제로 뻗어 잡아 챈 천인문의 표 정이 심각해졌다. 그러다 그의 얼굴이 환하게 폈다. "이건…" "왜 그래? 정말 언니가 임신 맞니?" 단목 수령이 궁금한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다. "처음 짚는 거라서 확신할 순 없지만 맞는 것 같아." "뭐 정말?" 환하게 핀 얼굴로 대답하자 단목 수령의 얼굴도 덩달아 밝 게 피었다. 쪼르르 서혜령의 옆으로 달려가 그녀의 손을 마주잡으며 흔들었다. "언니 축하해요." 궁소미와 매향도 그녀를 둘러쌌다. "동생 축하해. 드디어 동생도 엄마가 되겠네." 자신의 일인냥 기뻐하는 그들의 모습에 서혜령도 당황해하 면서도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언니! 모두 고마워요." "뭘요. 임신했다니 정말 아~!" 무엇을 상상하는지 단목 수령은 황홀한 표정까지 지어가며 흐뭇해했다. 그러나 옆에서 들려온 천인문의 말에 얼굴이 구겨졌다. "누나가 기뻐하는 건 이해가 가는데 이모는 할머니가 됐는 데도 상당히 기뻐하네. 그게 그렇게 좋아? 훗! 내가 이모 입장이라면 삼십도 안 되어 벌써 할머니가 된다는 건 정말 끔찍했을 걸." "뭐 할머니라고?" 할머니라니… 서혜령이 임신한 것은 확실히 기쁜 일이었지 만 천인문의 말대로 생각해 보니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니었 다. 이제 겨우 스물의 나이를 넘어선 새파란 청춘이다. 그 런 나이에 벌써 할머니라니… 그녀는 낮은 한숨을 몰아 쉬었다. 여염집의 여인이라면 충 분히 혼례를 치루어야 할 나이지만 가문의 부활이란 목표 를 세운 그녀로선 아직까지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언제까 지 이렇게 살순 없지 않는가. 가문을 생각하자 집에서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부모가 떠 올랐다. 그녀의 표정이 급속도로 변하자 서둘러 서혜령이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이젠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일단 안전하게 숨을 수 있는 곳을 찾아야겠지. 아마 우리 가 살았던 곤륜이라던가 그런…" 그 때까지 조용히 듣고 있던 방효겸이 끼어 들었다. "죄송합니다만 저희는 피할 곳이 있습니다." "거기가 어딘지 알 수 있겠소?" 옥조영의 질문에 잠시 방효겸은 생각에 잠겼다. 비록 그들 이 도움을 주었다고는 하나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 을수록 좋은 것이다. "죄송합니다만 말씀 드리기가…" "아니오 괜찮소. 말하기가 힘들다면 하지 않아도 좋소. 그 럼 이제 어떻게 한다?" "뭐가 걱정이세요?" 단목 수령의 질문에 옥조영이 잠시 방효겸 등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의 생각을 아는지 방효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도움을 주신 점은 감사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 보호해 주 실 것은 없습니다.." 옥조영은 보호란 말에 잠시 움찔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듣기엔 거슬려도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그들의 실력으로는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상당히 위험한 여정이 될 것이다. 그들을 반드시 보호해야 할 이유가 없 는 그들은 여기서 헤어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헤 어진다면 그들의 앞날은 상당히 험할 게 분명했다. "자네는 어떻게 할건가?" 진무릉의 생각이 어떤지 알고 싶었던 옥조영이 진무릉을 향해 물었다. "따라가겠습니다." 진무릉은 '그녀의 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을 때까지.' 란 말은 꾹 참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확실한 대답이었지만 옥조영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자신의 일행을 바라보았다. 여미릉과 백운호 는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없다는 표정이다. 천인문은 자신 을 바라보는 옥조영의 시선을 깨닫고 자신의 생각을 피력 했다. "모르겠어요. 솔직히 따라 가고 싶긴 하지만…" "하지만?" "색시가 임신했잖아요. 애기는 함부로 몸을 굴리는 엄 마는 아주 싫어할 걸요." "하하하! 이 녀석! 이제 정신 좀 차렸나 보구나. 이제 아 빠 될 자격이 있어. 우하하하!" 조용했던 백운호가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조용히 듣고 있던 조기혜는 씁슬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 서혜령이 임신을 했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던 그녀다. 갑 자기 천인문이 자신에게서 멀어진 느낌이다. 그러나 그렇 다고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고 싶지 않았다. 그런 비참한 감정을 느끼는 자신이 너무 싫었지만 감정이 흔들리는 것 은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꾸나. 일단 여기서 하루만 가면 남경이 다. 남경에 들어가긴 어려울 테니 아마…" 잠시 고개를 돌려 방효겸을 바라본다. "확실하진 않지만 그대들은 저 남해 쪽으로 내려갈 듯 보 이는데 남경 쪽에서 배를 타고 군산으로 갈 생각이 아니오 ?" "……!!" '아니 어떻게…….' 옥조영은 자신을 의심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방효겸에게 빙그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람들이 가장 도피하기 좋은 곳이 그쪽이니 그렇게 의심 하며 볼 것 없소. 아마도 군산이나 상음에서 내려 항산(恒 山)을 지나 광주(光州)나 복주(福州)에서 해남으로 배를 탈 듯 한데." 밤에 엿들었음에도 전혀 그렇지 않은 듯 시치미를 뚝 때며 설명을 하자 실제로도 그렇게 도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 다는 것을 알고 있던 방효겸으로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 에 없었다. 당시 해남도(海南島)는 소수 민족이 거주하는 곳이라 몸을 숨기기엔 최적의 장소나 마찬가지였다. 해적들이 그곳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도 관군의 토벌이 어려운데다 숨기엔 좋은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다. 이미 상대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하자 감출게 없다 생 각한 방효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경에서 배를 타고 광주까지 가서 거기서 우리와 갈라서 는 거요. 그 동안은 우리와 함께 가고. 어떻소?" "… 좋습니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다. 강한 인물들에게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쉽게 동의를 한다. "일단 급한 불은 껐군. 내일 새벽에 출발할 수 있게 모두 일찍 자 두게." 다음날 해가 뜨기 직전 출발한 일행들은 반나절을 달려 남 경의 외곽 지역에 자리한 종산포구에 도착했다. 포구에서 궁소미는 그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난 여기서 이만 남경으로 들어가 볼까 해." "왜요?" "왜냐니? 난 상인이야. 여행을 하고 있을 만큼 편안하진 못하다 이 말씀이지." "누나는 위험하지 않아요? 우리하고 같이 있었는데." 천인문의 질문에 잠시 백재홍을 바라 보던 궁소미가 고개 를 돌렸다. "괜찮아. 계속 마차에 타고 있었고, 잠시 누군가에게 물어 봤는데 별다른 것은 없는 것 같아. 그러니 걱정할 건 없어 . 그럼 이만 가볼께. 동생은 몸조심하고 문이는 동생 잘 보살펴야 해 알겠지?" "그럼요. 걱정 말아요." "언니! 조심해서 가세요." 천인문과 서혜령이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잘 있어. 어르신들도 다음에 뵙도록 하죠. 그럼 마 부! 출발해요." 궁소미의 인사가 끝나자 마부는 다시 말을 몰아 나갔다. 마차는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가며 조금씩 멀어져갔다. 궁소미와 헤어진 그들은 곧 포구에서 배를 찾기 시작했다. 남경까지 무사히 오긴 했지만 아직은 안심할 수 없었다. 이미 자신들의 행색에 관한 내용이 이곳에 전달되었을지도 모르는 입장이었다. 극도로 조심하며 배를 찾아 나선 그 들은 두 시진을 넘어서야 겨우 배 한 척을 빌릴 수 있었다 . 단속이 심해졌는지 뱃값은 엄청났다. 평소라면 금자 한 냥이면 충분할 배를 무려 열 냥이나 주고서야 겨우 빌릴 수 있었던 그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올라 탈 수밖에 없었다. 어로를 하는 배치곤 상당히 큰 배였지만 범선이나 유람선 따위가 아니라 그런지 상당히 불편했다. 군산까지는 적어도 일 주일이 이상 걸릴 여로였다. 충분한 음식 따위는 준비하지 않았기에 중간중간 보급을 할 생각 으로 무조건 출발시켰다. 여행은 편안했다. 며칠 후 파양호( 陽湖)를 지나며 다시 보급을 한 그들은 처음과는 달리 느긋하게 풀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불안과 공포가 그들을 찾아오긴 했지만 별다른 공격은 받질 않았다. 그렇게 오일 동안 배를 타고 나가던 그들의 눈앞에 동정호의 거대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후와! 역시 동정호는 대단한데." "여기 와 본 것처럼 말하는구나." 옆에서 동정호를 구경하던 백운호가 고개를 돌렸다. "와 봤죠. 저쪽에 있는 악양루(岳陽樓)에도 올라 봤는데. 거기 용봉탕이라던가? 잉어탕 먹고 있을 때 수령 이모가 불쑥 들어와서 말이죠." "야! 너 입다물어." 갑자기 옛 생각이 난 천인문이 주절거리자 단목 수령이 눈 을 들어 쏘아 봤다. "뭘 그래? 별 부끄러운 것도 없었으면서." "그래도 다물어." 갑자기 총관이 떠오른 그녀, 연이어 부모님의 생각이 떠올 라 눈시울이 붉어졌다. "알았어." 코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리는 천인문. 방효겸의 얼굴을 바 라보자 그도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고개를 돌리는 천인문의 귀로 방효겸의 낮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무황성!" 천인문이 고개를 돌렸지만 방효겸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 지 어느 한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형양(衡陽)! 자신의 계획을 망쳐버린 사파의 거두들의 집 합소인 무황성이 있는 곳과도 가깝다. 너도나도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 동정호의 갈대를 바라보며 정취에 젖어 있을 무렵 어디선가 쾌속선 여덟 척의 모습 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지?" 갑자기 배들의 속력이 서서히 오를 때까지만 해도 별 신경 을 쓰지 않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나타난 배의 방향이 그 넓은 동정호에서 자신의 배로 향하자 선주의 눈이 자꾸 커 졌다. 날렵한 배의 모습이 서서히 크게 잡혔다. 그 중 중 앙에서 미끄러져 다가오는 배는 타고 있는 배의 네 배는 될 정도로 거선(巨船)이었다. 그 위에는 눈에 확 들어오는 붉은 호랑이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자…장강십팔채(長江十八寨)…" 동정호를 주름 잡는 장강십팔채의 배가 나타나자 선주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붉은 호랑이를 쓰는 곳은 동정호에 자리한 세 개의 채 중 하나인 적호채(赤虎寨)밖에 없었다. "오호라. 저 녀석들이 장강십팔채? 그런데 왜 이쪽으로 오 지? 우리를 뜯어먹으려는 건가?" 농담조로 몇 마디 던지는 천인문이었지만 마음은 불안한지 조심스레 서혜령에게 시선을 던졌다. "일단 색시는 위험하니까 들어가 있어." "아니에요." "어허! 들어가라니까." 들어가기 싫다는 그녀를 억지로 차양 아래로 밀어 넣은 천 인문을 보고 있던 조기혜는 눈을 들어 배로 시선을 던졌다. "얼마든지 오라고 그래. 이 단목 낭자께서 채찍 맛을 단단 히 보여주지." 얼마 전 있었던 관병과의 전투에서 자신이 배운 편법(鞭法 ) 만화가무(萬化歌舞)를 맘껏 써 본 단목 수령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두들 그녀의 말에 빙그레 웃 음을 지었다. "싸우고 싶은 모양이네만 참아 주게." "예? 그게 무슨?" "함부로 싸울 필요가 없단 뜻일세. 싸워 보았자 우리의 행 적만 노출될 뿐이네. 웬만하면 그냥 돈으로 타협하는 편이 좋을 것 같네 그려." "그… 그런…" 옥조영의 말에 실망한 듯 단목 수령이 고개를 저었다. 그 러나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자기들은 지금 도피 중이다. 아무리 상대가 약하더라도 필 요 없는 싸움은 하등 도움 될 게 못 된다. 그것을 알기에 모두들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모습이다. "황금 열 냥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방효겸의 말에 옥조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 타고 있는 배는 어선. 열 냥 이상은 가져가지 않을 게 분명했다. 하 지만 볼이 난 단목 수령이 투덜거린다. "백 냥을 달라 할 지도 모르죠. 아무리 어선이라 해도 타 고 있는 사람들 모습을 한 번 보라고요. 우리가 어디 어부 같이 보여요? 한 몫 단단히 잡으려 할 걸요." "하하하! 그렇게 되면 직접 손을 쓰면 되지 않느냐?" "정말이죠." 그제야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런 모습에 긴장하 고 있던 모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때였다. -쏴라! 긴장이 풀어지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어디선가 들려온 목 소리에 깨져 버렸다. 그리고 둘러싸듯 횡대로 늘어서 밀고 오던 배에 몸을 감추고 있던 사내들이 화살을 들고 나타 나 벼락같이 화살을 쏘아 댔다. 아무런 협박도 없이 날아온 갑작스런 공격. 모두들 깜짝 놀라 급히 무기를 들었다. 엄청나게 쏟아지는 화살들이 뱃전으로 날아왔다. 물경 수백 대는 넘어가는 화살들이 한 척의 소선에 쏘아지자 그들은 정신을 차릴 수 가 없었다. "아악!" 막 차양으로 피하던 민예진의 팔에 화살이 날아 박혔다. "부인! 부인! 윽!" "엄마!" 백재홍이 쓰러지는 그녀를 붙잡는 순간 또다시 날아온 화 살 한 대가 그의 등판을 꿰뚫어 버렸다. 밖으로 나오던 서혜령이 급히 화살을 쳐내며 두 남녀의 몸 을 받아 안으로 들였다. 진미랑도 급히 엄마를 부르며 안 으로 뛰어 들었다. 그 모습에 진무릉의 신형이 부르르 떨 렸다. "이익!" 갑자기 그의 몸을 둘러싼 살기가 엄청난 기세로 뿜어졌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안개처럼 핏빛의 광채가 그의 몸을 둘 러싼 순간 그의 신형이 쏘아졌다. 적선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허리에 차인 검이 뽑히며 수적 들의 목이 하늘로 날았다. 천인문이 안으로 들어 상처를 살폈다. 복부를 꿰뚫고 나온 화살촉으로 보아 백재홍은 살리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민 예진의 상처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절레절레 고 개를 저어 보이는 천인문. 숨이 넘어가는 백재홍이 안색을 찌푸리며 다가온 민예진의 뺨을 어루만졌다. "부인! 왜 우는 거요. 울지 마시오." "안 되요. 난 당신을 이용만 하려 했어요. 그런데 나에게 빚을 갚을 기회도 주지 않고 그냥 가려는 건가요?" "빚이라니… 부부 사이에 빚이라니 거 무슨 가당치도 않은 말이오. 나는… 말이오. 당신을 만나 산 팔 년 간이… 헉 헉… 정말 내 생애 최고의 날이었소. 그것만으로도 난 기 쁘오." "흑흑흑!" "당신도 빨리 화살을… 헉… 헉… 이… 이보…게. 내 아… 아내… 화… 화사… 살…" 백재홍의 숨이 점차 급격해졌다. 안색도 시퍼렇게 물들 듯 변해가고 있었다. 죽기 전이라 생각해서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천인문이 그녀의 안색까지 조금씩 퍼렇게 변해 가 는 모습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당황한 천인문 이었지만 팔에 꽂힌 화살촉을 부러트리려 잡아가던 순간 천인문이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독이다." 반짝거리는 화살촉이 시퍼렇게 빛나는 것이 알 수 없는 독 이 발라져 있었다. 천인문은 급히 그녀의 어깨와 팔뚝에 혈을 눌렀다. 조심스 레 화살촉 끝을 부러뜨리고 그녀의 팔에서 깃대를 잡아 당 겨 뽑았다. 피가 터지며 그녀의 팔에서 화살이 뽑혔다. 잠시 뽑아 낸 화살촉의 냄새를 맡았다. 그러나 이내 고개 를 흔들고는 차양 밖으로 뛰어 나갔다. "네 놈이 대장이냐?" "제… 제발 살려 주시오." 목을 잃은 수십의 시체 가운데 유일하게 선 진무릉이 마지 막으로 남은 녀석을 잡아챘다. 한 무리의 대장이란 녀석이 몸을 부르르 떨며 말하는 모습은 추악했다. "네 놈이 한 일을 알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목울대를 잡아 번쩍 들어올렸다. 두 다리가 땅에서 떨어진 그는 숨이 막히는지 새파랗게 질리며 손발을 휘저었다. "내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시체만은 보존할 수 있게 해 주 지. 잘 가거라." 단숨에 검을 들어 사내의 목을 베어갔다. 막 검 날이 목을 가를 때였다. "멈춰요." "……?" "독이에요. 해독제를 받아야 해요." 천인문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든 진무릉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약은?" "켁켁!" 숨이 턱밑까지 달아오른 사내가 발버둥을 쳤다. "해약은 어딨는가? 두 말하게 하지 마라." 그러나 여전히 멱살을 잡힌 사내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숨 이 넘어갈 듯 컥컥대자 진무릉이 집어 던지듯 땅에 내려놓 은 뒤 사내의 두 발을 밟아 버렸다. 우드득하는 소리와 함 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말해라. 어서. 해약은?" "아아악! 없소. 그들이 약만 주었소. 제발…" 도리질을 하며 소리치는 사내의 말에 그의 목을 다시 잡아 챘다. "그들이라니. 그들이 누구냐?" "그… 어떤 관인이 무황성의 독객하고 같이 왔다 갔소. 그 들이 준…" 그 때였다. 타고 왔던 소선에서 비명이 터졌다. "엄마! 안 돼." 딸의 울음소리에 순간 노화가 치민 진무릉이 사내의 목을 검으로 쳐버렸다. 잘린 머리통이 하늘로 빙글 치솟다가 갑 판에 떨어져 굴렀다. 진무릉이 날아 다시 배에 돌아왔을 땐 그녀는 새파랗게 질 려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를 껴 앉고 울음을 터트리는 진 미랑의 옆에 이미 목숨이 끊어진 백운호의 모습이 보였다. "부인!" 한 달음에 달려와 그녀의 목을 받쳤다. 간신히 눈을 떠 눈 앞의 사내를 확인한 민예진.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짜내며 입을 열었다. "이… 이렇게 가게 될 줄은 몰랐네요." "말하지마. 내가 반드시 살리겠어." 그녀의 요혈을 손으로 짚던 그는 그녀를 자리에 앉히고는 천인문에게 호법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것이 불필요한 일 임을 천인문은 알고 있었다. 어떤 독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그녀는 내공으로 독을 밀어내기에 너무 늦은 것 같았다. "아저씨! 그만 두세요." "무슨 소릴 하는 게냐?" 화를 버럭 내며 고개를 돌렸다. "…… 유언이나 들어 보시는 게…" "아니야. 그녀가 죽을 리가 없어. 죽이지 않아. 내가 반드 시 살리겠어." 이글대는 눈을 들어 그녀의 명문혈에 장심을 붙이고는 내 공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녀의 피부는 더욱 파 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안 돼. 죽으면 안 돼." "… 미안… 했어요. 그래도 당신을 사랑… 했는데…" 처연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민예진이 힘없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 난 나쁜… 엄마… 나쁜… 아내… 우리… 미… 미랑 … 이를…" 가빠오는 숨을 몰아쉬던 그녀가 공허한 눈으로 미랑을 찾 았다. "엄마 죽지마." 그녀의 팔을 잡고 매달리듯 흔드는 진미랑의 뺨에 민예진 의 손이 닿았다. "미랑…아… 아빠… 말 잘 듣…들…" 마지막 말을 맺지 못한 그녀의 머리가 옆으로 푹 꺾여 버 렸다. "으아아아아! 안 돼." 고함이 터져 나왔다. "죽인다. 모두 죽여 버리겠다." 피로 물든 듯 진무릉의 몸이 불게 타오르는 순간 그의 신 형이 사라졌다. 그리고 배에서 들리는 비명소리. 그는 사정없이 수적들의 목을 쳐 날리고 있었다. 망설일 게 없었다. 눈에 보이는 족족 쳐 버렸다. 보기에도 끔찍한 살성의 모습에 수적들은 급히 소리쳤다. "으아악 도망가!" 수적들은 급히 물 속으로 몸을 날렸다. 완전히 그들의 모 습이 물 속으로 사라지자 한참 손을 쓰고 있던 옥조영과 백운호, 단목 수령이 돌아왔다. 그들도 화가 났던지 온 몸 에 피가 튈 정도로 사람들을 베고 다녔던 모양이다. 돌아온 그들은 쓰러진 두 명의 시체를 보고는 눈을 찔끔 감았다. 이름 없는 야산에 두 개의 봉분이 솟았다. 흔해 빠진 묘비 하나 없는 묘엔 진미랑이 딴 꽃 한 송이만이 덩그러니 놓 여 있었다. 봉긋한 묘 옆에는 한참을 울다 지쳐 잠이 든 진미랑이 누 워 있었고 진무릉은 계속 무덤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 그런 그의 모습에 일행들은 모두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 볼 뿐 아무 말도 건넬 수 없었다. 하늘이 어둠으로 물들고 반으로 나뉜 달이 서서히 떠오를 무렵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진무릉이 천천히 일어나 더니 무황성이 자리한 형양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복수하겠다. 무황성" 피를 토하듯 울분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옆에서 보고 있던 그들은 더욱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기다려라. 내 다시 중원에 돌아오는 날, 그 날로 너희들 의 목숨은 영원한 말살이다." -115- "휴! 좋은 인연이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헤어 지고 나니 아쉽긴 하네요." 그들은 떠나갔다. 간다는 말도 없이 불쑥 사라져 버렸다. 아침에 눈을 뜨고 난 후 종적을 감추어버린 탓에 잠시 혼 란에 빠져 있던 일행들은 다시 출발을 하기로 했다. 배에서 습격을 받은 탓에 행적이 노출되었다 생각한 옥조 영은 동정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등청현(登廳縣)을 들 러 말을 구입했다. 모두 여덟 필의 말에 흑풍까지 모두 아 홉 필의 말이 관도위를 달려나가자 뽀얀 먼지가 사방으로 나부끼기 시작했다. 소주를 벗어나 두 번의 공격을 받았던 탓인지 그들 사이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다행히 첫 번째는 별 탈 없이 끝났지만 두 번째 공격에서는 두 명의 목숨이 사라 져 버렸다. 그것도 무공을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 직 무공을 모르는 두 명의 인물이 더 있다. 옥조영은 흘끔 뒤따라오는 방효겸과 담공우를 바라보았다. 비록 보호를 받는다고 해도 무공이 없는 그들로선 위험하다. 어떻게 해 야 할지 고민을 하느라 옥조영은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 작했다.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방효겸도 담공우 의 문제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좋은 생각만 하려 해도 자꾸 나쁜 생각들만 떠올랐다. 떠오르는 나쁜 상념들을 지 우려 고개를 저었지만 사라질 줄을 몰랐다. '폐하만이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폐하만이라도 안전해야 하는데. 폐하께서 살지 못하면 우리는 모두 다 끝이다.' 뭉칠 수 있는 중심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켜져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한참 상념에 잠겨 있던 그 순간 분노가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굴까요? 누가 감히 우리를 공격하는 거죠? 독만 해도 그래요. 그 독은 아무나 쓸 수 있는 독이 아니었어요. 적 어도 독에 관해 해박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구하기 어 려운 독이었어요." 진무릉과 적호채의 두목이 나누었던 이야기를 알지 못한 천인문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노부도 모르겠구나." "분명 강호인들이에요. 그들이 아니고서 그런 독을 쓸 줄 아는 사람은 없을 게 분명해요." 천인문이 단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왜 무림인이 우리를 공격하지? 우리가 특별히 강 호인들에게 잘못 한 거라도 있나?" "……" 옥조영의 질문에 천인문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대로 강호인이 그들을 공격할 이유 라곤 없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몇 가지 의문점도 찾 을 수 있었다. 적호채에서 평범한 한 척의 어선을 둘러싸 고 공격을 한 점이라든지 살상을 목적으로 화살에 독을 바 른 점, 그리고 그렇게 강한 독을 어떻게 구했느냐 하는 점 이었다. "그들은 어때요? 소주에서 만났던 관부인들." 옆에서 말을 달리던 단목 수령이 물었다. "하지만 그들은 관부의 인물들이다. 무림인들에게 어떤 영 향을 미칠 수가 없…" 순간 옥조영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반짝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그들이 관의 인물이니 직접적으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곳 은 없다. 다만 정화의 원정단에 도움을 주었던 정파의 무 리들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독은 당문에서나 찾아 볼 수 있을 텐데. 당문 이 아무리 부탁을 받더라도 그런 독을 관에 내어줄까? 아 니야, 그럴 리가 없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그럼 어 디지? 혹 무황성인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였다. 비록 싸우기는 했지만 마 지막엔 무황성의 인물이 관군을 공격한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끌고 오지 않았던가. 정파에서는 당문이나 겨우 찾아 볼 수 있을 법한 독이지만 무황성같은 사파라면 그런 독도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어제 저녁 무렵 봉분에서 진무릉 이 속삭이듯 중얼거린 말이 번뜩 떠올랐다. "그래! 무황성이었어." 확신에 가까운 어조로 대답하자 일행의 시선이 모두 그에 게로 쏠렸다. 옆에 있던 천인문이 의문을 표했다. "예? 무황성이요?" "그래! 무황성! 그들은 관에 죄를 졌지. 그 일로 죄를 사 해 주겠다는 명목으로 관에서 도움을 청했을 거다. 그렇게 되면 말이 되지. 그 독도 어떻게 나타난 것인지도 설명이 되고 말이지." "그럼 우리 적이 무황성이란 말인가요?" "그렇게 된 것 같구나." "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뭘 말이냐?" "무황성이 적이라면 쉽게 벗어나긴 어려울 것 같은데요." "일단 그들의 목표는 정확하게 말하면 저들…" 말을 하다 그들의 시선을 느낀 옥조영이 입을 잠시 다물었 다. 방효겸등의 시선이 사라지자 그가 말을 늦추었다. "저들뿐이다. 아마 관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저들이니 까." "그럼 우리는 안전한 건가요?" "그렇지는 않을 게다. 하지만 항산(恒山)을 넘어 가면 일 단 추적의 손이 쉽게 미치진 못할 게 분명하다. 산이 높고 험준하다 보니 추적이 힘들어지겠지." "그래도…" "광주(光州)에만 도착하면 그들은 안전하다. 더 이상 무황 성도 쫓지 못할 게고 우리는 우리의 갈 길을 가면 되는 것 이다." "그냥 헤어지는 건가요?" "그럼 뭘 바라는 게냐? 아예 해남도까지 호위해서 갈까? 그리고 네 아내 생각도 해야지. 아직 몇 개월 되지 않아 그리 급할 건 없다지만 이렇게 말에 오래 타고 있는 것은 몸에 안 좋다." "그건 저도 알아요. 그래서 흑풍이한테 태운 거잖아요." 처음 출발할 때 천인문은 서혜령을 생각하여 흑풍에게 타 도록 했다. 처음에는 흑풍이 반항하며 태우지 않겠다고 반 항을 했지만 채찍과 당근을 잘 섞어가며 달랜 결과 설득할 수 있었다. 흑풍은 안정감이 다른 말에 비해 상당히 좋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장거리 여행이 그녀와 태아에 좋을 리가 없었다. "잠시 쉬었다 가요." 힘들어 보이는 서혜령을 생각해 휴식을 이야기하자 모두들 동의를 했다. 방효겸은 시간을 허비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자신을 지켜주는 터라 불평을 할 수도 없었다. "아마 또 오겠죠?" 서혜령에게 편안한 자리를 내어 준 후 다가와 묻는 천인문 에게 옥조영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럴 게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와 헤어진 후엔 공격이 더 욱 심해지겠지." 그의 말에 천인문도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항산의 초입에 이를 때까지도 공격 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꾸 피로해져 갈 수밖에 없 었던 것은 쉬지 않고 말을 탄 것도 있지만 휴식 때도 언제 공격을 받을지 몰라 전전긍긍대며 눈을 부벼야 한 탓이 더욱 컸다. 그것은 특히 방효겸의 경우에 심했다. 무공도 없는 데다 지켜야 할 사람에 대해 신경을 쓰는 터라 그의 몸은 눈에 띠게 말라갔다. 그러나 모두 그런 그를 위로하거나 걱정하며 속력을 늦추 는 일은 하지 않았다. 항산(恒山)! 예로부터 달래나물이 많아 상산(常蒜)이라 불린 항산은 오 악(五岳) 중 하나답게 산세가 험준한 산이다. 험하기는 하 지만 여러 시인묵객(詩人墨客)들과 명문으로 알려진 항산 파(恒山派)를 찾는 강호인이 끊임없이 발길을 내딛는 곳 중에 하나였다. 혼원현(渾源縣)을 출발한 그들은 곧 항산의 자락에 접어들 수 있었다. 멀리 구름을 안은 채 신비로운 자태를 감추던 항산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들어왔다. "이제 다 왔습니다. 저 산만 넘으면." 방효겸이 눈을 들어 산을 보았다. "그럼 출발합시다." 다시 옥조영의 말에 그들은 말을 몰았다. 그러나 산길에 접어들 때부터 그들은 말에서 내려야 했다. 흑풍도 간신히 나아갈 정도로 험준한 산세였다. 게다가 산을 넘기엔 너 무 길이 최악이었다. "이것도 길이라고 헉… 헉!" 돌부리가 여기저기 채이며 잡초와 무성한 나뭇가지가 길을 덮고 있었다. "잠시 쉬었다 가죠." 그들은 서혜령의 나쁜 안색에 휴식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방효겸이 입을 열었다. "일단 여기를 지나면 작은 골짜기가 나옵니다. 보통 산을 넘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쉬었다 산을 넘는 곳이지요. 쉴 만한 공터도 있고, 작은 연못도 있으니 일단 거기까지라도 가서 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얼마쯤 걸리죠?" "반 각 정도 걸릴 겁니다." "그럼 그렇게 해요." 서혜령이 나서 먼저 선수를 치자 모두들 쉬고 가자는 말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험준한 산길이 평탄 해지더니 오십 여명 남짓의 숫자가 쉴 수 있는 골짜기가 나타났다. 양쪽으로 십 여장이 조금 넘어 보이는 절벽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모두들 그가 말한 장소가 나오자 모두 자리에 주저앉았다.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담공우의 옆으로 가 수통을 내밀 던 방효겸. "폐하! 이제 다 왔습니다. 조금만 힘내십시오." 항산을 넘으면 자신들의 복위단이 자리한 골짜기가 나온다 . 그 곳까지 무사히 간다면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 나 그것은 그만의 생각이었다. "하하하! 어서 오시게." 머리 위에서 울려 퍼진 호쾌한 소리에 그들은 모두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왼쪽 절벽 위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자… 자네는…" 옥조영이 선두에 서서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인물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소주에서 만났던 그 관복의 사내였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소이다. 헌데 이걸 어쩌리오. 여기가 그대들의 무덤이 될 곳이니." 정사흠이 굳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하하!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곧 알 수 있을 것이오. "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의 손이 하늘로 올라갔다. 순간 사 방에서 활을 든 수많은 병졸들이 불쑥 나타났다. 모두들 시위를 당기고 그들을 겨누고 있었다. "혹시 동정호에서 그들을 부른 것도 당신이었소?" 이왕 이렇게 된 것 궁금증이나 풀어보자는 심산으로 옥조 영이 되물었다. 정사흠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소. 물론 본관이 직접 간 것은 아니지만 태감의 서찰 을 건네 준 건 나의 부하가 한 일이니 본관이 했다고도 할 수 있소." "무엇 때문에 우리를 그냥 보낸 거요? 동정호에서 충분히 제거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오?" "많이 궁금한 모양이구려. 설명해 드리겠소. 본관은 정화 태감께 한 가지 전해들은 게 있소. 이번 원정대에서 자신 의 무리를 도와 주었던 한 사내를 말이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옥관에 달렸던 작은 호차 하나를 선사했다는 말까 지 말이오. 그런데 저 부인께서 그걸 가슴에 달고 계시더 군요. 그래서 그 분이 혹 당신들의 무리가 아닐까 생각했 소." "그래서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다는 말이구려." "그렇소. 당신들은 이미 나라에 공을 세웠소. 그렇기에 상 은 주지도 못할망정 벌을 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소. 원래 본관은 당신들이 저들과 그냥 헤어지기만을 기다렸을 뿐이 오. 그래서 적호채를 이용하면 충분히 떨어 낼 수 있으리 라 생각했소. 불행히도 그렇게 되지는 못했지만 말이오." "그럼 독을 제공한 것도 당신이요?" 이번에는 천인문이 질문을 던졌다. "소개해 줄 사람이 있소." 그의 말에 그의 옆에 웬 곱상한 노인 하나가 능글맞은 웃 음을 띄고 나타났다. "이 분은 무황성에서 독전(毒殿)을 맞고 계신 독객 황정이 라 하시오. 이번에 한 팔 크게 도움을 받고 있소이다." "이렇게 갑자기 나타난 이유는?" 핵심을 찔렸는지 잠시 머뭇거리던 정사흠이 얼마 후 입을 열었다. "이제 더 놓아 둘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오." '놓아두었다? 그럼 지금까지는 일부러 놔두었단 말인가?' 의문이 들었지만 질문을 하진 않았다. 옥조영이 다시 천인 문의 뒤를 이었다. "그럼 우리도 죽이겠다는 뜻인가?" "지금이라도 고이 물러난다면 그냥 보내 드린다 약속하겠 소. 하지만 가기 싫다면 할 수 없지 않겠소. 공을 세웠다 하나 여기서 죽는다면 누가 죽였는지 어찌 알겠소?" "흥! 너 바보 아냐? 우리가 저 따위 화살에 맞아 죽을 걸 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야." 백운호가 껄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후후! 될지 안 될지는 두고 보면 알지 않겠소? 쏴라!" -파팍! 화살이 또 비 오듯 쏟아졌다. 골짜기답게 화살을 피하기엔 무리가 없어 보였다. 모두 엄폐물로 몸을 숨긴다. "옥형!" 백운호가 눈빛을 보내자 옥조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 나 공력을 끌어올리던 그 순간 그들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 졌다. 갑자기 내공이 흩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이건!" 산공분이었다. "하하하! 왜 공격을 하시지 않소? 아니지,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것 아닌가요? 이젠 아시겠소? 그대들의 손으로는 어 떻게든 이 곳을 빠져나갈 수 없소." "이런 비열한…" 분노를 참지 못한 백운호가 길길이 날뛰었지만 별 수가 없 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내공이 한 점도 모이질 않았다. 무공이 없는 방효겸은 사태가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대략 그들의 얼굴에 나타난 절망감을 보고 일이 잘 못 되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품속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더니 하늘로 손을 치켜올렸다. -펑! 손에서 무언가가 쏘아지자 하늘로 올라간 그것은 노란빛과 푸른 연기를 내뿜으며 터져 버렸다. 신호탄이었다. "우하하! 마지막까지 발악을 하시는구려. 하지만 이걸 어 쩌나. 마지막까지 실망을 안겨 드려야 할 텐데." "……" 그 말이 끝나자 그들과 함께 있던 곳에서 누군가의 모습이 다시 드러났다. 그의 뒤에는 붉은 옷을 입은 사내 하나가 밧줄로 포박되어 끌려오는 있었다. "저, 저들은." 방효겸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식으로 커졌다. 분명 저들 은 자신이 키운 복위단의 대장이 분명했다. 그런데 어떻게 저들에게 잡혔단 말인가. "하하하! 알겠소? 왜 실망하게 된 것인지. 모를 리가 없지 . 당신이 키운 그들이 왜 우리와 있는지 말이오." "어떻게 그들을…? 독으로 잡은 것인가?" "그렇소. 잘 알고 계시구려." "아니 믿을 수 없다. 어떻게 너희들이 그곳을 알고." "하하하! 그거야 당신이 가르쳐 준 것이 아니오. 우린 단 지 자네의 인도를 받아 따르던 중 마지막에 조금 더 빨리 왔을 따름이오." "인도라니. 우리가 언제 네 놈들을 인도했단 말……. 그, 그럼 혹시 누군가가." 길길이 화를 내던 방효겸이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서서히 일행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럴 리 없어. 우리 안에는 배신 한 사람이 있을 리 가 없지.' 확신을 가지고 고개를 젖는 그의 모습에 정사흠이 코웃음 을 쳤다. "믿기 어려울 걸로 생각하오만 사실은 사실이니 어쩌겠소. " "그 말을 믿으라는 게냐? 헛소리다." "후후! 생각은 자유이니 더 말하진 않겠소. 그럼 이제 남 은 일이나 해결해 볼까요? 그만 항복하시오." 최후의 통첩이 그의 입에서 떨어졌다. 방효겸은 모든 게 끝났다는 듯 절망의 표정으로 고개를 떨 구었다. 그러나 마지막 수단이 남았는지 그는 오기가 그득 한 시선을 들어 정사흠을 쏘아보더니 옆에 있던 담공우를 주시했다. "폐하! 폐하께선 반드시 사셔야 합니다." 그러나 절망에 차 있던 담공우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다 죽었소? 날 위해서 말이오. 그런 데 나보고 살아 남으란 말을 하는 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소." "무슨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폐하께서 사셔야 후사를 이 을 수 있습니다." "됐소. 숙부께서 잘 알아서 하실 게요." "무당의 황요진을 잊으셨습니까? 아직 우리에겐 숨은 힘이 있습니다." 그의 말에 담공우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어리었다. 방효겸 은 고개를 돌려 옥조영 등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도와 주시겠습니까?" "어떻게 말이오? 우린 이미 내력을 잃었소. 한 시진만 있 다면야 내력을 회복해 뚫을 수 있을 진 몰라도 그 시간을 그들이 줄 리가 없지 않소." 백운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마지막 수단을 써야지요. 저들까지 잡힌 마당에 더 바랄 수 있는 건 없다지만 폐하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모셔야 합니다." 비장한 각오가 어린 말에 옥조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부탁합니다." "최선을 다해 보겠소."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인 그는 품에서 또 다른 물건을 꺼내 자마자 절벽으로 집어 던졌다. 내공이 없는 그의 단순한 근육의 힘으로 집어 던진 물건은 팔 장 여를 날아올라가다 서서히 속력이 떨어졌다. "벼…벽력탄이다." 그 순간 누군가의 신형이 빗살처럼 날아 벽력탄을 향해 날 아갔다. 그리고 그의 손이 부딪히는 가 싶더니 멀찍이 떨 어진 절벽의 구석 쪽에 쳐 박히더니 엄청난 굉음을 터트리 며 터져 버렸다. -우르릉! 벽력탄이 터진 곳은 완전히 폐허가 된 듯 와르르 무너진 절벽 밑엔 돌더미가 사방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너…넌?" 벽력탄을 쳐 낸 것은 무웅이었다. 역시 정사흠의 말대로였 다. 배신자가 내부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믿었던 사람 에게 배신을 당한 고통에 방효겸의 얼굴은 와락 일그러져 버렸다. "너였느냐? 네가 배신을…" 그는 배신의 쓰라린 고통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말을 더듬 으며 손을 찔렀다. 무웅은 눈을 찡그리더니 몸을 돌렸다. "알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추악한 배신을 하긴 했지만 그 래도 끝까지 감추고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네 녀석이 한 행위가 감추어 질 줄 알았느냐? 더러운 놈." "큭! 큭큭! 크하하하! 더럽다고 했습니까? 추악하다고요? 그래 좋습니다. 추악해도 좋고 더러워도 좋습니다. 군주만 아는 당신에겐 우리 같은 사람의 목숨은 목숨도 아니겠지 요." "너희들도 원했던 것이 아니냐?" "우리가 원했다고요? 우하하! 웃기는 소리하지 마시오. 우 리에겐 선택의 여지란 없었소. 아무것도 고를 수 있는 여 지가 없었단 말이오." "무엇을 약속 받았느냐? 여자냐? 돈이냐?" "돈? 여자? 꼭 당신 같은 사람이 생각하는 그대로 말하는 군요. 난 돈도 필요 없고 여자도 필요 없소. 나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내가 사랑하고 내가 좋아하는 내 친구들, 그 들의 목숨뿐이오. 그들이 친구들을 살려 주겠다 약속했단 말이오. 알겠소? 내세에서 당신이 빚을 갚아 주겠다 했소? 웃기지 마시오. 당신이 어떻게, 어떻게 갚아 주겠단 말이 오. 죽고 나면 이미 모든 것은 끝인데." 비통에 찬 목소리는 갑자기 울려퍼진 정사흠의 웃음에 파 묻혀 버렸다. "우하하하! 결국 알리고 싶지 않다 하더니 이렇게 알려지 게 되어 버렸군. 그래 당신의 믿던 부하에게 배신을 당한 기분이 어떻소?" "으드득! 내 죽어도 절대 이 원한을 잊지 않겠다. 너희 같 은 노비들을 믿고 풀어준 내가 바보였다. 으으윽!" 원독에 찬 시선을 지긋이 받아치던 무웅이 피식 웃음을 터 트렸다. "노비를 풀어 준 게 우리의 인생이 불쌍해서 풀어준 것이 오? 아니지 않소? 당신은 화살 받이가 필요했고 그 필요에 따라 풀어준 것일 뿐이오. 당신에겐 최고의 과업이 황제 의 복위였는지는 몰라도 나 같은 노비에겐 같이 울어주고 같이 웃어주었던 친구밖에 없소. 내 평생 믿었던 것은 나 의 형제요, 나의 친구였던 그들뿐이오. 난 그들을 위해서 라면 배신이란 추악한 오명을 쓰더라도 상관없소." "흐흐흐! 우하하하! 네가 배신하더라도 그들이 널 살려 줄 것 같으냐? 이미 너의 친구들은 다 죽었을 게다. 으하하 하하!" "큭큭! 당신이 머리가 좋다지만 결국은 당신 속에 든 알량 한 지식뿐이오. 세상 모든 일이 당신의 생각대로 된다 생 각하진 마시오. 황제 폐하는 당신과 다른 분이오. 선황의 밑에 있던 썩은 고관들이 노비와 농노들을 쥐어짜면서 제 살 불리기만 할 줄 알았지 어디 황제폐하처럼 그들의 삶을 궁휼히 여긴 적이 있었소? 아니 한 번도 없었소. 내 부모 님은 날 위해 밥을 훔쳤다가 머리가 깨져 죽었소. 그런 게 말이나 되오?" "자자 그만! 더 이상 시간이 없다." 이야기가 길어질 듯 하자 정사흠이 말을 잘랐다. "자 모두 오라를 받아라." 언제 내려왔는지 백에 가까운 병사들이 창을 들고 그들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두 명의 병사가 밧줄을 들고 다 가오자 방효겸은 자포자기한 눈빛으로 담공우를 바라보았 다. "폐하! 옥체를 보중하시옵소서. 소신은 이제 더 이상 폐하 를 모시기가 어렵게 되었사옵니다." 눈물을 주루룩 흘리던 그가 크게 대례를 취했다. 그 모습 에 담공우는 더 이상 보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렸 다. 절을 하고 일어서던 방효겸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 며 입을 열었다. "가더라도 나 혼자 가진 않는다." 다가오는 병사들에게 급히 검은 화탄을 집어 던지는 순간 병사들이 혼비박산하며 소리를 쳤다. "벽력탄이다." -콰콰쾅! 다시 한 번 폭발이 일어나며 사방으로 흙이 튀어 올랐다. 이번에는 무웅도 쳐낼 수가 없었는지 급히 몸을 날릴 뿐이 다. 비명소리와 함께 찢어진 살더미가 사방으로 날렸다. "으악!" "컥!" "제기랄! 쏴라!" 절벽에서 보고 있던 정사흠이 노기를 터트리며 공격을 명 했다. 급히 병사들이 시위를 당긴 화살을 날렸다. 퍼퍼퍽! 품에서 소검(小劍) 한 자루를 꺼내들던 방효겸이 수십 대 의 화살에 고슴도치가 되어 버렸다. 털썩 무릎을 꿇어버린 방효겸. 그의 눈에서 생기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폐하! 폐하의 부탁을 저버린 불…" 그의 눈에 어렸을 때 형을 따라 들어가 뵈었던 태조의 모 습이 떠올랐다. 어린 건문제를 부탁하던 늙은 태조, 그는 노기를 뿜고 있었다. 왜 제대로 그를 지키지 못했냐며 화 를 내고 있었다. 그는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불충하게 폐하의 어명을 지키지 못했 사옵니다.' '그래! 그렇구나. 허허허!' 마지막을 웃음으로 장식한 태조가 손을 들어 그를 부르고 있었다. 그의 뒤에서 형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동생의 이 른 재회를 슬퍼하고 있었다. 방효겸은 몸을 일으켜 태조의 뒤를 따라 갔다. "안 돼!" 화살받이가 되어 쓰러지는 방효겸의 모습에 담공우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달려갔다. 목을 받치고 그를 흔들었지만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를 뿐 깨어날 줄 몰랐다. "안…돼. 안 된다. 가지 마라. 이건 명령이다. 날 놔두고 가선 안 된다. 제발 눈을 떠!" 아무리 그의 시신을 잡고 흔들어도 그의 눈은 떠지지 않았 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그의 얼굴이 들리자 처연한 미소 한 줄기가 그의 얼굴에 맺혔다. "흐흐흑! 그렇게 가는 거요? 날 남겨 두고. 그건 알고 있 소? 당신은 말이오. 내가 아는 최고의 책사였소. 한신(韓 信)도 장량(張良)도 못 따를 최고의 책사란 말이오. 당신 이 마지막에 하려 했던 말, 그거 불충을 해서 미안하단 말 이 아니오? 걱정 할 필요 없소. 당신은 불충하지 않았소. 당신에게 죄가 있다면 제가(齊家)를 하지 못한 것뿐이니 그리 미안해 할 것 없소." 한참을 그렇게 웃으며 주절거리던 담공우가 방효겸의 손에 쥐어진 소검을 손에 들었다. "이건 태조 폐하께서 선사하셨던 그 일심(一心)이구려. 일 심… 날 일심으로 모시라는 뜻 아니었소? 그런데 날 두고 가겠다는 거요? 할아버지께서 부르신다 한들 그러면 안되 지 않소? 큭큭 하지만 방책사! 당신의 주군이 나 하나뿐이 듯 나에게도 책사는 당신뿐이오. 그런데 내가 나의 책사를 두고 가긴 어디로 가겠소. 조금만 기다리시오. 그러면 날 곧 볼 수 있을 거요." 소검을 내려다보던 담공우가 검을 뽑아 들더니 그대로 가 슴을 향해 내려찍었다. 심장을 찔린 검을 타고 핏방울이 스르르 흘러나왔다. "이... 이런!" 갑자기 자신의 몸에 검을 박아버린 모습에 모두들 휘둥그 래졌다. 그러나 더욱 놀란 것은 정사흠이었다. 자신의 조 카가 보고 싶다는 영락제의 밀명을 받고 내려왔던지라 어 떻게든 압송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여봐라! 뭣들 하느냐? 어서 그를 살펴봐라." 정사흠의 명에 병사들과 장수들이 그의 상세를 살피기 시 작했다. 그러나 곧 그들이 안절부절한 표정으로 머리를 저 었다. "크으……." 정사흠의 입에서 다시 신음이 토해졌다. 그는 씁쓸한 표정 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출발!" 대오를 정비한 병사들이 시체를 수습하고 도열하여 늘어서 자 정사흠은 출발 명령을 내렸다. "이제 헤어지게 되었군요. 좋은 인연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네요." 돌아서는 정사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천인문이 자신의 감 정을 피력했다. "좋은 기억은 아니니 빨리 잊어버리는 게 좋지." "그게 쉬울까요? 전 모르겠어요." 백운호의 말에 천인문은 갈등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 다. 갑자기 겪어 버린 충격에 세상이 모두 이상하게 보였 다. "후후후! 할아버지! 사람이 왜 세상을 살아가죠?" "그게 무슨 말이냐?" "전 세상이 그래도 정말 재미있고 아름답고 멋진 곳인줄만 알았어요. 모두들 활기차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곳이 세상 일 거라 생각했어요. 근데요. 그게 아닌 것 같아요. 반역, 배신, 사랑, 너무너무 많아서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천인문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우연히 알게 된 사람들 , 그들 모두는 각자 이상을 가지고 살아갔다. 진무릉과 백 운호의 눈물겨운 사랑, 방효겸의 불굴의 의지와 굳은 충성 심. 궁소미와 정화의 열정. 그 모두가 멋있게만 보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친구에 대한 우애 때문에 배신한 무웅은 나쁜 것인가? '모르겠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걸까? 정말 하나도 모르겠다.' 생각하면 할수록 세상은 복잡한 것 같다. 아직 세상을 살 아가는 연륜이 부족한 탓일까. 나직히 한숨을 내쉬며 고개 를 젓던 천인문이 고개를 저었다. "허허허! 그래 생각하던 것은 결론이 났느냐?" "헤헤! 그게 말이죠. 잘 모르겠어요. 아직 전 세상을 알기 엔 너무 어린가 봐요." "뭐? 하하하! 그건 그렇고 이제 어떻게 할거냐? 우리하고 같이 곤륜으로 돌아갈 테냐?" 한참을 웃던 옥조영이 천인문의 의중을 물어왔다. 천인문 은 환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뇨! 세상은 넓고 볼 것도 많잖아요. 아직 세상을 모르 는데 할아버지를 따라 산으로 갈 필욘 없죠. 아직 더 보고 더 배우고 싶어요." 어딘가 모르게 얼굴에서 충만한 자신감을 뿜어내는 모습에 다시 권유하려던 옥조영도 머리를 저었다. "그래! 넌 아직 젊지. 더 해 보고 싶은 일도 많을 게다." "예!" "그래! 그럼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아오너라. 알겠지." "그럼요." 천인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옥조영이 몸을 돌려 말 위에 풀쩍 뛰어 올랐다. 이미 서혜령과 인사를 끝낸 여미릉과 백운호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이 노물들은 물러가마." 옥조영이 멋진 마무리 인사를 남기더니 말을 몰아 뛰어 나 갔다. 여미릉이 그런 그를 보며 주책이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 뒤에 들려온 백운호의 말에 화 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하하! 문아 밤에 너무 힘쓰지 마라. 그러다 나처럼 일 찍 늙는다." 더욱 강한 인사를 남기고는 얼굴을 찡그리는 여미릉을 피 해 말을 몰아 나간다. 여미릉도 서혜령을 잠깐 돌아본 후 그의 뒤를 따랐다. "사부님! 같이 가요." 남느냐 따르느냐를 고민하던 단목 수령, 그러나 결국 가문 의 영광을 위해 사부를 따르기로 결심하고는 우렁차게 소 리치며 그녀의 뒤를 쫓는다. 모두 사라지는 모습에 서글픈 표정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서혜령의 옆으로 다가온 천인문이 그녀의 어깨를 살짝 감싸 쥐었다. 홀로 남은 조기혜는 다정한 두 남녀의 모습을 보고는 슬픈 눈으로 바라보다 눈물을 흘렸다. 멀리 세워둔 말에 다가가 조용히 오르는 순간 천인문의 목 소리가 들렸다. "누나야 어디 가는데?" "……!!"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앞을 막아서는 천인문. 조기 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그들을 바라볼 뿐이 다. "색시하고 나하고 밖에 없는데 누나도 가려고? 그럼 심심 하잖아. 나 외롭단 말이야. 응 가지마라." "그…그런!"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줄 몰라하던 조기혜의 눈에 빙그레 웃고 있는 서혜령이 들어왔다. 조기혜는 어색한 웃음을 지 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같이 있자." "그럼 누나도 빨리 내 옆에 와서 서. 옆구리가 허전하잖아 ." 빙그레 웃으며 손을 들어 보이자 조기혜도 따라 웃음을 날 리며 말에서 내려 그의 옆에 섰다. "하하하! 양손에 떡이네. 우하하! 아얏!" 통쾌한 웃음을 터트리다 양쪽에서 꼬집힌 천인문이 온 몸 을 비틀었다. 그런 모습에 두 여인도 같이 웃음을 지었다. -116- -8년 후- 자그마한 야산의 언덕 위엔 작달막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모옥 하나가 아름답게 놓여 있었다. 언덕 아래로 사람들이 손에 닭이며 계란 등 먹거리를 들고 오르내린다. 집의 한쪽에선 한 젊은 사내가 여인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 연신 눈을 찡그리며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 하더니 어느 순간 얼굴이 펴지며 손을 놓았다. "흐음! 축하하네." "그, 그럼." 시골 촌부의 얼굴이 활짝 폈다. 여인의 옆에 서 있던 사내 가 화색을 지으며 사내에게 물었다. 사내는 여인의 남편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사 개월 됐어. 장씨! 축하해." 사내의 말에 촌부와 사내는 같이 일어서 연신 허리를 굽혀 댔다. "감사합니다요 어르신.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요." 젊은 사내는 그들의 말에 손사래를 쳤다. "은혜라니. 내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일은 자네 둘이 열 심히 밤에 노동한 덕택이 아닌가." 그 말에 촌부의 얼굴이 와락 붉어졌다. 사내는 그런줄도 모르고 연신 함지막한 웃음을 걸고 인사를 할 뿐이다. "장씨!" "예! 어르신." "자네 지금부턴 아내가 먹고 싶다는 것 다 해 먹여. 비싸 니 뭐니 하면서 자꾸 빼면 나중에 아내가 쓰러져도 난 몰 라." "아이구 당연합죠. 호랑이 간이라도 먹고싶다면 해 먹입죠 . 먹이구 말굽쇼." "후~! 그럼 됐어. 그리고 안댁은 힘든 일은 하지마. 무거 운 것도 들지 말고. 그런 일 했다가 덜컥 애 떨어지니 뭐 니 하면 나 더 이상 당신들 안 봐 알았지?" "예예! 걱정 마십쇼. 아예 집에 꽉 묶어 놓겠습니다요." 사내는 연신 허리를 굽히다 손에 들고 있던 소고기를 내밀 었다. "의원님, 따로 드릴 건 없고 저희가 어제 잡았던 고기나 좀 드셔 보시지요." "흠! 그러고 보니 자네는 소를 잡았지? 그러고 보니 이제 몇 달은 고기 좀 실컷 먹겠군." "고기라면 저희 집에 수두룩 합니다. 매일 매일 가져다 드 릴 테니 걱정 마시고 마음껏 드시지요." "그럼 다음엔 소고기 말고 돼지로 부탁하지. 그래도 돼겠 지?" "그러문입쇼." 사내와 아낙은 연신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한참을 인사 하던 두 부부는 서로 의지하며 산을 내려갔다. 그들이 사 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던 젊은 사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 섰다. 그는 천인문이었다. '더 없나 보군. 오늘은 일찍 끝났네.'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았지만 기다리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천인문은 주위를 둘러본 후 사람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소고기를 들고 초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안 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두리번거리던 천인문은 고기를 탁자에 놓고는 뒷문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한 명의 미부가 아이 하나를 업고 있었다. 바로 서혜령과 그들 부 부의 아이 천인영(天麟榮)이었다. "끝나셨어요?" 서혜령이 뒷문으로 나오는 천인문을 보고 말을 건넸다. "끝났어. 영이는 자나?" 그녀의 등에 업힌 천인영을 살펴보며 서혜령에게 물었다. "막 잠이 든 것 같네요." 그녀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천인문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럼 색시야. 우리~ 영이 내려놓고." 듣고 있던 서혜령이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천인문이 무엇 을 요구할지 알아차린 탓이다. "죄송해요. 하지만 지금 내려 놓으면 영이가 깨요." "조심해서 내려 놓으면 괜찮아." 그녀가 몸을 돌릴 새도 없이 빠르게 다가간 천인문이 그녀 의 등에서 천인영을 내려 받으려 했다. 그러나 막 천인영 을 잡기도 전에 터지는 소리. "아아아아아앙." 갑자기 큰 고함을 치며 몸을 푸들거리던 천인영이 두리번 거리더니 천인문을 짜증나는 얼굴로 바라본다. "뭐야 아빠잖아." "그래 영아 아빠야. 그만 방에 들어가서 잠자거라. 엄마가 피곤해 하시잖니." 웃는 얼굴로 말했지만 속에서는 열불이 났다. 부드러운 얼 굴로 말했지만 천인영은 살살 웃더니 뚝 잡아 땐다. "싫.어." "왜 싫어? 엄마가 피곤해 하셔." "아니. 엄마 피곤해?" 고개를 살래살래 젖더니 서혜령에게 물었다. 천인영의 물 음에 서혜령은 어찌 대답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자신을 바 라보며 절박한 눈빛을 보내는 낭군을 보자니 피곤하다 해 야겠지만 그렇게 천인문이 눈빛을 보내는 이유를 알기에 거짓말을 해서 내려보내기도 그랬다. "으...응. 그래 엄마 피곤해. 그만 방에 가서 자자." 남편의 강한 눈빛에 결국 굴복해버리고는 천인영에게 거짓 말을 했다. "싫.어." "왜 싫어. 너도 편하게 자고 엄마도 편하게 잘 수 있잖니? " "내가 내려가면 아빠 업어 주려고 그러는 거지?" 천인영의 질문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 두 남녀. "너...너!!"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나도 다 알아. 내가 자러 가면 맨날 아빠가 엄마 등에 업히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싫 어. 엄마는 내 꺼야." 갑자기 할 말을 잊어버린 천인문. 엄마가 자기거란 천인영 의 말에 후끈 달아 올랐다. "내가 크면 엄마하고 결혼할 거다. 그렇지 엄마~!" 갑작스런 아들의 청혼에 서혜령도 황당해했다. 천인문은 얼굴을 구기더니 내뱉듯 한마디를 던졌다. "그만 내려 와." "싫어. 계속 업힐 거야." "이 녀석이?" 서혜령은 한심하다는 듯 천인문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지만 천인문은 그런 그녀의 시선을 싹 무시하고 있었다. 천인 문도 이젠 어쩔 수 없는 것인지 대 놓고 소리친다. "그 자리는 이 아비의 자리야. 당장 내려와." "싫다니깐. 아빠는 다 커서 엄마한테 업히려고 그래. 사람 들이 알면 얼마나 아빠를 놀리겠어." "......!" "아빠도 이젠 정신 좀 차려. 매일 엄마한테 업히지 말고. 그게 싫으면 둘째 엄마한테 가서 업어 달래." "그래 영아 말 한 번 잘했다. 상공~! 저의 등은 비었는데 요?" '허걱!'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간드러진 목소리에 천인문의 얼굴이 샛노랗게 변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멋쩍은 미소를 짓는 천인문의 눈에 여인 하나가 들어왔다. 그녀의 배는 남산처럼 불러 있었지만 고운 자태는 전혀 흩어지지 않았 다. 그녀의 이름은 조기혜였다. "그, 그게 부인은 지금 임신 중이잖소. 그…러니까… 하하 하!" "호오! 그래요? 그럼 배가 부르지 않았을 때도 언. 니. 만 찾던 그 남정네는 누구였을까?" "그… 그건 말이지… 하하! 그것도 나였나? 하하하!" 상큼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조기혜는 어쭙잖은 변명을 늘어 놓는 천인문을 바라보다 그의 귀를 잡아 당겼다. "사랑하는 상~공~! 그럼 절 따라 오세요." "아~아얏!" 두 눈을 찔끔 감으며 질질 끌려 들어가는 모습에 서혜령의 등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천인영이 고개를 들었다. "킥킥! 역시 아빤 둘째 엄마한테는 꼼짝 못하네. 큭큭!" 혼자서 낄낄대며 웃음을 짓던 천인영은 다시 그녀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천인영을 뒤돌아보던 서혜령은 어이가 없는 듯 멍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어느 덧 밤은 깊어졌다. 천인영이 잠에 든 것을 확인하고 는 침상에 내려놓은 서혜령은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지만 천인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천인문은 앞마당에서 둥실 떠오른 달을 보며 앉아 있었다. 그를 찾아 돌아다닌 서혜령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왜 안 주무세요? 피곤하실텐데..." "......" "영이 한 말 때문에 기분 나쁘셨어요?" 혹시나 싶어 묻는 그녀에게 가벼운 미소를 보여주며 대답 하는 천인문. "아니, 그냥 세월이 정말 빠른 것 같아서." "......" "얼마 전엔 내가 어머니 등에 업혀서 아버지하고 싸웠던 것 같은데, 이젠 내 아들하고 그걸 두고 싸울 줄은 몰랐어 ." 그의 말에 서혜령이 방긋 미소를 지었다. 달을 보던 천인 문도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서혜령도 머리를 어깨 위에 살며시 기대왔다. "사랑해 색시야." "저도요." 마주보며 웃던 두 부부의 얼굴이 서서히 다가갔다. 그리고 둘의 얼굴이 하나가 되는 순간 안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신 나 두고 뭐 하는 거에요?" 놀란 표정으로 마주보다 집을 향해 고개를 돌린 두 남녀는 다시 빙그레 웃음을 짓는다. "그녀가 또 질투하네요." "에그! 내가 어쩌다가 저런 마누라를 얻었는지. 정말 인생 이란 알 수가 없는 거야, 알 수가 없어." "호호호!" 두 남녀는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두 부부의 사랑놀이를 내려다보는 둥근 달도 덩달아 빙그레 웃음을 머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