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SF & FANTASY (go SF)』 8383번 제 목:[darkspwn] 라이컨슬로프-50 올린이:darkspwn(유민수 ) 98/09/06 12:28 읽음:1025 관련자료 없음 ----------------------------------------------------------------------------- 50. 세계의 종말. 꿈같은 이야기였다. 디네즈는 그 생각이 얼마나 허황된 망상인 지 잘 알고있었고, 그것은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있던 다른 자들도 같은 생각 이었다. 세계는 절대로 멸망할수 없었다. 세계란 우리가 존재하는 그 차원,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만일 바타쿠가 세계를 없애버리려 한다면 제일먼저 이 세 계를 주관하는 신과 악마를 쓰러트려야 한다. 태양신 유노와 파괴신 헤게모니 가 바로 그것이다. 신을 쓰러트릴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지닌자는 이세상엔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존재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태양신 유노가 창조한 존 재이며 파괴신 헤게모니의 속성을 지닌 중간적 존재다. 창조자를 뛰어넘어 그 를 죽인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숨막히는 긴장이 지나가고 디네즈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자살을 하려면 혼자 할것이지……" "가능한 소리인가?" 라니쿠의 반문이 들렸다. 그러나 대답은 디네즈에게서가 아닌 세이렌에게서 나왔다. 세이렌은 가라앉은 어조로 대답해갔다. "신은 불멸일 뿐입니다. 악마도 마찬가지……" "……" 모두의 시선이 세이렌에게 향했다. 진지한 공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다. "단지 그들은 불멸로서 존재합니다. 세상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아요. 그 들은 세상의 시작과 함께 있어왔고……유노는 빛의 종족을, 헤게모니는 어 둠의 마족을 만들었습니다. 둘은 태고때부터 싸워왔고……그 사이엔 언제 나 죽음을 관장하는 죽음의 신, 라그도메제키아스가 있었습니다." "라그도메제키아스?" "사악한 어둠도 아니고 찬란한 빛도 아닌……그저 회색의 존재. 절대로 눈 에 띄지 않으나 신과 마, 어느쪽도 이길수 없는 절대의 존재. 죽음……존 재를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곧 죽음이니까요." "……" "그는 신과 마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습니다. 그저 거대한 파멸의 낫을 들고 있다가 시간이 되면 하나씩, 하나씩……존재를 소멸시켜갑니다. 증오나 분 노……그 어느것도 아닙니다. 그는 그저 시간의 수레바퀴 속에서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는 헛된 고리를 끊어내고 새로운 고리를 시작시킵니다. 신은 다 시 마로……마는 다시 신으로……. 그 중간자의 존재 역시 죽음이 존재합 니다." "쉽게 말해줘. 무슨 소린지 대체모르겠어." 볼멘소리로 디트리히가 한마디 내뱉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낭하에 모인 모 든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러나 디네즈는 어느정도 세이렌의 말을 이 해하고 있었다. 디네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들을 일컬어 운명이라고 합니다. 운명의 세 주체……운명의 실을 주관하 는 세 존재. 태양신 유노는 운명의 실을 만들어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파괴신 헤게모니는 그 실을 묶어 존재라는 그릇을 만듭니다." "파괴신이 존재를 만든다고?" 카뮤가 놀라 반문했지만 세이렌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괴신의 역할은 그런것이니까요. 마(魔)는 시작된 객체에 시련을 주고…… 시련을 뛰어넘음으로서 객체는 각자의 생각과 사고, 그리고 존재로서의 의 지를 갖게 됩니다. 파괴신이 무작정 존재를 없애버린다고는 생각하지 마세 요. 그것이 '마'의 역할입니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존재가 완성되었을때, 죽음의 라그도메제키아스는 낫을 휘둘러 모든것을 원점으로 되돌립니다." 세이렌의 설명이 끝나자 사람들의 얼굴에는 여러가지 표정이 떠올랐다. 신과 마……상반되지만 존재해야만 하는 것들이란 생각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인 간이 헤게모니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유노의 자식들 인 것이다. 디네즈는 세이렌의 설명이 의외로 잘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빛과 어둠, 그 두가지의 존재를 동시에 가질수 있었던 라이컨슬로프로서의 경험이 라그도메 제키아스의 존재를 인정하는데 큰 기여를 한 것이었다. 디네즈의 경험으로도 두 종족은 모두 각자의 생활을 영위하며 이유도 모른 채 서로를 죽이고 또한 죽임을 당해왔다. 누구도 왜 그래야 하는지 알수 없었 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두 존재는 모두 사라졌다.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 닌……죽음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디트리히가 입을 열어 세이렌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은 대번에 디네즈 의 의식을 현실세계로 되돌려버렸다. "그거하고 바타쿠가 심장을 모으는것 하고 무슨 관계지?" "바타쿠가 생각하는것은, 이 세계에 라그도메제키아스의 힘을 끌어들이는 겁니다. 시간의 수레를 조금 빨리 돌려 라그도메제키아스의 죽음을 세계에 내리는 겁니다. 방금전 말씀드렸죠? 파괴신이 그릇을 완성하면……" "……라그도메제키아스는 죽음의 낫을 휘두른다 라는 거군." 신음하듯 디네즈는 대답했다. 모두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파괴신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현재 어디엔가 봉인되어 있는 마왕 사브란 이구드의 힘이면 충분합니다. 헤게모니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마'를 총칭하 는 것이므로 사브란이구드의 폭주를 이끌어낼수 있다면 세계는 당연히 '마' 에 의해 객체가 완성되어갑니다. 결국엔 라그도메제키아스가 나올수밖에 없다는 거죠." "……사브란이구드의 부활을 이끄는 열쇠는?" "사브란이구드의 힘을 봉인하고 있는……유노와 헤게모니의 혼합체. '증표' 입니다. 본래는 다섯개지만, 세개만 모여도 그를 부활시키기엔 충분하니까 요." 이야기가 점점 현실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사람들로서는 그저 잭슨을 혼란시 킨 아마란스 군대와 싸운다는 것으로 단순화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아마란스 의 뒤에 존재하는 파르테논이란 존재가 이 이상한 이야기를 현실로 끌어내리 고 있었다. 디네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있는 젠쿠에게 시선 을 돌렸다. "젠쿠. 로무네크 마을은 어쩌고 여기로 나온거지?" "저 친구가 찾아왔다." 젠쿠는 눈짓으로 팔짱을 낀채 서있는 디트리히를 가리켰다. 디트리히는 디네 즈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예의를 표시했다. "디트리히였던가? 저 친구가 그린 드래곤을 타고와서 말하더군. 디켈이 위 험에 빠졌다구 말이야……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난 네가 죽은줄 알았거 든." "……믿었어? 그말을?" "설명을 듣고 이해했지. 처음에는 말야. 마을을 지키기 위해 일단 라니쿠와 후타쿠 그리고 나. 이렇게 셋만 왔어. 하지만 일이 심각하게 꼬이길래 후 타쿠를 마경으로 보냈다.……아무래도 마을 전사를 모두 불러와야겠어." "……여전히 와일드 하군, 젠쿠." "멋있지? 하긴 여자라면 누구나 반할만 하겠지.……이젠 암컷이 되어 이리 저리 기대기만 하는 디켈이라면 더더욱. 위대한 라이컨슬로프의 전사가 비 리비리한 여자 호모로즈가 되어 자리에 누워있는 꼴이라니……물론 바타쿠 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의 결과지만 말이야." 디네즈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디네즈는 낮은 웃음을 흘리며 왼손을 펼쳤다. 푸른 투기가 검이 되어 스르르 뽑혀나왔다. 젠쿠는 디네즈의 투기검을 보고는 호오 하며 탄찬을 보냈다. "많이 늘었는데……" "입만 살아가지고……네 생명을 구했던 자가 나라는 걸 잊었나 보지? 그리 고 난 이제 디켈이 아니야. 디네즈다. 라무네즈의 이름을 이어받았어. 믿기 지 않으면 몸으로 직접 배워보는건 어때?" 디네즈는 투기검을 늘였다 줄였다 하며 젠쿠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젠쿠는 어 깨를 으쓱 하고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쫑긋 서있는 귀를 아래로 숙였다. 복 종과 상대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디네즈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투기 검을 손안으로 집어넣었다. "알아모시죠, 디네즈" 장난기 가득한 젠쿠의 말이었지만 일단 그의 입에서 수긍의 표시가 나온이상 왈가왈부할 이유는 없었다. 디네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냉정한 목소리로 토오르에게 말을 꺼냈 다. "이번 전투에서 우리의 피해는 얼마나 되죠?" "……허공에서 날아온 불덩이 때문에 조금 다치긴 했지만……얼마 되지 않 습니다. 아마란스의 군대는 어둠에 먹혀버렸으니까요." "불행중 다행이군." 디네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디네즈는 카뮤에게 매서운 눈초리를 보냈 다. 카뮤가 잠시 찔끔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담담하게 디네즈의 시선을 받아냈다. '많이 늠름해졌어……' 디네즈는 슬며시 웃었다. 스무살은 넘었지만 아직 어린애라고 생각하던 터였 다. 그러나 카뮤의 성장은 디네즈를 기쁘게 했다. 디네즈는 가볍게 손짓으로 카뮤를 불렀다. 카뮤가 디네즈의 곁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카뮤의 얼굴에도 약간의 미소가 있었다. 디네즈는 카뮤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았다. "애를 많이 썼구나, 카뮤." "……마스터." "이젠 물러설수도 없다. 바타쿠의 진의가 밝혀진 이상, 그녀석이 어디로 움 직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가능한한 잭슨을 하루빨리 평정해서 파르테논, 그자식을 전장으로 이끌어내는 것 외에는 현재로선 방법이 없구나." "……화내지 않으시는 건가요?" "별수 없잖니." 디네즈는 빙그레 웃어주었다. "나의 귀여운 제자야. 이젠 가르칠것도 없구나. 한사람의 전사로서 걸맞는 대우를 해줘야 겠다." 디네즈는 카뮤의 머리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내려 홍조를 띈 카뮤의 볼에 양 손을 대었다. 카뮤는 부드러운 디네즈의 손길에 자신을 볼을 잡자 멍한 눈빛 으로 디네즈를 바라보았다. 디네즈는 양손으로 카뮤를 잡고는 얼굴을 가까이 밀착시켰다. "……!" 카뮤의 두 눈이 둥그렇게 변했다. 디네즈의 입술이 카뮤의 입술에 진하게 밀 착된 것이었다. 휘익 하는 젠쿠의 휘파람 소리가 나고 모두는 얼빠진 표정으 로 디네즈와 카뮤의 키스를 바라보았다. 약 2분여정도 진행된 키스는 디네즈 가 얼굴을 떼어버림으로서 끝났다. 카뮤는 아직 정신이 되돌아오지 않고 있었 다. 디네즈 역시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라이컨슬로프 부족의 전사, 디네즈의 이름으로 카뮤 폰 렉싱턴을 한사람의 전사로서 인정한다. 그 증거로 부족의 관습에 따라 네즈의 이름으로서, 카 뮤에게 전사의 이름인 '쿠'를 부여하겠다.……원래는 그래야 하지만 너는 인간이어서 부족의 이름을 따올수가 없으니 부득이하게 네즈의 가호를 내 릴수밖에 없구나." "……네즈의 가호라. 용케 기억하고 있었군, 디네즈." 젠쿠가 키득거리며 말하자 디네즈는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디네즈는 말을 마치는둥 마는둥 하며 막사를 나가버렸다. 라니 쿠와 젠쿠는 서로를 바라보며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카뮤는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촛점이 풀린 채로 입만 바보처럼 벌리고 있었다. "네즈의 가호가 뭐죠?" 로리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로리타의 검은 얼굴이 조금 파랗게 질려있 었다. 젠쿠는 능글맞은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늑대의 관습. 상대를 인정하는 육체의 접촉이지 뭐겠어." "접촉?" "하룻밤을 같이 지내는 거지. 이거 정말 보기드문 진풍경이겠어. 역대 최초 의 여자 라이컨슬로프와 남자 호모로즈라니 말야. 하하하!" 젠쿠의 설명이 받아들여지기 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카뮤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디트리히의 입이 벌어진것이 어지간히 놀란것 같았다. 로리타의 얼굴도 새파랗게 질린채 아무말 못하고 있었다. "……결혼입니까?" 질문은 엉뚱한 곳에서 나왔다. 굳은 얼굴의 토오즈가 물어본 것이었다. 젠쿠 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간단하게 대답했다. "늑대의 관습에 결혼은 없다. 라이컨슬로프는 대부분 남자 뿐이고, 자식을 갖지 않으니까." "……그럼 조금전의 설명은 뭡니까?" "말 그대로야. 그냥 하룻밤 같이 자는거지. 어떤 식으로 자든지 간에 상관 하지 않아. 그러니 재미있다고 할수밖에." 모두의 시선이 카뮤에게로 쏠렸다. 아직도 카뮤는 그대로였다. 아마 방금전의 설명도 제대로 듣지 못한것 같았다. 디트리히와 카뮤, 로리타와 토오르를 제 외한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같은 표정을 읽을수 있었다. '부럽다……' * * 진지한 것은 이제 그만....이라고 하고싶지만 성격상 안되는군요. 아뭏든 다음 회는 카뮤와 디네즈의 첫날밤입니다.....요...^^ 『게시판-SF & FANTASY (go SF)』 8418번 제 목:[darkspwn] 라이컨슬로프-51 올린이:darkspwn(유민수 ) 98/09/06 21:05 읽음:1086 관련자료 없음 ----------------------------------------------------------------------------- 51. 사람이 긴장을 하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고 한다. 온몸의 털이 다 일어 서고 계속 물을 마셔도 목은 언제나 갈증으로 타오르는 상태다. 1분에도 몇번 이나 거울을 보고 몸에 먼지 하나라도 있을까 걱정하며 안절부절 못하고 방 안을 헤멘다. 현재 카뮤가 그런 상태였다. 카뮤는 지금 디네즈의 막사에 들어와 있었다. 전쟁용 막사라 간단한 침구 몇 개와 작전지도만이 있는 곳이었지만 카뮤에겐 그런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달 이 떠오르고 모든 사람들이 잠을 자야 하는 시간……카뮤에게 두려운 시간인 것은 틀림없었다. 아니, 지금까지 기대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 었다. 갑옷은 깨끗이 벗어 침대 옆에 놓아둔채 카뮤는 머릿속으로 계속 여러 가지 문구를 떠올리고 있었다. '좋은 밤입니다……? 그게 아니라면……아름다우십니다? 젠장! 상대는 마스 터다. 마스터가 아름다운 것은 어제오늘 일이냐!' 카뮤는 손수건을 입에 물고는 계속 손가락으로 뜯어댔다. 손수건은 거의 걸레 로 변해있었지만 카뮤는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가슴속이 활활 불타오르 는것 같았다. 카뮤는 다시 일어나서 한켠에 놓은 물을 한컵 가득따라 벌컥벌 컥 마셔버렸다. 벌써 10여잔을 마셨지만 가슴속의 불은 꺼지지 않고 있었다. "이럴줄 알았으면……목욕이라도 하고 오는건데……" 카뮤는 손을 코에 갖다대고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알듯모를듯 땀냄새가 나 는것 같기도 하고 도통 알수없었다. 카뮤는 심호흡을 하고 결단을 내렸다. "평소대로 가는거야. 평소대로!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가 만……난 아직 연습을 한적이 없는데……" "무슨 바보같은 말을 하는거야?" 갑자기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카뮤는 펄쩍 뛰어올랐다. 막사의 천정에 머리가 닿을뻔 했지만 놀라 쓰러지지는 않았다.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막사 한켠의 구석에서였다. 카뮤가 천천히 다가가자 그곳에는 호기심에 가득찬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넷이나 있었다. 젠쿠와 라니쿠였다. 그들은 늑대의 모습으로 몸을 잔뜩 웅크린채 몸을 숨기 고있었다. 카뮤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에요?" "……네가 아직 여자 경험이 없는것 같아서 코치해 주려구." 젠쿠가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카뮤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갔다. "나……난 그런거……어, 그러니까……" "부끄러워 하지마. 자신을 가지라구." 라니쿠가 한마디 거들었다. "호모로즈간의 교합은 나도 꽤 봤거든. 호모로즈의 놀라운 생식력에는 경이 를 표하고 싶어. 마경에까지 들어와서 생식을 하더란 말이야." "……" "당당하게 해. 남자는 자고로 그래야 하는거다. 힘이 있는 남자만이 미인을 차지한다……라는 명언도 있지." 젠쿠가 근엄하게 말했지만 방 한구석에 숨어있는 주제에 조언을 한다는 것은 별로 보기에 좋지 않았다. 카뮤는 발을 내밀어 젠쿠의 얼굴을 밟아버렸다. "쿠엑!" 젠쿠가 기겁을 하면서 도망쳤다. 카뮤는 사막에서 얻은 푸그르슈타르의 검을 뽑아들고 황황하게 도망가는 그들을 쫒아내버렸다. 어깨로 숨을 몰아쉬며 막 사로 돌아온 카뮤는 섬뜩한 느낌에 주위를 다시 돌아보았다. 젠쿠와 라니쿠는 없었고 막사는 여전히 조용했다. 그러나 카뮤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지만 존재감이 느껴진 것이다. 카뮤는 온몸의 신경을 집중해 주위를 살펴보았다. '……저건' 주변의 광경과 약간의 이질감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약간 굴곡이 진 것 처럼 막사의 모서리의 땅이 조금 부풀어올라와 있었다. 카뮤는 불꽃이 피어오 르는 검을 뽑아들고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좋은말 할때 나와요. 엔시아……" "……" "안그러면 적으로 간주해서 날려버리겠어요." "……알았어, 나갈께." 땅이 들썩이며 굴곡이 진 부분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머리카락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호기심에 가득한 얼굴로 엔시아와 크리스가 걸어나왔다. 카뮤는 이 마에 핏줄이 서는것을 느꼈다. 엔시아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어떻게 알았어? 나는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최소한 엿보려는 사람의 시선은 속일수 없겠죠. 엔시아는 그렇다 치고 크리스는 무슨 일이죠?" "……그냥. 재미있을것 같아서." 드디어 살기를 띄는 카뮤를 보고, 크리스는 멋적은 표정을 짓더니 엔시아의 팔을 잡아끌면서 막사를 빠져나갔다. 나가는 크리스와 교차해서 디네즈가 들 어왔다. 디네즈는 줄줄이 자신의 막사에서 나가는 사람들을 멍한 눈으로 바라 보고 있었다. 디네즈가 들어오자 카뮤는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지금까지 생각해둔 말 이 조금도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디네즈는 카뮤를 보고는 살풋이 웃어주었 다. "손님이 많네." "……" "그렇게 얼어있지 말고 앉아. 할 말도 있고하니……" "네." 카뮤는 빠른 동작으로 침대에 앉았다. 디네즈는 미스릴 갑옷을 벗어 한켠에 두었다. 갑옷을 벗은 디네즈의 모습은 카뮤로서도 처음보는 것이었다. 갑옷안 에 입은 옷은 몸에 달라붙은 검은 천 하나뿐이었다. 여자들이 몸에 걸치는 옷……그러니까 가슴을 받치는 천이라던지 국부를 감싸는 천조각의 느낌은 전혀 나지 않았다. 카뮤는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디네즈는 새파란 얼굴로 얼어버린 카뮤를 바라보며 얼굴에 붉은 홍조를 띄 었다. 디네즈는 긴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올리고는 끈으로 묶어 머리뒤로 넘겼 다. 그리고 카뮤가 앉아있는 침대의 옆자리에 앉았다. 출렁하는 느낌이 카뮤의 곤두선 감각에 직격으로 다가왔다. 카뮤는 엉겁결에 큰 목소리로 말했다. "자……잘 부탁합니다!" "무슨소리야?" "아니오……그냥." "……너답지 않구나, 카뮤. 조금 이상해." 디네즈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맨처음 너를 만났을때는 아직 어린 꼬마였는데……얼마 되지않은 시간에 훌륭한 전사로 자랐다니 기쁘구나." "모두 마스터의 덕분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잘 모르겠다." 쓸쓸한 표정으로 디네즈는 카뮤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 했다. 담담한 향기가 카뮤의 후각을 자극했다. 부드러운 디네즈의 느낌이 카뮤의 심장을 크 게 자극하고 있었다. 디네즈는 카뮤를 안은채로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무슨 기분인지……잘 모르겠다. 시원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아뭏튼 좋은 일이겠지." "……" "네게 라이컨슬로프 부족의 전통을 강요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있겠지." "아닙니다! 전혀! 저는 기쁘게……" 카뮤가 머리를 들며 외치다시피 부인하자 디네즈는 부드럽게 웃었다. "내가 그렇게 좋으니?" "……네." 카뮤는 빨개진 얼굴을 푹 수그렸다. "처음 봤을때부터……였어요. 너무 슬퍼보이시길래……조금 위로해 드리고 싶다고 생각했죠. 마스터의 옆에 있으면서 저는 마스터가 웃으시는 것을 즐거움으로 생각했습니다. 전……그저 마스터의 웃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 다고 생각했어요." "……좋은 말이구나." 디네즈는 오른손을 들어 카뮤의 은회색 머리카락을 가만히 만져갔다. 디네즈 의 눈망울이 작은 촛불의 불빛에 흔들리는듯 보였다. 카뮤는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는것을 느꼈다. 디네즈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 부족의 전통은 아이를 데려온 전사를 '파베르'라고 말하고 그 파베르 에 의해 라이컨슬로프로 정해진 아이를 '아슈낙'로 인정한다. 전사의 이름 인 '쿠'를 가진 자만이 아슈낙을 가질수 있어. 파베르는 아슈낙을 가르치고 또한 보살피지만, 전사로 키우기 위해 잠도 따로자고 말도 부드럽게 하지 않아. 하지만 아슈낙이 역시 '쿠'의 전사가 되면……파베르는 아슈낙을 안 고 라이컨슬로프의 비밀을 알려주게 된단다. 인간에게 버림받아 마물이 되 어야 했던 라이컨슬로프 부족의 슬픈 이야기를 말야. 대부분의 아이들은 고통을 이기지 못해 괴로워하고……그 괴로움을 위로해주기 위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슈낙과 함께 잠을 잘수 있단다." "그것이 네즈의 가호인가요?" "그래. 네즈의 가호……그 가호의 밤에는 어떤 말과 행동도 허용되지. 만일 아슈낙이 파베르에게 죽여달라고 한다면, 파베르는 아슈낙을 죽여야 한다. 반대로 파베르를 죽이고싶다면……아슈낙은 파베르를 죽일수 있다. 파베르 는 아슈낙의 손톱을 받아들이고 죽어야 하지. 또한……극히 드문 일이지만 아슈낙이 파베르를 사랑한다면……" "……" "……파베르는 아슈낙을 받아들여야 한단다." 카뮤의 마음속에 쿵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디네즈가 말하는 의미는 간 단했다. 오늘밤, 카뮤가 원한다면 디네즈를 얻을수 있었다. 또한 원한다면 디 네즈가 바타쿠를 찾아 헤메는 것도 중단시킬수 있었다. 카뮤는 오랜시간 생각했다. 디네즈는 참을성있게 앉아 카뮤의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 카뮤는 많은 생각을 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정말로 카뮤 자신 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또한 이런 이야기를 일부러 꺼내가며 디네즈가 말을 건네는 이유는 무엇일까. 카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스터……" "말하거라." "……저는 많은 생각을 했어요. 상처입고 괴로워하면서도 모험을 하는 마스 터를 보면서……더이상 위험해 지지 않도록 바타쿠를 쫒는 일을 포기하라 고 말하고 싶었어요. 다른 사람의 분쟁에 휘말리지 말고, 어디론가 떠나 서……평범하지만 아름다운 가정을 꾸미라고도 하고 싶어요. 그리고 무엇 보다……" "……" "……저는 마스터를 좋아해요. 아니, 사랑합니다." "……카뮤." 디네즈의 눈이 크게 떠졌다. 조금은 놀란듯 했지만 디네즈는 이내 가벼운 미 소를 짓는 것으로 그 표현을 대신했다. "마스터도 모르신다고는 말하지 마세요.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모르신다 면 이런 말씀……자세히 하실리 없겠죠." "……그래." "하지만……" 카뮤는 조금은 눈물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저는 그럴수가 없어요. 마스터가 가장 원하는 것이……그것이라는 걸. 화 석의 숲에서 보았던 마스터의 기억이 저를 아프게 해요. 원하지만……하지 말라고 할수 없는게 너무도 가슴아파요. 제가……제가 할수 있는건……그 건……" "……" "……그저 마스터를 지켜보는 것 뿐……이겠죠. 언젠가 마스터가 그랬죠? 우리가 택할수 있는 길은 두가지가 있다고. 하나는 상대를 없애버리는 것……그게 아니면 그저 지켜보는 것이라고." "……" "하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저는 아무짓도 하지않고 지켜보는 것은 이제 지 쳤어요. 더이상 마스터가 상처받고 괴로워하면서 사는것을 보는것도 진절 머리가 나요. 이젠……결단을 내리겠어요." 카뮤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카뮤는 디네즈를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디네즈 역시 슬픈 눈으로 카뮤를 마주보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 르고 카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원하는 것은……저를 버리지 말라는 거에요. 저는 영원히……디네즈, 당신의 옆에 있고 싶어요." "……!" 디네즈의 얼굴이 일순간 놀라움으로 변했다. 디네즈의 얼굴은 몇차례 다른 표 정으로 변해가다가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디네즈는 카뮤의 눈물이 가득한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카뮤의 눈물을 손가락으로 조심스 럽게 닦아냈다. 그리고 디네즈의 눈에서도 천천히 눈물이 떨어졌다. 디네즈는 웃고 있었다. "네가 나를……다시한번 놀라게 하는구나." "……마스터." "영원히 곁에 있다는거……분명히 같이 있고싶다는 의미겠지?" "네." "그런데 말야……우리 부족의 언어중에……영원히 곁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니?" "……?" 카뮤의 얼굴이 멍해졌다. 디네즈는 얼굴을 천천히 카뮤의 얼굴에 교차시켰다. 그리고 진한 키스를 카뮤의 입술에 남겼다. 카뮤는 놀란듯 디네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디네즈는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 부족의 언어중에……영원히 곁에 있다는건……같은 동굴에서 같이 생 활한다는 것. 그런건 늑대의 관습중에 하나밖에 없어." "……" "넌 지금 내게 청혼을 했단다. 청혼은 양쪽이 모두 동의해야 하는건데…… 이를 어쩌면 좋겠니." "……" 카뮤의 눈이 위로 넘어갔다. 디네즈는 카뮤가 쓰러지지 않게 몸으로 잡아주어 야 했다. 카뮤는 정신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 * 에구에구....힘들어. 이제 디네즈와 카뮤를 짝지어 줬네요. 하지만! 네즈의 가 호가 깃든 밤은 오늘밤 뿐이죠? 카뮤는 기절했으니……디네즈의 답변을 못듣 겠군요. 호호호....다음은 어떻게 될까요? 아....그리고 팬레터의 약발이 떨어지고 있는 중입니다.....비평 메일을 부탁합 니다. 『게시판-SF & FANTASY (go SF)』 8729번 제 목:[darkspwn] 라이컨슬로프-53 올린이:darkspwn(유민수 ) 98/09/12 22:29 읽음:940 관련자료 없음 ----------------------------------------------------------------------------- 라이컨슬로프 53. 좋은 저녁식사였다. 포만감에 가득한 행복을 느끼며 디트리히는 식탁 대용으 로 썼던 넓적하고 길다란 빵을 바닥에서 대기하고 있던 개에게 던졌다. 얼룩 점박이의 개는 디트리히가 던진 빵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조금은 묘한 기 분이었다. 이국적인 풍물이랄까……아뭏든 잭슨에는 휴프노스와는 다른 재미 있는 점이 있었다. "재미있으신가요?" 예의바른 목소리다. 디트리히는 눈을 들어 맞은편에 앉아 아직 식사를 하고있 는 토오르를 바라보았다. 토오르 라이트 공작, 키클로프 연합군의 수장이자 대표자다. 휴프노스에 있을때는 그저 지방의 한 영지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특 별한 취미의 제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만나본 그는 상당히 색다른 분위기를 가진 사내였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마물을 친구처럼 대하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있었지만, 단순한 호의와 생활로 굳어진 친절은 다른것이다. 토오르는 마물들을 정말로 신뢰하고 있었다. 그런 신뢰는 이바이더의 마물들이 토오르에 맹종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다. 디트리히는 토오르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말머리를 한켠에 앉아 군사지도를 펼쳐든 칼로스 장군에게 향했다. 고양이의 눈처럼 위아래로 차켜올라간 그의 눈동자가 푸른 인광을 발하고 있었다. "식탁까지 훌륭하게 사용하는 격식……이라는건 정말 훌륭합니다." "그런 깊은 생각은 없어요. 그저 관습일 뿐입니다." 토오르가 빙그레 미소를 떠올렸다. "……기품있는 휴프노스의 기사께서 보시기엔 아마 야만스러운 풍물일수도 있겠지만요." "천만에……오해하진 마십시오, 토오르 공" 디트리히는 여유있게 토오르의 말을 받았다. 디트리히는 친근한 표정으로 손 가락을 들어 턱을 쓰다듬었다. 약간은 까칠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요즘 수염 을 잘 깎지 않은 탓이다. 왜 그랬을까? 디트리히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저 재미있다고 느낄 뿐입니다. 풍물은 그저 풍물일뿐……야만스러움을 결정하는 것은 편견입니다." "……편견이라……" 토오르는 식탁 대용의 빵을 집어들어 조심스레 접었다. 스프가 스며들어 눅눅 해진 빵은 아주 쉽게 반으로 접혔다. 토오르는 유려한 동작으로 빵을 바닥에 던지며 말을 이어갔다. "아주 뛰어난 생각이시군요. 특별한 가치관을 가지신 것인가요?" "……그런거 없습니다. 그저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지요." "……그렇군요. 개인적이긴 해도 마치 현자의 말씀처럼 생각되어서요." "……" 뒤틀려있다……디트리히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판단했다. 토오르라는 작자는 지금 기분이 엄청나게 나쁜 것이다. 비록 겉으로는 저렇게 헤헤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음흉한 비수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디트리히는 마음속으로 천천히 방어자세를 취해갔다. "제가 어떻게 현자에 비견되겠습니까. 저는 그저 우둔한 기사일 뿐인걸요." 디트리히의 말이 조금씩 격식을 차려가자 토오르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그 눈에 떠오른 감정을 디트리히도 읽을수 있었다. 그는 조금은 감탄하고 있는듯 했다. 토오르는 손짓으로 음식을 들고 서있는 당번병을 나가게 했다. 당번병이 자 리를 비우자 칼로스와 토오르, 그리고 디트리히만이 지휘막사에 남았다. 토오 르는 양손을 조심스레 맞잡고 탐색하는듯한 시선을 보내왔다. "우둔하기만 해서는 드래곤 나이트가 되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 디트리히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토오르는 디트리히에게서 무언가를 알아내려 는듯 보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수 없었지만 디트리히로서는 토오르를 신용 할수 없었다. 기사로서의 직감이었다. 적어도 디트리히의 감각으로 본 토오르 는 가슴속에 무언가를 숨긴듯 보였다. 토오르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기사중의 기사……분명 그 조건에 완벽하게 들어맞을 분은 아마도 명성높 은 칼라일 가문의 디트리히 공 외에는 없겠다고 생각합니다. 디트리히경. 기사의 조건에 대해 이야기를 청해도 폐가 안될까요?"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군요." "……" 의외의 대답이었던듯 했다. 토오르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다시 평온한 본 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어째서?" "……주군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지키지 못한 기사는 더이상 기사가 아닙니 다. 실패자는 말이 없을 뿐입니다." "가베라님의 일은 유감입니다만 당신은 수룡왕의 명령에 따랐을뿐……당신 의 잘못은 아닙니다. 가베라님의 명령은 분명 마경의 라이컨슬로프 부족을 디네즈 사령관의 지원세력으로 만들라……는 것이었을 테구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절대적 충성의 대상이 내린 명령은 완벽히 수행한 훌륭한 기사이시지 않습니까. 그런분이 어째서 실패자라는 것인가요?" 디트리히는 슬픈 미소를 떠올렸다. 그의 얼굴이 수십년은 늙어버린듯이 변해 가는듯 보였다. "……칼라일 가문의 역사는 언제나 그래왔었죠. 주군을 충심으로 섬겨 도……끝내는 잃어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은 칼라일 가 문을 기사의 모습으로 여깁니다." "……" "당신은 이해할수 있습니까? 이렇게 될수밖에 없는 지긋지긋한 굴레를." 디트리히는 허리춤에 매달려있는 바스타드 소드를 무의식적으로 쓰다듬고 있 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만지는 것은 검자루에 양각되어 있는 칼라일 가 문의 문장이었다. 휴프노스를 창건한 카알 휴프노스 대공에게 하사받은 최초 의 문장은 창에 찔려 괴로워하는 드래곤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드래곤 나이트 가 되면서 그 문장은 창을 부러뜨리고 표효하는 드래곤의 모양으로 바꾸었다. 디트리히는 가끔씩 주군을 연속해서 잃어가는 것이 이 문장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때가 있었다. 드래곤을 살리기 위해 주군을 뜻하는 창을 지워 버렸기에 주군을 잃는것 같았다. '부질없는 망상이지……' 디트리히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토오르는 묘한 시선을 고뇌하는 디트리히 에게 던졌다. 이렇다할 특징이 없는 그의 얼굴은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 다. "디네즈 총사령관과는 어떻게 만나게 되셨는가요?" "……끈질기군요." "조금은 사령관에 대해 알아두는게 좋다고 생각해서요. 실례가 되었다면 죄 송합니다." 토오르는 예의바르게 대답했지만 그의 표정 어디에서도 그런 느낌은 받을수 가 없었다. 디트리히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말하자면 깁니다." 디트리히는 지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수도인 카알에서 디네즈양을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저런 전사의 모습이 아 니었고……그저 여린 레이디인줄 알았습니다. 바이서스 몰락귀족의 영 애……연약하고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여성이었죠." "……정말입니까?" 토오르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아마 속으로는 꽤나 놀라고 있는것 같았 다. "몇가지 일이 지난후에 저는 디네즈양을 보호하고 싶어졌습니다. 제가 섬겼 던 휴프노스의 군주는……솔직히 별로 충성을 바치고 싶은 사람이 아니었 습니다. 그는 정통이 아니니까요. 칼라일 가문은 오직 휴프노스 폐하의 후 손만을 섬길것을 맹세했었습니다." "……" "기사도……주군과 레이디를 보호하고 섬긴다라는 것은 토오르 공도 아시겠 죠. 저는 왕궁에 머물러있는것이 싫었습니다. 의식적인 생활과 혐오감을 참아 내는 것이 힘들었죠. 저는 단순한 기사일 뿐입니다. 암투가 횡행하는 왕궁은 체질상 맞지가 않아요." "그래서 디네즈 사령관을 택하셨나요?" "……그랬습니다. 레이디로서의 충성을 맹세하고 그녀를 따르기로 결심했 죠. 그 직후 저는 레이디를 잃을뻔했고……그녀를 살리기 위해 드래곤 나 이트가 되었습니다. 그게 제가 드래곤 나이트가 된 이유입니다." "그녀가 드래곤 나이트가 된 것은 그 이전인가요, 아니면 그 이후인가요?" "만나기 이전입니다. 레이디의 과거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기사 도에 어긋나니까요." "……이해합니다." 토오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토오르가 일어서자 칼로스는 지도에서 눈을떼었다. 느긋한 걸음걸이로 토오르는 칼로스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 을 얹었다. 칼로스는 토오르에게 무뚝뚝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칼로스는 토오르의 손 을 떨쳐버리거나 싫은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언제나 그래왔던것처럼, 또한 토오르의 손이 자신의 어깨에 있는것이 당연한 것처럼 앉아있을 뿐이었다. 토 오르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디네즈양은 카뮤를 좋아하는 모양이더군요." "……불행히도 그렇습니다." 디트리히는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 아릿한 아픔같은것이 되살아난다. 기사로서의 책무와 남자로서의 사랑중 디트리히가 택한것은 기사 의 책무였다. 아마도 몇대에 걸쳐 겪었던 주군의 참살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서 택한 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선택도 디트리히의 마음을 달래주 지는 못했다. 선택이란 어느 하나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것을 디트리히 자신이 가장 잘 알고있기 때문이었다. 소중히 생각하는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 은 견디기 힘든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결정을 받아들여야 겠죠." "……어떤 결정이었습니까?" 디트리히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모릅니다. '네즈의 가호'라는 밤을 지내고 나온 레이디는 아무말도 하지 않 았습니다. 카뮤도 대답하지 않았고……둘 사이에 무언가의 결정이 있었다 는 것은 알겠는데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청혼이라도 한걸까요?" "글쎄요……별다른 감정표현이 없는 사람이니 알 도리는 없겠죠." "……증오스럽지 않으십니까?" "……" 가슴이 가라앉는다. 디트리히는 그렇게 느꼈다. 토오르의 말은 조용하지만 강하게, 디트리히의 아픈 가슴을 한꺼번에 쓸어내리고 있었다. 조금은 그윽한 시선으로 디트리히는 장막밖, 어딘가에서 있을 디네즈를 생각했다. 그리고 조 용히 대답했다. "전혀." "……어째서입니까." "……" 디트리히는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웃으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저도모르게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무엇이 우스울까……디트리히는 중얼거렸다. "카뮤는……레이디를 잘 지켜줄겁니다. 자존심이나 권력……명예도 버리더 라도 디네즈양을 지킬거에요." "……" "저는 그렇게 못합니다. 저는 기사도와 사랑중에서……기사도를 택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디트리히 폰 칼라일이라는 남성이 기 이전에 주군과 레이디를 수호하는 기사……결국 남자가 아닌 기사로서 남을수밖에 없으니까요." "기사는 남자가 아닙니까?" 조금은 희극적이다 라고 디트리히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입술에서는 단정 짓듯 대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사는 여자를 만족시킬수 없으니……남자가 아니라고 해야겠죠." "……" 토오르의 눈이 둥그래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마도 조금은 다른 추 측을 했던것 같았다. 칼로스는 침묵을 지키는 토오로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조금전 디트리히가 '기사'에 대해 입을 열었을때부터 칼로스의 얼굴은 점점 차갑게 굳어있었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대 토오르는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디트리히경." "……네." "만일……당신에게 지켜야 할 무언가가 생긴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켜야죠. 목숨을 바쳐서라도……이번에는 기필코 내 손으로 직접 지킬겁 니다." "그것이 설령 마족이라면?" 디트리히는 순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내 디트리히는 씁쓸하게 웃으 며 입을 열었다. "내가 지켜야 하는 사람은 정당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자여야 합니다. 내 가 휴프노스의 허수아비 왕을 버리고 일개 여인이라고 생각되었던 디네즈 양을 따른것도 그 때문이겠죠, 토오르공" "……" "디네즈양은 라이컨슬로프입니다. 그러나 디네즈양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은 변함없습니다. 디네즈양이 설령 코볼드나 오크……라해도, 제가 지키기로 결정한 상대는 지킵니다. 대답이 되었습니까?" "……충분합니다." 토오르는 천천히 몸을 돌려섰다. 칼로스가 일어서 토오르의 옆에 나란히 섰 다. 토오르는 허리에 찬 검을 뽑아들었다. 칼로스도 왼쪽 허리의 검집에서 똑 같이 검을 빼냈다. 디트리히는 의구심에 가득한 눈으로 둘의 행동을 지켜보았 다. 토오르가 들고있는 검은 일반적인 롱소드였다. 다만 검날이 다른 소드에 비 해 세배는 넓고 두꺼워보였다. 마치 옛날에 크리스가 가지고 있었던 쇠뭉치만 큼은 아니었지만 정말 넓은 검날을 갖고 있었다. 칼로스가 가진 검은 토오르 와는 반대였다. 손을 거의 덮을만큼 넓은 손잡이였지만 검날은 일반적인 검보 다도 조금 얇고 군데군데 가시같은 것이 돋아나 있었다. 토오르와 칼로스는 서로 마주보고 검을 들어 허공에 대었다. 다만 토오르는 검을 거꾸로 쥐고 있었다. "……" 툭 하는 소리가 나며 토오르의 손잡이가 검날에서 빠져나왔다. 디트리히는 어 하는 소리를 냈지만 역시 철컹 하며 칼로스의 검날도 바닥으로 떨어져버렸다. 토오르는 근엄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바이더의 수호자이자 키클로프 연합의 수장, 토오르 폰 라이트 공작은 지금 이순간 과거에 그래왔듯……어둠의 생물을 지켜줄 새로운 바라야즈를 선출하겠습니다." 토오르의 검날이 칼로스의 손잡이 안으로 빨려들듯 사라졌다. 크릭 하는 소리 가 나며 마치 원래 하나였던것처럼 토오르와 칼로스의 검은 하나가 되었다. 토오르는 하나가 된 검을 두손으로 받쳐들었다. 그것은 투핸드 소드(Two hand sword)였다. 아주 거대하지만 그리 길지않은 철저한 실전용 검으로 보 였다. 토오르는 디트리히의 앞까지 걸어와 무릎을 꿇었다. 디트리히의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토오르 경!" "아무말 하지 마십시오." 칼로스가 낮게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엄한 경고가 담겨있었다. 잠시 머뭇 거리는 사이 토오르는 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며 검은 디트리히에게 내 밀었다. "이 검은……이바이더의 통치자가 소유하는 검입니다. 받아주시오." "……이건……" "부탁이오. 내 뒤를 이어 바라야즈가 되어 주시오." "……" 토오르의 음성은 침중했다. --------------------------------------------------------- 자……이제 디트리히가 갈곳은 정해졌군요. 남은것은.....디네즈와 카뮤를 세 레노스 대륙으로 날려버리는 일만 남았군요. 앗차! 이 말은 하면 안되는 건가? 아뭏든.....다음회를 기대해 주세요. 다크스폰이었습니다 『게시판-SF & FANTASY (go SF)』 9055번 제 목:[darkspwn] 라이컨슬로프-54 올린이:darkspwn(유민수 ) 98/09/19 20:36 읽음:838 관련자료 없음 ----------------------------------------------------------------------------- 라이컨 슬로프 54. 밤바람이 차갑다. 아직 겨울이 되려면 멀었지만 잭슨의 가을은 아마란스와는 다른 느낌의 냉기를 가져온다. 아마란스는 잭슨의 정가운데 있는 분지에서 생 성된 공국이어서 냉기라고는 해도 몸이 시릴정도로 차가운 기운은 아니었다. 기요틴은 몸은 한차례 부르르 떨고는 활짝 열린 창문을 조심스레 닫았다. 붉은 빛을 내며 타오르는 난롯가에 앉아 몸을 쭉 펴고나서야 기요틴은 온몸 을 마사지 한듯한 시원한 느낌이 드는것을 느꼈다. 데버룬의 바람은 축축한 느낌이 강하고 시기가 시기인 만큼 습기는 차가운 냉기에 얼어 작은 얼음조 각처럼 변해 갑옷이라도 입을려고 하면, 차가운 갑옷이 살갗에 쩍쩍 달라붙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기요틴이 갑옷을 싫어하는 것이 단순히 그 느낌때문만은 아니었다. 기요틴은 난로옆에 수북이 쌓인 장작을 하나 집어들어 불위에 던졌다. 타오 르던 불티들이 춤을추며 어둠속으로 날아오르다가 사라졌다. 타버린 잿더미의 존재에 불과한 그것들은 기요틴에게는 묘한 추억을 떠오르게 했다. 추운날씨 와 난롯불……두 존재는 하나가 되어 허공에 춤추는 불티의 모습에, 어릴적의 기억을 교묘하게 융합시키고 있었다. "가츠……" 기요틴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는 스스로 흠칫 놀랐다. 그러나 이내 몸은 안락의자에 눕히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이름을 불러보는 것도 오랫만이군." 기요틴은 우울한 시선으로 허공중에 소멸하는 불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불꽃을 볼때마다 기요틴은 무뚝뚝하고 억세보이던 그 남자……가츠 폰 라 이트 자작의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눈초리를 떠올릴수 있었다. 쇠뭉치라고 볼 수밖에 없던 거대한 투 핸드 소드, 베르가곤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던 아마란스 최고의 검사를. "바라야즈라고 했나?" 기요틴은 암갈색의 기묘한 눈동자를 굴려 흥분에 젖어있는 젊은 검사를 바라 보았다. 분명 라이트 자작 집안에서 나타났다는 괴짜 도련님……이란 기억이 있다. 사실 아마란스 용병학교에 다니는 사람치고 가츠 폰 라이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그의 모습은 유명했다. 온통 검은 가죽으로 몸을 감 싸고 묘하게 구부러진 샴실을 양손으로 교묘하게 다루는 그의 모습은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볼수 있었고, 라이트 자작 집안에서 이미 내놓은 자식이란 소문은 그의 기묘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더군다나 가츠는 현재 기요 틴의 제자인 것이다. 비록 전투와는 거리가 먼 역사학(歷史學)이었기 때문에 그의 출석은 적었지만. 가츠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생님.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은 있으신가요?" "바라야즈……바라야즈……" 기요틴은 머릿속에 아마란스 역사책을 펼쳐놓고 빠른속도로 음미해갔다. 그러 나 기요틴의 기억속에 그런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기요틴은 고개를 저었다. "아마란스 역사서에 그런 특이한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는데." "아마란스가 아닙니다. 이바이더 공국입니다." "이바이더? 아아……서쪽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영지 말인가." 기요틴은 그제서야 가츠의 말을 납득했다. 가츠가 말하는 바라야즈라는 것은 마족의 전설에 내려오는 '존재하는 것들의 기사'에 대한 내용이었다. 기요틴은 머릿속의 한 구석에서 전설로 기억하고 있는 켸켸묵은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올해나이 스물이 되는 젊은 선생으로서는 단번에 알아내기 힘든 항간의 소문 에 지나지않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기요틴은 그런것 보다도 가츠라는 사내가 전설에 흥미를 보인다는 것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어쩌면 좋은 계기가 될수 있겠어.' 기요틴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적어도 기요틴이 알고있는한 가츠는 아주 뛰어 난 학생이었다. 한번 말해주면 잊는적이 없었고 역사의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 도 매우 넓었다. 편견이나 선입관이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 다. 다만 학문에 대한 관심이 거의 전무한 관계로, 기요틴으로서는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가츠가 직접 질문을 들고 찾아온 것이었다. 기요틴은 머릿속에 남아있는 바라야즈에 대한 내용을 전부 끄집어내었다. "전설의 왕……그를 수호하는 기사. 어둠은 걷히고 빛은 찾아들지만, 어둠 의 권속들이여. 그대는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전설이었지. 흥미가 있 나?" "물론입니다, 선생님. 어제 술집에서 이바이더의 용병이 말해주었습니다." "그건 단지 전설일 뿐이라네, 가츠군." 기요틴은 슬슬 말머리를 돌려보기로 했다. "존재하는 것의 기사라는 전설은 오래전……그러니까 마계전투가 있었던 400여년 전쯤이었던가? 마족들의 입에서 입으로,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역 사에 끼어들게 되었지. 휴프노스의 카알 대제와 아마란스 공국의 창시자이 셨던 라체트 폰 아마란스 대공(大公)께서 직접 마물의 소탕을 명하셨고, 그 에따라 궁지에 몰린 마물들이 소리높여 '존재하는 것들의 기사'를 찾았던 것이 아니었겠나. 살아남기 위해서 말이야."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닌것 같습니다. 이바이더에는 실제로 그 기사를 지칭 하는 '바라야즈'가 있다고 합니다." "바라야즈가 있어?" "네. 선생님. 하지만 그는 바라야즈가 무엇인지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습니 다. 그래서 선생님께 물어보려고……" "……그렇다면 큰일이지." 가츠의 눈이 조금 크게 떠졌다. 기요틴은 낮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바라야즈……란 말은 고대 오크들의 언어야. 오크들은 다른 마족과는 달리 인간과 비슷한 어휘체계를 가지고 있었지. 그래서 인간들은 오크의 언어와 기록을 통해 마족들의 생각과 사고방식을 이해할수 있었다. 그 결과, 그들 의 사고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지배자가 바로 '바라야즈'라는 것을 알아낼수 있었네."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하지 않았던가? '마'를 수호하는 기사일세. 그것도 '마'가 아닌 '빛'에서 태어난 전사 말이야." "……" "바라야즈의 '바라'는 '상반된'이란 의미가 있네. 오크의 관점으로 생각할때 '상반되다'라는 말은 '배신' 또는 '남을 배신하고 자신에게 이로운 일을 하 는 자'라는 뜻이네. '야즈'는 '싸우는 자' 내지는 '지키는 자'란 의미……그 리고 그 이름이 뜻하는 의미인 '지배자' 그리고 '수호자'라는 결과를 비교 해 보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네." "……" "빛을 배신하고, 마의 편에서 태어난 곳을 공격하는 이단자." 가츠의 얼굴에서 핏기가 조금 사라졌다. 잠시 그의 얼굴에서 여러가지 생각이 스쳐가는듯 보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않아 가츠는 눈을 매섭게 뜨며 낮게 대 답했다. "아닙니다." "……아니야?" 기요틴이 반문했다. 가츠는 으르렁거리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선생님은 잘못 이해하고 있어요." "……내가 지금 말한것은 400년간 전해내려오는 정설(定說)이네." "400년간 잘못되었을 수도 있죠. 나는 그들을 이해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 가츠의 말에 기요틴은 대답을 할수 없었다. 이해할수 있다니……숱한 전장에 서 마족들의 목을 수도없이 베어온 가츠였다. 마족이라면 쉽사리 베어넘기던 마물들의 살육자, 가츠 폰 라이트가 그들을 이해한다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 았다. 기요틴은 문득 가츠의 허리에 언제나 매달려있던 샴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다. 검집은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 있어야할 검은 보이지 않았다. 기요틴은 말투를 조금 낮추었다. "……자네 검은 어쨌나." "……" 가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마치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 처 럼. 가츠는 몸을 돌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기요틴의 교실을 빠져나갔다. 기요 틴은 다급하게 가츠를 불러세웠다. "가츠! 대답을 해!" "……선생님." "검사의 모든것이라 할수있는 검을 몸에서 떼어놓는다는 것은 이해할수 없 는 일이다. 하물며 자네같은 일류 검사가! 검을 어쨌나!" "그런것……없애버렸습니다." 기요틴은 입을 벌린채로 아무말도 못했다. 가츠는 문간에 선채로 고개만 뒤로 돌려 기요틴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츠는 슬픈 얼굴을 한채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선생님만은……이해하실줄 알았어요. 그들이 메고있는 어둠의 멍에를." "……가츠……"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그들을 베어버린 칙칙한 검따위……무슨놈의 명예입 니까. 저는 학살자입니다.……학살자." "……" "이제는 안합니다. 그런짓은 절대 안합니다. 나는 더이상 학살자로 남고싶 지 않아요." 가츠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멀어져가는 그를 기요틴은 멍하니 바라볼수 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10년……기요틴이 아마란스 학술원의 이사 자리로 오를때까지 기 요틴은 가츠를 볼수 없었다. 그는 자진해서 풍족한 영지를 반납하고, 버려진 땅 이바이더로 갔다고 했다. 물론 영지를 교환할때 얻어지는 승계의 법칙에 따라 그는 자작에서 공작으로 한단계 직급을 올릴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고……사람들이 가츠의 모습을 본것은 15년이 지난 후 였다. 이바이더에 다녀온 세금조사원이 세무청장으로 근무하던 기요틴에게 보고를 한 것이었다. 그는 기묘한 얼굴을 하고는 기요틴에게 보고를 했었다. "이바이더의 마족들이 이상해 졌습니다." 기요틴은 세금징수 서류에 도장을 찍어나가다가 눈만 위로 치켜들어 조사원 을 노려보았다. 조사원은 날카로운 기요틴의 시선에 움찔 했지만 보고는 계속 해나갔다. "마족들이 몰려다니고 있습니다." "그거야 언제적 이야기인가." 기요틴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바이더는 마족들의 천국 이잖아. 아직까지 별다른 사건은 없지만……세 금만 꼬박꼬박 내 준다면 몰려다니든 말든 상관할바 없네." "……그게 아니라……마족들의 우두머리가 인간인듯 싶습니다." "……" 기요틴은 도장을 내리찍던 동작 그대로 멈췄다. 마치 오래된 상처가 새로 돋 아나듯, 그의 기억에 가츠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기요틴은 도장으로 세 차게 마지막 징수 청구서에 일격을 가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어조로 기요틴이 물었다. "어떤 인간인가?" "그건 모릅니다. 다만 검은 가죽갑옷을 입은 전사였는데……마족의 앞에 서 서 해적들과 싸우는 모습을 여러번 봤습니다." "……해적?" "이바이더 동쪽의 해적들의 섬인 스칼레이토가 있잖습니까. 불규칙적으로 그들이 이바이더를 침공하는듯 했습니다. 그런데 마족들이 그들과 맞서 싸 우더라니까요." "……" "이바이더의 촌놈들이 마족과 내통해서 독립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조치 를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알겠다." "그럼 제가 보고를……" "아니다. 돌아가서 쉬도록. 보고는 내가 하겠다." 조사원을 돌려보내고 나서 기요틴은 많은 생각에 잠긴끝에 아마란스 대공을 만나 보고를 올렸다. 아마란스 대공은 토벌대를 보냈고, 몇달간의 전투가 지 난후에 토벌대는 마족들을 이끌었다는 전사의 머리를 베어가지고 돌아왔다. 대공의 친정이 있던날……기요틴은 분명히 볼수 있었다. 나무상자안에 얌전 히 놓여있는 가츠의 머리를. 그리고 여전히 불꽃이 튀기는듯한 눈초리로 아마 란스 대공을 노려보는 시선을. 기요틴은 이바이더의 모반을 막았다는 상으로 세무청장에서 총무청감의 자리에 올랐고, 이후 두달만에 이바이더는 독립했 다. 아직 열 두살이라는 어린 그의 아들, 토오르 폰 라이트가 뒤를 이었다고 했 다. 그는 아버지를 빼다박았는지 마족들을 시민으로 받아들이고 키클로프라는 군소 국가들의 동맹을 이끌어냈다. 결국 아마란스로서도 시끄러운 영지 하나 버리는셈 치고, 이바이더를 인정해버렸다. 하지만 그 여파가 현재에까지 미치 고 있었다. 그것도 아마란스의 최대 적국(敵國)으로 부상해버린 최악의 상태 로. "바라야즈……인가." 기요틴은 다시한번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우울한 기요틴의 추 억을 단번에 깨버리는 목소리가 튀어들어왔다. "아닌데." 여자의 목소리였다. 기요틴은 등골에서 소름이 오싹 돋는것을 느꼈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는 기요틴의 목 바로 아래에서 싸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일어서다 가 멈춰버린 엉거주춤한 자세로 기요틴은 서버렸다. 정신이 완전히 돌아온 기요틴의 귀에 간간이 들리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기습……! 어떻게!' 기요틴은 검을 겨누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무서우리만치 단정한 얼굴의 여자는 엷은 냉소를 짓고 서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붉은 화염이 감도는 아머 파트를 착용한 은회색 머리카락의 남자아이가 있었다. 기요틴은 침을 꿀꺽 삼 키고 말라붙은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 "너는 누구냐!" "……알거없다." 여자는 차갑게 냉소했다. "네 이름이 기요틴 페르제바브……아마란스의 냉혈재상 맞는가?" "……" "대답하지 않으면 목에 바람구멍을 내 주겠어." "……맞소." "제대로 찾았어. 역시 네 눈썰미는 좋아, 카뮤." 여자는 남자이이를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방금전의 차가운 냉소를 보 내던 얼굴이라고는 생각할수 없었다. 카뮤라 불린 남자아이는 얼굴을 조금 붉 히며 어물어물 대답을 하지 못했다. 기요틴은 불쾌해졌다. "대답을 했으니 내 질문에도 말해주지 않겠소?" "……포로 주제에 말이 많군." 여자는 손을 한차례 흔들었다. 그러자 서늘한 냉기가 기요틴의 양 머리옆을 지나치며 무언가가 발 아래로 후두둑 떨어졌다. 눈을 아래로 내려보니 머리카 락이었다. 기요틴은 황급히 손을 옆머리로 가져다 대었다. 귀는 멀쩡한채 머리카락은 마치 면도날로 밀어버린 것처럼 깨끗하게 잘려있었다. 기요틴의 등을 찬바람 이 훑고 지나갔다. "용기가 가상하구나. 말해주지. 디네즈. 디네즈 다크메이스다." 드래곤 나이트……기요틴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 * * 자자. 이제 슬슬 결말로 가는군요. 4장의 결말이 다가옵니다. 그리고……연재가 일주일만에 이뤄져 죄송합니다. 학교 시험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요즘 이벤트 기획하는 직장일이 너무 힘들어서....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는 꿋꿋하게 올릴겁니다. 많은 성원을...그리고 추천과 비평 메일을 부탁드립니다. 다크스폰이었습니다 『게시판-SF & FANTASY (go SF)』 9090번 제 목:[darkspwn] 라이컨슬로프-55 올린이:darkspwn(유민수 ) 98/09/20 10:24 읽음:967 E[7m관련자료 있음(TL)E[0m ----------------------------------------------------------------------------- 라이컨슬로프 55. 카뮤는 얼굴을 붉힌채 디네즈가 기요틴 재상의 목에서 검을 거두는 것을 보 았다. 그녀를 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전장에서 마주치기라도 했 다면 기요틴 재상의 목은 아마도 카뮤가 날려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를 살려두어야만 했다. '정말 힘들군……' 카뮤는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문득 며칠전 '네즈의 가호'가 있었던 밤이 생각 이 난 것이었다. 잠시간의 기절에서 깨어난 뒤, 카뮤는 디네즈의 대답을 들을수가 없었다. 디 네즈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채로 두어시간을 그렇게 앉아있었다. 두시간……그 러나 카뮤에게는 지금까지 살아온 나날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기간이었다. 두 시간이 지날즈음이 되서야 디네즈는 입을 열었다. "카뮤." "……네." "네 제안, 받아들여야 겠구나." "의무입니까?" "……그럴지도." 쓴웃음을 보이는 디네즈의 모습에 카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는 때가 좋지 않을때 고백을 한 것이다. 하필이면 '네즈의 가호'라니. '그래도 이런 기회가 없었다면 말도 못했겠지.' 카뮤는 디네즈의 입이 열리기만을 꾸준히 기다렸다. "나도 잘 모르겠구나. 너와 함께 산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야." "마스터!" "하지만……" 디네즈는 말을 길게 끌었다. "……그게 연인으로서의 사랑인지는 잘 모르겠다. 너와 함께 있고싶은것은 내 마음이지만, 어쩌면 제자로서 사랑하는 것일런지도." "그렇군요." "……따라서 나는 이렇게 하기로 했단다." 디네즈는 손을 내밀어 카뮤의 손을 잡고는 가슴에 가볍게 대었다. 봉곳이 알 맞게 부풀어오른 그녀의 가슴이 너무 부드러워 카뮤는 일순간 숨이 멎는듯 했다. "네가 내 복수를 완성시켰을때, 너를 받아들이겠다." "……포기하지 않는군요." "그때까지는 지금처럼 지내자. 나도 조금은 생각할 여유가 필요하니까." "……" "카뮤?" 조금은 볼이 부풀어오른것 같다. 바보처럼 느껴진다. 나도 벌써 스무살이다. 이제는 결혼도 할수있는 나이인데 아직까지 아이처럼 골을 낸다는 것은 별로 좋은일이 아니다. 카뮤는 맞잡은 디네즈의 손을 들어올려 정중하게 입을 맞추었다. 엄숙해진 카뮤의 분위기에 디네즈는 잠시 할말을 잊고 있었다. 카뮤는 디네즈의 손에 길게 입을 맞추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알겠어요, 디네즈." "……카뮤." "이젠 더이상 마스터라고 하지 않을래요. 내게 있어 당신은 결혼신청에 대 해 고민하는 레이디니까. 그래도 괜찮죠?" "이젠 맞먹으려고 하네." 핀잔하는 듯한 어투였지만 디네즈의 기분은 그리 나빠보이지 않았다. 디네즈 는 카뮤의 머리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중얼거리듯 말을 이어갔다. "……귀여운 카뮤군. 이제는 듬직한 말도 할줄알구……남자가 다 되었어." "난 원래부터 남자였어요." "그랬던가?" 디네즈는 싱긋 웃었다. "그렇다면……이젠 어떻게 나를 도와줄거니?" 카뮤는 입속으로 낮게 그때 했던 말을 다시 읊조렸다. '파르테논을 잘 아는 사람을 잡아, 그가 있는곳으로 이동한다.' 제루가이더 성채에 아마란스의 재상, 기요틴 페르제바브가 있다는 소식을 들 은것은 정말 운이 좋았다. 성채의 앞에서 몇일간의 준비기간을 거친뒤, 디네 즈와 카뮤는 지체없이 라이컨슬로프의 전사들을 끌어모아 제루가이더 성채를 멀리 경유해 등뒤를 치는 기습을 시행했다. 그것은 라이컨슬로프 전사들의 놀라운 이동능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작전 이었다. 인간이라면 스무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그들은 단 한시간에 주파해 낸 것이다. 그것도 제루가이더 성채의 산맥을 빙 돌아 데버룬의 평야를 지나 서. 디네즈와 카뮤는 자카드를 타고 성채의 동쪽 산등성이에 올라가 천천히 내려오는 길을 택했지만, 실제로 성에 먼저 도착한 것은 라이컨슬로프 전사들 이었다. "커어억!" 어디에선가 숨이 막히는 듯한 비명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신음소리가 이렇게 가까이 들려온다는 것은 제루가이더 성채를 지키는 병사들의 대부분 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카뮤는 낮은 어조로 디네즈에게 말 을 건넸다. "거의 끝난것 같아요." "이로서 제루가이더는 완전함락. 캐디시의 잔당 완전 소탕인가. 데버룬에 남아있는 녀석들은 토오르가 알아서 처리할테고……그렇다면 이제 슬슬 내 볼일을 봐야겠구나." 디네즈는 차가운 냉소를, 완전히 얼어붙어버린 기요틴에게 보냈다. "원하는게 무엇이냐." 기요틴이 굳은 얼굴을 애써 꿈틀거리며 입을 열었다. 포로로 잡힌 상황이었으 나 그의 행동거지는 의연했다. 카뮤는 마음속으로 약간의 경탄을 보냈다. "파르테논은 어디에 있느냐." "……모른다." "말하지 않겠다는 거로군." 카악 하는 굉음이 나며 기요틴이 서있는 바닥이 입을 벌렸다. 그 여파로 기요 틴이 잠시 멈칫했지만 상당히 놀란듯 했다. 디네즈의 오른손에서 스피릿 스워 드가 나와있었다. 스피릿 스워드는 키킥 하는 특유의 신음성을 내며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디네즈는 차갑게 되물었다. "나는 같은질문 또하는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어디에 있어?" "모르는건 모르는 거다. 파르테논의 거취를 아는 자는……아마란스 대공폐 하 한분 뿐이다." "……이번에는 팔을 잘라줄까?" "잘라도 소용없을거다. 어차피 살기를 바라진 않으니까." "……거짓은 아닌것 같군." 디네즈는 일순 흥미를 잃어버린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재차 날카롭게 물었 다. "그에 대해서 아는거 있으면 다 말해봐." "……역시 아마란스 대공폐하 한분만 아신다." "그말을 나보고 믿으란 말인가, 냉혈재상 각하." "……나로서도 알고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드래곤 나이트." "……" 순간 기요틴의 눈에서 무언가 모를듯한 빛이 스쳐갔다. 기요틴은 음울한 표정 으로 말을 이어갔다. "어느날……아마란스의 궁전에 검은 갑옷을 입은 파르테논과 그의 딸, 드로 이얀이 나타났다. 아마란스 대공각하께서는 앉은자리에서 그를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과거에 그들이 누구였는지도, 그리고 무엇때문에 아마란스를 위 해 싸우는지도 몰라. 마물과의 전투 이외에는 싸움을 하시지 않는 대공의 태도가 갑작스레 달라진 것도 그 녀석이 나타났을 때와 거의 일치한다." "……" "아는건가, 너희들은. 그녀석이 누구인지……" "내게 그걸 묻는가? 그래봤자 파르테논 장군이겠지." "농담을 사실처럼 하는 습관이 있으시군, 드래곤 나이트." 기요틴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피었다. 비웃음……분명 자신을 우습게 보지 말 라는 일종의 과시처럼 느껴졌다. "카피티아 대사제가 하던말을 이제야 이해하겠어. 인간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 드래곤과 드래곤 나이트가 휴프노스와는 전혀 관계도 없는 잭슨의 분 쟁에 끼어든 이유가 있을거라고 하더니 당신들의 목적이 바로 파르테논이 겠지. 아니, 아니야. 그건 가명일테구……진짜 이름은 따로 있겠지만." "머리좋군, 기요틴." "칭찬의 뜻으로 받아들이겠소. 더불어 승자로서의 관용을 베풀어주길 바라 는데." 기요틴은 머리를 조금 숙여 감사의 예를 표했다. 예의바른 모습이었으나 그의 눈안에 감춰진 예리한 기운을 카뮤는 눈치챌수 있었다. 절대 녹록한 상대는 아니었다. 디네즈는 차가운 눈으로 기요틴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빙긋 웃고는 입을 열었다. "제대로 생각이 박힌 인간이 아마란스 진영에 있으리라고는……" "아마란스라도 해서 전쟁광만 있는건 아니다. 오히려 분쟁을 피하고 싶은게 우리다. 잭슨같이 산지가 많은 국가를 꾸려가기란 쉬운일이 아니야. 데버 룬같이 넓은 곡창지대를 가진 나라라면 모르겠지만……키클로프 연합처럼 별로 쓸데없는 국가와 싸우는 것은 우리에겐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아." "……그런데도 왜 싸우는건가?" "발빼는게 늦었다고 말하면 믿겠소?" "이해할만 하군. 그런 당신이라면 이해도 빠를테니 내가 하는말 잘 들어요." 디네즈는 날카롭게 말했다. "당신을 죽이지 않을테니, 아마란스로 돌아가 대공에게 전하시오. 파르테논 과 드로이얀을 가까운 시일내에 내 앞에 출두시키시오. 나를 포함해서 드 래곤족이 원하는 것은 단지 그것 하나뿐이야. 녀석은 수룡왕을 죽인 범인 이니까." "……수룡왕을!" 기요틴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일의 심각성을 눈치챈듯 했다. "파르테논이 죽지않는한 그린 드래곤 일족은 아마란스와의 전쟁에서 물러나 지 않는다. 또한 파르테논, 아니 바타쿠가 내 손아래 죽지 않는다면 화룡 왕과 풍룡왕의 드래곤 나이트도 물러나지 않는다. 어떻게 할텐가? 3대 드 래곤족 모두와 싸우겠나, 아니면 파르테논을 내놓겠나." "……" "대답은 3일후에 데버룬으로 가져오시오. 잘 생각해 두는게 좋을거요, 냉혈 재상." 디네즈는 말을 마치자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리고 카뮤의 어깨에 손을 얹 고는 천천히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얼마 가지않아 디네즈는 우뚝 서 고 말았다. 누군가가 문을 막고있었다. 칙칙한 회색의 승복에 한손에는 거대 한 낫을 들고있었다. 커다란 승복의 두건에 가려 그의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카뮤는 그의 몸에서 풍기는 무언가 다른 이질감에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 발 하는 경고를 들을수 있었다. 카뮤는 오른손을 들어 디네즈를 막고는 몸을 조금 앞으로 당겨 디네즈를 자 신의 등 뒤로 돌렸다. 디네즈의 눈이 조금 크게 떠졌다. 느릿느릿하지만 무거운 음성이 승려로부터 전해져왔다. "찾았다." 카뮤는 오른손을 들어 낮게 외쳤다. "나오너라, 나의 종이여." 카르륵 하는 불꽃이 튀어오르며 오른손의 아머파츠는 길다란 불꽃의 검으로 변했다. '사막의 영혼은 태양아래 영원하다'라는 긴 이름의 검이었다. 네레노 디아의 사막에서 푸르그슈타르에게 받은 이후 단 한번도 빼지않았던 검이었 다. 그러나 카뮤는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생각했다. 이 승려는 위험하다는 예 감을 전해주고 있었다. 조금은 당혹한듯 기요틴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피티아 대사제!" "무사하시군요, 기요틴. 그대의 운명의 끝은 멀었습니다." 카피티아의 목소리엔 감정이 없었다. 그의 얼굴이 천천히 위로 들렸다. 하얀 수염이 나타나고 갈색의 피부에 온통 칼자국이 나있는 뺨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위로……하얀 백안(白眼)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카뮤는 하얀 눈동자를 보는순간 숨이 멎는듯한 충격을 느꼈다. 저자는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당혹했는가, 어린 소년이여." "……" 카피티아는 엷은 미소를 띄워올렸다. "육체의 눈은 정확하지 않아. 자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아네." "……무슨 일입니까." "자네에겐 볼일이 없어. 내가 관심이 있는건……" 카피티아는 거대한 낫을 쥔 오른손을 조금 틀어서 반달 모양으로 휘어진 칼 날이 카뮤의 등뒤에 서있는 디네즈를 가리키도록 했다. "……저 완성된 자야." "……완성?" "그렇다. 라그도메제키아스의 혜안을 빌었을때, 그녀만큼 완성된 자는 없 다." "라그도메제키아스." 카뮤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져갔다. 카뮤의 뇌리에 세이렌이 했던 말이 잠깐 스쳐갔다. '세 주체……운명의 실을 주관하는 세 존재. 태양신 유노는 운명의 실을 만 들어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파괴신 헤게모니는 그 실을 묶어 존재라는 그릇을 만듭니다. 마지막으로 존재가 완성되었을때, 죽음의 라그도메제키아 스는 낫을 휘둘러 모든것을 원점으로 되돌립니다.' "원점……" 생명의 원점, 태어났던 때로 돌아간다. 카뮤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 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저 노인은 적이다. "꺼져요, 노인네!" 카뮤의 대답은 즉각적으로 돌아왔다. 카뮤의 오른손에서 불꽃의 검이 흉흉한 살기를 내뿜어댔다. 카뮤의 기운이 검을 통해 분출되고 있었다. "당신은 우리에게 볼일이 있어도, 나와 디네즈는 안그래. 디네즈를 막겠다 면 우선 내 시체를 밟아야 할거야." "……그런가." 카피티아는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리 크지않은 방 안이 꽉 차는 느 낌이 들었다. 거대한 낫이 허공에 들리자 검은 기운이 낫 주위를 떠도는게 보 였다. 작은 요정처럼……검은 기운들은 낫의 주위를 헤메듯 돌아다녔다. 카피 티아는 텅빈 목소리로 외쳤다. "소년이여. 너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 카뮤는 순간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대답했다. "디네즈를 위해 살고있다." "……특이한 대답이군." 카피티아는 묘한 시선을 카뮤에게 보냈다. "자신을 위해 살지않고 타인을 위해 산다는 말인가. 자신의 마음을 속이면 서? 그건 완성에서 멀어지는 길이다." "완성?" "그렇다. 완성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저 여인은 완성된 존재라고 할수있 다. 지극히 훌륭하게 개인적이거든." 카뮤는 시선을 돌려 등뒤의 디네즈를 바라보았다. 디네즈의 얼굴이 납빛으로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녀의 시선 아래 감춰진 증오와 분노의 불길을 카뮤는 느낄수 있었다. "저 여인은 아주 현명하다. 빛에서 태어나 어둠으로 들어왔고, 그리고 어둠 에서 다시 빛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훌륭한 어둠이다. 그녀 는 자신의 목적……복수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살아왔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주변사람들을 이용한다. 특히 자신을 사랑하는 한 어 린 소년을 말이지." "닥쳐." 디네즈가 일갈했다. "더이상 지껄이면 목을 잘라버리겠다." "그래보았자 죽기밖에 더하겠나. 여인이여." 카피티아의 어조는 여유롭기까지 했다. "자신을 위해 살고, 개체로서 인정할때……존재로서의 완성은 이룩된다. 죽 음이란 모든것의 종말이 아니다. 또하나의 시작이다." "……" "너는 자신의 복수를 위해 저 아이를 끌어들였다. 렉싱턴에서……카알에서. 네레노디아에서도. 그리고 바로 이곳, 잭슨에서도. 부인할텐가?" "……" "사랑? 이해? 너는 한순간이라도 느껴본 일이 있는가? 너를 다크메이스에 게 팔아버린 네 아버지를 이해해 본일이 있는가? 단 한순간이라도 사랑의 눈길을 보내는 저 소년에게 진심으로 우러나는 애정을 보인일이 있는가? 너의 행동은 하나하나 계산된것. 사람의 마음을 이끌고, 또한 그들의 자발 적인 협조를 얻어내고자 일부러 꾸민 것들뿐이지 않은가." "아니야! 이 나쁜 녀석아!" 처절하게 디네즈는 외쳤다. 그녀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나는……나는 카뮤를 사랑한다. 카뮤를 좋아해. 네가 말하는 그런생각은 내게 없어!"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겠지." 카피티아는 냉소했다. "소년을 사랑한다면 왜 일찍 받아들이지 않았지? 라이트 공작과 이바이더로 갔을때, 너는 어째서 소년을 데리고 떠나지 않았는가. 그를 생각해서? 천 만에. 그래야만 저 아이는 기를쓰고 너를 따라올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저 소년은 네게 다가가려고 무슨짓이든 할테니 까." "……아니야." "로리타가 소년을 사랑하는것을 알고있었지? 그 아이를 붙들어 두려는 생각 에 일부러 소년을 사랑하는 척 하려던거 아닌가? 다크엘프라는 절망감에 다가서지도 못한채, 좋아하는 남자 곁에서 영원히 맴도는 위성을 만들려는 생각 아니었던가?" "……나는 그러지 않아. 나는……나는……" "그렇다면 왜 로리타를 남겨두었지? 왜 그녀를 다크엘프의 마을로 돌려보내 지 않은건가? 언제라도 그럴 기회는 충분했다." "……시간이……" "시간같은건 애초부터 없었다, 디네즈." 카피티아는 팔을 옆으로 쭉 뻗었다. 검은 기운이 서린 낫이 몸과 수직으로 섰 다. 카뮤는 디네즈를 물러서게 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 "너같은게 내 마음을 알아? 그 고통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붙 잡아야 했다. 복수……그래, 복수다! 복수를 갈망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살 아남을수 없었단 말이야!" "너를 책망하는게 아니다, 디네즈." 카피티아는 낮게 읊조렸다. "개체라면 당연한 일……자신을 희생시키거나 남을 용서한다는 말도안되는 생각을 믿고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에게 충실한 것이 훨씬 인간답거든." "……" "너는 훨씬 인간답다. 기사도니 뭐니 하면서 마음을 속이는 디트리히보다 낫고, 마음속 깊숙히 아버지를 죽인 마물들을 싫어하면서도 바라야즈를 짊 어진 토오르보다 낫고, 그런 토오르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괴로워 하는 기요틴보다 낫다." 카뮤는 저도모르게 눈을 뒤로돌려 기요틴을 바라보았다. 기요틴의 얼굴은 흙 빛으로 변해있었다. "분노에 몸을 맡기고 싶은가? 그렇다면 맡겨라. 증오스러운가? 그렇다면 증 오하라. 자신의 마음이 가는대로 살고 행동해라. 마(魔)에 가까운 마음이 되었을때, 너는 비로서 진정한 완성이 될수있는 것이다, 디네즈여." "……" "라그도메제키아스는 영원한 관조자……선과 악의 구별도 없다. 우리는 지 켜보고 생각하고, 또한 결정한다. 나는 너를 오랫동안 보아왔다, 디네즈 폰 휴프노스." "아니야!!" 디네즈의 몸이 날았다. 카피티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 리며 스피릿 스워드의 일격이 카피티아의 목을 향해 날아든 것이었다. 아차하 는 순간이었기에 묵직한 낫을 들고있는 카피티아가 막을길은 없었다. "대사제!" 기요틴이 놀라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카뮤가 본것은 피를 뿌리며 죽 어가는 카피티아가 아니었다. 디네즈의 스피릿 스워드가 닿기도 전에, 지워지 듯 카피티아의 몸이 사라져버렸다. 디네즈의 검이 목표를 놓치고 주춤할때 그 녀의 등을 뚫고 찬연히 피어오르는 검은 불길을 카뮤는 볼수 있었다. 카뮤의 눈이 크게 확대되었다. 카피티아는 전혀 다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낫을 들고 그 끝에 디네즈를 꽂아들고 있었다. 디네즈는 즉사했는지 움직임이 없다. 죽었다……죽었다. 피……피다. 피가 뚝뚝 흘러내린다. 카뮤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고 의식 의 끈이 멀어져가는것을 느낀다. 죽인다……죽인다……죽인다. 카뮤의 눈에서 무언가가 갈라지듯 빠져나온다. 시야가 붉어지며 눈 아래로 붉 은 무언가가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죽음……죽음이다. 디네즈는 움직이지 않 는다. 죽은것이다. 죽었다……죽었다……죽었다. "으아아아아!!" 카뮤는 목이 찢어져라 외치며 불꽃의 검을 카피티아에게 휘둘렀다. 그러나 검 이 카피티아에 닿으려는 순간, 역시 카피티아는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퍽 하 는 소리가 나며 카뮤는 방 구석으로 처박혀 버렸다. 눈앞이 흐려지지만 그 틈 새로 카뮤는 볼수있었다. 여전히 낫에 꿰인채 허공에 들려있는 디네즈의 모습을. 쿠쿵!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머리를 울린다. 카뮤의 머릿속에 전혀 다른 무언가가 말을 걸어오는 것을 느꼈다. 분노…… 분노? 아니다. 난 그저 디네즈를 죽인 저녀석을 죽이고 싶을 뿐이다. 디네즈 를……그녀를 모함하고 저렇게 죽게 만든 카피티아를 죽이고 싶다. 죽이고 싶은가…… '그것'은 집요하게 카뮤의 영혼에 대고 외쳐댔다. 카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살아가는 의미를 잃었다 어떻게 할텐가…… '그것'은 혀로 핥는듯한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물었다. 죽인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죽이겠다……디네즈가 죽은이상, 세상에 살 아있을 가치가 있는 것들은 없어. 힘이 필요한가…… 카뮤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분노로 새빨갛게 변한 눈을 들어 카피티아를 노려보았다. 카피티아는 놀란 눈으로 카뮤를 보고 있었다. 그의 입이 열리며 비명처럼 신음성이 새어나왔다. "퓨리(Fury)가……" 파멸을 원하는가…… 그렇다 죽음을 원하는가…… 그렇다 힘을 원하는가…… 카뮤는 대답했다. 그렇다 '그것'은 말했다. 그렇다면 힘을 주겠다. 르르르……르르……르르르…… 카뮤의 입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숨이 막힐듯한 지독한 살기가 온몸으로 흘러넘쳐 카피티아를 압박해 들어갔다. 카피티아는 낫을 휘둘러 디 네즈를 방구석에 놓아둔채 뒤로 물러섰다. 그의 입에서 경악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광전사(狂戰士)……버서커!" * * * 이로서……4장은 끝입니다. 다음은 5장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입니다. 무엇을 잃어버렸냐구요? 글쎄요……그건 저도 모르죠.^^ 버서커라고 하면……역시 '로도스도 전기'의 올슨이 생각나는군요. 광전사의 특이한 성격은……저를 매료시켰답니다. 그래서 꼭 카뮤를 버서커로 만들고 싶었죠. 애초 설정은 디트리히였지만……그는 잘먹고 잘살게 설정을 바꿨습니 다. 개인적으로 느끼한 인간이라서 말이죠. 다크스폰이었습니다 『게시판-SF & FANTASY (go SF)』 9474번 제 목:[darkspwn] 라이컨슬로프-56 [4장 종료] 올린이:darkspwn(유민수 ) 98/09/27 10:10 읽음:941 관련자료 없음 ----------------------------------------------------------------------------- 라이컨슬로프 56. "퓨리!" 로리타는 심장을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에 잠시 숨을 쉴수 없었다. 이 강한 존재감……정령사인 로리타만이 느낄수 있는 정신 정령만의 독특 한 감각은 로리타의 섬세한 신경을 휘저어대고 있었다. 파괴하라……파괴하라……분노하라…… 르르……르르르……르르르…… 로리타의 입에서 피에 굶주린 짐승의 울음소리가 조금씩 새어나왔다. 그러나 로리타는 크게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하아……하아악!" 몸을 감싼 로브가 푹 젖어있었다. 로리타는 가슴을 삼킬듯한 분노의 흐름에서 떨어지려고 노력했다. 분노……퓨리는 바로 그 분노의 결정 체였다. "틀림없이 안좋은 일이 일어난거야." 로리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짓누르며 막사를 빠져나와 달렸 다. 경비를 서던 보초들이 허겁지겁 달려가는 로리타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로리타는 그들을 신경쓸 겨를같은건 없었다. 약 20큐빗 정도를 달려가자 커다란 지휘용 막사가 시야에 들어왔다. 로리 타는 경비병에게 급하다는 신호만 보이고는 막사 안으로 뛰어들어갔 다. "큰일이에요, 디트리히!" 로리타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이내 그 말은 기어들듯 작아지 고 말았다. 막사 안에는 거대한 검을 두손으로 받쳐든채 무릎을 꿇은 토오르와 당황한 표정의 디트리히가 있었다. 디트리히는 로리타를 보자 대번에 반가운 기색을 띄었다. "로리타!" "……무슨 일이에요?" 상황파악이 안돼 머뭇거리는 로리타에게 칼로스가 다가왔다. 칼로스 는 오른손을 쭉 뻗어 로리타와 디트리히 사이의 공간을 가로막는듯한 몸짓을 보였다. 그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지금은 안돼. 결정이 난 이후에 이야기를 하도록 해." "그럴 시간이 없어요!" 로리타는 다급하게 말했다. "분노의 정령이……퓨리가 나타났어요!" "……퓨리?" 칼로스는 가볍게 반문했지만 로리타의 말을 이해하지는 못하는듯 보였 다. 로리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노의 정령, 퓨리에요. 죽음과 공포……그리고 파멸을 불러 일으키 는 정령이 바로 이 근처에 있어요. 그것도 제루가이더 성 방향에 서." "제루가이더?" 디트리히의 안색이 파랗게 변했다. 디트리히는 두말않고 토오르가 받 쳐든 검을 한손으로 집어 들어올렸다. 디트리히가 검을 잡자 토오르는 잠시 비틀거렸지만, 이내 머리를 깊게 숙이고는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칼로스도 뻗었던 팔을 내리고 무거운 시선을 디트리히에게 보냈다. 디트리히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이런일로 티격태격할 때가 아닌듯 합니다. 바라야즈인지 뭔지는 모 르지만 일단 받아들일테니까 세부적인 내용은 나중에 이야기 합시 다." "그러죠." 토오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머리를 조금 숙였다. 디트리히는 로리타와 함께 밖으로 나와 멀리 보이는 제루가이더 성채 를 올려다보았다. 성채 곳곳을 밝히고 있던 횃불이 보이지 않았다. 아 니, 횃불들이 한군데로 줄줄이 몰려있었다. 그리고 그 불은 하나 둘 씩 꺼져가고 있었다. 마치 죽어가는 생명의 불꽃처럼. "카뮤……" 로리타는 낮게 중얼거렸다. 이 상황에서 카뮤가 생각난 이유는 로리타 도 잘 몰랐다. 그러나 두근거리는 심장의 흔들림은 왠지모를 불안속에 그녀를 집어넣고 있었다. 기요틴은 벽에 짓눌리는듯한 생각이 들 정도로 뒷걸음질쳤다. 그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현재 자신이 가지고있는 지식을 총동원해도 이해할수 없는것 뿐이었다. 갑자기 거대한 낫을 휘둘러 드래곤나이트 를 쓰러트리는가 하면, 전설속의 광전사가 눈앞에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광전사(狂戰士) 버서커. 분노의 대정령 휴리(Fury)의 농간에 의해 만 들어지는 감정의 응집체. 소중한 것을 잃거나 원한에 가득한 뛰어난 전사의 영혼을 두드려, 죽음과 공포를 모르고 모든것을 살육하는 미쳐 버린 전사를 의미한다. 전설의 최초의 버서커는 본래 바이서스의 귀족으로, 휴프노스 2개 대 대의 공격으로 자신이 이끌던 기사단이 몰살하자 분노에 미쳐 버서커 가 되었지만, 그 결과는 역사서에도 기록될 정도로 참혹했다. 2개 대 대는 전멸, 마을 두개가 하루만에 증발……버서커는 목이 잘리고 양팔 이 날아가는 치명상을 입었어도 죽지않았다고 전해졌다. 그러나 하룻 밤이 지나자 버서커는 심장이 터져 죽어버렸다. 분노의 힘에 심장이 견디지 못하는 것이 그 이유였다. 르르……르르르…… 눈동자조차 보이지 않는 충혈된 눈이 자세를 취하고 있는 카피티아를 탐색하듯 노려보았다. 붉은 화염을 내뿜던 소년의 검은 검붉은 핏빛 흐름을 날름거리며 조금씩 조금씩 커져갔다. 처음에는 에스토크처럼 보였던 것이 점차 롱소드, 바스타드 소드 그리고 사람 키만한 크기의 투핸드 소드로 자랐다. 검은 살아있는것처럼 몸을 꿈틀거리며 화염을 발산했고 그에따라 방안의 온도는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경솔했나." 카피티아가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은 눈에띄게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크오오오! 소년이 움직였다. 스쳐가는 그림자로밖에 느껴지지 않을정도로 소년은 카피티아에게 돌격해갔다. 카피티아가 급히 낫을 휘둘렀지만 낫은 반 도 내려오지 못하고 쩡 하는 소리와 함께 밖으로 튕겨나와 버렸다. "큭!" 카피티아의 몸이 허공을 날아 돌벽에 쿵 하고 부딪혔다. 울컥 하며 그 의 입에서 선혈이 흘러나온다. 카피티아의 로브는 반쯤 탄채로 너덜너 덜했다. 검의 열기에 타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에는 조그만 화상만이 있을뿐 별다른 치명상은 없어보였다. "제길." 카피티아가 급히 몸을 옆으로 굴렸다. 간발의 차이로 카피티아가 있던 돌벽은 엄청난 폭음을 내며 폭발해버렸다. 먼지 사이로 검을 휘두르는 소년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그러나 다음순간 카피티아는 위로 튕겨져 돌벽 천정에 처박히고 말았다. "커억!" 아주 잠시동안, 카피티아는 천정에 박힌채 멈춰버렸다. 다음순간 카피 티아는 철퍽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의 손에서 낫이 떨어져나갔다. 카피티아는 손을 잠깐 들어 부르르 떨었지만 이내 푹 쓰러지고 말았다. 우어어어! 기요틴은 질린 얼굴로 안개처럼 쓸고 지나가는 먼지구름 사이에 서서 표효하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온몸의 근육이 마치 거인의 그것과 같았 다. 두손으로 간신히 들 정도의 거대한 투핸드 소드를 장난감처럼 한 손으로 들고 붉은 눈동자를 카피티아에 박아두고 있었다. 르르……르르르르 소년의 눈이 천천히 방향을 바꿔갔다. 소년은 똑바로 기요틴이 있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기요틴의 등에서 찬바람이 불고 지나갔다. 소년 의 입이 양옆으로 길게 찢어져갔다. "쿠악!" 위험하다! 기요틴은 온몸의 기력을 다 짜내어 머리를 숙였다. 위잉하 는 바람소리와 함께 델것같이 뜨거운 기운이 뒷통수를 스치고 지나갔 다. 곧이어 귀청이 떨어질듯한 폭음소리가 이어지고 기요틴이 서있던 돌벽 자체가 무너지고 있었다. "아앗!" 기요틴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벽돌들이 허공으로 흩어 지고 기요틴은 볼썽사납게 사지를 허우적거리며 5큐빗 높이에서 떨어 져버렸다. 온몸이 찢어질듯 아팠지만 기요틴은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적어도 저 버서커에 의해 죽을일은 없을테니까. 그러나 그런 예상은 이내 무참히 깨어지고 말았다. 커어어어! 괴성과 함께 허공으로 소년이 튀어올랐다. 푸르스름한 달빛을 받으며 버서커는 미쳐 날뛰는 광기처럼 하늘을 날았고 이내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력으로 멀리 보이는 불빛을 향해 달려가버렸다. 불빛……기요틴의 등뒤에서 찬바람 이 이는듯 했다. "마을이……" 소년이 일으킨 소동에 병사 몇몇이 뛰어나왔지만 속절없이 소년의 검 에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었다. 흉흉한 분노의 폭풍 속에서 버서커는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긴장이 점점 풀어져 버렸다. 결국 기요틴은 의식을 놓아버렸다. 온몸이 아팠다. 그리고……피곤했다. 이젠 조금 쉬 어야 할 때인것 같았다. 로리타는 발아래 펼쳐진 제루가이더의 광경에 할말을 잃고 있었다. 파괴……그리고 죽음. 죽어가는 모든 인간들의 마음이 날카로운 창이 되어 로리타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불러오 는 절망과 죽음, 그리고 분노의 메시지에 난폭한 정령들이 허공을 내 달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로리타는 허공에 떠있다는 사실도 잊 은채 손으로 몸을 감싸안았다. "괜찮은가?" 둔탁하지만 낮은 어둠의 언어다. 가르고리안 족의 자갈로테이아가 걱 정스런 어투로 물었다. 로리타는 애써 머리를 끄덕이고는 손을 들어 성 한켠을 가르켰다. 그곳은 성 안쪽의 마을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울 부짖는 비명소리가 멀리 떨어진 로리타가 있는곳까지 전해오고 있었 다. "저곳으로 가요. 저쪽에 퓨리의 존재가 강하게 느껴져요." "알았다. 하지만 괜찮겠는가……분노의 대정령, 퓨리와 맞서 싸울수 는 없다." "싸우진 않아요. 정령과 싸워 이길수 있는자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럼 왜 가는가? 다크엘프여. 아직 네게 정신정령과 교감하는 것은 무리다." "……가야만 하는 상황이잖아요. 최소한 노력은 해 봐야죠." "……" "자갈로테이아?" "알겠다." 자갈로테이아는 날개를 쭉 뻗치고 로리타를 안은채 허공을 한바퀴 돌 았다. 눈 아래로 제루가이더의 곳곳이 들어왔다. 곳곳에 즐비하게 늘 어선 병사의 시체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단 일격에 목을 당한 것들뿐 이었다. 그것도 검이나 창이 아닌 날카로운 발톱같은 것으로. "라이컨슬로프 부족전사……! 그렇다는 말은 디네즈도 이곳에 있다 는 의미인데." 로리타는 불안한 시선을 마을쪽으로 향했다. 과연 마을 부근의 망루에 몇명의 라이컨슬로프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마을과 가장 가까운쪽의 망루위에 팔이 하나 없는 라이컨슬로프, 젠쿠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 은 경악에 가득한 모습으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갈로테이아는 젠쿠가 서있는 부근까지 날아 내려왔다. 젠쿠는 자갈 로테이아의 날개짓소리를 들었는지 로리타를 향해 눈을 들었다. "젠쿠!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아주 안좋아." 젠쿠는 망루위에 내려온 로리타에게 불편한 얼굴을 드러냈다. 그의 시 선은 자꾸만 마을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로리타는 젠쿠의 시선을 따라 아래쪽에 보이는 마을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버 리고 말았다. "이럴수가……" 자갈로테이아의 탄식이 이어졌다. 마을은 참혹 그 자체였다. 마을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죽음……파괴. 마을 가운데에 한명의 전사가 좌충우돌 날뛰며 검붉은 화염을 내뿜는 거대한 검을 들고 날뛰어댔다. 그 검에는 여자 한명이 산적처럼 꿰어 불타오르고 있었다. 흘러내리는 피는 화염에 휩싸여 매캐한 고기타는 냄새를 허공에 뿌리고 시체가 타는 역겨운 냄새가 로리타가 서있는 망 루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전사는 마침 바닥에 쓰러진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는 공포에 질려 말도 못하고 발만 허우적거리며 도망가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린것인지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다. 전사는 쿵쿵 하는 발소리를 내며 아이에게 다가갔고, 아이는 애원하는 눈을 들어 전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이의 애원은 비참하게 끝을 맺었다. 쿠웅! 아이의 머리는 잘 익은 수박처럼 깨져버렸다. 전사가 발을들어 아이를 밟아버린 것이었다. 허연 뇌수와 뭉그러진 눈알이 사방으로 너저분하 게 흩어지고 전사는 시체가 꿰인 검을 휘둘러 반쯤 탄 여자를 허공으 로 날려버렸다. 불꽃에 휩싸에 잔인하게 웃고있는 전사……미쳐버린 광전사의 얼굴을 로리타는 절대로 잊을수 없었다. "카뮤!" 그오오오오 광전사가 울부짖었다. 처절한 분노의 고통이었다. * * * 카뮤는 광전사로……디네즈는 어디로? 여기까지를 4장의 끝으로 하려고 합니다. 5장은 라이컨 슬로프의 제 2부가 되겠군요. 제 2 부……는 왕궁의 음모와 전쟁의 시작입니다. 부제로는……역시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입니다. 『게시판-SF & FANTASY (go SF)』 15806번 제 목:[darkspwn] 라이컨슬로프-57 올린이:darkspwn(유민수 ) 98/12/10 00:29 읽음:593 관련자료 없음 ----------------------------------------------------------------------------- 『신들이란 무엇인가? 엘프의 고대 기록에 의하면 신들은 인간과 마족을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역사에 개입했다는 사실은 남아있지 않다. 신의 뜻을 전달하는 신관마저도 진의를 알지못해 전전긍긍할뿐……신이 인간에게 원하는 것은 어쩌면 방관(傍觀), 그것 뿐일런지도 모른다. ……』 대신관 레조 하이크 프랜시스의 '신학의 이면(裏面)' 中 아마란스력 22년 3월 출간 라이컨슬로프(=獸人) EDITION Ⅱ 57. 살레로네 살레로네 라포네 톤 미카에노 로니모 언덕을 지나가는 정령이 셋 있네. 길잃은 어린아이, 정령을 따라가고 지옥의 정령들이 아이를 반겨주네. 살레로네 살레로네 라포네 톤 미카에노 로니모 아이는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정령은 아이를 돌려보내지 않고 호호백발 할머니가 되어서야 집으로 가게하네 살레로네 살레로네 라포네 톤 미카에노 로니모 마법의 노래, 살레로네의 주문. 정령의 서클이여 돌아라 돌아. 정령의 주문은 끝나지 않지만 호호백발 할머니가 마지막을 말하네. 살레로레 살레로레 라포네 톤 미카에노 로니모 지옥의 정령들이 미쳐 날뛰네. 먼지가 가득한 어두운 다락방……지드 엥겔스는 이곳을 '요정의 방'이라고 생각했 다. 바닥에 귀를 대고 가만히 누워있으면 콩콩 하는 작은 심장소리와 집안 전체에 서 나는 소소한 잡음까지 손에 잡힐듯이 들리는 것이, 집안을 돌보는 요정 살레로 네가 지드의 집안을 들여다볼 곳은 이곳외에는 없을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지드는 바닥에 배를 붙인채 길게 누워 눈을 감고 다락방 바닥으로 전해져오는 소 리를 듣고 있었다. 꺄악 하는 비명소리……쌕쌕거리는 거친 숨소리를 내며 주먹을 휘두르는 남자의 고함소리. 그리고 벌벌떨면서 구석에 웅크려 있는 작은 여자아이 의 두려움에 가득한 탄식까지. 마지막으로 '요정의 방'에 숨은채 공포의 순간이 지 나가기까지 숨어있는 작은 남자아이의 심장 고동소리도. "살레로네 살레로네 라포네 톤 미카에노 로니모" 지드는 입속으로 작게 웅얼거리듯 주문을 외웠다. 얼굴이 쭈글쭈글한 할머니…… 마녀라는 별명을 갖고있던 지드의 할머니가 가르쳐준 주문이었다. 이 주문을 외우 고 있을때면 지드는 가슴이 편안해 지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지옥의 정령을 불러내는 주문이란다……' 할머니는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 지옥의 정령……할머니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람들을 감시하는 정령들을 불러내어 저주를 거는일을 잘 하셨다. 물론 그렇게 믿는 사람은 지드 하나밖에 없었지만, 지드는 할머니가 위대한 마녀라는 것을 알 고있었다. 할머니는 많은것을 알고있었다. 수많은 위대한 전사들과 마법사들이 벌이는 모험 이야기나, 아빠가 술에 절어 돌아다니는 이유……그리고 죽음과 삶에 대한 근원적 인 해답까지. "살레로네 살레로네 라포네 톤 미카에노 로니모"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생각난다. 기억속의 할머니는 언제나 가슴속의 작은 물건 을 소중하게 품고있었다. 아아……잊을수 없었다. 몇년전, 천식으로 작은 기침을 계속하시다가 피를 토하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할머니는 파랗게 질린채로 침대에 누워 한손으로 지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었다. '살아있는것은 죽게 마련……죽음도 사는것의 연장이니 슬퍼할 이유는 없단다.' 지드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의 말은 언제나 옳았다. 이 지옥같은 생 활이 죽어버리는 것과 다를게 무엇이 있을까? 어쩌면 할머니는 점점 심해지는 아 버지의 행패에 지옥의 정령들을 불러내서, 스스로 죽음을 이용해 물러난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럴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할머니는 소중히 간직하던 물건 을 다른사람도 아닌 지드에게 물려주셨으니까. 지드는 가슴속의 작은 물건을 손가락 끝으로 훑어보았다. 울퉁불퉁한 굴곡에 양 각으로 솟아있는 고통에 가득한 사람의 얼굴이 새겨진 육각형 벌집모양의 작은 펜 던트. 할머니는 이것을 '게레리트'라고 불렀다. '정말 괴로워질때……영혼을 팔아서라도 이루고 싶은 일이 있을때, 게레리트의 입에 네 피를 떨어트리거라. 그리고 내가 가르쳐주는 주문을 외우거라. 그러면 지옥의 정령이 너를 도와줄게야.' "지옥의 정령……" 지드는 살며시 눈을 떴다. 하지만 눈이 잘 떠지지 않는다. 아마도 깨진 머리에서 흘러내린 끈적한 피가 눈을 덮어서 그런 모양이다. 아버지의 매질이 심해지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아버지는 지드를 좋 아하지 않았다. 아니, 두려워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아버지가 평생을 두려 워한 것은 할머니 외에는 없었고, 할머니를 제일 많이 닮은것은 지드 뿐이었으니 까. "살레로네 살레로네 라포네 톤 미카에노 로니모" 희미한 시야 사이로 떨리는 손에 쥐어진 게레리트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살아있 는 인간을 억지로 육각형 안에 집어넣고 그로테스크하게 일그러진 얼굴만을 앞면 에 드러내놓은듯한 묘한 조각이다. 일그러진 입술에 지드가 흘린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피……피……피……조각이 점차 일그러지며 피를 조금씩 빨아들이고 있다. 지드는 그런 게레리트를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게레리트를 둘러싼 작은 테 두리에 새겨진 룬문자……할머니는 그 문자를 알고있었던 것이다. "이젠……할수 있을것 같아요, 할머니" 지드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할머니가 가르쳐준 주문의 마지막을 읊었다. "살레로네 살레로네 라포네 톤 미카에노 로니모……키토네토 블레모 혼 라그도 메제키아스……" 지드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게레리트를 든채로 지드는 그렇게 다락방 바닥에서 죽어갔다. 죽어버린 지드의 육체 주위에 검은 안개가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했다. 검은 안개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처럼 지드를 조금씩 감싸안고 있었다. 이바이더 력(歷) 184년에 일어난 잭슨의 내란은 '환란의 전쟁'이라고 역사에 기록 되게 되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승리자'로서의 키클로프 연합국의 기록이었으며 184년에서 185년간 일어난 단 1년간의 일이었으나 키클로프 연합국이 잭슨 전체 를 표방하는 거대국가로 드러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바이더 력 184년, 캐디시 공국에 의한 데버룬 침략으로 시작된 '환란의 전쟁'은 시종일관 캐디시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캐디시는 곧이어 막강한 해군력을 자랑하는 앗소스와 제휴하여 '잭슨의 통일'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로메오 대륙 최대 의 파란을 일으켰다. 캐디시의 진격은 순조로웠으며 철의 강국, 아마란스와의 연계 로 잭슨 최대의 국가가 되는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그런 캐디시의 공격 에 제동을 건것은 이전까지는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작은 나라였다. 이바이더. 전 대륙을 통합하여 단 하나밖에 없는 마족-인간과의 연계가 가장 훌 륭하게 일어난 소국가. 아마란스의 영지였으나 이바이더를 대표하는 라이트 공작 가(家)의 영도로 독립한 신흥국가였다. 이바이더의 통치자, 토오르 폰 라이트는 아마란스에게서 독립한 군소국가와 여러 작은 나라를 연합한 연합체계 '키클로프'를 발동중에 있었으며, 그를 뒷받침하는 막강한 군사력인 '다크메이지'의 힘을 입어 캐디시의 추격에 분연히 일어났다. 그러나 키클로프 연합은 지리멸렬했고, 끝내 이바이더의 영지를 공격당하는 상황 에 이르른다. 이때 이바이더는 '드래곤 나이트'라는 히든카드를 영입하는데 성공하 고 대 반격을 가할수 있게 된다. 전쟁은 키클로프 연합이 아마란스-캐디시-앗소스 연합을 물리치는 양상으로 발 전하며 키클로프 연합의 수장, 토오르 폰 라이트 공작은 '다크메이지'의 지휘권을 모두 수룡왕의 드래곤 나이트에게 이양하고 그를 모든 마족의 지배자인 '바라야즈 '로 추대한다. 당시 잭슨을 양분했던 아마란스는 이바이더에 직접 재상인 '기요틴 페르제바브'를 보내 화친을 성립시키고 아마란스와 이바이더는 공존하기로 확약을 맺는다. 어떤 정치적 협상이 있은뒤, 아마란스와 이바이더는 잭슨 통합국가 '가베라'를 만들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시기는 아마란스의 지배자인 '텔아비즈 폰 아마란스'의 암살과 최고의 장군이라 평가되던 '파르테논 폰 루돌슈타인'이 실종된 시기와 일치한다. 역사에는 파르테논이 텔아비즈 아마란스 대공(大公)을 살해하고 도망쳤다는 기록을 남겼으 나 그 진위는 파악되지 않았다. 아마란스-가베라로 대표되는 잭슨은 하나의 국가로서 융합, 잭슨이라는 지명도 사라진다. 다만 마족과 인간이 공유하는 '이바이더 공국'의 정신이 그대로 살아있 다는 평가와 함께 이바이더력 189년에 모든 시끄러운 여론을 잠재우고 통일국가 '가베라'가 들어선다. 가베라 왕국 건도 1년……이바이더의 역사가 190년으로 끝나는 시점이었다. * * 일단 도입부는 그대로 활용했습니다. 4장 마지막을 먼저 읽어주시고....5장 시작을 읽어주십시오. 모든것을 재구성합니다. 다크스폰이었습니다. 번거로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참고로, 서두의 제언은.....이번 출판용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결국 연재분과 많 이 다르다는 이야기....죠.^^) 『게시판-SF & FANTASY (go SF)』 15807번 제 목:[darkspwn] 라이컨슬로프-58 올린이:darkspwn(유민수 ) 98/12/10 00:30 읽음:505 관련자료 없음 ----------------------------------------------------------------------------- 라이컨슬로프 EDITIONⅡ 제 5 장.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 58.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 센 바람은 아니지만 바람에 섞인 밀림의 냄새는 무언가 알수없는 힘을 담고 성의 낭하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루닌 하펜다즈는 밀림의 향기를 음미한 바람에 갈색 머리칼을 흐트리며, 왼편으로 늘어선 이국적인 성 안 의 뜰을 바라보았다. 허리춤 밖에 다가오지 않는 작은 녹색의 풀들과 그 위에 군 림하듯 늘어선 형형색색의 꽃들. 그것은 '실용적'이라는 평가가 가장 걸맞는다는 '샤이닝 힐'의 내부라고는 생각할수 없는듯 보였다. '……정원인가.' 그루닌은 흐트러진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대충 쓰다듬은뒤 발걸음을 돌려 꽃들이 만발한 정원으로 걸어갔다. 넓다고는 할수없는 네모난 궁내정원의 가운데에는 열 십자 모양으로 노란 길이 나 있고 길 가운데에는 동그란 의자 두세개와 작은 원형 탁자가 놓여진다. 그것은 현 국왕 토오르 폰 라이트 폐하의 배려이기도 했다. 마음 이 노곤해진 기사들의 심신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나……그루닌의 기억에 분명 그렇 게 들어 있었지만, 검술외에는 별로 소양이 없는 가베라의 기사들은 손바닥만한 정원에 앉아있는것을 별로 즐기지 않았다. 그루닌은 양옆으로 늘어진 잎새를 손으로 헤치며 정원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정 원 안의 탁자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종들이 매일 청소를 하는듯 의자와 탁자는 정 갈하기 그지 없었다. 그루닌은 허리춤의 검을 풀어 탁자에 기대어 놓고 의자에 앉 았다. 따뜻한 햇살이 그루닌의 눈을 어지럽혔다. 손을들어 머리위로 시선을 들자 크리 스탈을 정교하게 깎아 만든 세모 모양의 창이 눈에 들어왔다. 창 밖으로 푸른 하 늘위로 날아다니는 새 한두마리와 반쯤 가려진 태양이 있었다. 그루닌은 눈을 가 늘게 뜨고 햇살의 감각을 즐겼다. '편안하군. 얼마만의 한가함인가……' 그루닌은 머릿속으로 그동안의 일정을 더듬어 보았다. 방금전만 해도 국왕의 명 을 받아 해변에 출몰하는 서펜트를 막았고, 그 전에는 자빅 지방에서 날뛰던 호랑 이를 잡았으며 그 전에는……뭐였더라……. 긴 한숨을 내쉬며 그루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수많은 전투들로 점철되어 있는 기억을 더듬어간다면 결국 마지막에 드러나는 것은 가장 기억하기 싫은 바로 그 '추억'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후회해도, 그리고 절망해도 소용없는 과거의 일인 그것을 되새기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현재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은 가베라 왕국의 기사이며 또한, '헤스펠 제레이트'를 섬기는 기 사라는 사실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할때마다 이미 지워진 가슴의 문장 언 저리를 쓰다듬는 버릇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는 사라진 이빨을 드러낸 충견의 문장. 바로 제스타 가문(家門)의 문장을. 그루닌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햇살의 붉은 실루엣 사이로 과거의 기억이 스쳐지 나갔다. "이래도 네 죄를 인정하지 않는가!" 귓속이 울리고 있었다. 머리는 천근처럼 무겁고 정신은 혼미하다. 벌써 몇시간째였 던가……양팔을 묶인채 심문대에 엎드려 있던 탓인지 눈앞이 캄캄하다. 아직까지 의식의 끈을 놓지않는 자신도 대단하지만 끈질기게 심문을 해대는 제스타 공(公) 도 거의 괴물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그루닌의 머리카락을 잡아채 억지로 머리를 들어올린다. 멀어져가는 정신 이 잠깐 되돌아와 흐린 시야 사이로 뚱뚱한 제스타 흐루시제스 대공의 성난 얼굴 이 보였다. 살집좋은 뺨이 온통 분노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루닌은 꺼져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대공……억울……" "이놈이 그래도!" 퍽 소리와 함께 그루닌의 얼굴이 왼편으로 돌아갔다. 이빨이 두개 부러져 반쯤 벌 려진 그루닌의 입 사이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루닌의 몸에 가해지는 구타는 약해 지지 않았다. 온몸으로 쏟아지는 매서운 가격에 그루닌의 정신은 저승과 이승사이 를 자꾸만 오락가락 하고 있었다. 얼마나 맞았을까……매질이 멈추고 머리가 다시 들어올려졌다. 이번에는 제스타 대공의 얼굴이 더욱 똑똑하게 보였다. 그루닌의 눈 앞으로 얼굴을 들이민 것이다. 대공은 증오가 가득담긴 눈으로 그루닌을 쏘아보고 있었다. "네놈이 나를 죽이려 했다는 것이 이미 드러났다. 그루닌 폰 하펜다즈." "대……대공……나는……" "그래도 너라는 녀석을 믿었던 결과가 이거로구나. 쓰레기 같으니라구." 대공의 주먹이 다시 그루닌의 뺨을 힘차게 때렸다. 아득한 의식 사이로 그루닌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가 아는 제스타 흐루시제스 대공은 이런 사람 이 아니었다. 냉철하고 이성적인……그가 가장 존경하던 주군이었다. 그루닌은 있는힘껏 목소리를 짜내어 외쳤다. "억울……억울합니다!" "시끄럽다!" 대공은 일갈했다. "거리에서 쓰레기를 주워먹는 잡견도 네놈보다는 낫다! 잡견도 주인은 절대 물 지 않으니까," "……" "이것이 네 집에서 나왔는데도 시치미를 뗄건가!" 무언가가 눈앞으로 떨어졌다. 그루닌은 퉁퉁부은 눈을 겨우 움직여 가는 실같이 눈두덩을 들어올렸다. 대공이 던진것은 놀랍게도 사람의 머리였다. 검은 피부에 생전에는 미남이었을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방치된듯 반 쯤썩어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고 눈을 반쯤 위로 뜬채 원한이 담긴 눈동자가 허공 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루닌은 가슴이 메어지듯 아파왔다. '……어떻게' 그제서야 그루닌은 정신이 드는것을 느꼈다. "대공!" "이제야 인정하려나 보군." 대공은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 머리가 누구의 머리인지 한번 네 입을 말해보아라." "……글로린. 전(前) 왕실 기사단장 글로린 폰 데크하인의 머리입니다." "그가 왜 그 모양이 되었는지도 잘 알고있겠지?" "……" "말하라." "……대공……그것은……" "……왜 대답을 못하는가!" 그루닌은 잦아드는 목소리로 흐느끼듯 대답했다. "……반역……대공을 암살하려한 죄……하지만……" "뭐가 하지만 인가!" 대공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반역자를 도운죄는 같은 죄로 처벌한다는것, 잘 알고 있겠지. 다른 놈이라면 모 르겠지만 ……그루닌! 제스타 공국의 자랑스러운 가디언(Gardiun)인 네가 내게 등을 돌린다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런 놈이 나 를 배신해!" "글로린은 결백합니다!" 그루닌은 온몸을 비틀어 처절히 외쳤다. "글로린은 무죄입니다. 그는 반역을 기도한적이 없습니다." "내 눈이 잘못되었단 말이냐! 내가 장님이냐! 성 안에 검을 뽑아들고 달려와 머 리위로 검을 휘두른 작자가 결백해!"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를 지르던 대공은 분이 안풀리는지 앞으로 달려나와 글로린 의 머리를 마치 공처럼 강하게 차버렸다. 글로린의 머리는 심문실의 벽으로 날아 가 퉁 하며 튀어올랐다. 그러나 이내 퍽 하는 깨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뒹굴었 다. 그래도 그의 부릅뜬 눈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 시선은 마침 대공을 향하고 있었다. 대공은 손가락으로 글로린의 눈을 가리키며 고함을 질렀다. "저 눈! 저 눈으로 나를 보며 검을 던졌단 말이야! 내가 피하지 않았다면 내가 저꼴이 되어 있었을 거다. 키우던 개에게 물리는 기분이 어떤지 알기나 하느냔 말이다, 그루닌!" 핏발선 대공의 눈이 그루닌에게 향했다. 그러나 그루닌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정말로 대공에게 검을 던졌다면, 대공은 이미 죽었을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한 데에는 이유가……" "빌어먹을 놈의 이유. 그놈은 반역자야! 그를 도운 너도 마찬가지고!" 대공의 손가락이 그루닌의 얼굴을 정확하게 가리켰다. "……내 명령은 단 하나였다. '반역자의 목을 잘라 매달고 완전히 썩어 물이 될때까지 놔두어라! 까마귀가 파먹어도 좋고 매가 잘라가도 좋다! 땅에 매장해선 안된다! 이를 어기는 놈은 사형이다.' 그런데 매단지 3일만에 반역자의 머리가 사라졌고 그 머리는 네 집 뒷마당의 나무밑에서 나왔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텐가!" "그는 죄가 없습니다……그는 결백합니다." "이놈이 그래도!" 대공의 발이 그루닌의 얼굴을 다시한번 가격했다. 퍼억 소리와 함께 그루닌의 의 식이 멀어져갔다. 안개처럼 희미해지는 의식 사이로 대공의 노호성이 계속 이어졌 다. "이놈을 지하감옥에 처박아! 먹을것도 마실것도 주지 말고 말려 죽이도록! 배반 자의 댓가다!" "……배반자……" 손가락에 통증이 느껴지며 몹시 쓰라렸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지워진 문장을 쓰다듬던 손가락이 어느새 갑옷을 쥐어뜯고 있었다. 손톱이 벌어지고 피가 흘러나 오고 있었다. 그루닌은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하감옥에 갇혀서 처음 보았던 광경도 피가 흘러내리는 손가락이었다. 컴컴한 어둠속에 배식구 틈으로 흘러나오는 한줄기 빛……그리고 그 빛에 비춰진 피에절 은 손가락. 그것이 그루닌의 추억이었다. 그루닌은 천천히 주먹을 쥐어갔다. "……가만히 있어요." 주먹을 쥐던 그루닌의 손을 누군가가 잡았다. 그루닌은 흠칫 놀랐다. 이렇게 가까 이 올때까지 그는 전혀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가 흐르는 그루닌의 주먹을 잡고있는 것은 어린 소녀였다. 연보라색의 머리카 락에 검은 피부를 가진 소녀였다. 소녀는 맑은 흑수정같은 눈망울로 그루닌을 바 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상처가 덧나면 안되니까 그대로 있어요." "……" 소녀는 왼손으로 그루닌의 손을 잡은채 오른손으로 자신의 품을 뒤젹였다. 그리고 작은 손수건을 꺼내 상처난 그루닌의 손가락을 싸매기 시작했다. 상처는 그리 크 지않아 손수건으로 감싸자 금방 피가 멎어버렸다. 소녀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그루닌에게 말을 건넸다. "이런짓 하면 안돼요. 상처가 덧나면 곪을지도 몰라요." "……으응." 그루닌은 손수건이 감싸진 손을 쥐었다 폈다 해봤다. 단단하게 묶여있는지 통증 은 거의 없었다. 매우 익숙한 솜씨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루닌이 고개를 들자 소녀는 이미 그자리에 없었다. 시선을 돌려보니 주머니에 서 작은 가위를 꺼내 꽃들을 돌보고 있었다. 풍성한 머리카락 사이로 긴 귀가 삐 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다크엘프……인가.' 소녀는 꽃들을 몇차례 둘러보고는 고개를 돌려 그루닌을 바라보았다. "이젠 괜찮을 거니까 움직여도 돼요." "……그, 그래?" 그루닌은 멋적어졌다. 소녀의 갑작스런 등장에 놀란탓도 있지만, 다크엘프가 점잖 게 꽃을 돌보는 것도 처음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루닌은 일단 탁자에 놓아둔 검을 집어 허리춤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소녀에게 정중히 말을 건넸다. "고맙구나." "……네? 뭐가요?" 소녀의 흑수정같은 눈동자가 그루닌을 응시했다. 그루닌은 일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 그러니까……치료 말이다. 치료." 손수건이 묶인 손가락을 들어올리자 소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게 감사할건 없어요. 치료다운 것도 아니었는데요." "아니다. 덕분에 통증이 많이 줄었는데 뭐." "그러면 처음부터 상처내지 마세요. 멋진 기사님." 소녀가 빙긋이 웃으며 종종걸음으로 노란 길을 따라 걸어갔다. 흰색의 작은 레이 스가 달린 소녀의 옷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그루닌은 소녀를 불러세웠다. "아, 잠깐만." "……네?" 소녀가 돌아보았다. 그루닌은 황급히 말했다. "난 그루닌이다. 네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니?" "……글쎄요?" 소녀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숙녀의 이름을 묻는건 실례에요." 소녀는 깨드득 하고 웃고는 노란 길을 따라서 사라졌다. 그루닌은 멍청히 서 있다가 손수건이 묶인 손가락을 다시한번 바라보았다. 소녀 의 머리카락처럼 보랏빛의 손수건이 앙증맞게 손가락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루닌 은 머리를 긁적였다. "……꿈은 아닌가." 그루닌은 소녀가 사라진 길을 따라서 걸어갔다. 정원 밖으로 나왔어도 소녀의 모 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연기처럼……그리고 요정처럼 소녀의 담담한 향기만 남아 있었다. * * 여기부터 다릅니다. 일단....시점은 그루닌을 중심으로 움직이려 합니다. 여러분의 날카로운 비평 바랍니다. 다크스폰이었습니다. 『게시판-SF & FANTASY (go SF)』 16049번 제 목:[darkspwn] 라이컨슬로프-59 올린이:darkspwn(유민수 ) 98/12/12 20:20 읽음:503 관련자료 없음 ----------------------------------------------------------------------------- 라이컨슬로프(=獸人) EDITION Ⅱ 59. 샤이닝 힐. 마도왕국(魔道王國)이라는 별명이 더 어울리는 가베라 왕국의 수도이 자 '환란의 전쟁' 이후에 만들어진 왕궁의 이름이기도 했다. 본래 이름은 '토오르 클리프'였으나 자신의 이름이 붙는것을 병적으로 싫어한 토오르 국왕의 뜻에 따라 빛나는 절벽이라는 의미의 '샤이닝 힐'로 불리게 되었다. 그 이름 그대로 왕성은 아름다웠지만 유일하게 대지의 요정족, 드워프의 손이 가 지않은 왕성이었다. 드워프와 가베라 왕국과의 연계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 겠지만 실제로 샤이닝 힐을 만든것은 국민의 30퍼센트를 점유하는 마족에 의해서 였다. 가베라의 주민인 마족들은 대부분 '이바이더' 공국에서 모여살던 자로서, 그들 나 름대로의 통치자 '바라야즈'를 중심으로 현 국왕 토오르에 협력하고 있었다. 본래 수룡왕의 드래곤 나이트였다는 디트리히 폰 카라일은 가베라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전해지며, 바라야즈의 임무를 맡은 지금에도 전폭적인 지지를 실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만들어진 마족들의 선물이 '샤이닝 힐'인 셈이었다. 암흑마법, 사령마법, 5대 마법등……샤이닝 힐의 절반은 마법에 의해 만들어졌다. 유리나 크리스털로 만들지는 않았으나 마법에 걸린 돌들을 많이 사용해, 어둠이 찾아오면 샤이닝 힐은 말 그대로 아름답게 빛나는 촛불처럼 어둠속에서 푸르게 타 오르곤 했다. 그루닌이 앉아있는 접견실도 마족들이 많은 신경을 쓴 부분중에 하나였다. 국왕을 알현하려는 접견인이 찾아오면 바닥에서 하얀 액체가 사람 수대로 튀어나 와 저절로 의자를 만든다. 접견인이 의자에 앉게되면 벽이 열리면서 음료수를 든 갑옷이 나와 마실것을 권하고는 다시 벽 안으로 들어간다. 은빛 미스릴로 만든 매 끈한 갑옷이라 혐오감도 들지않으며 또한 실용적이기도 했다. 그루닌은 은빛 갑옷이 가져다준 '네르'라는 음료를 마시며 느긋한 기분으로 의자 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알현을 하려면 일정시간 대기하는 것은 상식이 었고, 더구나 접견실에는 몇명의 접견인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록 오크 하나에 인간 둘……그리고 날개달린 괴물 하나. 다른 나라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 다. 가베라의 기사로서, 마족에게도 예를 다해야 하는것은 알고 있지만 아직도 마족 을 보기만 하면 오른손이 검 손잡이에 대어지는 것은 막을수 없었다. 그동안 숱한 마족들과 함께 일을 해서 많이 친해지기도 했지만 잘 고쳐지지 않는 과거의 습관 같은 것이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접견장의 문이 열리고, 왕을 접견했던 사람이 걸어나왔다. 비서는 방문자 명단을 잠깐 훑어보고는 조금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루닌 자작님. 들어가십시오." "……네?" 그루닌은 의아한 시선을 비서에게 보냈다. 비서는 그루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착오가 있는듯 한데……나보다 저 분들이 먼저 오셨습니다. 귀족이라고 해 서 순서를 지키지 않을순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들어가세요. 귀족이라고 우대하진 않는것이 왕가의 법칙 입니다." "그렇다면 저분들이 먼저 들어가셔야죠." "……잠깐만요. 그루닌 폰 하펜다즈 자작님……이시죠?" 비서는 명단에 다시 시선을 던지며 반문했다. "맞습니다만." "……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의 요청이니 먼저 들어가셔야 해요." "……" 그루닌은 먹던 음료수를 의자에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온 접견인들 의 시선이 쏠리고, 그루닌은 머리를 숙여 예의를 차렸다. 예의바른 그루닌의 인사 에 그들도 가벼운 목례로 사과를 받아들이는듯 했다. 그루닌은 비서의 따듯한 눈웃음을 등뒤로 하며 접견장의 문을 열었다. 접견장은 그리 크지는 않았다. 둥그런 원탁이 가운데 놓여있고, 국왕은 그 원탁이 약간 움푹 패여있는 곳의 의자에 앉아있었다. 보통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몇명의 참관인을 두는것이 예의였지만 국왕에게 민원을 호소하러 온 사람들이 그것을 꺼 려, 대부분의 경우 왕과 일대 일로 만나는 것이 상식적인 의례였다. 그러나 지금 그 원탁에는 국왕, 토오르 폰 라이트 외에 몇명의 참관인이 앉아있었다. 회색빛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젊은 기사 한명, 그리고 검은색 로브를 걸친 신관 이 한명이었으며 국왕의 왼편에 앉아있는 자는 그루닌도 익히 잘 아는 여성이었 다. 그루닌은 그 여성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국왕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토오 르 국왕은 부드러운 미소로 그루닌의 인사에 화답했다. "서펜트의 설득은 잘 되었나 보군." "조금 힘들었습니다만……헤스펠 님의 도움으로……" "헤스펠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던데……자네를 극구 칭찬하시더란 말이야. 수룡 왕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토오르는 기분좋은 표정으로 옆에 앉은 여성에게 시선을 던졌다. 여성은 머리를 끄덕이며 그루닌에게 말을 건넸다. "아주 좋은 드래곤 나이트를 두었다고 기뻐하더군, 그루닌." "황송할 따름입니다, 수룡왕님." 그루닌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성에게 깊이 머리를 숙였다. 일순 여성은 쓴웃음을 지었지만 그루닌이 하는 행동을 일부러 막지는 않았다. 세이렌 라인돌프 뮤레이너. 그린 드래곤의 우두머리이며 '수룡왕'으로 불리는 그 린 드래곤이 바로 그녀였다. 다만 드래곤의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것 이 특징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언제나 인간으로 변신한 형태였다. 세이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머리를 다시 국왕에게로 돌렸다. "그러고 보니 헤스펠이 보이질 않던데……" "성 드래고니안(聖 Dragonian)의 레브네인 호수에서 휴식을 취한다고 들었습니 다. 이번 원정은 힘들었을 테니까 유황 호수에서 쉬는것도 좋을테죠. 동면을 취 할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유황 호수 목욕이라……부러워지는군요." 세이렌은 은근한 미소를 띄워올렸다. "……마지막으로 쉬어본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질 않아요." "바쁘셨기 때문일테죠. 그동안 그린 드래곤의 통합을 위해 애써오시지 않았습니 까. 그리고 그 힘을 저희 가베라 왕국에 빌려주셨으니 저희들로선……" "당연한 일인 것을요. 선대 수룡왕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저희들이 살수있는 장 소를 마련해 주셨으니." 세이렌은 말을 멈추고는 가볍게 머리를 저었다. 아마 그동안의 험난했던 시간이 기억난듯 싶었다. 수룡왕과 가베라 왕국의 인연. 그것은 숱한 난관을 거친 결과였다. 그것은 현 가 베라 왕국의 묘한 정치체계와도 맞물려 있었다. 가베라에는 독특한 삼두정치(參頭政治)라는 체계를 갖고 있다. 수많은 종족들과 좀체로 융합되지 않는 인간-마족간의 차이를 좁히기 위한 제도로, 마족의 우두머 리라는 '바라야즈'와 인간의 통솔자 '국왕'이 긴밀히 협력하여 나라를 꾸려가는 것 이었다. 신족이자 마족이라 칭할수 있는 드래곤만이 예외였으나 암묵적인 묵계에 의해 그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세 우두머리가 모든 국사를 진행시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삼두정치'인 것이다. 다만 드래곤과 가베라 왕국의 관계는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베라 왕국의 전신이었던 '이바이더 공국'과 '아마란스 공국'과의 전쟁에서 이바 이더 공국이 승리자가 될수 있었던 것은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드래곤 나이트'의 영입이 가장 큰 위력을 발휘했었다. 언제 어디에서 만났는지는 알수 없지만 현 국왕 토오르 폰 라이트는 여행길에 세명의 위력적인 동료를 얻었던 것이다. 화룡왕 다크메이스 헬파이어의 드래곤 나이트인 '디네즈 다크메이스', 당시 수룡 왕 가베라 폰 라인돌프 뮤레이너의 드래곤 나이트인 '디트리히 폰 칼라일' 그리고 풍룡왕 아드리안 홀슈타인의 드래곤 나이트 '제르뮤 폰 렉싱턴'이 그들이었다. 특히 '학살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디네즈 다크메이스'의 활약은 역사에도 기록 될 정도였다. 현재 가베라 군대의 기본을 이루는 '드래곤 스케일'이라는 유기적인 군대 진형도 그녀의 머리에서 나왔으며 가장 참혹한 전쟁이었다는 '터뷸론 대회전 '에서는 전투 시작전에 1만 5천의 상대 병력을 말 그대로 '증발'시키는 등의 전투 로 그 이름을 떨쳐왔지만 '제루가이더 함락전'에서 승리한 이후 갑자기 모습을 감 춰버렸다. 현재 샤이닝 힐의 가운데 있는 '화염의 호수'에서 잠자고 있는 레드 드래곤 '자카 드 가베모슈'의 주인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그녀를 찾는것은 가베라의 가장 큰 숙 원사업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 토오르는 마족을 총괄하는 '바라야즈'의 자리를 수룡왕의 드래곤 나 이트에게 이양했다. 모든 마족의 정치적인 우두머리인 바라야즈는 최소한 '이바이 더 공국'시절의 마족에게는 절대적인 지배자였다. 이유를 알수없는 사고로 전대 수 룡왕이었던 가베라가 사망한 후, 현 수룡왕인 세이렌은 바라야즈의 안배로 이바이 더 공국에 쉴 장소를 정했다. 그 이후, 수룡왕은 뿔뿔이 흩어져있던 그린 드래곤 일족을 찾아내는 한편 우수한 기사와 전사를 선발해 각자 '드래곤 나이트'의 직위를 주었다. 드래곤의 법에 따르 자면 '드래곤 나이트'를 가진 드래곤은 레어의 규약을 깨고 한군데 모일수 있었다 고 한다. 세이렌은 그렇게 모인 드래곤의 힘을 토오르에게 빌려주었고, 감사의 표 시로 토오르 국왕은 '샤이닝 힐' 동쪽의 넓은 해안지대에 '성 드래고니안'이라는 이 름을 붙인 도시를 건설하고 모든 그린 드래곤 일족에게 무상으로 증여했던 것이 다. 성 드래고니안의 드래곤은 각각 드래곤 나이트를 가지며, 그들로 이루어진 기사 단을 흔히 '템플 드래고니안 전대(戰隊)'라 부르고 있었다. 템플 드래고니안 기사단 은 마족들로 이루어진 기사단인 '라이칸테스'와 더불어 가베라의 2대 세력으로 불 리고 있었다. 다만 비밀스러운 단체라는 인식이 강한 라이칸테스와는 달리 템플 드래고니안 기사단은 가베라를 상징하는 역할도 같이 하고 있었다. 그루닌도 그런 방식으로 세이렌에게 선발된 드래곤 나이트 중 한명이었다. 바다 의 고도에서 잠들어 있던 '헤스펠 제레이트'를 깨우러 갔었던 그 시점의 일을 그루 닌은 잊지 못했다. 춥고 배고팠던 제스타 하이랜드에서의 추방자 생활……그 와중 에 찾아온 드래곤 나이트의 제의. 몸을 깎아내는듯한 고통 속에서 그루닌은 훌륭 하게 드래곤 나이트의 시련을 겪어내고 지금의 위치를 얻어낸 것이다. 세이렌은 머리가 아파오는듯 눈썹을 살짝 찡그리고는 토오르에게 말을 건넸다. "여담은 이정도에서 끝내기로 하고……본론으로 들어가죠." "……예의 그 이야기 말입니까?" 토오르 국왕의 얼굴이 조금 굳어지며 미미하지만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저로서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섣불리 드러낼수 없는 일이지 않습 니까." "그렇다고 저렇게 묶어둘수는 없는 일이죠. 아무리 그녀라 해도……" "……바라야즈의 의향은 그렇지 않았던듯 싶습니다." 토오르는 시선을 로브를 걸친 신관에게로 향했다. 신관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검 은 로브의 그늘을 뚫고 마족 특유의 붉은 눈이 보였다. 신관은 정중하게 토오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바라야즈께선 일단은 숙고해 보자는 의향이셨습니다. 위험의 강도를 생각하자 면 일단 정찰대는 보내는 편이 낫다고……그것은 라이칸테스(Lycantes)에서 나 온 의견입니다." "라이칸테스에서?" 토오르의 목소리가 조금 올라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언질이었던듯 싶었다. 그루닌 은 자리에 앉아 회의의 진행을 지켜보기로 했다. "……라이칸테스의 의향이라면 무시할순 없겠지. 그녀를 보호하는 직접적인 권 한은 그들에게 있으니……" "그 외에도 그녀를 수호하는 기사에 대해서도 그렇죠. 그녀를 옮기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의 저지를 막아낼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라면……라이칸테스 기사대장님께서 마법을 걸어주신다면 가능하다고 생 각합니다만." "한계는 있소이다. 그분이 언제나 붙어있을수는 없어요." "그때문에 이들을 호출한 것이 아닙니까. 충분한 호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점에 대해서입니다만……" 신관의 눈이 그루닌에게로 향했다. 붉은 눈동자가 이글거리듯이 타오르고 있었다. 적의는 보이지 않았으나 절대로 호의적이진 않은듯 싶었다. "……솔직히 저희들로서는 인간을 믿을수가 없습니다." "뭐라고요?" 수룡왕의 언성이 높아졌다. 수룡왕의 눈썹이 가볍게 찡그려져 있었다. "그는 드래곤 나이트입니다. 설마하니 우리 성 드래고니안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입니까." "성 드래고니안은 믿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믿을수 없습니다." 신관은 짧게 말을 끊어버렸다. 단호한 그의 말에 수룡왕도 잠시 할말을 잃었다. 잠시동안의 침묵이 지나간후 정적을 깬 것은 회색빛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기사 였다. 기사는 불만스러운 듯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엄청나게 미안하군. 인간이라 죄송하오이다." "……" 모두의 시선이 기사에게로 쏠렸다. 그루닌은 거친 기사의 말에 조금 놀라고 있었 다. 지금까지 그루닌은 그가 '회의'에 직접적으로 참가하기 위해 앉아있는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루닌은 새삼스럽게 기사를 살펴보았다. 손질을 하지 않은 검은 머리카락에 아직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가문을 표시하는 가슴의 문장은 보이지 않았지만 예전에는 있었던듯 가슴 정 중앙부분이 조금 하얗게 변해 있는것이 눈길을 끌고 있었다. 플레이트 메일을 제외하면 가벼 운 옷차림이었지만 그의 허리춤에서 늘어져 있는 검은 그렇지 않았다. '저건……' 가죽으로 비끄러맨 은빛 검신은 온통 검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음산하고 어두 운 검은 빛……그루닌은 그 검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기운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 은 바로 수많은 마족을 살해하고 그 심장에 검을 꽂았을때 마족의 독기가 침범한 흔적이었다. 과거에는 '마족 살해자(Devils slayer)'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갖고 있 어야 했던 검의 상징이었다. 그루닌은 내심 불쾌해졌다. "포르켄 자작. 조용하시오." 토오르의 음성도 거칠어졌다. 언제나 온화한 국왕이 저렇게 거친 태도를 보이는것 을 그루닌은 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검은 검을 본 뒤여서 그루닌도 국왕의 태도를 무례하다고 생각할순 없었다. 포르켄이라 불린 남자는 토오르의 일갈에 가볍게 콧방귀를 뀌는 것을 응수했다. 토오르의 눈썹이 일순 세로로 곧추 세워졌지만 이내 본래의 온화한 얼굴로 돌아갔 다. "당신이 복권된지는 1년정도……그동안 마족을 이해할수는 없었습니까?" "……별로." 포르켄이 무뚝뚝하게 대답하자 신관의 붉은색 안광이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 분 명히 자극을 받은듯 했다. 포르켄은 건장한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어갔다. "지하감옥에 갇혔던 인간 주제에 고귀하신 마족을 이해할순 없을테니. 본래의 직위로 복권시켜주신 토오르 폐하에게는 감사하고 있소." "……그런 이야기가 아니질 않소이까." 토오르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해묵은 인간과 마족간의 감정싸움을 여기에서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일단 우 리 왕궁이 포르켄 가문(家門)에 의뢰하고 싶은 일은 감정싸움이 아닙니다." "이런 남자에게 의뢰를 하실 생각이었습니까?" 신관의 언성도 조금 높아졌다. 목소리에는 강한 의구심이 담겨있었다. 토오르는 신 관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쩔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최소한 그를 만나려면 아스트리아 왕국을 지나가 야 하는데……아스트리아 왕국은 마족에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저는 국가단 위의 전쟁을 치르고 싶지는 않아요." "……" 신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한 불신감을 나타내는 것은 분명했다. 토오르의 얼굴에 난처한 빛이 떠올랐다. "분명 마족 기사단(魔族 騎士團), 라이칸테스의 의향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으 로선 '그녀'를 그렇게 만든 자가 아스트리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직접 쳐들 어가고 싶어하신다는 점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적인 전력 차라는 것은 존재합니다. 성 드래고니안에서 지원할수 있는 드래곤 나이트는 현재로서는 그 루닌 자작 뿐이고요." "……그러니까 어디에 있는지만 알려달라고 하지 않았소이까!" 신관이 거칠게 항의했다. 꽉 쥐어진 주먹이 탁자 위로 올라와 있었다. 상당히 흥분 하고 있는듯 싶었다. "그놈을 찾아 2년이나 뒤졌소이다. '그녀'를 되돌리는 것이 우리 라이칸테스의 기본적인 목표이며 또한 최종적인 목표입니다. 토오르 국왕께서는 예전의 '조건 '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끌고있다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습니 다." "말이 지나치십니다!" 세이렌의 언성도 높아졌다. "가베라가 잭슨 지방을 통일한 국가라고는 하지만, 절대적인 전력차는 있는법입 니다. 템플 드래고니안 기사단과 라이칸테스가 모두 합쳐진다 하더라도 수백년 간 존재해온 아스트리아의 아성을 무너뜨리기란 한계가 있는법……더군다나 아 무런 '이유'도 없이 쳐들어 간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일단 무례했던 점은 사죄하겠습니다." 신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정치적인 문제라 그 말씀이군요. 가베라의 능력이 아스트리아를 압도하지 못한다는……" "……불행하게도." "……" 회의는 다시 깊은 침묵으로 접어들었다. 신관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듯 하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신관은 결연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믿겠습니다." "……"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졌다. 어떤 상황인지 이해할수는 없었지만 그루닌이 생각하 기에 이번 회의는 일단락 된듯 싶었다. 신관은 천천히 접견장의 문을 향해 걸어가 면서 말을 이어갔다. "2년전 제루가이더에서처럼……이번에도 믿겠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히 하 겠습니다." "……" "이번 계획이 실패하면 저희 라이칸테스의 모든 전력은 '그 자'……를 찾으러 떠 납니다. 설령 국가간 전쟁이 난다 하더라도!" 신관의 머리가 휙 돌아갔다. 로브 사이로 붉은 눈이 더욱 강하게 불타오르고 있었 다. 순간적으로 그루닌은 강한 압박감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살기' 같았다. 그리 고 그 대상은 이 자리에는 없는 누군가를 향하는듯 했다. "책임을 모두 미룰순 없으니 이번 계획에 라이칸테스에서도 한명 참가시키겠습 니다." "하지만 라이칸테스에는 인간이……" "아니, 한명 있소이다." 신관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 "아몬 폰 후트……조만간 그를 보내겠소." 문이 열리고 신관은 연기처럼 그 사이로 사라졌다. 강한 압박감을 주던 그가 빠져 나가자 회의장은 대번에 조용해졌다. 잠시간의 정적이 지나고 흠흠 하는 헛기침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달래며 토오르가 입을 열었다. "조금 시끄러웠지만 일단락은 된듯 싶군요." "……아몬 폰 후트……라면?" 세이렌이 토오르에게 질문을 던졌다. 토오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루가이더의 기사들……그들이겠죠. '그녀'와 같은……" "그렇다면 안심이군요." 세이렌의 얼굴에 만족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세이렌은 그루닌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로서 결정이 되었군요. 그루닌. 계속되는 업무에 지쳐 있겠지만……준비를 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어떤 준비를 하면 되겠습니까?" 그루닌의 시선에 세이렌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그저 검이나 잘 닦으세요. 이번 계획에 헤스펠은 가지 못합니다. 나 중에 명령서가 댁으로 갈 겁니다." "……" "그리고 포르켄 자작이라 하셨던가요?" 포르켄의 얼굴이 조금 굳어지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렌은 부드럽게 그에 게 말했다. "당신도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역시 명령서는 저택으로 보내겠습니다." "보수는?" 포르켄의 말에 토오르가 대답했다. "모든 권한의 복귀. 본래 영지를 돌려드리죠. 포르켄 가문의 꿈이 이루어지는 겁 니다." "……" 포르켄은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거절할수 없는 조건이군. 받아들이겠소." 회의는 그것으로 끝났다. 무슨 말을 하는지 내용은 잘 알순 없었지만 결국 그루닌 에게 새로운 명령이 전달된다는 것……그리고 그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라는 것만 을 알수 있었다. 그루닌은 자리에서 일어나 수룡왕과 토오르 국왕에게 예를 표하고 접견장을 나왔 다. 그의 곁에는 조금전 같은 명령을 받은 포르켄이 있었다. 그는 퉁명스런 어조로 그루닌을 불러세웠다. "당신이 헤스펠의 드래곤 나이트인가?" "……그렇습니다만." 포르켄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루닌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불쾌한 얼굴을 했 다. "……마족보다야 낫겠지." "……?" "잘 가시오. 나중에 봅시다." 포르켄은 큰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무어라고 궁시렁대는 그 의 불만이 들렸지만 내용을 알아들을순 없었다. '……재미있는 사람이군.' 그루닌은 작은 미소를 떠올렸다. 최소한 이번 여행은 심심하지는 않을듯 싶었기 때문이었다. * * * 59화 입니다. 기본 맥락은 비슷하다고 말씀드렸죠? 일단 그루닌의 시점으로 전개 합니다.(에궁 힘들어....이러다 시험 망치는거 아닐까?) 『게시판-SF & FANTASY (go SF)』 16146번 제 목:[darkspwn] 라이컨슬로프-60 올린이:darkspwn(유민수 ) 98/12/14 00:39 읽음:478 관련자료 없음 ----------------------------------------------------------------------------- 라이컨슬로프 edition II 60. "이건 대체……" 조금전 왕궁 전령으로부터 받은 작은 편지 한통을 보면서 그루닌은 의아한 마음을 감출길이 없었다. 하얀 린네르 백지에 봉인된 것도 없이 그저 표효하는 드래곤의 문장……가베라 왕실의 문장이 인쇄되어 있는, 허술하기 짝이없는 편지였다. 처음에는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닐까 돌려 생각도 했지만 화려한 장식체로 씌여진 글을 읽고나서는 아예 짐작하기롤 포기해 버렸다. '제 12 회 왕실 무도회에 삼가 참가하여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무도회……"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그루닌은 잘 닦아놓은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스르 릉 하는 소리를 내며 검은 본래의 자리를 찾아 들어갔고 작지만 아담한 그루닌의 방에는 잠시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 짧은 침묵이 흐르는 사이, 그루닌은 나름대로 예전의 회의에서 얻어들은 지식 과 이 편지에서 읽어낼수 있을만한 모든 지령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 어쩌다 눈을 들어 편지를 가지고 온 전령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떠한 내용의 지 령을 떠올린다 하더라도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리는 것을 경험할수 있었다. 전령은 왕실의 잔심부름을 하는 시종……이라는 표현이 전혀 들어맞지 않는 커다 란 체구였다. 온몸은 짧고 억센 황갈색 털로 덮여있고 딱 벌어진 근육질의 몸에 끼워 맞춘듯한 흰색 옷은 빌려 입은것처럼 이상해 보였다. 물론 그루닌도 어울리 지 않게 옷을 끼워입는 인간들을 서너번 본 기억은 있었지만 상식을 초월한 옷차 림을 보고 있노라면 정신집중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전령은 가볍게 킁킁거리는 소리를 내고는 정중한 동작으로 긴 뿔이 돋아있는 머 리를 숙였다. 생각외로 긴 탓인지 창날처럼 날카로운 뿔은 그루닌의 얼굴 바로 앞 을 스치는듯 했다. "궁내부(宮內府)에서의 전갈입니다. 수룡왕 님의 상대로 지명이 있었으니 꼭 참 석하시라는 내용입니다." 칼로 찍어댄듯 일그러진 입술이 움찔거리며 탁한 소리를 내자 그루닌의 등에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마치 전설에나 전해 내려오는 지하미로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황 소의 머리에 사람보다 머리 두개는 커보이는 듯한 모습……왕궁에서 찾아온 전령 은 미노타우르스였다. 잠시 할말을 잊고있던 그루닌은 가볍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다른 말씀은?" "의례용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와 달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인지라……" "갑옷을 입고 춤을 추는건 무리일텐데." 그루닌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왕성의 기사란 직업을 몇년간 하고 있지만, 역시 가장 번거로운 일은 아마도 의 례용 플레이트 메일을 입는 일이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온통 하얀 색으로 장식된 철갑 플레이트 메일에다가 끝은 장식용 붉은 천을 붙여놓아 어떻게 보면 어린아이 장난감처럼 보이기도 했다. 쓸데없이 커다란 오각형 방패라든가 등을 가 로질러 메게 되어있는 의식용 대검은 실전에서는 전혀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무거 웠다. 본래 왕국 건립일이나 특별한 사신을 영접해야 하는 자리에서만 입는것이 일반화 되어있지만 그나마도 기사들은 의례용 갑옷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하물며 날렵한 스텝을 자랑해야 할 무도회에서 덜그럭 거리는 갑옷을 입고 날뛴다는 것은 불가능 에 가까웠다. 그루닌이 하사받은 의례용 갑옷도 별로 다를바 없었다. 드래곤 나이트의 문장이 가슴에 새겨진 흰색 플레이트 메일이긴 했지만, 현재로선 손질용 기름을 잔뜩 머 금은 채로 방 구석에서 장식품이 되어버린지 오래였다. 이점은 다른 드래곤 나이 트 역시 다를바 없었던 것이다. 곤란한 표정을 짓는 그루닌에게 전령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가볍다고는 하 지만 상당히 위압적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바라야즈님의 지시입니다. 자신도 직접 의장용 갑옷을 입고 나오신다고……" "……그래?" 그루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미노타우르스가 말하는 품을 봐서는 아마도 바라 야즈의 직접적인 언질이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족의 우두머리 바라야즈. 전대(前代) 수룡왕의 드래곤 나이트였다는 것을 제외 하고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사나이.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무도회에서라면 그 도 들키지 않고 즐길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바라야즈와 수룡왕……그리고 토오 르 국왕. 이 셋이 모두 모인다는 것은 예전의 회의에 대한 내용을 공표하려는 성 격이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시에 가면 되는건가?" "저녁 여섯시 정도입니다. 장소는 샤이닝 힐 중앙 '화염의 호수'입니다." "호수 맞은편의 광장을 말하는가 보구만. 알았네. 수고하도록." "그럼……" 전령은 육중한 몸을 움직여 조그만 방문을 비집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문설주가 조금 휘어져 있었다. '고쳐야 겠군' 그루닌은 몸에 걸쳤던 갑옷을 벗으며 구석에 놓여진 의장용 갑옷을 바라보았다. 반짝반짝할 정도로 빛이나는 갑옷이 새로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갑옷 을 걸친후의 무거운 느낌이란……그루닌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이면 저거라니……" * * 조금 자세한 느낌이 있지만……뭐 좋겠지요. 여러분들의 감상 바랍니다. 한줄이라도 좋으니 제발 써주세요. 요즘들어 의욕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다크스폰이었습니다. 추신 : 하이텔 환동의 여러분……제게 마구마구 격려 메일을 보내주시면 감사하겠 습니다. 하이텔 분들과도 대화를 나누고 싶거든요. 『게시판-SF & FANTASY (go SF)』 16230번 제 목:[darkspwn] 라이컨슬로프-61 올린이:darkspwn(유민수 ) 98/12/15 00:30 읽음:489 관련자료 없음 ----------------------------------------------------------------------------- 라이컨슬로프 EDITION II 61. 푸른 달빛의 맑은 분위기가, 수면(睡眠)을 가져오는 가벼운 향기처럼 아름다운 왕 성 샤이닝 힐을 감돌고 있었다. 살아 숨쉬는 달의 여신이 호흡처럼 달빛의 향기는 어쩌면 마법으로 장식된 푸른 성벽의 숨결일런지도 몰랐다. 조금은 로맨틱한, 다른 한편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루닌은 '화염의 호수'가 보이는 테라스에서 달빛을 받아 더욱 푸르게 보이는 성곽을 감상 했다. 뾰족하게 솟아오른 첨탑에 밝은 불이 켜쳐있는 것이 무도회가 열리는 지금 도 보초를 서고있는 감시병이 있다는 증거였다. 비록 싸울 상대도 없고 국경지대 도 아니지만 가베라의 병사들은 언제든지 싸울수 있는 자세가 되어있는듯 했다. 또한 그것은 처절한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볼수있는 어두운 부분이기도 했 다. 그루닌은 눈 아래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사람들의 춤을 바라보았다. 남녀가 서 로 손을잡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왈츠는 무척 경쾌해 보였다. 하지만 춤을 추고있는 사람은 드레스를 몸에 걸친 궁정부인들이거나 문관(文官)들 뿐이었 다. 화려한 촛불의 조명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둔중한 플레이트 메일의 남자들 은 모두 기사들이었던 것이다. 수십킬로에 이르는 무거운 갑옷을 입고 날렵하게 스텝을 밟는다는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한 부인과 스텝을 밟는 기사도 한명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서툴러 보이는 그 기사는 부인의 움직임에 따라가느라고 죽을 힘 을 다하는듯 보였다. '어지간히도 고생하는군.' 그루닌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달이 동그랗게 떠있는 가운데 멀리 동쪽의 한켠에서 어두운 밤을 꿰뚫는 더 어두운 암흑이 보였다. 일명 '죽음의 눈'이라고 불리는 또 하나의 달……사람들은 저 달을 '헤게모니의 보석'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 하는 그 달은 100년에 한번씩 푸른 달을 가리고 암흑의 밤을 가져온다고 한다. 그 리고 그 암흑의 밤에는 새로운 마족들이 다시 태어난다는 전설도 있었다. 물론 마 족들에게 직접 물어본 바로는 완전한 헛소리라는 핀잔만 들었지만. 아마도 인간들이 헤게모니의 보석을 싫어하는 이유는 400여년 전에 일어났던 마 계전투의 영향인듯 싶었다. 400년전……마왕 케르페르트의 부활이 시작된 시간이 바로 헤게모니의 보석이 푸른 달을 가렸던 바로 그때였으므로. 완벽한 어둠이 세 상을 지배하던 그 시간에 어디에선가 나타난 케르페르트가 인간들을 공격했다고 한다. 어둠 사이로 새빨갛게 타오르는 증오에 찬 두 눈동자……그것은 아마도 인 간이 어둠에 직접적인 공포를 가졌던 최초의 사건이 아닐까 그루닌은 생각하고 있 었다. 어둠……그것은 아름다움과 추악함의 상징이었다. 어둠이 있기에 사람들은 빛이 있음을 알고, 또한 그 어둠의 틈새로 엄습하는 공포는 빛의 소중함을 알게된다. 아 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괴로움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잘 알수 없는 경험 중의 하나였다. 그루닌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지하감옥의 기억도 그중 하나였다. 온 몸을 갉아먹는듯한 어둠속에서, 주변에 아무것도 없고 오직 혼자라는 외로움이 결 국 증오와 분노로 점철되어 간다. 인간성은 점점 말살되어 버리고……한때는 영혼 자체가 사라져 결국 '증오'라는 하나의 감정으로 묶여진 마물이 되는건 아닌가 생 각한 적도 있었다. 지하감옥에서의 2년동안 그루닌은 인간과 마물 사이에서 오간듯 했다. 가끔 씩……원형 투기장에 불려나와 이유를 알수없는 격투를 하면서, 그리고 상대로 불 려나온 인간을 하나하나 없애가면서 어느덧 살인의 쾌감을 느끼는 자신을 저주했 었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은 아픈 앙금으로 남아 불현듯 떠오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루닌은 입안에 머금은 붉은 와인이 점차 씁쓰름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 뭐하는가……" 뒷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루닌은 정신을 차렸다. 몸을 조금 돌려보려고 했지만 역시 의식용 플레이트 메일은 너무 무거웠다. 잠시간의 시간을 들인 끝에야 그루 닌은 자신을 부른 사람을 마주볼수 있었다. 토오르 국왕이었다. 그도 온몸을 감싼 플레이트 메일 때문에 무척 힘겨워하는듯 했다. 토오르는 눈짓으로 춤을 추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함께 어울리지 않겠나? 한창 즐거워 지는것 같은데." "……마음만은 굴뚝 같습니다만." 그루닌은 손가락으로 가볍게 갑옷을 두드렸다. 퉁퉁 하는 무거운 쇳소리가 마치 종소리처럼 들렸다. 토오르는 씁쓰름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무리겠지. 하지만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네." "……" 토오르는 눈을 돌려 '화염의 호수'를 바라보았다. 실제로 불꽃이 타오르는 것이 아 닌 붉은 안개가 매일 떠도는 인공호수였다. 왕실 관계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카 드 가베모슈'라는 레드 드래곤이 안에 들어가 동면을 취하자 자연스럽게 생겼다 는……전설아닌 전설을 갖고 있는 호수였다. 토오르는 한가로운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손님이 오시기로 했거든." "손님이라면……" "으음. 아스트리아에서 가베라 왕국 건립을 축하한다는 사신이 온다고 했네. 아 마도 무도회 메인 이벤트 때 모습을 드러내겠지." "그랬군요. 역시 사신을 맞이하는 예절이었습니까……" 그루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는 아무런 이유없이 무거운 갑옷을 입힐 국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루닌은 빙긋 미소를 띄워올렸다. "그건 그렇고 건립 2년만에 축하사절이라니……아스트리아도 대단한 성의입니 다." "아예 없는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들로서도 골치아픈 문제였겠지. 아뭏든 좋은 방향으로 결정해 줬구만 그래." 토오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적이나 친구냐……라는 문제겠지만 솔직히 껄끄러운 상대일걸세. 잭슨의 계속 된 전란을 통일한 가베라 왕국이 아닌가. 지금까지 숱한 전쟁을 치뤄온 아스트 리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면 작은 소국으로 쪼개져 있던 과거의 상황이 더 나았을 수도 있겠지." "힘의 균형 말씀입니까." "음. 아스트리아로서는 등뒤에 강대한 적을 두는것은 원치 않겠지. 소국으로 쪼 개져 있을때야……섣불리 도발만 하지 않는다면 신경쓸 필요가 있었겠나. 생각 같아서는 당장 전쟁이라고 일으키고 싶겠지만 잭슨의 저력을 두려워하는 것이 겠지. 더군다나 이쪽에는 수룡왕도 계시고. 섣불리 덤빌수는 없을거야." 약간의 미소를 띄우면서 토오르는 손을 들어 그루닌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쳤다. 드래곤 나이트인 그루닌을 충분히 의식한듯 했다. "본래 수룡왕은 아스트리아 건국 초기부터 인간의 역사에 간섭해 오신분……따 지고 보자면 아스트리아 그 자체라고 할수 있지. 윌리엄 아키아바 국왕께서 눈 에 가시처럼 여겨오던 수룡왕이시지만 일반 국민들의 반발을 잠재울수는 없을 테니까." "어떤 내용입니까?" "단순하네. 용의 방벽이 무너진 이후 윌리엄 국왕의 처신이 잘못되었다는 비난 이네. 수룡왕을 다른 나라에게 빼았겼다는 거지." "상당히 곤란하겠군요." "어쩌면 수룡왕의 반환문제를 걸고 넘어질지도 모르겠지만……수룡왕께서도 물 건이 아닌 이상에야 별 도리는 없겠지. 하지만 문제는 지그프리드, 늙은 너구리 야. 무슨 생각으로 이런 사신으로 내려보낸 건지 알수 없는데다, 이번에 내려온 사신이란 자도 그 노인네의 손녀……상당한 두뇌의 소유자라고 들었네. 충분한 대책을 강구해야 겠지." "……미인입니까?" "그렇다고 들었네. 하지만 본적은 없어." 토오르는 심각한 얼굴로 돌아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듯 했다. 지나가는 듯이 흘린 말이었지만 그루닌은 토오르의 고뇌를 충분히 이해할수 있을듯 했다. 아마도 전 기사들을 무도회에 불러들인것도 모자라 플레이트 메일로 강대함을 표현하려는 이 유도 그 '사신'에게 있는듯 싶었다. 윌리엄 아키아바. 아스트리아 역사 300년간 최고의 멍청이 국왕으로 알려진 인물 이었다. 현재 실세라고 일컬어지는 지그프리드 폰 루돌슈타인 후작의 힘을 업어 국왕이 된 사람이라 국정에는 별다른 뜻이 없다고 들었다. 따라서 토오르가 주시 하고 있는 지그프리드 후작의 손녀라는 사람을 어떻게 구워삶는가가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될수 있다는 의미였다. 토오르는 몸을 돌려 테라스 밖으로 한걸음 내딛었다. "자네도 그만 내려오게나. 조금 있으면 수룡왕께서도 오실테고……사신이라는 여자의 얼굴도 봐야 할테니." 그루닌은 멀어져가는 토오르 국왕의 등을 바라보았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있어 힘 들어 보였다. 어쩌면 그가 걸머지고 있는 무게는 갑옷, 그 이상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루닌도 천천히 국왕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무도회가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 * 61회 입니다. 내용이 많이 다르죠? 본래 생각했던 대로.....궁정 암투 및 국가간의 힘의 균형 위주로 전개해 나갈 생 각입니다. 격려 메일 보내주신 분께는 감사드립니다. 음....그런 추천 및 비평 메일이 저를 힘나게 합니다. 앞으로도 많이 보내주세요...^^ 다크스폰이었습니다. 추신 : 왕성과 전략에 대한 묘사부족이라는 지적……감사합니다. 출판본에는 조금 수정이 있을듯 합니다만……솔직히 심리묘사를 전문으로 하는 관계로 외부 적인 서술은 자제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인듯...(죽어도 무식 하다고는 안하는 나쁜 다크스폰....^^) 추신 2 : 코믹……부분입니다만, 솔직히 저는 코믹을 즐기지 않아서요.(본래 라이 컨슬로프는 코믹한 글이 아닙니다. 가끔씩 감초처럼 넣기는 하지만요.) 다 른 소설들....그러니까 은하영웅전설 같은 것을 보시면 충분히 아시겠지만, 그 소설에도 역시 코믹성 글은 극히 적습니다. 제가 지향하는 글이 그런 설정인 관계로.....(죽어도 재미없다는 말은 안하는 나쁜 다크스폰...^^) 추신 3 : 죄송합니다.....^^ 『게시판-SF & FANTASY (go SF)』 17054번 제 목:[darkspwn] 라이컨슬로프-62 올린이:darkspwn(유민수 ) 98/12/21 19:56 읽음:453 관련자료 없음 ----------------------------------------------------------------------------- 라이컨슬로프(=獸人) EDITION Ⅱ 62. 무도회장에 그루닌이 도착했을때 활기찬 왈츠의 선율도 어느덧 그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루닌은 눈을 돌려 토오르 국왕이 있는곳을 찾았다. 그는 어느 새 무도회장 입구 맞은편에 있는 왕좌에 다가서고 있었다. 국왕을 눈으로 쫒고있는 사람은 그루닌 혼자만이 아니었다. 플레이트 메일을 입 은 기사들이 제일먼저 축 늘어진 어깨를 세워올리며 어두운 촛불의 그늘밑에서 나 왔고 주위에서 경계를 서던 병사들의 움직임도 조금씩 기민해지고 있었다. 그루닌 은 천천히 걸어 무도회장을 가로지르는 붉은색 양탄자에 다가섰다. 쿵! 쿵! 단조롭지만 광장을 울리는 소리가 났다. 그루닌의 시선은 자연스레 무도회장의 입구 쪽으로 향했다. 푸른색 대리석으로 조각된 문 옆에 말쑥한 흰색 제복을 입은 집사관이 서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왕가를 의미하는 드래곤이 장식된 홀(=지팡이)을 들려 있었다. 집사관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자 더욱 근엄한 모습으로 홀을 들어 대리 석 바닥을 다시한번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아스트리아의 사절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부드럽게 흐르던 왈츠가 집사관의 우렁찬 외침과 더불어 경쾌한 선율로 바뀌었다. 푸른색 대리석 문이 좌우로 열리고, 그 사이로 몇명의 사람들이 천천히 걸어나왔 다. 사절들은 길게 깔린 양탄자 위를 천천히 걸어 조금 떨어진 국왕의 왕좌에 다가갔 다. 누가 먼저라 할것도 없이 좌우로 늘어선 사람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산발 적으로 나오던 박수소리는 어느덧 우레와같이 울려퍼졌고, 아스트리아의 사절들은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이며 사람들에게 일일이 답례의 인사를 보냈다. 그루닌도 박 수를 치면서 아스트리아의 사절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저 여자인가……' 국왕의 언질이 있었던 후였기도 했지만, 네명의 사절들 중에 가장 돋보이는 사람 이 한명 있었다. 여자……부드러운 크림색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연보라빛 레이스가 물결치는 실크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가히 놀라우리만 치 아름다웠다. 물결치듯 굽어진 머리카락은 하얀 얼굴을 감싸며 허리까지 흘러내 려와 있었고 봉긋 솟아오른 가슴을 약간 드러낸 드레스의 가슴에는 하얀 빛을 내 뿜는 커다란 보석 목걸이가 박혀 있었다. 하얀 보석은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주기적으로 그 광채를 강하게 발하고 있었 다. 그러나 그 보석마저도 그녀에게 쏠리는 시선을 붙잡지는 못하고 있었다. 창백하다고 까지 할만한 백옥같이 하얀 피부……그린듯한 초승달 모양의 눈썹은 약간 붉은빛이 도는 갈색의 눈동자를 가리우듯 내려오고, 잘못 건드리기라도 하면 아름다운 균형이 무너질까 두려울 정도의 군형잡힌 콧날은 이지적이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욱 실감있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가느다란 오른손을 장식하고 있는것은 검은색의 크리스탈이 박힌 장식물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마법학교에서 인정받은 '마법사'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저렇게 아름다운 여성이 마법사라니……' 그루닌은 우아한 자태로 걸어가는 여성의 뒤를 말없이 눈으로 쫒아갔다. 사절들의 선두에 선 여성은 품위있는 걸음걸이로 토오르 국왕이 앉아있는 왕좌에 다가갔다. 그리고 손으로 드레스의 양 옆을 잡아 살짝 들어올리며 머리를 조금 숙 였다. 귀족……궁중부인들의 예법이었다. "아스트리아의 사절들이 가베라 왕국의 주인께 인사드립니다." 토오르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사절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히며 오른팔을 왼쪽 가슴에 가볍게 대었다.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스트리아의 국왕을 대신하시는 분이시 니, 그에 맞는 예우를 해 드리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그루닌은 토오르 국왕의 자세에 조금 감동하고 있었다. 우아한 동작도 동작이지 만 상대를 추켜세우는듯 하면서도 끝까지 자신을 잃지않는 세련된 화법이 일품이 라 할수 있었다. 토오르는 예의바르게 사절의 하얀 손을 들어 가볍게 키스를 했다. "실례가 되지 않으신다면 레이디의 이름을 물어봐도 될런지요." "실례랄것 까지야……루돌슈타인 가문의 드로이얀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지그프리드 재상 각하의 손녀분이시로군요. 익히 소문은 들었습니다." 드로이얀의 얼굴에 작은 홍조가 돌았다. 하얀 얼굴에 작게 퍼지는 붉은 기운은 그녀를 더욱 생동감있게 보여주고 있었다. 토오르는 허리를 들어 다른 사절들을 바라보았다. 토오르의 시선이 향하자 사절들은 저마다 가볍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드로이얀을 수행하는 사절들은 모두 셋이었다. 보통 사람의 가슴 정도가 되는 땅 딸막한 키에 완전한 대머리를 가진 남자는 정중한 어조로 자신을 베르나르 자작이 라고 소개했다. 근육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는것이 아마도 문관이거나 행정관인 듯 했다. 다른 한 사람은 쉰이 넘어보이는, 신경질적인 인상의 노인이었다. 온몸을 회색 로 브로 감싸고 있었지만 두건은 벗은 상태여서 희고 긴 수염을 볼수 있었다. 로브의 가슴에는 두개의 문장이 수놓아져 있었다. 하나는 불을 내뿜는 그리폰의 문양…… 분명 루돌슈타인 가(家)의 문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붉은색 십자가 모양이었다. 불 타오르는 십자가 문양……그것은 태양신 유노의 상징이었다. 노인은 왼손을 가슴 에 대고 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빛의 수호자이자 기사도의 거울, 모든것을 축복하시는 유노의 종복, 지그프리드 재상 각하를 섬기는 윈더멘틀 합스부르크입니다." "유노의 신관이셨군요. 반갑습니다." 토오르는 웃는 낯으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음 사람으로 시선을 돌리 자 그는 아무말 없이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해 버렸다. 토오르는 사절단의 손을 이끌어 왕좌 옆에 미리 마련된 연회석에 앉혔다. 가장 높은 자리에는 역시 사절단의 대표 격인 드로이얀이 앉고 다른 사람은 그 외의 자 리에 자유롭게 앉게 되었다. 토오르가 사절단에게 몇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기사 몇명이 나서서 왕좌의 방향을 조금 틀어 드로이얀을 바라볼수 있게 만들었 다. 그것은 자유로운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한 장소에 고정되어 있는 일반적인 왕좌와는 달리, 가베라의 왕좌는 그렇지 않았 다. 언제 어디서든, 가벼운 토론을 나눌수 있게 이동식으로 만드는 것이 보통이었 다. 토오르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친밀한 시선을 드로이얀에게 던졌다. "여행은 즐거우셨습니까?" "덕분에……평화로운 곳이더군요." 드로이얀은 하얀 손을 들어 이마에 가볍게 가져갔다. "중부대로를 가릴듯한 푸른 숲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들판에서 하 늘거리는 긴 풀들도 아름다웠어요." "나무를 좋아하시나 보군요." "별로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제일먼저 눈에 들어와서요." 예의바른 미소로 드로이얀은 토오르의 질문에 대답했다. 천진무구한 미소가 그녀 를 마치 어린아이처럼 활기넘치게 보이게 하고 있었다. 그루닌은 마음속으로 감탄 을 하며 드로이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상당한 여자로군……' 그루닌은 토오르의 고민을 조금 이해할것 같았다. 국왕의 걱정대로, 그녀는 그저 장식품 역할이나 하는 일반 귀족가의 자제와는 조금 다른듯 싶었다. 나무와 긴 풀……어떤 사절도 그런 것에 감명을 받지는 않는다. 영혼까지도 자연 을 사랑하는 엘프(Elf)족이라면 모를까, 일반적인 인간이 무성한 나무와 풀을 한 국가의 소감으로 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이 아닌 보다 더 포괄적인 시 야를 가진 통치자의 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 이유는 나무와 긴 풀이야 말로 한 나라의 능력을 평가하는 지표로 작용하기 때문이었다. 나무……그것은 힘이었다. 철광이 많이 생산되는 베르마트 왕국조차 주요 건물 및 무기는 모두 나무로 만들어진다. 또한 국민들의 일반 생활에도 필수적으로 사 용되는 것이 목재이고 보면, 무성한 숲은 그 국가의 잠재력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었다. 긴 전쟁을 겪은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겪어야 하는것이 목재의 부족이다. 강 궁이든 검이든, 나무가 쓰이지 않는곳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독립된 도시국가로 나뉘어졌던 과거 잭슨의 분쟁에서도, 영주들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영지안에 소유 한 목재를 소비시키지 않으려 애를 써왔다. 통일국가 가베라가 들어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보다 더 양질의 나무를 확보하 기 위한 노력……그것은 토오르 국왕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사업이었다. 나머지 요인인 '풀'. 그것은 뛰어난 이동능력을 의미했다. 많은 양의 풀은 그에 상응하는 수의 말을 키울수 있는 자원이었다. 말린 풀은 보통 건초(乾草)나 마초 (馬草)로 분류되며 철광석과 더불어 기본적인 전략물자로 취급되고 있었다. 하지만 중요등급으로 따지자면 철광석 보다는 마초가 훨씬 더 높은 위치를 차지했다. 철 광석은 수입이 가능하며 빼앗아 사용할수도 있지만 마초는 그렇지 못하다. 적절히 보존하기 어려우며 또한 그것이 없으면 대규모 단위의 군대를 이동시키기란 꿈도 못꿀 일이다. 따라서 긴 풀의 보존은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한 것이다. 토오르는 뭐라 말하기 힘든 묘한 표정을 짓고는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윌리엄 국왕께서는 안녕하신지……" "언제나처럼 건강하십니다. 덕분에요." 드로이얀은 생긋 미소지었다. "물론 몇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고는 하시지만 그리 심각한 정도는 아닙 니다." "……예의 그 문제입니까? 전령을 통해 편지는 몇차례 받았습니다만 수룡왕님은 물건이 아니라서요." 토오르의 눈빛이 조금 냉정하게 변했다. 그러나 드로이얀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저희들로서도 일부러 그 문제를 걸고 넘어질 생각은 없습니다. 국가적 차원에 서 보자면……정치적인 해결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또한 그 분의 거취는 수 룡왕님 자신이 결정하실테죠. 저희의 불찰일 뿐입니다. 따라서 양국의 우호적인 관계에 흠이 생기지 않는 한도 내에서 가벼운 질의를 드리는 것으로 결말을 짓 고자 합니다." 그녀의 설명은 매우 간단하고도 냉철했다. 가장 깊게 골이 파일수 있는 부분을 은근슬쩍 넘어가자는 의도가 강하게 숨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민감한 사안을 부 드럽게 넘기는 뛰어난 화술은 듣는 사람의 기분을 충분히 헤아리는듯 했다. 다만 문제의 심각성은 이미 국가적인 차원에서 다뤄야할 내용이기는 했다. 수룡왕의 거취. 그것은 지금까지 수룡왕의 그늘아래 있었던 아스트리아와 앞으로 수룡왕과 협력관계에 있을 가베라 왕국에 대한 힘의 균형문제였다. 드래곤의 참전은 무엇보다도 한 국가에 강한 힘을 실어주게 된다. 그 막강한 힘 과 지식은 다른 나라의 침입을 저지하고 또한 자국내 산업발전의 토대가 될수 있 다. 아스트리아의 경우엔 전대 수룡왕은 인간의 전쟁에 개입해 초기국가 형태였던 아스트리아의 국력을 부강하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그것은 북부 베르마트 왕국도 마찬가지였다. 베르마트를 대표하는 드래곤은 '지룡 왕(地龍王)'이자 '숙고와 이해의 관조자'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산악지방에 전투가 많을수밖에 없는 지리적 요건을 갖추고도 인간과 마족은 서로 분리되어 살 아가고 있다. 그것은 인간과 마족을 균등하게 생각하고 또한 각 종족간의 전쟁을 억제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그 지룡왕이 북부산맥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었다. 숙고 와 이해로 두 종족간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관심이 있는 지룡왕이므로 만일 아스트 리아를 비롯한 어떠한 나라가 베르마트에 쳐들어간다면, 균형을 깨려는 침략자에 대해 행동을 개시할 것이다. 수룡왕의 경우도 그랬다. 수룡왕은 '맹약'이란 이름으로 아스트리아의 창립자, 카 알 아스트리아와 연계되어 수많은 전쟁에서 아스트리아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었 다. 하지만 그 아스트리아 가문이 사라지고 현 국왕 윌리엄 아키아바와의 접견에 서 나쁜 상태로 돌아버린데다, 선대 수룡왕의 암살과 '용의 방벽'이 무너진 사건은 현 수룡왕이 등을 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즉, 수룡왕이 굳이 아스트리아의 의리를 지켜야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다. 기본 적으로 수룡왕이 '협력'을 해주고 있었던것과는 달리 가베라는 수룡왕과 '연계'하여 왕조를 창립했다. 마치 카알 아스트리아 대제와 전대 수룡왕과의 인연처럼. 따라서 굳이 골치아픈 수룡왕의 양도 문제를 거론하기 보다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가베 라 왕국과의 동맹을 맺는것이 더 이익이라는 점을 드로이얀은 말하고 있었다. 토오르는 기분좋은 미소를 떠올리며 가볍게 '네르'를 한잔 들이켰다.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렇게까지 하신다면 저희로서도 더이상 바랄 나위가 없습니다." "결론을 내리기까지 문제도 많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할아버님인 지그프리드 재 상각하의 노고가 컸습니다." "……감사하고 있습니다." "노구를 이끌고 반대파들의 불만을 잠재우기가 쉽지 않은데다가 국민정서도 있 고 해서 말입니다. 수년간 걸친 논쟁끝에 결국 재상각하께서도 어느정도의 이 익이 보장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을 얻으셨지요. 저희로서는 그점이 가장 문제가 되는 쟁점이기도 합니다만……" "……그렇군요." 토오르는 가볍게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그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는 말씀이군요. 수룡왕님에 대한 언급을 피하 는 대신 어느정도의 성의표시를 보여달라……라는 말입니까?" "성의표시라고 하기엔 어폐(語弊)가 있네요. 제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그리 어려 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보자면 동맹국에게는 의례적인 일이랄수도 있어요……" 드로이얀은 시선을 들어 베르나르 자작을 바라보았다. 베르나르 자작은 깊이 고 개를 숙이더니 품에서 둘둘 말린 아마(亞麻)로 된, 두루마기를 하나 꺼냈다. 곱게 말려진 두루마기의 끝에는 붉은 색의 밀랍으로 봉인이 되어 있었다. 드로이얀은 베르나르 자작에게서 두루마기를 받아들고 천천히 일어나, 정중한 자세로 그것을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윌리엄 폐하의 친서(親書)입니다. 답변은 천천히 하셔도 좋습니다만 모쪼록 빠 른 시일에 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드로이얀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로서 제가 할 일은 모두 다한듯 합니다. 죄송하지만 천천히 여행의 피로를 풀어보고 싶네요." "그러시다면……저희로서도 예를 갖추겠습니다. 국내에 체류하시는 동안 도움을 드릴 친절한 기사 한분을 소개시켜 드리죠." 토오르는 점잖게 드로이얀의 미소에 화답하고는 집사관을 향해 눈짓을 했다. 집 사관은 정중히 허리를 숙여 대답하고는 다시 홀을 들어 바닥을 내리쳤다. 쿵! 쿵! 쿵! 집사관은 턱을 쳐들고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왕명에 의해 명령합니다! 지금 이시간 이후로 아스트리아 사절단의 호위를 맡 게될 기사를 발표하겠습니다! 모든 기사분들 께서는 길 양 옆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무도회장에 모였던 기사들 사이에서 가벼운 웅성임이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뜻 밖이라는 시선이었다. 그루닌도 묘한 호기심을 가진채 붉은 양탄자 옆에 서서 집 사관을 바라보았다. 집사관은 장내를 한번 훑어보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라이칸테스 기사단! 케라투 남작!" 기사들은 함성과 함께 박수를 쳤다. 푸른색의 육중한 문이 다시 열리고 그 사이 에서 회색 갑옷을 입은 기사가 한명 걸어나왔다. 그는 도열한 기사를 보고는 잠시 움찔 하는듯 했으나 이내 하늘을 향한 코를 킁 킁거리며 천천히 붉은 양탄자 위로 힘차게 발을 내딛었다. '……기가 막히군.' 그루닌은 할말은 완전히 잃고 있었으나 예의바르게 박수를 치는것은 잊지않고 있 었다. 장내에 모인 기사들의 표정도 모두 같았다. 그러나 별로 놀라는 얼굴은 아니 었다. 결국 라이칸테스 기사단이다. 그곳에 모인 기사들이 인간일리는 없을테니까. 하지만 이번에 나타난 케라투 남작은 정말 의외였다. 그는 보통 사람의 키보다 조금 작았다. 그러나 떡 벌어진 어깨와 근육으로 뭉쳐 진 강인한 팔은 그가 어떠한 수련을 거쳐왔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입 사이로 삐죽 이 드러난 하얀 송곳니……상당히 신경써서 하얗게 물들인 송곳니가 촛불아래 반 짝이고 있었다. "세……세상에……" 숨이 넘어갈듯한 비명처럼 들리는 탄식이 연회석에서 흘러나왔다. 그루닌은 눈을 살짝 돌려 아스트리아의 사신이 앉아있는 연회석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백짓장처 럼 하얗게 변해버린 드로이얀과 분노에 얼굴조차 시뻘개져버린 신관, 윈더멘틀 합 스부르크의 얼굴이 있었다. 케라투 남작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연회석 앞으로 나와 우아하게 한쪽 무릎을 꿇 어 토오르에게 인사를 올렸다. "라이칸테스의 근위대 기사, 케라투 히큐베크 남작. 이렇게 국왕폐하의 명을 받 고 왔습니다. 취익." "어서오게나. 자네의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호위해야할 손님들이 있으니 그분 들을 도와주게나." "명심하겠습니다. 취익." 케라투는 습관처럼 콧소리를 내며 한껏 부드러운 표정으로 드로이얀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돼지머리가 아름다워 보이는건 아니었지만 최소한 조 금 전보다는 나은듯 했다. '취미도 희안하시군……' 그루닌은 싱글싱글 웃고있는 토오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케라투 히큐베크……멧돼지를 연상시키는 머리에 삐죽 튀어나온 두 송곳니. 그는 바로 오크(Orc)였다. * * 조금 익살을 부려 보았습니다.^^ 약간의 재미도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는듯 하 군요...하하하...) 다크스폰이었습니다. 추신 : 음.....출판용 제목으로 '라이컨슬로프'가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나왔습니 다. 조금 어렵나요……그렇다면 좋은 이름을 보내 주십시오. 채택되신 분에 게는 책 전질을 하나 드리죠.(싸인도 해서요...^^하하하...) 『게시판-SF & FANTASY (go SF)』 17502번 제 목:[darkspwn] 라이컨슬로프-63 올린이:darkspwn(유민수 ) 98/12/26 01:33 읽음:413 관련자료 없음 ----------------------------------------------------------------------------- 라이컨슬로프(=獸人) EDITION Ⅱ 63. 헤게모니의 보석이 허공중에 떠 있었다. 푸른 빛이 안개처럼 흩어져있는 어두운 밤하늘 가운데에 지옥의 구멍처럼 뚫려있는듯한 착각을 주는 암흑의 달을 바라보 며 그루닌은 샤이닝 힐의 낭하를 지나갔다. 무도회가 모두 끝나고 기사들이 돌아 간 뒤에도 그와 다른 한명은 그자리에 남아 있어야만 했다. 그것은 국왕의 명령이 기도 했고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기도 했다. 다른 한명……포르켄 폰 레이프는 불만에 가득한듯 들리지 않을정도의 작은 목소 리로 중얼대고 있었다. 그루닌은 그에게 웃음띈 시선을 보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세요?" "……" 포르켄의 손질을 하지 않은 검은 머리카락이 꿈틀거리며 시선이 그루닌에게로 향 했다. 암갈색의 깊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아무것도." "아닌것 같은데요. 뭐가 그렇게 불만이신겁니까?" "……자넨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지?" 포르켄의 목소리가 조금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 "케라투 히큐베크……그자식이 남작이란 말이야. 자네나 나나 모두 자작인데 말 이야." "무언가 많은 공을 세웠겠죠. 그렇기 때문에 아스트리아 사절단을 호위하는 중 임을 맡게 된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문제다. 자식은 오크란 말이야!" 포르켄의 이마에 핏발이 섰다. 눈꼬리가 길게 올라가고 있었다. "오크 주제에……오크 주제에 말야! 이번 호위가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그자식은 분명히 우리와 같은 자작으로 올라올게 뻔해. 하찮은 오크가 같은 작위를 받고 우쭐거린다면 그 꼴을 어떻게 보느냔 말이야." "……포르켄 경" "대체가 국왕폐하도 생각이 있으셔야지. 사절단 호위라는 중책을 어째서 마족에 게 맡기시는지……조금전 사절들의 얼굴표정을 자네도 봤지않나." "그것도 좋지 않습니까?" "……" 그루닌은 포르켄의 의아해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포르켄은 한창 열을 내다가 찬물 을 맞은 사람처럼 표정이 묘하게 변해 있었다. "국왕폐하께서는 어쩌면 사절단에게 가베라의 실상을 알려드리려 했는지도 모르 죠. 오크도 기사가 될수있고……또한 한 나라의 중임을 맡을만한 능력이 있다 는 사실을 말입니다." "단순히 그것때문에?" "물론 그건 아니겠죠. 제가 무얼 알겠습니까." 그루닌은 빙긋 미소지었다. "그저 단순한 추측일 뿐이에요. 하지만 무도회장에 모였던 기사들……어느 누구 도 반발하지 않았어요. 라이칸테스 기사단의 존재를 인정하고 긍정하고……또 한 한때는 말살의 대상이었던 오크가 자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사로서, 사절단 호위라는 중임을 받아들이는 것을 아무런 거부감없이 받아들일수 있다 라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마족이란 존재를 익숙하게 생각한다란 의미겠죠." "……그렇군." 포르켄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마족과 인간족 사이에 틈은 없다……라는 것을 전시하기 위한 상징이었단 말인가? 그 오크 기사는?"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죠. 아무튼 국왕폐하의 복안이 어느정도 받아들여진것만 은 확실합니다. 그 옹고집쟁이 유노 신관마저도 아무말 없이 케라투를 호위기 사로 인정한 것을 보면요." "한 국가의 군주가 지명하는데 신관 주제에 어떻게 하겠나." 포르켄이 씁쓸한 고소를 띄우며 분노에 부들부들 떨던 사절단의 신관, 윈더멘틀 합스부르크의 모습을 떠올리는듯 했다. 유노를 섬기고 마족의 전멸을 주장하는 신 관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하얀 얼굴의 그녀…… 드로이얀의 주의 한마디로 그는 그 일을 받아들였다. 대단한 카리스마가 아닐수 없었다. '……대단한 여자야.' 어쩌면 국왕은 드로이얀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싶었던 것일런지도 몰랐다. 상대 의 역량을 견주어볼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수 있였던 것이다. 만일 그녀가 화를 낸다면 그것은 생각만 깊고 시야가 좁은, 다루기 쉬운 스타일 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드로이얀은 창백해진 얼굴로 그저 '훌륭한 기사입니 다. 호의, 고맙게 받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모든것을 견뎌냈다. 결국 그녀는 진정한 '현자'로서의 자질이 있는 위협적인 외교관이란 의미였다. 그루닌은 그점을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무거워지고 있었다. "자네는 무슨 생각을 하는건가?" 표정이 한결 밝아진 포르켄이 되물어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이번 임무가 무엇일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곧 알게 되겠지. 하지만 무도회가 끝난 후에 불러낸 것을 보면 그리 중요한 일 은 아닌것 같군. 비밀 임무라던가……뭐 그런 종류는 아닐거야." "그럴까요?" "곧 알게 되겠지. 마침 오는구만." 포르켄이 눈짓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횃불이 없어 어두운 복도 쪽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루닌과 포르켄은 무거운 플레이트 메일을 철컥거리며 그 방향 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다가오는 기사의 몸에서도 무거운 갑옷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간간히 비치는 달빛에 반짝이는 것을 보니 의장용 플레이트 메일인듯 싶었다. 보통 사람의 체격 보다는 조금 크고 왼편 허리에 긴 손잡이가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검집의 길이가 그리 길지 않은것을 보면 양손으로 잡고 쓸수있는 바스타드 소드 인듯 했다. 횃불이 비치는 곳으로 기사가 걸어나와서야 그루닌은 그를 볼수 있었다. 은회색의 플레이트 메일 가슴에는 하얀 드래곤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앞쪽으로 조금 기울어진 바스타드 소드의 손잡이에는 검을 부러뜨린 그린 드래곤의 문양이 있었다. 진한 밤색의 머리카락에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회색 눈동자의 젊은 기사 였다. 체격은 아주 건장한 편이고 등쪽에는 몽둥이처럼 보이는 손잡이가 튀어나와 있었다. 검은색 망토 아랫편으로 검끝이 흔들리는 것을 봐서는 투 핸드 소드(Two handed sword)를 메고 있는듯 싶었다. '검을 두개나 갖고 다니는 건가……' 그루닌은 이상하게 보이는 기사의 차림새에 눈썹을 조금 찡그렸다. 바스타드 소드는 기본적으로 전장에서 많이 사용하는 검으로, 용병이나 전사들이 애용하는 편이다. 기본적인 롱 소드에 비해 검날이 넓고 손잡이가 길어 손이 미끄 러지는 일도 없다. 더군다나 쇠로 만든 가슴 보호구 정도는 무리없이 둘로 쪼갤수 있는 파괴력이 장점이어서 힘이 있는 전사는 거의 대부분 이것을 사용할 정도였 다. 그에 비해 투 핸드 소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무기였다. 본래 풀 플레이트 메 일……그러니까 의장용 플레이트 메일처럼 온몸을 무쇠나 미스릴로 도배하고 말 위에서 달리는 마상용 기사(騎士)가 부득이하게 서로 싸울 경우 사용하는 무기였 다. 일반 바스타드 소드보다 다섯배는 무겁고 또한 다루기도 힘들다. 갑옷을 일격 에 쪼갤수 있긴 하지만 행동이 재빠른 보병과의 싸움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단점이었던 것이다. 결국 전혀 맞지않는 두개의 무기를 가진 전사에게 그루닌이 내릴수 있는 평가는 두가지 였다. '멋을 부리고 싶은 초보 기사'이던가……'인간의 수준을 뛰어넘은 괴물 기사'일 것 이다. 그루닌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기사로서의 예의를 표했다. "주군에게 생명을, 레이디에게 경애를." "생명은 작으나 명예는 영원하다. 그루닌 자작님이시로군요." 남자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그루닌의 앞으로 다가왔다. 남자는 빙그레 웃으며 가볍 게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계신 분은 포르켄 자작님 이시겠죠.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실례하지만 그쪽의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디트리히라고 불러 주십시오." 남자……디트리히는 짧게 대답했다. "토오르 국왕의 명으로 오신것으로 압니다만……" "맞습니다." "따라오십시오." 디트리히는 몸을 돌려 걸어왔던 어두운 복도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그루닌과 포 르켄도 디트리히의 뒤를 따라 재빠르게 걸어갔다. 횃불의 불빛은 금방 사라지고 보이는 것은 디트리히의 밤색 머리카락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어둠 속으로 스 며들듯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디트리히라고 이름을 밝힌 그 남자의 걸음걸이가 의외로 빨랐기 때문이었다. 그루닌은 얼마 가지않아 숨이 턱에까지 닿는것을 느꼈다. 그것은 포르켄도 마찬 가지인듯 했다. 이리저리 꺾여진 어두운 복도를 디트리히는 마치 보이는것처럼 걸 어가고 있었다. 그것도 두개의 검과 의장용 플레이트 메일까지 갖춰입은채로. 그루 닌은 조금전 디트리히에게 내렸던 두개의 평가를 하나로 끌어맞출수 있었다. '저건 괴물이다……' 간간히 걸려있는 흐린 등잔 불빛에 의지하면서 그루닌은 디트리히의 뒤를 열심히 쫒았다. 얼마나 걸었을까……급작스럽게 디트리히의 머리카락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자칫 부딪힐뻔 했지만 그루닌은 가까스로 멈출수 있었다 그러나 뒤따라 오던 포르켄과 는 충돌해 버리고 말았다. 카캉! 눈앞에 별이 보이고 포르켄은 비틀거리다가 주변의 벽을 잡고 중심을 잡았다. 그 루닌은 충격이 조금 덜한 편이라 억지로 서있을수 있었다. "조심하십시오." 디트리히가 뒤를 돌아보며 짧게 말했다. 그의 얼굴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엷 은 미소를 띄었던 조금전과는 아주 달라 보였다. 눈을 들자 작은 문이 보였다. 철판으로 덧대어진 육중한 문……그러나 곳곳이 일 그러지고 찢어진 흔적이 무수하게 나 있었다. 디트리히는 손을 내밀어 그 문을 밀 어젖혔다. 쿠웅. 둔중한 소리가 나며 문이 열리고 디트리히는 스며들듯 어두운 문 안쪽의 암흑으로 사라졌다. 그루닌은 침을 꿀꺽 삼켰다.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그루닌은 천천히 문 을 향해 걸었다. 문 안쪽은 뜻밖에도 꽤 넓은 광장이었다. 둥근 돔 형의 강철 지붕에 기묘하게 불 타고 일그러진 흔적이 그로테크스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커다란 돌로 이루 어진듯한 바닥은 하얀 빛이 스며나오는 마법진으로 가득했다. 그것도 아주 거대 한……그리고 강대한 마력이었다. 그루닌은 눈을 의심할수밖에 없었다. 넓은 광장을 거의 메우다시피 그려진 마법진 정 가운데에는 기괴한 형상의 물건 이 서 있었다. 그것은 꿈틀대는 심장과도 같았다. 사람의 두배정도는 되어 보이는 붉은 크리스탈……그 붉은 핏빛 형체에는 살아있는 생물의 조직 같은것이 사방으 로 퍼져 있었다. 꿈틀대는 촉수처럼 그 조직은 봉쇄된 마법진 안쪽에서 끊임없이 흐느적대고 있었다. "저……저것은 대체……" 숨이 막힐듯한 공포감에 포르켄의 신음성이 들렸다. 그루닌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 춤의 검을 움켜잡고 있었다. "멈춰." 냉랭한 목소리였다. 등줄기를 차가운 얼음이 긁어파는듯이 그 목소리는 그루닌의 신경을 일순간에 마비시켰다. 황급히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눈을 돌리자 그곳 어둠에 무엇인가가 서 있었다. 그자은 돌바닥을 가볍게 두드리듯 천천히 그루닌에게로 다가왔다. 보통 사람의 절반정도 되는 작은 키였으나 몸 전체에서 느껴지는 강한 압박감은 그루닌의 심장 을 조이는것 같았다. 그루닌은 숨도 제대로 못쉬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검은 로브……그자가 입고있는 것이었다. 아무런 장식도, 표시도 없었으나 그루닌 은 그 로브의 주인이 누구인지 어느정도 알아차릴수 있었다. "여기서 검을 뽑지 말아라. 살고 싶다면." 검은 로브가 짧게 말했다. 단순한 명령이었지만 그루닌은 자신도 모르게 검의 손 잡이에서 손을 떼어버리고 있었다. 그루닌은 경악했다. 자신도 모르게 몸이 검은 로브를 입은 자의 명령에 반응해 버리고 있었다. 마치 조종하는 것처럼. "이자인가?" 로브의 두건이 어두운 한 구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곳에서 차분한 디트 리히의 대답이 들려왔다. "음. 결정했던 대로……" "너무 약해. 괜찮을까요."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다." 다른 구석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토오르 국왕의 목소리인듯 싶 었다. 지옥에서 구원을 만난 기분이 된 포르켄과 그루닌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몇 걸음 물러났다. 과연 어둠 속에서 토오르 국왕의 굳은 얼굴이 보였다. 검은 로브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서두르는게 아닙니까. 섣불리 행동하다간 바타쿠에게 들킬 염려가 있어요, 국왕." "……라이칸테스를 움직일텐가?" "필요하다면." 검은 로브는 가볍게 큭큭대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루닌은 소름이 오싹 돋는것을 느꼈다. 눈앞에 서있는 저 검은 로브를 입은 자가 절대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마족 기사단, 라이칸테스의 기사대장인듯 싶었다. 강대한 마력과 정령술을 쓴다는 소문 이 전해져 오지만 그 모습을 본 사람은 아직까지 단 한명도 없었다. 하지만 그루 닌은 그를 정면으로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우리들의 기본 생각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건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 지……" "아스트리아를 지나가려면 그길 밖에는 없어. 윌리엄 아키아바의 친서에도 나와 있지만……우리의 목적과 비슷한 문제를 의뢰해 왔으니까." "……그것을 말하는 겁니까?" "아마도 그런것 같지만……조금 심상치 않은 일이라서. 수룡왕께서는 어떻게 생 각하시는지." 토오르는 다른 구석을 바라보았다. 옷이 끌리는듯한 작은 소리가 나며 한 여자가 걸어나왔다. 수룡왕 세이렌 라인돌프 뮤레이너였다. 수룡왕 역시 굳은 얼굴로 간단하게 대답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입니다. 베르제뷔트……그자는 분명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라고 했으니까요." "우리로서는 마지막 희망인 셈이니까." 토오르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더불어 베르제뷔트의 능력을 측정해 보기 위해선 '그'를 꼭 데려가야 하는 겁니다." "납득하기 힘들군요, 토오르. 그것과 이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듯 한데." "……'그' 역시 비슷한 경우지 않습니까." 검은 로브는 침묵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붉은 크리스탈을 바라보았다. 붉은 크리스탈은 아직도 숨쉬듯 맥동하며 촉수를 뻗쳐대고 있었다. 그루닌은 검 은 로브의 시선을 따라 크리스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건……' 크리스탈 안쪽에 무언가가 보였다. 그것은 흐릿한 붉은 그림자 정도로 보였지만 자세히 바라보면 볼수록 더욱 또렷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루닌은 몇발자국 다가 가 크리스탈을 노려보았다. 그것은 여자였다. 미끈한 나신의 여자였다. 마치 고정된 박제처럼 크리스탈 안에 갇힌 여자는 온몸을 쭉 편채 갇혀있었다. 숨도 쉬지 않는듯 했고 살아있는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멀리서 바라본 여자의 얼굴을 본 순간, 그루닌은 심장이 멎는듯한 충격을 느꼈다. "수룡왕!" 수룡왕 세이렌……바로 그녀의 얼굴이었다. 머리카락이 검은색이라는 점이 다를 뿐……모든 면에 있어서 완벽하게 같다고 표현할수밖에 없는 얼굴이었다. 그루닌 은 놀라움이 지나쳐 정신까지 혼미해진 얼굴로 수룡왕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수룡 왕은 가볍게 고개를 저어 입을 다물라는 표시를 할 뿐이었다. "좋습니다." 검은 로브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천천히 크리스탈을 향해 걸어가면서 말을 계속 이어갔다. "잠시 휴식을 한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그'에게 무슨일이 일어난다면……" "그럴일은 없소. 절대로." 끊어내듯 토오르는 부정했다. 검은 로브는 냉소를 지으며 크리스탈의 근처에 다가 섰다. 그곳은 촉수가 한군데로 모인 곳이었다. 기둥을 감싸는 덩굴처럼, 촉수는 어 떤 것을 감고 있었다. 검은 로브는 손을 내밀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dltptkddml ahems tkdkrgks rjtemfdldu anffjskfk……" 주문에 호응하든 촉수는 한가닥 한가닥 그것에서 떨어져나갔다. 뭉친 실뭉치가 풀 리듯……촉수는 그렇게 크리스털 속으로 사라졌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그루닌은 촉수에 감겨져 있던 것을 볼수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었다. 은회색 머리카락……거의 벗은듯한 몸에 오른팔에는 검붉은 거대한 검이 찍어 눌 리기라도 한듯 매달려 있었다. 잘 단련된 몸은 한군데의 군더더기도 없는 매끄러 운 몸매였다. 그러나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눈동자는 풀려버린 것처럼 텅 비어 있 었다. "……" 검은 로브는 잠시 침묵속에 잠겼다. 손은 들고 있었지만 차마 주문을 걸지 못하겠 다는 것처럼 머뭇거리고 있었다. "……로리타." 디트리히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검은 로브의 머리가 휙 젖혀졌다. 그 서슬에 로브의 두건이 반쯤 흘러내려버렸다. 어두운 그늘 사이에서 검은 로브 안에 있던 얼굴이 흐릿하게 비쳐졌다. "디트리히. 당신은 내 마음을 몰라요. 아무리 마족의 수호자……바라야즈라 하더 라도." "……" 디트리히는 눈썹을 약간 찡그렸다. 그러나 로리타라고 불린 검은 로브의 말을 들 은 그루닌은 망치에 뒷통수를 한대 얻어맞은것 같았다. 바라야즈……마족의 지배 자라고 불리는 바라야즈가 자신들을 인도한 디트리히였을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2년간 나는 싸워왔어요. 심장을 찢어내는듯한 고통……당신은 그것을 모릅니 다." "……로리타." "내가 왜 라이칸테스를 이끌고 있는지……조금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순간 어두운 방안을 비추던 횃불이 무엇에 놀란듯이 허공으로 춤추며 타올랐다. 약간 밝아진 불빛덕에 그루닌은 반쯤 벗어진 로브의 두건에 감추어진 얼굴을 살짝 엿볼수 있었다. 그러나 그 얼굴을 보는 순간……그루닌은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연보랏빛 머리카락……그리고 검은 얼굴에 왼쪽으로 살짝 드러난 긴 귀. 오밀조 밀한 아름다운 입술을 가진 예쁜 얼굴의 소녀. 그것은 얼마전 만났던 꽃을 가꾸던 다크엘프 소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그루닌이 보았던 것은 또다른 소 녀의 눈동자였다. 검은 흑수정처럼 아름다웠던 소녀의 눈동자는 죽어있었다. 그것도 깊은 고통과 절망에 무서울 정도로 타오르는 증오의 불빛으로. 그루닌은 어느덧 온몸을 휘감는듯한 냉기에 몸서리치고 있었다. * * 조금 늦어졌지만……뭐 이쁘게 봐주세요. ^^ 다크스폰이었습니다. 『게시판-SF & FANTASY (go SF)』 17681번 제 목:[darkspwn] 라이컨슬로프-64 올린이:darkspwn(유민수 ) 98/12/27 12:54 읽음:445 관련자료 없음 ----------------------------------------------------------------------------- 라이컨슬로프(=獸人) EDITION Ⅱ 64. 여름의 열기가 남부가로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노란 벽 돌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때문에 끝없이 이어진듯한 길의 끄트머리는 꿈속처럼 흔 들거리고 있었다. 그루닌은 목 언저리로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내며 꺼림직한 기 분을 떨쳐버리려 애썼다. '……로리타……였던가.' 그루닌의 손가락에는 아직도 연보랏빛의 손수건이 매어져 있었다. 상처는 이미 나아버린지 오래였고 굳이 매달고 있어야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루닌은 섣불리 손 수건을 떼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루닌은 긴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으로 부드러운 실크의 감촉을 다시한번 되새겼다. '……예쁜 눈이었어.' 아름답게 어우러져있던 정원. 그 사이로 춤추듯 사라지던 로리타의 흑수정빛 눈이 다시 기억속에 되살아났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지하광장에서 보았던 소름끼치도 록 무섭던 그 눈빛……가슴을 죄는듯한 공포의 눈빛도 동시에 살아나 그루닌의 머 리는 혼란속에 빠져 버렸다. 다만 손수건을 만지고 있는 잠깐동안의 시간만이 그 녀……로리타의 섬뜩한 모습을 잠시나마 잊을수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루닌은 시선을 들어 행진하듯 앞에서 굴러가고 있는 커다란 수레를 바라보았 다. 그것은 수레라기 보다는 이동용 요새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무칙칙 한 철창살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어제의 그 소년이 온몸에 미스릴제 사슬로 양팔을 결박당한채 묵묵히 앉아있었다. 가끔, 아주 가끔씩 소년은 밖을 내다보는듯 했지만 그것은 수레의 흔들림에 의한 자연스러운 움직임일뿐 그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생기가 없었다. 마치 존재하기만 하는 시체처럼, 그런 느낌만이 들 뿐이었다. '……누구일까……' 그루닌은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수룡왕이 내린 명령은 아주 간략했다. [이 남자를 아스트리아와 베르마트 중간지대에 위치한 제스파즈 마을로 데려갈 것. 목적은 치료다. 만일 적의 습격이 있을시 안전하게 복귀하는것을 우선 목표 로 생각하라.] 황당하기까지한 명령에 그루닌은 아무런 말도 할수 없었다. 포르켄조차 가볍게 신음소리를 낼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해명은 전혀 돌아오지 않았다. 습격이라니……지금은 평화시기였다. 무거운 세금도 없고 전쟁도 없으며 도적도 없다. 사악한 마족의 침입같은 사건은 최소한 가베라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아스트 리아의 치안력은 로메오 대륙 최고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어째서? 게다가 목적 이 치료라고 한다면 무슨일이 있더라도 이 남자는 보호해야 하는 종류의 인간이란 의미였다. 그런데 어째서 습격시 죄수가 죽던말던 상관하지 말라는 명령이 덧붙여 진 것일까? 더군다나 저렇게 이상한 수행원까지 붙어있는 수상쩍은 인물을. 그루닌은 수레 앞에서 묵묵히 말을 타고가는 다른 한명의 수행원을 바라보았다. 특징없는 갈색말에 장비라고는 몸에 걸치고 있는 플레이트 메일 하나였다. 검도 없이 허리춤에 단도 몇개만이 구색을 갖추고 있었고 머리에는 눈쪽에 길게 구멍이 나있는 둥그런 원통 모양의 투구를 눌러쓰고 있을 뿐이었다. 문장도 장식도 아무 것도 없는 이상한 갑옷이었다. 출발할 즈음 묵묵히 다가와 전출명령서를 그루닌에게 불쑥 내밀고는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아몬 폰 후트……분명 라이칸테스에서 유일 하다는 인간 기사라고 들은 기억이 있었다. 인간이 라이칸테스에서 무슨일을 하는 지는 잘 알수 없었지만 사교성이 없는것으로 봐서는 공보관이 아닌것만은 분명했 다. 그루닌은 품속에 갈무리된 한통의 편지를 손으로 지긋이 눌러보았다. 얇지만 사 각거리는 종이의 감촉이 가슴에 그대로 느껴졌다. 그것은 지하광장에서 나온후 토 오르 국왕이 건네준 별도의 명령서 비슷한 것이었다. 그루닌은 우울하게 보이던 토오르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다시한번 떠올렸다. "이것은 가베라 왕국의 통치자로서 부탁하는 것이네, 그루닌. 내 휘하의 장미 기 사단원이 아닌 자네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것은 무리인줄 알고 있네만……" 토오르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루닌과 자신을 바라보는 포르켄을 의식하며 작게 말했다. 그루닌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토오르가 넘겨준 작은 편지를 받아들 였다. 토오르는 무거운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나라와 나라간의 외교는 국운을 좌지우지할만큼 중요한 일이네. 자세히 말할수 는 없지만 아스트리아에 도착하거든 곧바로 지그프리드 후작의 거처를 찾아가 도록 하게나." "지그프리드……교활한 너구리 재상을 말입니까?" "……그런 별명이었던가? 흠. 그리 틀린말은 아니로군 그래." 토오르는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대외적으로는 신용할수 없는 사람이지. 그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생각이 라곤 오직 아스트리아의 국익(國益),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하지만 반대 로 생각해본다면 충성하는 애국민이라고 할수 있어." "……" "윌리엄 아키아바의 친서 내용까지도 그는 알고 있을테니 시시콜콜히 설명할 필 요는 없을것이네. 온 국가력을 동원해서 소문을 차단하고 있기는 할테지만…… 우리도 어느정도의 윤곽을 알고있는 상황에 여론을 무마하기란 쉬운일이 아닐 테지. 자네가 아스트리아로 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네." "자세한 설명을 해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도통 무슨 말씀이신지……" 토오르는 잠깐 생각하는듯 하더니 짧게 대답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자네가 수송하는 남자는 더미(Dummy)라고 말할수 있겠지." "위장(衛將)이란 말입니까?" "……여러 의미에서야. 하지만 소홀히 해도 좋을 사람은 아니니 주의하게." 토오르의 얼굴이 신중하게 변했다. "그 이상은 말할수 없네. 아무튼 가베라의 안전에 관계된 일이라고만 생각해 주 게나." '가베라의 안전……이라니. 알 도리가 없잖아.' 짜증스러운 기분이 들어 그루닌은 조금 불쾌해졌다. 권력 상층부에서 돌아가는 비 밀스러운 이야기를 모두 알 필요는 없었고 굳이 토오르 국왕의 명령을 들어줄 이 유도 없었다. 그루닌 폰 하펜다즈……이미 헤스펠 제레이트라는 드래곤의 종복으로서, 생사여 탈은 물론 외부적으로는 어떠한 명령을 듣지 않아도 되는 독립된 존재였다. 그린 드래곤의 수장인 세이렌의 경우는 예외로 치더라도 그 외의 종족의 간섭은 허용되 지 않았다. 만일 무례하게 명령하는 자가 있다면 그루닌은 검을 들어 그의 목을 베어버리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루닌에게는 최소한 '가베라'의 국록을 먹고 산다는 책임감이 있었고 제 스타 하이랜드 공국에서 몸에 배어버린 왕실기사단의 습관이 남아있는터라 무의식 중에 압력을 받는듯 싶었다. 그루닌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행로는 순조로웠다. 남부가로의 노란 바닥돌을 제외하고는 푸른 풀숲으로 덮여있 다. 도적도 없고 야수도 없다. 사람의 왕래가 많은 가로이다. 그런것이 있을리 없 었다. 어찌보면 으름장을 놓던 명령서와는 달리 단순한 산책이라는 생각이 들 정 도였다. 앞으로 반나절을 더 가면 아스트리아에 도착하게 된다. 그로부터 사흘을 더 가면 아스트리아의 수도, 카알이 나오고 다시 나흘을 더 가야 북부 대로에 도착한다. 아 스트리아의 창시자, 카알 아스트리아 대제는 북진정책을 택했다. 남부의 작은 도시 국가와의 분쟁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고 단순한 유화책을 사용했던듯 하다. 그 결 과가 평온한 남부가로, 험난한 북부 대로라는 말로 이어졌다. 북부 대로는 군대의 이동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크고 단단했다. 게다 가 아스트리아 성립후에도 베르마트와는 수많은 전쟁을 치러왔다. 어찌보면 요즘 들어서 두 나라의 연대가 깊어진 것이 이상스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는 한 인물이 있었다는 평가가 있었다. '지그프리드 폰 후돌레이드 재상……아스트리아의 애국자이자 교활한 너구리 늙 은이.' 그루닌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분명 앙숙이라는 두 나라의 오래된 반목을 멈추게 했다는 면으로 보자면 충분한 지략가에 정치인이라고 할만했다. 외부적으로 흠잡 을데 없는 충실한 관리이긴 했으되, 여색을 밝히는 버릇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얻 어진 별명이 '교활한 늙은 너구리'였다. 아스트리아의 민담에 '너구리'는 종종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 여자를 납치한다고 한다. 아마도 그 너구리를 지그프리드에게 비유해 놀림감으로 삼는듯 했다. 그러나 지그프리드 재상은 그런 소문에 별 신경을 쓰지는 않는듯, 각국으로 소문이 흩어 져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어이, 그루닌!" 그루닌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포르켄이 떨 떠름한 표정으로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이 허리에 찬 검에 대어져 있 는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루닌은 재빨리 앞을 바라보았다. 남부 가로의 중간에 한 사람이 서있었다. 타오르는듯한 붉은 로브를 입고있는 사 람이었다. 로브에 가려 어떤 인물인지는 알수 없었지만 이렇게 더운 날씨에 머리 에 둘려쓰는 후드까지 내리고 있는것을 보면, 흔히 볼수있는 인물은 아닌듯 했다. 그루닌은 조금 긴장하며 검에 채워둔 안전고리를 풀었다. 긴 검은 지팡이를 짚고있던 붉은 로브는 그루닌 일행을 보자 천천히 몸을 돌려 가로의 옆으로 비켜섰다. 로브의 후드가 조금 위로 올라가는듯 했다. 아마도 자신 을 주시하고 있으리라……그루닌은 생각했다. 그루닌은 말의 옆구리를 가볍게 두드려 속도를 냈다. 마차를 가로막듯이 하며 붉 은 로브에게 다가간 것이다. 붉은 로브를 입은자는 그루닌이 다가오자 가볍게 머 리를 끄덕였다. 그루닌은 애써 쾌활하게 입을 열었다. "날씨가 참 덥습니다." "……그렇군요." 가늘고 여린 느낌이 드는 목소리였다. 여자인가……그루닌은 조금은 안심이 되었 다. "어디로 가십니까? 부탁하실 일이 있으시다면 어느 것이라도 말씀하십시오." "감사합니다만……이것도 수행이라서요." 여자는 손을 들었다. 푸른 정맥이 보일듯한 하얀 손이었다. 로브 아래쪽에 계속 있 어서인지 작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녀의 손이 두건을 젖히자 어두 운 그늘 속에서 푸른빛의 눈동자 두개가 보였다. 그루닌은 말에서 내려 가볍게 허 리를 굽혔다. 숙녀로서의 예의를 지키려는 생각이었다. 여자는 엷게 미소를 지었다. "하급 신관인 제게 예를 지키실 필요까지는……기사님이신가 보군요." "가베라의 그루닌입니다. 실례가 안된다면 숙녀께서는……" "라그도메제키아스의 신관, 클렌 하슈타프입니다. 동등한 생명에게 동등한 권능 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신관님." 그루닌의 옆에 호송마차가 멈춰섰다. 떨떠름한 표정의 포르켄과 그 뒤에 도열한 병사 둘이 그루닌과 클렌 신관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클렌은 손으로 두건을 약간 걷어올렸다. 창백한 피부가 태양아래 어느정도의 윤곽을 보이고 있었다. 대체로 가는 선의 얼 굴이었다. 미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기엔 그녀의 얼굴은 평면이라는 생 각이 들 정도로 굴곡이 없는데다, 하얗다 못해 창백하기까지 해 마치 병자처럼 보 였다. 클렌은 철저하게 방어진으로 둘러싸인 호송마차에 호기심의 시선을 던졌다. 마차의 철창 사이로 '남자'의 붉은 검이 삐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루닌은 몸을 조금 돌려 짐짓 클렌의 시야를 가리며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어디로 가시는 길이신지 물어봐도 실례가 안될까요?" "아스트리아에 갑니다. 신탁을 받았거든요." "그렇습니까……" 그루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클렌은 검은 지팡이를 질질 끌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뜨겁기 한이없는 날에 신탁이란건 무리가 있어요. 아무리 라그도메제키아스 님 이라지만……" "천천히 가셔도 되지 않을까요. 죽음이란 어느 누구에게나 소리없이 다가오는 것, 라그도메제키아스의 신탁이라면 시간과는 별로 관계가 없을텐데." "그게……이번에는 지금 당장 가야 한다고 해서요. 그래서 서둘러 길을 떠난겁 니다." 클렌은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을 짜증스레 바라보고는 후드를 다시 원래대로 돌렸 다. 포르켄이 헛기침을 하며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물과 음식은 충분하신가요? 부족하다면 저희에게 여분이 있으니……" "아닙니다. 그보다도 물어볼 것이 한가지 있는데요." "말씀하십시오." 그루닌은 친절하게 대답했다. 클렌이 지팡이를 약간 들어 호송마차를 가리키며 입 을 열었다. "저 마차에 타고있는 사람 손에 붙인거, 정말 검입니까?" "……그럼 저게 젓가락으로 보입니까?" 포르켄이 불만스레 중얼거렸지만, 이내 그루닌을 비롯한 병사들의 따가운 눈총에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클렌은 별로 불쾌해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이거 실례를……동료의 무례를 용서하시길."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게 당연하죠. 하지만 말이에요……저 분의 손에 붙 은 붉은 검, 이번 신탁에서 들은 기억이 있어서요." "……" 포르켄과 그루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사람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 는듯 했다. 저 자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바로 눈앞에. 다만 그루닌은 그러한 사람이 대로상에, 그것도 호송중에 만날수 있다는 우연에 대해 깊은 생각 에 빠지게 했다. '단순한 우연? 아니면 라그도메제키아스란 녀석의 장난인가……' 심각한 분위기에 클렌은 오히려 당황해 했다. "아, 저……기밀이라든가 비밀이었다면 용서하세요. 신탁엔 그렇게 정색하실만한 내용은 아니었는데……" "아닙니다. 사실……저희도 저 사람이 누군지 잘 모르니까요. 그리고 단순한 호 송인일 뿐이구요." 클렌은 땅이 꺼질듯 휴우 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루닌은 글렌을 의심하 던 생각을 일단 접어두기로 했다. 최소한 그루닌이 첩자였다면 저런식으로 행동하 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클렌은 호기심이 가득한 포르켄의 시선을 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오른손에 붉은 검을 단 전사를 만나게 될거라고 했어요. 그를 주시하라고…… 이상한 신탁은 지금까지 많이 받아봤지만 이번처럼 모호한 경우는 처음이었거 든요." "그렇습니까……" 그루닌은 수긍했다. 신관이 가져오는 신탁은 대개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았다. 그점 에 대해서 그루닌의 드래곤인 헤스펠은 이렇게 말했었다. '신은 피조물이 당황해 하는 모습을 즐기지. 그래서 신탁이 그모양인 거야.' 신족이기 보다는 마족(魔族)에 가까운 드래곤의 증언이어서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그루닌은 헤스펠의 의견을 정답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실제로 이런 식의 신탁은 별반 쓸모가 없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클렌이 있건없건간에 저 남자 는 제스파즈로 가야만하는 것이다. 그루닌은 다시 말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클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클렌은 자신에게 내밀어진 손의 의미를 몰라 잠시 머뭇거리는듯 했다. 그루닌은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네?" 클렌은 검은 지팡이를 가슴쪽으로 모았다.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저기……그러실 필요는……" "어차피 저 친구를 따라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천천히 뒤에서 따라가도……" "일국의 기사로서, 그런 무례는 저지를수 없습니다, 레이디." 흥 하고 포르켄이 코웃음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루닌은 포르켄에게 날카로운 눈빛 을 보내고, 클렌에게 다가가 그녀를 부드럽게 말 위로 끌어올렸다. 클렌은 어린 양처럼 순순히 그루닌의 말 위로 올라왔다. 그녀는 무척 가벼웠다. 무술이나 마법을 익힌적이 없는, 순수한 신관의 체격인듯 했다. 그루닌은 빙그레 미소를 지어주었다.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클렌은 말 위에서 균형을 잡으려다 지팡이를 떨어트릴뻔 했다. 말을 타는것은 처 음인듯 했다. 포르켄이 궁시렁대며 클렌을 부축했고, 결국 클렌의 지팡이는 포르켄 이 들게 되었다. 죄수 호송마차는 다시 움직였다. 여유롭게 흔들거리는 일행들의 앞에는 남부 가 로가 펼쳐져 있었다. 마물에 대한 위협이 전혀 없는 가베라를 지나쳐서 카알로 통하는 길로 접어들자, 노란색의 남부 가로는 거의 끝을 드러냈다. 그루닌은 내리쬐는 햇볕을 피해 가로 주변의 나무그늘에 말을 세우고 말안장에 묶어둔 물통을 꺼내들었다. 포르켄과 아몬은 제각기 떨어져 투구를 벗어둔채 쉬고 있었다. 호위병사 둘은 소년이 갇혀있는 수레에 등을 기대고 한가로이 물을 마셔 대다가 그루닌의 시선을 받고는 긴장하는 듯 했다. 그러나 그루닌은 손을 내저어 그들이 계속 쉬도록 했다. '평화로울 때 쉬어두는게 좋지.' 그루닌은 붉은 로브 아래에서 숨을 할딱이는 클렌에게 주의를 돌렸다. 클렌을 앞에 태우고 여행을 해서 알게된 사실이지만, 클렌의 옷은 정말 두꺼웠다. 클렌의 이야기에 의하면 라그도메제키아스 신관이 입는 옷은 금속 실로 만든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루닌은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생각으로 물결치듯 흘러 다니는 클렌의 옷이 금속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던 것이다. "전속 장인이 있어요……신관용 제복만 만드는." 클렌은 하얀 얼굴을 조금 붉히며 방긋 웃었었다. 하지만 그렇다는 말은, 클렌의 몸무게가 아주 가볍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녀를 안아올릴 때 손에 느껴진 무게는 그리 무겁지 않았으니까. 그루닌은 물통을 그대로 클렌에게 내밀었다. 클렌은 푸른 눈으로 그루닌을 올려 보고는 물통을 받아들었다. 마시는가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클렌은 물통을 든채 소년이 있는 쪽으로 다가간 것이었다. 마차에 다가가자 병사들이 어떻게 하면 좋 겠느냐는 시선을 보내왔다. 그루닌이 고개를 끄덕이자 병사들은 아무말 없이 클렌 의 앞을 비켜섰다. 클렌은 수레 안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역시 언뜻 본것처럼 소년의 오른팔에는 붙 인것처럼 거대한 붉은 검이 붙어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검에 씌여 진 글자는 쉽게 읽을수 있었다. '사막의 영혼은 태양아래 영원하다……' 클렌의 기척을 느꼈는지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소년의 얼굴을 보는순간 클렌은 아 하는 탄성을 터트렸다. 단정한 얼굴이었다. 며칠간 씻지 않아 더러워져 있었으나 분명히 여자처럼 선이 고운, 단정한 얼굴이었다. 은회색 비슷한 아마색 머리카락에 중간 정도의 체구였으 나 온몸에 솟아있는 단단한 근육은 '여자'같다는 이미지를 밀어내고 늠름하다는 느 낌마저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탁하게 흐려있었다. 클렌은 물통을 들어 소년에게 내밀었다. 소년은 물통을 바라보기만 할뿐 움직이 지도,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소용없어요." 클렌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루닌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머리를 좌우로 흔 들었다. "한두번 해본게 아니에요. 그 남자의 정신은 완전히 죽어버린 것 같습니다." "……정신이 죽어요?" "자폐증이죠." 그루닌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그대로 앉아있었으나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 지 않고 있었다. "손에 들러붙은 저 검……아마도 저것이 원인인 듯 싶어요. 어쩌면 에고 소드 (ego sword)의 한 종류인지도 모르죠. 주인의 정신을 갉아먹으며 성장하는 기분 나쁜 검일지도……사막의 영혼은 태양아래 영원하다 였던가?" "에고 소드였다면 분명히 난동을 부릴텐데요. 도망가려구요." "어쩌면 소년의 의지가 에고 소드를 누를만큼 강해서 자폐증 정도로 끝난건지도 모르죠. 체격을 보면 상당한 수련을 쌓은 검사라는 짐작은 되지만……그 외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 클렌은 수긍하는 듯 했다. 잠시간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물통을 들고 한모 금을 마셨다. 그리도 또 한모금……급기야는 계속해서 꿀꺽꿀꺽 삼키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목이 말랐던가……' 그루닌은 쓴웃음을 지은채 그녀가 물을 다 마시기만을 기다렸다. 약 1분정도 기다리자 클렌은 거의 비어버린 물통을 주시하며 아연한 표정을 떠올 렸다. 그루닌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부족하신가 보군요. 잠깐만 기다리시면 제가 곧……" "아니에요!" 당황한 어조로 클렌이 외치듯 소리쳤다. 그 서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클렌 의 얼굴은 석양처럼 붉게 물들어버렸다. 클렌은 우물우물 거리며 작게 대답해갔다. "……너무 죄송해요. 한모금만 마신다는 것이……기사님도 목이 마르실텐데……" "아닙니다. 저야 카알에 도착해서도 충분히 마실수 있는걸요." 그루닌은 손을 내밀어 물통을 받아쥐었다. 물통은 정말 착실하게도 비어있었다. 이 렇게까지 마실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어지간히 목이 마르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저 친구를 먼저 생각했단 말이지……' 그루닌은 다시한번 클렌을 생각하게 되었다. 어쩔때는 신을 섬기는 신관처럼 보였 다가, 어느 순간에는 성녀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직 어린 여자아이 답게 덜렁거리 기도 한다. '바람의 정령……요정을 닮았어.' 그루닌은 눈을 들었다. 클렌은 아직도 마차 곁에서 소년을 지켜보며 작게 말을 걸 고 있었다. 아무 대답없는 소년을 향해 소곤소곤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루 닌도 들어본 기억이 있는……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어린아이들의 노래였다. 살레로네 살레로네 라포네 톤 미카에노 로니모 언덕을 지나가는 정령이 셋 있네. 길잃은 어린아이, 정령을 따라가고 지옥의 정령들이 아이를 반겨주네. 살레로네 살레로네 라포네 톤 미카에노 로니모 아이는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정령은 아이를 돌려보내지 않고 호호백발 할머니가 되어서야 집으로 가게하네 살레로네 살레로네 라포네 톤 미카에노 로니모 마법의 노래, 살레로네의 주문. 정령의 서클이여 돌아라 돌아. 정령의 주문은 끝나지 않지만 호호백발 할머니가 마지막을 말하네. 살레로레 살레로레 라포네 톤 미카에노 로니모 지옥의 정령들이 미쳐 날뛰네. '정령의 춤'이었던가? 가베라 뿐만 아니라 로메오 대륙에서는 흔히 듣는 아이들의 동요였다. 아주 오래전, 정령과 엘프와 드워프, 각종 요정들이 인간과 함께살던 시 절에 대한 이야기로 할머니들의 자장가 가락에 붙여져 불러지는 노래였다. '이슬리 제레미'라는 아이가 있었다. 이슬리는 마치 요정처럼 키가 작고 귀여운 아이였다. 너무 귀여운 아이였기 때문에 이슬리는 정령들을 친구로 삼아 마음껏 뛰어놀았다. 그러던 어느날, 정령들의 축제에 이슬리가 초대되었다. '바르키르'라 부리는 정령의 축제엔 모든 정령이 함께 모여 원을 그리며 춤을 추 는 축제, 인간은 들어올수 없었다. 그러나 이슬리는 정령들과 춤을 추고싶은 나머 지 그 원에 살짝 끼어들고 말았다. 그러나 이슬리는 한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정령들의 춤……살레로레는 영원히 계속되는 춤이며 한번 시작되면 1천년이나 계 속되는 영원한 축제였다. 이슬리는 춤을 추면서 자랐고, 조금씩 조금씩 죽어갔다. 죽어가는 이슬리에게 정 령들의 축제에 빠져있던 지옥의 정령들이 모여들었다. 지옥의 정령은 바르키르에 는 참가할수 없었지만 '죽음'을 앞둔 이슬리를 핑계로 살레로레에 끼어들었다. '사라져라, 저승의 벌레들아!' 지옥의 정령들은 바르키르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착한 정령들이 지옥의 정령 에 의해 쫒겨나자, 지옥의 정령들은, 춤을 추는동안 늙어 호호백발 할머니가 된 이 슬리를 '발푸르기스의 산'이라는 변경으로 쫒아내 버렸다. 일년내내 눈과 바람이 몰아치는 그곳에서 이슬리는 춤을 추는동안 알게된 정령들의 주문을 부르짖으며 지옥의 정령을 저주했다. 그러자 지옥의 정령들은 이슬리의 주문에 쫒겨 다시 저 승으로 돌아가 버렸고 정령들은 다시 바르키르를 시작할수 있었다고 한다. 이야기가 여기에까지 이르면 아이들은 눈을 빛내며 물어온다. '이슬리는? 이슬리는 어떻게 됐나요?' 하지만 이슬 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아주 가끔씩 '발푸르기스 산'에서 요정처럼 차려입은 할머니들이 모여 축제를 벌이곤 한다는 전 설만이 전해진다고, 이야기는 그곳에서 끝나고 마는 것이다. '이슬리는 돌아오지 못한거지.' 그루닌도 어렷을 때 할머니에게 이 이야기를 들으며 만일 정령들의 축제 바르키르 를 보게 되더라도 절대로, 절대로 춤을 추는 곳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주의를 듣곤 했었다. 클렌이 저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노 라면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 할머니의 무릎위 에서 이슬리의 이야기를 듣고있을 때로 돌아간 듯이. 그루닌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 이제야 서서히 본편으로 들어가는 군요. 에구구 힘들어라..... 다크스폰이었습니다. 추신 1 : 비평 및 감상문 좀 보내주세요. 요즘 기근에 허덕이고 있습니다.(흑흑) 추신 2 : 귀환병 이야기와 마육기 책을 봤습니다. 자음과 모음사……돈좀 번다고 들었는데 책을 어째서 그따위로 만드는지……실망스럽더군요. 조금더 고 급스러운 분위기를 원했었는데. 『게시판-SF & FANTASY (go SF)』 17927번 제 목:[darkspwn] 라이컨슬로프-65 올린이:darkspwn(유민수 ) 98/12/29 16:43 읽음:381 관련자료 없음 ----------------------------------------------------------------------------- 라이컨슬로프(=獸人) EDITION Ⅱ 65. 아스트리아의 수도 카알은 로메오 대륙 최대의 상권도시라는 명성이 걸맞는 번화 한 도시였다. 세레노스 대륙 방향으로 툭 튀어나온 레디쉬 브라운 만(灣)을 중심으 로 가지처럼 뻗어나간 항구에서 세계 각지로 무역을 나가는 선박이 들어오고 나간 다. 입출항 절차뿐만 아니라 완만하게 굽어있는 만 위에는 잡석과 자갈로 도로를 건설해 놓아 물품을 하역하고 장사를 하는데는 이곳만한 데가 없다는 평가가 내려 져 있다. 레드쉬 브라운 항구 입구에는 가로로 걸쳐져 있는 거대한 개도교(開徒橋)가 있다. 다리를 만든 명공(名工) 드워프 케스타크 루드벤트의 이름을 빌려 '케스타크 브리 지'라 불리는 이 다리는, 입항을 원하는 선박들이 있을경우 거대한 다리를 위로 들 어올려 배를 항구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드워프들이 수룡왕의 부탁으로 건설했다는 전설대로 300년이 지나도록 고장한번 없는 정교한 기관장치에 의해 최소한의 인원으로 운용할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만을 가로막는 개도교를 잇는 것은 세개의 뾰족한 첨탑이었고 그 위에는 웬만한 저택 규모의 군용 막사가 지어져 있었다. 숱한 전쟁을 치러온 아스트리아 였기에 300년 전에 이 다리를 만들때도 상당한 고안을 했음이 분명했다. 따라서 모든 선박이 들어올수 있는것은 아니었다. 들어올 수 없는 배는 한 종류였다. 군선……바로 그것 뿐이었다. 일반 상선을 제외한 군선들……예를 들자면 네레노디아의 2단 갤리선(Galley)이라 든가 제스타 공국에서 입항한 갈레아스(Galleass) 군선, 그리고 베르마트 공국의 자랑인 3단 갈레온(Galleon) 범선들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이 군선들은 대부분 사 신들의 마중이나 전략물자의 수송등에 사용되었기에 데리쉬 브라운 항구 바깥에 따로 그들을 위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루닌은 웅장하게 서있는 카알의 출입문 너머로 보이는 3단 갈레온 범선을 바라 보았다. 제스타 하이랜드 공국 시절에 얼핏 본 기억은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카알에는 얼마나 머무르실 생각이십니까?" 통행증을 검사하던 병사가 활달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루닌은 잠시 갈레온 범선을 보는것을 멈추고 병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소박하게 생긴 병사로 아직 어려 보였다. 아마도 입대한지 얼마 되지 않았겠지 싶었다. 그루닌도 제스타 하이랜드 공국에서 초보 기사생도 수련 시절, 성문에서 통행증 검사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이 기억났다. '상당히 지겨운 일이었지……' 그루닌은 빙긋 웃으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잘 모르겠지만 얼마 있지는 않을거네. 한 일주일쯤?" "소지하신 물품을 검사해 봐도 되겠습니까?" "검사? 보통 그런건 안하지 않나? 이상한데……" 반문하는 그루닌에게 병사는 씁쓰름한 표정을 지었다. "상부 지시라서요. 북부 지방에서 전염병이 번지고 있다는 의전국(醫專局)의 보 고가 있었습니다. 더럽다거나 불결한 물품은 반입을 금지시키라고 합니다." "그런건 없네. 검사해 봐도 상관은 없겠지만 우리가 수송하는 건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라서." 그루닌이 등 뒤의 수레를 향해 손짓하자 병사는 고개를 옆으로 빼 철창으로 엮어 진 수레를 힐끔 바라보았다. "엄청난 보호군요. 죄수입니까?" "……그렇네." 그루닌은 적당히 둘러댔다. 치료를 위한 병자라고 말한다면 들어가는 것을 막을지 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병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류에 무언가를 맹렬히 기입했다. 몇분동안 끄적이던 병사는 통행증을 그루닌에게 돌려주었다. 그루닌은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수레 근처에서 지루하게 기다리던 포르켄에게 신호를 보냈다. 포르켄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레는 천천히 카알 성내로 들어갔다. 성내 도로는 북적이는 마차와 행인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시끄럽게 떠들 어대는 행인들과 조금만 방심하면 충돌하기 알맞을만큼 혼잡한 거리를 빠져나가기 란 수월치 않았다. 지금까지 호송하던대로 수레를 앞세울수는 없는 상황이라 포르 켄과 그루닌, 아몬이 앞서서 길을 트고 수레를 위시한 나머지 일행들은 천천히 뒤 따르는 방식으로 전진해갔따. 포르켄은 말 앞에서 혼잡스럽게 움직이는 마차들을 피하느라 주위를 두리번거리 며 입을 열었다. "우리 쉴 곳을 찾아야 하는게 아닌가?" "짐을 풀 곳이라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저 친구까지 수용하려면 문제가 있을텐데요." 포르켄은 그루닌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고는 이맛살을 약간 찌푸렸다. 그루닌 의 시선이 가 있는곳은 수레였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멍하니 앉아있는 소 년과, 철창을 사이에 두고 카알 성내를 바라보는 클렌이었다. 클렌이야 상관없겠지만 마법진과 철창으로 갇혀있는 소년을 둘데는 마땅치 않았 다. 호송하는 병사들의 숙식문제도 그렇지만 광장 아무데나 세워둘수는 없는 노릇 이었다. 포르켄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죄수라면 좋겠군. 광장 가운데에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경값을 받아먹을수 있으니까. 생긴게 곱상해서 좋은 장삿거리가 될테니." "……그럴수야 없죠." 그루닌은 애써 미소지으며 포르켄을 달랬다. "넓은 빈터를 가진 여관을 찾아보죠. 길드 연합회에 물어보면 알수 있을겁니다." "여관 길드 말인가?" "카알의 숙박업소들이 모인 곳이니만큼 확실한 길이긴 합니다. 레디쉬 브라운 항구 근처에 있다고 들었는데……간적은 없어서 잘 모르겠군요." "그곳은 잘 알아. 예전에 가본적이 있어. 내가 갔다오겠네." 포르켄은 간단하게 대답하고 말머리를 오른편으로 돌렸다. 푸르륵 거리는 소리를 내며 말이 잠깐 멈칫거렸으나 포르켄의 모습은 금세 항구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었 다. 포르켄은 말의 배를 툭툭 쳐 속도를 올리면서 그루닌에게 소리쳤다. "자네는 기레인 광장에 가서 좀 쉬라구. 지금 가는 방향으로 계속 가면 될거야. 여관을 알아본 다음 그리고 가겠네." "조심하십시오!" 그루닌이 손을 흔들자 포르켄은 재빨리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그루닌은 아몬과 함 께 천천히 광장으로 향하는 길로 말머리를 잡았다. 기레인 광장은 카알 중심부에 위치한 넓은 빈터였다. 300년전 수도 카알이 건설 될때 만들어진 광장으로 처음에는 레디쉬 브라운 항구를 건설하기 위해 자재를 쌓 아두는 장소였다고 한다. 다리가 모두 건설되고 난 후, 기레인 폰 제스키트 자작의 아이디어로 중앙에 수도창건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운것이 계기가 되어 시민이라 면 누구나 쉴수있는 휴식장소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광장은 다른곳과는 달리 유 쾌한 노랫소리와 물건을 담은 상자를 들고다니는 노점상들의 모습으로 북적이기 마련이었다. "굉장히 번화한 거리네요." 감동받은 어조로 클렌이 말했다. "신전이 있던 곳 하고는 완전히 딴판이에요." "대륙 최고의 번화한 도시니까요. 다른곳과는 많이 다를겁니다." 그루닌은 말에서 내리며 대답했다. 클렌이 종종걸음으로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설마요. 라그도메제키아스 신전은 그리 붐비는 곳은 아니지만, 별 다를바 없어 보이는데요. 사람만 많은것 뿐이잖아요." "……사람이 많으면 분쟁도 많은 법이죠." "살아있는 것은 모두 같다고 신께서 말씀하셨는데요. 분쟁이란 대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분쟁이 있는 곳에는 다툼과 싸움 그리고 범죄같은 일도 자주 일어납니다. 클렌 신관님이 계셨던 곳이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신전 주변은 그런 인간들에 겐 금지구역처럼 작용하죠. 신전 밖으로 나오게 되면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들 은 꽤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티격태격하는 싸움이라든가……거렁뱅이, 몸을 파는 여자들이겠죠." "저 사람들 말인가요?" 그루닌은 클렌이 손을 들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당수의 사람들 이 모여있는 가운데 고함소리가 들리고 가끔씩 허공위로 돌멩이가 날아다니고 있 었다. 단순한 싸움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많은 사람들에게 얻어맞고 있는듯 싶었 다. "여기에 그대로 있어요." 그루닌은 클렌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말하고 사람들을 향해 달려갔다. 광장의 한켠에 몰려있는 사람들은 모두 손으로 입 언저리를 막은채로 공포에 질 린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그루닌이 다가오자 그들은 황급히 자리를 피하며 길을 터 주었다. 원형으로 빙 둘러싼 사람들의 가운데에 낡은 모포를 둘러쓴 남자가 웅크리고 있 었다. 그는 사방에서 날아오는 돌멩이를 피하기 위해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은 채 돌바닥에 최대한 몸을 낮추고 있었다. 퍽 퍽 하는 소리가 날때마다 사내는 고 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며 괴로워했다. 온몸에 맞은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어 참 혹하기 그지 없어 보였다. 그루닌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무슨 짓입니까! 멈추세요!" 돌을 들었던 사람들이 그루닌을 노려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여전히 공포가 어려 있었다. 돌팔매질이 멈추자 그루닌은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이내 양팔과 허리가 잡혀 그루닌은 움직일수가 없었다.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려 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루닌을 완강하게 막았다. 그중 한 남자가 거센 목소리로 그루닌에게 말했다. 그의 왼손에는 불타는 횃불이 들려 있었다. "다가가지 말아!" "대체 뭐하는 겁니까! 이 손 놔요!" "당신을 위해서야, 기사양반!" 횃불을 든 남자는 그루닌의 앞을 팔로 막으며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그루 닌은 저항을 멈추고 남자를 마주 바라보았다. 남자는 손가락으로 웅크린 두 사내 를 가리켰다. "이건 우리가 살아남기 위한 어쩔수 없는 조치요. 저들을 쫒아내거나 불태워버 리지 않는다면 우리도 모두 죽어!" "뭐요?" 그루닌의 얼굴이 핼쓱하게 변했다. 횃불을 든 남자의 말을 모두 이해하긴 힘들었 으나 이 사람들이 하려는 일이 무엇인가는 대번에 알아차릴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저들을 불태워 죽이려는 것이었다. "저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이잖소! 산채로 불태운단 말입니까?" "이미 죽은 시체야! 보라구!" 그는 횃불을 낡은 모포를 향해 집어던졌다. 모포는 횃불에 닿기가 무섭게 맹렬한 기세로 타올랐고 바닥에 엎드린 남자는 허겁지겁 모포를 벗어들고는 자리에서 일 어났다. 그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그루닌은 귓가에서 대포가 터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 남자의 얼굴……얼굴의 반이 완전히 썩어있었다. 한쪽눈은 누런 진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고 볼 한쪽은 늑대에게 씹혔는지 뜯겨져나가 누런 이빨이 그대로 보였 다. 목 언저리에는 하얀 구더기가 꿈틀대다가 남자의 움직임에 따라 바닥으로 툭 툭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시체……썩어가는 시체 그 자체였다. "꺄아악!" 사람들 틈에서 비명소리가 울리고 겁먹은 몇몇 여자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 망가 버렸다. 그루닌은 뱃속에서 역류하는 메스꺼운 기운을 참아내느라 혼신의 힘 을 다하고 있었다. 충격에 정신이 나가버린 그루닌에게 횃불을 들었던 남자는 신 음성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나도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구, 기사나리." "당신은……" "포링 엔가드. 의사다. 포링이라고 불러." "저건 대체……뭡니까?" "전염병이다. 빌어먹을 전염병이야." 포링은 주위에 늘어선 사람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그러자 군데군데 서있던 남자들 이 저마다 유리병을 꺼내 썩어가는 시체에게 던졌다. 유리병은 시체에 닿자마자 바로 깨지며 걸쭉한 액체를 내뿜었다. 시체는 괴로워하며 도망갈 곳을 찾았지만 몇발자국 옮기기도 전에 사방에서 돌팔 매질이 쏟아졌다. "시작해라!" 포링의 고함에 한 남자가 시체를 향해 석궁(石弓)을 겨누었다. 석궁 화살 끝에는 작은 천이 감겨있고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활을 든 남자는 신중하게 시체를 겨 냥하고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도망치려는 시체의 등에 박히고 삽시간에 불타올랐 다. "우어어어어억! 사……살려줘!" 시체는 한동안 몸부림치더니 천천히 무릎을 꿇고는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나 불 길에 휩싸여 몸 전체가 타들어가면서도 시체는 끔찍한 고통이 섞인 비명을 계속 질러댔다. 밥 한끼 먹을시간이 지나서야 시체는 잠잠해졌다. 아니, 기름이 부어진 탓에 더 빨리 타버린 것이 이유일 테지만 시체는 결국 한줌의 재로 변해버리고 말 았다.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 공포에 질린 눈으로 돌아가고 결국 남은것은 그루 닌과 약간 뒤쪽에서 구경하던 클렌, 그리고 어두운 표정의 포링 뿐이었다. 포링은 그루닌을 힐끗 곁눈질하고는 차갑게 중얼거렸다. "너무하다고 생각하시오?" "……" "어쩔수 없소. 저 시체에 닿은 사람은 예외없이 똑같이 시체로 변해버렸으니까. 태워버리거나 추방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야. 내 경우엔 태우는 것을 원 칙으로 하지.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이 성문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니까." "그럼 성문의 검열이 심해진 것도?" "그렇소. 왕성에서는 쉬쉬하고 있지만……대부분의 국민들은 알고있소이다." 포링은 긴 탄식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혀 보지 못하던 끔찍한 병이오. 베르마트 방향에서 불어온 돌림병인듯 한 데……걸린 사람은 예외없이 저런 시체로 변해버리지. 심장도 멎고 숨도 안쉬 어. 초기에는 산 사람과 똑같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살이 썩어들어가지. 살아 움 직이는 시체야. 감정도 공포도 남아있지만 통증은 못느끼죠." "세상에……" "좀비 신드롬(Zombi syndrom)……학계에선 그렇게 부르지만 사람들은 케스트 (Kest)라고 부릅니다." "케스트? 그게 뭐죠?" 포링은 몸서리를 치며 대답했다. "켈레만의 질병……부조화의 질병이란 뜻이오." "켈레만?" "근래들어 새로이 출현한 베르마트의 마경 이름이오. 살아있는것은 모두 죽어가 고……죽은것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숲……그래서 부조화의 숲이라고 부 르지." 포링은 그 말을 남기고는 황황히 가버렸다. 광장 언저리에 있던 사람들조차 슬금 슬금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그루닌은 사람들의 공포가 머리속을 짓누르는듯한 환 각마저 느낄수 있었다. '켈레만……케스트……대체 어떻게 되어 가는거지?' 마음속의 불안감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예감이었다. 그 리고 그 예감은 점점 확신처럼 그루닌의 마음속을 갉아먹어갔다. * * 아웅 힘들다……현재 계획은 방학 끝나기 전에 라이컨슬로프를 끝내는 겁니다. 설정이 이미 잡힌 상태라....살붙이고 서스펜스 잡아서 글쓰고 있습니다. 역시 전 개그가 안되는것 같아서요......이렇게라도 보충해야지... 다크스폰이었습니다. [살아있길 원하나? 죽는게 싫은가? 이상하군……자네의 생활은] [죽은 것과 다르지 않은데? 큭큭큭큭……] [어둠의 천사, 다크스폰] 『게시판-SF & FANTASY (go SF)』 18323번 제 목:[darkspwn] 라이컨슬로프-66 올린이:darkspwn(유민수 ) 99/01/01 01:34 읽음:438 관련자료 없음 ----------------------------------------------------------------------------- 라이컨슬로프(=獸人) EDITION Ⅱ 66. 밤의 장막이 내려진 카알의 거리는 한산하기 그지 없었다. 보통의 도시라면 촛불 과 등불뿐만이 아니라 마법사들이 켜놓는 푸른 마법의 불빛까지 거리를 비춰 또 하나의 세상이 열리는 시간일 테지만, 카알의 저녁은 적막 그 자체였다. 마치 대지 의 마수 베히모스가 그 시커먼 숨결을 뿜어대기라도 한듯이 문은 겹겹이 닫혀져있 고 가끔씩 지나가는 야경꾼이 울리는 작은 징소리만이 질식해버릴듯한 시간을 일 깨우고 있었다. 그루닌은 높다랗게 서있는 지그프리드 저택의 테라스에 서서 조용한 카알의 거리 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테라스라고 해서 금으로 장식된 선반이 있는것도 아닌, 딱 딱한 나무로 된 난간만이 단촐한 장식일 뿐이었다. 철혈재상 지그프리드……아스 트리아 제일의 권력자인 그의 저택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무미건조하게 생긴 집이었다. 장식이나 휴식용 호수같은 것들이 전혀 없는 변경의 요새라면 맞 을 정도로 실용적인 측면에서 지어진듯 싶었다. 그루닌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사치스러웠다면 다행이었을 것을……' 권력자의 사치……그것은 한 나라의 수준을 재는 평가로 작용할수 있었다. 저명한 전략가이자 저술가인 마키아베르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권력을 가진 자는 두 가지의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권력을 이용하는 자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 을 향유하는 자였다. 권력을 향유하는 자는 보통 '쓰레기'라던가 '폭군'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아 신경쓸 필요가 없는 부류지만, 다른 한 경우는 경계해야 하는 인물이 다. 권력의 이용은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군림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군림을 위해서 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단단하게 다져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자금과 인 맥……그리고 흠잡힐데 없는 정치적 감각을 요구한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말하자 면 '근검절약과 실용성'이며 또한 '탁월한 식견'을 의미했다. 지그프리드의 근검절약과 실용성이 돋보이는 이 저택은 그가 권력을 이용하는 자 라는 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여자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드로이얀이 보여준 출중한 화법이나 외교술. 그것은 남여의 차이를 염두에 두지 않았거나 그 것을 극복한 사람만이 할수있는 훌륭한 교육이었다. 정치의 세계에서 여성이란 장 식물에 지나지 않은 존재이다. 그러나 지그프리드는 그 여성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뛰어난 정치가로서의 소양을 가지도록 교육시킨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자료에서 짐작할듯 지그프리드는 훌륭한 '정치가'가 갖춰야 하는 기 본적인 요건을 모두 갖춘 '껄끄러운 상대'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런 자를 상대 해야 하는 그루닌의 심사가 편할수는 없을 터였다. "그루닌 자작이십니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루닌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 방향을 향해 시선 을 돌렸다. 테라스 안쪽의 방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비단처럼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중년 남자였다. 촛불의 불빛을 받아 색다른 빛을 반사하는 검은 머릿결에 갈색의 그을 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왼쪽 눈가에 찢긴 상처가 나 있고 그 부분을 검은색 안대 로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훤칠한 키와 균형잡힌 몸매는 그가 상당한 수련을 쌓은 전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루닌은 몸을 돌려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만……" "무슨일로 오셨습니까?" "국왕폐하의 부탁을 받아 전할것이 있어서요. 재상각하께서는 언제쯤 돌아오십 니까?" "그렇다면 잘못 오셨군요." 남자는 짧게 대답했다. "재상각하께서는 현재 카알에 안계십니다." "……" 잠시 할말을 잃은 그루닌에게 남자는 재차 대답을 이어갔다. "재상각하께서 돌아오시기 전의 모든 일은 제가 처리합니다. 어떤 일이십니까?" "실례지만 재상각하와는 어떻게……" "사위입니다." 남자는 세련된 몸짓으로 그루닌에게 의자를 권하며 원형 탁자에 앉았다. "루돌프……라고 불러 주십시오." 루돌프는 붉은 기운이 도는 갈색의 눈동자로 그루닌을 바라보았다. 냉정한듯 하면 서도 어딘지 모르는 품위가 있어보이는 눈빛이었다. 그루닌은 그런 눈동자를 예전 에 한번 본 기억이 있었다. 바로 드로이얀 폰 루돌슈타인의 눈동자였다. 그루닌은 최대한 예의를 갖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드로이얀 양의 아버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을 알아보시려고 먼 가베라에서 오시진 않았던듯 합니다 만……" 그는 웃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루닌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는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은연중에 흐르는 저런 분위기는 태어날때부터 갖춰지는 카리스마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루닌은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며 루돌프의 앞 의자에 앉았다. "토오르 국왕폐하의 전언입니다. 윌리엄 전하의 친서에 관련된 내용이라고 합니 다." "아아, 그 친서 말입니까." 루돌프는 짙은 눈썹을 잠깐 찡그리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 일이라면 이미 베르마트 왕국과의 교섭이 진행중입니다. 수룡왕님의 협력을 얻었으면 했었던가요." "……네." 그루닌은 그 말밖에는 할수 없었다. 눈앞에 앉아있는 저 루돌프라는 남자는 아스 트리아 권력 핵심부의 인물인듯 했다. 윌리엄 국왕의 친서에 대한 내용을 아무렇 지도 않게 말하는 것을 보면 역시 토오르 국왕의 생각이 맞은것 같았다. 루돌프는 그루닌이 내민 편지를 받아 신중하게 봉인을 뜯었다. 편지를 펼쳐든 루 돌프는 눈만으로 쭉 읽어가다가 그루닌을 힐끗 바라보았다. 의혹섞인 시선이 잠시 스쳐가고 루돌프는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역시 수룡왕님은 거절입니까. 하지만 조금 의외군요. 드래곤 나이트 를 보내시다니……" "……" "좋습니다. 그러면 간단하게 설명부터 하겠습니다." 루돌프는 양 손을 맞잡고 팔꿈치를 탁자에 괴었다. "2년 전입니다. 북부 헤스페라이트 산맥 중앙부의 제스파즈 마을에서 일어난 일 입니다." 루돌프는 슬며시 운을 띄워올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스파즈 마을은 북부 베르마트의 한 촌락에 불과하고 통행하는 사람도 없는 마을이죠.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알수없는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그 마을은 시 체 만이 사는 지역이 되어버렸어요. 그것도 주변의 헤스페라이트 산맥까지 포 함해서." "……시체?" "그래요. 시체. 자세한 것은 직접 가시게 된다면 질리도록 볼수 있겠지만 여기에 서 조금 알고 가시는 편이 나을듯 합니다. 아니, 나중에 표본을 하나 보여드리 죠. 그게 빠르겠군요." 루돌프는 씁쓰름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유일하게 마경이 없는 베르마트에 생겨난 마경(魔境) 은 저희들로선 다행스러운 편입니다. 아스트리아의 암흑의 숲, 네레노디아의 열 사의 사막, 제스타 하이랜드는 그 자체가 마경이니까……그들로서도 골치거리 를 하나쯤은 안고 있는게 형평성에 맞는다고 할수 있겠죠." "……짓궂으시군요." "그저 제 생각이 그렇다는 겁니다." "장소가 정확히 어떻게 되는 겁니까? 헤스페라이트 산맥에 대해선 잘 몰라 서……" "헤스페라이트 산맥은 베르마트 바로 남쪽에 위치한, 아스트리아의 가로가 연결 된 산맥입니다. 2년전부터 생겨난 제스파즈의 암흑지대가 점점 범위를 확장해 서 가로를 덮어버리기 전까지, 아스트리아와 베르마트는 많은 교역을 해 왔었 죠. 그러던 것이 1달 전부터, 제스파즈의 암흑대가 드디어 북부 가로로 뻗어나 갔습니다. 결국, 두 왕국의 교역은 뱃길만이 유일하게 되었어요. 덕분에 베르마 트 용병대는 굶어죽기 일보 직전까지 몰려버렸죠." "큰일이군요." "베르마트는 국토의 삼분의 일이 산맥이고, 나머지 삼분의 일은 빙하로 덮인 불 모지. 언제나 식량부족이 끊이질 않는 곳이라서 광맥과 용병을 수출하지 않으 면 먹고살기 힘든 곳이죠. 그런데 이번 사건에 골머리를 앓게 되었습니다. 아스트리아로서도 남아도는 식량을 수출할 곳이 막힌데다가 베르마트의 좋은 광물이 들어오지 않자, 산업에 막대한 지장이 생겼죠. 그래서 지그프리드 재상 각하께서 베르마트의 왕제, 쉬르만 게하르츠 베르마트를 왕궁으로 초청하여 두 나라간의 돈독한 우의를 다졌습니다. 쉬르만 왕제(王弟)께서 가로를 덮어버린 암흑대를 '켈레만'이라고 명명하시고 대대적인 토벌을 명했습니다. 선봉에는 베르마트 용병대가 서고 후위와 식량지 원을 아스트리아가 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1차 토벌대가 켈레만으로 들어갔 는데……모두 증발해 버렸습니다. 깨끗이." "……" 그루닌은 긴장된 시선으로 루돌프의 입을 주시했다. 루돌프는 감정이 섞이지 않은 어조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토벌대를 공격한 것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어요. 최소한 살아 돌아온 자는 없으니까. 3천명의 토벌대는 어디로 갔는지 소식조차 없고……소문이긴 하지만 켈레만의 외곽에서 돌아다니는 그들을 본 사람은 있다고 합니다. 반쯤 썩어버 린 몸을 이끌고 베르마트 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고 하더군요." "……좀비?" "아니, 좀비는 아니에요. 말도 하고 감정도 있고……지능도 있었으니까. 더군다 나 아직 자신이 죽었다는 것조차 실감하지 못하고 자꾸만 다가오려는 살아있는 송장이죠. 하지만 확실히 썩어가긴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리빙 데드 맨 (Living Dead Man)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 았어요." 그루닌의 뇌리에 낮에 보았던 그 시체가 스쳐갔다. 고뇌에 차있던 의사 포링의 말 이 되살아나듯 귓가를 때렸다. 그루닌은 자신도 모르게 탁자를 치며 자리에서 일 어났다. "케스트(Kest)! 그 전염병이었군!" "……알고 계셨군요." 루돌프의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드러났다. 단번에 5년은 늙어보이는 듯한 그의 안 색에 그루닌은 미안해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공연히……" "아닙니다. 알고계시다니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아무튼……그 대대적인 토벌전 이후, 베르마트와 아스트리아의 교역은 배를 통한 무역쪽으로 바뀌었습니다. 일 단 켈레만 지역은 원천적으로 봉쇄시키고 있었는데 근래들어 좀비 신드롬 아 니, 케스트인가 하는 돌림병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무서운 병이더군요." "동감입니다. 케스트는 무서운 기세로 켈레만에서 아스트리아를 향해 번져오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남쪽을 향해서. 감염경로도, 매개체도 밝혀지지 않았어요. 여러가지 추측은 무성하지만." 루돌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대로 감싸인 왼쪽눈이 얼굴에 가려 안보이자 늠름하게 보이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볼수 있었다. 훌륭한 남자다……그루닌은 그렇게 느꼈다. 비록 이야기를 별로 나누어 보진 않았지만 진 심이 담긴듯한 그의 말솜씨는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루돌프는 다시 입을 열었다. "현재로서 취할수 있는 방법은 감염될 소지가 있는 모든 사항을 검사하고 막는 것 뿐입니다. 더러운 물건이나 병자……특히 케스트에 걸린 병자는 모두 소각 처리 하거나 추방시키는 것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현재까지 카알 성내에서 밝 혀진 환자만 백여명이 넘어갑니다." "백명씩이나!" "결국 우리가 내린 결론은 하나입니다. 조사단을 보내기로 한거죠." "그렇군요." "하지만 뜻밖입니다. 저는 흑마법에 능통한 마족이 올줄 알았는데, 뜻밖에 그루 닌 자작님을 보내실 줄은……예상도 못했어요." "……네?" 요즘들어 왜 이리 이해할수 없는 일이 많은지 그루닌은 이해할수 없었다. 루돌프 의 말을 알아먹기까지는 몇분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더군다나 루돌프의 얼굴표정 이 별로 변하지 않았기에 그의 말이 무슨뜻을 가지는가를 생각하기란 쉽지 않았 다. 그러나 몇단계의 생각을 거쳐 말뜻을 이해했을때, 그루닌은 등줄기로 찬바람이 지나가는것을 경험할수 있었다. 머릿속이 멍해지며 그루닌은 할말을 잃고 루돌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루돌프는 가볍게 미소띈 얼굴로 말을 계속 이어갔다. "드래곤 나이트가 선봉에 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저희 아스트리아 국민의 사 기도 올라가겠죠.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정말 용감하신 분이로군요." "아, 저기……" "아스트리아에서 보낼 조사단 인선이 끝나진 않았지만 최고의 인력을 지원해 드 리도록 하겠습니다." "……" 그루닌은 질문을 던질 시기를 완전히 놓쳐버렸다. 루돌프의 능란한 화술에 먹혀 버려 반론을 제기할 방법자체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루닌은 허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켈레만……켈레만이라니! 차라리 젓가락을 들고 서펜트와 다시 대결 하라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똑똑 가볍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야기가 마무리 되어가던 분위기여서 그루닌 과 루돌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루돌프가 목소리를 조금 높여 대답했다. "누구냐." "드로이얀이에요." 귀를 울리는듯한 목소리였다. 그루닌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와라." 루돌프의 말이 나오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반쯤 열린 문으로 검은 마법사의 로 브가 날아들듯 들어왔다. 치렁치렁한 로브의 끝은 은색 실로 장식이 되어 있었지 만 음산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기분나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로브의 두건이 젖혀지고 크림색의 풍성한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너머로 흘러내 렸다. 그루닌은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허리를 가볍게 숙였다. 그러나 그루닌이 말 을 꺼내기도 전에 드로이얀의 앙칼진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무슨짓을 한 거죠?" "……" 그루닌은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그의 시선은 부들부들 떨고있 는 드로이얀과 역시 무표정한 루돌프의 얼굴을 오갔다. 루돌프는 자리에 앉은채로 드로이얀의 얼굴을 쏘아보고 있었다. * * 별로 마음에 들진 않는군요. 으음……잘 모르겠습니다. 추신 : 감상! 비평! 비평! 비평에 목마른 다크스폰입니다. 제발요...... 『게시판-SF & FANTASY (go SF)』 18617번 제 목:[darkspwn] 라이컨슬로프-67 올린이:darkspwn(유민수 ) 99/01/04 02:44 읽음:400 관련자료 없음 ----------------------------------------------------------------------------- 라이컨슬로프(=獸人) EDITION Ⅱ 67. 드로이얀은 한동안 루돌프와 매서운 시선을 교환했다. 샤이닝 힐에서 보았던 부 드러운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매우 당차고 고집센 감정이 조금 떨어진 그루닌에 게도 정확하게 전달되고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녀의 불쾌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한 독특한 감정 전달방식을 사용하고 있는듯 했다. 그루닌은 구부렸던 허리를 펴고 몇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곧 있을 부녀간의 말싸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제스춰였다. 그루닌이 물러서자마자 드로이얀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켈레만 원정대에서 저를 제외한 이유를 알고 싶어요. 그렇게 말했는데도 제 이 름을 명단에서 지워버리신 것은 용납할수가 없어요." "그런 문제가 아니다, 드로이얀." 루돌프의 갈색 눈동자가 힐끗 그루닌을 바라보았다. "네가 가지 않아도 충분할 정도의 인원은 마련되었다. 재상각하께서 안계신 동 안, 왕성을 주시할 사람이 필요하다." "그거라면 힌덴부르크 남작에게 시키면 되잖아요! 할아버지의 수족과 같은 사람 이니까." "그는 믿을수 없다. 내가 할수있는 최선의 길은……" "아버지도 믿을수 없는 사람이긴 마찬가지 잖아요!" 드로이얀은 루돌프의 말허리를 끊어버렸다. 루돌프는 몇차례 입을 벙긋거리다가 끄응 하는 신음과 함께 몸을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었다. 무척 곤혹스러운듯 했다. 하얀 손을 가슴앞에 모으며 드로이얀은 날카롭게 되물었다. "다시한번 묻겠어요. 저를 원정대에서 제외시킨 이유가 뭐죠? 내가 아는한, 아스 트리아 뿐만 아니라 로메오 대륙을 아무리 뒤져도 나와 대등한 실력을 가진 마 법사는 없어요." "……그렇겠지." 그루닌은 드로이얀을 무의식중에 바라보았다. 로메오 대륙 최고의 마법사라고 자 칭하는 그녀의 모습은 연약한 귀족 가문의 아가씨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루돌 프와 오래 이야기를 나눈것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의 경험과 직감으로 보건대 쓸 데없는 말이나 공치사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런 루돌프 가 그녀의 실력을 인정했다는 것은 드로이얀이 뛰어난 마법사라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대륙 최고라는 말은 어폐가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루돌프는 무표정한 얼굴에 비웃는듯한 표정을 떠올리더니 짧게 말했다. "네 꿍꿍이를 내가 모를줄 아느냐?" "……뭐라고요?" "나는 케스트를 조사할 마법사를 원했지 엉뚱한 곳에 마음이 가있는 사람을 원 한건 아니다, 드로이얀." "아버지!" "그만해." 루돌프의 얼굴이 다시 무표정하게 돌아왔다. "이데로스의 유적을 파헤치려는 생각인거 다 안다." "……" 드로이얀은 상당한 충격을 받은듯 했다. 입을 조금 벌린채로 한마디 반론도 하지 못한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바타쿠는 그런 드로이얀에게 날카로운 어조로 대답했 다. "그건 용납할수 없다. 원정대 전부를 위험에 빠트릴순 없어. 더군다나 저기 계신 그루닌 자작도 함께 간다. 네 개인적인 용건때문에 외교적인 문제를 일으킬순 없다." 루돌프는 팔꿈치를 탁자위에 올리고 신중한 자세로 돌아갔다. 긴 설명이 필요할 때면 취하는 습관처럼 보였다. 생각대로 루돌프는 감정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어 조로 이야기를 꺼냈다. "헤스페라이트 산맥의 고대유적은 단 하나. 이데로스의 유적……약 2천년 전에 존재했다는 마법왕국. 지금도 간간히 발굴되는 거대 유적을 만든 고대국가. 마 법의 기초를 만들고 융성시킨 로메오 대륙 최초의 통일왕국. 기본 마법서에 단 골 손님처럼 등장하는 이야기겠지……" "……" "이데로스는 마법을 창조하고 생활에 자유롭게 적용시킨 최초의 국가. 현재 남 아있는 마법들은 그것들의 편린들을 모아 묶어둔 것일 뿐……마법사 나부랑이 인 네가 관심을 가지는 것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너무 위험해." "위험하지 않아요." "그래? 내가 알고있는 이야기와는 다른 소리를 하는구나." 루돌프의 눈가에 미소가 어렸다. 철부지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듯한 조소였다. "이 이야기는 베르마트 왕국의 비밀 문건에서 읽은 내용이다. 이데로스의 그 유 적은 약 4년전, 제스파즈 마을 북쪽의 분지에서 신전공사를 하던 인부가 파낸 것이 최초였다. 고대어로 '노스페라투'라는 이름이 써 있었던가……무슨 뜻이었 지?" "……불멸의 사원……이에요." 루돌프의 말을 곰씹듯 드로이얀은 작게 대답했다. "네가 알고 있다면 베르마트 역시 모를리 없었겠지. 더군다나 이데로스의 전설 을 아는 마법사라면 누구나 고대유적 탐험이 꿈일테니까. 베르마트의 왕궁 마 술사도 마찬가지였겠지. 그래서 조사단을 여러차례 파견했고 그 결과 유적안에 서 수많은 골렘(Gorem)들을 발견해냈다. 그것도 모두 아이언 골렘(iron Gorem)으로 말이지." '……아이언 골렘?' 그루닌은 크게 놀랐다. 아이언 골렘……돌로 만들어진 스톤 골렘과는 달리 온몸이 철로 되어있어 창검이 먹히지 않는 고급 수마(獸魔)였다. 마법사의 소환으로 만들 어지며 좀비 수준이나 다를바없는 스톤 골렘과는 달리 의지와 생각을 가진다고도 전해졌다. 기록에 남아있는 아이언 골렘은 약 70년전 마르세이 마을에서 발굴된 유적에서 나타난 것이 유일했다. 아스트리아의 해안도시 마르세이에서는 해안 굴착공사를 하던중 모래사장에 묻혀 있던 아이언 골렘을 발굴해 내었던 것이다. 이데로스의 유적이라고 판단한 발굴단 은 무척 기뻐하며, 아이언 골렘에 새겨진 시동어를 외워 골렘을 작동시켰다. 굴착 공사에 효과적으로 사용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골렘에는 함정이 숨겨져 있었다. 골렘이란 소환시 마법사에게 부여받은 사명대로 움직이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 아이언 골렘이 부여받았던 사명이 '자신을 깨운자를 죽여라'였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마르세이 마을은 하루만에 쑥대밭이 되었고, 이 소식을 듣고 출동한 아스트 리아 마법사 부대에 의해 아이언 골렘은 파괴되고 말았다. 그러나 아이언 골렘 하 나를 파괴하는데 5개 부대의 병사와 1류 마법사 셋의 목숨이 희생되어야만 했다. 이 부서진 골렘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데로스의 고대 기록이 발견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헤스페라이트 산맥 어느곳에 이데로스 마법학의 정수를 모은 신전이 있다 는 것이었다. 그 신전의 이름이 바로 '노스페라투'……불멸의 사원이었다. 드로이얀과 루돌프가 이야기 하는 내용이 바로 불멸의 사원이 묻혀있는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마법학계의 커다란 쾌거가 아닐수 없었다. 그러나 루돌 프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불멸의 사원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은 모두 아이언 골렘의 몸으로 막혀있었다. 아이언 골렘을 치우는 길은 두가지……강한 마력으로 파괴하던가 아니면 작동 시켜 다른 곳으로 옮기든가 해야겠지.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파괴할수 있는 거냐?" "……" "파괴할수 없다면 가만히 있어. 베르마트에서도 포기한 사원이다. 어쩌면 베르마 트 전체가 멸망할지도 모를 일이지. 뒷감당 할수없는 일이라면 그만두는게 좋 아." 드로이얀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바닥에 떨군채 가만히 서있을 뿐 이었다. 어떻게 보면 심통이 난 어린아이가 떼를 쓴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 나 드로이얀의 대답은 뜻밖에도 냉랭했다. "상관없잖아요." "……" 드로이얀의 머리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붉은 기운이 도는 드로이얀의 눈동자 가 점차 하얀 빛으로 물드는 것처럼 보였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변화에 그루닌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루돌프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뭐라고 했니?" "베르마트……상관없잖아요. 어차피 우리나라도 아니잖아요." "드로이얀! 무슨말을 하는거냐!" 천둥처럼 루돌프의 고함이 방 안을 울렸다. 어찌나 큰 소리였는지 그루닌의 귀가 다 멍멍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드로이얀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맹렬하게 소리를 질러댔다. "아빠는 변했어요. 정말 달라졌어!" "……뭐?" 어이없는 표정이 되어버린 루돌프에게 드로이얀은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이젠 내가 귀찮은 거죠! 더이상 데리고 다닐 필요가 없는거죠!" "드로이얀……나이값좀 하려무나. 애같은 투정좀 그만두고." "사실이잖아요! 아빠가 무슨 생각하는지 난 모르겠어요. 이유가 뭐냔 말이에요!" 드로이얀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애처롭게 보이긴 했지만 그루닌으로서 는 이해가 가지않는 모습이었다. 뛰어난 마법사이자 유능한 외교관인 드로이얀의 지금 행동은 열살정도 먹은 어린아이가 소리지르는 것과 별반 다를게 없었기 때문 이었다. 드로이얀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루돌프에게 외쳐댔다. "아빠의 계획을 막던 사람은 이미 2년전에 죽었어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길 로 가버렸다구요! 이제 제 도움 같은건 필요가 없겠죠. 그런데……왜 아직까지 주저하고 있는 거에요? 제스타 하이랜드로 가서 그 녀 석을 찾는건 어렵지 않잖아요." "이유가 있다고 했지 않니. 아직 움직일 때가 아니야." "혹시……언니 때문인가요? 그래요?" "……" 루돌프의 입이 굳게 닫혔다. 그러나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에 은은한 살기가 감돌 고 있었다. 무서울 정도의 침묵이 잠시 흐르고 루돌프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방으로 돌아가라." "……언니가 죽은게 아빠탓은 아니잖아요. 카피티아 대사제와 아버지는 아무런 관련이……" "시끄러." 나지막하지만 강한 압력이 들어간 말이었다. 드로이얀이 엉겁결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을 정도였다. 조금 떨어진 그루닌에게까지 무서울 정도의 힘이 전해질 정 도였다. 루돌프의 매서운 눈초리가 드로이얀에게 향했다. 드로이얀은 몇마디 더 하려는듯 보였으나 무거운 루돌프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돌아서고 말았다. 힘없이 내려간 그녀의 어깨가 측은하게 보였다. 드로이얀은 문고리를 붙잡은채로 한참을 서있더니 나지막하게 한마디를 던지고 방을 나가버렸다. "아빠 미워." "……" 접견실 안에 잠시 썰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부자연스러워진 분위기가 견디기 힘들어진 그루닌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루돌프는 공손한 어조로 그루닌 에게 사과를 했다. "딸아이의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원래는 이런 아이가 아닌데……" "괜찮습니다. 여러 문제가 맞물리면 그럴수도 있으니까요." 그루닌은 빙그레 미소를 떠올렸다. "따님하고는 친하게 지내시나 보군요. 아빠라고 부르긴 힘들텐데……" "……엄마없이 자란 아이라……그런면이 조금 있습니다. 몸둘바를 모르겠군요." 루돌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루닌은 조심스레 루돌프에게 말을 건넸다. "아무튼 제스파즈 마을로 같이 가는 일행을 정한후에 제가 묵고있는 여관으로 연락을 주십시오. 드로이얀 양과의 문제도 매듭지으셔야 할듯 하니까……사흘 안으로 같이 떠날 동료를 지정해 주시면 될듯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루닌 자작." 루돌프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최고중에 최고의 전사와 의사를 지원하겠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을겁니다." 루돌프의 미소는 매력적이었다. 그동안의 번잡스러운 토론과 상황을 깨끗이 잊게 할만큼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숨어있는것 같았다. 그루닌은 작별인사를 하고 접견실을 나오면서도 루돌프의 미소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이상스러울 정도로 상대를 휘어잡는 매력이 있었다. '한 나라의 왕자라고 해도 믿었을 거야.' 그루닌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은 협력하는 관계지만 결국은 적이 될수밖에 없 는 상대에게 이렇게 빠져드는 자신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 * 힘들군요. 그말 외엔 할수 없습니다그려..... 비평을 바랍니다. 요즘들어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어디가 잘못된 건지…… 다크스폰이었습니다. 『게시판-SF & FANTASY (go SF)』 19080번 제 목:[darkspwn] 라이컨슬로프-68 올린이:darkspwn(유민수 ) 99/01/07 21:50 읽음:349 관련자료 없음 ----------------------------------------------------------------------------- 라이컨슬로프 EDITION Ⅱ 68. 따사로운 햇살에 그루닌은 기분좋게 졸린 눈을 떴다. 창 밖으로 아침을 알리는 닭울음 소리와 웅성대는 사람들의 소란이 그루닌의 신경을 짜릿하게 자극하고 있 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숙면에 그루닌은 기분이 좋아졌다. 등과 가슴에 거북한 느낌이 남아있는 것이 아무래도 아직 갑옷을 입고 있는듯 했 다. 피로에 지친 탓인지 지그프리드 저택에서 돌아온 후 침대 위로 쓰러져 버렸고, 무슨 일이냐고 불평하는 포르켄에게 한마디 대답도 할수 업었던 것이다. 난생 처 음 돌아다닌 카알은 정말 넓고 복잡한 곳이었다. 단순히 '해변의 호수'라는 이름만 갖고 길을 찾는다는 위험이 얼마나 큰 것인지 그루닌은 어제야 깨달았던 것이다. 해변의 호수라는 여관은 카알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곳이었다. 3층으로 된 커다란 건물도 그렇고 특히 전설을 찾아 헤메는 모험자들을 위해 '역사의 장소'라는 표지 판이 붙은 물건이 꽤 여러개 있었다. 예를 들어 데스 나이트가 부순 탁자 라든가 전설의 드래곤 나이트 세명이 모인 광장……지금은 소년이 탄 수레가 있는……에 도 안내판이 붙어있었다. 초보 모험자들을 위한 주인의 알뜰한 배려라기 보다는 여관의 홍보용 상술인듯 싶었지만, 모험자라면 으례 해변의 호수에 들러 입담좋은 주인장 조이의 이야기를 듣는것이 일반화 되어 있었다. 갑옷을 벗고 간편한 셔츠 차림이 된 그루닌은 1층의 펍으로 내려왔다. 상당히 넓 은 펍으로 아침인데도 사람들로 발디딜 틈 없이 북적대고 있었다. 그루닌은 그 북 새통 한켠에서 병사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포르켄을 발견할수 있었다. 포르켄은 사람 머리통만한 맥주잔을 들고 기분좋게 마시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환호성을 지르는 병사들과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클렌의 모습도 있었다. 그루닌은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푸아!" 포르켄이 큰 소리로 탄성을 지르고는 부서질듯이 술잔을 펍의 위에 내려놓았다. 병사들은 시끌벅적하게 웃고 떠들며 포르켄의 빈 술잔을 술통에 처박았다. 그들 곁에는 상당히 큰 맥주통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벌써 반이나 비어버린듯 했다. 그 루닌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마시다가 여행경비를 다 써버리겠군." "어, 일어났나? 잠꾸러기 아저씨." 포르켄이 능글맞게 씨익 웃었다. "나중에 가베라 국왕께서 다 정산해 주실거 아닌가?" "……보고서에 '술값'이란 조항은 없네." "여관비에 넣으면 되잖나.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라구." 병사들이 다시 술잔을 내밀자 포르켄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몬은?" "……호송 환자에게 가 있지. 임무에 충실한 친구라니까." "자네도 그렇지 않나. 아침일찍 일어난 걸 보면……" "그래야 잔소리를 안들으니까. 융통성 없는 기사 양반." 포르켄은 즐겁다는 투로 그루닌의 신경을 긁어댔다.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봐도 포르켄은 먹던 술잔을 들어 건배를 외칠 뿐이었다. 꼬일대로 꼬인 포르켄의 독설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아침부터 듣는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루닌은 포르켄을 놔두고 소년이 있는 광장쪽으로 향했다. 광장에는 여러대의 수레가 놓여 있었다. 국가 대 국가간 물품을 나르며 무역을 하는 상단(商團)이라든지 떠돌이 유랑극단의 수레가 몇대 있었다. 그리고 그 틈 사 이로 교묘하게 감춰진 소년의 수레가 보였다. 아마도 아몬의 작품인듯 했다. 그루닌이 수레쪽으로 다가서자 투구를 쓴 아몬의 머리가 얼핏 보였다. 아몬은 그루닌이 다가오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수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 레 윗쪽에 큰 모포가 둘러져 있는것이 아몬의 배려인듯 했다. 소년은 아직도 텅 빈 눈동자를 한채 앉아있었다. "환자는 어떤가?" "……" 아몬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눈을 반쯤 가리고 있는 그리드 사이로 검은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자네는 말이 별로 없군." "……" 아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던 그루닌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빈정대는 포르켄도 그렇지만 말이없는 아몬도 사교성은 별로 없 는듯 했다. 그루닌은 아몬의 곁에 나란히 앉아 수레 안에 갇혀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은회색 머리카락에 단정한 용모. 가베라를 떠나면서 줄곧 그루닌은 소년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예를 들자면 과거 캐디시 공국의 불운한 왕자였다던가, 데 버룬이 함락 되었을때 정신을 잃어버린 공작……현실성이 거의 없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소년의 아름다운 용모는 왕자 아니면 귀족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루닌에게 미소년(美少年)을 좋아하는 변태적 습성이 있는건 아 니었지만, 수룡왕의 냉막한 아름다움 보다는 저 소년쪽이 훨씬 호감이 가는것은 사실이었다. '……크리스탈에 갇혔던 여인의 얼굴이었지.' 그루닌은 소년을 처음 만났던 지하의 방을 떠올렸다. 숨쉬듯 붉은 광채를 내뿜던 붉은 크리스탈……그리고 그 안에 알몸으로 갇혀있는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을. 드래곤이 인간의 모습으로 변할때, 보통 처음 본 인간의 얼굴로 변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렇다는 말은 수룡왕이 처음 보았던 인간이 그 여성이고, 그 여성을 지키 듯 앉아있던 이 소년 또한 수룡왕과 깊은 관계에 있다는 의미였다. 그루닌은 문득 제스타 공국에서의 기억을 되살렸다. 제스타 공국은 유노 신앙이 극단적일 정도로 강한 곳이었다. 마족의 집합소라 불리는 세레노스 대륙에서 인간 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강한 힘을 가져야만 했다. 마족의 마력에 대 항할수 있는 가장 적합한 신력(神力)이 유노였기에 세레노스 대륙의 유노 신앙은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유노에 반하는 헤게모니의 습성……마력이라든가 정령력……을 지닌 자들 은 모두 인간의 적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만일 마족과 협력하자는 말을 한다면 '마 족의 앞잡이'라든가 '인간족의 배반자'라는 오명이 붙어 화형을 당했다. 그것은 어 른뿐만이 아니라고 여자, 아이들, 노인들까지도 예외가 없었다. 유노의 법칙에 따르면 전사는 인간을 보호하고 신관은 전사를 보호한다. 전사는 신관의 조언을 받아들여야 하고 힘이 없는 일반인을 보살펴야 했다. 그러기 위해 서는 인간을 오염시키고 파멸로 이끄는 어둠의 세력……마족을 없애야 했고 그에 협력하는 자들은 '이단'으로 규정해 화형을 시키는 것을 제일 중요한 과제로 삼았 다. 그루닌이 갑자기 이 기억을 떠올린 것은 제스타를 떠나기 2년전 보았던 마녀 화 형식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제스타 궁(宮) 광장에서 열렸던 마녀 화형식에서 처 형된 마녀는 열 다섯 나이의 어린 소년이었다. 그 아이는 유노 신전에서 파견한 '마녀 심판관'에 의해 마녀라는 낙인이 찍혔다. 당시 마녀 심판관이 내린 판결문은 아직도 그루닌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피고는 남자라고 하기엔 너무 여자같습니다. 남자다운 성격도 없으며 남자를 상징하는 물건 역시 미비하기 짝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피고는 여자에게 호감 을 느끼지 않고 남자에게 사랑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것은 신께서 배정하신 질 서를 깨트리고 무시하며 증오한다는 말고 일치하며, 헤게모니의 저주받은 속성 을 가지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따라서 저는 피고를 마녀라고 단정합 니다!" 제스타 공(公)의 인정이 이어지고 사람들은 소년을 향해 돌을 던졌다. 날아오는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석유가 부어진 기둥에 묶이면서도 소년은 울부짖 었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도 쉬지않고 절규했다. 자신은 마녀가 아니라고……태양신 유노의 불길에 맹세코 마족을 돕지 않았다고. 그 소년의 겁에 질린 눈초리를 그루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끔찍한 공포에 영혼마저 빼앗겨버린듯한 텅 빈 눈동자였다. 그 소년의 눈동자를 수레안의 소년도 갖고있었다. 공포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영혼을 삼켜버려 텅 비어버린 눈동자를. 그루닌은 쓰라린 기억을 떨쳐버리려는듯 눈을 감았다. 저녁 무렵이 되었을때 지그프리드 저택에서 두명의 남자가 찾아왔다. 두 남자는 그루닌에게 다가와 윌리엄 아키아바 3세의 명령서를 전하고, 제스파즈 마을로 동 행하기로 결정했다. 포르켄과 아몬은 여행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알려졌어도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히스테리에 가까운 반응을 보인것은 오히려 클렌 쪽이었다. 클렌은 라그도메제키아스의 율법이 어긋날수는 없다면서 강하게 반발했다. 물론 그루닌은 라그도메제키아스의 율법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그 신의 율법을 알기 위해서는 신관이 되는 수밖에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으니까. '빛과 어둠……유노와 헤게모니. 그리고 그 사이에 라그도메제키아스' 현존하는 모든 경전에 기록된 내용은 이것 뿐이었다. 빛과 어둠을 대표하며 수많 은 경전과 율법을 가진 유노나 헤게모니와는 달리 라그도메제키아스는 아무런 책 임도 의무도 부과하지 않았다. 신의 힘을 가진것은 분명하나 아무일도 하지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그래서 라그도메제키아스는 '존재의 방관자'라는 별명으로 불리 고 있었다. 클렌도 그루닌들이 알고있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죽음'과 '존재'는 따 로 떨어질수 없다는 극히 일반적인 말을 늘어놓다가 제스파즈까지 동행하겠다는 결의를 다졌을 뿐이었다. 그루닌은 두 명의 남자를 포르켄들에게 소개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뜻밖에도 한번씩 만나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포링 엔가드. 유능한 의사이자 전염병 전문의였다. 그는 흥분에 들뜬 얼굴로 조사 단에 동행하게 된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여기는듯 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그 루닌으로서도 정말 의외였다. 다만 아스트리아가 이번 케스트의 출현을 얼마나 걱 정하는지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드로이얀 폰 루돌슈타인의 아버지이자, 지그프리드 재상의 전권대리인인 루돌프 였다. 루돌프는 예의를 갖춰 정중히 인사했지만 모두 대답하는 기미가 없었다. 그 저 어두운 표정으로 서로 눈치만 볼 뿐이었다. * *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으음.....또 슬럼프인가 봅니다. 요즘 몸이 안좋아요. (아마도 비평 글이 없어서 인듯....^^) 『게시판-SF & FANTASY (go SF)』 19081번 제 목:[darkspwn] 라이컨슬로프-69 올린이:darkspwn(유민수 ) 99/01/07 21:50 읽음:321 관련자료 없음 ----------------------------------------------------------------------------- 라이컨슬로프 EDITION Ⅱ 69. 멀리서 보는 산과 직접 들어가서 보는 나무는 다르다는 현자의 말이 있다. 산은 아름답지만 그 안의 나무에는 벌레들이 서식한다……라는 격언 비슷한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제스파즈로 가는 여행 사흘째, 국경의 도시 베니스에 들어오자마자 그루닌은 그 격언이 사실이라는 생각을 가질수 있었다. 거리는 적막에 싸여있고 사람들은 저마다 멍한 표정을 지으며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마치 부유하는 유령처럼 보였다. 국경의 도시가 가지는 분위기란 시끌벅적 하든지 살기가 넘치든지 둘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베르마트와의 대외관계가 호전 된 요즈음이라면 상인들이 벌이는 민간무역이 활성화되어 있기 때문에 시끌벅적 해야 하는것이 정상이었다. 얼마전 지나온 국경 도시 쥬블킨의 활기찬 분위기를 기억하고 있던 그루닌으로서는 정말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그루닌 일행은 본래 10보 정도의 넓은 거리를 띄우고 있었다. 선두에는 아몬이 서고 마차를 둘러싸듯 그루닌과 포르켄이 호위하며 그 뒤를 루돌프와 포링이 따르 는 식이었다. 그러나 베니스에 들어오고 얼마 되지않아 일행은 거의 붙어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여있었다. 수레를 끄는 병사 두사람도 경계의 눈초리를 쉴새 없이 주변으로 보내고 있었다. "어쩐지……이상하지 않아요? 너무 조용해." 클렌이 작은 목소리로 그루닌의 귀에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믿고싶지 않 다는 감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것은 그루닌도 역시 같았다. 무어라 표현할순 없 지만 그루닌 일행은 베니스에 어울리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물론 철창이 쳐진 괴상한 수레에 서로 다른 갑옷을 입은 기사가 셋이니 평범하다 고는 할수 없는 차림새였으나 도시에 흘러넘치는 괴괴한 분위기가 그루닌들을 밀 어내고 있는 듯 했다. 활기라고는 느낄수 없을만큼 도시는 조용했다. 도로 양편으 로 길게 뻗어있는 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딱딱하 게 굳어있었다. 생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데다 마치 칙칙한 회색의 커튼이 그들의 영혼을 감싸는 듯한 기분이 전해져오고 있었다. 그들중 어느 누구도 그루닌을 바라보고 있는 사 람은 없었다. 그저 무심하게 자신들이 갈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루닌은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그루닌 일행을 주시하고 있었다. 눈에 보 이지 않은 그 무언가가. 그루닌은 일단 '사이런스'라는 이름의 인에 숙소를 정하고 여장을 풀었다. 내일부 터 3일간은 꼬박 말을 달려야 할 판이었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노숙이라도 한다면 몸이 배겨나지 못한다. 그러나 일행중 어느 누구도 쉽게 무장을 풀려고 하지 않았 다. 언제나 시끄러운 펍에서도 소란하나 없이 묵묵히 술을 들이키는 사람들 뿐이 었다. 너무 조용한 나머지 바늘이라도 떨어트린다면 쨍하는 소리가 날것만 같았다. 가벼운 흑맥주 한잔씩을 시켜 앞에 놓고서도 일행은 각자 허리에 찬 롱소드의 안 전장치를 풀어놓고 있었다. 포르켄은 아예 검을 뽑아 탁자위에 올려두었고 아몬은 투구를 좀처럼 벗으려 하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평정을 유지한 사람은 루돌프 뿐인듯 싶었다. 루돌프는 무표정한 눈으로 주위를 계속 살피고 있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태평스러울 뿐이었다. "너무 조용해……" 웅얼거리는 듯한 말이었다. 포르켄과 그루닌은 어디에서 나는 말소리인지 몰라 두리번거리다가 그 목소리의 주인이 아몬임을 알아차리고는 새삼스럽게 놀랐다. 일주일이나 되는 여행기간중 아몬은 한번도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몬은 손을 올려 눈을 보호하는 그리드를 올렸다. 날카로운 검은색 눈동자가 그 루닌을 직시했다. "이런 분위기……기분이 안좋아. 분명히 예전에 느껴본 기억이 있어." "어떤 기억?" 아몬은 질문을 던진 포르켄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약간 아래로 내리깔은 경멸 의 시선……뜻밖의 응대에 포르켄은 큼큼 하는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무마하려 했 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아몬은 다시 그루닌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둠의 숲……바로 그곳에서." "……마경(魔境)?" 아몬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그리드를 내려버렸다.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더이 상 말할게 없다'라는 듯한 행동에 그루닌은 더 이상의 질문을 던질수가 없었다. 장식이 전혀없는 둥그런 은빛 갑옷……라이칸테스 기사단의 아몬을 나타내는 가 장 좋은 장식이었다. 라이칸테스 창립 초기에서부터 활약을 보여온 아몬은 신출귀 몰한 이동능력으로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소문에 의하면 과거 키클로프 연합군이 보유하던 '은빛 기사단'의 일원이라는 말 도 있고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일단은 업무에 충실한 기사 라는 평가는 변하지 않았다. 물론 업무에 충실한다는 평가는 모든 라이칸테스 기 사단의 일원이 공통적으로 듣는 평가였다. 위이잉…… 그루닌의 귓가에 무언가가 날아 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그루닌은 무의식중에 손을 들어 귓가를 재빨리 훑었다. 위이잉 하는 소리가 일시에 멈추고 손바닥 안에서 무 언가가 꿈지럭거리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음!" 그루닌은 주먹에 힘을 주어 그것을 으깨버렸다. 끈적한 무언가가 손바닥 안을 흘 렀다. 손을 아래로 펴고 작게 흔들자 바닥으로 작은 파리가 툭 하고 떨어졌다. "가혹한 짓을……" 클렌이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아무리 작은 벌레라도 라그도메제키아스의 낫이 내려오기 전에는 살 가치가 있 는겁니다." "……그때가 지금인 듯 합니다, 신관님." 조금은 멋적어진 그루닌이 가볍게 클렌의 말을 받아치자 클렌은 무언가 말하려는 듯이 우물우물 거리다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포르켄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레이디가 화가 나셨군. 기사가 그러면 안되지" 포르켄은 능글맞게 이죽거렸다. "파리가 아무리 방해를 하더라도 기사라면 인내하지 않으면 안되지. 아무렴." "그런 취미는 없네. 기사는 레이디와 국왕을 수호하는 것. 그 이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어." "다른 생각도 하라고. 이를테면 여자의 따뜻한 품속을 찬양하는 것 말이야." 아몬이 노려보았지만 포르켄은 당당하게 흑맥주를 높이 들어 건배를 했다. 그루닌 은 아몬에게 그만하라는 손짓을 보내 당장 검이라도 뽑을 기세를 무마시켜야 했 다. 그루닌은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손바닥을 닦았다. 미끌미끌한 느낌이 그대로 남아있어 기분이 좋지않았기 때문이었다. 몸집이 작은 파리였지만 체액이 꽤 많아 손 전체가 흥건히 젖은 듯 싶었다. "잠깐! 그대로 있어요!" 그루닌의 손목이 사슬에 조이는 것처럼 아파왔다. 포링이 한 손으로 그루닌의 손 목을 우악스럽게 움켜잡고 있었다. 그루닌은 고통의 비명소리가 새어나가려는 것 을 가까스로 막을수 있었다. 그루닌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포르켄이 포링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이봐! 당신 무슨……" "……이걸 보시오." 포링은 다른 손을 내밀어 그루닌의 손안에 쥐어진 손수건을 조심스레 끄집어냈 다. 하얀 손수건 안쪽으로 작은 반점이 보였다. 연분홍색의……아니, 그것보다는 더 짙은 색깔의 얼룩이었다. "……" 포링이 조심스레 그루닌의 손을 풀어주자, 그루닌은 손가락으로 손수건을 집어올 렸다. 점점 위로 들리는 손수건의 얼룩은 점점 그 색깔이 선명해져 갔다. 연분 홍……분홍……주황……그리고 검붉은 빛으로. 그루닌의 등에 찬바람이 지나갔다. 포링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피를 빠는 체체파리……멸종된줄 알았는데" 포르켄이 검을 왈칵 움켜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탁자를 빙 돌아 그루닌 이 던져버린 파리의 잔해를 살폈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포르켄은 허리에서 쇼트소 드를 뽑아 그 검날위에 파리을 올려놓았다. 포르켄은 조심스레 파리를 들어 탁자위에 놓았다. 모두의 시선이 파리로 향했다. 그루닌이 잡은 파리는 아주 작았다. 잘못보면 모기만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 로……그러나 그 파리의 날개는 모두 여섯개였다. 보통 파리의 날개가 두개인 것 에 비하면 너무 많았다. 게다가 주둥이는 마치 작살을 방불케 할 정도로 크고 길 었으며 이미 터져버린 배에는 주름이 잔뜩 잡혀있었다. 포링이 손톱끝으로 파리의 뱃가죽을 잡아당기자 길이는 대번에 세배 정도로 늘어 나버렸다. "그루닌 자작님……당신의 파리잡는 능력에 경의를 표해야 겠습니다." "……위험합니까?" "위험한 정도가 아니오. 이놈은 맹독이 있어 물리기만 하면 끽소리도 못하고 곧 장 저승행입니다." 포링의 얼굴이 점점 새파랗게 질렸다. "체체파리는 무리를 짓는 습성이 있어요. 마을 안에 파리가 돌아다닐 정도라면 이미 이곳은 파리들의 소굴이란 말인데……" 아몬이 갑자기 양 손을 들어올려 투구의 이음새를 만지작거렸다. 몇번 덜그럭 소 리가 나고는 아몬의 투구가 벗어졌다. 검은색 머리카락에 균형이 잘 잡힌 아몬의 얼굴이 드러났다. 어찌보면 미남일수도 있는 얼굴이었지만 아몬은 그런것에는 전 혀 신경을 쓰지않고 마치 개처럼 파리의 잔해에 코를 가져다 대었다. 한참을 킁킁거리던 아몬은 고개를 갸웃 했다. "……피냄새가 아주 흐려. 방금 먹은게 아니야." "다행이지. 방금 먹은 피였다면 세계 최초로 파리에 물려죽은 드래곤 나이트가 나왔을테니까." 굳은 얼굴로 농담을 지껄이는 포르켄에게 그루닌은 곱지않은 시선을 보냈다. 그 러나 포르켄의 얼굴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아몬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의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 피 냄새는 분명……보름이나 지난것이 야. 반쯤 썩어있어." "……그래서?" "파리가 단식을 하고 있다는 말이지." 농담처럼 내뱉은 아몬의 말에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핏기가 사라져버 린 창백한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루닌은 아몬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할수 있었다. 보름이나 지난 피를 몸속에 담 고있는 체체파리……파리가 얼마나 멀리 나는지는 잘 모르지만, 이곳은 사막이 아 니다. 아니 오히려 피를 빠는 흡혈충(吸血蟲)이 살기에는 가장 좋은 도심 한가운데 다. 체체파리가 갑자기 돌아버리거나, 단식을 밥먹듯이 한다는 교단에 투신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불가능한 말이었다. 결국 나올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였다. "……베니스에 살아있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로군." "……" 무서운 침묵이 맴돌았다. 그러나 그루닌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신경이 다른 테 이블에 앉아있는 자들과 문 밖으로 향해 있었다. 펍 밖은 조용했다. 아직 아무런 움직임도 기척도 없었지만 그루닌은 신경을 옥죄는 듯한 느낌이 더욱 강해지고 있 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일종의 살기……라고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그루닌의 신경을 강렬하게 자극하는 '무언가'에 대한 적의가 담긴 감각이 전해오고 있었다. 그루닌은 포르켄에게 조용 히 말했다. "포르켄, 수레에 가서 기다려." "알겠다." 포르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펍을 나갔다. 멀리 웅성대는 사람들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루돌프는 짧게 입을 열었다. "오는군……" "어떻게 된 일일까요. 마을 사람들 모두 케스트에 걸려 죽어버린건 알겠는 데……" "리빙 데드 맨들이 살아있는 놈들부터 죽이자라는 생각아래 연합이라도 했나보 지. 좋은 함정이야. 완전히 속았으니까." 루돌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 작은 땀방울이 맺혀있는것이 보였다. 그루닌도 일어나 허리에서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스르릉 하는 소리와 함게 청백색 의 빛을 띄는 그루닌의 검이 빠져나왔다. 루돌프는 힐끗 아몬을 바라보고는 심각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아몬이라고 했던가? 가베라의 기사여." "그렇습니다만." 투구의 그리드를 올리며 아몬이 대답했다. 아몬은 자리에 앉은채 무엇인가를 고민 하는듯 보였다. 루돌프는 가볍게 냉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고민은 그만하고 이제 슬슬 본 모습을 보일때도 됐다고 생각하는데? 성년식을 치른지 얼마 안된 친구치고 생각이 많군 그래." "……무슨 말씀이신지……" "인간의 모습으로는 제대로 싸울수 없지않나? 힘 조절이 가능하다고 해도 말이 지." "……" 아몬은 마치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경악에 찬 그의 눈동자가 루돌프에게 고정되 어 있었다. 아몬은 손을 뻗어 자신의 갑옷을 움켜잡았다. 아차 하는 순간, 아몬은 몸을 감싼 플레이트 메일을 벗어던졌다. 단 한번도 벗지 않았던 아몬의 갑옷 안쪽은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색 옷 한벌 뿐이었다. 그루닌은 아몬에게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아몬은 떫은 감을 씹은 표정으로 그루닌을 한번 힐끗 보고는 가볍게 혀를차며 소 리를 질렀다. "카아앗!" 순간 그루닌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수밖에 없었다. 아몬이……아몬의 몸이 변화하 고 있었다. 몸에 붙어있던 검은색 옷이 대번에 찢어지고 그 사이로 울퉁불퉁한 근 육이 솟아올랐다. 솟아오른 근육이 점차 갈색으로 변하고 길게 거친 털이 근육을 뚫고 흘러넘치듯 나풀거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아몬의 얼굴이 무엇에 당겨지기라도 하는듯 입 주변이 앞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코끝은 점점 검어지고 갈색의 짧은털이 얼굴 전체로 돋아났 다. 거친 털 사이로 하얀 아몬의 송곳니가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늑대……바로 늑 대였다. "아……아몬……" 카우우우! 아몬은 허공을 향해 길게 울부짖었다. 아몬의 모습……그것은 라이컨슬로프 '베어 울프'였다. '이럴수가……' 전혀 예상할수 없었다. 생각도 할수 없었다. 그루닌은 입을 멍청하게 벌린채 주먹 을 쥐었다 폈다 하며 몸을 푸는 아몬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온몸에 갈색 털이 숭 숭 돋아난 아몬, 아니 '라이컨슬로프'는 돌처럼 굳어버린 아몬을 알아채고는 퉁명 스레 말을 건넸다. "자네는 역시 몰랐군." "놀랍군……자네 인간이었잖아. 아몬 폰 후트 백작이 아니었나?" "마족이 귀족 작위를 갖는건 가베라에서는 어려운 일이 아니야. 그보다는……" 아몬은 매서운 눈초리로 루돌프를 노려보았다. "……당신은 누구죠? 어떻게 우리에 대해 알고 있는 겁니까." "……나이를 어느정도 먹게되면 사물을 판단하는 눈이 생기는 법이지." 루돌프는 엷게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는 독특한 손가락을 하고 있군. 베어 울프만이 그런 모양을 가지지." 루돌프의 시선은 아몬의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루닌은 그의 시선을 따라 아몬의 손을 살펴보았다. 그러고보니 정말 특이한 손가락이었다. 중간 손가락과 집 게 손가락의 길이가 정확하게 일치했다. 마치 바닥을 기어다니는 늑대의 발가락처 럼 묘한 균형을 이루며 뒤틀려 있는 것이었다. 아몬은 주먹을 꾹 쥐었다. 앙다문 그의 입술이 떨리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분해 하는듯 했다. 루돌프는 감정이 섞이지 않은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앞으로는 장갑이라도 끼고 다니도록 하게. 그보다는……저 녀석 들부터 처리해 야 할 것 같구만." 홀의 탁자에서 묵묵히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일어서고 있었다. 돌아서 진 않았지만 그루닌의 피부위로 그들의 시선이 따갑게 내려꽂히는듯 했다. 그루닌 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쿠지직! 펍의 오른편에 놓인 탁자가 갑자기 부서졌다. 탁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탁자조각에서 몽둥이로 쓸만한 것들을 집어들고 그루닌들을 바라보았다. 공허하게 텅 비어있는 눈 여러개가 자신에게 향하는 것은 별로 기분좋은 일이 아니었다. 우워어어어! 사람들이 달려들었다. 좀비와는 다르게 아주 빨랐다. 맨 앞에 선 사람이 몽둥이를 휘둘러 아몬의 머리를 노렸다. 아몬은 입 주위를 일그러뜨리며 코웃음을 쳤다. "시체따위가……" 아몬이 왼손을 들어올렸다. 손톱이 칼처럼 튀어나가며 쇼트소드보다는 길게 구부 러졌다. 손톱검……라이컨슬로프의 기술중 하나였다. 아몬은 손톱검을 비스듬히 휘 둘러 부딪혀오는 몽둥이를 그어버렸다. 허공중에 몽둥이가 분리되고 이어서 아몬의 오른손이 달려드는 사람의 목을 움켜 잡았다. "쿠악!" 우두둑 하는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나고, 그 사람의 머리 아래는 축 늘어져버렸다. 그러나 머리만은 입을 벌려 아몬의 손을 물어뜯으려 하고 있었다. 아몬은 그 사람 을 머리위에서 빙빙 돌려 달려드는 다른 사람들에게 던져버렸다. 앗 하는 순간에 눈앞으로 날아오는 동료를 그들은 몽둥이로 치워버렸다. 뿌둑 하 며 머리뼈가 박살나는듯 했지만 한켠으로 떨어진 그 사람은 다시 일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루닌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말도안돼." "좀비보다 빠르고 강하지. 이미 죽은자는 공포나 고통이 없소." 루돌프가 펍의 문 밖을 살피며 말했다. "일단 도망가고 봅시다." 그루닌은 팔을 풍차처럼 휘두르는 데드맨의 가슴에 검을 박아넣었다. 그러나 검 에 박혀서도 데드맨은 발악을 하며 그루닌의 목을 죄려고 애썼다. 그루닌은 입술 을 깨물었다. "하앗!" 데드맨을 검에 꽂은 그대로, 그루닌은 달렸다. 공성추처럼……그루닌의 공격의 뒤 에 데드맨들을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그루닌의 손에 계속해서 데드맨들이 꼬치처 럼 꿰이는 감각이 전해왔다. 그루닌은 오른팔에 온몸의 힘을 기울였다. "우와아아악!" 검이 허공으로 들어올려졌다. 어느새 그루닌의 검에는 데드맨이 셋이나 꿰어져 있 었다. 그루닌은 온 힘을 다해 데드맨을 들어 펍의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우당탕탕 데드맨이 널부러지고 그루닌은 근처 데드맨의 목을 잘라버리며 외쳤다. "어서 수레로! 이곳을 떠난다!" 아몬은 손톱으로 달려드는 다른 데드맨의 몸을 삼등분 해버리고 클렌의 팔을 잡 아 자신의 목에 둘렀다. 클렌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꽉 잡으십시오." 아몬은 클렌에게 말하며 루돌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루돌프는 이미 옆구리에 포 링을 낀채로 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아몬의 몸이 일순 흔들리는가 하더니 그루닌의 옆에 나타났다. 아몬은 그루닌의 허리를 움켜잡고 다시 몸을 날렸다. 그루닌은 허리가 둘로 꺾이는 듯한 충격을 맛 봐야 했다. 아몬의 이동속도는 너무 빨랐다. '엄청난데……' 마치 급류에라도 탄것처럼 눈앞의 풍경이 시시각각으로 바뀌고 있었다. 눈앞까지 달려온 데드맨이 갑자기 휙 사라지고 펍의 문이 나타나는가 하면, 둔중한 충격이 느껴진 순간 이미 그루닌의 몸은 펍의 밖으로 나와있었다. 아몬은 밖에 나오자마자 둘을 내려놓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연이은 움직임 에 벌써 지쳐버린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루돌프의 호통이 그를 질타했다. "정신차려!" 차가운 무언가가 아몬의 머리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몬의 털을 조금 자르고 지 나간 그것은 마침 밖에서 달려들던 데드맨의 머리를 꿰뚫고 그대로 조금 떨어진 기둥에 박혔다. 그것은 작은 쇼트소드였다. 루돌프가 소드를 던져 데드맨을 작살에 꽂힌 생선처럼 기둥에 박아버린 것이었다. 멍해있는 아몬에게 루돌프는 차갑게 일갈했다. "전투중에 정신을 놓지마! 주위를 살피고 적을 파악해!" 루돌프의 명령은 간결하지만 효과적이었다. 잠시 정신을 놓고있던 아몬은 머리를 위로 치켜들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았다. 차한잔 마실 시간 정도 냄새를 맡던 아몬은 이내 눈가에 작은 주름을 만들었다. 아마도 '기분나쁘다'는 표현인듯 싶었 다. "적의 냄새가 없습니다." "……도망간건가?" 그루닌이 반문했지만 루돌프는 조용히 부정했다. "천만에. 젓가락으로 드래곤을 죽일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을걸. 집요한 놈들이 다." "……화끈한 비유로군요." "끈질긴 놈들이니까. 하지만 멍청하진 않을거요." 아몬은 칼날처럼 귀를 쫑긋 세웠다. 루돌프는 흥 하는 소리를 내며 작게 중얼거렸 다. "만일 시체라도 움직여 조종해 온다면 큰일이오. 베니스의 인구가 4천……4천명 이 일시에 덤빈다면 드래곤이라도 살아남기 힘들어." "그렇다면……" 아몬이 그루닌의 입을 막았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그루닌은 숨이 막히는 것을 같았으나 이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에 피가 얼어붙는 감각을 느껴야 했다. 도시가 웅성대고 있었다. 베니스가 적막에서 깨어나 바닥에서 울려퍼지는 듯한 목소리가 전해지고 있었다. 미약한 아이들의 작은 흐느낌처럼……하지만 거대한 신전의 종소리가 귀를 파고들듯, 그 소리는 서로의 울림을 덧붙이며 숨쉬듯 그루 닌의 영혼을 뒤흔들었다. "살레로네 살레로네 라포네 톤 미카에노 로니모……" 베니스를 떠돌던 시체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사이런스'로 모이고 있 었다. * * 연달아 올립니다. 으음.....예전에 쓰던걸 조금 활용하니까 진도는 빠르군요. 『게시판-SF & FANTASY (go SF)』 19082번 제 목:[darkspwn] 라이컨슬로프-70 올린이:darkspwn(유민수 ) 99/01/07 21:51 읽음:361 관련자료 없음 ----------------------------------------------------------------------------- 라이컨슬로프 EDITION Ⅱ 70. "빌어먹을 살레로네의 노래 같으니." 불평불만을 숨쉬듯 내뱉으며 포르켄은 굳은 얼굴로 검을 다시 고쳐쥐었다. 살레로네의 동요는 로메오 대륙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겹게 불러 왔던 노래였다. 다른 노래보다 쉽다거나 아름다운 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살레로 네를 모르는 아이는 없을만큼 널리 퍼져있었고 포르켄도 잘 아는 동요였다. 하지 만 그 친숙한 노래가 이렇게 음산하게 들릴줄은 예상도 하지 못했었다. 포르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양옆으로 할버드를 든 병사 둘이 있었지만, 그 들은 절대로 도움이 될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걸리적거리지나 않으면 모를까…… 어차피 죄수의 호송꾼 정도로 생각하고 데려온 자들이라, 살아 걸어다니는 시체들 사이를 뚫는다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루닌!" 포르켄은 '사이런스' 안쪽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건물 안에서는 고함소리 나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스폰지가 물을 빨아먹듯……포르 켄의 목소리도 허공중에 흡수되는 느낌이었다. "의무집행 우선사항……적의 습격이 있을시 안전하게 도주……라." 포르켄은 무의식중에 명령서 내용을 다시한번 상기했다. 그리고는 입 언저리에 쓴 웃음을 지어버렸다. "이렇게 될거라는 걸 이미 알았다는 말인가. 왕궁의 쓰레기들은?" 검은빛이 칙칙한 그의 검이 다시한번 빛을 발했다. 예전에는 모험자들의 용맹과 긍지로 가득했던 레이프 가문의 보검. 검은 소드. 이제는 학살자의 증거로 그 의미가 퇴색했지만 포르켄은 이 검을 버릴수 없었다. 마족의 피로 검게 물들은 검은 그가 살아온 증거이자 지표이기도 했다. 어쩌면 '데 블런스 슬레이어'의 죄명으로 감옥에 갇혔을때 이 검을 버렸더라면 용서받고 평범 하게 살아갈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포르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검은 빛이 흐르는 소드는 그가 살아온 역사였다. 기사도와 왕명에 의해 마족을 살해하고 빼앗고……그리고 또 죽이고.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세월 이었다. 게슈빌츠인지 뭔지 하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지금까지 '정당'하다고 생각해온 '역사'를 부정할수 없었다. 하지만 감옥 안에서……그리고 점차 일상화 되어가는 마족과의 공존생활에서 포르 켄도 내심 의문을 품었다. '나는 왜 마족과 싸웠나……' 마족은 '불결'하다거나 '저주받은 제물'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실제 겪어본 마족은 피에 굶주리거나 인간을 괴롭히는 것을 낙으로 삼지 않았다. 그들은 필요에 의해 자신의 영역과 몸을 지켰고, 그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 마족 역시 인간을 괴 롭히지 않았다. 전설에 나오는 마물들의 광란은 현실세계에선 존재하지 않았던 것 이다. 아니, 오히려 포르켄과 같은 일류 전사들이 평범한 마족들의 마을을 습격해 학살 하고 불사르고, 그들의 보물을 갈취했었다. 만일 내가 인간이 아니라……내가 태워 버린 오크 마을의 한 오크였다면 어떠했을까. 과연 그것이 '역사'라고 불릴만한 것 이었던가? "제기랄!" 포르켄은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욕설을 퍼부었다. 눈앞에 다가오는 것은 한때 는 인간이었던 것들이다. 자신이 피땀을 흘려 지키고 수호하며 예의를 갖춰야할 백성들인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확실한 적의를 갖고 다가오고 있다. 바로 예전에 '인간'이었던 것들이. "포르켄! 우리가 간다!" 아몬의 목소리였다. 동료인 그가 나를 도우러 온 것이다. 믿을수 있는 동료가. 포 르켄은 고개를 돌려 아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자리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 그루닌과 루돌프, 클렌의 앞에서 온 힘을 다해 아몬의 목소리로 다가오는 그것, 그것은 온몸에 늑대의 털이 숭숭 돋아난 라이컨슬로프였다. '마족이 나를 도우러 온다……불결하고 저주받은 것이.' 포르켄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팔을 쭉 벌리고 자신을 죽이려 다가오는 인간 들……포르켄은 자신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제기랄." '사이런스'는 잠깐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아니, 데드맨들로 포위당했다. 원을 그리듯 '사이런스'를 둘러싼 데드맨들은 검을 비롯한 온갖 무기를 겨눈채 그루닌들 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확실하게 접근해왔다. 포르켄과 합류한 그루닌은 병사들에 게 명령을 내렸다. "수레를 지켜! 틈을 봐서 탈출한다!" "헛소리를……." 포르켄이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수레를 가지고는 도망 못가.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 안전하게 귀환하는것이 우 선이야." "할수 있는데까지는 해봐야 하잖아.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최선?" 백여보 밖에 반쯤 썩은듯한 시선으로 다가오는 데드맨을 노려보며 포르켄은 코웃 음 쳤다. 그루닌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그건 살아있을때 말이지." "……" "병자 하나 끌고 도망을 가는것에 목숨을 걸순 없어." "그래도 살아있는 인간이다. 데드맨 소굴에 놓고 간다는건 우리가 죽이는 것과 다르지 않아." "……그래?" 포르켄은 허리의 쇼트 소드를 뽑아들고 소년이 갇혀있는 수레를 향해 조준했다. 그러나 이내 낌새를 알아챈 그루닌이 그의 쇼트 소드를 빼앗아버렸다. 그의 얼굴 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뭐하는 거야!" "이래 죽이든 저래 죽이든 같잖아!" "포르켄!" 포르켄의 어깨를 무엇이 움켜잡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몬이었다. 아몬은 갈색의 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죽일수 없다. 저녀석은 죽어선 안돼." "……어째서?" "저 녀석은 인간이지만 우리들의 동료다." "……" 포르켄은 아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몬은 진지했다. "……라이칸테스 기사단에 있어선 은인같은 사람이다. 그도 우리의 동료야." "저 녀석은 식물인간이야. 아무 도움도 안돼." "도움이 되고 안되고가 문제가 아니잖아!" 화를내는 아몬을 노려보며 포르켄은 어깨를 흔들어 그의 손을 떼어냈다. 하지만 쇼트 소드는 다시 허리춤으로 집어넣었다. 루돌프는 팔짱을 낀채 사태를 지켜보고 클렌은 겁을 먹은듯 오들오들 떨며 포르켄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기랄……포르켄은 마음속으로 다시한번 욕설을 퍼부었다. 그루닌이 한손으로 수레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방법을 생각해 보자구. 빠져나갈수 있는 방법이 있을거야." "……너무 늦어. 보라구. 저 시체들이 벌써 이만큼이나 다가왔다." 데드맨들과의 사이는 이미 오십여보로 좁혀져 있었다. 그루닌은 수레안에서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도 소년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변화가 없었다. 그루닌은 이 를 악물었다. "……할 수 없어." "……?" 포르켄과 아몬의 시선이 그루닌의 얼굴로 향했다. 그루닌은 그들을 바라보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동료를 버릴순 없어. 동료를 배신할수 없어. 포르켄……너와 내가 동료인 것처 럼, 너도 저 소년과 동료인 거다." "……" "……포르켄. 우리는 기사다. 기사도를 지켜야 하는 명예로운 기사라구." "……명예……?." 포르켄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입술 사이로 흘러내리던 조소는 점점 높아져 마침 내 히스테리컬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살레로레의 웅성거림 속에서 포르켄의 웃음 은 묘한 분위기로 퍼져나갔다. 이십여보로 줄어든 거리를 눈으로 재며 포르켄은 사납게 외쳤다. "명예 따윈 없어! 그루닌!" 포르켄은 검은 소드를 들어 그루닌과 아몬을 향해 휘둘렀다. 검은 소드는 허공을 갈랐고 그루닌과 아몬은 클렌을 보호하며 뒷쪽의 수레로 물러섰다. 머리카락이 몇 가닥 흘러내려 포르켄의 이마위를 어지럽혔다. "명예를 지키며 주군에 충성하고, 인간들을 위해 마족을 사냥하던 내가 명예로 운 기사인가! 죄없는 마물들을 사냥한 데블런스 슬레이어 포르켄이 나란 말이 다! 몇년전만 하더라도 명예로운 이름이지만 지금은 한낱 쓰레기같은 범죄자에 불 과하지. 이런 꼴을 보라고. 뭐가 기사도고 뭐가 명예라는 말이냐!" 포르켄은 검은 소드를 치켜들며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광기……반쯤 비쳐버린 광 기섞인 눈빛이 그의 눈에서 폭사되어 나왔다. "난 기사가 아니야. 레이프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몸을 판 일개 전사에 지나지 않아!" "……" "그러니 내게 명예 운운 하지마." 포르켄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소리를 지른탓에 목이 조금 쓰라렸지만 온몸에서 땀이 조금 배어나와 있었다. 약간은 젖은듯한 촉촉한 느낌. 전투를 벌이기 전에 느 끼는 두근거리는 긴장감. 포르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포르켄은 검은 소드 를 한손으로 옮겨쥐고 허리춤에서 쇼트소드를 꺼내 쥐었다. 양손으로 검을 휘두르 는 것은 레이프 집안 비전(秘典)의 검술이었다. 포르켄은 성문을 향해 힘차게 한발 자국을 내딛었다. "……약속은 지킨다. 걱정하지 말라구." 포르켄은 검은 소드를 천천히 머리위로 들었다. 따가운 태양아래 검이 번득였다. 포르켄은 다리에 힘을 주어 앞으로 내달렸다. 이십여보의 거리가 순식간에 줄어 들며 포르켄을 부르는 그루닌의 당황한 고함이들렸다. 포르켄은 양팔을 가슴 앞으 로 끌어당겨 두 검을 교차시켰다. "……제기랄." 포르켄은 쓴웃음을 지었다. 벌써 몇번째 튀어나오는 욕설인지 그도 인식하지 못하 고 있었다. 포르켄은 검은 소드를 고쳐쥐고 데드맨의 뒤로 보이는 베니스의 성벽을 바라보았 다. 성벽은 아직 닫히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성벽을 열어둔 것이다. 포르켄 은 땅에 침을 한모금 뱉었다. "……동료라니." 포르켄의 검이 데드맨들을 향해 날아갔다. 젤리처럼 물컹한 데드맨의 피가 튀고 대번에 다섯이나 되는 데드맨들이 두토막이 나서 허공으로 흩어졌다. 포르켄은 춤 추듯 두 검을 휘두르며 성벽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의 주변에 서있던 데드맨은 저 항한번 하지 못하고 낙엽처럼 조각나 사방으로 흩날렸다. 데드맨들이 포르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포르켄은 양팔을 벌리고 달려드는 데드맨 하나의 목을 날려버리고 힘차게 그녀석의 어깨를 걷어차버렸다. 목이 잘린 데드맨은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허공으로 날아가버렸다. 포르켄은 힘차게 외쳤다. "어서 가!" 데드맨의 토막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휘날렸다. 발악하듯 날뛰는 포르켄의 공격에 데드맨의 행렬이 주춤했다. 둥글게 둘러싼 포위망이 조금 일그러지며 성문쪽을 향 한 데드맨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포르켄!" 그루닌이 검을 빼어들고 달려나갔다. 그러나 얼마 가지않아 아몬에게 잡히고 말았 다. 아몬은 족쇄를 채우듯 그루닌의 양 팔을 껴안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루닌은 세 차게 저항했다. "이거 놔앗!" "……" "놔! 포르켄을 구해야 해!" "정신차려!" 아몬의 손톱이 그루닌의 팔 살갗을 조금 파고 들어갔다. 갑작스런 통증에 그루닌 은 멈칫거렸지만 다시 아몬의 힘에서 벗어나려 몸을 비틀었다. 어깨를 흔들고 팔 뚝에 온힘을 가해 벗어나려 했으나 그때마다 아몬은 손아귀에 힘을 주어 그루닌의 발악을 무산시켰다. 그루닌의 저항을 억지로 막아내며 아몬은 그의 귀에 대고 강한 어조로 소리질렀 다. "정신차려! 포르켄이 왜 저러는지 알잖아!" "……하지만!" "방법이 없어!" 아몬이 오른팔을 빼더니 그루닌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마치 어린애를 집 어들듯 그루닌을 잡아 허공위로 들어올렸다. 그루닌은 목이 급격하게 죄어오는 것 을 느끼고 발버둥을 쳤지만 아몬의 힘을 막아낼수 없었다. 가물가물해지는 정신 사이로 아몬의 노호성이 들렸다. "어린애처럼 굴지마! 이틈을 타서 빠져나간다. 조용히 있어." 옥죄어오던 목이 갑자기 시원해졌다. 그루닌은 허공에서 들린 그대로 바닥으로 처 박혔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루닌은 아몬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몬은 이미 그자리에 없었다. 그는 두려움에 벌벌떠는 병사 둘을 수레의 지붕으로 던지고 있 었다. 수레 위에는 이미 루돌프가 아몬과 함께 올라가 있었다. "서둘러!" 아몬이 그루닌에게 외쳤다. 그루닌은 묵묵히 검을 챙겨들고 수레를 향해 다가갔 다. 하지만 그의 걸음은 갸냘픈 하얀 손에 의해 저지당했다. 클렌이었다. 클렌은 붉은 로브 사이로 파란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감정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차갑고 얼음같은 눈동자였다. 그루닌은 순간 숨이 멎는것을 느꼈다. "……이대로 좋은가요?" "……네?" 그루닌은 잠시 당황했다. "포르켄님을 이대로 버리고 싶습니까?" "……그것은…… 클렌이 루돌프를 돌아보며 물었다. "성문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죠?" 루돌프는 매섭게 클렌을 쏘아보더니 간단하게 대답했다. "10분." "전력으로 달려서?" "포르켄이 견딜만한 시간은 10분 뿐이지. 되든 안되든 달려야 해." "……그렇군요." 클렌이 검은 지팡이를 천천히 하늘로 들어올렸다. 강렬한 햇살에 지팡이는 마치 검은 뱀처럼 보였다. 클렌이 천천히 지팡이를 회전시켰다. 원을 그리듯……지팡이는 정확하게 위아래 가 뒤집혀 불룩한 부분이 위로 올라왔다. 클렌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10분……그 정도라면……" 클렌의 지팡이가 검은 번개처럼 세차게 땅을 향해 내리꽂혔다. 카아앙! 강한 쇳소리가 나며 클렌의 지팡이가 활짝 펼쳐졌다. 아니……클렌의 지팡이에서 무언가가 강하게 펼쳐진 것이다. 그것은 검은 빛을 띄는 칼날이었다. 지팡이의 불 룩한 부분에 숨겨지듯 감춰진 칼날이 튀어나와, 클렌의 지팡이는 마치 거대한 낫 처럼 보였다. 클렌은 지팡이를 땅에 꽂은채 기도의 영창(靈唱)을 시작했다. "만물의 공통된 것, 죽음의 어둠이여. 라그도메제키아스의 이름으로 너를 선택하 노니 암흑보다 더 어두운 암흑으로 너의 모습을 보여라……죽음의 굴레에서 벗 어나 미친듯이 발악하는 저들을 멸하는 것이 너의 사명이니……" 지팡이 주위에 검은 기운이 서리기 시작했다. 암흑의 기운은 점멸하는 반딧불처럼 지팡이 주위를 맴돌며 클렌을 휘감아갔다. 클렌의 무거운 로브가 펄럭거리며 검은 기운이 마치 세찬 바람처럼 폭발적으로 흘러나왔다. 지팡이를 중심으로 터진 암흑의 기운이 폭포처럼 주변으로 퍼지고 있 었다. 클렌의 날카로운 기도는 절정을 이루었다. "암흑의 암흑, 봉인의 기운. 죽음의 고리에서 벗어난 자를 선택해 시간을 본래대 로 되돌려라!" 일순, 암흑의 기운이 클렌을 중심으로 뭉치더니 강한 급류처럼 성문쪽을 향해 밀 어닥쳤다. 암흑의 급류는 홍수처럼 데드맨들을 삼켰다. "쿠어어어어……" 급류에 휘말린 데드맨은 잠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다가 급격하게 부패하기 시작 했다. 물렁거리는 살점은 순식간에 녹아버리고 허연 뼈가 드러나다가 누렇게 변했 다. 그리고 마침내 한줌 잿더미로 변해 암흑의 급류에 휘말렸다. "가자!" 아몬의 고함이었다. 그루닌은 멍하니 서있다가 갑자기 허리가 부러지는 듯한 충 격을 받았다. 아몬이 그의 허리를 붙잡아 수레위로 던져버린 것이다. 아몬은 수레의 손잡이를 붙잡고 전력으로 성문을 향해 달렸다. 아니, 그곳에 있을 포르켄을 향해 달렸다. 달리는 말에 탄것처럼 수레가 심하게 흔들렸으나 그루닌은 이를 악물고 수레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클렌의 모습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기도를 마친후 탈진한듯 몸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클렌!" 그루닌은 왼손으로 수레의 쇠창살을 잡고 몸을 반바퀴 회전시켰다. 그의 손이 늘 어나듯 밖으로 향하고 그루닌의 손은 클렌의 허리에 감겼다. "꺄아앗!" 클렌이 비명을 지르고 이어 우당탕 소리가 나며 클렌도 수레의 지붕으로 떨어졌 다. 그러나 클렌은 그루닌의 몸 위로 떨어진탓에 별로 다치진 않은듯 했다. 오히려 두번이나 충격을 받은 그루닌은 숨도 제대로 못쉬고 있었다. 클렌이 그루닌의 몸 위에서 크게 말했다. "괜찮아요?" 붉은 로브가 벗겨지며 짧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남자처럼 짧은 그녀의 머리카락은 뜻밖에도 하얀 백발이었다. 그루닌은 놀라 눈을 크게 떴고, 클렌은 황 급히 로브를 잡아 푹 눌러써 버렸다. 그루닌은 당황해 재빨리 눈을 돌렸다. "실례……" "……" 멋적어진 두사람이 서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가운데 아몬은 드디어 포르켄에게 가 까이 근접했다. 클렌의 주문의 영향을 직격으로 받은터라, 반경 8큐빗 안에 데드맨은 모두 먼지 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 비틀거리고 있는 포르켄의 모습도 그리 좋 은편은 아니었다. 온몸에 데드맨의 손에 의한 상처가 가득했고, 갑옷도 한쪽 암숄더만 제외하면 모 두 너덜너덜하게 변해 있었다. 아몬은 포르켄을 향해 일직선으로 다가갔다. "포르켄!" 포르켄이 머리를 힘들게 들었다. 피로 얼룩진 그의 한쪽 눈이 무참히 일그러져 있 었다. 그러나 그는 얼굴 가득 웃고있었다. 소중히 품고있던 소원을 이룬것처럼……그는 만족한 듯한 얼굴로 달려오는 아몬 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루닌이 다시 한번 몸을 수레 밖으로 길게 빼었다. "잡아!" 포르켄의 손이 부르르 떨리며 허공으로 들어올려졌다. 그루닌의 손이 길게 뻗어졌 다. 천천히 시간이 흐른다……그루닌은 그렇게 느꼈다. 바람처럼 달리던 수레의 흔들 림도 가라앉고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피투성이에 손가락 하나가 물어뜯겨진 포르켄의 손가락 뿐이었다. 끔찍하다 못해 처참한 손. 그러나 그루닌은 피에 얼룩 진 그 손이 뼈에 사무치도록 반가웠다. 그루닌은 온몸을 밀어내듯 옆으로 빼내어 포르켄의 손을 향해 다가갔다. 조금 만……조금만 더……. 그루닌과 포르켄의 손이 점차 다가왔다. 천천히……아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가까워지는 거리에 그루닌은 더할나위 없는 기쁨을 느꼈다. "포르켄!" 비명인가? 절규하는 아몬의 고함이 들린다. 순간 그루닌의 시야에서 포르켄의 손 은 사라졌다. 아니,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아래로 힘없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포르켄의 얼굴에는 아직도 웃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서는 생명의 불꽃 이 스러지듯 사라지고 있었다. 포르켄의 머리가 아래로 떨구어지고 쓰러지는 그의 등에 무수하게 꽂힌 화살이 보였다. 쿠웅 포르켄은 쓰러졌다. 그리고 스쳐 지나가듯 아몬이 끄는 수레가 그의 곁을 지나갔 다. 그루닌은 비명을 질렀다. "안돼애애!" 그루닌이 손을 휘저었지만 쓰러진 포르켄의 팔에는 닿지 않았다. 썩어버린 데드맨 의 잔해 사이로 포르켄은 그렇게 차갑게 굳어있었다. 그루닌은 자꾸만 멀어지는 포르켄의 시신을 노려보았다. 죽었다……죽었다……지켜주지 못했다. 그루닌의 마음속에 강한 슬픔이 치밀어 올랐다. 내 잘못이다……그가 옳았다……내가 틀렸다……내가 죽인거다. 슬픔이 점점 분 노로 변해갔다. 포르켄을 구하지 못한 자신에게. 동료를 위험에 빠트리고 끝내는 귀중한 생명을 잃게 만든 형편없는 자신에게. '힘……힘만 있었다면……' "으아아아아!" 그루닌은 처절하게 절규했다. 그의 머릿속이 벼락에 맞은듯 하얗게 변해버린것 같 았다. 모든 이성과 자부심……드래곤 나이트라는 사명감. 모든것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오로지 동료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분노만이 그의 영혼을 강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백지로 변해버린 그의 머릿속을 뚫고 무언가가 말을 걸어왔다. 죽이고 싶은가…… 그것은 하얗게 타버린 그루닌의 영혼에 직접 말을 걸어왔다. 힘을 원하는가…… 그루닌은 외쳤다. "그렇다! 나는 힘을 원한다!" "그루닌?" 클렌의 당혹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그루닌의 귀에서는 스치듯 사 라져버렸다. '그것'은 집요하게 물어왔다. 파멸을 원하는가…… 그렇다 죽음을 원하는가…… 그렇다 힘을 원하는가…… 그루닌은 대답했다. "그렇다!" [아니야……] 전혀 다른 목소리……그루닌의 정신이 돌아왔다. 분노에 미쳐 날뛰던 그의 영혼이 냉수에 뒤집어쓴 것처럼 차가워졌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그것'의 목소리를 뚫고 그루닌의 영혼에 직접 말을 걸고 있었다. 방해하지마! [당신이 원하는 건 그런게 아니야……] "누……누구냐!" [당신이 원하는 건 이런게 아니야.] '목소리'는 친근하게 그루닌의 영혼을 가라앉혔다. 하얗게 변했던 시야가 본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흔들리는 수레가 보이고 성문앞에 까맣게 자리잡은 데드맨들의 새로운 포위망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그것'과 '목소리'의 공방이 계속되고 있었 다. 방해하지마! 가만히 처박혀 있어! [싫다……이젠 너같은건 싫다. 휴리(Fury)……] 난 네게 힘을 주었다! [그건 네 힘이 아니야] 나를 배신하는가! [배신이 아니다. 본래의 내 모습을 찾을 뿐……] '그것'이 사라졌다. 그루닌은 그렇게 느꼈다. "르르……르르르르……" 등골이 서늘해지는 짐승의 울음소리였다. 그루닌은 영혼과 귀에 동시에 들려오는 괴성에 당혹해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않아 그 목소리가 수레에 앉아있는 은회 색 머리카락의 소년에게서 나오는 것임을 알수 있었다. 소년의 온몸에서 강한 기운이 일어나고 있었다. 마치 폭풍처럼……모든것을 삼켜 버릴듯이 붉은 기운이 뻗쳐나고 있었다. 소년이 천천히 일어서고 있었다. 쿠우웅! 수레의 바퀴가 조각조각 부서져 나갔다. 수레를 끌던 아몬은 수레 손잡이를 잡은 채 앞으로 고꾸라지고 그루닌은 클렌의 허리를 잡고 지붕위에서 뛰어내렸다. 수레 주위는 이미 숨쉬기도 힘들 정도의 뜨거운 고열이 넘쳐나고 있었다. 타캉! 사슬이 기름속에서 튀어나가는 것처럼 소년의 몸에서 하나하나 떨어져 나갔다. 마치 거추장스런 거미줄을 털어버리듯이 소년이 손을 흔들때마다 은빛 찬란한 미 스릴제 사슬이 덩굴조각처럼 찢어지는 것이었다. 사슬이 모두 흘러내리는 데는 차 한잔 마실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곧바로, 소년의 힘은 자신을 감싸고 있는 마법진에 밀어닥쳤다. 우지지지직 마법진을 중심으로 붉은 기운이 덩어리쳤다. 날뛰는 드래곤의 이빨처럼……붉은 기운은 마법진을 강하게 밀어부쳤다. 마법진이 그려진 바닥에 금이 가면서 이내 바닥도 둘로 쪼개져버렸다. "큐우……큐우……큐우……" 붉은 열기가 가득한 가운데 소년의 숨소리가 드래곤의 숨결처럼 거칠게 흘러나왔 다. 드래곤의 브레스를 연상시키는 열기는 쇠창살로 전해졌고, 쇠창살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녹아 흘러내려 버렸다. 그루닌은 클렌의 허리를 잡은채로 소년의 열기가 닿지않는 방향으로 몸을 피했 다. 뒤이어 수레의 손잡이를 든채로 아몬이 합류했지만, 병사 둘은 소년의 열기에 그만 까맣게 타서 죽어있었다. 그루닌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몬에게 말을 건넸다. "……저 괴물이 정말 인간인가?" "이거 도망가야 하는건가……" 아몬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강한 공포가 어려 있었다. "……로리타 대장도 없는데……저 버서커의 폭주를 어떻게 막지?" "버서커? 버서커 나이트?" 그루닌의 등 뒤로 싸늘한 바람이 지나가는듯 했다. 버서커……그것은 가베라 전 사(戰史)에 남아있는 제루가이더 학살사건을 일으킨 괴물을 의미했다. 2년전 한명 의 광전사, 버서커가 제루가이더에 나타났다. 키클로프 연합군에 대항하던 캐디시 공국의 최후의 보루였던 요새인 제루가이더에 나타난 이 광전사는 하룻밤 동안 남 녀노소를 막론하고 움직이는 것은 모두 죽여 시체의 산을 쌓아놓았다. 형체를 알 아볼수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찢긴 시체들은 곧 타버렸고, 버서커는 홀연히 자취 를 감추었다고 했다. 아니, 그렇게 알고 있었다. "크으으으……" 소년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몸을 조금씩 비틀면서 자신을 가두고 있던 수 레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소년을 중심으로, 성문을 막고있던 데드맨들이 조금씩 포위망을 좁혀왔다. 그러나 데드맨들은 성급히 달려들지 않고 뜨거운 열기 밖에서 서서히 움직임을 멈춰갔다. "르르……르르르……르르르" 거친 짐승의 울음소리. 그루닌의 귀를 긁어파는듯한 낮은 울음소리가 서서히 흘러 나왔다. 소년의 오른손에 거무칙칙하게 달라붙어 있던 검이 점차 붉어지고 있었다. 마치 화로에 달구는 무쇠처럼, 검게 붙어있던 조각들이 먼지처럼 흩어지며 타오르는 화 염을 뿜어내었다. "……죽여!" 데드맨의 포위망이 움직였다. 흐리멍텅한 눈을 굴리던 데드맨이 갑자기 좌우로 흩어졌다. 잘 훈련된 병사처럼 각각의 사람들은 동일한 동작으로 재빠른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갈라진 사이로 무언가를 든 데드맨이 달려나왔다. 거대한 활이었다. 양옆으로 물러선 데드맨 사이에서 삐죽이 튀어나온 것은 보통 대 기사(騎士)용 크로스 보우, 아르발레스트(Arbalest)였다. 대형 화살이나 신호탄 을 잴때 사용하는 거대 활이었는데 지금은 짧은 투창인 필럼(Pilum)이 매어져 있 었다. 인간을 초월한 데드맨의 힘으로도 조절이 힘든듯 데드맨 셋이 붙어 소년을 향해 겨냥하고 있었다. 그루닌은 큰 소리로 외쳤다. "피해! 위험하다!" "카아아악!" 동시였다. 아르발레스트에서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필럼이 튀어나오는 것과 소년이 움직이는 것이. 앗 하는 사이 필럼은 데드맨과 소년 사이의 거리를 순식 간에 좁혀버리고 소년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 붉은 파도였다. 날아가던 필럼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것과 소년의 눈 앞에 파도처 럼 붉은 파도가 나타는 것도 역시 동시였다. 붉은 파도는 필럼이 날아오는 것보다 더 빨리 데드맨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피……피하……" 놀란 데드맨들의 비명이 채 새어나오기도 전에 붉은 파도는 아르발레스트를 들고 있던 데드맨들을 덮쳤다. 코를 찌르는 고기타는 냄새가 역겹게 풍기고 사방으로 조각난 데드맨의 살점들이 어지럽게 날아올랐다. 폭발하는 화산의 분노처럼 붉은 파도는 계속해서 주변의 데드맨들을 말아올리고 있었다. "쿠아아악!" 데드맨들은 황급히 물러나려 했지만 붉은 파도는 마치 회오리처럼 도망가는 그들 을 하나 하나 끌어들여 산산조각을 내며 하늘로 태워올렸다. 처절하게 절규하는 데드맨의 비명에도 불구하고 붉은 회오리는 점점 커져만갔다. "베르제뷔트님!" 데드맨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베르제뷔트님! 살려주십시오!" 타오르는 태양을 향해 기도하듯 온몸을 비트는 데드맨들을 향해 붉은 파도는 계속 덮쳐갔다. 붉은 파도……그것은 거대한 붉은 검의 움직임이었다. 물결치듯 연속으 로 흘러가는 투 핸드 소드에는 작열하는 화염이 매달려 있었다. 검이 데드맨을 토막내 버리면 화염은 잘려진 그것들을 순식간에 태워 한줌의 재 로 만들어 버렸다. 검이든 활이든……철퇴든 가리지 않고 붉은 검에 스치는 것은 모두 가루로 변해 날려가고 있었다. 성문을 막고있던 데드맨은 거의 전멸상태였다. 남은것은 요행히도 그루닌 일행에 제일 가까이 있던 몇명의 데드맨 뿐이었다. 데드맨들은 공포에 절은 눈빛으로 서 서히 사그라드는 붉은색 회오리를 노려보았다. 미쳐 날뛰던 회오리는 평온히 가라 앉고, 남은것은 타오르는 붉은 대검을 든 소년 뿐이었다. 소년의 눈동자는 붉게 물 들어 있었다. 데드맨들은 발을 버르적 거리며 소년에게서 멀어지려고 발악했다. 그러나 그들의 몸은 좀체로 뒤로 물러서지도 못했다. 공포에 하반신이 완전히 마비된것 같았다. 한 데드맨이 썩은 생선의 눈알처럼 흐릿한 눈동자를 굴리며 겁먹은 어투로 흐느꼈 다. "……미쳐버린 전사……" "버서커 나이트……" 데드맨은 쉬어터진 목소리로 똑같이 아우성쳤다. "……마법의 노래, 살레로네의 주문.……미쳐 날뛰는 지옥의 정령. 무섭다……두 렵다……" "……" "우리와 같아……우리와 같다……" "……시끄러워!" 소년이 소리쳤다. 레드 드래곤의 숨결처럼 붉은 열기가 버르적거리는 데드맨을 직 격했다. "캐애액!" 지독한 고기타는 냄새가 나고 바닥에 쓰러져있던 데드맨이 불덩이가 되어 나뒹굴 었다. 잠깐동안에 잿더미가 되어버린 데드맨을 바라보며 소년은 입을 열었다. "난 살아있어. 엄연히 다르다구……입이나 다물어." 소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아직 강한 열기는 멈추지 않 았지만 소년의 눈은 갈색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루닌은 그제서야 소년의 얼굴을 바로볼수 있었다. 부드럽다……지독한 열기 가 운데서도 그루닌은 그렇게 느꼈다. 소년의 갈색 눈동자는 공포에 질린 그의 마음 을 어루만질만큼 부드러운 느낌을 전해주고 있었다. 서서히 사그라드는 열기 사이로, 거대했던 붉은 검이 작게 가라앉고 있었다. 사람 키만한 투핸드 소드가 바스타드로, 그리고 다시 에스토크로. 마지막에는 소년의 오 른팔을 감싸는 작은 암숄더로 잦아들어갔다. "……세상에" 아몬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압도적인 소년의 힘에 질려버린듯 했다. 소년은 그루닌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그루닌을 향해 엷은 미소를 던지고 있었다. * * 제르뮤의 부활입니다. 에구에구...힘들군요. 비평및 추천……감상문 아무거나 주세요. 저, 요즘 힘들어요....흑흑.. 『게시판-SF & FANTASY (go SF)』 19384번 제 목:[darkspwn] 라이컨슬로프-71 올린이:darkspwn(유민수 ) 99/01/09 20:49 읽음:371 관련자료 없음 ----------------------------------------------------------------------------- 라이컨슬로프 EDITION II 71. 차가운 달빛이 불타버린 베니스의 풍경을 을씨년스럽게 비추었다. 푸른 달빛은 시커멓게 변해버린 모든것을 감싸안고 망각의 늪 속으로 끌어들인듯 불이 꺼진 베 니스는 조용하기만 했다. 이제는 데드맨도 체체파리도 보이지 않고 파괴된 잔해만 이 남아 있었지만 그루닌은 잔해들을 바라보면서 깊은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눈앞에 앉아있는 은회색 머리칼의 소년이 적이 아니라는 축복할 만한 사실을. 제르뮤 폰 렉싱턴. 그 이름을 들었을때 그루닌은 가베라의 역사에 깊이 새겨져 있는 소년의 또다른 칭호를 깨달을수 있었다. 냉혹과 전략의 수호자……또한 생명 의 수호자인 풍룡왕 아드리안 홀슈타인의 드래곤 나이트. 드래곤의 정점 에인션트 드래곤의 맹약자로서 제루가이더 성채에서 사라져 버린 가베라의 은인이었다. 어 떻게 그가 버서커 나이트가 되어 식물인간이 되었는지는 몰랐다. 아니, 버서커 나 이트가 되어 살아남은 인간은 제르뮤 외에는 없다는 표현이 더 걸맞을지도 몰랐 다. 영혼 깊숙히 말을 걸어왔던 분노의 정령 휴리에 대해서는 그루닌도 알고 있었 다. 그리고 휴리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던 사람이 바로 제르뮤였다는 사실 조차도. 제르뮤는 아몬에게서 지금까지의 일을 듣고 있었다. 왜 여기로 오게 되었는지 그 리고 베르제뷔트라는 작자를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녀'를 되살린다는 부분에서 제르뮤의 얼굴 표정이 미미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제르뮤는 긴 한숨을 내쉬며 붉은 빛으로 달아오르는 그의 암 숄더를 어루만졌다. "……상당히 많은 일이 있었군요." "……모두 걱정하고 있습니다. 돌격대장 젠쿠님과 라니쿠님의 심려가 크셨으니 까요."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리는군요." 제르뮤는 씁쓰름한 미소를 지었다. "젠쿠 아저씨도 라니쿠 아저씨도……예전에는 그저 협력해주던 고마운 분들일 뿐이었는데, 이제는 가베라 왕국의 기사라니. 구속되는 것을 싫어하는 라이컨슬 로프 부족전사들이 어째서 기사가 될걸까요." "그건……저도 잘 모릅니다만……" 아몬의 귀가 축 늘어졌다. 보름달 아래 라이컨슬로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아 몬의 행동은 잘 길들여진 강아지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은채 제르뮤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토오르 국왕폐하와 라이컨슬로프 부족들의 맹약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맹약 이후에 '쿠'의 이름을 받은 어린 늑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스터를 되살리는 일인만큼 젠쿠 아저씨가 올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게……힘 조절이 아직 수월하지 못하신 분들이라……" 아몬은 겸연쩍은 표정을 떠올렸다. 마치 주인에게 야단맞는 강아지의 얼굴 같았다. "아시겠지만 인간과 라이컨슬로프의 변화를 자유롭게 구사할수 있는 전사는 많 지 않습니다. 낮에도 변신이 가능하고 밤에도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려면 엄청 난 체력과 의지력이 요구되기에……" "아몬은 그게 가능하잖습니까. 설마하니 젠쿠 아저씨보다 당신이 강하다는 건……" "그건 아닙니다. 제게는 특수한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아몬은 황급히 부언했다. "라이칸테스가 하는 일은 대부분 인간들 틈에서 정보를 수집하거나 암살하는 것 들 뿐이라……그러한 일을 전문적으로 하기위해 변화가 자유로운 전사가 필요 했습니다. 그래서 아직 어린 '켈'에게 보호 마법을 걸었습니다. 그러한 자들을 라이칸테스에서는 '아몬'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러한 전사란 말이군요. 변화가 자유로운 라이컨슬로프 전사들 말 이에요. 그냥 변신할수 있는 전사는 없습니까?" "마법없이 변신이 가능하다……그런 전사가 있을리는 없겠지만, 만일 있다면 드 래곤만큼 강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겠죠." 자신있게 단언하는 아몬에게 제르뮤는 가볍게 수긍의 고갯짓을 했다. 이미 알고있 다는 표정이었다. 제르뮤는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응시했다. 그루닌은 제르뮤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곳에는 팔짱을 낀채 서있는 루돌프가 있었다. 루돌프는 무표정한 모습 그대로 물끄러미 제르뮤의 시선을 받아내고 있었다. 제르뮤는 차 한잔 마실 시간동안 루돌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돌프 역시 아무말 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가 잠시 이어지고, 침묵을 깨며 제르뮤는 그에게 말 을 건넸다. "루돌프 씨라고 했던가요?" "……그렇소." "어디에서 뵌 듯 한데……혹시 모르십니까?" "잘 모르겠소. 난 초면인데……" 루돌프는 점잖게 대답했다. 제르뮤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설마요. 용의 방벽에서 수룡왕과 함께 만났던 것 같은데요." "……" 루돌프의 입술이 뒤틀리듯 올라갔다. 무표정한 그의 표정이 저렇게 변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그루닌은 이상할 정도로 침묵하는 루돌프를 이해할수 없었다. 마치 오 랜 시간이 지난후 만난 원수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루돌프는 침묵을 잠시 유지했다. 그리고 천천히 허리를 감싼 벨트를 풀렀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루돌프의 검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는 완전한 비무장이 되었 다. 루돌프는 양 팔을 좌우로 벌렸다. "……추억을 되새기자는 의미인가." "그럴수도 있겠군요, 루돌프 폰 아스트리아씨." 제르뮤는 빙긋 웃었다. 속마음을 들킨 순진한 소년처럼 그의 미소는 티없이 맑았 다. 그러나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신랄하기 그지 없었다. "가족을 배신한 변절자 주제에 되새길만한 좋은 추억이나 있다면 모르지만." "……" 루돌프는 침묵했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얼굴에서 그의 속마음을 알아내기는 불 가능했다. 그는 그저 벌렸던 팔을 다시 모아 팔짱을 끼는 일 외에는 하지 않았다. 제르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푸른 달빛아래 건강한 그의 가슴에 옅은 그늘이 졌다. 부드럽지만 냉랭한 어조로 제르뮤가 물었다. "그러고보니 드로이얀 양이 보이지 않는군요. 그녀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답할 이유는 없다." 루돌프 역시 냉정하게 대답했다. 숨막힐듯한 긴장감이 흘렀다. 제르뮤는 웃음띈 부 드러운 얼굴로 질문을 이어갔다. "이 근처에 없다는 말이로군요. 하기는 그정도의 난리가 있었는데 나오지 않아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 루돌프의 눈썹이 일순간 꿈틀했다. 그는 천천히 팔짱을 풀고 자세를 조금 낮췄다. 눈에 띄게 긴장한 모습이었다. 제르뮤는 즐거운 어투로 루돌프에게 계속 말을 건 넸다. "설마하니 버림받은 겁니까? 드로이얀에게?" "……" "그렇군요. 당신도 버림받았군요. 아하하하……" 제르뮤는 유쾌하게 웃었다. 창백한 달빛아래 크게 웃어대는 제르뮤의 모습은 섬뜩 하기조차 했다. 루돌프가 성난 목소리로 일갈했다. "버릇없는 아이로군." "……너무 웃어서 미안해요. 하지만 저로서는 즐거워서 견딜수가 없어요. 아이러 니 하지 않아요? 모든것을 버린 남자가 다른 사람에게서 버림받는 상황이 말이 에요." "……" "만일 버림받은게 아니라면 어디에선가 다른 일을 하고 있겠군요. 어떤 일인지 는 알수 없지만……최소한 당신이 계획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당신은 언 제나 안전한 곳에서 다음 계획을 짜는 사람이지 이렇게 혼자 돌아다니는 사람 은 아니니까." "……흥." "……어쩌면 당신의 귀한 따님이신 드로이얀이 있는곳이 제스파즈 마을 근처인 지도 모르겠군요. 단순한 질병 조사였다면 당신이 직접 나설일은 없었을 테니 까요. 흐음……그러고 보니 이 생각쪽이 정답인것 같네." "……좋을대로 생각해라." 불쾌한듯 루돌프는 대답했으나 그의 목소리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목소 리에서 그루닌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불현듯 그루닌은 카알에서 드 로이얀과 루돌프가 다투던 때를 떠올렸다. 당시 드로이얀은 헤스페라이트 산맥으 로 가려고 했었다. '이데로스'의 유적……'불멸의 사원'을 파헤치기 위해서. 그제서야 그루닌은 루돌프가 이번 조사대에 참가한 이유를 알아차릴수 있었다. 지그프리드 재상의 사위나 되는 사람이 죽을 위험이 강한 켈레만으로 간다는 사실 만으로도 의심을 했어야 할 일이었다. 그루닌은 둔한 자신의 머리를 원망했다. '대단한 소년이다.' 그루닌은 제르뮤를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제르뮤의 직감과 상황판단 능력은 일반 수준을 훨씬 넘어선듯 했다. 루돌프와 드로이얀에 대한 개인적인 지식은 둘 째 치고라도 아몬의 설명만으로 상황을 올바로 판단하는 능력은 경이로울 정도였 다. 한참동안 웃음을 참지 못하던 제르뮤는 점차 진정하는듯 했다. 그리고 예의 부드 러운 목소리로 아몬에게 말을 건넸다. "아몬. 부탁이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당신은 가베라로 돌아가요." "……네?" 아몬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몬의 눈에 의아한 빛이 가득차 있었다. 제르뮤는 짧게 아몬에게 대답했다. "돌아가서 로리타를 불러와요. 디트리히와 세이렌도……세이렌에게 마스터를 이 곳으로 데려오라고 해요. 베르제뷔트는 내 생명을 걸고 잡아 놓을테니까." "디네즈 양이라면 거대한 붉은 크리스탈에 갇혀 있습니다. 너무 크고 무거워서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옮기는 것은 무리가……" "걱정하지 말아요." 제르뮤는 빙긋 웃었다. 제르뮤는 왼 손을 내밀어 오른손 손목을 감싼 암 숄더를 잡았다. 그러자 암 숄더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오른손 손바닥 안으로 조금 떨 어져 나가 작은 구슬 모양으로 바뀌었다. 제르뮤는 구슬을 아몬에게 "숨쉬는 붉은 크리스탈이라면……아마 네레노디아의 심장이 변한 모습이겠죠. 만일 그렇다면 녀석은 내 말은 들을 겁니다. 이 구슬을 로리타에게 건네줘요. 그 애라면 잘 사용할수 있을 거에요. 그리고……" "……?" 제르뮤는 얼굴을 조금 붉혔다. 어색한 사과를 하듯 쑥쓰러워 하는것처럼 보였다. 제르뮤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그맣게 말했다. "……고맙다고……지켜줘서 감사하다고 전해줘요." "……네." 아몬은 고개를 숙이자 마자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루닌이 그의 모습을 두 번째로 본 것은 아스트리아로 향하는 길 쪽이었다. 눈깜짝할 사이에 그는 아주 먼 거리로 날아가버린 것이었다. 제르뮤가 가볍게 휘파람을 불며 감탄했다. "순간이동(=teleportation)……이네. 정말 다재다능한 친구로군요." 제르뮤는 그루닌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친근하게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상황이 상황이다보니까 물어보질 못했네요." "그루닌 폰 하펜다즈 자작……입니다. 헤스펠 제레이트님을 섬기는 드래곤 나이 트입니다." "……드래곤 나이트?" 제르뮤의 눈살이 조금 찌푸려졌다. 그루닌은 조금 불안해졌다. "그렇습니다만……" "……헤스펠 제레이트……는 어떤 드래곤입니까?" "성 드래고니안의 그린 드래곤 이십니다. 수룡왕 세이렌 님의 직속 부하로 서……" "알겠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듯 하군요." 제르뮤는 씁쓰름한 미소를 지었다. 별로 좋지않은 기억이 떠오른듯 했다. "세이렌의 생각이겠군요. 그 사건 이후의 휴유증인가……"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는……" 제르뮤는 고개를 돌려 아직도 굳은 얼굴을 하고있는 루돌프를 바라보며 말을 건넸 다. "루돌프……아니, 바타쿠씨. 당신과 마스터 사이의 일은 직접 해결하도록 하세 요." "……무슨 말이지?" 루돌프가 차갑게 대꾸했지만 제르뮤는 손을 내저어버렸다. "결자해지(結者解之)란 말이 있죠. 매듭을 묶은자가 풀어야 한다……마스터를 저 렇게 만든 사람이 당신이긴 하지만, 반대로 살릴수도 있지 않겠어요? 당신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살려놓고 봐야 해결을 해도 할거 아닙니까." 루돌프는 큰 충격을 받은듯 했다. 잠시 대답을 못하던 그의 얼굴에서 수많은 감 정이 교차해 가는것을 알수있었다. 놀라움, 의아스러움……그리고 고통까지도. 루 돌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끊어내듯 입을 열었다. "자네……지금……내게……도와달라는 건가?" "바로 맞췄습니다." 제르뮤는 가볍게 손뼉을 쳤다. 비아냥거리는 의미가 강하긴 했지만 루돌프의 긴 장이 눈에띄게 풀려버렸다. 어떻게 보면 허탈해 보이기도 했다. 제르뮤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 특성이 있는듯 했다. "쓸데없는 분노나 복수따위……허무할 뿐이에요. 정말로." 제르뮤는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은근한 그의 중얼거림은 그루닌과 루돌프에게 확실히 전해졌다. 모든 지혜를 깨달은 현자처럼 제르뮤의 얼굴은 부드 럽기 짝이 없었다. 제르뮤는 귀퉁이에 쌓아둔 짐꾸러미를 뒤적거리며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당신이 마스터를 다크메이스의 둥지에 떨어트린 데에는 말못할 사정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해서 천륜을 저버린 그 짓이 보상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약간은 위안이 되지 않겠어요? 내가 당신을 베어버리지 않는 이유도……그래요. 난 마스터가 당신에게 영원한 증오를 안고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아서에요. 그러기에 마스터는 너무 연약한 여자일 뿐이죠." "……" "정이 많은 여자에요. 마스터는……정말 사랑스러운 여자에요. 안그런가요? 장인어른?" 루돌프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축 늘어진 그의 어깨는 무언가 알수없는 과거의 무게를 다시 짊어지고 있는것처럼 보였다. 제르뮤는 짐꾸러미에서 냄비 하 나와 감자자루를 찾아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쾌활하게 입을 열었다. "삶은 감자 싫어하시는 분 계세요?" * * 제르뮤 특제 삶은 감자 입니다.^^ 자아....이제 5장의 본편이 시작이군요.(600장이나 지나서야 본편 시작이라니...나 도 어지간하다....-_-;;) 추신 : 출판용 라이컨슬로프의 제목이.....'마경의 기사'가 될 가능성이 많아졌습니 다. 으음.....나우에서 어떤분이 추천해 주신 이름이었죠. 확실히 무난한 이 름이긴 해요. 라이컨슬로프는 1권 부제로 쓸 생각입니다.(영업부에서 말하 길……라이컨슬로프란 이름이 너무 어려워서 잘 안팔릴것 같아요. 다른 이 름을 쓰면 안될까요? 라고 하데요. 으윽.....그렇게 어려운 이름이었나.....) 『게시판-SF & FANTASY (go SF)』 19953번 제 목:[darkspwn] 라이컨슬로프-72 올린이:darkspwn(유민수 ) 99/01/13 16:45 읽음:366 관련자료 없음 ----------------------------------------------------------------------------- 라이컨슬로프 EDITION II 72. 눈부신 햇빛이 창문을 통해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엷은 푸른 색이 은은하게 배어 나는 유리를 거친 것이라 싱그러운 느낌을 주었지만 그래도 피부가 화끈거리는 것 은 어쩔수 없었다. 언제 부터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포근하게만 생각되던 세계 가 점차 회색빛으로 보일 뿐이었다. 로리타는 머릿속의 신경이란 신경은 모두 뒤집힌듯한 충격 때문에 말도 할수 없 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펄쩍펄쩍 뛰지 않는것만 해도 초인적인 자제력이라고 할만 했다. 극도의 흥분을 가까스로 억제하며 로리타는 무릎을 꿇고있는 아몬을 바라보 았다. 아몬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제르뮤가 부활한 장 소가 베니스라고 했다. 베니스라면 아스트리아와 베르마트의 접경지대가 가까운 곳이니 빠른 말을 달려도 일주일은 걸리는 곳이었다. 그런 먼 거리를 아몬은 단 사흘만에 돌파해버린 것이었다. '라이칸테스 제일의 이동능력자 답구나.' 로리타는 시선을 돌려 환한 미소를 띄고있는 디트리히를 바라보았다. 아몬이 보 고를 하던 시점부터 디트리히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디트리히가 큰 목 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가! 제르뮤가 깨어났다고!" "네. 바라야즈님." 아몬은 어깨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상당히 지친 탓인지 그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못했다. "제르뮤님은 그루닌 자작과 함께 제스파즈로 북상…… 베르제뷔트를 잡으시겠다 고 하셨습니다." "앗하하하!" 디트리히는 벌떡 일어나 세이렌을 향해 달려갔다. 마치 인형을 안아 올리듯 세이 렌을 안고는 허공에 번쩍 들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뛸듯이 기뻐하는 것은 세이 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 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세이렌의 흐느끼는 목소리를 들으며 로리타는 처음으로 편안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잊혀지지 않는 고통스러운 기억이 다시한번 떠올랐다. 천년처 럼 느껴지는 2년이라는 시간…… 로리타는 단 한시도 잊을수 없었다. 눈부신 햇빛 이 아닌 역겨운 분노만이 흐르던 제루가이더의 그때. 그녀의 운명을 다시한번 절망으로 빠뜨렸던 대학살이 벌어졌던 제루가이더의 사 건. 그것은 마치 어제 일처럼 머릿속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제르뮤!" 그오오오오 광전사가 울부짖는다. 분노와 증오로 가득한 광전사의 외침은 로리타의 가슴을 송곳으로 후벼내듯 파고들었다. 매캐한 시체 타는 냄새가 후각을 마비상태로 만들 어 이제는 냄새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꿈틀대는 화염은 불의 정령, 샐러맨더(Salamander)의 날름거리는 긴 혓바닥이었 다. 우둘투둘한 두꺼운 가죽을 불꽃으로 감싸고 시커멓게 타버린 시체위를 기어다 니는 불도마뱀 샐러맨더는 오직 정령사인 로리타에게만 보이는 광경이었다. 불을 일으키는 샐러맨더는 본래 의지가 없었다. 샐러맨더는 자신을 불러낸 자의 말만 듣기에 정령을 볼수 있다면 정령을 불러낸 자가 누구인지 알수 있었다. 그러 나 로리타는 알고싶지 않았다. 광기로 얼룩진 정령의 모습……그것은 분노를 관장 하는 가장 다루기 힘든 상위정령, 퓨리(Fury)를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정령에는 모두 네가지 종류가 있다. 세계를 구성하는 네 원소별로, 불꽃을 관장하 는 불의 정령, 물을 지배하는 물의 정령, 바람을 제어하는 바람의 정령, 대지를 지 키는 흙의 정령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각 원소별로 하위정령과 상위정령 그리고 정령왕으로 나뉘는데 특히 정령왕의 위치는 에인션트 드래곤이나 신과도 같은 힘 을 지닌 존재였다. 정령이 하는 일은 세계를 조화롭게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 세계가 창조된 이후부 터 세계를 정해진 규칙에 따라 이끄는 것. 그것이 정령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령도 이단자가 있다. 그것은 형태가 없는 정신정령(精神精靈)이었다. 정 신정령은 생물의 영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괴팍하고 종잡을수 없는 난폭자였다. 정해진 규칙도 없고 선과 악의 구별도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힘을 강화시키는 일 뿐이었다. 슬픔을 지배하는 정신정령 밴시(Banshee)라든가 공포를 관장하는 쉐이드(Shade) 는 정령사들도 꺼리는 상대였지만 그들보다 더욱 기피하는 정신정령이 바로 분노 속에 폭주하는 퓨리(Fury)였다. 퓨리의 힘은 정령왕보다 강했다. 살아있는 모든 것 들의 분노와 절망을 먹기 때문에 무한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퓨리를 제어 할수 있는 정령사는 없었다. 살아있는 생물인 이상 지배할수 없는 것이다. 퓨리는 처절한 분노와 절망에 빠진 전사의 마음속을 파고들어 약해진 마음을 끊 임없이 부채질하며 자신의 힘을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 전사가 요구를 받아들이면 퓨리는 전사의 몸을 지배해 죽을때까지 한없는 폭주를 시작한다. 그렇게 폭주해버 린 전사를 버서커…… 일명 광전사(狂戰士)라고 한다. "준비해!" 젠쿠의 목소리였다. 젠쿠가 오른팔을 들어 라이컨슬로프 부족전사들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의 지시가 떨어지자 부족 전사들이 일제히 밤하늘을 향해 울어 젖혔다. 카우우우우! 긴 늑대의 울음소리가 밤하늘을 뒤흔들자 광전사의 붉은 눈동자가 위로 향했다. 푸른 달빛 아래 건장한 늑대의 모습들이 하나 둘 튀어나왔다. 망루나 지붕위…… 그리고 광전사의 검이 닿지않은 높은 지대에는 노랗게 타오르는 늑대의 눈동자가 있었다. 가르르르르……. 먹이를 사냥하는 늑대들의 목울음이 들렸다. 낮지만 신경을 거슬리는 소리였다. "목표는 저 반푼이. 죽이지 말고 적당히 패서 기절시켜!" 젠쿠가 망루에서 뛰어내렸다. 시체더미를 태우던 빛 덕분에 로리타는 젠쿠의 모 습을 똑똑히 볼수있었다. 지붕에서 지붕으로 뛰어다니는 늑대들의 포위망이 서서 히 광전사를 좁혀들어갔다. 광전사는 붉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거대한 붉은 검을 치켜세웠지만 늑대는 검이 닿을 거리 밖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가 튀어나와 광전사의 정신을 뺏는 사이 다른 한명이 광전사를 견제한다. 광 전사는 검을 휘둘러 접근을 차단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늑 대들 때문에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늑대들은 낮은 목울음 소리로 서로간에 대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잘 알수 없지만 그것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한마리의 드래곤과 비슷했다. 머리가 나서면 꼬리가 대응하고, 꼬리가 공격당하면 몸통과 머리가 동시에 적을 유린한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적은 지쳐갈수밖에 없는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그러나 광전사는 지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검을 휘두 르는통에 미처 피하지 못한 늑대 몇마리의 털이 그을렸다. "아아아아아악!" 광전사가 갑자기 울부짖으며 검을 들어 늑대가 숨어있는 장소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늑대들은 회색빛 그림자가 사라지듯 이미 그곳을 빠져나간 뒤였다. 하지만 광전사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쿠웅! 싯뻘건 불길이 그곳을 휘감았다. 그리고 불길은 빠르게 주변으로 퍼져갔다. "르르르…… 르르르르……." 광전사의 검이 보이지 않을 속도로 돌아갔다. 거대한 붉은 검에서 화염이 채찍처 럼 뿜어져 나왔다. 화염은 늑대가 숨어있던 곳을 모두 철저히 파괴시키고 불태웠 다. 얼마 지나지않아 광전사를 중심으로 거대한 공터가 생겨버렸다. 늑대들은 모두 낭패한 표정으로 공터 바깥에 늘어서 있었다. "광전사 답지않게 머리가 좋군." 자갈로테이아의 낮은 목소리였다. 로리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뛰어난 적응력과 상황판단은 제르뮤의 장점이었다. 광전사가 되었다 해도 그 재 능이 사라질리 없었다. 늑대의 포위를 없애고 상대를 제압해 버리기 위해서 장애 물을 전부 파괴시킨 것이다. 거추장스러운 것이 사라진다면 광전사를 상대로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이대로 두면 모두 죽고 말거야…… 어쩌면 좋지…….' 로리타는 눈을 들어 광전사를 둘러싼 정령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제르뮤를 흐릿 하게 감싼 분노의 정령 퓨리의 추악한 모습이 있었고 그 주변을 미쳐 돌아가는 샐 러맨더가 있었다. 제르뮤의 검에 깃든 샐러맨더였으나 퓨리의 영향탓에 폭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르뮤의 가운데 부분의 정령은 조용했다. 아니, 오히려 제르뮤의 몸에 다 가오는 불길을 샐러맨더 스스로 제어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지키는 광전사…… 그런 것은 없었다. 광전사는 어떠한 고통도 느끼지 않는 미친 전사다. 몸이 불타버 리더라도 적을 죽이는 것 만이 유일한 목적인 것이다. '뭔가가 있어.' 로리타는 망루 위에서 몸을 날려 바닥으로 내려섰다. 조금 떨어진 곳에 젠쿠가 서 있었다. 젠쿠는 눈길을 제르뮤에게 떼지 않은채 로리타에게 말을 걸었다. "저 녀석을 잠들게 할순 없나?" "불가능해요. 퓨리가 있는 한 광전사는 잠들지 않아요." "제길…… 생포는 고사하더라도 이쪽이 당하겠어. 광전사가 저렇게 강했던가." 로리타는 눈을 크게 뜨고 제르뮤를 노려보았다. 제르뮤는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날뛰는 샐러맨더 뒤로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퓨리의 모습이 있었다. 그는 무엇엔 가 갇힌듯 몸부림치고 있었다. 폭주하려는 퓨리를 붙들고 있는것은 강한 마력의 사슬이었다. 제르뮤의 가슴 부근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퓨리의 손발을 얽어매고 있었다. 로리타의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네레노디아의 심장! 심장이 퓨리를 억제하고 있어!" "뭐?" 젠쿠가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로리타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젠쿠! 디네즈를 찾아요. 어쩌면 제르뮤를 되돌릴수 있을지도 몰라!" "……무슨 소리야?" "어서!" 흑수정같은 로리타의 눈이 젠쿠를 쏘아보았다. 젠쿠는 섬뜩한 로리타의 시선을 받고는 뒤로 몇걸음 물러섰다. 잠시 머뭇거리던 젠쿠는 이내 뒤로 돌아 어디론가 달려갔다. 젠쿠의 낮은 목울음이 흘러나오고 몇명의 늑대들이 젠쿠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나머지 전사들은 모두 로리타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왔다. 낯익은 늑대들은 없었지만 전사들은 모두 로리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그 녀가 무슨 말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듯 했다. "뭐하는 거에요?" "대장이 말했다. 대책이 있는 모양이니 조언을 부탁하라고. 우리들은 네 지시에 따른다." "……." 일사분란한 행동이었다. 로리타는 라이컨슬로프 부족전사의 힘을 그제서야 알아 차릴수 있었다. 무리를 이끄는 대장의 한마디에 그들은 무조건 따른다. 설령 그것 이 전혀 다른 종족에게 머리를 숙이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 기는 문제는 적을 쓰러트리는 것 뿐인듯 했다. 로리타는 로브를 벗고 가벼운 차림이 되었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해서 정령을 소 환했다. 이내 눈앞에 물의 정령 언딘(Undine)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 을 한 언딘은 로리타의 의지에 따라 늑대들의 몸을 감쌌다. 늑대들은 자신들의 몸 을 갑옷처럼 보호하는 물의 장막을 보고 가볍게 감탄하는듯 했다. 로리타는 짧게 말했다. "젠쿠가 돌아올때까지 제르뮤가 어디 못가도록 해요. 정령으로 방어해 주겠어 요." "좋다. 다크엘프." 늑대들은 모두 흩어졌다. 물의 방어를 받은 늑대의 움직임이 더 빨라져 있었다. 샐러맨더의 열기를 견딜수 있기 때문이었다. 늑대들은 광전사의 주의를 끊임없이 혼란시켰다. 광전사는 열기를 내뿜으며 늑대들의 접근을 막았지만 한발자국도 움 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로리타는 젠쿠가 사라진 곳을 애타게 바라보 며 계속 언딘을 소환하고 있었다. "로리타!" 어둠 사이를 뚫고 무언가가 달려오고 있었다. 젠쿠였다. 젠쿠의 뒤로는 누군가를 안은 늑대 몇마리가 보였다. 그것은 축 늘어져 있었다. '설마…….' 젠쿠가 곁으로 다가왔을때 로리타는 할말을 잃어버렸다. 젠쿠의 얼굴이 백짓장처 럼 하얘서도 아니었다. 절망해버린 늑대의 표정을 봐서도 아니었다. 로리타의 눈앞 에 누워있는 것은 절대로 믿고싶지 않은 현실이었다. 그것은 이미 죽어버린 디네 즈의 시체였다. "디네즈!" 로리타의 집중이 사라지자 언딘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늑대들은 모두 급히 자리 를 피했고 행동이 늦은 늑대 몇마리가 털을 태워버렸다. 그러나 사상자는 없었다. 하지만 로리타는 기절해버리고 싶은 현실을 감내해야 했다. 그녀의 몸은 아직 온기가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미 죽은 것이다. 영 혼이 몸을 떠나진 않았지만 되살릴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디네즈만이 폭주해버린 제르뮤에게 강한 정신적 충격을 줄수 있었다. 또한 로리타가 네레노디아의 심장에 접근할수 있는 기회를 만들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그 모든 상황이 날아가버린 것 이다. "로리타!" 젠쿠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로리타는 멍해진 눈을 그에게 돌렸다. 젠쿠의 표 정이 공포로 질려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천천히 다가오는 제르뮤가 있었 다. 제르뮤는 불꽃이 넘실대는 검을 든채 로리타와 디네즈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피해!" 젠쿠가 소리쳤지만 로리타는 움직일수 없었다. 아니,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가장 소중한 사람인 제르뮤는 광전사로 변해버렸고 그를 되돌릴수 있는 희망인 디 네즈는 죽어버렸다. 어쩌면 제르뮤가 변한 이유도 디네즈가 죽었기 때문인지도 몰 랐다. 로리타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제르뮤의 검을 기다렸다. 광전사는 어차피 죽는다. 제르뮤가 죽는다면…… 자신도 살고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제르뮤의 검은 로리타를 내려치치 않았다. 로리타는 눈 을 뜨고 눈앞의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르뮤가 디네즈의 옆에 주저앉아 있었다. 불길이 넘실대던 붉은 검은 고철덩어 리처럼 오른손에 늘어져 있었다. 피에젖은 은회색 머리카락아래 빛나던 그의 눈동 자는 텅 비어있었다. 이미 죽어버린 눈이었다. 모든것을 포기하고 의욕을 잃어버린 눈이었다. "디…… 네…… 즈……." 제르뮤의 입이 실낱처럼 열리고 단 세마디를 읊었다. 그리고 그대로 석상처럼 굳 어있었다. 퓨리의 모습은 제르뮤의 근처에 없었다. 아니, 제르뮤의 가슴 부근으로 빨려들어 가며 절규하는 퓨리의 모습이 있었다. 무한한 마력을 가진 네레노디아의 심장…… 케르페르트의 봉인이 퓨리마저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로리타는 볼수 있었다. 심장에 갇혀가면서 까지 퓨리가 그러쥔 또다른 영 혼이. 그것은 분명 제르뮤의 영혼이었다. 하지만 영혼의 눈조차 깊은 슬픔을 담은 채 디네즈를 향해 있었다. "제르뮤……." 로리타는 가슴 깊숙히 끓어오르는 절망감을 느꼈다. 디네즈의 죽음…… 그것은 자신도 모르던 희망으로 그녀의 마음에 다가왔던 것이다. 제르뮤의 시선이 자신에 게 올수 있을것이라는…… 단순한 소망이. 하지만 그것마저 철저하게 무너져버린 것이다. 로리타는 천천히 손을 뻗어 제르뮤의 가슴에 갖다대었다. 얇은 옷 너머로 묵직하 고 강대한 네레노디아의 심장이 느껴졌다. 심장은 퓨리를 거의 먹어치우고 있었다. "죽음을 관장하는 시간의 강물이여……." 로리타는 울음을 참아내며 금지된 주문을 조용히 읊기 시작했다. "영혼의 무게를 감내하는 저울을 바치니…… 시간의 흐름이여 멈추거라." 강력한 마력이 네레노디아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와 로리타의 몸으로 흘러들었다. 온몸을 칼로 갈기갈기 찢어내는 듯한 고통이 온몸을 뒤덮었다. 로리타는 이를 악 물고 참았다. 견디지 못하면 죽는것은 제르뮤일 것이다. 넘실대는 마력은 날카로운 검이되어 로리타의 영혼을 깎아냈다. 영혼의 무게…… 그것은 엘프로서 약속받은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정해진 수명을 제물 로 삼아 시간을 멈추는 마법…… 다크엘프 족이 마왕 케르페르트에게 영혼을 판 댓가로 받은 금단의 마법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혼미해진 정신 사이로 네레노디아의 심장이 극단적으로 커 지는 것을 볼수 있었다. 제르뮤의 가슴에서 커지기 시작한 붉은 심장은 거대한 크 리스탈이 되어 디네즈를 삼키고 있었다. 심장은 마치 해파리의 촉수처럼 제르뮤를 휘감았다. 크리스탈은 디네즈를 완전히 삼키더니 강렬한 붉은 섬광을 뿜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그곳에는 숨쉬듯 붉은 광채를 발하는 거대한 크리스탈과 붉은 촉수에 감겨있는 제르뮤의 모습이 있었다. 디네즈가 입었던 옷은 모두 사라 져 있었다. 균형잡힌 아름다운 나체만이 크리스탈의 안에 있었다. 로리타는 멍한 눈으로 아름다운 디네즈를 바라보았다. 정지된 시간속에 갇힌 그 녀의 모습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빼앗을 정도로. '영원한 휴식……' 로리타는 중얼거렸다. 죽음이란 단어가 이렇게 절실히 다가온 것은 처음이었다. 이제 로리타는 더이상 영원한 삶을 사는 엘프가 아니었다. 수명이 얼마나 줄어들 었는지, 그리고 언제 죽어버릴지 알수 없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최소한…… 쓸모없는 다크엘프의 영혼으로 두 사람을 살릴 기회를 얻었으니까. 로리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크리스탈로 다가섰다. 크리스탈은 낮은 진동음 을 내며 로리타에 공명했다. '살릴거야…… 깨울거야. 모든것을 바쳐서라도…….' 로리타는 어느덧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은 생소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아마 도 이 눈물이 마지막으로 흘릴수 있는 눈물일 것이다. 시간의 마법을 유지하기 위 해서는 모든 감정을 없애야만 한다. 그것만이…… 그것만이 제르뮤를 살릴수 있는 길이었기에. 순간의 기억이지만 그것은 로리타의 마음을 다시 냉정하게 만들었다. 제르뮤는 살렸지만…… 이제 남은것은 디네즈였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봉인을 유지해야 했 다. 로리타는 차가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는 자카드를 깨우러 가겠습니다." 찬물을 끼얹은 듯이 회의실은 조용해졌다. 디트리히는 세이렌을 안은채 멍한 시 선을 로리타에게 보내고 있었다. 이해할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로리타는 몸을 돌려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녀의 눈에는 물기조차 없었다. * * 설정상....로리타는 너무 불쌍하게 되어 있습니다. 스토리상 어쩔수 없는 노릇이죠. 개인적으로 정말 싫지만....에휴........ (난 로리콘인가 부다....) 다크스폰이었습니다. 추신 : 언젠가 제게 글쓰는 방법 가르쳐 달라시던 분……은 제가 써둔 글쓰기 강 좌가 있으니 한번 읽어보세요. 충분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게시판-SF & FANTASY (go SF)』 20494번 제 목:[darkspwn] 라이컨슬로프-73 올린이:darkspwn(유민수 ) 99/01/17 00:52 읽음:333 관련자료 없음 ----------------------------------------------------------------------------- 라이컨슬로프 EDITION II 73. 마경(魔境)이란 곳이 있다. 일상적인 생각과 관념에서 벗어나는 그 무엇인가가 모 인 장소를 마경이라 부른다. 어둠보다 더 어두운 암흑의 숲, 과거를 반추하며 현재를 부정하는 화석의 숲, 살 아있는 것을 거부하는 열사의 사막. 로메오 대륙에는 이렇게 세 장소의 마경이 있 다. 마경이 언제 생기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나타났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그저 전설속에서 세상이 열릴 때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을 진실처럼 받아들일 뿐이었다. 그러나 최소한 이제 로메오 대륙의 주민들은 마경이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조화를 거부하는 조화의 숲, 켈레만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눈 앞에 펼쳐진 그린듯한 켈레만의 풍경은 가벼운 전율마저 느끼게 하고 있었다. 존재할수 없는, 상상속에나 가능한 아름다운 풍경. 그것은 모순으로 가득한 현실 속에서 엄청난 부조화를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다수의 존재하는 풍경속에 자로 잰 듯이 반듯한 켈레만은 툭 튀어나온 부조화일 수밖에 없었다. '조화롭지 못한 조화…….' 그루닌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켈레만이 괴기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그 것인 듯 했다. 켈레만은 아름다운 대지였다. 곧게뻗은 나무들과 티끌한점 없이 새파란 하늘. 멀 리 하늘위로 한가롭게 새가 날고 숲에 들어가는 잔디밭 위에는 조그만 토끼와 사 슴이 풀을 뜯고 있다. 오히려 켈레만임을 알리는 입구의 말뚝이 보기싫을 정도로 극명한 조화를 드러낸 숲이었다. 마치 전설속의 아름다운 '이데로스'의 풍경을 그 린 것처럼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같았다. 하지만 풍경에 심취해 있던 그루닌의 생각을 현실로 끌어내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이 반쯤 뜯겨나간 토끼가 그루닌의 구두 뒤축을 물어뜯은 때부터 그루닌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곳이 켈레만…….' 그루닌은 한걸음 한걸음 발을 내딛으면서도 신경이 갉아먹히는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모든것이 너무나 완벽하게 보여 길을 걸어가는 자신들이 있어야 할 곳 이 아니라는 거부감이 강하게 들고 있었다. 나무 하나 풀 한포기, 모든것이 잘 계 획되고 맞춰진 것처럼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갑자기 난입한 불청객인 그루닌 일 행들은 조화를 깨트리는 물건처럼 여겨질 뿐이었다. "베니스보다 더 위험한 곳이군." 무거운 어조로 루돌프가 중얼거렸다. 켈레만에 들어온 이후 루돌프는 모습은 변 해버렸다. 말이 없는 온후한 정치가에서 최전선에 나선 기사로 돌변한 것이다. 루돌프의 눈 과 귀는 전투에 나선 전사처럼 주위의 모든것들을 하나하나 검사해 나가고 있었 다. 그의 움직임이라든가 집중력은 그루닌의 수준을 가볍게 능가하고 있었다. 실제로 루돌프는 그루닌을 덮치려 했던 데드맨 둘을 찾아내기도 했다. 데드맨들 은 발각된 것이 들통나자 눈썹이 바람에 휘날리게 사라져버리기는 했지만, 그루닌 은 깊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 상처가 난 것은 자존심이었다. 기사의 자존심은 그루닌이 가장 소중히 지켜왔던 것이었다. [군주에게 충실하고 레이디에게 성실하라.] [적을 상대할때 사자와 같이 용감하며 뱀처럼 신중하라.] [백성을 대할때는 정중한 귀족이며 자신을 대할때는 엄격한 스승이 되어야 한 다.] [이 모든 덕목을 갖춰야만 기사(騎士)라 불릴수 있으리라.] 유노의 경전에 명시되어 있는 이 기사도(騎士道)를 지키며 뛰어난 전사이자 기사 로서 사는것이 그루닌의 목표이자 생활이었다. 드래곤 나이트가 될 때에도 그루닌 은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기사가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 맹약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베니스에서 그루닌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은 것이나 마 찬가지였다. 포링보다 먼저 체체파리를 발견하지 못했으며 기사도를 지키려다 포르켄을 잃었 다. 레이디를 지켜야 하는데도 클렌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눈앞을 가로막은 수 많은 데드맨들에게 절망하여 기사의 기본조차 지킬수 없었다. 영혼까지 퓨리에게 버리려는 것도 제르뮤의 도움으로 살아났고 결국 켈레만에서조차 루돌프에 눌려 쓸모없는 군더더기 신세가 되었다. 이래서야 최고의 기사라는 드래곤 나이트의 빛 이 바래버릴 지경이었다. 베니스에서 말을 잃어버린뒤 일행은 걸어서 켈레만을 통과하고 있었다. 제일 선 두에 루돌프와 포링이 나서고 중간은 지팡이를 짚고있는 클렌이며 후미엔 그루닌 과 제르뮤였다. 제르뮤는 마치 여행을 떠난 여행자처럼 유유자적한 채로 경치를 구경하고 있었다. 오히려 속편한듯 보이는 제르뮤가 그루닌은 부러울 뿐이었다. "우울하신듯 하군요." 그루닌은 고개를 들어 말을 건넨 클렌을 바라보았다. 조금 젖혀진 그녀의 붉은 두건 사이로 흰 머리카락이 보였다. 조금은 괴기스러운 모습이었지만 그렇다고 해 서 그녀의 천진한 모습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클렌은 신관의 지팡이를 짚은채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잠시 생각할게 좀 있어서……." "베니스에서의 일이라면 신경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클렌의 얼굴에 엷은 그늘이 졌다. 그녀는 두건을 조금 잡아당겨 흰 머리카락을 완전히 숨겨버렸다. 그루닌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무례를 범한것은 죄송합니다." "고의가 아니었으니 상관없습니다." 클렌은 밝게 미소지었다. "그것은 사고였으니까요." "……사고 여부를 떠나 무례를 범한 사실은 덮어둘 일이 아닙니다. 왕국으로 돌 아가는 대로 기사단에 의뢰해 응당한 처벌을 받을 생각입니다." "……" 클렌의 눈빛이 기이한 빛을 띄었다. 그녀는 매우 복잡한 시선으로 그루닌의 얼굴 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루닌은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수 없었다. 그러나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날아왔다. 노래하듯 제르뮤가 쾌활한 어조로 중얼거린 것이었다. "군주에게 충실하고 레이디에게 성실하라…… 사자처럼 용맹하고 뱀처럼 신중하 라. 백성을 대할때는 정중한 귀족이며 자신을 대할때는 엄격한 스승이 되어야 한다. 그루닌도 역시 기사도를 숭배하는 분인가 보군요." "……." 그루닌은 제르뮤를 바라보았다. 제르뮤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그루닌을 주시하 고 있었다. 베니스에서 찾아낸 가벼운 체인메일로 무장을 갖춘 그의 모습은 기사 의 수발을 드는 견습생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너무 어리게 보이는 인상 탓일 것이 다. 그루닌은 고개를 숙여 긍정했다. "제가 살아가는 목적이니까요, 풍룡왕의 나이트." "풍룡왕의 나이트라……." 제르뮤는 쿡쿡 거리며 가볍게 웃었다. 소풍나온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미소였다. 잠시 무언가 생각하던 제르뮤는 어조를 조금 낮추며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나요?" "기사도를 지키며 충실한 기사가 되고자 합니다. 그것이 기사로서의 목적……." "잠깐만요.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루닌의 말이 시작되자마자 제르뮤는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루닌은 입을 벌 린 상태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말이 중간에 잘리는 것은 별로 기분좋은 일이 아 니었으나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제르뮤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가로운 걸음걸이로 북부가로를 걸으며 제르뮤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내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군주에게 충실하면서 레이디에게 성실할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만일 군주가 레이디를 죽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실겁니까? 레이디를 죽일건가 요?" "네? 아, 그……." 그루닌은 말문이 막혔다. 제르뮤의 질문은 간단한 것이었으나 대답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펜다즈 집안은 대대로 제스타 대공을 보호하는 기사단의 일원이었다. 군주를 섬기고 레이디를 경애하는 것이 당연시 되어있었다. 유노의 가르침이 생활 깊숙히 배어있는 제스타 공국의 기사란 당연히 기사도를 따라야 했다. 제스타 공국의 '크루세이더' 기사단이란 신을 섬기는 신관과도 맞먹는 예절과 법 도를 몸에 지녀야 했다. 그루닌은 크루세이더 기사단의 가디언이었다. 대공을 지키 는 만큼 정의에 대한 갈구가 무엇보다 강했고 또한 그것은 기사단의 실질적인 우 두머리인 제스타 대공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루닌은 격한 어조로 제르뮤의 질문을 부인했다. "그런 말도 안되는 상황이 있을리가 없습니다." "만약이라는게 있잖아요." "그런 주군이라면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루닌…… 당신은 예전에 제스타 공국의 크루세이더 기사단이었다고 들었습니 다." "……." "당신은 어째서 제스타를 떠났습니까? 정의로운 크루세이더의 백기사는 절대로 주군을 배반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요."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저절로 터져나오는 고함에 그루닌은 스스로 놀랐다. 그의 주먹이 꽉 쥐어져 있었 다. 쥐어진 손아귀에 잡힌 연보랏빛 손수건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너무 세게 쥐어 진 나머지 손수건이 다시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을 알아차릴수 있었다. 상처가 다 시 벌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루닌은 통증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루닌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제르뮤를 쏘아보았다. "나는…… 배반자가 아닙니다. 정의를 수호하는 백기사입니다. 나는 크루세이더 의 기사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여기에 있습니다. 내 생각에 명예롭게 제스타를 떠나진 않았다 고 판단되는데요." 맑은 빛을 띄는 제르뮤의 눈이 그루닌에게 똑바로 향했다. 순수해 보이는 소년의 눈동자는 그루닌의 마음속까지 읽어내는듯 했다. 그루닌은 강한 두려움마저 느껴 야 했다. 일견 순진해 보이는 제르뮤는 무서울 정도로 강렬한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상대 를 꼼짝할수 없게 만드는 화법도 그렇지만 모든것을 알고있다는 듯한 그의 눈동자 는 그루닌의 가슴을 심하게 압박했다. 그루닌은 제대로 숨도 쉴수 없었다. 제르뮤는 부드러운 말투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엄격한 백기사가 어쩔수 없이 제스타 공국을 떠나야만 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일이 있었겠죠. 당신의 성격으로 볼때 절대 주군에게 해가 될 일은 하지 않았 을테니 잘못은 주군에게 있었겠군요." "……제스타 대공은 잘못이 없습니다! 그를 모욕하지 마시오! 그는…… 그는 ……." "잠시 오해를 했다 그거죠?" "그렇습니다. 그건 아주 사소한……." "그 사소한 결과가 당신을 추방시켰군요. 아주 사소한 오해가." "……." 모든것이 무너져버렸다. 마지막 지탱하던 것까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루닌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온몸에 힘이 빠져버린 것이었다. 제르뮤는 망연자실한 그루닌을 물끄러미 지켜보고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제가 아는 사람중에 에드거라는 모험자가 있습니다." "……." 그루닌은 제르뮤를 바라보았다. 그는 과거를 회상하는지 그윽한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지옥같은 열사의 사막을 일주일만에 돌파할 정도로 뛰어난 모험자입니다. 하지 만 그는 팔이 하나 없는 장애자입니다." "……!" "그가 이런말을 하더군요. 독이란 약한 생물에게 있는 거라구요." 제르뮤는 날카로운 시선을 선두에서 묵묵히 걷고있는 루돌프에게 던졌다. 루돌프 는 그루닌과 제르뮤의 대화엔 관심이 없는듯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있었다. 제르 뮤는 루돌프에게 말하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독을 품고 있는것처럼 보입니다, 그루닌. 기사도라는 맹독(猛毒)을 말이 죠." "……독?" "자유로운 영혼을 얽어매는…… 아주 지독한 독이죠." 제르뮤는 빙긋 미소지었다. "그루닌. 당신은 강합니까?" 제르뮤의 물음은 단순했다. 그러나 역시 그루닌은 대답할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전혀다른 질문으로 그루닌의 머릿속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나는 왜 기사 가 되었을까…… 어째서. 제르뮤는 어깨를 쭉 폈다. 작은 그의 키가 더욱 크게 느껴지고 있었다. 제르뮤는 밝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강해질겁니다. 드래곤 나이트는 모두 강하니까요." * * 당신은 강합니까? 다크스폰이었습니다. 묘사가 부족하군요...책으로 낼때는 좀더 보강해야 겠네요. (700장에서 끝내려고 했는데.....6장으로 조금 줄여야 하나....) 추신 : 비평 좀 보내주세요. 출판에 사용할 비평을 찾고있습니다...팬레터는 많은데 쓸만한 추천글이 없군요. ^^ 『게시판-SF & FANTASY (go SF)』 20946번 제 목:[darkspwn] 라이컨슬로프-74 올린이:darkspwn(유민수 ) 99/01/20 01:54 읽음:301 관련자료 없음 ----------------------------------------------------------------------------- 라이컨슬로프 EDITION II 74. 루돌프의 발걸음이 멈춰섰다. 그루닌은 온몸을 긴장시키고 루돌프의 옆으로 걸어 갔다. 제스파즈로 통하는 길이 완전히 막혀있었다. 바싹 말라 불쏘시개로 쓰면 좋을만 한 장작들이 산더미 처럼 쌓여있었다. 북부가로 주변은 울창한 나무들이 빽빽히 들어선 것이 누군가가 일부러 갖다놓은 듯 보였다. 게다가 상당히 넓게 쌓여있어 주위를 돌아 피해가려고 해도 그리 쉽게 갈수는 없어 보였다. 루돌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낮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어쩌려는 생각일까……." "……우리가 장작더미에 올라가면 불을 지르려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 루돌프는 그루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농담인가 진담인가를 심각하게 고려하 는듯 하더니 이내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루닌은 머 쓱해져 쓴 입맛을 다시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렇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니겠죠?" 루돌프는 다시 차 한잔 마실 시간을 두고 그루닌을 바라보았다. 침묵이 지나가고 루돌프는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루닌 경. 진지하게 대답해 주십시오. 우린 적의 소굴 한가운데 들어와 있습니 다." "……정답인것 같은데요." 제르뮤였다. 제르뮤가 머리를 끄덕이며 그루닌의 의견에 동감하고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의 대답에 루돌프와 그루닌은 잠시 할말을 잃어버렸다. 루돌프는 이성을 유지하느라 무척 애를 쓰며 제르뮤에게 말을 건넸다. "자네마저 그러기인가? 농담할 상황이 아닐세." "농담이 아닙니다, 루돌프. 그 외의 목적은 생각할수 없어요." 제르뮤는 날카롭게 반문했다. "……아무래도 곤란한 상황이 될것 같습니다." 심각해진 그의 표정에 루돌프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르뮤는 클렌에게 물 었다. "레이디께선 신관이니 데드맨을 깨끗이 없앨수 있겠죠? 준비를 해 주십시오." "네? 아, 네." 클렌은 서둘러 지팡이를 거꾸로 돌려쥐고 바닥에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풀을 베 는 큰 낫처럼 긴 칼날이 툭 튀어나왔다. 언제봐도 살벌한 칼날이었지만 제르뮤는 눈 한번 돌리지 않고 말했다. "저희가 방어해 드릴테니 될수있는한 많은 녀석들을 처리해 주시길 바랍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데요?" "천만에요." 제르뮤는 갑자기 오른손을 치켜올렸다. 그의 붉은 암숄더가 급격하게 검의 형태 로 모양이 바뀌어갔다. 제르뮤는 등 뒤를 돌아보며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떼거지로 기다리고 있어요." 우와아앗! 엄청난 함성이었다. 고막이 웅웅 울릴정도로 많은 수의 사람들이 지르는 고함이 었다. 그루닌과 포링은 놀라 자신도 모르게 몇걸음 뒤로 물러섰다. 주변의 나무들 뒤에서 제각기 검과 방패를 든 데드맨들이 하나 둘 튀어나오고 있 었다. 군데군데 썩어버려 뼈가 드러난 몸을 하고도 그들은 기묘하게 반짝이는 눈 동자로 그루닌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죽어버린 시체라고는 볼수없는 지능이었 다. 지나가지 못하도록 나무를 쌓아두고 뒤를 포위하는 전형적인 매복전술이었다. 그루닌 일행이 당황한 사이 나무 뒤에서 엄청난 수의 데드맨들이 북부 가로를 포 위해 버렸다. 그들은 검을 들어 그루닌 일행을 나무더미 쪽으로 밀어붙이고 있었 다. "붙여라!" 어디에선가 쉰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러자 데드맨들 뒤편에서 불화살 몇 개가 날아 나무더미 위에 꽂혔다. 바싹마른 장작은 불길이 닿자마자 맹렬한 기세로 타 올랐다. 그것은 거대한 불의 벽이었다. 불의 벽이 그루닌 일행의 퇴로를 완전히 막아버린 것이었다. 제르뮤는 가볍게 냉소했다. "머리 좀 썼는데." 이내 기분나쁜 어투의 목소리가 데드맨들 사이에서 터져나왔다. "죽여라!" 우아아앗! 데드맨 다섯 정도가 검을 치켜든채 제르뮤에게 달려들었다. 흉흉한 기세로 날아 오는 검들이 반사하는 빛 때문에 제르뮤의 주변은 일순간 하얀 검광으로 덮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제르뮤는 어지러운 빛 사이로 다섯개의 검이 목과 팔 그리 고 다리를 노리고 있는것을 똑똑히 볼수 있었다. "이런." 제르뮤는 가볍게 혀를차고는 갑자기 몸을 앞으로 날렸다. "아앗!" 당황한 데드맨의 탄성이 터져나오고 제르뮤의 머리위로 검날 두개가 스쳐지나갔 다. 제르뮤는 검을 가볍게 내리찍어 다리를 향한 검 두개를 막아버렸다.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리고 제르뮤는 앞으로 돌진했다. 눈 바로 옆으로 데드맨의 검이 날아 오고 있었다. 한쪽 눈이 썩어 뭉그러진 데드맨의 시큼한 냄새까지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간 제르뮤는 검을 그러쥔 데드맨의 손을 잡고 당겨버렸다. 데드맨의 엄청난 힘이 느껴지고 제르뮤는 몸을 빙그르르 돌려 바닥에 꽂은 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크아아악!" 싯뻘건 화염이 치솟았다. 제르뮤의 검……푸르그슈타르에서 뿜어진 화염이 검날 처럼 데드맨 다섯을 한순간에 두토막 내버렸다. 제르뮤는 휘두른 검을 회수하는 동시에 허공에 뜬 데드맨 조각을 다시한번 그어버렸다. "으아악!" 불길이 허공에 춤을추고 데드맨 다섯은 일순간에 회색 잿더미가 되어 바닥에 흩 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제르뮤가 있었다. 제르뮤는 사신(死神)처럼 희미한 미소를 지 은채 데드맨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순간의 일이었다. 다섯이나 되는 데드맨들이 어처구니 없이 소멸된 것이었다. 믿지못할 광경에 데드맨의 무리들은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이미 공포를 느 끼지 못할 데드맨의 눈이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제르뮤는 천천히 앞으로 한발자국을 내딛었다. 단지 한발자국이었지만 데드맨들 은 완전히 혼란상태에 빠져버렸다. 저마다 아우성치며 뒤로 빠르게 물러나고 있었 다. "정신차려! 저놈은 하나야!" 쉰 목소리가 다시 호령을 하자 데드맨 무리가 주춤거리며 멈춰섰다. 제르뮤는 힘 차게 소리질렀다. "클렌! 지금이야!" "준비됐습니다!" 제르뮤는 재빨리 몸을 돌려 옆으로 달렸다. 그의 뒤에는 낫을 든 채 주문을 영창 하는 클렌이 있었다. 클렌의 신관 지팡이에서는 이미 시커먼 죽음의 기운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붉은 로브의 클렌은 두손으로 낫을 잡고 머리위로 치켜올렸다. 그 모습은 마치 죽은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라그도메제키아스처럼 장엄하기까지 했다. 클렌은 날 카롭게 외쳤다. "저승의 규약을 깨는 저열한 것들아! 신의 힘에 의해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 가라!" 클렌의 낫이 내리쳐졌다. 시커먼 기운이 데드맨들을 향해 덮쳐갔다. 그 기운은 지 옥의 밑바닥에서 기어다니는 아귀(餓鬼)의 이빨처럼 데드맨들의 썩어가는 몸을 참 혹하게 난도질했다. 검은 기운이 닿은 데드맨은 그대로 썩어 재가 되어버렸다. 괴롭게 몸부림치던 데 드맨의 몸에서 영혼이 하나 둘 해방되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 고통에 신음하던 영 혼들은 썩은 몸에서 빠져나가자마자 강렬한 햇살에 녹아버리듯 어디론가 사라져버 렸다. 데드맨들은 검을 들고 있었지만 이미 싸울 의지를 완전히 상실해 버린듯 했다. 그것은 전쟁터에서 겁을 집어먹은 병사의 모습이었다. "으으…… 살려줘!" 몇몇 데드맨들이 검을 버리고 숲 쪽으로 줄달음질을 쳤다. 그러나 그들은 멀리 도망가지 못했다. 데드맨들 사이에서 무언가가 그들을 향해 빠르게 날아간 것이었 다. 아차 하는 순간 그것은 데드맨의 몸을 뚫고 나무에 박혀버렸다. "아아악!" 도망치던 데드맨은 몸부림쳤다. 그들은 등에서 가슴으로 삐어져 나온 그것에서 도망치려 버르적거렸지만 꼬치에 꿰인 벌레처럼 허무한 몸짓일 뿐이었다. 데드맨을 뚫은것은 하얀 뼈였다. 하얀 뼈가 뾰족한 창처럼 데드맨을 꿰어놓은 것 이었다. 쉬어터진 목소리가 공포에 떨고있는 데드맨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배반자……." 데드맨들 사이에서 무엇인가가 걸어나왔다. 그것은 말을 탄 기사였다. 그러나 기 사의 오른쪽 상반신에는 살점이 남아있지 않았다. 절반이 백골이 된 끔찍한 모습 이었다. 기사는 하얀 이빨을 딱딱거리며 음침한 목소리로 외쳤다. "감히 베르제뷔트 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도망을 가? 영원한 고통속에서 벌레처 럼 발버둥쳐라!" 기사는 창에 꿰인 데드맨에게 차갑게 냉소하고 푸른 빛을 내뿜는 머리를 들어 제 르뮤를 노려보았다. 제르뮤 역시 냉정한 눈으로 기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사는 잠시 제르뮤를 바라 보더니 살점이 남아있는 왼쪽 부분으로 빙긋 미소를 지었다. "과연 베르제뷔트 님이 말한대로군. 아주 강한 전사야." "그는 어디에 있나." "어디에나 계시지." 기사는 가래끓는 듯한 어투로 냉소했다. "베르제뷔트 님은 켈레만을 만드신 분…… 켈레만이 그분이고 또한 그분이 켈레 만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영원한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위대한 뜻을 너희는 이 해하지 못해." "……위대한 뜻?" "그렇다. 소년이여." 기사는 클클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인간이란 누구나 영원한 삶을 살기를 원하지. 죽음을 두려워하고 피하려 갖은 애를 쓰지만…… 정해진 굴레에 따라 죽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운명에 의 해 이리저리 쏠리는 벌레같은 생활은 누구도 원하지 않아. 왜 그래야만 하지? 난 자유로운 영혼이다." "……." "너라면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강한 힘을 가진 자여. 삶과 죽음이란 동일하다. 너 역시 영원한 생명을 살고 싶을 것이다. 아무리 강한 자라도 죽음의 권능을 이길수는 없는 법……. 어떤가 그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가?" "그래서?" 기사는 대답했다. "우리와 함께 가자. 베르제뷔트님은 강한 전사를 사랑하신다. 나는 아직 얻을수 없었지만 너라면…… 너처럼 강한 전사라면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다. 함께 가지 않겠나? 자네 동료들은 안전하게 돌아갈수 있도록 내가 장담하지." 제르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루닌은 제르뮤와 기사를 번갈아 바라보며 불안한 마음을 감출수 없었다. 영원한 생명…… 그것은 모두가 바라는 꿈이었다. 게다가 그의 목적이 한 여성의 부활인 이상 베르제뷔트의 제안이 반가울수밖에 없 었다. '어떻게 하지…….' 그루닌의 목이 타들어갔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 비틀어져갔다. 그루닌은 굳은 제 르뮤의 안색을 계속 살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제르뮤는 픽 하며 실소를 터트렸다. 기사의 왼쪽 눈썹이 치 켜 올라갔다. 제르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탄식했다. "정말 어지간히 머리가 안돌아가는 녀석이군." "뭐야!" "지금 그걸 설득이라고 하고있는 거냐? 저걸 보라구." 제르뮤는 손을 들어 아직도 버르적거리고 있는 데드맨을 가리켰다. 기사는 의아 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제르뮤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르뮤는 차갑게 일갈했다. "영원한 생명이란걸 얻기 위해서는 너처럼 저런 짓을 해야 한다는 거잖아. 베르 제뷔트의 악취미 아니야? 이미 죽은 자를 반쯤 되살려서 장난감처럼 갖고 노는 메스꺼운 놀이." "……." "죽음이란건…… 수십년간 고된 삶을 살았으니 다시 태어날때까지 잠깐 편히 쉬 라는 휴식시간이 아니었던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 "영원한 생명? 모두가 원한다고? 베르제뷔트인가 뭔가 하는 자식에게 웃기는 소 리 하지 말라고 전해줘." 제르뮤는 코웃음을 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영원한 생명 달라고 애원한 적 없으니까 그냥 이대로 살다가 늙어죽게 내버려 뒀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그자식이 어디있나 말해. 잡아다가 머리통을 부숴버리게." "이 버릇없는 놈이!" 기사는 분에 못이겨 숨을 몰아쉬었다. 제르뮤는 가볍게 손짓을 해 그루닌과 루돌 프를 불렀다. 그루닌과 루돌프는 엷은 미소를 띄며 허리에서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클렌이 그들의 뒤에서 다시한번 주문을 욀 준비를 했다. 그녀의 얼굴에서도 잔잔 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제르뮤는 검을 들어 기사의 얼굴에 향한채 말했다. "더 할 말은 없나? 떠벌이 해골 아저씨?" "……." 기사는 말고삐를 잡은채로 잠시 침묵했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나고 기사의 반쪽 얼굴에서 미소가 떠올랐다. 아주 기분나쁜 미소였다. 그것은 상대를 비웃 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보일만한 경멸이 담긴 조소였다. 기사는 싸늘한 조소를 담은채 조용히 말했다. "이렇게 아둔한 녀석일 줄은……." "냅둬. 이렇게 살다 죽게." "그도 좋겠지. 모르는게 약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기사는 가볍게 코웃음쳤다. 그리고 허리에서 검을 뽑아들어 머리위로 치켜들었다. 제르뮤를 비롯한 일행들은 온몸을 긴장시키며 기사가 달려들기를 기다렸다. 그러 나 기사는 검을 든채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기사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면 죽어라! 강대한 힘에 의해!" 기사의 고함이 터져나오자마자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술취한 사람처럼 제자리 에 서있을수 없을정도였다. 기사 뒷편의 데드맨들이 모두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 졌다. 제르뮤와 루돌프는 재빨리 균형을 잡을수 있었지만 그루닌과 클렌, 그리고 포링은 서로 부둥켜안은채로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바닥에 엎드린채 그루닌은 기사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내 놀라움에 가득한 눈 으로 그의 뒷편을 주시해야만 했다. 기사의 뒷편으로 다가오는 그것…… 그것은 드래곤의 뼈였다. 엄청난 크기의 뼈…… 거대한 날개와 강인한 발톱이 햇빛아래 푸르게 번득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루닌이 놀란것은 뼈의 거대함 때문이 아니었다. 그루닌을 압도한 것은 드래곤의 머리때문이었다. 초록색 비늘로 가득 덮인 그린 드래곤…… 하지만 에인션트 드래곤이 분명한 거대한 크기에 입 주위에 감도는 짙 은 초록색의 숨결. 머리 아랫부분의 살점은 남아있지 않으나 남아있는 부분 만으 로 그루닌은 저 드래곤이 누구였는가를 쉽게 알아차릴수 있었다. 악몽처럼…… 제르뮤의 목소리가 그루닌의 귀에 들렸다. "가베라…… 가베라가 어떻게 여기에……." * * 5장도 거의 끝을 향해 가는군요. 흐음.... 6장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서서히 대단원을 향해 다가가는 라이컨슬로프...기대해 주십시오. 다크스폰이었습니다. 『게시판-SF & FANTASY (go SF)』 21122번 제 목:[darkspwn] 라이컨슬로프-75 올린이:darkspwn(유민수 ) 99/01/21 05:03 읽음:279 관련자료 없음 ----------------------------------------------------------------------------- 라이컨슬로프 EDITION II 75. 그루닌은 머릿속으로 언데드 악령에 대한 모든 지식을 있는대로 끄집어냈다. 혼 란한 의식 속에서도 뇌리에 뚜렷이 떠오르는 단어는 하나였다. 그것은 절망스러울 정도였다. '드래곤 본(Dragon Bone)……. 최악의 언데드 악령.' 죽은 시체가 스스로 움직이는 언데드(Undead) 악령. 그것은 영혼을 가진 생명체 와는 정 반대의 존재로 의지가 없는 인형과 비슷하다. 언데드는 사령술사(死靈術 士)나 마법사가 마술을 사용해 영혼이 떠난 시체를 조종하는 술법으로서 좀비 (Zombie)나 스켈레톤(Skeleton)이 가장 잘 알려진 부류이다. 다만 이미 죽었기 때 문에 행동이 느리며 단순한 행동 외에는 못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하지만 드래곤 본은 달랐다. 최강의 종족 드래곤의 좀비 형태인 드래곤 본은 살 아있을때의 모든 능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이미 죽었기 때문에 의지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흉폭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르르르륵! 듣기 거북한 목울음 소리가 울렸다. 그루닌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드래곤 본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드래곤의 볼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브레스를 내뿜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강산(强酸)이다! 피햇!" 그루닌은 있는힘껏 고함을 지르며 멍하게 서있는 포링을 붙잡고 뒤로 뛰었다. 그 루닌의 눈앞에 창백한 낯빛을 한채 낫을 치켜드는 클렌의 모습이 보였다. "모두 내 뒤로 와요!" 비명처럼 클렌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제르뮤와 루돌프가 허겁지겁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드래곤의 볼이 터질듯 풍선처럼 팽창한 것이었 다. "어서!" 클렌은 앞으로 한걸음 내딛으며 낫을 힘차게 휘둘렀다. 시커먼 기운이 낫에서 빠 져나와 얇은 막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드래곤의 입이 열리며 녹색의 기분나쁜 안개가 폭포처럼 클렌의 머리위로 쏟아졌다. "크윽!" 그루닌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클렌의 앞을 막아섰다. 시큼한 산의 냄새가 퍼지 며 녹색의 구름이 주위를 삼켜버렸다. 클렌의 놀란 모습 뒤로 얼굴을 손으로 가린 제르뮤와 루돌프가 있었다. 옷 주변에 강산으로 타버린 구멍이 보이긴 했지만 상 처는 없는듯 했다. '다행이다…….' 등이 타는듯이 뜨거웠다. 클렌의 방어막으로도 가베라의 강산은 전부 막을수 없 었던 것이었다. 녹색의 구름이 씻은듯 사라지자마자 그루닌은 갑옷을 통째로 벗어 내동댕이쳤다. 갑옷은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종잇장처럼 구겨져 버렸다. 드래곤의 브레스에 모두 타버린 것이었다. 그루닌은 통증에 못이겨 한쪽 무릎을 꿇었다. 클렌이 당황한 얼굴이 눈앞에 들어 왔다. "괜찮아요?" 하얀 그녀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루닌은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견딜만 합니다." 어처구니 없다는 투로 루돌프가 말했다. "제정신이오? 그린 드래곤의 강산 브레스를 맨몸으로 막으려 하다니." "강산 브레스는 익숙합니다. 성 드래고니안 기사들은 모두 한번쯤은 강산에 맞 은 경험이 있어요." "……기가 막힌 친구로군." 루돌프의 입가에 엷게 쓴웃음이 어렸다. 이런 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매력적인 미 소였다. 브레스에 익숙하다……라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드래곤의 브레스는 세상에서 제 일 지독한 공격이었다. 그린 드래곤의 강산 브레스, 레드 드래곤의 화염 브레스, 블루 드래곤의 번개 브 레스의 일격을 견뎌낼수 있는 물질은 없었다. 그루닌이 조금전의 브레스를 맞고도 살아날수 있었던 것은 클렌의 방어벽 덕분이었다. 그루닌은 온몸에 엄습하는 고통을 참으며 등 뒤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전 내뿜은 브레스의 여파로 클렌의 방어막 주변을 제외하고는 모두 누렇게 삭아있었다. 데드맨이라고 해서 브레스를 피할순 없었다. 길을 막아섰던 데드맨들 대부분이 드래곤 본의 강산에 녹아 질퍽한 액체로 변해 있었다. 그나마 남은 데드맨도 열명 남짓 뿐이었다. 그 안에는 말을 탄 기사의 모습도 있었다. 기사는 경악에 찬 눈으로 그루닌 일행 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럴수가……." 그루닌의 눈앞에 무엇인가가 어른거렸다. 그것은 빠른 속도로 기사를 향해 달려 가고 있었다. 붉은 그림자로 보이는 그것은 맹렬한 속도로 기사의 머리를 향해 날 아갔다. 기사는 검을 급히 들어올려 붉은 그림자를 향해 뻗었다. 카앙! 귀를 찢는듯한 금속성이 울리고 붉은 그림자는 기사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장난감처럼 기사의 목과 조각난 검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붉은 그림 자는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미쳐 날뛰는 유성처럼 남아있는 데드맨을 향해 날았다. 아차 하는 사이 데드맨들은 모두 두토막이 되어 바닥으로 널부러졌다. 그제서야 그루닌은 붉은 그림자가 무엇인지 알아차릴수 있었다. 그것은 제르뮤였 다. 투 핸드 소드처럼 거대해진 붉은 검을 든채로 제르뮤가 우뚝 서 있었던 것이 다. 제르뮤는 검을 들어 가베라를 똑바로 겨냥했다. 그의 검이 붉은 화염으로 덮여있 었다. 살기로 가득한 그는 미쳐버린 광전사처럼 보였다. "베르제뷔트!" 분노에 가득한 제르뮤의 절규가 퍼져갔다. 드래곤 본의 머리가 제르뮤를 향해 돌 아갔다. 드래곤 본의 볼이 조금씩 불룩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제르뮤는 피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큰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썩 나와! 베르제뷔트!" "제르뮤!" "가베라를 저렇게 만들다니…… 네 놈의 껍질을 벗겨놓고 말겠다!" 제르뮤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있었다. 그루닌은 아연해졌다. 절규하는 그의 모 습은 처절하기까지 했다. 제르뮤의 신형이 다시 허공으로 떴다. 붉은 그림자로 밖에 볼수없는 그의 모습은 곧장 드래곤 본을 향하고 있었다. 드래곤 본은 눈앞으로 닥쳐오는 제르뮤를 향해 거대한 날개뼈를 휘둘렀다. 그러나 제르뮤의 돌격은 너무 빨라 날개뼈가 다가오기 도 전에 벌써 드래곤 본의 목 근처에 가 있었다. "타아아앗!" 붉은 화염이 하늘에 붉은 궤적을 그렸다. 깨끗한 반원의 호선이 드래곤 본의 목 에 작열했다. 그러나 그것 뿐이었다. 제르뮤의 검이 바위에 부딪힌 것처럼 맹렬하 게 튀어나간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드래곤 본의 입이 열렸다. 녹색의 브레스가 허공으로 향해 폭사되었 다. 그러나 제르뮤의 공격이 가해진 탓에 브레스는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 클렌 의 뒷편에 불타고 있던 나뭇더미로 떨어져버렸다. 강산이 부어진 불길은 폭발하듯 타오르더니 이내 사그라들었다. 시큼한 구역질나 는 냄새가 사방으로 퍼지고 제르뮤는 중심을 잃고 허공으로 날아가버렸다. 그는 땅으로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 "제르뮤!" 그루닌의 눈앞으로 루돌프가 달려나갔다. 루돌프는 날아오는 제르뮤를 받았으나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땅바닥에 몇차례 굴러버렸다. 한참을 데굴데굴 구르던 루돌프와 제르뮤는 바닥에 튀어나온 바위에 부딪혀서야 멈출수 있었다. "큭……." 루돌프는 작게 신음을 내질렀다. 흙으로 엉망이 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상처는 제 르뮤가 더 심해 보였다. 온몸에 여기저기 상처가 난데다 입 언저리가 조금전의 충 격으로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제르뮤의 눈은 아직도 드래곤 본에 꽂혀있었다. 증오와 분노를 참지 못하 는 소년의 눈이었다. "죽여버리겠어!" 제르뮤가 억지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는 몇발자국 옮기지 못하고 다시 바닥 으로 쓰러져버렸다. 상처가 가볍지 않은듯 했다. 제르뮤는 검을 의지해 다시 일어 나긴 했지만 공격할 기운은 없어보였다. 그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이 담긴 눈으 로 드래곤 본을 노려볼 뿐이었다. 루돌프가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다시 브레스를 뿜을 준비를 하는 드 래곤 본을 노려보더니 가볍게 혀를 찼다. "어쩔수 없나……." 루돌프는 몸을 조금 낮추더니 용수철처럼 몸을 앞으로 퉁겼다. 유성처럼 보이던 제르뮤의 움직임과 거의 비슷한 동작이었다. 놀라울 정도의 움직임으로 달려나가 던 루돌프는 갑자기 손을 쭉 뻗어 제르뮤의 허리를 잡아 들었다. 어어 하는 사이 루돌프는 제르뮤를 그루닌에게 집어던졌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 동에 그루닌은 대비할 틈도없이 맹렬하게 충돌해 버렸다. 그 기세는 멈추지 않고 방어막을 준비하던 클렌까지 덮쳐 세 사람을 한덩이로 뭉쳐 넘어졌다. "카아아!" 루돌프의 고함이 들렸다. 혼미한 의식을 일깨우려 애쓰며 그루닌은 무의식적으로 루돌프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것은…….' 그루닌의 눈앞으로 드래곤 본에게 돌진하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 은…… 그것은 인간이 아니었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루돌프의 몸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루돌프의 얼굴이 무엇에 당겨지기라도 하는듯 입 주변이 앞으로 튀어나오기 시작 했다. 코끝은 점점 검어지고 폭발하듯 거친 검은 털이 얼굴 전체로 돋아났다. 갑옷 과 검은 허공으로 날아가고 하얀 송곳니가 비수처럼 드러났다. 양팔은 기괴하게 거대해지고 그 끝에는 열개의 섬뜩한 발톱이 마치 칼날처럼 튀 어나왔다. 엷은 푸른빛을 띄는 발톱은 공간을 찢어내는 혜성처럼 드래곤 본의 얼 굴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하얀 흔적으로 남아있는 그의 왼쪽 눈 너머로 이글대 는 짐승의 눈동자를 볼수 있었다. '라이컨슬로프…….' 드래곤 본의 입이 활짝 열렸다. 섬뜩한 녹색의 구름이 루돌프를 향해 거세게 짓 쳐들어갔다. 그러나 루돌프의 신형은 허공에서 갑자기 바뀌어버렸다. 하늘을 나는 새처럼 그의 몸이 방향을 틀어버린 것이었다. 푸화악! 브레스가 대지를 휘감고 루돌프의 몸은 벌려진 드래곤 본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목이 틀어막힌 드래곤 본은 온몸을 비틀며 저항했다. 그러나 루돌프는 두 다리와 한쪽 팔로 드래곤 본의 입을 벌리고 오른쪽 팔을 비수처럼 쑤셔넣어 버렸다. 크롸라락! 푸른 빛이 폭발하듯 터져나오고 드래곤 본의 머리는 말 그대로 조각조각 터져버 렸다. 굳어버린 것처럼 가만히 서있던 드래곤 본의 몸이 천천히 기울었다. 무너지 는 성처럼…… 드래곤 본의 웅장한 골격이 산산히 흩어지는 것이었다. 쿠웅! 지진처럼 땅을 울리며 드래곤 본은 쓰러졌다.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다는 최악의 악령이 먼지처럼 부스러지고 있었다. 그루닌은 자신의 눈으로 본 사실을 믿을수 없었다. 자욱한 먼지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걸어나왔다. 그것은 힘에 겨운듯 비틀거리며 드래곤 본의 뼈를 헤치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루닌은 자리에서 일어나 검은 그림자를 향해 다가갔다. 검은 그림자는 루돌프였다. 아니, 그루닌보다 머리 하나는 큰 검은 늑대…… 라이 컨슬로프였다. 라이컨슬로프의 오른팔은 대포에 맞은것처럼 어깨 아래로 너덜너덜 한 살조각으로 변해 있었다. 라이컨슬로프는 다가오는 그루닌을 푸른 인광(燐光)이 번득이는 오른쪽 외눈으로 쏘아보았다. 그루닌은 그에게 말을 건넸다. "루돌프씨?" "……." 라이컨슬로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우울한 시선을 그루닌의 등 뒷편으로 보 낼 뿐이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그루닌은 알고있었다. 검을 의지 하며 제르뮤가 그루닌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의 눈동자에는 놀라움에 가득했다. "이런 무모한 짓을……." "……." "바타쿠! 이런다고 고마워 할거라고 생각해요?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겁니까!" 루돌프…… 아니, 바타쿠란 이름을 가진 라이컨슬로프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맺 혔다. 늑대의 긴 입이 묘하게 치켜올라가는 것이 웃고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묘 한 울림을 가진 목소리로 루돌프는 입을 열었다. "자네는 내 가족이니까." "……." 제르뮤의 낯빛이 핼쓱해졌다. 단정한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디네즈를 잘 부탁하네. 네 말대로 정이 많은 아이지. ……마치 제 엄마처럼." 바람이 불어왔다. 미약한 바람이었지만 그것은 자연스러운 바람이 아니었다. 무언 가 거대한 것이 날갯짓을 할때 소용돌이 치는 바람이었다. 그루닌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남쪽 하늘 언저리에 거대한 물체가 있었다. 초록색의 그것들은 붉은 크리스탈을 함께 나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감정이 섞이지 않은 바타쿠의 목쉰 목소리가 울렸다. "이제야 오는군." 그루닌은 바타쿠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엷은 미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 다. 바타쿠는 무거운 어조로 제르뮤를 향해 말을 건넸다. "가족을 배신한 변절자라고 했던가?" "……." "이해할수 없겠지. 이해해 달라고 하지도 않겠네. 하지만 나는……." 바타쿠는 눈을 들어 하늘을 뒤덮은 그린 드래곤의 무리를 힐끗 올려보았다. 세이 렌…… 헤스펠…… 성 드래고니안의 모든 드래곤이 붉은 크리스탈의 촉수를 하나 씩 입에 문채로 그것을 나르고 있었다. 그들의 맨 앞에 석양처럼 붉은 비늘을 가진 레드 드래곤이 있었다. 태양빛에 반 사되어 아름다워 보이는 레드 드래곤의 등 위에는 로브자락을 휘날리는 다크엘프 의 모습이 있었다. "……가족을 사랑하네. 10여년 전에도 나는 저 아이를 버리지 않았어. 내 영혼을 걸어도 좋아." 눈도 뜰수 없을 정도로 거센 돌풍이 몰아치고 드래곤이 나르던 붉은 크리스탈이 제르뮤의 앞에 놓여졌다. 숨쉬듯 붉은 빛을 발하는 투명한 크리스탈의 가운데에는 섬뜩할 정도로 아름다운……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바타쿠를 닮은 모습의 여성이 있었다. 디네즈 다크메이스…… 바로 그녀였다. 바타쿠는 디네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베르제뷔트를 잡아야만 해. 게레리트…… 그것만이 저 아이의 희망이야." * * 에구구....힘들다. 이번 주나 다음 주면 5장이 끝날것 같군요. 피치를 올리고 있습니다...... 추신 : 열혈 추천을 올리고 계시는 JCHUN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