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ovel.munpia.com/71744 리멤버 더 네임 ======================================= [1] 프롤로그 햇볕도 겨우 들만큼 빽빽하게 나무가 들어선 숲 속, 이제 갓 7살은 넘었을 법한 어린 남자아이가 갈색 나무 토막 하나를 주어들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숲 속을 돌아다니는 일은 아무리 길이 익숙하다 할지라도 그 나이의 아이들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잔가지 하나, 떨어져 나뒹구는 전나무 껍질 하나가 소중했기에 아이는 등에 진 바구니에 나무 토막을 집어넣으면서도 눈은 또 다른 나무 토막을 찾고 있었다. 땔감으로 쓸만한 나뭇가지들은 이미 충분히 주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가 가능한 한 무게를 지탱할 수 있을 만큼의 땔감들을 모았다고 해야 맞겠다. 숲 속의 길은 길이 아니다. 잠깐 한 눈 판 사이에도 눈 앞의 길은 미로의 입구가 되기 일쑤였고 오래도록 걸어 난 길이라도 굴곡진 땅과 돌, 주변에서 뻗어나온 가지들을 피해가며 어렵게 나아가야만 했기에 쉬운 길은 아니다. 게다가 이제 겨우 다리에 힘이 붙기 시작하는 나이대의 어린 아이에게는 더욱 그랬다. “후흡, 후흡.” 짧은 호흡이나마 가다듬으며 무릎에 댄 조막만한 손을 살짝 털어내곤 몸을 곧추 세웠다. 오늘 중으로 배낭을 채우는 일이 요원하리라 생각했었지만 본인의 예상보다 훨씬 부지런했었기에 해가 지기 전에 배낭을 채우고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는 다시금 눈에 힘을 주고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당장이라도 집으로 돌아가 기뻐하실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며 가득찬 배낭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곧장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숲 속에서 무작정 달렸다간 힘만 빼고 말 일이었다. 부지런히 집으로 향하던 중, 해도 반쯤 넘어가 서쪽 산맥 위에 갈 때쯤 아이는 숲을 벗어날 수 있었다. 짙은 숲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니 나지막한 언덕이 저 앞에 보였다. 저 언덕 너머에 20가구 정도가 모여 사는 빈촌(貧村)이 있었다. 그 빈촌의 가장자리, 아버지가 공들여 지어놓은 두 칸짜리 통나무집에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숲을 빠져나오느라 힘이 많이 부쳤지만 목표가 보이기 시작하자 다시금 힘을 내어 앞으로 나아갔다. 어머니는 아마도 모직 앞치마를 둘러메고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저녁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2살 터울의 동생도 옆에서 어머니를 돕겠다며 식기를 준비하는 등의 부지런을 떨고 있을 테고. 그리고 이내 셋이 식탁에 앉아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하게 될 것이다. 아이는 자신이 얼마나 힘이 좋아졌는지를 자랑할테고, 오늘 따라 가득 찬 배낭을 내밀며 어머니에게 칭찬을 받을 것이다. 동생은 투덜대듯이 자기도 할 수 있다며 아이에게 다음엔 자기도 따라가겠노라고 칭얼대겠지만 아이는 어림도 없다는 듯 거절할 것이다. 어머니는 그 모습을 보면서 또 미소를 지을 것이고. 이미 상상만으로 아이의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고, 행복이 넘쳐 흐르는 듯 했다. 언제나 같은 일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아이에게는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시간들이었다. 비록 자신이 다른 이웃들에게 동정과 연민의 시선을 받는 처지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런 시선들에 울적해 있기보다 어머니와 동생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매일 매일 확인받을 수 있기에 남모를 자부심과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었다. 언덕을 넘어서자 빈촌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었지만 그래도 뿌듯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제는 힘을 아낄 필요도 없었다. 마을 가장자리에 조그만 텃밭을 끼고 있는 집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 아이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열며 소리쳤다. 평소보다 빨리 배낭을 채웠고 평소보다 더 빨리 집에 도착할 수 있었음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아이의 목소리는, 그러나 어두운 실내의 적막함에 사로잡혀 버렸다. 조용한 집. 아이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상황에 부딪히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리 집이 아닌가?’ 하지만 실내를 둘러보면 익숙한 집안 풍경이었다. 실내 가운데 놓인 탁자며, 벽에 걸려 있는 말린 채소들과 주머니들. 오른쪽 벽 한 면에는 두 사람 정도가 앉을 수 있게 만들어진 장의자도 매우 익숙한 물건이었다. “엄마?” 아이는 다시 한 번, 나지막한 목소리로 어머니를 불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엄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고, 동생 역시 대답이 없었다. 아이는 문 옆에 배낭을 풀어 놓고 거실 저편의 닫힌 문으로 다가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기발랄했던 발걸음은 너무나 무거워졌고 아이의 얼굴은 집안의 적막감이 가져온 무게 때문에 한 없이 어두워졌다. 문고리를 잡고 힘겹게 밀어 열었지만 방안은 거실보다 더욱 무겁고 어두운 공기로 가득차 있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입 안이 바싹 마르고 손 끝이 자기도 모르게 덜덜 떨려왔다. 지금껏 아이가 경험해보지 못한 가장 큰 두려움이 덮쳐왔다.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해진 아이는 눈물을 왈칵 쏟아냈지만 자신은 울고 있다는 자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엄마를 찾아야 겠다는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집 밖을 뛰쳐나왔을 뿐이었다. 울면서 집을 뛰쳐 나온 아이는 서럽게 외치며 어머니를 찾았지만 빈촌 어디에서도 응답은 들리지 않았다. 넓지 않은 빈촌을 가로지르며 어머니를 외치던 아이는 마을 중앙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무도 없었다. ‘무슨 일이냐?’ 며 자신을 불러 세우는 옆 집 아저씨의 걸걸한 목소리도 없었고 ‘괜찮니? 엄마 안계셔?’라고 안부를 묻는 윗집 아줌마의 목소리도 없었다. 마을에 단 하나 뿐인 동갑친구 브뤼엘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눈물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본 아이는 빈촌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아이는 고여 있는 눈물을 닦아내며 다시 주위를 천천히 맴돌며 인적(人跡)을 찾아보지만 언덕을 함께 타고 넘어온 바람만 얕은 소음을 남기고 지나갈 뿐이었다. 마을 가운데에 세워놓은 장대에 다다른 아이는 한 순간에 유령마을이 된 이 곳에서 유일한 사람임을 천천히 깨닫고 있었다. ‘엄마를 찾아야 돼.’ 좀 더 이성적으로 판단을 한다면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 추적을 해 나가야 했다. 하지만 조금은 덜 여문 아이의 머리로는 어머니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에만 몰두할 수 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마을 바깥에 일이 있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갔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아이는 자신이 들어온 언덕의 반대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엄마!’를 외치며. 아이가 집에 돌아온 것은 해가 지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해가 지면 동생과 하늘을 바라보며 관찰하던 별들이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었지만 전혀 올려다 볼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로 터벅거리는 걸음으로 빈촌에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아이는 생각했다. ‘어쩌면, 엄마가 벌써 돌아왔을지도 몰라.’ 그 생각이 들자마자 집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숲길을 걷고 마을 밖 너머 외진 곳까지도 뛰고 걸으며 지칠대로 지쳤지만 다시 힘을 내서 달려보는 아이였다. 어머니와 동생이 돌아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은 채로. “엄마!” 더 큰 목소리로 어머니를 부르며 집의 문을 열었건만 아까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 보다 더욱 심한 어둠과 적막이 아이를 맞이했다. 잠시 열린 문에 기대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참아보려 했던 아이였지만 쉽지 않았다.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장의자로 간 아이는 의자 위에 지친 몸을 뉘우며 생각했다. ‘여기서 기다려봐야지. 여기서 기다리면 엄마가 돌아오실거야.’ 눈물은 멈추지 않았지만 하루의 고단함과 피로를 이기기 어려웠던 아이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아이는 꿈을 꿨다. 집 밖에 놓여 있는 바위에 걸터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두드리고 있는 넓은 등. 아이가 다가가자 등의 주인이 아이를 돌아보았다. 아이를 돌아보며 씩 웃는 그 얼굴은 지금보다 더 어릴 때 보았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아이를 보며 물었다. “잘 잤니?” 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예, 아빠. 무서운 꿈을 꿨어요.” 아버지는 이내 고개를 돌리고 하던 일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아이에게 되물었다. “어떤 꿈을 꿨는데?” 아이는 아버지가 무엇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게 뭔지 보기 위해 아버지 앞으로 다가가며 대답을 했다. “모르겠어요. 너무 무서워서 계속 울었어요.” 아버지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망치를 내려쳤다. 조그만 나무 조각에 쇳조각을 박아넣고 계셨다. “이제는 괜찮아?” 아이는 궁금함을 참지 못해 한 발 더 다가갔다. “예. 근데 이게 뭐예요?” 아버지는 나무조각을 들어 보더니 이내 옆에 놓인 송곳을 들고 나무조각 위를 뚫기 시작했다. “이거? 선물이란다.” 아이는 아버지가 뚫린 구멍으로 가는 실을 꿰어 넣고 있는 걸 바라보다 물었다. “엄마 거예요?” 아버지는 낡은 헝겊을 들어 나무 찌꺼기들을 털어내고 쇳조각을 정성스레 닦기 시작했다. “아니.” 어쩐지 아버지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은 것 같다. “에이미꺼예요?” “아니.” “그럼 제 꺼예요?” 아버지는, 이제는 펜던트라고 불릴만한 모양새를 갖춘 나무 조각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 보다 아이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래. 니 꺼란다.” 아버지는 아이의 목에 펜던트를 걸어주었다. 아이는 펜던트를 들어 살펴보았다. 뽀얀 색깔의 나무 펜던트는 아버지의 엄지 손가락만 했는데, 가운데 네모난 모양의 쇳조각이 박혀 있었다. “이제부터 그게 널 지켜줄꺼란다.” “예?” 아버지는 다시 웃음을 지었지만 그 웃음을 바라보는 아이는 슬픔을 느꼈다. “네 이름이 뭐지?” “제 이름이요?” “그래. 이름이 뭐지?” “제 이름은…….” “그래. 잊지말거라. 그 이름을 기억해야 한단다.” “제 이름은…….” ======================================= [2] 명명식(1) “그래, 이름이 뭐니?” 아이는 낯선 목소리에 정신이 점점 깨어옴을 느꼈다. 점점 시야가 밝아지는 동시에 웅웅거리는 주변의 소음에도 귀가 열렸다. 아이가 정신을 차리려는 모양새를 보이자 지켜보던 사람이 다시 한 번 아이에게 물음을 던졌다. “얘야? 정신이 들어? 이름이 뭐니?” 시야가 트이자 아이에게 보인 것은 이상한 복장을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파란색 상의를 갖춰 입은 남자의 모습에 살짝 경계심이 들어 입을 다문 아이는 이내 자신이 누워 있음을 깨닫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으윽.” 어쩐지 몸이 꽤 굳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속으로 ‘어제 무리를 했나보다.’ 라며 자신의 몸을 점검해보는 아이였다. 아이의 움직임에 남자는 어이쿠, 하며 바짝 다가와 아이의 등을 받치며 아이가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도왔다. “어이구, 애가 바닥에 그리 웅크리고 있었으니 몸이 이렇게 차네. 괜찮니?” “……네. 괜찮아요.” 아이는 억지로나마 몸을 일으켜 앉은 자세를 취하자 그제야 피가 제대로 돌면서 머리가 개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고 나니 뿌옇던 시야가 한껏 맑아진 듯 주변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는 이내 당혹스러운 감정에 휩싸이고 말았다. 아이의 눈에 들어온 그 풍경들은 지금껏 보지 못했던 모습들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복장의 사람들이 여럿 있었고, 개중에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알아듣지도 못할만큼 빠르게 소리치는 사람도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리에 앉은 채로 멍하니 앞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젊은 사람도 있었고 나이 든 사람도 있었다. 또 아이가 앉은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신의 키보다 약간 작을 법한 높이의 하얀 벽이 있었고 그 벽 너머 또 사람들이 있었다. 다만 그 벽너머의 사람들은 모두 파란색 상의를 갖추고 있었다. 마치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과 비슷한 복장의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굉장히 밝았다. 살짝 시선을 올려보니 천장에는 눈이 부시도록 빛을 내뿜는 무엇인가가 여럿 있었다. 그런 기물(奇物)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그렇게 아이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던 모습을 보던 남자가 잠시 벽너머로 갔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의 손에는 작은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물 좀 마시겠니?” 아이는 대답없이 종이 컵을 바라보다 슬그머니 그것을 받아들었다. 먼지 하나 보이지 않는 새하얀 종이컵에는 맑은 물이 담겨 있었다. 아이는 가만히 들여다보다 살짝 입을 대어 맛을 보았다. 익숙한 물이었다. 조심스럽게 안에 담긴 물을 받아 마시는 아이를 보던 남자는 싱긋 웃더니 아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래. 이제 정신이 좀 드니?”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사니?” 아이는 가만히 있었다. “엄마는?” 아이가 눈을 번쩍 떴다. 그렇다. 어머니의 존재. 아이가 지난 밤 늦게까지 찾아다녔던 어머니. “엄마가 없어졌어요.”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검지로 눈썹을 긁었다. “아빠는?” “아빠는…… 돌아가셨어요.” “흠. 일단 잠시만 기다려볼래?” 남자는 몸을 세우고 벽으로 다가가 벽 너머의 사람이랑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사이 아이는 주위를 둘러보며 다시금 주변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처음보는 얼굴이었고 처음보는 복장이었다. 그리고 처음보는 집에 처음보는 기물들이 주위에 널렸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자면 모든게 이상한 것이었지만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분명 자신은 아버지가 만든 의자에 누워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아버지가 만든 의자를 떠올리자 동시에 꿈에서 봤던 장면도 떠올랐다. 어렴풋하지만 아버지는 펜던트를 만들어 자신에게 주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와 동시에 아이는 자신의 목에 무언가 있음을 느꼈다. 설마하면서도 손을 가져가 확인해보니 아이의 목에는 꿈 속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펜던트가 걸려 있었다. 이제는 도저히 ‘생각’ 자체를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어머니와 동생의 행방불명부터 꿈에 나타난 아버지의 선물, 그리고 그 선물이 현실에 나타나 목에 걸려 있는 이 상황.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것도 아이의 이해를 허락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 때 남자가 다시 다가왔다. “너 이름이 뭐니?” “이름…… 이요?” 아이는 또 다시 당황스러운 상황에 직면했다. 자신의 이름. 분명 자신의 이름을 묻고 있는데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남자는 아이를 채근하지는 않았지만 대답하지 않는 아이의 모습에 의문을 가졌다. “혹시 이름이 뭔지 몰라?” “…….” 아이는 묵묵부답. 남자는 답답한 마음에 이것저것을 물어보았지만 아이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름을 물었던 그 순간부터 아이는 묵비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봐. 최순경. 거기만 있지말고 저기 저 아저씨 좀 조용히 시켜봐.” “예.” 최순경은 고개를 숙이고 발끝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를 잠깐 바라보다 이내 파출소를 노래방으로 착각이라도 한 건지 괴성을 지르며 발을 동동거리는 취객을 제압(?)하러 발을 옮겼다. 그러한 소란에도 아이는 아무런 미동없이 인형처럼 의자에 앉아 자신의 발끝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는 파출소에서 밤을 샜다.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는 아이는 마치 말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입을 꾹 다물었고, 식사 때 준 밥도 먹지 않았다. 아침 일찍 복지센터에 연락해둔 덕에 점심시간이 되기 전 복지사 한 명이 찾아왔다. 40대는 넘어보이는 외모의 여성 복지사는 눈이 벌겋게 충혈된 최순경에게 아이의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인평공원을 순찰하다가 우연히 봤어요. 조그만 애가 의자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길래 처음에는 애인줄도 모르고 갔다가 깜짝 놀란 거 있죠. 몸을 흔들어봐도 깰 생각을 안하길래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하나 했는데 우선 파출소가 가까워서 일단 데리고 들어와서 저기 저 의자에 담요 몇 장 깔고 눕혀뒀죠. 그랬더니 금새 애가 깨더라구요? 처음에는 물어보는 말에 몇 마디 대답을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대답을 안해요. 말을 아예 안하더라구요. 그래서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고 그래요.” 최순경은 눈썹을 긁으며 인상을 조금 찌푸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아, 애가 잠깐 말을 할 때 물어봤더니 아빠는 돌아가셨고 엄마는 안계시대요.” 복지사는 가만 생각하더니 뭔가 짐작이 간다는 듯이 순경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혹시 복지원에서 있다가 나온 거 아닐까요? 방금 말대로면 고아라는 말인데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은 그 복지원에서 몰래 나온거죠. 그리고 거기로 다시 돌아가기 무서우니깐 이름을 밝히지 않는 거구요.” “음…… 왜요?” “요즘 좀 줄었다고는 해도 가끔씩 복지원 내에서 가혹행위가 있는 곳도 있잖아요?” “아, 그 뉴스에 나오는……?” “그쵸. 아니면 같이 사는 애들한테 왕따 당해서 도망친 걸수도 있구요. 어쨌든 이름을 모르면 그 복지원을 찾을 수 없을 테니깐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거죠.” 복지사는 꽤나 확신한다는 듯한 어투로 최순경에게 말을 건넸다. 마치 자신이 꽤 많은 경험을 통해서 이런 케이스를 종종 봐왔기 때문에 알 수 있다, 는 것을 자랑하는 것처럼 느껴져 최순경은 괜히 머쓱해졌다. 최순경의 멀뚱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복지사는 자신이 이 사태를 깔끔히 마무리해야 겠다는 사명감이라도 가진 듯 말에 힘이 넘쳤다. “제가 아이를 데리고 다른 복지원에라도 들어갈 수 있게 알아보도록 하죠.” “어, 저기…….” 최순경은 일이 이렇게 술렁술렁 넘어가는 모양새가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전문가의 판단에 따르기로 했다. 어쨌든 저 아이의 일은 복지사가 처리해야 할 일이었으니 자신이 이러쿵저러쿵해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아이는 따뜻한 미소를 짓는 복지사의 두툼한 손을 잡고 파출소를 나섰다. ======================================= [3] 명명식(2) 아이는 복지사의 손에 이끌려 병원으로 갔다. 우선적으로 아이의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했기에 복지사는 아이를 검진하도록 했다. 이후 임시적으로 미아센터에도 문의해서 인상착의를 확인했지만 아이의 실종 신고는 없었다. 이후에도 복지사는 충실하게 절차를 밟아 아이가 새로운 복지원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일을 진행했다. “걱정마렴. 니가 좋은 곳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줄테니 아줌마만 믿어. 알았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신뢰를 얻으려는 복지사의 노련함도 아이의 말문을 트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복지사는 익숙하다는 듯이 아이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어 주었다. 복지사의 노력 덕분에 아이는 꽤나 건실하다고 평이 난 시 외곽의 보육원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아네스 보육원이란 이름을 가진 그 곳은 지역 신문에도 종종 나오는 건실한 보육원으로 많은 사람들이 봉사활동도 자주 오고 모금도 꽤 잘 되는 편인 곳이라고 했다. 복지사의 차를 타고 시 외곽으로 가는 동안 아이의 눈은 쉴새 없이 흔들렸다. 커다란 건물, 포장된 도로, 다양한 색상의 간판 등 그 무엇도 이전에 본적도 없던 것들이었다. 비록 아이가 도심에서 외떨어진 빈촌에서 살았다지만 이 곳은 결코 자신이 살던 세상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지금 자신이 타고 있는 ‘차’라고 불리는 탈 것은 가히 기물 중의 기물이었다. 이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있었다면 분명 어느 누구에게라도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빈촌이라도 어른들 중의 몇몇은 도심으로 가서 물물들을 사오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는 단 한 번도 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시장에 가서 아빠랑 같이 밀을 사려고 가게 앞에 서 있는데 갑자기 저 길 끝에서 먼지 구름이 나는 거야. 사람들이 전부 매대 뒤로 숨는 모습이 보이길래 나도 재빨리 뒤에 숨었지. 조금 있으니까 땅이 쿵쿵거리더니 시커먼 말이 휙 하고 지나가는데 가만 훔쳐보니깐 말야, 말이 우리 집 지붕보다 더 커. 알겠어? 엄~ 청 큰 거야! 그리고 빠르기는 엄~ 청 빨라! 근데 말 위에 번쩍 거리는 갑옷 입은 기사님이 앉아 있는데 그 기사님은 전혀 흔들림없이 말 고삐를 붙잡고 허리를 탁 세우고, 응? 앞을 이렇게 지긋이 바라보면서 타고 있는 거 있지? 근데 그 기사님이 그 와중에 매대 뒤에 숨은 나를 본거야. 그렇게 빨리 움직이는데 나를 본거야. 탁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더라구? 그래서 나도 같이 고개를 끄덕여 줬지. 그랬더니 기사님이 씩 웃으면서 가시는 거야. 알겠어?” 숨도 안 쉬고 몰아치듯이 자랑질하던 친구에게 아이가 되물었었다. “그렇게 빨리 달린다는 말 위에서 기사가 널 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씩 웃고 그랬다고?” “그렇다니깐?” “그걸 다 봤다고?” “그래!” “그렇게 빨리 달렸다는 말이?” “……의심하냐?” 친구의 허풍에 웃음을 띄었던 아이였지만, 지금은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그 허풍이 진심이라 해도 이 ‘차’가 보여주는 빠름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가온 낯설음은 아이의 눈과 귀를 지배하고 머리 속을 뒤집어 놨다. 때문에 아이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고 아무것도 이야기 할 수 없었다. 그저 펜던트만 꼭 쥘 뿐이었다. 시 외곽의 한적한 동네로 들어서자 차는 속도를 줄였고 이내 보육원에 다다랐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만한 소로로 빠져 나간 차는 이내 주목과 단풍 나무 등의 조경수로 둘러쳐진 건물로 들어갔다. 좁지 않은 마당에는 잔디가 깔려 있었고 그 너머로 아이들이 뛰어놀기 적당한 공터가 있었다. 건물은 3층 높이로 깔끔한 베이지색과 흰색이 어우러져 페인트칠이 되어 있어 깨끗한 건물이란 인상을 주었다. “자, 여기가 니가 앞으로 지내게 될 새 집이란다. 어떠니?” 복지사는 예의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이끌었다. 아이는 표정없이 주변을 둘러보며 복지사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복지사도 아이의 동공이 쉴새없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아차리진 못했다. “어이구, 오셨습니까.” “예. 김원장님 잘 계셨어요?” 50대 중반의 보육원 원장은 넉넉한 인심을 자랑하듯 부푼 뱃살을 내밀며 복지사와 아이를 환영했다. 아이는 아무 반응 없이 그저 원장을 ‘관찰’했다. 원장은 보육교사 한 명을 불러 아이를 잠시 맡아 달라 청하고 복지사와 대화를 나눴다. “도망친건가요?” “아마도 그런 거 같아요. 처음에 파출소에서 엄마, 아빠가 없다고 했대요. 그런데 이름을 물으니까 그 때부터 입을 닫았다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실종신고도 들어온데가 없는 걸 보니 도망친 거 같아요.” “흠. 아직도 그런 곳이 있다니 참…….” “그러니까요. 아마 그 쪽도 굳이 찾으려 하지 않는 걸 보면 수상쩍은 민간 보육원일수도 있겠다 싶네요.” “요즘 사람들이 말이예요. 나랏돈 먹는 걸 예사로 알고 여기저기 아무나 모아다가 이름 올려서 그저 돈만 챙기려고 하는 것 같아요. 같은 직종의 종사자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에이, 원장님 정도만 되도 저희가 힘들 게 하나 없지요. 솔직히 말해서 원장님 같은 분들만 있어도 우리나라 복지문화가 선진국 수준에 이를 걸요?” 원장은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며 손사래를 쳤다. “허허, 그 무슨 과장이십니까. 제가 어디 그런 정도가 됩니까? 그저 밑에 있는 아이들이 그나마 어려움 없이 잘 자라주기만을 바라면서 뒷바라지나 조금 하는거 뿐입니다.” 복지사는 덩달아 웃으면서 원장의 말에 추임새를 넣었다. “그 조금이 저 아이들에게 희망이 되고 꿈이 될 거예요. 여기 졸업한 애들도 자주 오고 그러죠? 다 원장님 인덕이예요.” “허허허, 이거 강주사님 때문에 제가 얼굴을 못 들겠습니다 그려. 허허.” 그 이후로도 몇 가지 덕담이 오가다가 복지사는 아이를 잘 부탁한다며 마지막 인사를 하고 복지원을 나섰다. 차에 오르기 전에 마당에서 가만히 서서 복지원 바깥을 바라보던 아이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기 선생님들이 다들 착하신 분이야.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잘해서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렴.” 모든 일이 잘 풀려 만족스러운 복지사는 포근한 미소를 아이에게 남기고 보육원을 떠났다. 아이는 그저 멀뚱히 서서 떠나가는 차의 뒤꽁무니만 쳐다볼 뿐이었다. 곁에 서 있던 보육교사는 아이를 데리고 원장실로 데리고 갔다. 원장은 머그컵에 오렌지 쥬스를 담아 아이에게 건네며 물었다. “잘 생겼구나. 이름이 뭐지?” “…….” 아이는 받아든 머그컵만 바라봤다. 노란 색의 액체는 아이로선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과실 향이 나는 듯한테 뭔지는 모르겠다. 아이가 컵만 바라보고 있자 원장은 웃음기 가득한 말로 마시기를 권했다. “목 마르지 않니? 다른 아이들도 그 쥬스를 좋아하길래 혹시나 해서 잔뜩 사놨단다. 한 번 마셔보렴.” ‘마셔보렴’이란 말에 아이는 흘끗 원장의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컵에 입을 댔다. 이윽고 놀란 눈으로 다시 원장을 쳐다보는 아이의 반응에 원장은 다소 생경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아이가 재차 음료수를 조심스럽게 맛보다가 이내 컵을 다 비우는 모습을 보고 원장은 헛기침을 했다. ‘아마도 이 아이는 저 음료수를 처음 마셔보는 모양인데. 혹시 그전에 원에서 먹을 거 가지고 장난질이라도 쳤던 걸까?’ 원장은 아이의 검진 결과에서 구타의 흔적이 발견되지는 않았다는 복지사의 말을 떠올리며 치사한 방식으로 아이를 괴롭혔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흔한 쥬스를 처음 마셔보는 듯한 반응을 보일 리가 없지 않은가. “한 잔 더 줄까?” 아이는 원장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장은 짧게 웃음을 지으며 냉장고에서 쥬스를 꺼내 아이의 컵에 부어주었다. 쥬스를 마시는 아이를 바라보며 잠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만 있는 원장실에 아이의 추릅거리는 소리만 이어졌다. 그 사이에 원장은 좀더 세밀하게 아이를 뜯어보았다. 옅은 갈색빛이 도는 검은 머리가 목을 거의 덮을 정도로 길었고 아이치고는 넓은 어깨를 지니고 있다는 인상이었다. 눈썹은 그리 심하게 짙지도 연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목구비가 전체적으로 뚜렷해보이는 듯해서 오히려 순 한국 사람이라기보다는 혼혈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아직 어린 아이지만 꽤나 얼굴이 ‘조각’스럽다는 느낌도 들었다. 세 잔째 쥬스를 마시고 컵을 내려놓는 아이에게 원장이 무심히 툭 한 마디를 던졌다. “몇 살이지?” 대답을 기대한 물음은 아니었다. 그저 잠시간의 침묵을 깨뜨리고자 다시 말을 꺼냈고 꺼낸 말이 의례 물어보는 통상의 질문이었던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답이 나왔다. “…7살이요.” 아이의 말문이 트인 것이다. 쥬스 3잔에 말문이 트이다니. 원장은 다시금 아이 학대설에 심증을 굳히며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렇구나. 그런데 혹시 이름은?” “…….” 여전히 이름을 묻는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않는 아이였다. ======================================= [4] 명명식(3) 면담을 마친 아이는 배정된 방으로 이동 했다. 넓지 않은 방이었지만 양쪽 벽에 싱글 침대가 각각 붙어 있었고 정면으로는 큰 창이 나 있었다. 얼룩이 조금 있지만 깨끗하다고 평할 만한 정도의 하얀 커튼이 창을 가리고 있었고, 그 사이로 햇빛이 새어 들어와 아이의 발치까지 비추고 있었다. 아이를 안내했던 보육교사가 창의 커튼을 걷자 방안이 온통 하얀색으로 물드는 느낌이었다. 그 창 너머로는 보육원의 입구와 그 곁을 장식하던 조경수들이 보였다. 조경수 너머로 샛길과 큰 도로, 더 멀리에는 작은 마을도 보였다. 창밖을 보는 아이에게 보육교사가 말을 건넸다. “이제 여기가 니 방이란다. 친구랑 같이 살게 될 거야. 너랑 동갑이니까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거야. 그치?” 아이는 교사를 돌아보았다. 갈색 머리에 눈썹은 짙고 가늘며 눈은 마치 순한 강아지모양으로 둥글둥글해서 선하다는 인상을 주는 여교사였다. 옅은 화장을 했지만 이를 알지 못하는 아이의 눈에는 그저 젊고 예쁜 여자, 거기다 피부도 동생의 그것만큼이나 고운 여자로 비쳐졌다. 괜히 어머니의 거친 피부가 함께 떠올라 마음이 아렸지만 아이는 애써 울적한 마음을 누르며 대답했다. “……예.” “그래, 대답도 잘 하는구나. 그럼 잠시 여기… 아, 아니구나. 이제 곧 점심시간이기도 하니까 선생님이랑 같이 식당에 가자. 밥 먹어야지?” 교사는 아이를 이끌고 보육원 뒤로 데리고 나왔다. 거기는 단층 조립식 건물이 있었다. 들어가니 꽤 넓은 공간에 여러 개의 탁자와 의자들이 놓여 있었고 이미 많은 아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벽에 붙어 늘어선 줄 뒤로 교사와 아이가 섰다. 이윽고 배식을 받은 아이는 교사와 함께 식탁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이것저것을 알려주는 교사의 배려가 고마울 법도 하건만 아이의 표정이 굳어 있어 교사는 썩 신이 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태도의 아이들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크게 문제될 일도 아니었다. 사실 문제는 표정 따위가 아니었다.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동작과 의기소침해 있는 모습들이 혹시 시설에 적응하지 못하게 될까 걱정스러운 것이었다. 지금도 식판의 음식들을 조심스럽게 맛을 보며 끊임없이 주위를 살피는 동작들을 보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원장이 살짝 귀띔해주긴 했지만 이 아이, 꽤나 심하게 학대를 받아왔던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런 걱정을 하는 교사의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쉴 새 없이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을 느끼고 있던 아이였다. ‘식당’의 개념이 없었기에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속이 덜컥거리는 당혹감에 휩싸여 있던 아이는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실내에 가득 찬 음식냄새에 멀미가 나는 듯 했다. 식판에 받은 음식들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맛을 보며 혹시 이 곳이 ‘천국’이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했다. 이미 원장이 건네준 주스의 맛에 한 번 황홀경, 까지는 아니더라도 미각에 심대한 충격을 받았던 상태였다. 눈앞에 놓인 어마어마한 음식들은 지금껏 보지 못했던 풍성한 식단을 자랑했고 다양한 색깔과 향, 맛을 함유하고 있었다. 어쩐지 이런 음식들은 도시의 귀족들만 먹는 게 아닐까 싶어 예의를 갖추고 조심스럽게 음미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주변 또래 아이들의 모습에서는 별다른 예의나 격식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숟가락으로 퍽퍽 집어먹기 바빠 보였다. 몇몇은 허겁지겁 먹는 모습에 시간제한이 있는 것인가 싶었지만 깔깔대며 먹는 아이들 곁으로 어른들이 천천히 먹으라며 등을 쓸어주는 모습을 보면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았다. 밥 먹는 아이들의 표정은 대체로 밝았다. 옆의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마주 앉은 아이들과 장난을 치는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길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지난 시간들이 어쩐지 처량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한 끼 식사도 어려워 동생과 스튜를 나눠먹기도 했었고, 다음날 끼니가 걱정되어 배낭을 가득 채워 와야만 했던 자신의 모습이 반추되며 더욱 울컥하는 감정을 느꼈다. “왜 그러니? 밥맛이 없어?” 마주앉은 교사가 안타까운 심정으로 물어왔다.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숟가락으로 맑은 국을 한 입 떠먹었다. 코끝이 시큰한 느낌이었다. 그 시간, 원장은 행정과장, 사무국장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원장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원장은 원두커피를 한 입 마신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아이, 어쩌면 정신적인 학대로 다른 아이들과 잘 못 지낼 수도 있겠다는 염려가 들었습니다. 때문에 안전관리에 조금 신경을 써주셔야겠어요.” 마른 몸매의 작은 눈매를 가진 행정과장이 안경을 벗어 렌즈를 살펴보며 말을 붙였다. “그 부분은 안전관리 담당이 책임을 지겠죠. 김 선생이 워낙 책임감이 강하시니깐 원장선생님은 걱정 안하셔도 될 겁니다.” “큼.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과장님도 혹시 필요한 게 있는지 살펴보시고 이야기 해주세요. 게다가 그 아이가 내년에는 8살이라는데 학교에 가야 하지 않습니까? 몇 개월 남지 않아서 서류 작업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행정과장은 안경을 고쳐 쓰고 앞에 놓인 커피를 들어올렸다. “그것도 제가 준비 잘해서 처리하겠습니다. 이거 원장 선생님이 이것저것 신경 쓰시느라 살이 더 빠지시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허허, 저도 오랜만에 새로 아이가 들어와서 그런지 신경이 많이 쓰입니다.” 원장은 행정과장의 마른 눈을 살짝 째려보았다가 이내 손에 들린 커피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까지 아네스 보육원은 지역에서 꽤나 평판이 좋은 축에 속했다. 원장이 나름 신경 써서 관리를 한 탓도 있었고 복지재단 이사회와도 사이가 좋았기에 별 문제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로 언론 플레이를 하지 않아도 지역 내 봉사활동 장소로도 인기가 있어, 인근 지역의 학생들이 찾아와 봉사 활동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점점 보육원으로 위탁되어 들어오는 아이들이 줄어들면서 지원금의 규모가 일정이상 늘어나지 않게 되었다. 나라 전체의 경제도 썩 좋은 편이 아니어서 재단에서 들어오는 유입금도 점점 줄어드는 모양새라 원장은 내심 걱정이 늘어나고 있는 중이였다. 게다가 앞에 앉은 행정과장이란 사람은 재단 이사 중 한 명의 추천으로 들어왔는데, 성격이 모난 것은 아니지만 때로 말에 가시를 드러내기 일쑤여서 대화하기가 영 껄끄러웠다. 이 사람이 자기 라인만 믿고 까부는 것인지 감히 원장이란 직책을 우습게 만 보는 것 같았다. 틈만 보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바꿔야겠다고 내심 다짐하는 원장이었다. 그 때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커피만 홀짝이던 사무국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애들 디딤돌통장도 다시 한 번 정리해야 할 듯 하더군요. 그간 조금 지저분해진 것 같아요.” 디딤돌통장은 보육원을 퇴소한 뒤 자립하는 아동들을 돕기 위해 후원금 등을 모아 만든 통장으로 언제든 아이들에게 돌아갈 수 있게 준비되어야 할 통장이었다. 후원금 관리 종합 통장이야 목돈이 오고 가니 특히 감사에 주의해야 함은 물론이지만 디딤돌 통장 역시 푼돈이나마 주의해야 한다. 아무래도 후원금 관리 통장에 비해 중요도가 떨어지는데다가 언제든 아이들에게 쥐어주고 나면 책임이 없어지는 통장이기에 감시의 눈에 덜 들어오는 부분이어서 꽤나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곧 연말이니 정리 할 때도 됐습니다. 사무국장님이 신경 써 주세요.” 평소 몸 관리를 조금 하는 듯 키는 조금 작지만 다부진 몸매의 사무국장은 그나마 원장과 소통이 제법 되는 인물이었다. 말주변도 없고, 말수도 많지 않지만 필요한 말만 고심해서 꺼내는 듯해서 믿음직했고 원장이 미처 챙기지 못한 것들, 이를테면 연말 감사 대비라든가 내부 인테리어 정비 업체 선발권과 같은 소소하나 중요한 것들을 잘 챙겨주는 편이어서 원장은 사무국장이 맘에 들었다. 반면 행정과장은 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겉으로야 깨끗한 척 하며 고상을 떨지만 지네들이나 자기나 별반 다를 것도 없는 인물들이다. 그런 주제에 껄껄거리며 가식을 떠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도 않을뿐더러 자기 라인을 타지 않은 인물이라 낙인찍고 따돌리는 모양새니 더더욱 두 사람의 행태가 불쾌하기까지 했다. 그 역시도 틈만 생기기를 바라며 두 사람을 노려볼 뿐이었다. 만약 기회가 생겨 두 사람을 쳐낼 수 있다면 자신과 자기 라인의 지갑도 꽤나 두둑해질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오월동주 하는 원장실의 분위기가 고조될 무렵, 아이는 식사를 마치고 배정된 방으로 향했다. 방에 홀로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은 아이는 그제야 깊은 한 숨을 내쉬며 잔뜩 긴장된 몸을 풀 수 있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정신없이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다니며 새로운 세계의 기이한 환경에 맞닥뜨려 멘탈이 부서지기 직전까지 내몰리고 있었던 와중에 겨우 홀로 신변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사실은 정리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맨 몸으로 이 세상에 떨어져 낡은 옷가지 하나 있던 것도 어느새 새 옷으로 갈아입혀져 이 곳에 오게 되었기에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던 형편이었다. 다만 목에 걸린 펜던트만이 오롯이 자기 것이라 하겠지만. “…….” 이 펜던트만 보면 더욱 싱숭생숭해진다. 꿈에서 받은 물건이 현실에 등장하여 목에 걸려 있는 이 상황이라니. 작은 손으로 펜던트를 쥐어보는데 어쩐지 펜던트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듯 했다. ======================================= [5] 명명식(4) 아이는 꽤나 심한 피로감이 느껴져 침대에 모로 누워 지친 몸을 달랬다. 역시나 침대는 포근했고 매우 고급스러웠다. 깨끗하게 세탁된 침대 시트와 푹신한 매트리스는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안락함을 선사했다. 보육원 바깥으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창밖으로 오후의 햇살이 침대 위까지 다가와 아이를 어루만졌다. 그 따뜻함에 아이는 먹먹해져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엄마…….” 언제나 곁을 지켜주었던 어머니의 존재가 사라지고 아이는 홀로 세상에 남았다. 게다가 세상마저도 아이를 다른 곳으로 내던져 버렸다. 참으로 막막하기 이를 데 없는 처지에 놓인 아이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겨울이 다가왔다. 보육원 앞의 단풍나무 잎들도 어느새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보일 무렵 보육원 안은 주말을 맞아 대청소로 소란스러웠다.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동계 대비를 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주말 자원봉사자들도 이전보다 더 많이 찾아와 대청소를 돕고 있었다. 나이가 든 아이들 - 대체로 중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고 있던 큰 아이들은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손을 거들어 청소를 도왔다. 하지만 모두가 그 소란에 동참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복도를 뛰어다니며 활기차게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들이 몇 몇 있었는데 나이가 너무 어려 청소에서 열외가 된 아이들이었다. 개중 몇몇은 날씨가 춥든지 상관 않고 마당으로 뛰쳐나가 공이나 차며 놀자고 다른 이들을 꼬드기고 있었다. 하지만 또 그런 무리에도 어울리지 않고 독자적인 행동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좀 나가자. 답답하지도 않아?” 칭얼대듯 조르는 명수의 목소리에도 아이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보였다. “이렇게 시끄러운데 공부가 되냐? 밥 먹고 운동해야 된댔어. 나가자 응?” “난 이거 다 해야 돼.” 단호한 거절에 명수는 살짝 삐쳤다. 명수는 아이에게 천천히 다가가 아이의 등 뒤에 서서 좀 더 애원조로 부탁했다. “야 나가자. 응? 철용이 형한테 지면 안 되잖아. 그 형한테 이길 사람이 너 밖에 없어.” 아이는 대꾸도 하지 않고 책상에 앉아 열심히 받아쓰기를 했다. 반 토막이 돼 버릴 만큼 짧아진 연필을 잡고 공책에 한글을 한 자 한 자 힘주어 쓰고 있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아이는 나름대로 처음의 절망과 슬픔에서 벗어나 보육원에 적응을 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문물과 맞닥뜨려 당황했던 순간도 이제 점차 희미해져갔다. 오히려 낯선 생활이 익숙함으로 변할 만큼 빠르게 적응을 한 것이었다. 그 와중에 아이가 흥미를 보인 것은 바로 ‘배움’이었다. 귀족들의 전유물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을 여기서는 아무나 다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거듭하던 와중, 가장 흥미롭게 여겨졌던 것이 바로 ‘교육’이란 분야였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배울 수 있고 익힐 수 있다는 것은 놀라움이었고, 글자를 배우고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즐거움이었다. 어차피 예전이나 지금이나 글자를 몰랐던 것은 매 한가지였기에 서로 다른 글자를 썼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글자를 배우고 익힐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아이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고 그 시간만큼은 다른 슬픔, 기억들을 잊을 수 있었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이가 적응의 시간을 갖는 동안 달라진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방을 쓰는 명수라는 아이와도 말을 터놓고 놀 수 있을 정도로 금방 친해졌고 단 둘 뿐이지만 보육교사들과도 길지 않은 대화 정도는 나눌 수 있을 만큼 친해졌다. 그들의 도움으로 아이는 글자를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어머, 어쩜 이렇게 똑똑하니? 벌써 이걸 다 외운 거야?” 교사들은 아이를 가르치며 아이의 영특함에 자주 놀라움을 표시했다. 얘, 천재 아냐? 라고 생각할 만큼 아이는 빠르게 많은 양을 배우고 익혔다. 요즘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입학하기 전에 기본적으로 한글을 떼고 온다지만, 기간 대비 익히는 속도는 아이가 월등히 빠르다고 교사들은 판단했다. 게다가 아이는 부지런했다.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이 집중력이 금방 흐트러질 법도 했는데 아이는 어른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배움에 집중을 했다. 때문에 아이는 금세 한글을 익혀 웬만한 책들은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비단 공부에만 두각을 나타낸 것은 아니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아이들과 마당에서 공을 차던 명수가 아이를 억지로 끌고 와 함께 공을 찬 적이 있었다. 규칙도 질서도 없이 무조건 공을 차서 골대에 넣기만 하는 정도의 공놀이였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숲길을 다니며 단련된 체력과 각력은 그 나이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두드러졌고 명수가 속한 팀은 2살 많은 철용의 팀을 이길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종종 명수는 자기 팀에 아이를 끼워 넣으려 했고 아이는 절절한 부탁에 못 이겨 한두 번 나와서 어울렸다. 덕분에 다른 아이들과도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지만 공부에 대한 아이의 열정은 경기에 나서는 것보다 컸었기에 명수는 매번 아쉬움을 뒤로 하고 홀로 방을 나와야 했다. 오늘도 방에 홀로 받아쓰기 책을 보며 공부를 하던 아이는 문득 인기척을 느껴 뒤를 돌아보았다. 등 뒤에는 새하얀 미소를 짓는 10대 소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부하고 있었구나. 내가 방해한 거니?” 아이는 고개를 절레 저으며 소녀를 보았다. 새하얀 미소만큼이나 하얀 피부에 가는 눈썹, 눈꼬리가 아래를 쳐진 듯한 눈웃음을 짓는 소녀는 분홍 입술을 열었다. “너 잘생겼네? 어쩜 이리 예쁘니? 이름이 뭐야?” “…….” 아이는 입을 오물거리며 대답하기를 머뭇거렸다. **** 며칠 전, 아이는 원장실에 불려갔다. 원장은 예의 주스를 하얀 머그컵에 가득 따라 부은 뒤 아이에게 건네며 건너 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아이는 속으로 ‘의자 망가지겠네’라며 원장의 부푼 배에 깔리는 자신을 잠깐 상상했다. “그래, 요즘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소문이 났더라. 선생님은 걱정이 많았어. 니가 여기서도 힘들어 할까봐 말이야. 그런데 지켜보니 이제 걱정을 덜어도 되겠다 싶더라. 공부가 재밌어?” “예.” 아이는 이제 지난번처럼 주스를 받자마자 벌컥 마시는 행위가 예의 없게 보일 수 있다는 정도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적응을 했다. 그래서 가만히 눈치를 보며 머그컵을 흘낏 쳐다보기만 하면서 감히 마시지는 못했다. 그 모습이 또 귀엽게 보인 원장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아이에게 주스를 마셔도 된다는 의미로 손을 까딱거려 보였다.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인 아이는 슬며시 컵을 들어 한 모금씩 아껴가며 주스를 마셨다. “이제 너도 내년이면 학교를 가야 한단다. 근데 학교를 가려면 필요한 게 몇 가지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이름이란다. 우리나 니 이름을 알아야 이것저것 서류를 챙겨서 학교에 가져갈 수 있거든. 무슨 말인지 알겠니?” “……예.” “그래, 그럼 이름이 뭐지?” “……어, 이름은 …….” 여전히 이름을 말하기 어려워하는 모습에 원장은 아이의 속사정을 지레짐작하고 넌지시 제안을 했다. “그럼 말이다, 새 이름을 지어줄까?” 아이는 화들짝 놀라 원장을 쳐다봤다. 새 이름이라니? “혹시 예전의 이름을 쓰기 어렵다면 말이다, 새 이름을 만들어서 쓰는 방법도 있어서 하는 말이란다. 물론 새 이름을 만들면 앞으로도 그 이름만 계속 써야 할 거야.” “새 이름…….” “이름이 있어야 학교도 갈 수 있고 니가 좋아하는 공부도 계속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제 그 정도는 너도 알겠지?” 아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다. 새 이름을 짓는다는 것. 사실 처음 이 세계에서 눈을 뜨고 난 뒤 이름을 묻는 질문들에 대답을 하지 못했던 것은 꿈의 여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는 꿈 속 아버지의 말은 말 그대로 언명이 되어 각인이 되었다.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내뱉는 행위가 자연스럽지 못해 우물쭈물 거리는 사이에 어른들의 오해가 깊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또 다른 의미로 이름을 섣불리 말하기 어려웠다. 자신의 이름이 이 곳의 흔한 작명방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름을 말했다가 그 이름으로 인해 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사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그래서 이름을 쉽사리 말하지 못했는데. 새로운 이름을 짓는다? ======================================= [6] 명명식(5) “좀 더 생각해보고 결정할래? 아직 시간 여유가 있으니 천천히 결정해도 된단다.” 원장은 넉넉한 미소를 띠며 아이의 얼굴에 드러난 어둠을 관찰했다. “네.” 역시나 영특한 이 아이는 쉽게 선택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혹시 했지만 역시나, 라고나 할까?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교사들로부터 들은 바도 그렇고 본인이 보기에도 이 아이는 남다른 면모를 보여주었기에 이런 상황도 예상해 본 원장이었다. “그래, 알겠다. 그리고 혹시 이름을 새로 짓고 싶거든 언제든 찾아와서 이야기하거라. 아니면 다른 선생님들께 이야기해도 되고. 알겠지?” 그 이야기를 끝으로 아이와 원장의 2차 대담은 끝이 났다. 하지만 원장은 곧 3차 대담을 이을 것이라 예상했다. 여전히 아이의 얼굴에는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고, 원장은 그 어둠이 이전 보육원에 대한 부담감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전의 이름을 쓰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원장은 책장으로 가서 퇴소자 명부를 꺼내 들추며 적당히 붙일 만한 이름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어쨌든 적당한 이름을 아이에게 지어주는 일도 원장 개인에게는 뿌듯함과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것이 벌써 3개월 전, 단풍나무에 물이 한참 들던 시기의 일이었다. 아이가 그렇게 잠시 지난 일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긴 동안, 이름을 물었던 자원봉사자 소녀는 대답 없이 멍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을 보다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생김에 짙은 감색 눈동자가 어딘지 이국적인 느낌도 주지만, 또 그렇다고 외국 혼혈 같지만도 않은 인상이었다. 옛날 조각 같은 외모로 유명했던 영화배우의 얼굴처럼 어린 나이임에도 살짝 날이 선 듯 한 턱선과 깊은 눈매, 두드러지게 솟지는 않았지만 낮지 않은 콧등과 다부진 입매가 어린 나이의 아이들에게서 선뜻 보기 힘든 얼굴, 이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다소 엉클어져 정리되지 않은 듯 한 머리는 오히려 공들여 가꾼 머리보다 얼굴에 어울린다는 느낌이었다. 대충 얼굴을 감상을 마치고도 아이의 멍한 얼굴이 계속되자 소녀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에 정신이 들었는지 아이가 소녀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이름을 물었는데 대답을 안 하네? 알려주기 싫어?” 소녀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아이는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요.” 아이는 소녀의 장난기를 받아줄 마음이 없는 지 이내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누나가 무섭게 생긴 얼굴이야?” 아이의 반응이 수줍은 많은 또래들의 반응처럼 보여 되레 신이 난 소녀는 장난을 멈추지 않았다. “아, 아니요.” 아이는 아예 몸을 돌려 책상에 놓인 공책을 얼굴을 파묻듯이 했다. 소녀는 한 발 더 다가가 아이에게 접근했다. 소녀가 다가오는 것을 느낀 아이는 당황스러워서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낯선 이의 접근에 몸이 움츠려 드는 것은 아이에겐 당연한 방어기제였을지 모르겠지만 소녀에게는 흥미를 돋우는 리액션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를 구한 것은 밀대로 복도를 닦고 있던 다른 자원봉사자였다. “지원아, 너 거기서 뭐해? 청소는 마저 하고 놀아.” “예, 언니. 갈게요.” 소녀는 짓궂은 미소를 남기고 방을 떠났다. “얘, 나중에 누나한테 이름 알려줘. 알았지?”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는지 금방 복도로 나가버리는 소녀였다. 아이는 그저 쥐고 있던 연필만 다시 한 번 그러쥐고 공책에 한 글자 한 글자 깊게 써나가기 시작했다. “언니 언니, 저기 305호실에 있는 애 봤어요?” “아니, 왜?” 괜히 청소는 안하고 딴 짓하는 모양새라 여겼는지 불퉁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자원봉사자에게 지원은 신이 난 얼굴로 자신이 보았던 아이에 대해 이리저리 설명을 하며 기분 좋은 웃음을 복도에 퍼뜨렸다. 겨울이 다가오며 날씨는 꽤 쌀쌀했지만 아네스 보육원은 많은 자원봉사자들의 활기로 온기가 가득했던 주말의 오후였다. ****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왔다. 어느새 보육원 주위의 나무들에서 뒷산에도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아이는 아침 일찍 일어나 창밖으로 봄의 정경을 바라보았다. ‘이 곳도 봄이 오는 것은 똑같구나.’ 새벽의 찬 공기가 가시기도 전인 터라 창문을 열진 못하고 바깥을 바라보는 아이는 그 정경 위에 빈촌의 봄을 투영시켜 보았다. 숲 속에 새로 난 약초들을 캐기 위해 부지런을 떠는 아저씨, 아줌마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모습. 집들마다 아침을 준비하느라 때운 불길에 하얀 연기가 몽글 몽글 솟아오르는 모습. 언덕 위로 따뜻한 봄을 찾아 줄을 이어 날아온 철새들의 부지런한 아침 비행. 그리고. “벌써 일어났어?” 한껏 과거의 편린에 떠돌던 아이를 돌려 세운 명수의 목소리.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아이는 꽤 잠겨 있는 목소리로 명수의 물음에 화답했다. “응. 준비할 것도 있고.” “으윽, 나도 준비할래. 이제 학교 가야 되는데.” 명수는 억지로 움츠린 몸을 피며 기지개를 켰다. 아이답지 않은 거친 신음소리가 절로 나온다. “에구, 이제 좋은 날도 다 갔다. 그치?” 분명 명수는 행정국장님에게 저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틀림없다. ‘좋은 날은 갔다’라는 표현을 이제 8살이 된 명수가 자의적으로 할 리가 없으니까. “일어났으면 씻어. 난 방금 씻고 나왔어.” “그래야지, 으이구.” 답지 않은 표현을 내뱉는 모양새가 도리어 애처럼 여겨지게 만들었다. 아이는 미소를 머금고 다시 창밖을 내다봤다. 소로 바깥으로 보이는 큰 길 위에 자동차들이 여럿 다니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는 소음으로 가득한 운동장. 이곳은 시내에 위치한 혜운 초등학교의 입학식이 열릴 운동장이었다. 수없이 많은 아이들과 그 아이들만큼 많은 학부모들이 운동장을 메우고 있었다. 아이는 여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본 적이 없었기에 자연 위축되는 느낌을 받았다. 자기도 모르게 보육교사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갈 정도로 말이다. 그런 모습이 오히려 반가웠던지 보육교사는 빙그레 웃으며 남은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교사들의 안내에 따라 운동장 한 쪽에 위치한 강당으로 인솔되어 들어간 아이들 무리는 지정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더러 몇 몇은 부모의 손을 놓아야 한다는 사실에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딱히 신경 쓰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마저도 흔한 입학식의 풍경이었으니까. 아이들은 지정된 의자에 앉고 학부모들은 강당 뒤편에 우르르 모여 서서 입학식이 진행되는 모습을 구경했다. 의자에 앉았지만 여전히 어수선한 아이들을 데리고 입학식은 진행되었다. 학생인사도, 교장 선생님 훈화도, 담당 선생님 소개도 어리바리한 초등학교 1학년들에게는 의미 없는 일이었다. 보육교사의 품을 떠난 아이에게도 그 예식은 크게 다른 의미는 없었다. 다만 학교라는 공간에서 새로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마음가짐이 다른 또래들과 달랐을 뿐이었다. 아이는 1학년 3반으로 배정되었다. 담당교사의 등을 바라보며 따라간 교실에서 아이는 색다른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른바 자기 소개였다. “자, 조용히 하세요. 선생님은 앞으로 여러분들과 1년 동안 같이 지낼 김희연 선생님이라고 해요. 제가 인사, 라고 하면 여러분들은 반갑습니다, 라고 대답해야 되요. 알았죠?” “예!” 보육교사보다 더 어려 보이는, 20대 후반의 여 교사는 하얀 블라우스와 투피스 정장으로 세련되고 무난하며 단정한 이미지를 학부모들에게 보이고자 노력한 티를 내고 있었다. 선생님의 소개를 시작으로 아이들이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자기소개가 끝날 때마다 아이들은 반갑습니다,를 외쳤고 학부모들은 박수를 치거나 사진을 찍으며 호응했다. 이윽고 아이의 차례가 왔다. 아이는 덤덤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가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30명 정도의 아이들, 그리고 그 뒤에 비슷한 수의 학부모들이 오로지 자신만을 쳐다보는 광경에 아이는 덤덤해 보이는 표정과 달리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꼭 쥔 주먹이 금세 땀으로 젖어 들 정도였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학부모들은 그저 앞에 나온 아이의 묘한 외모에 서로 수군대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이내 아이의 입이 벌어지며 목소리가 들리자 학부모들은 모두 아이에게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저는, 제 이름은…….” 침을 꿀꺽 삼키며 마른 목을 적셔 보는 아이였다. “제 이름은…….” ======================================= [7] 신학기(1) 새 학기의 ‘소란스러움’은 며칠이 지난 후 ‘번잡스러움’으로 변이되었고 한 달이 지날 무렵에는 ‘혼란스러움’으로 바뀌었다. 변한 게 없다는 이야기다. 초등학교 교사 3년차인 김희연이 1학년을 맡는다는 것도 보통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어른들만의 사정이라고 고상하게 표현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으나 희연은 억지로 1학년 담임을 떠맡게 되었다. 3년차이기에 경험이 일천하다 표현해도 무방할 희연. 그녀에게 난장판이 되기 직전의 1학년들을 수월하게 통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1학년 3반은 종종 옆 반의 경험 많은 선생님들이 출동해서 진압(?)을 하기 일쑤였다. 덕분이라고 해야 될지, 아니면 1달 간의 학교생활에 적응을 한 탓인지 수업 시간이 되면 어떻게든 진행은 가능한 수준으로 아이들의 태도가 좋아졌다. 그 정도에 희연은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쉬는 시간이 되면 비행기 소음 이상의 소란이 1학년 3반을 가득 채웠기에 교실 앞 창가 쪽에 자리한 희연은 그저 머리만 싸매며 참을 뿐이었다. ‘차라리 오전 내내 체육시간이었으면…….’ 그랬다면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뛰다가 다치진 않을지, 경계 태세를 갖춰야 했을 테다. 그리고 그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심력을 낭비하게 될 테지만, 당장 희연은 이 소란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고개를 살짝 들어 교실을 바라보니 당장 한 소리라도 해야 할 듯 싶었다. “지훈아, 책상에 올라가면 안돼요. 다쳐요. 희진아, 너도 거기 창문에 올라가면 안돼요, 내려오세요. 뒤에! 뛰지마세요! 넘어져요!” 그런 소란의 와중에 창가 쪽 책상 열 가운데 앉은 한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잘생긴 외모로 학부모들 사이에 소문난 그 아이는 이 소란스러운 교실의 열외자였다. 아이는 항상 책을 읽고 있었다. 대부분 교과서였지만 가끔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동화책을 읽고 있기도 했다. 수업시간에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자신과 아이 컨택을 하며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에 살짝 부담도 됐지만, 그래도 이 아이 덕분에 교사로서의 자부심과 만족감을 느끼기도 했다. 수업에 충실한 아이를 싫어할 교사는 없으니까. 교실 앞에 앉아 턱을 괴고 자신을 관찰하는 선생님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책에 집중을 하고 있던 아이는 요즘 꽤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매일 새로운 가르침으로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수업도 만족스러웠고, 무엇보다 학교의 교과서를 통해 얻고 있는 지식은 매일 매일 아이를 놀라게 하였다. 수업의 진도와는 별개로 교과서를 읽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아이는 희열에 가까운 즐거움을 느꼈다. 특히 방과 후 수업에서 배우는 수학은 즐거움 이상의 짜릿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한 문제 한 문제를 풀 때마다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고 배움이 깊어질수록 자신을 둘러싼 혼란들이 정리되어 가는 느낌마저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부의 즐거움에 빠져 있던 아이의 어깨를 누군가 두드렸다. 돌아보니 지훈이었다. 이제 신학기가 시작되고 1달이 지났을 뿐이지만 지훈은 반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좋은 의미에서 활발한 아이였지만 사실 ‘악동’의 이미지가 더 잘 어울렸다. 수업시간에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갑자기 화장실을 간다며 교실을 뛰쳐나간다거나 - 그 이후에 선생님이 쫓아오면 마치 술래잡기라도 하는 듯 해맑게 웃으며 도망치기 바쁘다 - 쉬는 시간에는 책상 위에서 폴짝 폴짝 뛰어다니며 스릴을 만끽하는 액션지상주의자 같은 면모를 보이는 아이였다. 창의성도 뛰어나 매번 다양한 방식으로 옆 자리의 여자애를 울리는데, 어느새 그런 지훈의 ‘놀이’에 동참하거나 동참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줄을 잇는 지경이었다. 때문에 그 악명이 학부모들이 사용하는 SNS 방에서 자자했다. 그래도 그의 악동 짓을 엄격하게 제지하지 못하는 것은 귀한 집의 독자라는 이유였고, 그래서 그저 끙끙 앓고만 있는 피해자(?)들의 부모와 담임교사였다. 그런 지훈이 아이에게 다가온 것이다. 다음 피해자로 지목(?)된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멀뚱한 눈으로 지훈을 바라봤다. 지훈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등 뒤에 세운 채 짓궂게 웃으며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너 석고상 닮았대.” 무슨 말인가 싶었다. “우리 누나가 그린 그림을 보고 엄마가 너랑 닮았대. 그게 석고상이래. 너 석고야.” 맥락이 없는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는 잠시 멍해졌다. 사실 지훈이 말하는 내용은 학부모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SNS 상에서 잠깐 화제가 됐던 이야기였다. 입학식 날 눈에 띄었던 아이의 외모를 가지고 평가를 나누던 학부모들 중에서 누군가 ‘조각’같은 외모라는 평을 남겼고, 이에 예고 입시를 앞두고 있는 딸을 둔 학부모가 석고 소묘로 사용되는 석고상 중의 ‘줄리앙’을 언급했다. 물론 그 뒤로 자기 자식도 만만치 않네, 그 집 아이들도 예쁘게 생겼더라 등등 서로 금칠하기 바빠진 SNS 대화는 제쳐두고라도, 아이의 외모를 석고상에 비유하며 평가했던 내용이 지훈의 귀에도 들어갔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아이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얘 석고야.” 별 말도 아닌데 애들이 박수를 치고 까르르 웃으며 배를 잡았다. 멍해 보이는 아이의 표정과 리액션이 지훈이 패거리들에게 재밌는 현상이었던 것일까. 깊이 파고들 문제도 아니었던 이 사태 이후, 아이는 ‘석고’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옆 반의 명수가 이를 알게 된 후, 보육원에서도 아이를 ‘석고’라 부르는 이들이 늘어났다. 보육 교사가 이 별명을 들었을 때, 한 편으로는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또 한 편으로는 별명 때문에 아이가 상처받지 않을지 걱정했다. 때때로 그 시기의 아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별명으로 상처받아 의기소침해 하는 경우도 더러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는 괘념치 않았다. ‘석고’라는 단어의 뉘앙스가 그렇게 기분 나빠해야 할 것인지를 몰랐기 때문인 것이 한 이유였고, 또 다른 이유는 예전의 빈촌 생활시 들었던 별명보다 낫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빈촌에서는 하루 종일 숲길을 뛰어 다니는 모습을 빗대어 ‘스크로파’, 이곳 말로 ‘멧돼지’로 불렸다. 얼굴 가득 진흙이나 묻히고 다니며 꿀렁대는 소리나 내는 돼지에 비유되느니 차라리 석고가 좋다고 생각하는 아이였다. **** 어느새 계절은 여름이 가까워져 성격 급한 사람들은 반팔 티셔츠만 입고 외출을 할 정도가 되었다. 여전히 보육원에는 자원 봉사자들이 틈틈이 찾아왔고 마당의 잔디들 사이로 거센 잡초들도 쑥쑥 자라 보육원 어린 아이들의 발목에 생채기를 낼 정도가 되었다. 그래봐야 자원봉사자들의 손에 금세 베어져나갈 것들이지만 보육교사들은 아이들이 잔디밭에 들어가지 않도록 지도해야 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보육 교사가 운전하는 승합차에서 하차하며 큰 소리로 인사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교문으로 걸어가는 아이들에는 1학년인 명수와 아이 외에도 3학년, 5학년 각 1명씩, 그리고 6학년 2명이 더 있었다. 보육원 내에서나 밖에서나 6학년은 의젓했고 중간 학년 아이 둘은 6학년 형들의 뒤를 졸졸 따라갔지만, 천방지축 1학년이라 칭함에 모자람이 없는 명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끌다시피 하며 교내로 뛰어 들어갔다. 위 학년 아이들은 그런 둘을 말릴 생각이 없었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의 발걸음은 주변의 등교하는 학생들보다 무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이 난 명수와 목줄이라도 잡힌 강아지모양으로 함께 뛰는 아이였다. 억지로 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이도 즐겁긴 마찬가지였다. 특히 최근에 학교에 도서관이란 시설이 있고 그곳에 비치된 장대한(?) 서적들의 향연에 한껏 취할 수 있음을 알게 된 아이였다. 단체로 등교하다 보니 비교적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등교할 수 있었기에 아이는 책가방을 교실에 두고 달음박질하여 도서관으로 향했다. “오늘도 1등이구나.” 마침 도서관의 문을 열고 있던 사서 선생님의 환대에 아이는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그래 먼저 들어가렴.” 도서관 현관 옆에 위치한 사서대로 가던 선생님의 허락에 아이는 다시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장서 앞으로 뛰어갔다. 지난 밤 동안 숨죽여있던 책들이 한꺼번에 숨을 토해내는 듯 묵은 책의 향기가 아이의 후각을 자극했다. 그 냄새마저 달콤하게 느끼며 아이는 오늘 하루 볼 책들을 세 권 정도 골랐다. 아직 두꺼운 책을 모두 소화해 낼 정도의 이해력과 지식이 겸비되지 않아 비교적 얇은 저학년 용 책들을 고르지만 특별히 고르는 주제는 없었다. 특히 저학년 용 책들 중에는 시리즈 형식으로 엮인 전집들이 많아 한 시리즈를 연달아 읽고 다음 시리즈를 읽는 방식으로 책을 소화해냈다. 아이는 잘 몰랐겠지만 요즘은 저학년 용 책들이라고 전부 창작 동화나 위인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논술을 대비한 인문 고전 혹은 수리 경제 분야 책들도 삽화와 함께 나오고 있어 아이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 매우 충분하다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지난 7년간 그 어떤 체계화된 지식의 습득과 거리가 멀었던 아이가 매우 빠르게 이 세상의 시스템과 사회 환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었다. 또 아이가 책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전혀 다른 사회, 전혀 다른 삶에서 이곳으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경험한 슬픔과 절망의 감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독서로부터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몰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아이를 괴롭히는 과거의 기억들 때문에. **** 희연은 아침 교무회의를 마치고 반으로 들어왔다. 뜨거운 기름의 물 같았던 아이들이 이제는 뚜껑 없는 믹서기 속의 고춧가루들 같았다. 언제 스위치가 켜질지 몰라 조마조마하기도 했지만 스위치만 잘 조절하면 얌전한 아이들이었다. 아직 수업이 시작되기 전이라 반쯤 스위치가 켜진 듯하지만 그간의 시간이 마냥 흐르기만 한 것은 아니었는지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서자 조금은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는 아이들이었다. 혼자 기름에 튀겨진 게 아닌지 의심스러운 지훈이는 여전히 반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목소리로 옆 친구와 작당 모의를 하고 있었지만 다른 대부분 아이들은 자기 자리를 지키고 앉아 나름 조용히 쑥덕대고 있었다. 그 쑥덕임이 모여 ‘시끌벅적’이 됨을 아직 아이들은 모르고 있다. 그리고 유독 한 아이, ‘줄리앙’을 닮았지만 ‘석고’로 불리는 저 아이는 주변의 소란에 상관없이 책을 읽고 있었다. 한 학기가 거의 지나가고 있는 지금에 이르러 저 아이의 집중력과 학습태도는 거의 전교에서 수위를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희연이었다. 학기 초에는 크게 돋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작문수업이나 수학시험에서도 꽤 좋은 점수를 받기 시작했다. 특히 방과 후 수업을 담당하는 선생님의 칭찬이 대단해서 희연도 기대를 많이 하는 학생이었다. 아침부터 저렇게 책을 읽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보육원에 있는 아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 때 수업종이 울렸다. “자, 이제 수업시작해요. 첫 시간은 뭐죠?” “가족이요!” 이 때만큼은 애들이 참새 떼 같다는 생각에 속으로 피식 웃으며 둘러보는데 마침 ‘줄리앙’과 눈이 마주쳤다. 언제 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이 과목을 가르칠 때가 개인적으로 힘들다고 느끼는 희연이었다. 특히 저 슬픔 가득한 눈과 마주칠 때면 저도 모르게 죄책감 비슷한 감정까지 느끼고 마는 3년차 교사 희연이었다. ======================================= [8] 신학기(2) “자, 오늘은 여러분들과 가족 역할놀이를 할 거예요. 여러분들이 엄마 역할, 아빠 역할을 하고 동생 역할도 하면서 각자 느낀 점을 발표할 거예요. 알았죠?” “예~.” ‘줄리앙’의 사정이야 안타깝지만 수업은 수업일 뿐이다. 각자의 사정이 없는 사람들이 있을까. 비록 초등학교 1학년, 한참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자랄 아이들이라지만 희연이 관심을 가져야 할 32명 중 1명에 불과한 줄리앙을 위해 수업을 안 할 수는 없었다. 희연은 4명 혹은 5명으로 가족을 정해주고 각자 맡고 싶은 역할을 정하게 시간을 주었다. 이후 아이들은 엄마, 아빠 혹은 삼촌, 할아버지, 할머니 역할을 맡아서 역할놀이를 수행했다. “자, 니가 먹고 싶은 거 다 사 먹으렴.” 억지로 엄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아들 역할을 맡은 아이에게 돈을 내미는 시늉을 하는 아이는 자기 부모가 그랬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반영한 것 일테다. “안 돼, 손 떼. 안 돼, 이것도 하지마. 엄마가 너 이거 하지 말랬잖아.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나름 앙칼지게 꾸중하는 모습을 표현하며 엄마 역할을 수행하는 아이들의 연기에 아이들이 박수치고 환호를 보냈다. “나 돈 좀 줘요. 게임해야 되요.” “넌 무슨 역할이니?” “우리 삼촌이요.” “…….” 어쩐지 슬픈 미소를 짓게 되는 희연이었다. ‘줄리앙’이 속한 가족이 앞에 나왔다. 뜻밖에도 ‘줄리앙’이 아빠역할이었다. 여자가 셋이어서 엄마, 큰 딸, 작은 딸이 돼 버렸다. 엄마는 집안 청소를 하고 큰 딸은 엄마를 돕겠다며 바닥을 닦는데, 작은 딸이 엄마한테 매달려 과자 사달라고 마냥 조르는 통에 아이들이 왁, 하고 웃는다. 엄마보다 키가 큰 작은 딸이 팔을 붙잡고 휙휙 둘러대며 조르는 모양새가 희연이 보기에도 우스웠다. 그 와중에 ‘줄리앙’의 행동이 묘했다. 줄리앙은 가족과 외따로 떨어진 곳에서 도끼질을 하고 있었다. 무엇이냐 물으니, “의자를 만들 나무를 베고 있어요.” 라고 대답하는 줄리앙이었다. 그 대답에 우와, 하는 탄성이 아이들로부터 쏟아졌다. 희연으로서도 신기한 모습이긴 했다. 나무를 조립해서 만드는 의자도 아니고, 아예 처음부터 나무를 베어서 만든다? 희연의 상식에서 저런 행위는 불가능한 장면이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개인이 임의로 나무를 벌목하는 행위는 불법이었으니까. 그 때 한 아이가 외쳤다. “의자를 어떻게 만들어. 너 아빠 없잖아. 거짓말이야.” “…….” 악의 없이 악질적인 행동을 취하면서도 그 행위의 선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나이대의 아이들이다 보니 이런 모습들이 돌발적으로 나타나곤 했다. 그리고 초등 3년차의 경험치로는 ‘돌발’에 곧바로 ‘비상 스위치’를 누르는 순발력이 떨어지나 보다. ‘3년차 선생님’은 당황해서 곧바로 대처하지 못했다. 희연이 어정쩡하게 웃으며 상황을 무마하려는 때였다. “우리 집 뒤로 가면 숲이 있었어. 30… 분 정도를 걸어 들어가면 붉은 삼나무가 많아. 거기 나무를 베어서 의자를 만들어.” 아이들은 동그래진 눈으로 아이를 쳐다보았다. “붉은 삼나무는 다른 나무들보다 옹이가 적어서 모양이 예쁘고, 가볍고 단단해서 의자나 탁자용으로도 좋아.” 희연은 아이가 교실의 아이들을 향해 덤덤하게, 작지도 크지도 않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제지하지 않았다. 제지할 생각도 없었다. “나무는 톱으로 의자에 쓸 만하게 잘라내. 이 때는 반드시 나무결 방향으로 나무를 잘라 써야 돼. 나무결 방향과 반대로 자르면 힘이 약해져서, 나중에 의자로 만들면 금방 못쓰게 된다고 하셨어.” 아이가 말을 잠시 말을 멈춘 순간에도 누구 하나 말을 꺼낼 생각이 없었는지 조용한 정적이 흐르는 교실이었다. “적당한 모양으로 자르고 나면 사포로 문질러. 이때는 나도 도울 수 있어. 면이랑 모서리를 샌딩해주고 가루를 털어내면 아빠가 기름을 발라. 그리고 외벽에 세워서 말렸다가 3일 뒤에 다시 사포랑 기름칠을 해. 그걸 2번 더 하고 나면 나무가 잘 안 썩고 우리 가족이 앉아도 될 만큼 따뜻한 의자가 된다고, 하셨어.” 아이는 말을 잇는 동안 시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아이는 푹 고개를 숙인 채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말을 쉽게 꺼내는 아이들은 없었다. **** “흠. 아마 어디 책에서 본 게 아닐까?” 도서관의 사서를 맡았던 이 선생님의 말씀에 희연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그럴까요? 그러기엔 너무 디테일한 것 같기도 해서 말이죠. 제가 듣기에는 마치 본인이 직접 보고 경험한 것 같이 리얼했거든요.” 이 선생님은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바라보다 입술을 적시듯이 살짝 한 모금을 마셨다. 믹스커피는 너무 달다는 생각을 하면서 희연의 말에 대꾸했다. “뭐 제가 직접 듣지 않았으니까 그 느낌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말이 없네요. 하지만 목재 가공에 대한 것은 이 도서관에서도 잘 찾아보면 있을 거예요. 저도 정확히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말이죠, 그 아이가 워낙 영특하니 마치 자기가 경험한 것처럼 꾸몄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되네요. 그런 거 있잖아요. 거짓을 진실로 믿는 거, 뭐더라?” 희연이 말을 가로 채기 전에 이 선생님은 말을 이었다. “아, 리플리 증후군! 그니까 걔는 부모가 없다는 사실에서 아이들에게 자격지심을 느끼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허구의 진실을 만들어 낸거죠. 의자나 집을 뚝딱 만들어내는 만능 아버지. 아이 생각에는 그게 멋진 거예요. 요즘 누가 나무 베어서 의자 만들어요? 다 만들어진 걸 사서 쓰는데. 아, 물론 그 아이가 나쁘다거나 그런 건 아니예요. 저도 그 아이 좋아해요. 아침마다 제일 먼저 도서관 찾아오는 아이는 걔 밖에 없어요. 조금 숫기가 없어 그렇지 착실하고 부지런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너무 이야기에 몰두하다 보니 앞에 앉은 희연의 반응이 심상치 않기에 실수했다는 생각이 든 이 선생님은 급히 변명하듯이 말을 덧붙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희연은 이 선생님의 추측이 심정적으로는 동의할 수 없지만, 이성적으로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보육원의 보육교사에게도 해줘야 하나, 라는 고민을 가지게 되었다. 담임 교사의 섣부른(?) 고민을 모르는 아이는 그저 반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이미 오전 수업이 모두 끝나고 오후 방과 후 수업을 앞두고 교실에서 대기 중인 아이였다. 이제 곧 수업을 받을 수학 과목은 아이가 독서 다음으로 학교를 좋아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초등학교 수학의 수준이야 뻔하지만, 그래도 아이에게는 신기하기 짝이 없는 학문이었다. 마치 이야기 속의 마법사들이나 이해할 수 있을 듯한 학문이랄까? 이전의 빈촌에서는 숫자를 다루는 사람들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수를 사용해도 나무 묶음을 세는 정도로나 사용했다. 이렇게 구체적인 숫자를 실생활에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은 처음 알게 된 아이였다. 흥미를 갖고 달려드는 아이에게 교과서의 진도는 의미가 없었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안다, 는 말이 실제로 수학에서는 적절히 응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비단 아이 뿐만 아니라 수학에 관심을 가진 아이들이라면 - 2학년 때나 배울 - 3자리 숫자도 이미 1학년 때 개념을 잡을 수 있었고, 3자리 숫자를 배우고 나면 4자리나 그 이상의 큰 수들도 이해를 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초등학교 수학은 다양한 문제 환경이 제공되고 그 속에서 연산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기 때문에 교과서만 보면서도 아이는 어려움 없이 독학 가능한 수준까지 수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물론 방과 후 수업에서 배우는 것도 영향이 컸다. 그 덕분에 같은 반 아이들이 50까지의 수를 배우고, 홀수와 짝수의 개념을 배우고 있을 때 아이는 혼자 덧셈과 뺄셈은 물론 곱셈까지 개념을 이해하고 문제를 풀며 공부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저도 모르게 연한 미소를 지으며 수학 책을 보고 있던 아이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이 있었다. 경은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 아이는 같은 반 급우였다. 또래의 평균보다 조금 큰 키를 가진 탓에 교실에서는 아이와 조금 떨어진 뒷자리에 앉아서 수업을 들었다. 경은이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의 ‘일’이 있고 나서부터 아이를 지켜보게 되었다. 학기 초에는 동성 친구들과 어울리기 바빴고, 이후에는 학급 내에서도 친하게 어울리는 몇몇 이성 친구들에게 관심을 가졌었다. 예를 들면, 선생님께는 매일 지적을 받지만 또래들 사이에서는 활기 넘치고 넉살 좋은 친구인 지훈이 대표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러던 와중 가족 시간에 ‘아이’가 선보인 놀라운 ‘아빠’의 일이 그녀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 전까지 아이는 그저 조금 이질적으로 생긴, 하지만 같이 잘 어울려 놀지 않고 혼자 지내는 같은 반 아이 정도의 이미지였는데 그 일 이후로 ‘비밀을 가진 신비한 소년’의 이미지로 변한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대화 없이 지냈던 친구라 쉽게 말을 붙이기는 부끄러웠고, 그래서 그저 뒤에서 몰래 훔쳐보는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마침 방과 후 수업을 듣는 아이가 많지 않은 상황이라 다른 아이들의 시선도 적어진 틈에 부끄러움을 이겨낸 호기심을 앞세워 보기로 한 것이다. “저기…….” 슬쩍 다가가 말을 붙였지만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공책에 숫자를 끄적이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아이였다. “…석고야.” 스스로 말을 내뱉고도 아차, 싶었다. 가끔 다른 친구들이 아이를 부를 때 ‘석고’라고 부르는 모습을 종종 봤던지라 자기도 모르게 별명으로 아이를 부른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아채고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목적은 달성했다. 아이가 시선을 돌려 경은을 바라봤다. ======================================= [9] 신학기(3) 경은은 머뭇대다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뭐해?” 뭘 하고 있었는지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음에도 시치미를 뗄 요량 이였을까? 스스로도 모르겠어서 경은은 괜히 등 뒤에 숨긴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 공부.” 참으로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아이였다. 사실 아이가 이성 친구와 이야기를 나눠 본 경험이 - 보육원에서도 또래 여자 아이는 거의 없었다 - 많지 않다는 사실은 둘째 치더라도, 학교에 와서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잡담을 하며 하하 호호 해 본적이 없었기에 이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경은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너 책 좋아하지?” 누구라도 아이가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안다. 다만 경은이 확인하려는 것은 아이의 책에 대한 호감도가 아니었다. “응, 좋아해.” 저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는 지였다. 등교할 때부터 하교할 때까지 아이에게서 관찰할 수 있는 표정은 얼마 되지 않았다. 오죽하면 ‘석고’라는 별명이 잘생긴 얼굴 때문이 아니라 감정 없는 표정 때문이라고 이야기할까. 그래도 책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경험 없는 아이라도 눈치 챌 만큼의 미미한 변화가 얼굴에서 보였다. 경은은 어쩐지 자기가 대단한 비밀을 캐낸 기분을 느꼈다. “우리 집에 책 많은데 같이 가서 볼래?” 뜬금없는 초대에 말문이 막힌 것은 둘 다 였다. 의문이 든 아이와 당황하는 경은. “우리 언니랑 오빠가 책 좋아해서 책이 많아. 나도 많이 읽어. 너도 보면 좋아할 거 같아서. 아니면 빌려줄까?” 횡설수설하는 경은의 태도가 어쩐지 밉지 않게 느껴진 아이는 그 호의를 매몰차게 거절하지 않았다. “갑자기 가는 건 어려워. 나도 학교 마치면 … 집에 가야 되고. 그래도 니가 빌려준다면 고마울 거야.” 1학년에게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주지 않았기에 방과 후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책을 반납해야 했다. 그게 늘 아쉬웠던 아이였기에 경은의 제안이 반갑기만 했다. 아이는 고마움을 가득 담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경은은 잠시 멍하게 아이를 바라보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자기 자리로 급하게 돌아갔다. “그래.” 짧게 대답을 남기고 돌아선 경은에게서 시선을 돌린 아이는 다시 풀던 문제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학교란 정말 좋은 곳이었다. 궁금한 것을 상냥하게 알려주는 선생님이 있었고, 몰랐던 사실들을 자세하게 알려주는 책들이 쌓여 있었고, 자신에게 기꺼이 친절을 베풀어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는 선생님도 있었고, 부모가 없다고 놀리는 친구들도 있었고, 준비물을 제대로 챙기지 않는다며 고깝게 보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런 것은 아이에게 중요하지 않았고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풍족한 식사와 충만한 지식들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한 학교생활이었으니까. 방과 후 수업, 수리셈의 수업을 맡은 박해울 강사는 수학만 10여년을 담당한 경력 강사였다. 이름난 대학을 졸업했던 해울은 청년 취업난의 위기를 방과후 교사 자격증으로 탈출한 케이스였다. 과외 경력도 꽤 있었기에 만만하게 보다가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여간 쉽지 않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많이 고생도 했다. 하지만 10여년이 지나고 나니 이제는 베테랑이 되어 여유롭게 수업을 진행할 정도가 된 해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여유가 많이 사라졌다. “선생님, 이렇게 생긴 것도 원인가요? 왜요?” 타원형의 동그라미를 가리키며 매우 궁금하다는 눈빛을 가지는 아이를 바라보며 해울의 이마에 땀이 송글 솟았다. 초등학교 교과과정상에서 타원을 설명하기란 어렵다. 특히 이제 갓 1학년이 된 아이에게는 더더욱 힘들다. “둥근 모양이 원이라고 했죠? 이것도 둥글둥글하죠? 사실 정확히 원이라고 할 수 없지만 원과 비슷하기 때문에 원에 속하는 모양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초등학교 학생들은 중, 고등학교 학생들과 달리 형식적인 정의를 이해하기 어려워한다고 알려져 있다. 때문에 기하학적 개념을 설명할 때도 유사한 모형이나 모델을 내세워 개념을 가르치지, 형식적 정의를 가르치진 않는다. 예컨대, ‘평면에서 한 점으로부터 일정한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라는 정의 대신 농구공, 지구본, 동전 등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모양을 원으로 이해하게끔 가르친다. “둥글둥글하기 때문이라면 이렇게 생긴 것도 원인가요?” 각이 사라진 별모양의 울퉁불퉁한 원. 해울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머릿속으로는 맹렬하게 아이를 이해시키기 위한 문장들을 만들어내며, 해결책을 제시했다. 아니 제시하려고 했다. “이 책에 보면 원은 중심과 반지름을 가지는 도형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는데요. 이 모양들은 모두 같은 반지름을 가지는 모양들이잖아요. 그런데 이 모양은 여기는 긴 반지름이고 여기는 짧은 반지름이니깐 원이 아닌 거 아닌가요?” 와, 하고 속으로 탄성을 내뱉는 해울이었다. 이쯤 되니 그는 이 아이를 다시 봐야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책만 보고 ‘반지름’의 개념을 이해한 것이 분명한 아이를 다른 초등학생 1학년 대하듯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사실 여러분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여러분들의 형, 누나들이 배우는 방식으로 설명을 해볼까요?” 해울은 아이 외에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 사태가 어찌 흘러가나 궁금해 하는 학생들을 둘러보며 한계를 설정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매우 일반적이며 수학적인 정의를 들어 아이들에게 ‘기하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삼각형은 여기, 여기, 여기 이렇게 점 세 개를 각각 이어서 만든 모양을 말해요. 이 때 점 세 개는 한 직선 상에 있지 않아야 되요.” “두 개는 있어도 되는 거죠?” “…….” ‘직선’이 뭔지 알려주면 폭풍같이 몰아치는 질문들도 끝이 날까? **** “이거 박 선생 고생 좀 했겠는걸?” “말도 마라. 아주 진땀을 뺐다.” 해울은 김치를 집어 먹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양새가 웃겨보였는지 재차 웃음을 터뜨리는 친구이자 동료 논술 강사 미진이었다. 함께 방과후 교사로 활동하는 두 교사는 수업이 끝난 후 저녁도 먹고 스트레스도 풀 겸해서 감자탕 집으로 왔다. 혜운 초등학교에서 방과후 교사로 재직한 것은 미진이 먼저였다. 해울이 오고 난 뒤, 우연히 서로 같은 나이임을 알게 된 미진이 먼저 친목 도모를 위한 식사를 제안했고 이후 두 사람은 종종 식사 혹은 음주를 함께 하는 친구가 되었다. “야, 내가 볼 땐 걔 천재다. 그냥 말만 천재가 아니라 진짜 천재. 내 수업 때도 걔가 발표하는 거 들으면 얘가 진짜 초등학생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든다니깐. 게다가 1학년이라니? 직접 보지 않고 듣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일인데 내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인데 어쩌겠어. 믿어야지.” 해울은 소주 한 잔을 꿀떡 비우고 쓴 맛에 인상을 찌푸리는 미진에게 물 한 컵을 건넸다. “얘가 말이야. 처음에는 다른 애들하고 비슷했단 말야. 아니 오히려 조용했거든. 말도 없고. 그렇지 않든? 그런데 어느 날 부턴가 툭툭 질문을 던져대더니 지금은 아주 고슴도치야. 사정없이 찔러대.” “내 수업도. 와, 난 애가 이렇게 말 잘하는 줄 몰랐잖아. 논술? 얘 1, 2년만 더 공부하면 말이지, 반쯤 과장해서 대입 쳐도 되겠더라.” “에이, 그건 좀 심했다.” “그래, 좀 심했어. 그치?” 둘은 웃으면서 소주잔을 부딪쳤다. 그리고 부글거리며 끓고 있는 감자탕에 숟가락을 들이밀며 주린 배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 [10] 신학기(4) 아네스 보육원의 보육교사 이경희는 이 곳의 책임교사 역할을 담당했다. 중고등학생 애들은 각자 알아서 등교를 하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지만, 초등학생들은 보육원 승합차로 등하교를 시켜야 했다. 때문에 하교 시에도 5, 6학년 아이들의 일정에 맞춰 애들을 데려와야 해서 자신이 데리러 가기 전까지 저학년 애들은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나마 보육원 애들이 대체로 눈치가 빠르고 조심성이 많은 편이라 큰 사고를 잘 치지 않기에 걱정을 덜 하는 편이기는 했다. 그런데 요즘 다른 의미로 걱정이 되는 면이 있었다. 학교에서 ‘석고’로 불리는 아이 때문이었다. 원체 표정이 없는 아이여서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때가 많기도 했었는데 최근 담임교사와의 면담 이후에는 그 아이의 자질 때문에 걱정이 많아졌다. 솔직히 말해서 다른 아이들이 그 아이처럼 사고 안치고 열심히 공부하며 정숙하게 행동한다면 보육교사로서 더 바랄 것도 없을 것이다. 며칠 전부터는 친구에게 책을 빌려다 보기 시작하면서 방에서 독서를 하는 시간이 늘어나 다른 아이들에게 야단치듯 잔소리할 필요도 없어졌음은 물론이다. 기본적으로 눈치도 빠르고 부지런한 아이였다.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알아서 등교 준비를 하니 깨우는 수고를 덜었고, 청소시간에도 부지런하고 빈틈없는 아이였기에 경희가 보기에 흐뭇했다. 다시 말해 생활 태도 면에서는 만점을 줘도 아깝지 않을 원생이었다. 그런데 얘가 천재란다. 보육교사 모르게 과외를 받을 리도 없다. 그러니 독학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또래보다 빠르게 학과 진도를 나감은 물론이요, 몇 몇 과목에서의 두드러지는 활약상은 담임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 종합적으로 방과 후 교사들의 의견까지 참고해 본 담임교사의 눈으로 그 아이가 ‘천재’란다. 물론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테스트는 없었기에 ‘천재’라고 장담은 못해도 ‘영재’ 수준은 넘을 것 같다는 첨언. 때문에 앞서 언급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테스트와 관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염려 아닌 염려를 비추는 담임 교사였다. 도대체 보육원 시스템을 뭐로 보고 저러나 싶은 경희였다. “선생님!” 마침 아이들이 교문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그 무리에 예의 ‘석고’로 불리는 ‘영재’가, 역시나 표정 없는 얼굴로 명수 손에 끌려 뛰어오고 있었다. “그래. 천천히 타. 천천히. 명수야, 발 밑에 조심해야지.” 보육원에서 보살펴야 하는 아이들은 한두 명이 아니다. 한 아이가 두각을 드러낸다고 해서 그 아이에게 집중 관리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 있는 편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아이는 특별한 지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배, 고, 파, 요, 배, 고, 파~!” 명수는 언제나 그렇듯이 신이 났다. 저렇게 24시간 기운이 넘쳐흐르기도 힘들 텐데. 그야말로 무한 긍정이다. 그리고 늘 ‘무한 긍정’의 손에 이리 저리 휘둘리는 ‘풍선’ 같은, ‘석고’로 불리는 ‘영재’에게 잠깐 시선이 갔지만 이내 눈을 돌렸다.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안타까움만 더 할 뿐이다. 곧 있으면 방학이 되니 찾아오는 자원봉사자들 중에 재능기부에 뜻이 있는 사람들이 있는지 찾아볼까 하는 생각만 잠시 해볼 따름이다. **** 경은의 엄마는 요즘 딸아이가 유독 즐거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은 위로 4학년 오빠와 3학년 언니가 있어 신경이 분산되는 면도 없잖아 있다. 하지만 이제 갓 초등학교를 입학한 딸아이가 흥얼거리며 책가방을 챙기는 모습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요즘 오빠나 언니 방에서 책을 고르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어 기특하다고 생각하다가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은 보지 못했음을 떠올리게 되니 경은의 저런 모습이 살짝 의심스럽다. “경은아, 학교는 어떠니? 재밌어?” TV를 보며 저녁 식사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경은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역시 아직까지는 책보다 TV를 좋아하는 경은이었다. TV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경은에게 재차 묻자 대답이 나온다. “응, 재밌어. 아까 학교에서 혜진이랑 체육시간에 편먹고 땅따먹기 했는데, 우리가 이겼어. 혜진이는 엄청 빠른데 나도 엄청 빨라서 다른 애들이 땅 먹기 전에 우리가 먼저 땅 먹어서 이겼어. 선생님이 빠르다고 칭찬도 해줬어.” 식탁 위에 수저를 놓으며 경은의 엄마는 마침 잘 됐다는 듯 수다를 늘어놓는 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미 SNS에서 담임교사가 오늘 생활체육시간에 땅따먹기 러닝 수업을 진행했음을 알려온 터라 딸의 수다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랬구나. 우리 경은이 친구들이랑 잘 지내나보네.” “응, 오늘 또 지훈이가 국어 시간에 까불다가 선생님한테 혼났어. 그래서 애들이 다 웃었어. 호랑이가 토끼한테 잡아먹을 거라고 했는데, 지훈이가 토끼 고기가 맛있는 거냐고 선생님한테 질문했어. 선생님이 모르겠다고 했더니 호랑이도 먹을 수 있냐고 묻는 거야. 그래서 애들이 다 웃었어. 선생님이 호랑이는 우리가 보호해야 하는 동물이라고 했더니 자기가 꼭 먹어보고 맛을 알려주겠대. 그래서 또 우리가 다 웃었어. 근데 나는 안 웃었어. 걔는 너무 이상한 거만 생각해.” 대충 맞장구를 쳐준 경은은 여전히 본심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생각에 혹시나 하고 찔러보았다. “근데 경은이는 학교에서 제일 친한 친구가 누구야?” “나? 혜진이랑 제일 친하지.” “혹시 혜진이는 공부 잘하니?” “음… 나랑 비슷해.” “혜진이는 책 많이 읽고 그러니?” “아니, 책은… 석고가 많이 읽어.” 직감적으로 이 녀석, 이라는 것을 알았다. ‘석고’라는 아이가 딸의 기분을 업시켜 놓았다. “그, ‘석고’라는 친구랑 친하니?” “응. 걔랑 방과 후 수업 매일 같이 들어. ‘석고’는 되게 똑똑해. 선생님들이 맨날 칭찬해.” “그러니?” 경은의 엄마는 식탁을 대충 차려놓고 잠시 경은에게 다가갔다. 사실 걔가 똑똑한 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살짝, 아주 살짝 불안할 뿐이었다. “근데 경은아. 엄마는 니가 걔랑 너무 가까이 안했으면 좋겠어. 걔 말고도 똑똑하고 착한 친구들 많지 않니?” “…….” 뜻밖의 말을 들었음일까? 경은은 엄마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쳐다보았다. 하지만 엄마의 입장에서 볼 때, 표정 없는 보육원 사내아이가 딸과 가깝게 지내는 것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고깝게 여겨질 수 있지만 보육원 아이는 아무래도 다른 아이들보다 정서적으로 불안할 수 있고, 그런 아이와 가깝게 지내다 정서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드는 게 사실이다. 게다가 혹시라도 딸에게 해코지라도 할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편견일 수 있겠지만, 현실이 그런 것을 어쩌겠는가. 엄마는 어떻게 딸을 이해시킬 것인가를 맹렬히 고민하며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식탁 위의 국이 식어간다는 사실도 잊은 채. **** 또다시 아침이 밝아왔다. 언제나 그랬듯이 오늘도 가장 먼저 일어난 아이는 보육원 뒷산을 오르는 중이었다. 이름은 모르지만 - 이름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지만 - 빈촌의 서쪽 언덕 너머의 숲을 그토록 오래 돌아다녔던 경험이 있었기에 이 정도 산을 오르내리는 것은 여반장이었다. 보육교사나 생활지도원 선생님들도 아침잠에서 깨기 전에 몰래 산에 올랐다가 산 정상에서 맞이하는 일출을 바라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산에 오르게 된 계기는 별거 아닌 충동 때문이었다. 일어나보니 아직 어스름한 하늘빛을 보게 되었고 문득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 충동적으로 ‘숲’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숲이 머금은 물기와 서늘한 공기가 아이의 몸과 마음을 상쾌하게 씻어주는 느낌에 아이는 기분이 좋았다. 숲이 잠에서 깨어나는 소리, 하늘이 새 아침을 알리는 소리들이 귀를 즐겁게 했다. 이곳은, 적어도 이 곳 만큼은 ‘숲’을 뛰어다니던 그 곳과 닮았다. 숲의 기운을 만끽하던 아이는 어느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미친 듯이 책을 파고든 이유를. 아이는 알고 싶었던 것이다. ‘이곳은 어떤 곳이지?’ 이곳은 아이의 머리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문물과 환경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보육원 내 시청방에서 TV를 봤을 때는 가히 기절하기 직전까지 가지 않았던가. 과거 아이가 처음 숲에 발을 들이밀 때는 곁에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숲의 길부터 시작해서 나무, 약초, 동물들을 알려주었고 숲에서 조심해야 할 것들, 숲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그러나 이곳은 그 숲보다 더 생소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데 누구도 무엇을 조심해야 하고 무엇을 가까이 해야 하는 것인지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는 그래서 이곳에 대해 알아야 했다. ‘왜 이곳에 오게 되었을까?’ 아이는 본능적으로 과거 살던 세상과 이곳이 전혀 다른 세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늘의 색, 공기의 맛이 전혀 달랐다는 것은 물론이요, 복식과 생활상, 문물, 음식 등이 모두 달랐다. 무엇보다 ‘말’이 달랐다. 처음에는 아이도 깨닫지 못했다. 자신은 자연스럽게 알아들었고, 자연스럽게 말을 내뱉었으니까. 그런데 아이가 이름을 떠올렸을 때, ‘언어’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남 몰래 충격을 받았었다. 불가해한 상황에 놓인 아이는 말문을 닫아 걸기도 했었다. 하지만 총명했던 아이는 이곳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면서 ‘왜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물론 아직 그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아이는 자신이 어른들 만큼 똑똑해지거나 혹은 그 이상의 지식을 쌓게 되면 그 답이 보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자신이 아직 어려 아는 것이 없어서 모른 것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끝으로 남은 물음. ‘엄마는 어디로 가셨을까?’ 이 물음은, 아이가 가장 풀어보고 싶은 난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쩌면, 영영 알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문제는 바른 해결 과정만 짚어 내면 풀 수 있다, 는 방과 후 교사 박해울 선생님의 말씀이 틀리지 않다면 말이다. 떠오르는 해를 보며 아이는 다짐했다. 반드시 이 문제를 풀어낼 것이라고. ======================================= [11] 신학기(5) 내일이면 방학식이다. 교사에게 방학이란 반쯤은 휴가이기도 하다. 교사 좋은 게 뭔가? 회사원들이나 일반 공무원들은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휴가를 공식적으로 누릴 수 있다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던 희연이었다. 하지만 방학 때도 방과 후 수업이 진행되는 기간 동안에는 수업이 없더라도 일단 학교에 나와서 출석을 체크해야 되고, 출석을 체크하고 나면 잡무가 이어지게 되고, 잡무를 보다보면 퇴근이 늦어지게 마련이다. 물론 평소보다 빠른 퇴근은 할 수 있겠지만, 과거의 교사들이 방학 때 해외로 가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선배 교사들로부터 듣게 되면 괜히 아쉬움만 커졌다. 그런 아쉬움을 펜 끝에 담아 꾹꾹 눌러쓰고 있는 ‘방학 기간 학급 운영 계획서’다. 그러고 보면 요즘 아이들이 불쌍하기도 하다. 예전에는 방학이 참 길었던 거 같은데, 주 5일제를 택한 이후부터는 방학이 짧아졌으니 말이다. 잡생각이 들어 잠시 멈췄던 펜을 움직이려는 찰나, 수업 종이 울렸다. “자, 내일부터 여름방학이죠?” “예!” 이럴 때는 한 마음 한 뜻으로 소리친다. 애들이란. “얼마 전에 선생님이랑 생활 계획표 만든 적 있죠? 오늘은 여름 방학 동안 지킬 생활 계획표를 만들어 볼 거예요. 여러분들이 여름 방학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도 아주 중요해요. 친구들이랑 방학 동안에 무엇을 하고 싶은 지 발표했던 거 기억하죠? 예를 들어서 지훈이처럼 운동 열심히 해서 튼튼한 어린이가 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되요? 네, 맞아요. 아침마다 일찍 일찍 일어나서 운동하고 아침밥 잘 챙겨먹고 해야겠죠? 또 음, 상우는 공부를 잘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요?” “매일 매일 공부해야 돼요.” “그래요. 매일 매일 공부하면 되는데 언제부터 언제까지 해야겠다, 라고 스스로와 약속을 정하고 실천을 하면 더 열심히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제부터 각자가 방학동안 하고 싶은 일, 또는 해야 되는 일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생활 계획표를 만들거예요. 다 만들면 친구들 앞에서 한 명씩 발표해서 친구들한테 약속하는 거예요. 나는 이 계획표대로 생활해서 내가 하고 싶은 거, 내가 되고 싶은 거 하겠다고 약속하는 거예요. 알겠죠?” “예~!” 희연은 미리 만들어놓은 계획표 도안을 한 장씩 나누어준 후 지도를 시작했다.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 몰라 고민하는 아이를 찾아 지도해주거나, 갑작스런 돌발행동으로 도안에 훼손이 됐을 때 예비 도안으로 바꿔주었다. 그러던 도중이었다. ‘공식 악동’ 지훈이 종이 도안을 들고 이리저리 돌리다 검지를 길게 베인 것이다. 깊이 베이지는 않아도 피를 흘리며 울어대기 시작하니 어수선해지기 시작한 교실이었다. 희연은 재빨리 지훈을 양호실로 데려갔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1학년들이지만 잠시라면 별 일 없으리라는 생각이 있었다. 게다가 가장 높이 튀어 오르는 ‘공’을 희연이 붙잡고 있으니 큰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 면도 있었다. 선생님이 나간 후, 경은이 앞에 앉은 ‘석고’를 바라봤다. ‘석고’는 반의 어수선함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왼쪽 손으로 턱을 괴고 도안만 바라보고 있었다. 도안을 받은 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같은 자세다. 어머니의 다그침 이후 ‘석고’에게 제대로 말을 걸지 못했던 경은이다. 관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또 어머니의 당부를 어길 정도의 반항심도 없어서였다. 그래서 책을 빌려주던 일도 그만 두었지만, ‘석고’는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다. 애초에 먼저 다가간 것도, 매번 말을 붙인 것도 경은이었지만 자신이 갑자기 책을 빌려주지도 않고 말을 붙이지도 않는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행동하는 ‘석고’의 모습이 얄밉게 느껴졌다. 조그만 입술을 삐죽이며 가만히 쳐다보다 괜히 시비라도 걸어보고 싶어졌다. 벌떡 일어나 앞으로, ‘석고’를 향해 걸어갔다. 1학년 3반 반장 배형오는 옆자리에 앉았던 지훈이가 피를 흘리는 모습에 가슴이 덜컥했다. 피를 보고 나니 괜히 자기가 다친 것 같고 지훈의 우는 모습이 마치 고통에 절규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책상 위에 뚝, 한 점 떨어진 핏자국을 바라보니 피가 흘러 붉에 물들었던 지훈의 손가락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미처 그 모습을 캐치하지 못한 선생님이 지훈을 데리고 간 뒤에도 심하게 몸을 떨며 컥컥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형오가 걱정스러웠는지 옆에 앉아 있던 짝이 물었다. “괜찮아?” 그 말이 촉매제라도 되었는지, 형오는 목을 부여잡은 채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교실을 뛰쳐 나가려했다. 몸을 돌리며 뛰어 나가는 순간 앞에 누군가 없었다면 말이다. “꺄악!” 쾅! 비명과 동시에 커다란 충돌음, 책상 넘어지는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오고 한 박자 늦게 아이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런 소란에는 아무리 주변에 신경 쓰지 않던 아이라도 뒤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돌아보니 같은 반 누군가가 다쳤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벌떡 일어나서 달려간 아이는 이내 두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중 한 명은 자신에게 책을 빌려준 고마운 소녀, ‘경은’이었다. 경은은 이미 정신을 잃은 듯 보였다. “죽은 거야?” 한 아이의 눈물 가득한 추측이 틀렸다는 것을 아이는 알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비록 경은이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지만, 미약하게나마 가슴이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아이, 같은 반 반장 형오는 목을 부여잡고 교실 바닥에서 부들대고 있었다. 얼굴이 새빨갛고 눈은 부릅뜬 채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발을 마구 휘젓는 통에 곁에 있던 책상과 의자들이 밀려나고 쓰러지는 탓에 학급의 누구도 형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위험하다!’ 어떡해, 죽은 거야?를 웅얼대며 머뭇거리는 반 아이들을 제치고 달려간 아이는 형오를 등에 업었다. 자기보다 덩치가 큰 형오였지만 가볍게 둘러업고 교실을 뛰쳐나갔다. 양호실은 기억자로 꺾인 건물의 맨 끝에 위치하고 있어 단순히 달려도 100미터는 달려야 할 거리였다. 하지만 아이는 쉼 없이 발을 놀려 양호실로 달려갔다. 그 소리가 요란했는지 고개를 내밀어 보는 옆 반 선생님들도 있었지만, 그 선생님들이 뭐라 제지하기도 전에 아이는 이미 지나가고 없었다. 자기 몸만 한 덩치를 업고 이를 악 문 채 달려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뒤늦게 교실을 뛰쳐나와 ‘무슨 일이야!’ 하고 비명을 지르는 선생님도 계셨지만, 이미 아이는 오른쪽으로 꺾인 복도로 향한 뒤였다. 아이가 양호실 문을 벌컥 열었을 때, 그는 복도로부터 들려오는 소란에 뭔 일인가 싶어 궁금해 하는 희연의 눈과 마주쳤다. “형오가 위험해요!”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해 하는 희연을 대신해 재빨리 다가온 양호 선생님이 형오를 받아들었다. 손가락에 밴드를 감은 채 침대 위에 앉아 눈만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지훈은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바리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형오를 가까운 침대에 눕히는 양호 선생님 뒤에서 아이는 재차 소리쳤다. “숨을 못 쉬고 있어요!” 아이는 제대로 숨도 가누지 않고 희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여전히 자리에 말뚝처럼 선 희연이었다. “경은이가 다쳤어요!”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양호실을 빠져나갔다. 이게 무슨 일이야, 하고 느긋하게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조금 늦게 알아차린 희연.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양호실을 뛰쳐나왔을 때는 이미 멀어진 뜀박질 소리만 복도에 남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는 재빨리 교실로 돌아왔다. 담임에게 상황을 알렸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도움을 요청했다지만 그 도움이 올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릴 만큼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금세 교실로 돌아온 아이는 여전히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은 경은과 그 주위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학우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시 뛰어간 아이는, 이번에도 경은을 둘러업고 나가려 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고 찾아 온 옆 반 선생님이 경은 옆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경은을 살피고 계셨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은 아이나 선생님이나 비슷해 보였다. 아이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선생님에게 이야기했다. “양호실에 데리고 가야 돼요.” 때마침 달려온 희연이 열려 있는 교실 뒷문으로 들어왔다. “선생님!” 어쩔 줄 몰라 하는 두 선생님이 바로 행동을 보이지 않는 것이 답답했던 아이는 그대로 경은에게 다가가 재빨리, 그리고 능숙하게 경은을 둘러업었다. 곁에 있던 선생님이 어리바리하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희연을 향해 달려갔다. 정확히는 선생님의 뒤편 복도를 향해 뛰쳐나갔다. 다만 목적지는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에, “양호실!” 이라고 희연에게 소리치며 복도를 내달렸다. 희연도 덩달아 아이 뒤를 함께 달렸는데, 이 때 희연은 매우 희귀한 경험을 했다. 자기 허리에 겨우 닿을 키를 가진 아이가 자기보다 훨씬 앞서 나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둘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급박한 순간에도 희연은 잠깐, ‘이게 뭐지?’라는 의문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아이 뒤를 쫓았다. 식은땀이 절로 나는 이 상황에, ‘긴급’이라는 글자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데 한눈 팔 새가 없었다. 방학식 전날 벌어진 우연한 사고였습니다, 라고 경위서 첫머리를 떠올려 보는 희연이었다. ======================================= [12] 미명(1) “선생님이 아프면 양호실로 가야한다고 알려주셨던 게 생각나서 데리고 갔어요.” 경은이랑 형오를 업고 복도를 질주했던 아이에게 ‘상황’을 물었더니 나온 대답이 그야말로 FM이었다.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하는 아이의 태도가 신기하게 여겨져 다른 질문을 던져보는 교감에게, “무섭진 않았고요. 그냥 걱정이 됐어요. 빨리 양호실에 데려가서 치료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야무지게 대답한다. “위험하다는 생각은 안했어요. 형오나 경은이는 제가 충분히 업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니요, 형오는 숨을 못 쉬는 거 같았는데 먼저 데려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때는 선생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라도 저보다 빨리 경은이를 데려갈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어지는 질문들에도 똑 부러지는 대답을 내놓는 아이가 비범해 보이는 것이 비단 교감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잠시 후 아이는 꾸벅 인사하고 상담실을 나갔다. 교감은 잠시 나간 아이의 흔적을 눈으로 쫓다 왼편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3년차 교사 희연을 쳐다보았다. 역시 3년차에게 1학년을 맡겨서는 안 되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괜한 마음에 출산휴가를 신청하고 나가버린 교사 두 명을 속으로만 타박했다. “김 선생님. 일단 내일 방학식이나 준비 잘 하세요. 징계위원회는 방학 중에 열릴 거 같으니 그 전 까지 경위서 제출해 놓으시고요.”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입니다. 형오 학생 부모님도 이해를 해주셨고, 경은 학생 부모님은 … 일단 천천히 해결해 봅시다.”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아니 100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저 ‘복불복’이었을 뿐이다. “형오 학생은 집에서 쉬기로 했다니깐 방학 끝날 때까지는 학교에 못 올 겁니다. 어차피 2학기 반장도 새로 뽑아야 하니 형오 어머니는 내일 안 나오셔도 괜찮지요?” 학기 초, 형오 어머니가 학부모 모임에서 ‘반장 엄마’로 뽑히면서 형오가 ‘반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졌던 것이었기에, 시기적으로는 형오 어머니의 반장 사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내일 방학식 이후에 가질 학부모 간의 비상 대책 모임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갈지는 희연으로서도 알 수 없었다. SNS에서 이미 엄청난 양의 말들이 오고 가는 판국이었으니까. 이마에서부터 흐른 땀이 똑, 하고 책상 위로 떨어졌다. 상담실을 나온 아이는 곧장 도서관으로 갔다. 이미 수업은 끝났고 대부분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방과 후 수업은 방학 이후로 연기된 탓에 아이는 고학년 학생들의 수업이 끝날 때까지 도서관에서 책을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만약 오늘 일이 없었다면 명수가 와서 운동장에서 놀자고 꼬셨을 테지만, 마침 상담실로 불려갔다가 늦게 나온 덕분에 아이는 홀가분하게 도서관으로 향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데스크에 앉아 업무를 보던 사서 선생님이 아이의 인사에 환하게 웃으시며 반겼다. “왔어? 아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늘 활약이 대단하다고 하더라. 역시 똑똑한 애들이 뭔가 달라도 다른가봐?” “칭찬 고맙습니다.” “어쩜, 대답도 저리 야무지게 잘할까?” 학생들 독서 지도 수업 외에는 하는 일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따분한 일상에 지루해하던 찰나,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의 액션 활극(?)을 듣고 신이 난 사서 선생님은 아이를 보며 연신 싱글벙글 이었다. 그러던지 말던지 아이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는 곧장 교양서적 칸으로 가서 책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지금 가장 궁금한 것은 형오가 왜 그런 증상을 보였는지였다. 다른 선생님들께 묻기엔 분위기가 저어해서 차마 물어보기가 어려웠다. 당연히 양호 선생님에게 여쭤 보는 게 가장 좋은 일일 테지만, 아쉽게도 선생님은 형오와 경은을 데리고 병원으로 간 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곧 학교로 돌아오실 테지만 그 전까지는 도서관에서 그 증상에 대해 찾아볼 생각이었다. 서가에는 다양한 제목의 책들이 아이를 유혹했다. ‘내가 혼자 하는 여행, 새로운 생활교육, 리더십…….’ 시간만 허락한다면 다 읽어보고 싶은 주제와 내용들이지만 너무 서두르지는 않기로 했다. 아버지가 가르쳐 준 제 1 원칙, 서두르지 마라. 숲에서 서두르다가는 길을 잃을 수 있다. 사냥에서 서두르다가는 오히려 다칠 수 있다. 사람에게 말을 할 때 서두르다가는 자신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수 있고, 오해를 부르며, 싸우게 된다. 그러니 서두르지 마라. ‘의학’이라는 이름이 붙은 서적들은 모조리 빼서 독서대로 향한 아이는 한 권씩 읽기 시작했다. ‘감기가 추위 때문이 아니라 200여 종의 바이러스들 때문에 걸려…….’ ‘5억명이 넘는 사람이 죽을 정도로 위험한 바이러스, 문명을 멸망시키기도 …….’ 바이러스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병의 원인이라는 사실 정도는 맥락을 통해 이해할 정도의 통찰력을 가진 아이였다. ‘의사는 화살을 잘라내고 진통제를 뿌려주기 때문에 만인(萬人)에 해당되는 가치가 있다.’ 는 ‘일리아스’의 시구가 의사에 관한 서양 최초의 기록이라는 내용도 읽었지만 아이가 찾는 내용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 정도 내용들을 알고 있는 걸까, 내가 알아야 할 지식이 끝이 없겠구나, 라는 정도의 감상을 남기고 다음 책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여러 책들을 읽다보니 내용들이 거의 대동소이함을 알게 되었다. 거의 대부분 신체적 구조 혹은 역할에 대한 내용일 뿐 구체적인 병명과 그에 대한 증상과 치료에 관한 내용을 서술한 책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사서 선생님께 물어보니, “여기 그런 책들이 없기도 하지만, 그런 내용들을 이해하기엔 니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단다.” 라며 유쾌한 음성으로 대답해주셨다. 어디서 그 책들을 볼 수 있겠냐는 질문에 “학교 도서관 말고 시내 큰 도서관을 가면 볼 수 있지.” 라고 대답하는, 어디서 신나는 노래라도 들었다는 듯 입술 끝을 지긋이 올리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사서 선생님이었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어쩐지 다른 걸 물어도 잘 대답해주실 것 같아 아이는 다른 도서관을 찾아가는 대신 선생님께 질문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반 반장이요, 갑자기 숨도 못 쉬고 부들부들 떨더라구요. 왜 그렇게 된거죠? 입을 막은 것도 아니고 누가 때린 것도 아니었는데 숨을 못쉬었어요. 어떤 병에 걸린건가요? 갑자기 병에 걸리는 경우도 있나요?” 그제야 아이가 궁금해 하는 것을 알게 된 사서 선생님은 이 아이의 또 다른 비범한 능력, 통찰력에 대해 알게 되었다. 숨을 못 쉬는 반장의 모습에서 ‘병’의 원인을 찾고 ‘해결 과정’을 탐구하는 자세는 다른 또래에게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모습일 것이라고 선생님은 생각했다. ‘증상’과 ‘병’을 연결시켜 ‘치료’를 떠올리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게다가 다행(?)히도 그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몇 몇 선생님들을 통해 전해 들었던 선생님은 아이가 최대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고 싶었다. “반장이 갑자기 병에 걸린 건 아니란다. 가끔 어떤 사람들은 특정한 대상에게 공포를 느끼는 경우가 있어. 예를 들면 주사 바늘을 무서워한다거나 어두운 실내 공간을 무서워한다든지 말이야. 그리고 그 대상과 마주하게 되면 갑자기 몸이 말을 안 듣기 시작하는거지.” 선생님은 아이의 반응을 지켜보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우리가 숨을 어떻게 쉬는지 아니?” “코나 입으로 공기를 들이마시면 폐로 들어와 혈액을 타고 온 몸으로 전해진다고 했어요. 그리고 불필요한 이산화탄소를 다시 입으로 뱉어낸다고 했어요.” 조금 전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기에 아이는 냉큼 대답했다. 이 똘똘한 아이가 여간 사랑스러운게 아니다. 선생님은 더욱 신이 나서 아이에게 ‘포비아Phobia’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의학 상식은 있지만 의료 윤리에 대해서는 까마득한 사서 선생님의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고 아이는 형오의 보여준 병의 ‘병명’과 ‘증상’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선생님도 ‘원인’만큼은 잘 알지 못했다. 덕분에 형오의 프라이버시와 바닥까지 치달았던 의료 윤리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똘똘하고 재능있는 학생 앞에서 '선생님'으로서의 위엄과 풍부한 지식을 과시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아이는 오늘의 일을 통해 사람의 병이 반드시 신체적 결함이나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정신’에 상처를 입으면 병이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시내의 큰 도서관에 가면 더 많은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은 부록이었다. 오늘도 나름 뿌듯하게 하루를 보냈다는 느낌에 승합차로 보육원을 향해 가는 동안 명수의 투정이 그리 거슬리지 않았다. 반면, 희연은 오늘 하루가 그 어떤 날보다 지옥 같았다. 하루 종일 윗분들에게 시달린 것도 모자라 핸드폰은 끊임없이 알림메세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통에 일일이 확인하는 것도 지쳐 그냥 책상 서랍에 던져두었다. 확인해봐야 별 시답잖은 내용으로 학부모들끼리 이러쿵 저러쿵 하는 내용일테니. “희연아, 가자. 술이나 한 잔 하자.” 5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동기가 위로주를 쏘겠단다. “그래, 그러자. 오늘 같은 날 한 잔 해야지.” 희연은 책상을 가볍게 탁,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이 방학식이니만큼 만취하기는 어려워도 목을 축이는 정도까지는 괜찮으리라. 빛을 잃은 갈색 플랫 구두가 주인을 데리고 교문을 나섰다. ======================================= [13] 미명(2) 술 한 잔 하자기에 호프집에라도 가나 했더니, 매캐한 냄새로 가득 찬 돼지 막창 집으로 왔다. 여자 둘이서 돼지 막창집 가는 거야 안 될 것도 없다만. 그래도 희연은 조금 조용한 곳에서 울적한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불판 위에 고기 몇 점 올려놓고 소주 몇 잔 걸치니 이게 또 차라리 낫다 싶었다. 미처 닥트에 흡입되지 못한 연기들이 희뿌옇게 모인 가게 안은 시끌벅적 요란스러웠고, 덕분에 희연이 홧김에 된소리로 욕을 내 뱉는다 해도 누구 하나 신경 쓸 사람 없을 것 같았다. “아, 정말 그 짧은 순간에 그리 될지 누가 알았겠냐고~.” 희연의 동기, 화수가 고기를 뒤집으며 맞장구를 쳐 줬다. “그래. 솔직히 내가 너였어도 그 때는 어쩔 수 없었겠더라. 애가 다쳐서 우는데 혼자 양호실 가라고 할 수는 없잖아.” 역시 동기의 힘은 대단하다. 동기의 응원에 더욱 힘이 난다. “교감도 맨날 안전, 안전 하는데, 그러면 교실마다 인터폰이랑 달아주지 그랬냐? 띠, 아 거기 양호실이죠? 여기 1학년 3반인데요, 학생 한 명이 다쳤어요. 데려가서 치료해주세요. 막 이래?” 화수가 상추를 두어 번 탁탁 털고, 그 위에 고기 한 점 올리고 마늘 하나, 고추 하나, 쌈장 조금 해서 먹기 좋게 싸서 희연의 입에 넣어준다. 역시 배려심, 이라며 엄지를 척 내밀어 보이며 맛있게 받아먹는 희연이다. “근데 교감이 징계는 어떻게 한다니? 위원회 열겠대?” 얼굴이 절로 붉어지는 것이 매운 고추라도 먹었나 싶다. “아니, 그게 무슨 징계위원회를 열 일이냐고. 응? 형오가 혈액공포증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지네 엄마가 나한테 한 마디 하지 않은 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 도사야? 경은이는 수업시간에 왜 일어나고 그래? 누가 수업시간에 일어나서 돌아다니랬냐고? 선생이 교실에 없어도 얌전하게 기다려야지 말야. 내가 뭘 잘못했어?” 두서없이 이어지는 희연의 말은 소주 한 잔이 더해질수록 더욱 격앙되어졌다. “근데 교감이라는 사람이 같은 선생을 보호해야지 말야, 자기 혼자 살겠다고 책임은 다~ 나한테 있대. 징계 위원회도 지가 나서서 열자고 했을 걸? 젠장.” 분기가 치솟는지 소주를 퍼붓다시피 들입다 마시는 희연을 화수는 제지하지 않았다. 한 쪽이 달린다고 같이 폭주해버리면 뒷감당이 안 된다. 적당히 풀어주는 것도 요령이리라. “학부모들도 그래. 아니 자기 자식들 잘 봐달라고 굽실댈 때는 언제고 일 터지니깐 선생이 어쩌고, 자질이 어쩌고. 아주 내가 지들 껌이야, 껌. 맛있다고 열나게 빨다가 단물 떨어졌다고 뱉는 거 봐라. 내가 그래서 학부모들한테 정이 떨어져, 정이. 스승의 날 때 선물 갖다 바칠 때 표정 봐. 아이고, 우리 엄마가 그랬으면 내가 창피해서 달려가 말렸을 거다. 게다가 선물이라고 주는 게 바디 로션이다. 진짜 내가 지금까지 받은 바디로션으로 매일 쳐 발라도 10년은 쓰겠다. 그래놓고선 뭐? 선생이 한가하니까 애들한테 신경을 안 써? 아니 지들이 나랑 하루를 같이 있어 보길 했어, 뭘 했어? 오전 수업만 한다고 수업 땡 하고 나면 선생도 같이 노는 줄 아나? 수업 일지 작성해야지, 부교재 준비해야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지들이 뭘 안다고 노네 마네야? 아 씨, 진짜 더러워서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이 쯤에서 한 번 끊어줘야지. 자작하려는 희연을 말리며 화수가 대신 병을 건네받아 잔을 따라 주었다. “니가 참아라. 나도 가끔 그런 얘기 듣는데 참고 있잖아. 솔직히 밴드 만들어서 일일이 하루 수업 내용을 보고하듯이 알려주는 거, CCTV로 감시하는 거랑 뭐가 다르냐고. 자기 하인 다루듯 하는 학부모들도 있다니까?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이 딱 그 짝이야.” 둘은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에 호응해주고 위로해주면서 술잔을 나눴다. 어느 사이엔가 불판 위의 고기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 방학식 날, 아이들은 가볍게 등교해서 짧은 훈화를 듣고 더욱 가벼운 발걸음으로 학교를 뛰쳐나갔다. 어느 반은 긴급 학부모 회의가 예정되어 있어, 해당 반의 선생님이 아침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다는 말도 있었지만 아이들은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방학이고 무한한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조금 안타까운 날이었다. 도서관이 개방되지 않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다시 개방한다니 그 때까지는 학교 도서관을 이용할 수 없게 되었고, 덕분에 아이는 전 날 사서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시내 도서관 출입에 관해서 보육 교사에게 요청을 했다. “미안하지만 넌 아직 어려서 보육원 외출이 조금 어렵 단다. 선생님이 한가하면 같이 가줄텐데 보다시피 선생님이 많이 바빠서 말이야.” 만약 도서관을 가려는 원생들이 많으면 단체로 도서관에 가볼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갓 1학년이 된 원생을 자유롭게 나갈 수 있도록 해 줄 보육원은 없었다. “형이나 누나들이 따로 보는 책도 있으니 한 번 빌려달라고 해보지 그러니?” 그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까지는 학교 도서관을 이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겼고, 두 번째 이유로는 아이가 썩 그렇게 넉살 좋은 성격만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별 다른 방법이 없으니, 쑥스러움은 강아지 꼬리 감추듯 숨겨놓고 부탁을 해 볼 요량으로 선배 원생이 있는 방을 찾아갔다. “어라, 웬일이야? 석고가 내 방엘 다 오고?”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김형근은 같은 초등학교 6학년이다. 비교적 네모난 얼굴형에 묵직해 보이는 면도 있지만, 대체로 쉬는 시간마다 운동장에서 공을 차며 발끈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형이기도 했다. 보육원에서도 종종 애들 무리를 이끌고 다니는 활달함이 엿보였기에 먼저 찾아왔다. 우선 진입장벽이 낮은 순으로 접근해 볼 생각이랄까. “책? 별로 없는데? 옛날에 쓰던 교과서도 다 물려줘서 가진 게 없는데. 아, 1학기 끝났으니까 이거라도 빌려줄까? 2학기 것도 개학 전까지 보고 준다면 괜찮고.” 방학 때는 책을 안 보실 생각이신가 보죠? 속으로 물음을 삼키며 아이는 1학기 책이라도 보겠다며 빌려다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놓은 뒤 다음 대상자를 물색했다. 형근의 옆 침대를 쓰는 철용은 그냥 포기했다. 프로축구선수를 꿈꾸는 철용과 책은 아무래도 거리가 멀어 보였기 때문이다. 똑, 똑. 열려 있는 문을 두드리고 복도에서 대답을 기다렸다. “어? 석고네? 무슨 일이야?” 다정하게 말을 붙여주는 정다영은 5학년으로 얼굴만 보면 형근 못지않게 옅게 탄 피부에 장난기 가득한 눈을 가진 소녀였다. 기회가 된다면 금세라도 옆구리 콕콕 찌르며 친근함을 표현할 것 같은 쾌활함이 엿보이는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이의 손을 끌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평소에도 등교 때나 하교 때 유난히 아이를 귀여워해서 옆자리에 앉히려고 하지만 아이는 그런 접근이 선뜻 반갑지만 않았다. 너무 훅훅 들어온달까. 그래도 저 건너편 책상에 앉아 돌아보는 소미보단 낫다. 보육원에 단 둘 뿐인 6학년 중 한 명인 소미를 아이는 굉장히 꺼려했다. 이유는 다름 아닌 냄새 때문이었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아이는 대단히 예민한 후각을 가지고 있었고 - ‘스크로파’라는 별명에는 아이의 예민한 후각을 코를 킁킁대며 냄새 맡는 동물의 습성에 빗대어 붙인 것이기도 했다 - 소미에게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쾌한 냄새가 맡아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 번도 맡아 본 적 없는 냄새는 아니었다. 다만 과거 빈촌에서 맡아 본 적이 있는 냄새였다. 그리고 그 냄새를 풍기던 사람을 아이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은 말 그대로 왜 소미에게서 그 냄새가 나는 지, 원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 냄새를 잘 맡지 못하는 눈치였다. 같은 학년인 형근이 소미를 두고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린 적이 있었다. “예쁘면 뭘 해. 걔는 너무 어두워. 자기는 찾아오는 아빠도 있으면서 그렇게 세상 근심 다 가진 애처럼 구는 데 정이 안 가.” 그러면서도 틈만 나면 흘끔흘끔 쳐다보는 형근의 시선이 종종 들키곤 했다. 예쁜 건 자주 감상해야 된댔어, 라는 변명은 아이를 전혀 설득시키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자주 관심을 갖고 있던 형근도 알지 못할 만큼 희미한 냄새였다. 어쨌든 찾아온 용건이나 빨리 이야기하고 나가려는 아이에게 뜻밖에도 여러 권의 책을 선물해준 건 소미였다. 주말마다 아버지가 찾아오는 소미는 그 때마다 먹을거리나 옷, 혹은 책을 선물로 받았는데, 그렇게 받은 책 중에 소설책 3권을 선뜻 내주는 것이었다. “그냥 너 가져가. 책 좋아한다며? 난 다 읽은 거야.” 끝까지 읽은 건지 의심이 들만큼 깨끗한 책이었다. 아이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표하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나중에라도 책 보고 싶으면 아무 때나 와서 빌려가.” 다영에게서도 몇 권의 책을 빌린 아이는 두 손으로 가뿐하게 빌린 책을 싸들고 방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돌아가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볍지 않은 것은 단지 책이 무거워서는 아니었다. 어쩌면 아이는 책을 빌리기 위해 이 방을 다시 오는 일은 거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과거 그 냄새를 풍겼던 사람은 빈촌에서 두들겨 맞고 쫓겨났다. 그 전까지도 마을 내에서 곱지 않은 시선을 받던 사람이었고, 가끔은 무거운 배낭을 메고 지친 발걸음을 옮기던 아이에게 시비를 걸기도 했던 -어머니의 표현에 따르자면- ‘몹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쫓겨나던 날, 그가 풍긴 냄새, 그 냄새가 아이는 싫었다. 먹고 남은 음식 쓰레기를 뒤죽박죽 섞어 정체를 알 수 없게 만들면 맡게 될 것 같은 역한 느낌의 냄새, 그 불쾌함이 싫었다. ======================================= [14] 미명(3) 다음 날이 밝았고, 아이는 어김없이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뒷산 정상에서 일출을 바라봤다. 조금쯤은 다른 아이들처럼 느긋하게 생활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이전의 습관이 그림자처럼 남아서, 또 아침 햇살이 스며드는 숲의 향기가 좋아서, 라는 이유로 산에 오르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천천히 밝아오는 아침 하늘을 오롯이 혼자서 감상하는 이 순간만큼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나 분위기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이리라. 무덤덤한 표정과 달리 거의 항상 신경을 세우고 있었던 아이의 남모를 고충이었다. 산에서 내려오니 보육원도 조금씩 아침잠에서 깨어나는 분위기였다. 아이가 아침을 먹으러 식당엘 갔을 때 원생들이 다소 들떠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오늘은 이 달의 마지막 주말이었고, 이 날에는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자원봉사자 중에 피자와 등갈비 폭립(Pork ribs)을 가득 싸들고 오시는 분이 계셨다. 당연히 ‘외식’을 연례행사처럼 손꼽아 기다리는 원생들에게 가장 인기 많은 메뉴라 할 수 있었다. 아이 역시 놀라운 재료들과 맛으로 무장한 그 음식들을 좋아했다. 다만 그 음식만큼 보육원 식당에서 제공하는 아침도 맛있었고, 끼니를 챙겨 먹을 수 있다는 만족감을 포기할 수 없었던 아이는 남들보다 더 많이 아침을 챙겨 먹었다. 아침 등산을 하기 시작한 후로 부쩍 식사량이 늘어난 아이였다. “너 진짜 많이 먹는다. 배 많이 고파?” 명수의 걱정 가득한 오지랖에도 아이는 부지런히, 맛있게 식판을 비워냈다. “너 그렇게 많이 먹으면 돼지 된다. 안되겠다. 내가 너 운동시켜야겠다.” 역시나 명수다, 싶은 생각에 아이는 싱긋 웃고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방학이기도 했고, 주말이기도 했다. 오늘 하루, 아니 오전쯤은 같이 놀아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은 마음에 명수의 요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이따가 형근이 형이랑 산에 가서 사슴벌레 잡을 거다. 예전에 형이 새하얀 토끼도 봤다는데, 엄청 빨리 도망가서 잡진 못했대. 혼자라서 잡기 힘들었는데 둘이 가면 한쪽에서 막고 한쪽에서 잡으러 가면 쉽게 잡을 수 있대. 철용이 형이랑 너까지 해서 넷이 올라가면 토끼 잡을 수 있을 거야.” 여태 산을 오르면서 토끼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이다. 토끼똥 하나 구경 못해본 아이는 저 산에 토끼 없어, 라고 말하는 대신 이 손 저 발 써가며 신나게 이야기하는 명수의 재잘거림을 묵묵히 받아주었다. 어쩐지 명수의 모습에서 옛 친구의 수다가 생각났다. 명수의 식판은 점점 식어갔지만, 얼굴은 점점 뜨거워졌다. 보육원의 남자 초등학생 4명은 신발을 동여매고 산에 오르기 위한 준비를 했다. 형근의 지시에 따라 보육원 현관 앞에 모인 동생들을 등 뒤에 세우고 형근은 보육교사에게 산에 다녀오겠노라고 허락을 구했다. 마침 보육교사는 주말 외출을 신청한 아이들을 배웅하느라 현관에 나와 있던 상황이었다. “니가 큰 형이니까 동생들 안 다치게 잘 돌봐야 한다. 너무 멀리가지 말고. 알았지?” “예, 선생님!” 가자, 라고 신나게 외치는 큰 형을 졸졸 따르는 작은 병아리 무리들. 그들의 뒷모습을 눈에 담고 있던 보육 교사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머, 소미 아버님 오셨네요? 어머 소미야, 오늘 너무 예쁘게 차렸는데? 아버님 올 때마다 소미가 저렇게 꽃단장을 하네요.” 원생들의 부모님들에게 립서비스는 기본이지만 소미의 경우에는 진심으로 예쁘다는 생각이 들어 말을 꾸밀 필요가 없었다. 넉살 좋은 웃음으로 소미와 소미 아버지를 배웅하던 보육교사는 보육원 정문을 빠져나가는 소미의 어깨가 많이 지쳐 보인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반에서 우등생으로 소문난 소미였기에 그간 공부하느라 힘들었었나 보다, 라고 짐작해 볼 따름이다. ‘아버지한테 맛있는 거 얻어먹고 그러면 힘도 나고, 기운도 내고 그러는 거지. 그래도 찾아오는 아버지가 있는 게 어디야.’ 부모와 함께 외출을 떠나는 원생들을 걱정하느니, 뒷산에 올라간 철부지 꼬마 애들을 걱정하는 게 바람직하리라. 보육 교사는 걸치고 있던 앞치마를 괜히 툭툭 털어 내고, 원내로 들어갔다. **** “석고야, 석고야. 뭐하니?” “…….” “석고야, 석고야. 뭐하~니?” “…가만히 있어봐.” “석고야, 석…….” “자, 여기.” “윽, 뭐야!” 뒷걸음질 치는 명수에게 다가간 아이는 눈앞에 들이대고 설명했다. “새똥하늘소.” “으… 응? 하늘소? 이게?” 너무 작고 희어서 얼핏 지나가다 보면 잎에 떨어진 새똥처럼 보인다고 ‘새똥하늘소’라 이름이 붙은 곤충을 눈앞에서 본 명수는 조금 전까지의 지루함이 싹 날아간 듯이 보였다. 배 부분만 허여멀건 것이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새똥이다. 이 작은 걸 찾아낸 아이의 관찰력은 명수의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엄지와 검지로 조심스럽게 건네받아 가만히 살피니, 6개의 조그만 다리가 꼼지락 대는 것이 여간 신기한 게 아니다. 어디 나도 한 번 보자, 며 몇 걸음 떨어져 걷던 철용도 달려와 같이 감상했다. “아까 거랑 또 다른 거네? 석고는 이런 거 정말 잘 찾네?” 형근은 두어 걸음 떨어진 곳까지 왔다가 슬쩍 눈치만 보고는 다시 멀어진다. 눈을 부릅뜬 모양새가 조만간 뭔 일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힘을 빡 주고, 주변을 샅샅이 훑으며 산을 올랐다. 아이가 3마리를 찾는 동안 자신이 한 마리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산을 오르다보니 아무리 기운 넘치는 꼬마 아이들도 지치기 마련인데, 먼저 우는 소리를 내는 것은 역시 명수였다. “형. 조금만 쉬었다 가면 안 될까?” 이미 이마와 볼이 발그레 달아오른 형근이 어쩔 수 없이 허락한다는 듯, “그래 잠깐 쉬다 가자.” 라고 말한 뒤 제일 먼저 풀썩 주저앉아 버린다. 뒤따라 다른 아이들도 형근의 옆에 주르르 주저앉고는 거친 숨을 달래며 올라온 산길을 내려다 봤다. “형 우리 너무 멀리 온 거 같애.” 평소 누구보다 더 많이, 더 빨리 뛰는 ‘운동장의 지배자’ 철용도 산길은 힘들었나보다. 대충 이만큼 왔으니 이만 돌아가자는 뉘앙스가 담긴 말에 형근은 잠시 고민하느라 대답이 늦었다. 그러자 명수가 순박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토끼 잡을 때까지 더 올라가야지.” 이 정도면 되겠지, 라고 속으로 생각하던 형근은 명수의 말에 당황하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철용이 또 한 마디 했다. “너무 멀리 와서 길 잃어버리면 어떻게 돌아갈래? 너 길 모르잖아?” “형근이 형은 길 잘 알아.”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맞다고 할 수도 없는, ‘사면초가’ 상태다. “선생님이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했잖아. 선생님 말씀도 들어야지.” “선생님도 토끼 잡아가면 좋아하실 거야. 보육원에서 토끼 키우는 사람 우리 밖에 없을걸?” 이미 명수는 머릿속으로 토끼집을 만들어 놓고 밥까지 챙겨주고 있었던 것 같다. “야, 토끼가 바보냐? 우리가 4명인 걸 봤으면 벌써 도망쳤겠다.” “아니야, 토끼는 형근이 형이 금방 찾을 거야.” 명예와 실리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형근. 그는 이미 ‘자가당착’에 빠진 상황이었다. 옆에서 말없이 지켜만 보며 어제 저녁 외운 고사 성어나 떠올려 보던 아이가, 이제 적당히 말려야 할 때인 것 같아 둘 사이를 중재했다. “지금 하늘에 구름이 낀 걸 보니 곧 비가 올 거 같은데. 비가 오면 산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고 잘못하면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음에 다시 오는 게 좋을 거 같애.” 셋이 고개를 들어보니 과연 하늘에 먹구름이 모이고 있는 듯 어두워지고 있었다. 비를 맞기는 싫었던지 명수가 마음을 돌려 하산을 결정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툭툭 털고 일어선 형근은 다시 앞장서 산을 내려갔다. 그렇지만 그들의 선택이 늦었던 건지 혹은 생각보다 하늘이 짖궂은 건지 산을 다 내려가기도 전에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이내 소나기가 되었다. 아이들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거리기만 했다. 형근이 결심한 듯 뛰어가자, 고 했지만 이내 아이의 제지에 걸려 걸음을 멈췄다. “위험해요. 지금은 비 때문에 미끄러워서 뛰다가 넘어지면 크게 다쳐요.” 아이는 두려움이 가득한 아이들에게 우선 해결책을 제시했다. “저 옆으로 가면 비를 피할 데가 있으니 거기로 가요. 소나기는 금방 멈춰요.” 아이가 앞장서 길을 옆으로 틀었다. 아이의 기억에 저기 어디쯤에 기이하게 큰 바위가 비스듬하게 땅에서 솟듯이 묻혀있는 지형이 있었다. 완전히 비를 피하지는 못해도 잠시나마 몸을 숨길만한 곳은 되리라, 판단한 아이였다. 진정한 ‘사면초가’는 바로 지금이리라. 스치듯 지나가는 생각이었다. ======================================= [15] 미명(4) “석고야, 추워.” 바위 아래로 몸을 숨겨 급하게 비를 피했지만, 오는 동안 적지 않은 비를 맞아 흠뻑 젖은 채인 아이들이었다. 특히 어린 명수가 체력이 많이 떨어진 틈에 비를 맞았던 탓인지 벌써 입술이 파래지는 것 같았다. “조금만 참아. 금방 비가 그칠거야.” 아이는 명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형근과 철용도 다가와 서로를 껴안았다. 체력이 심하게 떨어진 상태만 아니었다면 이런 조난(?)을 당하지 않았을 일이지만 별 수 없었다. 아이는 비가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위 때문에 시야가 많이 가려졌고, 그 너머로 댓살같이 내리 퍼붓는 소나기가 하늘을 가리고 있어 먹구름이 어디까지 지나갔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아이의 등으로 추위가 슬그머니 올라와 앉기 시작했다. 명수의 어깨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남은 한 손을 들어 목에 걸려있던 펜던트를 꺼내 붙잡았다. ‘아버지. 도와주세요.’ **** 보육원 안으로 중형 세단 한 대가 들어왔다. 이윽고 현관 앞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린 이는 원장과 사무국장이었다. 여름의 초입을 맞아 보신도 할 겸 백숙 한 그릇씩 거하게 드시고 오신 원장은 더욱 넉넉해진 ‘인성’을 두드리며 보육원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를 배곯은 표정을 지으며 사무국장이 뒤따랐다. “원장 선생님. 그럼 분기 예산안 수정 보고서, 말씀대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예. 그러세요. 정말 사무국장이 계셔서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마음 아시죠?” 배도 부르고 일도 잘 풀리니 기분이 좋았다. 모처럼 오늘은 일찍 집에 들어가서 가장 노릇 좀 해볼까, 궁리해보던 원장이었다. “그리고 이번 년도에 졸업하는 애들이 4명인데, 인원 감축을 해야 할지…….” 사무국장의 걱정에 너털웃음을 짧게 터뜨리며 해답을 제시해주었다. “원… 애들이 빠졌으면 빠진 만큼 또 데려오면 되죠. 지금 계신 분들 모두 경력자들이신데 함부로 감축할 수야 있나요. 일 할 사람이 너무 많다고 자르고, 부족하다고 새 사람 뽑고 그러면 애들도 혼란스러워 합니다. 일 할 사람이 많으면 일을 만들어야 보육원도 돌아가고, 나라에 보탬도 되고 그러는 거죠, 안 그렇습니까? 바로 그런 일 하는 게 우리 사무국장 님 일 아니십니까? 나중에 시청 이 국장 만나서 잘 이야기 나눠보세요. 혹시 압니까? 우리 쪽으로 들어올 아이들이 생길지.” 살짝 얼굴색이 변하는 사무국장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는 격려해주는 인자한 원장. “아 국장님 같이 올라가셔서 커피나 한 잔 하시죠. 마침 좋은 커피도 들어왔다던데.” “예, 알겠습니다. 원장 선생님.” 사무국장은 표정을 가다듬으며 능글거리는 원장의 뒤를 졸졸 쫓았다.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본 행정과장이 짧게 혀를 차곤 눈에 띄지 않게 재빨리 행정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행정과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여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이서림 씨, 커피 한 잔 부탁해요. 진하게요.” “예, 과장님.” 자기 책상을 찾아 앉은 과장은 넥타이를 살짝 느슨하게 풀었다. 요즘 점점 살이 차오르는지 넥타이를 매는 것도 고역이다. 이게 다 나잇살이겠거니 싶다가도 ‘다이어트’를 좀 해야 하나, 같은 고민을 짧게 가져본다. 여직원이 커피를 가져왔다. 진한 고동색 커피를 들어 한 모금을 머금고는 창밖을 내다 봤다. 아까는 미친 듯이 쏟아지더니 이제 빗줄기가 조금 약해진 모양이다. 역시 여름 소나기는 짧고 굵게 존재감을 드러낸다싶다. “소나기라…….” “예?”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던 일 하세요.” 눈치를 보다 이내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는 여직원에게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이제 몇 가지 확실한 증거들만 찾으면 원장을 탄핵하는 일도 멀지 않았다. 정황상 원장의 비리가 확실해 보이는데 사무국장이란 놈이 어찌나 단단히 바리케이드를 쳐 놨는지 쉽게 뚫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원장의 라인도 여간 튼튼한 게 아니다. 위 아래로 확실한 줄을 잡고 있으니 그 지위가 꽤 단단해 보이기도 했다. ‘재단 이사 황희숙, 강명자, 거기에 사무국장까지.’ 하지만 결국 ‘소나기’를 맞는 것은 원장이 될 것이라고 행정과장은 생각했다. 재단 실세 중의 실세가 자기 뒤를 받쳐주니 언젠가는 이 판을 엎을 수 있으리라. 진한 커피를 마시며 비가 언제 그치려나, 짐작해보는 행정국장이었다. 거세게 내리던 비가 조금씩 기세를 줄이기 시작한 것은 점심시간이 지날 무렵이었다. 고작해야 3시간 정도 비가 퍼 붓다 말았지만 - 그리고 아직 비가 그친 것은 아니지만 - 그 비 때문에 보육교사는 피가 마르는 심정을 맛봐야만 했다. “박 선생님, 무슨 일 있나요?” 현관을 떠나지 못하는 보육 교사의 모습이 이상하다 여긴 생활 지도원이 말을 건넸다. 여름 소나기가 반가워 저러고 있을 양반이 아닌데, 라는 생각은 속으로만 하면서. “아, 아니요, 별 일은요. 그냥 오랜만에 비가 오는 게, 좋기도 하구요. 오늘 외출 나간 애들이 무사히 돌아오나 싶어서요.” 저 양반 지금 자기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이나 할까? 라는 생각도 속으로 삼켰다. 외출 나간 애들이 돌아오려면 아직 4시간은 더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제쳐두고라도 자기가 언제부터 그렇게 열심히 애들 걱정 했다고 저럴까. 생활 지도원은 괜한 물음을 던졌다 싶어 그냥 자기 할 일이나 찾아보자는 마음으로 돌아섰다. ‘지 할 일이나 하지 남의 일에 괜한 오지랖이람.’ 보육교사는 돌아서는 생활지도원을 한 번 째려보고는 다시 바깥을 쳐다봤다. 비가 완전히 그치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다. 지금이라도 장난스런 미소를 얼굴 가득히 채워서 저 빗속을 뚫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왔으면 싶다. 그럼 자신은 꽤나 엄한 얼굴로 아이들을 채근할 것이다. 이렇게 비가 오면 바로 돌아왔어야지, 왜 이렇게 오래 걸렸냐고. 자신이 얼마나 너희들을 걱정했는지 아냐고. 그러면 아이들은 빗물 섞인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잘못했다고, 선생님 말씀 잘 듣겠다, 며 잘못을 빌겠지. 그 후에 자신이 무릎을 굽히고 아이들과 시선을 맞춘 후 따뜻하게 안아주며 “선생님이 정말 엄마 같은 마음으로 너희들이 무사하길 기도했단다.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라고 말을 하는 모습을 지나가던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지켜보겠지. 그러면 관리 소홀이라는 명목으로 경위서를 쓸 일도, 징계를 받을 일도 없겠지. 원장의 찢어진 눈매를 마주하고 무릎 꿇을 일도 없겠지. 제발,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오늘 하루 무사히 지나가기를. 누가 들어줄지 모를 기도를 속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그 시간 자신들을 걱정(?)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 채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던 무리들은 잠시라도 쉬었던 게 약이 되었는지 조금이나마 기운을 차렸다. “형근이 형. 이제 내려가자.” 철용이 다시 한 번 하산을 종용하자 형근이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하겠다 마음먹었다. 힐끔 옆을 보니 명수도 많이 힘들어 보였다. 여기서 비가 그치기를 마냥 기다리는 것도 답은 아니지 싶었다. “그래, 비도 조금밖에 안 오니까 내려가도 되겠다.” 아이도 이제 내려가는 게 옳다 싶어 고갯짓으로 동의를 표했다. 이상하게도 아까보다 덜 추운 느낌이 들기도 해서 체력이 많이 돌아왔다는 판단을 했다. 명수도 말은 없었지만 파랗게 질렸던 입술이 제 색을 찾은 걸 보니 움직여도 될 거 같았다. 형근을 위시한 무리들은 천천히 한 걸음씩 조심해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시 비를 맞아서인지, 아니면 젖어 있던 옷이 찰싹 들러붙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르겠지만 잠깐 따뜻했던 몸이 이내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명수는 부들부들 떨며 아이를 붙잡은 팔에 힘을 더했다. 올라 왔던 길을 그대로 내려가는데도 길 위에 떨어진 젖은 낙엽 때문에 비틀대거나 넘어지기 일쑤여서 아이들은 더욱 긴장한 채로 하산을 했다. 서로 말은 없었지만 위기감은 머리끝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하지만 결국 제대로 걷지 못하던 명수가 헛발을 짚으며 미끄러지고 말았다. “명수야!” ======================================= [16] 미명(5) “명수야!” 아이의 비명에 앞서 걷던 형근이 놀란 얼굴을 하고 급하게 돌아보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하지만 형근은 그 고통을 느낄 새가 없었다. 낙엽에 미끄러져 넘어진 명수가 비탈을 타고 구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은 철용도 마찬가지. 자신을 붙잡고 걷던 명수가 아래로 푹 꺼지며 굴러가는 것을 인지함과 동시에 아이는 손을 뻗었다. 명수를 붙잡으려 했으나 한 끝 차이로 명수는 아이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아이는 명수를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급히 명수를 쫓았다. 아래쪽으로 구르는 명수를 금세 쫓은 아이가 폴짝 뛰어 명수를 넘었다. 양 발에 힘을 주어 미끄러지지 않게 균형을 잡고 돌아선 아이는 발 앞으로 굴러온 명수를 붙잡았다. 그러나 굴러 오던 힘을 감당 하지 못한 아이가 이내 명수와 뒤엉키며 쓰러졌다. 쓰러지는 순간에도 아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몸을 잽싸게 돌려 작은 나무가 서 있는 쪽으로 향한 아이는 이내 소나무 아래 줄기에 부딪히며 짧은 신음을 토해냈다. “명수야! 석고야!” 형근과 철용이 한 발 한 발 조심해서 쓰러진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명수는 많이 놀랐는지 크게 울지도 못하고 컥컥 거리며 울먹거리고만 있었다. 반면 몸으로 명수를 받아냈던 아이는 땅에 엎어져 있는데 움직임이 없었다. “명수야, 괜찮아? 다친 데 없어?” 말 없이 도리도리 고갯짓으로 대답하는, 눈물 범벅인 명수를 일별하고 형근은 아이에게 다가갔다. “야, 정신차려봐! 야!” 몸을 흔들며 부르는데도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는 아이였다. 형근과 철용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명수가 가만히 보다 울음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죽은 거야?” 철용이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서다 주저 앉아버렸다. 형근의 두 눈은 이보다 커질 수 없다는 것처럼 커졌지만, 설마 하는 마음으로 아이를 조심스럽게 돌려 눕혔다. 외관상으로는 크게 다친 부위가 없어 보였다. 어느새 부슬비가 되어버린 빗줄기가 내리고 있지만 붉은 피가 보이지는 않는 거 같았다. 피가 안 나면 크게 다친 건 아닐 것이다. 형근은 그리 판단하고 조금 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슬며시 아이의 가슴께로 손을 올려보았다. 옆의 두 아이가 그 모양새를 말없이 지켜보는데 명수가 끝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죽었어?” 울음을 억지로 참고 있음을 역력히 드러낸 형근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모르겠어.” 이번에는 손을 떼고 귀를 가슴에 대 보는 형근. 명수가 다시 말을 하려는데 이번에는 철용이 검지를 입술에 대며 명수를 제지했다. 그러기를 한참, 다시 몸을 바로 세우더니 궁금해 미치기 직전이라는 눈빛을 보내는 두 사람에게 형근이 말했다. “살아 있는 거 같아. 가슴이 움직여.” “와!” “철용아, 내가 석고 업고 갈 테니깐 니가 명수 손 붙잡고 내려와. 명수야 걸을 수 있겠어?” 형근의 리더쉽이 위기 속에서 피어나는 순간, 시간이 갈수록 약해지던 빗줄기가 시나브로 멈추었다. 여전히 바닥은 미끄럽지만, 한 발짝씩 조심하며 보육원을 향했다. 다행히도 보육원까지 멀지 않은 시점에서 벌어졌던 사고였던지라 넷은 무사히 보육원의 후면이 보이는 곳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엉망진창이 된 모습으로 보육원에 나타난 아이들과 이를 발견한 다른 아이들. 선생님을 외치는 아이들과 급체한 얼굴로 나타나 전기라도 맞은 듯 부들부들 떨어대는 보육교사. 요란 법석을 떨어댄 아네스 보육원의 주말 오후 광경이었다. **** “애는 어때요?” 입 안 가득 담배연기를 베어 물었다가 뱉어내는 원장의 심각한 얼굴에 코를 막는 시늉도 못하고 그저 죄송한 마음으로 답하는 보육교사였다. “일단 자기 방 침대에 눕혀 놓았고요…….” “제가!” 갑자기 터져 나온 고성에 화들짝 놀란 보육교사의 좁은 어깨가 더욱 움츠려진다. 원장은 다시 한 번 깊이 담배 한 모금을 들이마셨다가 뱉으며 조용히, 천천히 말을 꺼냈다. “제가… 어디 있냐고 물은 게 아니잖아요. 아이 상태가! …후우, 어떠냐고 물어본 거잖아요.” “예… 저… 아이는 아직…….” “아직?” “예! 아직 정신을 잃은 상태입…….”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애가! 정신을! 잃었다고 가만히 있어! 당신 초짜야? 응? 초짜냐고!” 보육교사는 분기를 터뜨리는 원장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그저 죄송합니다, 만 반복했다. “아이들이 산에서 다쳐서 내려올 때까지 당신, 뭐한 겁니까! 그리고 지도원 하나 없이 누가 애들만 산으로 보내래요? 예? 그리고 비가 그렇게 오는데 안 왔으면 보고를, 보고를 해야 할 거 아냐! 당신 그냥 시말서나 쓰고 말면 다일 줄 알았어? 응? 당신 말이야! 이거 구속감이라는 거 몰라? 이래 놓고 나한테 책임 씌어서 말이야, 나 한 번 엿 먹어 보라는 거야 뭐야! 저러다 애 잘못되면, 당신 인생 완전히 끝이라고! 알아 몰라!” 볼륨을 최대로 올린 후 기타 스트링을 울리면 앰프에서 이런 소리가 나지 싶었다. 보육교사는 원장이 질러대는 말이 드문드문 들리는데도 내용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만 할 뿐 대꾸는 하지 못했다. 그저 입술만 덜덜 떨며 눈치만 보는 그녀. 비 오는 록 페스티발의 진흙탕에서 뒹굴다 나온 얼굴처럼 거무죽죽한 그녀가, 사무국장이 보기에 안돼 보였다. 옆에서 된서리는 피하자는 식으로 묵묵히 서 있던 사무국장이 타오르듯 붉어진 얼굴의 원장을 말렸다. “원장 선생님. 일단 고정하시죠. 혈압도 있으신데…….” 보육교사를 노려보며 씩씩대던 원장은 꽁초만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새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인 보육교사를 노려보는 원장의 품이 여간 사나운 게 아니었다. 동물원 철망을 뚫고 나온 흑곰이 날 선 눈매로 먹잇감을 노려보는 모양새가 딱 저러하지 않을까. 사무국장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키는데 원장이 입을 열었다. “박 선생.” 동굴 벽을 긁는 소리에 흠칫한 보육교사가 눈동자만 올려 원장의 눈치를 봤다. “혹시 전화했어요?” “…전화요?” “119 말이예요.” “아! 아뇨, 아직……. 아, 지금 바로 하겠…….” “하지마세요.” “예?” 원장의 지시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눈이 마주친 보육교사는 앗 뜨거, 하며 금세 고개를 내렸다. 잠시 정적이 흐르는 원장실에 담배 끝이 타들어가는 소리만 울렸다. “소문나면 안 좋으니까, 연락하지 마시라고요. 알겠죠?” “예…….”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의 대답이 시원찮았는지 원장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알겠냐고?” “예, 예!” “나가봐요.” 곰에게 벗어난 보육교사는 환호성을 지르는 대신, 앓는 소리를 내며 절뚝거리는 무릎을 억지로 움직여 원장실을 벗어났다. 곰은 담배를 마저 피웠다. 원장실은 앞이 보이지 않게 연기로 가득 찼다. **** 아이는 잠이 들었다. 그런데 자신이 잠을 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잠에서 깨어나려고 하는데 깨어나 지질 않는 것이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어서 아이는 어찌해야 될지 몰랐다. 아이는 주변을 둘러 볼 수 있었다. 잠을 자는데 둘러볼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하지만 주위는 온통 어두워 사위를 둘러보아도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때 노랫소리인지 뭔지가 들렸다. 낭송시 같기도 했다. 미신(迷信)을 믿는 사람은 자신(自信)을 잃는구나 미몽(迷夢)에 빠져 세월을 낭비한 사람은 자만(自慢)의 숲에서 길을 잃었구나 미궁(迷宮)에서 벗어나려는 그대여 자해(自害)의 흔적을 남겨두었구나 혼란을 방조하였던 신이시어 이제는 돌아와 방종(放縱)의 무리들을 무찌르소서 혼구(昏衢)의 끝에 선 신이시어 이제는 빛을 열어 어둠을 무찌르소서 그리하여 미명(未明)의 시간, 창천(蒼天)의 뜻을 세우소서. 낭송이 끝날 때, 아이는 눈을 떴다. ======================================= [17] Chapter(1) 눈은 떴지만 여전히 주변은 어두워서 주위의 사물이 구별되지 않았다. 1년 전에도 이런 경험을 했었음을 떠올린 아이는 이내 자기가 쓰러져 있음을 깨달았다.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하는데 쉽사리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애면글면 팔에 힘을 줘서 일어나보는 아이. 입에서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여긴 어디?’ 방금 전까지 명수와 산에서 비를 맞고 있었다는 기억까지는 떠올렸다. 그 이후. ‘명수가 넘어지고 난 …….’ 등에 강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 그러고 보니 등이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우선은 주변을 파악해야 할 것 같아서 의자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지만 여전히 어둠에 묻혀 보이는 것이 없었다. 손을 뻗어 어디 걸리는 것이 없는지 휘저어 보지만 당장은 의자 밖에 없다.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주변을 더듬어 나갔다. 그리고 손이 닿았다. 벽으로 추정되는 그것에서 거친 나무의 차가운 질감이 느껴졌다. 아이는 그 느낌이 익숙했다. "음?" 한 손은 벽을 짚어 의지하며 다른 한 손은 이 곳 저 곳을 더듬어가며 정체를 파악할 만한 무엇인가가 손에 잡히기를 바랐다. 직각으로 꺾이는 벽이 나타나고 다시 그 벽을 따라 게걸음을 걸었다. 이윽고 다른 이질감이 느껴지는 벽이 나타났다. 가로방향으로 정렬되어 있던 벽이 세로방향으로 바뀌는 느낌. 아이는 문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힘을 주니 바깥으로 밀려나는 문이었다. 열리는 틈새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아이는 문을 나섰다. “아…….” 여전히 주변이 어둡긴 매 한가지였으나 서서히 어둠이 옅어지고 있는 하늘이었다. 동살이 잡힐 무렵이라 보라색과 감청색이 뒤섞여 신비로움이 가득한, 한 눈에 담기도 어려울 만큼 넓은 하늘. 이세계로 떨어진 1년 동안 저렇게 넓은 하늘은 보지 못했다. 하늘을 가리는 높은 건물도, 이 곳 저 곳으로 복잡하게 펼쳐져 시선을 어지럽히던 전선들도 없기에, 맨살을 드러낸 듯 오롯이 드러난 넓고 넓은 하늘이었다. 또 바로 앞으로 보이는 전경 역시 너무 익숙하고, 또 그리웠던 장면이었다. 늙은 전나무 껍질로 지붕을 메우고 통나무를 세워 벽을 만든 집들. 집들 사이로 익숙한 속길과 드문드문 소담스럽게 솟아난 잡초들. 정리를 하지 않은 흙길에는 생겨난 허방들. 어른들의 힘으로도 뽑을 수 없어 그냥 내버려둔, 한 때는 놀이터 삼아 놀던 바위들. 그리고 새벽이슬을 머금어 살짝 고개 숙인 꽃들과 듬성듬성 솟아 그늘을 만들어주던 나무들. 이곳은 빈촌이었다. 입술을 깨문 채 아이는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나온 집의 실내가 희미한 빛을 받아 어렴풋하게 그 정체를 드러냈다. 탁자와 의자, 벽에 걸린 장식물들까지. “엄마…….” 저도 모르게 신음처럼 터져 나온 한 마디에 아이는 정신을 차렸다. 엄마. “엄마? 엄마!” 안으로 뛰어든 아이는, 어둠에 싸인 집에서, 방에서 끝끝내 어머니를 찾을 수 없었다. 바깥 공기만큼, 아니 그보다 더한 싸늘함이 집안을 채우고 있었다. 어느새 해가 떠올라 주위가 환해졌다. 이맘때면 부지런한 사람들이 아침을 준비하랴, 먼 길을 떠날 준비를 하랴 분주했을 텐데, 1년 전과 마찬가지로 빈촌은 조용하기만 했다. 집 밖 외벽에 기대어 앉은 아이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엉망인 상태였다. 어떻게 이곳으로 다시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이후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여전히 모든 게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상황이라는 것만 재확인했을 뿐이다. 팔을 들어 눈 주위를 쓱쓱 문지른 아이는 벌떡 일어나 집으로 들어갔다. 주변이 밝아진 틈에 ‘조사’를 해 볼 요량이었다. 비록 1년 정도였지만 타지에 나가 수학한 유학생(?)으로서 나름 머리가 깨인 상태이기도 했던 아이는 그간 배우고 익힌 바를 실천해 볼 생각으로 집 안 구석구석을 살폈다. 1년 전이야 어머니가 없어졌다는 사실에 당황해서 어리숙하게 행동했었다지만 이제는 배운 머리를 써먹어야 할 때였다. 아이는 조사를 시작하고 몇 가지 단서를 추려낼 수 있었다. 하나는 집 안에 먼지가 많지 않았다는 것. 만약 자신이 집을 떠나 있던 1년간 이 집이 방치되었다면 거실 탁자가 이렇게 깨끗하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누군가 청소를 한 흔적은 없어보였다. 만약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다면 벽 아래로 떨어진 마른 약초 다발을 주워다 어디에든 올려놨을 테니 말이다. 두 번째는, “모든 것이 그대로.” 아이가 기억하기에 1년 전, 그러니까 자신이 마지막으로 이 집에 있었을 때와 같은 상태라 가정한다면 이 집에는 모든 것이 평상시와 같은 형태로 존재했다. 방에 걸려있는 몇 안 되는 어머니나 동생의 옷가지들도 그대로였고, 주방에 놓인 그릇들도 가지런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마치 전 날 저녁, 세 식구가 다 함께 식사를 하고 난 뒤 뒷정리를 마치고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면 바로 지금과 같은 모습일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세 번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집들도 들어가 보고 난 뒤의 단서였다. “아무도 없다.” 다른 집 역시 자기 집과 마찬가지로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고, 다른 모든 의복이나 생필품들이 제 자리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결론. “사람만 사라졌다.” 그럼 또 다시 의문점 하나. 왜 사라졌는가? 혹시 도시의 기사들이 와서 데리고 갔을까? 예전에 옆 집 아줌마와 아저씨가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여기는 걷어 갈 것도 없고 하니깐 사람들이나 끌고 가서 노예로 만들게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그려.” “아이고, 그런 무서운 소리는 하지 마요. 말이 씨가 될라.” “별 수 있나. 만약 들키면 또 도망가야지 뭐.” 그러나 아이는 고개를 내저으며 생각했다. ‘도망이라면 급하게 집을, 마을을 뛰쳐나간 흔적이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 또 도망가는 사람들이 짐을 모두 그대로 두고 몸만 비울 리도 없어.’ 하다못해 체온을 보존할 담요라도 싸들고 가지 않을까? 바로 얼마 전에 비슷한 경험을 했기에 아이는 나름 합리적인 추론을 해보았다. 하지만 그 끝에 다다른 결론은 ‘알 수 없음’이였다. 사라진 이유도, 사라진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도.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전 내내 마을을 둘러봤지만, 마치 사람만 골라다 빼놓은 것처럼, 마치 마을 전체가 박물관이 된 것처럼 보였다. 해가 중천에 올랐을 때, 아이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허기가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아이는 아침을 먹고 뒷산에 오른 뒤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솔직히 정신을 잃었던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벌써 이곳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오전을 보냈기에 배가 고플 만 했다. 오전에 살피면서 봤던 빵이 생각났다. 부엌 선반에 올려져 있던 빵을 꺼내보니 겉으로는 먹을 만 해 보였다. 한 꼬집 뜯어내 입안에 넣고 우물거렸더니 맛이 꽤 괜찮았다. 이곳은 이세계와 달리 냉장고라는 것이 없어 음식을 오래 보관할 수 없었다. 때문에 어떤 음식이든 오래 두고 먹지 않는다. 다시 말해 지금 아이가 있는 때와 이세계로 가기 전의 시간차가 거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른 재료들도 선반에 있었지만, 요리를 할 줄 모르는 아이로서는 그저 보기 좋은 떡에 불과했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이 곳, 자신의 고향은 이세계에 비해 굉장히 낙후된 곳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 곳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이 여기서는 하나같이 놀라운 문명의 산물들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니, 그 중 하나라도 있다면 생활에 불편함이 없을 것 같았다. 반대로 여기서는 모든 게 불편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음을 아이는 인정했다. 비록 1년일지라도 그 곳에 적응했었던 아이에게, 딱딱하고 냄새나는 침대와 방풍·방한이 되지 않는 집은 그리움보다 불편함으로 다가올 것이다. 까닭 모를 서러움에 아이는 눈물을 훔치며 먹던 빵을 마저 먹었다. 주전자를 들고 우물에서 물을 떠와 목마름을 채우고 간단한 식사를 마쳤다. 어쩌면 잠시 자리를 피했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올지도 몰라. 아이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침대로 가서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기다려보기로 결정했다. 침대에 누워 있으니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1년 전, 숲으로 땔감 등을 주우러 들어가기 직전, 침대에 누운 채로 다친 허리를 한 손으로 짚으며 배웅하던 어머니의 모습. “엄마 잘 돌보고 있어. 형 금방 갔다 올게.” 라고 했더니, 씩씩한 얼굴로 대답하던 동생의 모습. 모두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 모습이 마지막 모습이 될 거라곤 어머니나 동생도 몰랐을 것이다. 명수도 생각이 났다. “괜찮겠지?” 아무래도 산에서의 모습이 영 쉽게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넘어지기 전에도 추위에 입술이 파랗게 질릴 만큼 힘들어하던 명수였다. 자신의 팔을 꼭 붙잡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산을 내려가던 명수였는데 구르기까지 했으니……. 보육원에 들어와 처음 방에 배정되어 명수와 같이 있게 된 날, 낯선 사람이 들어와 한 방을 쓰게 되었으니 아무리 활달한 성격의 명수라도 쉽게 다가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명수는 명수였다. 어색함이 가득했던 그 순간을 참기 어려웠는지, 아니면 호기심이 다른 모든 것을 누를 만큼 강했던 건지, 그 아이가 먼저 다가와 말을 붙인 것이다. “그거 목걸이야?” 펜던트를 가리키며 궁금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던 명수였다. 그랬던 친구였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알 수가 없다. 잡생각이 끝도 없이 밀려들어왔다. 해거름이 다 되어서도 아이는 침대에서 말똥말똥한 눈으로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 [18] Chapter(2) 문득 아이는 이런 생각을 했다. ‘왜 난 그곳으로 갔을까?’ 빈촌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실종에만 주목하여 이 생각 저 생각 다 하다 보니 정작 자기에게 벌어진 기현상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을 못했었다. 어쩌면 다른 모든 일에 앞서 그 일부터 고민을 했어야 했던 거 아닐까? 저쪽 세계로 넘어갔을 때는 그 세계에 적응하는 일만으로도 아이에겐 벅찬 일이었기에 생각하지 못했다고 쳐도, 다시 돌아온 지금 마냥 돌아왔으니 끝, 하고 넘길만한 일은 아닌 것이다. 단적인 예로 아이는 줄곧 거실의 ‘그 의자’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 의자’에 앉거나 누웠다가 다시 그 곳으로 가게 될까봐. 아이는 질문에 대해 논리적인 추론을 할 수 없었기에, 비논리적인 결과를 두려워하며 의자를 피하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 걸까?’ 모르는 것은 너무나 많다. 애초에 글자 하나, 셈법 하나 배운 적이 없던 아이였다. 이세계에서 ‘학교’와 ‘책’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배웠지만, 자신은 고작 ‘1학년’이었다. 5학년이나 6학년, 혹은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들은 더 많은 걸 배우고 익힐 것이 분명한데, 그 과정을 밟지 못한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때문에 자신이 떠올리고 있는 온갖 의문들에 대해 정답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온갖 의문들이 된바람이 되어 아이의 몸을 두드리고 지나갔다. 아이는 손과 발을 바짝 끌어당겨 몸을 웅크린 채로 잠이 들었다. **** 아침 햇살이 산 위에서부터 천천히 다가오더니 난벌에 이르렀다. 듬성듬성 서 있던 잡목들 사이에서 꾸물대던 새벽안개가 자리를 피해주고 그 자리를 온기 가득한 햇살이 자리했다. 부지런한 솔새들도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며 먹이를 구하기 위해 움직일 무렵, 산기슭 아래 커다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아침을 깨우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그그.” 두터운 로브를 이불삼아 잠을 청했건만 - 노숙이란게 다 그렇듯이 - 새벽 찬 공기에 몸이 많이 굳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폈더니 절로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온 몸을 둘둘 말았던 로브를 풀어 헤치고 나오니, 마구 헝클어진 흰 머리가 어깨 아래까지 흘러내렸다. 풍찬노숙으로 단련된 두꺼운 피부도 세월의 흐름을 이기진 못했다. 그의 나이의 3배는 더 될 만큼의 주름이 새겨진 얼굴. 부르튼 윗입술과 그보다 두꺼운 아랫입술이 서로 멀어지며 지난밤의 냉기를 토해내듯 하품을 하는, 두꺼운 눈꺼풀과 아래로 축 처진 눈매를 가진 노인, ‘핀체노’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물이 흐르는 소리를 찾아낸 그는 천천히 일어나 로브를 대충 툭툭 털어내고는 몸 위에 걸쳤다. “에휴, 에휴.” 팔 한 번, 다리 한 번 놀리는데도 한숨소리가 섞여 나오는 게 스스로 생각해봐도 이제 갈 때가 되었나 싶었다. 남들보다 더 오래 살았고, 더 많이 보았고, 더 많이 경험했다. 이 만큼 살고 겪었으면 이제 준비를 해야 되지 싶어 나온 여행길인데 영 처음과 같지가 않다. 그럴 만도 한 게, 어느덧 노숙 생활만 10년. 초심을 잃어버린 노인이었다. “배는 고프고, 먹을 게 보이진 않고, 가진 건 없고, 얻을 수나 있으려나?” 자기 멋대로 음을 붙여 흥얼대며 물가를 찾은 핀체노는 손가락을 슬쩍 집어넣어봤다. “윽, 차가워!” 시기상으로는 봄이지만 아직 겨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던 터라 이럴 때 곤란함을 느끼게 된다. 먹을 것이 보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오디나 버찌도 어찌 구해볼 수 있을 테고 더 시간이 지나면 살구도 어찌 구해볼 수 있을 테지만, 지금은 어렵다. 손에 물을 살짝 묻혀 얼굴을 설렁설렁 닦아내며 세수를 마친 노인은 로브 안팎을 뒤져보았다. 허리에 찬 주머니도 보고 소매 안도 보지만 먹을 거라곤 찾을 수 없었다. 이리되면 주변에 인가라도 있나 봐야 할 텐데,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침 끼니를 준비하기 위해 불을 때우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어휴, 별 수 있나. 내 인생이 이런 것을.” 궁시렁거리며 옷맵시를 점검하고 길을 나섰다. 가만 있어봐야 배를 채울 방법이 없으니 움직여서 찾을 수밖에 없다. 걷다보면 뭐, 어떻게든 되겠지 싶은 핀체노였다. 그 동안 여러 곳을 돌아다녔지만 이곳은 처음이었다. 이 곳에 오기 전 들렀던 도시가 자신이 알기에 이 나라에서 동쪽으로 가장 끝에 위치한 도시다. 이 방향으로 가면 ‘대산맥’이 하나 있는데 북쪽에서 남쪽까지 거대한 장벽처럼 높이 솟구쳐서 동쪽과 서쪽을 가르고 있었다. 대산맥 동쪽으로는 자신이 지난 몇 년간 지냈던 ‘부오노’ 공국을 비롯, 수십 개의 국가들이 존재한다. 수년간 전쟁을 벌인 나라들, 십 수 년간 정쟁(政爭)에 시달리는 나라들 등이 생겼다 사라졌다를 반복해온 역사를 가진 땅이 대산맥 동쪽, 통칭 ‘드뷔시’라고 불리는 땅이다. ‘드뷔시’에서 사는 사람들은 대산맥 쪽으로 올 일은 거의 없었고, 있다하더라도 이 곳까지 올 이유는 별로 없었다. 대륙에 이름난 특산물이 나는 것이 아니어서 상단들이 일부러 찾아올 일이 없고, 정치적으로 중요성을 가진 위치도 아니기에 권력자들의 시선에서도 벗어난 곳이었다. 그래서 이곳을 쓸모없다는 의미로 사람들은 ‘아크리스토스’라 불렀다. 핀체노도 웬만하면 대산맥으로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산맥은 사람이 넘을 수 없는 곳이었고 넘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기에 마지막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곳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인은 마지막을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이 곳으로 오게 되었다. 다만 그 마지막을 아사(餓死)로 결정한 것은 아니었기에 주린 배를 움켜쥐고 먹을 것을 찾아다닐 뿐이었다. **** 새벽에 언덕을 넘어 온 바람이 지나가며 아이가 자고 있던 집을 두어 차례 흔들었다. 들창이 흔들리는 소리에 흠칫 놀래며 깼다가도 어두운 사위에 방 안을 휘도는 공기 소리만 들려올 뿐이어서 다시 잠들기를 반복하며 긴 밤을 보냈다. 그 덕분에 아이는 꽤 오랜만에 숙면을 취하지 못하게 되었다. 찬바람이 머리까지 얼렸던 것인지 자리에서 일어나자 가벼운 현기증이 느껴졌다. 해바라기라도 해야 겠다는 생각에 집 밖의 너럭바위로 갔다. 바위가 차갑긴 했지만 침대보단 낫다는 생각에 그 위로 올라가 벌렁 드러누웠다. 생각해보니 꽤 오랜만에 주변의 눈치도 보지 않고 과감한(?) 행동을 했다. 보육원에서 애들이 심심치 않게 풀밭에서나 운동장에서 드러눕고 뒹굴어도 자신은 눈치가 보여 그러지를 못했었다. 산에 올라가는 것도 다른 사람들 모르게 새벽에 몰래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식이어서 역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바위에 대(大)자로 드러누워 햇볕을 쬐는 행동을 하다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눈꺼풀 위로 따사로운 햇살을 내리쬐니 지난밤 찾아온 냉기가 밀려나가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을 만끽하던 도중, 자신이 처한 현실이 떠올랐다. “이런 바보 같은.” 아무래도 이 곳에 마법사라도 다녀 갔었나보다. 지난밤의 냉기가 사람을 이처럼 멍청하게 만든 것을 보니 마법사의 손길이 닿은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자책은 그쯤해두고 아이는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나 집 밖을 나올 때도 못 느꼈고 지금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으니, 간밤에 마을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역시 찾으러 나가야 하는 걸까?’ 혼자서 이 마을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두렵기도 했다. 올 때까지 기다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그리고 그 동안 버틸 수 있을까?’ 라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마을을 떠나는 것 보다는 낫지 않을까?’ 라고 이유를 갖다 대며 선택지를 저울질했다. 저 멀리 시선을 던져보니 높게 뻗은 산에 허리 안개가 길게 걸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만약 마을을 떠난 사람들이 저 산으로 갔다면, 자신도 저 산을 가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아무리 숲길에 단련이 된 아이라도 저 곳만큼은 가지 못했었다. “…….” 가만 보면 저 허리안개가 걸린 산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뜨거운 한 낮에도 산머리에 걸린 구름이나 중턱에 걸린 안개들이 쉬이 사라지지 않아 예전부터 줄곧 어린 아이의 상상력을 끝없이 자극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저 곳은 금지(禁地)였다. 어른들은 허락된 숲 속의 경계선까지만 다녀왔고, 그 너머로는 결코 가지 않았고 가지 못하게 했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법이지만 굵은 눈썹을 꿈틀대며 단호하게 ‘안 돼’를 외쳤던 아버지의 말씀을 어길 용기까지는 나지 않았다. 이유는 모른다. 그저 ‘위험’하다는 이유였다. 정체불명의 ‘위험’도 호기심을 자극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어른들도 가지 않는 땅을 서슴없이 벗어날 자신은 없었던 아이였기에 아버지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는 모양새가 됐다. 아이는 종종 동생이나 친구와 함께 너럭바위 위에 서서 산을 바라보곤 했다. “뭘 보고 있누?” 흠칫 놀란 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보육원에서 쓰던 걸레를 연상시키는, 우중충한 회색 로브를 걸치고 해를 등지고 선 ‘노인’이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아이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다 너럭바위 끝에서 발을 헛디뎠다. 중심을 잃고 바위 밑으로 떨어지는 아이에게 잽싸게 다가와 잡아주는 노인이었다. 아이는 큰 부상의 위기에서 벗어낫다는 사실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에게 손목이 잡혔다는 사실이 더 큰 위기로 느껴졌다. 몸을 비틀며 바위 아래로 뛰어내린 아이는, 순순히 손목을 놔준 노인 덕에 몇 걸음 물러나 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바위 위에 선 노인은 고개를 이리 저리 돌려 마을을 훑어보고 있었다. “흠, 이 마을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건가?” 아이는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노인을 관찰했다. 아까와 다른 위치에서 바라봐서 그런지 음영에 보이지 않던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짙은 갈색 빛의 얼굴에는 자글자글한 주름이 잡혀져 있는데, 자신이 알던 사람들 중 가장 많은 주름을 가진 노인이었다. 머리카락이나 눈썹, 수염은 모두 흰색이긴 한데 어쩐지 명수가 가끔 침대 밑에 숨겨둔 속옷 색깔을 연상케 했다. 허리까지 닿은 수염이 인상적이긴 했다. 이야기 속 마법사가 저럴까 싶다가도 옷이나 수염에 붙은 잔풀이나 마른 찌꺼기 같은 것들이 ‘나는 거지요’라고 외치고 있었다. 왼 손에 든 지팡이는 말라비틀어진 나무를 꺾어다 길잡이용으로 들고 다니는 것으로 봐도 무방하리라 여겼다. 가죽샌들을 신었나 싶었는데, 가만 보니 앞코가 뜯어진 것에 불과하다. 반면, 노인이 보기에 아이는 신기했다.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이 곳에서 보기 힘든’ 아이였다. 선입견일 수 있지만, 이런 빈촌에서 자란 아이라면 얼굴에 노랑꽃이 피어 있거나, 피죽이 말라붙어 있어야 할 거 같은데 저 아이는 마치 대도시의 귀족 아들래미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을 ‘관찰’하는 저 또랑또랑한 눈은 여느 학자의 눈과 비교 해봐도 손색이 없을, 총기가 넘치는 눈이었다. 제대로 수선도 안 된 낡은 옷을 걸치고 있지만 뽀얗고 밝은 빛이 도는 얼굴을 가진 아이, 라면 뭔가 사연이 있을 듯 했다. 한 사람은 입을 꽉 다물고 경계어린 시선을 보냈고, 한 사람은 재미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너 누구니?” “누구세요?”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 [19] Chapter(3) 핀체노가 눈치를 보아하니 저 아이는 쉬이 입을 열 것 같지 않았다. “나는 핀체노라고 한단다. 드뷔시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여행을 하느라 이 모양이다만. 어쨌든 너는, 아니 이 마을에 너 밖에 없는거냐?” 아이는 슬쩍 옆을 둘러보았다. 외지인의 출현에 호기심을 드러내며 고개를 삐죽이는 마을 사람들, 의 모습 따위는 볼 수도 없었다. 핀체노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아이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거 같아요.” “넌 여기 사는 게 아닌가 보구나?” 이건 정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대답하지 않고 자리를 피하기도 그렇고, 대답을 하려니 자신의 처지를 표현하기가 미묘하다. “여기 … 여기가 우리 집이예요.” “부모님은?” “사라지셨어요.” “사라져?” 핀체노는 긴 다리를 뻗어 바위 아래로 내려왔다. 아이와 대화를 하기엔 너무 높지 않았나 하는 생각으로 내려와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갔다. “저… 저기 숲을 갔다왔는데 마을에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어요.” “호오, 그렇다면 마을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말이구나.” 핀체노는 역시나 흥미롭다는 생각을 하며 시선을 옮겨 텅 빈 마을 속길을 바라보았다. “한번 둘러봐도 되겠느냐?” 아이는 딱히 막아야 할 이유도 없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앞장서 걸어가는 핀체노의 뒤를 따라갔다. 핀체노는 아이의 옆집을 먼저 확인해보았고 이를 시작으로 마을의 집들을 순회했다. 마지막으로 아이의 집에 들어 온 두 사람. “흐음. 신기하구나. 보아하니 얼마 전까지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정말 사람들이 ‘사라진’ 건가?” 노인이 자신과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는 것에 뜻모를 위안을 받은 아이였다. 그래서 노인이 선반을 가리키며 “저거 먹어도 되겠니?” 라는 요구에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리고는 컵에 물까지 따라 식탁 위에 올려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식탁에 앉아 빵을 떼어 먹으며 조촐한 아침 식사를 함께 하였다. “고맙다. 그런데 여기는 마을 이름이 뭐니?” 아이는 자기 물컵을 만지작거렸다. “몰라요. 다들 그냥 빈촌이라고 했어요.” 노인은 아이의 말본새가 나이에 비해 꽤 정연(整然)하다고 느꼈다. 분명 배움이 있었던 아이이리라. “혹시 글을 배웠니?” “……아니요.” 빵을 우물거리며 대답을 늦췄던 아이였다. 확실히 이곳의 글은 배운 적이 없었으니까 맞는 대답을 한 셈이다. 반면 핀체노는 요 근래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에 조금 흥이 돋은 상황이었다. 갑자기 ‘사라진’ 사람들이나 빈촌과 어울리지 않는 아이의 존재는 충분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재였다. 게다가 아이가 은연중에 보여주는 차분함과 총기(聰氣) 역시 흥미롭다. “아까는 뭘 보고 있었던거냐?” ‘핀체노’라는 이름만 알 뿐,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인이다. 다만 위험하다는 인상은 아닌지라 마주앉아서 함께 식사를 하고는 있지만 학교에서 ‘낯선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고 교육받은 아이는 경계심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산을 보고 있었어요.” “왜?” “…혹시 다른 사람들이 산으로 간 게 아닐까 싶어서요.” “그래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고?” “…어제까지는 기다리려고 했는데, 이제 찾으러 가봐야 될 거 같아요.” “그런데 왜 가지 않고 보고만 있었누?” 컵을 매만지는 손길이 사뭇 긴장돼 보였다. “어른들이 가지 말라고 했어요. 가면 못 올 수도 있다고요.” 저 아이는 분명 혼자서라도 가 볼 생각이었을 것이다. “무섭고?” “…예, 무서워요. 그래도 가야돼요.” 솔직한 아이다. “만약 사람들이 없으면 어쩔테냐?” “그럼 또 다른 곳을 찾을거예요.”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아이의 눈빛이 노인에 보기에 마음에 들었다. “내가 같이 가주랴?” “예?” “어차피 나도 급할 게 없고 어린 너 혼자 저 산에 보내는 게 영 마음에 걸리는구나. 어른인 내가 어린 너를 보살피는 게 또 도리에 맞지 싶구나.” 아이는 노인의 친절이 당황스러웠다. “저기, 위험한 곳이라고 하던데요.” “나를 걱정해 주는 거니? 아이야, 고맙지만 난 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약한 사람은 아니란다. 내 몸이랑 너 하나 정도는 지킬 힘이 있고.” 저 주름진 얼굴과 굽은 어깨를 보면 오히려 아이가 하루종일 부축해야 할 거 같은데.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많은 어린 너를 저 ‘위험하다는 곳’으로 혼자 보내느니 내가 혼자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너한테 이야기를 해주는 게 더 좋은 생각 같지만, 어쩐지 그 방법은 니가 싫어할 거 같구나. 그렇지?” 당연하다. 아이는 제 눈으로 보고 확인해야 마음이 풀릴 것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다음 계획도 세울 수 있다. 다른 방향으로 가야할지 아니면, 저 산을 넘어야 할지. “그러니 내가 같이 가자는 것이다. 어떠냐? 같이 가겠느냐?” 썩 내키는 선택은 아니지만, 어떤 위험이 있을지 알 수 없는 산에 어린 아이 혼자 올라가는 것보다는 어른이 곁에 있는 것이 좀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예. 그럴게요.” 핀체노는 입가에 선 주름을 밀어 올리며 마주 앉은 아이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혹시 따로 준비할 게 없다면 지금 바로 일어나자꾸나. 너무 늦게 출발했다간 깊은 밤에 산을 헤매야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에서 몇 가지 두꺼운 옷가지를 챙겨 배낭에 넣고 집을 나섰다. 배낭에 넣어두었던 땔감들이 현관 옆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었으나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팡이를 짚으며 아이의 걸음에 맞춰 걷던 노인이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그런데, 아이야.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 “…루치드예요.” 그 순간 아이의 목에 걸렸던 펜던트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웃옷 속에 파묻혀있던 터라 두 사람은 전혀 알지 못했다. 게다가 뿜어졌던 빛은 나오기가 무섭게 다시 펜던트로 스며들었다. 다만 산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던 핀체노가 정체 모를 위화감에 아이를 돌아보았지만 이미 빛을 갈무리하고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간 펜던트였다. 노인은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좋은 이름이구나. 새벽에 태어난거니?”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런 의미가 있나요?” 짧게 웃음을 터뜨리며 핀체노는 ‘루치드’의 의미를 설명해주었다. “옛 고어로 남쪽지방에서 쓰이던 언어가 있는데, 거기서 ‘루치드’는 ‘밝은 새벽’을 의미한단다. 하루의 시작이며 희망의 아침을 비유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네 미래를 축복하기 위해 지어진 이름 같구나.”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이 가진 의미를 알게 된 루치드는 담담히 ‘밝은 새벽’을 반복해서 읊었다. “누가 지어준 이름이니?” “…모르겠어요.” 그냥 루치드라고 불리며 살아왔는데 누가 이름을 지어줬는지는 들어 본 기억이 없다. 아버지일까? 그런데 그렇게 생각을 진행하다보니 의문이 들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자신에게 글자를 알려준 적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숫자나 셈법을 알려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이세계로 가기 전의 날짜로 2년 전이었다. 그 때는 자신도 고작 5살 밖에 되지 않았기에 아버지가 무엇인가를 자세히 가르쳐준다고 해도 배울 준비가 되지 않았던 탓에 알려주지 않았다고 납득을 한다 쳐도 어머니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무언가를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글자든 숫자든 가르침은 물론이고 사용하는 모습도 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아이가 아는 숫자는 컵 3개, 의자 2개 정도에 불과했었고 나머지는 두루뭉술하게 표현하며 지냈다. 보육원 뒤의 낮은 산도 ‘용천산’이라는 이름이 있었는데, 저 높은 산이나 넓은 숲에는 이름이 없다. 아니 아이는 이름을 몰랐다.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생활에 불편함이 있었나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지난 1년간의 교육이 있었기에 이 정도로 자각을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좀 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라도 알지 못했을 사실이었다. 그런데 내 이름은 옛 고어에서 나온 말이다?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았다. 혹시 부모님은 글이나 숫자를 몰랐던 것일까? ‘그럼 내 이름은 누가 지은거지?’ 갑작스럽게 들은 이름의 의미 때문에 부모님의 정체를 고민하는 사이, 두 사람은 산기슭에서 시작된 숲의 초입에 도착하였다. “넌 이 숲에 몇 번 와봤다고 했었지?” 아이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흠, 그렇구나. 그럼 들어가 보자꾸나. 네가 앞장서겠니?” “예.” 핀체노는 앞장 서 걷는 아이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쩐지 저 아이에게 호감이 갔다. 어지간하지 않으면 아이든 어른이든 거리를 두었던 핀체노였다. 그가 지난 세월동안 겪었던 일들을 떠올려보면 그것이 당연했었는데, 이 아이의 눈을 보면서는 경계심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경계하던 아이의 눈에서 순수함이 느껴져 이 나라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긴 여기가 많이 외진 곳이긴 했다. “혹시 이 마을 밖의 다른 마을을 가본 적이 있니?” 참 곤란한 질문이다. “아니요.” 아이는 지나가는 나무 가지를 옆으로 젖혀 내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 [20] Chapter(4) 사실 루치드는 자기가 겪은 현상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는 게 좋을까, 하는 고민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그 기현상을 아무에게나 털어놓기엔 꺼림칙했다. 어른들이라고 해서 다 알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초등학교 1학년 천재소년 ‘루치드’였다. “역시 아직은 쌀쌀하구나.” 로브를 여미며 루치드의 뒤를 따르던 핀체노의 푸념에 루치드는 대꾸하지 않았다. 물론 맞는 말이긴 하지만 덕분에 루치드는 몸에서 나는 열을 조금이라도 식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숲의 경계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코스였기에 급하게 서둘 이유가 없었지만, 지금은 빨리 산에 올라야 부엉이 울음소리 들으며 산을 헤매는 꼴을 피할 수 있기에 조금 서두른 감도 없잖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숲의 경계를 넘기 전인데도 입에서 단내가 나는 듯 했다. 핀체노는 아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 잠시 걸음을 멈추도록 했다. “루치드, 잠깐 쉬었다 가자꾸나. 너무 급하게 가다보면 오히려 지쳐버려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될 거야.” 짐짓 괜찮은 척 하려던 루치드는 핀체노의 말이 옳다 여겨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적당한 자리를 잡아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는 핀체노를 따라서 쉴 곳을 찾았다. 마침 옆에 지면 위로 드러난 나무뿌리가 보여 그 위에 걸터앉았다. “물 좀 마시겠느냐?” 그러고 보니 목이 말랐다. 주위를 둘러보니 안타깝게도 이곳은 물이 없는 곳이었다. 루치드의 기억에 숲을 가로지르는 물길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아마 2,30분 전에 지나쳤을 것이다. 만약 저쪽 세계였다면 조그만 물통에 시원한 물을 담아 들고 다녔을 텐데 여기서는 그런 물통을 본 기억이 없다. “물이 없어요.” 핀체노는 아이에게 컵을 건넸다. 아이는 컵을 받으면서 어리둥절한 눈치로 핀체노를 바라보았다. 언제 컵을 챙기셨지? 아니 그보다 이 컵은 우리 집에서 쓰던 컵이 아닌데? 그리고 컵을 받아들고는 더욱 놀랐다. 컵 안에는 맑은 물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게 … 어떻게 된 거죠?” “우선 마시거라.” 즐거워 보이는 낯빛을 하고 아이를 바라보는 핀체노의 입은 그저 싱글벙글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을 금세 해줄 모양새는 아니었다. 아이는 우선 마른 목을 축이자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정체불명’의 물을 마셨다. 깨끗하고 시원한 물이었다. 컵을 반 쯤 비우고 건네자 헤플 정도로 웃음을 짓던 핀체노가 물었다. “다 마시지 그래?” “아니요. 이제 괜찮아요. …할아버지도 드셔야죠.” “이런, 내가 마실 것 정도는 알아서 챙겨 마실 테니 걱정 말고 더 마시거라.” “아니요. 정말 괜찮아요. 이제.” “그래? 그럼 알았다.” 핀체노는 컵을 받아 마셨다. 남은 물을 마저 마시고 난 뒤, 컵을 든 손을 내리는데 어느새 컵이 사라졌다. 루치드는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아이의 반응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핀체노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 어. 분명히… 손에 들고 있었는데? 손에 있었는데?” 핀체노가 손을 들어 앞뒤로 뒤집었다. 아이는 미어캣처럼 그 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런 건 처음보지?” “…예. 이거 …마술인가요?” “응? 마술? 음, 조금 비슷한 표현이긴 한데, 마술은 아니고 마법이다.” “아, 그런가요?……. 예? 마법이요?” “그래. 마법. 마법사 처음 보니?” 당연하다. 마법사를 처음 보냐고? 마법사는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책에서나 나오는 내용이었다. 아, 저 쪽 세계에서도 마법사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뭐였더라? “익스페토 패트로늄?” “응? 그게 무슨 소리냐?” “네? 아, 저, 마법사 하면 무슨 주문을 외우고, 지팡이에서 번개가 치고…….” “뭐? 큭, 크하하!” 아이의 어리바리한 리액션에 핀체노가 결국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괜히 민망해진 루치드가 쭈뼛거리는 모양이 또 웃겨보였는지 허벅지를 치며 박장대소를 했다. “그런 이상한 주문은 도, 도대체 누가 한다는 것이냐?” 적갈색 와인 빛을 한 얼굴의 주름이 쉴 새 없이 부르르 떨리도록 폭소를 터뜨리는 핀체노의 모습을 보면서도 어쩐지 멍하게 정신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짓는 루치드였다. “해리….” “푸하하, 그거 이름도 걸작이로세. 해리라니? 마법사의 이름을 ‘약탈자’라고 지은 걸 보니 꽤 못된 마법사인가 보구나!” “…….” 계속 핀트가 나간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인데, 막상 루치드로서는 지금 상황을 논리적으로 이해할만한 배경지식이 없어 그냥 핀체노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핀체노는 한참을 웃다가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까지 돼서 꺽꺽거리기까지 했다. 한참이 지나고 난 후 겨우 진정이 된 듯 웃음이 잦아든 핀체노는 보굿같이 거친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내며 물었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기막힌 마법사 이야기를 들었는지 정말 궁금하다만 그만 물으련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가는 제 명에 못살 듯 싶구나.” 그러든지 말든지 루치드는 인내심을 가지고 핀체노가 무엇이든 설명해주길 기다렸다. 아기 고양이 같은 아이의 눈빛을 보며 핀체노는 다시 헤픈 미소를 지었다. ‘미소’를 돈으로 비유한다면 핀체노는 이미 가진 돈을 모두 탕진하고도 빚을 지었을 인물이리라. 하지만 핀체노는 기꺼이 돈을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묘하게 자신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저 아이의 눈빛을 바라보는 대가라면 말이다. “돌려 말하지 않으마. 난 마법사란다. 컵이든 물이든 언제든지 꺼낼 수 있지. 내가 웃은 건 널 비웃으려고 했던 건 아니란다. 다만 지난 10년간 마법을 쓰지 않았던 터라 너처럼 반응하는 모습을 본 지가 꽤 오래되어서 말이다. 아니, 생각해보니 그 전에도 너처럼 신선한 반응을 본 기억이 드물 구나. 게다가, 해리, 큭. 흠흠.” 억지로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무릎을 주먹으로 두어 번 내리치며 진정하려 애쓰는 핀체노를 보며 루치드는 이 세상이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지식 이상의 비밀을 간직한 세상임을 깨달았다. 원하지 않았지만 나름 신비한 경험을 겪은 루치드였다. 처음 저 쪽 세계로 갔을 때, 놀라운 기술 문명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이 쪽 세계로 다시 돌아오니 이번에는 이야기 책에서나 나올법한 마법의 존재를 알 게 되었다. 루치드를 경악에 빠뜨리게 하고 황당한 처지에까지 놓이게 하는 이것들은 그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강력하게 자극했다. 그리고 이 쪽이든 저 쪽이든 ‘세계’는 무궁무진한 지식과 비밀을 담고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었다. 루치드는 궁금했다. 얼마나 많이 보고 듣고 배워야 ‘세상’이란 것을 알 수 있을까? 자신이 어른이 될 때까지, 혹은 눈앞의 핀체노처럼 늙기 전까지 ‘세상’의 신비라는 것을 모두 알 수 있게 되는 날이 올까? 당장 초등학교 교과서들만 해도 자신이 모르는 것투성이고, 그것마저도 어느 세월에 다 배울 수 있을까 염려되었던 판국에 ‘세상’의 진실, 비밀, 신비를 모두 알게 되는 날이 과연 찾아올까? 언제쯤이면. “저는 알 수 있을까요?” 그 모든 것들을. 어디를 바라보는지 모를 눈으로 힘없이 뱉어내는 말에 웃음을 그치고 바라보던 핀체노가 한마디 툭 던졌다. “배워볼테냐?” “…네?” 어리둥절한 루치드. “알고 싶다며? 가르쳐줄테니 배워보겠냐는 말이다.” 무엇을, 이라는 물음에 앞서 루치드는 답을 찾았다. “마법, 말인가요? 제가 배울 수 있나요?” “그럼, 마법은 배울 수 있지. 누구나 마법은 배울 수 있단다.” “…그런가요?” “그럼, 다만 마법을 쓸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인거지.” 루치드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쓰는 건 둘째다. 우선 배워야 한다. 뭐든지 알아야 한다. “예, 배우고 싶어요, 마법. 가르쳐주세요.” 핀체노의 입술 끝이 또 말려 올라갔다. 지금 그는 노름으로 모든 가산을 탕진한 노름꾼의 얼굴을 했다. 탕진한 가산 이상을 채워줄 금광을 발견한 노름꾼의 얼굴을. “지금 당장 모든 마법을 배우기도 어렵거니와 시간이 많지 않으니 걸으면서 이야기 할까?” “예!” 툭 튀어나온 덤불 끝을 발로 밀치며 나아가던 핀체노는 마법에 대해 설명했다. “마법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눈에 기적으로 보일 수 있다. 아까 네가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컵과 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신기하겠지. 그런데 사실 마법이란 게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란다. ‘가져오는’ 거지. 그럼 궁금하지? 가져온다면 ‘어디서’ 가져오는 것일까? 답부터 말하자면 그 곳을 나는 ‘라티오’라고 부른다. ‘라티오’는 모든 것의 원형이 존재하는 곳이란다. 물론 이 세계에 존재하는 곳은 아니지.” “그럼 다른 세계인가요?” “호오. 꽤 신선한 반응이구나. ‘다른 세계’라는 개념을 떠올리는 게 쉽지 않은데 말이다. 넌 타고난 마법사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런데 ‘다른’ 세계는 아니란다. ‘라티오’는 어쩌면 이 세계나 다른 세계 - 다른 곳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념적으로는 존재할 법한 세계를 지칭하자꾸나. 어쨌든 그 모든 세계를 초월하는 곳이지.” 루치드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옆을 돌아보았다. 핀체노가 바라보니 그 얼굴이 거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있느냐?” “…전부 다요.” 루치드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부분은 루치드가 ‘이 쪽 세계’에 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하다는 것과 그럼에도 영특한 면이 보이긴 하지만, 결국에는 ‘저 쪽 세계’ 기준에서도 초등학교 1학년이라는 사실이다. ======================================= [21] Chapter(5) 아무래도 어린 아이에게 맞는 설명을 해야겠지만, 핀체노는 지금까지 이토록 어린 아이에게, 게다가 아무런 지식이 없는(?) 아이에게 마법을 가르쳐줘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말 한마디를 해도 많은 생각을 하고 검증을 마친 뒤 꺼낼 정도여야 했다. “쉽게 설명해주마. 마법은 상상을 구현해내는 일이란다. 아니, 다시 설명하마. 네가 상상하는 것들, 네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것들을 현실에, 눈앞에 만들어내는 거란다.” “만드는 게 아니라면서요?” 이 아이는 분명 똑똑한 아이다. 다만 아는 게 많지 않을 뿐이겠지. 그건 앞으로 자신이 하나씩 알려주고 채워주면 될 문제이리라. “그래. 음. 예를 들어보자꾸나. 지금 네 머릿속으로 어떤 물건을 상상해 볼 수 있겠니?” “예.” 길가에 툭 튀어나온 나무초리를 꺾어 손에 쥔 핀체노가 말을 이었다. “어떤 물건이니?” “…공이요.” “그래, 그 공을 이제 눈앞으로 끄집어내는 것이 마법이란다.” “…어떻게요?” “마법의 힘으로? 하하. 농담이란다. 뭐 반쯤은 진담이기도 하다. 어쨌든 아까 했던 이야기와 연결시켜보자꾸나. 나는 네 머릿속이라고 예를 들었지만, 사실 머릿속이 아니라 ‘라티오’라는 곳에서 끄집어내는 것이지. 여기서 ‘라티오’를 설명해보자면, 그 곳은 모든 사물과 개념의 원형이 있는 곳이란다. 예를 들자면 네가 ‘공’을 상상했을 때 ‘공’의 모양을 떠올렸겠지?” “예.”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공이 다 똑같은 모양은 아니지?” “예.” “모양도 다르고 색도 다르고 땅에 튀어 오르는 정도도 다 제각각일 테다. 그치?” “예.” 핀체노는 손에 든 나무초리를 앞으로 뻗어 둥근 모양을 그려냈다. “하지만 어떤 모양을 하고 있든 우리는 ‘공’이라고 부른단다. 그렇다면 ‘공’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들은 공통적으로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게다. 역으로 그 특성들을 모두 포함하는 물체를 ‘공’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고. 여기까지는 이해하겠느냐?” 아이의 머리가 순간 멍해졌지만 이내 고속엔진이 돌아가듯 머리를 굴려 그 정의를 논리적으로 추론, 통합하여 개념을 이해해 나갔다. “알 것 같아요.” “영특한 녀석 이로고. 자, 여기서 ‘라티오’의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아까 ‘라티오’에는 사물의 원형이 있는 곳이라고 했지? 원형이라는 것은 일단은 모든 사물들의 원래 모습이라고 이해하는 게 좋겠구나. ‘공’도 마찬가지란다. 그 곳에는 이 세상 모든 종류의 실체하는 공들의 ‘원형’이 존재한단다. 어떤 모양이나 색으로 정의되지 않고 단지 그 본래 고유의 특성만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그럼 그 공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모르겠어요.” “인간은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없지. 왜냐하면 상상하는 순간, ‘공’은 특정한 성질로 정의되기 때문에 라티오의 ‘원형’과는 다르게 된단다.” 루치드는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를 도모했다. 사실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축구공’이었다. 그런데 축구공도 굉장히 다양한 디자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학교 운동장에서 경험했다. 뿐만 아니라 공에는 테니스공, 야구공 등, 별의 별 ‘공’들이 존재했다. 그 모든 것들을 ‘공’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공’에는 분명 그 모든 디자인들을 아우르는 고유의 이미지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다. 고유의 이미지만으로 존재하는 공을 핀체노는 ‘원형’이라고 불렀다. ‘원형’은 상상할 수 없다. “그럼 ‘라티오’에 있는 원형들은 모두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겠네요?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것들이니까요?” 한 동안 궁리에 빠져 있던 아이가 툭 내뱉는 말에 핀체노는 또 한 번 감탄했다. 몇 가지 고급단어들을 쓰는데도 확실하게 의미를 알고 활용하는 것도 놀랍고 복잡하고 어려운 개념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하고 이해하는 모습을 보면 과연 이 아이가 빈촌에서 살던 아이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혹시 도시에서 납치된 귀족? 하지만 그렇다쳐도 저 나이 대 아이의 귀족이라도 고급학문을 배우고 익혔을 리가 없다. 그냥 이 아이가 천재(?)인 것이다. “그렇지.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라티오’에 있는 ‘원형’들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영원불멸의 속성도 가진다. 이 나무를 보거라. 그리고 저기 저 나무도. 우리가 ‘삼나무’라고 부르는 이것들이 현실에서는 이렇게 제각각이지만 ‘라티오’에서는 오직 ‘삼나무’의 ‘원형’으로서 홀로 존재하기 때문에 고유하며 유일하다.” 핀체노는 어느새 컵을 손에 들고 있었다. 볼수록 신기한 장면이라 루치드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목을 축인 핀체노가 다시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라티오’는 이 세상 모든 사물의 원형이 존재한다. 바꿔 말하면 이 세상은 ‘라티오’의 변형된 복제품이라고 할 수 있지.” “인간도요?” “그래. 인간도. 하지만 인간의 ‘원형’에 대해서는 설명을 미루자꾸나. 그건 마법에서 일종의 금기거든.” “자, 이제 이 컵을 보거라.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컵들이 있느냐. 그런데 컵은 속성이 무엇이냐? 생각나는 대로 말해보거라.” “일단 둥근 바닥이 있고, 손잡이도 있고…….” “그리고?” “안에 물을 담을 수 있고…….” “자, 그러면 보자. 둥근 바닥이라고 했는데, 둥근 바닥 말고 네모난 바닥이라면 컵이 아닐까?” 컵의 바닥면을 보여주며 핀체노가 연한 미소를 지었다. “음. 아니요. 바닥 모양은 상관없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바닥의 모양은 컵의 고유한 성질이 되지 못하겠구나. 그렇지?” “네.” “손잡이는?” “손잡이도 없어도 될 거 같아요.” “그래 손잡이 역시 컵의 고유성이 아니겠구나.” “…….” “어이구 벌써 여기까지 왔구나. 여기서부터 산을 올라야 할 거 같은데?” 어느새 숲의 경계를 빠져나온 두 사람이었다. 루치드는 당장 산을 올라야 한다는 생각과 마법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부딪혀 갈등을 했다. 아무래도 산을 오르면서는 편하게 대화를 나누기 힘들 거 같았다. 그 생각을 눈치 챘는지 핀체노가 제안을 했다. “우선 여기서 잠깐 쉬었다 오르자꾸나.” “네.” 한 차례 긴 호흡을 뱉으며 숨을 가다듬던 핀체노가 끊어졌던 가르침을 계속했다. “자, 루치드. 이 컵의 고유성은 과연 무엇일까?” “잘 모르겠어요.” “컵이 뭐지?” “…물을 담는 거요?” “물을 담아서 마시기 위한 그릇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하겠다. 바로 그런 성질만 내포한다면 어떤 모양이라도 컵이라고 표현해도 괜찮겠지? 그게 바로 고유성질, 혹은 ‘샤락티라스’라고 표현할 수 있단다.” ‘공’을 예로 들었던 탓인지 루치드는 컵의 외양에서 고유성질을 파악하려 했지만 잘못된 접근이었다. “‘샤락티라스’는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 내적인 것도 있단다. 아무튼 이런 샤락티라스를 이해한다면, 마법은 다 된 것이나 마찬가지이지. 샤락티라스를 안다는 것은 ‘원형’, 마법사의 언어로 ‘포르마’를 안다는 것과 같은 말이거든. 마법사는 구현해낼 포르마의 샤락티라스를 온전히 이해하고 숙지해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포르마를 현실에 구현해낼 수 있다. 덧붙여 말하자면 샤락티라스를 모르는 포르마는 구현할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란다. 단, 이것은 알아야 한다. 마법사가 모른다고 해서 포르마가 없는 것은 아니란다. 포르마는 항상 존재한다. 다만 사람들이 모를 뿐이지. 이해하겠느냐?” 고개를 끄덕이는 루치드를 보며 핀체노는 첫 번째 강의를 마치기로 했다. “어려운 단어가 많이 나와서 어렵겠지만, 알고 있는 게 좋을 거다. 사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표현해내는 단어나 의미들도 모두 포르마가 존재한단다. 포르마는 모든 만물의 원형이며 모든 개념의 원형이다. 그것은 절대적이고 고유하다. 그리고 마법사의 시작은 포르마를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마법사는 평생을 포르마를 이해하고 연구한단다. 하지만 포르마를 직접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으니 포르마의 복제품인 세상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이지. 복제품에서부터 원형을 복원한 달까? 그런 비유도 들 수 있겠구나. 마지막으로 마법의 구현에 대해서 한 마디만 하고 끝내자. 마법사는 포르마 그 자체를 현실에 가져올 수 없단다. 당연하겠지? 그래서 포르마를 특정한 모양으로 구현해내게 된다. 마치 이 컵처럼 말이다. 특정한 모양으로 만드는 과정은 마법사의 심상공간에서 이루어진다. 네가 이해하기 편하게 표현하자면 여기, 머리에서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지. 특정한 모양으로 만들어 눈앞에 구현해내면 마법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핀체노의 설명에 귀 기울이고 있는 루치드의 얼굴에 빛이 서렸다. “심상 공간에서 포르마를 특정한 모양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심상수련이란다. 이를 마법사의 용어로는 ‘챕터’라고 표현한단다. 이 컵을 보면 ‘물을 담는 그릇’이라는 샤락티라스를 가진 포르마에 나무재질, 동그란 바닥, 손잡이를 덧붙여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지.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가져야 할 수련과정이라고 할 수 있단다.” “포르마, 샤락티라스, 챕터…….” 루치드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지금까지 들었던 내용을 다시 한 번 머릿속에서 떠올려보며 암기를 했다.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운 루치드였다. ======================================= [22] 야누스(1) 어느덧 두 사람이 산을 오르고 한 참이 지난 후였다. 사람의 왕래가 없는 곳이라 산에는 흔한 자드락길 하나 보이지 않았다. 산짐승들이 오가는 길이 드문드문 보이긴 했지만 그런 길은 더 위험하다는 핀체노의 의견에 따라 험한 곳으로만 피해 다녔다. 덕분에 어린 루치드의 체력은 급격히 떨어지고 팔다리가 후들거려 위로 한 발짝 내딛는 것도 힘겨웠다. 사실 핀체노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루치드보다 못한 체력을 가졌음은 물론이고, 근래 이토록 험한 산을 오르내린 경험이 없었던 탓에 저도 모르게 입에서 침이 흘러내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산 아래서 다소 시간을 지체했던 터라 머뭇거릴 여유는 없었다. 루치드는 연신 두리번거리며 혹시라도 단서가 될 만한, 혹은 사람의 흔적이 있었는지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실 여기까지 왔어도 흔적이 없다면 더 올라가봐야 무의미하다. 마을에서부터 최단거리로 산에 올라왔는데 이곳에서 발견되지 않는 흔적이라면, 사람이 온 적이 없다고 확신해도 무방할 것이다. 루치드는 이곳에서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야 나중에라도 찾아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미련을 갖지 않을 테니깐. 잠시 무릎을 굽히고 숨을 고르는 루치드의 옆에 선 핀체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거진 숲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였지만 해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해가 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향했을 테지. 조만간 해거름이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할아버지, 포르마를 챕터한 다음에 현실에 나타내는 건 어떻게 하는 거예요?” “마법사란 의지가 강한 사람이어야 한단다. 쉽게 의지가 꺾여서는 안 되지.” 핀체노의 동문서답에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핀체노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루치드를 내려다보며 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웃음에서 물기가 배어나오는 듯하다. “심상공간에서 챕터를 끝내면 포르마는 구체적인 형상을 갖게 되지. ‘피구라’라고 한다. 그리고 그 피구라를 현실로 구현해내는 것을 ‘컨슈메’라고 하지. 컨슈메를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마법사가 의지를 가지면 된다.” “의지요? 그냥 의지만 가지면 되는 건가요?” 핀체노는 지팡이에 의지해 몸을 낮춰 자리에 앉았다.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는 모양새가 보통 피곤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노구를 이끌고 산에 오르는 일이 아무리 마법사라 할지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나보다. “그래. 그냥 의지만 가지면 된다. 다만, 보통의 의지 가지고는 안 되지. 초월적인 의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법칙을 아우름과 동시에 그 법칙을 넘어서라도 해내겠다는 의지. 다른 모든 잡념을 떨치고 단 하나, 컨슈메를 해내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가능하지.” “…….” 오늘따라 말을 너무 많이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라 핀체노는 목 주위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어 끈적거리는 느낌이 그리 좋지 않았다. 로브에 쓱쓱 문질러 닦아내본다. “쉽지 않은 일이군요. 마법이란 건.” 루치드는 고개를 돌려 지금껏 올라온 길을 내려다 봤다. 나무들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도 않지만 꽤나 험한 길이란 기분에 심란해졌다. 저 길을 먼저 올라온 사람들은 ‘역시나’ 없었나보다. 다시 저 길을 타고 내려가야 할 텐데 핀체노의 상태가 조금 걱정되었다. 갈색빛 얼굴이 이제는 입고 있는 로브와 비슷한, 검회색으로 물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틀 전에도 산에 올랐다가 사고를 당했는데, 또다시 산에 올라 이렇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비록 지금은 비가 오진 않았지만, 보육원 뒷산보다 훨씬 험한 산이었기에 어쩐지 불길한 생각도 들었다. 나쁜 생각은 하지 말아야지, 다짐을 하는 루치드 곁에서 핀체노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내가 보기엔 사람이 온 적은 없었던 것 같구나. 어쩌겠느냐. 내려가 보겠니?” “예.” “그럼 조금만 더 쉬었다가 돌아가자꾸나.” 아무래도 바로 일어서는 것은 무리였던지 핀체노는 자리에서 좀 더 쉬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자신은 이 산을 넘을 생각으로 이곳까지 찾아왔다. 그런데 몇 십 년 만에 생긴 어린 제자 때문에 다시 돌아가려고 하고 있으니, 세상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갈 수 있을까…….” “예?” 핀체노의 중얼거림에 옆에서 쉬던 루치드가 돌아보았지만 핀체노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루치드는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마법을 알고 나니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저기요. 혹시 마법으로 번개를 부리거나 불을 만들거나 하는 것도 가능한 거죠?” “왜 안 되겠느냐? 물도 나타내는데.” “물의 포르마는 뭐죠?” “질문이 잘못되었구나. 물의 포르마는 물이지. 그리고 네가 궁금해 하는 것은 물의 샤락티라스겠지. 물은 어떤 고유성질을 가지고 있을까? 그런데 말이다. 우선 이걸 설명해 주어야겠구나. 어린 너의 눈으로 보는 것보다 세상은 복잡하단다. 굉장히 단순해 보이는 사물들도 많은 고유성질을 가지고 있지. 그리고 모든 고유성질을 파악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란다. 그래서 마법사가 되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단다. 단순히 사물의 외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특성을 살피고 이해해서 완전히 그 사물을 ‘아나그노리시’, 인식해야만 ‘피구라’를 할 수 있게 되는 거야.” “아나그노리시…….” “잘 이해하는 것 같으니 하나 더 보여주마. 이 그릇을 봐라.” 어느새 큼지막한 대야가 땅 위에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맑은 물이 찰랑거리며 루치드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잘 보거라.” 이윽고 잠잠했던 물의 표면이 덜덜 떨리기 시작하더니 가운데를 중심으로 물이 회전을 시작했다. 처음엔 천천히 움직이다가 이내 그 속도가 빨라지더니 물 가운데가 쑥 가라앉고 대야 가장자리로 물이 넘쳐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곧 회전이 멈추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처음처럼 잔잔하게 가라앉아 입을 벌리고 있는 루치드의 얼굴을 비췄다. 루치드는 고개를 돌려 핀체노에게 이 사태의 해명을 요구한다는 강한 눈빛을 보냈다. “일종의 소용돌이란다. 마법의 대상은 비단 사물에만 그치지 않고, 특정한 현상의 재현까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거란다. 신기하지?” 고개가 부서질 정도로 끄덕이는 루치드가 너무나 귀여워 보여 핀체노는 아이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었다. “이렇듯 마법은 이론적으로는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을 재현해내는 힘을 일컫는다. 다만 이론적이라고 말했듯 현실적으로는 모두 재현해내기가 힘들지. 왜냐하면 아무리 사람이 노력해도 자연의 모든 것을 알기란 불가능한 법이거든. 가령 네가 요구했던 번개를 나는 구현해낼 수 없단다. 난 아직 번개의 샤락티라스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거든. 즉 아나그노리시가 실패했다는 뜻이다. 내가 마법을 배우면서부터 수련한 것은 보다시피 물의 아나그노리시였단다. 그것만 가지고도 거의 평생을 전념해서 노력한 끝에 이런 마법이 가능해졌지. 그만큼 아나그노리시, 즉 샤락티라스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법사란 사람들은 그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들이지. 너도 그 불가능에 도전할 마음이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주변의 사물과 현상들을 아나그노리시 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거야.” ‘사물과 현상을 완전히 이해한다!’ 루치드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희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물의 샤락티라스는 내가 파악한 바로는 대략 100여 가지가 넘지 않을까 싶다.” “예?” “사실 나도 정확히 세어보질 않아서 모르겠구나. 다만 그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은 것이지. 네가 한 번 물의 샤락티라스를 생각해보렴.” “물이면… 우선 흐르는 성질이 있고, 맑고 투명하고…….” “물은 빛을 투과할 정도 투명하지. 그 자체로 빛이 나지 않는다. 흐르지만 고이기도 하지. 맛이라는 것이 없고, 모래나 가루를 녹이기도 하지. 점성이 적어서 한 방울씩 떨어지기도 하고 또 한 방울, 한 방울이 뭉쳐 있지. 끓이면 기체가 되고 온도가 낮으면 얼어버리지. 물을 자세히 보면 한 방울은 대체로 동그란 모양을 유지하려고도 하지. 어떠냐? 물의 고유성질이란 것이 엄청나지 않느냐? 하지만 이것들은 겨우 내가 파악한 것의 일부분이란다. 그럼 마법사들은 이 물의 성질을 어떻게 파악하는 걸까? 먼저 정답을 말하자면 ‘아나그노리시’다. 사실 오랜 시간 경험하고 체험하고 실험하는 과정은 필수겠지." 잠깐 말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던 핀체노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 마법사는 단 한 순간 그 모든 속성을 파악하는 경우가 있어. 이것은 일종의 전지(全知)적인 깨달음이니 마법사들은 진정한 ‘아나그노리시’, ‘디아포’라고 부른다. ‘디아포’가 발생하는 순간, 마법사는 ‘라티오’의 포르마를 마주하게 되지. 바로 그 순간이 마법사로서는 가장 영광된 순간이지. 어떻게 생각하니? 루치드?” ‘디아포!’ 루치드는 ‘디아포’, 그 말이 너무나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지난 해 처음으로 책을 마주하고 느꼈던 감정, 그 설렘을 다시 느꼈다. 문득 루치드는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거대한 입을 연상했다. 그 입은 이 세상의 모든 책과 ‘지식’이라 일컫는 것들을 삼키고자 했다. 책 한 권, 한 권을 읽을 때 마다 느꼈던 만족감과 고양감은 포만감과 같았다. 더 많이, 더 자세하게 알고 싶다. 더 많이 채우고 싶다! 루치드와 핀체노는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내려올 때는 올라갈 때보다 더 조심해야 하지만 루치드의 머릿속은 온통 오늘 하루 동안 들었던 내용들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포르마(원형)’의 ‘샤락티라스(고유성질)’를 완전히 알게 되는 것이 ‘아나그노리시(완전한 이해)’. 아나그노리시가 된 포르마는 심상공간에서 ‘챕터(특정화, 가공)’를 시켜 ‘피구라(특정 사물)’를 만든다. 마법사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컨슈메(재현)’. 끝으로 포르마를 완전한 아나그노리시 상태로 이끄는 ‘디아포(깨달음)’. ======================================= [23] 야누스(2) 어느새 해가 서편으로 많이 기울었다. 특히 대산맥에 위치한 산이었던지라 더욱 빨리 산에 어둠이 찾아들고 있었다. 아이의 반짝거리는 눈빛에 기분 좋게 호응했던 탓에 다소 지체한 면도 있었다. 아무래도 숲에 들어섰을 땐 어둠 속을 헤맬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어둠보다 더 큰 걱정이 있었지만 어린 루치드에게 선뜻 말하기란 쉽지 않았다. ‘숲에 들어서기 전에 이야기는 해야 되겠지.’ 핀체노는 지팡이로 중심을 잡아가며 혹여 루치드가 넘어지진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종종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어리다 해도 루치드는 이런 산과 숲의 길에 익숙한 아이였다. 통길 하나 나지 않은 길이라 해도 어느 곳을 어떻게 밟아가며 산을 타야 하는지를 이제는 거의 본능적으로 파악하고 실행하는 수준인, 말하자면 아마추어 산악동호회의 대장 정도의 실력은 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실력이 있었으니 루치드는 산을 타고 내려가면서도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있었다. ‘마법으로 구현할 수 있는 대상은 제한이 없다. 다만 아나그노리시가 되지 않으면 구현할 수 없다. 내 수준에서 아나그노리시가 가능한 것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배우면 써먹고 싶어지는 법. 특히 영특하기로 소문(?)난 루치드에게 그 호기심과 열망은 참기 힘든 것이었다. 이를 눈치 챈 핀체노가 지나가듯 말하기를, 사물을 구현해내는 마법은 매우 어렵다고 했다. 구현 마법보다는 재현 마법이 비교적 쉬우니 그 쪽으로 연구를 해보라는 핀체노의 조언을 따르기로 한 뒤로 이제까지 고민 중인 루치드였다. 그러다 루치드는 움푹 파인 땅에 쌓인 낙엽을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단순한 실수였지만 충분히 식겁할 만한 상황은 만들어졌다. 내딛었던 발이 미끄러지며 몸의 중심이 급격히 흐트러지고 말았다. -쿵 눈 깜짝할 사이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다행히도 다른 발에 힘을 가해 몸을 지탱하는 순발력을 발휘해서 더 큰 사고로 이어지는 일은 방지했다. “괜찮으냐?” 핀체노가 황급히 돌아와 루치드의 안부를 물었다. 루치드는 멍한 얼굴로 핀체노를 바라보았다. 아이가 너무 놀라서 얼이 빠진듯해 핀체노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루치드의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다행히 큰 부상은 보이지 않았다. 핀체노가 다시 루치드의 눈을 마주보며 물었다. “괜찮으냐, 루치드?” “…이거예요.” “응?”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하는 얼굴. 루치드는 자신이 방금 넘어졌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람처럼 해맑게 웃으며 핀체노의 두 팔을 붙잡았다. “넘어지는 거요! 미끄러지는 거요! 이것도 마법이 되는 거죠?” 그제야 루치드가 아나그노리시한 대상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핀체노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 이렇게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해도 되는 걸까? 이 아이를 알게 된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았건만, 마법사의 운명을 타고난 아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영특함을 보여 핀체노를 놀라게 했다. “시작이 좋구나. 사실 우리가 추구하는 마법은 네가 예전에 말했었던 주문이나 별칭이 붙지 않는단다. 다만 예외적으로 몇몇 마법들에는 특별한 이름이 붙곤 하는데, 방금 네가 말했던 미끄러지는 마법이 그 중의 하나지. ‘프라에테’. 그게 그 마법의 이름이다. 왜냐하면 처음 마법을 배우는 마법사들이 연습하기 좋은 마법 중의 하나거든. 말하자면 입문마법이라 할 수 있겠지.” 핀체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난 루치드의 엉덩이를 털어주며 설명을 계속했다. “프라에테는 단순하다. 미끄러지는 것. 네가 방금 아나그노리시한 감각과 이해라면 충분히 컨슈메를 할 수 있을게다.” 루치드는 땅에 놓인 지팡이를 들어 핀체노에게 건넸다. “그런데요, 재현마법은 피구라를 어떻게 하나요?” 핀체노는 다시 앞장 서 걸으며 지팡이로 땅을 콕 찍었다. “마법에 따라 다르지만, 프라에테의 경우 피구라는 심상공간에서 감각을 재현해야 한단다. 이게 쉬운 일은 아니지. 일반적으로 재현마법의 경우에, 아나그노리시는 다소 쉽지만 피구라는 어렵다. 반대로 구현마법은 아나그노리시는 어렵지만 피구라는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야. 그래서 어떤 마법사는 재현마법에 강하고, 어떤 마법사는 구현마법에 강하지.” 루치드는 핀체노에게 바짝 붙다시피 하여 그의 설명에 귀 기울였다. “프라에테의 경우에는 감각의 재현도 어렵지만 챕터도 쉽지 않단다. 예를 들어 미끄러진다는 성질을 어느 곳에, 어느 정도의 길이까지 적용할 것인가를 바로 챕터로 결정하는 것이란다.” 핀체노는 손가락을 들어 옆에 서 있는 나무 두 그루를 가리켰다. “저 두 나무 사이의 거리만큼 땅을 미끄럽게 할 것인지, 아니면 저 나무와 이 나무 사이만큼 할 것인지를 챕터 해야겠지. 또 살짝 미끄러질 정도로 할 것인지, 아니면 발이 닿자마자 미끄러지도록 할 것인지도 챕터 해야 되고.” 루치드는 머릿속으로 핀체노가 알려준 내용들을 수차례 복기하며 이해하려 애썼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두 사람은 숲의 경계에 닿았다. 벌써 숲 속은 많이 검기울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루치드, 하나 알려 줄 게 있구나.” “예?” “마법사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는 말, 기억하느냐?” “예.” “난, 사실 의지가 약한 사람이란다.” “무슨 말씀이세요?” “이제 조금 있으면, 넌 조금 다른 모습의 나를 보게 될 게다. 아니지, 다른 모습이 아니라 아예 다른 사람일게다. 그리고 그 사람은 아마도 널 모를 거야. 그래도 너라면 충분히 상황을 이해하고 협력해줄 게다. 부디, 놀라지 말고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길 바라마.” 뜬금없는 말을 놀란 루치드가 대꾸도 못하고 핀체노를 바라보지만, 핀체노는 그저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시 말을 이어주길 기다렸지만 더 이상 핀체노의 설명은 없었다. 어둠이 짙어가는 가운데 침묵도 길어지자 루치드는 참지 못하고 물음을 던졌다. “저기, 할아버지. 무슨 말씀이신지…….” 핀체노는 깊은 한 숨을 토해내더니 고개를 내려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깊은 주름에 내려앉은 눈꺼풀 안으로 묵광이 번쩍였다. “누구냐, 너는?” “예?” “누구냐고.” 갑작스런 어투의 변화에 루치드는 황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어버버거리며 핀체노를 바라보는데, 핀체노가 손에 든 지팡이를 바라보더니 다시 한 숨을 쉰다. “이 놈의 지팡이는 버리고 버려도 다시 돌아오는군. 미친 핀체노.” 그리고 다시 루치드를 바라보며 말없이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어둠이 깊게 밀려든 숲 속에서 정체 모를 산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던 핀체노가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루치드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냐?” 어디라고 해도, 루치드는 지명을 모르기 때문에 그 질문에 대답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 상황 자체가 이해되지도 않았다. 때문에 루치드는 아무 것도 대답 하지 않았다. “흠, 저 산을 보니 대산맥에 가까이 온 거 같긴 한데.” 딱히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는 듯, 여상한 어투로 말을 잇다가 시선을 깔고 루치드를 바라보는 핀체노. 그 눈매가 여간 날카로운 게 아니었다. “어제는 없었는데, 오늘 옆에 있는 걸 보면 오늘 낮에 만난 것이로고. 너 누구냐?” 재차 날선 물음이 날아들자, 이번에는 어쩐지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치드인데요.” 핀체노는 허리가 결린다는 듯,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허리께를 두드리고 허벅지를 주물렀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루치드 역시 온 몸이 쑤시고 알배기는 느낌에 몸을 비틀어가며 뭉친 근육을 풀어주었을 테지만 지금은 옴짝달싹도 못할 만큼 긴장된 상황이었다. “어디 사냐?” “…저 숲 바깥 마을에…….” 루치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져보지만, 이미 숲은 어둠으로 가득 찬 상태. 핀체노는 짧게 혀를 찼다. “여기에 마을이 있다고?” “……예.” 왠지 모르게 신경질이 잔뜩 난 핀체노의 목소리에 루치드의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날카롭게 변한 핀체노의 시선이 신경 쓰여, 뒤로 숨긴 손가락만 꼼지락거려보지만 가슴이 쿵쿵대는 느낌이었다. “그럼 여긴 왜 온 것이냐?” 우물쭈물 하면서도 루치드는 아침의 만남부터 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던 얘기까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 미친 핀체노. 지가 뭐라고 오지랖인지.” 계속 자기 자신을 남 부르듯 하는 태도가 심상치 않게 보였다. “너, 꼬마. 알겠으니 이제 집에 가라. 난 가야할 곳이 있다.” “어?” 루치드는 뒤돌아서는 핀체노를 붙잡았다. “뭐야?” “저기…….” 루치드는 쉽게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대로 두면 핀체노가 절 두고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 혼자 남겨진다는 두려움과 이 어둠에 다시 산으로 돌아가려는 핀체노에 대한 걱정이 버무려져 아이는 무작정 핀체노의 로브를 붙잡고 말았다. 하지만 붙잡고 나니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그 때 핀체노가 ‘모르는 사람일거다’라고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누군지 부터 알아야 할 거 같았다. “누구세요?” 문제의 해결은 언제나 올바른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 [24] 야누스(3) “나? 왜?” “어, 저기… 조금 전까지 핀체노 할아버지와 같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핀체노 할아버지 보고 미쳤다고 하니까, 다른 사람인거 같아서요.” “…너 꽤 똘똘하구나.” 어둠 속에서도 번들거리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여겨 루치드는 한 걸음을 물러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피식 웃음을 짓던 그는 평이한 어조로 대꾸했다. “내 이름은 야누스다.” “그럼, 핀체노 할아버지는…….” “그 놈은 내 부(副)인격. 어느 날부터 나타나서 내 몸의 주인행세를 하려는 도둑놈.” 루치드의 이해선상에서 벗어난 대화 주제가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내가 원래 이 몸의 주인. 그런데 그 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그 놈이 나타나 정신을 차릴 땐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잠들었다가, 내가 정신을 차리면 그 놈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더군. 최근에는 그 놈의 힘이 약해진 탓인지 내가 주로 이 몸을 이끌고 있었는데 말이야. 아주 오랜만에 정신을 잃었었는데 이런 핏덩이를 옆에 끼고 있어…….” “어, 그럼 둘은 다른 사람이라는 건가요?” “뭘 들은 게야. 흠, 그러고 보니 넌 아직 어려서 ‘인격’의 분화 따위를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겠구나. 그래, 이런 걸 처음 만난 네가 알 필요는 없겠지.” “저기, 그런데요. 그럼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밤에 산에 들어가는 건 위험한데?” “니가 알 필요는 없다… 만, 일단 저 산을 넘어가는 게 목표다.” “왜요?” 짜증난 얼굴이 되어 아이를 돌아보는 야누스. “내가 왜 그걸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답을 해주겠다. 저 산을 넘어 이 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다. 왜냐고? 미친 핀체노란 놈이 너무 많은 죄를 지어서 그 죄를 풀 길이 없다. 그래서 사회 공헌과 속죄의 의미로 이 땅을 떠나려는 것이다. 알겠냐?” “그런데요, 제가 본 핀체노 할아버지는 착하신 분이셨는데.” “헛소리! 그 놈이 얼마나 미친놈인지 아느냐! 혹시…… 그 놈이 마법사라고 하더냐?” 버럭, 화를 내는 핀체노, 아니 야누스의 일갈에 흠칫 놀란 루치드. “예. 저도…….” 저도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 마법을 배우고 있었어요, 라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들을 생각도 없어 보이는 야누스가 한 팔을 휘두르며 노성을 토했다. “그 미친놈은 말이다! 한 도시를 물에 잠기게 만들었어! 도시의 수많은 사람들을 수장시켰단 말이다. 그리고 지명수배가 되어서 지금도 현상금 사냥꾼들과 기사들이 나를 쫓고 있을게다.” 생각지도 못한 과거사가 나오자 어안이 벙벙해진 루치드의 얼굴을 보고 픽, 비소를 날렸다. “그 놈이 어떻게 마법사가 된건지는 모르겠다. 난 마법을 쓸 줄 모르거든. 어쨌든 그렇다. 그 놈이 무슨 말로 널 꼬드겼는지 모르겠지만 잊어라. 마법사? 자기 자신도 제어하지 못할 힘 따위 개나 주라 그래라.” 그리고 획 몸을 돌려 산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멍하니 있다가 달려가 야누스의 로브 소매를 붙잡았다. “안돼요. 할아버지. 위험해요.” “위험하기 때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난 오래 살았고, 이제 더 이상 미련이 없다. 그리고 더 이상 이 몸을 미친 놈 손에 맡기는 것도 싫고. 그래서 가는 것이니 막지 말아라.” 소매를 툭 털어 아이를 떨쳐낸 야누스는 화를 진정하려는 듯, 잠시 호흡을 가다듬더니 무릎을 꿇어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괜히 역정을 부린 것 같았다. “너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묻지 않겠다. 인연이 길어지면 복잡해질 뿐이니 지금 내 사정에서 다른 것들을 신경 쓸 여력이 없다. 다만 똘똘해 보이는 아이야. 다른 사람의 사정을 제대로 모르면서 이런 식으로 길을 막는 것은 좋지 않다. 누가 니가 가려는 길을 막고 서서 가지 못하게 하면 넌 어떤 기분이 들겠느냐. 니가 가려는 길에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곁에 서서 이리로 가라, 저리로 가라, 이 길은 가지 마라, 저 길은 위험하다 참견하면 어떤 기분이 들겠느냐. 충고라면 고맙겠지만 참견이라면 불쾌하다. 그리고 핀체노란 녀석은 불쾌함을 넘어 내 삶을 망쳤다. …난 지쳤고 늙었다. 그러니 이제라도 나는 나의 길을 가야한다. 아이야, 사람은 누구나 자기 갈 길이 있는 법이다. 나에겐 이 길이 나의 길이다. 넌 너의 길을 가거라.” 말을 마치고도 잠시 동안 눈을 마주쳤던 야누스가 이윽고 몸을 일으켜 세우고 뒤돌아섰다. “밤길 조심하거라.” 야누스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루치드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잠시 그 자리에서 야누스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다 부엉이 울음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더 지체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숲을 빠져나갔다. 숲을 겨우 빠져나왔을 때는 중천에 새하얀 달이 구름에 가린 채 떠올라 있었다. 언덕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마침 구름이 지나가며 모습을 드러낸 둥근 달에서 희미한 백광이 빈촌 위로 떨어져 내렸다. 옆에서 불어온 바람 때문인지 서늘한 느낌을 주는 풍경이었다. 루치드는 선뜻 언덕을 내려가기가 주저됐다. 물론 빈촌은 여전히 비어있겠지만 그 사실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는 사실이 겁이 나기도 했다. 명수나 경은이는 이런 경험을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1학년 3반의 동급생들은 언제나 소란스러웠고 활동적이고 즐거웠다. 함께 수다를 떨 친구가 있고, 돌아갈 집이 있고, 그들을 안아줄 부모가 있다. 그런데 자신은 이 언덕에 홀로 서서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저 서늘한 빈촌으로 들어가야 한다. 왜 그럴까? 루치드는 머리를 흔들고 빈촌으로 들어갔다. 어쨌든 밤이슬은 피해서 잠이라도 청해야 할 것 같기에. 저절로 긴 한숨이 내뱉어진다. 이번에도 산에서 불어온 바람 때문에 들창이 덜컥거리며 요란스러운 밤이었지만 워낙 피곤했던 탓인지 루치드는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잠에서 깰 수 있었다. 부스스한 몰골로 집을 나와 너럭바위에 누웠다. 해가 좀 더 높이 떠 있었던 덕분에 간밤의 추위가 금세 떨쳐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문득 루치드는 기분 전환도 할 겸 마법을 연습해보고자 마음먹었다. 고작 하루의 가르침이었지만 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선 입문마법이라던 ‘프라에테’를 연습해보았다. 미끄러진다는 현상은 이해했다. 낙엽에 미끄러지며 넘어질 때의 그 느낌이 워낙 강렬해서 그 느낌을 재현보고자 마음먹었다. 사실 루치드는 잘 몰랐겠지만 그가 넘어지던 순간 그는 ‘디아포’, 즉 깨달음을 얻었다. 그 현상(포르마)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아나그노리시)가 이루어진 것이다. 때문에 마법의 구현원리에 따르자면 심상공간에서 그 이미지를 떠올리고 거기에 몇 가지 조건을 붙여 현실에 재현하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심상공간에 그 이미지를 재현해 낸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왜 안 될까를 고민하던 루치드는 자신이 지금 마법에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머릿속에서 너무 많은 생각들이 교차하며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의 실종, 수색, 핀체노, 야누스…….’ 어젯밤에 야누스는 산으로 떠났다. 어쩌면 다시 핀체노가 되어서 돌아올지도 모른다. 자신이 갈 곳은 이 마을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테니까. ‘그럼 나는 다시 핀체노가 올지도 모르니 여기서 기다려야 하는 걸까?’ 이렇게 되면 또 반복이다. 가족들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마을에서 기다리고, 마법을 가르쳐 주었던 핀체노가 다시 돌아올지 모르기에 기다려야 하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마을에서 기다려야만 하는 걸까?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그 때 야누스의 말이 생각났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갈 길이 있는 법이다. … 넌 너의 길을 가거라.” 나의 길. 나의 길이 뭘까? 루치드는 고민을 거듭했다. 마을에서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어제처럼 용기내서 찾으러가는 것이 옳은 길인 것 같았다. 물론 어제는 핀체노가 함께 해주었기에 산에도 오를 수 있었지만, 어쨌든 그 곳에 올라갔던 덕에 사람들이 저 곳으로는 가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른 방법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런 방식으로 단서를 찾아 나서는 행동을 취하는 것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바른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리지 말고 움직이자.’ 루치드는 다른 집을 뒤져 먹을거리도 조금 챙기고 물주머니도 하나 구해서 물을 담아 허리에 매달았다. 배낭에 필요해 보이는 짐들, 그래봐야 낡은 옷가지 몇 개지만 그거라도 챙겨서 등에 매고 나니 어쩐지 기운이 솟는 느낌이었다. 힘찬 발걸음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빈촌을 나왔다. 루치드가 가려고 하는 곳은 이 근방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였다. 옆집 친구였던 브뤼엘이나 마을 어른들이 종종 가던 방향인지라 그 길을 따라 가면 시장이 존재한다는 그 ‘도시’로 갈 수 있으리라 희망을 가지고 루치드는 힘차게 나아갔다. 도시에 가면 사람들이 많을 테고, 어쩌면 그 곳에서 어떤 소문이라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겼다. 넓은 벌판을 가로지르는 통길이 난 덕분에 루치드는 길을 잃을 걱정도 하지 않고 걸었다. 가다가 힘들면 잠시 멈추기도 하고, 틈틈이 머릿속으로 ‘프라에테’의 이미지를 만드는 연습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마법을 연습하지 않는 때에는 계속 잡생각이 떠올라 루치드를 괴롭혔기에 루치드는 계속 마법을 생각하려 애썼다. 당장은 그것만이 겨울 밭에 홀로 세워진 허수아비가 된 것 같은 현실을 이겨내는 방법이었다. 다만 마법의 구현이 좀처럼 쉽게 되지 않아서, 또 그거 나름의 괴로움을 주긴 했지만. 그래도 핀체노가 말했듯 - ‘평생을 연구’해야 하는 마법사의 노력을 상기해보자면 -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고민해야 할 것 같았다. 벌판이 끝나면 다시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야 했다. 하지만 하늘을 보아하니 그 고개를 넘기엔 시간이 애매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어제의 경험으로 봤을 때는 딱히 어려움이 있을까 싶은 낙천적인 마음도 생겼다. 하지만 핀체노라는 어른이 곁을 지켰기에 무서움이 덜 했던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홀로 노상에서 밤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저 멀리 보이는 고갯길을 두고 루치드는 잠시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 ======================================= [25] 야누스(4) 루치드는 등에 매고 있던 배낭을 다시 한 번 고쳐 메고 고개를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고개를 넘다 밤을 맞이하였을 때 찾아올 위험이나 산 아래에서 밤을 맞이하는 거나 비슷할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아무런 힘도 없는 자신에게는 이러나저러나 같은 조건, 그렇다면 조금 더 빨리 도시를 향해 가는 게 낫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왕래가 적은 길이어서 그런지 어제 오른 산길만큼이나 험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게다가 어제 무리했던 탓인지, 제대로 피로를 풀지 않았던 탓인지 고개를 오르는 게 무척 힘이 들었다. 고개를 반도 오르지 못했는데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가빠졌다. 해는 이미 대산맥 너머로 넘어가 사위가 어둠에 잠기고 있었다. 발끝에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자꾸 걸려 신경이 쓰였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나뭇가지들을 피하느라 허리를 굽히거나 몸을 비트는 바람에 체력이 더 빨리 소모되었다. 주변의 색이 점점 사라질수록 마음속의 두려움은 점점 커져갔다. 거친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오르던 루치드가 마침내 잿마루에 올랐을 때는 거의 녹초가 되다시피 한 때였다. 쉬는 것도 참아내며 억지로 올라와 마루에 서니 아래로 잡목들의 우듬지가 보였다. 다시 저 한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야 하지만, 도저히 지금 상태에서는 한 걸음 걷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굽이진 고갯길 가장자리에 큰 바위가 있어 그 곳에 몸을 기대고 잠시 쉬기로 결정했다. 눈을 감으니 금방 잠이 들 것 같았다. 이상한 소리가 들리지만 않았다면 진짜 잠이 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 아우우~ 눈이 번쩍 뜨였다. 루치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그나마 잿마루 근처에는 높게 자란 나무가 없어 주변으로 달빛이 들어와, 희미하게나마 사물을 구별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울음소리를 낸 주인공은 보이지 않았다. - 아우우~ - 아우~ 늑대소리란 것은 알겠다. 가까운 곳에서 나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도대체 몇 마리가 주변에 있는지, 까지는 파악하지 못한 루치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경계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당장 무언가를 대비할 방도는 없었다. 그저 주변을 둘러보며 두려움에 떠는 일 밖에. 두 발이 제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른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긴장감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소리가 들리는 방향도, 눈에 보이는 잡목들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뒷목에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하지? - 크르르 일단, 뛰기 시작했다. 아까 보았던 잡목숲을 향해 전력으로 뛰었다. 어깨에서 배낭이 덜커덕거리며 몸의 움직임을 방해하지만 벗을 타이밍도 잡지 못할 정도로 정신없이 뛰었다. 내리막을 뛰어가는 거라 힘에 부치는 일은 없었다. 다만 긴장에 시야가 좁아져 제대로 길을 따라 가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뛸 뿐이었다. 내려갈수록 가속도가 붙어 몸의 중심이 흔들렸다. 그럴수록 더 빨리 뜀박질을 하며 넘어지지 않도록 애를 썼다. 하지만 몸은 계속 앞으로 넘어질 듯 기울어져만 갔고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지도 모르게 정신이 없었다. 바로 뒤에서 늑대들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다가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공포가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 내몰린다는 게 바로 이런 걸 말하지 싶었다. 갑자기 앞에 나무가 나타났다. 시야가 너무 좁아져서 눈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나무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앗!” 짧은 비명과 함께 앞으로 넘어졌다. 방어적으로 손을 뻗어 몸이 그대로 땅에 처박히는 것은 막았다. 하지만, 고갯길을 구르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두 세 바퀴를 굴렀지만 대신 나무에 그대로 코를 박고 넘어지는 일은 피했다. 가까스로 나무 옆을 지나는데 뒤에서 둔탁한 충돌음이 들렸다. 힐끔 쳐다보니 자기만한 덩치를 가진 늑대가 나무에 머리를 박고 쓰러지고 있었다. ‘정말 늑대가 바로 등 뒤에까지 쫓아왔다!’ 헛바람을 들이킨 루치드는 그 때부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뛰다보니 튀어나온 나무초리가 얼굴과 몸을 사정없이 할퀴지만 아픔도 제대로 못 느낄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도 나무 사이를 교묘하게 몸을 비틀어 피해 다녔다. - 컹! 언제 따라잡은 것인지 바로 옆에서 늑대가 쫓아와 달리고 있었다. 짐승의 눈에서 광망이 흘렀다. ‘안돼!’ 더 빨리, 더 멀리 달리고 싶지만 한계가 있었다. 그나마 빽빽하게 들어선 잡목들이 늑대들의 발을 잡아 끌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하지만 루치드에게 그걸 떠올릴 여유 같은 것은 없었다. 그 때,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반대편에서 늑대가 달려들었다. 루치드의 목을 노리고 뛰어오른 늑대. 루치드는 앞으로 넘어지다시피 굴렀다. 화끈! 늑대의 앞발이 루치드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며 깊은 상처를 남겼다. 루치드는 정신없이 앞으로 굴러 내려갔다. 다시 다른 늑대가 쫒아왔다. 늑대는 굴러가는 루치드보다 빨랐다. - 컹! 늑대는 바로 뒤에서 땅을 박차고 뛰어와 붉은 아가리를 벌렸다. “!” 늑대는 루치드를 물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아가리에 물린 것은 루치드의 배낭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루치드와 함께 했던 낡은 배낭은 늑대의 아가리에 뜯겨져 그 속에 들었던 옷가지들과 함께 허공을 비산(飛散)했다. 늑대와 부딪히는 충격에 루치드는 더 빠르게 비탈길을 굴러 떨어졌고 그의 생명을 구한 배낭과 안녕을 고했다. 늑대와 부딪힐 때쯤 잡목숲도 끝나 더 이상 늑대의 추격을 방해할 장애물도 없어진 상태였다. 골짜기에서 떨어지는 낙석처럼 구르던 루치드의 뒤를 두 마리의 늑대가 쫓았다. 메마른 숨소리를 내며 치달린 늑대들의 광기서린 눈빛이 금방이라도 루치드를 덮치려는데. 루치드가 늑대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상황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바로 뒤를 쫓았던 늑대 한 마리도 모습을 감췄다. - 우우~ 대신 사라진 늑대는 희미한 울음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다른 늑대들은 눈치를 채고 달리던 속도를 줄였다. 이윽고 루치드와 늑대가 사라진 즈음의 위치에 다다른 늑대들은 아래로 푹 꺼진 벼랑 위에 멈춰 서서 검은 어둠 속의 우듬지만 바라봤다. 스산한 바람이 벼랑 위를 가르며 지나갔다. - 아우우~ - 아우~ 날이 밝았다. 우듬지 위로 새들이 아침먹이를 구하기 위해 휘파람 소리를 내며 날아다녔다. 이슬을 머금은 야생화들과 잡풀들 사이로 청설모 한 마리가 가로지르며 달리다가 이내 나무 위를 타고 올라 모습을 감춘다. 초봄의 온기가 서린 바람이 우듬지를 쓰다듬듯 스치고 지나가는 가운데, 그 속 어딘가에서 부스럭거리는 움직임이 나무를 흔들었다. 루치드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을 때,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으윽.” 아파도 아프다고 투정부릴 대상이 없어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인 루치드는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숲 속인지라 바로 경계를 했지만 다행히도 별 다른 위험이 없어 보였다. 마음을 놓지 못하고 일어서려는데 옆구리에서 통증이 느껴져 비명을 질렀다. 쉽게 몸을 움직일만한 여건이 되지 않는 듯해서, 우선 자신의 몸부터 살피기 시작했다. 일단 어깨가 아팠다. 고개만 살짝 돌려 보니 왼쪽 어깨에 깊이 파인 흔적이 보였다. 멈췄던 눈물이 다시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아냈다. 팔 다리는 제대로 움직일 만 한 것 같았지만 워낙 피범벅에 흙투성이가 된 모습이라 자세히 살펴볼 요량으로 소매와 바짓단을 조심스럽게 뒤집어 살폈다. 긁히고 찢어진 자국이 처참하게 새겨져 있지만 어깨보단 나았다. 오른손을 들어 올려 머리를 눌러보니, 사실 보이지가 않아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어쨌든 주변도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에 일어서 보려는데 또다시 옆구리의 통증이 심해서 몸이 절로 숙여졌다. 이를 악물고 옆의 나무를 의지해 일어서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 커다란 덩치를 가진 늑대가 있었다. 흠칫 놀란 루치드는 잠시 그대로 움직이지도 않고 늑대를 바라보았지만 늑대에게서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있다 천천히 다가가보니 목이 기이하게 꺾인 채로 혀를 빼물고 죽어 있었다.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던 루치드는 자리에 주저앉더니 이내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처지가 너무 비참했다. 자신에게 벌어진 이해할 수 없는 일들부터 해서 왜 늑대에게 쫓겨 가며 이 고통을 느껴야 하는 지, 이유조차 알 수 없는 이런 일들을 왜 계속 당해야 하는지, 왜 친구들처럼 살 수 없는 것인지, 누구에게 묻고 싶어도 대답해줄 사람 하나 없는 이 현실이 너무 비참했다. “흐윽, 엄마….” 도대체 어디에 있는거예요? ======================================= [26] 야누스(5) 루치드는 한참을 울다가 어느새 지쳐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하루가 지났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봄기운이 차올랐지만 그래도 밤은 추웠다. 밤이슬과 추위에 몸이 꽁꽁 얼어붙어버릴 정도가 되어 깨어난 루치드는 피로는 조금 풀렸을지 몰라도 통증은 더욱 심해졌다. 온 몸 구석구석이 모두 결리고 아파서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로 옆에 죽은 늑대의 사체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보니 다시 분노와 절망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이를 악물고 사체를 노려보지만 당장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태우고 싶다.’ 으슬으슬한 몸 상태 때문이었는지 루치드는 저 놈을 태워서라도 불을 지펴 몸을 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놈 정도면 불쏘시개 없이도 알아서 잘 타겠지.’ 그러나 당장 불을 피우고 싶어도 피울 방법이 없었다. 저쪽 세계였다면 쉽게 불을 피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부싯돌이나 다른 점화도구가 없으니 어렵다. 게다가 불을 만지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어서 자신은 제대로 피워본 적이 없었다. 그저 어깨 너머로 구경해 본 수준에 불과했던지라, 흉내라도 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충동적으로 떠올린 생각이었지만, 루치드는 배고픔이나 추위도 잊고 당장 불을 피울 방법만 골똘히 생각했다. ‘마법으로 가능할까?’ 갑작스럽지만, 어쩌면 당연스럽게 마법을 떠올린 루치드는 불을 떠올려 보았다. 아직 프라에테도 제대로 재현해내지 못하는 마당에 ‘불’을 구현해낸다는 것은 어찌 보면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절박함이 가득했던 루치드는 막무가내(?)식으로 불의 고유성질을 떠올려 보았다. 빛, 뜨거움, 물건을 태우는 성질……. 생각하다보니 불에 대해 알고 있는 몇 가지 지식들이 연계되어 떠오르기도 했다. 안전 교육 시간에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들, 보육원에 찾아온 소방관의 안전교육과 실습. 어느 순간 머릿속에 불이 떠올랐다. 아니 정확히 머릿속이라고 표현하기 힘든, 하지만 분명 이미지화 되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이 ‘보였’다. “아나그노리시.” 루치드는 자연스럽게 불의 아나그노리시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떠올린 이미지를 가만히 바라보다, 이제는 저 이미지를 구현해 내야겠다는 생각에 집중했다. 핀체노는 조건을 붙여야 한다고 했다. 어느 정도의 크기, 어느 정도의 뜨거움으로 조건을 붙여야 할까? 다시 밤이 되었다. 산 속 어딘가에서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소리가 스산한 기운을 흩뿌리며 지나갔다. 뒤척임도 없이 잠든 밤의 숲. 그 속에서 갑자기 빛이 뿜어져 나왔다. “됐어!” 눈앞의 늑대가 불에 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머리만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곧 저 불은 몸통으로 번져나갈 것이 분명했다. 땀범벅이 되어 온 몸이 축축해진 루치드는 엉거주춤 일어나 불타는 늑대에게 한 발 다가갔다. 열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 열기만큼, 아니 그 열기보다 더한 희열이 루치드의 몸을 감쌌다. 루치드는 마법사가 되었다. 아마도 간밤의 그 불이 계속 커져나갔다면 이미 숲 속은 불바다가 되고 그 속에서 마법사가 된 루치드는 그대로 땔감처럼 새카맣게 타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날 밤 모처럼 축축한 비가 내려 루치드의 생명을 구했고, 루치드는 그것이 물을 다루던 핀체노의 은혜라고 생각했다. 뒤를 생각하지 않고 저지른 자신의 아찔했던 실수를 자책하며 루치드는 도시로 향한 길 위에 서 있었다. 여전히 옆구리의 통증이 가시지 않아 한 걸음 걷기가 무척이나 괴로웠지만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산 속에서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다. ‘핀체노 할아버지. 고마워요.’ 핀체노의 은혜는 비단 비를 내려 불을 끄게 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루치드는 비었던 물주머니를 조금 채울 수 있었고, 허기진 배를 늑대 바비큐로 채울 수 있었다. 도구가 없어 야만인처럼 맨 손으로 죽죽 잡아 뜯어야 했지만 먹을 수 있었다는 데 고마워했다. 다소 핏기가 서렸다는 점과 비 때문에 눅눅해진 고기 식감은 불만거리가 되지 않았다. 걸어가는 동안 루치드는 10원짜리 동전 크기의 불을 만들어 툭툭 던져보았다. 마치 불똥 같은 모양새였지만 허공에서 침 대신 불을 뱉는 모양새 때문에 즐거웠다. 혹시라도 불이 번지진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땅에 떨어진 불을 신발 앞굽으로 꾹꾹 눌러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른 마법도 구현해보려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핀체노처럼 물을 해보려 해도 물의 이미지가 명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돌을 만들어 던지면 위협적이지 않을까 싶어서 시도해봤지만 역시 실패. 원인은 대상에 대한 연구가 부족해서. 다시 말해 자신이 아는 바가 많지 않다는 것이 원인이었다. 그래서 그나마 가능한 불이라도 익숙해지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불똥놀이’를 하는 중이었다. 주변은 벌판이었다. 통길이 난 옆으로 잡초밭이 나 있고 군데군데 나무들이 들어서 그늘을 만들어주는 정도였다. 이 거리까지 나와 본 것은 루치드 생애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두렵다는 생각은 많이 줄었다. 그간 극한 경험을 하기도 했고, 마법사가 되었다는 자각에 용기가 생기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걷는 여유가 생긴 루치드는 마침 벌판 가운데 샘물이 솟아나는 곳을 찾았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이곳을 들렀던 것인지 샛길이 나 있었다. 목을 축이고 잠시 그늘을 찾아 앉은 루치드는 핀체노의 지팡이를 떠올렸다. 지팡이가 있다면 걷기가 좀 더 수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곧 마법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까지 닿았다. 지팡이의 고유성질, 샤락티라스는 ‘걸을 때 짚을 수 있는 막대기’ 라는 정도이다. 루치드는 과연 이 정도만으로도 아나그노리시가 가능할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조금 집중을 하니 곧 이미지가 연상되었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다소 희미한 형태. “챕터…….” 조건을 붙여 보기로 했다. 우선 적당한 길이를 떠올리고 굵기도 잡아보니 이미지가 점점 명확해진다. 하지만 아직은 구현이 어렵다. 조금 더 조건을 붙이자면……. “무조건 단단한 … 쇠막대?” 이쪽 세계에서는 많이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저쪽 세계에서는 쇠의 질감이나 형태, 속성들을 경험해볼 수 있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떠올려 보니……. ‘컨슈메’, 구현이 되지 않았다. “어렵구나.”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쇠’를 구현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이러고 보면 가장 원시적 에너지체인 ‘불’을 마법으로 구현한 것은 어찌 보면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차라리 나뭇가지라도 하나 주어서 지팡이 삼는 게 낫겠어.” 마법에 실패하고 의기소침해진 루치드는 기분 전환할 겸 다른 쪽으로 의식을 돌렸다. 가장 먼저 ‘디아포’, 깨달음을 얻어 아나그노리시를 이룬 ‘프라에테’라는 마법. 이제는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숙달되었기에 다시 한 번 도전해 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 루치드는 팔 다리를 땅에 대고는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었다. 한 순간 앞을 짚었던 손이 맨땅에서 미끄러지며 몸의 중심이 흐트러졌다. 허리에 힘을 줘 중심을 잡으려하니 통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까스로 땅 위를 뒹구는 꼴불견은 피했지만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루치드는 들뜬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마치 사냥에 성공한 늑대처럼 소리를 질렀다. 결국 프라에테는 성공했다. 비록 매우 작은 범위에 적용되었지만 충분히 미끄러운 상태가 만들어졌다. 다음은 숙련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니, 범위를 넓히거나 미끄러지는 정도를 지정해보면서 마법을 수련했다. 어떻게 ‘챕터’ - 조건을 지정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프라에테가 재현되었다. 다만 연못에는 적용이 되지 않았다. 아마도 물이 얼지 않아서 그런가보다, 라고 생각하고 넘어간 루치드는 이내 흥미로운 꾀를 냈다. 우선 프라에테로 샛길 가운데 일부분을 지정한 뒤, 그 위에 덧옷을 벗어 올려놓고 옷 위로 올라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펼쳐둔 옷 위를 오른 뒤, 발로 지면을 한 번 밀었다. 길을 따라 천천히 미끄러지는 루치드. 루치드의 몸무게 때문인지 급격히 미끄러지진 않아도 호수에 띄어진 뗏목처럼 흙바닥 위를 미끄러졌다. 몇 미터 가지 못해 멈추었지만 루치드는 아이처럼(?) 신이 났다. 스케이트 타며 놀던 아이들이 부럽지 않은 순간이었다. 이를 활용하여 아이는 큰 길이 난 곳까지 재미있게(!) 이동할 수 있었다. 큰 힘 들이지 않고, 마법도 수련하며 이동해 보았다는 사실에 만족한 루치드는 오랜만에 활짝 웃을 수 있었다. ‘계속 이렇게 가볼까?’ 생각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이후 불꽃을 허공에 날리며 들판 사이 난 길을 폭주(?)하는 루치드였다. 루치드는 시간을 알차게 보냈다. 마법을 수련하는데 매진하면서 점차 마법의 속성이나 과정에 대한 공부가 깊어졌고, 덕분에 더 수월하게 마법을 부릴 수 있었다. 덕분에 비참한 처지에 놓인 현실 부정이나 파괴적 감성, 자기 비하나 자괴감에 빠지지 않게 되었고 대신 자신감과 긍정적인 용기와 인내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아, 저건가?” 어느덧 또 하나의 고개를 넘으니 저 멀리 성과 마을이 보였다. 아직은 멀어서 희미하게만 보이지만 그래도 사람이 사는 도시에 입성하게 되었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저 곳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생활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꽤 지저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피나마나 오랜 시간을 이동하며 쌓인 먼지와 축축이 배인 땀, 무엇보다 피범벅이 되었던 자국과 찢어진 구멍 등이 누가 봐도 ‘거지’를 연상케 할 복장이었다. 현실적으로 따지자면 루치드는 ‘거지’가 맞지만, 그래도 ‘거지’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냄새도 조금 나는 것 같은데…….’ 어디 흐르는 물이라도 찾아서 옷 좀 씻어야겠다, 는 생각을 갖고 고갯길을 넘었다. 비탈길 옆으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가니, 과연 꽤 넓은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차갑기가 거의 얼음 수준이었지만 몸을 씻을 만한 기회라 여겨 앞뒤 생각도 하지 않고 들어갔다. “으으으… 추워.” 그래도 오랜만에 목욕을 하고 나니 정신이 맑아진 느낌이었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물에서 나와,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땔감을 모아다 냇가에서 불을 지피고 몸을 말렸다. 옷은 겉만 보면 씻으나마나 한 거 같았지만, 그래도 찝찝했던 땀이나 흙먼지는 씻겨 내려간 거 같아서 말리고 나면 꽤 보송보송한 느낌일거라 상상했다. “따뜻해…….” 온기가 들자 몸의 떨림도 잦아 들었다. 돌이켜보니 자신의 처지가 많이 나아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늦은 오후가 될 무렵이었지만 불을 피운 후로는 이전처럼 위험하다는 생각도 덜하게 되었다. 조금 여유로워진 기분이었다. “이런 곳에 어린 아이라니. 신기한 일이군.” 굵은 성인 남성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 루치드가 뒤를 돌아보았다. 갈색 가죽 브레스트를 입고 어깨에는 활을 멘 남자가 숲 속에서 나와 루치드에게 다가왔다. 무의식적으로 벌떡 일어나려는데 깜박 잊고 있었던 옆구리의 통증이 전신으로 퍼졌다. 외마디 신음과 함께 루치드는 무릎을 꿇었다. 어느새 루치드 바로 앞에까지 다가온 남자는 표정 없이 아이를 관찰했다. “심하게 다쳤나보군.” 그간 조심하며 움직이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통증이 재발하는 바람에 제대로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루치드는, 시선을 들어 남자를 바라보며 경계심을 세울 뿐이었다. ======================================= [27] 천도(1) “누, 누구세요?” 경계심을 잔뜩 키운 아이의 눈초리가 생긴 것 같지 않게 여간 사나운 게 아니다 싶었던 남자는 자리에서 멈췄다. 괜한 오해를 부르는 것은 자신으로서도 반갑지 않은 일. “나야말로 묻고 싶구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이 산에 혼자 올라와 있다는 게 믿기지 않거든.” 아이의 이마에서 솟아난 땀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니 그냥 젖은 머리에서 떨어진 물인가? 자신을 바라보는 큰 눈망울에서 경계와 두려움이 느껴졌다. “쉽게 대답을 하지 않을 거 같군. 나는 모슬라. 보다시피 사냥꾼이다. 됐냐? 그럼 듣기 힘든 네 이름도 한 번 들어보자. 설마 이름도 없는 녀석은 아니지?” 아이의 꾹 다문 연보랏빛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잠시간 들숨을 들이마신 아이는 힘겹게 이름을 밝혔다. “루치드, 예요.” “도망친 노예라도 되는 거냐?” 준비된 질문이 곧바로 이어졌다. 모슬라는 섣부른 예단은 금물, 이라는 격언이 잠깐 생각났지만 누가 봐도 저 아이는 거지, 아니면 노예였다. “아, 아닌데요.” 저 머뭇거림을 어색함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당황스러움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알 것 같았다. 우선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겠다, 고 마음먹은 모슬라는 다시 말을 건넸다. “알겠다. 사정은 나중에 다시 듣도록 하고 일단 너 몸부터 좀 보자. 보아하니 정상이 아닌 듯한데.” 루치드는 사냥꾼이 다가와도 딱히 제지할 핑계가 없어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의 몸은 추위와 배고픔, 오래된 상처로 정상이 아니었고, 사냥꾼 - 모슬라는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든 제압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성인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리라고 여겨지진 않았기에 그의 접근을 묵인했다. 사냥꾼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 그런지 모슬라의 얼굴은 누가 봐도 사냥꾼의 그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덥수룩한 수염에 부리부리한 눈매가 인상적인 얼굴이었다. “일단 어깨의 상처가 심하군.” 가까이 다가온 모슬라의 굵은 턱이 불빛에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갈비뼈도 다친 거 같고.” 루치드의 옆구리로 향한 그의 손은 엄청나게 크고 두꺼워 마치 어지간한 돌멩이는 계란 깨뜨릴 듯이 부셔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의외로 자신의 몸을 살피는 그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온 몸에 성한 곳이 없군. 시간도 꽤 지난 것 같고……. 용케도 잘 버티는구나. 다른 아이들 같았으면 고통에 못 이겨 기절했을법한 부상인데… 불까지 피우고 말이지.” 감탄인지, 비아냥인지 모르겠다. 루치드는 불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지, 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나 마법사요’라고 말하는 것이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쯤은 판단할 수 있었으니까. “그 정도 상처라면 도시의 치료술사를 찾아야겠다. 어쩔 테냐?” 도움을 주려는 그의 마음을 의심해야 했다. “왜 도와주시려는 거죠?” 그는 경찰도 아니고, 보육교사도 아닌 그냥 ‘낯 선 사람’이었으니까. “어른이라서? 다친 아이를 보면 돕는 게 당연한 거다. 아무리 도망친 노예라도 말이다.” 친절을 무작정 받아들일 만큼 루치드는 어리지 않았고, 게다가. “전 도망치지 않았어요.” 어쨌든 호의를 밝힌 사냥꾼에게 괜한 오해를 받긴 싫어서 루치드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실종된 빈촌 사람들과 어머니, 동생의 이야기. 그리고 가족을 찾기 위해 나선 루치드의 험난했던 여정. 물론 저 세계 이야기나 핀체노에게 마법을 배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다니. 믿기 힘든 이야기군.” 모슬라는 어느새 모닥불 근처에 앉아 루치드의 이야기를 들었다. 모닥불의 온기가 경계 서린 분위기를 다소 누그러뜨렸다. “전 엄마와 동생을 찾아야해요. 사람이 많은 도시라면 소문이라든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가는 중이였어요.” 모슬라는 수염이 덥수룩한 턱을 긁으며 대꾸했다. “나는 비록 외곽이지만 저 도시에 자주 들어가서 물건을 거래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런 이야기를 들은 바가 없다. 마을 사람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일이라면 사람들 입에 오르지 않았을 리 없어.” 타당한 추론이지만 루치드에게는 실망을 안겨주는 말이었다.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냇물이 흐르는 소리, 나무가 타들어가며 나는 소리가 대화가 끊어진 틈을 파고 들었다. 냇물이 흐르듯 시간이 흘렀고, 땔감을 태우는 불빛처럼 서쪽 노을이 하늘을 물들였다. “우선 날이 완전히 저물기 전에 우리 집으로 가자. 불이 있다고 해서 산의 추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닐 테고, 니 몸을 생각한다면 밤이슬을 피할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군.” 사냥꾼의 집은 그 곳에서 멀지 않은 산 중턱에 있었다. 사냥을 위해 산을 오를 때 사용한다는 간이 오두막이었지만 두 사람이 밤을 보내기엔 충분했다. 몇 장의 가죽을 깔고 루치드는 모처럼 바람 불지 않는 지붕 아래서 잠을 잘 수 있었다. 다음 날, 부지런한 사냥꾼만큼이나 예민한 소년은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다. 간단히 준비를 한 두 사람은 이내 도시를 향했다. 모슬라는 시장에 내다 팔만한 가죽 몇 장을 등에 진 채로 길을 나섰고 그 옆에서 적당한 지팡이를 얻은 루치드가 따라갔다. 이윽고 두 사람은 해가 중천에 다다를 때쯤 도시에 도착했다. 도시에 가까이 다가가니, 4층 높이의 큰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그 스케일에 놀라기도 했을 테지만 루치드는 큰 감흥을 느끼진 못했다. 4층 높이의 초등학교 건물이나 그 옆으로 우뚝 선 20층 높이의 아파트 단지들을 보며 지냈던 루치드였다. 굳이 감상을 표현하자면, 그저 옛스러운(?) 건축물에 대한 짧은 소회 정도? 기대했던 대로 도시는 빈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 저 세계의 도시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지만 - 큰 규모를 자랑했다. 잘 정비된 도로와 튼튼해 보이는 가옥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만큼은 이보다 많은 수의 사람들을 본 적 없었기에 다양한 복식과 얼굴들을 마주하고, 조금은 다른 의미에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색다른(?) 경험을 한 루치드에게 이 도시의 복잡함은 ‘무질서’로 느껴졌고, 사람들의 의복과 생활환경은 ‘후진성(後進性)’으로 다가왔다. 반면, 눈을 좁히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루치드의 모습을 보며 - 정반대의 의미로 - 오해를 한 무슬라가 피식 웃으며 등을 툭툭 두드렸다. “우선 치료술사를 먼저 찾아 치료부터 받고 감상해라. 촌뜨기처럼 굴지 말고.” 진짜 촌뜨기는 가짜 촌뜨기를 위무했고, 가짜 촌뜨기는 진짜 촌뜨기를 시늉 냈다. **** 치료술사는 루치드의 상처를 보고 놀랐다가 늑대의 습격이라는 이야기에 천만 다행이라는 반응을 보이며 ‘운이 좋았다’라고 표현했다. 루치드는 그 표현에 대해 딱히 따지고 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어색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깨 상처에는 치료 술사 특제 연고를, 옆구리는 가문의 비약이라는 액체 비스무리한 것을 바른 후, 각각에 붕대를 감아 치료를 끝냈다. 속으로 ‘주사’를 맞지 않아 다행이라고 루치드는 생각했다. 치료를 마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사냥꾼은 부리부리한 눈매를 하고 아이의 치료가 끝날 때까지 곁을 지켜 주었다. 혹시 도망갈까 봐 감시하는 걸까, 라는 생각도 했지만 딱히 경계하는 태도는 아닌지라 그 의심은 지워버렸다. ‘애 혼자 뒀다간 무서워서 울지도.’ 라고 무슬라가 생각하는 줄은 꿈에도 모를 루치드였다. 둘은 다시 시장 골목으로 나왔다. 무슬라가 가지고 온 가죽을 팔기 위해 피혁점을 찾았다. 가죽 5장에 299쿠퍼의 수입을 얻은 무슬라였다. 루치드는 자신의 치료비가 얼마가 나갔는지 물어봤다. “왜? 돈 있어?” “나중에라도 갚을 거예요.” “됐다. 이런 건 당연히 어른이 내는 거다. 그건 그렇고 일단 집으로 가자. 날도 저물었는데 거리에 어물거리다 경비대에 잡히면 답이 없다.” 여전히 도망 노예라고 생각하는 걸까, 묻고 싶었지만 이미 한 발 먼저 앞서나가는 무슬라 때문에 루치드는 그저 졸졸 뒤를 따랐다. 도시 동쪽 외곽의 낡은 집으로 초대된 루치드는 무슬라와 늦은 저녁을 함께했다. 비록 반 강제적인 초대였지만 루치드는 아주 오랜만에 뜨거운 요리를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따뜻한 버섯수프와 토끼다리구이는 적당한 향신료가 없어 퀴퀴한 잡내가 조금 나긴 했어도 제대로 된 식사도 못하고 지냈던 며칠간의 산행에 비하면 진수성찬이나 다름없었다. 식사하는 동안 딱히 대화는 없었지만 루치드는 식사시간 내내 접시와 그릇에 코를 박을 듯이 집중을 하고 먹었던 터라 어색함을 느낄 일은 없었다. 식사가 끝난 후에 몰아서 밀려들어온 부끄러움 - 식사 예절은 전혀 상상 못했다 - 과 어색함 - 오늘 처음 만나 빚을 지게 만든 사람이다 - 에 집 구경도 못하고 소파에 앉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보이는 거라곤 빛바랜 나뭇결의 바닥과 그 위에 미세하게 쌓인 흙먼지들, 들리는 거라곤 삐걱거리며 문이 열고 닫히는 소리와 설거지 소리. ‘아, 내가 설거지라도 해야…….’ 생긴 것 같지 않게 깔끔한 사람인지 먹자마자 바로 설거지를 하는 모슬라. 지금이라도 달려가야 하나, 내적 갈등에 눈동자만 흔들리는 루치드의 동거 첫 날의 모습이었다. ======================================= [28] 천도(2) 다음날, 아침을 간단히 먹은 두 사람은 번화가로 향했다. 가는 동안 무슬라는 루치드가 이 도시 - 도시 뿐만 아니라 드뷔시대륙 전체에도 해당하지만 - 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간단하게 이 도시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이 도시의 이름은 ‘녹스’라고 불렀다. 드뷔시 대륙, 부오노 공국 내에서 가장 외진 곳에 위치한 도시로서 사실 이 도시가 처음부터 이렇게 컸던 것은 아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 근방이 상업적·정치적·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도시가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과거에는 대산맥을 넘어 보려는 도전정신 가득한 모험가들이나 잠시 들리던 마을이었다. 그러다 부오노 공국을 집권했던 공작이 폭정의 칼날을 휘둘러 많은 사람들이 신음을 앓던 시기가 있었다. 도망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들은 이곳으로 모여들어 살기 시작. “다른 곳으로는 왜 안가고 여기로 다 왔대요?” 무슬라는 괜히 목을 긁적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길이 험해서야. 공국에서 이 곳으로 오기 위해서는 천혜의 험지라 불리는 ‘리아빈’이라는 늪을 지나야 하거든. 그 늪지대가 워낙에 넓어서 마치 미궁 같다는 의미로 ‘리아빈’이라고 불렀다는데, 자세한 건 모르니까 묻지 마라. 아무튼 그 늪을 통과하는 데는 2달이 걸린다고 할 정도‘였’지. 건너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아. 만약 그랬다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올 생각도 못했겠지. 그런 이유로 잡으러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야. 두 번째 이유는 대산맥으로 들어가기 좋은 길목이라는 거지. 다른 곳은 대산맥 아래 몬스터 서식지가 있는 것으로 밝혀진 반면, 이 곳은 몬스터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 때문에 사람들이 여차하면, 그러니까 자신들을 잡으러 오는 이들이 있다고 해도 산으로 도망갈 수 있었다는 거지.” 사람들이 모여 큰 마을을 이룬 이후, 드뷔시 전역에서 알음알음으로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도망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각자의 사정이야 모두 다 다르겠지만 삶의 터전을 버리고 찾아왔다는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은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기대하며 마을을 키워나갔다. 물론 처음에는 이 곳으로 온 사람들을 잡아가기 위해 군사들이 동원된 적도 있었지만, 앞서와 같은 이유로 병력들은 이 곳에 오기도 힘들었다. 더러 늪을 통과하고 도착한 병사들도 있었지만, 이미 그 때 그 사람들은 돌아갈 길이 막힌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부상을 당하거나 비 때문에 길이 막혀 돌아갈 수 없게 되거나. “부상당한 사람도 생겼나요?” “뭐, 그랬다고 하더라. 물론 이건 아주 옛날이야기이고 구전으로만 전해져 오는 거라 정확하지는 않겠지.” 이런저런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마을에 남게 되고 그 사람들이 마을을 키우기 시작하니 어느새 그 규모가 작은 마을 수준은 이미 넘어설 정도. 그래서 마침내 폭군이 처단되어 사람들이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음에도 쉬이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오노 공국의 정책이 바뀌었다. 이 곳을 ‘자유국경지대’라는 이름으로 지정하여 세금만 잘 낸다면 도망친 사연에 대해 특별히 죄를 묻지 않기로 한 것이다. 마을의 규모가 작지 않으니 세금만 잘 낸다면 오히려 공국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 위정자들의 처신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공국은 원활한 지역 관리를 위해 이 지역을 담당할 관리를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오기 힘들다면서요?” 처음 이 곳에 온 사람들은 갖은 고생을 다 겪고 이 곳에 도착했다. 하지만 사람의 힘은 위대하다, 는 격언처럼 누군가의 노력에 의해 늪지대의 지도가 만들어졌다. 지도라고 해봤자 모든 지역을 상세히 표기한 지도는 아니고, 단지 외부와 이 마을 사이를 왕래할 수 있는 길이 기록된 지도였다. 파견된 최초의 관리 이후로 이 마을과 공국 내부를 연결하는 다리가 건설되기 시작하여 지금은 늪지대와 상관없이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동시에 사람들은 마을 주변으로 성벽을 쌓기 시작했다. 가끔씩 대산맥에서 내려오는 짐승들이나 혹시 모를 몬스터의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결국 사람들은 부오노 공국 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한 성을 축조해냈다. “마을이 커감에 따라 성벽의 규모도 점점 커져서 지금은 ‘도시’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규모가 되었기에 보다시피 ‘거대한’ 성벽이 만들어 진 것이지.” 사람들은 희망의 도시가 되리라는 뜻에서 이 도시를 ‘녹스’라 부르게 되었다. “물론 니가 살았다는 빈촌처럼 알려지지 않은 촌락들이 더 있을 수도 있겠지만 여기가 공식적으로는 대산맥에 가장 가까운 도시다. 그리고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공국이나 인접 국가들의 상단들이 종종 방문하기도 하면서 이제는 상거래도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편이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은 예전의 도망자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라는 이미지는 거의 사라진 상태지.” 무슬라는 루치드를 도와 빈촌에 대해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어떤 식료품 가게는 빈촌에서 온 사람들을 기억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빈촌의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나 실종에 대한 실마리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낙담한 루치드를 데리고 돌아온 무슬라는 이후의 일에 대해 의논을 했다.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도록 해라. 어린 아이가 홀로 이 도시에서 지내기에는 쉽지 않은 일이니 말이다. 게다가 그 부상이 나을 때까지는 뭘 하기도 어렵겠지. 그러니 우선 부상이 나을 때까지는 여기서 지내면서 쉬도록 해라.” 루치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요? 왜 … 이렇게 도와주시는 건가요?” “…비록 이 도시가 도망자의 도시라는 타이틀은 버렸다지만 여전히 많은 지역에서 이 곳으로 ‘도망’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렇다. 자세한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나도 ‘도망’을 온 것이지.” “…전 도망을 친 게 아니에요.” 무슬라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이제는 믿는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어쨌든 이 곳에 오기 전 내게는 아내와 아이가 있었고, 그 아이가 컸다면 지금쯤 너만 했을 거 같다.” “왜 같이 오지 않았어요?” “오는 길에 사고가 있었다.” 그 말을 끝으로 무슬라는 입을 열지 않았다. 세상 물정 모르는 루치드라고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다만 이런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그냥 침묵에 동참했다. 컵의 손잡이를 쥔 채 시선을 내린 무슬라의 표정은 딱히 슬프다거나 절망적인 표정은 아니었다. 그저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래서 더욱 마음이 시리게 느껴졌다. 다음날부터 무슬라는 본업으로 돌아가 산을 올랐다. 단순히 사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약초나 땔감을 구해오기도 했다. 하지만 루치드는 부상 때문에 집에서 쉬어야만 했는데, 그 시간에 마법을 연구했다. 불이나 프라에테 - 미끄럼 마법은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재현이 되었기에 그 외에 구현 가능한 마법을 찾아보며 시간을 보냈다. 2달이 지날 무렵, 루치드는 무슬라를 따라 산을 오를 수 있을 만큼 부상이 나았다. 어깨에도 새살이 돋아 작은 상처자국이 남았지만 거동에 불편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치료술사가 처치한 약의 힘인지, 자연 회복의 시간이 되었던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친 갈비뼈도 대충 다 아문 것 같았다. 루치드는 무슬라에게 함께 산에 오르기를 부탁했다. 심심해서라기보다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얻어먹기만 하는 것이 내심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딱히 그 생각에 반대할 마음은 없었는지 무슬라는 흔쾌히 루치드를 데리고 산에 올랐다. 처음에는 부상을 걱정해 조심하는 면도 있었지만 의외로 루치드가 잘 따라와 살짝 놀라기도 했다. 루치드는 무슬라로부터 덫을 놓는 방법이나 약초를 구분하는 법 등을 배웠다. 다시 2달이 지나 한 여름이 되었을 때는 모슬라가 덫을 놓는 동안 루치드가 근방의 약초를 캐며 일을 나눌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무슬라는 루치드가 산을 잘 탄다는 사실에도 놀랐지만, 가장 크게 놀란 사실은 시장에서였다. 가죽이나 약초를 팔기 위해, 상점을 들렀을 때, 루치드가 옆에서 능숙하게 셈을 하는 것을 본 것이다. 어린 아이가 ‘산수’를 할 줄 안다는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단자리 셈법 정도야 누구나 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그 수가 오를수록 고도의(?) 수학적 지식이 필요한 법이었다. 그런데 10살도 채 되지 않아 보이는 아이가 곱셈도 척척해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 묶음에 24쿠퍼를 주셨으니 8묶음에는 192쿠퍼를 주셔야돼요.” 상인이 깜짝 놀라며 여러 가지를 물으니 거침없이 대답이 나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너 차라리 내 밑에서 일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 산을 오르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니? 앞으로 너 하는 거 봐서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이 정도 ‘산법’을 할 정도라면 내가 삯을 좀 더 쳐주마. 어떠냐?” 무슬라 역시 어린 아이가 산을 타는 것보다는 몸에 덜 무리가 가고, 충분히 제 몫도 할 수 있어 보이니, 상점에서 일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상인의 제안과 무슬라의 권유에 루치드는 잠시 고민을 했지만 길지는 않았다. 자기 생각에도 산을 오르는 것보다는 셈하는 것이 더 ‘재미있는’ 일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무슬라 아저씨에게 갚을 빚도 있으니.’ 무슬라는 상인에게 은근히 으름장을 놨다. “어린 애라고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되오. 만약 내 눈에 띄면 가만 두지 않을게요.” “걱정 마시게. 이 정도 ‘고급 인력’을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나도 저만한 애가 있어. 나름 양심적으로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니 걱정 말고 자네 일이나 잘 보게.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우리 집에 약초를 팔 때는 내가 셈을 잘 쳐주겠네.” 비록 초등학교 1학년이지만 수학만큼은 고학년 수준이라고 자랑할 만한 실력이 되는 루치드는 이 정도 ‘산수’실력만으로도 ‘고급인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실력을 인정받아 기쁘다 쳐도 그만큼 이 세계의 수준이 낮다는 것일 테니 괜히 안타깝게 느껴진 것이다. 게다가 저 세계에서 쉽게 얻을 수 있었던 수준 이상의 지식을 이곳에서는 얻기 힘들 것 같다는 전망에 안타까움이 더했다. 루치드는 비교적 서늘한 창고에서 재고관리를 맡게 되었다. 한여름에 매장에 나와 손님을 상대하는 일이 어린 아이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무슬라의 의견과 수에 능통한 상인들과 비교해 봐도 결코 뒤지지 않는 빠르기의 산수를 구사하는 아이의 능력이 재고관리에 어울린다고 판단한 상인, 샤피로의 생각이 맞아떨어진 직책이었다. ======================================= [29] 천도(3) 아이는 선풍기 하나 없는 곳에서 더위와 싸우며 일을 시작했다. 어찌 보면 매대 앞에서 호객 행위를 하는 다른 상점의 점원들에 비하면 배부른 투정일수도 있지만 초등학교에서는 방학이 시작되기 2주 전부터 2교시만 지나면 에어컨을 틀어주었고, 보육원에서도 방마다 설치된 선풍기를 쐬며 책을 읽었었다. “바람아 불어라, 불어라.” 명수가 침대 위에 올라가 벽에 설치된 선풍기를 향해 팔을 내뻗고 장난치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복도를 지나던 보육교사가 그 모습을 보고 손가락 다친다며 혼내던 모습도 떠올랐다. 경은이는 여름방학 때 수영장에 가서 수영을 배워오겠다고 했었다. 그러고 보니 경은이도 옆구리를 다쳤었는데, 다 나았을까? 형오는? “루치드, 점심이나 먹자꾸나.” “예!” 루치드는 매일 매일 들어오고 나가는 약초들의 수를 체크하는 일을 했다. 더불어 창고에서 기존의 약초들이 얼마나 있었는지를 가감해서 장부를 표기했다. 이곳에서 쓰는 숫자를 새로 배워야했지만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루치드는 샤피로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중장부를 만들었다. 학교에서 배운 숫자로 표기하는 장부와 샤피로가 볼 수 있게 만든 장부로 나눠서 작업했는데, 표기법이나 계산은 익숙한 방식으로 하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샤피로가 볼 장부는 결과만 깔끔하게 정리해서 주는 게 샤피로에게도 좋았기에 각종 계산을 여백에 쓰느라 지저분해진 루치드식(式) 장부는 따로 관리했다. 노트를 하나 더 만든 다른 이유는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글을 써서 기억을 보조하는 행위는 매우 중요했다. 자신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고, 특히 마법을 연구할 때 갑자기 떠오르는 단상(斷想)들을 기록할 수 있었다. 덕분에 루치드는 단순히 머리로만 마법을 연구할 때보다 좀 더 구체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나오는 거야. 빨리 와서 같이 먹어야 빨리 치우지.” 앙칼진 목소리로 루치드를 타박하는 이는 샤피로의 딸, 에리카였다. 에리카는 루치드보다 2살 더 많은 10살이었다. 루치드가 고용되기 전에는 종종 상점을 나와 아버지의 일을 도왔었는데, 루치드가 가게를 나오기 시작한 이후로는 점심시간 때 식사를 가져다주는 일을 주로 하게 되었다. 가끔씩 약초를 정리하기 위해 창고에도 들어가 보지만 숫자를 맞춰 정리해놓은 탓에 손댈 게 없었다. 때문에 일이 없어진 에리카는 도리어 시간이 넉넉해져 좋아해야 하건만, 이상하게도 루치드를 보면 타박하기 일쑤였다. “장부 정리하느라 늦은 거예요.” “군소리 말고 어서 와서 밥이나 먹어.” “이 녀석아. 일 잘하는 애를 왜 구박하고 그래.” “아빠! 내가 무슨 구박을 했다고 그래? 이러다 나중에 ‘학대’라는 말까지 나오겠네?” “무슨 말버릇이야, 그게!” “치.” 날카로운 눈매로 자신을 바라보는데, 루치드는 차마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아 슬쩍 시선을 피했다. 하루는 점심을 먹고 난 뒤, 잠시 가게 뒤편에서 샤피로와 쉬고 있는데 에리카가 다가왔다. “문제, 시네디움 10뿌리랑 앤젤리가 50뿌리로 약을 만들면 몇 개의 약을 만들 수 있어?” “5첩” 이 정도는 생각하고 자시고도 없이 바로 답이 나왔다. 에리카는 샤피로를 돌아보았다. “…맞아?” “이 녀석아. 니가 문제를 내 놓고선 나한테 답을 묻는 거냐?” “아이 참. 맞냐구?” 못 말리겠다는 듯 피식, 실소를 금치 못하는 샤피로였다. “맞다. 그 정도는 너도 계산할 줄 알아야지.” “에이. 뭐 이런 애가 다 있담.” “너도 그렇게 놀지 말고 공부 좀 해라. 동생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냐?” “베이커 아저씨도 나보다 산수 못하던데 뭘.” “어이구. 말이나 못하면.” “아빤 내가 말도 못하는 벙어리였음 좋겠어?” “에리카!” 서둘러 가게를 빠져나가는 에리카를 보며 한숨을 내쉬는 샤피로. 그의 모습을 보며 루치드는 괜히 심란해졌다. 물론 지금 상황이 나쁘진 않았다. 샤피로는 절대 자신을 못살게 굴지도 않았고, 매 끼니도 챙겨줄 만큼 자상했다. 지금쯤 도시 동쪽의 산을 타고 있을 무슬라 역시 자기 아이 다루듯 애정 어린 시선, 까지는 아니어도 늘 고마움을 느낄 만큼 잘 대해주었다. 다만 자신은 할 일이 있었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린 루치드였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늦여름의 뜨거운 공기가 루치드의 이마를 슬며시 누르고 지나갔다. 동쪽과 북쪽의 산들이 노을 색으로 물들며 계절이 바뀐다는 신호를 보냈다. 성급한 사람들은 두터운 ‘카울(Cowl)’을 준비했고, 부지런한 사람들은 옷장 깊숙이 보관해온, 가죽을 덧댄 ‘지폰(Gyphon)’을 꺼내 햇볕에 말렸다. 계절의 변화에 민감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또 그 반대 유형의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무슬라는 날씨가 더울 때도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고, 추워진 지금도 가죽 재킷만 입고 있다. 산을 타는 사냥꾼이란 이런 모습이다, 라는 것을 강조하는 듯 했던 그가 갑자기 손에 ‘클록(cloak)’을 들고 루치드 앞에 나타났다. 지금 막 아침 식사를 마치고 상점을 가기 위해 준비를 하던 루치드는 그런 무슬라를 쳐다봤다. “아침, 저녁으로 날이 꽤 춥다. 걸치고 나가도록 해.” 그러고 보니 손에 들고 있는 클록이 무슬라가 입기에는 많이 작아 보이긴 했다. “아저씨, 그건 너무 … 겨울용인 거 같은데요?” 무슬라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 수염이 더 자란 탓인지 광대뼈 아래까지 덥수룩해서 얼굴색을 확인하기 위해선 이마를 보는 수밖에 없었다 ― 클록을 높이 치켜 든 채로 대꾸했다. “입어라.” 거절은 거절한다, 는 단호한 어투에 루치드가 되레 얼굴색을 붉히다가 클록을 건네받았다. “먼저 가마.” 뒷모습을 바라보던 루치드가 한 박자 늦게 인사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별다른 제스처 없이 굳은 걸음으로 산을 향하는 무슬라를 바라보던 루치드는 이내 클록을 걸치고 상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야, 너 뭐야? 추워? 가을하고 겨울도 구분 못하는 거야?” 대꾸할 말을 찾을 필요도 없다 여긴 루치드는 그저 클록을 벗어 상점 한편에 고이 접어두었다. “에리카, 그게 무슨 말이냐. 날이 추우면 입을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너야말로 여자애가 옷 좀 제대로 입거라. 아침에 입으라고 줬던 카울은 어쩌고 그렇게 나왔어?” “내가 무슨 애야? 맨날 이거 입어라, 저거 입어라 그래? 그리고 튜닉만 입어도 충분하거든요?” 에리카는 더 이상의 잔소리는 듣기 싫다며 상점을 뛰쳐나갔다. “저 녀석 언제 철들려고 저러는 건지.” 힐끔 루치드를 바라보는 샤피로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일부러 반응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시늉을 하며 장부를 챙겨 창고로 향했다. 그간 품목들의 변화도 많고 매수, 매도에 의한 재고 변화도 잦아서 창고 내 물품들의 재고 수량 확인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계절이 변하기 전에 재고물품 정리를 마쳐야 한다는 샤피로의 의지와 격려에 힘입어 요며칠간 더 많은 시간을 창고에서 보냈던 루치드는, 마침내 오늘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 창고 내의 수많은 서랍장들 중 마지막 2종의 서랍장만 남은 것이다. 오늘 중으로 재고 확인이 끝나면 모든 물목에 대한 재고장부가 완성된다. 그러면 앞으로 들어오거나 나가는 물목에 대한 수량만 확인하면 언제나 정확한 수량의 재고 관리가 이루어질 것이다. 샤피로는 그간 중구난방으로 방치되었던 창고가 깔끔히 정리된다는 기쁨에, 오늘 일이 끝나게 되면 루치드에게 보너스 명목으로 삯을 더 쳐주기로 했다. 루치드는 그 돈으로 무슬라에게 선물을 하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특히 오늘, 클록까지 챙겨주는 마음씀씀이에 남몰래 감동받았던 소년 루치드는 어떤 선물을 사줘야 할지 고민을 하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를 위해 선물을 준비한다는 것은 루치드의 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선물을 받는 사람이 기뻐할 모습을 기대하는 행위 자체가 신선하면서도 뿌듯한 기분을 갖게 만들었다. 아침 일찍 무슨 바람이 불어 아버지와 출근길을 같이했었는지 모를 에리카가 다시 가게로 돌아온 것은 점심시간 때였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나타난 에리카는 평소처럼 점심식사용 도시락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첫 마디는 평소와 달랐다. “아빠, 산에 멧돼지 떼가 나타났대.” “어, 그래? 잘하면 무슬라가 오늘은 돼지고기를 가지고 오겠는데? 루치드. 어쩌면 오늘 포식하겠구나?” 창고에서 나와 있던 루치드가 그 말을 듣고 씩 웃음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에리카의 표정은 평소와 사뭇 달랐다. 마치… 그 날의 명수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그게 아냐, 아빠. 멧돼지 떼라고. 스크로파 무리가 나타났다고! 지금 서쪽 산에서 성으로 오고 있대. 그래서 경비대가 난리 났대.” 순식간에 루치드의 얼굴이 에리카처럼, 아니 그보다 더 새파랗게 질렸다. “스크로파 무리가? 아직 가을 초입인데 벌써 무리가 지어졌단 말인가? 루치드, 오늘 무슬라가 어느 산으로 갔니?” 무슬라를 먼저 걱정해주는 샤피로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어디로 간다고 했지? 모른다. 무슬라는 루치드에게 행선지를 밝히지 않았다. 고개를 젓는 소년의 안색이 심상치 않다 여긴 샤피로는 우선 자리에 앉히고 안정을 시켰다. “걱정마라. 루치드. 무슬라는 그래도 이 도시에서 꽤 경력 있는 사냥꾼으로 통하는 사람이다. 그간 늦가을에 준동하던 스크로파가 갑자기 이 시기에 나타난 게 이상하긴 하지만, 경험 많은 무슬라라면 바로 눈앞에 스크로파 대장 녀석이 나타나더라도 현명하게 대처할 인물이다. 또 혹시 모르지. 오늘은 동쪽 산으로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느냐.” 소년은 고개를 숙였다. 매번, 정말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결과가 좋았던 적은 없었다. 언제나 소년의 주위에서 일이 벌어지면 항상 불행한 결과만 찾아오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그런 불길함이 엄습했다. “이보게, 샤피로. 들었는가? 스크로파 무리가 나왔다네!” 거리 맞은편에서 장사를 하던 피혁점 주인이 가게를 찾아왔다. “방금 딸에게 이야기 들었다네. 서쪽 산에서 나타났다는데 혹시 다른 이야기 있는가?” “나도 방금 아내에게서 들었는데, 아내 말로는 오늘 서쪽 산으로 간다고 신고를 하고 나간 사람이 꽤 된다더군. 알다시피 서쪽 산이 이 시기에 약초가 많이 나지 않는가?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산을 올랐던 모양이야. 경비대에서도 우선 성문을 닫고 스크로파를 막은 뒤에 산으로 구조대를 보낼 모양일세.” 찡그린 얼굴을 하고 있던 샤피로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앞머리를 한 차례 쓸어 올렸다. 그 때 상점 바깥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스크로파에게 쫓기는 사람들이 있다!” 루치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30] 천도(4) 녹스의 경비대장 포우는 대원들을 독촉해서 성문을 닫고 있는 중이었다. “서둘러라. 어서!” 쉰 목소리로 명을 내리는 경비대장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 하나 급하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특히 포우는 몸과 마음을 다하여 위급함을 드러냈다. 평소 누구보다 친절하고 용기 있는 행동으로 도시민들에게 신뢰받는 경비대장은 이제 2년차 대장이지만 경비대에서만 8년을 보낸 베테랑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보기에도 지금의 스크로파 무리의 준동은 심상치 않게 보였다. 단순히 시기만 문제가 아니라 도시 앞 평원을 가득 채운 듯한 먼지구름의 크기가 문제였다. “세상에, 저 정도 숫자라니…….” 함께 성벽에 올라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부대장의 독백이 그의 마음과 같았다. 지난 8년간 매년마다 스크로파 무리의 준동을 경계하고 관찰해왔던 본인 역시 저 정도의 무리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대장님, 저기! 사람이 있습니다.” 한 경비원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쪽은 성문으로부터 정서쪽 방향이었다. 분명 먼지구름을 등 뒤에 두고 달려오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크로파 무리에 쫓겨 달아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직 거리가 멀어 신원이 확인되진 않았지만, 그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스크로파 무리와 사람들 사이의 간격이 점점 좁아지고 있음은 먼지구름이 다가오는 속도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어떡합니까? 대장님?” 다급한 음성으로 포우의 결정을 묻는 부대장이었다. 포우가 보기에 거리가 애매했다. 도개교를 올리기 직전인 상태이기에 이대로라면 사람이 겨우 들어올 수 있을 만큼 문을 열어놓는다면 저들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뒤의 스크로파들이 잇따라 들어와 성 안을 헤집어 놓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저 정도라면 성문을 닫는데 성공한다 쳐도 맨몸으로 부딪혀 성문을 부수고 들어올 수도 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녹스’가 준비한 것이 깊이 파인 해자였고, 도개교였다. 그리고 도개교는 들어 올리는 데 시간이 걸린다. 서둘러 결정해야 했다. 쫓기는 사람들도 분명 이 도시의 시민이다. 도시민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경비대장으로서 그들을 모른 척 할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현실적으로 감당해야할 위험이 크다. 그의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주저하지 않고 성문을 닫았을 것 같았다. 과거에도 그렇게 했으니까. 하지만, 포우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에게는 개인적으로 스크로파 준동에 따른 아픈 트라우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스크로파 준동과 그것들에게 쫓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순식간에 도시 반대편까지 알려졌다. 그 사이에 위치한 번화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리고 루치드는, “가봐야겠어요.” 라는 짧은 말 한마디만 내뱉고 가게를 뛰쳐나갔다. 샤피로가 얼른 일어나 소년을 막으려 했지만 소년은 이미 상점을 벗어나 번화가 중앙길을 내달리고 있었다. 루치드는 어떻게든 무슬라가 무사하기를 기도했다. 이 곳으로 돌아와 벌써 반 년가량 흘렀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무슬라와 함께 했다. 그는 처음 어색하게 마주쳤던 그 때의 인상과는 달리 항상 자상하고 배려심 넘치는 태도로 루치드를 대했다. 그의 말마따나 자신의 잃어버린 아이에 대한 보상일수도 있고 혹은 가족을 잃어버렸다는 공통점을 가진 이에 대한 측은지심일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무슬라와 함께 생활하면서 행복했다는 점이었다. 그와 함께한 6개월은 마치 새로운 아버지를 만난 것과도 같아, 오히려 가끔씩 죄책감을 느낄 만큼 이 생활을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그만큼 무슬라는 루치드의 마음 속에서 상당히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루치드는 서문에 다다랐다. 성벽 위로 올라가보고 싶었지만 이내 경비대의 제지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당장은 자신을 제지하는 경비대원을 붙잡고 하소연을 하는 것 밖에 없었다. “이 곳으로 달려오는 사람들을 구해야 돼요. 제발, 제발 문을 열어주세요.” 물론 이 곳에서 그런 하소연을 하는 사람은 루치드 뿐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서문으로 몰려와 문을 닫지 못하고 명을 기다리는 경비대원이나 성벽 위의 경비대장을 향해 울음 섞인 탄원을 올리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요, 아버지 좀 구해주시오!” “제 남편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구요! 문을 열어줘요!” 경비대원들은 몰려든 사람들의 사정이야 안타깝지만 당장은 무엇도 할 수 없었다. 경비대장의 명이 떨어지기 전에는. 그리고 포우는 소란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만 환영과 싸우며 고민을 이어갔다. “더 이상은 안됩니다. 빨리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부대장의 다급함이 포우를 돌아보게 하였다. 분명 그의 말에서는 성문을 닫자는 뉘앙스가 느껴졌다. 그게 옳은 일일 것이다. 다만 포우의 눈에는 자신의 형이었던 포레프가 성문 앞에서 스크로파의 송곳니에 치여 하늘로 떠오르는 장면만 반복되고 있었다. 부대장은 여전히 정신이 나가 있는 듯한 포우를 재촉했다. “대장님” “야! 거기 서!” 거의 동시에 터져 나온 소리, 그리고 소란스러움에 포우는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미처 꽉 닫지 못했던 문틈으로 아이가 빠져나가 도개교를 건너고 있었다. 저 아이는… 죽을 것이다. “성문을… 닫아라.” 지금껏 트라우마와 싸우던 포우의 가장 큰 고민은 양심이었다. 자신의 형은 성문 바로 앞에서 죽었다. 어쩌면, 만약 당시의 경비대장이 문을 열어놓고 기다렸다면 형은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뒤의 일은 고민의 대상이 아니었다. 지금도 달려오는 저 사람들을 어쩌면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으니까. 다만 당시에는 고민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고민이 되어버린 문제가 있었다. 다수와 소수의 선택. 그 흔해빠진 딜레마에 빠져버린 것이다. 개인의 존엄성이나 다수를 위한 공리주의 따위의 철학적 논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포우 개인의 양심의 문제였다. 한 명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을 희생해야 한다면, 고민은 되지만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희생이 점차 자신이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리면 그 때는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고 사람들을 살릴 수 있을까. 자신의 양심은 어느 정도까지 허용하거나 선을 그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지금 깨달았다. 지금 도개교를 뛰쳐 나간 아이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 저 아이 외에 또 다른 사람이 희생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떠올리자마자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미안하다.”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뱉은 사과는, 당연히 루치드에게 닿지 않았다. 설령 그 소리를 들었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루치드는 달려가면서 앞을 내다보았다. 급격히 가까워지고 있는 먼지구름이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거리가 있어서인지 쫓기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확대.’ 순간적으로 시야가 변했다. 루치드는 샤피로의 창고에서 일하는 동안 마법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기록하고, 집중하고, 고민했다. 그 성과 중의 하나가 바로 ‘확대’였다. 시작은 사소한 계기였다. 약초를 정리하던 중, 비슷해 보이는 약초 두 종류를 비교하다가 학교에서 봤던 돋보기가 생각이 났다. 돋보기로 ‘확대’를 해서 비교를 하면 더 잘 볼 수 있을텐데, 라는 생각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구현 가능한 마법의 목록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먼저 스크로파의 무리들이 보였다. 황토색 분진을 온 몸에 두르고 흉포한 눈빛을 한 스크로파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멧돼지라고 부르기에는 그 덩치가 만만하지 않은데다가 특히 앞으로 삐죽 나온 송곳니의 묵빛은 심상치 않을 정도였기에 몬스터에 포함되는 스크로파였다. 그놈들을 뒤에 두고 달리는 사람들도 찾았다. 그 중 가죽 재킷을 입은 무슬라가 보였다. 이미 상처를 입었는지 얼굴 반쪽이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안돼!’ 이를 악물고 달렸다. 뒤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또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정신없이 달리던 사람들의 눈에도 마주보고 달려오는 루치드가 보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특히 무슬라는 루치드를 알아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오지마! 도망가!” 왜 이곳으로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빨리 도망가야 할 때이다. 산기슭을 벗어나면서부터 도시까지 펼쳐진 평원에 스크로파 무리가 가득했기에 어느 쪽으로든 도망갈 길이 없었다. 있다면 단 하나, 성 뿐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그래서 그 동안 ‘녹스’에서는 매년 성벽을 보수하고 해자를 깊게 하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베테랑 경비대장이 경악할 만큼 그 수가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상태. 과연 성안에 있어도 안전할지 미지수라 여길 정도였다. 그런데 이 곳으로 달려오다니? “돌아가! 가라고!” 무슬라의 외침은 뒤쫓는 스크로파들이 내는 괴성과 땅울림에 묻혀 루치드에게 닿지 못했다. ======================================= [31] 천도(5) 이제 무슬라와의 거리가 10걸음 정도까지 가까워졌다. 이 정도 거리임에도 무슬라가 소리치는 내용이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짐승들이 내는 소리가 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만나서 들으면 되니까. “돌아가! 가라고!” 무슬라는 산에서부터 달려오느라 호흡은 이미 숨이 깔딱거릴 만큼 거칠어진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목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실제로 입 밖으로 피가 터지듯이 뿜어졌다. 있는 힘을 다해 경호성을 터뜨린 무슬라는 순간 호흡이 흐트러지며 일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달리던 와중에 블랙아웃이 된 무슬라. 눈이 뒤집히며 정신을 잃은 그는 앞으로 내딛던 발이 꺾이며 넘어졌다. 무슬라가 기우뚱거리더니 앞으로 쓰러지는 모습을 목격하는 순간, 루치드는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무슬라!” 무슬라의 모습이 가까워 진만큼 뒤를 쫓는 무시무시한 크기의 스크로파들도 가까워져 그놈들의 코에 붙은 붉은 혈흔이 보일 정도였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사냥감을 쫓는 몬스터의 야성이 감각을 따갑게 찌르고 있었다. 툭 튀어나온 코와 옆으로 삐져나온 날카로운 묵빛 송곳니가 금방이라도 치고 들어와 몸에 구멍을 낼 것 같았다. 루치드가 빠르게 거리를 가늠하니, 자신이 좀 더 무슬라에게 가깝지만 달려오는 속도를 보자면 저 짐승들이 더 빠를 것 같았다. 일단 무슬라를 구하고 봐야 했다. 감추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비켜!” 눈에 힘을 주고 프라에테를 시전했다. 가장 앞에서 달리던 스크로파 한 마리가 앞발을 미끄러뜨리며 그대로 땅에 코를 처박았다. 바로 뒤를 달리던 놈들이 연쇄적으로 부딪히며 넘어졌다. 그러나 뒤를 따르던 대부분은 넘어진 놈들을 옆으로 피하거나 뛰어넘으려 했고, 또 개중 몇 마리는 넘어진 놈들을 짓밟고 뛰어오르기도 했다. 넘어진 놈들도 금세 몸을 뒤집고 일어나 달리던 무리에 섞여 질주를 계속했다. 목표는 무슬라가 누워있는 방향. 루치드는 연거푸 프라에테를 시전하여 그들의 질주를 늦추려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짐승들은 나뒹굴거나 부딪히며 땅으로 고꾸라졌다. 그동안의 마법 수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워낙 많은 수의 스크로파들이 달려든 탓에 그 순간이 매우 짧았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무슬라는 쓰러진 채로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잃은 것은 순간이었지만 위험은 배로 커져 다가오고 있었다. 온 몸을 두드리는 땅의 울림이 경련처럼 몸을 뒤흔들었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미 산에서부터 뛰어오느라 힘을 다 쏟았던 탓이었다. 간신히 고개만 들어 바라보니 흐릿한 시야 너머로 루치드의 얼굴이 보였다. 다리를 맹렬히 움직여 달려오고 있던 소년이 뭐라고 악다구니를 쓰는 모양이지만 들리지가 않았다. 루치드 역시 고개를 든 무슬라를 바라보았다. 바닥에서 엎드린 채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일어나요! 제발!” 그러나 그의 말을 듣는 모습이 아니었다. 넘어진 충격에 정신을 차리고 있지 못하는 것이리라. 입술을 깨물었다. 아픔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깨물었다. 피가 새어나왔다. 이대로는 안 된다. 루치드는 순식간에 이미지를 떠올렸다. 피구라가 만들어졌다. 서둘러 조건을 붙이기 시작했다. 챕터 1. 대상 지정. “전부…….” 챕터 2. 범위 설정. “내 눈 앞에서…….” 챕터 3. 특수조건 설정.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꺼져버려!” 순간 평원의 한 가운데 빛이 터져 나왔다. 성벽에 서서 스크로파의 돌진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태양이 떨어졌다고. 한순간 작열했던 빛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쉬이 시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겨우 눈을 깜빡거리며 시력을 회복한 사람들이 다시 돌아봤을 때, 그곳에 백광이 서린 불의 장벽이 스크로파의 돌진을 막는 성벽처럼 우뚝 세워져 있었다. 가장 앞서 달리고 있던 스크로파들이 불의 장벽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평원 전체를 떨게 할 정도의 비명의 합창이 터져 나왔다. 불의 장벽에 닿는 순간 스크로파들은 녹듯이 타들어갔다. 기름기 많은 털들이 타들어가며 고약한 누린내를 사방에 뿌려댔다. 뒤에서 달리던 놈들은 자리에서 멈추거나 방향을 틀어 장벽을 피하려는 동작을 취했다. 하지만 모두가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 그 뒤에서 달려드는 놈들 때문에 떠밀리듯 장벽으로 밀려간 놈들은 숯불구이가 되었다. 아니 아예 장작이 되어버렸다. 꽥꽥거리며 내지른 비명마저 불에 녹을 정도로 불의 장벽은 거세게 타올라 몬스터의 거침없던 질주를 막아냈다. 숯덩이가 되어 장벽 맞은편으로 건너온 스크로파들을 보며 사람들은 입을 다물 줄 몰랐다. 갑자기 평원에 세워진 불의 장벽, 이라는 기현상을 이해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무슬라는 등 뒤에서 치밀어 오르는 열기에 정신을 차렸다. 힘겹게 고개를 돌린 그 역시 겨우 스무 걸음 남짓한 거리에서 성벽만큼 높이 치솟아 타오르는 불의 장벽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루치드가 힘겨운 발걸음으로 무슬라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아저씨. …괜찮아요?” 불의 휘광에 압도되어 정신이 나갔던 무슬라가 화들짝 놀라며 루치드를 바라봤다. 어느새 눈을 마주할 거리까지 다가와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에서 무슬라는 피곤과 두려움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는 루치드가 이 기현상을 벌인 당사자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이 어린 녀석이 자기를 위해 달려와 주었다는 사실이 기쁘고 슬펐다. “…괜찮아.”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너, 넌 괜찮은 거냐?” 저 큰 눈망울에 맺힌 물기를 닦아주고 싶었다. “예.” 루치드는 무슬라를 부축하려 무릎을 꿇었다. 내뻗는 소년의 작은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였다. 무슬라는 고개를 내젓고 자기 힘으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소년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꾸에엑!” 갑자기 장벽에서 튀어나온 엄청난 크기의 스크로파. 성인 남성 10명을 합친 덩치의 놈이 흉포한 기세를 터뜨리며 불의 장벽 너머로 뛰쳐나왔다. 루치드가 무슬라를 마주하는 순간 긴장이 풀려 불의 장벽이 순간적으로 약해졌다. 그 틈을 교활하게 알아차린 스크로파의 대장 한 놈이 장벽을 넘은 것이다. 잔불이 붙어 군데군데 불타고 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오로지 루치드만 바라보는 스크로파였다. 성벽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을린 송곳니를 앞으로 내뻗으며 달려드는 스크로파. 기력이 흐트러져 집중을 할 수 없었던 루치드가 무기력하게 달려드는 놈을 보던 중, 무슬라는 결단을 내렸다. 분명 조금 전까지도 몸에 힘이 없어 일어나 앉는 것도 힘들어했었건만. 무슬라는 루치드를 옆으로 힘껏 밀어냈다. 루치드는 깜짝 놀란 얼굴로 내던져지며 무슬라를 바라봤다. 무슬라는 끝까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피에 젖어 검붉어진 얼굴에 트레이드마크인 덥수룩한 수염마저 피에 젖어 엉망이었지만 루치드는 알 수 있었다. 무슬라가 미소를 짓고 있음을. - 쾅 무슬라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황급히 쫓아간 시선에 허공을 부유하는 무슬라가 보였다. 허리가 기괴하게 꺾인 채로 멀어져가는 그를 보았다. 대장 놈은 무슬라를 치고도 몇 걸음을 더 나아갔다가 멈췄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루치드를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쳤다. 짐승의 눈빛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루치드는 어쩐지 그 시선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왜? “왜?” 왜 저 놈이 화를 내는 거지? 왜? 지가 뭔데 나한테 화를 내지? 정작… 정작 화를 낼 사람은 난데? “니가, 니가 뭔데!” 루치드는 똑같이 스크로파를 노려보았다. 저 놈만 보였다. 다른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스크로파가 발구름을 하고 뛰어왔다. 저 놈도 자신이 가진 생각과 똑같은 생각을 하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서로의 숨결이 상대에게 닿을 정도가 되었다. “죽어!” **** 스크로파의 준동이 끝나고 녹스의 사람들은 경비대를 앞세워 평원으로 나왔다. 불의 장벽은 사라졌고, 장벽을 피해 달렸던 스크로파 무리는 그대로 성을 비껴 나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안전이 확보되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평원으로 나서니, 평원에 남은 것은 불탄 스크로파 숯덩이와 미처 피하지 못해 짓밟힌 사람들의 시체들뿐이었다. 마지막까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았었던 무슬라에게 가장 먼저 다가간 샤피로는 나이에 맞지 않게 울음을 터뜨리며 그 앞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끔찍한 모습에 다시 한 번 가슴을 쥐어뜯으며 희생을 슬퍼한 샤피로가 이내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딸 에리카가 사람들과 함께 마지막까지 날뛰던 스크로파 대장 놈의 사체 앞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이 놈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정확하게 보지 못했다. 다만, 이 놈이 죽기 직전 어린 아이와 마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어린 아이의 주검은 발견되지 않았다. 에리카가 주변을 서성거리며 찾아보지만 끝끝내 찾지 못했다. 그 날, 에리카는 밤이 늦게까지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아무리 달래도 방법이 없었다. 샤피로는 딱히 말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딸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했기 때문이다. 루치드는 다시 꿈을 꾸었다. 자신이 꿈속에 있음을 깨달았다.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노래인지 시인지 알 수 없는 읊조림을 들었다. 인간이 신이 만든 장난감이라면 운명은 태엽 감아놓으면 풀리고 풀리면 다시 감고 느슨하면 조이고 조이면 부서지는 인간이 장난감이라면 신의 놀이는 이제부터지. ======================================= [32] 크레센도(1) “선생님, 석고 눈 떴어요!” 잠에서 깨어난 루치드는 의식을 깨우는 목소리에 신음을 흘리며 반응했다. 매우 익숙한, 그리웠던 목소리였다. 몇 번 눈을 깜빡거리며 초점을 잡으려 애썼더니, 시야에 명수의 웃음이 보였다. “일어났어? 괜찮아? 나 보여?” 아직 일어난 거 까지는 아니고, 정신을 차리는 중이니 괜찮은지 아닌지는 좀 더 두고 보고, 보이기 전부터 네 목소리가 들리는데 더 정신없으니까 제발 목소리 좀 낮춰줘.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었지만 목이 잠겨서 그런지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모든 것을 함축하는 의미로 미간을 살짝 찌푸려주었다. “일어나는 거야? 눈 좀 떠봐. 너 정말 잘 잔다! 다 잔거야?” 통하지 않았나보다. “명수야, 좀 조용히 해라. 너 때문에 다시 아프겠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보육교사가 명수에게 핀잔을 줬다. 그러거나 말거나 명수는 루치드를 바라보며 반짝이는 눈빛으로 호기심을 드러냈다. 몸이 정상이라도 호응을 해 줄지 말지 고민을 했을 텐데 다행히 지금은 병상에 누워 있다는 좋은 핑계거리가 있었다. 깔끔하게 무시했다. “일어났구나, 다행이야.” 다가온 보육교사가 루치드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어디 아픈 곳은 없니?” 가만히 누워 몸을 체크해봤다. “괜찮은 것 같아요.” 루치드의 대답에 흡족해 하는 교사의 낯빛이 밝았다. “다행이구나. 일단 오늘은 여기서 자도록 해라. 명수는 니 방으로 돌아가고.” 명수가 끼어 들었다. “저도 오늘 여기 있으면 안돼요? 석고랑 같이 이야기할 거 많은데.” “안 돼. 아픈 사람 괴롭히면 어떻게 쉴 수 있겠어?” 교사의 말에 명수는 너무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저 안 괴롭혀요. 그치?” 루치드는 피식 웃음이 삐져나왔다. “전 괜찮아요. 선생님.” “내가 괜찮지 않아요. 어차피 여긴 침대가 하나뿐이니 명수는 어서 니 방으로 가. 알겠지?” 상대가 안 되건만 괜히 실랑이를 벌여보다, 벌 받고 싶냐고 으름장을 놓는 교사의 엄포에 아쉬움 가득한 눈빛을 하고 명수는 돌아갔다. 교사가 방을 나서며 불을 껐다. 그제서야 해가 진 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루치드였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이곳은 보육원 내의 양호실 이였다. 양호교사도 없는, 불 꺼진 양호실에 홀로 남은 루치드는 주위를 둘러보며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녹스’에서만 6개월을 지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는데 그간 워낙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아서 마치 6년을 보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자신이 현재 누워 있는 공간에서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거미줄과 먼지가 가득했던 아저씨의 집 천장을 바라봤었는데, 지금은 때 묻지 않은 하얀 도배지가 발린 깨끗한 천장을 마주하고 있다. 불 꺼진 형광등을 대신해 창문으로 달빛이 쏟아져 실내를 비춰준 덕분에 주변 파악이 어렵지 않았다. 달력과 액자 속 풍경화. 동그란 벽시계, 유리문이 끼워진 서랍장, 철제 책상과 의자 등. 그제야 자신이 이 곳, 놀라운 과학문명과 발전된 지식을 배울 수 있는 ‘이 세계’로 왔음을 눈치 챘다. 현실을 파악하고 나니 주변의 것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푹신한 침대와 두터운 이불. 외풍은 당연히 없었고, 오히려 낮 동안 에어컨을 틀어 놨었던 건지 시원한 공기가 실내를 채우고 있었다. 자다가 깼다는 말을 떠올려보면, 당연히 자신이 눈을 떠야 할 곳은 양호실이 아닌 자기 방이었어야 하는데 왜 이 곳에 누워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가만히 누운 채로 몸을 더듬어보니 팔 다리는 제대로 붙어 움직임에 지장이 없었다. 다만 어쩐지 피곤한 기분이었을 뿐이다.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번쩍 눈을 부릅뜬 루치드. 잊고 있었다. 자신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니 조금 전까지 자신이 보고 있었던 광경이 떠올랐다.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던 스크로파의 광기서린 눈빛, 번들거리는 입과 거친 콧김을 내뿜던 뭉툭한 코. 미친 녀석이 지 몸에 불이 붙은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오던 그 광경을 잠시 잊고 있었다. 죽음의 위기, 혹은 복수의 기회였다. 자신은 달려오는 그 놈을 마주 보며 질세라 악을 질러댔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일순간에 쏟아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눈을 뜬 것이다. 결국, 방금 전까지 녹스의 서편 평원에서 사투를 벌였던 그 기억을 떠올리고 말았다. 동시에 잊고 싶었지만 잊을 수 없는 장면의 기억까지 함께 떠올렸다. “아저씨…….”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려 했다. 이불을 집어 들고 입에 물었다. 이불이 튿어질 만큼 세게 물었다. 그 밤, 루치드는 밤이 새도록 울었다. 파란 달빛이 방 안 깊숙이까지 들어와 루치드를 감쌌지만 위로가 되지는 못했다. **** 일요일 아침은 일반 가정집이라면 보통 느긋하기 마련이지만, 보육원은 바쁘기 그지없었다. 특히 자원봉사자들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에 바쁜 보육원 직원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특히 여름방학을 맞이하며 시작된 자원봉사자들의 활동 개시로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일요일이다 보니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았다. 더군다나 내부의 모습이 외부에 공개되는 상황이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준비를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깨끗하고 시설 좋은 보육원, 원생들을 사랑과 정성으로 보살피는 보육원. 이 타이틀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원장의 으름장도 직원들을 빠릿빠릿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정작 자기는 골프나 치러 가고 말이지.” 생활지도원 한 명이 봉사자 예약 명부를 점검하며 투덜댔다. 전날 일어난 사고 때문에라도 입조심 하라고 으름장을 놓던 원장은 시장과의 라운딩이 예약되어 있다며 골프채를 그렇게 열심히 닦더니 오늘은 코빼기도 비출 마음이 없나보다. “그런 강심장도 없어. 어제 그 사단이 났는데도 119에 전화도 안했대잖아.” “애가 무사히 깨어났으니 망정이지. 어휴.” “그런 사람이니까 원이 이 만큼 인지도를 갖고 운영되는 것일 수도 있어. 사고가 알려졌어 봐. 오늘 자봉이 아니라 기자를 맞이해야 했을걸?” “덕분에 우리 애들이 편안하게 잘 사는 거고?” “아니라고는 못하겠네.” 지도원 두 사람이 자기 일처럼 열심히 뒷담화를 나누면서, 정작 해야 할 일은 점점 미뤄지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무국장이 사나운 눈짓으로 째려보지만 않았다면 아예 일은 제쳐 두고 만담을 펼칠 기세였으니까. 그런 분위기와 의미는 다른지만 소란스러운 곳이 있었다. 바로 명수와 루치드가 함께 쓰는 방이었다. “난 정말 너 죽은 줄 알았어. 너 쓰러지고 안 일어나니까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명수의 호들갑은 여전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연극 준비라도 하나 싶었을 것이다. 혼자 넘어지고 부딪치고 기절하는 시늉을 다 냈다. “…그래서 형근이 형이 너 업고 뛰었잖아. 형 아니었으면 너 죽었을지도 몰라.” 걸핏하면 '죽음'이란 단어를 쉽게 내 뱉는 명수에게 과연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고마워요, 형.” “괜찮아. 아무것도 아냐, 그런 거. 그보다 너 이제 괜찮아? 어제 밤에 깨어났다며?” 누가 뭐래도 초등학생 가운데서는 최고 맏이시다 보니 어린 동생들에 대한 염려가 지극하시다. 허풍만 줄인다면 꽤 리더십 있는 형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쉽다. 어제 비만 안 왔으면 형이 토끼 잡아줬을텐데.” 정말 아쉽다는 듯 한숨을 푹 쉬는 명수의 어깨를 형근이 두드려주며 위로했다. “다음에, 다음에 꼭 잡아줄게. 어제는 우리가 준비가 덜 돼서 그런 거야.” 루치드는 갓 잡은 토끼 가죽을 벗겨 시장에 내다 팔고, 고기로 죽을 끓여 먹던 6개월을 보냈더니 더 이상 토끼를 보고 싶지 않았다. 어느새 형근과 명수 둘이서 대화를 주고받으며 미래의 창대한 계획을 설계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혼자만의 생각에 몰입할 수 있었다. ‘난 6개월을 보냈는데, 여기서는 고작 6시간 정도 밖에 흐르지 않았어.’ 시간의 갭을 이해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 시간의 비율을 계산하기에는 아직 상식이 부족했다. ‘그 곳에서 입은 상처가 아직 남아 있어.’ 어깨에는 희미해진 상처가 남아 있었다. 전날 -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게 이상했지만,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고작 하루 전의 일이었으니까 - 산에서 구르며 다친 상처라고 보기에는 오래된 상처였고, 실제로 ‘저 곳’에서 다치기 전까지는 어깨를 다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마법도 가능할까? **** 형근과 명수는 루치드를 방에 남겨두고 나왔다. “쟤, 어제 심하게 다쳐서 그런가? 평소보다 말이 없네.”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요?” “아냐, 내가 보기엔 조금 분위기도 이상해. 음… 아직 피곤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어. 석고가 공은 잘 차지만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하는 애는 아니니까, 체력이 약한 거야. 그래서 어제도 그렇게 심하게 넘어진 거고. 넘어지고 나서도 정신을 못 차린 거지.” 그냥 넘어진 게 아니라, 명수를 구하기 위해 몸을 굴린 것이지만 형근은 그 부분을 묘하게 왜곡해서 말했다. 사고 직후 보육원으로 돌아와서도 정황을 묻는 보육교사에게 “명수가 토끼 보고 싶다고 졸라서 산에 올라갔는데, 갑자기 비가 왔어요. 잠깐 비를 피했다가요, 너무 늦으면 위험할 거 같아서 내려오는데요, 명수랑 석고가 같이 넘어졌어요. 근데 석고가 정신을 못 차리길래 제가 업어서 데려왔어요.” 라고 보고했다. 다친 아이를 업고 데려온 아이를 혼내는 교사는 없었다. 당장 혼날 일이 무서워 임기응변으로 대답을 했지만, 어느새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형근이었다. 하지만 진짜 사실을 기억하는 그로서는 깨어난 루치드가 어떤 진술을 할지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때문에 아침부터 병문안을 핑계로 명수의 방을 찾았던 것인데, 어쩐지 아이의 분위기가 무겁고 진중해서 같이 있기가 불편했다. 눈치를 보니 자기 생각에 빠져 신경을 쓰지 않기에, 명수를 데리고 방을 빠져나온 것이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루치드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한참을 침대 위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겨있던 아이는 천천히 앞으로 손을 내 뻗었다. 펼친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끔 동작을 취하고 그 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손바닥 위에 조그만 불빛이 반짝이며 나타났다. ======================================= [33] 크레센도(2) 월요일부터 3주간 방학기간 방과후 수업이 학교에서 진행되었다. 다른 아이들은 질색을 할 일이지만 루치드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지식을 쌓는 일이 즐거운 이유도 있겠지만, 가슴을 짓누르는 기억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게 몰두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이유가 컸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루치드가 많이 변했다고 느꼈다. 주말의 그 ‘사고’ 이후 아이가 부쩍 말수가 줄어든 데다가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분위기를 풍겨 쉽게 다가가기 어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단, 명수는 그런 분위기를 전혀 모르는 듯, 루치드의 옆에 앉아 재잘대면서 함께 등교를 했다. “방학인데도 학교 나오느라 힘들었죠?” 수학선생님의 너스레에 반 아이들이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 웃음이 과연 수업이 끝날 때까지 지속될지는 봐야겠지만, 당장은 친구들과 만나서 수다떠느라 기분이 좋은 상태다. “수업시작할께요.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수학시간에 옛날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하니, 아이들의 호기심에 찬 눈으로 선생님을 바라봤다. 지난 밤, 나름의 수업준비를 하면서 아이들의 집중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방안을 고민하던 중 떠올린 아이디어가 제대로 먹혔다고 생각하며 선생님은 미소를 지었다. “옛날 아주 무서운 왕이 저 더운 나라에 살고 있었어요. 그 왕은 평소에도 나라를 위한다면서 젊은이들, 어린이들 할 거 없이 마구 일을 시켰어요. 그 일이 너무 힘들고 고단해서 죽는 사람도 있었죠. 그런데 어느 날, 왕은 한 무리의 사람들을 잡아 와서 또 다른 일을 시켰어요. 벽돌을 불에 구워서 뜨겁게 만든 다음, 그 돌을 나르는 일을 시켰어요. 그렇지 않아도 더운 나라인데 뜨거운 돌을 들고 나르는 일을 하니 많이 힘들었겠죠?” “예!” “뜨거워서 손다쳐요!” 아이들이 잘 집중하는 것 같아 기분이 업된 선생님은 계속 말을 이었다. “예, 그렇게 힘든 일인데도 무서운 왕은 신경도 안 쓰고 무조건 일만 시켰어요. 왕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한 사람당 9소스 씩의 벽돌을 지고 나르도록 하라. 벽돌 한 묶음은 60개의 벽돌로 되어 있어요. 그 일을 시킨 날은 사람 수의 3분의 2였어요. 사람 수와 일한 날의 수와 벽돌의 샤르 수를 모두 더하면 140이 되요. 여기서 샤르는 60소스예요. 그럼 문제예요. 몇 개의 벽돌을 운반하기 위해 몇 사람이 며칠 동안 일한 걸까요?” 갑작스레 튀어나온 문제에 아이들은 침묵으로 대응했다. “어렵죠? 사실 여러분들이 풀기 어려운 문제예요. 그런데 이 문제는 4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만든 문제예요. 이렇듯 아주 옛날에도 사람들이 수학을 통해서 생활의 지식과 문제를 해결하는 습관을 길렀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어떤 수학자는 자연현상이나 사회현상 혹은 생각의 방식까지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했어요. 그만큼 수학은 우리 삶과 아주 가까운 학문이고 그렇기 때문에 아주 중요해서 여러분들이 방학 때도 이렇게 학교에 나와서 배워야 하는 거예요. 알겠어요?” 말이 조금 길어졌나 보다. 아이들이 다소 시큰둥한 모습이었다. 처음의 반짝거리는 눈빛을 하고 바라보던 아이들의 호응에 너무 흥분했었던 건 아닌지 잠시 반성해보는 선생님 이였다. “자, 그러면 선생님이 문제를 하나 낼게요. 같이 풀어보도록 해요.” 루치드는 선생님의 흥분과 다른 의미로 흥분했다. 수학은 ‘자연현상’, ‘사회현상’, 심지어 ‘생각의 방식’까지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선생님이 설명하시는 순간, 머릿속에서는 ‘수학 = 마법’이란 공식이 떠올랐다. ‘수학을 공부하면 마법에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사실 선생님이 말하려던 내용은 수학자 키스 데블린(Keith Devlin)의 ‘패턴 수학’을 인용한 것이다. 정확하게는 「수학은 자연현상과 사회현상의 패턴, 나아가 생각의 모든 패턴까지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 내린 것인데, 어찌 보면 그냥 수학에 대한 여러 정의들 중의 하나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일반 상식까지 갖추기에는 많이 어리고 부족한 루치드였기에 순수한 마음으로 선생님의 말씀을 금과옥조처럼 여겨 받아들인 셈이다. 하지만 이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선생님이 길가메시 서사시에 나온 내용을 각색하여 수학 문제를 푸는 동안, 다른 누구보다 집중하여 수업을 듣는 루치드였다. 방과 후 수업이 끝나고 루치드는 교내 도서관으로 향했다. 자신의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은 그였기에 도서관에서 가장 먼저 백과사전을 찾았다. 이전까지는 책을 읽을 때 나름의 취향이라는 것이 있어, 주로 인문학 서적을 많이 읽었다. 그러나 마법 구현을 위한 이미지를 만드는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가 사물의 본질에 대한 지식 부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루치드는 그 부분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 백과사전을 읽으려고 책을 펼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명수가 데리러 왔다. 보육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방학 동안에는 학교에 오래 남아 있을 수 없었기에 루치드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학교를 나섰다. 학교 앞에는 벌써 고학년 보육원생들이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형근이 소미와 다영 앞에서 혼자만 재밌을 법한 이야기를 떠들고 있었고, 다영은 그 재미없는 이야기를 차마 재미없다고 이야기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들어주는 척을 했고, 소미는 대놓고 시선을 돌려 듣지 않는다는 의사를 보였다. 철용은 고학년 세 명의 이야기에 끼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이며 교문을 힐끔 쳐다보다 명수와 루치드를 발견하고 두 손을 번쩍 들어 환영했다. 뒤이어 소미도 명수와 루치드를 발견했다. 다가오는 루치드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너 많이 다쳤다며? 괜찮아?” “…네.” 여전히 그녀에게서 희미하지만 기분 나쁜 냄새가 나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매너이기 때문에, 라는 핑계보다는 그냥 아무도 말하지 않으니깐 나도 말하지 않겠다, 정도의 태도로 보는 것이 맞겠다. 형근의 수다에 질린 와중에 말 붙일 상대가 보여 안부라도 물으며 말을 이어 가려던 소미는 어쩐지 달라진 분위기의 루치드를 느끼고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했다. “내가 석고 업고 산에서 뛰어왔다니까? 정말 내가 조금만 늦었어도 얘 위험할 뻔 했어. 선생님이 내가 너 살린 거라고 그랬다니깐.” 생색이라도 내 보려는 형근의 말에 아무도 대꾸하지 않아 괜히 뻘줌해진 형근이 철용이에게 뒷말을 붙였다. “너 봤지? 그 미끄러운 산을 안 넘어지고 뛰어온 거?” “응. 봤어. 내가 뒤에서 보는데 심장 떨려 죽는 줄 알았거든. 그냥 뛰는데도 미끄러워서 혼났는데 형은 미끄러지지도 않더라고.” 고학년도 아니고 저학년도 아닌 철용이가 그간 심심했었나보다. 말을 붙이기가 무섭게 호응을 하는데, 형근 못지않게 입이 근질근질 했던 모양이었다. 다영은 철용이에게서 아까 들은 이야기를 다시 듣게 생겼다. 뭐 대단한 모험을 했다고 저리 신이 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때마침 보육원의 차가 오지 않았다면 ‘형근과 철용의 뒷산 대모험’ 파트2가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파트1과 파트2가 똑같은 내용일 게 뻔해서 듣고 싶지 않았던 소미와 다영은 얼른 차에 올라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철용의 입이 풀리기 시작했을 때는 누구도 말리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둘은 보육원에 도착할 때까지 파트2를 들어야만 했고, 차에서 내릴 때는 파트3 예고편까지 들었다. “다음에 또 토끼 잡으러 갈껀데, 같이 갈래? 다음에는 꼭 잡을 수 있을 거야.” “괜찮아. 우린.” 대답이라도 해줘야 인지상정. 소녀 둘은 자기 방으로 달음박질하듯 뛰어 들어갔다. **** “견학이요?” “예, 인평고등법원 자원봉사회에서 저희 원생들을 초청하여 법원견학 및 만찬 등을 시행하고자 하는데 어떠냐는 취지의 협조문을 보냈습니다.” 원장은 커피를 한 입 마시고, 그 뒷맛을 음미했다. 새로 들어온 커피인데 어디 품종인지는 까먹었다. 그냥 비싼 커피라는 정도만 기억해뒀다. “당일 법원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차량을 보내주고, 저녁 만찬까지 함께 한 후 일정을 마칠 예정이랍니다.” “우리가 먼저 협조 공문을 보냈던가요?” “아닙니다. 하지만 지역사회 연계서비스의 일환으로 …….” 사무국장의 원론적인 이야기에 원장은 손사래를 쳤다. “그런 순진한 이야기가 아니죠. 보육기관에서 공문을 보내기 전에 저 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면,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거죠.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 우리에게 영향을 주던, 저 쪽에게 영향을 주던 우선은 파악을 해 놔야지 돼요. 남들이 이래라 저래라 한다고 우리가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죠. 우리도 우리 일정이 있는데요. …혹시 우리가 일정을 정해도 되는 겁니까?” “아, 아뇨. 실은 3주 뒤 월요일부터 수요일 사이에 일정을 잡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함께.” “거 보세요. 우리 마음대로 일정 정하는 것도 아니고 저 쪽에서 미리 날짜까지 박은 거잖아요. 그러면 뭔가 있는 거죠. 행정과장님 한 번 알아봐주세요. 제 생각에는 아마 저쪽에서 기자들까지 불러서 성대하게 한 판 벌이려는 모양인데, 구정물이면 피하고 굿판이면 떡고물 좀 얻어먹고 그래야죠.” 멀쩡하게 사무국장이 두 눈 뜨고 앉아있는데 일은 딴 사람 시킨다. 행정과장은 고약한 심보라며 속으로만 투덜댔다. 누구는 일이 없어서 노는 줄 아시나. 귀찮은 건 죄다 내 몫이지. “예, 알겠습니다. 원장님.” 대답이라도 잘 해드려야 저 욕심 많은 원장이 허허거리며 넘어갈 것이다. “허허. 우리 행정과장님이 워낙 유능하시니까 우리 원이 이리 잘 돌아가는 겁니다. 그죠? 사무국장님?” 빈말에도 속 좋게 웃어야 하는 행정과장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사무국장이 피식 웃었다. “그럼요. 저도 행정과장님 덕분에 한 손 덜게 생겨 다행입니다.” 이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르는데 그 모습을 보고 원장과 사무국장이 웃음을 터뜨린다. 속내야 어쨌든 웃음꽃이 활짝 핀 어느 더운 여름 날 오후, 원장실의 풍경이었다. ======================================= [34] 크레센도(3)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이 앞에서 갑자기 차가 좀 막혀서 말이죠. 이거 참 늦어서 죄송합니다.” 행정과장은 너스레를 떨며 기다리고 있던 인평일보 기자 양희봉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유 별 말씀을. 저도 이제 막 왔습니다. 보니까 저 앞에서 공사를 하던 거 같더라고요. 도로가 깨졌나 봐요.”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는 양희봉은 지역신문의 정치부 담당이다. 말이 정치부지, 사실 인평시 정도의 지역에서는 그냥 다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복지서비스의 안정적 기여가 사회 전반적인 생활수준 향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인평시’를 비롯한 지역사회 각 기관들의 적극적인 협조는 환영할 일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보육사업 지침상 보육시설과 지역 기관과의 상호 연계는 필수였다. “가령 향토 박물관 견학. 각 지역의 역사와 향토성, 문화적 가치의 존속을 목표로 건립되지요. 그리고 이를 통해 문화적 자산과 활용, 사회적 연대성의 가치 상승이 기대됩니다.” “뭐 그렇겠죠. 교육적으로나 지역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나 의미는 있겠죠.” 기자의 심드렁한 태도를 지적할 마음은 없었다. 어차피 본론으로 들어가기 좋게 끼어 넣은 애피타이저 정도였으니까. “지역사회 복지서비스의 활용도를 높이고 효율적인 복지프로그램 운영을 홍보하면, 지자체의 이미지 개선도 되고, 복지 서비스 확충에 관련된 자금 마련에 이득을 취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번 일의 경우에는 좀 다르다는 느낌이 오더군요.” “예, 다르더라고요. 저도 그냥 넘어갈 뻔 했죠.” “벌써 알아보신 거군요.” 기자는 술잔을 들어 눈높이에 맞췄다. “예. 사실은 우리도 모르게 사고가 하나 났더라고요. 웬만하면 저희 후배들이 캐치했을 일인데 꽤나 잘 감춘 사건이었어요.” 노란 빛이 산란되어 눈을 어지럽히는 크리스털 잔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입에 털어 넣었다. “혹시 어떤 일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비어버린 술잔을 채워주면서 행정과장은 기자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룸의 조명 때문에 그런지 기자의 눈매가 꽤 날카롭게 벼려져 있다는 인상이었다. 나쁘게 말하면 고약한 인상인 셈이다. “사건 자체는 별 거 아니더라고요. 그냥 흔하디흔한 횡령.” “…사람이 별거겠죠. 대상이든 저지른 사람이든.” 희봉은 컵을 빙빙 돌리며 안의 술이 얼음과 잘 섞이도록 했다. 시원할 때 마셔야 제 맛, 이라는 지론이 있었다. “시장 친척 이예요. 외가쪽. 모르면 그냥 먼 친척이겠거니 했겠는데, 의외로 관계가 깊었나봐요. 검찰이 주변 인물 탐문 중에 시장과 밀접한 선이 있다는 걸 알았다나 어쨌다나. 아무튼 중요한 건 뭐 시장이 횡령범을 구하려 한다, 는 정도로 요약되겠네요.” “그런데 왜…….” “왜 보육원 행사를 벌이는 게 그 쪽과 관련되느냐, 는 거죠?” 희봉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3주 뒤라고 했던가? 견학이? 아무튼 다음 달 월요일에 법원 심리가 시작 돼요. 그런데 그 전에 좀 접선이 필요 했나 봐요. 판사랑. 그런데 그냥 만나도 될 일인데 왜 큰 판을 벌여서 잔치를 하느냐? 이번 시장이 연임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그 때문에 쫓아다니는 기자들이랑 시선이 좀 있더라고요. 이번 일을 조용히 만들기 위해서 여기저기 힘 좀 쓰고 다니는데 들키기라도 해봐요. 거기다 요즘 식당이나 여기나 눈들이 보통이 아니잖아요? 괜히 대접받니 마니 하면서 눈총에 맞느니 아예 판 벌이고 보는 거죠. 공식적인 듯 공식적이지 않게.” “그런데 기자님은 어떻게…….” “어떻게 알았냐고요? 시장 쪽에서 알려줬어요.” “예?” “아니면 제가 지금 이런 룸에 와서 과장님이랑 있는 게 정상이겠어요? 법 하나 제대로 만들어진 덕분에 얻어먹을 거 못 먹고, 입을 거 못 입고 그러는데. 이번에 시장 친척이란 놈이 제대로 일 벌여준 덕분에 저도 입 좀 축이게 된 거예요.” “…….” “제가 왜 이런 이야기 하는지 아시겠어요?” “모르겠습니다.” “과장님, 정 이사님 라인이라면서요?” 행정과장은 사레가 들려 콜록거렸다. 기자는 휴지를 건넸다. “정 이사님이 또 저기 시장라인이랑 연이 있대요. 아무튼 참 이 바닥도 완전 거미줄이야. 그쵸?” 거미줄? 아니, 이 바닥은 그냥 진흙탕이다.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처럼 깊은 진흙탕. 두 발을 빠뜨린 채 허우적거리면 주변으로 마구 선이 뻗는다. 휘저을 때마다 새로운 선이 생기고 사라지고 생긴다. 시장의 친척이라는 사람이 얼마를 횡령했고, 거기에 시장이 얼마나 관여되었으며, 시장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워삶았고, 얼마나 많은 돈을 썼으며, 얼마나 많은 돈을 쓸 건지는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 알아서도 안 되는 문제였다. 기자와의 간담회가 끝나자마자 마치 짠 것처럼 정 이사로부터 전화가 와서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원장 쪽은 신경 쓸 것 없다며, 다만 법원 쪽이랑 잘 협조하라는 지시만 내리고 통화는 마무리되었다. 진실의 무게는 무거운 법, 주머니에 밀어 넣은 휴대폰이 걸리적거렸다. 루치드는 한동안 공부에만 매진했다. 아니, 공부 말고는 하는 게 없을 정도였다. 수업 시간은 말할 것도 없고 남는 시간은 오로지 책만 읽어서, 어떤 지도원은 아이가 활자 중독증에 걸린 것은 아닐까 의심을 할 정도였다. 학교에서는 자투리 시간이 될 때마다 백과사전을 꺼내들고 읽었다. 주제별로 구분된 백과사전은 흥미롭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마법에 도움이 많이 됐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루치드는 피구라, 즉 이미지 형성에 거의 성공 직전까지 다다른 마법을 4개 정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법 구현이 가능한 정도까지는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물질에 대한 공부가 부족해서 그런 것 같았다. 보이는 형태만 가지고 이미지를 형성할라치면 기껏해야 검은 실루엣 정도의 이미지만 만들어질 뿐이었다. 사물 구현 마법이 어려운 이유는 역시 사물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핀체노가 물을 만들어낸 것은 거의 마법사의 정점에 다다른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었다. “거의 평생을 바쳤지. 이 마법을 위해. 그럼에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던 것을 어느 순간 물에 대한 깨달음―디아포를 얻어 구현에 성공했다. 그 순간은 정말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단다.” 루치드가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은, 자신 역시 깨달음이 아니었다면 불의 재현에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란 사실이었다. 정확한 명칭을 몰랐어도 연소와 산화, 가연에 대한 개념을 의식적으로 인식했기에 마법이 가능했었다. 지금은, 적어도 불에 대해서만큼은 다른 누구보다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곳에서 책을 읽던 중에 ‘연소반응’이라든가 ‘가연물’ 혹은 빛의 파장에 의한 색의 변화 등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복잡한 물질 분석과 과학적 이론의 부재로 인해 피구라 근처에라도 간 사물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책을 읽고 관련 서적들을 찾아서 지식을 보충하다보면, 언젠가는 사물 구현 마법을 시전할 수 있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희망을 가졌다. 루치드는 읽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육원이 견학을 가기로 한 월요일이 왔다. 아침부터 분주하던 보육원 앞으로 법원에서 보내온 35인승 버스가 도착했다. 아이들은 줄을 맞춰 버스에 올라탔다. 같은 버스에 보육교사 한 명과 생활 지도원 2명이 동행하기로 했다. 원장과 사무국장은 자가용을 이용해 이동하기로 했고, 행정과장은 원에 남아서 잡무를 처리하기로 해서 같이 가지 않았다. 어차피 원장 역시 잠시 얼굴만 비춰서 사진만 찍고는 나올 예정인지라 그리 오래 머무르지는 않을 것이다. “명수야, 바로 앉아야지. 지혜야. 너는 중학생이 돼서 동생들 보기 부끄럽지 않니? 그러니까 명수가 따라 하잖아!” 명수는 누굴 따라 한다기보다는 자의적인 충동으로 움직이는 것이지만, 굳이 교사에게 고자질할 이유는 안됐다. 다 아는 사실을 고자질할게 뭐람. 루치드는 제 자리에 엉덩이를 딱 붙인 뒤부터는 고개도 들지 않고 책을 읽었다. 『생활 속의 물리』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중학생인 형에게서 빌리게 되었는데, 빌릴 때 책이 아주 깨끗해서 페이지를 넘길 때 손 때 묻을까 두려울 정도였다. 사실 루치드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이겠지만 거의 반 이상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다만, 그래도 읽어두는 편이 나중에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해가 되든 안 되든 꾸역꾸역 읽어나갔다. 사실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다름 아닌 프라에테 때문이었다. 미끄러진다는 현상이 물리학적으로 ‘마찰력’과 관계있다는 백과사전의 내용에 깨달음을 얻은 루치드는 물리학이 현상 재현 마법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다만 아직 물리학을 이해할 만한 배경 지식이 부족해서 이해는 못할지언정 외우기라도 하자라는 심정으로 책을 붙들고 있을 뿐이었다. 루치드가 책을 읽을 때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소년이 부상을 입은 이후, 알게 모르게 사람들은 루치드에게 접근하기를 꺼려했다. 주위의 분위기에 민감한 아이들은 루치드에게서 어쩐지 위험한 느낌이 난다는 이유로 꺼려했고, 어른들은 소년의 어두운 분위기를 애써 밝게 만들어야겠다는 의무감을 느낄 수 없었기에 꺼려했다. 요컨대, 보육원 애들이 다 그렇지 뭐, 라는 정도의 선입견이 한 몫을 했다 하겠다. 그렇지만 세상엔 예외가 존재하기 나름이고, 루치드의 옆에는 예의 명수가 존재했다. “석고야, 내리자. 다 왔다.” 명수는 가장 먼저 버스에서 내렸다. 보육원 밖으로 나온 게 마치 쇼생크 탈출처럼 느껴지는 모양인지 나오자마자 두 팔을 뻗어 하늘을 찌를 듯 두세 번 흔들었다. 심하게 들떠있는 모습의 명수를 보며 루치드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 [35] 크레센도(4) 일정은 누구나 다 예상할 수 있는 순서대로 진행이 될 예정이었다. 인사말로 시작해서 사진 좀 찍고 법원 견학 및 재판 방청으로 진행한 뒤, 점심식사를 가질 것이다. 점심 이후로는 모의 법정 체험 및 재임 판사의 특별 강의, 그리고 마지막 저녁만찬으로 견학 행사가 마무리 될 예정이었다. 인사말은 간단히 끝났다. 어차피 나중에 저녁 만찬 때 저기 앞에 있는 시장이나 원장이나 법원장 등 높으신 분들이 함께 모여 한 마디 하시려면 빨리 빨리 진행이 되어야 했다. 때문에 최대한 간결하고 신속한 진행이 예정된 오늘의 견학이었다. 사진을 도대체 몇 장이나 찍으려는 건지 이 사람과 찍고 저 사람과 찍고 다 같이 찍고, 끝났나 싶은데, 높으신 분과 찍고 더 높으신 분과 찍고 또 다 같이 찍는다. 그럴 거면 각자 휴대폰 들고 와서 셀카나 찍고 가시지. 도대체 보육원 애들 사진을 찍어다가 어디에 써먹겠다고 그러는지 모를 일, 이라고 생각하는 보육원생들과 달리, 사실 윗분들은 이런 저런 식으로 많은 활동 기념사진들이 필요했다. 법원 홍보물에도 쓰고 사무실에도 걸어 놓고 신문에도 보내고, 몇 년 뒤 은퇴기념으로 발간될 책자에도 넣고, 정치인으로 전향해서 선거에도 나올라치면 또 어디 쓸데가 없겠는가. 결국 남는 건 사진 밖에 없더라, 라는 말이 나올 만 했다. “석고야, 힘들어.” 덕분에 에너지 과다보유자 명수도 방전이 될 정도였다. 이제 또 이 넓은 법원을 돌아다녀야 하는데, 벌써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법원 순회 및 법정 견학은 소란을 방지하기 위해, 그리고 원활한 견학 활동을 위해 4팀으로 나눠서 진행하기로 했다. 팀당 8명씩으로 인원을 나눈 뒤, 인솔직원을 따라 아이들은 법원 내로 들어갔다. **** “최순경, 오랜만이야?” 등 뒤에서 불린 이름에 돌아보니 인평일보 소속 기자였다. “아, 양기자님. 오랜만입니다. 법원에는 어쩐 일로?” “나? 오늘 여기서 복지행사 있다고 해서 스케치 뜨러 왔지. 최순경은 근무 시간 아닌가?” 최순경이 보기에, 양기자가 자기 본류의 것도 아닌 복지행사 관련 기사를 쓰기 위해 이 곳에 왔다는 것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없는 말을 지어내는 투도 아니고 능청스런 얼굴로 되묻는 양기자에게 무슨 사정이 있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아, 실은 오늘 재판이 하나 있는데, 거기 참고인으로 부르더라고요.” “어떤 거? 아, 혹시 강간미수사건?” 최근 인평시를 소란스럽게 만들었던 사건 중의 하나가 강간미수 사건이었다. 피의자가 술에 취한 여성을 데리고 공원 화장실로 끌고 가 강간을 하려다가 순찰 중이던 경찰에게 걸려 도망을 가다 체포된 사건. 당시의 여성이 미성년자라는 점에서 논란. 술집에서 먼 공원까지 오게 된 경위와 그 과정에서 제지를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논란. “예. 그 때 제가 최초 현장 발견자였거든요.” “오호, 그럼 최순경, 이번에 경장 되는 건가?” “아뇨,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 “뭐, 이렇게 열심히 하시니 조만간 최경장님이라고 부를 날도 얼마 남지 않았겠어. 그 때 모른 척하면 안 됩니다. 최경장?” 양기자의 너스레에 최순경이 부끄럽다는 듯이 손사래 치며 웃었다. “아, 참. 양기자님도. 저도 이제 알 거 다 아는데, 너무 애 취급이시네요.” “미안, 미안. 그냥 오랜만에 봐서 반갑기도 하고 해서 그냥 농담이나 한 마디 한건데 뭘 그러나. 그래도 진짜 나중에 시간되면 밥 한 번 먹자고. 오케이?” 최순경은 사람 좋은 얼굴로 악수를 청하는 양기자의 손을 마주 잡았다. 법원 순회를 하던 중, 루치드는 417호 법정 앞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파란 제복의 최순경이었다. 이 세계로 와서 가장 처음 본 얼굴. 그리고 사회복지사에게 넘겨지기 전까지 하룻밤을 함께 보냈기에 기억에 남은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먼저 나서서 인사할 정도는 아니라 여겨 지나가려는데, 최순경이 먼저 얼굴을 보고 아는 척을 해왔다. “어, 너. 오랜만이다.” 아는 척 하는 얼굴을 두고 모른 척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서 쭈뼛대며 인사했다. “예, 안녕하세요.” “잘 지내고 있지? 아저씨가 워낙 바빠서 너희 보육원에 한 번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시간을 못 내서 미안했었는데, 이렇게 얼굴 보니 반갑구나.” “예.” “오늘 견학 온 거니?” “예.” 계속된 단답형 대답에 머쓱하기도 하고 더 이상 물을 질문도 없었던 최순경은 그냥 잘 지내라라는 인사를 끝으로 아이를 보내려 했다. “누굽니까? 아는 사인가요?” 뒤에 서서 바라보던 양기자는 최순경이 보육원 아이를 보고 아는 척 하는 게 신기했다. 별로 접점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만약 접점이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호기심이 간다. 경찰이 안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사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오랜 기자 생활의 노하우랄까. 게다가, 아네스 보육원이잖은가. 양기자는 미소 띤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아, 예. 예전에 인평공원 … 아니 좀 인연이 있어서요. 이 아이가 아네스 보육원에 들어갈 수 있게 좀 도울 수 있었거든요.” “으흠. 그렇군요. 아, 거기요. 저 인평일보 기잔데요, 이 친구들 지금 어디 가나요? 만난 김에 따라가서 사진이나 하나 찍어놓게요.” 인솔직원이 길막(?) 중인 기자를 못마땅하게 여겨 누가 봐도 인정머리 없다 싶은 어투로 툴툴거리듯 대답을 했다. “법원 견학이요. 민사법정 관람이 있습니다.” 물론 어투 가지고 마음 아파할 양기자가 아니었다. “아, 그래요. 그럼 최순경. 이만 헤어지자고. 난 이친구들 따라갈게.” “예, 그럼 다음에 시간 되면 한 번 뵙죠.” “그래, 자네도 수고하시고.” 돌아다니기도 귀찮고, 바로 앞에 법정도 있고, 이제 막 만나 기자 끌고 이리 저리 가는 것도 마땅치 않고, 그래서 직원은 417호 법정으로 아이들을 인도했다. 마침 공개 재판이 열리기 직전이었던 417호 법정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배석해 있는 상태였지만 아이들이 앉을 수 있게 몇 몇 사람이 양보해준 덕에―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양기자의 설명이 덧붙여지기도 했던 탓에 8명을 자리에 앉힐 수 있었다. “아, 이 사건이네.” 417호 법정은 강간미수사건이었다. “이거 애들이 견학해도 되는 거요?” “어차피 공개재판이고, 잠시 보다가 나올 거라서 상관없을 거예요. 변호사 모두진술까지만 보고 나올 테니까요.” 직원이 무심한 태도로 양기자의 질문에 답했다. 속으로만 혀를 차던 양기자는 대충 거리를 잡고 아이들을 앵글에 담았다. 잠시 후 판사가 입장했다. 판사는 방청석 뒤쪽의 아이들을 보고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 직원은 검사의 공소장 낭독과 변호사의 모두 진술이 끝나면 퇴정하겠다고 알렸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변호사의 모두 진술이 끝난 직후 아이들은 조용히 법정을 빠져나왔다. 인솔직원의 안내에 따라 법정을 나와 이동하려는데, 명수가 손을 번쩍 들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물었다. “강간이 뭐예요?” 당황스러울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직원은 매우 노련하게, 라는 모습으로 보이게끔 태연스럽게 웃음을 보였다. “음, 여러분 성폭력 예방교육 들어 보신 분?” 다들 손을 들었다. 초등학교는 물론이고 유치원에서부터 시작하는 교육이다. 다만 ‘강간’ 혹은 ‘미수’ 혹은 ‘치상’ 등의 용어를 들어본 적이 없던 저학년 아이들이기에 저런 질문이 나왔다. 직원은 조금 전 기자의 질문에 답할 때와는 달리 아이들의 질문에는 친절하게 대답을 해줬다. “폭력이나 협박으로 반항하지 못하게 한 다음 강제로 성행위를 할 경우를 강간이라고 해요. 강제적인 성행위가 상대방에게 아주 깊은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거 배우셨죠? 그런데 사람을 때리거나 협박까지 하게 되면 그 죄가 더 무거워져요. 그래서 강간은 아주 무서운 죄목이랍니다.” 이정도면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임기응변을 칭찬하던 직원은 이어진 다른 아이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렸다. “아까 검사님이 말씀하시길, 화장실에서 증거가 나왔다고 했는데 그게 뭐예요?” 이래서 이런 종류의 재판은 비공개로 해야 된다. 아니면 이런 재판에 애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던지. 직원은 자신이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갔다는 사실은 잊은 듯, 괜히 법원의 시스템을 탓했다. “그건 여러분들이 몰라도 되는 내용이라고 생각되는군요.” 옆에서 핸드폰을 보던 기자가 힐끔 쳐다보는 것을 느꼈지만 그냥 무시했다. “그 이상의 이야기들은 아직 어린이 여러분이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일 수 있다고 생각이 드네요. 좀 더 자라서 많은 이야기와 교육을 받고 난 뒤라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정액이라도 나왔겠지.” 같은 팀으로 편성돼 함께 다니던 중학생 형이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복도 여기저기를 쳐다보던 중, 여기 실내 디자인 별로네, 라는 말을 꺼내는 모양새로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불량기 가득한 얼굴의 학생을 째려보던 직원에게 다시 손을 번쩍 들며 질문을 하는 용감하고 호기심 많고 진취적인 명수. “정액이 뭐예요?” 직원은 괜히 단어만으로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와중에, 해맑은 얼굴로 호기심을 풀어야겠다는 눈빛을 보내는 용감한 명수의 질문에 난감함을 느꼈다. 직원이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데, “꼬마야, 나중에 너희 형한테 물어봐라. 저 형이 잘 알려줄게다.” 양기자가 직원의 곤란함을 읽고 도움을 주었다. 은근히 이 코믹한 상황을 더 즐기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어린 애들 앞에서 고생하는 직원이 불쌍하기도 해서 한 마디를 던진 것이다. “냄새나는 거 있어.” 중학생은 저기 저 벽에 얼룩이 있네, 같은 어투로 대답했다. ‘아, 저 얄미운 주, 중2병 말기 환자 같으니라고!’ 직원은 티가 나게 인상을 쓰며 더 이상의 대화가 진행되지 않도록,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다는 생각으로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여러분, 일단 이 앞에서 떠들면 안 되니까…….” “너도 알잖아.” 중학생은 옆에 서 있던 학생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난데없이 툭 던져진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린 여학생. ======================================= [36] 크레센도(5) 서동인은 현재 인평중학교 재학 중인 평범한 남학생이었다. 성적도 보통이고 교우관계도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학생이었다. 누구도 물어보진 않았지만, 그의 생활 모토가 중간은 가자, 쯤은 되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였다. 결코 튀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튀려는 의지도 없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닌 법이다. 동인은 사실 또래들에게 인기가 좋은 편이었다. 얼굴도 나름 잘 생겼다고 평가할 만큼 콧대가 높고, 짙은 눈썹과 뾰족한 턱을 가진 소년이었다. 보육원생이라고 해서 모두가 얼굴에 그늘을 만들고 살지는 않지만, 그는 오히려 귀한 집에서 자란 아이 같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보육원에 다니는 것을 감추지 않았기에―어차피 학교 앞에서 보육원 승합차에 타기 위해 기다리는 무리를 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사실이었기에 다들 그의 사정을 잘 아는 편이었다. 상위 1%의 우수함을 보이지도 않았고 하위 1%의 불량함을 보이지도 않았지만 두루두루 사귐에 어려움이 없는 괜찮은 친구, 동생, 선배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다. 동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배척당하는 것을 경계했다. “동인아, 도서관 같이 가자.” 반에서 공부 좀 한다는 친구가 물으면, 환한 미소로 답했다. “그래.” 점심식사는 최대한 빨리 끝내야했다. 그래야 아이들과 같이 운동장에 나가서 공을 찰 수 있었다. 누구보다 빨리 먹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땀을 한가득 쏟아내며 5교시가 되기 바로 전까지 운동장을 누볐다. 축구에 가장 열정적이고 팀워크에 가장 헌신적이며 언제나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을 부르던 동인은, 보육원에서는 공을 차지 않았다. 철용이나 형근이 아무리 졸라도 공을 차지 않았다. 그는 자주 거울을 봤다. 거울을 보며 미소 짓는 연습을 했다. 누구에게나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있도록 연습했다. 어린 나이에 표정을 연습한다는 것은 얼핏 이해하기 힘든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동인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척받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가 자신의 외모라는 사실을 꽤 빠르게 깨달았다. 부모에게 감사하게 생각하는 유일한 것이 바로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말을 맞이하여 아이들이 외출이나 외박을 나가고 보육원이 거의 텅 비다시피 했다. 당연히 동인은 외출을 하지 않았다. 찾아오는 친척들도 없었고, 구태여 나갈 일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어쩐지 마음이 심란했다. 그 주에 봤던 시험의 성적이 걱정이 되어서도 아니었고, 점심시간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돼지불고기 반찬을 많이 못 먹어서도 아니었다. 그냥 방 안에서 책상에 앉아 한 쪽 손으로 턱을 괴고 창밖을 내다보는데, 창밖으로 조용히 해가 저물어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심란했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같아, 동인은 기분을 풀고자 보육원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때마침 소녀가 보육원의 정문을 지나 본관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걷는 모양이 시원치 않아 보여서 도와줄까, 라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일단 지켜만 봤다. 현관 앞으로 다가왔을 때, 동인은 소녀의 모습을 두 눈에 가득 담았다. 본관 앞을 지나던 여름 바람이 그녀의 머릿결을 흐트러뜨리며 지나갔다. 저녁노을을 받아 자줏빛으로 물든 머리가 허공에 잠시 나풀대다 어깨위로 떨어졌다. 레이스가 달린 하얀 원피스의 소녀는 두 손으로 원피스 옆자락을 가볍게 움켜쥐고 있었다. 시선이 아래로 향한 탓에 긴 속눈썹이 두드러졌다. 살짝 눈물이 맺힌 것 같은 착각을 주는, 투명하고 붉은 노을빛 눈동자가 보였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동인은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이내 소녀에게 다가갔다. “도와줄까?” 라고 이야기를 했어야 옳았다. 하지만 소녀에게 다가가는 순간, 그가 느낀 완벽한 이미지의 풍경화에 금이 갔다. 그녀에게 있어 단 하나의 흠집이었다. 그 흠집만 사라진다면 그녀는 완벽한 이미지로서, 풍경으로서, 자신의 머릿속에, 가슴속에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이상한 냄새 나.” 동인은 그저 참을 수 없었을 뿐이었다. 완벽한 그림을, 완벽한 그녀의 모습을 비릿한 향기와 함께 기억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소녀는 순간 눈물을 왈칵 터뜨리며, 고개를 숙였다. 소리도 내지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울음을 터뜨리는 그녀를 보며 동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기 말이 심했나, 라고 반성해볼 찰나에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 동인은 거울을 자주 보면서 눈에서 나오는 감정의 빛을 여러 번 읽어보았다. 나름 익숙했다. 그리고 지금 소녀가 자신에게 내뱉는 소리 없는 비난까지도 읽어낼 수 있었다. 소녀는 자신을 경계했다. 자신을 싫어했다. 소녀는 자신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동인이 중학교로 올라갈 때까지 소녀와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어쩌다 보육원 식당에서 마주칠 때라도 소녀가 먼저 자리를 피했다. 동인이 초등학교 졸업을 하던 날, 보통은 보육원 내 초등학생들이 모여 축하해주는 자리를 갖지만, 소녀는 그 자리마저도 피했다. 동인은 소녀에 대한 감정이 점점 비틀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중학교에 올라온 뒤 소녀를 보기란 더 어려워졌다. 하지만 중학교에 올라온 뒤 동인은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전까지 몰랐던, 그녀가 가끔씩 풍기던 냄새의 정체를. 사실 남자 중학교란 소년이 남자가 되도록 만드는 강제 수용소 같은 곳이었다. 어른들이나 어린 아이들은 모르는, 하지만 그 곳에 속한 아이들만이 공유하는 강한 유대감과 응집된 결속력으로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든다. 그리고 세상의 갖가지 난잡하기 이를 데 없는 정보들을 공유하며 진화를 한다. 그 진화의 과정에 동참한 동인 역시 이전까지 몰랐던, 어른들이 감추려 했던, 혹은 어떤 어른들은 모르는 정보들을 듣고 배우고 알아갔다. 찰지게 욕하는 법, 싸움으로 서열을 정하는 법, 그리고 비밀스런 밤의 일들까지. 동인이 진실을 알게 된 이후, 그가 느낀 가장 큰 감정은 배신감이었다. 모나리자가 남자라고 해도 이렇게 분노할 리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봤던 풍경들 중 가장 완벽하고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그림이었는데, 그 그림이 사실 예전부터 오염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염된 것은 더러운 것이다. 더러운 것. 친구들은 그런 것을 두고 ‘걸레’라고 불렀다. 고작 ‘걸레’에게 구더기 취급을 받았던 것일까? 고작 ‘걸레’에게 버림받았다고 지금까지 가슴 아파했다고? 내가? 언젠가 그녀가 자신을 피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이면, 자신은 기꺼이 그녀의 냄새를 지우고 그녀의 완벽함을 소유하리라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녀의 냄새는 지울 수 없는 냄새였다. 그녀는 지울 수 없는 냄새를 가진 ‘걸레’였다. 시간이 갈수록 빨지 않은 걸레처럼 그녀에게서 냄새가 진해졌다. 이제는 자신이 그녀를 피했다. 그녀의 냄새 자체가 싫었고, 그녀의 눈빛을 기억하기 싫었고, 그 눈빛에 상처 입은 듯이 행동했던 자신의 과거가 싫었다. 그런데 기회가 왔다. 그녀를 곤란하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너도 알잖아?” 생각대로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동공의 흔들림이 온 몸으로 느껴질 정도다. 그녀의 얇고 붉은 입술이 보기 흉하게 떨렸다. 루치드는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에서 다영과 함께 팔짱을 끼고 걷던 소미의 얼굴이―원래도 하얀 편이었지만 지금은 아예 색이란 것 자체가 사라졌다고 느껴질 정도로 창백하게 변했다. 떨리는 무릎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인데, 본인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지 멍한 시선이다. “무슨 소리야? 그게?” 양기자. 그는 놀라운 촉을 발휘했다. 뭔가 있다고 느끼고 바로 동인에게 물었다. “얘한테서 정액 냄새가 자주 나거든요.” 양기자는 들으면서도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이 나이대 애들이 거침이 없다고들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보고 듣고 있으니 괜히 손발이 저리고 무서워졌다. 그리고 소녀의 하얀 얼굴을 보니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아이, 라는 고딕체의 굵은 타이틀을 떠올렸다. 직업정신이란. 보아하니 인솔을 맡았던 법원 직원 역시 갑작스러운 상황 전개에 당황해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분위기를 감지한 아이들이나 주변의 사람들마저도 그 자리에 서서 아무 말 없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순간 ‘마녀사냥’을 떠올렸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자신은 ‘재판관’이 아니라 ‘기자’였다. 사실만을 보도하고 진실을 깨우치게 할 ‘의무’를 가진 기자. “저기요.” 우선 어리바리한 직원부터 정신 차리게 만들었다. “예?” “지금 이 학생들 관련 인솔자부터 데려오세요.” “예?” 역시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13세 미만 아동에 대한 성범죄 사건이에요. 고발을 하든, 제보를 하던 책임자가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보아하니 중학생은 아니고, 그럼 초등학생이지. 초등학생이라면 ‘합의하에 성행위’란 것은 없다. 무조건 ‘미성년자 성폭행’이다. 양기자는 머릿속으로 타이틀과 기사내용들이 획획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만약 TV시사 프로그램이었다면 이런 부제가 붙을 법도 하다. ‘―그날 법정에선 무슨 일이?’ 법정에서는 강간현행범에 대한 재판이, 법정 밖에서는 미성년자 성폭력법 위반건이 제보되어. 현재 재판 중인 사건은 사실 크게 기사거리가 되기 어려웠지만, 이 사건은 자신이 손만 본다면 전국구급 사건으로 보도될 수도 있다. 사건 자체는 잘 모르지만 사이드 스토리가 맘에 들었다. 법원에서 이루어진 제보, 보육원에서 생활 중인 아이의 일탈, 게다가 아네스 보육원. 지금껏 언론이나 지역에서는 꽤 호평을 받는 축이었던 아네스 보육원이지만, 실상은 금이 가기 시작한, 언제든지 들추면 꽤 구린내를 풍길법한 곳이라는 것을 양기자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미성년자 성폭행? 재미있다. 직원이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 때 법정에서 참고인 진술을 끝내고 나온 최순경이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양기자님?” 양기자는 마침 잘 됐다는 듯 최순경에게 말했다. “다행이네요. 여기서 이 아이 진술을 받을 조사권을 가진 사람이 없었는데 최순경님이 딱 맞춰 나오셨네. 이제 보니 최순경 일 복이 있어요.” 양기자는 중2병의 제보에서 자신의 추측―집단 성폭행, 혹은 지속적인 성폭력이 이루어졌을 가능성―까지 조리 있게 설명했다. 때마침 보육교사 한 명이 인솔직원과 함께 도착했고, 소미는 결국 최순경과 함께 법원을 빠져나가야 했다. 루치드는 멀어져가는 소미의 등을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 루치드는 법정 견학을 하면서 이 곳의 논리적이며 합리적인 사건 처리 과정에 감동을 받을 정도였다. 사건에 대한 이성적인 접근과 서술―검사의 공소장 낭독과, 죄를 지었더라도 최소한의 합리적 변호―변호사의 모두진술이 허락되는 곳. 모든 사실과 증거를 두고 합리적인 변론과 토론으로서 죄를 평가하고 벌을 정한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고무되어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전의 세계는 몽둥이찜질을 피해 도망가는 사람을 쫓아 등 뒤를 후려치거나, 상대가 울며불며 사정해도 발길질을 멈추지 않던 곳이었다. 이제 그런 곳을 ‘폭력’과 ‘야만’이란 단어로 묘사할 수 있을 만큼 지식이 생긴 루치드였기에 여기서는 더 이상 그런 장면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소미의 모습은 마을에서 봤던 그 아저씨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소미의 그것과 비슷한 냄새를 풍기며 마을에서 쫓겨나던 아저씨. 그 아저씨가 마을을 나갈 때 아무도 그를 붙잡지 않았었다. 오히려 날 선 눈초리와 사나운 욕지기로 그 아저씨의 뒷모습을 배웅했었다. 흙먼지로 덮인, 찢어진 옷가지가 너덜거리는 채로 마을 밖으로 나가던 아저씨의 뒷모습이 소미의 뒷모습에 겹쳐졌다. 달려가 소미를 붙잡았다. “괜찮아?” 루치드는 위로해주고 싶었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소미는 죄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냄새가 나는 게 죄라고?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죄인이 되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였다. 소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눈물 가득한 눈으로 루치드를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고 최순경을 따라갔다. 루치드 외에는 아무도 소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소미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들 소미를 바라보는 눈빛이 변했다. 혀를 차는 어른들도 있었다. 왜 데려 가냐고 말리는 사람도, 잘못이 없다고 변명을 하는 이도 없이 즉석에서 재판이 이루어진 것처럼. 말 한마디에 한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는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루치드는 아직 자신이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없었고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죄를 시인한 사람도 없고, 죄를 확정할 만한 증거가 나온 것도 아닌데, 단 한마디의 ‘말’이 죄를 단정 짓게 하고 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만 모르는 것인가 싶은데, 주변의 아이들도 모르는 눈치다. 다만 동인과 다른 어른들만이 다른 눈빛으로 멀어져가는 소미를 바라봤다. “어린 게 벌써부터…….” “고아원 애들이잖아요.” 고아원. 부모가 없다는 게 죄의 증거가 될 리 없을 텐데. 루치드는 알아야 할 게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단순히 많이 배우고 익혀서 지식을 채우고 마법을 연구한다는 정도로는 부족했다. 알지 못하면 언젠가는 자신도 소미처럼 등을 보이며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존의 개념으로서 각인되었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배워야 한다. 인솔교사가 다시 아이들을 이끌었고 루치드도 명수의 손에 붙잡혀 자리를 떠났다. 양기자는 최순경을 따라갔고, 직원은 잠시 보고를 위해 자리를 피했다. 소미는 떠났고 견학은 계속되었다. 이후 소미는 보육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 [37] 오해(1) 인평시는 물론이고 전국구급 뉴스로 보도가 되었다. 3년여간 딸을 성폭행한 인면수심의 아버지. 보육원에 딸을 맡겨놓고 타지에서 일을 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딸을 추행하기 시작. 같은 원생의 제보로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기까지 수많은 밤을 눈물로 지새우며 공포에 떨어야했던 어린 여자 아이의 충격적인 사연. 이어지는 후속보도. 《그 날, 보육원에서는 무슨 일이.》 《보육교사를 비롯, 원 내의 누구도 소녀의 아픔을 알아채지 못했다》 《보육원의 느슨한 생활 관리 실태를 파헤치다》 원장은 신문지를 구겨다 바닥에 팽개쳤다. “아직도 취재요청이 들어오고 있습니다만, 일단 모두 거절을…….” 사무국장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보려는데, 원장이 홱 고개를 돌려 째려보자 금세 입을 다물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원장은 테이블에 놓인 담배를 다시 하나 꺼내든다. 제자리에서 벌써 4개째를 피워대고 있던 원장이었다. “행정과장님. 이 일을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왜 나한테 화살을 돌리십니까? 라고 묻고 싶지만 애써 참으며 머리를 굴렸다. 사실 지금이 행정과장으로서는 최적의 기회이기도 했다. 이참에 원장과 사무국장을 책임자로서 문책하고 사퇴시키면 될 일, 이라고 판단하고 있던 차였다. 윗선에서 갑자기 자중하고 있으라는 지시만 떨어지지 않았다면 지금껏 모은 서류들을 품에 안고 먼저 달려가 일을 시작하자고 했을 텐데. “…책임자를 문책하고 감독 시스템을 조금 손 봐야 하지 않을까요?” 상식적인 수준에서 일을 처리하자, 라는 말을 조금 풀어서 대답을 했다. 역시 아니나 다를까, 원장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지금 이 사태에 책임자라면 출석을 맡았던 일직 선생님들 아닙니까? 그 선생님들 다 자르자는 말씀이십니까? 예?” 저는 원장님을 말한 겁니다만, 이라는 말이 정말 혀끝까지 나오다못해 입술이 살짝 열리고 첫음절을 발음하기 직전까지 갔지만 최대한의 이성과 인내심을 발휘하여 참아냈다. “원장님의 복안이 어쩌신지 여쭙고 싶군요.” 한 발 물러서며 묻는 듯 공손한 태도, 같이 보이지만 니 속을 니가 밝혀봐라, 라는 뜻임을 모를 원장이 아니었다. 못마땅한 얼굴로 행정과장을 힐끔 보고는 입을 열었다. 담배연기가 새어 나왔다. “이사회에서 아마 공식적으로 논의가 될 것입니다… 만, 귀띔을 듣기로는 윗선에서 보여주기를 해야 한다더군요.” “보여주기라 함은?” “…인적 쇄신이죠.” 아무 말 없이 시선을 깔고 있던 사무국장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행정과장은 말 그대로 행정적 업무를 전담하는 직책. 이 사태에서 책임을 묻기 애매한 자리인 반면, 사무국장은 원장을 대신해 책임을 질 만한 직책으로 적당했다. 사무국장은 사직서를 내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새로운 사무국장은 이사회에서 선임을 할 때까지 공석으로 남겼다. “정이사님, 이번 일은 분명히 원장을 쳐내기 좋은 타이밍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왜 원장을 살려두는 겁니까?” “과장님. 과장님의 마음, 저는 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보육원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저희도 자중해야지요. 이 때다 싶어 함께 춤판을 벌였다가는 개판이 될 겁니다.” 교양 있는 척 나긋나긋 말하는 어투랑 ‘개판’이란 용어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혹시 제가 모르는 부분이 있는 겁니까? 원장을 쳐낼 수 없는 이유를 저는 모르겠습니다.” “너무 직접적으로 물어 오시니 제가 어떻게 말씀드려야 하나……. 그래, 우리 과장님도 이제 아셔야 할 거 같으니 말씀은 드려야겠네요. 저희는 현재 보류중인 정관 개정을 밀고 나갈 생각입니다.” 행정과장은 너무 놀라서 입을 벌렸다. 재단 정관 개정이라니? 정관개정과 함께 선거관리규정, 운영규칙 개정 등이 후속될 계획이라는 정 이사의 말에 머릿속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원장은 내년에 퇴직을 할 겁니다. 자연스럽게 물러나는 거죠. 개정 정관에 따라 임원퇴직금 규정을 적용받게 되는 대신, 저희 쪽에 한 표를 던질 겁니다. 원장과 김 이사, 두 사람이 넘어오면서 개정이 되겠죠.” 원장은 시류를 읽고 빠져나올 틈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안전한 퇴직 절차를 약속받고 대신 권력을 이양한다. 자신의 치부는 묻는다. 대신 표를 옮겨준다. 늙은 너구리의 담배냄새가 몸에 배였는지 여기저기서 냄새가 난다. 이 놈의 빌어먹을 냄새. 보육원은 많은 것이 바뀌었다. 보육교사 2명은 경질되었다. 사무국장이 바뀌는 정도로 책임이 끝나지는 않으니 당직교사도 책임을 져야 하는데, 이 사건은 무려 3년에 걸쳐 벌어진 사건이었기에 2명 모두 사직하는 것으로 일이 처리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보육교사로 무려 4명이 부임하게 되었다. 기존의 관리 시스템이 아이들을 모두 챙기지 못했다는 여론에 대한 대응으로서 이사회는 과감한 선택을 하게 되었다. 보육원 내 아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육교사를 늘리니, 적어도 감시 감독의 역할만은 이전보다 좋아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반대로 아이들의 생활은 좀 더 타이트하게 변했다. 교사가 바뀌었으니, 아이들도 바뀌어야 했다. 첫 번째로, 한동안 외박이 금지되었다. 여론이 다소 누그러지면 외박이 허용될지라도 현재는 외출만 허락하는 상황이 되었다. 외출 시에도 행선지를 분명하게 밝히도록 하며, 허락 없이 시 외부로 나가는 것을 금했다. 두 번째는 방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학년별로 나뉘어 동급생들끼리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갖게 한다는 방침이었는데, 이번을 기회로 아예 남녀 구분을 나누도록 했다.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기획은 좋았으나, 그게 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도―그런 게 다 보여주기의 일환으로서 의미가 있다 하니, 일단 층을 나누어 남자는 3층부터 5층까지, 여자는 1층과 2층을 쓰도록 했다. 다영은 중학생 언니 한명과 함께 방을 쓰게 되었다. 함께 방을 쓰며 생활해왔던 다영은 갑작스런 소미의 부재로 인해 상당히 혼란스러워했다. 특히 소미가 겪었을 아픔을 자신이 전혀 몰랐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다행히 함께 방을 쓰게 된 언니가 잘 다독여줘서 며칠이 지난 지금은 다소 안정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루치드를 비롯한 초등학교 남학생들은, 원래 낮은 학년이었기에 아래층을 쓰고 있었는데 남녀분리정책에 따라 기존의 1층에서 3층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우와, 여기서는 저기 길 다 보인다, 석고야!” 명수는 더 높이 올라가게 되었다는 사실에 좋아했다―어쩌면 층이 안변했어도 좋아했을 것 같다. 오르거나 말거나 명수는 그저 보육원 이삿날 가장 들떠있던 아이였다. 형근은 학교도 제일 위층에 있는 교실을 쓰기에 매일 아침마다 계단을 오르는 게 귀찮았다고 했다. 그런데 보육원마저도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게 되었다고 짜증을 부렸다. “운동장 나가기가 힘들어졌어.” 철용은 간단하게 소감을 말했다. 루치드는 새로 바뀐 보육교사를 찾아갔다. “법원 가기 전날 소미누나한테 빌린 책이 있는데 어떡하죠?” “누구?” “소미누나요.” 바뀐 보육교사는 잠깐 생각하다가 곧 그 이름의 주인을 떠올리고는 얼굴을 굳혔다. “괜찮을 거야. 이미 소미 짐을 다 빼서 다른 곳으로 옮겼어. 그러니 그 책은 그냥 니가 가져도 될 거야.” 소미는 다른 시의 보육원으로 옮겨갔는데 최순경을 따라간 뒤로는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았다. 남아있던 짐들은 지도원 선생님들이 모두 챙겨서 소미가 옮기게 된 보육원으로 보냈다. 그래서 루치드는 미처 빌린 책을 반납하지 못했다. 교사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선 루치드는 방으로 돌아왔다. 한참을 침대 위에 앉아 책의 제목을 들여다보았다. 잠시 후, 『더러운 나의 불행 너에게 덜어 줄게』 라는 제목의 책이 책꽂이에 올려졌다. 루치드는 방학동안 더욱 미친 듯이 책에 매달렸다. 이제 그에게 공부는 죽느냐 사느냐의 선택과도 같은 문제가 되었다. 비단 소미의 사건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이 부족해서 생긴 문제들, 자신이 아는 것이 부족했기에 통제할 수 없었던 상황들, 자신의 힘이 약해서 벌어진 일들 모두 결국은 자신의 배움이 일천한 까닭이었다. 무슬라의 죽음 이후, 한동안 깊은 슬픔과 무기력에 빠져 있던 루치드는 소미의 사건 이후 기력을 회복했다. 아니 회복한 것처럼 보였다. 이전에는 검은 아우라를 두른 것처럼 생기 잃은 시체마냥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자아냈었다면, 지금은 다소 생기가 돌아온 대신 대부분의 시간을 독서에 바친 것처럼 보였다. 루치드가 책을 읽을 때면 보육교사들마저 말을 걸기가 무서울 정도로 열을 내며 독서에 몰두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독서는 치열한 생존의 투쟁이었다. 자신의 손에 들린 책을 모두 읽고 이해하지 못하면 또 다시 무기력한 상황에 놓이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가 늘 그를 짓눌렀다. 더 이상 독서는 세상의 신비를 알아가는 여행이 아니었다. 턱 밑까지 다다른 스크로파의 송곳니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혈투였다. 그래서 그의 독서는 치열했고, 화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질 만큼 뜨거웠던 것이다. 그 치열함과 정열이 소녀들의 눈에는 좋게 보였는지 보육원 내에서 루치드가 책을 읽고 있을 때면, 몰래 찾아와 엿보는 소녀가 늘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각’같은 외모 때문에 ‘석고’라고 불리는 소년이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은 어떤 정물화보다도 빛나는 그림이었다. 보육원 내에 존재하는 모든 책을 거의 다 읽었다고 소문이 날 정도로 몰두했던 탓인지, 방학이 끝나기 2주 전쯤 루치드는 보육교사의 허락을 받아 외출을 할 수 있었다. 그날, 루치드는 처음으로 시립 도서관을 가게 되었다. “여기 처음 와보지?” 같이 외출을 나온 고등학생 누나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예.” “어때?” “되게… 많네요. 책이.” 루치드는 오랜만에 웃음을 지었다. ======================================= [38] 오해(2) 윤정은 눈이 작고 콧대가 그리 높지 않지만 얼굴이 작고 입술도 흔한 표현처럼 ‘앵두’같이 작고 도톰해서 마치 순정만화체의 인형 같은 이미지였다. 덕분에 주로 ‘귀엽다’는 말을 자주 듣곤 했다. 하지만 이미지와 달리 욕심이 남다르게 강한 편이었다. 특히 식탐이 강한데, 그에 비해 먹는 양이 많지는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미각적 자극에 특이하게 집착하는 면이 있었다. 그래서 뭐든지 먹을 것만 있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달려들었다. 예를 들면, 반에서 한 친구가 간식거리를 가지고 왔을 때, 윤정은 여지없이 냄새를 맡고 나타난다. “어, 이거 뭐야? 나 한입만!” 그녀는 적어도 상대의 허락이 있기 전까지 손대지 않는 매너는 갖추고 있었다. “마카롱인데…….” “아, 이게 마카롱이야? 말로만 들었지, 처음 봐!” 그리고 눈을 빛내며 상대를 쳐다본다. 인형 같은 귀여움은 동성의 친구들에게도 인정사정없는 폭격을 가했다. 그 모습을 보며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듯, 이라고 친구들은 생각했다. “하나 먹어.” 그 순간부터, 윤정은 햄스터처럼 두 손으로 마카롱을 들고 오물오물 씹어 먹는다. 먹는 것에 있어서는 경건한 태도로, 맛을 음미할 때는 세상의 진리를 탐구하는 자세로 대한다. 이 모습을 친구들이 보기에, 윤기가 흐르는 보드라운 털을 가진 햄스터 한 마리가 꼬물대며 먹이를 먹는 모습으로 보인다는 것을 윤정은 몰랐다. 그리고 그 모습을 기대하며 친구들이 먹을 것을 ‘일부러’ 가지고 온다는 것도 몰랐다. 윤정이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보육원에 정말 귀여운 애가 한 명 들어왔다. 얼굴이 조각같이 잘생겼다며 친구들이 떠들어도 사실 관심이 가진 않았다. 초등학교 1학년의 외모에 관심을 가질 시간에 좀 더 맛을 탐구하기 위해 시간을 쓰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보육교사의 허락 하에―식당에서 아주머니들을 돕는 유일한 학생이었다. 그 일을 돕는 대가로 아주머니들에게 요리를 배우거나, 남은 재료를 이용해 특이한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그러던 어느 날, 소문의 아이가 식당에서 밥을 먹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와.”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옆의 친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거봐, 잘생겼지? 쪼그만 애가 어떻게 저렇게 생겼을까? 쟤 크면 진짜 한 인물 할 거 같지 않니?” 윤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윤정이 감탄한 것은 그 아이의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진정 감탄한 것은 그 아이가 식판에 둔 음식을 대하는 태도였다. ‘저런 경건함이라니!’ 밥알 하나, 반찬 하나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나하나를 음미할 줄 아는 아이였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그냥 ‘먹는 행위’로만 보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전문가(?)인 자신은 알아볼 수 있었다. 저 아이가 자신만큼이나 음식에 대한 리스펙트(?)를 가진 이라는 것을! 윤정은 가끔씩 특식이 나올 때면 배식을 담당하기도 했는데, 괜히 그 아이가 오면 조금 더 양을 준다거나, 속이 꽉 찬 것을 주는 식으로 대우를 해주었다. ‘쟤는 그런 대접을 받을 가치가 있어.’ 보육원이 좋지 않은 사건으로 언론의 집중 포화에 시달리다가 겨우 벗어났을 무렵, 보육교사 한 명이 찾아왔다. “초등 중에 책을 좋아하는 애가 한 명 있는데, 걔가 도서관에 가고 싶어 하거든, 그런데 같이 가줄 사람이 필요한데, 혹시 주말에 시간되니?” “혹시 ‘석고’예요?” “어머, 니들도 걔를 ‘석고’라고 부르니? 걔네 또래 애들만 그렇게 부르는 줄 알았는데?” “저희 다 그렇게 불러요. 잘 생겼잖아요.” 잘 먹기도 하구요. 굳이 입 밖으로 꺼낼 말은 아니어서 하지는 않았지만 속내는 그랬다. 마침 자기도 주말에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 나갈 일이 있기도 했는데 데리고 가는 것은 별 문제가 없다 싶었다. 그리고 나간 김에 바깥 음식도 한 번 먹여주면서 그 모습을 관찰해 보고 싶기도 했다. 마치―자신은 여태껏 모르고 있다지만―친구들이 자신을 관찰하고 싶어 하는 마음처럼 말이다. **** 자 이거 한 번 먹어봐. 저것도. 이것도 먹어볼래? 시내로 나가서 도서관으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식탐원정대’라 불릴만한 길이었다. 길거리에 있는 각종 먹거리부터, 골목 구석의 분식집들까지 다 찾아다니며 조금씩 한입씩 군것질을 했다. 대형 마트라도 갔으면 그야말로 나스카레이싱 뺨치는 속도로 하루 종일 돌고, 돌고, 또 돌았을 일이었다. 다행히도 목적지는 도서관이었기에 이 정도로 끝났다 싶을 정도였다. 눈빛을 반짝이며 윤정이 물었다. “어때?” “되게… 많네요. 책이.” 도서관에 들어서며 루치드는 오랜만에 웃음을 지었다. 반면 도서관에 음식을 들고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손에 들고 있던 마지막 닭꼬치를 루치드에 입에 넣어줬던 윤정은 아기 햄스터(?)같은 표정으로 꼭꼭 씹어 먹는 소년의 표정을 감상하다가 물음을 던졌던 것인데……. “맛은?” “아, 맛있었어요. 닭꼬치.” 아, 저 미소! 정말, “너 내동생해라.”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네?” “어?” “…….” 속으로만 생각했던 말이 절로 튀어나왔던 탓에 윤정도 당황하고, 루치드도 어리둥절했다. 윤정이 피식 웃으며 루치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 소기의 성과(?)는 달성했기에 내심 뿌듯했던 윤정은 미소를 지으며 물음을 던졌다. “그럼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모르겠어요. 언제까지 있을 수 있어요?” “음, 그래도 6시까지는 돌아가야 하니깐 5시에는 여기서 나와야겠지? 누나는 약속이 있어서 잠깐 어딜 좀 갔다 와야 돼. 그러니깐 여기서 얌전하게 책보면서 기다려. 알았지? 혹시 궁금하게 있으면 저기 저 데스크에 있는 선생님한테 부탁하면 될 거야. 알았지?” “예.” “그래도 너 혼자 두는 게 걱정돼서 금방 올 거야. 2시간 정도? 그러니깐 그 때가지는 잘 참아야 돼. 무섭다고 울지 말고?” “예, 다녀오세요. 저 책보고 있을게요.” “아이, 어쩜 이렇게 말도 잘하니?” 도서관은 영유아 아동들을 위한 자료실과 일반 성인들을 위한 일반 자료실로 구분이 되어 있었다. 루치드는 당연히, 일반 자료실로 들어가서 책을 보기 시작했다. 최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는 단연 물리학이었다. 수학과도 연계가 되는 중학교 1학년 수준의 물리학은 어렵긴 해도 이해를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고 오히려 공부하기에 효율이 좋은 분야였다. 다만 독학이다 보니 진도를 나가는 수준이 다소 떨어지는 면은 있었다. 대신 여러 책들을 참조하여 보면서 깊이 있게 이해를 해나가도록 했다. 빨리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 탓이었다. -찰칵! 작은 소음이 터졌지만, 루치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다. 그만큼 책에 몰두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때문에 자기 주위를 맴도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사람들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소년을 구경했다. 어려보이는 아이가 『물리』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들을 옆에 쌓아두고 읽는 모습이 특이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 아이의 외모였다. 그래서 몇 몇 사람들이 몰래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 몇몇은 SNS에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주말 도서관행. 오늘도 열심히 공부를. 그런데 도서관에 이런 귀여운 꼬마가! #도서관 #열공 #어린왕자 ―오늘 친구들이랑 #도서관에 왔어요. 그리고 #그림같이 #잘생긴 #꼬마아이를 봤어요! 어때요? ―세상에 영재가 많다고는 들었는데 오늘 그 영재를 봤다. 그런데 잘생기기까지! #영재 #영재교육 #세상은 불공평 수군거림이 커지고 몇 몇의 불만이 커지자 직원이 나서서 정리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런데도 아이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고개도 움직이지 않고, 오로지 페이지를 넘길 때만 손가락이 까딱 움직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속으로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를 데리고 왔던 부모들은 조용히 소년을 가리키며 “너도 저 애처럼 공부해야 나중에 성공할 수 있어.” 라고 소곤거렸고, 친구들이랑 공부하러 왔다가 책가방만 던져두고 돌아다니던 아이들은 자극을 받아 책장으로 가서 책을 골랐다. 소란스런 분위기에 짜증을 내려던 어른들은 아이를 보고 나라의 미래가 밝다며 흐뭇해 하셨다. 그 날, 도서관은 모처럼 독서 열풍에 휩싸여 너도나도 독서에 몰입했다. 같은 날, SNS에 올라온 사진을 보며 사람들은 새로운 도서관 광고냐며 ‘좋아요’를 눌렀다. 윤정이 와서 보니, 그날따라 사람들이 열을 내며 독서에 열중하고 있었다. 책을 고르는 사람들, 책을 읽는 사람들로 자료실이 북적거린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유독 빛을 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루치드였다. 윤정은 차마 그 집중하는 모습을 방해하기 싫어 5시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 사이 분위기에 휩쓸려 저도 모르게 책 한 권을 꺼내 읽었던 것은 덤이었다. **** “관장님, 며칠 전 SNS상에 올라온 사진 때문에 저희 도서관을 방문한 사람들이 늘었다는 보고 들으셨죠?” “아, 그래요. 제가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도통 실감이 안나요. 이런 게 입소문인가 싶기도 하고.” 헛헛한 웃음을 짓는 관장을 마주보며 관리과장이 말을 이었다. “예, 그 때문에 저희 직원 한 명이 기획 하나를 발안했습니다.” “어떤 거죠?” “요점만 말씀드리자면 광고를 하나 찍어서 홍보하자는 겁니다. 그 아이를 모델로 해서.” 관장이 잠시 생각하는 틈을 보이자 과장은 태블릿에 띄어진 사진을 들이밀었다. “어차피 저희는 이번 가을맞이 기획전도 준비하고 있던 터라 홍보물도 준비해야 되는데, 마침 좋은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기성모델보다 신선하고 그림도 괜찮다는 평입니다.” “…그런가요?” 기성모델이 아니니까 광고비가 조금 줄어들지도 모르겠다, 라는 말은 삼켰다. 어차피 다 아는 사실을 꺼내서 속물처럼 보일 필요가 있나. 홍보 이미지 효과가 좋을 것이다, 라는 포장이면 만사형통일지니. “그 아이는 누굽니까?” “처음엔 잘 몰랐는데 말입니다. 마침 그날 데스크 직원이 그 아이를 알고 있었습니다. 아네스 보육원에 있는 아이라고 하더라고요.” “보육원이요?” “예.” “…협조 공문 보내보세요. 아니, 한 번 찾아가보죠. 어쩌면 좋은 기획 하나 만들 수 있겠네요.” ======================================= [39] 오해(3) 루치드 생애 첫 방학이 끝나가고 있었다. 방학 숙제도 ― 윤정의 도움이 있었다 ― 미리 다 해놨고, 방과 후 수업도 개학을 앞둔 3주 전부터는 하지 않아서 시간이 남아 돌았다. 덕분에 시립도서관을 방문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 소년은 원 없이 많은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이 보육원에서 맛보지 못했던 다양한 먹거리들을 체험해 볼 수도 있었는데, 역시 윤정의 도움이 컸다. 덕분에 조금 마른 체형이었던 몸에 살이 붙기 시작했다. 어느새 개학이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명수는 방학숙제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침부터 운동장에 나가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명수가 함께 놀자며 졸랐지만, 오늘 특별 면담이 있다는 이유로 도서관에도 가지 못했기에 그 핑계로 방에 남았다. 도서관에 가지 못해 아쉽긴 했지만, 그렇다고 할 게 없어 노는 것은 아니었다. 책상 위에 연필을 굴렸다. 가로 누워 또르르 굴러가던 연필이 갑자기 급브레이크라도 밟은 듯이 멈췄다. 루치드는 연필을 집어 다시 책상 한 끝에서 다른 쪽으로 굴렸다. 그리고 또 연필은 잘 굴러가다가 책상 중간쯤에서 우뚝 멈춰버렸다. “마찰력을 최대한 높이면 멈추게 할 수도 있구나.” 루치드는 지금 물리학 실험을 빙자한 마법 수련을 하고 있었다. 임의로 정한 마찰계수를 최대한 높여 평면상에서 구르던 물체를 멈추게 하는 실험이었다. 이제까지는 ‘미끄러진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는데, ‘마찰력’을 공부한 뒤부터는 다양한 응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임의의 수치를 조건(챕터)으로 마찰력을 설정할 수 있게 되면서 루치드는 수학까지 활용하여 마찰력을 실험할 수 있었다. “변수가 많구나.” 일단 마찰계수에 대해 임의의 수치를 지정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자신이 연필을 굴리는 힘에 대해서는 정확히 측정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항상 똑같은 힘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궁리를 하다가 문득 책꽂이에 꽂힌 소미의 책을 보았다. 책꽂이에 놓여 있던 책을 기울여 그 위에 연필을 놓으면 아래로 구른다. 얼마 전 ‘중력’의 힘이라는 것을 배웠다. 중력은―물체의 질량과 거리가 일정하다는 조건하에서―언제나 일정하다, 고 알고 있다. 때문에 경사각을 고정하고 지정한 위치에서 연필을 놓았을 때 적용되는 힘은 언제나 ‘중력’에 의해 일정해 질 것이다. 이럴 때 마찰력―정확히는 마찰계수―을 변화시키면서 구르는 물체의 변화를 관찰해보면 어떨까? 물리학 영재소년 루치드가 탄생하는 순간, 이라고 하면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또래들보다, 아니 중고등 교육을 포함한 이 곳의 교육 시스템 하에서 가장 진취적인 학습법으로 물리학을 공부하는 루치드였다. 아쉬운 점은 루치드가 아직 사인(sinθ)과 코사인(cosθ)을 배우지 못해서 제대로 계산을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마찰계수를 독립변수로 가장 기초적인 현상 변화 관찰 정도에만 그치고 있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아쉬움과 별개로 마법의 응용력이 늘었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단순히 인지적, 추상적인 수준에서 마법을 구사할 때와 달리 정확한 수치를 지정하여 마법을 시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난이도였지만 마법의 활용도는 더욱 높아졌다. 미래의 천재 물리학자가 될지도 모를 루치드의 마법 실험은 보육교사의 방문으로 중지되었다. “원장님이 부르시는구나.” 루치드가 보육교사에게 다가가자, 빠르게 위아래를 훑으며 소년의 옷매무새를 정리해준 보육교사는 소년을 데리고 원장실로 향했다. “왔구나. 거기 앉거라. 주스 마실래?” 매 번 원장실에 오면 주스를 마셔야 하는 건지 궁금했지만, 사양은 하지 않았다. “그래, 요즘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소문이 자자하더구나. 선생님은 그 이야기를 듣고 아주 기뻤다. 사실 선생님은 말이야, 사람은 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꿈이 없으면 목표가 없는 것이고, 목표가 없으면 이 세상을 살기 힘들어. 그래서 어릴 때부터 목표를 세우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학생이 해야 할 본분인거지. 너는 학생으로서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인간으로서의 준비를 잘 해나가고 있는 거고. 그래서 선생님이 학생을 칭찬하고 싶어서 불렀어.” 칭찬 한마디 하자고 불렀을 리가 없다, 고 생각은 했지만 루치드도 이제 알만큼은 아는 아이였기에 얌전하게 주스를 마셨다. 이제는 이 주스 맛이 그렇게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은 모두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라지. 선생님도 그렇고 여기 함께 생활하는 형들이나 누나들도 그럴 거다. 그런데 이 세상은 사실 그게 힘들다. 예를 들어서, 이 세상에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항상 얼굴에 인상 쓰고 다니거나, 아니면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도둑질이나 하고, 그러다가 잡혀서 감옥에 가는 사람도 있어. 왜 그런 사람들이 있겠니? 그 사람들은 어릴 때 꿈이 없어서 그래. 꿈이 없고 목표가 없어서 공부도 게을리 하고 맨날 놀기만 하다 보니 직업도 제대로 못 가지게 되고, 그러다가 먹고 사는 게 힘들어서 범죄를 저지르는 거야. 선생님이 말하고 싶은 건, 바로 학생처럼 어릴 때부터 꿈과 희망을 가지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라는 거다. 그리고 학생의 본분에 맞게 열심히 공부하는 자세를 갖는 거지. 그래야 범죄자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게 되고 이 힘든 세상도 잘 이겨내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거야. 우리 학생은 그런 면에서 아주 모범적인 학생이라고 할 수 있어.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열심히 하잖아. 그치?” 루치드는 원장의 이야기가 ‘합리적’이지 못하다, 고 생각을 했다. 함께 방을 쓰는 명수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그렇다고 그 아이가 나쁘게 변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명수는, 적어도 자신이 지금껏 살면서 겪어본 사람들 중 가장 활발하고 가장 명랑하고 가장 긍정적이며 가장 착한 친구였다. 그리고 설령 그 아이가 앞으로 공부를 안 한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범죄자가 된다는 말은 납득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루치드는 이미 그런 사람들이 모여 이룬 마을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들, 심지어 부모님까지 그런 류의 범죄자로 단정 짓는 원장의 이야기에 루치드는 동의할 수 없었다. “사실 우리 보육원이 학생과 같이 어려운 상황에 놓인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많이 불편하거나 힘든 부분도 있을 거야. 하지만 그런 걸 불평하고 불만만 가지고 생활하는 건 옳지 못한 행동인거지. 그래서 선생님은 우리 학생이 더더욱 자랑스럽고, 또 예쁘다고 생각해. 물론 미안하기도 하지. 우리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더 많이 돕고 싶은데 여건이 되지 못해서 말이다. 그래도 선생님들이 우리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진짜 부모와도 다를 게 없을 거야. 그렇지요 과장님?” 너구리가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리며 동의를 구하는데, 그 앞에다 대고 글쎄요, 라고 어깃장을 놓고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과장은 그저 억지스럽지 않게 보이도록 미소를 지으며 보조 연기자 역할에 충실히 임했다. “그리고 말이죠, 우리 학생이 이번에 도서관에 갔다가 아주 좋은 모습을 보여서 공부하는 학생으로서의 귀감이 되었다던데. 그 때문에 인터넷에서도 공부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우리 학생에 대해 바른 학생이라는 칭찬이 자자하더라고.”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대사가 없는 과장은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때문에 도서관에서 우리 쪽으로 부탁을 해왔단다.” 주스가 담긴 컵을 입에 물다가 드디어 본론? 이란 생각에 눈을 들어 원장과 눈을 맞췄다. 잠시 쉼표를 찍듯 말을 멈춘 원장이 소년의 반응에 즐거워하며 말을 이었다. “도서관에서 우리 학생을 모델로 해서 광고를 찍고 싶다고 하네. 학생의 공부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우리 시 전체에 홍보용으로 알릴 거라는 구나. 어떠니? 아마 학생으로서는 조금 놀랄만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좋은 경험이 되지 않겠어?” “저요?” “그래. 뭐, 너무 부담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사진만 찍는 거니까, 그냥 잠깐 포즈만 취하면 되는 거고. 대신 이 일을 하게 되면 도서관에서 너에게 명예 홍보 대사로서 다양한 혜택을 제공해주겠다고 했다. 너로서도 명예로운 일이 될 테니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거다.” 다소 어정쩡한 태도로 컵을 만지작거리는 아이의 모습에 살짝 불안한 느낌이 들었나보다. “힘든 일은 없을 거다. 그냥 사진만 찍는 거라니까 가서 아저씨들 말만 잘 들으면 금방 끝날 일이지. 대신에… 대신 니 사진이 인평시 전체에 널리 알려지게 되는 거란다. 신나지 않느냐? 마치 연예인들처럼 말이다.” 과장이 아무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구리가 아무리 교활하고 정치적 권모술수에 능한 이라 해도 상대는 아이다. 아이가 뭘 원하는지를 전혀 모르니 겉만 번지르르하게 말을 포장하는 원장이었다. 빛 좋은 개살구가 딱 저 꼴을 일컬음이리라. 결국 참다못해 개입을 선언! “혹시 뭐 원하는 거 있니? 만약 니가 도서관 홍보 모델로 활동한다면 대신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을 거 같은데 말이다. 물론 우리가 들어줄 수 있는 걸로.” 보조 연기자의 애드리브가 맘에 들지 않았던 원장이 소리 나지 않게 눈치를 줬다. 과장이 헛기침을 하며 몸을 바로 세우는데 아이가 입을 열었다. “원하는 거 말하면 들어주실 수 있나요?” “어, 그래. 물론이지. 물론 너무 어려운 거면 우리가 들어주기 힘들지만 우리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들어줘야지.” 아이의 반응에 황급히 태세 전환을 시도하는 너구리는 다 들어줄 것처럼 하면서도 단서를 달았다. “책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책을 많이 읽고 싶거든요.” “책?” 너구리는 이 아이가 평소에 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에 대해 들은 바가 없어 전혀 알지 못했고, 과장 역시 잘 알지 못하지만 우선은 몇 권의 책이 얼마의 금액으로 구매가능하며, 어떤 식으로 조달했을 때 가장 효율적일지를 머릿속으로 계산해 보았다. 책 한 권으로 퉁치기에는 생색내기도 어려워 보이고, 그렇다고 너무 많은 책은 비용 절감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현 보육원의 정책상 맞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다섯 명의 인원―두 명의 보육교사와 세 명의 생활지도원을 추가하는 비용만 가지고도 이사회에서 어려운 결정을 했다는데. “그래, 일단 알겠다. 그럼 우리가 그 소원을 들어 줄 테니 모델을 해 보겠니?” “예, 그럴게요.” 우선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보는 원장이었다. 어차피 돈 계산은 행정과장이 할 테고, 자신은 적당한 수준에서 결정만 지으면 될 일이었다. 루치드는 꾸벅 인사하고 돌아섰다. 미래의 물리학자는 우선 시립도서관 홍보모델이 되었다. ======================================= [40] 오해(4) 며칠 뒤, 루치드는 이른 아침부터 외출을 준비했다. 지도원 한 명이 붙어서 씻기고 입혔다. 가진 옷이 많지 않아 고르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저 깨끗한 이미지면 된다는 윗분의 지시가 있었지만, 루치드의 평소 생활은 조선시대 선비의 환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정숙하고 고아하였다. 때문에 소년의 옷들 대부분이 단정하고 깨끗해서 딱히 손 볼 게 없었다. 이후 보육교사와 함께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오늘의 촬영은 세트장 안에 준비된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촬영하는 것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기껏 골라온 옷은 금방 벗어 던졌다. 스태프-코디네이터가 미리 준비해 둔 여러 벌의 의상들을 번갈아가며 입기 위해서였다. 스튜디오 한 편에서 미리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 입고, 헤어메이크업을 받고, 스태프가 건네 준 책을 받아 들고는, 스태프들이 조명을 키고, 사진작가가 현장을 최종 조율한 뒤 촬영이 시작되었다. 내심 책 한 편 읽고 있으면 금방 끝나겠지, 라는 마음으로 차분히 있으려고 했다. 하지만 현장은 각종 소음과 번잡한 움직임으로 인해 방학식이 열리는 학교운동장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혼잡하고 북적거렸다. 고개를 들고, 약간 숙이고, 허리 세우고, 어깨를 약간 왼쪽으로 기울이고, 립밤 한 번 바르고, 머리를 다시 한 번 정리하고, 책상 각도를 체크하고, 조명 한 번 바꾸고, 카메라를 반대편으로 이동하느라 루치드는 책을 제대로 펼칠 여유가 없었다. 촬영 중간 중간에 쉬는 타임이 있을 때면 여자 스태프들이 찾아와서 같이 사진 찍자고 들러붙고, 밥 먹을 때도 핸드폰을 들이밀고, 의상을 갈아입다가도 불쑥 내밀어진 렌즈를 바라보며 표정을 굳혀야 했다. 정신없이 사람들의 지시에 따르다 보니 어느새 촬영이 끝이 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스태프들이 서로의 수고를 격려하고 인사를 하는 사이에 루치드는 스튜디오를 빠져나왔다. 보육교사는 루치드를 차에 태우며 물었다. “수고 많았어. 재미있었니?” 재미를 느낄 여유가 없었다.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정신이 없었다. 아예 혼이 빠져나간 인형이 되었던 것 같았다. 덕분에 스태프가 건네준 책은 한 페이지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사실은 책 제목도 잘 생각이 나질 않았다. **** 촬영을 끝내고 돌아온 날 밤, 루치드는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원장이 해 준 길고 지루한 이야기 중에 루치드를 고민하게 만든 주제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내 꿈은 무엇일까?’ 원장과의 면담자리에서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느라 제대로 곱씹을 여유가 없었다. 지나고 나니 머릿속에서 그 질문만이 꽃을 찾는 꿀벌처럼 맴돌았다. 돌이켜보면, 가족의 실종 이전부터 루치드는 딱히 꿈이란 것을 갖지 못했었다. 가질 생각조차 못했던 삶이기도 했다. 나무꾼? 약초꾼? 장사꾼? 사냥꾼? 어느 것도 자신의 꿈은 아니었다. 그저 하루하루 가족들의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숲을 들락거렸을 뿐이었다. 이곳으로 온 뒤에는 변화된 사회와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매일 분투를 벌이다시피 신경을 곤두 세우고만 있었다. 마법을 배웠을 때도, 딱히 마법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진 않았던 것 같았다. 무슬라의 죽음 이후에는 자신의 힘이 약하다는 사실에 절감하며 조금이라도 많은 것을 배우고 힘을 기르자는 생각에 미친 듯이 공부에 몰두했지만, 그것을 자신의 ‘꿈’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루치드는 명수에게 물었다. “넌 꿈이 뭐야?” “나? 난… 부자가 될 거야.” “부자?” “응, 그래서 우리 집에 운동장을 만들 거야. 하루 종일 친구들이랑 놀 수 있게. 그때는 너도 마음대로 운동장에 나와도 돼.” “그렇구나.” 루치드는 두 가지를 알게 되었다. 첫째, 명수는 친구가 운동장에 나오지 않는 이유를 누군가가 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은 운동장에 나가서 놀고 싶어 한다’는 전제가 성립해야 하지만, 명수에게 논리학을 들이대는 우행(愚行)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둘째, 명수는 꽤 소박하지만, 그래도 ‘꿈’을 가지고 있었다. “어, 어, 근데 또 난 옷가게 사장도 할 거야. 그래서 맨날 멋진 옷 입고 다닐 거야. 너도 하나줄게.” 셋째, 명수는 착하다. “아, 그리고 슈퍼마켓도 할 거야. 그래서 맨날 과자 먹을 거야. 매일 다른 거 먹을 수 있으니까.” 넷째, 명수의 꿈은 끝이 없었다. 그리고 저렇게 꿈 많고 소박한 아이가 범죄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 동인은 그 날 이후, 말수가 줄었다. 학교에서나 보육원에서나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생활하지만, 입을 여는 횟수는 확연히 줄었다. 학교 친구들은 그저 가을이니까, 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보육원에서는 티가 나게 말문을 닫아 걸어서 보육교사나 지도원 선생님들의 걱정을 샀다. 트레이드마크 같았던 환한 미소도 그 이후에는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무슨 일 있니?” 괜히 걱정이 된 생활지도원이 동인에게 물었다. 동인은, “아니요.” 라고 말하며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사실 동인은, “소미가 그렇게 된 건 니 책임이 아니란다. 너무 마음 쓰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사실은 자신이 소미에게 잘못했다. 자신이 그녀를 ‘걸레’로 취급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그렇게 심한 말로 ‘모욕’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계기가 어떻든 결과적으로 소미는 더 이상 아버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잘 된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동인은 마음 한 구석에 바위를 얹어 놓은 듯 답답함을 느꼈다. 소미는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팠다. 차라리 소미가 그 자리에서 화를 내거나, 혹은 소리라도 질렀다면 뭐라도 정리가 되었을 텐데. 동인은 그 날 이후 엉망으로 쓰러진 도미노 게임같이 난장판인 상태로 살아가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그 사건에 대해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친구들의 태도가 변함이 없었지만, 보육원 내에서는 어쩐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들이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 또래들, 형이나 누나들. 보육교사와 지도원 선생님. 모두 자신을 한심한 녀석, 못난 녀석, 나쁜 놈으로 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어쩌면, 학교에서도 알지도 몰라…….’ 그래서 웃고 있기가 힘들었다. 말 한마디도 꺼내기가 무서웠다. “뭘 잘했다고 떠들어!” “너 뻔뻔하다?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수가 있어?” “사람을 그렇게 몰아세우고 몰랐다고 하면 끝이야?” “그렇게 당당하게 이야기 하더니? 왜 물먹은 휴지 꼴이야?” 모두들 한 목소리로 ‘니가 소미를 쫓아 낸 거야!’ 라고 몰아붙이는 것 같았다. “아니야! 난 소미를 보호해주고 싶었다고!”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들어줄 사람도 없었다. 동인의 속앓이는 계속되었다. 방학이 끝나기 하루 전, 보육원 현관 알림판에 광고지가 하나 걸렸다. 동인은 식당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눈에 띄어 바라보니, 시립도서관 홍보용 광고였다. 잘 생긴 소년이 진지한 얼굴로 책을 보고 있었다. 소년에게서 묘한 분위기가 흘러 나와 계속 바라보게 만드는, 그런 광고였다. 예전에는 저 아이를 잘 몰랐다. 원래 보육원내에서 활발하게 교우관계를 가졌던 것도 아니었고, 가끔 오가다가 마주친다 해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 날 이후, 저 아이를 잊을 수 없게 되었다. 경찰과 함께 법원을 떠나려는 소미에게 달려간 유일한 아이. 소미를 붙잡고 안부를 묻던 모습, 그리고 그 아이를 바라보던 소미의 표정까지. 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바라볼 때와 전혀 다른 표정과 눈빛을 저 아이에게 보냈다. 어쩐지 자신의 것을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도둑맞은 느낌. 강탈당한 기분. 자신은 이렇게 엉망인데 저 아이는 자신의 것을 빼앗은 것으로도 모자라 이렇게 광고까지 찍고 얼굴을 팔고 다녔다. 마침, 그 아이가 식사를 마치고 보육원 현관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동인은 그 아이, 루치드를 쳐다보았다. 명수가 루치드 옆에 매달려 칭얼대고 있었다. “같이 나가자. 나도 도서관 갈래. 도서관 가고 싶어.” 그럴 리가. 그냥 보육원 바깥으로 외출을 나간다는 것이 목적일 것이다. 하지만 루치드로서는 명수를 나가게 해 줄 권한이 없다. “선생님한테 말해봐.” “니가 말해줘, 니가. 나랑 같이 도서관 가고 싶다고 말해봐.” 말해주는 정도는 해줄 수 있지만, 과연 선생님들이 허락을 하실지는 모르겠다. “너는 선생님한테 졸라야지, 왜 엄한 친구한테 조르고 있어? 직접 가서 가고 싶다고 이야기해.” 언제 뒤에서 따라왔는지, 윤정이 명수의 채근을 나무랐다. 명수는 찔끔하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선생님한테 이야기하는 건 무서워요.” “선생님이 너 때려?” “아니요.” “선생님이 너 괴롭혀?” “아니요.” “그런데 왜 무서워?” “원래 선생님은 무서운 거예요.” 우문현답이라는 생각에, 윤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래도 외출 허락을 받으려면 직접 가서 이야기해야 되는 거야.” 시무룩해진 명수를 보더니, 마음이 약해진 윤정이 명수에게 제안을 했다. “그럼 누나가 옆에 있어 줄 테니까, 같이 선생님한테 가서 허락받자. 알았지?” “그냥 누나가 이야기 해주면 안돼요?” “안 돼.” 어쩔 수 없이 명수는 누나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루치드 역시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피식 웃으며 위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야, 너. 거기 서봐.” 누군가 자신을 불렀다. 루치드가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찾으니, 동인이었다. 법원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루치드는 그를 기억해내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이리 와봐.” 루치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몸을 돌려 동인에게 다가갔다. ======================================= [41] 오해(5) 가까이서 본 루치드는 광고 사진 속의 얼굴보다 훨씬 신비스러운 느낌이었다. 문득 이런 얼굴에 소미가 호감을 나타냈으리라 생각하니, 동인은 괜히 화가 났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야.” “예?” 영문을 모른다는 듯, 순진한 ‘척’을 하는 저 얼굴을 보니 가슴 속에 바위가 하나 더 얹어지는 느낌이었다. “너 왜 째려봐?” “예?” 루치드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동인을 쳐다보았다. 몇 번 본적도 없던 형이 갑자기 자길 불러 세우고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새끼야, 왜 째려 보냐고?” 양끝이 치켜세워진 눈썹 사이의 일그러진 미간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루치드는 한 발 물러서며 답했다. “안 그랬는데요?” 꼬박꼬박 말대답하는 본새가 영 못마땅했다. “이 새끼가? 야, 너 내가 만만하냐? 응? 만만해?” 어깨를 툭툭 밀치며 다가오는데, 루치드로서는 저항할 이유가 없어 그저 밀쳐지는 대로 물러났다. “니가 저기 지나가다가 나 째려보는 걸 봤는데, 안 봐? 씨발, 어디서 뻥을 치고 있어, 이 새끼야!” 그러는 사이에 식당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이 점점 현관 앞에 착착 쌓이고 있었다. 갑작스런 사태에 호기심 반, 걱정 반의 심정으로 아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씨발, 눈 안 깔아! 눈깔 확 뽑아버릴까?” 이런 걸 ‘시비’라고 표현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당하는 상황에 놓이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잔뜩 찌그러뜨린 동인의 얼굴만을 바라보며 ‘왜’라는 단어만 떠올릴 뿐이었다. “이 새끼, 눈 봐라. 씨발 그래 내가 만만하다, 그치? 응?” 이제는 이마를 툭툭 쳐댔다. 이해를 떠나 그냥 이렇게 무기력하게 당할 수만은 없다는 오기가 생겼다. “만만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쳐다본 적도 없어요. 어떤 모습을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오해하신 거 같아요.”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지며 마치 ‘흉신악살’이란 표현에나 들어맞을 모습이 된 동인이었다. “이런 개새끼가, 오해? 졸라 혓바닥 길다, 응? 애새끼가 어디서 배워먹었기에 선배한테 대들고 거짓말이야? 죽을래?” 평소에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 없던 동인의 화난 모습에 다른 아이들은 깜짝 놀라서 감히 끼어 들 생각조차 못하고 있을 때였다. 계단 쪽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삐죽 튀어나왔다. “서동인, 너 뭐야! 왜 그래!” 어느새 윤정이 명수와 함께 다가왔다. 따라오던 루치드가 보이지 않아 되돌아왔더니, 그 사이에 이 난리가 났다. “이 새끼가 야리고 가잖아요. 잘못을 저질러 놓고 사과도 안하고, 말대꾸나 하고.” “정말 그랬니?” “아니요.”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이 새끼가, 어디서 거짓말을 해! 너 아까 저기서 나 째려보고 갔어, 안 갔어?” “안 봤어요.” 동인은 주먹을 휘둘렀다. 갑작스런 주먹에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루치드는 그대로 얼굴에 들어맞았다. 윤정은 비명을 질렀다. 순간적인 주먹질에 놀라 주저 앉아버린 루치드에게, 동인은 주먹에 그치지 않고 발을 휘둘러 쓰러진 루치드를 걷어찼다. 이어지는 폭력에 놀란 아이 몇이 새된 비명을 지르는 사이, 남자 고등학생, 기웅이 끼어들어 동인을 말렸다. “야, 서동인. 이게 무슨 짓이야! 원에서 주먹 쓰면 안 되는 거 몰라? 어디서 애들을 때려!”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기웅을 보던 동인이 제 화를 참지 못하고 발을 굴렀다. “아, 씨발. 이 새끼가 자꾸 구라치잖아요. 열 받게.” 순간 멍, 했던 기웅이 정신을 차리고 일갈했다. “야, 너 형 앞에서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너 왜 그래?” “아, 진짜. 씨…. 졸라 열 받네.” “뭐?” 홱 얼굴을 치켜들며 기웅을 노려보는 동인. “형이 뭔데? 엉? 형도 뭐, 씨발 저 새끼랑 짰어? 왜 나한테만 그래?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한테 그래? 저 새끼가 잘못했다고. 잘못했다니깐? 근데 왜 나한테 그래? 내가 거짓말 했어? 내가 잘못한 거야? 잘못한 거냐고!” 소리를 꽥 질러대는 동인의 악기(惡氣)에 기웅을 비롯한 아이들은 아무 말도 못했다. 현관 앞이 싸늘해질 쯤. “이게 무슨 짓이야! 다들!” 보육교사가 소란 통에 나타났다. 몇 몇 아이들이 물러서며 그 자리로 교사가 다가왔다. 둘러보니 루치드는 바닥에 쓰러져 있고, 그 곁에 윤정이 붙어 부축을 해주고 있었다. 반대편에 동인이 씩씩거리는 와중에 키가 큰 기웅이 가운데 서서 싸움을 막는 모양새였다. “무슨 일이야. 기웅이 너, 얘기해 봐.” 기웅은 자신이 본 장면부터 설명을 했다. “너희 둘 따라오고, 나머지는 다 제 방으로 올라가. 어서!” 교사의 명령에 아이들은 평화를 쫓는 비둘기 무리들처럼 우르르 사라져갔다. **** “너부터 얘기해봐.” 교사는 동인에게 먼저 질문을 던졌지만, 입을 꼭 다물고 묵비권을 행사 중인 동인이었다. “니가 얘기해 봐.” 어느새 한 쪽 볼이 부어오른 루치드는 그 때까지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저 동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교사가 보기에 루치드의 눈에서 눈빛을 읽기가 쉽지 않았다. 때린 동인을 노려본다거나, 더 큰 힘을 보인 형을 무서워하는, 그런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감정 없는 눈빛? 벽을 바라보는 눈빛? 루치드는 그런 눈으로 동인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래서 윤정이 누나가 명수를 데리고 외출 허락을 받기 위해 올라가고, 그 뒤를 제가 따라가는데 이 형이 절 불렀어요. 그래서 돌아봤고 제가 자신을 째려봤다면서 사과하라고 하셨고, 전 보지 않았다고 이야기 했어요.” 누가 때렸네, 어쩌네 하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지만 보육교사가 듣고자 하는 이야기는 다 나온 셈이었다. 그런데 짧지만 묘한 느낌이 드는 브리핑이었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루치드의 이야기는 초등학교 1학년이 이야기했다고 생각하기에 너무 이상했다. 그 또래 아이들의 화법을 쓰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건조하고 담백한 어투로 사실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이 나이 때 애들에게서 가능할까? 문득 예전에 아이의 담임교사로부터 들은 ‘영재설’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건 급한 일이 아니다 싶어 다시 기억 너머로 묻어버리고, 일단 동인에게 사실관계를 재차 확인했다. “…….” 여전히 묵비권 행사 중이었다. 루치드의 말만 들으면 누가 잘못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시비가 붙은 원인이 저 ‘영재’인지, ‘묵비권 행사 중’인지, 아니면 단순한 오해로 인해 빚어진 일인지를 판가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교사로서 분명히 선을 긋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보였다. “서동인.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는 일단 나중에 판단하도록 하마. 그런데 원에서 주먹을 휘두른 거, 특히 어린 동생한테 폭력을 행사한 것은 누가 봐도 니 잘못이다. 그렇지?” 여전히 묵묵부답. 그러거나 말거나 보육교사는 우선 서동인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폭력은 안 된다는 원칙을 주지시켰다. “너도 형한테는 언제나 공손하게 행동해야 돼. 알겠니?” “예.” 루치드는 변명이나 여타의 덧붙임 없이 간결하게 대답을 했다. 때문에 교사 역시 더 할 말이 없었다. 교사는 다시 한 번 싸우지 말라는 주의를 주고 두 사람을 돌려보냈다. 상담실을 나와 3층으로 가는 계단에서, 동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너 내가 언젠가는 죽여 버린다.” 그러고는 투벅투벅 걸어 올라갔다. 루치드는 잠시 제자리에 서서 올라가는 그를 지켜봤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뒤, 루치드는 방으로 돌아왔다. 명수가 요란하게 맞이하며 괜찮냐, 아프냐고 물어보는데, 오히려 루치드가 명수를 진정시켜야 할 판이었다. “다행이다. 그럼 나 화장실 좀. 니가 걱정돼서 화장실도 못 갔거든.” 그러고는 화장실로 뛰어가는 명수였다. 그 모습을 쓴웃음을 지으며 바라보던 루치드는 명수가 나간 뒤, 책상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의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었다. 분명한 사실부터 짚어보았다. 1. 동인은 거짓말을 했다. 이 부분은 자신의 입장에서는 분명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을 부르기 전까지 그곳에 있는 줄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2. 동인은 먼저 폭력을 행사했다. 역시 분명한 사실인데, 이 점을 짚어보는 이유는 단 하나. 말다툼 따위와 상관없이 그가 주먹을 휘둘렀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루치드는 그가 주먹을 휘두른 이유가 궁금했다. 당시의 대화를 돌이켜 보아도 그가 갑자기 주먹을 휘두른 이유에 대해서는 짐작할 수 없었고, 그 때문에 아무런 준비 없이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3. 선생님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했다면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게 들통 나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쩐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고등학생 형한테 이야기 했던 것처럼 거짓말로 자신의 입장을 변호했다면 이해를 했을 텐데,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4. 죽이겠다는 협박을 했다. 이 부분에 있어서 루치드는 앞서의 의문들 중 몇 가지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우선 처음의 거짓말을 한 이유는 ‘일부러’ 시비를 걸기 위해서 한 것이다. 또 폭력을 행사할 만큼 자신을 ‘미워하고’ 있었다고 설명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혹은 진실―이 타인, 특히 선생님과 같은 어른에게 ‘드러나는 것’을 경계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을까, 라고 추측해 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겠다는 말을 남겼다는 것. 요컨대 그는 처음부터, 아니 이 사태가 벌어지기 이전부터 자신을 미워했거나 증오하는 감정을 품고 있었다는 결론이 되겠다. 그러고 나니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왜 나를 싫어하지?’ 그와 자신과의 접점이 없는 상황에서 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계기가 있었나 떠올려보니, 법원이 떠올랐다. 그리고 유소미를 기억해냈다. 유소미와 서동인, 그리고 자신? 루치드의 입장에서는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이 특별히 소미와 친했던 것도 아니었던 터라 ‘관계’라는 표현을 쓰기도 애매했다. ‘가서 물어봐야 하나?’ 그런데 문득 이상한 점이 떠올랐다. ‘왜 내가 이걸 고민하고 있지?’ 루치드는 자기가 궁금해 하는 이유 자체에 의심을 품었다. 만약 자신이 아닌 다른 이였다면, 지금 어떤 생각을 했을까? 루치드는 다시 한 번 지금 상황을 정리했다. ‘나는 이유도 없이 증오심을 품은 상대에게 맞았고, 죽이겠다는 협박을 들었다.’ 이것은 단지 자신의 기준에서 상황을 판단한 것. 따라서 ‘이유 없음’이란 표현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결과가 있는데 원인이 없을 리 없다. 때문에 루치드는 원인을 찾는 과정을 짚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원인을 찾으면 결과를 바꿀 수 있는가? 생각해보니 바꿀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 바꿀 수 없다. 이미 상대에게 맞은 상태이고, 협박을 들은 상황인데, 결과를 바꾼다고 맞은 게 맞지 않은 게 되는 것이 아니고 죽이겠다는 협박을 듣지 않은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루치드는 한 달 전에 속으로 했었던 다짐이 생각났다. ‘힘이 약해서 무슬라가 죽었다. 힘을 키우면 무슬라가 살아나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힘을 키우는 이유는? 다시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무력하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 번뜩이는 생각과 깨달음. “아, 목적이 잘못 되었구나.” ‘달려드는 스크로파를 무찌르고 위험에 놓인 사람을 구한다는 등식은 옳지 않아. 애초에 스크로파를 제거해서 위험한 상황 자체를 없애야 옳은 거야. 그래. 단순히 힘만 기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치고 고칠 수 없다면 제거를 해야 돼. 그래야 진짜 예방법이 되는 거야.’ 지금 상황도 잘못된 원인을 찾아 수정하고 닥쳐올 위험을 예방하자는 식으로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옳지 않은 방법이었다. 아예 원인을 ‘제거’해서 부정적인 결과, 그 자체가 나오지 않게 해야 바른 등식이 된다. 다시 말해서 서동인이란 사람은 루치드의 미래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원인’이며, 따라서 '제거'해야 할 대상. 루치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42] 오해(6) 루치드가 한참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동인은 억지로 냉정을 찾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돌이켜봐도 자신이 심했다는 자책이 들었다. 굳이 그 곳에서 일을 크게 벌일 필요가 없었다. 조용히 해결할 수 있었던 일을 순간의 충동을 이기지 못해 그르쳤다. “씨발놈.” 저도 모르게 입에서 욕지거리가 쏟아져 나왔다. 태엽인형처럼 방 안을 빙글빙글 맴돌며 건방진 꼬마를 어떻게 처리할 지를 궁리했다. “동인아, 안에 있어?” 닫힌 문 밖에서 누군가 자신을 불렀다. 아무것도 안했건만 큰 일 치르다 들킨 사람모양으로 덜덜거리며 물었다. “누구세요?” “나다. 기웅이 형. 들어가도 되냐?” 어떻게 하나, 고민을 했다. 지금은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기웅이 형에게까지 날을 세우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문을 열었다. 기웅이 두 손을 호주머니에 끼워 넣은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복잡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기웅은 현재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벌써 키가 180을 넘을 정도로 키가 크고 운동신경도 좋아서 만약 고등학교에 운동부라도 있었다면 당장에라도 모셔가려고 하지 않았을까 싶은 남학생이었다. 하지만 기웅이 다니는 인문계 고등학교에는 운동부가 없었고, 그저 특별활동 수준의 농구부와 축구부가 있을 뿐이었다. 사실 운동부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기웅은 활동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았다. 개인적인 형편에서 운동부에 가입해 활동할 만한 여력이 안 된다고 판단한 이유가 하나고, 또 하나는 기웅이 바라는 것은 안정된 직장을 얻어 독립하는 것이었기에 공부에 좀 더 치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웅은 전교 수위권에 들 정도로 성적이 우수한 편이었다. 동인이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부터 현재까지, 거의 5년 이상을 보아 온 기웅은 ‘친형’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자상하고 똑똑하며 자신을 잘 보살펴 준 형이었다. 숙제를 도와줄 때도 있었고, 고민 상담을 들어줄 때도 있었으며 외출을 할 때도 종종 함께 나가던 사이였다. 동인이 보육원 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기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동인아.” 여전히 친근하게 불러주는 이름.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동인은 울컥하고 말았다. “혹시 무슨 일 있어?” 기웅은 왜 그랬냐고 묻지 않았다. 동인이 잘못했다고 혼내지도 않았고, 사실관계를 추궁하지도 않았다. 그저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인 이유를 물었다.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 기웅은 그런 형이었다. 상대를 배려할 줄 알고,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사려 깊은 남자. “…….” 하지만 그런 형에게도 쉽게 속을 털어놓지 못하는 동인이었다. “난 니가 쉽게 주먹을 쓰는 애가 아니란 걸 안다. 너처럼 속 깊은 애가 갑자기 그런 행동을 보였다는 건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었을 거야. 혹시 내가 도울 수 있는 문제라면 돕고 싶어. 내가 친형은 아니지만 그래도 널 친동생처럼 생각하니까.” 미안해요, 미안해요. 속으로 삼킨 말이었다. 동인은 기웅을 마주 볼 수 없었다. 바라보면 울어버릴 것 같아서. 자신의 추악함을 들킬 것 같아서. 기웅은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던 동인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내가 너무 성급했나보다. 일단 좀 마음을 가라앉히고 안정되면 그 때 다시 이야기하자. 알지? 난 니 편이야.” 이런 형에게 자신은 그리도 모질게 욕을 해댔었다. 못난 서동인. 어쩐지 자책의 시간이 길어질 것 같았다. 기웅은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문을 닫아주고는 계단으로 가려는 찰라, 복도 한 편에 서 있던 아이와 마주쳤다. 아까 현관에서 동인에게 맞았던 아이였다. 기웅도 소문으로만 들어 얼굴 아는 정도였다. 너무 어린 아이이기에 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나이에 맞지 않게 영리하고 심성이 바른 아이라고 들었다. 사실 그 보다는 모델 뺨치는 ‘외모’로 더 소문이 났지만, 그것은 관심영역 밖의 일이었다. “여긴 왜 왔어? 동인이 보려고?” “예.” 목소리의 고저가 없는, 차분하고 냉정함이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저러나? “음, 저기 방에 있는데. 무슨 일인데?” “…….” 루치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웅은 기다려도 대답이 나오지 않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기웅이 아이의 용건을 추측해보니, 사과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2차전을 벌이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생각해보니 이대로 둘을 만나게 하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다. “그럼 혹시 그 전에 나랑 먼저 이야기 좀 할래?” 루치드는 머뭇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조금 늦춰진다고 해서 별 일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둘은 기웅의 방으로 갔다. 루치드는 들어서자마자 기분이 좋아졌다. 남자가 쓰는 방 치고는 꽤 깨끗한데다, 무엇보다 책이 많았다. 책장에도 침대 위의 책꽂이에도, 많은 책이 꽂혀 있었다. 루치드가 책장의 책들을 훑으며 호기심을 보이자, 기웅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책 좋아해?” “예.” 자판기 음료수처럼 대답이 바로 튀어나왔다. “공부를 잘하겠구나. 근데 여기 있는 책들은 형이 읽는 것들이라 조금 어려울 텐데?” “전 어떤 책이든 좋아요. 지금 당장 이해를 못해도 계속 읽다보면 배울 게 있을 거고 이해하는 부분도 늘어날 거예요.” 마치 자기 또래 아이가 대답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어투다. “아, 그렇구나. 그럼 나중에 읽고 싶은 책 있으면 언제든지 허락받고 빌려가도록 해. 당장 필요한 책만 아니라면 언제든지 빌려줄게.” “고맙습니다.” 루치드는 감사의 뜻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그 전에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여기 앉을래?” 빈 침대를 툭툭 두드리는데 먼지 하나 없었다. 루치드는 침대에 걸터앉아 기웅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직 니 이름을 모르네. 이름이 뭐야?” 루치드는 시원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너를 ‘석고’라고 부르더라. 이렇게 좋은 이름이 있는데 말이지.” 대답을 기대한 말은 아니었는지 기웅은 계속 말을 이었다. “아까 일은 내가 대신 사과할게. 형들이 동생들을 잘 보살펴야 하는 건데, 이유가 어쨌든 폭력은 나쁜 거거든.” “…나쁜 건가요?” 으음? 예상치 못한 반응에 기웅이 잠깐 주춤거렸다. 조금 핀트가 나간 대화가 진행될 조짐이었다. “나쁘지. 가만, 혹시 너랑 가장 친구가 누구지?” “명수요.” 생각보다 말이 더 빨리 나온 것 같은 대답이었다. 루치드는 이제까지 굳어있던 표정이 살짝 풀리는 것을 느꼈다. 생각만으로도 자신을 기분 좋게 해주는 친구. “명수? 같은 반이니?” “아니요, 여기서 저랑 같은 방을 써요.” “아, 그렇구나. 그럼 예를 들어보자. 어느 날 명수가 니가 가장 아끼는 물건을 망가뜨렸어. 그래서 니가 무척 화가 났다고 가정해보자. 화를 참지 못하고 친구를 때리면 넌 기분이 좋겠니?” “아니요.” 앞의 가정이야 둘째 치고, 명수를 때린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만약 누가 명수를 때린다면 그 즉시 ‘응징’을 가할 것이다. “그래, 친한 친구를 때리는 게 기분이 좋을 리 없을 거야. 마찬가지로 명수도 친한 친구에게 맞기까지 하면 기분이 매우 안 좋을 거야. 그리고 그런 일이 생기면 명수랑 친구로 지낼 수도 없겠지?” 초등학교 1학년의 수준에 맞게 폭력의 비도덕성을 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고작 고등학교 1학년인 주제에 누굴 가르친다는 말인가. 차라리 맞춤법이나 사칙연산을 가르친다면 모를까. 콧잔등 위로 땀이 송글 솟아 미끄러졌다. “이 세상도 비슷하단다. 사람은 살면서 다른 사람과 문제가 생길 때도 있어. 그런데 그 때마다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과 같이 살 수 있겠니? 그 사람과는 친구도 될 수 없고 함께 살아간다는 것도 힘들 텐데? 언제 또 주먹을 휘두를지 모르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게 쉽겠니? 결국 불신, 사람을 믿지 못하는 마음이 생기겠지? 그래서 폭력은 나쁘다는 거야. 폭력은 사람의 몸에 상처를 남기기도 하지만 마음에도 상처를 입히는 행동이니까. 또 폭력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만 자신에게도 상처를 남긴단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 사는 게 아닌 이상 사람은 함부로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 되는 거야. 그것 때문에 아까도 동인이를 혼낸 거고, 너한테도 동인 대신 사과를 한 거야.” 땀에 젖은 티셔츠가 등에 들러붙는 느낌이었다. 해냈다! 라는 감정보다는 해낸 걸까? 라는 의구심이 먼저 들었다. “왜 형이 사과를 해요?” “동생의 잘못은 형의 잘못이기도 하니까. 동생이 바르게 자라도록 돕는 게 형의 역할인데, 형이 그 역할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지. 너도 마찬가지란다. 만약 니가 보육원 밖에서든 안에서든 잘못하면 형이 먼저 나서서 사과할거야. 너도 내 동생이니까. 그렇지?” 루치드에게 형이 생겼다. 그리고 ‘지금 생겨난 형’이 물었다. “그럼 아까는 왜 그 방에 가려고 했었어?” “…….” 어쩐지 자기 생각을 곧이곧대로 이야기했다간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루치드는 그냥 입을 열지 않았고, 기웅은 아이의 침묵에 단순히 ‘사과’를 하려고 갔던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짐작했다. “아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얘기해 주겠니?” 기웅은 어깨를 살짝 낮추고 루치드와 눈을 마주쳤다. 루치드는 보육교사에게 이야기한 것과 똑같은 내용을 되풀이했다. “흠. 그것만 가지고는 원인을 모르겠네. 혹시 짐작 가는 것은 있니?” “아니요. 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래서 물어보고 싶었어요. 왜 그랬냐고요.” “아, 그래서 아까 동인이 방에 가려고 했던 거야?” 루치드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이 바뀌기 전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으니까. “정말 착하고 똑똑한 아이네. 하마터면 널 오해할 뻔 했어. 아까도 말했지만 서로 대화를 통해 갈등을 해결한다는 것은 어른들도 쉬운 일이 아니거든. 나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기웅이 씩 웃으며 루치드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루치드는 그 사이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 대화로 갈등을 해결…. 나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만약 모든 원인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동인을 ‘제거’하려 했다면, 앞으로도 그런 원인을 제공할지 모를 ‘사람들’을 찾아 모두 제거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 모든 사람을 제거한단 말이며, 그 사람들이 ‘원인’이 된다는 것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무엇보다 자신 역시 이 ‘사회’에 속해서 살아가게 될 텐데, 이 사회에서 ‘제거’라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규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아마도 ‘저쪽 세계’의 규칙이리라. 폭력과 야만의 세계, 라고 자신이 규정했던 곳의 규칙. 이 문제는 몇 번이고 고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이 세운 규칙과 이 세계의 규칙, 그리고 저 세계의 규칙을. 그 규칙들이 옳은 건지, 틀린 건지를 오래도록 고민해야 할 것 같았다. 이 날은 루치드가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맞은 날이며, 자신의 세계관과 사회관을 고민한 계기가 된 날이었다. 또 비록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처음으로 사람을 상대로 위해를 줄 수 있는 마법을 쓰려고 마음을 먹었던 날이기도 했다. ======================================= [43] 충돌(1) 긴 여름방학이 끝났다. 최초의 방학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루치드 개인에게는 그 사이에 6개월의 추가된 시간이 있었다. 그래서 거의 8개월에 가까운 방학―정확히 말하자면 6개월의 사회생활과 2개월의 방학―을 경험한 셈이어서 길게 느껴지기도 했다. 교실에 들어서니 오랜만에 보는 반 친구들이 루치드를 반겼다. 그 중에는 경은과 형오도 있었다. “오~ 모델!” 아이들은 시립도서관의 광고 속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다. 깔깔대며, 환호하며, 발을 구르는 아이들의 환영에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찾아갔다. 둘러보니 아이들은 방학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잊은 것처럼 깔깔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형오는―이제 더 이상 반장은 아니다―언제 그랬냐는 듯 만화책 한 권을 두고 짝이랑 사이좋게 열독하고 있었다. 경은은 루치드와 눈이 마주치자 환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 보였다. 루치드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교실 바깥 화단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하얗고 조그만 별꽃들이 지고, 그 자리에 열매가 맺히고 있었다. 나쁜 기억은 잊고 즐거움을 되찾은 반 아이들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듯 했다. 개학 이후에도 루치드는 여전히 독서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친 듯이, 까지는 아니지만 섣불리 방해하지 못할 정도로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 학생들과 선생님의 주목을 끌었다. 또 루치드는 다시 학교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시립도서관의 책들보다 질적인 면에서 조금 떨어진다 할지라도, 아직 지식이 충분히 쌓이지 않은 루치드에게는 오히려 적당한 수준의 책이었다. 때문에 공부를 하는데 모자람은 없었다. 도리어 더 넓게, 다양한 측면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깊이 있게 공부하지를 못하다보니 가끔 책을 읽다가도 궁금한 점이 생기면 자력으로 해결하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학교라는 곳은 자력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궁금증을 해결해주기 위해 대기 중인 교사가 수십 명이 계시는 곳이다. 특히(!) 언제라도 교실 앞으로만 걸어가면 답을 해주기 위해 기다리시는(?) 담임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 프리즘을 통과하면 빛이 무지개 색으로 보인다고 하던데요.” “맞아. 책에서 읽었니?” “예. 그런데요. 그 빛들은 색깔만 다른 건가요? 아니면 또 다른 차이점이 있는 건가요?” “…….” ‘보통 니 나이 때 아이들은 그런 거 궁금해 하면 안 되는 거 아니니?’ 라고 묻고 싶은 3년차, 하고도 한 학기를 더 보내신 담임교사 김희연이었다. 물리학을 전공하지도 않은데다가, 일반인 정도의 물리학 상식을 가지고 있을 뿐인 희연은 쉽게 답을 주지 못하고 ‘선생 노릇 하기 쉽지 않다’는 푸념만 속으로 쌓을 뿐이었다. “선생님, 어떤 물건이 빛을 가려서 생기는 게 그림자잖아요?” “그래, 그림자놀이도 해봤잖니?” “예, 그런데요. 그림자도 색깔이 다르잖아요? 어떤 건 새까맣고, 어떤 건 덜 까맣잖아요? 왜 그런 건가요?” “…….” ‘그림자 안의 그림자, 까지는 생각나는데…….’ 왜 대학교 교양시간에 물리학을 듣지 않았는지 한탄스러워 괜히 가슴을 치는 초등학교 1학년 담임교사 김희연 선생님. 루치드는 선생님의 얼굴이 울긋불긋해지는 모양새를 보고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돌아섰다. 이제 선생님이 모든 질문에 답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된 소년이었다. 어느 날인가부터 교무실에 선생님들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1학년 남학생 한 명이 선생님의 손을 잡고 교무실에 나타난 이후부터 발생한 현상이었다. 여자선생님은 데리고 온 남학생을 고학년을 담당하는 선생님께 소개 시켰다. 예의 바르고 잘 생긴 남학생은 그 선생님께 질문을 던졌다. “달리던 자동차가 마찰계수 0인 빙판 위를 지나게 되면 차는 미끄러지나요?” “응? 어… 아마 미끄러질걸?” “미끄러지는 상태로 빙판을 지나치게 된다는 건가요?” “아마 그럴걸?” “그런데 마찰계수가 0이라면 운동 마찰력이 발생할 수 없고, 회전 마찰력도 발생하지 않는 거 아닌가요?” “응?” “그럼 마찰력에 의한 반발력이 없으니 차가 앞으로 못나가는 거 아닌가요?” “응?” 잠시 후, 그 선생님은 수업종이 쳤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서둘러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이후 시간이 흐른 뒤, 어느 6학년 교실에서 ‘아몽통!’(마찰력의 법칙=아몽통 법칙)을 외치는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후문이 있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교무실 습격사건은 ‘현재 진행형’, ‘수습 불가’였다. 김희연 선생님은 자신의 짐을 동료교사에게 나눠줬고, 동료교사들은 쉬는 시간 교무실로 오는 일이 줄었다. 혹시라도 교무실에 잠시 들렀다가도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교무실을 급하게 빠져나갔다. 교감선생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두가 워낙 바쁘시다보니(?) 쉬는 시간임에도 텅 비어버리기 일쑤인 교무실. 남학생은 허탕만 치고 돌아갔다. **** 점심시간, 명수가 교실에 찾아왔다. 명수가 나타난 순간 용건을 눈치 챘다. 아니나 다를까. “축구하러 가자.” 루치드는 싱긋 웃고 같이 운동장으로 나갔다. 교내 남학생들의 반 이상이 차지하고 있는 운동장에서 공을 찬다는 것은 거의 교통사고를 예약하고 차를 모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축구라 부르고 럭비를 하는 초등학생들이었다. 게다가 운동장을 사용하는 학생들의 서열에서 가장 말단에 위치한 1학년 남학생들이 마음 놓고 뛰어다니기란 거의 불가능한 상황. 자칫 공 한 번 잘못 찼다가 고학년 형들을 맞추는 불상사라도 일어난다면, 얌전히 교실로 돌아가기란 불가능할 지경에 이를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대부분은 운동장 한 귀퉁이에서 서로 공을 주고받거나 뺏는 식으로 놀았다. 그러다보면 공 한 번 못 잡고 그저 구경만 하다 끝나는 경우도 허다했다. 루치드는 그 허다한 경우를 가장 많이 겪는 케이스였다. 물론 자발적 의사에 의한 관람객 모드였다. 명수도 그런 상황에서는 루치드에게 억지로 공을 차라고 하지 않았다. 그럴 여유도 없었고, 그런 참견을 할 시간에 공 한 번 더 차보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명수였다. 그렇게 관람 모드로 바라보고 있던 루치드는 갑자기 어떤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만약, 저 공 자체의 마찰계수를 0으로 만든다면, 어떤 변화를 일으킬까?’ 일단 머릿속으로 실험을 해보았다. ‘마찰은 일종의 저항이라고 했어. 그러니 마찰계수 0의 공이 날아갈 때 공기의 저항도 줄지 않을까? 땅에 붙었다 떨어질 때도 마찰이 적으니 운동에너지는 거의 그대로 보존되겠지?’ 하지만 바로 마법을 시연하는 것은 참았다. 사람이 너무 많기도 했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특히 명수가 저기서 공을 차고 있는데, 확실하게 예측하지 못한 실험을 시도할 루치드가 아니었다. 루치드는 나중을 기약했다. 방과후 수업이 끝난 후, 루치드는 교실에서 나뒹구는 축구공을 들고 운동장 구석으로 갔다. 우선 벽을 향해 차보고 이후 넓은 운동장에서 차는 실험을 시도해 볼 예정이었다. 루치드는 우선 벽에서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세 걸음을 더 물러났다. 잠시 후, 루치드는 짧게 발을 구른 뒤 디딤발을 공 옆에 놓고 반대편 발등으로 공을 찼다. 가볍게. 공은 약 10m의 거리를 날아가 벽 중간쯤에 맞고 튕겨 나왔다. 잠시 공이 날아간 궤적과 속도를 눈에 담았던 루치드는 공을 주워 와 같은 자리에 놓았다. 짧게 한숨을 내쉰 루치드가 다시 세 걸음 물러난 자리에서 달려들어 비슷한 힘으로 공을 찼다. 공은 벽으로 날아가 아까 맞은 자리보다 훨씬 높은 곳을 맞은 후 튀어 올랐다. 차는 힘이 일정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실험은 통했다고 보았다. 즉, 마찰 계수 0의 공은 공기의 저항을 어느 정도 이겨낸 것이다. 루치드는 넓은 운동장으로 나갔다. 고학년은 수업 중이었고, 저학년은 대부분 집으로 돌아간 시간이어서 운동장에는 몇 되지 않는 아이들만 있었다. 그 중에 명수도 있었지만 한 쪽 골대에서 다른 친구들이랑 몸싸움을 벌이며 공을 뺏고 뺏기는 놀이를 하던 터라 루치드의 등장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운동장 가운데로 간 루치드는 저 멀리 놓인, 아이들이 없는 골대를 목표로 정했다. 공을 내려놓고 아까와 비슷한 힘으로 차 보았다. 공은 빠르지는 않지만 기이하게도 쭉 뻗는 궤도를 그리며 나아가더니 40m 가량 떨어진 골대의 위쪽 포스트를 맞고 팅겨 나왔다. 결코 노린 것은 아니지만 신기한 장면이긴 했다. 루치드는 괜히 머쓱해서 눈썹을 긁었다. 그런데 마침 그 장면을 본 사람이 있었다. “헉!” 수업이 따분해서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던 6학년 형근이었다. 운동장이 멀어 공을 찬 사람이 누군지는 정확히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그 아이가 찬 공이―빠르지도 않으면서―길게 뻗어 가더니 골포스트를 맞고 하늘 높이 팅겨 올라가는 장면은 턱이 빠질 만큼 신기한 장면이었다. 그 아이는 공을 주워 와 다시 운동장에 가운데 놓았다. 그리고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뜀박질을 시작해 공을 찼다. 아까와 달리 지면 위를 낮게 스치며 날아갔다. 그런데. “허억!” 형근은 이 보다 놀라운 장면은 볼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뜬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껏 살면서 저보다 빨리 날아가는 공은 보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프로축구 선수들이 찬다는 ‘캐논슛’이 아마 저렇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맨 눈으로 바라본 중에 가장 빠른 공이 방금 운동장을 가로질러 골대를 향했었다. 게다가 그 공은 그물을 뚫을 듯이 밀고 나가, 그물 아래가 거의 들리다시피 했다. “김형근!” 선생님이 부르지 않았다면 형근은 계속 그 공이 보인 궤적에 마음을 빼앗겼을 것이다. 선생님은 얼이 빠진 제자를 위해 친히 몽둥이를 들어 참사랑을 실천하셨다. 루치드는 공을 챙겨 교실에 갖다놓았다. 공이 날아가는 궤적을 통제하기 위해 일부러 세게 차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왔다고 자평했다. 공의 마찰력을 줄이는 것만으로도 공이 날아가는 속도나 궤적의 변화가 유의미하게 변했음을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 공을 차면서 전해진 운동에너지가 그물에 닿을 때까지 유지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확한 관측 장비가 있었다면 좋겠지만, 일단은 이런 식으로 테스트를 해 봤다는 것에 만족했다. 캐논슈터 루치드는 등장과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 어쩌면 그의 재등장은 그의 가장 친한 친구로 알려진 임명수에게 달렸을지도 모른다. **** “야, 나가자. 사람이 부족하다니깐.” 명수가 책상에 앉은 루치드 옆에서 예의 칭얼거림을 시전했다. “시간 늦었어. 조금 있으면 저녁 시간인데 그러다 선생님한테 혼나.” 루치드는 창밖으로 해거름이 되어 점점 붉게 물드는 하늘을 쳐다봤다. “그 전에 오면 되지.” 이제 곧 저 하늘은 보랏빛으로 변할 것이다. “학교에서 계속 축구하고 있었던 거 아냐?” 명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건 학교고, 여긴 원이잖아.” 예전에도 느꼈지만, 명수에게 논리학을 들이대는 건 참 못할 짓일 것이다. 루치드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랍게도, 자취를 감췄던 캐논슈터는 사라진 그날, 재등장을 해버렸다. ======================================= [44] 충돌(2) 가을이 짙어지면서 원내에 몇 안 되는 단풍나무에도 물이 깊게 배어들기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로 기온이 많이 떨어져 원생들의 건강관리에도 경계신호가 들어왔다. 그래서 생활 지도원들이 보육원 내의 위생시설이나 환경 점검에 부쩍 신경을 쓰고 있는 형편이었다. 여름 중에 새로 들어온 신입 생활 지도원 윤보람 선생님 역시 환경 점검의 일환으로, 저녁의 찬 공기가 실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각 층 복도의 창문들을 잘 닫혔는지 점검하고 있었다. 실내 환기를 위해서 열어놓았을 창문들을 찾아 단속을 하며 돌아다니던 보람은 일을 끝내고 상담실로 돌아왔다.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창가에 당직 보육 교사 한 분이 서 계셨다. “선생님, 뭐하세요? 저녁 드시러 가셔야죠?”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는지 보람이 들어온 줄도 몰랐었나 보다. “아, 윤 선생님.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혹시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원래 신입은 고참의 눈치를 살피기 마련. 고참의 심기가 불편하다면 그에 맞춰 눈치껏 행동해야 하는 것이 직장인의 바른 태도, 라고 생각하며 물음을 던졌다. “아, 아뇨. 걱정은요.” 그러나 뜸 들이는 것도 잠시. “사실은요. 우리 애 때문에요.” 보육교사는 팔짱을 풀며 한 숨을 내셨다. “사실은 말이에요. 우리 애가 핸드폰을 사달라는데, 그게 한두 푼이어야 말이죠. 사실 요즘 애들이 스마트폰 가지고 노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버티고 있었던 건데, 이제는 사줘야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드네요. 어제 집에 갔더니 애가 절 붙잡고 하소연을 하더라고요. 자기 반에서 핸드폰 없는 사람이 자기 밖에 없다면서 그러더니 눈물까지 보이잖아요. 창피하다고.” “몇 살인데요?”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에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벌써 스마트폰을 쓴다고요?” 보람이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자, 니 마음 내가 안다, 는 것처럼 피식 웃었다.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빠른지 선생님이 몰라서 그래. 윤 선생님도 나중에 시집가서 애 낳고 길러 봐요. 우리 때랑 아주 달라요. 선생님 때랑도 많이 다를 걸요? 우리 애도 보면 한글 떼기도 전에 인터넷을 하질 않나, 애 아빠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는데 잡으면 2시간이에요. 처음에는 우리 애가 천잰가 싶었다니깐. 알고 보니까 요즘 애들이 다 그렇대요. 어떤 애들은 인터넷으로 쇼핑도 한 대요. 정말 요즘 애들 보면 정말 하루에도 몇 번이나 깜짝 놀라는지 몰라요.” 요즘 아이들, 이란 말에 보람은 고개를 돌려 운동장에서 뛰어 노는 원생들을 바라봤다. 이제 곧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인데도 저 아이들은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듯 마냥 뛰어 다니며 공을 차고 있었다. 보람의 시선을 의식한 보육 교사 역시 고개를 돌려 그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 아이들은……. 그래요. 요즘 아이들 같지 않은 아이들이죠. 순수하고 영악하지도 못하고 선생님이 시키면 다 예, 하고 잘 따라주죠.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니 불쌍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우리가 더 노력해야 하는 거예요. 저 아이들을 지켜주기 위해서.” 보람은 허리 뒤로 손을 가져가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순수하거나, 영악하거나 한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는 여기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말이에요. 다만 저 아이들이 그 흔한 피시방도 가지 못해서 저 곳을 뛰고 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사회로부터 격리된 아이들이란 생각이 드네요.” ‘격리’라는 단어에 격하게 얼굴을 굳히는 보육교사. 몸을 돌려 보람과 마주 섰다. “격리는 아니죠. 우리는 저 아이들을 ‘보호’하는 거예요. 이 사회가 얼마나 흉흉해요? 저 아이들은 이 곳이 아니면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이예요. 당장 거리로 내몰린다고 생각해봐요. 소매치기, 앵벌이, 도둑 등 온갖 범죄에 노출될 지도 몰라요.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아이들에게도, 이 사회에도 비극적인 일이고,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 될 겁니다.” 보육교사는 단호한 어투로 말을 맺었다. “저는 저 아이들이 이 곳을 졸업할 때까지 무사히, 건강하게 잘 자라나주길 바라고, 또 그걸 도울 거예요. 최선을 다해서. 그러니 윤 선생님도 항상 긍정적인 마음과 태도로 우리 아이들을 봐 주세요.” 보람이 보기에 이 선생님은 자기 일에 대한 직업의식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 저 아이들을 보호한다는 것에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는 듯 했다. 어쩌면 오래도록 일하면서 생긴 고집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보람에게 저 아이들은 많은 걸 포기당하고 살아야 하는, 그저 불쌍한 아이들이었다. 누구는 스마트폰을 가지고 싶지 않을까. 누구는 인터넷을 하고 싶지 않을까. 친구들과 피시방을 가거나 노래방을 가는 일상을 타의에 의해 거부당한 삶을 사는 아이들. 친구들과 하굣길에 학교 옆 분식점 매대에 서서 군것질 하는 것도 허락받지 못하는 아이들. 저 아이들에게는 오로지 놀이터만한 운동장에서 공이나 차는 것 밖에 허락된 것이 없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뭘 하고 싶냐고 묻지 않았고, 물을 생각도 없었다. 지금 당장 저 아이들에게 허용된 것 이상의 것을 들어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보육원 바깥은 21세기인데, 이 아이들은 18, 19세기 삶을 사는 사람들 같았다. ‘어쩌면 저 아이들은 선생들도 모르게 심한 박탈감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마음을 잊기 위해 저리도 미친 듯이, 시간에 쫓겨 가며 공을 차는 것은 아닐까.’ 저녁노을 깊어가는 가을 어느 날, 아네스 보육원의 신입 생활 지도원 한 명이 단상에 젖어 들었다. **** 루치드 개인은 자신이 얼마나 똑똑한지를 실감할 수 없었다. 다른 이들,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똑똑하다거나, 영재라거나 해도 자신이 또래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나다는 생각을 갖기가 힘들었다. 사실 학교 시험에서 100점을 맞아도, 초등학교 1학년 시험 수준이 그저 그런데다가 한 반에 100점을 맞은 아이가 반 이상이 나오게 ‘설계’된 시험이었다. 여럿 중에 자기가 뛰어나다는 객관적인 근거는, 루치드가 보기엔 없었다. 특히 최근 기웅의 방에서 책을 빌려다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좀 더 많이 배워야 한다는 조바심마저 느끼고 있었다. 고학년답게 가진 책들의 난이도가 상당했다. 수학은 아예 접근도 못할 정도였고, 다른 과목들 역시 중학교 교과과정을 뛰어넘은 수준이기에 초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루치드에게 그것들을 이해하란 것은 불가능한 미션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루치드는 걸신들린 거지처럼, 폭식하는 푸드파이터들처럼 난이도와 상관없이 책을 읽어 나갔다. 어려운 책들이라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겨도, 문장의 구성이나 글의 논리를 따라가는 연습이 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다른 책들을 볼 때 이해가 빨라진다는 장점이 있었다. 루치드에게 기웅의 책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비쳐주는 일종의 지표였다. 저 책을 읽을 정도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은 아직 지식이 부족하고, 똑똑하지도 않으며,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한 상태, 라는 자가진단이 가능했다. 즉, 굉장히 ‘주관적’인 기준에서 루치드는 평범한 아이였다. 반면 객관적인 기준에서 루치드를 평가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 소년은 ‘세기의 영재’였다. “왜 천재가 아니에요?” 희연이 육학년 담임을 맡고 있던 선생님에게 커피를 내밀며 물었다. “천재라면 우리한테 묻지도 않고 다 알지 않았을까요? 묻기도 전에 아는 것. 그 정도는 해야 천재 아니겠어요?” 헛웃음을 지으며 커피를 받아들고는 잠시 향을 음미해보는 ‘아몽통’ 선생님. “정말 스트레스 받아요, 걔 때문에. 수업시간에 절 빤히 바라보면 괜히 찔리는 마음까지 들더라고요. 어떤 질문을 던질지 몰라 계속 긴장해야 되고……. 그래서 요즘은 걔가 있는 쪽으로는 거의 시선을 안 보내게 되더라고요.” “그럴 수 있지요. 사실 저도 지금까지 교직에서 10년 이상 있었는데, 그런 영재를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에요.” “그래도 요즘은 수업시간에 질문도 잘 안하고 거의 책만 읽는 거 같더라고요. 거의 독학 수준인데, 그렇다고 수업을 들어라, 고 하기도 뭣해요. 솔직히 이대로 놔두는 게 좋은 거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어요.” ‘아몽통’ 선생님은 입 안의 커피를 꿀떡 삼켰다. “고민 많으시겠죠. 그래도 선생님. 우리가 아이들한테 단순히 지식만 가르쳐 주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특히 초등학교 1학년에게 우리가 가르쳐야 하는 건 지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도록 도울 의무가 있어요. 다들 인성교육, 전인교육 하잖아요? 선생님이 그 아이를 바르게 지도해야 우리나라를 위해 노력하는 대들보 같은 인재가 또 한 명 나오는 거지요.” “…….” 갑자기 교육학개론을 설파하시는 선생님의 기합에 눌려 희연은 군소리도 못했다. “그리고 할 말은 아니지만, 만약 그 아이가 나중에 잘못되기라도 해봐요. 선생님 잘못일 수 있어요. 예를 들어서, 걔가 희대의 사이코패스나 살인마가 되었다고 생각해봐요. 세기의 지능을 가진 천재 살인마, 혹은 천재 사이코패스. 이런 거 됐다가 잡혀 봐요. 그 아이가 초등학교 때 어떤 선생 밑에서 어떻게 교육을 받았나, 이런 가쉽거리들이 신문이고 종편이고 다 보도되고 그러지 않겠어요?” 의욕이 앞서 너무 나가신 것 같습니다, 선생님. 희연이 속으로 삭히는 동안, 본인도 무안한지 괜히 헛기침을 터뜨리며 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요즘은 교무실에 잘 안 나타난다면서요?” “아, 예.” 그야 당연히, 교무실에 올 때마다 텅 비어 있는 걸 아는데 매번 헛걸음을 하면 ‘영재’가 아니지요. “허, 혹시 또 마주치면 제대로 가르쳐 줄… 용의는 있지만, 이제 6학년도 졸업학기라서 이것저것… 진학상담 때문에 바쁘기도 하네요. 거 참.” 허세부리지 마세요. 선생님. “근데 요즘도 그, 물리학을 공부하나요?” “예, 그런데 관심분야가 조금 바뀐 거 같긴 하더라고요.” “예?” “한참동안 마찰력이니, 마찰계수니, 저항이니 하더니 요즘은 온도가 어떻고, 절대영도니, 분자운동이니 하더라고요.” ‘분자운동’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희연이 이를 꽉 깨물었다. ‘아몽통’ 선생님은 짐작이 간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공감을 표시해주었다. “…영재는 영재네요. 아, 혹시 말이죠. 거 방송국에 제보나 해보시지 그래요?” “방송국이요?” “영재 아이들 정도의 소재면 방송국에서도 좋아라 하지 않을까요?” “음” 솔깃한 이야기라고 희연은 생각했다. 부차적으로 영재를 담당한 담임으로 인터뷰를 할지도 모르고. “그리고 그런 게 방송되면 그 아이의 딱한 사정도 같이 방송 될 테고, 그러면 여론도 조금 움직여서 그 아이를 돕기 위한 성금이나 지원도 들어올지 모르고요. 이러나저러나 그 아이한테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하지만 선뜻 나서기에는 조금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다. 만약 부모님이 계셨다면 그 분들의 허락을 받거나 혹은 협의라도 해 볼 텐데. “일단 한 번 해봐요. 제보한다고 다 방송되는 것도 아니고, 일단 와서 취재부터 할 텐데. 그쪽도 이것저것 알아보고 방송을 할 테고, 아이가 싫다하면 뭐 도루묵이겠지만 그건 그 때 생각해 볼 일 아니겠어요? 그것도 방송사에서나 걱정할 일이고 말이죠.” 잘 되면 좋고, 안 되도 별 일 없을 거다? 희연은 진지하게 생각해보겠노라 대답했다. ‘방송이라.’ ======================================= [45] 충돌(3) 최근 루치드는 마찰력을 응용한 마법 구현에 성공하며 잔뜩 흥이 오른 상태였다.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응용을 가할 수 있을지는 더 고민해봐야 할 문제지만, 여기에만 몰입하기보다 계속 새로운 이론들을 습득하면서 다른 마법을 구현하는 것에도 관심이 갔다. 특히 물리라는 학문분야에 좀 더 많은 관심이 가면서 최근에는 그 쪽 분야로만 책을 읽고 있었다. 기웅의 책 중에서 『물리야 놀자』와 같은 제목의 책은 무조건 빌려서 읽어보고, 학교 도서관에서도 ‘물리’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일단 읽고 보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고, 이해가 전혀 되지 않아 그냥 넘어가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런 부분마저도 자신의 지식을 늘리는 과정이라 생각하면서 즐겼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인지, 아니면 그냥 날씨가 유난을 떠는 건지, 가을이 되기가 무섭게 겨울이 와버렸다. 시기적으로는 늦가을 정도라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느새 길에는 패딩차림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극성인 부모들은 목도리까지 둘둘 말아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고, 그런 아이들은 교실이 탈의실인 냥, 들어오자마자 훌훌 벗어젖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요즘 교실에서는 히터가 빵빵하게 나왔다. 그게 아니더라도 교실 안에서 친구들과 책상 사이를 요령 좋게 지나다니며 술래잡기 몇 번 하고 나면, 땀으로 등이 젖을 지경이 되었다. 엊그저께 2학기가 시작된 거 같았는데, 어느새 2학기도 한 달이 남았다. 1학년은 국어, 수학 외에 통합 과목으로 여러 가지를 배우는데 이번 시간에 배우는 과목은 ‘겨울’이었다. “자, 오늘은 사랑의 온도계 놀이를 할 거예요.” 담임이 맑은 미소를 띠며, 큰 목소리로, 우렁차게 외쳤다. 어지간한 목소리는 아이들 잡담소리에 묻힌다는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체득한 3년차 선생님의 변화였다. “여러분, 이제 다음 달이면 12월이에요. 12월은 무슨 계절이죠? 그래요. 겨울이에요. 겨울에 대해서 말해 볼 사람?” 적절히 아이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참여를 독려하는 스킬이 익숙해진 3년차 선생님이셨다.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다친 친구를 도와주거나 이웃돕기 성금을 내거나, 길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행동들이 모두 봉사를 하는 행동인거예요. 특히 겨울에 추워서 덜덜 떠는 사람들이나, 먹을 게 부족해서 배를 곪는 이웃들을 돕기 위해서 자선모금들을 많이 하죠? 우리 것을 조금 나눠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베풀고 돕는 거예요. 그리고 이런 행동들을 통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좀 더 밝고 행복한 세상이 될 수 있게 되는 거랍니다, 여러분. 알겠죠?” “예!” “자, 그럼 선생님이 이 종이 온도계를 여러분에게 나눠줄 거예요. 여기에 여러분이 생각하는 나눔과 봉사의 방법들을 적어 봐요. 아래 칸부터 한 칸씩 적어나가면 점점 온도가 높아지겠죠? 이렇게 높아진 온도만큼 우리 교실에도, 우리 집에도, 우리나라에도 따뜻한 사랑의 온도가 높아지는 거예요. 아시겠죠?” 아이들에게 ‘나눔과 봉사’의 의미를 직접적인 사례들을 보여주며 가르친다. 아이들이 직접 실천할 수 있는 일들을 스스로 생각하게끔 만든다. 나눔과 봉사의 생활에 대해 동기부여가 되도록 아이들이 발표하는 내용들과 경험담들을 격려해주면, ‘바른 생활 과목’이 지향하는 기본 생활 습관 형성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나아가, 학교와 교실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공간에서도 ‘실천’의 습관을 들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이 단원의 목표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짝과 함께 선생님이 내주신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수다를 떨고 있을 때, 루치드는 다른 문제로 생각에 잠겼다. 얼마 전 루치드는 책을 읽다가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자신은 ‘불’이란 것을 ‘물’이나 ‘공기’와 유사한 갈래로 이해를 했었는데, 사실 불은 순수한 물리학적 ‘현상’이었던 것이다. ‘고열의 빛을 방출하는 연소 현상’ 루치드는 고민에 빠졌다. 분명 자신은 깨달음을 통해 불을 ‘구현’해 낼 수 있었다. 적어도 자신은 불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었고, 지금도 당장 손바닥 위로 엄지 손톱만한 불꽃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불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했다고 착각했음에도 불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루치드는 마법을 배울 당시 핀체노가 한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법사는 구현해낼 <포르마-원형>의 고유성질을 온전히 이해하고 숙지해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포르마>를 현실에 구현해낼 수 있다. 덧붙여 말하자면 고유성질을 모르는 <포르마>는 구현할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루치드가 이해하기로는 구현해내려는 대상의 고유성질을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의 설명이었다. 고유성질을 모르는 원형(原型)은 실체화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자신은 지금까지 불을 ‘물질’의 한 종류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마법이 가능했지? 루치드는 손바닥 위에 놓인 불꽃을 관찰했다. 분명, 의심의 여지도 없이, 불이었다. 그런데 가만 살펴보니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자기가 읽은 책에서 불은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했다. ‘산소 또는 산소의 공급원, 가연성 물질, 발화점 이상의 온도’ 그런데 지금 루치드의 눈에 보이는 불꽃에는 그 세 가지 요소 중 하나인 ‘불에 탈만한 물질’이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를 태우고 있다는 느낌 없이, 허공에서 빛과 열을 내는 현상을 지속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다시 예전의 기억을 돌이켜보았다. “보통의 의지 가지고는 안 되지. 초월적인 의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법칙을 아우름과 동시에 그 법칙을 넘어서라도 해내겠다는 의지. 다른 모든 잡념을 떨치고 단 하나, <컨슈메>를 해내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가능하지.” 핀체노는 마법의 구현에 필요한 의지에 대해 그렇게 설명했었다. ‘모든 법칙을 아우르’면서 동시에 ‘법칙을 초월’하는 의지. “어쩌면!” 마법은 분명 <라티오>라는 공간에서 ‘원형’을 빌려오는 행위라고 하였다. ‘이미’ 존재하는 원형에는 속성과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조건이 붙지 않는 원래 모습 그대로가 바로 원형이란 의미.’ 거기에 대해 속성이나 법칙을 부여하는 것이 마법사의 역할이었다. 마법사가 부여하는 조건들은 고유의 원형을 침해하지 않는다. 즉, 마법사가 설령 물을 진득한 것으로 착각한다고 해도 물의 제대로 된 고유 성질만 이해한다면 마법사가 원형에 부정확한 정의를 내린다고 하더라도 물은 구현될지도 모른다. 아니 구현될 것이다. 그 오해마저 아우르며, 동시에 ‘초월’된 의지에 의해서 말이다. 불을 처음 구현해 낼 당시 루치드는 추위에 떨었고 죽은 늑대 앞에 앉아 있었다. 그때 처음 떠올린 고유성질은 빛이었다. 그 다음이 뜨거움, 즉 열이었다. 그 이후에도 불에 관한 고유성질을 찾느라고 이것저것을 떠올렸던 기억은 있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머지 것들은 불의 고유성질이 아니라 불의 가변조건들이었으니까. 고유성질에 대한 이해는 원형과 맞닿게 되고, 그 원형을 이미지화(化) 시킴과 동시에 초월적인 의지로 구현. 불의 마법은 그렇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의외의 깨달음은 다시 수업시간 중, 선생님의 설명을 듣던 와중에 이어졌다. 선생님이 교과서에 제시된 다양한 사례의 봉사활동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이게 봉사활동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봉사활동이란 무엇인가, 라고 정의를 내린 뒤 그 정의에 맞는 사례를 찾는 것은 다르다는 인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봉사활동의 정의에 맞춰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사례들을 찾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다. 막연히 다양한 사례들을 모아놓고 이것이 봉사활동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순환 논법의 함정이다.’ 연역과 귀납의 차이는 마법을 연구하는 방법론에도 이어졌다. ‘열의 다양한 물리적 속성―에너지의 이동, 분자계(界)의 운동 등―은 <라티오>라는 공간에 존재하는 원형의 고유성질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원형을 접해본 경험이 없으니까 지금 당장은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열에 대한 정확하고 보편적인 정의를 내릴 수 있다면, 다양한 성질들을 접하더라도 고유성질에 대한 기준―보편성과 고유성에 의거, 원형 이미지의 구현에 도움이 될 것이다.’ 고유성질인지 아닌지, 그 확인은 단순한 성질의 나열로만 판단할 수 없다. 이미지 구현의 성공여부에 따라 고유성질을 확인할 수 있다. ‘끊임없이 이미지를 만드는 실천도 병행해야 한다. 충분히 구현 가능한 이미지가 만들어지면 ‘초월적인 의지’로 구현하면 된다.’ 결과적으로 루치드는 지금까지 잡식성 포식자처럼 이것저것 읽고 공부한 덕분에 자신의 오류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이 깨달음 자체가 나중에는 거대한 딜레마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린 루치드가 이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공부와 시간이 필요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 “선생님이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잠깐 이야기 좀 할래?” 희연이 가방을 싸고 있는 루치드에게 말을 꺼냈다. “예?” “사실은 선생님이 방송국에 제보를 했거든. 그래서 널 취재하고 싶다고 하는구나.” “저를요?” “사실 선생님이 부족해서 널 많이 도와줄 수 없었잖니? 부끄럽게도 말이야. 그래서 혹시 방송에라도 너의 사연이 나가면 널 도와줄 수 있는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선생님이 제보를 했어. 만약 방송에 나간다면 너를 후원해주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고, 아니더라도 널 위해 모금이 될 수 있어. 그렇게만 된다면, 니가 하고 싶은 공부나 니 수준에 맞는 수업들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몰라. 어떠니?”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왜냐하면 방송이라는 게 어떻게 진행될지, 그 내용이나 과정 자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루치드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만 이해했을 뿐이었다. 사실 그 부분이 가장 솔깃한 부분이기도 했다.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게 된다니. “일단 보육원에도 이야기는 해뒀는데, 너한테 이야기하는 것은 선생님이 직접 하기로 해서 이렇게 하는 거란다. 지금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돼. 대신 며칠 뒤에 방송국에서 작가 한 명이 와서 너랑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구나. 그 때 작가랑 이야기를 나눈 뒤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거야.” 방송에 관한 자세한 내용들을 그 작가로부터 들을 수 있다고 덧붙이는 담임의 설명에 루치드는 일단 작가를 만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며칠 뒤, 겨울 방학을 2주 정도 앞둔 12월의 어느 날. 방과후 수업을 마치고 나온 루치드는 방송국에서 왔다는 작가를 만나게 되었다. 새침한 표정이 언뜻 보이지만, 대체로 수수한 옷차림에 털털한 느낌이 있는 20대 중반의 여자 작가였다. “반가워. 난 이나연이라고 해. 선생님한테 이야기 들었지?” “예. 안녕하세요.” “그래. 가만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자리를 옮기자. 복도에서 계속 이야기하기엔 할 이야기가 좀 많아서 말이야.” 마침 나연의 뒤에 있던 선생님이 둘을 상담실로 안내했다. ======================================= [46] 충돌(4) “재형아, 내가 전에 말했지? 내가 들어오기 전에는 회의실 꼭 치우라고. 이게 회의실이냐, 돼지우리냐.” “좀 전에 다른 팀들이 회의실을 먼저 써서…….” “야, 야. 내가 변명하지 말고 움직이라고 했어, 안했어? 뭘 시키면 변명부터 나와? 습관 참 이상하게 생겼어? 응?” 장PD가 손을 번쩍 드는 시늉을 하자, 이에 화들짝 놀라 고개부터 숙였다. “죄송합니다.” “빨리 치우라고.” 막내PD가 서둘러 테이블 위의 먹다 마신 커피, 이면지, 굴러다니는 볼펜, 마커 등을 허둥지둥 대며 치웠다. 어째 새로 들어온 신입이 이렇게 어리바리해서야 뭘 시켜먹지를 못하겠다며 궁시렁대는 5년차 장수혁 PD가 가장 상석으로 가서 털썩 앉았다. 뒤이어 눈치를 보던 작가 세 명이 쪼르르 뒤따르며 자리에 앉았다. “김 작가님, 제보 들어온 거 확인하셨어요?” “막내가 갔다 왔어요. 나연아, 얘기해봐.” 나연이 준비해둔 사진을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혹시 2~3달 전에 SNS에서 잠깐 화제가 됐었던 ‘책 읽는 꼬마’ 사진 기억하시나요? 왜 묘한 분위기 나던 꼬마 사진인데.” “잘 모르겠는데.” 장PD가 머리를 긁적이며 테이블 위의 사진을 집어 들었다. “잘생기긴 했네.” “아, 저 봤어요. 그 때 보고 묘하게 잘생겼다, 고 감탄했었는데.” 막내PD가 커피 잔을 돌리다 입을 열었다. “우리 막내가 알 정도면, 꽤 유명했었나보네?” “예, 그때는 실시간 검색어에도 아주 잠깐 올랐었나 봐요. 아무튼 이번 제보 주인공이 바로 그 아이였어요. 이 사진은 이번에 인터뷰 갔다가 찍은 사진이고요.” 그리고 앞에 놓인 태블릿을 두드려 무언가를 급히 찾았다. 그 사이 장PD를 비롯한 사람들은 인터뷰 사진을 집어 들고 감상을 했다. “얼굴을 보니, 잘생겼네요. 카메라 잘 받겠는데요?” “일단 얼굴만으로 반은 먹고 들어가겠네.” 그 사이 나연이 찾아낸 사진을 들어보였다. “여기 이것 좀 보세요. 이 아이를 모델로 한 광고.”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 아이가 책 한권을 열심히 읽고 있는 모습이 담긴, 시립도서관 광고 사진을 보여주었다. “모델이야?” “전문 모델은 아니고요, SNS 열풍 때 나돌던 사진이 바로 이 도서관에서 찍힌 사진이래요. 도서관에서 그걸 기회로 가을기획전 도서관 홍보 사진의 모델로 이 아이를 썼다더라고요.” “그래, 오케이. 그건 거기까지. 이제 제보 내용 확인한 거 이야기 해봐요.” 조용히 듣고 있던 PD가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재촉했다. “우선 제보내용 확인차 선생님과 먼저 이야길 나눴는데, 선생님 말씀으로는 아이가 보통이 아니라더군요. 교무실 선생님들도 모두 그 아이를 알 정도로 학교에서는 유명하고요. 수학을 잘하고 최근에는 물리학 계통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한 대요. 주로 독학이고요.” “독학?” “예, 제보내용대로 학교에서나, 보육원에서나 따로 아이를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낸다고 하더라고요. 보육원에서도 물어봤는데 보통은 선배들의 책을 빌려서 읽는 시간이 대부분이라고 하던데요. 당연히 과외 같은 없었다고 해요. 이 애도 자긴 과외를 받아본 적이 없다고 하고.” “책만 읽었다, 라……. 테스트는?” “일단 미리 준비한 테스트 지를 주기 전에 인터뷰를 했어요. 그런데 범상치 않은 애라는 걸 금방 알겠던데요?” 나연은 어제 인평초등학교에 갔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 상담실에 들어간 두 사람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여기는 따뜻하구나. 요즘 학교 난방이 잘 된다더니, 정말 좋네?” “…….” “혼잣말이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우선 몇 가지만 물어보도록 할게. 이름이…….” 루치드는 딱 부러지는 어조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니?” “아뇨. 지금 제가 있는 보육원의 원장선생님이 지어주셨다고 알고 있어요.” “어, 그래? 이름이 너랑 어울리는구나. 아무튼, 책 읽는 걸 좋아한다고 선생님이 그러시던데, 어떠니?” “음, 책 읽는 걸 좋아하기는 하죠.” 루치드는 마뜩찮은 표정으로 답을 했다. “묘한 뉘앙스네.” “책 읽는 걸 좋아한다, 고 표현하기 보다는 책을 통해서 공부하는 걸 좋아한다고 표현해야 될 것 같아서요.” 뭐라고 하는 거지? 순간 방심하다 사각에서 날아온 잽으로 관자놀이를 맞은 느낌에 멍해진 나연이었다. “…지금 초등학교 1학년이라고?” “예.” 확인할 필요는 없겠지만, 괜히 나이도 물어보고 싶어졌다. “그래, 어쨌든, 그 두 개가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줄래?” “책을 읽는다는 것과 책으로 공부를 하는 것은 목적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처음 학교에 왔을 때는 책을 읽는 게 좋아서 아무 책이나 읽었어요. 위인전이나 수학책이나 과학책이나 문학책을 가리지 않고 읽었어요. 그리고 그 때는 그 책의 내용을 감상하거나 감흥에 빠지는 걸 목표로 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공부가 목적이에요. 한 분야의 지식을 얻기 위해서, 글을 읽고 내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거죠. 목적이 다르니까 두 행위도 다르게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쩐지 다른 인터뷰를 진행해보지 않아도 될 거 같았다. 초등학교 1학년생이 이렇게 유려하게 논리적인 이야기를 할 정도라면, 이미 ‘천재’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 방송 소재? 대박 소재였다. “그럼 요즘은 어떤 책을 읽고 공부하니?” “최근에는 물리학을 공부하려고 해요. 물리적 현상들에 대해 호기심이 많이 생겨서요. 그런데 물리학을 공부하려면 수학도 많이 알아야 하더라고요. 그래서 수학책도 읽는데, 제가 수학을 잘 못해서 물리학 책을 읽어도 이해하기가 아직은 쉽지 않아요.” “수학은 어느 정도 하는데?” “아직 사칙연산 수준이고요. 일차방정식 정도는 이해를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초등학교 1학년? 중학교 1학년 아니고? “초등학교 1학년이 일차방정식을 한다고? 걔 중학생 아냐?” 장PD 역시 나연과 비슷한 개그를 떠올렸나 보다. 나연은 속으로 자신의 개그가 아재개그 수준임을 한탄하며 대답했다. “어쨌든, 더 이야기 해 볼 것도 없이 걔는 방송 적합용 얼굴에 대박 소재임이 분명해요.” 장PD는 고개를 돌려 왕작가를 쳐다보았다. “진행 스토리는?” 왕작가가 시선을 들어 올린 채, 한 손으로 펜을 돌리는 묘기를 부렸다. 검은 펜 한 자루가 손가락 사이를 현란하게 누비고 다녔다. “우선 아이 학교생활이나 보육원 생활 좀 따고요, 인터뷰 좀 곁들이고, 아이큐테스트 받고, 과학고나 대학교에 협조 부탁해서 전문가 선생님 모시고 테스트 해보고 그러면 오케이?” 나연이 덧붙였다. “진짜 실물로 보면 얼굴이 장난 아녜요. 딱 한국 사람의 얼굴 같지 않은 게, 그렇다고 외국사람 같지도 않고 그래서 뭔가 묘한 분위기인데 밸런스는 또 잘 맞으니까, 잘생겼다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되는 얼굴이랄까? 아무튼 그런 얼굴이라서 내용 상관없이 시청률 보장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막내야, 자신감은 좋은데 얼굴 뽑아먹는 건 카메라가 할 일이지, 작가가 신경 쓸 게 아냐.” “그래도 잘 나오면 좋죠. 기왕이면 다홍치마고, 보기 좋은 떡이 좋잖아요.” 가볍게 시선을 돌리며 나연을 무시한 장PD가 막내PD에게 촬영스케치 준비를 시켰다. “재형아, 카메라 준비시키고. 왕작가님, 스케줄이랑 스토리 잘 따서 정리해주세요.” “몇 분 컷으로 쓰시게요?” “아직은 불확실하니까, 우선 20분 컷으로 가봅시다.” 우선 회의는 마무리되었다. 회의실을 나오며 조윤선 작가가 나연에게 물었다. “그리 잘생겼든?” “아, 언니! 대박! 진짜 솔직히, 웬만한 아역 배우들보다 훨씬, 훠얼씬 잘 생겼어! 나는 딱 보자마자 안아버릴 뻔 했지 뭐야?” “아주 반했네, 반했어. 회의 때 스토리 아이디어는 없고 주구장창 얼굴 이야기만 한다 싶더니… 너, 혹시 로리?” “언니~! 무슨 큰일 날 소리예요? 그냥 애 얼굴이 계속 아른거릴……” -찰싹 “야, 야. 그게 더 큰일 날 소리다. 애 얼굴이 아른거리는 거면 중병이네 중병.” 맞은 팔뚝을 감싸 쥐면서도 애써 자기변호를 해보려는 나연의 입을 왕작가가 막았다. “적당히 해라. 장PD도 얘기했지만, 얼굴 파는 건 카메라나 할 일이고, 우리는 스토리 만들어야지. 나연이 너 이직하려고?” “에이, 우리 왕작가님. 무슨 그리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요. 제가 천직이 작간데요.” 되도 않은 애교나 부리며 상황을 정리하려는 모양새가 귀엽다. 왕작가는 풋하고 웃더니 저녁이나 먹자며, 후배들을 이끌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 물리학을 공부하며 동시에 기초 중등 수학에 까지 이른 예비 방송스타 루치드는 얼마 전 수업 때 얻은 아이디어를 기초로 새로운 마법에 도전하고 있었다. 루치드가 ‘영재’로 주목받으면서 얻게 된 것들 중 가장 좋은 것은 바로 수업시간에 딴 짓을 해도 담임교사가 제재를 하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경호야, 선생님이 수업 중에 딴 짓하면 된다고 했어요, 안된다고 했어요?” “근데, 석고도…….” 석고도 지금 딴 데 보고 있는데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어허, 경호야. 선생님이 말씀하시잖니? 어른이 앞에 있으면 말을 잘 들으라고 했어요? 듣지 말라 고 했어요?” “잘 들으라고 했어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억지로 답을 하는 경호였다. “선생님 이번 한 번만 봐 줄 거예요. 우리 경호가 평소에 수업 잘 듣고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친구니까, 선생님 이번에는 그냥 봐주는 거예요. 대신 나중에 또 딴 짓하면 선생님이 진짜 벌줄 거예요. 알겠어요?” “예.” 어쩐지 억울해하는 것 같지만, 희연은 애써 눈을 돌렸다. 이 와중에도 정신이 딴 곳을 헤매고 있는 듯이 보이는 루치드였지만, 오히려 희연은 고맙기만(?) 했다.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동안 아이들은 루치드가 질문하고 선생님이 대답을 하지 못해 얼굴이 붉어지는 상황을 보고 즐거워 했었다. 그 상황이 일종의 게임처럼 여겨졌는지 아이들은 루치드가 수시로 선생님께 질문하기를 바랐고, 뒤에서 종용하는 모습까지도 보였었다. 다행히 루치드가 금세 흥미를 잃고―분명히 흥미를 잃은 것이지, 선생님에 대해 낙담을 한 것은 아니라고 희연은 믿고 있다―혼자 고민에 빠지거나 책을 읽는 시간이 늘면서 질문을 하지 않게 되자, 희연이 곤란에 빠지는 상황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 때부터 희연은 루치드를 자유롭게 방임하였다. 쉬는 시간, 창밖을 바라보던 루치드가 외투도 입지 않고 운동장으로 나왔다. 마침 옆 반의 명수도 운동장으로 나오고 있었다. 열혈소년 명수는 오늘도 10분의 휴식시간을 알차게 활용하기 위해 운동장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어, 석고야? 안 추워?” 두꺼운 잠바를 입고 뛰어나온 명수가 티셔츠 한 장만 입고 나온 루치드를 보며 물었다. 루치드가 씩 웃었다. “어. 안 춥네.” ======================================= [47] 충돌(5) 오랜 시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정 시간 일정 부분의 온도를 루치드의 뜻대로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다른 마법도 마찬가지였다. 마찰이든, 불이든, 확대든 오랜 시간 마법시연을 할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마법이 무효화되든지, 취소가 되었다. 단, 예외적으로 오랜 시간 마법시연에 성공한 적이 있었는데, 이전에 ‘불의 장벽’을 만들었을 때였다. 돌이켜보면, 그 때 꽤 오랫동안 ‘불의 장벽’이 유지되었던 것 같았다. 대신 몸에 힘이 급속도로 빠졌던 것을 보면, 분명 마법의 반작용이 있었음을 추측해 낼 수 있었다. 어쨌든, 루치드는 또 하나의 마법에 성공했고, 그 사실이 마냥 뿌듯했다. 10분의 쉬는 시간이 끝날 무렵, 루치드는 교실로 들어왔다. 의자에 걸쳐진 보라색 잠바가 보였다. 마법을 시연해내면서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보다 신기한 것은 이 세계의 과학문명이리라. 오랜 시간, 오랜 경험들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문물들이 마법의 효용성을 무력하게 만들고 있는 세상이었다. **** “선생님, 이번에 실시한 아이큐 테스트에 대해 간단히 설명 부탁드립니다.” 살짝 긴장한 듯 보이지만, 몇 번 연습을 했었는지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질문에 답하는 의사선생님이셨다. “예, 이번 아이큐테스트는 웩슬러 지능 검사라고 부르는 테스트로 가장 범용적으로 사용되는 방식입니다. 특히 우리 어린이가 받은 검사는 6세에서 15세까지의 아동들이 받는 ‘웩슬러 아동지능검사’(WISC)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 아이가 받은 점수가 124입니다. 124라고 하면 보통 상위 7% 안에 드는 우수한 IQ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흔히 영재라고 부르는 아이들의 IQ가 130이상의 상위 2%에 속하는 경우임을 감안한다면, 이 어린이는 영재라고 부르기는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결과에 가장 실망한 사람은 다름 아닌 제작진. 왕작가는 스토리를 궁리하고 장PD는 영상을 채우며 시간을 끌었다. “좀 더 자세하게 결과 분석을 해주신다면?” 장PD가 조 작가에게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이 부분은 자막으로 처리하라, 는 뜻. “아, 사실 검사 결과를 살펴보면 거의 다수의 부분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습니다. 특히 산수, 어휘, 이해와 같은 언어성 검사에서 높은 두각을 보였습니다. 반면 동작성 검사는 대체로 평범한 수준보다 조금 높은 정도의 점수를 얻었습니다. 이 검사를 통해 보아도 이 어린이가 평소 독서를 자주 하면서 인지, 지각, 이해에 대한 부분이 훈련이 많이 되고, 동시에 많이 발달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독서와 아이큐 발달이란 키워드에 동그라미를 치는 왕작가 옆에서 장PD가 연필로 선을 쭉 긋더니, ‘평범한 영재’와 ‘노력하는 영재’라고 빠르게 써내려갔다. 왕작가가 장PD의 뜻을 빠르게 캐치했다. 생각해보니, 원래 천재이거나 영재인 것보다는, 독서를 통해 영재 수준의 아이가 되었다는 ‘후천성 영재설’이 훨씬 좋은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병원에서 촬영을 마친 제작진은 서둘러 이동할 준비를 했다. 다음 장소는 서울과학고였다. 다행히도 제작진은 과학고 물리 담당 선생님께 촬영 협조를 얻었다. 예전에는 촬영 협조라고 하면 다들 거리낌 없이 해줬는데, 요즘은 시국이 워낙 흉흉해서인지 TV에 나오는 걸 많이 꺼리는 분위기다. 덕분에 제작진만 열나게 뛰어다니며 캐스팅부터 로케이션까지 촬영 협조를 부탁하는 신세였다. 승합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이에게 나연이 물었다. “아침부터 검사받느라 피곤하지 않니?” “괜찮아요.” “그래? 오늘따라 날이 더 추워져서 말이야, 누나가 너무 미안하네. 다음 촬영만 끝나면, 오늘은 모두 끝날 거야. 참을 수 있겠지?” 춥지는 않았다. 아이큐 테스트라는 것도 재미있었다. 다음 촬영은 과학고의 물리 선생님을 만난다고 귀띔을 들었는데, 더 재미있지 않을까? 피곤하기 보다는 기대가 더 많이 됐다. “자, 모두 탔어요? 출발합니다.” 과학고에서는 멀쑥한 차림에 단정하게 빗은 머리, 굵은 안경테를 쓴 선생님이 실험실 앞에서 제작진과 루치드를 반겼다. “물리학에 관심이 많다고?” 똑똑한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며,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교사의 운명이며, 숙명이고, 자부심이라고 생각하는 물리 선생님은 루치드에게 포근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예.” “최근에 어떤 걸 공부하고 있니?” “지금은 온도의 변화에 대해 관심이 가는데, 책이 없어서 제대로 공부하고 있지는 않고요. 그 전에는 마찰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어요.” 조금은 안타깝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아이가 제대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자신이 관심 있어 하는 분야를 계속 공부할 수 있겠지만, 듣기로는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아이라 제한이 많다고 했다. “음, 그럼 혹시 궁금한 게 있어?” “몇 가지 있는데요. 우선 마찰력이 필요한 분야와 필요하지 않은 분야에서 마찰력이 어떻게 응용되는지, 실제 사례들을 많이 알고 싶어요. 그리고 마찰계수가 극단적인 상황에서 어떤 변화들을 관찰할 수 있는지도 궁금하고요. 예를 들면, 모터의 축이 돌아갈 때 마찰에 의해 에너지가 손실된다고 하는데요, 만약 마찰계수가 0이 돼서 마찰에 의한 에너지 손실을 거의 0으로 조정할 수 있다면 모터의 에너지 효율이 올라가겠죠? 근데 그 효율이 영구기관에 준하는 효율이 될 수 있는지, 아니면 다른 요인 때문에 영구기관이 불가능한지도 알고 싶어요.” 이 아이 뿐만 아니라 물리학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구기관’에 대한 환상을 꿈꾸기 마련이지. 이런 걸 보면 또 어린 아이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초등학교 1학년이라고 했지. 하지만 물리 선생님은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인해 루치드와 같은 영재나 천재에 준하는 아이들을 여럿 본 경험이 있었다. 당장 이 과학고에 재학 중인 아이들만 해도 개중에는 정말 뛰어난 지성을 뽐내는 아이들이 여럿 있었다. “우선 마찰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힘과 에너지에 대해 알아야 할 것 같은데, 힘과 에너지는 공부를 해봤니?” “솔직히 말씀드리면 자세히는 모른다고 해야 될 것 같아요. 제가 아는 게 어느 정도인지를 비교해 볼 수가 없어서요. 다만 책을 읽다보면 개념이 헷갈릴 때도 있고,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어서 제가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니란 사실은 알고 있어요.”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꽤 진도가 나간 셈이라고 칭찬해주고 싶구나. 그럼 선생님이 우선 힘과 에너지에 대한 설명부터 해줄게. 그러고 나서 니가 말한 마찰력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괜찮지?” “네.” 장PD는 다소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문답들을 보며, 잠시 편집 방향을 고민했다. 분명히 이 아이가 자기 수준에 맞지 않는, 아니 또래의 수준을 뛰어 넘는 지식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아이큐가 영재 수준으로 높지는 않지만, 적당히 의사의 소견을 곁들이고 스토리를 만들어낸다면 ‘노력파 영재’라는 수식어 정도는 타이틀에 걸 수 있을 거 같았다. 문제는 지금 진행되는 방향이 의외로 심심해보일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뭔가 임팩트가 필요한데, 그 임팩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다른 스태프의 의견이 궁금해서 고개를 돌리는데 왕작가와 눈이 마주쳤다. 왕작가의 눈에서 걱정의 빛이 보이는 것을 보니, 자신과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잠깐 쉬었다가 가겠습니다. 괜찮죠 선생님?” “예, 뭐 그러세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선생님은 자기 옆에 앉아 있던 루치드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더구나. 혼자 공부 했다며?” “아뇨, 그렇게 힘들다는 생각은 못했어요.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지, 이해를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이해를 못해도 계속 공부하다보면, 이해가 될 날도 올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중학생 형들이나 고등학생 형들은 이런 거 다 이해하고 공부하는 거잖아요.” 물리선생님이. 촬영 전, 제작진에게 들은 이야기대로라면, 저 아이는 지식욕이 꽤 강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의외로 루치드는 조바심을 내지 않았고, 꾸준한 근성도 가지고 있음을 물리선생님은 알게 되었다. 그러니 괜히, 더 많이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혹시 장래 희망이 뭐야?”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왜?” “제가 좋아하는 것과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르니까요.” 어쩐지 아까부터 자신의 아들을 생각나게 하는 화법이었다. 어쩌면 보육원 생활이 저 아이가 자유롭게 자신의 꿈을 꾸는 것에 제약을 걸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리학을 특별히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어?” “음… 물리학은요, 주위에 보이는 현상들의 진실을 파헤치는 학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진리를 알아야, <라티오>에 접근이 가능하고 마법구현을 할 수 있으니까,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잘 한 일이었다. 물리선생님은 루치드에게서 자신의 아들과 같은 증상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그것이 ‘중2병’이라는 증상임을 루치드가 알게 된다면, 마음의 상처를 받을지도 모르겠다. 물리선생님은 촬영이 재개되기 전까지 중2병 증상을 보이는 환자, 아니 초등학교 1학년과 소소한 질문을 주고받았다. 그 동안 장PD와 왕작가는 급하게 대책회의를 열었다. “저 아이 자체만으로도 화제가 되지 않을까요?” 왕작가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당장 스토리를 만들기에는 버겁다. 지금도 후배작가들이 머리를 굴려보고 있지만, 자갈 소리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보기에는 영상에 임팩트가 부족하지 않아요?” “그럼 진짜 얼굴이라도 팔아야 하나?” 다양한 앵글로 아이의 얼굴을 촬영하는 방식을 통해 외모를 부각시켜 시선을 끌어보자는 이야기. 카메라 감독은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지만 장PD는 아니었다. “얼굴도 한계는 있어. 스토리가 없으면 도리어 말이 나올 거예요. 차라리 어떤 어려운 문제를 내고 맞히는 상황을 연출하는 정도로 타협하는 건 어때요?” “문제는 저 아이가 수학이나 물리부분이 고르게 학습된 상황이 아니어서 어중된다는 것이겠지요.” “일단 촬영을 마저 끝내야겠어요. 학교 측에서 마냥 촬영하게 놔둘 리 없으니까요.” 언제나 시간은 자기들 편이 아니었다. 이윽고 촬영이 재개되었다. 물리선생님이 힘과 에너지를 간략히 설명한 후, 몇 가지 공식을 칠판에 적어가며 마찰력에 대해 설명하고 그 실제 응용 사례들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주었다. 루치드는 어느 때보다 집중한 모습으로 선생님의 설명을 머리에 새겨넣었다. “잠시만, 선생님.” 장PD가 선생님을 불렀다. “혹시 준비하신 물리 실험이 있으면 지금 당장 가능한 게 있을까요? 아무래도 이론 수업만 하면 시청자들이 지루해 할 수도 있어서요.” “일단 준비한 실험 중에 마찰력 효율 테스트가 있습니다. 마찰계수가 다른 두 개의 실험체를 모터를 이용해 돌렸을 때 에너지 효율이 어떻게 차이 나는지를 실험하는 것입니다. 저쪽에 학생들이 미리 준비를 하고 있으니 가서 실험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장PD는 루치드에게도 동의를 구해서 바로 실험 장면을 촬영하기로 했다. 두 종류의 쇠막대를 동일한 속도로 회전하는 모터에 부착하여 회전수의 차이를 비교하고 에너지 효율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실험하는 것이었다. 정확한 수치를 산출해낼 수 있다는 점과 이를 통해 에너지 변화과정―전기에너지에서 회전에너지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손실되는 에너지의 차이 비교를 통해 마찰력이 에너지 전달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아본다. 실험 내용을 들은 루치드는 마찰계수 차이에 의한 비교를 어림짐작으로 알아보는 것이 아닌, 정확한 수치로 그 변화를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 흥미가 생겼다. 게다가. “선생님, 혹시 마찰계수를 최대한 낮췄을 때의 변화도 같이 측정할 수 있나요?” “음, 가능하지. 보통 윤활유 회사에서 많이들 실험하는 건데, 동일한 쇠막대에 특정 윤활유를 사용한 뒤, 에너지 효율을 측정하지. 여러 회사의 윤활유를 사용해서 어떤 제품이 더 좋은 효율을 내는지를 검사하기도 하고.” “여기서도 실험 가능한가요?” “그래, 제품 이름만 방송에 나가지 않는다면 말이야. 그렇죠? 피디님?” 피디는 기업들에서 실제 실험하는 것이라 하니 괜찮은 그림이 나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실험이 준비되는 동안 루치드는 잠깐 장난스러운 호기심이 생겼다. 윤활유를 사용해도 마찰계수가 낮아질 뿐, 0은 아니다. 그러니, ‘만약 마법으로 마찰계수를 0으로 만든다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윤활유를 이용한 실험에 살짝 끼어들어 보면 되리라.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그 계수는 루치드에게 유의미한 결과 값이 될 것이다. ======================================= [48] 충돌(6) 겨울방학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곧 방학이 된다는 것과 학년이 끝나간다는 사실이 교내 분위기를 살짝 들뜨게 만들었다. 아이들은 즐거운(?) 방학이 온다는 사실에 들뜨고, 교사들은 지독한 페이퍼 작업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얼굴이 들떴다. 부지런한 분들이라면 이전년도 학교생활 기록부를 수정하거나, 애들 교과 평가와 교과학습발달상황을 등록하는 일 정도는 이미 끝냈을 테지만, 대부분은 바쁜 일정 속에서 연말까지 미루고 미루다 연말 업무와 함께 몰아서 해야 될 지경이 되었다. 학기 전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학교생활기록부 작성과 마감이라는 어마무시한 서류작업은 각 반의 학생 수만큼이나 버겁고, 진급이나 졸업하는 학년들은 각기 또 다른 서류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력이 되시는 분들은 예전보다 줄어든 학생들 덕분에 요령 좋게 일처리를 하면서 방학을 준비했고, 경력이 얼마 되지 않는 선생님들은 오로지 노가다 하는 잡부의 심정으로 밤잠을 줄여가며 서류작업과 수업준비를 병행하며 학기말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1학년 3반 담임 김희연 교사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최근 눈 밑에 다크 서클이 짙게 내려앉았다. 그 와중에도 어제 저녁, 할 일이 태산이라고 투덜대며 밀린 빨래에서 나는 시큼한 냄새도 나 몰라라 하시던 분이 열 일 제치고 거실에 앉아 TV를 시청했다. 왜냐하면 자기 반의 골칫덩이, 아니 전 학교의 명물로 거듭난 루치드의 공중파 출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제보로 시작된 방송이었기에 책임감의 차원에서 시청을 한 것이 한 이유였다면, 또 다른 이유로는 피곤에 찌든 몸과 마음을 잠시 풀어 줄 자기 위로의 시간, 이라는 핑계로 게으름을 피우고 싶었던 것이 또 한 몫을 차지했다. 시청을 앞두고 희연은 어쩐지 자신이 흑막(?)의 주인이라도 된 것 같았다. 자신의 제자가 TV에 나와 영재로 소개된다는 사실에 조금 우쭐해지는 기분도 들었다. 내일부터 다른 사람들, 동료 교사나 학부모들이 자신에게 이것저것 물어볼 지도 모른다.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영재를 교육하는 방법이나, 영재들이 공부하는 방식이나, 그런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얻는 보람과 같은 것을 물어올지도 몰랐다. 50분짜리 방송에서 루치드는 방송 초반 MC들의 소개 이후 등장하여 약 20분간 VCR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어쩐지 희연은 그 아이가 자신이 아는 아이가 아닌 것 같은 생소한 기분을 느꼈다. “저런 애가 아닌데. 저 정도가 아닌데.”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목 뒤를 긁적이는 희연. 자신이 보아온 아이는 방송에 나오는 것보다 훨씬 재기 넘치고, 영리하며, 예상을 뛰어넘는 질문을 자주 던지는 ‘천재성’을 보였었다. 그런데 방송에서는 달랐다. 말하자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똑똑한 옆집 아이정도로 불릴 평범한(?) 아이처럼 보였다. 초등학교 1학년이 물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소개 멘트 이후 진행된 간단한 테스트에서 일차방정식을 어렵지 않게 풀어내며 대단하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데는 성공했다. 그런데 그 이후 아이큐테스트에서는 생각보다 높지 않은―영재라고 불리는 아이들이 가진 아이큐에 비해 낮은 수준의 테스트 결과를 보여 의아한 생각을 품게 하였다. 과학고 물리학 선생님을 만나서는 이런 저런 수업을 받는 태도만 보여주더니 빗면마찰력 실험을 보여 아이가 감탄하는 모습 외에는 별 다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루치드는 정확한 수치가 조율되며 진행되는 실험에 감탄을 한 것이지만, 그걸 모르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겨우 저걸로? 라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영상 말미에 물리선생님은 조금은 어정쩡한 태도로 마지막 인터뷰에 응했다. “초등학생이 주변의 신기한 현상과 과학적 지식에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당연하지 않아! 우리 반 애들 중에 호기심 가진 애는 그 녀석 밖에 없다고요! “하지만 그것을 호기심에 그치지 않고 전문적인 분야까지 공부를 해서 알려고 하는 욕심은 쉽게 보기 힘든 것입니다. 특히 초등학생이라면 놀라운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초등학생이 아니라고! 초등학교 1학년, 입학한지 1년 밖에 안 된 애라고요. “저 어린이가 보여준 열정과 노력이라면 앞으로의 모습이 무척 기대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응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아이는 천재다, 놀랍다, 대단하다, 국가와 사회가 나서서 도와야 된다, 라고 왜 말을 못해요. 희연은 어쩐지 심심해져 버렸다. 아이에 대한 자신의 기대가 너무 높았던 탓인지, 아니면 이 아이를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자신의 착각이었는지 방송은 재미가 없게 끝나버렸다. 혹시 자신만 그렇게 느낀 것인지 궁금해서, 방송국 게시판을 찾아 들어갔다. ―방금 나온 아이, 예전 SNS에 나온 책 읽는 아이 맞나요? 잘 생겼네요. ―혼혈인가요? 꼬마 주제에 콧대가 나보다 높아요. ―눈동자 색깔이 묘한 것 같은데, 조명 때문인가요? 아니면 제가 잘못 본건가요? ―물리학에 관심이 많은 아이, 라는 소재가 이제 좀 식상한 듯. 게다고 오늘은 조금 억지스러운 면이 있었던 것 같음. 억지로 아이를 영재라고 포장하려 한 듯. ―1차 방정식 풀 줄 아는 초등학생이 없나요? 얘만 풀 줄 아는 건가요? 자신은 익숙해서 몰랐는데, 사람들은 아이의 외모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대부분의 게시글이 아이의 ‘잘생긴’ 외모에 편중되어 있었다. 더러 아이의 실력에 대해 언급한 게시글이 있었는데, 그 대부분은 ‘영재’라는 기준에 못 미친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사실, 글이 많지가 않았다. 방송이 생각보다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했던 것일까? 희연은 차라리 이 시간에 빨래나 할 걸, 하는 생각을 하며 책상 한 쪽에 밀어 뒀던 서류들을 끌어안았다. 묵은 빨래가 점점 더 숙성되고 있었다. **** “장PD, 다른 제보 들어온 아이들 많잖아? 다음 회차 준비해야지.” “다음 회차 때부터 잘하면 되는 거고. 너무 미련 갖지 말고, 낙담도 하지 말고.” “시청률이 다는 아니잖아. 우리 아이들의 미래, 우리 대한민국의 교육문제도 잘 짚어낸 방송이었어. 괜찮았다니깐. 너무 실망하지 마.” “장PD님, 죄송해요.” 마지막으로 편집실을 찾아온 막내 작가 나연이 울기 직전의 얼굴로 찾아와 사과했다. <영재를 찾아서>라는 프로가 시작되고 가장 낮은 시청률, 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난 주 자동차 브레이크 등만 보고도 무슨 차인지를 맞추고, 경찰을 도와 도난차량을 알아내던 영재의 회차에 비하면 4%가 내려앉은 시청률이 나왔다. “니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래. 다 제대로 연출하지 못한 내 잘못이지.” 연출보다 소재가 더 중요한 프로그램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청률 폭망의 원인을 막내작가에게 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말 작정하고 얼굴 파는 작전을 썼더라면 오히려 시청률이 더 잘 나왔을 수도 있으니까. 결국 연출의 잘못이었다. 사실 장PD로서도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연말이라 일정이 빡빡해 재촬영이 어려웠고, 게다가 누구도 예상 못한 일도 벌어져서 수습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일 덕분에 장PD는 시청률을 토막 냈어도, 윗선으로부터 제재를 받지 않았다. 그래도 억울한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아 괜히 혼자 속앓이 하느라 편집실 바깥으로 나가지를 못하고 있었다. **** “사장님, 구했습니다.” “아, 이게 그 영상인가?”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비서가 내민 USB와 서류철을 받아들었다. “예. 방송에는 내지 못하게 막았습니다만 대신 협찬 광고를 하나 붙여주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했습니다.” 비서가 금테안경을 추켜올리며 성과를 보고했다. 제품 특성상, 주 타겟층이 보는 시간대가 아닌 곳에 광고를 낸다는 것은 그냥 돈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식으로 방송국에 억지로 광고를 붙이는 대신 은밀한 뒷거래를 하여 방송국이나 회사가 각자의 이득을 취할 때가 있었다. 이번에도 회사입장에서는 불리하게 작용될 영상을 내보내지 않게 되었기에 만족스러웠고, 방송국에서는 시답잖은 영상 하나 편집해서 광고하나를 얻어냈으니 만족스러웠다. 장PD가 시청률 토막의 책임을 지지 않은 것은 덤이었다. “영상 분석은 했고?” “예, 미리 과학고에 요청해서 받은 실험 데이터와 영상을 비교하여 1차 분석을 마쳤다고 합니다.” “1차분석이라니?” 서류철을 들추려다 비서를 바라봤다. “실은 저희도 처음에 들은 결과를 믿을 수 없었던 것이 사실 아닙니까? 한 번의 영상분석으로 사태를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조금 따른다는 판단입니다.” “그래서?” “차후 다른 실험과 병행해서 좀 더 정밀분석을 해보기로 연구진이 알려온 상태입니다.” “만약 그 영상 속 실험 결과가 사실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해당 실험은 고작 3회 정도 시행되었을 뿐입니다. 때문에 실험 데이터 자체의 신뢰도는 의심스러운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계수가 정확하다고 가정한다면… 저희 제품보다 7배는 더 우수한 전달효율을 보이는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7배라.” “만약 방송에서 그 장면이 조금이라도 나왔다면 입소문을 타고 시장점유율이 뒤바뀔 수 있을 만큼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데이터 말이야, 사실 말이 안 되는 거지?” “예. 저희 연구진들의 의견 역시 그 데이터를 의심했으니까요. 문제의 촬영 이전에도 그 쪽 제품을 실험해 보지 않은 게 아닌데, 갑자기 그런 결과가 나왔다고 하니 저희 연구진이 많이 당황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 영상 증거가 확실하고 증인들도 여러 명 있으니까요.” “…….” 비서는 몸을 바로 세우고 헛기침을 했다. “일단, 연구진들에게 맡겨보고 차후 다시 보고를 받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저 쪽 회사는 모르나?” “아마, 모를 겁니다. 저희도 촬영현장에 박 이사님 자제분이 있었기에 우연히 알아낸 것이지 않습니까? 그 아이가 영민하게도 결과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저희 쪽에 연락을 주었기에 막을 수 있었습니다.” 사장은 USB를 집어 책상 위를 톡톡 두드렸다. “나중에 박 이사랑 밥 한 끼 먹어야겠군. 아, 장학금도 한 번 알아보고. 연구소에는 빠른 시일 내에 결과물을 내라고 해요.” 사장의 종합적 지시사항에 비서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 방학이 다가오는 것과 동시에 또 하나의 큰 행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크리스마스. 보육원에서는 12월 초부터 준비한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이곳저곳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현관 앞에 있는 작은 조경나무들에 꼬마전구가 걸리고, 실내 복도에는 갖가지 종이꽃과 트리모루들이 장식되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보육원이라고 바깥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여러 복지가들이나 자원봉사자들, 지원기관의 협조로 풍요로운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수 있게끔 준비되고 있었고, 아이들 역시 크리스마스 선물이나 행사 등을 기대하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냈다. 루치드 역시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사실 방송에 나간 이후, 더욱 물리학에 애정을 갖게 되었고 좀 더 심화된 공부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커졌다. 하지만 방송 촬영 자체는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이동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많다보니 너무 효율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을 봤다면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을 텐데. 방송보다 즐거운 일은 보육원 안에서 생겼다. “우와, 이거 봐봐. 되게 많다.” “여기 만화책은 없나?” “이런 건 석고나 좋아하는 책인데. 별로네.” 보육원 안에 도서관이 생겼다. ======================================= [49] 충돌(7) 일전 ‘시립도서관’의 광고를 찍을 때, 보육원장은 루치드의 소원을 물었다. 보육원생의 사적 활동에는 보육책임자의 허락을 득하게 되어 있으나, 차후 예상치 못한 법적인 문제로 야기될 시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보육원생의 자발적 의사에 따른 결정으로 진행되어야 뒤탈이 없다. 그래서 원장은 루치드에게 모델료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루길 원했고, 루치드는 책을 원한다고 대답했다. 때문에 원장은 행정과장과 함께 몇 권의 책을 사야하나 고민을 했는데, 마침 시립도서관에서 솔깃한 제안을 해 왔다. 가을 기획전과 겨울 특집과 맞물려서 기획된 행사의 일환으로 지역사회 복지사업을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함께 하자’는 표현이었지만, 실제로는 보육원 내에 ‘작은 도서관’이라는 이름의 시설을 설치하자는 행사였다. 인평시와 인평시립도서관이 협조하여, 아네스 보육원 내에 ‘작은 도서관’을 설치한 후 이를 연말 지역사회 복지행사의 일환으로서 홍보하자는 게 주 내용이었다. 보육원은 당연히 오케이를 외쳤고, 1층의 행정실 옆 사무실 한 칸을 비우는 작업을 해왔다. 그리고 마침내 겨울방학이 시작될 즈음에 맞춰 보육원 내에 ‘도서관’이라고 불릴 시설이 갖춰지게 된 것이다. 대략 3천권 정도의 도서가 비치되며, 유아부터 고등학생까지 모두 읽을 수 있을만한 다양한 책들이 구비되었다. 루치드 개인으로서는, 책 몇 권 선물 받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을 얻게 된 셈이었다. 이틀 전부터 출입이 허용되면서 루치드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난 뒤에는 거의 자기 전까지 도서관에서 책을 봤다. 하지만 도서관의 성격상, 학문적인 서적보다는 인문, 문학 관련 서적과 기초학문분야의 책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 물리학을 계속 공부하고 싶어 하는 루치드는 조금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건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공부해도 되는 문제이니, 저녁시간에는 다른 공부도 할 겸해서 다른 분야의 책을 읽기로 마음먹었다. 그랬더니 너무도 즐거운 독서시간이 매일매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작은 도서관’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진 루치드를 복도에서 바라보는 두 사람이 있었다. 행정과장은 곁에 서 있는 보육교사에게 말을 걸었다. “저 아이가 혹시 부모나 이전에 있었던 보육원 이야기는 한 적이 없었나요?” “예. 과거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흠. 이거 나중에 문제가 될지도 모르는데.” 1년 전, 루치드의 초등학교 입학을 돕기 위해 출생신고서 및 기타 서류 작업을 했었던 행정과장은, 현재 서류상으로는 루치드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후 루치드가 개인 활동으로 광고를 찍거나 방송에 나왔었지만, 루치드를 찾는다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이 아니라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를테면 저 범상치 않은 아이의 친부모라는 사람이 뒤늦게 등장하게 되는 경우, 법적으로 조금 꼬일 수도 있는 일이 지금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양이 되더라도 친권자가 나타나면 법적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행정과장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일단, 다음 주말에 저 아이를 보러 온다고 하니까 선생님이 말씀 잘 전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등 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는 루치드는, 그저 맑은 미소를 띤 채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의 에피소드를 읽고 있었다. **** 방학을 맞이하고 난 뒤, 첫 주말. 보육원에는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원래 이 시기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아오는 시기이기도 했다. 자원봉사를 다니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이 많기도 하거니와, 연말을 맞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자라난 이타심(利他心)이 보육원을 찾게 만들었다. 이렇게 찾아오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아이들과 놀아주는 일을 상상하며 오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 보육원에 오게 되면 그 사람들은 다양한 작업들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복도를 청소한다거나, 현관을 청소한다거나, 창문을 닦는다거나, 잡초를 뽑는다거나, 커튼이나 이불을 빨거나, 부러진 의자 등을 수리한다거나. 다시 말해 청소가 제 1작업이요, 수리가 제 2작업이 된다. 그리고 그 시간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마음껏 모래먼지를 들이마실 수 있게 된다. 보육원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모래먼지 마시는 시간이라는 것을 아는 자원봉사자들은 몇 없었다. 아이들이 항상 외로움과 싸우고, 사랑에 고플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살고 있었고, 가끔은 원외에서 학교친구들을 만나기도 하며 지냈다. 자주 찾아오는 자봉과 친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뜨내기처럼 찾아오는 사람들은 되레 낯설어하며, 차라리 다른 놀 거리를 찾아 떠났다. 아직 운동장 모래먼지에 익숙하지 않은 영유아의 경우에도 자기들끼리 놀이방에서 노는 게 좋지, 낯선 언니 오빠들과 노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하물며 초등학생 이상의 아이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멀리 차!” “알았어.” 골키퍼를 서고 있던 루치드가 공을 공중에 살짝 놓았다가 오른발로 걷어 올렸다. 차는 힘에 비해 멀리 날아가는 공을 보며,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가끔씩이라도 연습을 했더니 이제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처음에 차는 순간에는 마법을 걸지 않았다. 적당한 힘이 전달될 수 있도록 공을 찼다. 그리고 공이 발끝을 떠날 때, 마법을 사용했다. 공은 전달된 힘을 거의 잃지 않고, 공기의 저항도 덜 받으면서 나아갔다. 날아가던 공에 마법의 효과가 사라졌다. 미리 적당한 시간제한을 걸어놓은 마법이었기에 대략 1~2초 정도가 지나면 마법이 사라지고, 대신 공기의 저항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면 잘 나가던 공이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공은 거의 반대편 골문 즈음에 떨어졌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신기해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도 익숙해져서, 루치드가 공을 찰 때면, 거의 대부분 아이들이 미리 달리고 있거나, 반대편 골문 앞에서 진을 치고 기다렸다. 그렇게 반대편 골대 앞에서 투닥이고 있을 때, 루치드는 상념에 빠져 잠시 자신만의 시간을 가졌다. “춥지 않니?” 누군가 골대 뒤에서 루치드에게 말을 걸었다. 뒤를 돌아보니 어쩐지 한 번 본적이 있던 얼굴 같았다. “예. 괜찮아요.” 반대편 골대에서 골문을 지키는 골키퍼는 두터운 점퍼를 입고 있었다. 아무래도 골키퍼가 다른 아이들처럼 계속 뛰어다니는 포지션이 아니다보니, 차가운 겨울바람을 가만히 서서 견뎌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치드는 다른 아이들처럼 가벼운 티셔츠 한 장만 입고 있었다. 마법을 계속 사용하여―지속시간이 길지 않아 반복적으로 사용을 해야 했다―추위에 버틸 수 있다는 점이 한 이유였고, 점퍼를 걸치면 몸이 무거워지는 같아서 입지 않는 것이 또 한 이유였다. “혹시 우리 본 적 있었나? 니 얼굴, 꽤 낯익다?” 인평시립도서관 홍보물에서 봤을 수도 있고, 공중파에 출연한 장면을 봤을 수도 있다. “예전에 여기 봉사활동 오셨을 때 봤을 수도 있겠네요.” “어, 그런가?” 소녀는 잠시 생각을 돌이켜보려는 듯, 머리를 들어 올리고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청명하게 맑은 겨울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시원하게 열려 있었다. “아, 맞다. 너 생각났어. 작년에 봤던 거 같은데? 니 얼굴 생각난다야.” 소녀, 지원은 용케도 루치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때, 내가 너한테 이름을 물었는데 이름을 안 가르쳐줬었지? 맞아. 어쩜 얼굴이 하나도 안변하니? 지금도 잘생겼다 너?” 지원의 호들갑에 괜히 민망해져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지금도 안 가르쳐 줄거야? 아, 내 이름 아니? 내 이름은 지원이야. 양지원. 연예인이랑 이름이 똑같다고 하던데.” 루치드는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지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그 이름? 너무, 너무 잘 어울린다.” 진심처럼 들리지 않았지만, 루치드는 개의치 않았다. 대신 나중에 원장선생님과 독대할 기회가 생긴다면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지은 이유가 뭔지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아, 그런데 축구 하는 거 좋아하니? 보기에 별로 안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서 말이야.” “좋아는 해요. 그런데 지금은 그냥 어쩔 수 없이 나와 있는 거예요.” “왜?” “도서관이 지금 청소중이라서요.” 설비가 갖춰진 지 한 달도 안 된 도서관을 자원봉사자 4명이서 들쑤시고 있었다. 책을 읽는 공간이 깨끗해야 되지 않겠냐는 원장님의 지나가는 말을 귀담아 들은 자봉책임자 분이 4명을 배정해준 덕택이었다. “책 읽는 거 좋아하나봐? 어떤 책 좋아해?” “막아!” 지원과 대화중이었지만 시선은 여전히 운동장 쪽에 두고 있던 루치드는 철용의 외침이 없더라도 공을 막기 위해 몸을 움츠린 상태였다. 형근이 막 공을 차기 위해 자세를 취한 상태였다. -퉁 제대로 발끝에 공이 걸렸는지, 공은 세차게 날아들었다. 다만 루치드 정면 아래쪽이었기에 막기가 어렵진 않았다. 더군다나 루치드에겐 보이지 않는 필살기(!)가 있었다. 빠르게 날아들던 공이 2걸음 앞쪽에서부터 급격히 속도가 줄기 시작해서 루치드의 손에 잡힐 때 쯤, 루치드는 그리 힘들이지 않고 공을 낚아챌 수 있었다. 고개를 드니 반대편 골대 근처에서 미친 듯이 손을 흔들어대는 명수의 간절한 눈빛이 보였다. “너 축구 잘한다?” 명수에게 날아가는 공을 함께 지켜보던 지원이 말했다. 루치드는 내용 없는 대화에 조금씩 지루함을 느꼈다. 아니 일방적으로 답을 해야만 하는 이런 건, ‘대화’가 아니었다. “저기, 할 일 많지 않으세요?” “왜?” “보통 여기 오시는 분들은 하시는 일들이 많아서, 한자리에서 오랫동안 저희랑 이야기 나누시는 분들이 안계시거든요.” “난 너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루치드가 뒤를 돌아봤다. “나, 아니 우리와 이야기를 하는 게 어째서 ‘일’ 인거죠?” “응?”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지원이 당황했다. 노려보는 것도 아니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니건만 표정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루치드의 눈빛이 왠지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지간한 영화배우 뺨치게 잘생긴 외모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돌연 홀르비오의 조각상 같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며 진실을 요구하고 있었다. 지원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치드가 몸을 돌렸다. 지원은 더 이상 아이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주춤거리다 이내 보육원 안으로 돌아갔다. 루치드는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바라봤다. 이제껏 자신은 저 아이들에게서 동질감 같은 건 느끼지 못한 채 생활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수도 좋은 친구라고만 생각했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 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생각해보니, 이유는 하나였다. 자신은 부모가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안계시지만, 어머니는 멀쩡히 살아계셨다. 단지 어머니가 자취를 감춰서 지금 자기 곁에 없을 뿐. 동생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자신은 가족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사라진 가족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결국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다가는 저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부모를 잃은 아이로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온 몸에 오한이 들었다. 여전히 마법이 작용하고 있건만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 [50] Lucid Dream(1) “철용아, 비켜!” “형, 조심해!” 형근이 가레스 베일처럼 재빠르게 달려 흐르는 공을 인터셉트했다. 램파드처럼 넓은 시야를 가진 형근은 같은 편에게 패스를 주고 앞으로 뛰어나간 뒤, 이내 공을 다시 돌려받았다. 형근을 막기 위해 다른 아이들이 달려들었지만, 메시같은 발재간으로 요리조리 발을 놀려 공을 지켰다. 이윽고 호나우도처럼 달려 상대 골문 앞에 다가간 형근이 공을 차기 전에 확인 차 앞을 바라보는데, “어?” 골키퍼가 보이지 않았다. “막아!” “안돼!” -툭 가볍게 찬 공은 떼굴떼굴 굴러 골문 안으로 가볍게 들어갔다. “석고 어디 갔어?” 명수가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어디서도 루치드가 보이지 않았다. 그 시간 루치드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오랜만에 뒷산으로 올라갔다. 한동안 산에 오르질 않았었던 루치드가 다시 이곳을 찾은 이유는 단순히 산에 오르고 싶다는 충동을 느껴 오른 것이 반, 혹시 지난번과 비슷한 위치에서 전이(轉移)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오른 것이 반이었다. 이곳에는 저 세계의 숲과 달리 대부분 소나무나 참나무였다. 사시사철 푸르기에 추운 겨울바람만 아니었으면 겨울인줄도 모를 정도로 푸른빛이 맴도는 숲이었다. 그렇다고 낙엽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산을 오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신발에 마찰계수를 높이는 마법을 걸어놓고 오르니 잘 닦인 아스팔트 길 위를 걷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터벅터벅 걸어 올라가니 어느새 정상이었다. 루치드는 거친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 때는 이 정도 산을 오르는데 호흡을 가다듬을 필요도 없었건만, 책상 붙박이로 1년 이상을 보냈더니 시간도 많이 걸리고 체력도 많이 부족함을 느꼈다. 보육원 운동장에서 바라본 하늘이나, 뒷산 정상에서 올려다 본 하늘이나 푸르기는 매한가지겠지만, 들이마신 공기의 맛은 달랐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실려 청량하고 서늘한 공기가 폐 속 깊숙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루치드는 눈을 감고 바람을 느꼈다. 마법도 해제했다. 무딘 칼날 같은 바람이 뒷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엄마.” 오랜만에, 나직한 목소리로 불러봤다. 어쩐지 목에 턱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 동인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운동장에서 중학생 몇몇과 초등학생 애들 몇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공을 차고 있었다. “제기랄.” 요즘은 욕을 입에 달고 사는 기분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언짢아지면 욕을 했고, 혼자 있을 때도 특별한 이유 없이, 특정한 대상 없이 욕이 나오곤 했다. 지금은 저 운동장에서 병아리 떼처럼 몰려다니며 공을 쫓는 아이들을 보니 절로 욕이 나왔다. 어릴 때는 몰랐지만, 중학생쯤 되니 저 공놀이가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저 장난 같은 놀이에 동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초등학생들은 마냥 공을 쫓아 뛰어다니며 아무데나 뻥뻥 차대지만, 같이 어울려주는 중학생들은 가만히 살펴보면 초등학생들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말하자면, 애들이 찬 공을 적당히 쫓아가, 적당히 받아주는 식으로 어린 동생들을 ‘돌봐주고’ 있었다. 자신이 어렸을 때는 지금의 ‘고등학생’들이 그런 식으로 자기들과 놀아주었고, 현재는 자기 나이 또래 애들이 지금의 ‘초등학생’들과 놀아주었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면 자기보다 어린 동생들이 마음껏 뛸 수 있게 운동장을 쓰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시간에 그들은 보육원을 나간 뒤의 자기 진로를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공부를 했다. 이것이 이 보육원의 규칙이었다. 정말 친형제보다 다정다감한 우애를 자랑하는, 아네스 보육원의 아름다운 전통이랄까?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끼리 돕는다.’ 그 점을 깨닫자, 동인은 공놀이에 흥미를 잃었다. 저 사이에 끼어서 동정심과 연민의 몸부림에 장단을 맞춰야 한다는 사실이 짜증났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 취급받기도 싫었고, 취급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동인은 축구를 싫어하게 되었다. 원내를 돌아다니는 자원봉사자들과도 마주치기가 싫어 방에 틀어박혀 있던 동인은 짜증만 부르는 놀이 문화에 질려 시선을 돌리려던 그 때, 골키퍼를 보던 아이가 몸을 돌려 운동장을 조용히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입술을 짓이기며 그 아이의 뒷모습을 끝까지 쫓았다. 가슴 속에서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느꼈다. 눈물이 맺힐 만큼 격렬하고 뜨거운 감정. 아무리 이를 악물어도, 당장 쇳소리로 소리를 지르지 않고서는 못 이길 것 같은 감정. 금세라도 눈이 충혈 될 만큼 부릅떠진 눈에서 뜨거운 열이 새어나올 정도의 감정. 미움, 증오, 원망, 혐오…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의 이름들을 다 갖다 대어도 모자랄 감정이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왜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지금까지 바른 생활, 밝은 미소, 좋은 사람으로 각인되어 왔던 자신의 삶을 한 순간에 나락으로 빠뜨린 게 저 아이였다. 용서할 수가 없었다. 동인은 무슨 생각에선지 몸을 돌려 방을 빠져 나왔다. **** 윤정은 모처럼 이른 아침부터 원내 식당을 찾아갔다. 보육원 아이들에게 줄 아침식사까지 도와준 윤정은 곧 아주머니들께 양해를 구하고 요리 연습을 시작했다. 최근 TV에서 요리 방송이 유행이라, 눈과 귀가 즐거웠던 윤정이었다. TV 속 요리사들의 현란한 스킬들을 익히자고, 마음먹고 벼르다가 마침내 오늘 주방에서 웍을 잡고 휘두르는 중이었다. 가녀린 팔로 웍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이 쉬울 리 없지만, 인내와 끈기, 집념과 열정으로 손목을 부여잡고 웍질을 했다. 기름을 두른 웍을 빙빙 돌리며 기름이 고르게 퍼지게 한 뒤, 미리 썰어놓은 대파를 집어넣었다. 간장을 겉에 두르듯 살짝 뿌려 향을 배가시켰다. 웍을 앞뒤로 흔들며 대파를 볶으니 향긋한 파기름 향이 주방에 가득 찼다. “아이고, 우리 윤정이가 이제 중식도 하나보네?” “뭐 만들려고 그렇게 요란스럽대?” 윤정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볶음밥이요.” 그 와중에도 윤정은 웍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후 다진 돼지고기와 각종 야채들을 넣어 볶다가, 불을 줄이고 밥을 넣었다. 아주머니들과 함께 먹으려면 꽤 양이 돼야 할 테니, 넉넉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들어간 양만큼 손목에 많은 무리가 갔다. 오직 요리에 대한 집념으로 얇은 손목에 힘을 주어 웍질을 해나갔다. 쉼 없이 달그닥거리던 웍이 마침내 멈췄고, 윤정은 불을 껐다. 넓은 접시 3개를 옆에 놓고 볶은 밥을 정갈하게 담았다. “자, 시식해 보세요!”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었지만, 그 땀의 양만큼 뿌듯한 만족감이 가슴 속을 채웠다. “다 한 거니?” “아뇨, 이번엔 게살 스프에 도전해 보겠습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다음 요리를 준비하기 시작한 윤정이었다. **** 기웅은 자신의 방문을 꽉 닫아 걸고 책을 읽고 있던 중이었다. 문 바깥에는 ‘공부 중, 출입금지’라고 쓴 A4지를 붙여놓았다. 사실 대부분의 보육원에서 원내에 고등학생들이 살고 있을 때는 고등학생 자원봉사자를 받지 않았다. 비슷한 나이의 고등학생들이 자원봉사자로 찾아오게 되면 느낄 수 있는 박탈감이나 위화감 조성을 사전에 막아보고자 하는 이유에서였다. 만약 자원봉사자로 들어오게 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서로 마주치지 않게끔 원외로 외출을 보내기도 했다. 이번 자원봉사 역시 주말을 맞아 고등학생 자원봉사자들이 많이 찾아오게 되었다. 그래서 원내의 고등학생들은 대부분 보육교사의 허락 하에 외출을 나갔다. 단, 기웅만 빼고. 딱히 나가봐야 할 일이 없다는 것도 있고, 굳이 얼굴만 마주치지 않는다면 마음 상할 일도 없지 않겠냐는 낙천적인 성격도 한 몫을 했다. -똑똑 “기웅아, 잠깐 시간 되니?” 보육교사의 부름에 기웅은 문을 열고 나갔다. “무슨 일이신데요?” “행정실에서 도움을 요청해서 말이야. 일이 좀 많나봐.” 평소에도 행정실에 일이 많이 밀리면 가끔 기웅이 가서 일을 도와주곤 했다. 보육원에 남아있는 고등학생들 중에서 제일 똑똑하기로 소문이 나기도 했고, 실제로 일을 도울 땐 똑소리 나게 일처리를 잘해서 자주 차출되어 나갔던 기웅이었다. 더 큰 이유라면, 불평불만이 없다는 것. 때문에 행정과장이 졸업하고 일 없으면 여기로 취직해라는 말을 건넬 정도였다. 의대 진학을 목표로 하는 기웅에게 막말을 한 셈이지만, 기웅은 그저 풋풋한 미소로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관대함을 보이기도 했었다. “예,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면 되나요?” “그래, 고마워. 나도 매번 미안하다.” 보육교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기웅의 팔을 툭툭 두드려 위로했다. 돈 한 푼 안 되는 일이지만 보육원을 위해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사용하는 기웅의 모습이 대견하고 안타까운 보육교사였다. 기웅이야말로 자원봉사자의 전형(典型)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지원은 운동장에서 도망치듯이 빠져나와 실내로 들어왔다. 얼굴이 화끈거려 누구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마땅히 갈 곳이 없어 결국 보육원 안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지원아, 뭐하니?” 함께 온 언니가 현관으로 들어오는 지원을 보았다. “아, 언니. 아… 저기 뭐 도울 일 없나 둘러보고 있었어요.” “너 얼굴이 빨간 데?” 지원이 얼른 두 볼을 감싸 쥐었다. “얼마나 밖에 있었으면, 얼굴이 그러니? 그만 좀 돌아다니고 저기 식당에나 가봐. 곧 식사 준비를 해야 하는데, 설거지거리라도 있는지 보고 도와줘.” 바깥에서 놀다가 온 것이라고 판단한 언니에게 오해라며 투덜대는 짓은 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마땅히 대꾸할 말도 찾지 못했다.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는 보육원 뒤편의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머리에서는 그 아이와의 대화가 계속 되풀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왜 그렇게 이야기했는지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전에도 자원봉사를 나오긴 했었다. 다만 그 때는 자봉 단장님이 맡긴 일이 많아서 보육원 아이들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떻게든 아이들과 즐겁게 놀아주리라 다짐하고 자원봉사에 참가했다. 오늘도 역시 맡겨진 일은 많았지만 요령껏 피해서 운동장으로 나갔던 것인데, 의외의 공격을 받았다. 분명 자신의 상식에서 아이들과 손잡고 놀아주거나,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사랑과 정(情)을 나누는 게 자원봉사라고 생각했었다. 마치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이 그러하듯이. 다만 먼지구덩이 속에서 공을 차는 건 꺼려지는 마음이 들어, 대신 멀찍이 서 있던 아이에게 말을 걸었던 것인데. 결과적으로 지원은 아이에게 심각한 타격을 받고 내상을 입어버렸다.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째서 일, 인거죠?’ 분명 자신이 뭔가를 잘못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아이의 눈빛에 당황했던 이유는 자신이 떳떳하지 못해서였다. 아이의 말을 듣는 순간, 그 마음을 알 수 있었기에 그 곳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난 것이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랑과 정을 나누는 대신, 아이에게 몹쓸 상처를 준 것 같아 자책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당장 돌아가기엔 너무 빈궁한 핑계밖에 없어, 일단은 식당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설거지라도 하면서 마음을 조금 정리하고 난 뒤 찾아가 용서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건물 뒤로 돌아가던 지원은 우연히 어떤 소년이 보육원 뒤 펜스를 넘어 산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았다. 짧은 머리와 지원보다 작은 키를 가진, 중학생으로 추측되는 소년이었다. 그는 펜스를 넘은 뒤, 차분한 걸음걸이로 산 위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잡목들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아무래도 보육원 아이들은 바로 뒤가 산이다 보니 저렇게 놀이삼아 산을 오르나보다, 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 지원은 이내 식당으로 들어갔다. ======================================= [51] Lucid Dream(2) 명수는 갑자기 사라진 루치드를 찾아 보육원 안으로 들어왔다. 혹시 혼자 방에 돌아간 걸까, 궁금해 하며 찾아봤지만,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방을 나오니 마침 보육교사가 남녀 두 사람과 함께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다. “선생님, 석고 못 봤어요?” 대뜸 달려와서는 인사도 없이 용건부터 던지는 명수 모습에 보육교사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그래봐야 신호를 캐치해서 자신의 행동을 반성할 명수가 아니었기에 의미는 없었다. “아니, 못 봤는데? 같이 운동장에서 놀았던 거 아니니?” 명수는 발을 동동 굴렀다. “아까는 같이 있었는데요, 지금은 없어요.” “그래서 찾는 중이니?” “네.” 뒤에서 지켜보던 사람들 중 여자 분이 다가왔다. 보라색 투피스 상의에 은색 브로치로 패션의 포인트를 가미한 세련된 스타일의 중년 여성이었다. 정갈하게 빗어 세팅한 헤어스타일이 기품 있는 여자로 보이게끔 했다. “어머, 귀여워라. 석고가 누구야?” 무릎을 살짝 굽히고 허리를 약간 접고 나서야 명수와 눈높이가 맞춰졌다. “제 친구요.” 보육교사가 덧붙였다. “석고는 별명인데, 이 아이랑 같은 방 쓰는 친구예요. 아마 같이 놀던 친구가 사라져서 찾는 건가 보네요. 그렇지?” “네, 석고가 골키퍼였는데요. 형근이 형이 골 넣었어요. 근데 석고가 없어서 못 막았어요.” 중년 여성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찾아서 골키퍼 시키려고?” “네.” “골키퍼 하기 싫어서 도망친 거 아냐?” 명수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어 강한 부정을 드러냈다. “아니에요. 석고는 골키퍼 좋아해요.”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다는 듯, 명수는 다시 루치드의 행방을 찾아 나서려 뒤돌아섰다. “명수야. 선생님한테 인사하고 가야지.” 멈칫, 하더니 이내 몸을 돌려 꾸벅 허리를 접어 인사를 하고는 다시 뛰어갔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중년 여성이 보육 교사에게 물었다. “애가 귀엽네요. 몇 살이에요?” “8살이에요.” 보육교사는 보육원 공식 말썽꾸러기랍니다, 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이내 시선을 마주하고 잠시 끊어졌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사실 저 아이가 찾던 석고라는 아이가 두 분이 찾으시던 아이예요. 저도 운동장에서 보이지 않아 이리로 올라온 건데, 방에는 없나보네요.” “그럼…….” 중년여성은 기껏 3층까지 올라왔는데 찾던 아이가 없다고 하니, 조금 들뜬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루치드의 부재에 난감한 빛을 보이던 상담교사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중년 여성에게 방안을 제시했다. “일단 다시 상담실로 돌아가셔서 기다리시지요. 제가 다른 선생님께 아이를 찾도록 지시를 내려놓겠습니다. 아마 보육원 안에 있을 테니 금방 찾아서 올 겁니다.” “예, 그러죠. 당신, 가요.” 중년 여성이 몸을 돌리자, 뒤에 말없이 서있던 남성 역시 묵묵히 그 뒤를 따라갔다. 다시 세 사람은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중년여성이 문득 생각난 듯이 질문을 했다. “그 아이도 방금 본 아이랑 비슷한 성격인가요?” “아뇨.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명수는 저희 원에서 가장 장난기 넘치는 아이입니다. 순수하고 밝은 아이죠. 반대로 그 아이는 매사 신중하고 진지하죠. 그렇다고 어둡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단지 나이보다 훨씬 똑똑하고 겸손하다보니, 꽤 젊잖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아이라고 설명 드린 겁니다. 발랄한 느낌은 아니지만 재기 넘치는 모습도 자주 보이고요. 아마 방송으로 보신 것보다 훨씬 밝은 모습일 겁니다. 아, 특별히 낯을 가리지는 않더군요.” 비교도 안 되게 좋은 아이입니다, 라는 설명을 최대한 자세히,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포장에 전력을 다하는 보육교사였다. 다행히 루치드는 그 어떤 포장이라도 잘 어울리게 만드는 다이아몬드 반지 같은 아이였다. 깎을수록 빛은 영롱해지고 아름다워지는 속 알맹이를 지닌 아이였다. “낯을 가리지 않는다니 다행이네요. 빨리 친해질수록 좋은 거잖아요. 그쵸, 여보?” 중년여성이 남성을 돌아보며 눈웃음과 함께 동의를 구했다. “그래요.” 남자의 굵은 목소리에도 살짝 기대감이 깃든 느낌이었다. **** 제일 아래층까지 뛰어 내려간 명수는 보육원 뒤로 돌아갔다. 아직 밥시간은 아니지만 어쩌면 식당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끔씩 윤정이 루치드에게 먹을 것을 주겠다며 식당에 데리고 들어가곤 했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찾아갔다. “안녕하세요?” 지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주방을 울렸다. 윤정과 주방 아주머니들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살폈다. “무슨 일이예요?” “아, 다름이 아니고요. 저 오늘 자원 봉사하러 온 학생인데요. 혹시 도울 일이 없나 해서요. 설거지라도 하겠습니다!” 나름 꿀꿀한 기분을 떨쳐내 보고자 씩씩한 목소리로 청원(請願)을 했다. 아주머니들은 시선만 돌려 윤정의 눈치를 봤다. 아주머니들도 비슷한 나이 때 애들이 한 자리에 있지 않도록 하는 불문율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어서와. 안 그래도 아주머니들이 곧 점심을 준비해야 돼서 일손이 필요했는데 잘 됐네. 그렇죠?” “아, 으음. 그렇지. 그래요. 어서 와요.” 아주머니들은 묵시적인 허락을 득한 뒤에야 지원을 반겼다. 지원이 주방 안으로 들어오자 윤정이 밝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몇 살이야? 아, 어려 보여서 말을 먼저 놨네?” “아, 저 중3인데요.” “아, 그래? 난 고2. 내가 언니네? 그럼 계속 말 놓는다?” “아, 예. 그러세요. 저도 그게 편해요.” “마침 잘 왔네. 일단 설거지는 조금 있다 하고, 우선 저기서 조금만 기다려. 거의 다 됐으니까.” 억지로 등떠밀리듯 밀려난 지원은 아주머니들 곁에서 뻘줌하게 섰다. 주춤대며 다시 아주머니들에게 고개 숙이는 지원을 호탕한 웃음으로 반겨주는 아주머니들이었다. “저기 윤정이가 요리를 잘하거든. 일단 조금 있다가 윤정이가 해준 요리 먹고 나서 일하면 돼.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그나저나, 윤정아. 아직 멀었니?” “아, 다 됐어요.” 뜨거운 불길이 감싸고 있는 웍 안에서 하얀 스프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윤정이 요령 좋게 국자로 떠서 그릇에 담아내니, 달콤짭짤한 게살의 향이 후각을 마비시킬 듯 올라왔다. “우와, 이게 뭐예요?” “게살 스프! 맛있겠지?” “예!” 그 때 식당 문이 벌컥 열렸다. 오늘따라 들어오는 사람이 많다며 생각을 하던 윤정은 불청객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이내 함박웃음을 지었다. “누나, 누나. 석고 못 봤어요? 어? 그거 뭐예요?” 대답을 할 틈도 없이 쪼르르 달려와 윤정 옆에 다가온 명수였다. “누나, 저도요. 저도 먹고 싶어요.” 역시 명수답다는 생각에 윤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주려고 했, 어, 요.” 한 그릇 푸짐하게 떠서 수저와 함께 건넸다. “뜨거우니까 조심해.” 명수가 숟가락을 받아들고 후후 불어대며 맛을 봤다. “맛있니?” 고개만 끄덕일 뿐, 입은 끊임없이 들락날락거리는 숟가락 때문에 바빴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윤정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어때?” “정말 맛있어요!” 지원의 격한 반응에 윤정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우리 윤정이는 역시 대단해. 어떻게 독학으로 이렇게까지 할 수 있대? 이거 그거 아냐? 절대미각인가?” “아이고,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눈대중으로 만든 건데 또 오바들 하신다.” 겸양 떠는 윤정이 보기 좋아 또 한 번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시는 주방 아주머니들이었다. 윤정은 자신의 것도 한 그릇 떠서 맛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만들었지만, 충분히 맛이 있었다. 역시 요리는 대단해, 라며 속으로 감탄하는 중인데. “저 한 그릇 더요.” 라며 그릇을 불쑥 내미는 명수 때문에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다시 건네받은 그릇을 비우던 명수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윤정에게 물었다. “누나, 석고 못 봤어요?” 윤정은 뜬금없는 질문에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니, 못 봤는데? 왜?” “같이 축구하다가 어디 갔어요.” “어디 갔는데?” “몰라요.” “그래서 찾는 중이었어?” “예.” 그럼 이 녀석, 지 친구 찾으러 들어왔다가 먹을 거에 눈이 돌아가서 이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구나, 라며 명수의 머리를 억세게 헝클어뜨렸다. “흠. 못 봤는데? 봤으면 누나가 여기 붙잡아두고 있었겠지.” 두 사람의 대화 속에 나오는 석고라는 이름이 독특해서 지원이 끼어들었다. “석고가 누군데요?” “아, 얘 친구.” 윤정이 루치드의 이름을 알려줬다. “혹시, 골대 앞에 있던 아이?” 저도 모르게 낯빛이 변한 지원이었지만 스스로는 알아채지 못했다. “예. 맞아요! 봤어요?” 혹시나 이 낯선 누나가 본 건가 싶어서 두 눈이 동그랗게 변한 명수. 하지만 지원은 아까의 감정이 다시 밀려오는 듯해서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아까… 골대 앞에 있는 거 봤지.” 명수는 아쉽다는 제스처로 발을 툭 굴렀다. “근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식당에 들어오기 전의 모습이 떠오른 지원이 물었다. “여기 아이들은 종종 저기 뒤에 있는 산에 가나요?” 윤정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름의 그 사고는 원내에서 꽤 큰 사고였다. 보육교사들이 단단히 입단속을 시켰던지라 외인(外人)에게 자세한 사정을 말해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안 올라가. 올라가지 못하게 막았어. 펜스도 세웠는데?” “어? 아까 중학생처럼 보이던 애가 올라가던데?” “응?” 윤정이 화들짝 놀라며 지원을 바라봤다. 그러다 급히 지원을 손을 붙잡고 식당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이미 들었겠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아주머니들이 모르는 게 좋을 내용이리라 짐작해서였다. 그 누가 됐든 산에 오르는 것은 금지가 된 상태였으니까. “혹시 얼굴 봤어?” “아뇨. 얼굴은 못 봤고요. 그냥… 머리가 짧고 키도 저보다 작았던 거 같아요. 그래서 중학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지원은 윤정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해서 혹시 자신이 ‘또’ 뭔가 잘못한 게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 저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하지만 그런 지원의 심리를 파악하고 있을 여유가 없던 윤정은 그저 누군가가 ‘산’에 갔다는 사실만으로도 뒷일이 걱정되어 가슴이 조마조마한 상태였다. “석고도 산에 갔어요?” 뒤따라 나온 명수가 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냐, 석고는 아니래.” 골대 앞에서 얼굴을 봤다고 한 말에 비춰보면, 짧은 머리의 남학생이 그 아이일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명수에게 대답했다. 하지만 명수에게 던진 대답처럼 간단하게 끝날 문제는 아니었다. 분명 누군가 산에 오른 것이 확실하다면, 이 것은 ‘사태’라고 불러야 마땅한 일이 된다. 그리고 이 사태는 자신이 혼자 해결할 수 없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리고 보통 이런 곤란한 일이 벌어졌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친구를 윤정은 한 명 알고 있었다. 윤정은 명수에게 여기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보육원으로 뛰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원은 자신도 따라가야 하나, 아니면 여기서 명수라는 아이를 지키고 있어야 하나, 아니면 설거지를 하러 주방엘 다시 가야 하나, 하는 고민에 빠졌다. ======================================= [52] Lucid Dream(3) 겨울바람을 쐬며 정상의 운치를 즐기던 루치드는 눈을 떴다. 빛이 몰려들어와 쉬이 시야가 돌아오지 않았다. 몇 번 눈을 껌벅거리며 기다리니 점점 황토색 바닥과 푸른색 잡목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호흡을 뱉었다. 루치드는 천천히 뒤로 돌았다. 때를 맞춰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동인이 정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 올라오는 동안, 자신의 숨소리도 컸지만 뒤에서 자박거리며 따라오는 소리도 그 못지않게 컸기에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처음에는 누굴까 궁금해 했지만, 어차피 자신을 불러 세우지 않는 이상 멈출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상까지 오른 뒤 천천히 올라오길 기다렸다가 얼굴을 확인하게 되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정상에 올라온 동인은 몇 걸음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루치드와 눈이 마주쳤다. 가쁜 숨이 진정되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했다. 무릎에 손을 대고 잠시 숨을 돌려보면서도 눈을 루치드에게서 떼지 않았다. 이쯤 되면 루치드도 동인의 저 눈빛이 의미하는 바를 모를 수 없었다. 동인은 말없이 지켜만 보는 루치드의 무심한 표정에 이가 갈렸다. 마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한 눈빛에 자존심이 상하기까지 했다. 감히 니가 날 무시해? “이 새끼…….” 동인은 침을 퉤, 뱉어내곤 루치드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초등학생보다 머리 하나 이상 차이나는 키를 가진 중학생을 올려다보는 루치드에게, 동인이 입을 열었다. “눈, 깔아라.” 그 말을 순순히 들을 이유가 없던 루치드는 그저 빤히 동인을 쳐다 볼 뿐이었다. -짝 동인이 거세게 휘두른 손에 루치드는 뺨을 맞고 비틀거렸다. **** 윤정은 4층에 올라갔다가 생활 지도원 한 분과 마주쳤다. “어, 선생님. 혹시 기웅이 못 보셨어요?” “못 봤는데. 자기 방에 있는 거 아니야? “아뇨, 방금 나오는 길인데 없어요.” “글쎄. 아, 혹시 석고 못 봤니? 운동장에도 안 보이던데.” 석고를 찾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선생님들보다 빨리 아이를 찾아야 안심이 될 모양이었다. 그러나 찾는 기웅이나 루치드는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 시간, 기웅은 행정실 직원과 함께 서류 정리 작업을 돕고 있었다. 대충 보니 ‘디딤돌 통장’과 관련된 서류들인 듯 했다. 보육원에 있는 아이들 별로 매월 적립되는 디딤돌 통장의 세부 내역이 기입되어 있었다. “너무 호기심 갖지 말고, 페이지 맞춰서 정리하도록 해.” 직원이 넌지시 한마디 던졌다. 기웅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페이지에 맞춰 정리했다. 고등학생 15명, 중학생 12명, 초등학생 6명, 영유아 8명, 해서 총 41명분의 통장내역이 각 인당 페이지로 구성되어 41장의 별첨 자료로 어떤 보고서의 뒤에 붙으리라, 예상만 해볼 뿐이었다. “공부는 어떠니? 잘 돼가?” 직원이 화제를 돌려보려고 말을 던졌다. “예, 괜찮은 편이네요.” “의대 갈 거라며?” “예.” “디딤돌로도 부족할 텐데.” 돌고 돌아 돈 이야기가 돼버리고 말았다. 실수했다는 심정으로 직원이 당황해할 때, “장학금 받아야죠.” 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사실 기웅 스스로도 무모한 도전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그도 세상물정 전혀 모르는 바보는 아닌지라, 돈 없이 의대를 진학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리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입학만 문제가 아니라, 의대를 다니는 동안에도 타 과에 비해 많은 돈을 빚져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기웅은 의대를 포기할 수 없었다. 돈과 권력, 명예와 같은 사회적 가치를 떠나,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미래였기 때문이었다. 아주 어렸을 적, 양친이 살아계셨을 때부터 가진 꿈이었다. “잡담하지 말고, 일이나 빨리 끝내. 빨리 끝내야 기웅이도 쉴 거 아냐.” 행정과장의 지적에 직원은 입을 다물었다. ‘자기 방에서 잘 쉬는 애를 불러다 일 시킨 사람이 누군데 나보고 그래?’ 속으로만 투덜거리며, 직원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했다. “기웅이 너도 빨리 해. 거기 내용은 비밀은 아니지만 니가 본다고 알 내용도 아니니까.” “예.” 기웅은 싱긋 미소를 지어 순종적인 태도를 보인 뒤, 작업을 서둘렀다. 이유야 어쨌든, 이제 행정실을 벗어나고 싶었다. 빠른 시간 안에. **** 지원은 우선 명수를 붙잡고 물었다. “저기, 아까 니 친구라는 애 말이야.” “석고요. 제 친구요.” “그래, 걔. 혹시 산에 자주 올라가니?” 아무래도 아까 윤정이 보인 반응이 심상치 않게 여겨졌다. 뭔가 비밀이 있는 듯하고, 서두르는 모양새가 어쩐지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여자의 육감은 정확하다는 신조를 가진 지원은 자신의 예감을 강력한 예지로 받아들였다. “예. 아니요.” “무슨 말이니? 올라간다는 말이야, 안 올라간다는 말이야?” “옛날에는 학교 가기 전에 올라갔었는데요. 지금은 안 올라가요.” “왜?” “…….”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명수는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누나한테 말해줄 수 없는 일이야?” 살살 얼러도 명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지원이 생각하기에 뭔가 자신이 알면 안 되는 일이 있었던 것이라고 짐작을 했다. “아이들이 산에 올라가면 되니, 안되니?” “안돼요.” “왜?” “선생님이 올라가지 말랬어요.” 보육교사가 올라가지 말라고 단단히 엄포를 놓은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지원은 산에 올라가는 아이를 똑똑히 보았다. 말인즉슨 보육원 내에서 몰래 산에 오르는 아이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 이 꼬마가 찾는 아이도 어쩌면 산에 올라갔을 수도 있다는 뜻. 물론, 산이 아니라 정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보육원에서 시내까지는 걸어서도 한참을 가야 하는 거리인데, 초등학생이 걸어가기엔 그리 짧지만 않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았다. “여기서 걸어서 시내에 가본 적 있니?” “아니요. 없어요.” “한 번도?” “음… 없어요.” 지원은 명수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묻는 말에 잘도 대답해주니 기특했다. 어쨌든 요지는 이 아이의 친구가 정문을 통해 외출을 할 가능성보다 산에 올라갔을 가능성이 크고, 보육원 내에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자신의 예감은 ‘산’에 갔을 거라고 얘기한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문제는 과연 그 아이를 찾기 위해 자신이 직접 산에 올라가봐야 하나, 라는 사실이었다. 흥미진진, 스릴 넘치는 모험이 될 확률이 클까,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채 허탕을 칠 확률이 클까? 지원이 고민에 빠진 사이, 명수는 산을 올려다봤다. 저 산에 다시 오르는 일은 두려웠다. 비단 선생님의 말씀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난 여름의 일이 있고나서 명수는 사람이 다칠 수 있다는 사실과, 자신이 그 사람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때문에 쉽게 산에 오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루치드가 산에 올라가는 모습을 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명수 역시 바보는 아니다. 가끔 루치드가 새벽에 보육원을 나와 산에 올라갔다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루치드는 명수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명수는 잠귀가 밝았다. 그리고 새벽 공기와 산의 이슬을 몸에 묻히고 돌아온 루치드에게서 숲의 향기를 맡는 건 어렵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루치드의 신발에 묻은 진흙과 나뭇잎에서 확신을 한 것이지만 아무튼, 진실을 알고 있던 명수였다. 그리고 명수는 앞에 선 낯선 누나의 질문들에서 루치드가 산으로 갔다, 고 의심을 하고 있다는 것, 을 알아챌 정도의 지능(!)은 보유하고 있었다. ‘어떡하지?’ 명수 역시 고민에 빠졌다. 지금이라도 혼자 산에 올라가야 할까? 아니면 보육원으로 달려간 윤정이 누나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결국 두 사람은 식당 앞에서 옴짝달싹도 못하고 제자리에서 고민만 거듭하며 시간을 보냈다. **** “이 새끼가 어디서 형을 야리고 있어!” 다시 반복되는 패턴이다. 누명을 씌우고 욕을 하고 때리고. 하지도 않은 짓을 했다고 덮어 씌어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키고, 욕을 해서 기를 죽이려고 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주먹을 휘두른다. 다시 뺨을 맞고 오른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그러나 루치드는 계속 동인을 쳐다보았다. 예전에서 처음 맞았다는 사실에 당황하기도 하고, 겁이 나기도 해서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졌던 것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이제는 동인의 저 행동에서 무언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욕을 하고 때리는 이유. 동인은 루치드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싫어했다. 아니,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때문에 저런 격렬한 반응이 나오는 것이리라. “왜 때려요.” 처음으로 루치드가 입을 열었다. “아니, 왜 절 무서워해요?” 그래. 때리는 이유는 안다. 자신을 무서워하니깐. 그럼 왜 무서워하는 거지? “뭐?” 동인은 방금 들은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멍하니 아이를 쳐다만 봤다. 내가 저 아이를 무서워한다고?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이런… 개새끼가….” 아이를 때리기 위해 쥐었던 주먹이 덜덜 떨려왔다. 저 아이의 무심한 눈빛과 태도는 분명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반면, 자신은 어떤 반응이라도 보이게끔 아이를 다그치고 있었다. 욕을 하고, 때리면서 자신을 두려워하길 바라고 있었다. 왜? “제가 형을 협박한 적도 없고, 약점을 잡은 적도 없고, 때린 적도 없는데 왜 절 무서워하는 거죠?” 저 아이가 무서운 이유. 자신을 협박한 적도 없었다. 약점을 잡은 적…이 있다! 그제야 동인은 자신이 루치드를 무서워하는 이유를 알았다. 루치드는 자신의 가장 나약한 면, 가장 추악한 얼굴을 아는 아이였다. 그것은 자신이 언제나 감추려고 했던 자신의 본성이었고 법원에서 그것이 드러났다. 동인은 과거로 돌아갔다. 그 때, 동인은 법원에서 소미를 힐끗 보며, 입을 열었었다. “얘한테서 정액 냄새가 자주 나거든요.” 동인은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이 년은 걸레야’ 라고 선언한 셈이었다. 이보다 심한 모욕이 어디 있을까? 저 아이의 눈빛은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자신의 본성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눈빛이었다. 지금은 입을 다물고 있지만, 언제 저 입이 열려 동인을 구렁에 빠뜨릴지 모를 일이었다. “니가 소미를 겁박한 거야. 니가 소미를 울게 만든 거야. 니가 소미의 마음에 상처를 준거야. 니가 소미의 아빠보다 더 나쁜 거야. 니가 나쁜 놈인 거야. 최악의 인간이야.” 동인은 아이의 입이 열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동인은 아이를 무서워했다. “이런 제길…….” 여전히 루치드는 동인을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맘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내가 저 따위 녀석을…….’ 동인은 달려들어 루치드의 멱살을 붙잡았다. 루치드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그의 작은 손이 반사적으로 동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동인은 루치드를 붙잡은 채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일정도로 씩씩거리던 동인의 거친 숨결이 루치드의 앞머리를 밀어냈다. “…죽여 버리겠어.” ======================================= [53] Lucid Dream(4) 루치드는 한 뼘도 안 될 거리에 있는 동인에게서 지독한 악취가 난다고 생각했다. 더러웠다. 그의 행동, 말, 사고방식 모두가 추잡하고 추악했다. 마치 스크로파처럼. 지독한 악의를 가지고 달려들던 그 몬스터를 떠올리게 만든 동인. 피에 물든 송곳니를 드러낸 채 넘칠 듯 광기를 눈에 담아 노려보던 그 놈을 닮았다. 일전에 기웅이 일깨워 준 ‘대화의 해결책’이 생각났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웅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몬스터와 대화를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사람과 대화를 할 순 있지만, 또 어떤 사람은 짐승과도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몬스터와는 대화를 할 수 없다. 오로지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만 있을 뿐이다. 죽이지 못하면 죽는다. 그것은 그곳 세상에서 진리였고, 이곳에서도 진리다. 나는 죽을 수 없다. 고로 난, 죽이겠다. 동인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줬다. 루치드의 눈에서 기광(氣狂)이 언뜻 흘렀다. **** “야, 박기웅!” 기웅이 행정실을 나와 방으로 돌아가려는 찰나였다. 뒤를 돌아보니 한 살 위 누나인 윤정이었다. “어, 누나. 왜요?” 머리가 헝클어진 것을 모르는지, 아니면 신경을 쓸 틈도 없었는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단을 급하게 뛰어내려온 윤정은 숨을 헐떡이며 기웅에게 다가왔다. 기웅은 뭔가 말을 하려고 애쓰는 윤정을 우선 말렸다. “누나 잠시 숨 좀 고르고 이야기해요.” 괜찮다며 손을 내젓는 데, 말은 못한다. 그러기를 잠시, 윤정이 허리를 펴고 기웅을 바라봤다. “기웅아, 너… 아니다. 잠깐 나 따라와라.” 윤정은 말을 하려다, 행정실 앞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기웅의 팔을 붙잡아 끌었다. 기웅도 크게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윤정의 뒤를 따랐다. 보육원 현관을 나온 윤정이 주위를 살핀 뒤 기웅에게 조용히 이야기를 했다.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누가 산에 올라갔나봐.” 순간 기웅의 낯빛이 변했다. 기웅 역시 방금 들은 이야기의 심각성을 모르지 않았다. 산에 오르는 일이야 별 일 아닐 수 있었다. 보통 때라면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자원봉사자들도 많이 찾아온 탓에 보육원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이런 때 예상치 못한 사고가 발생한다면, 단순히 보육원 이미지가 나빠지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기웅은 짐작했다. 아마 윤정도 그런 생각에서 자신을 찾았으리라. “누군지는 모른다고요?” “응. 자원봉사자 한 명이 식당 뒤 펜스를 넘어서 산으로 가는 걸 봤대.” “이런.” “일단 목격한 사람은 여중생이야. 그러니깐 말만 잘 해서 구슬리면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아무튼 선생님들이 알기 전에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할 것 같은데. 나 혼자서는 무리일 것 같아서 널 찾아다녔는데, 도대체 거긴 왜 갔던 거야?” 보육원 내를 돌아다니느라 힘이 무척 들었던 윤정이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 눈에 이상하게 보일까봐 억지로 급한 티도 안 내려고 신경 쓰느라 은근히 스트레스도 받았다. “행정실에서 일 좀 도와달라고 해서….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우선 펜스로 한 번 가 봐요. 현장에서 뭐라도 확인을 해야 알 수 있죠.” 둘은 다시 빠른 걸음으로 현관을 떠나, 보육원 뒤편 펜스로 향했다. 그 와중에 윤정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아, 그런데 혹시 오늘 석고 못 봤어?” “석고? 아, 걔요. 못 봤는데요.” “아까 명수가 석고 찾는다고 돌아다니던데.” “보육원 안에 있겠죠.” “내가 지금 보육원 안을 샅샅이 살피고 나온 길이거든? 도서관에도 없고.” “명수가 찾았겠죠.” “아니, 명수는…….” 보육원 본관 옆을 빙 돌아 뒤편으로 향한 두 사람이 식당이 보이는 지점에 왔을 때, 윤정은 걸음을 멈췄다. 앞서 나아가던 기웅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저기 서 있으라고 했는데…….” 윤정이 가리킨 방향은 식당 앞이었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기웅이 식당 앞과 윤정을 번갈아 바라보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설마, 걔가 산에 갔다는 거예요?” “모르겠어. 근데 자기 친구 찾겠다고 산에 올라간 거면…….” “이런….”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하얗게 질렸다. **** 윤정이 기웅을 찾았을 무렵, 명수는 지원의 눈치를 살폈다. 이미 말했듯이 명수는 바보가 아니었고, 지금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옆에 서 있는 낯선 누나가 제지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지원이 고개를 들어 보육원 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을 때, 명수는 슬그머니 몸을 돌려 펜스 쪽으로 향했다. “어디 가니?” 하지만 이내 들키고 말았다. 바로 옆에 서 있던 아이가 아무리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인다고 해도 들키지 않을 리 만무했다. 명수는 쭈뼛대며 손가락으로 펜스를 가리켰다. 지원은 잠깐 고민하는 척 하더니 명수에게 말했다. “그럼 일단 저 앞까지만 가서 보자. 혹시 누가 올라간 건지 알 수 있는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 셜록 홈즈에게 빙의라도 된 냥, 지원이 왓슨, 아니 명수를 데리고 펜스로 다가갔다. 펜스라고 하지만 그리 높지도 않아서,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쉽게 건너 뛸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한 펜스였다. 발자국이라도 찾아볼 생각으로 바닥을 훑어보았지만, 딱히 특정할 만한 발자국이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홈즈 흉내를 낸다고 해서 홈즈가 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넘어가면 안 되겠지?” 딱히 누군가에게 허락을 구하는 질문은 아니었지만, 듣고 대답해 줄 사람이 옆에 있었다. “안 돼요. 혼나요.” 그 말속에서 단호한 의지보다는 주저함이 느껴졌다. 저 아이 역시도 산에 오를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지원은 산에 오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결코 개인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님을 증언해줄 증인이 필요했다. 예를 들면 바로 옆에 서 있는 명수 같은 증인. 지원이 허리를 숙여 명수에게 물었다. “친구 찾아야 하지 않니?” 친한 친구를 찾아야 한다는 합목적성에 근거한 목표 설정은 명수의 심리적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어림짐작했다. 하지만 명수에게는 그 목적 외에도 지원이 모르는 트라우마가 있었다. “그래도 산에 가면 안돼요.” 아쉽게도 함께 오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앞서 물었던 것은 단지 거대한 계획을 위한 밑그림이었을 뿐이었다. “그럼 누나가 혼자 올라가서 니 친구 찾아볼 테니까 여기서 기다릴래? 빨리 올라갔다가 금방 내려올게. 그건 괜찮지?” 어차피 꼬마를 데리고 올라간다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혼자 올라가는 것이 운신하기에도 편하고, 이후에 자신의 행동을 증언할 증인으로서 안전하게 포섭해두는 편이 좋을 거라고 지원은 생각했던 것이다. 명수는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석고 찾을 수 있어요?” “아마 찾을 수 있을 거야. 대신 니가 여기서 얌전하게 기다려야 돼.” “네.” 지원은 명수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고는 펜스를 넘었다. 그리고 이내 잡목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산을 올랐다. 명수는 펜스 뒤에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근데 저 누나 다치면 어쩌지?’ 형근이형도 힘들어하던데, 저 누나도 힘들지 모른다. 그런데 혼자 올라가다가 다치면 도와줄 사람이 없다. 그런데 자신은 산에 올라가면 안 된다. 선생님이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선생님이 안 본다.’ 안보면 모른다. 모르게 올라갔다가 누나 따라 빨리 내려오면 모를 거다. 그러면 누나도 다치지 않고, 석고도 찾을 수 있다! 만족스러운 결론이 내려지자 명수는 서둘러 펜스를 넘었다. 빨리 움직여야 앞서 간 누나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명수가 펜스를 넘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웅과 윤정이 펜스로 뛰어왔다. 혹시나 싶어 식당 안을 들여다봤지만 역시나 안에는 아주머니들이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역시 산에 올라간 걸까?” 기웅이 펜스를 살피다가 대답했다. “예, 올라간 거 같네요. 얼마 되지 않았나 봐요.” 기웅이 가리킨 방향에는 작은 발이 끌리며 난 자국이 흙바닥에 꽤 선명히 남아 있었다. 명수가 서두르다가 남긴 자국이었다. “명수 발자국 같죠?” “그런 거 같네. 어쩌지?” “빨리 서둘러야죠.” 기웅은 몸을 띄어 펜스를 훌쩍 넘었다. 돌아보니 윤정이 손을 뻗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기웅의 도움으로 윤정도 펜스를 넘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뒤를 살핀 뒤 산 속으로 들어갔다. **** 루치드의 눈에서 흐른 빛을 감지한 동인이 흠칫 놀라며 잡고 있던 멱살을 놓았다.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선 동인을 향해 루치드는 한 걸음 다가갔다. “뭐, 뭐야?” 이상한 기분이 드는 동인이었다. 마치 눈앞의 꼬마가, 한주먹거리도 안 될 꼬마가 뭔가 큰일을 벌일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큰일에 자신이 휘말려 피를 볼 거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산꼭대기에 서 있던 두 사람. 어디로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이, 이 새끼가 미, 미쳤나?” 윽박이라도 질러서 루치드의 걸음을 멈춰보려 했다. 큰 기대는 없었지만. 그런데 멈췄다. 대신 루치드는 한 마디를 던졌다. “너, 죽어라.” 나지막한 한마디는 자신이 아이에게 내뱉었던 말과 무게감이 전혀 달랐다. 정말, 죽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에 오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조금 전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 감정들이 모두 사라졌다. 머릿속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야, 너희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동인은 정신이 나가버린 채 죽음을 당했을지도 몰랐다. 어떻게 죽게 됐을지는 몰라도 어쩐지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다. 죽음을 맞이하는 대신, 동인은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서 있을 수 없었다. 앉은 채로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너희 여기서 뭐하니?” 루치드가 돌아보니 아까 운동장에서 실없이 굴던 자원봉사자 누나였다. 루치드는 옅은 한 숨을 내쉬었다. ‘간단히 끝날 일이었는데.“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까. 루치드는 다시 시선을 되돌려, 주저앉아서 자신을 쳐다보는 동인과 마주했다.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저번과 다르다. 분명 이런 일이 반복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앞으로도 이유 없는 폭력과 협잡에 시달려야 할 필요가 없도록 해야 했다. 이런 일에 시간 낭비하는 것도 아까웠다. 그래서 루치드는 결정했다. 거친 숨을 내쉬며 올라온 지원은 우선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여 일단 소리부터 냈다. 중학생 애가 자리에 주저앉는 것을 본 뒤에야, 여유를 가지고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중학생과 마주 하던―아마도 자신이 운동장에서 말을 걸었던 아이는 등을 보이고 있어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상황을 살피니 큰일은 없었던 것 같았다. “에구, 난 또 여기까지 올라와서 ‘구타’라도 하는 줄 알았네.” 어쨌든 자신이 여기까지 올라온 핑계거리는 만들어진 것 같았다. 명수라는 아이의 친구를 찾기 위해 산에 올랐고, 혹시 폭력 사태가 있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에 이곳까지 왔음을 주위에 두루두루 알린 셈이었다. 나중에 따로 말을 맞출 필요는 없겠지, 라는 계산도 있었다. “석고야!” 루치드가 목소리에 반응해 몸을 돌렸다. 명수가 땀을 흘리며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루치드 역시 마주 웃으며 명수에게 말을 건넸다. “왜 여기까지 왔어?” “너 찾으려고 왔지. 나 너 찾는다고 보육원 안에 다 찾았어. 이 누나가 올라가자고 해서 따라온 거야.” 지원이 화들짝 놀랐다. “야, 내가 언제 올라오자고 했어? 내가 너 밑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 하지만 명수나 루치드나 그 말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석고야, 내려가자. 선생님한테 들키면 안 되잖아?” 그러면서 주위를 보다 동인을 보게 되었다. “어? 저 형, 중학생 형이네?” 보육원의 동생들과 잘 어울리지 않다보니 명수는 동인의 이름을 몰랐다. “그런데, 왜 저렇게 떨어? 추운가?” 그 말에 지원이 돌아보니 과연 눈에 띄게 몸을 떨고 있는 동인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도 새파랗게 질린 모습이고, 입술도 보랏빛으로 변한 것처럼 보였다. “얘, 괜찮아?” 동인은 덜덜 떨면서 말했다. “추, 추워요. 사, 살려, 주세요.” 그리고 모로 쓰러지는 동인이었다. ======================================= [54] Lucid Dream(5) “아이고, 힘들어 죽겠네.” “누나 좀 만 더 힘내요.” 기웅은 힘들어하는 윤정을 이끌며 산 정상을 향했다. 평소 운동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닌 윤정은 무척이나 힘들어했다. 그나마 겨울바람이 더운 열기를 금방 식혀주었던 덕에 땀을 많이 흘리진 않았다. 하지만 허벅지 근육이 마치 갓 튀긴 오징어 다리마냥 탱탱하게 당겨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석고야!” 정상에 다다를 때쯤 들린 명수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걸음을 멈췄다. “찾았나보다.” “예, 빨리 가봐야겠어요.” 윤정도 빠르게 올라가려고 다리를 들어 올렸지만, 쉽지 않았다. “안되겠다. 너 먼저 올라가라. 난 천천히 올라가야 되겠어.”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늑장부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기웅이라도 먼저 보내서 대처를 해야 된다는 생각에 윤정이 말을 꺼냈다. 기웅 역시 그 판단에 동의하며 서둘러 정상을 향했다. **** “야, 야! 왜 그래?” 지원이 쓰러지는 동인을 부축하려 뛰어들었다. 동인에게 손을 내미는데, 흠칫, 놀란 지원은 손을 재빨리 거뒀다. “아니, 왜 이렇게 차가워?” 동인의 몸이 마치 얼음 같았다. 비유적으로 차가운 몸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얼음 같이 차가워서 손을 댔다간 들러붙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명수도 달려와서 손을 대보지만 같은 반응을 보였다. 손이 얼어붙을 것 같아서 손대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지원이 살펴보니, 입술은 완전히 보라색으로 변했고, 얼굴은 마치 시체를 본다면 이러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창백했다. 두꺼운 겨울용 점퍼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몸이 차가워 질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지원이 문득 생각나 돌아보니, 루치드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우두커니 선 채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무심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지만, 자신이 올라오기 전에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 길이 없으니 뭐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아이의 뺨이 벌겋게 부어오른 모습을 보면 싸우거나 맞은 모습처럼 보이기는 했다. “넌 괜찮아?” 혹시 산 위에서 겨울바람을 오래 쐤던 바람에 이런 일이 생긴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 물었지만, 루치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살짝 저을 뿐이었다. 지원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일단 지금 급한 것은 쓰러진 아이였다. ‘어떻게 하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터라, 지원은 대책 없이 손만 쥐었다 폈다 반복할 뿐이었다. “무슨 일이야?”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산 정상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했다. 기웅은 빠르게 주변 상황을 살폈다. 머리와 옷가지가 조금 흐트러진 모습의 루치드는 얼굴을 가격 당했는지 뺨이 부어오른 모습이었다. 명수와 지원이라는 낯선 얼굴의 자원봉사자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자신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 사이에 동인이 쓰러져 있었다. “동인아!” 빠르게 다가가 살피니, 심각한 상황임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기웅은 동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마찬가지로 황급히 손을 뺐다. “이상해요. 애가 너무 차가워서 손을 대기가 힘들어요.” 지원이 이야기하는 바는 방금 기웅이 느낀 것과 같았다. 하지만 지원과 달리, 기웅은 적어도 이 아이가 보이는 증상이 무엇인지는 알아챘다. “저체온증이에요. 얼른 몸을 덥히지 않으면 죽을지도 몰라요.” 왜 몸이 이렇게 차가운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산을 오르느라 흘린 땀이 갑자기 식으면서 몸의 체온을 뺏는 바람에 저체온증이 왔다고 할 수 있겠지만, 손도 대기 어려울 정도로 차갑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기웅은 우선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서 동인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입고 있던 패딩을 벗어서 동인의 몸을 둘렀다. 지원이 그걸 보더니, 자기도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주었다. 산 정상의 추위는 여전했고 지원 역시 산을 오르며 땀을 흘렸을 테니 저 상태라면 몸에 무리가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웅은 굳이 지원의 옷을 거절하지 않았다. 우선은 위급한 상태인 동인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명수도 옷을 벗으려 했다. “넌 안 돼. 형이나 누나는 괜찮지만, 넌 위험해. 그러니까 입고 있어.” “괜찮아, 형. 나 괜찮은데.” 명수의 마음이 대견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활짝 웃어주지는 못하는 기웅이었다. 단지 쓴 웃음을 지으며 명수를 안심시켰다. “괜찮아. 이 정도만 되도 동인이는 괜찮을 거야. 너까지 안 그래도 돼.” 사실은 괜찮지 않았고,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굳이 명수에게 걱정을 끼칠 필요는 없었다. 기웅은 다시 시선을 돌려 동인을 바라봤다. 몸의 잔떨림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기웅은 이를 악물었다. 우선 응급조치라도 취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동인의 몸을 패딩으로 감싸고 그 위를 주물렀다. 지원도 따라하려 했는데 여간 손이 시린 것이 아니었다. 기웅을 보니, 그 역시도 손이 금세 새빨갛게 변한 것이 자신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기웅은 멈추지 않았다. 억지로 추위를 참으면서 동인을 살리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지원 역시 각오를 다지는데, 다시 누군가가 등장했다. “어? 무슨 일이야?” 윤정이 헐떡대는 숨을 미처 고르지도 못하고 기웅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기웅에게 가려 있던 동인을 발견했다. “아니? 이게 뭐야? 무슨 일이야? 얘 왜 이래?” “저체온증이예요.” 기웅은 설명할 힘도 없었고 여유도 없었다. 기웅을 대신해 지원이 자신이 온 다음부터 목격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윤정 역시 일단 옷을 벗어서 동인의 다리를 감쌌다. 그리고 있는 힘껏 주무르기 시작했다. 허둥대던 지원도 윤정을 따라 동인의 팔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세 남녀가 동인에게 붙어 응급조치를 취하자 낄 데가 없어진 명수는 그저 뒤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루치드는 그때까지도 말없이 그 장면을 관찰했다. 뭔가 또 이상한 마음이 불쑥 솟아올랐다. ‘분명 저 녀석은 죽어 마땅한 놈이다. 그런데 왜들 저 아일 살리려고 하지?’ 어쩌면 저 아이가 부린 행패와 악의 가득한 눈빛을 보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그런데 생각을 좀 더 진전시키니, 다른 의문이 생겼다. 과연 저 아이의 악행을 보았다면, 저 세 사람은 지금 보이는 모습처럼 살리려는 생각을 안 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답이 나왔다. 기웅의 생각이야 이미 들어서 알고 있지만, 윤정이나 저 자원봉사자도 죽는 사람을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것 같았다. 더 나아가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저 사람들은 우선 살리고자 노력 할 것 같았다. 그것을 당연하다고 믿을 테니까. 그런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니까. 자신이 죽이려고 한 사람을 저 세 사람, 아니 명수까지 포함해서 모두가 구하려고 하는 모습은 루치드의 단단한 사고에 금이 가게 만들었다. “저대로 두면 안돼요? 나쁜 사람이에요.” 라고 묻고 싶었다. 그런데 자신이 그 말을 던지는 모습을 상상하던 순간, 뭔가 기시감이 느껴졌다. “얘한테서 정액 냄새가 자주 나거든요.” 동인이 법원에서 소미에게 던진 말은 당시 소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까?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후 성교육을 받고 또 개인적인 호기심에 책을 찾아 읽으면서 대충 의미를 파악할 수는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의미만 파악했을 뿐인 그 말이 지금은 감정으로 다가왔다. 불쾌감.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고 모욕적인 발언으로 자존심을 뭉갰다. 동인은. 그런데, 자신이 물어보려고 상상했던 말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동인의 그것과 유사했다. 다른 점이라면, 동인은 ‘수치심’을 자극하여 인격적인 살인을 시도한 셈이고, 자신은 한 사람을 ‘죽이자고’, ‘죽도록 내버려두자고’ 말함으로서 실질적인 살인을 제안하게 되는 것이다. 루치드는 조금 전까지 죽을만한 사람은 죽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틀렸다고 눈앞의 세 사람이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저들은 사람을 죽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동인이 형, 어떡해?” 명수가 세 사람의 뒤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루치드는 다른 사람들을 신뢰하는 일이 드물었다. 자신의 부모의 정체마저 의심―자신의 이름을 누가 지었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상황인데,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 다만, 굳이 예외를 둔다면 그것은 바로 명수일 것이다. 한결같은 순수함과 웃음으로 루치드가 굳게 세운 벽을 쉽게 허물어뜨리는 친구. 그 친구가 지금 눈앞에서 걱정과 슬픔이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루치드는 자신의 유일한 ‘친구’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기 싫었다. 루치드는 몸을 돌렸다. 혼란스러운 가치관의 충돌 때문이기도 했고, 친구의 슬픔을 직시하고 있기 힘들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우거진 잡목 우듬지 위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아까 보았던 하늘과 똑같은 하늘이었다. 여전히 구름 한 점 없고, 여전히 푸른데, 어쩐지 마음이 콕콕 쑤시는 기분이었다. 루치드는 자신의 감정을 거슬러 올라가보았다. 이건 어떤 감정일까? 미안하고, 안타깝고, 벌 받는 느낌. 엄마한테 혼이 나서 집 밖에 나가 벽을 보고 서 있을 때 느끼는 감정. 루치드는 자신이 벌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을 뻔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은, 단지 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손쉽게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 자신을 죽이겠다는 협박이 과연 상대를 죽일 정도의 이유가 되는 것인가, 는 계속 고민을 해봐야겠지만, 자신이 총이나 칼 따위의 무기 앞에 무기력하게 놓여있었던 것도 아니고, 당장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마법’으로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사람을 죽이려고 했었다. 루치드는 자신의 머리 어딘가가 고장이 난 것이 아닐까, 라는 번민에 빠졌다. 물론 아직까지는 어느 쪽이 옳은지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옳다고만 생각했던 것이 사실 옳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게 되었다. 저쪽 세상의 진리는 이곳에서도 진리, 라는 보편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한 구석에서 싹을 틔었다. 루치드는 마법을 해제했다. “어, 이제 안 차가운 데요?” 지원이 놀라 소리쳤다. 저만 그런가싶어, 돌아보니 윤정이나 기웅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계속 주물렀더니 몸의 체온이 돌아오는 건가봐.” 윤정의 의견도 그럴듯했지만, 기웅으로서는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동인을 주무르는 건지 얼음덩어리를 주무르는 건지 알 수 없었던 상황에서 돌연 냉랭한 기운이 사라지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문제는 뒤로 제쳐두고라도, 우선은 동인을 살릴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는 것에 집중해야 했다. 빨갛게 부어오른 손에 더욱 힘을 줬다. **** 보육교사가 현관 앞에서 자원 봉사자들과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뒤에서 등을 톡톡 두드렸다. 돌아보니 윤정이었다. “어, 왜?” “선생님, 잠시만요.” 보육교사는 양해를 구하고 윤정을 따라나섰다. 식당 근처로 가는가 싶더니 건물 옆 후미진 곳으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기웅이 동인을 눕혀놓고 지원과 함께 마사지를 하고 있었다. 산에 있을 때보다는 얼굴이나 입술의 빛깔이 돌아온 편이지만, 보육교사의 눈에는 시체나 다름없어 보였다. “이게 무슨 일이야!” “저체온증입니다. 선생님.” 환장할 노릇이다. 보육교사는 얼른 핸드폰을 꺼냈다. 기웅의 말이라면 어느 정도 믿을 만 한데다, 저체온증이라면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전화를 걸면 서도 동인의 안색을 살폈다. 정신을 잃은 지 한참이 됐다는 기웅의 설명에 눈앞이 깜깜했다. “어, 선생님? 저 계은선 인데요. 지금 식당 옆에 저체온증 아이가 있어요. 정신을 잃은 지 시간이 좀 된 거 같아서 빨리 구급차를 불러야 할 것 같은데요.” 기웅은 마사지를 하면서도 귀를 기울였다. 바로 119를 부를 줄 알았더니, 누군가에게 상황을 보고하는 보육교사의 모습에 답답함을 느꼈다. 동인을 업고 산을 급하게 내려오느라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라 계속 주무르는 것도 힘에 부쳤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옅은 보랏빛 입술이 마치 동인의 생명선처럼 여겨졌다. ======================================= [55] Lucid Dream(6) 보고를 마친 보육교사는 지시를 받은 후에야 119에 전화를 걸어 요청을 했다. 차가 오길 기다리는 사이 보육교사까지 합세하여 동인의 팔다리를 주물렀다. “언제부터 이랬니?” “저희가 발견했을 때부터요.” 윤정이 대답을 했다. “다른 사람은 없었고?” 윤정이 흘끔 기웅의 눈치를 봤다. “예, 저희 밖에 없었습니다.” 보육교사가 보니, 기웅과 윤정의 옷이 많이 지저분해보였다. 땀도 많이 흘리고 바지는 흙먼지에 더러웠다. 하지만 다른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당장 자신만 해도 불과 1,2분이 흐른 것 같은데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으니 자연 옷이 더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더 힘내자꾸나. 금방 응급차가 올 거야.” 대답은 없었지만, 교사가 보기에 기웅이나 윤정은 대답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은 듯 보여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실제로도 두 사람은 지난 1시간여가 거의 하루같이 느껴져 당장이라도 드러눕고 싶을 정도로 지친 상태였다. **** 그 시간, 루치드와 명수는 방으로 돌아왔다. “괜찮을까?” 명수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루치드에게 물었다. “응. 괜찮을 거야.” 기운 빠진 루치드의 목소리에 명수가 등을 두드려 주었다. 기웅은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두 사람을 붙잡고 말했다. 기웅의 안색이 검다 싶을 정도로 근심서린 얼굴이었다. “너희들이 있으면 일이 복잡해질 수 있으니까, 우선 방으로 돌아가. 나머지 일은 형이 처리할 테니까, 방으로 가서 씻도록 해. 넌 얼굴에 얼음찜질이라도 하고. 혹시 많이 다친 건 아니지?” 루치드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아무리 맞았다고 해봐야 정신을 잃은 채 바닥에 누워있는 동인보다야 처지가 나은 편이니까. 사실 루치드는 많이 지친 상태였다. 산에서 내려오는 동안 동인을 업고 내려오는 기웅이 넘어지지 않도록 계속 마법을 사용했다. 기웅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사용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아직 그 정도의 마법 구현 실력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동인에게도 체온이 올라가게끔 아까와 정 반대의 마법을 사용하며 산을 내려왔다. “명수야, 씻으러 가자.” 머릿속이 복잡했다. 우선은 씻고 생각해 볼 일이다. 이왕이면 이 불쾌한 감정의 찌꺼기들도 함께 씻겨 내려갔으면 좋겠다. 한 편, 함께 자리를 피한 지원은 함께 자원봉사를 온 언니를 찾아갔다. “어디 갔다 온 거야?” “응, 아… 저 식당.” “아, 설거지하러 갔다 온 거야? 그럼 간 김에 점심까지 챙겨 먹지 그랬어?” 언니는 지원이 우물쭈물하면서 대답하는 모양새가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벌겋게 부어오른 손을 보니 고생을 했다 싶어 더 묻지 않았다. 고무장갑이라도 끼지 그랬냐, 며 핀잔을 주자 지원은 떫은 웃음만 지어 보였다. 마침 자봉 책임자분께서 오셔서 두 사람에게 점심 먹으러 가자며 손짓을 하니 더 이상의 대화는 진행되지 않았고, 그렇게 곤란했던 상황이 모면됐다. 식당으로 향하는 도중에 혹시 얼굴을 보게 될까 두근거렸는데, 이미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웅이 지원을 보내기 전에 한 말이 떠올랐다. “이 일은 비밀로 해야 되요. 그래야 이 아이들이 처벌받지 않을 테니까요. 그 쪽도 일단 허락 없이 산에 올라간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어요. 그러니 누구한테라도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알겠죠?” 지원은 기웅의 얼굴을 떠올리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산 정상에서는 워낙 급박한 상황이었던지라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지만, 지금은 어쩐지 그가 한 재빠른 조치와 믿음직한 행동들이 떠오르며 자꾸 그의 얼굴을 되새기고 있었다. 울림 좋은 목소리와 신뢰감을 주는 눈빛, 오똑한 콧날과 다부진 입매가 자꾸 다가와 그녀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얘, 뭐하니? 정신 차려?” “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숟가락만 들고 배식대에 들어서고 있었다. 언니가 그녀의 등을 치지 않았다면 식판 대신 숟가락을 들이 밀 기세였다. 부랴부랴 식판을 가져와 민망한 표정을 감쳤다. 아무래도 자원봉사자들은 보육원 아이들이 거의 다 먹은 뒤에야 들어올 수 있었던 모양인지, 보육원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단 두 사람만 빼고. “누나!” 마침 눈이 마주치자, 명수가 아는 척을 했다. 그러나 루치드는 흘깃 쳐다본 뒤로는 흥미가 없다는 듯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식사를 계속했다. 지원은 한 손을 들어 명수에게 인사를 하고는 언니와 가까운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쟤가 널 어떻게 알아?” “아, 아까 같이 좀 있었어요. …잠깐동안요.” “너 일 안하고 쟤랑 놀다 온 거지? 그래서 아까 무슨 죄지은 사람처럼 얼굴 붉히고 있었던 거지?” 마치 자신의 추리가 들어맞았다는 듯 의기양양한 언니의 모습에 1시간 전 홈즈에 빙의됐었던 소녀탐정 양지원은 쓰게 웃으며 아니라고만 말했다. “잠깐 놀았다고 어떻게 친해져? 분명히 계속 놀았던 거야.” 대꾸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밥을 먹었다. 저 아이들을 보니 동인의 걱정도 들었다. ‘그 아이는 괜찮을까?’ 지원의 걱정을 사고 있던 동인은 병원 응급실에 누워 있었다. 두꺼운 담요 2장을 덮어쓴 동인은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온도를 재던 의사가 걱정 어린 얼굴로 서 있던 보육교사에게 말을 건넸다. “체온은 돌아온 것 같습니다만, 꽤 저체온 상태에서 시간이 조금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급한 처치는 다 됐으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금방 깨어날 수 있는 거죠?” “글쎄요, 지금 맞고 있는 링겔이 다 떨어지기 전에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만. 다만 조금 이상한 점은 있네요.” “예? 뭔데요? 큰 문제라도 있나요?” “아, 지금으로서는 원인을 알 수 없으니 뭐라고 답은 못 드리겠습니다만, 이 아이 몸을 살펴보니 왼손과 양 발 끝에 약한 동상의 증상이 보이더군요.” “동상이요?” “지금 바깥 날씨를 고려하면 동상에 걸린다는 게 조금 이해가 안 가는데, 혹시 짐작가시는 부분이 있나요? 이 학생이 혹시 스키장이나 뭐 그런 비슷한 곳에 간 건 아닌가요?” 12월이지만 이 근처에 눈이 내린 곳은 없었다. 하물며 보육원에 거주하는 아이가 혼자 스키장을 갔을 리도 만무한 일. 보육교사는 뒤에 서있던 기웅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기웅은 유구무언이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글쎄요. 근데 그거 심한 건 아니죠?” “예, 말씀드렸다시피 약한 동상 정도입니다. 자연치유가 가능하리라 봅니다.” “예.” “땀을 많이 흘린 상태에서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으면 동상에 걸릴 수도 있으니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은 아닙니다만, 저체온증이나 동상이 이렇게 걸리는 경우가 이 주변에서는 보기 힘든 일이니까요.” 물론 의사가 말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더 있긴 했다. 아이의 몸에서 구타나 그와 비슷한 학대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그 가능성을 배제한 것이지만. 대신 조금 둘러서 말할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심한 운동이나 뜀박질을 한 뒤에 오래도록 야외의 공기에 노출된 상태라면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만약 아이들이 야외에서 오래 ‘놀지’ 못하도록 방비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의사의 배려는 보육교사에게 잘 통했다. 보육교사는 의사가 의심한 부분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그 부분을 에둘러 표현했음을 알아 들었다. 화를 내지는 않았다. “저희 원의 아이들이 워낙 축구를 좋아해서 지금도 운동장에서 놀고는 있습니다만, 저희가 ‘적당히’ 시간을 정해서 통제하고 있어요. 게다가 워낙 청결을 중시하는지라 다들 잘 씻고 다니기도 하고요. 그렇지?” 기웅 역시 그 부분에 있어서는 수긍하는지라, 간단히 대답했다. “예. 그런데요, 동인이가 땀을 많이 흘렸나요?” 뜻밖의 질문이 들어왔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서 그냥 따라온 건줄 알았는데. 그래도 일단 보호자 측의 질문에는 친절히 대답하는 게 의사의 의무다. “어? 어. 그래서 이상하다는 거지. 저 아이 옷가지를 수거한 간호사 얘기로는 흙은 많이 묻어있는데, 땀이 차거나 하지는 않았다고 하니까. 게다가 발만 걸렸다면 의심해볼만 한데, 손에 동상이 걸리는 건 조금 이해가 잘 가지 않기도 하고 말이야.” 자세히 말하자면, 동상이 걸릴 정도의 원인이 될 만큼 땀이 차지는 않았다고 해야 옳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왼손 세 손가락의 피부에 약한 손상이 관찰된다는 것은 땀과는 다른 병원(病原)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었으니까. 동상은 피부가 영하 2~10℃ 정도의 심한 추위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것이 원인이다. 혈액순환이 되지 않은 부위의 피부 조직이 손상되는 증상을 보이는데 동인의 경우에는 그 조건에 맞지 않았다. “선생님, 그런데 사람 몸이 추위에 노출되면 얼음처럼 차가워 질 수도 있나요?” 의사는 이상한 질문을 많이 하는 친구구나, 라고 생각하며 답을 해줬다. “사람 몸이 얼음장처럼 차갑다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의 체온이 있기 때문에 얼음처럼 차가워지지는 않지.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몸이 차갑게 식는 경우는 없어. 하지만 우리 몸은 우리 몸보다 차가운 물건을 만질 때 얼음처럼 차갑다고 착각을 할 때도 있어. 때문에 만약 이 아이를 말하는 거라면, 니가 얼음처럼 차가웠다고 착각할 여지는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말이지.” 착각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옆에서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보육교사 때문에라도 더 이상 물음을 던질 수 없었다. “우선 이 아이는 오늘 하루정도는 병원에서 관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의식을 잃을 정도였으니 아무리 지금 체온이 올라갔다고 해도 하루 정도는 입원 처리를 하시고 그 다음에 다음 치료 방향을 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보육교사는 의사의 처치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조금 전에는 기웅이 동인을 업고―보육교사는 기웅이 동인을 업고 산에서 내려왔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기웅에게 요청을 했던 것이고, 기웅은 비밀로 해야 할 문제였기에 군소리 없이 동인을 업었다―보육원 정문으로 조용히 빠져나와 밖에서 응급차에 실어 이 곳까지 왔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오후 1시. 아직 보육원에는 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있을 테고, 이 상태로 동인을 데리고 들어가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차라리 이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위에서도 그걸 원할 것이다. “기웅아, 너는 혼자 돌아갈 수 있겠지? 여긴 선생님이 지켜야 할 것 같은데.” “예. 혼자 갈 수 있어요. 걱정 마세요.” 교사는 지갑을 열어 택시비를 쥐어주었다. “괜히 보육원에서 이상한 소리 안 나오게 해줘. 물론 기웅이 너는 워낙 듬직해서 선생님이 믿을 만 하니까 이런 소리도 하는 거 알지?” “예, 알겠습니다. 선생님.” 기웅은 보육교사에게 인사를 하고 병원을 나왔다. 택시를 기다리던 기웅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분명 착각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차가운 물에 손을 집어넣은 것 같은 거였어. 그 정도라면 분명 최대로 잡아도 영상 2~3도 정도일거야. 그런 차가움에 노출된 거라면 손에 동상이 걸리는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지. 하지만 문제는 사람이 그렇게 차가워질 수 없다는 것이고. 사람의 피부가 그 정도로 차가워진다면, 실제로 내부는 더 차가웠을 수도 있다는 건데, 그러면 사람이 살 수 있나? 피부조직이 모두 얼어붙었을 텐데?’ 생각을 거듭할수록 뭔가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문득 그런 말이 떠올랐다. 현상은 있는데 실체는 없다. 기웅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무슨 범인잡기 놀이도 아니고, 형사놀이 할 땐가.’ 지원이 들었다면, 쑥스러워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을 테지만 기웅이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일단 돌아가서 생각하자.’ “택시!” ======================================= [56] 성장(1) 동인의 일은 유야무야 되었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게. 다행히도 동인은 무사히 깨어났고 보육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후 모종의 일이 있었는지 동인은 보육원을 옮기게 되었다. 하지만 그 역시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게 이루어졌다. 심지어는 보육원 직원들 중에서도 정확한 이유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지만, 위에서 워낙 쉬쉬하는 바람에 알고 싶어도 알지 못했고, 물어보지도 못하게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기웅은 소수의 아는 사람에 속했다. 발견부터 동인이 다른 보육원으로 이원(移院)되기까지의 과정에 모두 개입한 유일한 보육원생이었다. 동인이 이원을 결정하고 떠나기 전날, 기웅은 동인의 방을 찾아갔다. 동인은 묵묵히 짐을 싸는 중이었다. 짐이래봐야 몇 권의 교과서와 옷가지가 전부였다. “마음, 그대로야?” 기웅의 걱정 가득한 물음에도 동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동인이 병원에서 깨어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기웅은 동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동인이 퇴원할 때도 함께였고, 방에 틀어박혀 있을 때도 위로와 격려를 위해 방문한 유일한 원생이었지만 동인은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동인의 이원이 결정됐을 때 보육교사가 귀띔을 해주지 않았다면 그것조차 몰랐을 것이다. “동인아, 니가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형도 정확히 모르니깐 조언이랍시고 해줄 말은 없다. 하지만 예전에도 말했듯이 난 니 편이야. 힘든 일이 있으면 얘기해 줬으면 해. 도와줄 일이 있다면 도울 테니까.” 챙겨야 할 짐은 이미 다 챙겼다. 그럼에도 계속 방안을 서성이며 이리저리 들추고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기웅과 대화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었다. 멈추는 순간, 기웅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지금으로서는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원을 결정한 것은 이대로 이 곳에 머무를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을 원장에게 털어놓은 결과였다. “무서워요. 이 곳에 있기가. 저 죽을지도 몰라요.” 라는 말을 20번 쯤 했더니 원장이 오케이 했다. “동인아, 제발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이대로 그냥 가는 게 너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고민이든 문제든 풀어야 앞으로의 길도 열릴 거야. 그냥 이대로 가면 도망가는 것 밖에 안 될 거야. 그건 너한테 도움이 안 돼.” 사정하듯이 기웅이 말하자, 그 모습이 못내 안타깝고 미안하여 결국 동인이 몸을 돌렸다. 어차피 마지막이니까. “형. 난 여기 못 있어. 여기 있으면… 죽을 거야.” 무슨 소리냐고 묻고 싶은데, 그게 바로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동인의 눈에서 공포와 죽음이 보였기 때문이다. 마주한 사람에게까지 전염될 듯 한 격렬한 감정의 동요가 느껴졌다. “그건, 사고였어. 동인아. 아무도 널 죽이지 않아.” “아니, 날 죽이려고 했어.” “누가?” “…….” 사실 기웅도 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아이는 이제 초등학교 1학년생이었고, 보육원 현관에서든 산 정상에서든 동인이 휘두른 폭력의 피해자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 아이는 힘으로 동인을 이길 수 없었고, 무기를 들고 있지도 않았다. 지금까지의 모습을 봐도 전혀 폭력적인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다. 다만, 폭력이 왜 나쁜 거냐고 묻던 소년의 순진한 눈빛을 떠올리면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일 것이다. 아니 당연한 질문일 수도 있다. 도덕과 규칙은 후천적인 가르침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고, 그 나이 때 아이들에게 법, 문화, 사회, 규칙, 도덕을 가르치는 것이 학교의 의무이고 가정의 의무이니까. “동인아.” 동인은 분명 죽을 고비를 겪었고, 그 상황이 동인에게 정신적 충격을 줬음이 분명했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려고 든다고 피해망상에 빠진 것이다. 동인이 두 손을 깍지 끼고 다리를 떨어댔다. “걔가 날 죽이겠다고 했어.” 환청과 환각에 시달리기도 한다. 입술을 삐죽대는 동인. “난 잘못한 게 없어. 소미도 내가 잘못한 게 아냐. 내가 그런 게 아니라고.” 피해망상과 과대망상에 빠져 현실성을 잃고 사회성에 문제가 생긴다. 동인이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중얼중얼 댔다. 기웅은 고개를 돌렸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기웅은 동인의 방을 나왔다. 제대로 달래주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동인을 떠나보냈다. 그가 떠나는 날, 기웅은 창가에 서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문을 향해 걸어가던 동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기웅은 손을 흔들어 배웅할까 했지만 관두었다. 가슴이 아려왔다. 옛 기억이 떠올랐다. 기웅의 집에는 물건들이 온전히 있질 못했다. 언제나 어머니가 생각날 때마다 집어던지고 깨뜨리는 바람에 금이 가거나, 고장 나거나, 아니면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면 저 사람이 날 죽이려 한다, 면서 도망가기 일쑤였다. 아들인 기웅을 보고도 피하거나 혹은 죽이려 들었다. 아버지는 밤에 기웅을 데리고 방에 들어가 잤다. 항상 방문을 잠갔다. 새벽이 되도록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비명을 들어야 했던 때도 있었다. 어느 날, 기웅은 어머니에게 붙잡혔다. 왜, 어떻게 붙잡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미안해.” 라고 말했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 말에 담긴 공포와 슬픔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아버지가 나타났고, 기웅은 풀려났으며 이후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기웅은 병원으로 보내졌고, 이후 보육원으로 왔다. 지금까지도 기웅은 어떤 일이 벌어졌고 어떻게 일이 마무리 됐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두 분이 모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보육교사가 자신을 데리고 납골당에 찾아갔었으니까. 또 한 가지 아는 것은 조현병이란 병이 그토록 무섭다는 것. 한 가정을 순식간에 파괴시키는 무서운 질병이란 사실이었다. 그 병을 알게 된 이후, 기웅의 목표는 오로지 의대였다. 병을 고치겠다, 질병을 정복하겠다, 는 과장된 히포크라테스적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을 지켜야 된다는 자기 방어적인 선택이었다. “조현병은 유전적 성향이 있다.” 기웅은 자신이 어머니처럼 될까봐 두려웠다. 동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또 한 사람. 루치드는 동인을 바라보며 무수히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그라들었다. 적어도 이번 사태는 루치드 개인에게 많은 과제를 남겼다. 악의에 가득찬 사람을 대하는 방법이나 인간관, 세계관의 정립, 그리고 마법의 힘에 대한 과신과 통제. 하지만 그런 과제와 무관하게 지금 동인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혐오였고, 또 하나는 죄책감이었다. 루치드가 느끼는 혐오의 감정은 동인의 악의에 의해 피해자가 된 소미에 대한 감정과 연결되었다. 그녀가 얼마나 억울하게 느꼈을지, 얼마나 슬프고 괴로웠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를 이해하고 나니 동인의 배려심 없던 행동과 말이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를 알게 되었고, 때문에 그를 미워하게 되었다. 혐오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과 동일선상에서 자신은 동인에게 같은 악의를 품었었다. 자신은 동인을 이해하려들지 않았고, 배려하지 않았으며, 죽이려고 들었다. 거의 죽기 직전에 이르도록 힘을 쓰기까지 했다. 자신이 그를 혐오하는 만큼 자신을 혐오하게 만들었다. 죄책감이 들었다. 루치드가 이번 사태로 알게 된 것이 하나 있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의 감정과 생각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 관심이 없으니 이해도 하지 않으려했고, 배려를 하지도 않았다. 그러고 나니 예전에 책에서 읽었던 사자성어가 떠올랐다. 역지사지(易地思之). ‘내가 그를 배려하려 들지 않으니, 남도 나를 배려하려 들지 않는다. 내가 남을 이해하려 들지 않으니, 남도 나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내가 그를 이해하려 했다면, 그도 나를 이해하려 했을까?’ 그 점에서 기웅이 이미 답을 주었다. 결국 사람은 소통을 해야 했다. 소통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고 배려하려 해야 했다. 절로 한숨이 나올 일이다. 결국 이런 일을 직접 겪고 나서야 그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무리 머릿속으로 떠들고 외워봐야 진심으로 그 의미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그저 글줄로 된 껍데기만 머리를 채우고 있는 셈이었다. 물리학도 실험을 통해 이론을 검증하거나 반증하는데. 결론―이해와 실천이 없다면, 자신은 머릿속에 거대한 쓰레기통을 만들어 채울 뿐이다. “난 가해자일까, 피해자일까?”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루치드는 짐작할 수 없었다. 창문에서 시선을 돌렸다. 동인은 보육원을 빠져나갔다. **** 그 해 겨울은 무척 추웠다. 너무 추웠던 나머지 수도관이 동파되는 사태가 인평시 내 곳곳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수도관 동파쯤이야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문제였다. 하루도 걸리지 않아 수리공의 마법 같은 솜씨로 원상복구 되었다. 하지만 그 몇 시간의 불편도 불평거리가 되는지 인평신문에서는 몇 세대가 수도관 동파로 불편을 겪었다며 사회면 일부를 할당해 보도되었고, 인평시는 복지지원 예산을 확충해 소외지역 주민의 불편을 해소하겠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보육원 역시 춥기는 마찬가지였다. 화단의 꽃이나 나무들이 동장군의 서슬에 잔뜩 웅크리고 숨어서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때. 하지만 아이들은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뛰고 소리치고 웃었다. 아이들은 겨울에도 성장을 한다. 루치드도 성장했다. 먼저 윤정을 찾아가서 도서관에 같이 가자고 조르기도 했고, 명수와 함께 보육원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사실 거의 대부분은 명수가 휘젓고 루치드가 수습하는 형태였다. 또 루치드는 기웅을 자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웅은 책을 빌려주거나, 대화를 나누거나, 공부를 도와주었다. 사실 기웅은 루치드의 공부를 도우면서 여러 번 놀랐다. 영재라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이 될 아이가 중학교 과정의 수학을 풀어내는 것이 어디 보기 흔한 일인가. 다만 몇몇 개념들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문제를 풀 때 고민을 많이 한다는 점은 초등학생 같은 면도 있었다. 사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하여도, 5년 내지 6년의 시간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그 시간을 살면서 각종 언론매체나 학교, 가정, 사회에서 듣고 배우는 양이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단어나 문장을 이해하는 것은 바로 그런 시간의 도움도 필요한 것이었다. 게다가 루치드가 읽은 책이라고 해봐야 초등학교 도서관에 비치된 한정된 분량의 책에 불과하니 한계는 존재했다. 1년 동안 다 읽을 수도 없는 분량이기도 했고. 하지만 기웅은 루치드가 몇 년 안에 충분히 중학교 과정 전체를 이해할 만큼 지식이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을 역량을 지닌 아이였으니까. 루치드 스스로의 변화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다시 예전 처음 이 세상으로 넘어왔을 때처럼 인문, 사회 분야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었다. 자신이 너무 한 분야에 매몰되는 바람에 편향성을 가졌다는 자각이 있은 후 부터였다. 좀 더 많은 책을 읽고 좀 더 많은 지식을 쌓아서 편중된 시야를 넓히고 자신의 가치관을 고민하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울려 공을 차기 시작했다. 물론 공을 찰 때 마법을 쓰는 일은 없었다. 그러면 너무 재미가 없으니까. 그리고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잘 할 수 있었으니까. 아이들은 부쩍 그가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예전에는 너무 동떨어져서 책만 읽고 있으니, 진짜 그의 별명처럼 ‘석고상’ 같았는데, 이제는 조금 친구가 될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석고야, 밥 먹으러 가자!” ‘석고’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것은 여전했지만. “예. 형! 형도 같이 가자.” 철용이 팔을 들어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쳐내고는 씩 웃었다. “오케이, 고고!” “나도, 나도!” “당연하지, 넌 안 가려고 그랬어?” 명수가 마당을 가로지르는 수탉처럼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달려왔다. ======================================= [57] 성장(2) 해가 중천도 지나 서쪽으로 향해 갈 때, 원장실에는 피곤한 얼굴의 두 사람이 앉아 사담을 나눴다. “과장님, 그 원생은 잘 갔습니까?” “예. 그 쪽에서 조용히 입원시키기로 했답니다.” “나 원 참.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보육원장은 물고 있던 담배 끝을 짓뭉개며 연기를 토해냈다. 본래 가기로 한 곳에서 아이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서 이원을 거부하는 일이 벌어졌다. 원장은 행정과장과 함께 일을 무마하기 위해 조용히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병원을 섭외해서 진료 후 입원수속을 밟을 수 있게 했다. 상대 보육원에서도 조용히 처리되도록 입을 맞춘 덕택에 동인의 병원 입원은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다. “저기, 그리고 그 아이 말입니다.” “누구요?” “최근 입양 이야기가 오갔던 친구요.” “아, 어떻게 됐어요?” 사실 루치드의 입양 이야기가 오간 것은 여간 놀라운 게 아니었다. 영아도 아니고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를 입양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기 때문이다. 별로 시청률도 잘 나오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그 방송을 보고 입양을 고민하고 문의까지 주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부모를 희망하는 지원자 가족이 왔던 날, 보육원 내부에 난리가 났다는 점이다. 동인이 응급실에 갔다는 사실이 내부의 자원봉사자를 비롯, 누구의 입을 통해서든 외부로 유출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급하게 외부 사람들을 밖으로 보내게 되었고, 그 와중에 입양지원자도 끼어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들이 루치드를 만나긴 했다. 상담실에 기다리기를 한참―거의 한 시간을 기다렸을 것이다. 오죽하면 마주 앉아서 말동무를 해주던 보육교사가 녹초가 돼서 상담실을 나왔을까―이 되었을 때, 루치드가 생활지도원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 어디 갔었냐고 화를 내고 싶었지만, 꾹 참고 억지 미소를 짓던 보육교사의 얼굴을 봤다면 원장도 그녀를 그토록 다그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양부모를 희망했던 중년 여인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생각보다 아이의 생김새가 마음에 꼭 들었다. “tv로 볼 때보다 실물이 더 낫구나?” 옆에 앉은 남성의 얼굴에서도 기다림에 지쳐있던 피곤이 사라지는 모양새라 보육교사는 속으로만 한숨을 내쉬며 루치드에게 자리를 내줬다. 두 중년남녀는 루치드에게 자기 소개를 간략히 건넨 후,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공부를 좋아하는지, 운동을 좋아하는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싫어하는 음식이 뭔지, 음악을 좋아하는지, 만화를 좋아하는지,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청소를 잘하는지, 예의는 바른지, 말을 잘 안하는지, 원래 무뚝뚝한 건지. 기분이 나쁜지, 왜 기분이 나쁜지, 자신들이 무서운지. 보다 못한 보육교사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오늘 애가 좀 피곤한 거 같네요. 평소에는 안 이런데.” 낯빛도 어둡고, 대답도 안하고, 눈도 안 마주치는데 어떤 사람이 호감을 가질까. 기대감이 떨어져선지 남자는 몸을 등받이에 길게 기대고 아이를 관찰하는 태도로 변했으며, 중년 여성의 입 꼬리도 점점 내려가더니 종국에는 함께 입을 다물었다. 말없이 대치하는 형세가 만들어지자, 초조해진 보육교사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정상회담(?)을 종결시켰다. “일단, 오늘은 좀… 보육원 안에 워낙 많은 사람이 들어온 탓인지 좀 어수선하네요. 아이도 조금 스트레스를 받았나 봐요. 평소에는 전혀 이런 애가 아닌데 말이죠. 저기, 일단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고 다음에 다시 방문해 주시는 게… 어떨까요?” “그러죠.” 두 사람은 그렇게 돌아갔다. 보육교사가 등 뒤에 선 루치드를 노려봤다. 루치드는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산에서 돌아온 지 10분도 되지 않았는데, 씻자마자 지도원 손에 이끌려 이곳에 왔더니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럽기만 한 머릿속이 완전히 뒤죽박죽 꿀꿀이죽이 된 기분이었다. 이 일로 해당 보육교사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원장에게 온갖 험한 말로 꾸중(?)을 들었다. 보육교사는 루치드에게 이를 갈았다. 하지만 별 수 있나. 이제 겨우 초등학교 1학년인데. “입양 의사를 포기했습니다.” 행정과장의 보고에 원장은 넓은 이마를 한 차례 쓰다듬으며 입맛을 다셨다. “그 건은 일단 알겠습니다. 지나간 것은 어쩔 수 없죠. 그 날은 우리로서도 손 쓸 도리가 없었으니까요.” 불미스러운 사태가 발생하지만 않았다면, 일찍 사람을 동원해서 준비를 시켰을 것이다. 차라리 그 두 사람을 일찍 내보낸 게 더 잘된 일일 수도 있다고 자위하며 그 일은 덮기로 했다. “이번에 졸업하는 아이들은 몇 명입니까?” “5명입니다.” 행정과장이 졸업 명부에 찍힌 이름을 불러주려고 하자, 원장이 손짓을 했다. 어차피 들어봐야 제대로 얼굴을 떠올릴 수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오히려 관심이라면 5명 분의 디딤돌 통장이 발급되어 나간다는 사실이었다. “디딤돌 통장은 다 정리됐습니까?” “예, 며칠 전에 정리가 끝났습니다.” “다행이군요. …사실 우리끼리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이번 년도 투자 성적이 좋았다면서요?” 디딤돌 통장에 들어가야 할 돈들을 빼돌려 해외투자에 돌렸다. 그리고 그 투자수익을 재단 비자금으로 유용하고 있었다. 사실 디딤돌 통장은 보육원 아이들이 보육원을 졸업한 뒤, 사회에 나갈 때 진출자금이라는 명목으로 주는 일종의 지원금으로서 그간 사회복지가들의 모금과, 국가의 지원금 등이 합쳐진 돈이다. 그런데 비록 푼돈이라도 아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돈의 규모도 커지게 마련이다. 재단은 바로 그 돈들을 해외나 혹은 수익성 좋은 투자처에 투자하여 수익을 거두고 그 수익을 재단 비자금으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회계 상 보고되지 않는 투자이며 수익이기에 장부에 남을 리 없고, 또 이후의 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이중장부는 필수였다. 틈틈이 정리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연말에는 꼼꼼하게 따져 구멍이 생기지 않도록 보육원 행정실과 재단 회계 팀이 협력하여 장부를 조작했다. 올해는 남미 쪽에 투자했다고 하는데,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전략이 잘 맞아 떨어졌는지 꽤 큰 수익을 거뒀다는 후문이었다. 당연히 보육원장과 행정과장에게도 보너스가 지급될 예정이었다. “예, 그래서 윗분들도 꽤 만족하셨다더군요.” “그럼, 더 많은 애들이 들어올 수 있게 힘을 써야지, 이게 뭡니까? 5명이나 빠져나가는데 들어오는 애들은 없고.” “지금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아마 3명 정도는 더 들어올 것 같습니다. 모두 7세 미만인 것 같습니다.” 그건 다행이네, 라고 중얼거리며 원장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행정과장 역시 커피를 들었다. 사무국장이 빠졌지만, 기름칠 할 선원이 빠졌다고 배가 나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오월동주의 조각배는 여전히 구정물을 헤치며 나아갔다. 두 사람은 내년에도 무사히 구정물을 거스르고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 향긋한 커피를 한 모금씩 마셨다. **** 한 사람을 정신병원으로 보낼 만큼 추웠던 그 해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왔다. 2학년 1반에 배정된 루치드와 2반에 배정된 명수는 여전히 절친으로 지냈다. 뿐만 아니라 1학년 때는 서먹했던 아이들이 2학년이 되어서는 루치드와 가까워지려고 했다. 루치드가 예전처럼 벽을 세우지 않은 탓이 있을 테고, 방송까지 나온 아이의 영특함을 눈여겨본 부모들의 등쌀도 있을 테다. 전국 시청률은 엉망이었지만 인평 초등학교 학부모들의 시청률은 90%는 되지 않았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2학년 담임을 맡은 교사는 바짝 긴장한 채 수업을 시작했다. 학교 명물, 수학 천재, 뜬금포 질문의 선두주자. 수업파괴자, 학생선동자, 개구리 뒷다리보다 질긴 시선에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마냥 오들오들 떨어대는 교무실 선생님들은 선의의 피해자. 그녀는 그 피해자 중의 하나였다. “자 수업 시작할게요. 여러분 앉으세요.” 교사는 자신의 떨림을 아이들이 눈치 챌까 두려웠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루치드는 수업 때 질문을 하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 엉뚱한 질문으로 방해를 하는 일도 없었다. 학생들은 더 이상 당황해서 얼굴 붉히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여전히 소년의 시선은 날카롭지만, 끈질기게 달라붙는 일은 적어졌다. 무엇보다 쉬는 시간 수학이나 물리학 문제를 들고 찾아오는 일이 사라졌다. 대신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들이 많이 목격이 되었다. 1학년 담임의 전언에 따르면, 사교성이 많이 떨어지는 성격이라고 했는데, 지켜보니 그렇게 나쁘지 않아 보였다. 아니, 좋아 보였다. 가끔 루치드가 아이들과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 저도 모르게 입 꼬리가 올라갈 때도 있었다. 물론 실상을 알았다면 다른 반응이 나왔겠지만. “석고야, 너 무슨 만화 좋아해?” “나 만화 안 좋아해.” “그럼?” “책 좋아해.” “어떤 책?” “요즘 읽고 있는 책은 <데미안>이란 제목의 책인데 진정한 자아의 삶에 대해 성찰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책이야.” “…그림책이야?” “아니, 소설이야.” “…너 이상해.” “응, 나도 알아. 그래도 우리 친하게 지내자. 알겠지?” 이 시점에서 루치드가 미소를 지으면, 여자애들은 따라 웃었다. 남자애라면 썩소를 짓겠지만. 하지만 남자애들도 루치드를 싫어하지 않았다. 운동 잘하는 애는 따돌림 당하는 일이 드물었다. 특히 루치드와 편을 먹으면 지는 일이 거의 없어 서로 편먹으려고 다툴 정도였다. 루치드는 현명하게도, 팀을 번갈아가며 함께 하였고, 스포츠정신을 드높이는데 일조했다. 상대를 존중하고 같은 팀과 협력하며 정정당당한 플레이로 승리를 추구 하는 것. 루치드가 생각하는 스포츠 정신은 그의 생활신조와 닮은 부분이 많았다. 단 하나, 승리를 추구한다는 목적의식과 비교해서 루치드는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목표, 그의 꿈을. 그런데 루치드가 1학년 때의 생활과는 다르게 밝아지고 사교성도 좋아졌다는 평을 받는 반면, 본인 스스로는 괴로운 2학년 1학기를 보내고 있었다. 2학년이 된 뒤, ‘나2’라는 교과서의 내용을 공부할 때 처음 나오는 내용이 ‘몸 소중히 다루기’, ‘몸 살펴보기’ 와 같은 내용이었다. 당연히 성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되었고, 선생님은 열과 성을 다해 아이들이 그릇된 사고나 가치관을 갖지 않도록 교육했다. 하지만 루치드에게는 일련의 아픈 기억들―종국에는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기억을 상기시키는 주제였기에 수업을 듣기가 괴로웠다. 학기 중간에는 가족이나 친척을 소개하는 수업이 있었고 학기 말에는 우리 마을 둘러보기나 자랑하기 같은 수업이 진행되었다. 어느 것 하나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주제들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더 밝게 생활하려고 노력했던 면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담임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편안한 수업을 진행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셈이었다. 루치드의 머릿속에서야 온갖 감정의 회오리와 슬픈 기억의 폭풍이 휘몰아쳤지만, 겉으로는 평탄한 2학년을 보내고 있었다. **** “석고야 덥다.” 명수가 침대 위로 올라가 벽에 붙은 선풍기 앞에 서서 손을 벌리고 서 있었다. 언젠가 한 번 이 모습을 본 적이 있음을 떠올리고 미소 짓던 루치드는 슬쩍 마법을 사용했다. “으~ 시, 원, 하다!” 티나게 사용하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적당한 정도라면 얼마든지 명수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마법이 익숙해진 루치드였다. 당연히 선풍기 덕분에 시원해졌다고 생각하는 명수는 제자리에서 빙빙 돌며 선풍기 바람을 쐤다. 여름방학이 시작한지 이제 한 달이 지났는데,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었다. 루치드의 도움 덕택에 열대야 없이 꿀잠 자는 명수를 제외하고 대부분 아이들이 밤잠을 설치던 여름날이었다. ======================================= [58] 성장(3) 방학이 되면 아이들에게 시간이 남아 돌았다. 물론 보육원에서 어느 정도 통제를 한다지만 대부분 아이들은 자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단, 보육원 안에서만. 4시부터 6시까지 TV시청이 허락되는데, 4시가 되면 밖에서 놀던 아이들도 뛰어 들어와 42인치 TV 앞에 옹기종기 모여서 만화를 시청했다. 고등학생을 제외한 보육원생 거의 전체가 온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물론 진성 축구 마니아들은 만화도 거부하고 공을 차긴 하지만, 더위에 지친 대부분은 TV 앞으로 모여들었다. 시청각실에서 만화주제가 합창―대부분 음정이 제멋대로다―이 울려 퍼질 때, 루치드는 도서관에 있었다. 2학년이 되고 나서도 크게 생활패턴이 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보육원 도서관에 머무르는 시간이 조금 늘었다는 것과 아이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늘었다는 것 외에는 변한 게 없었다. 변하지 않은 것 중의 또 한 가지는 TV시청이었다. 루치드는 평소에 TV를 보지 않았다.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 이 보육원에 왔을 때 당연히 시청각실도 안내 받았었고, 명수를 따라 시청각실에 와서 멍하니 TV를 본 적도 있었다. 처음엔 신기했다. 작은 상자 안에 움직이는 사람들의 영상이란 것은 문화 충격을 넘어선, 거의 핵폭탄 급 파괴력으로 소년에게 다가왔었다. 하지만 그 때는 그것 외에도 신기한 것들이 넘쳐나던 때였던 데다가, 멘탈이 완전히 부서지기 직전까지 다다라 혼란의 극을 달리던 때였기에 소년은 TV를 보면서 재미를 찾을 수 없었다. 이후에 명수를 따라 와서 만화를 봤을 때도 재미있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 때쯤에는 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하던 때였다. 때문에 TV를 보면서 얻는 지식보다 책을 통해 얻는 지식이 더욱 많고, 또 들이는 시간에 대비해서 독서가 보다 효율적이라는 판단이 들어, 루치드는 TV를 멀리하게 되었다. 그 이후 TV를 본 것은 자신이 출연한 프로그램을 시청할 때 뿐이었는데, 그 때도 처음에 잠시 보다가 이내 부끄러워져서, 결국 끝까지 보지 못하고 도망쳐버렸다. 6시―저녁식사 시간―가 10여분 정도 남았을 즈음, 루치드는 책을 덮고 도서관을 나왔다. 우습게도, 시청각실은 도서관으로부터 한 공실(公室) 건너에 있었다. 책과 TV 사이에서 갈등할 아이들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시청각실을 지나가던 루치드는 아이들이 부동자세로 TV를 보는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났다. TV가 밥을 주는 것도 아닌데,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들 같은 모양새로 하나같이 입을 헤 벌리고 TV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나도 도서관에서 저런 모습일까?’ 그 중에서도 명수의 모습이 사뭇 눈에 띄었다. 공을 차다가 왔음이 분명해 보이는, 땀에 젖었다가 마른 듯 아무렇게나 삐죽 솟은 머리카락들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입을 쭉 내밀고 있었다. 언젠가 책에서 저것과 비슷한 모습을 본 거 같은데, 아마 바나나를 앞에 둔 침팬지가 저런 모습으로 앉아 있었던 것 같다. “명수야, 밥 먹으러 가자.” 애니메이션이 끝나고도 미련을 못 버리고, 광고 하나 하나를 눈에 새기듯 집중하고 있던 명수를 부르자, 그제야 아쉬움 가득한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명수였다. 그러다가 문득 움직임을 멈추고 다시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왜 그러나 싶어 바라보니, 불꽃놀이 축제에 대한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식당으로 가는 길에 명수가 중얼거리듯 말을 했다. “나도 보고 싶다.” “뭐, 불꽃놀이?” “응.” 루치드 역시 불꽃놀이를 본 적은 없었다. 다만 책에서 불꽃놀이에 사용되는 화약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읽은 기억이 있었다. 그 때는 <색색 깔의 화려한 불꽃들이 하늘을 수놓는다>, 정도의 설명만 있었기에 그저 불꽃놀이를 상상해 볼 뿐이었다. “너도 보고 싶지?” 보고 싶다고 말해, 라는 눈빛을 쏘는 명수였다. 만약 눈빛이 총알이라면 명수는 명사수였다. “응, 보고 싶어.” 답은 정해져 있지. “보러 갈 수 있는 방법 없을까?” 보러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해, 라는 눈빛을 쏘는 명수. 이번엔 과녁을 벗어났다.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아무리 루치드라도 모르는 건 모르는 거다. 최근 외출이 허가됐다고는 하지만, 저녁 늦게 외출이 허락될 리 없었다.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보면, 방법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선생님한테 부탁하면 안 될까?” 선생님께 부탁해봐, 니가, 라는 뒷말이 생략되어 있지만, 절친한 친구인 루치드는 재깍 알아들었다. 명수의 간절함이 느껴져 되레 웃음이 나왔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안 될 것 같은데? 여기서는 안보이나?” “너 작년에 못 봤지? 나도 못 봤거든? 그러니까 여기서 볼 수 없는 거야.” 명수의 미묘한 귀납법에는 루치드도 두 손 두 발을 들 수밖에 없었다. “일단 밥 먹자.” 식사를 끝낸 후에도 명수는 불꽃놀이에 대한 강한 갈망을 드러내 보였고, 방에 들어와서도 불꽃놀이가 얼마나 아름다울지, 지금 안보면 죽을 때까지 못 볼지도 모른다며 하소연을 했다. 명수의 절박함이 루치드의 가슴을 울린 덕에, 루치드는 제대로 방법을 궁리해보기로 했다. 우선 기웅을 찾아갔다. “형, 불꽃놀이 본 적 있어요?” “있지.” 기웅은 풀고 있던 페이지에 펜을 끼워 두고 문제집을 덮었다. “실제로요?” “그럼. 예전에 인평시에서 무슨 축제를 하는데 불꽃놀이를 했던 적이 있어. 그 때 한 번 봤었지.” “어떻게요?” “독지가 한 분이 저녁까지 책임지겠다고 하시고 보육원 아이들 다 데리고 나갔었거든. 그 때 인평시 축제랑 연계해서 그 분이 무슨 위원회 임원이셨다는데, 아무튼 우리도 그 때 축제 때 나가서 노래 부르고 했었지.” 말하자면, 행사초청으로 참가한 뒤, 저녁에 이어진 불꽃놀이를 봤다는 이야기다. “아까 TV보니까 불꽃놀이 광고 하던데, 혹시 보러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아, 그래서 물어보는 거구나. 어디서 하는데?” “그건 못 봤어요.” “인평시에서 하는 거라면, 어떻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다른 곳이라면 보기 힘들 거야.” 루치드는 방법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단순히 명수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의미에서 나선 것도 있지만, 루치드 본인도 불꽃놀이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1g 정도는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1㎏정도 될지도 모르겠다. “불꽃놀이 본 적 없어?” “예. 한 번도 본 적이 없네요.” 상심한 듯한 표정의 루치드가 보기 안타까웠는지, 기웅이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그럼 바로 한 번 보여줄까?” “어떻게요?” 기웅은 루치드를 데리고 시청각실 옆 PC실로 데리고 갔다. 참고로 PC실은 중학생이상만 입장가능하며, 그 곳 역시 시간제한이 있었다. 기웅은 보육교사에게 허락을 받은 뒤, 루치드를 데리고 PC실에 입성했다. 컴퓨터를 켜고, 옆에 루치드를 앉혔다. 이내 부팅이 완료된 컴퓨터에서 인터넷 창을 연 후, 동영상 사이트에서 불꽃놀이를 검색해 몇 개의 동영상을 찾아냈다. 결과만 말하자면, 루치드는 불꽃놀이의 현란한 화려함과 다양한 색깔의 향연에 눈이 즐겁다는 의미를 알게 되었다. 펑펑 터지는 효과음마저 즐거움을 주는 불꽃놀이였다. “화약을 어떻게 만들기에 저런 색깔의, 우와, 저건 어떻게 하는 거래요?” 루치드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모니터 속 불꽃놀이가 밥을 주는 것도 아닌데, 입을 헤 벌린 채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기웅은 괜히 뿌듯한 마음도 들고,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결국 아무리 똑똑하고 조숙하다 해도, 아이는 아이일 뿐이었다. 이 어린 아이가 불꽃놀이에 푹 빠져 저런 눈빛을 보이는데, 그 가벼운 소원 하나 들어주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고 서글프기까지 했다. 다른 가정의 아이들이라면, 이런 건 소원거리도 되지 못할 텐데. 하지만, 루치드는 역시 달랐다. 소년이 감탄한 것은 불꽃놀이의 화려함도 있지만 진짜 관심을 가졌던 것은 빛이 만들어내는 조화의 아름다움이었다. 단순하게 태양빛, 형광등빛 정도에만 머물렀던 빛의 개념이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당연히 루치드는 다음의 생각으로까지 전진해 나갔다. ‘마법으로 불꽃놀이를 할 수 있을까?’ 예전에 저쪽 세상에 손톱만한 불씨를 만들어 공중에 던져댄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그 때도 저런 화려함은 없었다. 소년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초월한 화려함이었기 때문이다. 루치드는 당장 도서관으로 달려가 화약과 불꽃, 빛에 관한 책을 읽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마법으로 만들어보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내일부터!’ 우선은 동영상에 나오는 불꽃놀이들을 즐길 시간이었다. **** 다음 날부터 루치드는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다시 예전의 루치드―어떤 사람은 자폐증상이 있는 건 아닌가 의심하기도 할 정도였다―로 돌아간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시선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명수나 다른 아이들과 마주칠 때 딱히 피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아니었고 가볍게 인사도 하는 모습을 보면 그저, ‘또 책에 미쳤나보다.’ 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루치드는 정말 빛이란 주제에 미쳐 있었다. 다만, 아쉽게도 빛은 공부하면 할수록 어려운 개념―파동, 입자, 속도―들이 등장해서 진도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 아직은 루치드의 공부가 많이 필요해 보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집중하는 루치드였다. 필사의 의지, 각고의 노력, 무한의 열정. 불꽃놀이가 열리기로 한 축제날이 되었다. 보육교사는 안전을 이유로 외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명수는 실망감에 눈물을 보일 정도였다. 루치드는 여전히 책을 붙잡고, 틈틈이 이미지를 만들어보려고 애썼다. 여름이 지나갔다. 루치드는 방학기간 내내 빛에 대해 공부했고, 마법은 실패했다. **** 2학기가 시작되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긴팔 옷을 입기 시작했고, 화단에는 다시 별꽃 열매가 맺혔지만, 때늦은 태풍이 상륙하는 바람에 학교 화단은 엉망이 되었다. 명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신나게 공을 차기 시작했고, 시간에 맞춰 TV앞에 앉았으며, 책 읽는 루치드를 억지로 끌어내어 운동장에서 가만히 서 있도록 시키면서 자신은 아침저녁으로 운동장을 땀범벅이 될 때까지 누비고 다녔던 결과, 감기에 걸렸다. 루치드는 태풍이 불든, 골키퍼를 서든, 일교차가 크든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한 가지 주제에 몰두했다. 학교도서관이든, 보육원도서관이든, 시립도서관이든 기회가 닿는 대로, 시간이 나는 대로 휩쓸고 다녔다. 가을밤 다들 잠자리에 들 시간, 루치드는 명수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마른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마른 수건이지만 마치 얼음을 가득 채운 것처럼 차가웠다. 물론 명수가 그 이유를 알아챌 수는 없었다. “명수야. 많이 아파?” 루치드가 따뜻한 목소리로 불렀다. 명수는 조금 어질어질하다가도 차가운 수건이 닿으면 어쩐지 몸이 낫는 거 같고 기분이 좋았다. 특히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자신을 위해 땀을 닦아준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괜찮아. 자고나면 괜찮을 거 같애.” 어쩐지 기운 빠진 명수의 목소리가 가슴을 저리게 했다. 항상 밝게, 기운찬 목소리로 자신을 불렀는데. “명수야, 잠깐 저기 좀 볼래?” 루치드는 명수를 부축해 자리에 앉게 도와주었다. 명수는 침대 위에 앉아 루치드가 가리킨 창밖을 바라보았다. 검은 하늘, 희미한 달빛만 서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 때, “와!” 검은 캔버스 위로 형광색 물감을 뿌린 듯, 밝은 색색의 빛무리가 하늘을 수놓았다. 흰색 빛무리가 오른쪽에서 터지면, 왼쪽에서 파란색 빛이 원의 형태로 터지며 빛을 뿌렸다. 빨간 빛이 점점 커지더니 별모양으로 번쩍이며 하늘에 자국을 남기니 초록색 빛이 하늘을 가로지르다 방사형으로 퍼지면서 혜성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빛의 향연. 축제. 소리는 없었지만, 그 화려함은 어느 불꽃놀이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다양한 빛의 스펙트럼이 검은 밤하늘을 물들이고 명수의 눈을 물들였다. 명수는 그 불꽃들이 밥을 주는 것도 아닌데, 입을 벌리고 바라보았다. 밥을 주지도 않았는데 밥값으로 눈물 한 방울을 하늘에 적선(積善)하는 명수였다. ======================================= [59] 성장(4) 그 해 가을,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를 불꽃놀이를 봤다는 사람들의 목격담과 희미한 흔적의 사진들이 SNS에 올라왔지만, 소수의 사람들만 흥미를 가진 미스터리로 기억되며 곧 묻혔다. 굳이 그런 일들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사건, 사고와 쓰잘데기 없는 잡담들이 넘쳐나는 시대였다. ‘좋아요’가 10만이 넘는 게시물이 넘쳐나는 SNS에서 인평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화제 거리가 될 뿐인 그 글이 관심을 끌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후로도 가끔 야심한 밤에 불꽃놀이를 봤다는 목격담이 학교, 상가, 기관에서 종종 이야기 거리로 거론되었지만, 역시나 도시전설 같은 괴담으로 취급되면서 점점 사람들―인평시에 사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폭죽 터지는 소리도 없었는데, 무슨 불꽃놀이야?” “소리 없는 아우성은 들어봤어도, 소리 없는 불꽃놀이는 처음 듣는다.” 결국 그 불꽃놀이가 한 어린이에게 일생일대의 선물과도 같았다는 사실은 두 사람만의 비밀로 남았다. **** 루치드는 3학년이 되었다. 이번에도 명수는 다른 반이 되었는데, 또 공교롭게도 바로 옆 반이었다. “야, 석고. 가자!” 루치드가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가방을 둘러멘 명수가 뒷문에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명수야. 우리 아직 종례 안 끝났다.” 3학년 담임선생님이 교탁에서 한 숨을 쉬며 말했다. 아이들이 꺅,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 우린 끝났는데요?” -딱 명수의 머리 위로 출석부가 떨어졌다. 머리를 감싸 쥔―세게 때린 것도 아닌데 아픈 표정을 지으며 엄살을 부리는―명수 뒤로 명수네 반 선생님이 서 계셨다. “우리도 안 끝났다. 이 멍청아. 종례는 하고 나가야 할 거 아냐!” 선생님이 명수를 데리고 갔다. 루치드는 피식 웃으며 담임선생님을 바라봤다. “쟤는 정말 변하는 게 없네.” 푸념같이, 핀잔처럼 툭 꺼낸 말이었지만, 루치드는 그저 웃음을 지으며 종례가 마치기를 기다렸다. 명수는 변함이 없었고, 여전히 루치드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 날 이후, 루치드의 마법 실력에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마법을 구현함에 있어 다양한 응용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빛에 색깔을 넣거나, 거리를 조정하거나, 움직이는 동선까지 조율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새로운 발견이었고, 발전이었다. 또 하나는 빛의 속성을 이해하게 되면서 그것이 다른 마법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불의 경우에, 예전에는 붉거나 노란 빛이 띄는 속성을 제거할 수 없었다면 이제는 보랏빛의 불도 구현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빛이 없는 불도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빛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빛이 없는 불이 있을까?” 처음에는 가능할까 궁금했는데, 놀랍게도 가시광선 바깥의 빛을 뿜어내는 불도 구현할 수 있었다. 다만, 열을 포함하는 가시광선 바깥의 빛이란 보통 적외선을 의미했다. 즉, 적외선을 다량으로 방출하는 발화 현상의 구현에 성공했다는 의미였다. 단, 이 경우에 불의 온도는 올릴 수 없었다. 적외선 자체가 파장의 특성상 에너지가 낮다. 때문에 온도를 올릴 수 있는 한계가 정해져 있었다.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것 중의 하나는 적외선을 이용한 의료기구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온열자극형 치료기법으로서 적외선을 활용해 통증의학과 등에서 이용한다고 했다. 루치드는 아직 안전이 확실히 보장되지 않은 실험을 타인에게 구사할 수 없었기에, 무모하지만 자신에게 사용해보기로 했다. 손바닥을 편 뒤, 그 위에 불의 이미지를 투영하고 대신 적외선만이 나오도록 했다. 불의 이미지는 투명해지고 대신 열기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밤에 실험했을 때는 희미하게나마 붉은 빛이 감도는 불이었다. ‘불’을 베이스로 하는 이상, 완전히 불의 이미지를 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희미하게 타오르는 불꽃을 발등에 살며시 갖다 대었다. 너무 뜨거우면 바로 취소할 수 있게 준비를 하고 나서 손을 가져다 대니, 발등이 점차 따뜻해졌다. 하지만 손을 발등에 붙이기도 전에 뜨거워지는 느낌이 강해져서 금방 마법을 취소해버리고 말았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루치드는 아주 천천히 열이 오르는 적외선의 구현에 성공했다. 이것은 일종의 합성마법이었다. 불의 이미지와 빛의 속성을 동시에 구현시켜 성공시킨 ‘작품’이었기에 루치드는 더할 수 없이 흥분되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다행히 빠른 자제력으로 참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옆에서 곤히 자는 명수를 깨울 뻔 했다. 이후, 몇 번의 자기생체실험(!) 끝에 루치드는 자신의 방식으로 물리치료가 가능한―검증되지는 않은―적외선 치료기를 완성했다. 재료는 단순했다. 자신의 손, 그리고 마법으로 구현한 ‘불’. 캄캄한 밤만 아니면 들키지 않을 만큼 가시광선의 발현을 억제하면서 동시에 적외선 자체의 에너지 전달력을 이용, 충분한 열을 전달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루치드가 재능과 노력을 다한 끝에 ‘약손’으로 거듭난 순간이었다. “야, 정말 너 덕분에 피로가 싹 풀렸다. 고마워.” 고3수험생 기웅이 루치드의 손길이 닿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한 말이었다. “할 거 없으면 마사지나 해라. 어디 가서 굶지는 않겠다.” 주말에 무리하신 행정과장님이 루치드의 손맛에 감탄하며 뱉은 말이었다. “어젯밤에 잠을 잘못 자서 그런지 목이 계속 결렸는데, 고마워.” 오전 내내 인상을 피지 못하고 계시던 보육교사가 고마워하시면 한 말이었다. 공부에 지친 고3수험생, 업무에 시달리는 회사원, 잠 못 잔 어머니들이 모두 감탄하며 다시 찾게 되는, 약손 루치드의 마사지 효능 되시겠다. “아 더워, 안할래.” 명수는 2분을 버티지 못하고 운동장으로 뛰쳐나갔다. **** 3학년이 되면서 교과과정에 변화가 생겼다. 국어, 수학과 통합교과로서 교양 교과목들을 배웠던 1,2학년과 달리 3학년부터는 국어와 수학 외에도 교양 교과로 통합 실시되던 부분이 분과되며 도덕, 사회, 과학, 체육, 음악, 미술을 분리하여 배우게 되었다. 특히 과학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루치드에게 새로운 재미를 가져다주었다. 일부 분야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은 아니어도, 초등학교 수준은 훌쩍 뛰어넘은 루치드였지만 그 외 주제들에 대해서는 깜깜했기에 흥미롭게 공부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과학은 크게 ‘물질과 에너지’와 ‘생명과 지구’의 두 개 분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중 루치드가 관심 있어 했던 분야는 당연 ‘물질과 에너지’였다. 특히 ‘에너지’쪽은 많은 공부와 연구, 실험이 동반되어 성과를 보인 반면, ‘물질’ 쪽은 투자한 시간이 적었던 것도 있고 이해력이 부족하기도 했다. “여러분들 지난 시간에 선생님이 숙제를 줬어요.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물체들을 살펴보고 그 물체를 이루고 있는 물질이 무엇인지 알아보자고 했었죠?” “예.” 3학년이 되면서 아이들의 대답에 성의가 없어졌다. 1, 2학년 때였으면 뭔지 몰라도 일단 소리 지르듯 대답했었는데. 좋게 말하면 학교 수업에 그만큼 적응했다는 말이기도 했고, 나쁘게 표현하자면, 머리가 좀 커졌다고 할 수 있겠다. 다행히도 3학년 담임을 맡은 선생님이 7년차 베테랑 선생님이셨다. 그 정도쯤은 별로 신경도 쓰지 않으시는 분이었기에 오히려 귀 안 따갑고 좋네, 라며 넘어가실 분이었다. “우리 어린이들이 많이 쓰는 지우개는 어떤 물질로 만들어 진건지 말해볼 사람?” 아이들 몇몇이 손을 번쩍 들었고, 나머지 아이들은 느긋하게 구경했다. 손들고 그러는 거 유치한 거야,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은 채. “고무요.” “예, 맞았어요. 그럼 문손잡이는 어떤 물질인지 맞춰볼 사람?” “철이요.” 오고가는 문답 속에 아이들의 지식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선생님이 들고 있는 이 구슬은?” “유리요.” “모래요.” 응? 이상한 답이 들렸는데? “탄산소다, 석회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였으면 무시하고 넘어갔으련만, 어느새 주변의 아이들이 고개를 돌려 선생님께 저게 무슨 소리예요, 라고 묻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높은 온도에서 급랭시켜서 굳히면 유리가 된다고 들었어요.” 루치드가 추가 설명을 했다. 너, 2학년 때 얌전한 학생으로 변했다며? “그, 그래요. 맞아요. 유리는 말이죠. 모래랑… 석회암이랑….” “탄산소다.” “예, 탄산소다라는 물질을 섞어서 만들어요. 다음에 선생님이 유리 만드는 영상을 여러분께 한 번 보여드릴 수 있을 거예요. 그 때 다시 유리에 대해서 자세하게 공부해 봐요. 알았죠?” ‘일단 이렇게 넘어가자, 제발.’ 다행히 선생님의 소원을 알아들었는지 루치드는 초롱초롱한 눈빛을 거둬들였다. 미소를 짓던 담임은 돌아서서 분첩으로 이마의 땀을 콕콕 찍어 닦아냈다. 반면 ‘생명과 지구’의 분야는 루치드에게 낯설지만 흥미로운 주제였다. 전혀 상이한 문명의 두 세계를 경험한 루치드였기에 이 분야가 남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양 쪽 세계를 경험하며 의외로 두 세계가 유사한 생태계를 공유하고 있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모른다. 단지 이곳에 ‘스크로파’나 ‘카싸르’ 같은 몬스터가 없다는 것 정도만 어림짐작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저 쪽 세계의 생태계에 대해서는 본격적으로 배울 기회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이곳의 생태계와 자연에 대해 배울 수 있다. 과학시간은 체계적이며 학술적으로 생태계를 분류하고 그 지식을 학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소년은 마음껏 그 시간을 만끽했다. “조금 있으면 여름이죠? 여름에 우리가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곤충은 뭐죠?” 여기저기서 다양한 대답들이 터져 나왔다. 매미부터 시작해서 모기, 파리, 거미, 나비, 나방, 잠자리 등등. “오늘은 매미의 한 살이에 대해 한 번 알아볼까요?” 매미를 비롯한 대부분의 곤충들은 알에서 부화하여 애벌레 단계를 거쳐 성충으로 자라며, 자라는 동안 허물을 벗습니다, 라는 설명을 담임선생님은 그림 자료를 곁들여 아이들에게 알려주었다. 징그럽게 생긴 번데기 사진에서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딱딱한 껍질의 매미 성충의 모습에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이 시간만큼은 루치드도 사진 자료와 선생님의 설명에 집중했다. 가장 지식이 부족했던 분야였고, 숲에서 오랜 시간 머물렀지만 이런 곤충의 변태(變態)과정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역시 또래 아이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수업에 참여하고 있는 ‘조용한’ 루치드를 보며, 내심 다행이야, 라고 되뇌었다. 3학년의 달라진 점 중의 하나는 바로 영어였다. 영어가 신설되며 국어도 제대로 모르던 아이들이 또 하나의 언어를 배우게 되었다. 주당 2시간의 과목이지만 학부모들의 열의는 일주일 내내 가르쳐도 모자라다는 입장이었다. 덕분에 아이들 중 다수는 영어 과외를 받았다. 엄밀하게 실상을 들여다보자면, 이미 그 이전부터 과외를 받으며 영어를 배우고는 있었는데, 보다 본격적으로 성적 향상을 위한 사교육에 돌입했다고 봐야 옳겠다. “Hello?” 선생님이 선창하면, “Hi? Nice to meet you.” 라는 대답이 아이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과외를 받은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신감 있게 교실이 떠나가라 소리쳤고,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지기 싫어 외쳤다. 덕분에 선생님은 적당히 해도 다 들린다는 듯, 제스처를 취해서 아이들의 목소리를 ‘볼륨 다운’ 시켜야 했다. 그 정도로 아이들은 활발하게 수업에 참여했다. 선생님은 오히려 학생들의 뜨거운 열기와 수다스러움을 억지로 자제시키면서 수업을 진행해야만 했다. 하지만 모든 아이들이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이 흥분하듯 소리치며 수업에 참여하는 모습들을 보며, ‘쟤들은 왜 저러나?’ 라는 표정으로 멀뚱하게 바라보는 아이들도 있었고, ‘난 누구? 여긴 어디?’ 라며 자신감을 잃고 고개를 숙인 아이들이 있었다. 그 아이들은 주로 입을 열지 않았고, 먼 산 보듯 수업에 참관하고 있었다. 루치드 역시 이 수업에서는 거의 대부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른 수업에서도 ‘되도록이면’ 입을 열지 않았지만―2학년 때와 마찬가지로 수업파괴공작을 피했다―이 수업에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워낙 다른 아이들이 적극적인 덕분에 선생님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루치드는 별 다른 제지를 받지 않았다. 루치드는 사실 이 수업을 받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루치드가 이 세계에 온 이후 받았던 것들 중 가장 큰 충격과 혼란과 쇼크였다. ======================================= [60] 성장(5) “Do you have a pencil?” “Yes, I do. Here it is.” “Thanks.” “Do you have a ruler?” 컴퓨터 스피커로 나오는 듣기 수업은 루치드에게 고역이었다. 아이들은 듣기에 맞춰 따라 말하기를 하지만, 루치드는 교과서의 그림만 쳐다볼 뿐이었다. “Why don’t you try that?” 한 두 시간 정도는 영어 선생님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넘어갔을 텐데, 한학기가 지나도록 말이 없으니 둔감한 선생님이라도 눈치를 챌 수밖에 없었다. 물어도 대답이 없으니 선생님이 못 알아 듣나 싶어 한국어로 바꿔 질문했다. “왜 안 따라해?” 루치드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고개를 숙였다. 초등학교 영어시간은 사실 아이들에게 노는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과외를 통해 배운 내용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대부분 간단한 몇 마디 단어를 반복해서 상황을 재현하는 수업이 대부분인지라 집중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이라도 손쉽게 참여할 수 있었다. 또 영어 전담 선생님도 적극적인 수업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다른 수업에 비해 훨씬 즐거운 분위기에서 수업에 참여했다. 그래서 루치드처럼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는 소극적인 아이들을 영어 선생님은 결코 좌시하지 않았다. 전체적인 분위기를 위해서라도 그렇지만, 공교육과 의무교육의 첨단(尖端)에 섰다는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지신 훌륭한 선생님들은 의무감으로 아이들을 독려하곤 했다. “OK. Look. Repeat after me. 선생님 따라 해봐. 알았지?” 하지만 루치드의 닫힌 입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강압적으로 수업에 참여시킬 수는 없는 일. 결국 루치드의 문제는 수업이 끝나고 따로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고 선생님은 다시 수업을 재개했다. 아이들은 모두 의아해했다. 자신들이 아는 루치드는 모르는 게 없는, 소위 ‘천재’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3학년 2반에서 루치드는 ‘아이돌’이었다. 그런데 아이돌의 명성에 금이 가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아이돌에게 사고가 나면 대서특필 되기 마련이다. “2반의 석고가 영어시간에 아무 말도 안하더래.” 아이들은 여전히 루치드를 석고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정작 1학년 때 루치드에게 석고라는 별명을 붙여준 지훈은 2학년 때 전학을 갔다. 사람은 떠났는데 별명을 남기고 떠났다. “석고가 영어를 못한대.” “석고가 수업시간에 말을 안 한대.” 석고와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아이는 이렇게 대답하기도 했다. “석고는 2학년 때도 수업시간에 말 많이 안했어.” “아니 아예 영어를 못한대. 수업 때 선생님이 물어도 대답을 못했대.” 아이들은 충격을 받았다. “엄마, 엄마. 우리 반 석고가 있잖아요. 영어를 못해서 선생님이 물어도 대답을 못했어요.” “엄마, 2반 석고 있잖아? 걔가…….” “아빠, 석고라고 1학년 때 같은 반 했던 애 알지? 걔가…….” “할머니, 우리 반 석고라고 있거든? 공부 되게 잘하는 애. 걔가 영어 못한대.” “석호?” “석호 아니고 석고.” “에구, 무슨 애 이름을 그렇게 지었누?” “…….” 학부모들에게도 그 일은 꽤 흥미로운 사건이었다. 커피숍에 모인 학부모들의 간담회에서도 화제 거리로 올랐다. “아니, 글쎄 2반의 걔 있잖아요? 석고라는 애?” “아, 걔! 나도 들었어요. 우리 애가 말해줬는데 난 처음에 못 믿었다니깐.” “저도요. 아니 방송까지 나올 정도로 똑똑하다던 애가 어떻게 그걸 못해?” “무슨 일인데요?” 영문을 모른다는 듯, 눈에 물음표를 띄운 한 엄마에게 다른 엄마가 놀랐다는 되물었다. “명은이 엄마는 몰라요? 거 있잖아요, 2반의 석고.” “아니, 걔는 알죠. 그런데 걔가 왜요?” “명은이가 같은 반이 아니라서 모르는구나. 글쎄 걔가 영어를 못한다지 뭐예요?” “예? 에이, 설마요.” 명은 엄마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피식 웃었다. 아는 단어 20단어도 안 되는 명은이도 영어 수업이 재밌다면서 과외 시켜달라고 조르는 판인데. 집에만 오면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하이’니, ‘두유해브컵’이니 하며 엄마에게 영어 실력을 뽐내는 판인데? “진짜래요. 선생님이 하이, 이랬는데 아무 말도 못하더라는 거예요.” “정말요? 이런…. 아무리 똑똑해도 못하는 건 있나보네요.” “내말이. 그 때도 방송 보니까, 영재는 아니라면서요? 가만 보니까 수학적으로는 조금 재능이 있긴 했나본데, 언어 쪽으로는 꽝이었나 봐요.” “세상 참 불공평하다 싶었는데, 이렇게 들으니까 또 공평하다고 생각 되네요?” “그러니까요.” 학부모들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그러면서도 고소하다는 내심을 감추기 급급했다. 우리 아이보다 잘난 아이 좋아할 부모는 아마도 없을 것 같았다. 특히나 그 아이가 보육원 아이라면. 아무튼 아이들, 학부모, 선생님들 할 거 없이 모두가 루치드의 무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영어를 말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도, 미안한 일도, 죄책감을 느낄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당황스러운 일이었을 뿐이었다. “영어가 어렵니?” 영어 선생님이 루치드를 데리고 상담실로 데려갔다. 선생님도 루치드가 학교에서 어떤 식으로 소문이 났던 아이인지는 알고 있었다. 아마 교무실에 있는 거의 모든 선생님들이 루치드의 질문을 피해서 도망쳤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단, 영어선생님만은 루치드의 질문을 받지 않았었기에 피난(?) 무리에 섞이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루치드는 자신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묵비권을 행사 중에 있었다. “혹시 선생님이 싫어?”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선생님 오해하지 마세요, 라는 듯 반사적으로 대답하는 루치드였다. 다행이라며 안심한 선생님은 왜 영어 시간에 말을 하지 않는지를 물었다. 루치드는 고민 했다. 이 사태를 어찌 벗어나야 할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마침 상담실에 선생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은근한 목소리로 제안을 했다. “선생님, 혹시 말이에요. 제가 이유를 설명 드리면 수업시간에 아무 말 안하더라도 봐주실 수 있을까요?”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영어 시간에는 듣고 말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그걸 안하겠다는 거니?” “저기 사정이 조금 있어요. 선생님. 대신 선생님이 봐주신다고 하셔야 제가 말씀드릴 수 있을 거 같아요.” 똑똑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자신이 고등학생이랑 이야기를 하는 건지 초등학생이랑 이야기를 하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뭔데? 일단 들어보고 판단해야겠구나.” 루치드는 계속 고민을 했다. 결국 결정을 내린 루치드는 선생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선생님 아무거나 영어로 말씀해주실래요?” “영어로?” “예.”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I don’t understand.” “Tell me anything in English.” “What? 아니 뭐?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영어로 말씀해주시라고요.” “너 방금 영어로 말했잖아?” 그것도 아직 가르치지도 않은 Anything 이란 단어를 써가면서. 게다가 발음은 왜 이렇게 좋은 거야? “…….” 루치드는 아무 말도 안했다. 선생님은 다시 영어로 물어봤다. 「너 영어 할 줄 아니? 어떻게 할 줄 아는 거야? 어렸을 때 배웠던 거야?」 「아니요. 배운 적은 없어요. 아니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선생님이랑 대화는 가능할 정도라고 생각은 해요.」 라고 영어로 대답하는 루치드였다. 영어 선생님의 입이 쩍 벌어졌다. 「천재, 천재라고 이야기만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그 정도 까지는 아니에요. 그냥 제가 관심 있어 하는 분야 정도만 좀 더 공부를 한 탓에 그런 거지, 사실 저는 천재 같은 거 아니에요. 과학시간에도 처음 듣는 내용들이 나오면 다른 애들하고 똑같이 수업 듣거든요.」 라고 영어로 대답해버리는(!) 루치드였다. 영어 선생님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너… 영어 잘하는구나.” “글쎄요.” 루치드는 한국어로 겸손하게 대답했다. 이후 루치드는 수업시간 면제를 허락받았다. 대신 수업시간에 다른 과목 공부를 하지 않겠노라는 약속을 해야 했다. 물론 루치드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약속에 응했다. 대신 선생님께 부탁을 했다. “부디 다른 분들께는 이 이야기가 안 전해 졌으면 좋겠어요. 지금도 선생님이 천재라고 하셔서 부담스러운 데, 이 이야기가 다른 분들께 전해진다면, 저 진짜 부담스러워서 공부하기 힘들 거 같아요.” 영어 선생님도 일단 둘 만의 비밀로 하자는 루치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후 한동안 교무실에서 엉덩이를 들썩이거나 교무실을 서성거리며 불안장애증상을 보이는 영어 선생님에 대한 걱정과 우려가 있었다는 후문이다. 학교 건물 뒤에 대나무 숲이라도 있었다면 불안증세가 나아질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학교 뒤편에는 4차선 대로와 상가들이 있을 뿐이었다. 루치드가 영어시간에 혼란스러웠던 이유. 사실은 영어가 영어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이 영어와 한국어로 번갈아가며 설명을 해도 루치드의 귀에는 똑같은 말을 두 번 하는 식으로만 들리는 것이었다. 물론 이후에 주의 깊게 들으면서 영어와 한국어를 구별할 수는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두 언어를 분간 없이 듣고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이 루치드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반면에 선생님이 판서를 해주시거나 교과서에 적혀 있는 영어를 보면 읽거나 이해하는 게 어려웠다. 아니 이해할 수 없었다. 배우지 않았으니까. 루치드는 이와 같은 상황을 과거에 한 번 겪었다. 바로 이 세상으로 전이되어 왔을 때. 낯선 경찰이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데 그게 자신이 아는 말과 다르다는 것을 전혀 모른 채 알아듣고 대답하기까지 했었다. 단,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는 순간 머릿속에 브레이크가 걸리면서 모르는 언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처음 접해보는 언어들을 아무런 장애 없이 듣고 이해하고 말하는 프로세스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이 발현이 되니 더 난감했다. 영어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귀에 들려오는 대화를 아무 장애 없이 알아듣고 있었고, 또 자신이 그 말에 대답을 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처음에 얼마나 놀랬는지 말도 못할 정도였다. 문제는 루치드가 내 뱉는 말이 한국어인지 영어인지가 분간이 잘 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머릿속에서 두 언어를 교환시켜가며 내보내는 중추신경계가 고장이 난건지 어떤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단, 상대방이 영어로 물으면 그에 대해 영어로 답하는 정도는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영어시간에 고개를 숙이고 들리지 않게 중얼거리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지금까지는 한국어로만 대화를 했기에 크게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한국어가 글자를 외우고 활용하는 면에서는 쉬운 글자였기 때문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영어는 또 다른 언어이고, 특히 영어와 한국어를 혼용해서 쓰는 수업시간에는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경험적으로 이런 일, 자신의 통제력을 벗어난 사태를 사람들에게 들켜선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루치드였다. 선생님이 내뱉는 말 모두를 영어로 답한다고 가정하면 지금 이상의 과도한 관심과 집중이 쏠릴 게 뻔하고, 잘못했다가는 자신의 과거까지 의심받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까도 영어 선생님이 루치드의 어릴 적 일을 지나가듯 물었던 것이 그 증거였다. ‘조심해야 돼.’ 루치드는 수업시간에 말은 하지 않아도, 대신 영어는 계속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한글을 배우듯 영어도 배워는 놔야 중학교든 고등학교든 가서 힘들지 않을 테니까. 대한민국 초중고를 통틀어 모든 학생들이 가장 부러워할만한 능력을 자각한 초등학교 3학년 루치드였다. ======================================= [61] 선택(1) 이런 저런 일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 어느새 루치드는 4번째 가을을 맞이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약간의 해프닝도 있었지만, 대체로 평탄하게 흘러간 3학년 생활이었다. 1,2학년과 달라진 커리큘럼에 버벅대던 아이들도 2학기가 시작되니 거의 적응한 모습을 보였다. “야, 패스!” “여기, 여기! 얘 맞춰!” 보통 피구를 생각하면 여학생들은 뒤에서 피하고 남학생들은 앞에 나서서 공을 잡으려 들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3학년 2반은 조금 달랐다. 3학년인데도 불구하고 키가 벌써 150㎝에 달하는 거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혜진아! 받아!” 다른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솟아있는 장혜진이라는 아이는 손을 뻗어 위로 넘어가는 공을 손쉽게 잡아냈다. 키가 크니 여리여리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혜진은 반에서도 운동신경이 제법 발달한 학생들 중 하나였다. 어지간한 남학생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였다. “앗!” “야, 맞았다. 너 맞았어!” 혜진이 던진 공을 피하려고 허리를 비틀어 보았지만, 결국 스치듯 맞고 말았던 남학생은 다른 아이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아쉬운 얼굴로 코트를 벗어났다. 루치드는 이미 코트 외부로 나가서 공이 밖으로 나가지 않게 잡아다가 패스를 해 주고 있었다. 마침 남자아이를 맞춘 공이 궤도가 바뀌면서 루치드 발밑으로 굴렀다. 루치드는 가볍게 공을 주워다가 반대편 코트 안으로 던져주었다. 혜진이 그 공을 잡고는 어디로 던질지 궁리했다. 양손으로 야무지게 공을 잡고 던질 시늉만 해도 코트 안에 있던 아이들이 양떼들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남아 코트 위에 서 있으려고 전력을 다하는 생존자들이었다. 그러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서 머뭇거리는 아이가 나오면, “와! 맞았다. 맞았어!” “병우야, 너 맞았어! 빨리 나가!” 혜진의 공은 어김없이 날아와 다리를 맞췄다. 공격팀은 환호성을 지르고 상대팀은 아쉬움의 한숨을 내셨다. 다리를 맞춘 공이 다시 코트 밖으로 나가기 전, 빛보다 빠르게 달려와 낚아채는 아이가 있었다. 아이가 공을 집어들자 상대팀의 기세가 올랐다. 공을 잡는 것만으로 기세가 오르게 만드는 아이. 그 만큼 신망을 받고 있는 아이는 3학년 2반의 또 다른 기둥. 서유림이었다. 희한하게도 3학년 2반에서 가장 키가 큰 두 친구가 모두 여학생이었다. 가장 큰 아이는 혜진이었지만, 그 못지않게 키가 큰 유림은 운동도 잘했다. 때문에 체육시간만 되면 유림이 팀과 혜진이 팀으로 나뉘어 경기를 하곤 했다. 남자 아이들이 힘껏 던진 공도 마치 떨어지는 사과 잡아내듯 가볍게 낚아챌 수 있을 정도로 운동신경이 좋은 두 아이는 소위 ‘라이벌’이었다. “유림아, 던져!” “혜진아, 피해!” “죽여라! 죽여라!” 살벌한 응원문구들이 터져 나왔지만 그렇게 심각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두 장수의 일기토를 기대하는 구경꾼들 같은 눈빛으로 두 사람의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루치드도 내심 기대하며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봤다. 두 사람은 모두 승부욕이 강해서 어지간한 남자아이들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였다. 오로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진지한 승부를 가를 뿐이었다. 체육 시간 뿐만 아니라 다른 과목 수업에서도 한 사람이 손을 들면 답을 몰라도 지기 싫다는 이유로 덩달아 손을 들 정도였다. 내심 생각해보면, 루치드는 그런 승부욕이 없었다. 특히 이런 체육시간에서 자신을 부각되게 만드는 장면을 극히 꺼려했다. 1, 2학년 때 이미 충분히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었고, 그 결과 자신만 피곤하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주위 사람들보다 빼어난 모습을 보여 봐야 그다지 뿌듯하다는 느낌은 없었고, 오히려 여기저기―교장실이나 교무실이나 원장실이나 광고 촬영장이나 방송 세트장―에 불려 다니면서 자신만의 시간이 줄어들 뿐이었기에 전혀 반갑지 않았다. 그래서 체육시간에 피구를 해도 억지로 손을 내밀어 잡는 척하면서 맞아주고 코트를 벗어나곤 했다. 대신 금 밖에 서 있다가 공이 자기 쪽으로 날아오면, 가볍게 공을 잡아낸 뒤 공격권을 같은 팀에게 넘기는 방식을 취했다. 코트 안에서는 공 한 번 제대로 못 잡으면서, 코트 밖에서는 어떤 공도 다 잡아내는 루치드의 실력을 의아하게 생각해 볼 법도 하건만, 아무도 그 점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그런 걸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두 여(女)장군의 위엄이 코트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 번의 공방전이 오가던 중, 혜진이 던진 공을 유림이 피했다. 목표를 잃은 공은 루치드 쪽으로 빠르게 날아들었다. 거의 머리 위로 벗어날 듯이 높이 솟아 날아가는 공을 향해 루치드는 마찰력을 높이는 마법을 시전했다. 그 뒤 손을 뻗으면 공은 벗어나는 일 없이 손에 가볍게 잡혔다. 루치드는 잡은 공을 다시 혜진에 던져주었다. 루치드는 두 학생의 활약 덕택에 자신이 부각되는 일이 줄었다고 생각하며 만족했다. 물론, 자신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학부모들의 SNS에서는 3학년 2반에서 가장 우수한 학업성적을 얻은 루치드에 대한 이야기로 도배되기도 했었다. -아니, 걔가 이번에도 1등이라면서요? -걔 정말 영어 못해요? 어떻게 영어시험도 만점이래요? -영어를 쓰는 건 할 줄 아는데, 말하거나 듣는 건 못하나 봐요. -우리 애한테 물어보니까, 집중력이 그렇게 좋은가 봐요. 앉으면 일어서질 않는다네? -제가 한 번 교실에 간 적이 있었는데, 쉬는 시간에도 책을 읽고 있더라니까요? -무슨 책인데요? -저는 못 봤는데 우리 애가 봤더니, 교과서를 보더래요. 역시 예습 복습이 중요하구나 생각해서 우리 애한테도 시켰더니 10분을 못 앉아 있더라고요. -우리 애도 그래요. 우리 애가 걔 반만 닮았으면 좋겠는데. -영수 어머니는 그런 말씀 마세요. 영수도 반에서 2등, 3등 하잖아요. 우리 애는 겨우 10등 할까 말까 하는데. 10등 아래로는 대화에 낄 생각을 하지 못하고 대신, ‘이 여편네들이…….’ 속으로 화를 삭이며 대화창을 바라봤다. 어느새 대화창에는 걱정을 가장한 자기 아이들 자랑 퍼레이드가 이뤄지고 있었다. ‘이 놈의 자식들을…….’ 집에 돌아오면 영문도 모르고 혼이 날 아이들의 미래를 당사자들은 전혀 몰랐다. 그저 즐겁게 땀을 흘리며 코트를 누빌 뿐. **** 보육원의 초등학교 통학차량에는 이제 몇 사람 타지 않게 되었다. 2년 전만 해도 7명이 시끌벅적거리며 탔었는데, 이제는 철용과 명수, 루치드까지 해서 세 사람만 타고 다녔다. 형근은 중학생이 된 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운동장에도 자주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도서관에 자주 얼굴을 비추면서 루치드와 자주 마주쳤고, 그 모습을 본 보육교사들은 철 들었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영은 소미가 보육원을 떠난 이후, 한동안 우울증 비슷한 증세를 보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중학교에 올라간 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면서 다시 예전의 밝은 모습을 되찾는 중이었다. 다소 통통했던 다영은 지난 시간 꽤 많이 힘들어하면서 살이 많이 빠졌었는데, 덕분에 미모를 얻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 남학생들의 눈길을 많이 끌고 있었다. 세 명 밖에 없어서 조용할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1학년이었을 때나 3학년이었을 때나 변함없이 에너지가 넘치는 명수와, 그에 못지않게 활달한 철용 덕분에 통학차는 조용할 날이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차량 내부만이 아니라 외부도 무척 시끄러웠다. “선생님, 저게 뭐예요?” 명수가 확성기를 들고 거리 위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아저씨를 가리키며 물었다. 보육교사는 힐끔 쳐다보더니, “선거운동을 하는 거구나.” 라고 알려주었다. 철용이 되물었다. “지난번에 하지 않았어요?” 이미 4월 달에 선거가 한 번 있었고, 그 때 무척 소란스러웠던 기억을 가지고 있던 철용은 이를 지적했다. 당시 선거 후보자들이 한 번씩 보육원을 찾아와서 화보집을 촬영할 기세로 달려들어 하루 종일 카메라를 들이 밀던 기억을 아이들은 잊지 않고 있었다. “일이 조금 있어서 다시 선거를 한다는구나.” “어떤 일이요?” 명수가 다시 되묻자, 보육교사는 조금 난감해졌다. 초등학생에게 보궐선거를 설명하려니, 자신이 가진 상식이 충분치 않았다. “그 전에 뽑았던 사람이 계속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어.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그 일을 할 사람을 찾아서 선거를 하게 된 거란다.” 조금 부족하다 싶어서 보육교사는 설명을 덧붙였다. “예를 들어서, 우리 원에 선생님들이 여러분 계시지? 그 중에 한 분이 아파서 그만둬야 하는 일이 생겼다고 생각해봐. 그러면 그 선생님이 하시던 일을 이어서 하실 분이 필요하겠지? 그것처럼 저 사람도 그 전 사람이 그만두면서 일을 할 사람이 없어지니까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나서서 선거운동을 하는 거란다.” 최선이었어, 라며 보육교사는 자신을 격려했다. “남은 사람들이 하면 되잖아요.” 똑똑한 명수가 명쾌한 답을 제시했다. 답이 궁해진 보육교사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 보육원에 행정과장님 계시지? 만약에 행정과장님이 아파서 일을 그만두면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겠니?” 보육교사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직위를 가진 행정과장을 예로 들면서 아이들의 이해를 도왔다. 행정과장이 맡은 전문적인 일은 다른 사람들이 쉽게 맡기 힘든 일일 테니까. “선생님이 하시면 되죠.” 철용이 대답했다. 사실상 아이들의 눈에 행정과장은 다른 보육교사들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단지 얼굴 보기 힘들고 말을 많이 안하는 아저씨 정도랄까? 저 놈은 공부는 안하고 맨날 공만 차더니 머리가 아주 축구공이네, 라는 말을 차마 뱉지 못하는 보육교사는 조금 더 이해를 돕기 위해 자신을 낮췄다. “행정과장님이 하는 일은 매우 어려워서 다른 사람들이 하기 힘들어. 매우 특별한 일이기 때문에 행정과장님 같이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들만 할 수 있거든.” “선생님은 공부 안하고 놀았어요?” 빠직. 보육교사의 이마에 핏줄이 솟아났다. 루치드가 가만히 있다가 한 마디 했다. “『로봇카 폴리』에서 로이가 없으면 불 끌 수 있는 사람이 없잖아. 그래서 로이처럼 불을 끌 수 있는 또 다른 로이를 찾아서 뽑는 거야.” “아, 그렇구나.” 명수와 철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보육교사의 손등에 핏줄이 솟아났다. **** “존경하는 인평시 여러분!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저 주정호가 이 자리까지 오게 만들어주신 여러분에게 감사 인사드리며 다시 한 번 강조하여 말씀드립니다. 저는 오직 사회의 정의를 위해서 싸울 것이며 바른 생각과 상식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것이며 보다 살기 좋은 마을, 보다 살기 좋은 인평시를 만들어 가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인평시 여러분, 터무니없는 유언비어에 속지 마시고 저 기호1번 주정호를 다시 한 번 기억해주시고 믿어주십시오. 정정당당하게 살아온 주정호, 앞으로도 당당한 걸음으로 여러분들 앞에 서도록 하겠습니다. 기호 1번 주정호입니다. 여러분!” 연설이 끝나자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이름을 연호했다. 그러나 멀찍이서 서있던 사람들 무리에서는 수군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저 사람, 소문 안 좋던데?” “에이, 소문이 뭐 중요한가. 일만 잘하면 되지.” “그래도 저 사람 됐다가 또 새 사람 뽑는다고 야단법석 되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설마 또 그러려고?” “아니 그 전의 놈은 설마 했나? 그 놈도 지 뽑아달라고 그리 하더만, 6개월도 못 채우고 내려갔잖아.” 일부 사람들은 은근히 기대하기도 했다. “그래도 저 사람은 토박이잖아. 뭘 해도 이 동네를 위해서 뭔가 해주지 않겠어?” “20년 전에 공무원 할 때 무슨 보조금 횡령했다고, 질이 안 좋다던데?” “유언비어래잖아?” “아니, 그럼 참말이라고 하겠어? 다 유언비어라고 딱 잡아떼고 보는 거지.” “그래도 당이 힘이 있으니까, 도움 좀 받으면 이 동네에도 힘이 좀 실릴 거고, 그러면 좋은 거 아니겠어?” 인평시 의회의원 보궐선거는 이제 시작이었다. ======================================= [62] 선택(2) 인평시가 보궐선거로 소란스러웠다. 오죽하면 초등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유세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져 교실에까지 다다를까. 그러나 유세 현장의 들뜬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인평초등학교 3학년 2반에는 서늘한 기운이 불어들었다. 단순히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가을바람 탓만은 아니었다. 점심시간 식사를 끝낸 시간, 몇몇 남자 아이들이 운동장으로 달려간 틈에 교실 뒤편에는 교실에 남아있던 나머지 아이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두 대장군이 눈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전운(戰雲)이 감돌았다. 10분 전. 아이들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오늘도 은혜로운 급식판을 받아 정답게 사담을 나누며 먹던 아이들. 성질 급한 남자 아이들은 씹는지 마시는지 모를 정도로 먹더니 이내 식판을 반납하고 운동장으로 뛰어갔다. 여자 아이들은 몇몇이 패를 갈라 저희들끼리 오붓하게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교실의 분위기가 묘했다. 평소라면 즐거웠을 식사시간에 어쩐지 긴장감이 넘쳐흘렀다. “야, 그래도 밥은 맛있게 먹네.” 누군가가 기어코 재를 뿌렸다. 4분단에 앉은 유경이었다. “내가 먹던지 말던지 니가 무슨 상관인데.” 잿가루 위에 송홧가루를 얹었다. 1분단에 앉아 밥을 먹던 은진이었다. “야, 너 말 되게 예쁘게 한다?” 다시 유경이 위에 석탄가루를 얹었다. “이게 진짜!” 뿔이 난 은진이 일어서자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다 쓰러졌다. 그 순간 교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야, 박은진. 가만히 있어라.” 날카로운 목소리가 교실을 가로질렀다. 유경과 함께 앉아 있던 혜진의 칼날 같은 눈빛이 은진에게 겨눠졌다. “장혜진. 니가 뭔데 계속 끼어들어?” 아직 앳된 목소리의 유림은, 속에 잔뜩 불을 집어 삼킨 듯 화가 치밀어 올랐다는 얼굴로 혜진을 향해 일성을 뱉어냈다. 남아있던 몇몇 남자아이들과 여자 패거리(?)들이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운동장으로부터 들려오는 아이들의 목소리들이 유세현장의 소란과 섞여 가을바람과 함께 어슴푸레하게 교실을 헤집고 지나갔다. 하지만 전장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듯, 교실은 일촉즉발의 무거운 공기로 가득했다. 누구하나 쉽게 소리를 내지 못했다. 창가 쪽에 앉아 있는 유림과 교실 뒷문 근처에 앉은 혜진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일단 유림이 벼린 칼날을 겨눴다. “야, 장혜진. 왜 은진이보고 가만히 있으라 마라 하니? 유경이 먼저 시비를 걸었잖아. 안보여? 염치도 없니?” “뭐? 염치? 서유림, 너야말로 미쳤니?” “미쳐? 누가 미쳤다고 그래? 너 죽고 싶어?” “하, 그래. 죽여 봐라. 응? 죽여 봐.” 혜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덩달아 유림이 일어났다. 둘이 일어나서 교실 뒤편 가운데 마주서자, 어느새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두 사람 주위로 원을 만들었다. “너 되게 웃긴다? 니가 뭐라도 된 줄 알고 그러니?” 하얀 맨투맨 티셔츠에 붉은 색 체크무늬 스커트를 입은 유림이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혜진을 바라봤다. “뭐?” 베이지색 롱 후드티에 레깅스 차림으로 무장한 혜진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유림에게 한 발 다가갔다. “니가 쟤 시녀야?” 순간 눈이 뒤집힌 혜진이 먼저 손을 뻗었다. 2시간 전. 사회 과목 시간에 선생님은 최근 인평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보궐선거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선거는 이 사회의 기본 체제인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 이야기를 진행하기에 좋은 소재였다. “여러분, 오늘은 우리 고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볼 계획이랍니다. 요즘 시내에 띠를 둘러메고 인사를 하거나 연설을 하시는 분들 본 적 있죠?” “예.” “혹시 무슨 일인지 아는 사람?” “선거요.” “예. 맞아요. 선거를 하는 거예요. 1학기 때도 선거가 있었지만, 우리가 자세히 배우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선거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에 대해 배워볼 거예요.” 선생님은 민주주의와 선거에 대해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그러다 수업이 종료되기 전, 이번 보궐선거에 대해 간단히 언급을 했다. “원래 선거로 의원을 뽑으면 다음 선거 때까지는 그 사람이 계속 책임을 다해야 되요. 마치 우리 반 반장처럼 말이에요. 은진이가 1학기 때 우리 반 반장으로서 노력했어요. 그렇죠?” “예.” 목소리가 조금 작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선생님은 설명을 이었다. “그리고 2학기가 되면서 우리가 반장을 새로 뽑았죠? 지금 우리 반 반장이 누구죠?” “유경이요.” 몇 몇 아이들이 외쳤다. 하지만 몇 몇 아이들은 유경이를 째려봤다. 유경이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제야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교사가 유경이에게 물었다. “유경아, 무슨 일 있니?” “아니요.” 누가 들어도 억지로 쥐어짜내듯 힘겹게 내뱉는 목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수업을 진행하느라 아이들의 분위기를 제대로 캐치해내지 못한 선생님의 실수였다. 이럴 때는 한 반에 40명씩 되는 아이들을 혼자서 통제하는 게 쉽지 않다고 여겼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은진의 표정도 심상치 않음을 알았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은진이 계속 유경을 흘겨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진아, 무슨 일이니?” 은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을 잠깐 봤다가 다시 유경을 향해 표독스런 눈길을 던졌다. “너네 싸웠니?” “…….” 마침 수업 종이 울렸다. 선생님은 두 사람을 상담실로 불렀다. 반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분위기 파악 못하는 몇 몇이 복도로 요란스럽게 뛰어나갔지만, 대부분은 전장에 감도는 암운(暗雲)을 느꼈는지 경거망동 하지 않았다. 5시간 전. 이제 막 아이들이 교실로 등교를 하고 있었다. 루치드도 자리에 앉아 수업을 준비했다. 사실 루치드의 수업 준비는 간단했다. 그냥 교과서를 읽는 것이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과외나 학원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문제집을 상시 들고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항상 교과서 혹은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는 게 다였다. 교과서를 읽던 루치드는 뒤가 시끄러워지는 분위기에 책을 읽고 있을 수 없었다. 고개를 뒤를 돌아보니 은진과 유경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서로 가방도 내려놓지 않은 채로 마주보고 있었다. 가만 보니 유경이 은진의 갈 길을 막고 있는 형국이었다. “야, 너. 아직도 니가 반장인 줄 아니?” “무슨 소리야?”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유경이 길을 막고 한다는 소리가 뜬금없이 들려 은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니가 뭔데 애들한테 명령해?” “무슨 명령?” “니가 까톡에서 애들한테 그랬잖아! 수업 끝나고 남으라고!” “아, 그건 우리 엄마가 먹을 거 사주고 싶다고 해서 그런 거잖아. 그게 무슨 명령이야?” “야, 니 생일도 아니면서 니가 왜 애들을 모아? 그것도 딱 ‘남아’라고 말했잖아. 니가 아직도 반장인 줄 아는 거 아니면 뭐니? 그러고 보니 1학기 때도 너 그랬지? 애들보고 이거해라, 저거해라. 꼭 말을 해도 명령을 하더라? 지가 뭐가 된다고.” “뭐?” “넌 부탁이란 거 할 줄 모르니? 어떻게 애가 예의가 없어? 어휴, 진짜 너 모르지? 애들이 다 너보고 밉상이라고 하는 거? 진짜 내가 아무 말 안하고 참으려고 했는데, 너 진짜 너무 막나가더라.” 은진은 쏟아지는 말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몇몇 개는 알아들었다. 그리고 그 알아들은 단어는 은진을 소위 ‘욱’하게 만들었다. “뭐, 이런 또라이가 다 있어?” “또라이? 너 나보고 또라이라고 했어?” “했다, 어쩔래?” 유경은 그만 참지 못하고 은진의 머리채라도 잡아채려고 달려들었다. 그 찰나에 유경을 제지하는 손길이 있었다. “야 그만해. 왜 여기서 싸우려고 그래?” 이제 막 교실에 들어왔다가 두 사람을 본 혜진이 유경을 말렸다. 이제 겨우 135㎝를 갓 넘은 유경이 150㎝에 육박하는 혜진을 힘으로 이길 수 없었다. “너도 봤잖아? 얘가 우리한테 막 명령질하고 대장질하는 거. 그게 화가 나서 반장으로서 한마디 했는데, 나보고 또라이라고 욕을 하잖아.” “너 그랬어?” 혜진이 돌아서며 은진을 쳐다봤다. 아니 노려봤다. 은진이 순간 겁을 먹고 아무 말을 못하는 와중에 또 다른 세력이 참전했다. “야, 너 뭐야? 뭔데 사람을 그렇게 쳐다보니?” 앳되고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유림이 성큼성큼 걸어와 은진과 혜진 사이를 파고 들었다. 싸늘하고 날카로운 비수가 허공에서 맞부딪히며 빛이 번쩍거렸다. 아이들은 일대종사(一代宗師)의 기싸움과도 같은 눈싸움에 위축되어 아무 말도 못했다. 루치드는 가만히 네 사람을 쳐다보았다. 루치드는 반에서 핸드폰이 없는 유일한 학생이었다. 때문에 저 아이들이 싸우는 계기가 된 까톡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1학기 때도 은진의 말투 때문에 몇몇 아이들―주로 여자 아이들―이 불쾌해 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참고로 남자애들은 그다지 불쾌해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부분 남자애들은 그런 면에서 무덤덤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냥 신경이 무뎌서 그럴 수도 있겠다. 아니면 3학년 2반의 특수성 때문일 수도 있겠다. 선생님들도 우스갯소리처럼 말하지만, 루치드의 반은 시쳇말로 ‘여초반’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상황이 벌어진 것은 비단 말투에 관한 것 때문만은 아니지 싶었다. 그런 것보다는 오히려 2학기 반장인 유경이 자신의 반장으로서의 권위를 침해당했다는 것에 화가 나서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지 않을까, 추측했다. ‘니가 뭔데’ 라는 표현에서는 자신을 왜 무시 하냐는 항변의 의미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겨우 반장인데, 어떤 권위가 있다는 것일까.’ 하는 점이었다. 제대로 말이 오고 간 게 아니지만 뉘앙스는 분명히 반장의 권위에 관한 문제였는데 말이다. 루치드로서는 고작 초등학교의, 고작 40명의 반 학생을 대표하는 반장이란 자리가 그렇게 중요한 자리인지 동의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저 아이들의 싸움을 어떻게 말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루치드는 원인을 잘못 해석했다. 반장의 권위가 아니라 서로의 자존심이 문제였다. 의외로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자존심 문제는 꽤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었다. 이미 3학년 쯤 된 여자아이들이라면 매우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도 싸울 수 있었다. 가령, “왜 내 친구한테 그렇게 말하는데?” 와 같은 이유로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친구가 무시당하면 자신의 자존심도 무시당한다는 생각에서 싸우게 된다. 혹은, “겨우 이거 만든 거니?” 와 같은 이유로 싸웠다. 여기서 포인트는 ‘겨우’라는 단어가 주는 깊은 상처와 패배감이었다. 루치드는 평생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초등학교 3학년 여자아이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자존심은 누구도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그런 것이었다. 루치드가 잠깐 고민에 빠진 사이에 아이들의 대치는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면서 깨졌다. 아이들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고 사태는 마무리 된 듯 했다. 다시 점심시간. 은진과 유경의 싸움이 혜진과 유림의 싸움으로 번진 것은 역시 해묵은 감정의 대립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 라이벌로서 서로를 경계하던 두 사람 사이의 도화선에 자존심이란 불이 붙었다. 결국 두 사람은 대장군의 기세를 내뿜으며 맞붙게 된 것이었다. 혜진은 유림이 ‘시녀’라고 비하하는 순간, 눈이 뒤집혔다. 이를 악물고 손을 뻗어 유림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그리고 거의 동시라 할 만큼 유림 역시 혜진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서로의 고개가 붙잡힌 머리 쪽으로 꺾였다. “놔라.” “너나 놔라.” 아이들은 섣불리 두 사람의 싸움을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칫했다가는 싸움에 휘말려 자기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루치드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어찌됐든 한 반에서 함께 생활할 친구들이었고, 모름지기 싸움이란 말려야 하는 것이다. 지난날의 깨달음은 루치드를 성숙하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이들이 성숙해질 시간이었고, 루치드는 기회를 주고자 했다. 루치드는 아이들의 무리를 헤치고 원 안으로 들어갔다. ======================================= [63] 선택(3) “조직위원장님. 지금 우리 쪽 분위기가 어떻습니까?” 눈 밑이 유달리 검게 변색된 조직위원장이 황급히 답변을 했다. “예, 일단 지지자들의 확보가 시급한 상황에서 터진 유언비어가 꽤 혼란을 주고 있나봅니다. 지지율이 조금 내려간 것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조직위원장이 애를 쓰고 있음을 모르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 운동본부에서 가장 자기 일 잘하는 사람은 저 사람, 이라고 주정호는 생각했다. 반대로 가장 일 못하는 사람은, “선전팀장님?” 마른 얼굴에 핏기가 쫙 빠져서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 게다가 정리되지 못한 턱수염과 퀭한 광대뼈 옆으로 흐르는 땀국물을 보고 있자니 주정호의 마음도 오염되는 것 같았다. “예. 저희도 열심히 알아보고는 있는데, 확실한 제보가 따르지 않으면 조금 어려울…….” 선전팀장은 상대의 흑색선전에 맞불을 놓기 위한 자료를 수집하라는 지시를 이행중에 있었다. 자고로 블랙 앤 블랙이다. 그런데 저 허수아비 같은 작자가 그 일 하나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깨끗한 사람? 그런 사람이 이 선거판에 끼어들었을 리가 없다고 주정호는 확신했다. “팀장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마치 칼날처럼 느껴졌다. 선전팀장은 자신의 목에 겨눠진 칼이 섬뜩해서 침도 제대로 못 삼킬 정도였다. “예.” “팀장님이 얼마나 유능하신 분인지는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저희가 보기에 못 미더운 모습을 보이시니 조금 실망스러운 마음도 듭니다.” 칼날이 목을 톡톡 두드리며 죽을래 살래, 라고 묻는 것 같았다. “죄, 죄송합니다.” 팀장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머리를 쥐어짜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대, 대신 현재 유언비어 확산 방지에 총력을 다하고 있으니 조만간… 효과가 있을 겁니다.” 빈말이나 다름없음을 모르지 않았지만, 이렇게라도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는 보신(保身)의 본능이 입을 열게 했다. 물론 주정호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대책 없는 낙관 따위 선거에서 지고나면 무용지물이니까. “우선은 지켜보겠습니다. 앞으로 유세 종료까지 일주일이죠? 이틀 안에 방안이 보이지 않으면 저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아니 모든 걸 잃을 수 있습니다. 다들 각오를 단단히 하시고 남은 기간 최선을 다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후보님.” 침착함이 사라진 선거운동본부의 모습에 주정호 후보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처음 유세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렇게 어려워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기호 1번 주정호는 벽에 붙은 자신의 홍보 포스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 정도에 쓰러질 내가 아니다!’ 지난 30년간 공직에서 구른 경험을 되살려, 직면한 위기를 해소할 대책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 루치드는 원 안으로 들어가 서로의 머리채를 틀어잡고 있는 손목을 붙잡았다. 혜진과 유림은 루치드가 하는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아 뭔가 싶었다. 순간 두 사람 다 화들짝 놀라 잡고 있던 손을 놓는 동시에, 루치드의 손으로부터 다급하게 손목을 빼냈다. 갑자기 손목이 화끈거려서 놀란 것이다. 손목을 보니 별다른 상처나 이상증세는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동시에 똑같은 반응을 보인 것으로 보아 루치드가 뭔가를 한 것 같았지만 그 정체는 알 수 없었다. “야, 너 뭐 한 거야?” “뭐한 거니?”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루치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같은 반에서, 자기가 보는 앞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기 싫다는 단순한 이유로 일단 손을 쓰긴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자신이 이 두 사람을 어떻게 화해시켜야 할지에 대해서는 깊은 고민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하긴 왜 싸우는지를 모르는데,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을까? 임기응변으로 루치드는 기웅의 흉내를 내보기로 했다. “너희들 왜 싸우는 건데?” “뭐?” 혜진이 생전 이렇게 황당한 소리는 처음 듣는다는 얼굴로 루치드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140㎝이 안 되는 루치드가 ‘감히’, ‘겁도 없이’ 자신의 일에 훼방을 놓았다.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일단 밀치거나 겁을 줬을 테지만, 이 아이는 그 유명한 ‘석고’였다. 반에서, 아니 학교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애. 혹은 천재. 혹은 제일 잘 생긴 애. 하지만 자기 취향의 얼굴은 아니어서 다른 아이들처럼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의 부모님도 종종 ‘석고’에 대해 언급을 하면서 친하게 지내라는 둥의 이야기를 들어왔다. 또 루치드도 자신의 눈에 띄는 행동을 하거나 자신의 거사(巨事)를 방해하는 일을 한다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았었기에 별 충돌 없이 지금껏 잘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시점에서 겁도 없이 등장하니 어이가 없었다. 반면 유림은 조금 달랐다. 유림은 사실 루치드에게 호감이 있었다. 다만 자신의 승부욕을 자극하는 라이벌의 눈치가 보여 섣불리 루치드에게 다가가는 행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소년의 별명처럼, ‘석고상’ 보듯이 매일 루치드를 훔쳐보며 연심을 키우고 있던 소녀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갑자기 루치드가 끼어드는 행동을 취하리라고는 상상하지 않았고, 때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속으로 갈팡질팡하며 머뭇거리는 중이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당장 루치드에 대한 감정과 라이벌에 대한 적개심 중 어느 쪽이 더 크게 마음속에 자리잡았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해 우물쭈물 거리고 있었다. “비켜.” 유림이 먼저 말을 꺼냈다. 루치드가 다치지를 않길 바랐다. “미안, 유림아. 그런데 난 너희들이 싸우는 게 좋지 않다고 생각해.” 유림의 얼굴이 붉어졌다. 비키라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아서? ‘내 이름을 불러줬어!’ 유림이 알기로 루치드가 누군가의 이름을 저렇게 부른 적이 없었다. 거의 대부분은 아이들이 루치드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지, 루치드가 먼저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마음을 알 턱이 없는 루치드는 이내 혜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도 일단 침착하게 이야기를 해 봐. 왜 싸우려고 했는지. 굳이 주먹을 쓰지 않아도 대화로 풀 수 있다면 대화로 해결하는 게 옳다고 보는데, 난.” 혜진을 바라보며 루치드가 제안을 했다. 혜진은 키도 작은 게―또래 남자아이들과 비교해도 작은 편은 아니었는데 자신이 보기엔 거기서 거기―건방지게 군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까불지 마. 니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정작 그 말에 욱한 것은 유림이었다. “이게,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감히 석고에게 까불지마라고?’ 유림이 다시 혜진에게 달려들려는 찰나, 루치드가 가로막고 섰다. 루치드는 두 팔을 뻗어 유림의 팔꿈치 윗부분을 잡고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보기와 다르게 루치드는 힘이 좋아서 유림은 루치드를 밀치고 나아갈 수 없었다. 유림은 그 순간 엉뚱한 생각을 했다. ‘안으려고 했던 게 아닐까?’ 팔을 붙잡아 말릴 것이 아니라, 남자답게 끌어안고 자신을 말렸다면. 마치 드라마처럼. 갑자기 자신의 키가 크다는 사실이 싫어졌다. 그리고 루치드가 아직 키가 작다는 사실이 안타까워졌다. 키만큼이나 조숙한 정신세계를 가진 유림이 첫 스킨십(?)에 당황과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이, 루치드는 고개를 돌려 혜진을 바라봤다. “물론 내가 모르는 게 있겠지. 니 자존심을 건드리려고 했던 건 아냐. 그래도 같은 반 친구들끼리 싸우는 건 좋지 않다고 봐. 만약 니가 유림이랑 싸우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 뒷일은 어떻게 감당할 거야?” 유림이었다면 내가 다칠까봐 걱정해 주는 거야? 라며 감동했을지도 모를 이야기였지만, 혜진에게는 자신의 자존심을 깔보는 발언으로 다가왔다. “내가 다쳐? 내가 고작 얘하고 싸운다고 다칠 거 같아? 너 내가 우습니?” 루치드는 말을 할수록 난감한 상황에 빠지고 있음을 알았다. 어떤 포인트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혜진의 자존심을 계속 건드리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루치드가 느낀 것은 혜진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혜진이 느끼는 불안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 원인을 찾기보다 혜진의 화를 누그러뜨리고 싸움을 멈추게 하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했다. 유림의 왼팔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돌아섰다. 왼손은 여전히 유림의 오른팔을 붙잡은 채. 유림이 쑥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른 채. “난 널 절대 우습게보지 않아. 넌 키도 크고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해. 내가 널 우습게 볼 이유가 없어. 넌 너의 친구들과도 사이좋게 지내고 선생님께 칭찬도 받는 아이야. 우리 반에서 널 우습게 보는 사람은 없을 거야. 선생님들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그 만큼 넌 다른 사람들한테 기대를 많이 받는 아이라고 난 생각해. 그런데 만약 니가 여기서 반 친구랑 싸운다면 넌 너를 기대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넌 그걸 원하지 않을 거 같아. 그렇지 않아?” “니 멋대로 추측하지마. 니가 뭔데 날 판단해?” 루치드는 깊은 한숨을 내셨다. 차라리 상대가 명수였다면, 말이라도 통했을 텐데. 혜진은 어떤 말을 해도 모두 잘라 먹혔다. 자신이 막고 있는 유림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아무 말 없이―유림은 머릿속에서 현실과 판타지의 충돌로 혼란을 겪는 중―자신의 통제에 잘 따라주고 있었다. 혜진의 경우도 일단은 쉽게 싸움을 시작하지 않고 있으니 적어도 대화를 시도해 볼 여지는 있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볼까?’ 그래도 이렇게 10분을 더 기다리는 건 루치드에게 고역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이런 식으로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역시 아직도 나는 부족하구나, 라는 자괴감이 들었다. “좋아, 그럼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뭐?” “지금 뭘 원하는 건데?” 혜진은 당연히 자신이 원하는 게 있었다. 그랬으니 이렇게 팔을 걷어 부치고 유림과 대치상태에 들어간 것이었지. 그런데 당장 루치드에게 대답을 해주려니 어쩐지 궁색해졌다. 대답할 거리를 고민하다보니 자신이 원하던 게 무엇이었는지 희미해졌다. 뭐였더라? 대답 없이 노려만 보는 혜진의 반응을 보며 루치드는 이쯤에서 말을 꺼내야 하는지, 아니면 기다려야 하는지 고민이 됐다. 여기서 괜히 말을 붙였다가 화를 더 낼 수도 있었고, 기다렸다가 상대가 화가 가라앉을 수도 있었다. 반대로 말을 붙여서 상대를 좀 더 이성적으로 생각하게끔 도울 수도 있었고, 기다렸다가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도 있었다. 다시 교실에 침묵이 자리 잡았다. 묘한 대치상황에서 아이들은 쉽게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지 않았다. **** “인평시민 여러분, 공직자의 자리란 청렴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세월동안 수없이 많은 사례들을 보았고 경험했기 때문에 ‘청렴’이란 단어의 엄중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공직자의 자리란 가장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어 심사해야만 하는 자리이며, 그래야 우리 사회가 바르게, 공평무사하게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정호 후보는 무려 20년 전 우리의 피땀으로 바친 세금을 감히 자신의 배를 불리고자 횡령하였던 전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뒤에도 검찰의 조사는 받지 않았지만, 몇 건의 의혹들이 더 있던 것으로 밝혀진 상황입니다. 과연 그런 사람이 우리 인평시를 위해, 우리 사회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희생정신과 청빈의 자세를 요구하는 의원으로서 일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와!” “주정호 후보가 말로만 정정당당이라고 외칠 때, 저는 법정에서, 사회에서, 이 거리에서! 정정당당하게 행동하며 살아왔습니다. 언제나 공정하고 깨끗한 사회, 상식과 기준이 바른 사회를 만든다는 신념으로, 인권변호사로서 20여 년간 이 사회를 위해, 국민들을 위해 지난 시간을 바쳐 온 저 강해준이가, 이제 인평시민 여러분을 위해서 제 한 몸을 바치고자 합니다, 여러분!” “와!” “기호 2번, 강해준이를 기억해주시고 꼭 투표해주십시오. 기호 2번 강해준을 꼭 뽑아서 인평시를 위해, 이 사회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여러분!” 유세 트럭 옆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트로트 멜로디와 함께 ‘기호 2번 믿어봐’ 라는 유세송이 흘러나왔다. 선전 띠를 둘러멘 선거운동원들이 트럭 앞에서 신나게 율동을 보이고, 강해준은 만면에 미소를 띄고 연거푸 허리를 숙이고 군중을 향해 인사를 했다. 군중들의 환호성이 대로변을 울렸다. ======================================= [64] 선택(4) 군중의 환호성, 유세 스피커의 노랫소리, 대로변을 달리는 자동차의 소음도 교실 안의 무거운 공기를 흩어버리기엔 모자랐다. 가까운 운동장에서 누군가 시원하게 공을 찼는지 풍선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진짜 풍선이 터진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소음의 근원을 찾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누구도 고개 돌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일촉즉발의 대치상황. 이 상황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영화 보듯 스릴을 느꼈고, 당사자의 감정으로 이입한 아이들―주로 여자 패거리들은 상대를 향해 총을 겨누듯 눈초리를 매섭게 흘겼다. 적장이 로맨스와 싸우고 있는 줄도 모르는 혜진은 눈 앞의 건방진 꼬마를 가만 둬선 안되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내가 원하는 건 유림이랑 은진이가 내 앞에서 무릎 꿇고 사과하는 거야.” 역시 타이밍을 잃었던 걸까? 루치드는 속으로 후회를 했다. 저건 누가 봐도 그냥 이유 없이 시비를 거는 말이었다. 몇 가지 대응할 말을 골라봤다. “넌 친구 앞에서 무릎 꿇고 사과해본 적 있어?” 너도 하기 힘들어할 행동을 요구하는 건 무리한 처사 아니냐, 라는 의미를 담았지만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할 여지가 다분한 대처법이었다. “사과하면 화를 풀 거야?” 이건 그냥 패스. 어느 유림의 위신과 자존심을 완전히 무시하는 발언이다. 너무 길게 고민하고 있으면 안 될 듯 해서 루치드는 빠르게 고민하며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얘들이 뭘 사과해야 하는데?” 결국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왜 화가 났냐? 왜 싸우는 것이냐? 결국 원인이 뭐냐는 질문이었다. “뭔지 몰라서 그래?” “응.” “모르면서 왜 끼어들어?” “싸우는 게 보기 싫어서 그랬다고 했잖아. 대화로 풀 수 없는 문제였던거야?” “그래. 이건 말로는 안돼.” “우리는 모든 싸움을 대화로 해결할 수 있어. 학교 내에서 일어난 일이든, 이 사회에서 일어난 일이든, 이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든 모두 대화로 해결할 수 있어. 만약에 모두 대화로 해결할 수 없다고 주먹을 휘두른다면 지금쯤 저 거리 밖에서는 모두 주먹질을 하고 있을 거야.” 기웅은 그렇게 가르쳐줬고, 루치드는 그 가르침을 충분히 받아들였다. 지금은, 말하자면, 그 가르침의 실전무대나 마찬가지였다. “억지부리지 마.” “억지는 니가 부리고 있는 거야. 넌 우리 반에서 가장 힘이 세. 그렇다고 해서 모든 걸 힘으로 해결하려고 든다면, 만약 너보다 힘이 센 사람이 나와서 널 힘으로 굴복시켜려 할 때 넌 그걸 납득할 수 있다고 생각해?” “…….” 루치드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대화의 기본은 소통이고 이해야. 난 너와 대화를 통해서 너를 이해하려고 하는 거야. 동시에 너도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거야. 니가 화가 난 이유를 난 여전히 몰라. 하지만 대화를 통해 내가 널 이해할 수 있다면, 그리고 니가 화가 난 이유를 내가 납득할 수 있다면, 난 너를 지지하겠어. 그러면 넌 너를 동조하는 또 한 사람의 지지자를 만들 수 있게 될 거야.” 혜진은 묵묵히 소년의 눈을 바라 봤다. 흔들림 없이 자신을 직시하는 눈이었다. 사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아까는 정말 화가 치밀어서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루치드의 긴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화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애써서 대꾸하는 것도 귀찮아졌고, 일부러 화를 내자니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한 가지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루치드는 ‘이해’를 하겠다고 한 것.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 그 것 한 가지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확실히 똑똑한 애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알았어. 그만해.” “?” 루치드가 무슨 말인가 싶어 바라보니, 혜진은 시선을 피하며 몸을 돌렸다. 아이들이 몸을 틀어 길을 내주니 그 사이로 빠져나가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처음엔 다른 아이들도 무슨 일인가, 하다가도 이내 웅성거리다 자기 자리로 천천히 돌아갔다. 싸움이 끝났다. ‘아차.’ 갑작스러운 혜진의 반응에 멍하게 그 빈자리를 쳐다보던 루치드는 여태 자신이 유림의 팔을 붙잡고 있었음을 잊고 있었다. 얼른 팔을 놔주며 물었다. “괜찮아?” 뭐가 괜찮다는 건지 물어볼 법한 물음이었지만, 유림 역시 어물쩡하게 넘어가버렸다. “괜찮아.” 얼굴을 가득 붉힌 유림이 쭈뼛대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보다가 루치드도 창가 쪽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조금 전의 대화를 복기해 보았다. 싸움은 멈췄지만 찝찝한 결말이었다. 혜진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돌아갔다기보다는 제풀에 지쳐 관두고 만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기도 했다. 자신은 대화를 청했지만 결과적으로 혜진은 대화를 거부했고, 싸움의 원인은 결국 끝까지 알아내지 못한 채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루치드는 혜진을 설득하지도 못했고, 싸움을 제대로 말리지도 못했다. ‘대화라는 게 어렵구나.’ 모든 싸움을 대화로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화를 하는 게 이토록 어렵다면, 서로간의 갈등, 불화 등을 원만하게 해결하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쉽게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면, 결국 그것이 폭력이리라. 결국 같은 이야기로 돌아온다. 쉽게 해결하는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방법으로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이유. 폭력이란 방법을 거부하고 대화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 “선생님께 물어볼까?” 마침 수업종이 울리며 담임선생님이 들어오고 계셨다. 선생님은 교실 문을 열다가 등줄기가 서늘해지며 원인 모를 식은땀이 흘러내림을 느꼈다. 다음 시간이 수학시간임을 선생님은 감사하게 생각해야 했다. **** 보육원으로 돌아온 루치드는 기웅의 방을 찾아갔다. 고3이 된 기웅은 항상 공부하고 있었다. 공부하는 시간을 뺏기기 싫어하는 루치드는 마찬가지로 기웅의 시간을 뺏기 싫어서 되도록 기웅을 찾아가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오늘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쩐지 기웅을 찾아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형, 궁금한 게 있어요.” 기웅은 귀찮다는 기색 하나 없이 반갑게 루치드를 맞이했다. 귀를 기울여 루치드의 이야기를 들은 기웅이 조금 난감한 기색을 보였지만, 그렇다고 루치드의 말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니가 했던 질문 중 가장 곤란한 질문이네.” “왜요?” “이 문제는 단순히 폭력과 대화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루치드의 표정을 보며 기웅은 피식, 웃음을 보였다. “일단 폭력과 대화라는 주제로 이야기해보자. 작년에도 한 번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매년 이 주제로 한 번씩 이야기하는 셈이네? 아무튼, 형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해볼게. 모든 문제에는 정의가 필요해. 정확하게 우리가 궁금해 하는 문제에 대해서 정확한 정의를 내려야 논리를 전개해 가는 과정에서 오해를 하지 않거든. 우선 폭력에 대해 정의를 내려 보자. 넌 폭력이 뭐라고 생각하니?” “주먹이나 발로 사람을 때리면 폭력이라고 하지 않나요?” “그걸 가리켜서 물리적 폭력이라고 해. 실질적인 행위를 통해 타인을 가격하는 것, 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 그런데 물리적 폭력 말고도 폭력이라고 쓰는 경우가 있어. 예로 들면 누군가 나에게 욕을 한다고 해. 욕이란 것은 상대를 비하하거나 얕잡아보는 말을 일컫지만 그 속에 상대방의 의도가 들어갈 수 있지?” “그건 알겠어요. 충분히 당해봤으니까.” 루치드의 무덤덤한 답에 씁쓸한 웃음을 짓던 기웅은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그런 말도 일종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 다시 말해서 상대를 강제하거나 억압하려는 의도가 담긴 말 역시 폭력인거야. 이런 걸 정신적 폭력이라고 해두자. 오늘 니가 겪은 일은 물리적 폭력이 일어날 뻔한 상황에 관한 이야기지만, 일단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논하는 자리니까 두 가지 모두를 염두에 두자고.” “예.” “대화라는 말에 대해서도 정의를 내리고 가자. 넌 대화가 뭐라고 생각하니?” “서로 소통하는 거?” “핵심을 찌르는구나. 거기에 하나만 덧붙이자. 대화는 서로 소통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상대를 존중하는 바탕이 깔려야 한다고 생각해. 상대를 깔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그건 대화가 아니라 싸움이지.” “그렇네요.” 오늘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쳐갔다. ‘나는 혜진이를 존중했을까?’ 기웅은 계속 말을 이었다. “상대를 존중하는 가운데 서로가 이야기를 나눠 소통을 이루는 것이 대화라고 일단 정의를 내리자. 그럼 이제 폭력과 대화란 주제로 넘어가서, 왜 갈등을 폭력이 아닌 대화로 해결해야 하는 것인가? 이 점에서 형은 사실 고집같은 게 있는 거 같아.” “뭔데요?” “성숙한 시민 사회의 일인으로서 이 사회의 지속과 발전을 고려한다면 폭력은 절대적으로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대충은요.” 그간의 독서경험이 기웅의 말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단순히 표현한다면 이 사회에서 폭력이 없어져야 한다는 말 아닌가? “그래서 모든 갈등의 해결은 반드시 대화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게 절대적 명제라는 거지.” 가만 보니 기웅이 고3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은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처음에는 루치드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을 하나 싶더니 점점 전문적인(?) 단어를 혼용하며 말을 잇고 있었다. 논술 시험 지문에서나 볼 법한 단어들이다. “단, 조건은 있어. 우리가 내렸던 정의에 따라 대화를 할 때, 서로가 대등한 입장이어야 한다는 거지. 대등한 입장에서만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고,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거든. 서로의 위치가 달라지면 대화가 되지 않아. 일방적인 훈계나 설교, 혹은 꾸중이 되는 거지. 부모가 자식에게 말하듯, 교장이 학생에게 말하듯, 상사가 부하에게 말하듯.” 그 후로도 30분간 루치드는 기웅으로부터 대화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루치드는 많은 시간을 할애해 준 기웅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왔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루치드는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기웅의 말대로라면, 대화는 갈등을 해결한 유일한 방법일수도 있다. 하지만 폭력도 방법이기는 했다. 그것은 루치드가 겪은 저세계의 방식이기도 했다. 그 곳에서도 대화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할 수는 있겠지만, 모든 갈등을 대화로만 풀 수 있을까 고민하면 그렇지 않았다. 일단 대등한 관계가 성립하기 어려웠다. 기사와 평민, 감시병과 도둑, 여관 주인과 주정뱅이 사이에 대등한 관계란 있을 수 없었던 사회다. 그 곳에서 대화를 한다? 어느 한 쪽이 칼을 빼들든, 몽둥이를 집어 들든 할 것이다. 그럼 이 곳은? 당장 오늘만 해도 혜진과 자신 사이에 대화가 되지 않는 상황을 경험했다. 물론 그렇다고 당장 주먹을 쓰지는 않았지만, 자칫 자신이 말을 잘못 꺼냈다면, 그래서 혜진의 자존심에 상처를 줬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과거에 루치드는 마법을 써 동인을 해코지하기도 했다. 기웅의 말대로라면 대화로 풀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기웅의 이상(理想)과는 반대로 두 사람 사이에 생긴 갈등은 대화로 풀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갈등의 최고조에 달한 상황, 서로가 칼을 겨눈 상황에서 한 쪽이 대화를 하자고 제안했을 때 그게 받아들여질까? 루치드는 낮에 잠깐 스쳐간 생각이 떠올랐다.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효율적인 방법.’ 폭력과 대화. 둘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효율적인 걸까? ======================================= [65] 선택(5) “찾았습니다!” 선전팀장이 선거 캠프 사무실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사무실이 엘리베이터도 없는 3층 건물에 위치한 지라 계단을 뛰어 올라와야 했던 선전팀장이 페이디피데스(Pheidippides)의 마지막 전언과도 같이 한마디 말을 남기고 입구 옆 의자 위로 쓰러졌다. “무슨 소리야?”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선전팀장에게 쏠렸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마음고생이 심해 점점 살이 빠지고 있던 지라 사람들의 동정만 더해가고 있던 처지였는데, 이제는 정신 나간 사람마냥 저러고 있으니 안타까움이 배가되었다. 마침 가까운 자리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정책팀장이 다가와 선전팀장의 안부를 물었다. “괜찮아?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호들갑인가?” 한참을 의자 위에서 숨을 고르던 선전팀장이 이내 고개를 들고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그제야 사람들이 자신을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보고들 있음을 알게 되어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선전팀장이 곁에 선 정책팀장을 잡아 끌어 눈높이를 맞추곤 조심스럽게 정보를 전했다. 정책팀장의 눈이 커졌다. 이윽고 정책팀장은 사무실 가장 안쪽에서 못마땅한 얼굴로 상황을 보던 주정호 후보에게 달려가듯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주정호의 눈이 커졌다. 주정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무실 입구로 향했다. 그때까지도 숨을 가누지 못해 헉헉거리던 선전팀장에게 다가간 주정호는 선전팀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고했어요. 거봐. 난 팀장님이 해낼 줄 알았다니까.” 주정호가 웃음을 터뜨리자 사무실 사람들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 특히 회의를 함께 하며 어느 정도 오고 가던 이야기를 알던 사람들은 상황을 읽고 파악했다. ‘강해준 약점이 걸렸구나!’ **** 그 후로 교실 안에 묘한 분위기가 계속 되었지만, 다행스럽게도 큰 사건은 터지지 않았다. 혜진과 유림은 의도적으로 서로를 쳐다보지 않았고, 우연히 눈이 마주쳐도 동시에 시선을 피했다. 은진과 유경 사이에도 비슷했다. 아니, 두 여자아이를 중심으로 나뉜 패거리들 전체가 서로를 피했다. 조용하고 침착한 분위기에 수업 진행에 무리가 없으니 선생님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사실 은밀히 진행되는 여자 아이들 간의 계파싸움을 담임선생님이 눈치 채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설령 눈치 채더라도 사실 말리는 선생님은 없었다. 딱히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이상, 여자들 간의 기싸움이란 남자 아이들 사이의 주먹질만큼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고, 아이들이 성장해 나가면서 겪는 과정 중의 하나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왕따나 지나친 폭력 문제로 발전하지 않는 이상은 선생님들도 눈감아주는 형편이라는 게 현실이었다. 두 집단은 싸우는 대신 자기 패를 불리는데 집중했다. “야, 미경이 재수 없지 않냐? 지가 예쁜 줄 알고 잘난 척 하는 거 봐.” 미경이라는 아이를 뒷담화하면서 거기에 동조하는 아이들을 자기 패거리로 흡수하려는 영악함을 보이는 아이들. “야, 재연이는 토요일에 부르지 말고 우리끼리 가자. 재연이한테 간다고 말하면 안 돼, 알았지?” 재연이라는 아이와 그 쪽 무리를 따돌리면서 동시에 친목과 결속을 다지는 아이들. 두 무리에도 끼지 않고 중립을 지키던 아이들도 더 이상은 중립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어느 한 쪽을 편 들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게 된 것이다. 한 편, 여자들의 계파싸움이 물밑에서 벌어지는 사이, 남학생들은 쉬는 시간마다, 점심시간마다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교실에서 교내 중앙계단까지 거리가 멀지 않았기에 손쉽게 운동장으로 나갈 수 있다는 거리적 이점은 아이들을 운동장으로 내모는 중요한 요소였다.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이 눈치싸움을 벌이든 말든 상관없었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자리에서 책을 탐독하는 루치드였다. 소년은 최근의 일도 있고 해서 잠시 물리학과 수학에서 손을 떼고 인문학 관련 서적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그런 소년을 멀지 않은 곳에서 바라보는 여학생이 있었으니, 바로 유림이었다. 그 날 이후, 유림은 루치드에게로 향하는 애틋하고 간절한 시선을 돌리기 힘들었다. 다시 한 번 루치드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하는 작고 소박한 희망사항을 품은 채 루치드의 뒤통수―루치드가 앉은 자리 줄의 제일 뒷자리가 유림의 자리였기 때문―만 바라보았다. “유림아, 무슨 일 있어?” 라고 물으며 루치드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는 모습 따위를 상상하며. 하지만 책에 빠진 루치드가 고개를 들고 소녀를 바라볼 일은 생기지 않았다. 먼저 다가가볼까 하는 마음도 없진 않았지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혜진의 무리들이 주위에 도사리고 있음을 아는 유림은, 차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뒤통수만 바라보는 게 다였다. 그래도 보다보니 뒤통수도 멋져 보이는 것 같아 그냥저냥 만족하며 지내고 있는 유림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루치드는 보육원 승합차량을 타기 위해 교문을 나와 기다리는 중이었다. 명수가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어쩌면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의미를 알 수 없는 춤을 추고 있었다. 그것도 무반주로. “좋은 일 있어?” 참지 못한 건 루치드 뿐만이 아니었다. 철용이 명수에게 질문하니, 명수가 말하기를, “수업 끝났잖아요.” 라고 대답했다. 수업이 끝난 일이 무반주댄스를 출 만큼 좋은 일이구나, 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는 루치드와 철용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교문 밖이 어수선했다. 낯선 어른들 몇몇이 교문 밖을 서성이고 있는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딱히 학부모로 보이는 것은 아니어서 의심스러운 눈빛을 하고 쳐다보는데, 사람들이, “저기다!” 라고 소리치며 한 쪽으로 달려가는 모습들이 보였다. 호기심이 생긴 루치드와 아이들이 그 곳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마침 교문 밖을 나오는 한 여학생에게 달려드는 모습들이었다. 어지간하면 누군지 몰라 헤맬 법도 한데, 워낙 키가 큰 여학생이다 보니 눈에 안 띌 수가 없는 그 아이는 바로 혜진이었다. 낯선 어른들이 달려들어 가슴에 품고 있던 것을 꺼내 들어 보이는데, 카메라였다. 플래시가 터지고 사람들이 혜진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니가 혜진이야?” “장혜진이야, 강혜진이야?” “너희 아버지가 강해준 후보가 맞니?” “강해준 후보를 자주 만나니? 얼마나 자주 만나니?” “강해준 후보를 최근에 본 게 언제니?” “너희 어머니가 강해준 후보에 대해 뭐라고 하시니?” 저 많은 말들이 한순간에 쏟아지니 제정신인 어른들이라도 정신이 없을 판국이다. 하물며 초등학교 3학년 혜진은 덩치 큰 어른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알아듣기도 힘든 말들을 바늘꽂이에 바늘 꽂듯 찔러대고 있으니 겁을 먹는 건 당연했다. 그러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주춤거리며 물러서다가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넘어진 여학생의 손을 붙잡아 주는 어른들은 없었다. 그들은 손을 건네는 대신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아버지가 강해준 후보라는 사실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니?” “너희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난 게 대학 때 부터라는 소문이 있던데, 들은 적 있니?” “너 말고 혹시 다른 동생은 없어?” 어른들은 어떻게든 대답을 듣고 말겠다는 모양새로 혜진을 다그쳤다. 혜진과 함께 교문을 빠져 나오던 아이들은 어느새 멀찍이 도망가 버리고 그 곳에는 혜진만 길 잃은 고양이마냥 바닥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그만하세요.” 어느새 어른들의 품을 파고들어와 혜진 앞에 우뚝 선 루치드였다. “지금 쓰러져 있는 거 안보이세요? 비키세요.” 잠시 영문을 몰라 하던 기자들은 잠시 머뭇대다가, 다시 본능적으로 질문을 해댔다. “너 누구니?” “혜진이랑 잘 아는 사이니?” “혜진이 아버지가 강해준 후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혜진이가 아버지랑 만나는 모습을 본 적 있니?” “그만하세요!” 어른들은 화끈거리는 열기를 느끼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착각인가 싶지만 분명 자신들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열기가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지만 어디에도 그 열기의 근원이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루치드가 몸을 돌려 혜진에게 물었다. “일어설 수 있겠어?” 혜진은 대답도, 고갯짓도 하지 않았다. 정신이 반쯤 나간 얼굴로 멍하니 루치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을 보니 자기 앞에 누가 서 있는지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루치드는 다시 몸을 돌려 어른들을 바라보았다. 비록 작은 체구지만, 몸으로라도 혜진의 얼굴을 가려주고 싶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기자님들 맞으시죠? 기자님들은 여자 아이가 넘어졌는데 어떻게 가만히 두고 보고만 계시는 거죠? 상식적으로 쓰러진 사람을 부축하고 도와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는 그렇게 배웠는데,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그리고 여자아이가 지금 겁에 질려 있는 모습이 안보이세요? 지금 기자님들이 하는 건 겁박이라고 배웠는데 아닌가요? 여자애를 겁박해서 기사거리를 얻고 기사를 쓰는 게 기자님들의 일인가요? 그런 건 법적으로 옳은 일이고 도덕적으로 옳은 일인건가요?” 순간 얼이 나간 기자단은 루치드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냥 봐도 저학년 초등학생이고, 장혜진과 아는 사이인 듯 보이니 3학년일 테다. 그런데 그런 것치고 말하는 본새는 중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찌됐든 상대는 초등학생. 언론고시를 패스하고 언론사에 입사하여 글짓기를 밥 먹듯, 책읽기를 물마시듯 해온 어른들이 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꼬마야, 비켜라.” “아무것도 모르면서 끼어들지 말거라.” 당연하겠지만, 눈앞의 꼬마를 상대로 주저리주저리 떠들 이유가 그들에게는 없었다. 어른에게 순종하고 권위에 복종하게끔 만드는 것이 지난 세월 기자로서 익힌 노하우였다. 그들이 어른들에게 그러했듯이. 루치드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기시감을 느끼게 하는 말들. 불과 며칠 전에 뒤에 앉아 있는 애한테 들은 말인데. 숨을 고르고 할 말을 정리했다. “지금 기자 분들은 한 여학생을 둘러싸고 겁박을 하며, 동시에 행동에 제약을 가하고 있습니다. 민법상 강박으로 인한 손해행위에 대해 배상청구가 가능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기자 분들은 이에 동의하십니까?” 어? 얘 뭐라는 거야? “아이가 넘어진 상황에서도 물리적 구호행위를 취하지 않았으며, 아이를 겁박하는 행위를 지속하였습니다. 이는 고의적인 강박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미 주변에 많은 증인들이 있으니 이에 대해 기자 분들은 참고하세요.” 응? “비록 증인들의 연령이 13세 미만 아동이 대부분이지만 이 많은 사람들의 증언이 합쳐질 경우 법정에서 분명한 증거의 효력을 다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따라서, 어떤 이유에서든 차후 이 상황에 대해 민사재판이 벌어질 때 기자 분들에게 불리한 상황이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 더 이상 상황을 악화시키지 마시고 물러나주시기를 바랍니다.” 기자들은 정신이 없었다. 방금 자신들이 무엇을 들은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민법을 배우나? 대학교 3학년이 아니고? 이런 멍청한 생각을 하는 기자들도 있었다. “석고야!” 루치드가 옆을 보니, 명수가 보육교사와 함께 달려오고 있었다. 보육교사는 영문도 모른 채 명수에게 끌려오다 기자들 사이에 서 있는 루치드를 발견하고는 낯빛이 변했다. “이게 무슨 일들이신가요?” 보육교사가 얼떨떨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기자들에게 물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하나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루치드는 이에 관여치 않고 몸을 돌려 혜진이를 부축했다. “혜진아, 일어나.”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눈을 돌려 루치드를 올려다보았다. 지금껏 내려다보기만 했던 루치드가 갑자기 커 보였다. 루치드는 혜진을 부축하여 자리를 빠져나왔다. 우선 자리를 피할 생각으로 승합차로 데려가는데, 그것을 제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얼이 빠져 있던 기자들이 정신을 차린 것은 명수가 보육교사를 데리고 승합차에 올라탄 뒤였다. 정신을 차린 몇몇 기자들이 돌아보며 떠나는 승합차를 잡으려는 손짓을 보이다가 이내 기운 빠진 모양새로 돌아섰다. “방금 뭐였지?” “귀신한테 홀린 기분이네.” 기자들은 서로를 쳐다보다, 어느 누구도 명쾌하게 상황을 설명하지 못하자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 [66] 선택(6) “석고야, 아까 니가 뭐라고 한 거야?” 루치드와 가까이 서 있었던 철용이 물었다. 뭔가 월드컵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넣은 사람을 보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예? 아, 별 말 아니었어요.” “되게 어려운 말 한 것 같던데?” “아뇨, 그냥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한 거예요. 책에서 본 거 같긴 한데 저도 무슨 말인지 제대로 몰라요.” 루치드는 1, 2학년 때 교무실을 오가며 선생님들을 도망가게(?) 만드는 스킬(?)을 익혔다. 뭔가 어려운 말을 써서 혼을 빼놓는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런 행동이나 말로 정신없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터득한 루치드가 응용 버전을 선보인 셈이었다. “선생님, 우선 혜진이 집에 데려다 줘야 할 거 같아요.” 보육교사가 룸미러로 뒤를 보며 말했다. “그래야겠구나. 저기, 집이 어디니?” 승합차는 유세 현장의 소란을 뚫으며 거리를 질주했다. **** 혜진은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섰다. 평소라면 ‘다녀왔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외칠 텐데, 오늘은 기운이 없었다. 기분도 아니었고. 신발을 벗으려는데, 남자 구두가 보였다. 혜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왔니?”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어머니가 안방에서 나와 혜진을 반겼다. 현관 앞에 서서 말뚝이라도 된 듯 가만히 서 있는 혜진을 보며 어서 들어오라고 재촉했다. “뭐하니, 들어와. 아빠 왔는데 빨리 들어와서 인사해야지.” “…….” 혜진은 입고 있던 검은색 벨벳 트레이닝 바지를 움켜잡았다. “혜진이 왔어?” 안방에서 하마의 울음소리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비대한 몸을 물속에 감추고 눈만 빼꼼히 내밀어 주위를 살피는 하마 같은 아버지였다. 혜진은 느릿하게 움직여 집 안으로 들어섰다. 때를 맞춰 아버지가 안방에서 나왔다. 한 달에 한 번, 아니 일 년에 10번도 볼까 말까 하는 아버지였다. 재작년까지는 그래도 자주 찾아 왔던 것 같은데, 지금은 거의 찾아오지 않는 아버지였다. 대신 요즘은 포스터로 얼굴을 마주했다. 혜진은 아버지를 본체만체하며 자기 방으로 들어서려 했다. 아버지가 부르지만 않았다면. “혜진아, 이리로 와봐라.” 거실에 놓인 검은색 가죽 소파 위에 앉은 아버지가 혜진을 불렀다. 혜진은 어떻게 할까 하다가 억지로 발을 돌려 아버지 곁으로 다가갔다. “거기 앉아.” 아버지가 1인용 소파를 가리켰다. 혜진은 내키진 않지만 지시에 따라 소파 끝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가죽이 비틀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기자들이 왔었더냐?” 역시 혜진의 반응이 심상치 않아 보이니 그 핵심을 파악해낸 아버지, 강해준이었다. 해준은 혜진의 침묵에서 답을 읽었다. “거기에 대해 할 말이 있다. 우선 미안하다. 되도록이면 이런 일이 없도록 했어야 하는데 말이다. 많이 놀랐겠구나.” “…….” 해준은 마른 뺨을 쓸어내리며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심했다. 들키지 말았어야 할 일이 들켰고, 기자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딸아이를 찾아갔었나보다. 앞으로의 선거도 문제였고, 입을 싸게 놀린 내부의 적도 찾아야 했고, 얄미운 얼굴을 하고 있을 주정호를 물 먹일 방법도 찾아야 했다.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이 없어 초조한 해준이었다. “일단 너희 엄마랑 이야기를 했다. 조만간 넌 엄마랑 함께 미국으로 가게 될 거다. 거기서 공부하는 게 너한테도 좋을 거야.” 이 얼마나 흔해빠진 전략이란 말인가. 그런데 이 흔해빠진 방법이 지금까지의 무수한 사례들을 통해 검증된 방법이라는 사실 때문에 선택하게 되었다. “여기 있으면 눈치도 보이고 학교 다니기도 힘들겠지만, 거기서는 새로운 친구들도 다시 사귈 수 있고 니 미래에도 도움이 될 게다. 이런 상황에서 가게 된 것이 좋지만은 않지만 언제고 널 미국에 보내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공부하는 것이 니 인생의 기회가 될 수 있겠다는 판단을 너희 엄마랑 함께 했다. 그러니 내일부터는 학교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모레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엄마랑 같이 가거라.” 혜진은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오늘 겁박 당했어요.” “응?” 생뚱맞게 무슨 소리야? 겁박이라니? 순간 당황스러운 마음에 이상한 상상까지 스쳐지나갔다. “무슨 소리니?” “…강박으로… 고의적인 강박이라고 했어요.” “강박이 무슨 뜻인지 아니?” 혜진은 도리질을 쳤다. “기자 아저씨들이 겁박했다고 친구가 알려줬어요.” “이 새끼들이…….” 기자 놈들이 딸에게 으름장을 놓았다는 정도로 이해되었다. 아니 그보다 초등학생이 겁박이나 강박이란 표현을 쓸 수 있나?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걔는 그랬는데, 내 앞에 서서 그랬는데… 아빠는 제 걱정이 안 돼요?” 혜진은 도저히 눈물이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힘을 주고 눈을 꼭 감아도 감긴 눈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비집고 흘러내렸다. 그 아이는 자기 앞에서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당당하게 섰었는데, 아버지라는 사람은 자신을 먼 곳으로 보내 버리려고 하고 있었다. 해준은 가만히 바라보다 한 마디 했다. “걱정 한다. 걱정하니까, 널 미국에 보내기로 결정한 거다. 널 위해서 한 엄마 아빠의 선택이야.” “친구랑 헤어지기 싫어요. 친구들이랑 함께 학교 다니고 싶어요.” “안 된다.” 지금쯤 미국에 살 집이 구해졌을 것이다. 미국행 비행기는 오전에 구해 놓았다. “왜요?” 울먹이는 혜진의 목소리도 아버지의 결정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여기 있으면 니가 힘들 거다. 널 위해서 엄마, 아빠가 선택한 거니까 잘 따라주길 바란다. 넌 착하고 똑똑한 아이니까 잘 알아들을 거다.” 상황이 좋다면 훨씬 부드럽게 좋은 아버지 역할에 충실할 수 있을 텐데, 여건이 이렇다보니, 여유가 없다보니 조금 강압적인 어투가 나왔다. ‘어쩔 수 없다, 지금은.’ 해준의 생각이야 어떻든, 혜진의 입장에서는 이 모든 게 억울하고 슬프기만 했다.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부모의 선택에 따라야만 하는 입장.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할 수도 없는 현실. 모든 게 혜진에게 불합리하게 여겨졌다. “나 미국가기 싫어. 가면 죽어버릴 거야.” 눈을 부릅뜨고 해준을 쳐다보는 혜진. “혜진아! 어디서 그런 말버릇이니!” 곁에서 조마조마하게 서 있던 어머니가 화들짝 놀라 혜진을 다그쳤다. 해준은 얼굴이 붉어졌다. 순간 속에서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손이 저절로 위로 올라갔다.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 판인데, 안 그래도 속이 상하는데, 안 그래도 지를 위해서 쓰지 않아도 될 돈까지 써가며 준비했는데, ‘감히… 감히 뭐?’ 혜진은 눈을 꾹 감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그것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대신 나지막한,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는 것 같은 목소리만 들렸다. “지금은 니가 날 원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몇 년 만 지나면 이해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고마워하게 될 거야. 그러니 지금은 아빠 말대로 해라.” 가죽이 짓이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실눈을 뜨니, 짓눌렸던 가죽 소파가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여보…….” “내일 전화하지.” 잠시 후,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신호라도 된 듯 혜진은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 보육원으로 돌아온 루치드는 우선 씻기 위해 세면장을 찾아갔다. 차갑게 쏟아졌던 물이 금세 따뜻한 물로 바뀌었다. 금속핸들을 돌려 차가운 물이 나오게 바꾼 뒤 두 손을 모아 물을 받았다. 차가운 물을 얼굴에 끼얹으니 정신이 확 깨는 느낌이 들었다. 덕분에 한참을 멍텅구리마냥 멈춰있던 뇌가 움직이기 시작한 느낌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 사람들 앞에 서서 일장연설을 했는지 모르겠다. 철용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 당시에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들을 아무렇게나 주워 삼켜 뱉어내기 바빴다. 그간 쌓아온 지식이 많다는 것을 뻐기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고, 논리적인 사고과정을 거쳐 토해낸 문장도 아니었다. 요컨대, 그저 정신없이 허점투성이인 임기응변을 펼친 만용에 불과했다. 다행히도 좋게 상황을 모면했기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이지, 자칫했다간 자신이나 혜진이나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랬을까?’ 유림과 혜진이 맞붙었을 때도, 혜진이 기자들에게 둘러싸였을 때도, 자신은 별 생각 없이 우선 달려들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어떤 이성적인 판단 하에 달려들었다고 보기엔 자신의 대처가 너무 무모해보였다. 그렇다면 충동적으로 달려들었다는 이야기인데, 도대체 왜 그랬을까?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 라는 건 어쩐지 자신의 감정을 속이는 기분이 들었다. 루치드는 솔직히 명수를 제외하고는, 조금 더 인심을 써서, 보육원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사실 제대로 마음을 준 친구가 없었다. 불쌍해보여서? 누가 누굴 동정한다는 것일까? ‘화가 나서?’ 그러고 보니, 화가 난 것 같기도 하다. 어른들 사이에 놓인 혜진의 모습을 떠올리자니 그 자리에 자신이 쪼그리고 앉아서 숨죽이고 있는 모습이 겹쳐졌다. 정신적 폭력이라고 했었나? 기웅은 물리적 폭력이 아닌 정신적 폭력도 폭력이라고 했다. 상대를 윽박지르고 행동을 제약하는 강압적 태도와 말 역시 폭력이라고 했다. 혜진이 당하는 것은 폭력이었고, 자신은 폭력의 피해자를 구하고자 했다. 왜? “나도 피해자니까.” 루치드 역시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력의 희생자였다. 말이나 행동은 없었지만, 자신에게 벌어졌던 그 모든 상황들이 모두 폭력이었다. 이유 없이 가족을 빼앗고, 이유 없이 낯선 곳에 떨어뜨려놓고, 이유 없이 소중한 사람들을 빼앗는 현실이 모두 폭력이었다. 루치드는 그 폭력에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를 품었다. 그리고 그 의지가 투영되어 싸움을 말리려고 했고, 혜진을 구하고자 했다. 자신의 감정을 깨닫자 루치드는 새삼 자신 안에 뭔가 단단한 것이 박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기준이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굳이 말로 하자면, ‘저항정신’이라고 해야 하겠다. 세면대 위에 붙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물기가 가득한 얼굴이 보였다. 생뚱맞게도 루치드는 자신의 얼굴이 낯설어보였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자신의 얼굴을 정면으로, 뚫어져라 바라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지금껏 세수를 할 때도 스쳐가듯 보았지, 이렇게 관찰하듯 바라본 적은 없었다. 루치드의 눈이 루치드의 눈을 마주보았다. 단단하고 투명한 눈이었다. 검은색도 아니고 푸른색도 아니고 갈색도 아닌 묘한 어둠이 깃든 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나라는 사람은 저렇게 생겼구나.’ 순간, 머릿속에서인지 아니면 세면장 바깥에서인지 환청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넌 누구니?” 나? 누가 날 부르지? 루치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찾아보았다. 그 때, 위에서 부르는 건지, 아래에서 들려오는 건지 다시 한 번 같은 질문이 들렸다. “넌 이름이 뭐니?” 루치드는 다시 고개를 돌려 거울을 바라봤다. “내 이름….” 내 이름? 내가 누구냐고? 당연히. “난… 루치드. 루치드다.” 루치드는 정신을 잃었다. **** “선생님, 선생님. 큰일 났어요!” 명수가 계단을 오르던 보육교사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어찌나 거칠게 잡았는지, 하마터면 옷이 벗겨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화들짝 놀란 보육교사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명수의 손을 붙잡고 물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난리니?” “석고가, 석고가….” 숨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뛰어왔는지 허덕대는 명수였다. “왜?” “석고가 쓰러졌어요!” 명수가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보육교사의 치마를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서 보육교사는 그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 [67] 모험(1) 바닥에서 싸늘한 냉기가 올라왔다. 냉기를 피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몸을 뒤척이던 루치드가 불현듯이 정신을 차렸다. 감겨 있던 눈을 떠 보니 주변이 어두웠다. “명수야.” 옆자리에 누워있을 명수를 찾았다. 주위가 이 정도로 어둡다면, 새벽인가? 하는 생각이 언뜻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흐릿한 시야가 어둠의 방해를 뚫고 초점이 서서히 잡힐 때쯤, 옆에 명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두 팔로 바닥을 짚으니, 거친 나뭇결이 느껴졌다. 한 쪽 무릎을 세우고 허리에 힘을 줘 몸을 일으키니, 어렴풋한 기억 속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둘러보니 익숙한 식탁과 의자, 문과 지붕과 마루가 보였다. “돌아왔구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불과 몇 분전, 자신이 무기력하게 당해야만 했던 이적(異蹟)의 폭력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있었는데, 마치 복수라도 하듯 이렇게 또 당하고 말았다. 여전히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누가 장난이라도 하는 것이라면, 그 사람을 잡아다 불에 태워버리고 말리라, 속으로 다짐하는 루치드였다. 우선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자 밖으로 나왔다. 역시나 자신이 살던 기억 속 빈촌의 모습 그대로가 눈앞에 나타났다.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달빛에 빈촌의 빈 집들 지붕에 놓인 기와들이 번들거리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릴 적엔 그저 돌덩어리를 얹은 지붕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저것들이 오랜 시간 불에 구워낸 건축재라는 것을 알게 될 정도의 지식이 쌓였다. 어릴 적엔 마을의 집들이 모두 아무렇게나 지어져 있는 건줄 알았는데, 이제는 나름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고, 남쪽의 햇빛을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지어진 집이라는 것을 알만큼 머리가 깨였다.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고, 그만큼 루치드는 성장했다. 하지만, 이곳은 기억의 마지막에 남아있던 모습 그대로였다. 마치 이곳만 시간의 흐름을 피한 것처럼 느껴졌다. 서쪽 ‘대산맥’에서 불어온 바람이 루치드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소리 없이 다가와 얼굴을 치고 간 까닭에 정신이 번쩍 든 루치드가 고개를 돌려 ‘대산맥’을 바라봤다. 어둠과 구름에 싸여 달빛으로는 그 진체(眞體)를 살피기 힘든 ‘대산맥’이 마치 루치드를 비웃는 것 같았다. 겹겹이 쌓인 산등성이 위로 우뚝 솟아 있던 왼쪽 산이 말했다. “네까짓 게 뭘 할 수 있겠냐?” 달빛을 받아 은은히 존재감을 뽐내던 오른쪽 산이 바람을 집어 던졌다. “건방지게, 어디서 까부는 것이냐?” 가운데서 어깨를 활짝 펴고 큰 형님처럼 서 있던 산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어디서 함부로 설치려 드느냐?” 루치드는 차가운 바람과 맞섰다. 두 다리를 곧게 펴 땅 위에 세우고 두 주먹을 힘껏 쥐었다. 어깨를 펴고 두 눈에 힘을 줬다. 이를 악물고 강하게 의지를 다졌다. “난 결코 포기하지 않겠어.” 내 힘이 약하더라도, 내 권리를 포기하지 않겠다. 내 힘이 부족하더라도, 내 의지를 꺾지 않겠다. 내 몸과 정신은 나만의 것이다. 끝까지 싸우고, 버티고, 이겨내겠다. 굴복하지 않을 것이고, 순종하지 않을 것이며, 지배당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하는 약속, 끝까지 지킬거다.” 루치드는 각오를 단단히 했다. **** 돋을볕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검은 기운을 물리칠 즈음, 집을 나온 루치드는 지난밤의 고민과 갈등을 깨끗이 지워버렸다. 이제는 예전처럼 누군가를 기다리지도 않을 것이고, 그저 당하고만 있지도 않을 것이다. 때문에 소년은 지난 밤 동안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가 앞으로 찾아 가야 할 길에 대한 문제였다. 루치드에게는 몇 가지 선택권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녹스’로 가는 방법이었고, 또 하나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서 실종자의 흔적들을 찾아보는 방법이었다. 녹스로 가야 할지를 고민한 이유는 단순했다. 지난번에 그 곳에서 오랜 시간을 지냈고, 얼굴을 익힌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슬라의 흔적도 찾아보고 싶었다. 비록 무슬라가 스크로파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더라도, 그의 집과 그의 흔적이 그 곳에 있을 터였다. 그것을 다시 한 번 찾아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다만 그곳을 가길 망설인 이유는, 지금 루치드가 세운 목적에 맞지 않은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저 세계에서야 방법을 모르니 그저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얌전하게 공부만 했었다면, 이제는 달랐다. 어떤 흔적이라도, 실마리라도 찾아서 가족을 찾아야 했다. 그것이 루치드의 과제였고 목표였다. ‘그것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공부 했던 건데.’ 혹시나 다시 이곳으로 오게 되었을 때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와서 당황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지난번의 일을 겪으며 깊이 생각했던 바였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으니 당황하게 되고 타인에게 의지하게 되면서 자신의 길을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때문에 핀체노에게 의지했고, 무슬라에게 민폐를 끼쳤었다. 이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했다. ‘지난 번 녹스를 갔을 때에는 가족들이나 빈촌 사람들의 흔적을 발견 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 곳에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된다.’ 따라서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지난번에도 서쪽 산맥은 가봤지만, 사실 그 곳이 얼마나 넓은가. 그가 간 방향에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가 빈촌 사람들이 ‘대산맥’을 가지 않았다는 증거는 될 수 없었다. 자신이 발견을 하지 못했거나, 혹은 사람들이 다른 길을 통해 ‘대산맥’을 넘어갔을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루치드가 다시 한 번 가봐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또 다른 방향은 남쪽이었다. 분명 이 곳이 대륙의 최남단이라는 이야기를 듣긴 했다. 하지만 그 부분에 있어 의문이 드는 점은, 루치드가 저 세계에서 쌓아온 지식과 상식에 맞지 않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심지어는 똑똑하다는 핀체노마저도 이곳이 최남단이기 때문에 남쪽으로는 갈 이유가 없다는 식으로 반응했었다. 그런데 지금도 눈에 보이듯이 남쪽에는 분명 ‘대산맥’만큼은 아니지만 산들이 있고, 산이 있다면 그 너머로 넘어가 볼 수도 있다는 뜻인데 왜 사람들은 이곳을 최남단이라고 표현한 것일까, 하는 점이었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도 하나같이 남쪽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건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설명해주지 않은 부분이 있을지도 몰랐다. 실제로 저 산을 지나면 더 이상 갈 곳이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루치드가 가진 정보로는 그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남쪽의 얕은 습지대를 지나 보이는 산은 분명 ‘대산맥’과 다른 유형의 산이긴 했다. 나무가 거의 보이지 않고 기암절벽과도 같은 지형에, 날카로운 돌들이 짐승의 아가리 속 이빨처럼 쭈뼛 솟아나있는 돌산이 바로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아이들이나 어른들이 섣불리 남쪽으로 갈 이유가 없었다. 캐낼 것도 없었고, 주워올 것도 없었으며, 괜히 갔다가 다치지나 않으면 다행이라 생각될 지형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최남단’이라는 호칭을 붙이며 지나갈 엄두도 못 낼 정도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게 루치드의 생각이었다. 여러모로 의심이 많이 가는 정황이라 여겼다. 때문에 남쪽으로 가봐야 하지 않을까를 지난 밤 고민을 했던 것이다. “그래. 일단 의심스러운 변수는 제거해야지.” 그래야 식은 깔끔해지고, 계산은 단순해지니까. 남쪽으로 향하기 전, 루치드가 할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하는 점이었다. 이건 의외로 중요한 변수일 수 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녹스로 가야한다는 점인데, 여기서 녹스까지 가는 길이 녹녹하지도 않을뿐더러, 시간도 많이 걸린다는 점이었다. 루치드가 조바심을 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언제 다시 이곳에서 다시 저 세계로 가게 될지 모르니까. 때문에 생각해 낸 것이, 빈촌에서 대략적이나마 그 시간의 흐름을 추측해보자는 것이었다. ① 지난 번, 저 세계로 가기 전에 이곳은 초가을이었다. ② 이곳에서의 6개월이 저곳의 시간으로는 6시간 정도였다. 하지만 저곳에서 2년 4개월의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돌아왔다. ③ 현재 이곳의 바람의 방향이나 기온으로 볼 때, 역시 가을로 추측되는 계절이다. 따라서 이곳은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던지, 혹은 1년이나 2년 혹은 몇 십 년이 지난 가을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날이 밝은 후 빈촌의 집들이나 그 실내를 보고 판단해보면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루치드의 생각이었다. '아, 그럴 필요가 없으려나?' 생각해보니, 자신이 준비한 게 단순히 지식만은 아니었다. 그 곳에서는 그다지 필요한 일이 없어 쓰지 않다보니 잠시 잊고 있었다. 다시 집으로 들어온 루치드는 천장에 빛의 구체를 만들었다. 구체라기보다는 발원점(發源點)이라고 해야 옳겠다. 그 지점으로부터 쏘아져 내린 형광등 보다 밝은 하얀 빛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루치드는 집안 곳곳을 환하게 밝히기 위해 여러 곳에 광원(光源)을 만들어 어두운 부분이 없도록 만들었다. 이후 집 안을 샅샅이 살폈다. 부엌 수납장에 담긴 음식들부터 해서 바닥에 쌓인 먼지의 흔적. 천장 모서리에 생긴 거미줄과 방치된 의자의 상태까지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피고 훑었다. ‘이상해.’ 음식―먹다 남은 빵, 야채들, 말린 버섯 등―은 겉으로 보기엔 멀쩡했다. 그래도 차마 뜯어 먹어보지는 않았다. 얕은 수준이지만 먼지가 쌓여있는 게 보이는데 먹을 수가 없었다. 아마 예전의 루치드라면 먹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위생에 대한 개념이 잡힌 루치드는 차마 손을 뻗기가 꺼려졌다. ‘그대로야.’ 식탁이나 바닥에 쌓인 먼지의 양도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다. 문제는 이전에도 살핀 바가 있었지만 정확히 어느 정도로 차이나는 지를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지난번에도 지금과 같이 밝은 빛의 보조를 받아 조사했었다면 비교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들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의지했던 것과 지금을 비교하자면, 해와 달의 차이만큼 확연한 차이가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지가 많지 않다는 점은 시간이 많이 흐른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지금 녹스로 가봐야 하는 게 아닐까?’ 루치드의 마음속에 갈등이 생겼다. 단순히 시간만 알자고 드는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간 김에 샤피로도 보고, 무슬라의 집도 보고 싶어질 것이고, 그러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것만 같았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시간과 남쪽 돌산을 넘어가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여유가 없다. 따라서 녹스는 가슴 속에서 지워야 했다. 지워야 하는데……. 자꾸 무슬라만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 속에 아련한 느낌, 아릿한 아픔이 느껴져 힘들었다. “이러지 말자.” 루치드는 소리 내어 각오를 다졌다. 이곳에서 다시 멍청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이미 충분히 많은 실수와 멍청한 행동을 해 왔었다. 이제는 그래선 안 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 하는 소년이었다. 확신할 순 없지만 건물의 상태나 실내의 모습으로 보건대,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그렇다면 빨리 움직여야 할 때였다. 지금도 늦긴 했지만, 서둘러서, 조금이라도 흔적을 발견해 낼 가능성을 높여야만 했으니까. **** 빈촌에서부터 남쪽 돌산 사이에는 짧지만 얕은 슾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여름이면 이곳에서 날아오른 각종 곤충들이 빈촌을 습격해서 밤잠을 못 이루게 하곤 했었다. 또 가끔 징그럽게 생긴 쥐들이 떼를 이루어 지나가는 모습들이 종종 눈에 띄곤 했다고 했다. 그래서 이 습지대로는 사람들이 잘 오지 않았었다. 반면 처음 이 곳을 방문(?)한 루치드는 의외의 주인(?)으로부터 환영인사를 받았다. “윽!” ======================================= [68] 모험(2) 나이가 어려 이 곳으로 올 이유도, 기회도 없었던 루치드는, 처음 방문한 습지대로부터 풍겨 나오는 습한 기운과 냄새의 습격에 콧등을 찡그렸다. 어디서부터 나는지 알 수 없는 썩은 내와 눅눅한 공기가 습지에 발을 내딛기도 전에 벌써 온 몸을 휘감으며 불쾌감을 느끼게 하였다. 소나기에 젖은 옷으로 산을 뛰어다닐 때도 느낀 적 없는 눅진한 불쾌감은 앞으로의 길이 편치 않으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임시방편으로 주위에 열을 발산하도록 마법을 구현하니, 그나마 조금 괜찮아졌다. 하지만 시각적으로 보이는 회색빛의 암울한 습지대는 그 모습만으로도 테러였다. 가능하다면 빨리 지나가고 싶어졌다. ‘옛날 녹스로 향하던 사람들도 이런 습지대를 지났을까?’ 무슬라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사람들은 천혜의 험지라 불리는 ‘리아빈’이라는 이름의 늪을 지나느라 고생했다고 했다. 과연 그 곳도 이곳만큼 냄새나고 더러운 곳이었을까, 의문이 들었다. 만약 그곳도 이곳만큼 더럽고 냄새나고 위험했다면, 그 사람들은 정말 죽음과 절망이 가득한 상황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의지가 남달랐으리라. 물론 루치드도 지금 남다른 의지를 품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자신감과 다르게 선뜻 발을 내밀어 습지를 건너는 게 꺼려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루치드가 습지 앞에서 우물쭈물 대던 사이, 멀리서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그 시선은 점점 루치드에게 다가왔다. 소리 없이. **** ‘그래, 별 수 없어. 이 정도에서 멈추지 않겠어.’ 발을 내밀었다. 찐득한 회색 진흙이 발모양에 맞춰 밀려나며 숨겨진 향을 내뿜었다. “윽!” 진흙 속에 뭐가 감추어져 있기에 밟는 순간 이토록 역한 냄새가 나는 걸까? 하지만 차마 ‘확대’ 마법을 써서 진흙 속을 자세히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보기에도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불편한데 그 안을 살핀다면 보통 사람의 비위로는 참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냄새만 맡아도 이렇게 속이 올라오는 것 같은데. 루치드는 자신이 땅을 밟은 건지, 똥을 밟은 건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발목이 묻힐 만큼 깊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미 신발을 거쳐 발에 느껴지는 물컹한 느낌 때문에 불쾌감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루치드는 다시 뒤로 물러섰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밟은 진흙이 서서히 옅은 색으로 말라갔다. 임기응변이었지만 높은 열을 뿜어내 축축한 느낌이나마 줄이고 싶었다. 그런데 진흙이 마르면서 향도 진해지는 것 같았다. “미치겠네.” 이건 루치드가 지금까지 겪었던 고난이나 위기와는 또 다른 성질의 위기였다. 제 정신인 사람이라면 이곳을 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리라 생각되었다. 고작 100걸음 정도의 넓이로 펼쳐진 습지를 건너지 못해 이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우습지도 않았다. 최남단이 땅의 끝이라서가 아니라 갈 수 없는 땅이라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문득 아래를 바라보니 마른 땅에 방금 자신이 남겨놓은 진흙의 흔적이 보였다. ‘만약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갔다면, 건너편에서 흔적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자.” 계속 시간을 끌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무너지려던 의지를 다지게 만들었다. 루치드는 매고 있던 배낭에서 헌옷가지―자신의 옷은 아니고, 옆집에서 ‘빌린’ 헌옷들이었다―를 꺼내 눈 아래를 모두 틀어막고, 한 걸음씩 걸어 나갔다. 후각을 희생하기보다는 촉각을 희생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법은 쓰지 않았다. 발밑만 바라보며 한 걸음 조심스럽게 걸어가던 루치드가 문득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그것은 처음 보는 생명체였다. 어지간한 어른보다 더 큰 몸뚱이에, 소년의 다리보다 더 긴 푸른색 깃털을 두르고 있었고, 양 옆에는 방패로 써도 될 법한 길고 두꺼운 날개를 찰싹 붙이고 있었다. 축구공 크기의 2배는 될 것 같은 머리와 잿빛의 넓적한 부리는 끝이 날카롭게 벼려져 있어 매우 위협적이었다. 게다가 그 부리 끝에는 회색빛 진흙이 묻어있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위협적인 것은 루치드를 바라보는 눈이었다. 소년의 주먹보다 더 큰 눈동자와 검은 동공이 소년을 호기심 깃든 눈으로 바라보고 있어 그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였다. 소년의 키보다 더 길고 얇은 다리를 습지에 박아 넣은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것은 ‘새’였다. “타조?” 하지만 루치드가 알기로 타조는 저렇게 짧고 굵은 목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타조라고 보기에 무리가 있지만, 아는 새가 많지 않았던 그는 큰 키와 긴 다리를 가진 새의 외형을 보고 그렇게 추측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언제 이렇게까지 다가왔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비록 루치드가 땅만 보며 걸음에만 신경을 몰두하고 있었던 점은 있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가깝게 다가올 때까지 몰랐다는 것은 앞으로의 루치드의 행보에 있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조심성이 없구나. 나는.’ 대략 10걸음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던 새는, 만약 몰랐다면 원래 그 자리에 서 있던 동상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움직임이 없었다. 새의 눈깔도 그저 색칠한 구슬을 박아놓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루치드에게로 향한 채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저 새가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몰라 루치드는 한참동안 움직임을 멈추고 새를 관찰했다. 루치드도 멈추고, 새도 멈추고, 딛는 발마다 밀려나던 진흙도 멈췄다. 어쩐지 바람도 불지 않았다. 어느새 높게 솟은 태양이 발밑에 만들어 둔 그림자마저도 멈춘 것 같았다. 루치드는 묘한 환상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멈춰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는 시간마저 멈춘 것 같았다. 아니 이 공간 자체가 현실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어쩐지… 가슴 속에서,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떠오를 듯 말 듯한 기분도 들고, 간질거리는 느낌도 들었다. ‘뭐지?’ 움직이지 못하는 마법에라도 걸린 걸까, 싶은 마음에 신발 속에 감쳐진 발가락을 꼼지락 거려보았다. 당연히 움직였다. 그리고 움직임을 인지한 그 순간 간질거리던 느낌도 사라졌다.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친 기분인데, 그것이 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대로 저 새와 눈싸움을 하면서 대치상태를 오래하는 것이 좋지 않다, 라는 판단을 내릴 뿐이었다. 누차 말하지만, 루치드는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딱 정해진 시간은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게 시간을 사용해야 하는데, 이런 냄새나는 곳에서 이상한 얼굴로 노려보는 새 따위와 눈싸움을 하고 있을 시간은 없는 것이다. 딱히 위기감이 느껴지진 않아서 마법으로 저 새를 공격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눈에 거슬리는 모든 것을 파괴한다, 같은 막돼먹은 명제를 루치드는 신용하지 않았다. “비켜라, 이 하찮은 것들!” 따위의 유치한 대사를 내뱉으며 질주하던 형근이라면 또 모를까. 그래도 중학교에 가고 나서 정신 차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우선, 루치드는 평화적이고 안전한 방법을 도모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왼 발을 들었다. 혹시 모를 위협이 있을지 모르니, 시선은 계속 새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새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진흙에서 발이 떨어졌다. 조심스럽게 왼쪽으로 한 걸음 정도 떨어진 곳으로 발을 내렸다. 엉거주춤한 자세가 됐지만 경계태세는 계속 유지했다. 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번엔 오른발을 들었다. 자세가 좋지 않아 중심을 왼쪽으로 기울인 채 오른발을 들었다. 들러붙어 있던 발바닥을 진흙이 쉽게 놔주지 않아 루치드는 속으로 끙끙거렸다. 다시 쩍 하고 바닥에서 떨어진 발을 왼발 옆으로 슬며시 옮겼다. 중간에 잠깐 휘청거리기도 했지만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새가 움직였다. 새가 오른다리를 들었다. 루치드보다 훨씬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들어 올린 오른다리―세 개의 발가락이 보였는데 루치드의 머리를 완전히 감싸 쥐고도 남을 정도로 커보였다―가 옆으로 벌어졌다가 다시 진흙 속으로 날카로운 발톱을 숨겼다. 왼다리를 들었다. 루치드가 휘청거렸던 자세였지만 새는 신기하게도 그 큰 몸뚱이를 오른다리 하나로 잘 지탱하고 있었다. 왼다리는 매우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며 오른 다리 옆으로 옮겨졌다. 새는 여전히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눈 속에서 비웃음이 보이는 것 같았다. 루치드는 괜히 발끈하는 심정이 들었다. ‘저게 누굴 놀리나?’ 루치드는 다시 옆으로 한 걸음을 힘겹게 옮겼다. 새도 같은 간격을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이대로 계속 옆으로 가는 것은 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루치드가 과감하게 한 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새는 똑같이 한 걸음을 다가왔다. 한 사람과 한 마리 새 사이의 거리가 8걸음 정도로 가까워졌다. 진짜 여차하면 불을 질러버리겠다는 각오를 하고 한 걸음을 더 다가간 루치드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온 새의 날카로운 부리에 저도 모르게 침을 꿀떡 삼켰다. 지금까지의 움직임만 보자면, 저 새는 루치드보다 훨씬 쉽고 빠르게 습지 위를 오갈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저 새가 어떤 감쳐둔 무기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루치드 역시 숨겨놓은 한 수―마법―가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돼 주었다. 하지만 용기와 별개로 상황은 루치드에게 별로 좋지 않았다. “아 정말… 미치겠네.” 결코 물러섬이 없는 새 때문에 루치드는 저도 모르게 짜증 섞인 말을 뱉었다. ―꾸에엑 무거운 부리 때문인지 턱을 내린 모양새로 있던 새가 기성(奇聲)을 토했다. 흠칫 놀란 루치드가 손을 뻗었다. 그러나 새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혹시 날 따라하나?” 루치드가 슬쩍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반응이 없었다. 더 높이 들어 올려 귀 옆에 대었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왼손도 위로 들어올렸다. ―꾸에엑 다른 움직임을 보이는 대신 다시 굵은 파이프 속을 긁어대는 울음을 터뜨렸다. 왠지 너 뭐하냐, 라고 핀잔을 주는 것 같았다. 루치드는 더 이상 바보짓은 하지 않겠노라고 생각했다. 맹렬하게 뇌를 가동하여 계산을 한 뒤, 루치드는 돌산을 향해, 새를 피하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방향으로 마찰계수를 적당히 낮추고 달렸다. 처음에는 너무 미끄러워져 휘청였지만 이내 조건을 수정하여 마법을 시전한 결과, 어느 정도 진흙의 저항을 덜 받으면서 달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때를 맞춰 새가 옆에 나란히 서서 달렸다. 머리를 똑바로 세우고, 시선은 여전히 루치드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처럼 루치드에게 고정된 채였다. 고고한 발레리나의 그것처럼 발을 번갈아 움직이며 진득한 습지 위를 뛰듯이 걸었다. 그럼에도 워낙 키가 커서인지 루치드의 스피드를 잘 따라왔다. 그 모습을 흘깃 쳐다본 루치드가 마법을 사용했다. 새의 진로방향으로 아예 마찰 계수를 0으로 만들어버렸다. 순간 중심을 잃은 새가 비틀댔다. 넘어지나, 싶은 순간에 새가 홰치듯이 날갯짓을 했다. 몸통 옆에 붙어 있을 때는 설마 했는데, 펼치니 자기 키보다 더 크고 넓은 날개였다. 순간적으로 몸이 떠오를 것처럼 위로 떴다가 이내 내려앉았지만, 대신 몸의 중심을 잘 잡았는지 습지 위를 뒹구는 참상은 일어나지 않아 루치드는 속으로 아쉬움을 삼켰다. 그러나 덕분에 루치드와 새 사이의 거리는 어느 정도 멀어졌다. 헌 옷가지를 들고 있던 오른손은 여전히 코를 막고 입을 막았다. 인간과 새가 동시에 습지 위를 뛰어다니자, 구역질나고 비위 상하는 역한 냄새가 천지사방에 다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꾸에엑 등 뒤에서 다시 새의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루치드는 돌아보지 않았다. 뛰면 금방 건널 수 있는 습지를 괜히 냄새를 탓하며 건너지 못하고 우물쭈물 했던 자신이 한심했고, 혹시라도 돌아보았다가 발을 잘못 디디면 습지 탈출이 실패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후드득 ‘어? 이 소리는 날갯짓 소리 같은데?’ 루치드는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앞으로 20걸음 정도를 더 뛰면 될 것 같은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리고 설마 하는 마음에 루치드는 뒤를 돌아보았다. ======================================= [69] 모험(3)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이 순간 루치드는 그렇게 바랐다. 하지만 마음을 읽지 못하는 루치드는 대신 진흙탕에 처박혀 날개를 퍼덕이는, 꼴사나운 모양의 새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루치드는 넘어진 와중에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검은 눈동자로부터 형언하기 힘든 감정을 느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진흙탕 위에서 버둥대면서도 자신을 향한 시선만큼은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 눈이 어쩐지 위협적이라기보다는 안타까워보였다. 루치드는 달리던 동작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진흙 속에 박힌 무거운 머리와 부리는 아무런 힘도 받지 못하는지 꿈틀거릴 뿐이고, 다리로는 세차게 바닥을 긁어내는 것 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거대한 날개는 연신 진흙탕 위를 퍼덕이며 바닥을 세차게 내리치고는 있었지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도와달라는 걸까?’ 물론 아직도 조심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무거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비틀대면서도 일어나기 위해 열심히 몸부림치는 모습이 안타깝고, 자신만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에서 엿본 묘한 감정도 무시하기 힘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새의 발 앞에 놓인 땅에 마찰계수를 0으로 만드는 마법을 걸어놓았던 상태였다. 혹시 그것 때문인가 싶어 마법을 취소했다. 그랬더니 두꺼운 날개를 팔처럼 사용하여 땅을 짚고, 다리를 땅에 박고 안간힘을 써서 몸을 일으키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차례 버둥대더니만 끝끝내 몸을 일으켰다. 새는 고개를 한차례 털어낸 뒤, 나름 처음의 고고함을 유지하려고 그러는지―물론 그럴 의도가 있을 리 없지만은―몸을 꼿꼿이 세우지만, 이미 새는 역한 진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진흙 위를 한참 구른 탓에 가지런했던 깃털도 듬성듬성 서 있었고, 갈회색 빛 진흙은 본래의 푸른 빛 감돌던 몸뚱이를 지저분하게 뒤덮고 있었다. 오로지 새의 눈동자만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모습으로 루치드를 직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미안.” 어쩐지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어차피 거리도 많이 떨어져 있고, 위협도 덜 될 것 같아 거뜬히 사과할 수 있었다. 눈길 한 번 돌리지 않고 루치드를 바라보던 새가 날개를 한 차례 퍼덕였다. 아마도 날개와 몸에 붙은 진흙을 털어내기 위한 몸부림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리 쉬이 떨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주변에 흐르는 물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정말 미안해. 내가 바빠서 그래. 이해해줘.” 물론 알아들을 가능성은 없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자신이 새에게 저지른(?) 만행에 사죄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래야만 자신의 마음도 홀가분해질 것 같았다. 새를 바라보던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천천히 뒷걸음질을 했다. 그러나 이번에 새는 움직이지 않았고, 그저 아까처럼 루치드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윽고 뒷걸음질로만 움직여 습지를 완전히 건너게 되었다. 습지 가운데서 루치드를 바라보던 새는 그제야 천천히 몸을 돌려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돌아서는 새의 눈에서 여전히 묘한 감정이 느껴져, 루치드는 마치 새가 그러했듯이 자신도 새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봐 주었다. “심심했던 걸까?” 이 넓은 습지에 왜 저 새 한 마리만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혼자였다면 심심해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종이 다르고 말이 통하지 않으니 루치드가 같이 어울려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그렇지만 여기서 시간을 허비해서는 될 일도 안 될 것이다. 루치드는 이내 몸을 돌려 돌산으로 향했다. 미련이든 뭐든, 찝찝한 감정은 발밑에 말라붙은 진흙과 함께 버무려 이곳에 버려두고, 루치드는 습지를 떠났다. **** 돌산을 올라가는 길은 바로 지척에 있었다. 다만 그 길을 길이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산기슭부터 커다란 바위들로 둘러싸인 가운데, 딱 한 곳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틈이 보였다. 빈촌 실골목도 이 길보다는 넓을 정도였다. 그 외는 루치드가 팔을 뻗어도 잡을 구석하나 없을 만큼 날카롭거나 혹은 높이 솟은 바위덩어리여서 루치드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선 신발에 붙은 진흙들을 마법으로 바싹 마르게 한 뒤, 바닥에 박힌 돌 위에 문질러 떼어냈다. 발이 가벼워진 뒤에야 주변을 살피며 혹시 모른 흔적들을 살폈다. 기이하게도 이곳은―산기슭과 바위틈으로 조그만 잔풀이 없지는 않았지만―작은 나무 하나 자라지 않는 순수한 돌산이었다. 어떻게 이런 지형이 만들어질 수 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식물, 특히 꽃이라도 한 두 송이 피어있을 법한테 그 흔한 야생화도 보이지 않았다. 차후에 선생님께 질문할 기회가 생긴다면 첫 번째로 물어봐야겠다고 속다짐하는 루치드였다. 주변에는 특이하리만큼 특징적인 흔적들이 없었다. 사람들의 흔적은 물론, 짐승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새 발자국이라도 있을까 싶었지만 발견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검불하나 없는 산기슭은 처음이라 할 정도였다. 곳곳에 조막만한 돌의 파편들이 널려 있고, 두드러기 나듯이 수많은 바위들이 대지위로 솟아나 있어, 어느 곳도 편안하게 앉을만한 자리 하나 없는 상황이었다. 고갤 들어 위를 바라보니 새삼 이 돌산의 위력이 느껴졌다. 그냥 절벽과 절벽이 겹겹이 쌓인 형태인데다 과연 길이라는 게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의 산이라 보는 게 옳겠다. 당장 보이는 자드락길을 따라 올라가더라도 중간에 어떤 곤란한 일이 생길지 예상할 수 없었다. 멀리서 보던 것과 다르게, 가까이서 보니 과연 이 산을 넘는다는 게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하게 거대한 석벽이고 무식하리만치 튼튼한 성문이었다. “과연 사람들이 이곳으로 왔을까?” 절로 한숨이 나왔다. 굳은 의지를 다진 게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서 습지 앞에서, 그리고 돌산 앞에서 그 의지가 무너지려는 기색을 보였다. 자신의 각오라는 게 이렇게 나약하고 꺾이기 쉬운 것이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내가 이러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닌데.” 하지만 자책한다고 해서 방법이 나올 것도 아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이미 정오도 지나, 대산맥을 향해 달려가는 태양이 보였다. 역시 가을이라 낮이 짧았다. 이미 습지를 건너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 터라, 섣불리 산을 올랐다가는 도리어 구조를 요청해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몰랐다.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루치드가 배우고 익히 바가 많고, 마법까지 익히고 있다지만 그래도 아직 10살에 불과하다. 신체적으로도 불리한 면이 많았다.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성숙되지 못한 탓에 어지간한 각오만으로, 어설픈 준비만으로 이 산을 오르는 것은 어려웠다. 다행히도 본인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루치드는 가까운 돌짬을 찾아 그곳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아직 해가 지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적당한 자리를 찾고 노숙을 준비하기에는 빠듯한 시간이 될지도 몰랐다. 게다가 습지에서처럼 느닷없이 나타나는 불청객을 혹 야밤에라도 만나게 되면 곤란했다. 다행히 멀지 않은 비탈길 옆으로 적당한 틈이 보였다. 조금 산을 오르는 수고는 하더라도 안전하게 하룻밤을 보내기 위한 수고비라 생각했다. 루치드는 바위들을 기어오르거나 뛰어넘으며 위로 올라갔다. 아직은 산의 초입이라 넘기 힘들 정도로 큰 바위는 없어 무사히 돌짬까지 올 수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큰, 마치 작은 절벽이라 해도 믿을 만큼 우뚝 솟은 바위가 아래쪽으로 갈수록 갈라지면서 그 틈에 적당한 공간이 만들어져 있었다. 비록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 루치드라도 일부러 바람을 맞을 필요는 없으니, 그 바위 틈 사이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이럴 때는 루치드의 몸이 크지 않다는 게 다행이었다. 배낭을 풀어 안에 든 물통을 꺼냈다. 아침부터 소란스럽게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적당한 옷가지와 물통을 수배하느라 힘들었지만 다행히 필요하다 싶은 것들은 다 챙길 수 있었다. 이전에 한 번 깨끗이 털었던(?) 적이 있어서 본래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까지 찾아가야 했었지만, 어차피 주인도 없었고, 오히려 그 주인을 찾아야 할 판국이니 적당히 필요하다 싶으면 모두 배낭에 챙겨 넣었었다. “흐으.” 시원한 물이 식도를 지나가니, 갈증과 긴장이 동시에 풀리는 기분이었다. 루치드가 찾아들어간 곳이 북쪽을 향해 트여있어, 햇볕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때문에 어두운 공간에 드러누운 채 눈을 감고 있자니 금세 잠이 들었다. 이따금씩 마법이 풀리거나 찬바람이 기어들어오면 재차 마법을 시전해 찬 기운을 몰아냈다. **** 돌이 깨진 틈으로 바람이 지나가며 휘파람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깬 루치드가 주위를 둘러보니 사위가 어둑어둑했다. ―휘이이 소리가 나는 곳이 어딘가 싶어 귀를 기울이니 막혀있는 돌 위쪽에서 나는 것 같았다. 아마도 지금 루치드가 있는 곳 외에도 틈이 벌어져 있는 곳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대충 시간이라도 가늠하기 위해 돌짬을 빠져 나왔다. 우선 약하게 광원을 만들어 주위를 밝힌 뒤, 조심스럽게 기어 나와 하늘을 보았다. 해거름도 한참이 지났었는지, 대산맥 위로 연보랏빛 놀이 펼쳐져있었다. 그 산맥에서 불어온 막새바람이 루치드의 뺨을 스쳤다가 바위 사이로 빠져나갔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놀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보랏빛이 검게 물들고, 가장 높게 솟은 산의 중턱에 늦저녁의 안개가 서서히 만들어 지고 있었다. 다시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낮에 습지에서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는데 또 다시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뭐지?’ 아직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분 때문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분명 자신의 가슴 속에서 벌어지는 일인데 자신이 모른다는 게 답답했다. 누군가에게 묻고 싶어도 물을 사람이 없고, 도움을 청하고 싶어도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다. 만약 이것이 어떤 병의 전조(前兆)라면 어떡하지? 가슴에 손을 올리고 있으려니, 또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자세로 한참을 있었지만 별 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알듯말듯한데 뭔지 모르는 기분이 이렇게 답답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관둘래.’ 차라리 이 시간에 다른 효율적인 것을 찾아 생각하는 것이 낫겠다. 이를테면 돌산을 쉽게 오르는 방법 같은. 객관적으로 루치드는 이제 겨우 140㎝정도인데 이 신체로 눈앞의 돌산을 넘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뿐인가? 자칫 잘못했다간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때문에 루치드로서는 효율적인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그리고 루치드에게는 마법이라는 도구가 있었다. 꽤 효율성을 보장해주는 도구라 할 수 있겠다. 문제는 어떤 마법을 써야 하는가, 에 대한 문제였다.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마법 중에서 효과적인 것은 마찰력을 이용하는 마법 정도 밖에는 없는데 이 마법이 과연 산을 넘는데 도움이 될까 의심스러웠다. 사실 이전부터 생각하던 거지만, 지금은 새로운 마법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음?” 간질거리는 기분. 알듯말듯한 기분. 머릿속에서 희미한 안개가 일렁이는 기분. ‘뭐지?’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머릿속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이미지에 집중했다. 그 이미지는 두터운 안개 같은 장막에 가려져 선명하지 않았다. 한겨울, 두꺼운 이불을 둘러쓰고 침대에 웅크리고 있는 명수를 깨울 때 루치드는 있는 힘을 다해 이불을 잡아당겼었다. 그 때 명수가 헤, 하는 웃음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곤 했었다. 지금. 실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덮고 있는 희미한 장막을 걷어내야 했다.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게 무엇인지 밝혀야 했다. 그래야 이 답답함이 사라질 것 같았다. ======================================= [70] 모험(4) 루치드는 있는 힘껏 장막을 걷어냈다. 벗겨지기를 거부하는 장막을 걷어내기 위해 전력을 다한 루치드. 저항하던 장막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루치드의 의지에 의해 연기처럼 흩어지듯 사라졌다. 루치드는 장막이 사라지고 드러난 그것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없지는 않았다. 다만 눈에 보이는 이미지가 아니었다. 무엇인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루치드는 인지했지만,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물처럼 투명하지만, 공기처럼 존재감을 느끼기 힘든, 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무엇인가가 그 자리에 있었다. 계속 궁리하면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루치드는 뚫어져라 그 공간을 바라보았다. ―꼬르륵 정신이 번쩍 든 루치드가 현실로 돌아왔다. 하늘에는 하얀 조각 달이 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깊은 시간을 생각에 잠겨 있었던 모양이었다. 굶주림을 참기에 루치드의 신체는 아직 여물지 못했고, 게다가 오늘 하루 많은 일이 있었는데도 제 때 끼니를 챙기지 못했던 잘못이 있었다. 루치드는 미련과 아쉬움이 남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우선은 배부터 채우고 다시 생각을 하든 뭘 하든 해야 할 것 같았다. 배낭을 뒤적거려 말린 고기를 꺼냈다. 이른 아침, 배낭을 꾸릴 때 준비해 놨던 고기였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얻으려했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식량이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돌산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는 마당에 아무런 준비 없이 산을 오른다는 것은 이미 지난번에 겪어 본 실수였다. 그리고 두 번의 실수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조리법을 아는 것도 아닌 루치드였지만, 대충 옆에서 보고 배운 게 있었다. 우선 수거한 고기들을 그대로 들고 가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물로 대충 씻어낸 후 불에 익혔다. 그리고 강한 열을 쏘아내 바짝 말리니, 즉석 육포 못지않은 음식이 탄생했다. 만약 조미(助味)에 대한 개념이 있었다면, 더 맛있는 육포를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루치드였다. 고기 외에도 배낭에는 말린 무라던가 말린 배추 따위를 넣어두어 만일에 대비했다. 마법이 여러모로 유용했음을 다시 한 번 느꼈던 루치드였다. 배를 채우며 루치드는 다시 아까의 ‘실체’를 고민했다. 과연 자신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그 ‘실체’는 무엇일까에 대해. 하지만 이미 지나간 버스였는지, 그 느낌과 실체는 다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느새 달이 높이 떠올라 하늘 가운데 자리 잡았다. 그 때까지도 머릿속을 간질거리게 만들었던 것의 정체에 대해 궁리해보았지만 역시 오리무중이었다. 이제는 포기해야 할 때였다. 시간을 지체하다간 내일의 산행에 어려움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정체를 파악하는 일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후회할 수도 있지만, 시간은 여전히 루치드의 편이 아니었으니까. 다음 날부터 루치드는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나마 순탄했다. 자갈이나 작은 바위가 잔뜩 놓인 길이었지만 오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정오가 지날 무렵, 깎아지른 절벽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옆으로 돌아갈 만한 길도 보이지 않아 천상 이 절벽을 타고 올라가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루치드는 이런 상황을 이미 산 아래에서부터 예상을 했었다. 그냥 보기에도 절벽위에 절벽이 놓인 산이었는데 이런 지형이 나오는 건 당연했다. 저 세계에서 최초의 과학 실험을 했던 기억이 났다. 책을 비스듬히 세워 경사면을 만들고, 그 위에 연필을 굴리는 실험이었다. 빗변에 강한 마찰력을 주었을 대 연필이 어느 정도의 마찰력에 반응하는지, 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한 실험이었다. 이 앞에 놓인 절벽은 그 실험의 연장선이었다. 그리고 연필 대신 루치드가 직접 실험체가 될 뿐이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손을 들어올렸다. 수직절벽이었으면 조금 더 망설였을지도 모르지만, 다행인지 약간은 경사가 있는 절벽이었다. 손을 뻗어 적당히 잡을 만한 자리가 있는 지 더듬었다. 뒤이어 오른발로 절벽을 디뎠다. 루치드는 온 몸을 절벽에 붙인 채 손과 발을 번갈아 움직이며 절벽을 기어올랐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본다면 납작도마뱀을 연상했을 움직임이었다. 만약 루치드의 몸무게가 지금보다 더 나갔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몸무게와 경사면이라는 조건에서 루치드가 구현 가능한 마찰 계수―저항은 다행히도 이 정도 경사의 절벽을 오르는데 무리가 없었다. 물론 끈끈이처럼 접착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한 걸음이 조심스러웠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몸에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이제는 추위나 더위에 강해진 루치드였지만, 절벽을 오르기 위해 쓰는 힘 때문에 몸에 절로 땀이 났다. 바람은 두 손을 대신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었다. 행여나 하는 마음에 루치드는 바람이 불 때면 절벽에 찰싹 붙어 움직임을 멈췄다. 호흡이 거칠었지만 별 수 없었다. 절벽을 다 올랐을 무렵, 두 손과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꽤 높은 절벽을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올랐더니 마지막에는 힘이 부쳤다. 마찰은 미끄러지지 않게 해준다 뿐이었지 결국 팔 힘과 다리 힘으로 밀고 올라온 셈이었다.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하지 않았던 루치드는 체력이나 근력이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 운동을 한다고 갑작스런 체력 상승이 될 리는 만무했다. 그나마 지금보다 어릴 때 쌓아두었던 체력과 운동신경이 보험이 되어 이 정도까지 오를 수 있었다는 사실에 루치드는 감사해야 했다. 간신히 절벽을 올라온 루치드는 그대로 자리에 드러누웠다. 가쁜 숨을 고르는데도 한참이 걸릴 정도였다. 어느 정도 숨을 고르고 난 뒤, 배낭에서 말린 고기를 꺼내 질겅질겅 씹어댔다. 조미가 안 된 고기다보니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것이, 그저 배를 채우기 위한 용도로서 억지로 씹어댈 뿐이었다. 문득 윤정이 생각났다. 작년에 윤정은 보육원을 졸업했다. 졸업하기 전까지 윤정은 다정한 누나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가끔 주말에 시립도서관을 함께 간다거나, 맛있는 음식들을 사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루치드를 돌봐주었다. 고3인데도 딱히 대학 생각이 없다던 윤정은, 틈만 나면 식당으로 루치드를 데리고 가, 음식을 직접 만들어 주었다. “맛있니?” 윤정은 자신이 만든 음식을 평가받고 싶어 했고, 특히 루치드가 해주는 평가를 굉장히 좋아했다. 그래봐야 루치드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곤, “맛있어요.” 가 다였지만, 그래도 늘 그 말을 듣고 싶어 했었다. 보육원을 졸업하는 날, 루치드의 어깨를 잡고 눈높이를 맞춘 윤정이 말했다. “다음에 누나가 레스토랑을 차리면 그 때 와서 꼭 맛을 봐주고 평가해줘. 기다릴게.” 작고 귀여운 얼굴의 윤정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루치드에게 덧붙였다. “그 때도 꼭 맛있다고 해줘야 돼. 알았지?” 어느새 씹고 있던 육포가 사라졌다. 배는 채워지지 않았지만 이 정도에 만족해야 했다. 생각보다 산을 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음식이나 물도 아껴야만 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이 산에서 다른 구호책을 발견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먹거리만 문제가 아니었다. 매일 밤이 되기 전에 새로운 돌짬이나, 혹은 하다못해 바위그늘이라도 찾아야 했다. 아무리 풍찬노숙이라도 지붕은 있어야 밤중에 갑자기 비라도 내릴 때 피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바위가 많다더라도 적당한 자리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터무니없이 작은 바위틈으로 비집고 들어가기도 힘들었고, 적당한 바위그늘을 찾더라도 뾰족하게 튀어나온 돌덩이가 아래 깔려있으면 잠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잠자리를 찾고 음식을 아껴가며 먹기를 반복하다보니 며칠의 시간이 지났다. 마침내 루치드는 산의 재빼기에 올랐다. 산을 넘기 위해 마루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적당한 고개를 찾아 넘으니 마침내 산 너머를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까지 오게 된 것이다. 재빼기에 오를 즈음 이미 주위가 어둑해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조급한 마음에 광원을 만든다 쳐도 산 아래를 환히 밝힐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내일을 기약하기로 했다. 대신 잠잘 곳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돌산의 장점이라면 야생동물이 없다는 점이었다. 예전처럼 산늑대의 습격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반대로 단점이라면 산짐승이 없다는 점이었다. 산짐승이 없다보니 불로 구워 먹을 식량조차 구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차라리 이럴 때는 늑대라도 달려와 주었으면 했다. 너무 많으면 또 그것대로 곤란했겠지만. “모조리 불로 구워 다가 구이 해먹으면 좋을 텐데.” 지난 번 늑대에게 당했던 게 어지간해서는 잊기 힘들었다. 복수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지금의 루치드라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다만 지금은 아니었다. 배낭 속에는 식량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말린 고기도 아끼고 아껴서 먹었지만, 체력 소비가 많은 지난 등산 과정에서 거의 대부분을 소비했다. 고기를 아끼느라 채소를 많이 먹었더니 전체적으로 식량이 많이 남지 않았다. 루치드는 밤을 지새울 만한 돌짬이나 바위그늘이라도 찾아볼 요량으로 주위를 둘러보는데, 기이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 멀지 않은 곳에 동굴이 있었다. 높이가 2미터는 넘을 것 같은, 그리 크지만은 않은 입구였지만 그래도 동굴임은 분명해 보였다. 루치드는 이런 곳에서 동굴을 발견할 거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던 탓에 얼떨떨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우선은 바람이나 늦가을의 이슬 정도는 피할 수 있을 곳을 찾았다는 생각에 동굴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물론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루치드는 우선 동굴 내부를 둘러보기로 했다. 어두운 동굴 내부가 스위치라도 켠 듯 밝아졌다. 머리 위에 광원을 만들어 둔 루치드는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기온의 차이 때문인지 내부의 벽은 다소 촉촉한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흙보다 돌과 바위가 대부분이었다. 바위에 구멍이 난건지, 구멍이 난 동굴에 바위가 박혀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갑자기 무너지지는 않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서 맞물린 바위들이었다. 한참을 걸어도 동굴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루치드는 계속 안으로 들어가서 살펴야 하는지 고민했다. 마음 한 편으로는 내일의 산행을 위해서라도 그만 탐사하자고 경고를 했지만, 호기심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이 정도까지 들어오고 나니 계속 들어가 보아야 하지 않는가, 라는 고집이 생겼다.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임은 맞는데, 그래도 일정한 크기를 유지하면서 안으로 이어지는 동굴의 모양새가 신비로웠다. 동굴 내부, 습한 기운 가득한 어두운 공간에 으레 있을법한 곤충이나 벌레도 하나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신비로웠다. 루치드를 배려하기 위함은 아니겠지만 걷는 것도 지쳐 이제 그만 할까, 라는 생각이 머리에 들 때쯤 동굴은 끝이 보였다. 입구에서부터 대략 30분은 넘게 걸어온 셈이었다. 이 정도면 길다고 해야 할지 짧다고 해야 할지 루치드는 가늠하기 힘들었다. 끝까지 다다른 동굴에서 루치드는 어떤 위험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막힌 돌벽을 확인하고 돌아서는 찰나에 언뜻 무언가를 보았다. 고개를 돌려 지나치듯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했다. 동굴의 오른편 벽에 무언가가 새겨져 있었다. 벽에 다가가니 광원으로부터 쏟아져 내린 빛이 벽을 밝히며 그 정체를 환하게 드러냈다. 그것은 그림이었다. ======================================= [71] 모험(5) 이 동굴의 제일 깊은 곳, 빛도 스며들지 않는 이 공간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림은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재빼기에서 서쪽을 바라봤을 때 보이는 산, 즉 ‘대산맥’의 가장 높은 산을 묘사하는 그림이었다. 신기한 것은 대산맥에 대한 묘사가 아이들 낙서 수준이 아니라 그림을 제법 배운 사람이 새겨 넣은 판화 같은 느낌이라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단순히 외형선을 새겨 넣은 것에 그치지 않고 색까지 입혀 놓았다! 푸른색이 칠해진 부분은 상록수들을 묘사하고 있었다. 색이 입혀지지 않은 부분은 울긋불긋한 동굴 본래의 색인 화다색(樺茶色)이 그대로 노출되어 낙엽이 진 나무들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산의 중턱에 걸린 허리안개는 바위를 갈아 나온 가루를 이용했는지 굵은 알갱이가 토돌토돌하게 솟아나 있는데 그 색이 흰색이라 마치 진짜 안개라도 낀 것 같은 절묘한 표현법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제일 신기한 것은 산 위의 하늘이었다. 그것은 분명 하늘빛이었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푸르고 붉은 저녁 하늘을 사실감 있게, 생동감 넘치도록 표현하고 있었다. 전체 그림은 루치드가 양 손을 벌렸을 때의 크기 정도였다. 하지만 그 정도의 그림에서 장대한 역사(役事)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니 절로 공손해지는 마음이었다. 광대한 자연을 한 폭의 그림으로 묘사해낸 솜씨가 예사롭지 않을뿐더러 동굴벽에 그린 기술도 놀랍기 그지없었다. “누가 이런 일을 했을까?” 그리고 “왜 이런 일을 했을까?” 분명 사람의 손길이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이 험한 돌산을 올라, 이 깊은 동굴을 찾아 들어와서 그림을 남겼을까? 그리고 이 그림은 왜 그려졌을까? 왜 남겼을까? 보다 보니 이 그림에서 보이는 산이 대충 언제쯤의 산인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군데군데 멍든 것 마냥 푸른 숲이 보이지만 대부분은 낙엽의 색이 산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늘은 마냥 푸르지도 않고 산마루 위로 붉은 놀이 조금씩 새어나오는 그림이었다. ‘가을 저녁의 대산맥’ 정도의 제목이라면 어울리겠다. 루치드는 찡하는 기분을 느꼈다. 뭔가 전기 한 줄기가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관통하는 기분이 들었다. 고대의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다양했을 것이다. 그 중에도 초상화나 풍경화를 그리는 사람들의 가슴에는 아마도 그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간직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도 바로 저 순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지 않았을까? 마치 저 순간을 박제하듯 벽에 박아 넣고 그 시간을 멈추게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루치드는 지난 습지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상하게 생긴 거인 새와의 만남. 그 새와 눈을 마주치고 대치를 벌이고 있을 때 한 순간 모든 것이 멈춘 느낌이 들었었다. 그 순간에는 습지에서 올라오는 냄새마저 멈췄는지 역한 기분도 느끼지 못했었다. 보이는 모든 것이 멈춰, 마치 사진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생동감 넘치는 색깔과 사실적인 사물,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한 장의 사진 속에 담긴 풍경과도 같았다. 또 다른 기억이 지나갔다. 처음 돌산에 올라 대산맥을 바라보았을 때, 산머리 위로 보랏빛 노을이 일렁이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오묘한 빛깔의 향연에 루치드는 그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 했다. 해는 완전히 서산 너머로 사라지고 그 잔향이 남아 하늘을 물들이고 있던 그 시간. 반대편으로부터 몰려들어오는 어둠에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듯 출렁거리듯 흐느적대던 태양의 자취. 지금 보고 있는 이 그림.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가을 저녁의 산을 흐르는 시간 속에서 도려내 이곳에 박제시켰다. 그 사람의 의도, 갈망, 꿈이 모두 느껴졌다. 그 사람은 저 순간을 갖고 싶어했다. 저 순간, 저 시간을 영원히 지속하고 싶어했다. 즉. ‘시간을 멈추게 하고 싶다.’ 루치드는 눈을 감았다. 어느새 밤이 되고 낮이 찾아왔다. 그리고 다시 밤이 왔다. 루치드는 아직 눈을 뜨지 않았다. **** 루치드는 어느 순간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곳에 서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니 서 있다는 사실도 확신할 수 없는 곳에 서 있었다. 공중에 떠 있는지, 바닥에 발을 붙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위, 아래, 오른쪽, 왼쪽, 앞, 뒤 모두 암흑인 공간이었다. 눈을 뜨고 있어도 눈을 뜨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오감이 모두 마비된 것 같았다. 지금까지 동굴을 탐험하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이런 곳으로 오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저기요?” 루치드는 입을 열고 말을 했다. 이 사실을 통해 말을 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확인했다. 손을 들어 눈앞에 가져다 대니, 팔이 제대로 보였다. 볼 수 있고 움직일 수 있음을 확인했다. 이번엔 앞으로 걸어봤다. 걷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제자리걸음인지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도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우선 앞으로 계속 걸었다. 루치드는 그만 걸었다. 얼마나 걸었는지 알 수도 없을 만큼 걸었지만 똑같은 암흑의 공간뿐이었다. 암흑인데도 자신의 팔이 보인다는 사실은 또 이상했다. 이상한 게 한두 가지겠느냐, 만은 아무튼 그랬다. ‘아!’ 루치드는 빛을 구현하는 마법을 써보았다. 하지만 반응이 없었다. 불도, 마찰도 그 어떤 마법도 구현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루치드는 계속 걸었다가, 한참을 주저앉았다가, 또 다시 걸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었다. 마법도 안 되고, 이동도 되지 않는 공간에 루치드는 혼자였다. 루치드는 달렸다. 숨이 찰 때까지 달려보았다. 하지만 루치드는 끝도 없이 달렸다. 달리는 게 지겨워 멈출 때까지 달릴 수 있었다. 숨이 차지도 않았고, 다리가 아프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배도 고프지 않았다. 모든 게 비정상인 공간이었다. 또 많은 시간이 흘렀다. 루치드는 여전히 혼자였고, 그래서 외로워졌다. 돌이켜보니 빈촌에서 마을 사람들이 사라진 이후, 늘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근원이 사라진 마당에 그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었던 소년이 의지할 사람이 없어 결국 책에 의지했었다. 새로운 지식과 맞닥뜨렸던 순간이 떠올랐다. 외로움이나 공포, 절망의 감정들을 모두 잊을 수 있을 만큼 놀랍고 신비롭고 재미있었던 순간이었다. 소년이 배우고 익힌 지식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수학이었다. 논리적인 연산과 정확한 계산식이면 딱 떨어지는 정답이 나왔다. 모든 것이 모호하고 모든 것이 불확실하던 순간에 오직 수학만이 루치드의 뜻대로, 루치드의 통제 범위 안에서 답을 주었다. 수학은 루치드가 자기 뜻대로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분야였다. ‘1 더하기 1은 2. 2 더하기 2는 4. 4 더하기 4는 8 … 16384 더하기 16384는 32768 ….’ 루치드는 문득 떠오른 숫자를 계속 더했다. 그러다 암산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어디 적을 만한 것이 없나 둘러봤지만 역시나 이곳에서 적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고집이 생긴 루치드는 암산만으로 어디까지 수를 더할 수 있을지 시도해보았다. 이것은 게임이었다. 숫자를 입으로 부르며 암산을 계속해나가는 게임. 숫자를 제대로 말하지 못해 머뭇거리거나 암산이 되지 않는 수가 나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룰이었다. 처음에는 5자리나 6자리 숫자에서 헤맸다. 하지만 점점 반복하다보니 숫자가 외워지기도 하고, 암산에 요령이 생기기도 했다. ‘1,073,741,824 더하기 1,073, 741,824는 …2,147,483,648.’ 10억 단위가 넘어가는 숫자까지도 줄줄이 외워지고 있었지만 루치드는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배도 고프지 않고 잠도 오지 않았다. 이 공간을 탈출할 방법도 없었고, 이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오로지 머리로 생각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오직 숫자를 되뇌는 것만이 허락된 것처럼 루치드는 연산에 몰입했다. 숫자가 20자리를 넘어설 때까지 더하기가 가능해졌다. 그러다보니 지겨워졌다. 어차피 더하기에 불과한 암산인데다, 너무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비틀어보기로 했다. ‘1 곱하기 1은 2. 2곱하기 2는 4. 4곱하기 4는 16 … 65,536곱하기 65,536은 ….’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직 루치드의 암산 실력이 모자라다는 증거였다. 루치드는 기뻤다. 적어도 자신이 약한 부분을 알았고, 채울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무엇보다 할 일이 생겼다. 지금까지는 그냥 시간 때우기 식으로 하고 있었다면, 이제는 할 일이 생겼다. 루치드는 조금 신이 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렀지만,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루치드가, ‘18446744073709551616 곱하기 18446744073709551616 은 … 340282366920938463463374607431768211456.’ 2를 128번 제곱한 수까지 암산이 가능해질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수백, 수천, 아니 그 제곱의 수만큼 암송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저만큼의 숫자가 한 번에 입에서 튀어나올 만큼 오래 게임을 지속했다. 이쯤 되니 다른 것에도 관심이 갔다. 과연 자신이 얼마만큼 할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고. 루치드가 숫자를 가지고 놀기 시작한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사칙연산에 있어서는 어지간한 계산기보다 빠르게 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사실은 자신이 계산을 하는 건지, 그 숫자를 구구단마냥 외워버린 것인지도 분간을 못하게 될 정도로 시간이 지났고 게임을 즐겼다. 곱할 수 있는 숫자는 모두 곱해보고, 나눌 수 있는 숫자는 모두 나눠봤다. 소수점 아래로 30자리까지 가는 수도 있었고, 100자리 이하까지 가도 딱 떨어지지 않는 수도 있었다. ‘사칙연산 말고 다른 건 없나?’ 수열이란 걸 떠올렸다. 규칙성을 지닌 수의 집합체를 만들어 보았다. 무한히 커지는 수열도 있었고, 한없이 작아지는 수열도 만들어졌다. 급수를 떠올렸다. 딱 떨어지는 수도 있고 무한히 더해지는 수도 있었다. 물론 루치드가 수열과 급수를 배운 적은 없었다. 다만 숫자를 가지고 놀다보니 우연히 '나타난' 개념이었다. 당연히 용어도 몰랐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몰라도 숫자는 계속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했고 루치드는 그걸 즐길 뿐이었다. 루치드는 숫자로 연상 가능한, 계산 가능한 모든 수를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으윽!” 루치드는 신음을 뱉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절로 나왔다.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느껴야만 하는 고통은 그 무엇으로도 참을 수 없었다. 머리를 움켜쥐고 굴렀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고통은 자신이 보내온 시간만큼, 아니 그 이상,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무서웠다. 그러던 루치드가 정신을 차렸다. **** 눈을 뜬 루치드가 처음 본 것은 역시나 어두운 공간이었다. 하지만 다른 점은 자신이 누워있다는 것이고,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땅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눈을 깜빡이다보니 정신도 말짱해져 조금 전까지 머리가 터질 것처럼 괴롭히던 고통이 말끔히 사라졌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몸을 일으켜보았다. 어쩐지 익숙한 공간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법을 써 보았다. 머리 위로 광원이 생기며 주위를 밝혔다. 역시나, 이곳은 동굴, 그 제일 안쪽에 자리 잡은 그림 앞이었다. 루치드는 몸을 일으키려다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그제야 엄청난 허기가 느껴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너무 배가 고파서 미칠 정도였다. 루치드는 배낭을 열어 가지고 있는 모든 음식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아끼고 자시고 할 판도 아니었다. 남은 물도 모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뭐라도 들어가니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잠시 자리에 누운 루치드는 가만히 생각했다. ‘뭐였지?’ ======================================= [72] 모험(6) 음식을 먹은 후 두통이 많이 가라앉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머리가 조금 멍한 듯 한 느낌이 드는 게 아직 후유증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까처럼 머리가 터져 나갈 듯이 아픈 것은 아니었다. 루치드는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던 고통의 원인을 살펴보려 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왔던 두통의 원인을 찾기엔 실마리가 부족했다. 자신이 가장 최근에 했던 행동이라곤 벽 앞에 서서 그림을 감상했던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그림에서 머리를 아프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 싶어 두려움을 무릅쓰고 다시 그림을 감상해보았지만 머리가 아프다거나 혹은 다른 이상이 생기는 일은 없었다. 다시 한 번 그림을 살펴보던 루치드는, 이내 고개를 젓고 벽에서 물러났다. 오랜 시간 산에서 올라오느라 체력이 많이 부족했고, 거기다 쉬지도 않고 동굴 탐사까지 감행했던 탓에 몸에 무리가 간 것이라 단정했다. 그리고 더 이상 그 문제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그 그림의 존재로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에 집중했다. “나 말고도 이 산을 올라온 사람이 있었던 거야.” 그것만으로도 루치드는 이 산을 오른 보람을 느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산 너머에 정확한 해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마을사람들이나 가족의 생사까지 알 수 있게 된다면 더 좋겠지만. 우선 동굴을 나왔다. 동굴 입구에서부터 루치드를 마중하듯 어슴푸레한 빛이 쏟아지더니, 바깥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하늘 중앙에 태양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만 흐린 구름이 드문드문 보이고 있어 조만간 비라도 내리려나 하는 추측을 해보게 만들었다. “하룻밤을 보낸 건가?” 루치드는 잠을 잔건지, 정신을 잃었던 건지는 구분할 수 없었으나 잠이 온다거나 하지는 않으니 이대로 모험을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 동굴을 지나 산의 반대편으로 가서 내려갈만한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반대편으로 가던 도중 루치드는 산 너머의 경치를 구경할 수 있었다. 지난밤에는 어두워서 관찰이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날도 환해졌으니 제대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루치드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아니 아예 생각도 못했던 장면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온통 구름이었다. 새하얀 구름이 끝을 모르게 퍼져 시선이 닿는 곳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확대 마법을 써서 둘러보아도, 하얀 구름이 쌓여 그 아래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올라올 때는 전혀 보지 못했던 구름이 반대편에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당장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아까보다 더욱 흐려진 구름들이 보이고 있는데, 고개를 내리면 또 다른 구름들이 보인다는 게 루치드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재빼기의 가장자리로 다가가니 더 난감한 상황이었다. 산 중턱에서부터 시작된 구름 탓에 산 아래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러다보니 얼마나 더 아래로 내려가야 지면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게다가. “이게 뭐야?” 반대편은 그야말로 절벽이었다. 어느 곳 하나 평탄하게 내려갈 만한 길이 보이지 않았다. 깎아 세운 듯 가파른 경사를 보이는 절벽들은 올라온 것처럼 쉽게(?) 내려갈 수 없어보였다. 어디 하나 손 짚을 데가 없고, 아래가 보이지도 않는데다, 거의 수직으로 뻗은 절벽이니 루치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멍하니 절벽만 바라볼 뿐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을 들여 주변을 조사한 결과, 그냥 내려갈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결국 절벽을 붙잡고 내려가야 한다는 이야기였는데, 사실 오르는 것과 내려가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2학년 초쯤. 학교 뒤편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모든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공만 차는 것은 아니었고, 게다가 1,2학년 아이들은 고학년 아이들의 위세에 밀려 운동장에 발도 들이밀지 못할 때가 많았다. 개중에 용감하고 씩씩하고 겁 없는 하룻강아지 같은, 예를 들어 명수 같은 아이들이 운동장 구석에서 먼지를 들이키며 공을 찼지만, 또 많은 아이들이 학교 뒤에서 술래잡기나 다방구 같은 놀이를 즐겼다. 하루는 아이들이 술래잡기를 하다가 지금은 전학을 가고 없는 지훈이 술래를 피한답시고 한편에 심어진 나무 위를 기어 올라간 적이 있었다. 어떻게 올라갔는지 다들 신기해했고, 지훈도 꽤 의기양양해 있었다. 다만 문제는 높이가 적잖이 높아, 올라간 지훈이 내려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수업시간이 되도록 내려오지 못해 울고 있는 것을 학교 직원이 발견, 사다리를 동원하여 겨우 구출했던 일이 있었다. 그 일로 지훈은 선생님께 혼나고 다시는 올라가지 않겠노라고 교실 앞에서 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선서를 하기도 했다. 딱 그런 심정이었다. 어떻게든 올라는 왔는데, 올라오고 나니 어느 쪽으로도 쉽게 내려갈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루치드가 올라온 쪽의 산면도 다시 내려가자니 덜컥 겁이 날 정도로 가파르게 보여, 도대체 어떻게 올라올 생각을 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루치드는 건너편 산면으로 내려가야 했고, 그 방도를 찾아야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루치드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해가 지기 전까지 주위를 살펴보기로 했다. “어? 저게 뭐지?” 주위를 살피던 와중에 루치드는 걸음을 멈췄다. 절벽 끝자락에 놓인 너럭바위 위에 희미하지만 수상한 흔적이 보였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흔적을 살피니 색이 바래져 있었지만 검붉은 색의 액체가 흘러 만들어진 것 같았다. 물감이라 보기에는 주변 상황과 너무나 동떨어진 추측이니 사람이나 동물의 피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혹시나 싶어 주변을 살폈지만, 여전히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흔적 외에 다른 것이 있는지도 살폈으나 아쉽게도 찾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루치드는 다시 피가 묻은 바위로 갔다. 오래된 흔적이라는 것은 바로 알 수 있었다. 바래진 색과 말라붙은 흔적에서 시간의 흐름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이것이 꼭 사람의 피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껏 이 산을 오르는 동안 동물의 그림자 한 번 볼 수 없었고, 게다가 동굴 안에서 발견한 그림과도 연계해서 보자면 이 피는 사람의 피일 확률이 높았다. 이곳에 정답은 없지만 산 아래에 답이 있을 확률이 높다는 사실만 재확인할 뿐이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울퉁불퉁한 바위틈 사이로 숨었다가 바위 아래로 기어들어가기도 했다. 동굴이 있는 산면의 그림자가 루치드를 집어삼킬 때 쯤, 루치드는 광원을 만들고 동굴 입구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루치드는 자기가 지금껏 배웠던 모든 과학적 지식을 동원해서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처음 떠오른 생각은 오를 때와 같은 방식인 납작도마뱀 방식이었다. 한 차례 경험도 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마찰력을 최대로 높여 천천히 내려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두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하나는 올라올 때도 가끔씩 그러했지만, 자칫 산면을 타고 흐르는 바람에 중심을 잃거나, 혹은 잘못된 자세로 무게 중심이 흔들리면 그대로 벽에서 떨어지고 말거라는 점이었다. 두 번째는 반대편 산면의 경사가 너무 가파르다는 점이었다. 확신은 못하지만 거의 수직으로 서 있던 것 같은데, 수직에서 마찰계수가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오를 때는 비교적 경사가 있는 면만 고르고, 수직으로 세워진 바위벽은 피했었다. 그럼에도 체력이 많이 떨어지다 보니, 재빼기에 오르기 직전쯤에는 위험한 순간을 한 두 번 맞이한 게 아니었다. 이 작전은 지나치게 위험해보였다. 두 번째 방식은 열기구에서 착안했다. 기웅이 빌려준 책에서 보았는데, 뜨거운 공기가 찬 공기보다 가벼워 대기 중에서 상승작용을 한다는 내용을 보았었다. 이 원리를 이용한 열기구처럼 루치드는 자신이 가진 배낭에 뜨거운 공기를 불어넣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방법이 어떨까를 고민했다. 풍선처럼 뜨지는 못해도 천천히 떨어져 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 방식은 당장 머릿속으로만 결과를 도출해내기 어려웠다. 때문에 루치드는 동굴을 빠져나왔다. 적당한 높이에 있는 바위 위로 배낭을 들고 올라간 루치드. 배낭을 머리 위로 들고 그 안에 열을 쏘아 공기가 달궈지게끔 해보았다. 적당한 시간을 보냈지만 배낭은 풍선처럼 부풀지도 않았고 여전히 비 맞은 빨래마냥 축 처진 채였다. 아무리 배낭 안을 데운다 해도, 배낭의 재질 자체가 공기를 담고 있기에 무리가 있었다. 데운 공기는 즉시 천을 통과하여 배낭 밖으로 배출되었다. 배낭안의 부피만으로는 배낭을 띄우기 힘들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세 번째 방식은 행글라이더였다. 남은 헌옷가지들을 모두 엮어낸 후 들고 뛰어내리는 방식을 구상했는데, 이것은 그냥 자살하는 모양새였다. 배낭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날개의 모양을 만들기도 힘들 뿐더러, 자칫 뛰어내리는 와중에 옷들이 서로 꼬이거나 뒤집혀버리면 바람의 저항이고 뭐고 간에 그냥 추락하는 것이었다. “이 곳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내려갔을까?” 실험과 고민을 반복하는 사이,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머리 위에 LED조명 부럽지 않은 광원 덕택에 어둠을 꺼려할 필요는 없었지만, 당장 루치드가 처한 상황을 낫게 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루치드는 지금 배가 고팠다. 이미 배낭 속에 먹을 것이라곤 마른 풀잎 한 장 정도였다. 오전에 미친 듯이 뱃속에 집어넣을 때는 차후를 생각할 겨를이 없어 그랬지만, 지금 돌이켜 보니 후회막급인 상황이었다. 굶주림을 버틸 수는 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너무 오래 굶주리게 되면 체력도 떨어질 테고 그러면 오히려 더 위험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별 수 없이 루치드는 어떤 방법이든 신속하게 이행해야 했다. 여전히 시간은 루치드의 편이 아니었다. 내일은 무조건 이 자리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내일 오전까지 방법을 떠올리던지, 아니면 아래로 내려갈 길을 찾던지 해야 할 것 같았다. 루치드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배는 고팠지만 피로가 심했었는지 이내 잠이 들었다. **** 새벽에 추위를 느낄 때마다 마법을 써서 추위를 막았다. 그러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루치드는 바깥이 하얗게 빛난다고 생각했다. 햇빛이 밝아서 그런가 생각했다가 이내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산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제까지도 하늘이 흐려지는 것 같아, 비가 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비가 아니라 눈이었다. 자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걸어간 루치드는 절벽 끝에서 참담한 심정이 들었다. 간 밤에 내린 눈이 어지간히 많았는지 바닥이 많이 미끄러웠다. ‘절벽은 더 심하겠지.’ 물론 열을 내서 눈을 녹이며 내려갈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어제보다 더 위험해졌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게다가 눈 때문에 시야가 많이 좁아진 상태였다. 눈송이 하나가 나풀거리며 눈앞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문든 공식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무거운 물체보다 가벼운 물체가 더 늦게 떨어지는 원리에 대해 과학책 한 귀퉁이에 ‘참고하세요’라는 글귀 아래 써져 있던 공식이 눈꽃송이를 보고 떠올랐다. “F=ma라고 했던가?” 질량 곱하기 중력가속도가 중력에 의해 떨어져 내리는 힘이었다. 그리고 ma=mg-kv, 즉 중력(mg)에서 저항력(kv)을 뺀 것이 바로 물체에 작용하는 힘이었다. 여기서 저항력은 저항상수 곱하기 속력이다. 루치드는 머릿속으로 이 공식에 맞춰 분석을 시작했다. ‘F=ma, 즉 중력이 끌어당기는 힘은 질량에 비례한다는 의미랬어. 그런데 이 힘은 저항력의 영향을 받지. ma=mg-kv. 이 공식에서 ma를 작게 만들려면 반대항의 값이 작아져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질량은 바꿀 수 없으니 저항력을 높이면 ma값을 낮출 수 있어. 이 공식에서 내가 임의로 조작이 가능한 것은 k, 즉 저항상수. 저항상수를 높여도 ma값을 낮출 수 있다.’ 생각대로라면 저항상수를 무한대로 올려 힘을 무시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문제는 루치드가 무한대의 수를 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무한대란 인간의 인지를 넘어선 수이기 때문에 마법이 불가능했다. 마법은 루치드가 인지해낼 수 있는 범위에서만 적용 가능했다. 따라서 루치드는 저항값을 최대한 올릴 수 있는 숫자를 만들어내야 했다. 자신이 인지 가능한 최대의 수로. 문제는 그 값이 mg의 값보다 모자란 수라면 의미가 없다. ‘35㎏ × 9.8㎧ = 343㎏㎧…….’ 루치드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바닥에 수식을 써내려갔다. ======================================= [73] 모험(7) 절벽 앞에 선 루치드는 심호흡을 했다. 자신이 아는 지식 내에서 계산은 했지만, 어떤 변수가 있을지 지금 상황에서는 알 수 없었다. 공부를 게을리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높은 수준의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바로 이렇게 드러나고 말았다. 그러나 여기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점점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고 있었다. 오후 늦게까지 더 기다릴 수도 없었다. 어두울수록 불리할 테니. 루치드는 다른 무엇보다 마법의 힘을 믿고 싶었다. 지금껏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 놀라운 기적의 힘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시도해 볼 수는 없으니 우선은 실험이 선행되어야 했다. 주변에 커다란 바위밖에 없어 오히려 적당한 크기의 돌을 찾느라 시간을 보냈다. 우선 주먹보다 조금 더 큰 돌을 몇 개 주워 다가 옆에 두고 실험을 시작했다. ‘첫 번째 실험.’ 돌을 가볍게 집어 절벽 바깥으로 가져갔다. 이른바 자유낙하실험이었다. 절벽 밖으로 내민 손에 힘을 풀자 손아귀에서 떨어져나간 돌이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돌은 바람 때문인지 곧바르게 떨어지지는 않았다. 낙하를 하던 중에 궤도를 비스듬하게 틀더니 이내 절벽에 부딪혔다가 통, 하고 튀어 올랐다. 그리고 다시 공중을 부유하다 절벽에 부딪히기를 반복하더니 어느새 구름 아래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루치드는 조금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만약 자신이 저 돌과 같은 궤도로 낙하한다면, 절벽에 머리를 찧거나 팔 다리가 부러진 채로 떨어지고 있을 것 같았다. ‘조금 멀리 던져야 하나?’ 그러나 우선은 같은 조건하에서 실험 진행 과정을 관측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에 힘을 주고 던지는 것은 뒤로 미뤘다. 두 번째 돌을 같은 방식으로 절벽 바깥에서 떨어뜨려 보았다. 대신 이번에는 돌 전체에 마찰 계수를 높이는 마법을 사용했다. 돌은 아까와 같은 방식으로 자유낙하를 시작하였다. 조금 천천히 떨어져 내리는 것 같기도 한데, 잘 알아볼 수는 없었다. 대신 절벽에 부딪히는 횟수가 조금 줄어든 것처럼 보였달까? 그러더니 이내 구름 아래로 모습을 감췄다. ‘관측자의 시점이 잘못됐네.’ 위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제대로 속도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손을 놓는 순간부터 구름에 사라지기까지의 시간을 속으로나마 세고 있었던 탓에 두 번째 돌이 첫 번째보다 늦게 떨어졌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다만 떨어지는 속도가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 원인을 예상 해보자면 돌의 면적이 너무 작아서 마찰계수를 높여도 저항값이 크게 오르지 않아, 돌의 질량을 무시할 만큼의 공기저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세 번째 실험은 루치드의 몸무게만한 돌을 던지는 실험을 해야 했는데, 문제는 그 돌을 드는 것 자체가 힘들어서 던지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루치드의 몸무게가 거의 35㎏에 육박하는데 그 정도라면 쌀 한가마니에 맞먹는다. 루치드는 그냥 돌을 굴려서 떨어뜨리기로 했다. “으윽!” 힘을 다해 돌을 밀어 떨어뜨렸다. 돌이 세차게 절벽을 들이 받고 튀어 올랐다가 다시 떨어졌다. 그러다가 다시 절벽에 부딪히는데 돌이 깨져서 두 동강이 났다. 두 개가 된 돌덩이들이 구름 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루치드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후우.” 절벽에서 물러난 루치드는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돌이 절벽에 부딪혀 두 동강이 날 때는 온몸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이번에는 마찰계수를 높여서 실험을 할 차례였다. 이번의 돌은 약간 넓적한 모양의 돌이었다. 돌을 밀기위해 엉거주춤한 상태로 몸을 숙인 루치드가 힘을 다해 밀었다. 돌이 공중에 뜨는 순간 가장 높은 마찰 계수를 설정했다. 돌이 아래로 떨어졌다. 절벽 가장자리까지 네 발로 다가가 고개를 내밀어 떨어지는 돌을 관찰했다. 그런데 확연히 느리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돌이 떨어지는 속도가 눈에 보였다. 깃털같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밑에서 들어 올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느리게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돌이 천천히 회전을 했다. 넓적한 부분이 세로로 서자, 돌은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름 아래로 사라졌다. ‘떨어지는 모양이 중요하구나. 최대한 넓은 쪽에서 공기의 저항을 받아야 돼. 그리고 마찰 계수를 더 높일 필요가 있어.’ 이제는 실전을 벌일 차례. 루치드는 절벽 끝에 섰다. 조금 전 돌이 떨어지는 속도만 돼도 안전은 보장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손을 높이 치켜 들었다. 두 팔을 감싸는 옷가지가 넓게 펼쳐졌다. 원래는 위에 또 하나의 옷을 입었다가, 떨어질 때는 넓게 퍼지면서 낙하산 같은 역할을 해주기를 바랐는데, 조금 전의 실험결과를 반영하여 그 역할을 바꾸기로 했다. 아예 넓게 펼친 상태에서 공기저항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마치 날다람쥐가 익막(翼膜)을 펴듯이 두 팔 사이에 바람막이를 만든 셈이었다. 뛰기 전, 루치드는 잠시 명수를 떠올렸다. 명수가 침대위에서 뛰어내릴 때 이불을 둘러쓰고는 “날아라!” 라고 외치며 뛰어내리다가 무릎을 땅에 찧고 아파하던 모습이 생각나서였다. 명수는 무릎에 멍이 드는 정도였지만, 자신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 이를 것이 분명했다. “풋.” 나중에 혹시라도 기회가 돼서 명수에게 지금의 이야기를 해준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무리 명수라도 믿지 않을 것이다. 물론 루치드도 명수를 억지로 설득하려 들진 않겠지.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우선은 살고 봐야 할 일이리라. “가자!” 루치드는 도움닫기를 한 후, 절벽 가장자리의 너럭바위 끝에서 몸을 던졌다. 피가 묻어 있던 바로 그 바위였다. ―후르륵. 루치드는 뛰자마자 마법을 썼다. 몸에 와닿는 공기의 느낌이 순간 달라졌다. 보이지 않는 스펀지 안으로 파고드는 느낌이 들었다. 루치드는 성공의 가능성에 들뜨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가지 고려하지 않은 것은 공중에서 자세를 교정하는 방법이었다. 분명 팔 다리를 활짝 펴고 배를 아래로 한 채로, 물에 붕 뜬 것처럼 가로로 자세를 취하고 뛰어내리려고 했는데, 머리 쪽이 비스듬하게 아래로 향했다. 머리 뒤편에 활짝 펼쳐진 옷가지들이 세차게 떨리는 소리를 냈다. ‘위험하다!’ 루치드는 자신이 아래로 떨어지는 속도가 빠르다고 느꼈다. 더 천천히 내려가야 하는데 자세가 통제되지 않아 당황되기 시작했다. 두 팔을 버둥거렸는데, 그럴수록 더 빠르게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귓가로 바람소리와 옷이 펄럭이는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밑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눈을 따갑게 찔러대는 통에 눈을 크게 뜰 수도 없었다. 입을 열어도 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가 목을 따갑게 만드는 것 같아 굳게 다문채로 낙하를 지속했다. 다행히 절벽으로 부딪히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옆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몸이 기우뚱하고 기울어지면서 절벽 쪽으로 향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바람이 부는 쪽으로 기울여 몸의 중심을 잡으려고 하지만 허리 아래로는 자기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절벽이 루치드의 왼편으로 다가왔다. 물론 루치드가 바람에 밀려 절벽 쪽으로 향한 것이지만, 루치드에게는 거대한 절벽이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으으윽!” 이를 악물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다리가 아까보단 조금 더 벌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머리가 다리보다 아래쪽이지만, 그래도 다리를 움직였다는 사실에 루치드는 조금 희망을 가졌다. 계획은 다리를 아래로 해서 목을 들어 올리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움직임을 더하는 순간 몸의 중심이 흐트러져서인지 절벽 쪽으로 더욱 빠르게 다가갔다. 팔과 다리를 절벽쪽으로 내밀었다. 곧 충돌 직전이었다. 그 순간, 루치드는 간절히 희망했다. ‘멈춰!’ **** 암적색의 모난 바위가 이불처럼 켜켜이 쌓여 있었다. 가만 보니 그 틈으로 작게 부서진 암석 조각들이 집 나간 어미 기다리는 아기새들처럼 숨어있었다. 절벽 끝에서부터 실금처럼 갈라지던 틈이 아래로 갈수록 벌어지더니 종국에는 또 다른 바위가 사이에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의 공간이 되었다. 그 공간에 바위 대신 바람이 잠시 들렀다가 빠져나갔다. 그러고 보니 그 틈 사이에 용케도 씨를 뿌렸는지 조금만 잡초 한 웅큼이 불쑥 나와 지나가는 바람마다 인사를 꾸벅 하고 있었다. 회갈색의 동돌이 바로 옆에 있는데, 중간에 흉터처럼 검게 물든 자국이 있었다. 위에서부터 떨어져 내린 물이 흐르고 흘러, 꺼칠꺼칠한 면을 깎아내고 깎아내, 맨들맨들하게 변한 형상이었다. 검은 속빛이 부끄러워 그 주변이 더욱 하얗게 보였다. 서쪽에서 부는 바람이 뺨을 쓸고 가듯 절벽을 스치며 온갖 자국들을 다 내고 지나갔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작은 상처들이 세월의 흐름에 점점 벌어지고 벌어져 마침내 이 절벽에 깊은 주름살을 만들어 냈다. 깊은 주름살을 바라보는 루치드의 눈에 묘한 빛이 서렸다. 루치드는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이 현상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 전에, 습지에서 같은 경험을 했었다. 그런데 그 때는 너무나 순간의 일이어서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불과 하루 전에 동굴에서 이 경험을 했었다. 그런데 그 때는 자신이 이런 경험을 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단지 머리가 아프다는 사실만 인지했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 경험을 하는 동안 실제로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루치드는 본능적으로 이 현상을 오래 끌수록 자신에게 돌아오는 부작용이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되도록 빨리 이 현상에서 벗어나야했다. 모든 것이 멈춘 상태였다. 심지어는 자신까지도 멈추었고, 눈동자마저 멈춰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볼 수도 없었다. 귀에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뭔가 들리는 것도 같은데 알 수 없었다. 지금 가능한 것은 오직 자신의 머릿속, 생각뿐이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은 이 현상을 벗어나는 것이지만, 그에 앞서 이 순간을 이용해 자신의 위기를 돌파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문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의 몸을 통제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마찰 계수, 즉 저항의 문제였다. 자신의 몸 전체에 저항을 걸어놓긴 했는데, 자신이 인지할 수 있는 마찰 계수가 생각보다 작았던 것 같았다. 이 보다 더 높은 마찰 계수, 저항 상수가 설정되어야 했다. 다행히 루치드가 이 현상을 자각하면서 동시에 동굴에서의 기억도 함께 떠올랐다. 자신이 인지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수, 그 한계를 깨뜨려야 했다. 동굴에서와 같은 상황이지만 그 때보다 훨씬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 루치드는 수(數)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루치드의 눈에 광채(光彩)가 서렸다. 발을 뻗어 절벽 위로 가져갔다. 발이 바위에 닿기가 무섭게 루치드는 힘을 다해 발을 밀어냈다. 몸이 쭉 밀리며 허공으로 나아갔다. 힘껏 밀어냈건만 몸은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천천히 밀려났다. 그와 동시에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천천히. 떨어지는 동안 얼굴 앞으로 눈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눈은 루치드보다 더 빨리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루치드는 구름과 맞닥뜨렸다. 그리고 서서히 구름 속으로 몸이 잠기기 시작했다. 마치 늪에 빠지는 사람처럼. ======================================= [74] 이종족(1) 루치드가 땅에 도착한 것은 구름을 벗어나고도 한참을 떨어져 내린 후였다. 바닥에 닿기 전 힘겹게 몸을 움직여 발이 먼저 땅에 닿도록 하는데, 그조차 쉽지 않았다. 결국 두 손과 두 발을 모두 사용하여 바닥에 내려앉았다. ―우욱 루치드는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메스꺼워 토악질을 해댔다. 두통도 심할 뿐만 아니라 눈앞이 어질어질해서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었다. 후원자의 도움으로 놀이공원을 처음 갔을 때, 명수의 손에 이끌려 처음 타 본 롤러코스터도 이만큼 무섭지는 않았다. 당연히 엉덩이와 등을 붙일 수 있는 의자와 몸을 단단히 동여맬 수 있는 안전벨트의 존재가 없었던 자유낙하는 없던 고소공포증도 만들 뻔 했다. 토악질을 마치고도 몸에 기력이 빠진 탓에 쉽게 일어나지 못한 루치드는 몸을 억지로 굴려 바닥에 드러누웠다. 저 높은 곳에 구름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떨어질 때 숲이 보였었다. 절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시작되던 숲은 돌산 위에서 바라보던 구름처럼,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멀리서 본 까닭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추측컨대 이 곳, 이 땅은 온통 숲으로 뒤덮여 있는 것 같았다. 채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온통 푸른색으로 뒤덮여 있어 반대편에서 보았던 늦가을의 풍취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돌산을 지나는 동안 거의 보지 못했던 풀과 나무들이 반가울 법도 하건만, 이 정도로 많으면 오히려 질리게 되리라. 루치드는 드러누운 상태에서 고개만 돌려 숲을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숲은 벌써부터 시커먼 속내가 보였다. 울창한 잎과 가지로 둘러싸인 채, 단연코 외부자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서린 어둠이 숲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 “신기하군.” “신기한데?” “신기한 일인가?” 동시다발적으로 한 방향을 향하던 목소리들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몇 년 만이지?” 깊은 땅속에서부터 울려오는 것 같은 굵은 목소리가 물었다. “모르지. 그걸 어떻게 알아?” 듣기만 해도 귀를 막고 싶을 만큼 거칠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되물었다. “아마 100년은 더 되지 않았을까?” 비음이 섞여 답답함을 주는 목소리가 대답했다. “우선 가서 살펴보도록 하지.” 옥타비스트같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가 크고 다부진 몸매의 그에게서 옆에 서 있는 까넬라 나무와도 같은 강직함이 엿보였다. “아, 난 귀찮아. 안 갈래. 오다가다 만날 텐데 뭐 하러 발품 팔아서 만나러 가냐? 마중 나가는 성격도 아니고, 난 안가.” 허스키한 목소리의 남자가 두 팔을 베게삼아 머리 뒤에 걸치고, 나무줄기에 몸을 기대며 대답했다. 팔다리가 길어서 그런지 비스듬한 자세를 취하고 있음에도 몸이 길어보였다. “이 넓은 숲에서 어떻게 만난단 말이지? 그리고 혹시 모르잖아? 어떤 위험분자인지는 멀리서라도 확인해야 할 것 같은데.” 비음 섞인 목소리가 답답하다는 듯 허스키 목소리의 남자를 책망했다. 셋 중 가장 키가 작아 보이는 이 남자는 얼굴이 둥글둥글했다. 다만 살이 쪄서라기보다는 얼굴형 자체가 모난 데 없이 둥근 형태였다. “아 짜증나게.” 허스키는 도리짓을 하며 힘겹게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우리 중에 체력도 제일 좋은 놈이 제일 게으르다는 건 정말 아이러니야.” 콧소리가 하품하며 기지개를 폈다. “서두르자. 곧 밤이 온다.” 옥타비스트가 두 사람을 흘깃 쳐다보며 재촉했다. **** 그 시간, 루치드는 여전히 풀밭에 누워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두 팔과 다리가 지면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바닥에 내려온 지도 한참이 됐지만, 여전히 쉽게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온 몸이 후들거리고 얼굴을 비롯해 온 몸에 갖가지 생채기가 나 있었다. 초반에 설정한 저항값이 잘못 되어서인지 생각보다 빠르게 떨어졌다. 그 순간에는 정말 죽음을 떠올릴 정도였다. 게다가 떨어지는 와중에 불균형하게 흐르는 공기의 흐름이 마치 맹수의 발톱처럼 날을 세우고 온 몸을 할퀴며 지나갔다. 또, 팔이나 다리를 움직여 자세를 교정하려 할 때마다 이곳저곳을 망치로 두드리는 충격을 느껴야 했다. 예를 들어, 오른팔을 들었더니 오른쪽 어깨를 타고 올라온 공기가 루치드의 뺨을 퉁 치고 지나간다거나, 왼다리를 곧게 폈더니 오른쪽 옆구리를 꾹 압박하는 공기의 힘에 헉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경우가 계속되었다. 절벽에 부딪히기 직전에는 정말 죽는구나, 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다행히 절벽에 부딪히기 전 각성을 한 루치드가 저항값을 재설정하여 마법을 재시전한 뒤, 눈보다 천천히 바닥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조금 나아졌다. 그럼에도 온 몸을 누르는 압력과 권투선수의 잽을 맞는 느낌은 위력이 약해졌다 뿐이지, 바닥에 닿을 때까지는 계속 온 몸을 괴롭혔다. 따지고 보면 루치드가 무사히 땅에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의 신이 돌봐주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루치드가 지금껏 쌓은 지식이 가볍지는 않으나, 또 깊이가 있던 것은 아니었기에 자유낙하는 그를 거의 반죽음 상태로 내몬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중간에 각성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몸의 일부는 부서지거나 혹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은 루치드가 재차 토악질을 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퉤.” 먹은 게 없다보니, 멀건 신물만 올라와 속이 따가웠다. 물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자유 낙하시의 공기의 예측하지 못했던 흐름과 이유를 알 수 없는 압력. 그리고 옷 때문에 저항력에 문제가 있었어.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변수가 되었던 거야.’ 루치드는 그밖에도 자신이 알지 못했던 많은 변수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론은 자신이 무모한 자살행위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저항력이 높다고 해서 몸에 가해지는 중력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었을지도 몰라.’ 결국 자신은 여전히 약하고 무지한 존재라는 사실을 재확인한 것뿐이었다. 다만 각성이라는 형태로 체험한 그 기적은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였다. ‘다시 시도할 수 있을까?’ 갑자기, 의도치 않게 발생한 그 현상은 아직 자신의 의지로 재발현되지는 않았다. 아니 어쩌면 지금은 너무 기력이 떨어져서 그런지도 몰랐다. 우선 이런 저런 일들은 몸을 추스르고 난 뒤에나 생각해 볼 문제였다. 호흡도 어느 정도 되돌아오고 팔다리도 잔 떨림이 멈춘 것 같았다. 서서히 힘을 주고 일어서 보니 그제야 땅 위에 설 수 있게 된 루치드였다. 고개를 돌려 자신이 뛰어내렸던 절벽을 바라보았다. 내려오는 동안 방향이 여러 번 바뀌면서 점점 절벽에서 멀어졌었다. 덕분에 바닥에 도착한 지금, 돌아보니 자신이 절벽으로부터 꽤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올려다 본 절벽은 중간이 구름에 가려져 그 위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보이는 부분의 높이가 반대편에서 올려다 본 돌산의 높이에 맞먹었다. 바꿔 말하면, 지금 루치드가 서 있는 곳은 돌산 반대편보다 낮은 지대라는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반대편에서는 돌산이었지만 여기서 바라보니 저곳은 그냥 거대한 하나의 절벽의 모습일 뿐, 산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구름 위로 솟은 절벽. 아니 성벽이라 불러야 하겠다. 어디 한군데 오를 데 없이, 수직으로만 세워져 동에서 서로 쭉 늘어선 거대한 장벽이었다. ‘만리장성?’ 문득 백과사전에서 보았던 만리장성이 떠올랐다. 직접 가보지 않아 그 모습을 사진으로만 봤을 뿐이지만 거대함과 그 끝을 모를 길이는 만리장성도 저러하지 않을까 싶었다. 차이점이라면, 그것과 다르게 눈앞의 절벽은 자연의 힘으로 세워진 장벽이라는 점일 것이다. ‘어떻게 돌아가지?’ 이제 진짜 돌아갈 길이 막막해보였다. 저곳만큼은 자신이 어떤 수를 써도 오르기 힘들어보였다. 절로 의지가 꺾일 만큼 웅장하며, 압도적이었다. 고개를 내젓던 루치드는 등을 돌렸다.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우선 이 앞에 펼쳐진 숲을 먼저 고민할 때였다. 우선 옷을 갈아입었다. 입고 있던 옷이 군데군데 찢어져 계속 입고 움직이기 불편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배낭에서 헌 옷을 하나 꺼내 입었더니 소매가 길어 손을 덮고도 남았다. 소매라도 걷어 입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손을 들었더니, 수전증 걸린 것 마냥 덜덜 떨고 있었다. 그 꼴이 기가 막혀 루치드는 피식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팔 다리에 힘이 좀 붙었지만 여전히 원래 상태로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러나 루치드는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이곳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시간은 루치드의 편이 아니었으니까. 잡초가 우거진 풀밭을 지나니 몇 걸음 가지 않아 숲의 가장자리에 들어섰다. 곧게 우뚝 선 나무들이 루치드를 맞이했다. 두께만 보면 루치드가 두 팔로 감싸고도 부족하리만큼 두꺼웠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덩굴식물이 그 줄기를 타고 올라가 가지 끝을 향했다. 숲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퀴퀴한 냄새가 주변을 메우고 있었는데, 축축한 대지에서부터 올라온 냄새가 잎과 가지에 틀어 막혀서 어디 가지도 못하고 숲 속에 붙잡혀 있는 것 같았다. 인질은 냄새뿐만 아니었다. 간간히 잎과 가지를 뚫고 들어온 희미한 빛줄기가 해방의 깃대를 땅에 꽂으려하지만, 바닥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온 숲 안개가 이를 막아섰다. 때문에 숲에 갇힌 어둠은 오랜 세월을 함께한 숲에 묶인 채, 도사견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오는 이들을 한입에 집어삼킬 기회를. 당연히 루치드는 그 어둠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대신 깃대를 꽂아 주리라. 루치드가 마법을 부리려는 찰나, 숲 속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루치드는 마법을 시전 하려던 것을 멈추고 기척이 느껴졌던 곳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루치드는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킬 여유가 없었다. 지금 자신의 몸 상태로는 어떤 위험이 닥쳤을 때, 순발력 있게 대처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루치드가 만일에 대비하면서 한참을 가만히 숲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 좀 가만 기다리지.” 비음이 섞여 맹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너야말로 좀 더 기다리지 그랬냐. 쟤가 방금 뭐 하려고 했는데.” 쇳가루가 보일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거친 목소리가 따라 나왔다. “나가자.” 한숨이 섞인 것 같은 굵은 저음의 목소리가 같은 자리에서 나왔다. 루치드가 당황을 감추며 제자리를 지키는데, 숲 속에서 세 사람이 걸어 나왔다. 아니,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한 사람은 온 몸이 새까만 데 오직 눈동자만 하얗다. 딱 벌어진 어깨와 굵은 팔 다리는 ‘전사’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특이점이라면 가죽 반바지를 입고 있는데, 그것만 입었다는 것 정도? 뒤이어 나온 사람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팔을 흐느적거리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유난히 팔다리가 길고, 앞선 사람보다 머리하나는 더 커보였다. 전체적으로 마른 느낌의 남자는 붉은 머리와 붉은 눈을 가졌고, 피부는 앞선 사람보다 연하기 하지만 검은 색이었다. 나란히 서서 나오는 또 다른 한 남자는 옆 사람 덕분에 유난히 키가 작아보였다. 그래도 앞 사람보다 약간 작은 정도였지만, 얼굴이 둥그스름하고 몸도 다른 두 사람에 비해 특별히 근육이 발달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소 느긋해 보이는 팔자걸음이 무척 잘 어울렸다. 이 남자 역시 다른 두 사람과 비슷하게 온 몸이 검은 색이었다. 단 머리카락과 손바닥이 갈색이었다. 그 남자가 루치드에게 질문을 던졌다. 예의 코맹맹이 소리였다. “야, 너. 방금 뭐 하려고 했어?” “…….” 루치드는 무슨 뜻인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코맹맹이가 길쭉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쟤, 말 못하는 거 아냐?” “그런가?” “할 줄 안다.” 마지막은 가장 앞서 나온 사람이었다. “어떻게 알아?” 코맹맹이가 물었다. “눈이 반응을 한다.” 저음의 남자가 단정짓듯 말했다. 세 사람의 시선이 루치드에게 몰렸다. ======================================= [75] 이종족(2) 낯선 외양의 세 남자와 맞닥뜨린 루치드는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보지는 못했지만, 말로만 듣던 흑인이 저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품었지만, 확신은 할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이 어떤 인종이든 지금 이 곳이 루치드에게 낯선 곳이고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를 곳이란 점에서 그들을 경계해야 할 이유는 많았다. “너 우리말 알아들어?” 코맹맹이가 다시 물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루치드는 계속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별로 좋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말이 통한다면 어쨌든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게 앞으로 루치드의 행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루치드는 방금 이 곳에 도착한 사람이고, 저 사람들은 계속 이 곳에 있었던 사람이었으니, 이 곳을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좋은 관계를 가질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물론 힘으로 저 세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것도 한 이유였다. “예.” “어? 정말이네? 그런데 왜 말은 안 해?” 길쭉이가 코맹맹이의 팔을 툭 쳤다. 눈매가 날카로운게 다소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길쭉이였다. “야, 저 놈도 우리 간보는 거잖아. 저 눈 좀 봐라. 뭔 일 저지르겠네.”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셋은 루치드의 동공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세 사람을 관찰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온 거지?” 왠지 쇠로 된 파이프를 연상시키는 남자였다. 긴 파이프의 한 쪽 끝에서 목소리를 내면 반대쪽에서 저런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산… 넘어 왔는데요.” “산?” “산이라고?” “…….” 세 사람의 눈이 커졌다. 가장 먼저 침착해진 것은 쇠파이프를 닮은 남자였지만 입을 먼저 연 것은 코맹맹이였다. “설마, 저 뒤의 저 걸 보고 말하는 건 아니지?” 루치드는 선뜻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돌아보지 않아도 코맹맹이가 내민 손가락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고, 자칫 틈을 보였줬다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기에 시선을 돌리는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다. “맞아요.” 세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루치드는 그게 이상한 일인가 싶다가도 아마 저 높은 산을 혼자 넘어왔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그러나 보다, 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10살의 어린애가 기어 올라올 수 있는 높이는 아니지 않았나 싶었다. 곱씹을수록 자신의 무모함과 무지가 부끄러워지는 루치드였다. “여기는 왜 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쇠파이프 남자가 눈만 하얗게 뜨고 바라보니 어쩐지 섬뜩했다. 아, 이도 하얗구나. “…가족을 찾으려고 왔어요.” “너희 가족이 여기 왔어? 여기? 왜?” 코맹맹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가만 보니 코가 유난히 큰 것도 같았다. 코끝이 뭉툭하고 납작한 게, 마치 공기 빠진 축구공을 연상시켰다. “확실한 건 아니고요….” 루치드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물론 저 세계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라. 꽤 흥미로운 일인걸? 그치? 아, 오해하지 마. 마을이 통째로 사라지는 일 자체가 흥미롭다는 것이지, 너희 가족이 사라진 게 안타깝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코맹맹이가 유쾌한 음성으로 변명을 덧붙였다. 그러자 여태 무뚝뚝한 얼굴로 루치드를 바라보던 남자가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먹을 거 가진 사람?” “응? 왜?” “이 판국에 먹을 게 생각나겠냐? 저 애 때문에 오지랖 떠는 거지.” 코맹맹이의 물음에 길쭉이가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둘 모두 먹을 만한 걸 들고 있지는 않았다. “가자. 넌 우선 배를 채워야 할 것 같다.” 어떻게 보기만 하고 알 수 있나? 라고 묻고 싶었지만 실제로 배가 고팠고, 이미 몸을 돌리고 앞장서는 남자를 세울 자신도 없어 그냥 뒤를 따라갔다. 세 흑인과 한 아이가 숲으로 들어갔다. **** 숲은 밖에서 보는 것처럼 어두웠다. 하지만 앞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어서 불 꺼진 저녁 보육원 복도를 걷는 기분이었다. 다만 보육원 복도보다는 발에 걸리는 게 많았고, 훨씬 복잡한 길을 따라가야 했다. 걸을 때마다 질퍽한 질감의 땅에 들러붙는 느낌과 코를 간지럽히듯 들락날락 거리는 퀴퀴한 냄새가 참기 힘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보다 루치드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앞서 걸어가던 세 남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모습을 감춘 게 아니라 어둠에 묻혀 거의 보이지 않았던 것이지만 당황스럽긴 매한가지였다. 대신 길쭉이의 붉은 머리는 선명하게 보였는데, 그러다 보니 붉은 털뭉치가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발 밑 조심해라.” 앞서가던 남자가 말했다. 뿌연 숲안개 탓에 발밑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마침 굵기가 루치드의 팔뚝만한 덩굴이 아래를 지나고 있었다. 주의를 듣지 않았다면 걸려 넘어졌을지도 몰랐다. 간간히 주의를 던져주는 남자의 말에 귀 기울이며, 붉은 털뭉치를 따라가다 보니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치드도 나름 숲에서 오랜 생활을 해본 아이였는데, 이 숲은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저기요.” 루치드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러나 앞에 걸어가던 사람들은 멈추지 않았다. 대신 갈색머리의 코맹맹이가 돌아보며 대답을 했다. “왜? 힘들어서?” “아, 아니요. 궁금하게 있어서요.” “뭔데? 어디 가냐고?” “아, 그것도 궁금하긴 한데요. 원래 이 숲은 이렇게 조용한가요?” 루치드의 귀에는 숲 위로 부는 바람소리와 그에 잎이 잘게 흔들리며 내는 소리들만 들릴 뿐이었다. 으레 들을법한 여러 가지 숲의 소리들이 전혀 들리지 않아 이상했던 루치드였다. “혹시 동물이나 곤충 같은 건 여기 살지 않는 건가요?” “호오, 너 숲을 잘 아는 모양이네? 어떤 소리가 들렸으면 해?” “네?” 엉뚱한 말로 되묻는 코맹맹이의 질문에 루치드는 바로 답을 주지 못했다. “동물 비슷한 것 있다. 곤충도 잘 찾아보면 있을 거다.” 제일 앞에 서서 걷던 남자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뒤에서 보니 그냥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나오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었다. “잘 찾아보면 있어. 그리고 없으면 우린 뭐 먹고 살게?” 여전히 유쾌한 어투로 대답하는 코맹맹이의 태도가 그렇게 밉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나저나 잘 찾아보면 있다고? 하지만 어두워서 인지 루치드는 아무런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만약 혼자였다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모습도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고 있다는 동물이 습격이라도 했을 때 루치드는 아무것도 모른 채 당하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다행인지 세 사람의 뒤를 따라가는 동안은 어떤 동물도 발견하지 못했고, 어떤 곤충도 기습적으로 튀어나와 놀래는 일이 없었다. “다 왔어. 여기야. 우리가 사는 곳.”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공터였다. 온갖 수목들과 이름 모를 식물들이 번잡하리만큼 빽빽이 들어선 정글 같은 숲에 이런 공터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그 공터가운데 서 있는 집을 보고 한 번 더 놀랐다. 집은 집인데, 마치 정글판 이글루 같은 모습이었다. 나무가 자연스럽게 저리 될 리가 있나 싶지만, 대지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이 곡면의 형태로 이어져 기둥이 되고, 줄곧 보이던 덩굴식물을 비롯한 각종 식물들이 얽히고 설켜 튼튼한 외벽이 되어 있었다. 따로 문 같은 건 없이 출입구 위에 넓은 잎 두 장이 겹쳐져, 마치 커튼처럼 젖히고 내부로 들어갈 수 있게 꾸며져 있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다고 보기가 어려운 게, 기둥역할을 하는 나무들이 너무 자연스럽게 휘어져 있는데다가 여전히 땅에 뿌리를 박고 생장활동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세 사람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루치드가 뒤따라 들어갔다. 내부는 생각보다 넓고 아늑했다. 벽이나 지붕은 나무와 식물들로 빈틈하나 없이 촘촘하게 메워져 있고, 바닥은 널빤지같은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빈촌의 루치드의 집보다 더 넓어 보이기까지 하니, 더욱 이 신비로운 집의 제작 비결이 궁금해졌다. 또 하나 놀라운 모습은 내부가 밝다는 점이었다. 언제 불을 켰는지 모르겠지만, 들어온 문 옆에는 등잔이 있고, 그 위에 양초로 추측이 되지만 외형은 동그란 돌멩이인 촛불이 놓여 있었다. 겉만 보면 돌멩이에 심지를 붙여 놓고 불을 붙여 놓은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이 꽤나 밝아서 문 옆에 걸어놓았음에도 실내가 환하게 밝아져 마치 형광등이라도 켜놓은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주방과 거실이 붙은 실내와 내부에 또 다른 방들―문이 2개였다―이 붙은 형식이었다. 먼저 들어온 남자가 주방으로 가서 음식을 준비하고, 붉은 털뭉치의 길쭉이는 방으로 들어갔다가 이내 나무 막대기를 하나 들고 나왔다. 혹시 하는 마음에 긴장을 하는데, 길쭉이는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주방 반대편의 거실로 갔다. 거실에는 가죽이 깔려 있는데 그 위에 모로 드러누웠다. “긴장하지 마라.” 길쭉이가 지나가듯 말했다. 침을 꿀꺽 삼킨 루치드가 시선을 피하려다, 궁금한 게 생겨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요, 그 가죽은 뭐예요?” 루치드가 가리킨 가죽은 길쭉이가 깔고 앉은 검은색 가죽이었다. 검은색인지 회색인지 섞였는데, 겉보기에도 매끄럽고 두터워보였다. 루치드는 두려움과 긴장보다 호기심이 앞서 저도 모르게 질문을 던졌다. “이거? 고래가죽.” 별 거 아냐, 라는 태도로 말하는 남자와 다르게 루치드는 예상 외의 답변에 어리둥절했다. “고래요?” “응?” 뭐 불만이냐? 라는 눈빛인데, 루치드가 듣고 싶은 답은 아니었다. 길쭉이가 말한 고래가 자신이 아는 고래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의 고래를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재차 물어보려 하는데, “니가 아는 고래가 맞다.” 라고 음식을 준비하던 남자가 대답했다. 어떻게 자신이 묻고 싶어 하는 것을 먼저 알고 대답해주는 건지 신기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아니, 그것도 그거지만 숲에 고래가죽이 웬 말인가? “이것부터 먹어라.” 남자가 접시를 식탁 위에 올렸다. 베이컨을 닮았지만 베이컨이 아니라는 사실을 코로 먼저 확인한 루치드는, 그럼에도 음식을 보는 순간 먹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도 교육을 잘 받은 루치드답게 어른들이 식사를 시작하기 전까지 주린 배와 흐르는 침을 참아냈다. 방에 들어갔다 나온 코맹맹이도 어깨에 숄더 담요 같은 천을 걸치고 나왔다. 얼룩덜룩한 게 무늬만 보면 짐승의 가죽 같기도 한데, 색깔이 요상했다. 연녹색과 주황색이 섞인 화려함이라니. “먼저 먹고 이야기하자. 궁금한 건 그 뒤에 해결해도 된다.” 남자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접시를 나눠준 후 식탁에 자리했다. 길쭉이가 여전히 거실에 모로 누운 채인 것을 보고 물었다. “난 이게 편해.” “쟨 저게 편해. 쟤는 늘 누워 있어. 게으름의 표본이지.” 코맹맹이의 부연 설명에 길쭉이가 매운 눈매로 노려봤다. 한쪽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앞에 놓인 접시에서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고는 질겅질겅 씹어댔다. 코맹맹이는 애써 시선을 피하는 눈치였다. 루치드를 비롯해 식사를 마친 이들은 식기를 치운 후 식탁에 둘러앉았다. 길쭉이는 여전히 거실 가죽위에 모로 누워 있었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궁금한 게 많은 줄 안다.” 남자가 서두를 뗐다. “예.” “우리도 너에 대해 묻고 싶은 게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코맹맹이가 여지없이 끼어들었다. “난 별로.” 시큰둥하게 툭 내뱉더니 눈을 감고 돌아 눕는 길쭉이였다. “우선 우리 소개부터 하도록 하지. 난 디아트리라고 한다.” “난 신테. 이 집에서 가장 마음이 넓은 남자지. 딱 봐도 알겠지?” 코맹맹이의 소개에 이어 길쭉이가 드러누운 채로 소개를 끝맺었다. “안트.” 안녕하세요, 라고 해야 하나 속으로 생각하는데 디아트리가 말했다. “넌 이름이 뭐냐?” “전, 루치드라고 해요.” 마주보고 있던 두 사람, 디아트리와 신테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 [76] 이종족(3) 다음 날, 여전히 하늘은 구름으로 가득 찬 까닭에 낮임에도 주변은 햇빛 하나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숲 속이라면 구름이 있든지 말든지 어둡긴 매한가지였겠지만, 지금 루치드가 있는 곳은 구름이 너무나도 잘 보이는 곳이었다. “이거 위험한 거 아니에요?” 루치드가 아슬아슬한 자세로 서 있는 곳은 나무의 가장 꼭대기였다. 곧게 뻗은 나무줄기에 한 발을 딛고 뻗어 나온 가지에 한 발을 걸쳐 균형을 유지한 채로 서 있던 루치드였다. “괜찮아. 자리만 잘 잡으면 떨어질 일 없을 거야.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긴 하지.” 오늘따라 흥이 나는 건지 코맹맹이, 아니 신테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가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위에서 보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끝없이 넓게 펼쳐진 초록의 평원. 풀 대신 나뭇잎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다른 세 사람도 서 있었다. 루치드와 달리 세 사람은 아주 편안한 자세로 가지 끝에 서 있거나 앉아(?) 있었다. 이들이 이 곳에 온 이유는 다름 아닌 낚시 때문이었다. “여기서 낚시가 되냐고? 당연하지! 여기가 포인트야. 특히 네가 서 있는 곳. 내가 큰 맘 먹고 양보한 거니까 잘 해보라고. 의심스러워? 그럼 옆의 나무로 가봐. 당장 조과(釣果)가 달라질걸?” 묘하게 포인트(?)가 빗나간 대답이었다. 신테가 허리에 두른 주머니에서 조그만 조약돌을 하나 꺼내 낚시 바늘에 끼우며 대답했다. “오늘 여기 색을 보니까 조황이 좋을 것 같단 말이지. 보통 이렇게 좋기가 쉽지 않거든? 아마 네 덕분에 운이 좋을 것 같아.” 아무리 둘러봐도 여기나 저기나 똑같은 녹색의 숲이었다. 신테가 낚싯대를 크게 휘둘렀다. 바늘에 꽂힌 조약돌이 멀지 않은 나뭇가지에 맞고 숲 속으로 떨어졌다. “지금까지는 말이야. 디아트리가 항상 대물을 낚았어. 근데 오늘은 내가 대물을 들 차례인 거 같아. 만약 정말로 대물이 나오면 그건 네가 행운을 빌려준 덕택일거야. 물론 초출은 내꺼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루치드는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디아트리는 원래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처럼, 마치 자신이 원래 나무의 줄기였던 것처럼, 흔들림 없이 서서 낚싯대를 붙잡고 있었다. 안트는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싶게, 얇은 가지 위에 등을 굽히고 앉아서 낚싯대를 두 손으로 공손하게 맞잡고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며 유유자적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루치드가 안트를 바라보고 있자, 신테가 다시 재잘대듯 수다를 계속 떨었다. “저 녀석은 말이야. 안보는 척 하면서도 다 보고 있는 건지도 몰라. 아니라면 정말 감각이 좋던지. 저렇게 멍 때리다가도 잘 낚아채더란 말이야. 방법을 알려 달래도 가르쳐주질 않아. 조황이 좋든 안 좋든 늘 일정량 이상은 낚는 선수지. 그런데.” 신테는 소곤거리듯 말했다. “대신 대물 낚시는 별로야.” “다 들린다.” 헛기침을 한 차례 뱉은 신테가 말을 이었다. “별로 탐내는 것 같지도 않아.” 아무리 둘러보아도 숲일 뿐이었다. 단지 촘촘하리만치 잎사귀와 가지들이 얽혀서, 겉만 보면 걸을 수도 있을 것처럼 보여 ‘평원’이라는 비유가 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빽빽하게 들어선들 푸른 잎사귀 위를 걷는 게 가능할 리도 없지만, 비유적으로 ‘푸른 바다’라고 부를 수 있을지언정 낚시를 한다는 것은―루치드의 상식으로는―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잡생각하지 말고 낚시에 집중해라.” 멀리 있던 디아트리가 숲 아래를 응시한 채로 말을 건넸다. 믿든 안 믿든 흉내라도 내볼 요량으로 신테가 끼워준 돌을 던져 숲 아래로 늘어뜨렸다. 그러고 보면, 돌을 바늘에 끼운다는 것 자체도 말이 안 되는데? 그렇게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자니, 자신의 모습이 꽤 우습게 보이리란 생각이 들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문득 어젯밤의 대화가 다시 떠올랐다. **** “이름이랑 어울리지 않는군.” “예?” 이름을 물어 보길래, 대답했더니 웬 엉뚱한 대답인가? 디아트리는 한 마디를 뱉고는 심각한 고민에 빠진 표정이었다. 대신 신테가 의아하다는 얼굴을 하고 루치드에게 질문했다. “진짜 이름이 루치드야? 신기하네?” “뭐가요?” 신테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음, 이름이랑 너랑 안 어울려.” 디아트리가 한 말이랑 같은 말이었다. “저랑 어울리는 이름이 있나요?” “아, 그런 의미는 아니야. 음,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신테가 고민에 빠진 디아트리를 힐끗 보며 대답을 궁리하는 사이에, 언제 돌아누웠는지 안트가 루치드를 바라보며―여전히 누운 채로―신테를 대신해 대답했다. “니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랑 너의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소리야. 하긴 그러니까 여기 올 수도 있었던 거겠지.” 안트의 허스키한 목소리에 반색하며 반응을 보이는 신테였다. “무슨 소리야, 안트?” 안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몸을 일으켜 두 다리는 앞으로 곧게 펴고, 두 팔을 뒤로 뻗어 몸을 지탱했다. 그 자세로 루치드를 말없이 주시했다. 뭔가 벌거벗겨진 기분이 드는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기분과 상관없이 궁금한 것은 물어봐야 직성이 풀리기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 여러분들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를 못하겠어요.” 침묵을 지키던 디아트리가 입을 열었다. “사물과 이름은 하나다. 이름이 잘못된 사물은 없고, 사물은 이름을 가져야 그 가치가 있는 법이다.” “예?” 처음으로 길게 말한 디아트리건만, 루치드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대신 신테가 보충설명을 했다. “우리 앞에 놓인 이게 뭐지?” 신테가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는 것. “접시…죠?” “그래, 그런데 접시가 이 사물의 이름이라고 생각해? 아니라고 생각해?” 어? 이름인가? 아닌가? 루치드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신테는 익살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루치드의 대답을 기다려 주었다. “이름, 은 아닌 것 같네요.” “이름은 아니지. 그런데 이름이기도 하지.” …말장난인가? “그런데 이것도 접시고, 저것도 접시야. 그리고 이런 종류의 사물에 붙이는 이름은 모두 접시야. 자, 그럼 접시라는 이름에는 공통점이 있지?” 순간 번뜩이는 것이 있었다. “공통의 성질, 특성인가요?” 신테가 씩 하고 웃었다. “역시. 아무튼, 접시들은 공통의 특성 혹은 효용성을 가지고 있어. 반대로 그 특성이나 효용성을 지닌 사물에 대해 우리는 ‘접시’라고 부른다, 이 말이지.” 루치드에게 꽤 익숙한 이야기였다. 순간 핀체노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사람은 다르지. 사람에겐 각자의 이름이 있어. 그렇지?” “예.” “개인에게 붙은 이름에는 개별적인 특성이 존재해.” “혹시 고유성질, 인가요?” 신테가 탁자를 탁 두드렸다. “그래! 역시! 역시야. 그치? 디아트리?” 디아트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뭔가 자신만 모르고 다른 사람들은 아는, 그런 게 있는 것 같은데. 어리둥절해하는 루치드에게 신테가 싱글거리며 말했다. “사람들은 각자 고유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 그리고 그것은 이름과 직결되지. 즉, 그 사람의 삶과 그 사람의 이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 이거지.” 일단 수긍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넌 너의 이름과 묘하게 어긋난다 이 말이지. 마치 다른 삶을 사는 사람처럼 말이야.” 루치드를 뜨끔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분명 루치드는 그들에게 알려주지 않은 생활과 경험을 했으니까. 그런데 그런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지? 혹시… 관상가? “쟤 또 우릴 이상하게 보는데?” 신테가 디아트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혹시 우리에게 이야기할 것이 있느냐?” 디아트리가 루치드에게 물었다. 물론 물어보고 싶은 것은 많았다. 하지만 겨우 자기소개만 했을 뿐인데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오고가는 와중에 감춰둔 비밀이 폭로당하는 느낌에 루치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쉽사리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지? 이야기를 해도 괜찮은 걸까?’ “피곤해 보이는군.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 그래. 피곤해 보이네. 내일 이야기해. 저쪽 방에 들어가면 침대 있어. 거기서 자.” 루치드는 아무 말도 못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첫째 날이 지나갔다. **** “아이쿠, 아깝다. 대물인 줄 알았는데.” 신테가 낚싯대를 들어올렸다. 빈 바늘만이 허공에서 그네처럼 왔다 갔다 했다. 다시 주머니에서 조약돌을 꺼내어 낚시 바늘에 꽂은 뒤 숲 아래로 줄을 늘어뜨렸다. 숲 위를 산책하듯 여유롭게 불던 선선한 바람이 슬며시 다가왔다가 낚싯줄을 한 번 흔들고는 조용히 지나갔다. 가끔 성난 바람이 지나가면 잎사귀들이 불쏘시개 맞은 불씨처럼 화들짝 일어났다가 금세 가라앉곤 했다. 그런 와중에도 세 사람은 흔들림 없이 서 있었다. 루치드가 선 나무가 튼튼하던지, 아니면 루치드가 가벼워서 인지 떨어질 위험은 없어보였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아슬아슬한 느낌에 땀이 송글 솟아났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하지?’ 라고 생각할 즈음, 디아트리가 낚싯대를 추켜세웠다. 낚싯줄에 뭐라도 걸린 듯 팽팽하게 당겨진 모습이었다. “이야, 오늘도 추출은 디아트리 몫인 거야?” 신테가 한탄하듯 말을 꺼내자, 신호라도 된 듯 안트가 낚싯대를 들어올렸다. “오오, 안트도? 과연 누가 먼저일까나?” 신테가 신이 난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응원을 하는 사이, 디아트리는 낚싯대를 들어 올렸다 놨다를 반복하며 챔질을 했고, 반면에 안트는 낚싯대를 높이 들어 올린 채로 가만히 아래를 응시했다. 가장 먼저 낚싯대를 거둔 것은 안트였다. 실이 팽팽하게 된 상태에서 이쪽저쪽으로 기울이며 낚싯대를 움직이다가 한 순간 힘차게 들어 올리니, 이내 허공으로 잎사귀를 뚫고 물고기 한 마리가 뛰어올라왔다. 넓적한 몸통을 가진 거대한 크기의 물고기였다. 루치드가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 바라보는데, 신테가 탄성을 질렀다. “와, 안트! 광어다, 광어!” 대략 1m는 될 법한 크기의 물고기, 광어가 낚싯줄을 물고 허공에 뛰어올라 꼬리질을 했다. 낚싯대를 낚아채듯 당긴 안트가 긴 팔을 내밀어 광어의 머리 부분을 움켜잡았다. 그러고 보니 안트의 손가락도 보통사람보다 길어보였다. 그 긴 손가락이 광어를 붙잡자, 광어는 한차례 퍼덕이더니 이내 얌전하게 붙잡혔다. 그에 뒤이어 디아트리도 낚싯대를 들어올렸다. 낚싯줄에 걸린 것은 족히 3m는 될 것 같은 거대한 크기의 두툼한 살집을 자랑하는 물고기였다. 저토록 연약해 보이는 나무 재질의 낚싯대가 부러지지도 않고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아, 아쉽다. 조금만 더 빨랐으면 안트를 이겼을 텐데.” “저건 뭐죠?” “저거? 참치. 처음 봐?” ‘눈앞에서 펼쳐지는 모든 것이 처음입니다.’ 참치가 숲의 잎사귀를 뚫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은 앞의 세 사람을 제외하고는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루치드가 얼이 빠져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는 사이, 손에 감각이 왔다. 깜짝 놀라 움켜쥐었더니 낚싯대로부터 엄청난 반동이 느껴졌다. “너도야? 너도? 아니, 왜 나는 아직 인거야?” 신테는 투덜대면서도 루치드를 옆에서 코치해줬다. “놓치지 마. 살살. 그래, 살살 낚싯대를 들어 올렸다가 살짝 놔줬다가를 반복하면서 힘을 빼줘야 돼.” 루치드의 힘이 먼저 빠질 것 같았다. “도와줄까?” 도와주세요, 라고 말하려는 찰나 낚싯대에 걸린 힘이 약해졌다. 루치드는 저도 모르게 낚싯대를 힘차게 들어올렸다. 팽팽해진 줄을 타고 올라온 것은 역시 루치드가 알지 못하는 물고기였다. “이야. 대단한데? 첫 낚시에 노래미를 건져 올렸네. 초출이지? 축하한다!” 루치드의 낚시에 걸린 노래미는 얼룩덜룩한 무늬의 작은 물고기였다. 대략 10㎝정도? 이만 한 놈이 그렇게 힘이 세다니. 아니 그것보다, 숲에서 이런 생선이 잡혀도 되는 건가? 루치드는 할 말을 잊었다. “너무 상심하지 마. 첫 낚시에 그 정도라면 잘한 거라고.” 신테가 루치드를 위로했다. 루치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요. ======================================= [77] 이종족(4)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다들 어깨에 물고기를 하나씩 걸치고 있었다. 디아트리는 4m짜리 청새치 한 마리와 3m짜리 참치 한 마리를, 안트는 3m짜리 부시리와 1m짜리 광어를, 신테는 2m짜리 농어 두 마리를 각각 짊어졌다. 반면 루치드는 네 개의 낚싯대를 둘러메고, 오른손에 10㎝짜리 노래미 한 마리를 든 채로 세 사람을 뒤따랐다. 신테는 “역시 오늘 조황이 좋았어. 그치?” 라며 희희낙락했다. 루치드는 왠지 의기소침해졌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디아트리가 주방으로 갔다. 서랍에서 칼을 꺼내 들더니, 같이 놓여있던 칼갈이에 대고 날을 다듬었다. 적당히 날이 섰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그제서야 선반에 올려놓은 참치의 배를 가르기 시작했다. 안트는 남은 물고기들을 염장하기 위해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신테가 도와주겠다며 두 마리의 물고기를 어깨에 다시 짊어지고 졸래졸래 따라 나섰다. 루치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거실을 서성거렸다. 루치드는 디아트리의 등을 보며 물었다. “저기, 좀 도와드릴까요?” “아니.” 뭔가 뒷말이 붙을 법도 한데, 간결하고 단호하게 의사를 전달하는 디아트리였다. 루치드는 그냥 서있기도 뭣해서 의자에 앉았다. 시선 둘 곳을 찾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그냥 디아트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디아트리는 내장을 들어낸 후 참치의 꼬리부분을 돌려 깎듯 잘라내고 있었다. “물어볼 게 있으면 물어봐라.” 디아트리가 무심하게 한 마디를 뱉었다. 꼬리를 잘라낸 그의 칼은 어느 새 참치의 머리를 가르고 있었다. 루치드는 침을 한 번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기는 어디죠?” “에르케넨.” “…….” 디아트리는 묵묵히 잘라낸 머리를 들어 한 편으로 치운 뒤, 뱃살을 발라내고 있었다. “여기 다른 사람들은 안 사나요?” “그래.” “…….” 이럴 때는, 말이 좀 많긴 해도 신테가 훨씬 대화하기 좋은 상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없나?” 더 궁금한 게 없는지 물어보는 디아트리였지만, 어떻게 더 물어봐야 할지 난감한 심정이었다. “그럼 내가 물어봐도 되겠나?” 어? “어, 예.” 디아트리의 칼은 멈추지 않고 계속 참치를 해체해 나갔다. “넌 어떻게 여길 올 생각을 했지?” “예?” 산에서 내려온 자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오신 분이 그렇게 물어보시면 어떻게 대답하란 말이지? 루치드가 또 한 번 대답에 곤란함을 느낄 때, 디아트리는 도려낸 뱃살을 옆에 치우고 등을 갈랐다. “여긴 사람들이 오지 못한다.” 산이 너무 험해서 오기 힘든 곳이다, 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왜요?” 등살마저 깔끔하게 분리해 낸 디아트리가 잠시 칼을 놓았다. 뱃살보다 등살이 더 색이 진하고 붉은 색이구나, 라고 잠시 생각했다. “혹시 이곳에 오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이 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느냐?” 디아트리가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물었다. “아니요. 없어요. 그러고 보니 다들 이곳이 대륙의 최남단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돌산을 넘으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아요.” 잠시 생각에 잠긴 루치드는 곧 말을 이었다. “아니 사실은 잘 모르겠어요. 저희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는 이곳에 오려고 했던 사람이 없었던 것 같지만, 확실하진 않네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일일이 이야기하고 나가시는 건 아니니까요. 또 우리 마을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왔을 수도 있죠.” “없다.” 디아트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말에 이견이란 있을 수 없다는 듯 단정을 지었다. “예? 혹시 있을 수도 있지 않나요?” 이토록 넓은 곳에 사람이 한명도 오지 않았다는 것은 믿기 힘들었다. 겨우 세 사람이서 저 장벽 전체를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혹시 왔더라도 다른 방향으로 건너왔다면 모를 수도 있을 테고. “없다. 왜냐하면… 이 곳은 사람들에게 존재하지 않는 땅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디아트리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렸다. “신테!” 밖에서 신테가 허겁지겁 들어왔다. 손에는 염장을 할 때 쓰는 소금이 묻었는지 하얀 가루가 묻어 있었다. “왜? 아직 염장 안 끝났는데?” “안트에게 맡기고 넌 루치드 데리고 경계에 다녀와.” “경계? 왜?” “그냥 가서 보여주고 와.” 신테는 흘낏 루치드를 보았다. 거기가 어디예요, 라고 묻기도 전에 신테가 고개짓을 하고 집을 나섰다. 루치드는 신테를 따라 ‘경계’라는 곳을 갔다. 아직 저녁이 되기엔 이른 시간이라 빨리 갔다 오면 저녁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거라며 콧노래를 부르는 신테를 따라간 곳은 다름 아닌 예의 절벽이었다. 여전히 구름 아래로 높다랗게 치솟은 절벽의 웅장함은 고개를 움츠리게 만들었다. “여긴 왜 온 거예요?” 높고 가파른 절벽은 아래에서 보기에도 아찔할 정도였다. “너 여기로 왔다고 했지?” “예.” 신테가 가만히 루치드를 바라봤다. 영문을 모르는 루치드는 빤히 자길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슬쩍 시선을 피했다. “넌 저기가 뭐로 보이니?” 평소의 유쾌한 어투가 아니었다. 여전히 비음이 섞인 목소리였지만,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들렸다. “네? 무슨… 절벽이잖아요?” “아, 그래. 절벽. 그래서 디아트리가 널 여기로 보냈구나.” 루치드는 대답 대신 신테를 바라보았다. 어제도 느꼈지만, 뭔가 계속 핀트가 나간 대화가 이어지는 기분이었다. 신테는 절벽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저길 경계라고 한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인지의 경계선’이라고 표현해야겠지.” 처음 듣는 말이 나왔다. “‘인지의 경계선’이요?” “저 곳은 애초에 눈으로 보이는 곳이 아니거든. 다시 보거라.” 루치드가 눈을 돌리니, 이게 웬걸?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 있던 절벽이 보이지 않았다. 그 곳에는 하늘거리는 빛의 장막이 있었다. 루치드는 숲에서 참치를 낚아채는 모습보다 더 놀라운 광경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심정적으로 무너지는 게 아니라 실제로 땅이 무너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분명 동서로 죽 늘어선 절벽이었다. 방금 전까지도 보고 있었던 절벽이었다. “저게 뭐죠? 아니, 방금 전까지 저기 절벽이…….” 말을 끝맺기도 어려웠다. “그게 네가 인지했던 경계선의 이미지겠지.” 혼란스러워하는 루치드를 보던 신테가 손을 끌고 경계선에 다가갔다. 경계선에 가까워질수록 장막에 서린 빛이 투명해졌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장막이 있는 줄도 모르게 변해버렸다. 하지만 장막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과 별개로 그 너머는 보이지 않았다. 루치드가 손을 내저었다. 아무것도 걸리는 게 없었다. 하지만 막이 있던 자리, 그 경계를 넘어갈 수는 없었다. “알겠니? 저기 저 경계 너머는 네가 인지할 수 없는 공간이야. 눈으로 보고 있어도 보이지 않고,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어.” “하지만, 전 저기서 넘어왔는데요?” 신테가 엄지와 중지를 튕겨 딱, 소리를 냈다. “바로 그거 때문에 우리가 놀란 거지. 저긴 평범한 사람은 올 수 없거든. 우리도 마찬가지로 저길 넘을 수 없고 말이야.” “그럼 전 어떻게 넘어온 거죠?” 신테는 대답대신 질문을 했다. “그 전에 말이야. 넌 저길 절벽이라고 불렀어. 그렇지?” “예.” “그리고 반대편은 돌산이라고 했고.” “예.” 신테는 무릎을 굽히고 루치드와 눈을 마주했다. “아마 네가 살던 대륙의 사람들은 그 돌산을 인지하지 못할 거야. 돌산을 보지도 못했을 테고. 지금 네가 보는 장막 너머처럼. 게다가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한다는 사실마저 모를 거야.” 모르는 걸 모른다? “그래서 아무도 그 곳으로, 돌산으로 오려는 생각도 안했고, 넘어볼 시도도 하지 않은 거지. 인지 너머를 향해 발을 딛는 것은 보통의 인간은 할 수 없으니까. 추측컨대, 너희 마을 사람들이 인지할 수 있는 마지막 공간은 아마도 네가 말했던 습지까지였을 거다.” 루치드는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그 말을 부정했다. “그럴 리가요? 사람들은 분명히 이곳, 아니 돌산을 보았을 거예요.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고요. 뻔히 보이는 걸 모를 리가 없잖아요?” “혹시 마을 사람들 중에 너에게 돌산에 대해 이야기한 사람이 있었어?” 루치드는 돌이켜 보았다. 그러고 보니 돌산에서 돌을 캐거나, 캐다가 다칠 것 같다고 예상했던 것은 오직 자신만의 추측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돌산을 생각하다보니,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넘겨짚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아버지나 어머니, 그리고 다른 마을 사람들까지도 돌산에 대해 언급을 한 적이 없었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한 가지 돌산을 증명할 수 있는 일이 생각났다. “저기, 근데요. 전 돌산을 오르다가 그림을 봤어요.” “그림?” 루치드는 돌산 고갯길에 있던 동굴에서 보았던 그림을 설명했다. 신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림은 아마도 니가 그렸을 거야.” “네? 아니 그게 무슨…….” “실제로 그렸다는 말은 아니고, 네가 눈으로 본 산의 이미지를 투영시킨 것이라는 거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자기 눈으로 보았고, 그 질감, 촉감, 색감을 또렷이 기억하는데 그게 그 벽화가 사실은 벽화가 아니고, 그린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라고? 루치드의 눈이 초점을 잃고 크게 흔들렸다. 신테가 두꺼운 손바닥을 들어 루치드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 그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다시 돌산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겠네. 그런데 우리가 너무 늦으면 디아트리랑 안트가 식사를 못할 거야. 그러니 우선 돌아가서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니?” 식사고 뭐고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루치드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저 세계로 넘어갔을 때만큼이나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알던 지식, 상식, 진실이 모두 무너지고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저 세계 말로 ‘멘탈이 붕괴’된다는 것이 바로 지금의 상황이리라. 루치드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신테와 함께 집 앞에 서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식탁에는 디아트리가 참치회가 수북이 쌓인 접시를 내놓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실에 누워있던 안트가 일어나 식탁에서 접시 하나를 챙기고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누웠다. “보고 왔어?” “이번에 바로 보던데?” “그랬겠지.” 두 사람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려는데, 디아트리가 선수를 쳤다. “우선 먹자.” 네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식사를 했다. 오전까지만 해도 수다를 떨던 신테마저도 말이 없었다. 루치드는 먹어도 맛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여 배를 채울 따름이었다. 하긴 세상이 무너지는데 식사가 다 무슨 의미인가. 식사를 마친 후 컵을 하나씩 붙잡고 이야기를 나눌 준비를 끝냈다. 디아트리가 말했다. “넌 아마도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것 같구나.” 컵을 바라보고 있던 루치드의 고개가 전광석화처럼 번쩍 들렸다. “경계의 근처에서 우리가 처음 봤을 때, 니가 마법을 쓰려고 하던 것 같아서 말이야.” 신테가 덧붙여 말했다. 루치드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호, 혹시 디아트리도 마법사예요? 아니 세분 다 마법사예요?” 신테가 대답했다. “아니, 우린 마법사는 아니야. 그냥 평범한… 평범한?” 말을 잇던 신테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디아트리를 바라보았다. “지톤이야.” 루치드의 등 뒤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안트를 바라보았다. 팔베게를 하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안트가 한쪽 발을 반대 다리 위에 올리며 말했다. “지톤(zitón), 구도자(求道者)라고 하지.” ======================================= [78] 수업(1) “지톤이요?” 루치드가 생소한 단어에 고개를 갸웃했다. “마법사 같은 건가요?” 신테가 검지를 까닥거리며 말했다. “아니, 마법사랑은 다르지. 마법사는 마법을 쓰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우리는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거든.” 뭔지 모르겠다. ‘진리를 찾는’ 이라는 서술이 루치드의 지식수준에서 명확히 해석되지 않았다. 진리라는 게 보물찾기 같은 것도 아니고, 그런 걸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디아트리가 깍지를 끼며 말했다. “진리 혹은 진실이다. 우리가 찾는 것. 세상의 모든 진리와 진실을 찾아 눈을 밝히는 일을 한다.” 신테가 덧붙여 설명했다. “마법사들이 사물에 담긴 이치를 탐구하듯, 우리는 세상 만물의 진리를 찾는 거야. 마법사는 그렇게 찾아낸 이치를 활용하여 마법을 사용하지만, 우리는 만물의 진리를 밝혀 바르게 세상을 보는 눈을 갖지.” 디아트리가 마침표를 찍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거다.” 루치드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을 골랐다. “진리를 밝힌다던지, 세상을 보는 눈이라는 말이 이해가 잘 안돼요. 혹시 호기심 같은 건가요? 비가 왜 내리는지 궁금해 한다거나, 우리가 사는 땅이 어떻게 생겼는가 하는 거요.” 신테가 웃었다. “비슷하네. 그래, 사실 호기심에서 시작할 수도 있지. 하지만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더라고. 예를 들어, 요즘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시간이야.” “네?” “우리는 모두 다른 곳에서 태어나 다른 곳에서 자라고 살아왔어.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눈을 마주치고 있지. 왜 이 시점에 우리가 만난 걸까?” “…….” 뭔가 차원이 다른 질문이 나왔다. 그게 중요한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저는 그냥 우연히 이 자리에 온 거 같은데요?” “물론 이 세상에 ‘우연’이라는 게 없겠냐, 만은 사람은 매 순간 의미를 쌓으며 살아가는 존재다. 단 한순간도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나무가 매순간 나이테를 두르듯, 사람은 의미를 쌓으며 살아간단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만남에도 의미가 있지.” “어떤 의미요?” 디아트리가 말을 끊었다. “이건 너에게 어려운 이야기다. 아직 니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루치드도 이해도 잘 가지 않는 대화를 계속 이어나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이 또래보다 더 호기심이 강한 아이라지만, 자신의 이해 범위를 벗어난 대화를 계속 이어나갈 만큼 호기심이 강하지는 않았다. 또 달리 물어봐야 할 것도 많았고. “돌산, 아니 경계선이라는 곳은 어떤 곳이죠? 저는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디아트리의 입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역시나 이번에도 신테가 대답을 했다. “두 번째부터 답을 줄게. 결론만 말하면 지금은 어려워.” “나중에는 갈 수 있다는 뜻이네요. 언제요?” 신테의 희망적인 답변에 굳어있던 얼굴이 살짝 풀렸다. “그건 니가 노력하기 나름이지.” “거길 넘어가기 위해 제가 뭘 해야 한다는 뜻인가요?” 신테는 입꼬리를 올리며 기특하다는 듯 루치드의 어깨를 툭 쳤다. “맞아. 그리고 그건 너의 첫 번째 질문과도 관련이 있지.” 그러나 더 이상의 답은 없었다. 루치드가 답을 기다리자니 뒤에 누워있던 안트가 버럭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희 둘 왜 이렇게 답답한 소리나 하고 있는 거지? 하여튼 저런 놈들과의 대화라니, 끝도 없지.” 안트는 투덜대며 루치드에게 말했다. “잘 들어. 그 돌산은 지금의 니 수준에서는 아무리 설명해 줘봐야 알 수 없어. 니가 그 돌산의 정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경계선에 대한 의문도 풀릴 거다. 그리고 그 때가 니가 저 경계를 넘어갈 수 있게 되는 날이다.” “제 수준이요? 어리다는 말씀이신가요?” 안트는 고개를 저었다. “니가 쓰는 마법, 아무나 다 쓸 수 있는 거야?” “아니요.” “나이의 많고 적음이 마법을 쓰는데 제한이 있어?” “아니요.” “같은 거다.” 이 사람들과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인가,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말하자면, 니가 아직 멍청해서 우리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거지.” “안트,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신테가 안트를 나무랐지만 안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쟤는 이렇게 말해줘야 알아 들을걸, 그렇지?” 그 말대로 루치드는 마지막 말 만큼은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디아트리가 말했다. “내일부터 우리들과 한 사람씩 번갈아 가며 생활하도록 해라.” “예?” “한 사람씩 따라 다니며 가르침을 얻어라. 그 가르침으로 니가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면, 이 곳을 나가는 것쯤은 문제가 없을 것이다.” 1:1 맞춤교육을 떠올린 루치드. “다 같이 다니는 건 아닌가요?” “오늘처럼 셋이서 한 자리에 모여 낚시하는 일은 드물어. 각자의 일이 있으니까 말이야.” 날이 완전히 저물었는지 바깥은 완전한 어둠에 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여쭐게요.” 슬슬 자리를 정리하려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저희 마을 사람들, 저희 가족, 모두 여기에 없는 건 확실한가요?” “그래. 이미 말했지만 여기는 사람이 올 수 없는 곳이니까. 너를 제외하고 말이지.” 신테가 빙글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여기는 누가 들어오면 누구든 알 수 있다. 그런 곳이니까. 자세한 건 앞으로 알아가도록 해.” 안트는 등을 돌렸다. 안트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대화는 끝이 났다. 무엇 하나 속 시원하게 정리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더 대화를 할 여지도 없어보였다. 침대에 누운 루치드의 머릿속에 ‘멍청한 놈’이란 말이 맴돌았다. 하지만 목표는 정해졌다. 이 곳에서 빨리 나가는 것. **** 1일차. 루치드는 디아트리를 따라 나섰다. 디아트리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묵묵히 걸어갔다. 디아트리는 몸이 너무 검어서 숲 속에서 집중하지 않으면 시야에서 놓치기 쉬웠다. 그 낌새를 눈치 챈 디아트리가 말했다. “쫓아오기 힘든 가?” 루치드는 조금 곤란하다는 표시로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어두우면 초를 들면 된다.” 문 옆에 놓여 있던 초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에 앞서 루치드가 다른 방법을 물었다. “마법을 써도 되나요?” 디아트리가 걸음을 멈추고 루치드를 돌아보았다. 하얀 눈동자만 어둠 속에 둥둥 떠다니는 광경은 볼 때마다 어쩐지 섬뜩하다는 느낌이었다. “써 봐라.” 루치드는 머리 위로 광원을 만들었다. 디아트리가 위를 흘깃 보더니, 다시 루치드를 보았다. 광원 덕분에 주변이 밝아졌지만 여전히 디아트리의 표정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놀랐다는 건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지, 인상을 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가자.” 디아트리는 몸을 돌려,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그래도 광원 덕분에 어둠속에서 길을 잃을 걱정은 하지 않게 된 루치드는 조금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한참을 걷던 디아트리가 어떤 나무 앞에 멈춰 섰다. 옆의 나무와 별 다를 게 없어 보이는 나무였다. 굳이 찾자면, 옆의 나무보다 색이 희미하다는 거? 그나마도 빛이 환하게 비쳐주었기에 알 수 있었다. “이 나무는 오래 전에 죽은 나무다.” 고개를 들어보니 여전히 가지에 잎이 달려 있었다. “이 근처에서 장작으로 쓸 만한 나무는 오직 이 뿐이다.” 디아트리는 나무 위로 올라가 나뭇가지를 꺾었다. 마른 나무처럼 퍽퍽한 나뭇가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떨어진 나뭇가지에 달려있던 잎은 어느새 낙엽처럼 노란 색을 띄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줄기에 붙은 나무껍질을 손으로 뜯어내 보니, 역시 죽은 나무였다. “죽은 나무만 장작으로 이용한다. 그게 이 숲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철칙이다.” “생명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건가요?” 학교에서 자주 배우던 가르침이었다. 산에 소풍을 갈 때, 산에 함부로 쓰레기 버리지 말라는 이야기. 길거리에서 돌아다니는 개나 고양이에게 돌을 던지지 말라는 이야기. “아니. 그냥 죽은 나무는 장작으로 쓴다는 것이다.” 0은 그냥 0이다, 라고 말하는 어투였다. 그러고 보면 디아트리는 항상 핵심적인 부분만 강조하는 어법을 사용했다. 미사여구를 덧붙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난 말이 많지 않다. 왜냐하면 말은 오해를 부르기 쉽기 때문이다.” 또 하나, 디아트리는 어찌된 일인지 루치드의 속마음을 읽는 것 같았다. 디아트리가 나뭇가지를 또 하나 꺾어 아래로 떨어뜨렸다. 루치드는 그 나뭇가지들을 하나하나 모아서 등에 맨 바구니에 하나씩 집어넣었다. “말은 서로의 갈등을 해결해주는, 그런 거 아닌가요? 대화를 해서 서로를 이해하는 그런 거요.” “언어는 사상과 인식을 재현하고 발전시키는 수단이다.” 맞다, 틀리다도 없이 그냥 자기 할 말만 한다. 디아트리는 옆의 나무를 가리켰다. “이 나무는 처음부터 이 모양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조금만 씨앗에서 시작되었을 거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대지 위로 싹을 틔어 점점 자라났을 것이다. 해가 갈수록 줄기는 굵어지고 높이도 높아졌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 우리가 보는 이 모습이 된 거다.” 디아트리는 더 위의 가지를 붙잡고 몸을 띄어 위로 올라갔다. 몸놀림만 보면 원숭이가 따로 없을 정도였다. 다른 두 사람보다 더 몸이 묵직해 보이는 것과 달리 가벼운 몸짓이었다. “우리가 언어가 없다면, 방금처럼 나무의 성장을 묘사할 방법이 있었을까? 몇 십 년, 몇 백 년의 세월을 함축하여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까?” 여전히 그의 굵은 목소리는 거리가 멀어지든 상관없이 루치드의 귀에 딱딱 틀어박혔다. “그런데 한 가지를 짚어 보자. 이 나무와 저 옆의 나무는 서로 다른 나무다. 그런데 앞서 표현한 나무의 성장이 이 나무를 설명하기 위해 한 것이라고 가정하자. 나는 이 나무를 설명했지만 넌 저 나무를 설명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있을 것 같은데요.” “있다. 왜냐하면 그 묘사에는 이 나무를 특정 하는 표현이 없었기 때문이겠지. 다시 말해서 모호한 묘사와 설명은 오해를 부를 수 있다.” “어차피 똑같은 나무잖아요.” “똑같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범주에 포함된다는 것이지. 개별적 주체로서 동일하냐, 라는 질문에는 같은 답을 할 수 없다.” 루치드는 잘못 대답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 한 번 자신의 머리가 멍청한 건가, 라는 자책을 하는데, 디아트리가 말을 이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언어는 사상과 인식에 관계한다. 잘못된 단어 사용이나 불명확한 표현, 혹은 서로 합의되지 않은 이해와 개념들이 언어로 표현되면 서로의 생각이나 사상에 충돌이 일어나고, 그것은 니가 말한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디아트리의 말은 길어지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은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되도록 간결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하여야 한다. 그래야 진리에 다가가는데 도움이 된다.” 두 문장을 말했는데, 그 문장 사이의 논리적 비약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리에 다가가는 길은 내 생각을 다듬는 길이다. 그런데 나의 말과 나의 표현 역시도 내 생각을 저해하거나 단정 짓는 요소가 될 수 있다.” 루치드는 자신이 최초에 디아트리에게 무엇을 물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걸 생각해내야 다음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디아트리와 대화를 나눈 지 불과 몇 분도 되지 않아 생전 처음으로 공부하기 싫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숙제를 주마. 이 숲이 얼마나 넓은지 설명해 보아라.” “예?” “당장 할 필요는 없다. 곰곰이 생각을 해 보고 답하면 된다.” 그 날의 수업은 이걸로 끝이었다. 루치드는 자신이 멍청한 건지, 디아트리가 수업에 재능이 없는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 [79] 수업(2) 2일차. 루치드는 안트를 따라 숲 속을 걸어갔다. 안트는 남쪽으로 갔다. 아니, 사실 이 곳에서 동서남북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아서 사실 남쪽이라는 확신은 없었다. “어, 이건가?” “뭐가?” 안트가 걷던 걸음을 멈추고 되물었다. 여전히 그의 빨간 머리는 숲 안개 긴 어둠 속의 횃불처럼 흔들렸다. 머리 위의 광원으로부터 쏟아진 빛에 더욱 활활 타오르는 안트의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어제 디아트리가 한 이야기 중에 생각나는 게 있어서요. 언어가 내 생각에도 영향을 준다고 했는데요, 제가 방금 우리가 가는 방향을 ‘남쪽’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사실 남쪽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디아트리같은 말을 하는군.” “예?” 안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몸을 돌렸다. 길 가운데로 늘어져 있던 축축한 덩굴을 잡아챈 후 옆에 선 나무에 걸치듯 던져 올렸다. 팔이 기니까 저런 것도 되는구나, 라며 감탄했다. “그 녀석은 말주변이 없어서 말을 많이 하지 않는 놈이야. 자기 머릿속에 있는 말을 밖으로 꺼내는 게 힘들어서 그럴 거야. 알고 보면 우리 중에서 제일 멍청할 걸.” 서슴없이 디아트리를 깎아내리는 안트였다. 그가 정말 멍청하다면, 그의 말을 10%도 알아듣지 못해 머리를 쥐어뜯은 자신은 뭐란 말인가. “마침 방향을 이야기했으니 그걸 비유로 들어주마. 그 녀석은 자신이 남쪽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하면 남쪽으로만 가는 녀석이다. 다른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아. 하지만 왜 굳이 남쪽으로 가야하는가를 물으면 대답하지 못하는 녀석이지.” 처음에는 안트의 걸걸한 목소리가 귀에 거슬렸는데, 듣다 보니 저 목소리도 나름 들을 만 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역시 사람은 적응하기 나름인가보다. “왜 그렇죠?” “남쪽으로 가는 길 외에는 생각하지 못하는 놈이거든. 남쪽으로 가야한다, 는 명제가 그의 머리에 있으면 오직 그것만 생각한다, 그 놈은.” 디아트리는 보이는 것만큼이나 우직한 사람인가보다. “말하자면, 생각과 말이 일치해야 한다고 믿고 그것을 실천하지. 그런데 사실 그런 놈이 생각은 단순해. 오직 하나만 생각하지. 생각이 단순하니 말도 단순하게 내뱉는 거야.” “안트는요?” “나? 굳이 표현하자면, 남쪽 대신 북쪽으로도 가보는 거지. 이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굳이 남쪽으로만 가냐? 다른 방향도 가보고 그래야 이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지.” 지금까지 몰랐던 안트의 모습이었다. 늘 틱틱거리거나 딴지를 거는 모습만 보여서 어쩐지 불량한 반항아의 이미지였는데, 알고 보니 모범생 같은 스타일이었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곳으로 가보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왜냐고? 원래 그런 길이 스릴이 있거든.” ‘모르겠다. 무슨 생각인지.’ 방금 전까지는 모범생 같았는데, 다시 불량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불량한 모범생? 그 때 안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루치드는 혹시 속으로 한 생각을 들킨 건가 싶어 뜨끔했다.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아?” “무슨 소리요?” “귀를 기울여봐라.” 가만히 있으니 여전히 숲 위로 부는 바람소리만이 두터운 지붕을 뚫고 들려왔다. “아무것도 안 들려요.” “아직 인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안트가 루치드를 데리고 숲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숲안개를 헤치며 나아간 그 둘 앞에 나타난 것은 작은 연못이었다. “어, 물이네요?” 지금껏 왜 물이 생각나지 않았는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물을 보자마자 갈증이 이는 것을 보니 우선 마시고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마셔도 되는 거예요?” 안트가 옆에서 긴 나뭇잎을 떼어다 루치드에게 건넸다. 그리고 자신도 잎 하나를 따서는 둥글게 말아 물을 떠 마시는 시범을 보였다. 루치드가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보며 안트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너에게 가르쳐 줄 건 별로 없다.” 무슨 소리냐는 눈빛을 보내는 루치드를 보며 안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단 하나 알려줄 게 있다면, 난 이 말을 너에게 들려주고 싶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마라.” “네?”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이야기다.” 루치드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를 보이자, 안트가 말을 했다. “넌 왜 이 곳에 왔다고 했었지?”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찾기 위해서요.” “가족을 왜 찾으려고 하지?” “네?” “가족을 왜 찾으려고 하지?” “가족이니까요.” “가족이니까 당연하다?” “네.” “그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 여기지 말라는 이야기다.” 디아트리보다 더 이상하다. 말을 못 알아듣겠다는 수준을 벗어났다. “가족은 소중한 것이냐?” “예.” “왜?” 막상 대답하려니 대답이 궁했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 그것 외에 다른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너의 부모가 널 한 시도 빼놓지 않고 때리고 학대하는 부모라면, 그래도 너의 가족은 소중한 것인가?” 순간 머릿속에 소미의 얼굴이 떠올랐다. 소미에게 가족은 소중할까? “표정을 보아하니, 어떤 일이 있었나보군.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 신경 쓰지 마라. 내 말의 요지는 니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언제나 당연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니까.” “의심하라는 말은요?”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은 마법사에게도 중요한 일일 텐데?” 거기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던 루치드였다. “지톤이 마법사를 가르치다니. 이번에도 예를 들어보마. 저 물을 봐라. 방금 마시기도 했으니 저 물이 물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 “예. 그렇죠.” “지금처럼 니가 경험적으로 체득한 사실을 지식화하는 것이 일반적인 지식 습득 과정이다. 하지만 그런 경험에는 한계가 있지. 그래서 사람들은 간접적으로 지식을 전수하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내가 저 잎으로 컵을 대신해 마시는 방법을 가르친 것처럼. 혹은 책을 통해서 지식을 전달하기도 한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루치드가 절감한 부분이었다. 책이 아니었다면 저 세계의 그 많은 지식들을 어떻게 얻을 수 있었을까? “그런데 말이다. 니가 마신 저 물이 사실 물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겠느냐?” “예?” “왜 저 것을 물이라고 생각했지?” “어? 저, 그러니까… 물처럼 생겼고, 또… 물맛도 나고….”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스러워서 더듬거리는 루치드를 보며 안트가 이야기했다. “니가 저 것의 정체를 알게 되는 날, 넌 이 곳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예?” 루치드는 그저께 저녁에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이 났다. 그 때도 분명 저런 말을 했었다. 루치드는 물의 정체에 대해 물었지만, 안트는 숙제라며 대답을 회피했다. 안트는 연못 옆에 핀 노란 꽃들의 잎을 하나씩 따서 주머니에 넣었다. “이걸 갈아서 음식에 넣으면 좋은 향신료가 되거든.” 이 곳에 사는 세 사람은 거의 대부분 먹는 일에만 집중하는 모습이다. 루치드에겐 이해할 수 없는 말이나 던져놓고, 거기다 시작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도 잡을 수 없는 숙제나 떠넘기고 말이다. “일하지 않으면 먹을 것도 없다, 는 말 들은 적 없나?” 루치드는 미간을 좁히고는 안트 옆에 앉아 잎을 따기 시작했다. 3일차. 신테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어떤 나무 위에 서 있었다. 루치드는 신테를 따라 나무 위에, 역시, 아슬아슬하게 서서는 신테를 바라보았다. “이틀 동안 많이 배웠어?” 그 동안 신테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눴더니, 조금 편하게 여겨졌다. “아니요. 다들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설명도 잘 안 해주셔서요. 일단은 혼자 고민하면서 풀어보려고 하는 중이예요.” “원래 지톤의 삶이 그래. 풀기 힘든 이야기에 매달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려고 하지.” “왜 그렇게 하나요?” “그게 지톤의 삶이니까. 넌 마법사로서 뭘 하고 있지?” “마법사로서요?” 딱히 마법사로서 하는 게 없던 루치드였다. 머리를 좀 더 굴려 생각해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 쪽 세상에 있을 때는 좀 더 많은 마법을 쓸 수 있도록 공부도 했었는데, 여기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지금까지 연구한 마법은 어떤 게 있지?” “일단 불이랑, 빛이랑, 열, 그리고 마찰력 정도?” “마찰력?” 생소하다는 표정을 짓는 신테였다. 루치드가 미끄러지는 현상으로부터 응용하게 된 마찰력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이야, 너 대단하구나. 마찰력이라고? 난 처음 듣는 이야기였어. 니가 만든 단어야?” 순간 말문이 막힌 루치드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대답했다. “아니요. 배운 거예요.” “너 대단한 스승이 있었나보네. 아무튼 내가 본 마법사 중에서 가장 놀라움을 준 친구야. 세상에 마찰력이라니.” 그는 마치 새 장난감을 얻은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쉴 새 없이 마찰력을 흥얼거리며 숲 위의 잎사귀들을 쓰다듬듯 쓸어내렸다. “뭐 하시는 거예요?” “이거? 오늘은 면요리를 먹고 싶어서 반죽하는 중이야.” “예?” 보육원 식당에서 두 볼과 턱에 밀가루를 묻혀대며 반죽을 주무르던 윤정의 모습이 생각났다. 하지만 지금 신테의 모습에서는 그것과 단 1%도 일치하는 면이 없었다. “나중에 보면 알게 될 일이고, 일단 다른 사람들에게서 뭘 들었어?” 루치드는 더듬거리며 지난 이틀간 배운 것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더불어 혹시 알려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에 숙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그 두 사람은 정말 대단해. 벌써 그렇게까지 나가다니. 하긴 마찰력을 이해하는 너라면 그리 어렵지는 않겠다.” 가끔 신테는 이렇게 핀트가 어긋나는 이야기로 사람을 당황시킬 때가 있었다.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새버렸네.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마법사가 마법을 연구하는 것처럼 지톤은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연구하는 거야. 디아트리는 언어를 연구하지. 나는 시간을 연구하고.” “안트는요?” “없어.” “없어요?” “주제를 정하는 게 귀찮나봐.” “그럼 연구를 안하는 건가요?” “아니, 연구는 하지. 대신 주제가 없을 뿐이야. 그는 모든 걸 의심해.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지.” 신테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숲 위를 쓸 듯이 팔을 휘두르던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나무 아래로 손을 쑥 넣었다. 그가 손을 뺐을 때, 그의 손 위에는 하얀 밀가루 반죽 덩어리가 들려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루치드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 그거 마법인가요?” “응? 아니야. 난 지톤인걸. 지톤은 마법을 쓰지 않아.” “그럼 어떻게……?” “나중엔 너도 알게 될 거야. 돌아가자.” 신테는 나무 아래로 내려갔다. 뒤이어 루치드가 나무를 내려갔을 때, 신테는 반죽을 양손에 들고 던졌다 받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넌 왜 사물 구현 마법은 쓰지 않는 거지?” “어, 그게 제가 아직 사물에 대한 지식이 모자라서요.” “니가?” 마치 못들을 걸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신테는 조금 심각해진 얼굴로 되물었다. “넌 빛이나 불도 마법으로 구현해내면서 정작 사물은 구현을 못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데? 사물 구현이 더 쉽지 않나?” 그 밀가루 반죽 처럼요? 라고 묻고 싶었다. 신테는 반죽을 눈앞에 들어보였다. “이게 뭐로 보이지?” 어제도 비슷한 질문을 들었는데. “혹시 밀가루 반죽처럼 보이지만 사실 밀가루 반죽이 아닌 건가요? 그것도 의심해야 한다는, 그런 건가요?” “공부는 잘 하고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아쉽게도 이건 그런 게 아니야. 당연히 이건 밀가루 반죽이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보이는 물건을 제대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야. 제대로 보게 된다면, 사물 구현 마법을 어려워 할 이유가 없어.” “제대로 본다는 게 어떤 뜻이죠?” “나무를 보고 나무라고 인식하는 것. 돌을 보고 돌이라고 인식하는 것. 물을 보고 물이라고 인식하는 거지.” 그런 이유라면 당연히 자신도 제대로 보고 있는 셈이다. 오히려 안트의 말 때문에 헷갈려버린 지금 상황이다. “이런, 그럼 나도 숙제를 줘야겠는데?” 또 숙제인가? 루치드는 저도 모르게 콧잔등을 찡그렸다. 신테가 피식 웃으며 루치드의 코끝을 툭 건드렸다. 코끝에 밀가루가 묻었다. “지금 아무것도 안 들리지?” “예.” 조용한 숲이었다. 곤충의 소리도, 숲속에서만 사는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숲이었다. “제대로 보는 것만큼이나 제대로 듣는 것도 중요하지. 우선 듣자. 들으면 보일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냥 하루 종일 귀를 기울여봐. 들릴 때까지.” 뭘 들으라는 거지? 루치드가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때, 신테가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 [80] 수업(3) 한 달이 지났다. 루치드는 여전히 번갈아가며 배움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세 사람이 말해주는 것을 제대로 소화하고 있다는 느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의미 없는 시간을 보냈다. 물론 아주 의미 없는 시간만은 아니었다. 나름 골몰히 생각하기도 하고, 새벽에 일어나 말똥말똥한 눈으로 숲 속을 응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학문을 쌓던 지난날에 비하면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때로는 지루했고, 때로는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생각에 모든 걸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까지도 했었다. 세 사람은 그런 루치드를 보면서도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공부하라고 하지도 않았고, 숙제를 빨리 하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든, 저렇게 보내든 모두 너의 몫인걸?” 신테는 루치드의 하소연에 이렇게 답했다. 루치드는 그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 4달이 지났을 무렵, 루치드는 숲 속을 돌아다니는 것이 익숙해졌다. 그 동안 공부만 하느라 약해진 체력이 강해졌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나무를 오르는 것도 익숙해져, 예전에는 마법의 도움을 받아 올랐다면 지금은 순수한 자신의 힘만으로 나무를 오를 수 있을 만큼 팔이나 다리에 힘이 붙었다. 사실 여기에는 안트의 도움이 있었다. “머리가 안 움직일 땐, 몸이라도 움직여봐. 몸이 게으르면 머리도 게을러지는 거야.” 세 사람 중 가장 게으른 사람에게 들은 조언은 아이러니하게도 루치드가 다시 생기를 찾을 수 있게 도왔다. 세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이 조금 줄어들어도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게 좋기도 했다. 무엇보다 몸에 힘이 붙고 달리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 눈에 보일수록 더욱 체력 단련에 힘을 썼다. 역시 성과가 눈에 보여야 동기부여가 되는 법이었다. 하루는 디아트리가 달리던 루치드를 불렀다. 그 때 루치드는 나름 꽤 먼 거리를 뛰어다닐 수 있을 만큼 체력이 붙기 시작하면서, 달리기에 흥을 올리던 시기였다. 특히 광원을 꺼놓고 달려도 될 만큼 가까운 숲의 지리에도 익숙해진데다가, 장애물피하기라는 형태의 놀이―숲안개에 가려진 바위나 노근(露根)을 피하거나, 나무와 나무사이를 가로지르는 덩굴을 피하는 등―에 흥미를 더해가던 루치드였다. 그 날도 신테와 과일을 따러 갔다 온 후, 저녁 러닝을 하러 나가려는 참이었다. “달리는 방법을 알려주마.” 6달 만에 새로운 가르침(?)을 주는 디아트리였다. 디아트리는 두 가지 근육의 사용법에 대해 알려주었다. 빨리 달릴 때 사용하는 근육과 오래 달릴 때 사용하는 근육이 다르다는 사실에서 시작된 그의 운동법은 호흡을 통해 근육의 긴장을 늦추고 힘을 오래, 그리고 강하게 사용하는 법이었다. “속근(速筋)은 격렬한 달리기나 운동을 할 때, 또는 순간적으로 강한 힘을 발휘할 때 유용하다. 이 근육은 호흡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이 근육을 쓰기 전에 호흡을 잘 다스려야 더 효율적으로 근육을 사용할 수 있게 되고 힘을 쓸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지근(遲筋)은 오래 달릴 때나 장시간 지구력을 요할 때 사용하는 근육이다. 이 근육을 사용하는 동안 많은 호흡을 요구한다. 이 호흡을 어떤 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효율이 달라진다.” 그리고 어떻게 호흡을 하면서 운동을 해야 효율적으로 근육을 사용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균형 잡힌 운동법으로 몸을 고르게 성장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동시에 호흡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하였다. “우리 몸은 평소에도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지만, 특히 격렬한 운동을 할 때 몸속의 에너지를 신속하게 공급해야 효과적이고 부상의 위험도 적다. 속근은 에너지를 한 번에 다량으로 주입하여야 하며, 지근은 오랜 시간 분산하여 주입하여야 한다. 그 에너지를 다루는 방법이 호흡이다.” 루치드는 디아트리의 가르침에 따라 운동을 시작했다.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운동을 하니 처음에는 힘들었다. 하지만 이 방식대로 했을 때의 보상―디아트리의 단단한 몸―을 상상하며 꾸준히 해나갔다. 안트는 얼굴 가득히 땀을 뻘뻘 흘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루치드를 보았다. “그래도 숙제는 꼭 해라.” 운동할 때는 거의 머릿속을 비우고 하는 편이었지만, 숙제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포기해서도 안 될 문제였고. **** 1년이 지났다. 그 동안 세 사람을 따라다니며 많은 것을 경험한 루치드였지만, 여전히 그들이 내준 숙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대신 몸은 점점 튼튼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위로했다. 하나라도 성과를 보인다는 사실이 쉽게 포기하지 않게 도와주었던 것이다. 네 사람이 다 함께 모여 숲낚시를 했다. 숲 위로는 여전히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이 마치 그려넣은 듯이 머물러 있었다. 나무줄기의 맨 위에 안전하게 자리를 잡은 루치드는 낚싯줄을 숲 아래로 드리웠다. 그 동안 자주는 아니지만 간간히 낚시를 하며 감을 익힌 루치드는 그 동안의 체력 훈련의 성과가 있었는지 1m짜리 물고기를 낚기도 했다. 신테가 그런 루치드를 칭찬했다. “실력이 많이 좋아졌는걸? 다음에는 저것도 잡을 수 있을 거야.” 신테가 가리킨 것은 5m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농어를 든 디아트리의 모습이었다. “저건 10년이 지나도 못 따라할 것 같은데요?”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키가 크지 않는 루치드였다. 체질량에 대해 근육이 발휘할 수 있는 근력은 체구가 작을수록 증가한다. 즉, 루치드가 계속 힘을 기른다면―이론적으로는―어른 이상의 근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종의 특성상, 몸이 성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근육이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았다. 다시 말해서, 루치드는 현재의 체구에서 낼 수 있는 거의 한계치의 근력을 훈련을 통해 가질 수는 있지만, 더 큰 근력을 갖기 위해서는 몸이 성장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왜 키가 안자랄까요?” “그건, 너의 몸이 성장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디아트리가 농어를 옆의 나무 가지에 걸쳐놓으며 말했다. “예?” 이번에도 신테가 친절하게 보충을 해주었다. “지금 니 몸은 사실 불균형적인 상태야. 괴리감이라고 표현하면 알려나? 예를 들어 거울을 본다고 가정해봐. 거울 속의 넌 거울 밖의 너의 모습을 그대로 비춰주지. 그런데 니가 오른손을 들었을 때 거울이 반대쪽 손을 드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니? 니가 고개를 움직이면 거울 속의 너도 고개를 움직여야 정상인 건데, 지금 니 모습은 한 쪽만 움직이고 한 쪽은 움직이지 않는 거지.” 신테의 이야기에 루치드는 입을 다물었다. 그 문제에 있어서는 분명히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전 거울속의 사람이라는 말인가요?”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신테가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그건 그냥 비유일 뿐 인거지.” 가만히 듣고 있던 안트가 툭 내뱉었다. “그냥 니 이야기를 해봐라. 이제 들려줄 때도 된 거 같은데.” 직설적인 안트의 추궁에 루치드는 입술을 달싹였다. 어쩌면 이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하고 도움을 얻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그 경험이 이 사람들한테 어떤 반응을 불러올지 몰라 두렵기도 했다. 감히 상상도 되지 않지만, 혹시라도 잘못되면 어떡하지, 라는 두려움이 입을 쉽게 열지 못하게 만들었다. “걱정하지마라.” 디아트리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눈치를 보니 다들 표정은 하든지 말든지였다. 고심 끝에 루치드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 2년이 지났다. 여전히 루치드는 키가 자라지 않았다. 대신 처음과 달리 어마어마하게 힘이 붙었다. 디아트리는 그게 루치드가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루치드는 자신의 경험을 모두 털어놓았다. 저 세계로 넘어간 기적 같은 일과 그 곳에서 본 것, 들은 것, 배운 것들을 모두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특별히 변한 것은 없었다. 세 사람 모두 신기한 현상이라며 놀라워했지만 그 일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나 과정 등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그 곳의 지식만큼은 놀라워했고, 특히 물리학적 지식에 대해서는 신테와 디아트리 모두 관심을 보였다. 다만 안트는 몇 번 듣더니 지겹다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니가 구현 마법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알겠어.” 신테가 이야기했다. “왜 그런가요?” “우선 이 이야기부터 해야겠는데, 이 세상은 이 세상만의 규칙이 있어. 그리고 내가 다른 세상을 가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너의 이야기를 통해 유추해보자면 그 세상 역시 규칙이 있을 거라는 건 알겠어. 다만 그 세상과 여긴 서로 다른 규칙이 통용되는 거지.” 오랜만에 알아듣지 못할 말을 들었더니 오히려 신선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쉽게 말하면 여기는 마법을 쓸 수 있지만, 그곳은 마법을 쓸 수 없어.” “예? 전 썼는데요?” “그래, 근데 그건 너니까 할 수 있었던 거겠지. 넌 두 세계 모두에 발을 걸치고 있으니까. 반면에 그 세계는 마법이라는 규칙이 없는 세계야. 그래서 세상의 진리를 과학으로 규명하는 세계인거지. 추측컨대 그 세계는 진리에 대한 탐구의 방향이 우리와는 다를 거야.” 그런가 싶기도 한데, 아직 그 쪽 세계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방향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던 루치드로서는 대답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넌 그 쪽 세계에서 공부를 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이 변화된 거야. 인식이 바뀌면 사상이 바뀌고 행동이 변화돼. 처음 이 곳에서 마법을 배울 때는 많은 변화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마법사의 가르침에 쉽게 순응했고 마법을 배울 수 있었던 거지. 그런데 그 쪽 세계에서 배움이 늘면서 부터는 마법적 인식이 점점 어려워진 거야. 그럼 마법을 배우는 게 불가능하냐고? 아니지. 넌 빛의 마법을 익혔다며? 앞으로도 다른 마법을 익힐 가능성은 충분해. 다만 이곳에서만큼은 아니라는 거지. 그 곳의 배움이 깊어지면 또 다른 변화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마법을 구현하는 게 쉬워지진 않을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야.” 이후 루치드는 저녁 시간이면 자신이 배운 것들을 하나씩 공유하면서 거기에 대한 첨언을 들었다. 처음에는 일방적으로 알려주기만 했지만 이곳과 저곳이 크게 다르지 않은 물리적 법칙이 적용된다는 사실에 기반해서 세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토론을 나눴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에도 루치드는 자신의 인식에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했다.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숙제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역시 같은 이유다.” 디아트리가 접시를 식탁 위에 올리며 말을 했다. 인식이 변화되지 않으면 숙제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누가 도와줄 수 없는 문제였다. 안트는 여전히 거실의 고래 가죽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예전에는 접시를 가지러 왔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대신 루치드가 접시를 가져다주었다. 배움에 대한 대가라고 했다. 신테가 나이프로 빵을 썰어 입에 넣으며 말했다. “내일부터는 내 숙제부터 해결하도록 노력해 봐. 듣는 게 된다면 보는 것도 되니까.” 루치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시키는 대로 해볼 요량이었다. 만약 자신이 이대로 멈춘다면, 몇 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자신은 10살로 살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 뒤로 누가 얼음을 떨어뜨린 느낌에 고개를 움츠리는 루치드였다. 다음날부터 루치드는 모든 일에서 제외되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로지 자신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단, 그 시간에 루치드가 해내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 듣는 일이었다. 무엇을 들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우선 듣기 위해 노력했다. 신테가 알려준 방식대로 앉아서 눈을 감고 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지났다. ======================================= [81] 수업(4) 오늘도 루치드는 집 앞에 놓인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광원을 띄우지 않으면 숲속은 어둠 그 자체여서 눈을 뜨나 감으나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어렴풋하게 보이는 것도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눈을 감았다. 오로지 귀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다. 처음에는 그 자세를 1시간 이상 유지하기 힘들었다. 눈을 감고 있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떨어뜨리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한 번은 너무 깊게 잠들었는지, 눈을 떠보니 집 안이 밝혀져 있고 세 사람 모두 집에 돌아와 있었다. 아무도 잠든 루치드를 깨우지 않았다. “피곤하면 자야지.” 안트는 시큰둥하게 말했고, “괜찮아. 그럴 때도 있지. 원래 니 나이 때는 잠이 많기 마련이야. 부끄러워 할 필요 없어.” 라고 신테가 넉살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녁 먹자.” 디아트리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루치드는 귀를 기울이는 연습을 했고, 아무런 성과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일을 반복했다. 눈을 감고 있던 루치드가 잡생각을 지워나가며 집중을 하던 무렵, 세 사람은 멀지 않은 곳에서 루치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래가는군.” “그렇지? 근데 오늘은 좀 될 거 같아 보이는데? 어때, 안트?” “도대체 이렇게 보고 있는게 무슨 소용이 있단 거야?” 투덜대는 안트의 등을 두드려주던 신테가 다시 루치드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놀라운 일을 겪은 아이야. 다른 세계라니. 솔직히 상상이 안가. 자동차니, 텔레비전이니 하는 건.” “난 백과사전이란 걸 보고 싶군.” 디아트리가 이토록 호기심을 드러내는 것은 드물었던 지라 두 사람이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돌아보았다. “오랜 세월에 걸친 지식을 다양한 책을 통해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전달한다는 것은 여기나 거기나 마찬가지긴 하지. 하지만 전달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누적된 양이 놀랍다는 것이다.” “그렇긴 하지. 아마도 그 세계의 과학이라는 문명은 누적된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발전된 것일 거야. 음, 그 반대인가?” 신테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안트가 입술을 삐죽이며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과학이라는 수단이 아니고는 진실에 다가갈 수 없었던 거라고 봐야 옳지. 이쪽이나 저쪽이나 생각하는 바가 비슷하다면, 그곳에도 지톤이 있을 수 있으니까.” 안트는 공중에서 손을 한 번 휘젓더니 아래로 내렸다. 그의 손에는 붉은 사과가 하나 잡혀 있었다. “쉿.” 디아트리가 둘을 조용히 시켰다. 세 사람은 다시 루치드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숲 위로 부는 바람소리라도 들으라는 걸까, 라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니 고작 그걸 들으라고 이렇게 숙제를 준 건 아닌 것 같았다. 사실 바람소리는 비록 수많은 나무의 잎사귀로 뒤덮였더라도 그 소리를 듣는 것이 어렵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바람이 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만약 바람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바람소리를 들으려 애쓰지 않는 이상에는 바람소리를 듣지 못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나아가,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으로 발전했다. 루치드는 가정을 세웠다. ‘신테는 소리를 들으라고 했어. 즉 소리를 내는 무언가가 있다는 이야기겠지. 그렇다면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걸 우선 인식하고 소리를 들으려 한다면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루치드는 생각을 조금 고치고, 더욱 귀에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을 했다. 잠시 후, 루치드는 눈을 번쩍 떴다. 멀지 않은 곳에서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눈을 떴음에도 미약하나마 소리가 계속 들리고 있었다. 천천히 일어난 루치드가 그 소리를 따라 갔다. 점점 소리의 진원지에 다가갈수록 귓가에 들리는 휘파람 같은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마침내 루치드는 소리가 나는 나무에 도달했다. 소리는 정확히 나무 위에서 들리고 있었다. 눈을 좁히고 어둠 속에 있는 무언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소리를 내는 그 무엇을 보기 위해 집중을 하자, 드디어 그 정체가 드러났다. 하얀 깃털을 가진 조그만 새였다. 자각을 하는 순간, 루치드는 귓가에서 아련하게 메아리치듯 소리가 들리기 시작함을 깨달았다. 그것은 비단 눈앞의 새에게서만 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어디 있었던 것인지 모르지만 숲 전체에서 온갖 새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 종류가 아니었다. 너무나도 많은 종류의 새가 이 숲속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을 여태 모르고 살았던 루치드였다. “들리니?” 신테가 물었다. 루치드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예. 정말… 이렇게 많은 새가 있는 줄 몰랐어요.” 머뭇거리던 루치드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동물들도 살고 있었는데도 보질 못했어요.” 두 볼에 먹을 것을 가득히 집어넣고 가지를 넘어가는 다람쥐와 윤기 나는 꼬리를 흔들며 나무줄기를 타고 올라가는 청설모. 긴 다리로 여유롭게 숲안개 위를 산책하듯 거닐던 고라니와 점박이 사슴들. 노근 위를 뛰어넘는 하얀 토끼와 바위 뒤로 숨는 갈색 줄무늬 너구리. 이 모든 것들을 지금껏 보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보지 않으면 볼 수 없다.” 디아트리가 루치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치드는 오른 손 소매로 눈 밑을 쓱쓱 문질렀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안트, 고마워요. 지금까지 전 모든 걸 의심하려고 노력은 했는데 단 하나 저를 의심하지 않았어요. 사실은 자신도 의심했어야 하는 거죠?” “편견이란 건 진실을 가리는 안대와도 같다.” “저 물은 마셔도 되는 거죠?” 루치드가 가리킨 방향에는 시냇물이 희미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안트가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트리, 고마워요. 이 숲은 사실 별로 넓지가 않았나 봐요. 대신 제가 모르는 게 많았던 거겠죠.” “끝을 상상하지 않으면 끝을 볼 수 없다.” 디아트리가 묵직하게 한 마디 했다. “신테. 이제 경계를 넘을 수 있나요?” 신테가 눈물을 찔끔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갈 때가 됐구나.” 루치드와 세 남자는 경계선 근처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동안, 루치드는 자신이 이 숲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살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수많은 동물과 새들이 곳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동안 보았던 발밑을 가리던 진한 숲안개는 희미한 자취만 남기고 있었고, 갈색 토지에는 다양한 식생들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안트의 키와 비슷한 크기의 두릅나무에 연녹색 잎이 이슬을 머금고 있거나, 고동색 떡갈나무의 줄기 아래에 하얀 버섯들이 점점이 돋아나있었다. 세월이 오래되어 자연히 죽어간 나무의 옆을 어슬렁거리는 늑대무리도 있었는데 전혀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들은 숲에 매우 조화롭게 어울려 있었다. 숲을 나왔더니 경계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희미한 빛의 장막을 두른 경계는 북극의 오로라가 이러할까, 라는 생각이 들만큼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숲에 가려져 있던 하늘도 보였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보였다. 해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맑은 하늘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해지는 느낌이었다. “저길 지나면 뭐가 있나요?” “그건 우리에게 할 질문은 아닌 거 같구나.” “아, 그렇군요.” 루치드가 보려고 마음먹는다면, 제대로 보기를 원한다면 보일 것이다. “아, 궁금한 게 있어요. 낚시는 어떻게 한 거예요?” “그건 숲의 비밀 정도로 남겨둬야 할 것 같은데? 나중에라도 생각나면 다시 올 마음이 생기도록 말이야.” “다시 와도 되나요?” 세 사람은 빙긋 웃었다. 평소 무뚝뚝한 표정의 디아트리마저도 웃었다. “친구가 있느냐?” “예. 있어요.” “친구를 소중히 생각해라. 우정은 인간관계의 최고봉이다.” “또 말도 안 되는 소리하네.” 안트가 팔짱을 끼며 핀잔 섞인 혼잣말을 뱉었다. 신테가 루치드의 어깨를 짚으며 이야기했다. “여기서 배운 것들이 너의 앞날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루치드는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 돌아서서 경계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 발을 떼어 걸음을 옮겼다. 푸른 잔디와 하얀 들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가운데, 루치드는 경계선을 넘었다. 5년 만에 다시 돌아가게 된 루치드였다. **** 루치드가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 예의 그 습지가 있었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되레 반가운 느낌마저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역시 산으로 막혀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돌산을 물어본다는 걸 깜박했네.” 하지만 지금은 돌산에 대한 호기심보다 다시 돌아왔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 더 컸다. 주위를 둘러보니 거대한 새는 보이지 않았다. 뭐, 이제는 크게 상관이 없을 것 같긴 했지만 어쨌든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루치드는 습지를 뛰어서 건넜다. 바짓단에 눅진한 진흙이 묻어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꾸에엑 습지를 다 건널 무렵 뒤에서 소리가 났다. 어느새 그 새가 나타났다. 돌아본 루치드가 씨익 웃음을 지었다. “반갑다.” ―꾸에엑 새가 화답하듯 울음을 냈다. 뒤돌아선 루치드가 새에게 다가갔다. 루치드는 그 새 역시 자신을 반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손으로 새의 날개를 툭툭 쳐졌다. “혼자 여기 살아?” 주먹만 한 눈으로 묵묵히 루치드를 바라보는 새였다. 루치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한 냄새에, 오물과 배설물과 곤충과 벌레가 뒤섞인 습지에 오롯이 서 있는 새였다. “외로웠겠구나.” ―꾸우우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가볍게 부리를 위아래로 흔드는 새였다. 루치드는 새의 부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난 일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할 거 같아. 하지만 다음에 올 일이 있으면 또 보러올게.” 다시 새는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루치드는 웃음을 지어주고 돌아섰다. 습지를 건너 돌아보니 여전히 그 자리에 있던 새가 날개를 활짝 펴 루치드를 배웅했다. 루치드도 손을 흔들어주고 빈촌으로 돌아갔다. 빈촌으로 돌아간 루치드는 매번 이곳으로 돌아올 때는 빈손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피식 웃음을 지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몸을 씻은 후,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집 앞의 너럭바위에 누워서 앞으로의 일을 그려보았다. 더 이상 가족과 마을 사람들에 대한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찾을 길도 없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무작정 막막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어쩐지 그곳에서 5년을 보내는 동안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천천히. 천천히 살아가보자. 살다보면 찾을 수도 있겠지. 제대로 듣고 볼 수 있다면 세월이 지나도 잊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도 있겠죠. 그렇죠?” 너럭바위 위에서 잠시 저물어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았다. 겨울엔 해가 짧기 마련이다. 노을은 금세 어둠으로 변했다. 별들이 하나 둘 떠오르며 밤하늘에 수를 놓기 시작했다. 하얀 휘장을 드리운 검은 하늘에 보름달이 떠올랐다. 문득 생각이 나서 빛을 쏘아 올리는 루치드. 겨울바람을 뚫고 하늘로 올라간 빛이 어느 순간, 팟 하고 터지며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잔영을 남기며 사그라드는 불꽃을 보며 루치드는 미소를 지었다. “친구는 인간관계의 최고봉이다.” 디아트리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명수는 루치드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아니 명수를 대할 때 자신은 ‘루치드’가 아니었다. “루치드는 이 곳 세계에서의 나.” 그 곳에서나 이 곳에서나 다 같은 ‘자신’이지만 이름으로 규정되는 정체성은 서로 달랐다. 자신은 그곳에서 늘 다른 이름으로 불렸고, 그 이름이 곧 자신의 정체성이었다. 그 세계의 일원으로서 본 모습을 규정하는 것은 그 곳에서의 이름이었다. 그 곳에서는 루치드라고 불리지 않는다. 그 곳에서는……. “나는…….” **** “정신이 들어요?” 귀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다. ―삐이 “선생님, 302호 환자 깨어났습니다.” 소년의 귀로 온갖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귀로는 뭔가 분주하게 사람들이 오가고 자신의 몸을 건드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이 쉽게 떠지지 않았다. 좀 더 힘을 줘 보는데 손가락 두 개가 눈꺼풀을 붙잡더니 강제로 개방을 실시했다. 놀랄 틈도 없이 웬 불빛이 눈동자 앞을 왔다 갔다 했다. “동공반응도 완전히 돌아왔네요.” 불빛을 쥐고 있던 남자가 무감각한 어투로 이야기했다. 목소리에 피로와 잠이 섞여 있다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남자는 소년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정신이 들어? 눈 뜰 수 있겠어?” 그렇게 흔들면 죽은 사람을 빼고는 다 일어나지 않을까요? 라고 말하고 싶은데 입술도 풀로 붙인 듯 떨어지지 않았다. 일단 한 번 열렸던 탓인지 눈을 뜨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여기 보여? 여기 봐봐. 이거 보여?” 눈앞에서 뭘 그리 흔들어대는지. 일단 보이긴 하니깐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음 질문을 던졌다. “이름이 뭐지?” ======================================= [82] 풋사과(1) 소년이 깨어났다. 연락을 받은 보육교사가 병원으로 달려왔고, 소년은 몇 가지 검사 끝에 무사히 보육원으로 돌아갈 수 있게 조치되었다. 퇴원을 앞두고 수속을 밟던 보육교사는 가기 전에 의사 선생님을 뵙고 가기 위해 간호사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 응급실 콜 받고 잠시 내려가셨거든요? 간호사 데스크에서 기다리시면 의사선생님 뵐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온 의사와 마주친 보육교사는 사정을 설명했다. 의사는 머리를 긁적대며 말을 꺼냈다. “사실 이게 맞나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시간으로만 따지면 거의 3일을 코마상태에 빠져 있던 아입니다. 당장 검사결과에 문제가 없고, 아이의 의식도 또렷하지만 다시 어떤 일이 발생할 지는 저로서도 장담을 못해요. 마음 같아서는 일주일정도 경과를 지켜보면서 아이의 건강이 완전히 돌아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는 퇴원을 불허해야 되요.” 의사는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욕을 뱉었다. 딱히 누구를 향해 한다기보다는 그냥 이 지랄 맞은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일 테다. 하지만 힘이 없기는 보육교사 역시 마찬가지인데 누굴 탓할까. 들어도 못 들은 척 하는 게 다였다. “아무튼 윗분들이야 한 푼이라도 아끼고, 한 푼이라도 더 벌려는 생각이시라고 짐작은 하지만, 솔직히 그 쪽은 이해가 잘 안되네요. 보육원이면 특히 더 애들 신경을 써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 그 한 마디도 꺼내기가 힘든 보육교사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사정이 있다고 하시니, 뭐 제가 경찰도 아닌데 그 쪽에게 뭐라고 할 일은 아닙니다만, 혹시라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시면 바로 병원으로 와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어요?” 보육교사는 고맙다는 짤막한 인사와 함께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소년에게 돌아갔다. “가자.” “예. 선생님.” 소년은 보육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쓰러진지 삼일이 지난 평일 오후였다. 보육원에 돌아온 소년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역시 명수였다. “석고야, 괜찮아?” 펑펑 울면서 마중 나와 주기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턱을 따라 떨어지는 시커먼 땀방울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안녕, 명수야.” “어, 그래. 이제 다 안 아파?” 그래도 걱정은 해주는구나. “다 나았으면, 너 우리 팀 해라. 우리 팀에 사람이 모자라.” “…….” “명수야, 지금 병원에서 돌아오는 애한테 무슨 말이니.” 보다 못한 보육교사가 어이없어 하는 웃음을 지으며 명수를 타일렀다. “석고가 평소에 운동을 안 해서 그래요. 저처럼 운동 열심히 하면 몸도 좋아지고 안 아픈 거예요. 전 병원 간 적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팀하면 병원 안가도 될 거예요.” 보육교사와 소년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명수가 강제로 손목을 잡고 끌자, 소년은 못 이기겠다는 듯 억지로 끌려갔다. 끌려가는 중에 힐끔 뒤를 돌아보며 보육교사의 눈치를 살피니, 피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보육교사와 눈이 마주쳤다. 보육교사가 손짓으로 허락을 하자, 그제야 명수와 나란히 달려 운동장으로 뛰어가는 소년이었다. 그 뒷모습을 보던 보육교사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다가 보고를 위해 원장실로 향했다. 꽤 차가운 늦가을 바람에도 아이들의 지치지 않는 열정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 “병원에 갔던 아이가 무사히 돌아왔다고 들었습니다만.” 마치 감기약 처방받고 왔다는 듯 서두를 떼는 행정 과장이었다. 원장이 피식 웃으며 과장 앞에 커피 한 잔을 내려놓고는, 자신도 소파 위로 무거운 엉덩이를 묻으며 커피 향을 음미했다. “예, 별일 없다더군요.” 여유로운 대답에 뿔이 난건지, 커피가 너무 입에 안 맞아서 그런지 과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일전에도 한 번 쓰러진 적이 있다면서요?” 행정과장은 뭐라도 꼬투리를 잡고 싶었다. 잠시라도 원장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자신이 느끼는 쓴 맛을 함께, 아니 혼자 느끼게 하고 싶었다. 원장이 쓴 맛을 느낄 때, 자신은 뭘 먹어도 달게 먹을 수 있으리라. “허허, 저도 그게 걱정이 됐었는데 검사결과 아무런 이상이 없다더군요.” 최근에 보도된 뉴스로 인해, 강해준 후보는 당선 가능성이 20%대로 떨어졌다. 반면 주정호 후보는 50%를 넘긴 상황. 보궐선거의 명암이 복지재단 이사회에 그대로 이어졌고, 이사회의 명암이 그대로 이어져 원장과 행정과장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2년 전,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원장 라인이 심대한 타격을 받으며 그대로 무너지지 않을까 했었는데, 끈질기게 버티더니 결국 갑작스런 보궐선거와 함께 이사회 라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후보의 당선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원장의 위세가 살아나는 중이었다. 만약 그 후보가 당선이라도 된다면 후일 중앙관계에 이사회 사람 중 한 사람이 진출할 가능성이 높다는 소문이 있었다. 당연히 그 사람은 원장 라인의 사람이었다. “그래도 조용히 무마되어서 다행입니다.” 속마음과 전혀 반대이지만, 어쩌겠는가. 판을 뒤집을 수 없다면 일단은 자중하는 수밖에. 행정과장은 요사이 보육원을 주시하고 있다는 양기자에게 언질이라도 해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윗선에서 말렸다. 재단법인 내의 회계문제도 있었던 데다가, 이사회 내부의 알력 다툼이 수면 위로 드러날까 전전긍긍했던 것은 양쪽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다 뒤집고 새 판을 짜는 것도 방법인데 말이야.’ 행정과장은 윗선에서 너무 몸을 사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빨리 위로 올라가야 했다. 너무 오래 여기 있다간 그대로 말라붙은 껌처럼 되지 않을까 걱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새 판이 짜 지겠죠.” 원장이 던진 한 마디에 화들짝 놀란 행정과장. 속내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짓던 원장이 머리를 까닥이며 말을 이었다. “주정호 후보가 당선이 되면, 인평시의 여러 가지 현안들이 일사천리로 해결될 겁니다.” “아무래도 그쪽 당이 힘이 있죠….” 원장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주정호 후보가 워낙 힘이 좋으니까요. 뭐 잘하면 내년에는 정관개정도 잘 진행될 거라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 커피가 쓴 것이 분명했다. 좀생이 같은 원장 같으니라고. 설탕 한 스푼이라도 넣어주지. **** 다행스럽게도(?) 소년이 쓰러진 날은 금요일 오후였다. 월요일 오전에 병원에서 깨어난 탓에 학교는 하루만 병결로 처리되었고, 화요일부터는 정상적으로 등교를 할 수 있었다. “너 어제 학교 왜 안 왔어?” 반 아이들은 소년이 쓰러진 이유를 알지 못했다. 선생님도 단순 몸살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아파서.” 소년 역시 굳이 자신이 쓰러졌다는 사실을―비록 보육교사의 당부가 있긴 했지만―떠벌릴 이유가 없었다. “좋았겠다.” 몇 몇 아이들은 소년이 결석한 사실에 대해 주목했다. 결석을 함으로서 학교를 하루 빠질 수 있었고, 덕분에 하루 마음껏 놀 수 있었겠다는 낙관적인 추측을 한 것이다. 만약 수업종이 울리지 않았다면, 아이들은 병결을 이유로 하루를 놀 수 있는 신선한(?) 아이디어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진행한 후, 집행결의를 시도했을지도 몰랐다. 선생님은 불온한 사전모의를 적절하게 차단함으로써 3학년 2반의 면학분위기를 수습할 수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의 업적을 알지 못했다. “자, 수업해야지. 다들 자리로 가세요.” 선생님은 몸은 괜찮냐는 말로 이틀간 코마상태에 빠졌다가 돌아온 아이의 안부를 퉁쳤고, 소년은 웃음으로 수업을 열심히 듣겠다는 각오를 보임으로서 여느 때와 다름없는 수업 환경이 형성되었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 선생님은 주요 공지사항을 우선 이야기했다. “조금 갑작스러울 수 있겠지만, 어제 장혜진 친구가 전학을 갔어요. 너무 갑자기 진행된 일이라서 혜진이가 우리 친구들한테 인사도 못하고 떠나서 많이 슬퍼했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대신 인사를 전해주려해요. 여러분들도 혜진이가 다른 학교에 가서도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꼭 잘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길 바랄게요. 알겠죠?” “예!” 아이들은 의례적인 대답을 힘차게 내뱉었다. 소년은 잠시 ‘장혜진’이란 이름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보았다. 너무 오래전에 들은 이름이어서 한참을 생각했고, 마침내 그 이름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마침 아득히 먼 어딘가의 유세 현장으로부터 단말마의 비명 같은 함성소리와 확성기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어와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였다. 고개를 돌려 교실 뒷문 쪽을 바라보니 빈자리가 보였다. 왠지 날선 눈매의 여자아이가 바라보고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은 분명 기억에서 불러온 친구의 그림자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만큼이나 색이 바랜 기억과 감정은 소년의 시선을 오래 붙잡을 수 없었다. 다시 시선을 되돌리려는데, 문득 뒤에서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눈동자를 살짝 돌리니 한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소녀는 화들짝 놀라며 급히 시선을 아래로 피했다. 소년은 다시 몸을 돌려 책을 보았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방금 전의 여자 아이를 생각했다. ‘누구였더라.’ 확실히 5년이라는 시간은 긴 시간이었다. 게다가 보는 법과 듣는 법을 익히기 위해 지난 과거의 기억들을 너무 깊은 곳에 묻어둔 나머지, 다시 기억을 되살리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곤란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차피 계속 학교생활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를 이름들이었고 기억들이었다. 무리하게 떠올리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고, 만약 급하게 떠올려야 할 이름이었다면 진작 떠올랐을 것이다. 명수처럼 지워지지도 않았을 테고. 반면 유림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월요일에 소년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많이 걱정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오늘, 전혀 아픈 사람 같지 않은 얼굴로 나타난 소년을 보고 내심 기뻐하고 있었다. 혜진이 전학을 갔다는 이야기는 나름 충격적이었고 속이 복잡해질 이야기였다. 하지만 진짜 충격은 소년이 혜진의 빈자리를 쳐다보는 모습이었다. 소년이 혜진의 소재에 관심을 가진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적이었고 마음이 아팠다. ‘왜 걜 찾는 거야? 날 봐! 날 보라고!’ 심히 평소의 독서습관이나 드라마 시청양태를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었지만 소녀의 감성은 남들이 쉬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속으로 외치고만 있을 뿐이었기에 남들이 알기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소녀의 외침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소년이 눈을 돌려 소녀를 쳐다보았다. 유림은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후에는 도저히 시선을 들어 올릴 수 없었다. 계속 자기를 쳐다보는 것 같았고, 혹시라도 눈이 다시 마주치면, “왜 쳐다봐?” 라고 말을 건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림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내가 혹시 나도 모르게 소리를 냈던 걸까? 다 들은 건가? 뭐라고 하지?’ 소녀의 복잡한 마음을 알 길 없는 소년은 이내 수업에 집중했다. 가을바람과 유세 현장의 소음이 다가왔다가 닫힌 교실 창문에 부딪히고 사그라들었다. 그 시간, 유세현장에서는 주정호의 유세기간 마지막 연설이 진행되고 있었다. “인평시 여러분, 부도덕하고 기만적인 강후보의 최후를 보셨습니까? 지금 내연녀와 그 딸을 미국으로 보내는 모습을 보셨습니까? 이런 후보가 우리 시의 의원이 되었을 때, 우리 인평시의 희망과 미래를 내팽개치고 자신의 사익을 뒤로 챙기며 배를 불리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이 우리 인평시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인평시가 원하는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원하십니까? 제가 인평시 의원이 된다면 인평시 여러분의 희망, 미래, 경제, 안정과 발전 모두 책임질 수 있습니다. 거짓말 하지 않는 주정호, 깨끗하고 정정당당한 주정호, 가장 밑에서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는 주정호를 뽑아주십시오, 여러분!” 그의 공약에 사람들이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 [83] 풋사과(2) 5년 만에 받는 수업은 낯설지만 신선한 고양감도 함께 주었다. 특히 예전에는 별 감흥이 없었던 과목 중의 하나였던 사회과목이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우리고장의 특성과 지형, 지물에 대한 정보를 왜 알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계속 들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그 당위성을 스스로 납득하는 소년이었다. “오늘은 옛날 사람들의 의식주에 대해 알아볼 거예요.” 소년이 느끼기에 저 세상과 이곳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과거에 대한 인식이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과거의 흔적 하나하나를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했다. 먹고 살기 바빴던 빈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고, 녹스에서의 6개월 동안에도 사람들이 특별히 무언가를 기록하거나 남기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남겨진 기록들을 검토했다. 그리하여 과거의 문물, 환경, 사건들을 모두 배우고 익히면서 현재와 비교했다.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도모했다. 이곳의 사람들은 ‘역사’를 굉장히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년은 생각해보았다. 만약 저쪽 세상에서 사람들이 이 곳 사람들처럼 ‘역사’를 공부한다면 무엇이 바뀔까? “옛날 사람들은 어떤 집에서 살았는지 교과서를 보면서 이야기하도록 해요. 교과서 65쪽 펴세요.” 지금은 사진 속의 이런 집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런 집들을 통해 조상들이 살았던 방식과 현재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비교해가며 설명해 주었다. 많은 아이들이 초가집이나 기와집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도시에서 거의 볼 수 없는 집임에도 아이들은 익숙한 듯이 알아보고 이야기하며 수업을 받아들였다. 아마도 TV의 영향이 큰 것 같기는 했다. 소년은 관심을 가지고 수업을 들었다. 다만 과거의 풍속과 생활환경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었다. 의문이 들면 물어봐야 하는 것이 학생으로서의 바른 태도다. “선생님. 질문 있어요.” 오랜만에 소년이 손을 들고 질문을 하려하자, 지레 놀란 선생님이 침을 꿀꺽 삼켰다. “옛날 사람들의 생활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뭐예요?” 교실이 조용해졌다. 3학년이 된 후로, 거의 수업시간에 질문이란 걸 한 적이 없던 소년이 손을 들었다는 사실에 침묵을 지킨 학생들과, 소년이 던진 질문의 답을 스스로 궁리하느라 침묵을 지킨 학생들이 섞여 교실은 침 삼키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개중 몇몇의 주목을 받던 선생님은 우선 질문의 의도를 먼저 파악하려 했다. ‘얘가 선생님한테 반항하는 건가?’ 사회과목 수업을 진행하는 동안 배우는 과거와 현재의 비교는 초등학교 학생들의 수준에 맞춘 역사학의 기초학습단계였다. 둘을 비교하여 현재의 모습이 얼마나 많이 발전했는지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하며 과거에서 현대로의 변화에 맞춰,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를 생각하게끔 만드는 것이 기초단계에서의 수업목표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은 생소하지만 익숙한 놀이문화부터, 과거 조상들의 생활상을 사진과 영상을 통해 흥미를 가지고 배우게 된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왜 배워야 하냐’고 묻는 아이들은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역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초등교육전반에 대한 이야기였다. ‘당연히’ 배워야 하는 것을 ‘왜 배워야 하냐’고 묻는 것은 선생님의 생각에 논리적이지 않았다. 반항이라면 모를까. 그러나 누구나 다 알 듯이, 저 소년은 평범한 초등 3년생이 아니었다. 1학년 때부터 줄곧 1등을 도맡았었고, 특히 몇몇 학문분야에서는 영재수준의 영특함을 보이기도 하는 학생이었다. ‘선생님이 맘에 안 드니?’ 라고 다그치기보다는 이 수업이 진행되어야 하는 교육학적 목표와 역사학을 배워야만 하는 역사적 사명감에 대해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후속 질문―소년이 질문 하나로 만족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선생님은 단정했다―들에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 “우리가 1학기 때 배운 내용 중에 ‘우리 지역 자랑하기’를 다들 기억하죠? 우리가 사는 지역에 대해 자랑할 수 있는 것을 직접 조사해서 알아봤었죠? 그 수업을 통해 여러분들은 우리 지역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나요?” 지역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에 대한 이야기로 서두를 뗀 선생님은 과거에 대한 배움이 주는 나라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단원의 목표인 ‘주체적 변화’에 대해 강조했다. “무엇보다 과거와 현재의 변화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이 발전되었는지, 혹은 무엇이 고쳐졌는지를 알 수 있어요. 그리고 이러한 차이점들을 하나씩 발견해 나가면서 여러분들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고쳐나가져야 좋을지, 혹은 어떤 걸 아끼고 지켜나가야 할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아이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선생님의 입을 바라보았다. 자기들이 왜 이 공부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 새삼 깨달은 아이들, 왜 이 지루한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가진 아이들 모두가 선생님을 주시했다. 선생님도 자신이 이 수업을 왜 진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하는 동안, 스스로도 복잡했던 생각이 점점 정리되어가는 게 묘하게 가슴을 울려, 더욱 열과 성을 다해 답변을 이어나갔다. “여러분들이 과거로부터 잘못된 것을 배우지 못하고, 과거의 생활, 관습, 문화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오늘날의 것들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해요. ‘과거가 없는 오늘은 없다. 오늘이 없으면 미래가 없다.’” 소년은 어느새 자기 설명에 도취되어 끌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열변을 토하는 선생님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수업 시간이 반쯤 지나가고 있었지만, 누구하나 이 분위기를 깨뜨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 돼지껍데기 몇 점이 석쇠 위에서 꿈틀대며 검은 연기를 토해낼 때, 둥근 양철 테이블 한 편에 앉은 50대 남자가 소주잔을 집어 들었다. “자, 짠 하자고.” 맞은편에 앉은 비슷한 연배의 반쯤 눈이 감긴 남자가 두 손가락으로 소주잔을 집어 내밀어진 잔에 톡 하고 건배를 했다. “아줌마, 여기 소주 2병이요.” 옆 테이블에서 말랑말랑한 목소리의 여자가 술을 주문했다. “우리도 한 병 더 시킬까?” 50대 남자는 풀어놓았던 넥타이를 주섬주섬 챙겨 넣다가 졸린 눈의 남자의 제안에 무의식적으로 메뉴판을 바라봤다. 이 집은 돼지껍데기도 괜찮지만 계란탕도 맛있지. “그라믄 계란탕 하나 더 묵자.” 나이가 들면 엉덩이가 무거워지기 마련이다. 비어진 소주병이 이제 겨우 2병이니 한 병 쯤 더 한다고 해서 무리가 되진 않겠지. 졸린 눈의 남자가 이모를 불렀다. 그 사이 하얀 와이셔츠의 50대 남자는 마른 뺨을 쓸어내렸다. 까칠까칠하게 자란 수염이 느껴졌다. 가게 밖 대로에서 확성기를 설치한 차량이 지나가고 있었다. 기호1번 주정호를 외치는 유세차량이었다. “애저녁에 끝난 게임이구만 뭘 저렇게 시끄럽게 떠들어 대누?” 와이셔츠의 투덜거림에 졸린 눈의 남자가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저거? 에이 아직 모르지.” “모르긴 뭘 몰라? 강해준인가 그 양반 완전히 게임 끝났드만.” “얼래? 허, 이 친구 보게. 저기 주정혼가 뭔가 하는 양반도 더럽긴 마찬가지 아냐? 돈 먹었다매?” 와이셔츠는 아르바이트 점원이 가져다 준 소주병을 받아들고 뚜껑을 돌렸다. 끈끈한 손바닥 탓에 뚜껑은 손쉽게 열렸다. “그게 언제쩍 일인데 그걸 갖고 이러쿵 저러쿵 해쌌누? 공소시횬가 그것도 다 끝난 일이라매?” “그거 말고도 더 있다더만.” 졸린 눈이 빈 잔을 들어 소주를 받았다. “에이, 아이다. 고거는 강해준이가 꼬투리 잡을라고 억지부린거더만. 그거 다 신문에서 흑색선전한기다. 죄가 있다 캐도, 제일 처음 꺼 조금 챙겨 묵은 거 밖에 없다드라.” “아니 그래도 공무원이 부정을 저질렀으면 처벌을 받아야지, 시효 지나서 처벌 못하면 단가? 그리고 신문에서 다 조사해서 드러난 사실인데, 증인도 있고. 그걸 흑색선전이라 하면 안 되지.” “어허, 이 사람이. 그게 언론플레이 라는 기다. 언론이 젊은 아들 선동하는 기라고. 저그들이 강해준이 밀어 줄라고 날조한 거라니까 그카네.” “누가 그러는데?” “누구기는. …알 사람은 다 안다. 강해준이는, 그거는 안 돼. 입만 열고 씨부리면 죄다 거짓말이고, 지 아랫도리도 함부로 놀리대는 그런 놈은 안 되는 기라. 그놈은 아예 인성이 못돼 처먹고, 이게 안 되는 놈이야.” 와이셔츠가 손가락을 들어 자기 머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막말로, 옛날에, 공무원 중에 안 그런 사람은 또 어데 있나? 걸린 사람만 바보라 카면서 죄다 뒷구멍 챙기기 바빴제. 그 때는, 응? 학교선생도 촌지 내달라고 응? 당당하게 외치던 시대였다 아이가. 주정호도 그때 조금 챙겨먹긴 했긋제. 근데 그거 갖고 사람을 뭐, 응? 뭐 대역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매도하고 마녀 사냥하듯이 말이야. …그러면 안 돼. 안 돼.” 술이 취하기 시작하면 요상한 어투가 섞여 나오기 시작하는 친구였다. 경상도 말투 같기도 하고 강원도 억양 같기도 하고, 경기도 사람 같기도 한, 요상한 말투의 와이셔츠는 사실 젊었을 적의 거친 파도를, 전국팔도를 헤치며 이겨낸 친구였다. 말하는 중간 중간에도 소주를 물마시듯 들이킨 탓에 졸린 눈이 조용히 소주 한 병을 더 시켜놓은 상태였다. “보래이, 지금 주정호가 말이데이. 휴…. 주정호가 응? 당선이 되제? 되믄 점마 돈이고 빽이고 다 인평시를 위해 쓸거라 안카나? 그리고 저그 당 얼매나 좋노? 그체? 금마가 의원이 되제? 그라믄 인평시가 발전하긋나 안하긋나?” 점점 혀가 꼬여가는지 발음이 조금씩 뭉개지는 와이셔츠에게 몇 안 남은 껍데기 한 점을 물렸다. “옛날에도 부정부패를 저지른 놈인데, 당선되면 더 심하게 안하겠나? 제 버릇 개 못준다고 하잖아.” 질겅질겅 씹어대면서도 와이셔츠는 자기 할 말은 하겠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안하지. 안하지. 금마가 하믄 짐승이지. 근데 안한데이. 나중에 함 봐봐라.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 아이가. 근데 내가 보믄 있제. 금마는 안해. 딱 보니까 이제 정신차린 기라. 정신 똑-바로 챙기가 할기다. 근데 강해준이가 되면 있제. 인평시 망한다. 완전-히 망해뿐다.” 점점 목소리가 커지는 와이셔츠를 달래기 위해 졸린 눈은 건배를 제의했다. 그리고 화제를 돌리려고 머리를 굴렸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는 ‘학교 선생도 촌지 내달라고’라는 부분에서부터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맞은편에 앉은 직장 동료 역시도 침묵을 지키며 껍데기만 집게로 뒤적거리며 타지 않도록 했다. “판 갈아 드릴께요.” 아르바이트 점원이 덜 씻은 듯 군데군데 검은 그을음이 묻은 석쇠를 들고 다가왔다. 대답도 안했는데 능숙하게 석쇠를 교체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러는 사이 옆 자리 아저씨의 목소리가 커지더니 맞은 편 아저씨가 진정을 시키려 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해준 후보를 규탄했다. “야, 나갈까?” 동료가 나지막하게 물어왔다. 이런 시끄러운 분위기에서는 이야기도 제대로 못하겠다 싶어 꺼낸 이야기인데, 두 사람 사이에 수북이 쌓인 돼지 껍데기가 아까웠다. “이것만 먹고 가지 뭐.” 교사윤리에 따르면 교사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했다. 하지만 교사도 이 사회에 속해서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생각이 있고 발언의 자유가 있지 않은가. 부당한 일에 부당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아이들에게도 떳떳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른 법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잔을 채워줬다. “오늘 우리 반에 애가 질문을 하더라. 역사를 왜 배워야 하냐고.” “누가 그런 질문을 해? 아, 걔?” “응. 그런데 처음엔 지도서에 있는 대로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하다보니까 막 대학 때 배웠던 것도 생각나고 선배들한테 들은 이야기들도 생각나고 그러는 거야. 사실 내가 처음에는 온고지신을 설명하려고 그랬다? 근데 말을 할수록 신채호 선생의 말이 생각나면서 막 흥분이 되는 거야.”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어. 근데 또 그걸 그대로 이야기하면 애들이 못 알아 듣지 않겠어? 그래서 또 풀어서 설명하고, 하다보니까 시간이 그냥 지나갔네? 그래서 진도를 못 나가고 수업이 끝났네? 종치니까 어, 내가 뭐한 거지? 이런 생각이 막 드는 거야? 그런데 또 조금 뿌듯한 생각도 들더라고? 이 아이들이 나중에 더 자라서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게 될 때 내가 한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공부를 한다면 바른 역사관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거.” “많은 선생님들이 그런 착각 속에 빠지긴 하죠.” 동료가 거짓으로 놀리듯 말했다. “근데 수업이 딱 끝나는데 걔가 다시 질문을 하더라?” “뭐라고?” “과거의 실수나 잘못도 모두 기억해야 하는거냐고.” “그래서?” “더 좋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현재의 잘못이나 실수를 고쳐나가야 할 필요가 있듯이, 과거의 잘못한 점이나 반성해야 될 부분들도 모두 기억하고 고쳐나가야 한다고 대답했지.” “잘했네.” 동료가 잔을 들었다. 선생님도 잔을 마주 들고 부딪쳤다. “근데 지금은 맞게 대답을 한 건지 모르겠어. 모든 사람들이 과거의 잘못을 일일이 기억하지 않는 게 사실이고, 또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치부를 덮거나 잊으려고 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과거를 잊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사람도 있고…….” 선생님은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힐끔 옆 테이블을 훔쳐봤다. “…나쁘거나 잘못된 걸 덮어서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 도 좋은 방법이라는 걸까?” ======================================= [84] 풋사과(3) 유난히 기온이 떨어진 늦가을 새벽. 부산스러운 아침을 맞이하고 있는 보육원 현관에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시험 잘 보도록 해. 너라면 분명히 좋은 결과 있을 거야.” 보육교사의 덕담에 기웅이 미소로 화답했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이거 꼭 쥐고 있다가 시험 풀 도록 해. 손이 얼어서 마킹 잘못하는 경우도 있다더라.” 다른 보육교사가 핫팩을 쥐어주며 말했다. “형, 파이팅! 누나, 시험 잘 봐!” 보육원 아이들이 와글거리며 기웅과 또 다른 고3수험생인 정연을 응원했다. “형. 이거, 엿 먹어.” 명수가 꼬마엿을 건네주며 응원했다. “고맙다, 명수야. 네 덕분에 시험 잘 볼 것 같다.” 기웅은 명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소년 역시 명수 곁에 서서 기웅을 응원했다. 보육원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응원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차에 올랐다. 보육원을 빠져나가는 차를 바라보며 소년은 싱숭생숭한 마음이 들었다. 저들은 조만간 윤정이 그렇게 나가듯 똑같은 모습으로 보육원을 나가게 될 것이다. 정든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가는 것을 마냥 슬퍼할 수만도 없었다. 저들은 이 보육원을 나감으로서 비로소 ‘독립’된 한 사람으로서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소년 역시 자신의 ‘독립’을 천천히 생각하게 되었다. 다른 세상에서의 일이지만, 오롯이 5년을 수련했던 과거를 떠올리면, 소년도 이제 마냥 철부지 애들처럼 지낼 수만은 없었다. 이제까지 이 세상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면, 지금부터는 홀로서기를 위한 노력도 겸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오늘 1시간 늦게 가니까 좋다, 그치?” 명수가 해맑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소년은 마주 웃으며 명수와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 선거가 끝나고 나니 메아리처럼 울려대던 확성기 소리가 사라지면서 모처럼 면학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제 방학이 한 달 쯤 남은 시점이어서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그래도 학기 말 시험을 앞둔 선생님들은 다행이다 싶었다. “이제 좀 조용하니 살 것 같네.”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 6학년 담임을 맡은 남자 선생님 두 분이 흡연실 창가에 서서 끽연을 즐기고 있었다. “도대체 학교 앞에서 유세를 했던 이유가 뭐랍니까? 암만 이 앞이 유동인구가 많은 거리라 해도, 학교 앞은 피해서 해야지, 상식이 없는 사람들도 아니고 말이죠.” 재를 톡톡 털어대던 선생님이 열린 창틈으로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선거 때 상식 지키는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이번 선거도 말이죠, 나 참. 애들 보기 부끄러운 일들이나 벌이는데, 그나마 애들이 어려서 그렇지, 조금 나이 찬 애들이라고 생각해봐요. 흑색선전에 선동에 추문까지…. 그러고도 뽑혔으니.” “이 동네도 참 인재가 없어요. 그쵸?” 마침 운동장에서 교내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오는 아이가 보였다. “인재라면 저런 애가 인재겠죠?” “누구? 아, 그렇죠.” 바깥 날씨가 여간 쌀쌀한 게 아닌데, 저 소년은 하얀 맨투맨 티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었다. 운동장에는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많았기에 얇은 옷차림이 그리 눈에 뛸 일만은 아니었다. 다만 평소에도 선생님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던 아이라는 사실이 주목할 만한 이유였다. 요즘은 조금 잠잠하지만 작년까지 저 소년이 교내 선생님들의 주의를 한 몸에 끌었던 아이였음을 떠올리면 인재는 인재였다. 다만 ―방송을 통해서였지만―아이큐 검사결과도 평범한 축에 속한데다가, 2학년 때부터는 조금 얌전하게 생활한 탓에 선생님들의 기억 속에서 조금 유별난 아이 정도로 지위가 격하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저 소년은 몇몇 선생님들의 관심대상으로 종종 거론되었다. 특히 지금 담배를 즐기는 선생님은 한 때 ‘아몽통’이란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을 만큼 저 아이가 벌인 기행(?)의 피해자였기에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흥미롭게 바라본다는 사실이 이상하지 않았다. “요즘은 얌전하다지만, 그래도 계속 전 학년 1등을 놓치지 않는다잖아요. 떡잎부터 남다르다는 게 딱 저 아일 두고 하는 말이라는 걸 요즘 느낀다니까. 나중에 어떻게 자랄지 정말 기대되는 녀석이예요.” 곁에서 함께 소년을 관찰하던 선생님도 한 마디 거들었다. “하긴 방송에서 제대로 못 보여준 면도 있어요. 2년 전에 쟤가 교무실을 순회할 때 모습을 생각하면… 아이구.” 실소를 터뜨리면서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아몽통 선생님은 마지막 한 모금을 정성 들여 빨아들인 후, 위를 향해 천천히 연기를 내뿜었다. 열린 창문 틈으로 스르륵 사라지는 연기를 보며 아몽통 선생님이 말했다. “솔직히 요즘 쟤를 보면요, 벌써 철이 든 거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도 들어요. 우리 반이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2년 전에는 궁금한 거 있으면 뭐든지 물어보려고 하고 책을 찾아보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안 그런다네? 생각해보니까 애가 눈치를 보는 거 같아요. 선생들 눈치보고, 지 친구들 눈치 보면서 안 튀려고 하는 거죠.” 맞은 편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에도 그런 것 같네요. 쟤 담임이 지금 이선생이잖아요? 가끔 이야기 나누다보면 이선생도 그렇게 이야기하더라구요. 애가 튀는 짓을 안 하려고 일부러 입 다물고 수업을 듣는 것 같다고.” “그런걸 보면 우리 교육이 문제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단 생각이 들어요. 평준화, 평준화 하는데 저런 애들까지 평준화가 돼 버리면 어쩌겠다는 건지…….” “영재원에 신청하면 안 되려나?” “…….” 말을 꺼낸 선생님이나 아몽통 선생님이나 그게 다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괜히 한 번 입에 올려 보는 이유는 뭘까. 저 아이가 영재원에 가지 못하는 이유는 사실 별 거 없었다. 첫 번째는 저 아이가 보육원 출신이라는 사실이었다. 보육원의 자랑이 될 법도 한 일이니까 적극적으로 나설 줄 알았는데 의외로 보육원에서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실은 동인의 일이 터지면서 내부 사정이 복잡하게 돌아가던 중이라 여유가 없었던 것이지만, 자세한 사정이야 선생님들이 알 턱이 없으니 그저 의아하다는 생각만 했었다. 또 1학년 때 담임을 맡았던 선생님이 의욕이 넘치는 선생님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방송출연―그것도 다른 선생님의 제안으로 진행된 일―까지는 어떻게 진행을 했는데, 영재원은 전혀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기 앞가림하기 바빴던 김희연 선생님은 이미 전근을 가고 없었다. 마지막으로 2년 전 방송을 통해 나타난 결과가 영재원에 보낼 만큼은 아니라는 선입견을 심었던 게 주효했다. 천재 아니면 영재라고 설레발을 쳤던 선생님―아몽통 선생님을 비롯해서 여러 선생님―들도 있었지만, 자기 반 애도 아닌데 나서서 영재원 신청 서류를 작성하며 오지랖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소년이 2학년이 됐을 때는 1학년 때의 영특함이나 재기발랄한 모습을 거의 감추다시피 해서 영재원 신청을 떠올릴 이유가 없었다. 그런 상황이니 괜히 공교육 시스템이나 탓하면서 은근히 책임회피를 하는 두 선생님이었다. 반면 두 선생님의 대화 소재로 입에 오르내리던 소년은 느린 걸음으로 운동장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최근 쉬는 시간 등을 이용해서 운동으로 체력을 키우는 소년이었다. 5년간 배운 체력 단련법을 꾸준히 익혀 나갈 생각으로 시간을 할애하는 면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균형’을 위해서였다. 지난 5년간 그토록 몸을 단련해 왔음에도 크지 못한 이유는 저 곳 세상과 이 곳에 걸쳐있는 자신의 ‘불균형’ 때문이라는 신테의 이야기를 잊지 않은 소년이었다. 이 곳에서도 디아트리가 알려준 호흡법에 따라 운동을 시작하니 그 효과가 눈에 보일 정도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턱걸이를 했더니, 첫 날의 경우 6개를 겨우 했는데 바로 다음날이 되자 9개를 하는 식이었다. 50%의 효율을 보이는 운동법에 매료된 소년이 더욱 운동에 매진했음은 물론이다. “우와, 대단하다!” 옆에서 구경하던 명수가 감탄할 정도였다. 따라 해보려던 명수는 3개를 한 후 힘이 부족해 철봉을 놓아야 했다. 물론 지난 5년간의 단련이 있었기 때문에 균형을 찾아가는 동안 몸이 빠르게 적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마 몸이 균형을 찾는 순간부터는 이 정도 효율을 보이지 못할 것이다. 뒤따라 들어온 명수가 소년을 붙잡고 이야기를 했다. “너 운동 잘하니까, 오늘 저녁에 우리 팀 해야 한다.” 언제는 같은 팀을 안한 적이 있었나 싶었지만, 소년은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명수를 웃게 해주었다. 그리고 매번 소년이 골키퍼를 했고 오늘도 골키퍼를 할 예정이지만, 명수는 그저 소년이 같이 한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했다. 명수가 소년을 붙잡고 오늘 있을 보육원배 동서 더비(Derby)―최근 보육원에서 축구를 즐기는 중학생과 초등학생의 팀이 본관 중앙 계단을 중심으로 동쪽 방을 쓰는 팀과 서쪽 방을 쓰는 팀으로 나누어서 경기를 하곤 했다―에서 사용할 전략에 대해 심도 깊은 토론―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명수가 달리고 철용이 받아서 때리는 단순 전략을 강조하는 정도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그 둘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음을 둘은 알지 못했다. 유림은 벼르고 벼렸다. 이제 한 달이면 겨울방학이 올 테고, 이후에는 소년을 볼 날이 거의 없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4학년이 되면서 다른 반이라도 되면 더욱 보기 힘들 지도 몰랐다. 그리고 잘생긴 소년을 다른 여자애들이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지도 몰랐다. 잘생긴 남자는 항상(?)―드라마에서 보았듯이―예쁜 여자들을 만났다. 유림이 자신의 외모에 자신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당장 교실을 둘러보아도 꽤 예쁜 여자애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런 애들은 소년과 키도 비슷해서,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자기보다는 나아 보였다. 여러 여자들이 한 남자를 다투는 모습은―드라마든 영화든 소설이든 만화든―쉽게 예상할 수 있는 그림이다. 자신이 누군가와 싸워서 질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소년이 보는 앞에서 거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일이 커지기 전에 소년을 찜해야 했다. 요 며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유림은, 마침 소년이 혼자 교실로 들어오고 있는 모습을 포착했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정성스레 준비해놓은 편지와 선물을 전달할 준비를 하는 찰나에 명수라는 놈이 소년의 옆에 늘 그랬듯이 껌딱지처럼 달라붙어버렸다. 평소에도 소년 곁에서 똥파리처럼 엉겨 붙는 녀석이라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오늘은 유독 미움이 더 커지는 기분이었다. ‘왜 하필이면 지금이야!’ 생각해낼 수 있는 욕이란 욕은 다 퍼 붓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만약 니가 지금 당장 자리를 비켜준다면 앞으로 평생 동안 널 미워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비켜줘. 제발.’ 들리지도 않는 부탁을 들어줄 리 없는 명수였다.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교실을 향하는 두 사람을 뒤에서 눈물 섞인 눈으로 바라보던 유림이 포기하려는데, 명수가 소년을 떠났다. “나 오줌마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복도가 울리도록 떠들며 사라지는 명수에게 고마움을 표한 뒤, 유림은 빠른 걸음으로 소년에게 다가갔다. “저, 저기.” 소년은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유림이 얼굴을 붉힌 채 서 있었다. 그녀가 소년보다 10㎝는 더 큰 탓에 올려다보아야 했던 소년은 소녀가 등 뒤로 무언가를 감추고 있음을 눈치 채지 못했다. “무슨 일인데?” 소녀가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데, 점심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교내에 울렸다. 이제 곧 운동장에 있던 아이들이 몰려들 것이다. 소년 역시 교실로 돌아가야 하는 건 마찬가지니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있잖아, 이거.” 유림은 눈을 질끈 감고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 [85] 풋사과(4) “이게 뭔데?” 뜬금없는 봉투와 선물에 놀란 소년이 소녀를 바라보았다.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힌 소녀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나중에, 수업 끝나고 혼자 있을 때 봐.” 뒤에서 아이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유림은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운동장에 풀어놓았던 아이들이 버팔로처럼 달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꼭, 꼭 나중에 혼자 봐야 돼.” 유림은 소년의 곁을 지나갔다. 소년이 뭔가 싶어 돌아보았을 때 이미 소녀는 교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정말 빠르다.” 키가 커서 그런지, 다리가 길어서 그런지 유림은 보통의 아이들보다 빨랐다. 소년은 잠시 손에 들린 물건들에 시선을 줬다가 이내 교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조금만 더 머뭇거렸다가는 달려드는 소 떼들, 아니 아이들에게 치일 수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어서였다. **** 수업을 마치고 보육원으로 돌아온 소년은 명수와 함께 공을 찼다. 명수가 공을 향해 달리고, 소년은 골문 앞에서 찬바람 맞으며 시간을 보냈다가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함께 축구를 했다. 저녁식사를 한 뒤, 소년은 보육원 도서관으로 가서 기웅에게 과외를 받았다. 수능을 마친 기웅은 졸업 때까지 남는 시간을 소년과 함께 보내기로 했다. 기웅이 보기에 소년의 현재 수준은 전체적으로는 중학교 1학년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수학이나 물리학은 그 보다 높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글을 읽고 해독하는 수준이나 일반 상식은 중학교 1학년 레벨 정도로 보였다. 물론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상식이 부족한 면도 있었다. “화산이 뭐예요?” 백두산, 한라산, 후지산 등을 이야기하면서 설명하려하면, “백두산이 어디예요?” 라고 묻는 통에 당황스럽기도 했었다. 뜻밖에도 지구과학 수준은 초등학교 3학년 수준보다 못하다고 느꼈지만 그것이 소년을 가르치는 데 장애로 작용하진 않았다. 그래도 중학교 과정을 과외 하는 게 부담이 적었다. 초등학교 수준이라면 오히려 방대한 지식을 요구하는데다가 적당한 수준으로 난이도를 조정하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학생 레벨의 과외이다 보니 기웅이 부담스럽지 않은 수준에서 과외가 가능했다. 게다가 말귀도 잘 알아듣고 이해도 빠르다보니 진도를 나감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최근 기웅이 가르치는 과목은 중1과학이었다. 물리학에 관심을 가진 것은 오래된 일이었지만 그 외 다른 분야, 예를 들어 화학, 생물, 지구과학 등을 배울 마음으로 과외를 요청했고 기웅은 순순히 도와주기로 했다. 기초가 튼튼해서 중학교 1학년 교과서를 두고 가르쳐도 이제 초등학교 3학년에 불과한 소년이 잘 따라오는 게 기특하기만 했다. “지난 시간에 어디까지 했었지?” “온도와 열이요.” 소년에게 매우 익숙한 분야였지만, 역시 과학적으로 체계화시켜 배우는 것은 이제껏 여러 책을 통해 잡다하게 익히는 것과는 달랐다. 대부분 아는 내용이더라도 체계적으로 정리해가며 익히다보니 훨씬 이해가 깊어지는 느낌이었다. “온도가 질량, 시간, 길이와 같은 기본적인 물리량이라는 사실은 이해했지?” “예.”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집중하는 자세와 빠르게 이해하는 모습을 보면 신이 나기 마련이었다. “열은 물질 사이의 온도 차이에 의해서 이동하는 에너지이고, 분자의 평균 온도에너지가 큰 곳에서 작은 곳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두 물체 사이에서 이동하는 물리량이라는 것도 이해했지?” 당연히 잘 아는 사실이었다. 심지어는 몸을 던져(?) 실험까지 해 본 마당이니. 몇 가지 질문들로 학습상황을 점검한 기웅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로 했다. “복습은 잘 된 것 같으니까, 넘어가자.” 두 사람이 과학교과서를 파고 들 때, 소년의 책가방에 들어간 편지와 선물은 점점 잊혀져갔다. 그 시간, 유림은 자기 방에서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고 있었다. 자기가 살아오는 동안 가장 큰 모험을 시도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당장 내일 소년이 어떤 얼굴로 자기를 바라볼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혹여나 불쾌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면 어쩌나, 걱정되기도 하고 사랑스러운 눈으로 자기를 쳐다볼까, 설레기도 했다. “유림아, 나와서 과일 먹어.” 딴 생각을 하느라 어머니의 부름을 듣지 못한 유림은 재차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뒤늦게 거실로 나갔다. “뭐하고 있었길래 엄마가 부르는데도 못 들어?” “아이 참, 엄마는. 공부하고 있었지.” “얘가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그럼 접시에 담아줄까?” “아냐, 됐어. 여기서 먹고 갈래.” 살짝 삐친 척 하는 유림의 모습이 귀여워 입 꼬리를 올리던 아버지가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돌렸다. 마침 뉴스에서 익숙한 얼굴이 나왔다. 한 달여간 인평시를 소란스럽게 만들었던 주인공. 「감사합니다. 이번 선거는 인평시 여러분의 승리입니다.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를 살리려는 열망이 가져온 인평 시민 여러분들의 승리입니다. 저에게 주신 신뢰와 믿음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여보 다른 거 틀어요. 뉴스는 나중에 혼자 봐도 되잖아요.” 힘없는 아버지는 리모컨을 어머니에게 건넸다. 이 시간에 공중파 일일드라마가 시작되는 것을 모르지 않는 아버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잠시 채널을 멈췄던 것이었는데 역시나 였다. 소파에 모로 누워 바라보니 두 모녀가 사과를 포크로 찍어 야금야금 베어 물며 일일드라마를 시청하는 모습이 참으로 닮았다. 재미도 없는 걸 잘도 본다, 싶었지만 어느새 덩달아 바라보며 스토리를 꿰맞추는 아버지였다. 「미안해. 사실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어떻게? 어떻게 니가 그럴 수 있어?」 “아유, 저 나쁜 놈. 지한테 그렇게 잘해준 여자한테 어째 저런대?” 어머니는 욕했고, “……흑.” 유림은 울었다. “어머, 유림아 너 왜 그래?” “흑, 아니, 불쌍해서.” 뒤에서 지켜보던 아버지가 한 말씀 하셨다. “애들 교육에 안 좋게 뭐 저런 걸 보고 있어? 당장 돌려.” 어머니는 리모컨을 다시 건네려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유림아, 너 접시 들고 들어가. 너 그냥 하던 공부 계속해.” “엄마…….” “어서. 들어가.” 단호한 어머니의 태도에 유림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유림의 희생으로 어머니는 리모컨을 지켜냈고, 아버지는 여전히 재미없는 드라마의 전개방향을 머릿속으로 추리해나가야 했다. **** 소등시간이 되어 방으로 돌아왔더니, 어느새 명수는 꿀잠을 자고 있었다. 소년도 잠들 준비를 하기 전에 내일 학교에 가지고 갈 책들을 준비하기 위해 책가방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가방 안에 고이 잠들었던 편지와 선물의 존재를 깨달았다. 소년은 명수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봉투를 개봉하고 속지를 읽었다. 「…오래 전부터 널 지켜봤어.」 와 같은 상투적인 문장에서 시작된 편지에는 10살 소녀의 감성과 낭만이 적당히 버무려진 글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주로 소녀가 기억하는 일상적인 기억들과 순간의 감정들을 약간의 과잉과 열망을 섞어 묘사하고 있었다. 「…니가 돌아보았을 때, 너의 눈에서 별빛이 흘러내리는 걸 보았어. 난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거야. 흘러내린 별빛이 내 마음에 박혀버렸거든.」 소녀는 특별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켜주려한 소년의 용기에 감탄했으며, 그 마음에 자신의 감정을 확인했음을 알렸다. 「…니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내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 한 거야. 난 니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내 마음을 확신할 수 있었어.」 소녀는 자신의 사랑이 위태로운 가운데서도 빛날 것이며, 역경과 고난, 조롱과 비난에도 꺾이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였다. 「…내가 널 좋아한다는 사실을 우리 반 아이들이 알게 되면, 모두 날 놀리겠지? 그래도 난 이겨낼 수 있어. …나보고 키다리라고 놀려도 니 옆에 있을 수 있다면, 어떤 별명이나 놀림도 참아낼 수 있을 거야. 난 너만 있으면 되거든.」 소년은 이 글을 계속 읽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갈등하면서도, 읽지 않는 것은 마음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꿋꿋이 읽어 내려갔다. 「난 널 사랑해.」 로 끝나는 문장을 보는 순간,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부담스럽다!’ 문장마다 흘러넘치는 감정의 과잉은 전혀 공감을 하기 어려웠고, 중간 중간 맞춤법에 맞지 않거나, 문법에 어긋나는 단어와 문장을 보면 빨간 줄을 긋고 싶었다. 무엇보다, 상대의 감정을 일절 고려치 않는 일방적 고백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부담을 줄 수 있는지를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부담의 극치는 단연 마지막 고백이었다. 소년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책으로야 여러 분야에 걸쳐 나오는 단어였고, 주제였기에 의미를 모르지는 않지만 소년은 그 감정을 감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돌아보면, 자신이 누군가를 아끼고 보듬어주고 싶다는 감정을 느낀 적이 없지는 않았다. 당장 옆에서 코를 골며 잠든 명수만 해도 소년이 이 곳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명수에 대한 감정을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보면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우정’이라는 감정이라면 오케이지만.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아도 ‘사랑’이라는 감정에 어울리는 것은 오직 ‘가족’ 뿐이었다. 그 외의 대상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다. 결론적으로 소년은 유림이 가족도 아닌데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리 만무하다는 이야기였다. ‘답장을 써줘야 하나?’ 고민하던 소년은 문득 선물꾸러미를 쳐다보았다. ‘열어봐야 하나, 아니면 그냥 돌려주어야 하나?’ 어차피 마음을 받지 않을 생각인 소년은 그냥 돌려주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런데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지금 소년이 느끼는 감정은 묘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정체를 알지 못했다. 분명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들은 많았었다. 명수, 기웅, 윤정, 학교 선생님들, 보육교사 선생님들, 원장선생님, 핀체노, 무슬라, 샤피로, 에리카, 디아트리, 안트, 신테. 그런데 그 사람들과 유림과의 차이를 살펴보니 바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온도차에 있었다. 명수나 무슬라 같은 사람들에게서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매우 뜨거운 감정을 받았고, 또 주었다. 디아트리나 학교 선생님들 같은 사람들에게는 뜨거운 감정보다는 은은한 감정을 받기만 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친절에 감사해했고, 고마워하는 마음을 늘 품고 다녔다. 그런데 유림의 경우는 너무 일방적인 감정을 받은 데다가 그 온도가 너무 뜨거워서 화들짝 놀란 셈이었다. “열은 에너지가 큰 곳에서 작은 곳으로 이동한다.” 유림의 에너지는 너무 크고, 자신은 너무 작았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도 주고받는 감정을 열에 비유할 때, 온도가 뜨겁든 차갑든 금방 열평형 상태를 이루었기 때문에 놀랄 이유가 없었다면, 유림의 경우는 너무 극적인 열량의 차이로 자신이 적응을 하지 못한 탓이라 여겼다. ‘유림이랑도 열평형 상태를 만들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지만 지금 생각해보기엔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였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생겼다. ‘열전도가 되지 않는 물체가 있을까?’ 마치 자신처럼 열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물체가 있을 수 있을까? 만약 있다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을까? 이른 사춘기에 빠진 한 소녀의 절절한 세레나데가 담긴 편지 한 장이 한 소년에게 물리학적 상상력을 계발시키는 밑거름으로 사용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 [86] 풋사과(5) 긴 밤을 보낸 소년은 다음 날 교실에서 유림을 만났다. 자신의 고정석인 창가 측 가장 뒷자리에 앉아 있던 소녀는 소년이 등교하는 모습을 보다 눈이 마주치자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했다. 아무래도 주변의 아이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리라. “유림아.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지, 지금? 그… 조금 있으면 수업 시작할건데?” “잠깐이면 될 거야.” “오오~!” 주변의 아이들이 놀랐다는 듯 놀렸지만 소년은 개의치 않았다. 괜히 시간만 끌어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고, 유림에 대한 배려도 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감정 역시 열량으로 치환해서 생각해보면, 이미 유림은 많은 열량을 빼앗긴 상태. 이 상태라면 분자활동이 둔해지며 온도가 낮아질 것이다. 평소 활동적이고 쾌활한 면을 자주 보이던 유림이 얌전해지고 둔중해지는 모습을 상상하면,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미안해.” 선물을 건네는 소년의 손에 시선이 닿은 유림은 입술을 깨물었다. 유림은 오늘 단단히 준비하고 나왔다. 딥레드 컬러의 풀오버 니트와 밝은 청색의 데님소재 스커트를 매치하여 여성미를 한껏 강조하는 스타일로 준비했다. 학교 가는데 웬 유난이냐며 어머니가 핀잔을 줬지만 꿋꿋이 버티고 나온 유림이었다. 그런데……. “왜?” 이유도 설명해야 하는 건가? 소년은 잠시 고민을 했다. “난 아직 준비가 안 된 거 같아서.” 유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싫어?” “아니, 니가 싫은 건 아니고…….” 설마……. “다른 여자애를 좋아하는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왜 싫어? 내가 못생겨서? 아니면 키가 너무 커서?” 다른 건 모르겠는데, 키가 크다는 게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가 될 수 있나? 소년은 내심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일단 부정했다. “아냐, 니 키가 왜 문제야? 그런 건 전혀 아니야.” “그럼 왜 싫어?” “아니, 싫다고 한 적은 없는데…….” “그럼 좋아하는 거 아냐?” 소년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림아. 같은 반 친구로서 널 좋아하는 건 맞을 거야. 싫어하진 않으니까. 만약 니가 사귀자라고 말하는 게 친구로서 지내자라는 뜻이라면, 그래 좋아.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야기하는 거라면, 난 아니야. 왜냐하면 난 그런 감정에 대해서 전혀 느껴본 적이 없거든.” 유림은 어리둥절해 있다가, 마지막 말에 꼬투리를 잡았다. “사랑을 왜 몰라?” 유림이 생각하기에 사랑을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지금 각종 드라마, 소설, 영화, 동화, 음악에서 ‘사랑’을 그리고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을 연기하고 ‘사랑’을 쓰고 있는데, 왜 ‘사랑’을 모른단 말이지? “…넌 죽음이 뭐라고 생각해?” “응?” 뜬금없는 질문에 유림은 나오기 직전이던 눈물이 쏙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만약 어떤 괴물이 너의 목에 이빨을 들이대고 물어뜯기 전이라고 가정하면, 넌 그 때 어떤 감정을 느낄 거 같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지금 내가 ‘사랑’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그런 거야. 경험해 본적이 없어서 모르거든.” 유림은 이 잘생긴 남자애가 사실 정신이 이상한 녀석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거랑 이거랑 어떻게 똑같니?” “감정은 다르겠지. 다만 난 경험해보지 않은 감정은 모른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야.” “…그럼 경험해보면 되잖아.” “사랑을?” “응.” “넌 죽음이라는 감정을 경험하기 위해 괴물의 이빨 앞에 니 목을 내미는 경험을 해보고 싶어?” “…너 진짜 이상해.” “아무튼 그런 거야. 미안해.” 소년은 교실로 돌아갔다. 소녀는 한동안 제자리에 서서 소년의 이야기를 곱씹었다. 그리고 교실로 돌아가 소년의 뒤통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절세미소년의 뒤통수가 평범해 보였다. 콩깍지가 벗겨진 순간이었다. **** 소년은 이전처럼 마법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신테의 말처럼, 이곳에서 공부를 하면서부터 인식체계나 사고 메커니즘의 변화가 일어났고, 이 때문에 전처럼 마법을 만들어 내거나 활용하기 어려워졌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었다. 이곳에서 이곳 나름의 법칙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연구하다보면 마법을 익히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조바심내지 않고 차근차근 공부를 해나가다 보면 익힐 수 있는 마법도 늘어날 것이라 믿었다. 전 세상처럼 항상 위험이 도사리는 곳도 아니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도 없을뿐더러 당장 저쪽으로 넘어가더라도 지금의 마법정도라면 몸을 보호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느긋한 자세로 학과 공부에 임하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마법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홀로서기를 했을 때 자신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서 마법이 유용하게 이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아, 이런.” 도서관에서 책을 보던 소년은 혀를 찼다. 그리고 노트에 수식을 쓰고 외웠다. 과거 소년은 자신의 부족한 지식과 함께 잘못된 지식이 가져올 참변을 미리 경험했었다. 돌산 위의 절벽에서 뛰어내릴 때, 중력가속도에 대해 잘못된 수식을 세우는 바람에 위험에 처했었던 일이었다. 당시에는 ‘ma=mg-kv’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kv^2’이었다. ‘제곱’이란 수식의 변화만 해도 수치의 변화가 크게 나타나니, 자신이 위험에 처했던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 외에도 낙하하는 물체에 적용되는 다양한 변수와 ‘유체역학적’ 변화들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모험을 강행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니, 새삼 자신의 무모함과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더욱 마법사용에 조심스러워진 소년은 조금 더 정확하고 깊이 있게 공부하기를 마음먹게 되었다. 소년이 공부에 대한 마음가짐을 새로 갖고 보육원 도서관에서 책을 후벼 파고 있을 때, 소년에 대한 마음을 깨끗이 정리하지 못한 유림은 서글픈 마음을 감추지 못해 밤마다 울었다. 차라리 싸우다 지면 억울하지나 않을 텐데, 이건 싸움도 못해보고 져버린 형국이라 억울하기까지 했다. “시작도 못했는데…흑흑.” 콩깍지의 유무를 떠나, 생애 최초의 ‘사랑’이 시작도 못하고 봄비 맞은 벚꽃처럼 바닥에 추락했다는 사실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아마도 ‘비련의 여주인공’이란 이런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일 테지.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기도 창피한 일이어서 혼자 끙끙 앓을 뿐이었던 유림은, 결국 학기말 시험을 망치고 말았다. 마음이 붕 떠서 자리를 잡지 못하니, 다른 사소한 일―수업이나 공부나 학기말 시험 같은 것―에는 집중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너, 이게 뭐야!” 유림은 어머니께 혼이 났다. 그리고 방학기간동안 특별조치의 일환으로 그간 피해 다녔던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그동안은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은 아니어도 이렇게 처참하지 않았었고, 운동도 잘해서 고른 성적을 보여 왔던 유림이었기에 굳이 지금 시점에 학원을 보낼 필요가 있겠냐는 아버지의 권고에 어머니가 한 수 무르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반 전체에서 하위권을 차지한 성적을 보자 이대로 둬선 안 되겠다는 위기의식이 발동한 어머니는 소매를 걷어붙이시고는 유림의 학업관리에 전념코자 하셨다. 본격적인 치맛바람의 시작이었다. **** 방학이 되었다. 소년은 기웅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소년을 위해 쓰겠다는 마음을 가진 기웅 덕택에 소년은 충분히 알찬 방학을 보낼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몸의 단련에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은 까닭에, 소년은 쑥쑥 키가 자라더니 어느새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될 무렵 키가 145㎝에 육박할 정도로 자랐다. 5년간의 단련의 성과와 맞물리면서 균형을 찾아가는 소년의 몸이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근력과 체력은 덤이라고 표현할 만큼 외적으로 보이는 성장이 두드러졌다. 명수는 갑자기 커져버린 친구의 키가 부러웠다. “너 몰래 뭐 먹지?”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명수는 친구의 성장이 식습관에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운동을 해도 자기가 더 많이 하고, 식당에서 같이 식사를 할 때도 자기가 더 많은 양을 먹는데, 자기보다 키가 커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명수였다. 이런 현상이 벌어진 데는 분명 자신이 모르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 정도로 머리가 자란 명수는 소년을 붙잡고 캐물었다. “너랑 매일 같이 있는데 뭘 따로 먹어?” 소년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명수는 갈고리눈을 하고 소년을 쳐다보았다. “기웅이 형이 몰래 뭐 주는 거야. 그치?” 바른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노라, 취조하는 형사의 어투에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더니, 명수가 고리눈을 뜨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닦달했다. “그렇구나? 그랬네. 기웅이 형도 키가 크잖아? 형이 먹는 거 너도 같이 먹는 거지? 그렇지?” 마땅히 대답을 할 말이 없어 그냥 바라만 보자, 명수가 한손으로 턱을 괴며 말했다. “나도 달라고 해야겠다. 달라고 하면 줄까?” 소년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기웅형에게 얻어먹으려면, 우선 같이 공부해야 될 거야. 기웅이 형이 공부하는 것 좋아하잖아. 그러니깐 같이 공부하고 있으면, 착하다고 선물로 줄 지도 몰라.” “공부? 공부해야 준다고? 아, 그래서 니가 기웅이 형한테 공부 배우는 거네? 그런데 어쩌지. 난 공부하기 싫은데.” 명수는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하루 종일 공을 차기도 바쁜 시간에 책을 읽고 있는 건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명수였다. “공부하면, 키가 커질 거야.” 소년이 명수가 알아듣기 쉽게 단정지어 말했다. 명수는 키가 커지고 싶었다. 축구선수는 키가 커야 좋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그 이유를 묻지 않아도 될 만한 것이, TV에 나오는 축구선수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당장 보육원 더비에서 키가 큰 철용이나 중학생 형들이 공을 잘 차는 모습을 목격하고 경험했다. 그게 다 키 때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 자신도 키가 커야만 했다. “좋아. 그럼 일단 방학동안 키 커지는 공부를 해야겠어.” 역시나 묘하게 핀트를 벗어난 다짐이지만 명수는 결심했고, 소년은 웃음으로 그 결심을 지지했다. 이후 도서관에 나타난 명수를 본 기웅이 놀라긴 했지만, 소년의 뒷공작에 사정을 알게 된 기웅은 날마다 과자 하나씩을 안기면서 명수의 공부를 도왔다. 키는 커질지 확신할 수 없지만 성적은 오르지 않을까 생각해보는 소년이었다. **** 방학이 끝나기 일주일 전, 소년은 윤정이 취업한 레스토랑을 들릴 기회가 있었다. 윤정은 사실 운이 좋게 풀린 케이스였다. 대부분 보육원 출신들이 알게 모르게 불편한 시선을 감수하고 어렵게 취업을 하는 것에 반해, 윤정은 손쉽게 취업을 할 수 있었다. 사정은 이러했다. 대학까지 갈 형편이 되지 않아 취업을 염두에 두었고, 평소에도 요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놓치지 않았던 윤정은 졸업 후, 이 쪽 방면으로 취업을 하기 위해 준비를 하던 차였다. 마침 그 모습을 눈여겨 본 독지가 한 분이 주선해 준 덕택에 윤정은 인평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레스토랑에 취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정으로, 윤정은 이곳에서 돈을 벌어 자격증 취득을 위한 준비도 할 수 있게 되었고, 곁가지로 여러 가지 조리스킬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1년여를 레스토랑에서 일하며 보조로서 자리를 잡은 윤정은 기웅과 소년을 레스토랑으로 초대했다. 첫 월급은 쓰지 못했지만, 첫 보너스는 이들을 위해 쓰자는 생각에서였다. 레스토랑의 문을 열고 들어선 소년은 그리 크지 않지만 깨끗하고 화려한 레스토랑에 눈이 핑핑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누나, 여기 너무 좋다.” “그치? 나도 여기 인테리어가 너무 보기 좋더라고. 나중에 내가 레스토랑 차리면 이렇게 만들고 싶어지더라.” 기웅과 윤정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소년은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 [87] 경쟁(1) 소년은 원목 테이블과 원목의자의 정갈함에 마음이 빼앗겼다. 말레이시아 수종의 멀바우 목재로 제작된 원목 테이블은 천장의 조명으로부터 떨어지는 빛을 받아 암적갈색의 미려한 색감을 뽐내고 있었다. 하드왁스로 수차례에 걸쳐 마감칠이 된 듯 고운 질감과 시각적 수려함이 시선을 사로잡고 검은 칠이 된 철재 프레임이 아래를 단단하게 받치고 있어 안정감도 보였다. 빈촌에서 사용하던 식탁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여서 소년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디자인’과 ‘기술’의 조화가 얼마나 아름다운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식탁이었다. “멋지지?” 윤정이 식탁을 두어 번 톡톡 두드리며, 마치 자신의 것인 냥 자랑스러워했다. “멋있네요! 가게가 정말 예쁜 것 같아요.” 소년이 해맑게 웃으며 칭찬했다. 기웅과 소년이 자리에 앉자, 윤정은 직접 서빙을 담당했다. 다른 직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두 사람을 위해 특별한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는 윤정의 마음씀씀이가 보기 좋았는지, 마스터쉐프가 직접 요리를 해 주었다. “자, 우선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배고팠지?” 그렇지 않아도 아침부터 굶으면서―윤정은 꼭 굶고 오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기다렸던 점심이었다. 뽀송뽀송하고 따뜻한 온열을 품은 빵 한조각도 맛있었지만, 뒤이어 나온 샐러드와 스테이크는 그냥 보기만 해도 화려하고 군침을 돌게 만들었다. “우와!” 먹기도 전에 절로 감탄이 나오게 만드는 요리였다. 아기자기한 색감과 마치 미술작품을 보는 듯한 데코레이션은 감히 포크를 찌르는 게 미안해질 정도였다. 기웅이 용감하게 샐러드를 찍어 올렸다. “누나, 이거 정말 맛있어!” 기웅의 찬사에 흐뭇한 미소로 화답하던 윤정은 뒤에서 지켜보던 마스터 쉐프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당연하지. 아마 인평시에서 제일 맛있는 레스토랑이 여기일걸?” 윤정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역시 소년은 음식 하나하나의 맛을 음미하며 먹을 줄 아는 아이였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바라보는 윤정의 입에 그 맛이 느껴질 만큼 생동감 넘치는 표정과 눈빛을 짓는 소년이었다. “어때?” 소년이 입에 넣은 음식을 꼭꼭 삼키는 것을 확인한 후 물었다. “고기가 질기지도 않고, 너무 연하지도 않게 딱 알맞은 느낌이에요. 이게 소고기인가요?” 장담하건대, 소년이 태어나 먹어본 음식 중 최고의 음식이라 할만 했다. “10분간 대파로 마리네이드한 소고기를 버터를 두르고 미디엄 레어로 구운 거야. 맛있지?” “…앞에 건 모르겠고, 일단 맛있네요.” 윤정은 소년의 접시에 자신의 고기를 썰어서 건넸다. “괜찮아요.” “아니야. 많이 먹어. 사실은 첫 월급 받았을 때 쏘고 싶었는데, 그 때는 학원 수강비로 써야 해서 여유가 없었거든. 그래도 이번에 연말 보너스로 두둑이 나온 게 있어서 이렇게 쓰는 거야. 너무 늦어서 미안해?” 일찍 초대하지 못했다고 되레 미안해하는 윤정에게 기웅이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우리가 미안하지. 이렇게 비싼 음식을 얻어먹는 건데.” 기웅이 미소를 지으며 고기를 한 점 썰어 입에 넣었다. 따뜻한 육즙이 입안에서 터지며 고소하고 달달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괜찮아, 정말. 난 니들한테 이렇게 사줄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윤정도 고기를 한 점 썰어서 입에 넣고 맛을 음미했다. “내가 나중에 진짜 의사가 되면 말이야. 누나 건강은 내가 책임질게.” “아이고, 그럼 미래의 의사한테 미리 특진비 내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나?” “어, 그렇게 되나? 그럼 뭐 특진비라 치고 많이 먹어줄게.” 기웅이 야무지게 고기를 크게 썰어서 입 안 가득 넣고 오물거렸다. 절로 웃음이 나는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래, 그럼… 넌 어떡할래?” 윤정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소년에게 물었다. 소년은 골똘히 생각했다. 하지만 당장은 어색한 웃음 외에 내밀게 없었다. 소년이 난감해하는 표정을 짓자 윤정이 머쓱해하며 괜찮다고 웃었다. “우리 석고는 그냥 이대로만 잘 자라라. 그러면 누나가 나중에 매일매일 맛있는 거 해줄 테니까.” “나는?” 기웅이 눈을 크게 뜨고 묻자, 윤정이 피식 웃었다. “넌, 돈 잘 벌 텐데 뭐. 제 돈 주고 사먹어. 대신 맛있게는 해줄게.” 두 사람이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는 사이, 소년은 조금 심각해졌다. 사실 심각해질 만한 주제였다. 일전에도 자신의 꿈과 목표에 대해 고민을 했었지만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보류해 놓은 상태였다. 그 뒤로 또 5년이나 지나면서 잠시 잊고 있기도 했었고. 다시금 이 주제가 환기되니 소년으로서는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소년의 표정에 윤정이 살짝 미안해하며 물었다. “너무 고민하는 거 아니니? 누나가 장난으로 그런 건데?” “예? 아, 아니요. 그냥…….” 소년은 머뭇거리다가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원장에게 꿈을 가지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부터, 최근 자신의 꿈과 목표를 찾지 못해서 답답하다는 이야기까지.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지 마. 니 나이 때는 그렇게 깊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더라. 형이 오래 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나고 보니 중학교나 고등학교 올라온 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거라고 본다.” 기웅이 냅킨으로 입가를 쓱쓱 문지르고 물잔을 들었다. “맞아. 사실 나도 요리사를 직업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얼마 되지 않았거든? 물론 기웅이나 내가 꿈을 이룬 건 아니지만 벌써부터 꿈이나 목표를 만들겠다고 억지로 고민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좋아하는 게 있으면 저절로 꿈이 생길 테니까.” 윤정도 잔을 들어 건배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지금은 좋아하는 게 뭔지를 천천히 찾아보도록 해. 너무 서두르진 말고. 내가 보기엔 니가 공부하는 걸 좋아하니까 학자나 교수 쪽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아니 것보단, 넌 뭘 해도 잘할 거야.” 기웅이 입을 축이고 말했다. 윤정도 기웅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설마 꿈이 없다고 스테이크 하나 못 갚겠니?” 윤정의 익살스런 우스갯소리에 기웅이 마주 웃었다. 소년은 이렇게 고마운 사람들의 마음에 어떻게 보답해야 하나를 더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니 이름도 그런 뜻이잖아?” 기웅이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윤정이 기웅을 돌아보며 물었다. “뭐? 무슨 뜻인데?” “얘 이름을 원장님이 지어주셨잖아요? 그런데 이름 뜻이 그거래요. 무럭무럭 자라서 받은 만큼 보답하라는. 단련할 단(鍛)에 보답할 유(侑)래요.” “그래? 원장선생님 답네.” 두 사람은 깔깔대며 웃었다. 소년, 단유는 아직 뜻을 몰라 어리둥절해 했지만 좋아하는 사람들이 웃으니 그게 보기 좋아서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 만물이 웅크린 채 긴 시간을 이겨내고 마침내 일어나 따뜻한 햇볕을 마주하는 3월, 단유와 명수는 4학년이 되었다. 3월 2일, 첫 등교일을 맞아 보육원 현관이 북적였다. 올해부터는 초등학교 통학차에도 인원 변경이 예정되어 있었다. 철용(6학년)과 단유(4학년), 명수(4학년) 외에도 새로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세 명의 푸릇푸릇한 새내기 신입생이 동승하게 된 것이다. “니가 지선이고, 니가 재민이고, 니가 …유철이지?” 명수가 한 명씩 콕콕 짚으며 선배노릇 좀 해보려는 폼을 잡았다. 세 아이들은 고개만 끄덕였다. 평소에도 나이차가 많아서(?)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무시무시한 초등학교 입학식까지 예정되어 있어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때문에 명수의 질문에도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얼어붙은 모습을 보였다. “명수야. 왜 애들 겁주고 그러냐?” 철용이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승합차가 현관 앞으로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명수에게 한 마디 던졌다. “겁이 아니고, 이름 외우는 건데요?” “니가 그러고 있으면 겁주는 거야.” 철용의 말에 발끈하는 명수. “나 참, 내가 이름을 물으면 겁이고, 석고가 물으면 관심인가?” “잘 아네?” “이씨.” 철용은 키득거리며 명수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명수가 짐짓 싫은 척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동무를 한 철용은 명수와 단유에게 당부하듯이 말했다. “이제 니들이 얘네들 잘 챙겨야 한다. 나나 형근이 형이 너희들 잘 돌봐준 것처럼. 알았지 명수야?” “형이 뭘 잘 챙겨줬다고 그래? 운동장에서 공 좀 차려고 하면 맨날 구석에 가서 놀라고 하면서.” “형이 너 다칠까봐 걱정돼서 하는 소리지. 그걸 오해하면 안 돼.” “우와, 형 6학년 되더니 말 되게 잘한다?” “너도 빨리 철 좀 들어라.” 그간 당했던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듯, 뿔난 시늉을 하는 명수와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기는 철용이었다. 그리고 올망졸망한 눈으로 두 사람의 만담을 귀담아 듣던 세 아이의 모습이 귀여워 단유는 슬쩍 웃음을 흘렸다. “우와, 형. 얘가 우리 비웃는데?” 그걸 또 곁눈질로 봤는지, 명수가 씩 웃으며 단유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 너 우리 비웃냐?” 철용이 다른 쪽 어깨를 붙잡았다. 당황한 단유가 빠져나오려하는데, 아무리 힘이 세진 단유라고 해도 두 사람이 붙잡고 있으니 쉽게 몸을 빼기가 힘들었다. “아, 아냐, 내가 뭘 비웃…큭.” 명수가 먼저 손을 내밀어 옆구리를 간지럽히고, 뒤따라 철용이 다른 쪽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아, 제발! 제발!” 명수가 우연히 발견한 단유의 약점, 바로 간지럼 태우기였다. 늘 진지한 단유였지만, 이때만은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다리를 동동거렸다. “미안, 미안! 안 그럴게! 명수야! 형!” 승합차가 오지 않았다면 두 사람의 합동 작전은 단유가 눈물을 흘릴 때까지 지속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때까지도 긴장을 풀지 못한 세 꼬마 아이들은 늦겨울의 얼음꽃 마냥 웃지도 못하고 제자리를 지켰다. **** 이번에도 명수는 단유와 같은 반이 되지 못했고, 명수는 입이 댓 발이나 나왔다. “아무래도 누가 일부러 이렇게 만드는 거 같지 않아?” “난 매번 바로 옆 반에 배치되는 게 더 신기한 거 같은데.” 단유의 학년은 매번 7반이 구성되는데, 신기하게도 매번 바로 옆 반에 단유와 명수가 나란히 배치되곤 했다. 이번 학년에도 단유는 4반, 명수는 5반이었다. “이제 운동장은 내꺼다!” 명수가 선언하듯 소리 지르며 교실로 입장했다. 4학년부터는 운동장 가운데서 놀 수 있는 권한 비슷한 게 생겼다. 3학년까지는 어린애 취급을 하며 운동장 가장자리로 내몰렸지만, 4학년부터는 고학년 학생들도 인정(?)을 하는 분위기여서 운동장 가운데서 놀아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 물론 달리다가 고귀하신 고학년 선배들의 존체(尊體)에 손상이라도 가면 바로 주먹질이 오갈만큼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하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명수였다. 사실 단유도 4학년이 되니 뭔가 변한 느낌이 들었다. 딱히 꼬집어서 뭐가 변했다는 것을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여섯 학년으로 구성된 초등학교 시스템에서 반을 넘었다는 것이 묘하게 사람 마음을 고양시키는 면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비단 4학년이 되었다는 사실만 변한 건 아니었다. “자, 2주 뒤에 학급 임원 선거를 할 거에요. 그 때까지 누가 학급 임원에 어울리지 잘 살펴보도록 해요. 그리고 그 때까지 우리 반 임시 반장을 할 사람을 뽑아야 하는데.” 선생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실 둘러보나마나 이 아이가 자신의 반에 왔다는 것을 미리 알았을 때부터 시킬 마음이 있었다. “김단유. 니가 2주 동안 우리 반 임시 반장이야. 다른 사람들도 단유 괜찮지?” “네!” 단유는 나름 유명 인사였고,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터라 다른 반에서 온 아이들도 잘 아는 얼굴이었고, 인정할만한 친구였다. 잘생겼고 공부도 잘하는 아이라고 소문난 아이인데다, 어찌된 일인지 키가 훌쩍 자라서 또래 가운데서도 돋보이는 아이였다. 같은 반이었든, 다른 반이었든 3개월을 못 보고 지난 사이에 머리 하나는 더 커진 채 등장한 단유의 외모에 놀란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중에 유림도 끼어있었다. “얼굴이 조금 변했나?” ======================================= [88] 경쟁(2) 유림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키가 커진 건 확실했다. 이제 자신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자랐다는 게 보이니까. 그런데 어쩐지 얼굴이 변한 것 같았다. 성장을 하면서 얼굴이 변하는 것은 당연한 거지만, 오랫동안 얼굴을 훔쳐보며 눈에 깊이 새겼던 유림의 입장에서 단유는 확실히 변했다. ‘분위기가 바뀐 건가?’ 단유의 얼굴은 약간 외국사람 같기도 하고 한국사람 같기도 한데, 혼혈 같지는 않은 묘한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냥 보통의 아이들처럼 보였다. 여전히 잘생겼다고 할 수는 있지만 흔한 한국 남자애, 라는 느낌이 강해졌다. 그런데,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유림이 단유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소년이 바로 옆자리에 앉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단유가 유림의 짝이었다. “안녕?” 단유가 스스럼없이 인사를 했다. 유림은 흘깃 쳐다보곤 시선을 피했다. 단유는 멋쩍게 웃으며 수업준비를 했다. 이내 종이 울렸다. “차렷!” “경례.” “안녕하세요.” 임시반장으로서 단유의 첫 임무였다. **** 기웅은 대학 진학과 함께 보육원을 졸업했다. 뜻하던 대로 의대에 진학을 했지만 형편상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지방 의대로 진학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 기숙사에서 지낼 수 있게 되어 잠자리는 걱정을 덜게 된 기웅은 떠나기 전날 자신의 책을 모두 단유에게 물려주었다. “공부 열심히 하고, 형이 시간 날 때마다 들릴게. 그 때까지 열심히 공부하는 거 잊지 마. 나중에 형이 테스트 해본다?” 단유는 희미하게 웃으며 기웅의 손을 맞잡았다. “나중에 제가 형을 찾아갈게요.” “그럴래? 그래도 되겠네.” 기웅은 단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명수를 바라보았다. “너도 공부 열심히 해. 공부 많이 하면 할수록 키가 커질 거야.” “아 좀, 놀리지 마요.” 그래도 머리가 굵어졌다고 반항하는 척 해보는 명수였다.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과자 먹고 키가 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명수는 그래도 방학동안 만큼은 기웅과 함께 공부를 했다. “내가 보니깐 넌 머리가 좋아. 공부만 열심히 하면 단유보다 훨씬 잘할 걸?” “그럴 리가요.” “진짜다. 내가 약속할게. 그리고 정말 훌륭한 축구선수는 머리도 좋아야 하는 거야. 머리 나쁜 축구선수는 국가대표도 못해.” 책임질 수 없는 말도 마지막이라고 막 하는 기웅의 속셈을 모르는 명수는 또 그런 건가, 싶어서 마음이 흔들렸다. “아, 진짜 하기 싫은데…….” 그렇게 기웅은 보육원을 떠났다. 그리고 그 후, 명수는 단유와 함께 도서관에 자주 출몰하는 기행을 보여 보육교사들을 놀라게 했다. “석고야, 이거 봐봐. 나 못 풀겠어.” “명수야.” 단유는 한숨을 쉬었다. “응?” “매번 모르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막 들어올 거야?” “응. 모르는 건 물어보라며?” “그렇지. 그런데 지금은 우리 종례시간이거든?” 명수가 교단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이 팔짱을 끼고 명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명수가 씨익 웃었다. “이것만 물어보고 갈게요.” “나가!” 명수는 후다닥 교실을 뛰쳐나갔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열린 문을 타고 복도로 울려 퍼졌다. **** 인평일보의 베테랑으로 알려진 양 기자는 시청 뒷골목에 위치한 국밥집에서 점심을 해결하는 중이었다. “이집이 이곳에서 30년을 있었대요. 국물 맛이 끝내주지 않아요?” “예, 끝내주긴 하네요.” 기자의 넉살에 허름한 양복차림의 사내가 흐린 미소를 지으며 숟가락질을 계속했다. 양 기자는 싱거우면서 매운 양념의 배추 겉절이를 집으며 껄껄 웃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요. 내가 뭐 아무데서나 떠들고 다닐 양반도 아니고.” 사내는 묵묵히 식사를 계속했다. 부추가 들어간 뚝배기를 휘휘 저은 뒤 숟가락에 밥을 가득 담아 국물과 함께 먹었다. “그리고 여기가 비록 시청 근처라 해도, 이 골목은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골목이 아니라서 오히려 사람들 눈에 덜 띈다니깐요? 이 골목만 나가면 설령 사람들이 그쪽을 보더라도 아, 시청에 볼 일이 있어서 왔나보다, 하지 저사람 어디 근처에서 기자 만나고 다니는 거 아냐, 이렇게 볼 사람 없다니깐요. 그냥 긴장 풀고 식사해요.” “알았으니까 그만하세요. 긴장 풀었어요.” “긴장 풀었다는 사람이 넥타이가 국에 빠진 줄도 모르고 먹나?” 화들짝 놀라 넥타이를 건져 낸 사내는 아예 목에서 풀어냈다. “그래, 거 단추도 하나 풀고. 그래 이제 좀 낫네. 어때요? 넥타이라도 푸니까 좀 낫지 않소?” 사내는 이후로 말없이 국밥을 떠먹기 시작했다. 양 기자는 이미 식사를 마치고 화장지로 쓱쓱 문지르고 있었다. 양기자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마침 아무도 없는데, 여기서 그냥 이야기할까요?” “…….” 사내도 주변을 둘러보지만, 늦은 점심시간이어서 그런지, 너무 외진 골목에 있는 인기 없는 국밥집이어서 그런지 사람이 없었다. 사내는 마른세수를 하며 각오를 다졌다. “이건 절대 비밀입니다.” “알죠. 비밀이니까 오셨겠죠.” 사내는 옆 의자에 얹어 놓았던 봉투를 슬며시 건넸다. 양 기자는 봉투를 열어 들어있는 몇 장의 서류들 윗 장을 대충 훑었다. “재단 내 비자금 내역이요. 내가 있는 동안 정리했던 거라 요즘 건 없을 테지만, 아마 지금 그것보다 더 할 거요.” 양기자는 사내를 흘끔 쳐다보았다가 다시 서류를 훑어 내려갔다. “특히, 지금 아네스 보육원의 김 원장이 손을 쓴 게 있는데, 그게 좀 클 거요.” “많이도 해먹었네.” 양기자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언제 터뜨릴 거요?” “…….” 양기자의 침묵이 불안해서 사내가 재차 물었다. “이보시오.” “자료는 이미 충분히 모았고, 이거라면 확실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곧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사내는 휴지로 귀 뒤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국밥이 제법 뜨거웠던 것 같았다. 양기자는 서류를 갈무리한 뒤 자신의 가방에 집어넣었다. “제가 먼저 나갈까요?” “내가 먼저, 아니… 양기자가 먼저 나가시오.” 양기자는 입 꼬리를 올리며 가방을 둘러멨다. “계산은 제가 하죠. 5분 뒤에 나와서 왼쪽 골목으로 빠지시면 사람들 눈에 들키지 않을 겁니다. 그럼 이만.” “그리고!” 일어서는 양기자를 불러 세운 사내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이제 연락 하지 마시오.” “물론이죠. 그럼 그동안 몸보신 좀 잘하시고요.” 양기자는 덜커덩거리는 문을 열고 가게를 나섰다. 따뜻한 봄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양기자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차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그런지 공기가 상쾌한 기분이었다. 10분 후, 사내가 가게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아귀가 맞지 않았는지 거친 쇳소리를 내며 열린 문을 나온 사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주변에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손수건을 꺼내 입을 막고 왼쪽으로 몸을 튼 사내는 궁시렁 거렸다. “이 놈의 황사는 정말 지긋지긋 하구만.” 문득 할 일이 생각났다는 듯, 사내는 상의 안쪽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예, 접니다. 전달했습니다. 예.” 듣는 사람도 없건만 조심스럽게 통화를 이어가던 사내는 이내 다른 골목길로 몸을 감추었고, 빈 거리에는 미세 먼지 주의보가 발령된 봄바람만이 설렁거리듯 지나갔다. **** “지금부터 학급 어린이회 임원 선출을 시작하겠습니다.” 임시반장 단유의 선언으로 4학년 4반 학급 임원 선거가 시작되었다. “반장으로 추천하실 분 있으면 추천해 주시길 바랍니다.” 교탁 옆 책상에 앉은 선생님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상하게 HR(학급 회의)시간만 되면 교탁 앞에 선 아이들은 마치 짠 것처럼 어색한 톤으로 진행을 했다. 자기들 나름대로 정례인양 어른들의 흉내를 내는 모양새가 진짜 어른이 보기에는 오히려 순수해보였다. 이제껏 교사생활을 하는 동안 쭉 봐오던 모습이라 무덤덤할 줄 알았는데, 나름 똑똑하다고 소문난 단유의 경우에도 어김없이 쉼표를 따박따박 찍듯이 끊어 읽거나 묘한 악센트 올림 현상이 나타나 웃음이 난 것이다. ‘별로 긴장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저 나이 때 애들은 웅변의 경험이 많지 않아서 여러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가운데 발표를 하는 것이 쉽지 않다. 나이든 선생님들이야 과거에 ‘국민교육헌장 웅변대회’같은 시답잖은 이벤트를 겪으며 단련이 되었다지만, 자신만 해도 어렸을 적엔 지금 단유처럼 앞에 나서는 걸 어색해 했었다. 선생님이 상념에 빠진 사이, 아이들은 한두 명씩 손을 들어 추천을 했다. “강동원 어린이를 추천합니다. 강동원 어린이는, 공부도 잘하고, 결석도 안하고, 친구들한테 잘해줍니다.” “지상훈 어린이를 추천합니다. 지상훈 어린이는, 공부도 잘하고, 청소도 잘하고, 솔선수범하는 어린이입니다.” 지난 3년간 아이들이 ‘HR시간에는 단정하고 예의바르게, 질서정연하게 행동하라’는 규칙을 ‘같은 어투로 발표’하라고 이해한 건 아닌가 의심을 품게 할 정도였다. 단유는 이름이 나올 때 마다 칠판에 바른 글씨체로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나갔다. “서유림 어린이를 추천합니다. 서유림 어린이는, 공부도 잘하고, 친구들 이야기를 잘 듣고, 부지런한 어린이입니다.” 단유와 유림의 눈이 잠깐 마주쳤다. 지난 2주간 유림은 정말 단 한마디도 단유에게 말을 건넨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서로 눈을 마주본 일도 거의 없을 정도였다. 수업 특성상, 짝과 함께 해야 하는 경우가 생겨도 유림은 무관심, 무간섭으로 일관되게 행동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유림이 눈을 피하지 않는 것이었다. 단유가 먼저 시선을 돌리고 칠판에 ‘서유림’을 쓰기 시작했다. “더 없습니까? 없으시면…….” 유림이 손을 들었다. “서유림 어린이. 발표하십시오.” “김단유 어린이를 추천합니다.” 아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학급 어린이회 임원으로 나올 아이들은 거의 미리 정해져 있었다. 이미 SNS를 통해 학부모들 사이에서 입이 맞춰지고 후보가 등록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후보 추천처럼 보여도, 해당 후보들은 미리 연설문을 준비해 오는 것이 보통인 것이다. 유력 임원 후보들 간의 경쟁이 지난 일주일간 학급을 달궈놓은 상태에서 새로운 후보 추천은 아이들을 당황시킬 뿐만 아니라 지명된 후보마저 당황케 하는 행위였다. 단유가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재미있다는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추천된 후보는 무조건 칠판에 적은 뒤, 후보연설 시간에 연설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복수?’ 단유가 머릿속으로 떠오른 단어였다. 임시반장 단유가 머뭇거리며 진행을 하지 않으니 선생님이 나섰다. “이유를 말해야지?” 유림이 입을 열어, 당당하고 힘이 잔뜩 들어간 어조로 추천 이유를 설명했다. “김단유 어린이는 우리 학교에서 제일 똑똑한 어린이이고, 운동도 잘합니다. 그리고 장난도 잘 안치는 진지한 성격과 친구를 아끼는 마음이 큰 친구라고 생각해서 추천합니다.” ‘내가?’ 단유가 멍한 얼굴로 유림을 바라보는데, 유림은 노려보듯 매서운 시선으로 마주보았다. “이름적어야지?” 단유는 선생님의 재촉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이름을 칠판에 적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후보는 없었다. 이윽고 호명된 후보들은 교실 앞으로 나와 공약 발표를 시작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발표를 들으면서 딴 생각을 했다. 사실 단유는 어느 학년 어느 반에 가더라도 반장을 할 만한 아이라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했지만, 단유가 반장이 될 확률은 거의 없었다. 후보가 지명되는 방식이 그러했듯이, 학급 반장은 학부모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이니 보육원 출신의 단유가 후보가 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지만, 단유가 당선될 일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기대하는 선생님의 속마음이었다. 적어도 투표는 아이들 마음에 달렸으니까. “…마지막으로 저는 남녀차별이 없는 교실을 만들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전교회의 때 건의사항으로 잘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웃음이 넘치는 교실을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쑥스러워 하는 아이도 있고, 말을 더듬는 아이도 있지만 그래도 각자 준비한 연설문을 보며 공약연설을 마쳤다. 유림이 나와서 당당한 목소리로 후보연설을 끝낸 뒤, 다음 발표를 위해 교탁 옆에 서 있던 단유가 눈치를 보다가 앞으로 나섰다. 아이들의 시선이 단유에게 몰렸다. 묘한 기대와 궁금증이 서린 눈빛들이었다. ======================================= [89] 경쟁(3) 단유는 입술이 바짝 마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껏 여러 경험을 했지만,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었다. 일전에 혜진이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 달려들었던 경험은 있었지지만, 지금은 그 때와 전혀 달랐다. 40명의 반 아이들이 모두 자신만을 쳐다보는 광경은 솔직히 두렵기 까지 했다. 차라리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게 더 쉬웠으려나? 선생님은 단유가 긴장하는 모습이 또 새롭게 보였다. 뭐든 잘하는 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또 제 나이에 맞는 모습같이 보였다. “단유야. 너무 긴장하지 마.” 선생님의 부름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단유는 호흡을 한 번 하고 생각을 정리했다. “저, 저는… 제가 반장이 된다면, 여러분들을 위해….” 갑자기 말을 멈춘 단유. 아이들과 선생님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단유를 앞에 세운 장본인인 유림 역시 여태 보지 못한 단유의 모습에 의아해하다가 말을 멈추기까지 한 것을 보고는 조금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과 다른 사정이 있었던 단유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저는 제가 어떤 반장으로서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제가 반장이 된다는 것을 가정하고 공약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전 제가 어디까지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약속을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러분께 이야기드릴 수 있는 건, 여러분과 더 많은 대화를 통해 서로가 원하는 점을 찾고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치고, 지켜야 할 것은 지키면서 행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과도 대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 혹은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들을 논의하고 합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서로가 만족할 수 있고, 화합할 수 있는 교실이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어느 한 쪽의 편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편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반장으로서 구체적 공약을 내거는 것은 사실 어려웠다. 준비가 안 된 것도 있지만, 반장이라는 직위에서 할 수 있거나 해야 하는 직무 범위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무작정 공약을 남발하는 것은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단유에게 있어 약속은 어떤 경우에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이나 말은 상대를 속이는 것인 동시에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는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며, 자신의 본질을 훼손하는 행위였다. “반장으로의 책무를 다하도록 노력할 것이며, 4반의 학생으로서의 의무도 다하겠습니다. 반장으로서 태만하지 않으며, 학생으로서 나태해지지 않겠습니다.” 반장으로서의 직위와 학생으로서의 위치는 서로 상충될 수 있음을 5년 전―이곳의 시간으로는 작년―에 경험한 바가 있었다. 때문에 각자의 위치에 맞게 행동하는 자세가 요구되며, 또한 그 둘을 모두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두 지위가 모두 ‘나’를 구성하는 요소일 테니까. “김단유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반장이자, 학생으로서 여러분과 함께 하겠습니다.” 자신이 뱉은 말에 대한 책임과 가치는 자신의 이름에 대한 가치로 귀속된다. 이름은 단순히 세 글자로 구성된 단어가 아니다. 겉으로 보이는 사물의 고유성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될 뿐만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특정 짓는 것이다. 곧 이름은 ‘나’의 직관적 표징(表徵)이며 내재된 본질의 표상(表象)이다. 그리하여 단유에게 이름이란, 실존주의적 자아이며, 주체성을 가진 본질인 동시에 고유의 ‘나’였다. 지난 5년간의 시간에 디아트리와 안트, 신테가 알려주려 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때문에 말 한마디로 허투로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이름을 내거는 행위는 이 세계와 자신 사이에 발생하는 약속의 인장(印章)을 찍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아이들은 뭔가 어마어마한 걸 들었다는 얼굴로 멍하니 단유를 바라보았고, 선생님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소년이 말을 멈추고 가만히 있을 때는 너무 긴장해서 그런가, 싶은 생각에 걱정이 들었고 다시 이야기를 진행할 때는 도대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구나 싶었는데,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는 뭔가 가슴 깊은 곳까지 전해지는 울림에 아이를 바라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아마 저 아이가 뱉은 말을 글로 펼쳐놓으면 어렵지 않은 단어들로 구성된 문장으로 완성될 것이다. 하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전달하는 소년의 모습이 심히 감동스러울 정도였다. 이제껏 저런 연설(?)을 한 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역시 단유는 다른 아이들과 다르구나.’ 차마 밖으로 뱉을 수 없는 진심이었다. 한편, 이 연설에 감동받은 사람은 비단 선생님뿐만이 아니었다. “와!” 침묵에 빠져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거 해주겠다, 저거 해주겠다, 하는 공약보다 훨씬 귀에 와 닿고 마음에 와 닿는 이야기였다. 그동안 단유가 자신들과 조금 동떨어진 모습을 보여 왔던 것이 사실이었다. 1학년 때는 제외하더라도―그 때는 동떨어진 건지 가까운 건지 파악할 정신도 없이 제 앞가림하기 바빴던 나이였다―, 2학년이나 3학년을 거치면서 단유가 수업시간이든 쉬는 시간이든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늘 책만 읽고 있는 모습을 봐왔다. 같은 반이 아닌 아이들이라도 부모님들께 늘 ‘전교1등 하는 단유’의 이야기를 들어왔던 터라, 어쩐지 연예인 보는 기분처럼 멀게 느껴졌던 것이 현실이기도 했다. 그랬던 단유가 ‘알아듣기 쉽게’, 자신들과 ‘함께’하겠다는 말을 진실성 있게 전하니, 그 말에 담긴 울림이 아이들의 가슴을 진동시켰다. 유림은 고개를 숙였다. 괜한 심술이 들어 무심코 일을 저질렀는데, 오히려 치명적인 반격을 당한 느낌이었다. 유림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싫어할 수 없잖아. **** “와, 지금도 생각하면 완전히 감동인거 있죠?” “아니, 뭐 조금 특이하긴 한데, 그게 그렇게 특별하다고 호들갑 떨 정도는 아닌 거 아닌가?” 시큰둥하게 받아들이는 옆 반 선생님의 반응이 답답했다. 그리고 괜히 자신이 무시당한다는 생각이 들만큼 뿔이 났다. “제가 이렇게 그냥 이야기하면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걔가 이야기할 때는 정말 말로 표현 못할 정도였어요. 아까 우리 반 애들 박수치고 소리치는 거 못 들었어요?” “에이, 뭐 그 정도가지고.” 5반 선생님은 별로 듣고 싶지 않은 기분이라고 티를 팍팍 냈다. 4반 선생님은 누굴 붙잡고 이야기해야 자신의 감동을 이해해줄까 둘러보지만 마땅한 선생님들이 안보였다. 고학년 선생님들은 아직 수업중이고, 저학년 선생님들은 다들 나가고 없었다. 아마 방과 후 수업이나 혹은 서류작업 혹은 그냥 바람 쐬러, 라는 이유로 교무실을 비운 상황이었다. 다시 5반 선생님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사실 4학년 대화라는 주제로 그런 연설을 하는 게 가능할까, 이런 생각도 했다니깐요?” “그래요, 알았어요. 대단해요, 대단해.” 조금이라도 경험 많은 내가 이해해줘야지, 라는 태도로 어물쩍 넘기려는데, 그냥은 넘어가지 않을 모양인지 4반 선생님은 5반 선생님을 붙잡았다. 아무리 귀찮아도 이런 식으로 넘어가려는 태도를 보이는 선생님이 아니신데 이상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가 있음이 분명하니 물어나 보자는 생각으로 5반 선생님을 돌려세웠다. “아까 잠깐 들으니까 5반은 막 웃고 난리던데, 무슨 일이었어요?” “아.” 5반 선생님은 미간을 좁혔다. 말할까 말까를 고민하던 선생님은 아무렴 어때, 라는 생각으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1시간 전, 5반 교실. “저요!” “예. 인명수 어린이. 말씀하세요.” 명수가 주먹을 굳게 쥐고 힘차게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저는 저를 추천합니다!” “와!” 아이들이 깔깔 웃고 넘어졌다. 선생님은 머리를 싸맸다. 그러나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명수는 씩씩하게 추천이유를 설명했다. “저는 운동도 잘하고, 축구도 잘합니다. 그리고 몸도 튼튼하고, 키도 큽니다. 그리고 석고가 제 친구입니다.” “석고, 아니 단유가 친구인 게 무슨 이윤데?” 보다 못한 선생님이 한 마디 하셨다. “제 친구가 똑똑하기 때문에 저를 많이 도와줄 겁니다. 그러면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있어도 잘 풀 수 있습니다.” 다시 아이들이 깔깔대고 넘어갔다. 실제로 뒷자리에 한 아이는 진짜로 넘어갔다. 약간의 소람이 있었지만, 어쨌든 칠판에 ‘인명수’라는 이름이 적혔다. 그리고 잠시 후. “제가 반장이 된다면, 5반 축구팀을 만들겠습니다. 그래서 점심시간마다 다른 반과 경기를 가질 수 있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반과 합동팀도 만들어서 5학년이나 6학년 형들과도 경기를 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그래서 계속 이겨서, 계속 운동장을 쓸 수 있게 하겠습니다.” “와!” 남자 아이들의 열렬한 환호에 명수가 해맑게 웃으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남자 아이들이 ‘인명수’를 연호했고, 여자아이들은 야유를 보냈다. “설마, 반장은 아니죠?” 4반 선생님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리고 실제로 걱정했다. 옆 반의 명수는 이름이 명수지, 사실은 ‘폭탄’이라고 불러야 옳다고 생각했던 4반 선생님은 혹시라도 자기 반으로 파편이 튈까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 아이들이 그래도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않았더라고요.” 시선을 들어 허공의 어느 한 지점을 응시하는 5반 선생님의 태도에 순간 쫄았던(?) 선생님은 대답을 듣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아, 그래요? 다행이네요.” “그런데, 체육부장이 됐어요.” 허공으로 올라간 시선이 내려오지를 못했다. “예?” “공약도 실천 하겠다네요.” 자포자기? “네?” “4반이랑 팀을 먹겠다던데요?” 허탈함? “네?” **** “그러니까, 니가 도와줘.” 명수가 단유의 팔을 붙잡고 졸랐다. “이제 니가 반장이라며? 그러면 너네 반도 니 말 들을 거잖아? 그러니까 도와줘. 응?” 단유는 창밖을 보았다. 달리는 통학차 차창너머로 푸른 잎을 틔운 가로수가 지나가고 있었다. 하얀 햇살이 보도블록 위를 비추고, 그 위를 하얀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바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저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단유는 생존에 대한 절박함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대해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아왔었다. 게다가 보육원이라는 좁은 울타리에 있다 보니 바깥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관심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일이 있고나니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당장 전혀 경험해본 적 없는 ‘반장’이란 직위를 떠맡아서 생활하게 될 텐데, 아마도 지금껏 학교에서 생활해오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지내게 될 것이란 사실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하물며 저 바깥에서 다양한 직종과 직위를 가지고 생활하는 사람들은 어떠할까? ======================================= [90] 경쟁(4) 지상훈의 어머니인 오여사는 속이 상했다. 1학년 때부터 줄곧 학급 반장을 해왔던 상훈이가 반장을 하지 못해서 속이 상한 것도 있지만, 하필 단유라는 애한테 졌다는 사실이 더 속상했다. “고아가 반장이 되면 어떡해?” 고아가 반장이 되면 자신을 비롯한 학부모들이 학급 일에 나설 명분이 약해지게 된다. ‘반장 엄마’라는 타이틀로 학급 일에 나서는 것과 ‘누구 엄마’로 나서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단독으로 나설 명분이 약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학부모회’라는 이름을 걸고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학부모회’라는 이름을 거는 순간 오여사는 다른 학부모의 눈치도 봐야 했다. 오여사는 전화를 걸었다. 잠시간 신호가 이어지다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원이 엄마예요? 저 상훈이 엄마예요. 예. 아, 다름이 아니고 소식 들으셨죠? 예. 예. 동원이가 아깝게 떨어진 것 같더라고요. 상훈이요? 에이, 상훈이는 좀 더 경험을 쌓아야죠. 3학년 때까지 반장한 거는 그냥 애들 장난인데요. 이제 4학년이니까 자기 앞가림도 하고 그래야죠. 아마 이번 기회로 많이 배운 게 있을 거예요. 좋은 경험이었다, 생각하면 되죠. 예. 그럼요, 동원이도 씩씩하니까 고작 이런 걸로 마음아파하진 않겠죠. 그나저나 말이에요. 사실 제가 좀 걱정이 돼서요. 아니, 그 단유라는 애가 이번에 반장이 됐다고 하잖아요? 사실 걔 똑똑한 거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공부 좀 하는 거랑 반장으로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거랑은 다른 거잖아요.” ‘반장 엄마’라는 타이틀은 ‘학부모회’에서 세력을 결집시키는 기준이 된다. 때문에 지금까지는 전화를 받기만 했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뀐 지금, 오여사는 적극적으로 세력을 결집시켜 힘을 모아야 했다. 우선은 반에서 가장, 아니 이제는 두 번째일지 모르는 강동원의 어머니를 포섭해야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성적지상주의 아니겠는가? “그렇죠? 제가 생각해보니까 지금 단유라는 애가 반장이 된 바람에 우리 반은 지금 학부모 총회 대표로 맡길 사람이 없는 거잖아요. 이러다 엉뚱한 사람이 임원이 돼서 전교 학부모회에 나가게 되면,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네, 맞아요. 그러니까 미리 우리끼리라도 우리 반을 위해서 강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을 임원으로 지정을 해놔야 나중에 학부모 총회에 나가서도 시간 낭비를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학급 임원 선거가 끝난 다음 학교에서 ‘학부모 총회’라는 이름으로 학부모를 초청한다. ‘학부모 총회’는 학교 교육 운영 방안이나 담임선생님 면담 등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개최되는 것이 명목상의 이유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학부모 총회’를 통해 학부모들이 모이면 학급 담임들이 학교의 각종 위원회 소속으로 할당되게끔 학부모 명단을 올리기에 급급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당연히 여기에 이름을 올리는 학부모들은 주로 학급 임원들의 부모들이 되기 마련이다. “아이, 참.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제가 부끄럽죠. 예. 저도 사실 예전부터 동원이 엄마가 교양도 있으시고 학식이 풍부하시니 아이들 교육문제에 앞장서실 수 있겠다는 생각을 계속 해왔거든요. 예. 그러니까요. 그래서 동원이 엄마가 이번에 한 번 대표로 나서보시는 건 어떠실지 궁금해서 이야기도 나눌 겸 전화한 거죠. 네.” ‘학부모 총회’를 통해 이름을 올린 학부모 대표들은 ‘전교 학부모회’에도 참석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는 주로 전교 임원들의 학부모들이 대표직을 맡는 게 불문율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문제는 차치해두더라도 ‘학부모회’에 들어서게 되면, 단순히 학부모들 간의 친목과 아이들 수발만 드는 게 아니다. 학교교육과정 운영 전반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곳이 바로 ‘학부모회’이다. 이 ‘학부모회’에서 한 자리 하는 것만으로도 웬만한 사회적 지위쯤은 무시하고도 남는다. 가령 어느 학부모의 직업이 ‘검사’나 ‘판사’라고 해도 바깥의 직종일 뿐, 학교 안에서는 아무개의 아빠, 혹은 엄마에 불과하다. 아무개가 다니는 학교의 운영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학부모회’ 간부에게 힘을 못 쓰는 게 현실이다. 이 정도 파워, 권력을 아무렇지 않게 포기할 학부모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예, 예. 그럼요. 예. 그럼 나중에 또 통화해요. 예, 들어가세요.” “거 참.” 뭐가 못마땅한지 소파에서 신문을 펼쳐보고 있던 오 여사의 남편이 혀를 찼다. 교양 섞인 가식과 넉살좋은 웃음으로 버무린 체면치례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이다. 오여사가 눈을 흘기며 남편을 바라보았다. “도와주진 못할망정, 뭐예요? 그 태도?” 남편은 헛기침을 하며 보던 면을 한 장 넘겼다. 단지 저 속마음을 감추고 가식을 떠는 태도가 맘에 안들뿐이지 학부모회에 들려하는 오여사의 태도를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그 역시도 그 자리가 만만치 않은 자리인 동시에 남 주기 아까운 자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오여사는 이내 전화부를 검색해 다른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림 어머니? 예, 안녕하세요. 저 상훈이 엄마예요.”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대화를 이어가는 오여사를 신문 너머로 흘깃 쳐다보던 남편은 이내 시선을 돌려 신문을 바라보았다. 대구 어디쯤에 사고가 났다는 사회면 기사는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다음 장을 넘겼다. **** 4반은 임시 반장일 때부터 익숙해진 단유의 구령에 맞춰 수업을 시작했다. 국어시간은 단유가 개인적으로 관심이 적게 가는 과목 중의 하나였었다. 적어도 작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4학년이 되면서부터는 국어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여러분, 얼마 전에 우리가 학급 선거를 했었죠? 그리고 반장이랑 부반장도 뽑았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일주일에 한 번씩 학급회의를 하죠? 바로 그 학급회의를 왜 하는지,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공부를 할 거예요.” 국어과 교육의 목표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전인적 성장, 창의성, 문화적 소양, 공동체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 학년에도 비슷하지만 국어과 학습과정에 따라 거의 기초적인 부분을 다뤘다. 때문에 학습 목표 달성을 심도 있게 다루지도 않았던 면이 있었던 데다가, 이미 그 시점에서 단유는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들이 읽는 서적들을 다독하던 상태라 국어과목에 대해 흥미가 별로 생기지 않았었다. 말하자면 선행 학습의 폐해라고 하겠다. 4학년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적어도 4학년부터는 지난 학년의 과정보다 심도 깊게 들어가게 되면서 단순히 읽기, 쓰기, 말하기의 수준에서 벗어나 좀 더 깊은 생각과 관찰을 바탕으로 논리적인 학습 태도를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학습 과정에서 단유는 흥미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여러 사람들이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문제가 생길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해결방법을 뜻을 모아 찾는 과정이 바로 학급 회의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단원의 목표는 설득과 경청, 자신의 의견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능력 함양이었다. 선생님은 수업을 진행하면서 새삼 단유의 지난 연설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 당시 단유가 보여주었던 연설은 분명 이 단원에서 알아야 할 모든 것을 함축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기본적으로 회의를 하는 방법과 절차에 대해 공부를 했다. 단유는 선생님의 말씀에 어느 때와 같이 집중하여 들었다. 그러나 앞으로 자신이 진행하게 될 학급 회의를 생각하면 보다 신경을 써서 들을 수밖에 없었다. “3학년 때까지 학급회의 많이 해 봤죠?” “네!” “그럼 그 때 했던 회의를 생각하면서 어떻게 진행이 되었는지 발표해 볼 사람?” 상훈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래, 상훈이가 이야기 해볼래?” 상훈은 지난 3년간 반장이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친숙하게 다가오는 주제였던 데다가 직접 주재까지 했던 회의 과정을 모를 리 없었다. 상훈은 학급회의 시작부터 마지막 종료까지의 멘트도 꼼꼼하게 기억해내서 발표했다. “그래 잘했어요. 여러분들도 다 기억나죠? 그럼 이 회의가 왜 필요할까?” 상훈이 손을 들었다. 다른 아이들은 손을 들지 않았다. “상훈이 말고 발표해 볼 사람 없니?” 손을 드는 아이들이 없었다. 선생님은 다시 상훈을 지목했다. 상훈은 마치 준비된 것처럼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반에서 필요한 물품이 있을 때요, 각자 준비하기 어려운 경우에 회의를 해서요, 선생님이나 부모님들께 공식적으로 이야기해서 준비할 수 있었고요. 또, 학급 친구들이 여름에 더울 때도 학급회의를 해서 일찍 에어컨 틀 수 있게 한 적도 있어요.” 회의라는 이름으로 선생님께 보고된 내용은 거의 동시에 학부모들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학부모들이 필요 물품을 뜻(?)을 모아 전달하거나, 혹은 선생님께 부탁(?)하여 시행 날짜보다 빠르게 에어컨을 사용할 수 있게 했었다. “맞아요, 학급회의를 통해서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죠. 또 다른 거 발표할 사람?” 상훈이 손을 들었다. 이쯤 되니 선생님도 교실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를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선생님은 지명을 통해 아이들의 발표를 들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을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어서 거듭되는 상훈의 발표를 들어야 했다. 그리고 상훈은 발표를 잘했다. 그 후, 다른 수업시간에도 상훈의 독보적인 수업 장악이 이어졌다. 단유야 원래 발표를 잘 하지 않았지만, 다른 아이들마저도 손을 들지 않고 가만히 수업에 참여하는 모습은 이상한 광경이었다. 물론 단유 역시 그런 분위기를 눈치 채긴 했지만, 딱히 나서서 뭘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는 동기가 부족했다. **** “오늘 나만 계속 발표했어.” “잘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야 돼. 니가 걔보다 못난 게 어디 있니? 그치?” “응.” “그래. 학원차 늦지 앉게 타고, 갔다 오면 엄마가 맛있는 거 해줄게.” “응.” 통화를 끝낸 오여사는 식탁 의자에 앉아 손가락으로 식탁을 톡톡 두드렸다. 몇 몇 학부모들의 협조를 통해 반의 분위기를 몰아가는 데는 성공하는 분위기였다. 어차피 반에서 손을 들고 적극적으로 발표를 하는 아이들은 몇 되지 않는다. 그 아이들만 잡으면, 반 분위기 전체가 잡힌다. 그리고 그 분위기를 타고 주도권을 잡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반장, 그까짓 거 뭐 한 학기 정도는 양보를 해야지.” 물론 단순히 2학기 반장을 노리는 포석만은 아니었다. 지금의 반장이 단순히 학급 회의라는 애들 소꿉놀이에 진행자 역할만 하도록 만들면 되는 것이다. 명목상의 반장은 단유라는 아이가 맡겠지만, 실질적으로 반을 이끌어가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자신의 아들, 지상훈이 될 것이다. 더불어 이번 주 금요일에 있을 ‘학부모 총회’에서 대표를 맡는 것도 자신이 될 것이다. 오여사는 핸드폰을 조작해 학부모 단톡방에 들어갔다. SNS에서 한참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상훈이가 그렇게 발표를 잘한다고 우리 애가 그러네요?」 「별 거 아니에요. 요즘 우리 애가 논술학원 다니잖아요? 그 학원 원장이 그렇게 실력이 좋다더니 그 효과가 나오나 봐요.」 「어머, 그래요? 」 「상훈 엄마, 거기 학원 어디에요?」 오여사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한 건 올렸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조만간 논술학원 원장이랑 식사자리를 가지게 될 지도 모르겠다. ======================================= [91] 경쟁(5) “너 나랑 이야기 좀 해.” 유림이 쉬는 시간에 단유를 잡아끌었다. 한동안 얌전히 있기에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인데?” “너 왜 발표 안 해?” 잔뜩 약이 오른 목소리로 단유를 다그치는 유림이 생경스럽게 여겨졌다. “응? 무슨 말이야?” “상훈이만 발표하잖아. 넌 왜 안하냐고?” 단유는 유림이 자신을 혼내는 모습이 선뜻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일단, 굳이 내가 발표를 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고, 상훈이가 발표하는 게 어떤 문제라도 되는 거야?” 단유의 되물음에 유림이 당연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넌 반장이잖아. 반장이면 솔선수범해야지.” 일단 전제가 합의되어야 대화가 될 것 같았다. “솔선수범이라는 게 수업이나 학교생활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내가 소극적인 면이 있다는 것은 인정할게. 하지만 난 솔선수범이란 의미가 수업시간 발표를 하느냐 안하느냐를 두고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수업태도에 관한 면에서 수업에 집중을 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해.” “…넌 말을 어렵게 하는 경향이 있어.” “수업시간에 딴 짓하지 않고 선생님 말씀 잘 듣는 태도가 학생의 본분이고 솔선수범해야 할 행동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이야.” 유림은 고개를 흔들었다. “발표도 중요해. 발표를 해야 수업에 잘 참여하는 학생이라고 생각한단 말이야.” “누가?” “선생님이.” “선생님?” “…아이들도.” “아이들이?” “그래.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만약 니가 맨날 발표는 안하고 책만 읽고 있으면, 아이들이 널 반장답지 않다고 생각할거야.” 신선하고 획기적인 관점이라고 단유는 생각했다. “하지만, 난 굳이 궁금한 게 생겨서 질문하는 게 아니면 나서고 싶지 않아.” “아우, 답답해.” 가슴을 콩콩 두드리는 유림. 영문을 모르는 단유는 그저 유림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바보야. 지금 엄마들이 상훈이만 발표하게 만들고 있단 말이야.” “왜?” “나도 정확히는 몰라. 그런데 상훈이를 진짜 반장처럼 만들게 하려고 한다고 들었어.”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이야기, 라고 단유는 생각했다. 단유가 어리둥절해 하자 유림은 더 이상 자신의 말로는 단유를 설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단유를 한차례 노려보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단유는 다른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는 제쳐두고, 사실관계만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어머니들이 아이들에게 상훈만 발표할 수 있도록 지시를 내렸다. 상훈은 매시간 발표를 한다. 어머니들은 상훈이를 진짜 반장으로 만들려고 한다?’ 엄연히 학급 선거를 통해 반장으로 뽑힌 사람이 있는데, 또 다른 반장을 만드는 제도가 있나? 지난 3년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문제라 단유는 고민에 빠졌다. 혹시 자신이 모르는 시스템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만약 그 말대로라면, 자신은 가짜 반장이 된다는 말일까? ‘진짜 반장과 가짜 반장의 차이는 뭐지?’ 단유는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웅이라도 있으면 물어보기 좋겠지만, 기웅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주변에 이 사실을 털어놓고 의논할 사람이 있는지를 머릿속으로 떠올려보았다. **** “자, 이거 먹으면서 해.” 오여사가 군것질거리를 접시에 담아 상훈의 책상에 올려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오여사는 흐뭇한 미소를 띠며 상훈을 바라보았다. 현재 상훈은 내일 있을 교과목의 예습을 하고 있었다. 일정부분은 학원에서 지도강사의 특훈(?)으로 미리 발표할 내용이 정리된 상태였고, 오여사도 한 손 거들어 둔 상황이었다. 상훈은 미리 준비된 발표문(?)을 달달 외워가면서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엄마는 처음에 니가 반장 선거 떨어져서 많이 실망할 줄 알았어.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하는 것을 보니 얼마나 대견한지 몰라. 우리 아들, 진짜 반장이 뭐라고?” “아이들과 선생님께 인정받는 반장이 진짜 반장이에요.” “그렇지.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가짜 반장이요.” “그래. 아들처럼 열심히 수업 준비하고 발표도 하고 그래야 진짜 반장인거야. 알았지?” “네. 제가 진짜 반장이 될 거에요.” “넌 이미 진짜 반장이란다.” 상훈은 다시 노트로 눈을 돌렸다. 책상 위 탁상시계의 바늘이 12시를 지나고 있었다. **** 다음날도, 그 다음 날도 어김없이 상훈의 독주가 이어졌다. 선생님은 난감해 하면서도 상훈의 독주를 도왔고, 아이들은 상훈의 발표가 끝나면 박수를 쳤다. 단유는 묘한 교실 분위기를 둘러보다가 이내 선생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선생님도 단유를 바라보다 눈이 마주쳤다. ‘넌 왜 발표를 안 하니?’ 라고 묻는 눈이었다. 하지만 단유에게서는 어떤 답도 나오지 않았다. 이런 일은 선생님으로서도 거의 경험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어느 정도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눈치는 챌 수 있었다. 이것은 정치였다. 부모의 도움이 없이는 성공하기 힘든 정치적 술수였다. 그리고 어쩌면. ‘에이, 너무 나갔나?’ 선생님은 상념을 멈추고 수업을 이어나갔다. 내일 있을 ‘학부모 총회’에 맡길 위원회 임원 명단을 생각하기에도 복잡한 머리로 딴 생각을 할 여력은 없었다. 하지만 머리가 복잡한 것은 비단 선생님뿐만이 아니었다. 단유는 어젯밤 들은 이야기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다. 어제 저녁, 단유는 보육 교사에게 찾아갔다. 사실 보육교사랑 사적인 이야기를 많이 나눠본 적이 없었던 단유였던 터라 이런 시도가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보육원에서 물어볼 사람이라고는 원장선생님이나 행정 과장, 보육교사와 생활지도원들 뿐인데―행정과 직원들은 거의 공기 같은 존재였다―, 저녁시간에 비교적 편하게 물어볼만한 사람은 보육교사들 뿐이었다. 그 중에서도 넉넉한 몸매를 지닌 김명숙 선생님을 찾아갔다. 명숙은 단유가 이 보육원에 들어올 때부터 계속 일해 온 선생님이었다. “선생님, 물어볼 게 있어요.” “응?” 생전 이런 적 없던 아이가 갑자기 물어볼 게 있다고 찾아오니 명숙은 얼떨떨하기만 했다. 보육원내에서도 유별나기로는 명수 못지않은 단유였다. 물론 명수와는 다른 의미로 유별난 아이였지만, 어쨌든 선생님들한테 폐 안 끼치고, 질문도 거의 없이 늘 도서관에 살던 아이가 갑자기 찾아오니 보육교사로서는 순간적으로 좋지 않은 생각부터 떠올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니?” 혹시나 공부와 관련된 거라면, 다른 젊고 유능한 생활지도원 선생님들을 추천해줄 요량이었다. 그러나 단유가 질문한 것은 뜻밖의 것이었다. “진짜 반장이랑 가짜 반장이란 게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이니?” 단유는 반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했고, 유림의 이야기까지 덧붙였다. 명숙은 느닷없는 이야기에 영문을 몰라 하다가, 단유의 설명이 이어지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리 보육원 내에서만 생활하는 보육교사라지만, 아이들을 맡아 생활한지 벌써 20년에 가까운 명숙이었다. 초등학교의 운영 실태 정도는 원내 식당 식단표 보듯 손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때문에 단유의 이야기를 통해 단유의 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유추해냈다. 아이들 간의 이야기라면 이게 뭔가 싶겠지만, 학부모가 끼어들었다면 당연히 이 문제는 정치적인 상황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아마 유림이라는 아이 말대로, 상훈이라는 아이가 진짜 반장 노릇을 하려고 하나보네.” “전 이해가 안 돼요. 왜 발표를 하는 게 진짜 반장인거죠?” “걔가 발표만 하는 건 아닐걸? 매일 일찍 등교도 할 거고, 청소도 나서서 하거나, 혹은 친구들 문제도 나서서 도와주고 있을 거야. 교실 내 대소사를 자기가 직접 맡으려고 하고 있을 텐데? 그렇지 않든?” 단유는 상훈의 행적을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딱히 관심이 없었던 터라 상훈이 평소에 어떻게 하는 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오로지 수업시간에 거수하는 장면만 기억에 남았다. 하지만 선생님의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친구를 도와주는 것도 봉사의 일종이잖아요. 그런 게 반장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예요?”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상훈이는 아이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는 거지.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서 신뢰를 얻으면 거기서 힘이 생기니까.” “…….” “반장이란 아이는 가만히 있는데, 나는 이렇게 나서서 너희들을 돕고 있다. 반장이란 아이는 수업 때도 가만히 있지만, 나는 손을 들고 발표도 하면서 선생님의 인정도 받고 있다. 뭐 이런 거겠지.” “그런 게 어떻게 마음을 얻는 거란 거죠?” 명숙은 순간 대답이 궁해졌다. 실제로 궁해졌다기 보다는 할 말이 너무 많은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표현해야 옳겠다. 아이들의 마음, 사람의 마음이 가는 방향을 논리적으로, 단유의 시선에 맞춰 구술한다는 게 어렵기도 하거니와, 어쩌면 당연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을 아이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기웅이가 니 공부를 도와주면 어떤 마음이 들었니?” “고마웠어요. 그리고 나중에 꼭 갚겠다고 이야기도 했어요.” “자원봉사자들이 우리 보육원에 와서 봉사활동을 하면 그 사람들에게 어떤 마음이 드니?” “어… 고마웠죠.” 단유는 이 순간 솔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한 번도 자원봉사자들에게 고맙다는 생각을 가져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자신이 부른 것도 아니고, 스스로 와서 ‘자기들의 일’을 했을 뿐이라고만 생각했지, 단유가 해야 할 일을 도와준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보육교사는 이런 단유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했다. “그래, 그것처럼 상훈이는 아이들을 돕고 고마운 마음을 받고 있는 거야.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수업태도를 보여서 선생님에게도 인정받는 모습을 보이는 학생이라는 인식을 아이들에게 심어 주는 거지. 그러면 아이들이 상훈이를 마치 반장처럼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와. 예를 들어서 교실에 싸움이 벌어졌어. 이 때 아이들은 너를 찾지 않고 상훈이를 찾게 될 수도 있어. 왜냐하면 상훈이가 그럴만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이해를 못하겠어요. 아이들은 반장인 저를 찾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원래는 그렇지만,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넌 그냥 가만히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기면, 쉽게 다가오지 못한다는 거지. 대신 언제나 앞장서는 상훈이를 찾아가서 중재를 부탁하게 될 거야.” 쉽게 동의하기 힘든 내용이었는데, 보육교사의 말이 신빙성 있게 들린다는 게 이상했다. “그럼 전 어떡해야 하죠?” “그건 너의 선택에 달렸지. 지금처럼 행동하든, 상훈이처럼 행동하든 말이야.” 나름 진지하게 대답을 해주긴 했지만, 사실 명숙은 4학년 교실에서 ‘정치적’인 상황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놀라웠을 뿐이었다. 예측되는 결과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크게 의미를 두지도 않았다. 그래봐야 초등학교 4학년 반장직인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 [92] 경쟁(6) 그 날의 수업이 모두 끝난 뒤, 단유는 운동장 스탠드에 나와서 아이들이 뛰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6교시(2시~3시 사이) 정도 되면 운동장은 거의 텅 비게 된다. 특별한 체육교과를 하는 반이 없는 이상 고학년들은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저학년 아이들은 이미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거나 학원으로 향했다. 때문에 이 시간에 학교에 남는 아이들은 학원차를 기다리거나 놀다 가려고 하거나 혹은 고학년 학생이 마칠 때까지 학교에 남아야 하는 아이들 정도였다. 그런 아이들이 뭉쳐 운동장을 마음껏 활보했고, 단연 그 중심에는 명수가 있었다. 명수는 날아다니듯 뛰어다니며 아이들 사이를 휘젓고 다녔다. 그간의 경험치가 무럭무럭 쌓여 어지간하지 않으면 또래 중에서 명수를 막기 힘들 정도였다. “…….” 아이들이 축구를 하는 모습을 보면 의외로 조용하다. 씩씩거리며 거친 숨소리만 날 뿐, 오고가는 대화 같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어른들이 패스해라, 수비해라, 공격해라, 막아라, 때려라, 이 새끼, 저 새끼 떠들면서 서로 의견을 교환하느라 시끄럽다. 저 순수한 아이들은 그저 공이 가면 발이 가고, 멀어지면 달려가고, 가까우면 차고 본다. 혹시 축구 동아리 활동이나 유소년 클럽이라도 다니는 아이들처럼 기술이라도 익혔다면 모를까, 막 차고 막 달려드는 저 무리 속에서는 명수가 가히 조자룡 급이었다. “와! 고올!” 명수는 화려한 드리블로 아이들을 제치고 슛을 넣은 뒤 세레모니를 하며 운동장을 크게 돌았다. 보육원 더비에서 비록 중학생 형들의 양보가 있었다지만, 1학년 때부터 단련된 축구 실력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그러나 단유는 그 자리에 끼지 않았다. 하루 종일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던 문제 때문이었다. 어제 보육교사의 말을 들은 뒤, 오늘은 상훈의 행적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랬더니 보였다. 상훈은 부지런했다. 아침에 등교하자마자 칠판 정리와 교탁 정리를 손수하고, 몇 몇 친구들을 불러 함께 책상 줄을 맞췄다. 모둠 활동 시에는 옆 모둠이 돌아볼 정도로 주도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임했다. 쉬는 시간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쓰레기통 주변을 정리한다든지, 주번의 일을 도와준다든지, 정 할 일이 없으면 아무에게나 다가가 대화를 시도하여 친밀감을 표현하곤 했다. 하루 수업이 모두 마친 뒤에도 남아서 청소하는 아이들 주변 정리를 도와주었다. 아이들은 상훈을 보면 웃었고, 고마워했고, 칭찬했다. 단유는 생각이 많아졌다. ‘상훈이는 부지런하고, 착하고, 친절하고, 똑똑하다.’ 그렇다면 자신은 부지런하지 않을까? 착하지 않은 걸까? 또 반장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유림이 이야기한 솔선수범은 무엇일까? 너무 많은 물음이 던져지지만 단유는 어느 것도 정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정답이 없는 문제일까?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문제에 부딪힌 단유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 “유민아빠, 와서 식사하세요.” “응.” 거실에서 TV를 보던 유림의 아버지는 구수한 청국장 냄새를 맡으며 연신 침을 삼키던 중이었다. 아직 아이들은 학원에서 돌아오지 않았기에 단 둘만 식사를 먼저 했다. 작년까진 유림이 함께 식사를 했지만, 첫 째 유민과 둘째 지호가 모두 중학교에 들어가고 유림까지 4학년이 되면서 학원을 하나 더 추가시켰더니, 이 시간에 집에 남은 사람은 두 사람 밖에 남지 않았다. 아버지가 국을 한 입 떠먹고는 기분 좋게 웃었다. “당신 내일 유림이네 학교 간다고 했었지?” 마주 앉은 유림의 어머니가 밥을 한 입 뜨면서 대답했다. “예, 근데 올해는 좀 그만하고 싶네요. 위에 애들이 모두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이제 그만 시달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요.” 작년까지 유림의 어머니는 유림이 다니는 학교의 운영위원회 소속 학부모위원 부대표를 맡았었다. 유림 때문이라기보다는 큰 애인 유민이 전교 부회장을 맡는 바람에 떠맡은 직책이었다. 그 전에도 큰 애가 반장이나 부반장을 도맡아 하던 바람에 지난 4년간 줄곧 임원직에 있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 두 애도 중학교로 진학을 한 마당인데다, 유림이 비록 부반장직을 맡긴 했어도 임원직은 맡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유림이네 반에 상훈이라는 아이 엄마가 좀 극성이더라고요? 상훈이 엄마가 그냥 임원 대표 맡아서 해버리면 좋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그래, 당신 그동안 마음고생 심했잖아. 이제 그만할 때도 됐어.” 유림 엄마는 임원직을 맡으면서 그간 속앓이를 많이 했었다. 실속도 없는, 명예직 같은 임원 대표를 맡는 바람에 아이들이 학교에서 좋지 않은 대우를 받을 때도 나서기가 어려웠다. 의외로 이런 일들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가령 지호가 수업태도가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선생님께 혼이 나더라도 나서지 못했다. 다른 엄마들처럼, “우리 애가 뭘 잘못했다고 혼내요?” 라고 따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명찰뿐인 임원이라도 임원이었기에 체면이 있어 나서진 못하고 애꿎은 아이만 다그치기 일쑤였다. 물론 다른 두 아이가 연좌되어 피해를 볼까 두려운 마음에 나서지 못한 면도 있었다. 또 학교 교권에 대항하는 학부모라는 이미지가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그 때문에 지호가 6학년 때 많이 힘들어 했었다. 쌍둥이 누나가 학교에서 잘 나갈 때, 알게 모르게 비교를 당하면서 위축된 면도 없잖아 있던 지후였는데, 중학교 진학과 동시에 남중, 여중으로 갈라지면서 요즘은 밝아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학교 행사가 왜 그렇게 많은지, 여기 저기 쫓아다니느라 바쁘다보니 자연히 집안일에 소홀하게 될 때도 있어 유림아버지의 눈치를 볼 지경이었다. 한 번은 유림어머니도 힘들어하고, 아이도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니 유림 아버지가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했었다. “그럴 거면 다 때려 치고 나와!” 그래도 명색이 전교 부회장 엄마인데다 1년만 참자는 생각으로 지호도 달래면서 힘겨운 시간을 보냈던 유림어머니였다. “그 엄마는 사정을 잘 모르나?” 아버지가 작년 기억이 떠오르는지 이맛살을 찌푸렸다. 유림아버지도 마음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집안의 가장으로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에 대한 걱정과 사랑하는 아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도와줄 방법이 없어 애만 태웠던 1년이었다. “예전에 몇 번 봤는데, 대가 센 여자더라고요. 이런 거 좋아하는 엄마들은 기를 쓰고 하려고 달려들 데요.” “몇 십 년이 지나도 똑같네, 똑같아. 치맛바람 날리면 그게 애들한테 좋은 줄 아나?” “단순히 치맛바람이 아니고 그것도 명패가 붙는 직함이라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엄마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나 참. 그게 다 허영이야. 쥐꼬리만한 권력도 권력이라고 달려드는 꼬락서니라니. …이 나라 교육 시스템은 애들 교과목을 바꿀게 아니라, 근본적인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니깐.” 아버지가 혀를 차며 국을 한 입 떠먹었다. 짭짤한 청국장의 구수한 향이 입 안을 맴돌다 사라졌다. “족쇄지, 족쇄야.” 아버지는 중얼거리며 다른 화제 거리로 넘어갔다. “주말에 부부동반 모임 갈 때, 뭐 입고 가지?” **** 금요일, 학교에 등교한 단유는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가 교실 앞에서 주번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상훈을 발견했다.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몰라도 서로 웃겨죽겠다는 듯 깔깔거리며 칠판과 교탁을 정리하고 있었다. 마침 등교하던 유림이 단유 옆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을 걸었다. “뭘 봐?” 단유가 턱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상훈이.” “왜?” “원래 반장이 저렇게 해야 하는 것인지, 궁금해서.” “반장이? 왜? 저건 주번이 할 일이지.” 단유는 눈을 껌벅거리며 유림을 돌아보았다. “그래? 그럼 상훈이는 왜 주번 일을 도와주는 건데?” “지가 도와주고 싶어서 하는 거겠지.” “반장 일이랑 상관없이?” 그제야 유림은 단유가 자신이 했던 말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건 반장이 할 일은 아니지, 그래도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주니까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할거 아냐? 저런 애가 반장이 되었어야 한다고. 자기들이 잘못 선거한 거 아닐까 생각하지.” “저것도 솔선수범이라는 거야?” “당연하지 않아? 친구의 일을 도와주는 걸 솔선수범한다고 이야기하는 거잖아.” 단유는 그제야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즉, 반장의 일은 아니지만 솔선수범해서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 아이들의 마음이 바뀐다는 거야?” “그렇지 않을까?” “니 마음도 그래?” “응?” “상훈이가 반장이 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유림은 입을 꾹 다물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의 눈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롱하는 말도 아니고, 의기소침해 있는 말도 아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다, 라는 게 느껴졌다. “…아니. 난 니가 반장이 되길 잘했다고 생각해.” “왜?” “몰라. 그냥 니가 반장이니까 니가 알아서 해.” 괜히 얼굴이 붉어진 유림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벌떡 일어나 교실 뒤편의 사물함으로 갔다. 단유는 물끄러미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상훈을 바라보았다. 상훈은 등교하는 아이들한테 밝은 웃음으로 인사를 하고 있었다. **** 점심시간이 되었다. 급식실에서 식사를 하던 남자 아이들이 허겁지겁 점심을 해치우고는 운동장으로 뛰쳐나가려 하던 때였다. 4반 아이들이 모여 있던 식탁 근처로 다가온 건장한 소년이 있었다. “야, 우리 반이랑 축구 시합하자.” 명수였다. 단유는 피식 웃었다. 입가에 묻은 밥풀이나 떼고 말하지. 그 때였다. “그래, 우리 시합하자.” 상훈이 일어나 화답했다. “축구할 사람?” 상훈이 반을 둘러보며 아이들에게 의사를 물어보았다. 그 때. “야.” 명수가 상훈을 불렀다. 상훈은 고개를 돌려 명수를 바라보았다. “응?” “니가 왜 나서?” “응?” “반장이 있는데 왜 니가 나서? 너 체육 부장이야?” “응?” 상훈은 체육부장이 아니었다. “난 정식시합을 제안한 거야. 대표가 결정해야지, 왜 니가 나서서 그래?” 상훈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냥 노는 거 아냐. 우리는 정식으로 시합을 요청하는 거야. 난 우리 반 반장을 대신한 체육부장이기 때문에 너네 반장한테 이야기한 거야.” 이 무슨 황당한 시추에이션인가. 순간 명수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야기한 건 줄 알았다. 그간 공부를 도와주긴 했었지만, 명수가 저렇게 논리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단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야, 석고. 할 거야 말거야?” “…….” 단유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할 말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잠시 생각을 한 후 대답했다. “명수야.” “응?” “넌 우리 반에 정식으로 시합 요청 한 적 있어?” “지금 하잖아?” “지금 하면 우리가 어떻게 받아? 우리 반에서도 의견을 수렴해서 결정해야 할 문제를 니가 하자고 하면 우리가 어떻게 바로 대답을 해.” “반장이잖아?” 단유가 머리를 짚었다. “그러니까, 그런 건 반장이 마음대로 정할 수도 없는 문제인데다가, 우리 반의 아이들이 그 시합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먼저 이야기해야 하는 거야. 하겠다면 어떤 선수로 구성할 지도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점심시간에 불쑥 나타나서 정식 시합 요청이니 하면 우리가 어떻게 그걸 받아들이겠어?” “그런가?” “너네 반은 선수가 정해졌어?” “응. 정해졌으니까 말했지.” “언제 정했는데?” “음… 어제 점심때?” “그런데, 우리 반에는 지금 알려주면서 당장 시합하자는 거야?” “그렇네?” 명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 정하면 안 돼? 우리 반 애들 기다리는데?” “순서가 틀렸잖아. 미리 이야기를 해줬어야지. 너네 반은 준비가 됐는데 우리 반은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까 시합이 안 되지 않겠어?” “그럼 준비하면 얼마나 걸려?” “우리 반에서도 의견을 물어보고 결정해야 하니까 당장은 어려워. 시합을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구성해서 이야기 해줄게.” “그래, 알았어. 그럼 오늘은 우리 반 애들끼리 하지 뭐.” 명수는 손을 흔들고 자기 반으로 돌아갔다. 4반 아이들의 식탁이 조용해졌다. “지금은 점심시간이니까 각자 식사 계속하고, 오후에 종례 전에 잠깐 이야기하는 게 어때?” 단유의 제안에 아이들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수긍했다. “그래, 그러자.” “그럼 선생님한테 시간 좀 내달라고 할 테니까 오후에 회의하자.” “콜!” 아이들은 기분 좋게 이야기하고는 식사를 계속했다. 단유도 이내 식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때까지도 상훈은 제자리에 서 있었다. ======================================= [93] 감사합니다(1) 10분 전, 점심시간 종이 울리고 급식을 위해 교실을 뛰쳐나가려던 아이들을 불러 세운 명수였다. 명수는 주먹을 위로 뻗으며 소리쳤다. “오늘 이기자!” “와!” 남자아이들이 신나게 함성을 지르고 급식실로 뛰어갔다. 명수는 씩 웃으며 자기반 반장을 붙잡았다. “내가 석고한테 이야기할게.” 단유와의 친분을 내세우는 명수의 속내는 뻔했다. 자기가 축구 시합 대표라는 걸 뽐내고 싶은 거였다. 축구 시합이 자기 공약이기도 했지만, 생애 처음 맡은 임원직을 꽤나 자랑스러워하던 명수였다. 체육부장이 된 뒤로 교실에서 어찌나 유난을 떨 던지…. 5반 반장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넌 우리 반 체육부장이니까 날 대신해서 명을 전달하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반장.” 사극 톤으로 말하며 반장이 어깨에 손을 얹자, 두 손을 공수해서 화답하는 명수였다. 두 사내 녀석들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급식실로 달려갔다. 잠시 후, 명수는 운동장 근처에 있던 아이들에게 말했다. “야, 오늘은 우리끼리 한다.” “왜?” “자기들이 준비가 안됐대.” “에이, 뭐야. 쫀 거 아냐?” “몰라, 우리끼리 하지 뭐.” 반장이 물었다. “왜? 안한대?” “아니, 자기들끼리 이야기가 안됐대.” “응? 무슨 소리야? …혹시 우리 시합하자고 말 안했었어?” 명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난 오늘 말하면 되는 줄 알았지.” “에휴.” 반장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명수의 팔을 툭 쳤다.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부장은 당장 골문 앞으로 가도록 하라.” “아니, 반장! 아니 반장님! 아니 반장 마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골키퍼라니요!” “벌이다!” “안 돼! 내가 골키퍼라니!” 명수는 머리를 감싸며 골문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이내 신나게 골문을 비우고 운동장을 질주하는 명수였다. **** 오여사는 콧노래를 부르며 차를 몰았다. 자신의 뜻대로 임원직을 맡았을 뿐 아니라 학부모들의 아들 칭찬으로 하루 종일 귀가 즐거웠기 때문이다. 담임선생님에게도 ‘솔선수범’하는 착한 학생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더할 수 없이 뿌듯했다.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그랬다. 도어락을 열고 집에 들어가니, 학원에 간 줄 알았던 상훈이 집에 와 있었다. “너 왜 학원 안 갔어?” 책상에 앉아 노트를 보고 있는 아들에게 물었다. 두 팔을 엇갈리게 품어 책상에 올려두고 노트를 보고 있던 상훈은 시선을 돌리지도, 답을 하지도 않았다. “지상훈. 엄마가 묻잖아? 왜 학원에 안가고 왔어?”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가니 찔끔 어깨를 떠는 아들은, 그럼에도 답이 없었다. “지상훈. 일어나.” “…학원가기 싫어.” 여전히 시선을 노트에 둔 상훈은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다가간 오여사가 조심스럽게 상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 대답은 하지 않고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하는 상훈의 반응에 오여사는 가슴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누가 해코지했나? 몇 몇 엄마들한테 전화해서 수업시간에 상훈이만 발표할 수 있게 협조 좀 부탁했던 게 아이들 사이에서 문제가 된 걸까? 아니면 선생님이 뭐라고 한 걸까? 아까는 자기 앞에서 나긋나긋하게 웃더니 감히 내 아들한테 몹쓸 소리라도 했던 걸까?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상훈아, 엄마 봐.” 오여사는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추며 상훈을 돌려 앉혔다. 상훈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무거운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었다. 보고 있자니, 오여사 가슴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뭔가가 있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무슨 일이니? 엄마한테 이야기해봐. 엄마가 다 해결해줄게. 무슨 일이야?” “…엄마, 나 반장 안할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이름. “왜? 단유라는 애가 뭐라고 했어? 너보고? 무슨 소릴 해?” 상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이제 반장하기 싫어. 진짜 반장도 싫고 그냥 하기 싫어. 나 반장 아니잖아.” 그 후로도 상훈은 그저 반장하기 싫다는 소리만 반복했다. “이 놈의 자식이! 이 고아 놈이!” 분명 단유라는 놈이 시샘을 한 거다. 그래서 귀한 내 아들한테 해코지를 했음이 분명하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당장 그 놈 사는 집에, 아니 보육원에 쳐들어가야겠다, 마음먹은 오여사가 벌떡 일어나 현관 앞으로 향했다. -삐리릭 도어락이 열리면서 상훈의 아버지가 들어오다 현관 앞에 서 있는 오여사를 발견했다. “어, 당신 나 마중 나온 거야?” 이 답답한 양반이 이 시국에 속편한 소리나 하고 자빠졌네? 오여사는 분개하며 말했다. “아니, 여보. 지금 상훈이가 학원도 안가고 지 방에서 울고 있는데 그런 소리가 나와요?” 방금 문 열고 들어온 상훈아버지는 얼떨떨해하며 되물었다. “왜? 왜 우는데?” “그게 중요해요?” “응?” 애가 울고 있으면, 왜 우는 지가 중요하지 않나? “애가 울고 있으면 달려가서 달랠 일이지, 여기서 나랑 말장난이나 하고 있을 거예요?” 오여사의 기백에 흠칫 놀란 아버지는 서둘러 방에 들어가려다가 오여사를 붙잡았다. “당신은 어디 가는데?” “어디긴 어디겠어요? 우리 아들 해코지한 놈 잡으러 가지.” “싸운 거야?” “우리 애가 누구랑 싸울 애에요? 아니, 당신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응?”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다. 아버지는 일단 오여사가 너무 흥분한 것 같아 진정시키려 애썼다. 이대로 오여사가 밖으로 나갔다가는 무슨 사고라도 나지 싶어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신, 일단 들어와서 진정해.” “어떻게 진정하란 거예요? 지금?” “어허! 좀 말 좀 들어. 왜 사람이 앞뒤 구분 없이 행동하려고 그래.” 오여사는 남편에게 팔목을 잡힌 채 집안으로 들어왔다. 거실로 끌고 간 아버지는 상훈을 불렀다. “상훈아. 거실로 나와 봐라.” 어기적거리며 방에서 나온 상훈은 소매로 눈을 문지르며 등장했다. 그 모습에 더 속이 터지는 오여사가 팔짱을 끼고 씩씩거렸다. 아버지는 오여사를 옆에 억지로 앉힌 뒤, 상훈에게 물었다. “왜 울었어?” “…….” 상훈은 아버지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을 열지 못했다. 자기가 왜 우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냥 눈물이 났을 뿐이었다. “왜 울었어?” “그냥요.” “그냥?” “…….”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얘기해 봐.” 상훈은 그제야 더듬거리며 점심시간에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단유가 그렇게 얘기하니까 애들이 다들 그러자고 했어요. 그리고는 자기들끼리 밥을 먹는데, 아무도 제 말을 안 들었어요. 그래서 진짜 반장하기 싫어졌어요.” “진짜 반장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상훈이 고개를 들어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아버지도 옆에 앉은 오여사를 쳐다보았다. 오여사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날, 오여사는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 월요일, 평소와 다름없이 교실로 들어온 단유는 문득 지난주와 다른 점이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왁자지껄한 교실이지만 언제나 그 중심에 있던 상훈이 보이지 않았다. 상훈의 자리로 눈을 돌리니, 언제나 자신보다 일찍 등교하던 상훈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유는 눈을 한 번 깜빡이고는 시선을 돌렸다. ‘오늘 1교시는 학급회의고, 2교시는 수학이네….’ 조례가 시작하기 전, 상훈이 뒷문으로 들어와 자리를 찾아갔다. 몇 몇 아이들이 손을 들며 반겼지만, 평소라면 활짝 웃으며 이름을 불렀을 상훈은 낯선 듯이 어색하게 손을 들어 인사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자, 오늘은 1교시 학급회의죠? 반장?” 단유는 교단 위로 올라가 학급회의를 시작했다. 선생님이 정해준 식순에 따라 학급회의를 진행한 단유는 이번 주 학급회의 주제를 발표했다. “지난주에 정한 것과 같이 이번 주 학급회의 주제는 급식 순서에 대해서입니다. 순서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여학생들이 늘 늦게 식판을 받아야 하는 점이 부당하다는 문제가 제기되었기에 이에 대해 논의를 하려고 합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 의견이 있으신 분들은 손을 들고 발표해 주십시오.” 그런데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발표하실 분 안계십니까?” 단유가 다시 물었지만 손을 드는 아이들이 없었다. 그러자 몇 몇 아이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몰리더니, 어느새 대부분 아이들의 시선이 한 쪽으로 돌아갔다. 그 모든 시선을 받은 아이, 상훈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학급회의를 지켜보던 선생님도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물었다. “상훈아, 어디 아프니?” 상훈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요.” 아프지도 않다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왜 발표하지 않니, 라고 묻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 일단 뒤로 물러난 선생님이었다. 단유는 상훈을 계속 쳐다보았다. “지상훈 학생, 혹시 하실 말 없으신가요?” 상훈이 얼굴이 붉게 변하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단유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였다. “내가 무슨 말 해야 돼?” 어조가 다소 날카롭다. 그렇지 않아도 침묵을 지키고 있던 아이들이 더 입을 열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몇몇 아이들은 소곤댔다. “오늘 상훈이 이상하지?” “어디 아픈가?” 단유는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지상훈 학생이 평소에 우리 반의 일에 관심이 많았고, 친구들을 많이 도와주는 모습을 자주 보았기 때문에 혹시 발언하실 내용이 있지 않은지 여쭤본 겁니다.” “…….” 상훈은 어쩐지 속이 꼬이는 느낌이 들었다. 저 말이 곱게 들리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 주말, 어머니와 아버지의 다툼 속에서 생각이 많았다. 아니 그 전부터 속이 복잡했다. 아버지는 왜 애한테 이상한 걸 시키고 그러냐, 며 어머니께 화를 냈지만 상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이상하다고 여기긴 커녕 뿌듯한 마음으로 ‘진짜 반장’ 역할을 했었다. 아이들은 자기를 보며 고맙다고 했고, 선생님은 똑똑하다고 칭찬했다. 교실에 떨어진 쓰레기를 찾다가 발견이라도 하면 재미있기도 했다. 아침에 등교할 때 이름을 불러주는 아이들이 늘어났고, 학교를 마치고 학원을 갈 때면 길거리에서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해주는 아이들 때문에 신이 났다. 그런데, 자신이 ‘반장’이 아니라고 부정 당하자 모든 게 싫어졌다. 모든 게 헛짓거리 같았다. 아이들이 ‘반장도 아니면서’라고 놀리는 것 같았다. 잘난 척 한다고 놀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반장’이 자신을 보고 말을 거는 게, ‘진짜 반장도 아닌 게 왜 반장인 척 해?’ 라고 놀리는 것 같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 놀리는 거야? 응? 내가 잘난 척 했다고 비웃는 거야?” 아이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특히 상훈의 작전을 알던 몇몇 아이들의 표정이 굳었고, 모르고 있던 아이들도 갑작스런 상훈의 돌발발언에 놀라워했다. 선생님은 당황스러운 가운데, 이 상황을 어떻게 주재해야할지를 궁리했다. “아닙니다.” 단유가 여전히 감정 없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단유는 당황하지 않았다. 다만 이 상황에 필요한 것은 대화라고 여겼다. 그리고 대화를 시도했다. “지상훈 학생이 오해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우선 그 점부터 짚고 가겠습니다. 전 지상훈 학생을 잘난 척 했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으며 당연히 비웃지도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지상훈 학생의 어떤 행동을 잘난 척으로 여길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지금껏 봐온 지상훈 학생의 행동은 ‘솔선수범’하는 학생으로서 모범적인 모습뿐이었습니다. 일찍 학교에 등교하는 부지런한 학생의 모습과 친구들을 돕는 자상한 학생의 모습, 교실의 쓰레기를 줍거나 책상열 정리도 앞장서서 하는 모습을 보면서 모범적인 학생이라고 생각했고,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상훈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아니 아이들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지난주까지 보여준 학생의 모습을 보면 지상훈 학생에 대해서 비웃는 친구들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지상훈 학생에게 고마워하는 친구들이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갑작스러운 단유의 부름에 선생님이 번뜩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왜?” “주제를 바꿔도 되나요?” “주제를?” “예. 급식에 대한 문제도 중요하지만, 이 주제는 뒤로 미루고 다른 걸 다뤄야겠어요.” “뭐로 바꿀 건데?” “지상훈 학생에 대한 친구들의 고마움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교실의 아이들이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 [94] 감사합니다(2) “제가 화요일 주번일 때 상훈이가 먼저 와서 도와줬습니다. 도와달라고 말 안했는데도 먼저 와서 교탁과 칠판 정리하는 걸 도와줘서 고마웠습니다.” “상훈이가 교실에서 쓰레기 줍는 걸 보았습니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는데 상훈이만 쓰레기를 주워서 버렸습니다. 교실 환경 미화를 위해 열심히 한 상훈이한테 고마웠습니다.” “수학문제가 어려워서 상훈이한테 물었는데, 친절하게 풀어주워서 고마웠습니다.” “아침에 학교 올 때마다 상훈이가 이름을 불러주면서 반겨주워서 고마웠습니다.” “쉬는 시간에 교실에서 장난치다가 넘어졌을 때 상훈이가 달려와서 다친 데 없냐고 물어봐주었습니다. 그 때 상훈이한테 고마웠습니다.” 아이들의 발표가 이어졌다. 서로 경쟁하듯 손을 들었고, 단유가 지명하면 일어나서 상훈이에게 고마웠던 점을 이야기했다. 선생님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조금 전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반이 떠들썩해지면서 혹시 옆 반에 방해라도 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분위기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밝았고, 서로 게임하듯 경쟁적으로 손을 들어서 발표를 했다. 상훈을 바라보았다. 상훈은 다른 의미로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눈꼬리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지만 울지는 않았다. 대신 입꼬리가 잔뜩 올라간 모양새가 귀여워 보이기만 했다. 이후로 4반은 매주 감사의 인사 시간을 정했다. 한 주 동안 고마웠던 친구를 정해 고마움을 표시하고 그 내용을 부반장이 적어 교실 뒤편 게시판에 붙이기 시작했다. 『3월 4주의 고마운 사람 - 지상훈』 가장 첫 장을 장식한 상훈을 필두로 여러 아이들의 이름이 교실에 걸리기 시작했고, 학급 분위기는 이보다 좋을 수 없다는 듯 화기애애하게 변해갔다. 선생님은 자신이 이것을 ‘지시’했다면 결코 이런 결과를 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기적 같은 일이었다. 자발적으로 나선 일이었기에 더욱 흥미를 가지고 이어나가는 이벤트가 되었고, 아이들은 말 그대로 ‘솔선수범’을 적극적으로 실천했다. 그 와중에도 단유는 앞장서지 않았다. 소년의 목표가 어디서든 튀지 말자, 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했다. 수업시간에 발표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가끔 가다 학생들 사이에서 생기는 말싸움이나 분쟁이 있을 때는 늘 앞장서서 싸움을 말리고 중재했다. 있는 듯 없는 듯 행동하지만 그래도 언제나 묵묵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소년이었다. **** 단유는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지난 5년간 단 하나―제대로 듣기―만 이루기 위해 집중했던 시간을 통해 인내심이나 끈기가 많이 생겼다고 자부했었다. 그러나 환경이 바뀌어서 그런지 학기 초의 인내심은 이내 사라지고 조바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물리학은 혼자서 해결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자료 조사의 한계도 있지만, 혼자서 궁리하고 연구해도 용어나 개념의 정의 등을 혼자서 이해하는데 한계를 느낀 것이다. 기웅이 과외를 해 줄 때는 이런 부분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는데, 기웅이 졸업을 하고 보육원을 나간 뒤로는 도움을 얻을 길이 막혀 버렸다. 여기에 단유의 성격이 한몫을 했다. 쉽게 도움을 요청하는 성격도 아니고 넉살좋게 다가가는 성격도 아니다 보니, 주변에 단유의 공부를 도와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애초에 선생님들에게 묻는 것은 포기했다. 지난 과거의 일―교무실 습격(?)사건―을 통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홀로 한계를 뚫는 게 어렵다보니 단유는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덕분에 그간 눈 밖에 나 있던 국어나 사회, 예체능 계열과 운동 쪽으로도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특히 두드러지게 보이는 면은 체육 쪽이었다. 일단 눈으로 보일만큼 성장 속도가 빠른데다가 체감하기가 빠른 면이 있어서 더욱 신이 나는 면이 있었다. “와, 몇 개야?” “20개 넘은 거 같은데?” 철봉 앞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모여 다들 단유의 턱걸이를 보고 있었다. 나이답지 않게 불끈 솟은 이두근은 남자 아이들의 로망이었고, 여자 아이들의 판타지였다. “그만.” 선생님의 신호로 단유는 철봉에서 내려왔다. 진작에 힘이 부족해 내려왔던 아이들과 몰려있던 반 아이들 모두가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이제껏 보지 못한 괴력은 단유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반 아이들의 체력 평가를 위해 곁에 서서 감독하던 선생님 역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금까지 교직 생활을 하는 동안, 초등학교 4학년이 턱걸이 24개를 하는 장면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같은 프로에서나 가끔 나올법한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지니 신기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아이들의 시선이 몰린 상황에서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법. 선생님은 빨리 교무실로 달려가서 5반 선생님을 붙잡고 수다를 떨고 싶었다. 단유는 꾸준히 운동을 계속했다. 달리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시간이 틈틈이 날 때마다 운동장을 돌거나, 턱걸이를 하거나, 팔굽혀 펴기를 하는 정도의, 체육 교과서에 나오는 정도의 개인 운동만 했다. 단, 디아트리의 호흡법을 지키면서 했을 뿐이다. 물론 지금이야 빠르게 자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정확히 말하자면 불균형 상태에서 몸을 단련했던 기간의 숙련도와 지금의 성장이 일치되는 순간부터는 몸의 성장이나 발달 속도가 느려질 것이다. 하지만 느려진 후의 일을 미리 대처할 방법이 없는 지금은 당장 운동의 성과가 눈에 보인다는 사실이 즐겁고, 땀을 흘리며 몸을 훈련하는 자체가 재미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은 보육원 더비에서의 포지션이었다. “석고야, 여기! 여기!” 건너편 골문 근처로 달려가던 명수가 소리쳤다. 단유는 손에 든 공을 살짝 띄운 후 정교한 컨트롤로 공을 찼다. 공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다 정확히 명수의 발 앞에 뚝 떨어졌다. 정말 이거 하나만큼은 조금 과장해서 국가대표 급이다. 허구한 날, 골킥을 하다 보니 숙련도가 거의 끝을 채운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나이스 패스!” 그 뒤로도 단유는 골문 앞에서 2시간을 서 있었다. 가끔 중학생 형들이 차는 공을 막기도 했지만, 이제 단유가 서면 거의 들어가는 골이 없다시피 했다. 아주 가끔씩 절묘한 2:1패스가 이루어지면서 골을 먹을 때는 단유도 어쩔 수 없지만, 그 외에는 단련된 골키퍼로서의 감각과 꾸준히 연마된 체력과 근력이 실점을 막았다. “석고야, 수고했어.” 이마에 비 오듯 땀을 쏟아내는 명수가 와서 어깨동무를 했다. 축축한 소매 자락이 단유의 뒷목을 짓누르지만 개의치 않았다. 조금 찝찝하면 어때. “내가 진짜 오늘은 한 골 더 넣으려고 했는데 봐준 거야, 알지? 오늘 점심 때 2반이랑 시합하면서 너무 힘을 썼나봐. 그래도 2반이랑 할 때는 내가 2골 넣었거든? 그러니까 오늘은 3골을 넣은 거야. 해트트릭이잖아? 그 정도면 거의 축구선수라고 부를 정도 아닌가? 더 넣을 수 있었거든? 형들이 불쌍해서 봐 준건데, 나도 너네 반처럼 감사장 같은 거 받아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 오늘 너무 배고프네. 오늘 식당 밥 뭔지 알아?” “미역국, 제육볶음, 멸치볶음, 김치” “제육볶음 나오는 거야? 야, 그럼 이렇게 걸어가면 안 되지. 뛰자!” 엉겁결에 명수를 따라 보육원 본관으로 뛰어갔다. 현관을 지나는데,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카키색 자켓을 걸치고 색이 바란 청바지와 때 묻은 운동화를 신은 여자였다. 긴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여자는 안경을 추켜 올리다가 단유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이내 단유는 시선을 돌리고 명수의 뒤를 쫓았다. 여자 역시 계단으로 뛰어 올라가는 두 소년을 힐끔 보았을 뿐, 별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여자가 두 아이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고 있을 때, 옆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뭐해?” 돌아보니 양기자가 어깨에 맨 검은 양가죽 크로스백을 고쳐 매고 있었다. “아니에요. 일은 다 보신건가요?” “여기 스케치는 끝난 거야?” “아, 대충 둘러 봤어요. 도서관도 있고, 영상실이나 영아놀이방이나 뭐 그냥 있을 거 다 있던데요.”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어떤 사람들이 일하는지, 그리고 그 사람들 전화번호라도 따 놓고 관계를 맺는 게 중요하다고 몇 번을 얘기해?” “그건 진작 했죠. 행정실 직원이랑도 명함 나눴고, 생활지도원 몇 사람 전화번호도 따 놨죠.” 주위를 슬쩍 둘러본 여자가 목소리를 낮춰서 물었다. “근데, 단순히 보육원 취재차 온 거 아니죠? 무슨 일 있는 거죠?” “일은 무슨…. 지난 연말에 인평시 복지예산 관련해서 말이 많았잖아. 그래서 조사하는 거라니깐.” 보궐선거와 맞물리면서 복지예산 운용실태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로 떠 오른 적이 있었다. 기관의 예산안 중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복지 예산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점검하자는 취지의 기사를 쓰겠다는 이야기는 보육원에 오면서 들었다. 하지만 여기자는 단순히 그런 이유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자의 촉이라는 게 발동했다. “너 촉 좋아하지 마라. 촉 좋아하다가 고소미 먹고 펜 놓은 사람 한 둘이 아니다.” “우와, 선배. 선배가 그런 이야기 할 줄은 몰랐네?” “선배를 뭐로 보는 거야? 내가 사회부 10년, 정치부 10년이다. 촉으로만 살았으면 진작에 쫓겨나서 지금쯤 치킨 다리 튀기고 있었을 거야.” 양기자가 구겨진 신발 뒷창을 고치고 일어났다. 팔짱을 끼고 노려보는 후배의 시선에 뒤통수가 따가웠다. 하지만 촉으로만 살면 위험하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바로 지금 양기자가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정말 위험할 뻔 했으니까. “기자는 발로 뛰어야 기자야.” 아네스 보육원의 전 사무국장이 준 서류만 믿고 기사를 올렸다간 정말 제대로 갈 뻔했다. 행정과장이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그 서류의 정체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대로 발표했었을 때 양기자는 아마 일주일 내로 짐 싸서 집으로 돌아가 법원의 출석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물론, 행정과장의 이야기를 100% 믿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알 수 있었던 점은 재단 이사회 내의 암투가 있었고, 그 암투에 자신이 이용될 뻔 했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분명 제대로 캐내면 좋은 기사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재작년의 일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전국구급 뉴스가 될 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좀 더 준비가 되어야 했다. “이번 주말에 서울에 가서 비싼 술이나 먹고 와야겠다. 지방은 놀 만한 곳이 없어.” 양기자의 중얼거림에 후배는 입술을 깨물었다. “중앙이었군요.” 서울로 가서 취재하겠다는 말은 곧 전국구급 기사일지도 모른다는 말. 양기자는 능청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아까는 뭘 보고 있었어?” “아, 아까 어떤 꼬마가 지나가는데 얼굴이 낯이 익더라고요.” “아마 도서관 홍보모델일거야.” “도서관이요?” “시립도서관 홍보모델. 작년까지도 계속 사용한 포스터였으니까 오다가다 보면서 얼굴 봤을걸? 왜 있잖아, 책 읽고 있는 분위기 있는 꼬마 포스터. 사진 잘 찍혔다고 너도 한 마디 했던 거 같은데.” “음… 아! 걔!” “그래. 걔.” 양기자는 주차된 승용차로 향했다. “아, 피곤해. 갈 때는 니가 좀 운전해라. 난 눈 좀 붙여야겠다.” “그러죠. 대신 운전비는 확실히 쳐 주셔야 합니다.” “아까 줬던 거 아닌가?” “아까요?” “저기 현관에서.” 여기자는 ‘서울’이란 힌트를 주지 않았냐는 양기자의 말에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 차키를 받아들었다. “그런데 사진이랑 실물이랑 조금 다르네요.” “뭐가?” “사진으로 볼 때는 되게 묘한 느낌이 있었는데, 실물은 그냥 평범한 아이 같아서요.” “당연한 소릴 하고 그러네. 아무리 지방 시립도서관이라도 포스터로 쓰일 사진인데 포샵처리 안했겠냐?” “그런가?” 이윽고 차에 시동이 걸리고, 불편한 소음을 뒤로 한 채 보육원을 빠져나갔다. ======================================= [95] 감사합니다(3) 시간은 언제나 흐른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체감하는 시간은 다르다. 아인슈타인 덕분이다. “와, 개어려워.” 여기자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앞에 놓인 노트북을 노려보았다. 당장 내일 게재할 기사 원고를 작성해야 하는데,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확 저지를까.” 이번 주가 시작될 때만 해도 선배 덕분에 다음 주 내내 써먹을 기획 기사거리 하나 얻었다고 희희낙락했었다. 그런데 보육원을 방문한 뒤, 선배는 스톱을 걸었다. 당연히 여기자는 방방 뛰며 선배 멱살 잡기 직전까지 갔었다. “야, 진정해라. 그리고 그 동안 내가 너한테 떠먹여준 기사가 한둘이냐? 고작 이거 하나 가지고 죽네 마네 하는 건 엄살이야. 당장 내일이 마감이래도, 즉석에서 만들어낼 이야기 하나쯤 가지고 있어야 기자라고 부르지. 안 그래? 대신 양고기 사줄게. 먹고 기운내서 쌈박한 거 하나 구해봐라.” 꽝, 다음 기회를. 어린 시절 과자에 동봉된 씰에서 뽑았던 문구가 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눈이 뒤집힐 것 같았지만 어쩌랴. 선배 각오하시라고 경고한 뒤, 벨트 풀고 양고기에 소맥을 들입다 부었다. 덕분에 다음 날 아침, 두꺼비눈으로 출근한 여기자는 노트북의 워드프로그램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 점심을 맞았다. 해장으로 얼큰한 콩나물국밥을 한 입에 뚝딱하고 다시 회사로 돌아와 자판기 커피로 입속을 헹구고 나니 정신이 반쯤 돌아왔다. 자리로 돌아와 여전히 흰 화면 그대로인 노트북을 보고 있자니, 그제야 남은 숙취마저 사라졌다. “내가 미쳤구나.”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랬지. 다음 주가 문제가 아니라 당장 내일 기사를 어떻게 써야 할지를 고민해야 했다. 복지예산 관련 특집 기사가 물 건너가면서 그간 조사했던 내용도 일단 올 스톱이 된 상태. 여기자는 머리를 쥐어뜯다가 일말의 희망을 품고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 저예요. 보육원 말고요, 어린이집도 같이 조사한 거 있잖아요? 그거 쓰면 안돼요? …안돼요? …그렇죠. 섣불리 건들 면 안 되긴 하죠. …예. 아, 그럼 혹시 다른 거… 아, 없으시다고요? 예, 예.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여기자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책상에 머리를 쥐어박기 시작했다. ―쿵, 쿵 “어이, 오떡이! 그래가지고 머리가 부셔지겠냐? 여기 창문 열어 줄게. 여기로 뛰어내릴래?” 얄미운 인간, 박팀장이 한 손에 테이크아웃 커피를 든 채 사무실로 들어오면서 말을 건넸다. 지네 팀도 아니면서 왜 쿠사리야? 오떡이라고 불리는 여기자, 오선혜는 날 세운 눈으로 박팀장을 째려봤다. 앗 뜨거, 하며 박팀장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법조팀의 박팀장의 뒷모습에는 여유가 철철 넘쳤다. 꼴 보기 싫게. 오선혜는 머리를 굴렸다. 오전에야 숙취 때문에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지만, 지금은 돌아가지 않는 머리도 억지로 굴려야 했다. “아, 맞다.” 언니가 인평초등학교 학부모회 임원이 됐다고 자랑했었던 기억이 났다. 당시에는 별것도 아닌 걸 자랑한다고 속으로 구시렁댔었는데, 지금은 뭐라도 나오라는 간절한 심정으로 핸드폰을 붙잡았다. “여보세요? 언니, 나 선혜. 상훈이는 잘 있지? 응. 다름이 아니고….” 선혜는 핸드폰을 어깨에 끼고 주섬주섬 짐을 챙겨 사무실을 나갔다. **** “…그래서 말이야. 우리 상훈이가 반에서 제일 처음으로 감사장을 받았다는 거지.” “상훈이가 평소에도 착하다는 소리 많이 듣는 애였잖아. 받을 만하지.” “애가 감사장 받고 좋아가지고 그날 어찌나 자랑을 하던지.” 오여사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커피 잔을 붙잡았다. 선혜는 마주 웃으며 커피 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하지만 속내는 그와 달리 바싹 타들어가고만 있었다. 반에서 고마운 사람을 뽑는 이야기가 그리 특별할 리 없다. 언니의 입장에서는 아들이 첫 감사장의 주인이 되었다는 게 기분 좋은 일이어서 그럴지 모르겠지만, 그런 이벤트는 아마 조사해보면 전국에 30% 이상의 교실에서 시행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다만 그 과정에서 반장이란 아이가 스스로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게 재미있었는데, 과연 그걸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 반장이란 아이는 어떤 아이야?” 오여사의 눈 밑이 살짝 굳어지는 느낌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욕심 많은 언니 눈에 아들의 반장직을 뺏은 아이가 마음에 들 리 없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사실 걔가 보육원 출신 아인데….” “보육원?” 선혜의 머릿속에 섬광이 번쩍였다. 오여사는 주저리주저리 반장에 대해서 털어놓았는데, 요약하면 지금까지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은 똑똑한 친구가 사실 보육원 출신이며, 한 때는 도서관 모델도 하면서 학부모들 사이에 자주 거론되기도 했었던 아이라는 것이었다. ‘그 아이구나.’ 어쩐지 눈에 띄더라니. 자신의 촉이 살아있다는 생각을 잠시 해보며, 기사의 방향을 잡았다. ‘교사 인터뷰, 아이 인터뷰, 제목은 「우리 반이 달라졌어요」 정도? 너무 유치한가?’ 굳이 사건을 찾을 필요도 없고 만들 필요도 없다. 화제의 인물, 혹은 화제가 될 만한 인물을 찾아 인터뷰하는 것도 좋은 기사가 될 테니까. 뭐니 뭐니 해도 오늘은 넘기고 봐야하지 않겠는가. 그러려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지금 빨리 가면 아이들이 하교하기 전에 볼 수도 있으리라. “언니, 고마워. 나 부탁하나 하자.” “뭔데?” “상훈이네 반 선생님 인터뷰 좀 하려고. 반 애들이랑. 전화 좀 미리 넣어줄래?” “인터뷰를? 왜?” “왜긴. 기사에 실으려고 하는 거지.” “그래?” 가만 보니 뭔가 기대하는 눈치가 보였다. “상훈이도 인터뷰할 거니까 걱정 말고. 지금 가면 안 늦으려나?” “어, 그래, 먼저 가라. 언니가 전화 한 통 넣어둘게. 학부모회 임원으로서 이 정도는 해줘야지. 학교운영에 도움도 될 테니까.” 진짜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학교든 좋은 일로 신문에 오르는 것을 기피하지는 않을 것이다. 선혜가 급하게 집을 나갈 때, 오여사는 입 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리며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최대한 교양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생님?” 그 시간, 4학년 4반 교실에서는 한참 창체활동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오늘의 주제는 직업 탐색이었다. 각자 책을 한 권씩 읽고 책 속에 나오는 인물의 직업에 대해 모둠별로 고민하고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그 후, 내용을 정리하여 교실 앞에서 발표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저희는 소방관 아저씨와 경찰아저씨들에 대해 발표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저희는 의사선생님에 대해 발표하겠습니다. 저희 모둠의 하연수 학생의 아버지가 의사선생님이셔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상입니다.” 각 모둠의 발표가 끝날 때마다 아이들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정리된 내용은 교실 뒤편의 게시판에 붙여서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저희 모둠에서는 5가지의 직업이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중에서 만화가와 과학자에 대해서 발표하겠습니다. 두 직업은 모두 창의성을 가져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만화가는 그림도 그려야 하고 글도 써야 하기 때문에 머리가 똑똑해야 하고, 과학자는 어려운 수학문제나 학문들을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머리가 똑똑해야 합니다. …이상입니다.” 단유는 각 모둠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을 주의 깊게 들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직업도 있었고, 고민을 해 본적도 없는 직업도 있었고, 한 번쯤 생각해봤던 직업도 있었다. 하지만 더욱 흥미로웠던 점은 세분화된 직업의 다양성과 전문성이었다. 자신이 줄곧 살았던 세계에서 직업이라 하면, 고작 벌목꾼, 농부, 약초상, 대장장이, 사냥꾼 등이었고 기사라는 것은 직업이라기 보단 계급이었다. 때문에 의사, 변호사, 검사, 소방관, 경찰, 물리학자, 만화가, 영화감독 같은 직업은 단유가 고민하는 꿈과 목표에 대해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솔직히 단유는 그 모든 직업을 다 경험해보고 싶었다. 의사가 돼서 사람을 고쳐주고도 싶었고, 변호사가 돼서 사회 정의를 일해 일하는 모습도 상상해보고, 소방관이 돼서 사회 안전을 위해 출동하는 모습도 그려보고, 물리학자가 돼서 자신이 매일 공부하는 물리학의 끝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저희는 모델과 연예인에 대해서 발표하겠습니다. 저희 모둠에서 읽은 책에서는 동물나라에서 가장 잘 생긴 여우가 밍크코트를 입고 패션모델로 나옵니다. 여우가 입은 밍크코트가 많이 팔리게 되면서 여우가 인기를 얻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모델이 들고 있는 가방을 사람들이 많이 삽니다. 우리 모둠에서도 세 사람이 같은 가방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좋지 않은 모델은 상품을 팔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델이 중요합니다. 우리 반 반장이 도서관 모델일 때, 사람들이 도서관을 많이 갔다고 합니다.” “와!” 아이들이 환호를 질렀다. 단유는 난데없이 거론되어 어리둥절했다. “내가 모델?” 모델이라는 것에 큰 자각이 없었던 단유는 새삼 자신의 첫 사회활동에 대해 인지를 했다. “그렇네? 우리 반에도 모델이 있었네? 단유야, 모델 할 때 어땠어? 친구들한테 니가 겪었던 모델에 대해 발표할 수 있겠어?” 단유가 엉거주춤하며 일어섰다. “저, 솔직히 별로 말할게 없는데요. 그냥 사진 찍으면 된다고 해서 사진을 찍었을 뿐인데요.” “몇 장 찍었어?” 한 아이가 돌발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어… 모르겠습니다. 아침부터 계속 찍었는데 많이 찍은 것 같긴 한데 몇 장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홍보포스터는 보통 수십 장에서 수백 장의 사진을 찍고 그 중에 가장 잘 나온 사진을 뽑아서 포스터를 만든다고 해요. 그렇죠?” 선생님이 부연설명을 해줬다. “아, 예. 그렇습니다.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찍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찍을 때마다 카메라감독님이 자세를 바꾸라고 지시를 해주시고, 표정도 지시를 해줬습니다. 그래서 웃었다가 웃지 않았다가 바꿔 가면서 찍었습니다.” 그 후로도 아이들의 폭풍 질문 세례가 이어지자, 원활한 진행을 위해 선생님이 적절히 끼어들어 아이들의 질문을 막았다. “자, 여기까지만 듣고 다음 모둠 발표도 들어야죠?” 다른 모둠의 발표가 이어졌고, 선생님은 힐끔 시계를 보았다. 10분 뒤 수업종이 울릴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교실 밖 복도에서 서성이고 있는 여기자와 인터뷰도 해야 된다. 그 전에 아이들이 수업에 참여하는 모습을 사진 찍고 싶다고 하니, 그것도 고려하면 지금쯤 들어오시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잠깐 그 전에 오늘 기자님이 오셔서 여러분들 수업 참여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싶다고 하셨어요. 여러분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모델이 돼야 하는 거예요.” 선혜는 아이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교실로 입장했다. 특히 상훈은 이모가 교실에 들어오자 괜히 신이 났다. “우리 이모야!” “정말?” 선혜는 괜히 이모소리 들으니까 아줌마 취급 받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결혼도 안한, 이제 겨우 30대 초반인데. 선혜는 억지로 웃으며 아이들에게 계속 창체활동을 진행하도록 유도하고 그 틈에 자연스럽게 나올만한 컷을 남겼다. 그리고 수업이 끝났다. 종례를 마친 후 선생님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선혜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하실래요? 아니면 상담실에서 하시겠어요?” “여기서 하죠.” 아이들이 모두 빠진 교실에서 선생님과 단유, 상훈만 앞에 모여 인터뷰를 시작했다. 초여름 따뜻한 오후 햇살이 책상 위로 온기를 남기고 있었다. ======================================= [96] 감사합니다(4) “…그래서 교실 환경이 보시다시피 많이 깨끗해졌죠.” 선생님은 뿌듯하다는 듯 연신 하이 톤의 웃음과 함께 인터뷰를 이어나갔다. 선혜는 수첩에 마침표를 찍고, 핸드폰 녹음기능을 중지시켰다. “예, 여기까지 할게요. 이대로 기사에 실어도 좋은 내용이겠는데요? 아마 여러 곳에서 선생님께 연락이 올지도 몰라요?” “에이, 무슨 그런 말씀을. 호호. 사실 제가 한 건 하나도 없는 걸요. 애들이 다한 거죠.”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인터뷰는 끝났지만 이후에 또 어떻게 만나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인터뷰이와 기분 좋게 헤어지는 것도 기자로서의 덕목이고 스킬이었다. “그래도 선생님의 지도가 있었으니, 화목한 교실 환경이 조성된 것 아닐까요?” “아유, 말씀도 참.” 겸양이 미덕이라, 선생님은 손사래를 치면서도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아마도 머릿속으로는 표창장이라도 받는 미래를 꿈꾸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며 선혜는 핸드폰이며, 카메라며, 수첩을 가방에 욱여넣었다. “그럼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인사드릴게요.” “예,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선혜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학교를 나왔다. 마감까지 2시간. 지금 빨리 차를 몰면 한 시간 반 정도의 여유가 있을 것이다. 가는 동안 정리를 마치고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기사 작성하면, 아슬아슬하게나마 오케이는 받아낼 수 있으리라. 학교 본관 뒤편에 주차된 자신의 차로 이동해 운전석에 올라탄 선혜는 가방을 옆 좌석에 던져놓고 시동을 걸었다. 할아버지 코 푸는 소리 같은 시동 소음에 괜히 민망해서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도 쉬이 안심하지 못하는 것은 이 차를 바꿀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조만간 무리를 해서라도 괜찮은 연식의 중고차로 바꿔야 할 것 같았다. ‘이번에는 낚이지 않으리라.’ 괜히 값싼 차 산다고 멀리 지방까지 찾아갔었다가 하루 종일 뱅뱅이만 돌고, 빈손으로 돌아왔던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분한 마음이 들었다. 명색이 기자라는 놈이 그 흔한 수법에 당하냐고 비웃음도 많이 받았었지. ‘아이고, 이럴 시간이 없는데.’ 선혜는 상념을 정리하고 주머니에 넣었던 핸드폰을 조작해서 인터뷰 녹음본을 재생시킨 후 차를 출발시켰다. 가는 중에라도 들으면서 머릿속으로 정리를 한다면, 노트북 앞에서 손가락이 멈추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김단유라고 했지?’ 핸드폰에서 단유의 단조롭지만 정갈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별 생각은 없었는데요.” 얼핏 들으면 아무 감정도 없는 목소리였다. 너무 단조롭게 들려서 오히려 나이를 의심케 만들었다. 단유를 인터뷰하기 전 상훈의 인터뷰에서는 한 문장 안에서도 단어와 호흡 사이에 감정이 널뛰기 하듯 격렬하게 움직여, 누가 듣더라도 ‘신나 죽겠어요’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인터뷰였다. 반면 단유는 마치 낯선 분위기에 딱히 긴장은 하지 않았지만 즐거운 분위기도 아닌 노련한 인터뷰이를 대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지시도 없이 스스로 내린 결정 아니었니?” “네. 맞아요.” “그 때, 어떤 생각이 들었던 거니?” 단유는 시선을 지그시 내리고 과거의 그 때를 회상했다.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의견을 제시했던 걸까? ‘모델 할 만하네.’ 선혜는 속으로 생각하며 슬며시 카메라를 들어 그 모습을 촬영했다. 이미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개인 촬영을 끝냈지만, 욕심이 나는 그림이어서 저도 모르게 촬영을 지시했다. ―찰칵 그 소리에 정신이 들었는지, 단유가 시선을 올려 선혜를 마주보았다. 선혜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특별히 감정의 파도가 없는 잔잔한 눈에서 달빛이 부서져 반짝이는 느낌이 전해졌다. “그 때는요.” 선혜가 이내 카메라를 내려놓고 수첩을 들며, 단유를 응시했다. “그냥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어요. 처음에는 상훈이가 절 오해하는 것 같았거든요. 전 상훈이를 미워하지도 않았고, 싫어하지도 않았어요. 비웃지도 않았고요. 그런데 상훈이는 제가 자기를 비웃는 거라고 오해를 한 것 같더라고요. 전 오해를 풀고 싶었어요.” “그래서 너의 오해를 풀기 위해 고마움을 표시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말을 하시면 또 오해가 생기네요.” 응? “저만의 오해를 풀기 위한 건 아니었어요. …전 평소에 상훈이가 교실에서 하는 모습들을 계속 보았어요. 누가 봐도 착하다고 말할 만한 일들, 혹은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을 하고 있었거든요. 상훈이는 당연히 우리 반 아이들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들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우리 반 모두가 너를 비웃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훈이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오해를 푸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저에 대한 오해가 아니라 우리 반 모두에 대한 오해를 풀고 싶었어요. 오해는 갈등을 만들고 갈등은 분쟁을 만든다고 했어요. 그리고 분쟁은 싸움이나 미움을 만든다고 들었어요. 전 그런 결과가 생기지 않도록 중간에서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그게 반장으로서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장으로서?” “네. 저는 반장이 뭘 해야 하는 자리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반에서 싸움이 일어나는 걸 막아야 하는 자리라고 생각했어요. 반 아이들 모두가 똑같은 걸 원하고 똑같은 걸 바라지는 않으니까 당연히 부딪히는 일들이 생길 거예요. 실제로도 많이 생겼었고요. 그런 일들을 최대한 중재해서 서로가 만족하는 결과가 나오도록 돕는 게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선혜는 펜을 잠시 손가락 사이에서 돌리다가 툭 한 마디 뱉었다. “혹시 정치가가 되고 싶니?” “네?” “니가 말한 걸 듣자니 어쩐지 정치에 대해서 공부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전 그게 뭔지 모르겠는데요?” “그러니?” 선혜는 입안에서 혀를 굴리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래 이런 건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시간이 촉박하니 이를 두고 이야기를 나눌 계제가 아니라고 판단한 선혜는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 “앞으로 어떤 교실을 만들고 싶니?” “전 아무것도 안할 건데요.” 화목한 교실을 만들 거예요, 혹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교실을 만들 거예요 따위의 답변을 상상하던 선혜는 눈을 크게 뜨고 바라봤다. “아무것도 안 해? 왜?” “제가 억지로 만든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우리 반 학생들은 모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고 모두 다른 걸 원해요. 그걸 제가 억지로 바꾸려 한다는 건 무리예요. 게다가 지금 이대로도 좋은 교실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굳이 어떻게 바꿀 필요가 있나요?” “더 좋은 교실로 만들 수도 있잖니?” “아이들이 부족함을 느끼는 부분이 있다면 학급회의시간에 다 얘기를 하거든요. 그것만 고쳐나가도 되는 것 같아요.” “혹시 꿈이 뭐니?” “…….” 단유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말할 수 없는 거니?” “아니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뭘 하고 싶은지.” 선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정도 생각을 가진 아이라면 자신의 꿈을 섣불리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넌 정치가를 꿈꿔도 될 거 같아.” “왜요?” “그냥. 궁금하면 나중에 한 번 찾아봐.” 단유는 말없이 선혜를 바라보았지만, 선혜는 아무런 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느긋하게 인터뷰이와 사담을 나눌 시간이 없었다. “수고했어. 다음에 또 기회 되면 보자.” **** 선혜는 사무실로 돌아와 거침없이 노트북을 두드렸고, 금세 그럴싸한 학교특집기사 한편을 만들어냈다. 오탈자와 비문 등을 간단히 훑으며 정리한 후, 데스크로 넘겼다. “너 죽을래? 지금 몇 시야?” “시간 지켰잖아요?” “너 이게 한 두 번이야? 너 혼자 기사 써? 너 혼자 신문 만들어?” “아, 죄송하다고요. 늦은 건 아닌데 너무 그러시네.” “아이고, 두야. 내가 언제까지 봐줄 거라고 이렇게 뻗대는 거냐? 응? 나 데스크거든?” “알거든요? “아우, 저 개념 없는 오떡이.” 선혜는 싱긋 웃으며 자리로 돌아왔다. 의자에 몸을 파묻고 다리를 들어 책상 위에 올렸다. 데스크에 통과가 되면 늘 하는 세레모니 같은 행위였다. 쉽게 말하면 잘난 척 하는 중이었다. 시경팀이 아닌 사회부 기자들 중 가장 늦게 송고한 기사라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 강철 멘탈의 여기자였다. ‘어쩌면 시경팀보다 늦었을 수도 있으려나?’ 그러거나 말거나 선혜는 핸드폰을 들어 양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선배. 물어볼 게 있어서요. 거기 보육원 있잖아요? 아이 참. 기사 안 쓴다니깐 그러네. 그거 말고 다른 거 때문에 물어보려는 거예요. 거기 애들 있잖아요? 부모가 모두 살아있어도 보육원에서 사는 애들도 있는 거죠? …당연히 알죠. 그냥 확인 차 물어본 겁니다. 예. 예.” 선혜는 옆머리를 긁으며 통화를 계속했다. 머릿속으로는 연신 섬광다발이 콩 볶는 번갯불처럼 이리저리 튀고 있었다. 이건 촉이었다. 분명 저 아이의 뒤에 뭔가가 있다는. **** 보육원으로 돌아온 단유는 저녁 식사 후 도서관으로 갔다. 평소 읽던 책은 잠시 놓아두고 직업과 관련된 책을 꺼내 들었다. 초등학생 혹은 중학생들을 위한 직업탐색 관련 서적이 시리즈별로 구비되어 있었다. 목차에서부터 낯익은 직업부터 생소한 이름의 직업들이 죽 나열되어 있었다. 경영 컨설턴트, 광고 AE, 방송작가, 손해사정사, 게임 마케터 등등. 이름에서 유추가 가능한 직업이 있는가 하면 도저히 직무내용을 짐작할 수 없는 직업들까지 천차만별이었다. 이렇게 많은 직업들이 바깥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단유는 자신의 꿈을 찾기 위해서라도 이런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에 공감하며, 목차를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목차의 끝에 이른 단유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다음 책의 목차를 살폈다. 그리고 시리즈의 마지막 권까지 훑었다. ‘이상하네.’ 단유는 다른 책을 꺼냈다. 역시 목차부터 직업들이 나열된 책이었다. 하지만 단유는 찾고자 하는 직업을 찾을 수 없었다. “단유야, 뭐하니? 소등시간 다 돼 가는데?” 보육교사 한 분이 도서관 문 앞에서 단유를 불렀다. 그제야 정신없이 책을 읽던 단유가 주위를 둘러보니 도서관에 혼자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단유는 마침 잘 됐다는 듯, 책을 들고 보육교사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응? 뭔데?” “정치가는 직업이 아닌가요?” “응?” “오늘 낮에 기자님을 만났는데요, 그 기자님이 정치가에 대해서 알아보라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책을 찾아보는데, 책에는 정치가란 직업이 나오지 않아서요.” “어, 아마 국회의원이라고 찾아야 하지 않을까?” 말하고도 민망한 보육교사였다. 국회의원만 정치가고, 지방의원은 정치가가 아닌가? 아니 그것보다 정치가란 게 직업인가, 를 먼저 고민했다. “그래요?” “어, 우선 늦었으니까 내일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고 일단 방으로 돌아가자.” “네.” 말 잘 듣는 단유는 책을 돌려놓고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보육교사는 단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괜히 뒷머리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내일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마침 내일은 토요일이었다. ‘토요일이라면 자원봉사자들이 오겠지? 그러면 조금 바빠지려나?’ 내일은 조금 바빠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도서관의 불을 껐다. ======================================= [97] 감사합니다(5) “석고야, 컴온!” 드디어 명수가 영어를 쓰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단유의 귀에는 ‘석고야, 가자!’로 들리지만, 명수가 영어를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만 놓고 보면 확실히 명수도 공부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억지로라도 붙잡고 공부했던 게 도움이 되긴 했나보다. 아니면 5반 선생님이 정말 훌륭한 교사라는 반증일지도. “그래, 가자.” 단유는 명수와 함께 운동장으로 향했다. 오전부터 현관 앞이 시끌벅적했다. 주말을 맞아 자원봉사자들이 찾아온 탓이다. 여름이 가까워오면서 자원봉사자들의 방문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이맘때면 보육원 철새도래지라도 된 것 같았다. 한 달 뒤쯤이면 온전히 철새로 뒤덮일 것이다. “안녕하세요?” “오, 명수구나. 단유도 잘 지냈어?” “네. 안녕하세요?” 자주 얼굴을 마주치는 푸근한 인상의 자봉단장님은 이제 인사를 나눌 정도로 친해졌다. 짧고 뭉툭한 손을 가진 자봉단장님은 명수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축구하러 가니?” “예. 남자는 축구예요.” 단장님이 어색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명수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단장님께 꾸벅 인사를 하고는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형! 형! 나도!” 뒤를 돌아보니 1학년 유철이랑 재민이가 중앙 계단을 뛰어내려오고 있었다. 짧은 다리로 계단을 뛰어내려오느라 위험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요령 좋게 뛰어내려 온 리틀 명수를 꿈꾸는 아이들이었다. 단유는 손가락을 뻗어 운동장을 가리켰다. “벌써 갔어. 얼른 쫓아가.” “예!” 두 아이들은 짧은 다리를 재빨리 움직여 하얀 햇살 속으로 몸을 던졌다. 초여름 오전인데도 날이 뜨거웠다. 단유도 운동장으로 달려가려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층계참에는 지선이가 서 있었다. 지선이는 사실 조금 안타까운 면이 있었다. 동성의 친구도 없을 뿐만 아니라, 가장 가까운 나이 때의 언니가 다영이었는데, 다영은 중학교로 진학한 후 거의 공부만 하고 지냈다. 아니 사실 소미 사건이후로 외부 사람들과 말을 잘 섞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 옳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지선이 중학교 2학년인 언니에게 쉽게 다가가기도 힘들 뿐더러, 애가 숫기가 없는 편이어서 종종 또래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멀리서 구경만 하곤 했다. “지선아, 공지선.” 단유가 지선을 불렀다. 멀리 운동장을 바라보던 지선이 화들짝 놀라며 단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리와. 같이 가자.” 지선이 도리질을 했다. “가자. 오빠가 같이 있어 줄게.” 머뭇거리며 손가락만 꼼지락대는 지선을 바라보던 단유는 계단을 다시 올라가 지선의 옆에 섰다. “심심하지? 밖이 따뜻하니까 밖에서 오빠랑 같이 애들 공놀이하는 거 보자.” 손을 잡고 끌자, 그제야 끌려간다는 식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지선이었다. 조그만 손을 잡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났다. 이제는 너무 오래전의 일이 되어버린 동생에 대한 기억이었다. 사실 동생 손을 붙잡고 마을 뒤 언덕을 올랐던 기억도 이제는 가물가물했다. 숲 속에 땔감을 주우러 다닌다는 핑계로 동생이랑 많이 놀아주지도 못했는데, 그 동생은 이제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도 없었다. 포기한 건 아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현실을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 단유는 그런 기억들도 억지로 누르고 오로지 자신의 생존에만 매달렸다. 그러던 게 올해 초, 지선을 만나며 조금씩 마음이 흔들렸다. 혼자였기 때문에 살아남는 데만 집중했던 지난날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외로움에도 불구하고 주변과 어울리지 못하는 지선만큼은 잘 돌봐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씩 했다. 다만 지선이 너무 낯을 가리고 성격도 수줍은 탓에 통학차 안에서나 학교에서 가끔 마주칠 때도 서로 이야기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어쩌다 얼굴이 마주쳐도 지선이 먼저 도망가기 일쑤였다. “혹시 추워?” 지선이 얇은 긴 팔 티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이 보여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지만 지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기 몸에 너무 큰 티셔츠였는지 소매를 몇 단은 접었는데도 손목에 이를 만큼 크고 넓은 티셔츠였다. “단유야, 뭐해? 빨리 와!” 명수가 운동장에서 리틀 명수들이랑 공을 주고받다가 뒤늦게 나온 단유를 보고 소리쳤다. “오늘은 그냥 구경만 할게.” “왜?” “그냥. 오늘은 나 쉴 거야.” “안 돼! 너 운동해야 돼. 안 그럼 또 쓰러진다!” “괜찮아. 요즘 운동 많이 하고 있어.” 몇 차례의 거절이 이어지자 명수도 포기했다. 명수도 이제 단유가 웬만해선 자기 말을 다 들어주는 편이지만, 한 번 고집을 부리면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윽고 운동장에서 간이 축구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명수가 많이 발전했다는 게 느껴졌다. 경기장 안에서 볼 때랑 밖에서 볼 때는 다르다더니, 철용이랑 공을 주고받는 모습도 능숙하고, 가끔씩 리틀 명수들에게 일부러 패스해주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었다. ‘어쩌면 저런 패스가 명수를 좋아하게 만든 건지도…….’ 경기를 보다가 옆이 너무 조용해서 힐끔 쳐다보니, 지선이 입을 꼭 다물고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릎을 세우고 팔을 둘러 다리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정말 예전 언덕 위에서 하늘을 감상하던 동생의 모습 같았다. 단유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지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선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심심하지?” 지선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오빠가 재미난 놀이라도 할 줄 알면 너랑 놀아줄 텐데, 아는 게 없네.” “…….”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 지선은 운동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단유가 옆에 앉아 있지만 외로워보였다. 문득 지선도 단유가 예전에 느꼈던 외로움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걱정?’ 단유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가슴을 천천히 진정시켰다. 푸른 숲에서 배운 호흡대로, 숲의 공기처럼 묵직하고, 숲 속의 바람처럼 가볍게, 숲의 향내처럼 은은하게 가슴을 안정시켰다. “김단유?”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어제 만난 여기자였다. 상훈이 이모라던가? 단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어머, 예의도 바르네. 옆에는?” “공지선이라고 우리 학교 1학년이에요. 같이 해바라기 중이에요.” “어쩜, 요즘 애들이 ‘해바라기’란 표현을 다 쓰네? 어제도 느꼈지만 넌 좀 특별한 애 같애.” “아니에요. 그냥 자주 이러고 있으니까 선생님들이 말씀해주셔서 알게 된 거예요.” 선혜는 히죽 웃으며 옆에 단유 옆에 앉았다. 2단짜리 시멘트로 된 스탠드에는 운동장에서 날린 흙먼지가 자욱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엉덩이를 붙이곤 단유를 바라보았다. “뭐하고 있었어?” “아이들 축구하는 걸 구경하고 있었어요.” 선혜가 시선을 돌려 명수가 드리블로 한 사람을 제치는 모습까지 관찰하다 입을 열었다. “왜 같이 안하고?” “지선이랑 같이 있으려고요.” “착한 오빠네?” “…….”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것으로 대신했다. “혹시 시간되니?” “…점심 때까지는요.” “그럼 혹시 인터뷰 좀 할래?” “어제 다 하신 거 아닌 가요?” “오늘은 심화 인터뷰.” 능청스러운 웃음으로 아이를 휘어잡으려는 선혜의 속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딱히 해코지하려 하는 것도 아니어서 일단 응하기로 했다. “언제 보육원에 왔니?” “초등학교 들어가기 1년 전이요.” “그 전에는?” “…….” 뭔가 있긴 있는데 대놓고 물어보기가 미안해지는 기분이 들어 선혜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어제 꿈 이야기를 했었잖아?” “네.” “지금까지 한 번도 뭐가 되고 싶다거나, 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 보통 니 나이 때 애들은 하고 싶은 게 많잖아? 놀이공원을 가고 싶다거나, 외국으로 나가보고 싶다거나 그런 거.” “별로 없어요.” 말 그대로였다. 단유가 하고 싶은 것은 오직 하나, 가족을 찾는 일 뿐이었으니까. 어제는 조금 딱딱한 어조긴 해도 분위기가 좋았던 것 같은데, 오늘은 따뜻한 햇살이 내려쬠에도 서늘한 기운이 들었다. 인터뷰이의 문제인가, 인터뷰어의 잘못인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뭐니?” “책 읽는 거요.” “어떤 책을 읽는데?” “아무거나 다요.” 어쩐지 오늘 날이 아닌 것 같았다. 선혜는 수첩을 덮어 가방에 집어넣었다. 두 팔을 뒤로 하고 몸을 기댔다. 초여름의 날씨라 바람도 적당하고, 하늘의 구름도 적당했다. 소년의 말 그대로 해바라기하기 좋은 날이었다. 눈을 살짝 감으니 주변 잔디에서 풍기는 풀냄새와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소리가 적당한 오케스트라 배경음처럼 들려, 이대로 여유를 즐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님, 물어볼 게 있는데요.” “뭔데?”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꿈꾸는 기분으로 되물었다. “정치가란 직업이 뭔가요?” “음… 정치를 하는 사람이지.” “…….” 불친절한 대답이었으려나? 괜히 꼬마한테 심통 부린 것 같아서 미안해졌다. “국회의원이나 지방의원처럼 국민들의 투표로 뽑힌 사람들이야. 이 사람들은 국민들의 뜻을 대신해서 정치를 하지.” 애 앞에서 선출직공무원과 정무직공무원 운운할 수 없으니 대충 이 정도로 만족하라지. “정치가 뭔데요?” 하, 이쯤 되면 기껏 안정시킨 마음의 평화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입장이 뒤바뀐 거 아냐? “정치를 사전에 나오는 것처럼 정의내리기엔 내가 너무 아는 게 없어서, 대답하기가 힘드네. 그래도 굳이 이야기를 하자면, 더 좋은 사회와 국가를 만들기 위해 서로 의견을 나누고 방향을 제시하는 일, 이라고 해두자.” “…어제 학급회의에 대해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그래. 그것도 일종의 정치지. 좋은 학교, 좋은 교실을 만들기 위해 너희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의견을 모아서 방향을 정하는 것.” “그런데 왜 저한테 정치가가 꿈이냐고 물었던 거예요? 전 아무것도 안한다고 말씀드렸는데.” “…내가 생각하기엔, 아무것도 안하는 정치가가 제일 좋은 정치가처럼 보여서.” 실은 ‘누나가 생각하기엔’이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조카 친구한테 ‘누나’라는 표현을 쓰는 게 너무 오글거렸다. 그렇다고 아줌마라고 자신을 호칭할 순 없지 않은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바뀌는 게 없지 않나요?” “그렇지. 아무것도 바뀌지 않지. 그런데 니가 그랬잖아. 부족함이 있다면 학급회의에서 이야기를 한다고. 넌 그걸 듣고 조정하거나 혹은 정리해주는 역할만 맡는 거잖아?” “예.” “내가 생각하는 좋은 정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정치가야. 그리고 사람들이 바꾸길 원할 때 바뀌도록 돕는 사람이 제대로 된 정치가라고 할 수 있지. 자기 욕심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욕심을 들어주고 중재해주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하거든? 사람들이 아무리 떠들어대도 귀 막고 눈 막고 자기 맘대로 하는 정치가는 정치가가 아니지.” 정치꾼이라고 하지. 속으로만 되뇌었다. “어려운거네요.” “왜?” “전 우리 반 아이들의 이야기도 다 듣지 못하는데…. 정치가라면 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거잖아요.” 선혜는 눈을 떴다.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보니, 소년의 눈 속에 맑고 깨끗한 빛이 서려 있는 느낌이었다. 볼수록 상쾌해지는 느낌. “부탁이 있어.” “뭔데요.” “제발 이대로만 자라다오.”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니 선혜가 입 꼬릴 주욱 늘리며 단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운동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아이의 뒤에 어떤 거물 정치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어쩌면 망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선배의 말처럼 촉만 믿고 살면 안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신의 촉을 믿고 싶었다. 이 아이는 분명 커서 문자 그대로 ‘훌륭한’ 어른이 될 거라고. 물론 그 앞에 많은 시련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 겪어보았고, 주위에서 많이 보았듯이 바르게 사는 게 어려운 세상이다. 하지만 이 아이만큼은 지금의 모습처럼 커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고프지 않니? 누나, 아니 내가 인터뷰 해준 보답으로 맛있는 거 사줄게.” “허락 없이는 못 나가는데요.” “내가 허락받으면 되지.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단유가 옆을 돌아보았다. 운동장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지선이 낌새를 채고 고개를 돌렸다. “얘도 같이 가도 되요?” “그럼. 되지. 우리끼리 가면 섭섭하잖아. 대신 저 애들은 안 된다. 내가 지갑에 여유가 없거든.” 운동장에서 뛰는 아이들을 가리키는 선혜의 말에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어날까?” “고맙습니다.” “응?” “궁금한 점 알려주셔서 고맙다고요. 맛있는 것도 사주시니까 고마워서요.” “나야말로 고마워.” “네?” 선혜는 팔을 쭉 뻗고 기지개를 폈다. “그냥 너랑 ‘대화’를 했더니, 상쾌한 기분이 들어서.” ======================================= [98] 스피드(1) 검은 하늘과 검은 산이 세계를 두른 시간, 하얀 달빛마저 구름이 집어삼키며 어둑해진 거리에 낡은 주황색 나트륨 계열의 가로등 불빛이 흩뿌려지고 있었다. 거리 끝 어디서부턴가 코끼리 울음소리 같은 웅웅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귀를 찢는 듯한 소음과 함께 2대의 차량이 붉은 꼬리를 남기며 질주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브레이크가 고장이라도 났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거침없이 속도를 높여만 가며 도로와 풍경을 할퀴고 지나갔다. “씨발, 안되겠는데?” “닥치고.” 이미 풀악셀로 밟고 있던 운전자는 혀로 마른 입술을 훑으며 정교한 핸들링을 선보였다. 한 발 앞서 달리는 검은 광택의 벤츠 AMG C63 쿠페의 뒤꽁무니를 거의 박을 듯이 따라 붙었는데, 한 끗 차로 앞서지를 못하니 속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코너!” 옆에서 떠들지 않아도 보인다. 눈이 삐꾸가 아니고서야 저게 안보이겠냐고? 운전자는 현란한 발기술로 기어를 변속하고 코너를 빠르게 진입했다. 차량에 가해진 감속G에 몸이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운전 중인 남자의 왁스로 멋을 낸 머리에 파란 조명이 번쩍이니 그 자체로 사이키나 다름없었다. “윽!” 동승하고 있던 친구가 갑작스럽게 찾아온 G포스에 신음을 냈다. 이 정도로 신음을 낼 정도면 영암서킷은 글렀네. 운전자는 이를 악물고 핸들을 조정하며 악셀을 밟았다가 클러치, 기어 변속, 다시 악셀을 밟았다. 클러치와 악셀의 숨 가쁜 전환 속에서 코너 탈출을 위한 가속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앞선 차량은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다시 100m정도 이어지는 직선도로. 빠르게 최고 속도까지 도달하지만 앞선 차량의 붉은 브레이크 등이 비웃듯이 불을 밝혔다. “흡!” 다시 감속. 몸이 쏠리지만 시선은 앞차의 꼬리에 고정했다. 핸들을 조정했다. 미세한 움직임만으로 하얀 쇳덩어리는 코를 틀어 선두의 뒤를 바짝 쫓았다. “으으으.” 신음인지 떠는 소린지 옆에서 나는 소리가 거슬렸다. 젠장, 지고 있으니까 별게 다 거슬리고 있다. 너무 오랫동안 빨간 불빛을 보고 있었나보다. 시야가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사내는 다음 코너에서 승부를 걸기로 했다. 죽든지, 이기든지 둘 중 하나였다. 다음 코너는 오른쪽으로 굽은 코너였다. 운전자에게 많은 G포스가 가해지는 구간이지만, 버티고 나가면 이기리라. 앞차가 다시 감속을 걸 때, 사내는 핸들을 교묘하게 틀었다. 브레이크는 밟지 않았다. 0.2초라도 늦게 밟으면 저 차를 앞지르는 것은 무리가 아니리라. 다만 정교한 컨트롤로 코너를 진입한 뒤, 재빨리 탈출속도를 얻는 게 관건. 이럴 때 써먹으려고 배워둔 게 있다. 개나 소나 다한다지만 진정한 고수는 정말 필요한 순간에 적절하게 사용하는 법이다. 은색 포르쉐 911 카레라는 선두 차의 왼쪽으로 치고 나갔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핸들을 꺾고 악셀에서 발을 떼는 동시에 브레이크를 순간적으로 밟고 다시 악셀을 힘껏 밟았다. 노면에 접지된 뒷바퀴가 미끌리며 타이어 타는 소음과 냄새가 귀를 웅웅거리게 만들었다. 차는 속도를 잃지 않고 코너를 진입함과 동시에 앞차와 코를 맞추었다. 검게 썬팅된 유리 때문에 보이진 않지만 많이 당황했으리라. “으어어!” 이 정도로 겁먹지 말라고. 사내는 핸들을 뒤틀면서 악셀을 밟은 발에 힘을 풀지 않았다. 하얀 차체가 거친 운전 탓에 덜덜거렸다. 하지만 이내 속도를 잃지 않고 미끌리던 차량이 힘을 서서히 받으며 코너를 탈출해 나간다. “크크.” 이게 드리프트의 묘미다! 잠깐 흥분했었나보다. 핸들이 조금 더 꺾였던 걸까? 차가 중심을 잃고 뒷바퀴가 살짝 들리는 느낌이었다. ‘어?’ 사내는 급히 핸들을 조작하려 하는데, 의도치 않은 피쉬테일이 시작되었다. 자동차의 뒷부분이 좌우로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당황해서 핸들을 조작해보려 할수록 움직임은 더 커져만 갔다. 그리고 순간. ―쾅! **** 1달 전. 명수는 방에서 열심히 손과 다리를 흔들어댔다. “뭐해?” 책을 읽고 있자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춤 연습.” 어떤 음악도 나오지 않는데, 춤이라니? “무슨 춤?” “그냥 춤이야.” 단유는 아무 말 없이 명수를 지켜보았다. 2사람이 쓰는 넓지 않은 방 가운데 서서 두 팔을 휘젓는 폼이 요란했다. 관절이 빠진 사람 모양으로 다리를 흔들어대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픈 사람이라고 착각할 만한 모양새였다. “왜 하는데?” 명수는 헉헉대며 대답했다. “조금 있다가 수련회 가잖아? 그 때 장기자랑 때 하려고.” 공 찰 때보다 더 열심히 하는 것 같긴 한데, 아무리 춤에 문외한인 단유가 보기에도 저건 그냥 ‘흔드는’ 거지 ‘춤’이 아니었다. “음악도 없이?” “아, 원래 있는데 여기서 틀 수 없잖아.” 본래 보육원에서 개인 물품 반입이 불가능하지 않다. 더러 부모님이나 친척들이 선물로 주는 물품들을 개인 소장하는 게 불법은 아니니까. 다만 그런 사치는 가족이 외부에 있는 경우에나 해당하는 것이었고, 단유나 명수는 그런 건 꿈도 꾸지 못할 형편이었다. “형이나 누나들한테 빌리면 안 될까?” 찾아보진 않았지만 물어보면 오디오 플레이어 정도는 빌릴 수 있지 않을까? “아냐, 괜찮아. 음악은 내 머릿속에 다 있어.” 설마,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저 움직임에 리듬, 박자가 있다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어질 단유였다. 보나마나 명수는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원래 그런 성격이니까. 활달하고 쾌활한 성격이지만 남들에게 부탁하는 걸 굉장히 꺼린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 같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낯을 가려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명수는 웬만하면 부탁을 하지 않았다. 다만 단유에게만큼은 예외였다. “후, 석고야. 처음부터 다시 할 테니까, 보고 평가해줘.” 뭘 보고 평가를 하란건지 난감하기만 했다. 애초에 대답은 들을 생각이 없었던 게 분명한 명수는 밑도 끝도 없이 팔을 휘젓고 다리를 흔들어댔다.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는 몸부림이었다. “명수야, 노래라도 부르면서 맞추는 게 어때?” “후, 후, 노래, 후, 부르면서, 후, 하면, 흐후, 힘들어, 후후.” 그래, 힘들어 보이는구나. 단유는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어때?” 단유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좋아.” 명수는 헤벌쭉 헤픈 웃음을 지었다. 저 웃음을 위해서라도 오디오 플레이어를 빌려야겠다. 며칠 뒤, 단유는 명수의 몸부림이 딴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기자랑을 준비해야 된다고요?” 선생님은 2박 3일의 수련회 중 첫날 있을 장기자랑 시간에 보일 장기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물론 단유에게 준비하라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각 반별로 장기자랑 시간에 선을 보여야 했기에, 학급회의 시간에 장기자랑을 주제로 의견을 모으라는 말씀이셨다. 그리고 회의 결과 4반은 노래와 춤을 선보이기로 했다. 의외로 여자아이들이 신이 나서 적극적으로 달려들었고, 16명 정도가 모여 춤을 추기로 했다. 몇 몇 남자아이들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여 함께 구성하다보니 인원이 늘어났다. “저는 연예인이 꿈이어서 집에서도 춤 연습을 많이 했습니다.” “나도 춤 잘 추거든?” 이 때 처음으로 자기 반에 연예인을 꿈꾸는 아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장기자랑에 나가기로 한 16명의 아이들은 최신 유행가에 맞춰 댄스를 선보이기로 했다. 생전 들어본 적 없는 노래였지만, 단유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다만, 이 아이들은 방과 후 수업 후에도 교실에 남아 준비를 하겠다는 의욕을 보였다. 다음 날, 3명이 빠지겠다는 통보를 했다. 부모님이 학원에 빠지는 것을 허락해주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그 다음 날에는 다시 2명이 더 빠지고, 2명이 참가 의사를 밝혔다. 빠지는 2명 역시 학원이 이유였고, 참가를 요구한 2명은 첫날엔 부모님을 설득할 자신이 없어 머뭇거리다가 허락을 맡은 뒤에야 참가 의사를 보인 것이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13명이 장기자랑에 나가게 되었다. 13명이 모여 연습을 하는 시간. 우연히도 시간이 조금 남았던 탓에 교실에 남은 단유는 그들이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교실에 비치된 CD플레이어로 준비된 음악을 재생시키니 스피커에서 쿵쾅거리는 음악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정한 비트의 드럼 위로 각종 전자음이 뒤섞인 일종의 ‘EDM 팝’ 곡이었지만 단유가 알 리 없었다. 다만 음악에 맞춰 춤추는 아이들을 보니, 단순히 7분여를 때우기 위해 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은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맞춘 안무에 따라 춤을 추었다. 개중에는 리듬감 있게 몸을 움직여 보는 사람이 감탄할 수밖에 없게끔 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명수 저리 가라 할 만큼 어설픈 몸짓으로 대충 형(形)만 맞추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꽤나 빠른 비트의 음악에 서로의 동작을 맞추는 그들의 모습은 유치하고 시시하다고 폄하할 수 없는 땀과 노력이 보였다. 첫 번째 시연이 끝나자, 단유는 박수를 쳤다. “대단하다! 멋있어.” 아이들은 반장의 격려에 기분 좋게 웃었다. “우리가 1등 하겠지?” “아니, 너네 1등 못해.” 아이들은 모두 고개를 돌려 대답이 들려온 곳을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 명수가 있었다. 아마 보육원을 가기 위해 데리러 온 듯한데, 마침 4반의 춤 연습을 지켜본 모양이었다. “왜?” “우리 반이 1등할 거니까.” 아이들은 화를 내지 않았다. 명수에 대해 알만큼 아는 아이들이었다. 명수의 이야기에 진지하게 화를 내는 아이들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명수는 의기양양하게 웃음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아이들이 대꾸를 하지 않는 이유가 자기 말이 옳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단유는 빨리 명수를 데리고 가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렀다. “갈게. 연습 열심히 해.” “반장, 잘 가.” 아이들은 대충 배웅하고 다시 연습에 돌입했다. 보육원으로 돌아오는 길, 단유의 머릿속에 조금 전에 들었던 음악이 반복되고 있었다. 몸이 음악에 맞춰 들썩이는 기분이었다. 최신 유행가라는 것을 주의 깊게 들어본 것은 처음이라 낯설면서도 흥이 돋았다. ‘음악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새삼스럽게 음악의 힘을 깨달은 단유였다. 어쩌면 명수도 이 음악을 머릿속에 품고 춤을 췄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수의 몸부림은 조금 전에 보았던 아이들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긴 했다. 좋지 않은 의미로. 단유는 음악이라는 것도 공부해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 혜린이는 거실에서 TV로 영상을 보며 춤을 따라 추고 있었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어서 혜린의 어머니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엄마, 이것 봐봐. 오늘 연습한 거야.” 어머니는 칼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몸을 돌렸다. 혜린이 신나는 얼굴로 음악을 재생시키곤 두 손을 앞으로 포개어 섰다. 박자에 맞춰 발꿈치를 들썩이더니, 이내 절도 있는 동작으로 안무를 선보였다. 자신의 딸이지만 팔 다리가 길고 유연해서 춤동작이 유려해 보였다. 딸이 연예인을 꿈꾼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만약 원한다면 서울로 데리고 가서 오디션도 보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딸은 오디션을 거부했다. “난 아직 준비가 안됐어. 더 연습해야 돼.” 그 이야기를 듣고, 딸이 얼마나 진지하고 진심인지를 깨달은 어머니는 재촉하지 않았다. 애초에 방임주의를 선택한 어머니는 딸의 성장을 즐겁게 바라만 보았다. “어때?” 숨을 고르며 묻는 딸의 말에 어머니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멋있어. 우리 혜린이가 아마 제일 멋있을 거 같은데?” 배시시 웃던 딸이 한 마디 했다. “반장도 우리보고 멋있다고 했어.” 어머니가 정색을 했다. “남자는 안 된다.” 혜린이 까르르 웃었다. 어머니도 금방 표정을 풀고 따라 웃었다. 행복한 모녀의 웃음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 [99] 스피드(2) “이 쌤, 4학년이 가기로 한 수련캠프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1반 담임이자 4학년 주임을 맡은 더벅머리의 선생님이 2반 선생님에게 물음을 던졌다. 요 며칠 아이들 수련회 문제로 신경을 쓰느라 눈 밑이 검게 변했다. “이미 안전점검이 끝났고, 다른 문제는 없다고 합니다. 시설보험도 가입되어 있다고 하던데요.” “안전점검이 끝났다는 말은 아무 문제도 없다는 뜻인가요?” “예. 해당 캠프의 관할소방서에서 실시한 소방시설 점검도 통과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이 쌤이 신경 좀 써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사실 4학년이 수련회에 가는 것에 대해 말이 없지는 않았다. 모든 학교가 시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학교에서는 5, 6학년만 수련회 참석을 허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게다가 초등학생들의 안전문제 때문에 어떤 학교는 아예 수련회를 없앤 학교도 있었다. 하지만 인평초등학교는 4학년부터 수련회를 갈 수 있게 허락 했다. 학교의 수련회가 향후 학생들의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는 감성적인 이유에서 실시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학생들의 정신수양과 단합, 협력, 그리고 체험 교육이라는 취지에 걸맞은 활동이라는 학부모와 학교의 종합된 의견으로 인해 시행되는 것이었다. 물론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다수의 의견은 그랬다. “요즘 방과 후에 각반에서 장기자랑을 연습한다고 들었습니다. 하는 건 좋은데, 너무 시끄럽게 음악을 틀면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 수 있으니 주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주임선생님이 수첩을 보며 한마디 했다. “요즘은 애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댄스만 하려는 거 아니에요?” 한 선생님이 푸념하듯 말을 보탰다. “우리 때는 동요 부르고 그러지 않았나?” “에이, 선생님 때도 춤추고 노래하고 다했죠. 선생님 나이 때면 김완선이나 소방차 아닌가요?” 그 말에 몇 사람이 키득거렸다. “조용하세요. 잡담은 나중에들 하시고. 다른 이야기 없으시면 이만 마치도록 하죠.” 1반 교실에서 간단히 진행된 회의를 끝낸 후, 4반 선생님과 5반 선생님은 나란히 교실로 향했다. “그 반도 댄스라면서요?” “우리 반은 체육부장이 워낙 열성적이어서요.”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는 투다. 하긴 명수라면. “우리 반 애들도 되게 열심히 더라고요. 예전부터 그러긴 했지만, 요즘 아이들 중에는 연예인이 꿈인 애들이 많은 것 같아요.” “사춘기라서 그래요.” “사춘기요?” 5반 선생님은 뒷목을 쓸며 대답을 이었다. “조금 빠르게 사춘기가 온 애들이 독립 성향이 강하다고 하잖아요.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싶어 하는 애들이 정신적으로 스타에게 기대는 경우가 많다잖아요. 그들의 화려함에 정신적인 의지를 하는 거죠. 그리고 스타와 동일시를 하면서 꿈을 꾸는 거죠.” “그냥 어릴 때부터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죠.” “노래와 춤을 그냥 좋아하는 것과 연예인을 꿈꾸는 건 별개라고 생각해요. 노래와 춤을 좋아하고 그 장기를 이어가려는 학생들의 태도와 연예인을 꿈꾸고 행동하는 학생들은 조금 달라요.” “그런가?” 5반 선생님은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목 뒤를 주물렀다. 짧지 않은 회의 시간을 버티느라 힘들었다는 듯이. “원래 아이들이 한 번쯤은 그런 꿈을 꿀 수 있어요. 그런데 너무 심하게 연예인에 빠진 아이가 있다면 적절한 지도가 필요해요. 4학년이면 아직 그럴 때가 아니지만, 5학년이나 6학년 중에 연예인에 빠진 애들 있죠? 그런 애들은 수업도 빼먹고 기획사 찾아간다고 말도 없이 서울로 상경하는 경우도 있다니까 조심해야 돼요.” 교실 앞에 당도한 두 사람이 서로 갈라서기 전, 5반 선생님이 한 마디를 보탰다. “그래도 진지하게 생각하는 아이들이 없는 건 아니니까, 그런 아이들의 의견을 그냥 무시할 수는 없겠죠. 그래서 선생님이란 직업이 어려운 거예요. 아이들의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해줄 수 있어야 하니까요.” “그렇죠.” 4반 선생님은 가벼운 목례로 선배 선생님에게 예우를 갖춘 뒤 교실로 들어왔다. 아이들은 댄스 연습에 매진하고 있었다. 자기 수업할 때보다 더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니 괜히 샘이 날 정도였다. 연습이 거듭될수록 혜린의 표정이 살아났다. 안무 대열의 가장 선두에 서서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춤을 추면 뒷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혜린의 춤과 열정이 전염된 탓인지, 연습이 숙달될수록 아이들의 춤도 점점 늘었다.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선생님은 장기자랑 대회당일 다른 사람들의 표정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 수련회 날짜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명수야. 준비 다 했어?” 보육교사가 방에서 짐 챙기는 것을 도왔다. 아직 어린 두 아이가 처음으로 보육원 밖에서 외박을 하게 되었다는 것에 걱정도 있었겠지만, 보다 걱정인 것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명수 때문이었다. 최근에야 조금 나아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지만, 그래도 명수다. “준비 다했어요.” 명수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속옷은 챙겼니?” 명수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보육교사가 다시 물었다. “왜?” “필요 없어서요.” 속옷이 필요 없다는 명수의 말에 보육교사는 이마를 짚었다. “갈아입을 옷은?” 명수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안 가져가는데요.” “왜? 저녁 되면 춥잖아.” “안 추워요. 그리고 추우면 빌리면 되는데.” “누구한테 빌려?” 명수는 자신만만하게 손가락으로 단유를 가리켰다. “그럼 뭘 가져가는데?” “축구공이요.” “그걸 왜 들고 가!” 보육교사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명수가 주춤거렸다. “제가 체육부장이거든요.” “단유야, 넌 뭐했니? 명수가 저러는 거 못 봤어?” 설마요. 단유는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보육교사는 가방에 불룩하니 솟은 공을 빼버리고 하나하나 점검해가며 짐을 쌌다. 명수는 공을 어떻게 들고 가야 하나를 고민했지만, 보육교사는 틈을 보이지 않았다. “거기서 사고 치지 말고, 혹시라도 문제가 있으면 바로 담임선생님한테 이야기를 하던가 아니면 단유한테 이야기하도록 해. 단유는 다른 반이더라도 명수 좀 챙기고.” 명수가 영 못 미더운 보육교사의 당부를 뒤로하고 두 사람은 취침에 들었다. 명수는 베개를 베자마자 잠이 들었지만 단유는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기대감? 흥분? 이런 감정보다는 낯선 경험을 앞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지금껏 비교적 안전한 생활을 영위해 왔다지만 고작 보육원과 학교를 오가는 수준에서 생활해왔던 단유였다. 요 며칠간 선생님이 안전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보여준 시청각 자료의 영상도 떠올랐다. “낯선 곳에서 선생님 허락 없이 돌아다니지 마세요.” “낯선 사람의 부탁을 함부로 들어주거나 따라가면 위험해요.” “불장난을 하면 위험해요.” “친구들과 위험한 장난을 하지 마세요.” 솔직히 그 정도라면 위험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늑대, 스크로파, 거대 새, 수직의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정도라야 위험이라고 여겨볼 만하지 않을까? 하지만 단유를 괴롭히는 것은 ‘위험요소’가 존재한다는 그 사실 자체였다. 생존이 제 1의 원칙이었던 루치드와는 달리 단유라는 이름의 자신은 독립이 제 1원칙이다. 위험이 적은 사회라는 인식 하에, 생존에 매달려 외부 세계로부터 자신을 격리하려는 자세 대신 독립을 위한 준비로서 세상과 마주하기로 결심했던 단유였다. 그런데 ‘위험요소’의 상기는 지난날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자신의 결심을 위축되게 만들었다. ‘살지 못하면 독립도 없는 것 아닌가?’ 부모도 없고, 무슬라도 없다. 여전히 자신은 한 명의 어린 소년에 불과하다. 운동을 했다지만, 그래봐야 10살의 약하디 약한 꼬마에 불과하다. 주위에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위험이 닥쳤을 때, 자신이 스스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면 쉽게 대답하기 어려웠다. 이런 걱정을 할 줄 알았다면 보다 열심히 마법을 수련했을 텐데. **** 다른 이유로 잠 못 드는 아이가 또 있었다. “엄마, 나 내일 실수하면 어떡하지?” 혜린이 이불을 뒤집어 쓴 상태에서 눈만 내밀어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달빛처럼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혜린의 이마를 쓸어내렸다. “걱정 마. 혜린이가 그 동안 열심히 준비했으니까 아마 실수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실수 좀 하면 어떠니? 우리 혜린이는 귀여우니깐 다른 친구들도 애교로 봐줄 거야.” “그래도 무대에서 실수하면 엄청 창피할 거 같아.” “아니야. 안 창피해 해도 돼.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거야. 설령 실수해도 당당하게 티내지 말고 하면 돼. 나 이만큼 연습했다, 하는 걸 보여주면 되는 거야. 그러면 선생님들이나 아이들이 모두 혜린이보고 멋지다고 할 걸?” “정말?” “그럼, 엄마가 거짓말 하는 거 봤어?” “…….” “왜 그런 눈으로 보니?” “엄마 거짓말 자주 해.” 혜린의 어머니는 의아한 눈으로 딸을 쳐다보았다. “언제? 무슨 말을 했는데?” “나 별로 안 예쁘고 안 똑똑한데 맨날 아줌마들한테 거짓말하잖아.” 어머니는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무슨 말이니, 너 예뻐. 예쁘고 똑똑해. 누가 너보고 안 예쁘대?” “…….” “누가 놀려?” “아니. 근데 우리 반에 예쁜 애들 엄청 많은데, 난 별로 안 예쁜 거 같아. 공부도 못하고. 유림이는 부반장인데 키도 크고 예쁘고 공부도 잘하는데.”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혜린아. 넌 정말 예쁘고 똑똑해. 시험 잘 못 본다고 안 똑똑한 거 아냐. 너 TV에서 가수들이 춤추는 거 보면 금방 따라할 수 있지?” “응.” “그거 아무나 못해. 한 번 보고도 금방 외워서 따라 하잖아. 머리가 좋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야. 그리고 예쁜 것도 기준이 조금씩 다를 뿐이야. TV에 나오는 가수들이 모두 다르게 생겼지만 다 예쁘다고 하잖아? 너도 그래. 유림이도 예쁘겠지만, 너도 예쁜 얼굴이야.” 아무리 엄마라지만 너무 오글거린다 싶어서 혜린은 이불을 둘러썼다. “푹 잠을 자야 몸도 개운하고 컨디션이 좋아질 거야. 그래야 내일 춤출 때 실수 안하지. 그렇지?” “응. 잘게요.” 어머니는 방의 불을 끄고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서는 낮은 소리로 뉴스 앵커가 뉴스를 보도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파에 앉아 뉴스를 보았다. 건물 외경이 보였다가, 인터뷰하는 장면이 보였다가, 그래프도 나오는데 어머니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혜린이 저렇게 자존감이 약해진 데는 자신의 책임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혼할 때 자녀의 정신적 충격에 대해 자문도 들었지만 막상 이렇게 현실에 부딪히니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마치 자기 때문에 부모가 이혼했다고 생각할까봐, 그 점에 대해 여러 날 동안 이야기를 했었고, 그 이후 혜린이 늘 밝은 표정을 지으며 생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조금은 안심하고 지냈는데, 갑자기 저런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에서 마른 껍질 갈라지듯 쩍 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오늘 밤 쉽게 잠들기 어려울 것 같았다. **** “선배, 담배 끊으시죠.” “끊었잖아?” “전자담배도 담배예요.” 전자담배의 LED등이 반짝였다. 이윽고 선배의 입에서 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솟아올랐다. “전자담배에는 타르가 없어서 건강에 무해해.” “타르가 아니더라도 암을 유발하는 물질이 많이 들어 있다잖아요.” “그거 다 언론플레이야. 담배를 안사면 세금이 덜 걷히니까 전자담배에도 세금 물리려고 하는 공작이라고.” 말해뭐하나. 귓등으로 듣지 않을 걸 알면서도 한마디 해봤다. 주영은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색 벤츠가 고급스런 광택을 뽐내고 있었다. “저건 왜 끌고 온 거예요?” “그냥, 드라이브도 할 겸.” “나 참. 이 산 구석에 퍽도 어울리네요. 밑에 다 망가져요.” “망가지면 새로 사면 되지.” “우와.” 금수저스러운 답변에 주영이 입을 쩍 벌렸다. “왜? 뭘 놀라는 척을 해? 그러는 넌 계절별로 가방 모으잖아?” “가방이랑 저거랑 같아요?” “같은데? 취미로 모으는 거잖아.” 범접할 수 없는 금수저였다. “갈 때 태워줄까?” “저도 차 가지고 왔거든요? 그리고 전 여기 남아서 일 봐야 돼요.”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고 앞장서서 건물로 들어섰다. 이 외진 지역에 하나 있던 이 학교는 폐교가 된지 10년이 지났고 그 이후 각종 수련회 캠프로 쓰이면서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다. “위치가 별론가?” “큰 길에서 조금 벗어난 것 같지만, 이정도면 적당하지 않아요? 오히려 가까운 게 이상하죠.” “그런가?” 선배는 다시 전자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내 입과 코로 짙은 연기가 시야를 가릴 정도로 뿜어졌다. ======================================= [100] 스피드(3) 출발하는 날의 아침부터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선선한 바람에 아이들의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대절한 7대의 버스가 줄을 이어 고속도로 위를 달릴 때,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선생님들은 일부러 엄한 분위기를 잡으려 애썼다. 4반 역시도 버스 안인지 전통시장 골목길인지 알 수 없는 분위기가 연출되자 선생님이 일어나 마이크를 잡았다. “4반.” 에코가 너무 많이 들어간 탓인지 웅웅거리는 울림이 버스를 가득 메웠다. 아이들은 귀를 막고 마이크를 든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기사에게 에코를 줄일 수 있냐고 묻곤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버스 안에서 어떻게 해야 된다고 했지?” “조용히 해야 되요.” “친구들이랑 이야기할 때도 조용히 해야지, 안 그러면 기사아저씨가 시끄러워서 운전을 못해요. 그렇죠?” “네!” 선생님은 저 아이들이 30분만이라도 조용히 있어주기를 바랬다. 지금까지 경험해 본 바에 의하면, 저들이 30분만 침묵을 지키면 반 이상은 마법에 걸린 것처럼 잠들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아이들이 2분도 지나지 않아 소곤거리기 시작했지만, 이 정도는 참을 만하다 여겼다. “조금 시끄러워도 양해해 주세요.” 기사에게 넌지시 부탁을 했다. 50대 중년의 기사는 껄껄 웃으며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초등학생들이 탄 차를 운전한다고 했을 때부터 이미 각오했던 바였다. 그리고 저 아이들이 아무리 떠들어봐야 아줌마부대의 춤바람은 이기지 못할 터였다. 덩치도 큰 아줌마들이 좁은 좌석 사이에서 쿵쾅거리며 춤추고 노래 부르며 술판을 벌이는 와중에도 고속도로 위를 시속 100㎞로 달려본 경험이 있는 운전기사였다. 한편, 중간 자리에 앉은 단유는 가만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친구는 건너편 자리에 앉은 아이랑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쑥덕대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젯밤을 설쳤던 까닭에 머리도 멍했고 달리 끼어 들 명분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젯밤부터 시작된 고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마법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이전처럼 적극적으로 마법을 배우지 않으면 큰일 난다는 절박감이 없었다. 물론 절박감이 있더라도 쉽게 마법을 배우는 것은 어려웠다. 이미 많은 것이 이전과 달라졌다. ‘김단유’라는 정체성을 인정한 이후로, 세계와 사물을 바라보는 인식과 인지 체계가 바뀌었다. 직관적이며 추상적인 사고에 의지한 인지체계에서 벗어나, 분석과 논리를 도구로 구체적이며 실증적인 인지체계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마법은 이러한 인지체계에서 ‘아나그노리시’, 즉 ‘인식’이 어려웠다. 안트는 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했었다. “이곳에서 가장 쉬운 마법의 하나로 꼽는 게 사실은 사물구현마법이다. 그 중에서도 돌이지. 정형적인 형태를 갖지 않으면서 그 속성은 누구나 알 수 있거든. 돌은 돌이야. 이게 당연한 인식이지. 그런데 넌 그게 안 되는 거지. 왜냐하면 너의 머릿속에서 돌은 여러 가지 성분들이 포함된 ‘광물질’로 인식되니까. 그 성분들 하나하나도 또 다른 성분으로 분해될 수 있다고? 그럼 그 성분마저 인지해야 하는데 과연 그게 가능할까? 때문에 그런 인식 체계라면 돌이란 것을 원형 그대로 인식한다는 게 어려울 것이다.” 집어들었던 돌을 숲 밖으로 내던지며 안트가 말을 이었다. “세포라든가, 분자라든가… 니가 말한 그런 속성들에 대해 내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런 식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게 그 쪽 세계의 진리라면, 그 세계에서 마법은 쇠퇴하거나 아니면 사멸했을 거다. 아니면 아예 발현이 불가능했던 세계일 수도 있고.” 안트의 말 때문이 아니더라도, 지난 시간동안 단유는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법 때문에 공부를 안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이곳의 학문 체계에 길들여진 상태인데다가, 이곳에서 살기 위해서는 마법보다 학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옆을 돌아보니 어느새 주변의 아이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어쩐지 조용하더라니. 단유는 슬며시 손바닥을 들어보았다. 그리고 가만히 응시했다. 아직 작고 하얀 손바닥에 불과했다. 단유는 주먹을 꾹 쥐었다. 뭔가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는 강한 열망을 담아 손이 하얘지도록 쥐었다. 하지만 강한 열망만큼 두려움과 불안감이 커져가고 있었다. **** “여기가 입지가 좋은 지 잘 모르겠네요. 너무 외떨어진 기분도 들고.” “그래서 좋은 거지. 높으신 분들이 조용히 요양하러 오기 딱 좋잖아. 서울에서 너무 멀지도 않고. 앞에 도로만 잘 나면 그만이겠는데?” “도로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로비 좀 하면 되지 않을까? 이왕이면 요 앞에까지 잘 닦아달라고 기름칠 좀 해야지. 몇 백억 짜리 병원이 들어올지도 모르는데 설마 가만히 있겠어?” 은발 사내는 연신 전자 담배를 뻐금거리며 폐교 본관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산을 뒤로하고 높이 10층짜리 초호화 병원이 건설된다면…. 거기다 앞에 놓인 개천도 돈 좀 들여서 정비하고, 뒷산에 등산로도 좀 닦아두고 그러면 거의 리조트 급 병원으로 우대받을 지도 모르겠다. “선배, 그런데 이제 머리 좀 새로 염색하는 게 어때요?” 보라는 땅은 안보고 남의 머리나 관찰하고 있네? “안 그래도 할 거야. 니가 그렇게 콕 집어서 말 안 해줘도 할 거라고.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아침에 할아버지도 한 소리 하시더라.” “뭐라고요?” “걸레를 머리에 얹고 다니냐, 고.” 주영은 고개를 돌리고 실소를 지었다. 감히 보는 앞에서 웃음을 터뜨릴 수는 없으니까. “연재훈, 정말 많이 죽었구나. 후배한테 비웃음이나 사고.” 먼 산 바라보며 푸념을 늘어놓는 말에, 주영이 표정을 가다듬고 변명했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선배를 비웃겠습니까?” “이상한 다나까는 쓰지 마시고. 지적도나 한 번 보자.” 주영은 들고 있던 태블릿을 꺼내 지적도를 보여주었다. “몇 사람이지?” “4명에게서 사들이면 이 곳 부지매입이 완료될 것 같아요.” “급한 건 여기랑 여기니까, 이것부터 해결하도록 해.” “알겠어요.” “공기도 좋고, 땅도 넓고, 주위에 사람도 적고. 나쁘진 않겠네.”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던 중, 주영이 눈치를 보며 넌지시 말했다. “선배, 나 화장실 좀.” “그런 건 말하지 말고 그냥 가라. 내가 그런 거 신경 쓰냐?” 주영은 재훈을 힐끗 노려보았다가 이내 본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주영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재훈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10대 재벌가에 속하는 분이시다. 그 할아버지가 말년에 의료사업에 관심을 쏟는 것은 단지 자신의 노구 때문만은 아니었다. 손자인 재훈이 국내 유명 의대에 진학을 하게 되면서부터 조금씩 관심을 두고 계셨다. 게다가 재훈의 형이 사업을 물려받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막내손자에게 색다른 선물을 준비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볼 따름이다. 그렇다면 선물을 받는 당사자로서 재훈은 자기 몫은 알뜰히 챙겨야 했다. 단순히 의료 법인 설립하고 병원 하나 뚝딱 짓는 것으로 그칠게 아니라 다른 가족들 모두가 감탄할 정도의 성과는 거둬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게 재훈의 계산이었다. 마침 눈치 있고, 말 잘 듣고, 몸매도 좋은 후배가 많은 도움을 주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산골 벽지에 병원 하나 짓는 걸로는 재훈의 야심을 채울 수 없었다. 영리 의료 법인만으로 형을 뛰어넘는 성과를 보이겠다는 재훈의 야망은 이곳에서부터 시작이 될 뿐, 여기서 끝나지는 않으리라. “저기, 누구신지?”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았다. 멀겋게 메마른 얼굴의 남자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화장실이 어디야?” 이 작은 건물 안에 화장실이 없을 리가 없는데 보이지가 않았다. 오래된 건물치고 청소가 잘 되어 있었지만 주영은 그걸 알아보지 못했다. 복도에는 흔한 쓰레기 하나 보이지 않았고, 천장에는 거미줄 하나 보이지 않는데, 주영은 그저 오래된 외벽 페인트의 바래진 푸른색만 머리에 담아두고 있었다. 연녹색 벽 위로 낡은 나무창들을 바라보며 시멘트 바닥 위를 걷던 주영은 걸음을 멈췄다. “밖에 있나?” 이럴 줄 알았으면 건물 주위를 다 돌아볼 걸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 때였다. “누구세요?” 흠칫 놀란 주영이 급하게 뒤를 돌다가 덩치 큰 사내가 바로 뒤에 서 있다는 사실에 놀라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앗!” 덩치도 웬 낯선 여자가 자길 보더니 마치 도깨비라도 본 것 마냥 놀라면서 넘어지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래도 사람이 넘어졌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다가가려는데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아악!” 여자의 비명이 복도를 지나 바깥에까지 울려 퍼졌다. **** 갑자기 나타난 메마른 얼굴의 남자는 사실 인평초등학교 수련회의 수련캠프를 돕기 위해 와 있던 사람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학교에 와 있었던 남자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수련캠프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캠프 기간 동안 쓰일 각종 기자재를 트럭에 싣고 왔을 뿐만 아니라 수련회 기간 동안 이용될 건물 상태를 최종 점검 하고 있었다. 지난주에 다른 학교가 한 번 사용했던 터라 청소는 비교적 되어 있던 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구석구석마다 살피며 남겨진 쓰레기는 없는지, 깨진 창문이나 부서진 곳은 없는지를 확인했다. 아침도 먹지 않고 일하다가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칭얼대는 동료를 위해 다함께 차를 타고 10분 거리에 있는 읍내 식당으로 갔었다. 늦은 아침을 마친 무리가 학교로 돌아오니 낯선 고급 승용차가 운동장에 서 있었다. “뭐야? 저건?” “벤츤데?” 누가 그걸 몰라 물을까? 마른 얼굴의 사내가 차에서 내려 벤츠에 다가갔다. 차에는 아무도 없었다. “일단 이 대리랑 너는 교문 앞에 현수막부터 설치해. 이제 곧 도착할 테니까 할 일은 해야지. 넌 나랑 같이 안에 들어가 보자.” 아무도 오지 않을 벽지라 감시자 한명 두지 않고 읍내로 나섰던 부주의함을 속으로 탓하며 마른 사내는 덩치를 데리고 본관으로 향했다. “넌 교실에 가서 기자재 확인해봐. 난 학교 뒤로 둘러보고 갈게.” “예.” 짤막하게 지시를 마친 사내는 곧장 건물 뒤로 돌아갔다. 몇 걸음 안가 사내는 고급차의 오너로 보이는 남자를 발견했다. 누가 봐도 차주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게, 이런 산골에서 화려한 은발에 키는 180을 넘을 듯 훤칠한데다, 어깨도 떡 벌어진, 캐주얼 정장 차림의 남자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농사 짓는 할아버지가 저런 모습이라면 그야말로 난센스다. “저기, 누구신지?” 사내의 물음에 은발의 사내가 돌아보았다. ‘얼굴도 잘생겼네.’ 얼굴이 합쳐지자 꽤 잘나가는 패션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외형이었다. “그러는 그 쪽은 누구신지?” 듣기 좋은 중음의 목소리에 사내가 대답하려는 찰나였다. “아악!” 건물에서 들려온 여자의 비명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돌아갔다. 먼저 움직인 것은 은발의 사내, 재훈이었다. 건물에 들어선 재훈은 복도 중간쯤에 선 덩치의 사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사내 앞에 넘어져 있는 여자는 다름 아닌 주영이었다. “주영아!” 재훈이 고리눈을 하고 뛰어갔다. 그 기세가 요란해, 덩치는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되레 뒷걸음질로 물러나려 했다. 재빨리 다가간 재훈이 쓰러진 주영을 먼저 부축하려 했다. “아악! 선배! 잠, 잠깐만!” 재훈이 주영을 안아들려 하는데 주영이 먼저 큰 소리로 제지했다. “왜?” “나 손목.” “응?” “넘어질 때 다쳤나봐요.” 재훈이 덩치를 째려보았다. “이 새끼가?” 덩치는 흠칫 놀라 더듬거리며 변명을 하려고 했다. “아, 아니에요. 저 아니에요.” “김 대리, 무슨 일이야?” 뒤따라 재훈의 뒤를 쫓아온 마른 얼굴의 사내, 박 과장이 물었다. “김 대리?” 재훈이 박 과장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 [101] 스피드(4) 박 과장은 자신들이 이벤트회사 직원이며 초등학교 수련캠프 때문에 와서 일하던 중임을 알렸다.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희야 말로 놀라게 해드린 것 같아 죄송하네요.” 엄밀히 말하면 죄송할 일이 아니지만, 저리 정중하게 사과하니 저절로 그런 반응이 나왔다. 화려한 은발의 사내의 모습에 ‘양아치’ 정도를 떠올렸던 박 과장은 재훈의 바른 태도와 정중한 어투에 생각을 고치고 응대했다. 적지 않은 사회생활에서 쌓인 경험이 눈앞의 사내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다. “일단 제 후배가 다친 것 같아 먼저 일어서야 겠습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까운 병원이 조금 먼데….” “네비 따라 가면 되겠죠. 그럼 수고하십시오.” 재훈은 다시 고개를 숙인 뒤, 주영을 부축하여 자신의 차로 이동했다. “어디가 아픈데?” “손 등이 시큰거리는 게… 부러진 건 아니겠죠?” “골절은 아닐 거야. 골절이라면 니가 지금 내 옆에서 이러고 있을 리가 없을 거니까.” “왜요?” “아파서 죽는다고 바닥을 뒹굴고 있었겠지?” 주영은 도끼눈을 뜨고 재훈을 째려보았다. 재훈은 피식 웃으며 조수석 쪽의 문을 열어주었다. “학교에서 이런 건 공부 안 해요?” “그런 건 본과 가서 하는 거야. 난 아직 예과야.” 시동이 걸리자 거친 엔진음과 함께 잔 떨림이 느껴졌다. 재훈은 주영의 안전벨트를 걸어주며 물었다. “엉덩이는 안 아파?” “엉덩이는 괜찮거든요.” “어떻게 뒤로 넘어진 애가 엉덩이는 안 다치고 손을 다치냐? 엉덩이에 뽕이라도 잔뜩 넣은 거 아냐?” “선배, 그거 성희롱인데요?” “고소해.” 네비를 조작한 후, 재훈은 차를 몰아 교문을 빠져나갔다. 주영은 이 요란스러운 남자가 자신에 대한 걱정을 농담으로 대신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대놓고 웃을 수가 없어 창밖을 바라보며 슬쩍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오해한 재훈이 넌지시 한 마디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골절이라도 깁스하면 금방 나을 수 있어.” “…….” “잘 붙잡고 있어. 단순 골절인지 복합 골절인지 몰라도 신경 손상가지 않게 하려면 부목이라도 댔어야 하는데 정신이 없어서 그냥 나와 버렸네.” “…….” “골절 아닐 거야. 정도나 부위에 따라 통증의 정도가 다르다지만 아마 염좌 정도일지도 모르니깐 너무 걱정하지 마.” “걱정 안 해요.” 재훈은 흘낏 눈치를 본 뒤, 말없이 운전만 했다. 제법 놀아본 것처럼 보이는 이 남자도 여자 마음은 잘 모르나보다. 손은 아팠지만 마음은 따뜻해진 주영이었다. **** 「환영합니다! 인평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 여러분!」 저 문구를 보고 있자니 괜히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수련캠프라고 불리는 폐교는 낡은 탓인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고, 바람에 흔들리는 낡은 철 구조물에 매달린 현수막은 끼익 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이들을 환영했다. “반별로 줄서세요.” 단유의 개인적 감상과 달리, 대부분 아이들은 들떠 있었다. 생애 처음이라고 해도 무방할―부모님이 동행하지 않은―외박을 앞둔 아이들은 마치 거대한 놀이공원에라도 온 것처럼 굴었다. 즐비하게 늘어선 아파트도 보이지 않았고, 학교 앞 분식점이나 학원들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초여름을 맞이해 밝은 녹색으로 치장한 산들로 주위를 메우고 소나무, 전나무 같은 큰 나무들 뿐 아니라 작살나무, 산사나무 같은 작은 나무들도 주위에 뿌리 내리고 있었다. 비록 낯설고 부모님도 안계시지만, 친자연적인 환경에 놓인 아이들은 친구들과 함께 ‘모험’이라는 판타지를 꿈꾸며 들떠있었다. “반장, 뭐하니?” 담임선생님의 부름에 단유는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뛰어갔다. 종종 정신을 놓고 있는 것이, 확실히 정상 컨디션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 뭐라도 하면서 몸을 움직이려 했다. 간단한 입소식을 마친 후, 각 반은 배정된 교실로 이동했다. “자, 선생님 따라 오세요.” 이 곳까지 오는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게 억울했던(?) 아이들이 우리를 탈출한 병아리 떼처럼 떠들어대는데, 선생님도 반쯤은 포기했다. 교실로 들어서니, 바닥에 매트가 깔려 있었다. 남자아이들은 얼씨구나 하며 배운 적도 없는 낙법을 하느라 난리가 벌어졌다. “4반! 4반! 선생님 말 들어야지!” “우아~. 야!” “선생님, 얘가 욕해요!” “야!” “우와!” 선생님은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떠드는 사람은 점심 못 먹어요.” 곧 4반에 굶주림에 눈 먼 평화가 찾아왔다. 몇몇은 못 먹어도 고, 라고 떠들 기세였지만 다른 아이들의 눈총에 몸을 사렸다. “12시부터 점심식사니까 각자 자신의 짐을 교실 뒤편에 두고, 나오도록 해요. 알았죠?” “네.” “반장은 교실에서 마지막까지 기다렸다가 다른 아이들이 모두 나가는 걸 확인하고 나오도록 하고.” “예.” 단유는 순순히 지시에 따랐다. 분주한 정리 시간과 함께, 남자아이들은 곧 운동장으로 뛰쳐나갔다. 점심은 운동장 한편에 마련된 천막에서 배식이 될 예정이었다. 짐이 섞이지 않도록 정리를 돕던 단유의 어깨를 누군가가 두드렸다. 돌아보니 유림이 손에 든 걸 건넸다. “뭐야?” “저쪽에 가방을 두려고 하는데 이게 떨어져 있어서 주워왔어. 누가 떨어뜨린 건지는 모르겠는데.” 유림이 교실 뒤의 어느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손에 들린 것은 다름 아닌 태블릿이었다. “이게 뭔데?” “태블릿.” “그게 뭔데?” “…….” 이럴 때 놀리면 안 된다고 배운 유림은 간단하게 설명했다. “컴퓨터 같은 거야.” 멀뚱히 쳐다보던 단유가 말했다. “니가 선생님 드려.” 니가 주웠으니 니가 처리해, 라는 반응이었다. “반장이 줘.” “너도 부반장이잖아.” “……” 귀찮다는 것일까, 아니면 부반장이니까 알아서 하라는 것일까. 다행히도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셨다. “반장, 너도 가서 식사해야지.” “선생님. 교실에서 이거 주웠어요.” 선생님이 받아보니, 액정에 금이 가긴 했지만 작동이 가능한 태블릿이었다. 암호가 걸려 내용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모양새로 봐선 아이들이 쓸 만 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래. 선생님이 주인 찾아볼게.” 캠프 준비하던 사람들이 놓고 간 것일지도 몰랐다. 선생님은 태블릿을 챙겨 아이들과 함께 교실 밖으로 나갔다. **** “어디 뒀지?” “뭘?” “태블릿이요.” “없어?” “예. 어쩌면 거기서 떨어뜨렸었나 봐요.” “학교?” 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미안하다는 표정이었다. 30분에 걸쳐 달려온 병원에서 X선 촬영 판독 결과 뼈에 금이 갔다는 소견이었다. “손등에 선상골절이라. 운이 좋은 건가, 나쁜 건가?” “무슨 뜻이에요?” “완전히 부러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다쳐도 하필 손등을 다쳤다는 점에서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놀리는 거예요?” “응. 놀리는 거야.” 주영은 깁스가 된 팔을 들어보였다. “이걸 보고도 놀릴 거예요?” “그걸 보고 놀리고 있는 거야.” 한숨을 내쉬는 주영을 보며 재훈은 슬쩍 팔을 들어 어깨동무를 했다. “2주면 풀 수 있다니까 조금만 참도록 해.” “저리 치워요.” 어깨를 털어내는 주영이었다. “돌아가자.” “어디요?” “어디긴? 집이지.” 주영은 가방을 둘러메다 그제야 태블릿을 학교에 떨어뜨리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죄송해요.” “니껀데 왜 나한테 죄송해 하냐? 그리고 거기 금방 가. 얼마나 걸린다고.” “저 때문에 번거롭게 돼서.” “그런 건 걱정하지 말래도. 내가 시간이 남아도는 거 잘 알잖아.” 어차피 예과다. 예과라고 만만한 건 아니지만 본과 들어가기 전까지 마음 놓고 놀 셈이었기에 얼마 전에도 주말을 맞아 유럽으로 잠시(?) 놀다오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의 머리도 유럽가기 전에 기분이라도 낼 겸해서 염색한 머리였다. “아, 잠시만.” 재훈은 아까 박 과장이라는 사람에게 받은 명함을 꺼내들었다. “여보세요? 박 과장님 되시나요? 예, 저는 아까 학교에서 마주쳤던 연재훈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 후배가 거기에 태블릿을 떨어뜨렸다고 해서요. 혹시 습득하신 게 있으신지 여쭤보려고 전화 드렸습니다. …아, 그래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가… 나중에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거기 언제까지 계실건가요? 예. 알겠습니다. 예, 그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뭐래요?” “있대.” 주영이 반색하며 웃었다. “다행이네요.” “그래. 가자.” 두 사람을 태운 차는 읍내를 나와 도로 위를 달렸다. “어디 가는 거예요? 아까 이 길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 뭐라도 먹고 가자고. 어차피 태블릿의 소재도 확인했고, 소지한 사람의 전화번호도 있는데 급할 게 뭐 있어?” “그래도 찾고 나서 먹죠?” “이 근처에 유명한 가든 식당이 있다더라. 배나 채우고 가지 뭐. 다시 돌아오기도 귀찮은데.” 주영은 재훈의 계획을 꺾지 못했고, 덕분에 두 사람은 꽤 괜찮은 식사를 할 수 있었다. **** 혜린은 점심시간 이후 가진 창작놀이시간에도 집중을 하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계속 안무만 떠올리며 저녁에 있을 장기자랑을 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탓이다. “잡았다!” 모둠별로 팀을 이루어 곳곳에 숨겨둔 문제를 풀어 시간 내에 푼 팀이 풀지 못한 팀을 잡는 게임이었다. “어?” 혜린은 혼자 얼이 빠져서, 같은 모둠의 아이들이 도망가는 동안에도 가만히 서 있다가 그만 추적팀에게 잡히고 말았다. 추적팀에게 잡힌 아이들은 지정된 자리에서 대기하였다가 자신의 모둠이 추적팀이 되면 합류하게 된다. 반대로 모둠이 추적팀에게 모두 잡히면 그대로 탈락이 된다. 머리와 몸을 동시에 사용하는 터라 대부분 아이들은 신나게 게임을 즐겼다. 「가로, 세로, 대각선의 합이 똑같아지도록 숫자를 넣으세요.」 9개의 칸에 1부터 9까지의 수를 조건에 맞게 넣는 마방진 퍼즐이었다. 제시된 문제에는 5개의 숫자가 미리 입력되어 있었기에 4개의 숫자를 알맞게 넣으면 되는 문제였다. 아이들이 문제를 받자마자 단유에게 문제를 넘겼다. 단유는 빤히 바라보더니, 곧 숫자를 기입했다. 그 놀라운 속도에 바라보던 선생님의 눈이 커졌다. 단유는 카드를 돌려주었다. 선생님은 정답을 외치고, 모둠에게 추적팀 완장을 주었다. 그리고 5분간 모둠은 완장이 없는 팀들을 쫓아야 한다. “잡았어.” 추적팀이 될 때마다 단유는 반드시 한 명은 잡았다. 단유가 달리기 시작하면 웬만해선 다 잡혔다. 하지만 단유는 한 명 이상을 잡지는 않았다. 뒤늦게 눈치 챈 아이들이 단유만을 피하려고 했고, 재수 없게 잡히면 투덜대기 일쑤였다. “왜 하필 나야.” 단유의 답은 명쾌했다. “니가 제일 똑똑해.” 잡힌 아이는 아쉬우면서도 기분이 좋았고, 단유네 모둠도 매번 추적팀이 되니 기분이 좋았다. “단유야.” 담임선생님이 불렀다. “네?” “미안한데, 이리로 와 줄래?” 단유가 다가가니 선생님이 그를 데리고 조금 외떨어진 곳으로, 아이들의 귀가 닿지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이런 이야기해서 미안한데, 넌 선생님들이랑 같이 외곽에서 애들 정리하는 거 도와주지 않을래?” “그럴게요.” 단유는 쉽게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실 선생님들은 일부러 단유를 빼기 위해 핑계를 만든 것일 뿐이었다. 단유가 있음으로 해서 게임의 균형이 맞지 않아서였다. 말하자면 단유가 먼치킨이었다. 단유네 모둠은 별다른 머리도 쓰지 않고 단유의 능력에 편승함으로써 제대로 게임의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고, 다른 모둠의 아이들은 먼치킨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양민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유가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아이고 이것 봐라. 이게 다 몇 명이야?” “수련캠프로 쓰인다더니 그게 마침 오늘이었네요.” 학교 안까지 들어오려다가 학생들의 수련회활동 때문에 들어오진 못하고 외부에 차를 세워둔 재훈과 주영이었다. 낮은 담 너머로 바라보니 아이들이 악인지 비명인지 모를 괴성들을 질러대며 요란스럽게 놀고 있었다. “저 옆으로 해서 들어가실래요?” “그래.” 막 교문을 지나는데, 한 아이가 외따로 떨어져 앉아 있었다. 그냥 지나치려던 재훈이 변덕을 부려 아이에게 다가갔다. “꼬마야. 넌 왜 같이 안 놀고 혼자 있어?” 앉아 있던 꼬마가 뒤를 돌아보았다. 잘생긴 꼬마네, 재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 [102] 스피드(5) 단유는 낯선 사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머리카락이 은발인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나이가 몇일까? “혹시 애들이 따돌리니?” “선배, 무슨 그런 말을 해요?” 듣는 애 상처받을 말을 대놓고 하는 게 민망할 지경이었다. 주영이 재훈의 팔을 잡아 끄는데, 재훈은 낚싯대 드리운 강태공처럼 쉽사리 자리를 옮기려 하지 않았다. “아니, 저렇게 선생님들도 계신대 애가 이렇게 떨어져 있는 게 이상하지 않아?” 머뭇거리던 주영이 머리를 굴려 답을 내놓았다. “다쳤을 수도 있잖아?” 저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다보면 넘어지는 아이도 있고, 다치는 아이도 있으리라. 물론 눈앞의 꼬마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지만. 재훈이 아이를 응시했다. 그러나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단유가 대답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했다. 재훈이 낯선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유로 접근했는지도 모르겠고, 자기들끼리는 쑥덕인다고 소곤대는데 그게 다 들렸다. 자기 마음대로 오해하는 내용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굳이 그걸 풀어줘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아서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낯선 이의 질문에 대답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했다. “가자, 선배. 왜 그래? 갑자기? 왜 어울리지 않게 고집이야?” “아니, 별 건 아니고 괜히 사람 차별하는 거 같잖아. 얘도 지네들이랑 같이 왔을 텐데 왜 애를 이렇게 방치 하냐 이거지, 난.” 평소에는 있는 줄도 몰랐던 오지랖을 부리니, 주영은 난감하기만 했다. “안 되겠다. 니네 선생님 어디 있어? 내가 좀 물어봐야겠다.” “…뭘요?” 단유는 이대로는 일이 커지겠다 싶어서 입을 열었다. 이 사람도 어쩌면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 대답하네?” “뭘 물어보시겠다는 거죠?” “당연히 널 왜 이렇게 따로 빼고 자기들끼리만 놀고 있는 건지를 물어보려고 하는 거지.” “선생님이 절 따로 떼어 놓았다는 건가요? 저 아이들로부터?” 재훈은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방금 아이의 답변에서 어쩐지 묘한 뉘앙스가 느껴졌다. 가만 바라보니 아이의 얼굴에 딱히 흠을 잡을만한 표정이 없었다. 화를 내지도, 슬퍼하지도 않는 얼굴이었다. 마치 뉴스 앵커 같은 얼굴로 카메라를 바라보듯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기심일까? 재훈은 무릎을 꿇고 아이와 눈을 마주했다. 가까이에서 바라본 아이의 눈은 크고 맑다는 느낌이었다. 청명한 저녁 노을빛 서린 눈동자였다. “처음에도 물었지만, 혹시 애들이 널 따돌리니?” “오해하신 것 같네요. 친구들은 절 따돌리지 않아요.” “그럼 왜 혼자 여기 있어? 다른 친구들은 모두 운동장에 있는데?” “재미가 없어서요.” “뭐?”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뒤에 서 있던 주영마저 풋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어린 애가 벌써 허세가 있다고 여겼다. 재훈의 옆에 같이 쭈그리고 앉은 주영이 질문을 던졌다. “저 애들이랑 같이 어울리는 게 재미가 없어? 니가 쟤네들 따돌리는 거야?” “역시 오해를 하신 것 같네요. 전 저 아이들과 어울리는 걸 싫어하지 않아요. 따돌리지도 않고요.” “그럼?” “말 그대로예요. 문제를 풀고 다른 모둠의 아이를 잡는 놀이가 재미없다는 거예요.” 그래, 뭐 각자의 개성이 있고, 각자의 취미나 기호는 다를 수 있으니까 저 아이들이 모두 즐겁더라도 한 명 쯤은 싫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이의 말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그래도 어쩐지 재훈은 물어보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뭐가 재미가 없는 거야?” 아이의 눈에 비친 나른한 감정? 혹은 무료함? 낯설지 않은 눈빛 같아서 물어보고 싶었다. 단유는 왜 계속 이 문답을 계속 해야 하는가를 고민했다. 머리가 하얗다는 것 외에는 이 사람에 대해 평가할 게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단유는 조금 색다른 선택을 시도했다. “왜 저만 대답해야 하죠?” 응? 재훈과 주영은 의외에 대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교문에 들어서며 봤던 현수막을 떠올리면, 분명 이 아이는 초등학교 4학년일 것이다.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초딩에게서 나올 대답은 아니라고 여겼기에 놀라움이 컸다. “번갈아 가면서 대답하는 게 어때요?” 단유는 언젠가 책에서 한 번 본 기억이 있어, 한 번 써먹어보고 싶었다. 이런 식이라면 일방적인 질문을 듣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은발머리 외에 또 다른 특이점이 있는지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재훈은 피식 웃으며 단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 그럼 누가 먼저 질문할까?” 흥이 돋은 재훈은 싱글 웃으며 물었다. “당연히 제가 먼저 해야죠. 지금까지 저만 대답했으니까요.” “그럴래? 그래, 그럼 물어봐.” “그 머리는 원래 그 색인가요?” “아니, 염색.” 아, 염색으로도 저런 색깔을 만들 수 있구나. 지금까지 갈색 아니면, 붉은 색 계열의 색으로 염색한 사람들만 봐서 그렇게 밖에는 염색을 못하는 줄 알았다. “왜 재미가 없다고 생각해?” 단유는 바닥에 선을 찍찍 그었다. 가로 2줄, 세로 2줄 그어 9개의 칸을 만들었다. “마방진을 푸는 문제가 있어요.” 단유는 막힘없이 숫자를 써내려갔다. “가로, 세로, 대각선 수의 합이 모두 같아야 하죠.” 쓰고 지우고 쓰고 지웠다. “이건 계산할 거리도 되지 않아요. 너무 쉬우니까 재미가 없는 거예요.” 눈앞에서 10가지 이상의 다른 숫자가 들어간 마방진이 만들어지고 지워졌다. 주영이 놀란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다 재훈을 바라보았다. 재훈도 바닥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아이가 숫자를 써 넣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순식간에 여러 다른 형태의 마방진을 만들어내는 아이라니? “수학을 좋아하는구나?” “제가 질문할 차례지만 간단한 질문이니까 대답할게요. 좋아해요.” 단유는 발을 쓱쓱 문대어 마방진을 지웠다. “여긴 왜 오셨어요?” 재훈은 바닥으로 향해있던 시선을 들어 아이를 바라보았다. “잃어버린 물건 찾으러. …단지 문제를 푸는 게 재미없는 거야? 아니면 다른 재미없다고 여길 만한 게 있는 거야?” “질문이 재밌네요. 있어요.” 두 가지 질문을 한꺼번에 하면서 대답하라는 꼼수라니. “어떤 물건인가요?” “태블릿. …어떤 게 또 재미없었어?” “뛰어다니는 거요. 이름이 뭐예요?” “응?” 조금 즉흥적인 질문이긴 했다. “연재훈. 왜 물은 거야?” “그냥요. 직업이 뭐예요?” “잠깐, 그냥이라는 답은 너무 성의 없지 않니?” “그런가요? 사실은 매번 이름을 묻는 질문을 받기만 해서요. 한번쯤은 먼저 물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름을 묻는 사람의 의도나 생각이 궁금하기도 했고요.” “어떤 느낌이었는데?” “별로, 아무런 느낌이 없는데요.” 재훈은 가만히 아이의 표정을 살폈다. “너 지금도 별로 재미가 없구나.” “네. 이렇게 하면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별로 재미가 없네요.” 재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영이 덩달아 일어서면서 물었다. “왜 일어나세요?” “이 아이, 지금 어떤 건지 알 것 같아서.” “네?” “그냥 가자. 쟤도 혼자 있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네.” 단유는 순순히 대답했다. 돌아서던 재훈은 멈춰 섰다. 그렇게 있기를 잠시. “주영아.” “예.” “아까 그 박 과장이란 사람이나… 아무튼 아무나 찾아서 태블릿 찾아서 와.” “…선배는?” “여기서 기다릴게.” 재훈은 다시 아이 앞에 앉았다. 단유는 의아한 눈빛으로 재훈을 바라보았다. “아까 하던 거 계속하자.” “하나씩 질문하기요?” “그래.” **** 운동장에서 놀이가 한참일 때, 일부의 이벤트 회사 직원들은 운동장 한편에 아시바를 쌓아서 소형 무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 후에 사용될 레크레이션과 장기자랑을 선보일 무대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 일을 지휘하고 있던 박 과장을 찾아온 주영은 잃어버렸던 물건을 받았다. “교실에 떨어뜨리셨나 봅니다. 아이들이 주웠다는데 그 때 이미 액정이 깨졌다고 하더라고요. 암호가 걸려서 아이들이 가지고 놀지는 않았겠지만 혹시 모르니 확인해 보세요.” 주영은 간단히 내용을 살폈지만 별 다른 문제는 없었다. 다만 액정이 깨진 게 눈에 거슬려, 차후에 다른 새 제품으로 바꿔야 할 것 같긴 했다. “손은 어떠세요?” 깁스한 손을 보며 박 과장이 물었다. 자기들 잘못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도의적으로 미안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 괜찮아요. 1주일 뒤에는 깁스 풀어도 된다고 했어요.” 완치는 2주라지만 굳이 거기까지 세세히 밝힐 필요는 없지 않나 싶었다. 쾌차하길 바란다는 인사를 받고 주영은 돌아섰다. 물건도 찾았으니 빨리 서울로 돌아가야 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재훈에게로 돌아갔더니 두 사람은 가까이 붙어 앉아 쑥덕대고 있었다. 은발의 덩치와 초딩이라니. 삼촌과 조카? “누구세요?” 뒤돌아보니 여선생님으로 추측되는 분이 서 있었다. 주영은 오전에 이곳에 들렀다가 태블릿을 떨어뜨리고 갔었는데 되찾으러 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말했다. “그거 우리 반 애들이 주웠어요. 짐을 정리하다 교실에 떨어져 있던 걸 주웠다고 하더라고요. 거기 액정에 금 간 건 주울 때부터 그랬다는데…….” 혹시라도 물품 파손으로 아이들을 해코지 하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기색이 보이는 선생님에게 주영은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선생님은 이내 고개를 돌려 재훈과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에게로 다가가려 했다. “저기….” 주영이 선생을 붙잡았다. 선생님이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자, 주영이 물었다. “혹시 저 아이 담임선생님 되시나요?” “예.” “실례가 안 된다면 저 아이, 왜 저기 혼자 있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선생님은 머뭇대다가 왜 물어보냐고 되물었다. 주영이 아이와 나눴던 이야기를 들려줬더니, 선생님이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실은 저 아이가 저희 반 반장인데요.” 로 시작한 이야기는 저 아이가 얼마나 똑똑하고 특별한 아이인지부터해서, 선생님이 ‘어쩔 수 없이’ 놀이에서 빼야만 했던 사정을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저희가 이제 곧 저녁식사 시간이라서요. 그런데 누구신지 여쭤보질 않았네요.” 참 빨리도 물어본다. 물론 주영도 아차,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담임선생님의 느슨한 태도도 그리 눈에 좋게 들어오진 않았다. 주영은 명함을 꺼내 보여주었다. “연성그룹에서 사업차 나온 거였습니다.” 연성재단 기획팀 3팀장 이주영이라고 적힌 명함이었다. **** “룰을 조금 바꾸자. 서로에게 문제를 하나씩 내는 거야. 그리고 시간 내에 문제를 맞히지 못하면 그 시간에 질문을 하나씩 하는 거지. 질문은 상대가 답을 맞히는 순간까지는 계속 할 수 있어.” “저 놀이의 변형이네요.” “그래. 대신 문제를 내거나 질문할 땐 빠르게. 스피디하게 하는 거야. 순발력이 필요하지. 해 보겠니?” “제가 불리한 거 아닌가요?” 당연히 재훈이 단유보다 배운 것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을 테니 이 게임이 재훈에게 유리하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나는 10초 내로 풀지 못하면 벌칙, 넌 30초 내로 풀지 못하면 벌칙. 오케이?” 단유가 받아들이고 게임이 시작되었다. “간단한 것부터 해볼까? 4학년이 어디까지 아는지 모르겠네.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오래 되서 말이야.” 헤픈 웃음을 실실 짓던 재훈이 문제를 먼저 냈다. “1부터 100까지 모두 더하면 얼마야?” “5050. 212와 108의 최소공배수는?” 흠칫 놀란 재훈. 그러나 10초가 되기 전에 답을 구할 수 있었다. “…5724. 답이 맞는지는 어떻게 확인하니?” “쉬운 계산이니까, 정답이에요.” “…. 9더하기 4는 1, 3더하기 11은 2, 그럼 10더하기 8은?” 12진법 문제.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이내 단유는 답을 알아냈다. “…6이요. 연속하는 두 개의 정수의 곱이 552일 때, 두 수는 뭘까요?” 단순 암산 문제는 숫자의 길이에 따라 시간제한이라는 룰을 이용하기 좋다. 가령 7자리 숫자를 제곱하는 문제만 내도 1분 안에 풀기는 힘들 것이다. 다만 재미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재미없는 문제는 내지도 않을 단유와 재훈이었다. “23, 24. 조금 난이도를 올릴까? 100이하의 소수의 합은? 소수가 뭔지는 알겠지?” 단유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30초 지났어. 질문하나 할게. 이름이 뭐지?” “김단유요.” “두 번째 질문. 지금 니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게 뭐야?” “…과학이요.” “너무 범위가 넓은데?” “물리요.” “세 번째….” “1060. 달걀을 세우는 방법, 아세요?” 단유는 질문하는 동안에 답을 알아냈다. 재훈은 놀라기를 잠시, 달걀이라는 흔하디흔한 소재에 고개를 일단 끄덕이며 안다고 대답했다. “깨지 않고 세우는 방법, 아세요?” 깨지 않고? 생각이 길어졌다. 10초가 지나자 단유가 물었다. “질문할게요. 식사하셨어요?” “응?” 그러고 보니 6월이라 낮이 길다지만, 그래도 주위가 어둑해지는 시간대였다. “아니.” “저희 선생님이 오신 것 같아서 그만 가봐야 할 거 같네요.” 재훈이 돌아보니, 낯선 여선생과 주영이 나란히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 [103] 스피드(6) 단유가 선생님을 따라간 뒤, 주영은 재훈에게 다가갔다. “가시죠.” 그 말에 재훈은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아니 무슨 울산바위도 아니고, 여기에 자리 잡을 생각인가? “안 갈 거예요?” 재훈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에 빠졌다. “저 혼자 가요?” 어차피 각자 차를 끌고 온 마당에, 가려면 혼자 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지만. “가만 있어봐. 어쩐지 꽤 쉬운 답일 것 같은데 생각이 안 난단 말이지.” “무슨 소리에요?” “달걀을 세우는 방법 말이야.” “콜럼버스? 그거야….” “그렇게 간단한 거였으면 내가 고민을 하겠니? 달걀을 깨지 않고 세우는 방법 말이야. 아, 너 답 알아도 말하지 마. 내가 알아낼 테니까.” 주영은 가슴을 쳤다. 산속이라 그런지 빨리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올라오는 길도 좁던데, 자칫했다간 밤이 되어서야 이 곳을 빠져나가는 불상사가 생길 것 같았다. “주영아.” “네.” “가서 밥 좀 얻어먹을까?” “선배. 전 도저히 이해가 안가네요? 왜 그러시는 거죠? 쟤랑 뭐 있어요?” “지금 한 말, 잘못 들으면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발언이었어.” “농담하지 마시고요.” 재훈은 아이의 눈빛을 떠올려 보았다. 어린 시절, 자신도 저런 눈빛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게 재미없던 시절의 자신을 닮은 아이를 보니, 어쩐지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도와준다? 아니 그냥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해야 하겠다. 단유라는 아이가 아니라 어린 시절의 자신을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 **** “단유야, 저 아저씨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선생님이 넌지시 물었다. 연성그룹에서 나온 사람이라고 보기엔 헤어스타일이 너무 경박하긴 했지만, 팀장이란 사람이 꼬박꼬박 ‘선배’라고 존칭을 쓰는 것을 보면 무시하기 힘든 직책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유는 굳이 감출 것도 없었기에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했다. “고작 그게 다야?” “예.” 선생님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인데, 하물며 단유라고 뭘 알겠는가. 그냥 변덕이 생겨서 몇 마디 말을 붙였을 따름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아이들은 다시 운동장으로 모였다. 레크레이션이 시작될 무렵, 단유는 선생님의 부름을 받아 대열에서 이탈했다. “단유라고 했지? 선생님한테 허락을 받긴 했는데, 아까 그 아저씨가 답이 너무 궁금하다고 하셔서 말이야. 직접 가서 이야기 해주겠니?” 선생님 곁에 서 있던 주영이 웃으며 물었다. 그에 단유가 교문 쪽을 바라보니 재훈이라는 사람이 여전히 그 자리에서 턱을 괴고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선생님께 허락을 구한 단유는 다시 재훈에게로 갔다. 명함의 힘이 그리도 대단했지만, 단유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답이 뭐니?” “질문부터요. 왜 기다리신 거예요?”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으니까. 답이 뭐야?” “그냥 물어보세요.” “답부터.” “그냥 돌리면 돼요.” “아!” 팽이와 같은 원리였다. “물어보세요.” “넌 나중에 뭐가 되고 싶어?” 단유는 말문이 막혔다. **** 레크레이션은 어떤 강사가 어떻게 진행하느냐에 집중도가 갈리기 마련이다. 어떤 강사는 마이크만 잡아도 아이들이 모두 몰입을 해서 일사분란하게 지시에 따르는가 하면, 어떤 강사는 백날 떠들어도 난장판이 되기 일쑤였다. “모두 일어나서 기타반주에 맞춰 춤추다가 노래를 멈추면 다들 멈추는 거예요. 아셨죠?” 그런 점에서 이번 수련회에 초빙된 레크레이션 강사는 중간은 하는 인물이었다. 흔한 레퍼토리를 그대로 붙여 넣은 것 같은 진행이었지만 식상해하는 것은 선생님들뿐이었고, 대부분 아이들은 왁자지껄 떠드는 가운데에서도 강사의 지시에 맞춰 춤을 췄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에게 선물을 준다거나, 지는 사람은 앞 사람 업어주기 같은 벌칙에도 아이들은 열광했다. 몇몇 아이들이 어둑해지는 하늘 아래 부모가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불안 증세―주위를 계속 살피며 불안한 모습을 보인다거나, 이유 없이 눈물을 흘리는 행위―를 보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4학년 쯤 되면 부모에 대한 의존증세가 많이 약해지고 대신 또래 집단과의 관계형성에 몰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더러 부모를 찾는 아이들의 경우에는 선생님들이 데리고 나와서 천천히 상황을 설명하거나 설득을 해서 함께 레크레이션을 즐길 수 있게 지도하였다. “자, 앞사람 어깨 주물러주고~. 돌아서서~. 뒷사람 어깨도 주물러주고~. 안마를 하랬지, 때리라곤 안했다.” 그렇게 어수선하고 떠들썩한 레크레이션 시간에 다른 이유로 즐기지 못하고 긴장한 아이가 있었다. 혜린은 시간이 다가올수록 몸이 뻣뻣해지는 느낌이었다. 머릿속에서 안무순서도 뒤죽박죽이 되는 느낌이었고 괜히 혀가 마르는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평소에 워낙 조용한 성격이었던 탓에 아이들이나 선생님은 혜린의 이상증상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단유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은발의 사내, 재훈을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재훈은 대뜸 사과했다. 꿈이 뭐냐고 물었다가 다시 사과부터 하는 재훈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 눈만 껌뻑거리니, “내가 어릴 때 제일 듣기 싫은 말이었는데, 어른이 되면 어쩔 수 없나보다.” 라고 변명을 했다. 재훈은 단유를 자기 앞에 앉혀 놓고 천천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표정을 보니 꿈이 뭐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나보네. 나도 그랬거든. 넌 꿈이 뭐니. 넌 뭐가 되고 싶니. 이런 거. 자랑 같지만 난 어릴 때 공부를 잘했던 편이었어. 그런데 사람들은 꼭 물어봐. 넌 뭐가 되고 싶냐고. 그런데 난 뭐가 되기 위해서 공부를 했던 게 아니었거든. 그냥 공부가 재미있어서, 책 읽는 게 좋아서 했던 건데 사람들은 마치 어떤 의도가 담긴 행동인 것처럼 받아들이더란 말이지. 덕분에 난 꿈과 목표를 정해야 했어. 꿈이나 목표가 없으면 잘못된 것 같고, 내가 잘못된 사람 같다고 여기게 됐거든. 그런데 방금 니 표정이 그렇더라. 꿈이 없어서, 목표가 없어서 잘못된 건 아닌가 자책하는 표정. 만약 내가 잘못 본 거라면 사과할게.” 단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훈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고개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이야. 그게 굉장히 스트레스였어. 그런데 사실 어린 아이가 뭘 알까? 넌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직업과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는지 아니? 난 지금도 가끔씩 놀라. 이런 일도 있구나. 저런 직업도 있구나. 호기심이 가는 것도 있고, 해보고 싶은 것도 있어. 지금 내 나이에도 그런데, 니 나이 때 그걸 정한다? 말이 안 되는 거야.” “…….” “말이 너무 길었지? 그냥 내 생각엔 그래. 지금 정하려고 하지 마. 그냥 니가 좋아하는 걸 계속 해. 하다보면 찾게 될 거야. 억지로 니 꿈을 목표를 정하려고 하지 마. 억지로 하려고 하면 재미있는 것도 재미없어지니까.” 재훈은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자신이 어렸을 때 듣고 싶었던 말. 만약 그 말을 들었다면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겠다. 지금보다 행복해졌을 수도 있고, 더 불행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당시 자신이 겪었던 스트레스와 슬픔, 좌절은 여전히 트라우마처럼 남아 자신을 괴롭히는 악몽처럼 따라 붙고 있었다. 적어도 이 아이는 자신이 겪었던 상처와 좌절의 시간을 걷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와!” 아이들의 함성소리가 크게 들렸다. 바라보니 무대에서 장기자랑이 시작되고 있었다. 단유도 돌아보았다. 연예인이 꿈이었던 아이들. 춤과 노래에 열정적으로 빠져있던 친구들. 자신은 그런 아이들과 비교해 너무 초라하고 한심했었다. 꿈도 목표도 없는 사람. 그런데 낯선 이 아저씨가 그게 잘못이 아니란다. 꿈과 목표를 억지로 정할 필요가 없단다. 돌이켜보니 기웅이나 윤정도 그렇게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그 때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고 마음에 와 닿지도 않는 이야기였는데, 지금은 너무 절절하게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사람 때문인지 가슴이 터질 정도로 시원한 느낌이었다. 3반의 장기자랑 시간이 끝나고 박수갈채와 환호가 이어졌다. 그 가운데 4반의 장기자랑, 댄스를 선보일 13명의 아이들이 무대 위로 올랐다. 각자 조금씩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다들 힘내자는 의미로 파이팅을 외쳤다. 하지만 혜린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대조명에 반사된 아이들의 얼굴이 운동장에 퍼져 있는데, 마치 검은 바다에 사람의 표정만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침을 꿀꺽 삼켰다. “혜린아. 힘 내.” 마주선 친구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개를 살짝 끄덕였지만 자신이 고개를 끄덕였는지도 모를 정신으로 서 있는 혜린이었다. 이윽고 음악이 나왔다. 너무 긴장했던 탓인지 정박자에 맞춰 안무를 시작하지 못한 혜린이었다. 그러나 그 동안의 연습이 무색하지 않게 금세 음악에 맞춰 춤을 맞출 수 있었다. “와!” 혜린의 긴장과는 달리, 팔 다리가 긴 혜린의 현란한 춤사위는 아이들의 시선을 뺏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음악과 하나가 되는 듯한 동작을 보이더니, 말미에 가서는 대열의 선두에서 가장 빛나는 댄서로서의 면모를 가감 없이 선보였다. 그와 함께 아이들의 환호성도 커져만 갔다. 혜린은 춤을 출수록 몸이 풀리고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긴장으로 굳었던 몸도 오랫동안 스트레칭으로 단련된 유연한 몸으로 돌아와 무리 없이 어려운 동작들도 해낼 수 있었다. 아이들의 환호성도 귀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음악의 리듬에 맞춰 움직이는 자신의 몸도 자각이 되었다. 모든 통제권이 돌아오니 혜린은 신이 났다. 조금 더 동작을 크게 할수록 아이들의 환호와 박수가 커졌다. 발을 높이 뻗고, 팔을 크게 휘두르며 춤을 췄다. 오롯이 음악과 하나가 되는 기분이었다. 선생님들은 혜린을 보며 속닥거렸다. “쟤는 정말 잘 추네요?” “연습을 할 때도 보통이 아니었어요. 다른 아이들보다 배는 열심히 하던걸요.” “이야, 저런 애가 가수가 되면 난리 나겠는데요? 얼굴도 예쁘고 말이죠.” 4반 선생님은 괜히 어깨가 으쓱거렸다. 우리 반 아이가 이 정도랍니다. 단유는 혜린을 보며 잠시 자신의 고민을 잊었다. 틈틈이 봤던 혜린은 그야말로 연습벌레였다. 자신이 책을 읽는 시간만큼이나 집중해서 춤 연습에 몰입하는 것을 한 두 번 본 것이 아니었다. 그 연습이 오늘의 무대를 빛나게 하고 있는 것이리라. 혜린은 신이 났다. 몸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고, 자기가 보여주고 싶은 동작은 무리 없이 보여줄 수 있었다. 노래는 끝나기 직전. 그리고 남은 회심의 동작. 혜린은 약간의 발구름 뒤 앞으로 텀블링을 시도했다. 너무나 가벼운 몸은 깃털처럼 공중을 돌았고, 곧 두 발이 무대 끝자락에 무사히 안착했다. 어느 때보다 더 큰 아이들의 환호가 뒤따랐다. 그때였다. 발이 바닥에 착지했음에도 몸이 앞으로 살짝 기운 것은 아주 약간의 실수였다. ―아악! 아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무대를 보고 있던 선생님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혜린이 무대 밑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본 담임선생님이 서둘러 아이들을 헤치고 나갔다. 단유 역시 벌떡 일어나 비명과 소란의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주영도 갑작스러운 사고를 목격하고 너무 놀라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서 있는 가운데, 재훈이 단유를 앞질러 떨어진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선생님과 거의 동시에 도착한 재훈은 선생님을 말렸다. “손대지 마세요. 위험할 수 있어요.” 엄중한 재훈의 한 마디에 선생님은 멈칫했다. 그 사이 재훈은 조심스럽게 혜린을 바르게 돌려 눕혔다. 혜린은 정신을 잃은 채였다. 이마가 살짝 찢어진 것 같지만 다른 부상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보이는 외상보다 보이지 않는 내상이 더 위험한 법이었다. “선생님? 119는요?” 다른 선생님이 와서 4반 담임의 정신을 깨웠다. 그제야 4반 담임이 핸드폰을 꺼낸다고 허둥지둥 댔다. “늦어요. 여기서 병원까지 30분이 걸렸어요.” 혜린을 살피던 재훈이 한 마디 했다. “부목 댈만한 걸 가져다주세요. 제 차로 가면 부르는 것보다 빨리 갈 수 있을 거예요.” 응급조치를 취한 뒤, 재훈은 자신의 차를 운동장 안에까지 몰고 와 혜린을 조수석에 태울 수 있었다. 좌석을 최대한 눕혀 혜린의 몸에 부담이 덜 가도록 했음은 물론이다. “주영아. 나 먼저 갈 테니까, 선생님이랑 같이 니 차로 오도록 해. 병원 어딘지 알지?”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던 듯, 재훈은 서둘러 차에 시동을 걸어 학교를 빠져나갔다. ======================================= [104] 스피드(7) 주위가 어둑해진 시간, 산 중턱에서 산 아래 국도까지 가는 좁은 비포장도로가 가장 큰 문제였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그나마 앞을 비춰주고는 있지만 마음 급한 재훈의 눈에는 한 없이 어두웠다. 덕분에 아찔한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조수석의 소녀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면서, 빠르게 산길을 내려갔다. 거의 15분여를 넘게 달린 끝에야 국도에 오른 검은 색 벤츠는 거칠 것 없다는 듯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방황의 시간동안 단련된 드라이빙 스킬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가장 큰 도움은 제로백 3.9초, 최고속도 시속 290㎞의 빠른 차가 가장 크긴 했다. “조금만… 조금만 참아. 금방 데려다 줄게.” 재훈은 핸들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액셀을 꽉 밟았다. 속도계가 한없이 올라갔다. **** “선생님, 혜린이 어떡해요?” “혜린이는 괜찮을 거야.” 아이들은 선생님들의 발 빠른(?) 대처와 함께 각자의 교실로 돌아갔다. 무대에서 떨어진 친구를 본 아이들은 모두 충격에 빠졌고, 몇 몇 아이들은 심각한 불안 증세를 보였다. 선생님들은 최선을 다해 아이를 달래는 동시에 학교에 사실을 알린 후 지시를 기다렸다. 역시나 학교에서는 우선 기다려보라, 는 지시가 하달되었고 이후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지만 별 다른 지시사항은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병원에서 치료받으면 금방 나을 거야.”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아이들의 심신을 안정시킬 수 있는 군것질거리들이 각각의 교실로 전달되었다. 본래 다음 날 캠프파이어 직전에 나눠줄 생각이었는데 지금 당장 그 쓸모를 다하게 되었다. 선생님들은 모두 속으로는 발을 동동 구르고, 하늘을 향해 혹은 불특정인을 향해 어찌해야 하냐고 하소연을 하고픈 심정이었지만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다. 선생님이 의연한 자세를 보여야 아이들의 동요도 가라앉을 테니까. 그 태도가 적절했는지는 둘째 치고 효과는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어수선한 가운데 아무것도 없는 교실에 앉혀두었더니 한둘씩 짝을 지어 수다를 떨기 시작하는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곳곳에서 웃음소리 비슷한 것이 새어 나오더니, 어느 샌가 교실은 토론과 화합의 광장처럼 변해버렸다. “니가 먼저 했으니까 내 차례지.” “아냐, 니가 먼저 했어.” “진구야, 너 옆에서 봤지? 누가 먼저 했어?” “…모르겠는데?” 결국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몰라도 끝은 내 순서에 끝내겠다는 남자아이들의 토론과, “나중에 같이 자자.” “미연이도 같이 자기로 했는데?” “그럼 셋이서 한 이불 덮으면 되지.” “나는? 왜 너네만 자?” “넌 내 옆에서 자면 되지.” 한 이불 덮고 잘 사람을 구하는 화합의 장이 교실 곳곳에서 펼쳐졌다. 더러 불안 증세를 보이는 아이들은 가장 앞에서 혜린을 목격했던 아이들이었다. 특히 가운데 자리했던 4반과 5반의 아이들은 단순히 목격만 한 것이 아니라, ‘쿵’ 하는 소리까지 들었다. “머리 다친 거 같은데?” “그럼 죽는 거 아냐?” “기억상실증 같은 거 걸릴 수도 있는데?” “그럴 일 없으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각자 조용히 대기하도록 해.” 선생님이 애써 아이들을 말려보지만, 아이들의 망상과 두려움은 커져만 갔다. “반장.” 담임선생님이 단유와 유림을 불렀다. “선생님은 저기 저 누나 차타고 병원에 갔다 올 거야. 선생님이 없는 동안 5반 선생님이 우리 반 봐주기로 했으니까, 반장이 5반 선생님 말씀 잘 들어서 우리 반 아이들 도와주도록 해. 알았지?” “예.” 단유는 같이 가면 안 되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끝내 묻지 못하고 속으로 삼켜야 했다. “유림이 너도 반장 잘 도와주고. 알았지?” “네.” 5반 선생님께 마지막으로 부탁을 드린 후, 선생님은 주영의 차를 타고 캠프를 떠났다. 빨간 테일 램프(Tail lamp)의 불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자리에 서서 바라보던 단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육원에 있을 때는 보지 못했던 별빛들이 유난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 재훈의 검은 벤츠 쿠페 승용차가 거침없이 도로를 질주하던 중이었다. 이미 제한 속도 따위는 잊어버렸지만 다행히도 도로 위에 오가는 차가 거의 없어 위험은 덜했다. 다만 국도의 특성상 갑작스런 커브길 에서는 급하게 차를 감속시켜야만 했는데, 그럴 때마다 정신을 잃은 소녀를 향해 손을 내밀고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했다. 그렇게 병원을 향해 달리던 중이었다. 뒤에서 굉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차가 워낙 방음이 잘되던 탓에 웬만해선 잘 들리지 않을 텐데도 그 벽을 뚫고 들어올 만큼의 소음이 들리니 신경이 쓰였다. 룸미러를 통해 확인해보니 파란 LED 실내등을 연신 번쩍거리며 달려오는 차가 보였다. “야, 저 차 졸라 빠르다?” “씨발, 여기가 달리기 좋다는 소문이 나긴 났나보다. 어중이떠중이가 다 끌고 나와서 달리네.” “벤츠 같은데?” 어중이떠중이는 아니지 않냐는 친구 말에 운전 중이던 사내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답했다. “씨발, 벤츠면 다냐? 어디 주인 허락도 없이 끌고 와서 길을 막고 지랄이야?” 마치 자기가 이 도로의 주인이라도 된 듯 말하는, 왁스로 한껏 머리에 힘을 주고 멋을 낸 블랙 재킷의 사내는 생긴 것과 달리 입이 걸었다. 물론 친구도 그에 못지않았다. “병신아, 그래서 어쩔 건데?” “씨발. 오늘 폐차 하나 만들어 볼까?” 왁스는 수동기어를 올리고 액셀을 밟았다. 은색 페라리가 스프링을 밟았다가 튀어 오르듯 앞으로 치고 나갔다. 페라리의 급작스러운 가속력에 앞서 달리던 벤츠도 여간 빠른 게 아니었지만, 곧 페라리에게 추월을 당하고 말았다. 재훈은 그런 페라리의 움직임이 영 거슬렸지만, 그렇다고 지금 어떻게 할 방법도 없었고 그럴 시간도 없었다. 부디 그냥 무사히 지나가는 양아치이기를 속으로 빌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재훈의 바램은 10초도 지나지 않아 무너졌다. 앞서나간 은색 페라리가 앞에서 얼쩡거리더니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다. 페라리의 꽁무니가 눈 깜짝할 사이에 코앞으로 다가왔다. “우 씨!” 깜짝 놀란 재훈이 브레이크를 밟으며 차를 틀었다. 하지만 페라리는 부딪히기 직전 다시 액셀을 밟으며 거리를 늘렸다. 벤츠는 순간적인 핸들의 작동으로 오버스티어링이 날 뻔했지만 다행히 차체자세제어장치(VCD)가 제대로 작동해서 자동차가 크게 흔들리는 것을 막았다. 룸미러로 그 장면을 보며 키득대던 왁스는 한 번 더 벤츠의 앞으로 가서 얼쩡거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재훈도 대비를 하고 있었던 터라 아까처럼 당황하진 않았다. 하지만 갈길 급한 와중에 웬 양아치한테 걸려서 시간을 낭비할 수만은 없었다. “젠장.” 재훈은 제로백 3.9초의 위엄을 보이리라 다짐하고, 액셀을 밟았다. 앞선 페라리를 서서히 따라가던 벤츠. 왁스는 피식 웃으며 한번 당해봐란 심정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 타이밍에 맞춰 벤츠는 페라리의 옆으로 뛰어들며 페라리와 나란히 서더니 이내 뛰어난 가속력으로 페라리를 앞섰다. “이 새끼가!” 왁스가 재빨리 액셀을 밟아보지만, 이미 가속을 내고 있던 벤츠에겐 밀려 결국 뒤를 쫓아가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와 졸라 빠르네?” “씨발, 닥쳐봐라. 내 얌전히 보내줄라고 했는데 안 되겠다.” 그리고 둘의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재훈도 필사적으로 액셀을 밟으면서 페라리가 앞서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동시에 최대한 빨리 병원에 닿을 수 있기를 기도했다. 너무 급박한 순간이라 조수석을 챙기지 못하고 있지만, 부디 아무 일 없기를 바라면서 연신 룸미러와 사이드를 보며 뒤를 견제했다. **** “혜린이 괜찮겠지?” 유림이 약간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잠들 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선생님들은 임시조치로 빠른 취침시간을 갖기로 합의했다. 아이들이 세면과 취침준비로 교실을 들락날락거리는 가운데, 단유와 유림은 선생님을 대신해서 아이들 취침 준비를 도왔다. 물론 5반 선생님이 먼저 와서 지시를 내려놓았고, 그에 맞춰 순서대로 아이들을 세면장으로 보내고 취침준비를 시키는 중이었다. “괜찮을 거야.” 비록 절벽에서 떨어져보고, 산비탈에서 늑대에 쫓기다 구르기도 했었지만, 그 때랑 지금은 또 다른 문제였다. 자신이 무사했다고 해서 혜린도 무사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게다가 무대 옆쪽에서 달려갔었기에 혜린이 떨어질 때 머리가 땅에 부딪히는 모습도 목격했던 단유였다. 앞으로 떨어지면서 팔을 짚긴 했지만 머리도 큰 충격을 받았으리라 예상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무사해야 할 텐데.” “…….” “단유야. 우리 기도할까? 혜린이 무사히 돌아오게 해달라고?” “누구한테?” “하느님한테 해야지?” “효과 있는 거야?” “TV보면 다들 이렇게 하던데?” 평소에도 종종 느끼는 부분이지만, 유림은 TV를 자주 시청하는 것 같았다. 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신에게 기도를 하는 행위가 과연 효과적이냐는 질문에 단유는 쉽게 수긍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너무 많은 일들을 겪은 과거를 떠올리면, 차라리 신이 혜린을 다치게 한 거라고 믿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고 싶으면 해.” 굳이 하겠다는 아이를 말리고 싶진 않았다. 그건 유림의 자유니까. 다만 자기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해서 좋은 결과가 있을 리 없는 무의미한 행위니까. ‘그래, 원래 이상한 아이였지.’ 이제는 단유가 이해하지 못할 말이나 행동을 해도 그러려니 하게 된 유림이었다. 슬쩍 눈치를 보다가 아이들에게 다가가 함께 기도하기를 요청했더니 다들 당연하다는 듯이 함께하였다. “우리 혜린이 무사히 돌아오게 해주세요.” “우리 친구가 부디 아무 일 없게 해주세요.” 아멘이고, 아미타불이고 간에 단유의 관심은 끌지 못했다. 지금 당장의 관심은 과연 단유는 그 장면을 막을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답은 알고 있었다.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애초에 너무 멀었다. 그리고 너무나 순간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쓸 수 있는 마법이 없었다. 결국 이렇게 되면 돌아오는 답은 늘 하나였다. ‘새로운 마법 수련.’ 차라리 재훈의 말대로 꿈과 목표 따위를 고민하느라 시간 보내느니 새로운 마법을 하나라도 더 수련했었다면, 어쩌면 오늘의 일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가져보았다. 막지 못했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지만,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는 조금 남는 사건이었다. **** “혹시 먼저 가신 분, 어떤 분이신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주영의 차를 얻어 타고 가던 선생님이 넌지시 물었다. 뒤늦게야 신분도 정확히 모르는 낯선 남자에게 소중한 반 아이를 맡겼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건 제가 말씀드리기 곤란하네요. 대신 제가 보증하도록 하죠.” 니가 뭔데, 라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명함이 말해주니까. 10대 재벌에 속하는 연성 그룹. 그리고 거기서 출자되어 만들어진 연성 재단의 기획팀장이라면 확실하겠지. “조그만 빨리 가주실 수 있나요?” 옆에 앉은 느슨하기 짝이 없는 선생님은 깁스를 한 손이 보이지도 않나보다. 내심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사정이 이러니 별 수 있나 싶어 그냥 간단히 대답했다. “그럴게요.” 국산 중형 승용차가 조금 더 속도를 올려 어둠을 뚫고 도로를 달렸다. **** 도로 위의 레이스는 점점 살벌해져만 갔다. 결코 앞자리를 내주지 않으려는 검은 벤츠와 필사적으로 앞지르려는 은색 페라리의 대결은 치열했다. “다음 코너에서 승부다!” 왁스는 오래전에 배워뒀던 드리프트를 염두에 두고 코너로 들어갔다. 벤츠는 특별히 수를 쓰지 않음에도 차의 월등한 성능으로 인해 부드럽게 코너인과 코너아웃을 이어나갔다. 왁스는 거칠게 발을 조작하여 드리프트를 완성, 가까스로 벤츠를 앞질렀다. 코너아웃을 위한 가속력을 높이려는데, 갑자기 뒷타이어 제동력에 문제가 생겼다. “어? 왜 이러지?” 술 취한 할아버지처럼 테일 램프가 좌우로 거칠게 잔영을 남겼다. 핸들을 조작할수록 더욱 심해지더니 이윽고 시계반대방향으로 360도를 휘돌며 도로 위에 긴 스키드마크를 남겼고. “이런 젠장!” 앞을 가로막는 페라리를 피하려고 조작하던 벤츠는 급작스러운 페라리의 제동에 미처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 채 피하려고 핸들을 틀다가 그만 페라리의 왼쪽 리어도어와 맞닥뜨렸다. 시속 200㎞로 달리던 두 차는 그렇게 부딪혔다. ―쾅! 오른쪽으로 핸들을 틀었던 벤츠는 페라리의 왼쪽 리어를 강타한 후, 옆으로 튕겨나가더니 갓길너머 가로수를 박았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충격으로 튕겨나간 벤츠는 길 가의 언덕을 굴러 도랑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 사이 페라리 역시 부딪힌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날아가듯 튕겨져 도로 위를 뒹굴다가 반대편 길가로 굴러 떨어졌다. 도로 위에는 온갖 차량 파편과 긴 스키드 마크만 남았고, 조금 전까지의 소란이 무색하게 정적이 내려앉았다. ======================================= [105] 아름다운 이별(1) “외과 연락하고, 이 선생 목부터 안정시켜.” 간호사가 가져온 목보호대를 앳딘 얼굴의 의사가 받아들 때, 다른 의사가 소리쳤다. “소아신경외과도 연락했습니다.” “와서 도와!”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달라붙어서 구급용 들것에서 베드로 옮겼다. “하나, 둘, 셋에 옮겨. 하나, 둘, 셋!” 그리고 곧바로 촉진을 비롯해서 간이 검사가 진행되었다. “이거 뇌척수액인가요?” 이마로 땀을 쏟아내고 있는 이 선생이 오른쪽 귀에서 하얀 이물질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육안으로 관찰했다. “확인해 봐.” 이 선생이 확대경으로 귀를 확인하는 사이, 지시는 계속 떨어졌다. “20% 만니톨 준비하고 산소는?” “포화도(oxygen saturation) 92%예요.” 이 선생이 잇따라 보고했다. “외이도에 피가 고여 있습니다.” “턱과 가슴 오른쪽에 bruise 확인됩니다.” 다른 레지던트가 보고를 했다. ‘hepatorrhexis(간 파열)?’ 교통사고가 났을 때 가장 다치기 쉬운 부분이 간과 비장이다. 일단 킵 해두고 동공반사를 확인했다. “동공은 반응이 있네. Skull Fracture(두개골 골절)인가?” 함몰은 아닌 것 같지만, 일단 역시 킵. 정확한 진단은 사진을 찍어봐야 나올 것이다. 이 선생이 복부 촉진을 하다가 말했다. “복부 반동도 의심스러운 데요?” “어떤 데?” “촉진 상 느낌이 없는데 복강내출혈이 심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침 옆에서 돕던 수간호사가 소리쳤다. “pneumothorax(기흉)이요!” “튜브 어딨어?” 재빨리 기관호흡용 튜브를 삽입하여 호흡을 도왔다. 이것저것 급히 필요한 조치들을 취한 뒤, 더벅머리 레지던트는 이 선생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 선생은 빨리 CT, MRI 다 찍도록 해.” 이 선생과 간호사가 들러붙어서 베드를 밀고 나갔다. 그 때 옆 침상에 누워 있던 남자가 이 선생을 불렀다. “선생님, 꼭 좀 살려주세요. 살려… 주셔야 합니다.” 이 선생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CT실로 내달렸다. **** 사고현장은 뒤따라 온 주영과 담임선생님에 의해 발견되어 곧바로 119에 신고 되었다. 두 차가 모두 도랑과 논에 뒤집힌 채 박혀 있어 두 여자의 힘으로는 구조 활동이 불가능했다. 신고 후 5분이 지났을 무렵, 119가 도착했다. 곧 차 안의 사람들을 구출하여 시내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사고 현장으로부터 병원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6분. 만약 시속 200㎞로 달렸던 재훈이라면 5분도 채 안 걸릴 병원을 앞에 두고 사고가 난 셈이었다. 이후, 인평초등학교 학생들의 수련회는 급히 취소되어 모두 학교로 돌아갔다. 그리고 돌아온 다음 날을 임시휴교 처리하여 하루를 쉰 후, 그 다음 날 다시 학교로 등교하도록 조치되었다. 사고가 난 다음날, 지역 신문에서 두 외산 차량의 과속 레이스에 대해 짤막한 보도가 나갔다가, 오후에 정정보도와 함께 기사가 내려졌다. 인터넷 신문에서는 재벌가 3세와 지역 유지의 철없는 아들이 벌인 죽음의 레이스에 대해 보도를 했지만, 역시 몇 시간 후 기사가 삭제되었다. 1명이 죽고, 3명이 중상이라는 정도의 사고 보도가 단신으로 전국 뉴스에 게재되었고, 그 외 다른 사고관련 뉴스는 없었다. **** “단유야, 혹시 뭐 들은 거 없어?” 유림은 걱정 어린 얼굴로 물었다. 단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단유 역시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어제 보육원에 있는 동안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좀처럼 책을 읽을 수도 없었다. 사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몇몇 학부모들이 전말을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아이들 앞에서 함구한 탓에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갑작스럽게 취소된 수련회와 돌아오지 않는 친구에 대한 호기심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이런 경우 아이들은 반장을 찾아왔다. 그래봐야 단유로서도 대답해 줄 말이 없었다. 다만 억측을 남발하는 아이들에 대해서는 자제를 시켰다. “아직 혜린이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니까 무사하길 바라는 게 좋을 거 같아.” 하지만 보통 때와 달리 단유의 말에는 확신이 없었다. 스스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혜린에 대한 걱정과 다르게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은 재훈에 대한 것이었다. ‘좀 더 이야기해보고 싶은데.’ 처음으로 자신을 ‘이해’해준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지금껏 단유를 도와주거나 가르침을 준 사람들은 많았다. 물론 모두 고맙고 감사하지만, 단유가 걱정하고 있는 것, 현재 느끼고 있는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이야기해준 사람은 재훈 뿐이었다. 물론 차를 가지고 나가는 것을 보면서 다시 안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던 단유는 역시나 돌아오지 않는 재훈에 대해 약간 원망하는 마음도 가졌다. 전혀 그럴 이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이들이 웅성대며 갖가지 시나리오를 작성해나가고 있을 때, 아침 조례를 위해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셨다. 그 어느 때보다 낯빛이 어둡고 침중한 표정이었다. “차렷.” 단유가 일어서자, 선생님은 손사래를 치며 인사를 거부하셨다. 단유가 자리에 앉자 선생님은 고개를 숙인 채로 교탁을 붙잡고 가만히 계셨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쑥덕대던 아이들도 입을 닫고 가만히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선생님이 고개를 들고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혜린이는….” 선생님은 목이 메어 제대로 이야기를 마칠 수 없었다. **** “일단 고관절 부위 수술은 잘 됐습니다.” 굵은 뿔테안경을 쓴 노년의 의사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환자가 문제가 아니라 선생님이 문제이신 것 같아요. 후두염, 후두암 같은 병명을 떠올리고 있던 주영의 귀에 다시 노(老)의사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다른 부위에는 큰 부상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차가 좋았던 탓이겠죠. 주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차트를 옆에 대기하고 있던 젊은 의사에게 건네고 고개를 돌렸다. 주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다른 궁금한 점 있으십니까?” “언제쯤 낫나요?” 뭐라고 떠들어도 알아듣지 못할 주영이었기에 핵심만 물었다. “…천천히 호전될 것입니다만 아마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계셔야 할 것 같습니다.” 회진이 끝나고 의사들이 우르르 몰려 나간 뒤, 1인실에는 조용한 기계음만 간헐적으로 울렸다. 주영은 물끄러미 남자를 바라보았다. 정말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블랙박스와 여러 경위를 통해 확인한 바, 재훈은 미친놈한테 제대로 걸렸다. 갑자기 앞을 가로막질 않나, 옆에서 주행을 방해하지 않나, 종국에는 미친 레이스를 펼쳐 결국 대형사고까지 나고 말았다. 죄인은 죗값을 치루면 된다지만, 애꿎은 피해자들은 어쩌란 말인가. 재훈이 천만다행이었던 점은, 그 사고의 순간에 작동된 차량 내부의 안전시스템 덕분이었다. 에어백은 물론이고, 차량이 중심을 잃고 부딪치는 순간에도 각종 전자제어시스템이 차량을 컨트롤 한데다 차체의 튼튼한 구조가 운전자와 동승자를 안전하게 지켜주었다고 한다. 다만 이 사고에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10살짜리 소녀였다. 만약 앉은 상태였다면, 안전벨트의 효용이 컸을 텐데, 사고 당시 누운 자세로 있었다는 점, 작은 체구의 소녀를 커버하기엔 안전벨트로는 무리였다는 점 등이었다. 주연은 잠든 재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병실을 나갔다. **** 혜린의 어머니는 새벽에 전화를 받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핸드폰을 떨어뜨렸다가 간신히 수습해서 통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혜, 혜린이 많이 다쳤어요?” 울음부터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물었다. “어디예요, 거기 병원 어디냐고요!” 손에 잡히는 걸 아무나 들고 집을 뛰쳐나왔다. 양말을 제대로 신었는지, 옷을 제대로 입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계단으로 뛰어가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온갖 생각이 밀려들었다. 겁이 났다. 그리고 이 순간 괜히 이혼한 남편이 생각났다. “여보….” 덜덜 떨다가 핸드폰을 눌렀다. 혼자서는 도저히 가기 힘들었다. 새벽이라 전화를 잘 받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모두 잠든 야심한 시간에 이혼한 전처에게 온 전화를 아무렇지 않게 받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전남편도 연신 울리는 불길한 벨소리를 무시할 수는 없었나보다. “여보세요.” 전남편의 소리가 들리자,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지 않았다면, 하염없이 울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혜린이가, 혜린이….” “무슨 소리야! 말을 똑바로 해! 혜린이가 왜!” 야밤에 우는 목소리로 딸의 이름을 되뇌는 전처의 목소리에 남자의 목소리가 커졌다. “사, 사고가….” “지금 어디야? 나 그리로 갈게. 당신 거기 그대로 있어.” 30분 후, 전남편이 몰고 온 차가 괴성을 내지르며 혜린 어머니의 아파트 앞으로 도착했고, 둘은 다시 병원으로 이동했다. **** “정신이 들어요?” 재훈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그를 반긴 것은 늙은 할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정신이 드느냐?” “할아버지….” 그리고 시선을 돌려 가장 먼저 목소리를 냈던 주인공의 얼굴을 찾았다. 할아버지의 왼편에 서 있던 주영이 재훈을 바라보며 처연한 웃음을 지었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 “당연히… 다 불편하죠.” 물어 뭐합니까, 라고 냉소적인 답을 할 뻔했지만 기력이 쇠한 탓인지 생각했던 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만하길 천만다행이라고 하더구나. …녀석아. 이야기는 이 팀장한테 들었다만 무모했어.” “무모하다뇨?” “도대체 그 아이가 뭐길래 거기서 그렇게 무리를 했냐는 말이다.” 재훈은 입을 꾹 다물었다. 물론 할아버지가 자신을 아껴서 하는 이야기란 것은 이해했지만, 그래도 가끔씩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뉘앙스로 이야기할 때면 반발심이 생겼다. “그냥 그 아이를 살려야 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구급차를 불렀어도 될 일이었다.” 그래, 차라리 구급차를 부를 걸. 그날따라 생전 부리지도 않던 생떼도 부리고 오지랖도 부렸다. 그 아이를 만난 탓이었을까? “저기… 그 애는 어떻게 됐어?” 주영은 입을 꾹 다물고 재훈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이런 사람 인줄은 몰랐다. 이 상황에서도 그 여자아이를 걱정하는 모습이라니. 자기 주위의 그 많은 사람들을 두고도 정 한번 주지 않던 사람이, 오만하기로는 자기 할아버지 못지않던 사람이 갑자기 웬 소년에게 진지한 충고를 해주질 않나, 구급차를 못 기다린다면서 응급 후송을 하겠다고 달려들기까지 했으니. “일단 안정을 취하세요. 그 아이는 괜찮아요.” 괜찮지 않지만, 괜한 뒷말을 꺼내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무슨 말을 해도 부스럼을 내는 이야기밖에 안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영아.” “네?” “잠깐 나가있지 않겠느냐?” 주영은 연 회장에게 고개를 숙이고 병실을 나갔다. 그녀가 나간 사이 연 회장은 손자를 바라보다 손자의 손을 덮으며 입을 열었다. “재훈아. 넌 니가 얼마나 나한테 귀한 사람인지 모르는 것 같구나. 비록 너희 아버지, 너희 형이 있어 사업체를 네게 물려주지 못한다 해도 그건 니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집안의 분란이 생기면, 그건 그것대로 모두가 불행해지는 길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래서 대신 내 가기 전에 너에게 병원이라도 하나 주려고 생각했던 거야. 그걸로도 충분히 넌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연 회장은 손자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할애빈 널 누구보다 아낀다. 넌 어렸을 때의 나를 보는 것 같거든. 너의 총명함과 영특함은 아마 너희 형도 따라잡지 못할 거야. 그러니 말이다. 넌 니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중한지를 알아야 한다. 넌 다른 누구보다 중요한 사람이야.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걸 부디 자각하길 바란다.” 너 위에는 오직 나만 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연 회장은 말을 마쳤다. 차라리 큰 아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면 좋으련만. 지금 자신의 뒤를 잇는 둘째 아들은 고집이 강했고, 욕심이 많았다. 큰 형과 치열한 법적분쟁도 불사했고, 마침내 이겼다. 그리고 자신의 뒤를 다시 자신의 장남에게 승계하기 위해 법적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여기서 연 회장이 괜한 욕심을 부리면 그룹 전체가 쪼개질 위험이 있었다. 연 회장은 아들의 야심을 이기지 못했고, 다만 막내 손자에게 자신의 남은 영향력을 다 쏟아 부어 주고 싶었다. 재훈은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맑은 정신이었다면 평소처럼 ‘훗’하고 웃어주었을 텐데, 지금은 웃지도 못하고 그저 늙으신 할아버지의 엇나간 고집을 묵묵히 받아주었다. ======================================= [106] 아름다운 이별(2) “이제 그만 들어가세요. 제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쉬셔야 할 것 같네요.” 재훈의 이야기에 할아버지도 그러마, 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리 낫거라, 진심어린 당부를 남기고 연 회장은 병원을 떠났다. 연 회장이 나간 뒤, 주영이 도둑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병실로 들어왔다. “뭘 그렇게 조심하고 그래?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그냥 병실이 조용하면 심신 안정에도 좋을 테고, 그러면 선배도 빨리 나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런 거죠.” “말 잘하네. 말 하는 김에 이야기 해봐라. 사실 내가 기억이 다 안나. 어쩌다가 사고가 이렇게 났는지도 모르겠고. 다 알아봤을 거 아냐?” 주영은 머뭇거리다가 자신이 조사한 바를 이야기했다. “심하게 났구만. 용케도 살았네?” “그런 말 마세요. 당시 구조대원들이 모두 놀랐었다니깐요. 차가 그렇게 망가졌는데 안에 있던 사람들이 살아있다고. 하늘이 도왔대요.” “하늘이 도우면 사고가 안 났어야지.” “또, 그런 말. 제발 말 좀 곱게 해요.” “그건 됐고. 그래서?” “예?” “다른 사람들은?” 주영은 침을 삼키고 한 호흡을 쉰 뒤, 입을 열었다. **** 고급 세단 안에 연 회장은 몸을 깊숙이 파묻은 자세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한 이사, 부탁 하나 하지.” 「예, 말씀하십시오.」 “우리 손주 해코지 한 놈, 확실히 처리하도록.” 「예. 회장님.」 연 회장은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비서에게 건넸다. 비서는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들어 품에 집어넣었다. 페라리를 운전하던 놈은 운 좋게도 살아남았다. 집안이 대단하다는 일설도 사실이었는지 응급조치 후 서울의 대형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팔과 다리가 하나씩 부서졌고, 고관절부상에 복강내출혈도 있었지만, 워낙 뛰어난 의사가 집도한 탓인지,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게 되었다. 하지만 감히 상대가 연성그룹이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룹회장이 가장 아끼는 손자를 상대로 위험한 장난질을 쳤으니, 그 죄가 대수롭지 않을 리 없었다. “지역 유지?” 회장이 혼잣말 하듯 넌지시 뱉은 말에 비서가 재깍 대답했다. “예. 자산규모가 대략 1조원정도 되는 업체를 운영하고 있답니다.” “구멍가게 하나 가지고 있는 주제에 건방을 떨었다는 거지? 자식교육도 못시키는 것들이 무슨 장사를 하겠다고….” 비서는 가만히 앞을 바라보았다. 뿔이 난 회장의 말에 대답을 하진 않았지만 내심 동의하는 바였다. 고작(?) 그 정도로 가진 척을 하는 게 우습지도 않았다. 한 이사가 아니더라도 비서실장의 직급에서 충분히 제재를 취할 수 있겠지만, 이번에는 자기 몫이 아닌 것 같아 참았다. 한 이사라면 자기보다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진 않을 것이다. 사실 마음에 하나 걸리는 것은, 그간 사업에서 멀리 떨어진 쪽이라 생각해서 다소 소홀하게 대한 면이 있던 둘째 손자에 대한 것이었다. 이렇게 되고 나니 앞으로 그룹 차원에서 의전이라든가 경호라든가 신경을 써야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아 섣불리 제안하긴 힘들지만 조금 시일이 지난 뒤 별다른 지시 사항이 없을 경우에는 회장님에게 직접 건의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건의가 통한다면 자신에 대한 신뢰도 올라가지 않을까, 라는 개인적인 사심도 조금은 섞여 있었다. **** “혜린아….” 혜린의 어머니는 창 너머로 보이는 딸의 처참한 모습에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각종 호스와 기계장치가 딸의 몸 곳곳을 유린하고 있는 모습에 가슴이 갈갈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비단 어머니만의 감정은 아니었던 것이, 이제는 전 남편이 된 혜린의 아버지 역시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뿐만이 아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입술만 짓뭉개고 있었다. 누구에게 이 분노를 투사해야 할지, 대상이 없었기에 더욱 화가 났다. 아이가 이 지경이 되도록 엄마라는 사람이 뭐했냐고, 화를 낼까? 사람이 다쳤는데 응급차도 부르지 않은 학교의 선생님들에게 화를 낼까? 도로에서 지키라는 속도도 지키지 않고 무리하게 내달린 운전자라는 사람에게 화를 내야 할까? 중앙선을 넘나들거나 차를 가로막는 등의 위협행위로 사고를 야기한 지역 유지의 아들이라는 놈에게 화를 낼까?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자신에게 화를 내야 할까? 눈에 핏발이 곤두서고, 꽉 깨문 어금니에 잇몸에서 피가 날 정도였지만 스스로는 알지 못했다. 주먹을 쥐었는데, 손을 너무 세게 쥐었던 탓인지, 손톱이 손바닥에 상처를 내고 말았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지나가던 간호사가 목격했다. “어머, 보호자님!” 간호사가 카트를 끌고 와 호들갑을 떨자, 그제야 자신의 손바닥에 상처가 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힘을 풀고 손바닥을 펴서 간호사의 조치를 받았다. 옆에 서 있던 혜린의 어머니는 그 것을 보고 다시 가슴이 아팠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내 자식 아픈 것만 보고, 내 가슴 미어지는 것만 생각하다가, 아이 아버지가 얼마나 아프고 힘들어할 지를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자신이랑 헤어진 것이지, 아이랑 헤어진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헤어질 때도 아이 때문에 얼마나 많이 싸우고 고민했던가. 결국 아이 아버지가 져 주었던 것일 뿐인데, 당시 아이 아버지가 아이를 부탁하며 했던 말이 새삼 떠올랐다. “나 대신 혜린이 잘 보살펴야 한다. 바빠서 끼니를 못 챙겨줬네, 돈이 없어 옷을 못 사줬네, 이런 이야기 나오면 당신 가만두지 않을 거야. 혜린이가 혹시라도 다치는 일 생기면 당신도 내 손에 똑같이 다칠 거야. 혜린이가 혹시라도 우는 일 생기면 당신도 울어야 할 거야. 우리 딸, 혜린이 아프게 하지도 말고, 다치게도 하지 말고, 슬프게도 하지 마라.” 꽤나 살벌한 부탁이었는데, 그 만큼 아이 아버지는 상당한 희생을 각오하고 양육을 포기했었다. 그런데 이 사단이 났고, 당연히 아버지 된 입장에서 보통 정신으로 버티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아무리 정신이 없었다지만―이 사람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제가 잘못했어요. 여보.” 울음이 말을 먹고, 눈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떨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우는데 어깨 위로 손이 올라왔다. 전남편은 전부인을 가볍게 안았다. “지금은, 그런 생각 하지 마라. 그냥… 기도하자. 우리 혜린이 무사히 돌아와 달라고… 기도하자.” 간호사는 손바닥에 가벼운 처치를 한 뒤, 자리를 피했다. 중환자실 앞은 언제나 이런 광경이었고,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둔해질 만도 하건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익숙해지지 않기 때문에 몸은 늘 힘들지만 최선을 다해 환자들을 돌볼 수 있었다. 중환자실의 문을 열고 들어간 담당간호사는 몇 가지 기기들을 체크하고 난 뒤,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뇌부종이 심했던 탓에 얼굴이 많이 부어올랐지만, 꽤 예뻤을 얼굴이었다. ‘빨리 일어나서 엄마, 아빠 만나야지.’ 속으로 아이의 쾌유를 바라며 간호사는 병실을 나왔다. **** “혜린이가 많이 다쳤대. 같이 갔던 아저씨도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했대.” 아침에 등교하자마자 단유 옆에 앉은 유림이 소곤대듯이 이야기했다. 첫날에는 자세한 사정을 아무도 몰랐지만, 하루가 지나니 어느새 소문이 나고 퍼져서―이미 SNS와 카페모임 등을 통해 어지간한 학부모들은 모두 이 사태를 알고 있었다―유림이나 몇몇 아이들의 귀에도 들어갈 정도가 되었다. 단유도 혜린이가 다쳤다는 이야기는 어제도 선생님께 들어 아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유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정정해주었다. “그냥 다친 게 아니고, 어쩌면 죽을 수도 있대.” “심한 거야?” “응. 우식비명이라는데?” ‘우식비명’이라는 병이 있나, 곰곰이 생각하던 단유는 ‘의식불명’을 일컫는 것임을 깨달았다. 의식불명 상태에서 깨어나는 경우도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본인이 그런 케이스였으니. 다만 자신이 의식불명이었다는 자각이 없었으니, 그 상태가 얼마나 환자에게 치명적인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경우와 달리 혜린이는 ‘죽음’을 언급할 정도로 심하게 다쳤다고 유림이 설명했다. 어쩌면 의식불명이란 상태가 치명적인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가졌다. 그런데 그와 별개로 단유에게 놀라움을 준 이야기는 바로 ‘재훈’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남자 역시도 사고가 나서 입원을 했다니. ‘그래서 돌아오지 않았던 걸까?’ 물론 미래를 알지 못하기에 확신 할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어쩐지 그런 사정이 있었다면 어쩔 수 없었겠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어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많이 다쳤다고 하니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런 친절을 보였던 남자가 마음을 완전히 돌려서 떠난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 만으로도 조금씩 자라나던 앙금이 사라졌다. 선생님도 아이들 사이에서 퍼지는 소문에 대해 들었다. 선생님은 굳은 얼굴로 엄한 유언비어가 퍼지지 않도록 당부했고, 대신 혜린이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각자가 기도하고 편지를 써서 보내자는 내용으로 아이들의 동요를 다독였다. “2주 뒤에 기말시험 있는 거 알죠? 혜린이를 위해 걱정하는 것도 좋지만 기말시험 준비하는 것도 학생으로서 중요한 일이니 준비 열심히 하도록 하세요. 알겠죠? 반장, 인사하고 마치자.” 하루 수업이 끝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선생님도 바쁘게 준비를 했다. 오늘은 1반 주임선생님과 함께 서울에 있는 대형병원으로 병문안을 가기로 했다. 정확한 사유는 모르겠지만, 아마 연성재단 명함을 줬던 여자의 힘으로 이송되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볼 따름이었다. “선생님, 가시죠.” 어느새 주임 선생님이 교실로 찾아왔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급히 정리한 뒤 주임선생님 뒤를 쫓아갔다. 그 시간, 학교 밖에서 통학차를 기다리던 단유 앞에 고급 승용차가 나타났다. 승용차에서 내린 사람은 다른 아닌 주영이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갑자기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을까, 궁금해 하는 단유와 달리 함께 서있던 철용과 명수는 연신 주영의 얼굴과 차를 훔쳐보기 바빴다. 주영이 단유에게 다가올 때, 자기들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던 두 사람이었다. “누군지 알아?” 철용이 명수에게 물었다. “아니요. 처음 봐요.” 명수는 함께 수련캠프에 있었음에도 주영과 재훈을 보지 못했다. 운동장에서 달리느라 정신이 없었고, 장기자랑 시간에 무대 보며 박수치기 바빴던 명수였다. “가서 물어볼까?” 철용은 형으로서 단유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딱히 검은 정장차림의 여자가 단유에게 해코지를 할 것 같지는 않아 보여서 가만히 두고 보는 중이었다. 그런 철용의 마음과 달리, 명수는 거침없이 단유에게 다가갔다. 철용이 급히 말리려 했지만 명수는 빠른 걸음으로 단유 옆에 붙었다. “아줌마, 누구세요?” 주영이 난데없는 호칭에 놀라 돌아보았다. 단유보다 작은 키지만 다부진 몸을 가진 작은 눈매의 명수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넌 누구니?” “명수요.” “얘 친구니?” “네. 아줌마는 누구신데요?” 이쯤에서 단유가 말렸다. 주영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아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사람이야.” “니가? 어떻게?” “수련회 때 왔었던 사람이야.” “난 못 봤는데?” 명수를 설득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단유는 주영에게 사정을 물었다. “여긴 왜 오신 거예요?” “재훈 ‘형’이 널 보고 싶어 해서 ‘누나’가 데리러 온 거야. 재훈 ‘형’이 다친 건 들었어?” 묘한 악센트는 무시하고 단유는 물었다. “많이 다치셨나요?” “다치긴 했지만, 심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야. 적어도 너랑 이야기는 나눌 수 있을 정도야.” 사실 주영은 재훈을 말렸다. 굳이 이 아이를 불러들여서 이야기를 나눌 이유가 어디 있는가 말이다. “지금 불러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나중에 그 아이를 볼 낯이 없을 것 같아서. 아마 오해할지도 몰라.” 아니 무슨 헤어진 연인들이 서로를 그리워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만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았던 아이의 마음을 그리 걱정하시고 계신가, 어이없는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재훈의 설득에 넘어가 단유를 찾아온 주영은 자길 바라보는 아이에게 물음을 던졌다. “같이 가 볼래?” ======================================= [107] 아름다운 이별(3) 단유는 주영과 함께 서울로 향했다. 그 전에 보육교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명함을 주고받는 과정이 있었지만, 역시나 명함의 힘은 대단했던 건지, 이후에 보육원까지 데리고 오겠다는 약조를 받은 후 단유의 외출이 허락되었다. 단유는 자신이 탄 고급 승용차의 안락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지금껏 타고 다녔던 통학차와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데?” 단유와는 별로 이야기를 나눈 바도 없어, 그저 묵묵히 운전만 하고 있던 주영이었다. “아저씨가 왜 절 보고 싶어 하는 거죠?” 주영은 잠시 고민을 했다. 호칭을 바꾸도록 해야 할까? “모르겠어. 그냥… 데리고 오라고 해서 그 말에 따를 뿐이야.” “직업이 어떻게 되세요?” “응? 누구? 아저…씨?” “예.” 뭐라고 해야 되나? “대학생이야. 조금 늦깎이긴 하지만.” 재훈은 대학을 늦게 들어갔다. 고3을 마친 뒤, 외국으로 도망을 갔기 때문이다. 도피라고 해야 될까? 대학에 가기 전에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는 출국을 시도했다. 뒤늦게 알아챈 아버지가 방방 뛰었지만, 역시나 연 회장이 손자의 편에서 응원해 준 탓에 급귀국을 해야 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전 세계 가고 싶은 곳을 모두 돌아다니는 만행(?)을 저지르며 무려 3년을 보냈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기념품이랍시고 나무로 깎은 정체불명의 인형을 가족들에게 하나씩 선사한 후, 수능을 쳤다. 그리고 의대에 합격했다. “제가 아는 형도 의대에 들어갔는데.” “그래? 어딘데?” “청인대, 라고 하던데요.” 지방대인 것 같은데 기억에 없다. “재훈형은 어느 대학이에요?” “서울대.” 국내 대학 서열 1위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딱히 감흥은 없었다. 단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빠르게 달리는데도 마치 제자리에 서 있는 것 같은 안락함과 편안함을 주는 차였다. “부모님…은 두 분 다 안계시고?” “예.” 주영은 괜히 말을 꺼냈나 싶었지만, 단유는 여상하게 대답했다. 괜한 질문은 했다 싶어서 머쓱한 마음에 한 마디를 더 꺼냈다. “한 숨 자도록 해. 도착하면 깨어줄게.” ‘그냥 자라. 그게 마음이 편하겠다.’ 속마음을 감추고 이야기했는데, 아이는 대답 없이 밖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멀리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보육원과 학교 사이만을 오가던 일상이 깨졌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괜히 뭔가를 기대하게 만드는 오후. 늦은 오후의 햇살이 썬팅지 너머에서 흐릿하게 다가와 단유의 입가를 비추고 있었다. **** 주임선생님과 4반 담임선생님이 병원에 도착했다. 선물 바구니를 사야하나를 고민하다가 중환자실이라는 말에, 일단 그냥 가기로 했다. 간호사의 말에 따르면 면회도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대신 그 앞에 계시는 학부모는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돼서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주임선생님이 앞으로 나서서 말을 꺼냈다. 혜린의 어머니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데, 어머니의 표독스러운 눈빛에 뒤에 서 있던 담임선생님이 찔끔 놀라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당신들이, 당신들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의자에 앉아 있던 어머니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달려들려고 했다. 옆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말리지 않았다면 멱살잡이라도 벌어졌으리라. “여보, 여보! 참아. 선생님들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래!” “잘못이 없다니요! 우리 애가 이렇게 됐는데 잘못이 없다니!” “보호자분들, 조용히 해주세요. 원내 정숙 지켜주세요.” 간호사 데스크에 있던 간호사가 달려와서 말렸다. 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거리는 어머니를 데리고 아버지가 자리를 옮기기를 제안했다. 네 사람은 병원 밖 1층의 쉼터로 나갔다. 담임선생님은 눈치 빠르게 음료수를 사들고 와서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건넸지만, 당연히 받지를 않았다. “제가 이 사람 말린 건 진짜로 당신들한테 화가 나지 않아서가 아니요. 당신들이야말로 1차적 책임이 있는 사람들인데 내가 참을 것 같아요? 만약, 정말 만약에 일이 잘못되면 당신들. 각오하는게 좋을 거야.” 마지막 말을 뱉을 때는 흡사 인육이라도 씹어 먹겠다는 살인자의 예고처럼 들려, 두 팔에 소름이 돋았다. “어머니, 아버지. 물론 저희가 잘못을 했습니다. 그런….” “하 선생님” 주임선생님이 말리기도 전에, 아버지가 먼저 담임선생님을 불렀다. “우리 애 담임이라고 하셨죠? 그렇죠? 부디 우리 애가 무사하시길 기도하셔야 할 겁니다.” 아버지의 말에 곁에 있던 어머니마저 이를 말려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담임선생님은 너무 놀란 나머지 딸꾹질을 했다. 아버지는 두 선생님을 노려보다가, 하늘을 올려보았다. 마른세수를 하며 시선을 잠시 돌렸던 아버지가 다시 선생님들을 바라볼 때는 세상 누구보다 처연하고 연약한, 눈물 가득한 아버지의 눈으로 돌아왔다. “우리 애가, 춤 연습을 그렇게 열심히 했다고 하더군요. 수련회에서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춤을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집에서 그렇게 열심히 연습했답니다. 단지 그것뿐이었어요. 그런데 그 아이가 왜 이런 일에 빠지게 된 걸까요.”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당신들 잘못이요? 아니면 운전했다는 남자의 잘못이요? 아니면 그 양아치라는 놈의 잘못이요? …이 사람 잘못이요? 아니면 내 잘못이요? 왜 그 아이가 지금 저 위에서 호스를 달고 오늘내일하는 처지에 당해야 하냐 말이오.” 누구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아버지의 분노는 슬픔으로 변해 하늘과 땅을 가득 메울 정도였다. 그 절절한 물음에 선생님들마저 목이 메어왔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다른 두 사람이 있었다. 주영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올렸다. 간접적으로나마 이 사건에 얽힌 사람으로서 저 아버지의 슬픔을 그냥 남의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었다. 재단의 힘으로 아이를 이곳으로 옮기고 수술비도 대납을 했지만,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일까. 단유 역시 혜린이 아버지의 독백을 들었다. 다만 그 이야기를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이 시점에서 필요한 일인가를 생각해보았다. 따진들 혜린이가 낫는 것도 아닌데. “어?” 시선을 피해 주위를 보던 선생님의 눈에 단유가 눈에 들어왔다. 선생님의 시선을 눈치 챈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돌려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누구?” 혜린의 어머니가 물었다. 선생님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대답을 했다. 여기 있을 애가 아닌데? “단유라고, 저희 반 반장이에요.” “아, 쟤가 단유구나.” 선생님이 양해를 구하고 단유에게 다가왔다. 주영의 얼굴을 보고 간단히 목례한 다음 물었다. “여기 어떻게 왔니?” “이 누나랑 같이 왔어요. 재훈 형 병문안을 왔어요. 혜린이도 이 병원에 있는 건가요?”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왕 온 김에 혜린 부모님한테도 인사하자고 권유했다. “안녕하세요. 김단유라고 합니다.” “반갑다. 이렇게 와줘서 고맙구나.” 혜린 어머니가 단유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아버지는 감정을 추스르느라 말을 하지 못했다. 그를 대신해서 혜린 어머니가 말했다. “지금은 면회가 안 되기 때문에 보기가 힘들 텐데. 어쩌지?” 선생님이 단유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의아해하는 단유를 대신해 선생님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이렇게 와서 혜린이가 빨리 낫기를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죠. 그렇지 단유야?” 평소 얼마나 똑똑하고 영민한 아이였는지 보여줬잖니? 부탁이니 여기서 멍청한 모습을 보이진 말아다오. “예. 혜린이가 빨리 나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제가 아무런 힘도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가까이 왔으니 제 진심이 전해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역시! 단유 넌 대단해. 고맙다. 속으로 고마움을 표하는 선생님과 달리 혜린 어머니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쩜, 말하는 게 이렇게 의젓할까? 고맙다. 단유야. 그렇게 말해주니까 아줌마가 한결 마음이 편해지네. 고마워.” 혜린 어머니는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자, 단유는 어쩐지 어머니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혜린이는요. 의지가 강한 아이였어요. 장기자랑 연습 때 다들 힘들어서 쉬자고 할 때도 끝까지 연습을 마무리하던 친구였어요. 그리고 친구들이 따라하지 못하면, 곁에서 동작을 따라할 수 있게 도와주었고요. 평소에는 조용해서 잘 몰랐는데, 사실 굉장히 밝은 친구였어요. 노래도 곧잘 따라 부르고 친구들이 힘들어 할 때도 곁에서 웃긴 이야기로 힘을 북돋아 주기도 했어요. 힘들 때 가장 환하게 웃는 친구라는 걸 그 때 알았어요.” 어머니가 울컥 눈물을 쏟아냈다. “혜린이는 춤을 너무 잘 췄어요. 그래서 제가 보다가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친 적도 있어요. 그 때 그랬어요. 스스로 신나서 춤을 추기도 했지만 다른 친구들의 응원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 멋진 춤을 추겠다고. 혜린이는 다른 사람의 응원에 보답하기 위해 더 많이 땀을 흘리던 친구였어요.” 아버지도 입술을 깨물었다. “혜린이는 쉽게 쓰러지지 않는 친구였어요.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는 아이였고요. 분명히 지금도 열심히 이겨내려고 노력하고 있을 거예요. 제가 본 혜린이는 그랬으니까요.” 혜린 어머니가 단유를 껴안았다. “고맙다. 고마워.” 선생님도 눈시울을 붉혔다. 주영은 뒤돌아섰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바라보자니 재훈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아이란 걸 알고 그랬던 걸까? **** “어, 왔네?” “안녕하세요.” 단유는 침상에 누워있는 재훈에게 인사했다. “이런 모습으로 만나니 괜히 내가 미안하네.” “아뇨. 전 이렇게 불러주실 줄 몰랐는데요.” “왜? 내가 그냥 그렇게 갈 줄 알았어?” “그런 생각도 있긴 했는데요. 그래도 오래 만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저한테 친절을 베풀 이유가 없잖아요?” “내가 너한테 친절을 베풀었나?” “형은 제가 가장 고민하던 문제를 짚어주셨어요. 그것만 해도 제게 큰 친절을 베푼 셈이죠.” 주영은 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원래도 능글맞은 면을 보이던 재훈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느끼하고 능글맞은 톤으로 이야기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나이에 안 맞게 요상한 어투로 대화를 이어나가는 단유라는 아이도 영…. 헛기침으로 대화의 틈을 낸 주영이 단유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까는 왜 그런 말을 했던 거야? 부모님을 위로해주려고?” “무슨 일인데?” 사정을 모르는 재훈이 먼저 되물었다. 주영은 최대한 간략하게 조금 전의 상황을 설명했다. 재훈도 궁금해 하며 물었다. “어떤 생각이었는데?” “별 생각은 없었어요. 누나가 말한 대로 위로하려던 것도 아니었고요. 그냥… 혜린이 엄마 눈을 보고 있으니까, 그 엄마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그냥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해줬다?” 단유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전에 혜린이 아버지가 그런 말을 했어요. 혜린이가 다친 게 누구 잘못이냐고.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엔 혜린이가 다친 건 누구의 잘못이다, 라고 따지는 건 지금의 상황과 맞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혜린이는 병원에 누워 있잖아요. 혜린이가 얼마나 다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일어나길 바래야죠.” 숲에서 새가 보이지 않았다. 새가 왜 보이지 않는지를 물을 게 아니라, 새를 보려고 해야 했다. 목이 마르면 왜 목이 마른지를 생각하기 전에 물을 마셔야 했다. 혜린이가 다쳐서 누워있다면, 빨리 낫기를 바라는 게 옳다. “혜린이가 빨리 나을 수 있기를 바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혜린이도 빨리 나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라는 걸 부모님이 잊지 않으셨으면 싶어서요.” 주영이 뭔가 반론을 말하고 싶어 했다. “혜린의 어머니가 가장 바라는 건, 혜린이가 빨리 낫기를 바라는 게 아닐까요? 그건 저 역시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그 상황에서 했던 말은 사실 혜린 어머니가 가장 듣고 싶어 했던 말일 거란 이야기였어요.” 주영은 입을 다물었다. “혜린이는 의지가 강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친구였어요. 지금도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을 거예요.” 확신에 찬, 단호한 음성으로 단유는 말을 맺었다. ======================================= [108] 아름다운 이별(4) 단유가 말을 마친 뒤, 병실에 잠시간 침묵이 맴돌았다. 링거액이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가습기 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단유의 시선이 그 방울에 맺힐 때, 재훈이 입을 열었다. “니가 오기 전까지 난 네가 영재원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곳에 간다면 아마 네가 잃어버린 ‘재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재훈의 말에 단유는 궁금하다는 눈으로 물었다. “영재원에 가면 꿈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요?” “아니, 꿈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 내 꿈이 뭐지, 내 목표가 뭐지 하며 찾고 다닐 시간에 수없이 많은 과제와 흥미로운 실험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 니 말을 들으니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 아니 그러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단유는 가만히 뒷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학교생활을 누리도록 해. 다양한 공부를 하고 다양한 친구들과 대화를 하는 평범한 생활 말이야. 그리고 너무 한쪽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혹시 물리나 수학 말고 좋아하는 과목 있어?” “다 조금씩 좋아하긴 하는데….” “다 좋아는 하지만 물리나 수학만큼 공부해 본적은 없지?” “네.” “이제부터는 다른 과목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도록 해봐. 그냥 좋아지지는 않겠지. 노력을 해야 할 거야. 대신 그 노력한 만큼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거야. 이건 일종의 슬럼프 같은 거거든.” “슬럼프요?” “간단히 이야기하면 의욕상실상태를 말하는 거야. 성과가 보이지 않으니 의욕이 생기지 않고, 의욕이 생기지 않으니 성과가 나오기 힘들지. 그게 반복되는 거야. 이럴 때는 너무 한 쪽에 몰입하는 것보다는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려보는 것도 좋아.” 단유는 눈을 반짝였다. 재훈은 ‘재미’라는 부분에 중점을 두고 해준 충고였지만, 단유에게는 ‘마법’의 지지부진한 성과에 대한 충고로 들렸다. “예전, 그러니까 고대에는 말이다. 음악도 수학이었어.” “음악이요?”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과 예술, 천문학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수학이 이용되었다. 수학과 음악의 경우는 둘 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정신적인 측면에서 접근한다는 과정의 공통점이 있었지. 머릿속으로 암산을 하듯, 음표와 음률을 머릿속으로 그려내는 것처럼. 여러 가지 식을 동원하여 숫자를 계산해내듯, 현과 현 사이의 거리, 음과 음 사이의 간격을 숫자로 계산하거나 표현해내기도 했었어.” 단유는 새로운 이야기에 조금씩 흥미가 생겼다. 음악에 수학이라니! “가령 피타고라스는 하프 연주를 하면서 가장 듣기 좋은 음이 나오는 법을 연구했다고 해. 그리고 현의 길이나 현을 치는 힘이 정수비례 관계라는 것을 밝히기도 했고.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한 옥타브는 1:2의 비를 이룬다고 했던가, 그럴 거야. 아무튼 그런 연구를 통해서 피타고라스 음률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이게 오늘 날 음정이라고 부르는 것의 기원이라고들 하지.” “대단하네요. 그럼 다른 것도 그런가요?” “미술도 마찬가지야. 어떤 그림들에는 다양한 기하학적 표현이 나오기도 하고, 정확한 계산 아래 수치에 맞게 물건이 배치되도록 그려진 그림도 있지. 물론 제일 대표적인 적용사례라면 ‘황금비율’이라는 건데. 뭐, 이건 사람마다 이견이 있어. 어쨌든 수학은 곳곳에 사용되고 있지. 그런 걸 찾아보는 것도 재미일 거야.” “전혀 몰랐던 내용이네요.” 단유의 밝은 목소리에 재훈이 싱긋 웃었다. “애초에 내 생각은, 니가 영재원에 갈 수 있게 뒤에서 지원해줄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 영재원 정도야 중학교 입학 후에 가도 되니까. 지금은 부디 한 쪽의 지식보다, 넓고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는데 집중하도록 해. 지금은 그게 더 중요한 시기일 테니까. 어찌됐든 불균형한 지식 습득은 불균등한 발전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니 피해야 한다.” “그럴게요. 고맙습니다.” “말을 너무 많이 했나봐. 오늘은 이만 여기까지 하자. 힘드네.” “저 때문에 쉴 시간이 많이 줄어든 거 아닌가요?”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앞으로 1년은 이 상태로 쉬어야 하는데, 몇 십분 정도는 티도 안나.” 이후 사소한 이야기가 오간 뒤, 단유는 주영과 함께 병실을 나갔다. 재훈은 웃음으로 배웅한 뒤, 조용한 병실에 홀로 남게 되었다. “변덕…일까?” 처음 만난 아이한테 자신의 옛 모습을 보았고, 불현 듯 솟아난 죄책감을 위로받고 싶어서 고집을 부렸다. 그러다가 단유가 혜린의 부모에게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고쳤다. 단유는 자신과 달랐다. 단유는…. 재훈은 눈을 감았다. 잠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잠들어야 겠다. 너무 많은 생각을 했더니 두통이 나는 것 같았다. “누나.” “응?” “혹시 혜린이 보고 갈 수 있나요?” 주영은 잠시 단유의 청을 들어줘야 하나 고민했다. 들어줄 수 있을까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전화 한 통이면 되니까. 선배가 아끼는 아이라는 점도 있지만, 조금 전에 자신이 직접 목격했던 아이의 마음을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주영은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연락을 했다. “가자. 대신 중환자실 바깥에서 봐야 할 거야. 안에까지는 들어가기 힘들어.” 중환자실에 도착한 단유와 주영. 병원이란 건물 자체가 본래 그러하겠지만, 특히 중환자실 앞은 침울하고 답답한 느낌이 강했다. 몇몇 간호사들과 의사들이 들락날락 거리지만 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서로 이야기할 때도 들릴락 말락 할 정도로 소곤거리듯 이야기를 나눴고, 느릿한 발걸음도 묵직하기만 했다. 몇 몇 보호자들이 중환자실 근처에 있는 의자에서 대기하거나 혹은 복도 바깥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혜린의 부모도 그 중 하나였다. “어? 반장 왔네? 어디 갔었다가 오는 거니?” 혜린의 어머니가 먼저 단유를 발견하고 인사했다. 1층에서 주영을 따라 간 뒤 바로 혜린을 보러가는 줄 알았던 두 사람이었다. 단유는 애써 변명하는 대신, 꾸벅 인사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중환자실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혜린이 누워 있는 침상이 보이긴 했는데, 자세히 보이진 않았다. 그저 조그만 아이가 온갖 줄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만 보였다. 주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각종 기계들이 혜린을 둘러싸고 있었고, 검은 모니터에서는 의미를 알기 힘든 숫자와 그래프가 그려지고 있었다. “원래 7시 반부터 면회가 가능한데, 지금 들어가도록 해주겠다네. 들어가 볼래? 들어가 보실래요?” 30분 일찍 들어가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이야기에 부모들이 반색하며 부탁을 했다. 그리하여 네 사람은 간호사의 인도에 따라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얼굴을 보자마자 입을 막았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전 남편의 팔에 의지해 겨우 서 있을 수 있었다. 반면 남자는 눈을 부릅뜬 채로 마치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서 딸의 모습을 지켜봤다. ‘저 아이가 그랬지. 빨리 낫기를 바란다고. 너도 노력하고 있을 거라고. 그래. 혜린아. 넌 강한 아이잖아? 금방 일어날 거지?’ 아버지는 손을 내밀어 혜린의 손을 붙잡았다. 퉁퉁 부은 손을 매만지니 더욱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키운 딸이었는데….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을 때, 다가와서 애교 부리던 딸. 함께 옷 사러 백화점에 갔을 때, 하얀 원피스를 입고 싶다며 조르던 딸의 모습. 가족여행으로 바닷가를 갔을 때, 모래사장에서 파도와 술래잡기를 하던 모습.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오로지 딸이 무사히 일어나기만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되뇌어야만 할 때였다. 그 기도가 하늘에 닿기를, 신이 있다면 신의 귀에 닿기를. 단유는 가만히 혜린을 지켜보았다. 낯설었다. 평소 보았던 혜린의 모습이 아니어서 낯설었고, 어쩐지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모습에 낯설음을 느꼈다. “어때? 괜찮아?” 땀을 뚝뚝 흘리며 묻던 혜린에게 단유는 박수를 치며 말했다. “내가 잘은 모르지만, 멋있었어. 너도 그렇고 다른 애들도 그렇고. 음악과 동작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거 같았어.” “그치? 우리가 그걸 맞추려고 얼마나 연습했는데. 그치, 얘들아?” 뒤에서 주저앉아 쉬던 애들도 손을 흔들며 기뻐했다. “그럼.” “반장, 괜찮았어?” “야, 반장은 거짓말 안하는 거 알잖아. 그치?” 단유는 살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한 번 더 연습할까?” “야, 혜린아! 좀 쉬자!” “넌 안 힘들어?” “힘들어도 이렇게 맞춰야 다른 반 애들 이기지. 나중에 장기자랑 때 다른 반 애들도 우릴 보고 멋있다고 할 거 아냐?” “10분 만 쉬자. 나 다리에 힘 하나도 없어.” 아이들의 아우성에 혜린도 못 이긴 척 주저앉았다. “그래, 쉬자 쉬어.” 단유는 그 때 혜린이란 아이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끝없는 열정과 욕심으로 불타오르던 아이. 확고한 신념과 목표가 선명했던 아이. 어딘가 흐리멍덩하기만 한 자신과 전혀 달랐기 때문에 더욱 기억에 남은 혜린의 모습이었다. 그 혜린이 지금은 꺼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촛불처럼 보였다. 그렇게 생각에 잠긴 사이에 주영이 단유의 어깨를 짚었다. “시간 다 됐어. 나가야 돼.” 단유는 혜린의 부모에게 인사를 하고 병원을 나섰다. 주영의 차를 타고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오던 길. 주영이 넌지시 물었다. “많이 친했어?” “…아니요.” 뜻밖의 대답이라 주영이 힐끗 쳐다보았다. “그럼, 왜 혜린을 보고 싶어 했어? 그냥 같은 반 아이라서? 아니면… 좋아하던 아이?” “아니요. 그냥 일어나라고 말해주고 싶어서요.” 주영은 입을 닫았다. 단유는 한결되게 말하고 있었다. 일어나라고. 그걸 또 잊었던 걸까? 왜 내가 그런 질문을 했지? 라며 스스로를 반성하는 주영이었다.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파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위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사람과 어떤 관계가 있고 없고를 떠나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다. 정말 당연한 그 일에 다른 해석과 해명을 붙여 이해하려는 태도는 당연하지 않은 행동이다. 주영이 자기반성의 시간을 갖는 동안 단유도 생각에 잠겼다. 이 세상은 안전하지 않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수련회를 가기 전날부터 시작했던 고민은 결국 이런 식으로 눈앞에 펼쳐졌다. 안심하지 마라. 긴장 풀지 마라. 자신을 지킬 힘이 필요하다. 단유는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 “왔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주영을 보며 재훈이 웃음으로 반겼다. “왜 안 자고 있어요?” “생각이 많아서 잠이 안 오네. 아니면 약의 부작용 때문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주영은 침대 옆 옷장에 가방을 넣어둔 뒤 재훈 옆으로 다가갔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요?” “있어.” “어디요?” “머리.” “왜요? 아파요? 어떻게 아파요?” “생각이 많다고 했잖아.” 주영은 가볍게 재훈을 흘겨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애는 무사히 들어갔고?” “내가 무사히 돌아온 거 보면 몰라요? 설마 어디 팔아먹었을까봐?” “모르지. 질투가 많은 녀석이니까.” 주영의 얼굴이 붉어졌다. 설마 이 사람 날 갖고 노는 거야? “혜린이라고 했던가.” 낮은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내뱉는 이름에 주영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몇 시간 전에 봤던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때?” “…안 좋대요.” 이미 주치의와 이야기를 나눴다. 도의적인 책임을 지기 위해 연성재단에서 치료비 전액을 부담하고 있었고, 주치의는 치료경과를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비용이 얼마든 상관없이 최선을 다해달라고 해줘.” “이미 이야기했어요.” 재훈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살면서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 놓였었다. 수능을 포기했던 순간, 해외여행을 결심한 순간, 돌아와 의대를 지원한 순간, 그 모두가 치열한 선택의 결과였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수많은 선택이 있었고 매번 좋은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니었다. 어떤 선택은 미련이 남았었고, 어떤 선택은 후회를 남겼다. 그리고 며칠 전의 선택은 죄책감을 남겼다. 아마 이대로 그 아이가 눈을 뜨지 못한다면, 평생을 죄책감과 싸우게 될지도 몰랐다. 주영은 재훈의 표정을 살핀 뒤, 화제를 돌렸다. “단유라는 애,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응?” “아까 그러셨잖아요? 영재원까지 지원해 줄 생각이었다고.” “아. 일단은 그 아이가 평범한 학교생활을 하도록 놔둘 생각이야. 그 이후에는 보육원에서 데리고 나오는 것도 고려중이고.” “데리고 나온다고요? 어떻게?” “뭐, 그거야 방법은 많지. 그건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지금 그 아이의 상태가 문제지.” “슬럼프요?” 재훈은 답을 하지 않았다. 주영이 의아한 눈빛으로 대답을 기다리자 재훈이 뒤늦게 답을 했다. “슬럼프도 문제지만, 사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어.” ======================================= [109] 아름다운 이별(5) 주영은 되물었다. 문제가 뭐냐고. “그 아이, 단유는 말이야. 내 친구를 생각나게 만들어.” 언제는 자기랑 닮았다고 해놓고선? 대답은 하지 않고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고 생각한 주영이 툴툴댔다. “그 친구는 별로 친하진 않았어. 사실 나도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는데, 그 아이는 더 심했어. 누구와도 가깝게 지내지 않았거든. 근데 가만 보면 이상한 게, 그 애한테는 누구도 다가가지 않았어. 그냥 다가가기 무서운 느낌이랄까? 무섭게 생긴 얼굴은 아닌데 말이야.” 그런 아인 각 반마다 하나씩 있지 않았나? “세월이 지나고 내가 고등학교에 올라갔을 때, 그 아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어. 소년원에 갔다고 하더라고. 왜 가긴. 죄를 지었으니까 갔지. …사실 가벼운 죄는 아니었어. 당시에 신문에도 났던 사건이긴 한데, 그 아이 사람을 죽였어. 세 사람을 죽였다고 하더라고.” 주영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반면 재훈의 음성이나 표정은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세상에. 세 사람을 죽인 사람을 두고 ‘친구’라고 부를 수 있나? 이 사람 제정신 아닌 줄 알았지만, 이 정도였나? “나중에 알았어. 그 아이, 사이코패스라고 기사에 났더라. 그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보니까, 그 친구가 무서웠던 이유가 뭔지 알게 되었어. 그 친구는 말이야.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어. 가끔 눈이 마주쳐도 그 아인 아무런 감정이 없는, 마치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유리구슬을 박아놓은 것 같은 눈이었지. 그 이질감이 무서웠던 거야. 다만 나나 다른 아이들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 이질감의 정체를 분명히 알지 못했을 뿐이고, 그래서 그 아이를 무서워했던 거겠지.” “그럼, 아까 그, 단유도 사이코패스라는 거예요?” “아니, 전혀 아닌데?” 무슨 뚱딴지같은 반응이냐는 듯 대답하는 재훈의 말에 순간 욱하는 감정이 들었다. “네? 그럼 무슨 소리예요?” “너도 참. 내가 아무리 사이코패스 이야기를 했기로서니 그걸 가지고 다른 사람을 그렇게 매도하면 쓰나? 이주영, 심보가 고약해?” “놀리지 말구요.” 피식 웃으며 재훈은 손을 내밀었다. 뭐냐는 눈짓을 보이자, 간단하게 ‘물’이라고 대답하는 재훈이었다. 물을 마신 후 재훈은 협탁에 컵을 올려 두었다. “실은 단유의 말에서 느낀 게 뭐냐 하면, 너무 이성적이라는 거야. 단유, 걔는 아버지의 슬픔이나 분노라는 감정에 대해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어. 감정적인 대응보다 이성적인 대응이 우선이라고 판단했다는 거지.” “예? 이해를 못하겠어요. 아니… 저기 아까 걔가 그랬어요. 혜린이를 보려고 했던 이유가 일어나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서라고. 그게 어떻게 이성적인 행동이에요? 지극히 감성적인데?” “그래서 말했잖아. 단유는 사이코패스는 아니라고. 걔는 다분히 감성적인 면도 많은 친구야. 그러니 나랑 이야기를 나누고 즐거워했지. 그런데 말이지, 자식의 사고에 화를 내는 부모의 감정 앞에 노출되었을 때,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게다가 이제 11살이 된 아이가 말이야.” “…….” “결과만 말하자면, 단유는 그 격렬한 감정 앞에서 자신을 격리시켰던 거야. 그리고 이성적인 대응을 한 거지. 분노하지 말고 차분하게 행동하라, 는 행동강령에 따른 거야.” “선배, 그것도 무서운 이야긴데요?” 주영은 자기도 목이 탄다는 듯, 컵을 하나 더 가져왔다. 목을 축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주영이 컵을 내려놓자 말을 잇는 재훈이었다. “단유는 일부러 감정을 격리하고 있어. 그 아이는 아마도 심한 감정의 격류에 휘말렸던 경험이 있었을 거야. 트라우마라고나 할까? 확신할 순 없지만 그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계속 가두고 있는 거야. 상처가 되새김질 되는 걸 막고 있는 거지.” “그런데, 그게 사이코패스랑 무슨 상관이에요?” “그 사이코패스란 녀석, 학교에서 특별활동을 나랑 같이 했거든.” “네?” “나 어릴 때, 학교에서 토끼를 키웠어. 우리 때는 토끼 키우는 게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을 때였거든. 학급 차원에서 토끼를 기르자고 했어. 그리고 나랑 그 친구가 당번을 맡게 되었지. 어느 날, 그 토끼가 죽었어. 이유는 잘 모르겠어. 먹을 걸 잘못 줬던지, 아니면 그냥 병이 든 건지.” “혹시….” “아냐, 니가 생각하는 그런 거. 그 친구 등교하자마자 토끼를 보러갔다가 죽어있는 걸 알게 되었어. 그리고 그 날 하루 종일 토끼를 붙잡고 울었어. 너무 울어서 선생님이랑 아이들이 수업도 포기하고 달랠 정도였어.” “예?” “그 아이가 사이코패스라는 이름을 달고 신문에 등장했을 때 놀란 건 그 때문이었어. 그 아이는 사이코패스가 아니었거든. 그 아이는 그동안 자신의 감정을 닫고 살아온 녀석에 불과했어. 그런데 아끼던 토끼의 죽음에 닫아 걸었던 빗장에 틈이 생기고 말았던 거 같아. 그날 그 친구가 쏟아낸 감정의 격류에 우리 반 아이들이 모두 휩쓸렸었지.” 주영은 아무 말도 못했다. “얼마 후. 그 아이가 소년원에서 자살 했다는 소리를 들었어. 사람들은 사이코패스인 아이가 더 이상 자기 멋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말하지만, 난 믿지 않아. 그 아인 살해당한거야. 주위 사람들의 편견과 거짓이란 칼날아래 살해당한거야.” 재훈은 협탁 위에 놓인 컵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런 생각을 해. 그 때 단순히 어린 마음에 무서워했던 마음을 버리고 친구로서 다가갔다면, 그래서 서로를 이해하려는 행동을 했다면, 그 친구는 여기 날 보러 병문안을 왔을지도 몰라. 싸구려 과일 바구니라도 들고 말이야.” “그럼 단유는?” “단유는 그렇게 만들지 말아야지. 영재원 같은 곳에서 공부를 하는 건 나중에라도 가능해. 단유라면. 그런데 지금 그 아이가 겪고 있을 거라고 추측하는 문제에 대해선, 다른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래서 일단 좀 더 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어. 그래서 아까 그렇게 이야기한 거고.” “여러 가지에 관심을 가져보라거나 친구들이랑 놀라고 한 거?” “그렇지.” “혹시 꿈이 선생님이었어요?” “주영아. 내가 꿈이나 목표를 갖는 게 싫었다고 말 안했나?” “…….” 이 사람 말 한번을 곱게 하지 않는다. 꼭 그렇게 비아냥거려야 속이 시원하냐? **** 단유의 학교생활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애초에 영재원 따위 생각해 본적도 없었을 뿐더러, 다른 교과목에 대한 관심도 슬슬 생기고 있던 무렵이었다. 특히 혜린이를 통해 관심을 갖게 된 음악에 대해서도 그랬지만, 다양한 학문에 대한 관심을 넓혀 나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조금씩 재미를 붙여 나갈만한 것이기도 했다. 더구나 기말 시험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 좋든 싫든 여러 과목을 공부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단유는 단 한 번도 1등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공부한 적은 없었다. 그냥 공부하다보니 1등이 되었을 뿐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딱히 열심히 공부할 필요도 없었다. 적당히 공부를 해도 웬만한 논리력과 사고만 있으면 초등학교 시험 정도는 언제든 100점을 맞을 수 있을 정도의 난이도였기 때문이다. 주영은 혹시 부탁할 게 있으면 전화하라고 전화번호를 알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전화를 할 상황도 없었고, 전화를 걸 휴대폰도 없었기 때문에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그래도 나중에 어떤 상황이 올지 몰라 외워두고는 있었다. “석고! 너! 공부! 가르쳐 준다며!” 명수가 씩씩대며 교실로 들어왔다. “응? 갑자기 들어와서 무슨 소리야?” “시험 다음 주 월요일이라며? 그거 왜 안 가르쳐 줘?” “몰랐어?” “몰랐지. 당연히 몰랐지. 안 가르쳐 주는데 어떻게 알아? 방금 영철이가 안 알려 줬으면 나 큰일 날 뻔 했단 말이야.” 영철이는 명수의 짝이었다. 단유는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선생님, 얘가 몰랐다는 데요?” 명수는 흠칫 놀랐다. 그리고 단유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5반 담임선생님이 붉어진 얼굴을 하고 명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명수야.” 으르렁. “서, 석고야. 나 공부하러 간다. 안녕. 저녁에 봐.” 명수는 급히 교실을 뛰쳐나가려 했다. 교실 뒷문을 지키고 선 4반 선생님만 없었다면. “명수야. 도대체 넌 지금 수업시간이란 걸 아니, 모르니?” “어? 몰랐어요. 정말요.” “인. 명. 수!” 명수의 뒷덜미를 잡은 5반 선생님의 일갈에 명수가 찔끔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아이들이 와~ 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단유도 피식 웃었다. 그리고 속으로는 오늘 저녁부터 특별과외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명수는 맨날 왜 저래?” 단유 옆에 있던 유림이 툴툴댔다. 언제나 부끄러움은 남의 몫이라던가? 단유는 연한 웃음을 담아 대답했다. “저래야 명수지.” “하긴 그래.” 유림도 쉽게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명수를 싫어하는 아이는 없었다. 왜냐하면 명수는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초등학교에서 리더십이 가장 강한 아이는 반장도 아니고 전교회장도 아니었다. 바로 축구 잘하는 아이였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 체육시간, 틈날 때마다 운동장으로 달려 나가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는 게 초등학교였다. 운동장으로 달려 나간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건 결국 축구밖에 없었다. 야구를 할 수도 없었고, 농구를 즐기기에도 키나 기술이 되지 않았다. 결국 가장 손쉽게 즐길 운동은 축구 밖에 없으니,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축구를 잘하는 아이를 중심으로 뭉치게 된다. 그리고 명수는 축구를 잘하는 아이였다. 때문에 반장이 아니더라도 5반의 남자 아이들은 명수를 중심으로 뭉쳤고, 명수가 운동장에서 내리는 지시에 따르는 것이 함께 축구를 즐기는 방식이었다. 체육부장이 된 후, 명수의 영향력, 리더십은 4학년 전체를 아우를 정도가 되었다. 직접 나서서 반 대항 경기를 벌이기도 하고, 철용의 도움 아래 고학년들과의 경기도 종종 벌였던 것이다. 게다가 명수는 설령 축구를 못하는 아이가 있어도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만큼 자기가 뛰면 된다고 생각하고 더 열심히 움직이는 아이였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5반이든 4반이든 아이들은 명수를 싫어하지 않았다. 축구도 잘하고 쾌활한 성격의 명수를 싫어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가 이상하다고 취급 받을 정도였다. “패스!” 단유는 잡고 있던 공을 허공에 띄었다가, 오른 발로 힘차게 걷어찼다. 날아간 공은 언제나처럼 명수 앞에 정확히 도착하였다. “나이스!” 단유는 한숨을 쉬었다. 분명히 오늘 저녁부터 공부를 하자고 하교할 때 이야기를 했었는데, 어쩌다보니 또 명수의 조름에 못 이기고 이렇게 보육원 더비에 끌려 나왔다. 저녁식사 후에는 꼭 공부를 시키겠노라 다짐하던 와중에 골문을 향해 공이 날아오고 있었다. 단유는 재빨리 몸을 움직여 좌측으로 뛰었다. 힘껏 손을 뻗어 막으니, 공이 손을 맞고 위로 튀었다. 코너킥이 되긴 했지만, 일단은 골이 될 뻔 한 공을 막았으니 아이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역시 석고!” 운동장을 힘차게 가르며 달려온 명수가 손을 뻗었다. ―짝! 두 사람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 “선생님! BP(혈압) 떨어지는데요?” “이런! 수혈팩 더 빨리 짜! 어서!” ECG(심전도모니터)가 미친 듯이 울어대고 있었고, 의사는 비명을 지르듯 지시를 내렸다. 온 몸에서 쏟아내는 땀방울이 가운을 적실 정도임에도 가슴을 압박하는 손을 멈추지 못했다. “양 선생, 이 선생이랑 자리 바꿔. 아트로핀은 어딨어!” “여기요, 선생님!” 심폐소생술을 시도하던 의사가 이 선생으로 바뀌고, 양 선생은 자리에서 내려왔지만 쉴 틈은 없었다. “과장님 호출하고, 수혈팩 더 가져와! 서둘러!” 한편, 혜린의 부모는 중환자실 바깥에서 두 손을 꼭 부여잡고 기도를 했다. 아무리, 아무리 해도 들어주지 않는 기도였지만 세상이 끝나더라도 멈추지 않을 기도였다. “하느님. 제발 우리 딸, 우리 혜린이가 일어날 수 있게 해주세요. 제발 눈만 뜨게 해주세요. 제 모든 걸 버릴 테니, 차라리 절 데려가시고 우리 혜린이는 살려주세요. 아무 죄도 없는 아이예요. 이제 막 꽃을 피우려는 아이예요. 그 아이를 아껴주세요. 착한 아이잖아요. 착한 아이한테 이러는 건 아니잖아요. 세상 누구보다 착하고 맑은 아이잖아요. 제발 살려주세요.” 눈물이 떨어져 차가운 바닥에 검은 점이 되었다. 금방 말라버릴 것 같은 눈물자국은 마르기는커녕 점점 더 넓어지기만 했다. ======================================= [110] 아름다운 이별(6) 시험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아이들은 4학년 첫 기말시험을 앞두고 다들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3학년 때랑은 또 달라진 점이었다. 3학년 때까지는 이렇게까지 기말 시험 성적에 매달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4학년부터 특별히 달라진 것도 없건만 시험을 대하는 아이들의 자세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당장 명수만 해도 그랬다. “체육부장이 모범을 보여야 하기 때문이야.” 굳이 체육부장이 아니더라도 학생이라면, 당연히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인데 명수에게는 특별한 이벤트처럼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공부하지 않겠다는 것 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유는 자기가 생각할 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점들을 따로 요약 정리하여 외우도록 시켰다. 수학의 경우에는 평소의 실력이 중요했던 터라 크게 의미가 없지만, 다른 과목의 경우에는 요약한 부분만 잘 정리해도 괜찮은 점수를 얻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거기에 집중을 했다. **** “너 학원 안다니지?” 유림은 뻔히 다 알면서도 그렇게 물었다. “응.” “걱정 안 돼?”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단유는 보던 책을 내려놓고 유림을 쳐다보았다. “학원 다니는 애들이 성적이 더 잘 나올지도 모르잖아. 그러면 너 1등자리 뺏길지도 몰라.” “1등이 중요해?” 어안이 벙벙, 하다는 표현이 이럴 때 쓰는 구나. 유림은 뺑소니 사건을 목격한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진심이야?” “뭐가?” “1등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처럼 말하잖아, 너? 그러면 지금까지 1등은 왜 계속 한 거야?” 늘 생각하는 부분이지만, 항상 오해는 생길 수 있다. 그리고 단유는 늘 오해를 풀어나가는 쪽이었다. “난 1등을 하려고 한 적이 없어. 그냥 1등이 된 거지.” 재수 없다. 평소에도 가끔 재수 없다고 여길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더 재수 없다. 유림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그럼 1등은 안 중요하다는 거야?” “응. 안 중요해. 그럼 넌 왜 중요한데?” “어? 1등하면… 좋잖아?” “어떤 점에서?” 어떤 점에서 1등이 좋을까? 유림이 잠시 대답을 고르느라 생각에 잠겼다. 1등을 하면 좋은 점을 생각하니, 가장 먼저 기뻐할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그 다음은 다른 아이들보다 성적이 좋다는 점에서 우월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1등 하면 좋은 점이 너무 많다. 선생님과 아이들의 인정. 성적표에 기록되는 점. 뒤따라 붙을 선물들. 칭찬과 찬사. 유림은 1등을 했을 때 좋은 점이 너무 많아서 뭐부터 말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유림이 하나하나 거론하자, 단유는 가만히 듣더니 한 마디 했다. “난 지금까지 1등 했을 때, 거기에 해당하는 것들을 받은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 특별히 기쁘다고 느낀 적도 없었고.” 유림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대화가 이런 식으로 전개되리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어 당황스러웠다. 단유는 늘 결여된 상태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다만 그걸 티를 내지 않을 뿐이었다. 때문에 유림은 종종 이런 식으로 당황스러운 순간을 맞이했지만, 정작 단유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니 매번 유림만 곤란함을 느꼈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둥의 사과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과를 했다가는 왜 했냐는 둥, 어떤 의미냐는 둥의 자기 머리만 아픈 토론이 진행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공부 열심히 해.” “너도.” 가끔 이런 감정소모가 없는 교류가 답답했다. 아니 일방적인 감정 소모를 강요받는 기분에 화가 나기도 했다. 왜 나만 열 받고, 왜 나만 억울한 거지? 한 학기 내내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은 질문이었다. “반장.”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그러고 보니 오늘 따라 선생님이 늦게 들어오셨다. “차렷.” “경례.”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여러분.” 목이 잠겨서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선생님은 짧게 헛기침을 해서 목을 푼 후, 수업을 진행했다. **** “좋은 아침이네요?” “왜?” “웃고 계시길래 그냥 그렇게 물어봤어요.” 주영은 들고 온 가방을 옆에 내려놓고, 병실의 블라인드를 걷었다. 아침햇살이 창문을 넘어 병실 안으로 쏟아졌다. 창문을 여니, 아침의 서늘하면서도 맑은 공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초여름 아침의 상쾌함이 폐부에 깊숙이 들어오도록 숨을 한껏 들이마시는 주영이었다. “요즘은 미세먼지 걱정 안하나 봐?” “선배!” 키득거리는 재훈을 흘겨보던 주영은 소매를 걷고 노트북을 펼쳤다. “일단 부지 매입은 잘 진행되고 있네요.” “그래야지. 병원 건립 계획서는 내가 써야 하는데 어떡하지.” “아직 시간 여유가 있으니 천천히 하셔도 되요. 지금은 어쩔 수 없잖아요. 땅은 미리 매입하더라도 병원은 천천히 짓는 쪽으로 하셔도 무방하실 것 같고요.” 재훈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지. 내가 병원을 지으려는 이유는, 아니 할아버지가 병원을 지어주려는 이유는 내가 그 병원에 들어가서 일하기를 바라는 게 아냐. 내가 정을 붙일 사업체를 주려는 거지. 내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야. 그러니 이왕이면 멋있게 지어놓고 나를 기다려야 맞아.” “왕궁을 먼저 건설하고 왕을 영접하라는 건가요?” “그런 식으로 비아냥대야 속이 후련하니?” “나 참. 선배가 평소에 저한테 하시는 거에 비하면 비아냥도 아니네요.” “마음 넓은 내가 봐줘야 한다 이거지? 알았어. 마음대로 해. 어쨌든 되도록 빨리 짓는 쪽으로 가자.” 주영은 노트북에서 손을 떼고 재훈의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혹시 서두르는 다른 이유가 있어요?” 재훈은 얌전히 주영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영리법인이야. 다른 병원들과 경쟁을 해야 된다고. 지금도 전국에 수십 개의 병원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이왕이면 보다 먼저 세워서 치고 나가야지. 그냥 지어놓고 세월아 내월아 할 거면 애초에 지을 생각도 안 했을 거야.” “구상은 제대로 하고 있나보네요. 사실 전 반쯤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그렇게 생각한 거야?” “선배가 해외에서 돌아온 지 1년도 안 지났어요. 그런데 그 사이에 수능을 치고 의대에 들어가고 연성재단 이사직도 겸임해서 일하고 계시잖아요? 그렇게 바쁜 와중에 갑자기 저한테 찾아와서 땅 사, 라고 말씀하셨던 분이 선배예요. 당연히 충동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나요? 그 바쁜 시간을 쪼개서 영리의료법인 설립을 구상하고 계획하고 있었노라고 말하면 열에 아홉은 믿지 않을 거예요.” “그 믿을 수 없는 일을 해낸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칫, 주영은 짧게 혀를 차곤 노트북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실 말이야 조금 폄하해서 표현했지만, 재훈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의대 정도야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었음을 자랑이라도 하듯 덜컥 수능을 보더니 다음해 서울대 의대 정문을 통과해 들어갔다. 연성 재단 이사직을 맡더니 시스템 구축이란 이름 아래 혁명적인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다. 덕분에 재단 내 보유금이 크게 늘었고, 더욱 많은 사업체의 투자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영리의료법인이라는 새로운 사업을 들고 왔다. 물론 병원이 세워지고 나면 연성재단 이사를 그만둠은 물론이고 연성그룹으로부터 완전히 손을 떼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재훈의 미래는 어둡지 않았다. 다른 무엇보다 재훈 본인의 실력이 미래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혜린이는?” 멈칫. 주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제 밤에도 고비를 한 번 넘겼대요. …그런데 여전히 불안하다고 주치의가 그러더군요.” “수술은 더 이상 안하고?” “이미 뇌부종과 간파열 등은 수술로 완전히 잡았대요. 다만 너무 큰 수술을 받기에 아이의 체력이 부족했었는데, 결국 그 체력이 지금 그 아이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네요. 그래서 더 이상 수술을 진행할 수도 없다고 하더군요.” “방법이 없다?” “…네.” 마치 자기가 죄를 지은 것처럼 움츠러드는 주영이었다. 눈치를 보니 재훈은 천장을 보며 깊이 생각에 빠진 모습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때였다. 조용한 병실에 핸드폰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보세요?” 주영이 전화번호를 확인하더니 급하게 통화를 했다. 말없이 전화를 통화하던 주영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통화를 마쳤다. 재훈은 주영은 흘깃 보다가 이내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 안 물어봐요?” “내가 니 애인이야? 뭘 물어봐. 말할 게 있으면 알아서 말하겠지.” “…혜린이 주치의요.” “…뭐라고 하는데?” 주영은 쉽게 말을 뱉지 못했다. 그 시간. 수업 중에 묵음으로 해놓은 전화가 번쩍였다. “선생님, 전화요!” 가장 앞자리에 앉은 아이가 선생님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이 번쩍거리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넌 맨날 선생님 핸드폰만 보고 있니? 칠판을 봐야지.”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번호를 확인한 선생님은 미소를 지을 수 없었다. 갑자기 걸려온 전화였지만 전혀 반갑지 않았다. “잠시만.”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교실 복도로 나갔다. 선생님이 멀리 간 것도 아닌데, 교실은 금세 시장통이 되어 시끌벅적 요란스러워졌다. 단유는 핸드폰을 보던 선생님의 표정을 지켜보았다. 그 순간에 떠오른 당혹감, 처연함, 슬픔 등 형언할 수 없이 많은 표정들이 복합적으로 스치고 지나가던 얼굴이었다. “선생님은, 대단히 표정이 많으시구나.” “응?” “혼잣말이야.” 왜 굳이 혼잣말을 하고 그래? 차라리 들리지 않게나 할 것이지, 괜히 사람 궁금하게. 유림은 투덜대며 고개를 돌렸다. 작은 시간도 아껴서 공부해야 했다. 단유는 1등에 대해 별 감흥이 없어 보였지만, 유림은 간절했다. 학원에서는 1등을 도맡아 하면서, 정작 학교에서는 2등 아니면 3등이었다. 3학년 때는 혜진이라는 맞수 때문에 그랬고, 지금은 상훈이라는 친구 때문에 순위가 오락가락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1등을 포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번에야말로 단유가 마음 놓고 있을 때 따라잡아 보리라. 무심결에 앞을 보니, 역시나 상훈 역시 책에 시선을 박은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두고 봐라. 너나 단유나 모두 내 밑이 될 거야.’ 그 때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눈이 빨갛게 변했는데,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무래도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일제히 조용하게 앉아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너무 조용하다보니 선생님의 정돈되지 않은 숨소리만 교실 뒤까지 들려왔다. “잠깐 자습하도록 하고, 반장. 나와서 아이들 떠들지 않게 좀 도와줘.” 선생님은 다시 교실을 나갔다.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무슨 일이야? 단유는 교탁 앞으로 나갔다. “일단 자습하도록 하자. 시험 일주일 남았으니까 그거 공부하면 될 거야. 그리고 조용히 해주었으면 좋겠어.” 단유의 고저 없는 목소리에 아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공부를 시작했다. 단유가 나서면, 학급회의 시간이 되는 것 같았다. 정숙하지 않으면 안 될 분위기처럼. 괜히 말을 꺼내면 지목해서 발표를 시킬 것 같은 두려움(?)이 느껴졌다. **** “뇌사래요.” “…….” 재훈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혜린은 몇 번의 심정지가 있었는데 결국엔 뇌사가 판정되고 말았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도 뇌사는 고칠 수 없었다. “부모님들은 일단 연명치료를 원하고 있어요.” 그럴 테지. 어느 부모가 딸아이의 손을 놓을 수 있겠는가. 아직도 따뜻한 피가 돌고 있을 그 손을. “그렇게 해. 당분간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모든 것을 인정하고 납득할 시간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주영은 하도 답답해서 툭 내뱉었지만 이내 후회했다. “죄송해요.” “야, 니가 죄송하다고 해버리면 난 뭐가 되냐?” “…죄송합니다.” “…….” 재훈은 눈을 감았다. 자신에게도 시간이 필요했다. 이 모든 걸 정리할 시간. 무엇을 정리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정리하고 싶었다. 깔끔하게. 눈을 감았더니 눈꼬리 옆으로 눈물이 또르르 하고 떨어졌다. 그게 기폭제가 되었는지 눈에서 눈물이 거침없이 쏟아져 흘러내렸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꼭 깨물었지만 끅끅거리는 소리는 감출 수 없었다. 그 사이 주영은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갔다. 한동안 재훈의 병실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다. ======================================= [111] 아름다운 이별(7) 유난히 쾌청한 하루였다. 시험이 일주일이 남았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오늘만큼 놀기 좋은 날이 또 있을까 싶은 하루였다. 맑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6월 중순임에도 불구하고 날이 덥지 않아 운동장에 공을 차던 아이들의 표정에는 더할 수 없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남쪽에서부터 불어오는 훈풍에 더운 땀을 식히던 아이들이 수돗가에 모여 시원한 물로 세수를 했다. 옷에 물이 튀어도 아이들은 신경 쓰지 않았고,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장난치기 바빴다. 점심을 먹고 난 후 남자아이들이 빠진 교실에서 여자 아이들은 끼리끼리 뭉쳐 수다 삼매경에 빠져 들었다. 드라마 이야기, 연예인 이야기, 남자 이야기는 세월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언제나 주된 화젯거리였고, 다들 상대의 이야기에 맞장구치기 바빴다. 어젯밤 학원에서 장난치던 남자애 이야기, 엄마랑 같이 보던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입었던 패션에 대한 동경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만의 고민, 그들만의 사정, 그들만의 은밀한 이야기들이 청명한 햇살 아래 싱그런 꽃잎처럼 돋아나 아이들을 감쌌다. 모든 아이들이 햇볕처럼 따뜻한 미소를 베어 물었고, 그 미소가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그런 날이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단유는 낯선 단어를 들으며 얼굴을 굳혔다. 단어의 의미는 몰랐다. 하지만 그 단어를 언급하는 주영의 얼굴에서 언젠가 한 번 겪었던 감정의 소용돌이를 느꼈다. “그 단어의 뜻을 모르겠어요.” “…뇌가 활동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뇌가 활동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죽었다’고 표현해. 그래서 뇌사라고 불러.” “뇌가 활동하지 않는다, 뇌가 죽었다는 말을 모르겠다는 뜻이에요. …혜린이가 죽었다는 건가요?” “…….” 뇌사자의 사망 진단은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었다. 간혹 가다가 뇌사자로 판명된 사람이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렸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 나오곤 했다. 사실 이런 기적 같은 케이스는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기적은 천분의 일, 만분의 일의 확률로 발생할 때 부르는 단어다. 즉, 뇌사자가 정신을 차릴 확률은 거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부모의 입장에서, 가족의 입장에서는 0%가 아닌 이상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 기적이 자기 가족에게도 발현되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의사로서, 주변인의 입장에서 그보다 안타까운 순간은 없다. 주영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자기 입으로 혜린의 사망진단을 내릴 수 없었다. 태블릿으로 ‘뇌사’라는 단어의 의미를 인터넷 사전에서 찾아 보여주었다. 단유는 말없이 태블릿을 보았다. 「뇌활동이 회복이 불가능하게 비가역적으로 정지된 상태」 「뇌사 판정이 내려지면 뇌의 기능이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 「뇌사 환자의 장기를 타인에게 이식」 다른 페이지를 살펴보았다. 비슷한 풀이에 비슷한 문장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장기 이식이란 게 가능한 건가요?” 물어보나마나한 질문이었지만 단유에게는 놀라운 지식의 단편(斷片)이었다. “각막 이식이란 게 있어.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타인의 각막을 이식해서 앞을 볼 수 있게도 하고. 심장을 이식해서 심장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아픈 심장을 건강한 심장으로 바꿀 수도 있지.” “의학이란 건 대단한 거네요.” 아마 이런 것도 재훈이 말한 지식의 불균등에서 온 무지의 한 단면일 테다. 주영은 매우 자연스럽게 장기 이식이란 것에 대해 설명했다. 말하자면 꽤나 흔한 상식일지도 모를 지식이었는데, 단유는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다. “아무튼 혜린이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거군요.” 단유가 이렇게 말했을 때, 주영은 살짝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얼마 전 재훈이 이야기한 것이 생각났다. ‘감정의 격리.’ 그 때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아이라면 설령 ‘사이코패스’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소름이 돋았다. “아직은 살아 있어.” 확신할 수 없는 말이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단유는 주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주영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아직은, 살아 있어.” 그래, 살아 있는 거야. 속으로 한 번 더 외치자, 주영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혜린의 부모님들이 바로 이런 기분일까? “제가 가도 되나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사실 주영은 재훈의 부탁을 받고 왔다. 아니, 재훈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왔을 것 같았다. “그냥 일어나라고 말해주고 싶어서요.” 라고 이야기했던 단유였다. ‘감정의 격리’라는 이해하기 힘든 상태를 떠나, 당시 단유가 보여줬던 꾸밈없는 감정의 실체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그리고 단유라면 혜린이를 만나야 할 것 같았다. “선생님께 허락을 맡아야 할 것 같은데요.” 잠시 생각에 빠졌던 주영을 일깨우는 단유의 말에 주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선생님이랑 같이 갈 거야.” **** 오후 수업을 교감 선생님께 부탁한 후, 선생님과 단유는 병원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하늘과 푸른 나무가 그날따라 눈에 가득 담겼다. 만물이 싹을 틔우고 소생하는 계절이 봄이라면 풍성함과 화려함을 자랑하며 성장의 기쁨을 노래하는 계절이 여름이었다. 그 여름의 입구에서, 한참 성장의 기쁨을 노래해야 마땅할 아이가 눈을 감았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길지 않은 교직생활 동안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경험해봤더라도 적응하기 힘든 일일 테지만, 그래도 너무 가슴이 아파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그 아이가 이런 처지에 놓인 게 마치 자기 탓인 것만 같았다. 선생님은 무채색의 수채화 같은 희미한 표정으로 창 밖 저 멀리 풍경들을 눈에 담았다. 이윽고 병원에 도착한 세 사람은 곧장 병실로 향했다. 병실이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이 무거워졌고, 그 무게 이상으로 가슴이 묵직해졌다. 그리고 도착한 중환자실. ECG(심전도검사)모니터는 규칙적인 신호음을 내고 있었다. 여전히 많은 선들이 혜린의 몸에 붙어 있었고, 혜린의 가슴은 천천히,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 했다. “부모님들은요?” 주영이 중환자실 담당 간호사에게 물었더니, 어머니가 실신하셔서 잠시 응급실로 내려갔다고 했다. 선생님은 입을 틀어막고 혜린이를 보다가 끝내 눈물을 터뜨렸다. 곧 등을 돌려 중환자실 바깥의 복도를 내달렸다. 주영은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할 뿐, 쫓아가진 않았다. “누나.” “응.” 단유는 혜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죽었다면서요? 아니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면서요?” “…….”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숨 쉬고 있는데요? 저기 위의 모니터는 심장도 뛰고 있다는 거 아닌가요?” “…….” 주영의 다문 입술을 열리지 못했다. 단유는 이해하지 못했다. 주영이 답을 하지 못하자, 고개를 돌려 간호사를 찾았다. “저기요?” “응? 무슨 일이니?” “저기 누워 있는 혜린이가 제 친군데요. 혜린이 살아 있는 거 아니에요? 숨 쉬고 있잖아요?” 간호사는 난감한 마음에 얼굴이 굳어버렸다. 입술이 쉽게 열리지 않아 우물쭈물 대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와줄 사람이 없을까 싶었지만 평소에는 그리 자주 찾아오던 레지던트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저, 저기 혜린이는 깊은 잠에 빠진 거야. 그런데 그 잠에서 일어날 수 없게 된 거란다.” 나름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다고 설명을 했는데, 하필 단유였다. “약을 쓰면 되잖아요? 병원에서 병을 고치기 위해 약을 쓰지 않나요? 저것도 병이라면 약을 써서 치료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눈이 부시면 눈을 감는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병이 있다면 치료하면 된다. 이 간단한 이치를 왜 모르지? “저 병은 고칠 수 없는 병이야.” 불치병. 사실 뇌사를 불치병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고치지 못하니 불치병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다만 의학계에서는 병이 아닌 죽음으로 본다는 차이가 있겠다. 간호사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했다. 간호사의 등을 바라보던 단유가 몸을 돌렸다. 주영과 눈이 마주친 단유. 주영의 눈이 슬픈 이유를 알았다. 왜 살아있는 거라고 했었는지 이제 알았다. 살아있지만 죽었다. 혜린은 살아있지만 죽은 거였다. 단유는 고개를 돌렸다. 중환자실이 아닌 복도를 바라보았다. 단유는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혜린을 바라볼 수 없었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온 몸에 힘이 빠지고, 서 있기가 힘들었다. 천지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오고, 무엇인가 뜨거운 콧김을 내 뿜으며 바로 등 뒤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나를 봐라.」 그렇게 명령하는 것 같았다. 결코 들어줄 수 없는 명령. 하지만 거역하기 힘든 명령이었다. 단유는 최선을 다해 돌아보지 않으려 애썼다. “괜찮아?” 주영이 보고 있자니, 단유가 혜린에게서 고개를 돌린 뒤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다가가보니 식은땀을 흘리는데 비정상적이라 할 만큼 많은 땀을 흘려 순식간에 위에 입고 있는 티셔츠가 흠뻑 젖을 정도였다. 주영은 간호사를 불렀다. 그 사이 바닥으로 널부러지듯 쓰러지는 단유. 그리고 단유는 정신을 잃었다.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혜린의 아버지는 고개를 떨구고 의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의사는 매우 정중하고 간곡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장기이식을 통해 새 생명을 구할 수 있음을 알리고, 그것이 혜린의 숭고한 뜻을 이 세상에 남기는 좋은 방법이라는 말이 아버지의 귀에 들릴 리가 없었다. 당장 혜린의 어머니는 응급실에서 잠들어 있고, 자신도 간신히 끊어질 듯 말 듯한 이성의 끝을 붙잡고 버티는 중이었다. 세상 누구보다 소중하던 이를 이렇게 보낼 수 없었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아직, 살아 있잖아요.” 대부분 의사들은 이런 상황이 자신에게 오기를 바라지 않는다. 의사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순간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열에 아홉은 사망진단을 내릴 때라고 할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짓도 아니건만 사망진단을 내리는 순간만큼은 마치 자신이 환자를 죽이는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렇게 뇌사환자의 경우에는 더욱 심했다. 거의 대부분의 보호자들은 환자가 죽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려 한다. 여전히 따뜻한 환자의 손을 붙잡고 있는 보호자들에게 ‘죽음’을 이해시키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버님,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뇌사자는 언제 심정지가 올지 모른다. 그리고 심정지 이후 산소공급이 중단되면 장기에 손상이 오고, 그렇게 되면 장기 이식도 어려워지게 마련이다. 때문에 빠른 이식 절차가 요구된다. “살아있다고! 살아 있잖아! 내 딸이!” 버럭 소리 지르는 아버지 앞에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그 뜨거운 시선을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는 의사였다. “진정하세요, 아버님. 아버님이 원하실 때까지 연명치료를 계속 하도록 조치할게요.” 의사 뒤에서 다가오던 주영이 혜린의 아버지를 진정시켰다. 의사는 주영을 돌아보았다가, 주영의 눈짓에 허둥지둥 퇴장했다. “…고맙습니다.” 남자는 끌어오르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뱉었다. 주영은 달리 대꾸할 말이 없어 가만히 있었다. “반장아이는요?” 아까 응급실에서 주영을 만났을 때, 반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아이에게도 충격이었던지, 중환자실 앞에서 쓰러졌다고 한다. 가여운 아이.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드는 아이였다. “괜찮대요. 지금은 잠시 잠 들었어요.” “그 아이한테도 미안하네요.” “전혀 그러실 필요 없으세요. 지금 누구보다 힘든 사람이 아버님이란 건 다들 알고 있으니까요. 조금 전 의사의 말도… 그러려니 하세요. 그 사람이 결코 무정해서 그런 건 아닐 겁니다.” “…….” 아버지는 깊은 숨을 토해냈다. 마른 입술 사이로 진득하고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 심연의 고지(故址)를 넘어 다다른 오지(奧地) 가지 꺾인 흔적 따라 다다른 미지의 세계 해거름을 눈에 담아 해오름을 반기리 보물을 훔친 공적(公賊)을 찾아 방랑하는 역적(逆賊)들이여 고집 꺾은 비적(匪賊)이 내리는 기적의 세례(洗禮) 보아라, 신의 유지(遺志)를 따르는 자여 들어라, 비탄의 고적(鼓笛) 소리를 홀로 남은 유적(遺跡)의 들판에서 무적(無籍)의 연자를 만나리 단유는 잠에서 깨어났다. ======================================= [112] Mera Vera(1) 따가운 햇살이 눈을 찔렀다. ―츠르릉 먼 곳에서 차임벨 소리처럼 들리는 새소리가 아련히 귓가에 울렸다. 단유는 한 손으로 눈앞을 가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차가운 돌의 질감이 느껴져, 다른 한 손으로 주위를 더듬었다. 그제야 딱딱한 너럭바위 위에 누워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실눈을 뜨고 주위를 살펴보니, 밝은 햇살아래 익숙한 마을의 전경이 슬며시 보이기 시작했다. 낡은 기와, 정리되지 않은 집기들과 마음대로 열린 들창과 왜바람에 오락가락하는 문짝들이 보였다. 좁은 실골목과 껍질이 벗겨진 통나무 외벽의 귀틀집도 보였다. 단유는 불에 덴 것처럼 벌떡 일어나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런 풍경의 동네가 다른 곳일 리 없었다. ‘지구’에서 지낸 시간이 불과 1년도 되지 않았는데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다니!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무슨 이유로 이곳에 오게 된 것인가? 이유? 「나를 보라.」 “으윽!” 몸이 떨려왔다. 단유는 자신이 마주해야 할 그 시선과 감정을 온전히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었다. 「나를 봐라」 명령. 단유가 고개를 들었다. 강한 분노를 담은 눈. 죽음을 불사한 눈. 허연 콧김이 뿜어졌고 그 틈으로 붉게 타오르듯 빛을 내뿜는 눈. 그 눈이 자신을 바라보았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 슬픔이 느껴졌다. 안타까움이 느껴졌고, 두려움이 느껴졌다. 절망이 느껴졌고, 후회가 밀려들어왔다. 그동안 외면했던 감정들이 몰려들어왔다. 그 때였다. “보지 않으면 볼 수 없다.” 디아트리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난 보지 않으려 했던가?’ 무엇을 보지 않았느냐는 질문은 무의미했다. 제대로 보는 연습을 했음에도 끝내 보지 않았던 것. 끝내 단유가 피했던 것.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어둠이 보였다. 어둠 너머를 바라보니 회오리치듯, 마구잡이식으로 얽히는 색색의 것들이 보였다. 그 색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가슴이 쿵쾅거리는 기분이었다. 어떤 색을 보고 있으니 기쁘고, 어떤 색을 보고 있으니 슬펐다. 즐거웠고, 괴로웠다. 행복하고, 외로웠다. 단유는 멈추지 않고 계속 바라보았다. 이 색깔들 너머에서 자신을 부르던 것이 있었다. 그것을 봐야 했다. 색들이 흩어졌다. 물방울처럼, 먼지처럼, 마치 없었던 것처럼 흩어지고 사라지니 그 곳에 다시 어둠이 있었다. 가만 보니 어둠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느 순간부터인지 몰라도 늘 그 곳에 있었던 색이었다. 색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이름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넌 뭐지?’ 이름. 알고 있잖아? 죽음. 단유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단유의 안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 이후, 단유의 갇혀있던 기억들과 감정들이 생명을 얻고 피어나기 시작했다. 검은색에서 푸른색으로, 노란색, 붉은색으로 자라나더니 마치 마법의 그것처럼 폭죽을 터뜨리며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환한 빛의 향연에 단유는 눈물을 흘렸다. 이윽고 단유는 눈을 떴다. **** 시간이 흐른 뒤, 단유는 집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아무도 없었고,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은 집이었다. 하지만 집에서 느껴지는 냉기는 너무나 익숙했다. “엄마.” 라고 불러보지만, 이제는 그 호칭마저 너무 어색하게 느껴졌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가족에 대한 의심으로 기억마저 변질되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가족이란 존재에 대한 의심. 이런 의심이 당연한가 싶었다. “모든 걸 의심해라. 의심해야 진실을 볼 수 있다.” 안트는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아직은 이른 것일까? 단유는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다시 가족을 찾기 위해 막막한 대장정에 올라야 한다는 사실이 버겁기도 했다. 흔적도 없고, 길도 없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잊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단유는 이곳에 오기 전 ‘지구’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뇌사상태에 빠진 혜린.’ 죽음에 이르렀다는 혜린이었지만, 단유는 엉뚱한(?) 궁금증이 생겼다. ‘가능할까?’ 집 밖으로 나온 단유는 손가락으로 바닥에 번호를 붙여가며 몇 가지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했다. 1. 마법. ‘이 곳에는 마법사가 있다. 어쩌면 그 마법사가 혜린이를 살릴 방법을 알지도 모른다.’ 저곳에서 혜린이는 죽음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아무도 그 병을 고치지 못한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곳은 또 다를 수 있다. 무엇보다 마법이란 힘은 자신이 경험한 바와도 같이 기적의 힘이 아니었던가? 어쩌면 혜린이의 병을 기적적으로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2. 시간. ‘지금까지의 사례들을 보면, 이곳에서의 시간과 지구에서의 시간은 다르다.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더라도 지구에서는 순간에 불과할 수 있다.’ 늘 그 시간의 괴리에 대해 궁금해 했지만, 여전히 원리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간의 경험을 통해 이곳에서의 1년이 지구에서 12시간 정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대로 지구에서 보낸 시간이 이곳에서 어떻게 적용되는 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두 가지만으로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혹시 마법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그리고 빨리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면, 혜린이를 구할 수 있을까?’ 당장 시도해봄직한 결론이었다. 결과를 확신할 수 없지만, 사람을 살린다는 것도, 혜린이를 구할 수 있다는 가정도 단유에게는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해보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당장 하자.’ 단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마을을 빠져나왔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사실 디아트리네를 찾아가는 것도 잠시 고민했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의 말처럼 ‘지톤’일 뿐이고, 마법을 사용할 줄 모른다고 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간도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마법사를 찾기 위해 자신이 서둘러 찾아갈 곳은 오직 한 군데 밖에 없었다. ‘녹스로 가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니, 거기에서 수소문하여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거기도 없다면, 녹스를 거쳐 ‘부오노 공국’의 수도에라도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수도라면 아무래도 더 많은 사람들이 있을 테고, 그 중에 마법사가 있는 곳을 아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으리라 여겼다. 이전과 달리, 단유도 많이 성장했다. 이제는 키도 150을 넘어서 평균적인 또래 아이들에 비하면 꽤 큰 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몸 전체가 균형 있게 발달하여 튼튼해졌다는 것이 예전과 달라진 점이었다. 꾸준히 운동을 해 왔던 것이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서였다. 1분 1초라도 아껴보자는 마음에 단유는 쉬는 시간도 줄여가며 달리기 시작했다. ‘빨리 마법사를 찾을수록 빨리 혜린이를 살릴 수 있다.’ 근거는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짧아질수록 좋다는 것은 분명했다. 멀리 산 중턱에서 떠난 참수리 한 마리가 긴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가로질렀다. 눅눅한 바람을 가르며 날아든 참수리가 이방인의 존재를 눈치 채고 울음을 터뜨렸다. ―삐이 하지만 이방인, 단유는 아랑곳하지 않고 달리기에 열중했다. **** “훌린, 오늘 왜 이렇게 졸리지?” 키보다 큰 창을 든 병사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건너편에 서 있던, 굵은 눈썹의 각진 턱을 가진 사내, 훌린은 눈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꾀부리지 마라.” 훌린은 두 다리를 어깨 넓이로 벌리고 두 팔을 모두 뒤로 하여 뒷짐을 쥔 자세로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해자 건너편의 넓은 평야를 향하고 있었다. 꾀는 니가 부리고 있잖아! “훌린, 창이나 들고 말해.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이제 막 태어난 우리 애가 밤낮을 못 가려서 그래. 너도 애가 있으면 알 거 아냐?” “몰라. 우리 애는 밤에 잘 잤어.” “거짓말!” 파트너가 소리를 지르거나 말거나 훌린은 뒷짐을 진 채로 눈동자만 굴려 평야와 하늘과 산을 번갈아보았다. 조금의 변화라도 생긴다면 곧장 옆에 세워 둔 창을 집어들 수 있도록. 다만, 그런 변화가 일어날 리 없다는 건 논외로 치고. “훌린, 나 잠시만 눈 좀 붙이자. 진짜 너무 피곤해서 그래. 잠깐만 눈 좀 붙였다가 뜨면 개운해질 것 같아서 그런다고. 야, 너 파트너가 이정도로 부탁하면 못 이긴 척 해줄 수 있는 거 아냐?” “제윅, 경비대장님 오신다.” “지금 오시는 건 아니잖아?” 제윅은 제발 부탁이라며, 훌린에게 매달렸다. 훌린은 힐끔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셨다. “조금 있으면 부오노에서 상단이 들어올 거야. 그 때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 없어.” “그러니까, 그 전에 잠을 좀 자두겠다는 뜻이지. 맑은 정신으로 일을 봐야 사고가 나더라도 재빠르게 행동할 수 있다는 거, 알잖아?” 계속된 파트너의 조름에 훌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래, 그럼….” 훌린은 말을 하다말고 뒷짐을 지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어느새 그 손에 조잡한 창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어, 아, 안녕하세요.” 단유가 도개교를 건너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 둘에게 인사를 건넸다. **** 단유가 녹스에 도착한 것은 사흘이 지난 뒤였다. 이전에는 중간에 사고도 당하고 정신을 잃기도 해서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에는 운이 좋았는지 생명을 위협받을 만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단유가 한 번 왔었던 길을 기억하고 있었던 탓도 있겠지만, 쉬지 않고 달린 소년의 절박한 각오가 시간을 단축시켰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먹지도 못해 그 짧은 시간에 퀭하게 변한 얼굴이었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넓은 평야 한 가운데 들어선, 여전히 높은 성벽을 자랑하는 녹스가 보였다. 단유는 남은 힘을 끌어 모아 녹스성으로 달려갔다. 녹스에 다가갔을 때, 동문 앞에는 2명의 성문 경비병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누구냐, 넌?” 게이트 앞에 선 한 병사가 거지꼴을 한 소년을 가로막았다. 엉망으로 뻗은 머리와 꾀죄죄한 옷차림, 신발도 없이 맨발로 평야를 가로질러온 소년은 누가 봐도 거지였다. 다만 이 근방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거지라는 사실이 병사가 아이를 가로막은 이유였다. “저, 전 루치드라고 해요.” 음, 제윅은 잠은 다 깼다는 얼굴로 옆머리를 긁으며 아이를 살폈다. 혹시? “이름을 물은 게 아니잖아? 뭐하는 녀석이냐고? 이 근방에서 너 같은 녀석을 본 적도 없고, 아침에 신고를 하고 성 밖을 나간 녀석도 아닌데, 넌 봤어?” 제윅의 말에 평야에서 뛰쳐나온 메뚜기 보듯 바라보던 훌린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녹스성은 출입을 엄격하게 관리했었던 것 같다. 무슬라도 성을 나가 사냥을 하러 갈 때마다 출입처에 신고를 하고 나갔던 것을 기억해냈다. 다만 그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비슷한 이유로 경계를 받고 있음을 아직 모르고 있는 루치드였다. 지금 두 병사가 경계하는 이유 중 또 하나는 루치드가 ‘도망친 노예’가 아닐까 하는 의심 때문이었다. “예전에 여기서 살았던 적도 있고요. 지금은… 저 산 너머의 빈촌에서 오는 길이에요.” “이봐, 저기 마을이 있었어?” 훌린에게 물으니 그저 어깨를 으쓱댈 뿐이었다. “여기서 살았었다고?” “예. 그… 무슬라 아저씨랑 같이 성벽 근처에서 살았어요.” “무슬라? 처음 듣는데?” 두 병사의 의심이 커져가는 가운데, 루치드는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이내 다른 이름을 떠올렸다. “아, 샤피로 아저씨 가게에서 일한 적도 있어요.” “샤피로?” “아, 약초상!” 훌린이 아는 척을 했다. 제윅이 미간을 찡그린 얼굴로 물었다. “알아?” “아, 예전에 중앙대로에 약초상을 하던 할아범이었어. 너 몰라?” “글쎄? 약초상은 알겠는데 가게 주인 이름까지는 모르겠는걸?” “그 아저씨 이름이 샤피로였어. 지금은 없지만.” 루치드는 깜짝 놀랐다. 안 계신다고? “그 아저씨, 예전에 가게 정리하고 드뷔시로 가셨어. 여기에 있기 싫다면서 말이야. 그 집 손녀가 드뷔시로 가고 싶다고 졸랐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뭐 당시에 여길 떠난 사람이 한둘이어야 말이지.” 워낙 많은 사람들이 떠나는 바람에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한다는 병사의 이야기였다. “어쨌든 그 아저씨 이름을 알 정도면, 여기 살았다는 말도 거짓말은 아니라는 건가?” “그렇겠지. 그런데 꼬마야. 그 아저씨도 없는데 어떡할 거냐?” 루치드 역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니 처음에 말을 걸었던 병사, 제윅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건 이 꼬마가 알아서 할 일이고. 어쨌든 꼬마 애를 성 밖으로 내쫓을 수는 없으니까, 일단 경비대장에게 맡겨야 하지 않을까?” 루치드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고, 그래서 순순히 훌린의 뒤를 따라 경비대가 묵는 숙소로 향했다. 떠나기 전 훌린은 한 마디를 남겼다. “졸지 마. 금방 갔다 올 테니까.” **** “부단주님, 저기 성이 보입니다.” 상단의 제일 앞에서 말을 타고 있던 대머리 남자가 소리쳐서 알렸다. 보고는 부단주에게 하는 것이지만 모두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한 탓에 모두가 만면에 활짝 미소가 피어났다. 세월이 지나고 길이 많이 변했다 해도 녹스로 오는 길은 언제나 험하고 힘들어서 각오를 다지지 않으면 오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이 곳에 오는 이유는 웬만한 상품은 모두 비싼 값에 팔린다는 점과 이 곳 사람들은 미처 모르는 특산품의 존재 때문이었다. 마차 근처에서 귀를 기울이던 한 사람이 이내 대머리에게 마차에서 내려온 지시사항을 전했다. “속도를 높여서 빨리 가잡니다. 해 떨어지기 전에.” “알겠어. 자, 모두들! 속도를 조금만 높여서 간다!” “오우!” 고난의 길을 건넌 상단이 다시 힘을 내서 평야 가운데 들어선 ‘녹스성’을 향해 나아갔다. “부단주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마차 안에서 굵은 인상의 사내가 정중한 어투로 반대편에 앉은 부단주에게 물었다. 길이 워낙 험했던 탓에 마차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편안한 여정이 되지 못했다. 특히 부단주는 녹스행이 처음이었다. 꽤나 아늑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꾸며진 실내였지만 오랜 여정에 사내도 허리에 통증이 올 정도였다. 하물며 부단주는 더 심했으리라. “괜찮습니다.” 귀를 간지럽히는 미성이 마차 안을 잔잔히 채웠다. 아버지가 직접 다녀오라고 한 이유가 있겠지, 라고 편하게 생각했던 처음과 달리 지금은 가만히 앉아만 있는데도 다리가 저릴 정도로 지쳤다. 차라리 밖에서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안전과 호위의 문제 때문에 마차 밖을 나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우선 도착하면 여관부터 잡아서 쉬도록 하시고, 다음 날 아침에 성주를 뵙는 걸로 하지요. 지금 모습으로 성주를 뵙는 건 오히려 더 큰 결례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래도 되나요?” “그 정도는 이해할 겁니다. 다들 ‘리아빈’을 건너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아니까요.” “말로만 들었던 ‘리아빈’이 그렇게 힘들 줄은 몰랐어요.” 공기, 바람, 냄새, 열기, 험한 지형. 이 모든 게 복합적으로 얽혀서 뭇사람들의 통행을 방해하는 천혜의 험지, 마치 미궁과도 같은 늪지대가 바로 ‘리아빈’이다. “그래도 처음이라서 고생 하신 겁니다. 몇 번 반복하다보면 그 길도 익숙해지지요.” 부단주는 희미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걸치고 있던 로브를 여미며 마차 밖을 바라보니 넓게 펼쳐진 산맥과 광활한 평야가 보였다. 첫 눈이 내리기 전에 도착해 다행이라는 남자의 말을 흘려들으며 부단주는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 [113] Mera Vera(2) 훌린과 루치드는 성문에서 멀리 떨어진 경비본부로 걸어갔다. 녹스 성은 네 방향으로 성문이 열려 있으며, 이 중 경비본부는 서문에 가깝게 위치해 있었다. 왜냐하면 매년마다 서쪽에서부터 몰려오는 흉포한 몬스터들의 습격에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최근에는 기이하게도 몬스터들의 습격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위험하다고 판단한 녹스성의 경비대는 경비본부를 서문 가까이 두고 있었다. 지나가는 동안 중앙대로를 지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훌린은 일부러 그러는지 몰라도 조금 둘러가는 길을 선택했다. “중앙대로로 가면 빠르지 않나요?” “…여기 살았다는 말이 사실인가보군. 그런데 경비대원들은 중앙대로를 사용하지 않는다.” “왜요?” “순찰병이 아닌 이상 중앙대로를 사용하지 않는 게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는다는 규칙 때문이지.” 사실 경비병들이 특별한 사유 없이는 중앙대로를 이용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몬스터 때문이었다. 경비병이 중앙대로를 이용하는 경우는 대부분 몬스터 때문에 경비병들이 집결해야 할 때뿐이었다. 그래서 대로에 경비병들이 등장하면 사람들은 일단 큰 일이 벌어진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필연적으로 가지게 되었다. 사람들의 심리적인 측면을 보살핀 성주가 명령을 내려 경비대원들이 업무 중에 중앙대로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할 정도였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경찰이 거리를 활보하는 것과 군인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것의 차이정도라고 하겠지만, 루치드가 이를 구분할 리 없었다. 훌린이 그렇게 말하니, 그런가보다 생각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성벽 주위를 따라 걷는 길이 어색하지만도 않았다. 이렇게 걷고 있자니, 옛 생각이 나기도 하고 옛 얼굴들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기분도 들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경비본부 앞에 서게 되었다. 경비본부는 2층 목재 건물로 되어 있었다. 붉은 전나무를 외벽에 쌓은 본부는 짧은 단이 아래 설치되어 있어 꽤 견고해 보이는 건물이었다. 겨울바람을 피할 생각이었던지 모든 창은 굳게 닫혀 있었다. “대장, 훌린입니다.” “들어와.” 훌린과 루치드는 경비본부 안으로 들어갔다. 의외로 실내는 여러 개의 등불이 밝혀져 있어 그리 어둡지 않았다. 커다란 테이블이 가운데 있고, 그 곳에서 몇 사람이 지도를 가운데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상석에 위치한 덩치 좋은 남자가 아마도 경비대장이라 생각됐다. 루치드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테이블 옆으로 다가섰다. “무슨 일인가?” 턱수염이 더부룩하게 난 경비대장은 날카로운 눈매로 훌린과 루치드를 살폈다. 특히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경계서린 눈으로 위아래를 훑어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벌써 이곳에서만 16년째 근속중인 베테랑 경비대원이며 7년째 경비대장으로서 경비대원과 성내 시민들의 성원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언제 어느 때고 늘 경비대장으로서의 책무와 의무를 저버리지 않았기에 경비대장으로서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훌린은 동문에서 아이를 만난 사정을 이야기했다. “샤피로? 그게 누구지?” 경비대장의 물음에 왼쪽에 서 있던 남자가 대신 아는 척을 했다. 가볍게 책상을 치며 입을 열었다. “예전에 중앙대로에서 약초상을 했던 상인입니다. 그 때 있잖습니까? 6년 전인가? 더 이상 여기 있기 힘들다며 떠난 상인 말입니다.” “그 때 떠난 사람이 한둘이어야 말이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 경비대장, 포우는 아이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왼쪽의 남자가 짝다리를 짚고 서서는 물었다. “도망자는 아니겠지?” 녹스가 부오노 공국의 지배하에 놓이면서부터 더 이상 도망친 사람들은 이 곳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부오노 공국에서 내려 보낸 성주와 관리들에 의해 성내 사람들의 신원이 철저히 조사되었고, 이후부터는 도망친 노예가 발견되거나 잡힐 경우 그 즉시 공국으로 이송되도록 조치되고 있었다. 때문에 경비대의 주 업무 중 하나는 노예나 범죄자의 출입을 막는 것이었다. “예전에 살았던 약초상을 아는 걸 보면, 이곳에서 살았다는 말이 사실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겠지.” 공국으로 돌아간 약초상을 만난 적이 있었다면, 그래서 녹스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단편으로라도 들었던 적이 있다면, 그 후 도망쳐 이 곳에 나타난 것이라면 단순히 샤피로의 이름을 들먹거리는 것이 이 곳에 살았다는 증거로는 이용될 수 없음이었다. 경비대장은 추측하기보다는 직접적으로 심문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니가 직접 말해봐라. 여기서 뭘 하고 살았고, 어디를 갔었다가 왜 지금 이곳으로 돌아오려고 하는지.” 엄숙한 분위기에도 루치드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지금 루치드를 괴롭히는 것은 사람들의 경계서린 시선 따위가 아니었다. 소년을 괴롭히는 것은 오직 배고픔과 수면부족이었다. 말하기 전에 우선 먹을 거라도 달라고 졸라 볼까 고민할 정도였으니.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니, 루치드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후 이야기를 풀어냈다. “일은 약초상에서 일했어요. 샤피로 아저씨네 가게 창고에서 약초들을 정리했고요. 그런데 사는 건 다른 곳에서 살았어요. 무슬라 아저씨라고 사냥꾼이었어요. 그 아저씨네 집에서 살면서 아침마다 샤피로 아저씨네 가게에 가서 일을 돕고 돈을 벌었어요.” “무슬라?” 경비대장의 오른편에 앉은 사내가 눈을 부릅떴다. 경비대장이 힐끔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아이에게로 돌리며 물었다. “왜? 아는 자인가?” 오른편에 앉아 있던 사내가 한껏 미간을 좁힌 채, 탁자에 두 손을 짚었다. 그리고 가라앉아 있던 기억을 되살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예, 당시에 제가 북문에 있을 때 종종 봤던 사냥꾼입니다. 녹스 주위의 산들을 모두 돌아다니면서 사냥을 하던 친구였는데, 워낙 솜씨가 좋은 친구라 기억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경비대장이나 다른 사람들이 말을 기다렸는데, 쉬이 나오지 않았다. 사내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6년 전에 죽었습니다. …스크로파 때 말입니다.” 샤피로의 이름이 나올 때부터 간질거리던 기억들이 있었다. ‘스크로파’라는 단어가 방아쇠가 되어 빵, 하고 터져 나왔고, 선명한 천연색 영상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그 때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은 모두에게 공포와 두려움이었고, 때문에 여전히 경비본부를 서문 쪽에 두고 있을 정도였다. 오래된 기억임에도 그 공포는 여전해, 사람들은 마치 지옥의 불길이라도 마주한 사람 같은 얼굴을 했다. 포우 역시 그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 당시 자신이 내렸던 선택에 대해 수천 번의 고뇌와 한숨으로 되새기며 긴 시간을 보냈었다.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죄책감을 떨칠 수는 없었다. 자신의 선택은 성 안에 사는 수백, 수천 명의 사람을 살리는 길이었지만, 대신 성 밖의 수십 명을 죽이는 결과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불 덕분에 스크로파 무리를 해치울 수 있었다지만, 그럼에도 포우에게는 지울 수 없는 원죄(原罪)와도 같은 순간이었다. 포우는 더욱 날카로운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계속 대답해봐라. 그럼 이후에 어디에 있다가 이제 나타나서 들어오려고 하는 건지.” “무슬라가 … 죽은 뒤에 전 … 이곳을 떠났어요. 너무 괴로워서요. 그래서 이 곳에서 남쪽으로 가면 빈촌이 있는데 그 곳에서 생활했어요. 그리고 지금은 … 마법사를 찾고 싶어서 왔어요.” “헉!” 누군가 급하게 헛바람을 삼키는 소리를 냈다. 루치드가 앞서 한 이야기가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질 만큼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아무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그저 모두들 루치드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 눈들은 마치 악마를 불러낸 소환술사라도 보는 시선들이었다. “다들 나가.” 포우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듯 명령을 내렸다. “대장님!” 옆에 앉은 사내가 대경하며 포우를 바라보았지만, 루치드에게 고정된 시선은 움직일 줄 몰랐다. “잠시들 나가 있어. 내가 이야기해 볼 테니.” 루치드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의 사람들을 둘러보지만 알 도리가 없었다. 다들 무거운 걸음으로 본부를 빠져나갔다. “너, 마법사가 뭔지 알고 묻는 거냐?” 포우가 으르렁거리며 물었다. **** “여기 이 여관이 저희가 사용할 곳입니다. 녹스에 올 때마다 이 곳을 이용하지요.” 녹스에는 여관이 많지 않았고, 특히 이 곳은 중앙대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어 치안이 좋았다. 때문에 비싼 물품들을 거닐고 다니는 상단이라면 주로 이 여관을 사용한다고 할 수 있었다. “2층 제일 안쪽 방입니다. 따라오시죠.” 검은 드레스에 하얀 블라우스를 받쳐 입은 부단장이 줄곧 자신의 곁을 지켜왔던 사내의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는 사이, 다른 사람들은 대머리 사내의 지시에 따라 방을 배정받고 짐을 정리했다. “정리하고 내려오면 식사가 기다릴 테니 다들 서두르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상단의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사이, 드레스의 윗 단을 살짝 집어 들고 2층으로 올라간 부단주는 곧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름 이 여관에서 가장 큰 방이라고 하더니, 생각보다 실내가 썩 나쁘진 않았다. 깨끗하게 정리된 방에는 단촐하게 작은 옷걸이와 침대, 침대 옆 협탁과 러그 위의 작은 테이블 하나, 양 옆으로 두 개의 의자가 구비된 아늑한 침실이었다. 자신이 집에서 쓰는 것보단 작지만 깨끗하게 세탁된 새하얀 시트의 싱글 침대 위에 걸터앉으니 이내 그간의 피로가 아래에서부터 몰려드는 느낌이었다. “쉬시지요. 식사는 가져다 드릴까요?” “그렇게 해주실래요?” 부단주가 보일 듯 말 듯 웃으며 부탁했다. 사내는 표정 없이 받아들였다. “예, 그럼 옷은 여기 두겠습니다. 편히 쉬고 계십시오.” 사내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방문을 닫고 나갔다. 부단주는 그대로 양팔을 벌리며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낯선 침대의 질감과 낯선 천장 때문에 금방이라도 밀려들어 올 것 같던 잠이 물러나는 기분이었다. 부단주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최대한 호흡을 길게, 천천히, 깊숙이. “벨로. 벨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부단주는 눈을 떴다. “식사 가져왔습니다.” 그 새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걸까? 잠이 올지 안 올지 걱정했던 게 부끄러워 괜히 얼굴을 붉혔지만, 이를 알 턱이 없는 사내는 테이블 위에 들고 온 음식을 내려놓고 있었다. “고마워요, 텔리오.” 텔리오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방을 나갔다. 부단주, 라보네는 침대에서 일어나 우선 옷을 갈아입었다. 검은 드레스를 벗자, 일순 몸에 한기가 들어 소름이 돋기도 했다. 하지만 무거운 드레스가 발아래 떨어진 순간, 마음도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를 죄고 있던 끈도 풀어버리자 해방감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이러고 있을까?’ 텔리오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는 이상, 이 곳에서 이렇게 있어도 뭐라 할 사람은 없겠지. 만약 집이었다면, 제니가 수소처럼 달려와서 ‘아가씨! 어쩌고저쩌고!’ 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교양과 예절 수양(修養)을 아침 세수를 하듯 해 온 사람으로서, 감히 이런 민망한 복장으로 지낼 수는 없었다. 짧은 해방감을 뒤로 하고 간편한 실내복으로 환복한 라보네는 탁자에 앉아 늦은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조금 식은 것 같은 스프는 그런대로 먹을 만 했다. 다만 스테이크처럼 보이는 고기덩어리는 라보네가 먹기에 너무 간이 세고 질겼다. 향신료를 골고루 뿌리지 않았던 것인지, 고기의 맛이 전혀 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험난한 여정에 지친 탓도 있겠지만, 도저히 식욕이 나지 않아 라보네는 나이프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 주위를 정리했다. 다시 침대에 누울까, 하다가 바깥의 정경이 궁금해서 창가로 갔다. 어느새 해가 서산으로 넘어갔는지 하늘이 붉고 어두웠다. 수도만큼은 아니지만 꽤 많은 가옥들이 주변을 메우고 있었다. 오래된 가옥들과 새로 지어진 가옥들의 차이가 별로 없을 만큼 깨끗하고 정갈한 거리라는 인상이었다. 비슷비슷한 구조의 집들이 죽 늘어선 가운데 창가 아래에는 서둘러 집을 찾아가는 것인지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도 볼 수 있었다. “라보네. 그 곳에서 니가 할 일은 단 하나다.” 상행을 떠나기 전, 상단 집무실에서 아버지가 자신을 붙잡고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카넬, 붉은 마법의 씨앗을 찾아라.” 날카로운 펜촉을 들어 잉크에 담근 뒤 양피지에 서명을 하시던 아버지는 평소보다 진중한 어투로 이야기하셨다. “아카넬만 있으면 니 동생을 살릴 수 있을 것이야.” ======================================= [114] Mera Vera(3) “마법사를 찾으려는 이유가 뭐냐?” 포우가 다시 한 번 묻자 루치드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냥 대답하려니 뭔가 켕기는 느낌이 들었다. 문득 떠오른 과거의 한 장면이 있었다. “그 미친놈은 말이다! 한 도시를 물에 잠기게 만들었어! 도시의 수많은 사람들을 수장시켰단 말이다. 그리고 지명수배가 되어서 지금도 현상금 사냥꾼들과 기사들이 나를 쫓고 있을게다.” 핀체노, 아니 야누스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이 버럭 화를 내며 해준 말이었다. ‘수장’, ‘지명수배’ 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루치드는 가슴이 쿵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나보다. 도시로 가서 아무나 붙잡고 마법사 아세요, 라고 물으면 누군가가 마법사는 저기 살고 있단다, 라고 손가락을 가리키고,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한 뒤 알려준 곳을 찾아가서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하면 만날 수 있는 존재라고만 생각했다. 지명 수배된 범죄자의 공범, 혹은 공모혐의를 받게 될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이나 했었던가. “왜 말하지 못하지?” 하지만 루치드는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거짓말을 꾸며낼 자신도 없었고, 계속 침묵을 지키는 것도 답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결국 루치드가 내밀 수 있는 카드는 대화를 통한 소통뿐이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말이다. “마법사를 만난 적이 있어요.” “마법사를?” 포우의 눈이 커졌다. “그 마법사는 서쪽 산맥을 넘어갔어요. 그래서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어요. 그런데 전 마법사를 찾아서 물어볼 게 있어요.” “무엇을 말이냐?”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방법이요.” 포우의 눈이 시커멓게 변했다. 아니 얼굴이 모두 시커멓게 변해버린 것 같았다. “너, 마법사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게 분명하군.” “예?” 포우는 앞으로 쏠렸던 몸을 뒤로 뉘어 등받이에 기댔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기세가 한 순간 풀리는 느낌에 그제야 슬며시 숨을 내쉴 수 있게 된 루치드는, 그래도 궁금한 건 풀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되물었다. “마법사, 는 어떤 사람이죠?” 포우가 감았던 눈을 살짝 떠 눈앞의 아이를 쳐다보았다. 저 표정이 일부러 꾸민 것이라 생각하긴 힘들었다. “마법사는, 우리들의 적이다.” 우리들의? 루치드가 그 모호한 표현에 의문을 품는데 포우가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은 마법사도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대부분 마법사는 인간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만의 세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 인간을 몬스터나 짐승과 같은 급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쉽게 사람을 다루고, 실험하고, 죽인다.” 루치드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럴 리가요? “그들이 어떻게 마법이라는 힘을 다루는지 모르겠지만, 그 힘을 가진 자들은 거의 전부 사람들을 해치는 데 사용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의 힘을 마력(魔力)이라고 부른다.” 마력(魔力). 다시 말해서 악마의 힘이란 이야기였다. “그래서 마법사들은 악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으며, 사람을 현혹하고 악의 길로 이끌며, 악마의 힘으로 사람을 개미 다루듯 한다. 가장 최근에는 한 도시를 수장(水葬) 시켜서 모든 사람을 익사시킨 적도 있었고, 또 어떤 도시에서는 사람들의 팔 다리를 베어내고 난도질한 적도 있었다. 칼이 아닌 마법으로 말이다. 남자, 여자는 물론이고 아이들까지 마력에 희생되었다.” 루치드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단 한 번도 마법으로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지톤’이었던 디아트리나 안트, 신테도 그런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었다. “그런 마법사를 만나고도 살았다는 것은 네게 천운이 있었다는 이야기겠지만, 마법사가 사람을 살리는 방법을 안다? 그럴 일은 없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는 방법만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이것도 오해일까? 아니면 자신만 몰랐던 사실일까? 핀체노를 떠올리면 ‘설마’ 하는 마음이 생기지만 야누스를 떠올리면 ‘어쩌면’ 이라는 마음이 생겼다. “니가 만난 마법사는 누구였냐? 이름은 아는가?” “…핀체노라고 했어요.” “핀체노, 라…. 어이!” 포우가 소리를 지르자, 밖에서 대기 중이던 경비대원들이 들어왔다. 그 중 훌린은 없었다. 아마도 본래 임무를 위해 동문으로 떠난 모양이었다. “핀체노라는 마법사를 아는 사람?” “들어본 것 같습니다.” “그래?” “물의 마법사, 였던 것 같습니다.” 포우가 루치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가?” “…네.” “그 사람이 방금 이야기한, 도시를 수장시켰던 마법사일 가능성이 높군.” 루치드는 마른 떡을 삼킨 것처럼 목이 메여왔다. “이 아이가 어떻게 아는 겁니까?” 조금만 수상한 낌새를 보이면, 즉시라도 제압할 요량으로 루치드의 뒤에 선 남자가 물었다. 포우가 조금 전 들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방법을 물어보려 했다는 말에 다들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마법사에게 나 죽여주소, 하는 거랑 뭐가 다른 거야?” “아직 어리잖아. 모르니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부모가 그런 것도 안 가르쳤대?” 포우는 그제야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너희 부모는 어디 있느냐?” “안계세요.” “돌아가신 거냐?” “…네.” 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센베크, 얘한테 일단 먹을 것 좀 갖다 주고 숙직실에서 눈 좀 붙이게 해줘야 할 것 같다.” “…예. 보아하니 조금만 더 시간을 끌었으면 배고파 뒤졌을 얼굴이네요.” “센베크!” 센베크라는 남자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루치드를 데리고 경비대 숙소로 향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포우가 옆에 선 남자에게 물었다. “타난. 어떻게 생각해?” “센베크가 말이 심했네요.” 포우가 슬쩍 고개를 들고 노려보자, 타난은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꼬마, 노예는 아닌 것 같고요. 다만 마법사를 찾는 아이가 평범할 리도 없잖습니까? 지켜봐야 할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감옥에 넣어둘 명분도 부족하네요. 소매치기라도 시켜볼까요?” “그 쯤 해둬. 농담은 너희끼리 해.” “대장. 대장은 너무 심각한 게 문제요. 좀 웃으면서 지냅시다.” “6년 전의 일이 생각나지 않는 거냐?” 타난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곧 억지 웃음을 지으며 표정이 일그러지는 타난이었다. “그런 일이라도 웃으며 넘겨야 하잖수? 대장은 그 때 열심히 했잖수?” “열심히 한 결과가 그 죽음이었던가.” “불가항력의 상황이었고, 불가피한 선택이었소, 대장.” 포우는 한 손으로 턱을 쓸어내렸다. “루치드란 녀석, 니가 좀 맡아라.” “제가요? 센베크도 있잖아요?” “센베크 손에 있으면 멀쩡한 빵도 흙이 된다.” 무언가를 온전한 상태로 두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이란 뜻이었다. “뭐라도 시킬까요?” “약초상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고 하니 살펴보도록.” “그리고요?” 당연히 뒤에 따라올 지시가 있겠거니 해서 물었다. “당분간은 그냥 지켜봐. 그리고 다른 의도가 있는지 살피는 것도 잊지 말고.” “흠. 기생충 한 마리 키우라는 소리로 들리는군요.” 포우는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부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주변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몇몇 순찰대원들이 횃불을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일렁거리는 횃불을 보니 가슴이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 긴 겨울밤, 차가운 바람이 거리를 쓸고 지나갔다. 높은 성벽이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는다 해도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지 못하듯, 구렁이처럼 성벽을 넘어 송곳니로 내리꽂듯 불어온 바람을 막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으, 춥다.” 걸치고 있던 클록(Cloak)을 여미며 순찰대원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들고 있던 횃불을 가까이 대고 그 작은 온기라도 쐬려는 듯 손을 가져갔다. “제대로 들어. 안보이잖아.” 파트너가 한 소리 했다. “이 밤에 누가 있다고 그래? 이렇게 추운 날 돌아다니는 놈이 있겠어?” 순찰대원이 자신의 임무를 망각한 건지 헛소리를 해댔다. 파트너는 혀를 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기라도 제대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작은 횃불이 거리를 밝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때문에 횃불이 비치지 않는 구석구석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미리 걱정하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근거 없는 의심과 추측이 불안을 만든다는 말 몰라?” 오들오들 떨면서도 할 말은 하겠다는 심산인지, 옆에서 계속 일을 방해하는 순찰 대원이었다. 왜 하필 이런 수다쟁이랑 파트너가 됐는지 답답한 네이트였다. “아인델. 나랑 같이 다니는 동안에는 게으름 피울 생각 하지마라. 나중에 당직보고 해버릴 테니까.” 깐깐한 녀석. 아인델은 보란 듯이 횃불을 높게 치들었다. 바람이 불며 횃불을 크게 출렁였다. “됐냐?” “잠깐.” “응?” 네이트는 자리에 서서 골목 한 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인델, 저기 비쳐봐.” “응? 뭔데?” “저기 뭔가 있었어.” 지나가는 고양이라도 본건가, 싶었던 아인델은 입술을 삐죽대며 횃불을 돌려 골목 쪽을 향하게 비추었다. ―으으 골목에서 음산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기울이니 잠시 후 조금 더 큰 신음소리가 정확하게 들려왔다. 듣는 순간 소름이 돋는 소리였다. 네이트가 한 발을 떼자, 아인델이 서둘러 네이트를 붙잡았다. 네이트가 왜 붙잡냐는 표정을 짓자, 아인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뭔 줄 알고 가는 거야?” “뭔지 모르니까 가는 거지.” “저긴 너무 어두워. 뭐가 있을지 모르는데 우리 둘만 가서는 안 돼.” “나 혼자 갈게. 횃불 줘.” 그렇다고 냉큼 줄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 불러서 같이 가든가, 아니면 아침에 다시 보자. 조금 있으면 날이 밝을 거라고.” “그 사이에 일이 나면 어떡하겠다는 거야. 정 못가겠으면 기다려.” 네이트가 다시 가려는데 아인델이 붙잡고 늘어졌다. 네이트의 미간이 좁혀졌다. 결국 아인델은 울상을 지으며 파트너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으으으. 아인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오히려 자기가 놀랬다. 네이트도 무식하게 돌진하지는 않았다.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들어 올린 횃불에 골목이 점차 밝아지더니, 이내 신음소리를 내는 정체를 발견했다. “헉!” 아인델이 놀라서 주저앉았다. 손에 든 횃불이 떨어지면서 바닥을 뒹굴었다. 네이트도 꼼짝할 수 없었다. 그들 앞에는 사람이 한 명 쓰러져 있었다. 사람이라고 판단한 이유는 팔과 다리가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놀란 이유는 그 사람이 새까만, 혹은 새빨간 피웅덩이 속에 잠겨있었기 때문이었다. **** 아침이 되었다. 긴 겨울밤을 이겨내고 맞이한 아침의 풍경은 여느 도시와 다를 게 없었다. 거리에는 이른 아침부터 성 밖으로 나가기 위해 분주한 사냥꾼들과 약초꾼, 농부들이 거리를 걷고 있었고, 부지런한 아낙들이 두터운 로브를 걸치고 물주머니를 채우러 우물을 찾아가고 있었다. ―똑똑 “일어나셨습니까?” 문 밖에서 텔리오가 부르는 소리에 라보네가 기침소리와 함께 대답했다. “예. 일어났어요.”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세요.” 텔리오가 주둥이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주전자와 대야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이미 물이 반쯤 차 있는―대야를 놓고 뜨거운 물을 조금씩 부어 온도를 맞춰 주었다. “식사를 하신 뒤, 성주를 찾아뵐 수 있도록 미리 성에 사람을 보내놨습니다.” “고마워요, 텔리오.” “식사는 곧바로 가져오겠습니다.” 텔리오가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손끝만 살짝 찔러 물의 온도를 가늠한 라보네는 천천히 세수를 했다. 얼굴에 물이 닿자 은근스레 남아있던 잠기운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세수를 마치고 환복까지 끝낸 라보네가 면사가 드리워진 모자를 눌러쓰고 기다리니 곧 노크소리와 함께 텔리오가 찾아왔다. “부단주님. 문제가 조금 생겼습니다.” 라보네가 의아해하자, 텔리오는 굳은 얼굴로 사정을 설명했다. “살인사건이 발생했는데, 마법사의 소행으로 보인다는 이야기입니다.” 라보네의 얼굴이 겨울하늘처럼 새파랗게 질려 몸을 떨기 시작했다. **** 어젯밤, 간단한 요깃거리로 배를 채운 뒤 경비대 숙소에서 잠든 루치드는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아침 일찍 눈을 떠야만 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바라보고 있으니, 자신을 데리고 왔던 남자, 타난이 다가왔다. “따라와라.” 어제 음식을 먹으며 짧은 시간이나마 사담을 나누었던 기억을 되돌려보면, 꽤 유머러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의 타난은 디아트리보다 더욱 엄격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보이고 있었다. 눈치가 없지 않은 루치드는 별다른 물음 없이 순순히 타난을 따라갔다. 그리고 곧장 간 곳은 경비대 본부의 대장 앞이었다. 도착하는 순간, 대장의 곁에 서 있던 센베크가 루치드의 어깨를 거칠게 눌러 무릎 꿇게 만들었다. 무릎을 바닥에 세차게 찧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새까만 눈동자의 포우가 루치드를 내려다보았다. 마르고 갈라진 입술이 천천히 열리며 잇소리가 났다. “너, 솔직히 말해라.” 루치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 [115] Mera Vera(4) “이 도시에 마법사가 있다는 걸 들었나?” 뜬금없는 포우의 말에 루치드는 눈만 껌뻑대다가 뒤늦게 의미를 알아차렸다. “예, 마법사요?” “딴 소리 하지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알아, 몰라?” 뒤에 선 센베크가 버럭 하며 윽박을 질렀다. 하지만 루치드로서는 이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포우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마법사에 대해 들었나?” 포우로서는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이 바로 루치드였다. 사실 요 몇 년간 녹스에 의심스러운 정황이 보고되고 있는 형편이긴 했다. 하지만 누구도 나서서 ‘마법사’의 존재를 입에 올린 사람이 없었다. 있다면 오직 눈앞에 있는 꼬마가 유일했다. “아, 아뇨. 없어요.” 녹스가 부오노 공국에 정식으로 편입된 이후로 성의 입출입관리에 만전을 다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모종의 목적을 가지고 몰래 들어오는 인물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몇 년간 녹스에 몰래, 혹은 위장해서 들어온 인물들이 있다는 첩보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같이 어떤 ‘물건’을 찾는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그 ‘물건’이 마법사와 관련되어 있다는 뜬소문이 윗분들 사이에서 돌고 있었으나, 자세한 지시사항이 내려온 것은 아니었다. 경비대장이라는 직함을 가졌기에 그나마 이 정도라도 들을 수 있었다. “거짓말입니다. 이 녀석 알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센베크가 씩씩대며 루치드의 뒤통수를 쪼개버릴 듯이 노려보았다. ‘마법사’를 찾는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꺼낸 후, 곧바로 ‘마법사’의 소행으로 보이는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당연히 제1용의자, 혹은 공범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정말 모, 몰라요.” 루치드로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마법사가 어디 있는지 알았다면, 마법사를 찾겠다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 곧바로 마법사를 찾아가면 그만인데.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경비대로서는 루치드를 가장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특히 센베크는 루치드가 시치미를 떼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자식이!” 감히 어린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거짓말을 지껄이는가, 라는 생각에 분을 못 이긴 센베크가 루치드를 걷어차 버렸다. 루치드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구석으로 처박혔다. 잘못 걷어 차인건지, 혹은 제대로 걷어 차인건지 일순간 호흡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통도 고통이지만, 너무 억울한 마음이 들어 루치드는 항변했다. “갑자기 왜 그러시는 거예요?” “…….” 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센베크가 루치드를 걷어차는 것을 말리지도 않았다. 다시금 폭력을 행사하려는 센베크를 말린 것은 곁에 서 있던 타난이었다. 그의 생각에 루치드는 의심만 있을 뿐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용의자도 되지 못하는 아이였다. 그리고 어쩌면 수사를 위해 협조를 받아야 할 대상일지도 모르는데 강압적으로 나갔다가는 어찌될지 모르기에 일단은 여기까지 하는 게 옳다고 여겼다. “타난, 그 녀석 일단 가둬놔라. 나중에 다시 이야기 해야겠다.” 가만히 지켜보던 포우가 지시를 내렸다. 타난은 가벼운 목례로 답한 뒤, 루치드를 데리고 본부를 나섰다. 센베크가 씩씩 거리며 그들이 나간 곳을 바라볼 때, 포우가 물었다. “센베크, 신원조회는? 신원조회의 대상이 저 아이가 아니라, 새벽에 발견된 인물임을 알아차린 센베크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게… 어렵습니다.” “왜?” “사실, 온 몸에 자상도 자상이지만, 머리 부분은 완전히 훼손돼서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랍니다.” 보고는 그렇게 했지만, 실상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짓뭉개진?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마치 머리 고기 썰어내듯, 얇게 저민 상황이라 얼굴이라 볼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단단한 두개골마저도 얇게 저며진 상태라 조사원들이 연신 구토를 하면서 맞춘 끝에 겨우 얼굴뼈를 모두 모을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뼈를 제외한 부분들은 기름덩어리처럼 흐물흐물해져서 조합이 불가능했다. 센베크는 보고를 계속했다. “일단, 그나마 남은(?) 몸뚱이에서 특정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알아보고는 있습니다, 만…….” 수사대원들이 신도 아니고, 얼굴이 없는 사람의 신원을 쉽게 알아차리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또 불가능 한 것만은 아니리. 시간이 걸릴 뿐일 것이다. 포우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다른 지시를 내렸다. “오늘 하루는 성내 출입을 완전히 금하도록. 그리고 순찰대와 협조해서 최대한 빨리 범인을 색출할 수 있도록 이야기해.” “오늘, 만인가요?” “…….” 포우가 지긋이 바라보자, 센베크는 냉큼 허리를 숙여보이고는 본부를 빠져나갔다. 텅 비어버린 본부에서 포우만 홀로 남았다. ―드르륵 의자가 뒤로 밀리며 나무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팔짱을 끼고 탁자 주위를 천천히 돌기 시작한 포우. 그의 직감에 이 사건이 단순히 단발성으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사건의 열쇠를 저 아이가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비록 그 아이가 진실로 마법사의 위치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 “그래서요?” 라보네가 면사가 달린 모자를 벗으며 텔리오에게 물었다. 텔리오는 두 손을 뒤로 하고 공손한 자세로 대답했다. “금일 성주 방문은 어렵다고 알려왔습니다.” 라보네는 손에 낀 하얀 장갑을 천천히 벗기 시작했다. “…진짜 마법사인가요?” “경비대에서 들려온 전언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경비대 내에서도 쉬쉬하는 이야기건만, 텔리오는 요령 좋게도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간 수차례 상행을 벌이며 쌓아온 인맥이 이렇게 통할 때가 있었다. “잘 됐네요. 그럼 저희 일부터 처리하도록 하죠. 서쪽 평야라고 했죠?” 아카넬, 붉은 마법의 씨앗에 대한 정보는 오직 라보네와 텔리오만 알고 있었다. 텔리오는 라보네의 상단이 첫 삽을 뜰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했던 사람이었다. 본래 상단주인 아버지 곁에서 일해야 할 사람이지만, 스스로가 자청해서 멀리 떨어진 상행을 주도하곤 했다. 그러면서 매번 좋은 성과를 냈기에 신임이 매우 높은 인물이었다. 녹스행도 여러 번 다녔던 텔리오는 라보네가 부단주직을 맡으면서부터는 라보네 곁에서 상단에 관한 여러 가지를 밀착과외하는 식으로 돕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녹스행도 함께 왔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비밀스런 지령, 아카넬을 찾는 임무까지 함께 하게 된 것이었다. 그에 대한 신뢰에는 그의 외모도 한 몫을 했다. 얼핏 보면 귀족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단정하게 빗은 머리와 정갈하게 다듬은 턱수염, 그리고 깊은 눈매와 부리부리한 콧날이 어울려, 얼굴만 봐도 ‘정직(正直), 정의(正意), 정도(正道)’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남자였다. 텔리오는 뒷짐을 풀지 않은 채, 짧은 헛기침과 함께 대답을 이었다. “그게… 어렵게 됐습니다.” “네?” 텔리오는 한층 낮은 목소리로 사유를 밝혔다. “오늘 하루 성외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범인을 잡기 위해서라는데, 사실 언제 금지령이 해제될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라보네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그럼 어떡하죠?” “우선, 상단의 일을 먼저 처리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미리 준비를 한 듯, 곧바로 대답이 나왔다. 텔리오가 이렇게 말하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렇게 해요.” 텔리오는 가볍게 허리를 숙여 보인 뒤, 방을 나갔다. 라보네는 장갑과 모자를 침대위에 내려놓고 창가로 다가갔다. 조금 전에도 보았던 그 길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아까와 달리, 어쩐지 생기(生氣)가 죽은 것처럼 보였다. **** “어린놈이 여긴 왜 들어온 거야? 소매치긴가?” 히죽대며 묻는 거한의 물음에 루치드는 침묵을 지켰다. “허, 참. 이 어린놈의 새끼가 어른이 묻는데 대답도 안하네?” 거한의 옆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던 날선 눈매의 마른 사내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루치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타난이 루치드를 데리고 온 곳은 경비본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지하감옥이었다. 1층에서는 경비대원 두 명이 철장 앞을 지키고 있었고, 철장을 지나 아래로 향하는 계단을 따라 걸어 내려가니 어둡고 눅눅한 감옥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각 칸마다 사람들이 있었는데, 대략 4명 내지 5명이 들어가 있었다. 사실 녹스에는 범죄자가 많았다. 출신을 무시 못 한다는 게 바로 이런 경우였다. 애초에 대륙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녹스로 도망쳐 들어온 사람들은―새 출발을 꿈꾸는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대부분은 다시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갇히기 일쑤였다. “형님, 제가 손 좀 볼까요? 손가락 하나 정도는 꺾어도 티가 안날 텐데요?” 날선 눈매의 반대편에 앉아있던 또 다른 사내가 실실 웃으며 물었다.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만큼 키가 작은 사내는 얼굴이 동그랗고 머리가 반쯤 벗겨진 사내였다. 헤프게 웃는 모습과 달리 눈에서는 붉은 빛이 감도는 것 같았다. “왜? 손이 근질근질해? 넌 임마, 그 손 좀 묶어 둬. 뭐 맨날 꺾네 자르네 하고 있어? 저 봐라. 애가 벌써 겁에 질려서 울려고 하잖아?” 타난은 루치드를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철장에 집어넣었다. 집어넣는 순간까지도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철장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얌전히 있어라, 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이 전혀 실효성이 없었다는 게 드러나는 중이었다. “이 새끼가 어디서 시끄럽게 울려고 그래? 소리 냈다간 봐라. 발모가지를 분질러 버릴 테니까.” 루치드는 울려고 하지도 않았고, 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앉아있는데 지들끼리 만담(?)을 즐기고 있었다. “야, 야. 애 그만 놀려라. 그러다 진짜 울겠다. 어이, 꼬마. 너 뭔 짓 하고 들어온 거야?” 처음에 물었던 거한이 다시 루치드에게 물었다. 머리가 완전히 벗겨진 거한은 온 몸이 울퉁불퉁해서 여간 힘 잘 쓰게 생긴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우락부락한 얼굴은 보기만 해도 시선을 피하게끔 하는 힘이 있었다. 루치드는 대답대신 무릎을 세우고 그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 새끼, 끝까지 쌩까네?” 마른 사내가 영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으며 엉덩이를 들었다. 발을 쭉 내밀어 루치드를 밀었더니, 루치드는 자세가 무너지며 바닥에 너부러졌다. 그 꼴을 보고 마른 사내가 키득거렸다. “아무 짓도 안했어요.” “아무 짓도 안하고 들어오는 곳이 아냐. 여기가.” 둥근 얼굴의 남자가 말투를 따라하며 비아냥거렸다. “새끼, 지가 뭘 했는지도 몰라?” 마른 사내는 꼭 말머리에 ‘새끼’라는 어휘를 붙여야만 문장을 완성시킬 수 있는 것처럼 굴었다. “아니면 미친놈이겠지. 지가 저질러놓고도 죄라고 생각 안하는 놈들 있잖아.” 다른 구석에서 촌극(?)을 바라보듯 구경만 하던, 눈 밑이 유난히 검은 사내가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아, 너 같은 놈?” 이라고 둥근 얼굴의 붉은 눈빛의 사내가 킬킬거리며 받아쳤다. “씨발 새끼가. 어디서 야부리 털고 지랄이야?” 다크 서클이 그르렁대며 일어서려는 흉내를 냈다. “야부리는 개뿔이.” 콧노래라도 흥얼거릴 것처럼 구는 둥근 얼굴. “이 새끼가 아침부터 성질나게 만드네. 야, 죽고 싶어? 응?” “미친 새끼, 너나 죽고 싶냐?” “와, 이 새끼. 너 꽤 오래 살았다, 그치? 이제 그만 살고 싶은 거지?” 다크 서클이 벌떡 일어나 둥근 얼굴에게 다가가자, 둥근 얼굴도 붉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마주 섰다. “조용히 해라.” 가만히 있던 대머리의 한 마디에 두 사람은 다가가길 멈췄다. 눈싸움을 벌이던 두 사람은 동시에 몸을 돌리고 자기 자리로 찾아갔다. 루치드는 다시 무릎을 세우고 고개를 파묻었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지금으로서는 아무런 단서가 없어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마치, 그 때와 같았다. 아무런 이유 없이 ‘지구’로 떨어졌던 그 때처럼. 그러고 보니 루치드는 너무 자연스럽게 저곳을 ‘지구’라고 부르고 있었다. 마치 이곳은 ‘지구’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면서. ‘둘은 다른 세상일까?’ 두 세상은 많은 차이가 있었다. 문명의 수준, 언어의 차이 등등. 하지만 그 외에 유사한 점은 더 많았다. 지구와 유사한 식생. 하나 뿐인 해와 달. 공기, 물 등. 오히려 지구과학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같은 지구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인류학적인―물론 루치드가 인류학을 배운 적은 없지만―측면에서 유사한 점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긴 했다. 그저 다르게 생긴 인종, 정도의 구별점 외에는 두 세계의 인류 사이에 다른 점은 없었다. 그 덕분에 루치드도 ‘지구’에서 쉽게 융화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법의 존재와 사상의 차이―왕, 귀족, 기사―는 ‘지구’와의 선명한 구별점을 지녔다. 게다가 ‘에르케넨(디아트리네가 있던 곳)’의 존재가 지구에는 있을 턱이 없었다. ‘지구’는 인공위성이라는 기물을 통해 우주 밖에서 전 지구를 탐색하는 수준이다. 인류의 눈 밖에 난 지역이 있을 턱이 없었다. 이런 점 때문에 두 세상은 루치드에게 전혀 다른 곳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저곳을 ‘지구’라고 부르는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그만큼 저곳 세상에 융합되어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단지 그런 이유라면 이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할 거리가 안 된다. 문제라면, 융합이 될수록 루치드가 ‘마법’을 사용하기 어려워진다는 점이었다. ======================================= [116] Mera Vera(5) “대장,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타난이 경비대로 돌아와 포우 앞에 섰다. 포우는 아침 점호 후 받은 몇 개의 보고서를 검토하던 중이었다. “음? 뭔가?” “그 사건 관련한 내용입니다.” 타난이 주위를 보며 눈짓을 했다. 포우는 경비본부 내에서 잡무를 보던 몇몇 대원들에게 나가 있으라는 명을 내렸다. “어젯밤 순찰대원 중 2명이 사라졌답니다.” “뭐? 순찰대원이 사라졌다면 큰일 아닌가? 왜 이제 보고가 들어온 거지?” 화들짝 놀란 포우의 반응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타난이 설명을 덧붙였다. “아시잖습니까? 순찰대가 워낙 느슨해서 그런 거죠. 아무튼 실종된 순찰대원이 둘인데, 그 중 한 명이 바로 피해자랍니다.” “응? 무슨 피… 설마?” 포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민간인도 아니고 순찰대원이었다? “예. 옷이 벗겨져 있어서 몰랐는데 발목에 난 문신을 본 순찰대원 한 명이 신원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문신은 일종의 부적이었다. 경비대원이나 순찰대원 혹은 소수의 민간인들이 무사를 기원하며 몸에 문신을 새기는 일이 종종 있었다. 보통은 신화 속 영웅의 이름이나 무기를 그려넣는다. 하지만 녹스에서는 조금 특이하게도 몬스터를 그려넣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번에 희생된 순찰대원 역시 발목에 ‘트로글(Trogl)’을 새겨 넣었다. 트로글은 원숭이처럼 생긴 몬스터로 숲속에서는 바람보다 빠르다고 알려져 있었다. “한 명이 피해자라면, 다른 한 사람은?” “그게, 찾지 못했답니다. 아마 다른 곳에서 죽임을 당했거나 혹은….” 타난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범인이 마법사라고 가정할 경우, 실험체로서 다루어졌을 가능성도 있음을 포우 역시 짐작하고 있었다. “두 사람을 모두 끌고 가기 어려워서 한 사람은 죽이고 한 사람은 데려간,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만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대장님. 이상한 점이 하나 더 발견됐습니다.” 다른 실종된 한 명에 대해 추리를 해보던 포우는 타난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 순찰대가 발견된 곳이 원래 순찰하는 곳과 다른 곳이랍니다.” “어디?” “원래 북문 쪽 거리를 순찰하는데, 중앙대로 쪽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그 대원의 집은?” 타난이 뒷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집은 남문 근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제는 교대 후 순찰대 숙소에서 잘 예정이었다고 하더군요. 교대는 순찰대 본부가 있는 동문 쪽에서 무사히 교대를 한 모양인데, 그 후에 숙소로 간 줄 알았답니다.” 순찰대 본부는 동문 근처에 자리 잡고 있어, 남북을 가르는 중앙대로를 기준으로 보면 경비대 본부와 대칭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경비대 숙소가 본부에서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면, 순찰대 숙소는 순찰대 본부의 약간 아래쪽, 즉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순찰대 숙소로 간줄 알았던 놈이 아침 점호시간이 되도록 오지 않아서 다들 의아해했더랍니다. 그런데 여기서 골 때리는 게, 죽은 놈이 평소에도 아침 점호를 밥 먹듯이 빼먹는 놈이었다는 거죠. 짬이 좀 되니깐 그랬는지는 몰라도 참…. 아무튼 그래서 으레 그러려니 하고 지나갔다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놈이 시체로 발견된 것이죠.” “엉망이군.” 짧게 감상평을 내린 포우였다. 아마 순찰대장은 이번 일로 경질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그건 그 쪽의 일. 지금은 살인 사건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다른 사항은 없고?” “일단 그 쪽은 끝입니다만….” “또 있나?” “순찰코스가 말입니다. 저희 숙소와 가까운 거리까지 포함되었나 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서 타난을 바라보자, 타난이 침을 꿀꺽 삼키고 답했다. “그 꼬마 놈 말입니다. 어제 저희 경비숙소에 있었잖습니까?” “하지만, 숙소에 다른 놈들도 있었을 거 아냐?” 포우가 타난의 억측에 대해 미리 반론을 펼쳤다. “그렇긴 해도 굳이 방법을 찾자면 못 찾을 것도 없지 않습니까? 체구도 작은 아이니 몰래 빠져나가려 한다면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나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 놈이 마법사라도 된다는 소린가?” 포우는 말을 뱉으면서도 부정했다. 마법사일리는 없었다. 그렇게 어린 마법사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을뿐더러, 만약 그렇다면 자기 앞에서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숨겨야 할 일이지. “그건 아니더라도,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마법사를 봤다던가, 아니면 불렀다던가.” “…일단 데리고 와봐. 아니, 내가 직접 가봐야겠다.” 포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이리와 봐라.” “…….” “끌고 와.” 거한, 리밋은 괜한 심술이 났다. 말을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 꼬마라니. 감히 누구 앞에서. 이쯤 되니 귀엽다고(?) 봐주고만 있을 시기는 지난 것 같았다. 이번에는 마른 사내가 일어나 루치드의 머리끄덩이를 붙잡더니 거한 쪽으로 던졌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에 쓸리며 구른 루치드는, 그래도 소리를 지르지 않으려 했다. 괜한 오기일 수 있지만 이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머리가 뜯겨나가는 고통은 어지간해서는 참기 힘들었다. “윽!” “고 놈 새끼? 독종이네?” 마른 사내가 히죽 웃고는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리밋이 손을 들어 마른 사내를 제지했다. 그리고 왼손으로 자기 앞에 너부러진 꼬마의 머리채를 붙잡고 들었다. “너 이름이 뭐냐?” 리밋이 물었다. 루치드는 상체를 억지로 들고 독기가 서린 눈으로 리밋을 마주보았다. 이놈들에 대한 분노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전부터 이유 없는 폭력과 억압에 얼마나 많이 시달렸던가. ‘이유 없이’ 두 세상 사이를 오가며 고생해야 했고, ‘이유 없이’ 폭력과 죽음의 위협에 놓여야 했었던 게 몇 번이던가. 게다가 조금의 시간도 아껴서 목표를 달성해야 할 이때에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처지에 놓여야 한다는 게 답답하고 억울하고, 그래서 화가 났다. “이 새끼 눈깔 봐라. 보기 좋네?” 리밋은 히죽 웃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루치드의 뺨을 올려붙였다. 감옥 전체가 울릴 만큼 커다란 소리가 났다. 루치드는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얘졌다가 뒤늦게 고통을 감지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소리를 내면 더 억울할 것 같았다. ―빠드득 어금니를 꽉 깨물고 리밋을 노려봤다. 왼쪽 뺨이 거의 두 배로 부풀어 올랐다. 리밋은 피식거리며 옆을 돌아봤다. 검지로 루치드를 가리키며, “야, 얘 눈깔 멋지지 않냐? 니들은 이런 거 본받아야 돼.” ―짝! 다시 손바닥이 같은 자리를 때렸다. 거한의 두툼한 손바닥은 넓적한 쇠몽둥이와 다를 게 없었다. 루치드의 여린 볼 살이 빨갛게 부어오르더니 몽글 피가 솟아났다. 얼얼함이 고통을 넘어서 감각이 아주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밋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질 않고 있었다. “니들도 이런 눈을 해야 내가 마음 놓고 때리지. 안 그러냐, 아가?” ―짝! 이전보다 더욱 세고 날카롭게 올려붙였다. 귀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는데, 루치드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머리가 웅웅거릴 정도로 울려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거한이 잡고 있던 머리채를 놓자 철퍼덕, 땅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고작 세 대를 못 참네. 야, 문! 얘 깨워봐라.” 둥근 얼굴이 웃으며 루치드에게 다가갔다. 루치드 앞에 쪼그리고 앉은 그는 루치드의 손가락을 붙잡더니 히죽 웃었다. **** “벨로?” 탁자에 앉아있던 라보네가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텔리오가 푸른색 로브를 입은 채로 방으로 들어왔다. 아마도 외출했다가 바로 찾아온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죠? 성 밖으로 나갈 방법이 생겼나요?” “아닙니다. 대신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기에 보고 드리려고 왔습니다.” “어떤 이야기요?” 텔리오는 한 호흡을 쉬었다가 대답 했다. “마법사를 찾는 아이가 있었답니다.” 라보네가 벌떡 일어났다. 원래 하얀 얼굴이었지만 아주 핏기가 보이지 않을 만큼 창백해진 얼굴이었다. “마법사를 찾다니요? 누가요? 마법사를 찾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을 리는 없다. 다만 찾더라도 몰래 찾지, 이렇게 소문이 돌도록 찾지는 않는다. “그게 어린 아이랍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마법사를 찾는다고 경비대에 이야기한 뒤, 어제 그 사건이 벌어졌답니다. 그래서 지금 그 아이는 경비대 감옥에 갇혀있다고 합니다.” 라보네는 잠시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차분하게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마법사라니. 혹시 그 아이가 뭘 아는 게 아닐까요?” “다른 이야기는 흘러나온 바가 없어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를 만나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감옥에 갇혀있다면서요?” 어느 성을 막론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만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돈을 좀 쓰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뇌물로 가능할까요?” 텔리오는 엄지로 턱을 살살 긁으면서 대답했다. “많이 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 경비대장이 워낙 강성이라서 대장은 안 통할 것 같습니다만, 그 아래쪽은 조금 비벼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텔리오가 가능하다고 하면 가능한 것이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말에 책임을 지는 사내고, 가능하기 때문에 말을 꺼낸 것이리라. “그럼 해야죠. 곧 점심때이니 그 때 틈을 볼 수 있을까요?” “서두르면 가능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두르세요. 헛걸음일지도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정보니까요.” 텔리오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 “아, 안된다니까요. 오늘은 아무리 부탁해도 안 돼요.” “이유가 뭐요? 도대체?” 실랑이를 한참 벌이던 사냥꾼이 가슴을 내밀며 따지기 시작했다. 생계가 걸린 일이니 절박하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경비대에게 들이대면 쓰나? “에휴, 가끔가다 이렇게 소식이 먹통인 사람이 있다니깐.” “제윅!” “알았어, 알았다고.” 성내 주민들이 모두 알아야만 하는 사건도 아니었고, 경비대도 되도록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쉬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눈 막고 귀 막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다들 얼굴에 입 하나씩 달고 다니는 이들이다 보니 알음알음으로 사건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진지하게 말하건대 눈 막고 귀 막고 다니는 사람이 있으니 눈앞에 서 있는 사냥꾼 같은 사람이었다. “아무튼 오늘 경비대장의 지시로 성 밖 출입이 금지됐으니 돌아가세요.” “그럼 난 뭐 먹고 살라고?” “나 참. 스팅. 내가 하루 종일 여기서 멍청하게 서 있으니 바본 줄 알아요?” 주위를 살피던 제윅이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조용히 속삭였다. “옆 집 여편네랑 붙어먹는 걸 모를 줄 알아?” 스팅이 흠칫 놀래더니 얼굴이 붉어졌다. “오늘 하루만 빌붙어봐. 그 동안 해먹은 게 있는데 정을 생각해서라도 하루쯤은 괜찮을 거야.” 손만 대면 금방 터질 것 같은 얼굴이 된 스팅을 보며 제윅이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큰 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세요.” 아무 말도 못하고 씩씩거리던 스팅은 콧바람을 크게 내뿜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피했다. “제윅, 뭐야?” 영문을 모르는 훌린이 물었지만 제윅은 능청을 떨었다. “아, 걱정 마. 별 거 아니었어. 그나저나 배가 좀 고픈데, 왜 교대를 안 해 주는 거야?” “곧 오겠지.” “하아. 어이, 거기 아저씨, 오늘 못 나가요. 돌아가세요. 어?” 제윅이 반응이 이상해서 훌린이 물었다. “뭐야?” “저 아저씨 갑자기 왜 달려가지?” 중얼거리는 제윅의 말에 고개를 돌려보니 이미 거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똥 싸러 갔나?” 아무 일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평야를 바라보는 제윅. 훌린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아니.” “그럼 수상한 사람 아냐?” “수상하긴, 뭐가 수상해? 그냥 오다가 돌아간 거지.” 훌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파트너 바꿔달라고 요청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지금 전 경비대와 순찰대에 경계령이 떨어졌는데, 너만 한가하게 그러고 있을 거냐?” “내가 뭘?”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제윅을 보니 괜히 속에서 욱하는 감정이 들었다. “수상한 행동을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보고하라는 말 못 들었어?” “뭐가 수상해? 그냥 오다가 못 나간다, 하니깐 그냥 돌아간 거지.” 훌린은 팔짱을 끼고 물었다. “어디야?” “뭐가?” “그 사람이 어디로 갔나고?” 제윅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한 쪽 골목을 가리켰다. “쫓아가봐.” “나? 지금? 왜?” “그 사람 얼굴 본 게 너였잖아? 가서 물어보던가, 잡아오던가 해.” “점심 교대 하고 가자.” “미친 놈. 당장 가!” “그렇다고 파트너한테 욕을 하냐?” 제윅이 정말 내키지 않는 듯 억지로 가고 있다는 시늉을 보이며 달렸다. 하지만 곧 뜀박질을 멈춰야 했다. “제윅!” “아, 왜!” “창 가지고 가야지.” 궁시렁거리며 돌아온 제윅이 창을 들었다. “지금쯤 멀리 가서 못 잡을 텐데.” “빨리 뛰어가.” “쳇.” 제윅이 다시 무거운 걸음을 옮겨 사라진 사내를 쫓아갔다. ======================================= [117] Mera Vera(6) “벨로, 지금 바로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두터운 로브를 둘러 입고 후드를 깊게 눌러 쓴 채 여관을 빠져나왔다. 여관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불어 닥친 바람에 후드가 날아갈 뻔 했다. 간신히 두 손을 들어 벗겨지지 않게 누른 라보네는 앞서 가는 텔리오의 뒤를 따랐다. 새벽에 벌어진 사건이 그새 퍼졌는지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오는 시간임에도 거리는 비교적 한산했다. 차가운 날씨에 로브를 둘러 쓴 사람들이 없지 않아, 그리 튀는 복장은 아니었다. “감옥이 여기서 먼가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간 라보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텔리오 역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감옥은 북문과 서문 사이의 중간쯤에 있습니다. 게다가 성벽 가까이에 있어서 조금 걸음을 빨리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서두르죠.” 두 사람은 이내 중앙대로에서 모습을 감췄다. **** “그냥 제가 데려오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타난은 대장이 직접 감옥으로 가는 게 마땅치 않다고 여겼다. 모름지기 이 성의 경비와 치안을 관할하는 경비대장이 경비본부를 비운다는 것이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아니다. 어차피 볼 거라면, 빨리 가서 보는 게 낫다.” 포우는 옆에 놓인 칼을 허리에 찬 후, 벽에 걸린 잿빛 로브를 집어 들었다. “어쩐지 시간 싸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 “공교롭지만, 마법사가 이 시기에 나타났다는 것이 수상해.” 포우는 경비본부의 문을 열고 거리로 나섰다. “무슨 뜻입니까?” “최근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마법 물품이 녹스성에서 발견됐다는데, 그 진위를 파악할 수 없어.” “마법 물품 말입니까? 어떤?” “그건 잘 모르겠다. 사실 물건인지, 사람인지 확실하지 않아. 하지만 그것을 찾기 위해 사람들이 녹스로 몰려들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과연.” 그러고 보니 최근 녹스 성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평년보다 많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금은 그렇게만 알아둬. 당장 중요한 것은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다.” 타난은 고개를 끄덕이고 포우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센베크는?” “아, 아마도 순찰대와 함께 조사 중일 겁니다.” “그래?” “아마도요.” **** “이봐? 당신 거기 서봐.” “저요?” 센베크는 중앙대로 근처에서 실골목을 들어가거나 나오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붙잡고 심문하고 있었다. “오늘 새벽에 뭐했어?” “예? 집에서 잤죠.” “확실해? 조사하면 다 나와.” 사람들은 센베크 덕분에 새벽에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았고, 군데군데에서 퍼져있던 소문이 모이자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새벽에 마법사에 의해 순찰대원이 죽었다.’ 비교적 정확한 이야기가 녹스 성 전체로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래서 오늘 성 밖의 출입이 금지됐던 거구만.” “그런데 위험한 거 아니에요?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살인을 저지르는 마법사가 성내에 있다는 거 아니에요?” “어, 그러네.” 사람들은 외출을 삼가기 시작했고,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집으로들 들어갔다. 덕분에 중앙대로에 늘어선 상점들에는 파리만 날렸다. 다만 그 덕분에 상행을 왔던 상인들이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녹스의 상인들과 느긋하게 거래를 할 수 있었다. “더 느긋하게 거래를 하라고요?” “그래. 최대한 느긋하게. 시간을 끌면서 유리하게 거래를 하도록 해.” 대머리 사내가 마른 손등을 비비며 추위를 조금이나마 이겨 내보려 했다. “듣기로는 살인자가….” “어허, 이 사람이? 자넨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돼.” 상행에 참가한 상단 소속 상인이 어쩔 수 없단 듯이 대머리 사내의 지시에 따랐다. 그들은 최대한 성주나 경비대의 시선을 빼앗아야 하는 역할을 해야 했다. 모든 상인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빠져나간 두 사람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 문, 이라고 불린 둥근 얼굴의 사내가 루치드의 손가락을 잡고 힘을 주려는 순간. “어이, 거기.” 철창 밖에서 익살맞은 목소리가 들렸다. 철창 안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바깥으로 쏠렸다. “어린 애한테 무슨 짓이야?” 바깥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 때마다 바닥을 퉁퉁 찍는 소리가 들렸다. 루치드가 갇힌 철창으로 사내가 다가오자 사람들은 소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손에 들린 창으로 바닥을 내리찍는 소리였다. 창을 든 사내는 턱짓으로 문을 물러서게 했다. “왜 계속 잡고 있어? 비켜.” 문은 슬며시 손을 놓고는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경계서린 시선을 풀지 않았다. 사내가 비록 경비대의 복장을 하고 있지만, 이 감옥에서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임지가 다른 곳의 경비대원이 감옥에 올 일이 있을까? 때문에 사람들은 쉽게 입을 열지 않고 가만히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이야, 여기 사람 너무 많네? 눈이 너무 많아. 어쩌지?” 말은 경박하고, 행동은 가벼웠다. 창끝을 발로 톡톡 두드리는 행동이나 다소 가벼운 어조의 목소리가 괜히 수상하게 여겨졌다. 참지 못하고 리밋이 물었다. “당신 뭐요?” “보면 몰라? 경비대.” “여기서 일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소.” “여기서 일하든, 저기서 일하든 경비대는 경비대지, 안 그래?” 리밋은 마치 자신을 놀리는 것 같다는 생각에 뿔이 났다. 하지만 철창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무슨 일로 오셨소?” “애 좀 데리고 가려고?” 말끝이 올라갔다. 목적이 불명확하다는 어투다. 리밋은 천천히 일어섰다. “어허, 그냥 앉아. 왜 일어나고 그래?” “당신, 뭐지?” “경비대라니까?” “내가 원래 감이 좋소. 그래서 이날 이때까지 죽지 않고 살았지. 그런데 지금 감이 안 좋소. 매우 불쾌한데 마치 개미가 내 살을 뜯어먹고 있는 기분이오.” “오호, 신기한데?” 경비대원이 히죽 웃었다. “정확해. 사실 당신같이 재미있는 사람하고는 오래 대화해 보는 게 소원인데 말이야,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미안해.” 경비대원의 마지막 말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느꼈는지 슬슬 일어섰다. 도망칠 곳은 없지만 그래도 앉아서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여겼다. 다른 철창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일어섰다. “허, 거참.” 경비대원은 슬쩍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가 짧게 혀를 찼다. “미안.” 경비대원은 리밋을 보며 한 쪽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감옥 안에 난데없는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 아니, 칼날이라고 해야 할까? 투명한 칼날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천지 사방으로 불어 닥쳤다. 순식간에 감옥 안이 피바람과 비명으로 가득 찼다. **** 감옥에 도착했을 즈음, 포우와 타난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 지독한 피비린내가 감옥에서부터 퍼져나오고 있었다. 포우는 허리에 찬 칼을 빼어들고 감옥으로 달려갔다. 뒤따른 타난이 포우보다 빨리 뛰어가 앞을 막았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타난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건물로 들어갔다.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의 철문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진득한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포우는 입구에 놓인 횃불을 하나 들어 그 뒤를 따랐다. 타난은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들고 있던 칼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앞에서 무엇이 나타나든 곧바로 베어낼 기세로 한 걸음씩 전진했다. 그리고 그 뒤를 포우가 주변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타난이 지하계단을 밟고 내려가다가 그만 발을 헛디뎠다. ―쿵 “타난!” 포우가 서둘러 내려와 타난을 일으켰다. 다행히도 크게 다친 곳이 없었던 타난은 민망함을 감추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곧 그는 칼날을 아래로 늘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감옥의 좌우 내벽 높은 곳에 뚫린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과 포우가 든 횃불을 통해 감옥 내부가 환히 드러났다. 신발 바닥이 철벅댈 정도로 피범벅이 된 바닥과 마찬가지로 피칠갑이 된 내벽도 끔찍했다. 하지만 가장 심한 것은 바닥에 너부러져 있는 시체들과 철막대들이었다. 아마도 철창이었을 쇠막대들이 모두 잘게 토막이 나서 바닥을 뒹굴고, 그 막대들만큼이나 잘게 썰려서 예전 모습을 상상조차 할 수 없게 토막 난 시체들이 감옥 전체에 널려 있었다. “우욱!” 타난이 그 자리에서 허리를 꺾으며 구토를 했다. 그간 지옥을 봤다고 자부했던 포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하얀 점액이 나올 때까지 구토를 했다. **** 한 편, 이보다 앞선 시간. “볼레, 잠시만 멈추시지요.” 간발의 차이로 경비대장보다 먼저 도착한 라보네와 텔리오는 감옥에 왔음에도 다가가지 않았다. 위험신호를 먼저 느낀 것은 텔리오였다. “왜요?” “더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피냄새가 납니다.” 그러고 보니 감옥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감옥에서 웬만큼 떨어져 있음을 감안하면, 이 정도의 냄새는 보통이 아닌 것이다. “쉿!” 텔리오는 라보네를 골목 안쪽으로 밀며 몸을 숨겼다. 잠시 그러고 있으니, 이윽고 한 경비대원이 웬 꼬마를 두 팔에 안아들고 북쪽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어쩐지 저 꼬마가 두 사람이 찾아보려했던 꼬마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떡하지?” 라보네가 흘깃 보더니 속삭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텔리오는 섣부르게 대답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단주의 안전이었다. 부단주의 안전이 전제되지 않으면 다른 무엇도 의미가 없었다. “제가 따라가 보겠습니다. 아가씨는 다시 중앙대로로 돌아가시지요.” “텔리오!” 텔리오가 라보네의 안전을 생각하듯, 라보네 역시 텔리오의 안전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습니다. 제 한 몸 정도라면 얼마든지 빼낼 수 있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상행만 20년입니다. 이 정도는 예전에도 경험해 봤으니 위험하지 않습니다.” 그 말이 비단 허풍만은 아니겠지만, 위험도는 그 어느 때보다 크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텔리오는 시간이 없었다. 저 경비대원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기 전에 뒤쫓아야 했다. “여관에서 기다려주십시오. 금방 돌아가겠습니다.” 짧은 목례와 함께, 텔리오는 몸을 돌렸다. “텔리오.” 부디 무사하기를. 라보네는 잠시 그 자리에서 텔리오의 무사귀환을 기도했다. **** 루치드를 든 경비대원은 북문 근처의 골목길로 접어들더니, 어느 허름한 집으로 들어갔다. 거리 전체에 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퍼진 탓에 경비대원은 다른 사람과 마주침 없이 들어올 수 있었다. “일어나라.” 루치드를 내려놓은 경비대원이 아이를 툭툭 발로 건드렸다. 몇 번 건드리니 루치드가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되찾았다. “안녕?” 경비애원의 인사에 루치드가 시선을 맞췄다. 얼굴을 보던 루치드는 그가 꽤 낯이 익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디서 봤더라? “어?” 생각이 났다. 바로 어제 동문으로 들어올 때 봤던 사람이었다. “안녕? 난 제윅이라고 해.”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그러다가 루치드는 조금 전 정신을 잃기 전의 희미한 기억을 떠올렸다. “감옥에서 절 빼주신 건가요?” “그래.” 아마 감옥에서 폭력을 당하는 것을 보고 구해줬음이리라. 그런데, 여긴 경비대 본부가 아닌 것 같았다. 둘러보면, 그냥 가정집 같았다. “여긴 어디죠?” “땡.” “예?” 경비대원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질문이 잘못됐어. 다시 질문해.” 이게 무슨 소리야? 질문? 루치드는 가만히 경비대원을 바라보았다. “누구세요?” “옳지. 대화를 하려면 우선 상대가 누구인지를 파악해야지. 이런 거, 저런 거 다 건너뛰어 버리면 상대가 섭섭하지 않겠어?” ‘무슨 소리야?’ 루치드가 어벙벙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으니, 경비대원이 씩 웃었다. “다시 한 번, 소개할게. 난 제윅이라고 해. 보시다시피 경비대원, 같이 보이겠지만 실은 마법사야.” “에?”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런 반응이 재밌었던지 제윅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제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루치드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오른손을 들어 루치드의 왼쪽 뺨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와 동시에 루치드는 극심한 통증이 느껴져 순간 손길을 피했다. “많이 아프겠구나. 좀 일찍 구해주고 싶었는데 파트너가 워낙 눈치가 없는 친구여서 말이야. 어제 봤었지?” “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마법사라고요?” “그래.” “전, 마법사를 아냐는 질문을 받았다가 감옥에 갇혔어요.” “그래, 알아. 그리고 좀 놀랬지.” “전 이유도 모르고 감옥에 갇혔고, 이유도 모른 채 맞았어요.”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지금 이유도 모른 채 여기에 왔어요.” 제윅의 눈이 반짝이며 루치드의 뒷말을 기다렸다. “제가 이해할 수 있도록 이 상황에 대해서 설명해줄 수 있나요?” “너무 광범위한데?” “전 지금 제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도 몰라요. 아는 것도 없지만요. 그래서 제윅이 말해주는 것을 듣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싶어요.” “나쁘지 않은 문답법이구나. 우선 내가 가르쳐주고, 질문을 받는다는 거지?” “예.” “꽤나 좋은 선생님을 만났었나보네. 늘 그런 식으로 지식을 쌓았던 거야?” 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거지? “아무래도 내가 먼저 이야기해야겠네. 널 보고 있자니 나도 억울하다고 느낄 정도야. 눈에 서글픔이 가득 찼어.” 루치드는 입술을 다물고 귀를 열었다. 그리고 마법사 제윅의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되었다. ======================================= [118] Mera Vera(7) 제윅이 자리에서 일어나 루치드의 주위를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음, 난 드뷔시의 북쪽에서 살았어. 꽤 추운 곳이었지. 그 곳은 산이 별로 없었어. 넓은 평야와 하늘만이 전부인 곳이었단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방향은 달라지지만 늘 그곳에는 바람이 불었지. 얼마나 심한 바람이었는지 사람들이 땅 위에 서 있기도 힘든 바람이었어. 그래서 난 줄곧 두더지처럼 땅에 굴을 파고 살았지. 뭐, 실제로 두더지를 만난 적도 있어. 꽤 맛있는 놈이었다.” 입맛을 다시며 히죽 웃는 제윅이었다. 루치드는 발끝을 들어 올렸다가 사뿐히 밟는 동작을 취하면서 장난스레 웃는 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 곳에서는 사람들이 한 곳에 살지 않았어. 늘 돌아다녔어. 왜냐고?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면, 먹을 물이 없어지거든. 우리는 늘 물을 찾아 움직였고, 한 번 찾으면 일주일 정도를 머물렀지. 그래도 그 때는 힘든 줄 몰랐어. 다들 그렇게 살았으니까.” 제윅의 목소리는 밝고 명랑해서 결코 어렵다거나 힘들다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제윅은 적절한 제스처를 취하면서 이야기를 맛있게 들려주었다. “정확히 언제라고는 말 못하겠지만, 물을 찾지 못해서 한 참을 방랑하던 때가 있었거든? 함께 다니던 어른들도 눈 밑이 검게 변할 정도였어. 나도 손톱이 벗겨질 정도로 땅을 파고 다녔지. 그런데 조금 피곤했었나봐. 내가. 파던 땅굴에서 헛잠을 잤던 거 같아. 그런데 누가 날 깨우더라고? 비몽사몽간에 일어나서 보니 처음 보는 얼굴이야. 그 사람이 날 살피더니, 따라오라고 하더라고. 그런데 난 어른들의 허락 없이 움직일 수 없던 몸이었단 말이지. 그래서 허락을 받아야 한다 했더니, 그럴 필요 없대.” 루치드는 주위를 도는 제윅을 보느라 고개를 좌우로 계속 움직여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괜히 어지러운 느낌도 들었다. “그래서 둘러보니 사람이 없네? 다들 어디 갔나 했더니, 찾을 필요 없대. 다들 가버렸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뭐 도리가 있나? 난 아직 어리고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데. 그래서 따라가겠노라 했지. 이쯤 되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알겠지?” 루치드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제윅이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냈다. “난 그 날로 방랑자에서 노예로 신분이 변천되었지. 저항하든 하지 않든, 사람들은 모두 노예상의 손에 끌려 간 상태에서 나만 굴에 남아 있었는데, 재수 없게 눈에 띈 거야. 뭐 별수 있나.” “…….” “그런데 참 세상사가 묘한 게 이런 순간인 거 같아. 마침 그 순간에 노예상들은 미친놈을 만나게 돼. 미친놈이라고 해야 되나? 뭐 지나간 일이니 상관없겠지. 그 미친놈이 길에 딱 나타나더니 잘 됐다면서 손으로 이렇게 휙휙 하더라?” 제윅이 지휘자의 그것처럼 공중에서 팔을 휘젓는 시늉을 했다. “그랬더니 바닥에서부터 검은 안개가 올라오는 거야? 신기하지 않아? 난 그 때 좀 신기하던데. 사람들이 모두 픽픽 쓰러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안 남게 됐어. 나 빼고.” “마법인가요?” 루치드가 물었다. 제윅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미친놈이 날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어. 이건 별로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별로 이야기할 것도 없고. 그냥 그 사람에게서 마법을 배웠지. 그리고 세월이 흘렀고, 난 마법사가 됐어.” 루치드는 참지 못하고 말을 끊어야 했다. “질문 있어요.” “흠, 질문도 받아야 하는 건가?” 제윅이 루치드의 등 뒤에서 양 어깨를 짚으며 물었다. “…….” “그래 해봐.” “이 이야기를 제가 들어야 하는 이유가 뭔가요?” 도대체 이 이야기의 핵심이 뭐지? 왜 이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참을성이 부족하구나.” 제윅은 루치드 앞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필요해서야.” “시간이요?” 제윅은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벌렸다. 루치드는 가끔 견학을 가서 보곤 했던 연극 무대 위의 배우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과장된 동작과 구구절절 늘어놓는 독백. “난 지금 기다리고 있어. 저 밖에서 우릴 훔쳐보는 사람이 좀 더 가까이 오기를. 그런데 안 오네. 내가 적당히 손을 써야 할까봐.”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제윅의 손에서 시작된 바람이 루치드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더니 등 뒤의 현관을 박살냈다. 나무가 쪼개지는 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입구의 나무문이 박살나서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그 조각 사이로 한 남자가 피를 흘리며 누워 있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지 헐떡이는 숨소리가 루치드의 귀에까지 들렸다. 제윅이 다가가 남자의 발목을 붙잡고 집안으로 끌어들였다. 남자가 흘린 피가 바닥에 긴 자국을 냈지만, 제윅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감옥에서부터 따라오는 것 같아서, 조금 기다렸어. 이 사람이 들어서 좋을 이야기도 아니어서 조금 꾸미기도 했지만 뭐 상관있나?” 루치드의 눈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이렇게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리라곤 상상해보지 못했다. 몸 곳곳에서 피가 꿀럭꿀럭 솟아나는데 제윅은 아무런 응급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제 진짜 이야기를 해 줄까? 난 저 북쪽에서 살고 있었어. 그런데 어느 날 소문을 들었지. 남쪽 중의 남쪽, 도망자들의 도시에 다른 마법사가 나타났다는 소문. 그런데 거기에 하나 더 신기한 이야기가 들렸지. 그 마법사가 불을 쓴다는 거야? 세상에. 요즘도 불을 쓰는 마법사가 있나? 궁금하더라고. 그래서 이 곳에 온 건데, 없네? 어떡해? 그래도 혹시 몰라서 여기서 머무르기로 마음을 먹었지. 사람 많은 곳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서 조금 고민하긴 했는데, 다시 올라가기도 귀찮고, 그래서 그냥 여기 경비대에 취직하게 된 거야.” 루치드는 죽어가는 남자에게 다가가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방금 마법사가 아무런 죄책감 없이 손을 쓰는 장면을 목격한 이상, 함부로 몸을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말이야. 세상에! 마법사를 찾는 아이가 있다는 거야? 처음에 듣고 든 생각이 뭔 줄 알아? ‘미친 거 아냐?’ 난 지금까지 미친 사람은 나한테 마법을 가르쳐 준 그 사람 밖에 본 적이 없거든? 그런데 대놓고 마법사를 찾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까 미치게 궁금한 야.” “알겠어요. 일단 제가 마법사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했고, 그래서 그게 궁금해서 절 만나러 왔다는 이야기는 알겠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죽이려고 하신 거예요?” “마법사의 일을 궁금해 하는 사람은 마땅히 치러야 할 댓가지.” 진짜 미친 사람은 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라보네는 여관으로 돌아가려다 걸음을 멈췄다. 다른 골목에서 로브를 둘러 쓴 두 사람이 감옥으로 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몸을 숨기고 살피니 한 사람은 허리에서 칼을 빼들었고, 또 한 사람은 창을 들고 서 있다가 먼저 감옥으로 달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들고 있는 무기를 보아하니, 경비대원임에 분명했다. 라보네는 이대로 돌아가야 하는지, 아니면 텔리오를 따라가야 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갔다가는 텔리오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도울 수 없을 것 같았다. 또 혼자서 여관으로 가다가는 중간에 무슨 변수가 생겨 안전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어느 쪽도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서둘러야 돼. 잘못하면 텔리오가 위험할 수 있어.’ 적어도 경비대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해줘야 할 것 같았다. 라보네는 후드를 고쳐 쓰고 감옥에 들어간 두 경비대원들이 나오기 전에 텔리오를 찾아 떠났다. 텔리오가 떠난 방향을 따라간 라보네는 복잡하게 얽힌 골목 때문에 앞서 간 사람들의 행방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어?” 어느 골목으로 들어갔을까를 고민하던 라보네는 문득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잠시 후, 라보네는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한 편, 간발의 차이로 범인과 목격자를 놓쳐버린 두 경비대원은 게울 게 없어질 때까지 게우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감옥을 빠져나왔다. “타난, 경비임무를 맡은 각 성문의 대원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호출해서 이 곳으로 출동하도록 해. 우리끼리 할 문제가 아니었나보다.” 포우가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내며 말했다. “대장님, 대장님도 일단 본부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타난의 당부에 포우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그럴 시간이 없어. 마법사가 아이를 데리고 갔어.” “예?” 자기랑 같이 토하고 있던 경비대장이 언제 그 걸 확인했단 말이지? 타난의 의심을 알았는지, 칼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다가선 경비대장이 감옥 옆에 있는 발자국을 가리켰다. “이 발자국은 범인이 감옥에서 돌아가면서 남긴 발자국이다. 그리고 그 옆에 점점이 떨어진 핏자국은 아마 아이가 남긴 거겠지.” “죽였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감옥 안에 어린 아이의 팔다리는 보이지 않았다. 즉, 범인은 다른 사람을 칼이나 다른 날카로운 것으로 해치면서도 아이는 죽이지 않았어. 그리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갔음이 분명하다. 죽였더라도 마찬가지야. 시체라고 가정해도 데리고 갔다는 것만은 분명해.” 다만, 그런 놈이 이런 증거를 왜 남겼나 하는 점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마른 땅에 피에 절은 발자국과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진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분명 일부러 남겼다고 보아야 옳다. ‘그렇다면 분명 따라오란 이야긴데, 과연 가는 것이 옳은가?’ 함정일지도 모르는데. 그렇다고 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엄연히 범인임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를 가지고 사라졌는데 어찌 쫓지 않겠는가. “우선 내가 가서 정탐을 할 테니, 넌 센베크와 경비대를 불러와.” “대장, 차라리 제가….” “아니, 내가 너보다 낫다.” “위험합니다.” “마찬가지야. 여기서 꾸물거릴 시간 없어. 서둘러.” 포우는 칼을 움켜쥐고 조심스럽게, 하지만 빠르게 핏자국을 따라갔다. 그렇게 라보네와 포우가 핏자국을 따라서 접근하던 그 시간. “처음에는 그냥 호기심이었어. 어떤 아이가 마법사를 찾는다고 소문을 내는 걸까? 어, 그런데 알고 보니 어제 봤던 그 녀석이네? 이것도 인연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지.” 제윅은 의자 하나를 끌고 와 루치드 앞에 놓았다. “그런데, 사실 널 여기 데려올 때까지만 해도 그냥 왜 찾는지 물어보려고만 했어.” “거기서 물어봐도 되는 거 아니었나요?” “안되지. 거긴 경비대 본부에서 너무 가까운 곳이야. 언제 경비대들이 들이닥칠지 몰라. 그러면 너무 귀찮아지거든.” “물어보려고만 했다는 말은 지금은 달라졌다는 건가요?” “역시 똑똑하네. 그런데 넌 나한테 너의 정체에 대한 여러 가지 힌트를 줬어.” “예?” 제윅이 손가락을 펼쳐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첫 째, 넌 네가 처한 상황에 대한 이유를 물었어. 그렇지?” “네.” 그게 어쨌다고? “둘 째, 넌 네가 굉장히 억울하다고 했어. 그렇지?” “…네.” 역시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셋 째, 넌 마법사를 찾는다고 했어.” “그랬어요.” 제윅이 씩 웃었다. 어쩐지 음산한 기색이 드리워진 웃음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접었던 손가락을 하나 펴 보였다. “먼저 첫 번째. 이곳에 어떤 아이들도 이유 따위를 묻지 않아.” “네?” “세상에. 난 네가 그 말을 했을 때 얼마나 놀랬는지 몰라.” “…그게 왜요?” 제윅은 일부러 눈을 크게 뜨고 놀랐다는 흉내를 냈다. 뭔가 얄밉다는 생각을 하려는 찰나 제윅이 웃으며 두 번째 접은 손가락을 폈다. “두 번째, 억울하다고? 세상에. 아무도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누가, 왜, 그 상황에서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어떤 사람이 그 상황에서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루치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무 당연한 일을 당연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제윅의 말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어? 당연한 일?’ 제윅은 다시 세 번째 손가락을 폈다. 모든 손가락이 펴졌다. “니가 한 말을 합치면, 무슨 뜻인 줄 알아? 넌 이 세상에 살지 않는 사람이란 소리야.” 루치드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 [119] Mera Vera(8) “물론 이해가 안 가겠지? 다행히 넌 좋은 선생을 만난 셈이야. 나와 이런 문답을 나눌 사람은 몇 없거든.” 루치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할 말만 계속해나가는 제윅이었다. “이곳에 사는 아이들은 ‘이유’ 따위를 생각하지 않아. 누가 때리면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여야 하고, 누가 밟으면 죄송하다고 사과를 해야 돼. 일을 시키면 잘 할 수 있게 뛰어다녀야 하고, 못하면 맞는 게 당연한 거야. 감히 어떤 아이들이 ‘이유’ 따위를 생각한단 말이지? 난 니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면 그런 게 가능하다는 것을 생각도 못했을 거야.” “…….” 생각지도 못한 문제였다. ‘이유’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러고 보니 자신이 ‘지구’에 오기 전, 빈촌에서 생활할 때는 딱히 ‘이유’를 생각하며 살지 않았던 것 같기는 했다. 그 당시의 루치드는 그냥 숨만 쉬고 살아가는 중이었지. 하지만 제윅의 이야기는 끝이 아니었다. 그는 한층 더 소리 높여 이야기했다. “그리고 억울하다? 이거야말로 기가 찰 일이지.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다스리는 건 엄연한 세계의 법칙이야. 왕이 귀족들을 다스리고, 귀족들이 평민들을 다스리는 건 당연한 거야. 통치자가 통치자로 존재하는 한에 있어, 다스림을 받는 쪽은 언제나 통치자의 말에 따름이 옳은 것이야. 귀족이 평민에게 일을 시켰는데 어떤 사람이 억울하다고 느낀다는 거지? 만약 억울하다고 느끼는 평민이 있다면, 미쳤거나 혹은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어야 할 거야. 게다가 억울하다는 건 잘못이 없을 때 드는 감정이야. 잘못이 없다고? 과연 그럴까?” 루치드는 울컥하는 감정이 들었다. 법칙? 합리? 제윅의 열변은 계속되었다. “경비대장이 널 감옥에 넣은 건 정당한 법집행이야. 의심스러운 사람을 감옥에 넣는 건 당연한 일이야. 감옥에서 이유 없이 맞아서 억울하다? 너의 뻣뻣한 태도를 보면 전혀 이유가 없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루치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지구’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의심만 가지고 감옥에 넣는다는 것이나, 언행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맞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마지막으로 마법사를 찾는다? 넌 이 세상에서 마법사가 어떤 위치인지 모른다는 이야기야. 이 세상에서 마법사를 입에 올리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될걸? 그리고 그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넌 포함이 안 된다는 걸 너만 모르고 있었다는 거지.” 제윅이 빈 손을 서로 맞부딪치며 짝, 소리를 냈다. 루치드는 제윅의 눈을 바라보았다.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눈이었다. “결론. 상식적인 내용임에도 상식인 줄 모르고, 합리적인 상황임에도 ‘억울’이라는 표현을 쓰고, 나이가 어린 주제에 ‘이유’따위를 거들먹거리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할까? 단언컨대, 없어. 이 세상에는.” 루치드는 괜히 항변하고 싶어졌다.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오해 아닌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다. “전, 빈촌에서 살았어요. 녹스에서 한 참 떨어진 마을에서 살았다 고요.” “그 곳에서 혼자 살았어?” 제윅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루치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요.” “어른들도 있었지?” “…예.” “어른들이 다들 귀족이라도 됐었나? 아니면 다들 왕족들이었나?” “…….” 당연히 마을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 그냥 평민들이었다. 사냥이나 하고, 나무나 줍고, 농사나 짓던 필부(匹夫)들이었다. “왕족들 혹은 귀족들이 아니고서는 그런 이야기를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게다가 귀족이나 왕족이라면 네가 했던 표현을 쓰지도 않겠지. ‘억울’이 아니라 ‘괘씸’이 될 테니까.” “…….” “그렇기 때문에 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거지.” “…….” 얼굴이 붉어지도록 열변을 토하던 제윅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씩 웃었다. “단,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하나 존재해. 그래서 최종 결론.” “…….” “넌 마법사일거야.” “!” 제윅은 루치드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말이 제대로 들어맞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제윅이 득의양양한 어조로 근거를 댔다. “빈촌이라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넌 그 곳에서 마법사를 만난 적이 있었던 것 같네. 마법을 배웠다는 이야기를 집어넣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긴 해. 마법사라면 ‘이유’를 따질 테고 ‘억울’하기도 하겠지. 힘이 있는데 힘없는 사람한테 당하면 ‘억울’하니까. 즉, 이 세상의 모든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 마법사가 바로 너의 정체라는 게 나의 결론.” 제윅이 손을 뻗어 루치드의 턱을 붙잡았다. “자, 이제 이야기해봐. 니 차례야.” 제윅인 얼굴을 가까이 댔다. “넌 마법사지?” 루치드는 쿵쾅대는 가슴을 도저히 진정시킬 수 없었다. “전….” “아, 아쉽네.” 제윅이 손을 놓고 상체를 뒤로 뉘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자세로 천장을 바라보던 제윅은 벌떡 일어났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기다리던 사람은 아니지만.” 그 말에 루치드가 고개를 돌렸다. 부서진 현관에 후드를 눌러 쓴 사람이 서 있었다. 라보네는 핏자국을 따라가다 멀리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직감적으로 그 곳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라보네는 서둘러 소리가 난 곳으로 뛰어갔다. 마침 핏자국도 소리가 난 곳을 향하고 있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가간 곳은 단층의 낡은 가정집이었다. 집 아랫단도 없이 바로 땅에 기둥을 박고 진흙을 바른 집이었다. 입구로 들어가는 문은 산산조각이 나 있어서 소리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라보네는 조심스럽게 다가가려 했지만, 입구에서부터 이어진 긴 핏줄기를 보니 심장이 빠르게 뛰고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내부를 훔쳐 볼 요량으로 고개만 빼꼼히 들이 밀 생각이었건만, 입구 근처에 놓인 시체를 보니 도저히 진정할 수 없었다. “텔리오….” 라보네가 너무 큰 충격에 얼어붙듯 서 있을 때, 거실 안의 어둠 속에서 슬며시 나타난 제윅이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네요? 아가씨?” “…….” “아, 귀족들은 ‘볼레’라고 부른다던가? 너무 오래전에 들은 거라 정확한지 모르겠네.” 라보네가 고개를 들어 제윅을 바라보았다. 라보네가 입을 열었을 때, 그 목소리는 매우 떨고 있었다. “당신이, 이렇게 한 건가요?” “그렇습니다. 볼레.” 제윅이 한 손을 가슴 앞에 대며 정중한 자세로 대답했다. 그 모습이 마치 비아냥거리는 것 같아 더욱 화가 난 라보네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죠?” “흠. 그건 말입니다. 안으로 들어오셔야 이야기를 드릴 수 있겠군요. 다른 손님도 밖에서 기다리고 계신 것 같으니 말입니다.” 제윅이 라보네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포우가 칼을 들어 제윅을 겨누고 있었다. 한 편, 거실 한 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치드는 제윅이 한 말을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얼렁뚱땅 자신의 정체가 들켰다는 건 둘째치더라도, 자신이 그간 그렇게 분노했던 사실들이 너무 어이없는 이유로 정당화된 현실에 허탈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라고?” 아이가 뭇 어른들에게 핍박과 멸시, 천대와 폭력에 시달림에도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아이들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게 당연하다고? 통치자의 논리? 자신의 상식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상식. 지구의 상식.’ 루치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것이었나.’ 이 곳은 지구가 아니었다. 지구의 상식이 이 곳에서는 상식이 아니었다. 지구에서는 불합리하다고 생각될 것들이 여기서는 합리적인 일들이었다. 루치드가 그간 지구에서 적응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공부와 노력을 해서 지금까지 별 문제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짜 적응해야 할 세상은 그곳이 아니라 이곳이었다. 그 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말.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지 마라.” 안트가 이야기 해준 말의 의미를 비로소 깨달았다. 루치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윅, 어떻게 된 거지?” 포우가 겨눈 칼을 높이 들고 물었다. “뭐긴요. 보시는 대로죠.” 제윅이 넉살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감옥의 그것도 네 짓인가?” “아시면서 물으시는 겁니까? 짓궂으시네요, 대장.” “대장이라 부르지 마라!” 포우가 노성을 터뜨렸다. “아이고, 무서워라.” 제윅이 라보네의 어깨를 짚고는 몸을 숨기는 시늉을 했다. 라보네는 당황스러운 나머지 제윅의 몸을 밀치려 했다. 그러나. “에이, 아가씨는 잠시 안에서 들어가 쉬시죠.” 라고 말하며 라보네의 몸을 돌리더니 거실로 밀어 던졌다. 라보네는 중심을 잃고 비틀대다 바닥에 철썩 주저앉았다. “대장도 들어오시죠?” 제윅이 문 옆으로 서며 마치 안으로 모신다는 의미의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나 포우가 그 말을 따를 리 없었다. 포우는 한 발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 제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그러나 눈과 칼끝으로는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제윅을 따라다녔다. “너, 마법사인가?” 포우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윅은 방긋 웃으며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네.” “감옥 안의 사람들, 경비대원들 모두 네 짓인가?” “그렇죠.” “새벽의 순찰대원도?” “그럼요.” 포우는 칼을 고쳐 잡으며 다시 물었다. “그럼 다른 한 사람은?” “다른? 아! 순찰대원? 그 사람은….” 제윅의 웃음이 짙어졌다. “대장님, 뒤요.” 흠칫 놀란 포우가 황급히 뒤로 돌았다. 눈앞으로 날카롭게 벼려진 창날이 밀려들고 있었다. “괜찮아요?” 라보네가 거실로 밀려 넘어졌을 때, 그 소리에 정신이 번뜩 든 루치드는 무의식적으로 다가가 안부를 물었다. 라보네는 그저 밀려 넘어졌을 뿐이었는지 크게 다치지 않았다. “그래. 괜찮아.” 넘어지면서 후드가 벗겨진 라보네의 얼굴을 본 루치드는 깜짝 놀랐다. 거짓 없이 말하건대, 라보네는 루치드가 이제껏 본 사람들 중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한 여자였다. 눈, 코, 입, 얼굴의 윤곽, 눈썹의 위치, 그 종합적인 균형과 비율은 루치드의 정신을 한 순간 빼앗을 정도였다. “혹시, 네가 그 아이니? 마법사를 찾는다던?” 라보네가 조심스럽게 아이의 정체를 물었다. 루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보네는 흘깃 시선을 돌려 입구에 선 제윅을 눈짓했다. “저 사람은 마법사?”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라보네는 아이를 보더니, 뭔가를 말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무릎걸음으로 거실에 쓰러져 있는 텔리오에게 다가갔다. “텔리오. 텔리오?” 죽은 줄 알았는데, 가만 보니 아직 숨줄이 붙어 있었다.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데 억지로 참았다. 여전히 제자리에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루치드를 보며 말했다. “도와주겠니?” 일단 텔리오를 입구로부터 멀리 떨어뜨려놔야 할 것 같았다. 그래봐야 저 마법사의 손아귀겠지만, 일단 거리상으로 여유가 있어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루치드도 굳이 거부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서―제윅이 하지 말라고 말한 적도 없었다―라보네를 도와 텔리오를 거실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그 이후, 라보네와 루치드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 때 밖에서는 요란한 쇳소리가 들렸다. ―챙! 포우는 늦지 않게 칼을 들어 올려 창의 진로를 빗겨나도록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어깨를 들이밀어 빈틈을 보인 습격자의 가슴을 밀어붙였다. 상대는 거친 숄더 차지(shoulder charge)에 뒷걸음질 치며 물러섰다. 그리고 다시 창을 포우를 향해 겨누었다. 거리가 떨어지고 나니, 상대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눈에 익은 사내는 아니었지만, 분명 복장은 순찰대원의 그것이었다. “한 편인가?” 그러나 말을 뱉자마자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순찰대원의 동공에는 아무런 상이 맺혀있지 않았다. 무감각한 표정과 일자로 붙은 입매를 보니, 인형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즉, 이지를 잃었다는 말. “재미있죠? 요즘 새로 익히는 마법이에요.” 포우의 등 뒤에서 흥얼거리는 목소리로 정체를 이야기해주는 제윅이었다. 그러나 포우는 감히 등을 돌릴 수 없었다. 한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창날이 날카롭게 자신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 [120] Mera Vera(9) “대장님, 사실 대장님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시선은 눈앞의 창에 둔 채로, 포우는 대답했다. 보이진 않지만, 목소리만으로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짐작이 돼서 오히려 더 열이 받았다. “역시 함정이었군.”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요, 혹시 불의 마법사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나요?” 순간, 6년 전 보았던 그 광경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불의 마법사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없다. 하지만 순순히 대답해 줄 수는 없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햇빛에 번쩍이는 창날이 시야를 어지럽혔지만, 결코 눈을 깜빡거리거나 돌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카넬에 대해서는 아시나요?” 뜻밖의 말. 포우는 어금니를 꽉 깨물어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도록 했다. 하마터면 들고 있던 칼을 내릴 뻔 했으나 억지로 버텨냈다. 오히려 제윅의 말에 반응한 것은 거실에 있던 라보네였다. ‘아카넬’이란 말에 절로 고개가 바깥을 향했다. 그 때, 루치드는 텔리오가 입고 있던 로브를 찢었다. 이미 갈갈이 찢겨져 있던 상황이라 두터운 로브라도 뜯어내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찢어낸 로브를 돌돌 만 뒤, 텔리오의 가슴에서 나오는 출혈을 막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다른 곳에 난 상처까지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기에 텔리오는 점점 죽음을 향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라보네가 다시 텔리오를 바라보았다. 이미 많은 피를 흘린 까닭인지 얼굴이 창백했다. 루치드가 응급조치를 취한 모양새를 보더니 물었다.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일단 피가 나오는 것을 줄일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이제 겨우 11살. 평화로운 지구에서 살았던 루치드가 이런 상처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 리가 없었다. 다만 이렇게라도 막지 않으면 피가 더 많이 빠져나올 것 같다는 생각에 조치를 취했을 뿐이었다. 라보네는 루치드를 흉내 내어 찢어진 로브를 아랫배의 자상 위에 덮고 눌렀다. 금세 피로 물드는 로브였다. 그 틈에 조심스럽게 물음을 던지는 아가씨. “너, 왜 마법사를 찾았던 거지? 너도 아카넬을 찾고 있었던 거야?” 루치드는 고개를 들었다가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라보네를 보고 있으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루치드 역시 바닥에 드러누운 텔리오와 같은 처지에 놓일 수 있는, 그런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라보네의 얼굴을 보게 되면, 오직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지배하던 위기, 경계가 모두 허물어지고 오직 단 하나의 생각, 계속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만 드는 것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루치드는 이후부터 라보네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아카넬이 뭐예요?” “뭔지 몰라? 그럼 왜 마법사를 찾고 다녔던 거지?” “그건….” 루치드는 말해도 되나 고민을 했다. 지금 이 사태가 벌어진 이유는 단순하게 보면, 자신이 마법사를 찾는다는 말 한마디 때문에 벌어진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아카넬이 뭔지를 먼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라보네 역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아카넬에 대한 것은 신화나 전설 속의 이야기와 같은 것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아카넬이 실존하느냐는 상당히 현실적인 물음으로 다가왔다. 당장 저 마법사로 추정되는 인물이 ‘아카넬’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되도록 아카넬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퍼지는 것은 주의해야 했다. 그것은 다른 어떤 보물보다 소중하고 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보물보다 소중한 것이 텔리오인데, 그의 생사가 불확실한 이 순간에 자신의 욕심만 쫓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때문에 라보네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자기 자신이 미워지려 했다. “내가 얘기해 줄까?” 라보네는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흠칫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윅이 의자를 질질 끌며 다가와 라보네와 루치드의 가운데 즈음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루치드는 왜 갑자기 그가 대화에 끼어들려는 건지 궁금했다.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자신의 정체(?)에 대해 추론하는 것을 보면 마냥 이유없이 행동하는 사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이는 루치드였다. “벨로. 후드를 벗으니 미모가 살아나네요?” 경황이 없어 후드가 벗겨진 줄도 몰랐던 라보네가 서둘러 후드를 눌러썼다. 제윅은 루치드를 바라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용케도 버티는구나. 역시 마법사라는 건가?” “마법사?” 라보네가 놀란 얼굴로 루치드를 바라보았으나, 루치드는 여전히 텔리오의 출혈을 잡기 위해 애를 쓸 뿐이었다. “몰랐어요? 벨로? 이 아이 마법사예요.” “…이렇게 어린 마법사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어.”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해서, 있을 수 없다는 건 아니죠. 아카넬을 들어본 적 없다고 해서, 있을 수 없다는 건 아니듯이? 흐흐.” 전혀 다른 사정이잖아요, 라고 항변할 수도 없었다. 말 그대로 마법사에 대한 일은 일반인들이 알기 어려운 면이 많았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알려진 마법사들은 대부분 나이가 든 사람들이거나, 옆에서 깐족거리는 마법사 같은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머리가 영글지 않은 아이가 마법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생각이 다른 곳에 미쳤다. 하지만 지금 입 밖에 내놓을 수는 없는 일.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제윅은 루치드를 향해 친절한 선생 노릇을 하고 있었다. “아카넬이 뭐냐고 물었지? 아카넬은 붉은 마법의 씨앗이라고도 불리는데, 사실 어떤 식물의 열매야. 그 열매를 먹으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 알려진, 전설 속 상상의 열매.” 루치드가 반색을 하며 물었다. “죽은 사람을 살린다고요?” “그래. 아카넬은 불의 힘을 가지고 있어. 뜨거운 불의 힘은 생명의 힘과 맞닿아있어. 차갑게 식은 시체라도 이 열매를 먹으면 순식간에 생명의 열기를 얻어 살아나게 된다고 해.” 루치드는 잠깐 그 열매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희망은 잠시, 루치드는 이내 그게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곳에서 열매를 얻어 봐야, 지구로 가지고 갈 방법이 없었다.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다. “아까 내가 불의 마법사를 찾으러 왔다고 했었지? 사실은 불의 마법사에 대한 소문에 앞서 들은 게 바로 아카넬이었어.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녹스에서 부오노 공국으로 도망간 사람 중 한 사람이 우연히 아카넬을 얻었다고 하더군. 그리고 그 열매로 죽은 사람을 살렸는데, 마침 그 사람이 돈이 좀 많은 귀족이었다는 거지. 귀족가에서 쉬쉬했지만 사람 입이라는 게 그리 쉽게 통제될 수 없는 법이거든. 어떻게든 소문은 나기 마련이고 결국 개나 소나 알게 되는 비밀이 되고 말았지. 볼레도 그 소문 듣고 온 것일 테고.” “그래서 아카넬이 어디에 있는 거죠?” 라보네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벨로. 이야기 좀 더 들어보시겠어요? 아카넬을 가지고 왔다는 녹스 출신의 이야기에 따르면, 녹스 앞의 평야에서 얻었다더군요. 하지만 보시다시피, 녹스 평야가 얼마나 넓어요.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건 바로 사람들의 욕심이에요. 사람들이 대놓고 찾지를 못하거든요. 왜? 만약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되면 다들 아카넬을 찾기 위해 평야에 뛰어들 테고 그러면 자기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손에 들어갈게 뻔하니까. 그래서 다들 모른 척 하고 조용히 탐색을 하는 거죠. 마치 아가씨가 그러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라보네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뿐이었다. 텔리오와 아카넬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아카넬을 쉽게 못 찾는다는 거죠? 아무리 넓다고 해도 그렇게 유명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 않나요?” 루치드의 의문은 타당한 것이다. 제 아무리 넓은 평야라 해도, 긴 시간을 들여 찾으려 한다면 못 찾을 것도 없다. 제윅이 대견하다는 듯 루치드의 머리를 툭툭 쳤다. 루치드는 고개를 숙여 피하려했지만 제윅의 손이 더 빨랐다. “아카넬이 맺히는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는 게 첫 번째 이유고. 두 번째는 아카넬이 맺히는 시기가 정해져 있다는 것. 세 번째는 아카넬이 보이는 시간대가 정해져 있다는 것. 그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찾지 못하는 거지.” 라보네는 중요한 단서를 얻었다. 특히 아카넬이 보이는 시간대가 있다는 정보는 처음 들었다. “언제 볼 수 있다는 거죠?” “벨로. 너무 티내지 말아요. 당신이 얼마나 절실히 아카넬을 찾는지는 알고 있으니까요. 아마도 가족 중 한 분이 죽어가고 있는 거겠죠?” 라보네가 멈칫했다. “벨로, 당신은 아마도 ‘볼레로’일 거예요.” “…….” 루치드는 웬 말장난인가 싶었지만, 라보네의 기색을 보니 그리 단순한 의미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라보네는 들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얼굴로 제윅을 바라보았다. 제윅 역시 싱글벙글 웃으면서 라보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 실종되었다던 순찰대원이 어떻게 이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이렇게 잘 싸우는 인간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의심스러웠다.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틈을 보이면 금방이라도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올 기세였다. 조금 전 제윅이 집 안으로 들어갔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바로 앞에 선 상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봐,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우선은 대화를 통해 상대가 왜 이러는지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말이 통할지 안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시도는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 그러나 여전히 빛을 잃은 눈동자였다.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눈빛인데, 그럼에도 창을 든 자세나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기세는 방심을 할 수 없도록 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 뒤에는 어떤 꿍꿍이를 가졌는지 알 수 없는 마법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렇게 시간을 허비해야 한다는 게 답답했다. “자네 이름이 뭔가?” 간단한 질문을 통해 대화를 시도해보려 하지만 무소용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타난과 센베크가 경비대를 이끌고 오는 것 뿐이었다. ‘제발 빨리 와라.’ 겨울임에도 턱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은 식을 줄 몰랐다. **** “그게 뭔가요?” 실례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어떤 정보든 들어야 할 거 같다는 생각에 루치드는 물음을 던졌다. “볼레로(bolero)는 일종의 저주야. 볼레로의 저주에서 무사히 통과한 사람은 신의 축복을 얻게 되고, 통과하지 못하면 신의 저주를 받아 죽음에 이르지.” “신의 축복이요?” “이 아가씨는 축복을 받은 케이스겠지? 그녀의 외모는 인간의 것이라고 볼 수 없으니까. 말하자면 신의 은총이 깃든 외모지. 메라 베라(Mera Vera)! 신이 사랑한 아름다운 여인이여!” “은총 따위가 아니에요!” 라보네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제윅의 말을 부정했다. 그러나 마법사는 손사래를 치며 능글스러운 태도로 일관했다. “당신이 뭐라고 하든, 그건 ‘은총’이에요. 물론, 인간이 받아들이기 힘든 은총은 오히려 저주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죠?” 제윅은 루치드를 보며 설명을 덧붙였다. “이 아가씨의 얼굴을 맨 정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단다. 아마 너도 느꼈으리라 보는데.” 물론 루치드도 느꼈고, 그래서 의식적으로 피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야.” “…그게 마법사라는 거군요.” “그렇지. 그래서 마법사들이 위대한 존재라는 거지. 뭇 인간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신의 은총, 신의 저주도 마법사들은 능히 이겨낼 수 있으니까.” 루치드는 라보네를 흘깃 보았다. 제윅의 말대로라면, 눈앞의 여자는 저주를 벗어나 신의 은총을 받은 케이스. 반대로 신의 저주를 벗어나지 못해서 신의 저주를 받아 죽어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겠지. 그게 바로 가족이란 것이고. 그 가족을 위해 ‘아카넬’이 필요해서 이 곳에 왔다는 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루치드가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볼레로는 유전인가요?” “유전이라. 그렇군.” “…….” “볼레로는 집안 내에 대대로 전해지는 저주니까. 대륙에 ‘볼레로’는 단 한 가문. ‘까타라(κατάρα)’ 가문이지.” 라보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제윅이 고개를 돌려 바깥을 바라보았다. “이제 왔으려나?” **** 바람이 바뀌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바람의 냄새가 바뀌었다. 싸늘하기만 하던 겨울바람에 묘한 땀 냄새가 섞이기 시작했다. ‘왔구나.’ 내심 마음 졸이던 포우는 겨우 안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바람이 바뀌기가 무섭게 여러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희미한 메아리처럼 골목을 파고 들어왔다. 포우는 다리를 조금 더 넓게 벌리고 자세를 취했다. 곧 기회가 올 것이다. 준비를 해야 했다. “대장님!” 센베크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고, 뒤이어 타난과 이하 경비대원들이 무기를 챙겨들고 달려왔다. 이제 불리한 형세는 벗어났다. 그럼에도 순찰대원의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어떻게 이렇게 있을 수 있는지 궁금했지만, 중요한 것은 순찰대원의 교본 같은 자세가 아니라 이 사태를 빠르게 정리하고 마법사를 잡는 것이다. 이윽고 달려온 센베크가 창을 뒤로 한껏 물렸다. 그리고 달려드는 힘과 함께 힘껏 내질렀다. 그리고 그제야 순찰대원의 자세가 번개같이 바뀌면서 다가오는 창을 비껴냈다. 그리고 틈이 생겼다. “하압!” 너무 오래 자세를 굳히고 있어서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도 있었지만, 다행히 수년간 단련해 온 몸뚱이는 배신하지 않았다. 바람을 가르고 공간을 건너 내지른 칼이 순찰대원의 왼쪽 어깨를 가르고 지나갔다. 본래는 가슴을 노렸지만, 센베크의 공격을 막는 순간에도 방심을 하지 않았던 것인지 재빨리 어깨를 틀었던 순찰 대원이었다. 결국 어깨를 내준 대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센베크의 뒤를 이어 타난이 달려와 내지른 창에 허벅지를 찔린 순찰대원은 곧 여러 대원들의 합공에 무릎을 꿇고 무장해제가 되었다. “대장님, 괜찮으십니까?” 그러나 여유롭게 안부를 물을 시간 따위 없었다. 포우는 곧 몸을 돌려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뒤를 타난을 비롯하여, 여러 대원들이 따라갔다. “제윅! 순순히 항복하라!” 포우가 칼을 겨누며 소리쳤다. ======================================= [121] Mera Vera(10) “대장, 아까랑은 전혀 다르시네요?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어요. 역시 사람은 무리 지을 때 강한 법이에요. 그쵸?” 앉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어깨를 으쓱거리는 제윅이었다. 포우는 눈빛만큼은 그 어떤 야수, 몬스터보다 사나웠고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 눈빛만큼이나 사납게 길들여진 칼날이 제윅의 가슴을 제대로 겨냥하고 있었다. “얌전히 항복해. 그렇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가만 두지 않으면?” 능글거리며 비아냥대는 제윅의 말에 센베크가 얼굴이 붉어졌다. “이 놈이!” “센베크! 가만히 있어. 상대는 마법사다.” 센베크는 몸을 들썩거리며 당장이라도 달려가려 했지만 포우는 그럴 수 없었다. 말로는 가만 두지 않겠다고 했지만, 자기들 역시도 쉽게 그를 잡을 것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단 한사람이라도 상대는 마법사. 이미 감옥 안에서 보았듯이, 그의 마법은 무력적으로는 자신들 개개인을 능가하리라. 그러니 계획적으로 함께 움직이지 않으면, 각개격파를 당할 수도 있었다. “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이야! 이대로 나가더라도 넌 대륙의 공적이 될 것이다.” “흠. 이제 저랑 대화를 하자는 건가요? 방금 전까지는 죽이지 못해 안달이라도 난 것처럼 구시더니?” “저 놈이 어디 입방정을 떨고 지랄이야!” 이번에도 센베크가 분을 참지 못하는데, 타난이 그의 어깨를 짚으며 진정시켰다. “대화를 원하시니 해드려야죠. 또 여기 저의 제자도 있고.” “제자?” 순간 모두의 시선이 제윅의 뒤에 있는 아이에게 옮겨갔다. 루치드는 무슨 말인지 싶어 의아해하다가 시선을 느끼곤 뒤늦게 말의 진의를 깨달았다. “제가 왜 아저씨 제자예요?” 황급히 이야기해보지만, 어쩐지 변명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윅은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너한테 가르침을 내렸으니, 넌 내 제자지. 안 그래?” 이 무슨 궤변인가, 오히려 할 말을 잃은 루치드였다. “역시 그랬군.” 포우는 오해를 했다. 하지만 루치드는 애써 변명하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말한다 해도, 귀담아 들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고, 이 세상이 자신과도 같은 아이들에게 얼마나 가혹한지를 들었기 때문이다. “자, 그럼 대화를 계속 해볼까요? 대장님? 어, 뭐라고 그랬더라?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느냐고 물으셨죠? 이런 짓이 어떤 짓인지 모호하긴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에 대해서는 밝혀드려야겠죠?” 포우가 칼날을 치켜세웠다. 옆으로 센베크와 타난이 슬며시 서서 창날을 앞세웠다. 그리고 그 뒤로도 한 사람씩 거실로 들어왔다. 거실 가운데 제윅과 라보네, 루치드가 병사들에게 둘러싸이는 형국이 되었다. 그렇지만 제윅은 딱히 그런 움직임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 할 말만 할 뿐이었다. “대장님이 워낙 너그러우시니 이렇게 다들 제 이야기를 경청하실 수 있도록 도우시네요. 자,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보도록 하죠.” 제윅은 왼 발을 반보 쯤 뒤로 물렸다. 창들이 일제히 들리며 제윅을 가리켰다. 그러나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른손을 가슴에 살짝 대고 허리를 살짝 굽히며 대장을 향해 인사를 했다. 그리고 검지를 치켜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6년 전 녹스 성은 위기에 처했었습니다. 아마 여기 계신 분들은 대부분 다 아실 겁니다. 그리고 그 위기는 평야에 나타난 ‘기적’ 때문에 넘길 수 있었습니다. 스크로파가 달려들던 그 곳에 갑자기 나타난 불의 벽! 사람들은 기적이라며, 하늘이 도운 것이라고 했다죠? 하지만, 그것은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저한테는요? 왜냐하면 그 불의 벽은 하늘의 기적이 아닌 사람의 기적이었기 때문이죠. 사람이 기적을 일으키다. 어쩐지 감이 오시나요? 예. 그것은 마법사의 힘이었습니다.” 몇 몇 경비대원들을 제외하고는 ‘마법사’의 존재에 대해 몰랐던 터라, 당황하는 기색들이 역력했다. 센베크가 일부러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이냐!” “엉뚱하다니요? 대장님도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시는데 그러시면 안 되죠.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마법사는 그 이후 녹스에서 사라졌던 걸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법사는 그냥 사라지지 않았어요. 그가 일으킨 기적의 힘을 이 곳 녹스 평야에 남기고 갔어요.” 진심으로 포우는 병사들을 물러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했다.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동요가 심한데, 저 이야기가 좋지 않은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때 통제가 되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포우의 결단은 늦었고,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녹스 평야에 남긴 것, 그것은 생명의 힘이 담긴 ‘아카넬’. 붉은 마법의 씨앗이라는 열매죠. 먹으면 죽은 사람도 살릴 정도로 생명의 힘을 가득 담은 열매라지요. 그것이 녹스 평야에서 불의 힘과 몬스터의 생명을 담보로 피어났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것을 탐내지 않을 수 있을까요?” 루치드는 지난 녹스 때의 일이 생각이 났다. 모든 것을 태울 듯이 타오르던 염화(炎火). 그 백광(白光)의 열기(熱氣)가 평야를 침식(侵蝕)하던 순간. 그리고 무슬라. “마법사로서도 궁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전설 속에나 있을 줄 알았던 열매가 실존한다니. 그래서 찾으러 왔지요. 찾으러 왔는데 쉽게 안 찾아지더라고요. 그래서 여유를 가지고 하자는 생각에 경비대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경비대에 있다 보면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의 출입현황도 확인할 수 있으니 좋고, 경비대로서 야외 순찰 활동을 할 수 있으니 또 좋고, 돈도 벌 수 있으니 또 좋은 게 아니겠습니까? 대장님께 너무 고마운 것은, 덕분에 지난 3년간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땅을 파고들 것같이 깊게 디딘 앞발과 하늘을 향해 충천(衝天)하는 기름진 송곳니. 주먹보다 큰 눈으로 광기를 불태우며, 그을린 가죽에 남아있던 불씨를 털어내던 몸짓. 비명(悲鳴)과 기성(奇聲)이 섞인 평야에 홀로 마주한 적대자(敵對者). 루치드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렇게 모인 이유는 다름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그간의 수고를 격려함과 동시에 떠나기 전 선물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떠난다고?” 포우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럼요. 여기서 할 일은 끝났거든요.” “설마, 아카넬을 찾은 것인가요?” 라보네가 퍼뜩 고개를 들며 물었다. 찾았다? 하지만 제윅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카넬은 찾지 못했습니다.” “설마…다른 사람이 찾았다는 건가요?” “아니요. 아카넬은 없었습니다.” “뭐라고? 그럴 리가 없어요!” 포우를 비롯한 경비대들은 가만히 있는데, 오히려 뒤에 선 라보네가 벌떡 일어나서 제윅의 말을 부정했다. “벨로, 죄송하지만 없어요. 그 이유는 눈앞의 대장도 알고 있어요. 그렇죠? 무려 4년을, 평야를 돌아다니며 아카넬을 찾아다녔던 분이시니 말이죠.” 몇몇 대원들이 헛바람을 삼키는 소리를 냈다. 제윅은 뒷짐을 지고 제자리에서 원을 그리며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사실 그동안 녹스 성의 움직임을 줄곧 관찰해왔어요. 그리고 이상한 점을 하나씩 발견했죠. 하나. 녹스 성에는 아카넬에 대한 소문이 없다. 뜻밖이었죠. 왜냐고요? 당장 부오노 공국으로 가보세요. 어지간히 귀 닫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아카넬에 대한 소문을 듣지 않은 사람이 없어요. 다만 몇몇 정보들이 제한적으로 퍼져 있을 뿐이지요. 아카넬이 나타나서 사용되었고, 기적을 일으켰다는 소문은 있는데 이게 어디서 발견된 것인지,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정보가 전해지지 않았어요. 뭐, 적당한 정보통제 정도는 이해해야죠.” 라보네는 그 말에 수긍할 수 있었다. 다만 유능한 아버지는 거기에 하나의 정보를 더 얻어냈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었고, 그 때문에 자신은 녹스로 오게 된 것이었다. “둘째. 경비대의 외부순찰이 몇 년 전부터 잦아졌다. 이건 뭐 여기 계신 분들이 모두 아는 사실이고.” 다시 몇 사람이 동요를 보였다. 포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셋째. 대장님이 알려주셨죠. 아카넬을 알고 있다고.” 모두의 눈이 커졌다. 녹스 성의 누구도 모른다고 했던 아카넬을 포우는 알고 있다? “제가 여러분들이 오시기 전에 대장님과 긴밀한 대화를 나눴어요. 제가 그랬어요. 불의 마법사를 아냐고. 그랬더니 대뜸 모른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또 여쭸죠. 아카넬을 아냐고. 그랬더니 대답을 하시지 않더군요.” 제자리를 돌며 말을 잇던 제윅이 멈춰 섰다. 그리고 포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때로는 말보다 몸이 더 솔직한 법이기도 하죠. 당신은 그 순간에 몸으로 대답하셨어요. 잔뜩 긴장하며 목에 힘이 들어가셨죠. 어깨에도 과도한 힘이 집중되는 바람에 자세가 흐트러질 뻔도 하셨으니까요. 왜 긴장하셨을까요? 모른다면 그런 반응이 나올까요?” 루치드는 솔직히 감탄했다. 창날에 둘러싸인 미치광이는 전혀 위축된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경비대장을 압박했다. 게다가 경비대장의 몸의 변화까지 세밀하게 관찰해 내는 통찰력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의미 없는 대화라고 생각했던 조금 전의 상황들은, 어쩌면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결론이 나오죠. 결론은….” “센베크!” 포우가 소리쳤다. “쳐라!” 센베크가 화답하듯 소리쳤다. “와!” 동시다발적으로 창날이 제윅을 향해 밀려들었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좌우 사방을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던 창의 파도에 피할 곳은 없어보였다. 그 순간. 제윅은 입 꼬리를 말아 올렸고. 제윅의 몸을 중심으로 회오리가 생성되었다. 그 바람이 어찌나 거칠고 강했던지 밀려들던 창들이 모두 비껴나가게 만들 정도였다. 밀고 들어오던 창수(槍手)들은 중심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했다. 그 때 센베크는 커다란 함성을 내지르며 창수들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창을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내려그었다. 바람마저 가를 정도로 강한 거력이 담긴 공격이었다. 제윅은 파리를 쫓는 것 같은 동작으로 가볍게 팔을 저었다. 내려오던 창대의 가운데가 뚝 부러졌다. 그리고 창날은 제윅의 옆으로 튕겨나가더니 한 병사의 얼굴을 뚫었다. 그러나 공격은 센베크만 하지 않았다. 포우의 오른편에 섰던 타난 역시 창을 찌르기 동작으로 밀어 넣었다. 오직 한 점만을 뚫겠다는 의지가 담긴 공격. “이얍!” 기합과 함께 창은 회오리를 뚫었다. 타난은 회오리에 진로가 틀리지 않도록 강하게 창대를 부여잡고 밀어붙였다. 그 순간. “엇!” 타난의 발밑으로 구멍이 생겼다. 부지불식간에 생겨난 구멍으로 타난이 떨어지자, 자연 공격도 무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포우도 곁에 있다가 땅굴 가장자리에 위치한 오른발이 미끄러질 뻔 했다. 그러나 기민하게 다리를 뺀 포우는 칼을 비스듬히 늘어뜨린 채로 달려가 제윅 앞에서 위로 그어올렸다. 만만치 않은 힘이 깃들었다고 생각한 제윅은 몸을 기울여서 칼을 피했다. 하지만 그 속도가 생각보다 빨랐는지, 칼날은 제윅의 오른쪽 가슴을 갈랐다. 하지만 얕았다. 칼은 옷자락만 베어내고 벗어났다. 제윅이 씩 웃었다. **** 창수들이 접근을 하던 순간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웅크렸던 라보네와 루치드는 회오리의 피해는 입지 않았다. 아마도 제윅이 적절히 통제했던 까닭이겠지만, 그것을 고마워하지는 않았다. “너 마법사라며?” 라보네가 루치드에게 물었다. 그 물음의 의미가 왜 제윅에게 저항하지 않느냐는 뜻임을 알아챈 루치드는 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대답했다. “마법을 쓰지 못해요.” 마법사가 마법을 쓰지 못한다고? 라보네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으로 물었지만 루치드는 대답할 수 없었다. 사실 그랬다. 루치드는 지구에 있을 때부터 마법을 쓸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피구라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떠오르던 피구라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불, 빛, 마찰에 관련된 모든 마법들이 마치 물에 젖은 수채화처럼 흐릿하게만 떠오를 뿐이었다. 그 이미지도 예전 마법을 사용할 당시의 기억에서 투영된 이미지였을 뿐, 라티오(원형 세계)의 포르마(원형)가 아니었다. 포르마가 인식되지 않으니 자연 마법이 구현되지 않았다. ‘지구’의 과학문명과 세계의 법칙에 잠식(蠶食)되기 시작하면서 생긴 변화라고 추측할 뿐이지만, 그 때문에 오랜 시간을 고민했다. 빛을 마법으로 재현해냈던 그 때처럼, 계속 공부를 하면 다시 마법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고 희망을 품었지만 갈수록 더 멀어지기만 했다. 그래서 마법사를 찾으려는 생각을 가진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설마 그 의도가 이런 결과를 낳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럼 저 마법사를 막을 방법이 없는 거구나.” 라보네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루치드는 고개만 살짝 들어 제윅을 바라보았다. 마법을 사용해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제윅이 경비대를 상대로 장난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 [122] 오염(1) 순식간에 벌어진 제윅과 경비대원간의 첫 번째 충돌은 제윅의 승리로 돌아갔다. 제윅은 바람을 이용하여 경비대원들의 총공세를 일순간에 무너뜨렸고, 센베크와 타난, 포우의 합동 공격 역시도 적절한 마법으로 공격을 무용(無用)되게 만들었다. 센베크의 공격은 창날이 부서지고 뒤이어 날아든 바람에 뒤로 밀려났다. 타난은 구덩이에 빠지면서 전장 이탈. 틈을 노리고 달려든 포우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뒤, 되레 빈틈이 생긴 포우에게 제윅의 마법이 시전 되었다. “윽!” 포우는 허겁지겁 뒤로 물러섰지만, 옆구리에 긴 자상을 입었다. 움직임이 조금만 더 느렸다면 허리가 완전히 두 동강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굳을 정도였다. 그 직후, 몸을 추스른 경비대원들이나 포우를 비롯한 센베크와 타난 등은 함부로 공격에 나서지 못했다. 포우는 너무 섣불리 행동했다는 자책과 함께 어떻게 제압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전투의 초기단계에서는 누구든 공포심을 느낀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공포라는 정서적 반응이 삶에 대한 적극성으로 바뀌기도 하고, 전투에 임한 병사들의 사기 진작에도 도움이 된다. 공포심이 극에 달하는 순간은 전투가 벌어지기 바로 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막연한 두려움과 불확실한 결과를 그리며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또 적을 앞둔 병사들의 공포심은 피로를 수반한다. 즉 적과의 대치상황이 길어질수록 병사들의 피로도가 올라가기 때문에 지휘자는 적절한 순간, 다시 말해서 병사들의 공포심이 적당히 올라갔을 때, 동시에 피로도가 많이 쌓이기 전의 순간을 포착하여 공격을 개시해야 한다. 공격의 시작 타이밍을 아는 것이 지휘자의 역량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공격이 실패했을 때, 병사들의 피로도는 보다 빠르게 오를 뿐만 아니라, 공포심은 불안과 절망으로 변질된다. 불명확하게 보였던 결과와 두려움은 명확해지고, 좌절감이 커진다. 이를 추스르고 다시 반격을 시도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또한 지휘자의 역량일 것이다. “…….” 하지만 포우는 반격을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애초에 상대가 마법사라는 점에서 병사들의 사기는 반쯤 꺾인 상태였다. 다행히 센베크의 함성이 병사들의 기를 북돋아 주는 역할을 한 것 같지만, 이제는 어렵다. 무의미한 희생만 늘릴 가능성이 높았다. 센베크의 창대는 여전히 상대를 향하지만, 무뎌진 것은 사실이다. 타난 역시도 구덩이에 빠지면서 발이라도 접질렸던 것인지 자세가 불안했다. 무엇보다 상대가 너무 가볍게 공격을 받아 넘겼다는 사실이었다. 너무 강한 상대였다. “왜? 더 안 하세요? 안 하실 거면 제가 계속 말을 해도 되나요?” 여전히 여유만만인 제윅이었다. “이제 여러분들에게 줄 선물인데, 대장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드릴 선물을 독차지하고 싶으셨나 봐요.” 웃음을 흘리며 말을 잇는 마법사는 주위의 회오리를 가라앉혔다. 순식간에 바람이 가라앉으며 실내에 떠돌던 먼지들과 작은 부스러기들도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결론을 말씀드릴 차례였죠?” 포우는 눈을 번뜩이면서도 감히 발을 떼지 못했다. 발끝에 과도한 힘이 몰려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카넬은 말이죠. 성주님이 모두 가져가셨어요.” 회오리 때문에 웅크리고 있던 라보네가 벌떡 일어났다. “정말인가요?” “예. 사실입니다. 벨로. 그리고 성주님께 그 아카넬을 모두 따다 드린 분이 저기 계신 포우님이시죠.” 모두의 시선이 포우에게 몰렸다. 심지어는 타난과 센베크 마저도 눈을 힐끔거리며 바라보았다. “아카넬은 특정한 계절,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만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저도 정확히는 몰랐어요. 그런데 경비 순찰 일지를 보다보니 재미있는 게 나오더군요. 4년 전부터 매해 겨울 초입, 특정한 날짜에 북문을 빠져나가시는 분이 계시더란 거죠. 평소에는 안 나가시는데 딱 그 날짜에만 나가세요. 그분이. 일 년 중 해당 날짜에만 동일한 행동을 반복한다면 의심해볼만 하지 않겠어요?” 그분이 누구인지는 묻지 않아도 될 내용이었다. “또 하나. 아까 녹스성에 아카넬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다고 했었죠? 그런데 일반 사람들이 모른다고 해도, 녹스성의 성주까지 모른다? 이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녹스성의 성주는 정기적으로 공국과 연락을 취하면서 보고를 하고 지시를 받는 분이시죠. 녹스 성의 그 누구보다 외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시는 분인데, 그런 분이 아카넬에 대한 소문을 모른다? 개가 웃을 일이네요.” 포우는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당장 달려가서 저 입으로 칼날을 쑤셔 넣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다. “자, 그래서 제 결론이 그런 겁니다. 경비대장 포우가 녹스(Nox)성주의 지시를 받아 아카넬을 찾던 중, 4년 전부터 아카넬을 포집하기 시작했고, 매년마다 아카넬을 가져다가 성주에게 바쳤다.” 라보네는 손을 떨며 말했다. “왜?” “왜라뇨? 아카넬은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소문이 난 열매예요. 그 귀하디귀한 것을 여기 계신 분들과 나눌 수는 없지 않겠어요?” 라보네는 바닥에 누운 텔리오를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텔리오는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창백한 시체가 된 텔리오 곁에 루치드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 진짜 선물! 아카넬은 매년 채집이 가능하다는 거, 짐작하시죠? 겨울초입이라고 했습니다. 특정한 날짜라고 말씀드렸죠. 그게 언제일까요?” 장난스럽게 입방정을 떠는 제윅에게 시선을 돌리는 사람은 없었다. 모든 이의 시선은 일제히 포우에게 향했다. 포우는 부들부들 떨며 제윅의 웃음을 노려보았다. “전 시간도 몰라요. 장소도 몰라요. 하지만 날짜가 오늘이라는 것만은 알죠. 바깥을 보니 이제 겨우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것 같네요. 자 시간은 얼마나 남았는지 몰라요. 하지만 오늘이라면 아카넬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 게다가 지금까지 경비대장님께서 친히 외부순찰을 나가신 시간은 저녁시간대라는 거.” 제윅의 말이 끝난 뒤, 거실에는 묘한 침묵만이 자리했다. “언제예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절실한 것은 역시 라보네였다. 자기 동생을 살려야 했고, 텔리오를 살려야 했다. “언제, 어디로 가야 하는 거예요? 말씀해 주세요! 제발!” 포우의 입술이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자신이 입을 열게 되면, 성주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근위병들이 찾아와 쑥대밭이 될 것이다. 그의 가족, 친척들이 모두 그 날로 생을 다하게 될 것이다. “제윅, 궁금한 게 있어요.” 루치드가 입을 열었다. **** 애초에 루치드는 아카넬에 대해 궁금하지 않았다. 아니 관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신기한 열매가 있다는 사실에 관심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현재의 루치드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문제는 마법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 마법을 쓰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가능해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에 마법사를 만나면 꼭 마법에 대한 지식을 얻어서 도움을 얻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상황이었다. 물론 이런 미치광이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뭐가 궁금하지?” 제윅이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되물었다. “마법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나요?” 제윅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뒤로 천천히 돌렸다. “뭐라고?” “마법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냐고요.” “…….” 제윅은 대답 없이 루치드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제윅이 터뜨린 광소(狂笑)에 모두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제윅의 웃음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푸하하, 이런 미친! 크크크.” 제윅은 억지로 웃음을 참아내려 애쓰면서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너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아니면 마법을 도대체 어떻게 배운 것이야?” “…무슨 소리죠?” “이야. 이거 참.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이런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이 들어서 좋을 게 없단 말이야.” 제윅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당장 북쪽평야로 가지 않으면 아카넬을 얻을 기회는 없어질 겁니다.” 모두의 얼굴이 변했다. 일부의 얼굴에선 분노가, 일부의 얼굴에서 탐욕이, 일부의 얼굴에서 의심이. “포우. 왜 이야기를 안 해요? 좋은 건 같이 나눠야죠?” 제윅이 슬쩍 떠보지만 포우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장!” 그런데 한 경비대원이 소리쳤다.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요? 병도 고칠 수 있다는 겁니까? 아시잖아요? 저희 어머니가 몇 해 전부터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계시다는 걸!” 그게 시작이었다. “제 딸, 레미가 지금 병 때문에 힘들어 합니다. 제발 대장! 알려주세요.” “대장. 저도 저희 아들이 아파요. 저희 아들은 지금 몇 해 째, 집 밖으로 나가질 못하고 있단 말입니다.” 사연 없는 사람 없다. 명분이 생기니 사연 많은 병사들은 용기를 얻었다. 창날이 돌아갔다. “텐! 무슨 짓이야! 창 돌려!” “타난! 당신 아내도 필요하잖아! 당신 아내도 지금 죽을병에 걸려서 오늘내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타난은 말을 잇지 못했다. “포우는 저녁식사 시간에 나갔었는데?” 다시 제윅이 음률을 붙여 지껄이자, 사람들의 마음에 조바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장!” “대장님! 말씀해주세요.” 포우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균열이 생겼다. 몇몇 병사들이 포우에게 접근했다. 타난과 센베크가 소리쳤지만 다가오는 병사들은 점점 불어났다. 포우를 위시한 몇몇 사람들은 조금씩 물러나더니 집 밖으로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 간의 고성이 오가기 시작했고, 일촉즉발의 형세가 만들어졌다. 거실이 텅 빌 무렵, 루치드는 다시 물었다. “제윅, 마법으로 사람을 살릴 수 없나요?” 루치드는 주변의 소란에 개의치 않았다. 그가 궁금한 것은 오직 하나였으니까. 제윅이 혀를 차며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역시 이래서 애들은 안 된다니깐. 분위기를 몰라, 분위기를.” “살릴 수 없나요?” “그래. 못해.” “왜요?” “하아. 이런 미친놈.” 제윅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를 고민하는 듯하더니 싱긋 웃었다. “라티오를 알아?” “예.” “모든 사물에는 포르마가 있다는 거 알지?” “예.” “인간에게도 포르마가 있을까?” “…있지 않을까요? ‘모든’이라고 했으니까.” “있다. 단, 인간의 포르마는 특별하다.” 특별하다? “인간의 포르마를 인식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야.” 루치드는 ‘금기’라는 단어에 예전 핀체노로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라티오’는 이 세상 모든 사물의 원형이 존재한다. 바꿔 말하면 이 세상은 ‘라티오’의 변형된 복제품이라고 할 수 있지.” “인간도요?” “그래. 인간도. 하지만 인간의 ‘원형’에 대해서는 설명을 미루자꾸나. 그건 마법에서 일종의 금기거든.” 핀체노는 인간의 ‘원형’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려했었다. 왜 그랬을까? 제윅이 대답했다. “인간의 포르마는 인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 “이 책상의 포르마는 말 그대로 책상이지. 돌의 포르마는 그냥 돌이야. 하지만 인간의 포르마는 인간이 아니다.” “그럼 뭔가요?” “신(神)이다.” 루치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이라고요?” 제윅이 비웃음처럼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루치드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래. 인간의 포르마는 신이다. 그리고 인간이 신을 떠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어떤 미친놈이 신을 포르마로 그려낼 수 있다면, 이미 그 미친놈은 신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왜냐고? 신의 모습을 그릴 수 있는 것은 신뿐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포르마를 아나그노리시한다? 아까 했던 말이지만 조금 수정해야겠군. 마법사는 신의 저주와 은총을 모두 이겨낼 수 있는 존재라고 했지? 실은 ‘이긴다’는 표현은 옳지 않아. 단지 버틸 수 있다는 거지.” 제윅이 검지로 루치드의 이마를 짚었다. “그렇지만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어. 인간의 그릇에 신이라는 물을 채워 넣는다면 그릇은 그 물을 감당하지 못하고 깨지게 된다.” 루치드는 입 안이 말라 까끌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인간에 관한 모든 것, 이를테면 팔이나 다리, 심지어는 손가락 하나도 신의 복제품이라고 한다. 인간 마법사로서는 감당할 수 없지. 그래서 아카넬이 주목을 받는 이유지.” “그럼, 진짜 아카넬은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나요?” 제윅은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루치드를, 그리고 옆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라보네를 바라보았다. “과연 어떨까?” 라보네가 물었다. “살릴 수 있다는 말이죠?” 제윅이 미소 지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퍼져나가는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에요.” 라보네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 [123] 오염(2) 라보네와 달리 다른 의미로 루치드는 힘을 잃었다. ‘신’에 대해서는 아직 감도 안 잡혔다. 너무 거대한 비밀을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이 배운 마법이란 영역의 비밀스러움에 기가 눌린 것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혜린이를 마법으로 살릴 수 없다는 사실에 허망함 마저 느낀 루치드였다. “만약에, 억지로라도 인간을, 아니 신을 ‘원형’으로 인식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나요? 그냥 죽는 건가요?” “죽는다? 글쎄? 그런 미친 짓을 벌일 생각을 한 사람이 없어서 모르겠네? 그냥 죽을지, 고통 속에 미쳐 죽을지, 행복하게 죽을지 모르겠네?” 루치드가 좌절감에 빠지려는 때, 제윅이 말했다. “누구한테 마법을 배웠는지 모르지만, 안타깝구나. 이런 기본적인 공부도 되지 않은 녀석이라니. 그리고 아가씨.” 제윅의 부름에 라보네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지금 머리가 혼란스러워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를 망설이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아카넬의 효능에 대해 의심이 없었건만, 제윅이라는 마법사는 그 소문이 ‘과장’이라고 했다. 제윅의 말이 거짓말일 수도 있지만, 희망이 한풀 꺾인 것도 사실이었다. “죄송해요. 벨로. 이 미친 꼬마 놈만 아니었으면 아가씨도 저 무리들과 함께 아카넬을 얻으러 가실 수 있으셨을 텐데.” “네?” 라보네는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되물었다. 그 때, 루치드가 소리쳤다. “말도 안돼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러시는 거죠?” “말이 안 되긴. 아까도 말했잖아. 마법사에 대한 정보를 듣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그건 궤변이에요. 만약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전제가 옳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죽음일 수는 없어요.” 라보네는 그제야 두 사람의 대화가 자신에 대한 것임을 알았다. “게다가 전제부터 이해할 수 없어요. 왜 다른 사람들이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안 된다는 거죠? 마법사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저씨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렇게 분석적인 면을 보면 마법사 같기도 한데, 마법사란 존재에 대해 모른단 말이지.” 고개를 젓는 제윅의 태도를 보며, 루치드는 또 무슨 엉뚱한 말로 사람을 흔들어 놓으려는 것인가, 싶어서 경계하는 마음이 들었다. “마법사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에는 한계가 있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사람의 한계를 벗어난 것일 테니. 그래서 대부분의 마법사는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몇 가지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다야. 그것만을 평생 연구해도 한계가 있을 정도라서 말이야. 그래서 전지전능의 마법사라고 해도 약점이 존재한다.” 루치드는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봐라. 이 세상에서 마법사가 차지하는 위치를. 마법사는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강하다. 때문에 어떠한 권력과 힘에도 굴하지 않는 존재이다. 그러다보니 마법사를 위험한 존재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누구일까?” “왕?” “왕을 비롯하여 소위 권력자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자 한다. 그런데 마법사는 그들의 자리를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지. 당연히 눈에 가시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러니 틈만 보이면 잡아서 없애려고 하지. 그런데 만약 그런 마법사의 약점을 안다면? 과연 그들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까? 요컨대, 마법사에 관한 정보는 모두 마법사 본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중대한 문제다. 그러니 그런 이야기가 퍼지지 않게 해야 함이지.” “굳이 서로 다툴 필요가 있나요? 서로 협조하거나 협력할 수도 있는 문제 아닌가요?” 제윅이 혀를 차며 라보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루치드를 향한 말이었다. “자, 이 여자는 이제 니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이제 이 여자는 아카넬을 구하든 구하지 않든 자기 집으로 돌아가겠지. 내가 이 여자를 살려둔다면 말이야.” “…….” “자, 이 여자가 집에 가서 이야기를 하는 거야. 어린 마법사를 봤어요. 그 마법사는 아직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대요. 그러면 이 여자의 아버지, 귀족으로 추정되는 그 사람은 그렇구나, 하고 그냥 넘어갈까? 어때요, 벨로? 그냥 넘어갈까요, 그대의 아버지는?” 라보네는 답하지 않았다. “마법사를 잡아와라. 그리고 물어보아라. 어떻게 마법을 사용하는 것인지. 말할 때까지 고문해라. 손가락, 발가락 하나씩 잘라가면서 고문하라. 그러고도 말하지 않으면 발목과 손목을 하나씩 자르고 그 다음은 팔, 다리를 잘라라. 만약 마법사가 솔직하게 말을 한다면 목을 잘라라. 말을 하지 않아도 잘라라. 위험한 존재는 더 크기 전에 없애버려야 한다.” 귀족에게 빙의라도 된 듯, 굵직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과장된 어투로 연기를 하는 제윅의 말에 루치드는 얼굴을 굳혔다. 라보네의 표정을 보아도 그 말이 전혀 없는 가능성이 없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어느 시대에나 그랬어.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잡아먹고, 더 강한 자에겐 칼을 숨기고 다가간다. 오로지 홀로 남을 때까지 싸우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마법사 역시 마찬가지다. 협력? 그야말로 니가 어리고 모자르다는 증거다. 알겠냐?” 제윅이 주먹을 아래로 내리쳤고 죽은 텔리오의 가슴에 구멍이 생겼다. 곁에 앉아있던 루치드와 라보네의 얼굴에 피와 살점이 튀었다. 라보네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텔리오….” “벨로. 저도 이제 가야할 것 같아요. 밖을 보니 이미 경비대원들은 북문으로 달려갔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바깥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벨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즐거웠습니다.” “제윅, 잠시 만요.” 루치드가 제윅을 제지했다. “이건 옳지 않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단지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에요.” “꼬마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네가 아니란다. 너의 말 따위는 일 푼의 가치도 없단다.” 나긋나긋한 말본새와 달리 눈빛은 잔혹한 동물의 그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루치드는 이 순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라보네의 목숨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저씨는 지금, 성주에게 가실 거죠?” “흠?” 처음으로 제윅은 놀란 얼굴을 했다. 라보네 역시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 얼굴을 했다. “경비대원들에게 선물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정황만 살피면 녹스 성 내의 무장병력을 북문으로 옮기신 거예요. 그렇게 되면 녹스성 내의 경비가 허술해지겠죠. 게다가 경비대장을 궁지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그분은 다른 걸 신경 쓰시기 힘드실 거예요. 즉 지금 녹스성에는 구멍이 생긴 겁니다.” 제윅은 이를 보이며 웃었고, 눈 안의 소용돌이가 더욱 거세진 느낌이었다. “아저씬 아카넬에 관한 정보들을 모두 수집하신 것 같지만, 지금 찾으러 가지 않았죠. 왜? 갈 필요가 없어서일 거예요. 하지만 아카넬을 가지고 싶어 하시죠. 그럼 답은 하나예요.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아카넬을 빼앗겠죠. 힘이 있으니까.” “잘 추리했구나. 영리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제법이었다.” “그리고, 아저씬 저 누나 뿐만 아니라 저도 죽이시려고 하시는 거죠.” “왜 그렇게 생각했어?” “약하니까요.” 루치드는 약하다. 마법사이지만 약하다. 그리고 약한 사람에 대한 제윅의 태도는 일관되었다. 게다가 명분도 있었다. 자신의 약점이 드러나길 원치 않는다. 싹을 제거한다. 이런 이야기들에서 하나의 결론을 내리는 것은 루치드에게도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 꽤 머리를 굴렸구나. 반쪽짜리 마법사도 마법사구나. 그렇게 계속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하는 자세가 마법사의 본 모습이지. 앞으로도 그런 자세로 살아갔다면 분명 나를 뛰어넘는 마법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그렇게 두지 않겠다, 는 뒷말은 생략되었지만 모를 수 없었다. 루치드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하지?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되나요?” “마법사의 호기심이란 끝이 없구나. 나 오늘 완전히 스승 노릇 제대로 하는군.” 마음대로 하라는 의미로 턱을 끄덕이는 제윅이었다. “아저씨의 마법, 어렸을 때의 경험에서 비롯된 건가요?” “밑천을 드러내란 소리네. 그래, 맞다. 본래 마법사는 익숙한 것에 능통한 법이지. 난 어린 시절을 항상 바람과 함께 했었고, 때문에 바람에 대한 포르마가 손쉽게 만들어졌던 것이지. 넌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말이야.” “어리면 안 되나요?” “…불가능은 아니겠지만, 불가능에 가깝지. 니가 아무리 많이 살았다고 해봐야, 나보다 오래 살았겠니?” 제윅의 말에는 라보네가 생각한 것과 유사한 의미가 있었다. 어린 마법사는 없다. 즉, 경험이 부족한 어린 아이들은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사물에 대한 통찰이 아무런 경험 없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건 날로 먹는 소리지. 수없이 많은 경험과 통찰은 세월이 담보되어야 한다. 그래서 네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루치드의 눈에 빛이 맺혔다. 통찰이라고? “바람을 아나그노리시(=인식) 하는 데 어려움이 없으시죠?” “왜?” “바람이 뭐죠?” “응?” “본래 바람은 공기의 이동이예요. 기압의 차이에 따라 이동하는 공기의 흐름이죠. 기압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하는 공기의 흐름이 바람이에요. 아시죠?” “…무슨 소리냐?” 제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기가 열을 받아서 따뜻해지면, 공기는 가벼워져요. 가벼워진 공기는 위로 올라가고 그 때문에 기압이 낮아지죠.” “아니, 그 전에 기압이라는 말이 무슨 말이냐?” “기압은 공기가 누르는 무게에 의해 생기는 압력을 말해요.” “공기에 무슨 무게가 있다는 말이냐?” 제윅은 당황스러웠다. 뭔가 현학적인, 자신이 이전에 알지 못했던 지식이 아이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데 흘려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저씨는 바람을 사용하시니 아실 것 같은데요? 공기의 무게가 없다면, 어떻게 바람에 의해 사람의 몸이 밀려날 수 있겠어요?” 제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공기에 무게라는 개념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세요?” “…….” 제윅은 입을 꾹 다물고 아이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루치드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결코 눌리지 않는 기세를 보였다. “아저씨가 살았던 곳은 바람의 방향이 제멋대로라고 하셨죠? 사실은 계절이 변할 때마다 방향이 바뀌었을 거예요. 계절에 따라 대륙의 온도가 변해서 그럴 거예요.” 제윅은 손바닥을 펼치고 올렸다. 손바닥 위로 작은 소용돌이가 생겼다. “넌 이게 뭐로 보이냐?” “회오리요.” “이게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 같냐?” “위아래의 기압차이로 인해서 생기는 거죠.” 제윅의 손바닥 위에 있던 회오리가 흩어졌다. “만약 아저씨가 그걸 몰랐다면, 아저씨의 통찰력이란 거 터무니없는 것이네요.” “이 무슨!” “공기의 수직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며 올라오는 공기의 흐름이 회오리라고 할 수 있어요. 혹시 아래로 회전하며 내려가는 회오리 보신 적 있으세요?” “…….” “한 번 ‘재현’해 보세요.” “아래와 위의 공기층의 온도차가 극명하게 나뉘면서 생기는 기압의 차이로 발생하는 게 회오리에요. 두 층의 공기가 교환되는 과정에서 공기의 이동이 회오리모양으로 빙글빙글 도는 거죠.” 루치드가 손가락을 요리조리 돌리면서 회오리를 설명했다. 제윅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어떻게?” “현상의 본질은 모르고 겉만 보면서 통찰이라고 표현하시면 안 되죠. 그거야말로 기만이죠. 제가 보기에 아저씨는 마법사가 아니에요. 그저 속임수를 부리는 것일 뿐이에요.” ‘현상의 본질이라고?’ 제윅은 루치드를 노려보았다. 이런 모욕을 참을 수 없었다. 손을 치켜 들었다. “죽여버리겠다.” 루치드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마법을 쓰지 못하는 이유. 그리고 저자가 지금부터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될 이유까지. “아저씨나 저나 결국 반쪽짜리였어요. 세상의 진실을 통찰한다고요? 진실은 통찰하는 게 아니었어요.” 제윅의 얼굴이 붉어졌다. 꼬마의 어처구니없는 말장난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신 있게 사용했던 마법이 ‘재현’되지 않는 것 때문이었다. 바람의 포르마가 흐릿해졌다. “너,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그 때, 루치드가 일어났다. 루치드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진실은 지식이 아니었어요.” 루치드가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 제윅 앞에 마주섰다. 비록 키가 작은 루치드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결코 작아 보이지 않는 루치드였다. “아저씨, 아저씨는 더 이상 마법을 사용할 수 없을 거예요.” ‘나처럼 말이에요.’ ======================================= [124] 오염(3) “어떻게 한 거야? 어떻게 한 거냐고!” 제윅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마치 역병환자라도 보듯이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제윅은 병에 걸린 사람처럼 비틀댔다. “어떻게 하다니요. 전 아저씨에게 통찰을 알려드린 거예요. 아저씨가 바라본 세계의 진실을.” “말도 안 돼!” “말이 되니까 아저씨도 귀를 기울이셨던 거예요. 말이 되니까, 이해가 되니까, 수긍이 되니까 아저씨의 마법이 그렇게 된 거예요.” 루치드는 한 발 더 다가갔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제윅이 무서울 리 없었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아저씨, 눈을 뜨세요.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세요. 그리고 그 안의 진실을 보세요. 아저씨의 마법은 그저 미완성일 뿐이에요. 전 그걸 도운 것일 뿐이에요.” 물론 그 마법이 완성이 되기 위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아직 루치드도 알지 못했다. “어린 사람은 마법사가 되지 못한다? 사실 진실은 거기에 있어요. 통찰력이 부족한 사람은 마법사가 되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제 눈에 아저씨는 한없이 통찰력이 부족한 사람이에요. 겨우 제가 보여준 지식의 단편에 포르마가 희미해진 것을 보면 말이죠.” “넌, 악마로구나! 사람을 현혹하는 진짜 악마였어!” 루치드는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받는 상황에서도 즐거웠다. 마치 자신이 과외 선생님이 된 기분이었다. “아저씨. 하나 더 알려드릴까요? 이제 모든 걸 의심해야 돼요. 모든 걸 의심하고 의심해서 타당성을 얻을 때까지 의심해야 돼요. 그러지 못하면, 더 이상 마법을 사용할 수 없을 거예요. 아저씨의 얄팍한 통찰력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건 앞으로 무리일 겁니다.” 제윅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때였다. 라보네가 텔리오의 허리춤에 달린 칼을 뽑아들고 달려든 것은. **** 텔리오의 가슴에 구멍이 생긴 이후로 라보네는 거의 반쯤 정신을 잃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온통 복수하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수로? 그런데 제윅은 자신을, 그리고 옆에 앉은 꼬마를 죽이려고 했다. 죽일 생각을 가지고 쥐를 가지고 놀 듯이 두 사람 앞에서 히죽대고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반전되었다. 꼬마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고, 미치광이는 당황했다. 꼬마가 마법을 사용할 수 없을 거라는 말을 했고 미치광이가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미치광이는 꼬마를 해치지 않았다. 오히려 뒤로 물러서며 겁을 먹고 있었다. 마침 텔리오의 허리춤에 달린 단검이 눈에 들어왔다. ‘이때다.’ 라보네는 칼을 빼어들고 제윅에게 달려들었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달려든 라보네의 얼굴은 그럼에도 아름다웠다. “죽어!” 제윅은 고개를 돌려 라보네를 보았다. 그 순간 모든 동작이 정지됐다. 루치드 역시 낌새를 눈치 채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역시 순간이지만 움직임이 멈췄다. 뒤늦게 라보네를 제지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이미 라보네의 단검은 제윅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윽!” 제윅은 너무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며 라보네의 얼굴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라보네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더욱 힘을 줘서 단검을 밀어붙였다. 작은 가드에 손가락이 밀려 짓눌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만하세요!” 루치드가 라보네를 껴안고 바닥을 뒹굴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제윅을 바라보았다. 제윅은 가슴에 박힌 단검을 두 손으로 쥐었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뽑아내려고 애를 썼다. 이를 너무 다문 나머지 잇몸이 짓뭉개지며 피가 새어나왔다. 핏발이 선 눈으로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제윅….” 제윅은 단검을 가슴에서 뽑아냈다. 피가 분수처럼 터지며 루치드의 얼굴을 적셨다. ―쿵 제윅은 모로 쓰러졌다. “제윅!” 루치드가 그의 가슴을 눌렀다. 하지만 작은 손가락 사이로 피가 뭉클 솟아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꼬마….” 제윅은 핏발 선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루치드는 정신이 없었다. 이렇게, 이런 상황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아닌데. 누군가가 죽는 것을 보려고 했던 것이 아닌데. “내가, 말했지. 힘이 없으면… 죽는다고.” 제윅이 슬쩍 시선을 옮겨 여전히 바닥에 쓰러진 채, 상체만 겨우 들어 올린 라보네를 바라보았다. “너도 마찬가지야. 힘이 없으면 … 죽는 거야.” 제윅은 자신의 말이 맞지 않냐는 듯, 입 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부릅뜬 눈에 빛이 사라졌다. 루치드는 멍한 눈으로 라보네를 쳐다봤다. 그녀는 제윅을 날선 눈으로 바라보며 외쳤다. “자업자득이야! 네가 텔리오를 죽였어! 그러니까 너도 죽는 거야!” 라보네는 루치드를 보며 외쳤다. “복수야, 이건. 정당한 복수라고!” 몸을 일으킨 라보네는 황급히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웠다. “마법사 놈들, 모두 죽여야 돼.” 단검을 루치드를 향해 겨눴다. 검날의 날카로운 끝에 루치드의 시선이 머물렀다. “너도 마찬가지야. 저 녀석이 말한 것처럼, 너도 악마야. 악마라고!” 라보네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텔리오의 죽음, 아카넬의 진실,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다가 결국 자신의 손으로 저지른 첫 살인. “진정하세요.” 루치드가 시선을 내리곤 어렵게 말을 꺼냈다. “진정? 어떻게 진정하라는 거지? 진정하면 내 동생이 살아나? 텔리오가 살아나?” 어떻게 일이 이렇게 꼬이나. 루치드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해거름이 시작되었는지 주위가 많이 어두워져 있었다. 상상이나 했을까. 거실에만 세 사람의 시체―순찰대원 한 명의 시체, 텔리오, 그리고 제윅―가 너부러져 있고, 한 여자와 한 아이만이 그 소란에서 살아남았는데, 아직도 위기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서로 죽고 죽일 때까지 싸워야 하는 건가요?” “뭐?” “아까 제윅이 그랬잖아요. 자신이 우리를 죽이려고 했던 이유.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잡아먹는다고. 당신은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저 자의 말을 진실로 만든다? 라보네는 무슨 속셈이냐고 반문했다. 루치드 역시 지금의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어떻게 진정시켜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머릿속을 정리한 루치드는 침착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법의 비밀을 알려드려요?” “뭐?” “마법은 말이에요. 진실로 믿는 힘에 있어요.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는 순간, 마법이 되요.” “무슨 소리야?” 루치드는 고개를 들었다. 사실 루치드가 한 말은 라보네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소리였다. 그러나 의외로 라보네는 루치드의 말을 들으며 흥분과 떨림이 가라앉음을 느꼈다. “자기가 믿는 진실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만 있으면 누구나 마법사가 된다는 것이에요.” 물론,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몇 가지 절차가 필요하긴 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과정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 그 자체에 대한 문제. “믿음이 흔들리면 마법은 일어나지 않아요.” 하지만 라보네가 이 사실을 알더라도 제대로 써먹을 수 없을 것이다. 마법사가 평생을 바쳐 쌓아 온 믿음을 일순간에 무너뜨리는 것이 쉬울 리 없다. 루치드와 같은 외계의 지식이 없다면. “이제는 알겠어요. 굳이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모두 마법을 쓸 수 있어요. 단지 요령을 익힌 마법사들만이 기술적으로 현란하게 마법을 사용할 뿐인 거였죠. 진실로 믿고 바란다면 누구나 마법을 쓸 수 있었던 거예요. 이곳에서는.” 이곳, 지성을 흉내 낸 야만과 교양을 가장한 잔인함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마법은 기적이 아니라 속임수였다. 루치드가 마법에 관한 새로운 이해의 단계에 접어들 때, 라보네는 이 악마가 무슨 소리로 자신을 현혹하는 것인가를 고민했다.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마법을 쓸 수 있다고?’ 설마, 이 소악마가 나를 마법사로 만들려는 것인가? 그리고 대륙의 공적이 되어 사람들이 나를 죽이려고 달려들게끔 하려는 것인가? 라보네가 손에 든 칼을 치켜 올리려다 멈칫했다. ‘아니지. 그래도 마법사가 되는 게 좋은 걸까? 마법사가 되도록 해달라고 졸라야 하나?’ 그렇게 라보네가 내적 갈등을 일으키는 사이, 그녀의 정신적 혼란이 점점 정리되어 갔다. 루치드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지금껏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마법의 메커니즘을 한 꺼풀 벗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후련한 감정 반, 아쉬운 감정 반이었다. **** 포우는 녹스의 북문에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시간, 녹스에서 외부로 나갈 수 있도록 개방된 유일한 문이 북문이었다. 그리고 나간 사람은 모두 경비대원이었다. 포우는 그들을 말릴 수 없었다. “대장, 정말 안 되오? 가르쳐줄 수 없단 말이오? 우리 아들이 오늘내일하는데, 정말 그렇게 알려줄 수 없단 말이오?” 포우보다 나이가 많은 경비대원 한 명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하소연하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도 포우를 붙잡고 눈물로 하소연했다. 그러나 난감한 것은 오히려 포우였다. 차라리 칼이나 창을 들고 협박을 했다면, 더욱 마음을 굳게 닫아 걸었을 것인데. 포우는 눈을 감고 입을 닫았다. 하지만 귀를 막을 수는 없었다. “대장, 대장!” “우리 어머니를!” “우리 딸!” 가족을 위해 사정을 하는 이들을 외면하기엔, 너무나 깊은 상처를 지닌 경비대장이었다. 마치 6년 전, 그 날처럼. 마침내 포우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달리기 시작했다. 북쪽 평야를 향해. 하지만 포우는 그들을 막지 않았다. “대장….” 타난이 다가왔다. 포우는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가라.” 타난은 머뭇거리다 결국 고개를 숙여보이곤 몸을 돌렸다. 그 역시 가족을 지키려 애쓰는 한낱 가장일 뿐이었다. “센베크.” “예.” “넌 괜찮나?” “어, 사실 욕심은 나는데,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요. 전 저 사람들과 싸우기 싫습니다.” 센베크는 욱하는 성격만 빼면 세상 둘도 없는 호인(好人)이다. 월급 받으면 곧장 자기 밑의 사람들을 데리고 주점으로 데리고 간다. 자기 돈으로 술을 먹이고 음식을 먹인 뒤에 집에 보낸다. 심지어는 자식이 있는 부하들에겐 대신 주라며 용돈까지 쥐어준다. 오죽하면 타난마저 헤프다고 타박할까. “그럼 날 따라와라. 마법사 놈, 이대로 보낼 수 없다.” “예. 대장.” 센베크는 그나마 몇 남지 않은 세 사람의 경비대원을 데리고 마법사에게 갔다. 마법사가 있던 집이 가까워 올수록 걸음이 무거워졌다. “대장, 우리끼리 가능한 겁니까?” “센베크. 우리는 녹스의 경비대다. 우리가 포기하면 이 살인자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면 아무리 아카넬이 있어도 의미가 없어진다. 그렇게 둘 순 없다.” 결국 포우는 자신의 동료, 부하들을 위해 마법사와 싸우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의지를 다지자, 센베크와 다른 경비대원들도 창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집 앞에 섰다. 이미 주위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횃불도 제대로 챙겨오지 못한 탓에 어두컴컴하기만 한 집의 입구가 마치 자기들을 삼켜 먹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윅!” 포우가 먼저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뒤를 다른 경비대원들이 달려 들어왔다. 그러나 거실에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늦은 건가?’ 포우가 자책할 때, 주위를 둘러보던 센베크가 포우를 불렀다. 포우의 발밑에는 차가운 시체가 된 제윅이 누워있었다. **** 라보네와 루치드는 라보네의 상단이 있는 여관으로 돌아왔다. 라보네는 오자마자 얼굴을 면사로 가렸다. “넌 어떻게 할 거야?” “글쎄요. 지금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애초의 목적이 마법사를 찾아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거였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다른 마법사를 찾는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어 보였다. “그럼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라보네의 제안에 루치드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위험한 거 아닌가요?”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음을 아는 라보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니가 마법사…라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을게.” “전 마법사가 아니에요.” 자조적인 대답에 라보네 역시 피식 웃었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마법사가 있을까? “대신 아까 하던 이야기, 계속 듣고 싶은데?” **** 제윅의 집에서 나오기 전, 라보네는 루치드에게 물었다. 마법사가 될 수 있냐고. 루치드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마법사는 될 수 없다고. 하지만 마법사가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그게 뭔데?” 루치드는 무심한 어조로 대답했다. “의심하는 법이요.” “그게 왜 중요해?” “…….” 루치드는 라보네를 바라보았다. 신의 저주라고 했던가? 아니 신의 은총인가? 라보네는 루치드가 마력에 빠져버렸다고 생각해서 얼굴을 돌렸다. “얼굴을 가리지 않아도 돼요.” 라보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 이제 괜찮은 거 같아요. 누나 얼굴을 봐도.” 라보네가 놀란 눈으로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루치드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검지를 들어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 [125] 오염(4) 루치드는 라보네와 함께 하기로 했다. 즉흥적인 제안에 즉흥적으로 대답을 한 것 같기도 하지만, 루치드는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당장 이 도시에서 보호자 없이 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상황을 인정해야 했거니와, 이 세상에 대해서 좀 더 알아야 겠다는 생각이 반영된 결정이었다. 이제껏 자신이 태어나 살아온 세상이기에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착각이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라보네 역시 즉흥적이지만 루치드와 함께 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영리하다는 것과 마법사‘였’다는 점은 충분히 루치드를 포섭할 명분이 되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아카넬 때문이었다. 미치광이 마법사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었기에 ‘과장된 소문’이란 말과 상관없이 아카넬을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아카넬이 성주에게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상황이었다. 마법사‘였’던 루치드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어보는 라보네였다. 게다가. “어떻게 내 얼굴을 봐도 괜찮은 건지 말해주지 않을래?” 저주를 피하는 방법을 알아낸다면 그것만으로도 루치드와 함께 할 이유가 된다고 생각했다. 부모님과 동생도 자신의 맨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다. 그래서 24시간 언제나 면사로 가린 모자를 쓰거나 천으로 얼굴을 둘둘 가리고 눈만 드러나게 하는 편법을 써야 했다. “누나의 얼굴을 계속 분석하는 거죠.” “뭐?” “누나의 얼굴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거예요. 눈과 눈, 눈과 코, 코와 입 사이의 거리들을 구하고, 그것들을 비율로 계산해보는 거죠. 그리고 각각의 비율이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해 보는 거죠. 또, 얼굴의 전체에서 눈, 코, 입, 눈썹, 점 등이 차지하는 면적과 비율, 거리 등을 또 구하고….” “그만!” 루치드는 입을 다물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제가 아는 형이 한 번 해보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서 해 본 거예요. 그냥 그렇게 계산을 하면서 바라보니까, 누나의 얼굴을 보는 게 어렵지 않더라고요.”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바로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그 ‘계산’이라는 걸 하면 신의 저주를 이길 수 있다는 이야기인걸까? 그렇다면 이걸 꼭 알아야겠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계산을 하는 거라고?” 루치드는 잠시 생각을 한 뒤, 다시 말을 꺼냈다. “단순히 한 개의 식을 계산하는 건 아니고요, 다중 복합 계산? 뭐 이렇게 표현해야 하려나?” 루치드도 딱히 설명하기 좋게 표현할 단어가 없어 두루뭉술하게 설명했다. 당연히 라보네는 이해를 하지 못했고, 루치드는 예를 들었다. “1, 2, 3, 4, 5 라는 숫자가 있어요. 그 다음은 어떤 숫자가 올까요?” “6?” 역시 거대 상단의 부단주답다고 할까? 아니면 그냥 간단한 산수라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거라고 할까? “맞았어요. 그럼 4, 5, 6, 7, 8, 9 다음은? “10?” “맞아요. 근데요, 12가 올 수도 있어요.” “어떻게?” “그걸 계산하는 게 다중 복합 계산, 뭐 이런 거예요.” 라보네는 그 답이 어떻게 나왔는지 물었고, 루치드는 별거 아니란 식으로 간단히 설명했다. 그 해설을 듣고서야 라보네는 다중 복합(?)이라는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 게 내 얼굴에 있다는 거야?” 그럴 리가 있나. 하지만 루치드는 라보네의 얼굴이 신의 은총에 의해 ‘만들어진’ 얼굴이라는 점에 착안했다. 다른 사람의 얼굴도 그렇겠지만, 특히 신의 손길이 닿았다는 얼굴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를 수학적으로 풀어보는 작업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것일 따름이었다. 쉽게 말하면, 딴생각하는 것인데 의외로 효과적이었다는 것. 어쩌면 루치드도 모르는 비밀이 숨어있는데, 미처 알아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산병 치료제에 다른 효능도 있음을 ‘우연히’ 알게 되어서 사용했던 것처럼, 루치드도 우연한 발견이었지만 다행히 먹혀 들어갔던 것이리라. 어쨌든 이를 계기로, 라보네가 알게 된 사실은 두 가지였다.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는 방법―그것이 비록 평범한 사람들은 쓰기 힘든 방법이지만―이 있다는 사실과 루치드가 수리적인 면에서 굉장히 똑똑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점은 상단을 운영하는 운영자의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런 쓸모가 있는 사람이라면 놓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라보네는 루치드에게 방을 내주고 다음날을 기약했다. 다음날 아침, 라보네는 개별 상인들을 총괄, 관리하는 대머리 상인을 불렀다. 텔리오가 단주의 직속 부하였다면, 대머리 상인-뷰익은 상단 산하의 개별 품목을 담당하는 상인들의 대표였다. 뷰익에게는 어젯밤 늦게 그를 불러 이미 상황을 설명했었다. “텔리오가 죽었어요.” 라보네는 간단치 않은 일이었지만, 몇 가지 밝히기 힘든 사정들을 제하고 설명하느라 간략해져버린 지난 일들을 뷰익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에게 텔리오를 대신하여 가운데서 잘 조율해 주기를 부탁했다. 또한 텔리오의 시신도 챙겨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하여 아침, 뷰익은 몇몇 사람들과 함께 텔리오의 시신을 챙기러 떠났다. 간밤에 떠나려 했지만, 순찰대원들이 야간 통행을 통제하는 바람에 가지 못했었다. “루치드, 우린 성주에게 갈 거야.” “아까 뷰익이란 분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래도 가야 돼. 가서 잘 이야기해야지.” 텔리오도 죽은 마당에 녹스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되도록 빨리 일을 마친 후, 공국 수도로 돌아가야 했다. “너랑 나만 가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경계심이 적어서 만나줄 지도 몰라.” 루치드는 그렇게 생각하기 어려웠다. 제윅의 말처럼, 이 세상이 가장 하찮게 보는 이가 바로 자기와 같은 어린 아이고 그 다음이 여자라면, 가장 하찮은 두 사람이 성주에게 갔을 때 그가 받아줄 가능성은 거의 없지 않을까? 그 이야기를 털어놓으니, 라보네는 상단 패를 보여주었다. “이 패를 무시하지 못할 거야. 이 패는 내가 귀족임을 알려주는 것이니까.” 가장 아래의 계층에서 가장 위에서 두 번째 계층으로 뛰어오르게 만든 것은 고작 저 조그만 나무패였다. 루치드는 정말 이 세상은 불공평한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내성 입구에서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내성 입구는 간단하게 통과하고, 성에 들어서니 서기관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라보네 일행을 맞이했다. 라보네와 루치드는 접견실로 안내되었고, 나머지 시종들은 내성 바깥에서 대기하도록 구분되었다. 루치드는 처음으로 화려하기 짝이 없는 귀족의 접견실을 구경하느라 안테나인형처럼 바빴다. 체통을 지키라고 한 마디 하려던 라보네는 입까지 나온 그 말을 도로 삼켰다. “화려하긴 한데, 통일성은 부족하네요.” 뭔가 정리 정돈되어 있지 못하고, 뒤죽박죽이랄까? 마치 명수의 책상 서랍을 보는 기분이었다. 액자, 도자기, 가구, 융단까지 모든 게 하나씩 보면 화려하지만, 구도, 배치, 배색 등의 면에서는 난잡하다는 인상이 들었다. 반면, 라보네가 보기에 화려함으로는 여느 귀족 자택의 응접실 이상으로 잘 꾸며진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성주가 지난 4년간 아카넬을 꾸준히 모으고, 이를 이용해 축재(蓄財)를 했다면 이 정도는 가뿐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상업적으로 이용했느냐를 따지는 것은 아직 이른 문제지만. 한참을 구경하던 중, 성주가 나타났다. 라보네가 일어나 인사를 했다. 귀족의 여식이 면사를 쓰는 것은 결례가 되지 않았기에 면사를 벗진 않았다. “반갑소, 난 녹스 성을 관리하는 빈첸티 자작이라오.” “까타라 가문의 라보네라고 합니다.” “까타라 가문은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가문 중 하나지.” 하긴 신의 저주를 받은 가문이니. “아버님은 잘 계시오? 일전에 수도에서 한 번 뵌 적이 있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이번 녹스 행을 나서기 전 아버님으로부터 평안히 잘 계신지 여쭤보라는 명을 받았었습니다.”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에 화답하는 자작의 모습은 겉보기에는 호인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지난 몇 년간 경비대장을 통해 아카넬이라는 보물을 편취(騙取)했다는 사실을 안 이상, 결코 만만히 볼 수는 없었다. “어제는 일이 있어, 보지 못했지만 이렇게라도 보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혹시 어제 일을 듣지 못한 걸까? 라보네가 속으로 궁리를 하며 대답했다. “예. 저희도 이곳에 오자마자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불행히도 그런 사정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어 아쉬워하던 차였습니다.” “그래요, 고맙소. 허면, 언제 돌아갈 예정이오?” 라보네는 저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살짝 적신 후, 대답을 했다. “되도록이면 빨리 일을 볼 예정입니다. 아무래도… 겨울이다 보니 오랜 시간을 외부에 나와 있는 것에 대해 저희 상인들이 많이 꺼리더군요.” “그렇지. 아무리 상인들이라도 다리는 가볍게 하고 싶은 법이지.” 짐을 내려놓고 쉰다는 의미에서,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의미였다. 이후 몇 가지 사사로운 이야기가 오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성주는 라보네의 뒤에 선 루치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는 일이 없었다. 시종이라 생각해서 말을 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어제 일을 들은 탓에 그 정체를 알고 일부러 언급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라보네는 되도록 성주와의 이야기 속에서 여러 가지 정보를 얻고 싶었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그 미치광이 마법사는 그리도 잘하던 것을, 자신은 왜 이렇게 못하는지 모르겠다고 괜히 자책만 했다. “그럼, 벨로. 부디 상단행을 잘 마무리하고 돌아가시기를 빌겠소.” 대화를 마무리 하려는 성주의 태도에 조급해지기 시작한 라보네는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에 우선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했다. “성주님, 그런데 간곡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뭔데요?” “저기….” 그 때, 루치드가 라보네의 어깨를 짚었다. 라보네가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동시에 성주 역시도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루치드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 거네요.” 루치드가 말을 했다. “뭐가?” 라보네가 앞뒤 다 잘라먹고 꺼낸 루치드의 말에 의문을 표시했다. 그러나 루치드의 시선은 성주에게 향하고 있었다. “저도 역시 아가씨처럼―‘누나’ 대신 ‘아가씨’로 부르라는 교육을 받았다―궁금해서요. 과연 알고 계신 것인지, 아닌지.” 루치드는 라보네가 계속 이야기를 끌면서, 대화를 이어나가는 모습에서 그녀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도 라보네처럼 성주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성주는 오직 라보네에게만 시선을 주었고, 그의 말에서 어제의 일을 알고 있다는 낌새는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아가씨와 성주님께서 나누시는 대화가 아무리 소소한 대화라 해도요,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것에 대해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아요?” 미치광이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루치드도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마치 보육원장과 대화하듯, 교장 선생님과 대화하듯 그런 느낌으로 이 대화를 바라보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제윅이 말한 바와 같이, ‘감히’ 어린 꼬마아이가 귀족의 대화 장소에 자리를 함께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시종이더라도, 한 번쯤은 언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그런 면에서 성주는 자연스럽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이 아가씨의 말을 끊었음에도 동요를 보이지 않는 저 눈. 저것이 가장 큰 증거였다. 연신 미소를 짓던 성주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루치드가 물었다. “성주님. 아카넬, 가지고 계시죠?” 라보네가 고개를 돌려 성주를 바라보았다. 성주의 얼굴이 석상처럼 굳어졌다. “성주님이라면 아카넬의 효능에 대해 아시리라 믿어요.” 라보네가 용기 내어 물었다. 성주가 시선을 라보네에게 맞췄다. “아시겠지만, 제 동생이 지금 자리에 드러누웠습니다. 만일 성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저희 가문은 이 은혜를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 “물론 그저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제 값을 치루겠습니다. 얼마를 부르시든 지요. 아시잖습니까? 저희 가문, 결코 약소한 부(富)를 누리는 가분이 아닙니다.” 라보네의 말은 누가 들어도 절절하다고 느낄 만큼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그러나 성주는 보통의 사람이 아니었다. 권력과 부를 가진 자로서 결코 까타라에 뒤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내가 왜, 이 변방에서 성주 노릇을 하는지 아시오? 벨로?” 성주, 빈첸티 자작의 말은 하나의 힌트였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서야, 루치드는 뒤늦게 시야가 좁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라보네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성주는 뒷말을 잇지 않았다. 하지만 루치드와 라보네는 알 수 있었다. 성주의 뒤에는 또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자작이란 계급, 그리고 접견실을 화려하게 만들 정도의 부. 게다가 아카넬까지. 이 정도 조건이라면 어떤 귀족도, 녹스 성의 성주로 만족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아카넬이라는 전설적인 보물의 실제 효능이 소문만큼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성주라면 더더욱 아카넬에 목 맬 필요도 없다. 아니, 실제 효능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평생 아카넬만 채집하면 자위할 생각이 아니라면 이 곳에 남을 이유가 없다. 즉, 얼굴을 굳히고 번들거리는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자작이 생각만 있다면 얼마든지 중앙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중앙으로 가지 않고, 이 곳에 남아 있다? 그리고 아카넬을 몇 해에 걸쳐 모으기만 한다? “누군가 뒤에 있다면….” 라보네가 중얼거렸다. 성주의 뒤에 아카넬의 채집을 알고, 이를 명령하는 사람이 있다는 가정이라면 빈첸티 자작이 이 성에 남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에 생각이 미치자, 그에 파생된 또 다른 결론이 나왔다. “성주님은 아카넬을 저희에게 줄 수 없으시겠군요.” ======================================= [126] 오염(5) 자작은 등을 소파에 기대며 고개를 살짝 젖혔다. 소파 위에 박음질 된 쿠션에 머리를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 숨을 길게 토하며, 천천히 눈을 뜬 자작은 라보네와 루치드를 한 눈에 담았다. “그대들의 활약은 이미 들었네. 그 쪽이 마법사의 제자라던가?” “오해십니다.” 라보네가 즉각 대답했다. “이 아이는 그 미치광이의 제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마법을 쓸 줄도 모르고요.” 자작은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손가락을 탁, 튕겼다. “미치광이라고 부른 그 마법사가 죽어 있더군?” 라보네는 입을 닫았다. “가슴에 칼이 박혀 있었다고 하던데, 보고에 따르면 키가 이 만한 사람이 기습적으로 파고 들어서 찌른 흔적이라더군.” 한 손을 머리 위로 치켜 들고 살랑살랑 흔들자, 라보네의 안색이 변했다. “경비대장은 어디에 계세요?” 루치드가 물었다. 만약 경비대장이 멀쩡했다면, 오늘 아침이라도 여관에 와서 자신들을 잡아가두려 했을 것이다. 같은 편인지 아닌지도 모를 마법사가 죽었다는 사실까지 확인한 마당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경비대장은 내성 내로 진입할 때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빈첸티 자작은 오른손으로 턱을 쓸어내렸다. 손길에 따라 턱수염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야기로 들은 것보다 훨씬 발칙한 녀석이로군.” 빈첸티 자작의 눈에는 경멸의 빛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모습이었다. “그는 아카넬에 대한 비밀을 다른 경비대원들에게 알렸다. 그는 그 책임을 져야만 했다.” “경비대장은 어디 있나요?” 루치드가 재차 되물었다. 빈첸티 자작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양손으로 깍지를 끼고는 입술을 덮었다. 덕분에 그가 웃는지, 아닌지 알 기 어려웠다. 다만 그의 눈만은 마치 먹이를 앞에 둔 짐승의 그것처럼 빛을 드러냈다. “책임을 졌다고 말했을 텐데.” 라보네는 등에 소름이 돋았다. 조금 전가지 앞에서 호인처럼 껄껄 웃으며 대화하던 상대가 순식간에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가 ‘책임’이란 단어를 뱉어내는 순간, ‘대가’를 입에 올리던 제윅이 연상되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뱉은 두 단어가 서로 다른 의미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작님.” 라보네가 서둘러 그를 불렀다. 라보네에게로 시선이 꽂힐 때, 그녀는 자신이 너무 성급했었던 건 아닌지, 루치드가 너무 버릇없이 굴었던 건 아닌지,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던 것이 아닌지 반성했다. “벨로, 당신의 가족 일은 안타깝게 생각하오. 하지만, 당신이라도 이 일에 깊숙이 관여되었다면 무사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요.”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자부하던 자신의 가문이 순식간에 모래성처럼 느껴졌다. “자작님.” 루치드가 다시 자작을 불렀다. “제가 어제 제윅이라는 마법사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잡아먹는다고.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자작은 대답은 하지 않고 루치드를 빤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지?” “그냥 자작님의 생각이 궁금해서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다? 그럴듯 하군. 역시 마법사라서 진실을 보는 눈이 대단한 걸?” 루치드는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어차피 확인해 볼 필요도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물어봤다. 그리고 역시나 같은 대답이 나왔다. 이 세상, 이 곳의 권력자들은 모두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나보다. 그러나 루치드는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실험을 생각해냈다. 어제 제윅을 상대로 한 실험도 즉흥적이었지만, 이번 실험도 꽤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작님, 그럼 지금 이 자리에서 자작님은 강한 사람인가요? 아니면 약한 사람인가요?” “뭐라?” 빈첸티 자작은 자기 막내아들보다 어려보이는 녀석이 뱉은 말에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곧 그 의미를 알아차리곤 분노가 치밀었다. “감히, 너 따위가 나를, 대공국의 자작을 모욕하는 것이냐!” 한낱 평민 따위가 귀족을, 그것도 한 성의 성주직을 맡고 있는 귀족을 향해 말장난을 하다니! “정녕 죽고 싶은 것이로구나!” 빈첸티 자작이 벌떡 일어나 바깥에서 대기 중인 근위병을 부르려 했다. 혹시 아카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까봐 바깥에 대기시켜 두긴 했지만, 자신의 호출이면 즉각 뛰어들 준비들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루치드의 말이 한 발 더 빨랐다. “자작님은 죽지 않을 자신이 있으신 건가요?” 고저 없는 루치드의 말에 자작은 말문이 막혔다. “이 꼬마 놈이 뭐라고 지껄이는 것이냐?” 라보네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루치드를 돌아보았다.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라고 소리치고 싶은 라보네는, 하지만 너무 당황스럽고 겁이 잔뜩 난 상황이라서 목소리가 꽉 막힌 목을 뚫고 나오지 못했다. “왜 자작님은 제가 마법사의 제자였다는 사실을 듣고서도 아무렇지 않을까, 궁금해서요.” 자작의 눈이 커졌다. 그러더니 라보네에게로 시선이 옮겨졌다. “너, 이 아이가 마법사의 제자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더냐?” “아니, 저기….” 루치드가 대답을 가로챘다. 호흡을 약간 느슨하게, 하지만 단어는 정확하게 뱉어냈다. “제가 마법을 쓰지 못한다는 걸 확신하시는 건가요?” 자작의 입이 쩍 벌어졌다. “믿, 믿을 수 없다. 너, 너처럼 어린 녀석이 마법사라는 이야기는….” “들어보신 적이 없으실 테죠. 제윅도 그러더라고요. 저 같은 마법사는 본 적이 없다고요.” 자작이 주춤거릴 때, 라보네에게 물었다. “어제 제윅이 절 뭐라고 불렀는지 기억하시죠?” “…….” 라보네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루치드는 얼굴을 굳히고 되물었다. “대답해보세요.” “…마법사라고.” 확실히 제윅은 루치드를 보고 마법사라고 부르긴 했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 는 수식어를 붙이긴 했지만 말이다. 루치드는 다시 자작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자작님. 자작님이 강할까요? 제가 강할까요?” “…….” 자작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작님이 바깥의 사람을 부르는 게 빠를까요? 제가 마법으로… 빠를까요?” 의도적으로 중간에 말을 흐릿하게 했다. 하지만 충분히 의미를 알아들은 자작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마에서 땀이 나고, 무릎 아래로 느낌이 없어졌다. 그리고 이내 소파 위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다지 신장이 크지 않은 루치드임에도 소파에 앉은 자작을 내려다보기엔 충분했다. “다시 한 번 물어볼게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다.’ 사실인가요?” 자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 말은 거짓말일 것이다! 속으로는 백번, 천 번 외치고 있었다. 이성적으로는 백 번, 천 번 생각해도 저 꼬마 놈의 말은 말이 되지 않았다. 바로 조금 전, 라보네라는 여자애도 저 꼬마 놈이 마법을 쓰지 못한다고 했었지 않은가. 그런데, 왜, 저 아이는 저리 태평하게,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협박하고 있는 것인가? “사, 사실이냐?” “…….” 라보네에게 물었다. 하지만 라보네는 지금 당장이라도 기절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상식으로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마법을 못 쓴다고 했는데, 혹시? 라는 가설 때문에 몸이 떨려왔다. 자작은 라보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기보다 더 심하게 몸을 떨고 있음을 목격했다. ‘사실이구나!’ 라보네의 말보다, 그녀가 보여주는 몸의 반응이 더 와 닿았다. 그녀 역시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이었다. 루치드는 자작과 라보네의 반응을 보며, 속으로는 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사람이 적을 앞두고 공포를 느낄 때, 두 가지 반응이 나왔다. 하나는 싸우고 이기고 싶어 하는 투쟁심, 또 하나는 포기하고 도망치고 싶어 하는 생존에 대한 욕구. 루치드는 어제 경비대의 모습을 보며 그것을 느꼈다. 센베크와 같이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사람과 마법사의 마법에 당한 뒤, 섣불리 달려들지 못하고 주춤거리던 경비대원들의 모습. 충분히 실험해 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치드는 저 앞의 자작에게 후자의 반응을 고르도록 강요(?)를 했고, 그것이 성공했다. 물론 그 앞에 한 가지 작업이 필요했다. 상대가 투쟁의 대상이 되지 못할 정도로 강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 그래서 물었다.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잡아먹는 것은 당연한 것인가. 자작은 그 테제를 되새김으로서 강자와 약자의 관계라는 올가미를 스스로에게 씌었다. 그 후, 루치드가 강자임을 되새겨만 주면 되는 것이었다. 관계가 설정되면 곧바로 ‘마법’이라는 절대적인 힘을 상기시켜 공포심을 크게 키우고, 공황(panic)에 이르게 하는 것. 마치 어제 경비대원들이 제윅으로부터 도망치던 모습처럼. 여러 가지 상황이 돕긴 했다. 근위병이 함께 있지 않다는 것. 혼자였기 때문에 더욱 자신을 약하다고 여기게 만들기도 했고, 라보네의 반응에 지레짐작으로 두려워한 점도 있었다. “자작님. 지금부터는 제가 말을 하지 않겠어요. 단, 자작님에게서 위험신호가 나온다면, 제윅이 그랬던 것처럼…. 아시죠?” 자작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모호한 표현은 특정되지 않는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루치드는 모르지만, 자작의 머릿속에는 새벽에 죽었다는 순찰대원의 이야기에서부터 과거 어린 시절 들었던 잔혹 무도한 마법사들의 일화까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희생자들의 얼굴 위로 자신의 얼굴이 겹쳐 떠오르기 시작했다. “라보네, 이제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해요. 명심해요. 당신도 예외는 아니에요.” 라보네의 어깨를 짚으며 루치드가 자못 근엄한 척을 했다. 이것도 하다 보니 익숙해지는 것인지, 조금은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큰 어른들이 고작 초등학교 4학년에 불과한 아이에게 협박당하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씁쓸하게도 이것이 가능한 것은 모두 이 세계의 야만적이면서 미개한 사회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야만과 미개함은 루치드에게는 그들 표현대로 ‘어리게’만 보였다. 라보네가 침을 꿀꺽 삼키고 자작을 바라보았다. 자작 역시 라보네를 바라보았다. 자작은 라보네의 눈에 어린 눈물을 보았다. 자작은 자신도 눈물을 흘릴 것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결론적으로 아카넬은 성에 없었다. 이미 뒤를 봐주는 분에게 가고 없다는 것이었다. 굳이 그 말이 사실이냐고 추궁할 필요는 없었다. 루치드의 마법은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보기 딱할 정도로 바른 자세로 대답에 임하는 자작의 모습을 감정 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자작은 커다란 심리적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자작의 비자발적(?) 배웅과 함께 루치드네는 내성을 빠져나왔다. 성문 앞에서 루치드가 뒤를 돌아보자, 딸꾹질을 하며 황급히 몸을 돌려 성 안으로 들어가는 자작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저 시선 바깥으로 몸을 숨겨야한다는 절박한 심정이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벨로.” “응? 아니 네?” “좀 서둘러서 가야겠어요.” “왜? 아니 왜요?” 여전히 두려움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길 위에서 라보네를 붙잡고 이런저런 이유를 설명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일단 가시죠. 가면 설명해 드릴게요.” 조금 걸음을 빨리해서 여관에 돌아온 두 사람. 그제야 루치드는 라보네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아니!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한 거야! …아니 한 거예요?” 여전히 미심쩍은 마음이 가라앉지 않은 라보네였다. 라보네의 연기 아닌 연기가 루치드의 블러핑을 도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루치드는 라보네에게 무릎 꿇고 빌어야 마땅할 일이었다. 같은 편을 속인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꾸물대다간, 자작이 보낸 군사들에게 당할지도 몰라요.” “군사를 왜 보내?” “자기만 안전하다면, 그 아랫사람들의 목숨 따위 신경 쓸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거든요. 제윅이 그랬잖아요. 마법사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서 죽이려 들 거라고. 지금쯤 자작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서 지시를 내렸을 거예요. 꼬마 마법사를 잡으라고.” “그래도 니가 마법으로….” “누나, 저 정말 마법 못 써요.” 그제야 상황을 제대로 알게 된 라보네는 뷰익을 재촉하여 녹스를 떠나기로 하였다. 자작은 자신의 안전을 우선 담보하기 위한 준비를 하느라 시간을 지체하였고, 결국 근위병들이 여관에 도착했을 때 라보네의 상단은 이미 녹스 성을 떠난 뒤였다. ======================================= [127] 추격자(1) 녹스 성을 빠져나온 라보네의 상단은 빠르게 평야를 벗어났다. 북문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속도를 내기 시작한 상단 마차와 행렬은 평소라면 많은 짐들을 싣고 달리느라 속도를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상단주의 특별명령으로 급하게 떠난 터라 짐을 가볍게 하고 달린 탓에 녹스로 올 때보다 훨씬 빠르게 평야를 질주할 수 있었다. “이유가 뭐래?” “모르지. 아침에 급하게 출발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난들 알겠나?” “자네는 뭐 좀 챙겼는가?” “챙기긴. 오늘부터 천천히 돌아다니면서 가지고 갈만한 약초나 있나 둘러볼 참이었는데.” “그나마 가지고 온 걸 다 팔아서 다행인건가?” 어제 내린 특별지시로 오후 늦게까지 중앙대로의 상점들을 돌아다니며 가지고 온 물품들을 모두 팔았던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며 상인들은 마차를 몰았다. 가벼워진 무게에 신난 것은 마차를 끄는 말들 뿐이었다. 평야를 벗어나 목야지에 들어섰다. 이곳까지 온 것은 처음이라 루치드는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평야를 벗어날 때까지는 마른 갈색 잡초들이 길 옆으로 펼쳐지다가, 목야지에 들어서니 드문드문 녹색 풀들과 야생화들이 겨울바람을 이겨내고 자라있었다. 낮은 언덕들이 여기저기에 울룩불룩하게 솟아나고 그 사이로 구불구불하게 난 길 위를 여러 대의 마차들이 오리 떼들처럼 질서정연하게 달렸다. 라보네는 근위병들이 지금이라도 쫓아올까봐 두려웠다. 연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고, 귀를 기울였지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다. 개인의 안위도 걱정이지만, 부단주로서 상단의 안전도 도모해야 할 책임이 있는 라보네는 만일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다. “마법, 진짜 못 써?” 몇 번을 확인하고서도 다시 한 번 물어보고, 또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어보는 라보네였다. 하지만 루치드는 매번 똑같은 대답만을 줄 수밖에 없었다. 가만 보니 그동안 외모에 너무 관심이 집중되어 있어서 제대로 그녀를 관찰할 틈이 없었다. 지금 단 둘만 마차에 올라탄 탓에 마주보고 있는 시간이 많아서 그런지, 그간 알아보지 못했던 그녀의 다른 면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루치드는 라보네가 어수룩한 면이 많은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겁도 없이 혼자 제윅을 찾아온 점이라든가, 상단패만 믿고 성주를 만나기 위해 홀로 나선 점이라든가, 위기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자신을 데리고 길을 나선 점이라든가. 솔직히 말해서 루치드는 자신이 이 상단과 함께 하는 것이 본인에겐 좋은 일이지만, 상단의 입장에서는 폭탄을 안고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되었다. 이미 자신이 마법사라고 확신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녹스 성의 성주였다. 게다가 그 성주는 무려 목숨을 담보로 협박까지 받은 상황이었다. 당장 근위병, 경비대, 순찰대 할 거 없이 모두를 동원하여 자신을 추적하러 올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무슨 자신감에선지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같이 가야 한다고 고집부리는 이 아가씨는 분명 영리하지 못하거나, 빈틈이 많은 사람임에 분명했다. “중간에 밥 챙겨먹기도 힘들겠지?” 라보네가 다시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루치드는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하얀 장갑을 낀 두 손이 연신 꼼지락거렸다. 루치드에게 고민거리를 준 또 다른 부분은 바로 라보네의 정신 상태였다. 생각해보면, 이 아가씨는 바로 어제 사람을 죽였다. 비록 ‘복수’라는 명분으로 저지른 짓이긴 해도, 그게 쉬운 일인가 고민해보면… 솔직히 답을 모르겠다. 만약 ‘지구’였다면 아무리 상황이 그런 식으로 전개된다 할지라도 살인을 저지르기 어려웠을 것이고, 게다가 살인 후에도 태연하게(?) 일상을 보낼 수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야만의 세계인 이곳에서는 오히려 저런 식으로 일상을 보내는 게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마치 시험 전날에도 공을 차고 노는 게 별 대수냐 라는 식으로 행동하는 명수처럼 말이다. 단지 루치드 본인이 이 세상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적응을 하지 못해서, 지금 이 상황을 부자연스럽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라보네에게 대놓고 “어제 살인한 소감이 어땠어요?” 라고 물을 수는 없었다. ‘아니, 그냥 한 번 물어볼까?’ 결국 루치드가 고민하는 이 모든 게 그가 이 세계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니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의 끝에는 처음과 같이 이 세상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는 결론이 나올 뿐이었다. 루치드에게는 다른 걱정거리가 하나 더 있었다. 지금의 이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것. 마법사를 만나려는 애초의 목적은 미치광이 제윅을 만나 위기에 처하는 상황으로 이어졌고,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단지 혜린을 구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만 확인받았다. 설령 다른 마법사를 만나더라도, 혜린을 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제윅의 말대로 인간의 ‘원형’이 ‘신(神)’이라면 말이다. ‘신’이라고 생각하니 ‘종교’가 떠올랐다. ‘지구’에 있을 때, ‘종교’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단순히 숲에게, 하늘에게, 산에게, 달에게 무사안일을 기원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체계적인 교리와 시스템을 갖춘 단체로서 종교가 존재한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었다. 다만 루치드가 처했던 환경이 종교와 직접적인 만남을 가질 기회가 없어서 관심이 덜했을 뿐이었다. 가끔 반의 친구들이 주말에 교회나 성당을 다닌다는 이야기는 전해들었지만, 그 뿐이었다. 그래서 간접적으로 소설이나 교양서적을 통해 종교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 뿐, 종교의식을 경험하거나 자세한 교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루치드였다. 이 정도 호기심에 대해서는 물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루치드는 창밖을 바라보는 라보네에게 물었다. “여기, 혹시 종교가 있나요?” “종교? 당연하지. 왜?” “그냥 궁금해서요. 종교가 있다면 어떤 신을 모시고, 어떤 형태로 종교의식을 치루는지 해서요.” 라보네는 문득 이 아이가 마법사임에도 마법사에 대해 모르고 살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어쩌면 마법사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여러 가지를 배우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그런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어떤 종교의 경우, 산 속 깊은 곳에서 은둔하며 세상과 벽을 쌓고 산다든가 하는 그런 거. 만약 루치드도 고약한 마법사 스승을 만나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면 이런 모습도 이해 못할 부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보네는 자기가 아는 한에서 신과 종교에 대해 알려주었다. 창조신이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신의 일화와 그 신을 믿는 종교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종교의 영향력 등을 알려주었다. 말하다보니 혼자서 불안에 떨며 주위를 감시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그래서 라보네는 창조신 뿐만 아니라 그 아래 보좌(寶座)를 가진 신들과 그 신들에 대한 종교, 신전 의식 등을 묻지도 않았는데 열성적으로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제야 이 곳에서도 종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루치드였다. 종교는 야만의 시대에도 존재하는구나, 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누나도 신을 믿나요?” “당연하지. 난 창조신, 카르타의 신도야.” “그럼 그 신이 저주를 내린 건가요?” 라보네는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창조신 카르타의 저주를 받은 가문이 라보네의 까타라 가문이었다. “신을 안 믿으면 어떻게 돼요?” “응? 신을 안 믿다니?” “신을 꼭 믿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가끔 이 꼬마 마법사는 이렇게 상식에서 벗어난 생각을 생각에 그치지 않고 입 밖으로 꺼내는 바람에 당혹스러울 때가 종종 있었다. “신을 어떻게 안 믿어?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 믿는다는 거야, 아니면 보좌에 앉은 신들을 부정하겠다는 거야?” 묘하게 다른 의미인가? 아니면 같은 말을 다르게 표현한 건가? 루치드는 ‘믿다’의 의미가 다르게 받아들여진 것 같았지만 일단 대답을 했다. “신이 존재하더라도 그 신을 믿지 않을 수 있잖아요?” 마치 기독교, 천주교 등의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해도, 그 신을 믿고 안 믿고는 개인의 사정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신을 믿는 거지.” 라보네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루치드는 라보네의 얼굴을 가린 면사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신이 있음을 증명할 수 있나요?” 신의 존재를 증명하라. 라보네는 루치드의 요구에 입이 쩍 벌어졌다. 마법사란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었단 말인가? “신이 없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지겠어? 신이 있으니까 이 세상이 만들어졌지. 이 세상 자체가 신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거야.” 너무 어이없었지만 라보네는 신의 말씀 첫 번째를 언급하여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그 설명과 동시에 라보네는 망치를 두들겨 맞은 듯 머리를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신언(神言) 1장의 첫 번째 문장은 바로 신의 존재와 역사(歷史)를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었어.’ 그리고 그것이 신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첫 번째 역사(役事)임을 깨달았다. “오, 카르타시여.” 라보네가 말을 하다말고 갑자기 마차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보통 때도 빛이 나는 얼굴이지만, 이 순간은 더더욱 밝은 빛이 나는 얼굴을 하고 눈물까지 흘리니 그 성스러움(?)에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루치드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중얼거렸다. “빛의 채도가 부위 별로 다르구나. 광대뼈와 입술, 코끝과 콧망울, 눈두덩과 눈꼬리의 채도가 달라지는 것은 곡률 때문일까, 아니면 외부의 빛을 받아들이는 각도의 차이 때문일까?” 라보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머리가 멍해지기 전, 간신히 가출하려는 이성을 붙잡고 주문(?)을 외우며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라보네는 한껏 눈물을 흘렸다. 한없이 벅차오르는 깨달음의 감정으로부터 희열을 느낀 탓이었다. “옆모습일 때와 앞모습일 때의 비율의 변화는 미적 감상의 차이를 줄 수 있을까? 고정된 지점에서 바라보는 얼굴의 면적의 차이가 영향을 주는 걸까, 아니면 새롭게 설정되는 비율의 차이 때문일까? 측면에서 눈썹과 코끝에 이르는 길이와 눈썹 끝에서 입 꼬리까지 닿는 거리의 비율이 정면일 때와는 미묘하게 달라지는 구나. 대략 1:1.5 정도일까?” 포장도 되지 않은 터라 가는 길이 원만치는 않았지만, 마차 속 두 사람의 여정은 비교적 순탄한 편이었다. **** “근위대는 지금 당장 까타라 상단의 뒤를 쫓아서 본 성주를 능멸한 이들을 추포하라.” “예.” 근위대장이 무릎을 꿇고는 굳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갑주가 덜걱거리며 나는 소음은 오히려 그의 발걸음에 반주(伴奏)가 되어 주었다. “근위대 전원, 출발하라.” 커다란 함성으로 대장의 지시에 대답한 근위대는 곧 말을 몰아 북문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성주님. 그 마법사란 놈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근위대장이 아무리 믿음직한 이라도, 마법사 앞에서는 한낱 평범한 기사에 불과했다. 공국 최고의 기사정도는 되어야 마법사에 대항할 기미라도 보이지, 이런 작은 성의 근위대장 정도로는 빵부스러기만도 못할 것이었다. “지금 이 곳이 그나마 이 성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지 않소? 마법사라도 쉽게 찾기 힘들 것이오.” 내성 지하에서도 한참을 숨어들어온 비밀의 방에서 성주는 평소의 오만함 따위는 전혀 내보이질 못했다. “그리고 근위대장 혼자라면 몰라도 일백의 근위대와 함께라면 상대해 볼만 하지 않겠소?” “그래도 마법사입니다. 과거 물의 마법사란 놈이 어떤 짓을 했던가를 떠올려 보십시오. 물론 그 어린 마법사란 놈이 그 정도까지는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서기관이 낮은 목소리로 진언을 했다. 하지만 자작은 두려운 가운데서도 결코 복수를 포기할 수 없다는 신념을 보였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의 목숨을 협박받은 것에 대한 복수가 아니었다. 귀족의 명예와 자존심을 깔아뭉갠 존재에 대한 가르침이고 응당 그렇게 해야만 하는 행동강령이었다.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감수하고 땅에 떨어진 귀족의 품위를 드높이기 위한 각오였다. ‘왜 오전에는 그 각오를 보이지 않았단 말인가.’ 라고 서기관이 잠시 생각해보았지만, 입 밖으로 내는 우행(愚行)을 저지르진 않았다. 꼬마가 성을 나간 후, 발작적으로 지시를 내린 자작에 의해 서기관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만들어뒀던 지하실의 존재를 떠올렸고, 수십 명의 하인과 하녀를 동원하여 오전 내내 지하실을 청소했다. 그리고 필요한 물품들과 먹을거리들을 옮겨서 불가피하게 오랜 시간을 갇혀 있더라도 불편이 없게끔 준비한 뒤, 성주를 그곳으로 안내했다. 그 이후 성주는 근위대장을 친히 불러 ‘명예’와 ‘신념’을 강조하였고, 근위대장은 늘 그렇듯이 성주의 명에 따라 ‘불손한 세력’을 처벌코자 달려 나갔다. “추포하여 오는 즉시, 형을 집행할 수 있게 준비하라.” 서기관은 그 명에도 머리를 조아렸다. 서기관이 나가면 지하실의 문은 굳게 닫히고 수십 명의 하인과 수 명의 경비대가 앞을 지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또 수십 명의 인부들을 불러 내성 외부의 광장에 단을 쌓고 임시 형장을 만들도록 해야 한다. 하루치 일당을 받은 인부들이 단을 쌓고 나면, 임시처형장에 몰려들 사람들의 통제를 위해 순찰대장에게 지시를 내려야 할 테고, 주변 상가들은 몰려든 사람들 덕에 돈을 벌 것이다. 그 과정에서 조그만 콩고물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협조하지 않는다면 그 날 하루 가게 문을 열지 못하도록 압박을 가하면 될 것이다. 또 잡혀온 꼬마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공표하고 마법사의 처형을 집행한 공을 중앙에 알리기 위한 공문도 작성해야 한다. 되도록 빨리 일을 처리하려면, 지금 공문 초안을 작성해야 할지도 모른다. 유능한 서기관은 오늘도 언제나와 같이 바쁜 하루를 기획하고 움직였다. ======================================= [128] 추격자(2) “까타라? 저주의 가문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긴 사각 원목테이블 위에 은제 3봉 촛대가 놓여져 있고, 그 위로 불꽃들이 흔들거렸다. 테이블의 크기에 비해 둘러앉은 사람은 고작 세 사람. 하지만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가 적당했다. 많은 귀는 많은 입을 만들어낼 뿐이었다. “그들이 아카넬을 얻었을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한 번 두들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있다면 좋겠지만, 없어도 정신 차리게 만들 수는 있겠지요. 그간 상단으로 가세가 살아난 탓에 오만방자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까?” “것도 그렇군.” 상석에 앉은 사내가 팔짱을 끼고 선택의 시간에 들어갔다. 오른편에 앉은 사내는 주군의 선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단정한 자세로 기다렸다. 반면 로브를 둘러쓴 왼편의 사내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아버님.” 사내가 고개만 살짝 돌렸다. 잿빛 플란넬 로브의 두건이 살짝 들리며 사내와 눈을 마주했다. “까타라 가(家)에서 보이는 작태가 못마땅한 것은 비단 우리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그럼에도 그들이 최근 이뤄낸 세가 약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만일 그들에게 본때를 보여준다 해도 배후에 저희가 있음이 알려진다면 득보다 실이 많다는 것을 고려해주시길 바랍니다.” 부오노 공국에서 까타라 가문은 그렇게 큰 가문은 아니었다. 그들이 유명했던 것도 단지 신의 저주를 받았다는 것 때문에 유명했을 뿐이고, 게다가 지금까지 신의 저주를 벗어난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한 남자가 신의 저주를 이겨낸 후 축복을 받았는데 하필이면 드뷔시 최고의 강국이었던 제국의 여왕의 눈에 들었다. 여왕은 그 남자를 궁에 들이고 남자의 가문, 까타라는 부(富)를 얻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상단을 운영한 까타라는 남자의 도움아래 전 드뷔시를 돌아다니며 상행을 하기 시작했고, 결국 대륙 5대 상단에 들 정도로 커져버렸다. 이후 남자는 정치적 모략에 의해 씁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상단은 용케도 힘을 잃지 않았고, 세월이 흐름에도 기세가 죽지 않아 지금에 이르렀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지금은 많은 정치적 경쟁자와 상단 라이벌들의 견제에 위태롭다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공자님 말씀도 틀리지 않습니다만, 저희 정체가 그리 쉽게 드러나진 않을 것입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보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용살대를 보내서 일을 처리할 것이니 흔적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껏 가문의 뒤에서 온갖 일들을 처리해 온 용살대라면 믿음직스러울 것이다. 남자의 자신감은 끝이 올라간 콧수염만큼이나 높이 솟아 있었다. “지젤 공의 자신감을 믿어보고 싶군.” 상석의 사내가 툭 뱉었다. 다른 무엇보다 ‘아카넬’이었다. 아카넬을 얻을 수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것에 다른 가정들은 무의미하다 할 정도였으니까. “지젤 공. 공을 믿겠소.” “감사합니다, 주군.” 지젤은 콧수염을 위로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반면 공자의 눈에 서린 어둠은 조금 더 깊어졌다. 3봉 촛대의 불빛으로도 가시지 않는 어둠이었다. **** “고마워요. 덕분에 깨달음을 얻었어요.” 라보네가 루치드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루치드는 고개를 저었다. “제게 고마워하실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전 여전히 신에 대해 모르겠으니까요.” 라보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어린 마법사의 정신세계는 자신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짧지 않은 시간 대화를 나누면서 느낀 것은 그랬다. 자신의 말재간으로는 무엇도 간명하게 이해시킬 수 없다는 것을. 그러는 사이, 마차는 눅진한 공기와 퀴퀴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는 곳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여기가 리아빈이라는 곳인가요?” 루치드의 물음에 라보네가 들창을 닫으며 대답했다. “예. 예전에는 오고가기 힘든 늪이었다지만 지금은 마차정도는 지나갈 정도로 길이 만들어져서 위험하지는 않다네요.” 녹스로 올 때도 이 길을 이용했으니 신뢰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다만 덜 위험하다는 것이지, 위험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예를 들면. “부단주님. 뒤에서 말을 탄 무리가 쫓아오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누군가 쫓아올 때, 피할 곳이 없었다. 라보네의 음성이 떨리기 시작했다. 짐작은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정체는요?” “아직은 멀어서 확신은 못하지만, 갑주를 입었다는 것을 보니 어쩌면 녹스의 근위대일 확률이 높습니다.” 노상강도일리는 없고, 병력이라면 녹스에서 나온 병력일 것이다. 그리고 녹스의 병력 중 상시 갑주를 착용하는 병력은 근위대뿐이다. 라보네가 루치드를 돌아보았다. “어떡하지?” 루치드라고 딱히 방법이 있을 턱이 없었다. “속도를 더 내서 도망갈 수 없나요?” 리아빈의 길은 좁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땅 위에 난 길이 아니었다. 나무판을 덧대서 바닥에 깔아 길을 낸 탓에 속도를 내는 데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마차들을 끌고 다니는 상단이 말을 탄 병사들을 속도로 이긴다는 것 역시 말이 되지 않았다. “일단은 조금이라도 더 무리해서 달려 봐요. 최대한.” 멈추지 말자는 소리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뷰익은 이내 큰 소리로 상단 행렬에 명을 내렸고, 조금 더 빠르게 길을 내달렸다. “만일에 대비해, 벨로께서는 따로 말을 떼어내서 도주하시는 방법도 고려하셔야 할 겁니다.” 뷰익이 제시한 방안이 그나마 현실적으로 가장 최선의 방법일지도 몰랐다. 다만, 그 이후 상단일행들이 받을 고초들을 생각하면 부단주로서 쉽게 내릴 수 있는 방법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정도는 저희도 각오를 합니다만, 부단주가 잡히는 상황이 오면 상단 전체에 피해가 올 수 있습니다. 그것만은 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보네는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라보네는 말없이 지켜보는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루치드라고 해서 딱히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작 앞에서 허풍을 떨 때는, 그나마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말을 타고 달려오는 병력 앞에선 그저 힘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가세요. 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요.” 더 이상 자신 때문에 피해를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겼다. 이들이 쫓기는 것도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에 불편했는데 차라리 자신이 저들 앞에서 스스로 잡혀간다면, 어쩌면 이들을 잡아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미 늦었어. 너만 잡힌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야.” 라보네는 냉정하게 계산을 해보기로 했다. 루치드를 데리고 가는 것이 좋을 것인가에 대해. 만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은 아이였다. 마법사‘였’지만 지금은 그냥 어린아이다. 외적인 면만 따진다면 이 아이를 버리는 것이 옳다. 하지만 이 아이에게는 ‘특별함’이 있다. 웬만한 어른들보다 영리하고 기발한 면을 가지고 있다. 그 점은 상단을 운영하는 가문에 큰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이 아이가 특별한 점은 ‘마법’을 잘 안다는 것이다. 또 마법을 사용하지 못함에도 마법사를 홀로 상대할 수 있다는 점은, 조금 과장해서 ‘아카넬’에 비견될 정도의 가치다. 상인은 도박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도박에 가까운 확률에 몸을 던지는 것도 상인이다. “뷰익. 이 아이 데리고 갈게요.” “벨로! 두 사람은 무리입니다.” “아니요. 저희 둘 다 성인에 비하면 몸이 작고 가벼우니 말에 부담이 되지 않을 거예요. 말 한 필을 같이 타도 괜찮을 겁니다.” 뷰익이 대경하며 말려보지만, 라보네는 결심을 굳혔다. 루치드는 두 사람을 보며 난감해했다. 자신을 데리고 가겠다는 라보네의 결정에 고마움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무리한 선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께부터 생사를 나누는 선택지 앞에 자주 놓였다. 그리고 매번 선택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겨우겨우 살아남았고,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이번 선택이 지난번과 같이 둘의 목숨을 살리는 선택일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다. 오히려 루치드 개인으로서는 서로 나뉘는 게 옳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소년이 목소리를 내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부디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어느새 근위대의 병력이 상단의 후미에 다다랐다. 뷰익은 핼쑥한 얼굴을 하고 라보네에게 당부했다. “결코 뒤를 돌아보지 마시고 달려가십시오. 여기는 미력하나마 제가 돌보겠습니다. 설마 상단 전부를 적으로 돌릴 생각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억지웃음을 지으며 뷰익은 라보네를 보냈다. 라보네는 말고삐를 쥐었고, 루치드는 라보네의 등에 붙었다. “말 타본 적 있어?” 루치드는 고개를 저었다. “많이 흔들릴지 모르니까 꼭 붙잡아야 돼.” 라보네는 힘껏 말의 옆구리를 찼다. 갈색 갈기를 휘날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 루치드는 위아래로 요동치는 말의 움직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잠시만 멈춰달라고 사정을 해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결코 그럴 수는 없었다. “멈춰라!” 뒤에서는 근위대 병사 몇몇이 쫓아오고 있었다. 상단을 두고 떠난 라보네가 전심전력으로 말을 몰았던 탓에 근위대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다. 게다가 상단마차들이 길을 가로막으니 근위대들도 쉽게 쫓을 수 없었다. 하지만, 몇몇 상인들을 칼로 협박하며 정리를 시작하니 곧 라보네를 추격할 수 있게 되었다. “너희는 이들을 데리고 다시 녹스로 돌아가라. 그리고 너희들은 나를 따라서 도주한 여자와 아이를 잡는다.” 경비대장은 빠르게 명을 내리고 이내 앞서간 두 사람을 잡기 위한 추격전을 재개했다. 갈 길은 뻔했고, 다른 길은 없으니 기마술이 뛰어난 근위대가 금방 그들을 잡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당장 멈춰라, 그렇지 않으면 결코 가만두지 않으리라.” 잡혀도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아서 라보네는 계속 달렸다. 교양정도로 배운 기마술이었다. 근위대들을 따돌리기엔 턱없는 실력. 그나마 추격전이 쉬이 끝나지 않는 것은 그들의 말이 꽤 비싼 말이었다는 점과 두 사람이 탔음에도 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았다는 점―오히려 갑주를 입은 성인 남성보다 가벼웠을 게 분명했다―, 또 리아빈의 길 자체가 평야에서처럼 마구 달릴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루치드가 고개를 돌려보았다. 우중충한 잿빛 투구를 눌러쓴 근위대 병사 한 명이 바로 뒤를 쫓고 있었다. 그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광기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꽉 잡아!” 라보네가 정신없는 와중에도 자신의 허리를 붙잡고 있는 꼬마의 팔이 느슨해진다는 느낌에 외쳤다. 차라리 앞에 태울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뷰익이 반드시 뒤에 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탓에 그러마 했던 것이 지금은 너무 불안한 모양새가 되었다. 루치드는 엉덩이가 너무 얼얼했다. 말 등은 생각보다 딱딱했고 넓어서 루치드의 가녀린(?) 허벅지로는 제대로 감싸 안고 있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계속 중심이 흐트러졌는데, 그나마 라보네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있던 탓에 낙마하지 않고 있었다. “아이부터 떨어뜨려라!” 가장 앞서 달리던 병사가 허리춤에서 칼을 빼어들었다. 왼손만으로 고삐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칼을 늘어뜨린 채 빠르게 접근을 했다. 루치드는 더욱 허리를 세게 부여잡았고, 라보네는 조금 더 빨리 달리도록 말을 채근했다. 하지만 거리는 금세 가까워졌고, 병사는 칼을 들어올렸다. 라보네가 탄 말의 왼편에서 다가온 병사의 칼이 늪의 눅눅한 공기를 가를 때, 라보네는 고삐의 오른쪽을 급히 당겼다. 말은 오른쪽으로 튈 듯이 방향을 틀었고, 병사의 칼날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병사가 칼을 휘두른 사이에 말의 속도가 조금 느려졌고, 라보네는 조금 더 거리를 벌릴 기회를 얻었다. 마침 또 길이 구부러지면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병사는 칼을 든 손으로 고삐를 조종하느라 잠시간의 틈이 생겼고 그 사이 두 말의 사이가 벌어졌다. 루치드는 왼편을 쳐다보았다. 숨을 헐떡이면서 달리는 말의 얼굴이 보였다. 젖은 코에서 허연 콧김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루치드는 왼발을 뒤로 올렸다. 라보네의 허릴 붙잡고 있던 왼손을 뒤로 뻗어 신발을 벗었다. 달리는 말 위에서 하기에는 위험천만한 동작이었다. 때문에 라보네는 기겁을 했다. “뭐하는 거야!” 간신히 신을 벗은 루치드는 서둘러 라보네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옆을 바라보다가 왼손을 휘둘렀다. ‘달리는 말 위에서 신발을 던지면, 신발은 어떤 궤도로 날아갈까?’ 물리학을 좋아했던 소년은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실험을 강행했다. 사실은 궤도를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옆의 말이 너무 바싹 따라 붙은 까닭이었다. 날아간 신은 운 좋게도 말의 눈을 때렸다. 말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좌우로 휘둘렀고, 병사는 말의 통제력을 일순간 잃었다. 좁은 길에서 통제를 잃은 말이 달려 나간 곳은 다른 곳도 아닌 늪의 한가운데였다. “살려줘!” 제때 뛰어내릴 틈도 없었던 병사는 말과 함께 늪 안으로 들어갔다. 라보네는 놀란 눈으로 옆을 봤다가 다시 정면을 향했다. 바로 뒤에 붙었던 말이 떨어져 나간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다만 그 말의 최후가 너무 남 같지가 않다는 것이 불안한 이유였다. ======================================= [129] 추격자(3) “저놈들을!” 근위대장은 말에 박차를 가하여 속도를 높였다. 거칠게 투레질을 한 말이 더욱 힘을 내기 시작했다. 가까워지는 말발굽소리에 라보네가 뒤를 흘깃 보았다. “앞에!” 루치드가 비명을 질렀다. 놀란 라보네가 앞을 보고는 서둘러 고삐를 틀었다. 늪을 향해 달리던 말이 급히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리아빈의 길은 고저차는 적지만 좌우로 급격히 방향을 틀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조심하지 않으면 늪을 향해 들이받아야 했는데, 덕분에 근위대도 속도를 높이지 못해 이 아슬아슬한 경주가 지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근위대장은 달랐다. 화려한 마장술로 쫓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바로 라보네의 갈색 말 뒤를 바짝 달라붙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날카롭게 벼린 칼날이 섬뜩한 기운을 뿜으며 드러났다. “감히 대공국의 자작을 모욕하고 협박하고 살아나리라 생각했던 것이냐!” 루치드는 잠깐 이 상황에서 저런 외침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체포에 불응하고 근위대원을 죽음으로 몰아간 죄! 용서치 않을 것이다!” 라보네는 저 근위대장도 늪에 빠져 죽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빌었다. “어차피 네 놈들 모두 참형에 처할 것들, 온전한 몸으로 추포하려 한 나의 배려가 네놈들에게 가히 과하였구나!” 근위대장은 목이 터져라 소리치고는 칼을 높이 추켜올렸다. 그리고 그의 말이 라보네의 오른쪽으로 붙었다. 라보네는 말을 오른쪽으로 틀어 비집고 들어올 틈을 막았다.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야 했던 근위대장. 왼쪽을 노리면 왼쪽을 틀어막으니 서로 막고 막히는 경주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뒤에서 쫓아온 다른 근위대원이 틈을 노렸다. 근위대장을 막는 사이, 비어진 공간으로 치고 들어온 근위대원은 칼을 뽑아들었다. 루치드의 눈이 커졌다. 막아야 하는데! “죽어라!” 근위대원이 칼을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드는 칼이 루치드의 왼팔을 가르기 직전! ―챙!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근위대원의 칼이 뒤로 튕겨나갔다. 뿐만 아니라 어디선가 날아든 단도 역시 불꽃을 튀긴 뒤, 늪으로 빠졌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어안이 벙벙한데, 달려가는 방향에서 늪 안개를 헤치고 나타난 무리들이 있었다. “뭐냐! 너희들은!” 근위대원이 붉어진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곧 근위대원은 바닥을 굴렀다. 낙마한 대원의 목에서는 단도가 박혀있었다. 근위대장의 안색이 변했다. 하지만 위기는 근위대장만의 것이 아니었다. 길을 막고 선 이들 때문에 라보네 역시 더 이상 말을 달릴 수 없었다. 급히 말고삐를 잡고 제동을 걸었다. 그 틈에 근위대장이 라보네의 옆으로 달리며 동시에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 칼은 라보네를 향하지 않았다. ―챙!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날아든 단도가 다시 금속음을 내며 바깥으로 튕겨졌다. 하지만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몇 개의 단도가 위 아래로 던져지니, 애써 칼을 휘둘러 피해보려 했지만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말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면서 앞발을 드니 어쩔 수 없이 말에서 뛰어내려야만 했다. 라보네가 바로 몇 발짝 앞에 있는데도, 길을 막아선 이들 때문에 더 가까이 갈 수가 없었던 근위대장이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냐? 누구 길래 녹스 근위대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냐?” 감히 대성(大城) 근위대의 일을 방해하는 이가 있다니! 근위대장이 이를 가는 사이, 길을 막고 있던 여러 사람들 중 한 사람이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당신들에게는 해를 끼치고 싶지 않소. 우리는 여기 이 여자만 데리고 가면 되오.” “너희들의 정체부터 밝혀라!” “…….” 무도한 무리들은 끝끝내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이 뒤따라온 근위대 7명이 차례로 하마(下馬)하여 근위대장 곁에 섰다.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너희 역시 준엄한 칼날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 기묘한 대치상황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라보네와 루치드는 말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가운데서 눈치만 봤다. “누군지 알겠어?” 라보네가 작은 목소리로 루치드에게 물었지만, 당연히 알 턱이 없는 루치드였다.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모르겠지만, 하나는 분명해 보이네요.” “뭐?” “저 사람들도 우릴 가만히 두질 않을 것이라는 거요.” 루치드는 눅진한 공기를 뚫고 찔러오는 죽음의 기세를 느꼈다. 저들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고, 호의를 가장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에 이런 대치 상황이 벌어졌을 뿐이었다. 만약 저들과 근위대의 목적이 서로 일치한다면 이 대립은 계속 되겠지만, 만약 다른 목적이고 서로에게 침해가 되지 않는다면 이 대치는 평화적으로 풀릴 가능성이 있다. 물론 그 평화가 루치드에게도 평화롭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하지?” 이 누나는 자신의 무기를 쓸 줄 모른다. 다만 지금은 그 무기를 쓰기에 적당한 타이밍이 아니니 일단 입을 닫았다. 대신 루치드 나름대로 이 사태를 돌파할 만한 방법을 강구했다. 만약 근위대뿐이라면, 혹은 앞에 무리뿐이라면 아무런 방책이 있을 리 없지만, 이런 3자 구도라면 변수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원래 3차 방정식이 2차 방정식보다 복잡한 법이니까. “3차 방정식이 해결되려면 등식이 3개가 필요해요.” 루치드의 중얼거림에 라보네가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며 물었다. “즉, 3차 방정식이 해결되지 않게 하려면 등식이 3개가 되지 않으면 되죠.” 이런 상황에서도 엉뚱함을 보이는 루치드의 태도에 라보네는 처음부터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했던 것이 아닌가 자책하는 시간을 가졌다. 라보네가 팔자 좋게 현실도피를 하는 동안, 루치드는 길을 막아선 복면인들을 바라보았다. “저기요.” 앞에 나섰던 복면인이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여기 왜 오신 거예요?” 복면으로 가려졌지만, 왠지 비웃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눈이었다. “겁도 없는 꼬마구나. 너야말로 도대체 뭐 길래 여기에 있는 것이냐?” 한 가지는 알았다. 저들의 목적은 라보네라는 것. “아저씨들이 찾는 게 저희들한테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복면인의 눈이 굳어졌다. “무슨 소리냐?” “저희가 가지고 있지 않다면요?” “웃기는 소리. 그렇게 말하면 풀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루치드의 입이 굳었다. 저들은 물건을 찾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게다가 그 물건은 큰 부피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최근의 사태들을 돌아보면 저 사람들이 찾는 게 달리 있지 않을 것 같다. “저희가 옷을 모두 벗어도요?” “뭐?” “뭐?” 루치드의 말에 복면인은 물론, 라보네도 고개를 돌려 루치드를 보았다. “저희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저희가 입고 있는 옷 모두를 저자들에게 주면 되잖아요.” “너 미쳤니? 내가 이 자리에서 옷을 어떻게 벗어?” “아.” 루치드는 머리를 긁었다. 생각해보니 라보네는 옷을 벗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도 체육시간에 여자아이들이 옷을 갈아입을 때, 남자아이들은 교실에서 나가야했다. 여자아이들의 몸을 보는 행위가 관습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이해한 루치드였다. “저기, 죄송한데 어떻게 하면 저희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죠?” “…정말 건방진 녀석이로군. 몇 마디 받아줬다고 저렇게 위아래 없이 구는 놈은 생전 처음이다. 그리고 도대체 우리가 뭘 찾는 줄 알고 그리 말하는 것이냐?” “아카넬이요.” 루치드가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굳었다. “너, 아, 아카넬이 무엇인지 알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냐?” 복면인이 애써 침착을 찾으려 했지만,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도저히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애초에 명령을 받고 나올 때, 아카넬에 대한 이야기는 오직 자신만 들었다. 그리고 자신은 용살대 부대장에게만 이야기를 했다. 즉, 여기 모인 10명 중 단 2명만 아는 정보였다. 그리고 거기까지만 알아야 할 내용이었다. “아카넬은 전설에 나오는, 붉은 마법의 씨앗이라고 불리는 것이죠. 실제로는 어떤 꽃의 열매인데, 죽은 사람도 살리는 열매라고 알려져 있죠. 그걸 찾으러 오신 거 아닌가요?” 루치드는 꽤나 또렷한 발성과 발음으로 아카넬에 대해 설명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오노 공국에서 나름 윗선의 일들을 처리하면서 지냈던 용살대였다. 당연히 아카넬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이 자리가 그 아카넬을 차지하기 위해 왔다는 것을 아는 이가 없었을 뿐이었다. 루치드는 그들의 반응을 몰래 살폈다. 분명 동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반대쪽도 살펴야 했다. 근위대 쪽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카넬이라고?” 심지어는 근위대장마저 몰랐다. 단지 자작을 협박하고 모욕했다는 이야기만 들었기에 충정심에 대로(大怒)하여 달려온 참이었다. “누나, 아카넬을 먹으면 죽은 사람도 살린다고 했죠?” “어? 어, 그렇지.” 라보네도 미묘하게 바뀐 분위기를 느꼈다. “살아있는 사람이 먹으면 어떻게 돼요?” “살아있는 사람?” “건강한 사람이 먹으면 어떻게 되나요? 거기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요.” “…불로장생한다고 하지.” 아, 그래서 이렇게 다들 죽자고 달려드는 것이었군. 단순히 치료약인줄로 알았던 루치드는 그제야 이 반쯤 실성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노려보는 이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사실은 다르다. 전설일 뿐이고, 마법사가 인정한 헛소문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 모인 용살대와 근위대에게는 헛소문이 아니었다. “아카넬 찾으러 오신 거 맞죠? 그런데 저희는 없어요.” 개도 웃지 않을 소리다. 범인이 재판장에서 저 범인 아니에요, 라고 말하면 아, 그렇구나 하고 믿어줄 재판관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 놈들 무슨 헛소리들을 지껄이는 것이냐!” 복면인은 일단 아이의 말을 부정했다. 이 일이 ‘아카넬’에 얽힌 일로 진행되면, 아무리 용살대라고 해도 위험하다. 게다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증인이 될 터인데, 만약 한 사람이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면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자신으로서도 예측하기 힘들었다. 비단 저 앞의 무리들뿐만 아니라, 용살대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무려 아카넬에 관련된 일이니. “그럼 왜 오신 거예요? 저흴 구하려고 오신 건가요?” 용살대에게 공식적으로 내려온 지시는 까타라 상단의 부단주인 라보네를 붙잡아 오라는 것이었다. ‘붙잡다’와 ‘구하다’가 의미는 다르지만 행위의 결과는 비슷하니 그렇게 밀어붙여도 무방하리라. “그렇다!” 루치드는 고개를 돌렸다. 근위대장이 칼을 든 채 노려보고 있었다. “저희는 저분들 따라갈게요.” 뭐? 근위대장의 눈이 커졌다. 누가 봐도 저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저들을 따라가? “너 바보냐?” 라고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저씨들은 저흴 죽이겠다고 했지만, 저분들은 저흴 구하겠다고 하니 저분들을 따라가겠다는 거예요.” 루치드가 어리바리하게 서 있는 라보네의 손을 잡고 끌었다. “가요, 누나.” 루치드가 복면인들을 향해 발을 떼는 순간. “멈춰라!” 근위대장이 소리쳤다. “한 걸음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루치드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복면인들에게 말했다. “어떡하죠?” 복면인은 상황이 유리한 것인지, 불리한 것인지 판단이 제대로 서질 않았다. 저들이 순순히 따라온다니 좋은 일이긴 한데, 이대로는 근위병들과 부딪힐 수밖에 없다. 불필요한 충돌이 벌어지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와라.” 지금은 이미 늪에 빠진 상황. 어찌해도 충돌이 피할 수 없다면 조금 더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몰아야 했다. “멈춰라! 멈추지 않으면 각오해야 하리라.” 복면인이 보니 저쪽은 근위대장을 포함해 8명, 자신들은 10명이다. 수적 우세, 라고 생각할 무렵, 공교롭게도 근위대 뒤쪽으로 새로운 병력이 도착했다. 애초에 녹스에서 출발할 때, 최소한의 근위병을 제외하고 30명이 출발했다. 이후 상단에 발이 붙들렸을 때, 즉시 달려 나갈 수 있는 8명이 루치드의 뒤를 쫓았고, 남은 근위병들은 상단을 수습하여 5명은 상단과 함께 녹스로 떠나고 나머지는 근위대장의 뒤를 쫓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근위병들은 총 24명이 되었다. 복면인의 얼굴이 검게 변해버린 순간이었다. “근위병 전원 돌격 준비.” “핫!” 복창 후 일제히 칼을 꺼내든 24명의 근위대. 적어도 이들은 아카넬이란 말에 흔들리기 전에 엄격한 군기에 의해 상명하복이 생활화된 직업군인들이었다. 게다가 근위대장이 침착하게 전투준비를 명하자 기계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명령에 복종했다. 급작스럽게 상황이 변해도 리더가 침착함을 유지하고 부하들에게 신뢰를 보여준다면, 부하들은 안심하고 리더의 명에 따르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부하들은 상황의 복잡성을 단순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리더의 명을 따름으로서 상황을 해결하려는 의지에 순응한다. 아카넬이라는 변수는 부하들의 침착성을 뒤흔들 여지가 크지만, 근위대장은 변수를 생각지 않도록 하였다. 지금 그들이 맞닥뜨린 것은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 적, 복면인들이었으니까. “제길.” 복면인이 입술을 짓이기며 한 손을 치켜들었다. 뒤에 선 복면인들도 칼을 꺼내들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반전되었다. ======================================= [130] 추격자(4) “어떻게 할 거야?” 라보네는 잔뜩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양쪽의 눈치를 봤다. 두 진영의 가운데에 선 두 사람이 신호만 주면 그 즉시 충돌이 일어날 것처럼 보였다. “어느 쪽이든 안전하진 않을 것 같네요.” 루치드도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일단 본인이 원한대로 판은 뒤집혔다. 복면인이 원하는 답, 근위대가 원하는 답, 그리고 루치드네가 원하는 답. 그 세 가지는 결국 상충할 수밖에 없었다. 아카넬이라는 변수를 던져서 각자의 등식에 오류를 만들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루치드가 원하는 답을 구하기 위한 새로운 등식을 성립시킬 차례. 우선은 루치드가 주도하는 판을 만드는 것이 첫 번째. 하지만 여기에 또 다른 변수가 있으니 이 전장에서 루치드만 목소리를 낼 줄 아는 것은 아니었다. “네놈들! 정체를 밝혀라! 그렇지 않으면 모조리 늪귀신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수적우세를 차지한 근위대장이 한층 힘이 붙은 목소리로 호령했다. 복면인의 수장격인 남자는 대답대신 손에 쥔 칼을 높이 들었다. 하지만 항전의 의미는 아니었다. 누가 봐도 불리한 형국에서 무리하게 싸움을 벌일 이유 따위는 없었다. 자신들이 비록 윗분들이 곤란해 하는 일들을 처리하는 해결사들이었다지만, 충심을 드러내는 조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정체를 드러내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생업(生業)의 특성상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여자만 있으면 되오.” 말 그대로 여자만 있으면 된다. 여자가 아카넬을 품고 있다면 더 좋겠지만. 그리고 그럴 확률이 높다고 여겼다. 건방지고 철없는 꼬마에게 그런 귀한 보물을 맡길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자를 우리에게 양보하면, 이대로 조용히 물러나겠소.” 일단 협상을 해봐야 했다. “웃기는 소리! 그 여자도 저 꼬마랑 한 패거리다! 공국의 자작을 모욕하였으며 신의를 저버린 불한당이란 말이다!” 애초에 두 사람을 잡아가는 것이 목적이었다. 다만 여자가 귀족이라는 점, 그리고 자작에게 직접적인 협박을 가한 상대는 꼬마라는 점 때문에 복면인의 제안은 들어줄 법도 했다. ‘아카넬’이라는 이름이 거론되기 전이었다면 말이다. 이제는 다른 어떤 이유로도 저 여자가 중요해졌다. 때문에 근위대로서도 포기할 수 없는 상황. “셋을 셀 동안 물러서지 않으면, 이대로 모두 죽을 줄 알아라!” 근위대장은 다시 한 번 경고를 했다. 유리한 상황에서 시간을 끌며 저들에게 기회를 줄 필요가 없었다. “하나!” 물론 자진하거나 항복을 한다면 더 없이 좋겠지만. “둘!” 루치드는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이 사태를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평화적이든 비(非) 평화적이든 제 1목표는 탈출이다. “셋!” 복면인들은 무릎을 굽히고 칼을 세웠다. 근위대원 역시 칼을 비스듬히 눕히고 앞선 발에 힘을 주웠다. “잠시 만요!” 루치드가 소리쳤다. 그리고 일순간 높아지던 긴장감은 맥이 끊겼다. 복면인들이나 근위대나 모두 아무 말도 못하고, 루치드를 쳐다보았다. 분노와 호기심이 공존했고, 긴장과 안도가 함께했다. “꼬마, 뭐하는 짓이냐!” 근위대장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니 루치드는 한순간이나마 머릿속이 텅 비는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단련된 군인의 살기는 다른 범죄자들의 그것들과는 사뭇 달랐다. “굳이 싸울 필요는 없지 않아요? 여러분들께서 싸우시면 분명히 죽는 사람이 나올지도 몰라요. 그러기보다는 서로 이야기를 통해 각자가 만족할 수 있는 방안을 합리적으로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요?” 대원칙은 탈출이지만, 안전하게 탈출하기 위해선 서로 대화를 통해 틈을 만들거나 혹은 평화적인 결론을 도출해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두 편이 모두 머뭇거렸던 것은 아무래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 때문일 테니까. 그 때, 근위대장이 굽혔던 허리를 천천히 펴기 시작했다. 뒤에 뒀던 발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고개를 바르게 들고 정자세로 섰다. 칼을 든 손을 내리고 칼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차렷 자세가 된 근위대장이 얼굴을 굳히고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자작께서 왜 너를 잡으라 하셨는지 알겠구나.” 조금 전까지 늪안개를 몰아낼 정도로 크게 호령하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낮고 음산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어린 놈. 넌 감히 그 가벼운 혀를 놀려 우리를 장난감처럼 다루려 하였구나.” 루치드의 눈이 커졌다. 절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근위대장의 기세에 밀려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우리는 녹스의 근위대다. 수없이 많은 나날을 단련하며 몬스터와 강도와 비적들로부터 녹스를 지키기 위해 싸워왔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다.” 처음부터 근위대로 뽑히지 않았다. 경비대원으로 경력을 쌓던 중 출중한 실력을 보인 자들에 한해 엄격한 기준 아래 선별된 이들이 바로 근위대. “우리가 수십 년간 쌓아온 명예와 신념을 한낱 종이쪼가리 다루듯 이야기하고, 목숨이 아까워 벌벌 떠는 겁쟁이로 취급하는구나.” 근위대장의 말이 이어질수록, 뒤에 선 근위대원들의 자세도 변하기 시작했다. 차렷 자세로 반듯하게 서기 시작한 근위대원들의 기세는 조금 전까지 근위대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근위대.” “예!” 낮은 호명에도 하나처럼 복창하는 근위대. “우리의 명예와 신념이 저 꼬마 놈의 혀에 휘둘렸다는 게 부끄럽다.” 근위대의 눈빛에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두려움? 공포? 오직 적개심과 분노만이 자리하는 눈빛들이었다. 루치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책임지겠다. 너희들은 눈앞의 적들을 모두 죽여라. 베고 쓰러뜨려라. 저 아이, 저 여자 모두 죽여라. 우리의 명예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라. 내가 책임지겠다.” 자작은 아이와 여자를 산채로 잡아오라고 했지만, 그런 건 이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에 대한 책임은 근위대장이 진다. 근위대는 오로지 자신들의 명예를 위해 싸우기만 하면 된다. “죽음 앞에 두려움을 보이는 사람 있는가?” “없습니다!” “저들과 싸우는 것이 두려운 사람 있는가?”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싸우겠는가?” “예!” 근위대장이 칼을 치켜 올렸다. “죽여라.” ―와! 거센 기합과 함께 근위대가 돌격을 시작했다. 복면인은 서둘러 명을 내렸다. “막아라! 아이와 여자를 보호하라!” 용살대 역시 뛰쳐나갔다. 복면인은 굳이 아이와 여자를 살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근위대가 죽이려 한다면, 살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보네야 자신들이 기습을 감행한 목적이자 목표이니 당연한 것이고, 저 아이도 말하는 본새는 건방지고 철이 없지만, 아카넬을 잘 아는 아이였다. 그에 대한 정보도 많이 알고 있을 듯하니, 우선 살려두고 볼 일이었다. 죽이더라도 자신들이 죽여야지, 근위대의 손에 뺏기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용살대 역시 기합과 함께 달려가 근위대와 칼을 맞댔다. 이내 서로간의 죽고 죽이는 혈투가 시작되었다. 그 와중에 용살대의 한 명이 루치드와 라보네를 데리고 용살대 뒷길로 인도했다.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둘을 보호할 속셈이기도 했고, 여차하면 인질로 삼아보자는 생각도 있었다. 인질이 될지 안 될지는 또 모르는 거니까. “죽어!” 싸움에 대응한 또 다른 이유는 용살대의 실력에 대한 믿음이었다. 저들이 몬스터나 비적과 싸웠던 경험이라며 말한 것들은 이미 지난 과거의 일이었다. 반면 용살대는 최근까지도 현장에서 실력을 쌓으며 살아남은 최상의 실력자라는 믿음이 복면인에게 있었다. “윽!” 용살대원의 칼이 비스듬히 올려쳐지며 근위대원의 가슴을 갈랐다. 큰 동작의 틈을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또 다른 근위대의 공격은 옆에서 대신 막아주는 용살대원에 의해 무위로 돌아갔다. 수가 적어도 충분히 싸워볼만 하다고 생각한 복면인의 판단처럼 용살대는 적절히 합격술을 펼치면서 근위대와 호각세를 이루었다. 루치드와 라보네를 호위하여 뒤로 물렸던 또 다른 용살대원은 전장의 상황을 보더니, 생각을 고쳤다. 이들이 도망가고 말고는 두 번째 문제였다. 우선은 동료들이 살아야 이 모든 게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용살대가 싸움에서 지면, 이 두 사람이 죽던지 도망가던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 용살대원은 칼을 뽑아들고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24대 10의 싸움, 아니 지금 근위대 2명이 쓰러졌으니 22대 10의 싸움이다. 승산이 없진 않다! 루치드는 멍한 눈으로 전투를 바라보았다. 제윅의 마법에 의해 낙엽처럼 나가떨어지던 싸움의 광경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날카로운 쇠와 쇠의 부딪힘이 이어졌고, 그 소리와 불꽃이 눅눅한 안개를 태울 정도였다. 피가 튀고, 살이 갈라지는 와중에 새된 비명과 악에 찬 함성이 터져 나와 늪지를 울렸다. 진짜 야만은 바로 눈앞의 광경이었다. “이 때야. 지금 도망가야 돼.” 라보네가 루치드의 어깨를 짚었다. 루치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어깨와 동공, 그 속에 감쳐진 두려움과 공포심.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는 이 전장의 광기에 전염되지 않은 유일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는 이러한 광경을 자주 보아서 익숙한 것일까? 목을 베어 피가 흩뿌려지고, 날아오는 칼을 막기 위해 들었던 팔이 절단되어 바닥을 구르고, 옆에서 날아온 눈 먼 칼에 얼굴이 베어져 비명을 지르는 이 광경이 익숙해질 수 있는 광경일까? 아니 태연히 감상할 수 있는 광경일까? “뭐해? 정신 차려!” 라보네는 루치드의 손을 붙잡고 반대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루치드는 아무 생각 없이, 이끌리는 대로 발걸음을 맞춰 뛰어갔다. **** 얼마나 뛰었을까? 역시 먼저 제풀에 지친 것은 라보네였다. “더 이상 못 뛰겠어.” 너무 숨을 헐떡대는 바람에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루치드는 뒤를 돌아보고 귀를 기울였다. 숨을 몰아쉬는 라보네의 숨소리만이 들렸다. “쫓아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아요.” 안개가 이정도로 낮게 깔린다는 말은 기압이 낮다는 말. 기압이 낮으면 소리도 멀리 전달된다. 게다가 소리는 습도가 높을 때 크게 들린다. 그런 조건 하에서도 들리지 않는다는 말은 잠시 쉬어갈 시간은 된다는 이야기와 같았다. 라보네는 루치드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지금은 그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그냥 오지 않는다고 하는 말을 믿고 싶을 뿐이었다. “얼마나 더 가야되나요?” 루치드의 물음에도 라보네는 답할 수 없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한 터라 주변을 살피며 왔던 것이 아니었고, 설령 보았다고 해도 기억할 리 없었다. 주변은 여전히 안개가 자욱한 늪지대였고, 아까와 지금이 어떻게 다른지 제대로 구분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루치드가 보기에도 딱히 다른 점을 찾기가 어려우니 뭐라고 따질 계제는 아니었다. “정말 너 대단하구나. 아니 대단하시네요.” 루치드는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싶어 라보네를 바라보았다. “마법사나 자작 앞에서도 대단하다고 생각은 했어요. 솔직히 미쳤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놀랐어요. 어떻게 거기서 두 편을 싸움 붙일 생각을 했대? 난 도저히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반쯤 포기하고 있었거든.” 존대와 하대가 뒤죽박죽 섞인 말투로 말을 꺼내는 라보네는 진심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 심란한 루치드였다. 루치드는 결코 둘을 싸움 붙일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까. 미친 사람처럼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달려드는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솔직히 무서웠다. 그들의 행동과 그들의 사고방식이. 루치드는 자신의 말이 불러온 결과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목숨보다 명예, 의리, 신념을 중요시 한다는 근위대장의 말은 일견 멋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외골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목숨만이 아니라 부하의 목숨까지도 책임져야할 근위대장이 명예와 위신이라는 명분으로 목숨을 초개까지 여기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도리어 루치드가 다른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았다고 여겨질 만큼. “그들이 죽고 사는 것은 그들의 운명이죠. 우린 그저 살아남았다는 것에 기뻐하면 되는 거예요.” 루치드가 넌지시 자신의 고민을 말하자, 단호하게 선을 긋는 라보네였다. 다만 루치드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생각을 부정하진 않았다. ======================================= [131] 추격자(5) 주위를 둘러보던 루치드는 여전히 짙은 안개에 싸인 늪과 짙은 녹빛의 수초들이 자신들을 아우르고 있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시간이 지체되고 있음을 떠올렸다. 지금은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을 시간이 아니었다. “그만 가요.” 지금쯤이면 아무리 못해도 싸움이 결판났을 것이다. 한쪽이 모두 죽었거나, 혹은 한쪽이 도망을 치거나. 둘 모두 루치드와 라보네의 안전을 담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나무 바닥 위에 주저 앉아있던 라보네가 끙끙거리며 일어났다. 후들거리는 무릎을 붙잡고 잠시 멈춰있던 라보네가 호흡을 가다듬고는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루치드로서도 딱히 그녀를 도울 방법은 없었다. 그저 열심히 달리는 수밖에는. **** “헉헉!”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태어나 이렇게 오랫동안 달린 적이 없었다. 다시 한 번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지금 쉰다면 그대로 끝이다. “힘내요.” 옆에서 달리는 꼬마는 정말 잘 달렸다.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달리기만 해온 사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꼬마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물론 자신보다는 편해보였다. 자신은 죽기 바로 직전이니까. ‘이렇게 죽나 저렇게 죽나 똑같다면….’ 라보네는 속도를 늦추더니 이윽고 멈춰버렸다. 앞서 달리던 루치드도 이를 알아채고는 달리기를 멈췄다. “나, 더 이상, 못 뛰겠어.” 루치드가 봐도 무리였다. 라보네의 입술이 파랗게 질릴 정도였으니까. 눈 아래를 가렸던 면사도 땀에 절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루치드는 라보네의 뒤를 바라보았다. 아까보다 더 크게 들려오는 뜀박질 소리였다. 아직 저들의 정체는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절걱거리는 갑주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아마도 복면인들 무리가 아닐까 짐작해볼 따름이었다. “괜찮아요. 쉬세요. 이만큼이면 최선을 다한 거예요.” 루치드가 라보네에게 다가왔다. 라보네는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짚은 자세로 호흡을 급하게 들이쉬고 있었다. 루치드는 라보네를 지나쳐 점점 다가오는 소리들과 마주섰다. 그리고 이제 이 상황에서 어떤 작전을 취해야 할지를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 “헉헉!”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칼을 쥔 손끝에 힘이 빠져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장시간 칼을 휘두르는 것도 힘든 판국에 사생결단의 각오로 칼과 칼이 맞부딪히기를 여러 번 하니, 더욱 악력의 소모가 빨랐다. “대장!” 아무리 근위대장이라고 해도, 이런 싸움의 한 복판에서 잠시 한 눈 팔다간 거기서 끝이다. 명패는 싸움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다만 명패가 쌓아온 신뢰는 도움이 된다. “윽!” 뒤에서 날아드는 칼을 막아낸 부하가 부지불식간에 지른 비명에 근위대장이 정신을 차렸다. 앞발을 내질러 눈앞의 적을 밀어낸 후, 뒷발을 중심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그리고 부하를 향해 두 번째 공격을 가하는 복면일당의 허리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불행히도 이들은 실력이 너무 뛰어났다. 공격을 가하던 순간이었음에도 방심하지 않았는지, 공격방향을 억지로 틀어 허리로 향하는 칼을 제쳐낸 후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여유까지 보였다. “괜찮냐?” “예… 괜찮습니다. 아직 싸울 수 있습니다.” 이미 많은 부하들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였다. 목을 부여잡고 땅에 쓰러지는 이들, 가슴에 칼을 박고 늪으로 밀려 쓰러지는 이들, 텅 비어버린 어깨를 붙잡고 오열하다 목을 잃은 이들까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급급한 상황에서도 근위대장은 부하들의 죽음을 한 눈으로 담아야 했다. “좋다. 그럼 싸워라. 너도 이제 몸이 풀리지 않았느냐.” 딴에는 농담이라고 하는 것일까. 그러나 부하는 히죽 웃으며 부들거리는 팔을 들어올렸다. “예, 이제 예전 실력이 나오려나 봅니다.” 당장 둘러봐도 갑주를 입고 선 이가 10명이 되지 않았다. 물론 상대도 줄긴 줄었다. 둘러보니 대략 5명 내지 6명? “우선 이 앞의 놈들부터 처리하고 가보자.” “하압!” 부하는 우렁찬 함성과 함께 칼을 휘둘렀다. **** “아직도 안 보이는군.” “꽤 멀리 도망갔나 본데요?” “그래봐야 여자와 꼬마다.” 사실 처음 뒤를 쫓을 때는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말한 것처럼 여자와 꼬마였으니까. 아무리 싸움에 지친 몸이라도 그간 전장에서 구른 실력이 어디 가겠는가? 이제 수적으로 2배 이상인 근위대와 부딪히고도 살아남은 이들이니 실력으로는 당당히 앞에 설만한 자격을 가진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와 꼬마는 쉽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조급해하지 않았다. 어쨌든 길은 하나니까. “말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사실 너무 긴 시간 벌어진 싸움 통에 놀란 말들이 모두 그냥 도망갔을 것이다. 도망가다가 잘못하여 늪에 발을 담그면, 그대로 끝. 특히 앞머리가 무거운 말들은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지기 일쑤였다. 복면인은 잠깐 고개를 돌려 따라오는 이들을 보았다. 10명이 가서 4명이 돌아오는 참사가 벌어지고 말았다. 근위대를 이겼다는 공적은 자랑할 만하지만, 그럼에도 반 이상이 죽어버린 탓에 앞으로의 활동에 지장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대장, 그런데 말입니다. 그 꼬마가….” “쉿.” 복면인은 말을 막았다. 아카넬에 대한 이야기는 굳이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 좋았다. 지금 당장은 그랬다. 처절한 싸움에서 살아남았다는 기쁨도 있지만, 동료를 잃었다는 아픔도 함께한 지금, ‘아카넬’에 대한 이야기는 좋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다만 생각해볼 여지는 있었다. ‘아카넬’이 있다면, 그게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이용하여 용살대의 세를 불릴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자면 반드시 그 꼬마나 여자가 ‘아카넬’을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고기 조각으로 만들어 늪에 던져주마.’ 이 모든 싸움이 허무하게 끝나지 않길 바라며 복면인은 달렸다. **** “저 소리?” 라보네의 귀에도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다. 라보네가 주춤거릴 때, 루치드가 옆에 서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돌아보는 라보네에게 루치드는 담담하게 말했다. “차분하게 행동하시면 되요. 절대 당황하지 마시고요.” 그리고 다가오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늪 안개를 뚫고 나타난 사람은 총 4명. 가죽으로 된 재킷과 바지에는 온통 핏자국이어서 얼핏 보면 붉은 가죽이라 착각할 법한 모양새였다. “여기까지 오다니, 꽤 열심이었나 보군.” 복면인들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남자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루치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 4명을 바라보았다. “자, 그럼 같이 갈까?” 루치드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는 듯, 복면인들은 여유로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근위대는요?” 루치드가 물었다. “그네들이야 그들의 소원대로, 명예를 지키게끔 도와주었지.” 어찌나 열렬히 애원하던지. “잠깐만요.” 앞서 걷던 복면인이 슬쩍 손을 올렸다. 그러자 뒤따르던 이들이 모두 제자리에 서서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왜? 아까처럼 입방정 떨어보시게?” 비아냥대는 복면인에게 루치드는 되도록 침착하게 보이게끔 노력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희는 아카넬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그건 아쉽네. 그런데 상관없어. 앞으로 천천히 알아보자고. 아직 갈 길이 머니까 시간은 많아.” “왜 저희들을 데리고 가려는 거죠?” “정확히 말하자면, 우린 저 여자가 필요한 거야. 저 여자를 보고 싶어 하는 분이 계셔서 말이야.” “그렇다면 굳이 그 자리에서 기다리지 않으셔도 되잖아요? 이 길이 하나라면 늪이 끝나는 위치에서 기다리셔도 되는 일 아니었나요?” “그랬다면, 너희들은 근위대에게 잡혔겠지? 오히려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루치드는 주먹을 꽉 쥐고 복면인을 바라보았다. 능글거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복면인의 태도는 분명 자신들이 우위에 있음을 알고 여유를 부리는 것이겠지. 분명 저들은 호의적이지 않으며, 라보네는 분명 그다지 좋은 대접을 받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국 남는 것은 도망뿐이다. 단지 도망갈 길이 없다는 것. 그렇지만 루치드도 그들을 기다리며 멍청하게 시간만 보냈던 것은 아니었다. “누나.” 이제껏 바싹 굳은 자세로 상황을 주시하던 라보네가 루치드의 물음에 화들짝 놀랐다. “누나.” 다시 한 번 부르자, 머뭇거리던 라보네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앞으로 나섰다. “호오, 여자를 희생시키고 대신 자신은 도망가겠다는 건가?” 복면인이 이 우스꽝스러운 사태에 비소를 날렸다. 실컷 입방정을 떨더니 결국은 여자를 앞에 세우는 꼴이라니. 이래서 꼬마들이란. 게다가 덜덜 떠는 저 꼴을 보니 우습지도 않다. “어이, 벨로. 그런다고 우리가 그 애를 포기할 거 같소?” 복면인은 피식 웃으며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뒤에 선 3인이 라보네를 향해 다가왔다. 그 때 루치드는 라보네 뒤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라보네의 어깨를 짚었다. “누나.” 라보네는 숨을 크게 들이쉰 후, 손을 들어 면사의 끝을 붙잡고 당겼다. 루치드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마법 이상으로 강력한 힘이 바로 신의 힘이었다. 그런데 정작 라보네는 그 힘을 저주라 생각하는지 늘 감추려고만 했다. 그런데 굳이 이런 상황에서 감출 필요가 있을까? 신의 힘은 라보네가 가진 강한 무기인데. 라보네의 얼굴이 들어나자, 다가오던 네 사람은 순간 정지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동공은 풀리고, 입은 자연스럽게 벌어지면서 어떤 이는 그 사이로 침이 흐르기까지 했다. 다행히도 복면으로 가려진 터라 흉측할 뻔 했던 그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었다는 게 라보네에겐 다행이었다. 이럴 때, 뭐라고 했더라? “Mera Vera.” 루치드는 중얼거리며 상황을 주시했다. 그리고 완전히 동작이 멈췄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루치드는 라보네의 어깨를 짚은 채로 뒤로 물러섰다. “천천히요.” 라보네는 루치드에게 의지한 채로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여기서부터는 어떻게 상황이 전개될지 알 수 없었다. 라보네가 자신의 힘을 시험해본 적이 없었기에, 저 현상이 일시적인지 아니면 반영구적인 것인지, 혹은 얼굴을 보지 않으면 다시 움직일 수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이렇게 뒷걸음질로 천천히 물러나는 방법을 선택했다. 대신 루치드가 길을 돌아보면서 라보네가 넘어지지 않게 도와야 했다. “괜찮을까?” 루치드의 손으로 전해지는 떨림만으로도 라보네가 얼마나 많이 긴장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일단은 해보는 수밖에 없어요.” 만약 자신이 힘이 좋다면, 저들이 움직이지 못할 때 다가가 때려눕히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 정도로 자신의 힘을 자신할 수 없기도 하거니와 누군가를 때려본 적이 없던 루치드였다. “조심하세요. 오른쪽으로 돌아야 해요.” 전진하는 방향에서 왼쪽으로 틀어지는 길이었다. 그렇게 조심해서 멀어지던 와중, 가장 뒤에 섰던 사내가 꿈틀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뛰어요.” 라보네는 즉시 등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루치드가 뒤따르면서도 복면인들의 상태를 계속 확인했다.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자, 굳었던 몸이 풀린 이들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몸이 굳은 게 아니라 정신이 굳어버렸다고 해야 옳겠다. “이 놈들이 잔 수작을!” 복면인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침을 느꼈다. 고생고생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이름도 모르는 꼬마 애와 여자 하나에게 농락당했다는 생각이 들자 분노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복면인들은 빠르게 뛰었다. 그들은 금방 뒤를 쫓았다. 그런데 문제는 라보네가 뒤를 흘깃 돌아볼 때마다 움직임이 멈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도 모르게 ‘지구’에서 유행하는 골목 놀이를 하고 있는 셈이었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은 그 놀이가 재미없었다. “제기랄!” 육두문자를 입에서 굴려대도 방법이 없었다. 그 때 머리를 쓴 것은 다른 복면인이었다. “대장, 차라리 상처가 나더라도 잡는 게 우선 아니겠습니까?” 너무 온전한 상태로 모셔(?)가려고만 했던 것이 문제였었다. 이대로는 놓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비도(飛刀)를 날려라.” 사내는 품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더니, 여자가 돌아보지 않을 때 힘차게 내던졌다. 달리면서 던진다고 해서 명중률이 떨어질 실력은 아니었다. “아악!” 라보네는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누나!” 급히 라보네를 부축해보지만 어깨에 깊숙이 박힌 단도를 빼는 것은 무서웠다. “도망가!” 그 순간. 라보네가 소리쳤다. 루치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난 괜찮으니깐, 너라도 도망가. 어서!” 고통 속에서도 라보네는 그렇게 외쳤다. 루치드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 [132] 추격자(6) 라보네가 루치드를 바라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지난 과거의 기억들이 지나가며 루치드는 온 몸을 떨어야 했다. “제발….” 루치드는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피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또다시 밀려드는 무력감에 눈을 돌린 것이었다. 피칠갑을 한 네 명이 달려오고 있었다. 언제나와 같이 저들은 저렇게 달려와 또 한 생명을 끊어낼 것이다. 예전의 그 놈들처럼. 루치드는 눈을 부릅떴다.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그만해!” 루치드의 외침이 늪지대를 울렸다. 흐느적거리던 수초들과 늪지 한가운데 서 있던 우람한 고목들이 울림에 반응했다. 절박함과 절망감이 섞인 외침에 잔잔한 안개가 밀려날 정도였다. 퍼석거리던 나무판이 울었고, 먹구름 낀 듯 어두웠던 하늘도 울림에 반응하듯 살짝 떠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달려들던 사내들도 그 울림에 반응했다. 좌절과 슬픔, 분노의 울림이 그들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들의 몸이 살짝 떨렸다. 루치드를 중심으로 울림이 퍼졌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울림이었지만, 모두가 보았고 모두가 들었다. **** 한동안 루치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온갖 감정이 들불처럼 타올라서 온 몸을 감싸더니 머릿속에서 폭탄이 터진 듯 한 느낌을 받았다. 이성을 되찾았을 때, 루치드는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그 광경이 놀라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물리적으로도 눈을 돌릴 수 없었다. 네 사람이 그들을 향해 뛰어오던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다. 늪에서부터 피어오르던 눅눅한 안개가 길 위로 기어오르던 중에 멈춰 있었다. 한 복면인이 거칠게 바닥을 짓누른 탓에 튀어 오른 나무 조각이 공중에 멈춰 있었다. 복면인이 두른 복면도 공중에 휘날리던 모습 그대로 멈춰 있었다. “…….” 눈앞에 모든 것이 멈춰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루치드 본인도 움직일 수 없었다. 손가락, 발가락, 혀, 심지어는 눈동자까지도 움직일 수 없었다. 오로지 생각만 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 때와 같았다. 에르케넨으로 들어가기 직전, 절벽에서 뛰어 내릴 때 경험했던 그 때처럼. 모든 것이 멈추고 오직 생각만 가능한 순간. 루치드는 이 현상이 왜 갑자기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기 힘들지?”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지만, 놀란 것은 그저 생각에 불과했다. 여전히 몸도, 눈도 돌릴 수 없었다. “괜찮아. 굳이 보려고 애쓰지 마. 그동안 편법으로 실컷 봐 놓고선, 뭘 또 보겠다고 그러니.” 라보네의 목소리일까? 싶었지만, 라보네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여성의 목소리 같으면서도 미성의 아이 목소리 같기도 했다. “그나저나 참 신기한 아이로군. 내 일찍이 너 같은 녀석은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나도 한 참을 살았고, 또 한 참을 살겠지만 너 같은 녀석은 두 번 다시 못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루치드는 침을 삼키고 싶었다. 하지만 침을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는 몸이니, 그저 머릿속으로만 느끼는 갈증이었다. 누구지? “누군지 알면서 묻네? 일부러 그러는 거야? 멍청한 척하기?” 누군지 안다고? 루치드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떠올렸다. ‘편법으로 실컷 봤다’는 것. 이 문장이 지칭하는 것은 오직 라보네의 얼굴 밖에 없었다. 라보네의 얼굴은 ‘신의 축복’. 그렇다면? “녀석. 굳이 그렇게 세세히 따지지 않더라도 말이야. 이 상황에서 너한테 말을 걸 이가 또 누가 있을까?” 그렇다면 당신이 이 시간을 멈춘 것인가요? “아니. 멈춘 건 너. 난 단지 끼어들었을 뿐.” 내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거지요? “한 번 해본 거라며?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려울까?” 모르겠는데요? “괜찮아. 몰라도 할 수 있을 거야. 너라면. 못하면? 할 수 없고. 그건 네 사정이고, 나도 이 참에 하나 물어보자. 계속 궁금해서 말이야.” 뭔데요? “너 마법사지?” …글쎄요? 진심으로 루치드는 자신이 마법사라고 부를 수 있는지 궁금했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데 마법사라고 할 수 있을까? “마법 쓸 줄 알잖아?” …예전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못해요. “그래? 뭐, 니가 그렇게 말하면 할 수 없지. 다만 그게 궁금했어. 넌 다른 마법사랑 조금 다른 거 같아서 말이야.” 어떻게요? “이 세상 사람이 아닌데도 마법을 쓰잖아?” 루치드는 머릿속이 텅 비는 느낌을 받았다. **** “잘 지내.” 목소리는 짧은 목소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예의바른 신(神)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소 장난스러운 면도 있지만, 진지하게 문답을 주고받았다. “어차피 얼마 후면, 나와의 대화는 잊을 거야. 그래도 나와 대화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일걸? 소중히 생각하고 고맙게 받아들여.”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사라진 목소리였다. 하지만 여전히 루치드는 멈춘 세상에서 생각을 계속 했다. 언제 이게 풀릴까? 지난번에는 어떻게 풀렸었지? 아니 그보다 방금 전의 대화를 통해 얻은 깨달음을 먼저 점검해보았다. ‘가장 익숙한 것’ 힌트는 그게 다였다. 하지만 제윅의 경우에서도, 핀체노의 경우에서도 그랬듯이 그들은 가장 익숙한 대상을 아나그노리시하여 마법을 시전 했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익숙한, 지금 당장 시전할 수 있는 마법이 무엇일까? 그런데 기묘하게도 매우 익숙한 것을 떠올리자, 아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야.” 이 세상 사람이든 아니든, 이 곳과 저 곳을 오가며 시간을 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이 왜 매우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루치드는 지금 느끼는 감각에 집중했다. **** 나무판자 위로 올라오던 안개가 꿈틀대더니 천천히 길 위를 덮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여러 마리의 뱀들이 사냥감을 노리듯 조심스럽게 기어오르기 시작한 늪안개는, 곧 성난 발길질에 걷어차이고 흩어졌다. “죽여 버리겠다!” 흉흉한 살기를 내뿜으며 달려오던 네 사람이 칼날을 앞으로 겨누고 달려들었다. 이윽고 자리에 주저앉아 있던 두 사람에게 다다른 복면인이 칼을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는 사나운 소리가 들리려는 찰나, 복면인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다른 사람들도 한 명씩 자리에서 사라졌다. “어?” 가장 뒤에서 달리던 복면인이 급히 제동을 걸어 뜀박질을 멈추었다. 두 걸음 앞에 꼬마와 여자가 있는데, 다가갈 수 없었다. 앞서 달리던 세 사람은 어디로 간 거지?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차에 꼬마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꼬마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어?” 사내가 당황하는 사이, 주변이 빠르게 변했다. 곧 자신이 떨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어디서? 어떻게?’ 방금 전까지 리아빈의 나뭇길 위에 서 있었는데, 어느 순간 떨어지고 있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억지로 몸을 틀어 바라보니 이윽고 그의 눈앞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있었다. “으아악!” 사내는 너무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타이밍에 주변에서도 비명이 들려왔지만, 너무 놀란 사내는 그것을 알아차릴 겨를이 없었다. 목이 찢어질 정도로 비명을 질렀지만, 그 순간은 짧았고 이내 비명은 사라졌다. 대신 암녹색 늪에 빠지며 난 소리가 비명을 집어삼켰다. 연이어 세 번 더 비명소리를 꿀꺽 삼켰지만, 누구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이 사태를 벌인 루치드도 알지 못했다. **** 루치드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저기 어디쯤인가일 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자기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을 계속 보고 있을 호기심도, 여유도 없었다. 다만 가벼운 흥분은 몸에 남았다. 다시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뜻밖에도 꽤 쓸 만한 마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이 마법에 대해서는 루치드 본인도 원리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게다가 이 마법이 가능하게 된 것에는 분명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인데, 누구의 도움이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런 찜찜함이 있었지만, 급한 것은 자기 무릎을 베고 신음을 흘리는 라보네였기에 의문점을 푸는 것은 뒤로 미뤘다. “괜찮아요?” 창백한 얼굴의 라보네는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어서, 도망가.”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루치드는 잠시 칼을 뽑아야 하는지 고민했다. 일단 움직일 때마다 차가운 날이 어깨를 찌를 텐데 그것은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변변한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루치드는 한숨을 쉬고 로브를 벗었다. 예전 같으면 추위를 막을 수 있는 마법을 썼겠지만, 지금은 그게 어렵다. 하지만 차라리 추운 게 낫겠지. 루치드는 어깨에 꽂힌 칼을 바닥으로 ‘이동’시켰다. 칼이 사라진 상처에서 피가 솟아났다. 루치드는 빠르게 칼을 집어 들고 로브 아랫단을 길게 잘랐다. 그리고 그 천으로 라보네의 어깨를 감아서 응급조치를 취했다. “잠시 눈감고 있어요. 금방 갈 거예요.” 루치드는 고개를 들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루치드와 라보네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뜻밖에도 루치드가 가장 자연스럽게, 익숙하게 받아들인 것은 바로 ‘공간’이었다. 다른 공간으로의 전이가 익숙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이상했다. 루치드의 기억에 ‘공간전이’는 고작해야 6번이었다. 제윅은 어렸을 때 하루 종일 바람과 함께 살았다고 했고, 핀체노의 경우는―직접 들은 바는 없지만―그가 사용했던 물의 마법을 보면 필시 오랜 세월 자연스럽게 경험했던 바가 틀림없었다. 반면에 고작 6번의 ‘공간전이’ 경험이 익숙하게 느껴진다? 결국 이 마법은 루치드에게 새로운 힘을 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쉽지 않은 숙제를 안겨준 셈이었다. “누나, 정신 차려 봐요.” 조심스럽게 라보네를 흔들어 정신이 들게 했다. 라보네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정신이 없었지만 간신히 눈을 뜰 수 있었다. “왜, 안 도망가?” “괜찮아요. 끝났어요. 그리고 저희도 리아빈을 나왔고요.” 그 말에 눈이 커진 라보네가 억지로 고개를 틀어 보았다. 주변에 낮은 둔덕이 보였다. 그리고 저기 멀리 짙은 어둠으로 둘러싸인 미궁, ‘리아빈’의 입구가 보였다. “어, 어떻게 나온 거야?” “그건 나중에 설명할게요. 우선 누나, 몸부터 치료해야 돼요. 여기, 혹시… 치료를 할 만한 곳이 있을까요?” 라보네는 기억을 끌어올려 가장 가까운 마을을 떠올렸다. “저 길을 따라 가다보면, 마을이 있었던 것 같아.” 루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눈 감으세요. 그리고 잠시 쉬세요. 그러면 제가 곧 마을로 데리고 가 드릴게요.” 희미한 미소를 짓는 루치드를 보며, 라보네는 눈을 감았다. **** 라보네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낯선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정신이 들어요?” 나이 든 여성의 목소리에 라보네가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렸더니, 두건을 둘러 쓴 중년 여성이 곁에 앉아 있었다. “여, 여긴 어디죠?” “레카에요. 아가씨 꼬박 이틀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우.” 그렇게 시간이 지났나? 그럼에도 가슴 한 편에 퍼지는 안도감은 살아남았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아, 혹시 저랑 같이 온 아이는요?” “그 아이는 아가씨를 여기 데려온 뒤에 볼 일이 있다면서 떠났어요.” “떠나요?” 라보네의 눈이 커졌다. “예. 가기 전에 저희 마을의 촌장님을 찾아서 아가씨 가문에 연락을 취하도록 조치도 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마 내일이나 모레는 오지 않을까 싶어요.” “아니, 것보다 그 아이는….” “아, 그리고 걔가 가기 전에 남긴 말이 있어요. 자긴 다른 급한 일이 있어서 떠나니까 굳이 찾지 않아도 된다고요.” “아….” 라보네는 짧은 탄식을 남기고, 고개를 돌렸다. 낡은 목재로 지은 집의 낯선 천장이 너무 낮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가슴이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 “정신이 들어?” “예. 저기… 제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죠?” “어, 10분? 20분? 그 정도 지났는데? 괜찮아?”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응급실 침대에서 내려왔다. “아니, 잠깐. 아직 검사도 안했고 혹시 모르니깐 좀 더 누워서 쉬는 게 어때?” 주영이 황급히 단유를 말렸다. “아니요. 이제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단유는 입고 있던 옷을 탁탁 털어낸 후, 주영을 바라보았다. “혜린이는요?” 주영은 슬픈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 [133] 화(1) 주영과 함께 중환자실 앞으로 돌아온 단유는 그 앞에 서 있는 혜린의 부모들을 볼 수 있었다. 혜린을 보고 있던 두 사람은 단유를 보고 반색하며 반겼다. “괜찮니? 쓰러졌다고 들었는데.” 단유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창 건너편으로 보이는 혜린을 보았다. 며칠 전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물론 ‘여기’에서는 20분 전의 이야기겠지만. “지금 면회 되나요?” 주영이 둘러보니 마침 의사 한 분이 다가왔다. 물론 의사가 다가간 상대는 주영이 아닌 혜린의 부모님이었다. “오후 면회 시간이니까 30분 정도 면회가 가능합니다, 만….” 의사는 굳은 낯빛을 한 부모님들을 향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런 역할을 맡을 때마다 의사로서의 신념과 인간으로서 도리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은 의사 가운을 입고 있으니 그에 맞게 이야기를 건넸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괴로운 투병생활을 하며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돕는 일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혜린의 선행이 세상에 빛을 볼 수 있도록, 결정해 주시길 바랍니다.” 혜린의 어머니는 입술을 바르르 떠셨고, 아버지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혜린을 바라보았다. 두 분 다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제 3자인 주영의 입장에서도 이런 상황에서 어떤 결정이 옳을지 쉽게 대답할 수 없는데, 하물며 부모 된 입장에서 어찌 결정이 쉬울까? 다만 의사의 마음을 모르는 바도 아닌지라, 눈치 없다, 냉혈한이다, 탓할 수만은 없었다. 그라고 어찌 한 소녀의 죽음이 가볍게 다가올까. 다만 더 많은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의사로서의 사명감과 신념이 저렇게 말 하도록 시킨 것이겠지. 주영은 고개를 돌려 중환자실을 바라보았다. 부모님을 비롯해 사람들은 마스크를 끼고 중환자실로 입장했다. 다른 환자의 가족들도 면회시간에 맞춰 기다리고 있었기에 한 명씩 입장해서 환자들을 면회했다. 중환자실의 특성상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없었다. 혜린의 경우에는 두 부모님이 먼저 들어가셨다가, 아버지가 나온 뒤 단유가 들어가 만날 수 있도록 배려되었다. 잠시 후, 단유 역시 마스크를 끼고 혜린에게 다가갔다. 혜린의 머리맡에선 여전히 규칙적으로 비프음을 내는 기계가 그래프를 그리고 있었고, 옆에서는 산소호흡기의 펌프가 쉭쉭거리며 소리를 냈다. 단유는 가만히 혜린을 바라보았다. 손을 내밀어 혜린의 손을 붙잡았다. 죽었다고들 하지만, 여전히 따뜻한 손이었다. 단유는 가볍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잠시 멈췄다. 그리고 대략 5초 정도 후 천천히 숨을 내셨다. 연신 눈물을 찍어 훔치던 어머니가 간신히 입을 열어 혜린에게 말을 건넸다. “혜린아, 친구 왔어. 네가 늘 웃으며 말하던 반장 말이야. 그 친구가 고맙게도 너 마지막 모습 보고 인사해주려고 왔어.” 어머니 역시 오전에 정신을 잃고 응급실 신세를 졌었다. 깨어난 이후, 계속된 의사들의 설득에 반쯤은 마음이 결정된 상태였다. 단유는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대신 혜린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어찌 보면 너무 담담한 표정이 더욱 슬퍼 보이기도 했다. “반장아, 우리 혜린이, 예쁘지? 이 가여운 아이 기억해줘. 기도해주고. 응?” 애원하듯, 호소하듯,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단유에게 이야기하는 혜린의 어머니에게 단유는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그럴게요.” 그리고 그 때, 그래프가 요동을 쳤다. 기계의 비프음이 빨라지고 변화가 생겼다. “어?” 뒤에서 지나가던 간호사가 급히 다가와 보더니,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곧장 중환자실을 뛰쳐나간 뒤, 가까운 곳에 있을 의사를 찾았다. 그리고 그 때, 혜린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혜린의 어머니는 무슨 상황인가 싶어 당황하던 와중에 그 모습을 보았다. 어머니의 눈이 놀람과 당황으로 가득 차올랐다. “혜, 혜린아!” 어머니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혜린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힘겹게 눈을 뜬 혜린이었다. “혜린아, 혜린아! 정신 들어?” 혜린 어머니의 목소리가 중환자실을 가득 채웠다. 놀란 아버지가 급히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고, 그 뒤를 의사 한 분이 뒤따랐다. “혜린이, 혜린이가 뭐!” 곧 아버지는 혜린이가 눈을 뜨는 모습을 목격했다. 아버지는 너무 놀라서 마치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뒤따라온 의사는 급히 아버지 앞으로 나섰다. “잠시 만요, 선생님, 잠시 만요. 제가 좀 보겠습니다.” 놀란 것은 의사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까지도 아이의 부모에게 이별을 준비하시라고 제언(提言)하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뇌사상태의 아이가 눈을 뜬다? 인터넷 신문 가십에나 볼 법한 이야기가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의사는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손전등 불빛으로 혜린의 동공을 비쳐 보았다. “동공반사도 되고……. 포화도는요?” 옆에 있던 간호사도 놀라기는 마찬가지. 어버버 거리면서도 의사와 함께 혜린의 상태를 점검해나갔다. **** “정신이 드니?” “…엄마.” 삽관된 튜브를 뽑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콜록대던 혜린은, 목소리가 이상했지만, 말을 하는데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에 눈물을 터뜨리며 주저앉아버린 어머니 곁에선 아버지가 다시 물었다. “혜린아, 나 보이니? 아빠 보이니?” “…아빠.” “그래, 그래. 보이네. 아빠 보이네.” 울먹거리면서도 혜린의 뺨을 연신 쓰다듬는 아버지였다. 그렇게 눈물바다가 되는 와중에 혜린이 물었다. “단유는?” “응?” “단유… 같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눈을 뜬 혜린이 뜬금없이 누구를 찾나 싶었는데,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서 물었다. “반장이 왔던 것도 알아?” “응.” 뇌사상태에서 정신이 없던 아이가 그 사이에 찾아온 반장이 왔었다는 사실을 안다? 어머니는 놀라운 기적이라며 성호경을 긋기 시작했다. 냉담자로 살아온 지난 세월을 반성하며, 앞으로 열심히 성당에 다니겠노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는 어머니였다. “반장은 조금 전에 돌아갔어. 시간이 늦었다고 해서. 나중에 엄마가 주말에 반장 데리고 올게. 반장 보고 싶어?” “…응.” 우리 딸이 이렇게 단유라는 남자애를 좋아하는구나 싶어서 생경스럽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죽음에서 돌아와 보고 싶은 사람이 엄마 아빠도 아니고 남자친구(?)라니. 이런 상황이고 보니, 괜히 웃음도 나왔다. 그래, 아무렴 어떠냐. “아빠가 그 놈이랑 한 번 이야기해야겠다. 어떤 놈이 우리 딸 데리고 가려나 했는데, 고얀 놈. 아빠한테 이야기도 안하고.” 딴에는 농담이라고 웃으면서 말씀하는데, 혜린으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농담이었나 보다. 혜린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어머니는 아드레날린이 과다 분비된 상황이었는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눈으로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깔깔대는 모습에 모르는 사람들이 봤다면 다른 과에 내원을 권했을 정도로 웃었다. 그 마음을 이해 못할 아버지가 아니었기에 굳이 말리진 않았다. 혜린은 그렇게 생환을 축복받으며, 마지막 검사까지 마치고 1인 병실로 옮겨졌다. 그 시간, 주영은 재훈의 곁에서 조금 전의 일을 이야기했다. 원래는 단유를 데리고 오려 했지만, 오늘 일도 일이지만, 시간도 많이 늦어서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단유는 다른 사람을 시켜서 보육원으로 데리고 가게끔 해놓고선 재훈의 병실로 올라와, ‘기적의 생환’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정말 다행이라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너무…기적 같은 일이어서 딱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네.” “저도 그랬어요. 저는 바로 옆에서 봤는데, 그 순간은 너무 놀랐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누구한테 말한다 해도 믿지 못할 순간이었다는 생각이 드니까 도리어 할 말이 없더군요.” “기적이라….” “전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려요.” 뇌사상태의 환자가 기적적으로 눈을 뜬다는 영화 같은 이야기가 바로 곁에서 벌어졌으니 놀라지 않을 리 없다. “의사들은 뭐래?” “할 말이 없죠. 무엇보다 뇌가 아무런 신호를 보내지 않는 완전 뇌사상태였다는데…. 이런 걸 보면 의학기술이 아무리 발전했다고 해도 믿을 만 하지는 않다고 생각되네요.”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에 대한 신비는 풀지 못할 거란 말도 있잖아.” 다소 자조적인 목소리로 대답하는 예과 재학 중인 의대생이었다. “단유는?” “그게… 별로 놀라지 않더군요.” “응?” 주영은 옆에서 의자를 끌어와 재훈의 침대 곁에 두고는 앉았다. 오른 다리를 들어 왼 무릎 위에 올려두고, 턱을 괴고는 재훈을 바라보았다. “그 때, 혜린이가 눈을 뜨고 사람들이 모두 놀라 몰려들 때요. 단유는 중환자실 밖으로 나오고 있었어요. 그리고 밖에서 혜린이를 보더라고요. 사실 저도 그 때는 너무 놀라서 단유를 관찰할 틈이 없긴 해서 정확히 뭐라고 말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 때 단유가 특별히 놀라고 그러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죽은 사람이 살아났는데?” 재훈의 반응에 주영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스스로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몰라, 말을 고르기가 어려웠다. “그게요. 애초에 혜린이 죽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게 너무 충격이었는지 오늘 오자마자 혜린이를 보더니 정신을 잃었거든요. 20분 정도?” “20분이나? 단유는 괜찮고?” “예. 대충 검사는 했는데, 이상은 없다고 하네요. 아무튼 그래서 그런지도 몰라요. …뇌사가 뭔지 모를 수도 있고요.” 실제로 정신을 잃기 전까지 단유는 혜린의 상태를 부정했었다. “그렇군. 단순하게 보자면…사람들이 호들갑을 떤다고 볼 수도 있었겠지. 그 아이라면.” ‘죽음’을 배제하고 혜린을 바라보면, 그 아이는 그냥 병에 걸려 치료를 받는 아이, 정도로 이해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단유는 그 때문에 병이 나았구나, 정도로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뇌사 상태에서 깨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적인 일인지, 그 확률과 심각성을 아직 나이 어린 단유가 알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요? 그래서 침착해보였던 걸 수도 있지요. 게다가 감정 격리라면서요?” 재훈은 찬찬히 단유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당장에는 알 수 있는 것은 없었고 모든 것은 가정에 불과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무리해서라도 잠깐 만나서 이야기해볼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다음 주말에라도 괜찮을 것이다. 급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튼 조금 전에 차타고 나갈 때 배웅을 했는데, 꽤나 침착해보이더라고요.” “일단 알았어. 단유 문제는 나중에 물어보면 될 문제고. 일단 혜린이가 살아났다니까, 나도 마음의 짐을 조금 덜게 생겼네.” 주영이 입 꼬리를 올리며 가벼운 톤으로 흥얼거리듯 받아쳤다. “그러네요. 선배, 마음고생이 심하셨는데 말이죠. 울기까지 하고.” “울긴 누가 울었다고 그래?” “아니, 애가 뇌사라는데 울 수도 있는 문제지, 그걸 굳이 부정하는 건 무슨 심보래요?” 눈이 동그래지며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주영을 바라보니, 배시시 웃으면서 재훈에게 핀잔을 주는 주영이었다. “…….” 머쓱해진 재훈은 고개를 돌렸다. “피곤하다. 너도 이만 가봐.” 주영은 피식 웃으며 가방을 챙겨 들었다. 치마를 정리하고 일어선 주영은 재훈을 향해 살짝 허리를 숙였다. “내일 봐요.” 재훈은 대답 없이 손만 까닥거렸다. **** 늦은 시간, 온갖 검사와 환대 속에서 정신없는 오후를 보낸 혜린은 간신히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피곤하다는 말에 두 부모님도 불을 꺼주시고 잠시 병실을 나간 틈이었다. 혜린은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기 집 거실만한 크기의 병실에 혜린 혼자만 덩그러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주황색 야간 등이 은은하게 병실을 비추는 가운데, 낯선 천장과 낯선 침대의 촉감 때문인지 통 눈을 감을 수 없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기억하는 마지막 광경 때문이었다. “괜찮아?” 자신의 손을 붙잡고 안부를 묻던 안정감 있던 목소리. 그리고 자신을 덤덤하게 바라보던 깊은 눈동자.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리던 모습. 그 때 꽤 차가운 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가며 몸을 살짝 떨기도 했지만, 당시의 기억은 단유의 입가에 살짝 머무른 미소만큼 따뜻했다. 돌이켜보면 단유의 웃는 얼굴을 본 적이 드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보기 힘든 것을 바로 눈앞에서 보았더니, 괜히 몸에 열이 나기 시작했다. 혜린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거기가 어디지?” 혜린은 단유의 옆으로 보이던 낯선 풍경을 떠올리고는 의문을 품었다. ======================================= [134] 화(2) 단유는 보육원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오니 명수가 물었다. “저녁 먹었어?” 그러고 보니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았다. “너 또 맛있는 거 먹고 왔지?” 지난번, 주영이 단유를 데리고 외출을 했다가 돌아올 때, 저녁시간이 지난 시간이어서 외부에서 저녁을 먹인 후 보육원으로 돌려보냈었다. 그리고 그 때 일을 들은 명수가 그 사실을 기억해내고 물은 것이다. “아니, 안 먹었어.” “진짜? 아, 아쉽네.” “혜린이 일어났어.” “그래? 잘 됐네.” 날씨 좋더라, 고 지나가듯 툭 던진 말에 맑았지, 라고 별 뜻 없이 받아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짤막한 대화였다.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았던 단유는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포근했던 하루였지만, 단유에게는 겨울바람과 싸우고, 구타를 당했다가, 죽을 위기를 겪은 뒤, 눅눅한 늪지 한가운데를 쉴 틈없이 달려야만 했던 그런 하루였다. 그리고 거기가 끝인 줄 알았더니, 끝이 아니었던 하루이기도 했다. 단유는 침대에 누웠다. 익숙한 침대에 누웠더니 이제야 자기 자리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 라보네를 레카에 데려다 주던 중, 루치드는 언제나 그랬듯이 엉뚱한 생각을 했다. 만약 아카넬을 혜린이에게 먹인다면 어떻게 될까? 그 생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몇 가지 가정이 필요했다. 하나는 루치드가 아카넬을 가지고 지구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문제. 다른 하나는 혜린이를 이 곳으로 데리고 오는 문제. 둘 다 예전에는 생각도 못한 문제였지만, 어쩐지 지금은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가 ‘공간’에 대한 포르마가 아나그노리시, ‘인식’이 되면서부터임은 말할 것도 없겠다. 사실 루치드로서도 이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웠다. 다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의 도움으로 ‘디아포’, 즉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공간’에 대한 포르마가 만들어졌을 때, 루치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랬기에 복면인들을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먼 곳으로 보내기도 했었던 것이고, 라보네를 데리고 레카까지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선 녹스로 다시 돌아가야 하나?’ 이곳으로 올 때와는 비교도 못할 만큼 빠르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자작을 만나서 ‘평화적으로’ 아카넬을 요구해서 얻어 볼 마음을 가졌다. 그리고 빈촌으로 돌아가서 다음 실험을 속행하리라. 그렇게 마음먹은 루치드는 이후 이틀 동안, 녹스로 돌아가 자작을 만나고, 아카넬 한 알―생각보다 컸다. 마치 작은 포도 한 알 정도의 크기였다―을 구해서 빈촌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역시 안 되는 걸까?’ 단유는 주영과 함께 중환자실로 돌아갔고, 면회시간에 혜린의 옆에 갈 수 있었다. 단유는 혜린을 붙잡았다. ‘될까?’ 단유는 눈을 감고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그리고 힘껏 의지를 다해 소리쳤다. ‘가자!’ 잠시 후, 루치드는 빈촌에서 눈을 떴다. 그리고 그와 손을 맞잡은 채 바닥에 누워있는 혜린이 있었다. 이상한 것은 혜린의 몸이 알몸이었다는 것. 루치드는 방으로 들어가 어머니의 옷가지 중 잡히는 것 아무것이나 가지고 와서 혜린의 몸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아카넬을 집어 들었다. 검지와 엄지로 으깨어 즙을 내고, 그 즙이 혜린의 입속으로 들어가게끔 해주었다. 아카넬을 모두 먹인 후, 루치드는 기다렸다. 혹시 추울까 봐 다른 어른들의 옷도 가져와서 덮어주었다. 저녁이 되고, 밤이 되었다가, 다시 아침이 밝아왔다. 루치드는 혜린의 곁에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아침을 알리는 산새소리가 들릴 무렵, 혜린이 눈을 떴다. “괜찮아?” 루치드가 물었다. 게슴츠레 눈을 뜬 혜린이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반장?” 루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이 들어?” 혜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 너 옷 입어야 돼.”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던 혜린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옷가지들로 몸을 가렸다. 얼굴이 붉어졌다. “나 잠깐 밖에 있을 테니까, 아무거나 걸치고 나와.” 루치드는 집 밖으로 나갔다.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오늘은 무척 맑은 날씨였다. 여전히 차가운 겨울바람이 골목을 쓸고 지나가지만, 청명한 하늘과 작은 신발모양의 새하얀 구름이 떠 있는,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잠시 후, 혜린이 붉은 얼굴을 하고 집밖을 나왔다. “반장, 우리 왜 여기 있는 거야?” 혜린이 고심 끝에 만들어 낸 질문이었다. 하지만 루치드는 하얗게 웃으며 혜린에게 다가갔다. “여긴 꿈속이야.” “응?”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오히려 혜린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넌 꿈을 꾼 거야. 많이 아팠거든. 그러니까 너무 오래 꿈꾸면 안 돼.” 루치드는 혜린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지구’로 돌아왔다. **** 단유도 짧은 시간 많은 고민을 했다. 그곳의 시간이 비록 여기에 비해 길다지만, 그곳에서 오래 머무는 것은 아무래도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길어지는 만큼 불균형도 심해진다고 하니까.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처음부터 시나리오는 잠깐 실험해보고 실험이 통한다면 바로 돌아오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혜린을 데리고 가는 것에는 성공을 했다. 이후 혜린이 일어나지 않고 있을 때,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아카넬의 효능에 대해서도 고민을 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아니라는 제윅의 말이 사실이라고 치더라도, 효능이 아주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니 성주가 기를 쓰고 매년마다 아카넬을 모았을 것이다. 게다가 혜린이 죽은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의학적으로는 죽었다, 고 판단했지만 역시 단유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현상이었다. 때문에 일단 되던 안 되던 해보자는 생각도 있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아카넬의 약효는 혜린에게 통했다. 두 번째 고민은 역시 시간이었다. 최대한 빨리 왔다가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혜린의 손을 붙잡은 채로 다시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것은 피하고 싶었고, 혜린도 이곳에 오래 머무르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혜린이 일어나지 않을 때는 어떡하나 싶었지만, 일어나는 순간에는 곧바로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혜린이 일어났을 때, 너무 기쁜 나머지 그 생각을 못했다. 오히려 혜린이 몸을 일으킬 때는, 혹시 당황해할까봐 일부러 집 밖으로 나갔다. 찬바람을 맞은 후에야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고, 혜린이 나오면 곧장 돌아가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다만 ‘꿈’이라고 말한 것은 자기도 모르게 나온, 말하자면 임기응변식의 대응이었다. 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름 만족할 만한 대답이 되었다고 자평했다. 그 이후, 사람들은 혜린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기뻐서 소리 지르고 놀라고 울었다. 단유는 몸을 돌렸다. 다음에 다시 볼 때는 아마도 교실에서일 것이다. **** “꿈, 인걸까?” 하지만 아무리 꿈이라도 너무 현실감 넘치던 광경이었다. 낡은 나무집과 판자바닥. 생전 처음 보는 질감의 옷들과 낡은 집기들. 게다가 문을 열고 나갔을 때, 거대한 산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시골에서나 볼법한 집들과 시골에서도 보기 힘들 것 같은 나무집들이 주위를 채우고 있었다. 무엇보다 문을 열었을 때, 들이닥친 그 차가운 바람의 느낌은 도저히 꿈이라고 여길 수 없었다. “꿈이라면 왜 반장이 거기 있었지?” 아침햇살을 맞으며 밝게 빛나던 반장의 얼굴. 하얀 미소와 검은 눈동자, 빛이 나는 두 뺨과 짙은 눈썹. 평소에도 잘 생겼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신비롭기 그지없었다. 그 순간에 혜린의 가슴에 둥, 하는 울림이 있었다. 그런데…. “왜 그때 난….” 왜 하필 알몸으로 그 애 앞에 누워 있었을까. 그 생각이 떠오르자 혜린은 얼굴을 붉히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다 봤겠지?” 아니, 꿈이니까 괜찮은 걸까? 그렇다고 물어볼 수도 없으니 그저 혼자 발을 동동거릴 뿐이다. 만약 꿈이라면 부끄러움에 몸부림 칠 꿈이고, 아니더라도… 아니라면 더 큰 문제다! “힝….” 눈물이 핑 돌았다. 기적의 주인공, 살아 돌아온 혜린의 첫 소감은 부끄러움이었다. **** 다사다난했던 4학년 1학기가 지나가고 방학이 찾아왔다. 언제나와 같이 방학이 되면, 보육원은 거의 매일 사람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반찬의 질이 올라가고, 특식이 많아지며, 운동장은 붐비고, 날은 점점 더워졌다. 명수는 애들과 함께 공을 차고, 나이 많은 형들이나 누나들은 외출을 나가고, 어린 아이들은 보육교사의 손을 붙잡고 보육원을 한 바퀴 돌며 운동을 했다. “선생님. 나비요.” 5살도 안된 아이들이 화단 위를 날아다니는 나비를 가리키며 즐거워했다. 보육교사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감상할 수 있도록 도왔다. 특히 저 나이때 아이들은 누군가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한다. 그래서 이것저것 관심을 불러 일으킬만한 것들을 찾고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 함께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소속감을 느끼고 안정감을 가진다. “어, 단유야? 어디 가니?” 마침 화단 옆을 지나가는 단유를 보며 보육교사가 물었다. 단유가 함께 걷고 있던 지선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방학 숙제 한다고 해서 도와주고 있어요.” “숙제?” “곤충 채집이라는데요?” 다른 아이들이었다면, 누가 누굴 돕는 거냐고 핀잔이라도 주었을 테지만, 단유라면 저렇게 행동하는 게 오히려 그 아이답다. “지선아, 오빠 말 잘 들어야 돼. 알았지?” “네.” 물어 무엇 하리. 최근 지선이는 껌이라도 된 것처럼 단유에게 달라붙어서는 항상 같이 다니고 있었다. 식당을 갈 때도 같이 가고, 도서관에 가도 같이 다녔다. 명수에게 붙들려 공을 찰 때는 골대 근처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경기를 관람했다. “여기 위험해. 스탠드에 가 있어.” 라고 말하면 고개를 끄덕이곤 골대 뒤로 돌아갔다.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안전한 곳을 찾아 위험을 회피하는 방향으로 행동하지만, 단유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행동만큼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잘 때만큼은 자기 방에서 잠이 드니까, 그나마 다행이랄까. “각시랑 어디 가냐?” 단유와 지선이 지나가는 모습을 본 명수가 입술을 삐죽이며 물었다. “식당 뒤에.” “왜?” “곤충채집. 지선이 방학숙제래.” “방학한지 일주일도 안됐는데, 무슨 숙제를 지금 해?” 명수에게는 방학한지 일주일이 안됐을 때 하는 것이 아니라, 방학이 일주일 남았을 때 하는 것이 방학숙제였다. “곤충은 미리 잡아두는 것이 좋아. 나중에는 잡기 힘들어.” “야, 공지선. 너 때문에 석고가 나랑 안 놀잖아.” 지선이 무미건조한 얼굴을 하고 명수를 바라보았다. 마치 ‘뭐 어쩌라고?’ 라고 묻는 얼굴이었다. 명수는 팔짱을 끼고 지선을 바라보았다. ‘니가 뭔데?’라고 묻는 얼굴로. “명수야, 너도 같이 가자. 나 혼자서는 못해.” “그럴까?” 명수가 씩 웃었다.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가자! 고고!” 지선은 괜히 바닥을 한 번 찼다. 그리고 단유의 손을 붙잡고는 뒤뜰로 향했다. 평화로운 방학기간, 보육원의 풍경이었다. **** 가끔 보육원으로 주영이 찾아왔다. “필요한 건 없니?” 라고 물었을 때, “없어요.” 라고 대답했더니, 그 다음부터 주영이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왔다. 필요한 게 생길 때까지 오실 거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라고 했다. “선배가 다 나을 때까지는 내가 널 돌봐주고 싶어서 그래. 말하자면 후원자라고나 할까?” 단유는 마침 잘 됐다는 식으로 물었다. “그럼 공부 좀 가르쳐주실 수 있나요?” “공부?” 주영은 난감했다. 첫 번째는 자신이 이곳에 잠시 들리는 것도 잠깐 틈을 내는 정도라서, 오랜 시간을 머물 수가 없었다. 두 번째는 단유 역시 선배와 같은 과, 소위 ‘괴짜’라는 것이었다. 괴짜는 괴짜만이 상대할 수 있는 법이다. 자신은 괴짜가 아니었다. 고로 단유는 자신이 상대할 수 없었다. “내가 시간을 많이 내지 못해.” “괜찮아요. 가끔 저 혼자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게 있어서 그랬어요. 책 찾아보면서 혼자 알아봐도 되니깐 신경 쓰지 마세요.” 별 기대 없이 물었다는 것처럼 들려, 오히려 주영이 미안해졌다. “그럼 말이야. 과외선생님 구해줄까?” “과외선생님을요?” 단유의 눈이 빛났다. ======================================= [135] 화(3) 땡볕이 내려쬐던 어느 더운 여름의 오후. 바쁜 사람들의 흠뻑 젖은 등이 그늘 아래서 말라가던 시간. 검은색 국산 소형차가 2차선 국도에서 보육원으로 들어오는 샛길로 들어오고 있었다. 입구에 선 푸른 주목나무 두 그루를 지나 보육원으로 들어선 자동차는 아이들이 뛰어 노는 운동장을 지나 보육원 본관 옆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낮은 하이힐에 하얀색 마 재질의 재킷과 작은 손가방을 한 손에 들고 내려선 이는 허리를 톡톡 두드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되게 덥네.” 암갈색 머리를 쓸어 넘기며 걸음을 옮길 때, 여자 앞으로 한 여자 아이가 달려왔다. 단발의 어린 여자 아이는 총총거리며 달려오다, 여자를 발견하곤 잠시 멈칫하는 듯 하더니 이내 여자의 뒤로 돌아갔다. “공지선! 너 거기 서! 당장 가져 와!” 여름햇살에 그을린 얼굴을 한 사내아이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뛰어왔다. 그러자 여자의 뒤에 선 여자아이, 지선이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꺼야.” 사내아이는 발을 쿵 굴리며 외쳤다. “니 꺼 아냐. 내 꺼 할 차례였어!” “아냐, 오빠가 나 줬어.” “니가 뺏은 거잖아!” 뭔가 물물거래가 있었던 듯한데, 그게 무엇인지 궁금해진 여자가 고개를 살짝 내려 지선을 보았다. 작고 여린 손가락 사이에 잡혀 있는 것은 하얀 나비였다. 얇고 찢어지기 쉬운 나비의 날개는 거친 뜀박질에도 용케 버텼나보다. “내놔. 니 꺼 있잖아!” 과연 지선의 다른 손에도 점박이 나비가 한 마리 더 잡혀 있었다. 얼굴이 붉어진 사내아이, 명수는 젊잖게 설득할 마음은 없었는지 계속 윽박질렀지만 지선은 평상심은 유지했다. “명수야, 그거 그냥 줘. 내가 한 마리 더 잡아줄게.” 또 다른 목소리의 출현에 여자가 고개를 들어보니, 아이치고는 이목구비가 꽤 뚜렷해서 잘 생겼네, 라는 감탄이 절로 나올 법한 외모의 소년이 명수 뒤로 나타났다. “점박이는 쟤 하나 밖에 없었잖아. 없으면 어떻게 해?” 오후 내내 본관 뒤뜰을 뛰어다니면서 잡은 나비가 고작 2마리였다. 게다가 2번째 잡힌 나비는 커다란 점이 날개의 가운데 찍혀 있었다. 소위 희귀템이라고 불릴 나비였던 것이다. “내가 다른 거 잡아줄게. 그건 지선이한테 양보해.” “에휴, 난 너무 마음이 약해서 탈이야.” 명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음 약한 애가 그렇게 윽박지르면서 죽자고 달렸냐, 라는 생각이 여자의 머릿속에 잠시 떠올랐다. 잘생긴 소년은 웃으면서 명수를 달래고는 지선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서로를 살피다가 소년이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는 사람이야?” 명수가 물었다. 소년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 그래도 어른한테 먼저 인사하는 거랬어.” 그제야 명수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어린 아이들에게, 그것도 처음 보는 아이들에게 인사를 받는 경험이 생소했던 여자는 얼떨떨해하면서 답을 했다. “지선아, 가자.” 소년이 부르자, 그제야 여자 뒤에서 슬며시 몸을 드러내는 지선이었다. “다음 거는 명수 오빠 거니까 욕심내기 없기다? 욕심내면 다른 두 마리도 모두 도망갈 거야.” “단유오빠가 잡고 있으면 되지.” 욕심내지 않겠다고는 안한다. 역시 지선이 답달까? 티 나게 욕심내진 않지만, 소유욕이 남다른 아이였다. 내 것은 당연히 내 것이고, 남의 것도 무조건 내 것, 이라고 생각하니까. 부디 보육원 밖에서는 너무 티내지 말았으면, 하는 조그마한(?) 소망을 품어보는 단유였다. “니가 단유니?” 여자의 물음에 단유를 비롯한 아이들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네. 그런데요?” 단유가 무슨 일인가, 싶어 궁금해 하는 눈빛으로 여자를 마주보았다. 여자는 씩 웃으며 말했다. “반갑다. 오늘부터 니 과외해 줄 선생님이다.” 과외? 그거 먹는 거야? 라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는 지선과 명수였다. **** “야, 내가 그걸 왜 해?” “좀 해줘라. 돈 많이 챙겨준다니까?” “암만 그래도, 거기까지 가는 건 시간낭비 같은데?” 테라스가 있는 카페에 나와서 아이스커피를 시켜놓고 사담을 늘어놓기 좋은 어느 날. 보통 여자 둘이 카페에서 한 탁자를 사이에 두고 있으면 으레 친구이야기, 남자이야기, 남자친구이야기를 하곤 했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조금 주제가 다양해지긴 했다. 친구가 들고 온 가방이야기, 남자가 사준 가방이야기, 남자친구가 사준 가방이야기 정도? 그러나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었다. 오랜 친구 주영이 가방 이야기 대신 남자 이야기로 이야기의 물꼬를 텄다. 그냥 남자 이야기도 아니고 어린 남자 이야기로 말이다. “애가 얼마나 똑똑한 지 말도 못해.” “천잰가 보지.” “천재는 아니고, 영재 정도라나 봐.” “누가?” “재훈 선배가.” 여자는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 위에 탁 하고 내려놓았다. “넌 언제까지 재훈 선배, 재훈 선배 할 거니?” “왜?” “그 놈의 ‘선배’ 딱지는 이제 뗄 때도 되지 않았어?” “우리 그런 관계 아니야.” “나 참.” 여자는 팔짱을 끼고 미결사건의 범인을 추적중인 수사관의 눈빛으로 주영을 노려보았다. “고등학교 때나 선배였지, 그게 언제 적이냐? 게다가 지금은 직장 상사라며? 그럼 선배딱지는 떼야 하는 거 아냐?” “오버하지 마라. 그냥 입에 붙어서 그렇게 부를 뿐이고, 재훈 선배도 그렇게 부른다고 뭐라 하지 않았어.” “나 참. 니가 아직도 이팔청춘의 꽃다운 고딩이라도 되냐? 무슨 순정파라고 선배, 선배 거리니?” 주영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손부채질을 했다. “아이고 덥네. 야, 그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고 우선 일부터 이야기하자.” “수상스럽네? 왜 말을 돌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렇지.” “그럼 뭐가 중요한데?” 주영은 다시 단유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자신이 무심결에 꺼낸 제안 때문에 과외교사를 찾고 있음을 알렸다. 사실 재훈에게도 이 이야기를 꺼냈다. 재훈은 니가 알아서 해, 라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래서 주영은 꽤 잘나가는 스타강사를 과외교사로 초빙해 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곧 벽에 부딪혔다.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었다. 어떤 스타강사도 인평시까지 내려가서 보육원에서 사는 초딩을 가르치려는 사람은 없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서울에서 인평시까지 왕복에 걸리는 시간과 과외교습을 하는 시간을 합치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에 학원 등에서 아이를 가르칠 때 받는 수입을 생각하면 스타강사라는 이들이 무리해서 그 과외를 맡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돈을 무한정으로 퍼다 준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주영에게는 그럴 돈이 없었다. 물론 재훈이 돈을 내는 것이긴 하겠지만, 그렇게 많은 돈을 지출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주영은 자신이 아는 이들 중, 똑똑하고 시간이 남아 돌면서 적당한 돈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을 구하려 했다. 그리고 그 친구가 바로 눈앞에서 자길 놀리며 더위를 식히는 친구, 하은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가르치라고?” “그건 걔랑 이야기해보면 알 거야. 그래도 초등학생이니까 그리 어렵진 않을 거야. 야, 솔직히 너 요즘 시간이 너무 남아 돌아서 주체를 못하고 있잖아? 이럴 때 그냥 용돈벌이도 하고, 드라이브도 할 겸해서 다녀봐.” “주영아, 이 언니가 아무리 시간이 많기로서니 시골까지 과외 하러 다녀야겠니? 돈이 아무리 좋아도, 시간과는 바꿀 수 없는 법이다? 우리의 젊음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너도 계속 그렇게 선배만 찾다보면 아무것도 못하고 훅 늙는다.” “이게 어디서 악담이니? 너는 안 늙어?” “그러니까 이렇게 알차게 시간을 보내고 있잖니?” 하은은 선글라스를 낀 후 아이스커피를 들어 빨대를 살짝 물었다. 주위에 앉아 있던 사내들의 도둑 시선이 그녈 훔치듯 지나갔다. 그러나 주영은 포기하지 않았다. 기름 값과 적당한 과외비를 적당히 제시하여 적당히 승낙할 수 있게 적당히 입에 기름칠하고 하은을 꼬셨다. 그리고 한 마디. “걔가 또 엄청 잘 생겼어. 어쩌면 커서 모델이 될 지도 몰라.” “초딩이 잘 생겨봐야 거기서 거기지. 그리고 야! 너 방금 위험한 발언이었어.” 자기도 훅하고 넘어왔던 주제에, 뒤늦게 아닌 척 하고 있어. 주영은 이런저런 이야기로 신비하고 영리하고 잘생긴 소년에 대한 환상과 그 환상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설득했다. 결과적으로 하은은 주영의 제안을 승낙했다. 다른 이유는 차치하고라도 마지막에 낸 카드가 하은의 마음을 움직였다. “오피스텔 2달 이용권! 걔 방학 끝날 때까지 쓸 수 있게 해줄게.” 기름 값, 과외비에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오피스텔까지 준다면 못해볼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그럼 가보지 뭐. 애들 방학기간만 하면 된다고?” “응. 애들도 아니고 애. 단 한명 뿐이야.” 정말 비효율적이고 비상식적인 과외였지만, 주영의 선배라는 재훈이라는 사람이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음을 알기에 이번에도 그런 기행(奇行)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걔 이름은 뭔데?” 주영은 등을 뒤로 젖히며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걸 이제 묻니?” **** “니가 단유구나. 난 정하은. 오늘부터 너 과외 선생님이야.” 단유는 눈을 멀뚱멀뚱 뜬 채로 하은을 바라보았다. 그러길 잠시, 하은의 입에 걸린 미소가 살짝 굳어지려는 때에 단유가 입을 열었다. “무슨 과외요?” 하은은 입꼬리를 내렸다. 그리고 등을 돌리고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야, 이주영. 이거 무슨 일이야?” ―뭐가 뜬금없이? “지금 니가 말한 보육원에 와서 단유라는 애를 만났는데, 얘가 나 보고 무슨 과외냐고 묻는다?” ―…아. “아?” ―미안. 걔한테는 아직 이야기 못했네. “뭐?” ―걔가 아직 핸드폰이 없어서 말이야. 그래서 연락을 못했어. 하은은 짝다리를 짚고는 한 손을 허리춤에 턱하니 걸치고는 빽 소리쳤다. “야! 이주영!” ―…미안. “너, 미안하면 다니?” ―단유, 앞에 있으면 바꿔 줄래? 내가 사정을 이야기할게. 씩씩거리던 하은이 고갤 돌려 여전히 자신을 관찰하는 단유에게 폰을 넘겼다. “받아봐.” 단유는 공손하게 전화기를 받아들고는 주영과 통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공손하게 전화기를 건넸다. ―잘 부탁해, 하은아. “너, 이 기집애. 나중에 두고 보자.” 신경질적으로 손가락을 놀려 통화를 끊은 하은이 단유를 내려다보자, 단유가 고개를 숙였다. “이야기 들었습니다. 김단유라고 합니다.” 갑자기 꼬마아이가 어른이 되면 이런 느낌일까? 말투가 사뭇 다르니 오히려 어색해진 하은이었다. “너 왜 갑자기 말투가 그래?” “처음이라서 예의바르게 인사드린 거예요. 이상했다면 사과드릴게요.” 하은은 어쩐지 만만치 않은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과외는 어디서 하는 거죠?” “어?” 하은은 주위를 둘러보지만 그래봐야 보육원 본관건물 외에는 나무와 산들 뿐이었다.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또 왜? “나 과외 어디서 해?” ―…아. “아?” ―보육교사 선생님들한테 이야기하는 거 깜빡했다. “깜빡?” ―야, 너도 알다시피 내가 요즘 재단 일 때문에 좀 바쁘니? 좀 정신이 없었어. 미안해. 내가 얼른 처리할게.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초딩과외는 잘도 챙겼네?” 하은의 비꼼에도 주영은 별 다른 변명 한마디 못했다. 괜히 했다간 오뉴월 서리 맛을 제대로 볼 거 같아서. **** “오늘은 그냥 인사 나눈 정도로 만족하고, 내일부터는 너네 방에서 하도록 하자. 보육원 선생님 말로는 6시 전에 끝났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4시부터 6시까지 2시간. 오케이?” “예. 알겠어요.” 하은은 방을 둘러보면서 공부하기에 썩 나쁜 환경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청소를 열심히 해서 그런지 딱히 냄새도 나지 않고, 책 말고는 다른 놀 거리도 부족해 보이는 방이었기 때문에 과외할 때 집중은 잘 될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책상 위에 눈이 갔다. “이 책은 누가 보는 거니?” “제가요.” “…….” 초등학교 4학년이라고 들었는데, 중등 물리, 고등 물리, 중등 수학과 같은 교과서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구멍에서 발견한 과학」 같은 제목의 서적들이 눈에 띄었다. “이거 두 개는 도서관에서 빌려서 보고 있는 거고요. 이 책은 졸업한 형이 물려준 거예요.” “…그렇구나.” 하은은 살짝 웃음을 지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방을 나오면서 하은은 잠깐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번 여름은 꽤 더울 것 같네.’ 그 방에는 에어컨이 없었으니까 더 더울 것이다. ======================================= [136] 화(4) 단유의 과외를 맡은 첫 날, 하은은 플리츠 스타일의 몬드리안을 떠올리게 만드는 원피스에 하얀 레이온 소재의 재킷을 걸치고 나타났다. 화장을 연하게 했지만, 워낙 도드라지게 붉은 입술과 진한 눈썹 덕에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또각거리는 걸음으로 보육원 본관에 들어선 하은은 보육교사를 만나 인사를 나눈 후, 곧장 단유의 방으로 갔다. 방에는 단유와 명수가 각자의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만약 명수가 어떤 아인지를 알았다면, 하은은 이 상황을 굉장히 수상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은은 그저 단유와 함께 방을 사용하는 룸메이트라는 정도의 인식이었기에 딱히 명수를 제재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른 아이들도 이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는 구나, 라는 생각을 했을 따름이었다. “안녕하세요.” 단유는 공손하게 인사했다. “어, 안녕.” 어제도 경험했던 부분인데, 역시 아직은 낯이 설어서 그런지 단유의 인사를 자연스럽게 받기 어려웠다. 자신이 다른 나이 든 어른들에게 인사할 때는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게다가 어른들도 마치 식사 후 물 한 컵 받아들 듯 자연스럽게 받아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들에게 인사 받는 것도, 인사하는 것도 어색했다. ‘차차 익숙해지겠지.’ 하은은 들고 온 가죽 가방을 어디 둘까 고민하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단유가 침대 위를 손가락질 했다. “저기 위에 잠시 두셔도 될 거예요. 전 의자 하나 빌려올게요.” 그렇게 말하고는 단유는 방을 나섰다. 단유가 나간 뒤, 하은은 잠시 단유의 침대 위에 걸터앉아 가방을 올려놓고 주위를 둘러보다―어제도 구경했고, 오늘도 오자마자 구경했지만, 여전히 시선 둘 데가 없어서 계속 구경만 하고 있는 중―명수와 눈이 마주쳤다. 방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책을 보고 있던 명수는 대놓고 하은을 바라보았다. “왜? 뭐 할 말 있니?” 명수가 가방을 슬쩍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혹시 먹을 거 안 가지고 오셨어요?” 먹을 거? 갑자기 왜 그런 걸 묻는 건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그 전에 오던 누나는 꼭 빵이나 과자 사가지고 왔었단 말이에요. 단유랑 저랑 나눠먹으라고요. 누나, 설마 단유만 주려고 숨긴 건 아니죠?” “…없는데?” “진짜요?” “응.” 명수는 부스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던 책을 접어 단유의 책상에 올려놓은 뒤, 의자를 책상 아래로 밀어 넣었다. “어디 가?” 마침 의자를 들고 온 단유가 명수를 보며 물었다. 명수가 단유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영문을 몰라 하는 단유에게 명수가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저 누나 빈털터리야.” 그리고 하은에게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 있었어요?” 단유의 물음에 괜히 얼굴이 붉어진 하은이었다. 고작 빵 때문에 이런 취급이라니. “변유철, 도재민! 공 차러가자!” 복도 너머에서 명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제일 궁금한 게 뭐야?” 하은은 단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았다. 벽에 붙은 선풍기가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페이지가 넘어가서 하은은 검지로 페이지를 눌러야 했다. 지금 펼친 책은 중등 수학. 하지만 몇 페이지 넘기다보니 물려받은 것이라 그런지 문제를 알아보기 힘들만큼 색색 깔로 범벅이 된 페이지가 많았다. “이를테면 과목 중에서 꼭 공부하고 싶다, 싶은 거.” “굳이 꼽자면….” 어느 하나를 딱히 꼽기 힘들었다. 이전 같으면 물리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잠시 접어두고 싶은 과목이 물리였으니까. 오히려 다른 과목을 통해서 전반적인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의문이 들었다. “질문 하나 해도 되요?” “뭔데?” “제가 물리를 좋아해요. 그런데 재훈이 형이란 분이 저한테 균형을 맞추기 위해 다른 과목도 공부해야 한다고 했어요.” “뭐… 그래, 그래서?” “다른 과목이 물리라는 과목과 어떤 관련이 있기에 균형이 안 맞는다는 건지 궁금해서요. 예를 들어서 사회 과목이랑 물리라는 과목은 전혀 다르잖아요. 그런데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사회 과목을 배운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요.” “그건 물리와 사회를 같은 평형계에 놓고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이에 맞게 다양한 지식과 상식을 갖춰야 한다는 점에서 균형을 맞추라고 이야기한 것 같은데? 예를 들면, 니가 고등학교 수준의 수학문제를 푼다고 해도 초등학교 1학년 수준의 국어 실력이 있다면 문제가 있겠지? 마찬가지로 대학교 수준의 물리를 배운다고 해도, 사회나 기타 다른 과목에 대해 전혀 상식이 없다면 학문적인 분야에서도 문제가 생기겠지만, 전반적인 삶의 질이란 부분에서 문제가 될 거 같네.” 마치 준비되었다는 듯이 곧바로 납득할만한 답이 하은에게서 나왔다. 단유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하은이 말을 계속 이었다. “가끔 그런 친구들이 있어. 수학을 잘해. 정말 잘해. 그래서 상상도 못할 만큼 잘해서, 과학고 갔다가 서울대 수학과 가는 친구도 있긴 했어. 그런데 얘가, 수학을 그렇게 잘하는 얘가 은행에서 자기 통장 하나를 제대로 만들 줄 몰라. 이게 말이 되니?” “삶의 질이란 게 그런 걸 말하는 거였군요.” 생각해보면 다른 무엇보다 단유에게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 싶었다. “또 아무리 국어를 잘한다 쳐도, 영어를 지지리 못해. 음, 뭐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잘하면 좋잖아? 적어도 기초 회화 정도는 할 줄 알아야지. 요즘 세상이 그런 시대니까.” “…….” 그 부분에 대해서는 철저히 패스. 단유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또 물리나 수학이나 생물이나 아무튼 한 과목을 집중적으로 파고 들어서 박사 수준이라고 해도, 도덕이나 기타 다른 부분에 문제가 있다면? 인성 쓰레기? 혹은 예의 없는 천재? 무례한 판사? 소시오패스? 이런 소리 들을 수도 있지.” “예. 알겠어요.” “그리고….” “잠시 만요.” “응?” “이해했어요. 균형이란 거…. 저기 다른 거 질문해도 될까요?” 단유를 빤히 바라보더니, 손톱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면서 말했다. “해봐.” “매일 같은 과목을 공부하나요, 아니면 다른 과목을 공부하나요?” “흠. 그러고 보니 우리가 오리엔테이션을 안했구나. 사실 말이야, 내가 주영이한테 듣기로는 이 과외의 진행을 너랑 상담한 뒤에 알아서 결정하라고 들었거든. 그런데 우리가 이야기를 많이 해보지 않았단 말이지. 말 나온 김에 내 생각을 먼저 밝히자면, 난 니가 원하는 과목들을 모두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그래도 선생님의 역량이나 과외라는 특수한 수업 형태를 고려해서, 니가 필요로 하는 것만 골라서 공부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애.” “네….” “특히 나 같은 경우에는 어릴 때 수학을 잘했어. 너처럼 수학을 좋아했지. 물리는 솔직히 내 관심사항은 아니었는데,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좋아지게 된 케이스랄까? 괜히 관심이 많이 가더라고. 수학을 응용하는 부분도 많았고 말이야.” “네….” “물론 생물이나 화학도 싫어하진 않았지. 내가 자랑하는 것 같아서 조금 부끄럽긴 한데, 내가 생물을 또 좋아했어. 신기했거든. 세포라든가, 성장이라든가, DNA라든가 뭐 이런 거. 또 「빅뱅인가 창조인가」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걸 읽고 종교주의자들의 신념이란 게 대단하구나,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벽을 깰 수 있는 이론을 찾아낸다면 꽤 재미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잠깐 했었어. 그래서 친구랑 동아리도 만들었고. 연구 동아리. 이름이 ‘쿵짝동아리’였어. 왜 쿵짝인줄 알아? 신이 쿵, 했더니 우주가 짝, 하고 생겼다고 해서 쿵짝이라고 했지. 괜찮지? 어릴 때는 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고 보니까 조금 부끄럽기도 해.” “저기요.” “또 한 때는 종교에 심취했던 적도 있었지. 물론 사이비 종교 같은 건 아니고, 종교학이라는 학문 자체에 말이야. 세계의 여러 종교를 비교해보고 거기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말이야.” “선생님.” “응?” 단유는 간신히 하은을 말리고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지고 정신이 없어지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꽤 길다면 긴 학교생활을 해오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유형의 선생님이었다. 무엇보다 질문에 대한 답이 주구장창 나오는 선생님은 눈앞의 하은 선생님뿐이었다. 다른 선생님들은 질문 한마디에 땀을 흘리며 단답식으로 대답하기 일쑤였으니까. “전 딱히 과목을 가리고 싶지 않고요. 그냥 선생님이 가르쳐주시는 게 어떨까요? 전 아무거나 괜찮아요.” “아무거나가 어디 있어? 그런 무책임한 발언은 실례야.” 무책임이라니요? 단유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무엇을 책임져야 했었던 건지 고민해야 했다. “그런데, 또 나쁘지는 않겠네. 나도 그게 나쁘지는 않을 거 같아.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사실 난 개인적으로 모든 학문은 하나로 통한다고 생각했거든. 아무리 전혀 다른 학문인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하나로 귀결된다는, 소위 만류귀종의 법칙이랄까?” 단유는 하은의 수다가 생각보다 치명적이고 파괴력이 상당하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 고갤 들어보니, 벌써 6시에 가까워지는 시계였다. 무슨 소리를 어떻게 들었는지 정리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지나가다니. “선생님.”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하려던 하은이 말을 멈추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차원이 뭔가요?” “차원? 이차원, 삼차원 할 때 차원?” “네.” 하은이 빙긋 웃었다. 역시 이 나이때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다 그런 종류인가, 싶어서 웃음이 났다. 생각해보면, 자기도 어릴 때는 세계 7대 불가사의니, 미싱링크니, 버뮤다 삼각지대 같은 이야기들을 좋아했었다. 비록 초등학교 4학년인 주제에 중등 수학책을 펴고 공부하는 아이였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주제는 비슷한 것인가보다. “이차원이 뭔지는 알아?” “직선이 1차원, 평면이 2차원이라고 들었어요.” “직선 위의 좌표를 x라고 나타낼 때, 평면상의 좌표는 직교하는 두 개의 직선을 축으로 해서 x, y의 1쌍의 좌표로 표현하지. 그리고 거기에 또 다른 축이 세워지면, x, y, z를 1쌍으로 하는 좌표가 형성되고. 즉, 하나의 공간 속에서 독립적인 좌표축의 수가 해당 공간의 차원이라고 설명하지.” “예.” “그리고 물리학적으로 측정되는 물리량의 관계를 나타내는 지수로서 차원이 이용돼. 일종의 단위계로서 차원을 설명할 수 있겠지.” “어렵네요. 거기까지는 공부를 못해서 이해가 잘 안되네요.” “그럼. 초등학교 수준에서 차원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사람이 3차원의 세계에 있는데 4차원의 세계로 갔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흥미로울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 현상을 이해하려면 다양한 물리학적 지식이 기반이 되어야 한단다. 그런데 아직 너한테 어렵지 않을까 싶네. 그래도 니가 그런 쪽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억해둘게. 앞으로 과외를 하는 동안 참고는 해야 될 테니까. 그래도 공부를 하는 동안 이런 식으로 질문을 하면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가르쳐는 줄게. 너의 성적이나 공부에 도움이 될 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말이야.” 하나를 물으면 열을 안다는 말이 있음을 안다. 하지만 하나를 물으면 열을 대답해준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단유는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을 경험하고 있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나 버뮤다 삼각지대나 그런 이야기는 잘 모르지만, 지금 경험하는 일이 지금까지 경험했던 일들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 하은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보육교사가 방문 앞에 와 있었다. 보육원에 과외교사가 와서 아이를 가르치는 일이 한 번도 없었기에 조금 걱정이 되는 마음도 있어 한 번 와봤는데 다행히도 수업분위기가 나빠 보이지 않았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긴 하지만, 선생님은 열정적이었고 단유는 순종적으로 귀를 기울여 듣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다시 보자. 내일은 선생님이 너랑 함께 볼만한 책을 들고 와서 함께 공부하도록 하자. 알았지?” “네.”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 차를 끌고 보육원 밖으로 나가는 하은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기분이 좋았다. 하이힐을 신은 다리가 아픈 줄도 몰랐다. 오랜만에 실컷 입을 털(?) 기회를 얻어서 그런지 상쾌한 기분이었다. “과외가 이런 건 줄 알았으면 진작 해 볼걸 그랬네.” 신이 난 하은이 손가락으로 운전대를 톡톡 두드리며 리듬을 만들어내고, 그 위에 콧소리를 올려 노래를 만들었다. 하은이 룰루랄라 거리는 사이, 단유는 식당으로 갔다. 가는 동안 운동장에서 젊음을 불태운 명수가 달라붙었다. “뭐 먹었지?” “아니. 아무것도.” “진짜?” “응.” 명수는 발로 땅을 한 번 툭 찼다. “진짜 빈털터리인가?” 반쯤(?)은 진실일지도 모를, ‘빈털터리녀(女)’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신의 오피스텔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 [137] 화(5) 녹음(綠陰)이 짙어가는 뒷산 위로 뜨거운 태양의 열기가 한창일 때, 하은은 쇼팽의 녹턴(Nocturne) 제2번 Eb장조 Op.9번 곡이 재생 중인 자동차를 끌고 보육원으로 들어섰다. ‘역시 출근길에는 클래식이야.’ 대학 졸업 후, 딱히 할 게 없어서 빈둥대던 그녀는 절친인 주영의 부탁으로 과외를 맡을 때까지만 해도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았다. 사실 주영이 부탁하지 않았다면, 하은은 적당한 회사에 취직해서 적당히 능력을 보이면서 적당히 세월을 보내다가 적당한 상대를 만나 적당한 시기에 결혼을 하고 그럭저럭 아이 낳고 생활하는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인생관에 비해 하은은 꽤 특별한 유년시절을 보내긴 했다. 다만 하은이 그 시절의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너 혹시 영재원이라고 아니?” 단유는 수학문제를 풀다 말고 하은의 물음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아니요.” “너 정도면 영재원에 들어갈 수 있을 거 같은데.” 하은은 옆머리를 긁으며 단유의 문제 풀이를 바라보았다. 한국의 영재교육은 현재 수학과 과학 분야에 다소 쏠림 현상을 보이고는 있다. 거의 5분의 4는 이쪽 분야 영재로 선발되어 교육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단유 정도라면 충분히 입학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굳이 나한테 과외를 받는 것보다는 영재원 같은 곳에 가서 공부하는 게 너한테 더 좋을 거 같아서 말이야. 아, 그런데 보육원 애들도 영재원 들어갈 수 있나?” 하은은 곰곰이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예전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을 하나씩 떠올려보면, 그 중에서 보육원에 다니던 친구는 없었던 것 같기도 했다. 혹 있었더라도 어린 나이의 하은에게 친구들이 보육원에 사는지 여부는 중요한 게 아니었기에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다 문득 단유가 여전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느끼고는 손짓을 했다. “신경 쓰지 마. 그것보다는 이 문제는 그렇게 접근하면 안 돼.” 하은은 단유가 풀던 식의 중간부분을 지적하며 말했다. “임의의 양의 정수를 m과 n으로 정했기 때문에 여기서 이런 식을 쓰게 되면 정수가 아니게 되잖아.” 모든 답을 알려주진 않지만, 문제가 되는 부분을 간략하게 짚어주고 바르게 인도할 수 있게 돕는 방법이 하은의 교습방식이었다. 때문에 단유는 자기 힘으로 문제를 풀었고 시의적절한 순간에 도움을 얻을 수 있어서 혼자 할 때보다 훨씬 빠르고 편하게 공부할 수 있었다. “오늘 주영이가 온다고 했었나?” “그래, 지금 왔다.” 하은의 중얼거림에 답한 것은 캐주얼 정장 차림의 주영이었다. 검은 색 소가죽 토트백을 든 주영이 또각거리며 다가와 단유의 인사를 받았다. 단유에게 과외를 맡긴 후 처음으로 셋이 함께 하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요즘 일이 많아서 통 시간 내기가 힘들었어.” “뭐, 그거야 니 사정인거고.” 주영이 눈을 흘기며 하은을 바라보았다. “어휴, 저 정 없는 거 봐.” “야, 나 정도면 정이 철철 넘쳐서 국을 끓여도 되겠네. 솔직히 정 없기로는 니네 선배가 더 하다.” “야,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와?” 괜히 얼굴을 붉히며 단유의 눈치를 보는 주영이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단유야, 선생님 어때?” “당연히 좋지, 뭘 물어?” “내가 너한테 물었니? 단유한테 물었지.” “좋아요. 잘 가르쳐 주시고요.” 단유는 담담하게 자신의 소감을 이야기했다. “쟤가 약간 푼수끼는 있는데, 그래도 머리 하나는 좋은 애니까 잘 배우도록 해.” “선생님한테 푼수가 뭐니? 푼수가. 너야말로 학교에서….” 괜히 또 트집 잡으면서 말문을 틔려는 모양새에 주영은 황급히 막아섰다. “됐고. 끝나고 같이 저녁 먹으러 갈래? 단유 너도.” “저도요?” “오랜만에 맛있는 거 먹여주고 싶어서 그래.” “…죄송한데, 명수도 같이 가면 안 되나요?” 먹는 이야기가 나오자 단유는 명수가 생각났다. 명수를 두고 혼자 맛있는 걸 먹을 수 없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나중에 명수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의 후환이 두려웠던 것도 한 몫을 했다. “뭐, 굳이 안 될 것도 없지.” “명수라면, 너랑 같은 방 쓰는 애?” “네.” “근데, 첫날에는 같이 공부하는 것 같더니 일주일동안 한 번도 얼굴을 못 봤네. 일부러 자리를 피하는 거니?” 그 말에 단유는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일부러 피하는 건 아니고요. 명수도 나름 바빠서 그래요. 걔는 저랑 달리 확실한 꿈이 있는 친구라서요.” “어떤 꿈?” “축구 선수요.” 축구 선수가 꿈인 명수는 1학년 둘을 데리고 운동장 스탠드 근처에서 특훈을 하고 있었다. 너무 더운 오후에는 6시 이후에나 잠깐 운동장을 쓸 수 있도록 했다. 그 외 시간에는 일사병 등의 건강 문제로 운동장에서 뛰지 못하도록 막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수는 두 꼬마―도재민, 변유철―를 데리고 그늘이 있는 스탠드로 데리고 가서 간단히 공 다루는 법을 과외시키고 있었다. “오른발로 여길 찼다가, 빠르게 여기로 차고, 다시 다리를 넘기면서 달리면 돼. 쉽지?” 재민이 작은 발로 이리 저리 움직여보지만, 잘 되지 않았다. “형, 안 돼.” “안 되면 될 때까지 해.” 명수는 꽤 엄격한 선생님이었다. “노력은 배신자가 아니야.” 비슷한 말인 거 같은데, 아무렴 뜻만 통하면 되지. 명수는 가슴을 펴고 다시 트래핑 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명수야!” 저 멀리서 단유가 부르는 소리에 명수가 고개를 돌렸다. 곧이어 파안대소를 터뜨리는 명수의 웃음소리가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운동장을 내달렸다. **** “뭐 먹을래?” 운전대는 주영이 잡았다. 조수석에 앉은 하은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오늘 같은 날에는 삼계탕이 제격이지? 니들 삼계탕 좋아하니? 닭고기가 애들 성장에도 좋다고 하잖아? 쫄깃쫄깃 야들야들한 닭고기 한 점 뜯어서 소금에 살짝 찍어먹으면…. 게다가 닭육수로 우린 국물에 찹쌀밥이랑 같이 먹으면….” “너한테 안 물었다.” 주영이 룸미러로 뒤를 흘깃 보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하은이 주영을 힐긋 째려보았다가 씩 웃으며 물었다. “그래 먹고 싶은 거 다 말해봐.” 명수가 손을 들었다. “저요, 선생님.” 명수는 나가서 먹는다는 소리에 곧장 방으로 뛰어가 씻고 옷 갈아입고 내려왔다. 불과 5분도 안 되는 시간에 방에서 뛰쳐나온 명수를 보며 과연 씻었을까, 궁금했지만 단유를 비롯해 누구도 딴지를 걸진 않았다. “스네이크요.” “스테이크겠지.” 단유가 정정해주었다. 스네이크를 보신용으로 먹는다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설마 명수가 그걸 알면서 말했을 리 없겠지. 하은이 웃으면서 명수를 꼬드겼다. “명수는 고기 먹고 싶구나. 그런데 닭고기도 고긴데, 닭고기 싫어하니?” “닭고기도 좋아요.” “그치? 닭고기도 좋지?” “그런데 스케이크도 좋아해요.” “스테이크.” 단유가 다시 정정해주었다. 명수는 아무렴 어떠냐는 식으로 웃었다. 단유는 딱히 가리는 것이 없다고 이야기했고, 콜을 외친 주영은 하은의 어깨를 툭 치는 것으로 메뉴를 정했다. 그리고 인평시내의 유명한 스테이크 레스토랑으로 차를 몰았다. “어머, 단유야! 명수도 왔네?” 마침 주영이 간 곳은 윤정이 일하는 레스토랑이었다. 주방에서 보조일을 하던 윤정이 단유와 명수를 알아보고 홀로 나와서 반겼다. “누나, 안녕하세요.” 단유와 명수는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리고 단유가 나서 주영에게 윤정을 소개했다. “반가워요. 단유를 후원해주고 있는 이주영이라고 해요.” “안녕하세요. 권윤정이라고 합니다.” 윤정이 맑은 웃음으로 홀 서버를 대신해서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 때 레스토랑 지배인이 와서 이주영에게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두 번째인데도 기억해주시네요.” 하은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직장빨이야.” 주영이 팔꿈치로 하은을 툭 치고는 웃으면서 지배인의 응대에 화답했다. 잠시 후, 푸짐한 샐러드와 스테이크 정찬이 나왔다. 명수가 칼질이 서툴렀던 탓에 주영이 명수의 고기를 썰어 주었다. 고기 한 점을 먹고 어깨춤을 추는 명수를 보며 주영이 피식 웃었다. “맛있어?” “네, 맛있어요.” 하은은 얌전하게 스테이크를 먹는 단유를 보며 물었다. “넌 여러 번 왔었나봐?” “아니요. 이번이 두 번째예요.” “되게 익숙해 보이네.” “석고는 못하는 게 없어요.” 명수가 끼어 들어서 자기 자랑인 양 으스댔다. 하은은 고기를 썰면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석고란 별명, 참 누가 지었는지 절묘하네. 모르는 사람이 들었으면 그냥 이름인 줄 알겠어. 그러고 보면 친구들 중에 너무 별명으로만 불러서 진짜 이름을 모르는 친구도 있어. 그치? 주영아?” “난 없는데? 친구 이름을 왜 몰라?” “난 있어. 어릴 때 친군데, 걔 별명이 파이였거든? 맨날 파이라고만 불렀더니, 진짜 이름은 생각이 안 나네. 걔는 뭐하고 살려나? 걔가 얼굴이 꽤 이쁘기도 했었거든? 그래서 같은 반 남자애들 중에 걔를 좋아하는 애도 많았는데, 걔네들도 다들 파이라고 불렀다? 웃기지 않니?” “별명이 왜 파인데요?” 하은은 먹기 적당하게 썬 고기를 포크로 집어 입안에 쏙 넣었다. 입이 작아서 그런지 고기를 입에 넣고 볼을 우물거리며 먹는 모양새가 마치 다람쥐 같았다. “수업시간에 자기가 파이(π)를 외워보겠다면서 줄줄이 읊어 대는 거야. 한 5분쯤? 걔 혼자서 소수점 뒷자리를 줄줄 읊었는데 거의 백 자리 이상 외웠던 거 같아. 그 뒤로 우리가 파이라고 불렀지. 사실 파이를 굳이 외울 필요 없잖아? 누가 그런 걸 외워? 필요하면 그 때 그 때 계산해서 구하면 되는데. 그리고 대부분 10자리 정도까지는 외우잖아? 그 이상은 별로 쓸 일도 없고 말이야.” “대부분은 10자리도 안 외운다.” 주영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하은은 포크를 치켜들고 좌우로 흔들었다. “우리 때는 외워야 했어. 가끔 성격 이상한 선생님들이 파이의 소수점 아래 8자리까지를 계산에서 써먹도록 문제를 냈거든. 그러니까 그냥 구구단 외우듯이 외운 거지. 편의상 말이야.” 단유는 얌전히 듣다가 호기심이 생겨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누나는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나 봐요.” 가끔 이런 저런 이야기를 곁들일 때, 들어보면 하은의 어린 시절에는 유난히 똑똑한 친구들이 주변에 많이 있었다는 것처럼 들렸다. “얘, 영재교육원 출신이거든.” 주영이 대신 대답했다. “영재교육원이요?” “응. 초등학교 때는 대학교 부설 영재교육원, 중학교 때는 영재학교로 진학, 고등학교도 조기 졸업, 그리고 서울대학교.” “한 마디로 엘리트 코스지.” “니 입으로 그런 이야기하면 오글거리지 않니?” “아니, 전혀. 왜? 없는 사실도 아닌데. 내가 밟은 코스가 엘리트 코스인 건 맞지. 다만 내가 엘리트가 아니라서 그렇지.” “또, 또.” 주영은 애들 듣는 데서 이상한 이야기한다고 하은을 나무랐다. 하은 역시 별로 자랑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쯤에서 멈췄다. 하지만 단유는 ‘영재원’에 대한 이야기도 궁금해서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었다. “아까 선생님이 저한테 영재원 안가냐고 하셨잖아요?” “너 그런 이야기 했었어?” “아, 그냥 쭉 보니까, 단유 정도라면 영재원에 무난히 들어갈 만한 실력인데 왜 안가나 싶어서 말이야.” “애들 있는데서 이런 이야기하는 건 그렇지만, 단유는 다른 아이들처럼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게 좋다고 선배가 이야기했어. 그 뒤에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하은이 포크를 내려놓고 말했다. “니네 선배가 그러자고 하면 그래야 돼? 아니 것보다, 단유가 실력이 되고 또 그 실력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려면, 이런 허접한 선생님께 과외 받는 것 보다는 시스템이 갖춰진 영재원이 더 낫지 않니?” 주영은 대답 대신 샐러드를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나도 물론, 영재원에 갔던 걸 후회까지는 아니지만 별로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긴 해. 그래도 그건 내 경우인거고, 단유라면 또 잘 적응해서 다닐지 누가 알아?” 주영은 물을 마시고 입을 헹군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도 처음엔 너랑 같은 생각이었고, 그래서 조용히 알아보긴 했어. 그런데 초등학생 영재교육원에 대해 알아보다 보니까, 그냥 나중에 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왜?” 주영은 단유를 보았다. 단유는 이 다음에 나올 이야기가 굉장히 궁금하다는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138] 화(6) “굳이 니가 들을 이야기는 아닌 것 같네.” “왜?” 의문을 표한 것은 하은이었다. “어른들의 사정이랄까? 애들이 들어서 좋은 이야기는 아니니까.” “무슨 어른 타령이니? 꼭 저렇게 말해놓고 들으면 별 거 아니더라. 괜히 어른인 척 하려고 저래.” 하은이 주영을 손가락질하며 흉을 보는 시늉을 하니, 단유도 웃음이 나왔다. “정하은!” 짐짓 화낸 척 하는 주영의 모습을 본척만척하며 자신의 고기를 듬성듬성 썰어서는 비워져가는 명수의 접시 위에 턱 하고 올려주었다. “고맙습니다.” 명수는 짧게 감사인사를 하고 식사를 계속했다. “그리고 너도 너 어릴 적 생각을 해봐라. 너 어릴 때 어른들 더러운 꼴 안 봤니? 다 봤잖아? 그래서 뭐가 변했어? 안 변해. 그냥 좀 더 일찍 세상을 안다는 것뿐이지. 그리고 요즘 아이들, 되게 똑똑해. 모른 척 하는 건지, 순진한 척 하는 건지 몰라도 알 건 다 아는 애들이라고. 뉴스를 봐라. 애들도 정치를 알더라.” 주영은 하은의 삐딱한 태도에 발끈하며 말했다. “그거랑은 다른 문제지. 그리고 말이야 바로 하랬다. 어른들의 더러운 모습, 사회의 더러운 모습 가려주고 깨끗하고 좋은 모습만 보는 게 뭐 어때? 그럴수록 더 맑고 깨끗하게 자랄 수 있지 않겠어? 자기 일에 더욱 집중하고 자기 꿈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더 보기 좋지 않아?” 주영의 이상론에도 흔들림 없이 하은은 평안한 어조로 태연하게 고기를 썰며 대답했다. “너 무슨 태교하니? 맑고 깨끗하게? 무슨 공익광고냐? 오히려 어릴 때 사회를 바로보고 나쁜 점, 좋은 점 구분하고 고칠 점, 지킬 점 구분해서 사회를 좀 더 좋게 바꿔 나가도록 해야지. 그래야 사회가 발전하지.” “그게 애들 몫은 아니지. 그건 어른들 몫인 거고, 어른들이 잘해서 발전된 사회를 물려줘야 하는 거지.” “그런 사회가 뚝딱 만들어지니? 우리 세대가 못하면 다음 세대가 하고, 다음 세대에서 마무리되지 않으면 그 다음 세대가 해야 되는 게 이 사회의 발전이란거야.” 단유는 남은 고기의 반을 뚝 썰어서 명수의 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입주변이 스테이크 소스로 범벅이 된 명수가 씨익 웃었다. 단유는 물 컵을 밀어 마시라고 권했다. “정치라는 게 더럽다고 눈 돌리면 이 세상이 어찌 되니? 대리인 뽑아놓고 내 책임은 끝, 하는 게 이 사회의 민주주의야? 단지 내 의사를 대신해서 발언권을 준 게 국회의원들이고 난 그들이 잘 활동하는지, 내 뜻과 다른 말은 하지 않는지 지속적으로 지켜봐야 하는 게 우리 일반 사람들의 몫이다, 이거야. 하물며 어린 아이들이라도 어른들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켜보고 생각할 권리가 있는 법이야. 이 세상이 어른들의 세상인 것만은 아니고 그들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인데, 당연히 알아야지. 대신 어른들은 어떤 행동이 바른 행동인지, 바른 가치관인지를 지도하고 따르도록 해주면 되는 거야. 눈과 귀를 가리는 게 능사는 아니라고.” 그러자 주영이 다소 격앙된 어조로 받아쳤다. “하지만 교육이라는 게 항상 바른 것만 보여줄 수 없고, 게다가 가치관이 미처 정립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사회의 어두운 면, 더러운 면이 보일 때 그 아이들에게 어떤 가치관이 만들어질지 어떻게 알아? 만약 비뚤어진 가치관이 형성될 경우에는 그걸 수정하기 위해서 또 얼마나 많은 사회적 자산이 소요될지 생각해봤어? 지금도 이 사회에 수많은 청소년 범죄자들이 소년원을 들락날락하고 있다는 것을 몰라서 그래?” “…….” 하은이 입을 다물었다. 주영은 아차, 하며 슬며시 시선을 내렸다. 속으로는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나, 아니면 침묵을 지키고 얼렁뚱땅 넘겨야 하나를 고민하며 사태 수습책을 강구했다. 괜히 뒷말 나올 이야기를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래서.” “응?” “그래서 단유가 영재원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뭔데?” 하은이 침착한 목소리로 화제를 원점으로 돌렸다. 주영은 화제가 바뀌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이번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을 수가 없음에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별 수 있나. “초등학교에서 영재교육원에 가려면, 학교장의 추천이 필요해.” “우리 때도 그랬나?” “비슷했어. 그런데 문제는 학교장의 추천장에 제한이 있다는 거지. 한 학교당 몇 명 이런 식으로.” “그게 말이 돼? 학교에 몇 명의 애들이 있는 줄 알고, 추천수를 제한해?” “그렇더라고. 아무튼 제한되어 있다 보니 경쟁이 치열해.” ‘경쟁’이라 표현함은 학교장의 자의적 추천이 아니라는 이야기와 같았다. “학부모들이 끼는 거구나. 그래서… 어른들의 사정이란 거고.” “그렇지.” 우리 아이가 영재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학부모들은 부지기수다. 그런데 진짜 영재는 그렇게 많지 않다. 따라서 영재만 가려서 영재교육원에 보내는 시스템이라면 추천수의 제한이 그리 의미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영재교육원이 마치 무슨 과학고, 무슨 대학교와 같이 간판이라는 것이다. 어느 영재교육원을 나왔다, 라고 이력서 란에 한 줄 넣기 위해 학부모들은 교장으로부터 추천장을 받으려고 줄을 선다. 자기 아이가 영재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런 아이들을 위한 사교육이 존재하니까. 즉, 사교육을 통해 배양된 아이를 영재교육원에 넣기 위해 학부모들 간의 추천장 쟁탈전이 벌어지는 시국이란 이야기. 이 와중에 부모도 없는 보육원의 영재쯤은 뒷자리로 밀리는 게 당연할 정도였다. “선배 말로는 중학교 정도만 되도 입학시험을 치루고 들어가는 게 더 나을 거라고 말하니까, 그 때 들어가자는 거지. 지금은 자칫하면 분란밖에 안 만들어지니.” 영재교육원에 억지로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렇게 되면 남은 초등학교 생활에 어려움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재훈이었다. “그리고 요즘은 선행학습 없이는 풀기 어려운 문제가 입학시험으로 나온다고 하더라. 그래서 진짜 영재라도 풀기가 쉽지 않다네. 그래서 요즘 영재교육원은 유명한 수학 전문 프랜차이즈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주로 들어간대.” 하은은 물을 입 안 가득 들이붓고는 열을 식히려 애썼다. 딱히 열 받는 내용은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 이 사회는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곳이니까. “우와, 배부르다.” 잠시 테이블에 침묵이 내려앉은 틈에 명수가 포크와 칼을 내려놓았다. 명수 외의 사람들이 모두 자기 고기를 나눠 준 덕분에 거의 2인분을 혼자 먹은 명수였다. “다 먹었어?” 단유가 묻자, 명수가 씩 웃었다. “응. 진짜 배불러. 아무것도 못 먹겠어.” “윤정이 누나한테 말하면 아이스크림도 갖다 주던데.” “누나!” 명수가 손을 번쩍 들고 마침 주방 안에서 이쪽을 바라보던 윤정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레스토랑 안의 손님들이 모두 명수를 바라보았다. 윤정이 붉어진 얼굴로 주방을 나왔다. 앞치마로 손을 닦으며 다가와 명수를 다그쳤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창피하게.” 명수가 웃으며 말했다. “여기 아이스크림도 줘요?” 잠시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던 윤정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명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단유, 너는?” “저도 주세요.” “다른 분들도 드릴까요?” 하은이 대신 대답했다. “부탁드릴게요.” 윤정은 명수를 흘겨보며 볼을 살짝 꼬집고는 자리를 떠났다. **** 단유와 명수를 보육원에 데려다 준 후, 하은은 자기 차를 끌고 오피스텔로 향했다. 잠시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춘 사이에 쇼팽의 시디를 꺼낸 후, 다른 시디를 집어넣었다. 이윽고 EDM계열의 음악이 흘러나오며 차량 스피커가 둥둥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분이 쉬이 풀리지 않았다. 차창 밖으로 긴 여름 낮이 지나고 어둠이 내려 앉아 있었다. 저 멀리 산의 음영이 음울한 자태로 누워있었다. “엉덩이 하나, 가슴 둘, 다리는 셋. 바람인가?” 엉뚱한 소리나 중얼거리며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하지만, 연신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단어가 하은을 괴롭혔다. 신호가 바뀌고, 하은은 차를 출발시켰다. rpm이 잠깐 치솟다가 서서히 내려왔다. ‘정속주행 해야지, 빠르면 사고 나지.’ 기분이 우울하다고 액셀을 꾹 지르밟았다간 사고 나기 딱 좋은 각이었다. ‘그 때도 이렇게 했어야 했어.’ 하은은 피하려 했지만 자연히 떠오르고 마는 옛 일을 회상했다. **** 중학생이던 하은은 일반 중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전국 상위 0.1%에 든다고 소문이 난 하은은 영재학교로 등교했다. 영재 학교 내에서도 하은은 소문난 천재였다. 다만 하은은 자신의 천재성에 대해 주변 사람들의 그것처럼 자각하지는 못했다. 영재학교는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쉴 틈없는 수업과 실험, 과제와 리포트로 아이들을 휘둘렀고, 아이들은 녹초가 되기 직전까지 매달렸다. 아무리 실험과 수업에 흥미를 느끼고, 뛰어난 천재성을 발휘한다 해도 그 무리들 내에서는 그저 평범한 정도. 똑같이 바쁘고, 똑같이 힘들고, 똑같이 어려웠다. 몇 몇 아이들은 학교 수업이 끝난 후 다시 학원으로 가야 했고, 몇 몇 아이들은 혼자 숙제를 하기 위해 밤 늦은 시간까지 도서관에 남아서 공부를 해야 했다. “하은아.” “응?” 책을 보던 하은을 부른 것은 명지라는 친구였다. 명지도 수학 쪽에 재능을 보여 영재학교에 입학한 아이였다. 다만 성격이 다소 소극적인 성향이 있어 교우 관계가 그리 좋지 못했는데, 유달리 하은에게는 친밀감을 표시했다. 하은도 또래와 비교해 평범함 이상의 외모여서 사춘기 남학생들의 가슴을 두근대게 했지만, 명지는 가히 학교 최고의 퀸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명지의 성격상 다른 남자 아이들과는 거의 말을 섞지 않았고, 그래서 거의 TV 속 아이돌처럼 남자 아이들의 대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물로 다뤄졌다. “배고프지 않아?” “뭐 먹으러 갈까?” 조금 늦은 시간이긴 했지만, 서두르면 학교 매점이 문 닫기 전에 라면 하나 정도는 사먹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라면 어때?” “좋아.” 배시시 웃는 명지의 팔짱을 낀 하은은 가벼운 걸음으로 매점을 갔다. “컵라면 2개만 주세요.” “김밥이라도 남았으면 줄 텐데 김밥이 다 떨어졌네.” 매점 아주머니의 립서비스에 하은은 말만이라도 고맙다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으, 뜨겁다.”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는 호들갑을 떠는 명지에게 하은이 한 마디 했다. “손 떼.” 굳이 컵라면에 손을 붙이고 온도를 재고 있을 필요는 없잖아? “이렇게 손을 붙이고 있으면, 물이 빨리 식지 않잖아? 그러면 라면이 더 맛있게 만들어질걸?” 컵라면의 스티로폼 재질 용기의 열손실 정도가 손의 온기로 보호될 정도인가는 차치하더라도, 굳이 화상의 위험성을 감수하면서 컵라면의 맛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 고쳐주고 싶었다. “의미 없다.” 하은은 명지의 팔목을 찰싹 때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명지가 또 예의 배시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뗐다. “하은아.” “응?” 시계를 보면서 시간이 얼마나 흐르나 지켜보던 하은이 명지의 부름에 시선을 맞췄다. “너 공부 재밌어?” “그냥. 할 만해. 왜?” “…….” 사실 영재학교에는 수업을 따라가는데 힘이 부쳐 낙오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 아이들이 멍청해서도 아니었고, 공부를 안해서도 아니었다. 다만 그 나이 때의 아이들이 견디기에는 너무 빡빡한 수업 일정 때문에 그랬다. “난 빨리 조기 졸업하고 싶어.” 포기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니 다행이랄까, 아니면 역시 영재학교에 다니는 아이답다고 해야 할까?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가도 마찬가지 아닐까?” 하은이 젓가락으로 컵라면 위를 톡톡 두들겼다. 적당한 반탄력으로 나뭇 젓가락이 튕겨지는 느낌이 좋았다. “고등학교도 조기 졸업하고 대학교 가면 되지.” “대학교도 비슷하면?” “대학교도 조기 졸업하지, 뭐.” 시계를 흘끔 쳐다보니, 아직 1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하은아, 넌 뭐가 되고 싶어?” “…글쎄다. 아직 정한 게 없는데.” “난 시인이 되고 싶어.” 뜬금없이? “왜?” “시가 좋으니까.” “그럼 여긴?” “여기는 엄마가 가라고 해서. 엄마는 내가 여길 졸업만 하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해도 된다고 했어. 물론 그 말을 순진하게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명분은 나한테 있으니까, 졸업하면 이야기할 수 있을 거야.” 명지가 뚜껑을 벗기고 젓가락으로 라면을 휘휘 저었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며 명지의 안경을 뿌옇게 만들었다. 얼굴이 이쁜 명지는 안경을 낀다. 그래서 대부분 남학생들은 명지의 맨 얼굴을 보지 못했다. 안경만으로도 대단한데, 벗으면 어느 정도일까, 라고 추측하는 게 그들의 일상이었다. 문든 하은은 웃음이 났다. “왜 웃어?” “아니, 누구는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데, 누구는 남자애들 반응이나 생각하고 있으니 꼴이 우스워서.” “너 남자 생각했어? 남자친구 있어?” “있겠냐?” “그야 모르지. 너 정도라면 뭐, 있을 수도 있지. 성격 좋고, 얼굴 예쁘고….” “야, 야. 그만해. 우리끼리 이러는 거 아니다.” “그치? 훗. 라면 불겠다. 먹자.” 둘은 참으로 맛있게 라면을 먹었다. 따뜻한 국물까지 남김없이 들어 마실 정도로. ======================================= [139] 화(7) 명지의 조기 졸업 선언은 그냥 되는 대로 내뱉은 말만은 아니었다. 평소보다 더 수업에 집중했고, 도서관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쉬는 시간에도 책을 붙들고 늘어졌다. 눈 밑으로 검은 그늘이 짙어짐에도 신경 쓰지 않았고, 머리카락이 점점 푸석해진다는 지적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쟤 안 씻은 거 같지?” “머리가 떡인데?” 더 이상 두고 보지 못할 정도가 되어, 하은은 명지를 붙들고 이야기했다. 다가가서 보니 명지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엉망으로 흘러내린 머릿결과 퍼석해진 두 뺨은 창백했다. “너 잠은 자니?” “바빠.” 명지는 보던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형광펜을 신경질적으로 그어대며 한 글자라도 더 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명지는 시간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모든 걸 서둘렀고, 매달렸다. 평소라면 저녁 시간대의 특강 시간에 명지는 ‘음악과 수학’이란 강의를 찾아들었을 테지만, 지금은 오로지 졸업을 위한 공부를 위해 도서관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조기 졸업을 위해 필요한 자격 중 하나는 필요 학점을 이수하는 것. 그게 되지 않는다면 조기 졸업은 물 건너가는 것이다. “학점은 되니?” 하은이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명지의 시선은 형광색으로 줄이 쳐진 해답지의 풀이를 보고, 손은 빈 노트 위를 열심히 내달리며 각종 공식들을 써내려가고 있었다. “…괜찮아.” 점점 문답이 어려워졌고, 종래에는 대화를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명지가 대화를 거부한 탓도 있었고, 하은이 제풀에 지친 탓도 있었다. 명지는 더욱 공부에 열을 올렸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아이들이 명지에게 품었던 판타지는 점점 사그라들었다. 심지어는 선생님들마저 명지를 걱정하며 조금 더 건강에 유의하길 바랐지만, 명지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전 아무 문제없어요.” 그리고 기이하게도 명지의 성적은 점점 떨어졌다. 아이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선생님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영재라고 해도, 결국 사람이었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고, 건강에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결국 집중력이 저하되고 암기나 계산 능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유형이 비단 명지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과거의 수많은 선배들이 그런 착오를 했고, 종국에는 영재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전학을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명지는 오로지 수업과 책에 집중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눈에서 총기가 사라지고 집중력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본인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명지의 부모는 오히려 열심히 하는 애한테 공부하지 말라는 거냐며, 일부러 전화를 걸어준 선생님을 타박했다. 공부에 ‘적당히’가 어디 있냐는 것이었다. 오히려 너무 열심히 한다는 말에 기뻐했다. 몇 번의 시험들이 있었고 명지는 성적표를 받고 구겨서 가방에 욱여넣었다. “난 할 거야. 난 할 수 있어.” 명지는 다시 책을 펼쳐 들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서 하은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친구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학기 마지막 시험이 다가왔다. 무학년 졸업학점제를 선택한 영재학교의 특성상, 이번 시험에서 받는 점수에 따라 조기 졸업도 가능할 것이다. 다만 그간 떨어진 점수 때문에 이번에 평점을 맞추려면 꽤 좋은 점수를 얻어야 했다. 하은은 언제나 그렇듯,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무리하지 않고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험을 치렀다. 반면 명지는 시험시간에 쓰러졌다. “명지야!” 그러나 곧 몸을 추스른 명지는 선생님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시험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제발요, 선생님. 꼭 시험 보게 해주세요. 예?” 반의 아이들은 명지를 괴물 보듯 쳐다보았다. 그녀의 기이한 의지와 집착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이었다. 아무도 그녀의 모습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명지는 조기졸업에 실패했다. 사실 시험도 시험이지만, 마지막에 제출해야 했던 졸업논문이 통과하지 못했다. 「심대한 이론적 과장과 오류가 빈번히 관찰되어」 논문심사가 거절된 것이다. 이후 명지는 반쯤 넋을 놓았다. “명지야, 이제 천천히 해. 굳이 여기서 조기졸업 하지 않아도 되잖아.” 보다 못한 하은이 명지에게 다가가 이야기했다. 명지가 멍한 눈으로 하은을 올려다보았다. “너, 1등 했더라.” 하은은 반 1등을 차지했다. “전교 1등도 아닌데 뭘.” 뱉어놓고 아차, 싶었다. 평소같이 농담처럼 말한 것이었는데 명지의 눈빛이 변한 것이다. “너 나만큼 공부했어? 노력했어? 안했잖아. 그런데 왜 니가 1등인거야? 너무 이상한 거 아냐?” “무슨 소리야?” 멍하던 눈빛에 살짝 검은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명지는 고개를 돌렸다. “꺼져. 너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명지야?” “…….” 하은은 자리로 돌아갔다. 어쩐지 자기가 실수로 내뱉은 말 때문에 명지에게 상처를 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책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너무나 단호한 명지의 태도 때문에 당장 사과하지 못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이라도 사과해야 하나, 싶어서 바라보니 명지는 가방을 챙겨 교실 밖으로 나갔다. 그 이후로 명지와 대화할 여유가 나지 않았다. 곧 방학이 되었고 명지는 더 이상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은 계절 학기나 재수강을 위해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말이다.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명지는 오지 않았다. “명지 있잖아, 2반에 걔.” “왜? 무슨 일 있어?” “방학 때 소년원에 들어갔대.” “어? 왜?” “나도 들은 이야긴데, 불량배들이랑 놀다가 무슨 죄를 지었나봐. 경찰에게 잡혔는데, 죄질이 불량하다고 소년원에 갔다던데?” 식당에서 들은 충격적인 이야기에 하은은 서둘러 선생님께 달려갔다. “니가 신경 쓸 일 아냐.” “제 친구 일이예요.” “…나중에 설명해 줄 테니까 넌 교실로 가.” 나중에 알았지만, 선생님은 명지에 대한 일을 학생들에게 알릴 생각이 없었다. 아이들이 알아봐야 심리적 동요만 일으킬 것이고, 결국 학습에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 일이란 게 어디 한 두 사람이 침묵한다고 될 일이었던가. 결국 어디선가 샌 소문은 식당을 중심으로 해서 아이들 사이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도둑질?” “빈 집을 털었대?” “임신이라고?” 영재들의 아이돌이었던 명지가 불량배와 어울리다가 임신까지 하고 소년원에 갔다? 도저히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은 벌어졌고, 하은은 선생님께 달려갔다. “알려주시지 않으시면, 지금 당장 학교를 나가서 명지를 찾아보겠어요.” “어디 있는 줄 알고 찾아?” “소년원에 있다니까,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면 나오겠죠. 다른 지방 소년원으로 갔을 리는 없을 거고 가까운 소년원부터 검색해서 찾아가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아이들에게 알리기도 싫지만, 공부 잘하는 학생을 또 잃고 싶지는 않았다. 선생은 협박 같지 않은 협박에 굴하고 말았다. “선생님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명지가 지난 학기 성적에 꽤 많이 실망했었나 보더라. 그래서 탈선한 거야.” “탈선이라고요?” 선생님의 표현이 다소 순화적인 표현이긴 했지만, 명지의 현 상황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고 여겼다. “…폭주족들과 밤에 거리를 돌아다녔대. 그게 몇 번 이어지다가 술도 하고 그랬나봐. 그러다가 폭주족의 한 아이가 차량 절도를 시도했고, 같이 도망가다가 걸렸대. 폭주족은 명지가 교사(敎唆)했다고 증언했고 명지가 인정했어.” “…말도 안 돼.” “명지를 본 선생님 말로는 자포자기 하는 심정이었다고 하더구나. 학교를 다니기 싫었대. 아무리 노력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다른 친구들은 쉽게 공부하는데 자기는 그게 안 된다고.” 하은은 말문이 막혔다. 어쩐지 마지막 말이 자길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자기가 뱉은 말이 그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후 하은은 영재학교를 별 탈 없이 졸업했다. 고등학교도 졸업했고 대학교도 졸업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명지에 대한 생각도 조금 변했다. 아마도 명지는 스스로의 굴레에 빠져서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신문에 흔히 나오는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 그리고 사춘기 소녀의 예민한 감성에서 비롯된 잘못된 선택. 결과만 두고 보면 사회면의 2단 기사에도 못 오를 일이었다. 그럼에도 하은은 명지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친구였다면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하는데. 더 많은 대화와 소통으로 친구를 안아줬어야 하는데. 마지막의 무신경했던 대화는 별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끝끝내 머리에 남아서 낡은 테이프 재생하듯이 틈틈이 떠올라 하은을 괴롭혔다. 오피스텔에 돌아온 하은은 냉장고에서 시원한 독일 에일 맥주 한 캔을 꺼냈다. 탄산이 많이 들어간 맥주는 배가 불러서 많이 못 마시지만 향이 진한 이 맥주는 한 캔 마시고 잠들기 딱 좋았다. TV를 켜고 소파에 앉아서 맥주를 한 입 들이켰다. 뉴스를 보다보니 외교문제로 여야가 시끄럽다는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다시 맥주를 한 입 들이켜고 보니 이제 남 여 개그맨 둘이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또 한 입 들이켜고 보니, 맥락을 전혀 알 수 없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다. 일찍 잠들기 위해 마신 술인데,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 “원의 면적이 0이라고요?” 단유가 의아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은의 갈색 머리카락이 창을 넘어 들어온 햇살에 눈부시게 출렁거렸다. “선분이나 곡선은 평면상에서 면적이 0이야. 그런데 선분을 잇게 되면 원이 되지. 그럼 원의 면적은 0. 이건 사실 ‘원’의 정의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고, 동시에 기하학적 원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문제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원의 면적을 구하라고 하면 이렇게 경계가 지어진 부분과 경계 안쪽의 영역을 모두 원이라고 인식하는 기하적 표현을 전제로 하는 거거든. 그런데 만약 처음의 설명처럼 선분의 연계로 형성된 도형으로서 원을 인식한다면 면적은 0이라고 할 수도 있는 거지.” “요지는 정확하게 정의를 내려야 한다는 거군요.” “아니, 다르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야. 우리는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대상을 보고 있지만, 사람은 모두 다른 환경, 다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언어의 교통(交通)에 문제를 겪는 일이 없다더라도 조금씩 다르게 이해하고 다르게 표현해. 대전제가 다른 일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지. 내가 ‘원’을 이야기할 때, 그 원과 니가 생각하는 원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듯이 말이야. 크기든, 형태든 혹은 위치든. 어떤 사람은 평면에 누워있는 원을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수직으로 서 있는 원을 생각할 수도 있지. 비스듬히 누운 원의 형태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겠네요.” “수학과 같은 학문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드물다지만, 그래도 항상 그런 부분을 고려해야 해. 단순한 사칙연산의 수준에서는 문제가 없다고 해도, 영재원에서 내는 문제들이나 고등 수학에서 내는 문제들에는 다르게 생각하는 법이 필요해.” 하은은 펜을 돌리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유는 그녀를 흘끔 쳐다보았다. 평소라면 좀 더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저 입이 오늘은 왠지 굳게 닫혀 있었다. 물론 평소와도 같이 수다가 쏟아져 나오는 것보단 지금이 더 낫다고 생각했지만,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걱정이 먼저 드는 게 보통이었다. “선생님.” “응?” 창밖으로 실낱같은 오리구름을 구경하던 하은은 조건반사처럼 단유의 부름에 반응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응? 없는데?” 하은은 단유를 보다 다시 하늘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런 선생님을 쳐다보던 단유는 펜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별 말씀이 없으시네요.” 하은은 단유를 바라보다 입 꼬리를 올렸다. “그 말은 내가 평소에 말이 많았다는 이야기네.” “네.” “어머, 너 너무 직설적이네. 그리고 아무리 선생님이 말씀이 좀 많았기로서니 제자로서 그렇게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건 조금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니? 우리 때는 선생님 그림자만 봐도 허릴 숙이고 10m 밖으로 피해 다녔어.” 하은이 박수를 치며 익살스럽게 웃었다. “선생님, 오늘 뭔가 참는 듯한 모습이셔 서요. 할 말이 있는데도 안하시고 계신 것처럼 보였어요. 그래서 혹시 제가 무슨 잘못을 한 건가 궁금해서 여쭤본 거예요.” 하은은 입을 꾹 닫고 단유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 아이, 대단히 민감하고 예민하다. 그리고 상대의 반응에 덤덤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끊임없이 관찰하고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처음 보육원 밖에서 만났을 때도, 함께 식당에 갔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책을 읽고는 있지만 계속 주변을 신경 쓴다. 티를 안내서 다른 사람은 모를지 모르겠지만, 하은의 눈에는 단유의 모습에서 누군가와 겹치는 환상이 보였다. 너무 예민하고, 여렸던 친구. 오히려 그 때문에 더더욱 문을 닫아걸고 안으로 침잠해야 했던 아이. 그리고 알면서도 다가가지 못했던 자신의 죄. 그리고 마침내 그 아이가 받아들여야만 했던 성적표는 과연 그 아이만의 잘못이었을까. “단유야.” “예.” “문제는 다 풀었니?” “…사실은 잘 안 풀려요.” 하은은 은은한 미소로 답했다. “같이 풀어보자.” ======================================= [140] 이(1) 여름 방학 동안 단유는 본인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간 홀로 공부하느라 애썼던 것에 비하면 짧은 시간에 중등 수학을 마스터할 수 있게 되어 좋았다. 특히 단유가 힘들어했던 부분이 통계와 이차함수 부분이었는데, 하은은 단유의 수준에 맞게 적절한 포인트를 지적해주면서 학습을 도와주었다. 일방적인 가르침보다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여 단유가 스스로 문제를 풀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주안을 둔 과외였다. 덕분에 단유는 획일적인 교습에서 벗어나 스스로 궁리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할 수 있었고, 이러한 학습방식으로 다른 과목에도 도움이 되었다. “명수야. 얼른 준비해.” “먼저 내려가지 마. 기다려 거기.” 명수가 옷을 마저 갈아입고, 가방을 둘러맬 때까지 단유는 방 입구에서 기다렸다. 이윽고 명수가 단유의 어깨를 툭 치며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명수야, 첫 날부터 왜 이리 굼떠! 동생들 보기 부끄럽지 않니?” “내가 부끄러워?” 재민과 유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선이만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명수의 어깨를 탁 치고는 아이들을 선도해서 안전하게 차에 오르도록 도왔다. 지선이 작은 다리로 쫓아와 단유의 손을 붙잡았다. 단유는 지선의 손을 잡고 차에 올랐다. **** 계절상 가을이라지만, 아직 더운 여름의 기운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대부분 짧은 반팔 티셔츠를 입었고, 더러는 반바지를 입고 등교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단유가 반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소년의 눈에 띄는 것은 얼굴색들이었다. 얼굴이 아주 거무죽죽하게 변한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아주 하얗게 변한 아이들도 있었다. 여름방학만큼 아이들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게 또 있을까 싶었다. “반장? 키 커진 거 아냐?” 한 아이가 단유를 보더니 인사를 했다. 또 커졌나 싶지만, 재어 보질 않아서 잘 모르겠다. 단유는 어색하지 않게 가볍게 손 인사로 대신하며 자리로 갔다. 창가 쪽은 역시나 아침 햇살이 길게 들어와 코팅된 책상 면이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단유는 그런 빛깔과 질감이 좋았다. 마치 집 앞의 너럭바위를 보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안녕?” 단유가 책상 위를 짚어보고 있을 때, 유림이 옆으로 왔다. “어, 너 키 커졌다?” 유림 역시 단유 옆에 서더니, 단유의 키에 놀랐다. “난 모르겠는데.” “너 커졌어. 예전에는 내가 너보다 키 컸는데, 이제 비슷하잖아.” 방학 전까지는 단유가 유림보다 5~6㎝ 정도 작았었는데, 이제는 거의 눈이 같은 높이에 있었다. “다행이다.” 유림은 작게 중얼거리며 가방을 정리했다. 단유는 뭐가 다행일까, 물어보려했지만 곧 다른 목소리가 끼어드는 바람에 말을 잇질 못했다. “안녕, 반장.” 유림과 단유의 시선이 모두 앞으로 돌아갔다. 책상 앞에 서 있던 사람은 혜린이었다. 유림이 벌떡 일어섰다. “혜린아! 괜찮아?” 사담을 나누다가 혜린이 소리 없이 들어오는 것도 보지 못했던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괜찮아? 아픈 데 없어? 우리 걱정 많이 했어.” “고마워. 이제 다 나았어.” 혜린이 아이들의 인사를 받는 사이, 단유는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가지고 온 책을 폈다. 그 모습을 혜린이 슬쩍 보았지만, 워낙 많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터라, 별 다른 행동을 취하진 않았다. 유림은 눈물을 흘릴 기세로 혜린의 손을 붙잡고 흔들었다. “내가, 너 어떻게 되는 줄 알고 얼마나 걱정 많이 했는데.” 울먹거리는 목소리에 울컥 감정이 차오르니 여자 아이들은 금세 눈꼬리를 찍어 눌렀다. 그리고 그 감정을 따라가지 못하는 남자아이들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천천히 자리를 이탈했다. 단유마저도 어색한 분위기에 일어서서 자리를 피해야 하나, 아니면 자기 자리니까 고개나 숙이고 있을까 고민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올 때까지 유림과 혜린을 필두로 여자 아이들이 뭉쳐서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여자 아이들이 뭉치면 나오는 흔한 레퍼토리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일생에 단 한 번 경험할까 말까한 일을 겪은 혜린은 거의 슈퍼스타급이었다. 본인이 인정하지 않더라도, 그녀는 죽었다가 3일 뒤 부활하신 분 못지않은 거룩하고 신성한 존재처럼 다루어졌다. “아무 기억도 안나?” “…별로 나는 건 없었어.” “내가 어떤 책에서 봤는데, 천사를 따라가서 천국을 구경해도 다시 돌아오면 기억이 나질 않는대.” 단유는 도대체 기억도 나질 않는다면서 천사는 어떻게 기억하고 이야기를 썼을까, 궁금했다. “우리 이모도 예전에 한 번 죽을 뻔 했는데, 그 때 어떤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와서 자기 손을 잡으려고 했대. 근데 이모가 그 손을 잡으면 영원히 떠나야 할 것 같아서 손을 감췄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 사람이 계속 쫓아오면서 ‘손 내놔, 니 손 내놔’ 이랬대. 그래서 우리 이모가 막 도망쳤대. 그러다가 그 사람이 ‘다음에는 안 봐준다’ 그러고는 사라졌대. 그 후에 우리 이모가 깨어난 거야.” 그건 미담이 아니라 공포소설 급인데. “혜린아, 넌 영혼이 막 빠져나가서 니 몸 보고 그런 건 없었어?” “아니…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왜 드라마 보면, 영혼이 쓱 빠져나가서 내 몸이 침대에 누워 있는 거 보다가 쑥 사라지잖아? 선이 연결되어 있으니까 어디든지 갈 수 있고.” 영혼설까지 나왔으니 다음엔 뭐가 나오려나? 그런 생각의 와중에 우연히 단유는 자길 훔쳐보던 혜린과 눈이 마주쳤다. 혜린의 얼굴이 붉어지면서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단유도 괜히 민망해서 고개를 돌렸다. 단유로서는 딱히 혜린이 문제가 아니라,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에, 합리적이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억지로 들으며 버텨야 하는 이 상황 자체가 난감할 뿐이었지만, 그런 반응을 오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야, 선생님 들어오시겠다. 일단 나중에 이야기해.” 유림이 서둘러 아이들을 각자의 자리로 돌려보냈다. 아이들은 혜린에게 무사해서 다행이라며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유림아.” “응, 너도 나중에 이야기하자. 선생님 곧 들어오실 시간이야.” 부반장으로서의 임무에 최선을 다한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하는 유림이었다. 혜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반장.” 유림이 작은 목소리로 단유를 불렀다. “왜?” 단유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유림을 돌아보다, 흠칫했다. 어쩐지 조금 전 등교 때의 표정이 아니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단유가 속으로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유림이 지긋이 단유를 응시하다 한숨을 토해냈다. “나중에 이야기하자. 지금은 할 기분이 아니야.” ‘아니, 내가 말하자고 했나? 자기가 말 걸어놓고 무슨 소리야?’ 뜬금없는 유림의 행동에 의아해하는 단유였다. 그 사이 유림은 혜린의 뒷모습을 관찰했다. 하얀색 긴팔 티셔츠를 안에 입고 그 위로 짙은 파란색의 하얗고 작은 도트무늬가 있는 스쿨룩 원피스를 걸쳐 입고 있었다. 분홍색 단화까지 신고 나온 걸 보면, 분명 각오가 선 것이 분명했다. ‘이 남자, 어떻게 지켜야 하지?’ 유림이 그런 생각을 하는 줄, 꿈에도 모르는 단유는 그저 종이 울리길 바랐다. 첫 시간은 HR시간. 단유가 1학기 반장직을 그만할 수 있게 되는, 공식적인 임기종료시간이었다. **** 혜린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전에도 계속 복잡했지만, 단유의 얼굴을 보고 나니 더욱 복잡하고 정리가 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자길 바라보니, 도대체 자신의 기억 속 그 모습과 장면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에 대해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일단 아이들의 환영인사 때문에 첫 시도는 무산되었다. 그런데 등교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단유의 담담한 표정을 바라보자니 과연 이 말을 꺼내도 되는 것일까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괜히 이야기했다가 미쳤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다가 아까 어떤 친구가 ‘영혼’이라는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복잡한 속이 더욱 얽히고설키는 기분이었다. ‘영혼이 천국엘 갔다가 온 걸까? 그러면 거기 단유는 왜 있었던 거지?’ 혹시 저승사자가 단유를 닮았던 걸까, 라는 엉뚱한 생각에까지 미치는 자신의 상상력 때문에 더더욱 단유에게 말 걸기가 두려워진 혜린이었다. **** 단유는 반장직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2학기 반장으로는 상훈이가 뽑혔다. “저를 반장으로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김단유 학생 덕분에 생긴 우리 반의 ‘고맙습니다’ 시간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나가겠습니다. 그리고 더욱 우리 반을 위해 힘쓰고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별로 한 건 없지만, 그래도 반장직에서 내려오니 어쩐지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하는 일 없는 일이라도 직책을 맡고 있으면 어깨가 굉장히 무겁고 부담스럽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딱히 반을 위해 무언가 최선을 다했다는 기분은 솔직히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1학기 동안 반장으로서 최선을 다해주었다며 박수를 쳐 줄때는 뿌듯함과 미안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다시 이런 일을 맡지는 않겠지만, 혹시라도 이런 일을 맡으면 그 때는 좀 더 최선을 다해야겠구나.’ 그래야 최선을 다했다며 웃음과 박수로 보답하는 친구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새로 뽑힌 반장은 앞으로 우리 반을 위해서 더욱 열심히 하도록 하고, 전임 반장처럼 우리 반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단유, 열심히 했고. 니가 반장이어서 선생님이 굉장히 고마웠다. 자 다들, 박수.” 선생님의 인사와 다시 이어진 박수에 단유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유림도 부반장직으로 내려놓고 일반(?) 학생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이제부터는 공부할 시간이 많이 필요하니까, 잘 된 거야.” 자신에 대한 위로인지, 아니면 단유를 위한 위로인지는 잘 구분이 되지 않았지만,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자, 그리고 오늘은 자리를 바꿀게요. 새롭게 시작하는 만큼, 새로운 짝과 함께 새출발하는 거예요.” 좋아하는 아이도 있고, 부끄러워(?)하는 아이도 있고, 귀찮아하는 아이도 있었다. 단유는 아무렇지도 않은 아이였고, 유림은 짜증이 나는 아이였다. “굳이 바꿔야 하나요?” 라고 묻고 싶은 걸 억지로 눌러 참았다. 괜한 놀림감이 되는 건 사양이었으니까. “1학기동안 여러분들은 서로에 대해 많이 알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선생님이 생각해보니까, 서로 원하는 짝들끼리 앉으면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죠?” “네!” 선생님은 빙긋 웃으셨다. “그래서 여러분들한테 선택권을 드릴게요. 나는 이 사람과 같이 앉고 싶다, 생각하는 사람은 손들고 발표하세요. 그러면 그 사람과 앉을 수 있는 기회를 드릴 거예요. 단 상대가 거부하면 같이 못 앉아요. 알겠죠?” “네?” 새로운 방식의 공개 처형인가, 라는 생각을 유림이 잠깐 해보았다. 어떻게 자기 입으로 ‘누구랑 같이 앉고 싶어요’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많은 아이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저요!”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탁이, 말해봐. 누구랑 앉고 싶어?” “저는 얘요.” 가리킨 것은 원래 짝이었다. 아이들이 ‘우우’거리며 야유를 보낼 때, 선생님이 방긋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원래 짝은 안돼요. 반드시 새로운 짝을 선택할 것. 또, 반드시 이성의 짝이어야 할 것!” “예?” 아이들이 놀래서 소리쳤다. “안돼요, 선생님. 안돼요.” “아이, 어떡해.” 선생님은 웃으면서 검지를 들었다. “자, 조용. 1분, 아니 2분 동안 신청 받아요. 2분 동안 앉고 싶은 사람 있으면 손들고 말하기, 나머지는 번호 순으로 앉기. 시작!” 마음을 정리할 틈도 주지 않고 졸속으로 강행해버리는 선생님의 태도에 성난 아이들의 마음은 갈대처럼 흔들렸다. 2분이란 제한 시간은 아이들의 마음을 태풍처럼 흔들어 댔다. ‘어떡하지.’ 특히 유림은 방법이 없었다. 반드시 헤어져야 할 운명. 헤어져야 할 상대. 우리 이제 안녕인가요. 그렇게 단유를 슬쩍 바라보는데, 단유는 아무 생각 없이 선생님을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다. ‘조금은 감정을 실은 눈빛으로 바라봐 주면 안 되나?’ 심술이 난 유림이 단유의 팔을 찰싹 때렸다. “아!” 작은 감탄사를 내며 단유가 고개를 돌렸다가, 유림의 시선에 머쓱해하며 시선을 돌렸다. “저요, 선생님.” 혜린이 손을 들었다. 유림은 불안했다. 단유는 멍했다. “그래. 혜린이. 혜린이는 누구랑 앉고 싶어?” “반, 아니 단유요.” “오오!” 아이들은 하나같이 입을 동그랗게 모으고 놀리듯 감탄했고, 혜린의 얼굴이 붉어졌다. 유림은 불안이 사실이 되자 괜히 화가 났다. 그리고 단유는 여전히 아무 생각이 없었다. “좋아?” 유림이 작은 소리로 단유에게 물었다. 왜 굳이 그렇게 작게 말하냐고 묻지는 않았다. 다만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작게 대답했다. “좋고 말고가 어딨어. 그냥 같이 앉는 건데.” 그냥 같이 앉는 게 아니고, 무려 ‘같이’ 앉는 거다.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를 모르는 이 무뚝뚝한 남자애가 미워졌다. 유림은 한 번 더 단유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 [141] 이(2) 혜린은 부끄럼을 무릅쓰고 제일 먼저 손을 든 덕에 원하는 짝과 앉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로 용기백배하여 후발주자들이 손을 들었고, 원하는 짝을 쟁취하기 위한 눈치싸움이 벌어졌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손을 든 사람들은 모두 여자아이들이었다. “우리 반 남자애들은 용기가 없어.” 점심시간. 남자가 용기 있게 먼저 다가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여자애들이 푸념을 할 때, 남자아이들은 공을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야, 오늘은 우리 팀이랑 하자.” “안 돼, 오늘은 우리랑 해야지.” 남자들은 그들만의 리그가 있었다. 한편, 언제나 그렇듯이 단유는 느긋한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도서관으로 갔다. “오랜만이네.” “안녕하세요.” 단유가 1학년이었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계속 한 자리를 지키는 도서관 사서 선생님에게 인사를 드렸다. 방학 전까지는 올림머리를 하고 계시더니, 지금은 짧게 커트를 하고 컬이 약간 들어간 볼륨펌을 하고 계셨다. “너 키 많이 컸구나? 점점 멋있어지네?” “고맙습니다.”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많겠어? 그치?” 마침 자판기 커피를 두 잔 뽑아서 들고 오시던 선생님 덕분에 단유는 자연스럽게 사서선생님에게 벗어났다. “선생님, 여기요.” “고마워요, 한 선생님.” 단유는 한 선생님에게도 인사를 하고는 서재로 갔다. “쟤가 그렇게 똑똑하다면서요?” 한 선생님은 작년에 이 학교로 온, 올해 2년째를 맞이한 선생님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학교에서 가장 똑똑한 애일걸요? 예전에는 방송에도 나갔어. 똑똑한 아이라고 소문이 나서 말이에요.” “어머, 그래요?” 한 선생님은 사서 선생님 옆에 의자를 하나두고 나란히 앉았다. “근데 보육원 애라서 그런가 친구가 없나 봐요. 맨날 여기 오네. 솔직히 저 나이 때 애들 중에 이 시간에 도서관 오는 애가 없잖아? 그런데 저 애는 항상 점심시간에 오거든? 책을 좋아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하루도 안 빠지고 여길 오겠어? 얼굴은 반반한데 아무래도 보육원 애라서 그런가, 조금 어두운 면도 있어요.” 사서 선생님은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반장이었다는데요?” 한 선생님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사서 선생님의 말을 받았다. “반장이라고 애들이 좋아한다는 법은 없지. 오히려 공부를 잘하니까 애들이 반장하라고 뽑았겠지. 그런 말 있잖아요? 수재들만 모인 회사가 멍청한 일을 저지른다고. 똑똑한 사람들도 한 조직 안에 모아두면 집단우둔의 상태로 빠지는 경향이 보인대요. 애들도 마찬가지라고요. 개별적으로 물으면 저 사람이 싫어. 그런데 다 같이 모아서 뜻을 모으라하면 잘못된 선택도 잘못이라고 인식을 못한다고 하잖아요.” 한 선생님은 커피 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집단 우둔화를 막기 위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던가? 아무튼 학교라는 곳에서 선생님들의 역할이 중요한 것도 그런 거예요. 아이들이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고, 개개인의 개성을 살릴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한 거죠. 집단생활에서 개인의 개성을 살릴 수 있도록 교육한다는 게 얼마나 중요하고 또 어려운 일이예요? 그래서 교사란 직업이 힘든 거죠. 다른 사람들은 그걸 몰라요. 그저 철밥통인 것처럼만 보고 방학 챙겨먹는 꿀직장이라고 뒷담화를 한다니까.” 짧게 혀를 차는 사서선생님이었다. 한 선생님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처음에 이 학교로 왔을 때, 우연히 마주친 후 친절하게 이것저것 알려주셔서 고맙게 생각하고 가까워졌는데 가끔 이렇게 자기 오류에 빠져서 뭐가 틀렸는지도 모르고 떠드는 경우가 잦았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점점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다른 선생님들이 도서관에 잘 오지 않는 이유가 있었구나.’ 뒤늦게라도 깨달아서 다행이라며 한 선생님은 커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빨리 나가야겠다. **** “혜린아,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수업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중이던 혜린은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돌아보니 유림이 굳은 얼굴을 하고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 이야기라면 오늘 하루 종일 차고 넘칠 만큼 한 것 같은데. 혜린은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애당초 무대에서 떨어진 이후부터, 눈을 뜨기 사이까지 정신을 잃었던 상태니 기억나는 게 있을 턱이 없었다. 눈을 떴을 때, 알몸 상태로 단유와 마주쳤다는 이야기는 결코 꺼낼 수도 없는 소재였으니 넘어가더라도 영혼이니, 천사니 하는 것은 아는 바가 없었다. 도리어 친구들이 이토록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던 하루였다. “저기 가서 이야기해.” 유림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정글짐이 있는 운동장 구석의 외진 곳이었다. 사고 이후 학원도 가지 않는 혜린은 급할 일이 없었기에 순순히 유림을 따라갔다. 빨간 가죽의 가방을 둘러맨 유림이 정글짐 근처에 자리 잡고는 가방을 벗어 옆에 내려놓았다. 혜린은 유림이 자연스럽게 뿜어내는 기세에 기가 눌려 침만 꿀꺽 삼켰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유림은 3학년 당시 최강자로 군림하던 ‘혜진’과 맞장을 뜨던(?) 이였다. 무려 대장군(?)에 버금가던 이와 마주하자니 기가 눌릴 수밖에. “너, 왜 단유랑 짝 하고 싶다고 했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에 혜린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냥.” “그냥이 어딨어?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너, 단유 좋아하니?” ‘아, 무섭다.’ 사고가 났던 이야기를 듣던 때보다 더 무서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혜린도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 돌아온 귀환자(?)답게 평정을 찾기 위해 애쓰며 유림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런 건 아냐.” “그런 게 아니란 말은 단유를 안 좋아한다는 말이야?” “…….” 이쯤 되니, 대충 유림의 말은 이해했다. 그리고 아마도 이 대화의 끝에는 ‘포기해’ 따위의 말이 나올 것이다. 혜린 역시 엄마랑 함께 드라마로 인생을 배워 온 여자였다. 보통 이런 장면에서 두 사람의 캐릭터는 선과 악으로 나뉘던데, 자신은 선일까? “아직, 단유를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어. 그래도 싫어하는 건 아냐.” “무슨 말이야!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은 거지. 딱 부러지게 설명해 봐. 아니면 단유한테 관심 끊어.” 이 봐. 딱 예상하던 대화야. “단유가 너 좋아해?” “응?” 유림은 의외의 반격에 치명상을 입었다. “니가 단유를 좋아하는 건 알겠어. 그런데 단유가 너 좋아해? 둘이 사귀는 사이야?” “…….” 무딘 인상의 혜린이 의외로 날카로운 창을 가지고 있었다. 유림은 미처 방어를 예상 못했던 자신의 실수를 남몰래 탓하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단유는 나 싫어하지 않아. 나도 그렇고. 여기 니가 끼어들 자리는 없어.” “그건 니가 판단할 일이 아니야.” “뭐라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비련의 여주인공이 나일 줄이야. 유림은 울컥했다. 그리고 혜린 역시 울컥했다. “나도 단유를 좋아할 자격이 있어. 단유도 나 싫어하지 않을 테니까. 단유가 누굴 좋아할지를 니가 고르는 게 아니잖아? 왜 니 맘대로 좋아하라 마라야?” “와, 얘 말하는 거 봐? 너 드라마 좀 봤나보다?” “너도 마찬가지거든? 너 지금 하는 행동 좀 봐.” 둘은 팔짱을 끼고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면서 운동장의 모래가 두 사람의 발밑을 스치고 지나갔다. “너 고백했어?” 혜린이 다시 창을 겨눴다. 이번에도 유림은 방어를 못하고 깊은 치명상을 입었다. “난 할 거야.” “뭐? 너 아까는 좋아하는 거 아니라며!” “지금 생각해보니까 좋아하는 거 맞아. 그러니까 고백할거야. 내가 지금 짝이니까 내가 먼저 할 권리가 있어.” 유림은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하는 걸 자존심으로 억눌렀다. 자기가 짝일 때 선수를 쳤어야 했는데. 한 번 거절당했다고 미루다가 엉뚱한 애한테 뺏길 처지가 되었다. 이래서 비련의 여주인공들이 마음을 모질게 먹나 보다. “악독한 년.” “뭐? 너 말 다했어?” 유림의 독기 서린 말에 혜린은 둔기로 맞은 듯 어질어질한 기분이었다. 생전 ‘악독’이란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난 이미 고백했고,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야. 그러니까 끼어들지 마.” 사실 왜곡. 하지만 혜린이 알 리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혜린이 피식 웃으며 유림을 째려보았다. “웃기고 있네. 너 거짓말 하는 거 다 티나.” “뭐, 뭐. 내가 거짓말한다는 증거가 어딨어?” “난 알아. 너 거짓말이라는 거. 진짜였으면 처음부터 그렇게 얘기하지 그랬어?” “쪽팔려서 그랬다, 왜! 어쩔 건데!” 유림이 팔짱을 풀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어쩐지 기세가 넘어간 형국이었다. “웃기지마. 그럼 언제 했는데?” “방학 전에 했어!” “오늘 대답 못 들었지?” “그, 그래.” “그럼 너 거절당한 거야. 2달 넘게 대답 못 들었으면 거절당한 거야.” 유림은 혜린이 이렇게 사악한 애인줄 몰랐다. 어떻게 한 마디, 한 마디를 매번 가슴 깊숙이 약한 곳에만 찔러 넣냐? “이게 정말!” 유림이 주먹을 쥐고 한바탕 뒹굴 준비를 하는데, “그만해.” 담장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그 목소리에 마법이라도 걸린 듯 움직임을 멈췄다. 한 사람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한 사람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공지선, 거기 서!” 명수가 소리를 지르며 지선을 쫓았고, 지선은 예의 덤덤한 표정으로 작은 다리를 재게 놀려 명수로부터 도망을 갔다. 발단은 명수가 자기 방학숙제라고 가지고 왔던 노트에 박제시켜 놓았던 나비를 자랑하듯이 보여줄 때였다. “부럽지? 부럽지?” 그것은 뒤뜰의 개망초 흰 꽃 위를 날아다니던, 새까만 날개에 빨간 점들이 두드러지는 제비나비였다. 빛을 받으면 고급스러운 검은색 비단처럼 보여 명수가 무척 좋아했다. 앞서 잡았던 다른 나비들에 비해 훨씬 크고 색이 예뻐서 명수는 다른 나비를 포기하고 이 나비만 가졌었다. 지선이 작은 눈으로 명수와 나비를 담담하게 쳐다보다가, 눈보다 빠르게 손을 휘둘렀다. 조그마한 손가락들이 갈고리처럼 굽혀지며 순식간에 노트 위를 긁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길 위에 있던 나비가 갈가리 찢기며 비산했다. 설마 그럴 줄은 몰랐던 명수가 얼이 빠져 있다가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지선을 바라볼 때, 이미 지선은 빠르게 달아나고 있었다. “공지선! 너 잡히면 죽어!” 축구로 단련된 명수가 뒤늦게 출발했지만, 지선을 붙잡지 못할 리 없었다. 그리고 이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던 단유도 명수 뒤를 쫓아 달렸다. 지선이 학교 담을 따라 달리다 모퉁이 돌 때쯤, 명수가 바짝 따라 붙었다. 그러나 곧 뒤쫓던 단유가 명수를 붙잡았다. “참아. 내가 다음에 다른 거 구해줄게. 그리고 지선이 아직 어리잖아. 모르고 그랬을 거야.” “걔가 몰랐을 거라고?” 물론, 단유 역시 몰랐을 리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낼 순 없었다. 단유는 명수의 어깨를 다독이며 억지로 교문 쪽으로 몸을 돌려 세우는데, 담 너머에서 익숙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단유의 얼굴이 굳었다. 명수도 분위기를 느끼고, 킥킥거리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대화를 엿들었다. 그리고 끝내 웃음을 참지 못하려는 그 때, 단유가 소리쳤다. “그만해.” **** 단유는 교문을 넘어 두 사람에게로 갔다. 그 때까지도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노려본다기 보다는 이 사태를 어떡하면 좋을 지에 대해 눈으로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니가 어떻게 해봐.’ ‘니가 먼저 말 꺼냈잖아.’ ‘좋아한다며?’ ‘싫다고 안한 거잖아?’ 반쯤 울기 직전인 두 사람 앞에 선 단유는, 한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다 왜 그래? 친구잖아. 친구끼리 왜 싸우고 그래.” 두 사람은 단유를 흘깃 보았다가 다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못 들었나?’ ‘모르나?’ 유림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물었다. “…어디서부터 들었는데?” 단유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유림이 욕했을 때부터?” 유림의 얼굴이 당장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변했다. “그럼 우리가 싸운다고 생각한 거야?” 혜린이 물었다. “응. 싸우고 있었잖아?” “우리가 왜…싸우고 있었다고 생각해?” “음…잘은 모르겠지만, 그냥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 때 담장 너머에서 웃음을 참는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 때문에 싸운 거야.” 명수였다. ======================================= [142] 이(3) “나 갈래.” 유림이 먼저 몸을 돌렸다. 내려놓았던 가방을 툭툭 털어낸 뒤 둘러매고 한 걸음 떼던 찰나. “단유야.” 혜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고개가 부러져라 돌린 유림은 혜린의 태도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나….” “강혜린!” 유림은 혜린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후다닥 달려와 혜린의 손목을 붙잡은 유림은 날카로운 눈으로 혜린을 노려보았다. 괜히 입이 바싹 마름을 느끼던 혜린은 유림과 그 뒤에 서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단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가자.” 유림은 짧게 한 마디 뱉고는 억지로 혜린을 끌고 갔다. 단유와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하며 혜린을 이끌었다. 혜린은 유림의 힘에 못 버티고 끌려가야만 했다. 그렇게 두 여자아이가 알 수 없는 신경전을 벌어다 바람같이 사라지자 단유만 괜히 뻘쭘해지는 기분이었다. 두 아이가 시야 밖으로 사라졌을 때에야 발을 뗀 단유는 곧 교문 앞에서 기다리던 명수와 만났다. “너 때문에 싸운 거 아냐?” “나?” “너 방학 전에 고백 받은 거 있어?” 단유는 기억을 되짚어보지만, 방학 전에 고백 받은 적이 없다. 유림에게 고백을 받은 적이 있지만, 그건 3학년 겨울방학 전의 일이였다. 그리고 그 때 대답도 확실하게 했던 상태였다. 즉, 유림이 고백했다는 상대는 단유가 아닌 다른 남자라는 이야기, 그리고 그 남자아이를 혜린이도 좋아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렇구나. 그래도 고백을 받은 적은 있었던 거네?” “작년 일이야.” “역시 여자들이란. 마음이 갈대야.” 명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침 지선이 저 멀리서 눈치를 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쟤도 조금 있으면 너랑 같이 있기 싫다고 도망 다닐걸?” 단유가 지선을 바라보았다. 명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지선을 보니 웃음이 났다. 지선이가 누굴 좋아하던 그게 무슨 상관일까. 그저 지선이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선아. 이리 와. 곧 차 올 거야.” 지선이 통통거리는 걸음으로 단유에게 달려왔다. **** “유림이 너, 오늘 학원 늦었다며! 왜 늦었어?” 3학년 때 성적이 떨어진 이후부터 유림의 엄마는 초밀착 특별 단속 모드로 돌변하여 유림의 성적관리를 하는 중이었다. 이유 없는 변화는 아니었기에, 유림도 별 말없이 어머니의 변화를 받아들이긴 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괜히 서운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학교에서 조금 늦었어.” “너 이제 부반장도 아니라며? 학교 마치면 빨리 학원 갔어야지.” 유림은 어머니의 잔소리가 이어질 것이 두려워, 화제를 돌렸다. “엄마, 나 물어볼 거 있어.” 어머니는 유림이 일부러 화제를 돌리려는 것을 눈치 챘다. 뻣뻣한 표정과 더듬는 말투를 보면 모를 수 없었지만, 일단 들어보자는 심산으로 되물었다. “뭔데?” “저기….” 유림은 뭘 물을까 하다,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에 무심코 말을 뱉었다. “친구가 어떤 남자애를 좋아하는데, 그 남자애를 좋아하는 또 다른 애가 있는 거야. 그런데 서로 한 친구는 자기가 먼저 남자애를 좋아했다고 그러고, 다른 친구는 아직 사귀는 게 아니니까 자기가 좋아해도 된다는 거야. 그런데 친구라면,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냐?” ‘요것 봐라?’ 이 익숙한 레퍼토리는 일일 드라마 단골 스토리인데? 엄마는 눈치를 챘다. “서유림 너!” “네?” 뜨끔한 유림이 어깨를 움츠릴 때, 엄마가 일갈했다. “엄마가 너 성적 올라갈 때까지, 드라마 보지 말랬지? 너 언제 본거야? 지금은 니가 그런 드라마 볼 때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했어? 그런 건 나중에 나이 더 들고 봐도 된다고 했어, 안했어? 응?” “…아니야, 엄마. 안 봤어.” “아니긴 뭐가 아니니? 너 그래가지고 뭐가 되려고 그래? 그깟 드라마 때문에 쓸데없는 데 신경이나 쓰면, 공부는 언제 하려고 그래? 엄마가 나 좋자고 그래? 너 잘되라고 학원도 보내주고, 숙제도 봐주는데. 엄마 마음을 그렇게 몰라?” “아닌데.” “한 동안 얌전하게 학원 다니고 공부도 하고 해서 엄마가 너 믿고 잠깐 풀어줬더니, 그 새를 못 참고 드라마를 봐? 내가 아주 TV 못 보게 없애버릴까? 토요일에도 TV 못 보게? 그럴까?” “아냐, 정말 안 봤어.” 얼굴이 달아오른 엄마와 다른 이유로 달아오른 유림이 거실에서 대치를 벌일 때, 아빠가 안방에서 나오시면서 한 말씀 하셨다. “거, 애 좀 그만 잡아. 애가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하면 그러겠어.” “당신도 그만 좀 싸고 돌아요. 지금도 이런데, 나중에는 얼마나 심하겠어요? 나쁜 습관은 일찍 잡아야 한다니까, 애 아빠가 더 길을 들이고 그래요?” 아버지는 크흠, 헛기침을 한 후 거실 소파에 몸을 뉘었다. 리모컨을 들어 올리니, 어머니가 소리쳤다. “서유림, 너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얼른 방으로 돌아가!” 유림은 아무 말도 못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채널을 돌리며 볼 만한 프로그램을 물색하는 모습을 보던 어머니가 낮은 목소리로 질책했다. “당신도 TV꺼요. 공부분위기를 만들어줘도 모자랄 판에 거실에서 TV보고 있으면 애가 집중을 하겠어요? 당장 꺼요, 얼른.” 아버지는 눈치를 보다 TV를 끄고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애를 위해서라는데 뭐라고 변명할까. 아버지는 넓은 등을 보이시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 “엄마, 나 궁금한 게 있어요.” “응? 뭐?” 혜린은 집에 오자마자 가방을 침대 위에 던져 놓고 어머니를 찾았다. 식탁에서 과일을 깎던 어머니는 혜린에게 시선을 던졌다. “친구가 어떤 남자애를 좋아한대. 그런데 그 남자애를 좋아하는 또 다른 애가 있었나봐. 그런데 그 애가 예전에 남자애한테 먼저 고백을 했다는 거야. 그러면 친구가 고백한 남자애는 좋아하면 안 되는 거야?” 어머닌 실소를 터뜨렸다. 여자들이란. 결국 나이가 많던 적던, 하는 행동은 다 거기서 거기였나 보다. “그 여자 애 둘이 한 남자를 좋아한다고?” “응.” “그런데 여자 둘은 친구고?” “응.” “삼각관계네?” “응.” 어머니는 과일 접시 위에 포크를 하나 얹어서 혜린이 앞으로 밀었다. “그런데 친구가 좋아하는 남자애를 좋아해도 되냐고?” “응.” 어머니는 사과 한 조각을 맨손으로 집어 아삭 깨물었다. 사과즙이 입안에서 새콤한 향을 터뜨리며 퍼져나갔다. “안되지.” “안 돼?” 울상이 된 혜린을 보며, 어머니 피식 웃었다. “그 남자애를 누가 좋아했던, 사람 마음 가는 걸 막으면 안 된다는 거지.” “엉?” 어머니는 포크로 다른 사과 한 조각을 집어 혜린에게 건넸다. “내가 너한테 아빠한테 가지 말라고 하면, 너 아빠한테 안갈 거야?” “음….” 갑자기 곤란한 질문을 던지는 어머니. 난데없는 질문에 혜린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빠한테 가고는 싶은데, 엄마가 가지 말라고 하면 또 가기 어렵다. “이 때는 아빠한테 가고 안 가고를 엄마가 결정하는 게 옳지 않은 거야. 너한테도 소중한 아빠인데, 엄마가 가라마라 하는 게 맞겠니? 결국 니 마음이 중요한 건데 말이야.” “그래도 엄마가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갈 거야.” 굳이 대답하기 어려운 예를 들긴 했지만, 또 딸이 이렇게 말해주니 고마운 것도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그래도 엄마랑 아빠 만나는 건 니 선택인거야. 비록 엄마랑 아빠가 다투고 헤어져 살지만, 니가 아빠랑 다툰 건 아니잖아. 게다가 너의 하나뿐인 아빤데. 아빠 싫어하는 거 아니잖아.” “응.” “그런데 비슷해. 니가 어떤 남자애를 좋아할 때, 그 남자애가 다른 여자애랑 사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그 여자애가 일방적으로 좋아했던 거라면, 뭐 어때? 니가 먼저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사귈 수도 있지.” “그치? 어… 근데 나 아닌데?” 혜린이 방긋 웃다가 금세 당황한 얼굴로 이야기를 부정하는 모습을 보니 귀엽기만 했다. 어머니는 과연 그럴까? 라는 표정으로 혜린을 바라보자, 혜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뭐, 아니면 말고.” “치,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모르긴 뭘 모르니 이 녀석아. 어머니는 꿀밤 대신 한 차례 더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걸로 귀엽고 소중한 딸의 마음을 지켜주었다. **** “아, 이제 선생님 안 오니까 심심하다.” 명수가 침대에 드러누우며 혼잣말을 하듯 이야기했다. 단유는 애초에 같이 수업도 듣지 않던 명수가 하은을 그리워하는 듯하니 우습기만 했다. “배가 고픈 건 아니고?” “그런 것도 있고.” 레스토랑을 함께 다녀온 이후, 하은은 보육원에 올 때 가방에 먹을거리를 하나씩 들고 왔다. 주영의 귀띔도 있었지만, 레스토랑에서 보여준 명수의 먹성에 깊이 감명을 받은 탓이었다. 어느 날은 크림 빵, 어느 날은 작은 외산 비스킷 등을 가지고 와서 선물로 명수에게 주었다. 단유 걸 챙겨줄 때도 있었지만, 단유가 늘 명수에게 넘겨준다는 걸 안 이후로는 명수 꺼만 챙겨주었다. 명수는 선생님이 오실 시간에 방에서 대기하다가, 하은이 오면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선물(?)을 받았다. 그러면 선물을 고이 자기 책상 서랍에 모셔놓은 뒤, 공부에 방해되지 않도록 운동장으로 뛰쳐나갔었다. “숙제나 하자.” 점점 해가 떠 있는 시간이 짧아지면서 명수가 운동장에 머무는 시간도 줄었다. 식사 후 짧은 식후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명수에게 단유는 같이 공부할 것을 권했다. 괜히 입맛을 다시던 명수도 이제는 자기 공부도 조금씩 챙겨나가는 중이었다. 사실 명수는 4학년이 되면서 많이 변했다. 단순히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점점 리더십을 갖춘 아이로 성장해나가고 있었다. 축구 시합 때 아이들을 진두지휘하는 정도만이 아니라, 학급에서 체육부장이란 직책까지 갖추면서 ‘책임감’을 겸비한 리더십을 욕심내기 시작한 것이다. 공부 못하는 체육부장이란 타이틀이 싫었는지 곧잘 공부―거의 단유에게 붙어 시험 전 특별과외를 받는 형식―도 했고, 성적도 곧잘 나오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자신의 말이 아이들에게 설득력을 얻는다는 것에 자신감도 붙기 시작했다. 공부에 재미를 붙였다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책을 아예 멀리했던 지난날에 비하면 많이 발전한 셈이었다. “배고파서 공부가 될까 모르겠네.” 챙겨놨던 선물을 야식삼아 조금씩 먹었던 방학동안의 일상이 그리운 명수였다. “숙제하는 동안에는 신경을 그리로 쓰니까, 배고플 겨를도 없지 않을까?” 단유는 그랬다.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는 모든 걸 잊을 만큼 몰입했으니까. “넌 그렇겠지.” 명수도 그 사실을 안다. 보육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안다. 단유의 집중력은 모든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자기는 아니었다. 정말 입이 궁금해서 다른 걸 하기 싫었다. 명수는 가만히 있다, 마침 입이 심심하지 않을 거리가 생각났다. “아, 석고야. 오늘 걔들 있잖아.” “누구?” “여자애들 싸우던 거.” 혜린과 유림. “응. 왜?” “걔네들이 좋아하는 남자애가 누구야? 넌 알 거 아냐? 너희반인데.” “모르겠는데?” 혜린이 누굴 좋아하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어서 모르겠고, 유림은 작년엔 자길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아까의 이야기로 봐서는 또 다른 애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았다. “한 번 맞춰봐. 궁금하지 않아?” 익살맞게 실실대며 호기심을 드러내는 명수에 비해 단유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자기랑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야기에 관심을 둘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이 누굴 좋아하던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너도 참. 답답하다. 여자 애 둘이서 한 남자를 두고 다투는 게 재밌지 않으면 도대체 뭐가 재밌어?” 명수가 가슴을 툭툭 두드리면서 답답해 하지만, 오히려 단유는 그게 뭐가 재밌냐고 반문했다. “야, 남자랑 응? 여자랑 응? 둘이서 응? 얼레리 꼴레린데? 안 재밌어?” 단유는 명수가 맨날 공만 차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이런 남녀관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게다가 걔 누구지? 유림이라고 했나? 걔가 키는 좀 커도 얼굴이 예쁘잖아? 아, 같이 있던 애도 예쁘던데. 그럼 궁금하잖아? 예쁜 애들이 좋아하는 남자애가 누굴까? 안 궁금해?” 안 궁금했다. 그리고 예쁘다? 단유는 턱을 괴고 잠시 두 아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얼굴이 예뻐?” “그럼 예쁘지. 넌 아니야?” “모르겠는데.” “왜?” 명수는 친구의 심미안을 의심했다. 어떻게 그 얼굴을 보고 안 예쁘다고 느껴? “일단 유림이는 눈썹과 미간 사이의 비율이 조금 좋지 않아. 그리고 코가 조금 길어. 눈이 크긴 한데 얼굴 전체의 면적에 대비하면, 조금 작아야 할 거 같아. 입 꼬리가 살짝 내려가는데 각도가 좋지 않아. 2도 내지 3도 정도 올라가는 게 얼굴의 전체 균형상 보기 좋을 거야. 혜린이는 얼굴의 착색이 별로 좋지 않아. 기본적으로 얼굴의 색이 고르게 나면 좋은데 이마 색과 턱의 색이 조금 불균형이야. 눈썹이 조금 짧고 광대 아래 부분에서 턱까지 이어지는 길이가 전체에 비해 짧아. 그리고 목의 길이와 귀의 위치가….” “그만!” 명수가 단유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안타까운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그냥 니가 걱정돼서.” “내가?” 단유가 모르겠다는 얼굴로 명수를 바라보지만, 명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책상으로 다가갔다. 노트와 책을 챙기더니 단유에게 말했다. “그냥 숙제나 도와줘.” 단유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143] 이(4) 다음 날, 단유가 학교에 왔을 때 혜린이 먼저 와 있었다. “안녕?” 수줍게 웃으며 인사하는 혜린에게 단유도 짧게 인사를 하고는 옆 자리에 앉았다. 혜린이 힐끔 눈치를 봤지만, 단유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책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안녕?”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혜린이 돌아보니 유림이 단유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보라색 레이스가 달린, 귀여움을 한껏 강조한 스커트와 하늘하늘한 소재의 아우터를 걸친 유림의 옷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혜린이 저도 모르게 힘을 주고 주먹을 쥘 때, 단유는 역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인사를 받아준 뒤, 다시 책을 꺼내고 중간쯤을 펼쳤다. “잠깐 이야기 좀 할래?” 유림의 제안에 단유가 고개를 들었다. “나?” “응.” 오히려 반응은 혜린에게서 나왔다. 동공이 심하게 떨리더니, 벌떡 일어섰다. “나랑 먼저 이야기해.” 혜린은 유림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교실에 등교하던 아이들이나, 이미 와있던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교실 뒤의 현장을 쳐다보았다. 잠시나마 당황했던 유림은 아이들의 시선을 느끼고는 곧 태도를 바꿨다. “그래, 나가자.” 먼저 몸을 돌리고 씩씩하게 나가는 유림과 그를 뒤따르는 혜린. 이 쯤 되니 단유도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어제 그만 둔 싸움을 계속 하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작년의 기억에서 유림이 만만치 않은 여장부(?)임을 확인했던 단유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자는 차원에서 이 사태에 개입하기로 마음먹었다. 책을 덮고 일어선 소년이 뒤를 따르는 줄 모르는 두 여자아이는 학교 본관 뒤편으로 향했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학교 뒤는 늘 축축한 느낌이 가득했는데, 특히나 9월 이후부터는 선선한 가을 아침의 습한 기운 때문에 질척인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왜 하필 여기야?” 혜린이 툴툴대자 유림이 고개를 홱 돌리며 뾰족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럼 운동장 한 가운데서 할래?” “뭘 해?” “왜 모른 척이야? 그럼 동네방네 광고하고 다닐래? 삼각관계라고?” 혜린은 얼굴을 붉히며 멈춰 섰다. 유림은 혜린을 노려보다 한 발 가까이 다가왔다. “왜? 신발 더러워질까봐?” 혜린은 어제와 같이 분홍색 아동용 구두를 신고 있었다. 꽤 고급스러워보이는 터라 살짝 부럽기까지 했던 디자인의 신발이었다. “좋아, 그냥 여기서 이야기해.” 유림이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었다. 혜린보다 키가 큰 유림이 내려다보면 웬만한 아이들은 기가 죽기 마련인데, 혜린은 겁 없이 유림을 노려보았다. 한 학기를 지내면서 서로를 잘 알게 된 두 사람이었다. 다른 반이었을 때는 그저 키 크고 운동 잘하며 싸움도 곧잘 하는 아이로만 알았던 유림이, 사실은 꽤 공부도 잘하고 직설적이지만 아무한테나 시비 거는 유형의 아이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마찬가지로 얌전해보이고 친한 몇몇 아이들과만 지내는 소심한 성격인줄로만 알았던 혜린이, 사실은 꽤 독한 면도 있고 고집스러운 면도 있으며 깡(?)도 있는 아이라는 것을 몇 가지 사례들을 통해 알게 된 유림이었다. 게다가 어제도 두 사람이 마주쳤을 때, 어지간해서는 다들 피하기 마련인데도 혜린은 꽤나 당당하게 자신과 마주했었다. “어제도 말했지만, 내가 먼저 좋아했어. 그러니 포기해 줬으면 좋겠어.” 혜린은 허리께에 두 손을 올리고는 어깨를 폈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는 또박또박 말을 뱉었다. “어제 나도 말했지만, 난 포기하지 않을 거야.” 두 감정의 대립은 어느 한 쪽이 양보하지 않는 이상, 이대로 평행선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았다. 잠시간의 침묵을 깬 것은 혜린이었다. “니가 좋아하면 다른 사람은 좋아하면 안 되는 거야?” “당연하지.” “왜?” “내가 먼저 좋아했으니까.” 혜린은 어제 밤새 고민하며 준비했던 무기를 꺼냈다. “만약 니가 단유를 먼저 좋아했다는 걸 인정해도, 단유가 널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건 너의 짝사랑일 뿐이잖아. 그게 다른 사람이 단유를 좋아하면 안 될 이유는 되지 않아.” 혜린의 말은 길을 잘 들인 총구에서 쏘아진 총알처럼 날아가 유림의 가슴 가장 안쪽까지 파고 들었다. “그리고 단유가 싫어하는데 좋아하는 것도 문제야. 왜 싫다는데 질척거리니?” 혜린은 쌍권총을 차고 있었나보다. 유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다. “단유는 싫어하지 않아!” 빽 소리를 질러보지만, 혜린이 여유 만만한 목소리로 다시 총구를 겨눴다. “단유가 너 좋대?” “싫어하지 않는다고 했어!” 의외의 대답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단유가 저 말 그대로 이야기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혜린은 판단했다. 하지만 그 정도는 혜린의 총구를 빗나가게 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단유가 너 좋대?” “그럼 너는? 단유가 넌 좋다고 그랬어?” 혜린이 씩 웃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래서 물어보려고. 단유가 나 좋다고 하는지 안하는지. 너도 궁금하잖아?” 유림은 머리에 큰 총알을 때려 맞은 기분이 들었다. “웃기지마.” “왜? 단유한테 내가 좋은지 안 좋은지 물어보자고. 물어보고 나 싫다고 하면 너도 좋은 거잖아? 안 그래?” 묘한 자신감에 불타오르는 혜린의 태도에 불안감만 커지는 유림이었다. 도대체 뭐가 있는 거지? “뭘 물어봐?”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돌아갔다. 싸움을 말리려고 따라왔던 단유의 존재를 이제야 깨달은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제와는 다르게 혜린은 이미 마음을 굳게 먹은 상태였다. “물어볼 게 있어.”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뭘?” “묻지 마!” 당황하고 침착함을 잃어버린 유림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 “무슨 일이야?” 싸우기는커녕 이상하게 유림이 밀리는 분위기? 라고 느낀 단유가 되물었다. “묻지 마! 너도 말하지 마! 너 경고했다! 말하면 너 가만 안 둬!” 표독스럽게 변해버린 유림이었다. 고리눈을 뜨고 어금니를 깨문 유림이 어울리지 않게 협박을 하니, 혜린은 아무렇지 않게 유림의 옆으로 돌아 나갔다. “단유야. 나 너 좋아해.” “응?” “강혜린!” 혜린이 단유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 너 좋아해.” “왜?” “넌 날 살렸으니까.” 단유는 입을 다물었다. “무슨 소리야? 김단유, 얘가 무슨 이야기 하는 거니?” 오히려 유림이 뜬금없는 소리에 의문을 표시했다. 혜린이 죽다 살아난 이야기는 주위 어른들의 입을 통해 들은 바가 있었지만, 거기에 단유가 활약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단유는 혜린과 시선을 마주한 채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달리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도 몰랐고, 유림이 듣는 이 상황에서 그 이야기를 꺼낸다는 게 어려웠다.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꺼낸다고 해도 그 때 그 이야기가 입에 오를 것 같아서 괜히 조심스러워지는 단유였다. “왜 둘 다 아무 말 안 해?” 불안해진 것은 유림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가만히 있는 모양새가 어쩐지 둘만의 비밀을 가지고 교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유림은 어느 쪽을 붙잡고 이야기를 해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혜린아.” 어렵사리 입을 연 것은 단유였다. “응. 말해.” “만약에 내가 널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거야?” 혜린의 눈이 살짝 커졌다. 단유는 재차 물었다. “만약에 내가 널 좋아한다면, 어떻게 할 거야?” “좋아하면?” “응.” “그, 그럼 사귀는 거지.” 유림이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그런 반응에 개의치 않고 단유는 말을 이었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데?” 단유는 나름 이성적으로 이 사태를 해결하고 싶었다. 혜린과 함께 갔었던 저 쪽 세상에 대한 이야기는 이 곳에서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혜린이 어떤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입을 열거나 닫을 건지를 물었다. 그런 의도였다. 다만 단유가 생각한 것보다 여자는 감성적이었다는 것. “너 나 싫어해?” “…아니.” “그럼 나 좋아해?” “…아니.” 대답은 하지 않고 갑작스레 치고 들어오는 직설에 단유는 당황하면서도 성실하게 대답했다. 이 문답이 끝난 뒤, 다시 자신의 질문을 할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하면서. 다만 단유는 여자가 감성적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럼 왜 날 살려 준거야?” 단유는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자신이 살려줬다고 시인하는 것도 힘들고, 그렇다고 살려준 게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는 혜린이 너무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때, 단유를 도운 이가 있었으니 유림이었다. 유림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듣는 순간, 이 사태를 끝내기로 했다. “강혜린. 그만 해. 단유가 너 안 좋아한 대잖아.” 분명히 단유는 좋아하냐는 물음에 ‘아니’라고 대답했다. 다른 건 필요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유림은 혜림에게 반격할 기회를 얻은 셈이었으니까. “아직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까 니가 그랬지? 질척거리지 말라고.” 유림은 한 쪽 입 꼬리를 올리며, 앞으로 한 발 다가갔다. 하얀 운동화에 젖은 진흙이 튀어 올랐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정도 쯤이야. “뭐래? 누가 질척거려?” “니가 그러고 있잖아? 단유는 분명히 너 안 좋아한다고 말했어. 그러니까…그만 꺼져.” 단유는 머리를 짚었다. 이 두 사람은 이성적으로 대화를 할 마음이 없는 게 분명해 보였다. 다들 말꼬리를 잡거나, 감정적인 대응으로 서로의 감정을 서로 자극하는 중이었다. 이래서는 원하는 대화를 할 가능성이 없었다. 게다가…. “야, 니들 종쳤어.” 3층에서 내려다보던 명수가 소리쳤다. 언제부터 쳐다보고 있었을까? 세 사람이 명수를 올려다보자, 명수가 씨익 웃으며 양손의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었다. “오오!” 단유는 눈썹을 찌푸리며 몸을 돌려야 했다. **** 단유는 그 날 하루, 수업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옆에 앉은 혜린이 계속 샐쭉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 척 하는 것도 힘들었고, 쉬는 시간마다 앞뒤를 왔다갔다하며 눈에 띄게 노려보는 유림을 의도적으로 피하려다보니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가진 비밀의 노출 때문이었다. 애초에 좋은 의도로 선택했던 일이었던지라 이런 상황이 올 것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러다보니 저쪽 세상에서 눈을 떴던 혜린이 과연 그 일을 똑바로 기억하고 있는지, 있다면 그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가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가 없었다. 긁어 부스럼 만든다는 말이 이런 상황을 일컫는 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었다. ‘좀 더 조심스럽게 행동했어야 하나?’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늘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럼에도 가끔씩 이 곳의 것이 아닌 힘을 발휘한 경우가 더러 있었는데, 돌이켜보니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동인의 경우가 그랬고, 영어선생님과의 경우가 그랬다. 명수에게 불꽃놀이를 보여준 적도 있지만, 이 부분은 그렇게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차라리 명수였다면 더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니까. 아무튼 좋은 의도로 행했던 행동이 이런 식으로 되갚아질 줄 몰랐던 탓에 단유는 머리가 아파왔다. 만약 이런 경우가 앞으로도 또 생길 것이라 본다면, 단유는 섣불리 힘을 쓰기 힘들 것이고, 쓰지도 말아야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부분은 차후의 문제였고, 지금은 혜린의 일을 해결해야 하는데, 딱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별로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는데.’ 여전히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는 모호함뿐이었다. 다만 이전의 일도 있고 해서, 책으로 찾아본 바에 따르면 남녀의 만남은 감정적 교류를 기반으로 했다. 처음 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지만, 혜린과는 다른 경우라고 생각했다. 사고가 있기 이전에도 제대로 이야기 한 적이 본인의 기억에는 없었다. 사고 이후에도 딱히 제대로 얼굴 본 적이 없었고, 개학 첫 날 짝이 되고 말았는데 무슨 좋아하는 감정이 생긴단 말인가. ‘여자는 어렵구나.’ 결론은 여자란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유림이 그랬고, 혜린이 그랬다. 돌이켜보면, 자기가 늘 어렵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여자였던 것 같다. 자원봉사를 오던 누나도 그렇고, 녹스의 약초상에서 일할 때 귀찮게 굴던 아이도 그렇고, 불과 얼마 전 자신을 거의 죽음에 이르게 할 뻔도 했던 신의 축복이었던 여자도 그렇다. ‘여자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 볼까?’ 단유는 새로 공부해야 할 과목이 늘었다는 사실이 별로 기쁘지 않았다. 어쩐지 마음고생만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 [144] 이(5) 단유가 혜린의 고백을 거절한 이후, 단유는 혜린이 서먹하게 대할 거라고 짐작했다. 유림이 그러했듯이. 그러나 혜린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와 같았다. 사실 평소에도 특별히 친근하게 대한다거나 말을 많이 붙인다거나 하는 행동은 없었기에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단유가 느끼기엔 큰 차이가 없었다. “단유야, 이것 좀 가르쳐 줘.” 혜린이 수학 책에 나온 문제 하나를 물어보았다. 단유는 별 어려움 없이 알아듣기 쉽게 가르쳐주었고, 혜린은 특별한 반응 없이 단조로운 톤으로 고맙다며 짧은 인사만 남겼다. 유림과는 4학년 1학기가 시작하고 나서도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야 어색함이 줄었던 것에 비하면, 혹시 고백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유림이 보기에도 혜린은 딱히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혹시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모습을 보인다면, 적당히 견제를 가할 생각이었던 유림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혜린의 모습에 맥이 풀리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혜린은 달랐다. 비록 단유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자신의 감정을 쉽게 꺾을 수 없었다. 예전에도 다른 남자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단유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감정을 느꼈다. 좋으니까 좋다, 라는 모호한 감정이라기보다는 조금 더 색과 형태가 선명한 감정이 만들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혜린은 자기 방식대로, 자기 마음이 가는대로 단유를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안녕?” 우선 단유보다 항상 일찍 등교를 했다. 보육원 차를 타고 오는 단유는 늘 일정한 시간에 등교를 하기 때문에, 자신이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일찍 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등교를 하면 가장 먼저, 물티슈로 책상을 닦았다. 자신의 책상을 닦으면서 동시에 단유의 책상도 함께 닦았다. 그리고 공부할 책들을 서랍에 정리하고 읽을 만한 책을 한 권 꺼내서 책상 위에 올려놓고 기다렸다. 그리고 단유가 오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 안녕.” 처음에는 다소 어색하게 인사를 받던 단유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인사를 받았다. 가끔은 은은한 미소를 띨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남몰래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써야 했다. 단유가 책상을 정리하고 선생님이 오시기 전까지 읽을 책을 펼쳐 들면, 자신도 준비한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둘은 선생님이 오시기 전까지 조용히,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고 책을 봤다. 단유가 보육원에 산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히 혜린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단유가 입는 옷들이 모두 물려받은 옷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단유의 옷들은 보통 유행을 많이 벗어난 옷들인 경우가 많았다.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가 그려진 옷도 있었고, 소매가 헤진 옷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단유는 그런 패션에 관심을 크게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혜린이 시간을 두고 관찰했더니 주로 입는 옷의 패턴이 있었다. 주로 흰색 계통 위주로 옷을 입되 주기적으로 같은 옷을 입는 패턴이 있었다. 굳이 원인을 따지자면 그날 입은 옷을 빨래를 맡긴 후 다시 찾아 입는 기간이 일정하다보니, 주기적으로 같은 옷을 입는 것이었지만 그 이유가 중요하진 않았다. “얘, 그거 입기는 날이 너무 춥지 않니?” “괜찮아, 엄마.” 단유가 하얀 맨투맨 티셔츠를 입고 올 때면, 혜린도 하얀 카디건을 걸치고 왔다. 노란색 인형 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올 때면, 밝은 노란색 계열의 블라우스와 청바지를 입었다. 단유는 거의 청바지를 입었고, 그래서 혜린도 아침마다 예쁜 청바지들을 골라 입고 등교했다. 그렇게 남몰래 커플룩 분위기를 내보는 혜린이었다. “단유야, 종쳤어.” 단유는 거의 대부분 완벽한 모범생의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가끔씩 부족한 부분이 보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혜린이 조심스럽게 그 부분들을 채워 주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책을 읽고 있을 때면 어깨를 톡톡 두르려 주위를 환기시켜 주었다. 또 창문이 열려 머리가 날릴 때면, 조용히 일어나 창문을 닫아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단유의 헝클어진 머리도 다듬어주고 싶지만, 거기까지는 나가지 않도록 손을 눌러야 했다. 책을 읽고 있을 때, 교실 뒤편에서 눈치 없이 떠드는 아이가 있을 때는 몰래 일어나 아이들을 조용히 시켰다. “미안, 시끄러워서 그래. 부탁해.” 아이들은 최근 들어 공부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혜린의 말에 딱히 억지를 부리지는 않았다. 그렇게 아이들이 자리를 피하면, 혜린은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책에 집중하고만 있는 단유였다. 미술시간에는 붓이나 물감을 가운데에 올려두고 넌지시 이야기했다. “이거 써.” “고마워.” 단유는 혜린에게 넓은 붓을 건네받으며 고마워했다. 단유가 준비물을 챙겨오지 않는 건 아니지만, 혜린은 준비물이 필요할 때 좀 더 넉넉하게 챙겼다. 한 자루만 챙겨도 충분할 붓을 3자루 씩 챙긴다던지, 찰흙을 챙길 때도 한 덩이 더 챙겨온다던지 하는 식으로 준비했다. 또 필통에도 늘 색연필이나 샤프를 두 개 이상씩 챙겨놓고 다녔다. 어느 날은 단유가 평소와 같이 등교를 하는데, 머리에 적갈색 낙엽이 붙어 있었다. 슬며시 손을 내밀어, 낙엽을 떼어내니 단유가 머쓱해하며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혜린은 슬쩍 미소를 지은 뒤, 손에 들린 낙엽을 바라보았다. “예쁘네.” 혜린은 낙엽을 쓰레기통이 아닌 사물함에 모셔놓았다. 점심시간이면 학교 급식실에서 식사를 했다. 다른 남자아이들이 급하게 점심을 챙겨먹고 운동장으로 뛰쳐나가기 바쁠 때, 단유는 늘 그렇듯 천천히 식사를 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단유의 앞자리는 혜린이 차지했다. “얼레, 둘이 같이 밥 먹는 거야?” “너희 둘이, 좋아하는 거야?” “오오!” 처음에는 다른 아이들이 서로 마주보고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놀리기도 했지만, 단유나 혜린이 그런 놀림에 반응할 아이들은 아니었다. 그랬더니 점점 놀림은 줄어들었고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반응이 나왔다. 어차피 교실에서도 짝이니까, 하는 반응이었다. 그런 반응이 나온 또 다른 이유는, 두 사람이 식사를 하는 동안 전혀 대화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여자애들처럼 수다를 떨지도 않았고, 서로 눈을 마주보며 사랑의 속삭임을 나누는 것도 아니었다. 둘은 그저 나란히 마주앉아 천천히 식사를 할 뿐이었다. 눈을 살짝 내리깔고 등을 꼿꼿이 세운 채로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식사를 했다. 그러니 보기 재미있지도 않았고, 반응도 없으니 아이들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졌다. 다만 유림만이 껄끄러운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러나 가끔 혜린은 아무도 모르게 살짝 시선을 올려 단유를 바라보았다. 하얀 피부의 단유가 느릿느릿 턱을 움직이며 입을 오물거리는 모습을 훔쳐보면서 즐거워했다. 그런 모습을 즐기느라 혜린은 소년의 페이스에 맞춰 밥을 떠먹고 반찬을 집었다. 소년과 함께 오물거리고 소년과 함께 물을 마셨다. 그러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부끄러우면서도 기뻤다. 혜린은 늘 마음이 따뜻했고 즐거운 기분이었다. 저도 모르게 미소 지을 때가 많았고, 그러다보니 표정이 밝아졌다. 사고 이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걱정이 많았던 어머니의 입장에서 밝아진 딸의 표정은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좋니?” 학교에서나 아무도 모르게, 얌전하게 행동할 뿐이었지 집에만 오면 그야말로 비글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다음날 준비물을 챙기는 것부터 해서, 내일 수업시간에 해야 할 숙제와 단유에게 물어보아야 할 단원과제들까지 챙기느라 분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렇다보니 눈치 채지 못하려야 못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응. 좋아.” 배시시 웃는 딸이 귀엽고 앙큼했다. “뭐가 그렇게 좋아? 걔는 너 안 좋아한대며?” 괘씸하게도 말이다. 그렇게 잘해주는 데도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 들은 적 없다니. 그러나 속없는 딸은 그래도 좋단다. “괜찮아. 좋아한다고 안하고 3초 이상 내 눈을 바라보지도 않지만, 그래도 좋아. 난 걔한테 좋아한다고 말도 했고, 1분 이상 바라보고 있을 수 있으니까.” 요는 내가 좋으니까 다 좋다는 거다. 이 어린 딸의 감정이 어찌 이리 애틋할까 싶어 괜히 마음이 쓰이지만, 이것도 한 때라 생각하니 그냥 두고 봐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어머니였다. “그래도 서운하지 않니?” 한 사람의 진심이 일방통행이라면 지치기 마련이다. “괜찮아. 아침에 인사하면 웃을 때도 있고, 학교 끝나면 잘 가라고 먼저 인사해 줄 때도 많아.” 단유가 내일 보자고 인사를 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내일 보자는 약속도 약속이니까. 그 약속이 즐거웠고, 내일을 기다리게 해주었다. 혜린이 좋아하는 옷을 입고 왔을 때 예쁘다고 칭찬도 안 해주고, 자기가 좋아하는 반찬이 뭔지도 모르고, 자기가 좋아하는 날씨가 어떤 건지도 모르는 남자애지만, 그래도 추워하면 말없이 일어나 뒷문과 창문을 닫아주고, 복도에서 달리는 아이들에게 부딪히기 전에 앞으로 나가 방패처럼 지켜 줄 때도 있었다. 그 날 이후, 다정하게 사담을 나눈 적은 없지만, 입을 무겁게 하는 대신 서로를 편하게 생각하는 마음은 더 커졌다고 혜린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서로를 편하게 해주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으니까. ****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다. 말하자면 4학년도 이제 마지막이라는 이야기였다. 단유에게는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던 4학년이었다. 때문에 어느 때보다 고민도 많이 하고 생각도 많아져 더욱 조심스럽게 생활한 1년이었다. 그러다보니 저도 모르게 소심해진 면도 없잖아 있었다. 이전에는 그저 방해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질문을 하지 않거나, 수업에 덜 적극적이었던 것이라면, 이제는 스스로가 튀는 것이 두려워 더 안으로 숨어드는 포지션을 취한 것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 덕분에 성적은 계속 상위권을 유지했고, 단유 스스로의 지식도 더 많이 채워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부족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더 알고 싶다.’ 이전까지는 절실히 느끼지 못했던 허기짐을 느꼈다. 적당히 알고 넘어가는 수준에서 이제는 더 알고 싶다는 감정이 생겼다. 아마도 이제 재훈이 형이 말한 ‘지식욕’이란 것일 텐데, 재훈형은 이에 대해 달리 조언해 준 바가 없었다. ‘전화해볼까?’ 재훈에게 직접 전화를 할 수는 없었지만, 보육원 내의 전화기로 주영에게 전화를 해서 면회를 신청할 수는 있을 것이다. 주영도 2학기 개학 이후로는 찾아오는 일이 적어졌다. 아니 거의 없어졌다. 당시에는 달리 서운하다는 감정도 없었지만, 지금은 아쉬움이란 감정이 생겼다. “김단유!” 선생님이 단유를 지적했다. 평소라면 수업시간에 넋 놓고 있을 리 없는데 요즘 들어 부쩍 이런 일이 잦아졌다. “선생님 말에 집중안하고 뭐하니?” 웬만하면 선생님도 단유를 지적하고 싶지 않았다. 지적해봐야 달리 시킬 일도 없었고 문제를 풀라고 할 것도 아니었으니까. 솔직히 단유가 나서봐야 다른 아이들이 괴리감만 느낄 뿐일 것이다. 일전에 혹시나 하고 과학시간에 문제를 하나 풀어 보라고 했더니, 무슨 중학교 과외문제 풀 듯이 온갖 잡지식을 꺼내놓으며 설명을 해대는 바람에 선생님이 식은땀을 흘린 적이 있었다. “죄송합니다.” 단유는 간단하게 사죄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자, 다음은….” 선생님은 이런 행동이 다른 아이들에게 편파적으로 보일까봐 걱정을 했지만, 의외로 아이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도 이제 단유를 거의 외계인 정도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딱히 왕따 취급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키도 반에서 제일 큰 아이들 편에 설 정도로 커졌고, 운동도 잘하는―하지만 축구는 거의 끼지 않는―반장 출신의 단유였기에. 아이들은 어린 나이지만 그에게 다소 경외감 비슷한 감정을 갖기 시작했다. 단유의 고민이 깊어질수록, 그의 눈은 깊어만 갔고, 그와 비례해서 아이들은 단유에게 거리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불쾌한 거리감이라기보다는 경건한 울타리랄까? ======================================= [145] 부(1) 「어머, 어쩐 일이야?」 주영은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 처음 핸드폰에 보육원의 전화번호가 찍혀 나오기에 혹시 단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가 놀란 마음으로 급히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전화를 한 사람이 바로 단유 본인이니 다른 의미로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상의 드릴게 있어서요.” 「어, 그래? 뭔데?」 단유는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했다. “공부는 하고 싶은데요, 어떤 공부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주영은 입을 꾹 다물고 단유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재훈 형이 그랬어요. 너무 한 과목에만 집중하지 말고 다른 과목도 소홀히 하지 마라고요. 그런데요, 너무 답답해요. 재미도 없고요.” 주영은 자신이 해결해주기엔 단유를 재훈만큼 이해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적어도 이런 문제는 재훈이 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언제 방학이니?」 “일주일 뒤요.” 「그럼 그 날 누나가 보육원으로 갈게. 그날 같이 병원에 가 보지 않을래? 아무래도 이 문제는 형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는데?」 “그렇게 할게요. 그런데 형은 퇴원 안 해요?” 주영의 웃음소리가 수화기를 넘어 들려왔다. 「곧 할 거야.」 몇 가지 안부를 묻는 몇 마디 말이 오간 후 통화를 종료했다. 단유는 수화기를 내려놓고도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통화를 하던 동안에도 느끼지 못했던 위화감이 느껴졌다. ‘뭐지?’ 뭔가 대단히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방금 전의 통화가 어떤 중요한 갈림길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문제는 갈림길에서 표지판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단유는 목 뒤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냉기를 느꼈다. **** “상훈아, 이거 먹고 해.” “네.” 상훈의 어머니, 오여사가 과일 깎은 접시를 책상 위에 올려주었다. “열심히 해.” “네.” 오여사는 웃으면서 상훈의 방문을 닫고 나왔다. “왜 그렇게 웃어?” 오여사가 연신 웃음을 잃지 않고 있는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상훈의 아버지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웃긴, 상훈이가 저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예뻐서 그러죠.” “언제는 공부를 안했나?” 오여사가 새어나오는 웃음소리를 억지로 누르며 아버지가 앉아계신 소파로 과일 접시를 들고 다가왔다. “사실은 말이에요. 요즘처럼 일이 잘 풀린다면 문제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뭐가?” 아버지는 포크로 단감 한 조각을 푹 찔렀다. 잘 익은 단감이 저항 없이 포크에 찍힌 채, 입으로 들어갔다. “상훈이는 반장을 맡았고, 성적도 1학기 때보다 올랐죠? 게다가 학부모회 임원도 연임했으니, 봄에 난리 쳤던 거에 비하면 얼마나 잘 풀렸어요?” “이그, 이 여편네야. 본심은 그거였구먼.” “그게 뭐 어때서요? 이번에도 상훈이가 성적이 잘 받으면, 5학년 때도 반장을 할 수도 있고, 게다가… 어쩌면 말이죠, 교장선생님 통해서 영재교육원 추천장도 받을 수 있다니까요?” “영재? 상훈이가 영재야?” 아버지는 처음 듣는다는 얼굴로 오여사를 바라보았다. 오여사가 아버지의 팔뚝을 찰 지게 내려치며 째려보았다. “당신은 당신 아들이 얼마나 똑똑한지도 몰라요?” “아니까 이런 소릴 하지.” “이이가 정말. 이래서 남자들이 다 욕먹는 거야. 자기 아들이 영재라고 하면 당연하다고 맞장구는 못 칠망정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버지가 팔뚝을 쓰다듬으며 답했다. “말이 되는 소릴 해야 이핼 하지. 상훈이가 똑똑하긴 해도 영재까지는 아니잖아? 아무리 자기애라도 객관적인 사실을 부정하면서까지 보게 되면 안 되지.” “이 남자가 정말? 객관적이라니? 뭐가 객관적이라는 거예요?” 오여사의 목소리가 격앙되게 높아지자, 찔끔 놀란 아버지가 검지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애 공부하는데 방해 돼. 소리 낮춰.” 씩씩거리던 오여사가 날선 눈으로 바라보다 겨우 입을 열었다. “솔직히 요즘 영재 교육원에 들어가는 애들 중에 진짜 영재가 어디 있어요? 다들 학원 다니면서 입학문제 미리 풀어보고 들어가는데. 그리고 그렇게 들어가야 그게 또 나중에 스펙이 되는 거란 말이에요.” 스펙이란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럼 영재교육원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나?” “아무나라니? 상훈이가 아무나 에요?” “또, 또!” 발끈하는 오여사를 진정시키며 아버지가 급히 변명을 했다. “당신 말대로 학원 다녀서 들어가는 거라면, 누구라도 시험만 치면 들어갈 수 있단 말 아니야?” “다른 지역의 영재 교육원은 필기시험을 없애고, 교사추천제를 시행하는 곳도 있다는데, 인평시에 있는 영재교육원은 교장추천제랑 입학시험을 병행해요. 그래서 교장이 추천만 하면 되는 거라고요. 그런데 교장이 아무나 추천을 하겠어요? 그래서 내가 기를 쓰고 임원이 되려고 한 거란 말이에요. 특히 영재교육원은 5, 6학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이제부터가 중요한 거예요.” 아버지는 포크를 접시 위에 올려놓은 뒤, 팔짱을 꼈다. TV도 끌까? “교장추천인데 부모가 입김을 불면 추천장이 나온다는 이야기네?” “말 참 속되게 한다. 꼭 그렇게 말해야 속이 편해요, 당신?” “말이 그렇잖아? 그런데 상훈이가 거기 가면 적응은 잘 할까?” “잘할까, 가 아니라 잘해야죠. 무조건. 그리고 상훈이는 잘 할 거예요. 봄에도 잘 버텼던 것처럼.” 아버지는 머리를 긁적이다 무심코 툭 뱉었다. “그거 단윤가 뭔가 하는 애 때문이라며? 오히려 걔가 영재라며?” 아버지는 또 한 대, 매운 맛을 봐야 했다. “걔는 보육원 애라서 안돼요.” “보육원 애는 입학이 안 돼?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어디 있긴요, 여깄죠.”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보육원 애한테 돌아갈 추천장 따위 인평초등학교에는 없다. “당신도 이제 상훈이한테 관심 좀 가져요.” “아니, 내가 언제 관심이 없었대?” “당신은 그저 당신 혼자 잘 살면 되는 줄 알고 살잖아요? 당신이 아무리 돈 잘 벌고 승승장구 해봐야, 당신 아이가 잘못되면 당신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당신 아들이 성공을 해야 당신도 성공을 인정받는 거라고요. 부모가 괜히 부모인 줄 알아요? 우리가 이런 거 지원 못해줄 형편도 아니고, 다 해줄 수 있는 데 안 해주면 나중에 원망 듣는 것도 우리고, 주위 사람들한테 욕먹는 것도 우리에요, 알아요?” “…알았어, 그만해.” 랩 하는 줄 알았다. 하여튼 이 여자는 흥분만 하면 말이 빨라지는데 이 때 멈추지 않으면 새벽 1시, 2시는 기본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러면 다음 날 피곤한 얼굴로 출근해야 하는 부담은 오로지 자기 몫이 된다. 그러니 적당히 져 주는 것이 좋다. 오여사는 다시 한 번 검지로 남편의 입을 가리키며 당부를 했다. “다시 한 번, 당신 아들이 영재냐 아니냐, 이딴 소리 해봐요. 내 가만 두지 않을 거예요.” 아이 앞에 선 어머니는 언제나 강한 법이었다. 그리고 가족 앞에선 언제나 작아지는 아버지였다. 알았다고 너스레를 떨며, TV 볼륨을 높였다. “소리 낮춰요.” 아버지는 다시 볼륨을 줄여야 했다. **** 다음 날, 기말 시험이 시작되었다. 인평초등학교는 인근 다른 초등학교에 비해 1주일 정도 늦게 시험이 시작되었다. 덕분에 아이들은 꽤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보통 학원에서는 다른 학교의 아이들도 모이기 마련인데, 다른 아이들이 시험을 끝내고 희희낙락일 때, 그 모습을 목격한 인평초 아이들은 더욱 큰 부담과 스트레스를 떠안아야 했던 것이다. 아무튼 그런 관계로 시작된 인평 초등학교의 2학기 기말고사는 시작되었고, 아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점수를 맞춰보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며 탄성과 탄식, 환호와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과 조금은 상이한 광경을 볼 수 있는 학급도 있었다. “1번에 3번, 34제곱센티미터.” “아아!” “…11번에 5번, 몸무게가 줄어든 때는 4월과 6월.” “아아!” “안 돼!” 단유네 반은 아이들이 시험이 끝나자 곧 단유가 자리에 일어서서 답을 불렀다. 선생님이 시킨 것은 아니고, 1학기 때 아이들이 단유에게 부탁을 했고, 이를 단유가 받아들이면서 이런 진풍경이 만들어졌다. 단유가 시험에 나왔던 수학문제의 답을 불러주면, 그걸로 아이들은 답을 맞춰보았다. 적어도 수학에 있어서만큼은 단유가 틀릴 리 없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이었다. “20번에 정사각형의 총 개수는 6개.” “와!” “아아!” 아이들의 탄성과 환호 속에서 선생님은 쓴 웃음을 지었다. 인평초등학교는 시험지를 배부 후 끝나면 모두 수거해서 거기에 바로 채점을 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보통 종이에 답만 적어서 기록해 놓는다. 그런데 단유는 시험 문제를 모두 외우기라도 했다는 듯이 각 답의 보기나 설명을 달달 외우며 아이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때문에 아이들은 더욱 단유의 답을 공식적인 것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자, 그만. 다들 자리로 돌아가. 이번 시간은 과학이야.” 아마도 이 시간이 끝나면, 또 이런 진풍경이 벌어질 것이고 선생님은 또 몰래 쓴웃음을 지어야 할 것이다. 단유라는 저 아이는 이미 탈(脫)초등학교 급의 ‘영재’였다. ‘하필이면 고아라니.’ 신이 모든 것을 주지 않는구나,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분단별로 시험지를 배부하는 선생님이었다. **** “20번 답은 빛의 직진. 혹은 빛은 곧게 나아간다.” “우와.” “빛이 구부러지지 않아서는?” “맞을 거야.” “빛이 앞으로 나가니까는?” “애매해.” “빛이 직접 비춘다는?” “틀려.” “왜?” “빛의 성질을 묻는 질문인데, 니 답은 그런 성질을 전혀 의미하지 않아.” 선생님은 시험지들을 정리하며 또 쓰게 웃어야 했다. 하지 말라고 하기에는 아이들의 반발이 심하고, 하라고 권장하기에는 또 우습고 그래서 못 본 척하면 좋으련만, 아이들은 보는 앞에서 대놓고 저러고 있었다. 그때, 상훈은 자신의 답을 적은 종이를 붙잡고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2개!’ 과학시험에서 2개나 틀릴 줄은 생각도 못했다. 수학은 오히려 1개 밖에 틀리지 않아서 점수가 좋을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다 맞을 줄 알았던 과학시험에서 2개나 틀릴 줄이야. ‘단유가 틀렸을 수도 있잖아!’ 하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믿기 힘든 가정이었다. 단유가 수학과 과학을 엄청나게 잘한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어떡하지?’ 다음 시간은 사회 시간. 주요 암기과목이라서 어제 저녁에도 열심히 공부했었는데, 그래서 오늘 아침까지, 조금 전까지 자신이 있었는데 지금 그 자신감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쉬는 시간은 이제 5분 정도 남았는데, 이 시간에 책을 더 본다고 해서 잘 할 자신이 없어졌다. 여기서 더 틀리게 되면 반 석차 2등은 물론이고 3등도 아슬아슬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됐을 때의 결과, 어머니가 보여줄 모습과 아버지가 보일 반응이 떠오르니 더더욱 손이 떨려왔다. 고개를 들었다. 아이들은 모두 자기 답을 체크한 종이를 보면서 짝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상훈의 짝도 뒤에 앉은 친구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들 시험을 잘 본 모양이다. 자기만 못 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씨….’ 위기감이 느껴졌다. 시험이 시작되었고, 상훈은 열심히 머리를 써서 시험을 치기 시작했다. 일단 되는대로 풀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너무 긴장한 탓인지, 아니면 어제 제대로 공부를 하지 않았던 것인지 헷갈리는 문제가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옳지 못한 방법을 제시한 사람은 누구인가.」 간단한 문제인 것 같은데도 답이 너무 헷갈렸다. ‘공청회를 열어서 의견을 모은다. 맞는 것 같은데? 대표자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투표로 결정한다? 맞나? 서로 의견이 다를 경우 토론을 통해 답이 나올 때까지 이야기한다. 그렇게 해야 되나? 의견이 다른 두 단체의 대표가 나와서 협상을 한다.’ 머리가 너무 아프다. 상훈은 슬쩍 시선을 들어보았다. 마침 선생님은 다른 분단 쪽을 보고 계셨다. 옆의 짝은 긴 머리를 아래로 늘어뜨리고는 침착한 자세로 시험을 치고 있었다. ‘어떡하지?’ 옆의 짝이 뭘 찍었는지 보고 싶은데, 가려져서 그냥 곁눈질 만으로는 잘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자세만 침착하지, 짝의 답마저 침착하게 정답을 가리키리란 법은 없었다. 상훈의 짝은 자신보다 성적이 좋지 않은 친구였으니까. 하지만―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그 친구의 것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상훈은 침을 꼴깍 삼켰다. ======================================= [146] 부(2) 연필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시 눈을 들어 올렸더니 마침 선생님이 고개를 돌려 자기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른 눈을 내리 깐 상훈은 가슴이 두근거려 진정시킬 수 없었다. ‘봤나? 봤을까? 지금도 보고 있으려나?’ 쿵덕대는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짝에게도 들릴까봐 겁이 날 정도였다. ‘의심하실까? 아직 안 봤는데. 이쪽으로 오면 어떡하지?’ 그 때, 선생님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한 교실,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만 들리는 이 곳에서 선생님의 걸음걸이는 마치 바닥에 못을 박는 것만 같았다. 상훈은 못이 박히는 상상에 두려워졌다. 문득 아버지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거짓말 하지마라. 남자는 거짓말 하는 거 아니다.」 ‘난 아직 컨닝을 하지 않았어. 하지만 그럼 왜 보고 있었냐고 물으면 어떡하지? 컨닝 하려고 했다고 말하면 안 되겠지? 그럼 엄마한테도 이야기 할 텐데. …엄마한테 혼나기 싫은데.’ 걸음소리가 멎었다. ‘바로 앞인가? 고개를 들어서 확인해볼까? 그러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엄마한테 이르면 어떡하지?’ 그러나 곧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뒤로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였다. 상훈은 이번엔 뒤에서 자길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뒤통수가 따가워 지는 느낌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너무 숙이고 있었던 탓에 시험지 문제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갱지에서 쿰쿰한 냄새가 났다. ‘시험 끝날 때까지 뒤에서 날 지켜보고 있는 걸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뭐하냐고 물어보실 지도 몰라. 그럼 뭐라고 하지? 아까 왜 눈치 봤냐고 물으면 어떡하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시선의 주박에 꽁꽁 묶인 셈이었다. 어깨가 아파왔다. 배도 아팠다. 콕콕 찌르는 통증에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다. ‘아프다고 할까? 그러면 시험 못 치게 될까? 그럼 3등도 못하게 될지도 몰라. 그런데 너무 아프다. 손 들고 솔직하게 이야기 할까? 그런데 난 컨닝 안했는데. 컨닝했다고 의심받으면 어떡하지? 공부도 잘하는 애가 왜 컨닝하냐고 혼내면 어떡하지? 왜 공부안하고 컨닝하냐고 하면 어떡하지? 엄마한테 전화하면 어떡하지? 엄마랑 아빠가 화내면 어떡하지?’ 머리가 너무 복잡해졌다. 고개를 들기가 무서워서 숙이고 있다 보니 목도 아파왔다. 그렇다고 고개를 들었다가는 그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상훈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지면서 시험지를 검게 적셨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개도 들지 못하고, 손도 펴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입술에서 침이 고였다가 떨어지는데도 소리가 날까봐, 괜히 들킬까봐 아무것도 못했다. 상훈의 이상을 알아차린 것은 짝이었던 영지였다. “선생님! 상훈이 울어요.” 반의 아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고개 돌아가는 소리가 착착 하면서 들리자, 눈에서 더욱 많은 눈물이 쏟아졌다. 부끄러웠고 창피했고 억울했다. “상훈아! 무슨 일이야? 왜 울어?” 선생님이 놀라서 달려왔다. 상황 파악을 위해 고개 숙인 상훈의 얼굴을 들어 올리자, 얼굴이 가관이었다. 눈물, 콧물에 침까지 흘리면서 오열을 했다. “상훈아, 상훈아! 왜 그래? 왜 갑자기 그래? 어디 아프니?” 그러나 상훈은 대답도 하지 않고 꺽꺽거리며 눈물만 한없이 흘렸다. 주변을 살피니, 상훈의 시험지는 이미 엉망으로 젖어 있었고, 문제를 대충 푼 것처럼 보이긴 하는데, 풀지 못하고 빈 칸으로 남겨둔 문제도 눈에 들어왔다. 그 외에 책상 위에는 다른 이상한 물건이나 특이한 사항은 발견되지 않았다. “상훈아, 많이 아프니?” 결국 선생님은 상훈이 아파서 우는 거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가자, 선생님이랑 양호실부터 가자.” 선생님은 억지로 상훈을 일으켜 세웠다. 상훈은 선생님이 붙잡는 대로 힘없이 딸려 올라갔다. “너희들은 계속 시험치고, 다른 선생님 곧 들어오실 거니까 조용히 하고 있어. 부반장은 반 친구들이 떠들지 않게 하고. 알았지?” 선생님은 대답도 들을 겨를도 없이 상훈을 데리고 교실을 나갔다. 그러자 교실의 아이들이 일제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시험 중간에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 반장에 대한 이야기는 미스터리한 이야기들 중 최고의 소재거리였으니까. “누가 떠드니!” 그러나 이내 소란은 옆 반 선생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시면서 잠재워졌다. “누가 시험시간에 옆의 짝이랑 떠들어? 조용히 하는 거 모르니?” 아이들은 곧 침묵에 빠졌다. 그러길 잠시, “선생님이 교실에 안 계신다고 떠들거나 부정행위를 하다가 불시에 잡히면 무조건 빵점 줄 거야. 알았지? 선생님이 갑자기 교실에 들어와서 확인할 거야.” 그리고 선생님은 다시 옆 반으로 이동하셨다. “인명수! 넌 그냥 자라, 좀!”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곧 교실과 복도 전체에 소음이 사라졌다. 그 시간, 상훈을 양호실에 데리고 간 선생님은 파래진 얼굴로 양호 선생님을 찾았다. 양호선생님은 상훈에게 다가가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지만, 상훈은 그저 울기만 할 뿐이었다. “119 불러야 하나요?” 담임선생님은 놀란 가슴을 부여잡은 채로 양호선생님에게 물었다. 양호선생님도 이런 상황은 별로 겪지 못했기에, 어떻게 병을 측정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야 할지도 모르겠는데요? 일단 부모님한테도 연락을 하셔야죠?” 그 때, 상훈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안 돼요, 선생님! 안 돼요!” “왜? 뭐가? 뭐가 안 돼?” “선생님, 안 돼요. 엄마한테 전화하지 마세요.” 잔뜩 울먹이는 목소리로 꾸역꾸역 말하는 내용이 결국 엄마한테 전화하지 말아달란 소리였다. 뭔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두 선생님이 멀찍이 서서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대화를 했다. “아픈 건 아닌 거 같죠?” “그러네요.” “무슨 일일까요?” “시험시간에 갑자기 누가 때렸을 리는 없고.”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양호 선생님이 상훈에게 물었다. “어디 아픈 곳은 없니?” 상훈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만약에 아픈 곳 있으면, 병원에 전화를 해야 돼.” 그러자 상훈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으며 아픈 곳이 없다고 고백했다. 담임선생님이 상훈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상훈과 눈높이를 맞췄다. “상훈아, 무슨 일인데? 선생님한테 말해줄 수 없어?” 처음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번 대답을 요구하니, 그제야 힘겹게 입을 열었다. 죄송하단 말, 무서웠다는 말. 그리고. “저…컨닝 안했어요.” 억울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양호선생님과 시선을 맞춘 선생님은 몸을 일으켰다. 잠시 상훈의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로 물러선 두 사람은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 “여린 아이네요.” 양호 선생님이 팔짱을 끼고 말했다. 선생님이 돌아보자, 보충 설명을 했다. “보통은 혼날 일이 두려워서 임기응변식으로 거짓말을 하는 게 보통이에요. 그런데 가장 먼저 죄송하다고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건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는 거죠. 컨닝을 안했다는 말도 사실일 거예요. 그런데 컨닝을 했다고 오해 받을까봐 무서웠던 거죠.” “컨닝을 할 애가 아닌데 그러네요. 우리 반에서 단유 다음으로 공부를 잘하는 앤데.” 단유 다음이란 말은 보통의 학급에서는 1등을 할 정도의 실력이란 말과 똑같았다. 그런 아이니만큼 컨닝을 할 리가 없다고 판단해도 무방하리라. “뭐, 그렇다고 해도 저 나이때 아이들은 선생님이나 어른들에게 실망감을 주지 않기 위해 급하게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리고 또 대부분 아이들이 죄의식 없이 그러기도 하고요. 하지만 상훈이라 했던가요? 저 아이는 그런 죄의식을 너무 깊이 느끼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거짓말을 못한 거라고 봐요.” 선생님이 고개를 주억거릴 때, 양호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아마 저 아이, 상담이 필요할 지도 몰라요.” “왜요?” 왜 해야 되느냐, 라는 질문이 아니라 어떤 주제의 상담이 필요 하느냐, 란 질문이었다. “저 아이 약간 강박이 있어요. 거짓말을 하지 않아서 착하다고 인정할 수도 있는 문제지만, 저 정도의 감정을 억눌러야 할 만큼 평소 거짓말이나 충동의 표현에 강박이 있었다고 봐야할 것 같아서요. 공부를 잘하고 평소에 저런 행동을 잘 보이지 않던 아이라 하니, 아마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도 많았을 거라고 추측이 되네요.” 돌이켜보면 1학기 때 반장선거 문제도 있었고, 2학기에 들어서 다시 반장에 재도전한 일이나, 평소 보이던 모범적인 태도에도 그런 욕구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다른 아이와 비슷하다, 고 생각하기에는 다소 과한 느낌도 있다고 선생님은 판단했고, 양호 선생님의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저런 경우, 보통은 가정 혹은 학교에서 강압적으로 주입된 어떤 가치관이 오류를 일으킨 경우겠지요. 사소하고 민감한 문제에도 가치관이 흔들리면,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거나 공포를 느끼죠. 상훈이는 바로 그 공포의 단계에서 저런 반응을 보인 거라고 생각해요.” “어쨌든 부모님을 불러야겠네요.” “그리고 부모님을 만나실 때는 상담 선생님과 함께 뵙는 걸 추천하죠. 대부분 부모님들의 단골 레퍼토리가 반복될 테니까요.” 다소 익살스런 말에 선생님은 추임새를 넣었다. “우리 애는 그럴 리가 없어요?” “그렇죠.” 너무 어두운 분위기인지라 억지로 농담 한 마디 꺼내보았지만, 결론은 웃픈(?) 상황이었다. 거짓말을 못하는 아이, 오히려 남들보다 죄의식이 강한 게 문제가 되는 아이라니. 어느 부모님이든 말은 그렇게 할 것이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하지만, 요즘 아이들 중에 진짜 건강한 아이는 과연 몇이나 될까? 학교에서 공부하고, 학원에서 공부하고, 집에서 공부하고, 주말에도 공부하는 요즘 초등학생들이 과연 예전의 초등학생들보다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성인병, 비만을 앓는 아이들, 스트레스에 자살을 생각하는 아이들. 이런 아이들이 팔 다리 잘 붙어 있다는 이유로 건강하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요즘 다른 시도의 초등학교에서는 기말고사나 중간고사 같은 시험들을 모두 없애고 있다는데, 도대체 이 구시대 유물 같은 시험을 아이들 줄 세우기의 잣대로 남겨둔 학교 측의 태도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요즘 선생님들은 정말 선생 노릇하기 힘들어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담임선생님의 푸념에 가볍게 동조해주는 양호 선생님이었다. **** “시험 잘 쳤니?” 혜린이 가방을 챙기면서 물었다. 물론 실제로 잘 쳤는지 궁금하진 않았다. 단유가 못 칠 리도 없거니와, 그저 말을 붙여보기 위한 노림수였으니까. “잘 쳤어. 넌?” ‘넌’이라고 물어봐 준 게 너무 고마웠다. 이렇게 한 마디씩 말을 붙여나가면 그게 또 대화가 되고,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분도 좋아질 테니까. “난 그냥. 사실 난 수학도 못하지만, 마지막 과목도 못 친 것 같아서 말이야.” “너 정도면 조금만 공부해도 수학 점수는 잘 나올 거야. 똑똑하니까.” 칭찬해주니 고맙긴 한데, 이렇게 대화가 끝나면 섭섭하다. “그런데 마지막 시간에 말이야, 갑자기 상훈이가 울었잖아? 왜 그랬을까?” “…….” 단유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자세한 정황도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판단을 내리고 입에 올리기 어려운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혜린이 괜한 걸 물었나 싶어서 얼른 화제를 돌렸다. “사회는 잘 쳤어? 다른 아이들은 소란 때문에 제대로 못 친 아이들도 있나봐.” “그냥 쳤어. 사회는 나도 잘하는 과목이 아니니까.” 단유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사회 과목 같은 데 취약점을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자신의 암기력. 이상하게도 단순 암기 과목에는 취약점을 보이는 면이 있었다. 수학이나 물리학의 경우에는 어려운 공식들도 곧잘 외우는 편인데 말이다. “그래도 너라면 잘 쳤겠지. 근데 이제 방학이잖아.” “응.” “혹시 방학 때 뭐 할 거야?” 무슨 뜻인지 몰라서 혜린을 돌아보자, 혜린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만약 가능하다면 방학 때 우리 집에 한 번 오지 않을래? 1월 20일이 내 생일이거든.” 겨울에 태어난, 혜린은 홍조를 띠운 채 소년의 대답을 기다렸다. “난 보육원에 살고 있어서 마음대로 나가질 못해. 나가려고 해도 선생님 허락이 있어야 하는데다가, 혼자서는 외출을 못해서 같이 나갈 보호자가 필요해.” 혜린의 얼굴이 금방 하얗게 변하면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 변화를 바라보던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방법을 찾아볼게. 어쩌면 나 후원해주시는 누나 도움으로 외출할 수도 있으니까.” 혜린의 얼굴이 환해졌다. “진짜?” “일단 해 볼게. 대신 못 가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알았어. 못 와도 괜찮아.” 와주면 더 좋고. “혹시 못 가게 되면 알려줄 테니까, 전화번호 알려줄래?” 단유가 혜린에게 물었다. “전화번호?” 혜린이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단유는 가끔 혜린이 저런 멍해 보이는 미소를 지을 때,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 [147] 부(3) “선생님,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오여사가 뿔난 표정을 하고는 날카롭게 되물었다. 선생님은 살짝 붉어진 얼굴로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궁리했다. 기말시험이 끝난 직후, 오여사를 학교로 부른 담임선생님은 양호선생님의 조언대로 상담교사와 함께 오여사를 만났다. 상담교사는 담임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양호선생님과 비슷한 결론을 내렸다. “상훈이는 지나친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서, 이대로는 학업에도 지장이 있을 수 있고, 건강한 멘탈을 위해선 부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여사는 상담교사의 말을 자르고 담임선생님에게 다소 화가 난 듯한 얼굴로 물었다. “지금 상훈이 사회 시험 성적이 어떻게 되는 거죠? 재시험을 치게 해주시는 건가요?” 선생님은 난감한 얼굴을 했다. 테이블 아래에서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면서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당장 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었다. 분명 상훈의 돌발적인 행동으로 인해 시험시간을 모두 끝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시험이 끝나기 5분도 채 안 남았던 시간의 일이었기 때문에 고작 그 시간 때문에 재시험을 치게 해준다는 것은 형평성에도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 상황에서 상훈의 사회시험 성적이 그렇게 중요한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다. 당장 아이가 정확한 원인은 모르지만,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아서 감정적 기복이 심하게 드러난 상황인데 시험이나 성적이 중요할까? 그런데 어머니는 달랐던 모양이었다. “원래 그 나이 애들은 감성적으로 민감할 수 있는 것 아녜요? 게다가 거짓말을 못해서, 양심에 걸려서 눈물을 흘린 건 칭찬을 할 문제잖아요? 왜 우리 애를 무슨 정신병에 걸린 애처럼 취급하는 거예요? 말할수록 기가 막히네.” 급기야 오여사는 테이블을 두드리며 열변을 토하셨다. “우리 애가 얼마나 착하면, 하지도 않은 죄 때문에, 단지 마음만 먹었다는 이유로 그렇게 가슴 아프게 울었겠어요? 그러면 선생님으로서는 그 심성을 칭찬하고 북돋아야 마땅한 거 아니에요? 어떻게 애가 병이라고 진단을 내려요? 선생님이 무슨 의사예요? 애를 병자 취급 하면 좋아요?” 상담 선생님을 보면서도 한 말씀 하셨다. “그리고 스트레스라니? 고작 4학년 애가 무슨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그래요? 우리 애가 스트레스를 받는 거면, 이 세상에 스트레스 안 받는 사람이 어딨다고 그래요? 다들 학원 다니고 밤늦게까지 학원 4개, 5개 다니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요? 그럼 그 아이들은 전부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병이라도 앓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 아이, 그렇게 약한 아이 아니에요. 얼마나 건강하고 부지런한지 몰라서 그래요? 이 선생님, 아시잖아요? 우리 애가 반에서 애들한테 고맙다고 칭찬도 받을 정도로, 응? 솔선수범해서 반의 모범이 될 정도로 부지런하고 씩씩한 아인데 말이야.” “어머니, 물론 상훈이 착하고 부지런하죠. 저희도 상훈이가 나쁘다고 말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그럼 이야기 다 끝난 거 아니에요? 왜 없는 병을 만들어서 씌우려고 하냐고요? 지금이 우리 애한테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 몰라서 그래요? 괜히 이상한 상담한다고 우리 애 붙잡고 이것저것 시키다가 괜히 애가 자존심에 상처라도 받으면, 그 때 어떡하실 건데요? 네? 자기가 있지도 않은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게 만들 거냐고요?” “아니, 어머니. 진정 좀 하시고요. 병에 걸렸다는 게 아니고요.” “제가 진정하게 생겼어요? 그리고 이 선생님. 이번에 우리 아이 성적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요? 내년이면 5학년이에요. 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하려고 했는데, 내년에 우리 아이 영재원 들어갈지도 몰라요. 그런데 선생님이 이런 식으로 나와서 우리 아이 앞길 막으면 안 되죠. 담임이란 분이 애들 잘되도록 칭찬하고 격려해야지, 없는 병 만들고 부모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예요?” 선생님은 아무 말도 못하고 쩔쩔 매기만 할 뿐이었다. 다만 상담교사는 이런 경우도 많이 겪었는지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며, 오여사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어머니, 저희도 상훈이가 잘못되길 바라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저흰 상훈이가 잘 되길 바라죠. 상훈이가 얼마나 똑똑한 지도 잘 알고 말이죠. 그리고 평소에도 착하게 행동하고 친구들로부터 신뢰도 많이 얻은 아이라는 걸 이 선생님 통해서 들었어요. 그런데도 저희가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건, 상훈이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질 않기 바라는 마음에서 준비한 겁니다. 이를 테면 예방조치라고 생각해주세요.” “불미스러운 일이라니요? 지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아니, 어머니. 일단 들어보세요. 지금 이 자료를 보셔도 아시겠지만 초등학생들이 학업 스트레스 등으로 일탈을 하는 케이스가 수도 없이 보고되고 있어요. 해가 갈수록 늘어나는 것도 사실이고요.” “상훈이가 이런 애들이랑 같아요? 이건 뭐예요? 흡연? 나 참. 이런 애들은 말 그대로 가정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선생님, 우리 집 가정환경 모르세요? 저도 대학 나온 여자구요, 우리 애 아빠도 대기업 부장이에요. 우리 부부는 부부 싸움 한 번 한 적도 없고요, 상훈이도 우리 가정에서 얼마나 소중하게 다뤄지는지 아세요? 학대나 이런 거 전혀 없다고요. 어떻게 이런 애들이랑 우리 상훈일 비교하면서 말이에요! 정말 듣자듣자 하니까 말들이 너무 심하시네!” 상담 선생님도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담임선생님과 눈을 마주쳐 보지만, 담임은 이미 기가 눌려서 입도 못 떼게 생겼다. 아무래도 이런 분위기에서는 상훈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것보다는 어머니를 우선 진정시키고 마음으로 이해를 해야 할 텐데, 어떤 말도 듣지 않으시려 하시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선생님, 우선 확실하게 약속을 해주시죠. 재시험 치게 해주실 거죠?” “네? 아니….” 우물쭈물 거리자 다시 한 번 탁자가 들썩일 만큼 쿵 소리를 내며 오여사 주위를 집중시켰다. “우리 애가 시험에서 부정한 일을 시도한 것도 아니고, 선생님 말대로 아팠다면서요? 그럼 재시험 치게 해주셔야 할 거 아니에요!” “…….” “선생님께서 약속 못해주시면, 저 이대로 교장선생님에게 갑니다?” “네?” 선생님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사실 재시험이라는 게, 다른 아이들과의 형평성도 있고요. 다른 아이들도 다 함께 시험을 치려면 아무래도 교과학습 스케줄이란 게….” “스케줄은 모르겠고요, 어쨌든 시험 도중에 일어난 문제로 우리 아이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된 건 사실이잖아요?” 말을 하다가 주위를 둘러보던 오여사가 말을 이었다. “여기 좋네요. 여기서 상훈이 재시험 치게 해주세요. 선생님은 수업하고 상훈이만 따로 여기서 재시험 치면 될 거 아니에요?” “네?” “여기 계신 상담선생님이 감독을 해도 되고요. 그렇죠?” 재시험이라기에 다른 아이들도 함께 쳐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더니, 상훈이만의 재시험이었나? “저기 어머니, 그건 너무 공정치 못한 처사라서 할 수 없겠는데요?” “공정치 않다니요? 뭐가 문제라는 거예요? 우리 아이가 부정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여기서 시험 친다고 책을 보고 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공정치 않다는 거예요? 우리 아이가 양심적이라면서요? 선생님 입으로 그러셨잖아요? 게다가 여기 선생님도 감독으로 들어오면 컨닝을 하지도 않을 거 아니에요? 객관적으로 정당한 평가를 받는 건데 뭐가 공정치 않다는 말씀을 하시는 거죠? 오히려 지금 이대로 사회시험 성적이 반영되는 게 공정치 않은 거죠. 안 그래요?” 담임선생님은 어깨를 움츠리고 상담교사의 눈치를 봤지만, 상담교사는 시선을 피했다. 도와줄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일단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에 어머니가 진정이 된 뒤에나 상담이 가능할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담임선생님은 어머니의 눈치를 보다가,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러면 말이죠, 어머니.” “말씀하세요.” “아버님도 함께 오셔서 다 같이 이야기를 하죠.” “네?” “아버님도 오셔서 상훈이가 재시험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면, 그 때 재시험을 치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그 때는 아버님과 어머님이 우선 상훈이에 대한 상담을 함께 받는다는 조건입니다.” 오여사는 벌떡 일어났다. 상담선생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버렸다. 담임의 생각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와 어머니를 함께 모셔서라도 상훈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겠다는 교사로서의 양심이 바탕에 깔렸을 것이다. 교사의 태도로만 본다면, 담임선생님은 분명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이 큰 사람이라고 인정할 만 했다. 다만 문제는 그 이야기를 듣는 상대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불을 지피는 정도가 아니라, 불에다 기름을 끼얹어 버린 모양새가 돼버렸다. “선생님, 지금 무슨 가정 분란이라도 일으켜 보겠다는 거예요, 뭐예요? 정말 듣자듣자 하니까 못하는 소리가 없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오여사는 가방을 챙겨들곤 상담실을 뛰쳐나갈 기세를 보이자, 부랴부랴 일어서 오여사를 말리는 담임선생님이었다. “어머니, 잠깐 진정 좀….” “진정이라니!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놔요, 이거. 당장 교장선생님 뵙고 제 입장 밝힐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오여사는 신경질적으로 소매를 뿌리치고는 상담실을 나갔다. “…어떻게 해요?” “일단 따라가 보세요. 교장 선생님 앞에서라도 이야기를 잘 풀어보세요, 선생님. 그리고 한 마디만 드리자면, 아버님도 함께 이야기를 하겠다는 선생님 생각이 옳다고 생각은 해요. 하지만 지금은 너무 섣부른 결정이었다고 생각해요.” “…….” “얼른 따라가 보세요.” 울상이 된 선생님이 서둘러 오여사의 뒤를 쫓았다. 상담교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챙겨온 자료들과 책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교권침해라고 표현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교사의 지위와 신뢰가 바닥에 떨어진 것은 분명해보였다. **** “괜찮아?” “응.” 영지가 걱정스런 눈으로 상훈을 바라보았다. 영지는 학기 초 상훈과 짝을 하고 싶다고 손을 들었던 아이였다. 딱히 상훈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상훈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영지는 어제 일 때문에 상훈이 많이 걱정됐었다. 다행히 상훈은 별 탈 없이 등교를 했다. “아픈 건 아니고?” “응.” 평소에는 잘 웃던 상훈이었는데, 오늘은 얼굴이 굳은 채로 마주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함께 수다를 떠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단답식으로 대답하면서 대화를 기피하던 아이가 아니었기에, 영지는 더 걱정스러웠다. “아프면 선생님한테 말해. 내가 대신 말해 줄까?” “아니.” 상훈은 책상에 엎드렸다. 너랑 대화할 기분이 아니다, 라는 뜻을 단호하게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영지는 걱정스런 얼굴로 상훈을 보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상훈이 등교했을 때부터 몇몇 친구들이 상훈 주위에 모여 있었다. “어떡해?” 영지의 물음에 다들 난색을 표할 뿐, 딱히 답을 내놓는 친구들은 없었다. 이런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르는 것이었다. 한편, 이 모습을 지켜보던 혜린이 고개를 돌려 단유에게 물었다. “상훈이 많은 아픈 걸까?” 반 친구가 아프면 걱정하는 게 당연하다. “그럴지도 모르지.” 단유는 책을 읽고 있었다. 상훈이 들어왔을 때, 아이들이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잠깐 시선을 주긴 했지만, 큰 흥미를 끌진 못했다. “넌 상훈이가 걱정 안 돼?” 단유가 고개를 들어 책상 위에 엎어져 있는 상훈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혜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별로.” “왜?” “정말 아프면, 병원에 가면 돼. 아프지 않으면 걱정할 필요가 없고. 만약 어떤 사정으로 병원에 가지는 않지만 아픈 것이라면 내가 해줄 게 없으니까 고민할 필요가 없고, 달리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 때 고민해도 될 거라고 생각해.” 혜린이 단유를 바라보다가, 툭 한 마디 뱉었다. “내가 아파도 그럴거야?” “응?” “내가 아파도 그렇게 할 거냐고.” “아파?” “아니, 지금은 안 아프지만 그래도 친구가 아프다는데 너무 무신경한 거 같아. 너.” 단유는 눈썹을 긁으면서 어렵게 이야기를 했다. “니가 아프다고 했을 때, 난 니가 입원했던 병원에도 갔었는데?” 혜린이 아, 감탄사를 뱉으며 작게 손뼉을 마주쳤다. “그렇네? 그럼 상훈이한테는 왜 그래? 상훈이 싫어해?” 아무래도 혜린은 단유의 행동이 이해가 가질 않는 모양이었다. “그냥, 난 내가 상훈이라면 어땠을까를 생각해봤어. 내가 상훈이의 사정을 전부 알지 못하지만, 지금 상훈이는 아픈 건 아니라고 생각해. 하지만 지금 저러는 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야. 이럴 때 섣부르게 다가가서 위로하는 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단유는 그런 경험이 많았다. 남들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일들을 많이 겪었고, 그 때마다 단유는 홀로 고민을 했다. 그럴 때, 보육교사나 다른 사람들이 와서 괜찮냐, 어쩌냐 하는 건 별로 도움이 되지도 않았고 오히려 귀찮기만 했다. “나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하지만 시간이 지난 뒤, 정리가 되면 그 때 찾아가서 위로해줘도 돼. 힘들어한다면 힘들지 말라고 격려를 해도 되고, 외로워한다면 외롭지 말라고 위로를 해도 되고.” 단유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그런 것이었다. 무작정 다가와서 위로하고 걱정해주는 건 도리어 민망해지는 일밖에는 되지 않았다. “언제 정리가 되는지 어떻게 알아?” “친구라면 알 수 있지 않을까?” 단유가 다시 고개를 돌려 상훈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책상에 엎드려 있는 상훈이었다. 확실히 단유는 상훈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긴 했다. 그 때, 뒷문으로 그림자가 홱 지나가는 듯 하더니, 어떤 아이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석고야! 큰일 났어!” 명수였다. “왜?” “나 체육복 안가지고 왔어.” “사물함에 있어.” “고마워!” 명수는 단유의 사물함에서 체육복을 꺼냈다. “체육부장이 체육복을 안가지고 와서 망신당할 뻔 했어!” 씩 웃고는 자기 교실로 건너갔다. “저게 친구야.” “응?” 혜린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내가 체육복 가지고 왔다는 걸 아는 거.” 무슨 소린가 싶었다. 하지만 단유는 미소를 지었다. 명수가 친구인 이유는 별 거 아니었다. 명수는 단유를 안다. 그리고 단유도 명수를 안다. 서로 알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한다. 다른 사람들이 섣불리 걱정할 때도, 명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상시와 같이 대해주고 웃어주었다. 그래서 명수를 대할 때 부담이 없었고, 늘 고마운 것이었다. ======================================= [148] 부(4) 단유는 상훈에 대해 알지 못한다. 상훈은 명수와 같은 친구라고 부르기에는 거리감이 있었다. 때문에 단유는 섣불리 상훈에게 다가가서 위로를 하는 행동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행동이 오히려 상훈에게 짐이 될 수도 있고, 단유 본인에게도 짐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혜린이 가만히 단유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넌 나를 친구라고 생각해?” “응.” 단유는 혜린을 친구라고 생각했다. “나에 대해서 잘 알아?” “알아가고 있지. 다 알아야만 친구가 되는 건 아니잖아? 알아가는 동안에도 친구는 될 수 있지.” “상훈이는?” “조금 애매한데?” 혜린은 턱을 괴고는 단유를 빤히 쳐다보았다. 단유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왜?” “나나 명수 말고 다른 친구 있어?” “…….” 그걸 왜 묻냐는 눈빛을 대신 보내자, 혜린이 재차 물었다. “친구가 많으면 좋지 않아?” “…별로.” 단유는 친구가 많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가진 비밀이 드러나지 않을까, 두려운 상황에서 자기 곁에 사람들을 많이 두고 싶지 않다는 의식이 반영된 결과였다. “친구가 없으면 외롭대. 우리 엄마가.” “친하게 지내는 형이나 누나들도 많아.” “친구는 많을수록 좋다고 그랬어.”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니, 혜린의 능력에서는 더 이상 논파가 불가능했다. 단유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기쁨보다는 가치관의 혼란이 생길 것 같은 기분에 혜린은 몸을 바로 하고는 책을 폈다. 집에 가서 어머니랑 이야기를 나눠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 수업이 끝나고, 상훈은 힘없이 가방을 둘러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훈아, 상훈인 잠깐 남도록 하고. 다른 친구들은 모두 집에 들어가도록 해요. 날이 추우니까 밖에서 오래 놀면 안 돼요. 알았죠?” “네!” 아이들이 우르르 교실 밖으로 뛰쳐나갈 때 상훈은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대기했다. “상훈아, 잠깐 이리로 와.” 선생님의 부름에 상훈은 터덜터덜 걸어 선생님 책상 쪽으로 향했다. “상훈아, 오늘도 기운이 없니?” “…네.” “아직도 신경이 많이 쓰여?” “…….” 시험을 쳤던 그 날, 어머니는 걱정 반, 질책 반으로 상훈을 콩 볶듯 볶았다. 그을음이 생기듯 상훈의 얼굴에 그늘이 생겼고, 상훈은 선생님에 대한 원망이 생겼다. 그리고 어제, 어머니가 학교로 오셨고, 어제 저녁에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계신 탓에 상훈은 침도 제대로 삼키기 힘들 정도였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달래려 하셨지만, 어머니는 분에 못 이긴 듯 연신 냉수를 마시면서 ‘선생이, 어린 것이, 어쩌구, 저쩌구’ 하시면서 소리를 높이시는 바람에 상훈은 자기 방에서 한 걸음도 나서질 못했다. “상훈아. 선생님은 상훈이가 걱정돼서 그래. 상훈이가 나쁜 짓 안한 건 선생님도 알고 우리 반 친구들도 다 잘 알아. 그래서 선생님은 상훈이가 나쁜 짓 했다고 혼내려는 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겁먹을 필요 없어.” 겁먹은 건 아닌데.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선생님은 상훈이가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그래. 사실 그 전에 선생님이 알아봐줬어야 하는 데 너무 늦게 알아본 것 같아서 미안하고 그러네? 혹시 공부하는 게 많이 힘드니?” 상훈이 고개를 저었다. “공부하는 건 안 힘들어? 그럼 힘든 건 없어?” 상훈은 부동자세로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혹시 엄마가 상훈이한테 너무 많은 걸 시킨다거나 그러니?” 조금 직설적인 물음이었지만, 상훈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던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상훈은 힐끔 선생님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상담교사가 말했었다. “상훈이는 쉽게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지 못할 거예요.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법을 배우지 못했거든요. 대신 부모나 선생님의 말에 예스만 이야기하는 친구라서 계속 자기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거죠. 주변에도 잘 지내는 모습만 보이려고 하고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혼자 있을 때만 전전긍긍하죠. 하지만 아이 혼자 전전긍긍해봐야 결론이나 해결책이 나올 리 없어요. 그러니 여러 가지 문제들이 계속 압축되고 쌓이면서 안으로 파고드는 거예요. 풀리지 않은 채로.” 최근 3일간 상훈의 모습은 무기력 그 자체였다. 그에 대해 상담교사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무기력은 우울증의 양상 중 하나죠. 외부의 기준이 너무 높게 세워진 데 반해서 자신이 그 기준을 채울 수 없다고 생각하면, 아이들은 무기력에 빠져요. 그리고 자신에 대해 좌절감이나 실망감을 느끼고, 심하게는 수치심도 느끼죠.” 선생님은 난감한 가운데서도 상훈의 모습이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껏 많은 아이들을 상대해왔고, 자신도 비록 어디 내놓을 정도로 훌륭한 교사라고는 장담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직업적 양심에 따라 최선을 다해왔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이렇게 여린 아이 한 명을 제대로 돕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답답하고 창피하고 화가 났다. “상훈아. 넌 똑똑하고 공부도 잘하고 모범적인 친구야. 그래서 우리 반 아이들이 모두 널 좋아하는 거 너도 잘 알지? 그렇지?” 상훈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사람이란 게 항상 잘하고 똑똑할 수는 없는 법이야. 때로는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하고 그러는 거지. 그럴 때는 당당하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게 옳은 거겠지? 숨기고 감추고 아니라고 변명하는 것보다는 말이야. 그렇지?” “…네.” “이번에 상훈이가 너무 마음이 여려서, 선생님이나 어머니한테 혼날까봐 그랬다는 거 잘 알아. 하지만 선생님은 널 혼내지 않아. 만약에 봤다고 해도, 죄송합니다, 라고 했으면 그 때도 선생님이 널 혼냈겠니? 안 그런단 말이야. 선생님뿐만 아니라 상훈이 엄마도 너 혼 안냈을 걸?” 상훈이 잠시 상상해보았다. 과연 혼내지 않았을까? 그러나 어쩐지 화내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았다.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들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또 울먹거리려는 상훈의 태도에 당황한 것은 선생님이었다. “왜 그러니, 상훈아?” 하지만 상훈이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무서웠고, 두려웠고, 그래서 눈물이 났다. “상훈아?” 당황한 선생님과 눈물이 맺힌 얼굴로 마주앉은 상훈. 교실 바깥으로 하굣길에 오른 아이들이 복도를 뛰어다니는 소리와,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공을 차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는 가운데, 움직임이 멈춘 교실에는 시계 초침소리만 째깍거리며 두 사람 사이를 오갈 뿐이었다. **** “엄마, 물어볼 게 있어요.” 오늘은 또 어떤 이야기로 당황스럽게 만들려나, 하는 기대를 품고 혜린의 어머니는 혜린과 마주앉았다. 혜린은 단유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단유는 친구가 많이 필요 없대요.” “왜?” “모르겠어요. 전 친구가 많을수록 좋을 것 같은데 단유는 그렇지 않대요.” 혜린의 어머니는 팔짱을 낀 자세로 식탁 위에 상체를 기댔다. “단유가 너랑 친구가 하기 싫다든?” “아니요. 나는 친구래요. 걔가 그러는데요, 친구는 서로를 잘 알아야 하는 거래요. 그래서 옆 반에 명수는 친한 친구라고 했고요, 저는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알아가는 중이니까 친구라고 했어요.” 논리적인 답은 아니지만, 맥락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혜린의 어머니가 생각하기에 그런 생각은 초등학생이 할 법한 생각은 아니었다. 철이 들었다고 말하기엔 너무 어둡고 비관적인 시선이 곁들여진 것 같았고, 너무 어둡다고 이야기하기엔, 병원에서 봤었던 단유라는 아이의 이미지가 너무 맑았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아이 같지 않은 아이? “사람은 누구나 생각이 다를 수 있어. 친구가 많으면 좋다고 생각하는 친구도 있고, 친구가 많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친구도 있지. 단유가 다 옳은 것도 아니지만, 단유의 생각을 이해하는 게 어렵지도 않아. 예를 들어보자면, 혜린이 넌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니?” “예원이요.” 예원이는 옆집에 사는 친군데 유치원 때부터 함께 지낸 탓에 서로 알고 지낸 기간이 길었다. 그 집 부모들 이랑도 잘 알고 지냈고, 심지어는 이혼 후 가장 위로를 많이 해준 사람들이기도 했다. “넌 예원이에 대해 잘 알지?” “예.” 좋아하는 장난감, 좋아하는 책, 좋아하는 색깔, 반찬, 옷 따위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넌 예원이랑 함께 있으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니?” “예, 알 수 있어요.” 혜린은 자신 있게 얘기했다. 어머니는 피식 웃으며 다시 질문했다. “예원이도 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잘 알고?” 혜린이 생각해보니, 예원이가 자기 생각을 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가끔은 자기 생각을 몰라줄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 “모를 때도 있었던 것 같아요.” “너도 마찬가질 걸? 예원이가 뭘 원하고, 뭘 싫어하는지 모를 때도 있을 거야. 예원이가 그런 것처럼.” 그럴 수도 있겠다. “엄마도 그래.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야. 그래서 계속 알아가는 게 중요하기도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야. 그런데 단유가 말한 대로, 친구란 게 서로를 아주 잘 아는 사이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잘 알기 위해서는 굉장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거야. 그러니 그런 친구를 만드는 것도 쉽지 않을 테고 말이지. 하지만 그런 친구가 있다면, 진정으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돌이켜보면, 자기도 그런 친구가 많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느니, 생활에 쫓긴다느니, 여러 핑계가 있겠지만 결국 이런저런 이유들로 함께 하는 시간이 줄다 보니 잘 안다고 생각했던 친구에게서 모르는 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나의 어려운 점이 상대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들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상대의 기쁨을 사심 없이 함께 해주기 곤란해질 때도 있었다. 학창시절에 만났던 친구들,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났던 친구들 여러 사람들이 존재했지만, 정말 서로를 잘 아는 친구가 몇이나 될까 생각해보면 많지 않았다. 어떤 친구는 여태 자기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모를지도…. “하지만, 엄마 생각에는 말이야. 그런 건 나중에 챙겨도 된다고 생각해. 지금은 주위의 친구들과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내고, 먼저 다가가서 마음을 터놓고 어울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보거든. 처음부터 친한 사람은 없잖아? 니가 단유에게 먼저 고백한 것처럼 말이야.” “엄마!” 혜린의 어머니는 흐뭇하게 웃으며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병원에서 봤던 단유를 떠올려 보았다. 다소 어른스럽다고 생각한 적도 있긴 했지만, 확실히 유별난 아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 아이가 했던 말도 그렇고. “단유는 니 생일날 오겠대?” “응. 온다고 했었어.” 혜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 그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얄밉게도 단유이야기에만 저런 웃음을 짓는다. “에잇, 미련퉁이.” 괜히 심술 나는 마음에 어머니는 혜린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이 아이의 미래가 심히 걱정스러운 어머니였다. 벌써부터 저렇게 남자애한테 흔들리면 안 되는데. **** “당신, 저랑 같이 학교에 가야겠어요.”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두꺼운 코트를 벗던 상훈의 아버지가 놀란 눈으로 오여사를 쳐다보았다. “왜? 당신 혼자 가서 이야기 나눈다고 하지 않았어?” “아니, 그 선생이 말길을 못 알아듣는 지, 아니면 그냥 애 엄마라고 얕보는 건지 말을 막 하는데 당해내질 못하겠더라고요.” “뭐라고 하는데?” 넥타이를 풀면서 묻는 말에 오여사가 그 때 생각이 나는지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우리 상훈이가 무슨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굴잖아요. 그리고 우리가 어디 집에서 상훈이를 학대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데, 나 참. 심지어는 무슨 불량 초등학생 자료를 꺼내들고는 상훈이랑 비교를 하려고 들더라니깐요?” “뭐야?” 아버지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상훈이가 불량학생 취급을 받아?” “그러니까요?” “당신은 그런 취급받는데 가만히 그냥 나온 거야! 당신 뭐하는 사람인데 그런 취급받으면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나와서 이러는데, 응?” 아버지가 화를 내자, 오여사는 찔끔하며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말 못한 건 아니고요. 하긴 했는데, 안 먹히더라는 거죠. 그래서 당신보고 같이 가자고 하는 거 아니에요? 그 쪽에서도 오라고 하고.” “뭐 오라고? 왜?” “그게, 아버지랑 같이 상담하자고…. 아니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깐요.” 중요한 건 상훈의 재시험이었다. 교장선생님 앞에까지 찾아갔지만 도리어 교장과 교감과 담임이 라인을 이루고 바리케이드를 쳐서 반격을 하니 결국 제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소리만 빽빽 지르다가 결국 얻은 것 없이 후퇴하고 만 어머니였다. 재시험을 위해서는 결국 아버지를 억지로 끌고 가서 스테레오로 담임을 협박해야 성공 가능성이 높아지리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면! 뭐가 중요한데! 아이가 말이야, 무슨 불량? 그러면 우리가 집에서 아이를 뭐 때리고 학대했다는 거야, 뭐야!” 아버지가 고성을 터뜨리며 화를 내자, 괜히 어머니는 맞장구를 치기도 그렇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어려웠다. 남편은 가끔 이렇게 극단적일 때가 많았다. 물론 불을 지핀 것은 본인이었지만, 오여사는 자기 손에 들린 게 불쏘시개인지 아닌지 구분도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학교 출장이 결정되었다. ======================================= [149] 부(5) 상훈의 아버지는 반차를 내고 학교로 오셨다. 교문 앞에서는 미리 만나기로 약속했던 오여사가 두터운 갈색 코트를 입고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업이 끝날 시간에 약속을 정했던 터라, 교문 앞은 여러 대의 학원 차들이 서 있었다. 논술학원, 수학학원, 체육관, 발레 학원 등등 다양한 명패를 붙인 학원차들을 보며, 아버지는 새삼 세상이 많이 바뀌었구나, 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의 교육을 모두 오여사에게 맡겨두었던 터라, 초등학생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뉴스나 오여사의 이야기에서 귀동냥으로 듣는 게 다였던 터였다. “상훈이는 저 차 타요.” 아버지가 학원 차들을 구경하는 것을 본 오여사가 검지로 가운데 선 승합차 하나를 가리켰다. “상훈이도 지금 저걸 타야 되는데….” 오여사의 중얼거림을 흘려들으며 아버지는 몸을 돌렸다. “갑시다.” 교실에서 보기로 했기에 두 사람은 운동장 가장자리의 보도를 걸어 본관으로 향했다. 운동장에서는 소수의 아이들이 공을 차며 뛰어다니고 있었고, 몇 몇 아이들은 가방을 둘러메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 밖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떤 아이들은 아버지를 향해 인사를 했다. 아버지는 얼굴도 모르는 아이들의 인사를 어떻게 받아야 하나 하다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하게 받아주었다. “학교에서는 어른들한테 무조건 인사하도록 교육받아서 그럴 거예요.” 이미 경험이 있던 오여사가 어색해하는 아버지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교내에서 마주치는 어른들은 모두 윗분들이니까 알든 모르든 인사를 한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다들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고 순진한 아이들만 그랬다. “교육을 잘 받았구먼.” “우리 상훈이도 인사 잘한다고 소문났거든요?” 4학년 교실이 있는 복도로 들어갔을 무렵, 몇몇 아이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면서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또 몇몇 아이들이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 이번에는 오여사가 먼저 나서서 인사를 받아주었다. “상훈이네 반 아이들이에요. 쟤는 상훈이 반에서 부반장 맡은 유영이라고 하고요.” “어, 그렇구나. 반갑구나.” 오여사가 학부모회 활동을 하면서 자주 학급에 얼굴을 보였던 까닭에 알아보고 인사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아이들이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는 모습이나 자연스럽게 받아주는 오여사의 태도가 꽤 익숙해보였다. “안녕하세요.” “어머, 그래. 반갑네? 여보, 얘가 단유라고 1학기 때 반장했던 상훈이 친구예요.” 익숙하게 들은 이름이었다. 아마 유일하게 기억하는 상훈이 친구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집에서, 오여사나 상훈이 입에서 자주 거론되던 이름이었으니까. “듣던 대로 잘 생겼구나.” “감사합니다.” 아버지는 익숙하게 인사를 받고 대답하는 단유의 모습이 꽤나 의젓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키도 상훈이보다 커 보이는데다가 운동도 잘 하는지 몸의 체격이 또래 아이들과 달리 튼튼해 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소년의 얼굴이었다. 평소에 잘생겼다는 이야기는 자주 듣긴 했지만, 실물로 보니 뭔가 아역배우나 모델 활동하는 연예인들이 이런 얼굴이지 않을까 싶었다. 다른 아이들은 인사를 받아도 어색한데, 들은 이야기가 워낙 많아서 그런지 단유는 꽤 친근한 느낌도 들었다. “니가 그렇게 공부를 잘한다며?” “그냥 좋아서 책을 자주 보다보니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잘하는 과목만 잘하고, 다른 과목은 별로예요.” 겸손인지, 겸양인지 모르겠지만 말하는 모양새도 아이답지 않다. 아이답지 않다고 해서 기분 나쁘다는 느낌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상훈이도 이 아이처럼 의젓하게 행동하고 말주변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래, 이제 집에 가니?” “…예.” 한 템포 늦게 나온 대답에 아버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단어가 있었다. 아차, 하는 마음에 사과를 할까 생각했다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으로 서 있는 단유를 보며 대신 머리를 쓰다듬었다. “열심히 공부해서…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딱히 덕담을 할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인사치례로 열심히 공부하라고 했더니 그 다음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아 대충 얼버무렸다. 잠깐이지만 ‘훌륭한 사람’이라는 모호한 표현이 썩 좋지 않았다. “여보.” 오여사가 아버지의 팔을 잡아끌었다. 시간을 지체하지 말란 뜻이었다. 대충 인사를 마무리하고 그렇게 지나가려는데, 단유가 뒤에서 화답했다. “상훈이는 좋은 아이예요.” 무슨 소린가 싶어서, 뒤를 돌아보았다. 오여사도 이 아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싶어 걸음을 멈췄다. **** 유난히 추운 겨울에도 한순간 기온이 올라가며 어제까지의 추위가 거짓말이었다는 듯, 따뜻해지는 날이 있었다. 그 날이 오늘이었다. 덕분에 평소 추위를 많이 타던 지선이 모처럼 인상을 쓰지 않고 등교를 하던 날이었다. “단유야. 안녕?” 어느 때와 변함없이 같은 표정으로 아침 인사를 하는 혜린을 보며, 단유는 자연스럽게 오른손을 들어 인사를 받아주었다. 책상을 정리하고 수업 준비를 하는데, 혜린이 말을 걸었다. “단유야.” 단유가 혜린을 돌아보자, 혜린이 희미하게 미소를 띠며 물었다. “우리 친구지?” “응.” “앞으로도 계속?” “응.” 별 일 없다면, 앞으로도 친구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고마워.” 단유는 의아하다는 눈으로 혜린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볼이 상기된 소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책에 시선을 돌리고는 이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단유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시선을 돌리다, 앞쪽에 앉은 상훈을 보게 되었다. 오늘도 상훈은 책상에 엎드려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어제는 상훈을 걱정하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는데, 오늘은 아무도 그 소년을 건들지 않았다. 상훈이 대화하기 싫어한다는 것을 눈치 채고 접근하지 않은 것이겠지. 단유도 시선을 돌리고 책을 보았다. 그리고 상훈에 대한 일은 잊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는. 점심시간,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혜린과 마주앉아 느릿한 거북이 식사를 하고 있는데, 단유 옆에 누군가 다가왔다. 누군가 싶어 옆을 보니 상훈이 식사를 마친 후 급식실을 빠져나가지 않고 단유에게 온 것이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해.” 보아하니, 상훈은 혜린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마도 혜린이 듣지 않았으면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단유는 굳이 일부러 다가온 상훈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식사를 마무리했다. 뒤따라 나오려는 혜린에게 양해를 구한 뒤, 단유와 상훈은 학교 뒤뜰로 향했다. “여기면 다른 사람은 못 들을 거야.” 한 때, 명수가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못해 난리를 피우기도 했었던 고목 옆 으슥한 곳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이었다. 상훈이 주위를 살피다 머리를 긁적였다. 이 정도로 비밀스럽게 나눌 이야기 정도는 아니었는데. “단유 너처럼 공부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 “응?” 상훈은 비장한 표정으로 자신의 질문이 가진 의미를 설명했다. “어제 선생님이 그러셨어. 사람이란 항상 잘하고 똑똑할 수 없다고. 그래서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한다고. 그런데 넌 실수도 안하고 잘못도 안하잖아. 선생님한테 혼난 적도 없고. 시험을 못 친 적도 없고. 아이들은 모두 니가 우리 학교에서 제일 똑똑하다는 걸 알고, 부모님들도 다 알걸? 그런데 어떻게 공부하면 그렇게 할 수 있냐고?” 뭔가 쓸데없는 부연설명이 들어간 것 같지만 요지는 이해했다. 어떻게 공부 하냐고? “…일단 니가 이야기하는 말의 가정 자체가 무척 잘못됐지만, 일단 내가 공부하는 방법은 책 읽는 거야. 난 너희들처럼 학원을 다니지 않는다는 거 알잖아? 그냥 책을 많이 읽는 것뿐이야. 책을 읽고 이해하고 또 다른 책을 읽는 게 내가 하는 전부야.” “그것만 해도 공부를 잘 할 수 있다고?” 그 정도라면 상훈도 늘 하는 일이었다. 밤 10시까지 책을 읽는데? “혹시 TV 안 봐?” “응.” 상훈의 어머니, 오여사는 TV 보지 말고 공부하란 말을 제일 많이 하셨다. 그래도 재미있는 프로가 나오면 눈이 가고 귀가 열려서, 엄마 몰래 볼 때도 있었다. 주말에도 그렇고. 그런데 역시 공부 잘하려면 TV를 보지 말아야 하나보다. “컴퓨터도 안하고?” “응.” 역시. 엄마가 하지 마라던 것을 안 하면 이렇게 공부 잘하게 되나보다. 상훈이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단유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게 공부랑 상관있나?” “응?” “TV를 보거나 컴퓨터를 하는 게 공부에 도움이 되는지, 방해가 되는지는 모르겠어. 애초에 난 그런 거에 관심이 없었고, 재미가 없어서 말이야.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공부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너도 알다시피 난 수학이랑 과학은 잘해. 하지만 다른 과목들을 그렇게 썩 좋은 편은 아니야. 내가 생각하기에 그 차이점은 재미라고 생각해. 내가 잘하는 과목은 재미가 있어서 계속 했던 과목들이고 다른 건 별로 재미를 못 느끼는 과목들이거든.” “그래도 넌 성적이 좋잖아.” “재미가 없다고 해도, 교과서는 계속 읽으니까. 그리고 내 경험에, 수업 때 배운 내용들은 대부분 시험에 나왔어. 말하자면, 수업만 잘 들어도 시험 치는 데 어려움은 없었어.” 어디서 돌 맞을 소리지만, 단유는 전혀 거리낌 없이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하지만 상훈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만약 단유의 이야기대로라면, 상훈은 지금보다 더 나은 성적을 얻을 방법이 없었다. “그건 나도 다 하는 거야. 나도 수업 잘 듣고, 책 많이 읽는단 말이야.” 분명 단유가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게 있을 것 같았다. 자신만의 비법 같은 것. “상훈아.” “…….” “그런데 난 니가 생각하는 것처럼 실수도 안하고 잘못도 안하는 게 아냐. 나도 실수 많이 해. 잘못도 많이 하고.” 상훈이 눈을 크게 뜨며 바라보았다. 단유가 거짓말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유의 깊은 눈은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실제로 단유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질렀는지 셀 수도 없을 지경이라고 생각했다. 그랬으니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겪고, 누군가를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도 만들었었지.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그리고 내가 보기엔 너야말로 실수나 잘못을 하지 않는 걸? 객관적으로 보면 너도 공부 잘하잖아? 선생님도 자주 칭찬하고. 아이들한테 친절하게 대하고, 이야기도 잘 들어주잖아. 그런데 왜 니가 그런 걱정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 상훈은 울컥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나, 시험 치던 날…컨닝하려고 했었어.” “컨닝 했어?” “아니. 안했어.” “안했으면 됐어. 안했는데 뭐가 문제야?” “그래도 나쁜 마음먹었다고. 난 착하지 않아. 친절하지도 않고. 공부도 너보다 못해서 엄마한테 혼나. 계속 학원 다니는 데도 1등도 못한다고.” 울먹거리는 상훈의 물기 젖은 목소릴 듣던 단유는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저 상훈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선생님은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대답하면 된다고 하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한다고 해도 나쁜 마음을 먹었던 거잖아. 만약 나중에도 공부를 계속 못하면, 진짜로 나쁜 짓을 할 수도 있잖아.” “그래서, 공부를 잘하면 나쁜 짓을 안 한다고 생각 한 거야?” “그래! 공부만 잘하면, 엄마도 화 안 낼 거고, 아빠한테도 칭찬받을 거고, 선생님도 뭐라고 안하실거야. 아이들도 더 좋은 친구로 생각할 거야.” 단유는 잠깐 지난 일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상훈의 고민과는 궤가 다르지만, 단유 역시 나쁜 마음을 먹었던 적이 있었고, 그 때의 마음을 지금도 조금은 가지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상훈의 입장이었다면, 단유의 위치에 선 아이는 자신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로 보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순간 섬뜩한 상상에 팔에 소름이 돋았다. 단유는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려다 꽉 막힌 기분이 들었다. 뭔가 위화감이 든다고 생각했는데, 가만 보니 눈앞에 선 상훈과 자신은 너무나 달랐다. 생각이나 행동이 다른 것도 있지만, 사고방식이 너무 달랐다. 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상훈처럼 이렇게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도움을 청할 수 있을까? 대화를 시도할 수 있을까? 동인형과 마주섰던 산 정상에서, 미치광이 제윅 앞에서, 리아빈 나뭇길 위에서 맞닥뜨린 복면인 앞에서, 적이라고 생각했기에 자신을 감추고 대적했다.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런 싸움의 여파일까? 그런 면에서 보면 상훈은 정말 착하고 순진하기만 한 아이였다. “상훈아. 난 부모님이 안 계셔.” 상훈이 순간 잊고 있었다는 듯이 화들짝 놀라며 입을 가렸다. “하지만, 예전의 기억을 떠올려보자면 부모님들은 내가 무얼 해도 좋아하셨어. 실수를 해도 날 좋아 하셨고, 잘못을 해도 용서하셨어. 너희 부모님도 마찬가지일거라고 생각해. 단지 순간의 실수나 잘못 때문에 너를 싫어하지는 않을 거 같아.” “그래도! 난 엄마나 아빠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엄마는 내 성적표를 보면 실망한단 말이야. 학원에 늦게 가도 늦지 않았다고 거짓말 하면 화낸다고. 아빠는 거짓말 하는 걸 되게 싫어하시고.” 상훈이 절박함을 담아 하소연했다. “그러니까, 너만 알고 있는 비법 좀 알려줘. 있잖아. 그냥 수업만 듣는다고 그렇게 안 되잖아. 나도 그렇게 하는데 안 된단 말이야.” 단유는 담담한 표정을 상훈의 눈을 응시했다. 그 절박함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눈이었다. ======================================= [150] 부(6) 상훈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단유를 돌아보자, 단유는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상훈이는 좋은 아이예요. 친구들한테도 잘하고 공부도 잘해서 친구들이 모두 좋아하는 친구고, 반장이에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네?” 오여사는 단유의 의도를 몰라 어정쩡하게 단유의 칭찬(?)을 받아주었다. “그런데 상훈이는 스스로가 얼마나 착한지를 몰라요.” “응?” “상훈이는 자기가 부모님한테 잘못하고 있다고 자책하고 있어요.” 상훈 아버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 무슨 소리니?” 오여사가 덜컥 거리는 마음을 감추며 단유에게 다가가려는데, 아버지가 오여사의 팔을 붙잡았다. “계속해봐라.” “상훈이는 자기가 공부를 못해서 어머니한테 혼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한테 어떻게 공부를 잘 할 수 있는지 묻기도 했어요. 저라면 절대 그렇게 못할 거 같거든요. 상훈이는 그만큼 적극적이고 노력하고 있어요.” 아버지의 일자로 굳게 다물어진 입술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요. 상훈이 너무 혼내지 마세요.” 아버지의 눈가가 살짝 찌푸려졌다. 단유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몸을 돌렸다. 어느 새 곁에 떨어져 있던 혜린이 후다닥 달려와 인사를 꾸벅하고는 단유를 쫓아갔다. 그럼에도 아버지와 오여사는 입을 열지 않았다. **** “어서 오세요, 아버님. 어머님.” 담임선생님이 인사를 하며 자리를 권했다. 아버지는 넥타이를 조여 맨 뒤 오른손을 내밀었다. “상훈이 애비 되는 지성언이라고 합니다.” “담임을 맡은 이주안이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자리에는 상담을 보조해 줄 상담교사도 함께 했다. 네 사람이 책상 2개를 붙여 자리를 만들고 둘러앉으니 어색한 침묵이 잠시간에 흘렀다. “우선 제가 어머님과 아버님께 사과를 먼저 드릴게요. 지난번에는 제가 너무 조심성 없이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는 겸연쩍다는 듯 인사를 받았다. 선생님은 고개를 가볍게 숙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일단 저희는 결코 상훈이가 잘못됐다거나, 혹은 큰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드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알려드리고 싶어요. 다만 상훈이가 지금 현재 보이는 감정적 상태가 걱정되니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에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는 것을 이야기 드리고 싶습니다.” “저희도, 예 뭐, 그런 이야기라면 신중하게 이야기를 들어야겠지요. 하지만….” 어머니가 조곤조곤 이야기하려는데 아버지가 손을 살짝 들었다. “일단, 선생님 말씀부터 듣고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계속하세요, 선생님.” 평소보다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감지한 어머니는 지레 겁을 먹고 입을 다물었다. 남편은 평소 점잖은 편이었고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가족들에게 윽박을 지르거나 힘을 과시하는 가부장적인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지만, 가끔은 극단적으로 나올 때가 있었다. 그때는 누구도 쉽게 말리지 못할 정도라 기가 강한 오여사도 움츠러들기 마련이었는데, 지금 그런 조짐이 보였다. 오여사는 조금 자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만일 남편이 화가 나면 어떻게 말려야 하나 걱정스런 마음도 들기 시작했다. “들으셨겠지만, 상훈이는 지금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감정적으로 여려진 상태입니다. 원래 착한 아이고 다소 여린 아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아이가 지금 보이는 모습은, 조금 위험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불안증을 보이고 있거든요.” “불안증이요?” 아버지가 되묻자, 감이 나쁜 편은 아닌 선생님도 괜히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예.” 선생님은 다시 차근차근 상훈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했다. 이미 오여사에게 한 번 했던 이야기였지만, 더욱 조심스럽게 말을 골라가며 이야기를 했다. “…상훈이가 특히 걱정하는 것은 부모님이 자신에게 실망하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이 많아요. 특히 자신의 성적 때문에 어머니나 아버님이 실망하시는 모습을 보이시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더라고요.” 아버지는 깍지 낀 손을 허벅지 위에 둔 자세 그대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은 상훈에게 그렇게 심한 압박을 가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오여사가 상훈에게 몇 번 지적하는 것을 보긴 했지만, 그 정도는 어머니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로 심한 것일까? “상훈이의 학교생활은 그야말로 모범생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어요. 친구들에 대한 배려심과 선생님이나 웃어른에 대한 예의범절은 타 학생들의 모범이 되고도 남죠. 공부도 사실 성적만보면 우수한 학생이고요. 그런데 지난 시험 당시 상훈이가 보였던 감정은 단순히 착하다는 이유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내가 나쁜 마음을 먹었다는 이유로 자신을 책망할 만큼의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 과연 자연스러운 것인가, 라는 것이죠. 두 분께서 생각하시기에도 이상하지 않나요? 단순히 두 분 아들이 아니라, 이제 11살, 4학년 아이가 보이는 감정으로서는 지나친 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지나치게 보는 게 이상한 것 아닌가요? 오히려 너무 착하게만 자란 아이의 심성 때문인 거죠. 저희 집에서도 얼마나 엄마나 아빠 말을 잘 듣는 순종적인 아인데요.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도 아플까봐 피해 다니는 아이가 저희 아이란 말이에요.” 어머니의 항변은 지난번과 동일했다. 선생님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어머니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리고 반론을 제시했다. “어머니 말씀도 이해를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난 일,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에 죄의식을 느끼고 눈물까지 흘리며 시험을 포기할 정도가 된다면 걱정스러운 부분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는 사실 성직자들이라도 이렇게 느끼기 쉽지 않거든요.” 그럴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아버지의 머리에 들어왔다. 자신의 과거를 억지로 떠올려 봐도, 그리고 기나긴 시간동안 봐왔던 사람들을 봐도 그 정도의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교회 목사나 사찰의 스님들도 그런 마음으로 죄의식을 느낄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단순히 어리고 순진한 아이들이라고 해도 그 정도는 아니라는 선생님의 말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 이유가 뭡니까? 아까 말씀하셨던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겁니까?” “저희는 일단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특히 상훈이가 어머니나 아버지가 자신을 혼낼까봐 무섭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요. 그나마 저희가 좋게 보는 점은,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아이가 자신의 마음을 숨기거나 혹은 거짓말을 하는 식으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경우가 있는데, 상훈이는 그러지 않는다는 것이죠. 상훈이는 솔직하게 자신의 두려움을 고백하는 용기가 있었어요. 다시 말하면 상훈이는 얼마든지 건강한 상태로 돌아갈 여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대로 놔둬도 괜찮을지도 몰라요. 스스로 극복을 하고 단단해지는 케이스도 있으니까요. 마치 우리 어른들이 그랬듯이요.” 과거에는 이런 상담이 없었다. 그저 성적이 떨어졌네, 애가 싸우네 하는 이야기로 부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정도의 상담만 있었다. 아이의 정신적인 건강까지 고려한 상담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고, 그래서 당시의 아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과 싸우며 자라나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자라난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다시 부모가 되어야 했다. 아버지는 옛날 생각이 났다. 시험지를 감추고, 성적표를 찢고, 부모님에게 거짓말을 해서 용돈을 타내고, 도서관에 가는 척 하면서 친구들과 놀러 갔던 일들. 아버지는 비록 뉴스에 나올 법한 큰 일탈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스트레스를 소소한 일탈 행위들로 해소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스트레스’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는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랬다. “그래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전문 상담사를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눠보셨으면 하는 겁니다. 단순히 저희들끼리의 이야기로 될 문제는 아니라고 보입니다.” “전문 상담사요?” 어머니가 화들짝 놀라자 상담교사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일단 상훈이는 병이 아닙니다. 무슨 정신병 같은 거라고 오해하지 마세요. 그런 게 아니라 단지 상훈이의 감성이나 멘탈을 좀 더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도울 수 있도록 확인해 보시라는 의미에서 권해드리는 겁니다. 아니면 그냥 상훈이와 진솔한 대화를 나눠서 가정 내에서 해결하는 방법도 있겠죠. 하지만 그것보다는 좀 더 객관적으로 자기 아이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법도 있음을 알려드리려는 겁니다.” “그만큼 위험하다는 건가요? 우리 상훈이가?” 상훈의 아버지가 입을 열어 물었다. 상담교사가 안경을 매만지면서 대답했다. “위험하다는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이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스스로 극복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훈이 보이는 불안증은 집중력 저하나 자존감 상실 등의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에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면 좋다는 의미에서 상담사를 권해드린 겁니다. 또 가정에서 자구책을 마련하는 것보다는 좀 더 체계적으로 연구된 상담소에서 방법을 찾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것이죠.” 상담교사는 차분한 어조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두 부모님을 책망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착하고 바른 아이를 길러내신 두 분께 칭찬을 드리고 싶을 정도니까요. 다만 부모가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야기 드리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부모였던 사람은 없습니다. 부모로 훈련받은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이전의 부모에게 훈육되어 온 습관이나 관행을 따르는 게 보통이지요. 때문에 부모는 전문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수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상담교사는 짧게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많은 부모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과연 나는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하고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두려움은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익숙한 반복과 습관만 남지요. 부모는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자녀를 훈육합니다. 하지만 자녀는 부모와 다르죠. 부모에게 익숙했던 방식이 자녀에게도 익숙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상훈에게도 어쩌면 두 분의 훈육이 다소 과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두 분이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또 반복되겠죠. 그러니 이런 문제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상훈이가 앞으로도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부모님들께서 불편하신 마음이 들더라도 아이를 위해서 시간을 내주시는 게 좋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드리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숨을 깊게 토해냈다. 어머니가 안절부절 못하다가, 선생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겠어요. 선생님. 그렇게 할게요. 방학 때 아이 데리고 상담소를 한 번 방문하던지 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상훈이 사회 시험 말인데요….” “여보.” 오여사는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다른 세 사람은 침도 삼키지 못하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잘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오래 봐주신 선생님들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좋겠군요. 그렇지 않아도 아까 교실로 올 때, 단유라고 했던가요? 그 아이가 그러더군요. 상훈이 혼내지 말라고. 사실 기분이 조금 좋지 않았습니다. 제가 상훈이를 혼낸 기억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런데 선생님 말씀 들으니까, 그럴 만도 하네요. 저도 어쩌면 익숙한 방식으로 저희 아들을 훈육하고 있었나 봅니다.” 아버지의 아버지, 지금은 돌아가신 상훈의 할아버지는 예전 꽤 근엄하신 모습으로만 기억되고 있었는데, 문득 그런 기억도 떠올랐다. 무슨 잘못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잘못을 했다고 엄동설한에 팬티바람으로 집 밖으로 쫓겨났던 기억이 있었다. 당시 할아버지는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셨다. 갑자기 화를 내시면서 집 밖으로 쫓아내셨고, 아버지는 이유도 모른 채로 밖에 나와서 떨어야 했다. 그 당시의 수치심과 죄책감, 그리고 억울함 등이 떠오르더니 상훈에게도 비슷하게 행동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선생님들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저희 부부도 아마 고칠 점이 많았었나 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숙였다. 담임선생님과 상담교사도 같이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만 안절부절못하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버지는 고개를 들며 마지막 인사 겸 고마움을 표시했다.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는데, 잊고 있었네요.” **** “무슨 이야기 한 거야?” “상훈이 혼내지 말라는 이야기.” 혜린의 물음에 짧게 대답했다. “어? 상훈이 도와주려고 그런 거야?” 단유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린 혜린이 묻자 단유가 씁쓰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애써 도움을 주려는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우연히 마주친 상훈의 아버지에게 그냥 상훈이 했던 말이 생각나서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아버지란 존재가 단유에게 어떤 동요를 일으킨 점도 있었다. 오랫동안 아버지를 떠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해줬던 말들을 단편적으로나마 기억하며 살아가는 단유였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자길 혼내지 말아달라고. 자기도 나름 열심히 살고 있으니까, 상훈이처럼 노력은 하고 있으니까, 나중에라도 혼내지 말아달라고. 그냥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았다. 단유의 표정을 보던 혜린은 다시 자책하면서 얼른 자리를 피했다. 단유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단유야, 잘 가.” 혜린은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자기 집으로 향했다. 교문 앞에서 헤어지는 두 사람을 보던 명수가 다가와서 물었다. “너희 둘이 사귀냐?” “아닌데?” 혜린과 이렇게 인사하는 장면을 한두 번 목격하는 것도 아닐 텐데, 새삼스럽게 그런 질문을 하는 의도가 궁금했다. “니 표정이 그렇잖아?” “내 표정이 어때서?” “너 막 이렇게 막 웃는데?” 명수가 손가락으로 자기 입꼬리를 붙잡고 끌어올리며 말했다. “내가?” 단유는 자기가 웃고 있었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오오, 석고 여자 친구 예쁜데?” 지선이 총총 다가오더니 단유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 언니 좋아?” 단유의 얼굴이 빨개졌다. 겨울바람에도 달아오른 얼굴이 식지 않았다. ======================================= [151] 동(1) 몇 십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의 추위가 계속 된다며 사람들이 몸을 움츠리는 겨울이었다. 남부와 제주도에 관측 사상 가장 많은 겨울비가 내리던 어느 날, 보육원에도 수없이 많은 눈이 쏟아졌다. “눈사람 만들래?” 명수가 단유를 꼬셨다. 하지만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왜?” “너 감기잖아?” 명수는 감기에 걸렸다. 며칠 째 코감기 때문에 코를 훌쩍이면서도 나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1년 내내 밖에서 뛰어다녔던 명수에게 방에서 가만히 쉬라는 보육교사의 명령은 그렇게도 가혹했었나보다. 명수가 열이 나는 것은 감기 때문이 아니라 뛰지 못해서라고 생각들 정도였다. “운동해야 건강해진다고 그랬어.” “넌 이미 감기에 걸렸어.” “운동하면 나아질 거야.” “안에서 운동해. 가르쳐 줬잖아.” 단유는 명수에게 호흡법과 함께 간단하게 운동하는 법을 가르쳐줬다. 운동은 곧잘 따라했지만, 호흡하는 법은 쉽게 따라하지 못했다. 호흡을 신경 쓰면서 하면 답답하다는 이유였다. “작년에는 이렇게 안 추웠던 것 같은데.” 명수가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보며 말했다. 확실히 작년보다 추워진 것도 있었지만, 사실 단유가 알게 모르게 추위를 막아줬던 점도 있었다. 하지만 올해는 단유도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방에 틀어박힌 상황. 물론 단유로서는 곤란함을 느끼지 못했다. 이러나저러나 어쨌든 책 읽기 좋은 날씨였다. “재민이랑 유철이한테 축구 가르쳐줘야 하는데.” “겨울 끝나고 가르쳐줘도 돼.” “겨울에 특별 수업을 해야 돼. 그래야 실력이 오르지.” “그 말 똑같이 해줄게. 방학동안 책 좀 읽어.” “눈 많이 온다. 그치?” 단유는 책에서 눈을 떼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정말 눈이 많이 내렸다. 사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기도 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린 적이 없었다. 내려도 금방 녹았던 것 같은데, 오늘은 유달리 많이 내리고 있었다. “오늘 어디 간다고 안했어?” 원래 오늘 주영이 데리러 오기로 했었다. 하지만 아침에 연락이 와서 오늘의 약속은 미뤄졌다. 이 날씨에는 누구도 움직이기 힘들 것이다. “잠깐 나가면 안 될까? 너무 답답한데.” 계속된 명수의 칭얼거림에 단유가 한숨을 내쉬더니, 책을 덮고 일어났다. 명수가 기대어린 눈으로 반짝였다. 확실히 명수는 단유를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반응이 올 것이란 걸 잘 알았기에 계속 조를 수 있었다. 그리고 단유도 이렇게 될 거란 걸 알면서도 명수가 걱정돼서 굳이 반대를 하고 있었지만 결국 져주는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한테 이야기하고 잠깐 나갔다 오자.” 단유는 명수와 함께 보육교사를 찾아갔다. “안 돼. 명수 넌 지금 감기야. 나을 때까지 방에서 쉬라고 했잖니? 더 심해지면 같이 지내는 단유도 힘들어져. 단유도 너처럼 감기 걸려서 힘들어지면 좋겠니?” “아니요.” “그럼 방으로 돌아가.” “날씨가 추워지면 운동량이 줄어들게 되고 실내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면 환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먼지나 오염물질, 세균, 바이러스 때문에 더 건강에 안 좋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역시 단유였다. 명수가 입을 헤 벌리고는 엄지를 척 내밀었다. 보육교사는 단유가 함께 왔을 때부터 이런 일을 예상했다. 단유가 함께 움직인 이상, 명수의 뜻대로 되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니 보육교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적당한 타협이었다. “1시간. 더 이상은 안 된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알라뷰!” “나가!” 두 사람은 후다닥 방을 뛰쳐나왔다. “옷 제대로 입고! 장갑이랑 목도리도 해!” “네!” 잠시 후, 두터운 잠바와 모자를 푹 눌러쓴 명수가 빨간 목도리를 칭칭 감고는 보육원 현관 앞에 섰다. 현관 앞에는 생활지도원 선생님 두 분이서 빗자루로 입구를 쓸고 계셨다. “니네 지금 나가려고? 눈 너무 많이 오는데?” “괜찮아요, 날씨가 추워지면 건강에 안 좋고 먼지가 많아서 환기에 안 좋대요. 그래서 밖에 나가서 놀아야 한다고 단유가 그랬어요.”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연습이 수년간 단련된 지도원 선생님들은 혀를 차며 대답했다. “너무 심하게 놀지 마라. 젖은 옷으로 놀면 감기 더 심해진다.” “네!” 기분 좋게 대답한 명수가 흐르는 코를 소매로 훔치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너도 적당히 좀 해라. 계속 저렇게 맞춰주다간 너만 힘들어.” “괜찮아요, 전.” 단유는 고개를 숙여보이곤 명수의 뒤를 쫓았다. 가끔은 이렇게 명수를 따라 몸을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생존에 대한 절박함, 이계에 대한 걱정, 마법에 대한 고민, 미래에 대한 번민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앗, 그걸 피하다니!” 어느새 눈앞으로 날아온 하얀 눈 뭉치를 고개를 옆으로 젖히며 피해낸 단유는 손으로 긁듯이 눈을 모은 뒤, 재빠르게 두 손으로 꽉꽉 눌러낸 눈을 던졌다. 명수는 두 팔을 들어 눈을 막았다. 그렇게 잠시 설전(雪戰)을 벌이고 있으니 어느새 다른 아이들도 뒤따라 나와 싸움에 참전하면서 규모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야, 니들 저기 가서 해!” 입구에까지 눈이 튀면서 지저분해진 탓에 선생님들이 소리를 빽 지르자, 아이들은 운동장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운동장에는 꽤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 유철이나 재민이는 앞으로, 뒤로 넘어지고 구르면서 즐거워했다. “야, 너, 너. 이리 와서 빨리 눈덩이나 만들어!” 명수가 유철이와 재민이를 불러 일을 시켰다. 아이들은 짧은 다리로 허우적대며 다가와서는 반복노동에 참여했다. 명수는 연신 만들어진 눈덩이를 던지면서도 아이들이 쉬는 꼴(?)을 참아내지 못했다. “지선이 너도 와!” 어느새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한 팀이 되고 고등학생이 반대 팀이 되었다. 고등학생들이 당연 숫자가 적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만한 페널티였다. 단유도 잠시 어울려서 눈싸움을 하다가, 잠시 물러났다.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눈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았는데, 상대팀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명수야, 이만 들어가자. 더는 안 되겠어.” “왜? 이제 시작인데!” 이미 1시간이 다 되었지만, 명수에게는 10분 정도밖에 체감되지 않았나보다. “재민이, 유철이, 지선이는 따라와. 니들은 그만 놀아.” “더 놀면 안돼요?” “형~.” “…….” 지선이는 아무 말 없이 눈뭉치를 뭉쳐서 단유에게 던졌다. “안 돼. 더 놀면 니들도 명수처럼 감기 걸려. 그럼 앞으로 남은 겨울방학동안 계속 방에만 지내면서 못 나올지도 몰라.” 아이들은 순순히 단유의 말을 들었다. 단유는 지선의 손을 잡고 입구까지 데려다 주었다. 어느새 본관 건물이 눈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바람은 많이 불지 않는데도 눈발에 시야가 제한되니 괜히 겁이 날 정도였다. “명수야!” 입구에서 명수를 불렀지만, 역시나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단유는 목도리를 벗어 두어 번 공중에서 털어낸 뒤 다시 목을 감쌌다. “애들 다 데리고 와. 더는 위험해서 안 되겠다.” “네.” 보육교사가 입구까지 나와서 걱정을 했다. “오늘 난방 확실히 해야겠네요. 저 아이들 들어오는 대로 다들 제대로 씻으라고 전해주세요.” “네, 선생님.” 생활지도원 한 명이 대답을 하며 입구 앞을 계속 쓸었다. 미끄러지면 더 큰 사고가 날 수 있기에 열심히 쓸고 또 쓸었다. “이제 들어오래요. 명수야, 그만 해.” 단유의 외침에 그제야 들고 있던 눈덩이를 내려놓고 좀비들처럼 느릿느릿 걸어서 운동장을 빠져나왔다. 화단과 길의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여서 작은 소목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아이들도 있었다. 다행히 그런 아이들도 푹신한 쿠션 덕에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다. “단유야, 우리 아직 눈사람 안 만들었는데?” “안 돼. 너무 눈이 많이 와서, 더 이상은 위험해. 그리고 이미 1시간 이상 놀았잖아.” 과연 명수는 온 몸이 푹 젖어 있었다. 저게 다 눈이 녹아서 생긴 물은 아닐 것이니, 열심히도 눈뭉치를 던졌음이 분명했다. 복숭아처럼 물든 뺨을 감싸며 명수가 달려왔다. **** “눈이 많이 내리네?” 재훈이 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뒤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잔을 감싸 쥔 주영이 대답했다. “여기도 겨우 왔다고요.” 재훈은 아직 병원복을 벗지 않았다. 이제 거의 다 나았지만, 퇴원은 1달 뒤에 하기로 했다. 어느새 푸른 병원복이 일상복처럼 적응이 되어서 그런지, 야무지게 소매를 걷어 올리고, 두텁게 살이 오른 흰 팔뚝을 자랑하며 다니는 재훈이었다. “선배, 정말 살 많이 찌셨나봐요?” “그래? 그래도 계속 물리치료 받으면서 운동하는데도 그런가?” 괜히 뺨을 톡톡 두드리면서 다이어트를 고민하는 재훈이었다. “얼마 전부터 꼬박꼬박 야식을 챙겨먹는다는 소문이 있더라고요.” “소문일 뿐이지.” 어느새 ‘나이롱환자’의 반열에 오른 재훈은, 1년간의 재활기간 동안 먹지 못했던 것을 몰아 먹겠다고 마음먹었는지 꾸준히 야식을 통해 영양분을 섭취하고 있었다. “의사들은 뭐하나 몰라.” “의사들은 자기 일하는 거고. 너는 니 일 해야지?” “저는 잘 하고 있어요.” “오늘 약속 아니었나?” “인평 시에 폭설주의보가 내렸어요. 가는 길이 다 막혀서 오도 가도 못한다는 이야기, 뉴스 안 보셨어요?” 주영이 병실 한 벽에 달린 TV를 가리켰다. “아침 드라마 보느라고 못 봤네?” 능청을 떠는 재훈을 흘겨보던 주영은 머그잔을 내려놓고 가방에서 서류 한 철을 꺼내 재훈에게 건넸다. “부지 매입 완료되었고요, 여기는 설계사 후보들이요. B설계사가 좋다고 소문은 났는데, 일단 한 번씩 검토해보세요.” “너무 늑장 부리는 거 아냐? 이제 가져다주면 어떡하지?” 느릿느릿 흥얼거리듯 핀잔을 주는 재훈의 손에 내려치듯 서류를 건넨 주영이 다소 높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늑장이라니요? 제가 지금 재단 일만 해도 얼마나 많은데, 여기에 선배 일까지 해주면서 몸이 남아나는 줄 알아요?” “그게 다 라인을 잘 탄 덕 아니겠어?” “아우, 정말. 진짜 이런 식이면 저 갈아타요?” “그러든가?” 능글맞게 웃는 재훈을 째려보던 주영이 제풀에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단유는 일주일 뒤에 보면 될 거 같은데, 이제 어떡하실 거예요?” “뭘?” “병원 나가면, 이제 활동에 제약은 없어지는데 단유에 대해서도 뭐 달라지는 게 있나 해서요.” “없어. 단유는 일단 중학교 들어갈 때까지는 이대로 지내는 게 좋아.” “그래요?” “왜냐고 안 물어?” “이유가 있겠죠.” “이거, 이 팀장. 게을러졌어?” “물으면 제대로 가르쳐나 주시고 그러시죠?” “물어보나 마나라는 거야? 왜 해보지도 않고 그래?” “제가 지금 선배랑 밀당이라도 해서 남는 게 뭐 있다고 그래요?” “밀당이라니?” 금시초문이라는 얼굴. “그럼요, 단유가 왜 계속 그 쪽에 있어야 하는데요?” “비밀이야.” “선배!” “야, 나 아직 환자야.”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주영은 고개를 홱 돌렸다. “단유는 말이야. 중학교 되면 보육원에서 데리고 나올 거야.” “걔를요? 어떻게요?” “입양.” “입양이요?” 주영의 눈이 커졌다. **** 혜린은 소파에 앉아서 과자를 먹으며 TV를 보고 있었다. 핑크색 계열에 캐릭터가 그려진 극세사 폴리에스터 재질의 잠옷을 위아래로 입은 소녀는 두 볼이 다람쥐처럼 부풀어있었다. “혜린아?” 혜린은 대답도 안하고 계속 과자를 입 안에 집어넣고 우물거렸다. “오늘은 날이 어쩔 수 없잖니?” 어머니가 너그러운 목소리로 혜린을 달래보려 했지만, 여간 뿔이 난 게 아니었다. 오늘은 원래 생일파티 때 입을 옷을 사려고 백화점을 가기로 했던 날이었다. 하지만 날이 날이니 어머니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또 굳이 오늘이 아니더라도 내일이든 모레든 날씨가 풀리면 가서 사면 될 일이었다. “옷 못 사러가서 그러니?” 혜린은 불퉁한 표정으로 TV를 보다가 툭 한 마디를 뱉었다. “아니야.” “그럼, 왜 그래?” “…전화가 안 와.” “전화? 무슨 전화?” “단유한테 전화번호 알려줬는데 전화가 안 와.” 나 참. “이 아침에 단유가 전화를 왜 해?” “몰라. 그냥 기분 나빠.” 혜린 나름에는 눈이 내리는 날, 단유가 걱정 섞인 목소리로 ‘눈이 많이 오는데 괜찮아?’ 라든가 ‘거기도 눈이 많이 내려?’ 라든가 ‘눈 오는데 우리 만날까?’ 같은 전화를 해 주길 상상하고 있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긴 했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 창밖의 눈을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보고 싶다….” 풋사랑에 빠진 초등학교 4학년 딸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심정을 어떨까? “이그, 내 딸만 아니면 진짜 한 대 쥐어 팼다.” 어머니는 혀를 차며 주방으로 돌아갔다. 날도 추운데 꿀물이라도 하나 타서 먹여야겠다고 생각하며. ======================================= [152] 동(2) 입구에서 몸을 털고 보육원 안으로 들어가려던 단유는, 우연히 시선을 돌리다가 보육원 정문 쪽에 희끗거리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눈발이 살짝 약해질 즈음해서 그 그림자가 사람의 것이라는 의심이 들었다. 이미 많은 눈이 쌓여서 사람들이 오가지 않을 날씨임에도 정문 쪽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는 게 의심스러워 자세히 관찰하니, 계속 그림자가 보였다 사라졌다를 반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선생님, 저기요.” 보육교사는 단유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눈을 좁히고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보았는지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단유도 호기심에 뒤를 따라갔다. 그림자는 다가오는 사람을 보지 못했는지 계속 왔다갔다 정문 근처를 서성이는 모양새였다. 다가갈수록 형체는 사람의 형태를 갖추더니, 검은색 패딩에 모자를 푹 눌러쓴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누구세요?” 보육교사가 소리치자, 그제야 다가오는 것을 알았는지 고개를 퍼뜩 들었다가 뒷걸음질을 치려했다. 그러나 발목 위를 덮는 눈 때문에 제대로 걷지 못하고 그만 휘청이다 엉덩방아를 찧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앵!” 어린 아기의 울음소리에 화들짝 놀란 보육교사가 서둘러 뛰어갔고, 그 뒤를 단유가 쫓았다. “어머나, 세상에!” 검은 패딩은 가슴에 포대기로 둘러 싼 아기를 안고 있었는데, 넘어지면서 아기가 놀란 탓에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보육교사는 얼른 아기를 안아들고는 다른 손으로 패딩을 일으켜 세우려했다. 그러나 패딩은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단유야, 좀 도와줄래?” 보육교사는 단유에게 아기를 맡기고, 패딩을 두 손으로 일으켜 세웠다. 모자를 눌러썼지만, 모자 아래로 보이는 얼굴은 꽤 앳된 얼굴이었다. 앳된 얼굴의 패딩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입양은 안돼요.” 주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왜?” 재훈이 정말 궁금하다는 얼굴로 주영에게 물었다. 내가 입양하겠다는데, 니가 왜 반대하냐는 물음이 섞인 질문이었다. “첫 째는 선배가 아직 미혼이라는 거.” “양부모가 성년자라면 남녀, 기혼, 미혼, 자식 유무 불문 입양할 수 있다고 했어.” 이미 그 정도는 알아본 재훈이었다. “선배의 법리적 조건을 따지는 것이 아니에요. 선배의 가족들이 반대할 거란 거죠.” “내가 언제 가족들 눈치 보면서 살았었나?” “그렇게 사셨으니 지금 이렇죠.” “그건 또 무슨 뜻?” 주영이 팔짱을 끼고 재훈을 노려보았다. “회장님 외에는 단 한 명도 이 병실에 들어온 적이 없다는 것.” 재훈은 빙그레 웃으며 팔짱을 꼈다. “그야말로 다행스러운 일이지.” “그리고 만약 입양을 강행하신다면, 회장님마저도 등을 돌리실 겁니다.” “뭐, 이제는 나 혼자 자립할 때도 되지 않았어? 애초에 혼자였지만.” “병원 건립에 차질이 생길 겁니다.” 재훈은 입을 다물었다. 재훈이 재벌 3세라는 것도 허울 좋은 명패일 뿐이었다. 할아버지의 도움이 없다면, 재훈은 그저 의대 본과생이라는 명패 밖에는 남는 게 없었다. 게다가 자기 앞가림 할 돈도 없는 고학생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재훈의 침묵 속에서 주영은 두 번째 이유를 들었다. “두 번째는 단유입니다.” “그게 뭐야?” “단유가 입양에 동의했나요?” “하지 않을까?” “자신감이 꼴불견이네요, 선배.” 재훈은 머리를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목을 슥슥 긁었다. “그리고 선배는 결혼 안하실 거예요?” “…좋은 사람 있으면 하겠지?” “만약 그 사람이 파양을 원하면요?” 재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물었다. “왜 파양을 원해?” 주영은 물을 한 잔 마셔 입술을 적신 후 이야기를 했다. “모르죠, 그건. 그냥 만약 그럴 경우에 어떡하실 거냐고 묻는 거예요.” “파양을 원하지 않을 거야. 단유가 귀염성은 없어도 예의는 바르거든.” “정말, 제멋대로네요.” 주영은 한숨을 내셨다. 재훈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만약에 파양을 원한다면, 그냥 다른 사람 찾지 뭐. 이 세상의 반이 여자라는데.” “…참 선배답네요.” “정 없으면 너랑 하지 뭐.” “예?” 주영이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재훈을 바라보았다. 익살맞게 킬킬거리며 재훈이 말을 이었다. “너도 단유 좋아하잖아? 파양 안 할 거잖아? 그럼 좋지 뭐.” “도대체, 뭐가 좋다는 거예요? 내 의사는 안 물어봐요?” “파양할 거야?”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주영은 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했다. “선배가 매사 이런 식이니까, 주변에…‘사람’이 없는 거예요.” 재훈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고, 주영은 붉어진 얼굴로 병실을 나갔다. 병실 안에서는 재훈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도 웃음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 “마셔요.” 보육교사가 녹차 티백을 넣은 머그컵에 뜨거운 물을 넣고 몇 번 휘휘 저은 뒤, 패딩에게 건넸다. “…….” 입술이 살짝 파랗게 물든 하얀 얼굴의 패딩은 얼굴 옆으로 튀어나온 머리카락을 정리한 후 조금씩, 조심스럽게 차를 입에 흘려 넣고는 맛을 음미하듯 부동자세로 앉아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보육교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가 옆에 앉은 생활지도원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생활지도원이 안고 있는 아기를 바라보았다. 아기는 지도원이 입에 물려준 젖병을 열심히 오물거리며 따뜻한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보육원에는 어린 아기들도 여럿 있었기 때문에 소독한 젖병쯤은 여유분을 가지고 있었다. “몸 좀 녹이셨으면 이야기를 해 보세요.” 보육교사가 패딩을 채근했다. “이렇게 추운 날, 저 어린 영아를 데리고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것도 사실 잘 믿기지 않을 정도인데 말이죠.” 어떻게 왔냐는 질문에, 혼자 왔다는 패딩의 말에 보육교사가 기겁을 했었다. 이 날씨에 고작 얇은 거적때기 같은 포대기로 아이를 둘둘 싸서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에 놀라고, 날씨 때문에 차량통행이 제한된 지금 시점에 혼자 왔다는 말에 또 한 번 놀랐다. 보육교사는 아이의 얼굴을 한 번 훔쳐본 뒤, 말을 이었다. “다행히도 아이가 별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만, 어쩌면 병원에 데리고 가야할지도 몰랐어요.” 아이의 체온을 재 본 결과, 살짝 미열이 있긴 하지만 위험한 정도는 아니었다. “진짜 설마해서 묻는 건데요, 혹시 정문에 아이를 두고 가려고 했던 거예요?” 가끔 그런 사람이 있었다. 드라마나 영화나 소설에서 나오듯이 아기를 보육원 앞에 두고 가면, 아기 우는 소리에 사람들이 뛰쳐나와서 아기를 데리고 들어간다는 상황을 기대하는 사람들. 그러나 열에 아홉은 반드시 아기에게 문제가 생길 상황이 만들어진다. 특히 겨울철에 그런 짓을 하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아기는 건강에 큰 위험을 겪게 되고, 심지어는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에도 이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패딩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그렇게 맡긴다고….” 보육교사는 화도 내지 못하고 혀만 찼다. 생활지도원도 흘끔 훔쳐보다 다시 아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일단 현실을 알려드린다는 차원에서 말씀드립니다만, 보통 불가피한 상황에서 육아가 어려운 경우에는 이렇게 아이를 버리듯이 던져두고 갈 것이 아니라 보육원 원장님과 상담을 하셔도 되는 거예요. 상담을 해서 아이를 맡기더라도 신변 노출 같은 건 없어요. 그리고 나중에라도 아이를 보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면회 신청을 하고 아기를 볼 수도 있고요.” 패딩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도 이렇게 하라고 가르쳐 드리는 게 아니에요. 혹시 주변에서 아가씨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말리라고 알려드리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네.” 패딩은 소매를 들어 눈을 쿡쿡 찌르듯 눈물을 닦아냈다. 보육교사는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생활지도원에게 눈치를 줬다. “잠시 나가 계세요.” 생활지도원은 말없이 아기를 안고 상담실을 나갔다. 이후 보육교사는 몸을 숙이며 패딩에게 물었다. “몇 살이세요?” 패딩은 슬쩍 시선을 들어 올렸다가 보육교사와 눈이 마주치자 뜨끔 하는 기색을 보이며 곧 아래로 내리깔았다. “아이 부모에 대한 기록은 결코 외부로 나가지 않아요. 하지만 기록은 해야 되요. 아가씨를 위한 것이기도 하고, 아기를 위한 것이기도 해요.” “…그냥 말 안하면 안돼요?” 그리고 흐느끼기 시작한 패딩 속 여자는 이제 겨우 17살이 된, 세상이 두렵기만 한 아이였다. **** “단유야, 아무한테도 이야기하면 안 된다. 알았지?” 생활지도원 한 분이 단유에게 주의를 주고 떠났다. 단유는 방으로 돌아와 책상에 앉았지만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보육원에 들어오는 아이들의 실체를 본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늦게 와? 너 혼자 놀다 왔지?” 명수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면서 물었다. “머리 제대로 말려. 안 그러면 감기 심해져.” “괜히 잔소리는.” 명수는 툴툴대면서도 억센 손길로 머리에 묻은 물기를 수건으로 훔쳐냈다. 단유는 명수를 바라보다가, 슬쩍 지나가듯이 물었다. “넌 언제 여기 왔어?” “여기? 보육원?” “응.” “몰라. 어릴 때 들어왔는데 기억은 안나.” 아무렇지 않게 대답해주는 명수의 얼굴에서는 별 다른 기색이 떠오르진 않았다. “왜 물어?” “그냥. 나도 여기 온지 이제 5년이 지났잖아. 그래서 물어봤어.” “그래?” 명수는 수건을 집어던지고는 침대 위에 풀썩 누웠다. 창밖으로 날리는 눈은 소리 없이 대지를 덮고 있었고, 라디에이터에서 온수가 지나가며 꿀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 기억나는 것도 있어.” 명수가 심드렁하게 툭 뱉어낸 말에 단유는 고개를 돌렸다. “그 때도 추웠던 것 같은데, 이렇게 눈이 내리진 않았던 것 같고. 비가 내렸나? 모르겠어. 아무튼 막 울면서 나가겠다고 떼를 쓰는데 어른들이 날 붙잡았던 기억은 있어.” “언제?” “몰라. 그런데 내가 여기 온지 얼마 안 됐을 때인 거 같아.” “그렇구나.” “그 때는 엄마랑 같이 간다고 했었는데….” 단유가 다시 명수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기억 나?” “아니. 기억은 안나. 그런데 엄마가 있었던 것 같아. 그런데 너무 오래돼서 모르겠어. 착각일 수도 있고.” 명수도 저런 기억을 가지고 있구나. “넌? 너도 처음에 엄마 보고 싶다고 했었잖아?” “내가?” “응. 너 잘 때 그랬어. 엄마 보고 싶다고.” 아마도 단유가 처음 여기 왔을 때, 자면서 잠꼬대 식으로 이야기를 했었는지도. 그리고 함께 방을 썼던 명수는 그걸 들었던 것일 테고. 한 번 자면 옆에서 아무리 불러도 깨어나지 못하는 잠버릇을 아는 단유로서는 믿기 힘들었지만, 지금의 명수는 꽤 진지해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나도… 모르겠어. …기억이 안 나네.” 사실이었다. 이상하게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수채화 물감으로 그린 듯이 흐릿하게 번져서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단순히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까닭으로 생각하기에는 이상한 점이 많았다. 한 때는 그렇게 열심히 찾아보려고 했던 어머니였는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감정이 예전만큼 강렬하지 않았다. 명수도 그럴까? “엄마 보고 싶어?” “…모르겠어.” 명수는 조금 느리게 대답을 했다. “솔직히 보고 싶기도 한데, 그렇게 많이 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어.” 비슷한가? “엄마가 날 안 보고 싶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단유는 가슴이 따끔거렸다. 그리고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고 자책했다. 명수는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명수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일부러 보고 싶어 하는 마음도 억누르고 있었다. **** 보육교사는 서류를 챙겼다. 그리고 맞은편에 웅크린 듯 몸을 숙이고 있는 패딩에게 이야기를 했다. “원래는 원장선생님과도 상담을 해야 하는데, 오늘 원장 선생님이 출근을 하지 못해서 이렇게 한 거예요. 대신 나중에 다시 한 번 와서 이야기를 하긴 해야 되요. 알았죠?” 패딩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보육교사는 짧은 한 숨과 함께 바깥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눈은 거세게 내리고 있었고, 오전보다 더 심해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일단은 여기서 좀 쉬세요. 당장은 나가기도 어려우니까. 전 다른 일 좀 보고 올게요. 아, 아기 보고 있을래요?” “아니요.” 즉각 대답이 나왔다. 미간을 살짝 찌푸렸던 보육교사는 쉬고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상담실을 나왔다. 그리고 영아실에 있는 생활 지도원을 찾아갔다. 어느새 아기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져, 천사처럼 자고 있었다. “어때요?” “우유를 한 통 먹고는 잠들었어요. 체온도 이상 없고요.” 보육교사는 물끄러미 아기를 바라보다가 조용하게 이야기했다. “일단 다른 선생님들께는 제가 이야기를 할게요. 그리고 상담실에 아기엄마에 대해서는 이야기 안 새어나가도록 하시고요.” “예. 단유한테도 이야기는 해 놨습니다.” “단유는, 괜찮을 거예요.” 워낙 입이 무거운 아이고, 다른 아이들이랑 사담을 나누는 성격도 아니니까. “아이들은 다들 자기 방에 있겠죠? 아, 선생님은 모르시겠구나. 일단 여기서 애 좀 봐주세요. 제가 다른 애들 돌아보고 오죠.” “네, 선생님.” 보육교사는 다시 아기 얼굴을 한 번 보고는 영아실을 나갔다. ======================================= [153] 동(3) 오후가 되면서 눈발이 다소 약해졌지만, 폭설로 인해 도로가 통제된 곳이 많았다. 그리고 보육원 역시 도로 통제로 인해 다들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당직이었던 사람들은 집에도 못가고 강제로 연속 당직을 서야할 판이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보육교사의 물음에 패딩은 고개를 저었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걸어서 이곳까지 온 마당이었다. 스스로도 이렇게 눈 때문에 고립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던 것 같으니 보육교사로서는 딱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다행히도 우리 식당은 정상 영업 중이니까, 가서 식사 같이 해요. 애들이 어떤 음식을 먹는지도 알아두면 나중에라도 걱정이 덜할 거예요.” 알고 싶지 않았지만, 당장은 배가 고픈 패딩이었다. 부스스한 옷차림새라도 대충 정리하고 일어서니, 보육교사가 앞장서서 안내했다. “아, 그런데 부모님은 여기 온 거 아세요?” “…아니요.”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가출했어요.” 속으로 가지가지 한다, 고 중얼거리면서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아이들을 보면 답답하면서도 화가 나는 게 사실이었다. 이 어린 여자아이는 그저 빨리 이 곳을 벗어나고만 싶어 했다. 아이에 대한 기억과 사실은 모두 지워버리고 싶을 뿐이니, 당연 모성애 같은 건 찾아보려야 찾을 수 없었다. 실제로 이 일을 하면서 알게 되는 것들 중 하나가 바로 모성애에 대한 진실이었다. 흔히들 모성애는 당연히 가지고 있는 본능 같은 것이라고 생각들 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았다. 보육원 앞에 아이를 던져두고 가는 사람은 그나마 양반이었다. 갓 태어난 아이를 화장실에 버려두고 떠나는 사람들도 있는데, 신고를 받고 찾아간 복지사가 아이를 데리고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오기 전에 병원에 들러서 몇 일간 관리를 받은 뒤 보육원으로 오게 된다. 그렇게 모성애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맞닥뜨리게 되면, 같은 여자로서도 자괴감이 들고 아기에게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저 아이들은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꼬물거리는 손가락이 허공을 휘저어도 잡아줄 사람이 없다. “선생님 오셨어요?” “예, 날씨가 이래서 어떡한대요?” 보육교사는 식당 아주머니들의 인사에 걱정 섞인 말로 화답했다. 이분들은 보통 아침식사 준비를 위해 새벽에 출근한다. 그래서 오늘도 일찍 출근했는데, 당시에는 이 정도로 눈이 내리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모양새로 보건대, 보육원 안에 방을 마련해줘야 할지도 몰랐다. “사정이 안 좋으면 안에 방을 준비할 테니까, 거기서 주무실 수 있게 해드릴게요.” “그래야 겠네요. 아까도 보니까, 거의 무릎까지 오더만요?” 보육교사는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하고 패딩을 식탁으로 안내했다. “여기 계세요. 일단 손님이니까 제가 대접해드릴게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리니, 패딩은 따라가야 할지 말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서 보육교사의 뒤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결국 자리에 앉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낯선 식당의 실내를 구경했다. “선생님, 고생이 많으시네요.” “뭘요. 다 제 일이니까요.” 알아도 모른 척, 모르면 모른 척 하는 게 속 깊은 어른의 바른 자세였다. 척 봐도 스토리가 만들어지지만 애써 모른 척 하며 식판에 가득 음식을 담아주는 식당 아주머니에게 보육교사는 고맙다며 인사하고는 몸을 돌렸다. 식판을 내밀자 패딩이 얼른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맛은 괜찮을 거예요. 여기 아주머니들 솜씨가 꽤 좋기로 소문났으니까.”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이들 입맛을 기가 막히게 잘 아시는 분들이에요.” 패딩은 말없이 식판을 내려놓고는 눈치를 보며 수저를 들었다. “먼저 들어요.” 상담을 하느라 식사 시간을 놓친 것은 보육교사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자기 몫의 식판을 받아들고 돌아왔다. “먹으면서 들어요.” 멈칫하던 수저가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혼모라고 해서 잘못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죄인처럼 굴 필요는 없어요. 네가 낳았으니까 무조건 네가 책임져야 돼, 라는 건 없어요. 오히려 많은 어려움이 있을 테니 우리가 도와주겠다, 라는 게 우리들의 입장이에요. …밥만 먹지 마시고 반찬도 같이 드세요.” 느리게 움직이면서도 멈추지 않는 수저였다. “지금 아가씨가 많이 힘들다는 거 잘 알아요. 하지만 본인의 미래만큼 당신이 낳은 아기의 미래도 소중하다는 걸 기억해주었으면 해요. 그 아기도 하나의 생명으로서 비록 축복을 받지 못하고 태어났지만, 앞으로의 인생마저 축복받지 못하는 인생이라고 한다면 너무 불쌍하잖아요.” 패딩은 코를 훌쩍였다. “이후에라도 부디 한 번쯤은 아기 생각을 한 번 해보시길 바랄게요. 당신의 배 속에서 오래도록 온기를 받으며 자랐던 아이를요.” 수저가 바닥에 떨어지며 청명한 소리가 울렸다. “그만…하세요.” 보육교사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꺼내서 예민한 감정을 건드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눈보라치는 겨울 날, 굳이 여기까지 와서 아이를 맡기려(?) 했던 여자의 마음이 그리 나쁘지 않다 여겨 끝내 뱉어내고 만 이야기였는데, 좋지 않았나보다. “전 못해요.” 울먹이는 여자의 목소리가 밥알과 뒤섞여 나왔다. 후드득 떨어지는 밥알들 속에 여자의 진심이 섞였다. “저도 행복해지고 싶다고요.” “저 아이랑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가 있어요.” 그러니 저 아이를 버리지 마세요, 라는 말은 패딩의 외침에 싹뚝 잘렸다. “저 아이는 제가 원했던 아이가 아니에요! 결코 원하지 않았던 아이라고요! 보기 싫다고요! 꼴도 보기 싫다고요!” 보육교사는 슬쩍 식당 안쪽을 바라보았다. 아주머니들이 허둥대며 모습을 감췄다. **** “석고야, 나 콧물.” 단유가 명수를 돌아보았다. 침대 위에 걸터앉은 명수가 고개만 앞으로 쭉 내밀고 있었는데 코에서 하얀 점액질이 주욱 늘어지며 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닦아.” “흐흐, 신기하지?” 퍽이나. 단유는 피식 웃으며, 책상 위에 있는 휴지를 집어서 건넸다. 명수는 휴지를 건네받는 대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머리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리는 콧물의 움직임이 재밌나보다. 명수는 바보 같은 웃음을 지으면서 손가락을 허공에 찔러댔다. “그만하고 닦아.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명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단유에게 슬슬 다가왔다. 단유는 휴지를 손에 돌돌 말아 뜯어낸 뒤, 명수의 코를 닦아 주었다. “누워 있어. 따뜻한 물이라도 갖다 줄게.” 명수는 다시 코를 내밀고 가만히 콧물이 흘러내리길 기다렸다. 말리고자시고 할 것도 없이 금세 흘러내리는 콧물이었다. 단유는 복도로 나가서 정수기를 찾았다. 그런데 정수기에 물이 떨어졌는지, 아니면 물이 나오는 중간 통로가 막혔는지 나오질 않았다. 깜빡거리는 신호가 보이지만, 무슨 뜻인지 모르는 단유는 짧은 한 숨과 함께 몸을 돌렸다. 방으로 돌아가려던 단유는, 생각을 고쳐 계단을 내려갔다. 식당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서 방에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본관 뒷문으로 나온 단유는 머리 위로 손우산을 만들고는 식당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작은 주전자에 물을 담아서 오면 충분하리라. 뽀드득거리는 소리를 즐기면서 식당에 들어간 단유는 식탁 하나를 두고 마주한 패딩과 보육교사를 볼 수 있었다. “저 아이는 제가 원했던 아이가 아니라고요!” 패딩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꼴도 보기 싫다고요!” 열린 문으로 눈과 바람이 쓸려 들어왔다. 식당 안으로 들이친 냉기에 고개를 돌리는 두 사람과 시선이 마주친 단유. ―쾅 문이 닫히면서 식당 안에 작은 울림이 퍼졌다. 검은 패딩의 여자는 단유를 바라보며 당황한 얼굴을 했다. 자신의 비밀이 탄로 났다는 것에 대한 당황과 진심을 들켰다는 부끄러움이 섞여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단유야, 무슨 일이니?” 보육교사 역시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사정을 물었다. “명수한테 줄 뜨거운 물을 얻으려고요.” “정수기는?” “물이 안 나와요. 고장났나봐요.” 보육교사는 짧게 숨을 토해내며 일어섰다. “아가씨, 다 드셨으면 자릴 옮기실래요? 상담실로 가시는 게 좋겠는데.” 패딩은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단유야, 여기.” 어느새 식당 아주머니가 주전자를 들고 달려왔다. 알아도 모른 척, 몰라도 모른 척 해야 하지만, 이 상황에서는 얼른 준비해주는 게 좋겠다는 눈치 빠른 어른의 바람직한 자세였다. 하지만 단유는 아니었다.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식당 아주머니가 뒤를 돌아보았다. 보육교사도 괜한 사실을 들켰다는 생각에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굳이 알아야 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 “단유야, 넌 몰라도 돼. 이건 누나와 선생님의 비밀 이야기야.” “…그렇군요.” 묘하게 뜸을 들이다 대답하는 단유의 반응에 보육교사가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비밀’이라는 단어와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진심에서 한 가지 사실을 추론해낼 수 있었을 뿐이었다. “명수가 그랬어요. 자긴 엄마가 보고 싶지 않다고요.” 패딩이 움찔했다. “엄마가 자길 보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 자기도 엄마가 보고 싶지 않다고요.” “다, 단유야.” “괜찮아요. 명수도 아무렇지 않다고 했어요. 명수도 이제 다 컸는걸요.” 명수가 다 컸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보육교사가 의문을 품고 생각에 잠긴 사이에 단유가 말을 이었다. “저나 명수는 이제 부모님한테 기대지 않아도 잘 클 수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슬퍼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 아이도 씩씩하게 자랄 거예요.” 단유는 몸을 돌렸다. 다시 문을 열자 찬바람이 식당 안을 파고들었다. 다시 문이 닫히고 작은 울림이 퍼져나갔지만, 식당 안의 어른들 가슴 속에 남긴 냉기는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 식당을 빠져나온 단유는 식당 처마 아래에서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중충한 하늘과 그 하늘을 뒤덮을 만큼 하얀 눈보라가 시야에 가득했다. 해나 구름, 산이나 나무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모든 것들을 하얀 눈이 뒤덮어 버렸다. “하아.” 단유의 입에서도 하얀 김이 모락모락 뿜어지더니 금방 눈바람에 흩어지며 사라졌다. 단유의 가족도 그렇게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과연 어떤 눈바람이 불었기에 그렇게 사라졌을까? 그런데 지금 단유의 마음속에는 사라진 입김을 그리워하는 마음 따위 없었다. 그냥 사라졌다는 사실만 남았을 뿐. “나도 씩씩하게 자랄게요. 엄마.” 조용히 중얼거린 단유는 본관으로 다시 성큼 걸음을 옮겼다. 단유의 가슴 속에도 몰아친 눈보라가 그 날의 푸른 수목들과 노을 빛 마을의 풍경을 지워버렸다. 한편, 식당 안에서는 패딩이 머리를 붙잡고 오열을 하고 있었다. 식당아주머니는 어느새 모습을 감췄고, 보육교사는 다시 자리에 앉아서 패딩의 곁을 지켰다. 사실은 보육교사도 눈물이 맺혔는데, 억지로 참고 있었다. 천방지축인 명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고, 단유 역시 의젓하고 과묵한데다 영리한 아이라서 대견스럽게만 생각했었는데 그 아이들 역시 가슴에 큰 상처를 감추고 살고 있음을 재차 느끼게 되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패딩의 울음소리가 조금씩 잦아들 때 쯤, 보육교사가 입을 열었다. “저기요.” 보육교사가 나직이 불렀다. “아까 그 아이가 한 말은 아가씨를 위로하는 말이었다는 거 아시죠? 결코 아가씨를 비하하려거나 모욕하려는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혹시라도 아가씨가 오해할까봐. “흑, 아, 알아요. 그냥 너무 미안하고 죄송해서요.” 다시 울음을 터뜨리며 흐느끼기 시작하는 아가씨였다. “불쌍한 아이들이에요. 저도 까맣게 잊고 지냈어요. 그런데 어느새 저 아이, 아니 저 아이들도 씩씩하게 자랐네요. 아마, 아가씨 아기도 그렇게 자랄 거예요.” 미혼모들은 새출발을 원한다. 하지만 아기들은 발목을 붙잡는다. 입양특례법에 의해 미혼모들은 직접 아기들의 출생신고를 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하는 미혼모들은 출생신고를 하지 않는다. 패딩의 여자도 새 출발을 원했고, 하지만 아기의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고, 되도록 아기를 보지 않고 살아가길 원했다. 하지만 그 아기가 커서 자신의 나이가 됐을 때, 아니 방금 보았던 아이의 나이만큼 됐을 때, 그 아이가 ‘엄마가 자기를 보고 싶지 않을까봐’ 라고 이야기를 한다면 굉장히 슬플 것 같았다. 아니, 지금 당장 그 마음이 너무 아릿하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껴졌다. “흑흑.” 자신은 엄마가 너무, 너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 [154] 동(4) 단유가 보육원 본관으로 들어올 때, 생활지도원 한 분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계단을 뛰어내려왔다. “단유야, 양 선생님 보지 못했니?” 생활지도원은 보육교사를 찾고 있었다. 단유가 식당에 있음을 알려주자, 황급히 식당으로 향하는 생활지도원이었다. 단유는 그녀의 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방으로 돌아갔다. “선생님! 큰일 났어요.” 식당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 생활지도원은 보육교사를 발견하자, 식당이 떠나가라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완전히 침착성을 잃은 모습에 보육교사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았다. “무슨 일인가요?” “아, 아기가 숨을 쉬지 않아요!” 보육교사가 벌떡 일어났다. 패딩은 무슨 일인지 몰라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뒤늦게 의미를 알아채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왜요?” “모르겠어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얼굴로 울먹거리는 생활지도원의 모습에 보육교사는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 급히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 뒤를 생활지도원이 뒤쫓으면서 식당에는 패딩만 남았다. 우물쭈물 대다가 낙오하고 만 패딩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넓은 식당 한가운데서 우두커니 서서 식당 문만을 바라보았다. **** “마셔. 이것도 먹고.” 단유가 물 컵에 따뜻한 물을 따르고 약과 함께 명수에게 건넸다. 명수는 군말 없이 단유의 지시에 따랐다. “아직도 눈 많이 내려?” 명수의 물음에 단유는 창밖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응. 앞이 거의 안 보일 정도야.” “아쉽다.” 명수는 아까 나눴던 대화를 거의 잊은 것처럼 굴었다. 단유 역시 굳이 티를 낼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말은 하지 않았지만, 조금 전에 봤던 패딩의 모습이 생각나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어떤 어머니는 병실에 누운 딸의 모습을 보며 오열을 하고, 어떤 어머니는 갓 태어난 아기가 꼴도 보기 싫다며 소리를 질렀다. 어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쉴 새 없이 학교를 들락날락 거리는데, 어떤 어머니는 아들의 교육에 무심하였던지 가르쳐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난 도서관 갈 건데. 같이 갈래?” “그냥 잘래. 책보면 멀미할 거 같아.” 명수는 침대 위에서 놀란 공벌레처럼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을 돌돌 말아서 뒹굴 거렸다. 아무래도 혼자 방에 있으면, 심심해서라도 금방 잠이 들겠지. 단유는 피식 웃으면서 방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아래층이 소란스러웠다. 반쯤 내려가다 보니 복도를 뛰어가는 보육교사와 생활지도원이 보였다. 보육교사가 영아실에 들어갔을 때, 다른 생활지도원 한 사람이 아기 곁에서 아이의 손과 발을 주무르고 있었다. “선생님!” 생활지도원이 보육교사의 얼굴을 보더니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경험이 많지 않은 지도원이어서 이런 경우를 자주 접하지 못했던 탓도 있으리라. 보육교사가 다가가 아이를 살피니, 다행히 숨은 쉬고 있는 듯 했다. “CPR(응급 소생술)을 계속 했더니, 아이 숨은 돌아온 것 같아요. 그런데 열이 너무 심해요.” 생활지도원의 브리핑을 들으며 보육교사는 전자 체온계로 다시 한 번 아이의 열을 쟀다. 체온계의 파란 디스플레이 화면에 39.3이라는 숫자가 떴다. “119는요?” “제가 연락을 했어요.” 식당으로 데리러 왔었던 생활 지도원이 먼저 119에 연락을 했었나보다. “다시 연락해서, 아이가 얼마나 숨을 못 쉬고 있었는지, 지금 열이 심하다는 이야기까지 다시 해주시고 언제까지 올 수 있는지 물어보세요.” “예, 선생님.” 보육교사는 다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생활 지도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저기 캐비닛 안에 해열제 있을 거예요. 라벨 확인해서 가져오세요.” “예, 선생님.” 두 사람은 서둘러 지시를 이행했다. 그 사이 보육교사는 다른 문제는 없는지 아이를 지켜보며, 바짝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아.” 식당에 있을 패딩이 생각났다. 혹시 여기에 오기 전에 아이에게 다른 증상이 없었는지 묻는다는 걸 깜박했다. 추운 날씨에 오래 노출되어 있었다는 사실에만 집중한 탓에 먹을 것을 주고 따뜻한 곳에서 몸을 녹이면 괜찮겠거니 했는데, 생각보다 아이 몸에 문제가 많았던 것일지도 몰랐다. “선생님.” 영아실 앞에서 단유가 서 있었다. “니가 어쩐 일이야? 아까 안 갔어?” “방에 갔다가 도서관 가는 길이었어요.” 중앙계단에서 영아실을 지나야 도서관으로 갈 수 있는 구조였기에, 단유의 말이 사실이겠지만 오늘 하루 종일 지나치게 자주 만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별로 좋지 않은 상황에서 계속. “그럼 온 김에 부탁 좀 하자. 식당가서 이 아기 엄마 좀 데리고 올래?” “예.” 단유는 몸을 돌렸다. 보육교사는 다시 아기를 살폈다. 뜨거운 입김을 토해내는 아이의 호흡이 약해지는 느낌이었다. “선생님, 여기 해열제요.” 보육교사는 아이를 생활지도원 품에 안겨놓고, 작은 유아용 숟가락에 시럽형 해열제를 부어서 아기에게 떠 먹였다. 작은 입으로 들어오는 해열제를 제대로 삼키지 못해, 입술 양쪽으로 흘러내리는 양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꾸역꾸역 먹인 뒤,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겼다. 그리고 얇은 담요로 아기를 감싼 뒤, 창문 곁으로 갔다. “선생님, 다른 애들은 모두 옆방으로 옮기시고요, 여기 창문 좀 열어봐요.” 이윽고 열린 창문으로 눈과 바람이 쏟아졌다. 보육교사는 등지고 서서 아이가 직접 눈을 맞지 않도록 하면서 냉기에 자연스럽게 노출될 수 있도록 했다. 대신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이미 감기에 걸렸을 수도 있지만 더 심해지지 않도록―몸에서 나는 땀을 계속 닦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생활지도원은 곁에 서서 얇은 천으로 아이의 몸을 연신 닦아냈지만, 아이는 울 생각도 없는지 숨만 토해내고 있었다. 차라리 울었으면 좋으련만. “선생님, 119가 오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거래요. 눈 때문에.” 미치겠네. 보육교사는 생전 안하는 육두문자를 입 안에서 굴렸다. **** 단유는 식당의 문을 열었다. 철 경첩이 삐걱거리며 요란한 소음을 냈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는 패딩이었다. “선생님이 와보시래요.” “…왜?” “이유는 말씀해주시지 않았지만, 아마 아기 때문인 것 같아요.” 패딩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죽었어?” 죽기를 바라는 모습은 아닌 것 같았다. 패딩은 그저 겁에 질려 있었다. “…저도 잠시 본 터라 정확히는 모르지만, 죽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패딩은 의자에 주저앉더니 몸을 숙였다. “안 가세요?” “…안 가면 안 될까?” 이런 게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었다. 왜 안 가고 싶을까? 자신의 아기가 죽는다는데. 아까 말한 것처럼 보기 싫다는 것일까? 그런데 그 아기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보기 싫다는 걸까? “왜요?” 하지만 패딩은 아이를 보기가 무서웠다. 만약 아기가 죽는다면 그것은 모두 자기 탓일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을 살인자로 몰지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데리고 오지 않는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거기서…. 순간 자기가 품은 생각에 놀란 패딩이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두 팔로 자기 몸을 감싸며 눈물을 보이기 시작하는 여자. “…난 최악이야. 아기를 볼 자격이 없어.” 단유는 이 여자를 설득할 자신도 없었고, 설득할 마음도 없었다. 단지 선생님이 데리고 오라고 부탁을 했기에, 그 심부름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저래서는 쉽게 따라올 것 같지 않았다. “일단 가요. 선생님이 급한 일로 찾으시는 것 같으니까.” “싫어. 안 가.” 패딩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죽지 않았다면 더더욱 볼 낯이 없다. 죽어가는 아이를 어떻게 본단 말인가. 그것도 ‘자신’의 아기인데. “아기 엄마들은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요?” “응?” “자기 아기를 보기 싫어하냐구요.” 패딩은 뜬금없는 단유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저 아이도 이 보육원에 사는 아이다. 그러니 분명 부모로 버림받았을 테지. “난, 아직 엄마가 될 준비가 안 됐어.” 엄마가 되는데도 준비가 필요하다, 는 패딩의 말에 단유는 어쩌면, 이라고 수긍했다. 뭐가 되든지 준비는 필요할 테니까. 다만 저런 태도는 이해가 안 됐다. “아가씨, 일단 가 봐요.” 어느새 식당 아주머니가 나와서 패딩의 곁에 섰다. 짧고 두툼한 손으로 패딩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두드리면서 말을 건넸다. “아가씨 마음을 다는 모르겠지만, 지금 선생님이 보자고 하는 건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리고 여기 계속 이러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 눈에도 띄니까, 일단 다른 곳으로 가시는 게 좋아요.” 여기서도 내쫓기는 신세구나. 집에서 내쫓기고, 자취방에서 내쫓기고, 남자친구한테 내쫓기고, 친구들한테도 내쫓기더니 보육원에서도 내쫓기는구나. 하지만 다른 사람 눈에 띈다는 말에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느릿하게 일어선 패딩은 어기적거리며 문 앞에서 기다리는 단유에게 걸어갔다. 가까이서 본 패딩의 얼굴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눈물 콧물에 빗물까지 뒤섞여서 얼굴이 엉망이었다. 갸름한 콧대와 얇은 입술은 핏기가 없고 푸석해보였다. “따라오세요.” 단유는 패딩을 데리고 본관으로 향했다. 다시 눈우산을 만들어 본관 뒷문으로 뛰어간 단유가 어깨에 붙은 눈을 털어낼 때, 패딩이 물었다. “너도 엄마가… 없어?” “예.”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단유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예전엔 엄마를 찾아다녔어요. 날 두고 어딜 가셨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그냥 그래요. 어쩌면 나중에 우연히 만날 수도 있겠다는 정도예요.” “엄마, 보고 싶지 않아?” 계단을 오르며 단유는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했다. “솔직히 보고 싶긴 해요. 그런데 찾으려고 애쓰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 시간에 제 힘을 기르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나도 그랬어.” 단유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고개 숙인 패딩이 웅얼거리듯 낮은 소리로 이야기했다. “난 엄마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거든. 엄마 밑에서 잔소리 들으며 시키는 대로 사는 것 보단, 내 힘으로, 내 의지로 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집을 나온 거고.” “저랑은 다른 것 같은데요?” “엄마가 보고 싶지만, 굳이 찾아가서 볼 정도는 아니란 이야기였어.” 자기보다 나이든 사람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뭔가 이상했다. 마치 자기가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단유가 보기에 저 패딩 속의 여자의 목소리에는 그녀가 말한 것과는 반대로 후회한다는 심정이 가득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상황을 원했던 건 아냐.” 단유는 다시 한 층 더 올라갔다. 그리고 영아실로 여자를 안내했다. “선생님.” 영아실은 그야말로 폭풍 전야의 상태였다. 선생님들은 전전긍긍하는 얼굴로 다들 바쁘게 움직이고는 있는데, 딱히 누구도 입을 열고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기묘한 침묵 속에서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 소리만이 영아실에 가득했다. “아가씨! 이 아이, 여기 오기 전에 뭐 먹었어요?” 보육교사가 급하게 물었다. 단유 뒤에 섰던 패딩이 꼼짝도 못하고 서서 바라보다가 질문에 황급히 대답했다. “저기, 없어요.” “네?” “그냥 물만 줬어요.” 보육교사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패딩을 바라보았다. “언제요?” “…집에서 출발할 때요.” “그게 정확히 언젠데요?” “새벽 5시쯤이요.” “젖은 언제 마지막으로 줬어요?” “아직 …안줬어요.” 보육교사는 다시 입안에서 육두문자를 굴렸다. 저 여자는 분명히 정신이 없거나, 철이 없거나, 심성이 고약하거나, 미쳤거나 아니면 전부 다일 것이다. 영양실조, 저체온, 감기 등 생각나는 질병만 해도 여러 가지였고 그 모든 게 현재 이 아이에게 모두 치명적이리라.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우유를 줬으니, 몸 안의 수분도 많이 뺏겼을 확률이 높다. “선생님, 119에서 연락 없었어요?” “예.” 생활지도원이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하던 그 순간, 들고 있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 쪽으로 몰렸다. ======================================= [155] 동(5) “뭐라고요?” 생활지도원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선생님! 119차가 오기 힘들어서 지금 응급구조대원 몇몇이 뛰어오는 중이라는데요?” “사람만 오면 어떡해? 얘는 지금 병원엘 가야 해!” “길을 뚫는 중이긴 한데,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시간이 걸린다고….” 자기가 잘못한 냥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보고를 마치는 생활지도원에게 굳이 화풀이를 할 순 없었다. 보육교사는 발만 동동 구르며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생각했지만, 당장 생각이 나질 않았다. “선생님, 아기가!” 급하게 고개를 숙이고 바라보니, 아이의 호흡이 거의 없었다. “창문 닫아요!” 보육교사는 급히 아이를 매트 위에 올려놓고, 두 개의 손가락으로 흉골 아래쪽을 조심스럽게 압박했다. 패딩은 우두커니 서서 입을 벌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잠도 못 자게 울어대서 귀찮다고 생각했던 아이였는데, 지금 그 아이가 울음도 터뜨리지 못하고 죽음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텅 비는 느낌이었다. 몸에 힘이 빠지는 느낌으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을 때도, 패딩은 앞에 서 있던 아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단유는 그 길로 곧장 보육원 입구로 갔다.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고, 과연 이 날씨를 뚫고 올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호흡을 끌었다가 천천히 내뱉으니 입에서 길고 하얀 입김이 길게 늘어지며 뿜어지다가 천천히 허공에서 흩어졌다. 지금 단유는 굉장히 복잡한 마음이었다. 저 아이를 살리고 싶다는 마음은 있지만, 당장 저 아이를 살릴 방법이 없었다. 지난 번 혜린의 경우와 같이 아카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당시 사용했던 아카넬이 마지막 아카넬이었음을 확인했었다. 결국 방법은 그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는 것이었지만, 저 아이에게 무리해서 다가가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게다가 단유는 병원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그리고 저 아이 때문에 자신의 비밀스런 힘이 밝혀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이기적이란 걸까?’ 굳이 무리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만, 그렇게 해야 되나, 라고 자문한다면 그렇게까지 할 정도는 아니라는 답이 나왔다. 자신의 솔직한 마음이 어쩐지 비도덕적인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 아기는 만난 지 이제 겨우 3시간 정도? 게다가 얼굴만 겨우 2번 본 정돈데? 하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려는 자신의 마음도 진심이었다. 자신이 여러 번 억울하게 죽음의 위기에 처했었고, 그 때마다 타인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자신을 희생해서든, 혹은 희생하려는 마음을 품어서든. 처음 본 사람, 몇 번 본 적 없었던 사람, 오래 함께 했던 사람 모두가 그러했듯이, 자신도 그 행동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그랬더니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후우.” 단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바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명수는 꿀맛 나는 잠을 자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희미한 웃음이 지어졌다. **** “선배, 우리끼리 이렇게 가도 될까요?” 응급키트와 몇 가지 기구들을 짊어진 응급구조대원 한 명이 헉헉거리면서 앞서 걷던 대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앞이 잘 보이지 않고 바람도 심해서 자칫하면 앞의 사람과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대화로 서로간의 위치를 확인하며 걷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에베레스트를 등정하는 사람들에게나 통용될 이야기. 여기서 그러는 것은 솔직히 오버였다. “시끄러워. 힘 빠져. 그냥 걷기나 해.” 쿨한 선배는 쿨하게 걸음을 옮겼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최선을 다한다. 최선을 다한 뒤의 결과에는 승복한다. 그것이 응급구조대의 역할이고 업무신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힘든 사람들을 모두 구조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선배는 오랜 경험을 통해 몸으로 체득했다. “이렇게 가다가는 2시간도 넘게 걸리겠는데요?” 거의 40도에 육박할 정도로 고열을 앓고 있는 아이를 의사도 아닌 구조대가 가서 무엇을 하겠는가. 다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고자 조금이라도 빨리 달려갈 뿐이었다. 오후 한 때 약해지던 눈발은 저녁이 가까워오면서 다시 거세지고 있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그냥 지나쳐도 모를 것 같은데요?” 후배가 다시 떠드는데 솔직히 신경이 쓰였다. 귀찮거나 짜증이 난다는 것이 아니라, 후배가 걱정하는 부분을 선배 역시 신경 쓴다는 의미였다. “그러니까 너무 아래만 보지 말고, 주위를 둘러보면서 가야지!” 주위를 둘러본들 보이는 것은 없지만 말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이러다 저희가 조난당하는 거 아닙니까?” 아까부터 후배는 여기가 K2 등정길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도시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지만, 대낮에 국도 한 가운데서 조난당한다는 이야기는 신문 한 편에도 오르지 못할 저질 개그 감이었다. “어?” “뭡니까?” 선배가 갑자기 맥 빠진 소리를 내자, 후배가 얼른 물었다. “그림자 같은 게 보였던 거 같아서.” 후배는 실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게 없었다. 세찬 눈바람에 제대로 앞을 보기 힘들었다. “눈에 뭐라도 들어가신 것 아닙니까?” 하지만 선배는 분명히 자기 눈으로 봤음을 확신했다. 걸음을 멈추고 상체 포켓에 꽂혀있던 손전등을 꺼내 앞을 비추었다. 하지만 제대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야, 뭐 보이는 것 없어?” 선배가 물었다. 하지만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재차 물었지만 여전히 대답이 들리지 않자, 선배는 손전등을 뒤로 돌렸다. 하지만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귀가 따갑게 떠들면서 자기 존재를 확인시켜 주었던 후배가 사라졌다. “장동원! 장동원! 대답해!” 목청을 높여 불러보아도 대답이 없었다. 갑자기 후배가 말한 대로 조난을 당하는 건가, 싶어 겁이 덜컥 났다. 선배는 앞으로 나가지도 뒤로 물러나지도 못하고 주위를 둘러보기 바빴다. 그런데 한 순간 어지럼증이 생겼다. 생겼다기 보다는 ‘느꼈다’라고 해야 하나? ‘뭐지?’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두어 차례 어지럼증이 동반되었지만 그 외의 별다른 사항은 느끼지 못했다. “선배님! 선배!” “동원이냐?” 갑자기 낙오한 줄 알았던 후배의 목소리에 선배가 주위를 살피니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후배가 무릎을 높이 올리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선배! 어디 가셨던 겁니까?” “무슨 소리야?” “선배가 갑자기 사라지셔서 한 참을 찾았단 말입니다.” 선배는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못했다. 사라진 게 누군데…. “어? 선배. 저기 보육원 아닙니까?” 등 뒤를 가리키는 후배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흐릿하게나마 건물의 외형이 보였고, 그 앞으로 보육원 정문이 보였다. “언제 여기까지 왔던 거지?” 후배의 중얼거림에 괜히 소름이 돋은 선배였다. **** 응급구조대는 급히 움직여서 보육원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를 안고 발을 동동대던 보육교사와 생활지도원의 얼굴이 순간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환해졌다. “일단 여기로!” 응급구조대원 둘은 급히 아이 앞으로 안내되어 아이를 보기 시작했다. 후배는 전화를 들어 병원의 의사에게 상황을 보고하며 긴급히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열은 39.8도, 호흡은 미약합니다.” 그렇게 응급구조대원 둘이 아이를 돌보는 사이, 패딩의 뒤로 단유가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패딩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단유가 바닥을 가리키며 물었다. “거기 차가워요. 들어가서 기다리세요.” 패딩은 얼이 빠져 자기가 주저앉아 있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로 한참동안 앉아 있었다. 힘주어 일어나보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단유가 패딩의 소매를 잡고 힘을 주니, 엉거주춤하나마 일어설 수 있었다. 어린 꼬마 주제에 힘이 세다, 고 잠시 생각하던 패딩이 후들거리는 무릎을 붙잡고 뒷걸음질로 복도 벽에 붙어 섰다. “안 들어가세요?” “들어갈 자격이 없어. 난.” “부모의 자격, 같은 건가요?” 패딩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유는 영아실을 쳐다보며 물었다. “저 아이는 어떤 아이가 될까요?” 패딩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순간 저 아이의 미래에 자신의 몫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때, 패딩은 책임감을 느꼈다. 또한 동시에 그 책임감을 벗어던지고 싶다는 충동도 느꼈다. 그리고 이런 부담스러운 질문을 하는 아이와 함께 있다는 것이 싫어졌다. 도대체 왜 곁에 서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고, 왜 내가 대화를 해야 하는 거지? 괜히 억울한 마음, 분노의 마음이 들어서 소년을 노려보는데 눈이 마주쳤다. 깊고 검은 눈동자가 자신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이름이 뭐예요?” “…유라.” “유라 누나는 저 아이가 어떤 아이로 자라길 바라죠?” “생각하고 싶지 않아.” 단유는 젖은 앞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유라를 보며 말했다. “그래요. 생각하지 마세요. 참견도 하지 마시고요. 저 아이가 저 아이만의 인생을 살 수 있게끔 해주세요.” 흠칫 놀란 유라는 저도 모르게 손을 떨었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 한 사람의 삶이 흔들리는 것을 더는 두고 보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부디 저 아이가 자기의 삶을 살 수 있게 내버려두세요. 그게 서로에게 좋겠죠?” 부모라도, 한 사람의 인생에 해가 될 수 있다면, 배제되는 것이 옳다. 특히 아이를 저렇게 방치하고 생명의 위기까지 오게끔 만든다면, 그런 부모는 저 아이에게 필요하지 않다. 단유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세상, 이 사회는 부모가 없어도 잘 클 수 있게 돕는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다. 자기도 그렇고, 명수도 그렇다. 그러니 다른 아이들도 그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서 잘 자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돕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있다. 그러니 차라리 저대로 혼자 살아가게끔 놔두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물론, 엄마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여전하다면 말이죠.” 부모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면. 그래서 어려운 것이리라.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부모가 되기 위한 준비도 필요할 것이고, 부모가 된 뒤에도 그녀와 다르게 많은 책임을 스스로 지고 행동해야 하리라. 준비와 책임을 각오한 사람만이 부모로서 마땅하리라. “너, 넌 어떻게….” 유라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뭔가 항변하려 했지만, 자신을 직시하는 저 눈을 보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너무 비참하고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단유는 몸을 돌렸다. 두터운 잠바를 입고 있던 단유에게서 겨울바람의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 구급차가 온 것은 세 시간이 지난 뒤였다. 시에서 지원한 제설차와 함께 길을 뚫으며 달린 구급차가 큰 길 쪽에 도착한 후, 응급구조대원 두 명이 아이를 안고 구급차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요란했던, 그러나 다른 사람 모르게 치러졌던 영아실 내의 전쟁같은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패딩은 이후 경찰에게 신병을 구속당한 뒤 경찰서로 향했다. 물론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의 일이었다. 사유는 영아사망의 사유 중 하나로 의심되는 유아 유기 부분을 조사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단유나 보육교사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보육원의 사람들은 그 뒤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오직 단 한 사람, 보육원 원장만이 사후에 보고를 받은 뒤, 경찰서로부터 정보 확인을 요청받으면서 뒷일까지 들을 수 있었지만, 원장은 구태여 그 사실을 보육 교사나 지도원들에게 알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게다가 굳이 알리지 않더라도, 당시의 상황 이후 그 아기가 당 보육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선생님들은 어느 정도 눈치를 챌 수 있었다. 하지만 서로 기분 나빠질 이야기를 괜히 입에 올려 구설수를 만들 일은 서로가 피했기에, 그 일은 사람들의 기억 저편으로 밀려났다. ======================================= [156] 변화(1) 이틀간의 폭설은 마치 먹다 남긴 피자처럼 운동장 구석에 꽁꽁 얼어붙은 눈더미만 남기고 사라졌다. 피자라면 차라리 씹고 뜯고 맛보면서 즐기기라도 했겠지만, 폭설에 할퀴고 상처받은 사람들에겐 지옥의 맛이었으리라. 상담실에서 보육원 전경을 바라보는 보육교사의 마음도 그러했다. 오전에는 경찰서에서 두 사람이 와서 사정청취라는 이름으로 며칠 전의 일을 묻고 갔다. 다른 사항에 대해서는 알려줄 수 없다며 입을 굳게 닫고 있더니, 아기는 그날 저녁에 사망선고가 내려졌다며 알려줬다. 차라리 아무것도 알려주지나 말 것이지. “선생님, 식사하러 가셔야죠.” 그 날, 함께했었던 생활지도원이 상담실에 목만 내밀고는 점심을 권했다. “별로 생각이 없네요. 선생님이 가셔서 아이들 좀 봐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며 보육교사는 겨울햇살에 빛나는 정문 옆 눈더미를 눈에 담았다. 당시 단유가 저쯤에서 몸을 숨기던 그 여자를 보지 않았더라면, 그래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무 쓸모도 없는 가정과 상상 속에서 무거워진 마음을 껴안아야 했던 보육교사였다. 그러던 와중에 보육원 정문으로 낡은 회색 승용차 한 대가 비실거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여긴 참 사고가 많네요. 다른 곳도 이럴까요?” “차라리 다른 곳처럼 큰 거 한 방 빵 터뜨리면 좋을 텐데, 이건 뭐 500원짜리 불꽃을 한 시간 간격으로 쏘아 올리는 거랑 뭐가 달라?” 묘하게 구체적인 선배의 묘사를 들으면서 선혜는 저 앞으로 다가온 보육원 건물을 바라보았다. “부산에는 집단 학대로 발칵 뒤집혔다는데, 그런 거에 비하면 얌전해서 좋은 거 아닌가요? 틈틈이 기사거리로 쓸 만한 거 하나씩 툭툭 던져주니까요.” “평소라면 기사거리도 안 돼. 연초(年初)다 보니까 이런 것도 기사가 되고 활자 포인트도 키울 수 있는 거지.” 후배의 말에 시니컬하게 양념칠하는 양 기자였다. 그의 말마따나 연초의 가정적 분위기에 위기감을 조성할 수 있는 기사였으니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다른 시기였다면 일반 사회면에 겨우 몇 줄이나 나올까 의심스러울 사건이기도 했다. 보육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온 두 사람은 곧장 원장실로 갔다. “아이고, 양 기자님. 오랜만입니다.” 어색한 너털웃음을 짓는 원장을 보며, 양 기자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그럼요, 잘 지냈죠.” “그거 참 다행이네요. 일이 많아서 이마가 더 넓어지시면 어떡하나, 걱정했거든요?” “네?” 양기자는 딴청을 피우며 대신 옆에 선 선혜를 소개했다. “여기는 제 후배 기자인데, 일전에 보신 적 있으시죠?” “어, 한 번 봤던 것 같기도 한데, 제가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허허.” 양기자는 입꼬리를 올렸다. “괜찮습니다. 앞으로 자주 볼 텐데요. 너도 인사해야지?” 이런 상황에 대해 미리 알려주고나 이야기를 하시던지. 당황스러운 대면 인사를 맞이한 선혜는 떨떠름한 얼굴로 선배를 바라보다 곧 표정을 고치고 인사를 했다. “반갑습니다. 인평일보 오선혜 기자라고 합니다. 일전에 이곳 보육원의 김단유라는 어린이를 취재하고자 잠시 들렀던 적이 있었죠.” “아, 그랬던 가요? 예, 반갑습니다.” ‘앞으로 자주 본다’는 양 기자의 말에 신경이 쓰였지만, 내색하지 않는 고단수 너구리 원장 되시겠다. “일단 자리에 앉죠?” 양기자는 마치 자기가 이 방의 주인인 냥, 먼저 소파에 앉아버렸다. 너구리 역시 예의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 그나마 상석을 양보해준 양 기자의 성의에 따라 얌전히 소파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작년이었던가요? 저희가 대충 운(韻)을 띄어드렸던 탓에 무사히 위기를 넘겼던 같습니다?” ‘사무국장의 일을 말하는 것인가?’ 사무국장이 위조서류를 빼돌려 넘기려던 일이 있었지만, 그 서류가 양기자에게 갔다는 것은 모르는 원장이었다. 너구리의 미간이 살짝 좁혀지는 것을 보며 속으로 함박웃음을 지은 양 기자는, 그래도 겉으로는 표시가 나지 않게끔 온화한 표정으로 원장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요즘 주정호의원을 자주 만나신다면서요?” “허, 주 의원님께서 인평시의 복지정책에 대해 관심이 많으시더군요. 여러 가지 자문을 듣고자 사회 각 분야의 분들을 모시던 와중에 기회가 닿아서 저도 가서 짧게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었죠. 하지만 자주 만나지는 못하죠. 그 분이 얼마나 바쁘신데.” 너구리가 아니라 능구렁이라도 되나보다. 매끈매끈한 변명들이 유려하게 쏟아져 나왔다. 역시 상대가 이래야 재밌지. 양 기자는 슬쩍 선혜를 바라본 뒤, 원장에게 말을 건넸다. “주정호 의원, 그 양반이랑 만나서 복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만 하셨다면 제가 올 이유는 되겠지요. 하지만 여기 후배 녀석은 사회부 기자거든요.” 너구리의 시선이 잠시 옆에 앉은 선혜에게 잠시 머물다 돌아왔다. “불과 2주 전에 여기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 관심이 많더라고요. 저희 후배가.” 원장의 얼굴이 살짝 풀렸다. 그 정도라면야. “그러시군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는데, 저희로서는 불가항력이었습니다. 당시 저희 원에서 당직을 서시던 선생님은 경력도 오래 되셔서 경험이 많으신 분이신 데도, 어쩔 수 없었다고 하시더군요. 병원에서도 그렇게 진단이 나온 것으로 알고요.” 선혜가 말을 가로챘다. “예, 그 점은 알고 있습니다. 경찰에서도 그렇게 발표를 했지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당시의 날씨와 겹쳐서 생긴 문제였다고요. 미혼모 여성의 철없고 무책임한 행동이 만들어낸 비극, 이었다죠.” 원장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그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때문에 단순히 원내의 복지가 문제가 아니라, 인평시 전체의 복지시스템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죠. 여전히 이 사회에는 미혼모가 많이 있고, 그들을 제대로 케어해줄 수 있는 시스템은 미미한 형편이니까요.” 선혜는 가방에서 수첩과 펜을 꺼냈다. “그런데, 그 날 보육원에는 원장 선생님이 자리에 안 계시더군요.” “허허, 아시다시피 그 날 눈이 많이 내려서 도로가 통제되었지요.” “오전 7시에서 8시 사이에는 도로 통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눈길이 미끄러워서 부분 통제가 되고 있었고, 위험하다는 생각에 출근을 미루다보니 그 날 보육원에 오지 못했죠.” 준비된 듯 술술 나오는 진술은 적을 가치가 없다는 듯, 선혜의 펜은 움직이지 않았다. “원장 선생님의 집에서 보육원으로 오는 길에는 부분 통제된 곳이 있었습니다.” “예, 그렇죠.” “그런데, 당시 원장 선생님은 집에 안 계셨더군요.” 너구리의 얼굴이 석고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후배와 원장의 대화를 여유롭게 들으면서 차를 마시던 양 기자가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여기서 이제 제 일이 생기네요. 원장 선생님, 그 날 저녁에 어디 계셨는지 여쭤봐도 되나요?” “…이거 좀 불쾌하군요. 양 기자님께서 언제 경찰로 전직이라도 하셨나요?” “아, 취재입니다, 취재. 강요하는 건 아니고요. 묵비권 지키신다고 해도 저야 할 말은 없죠. 대신 저는 계속 떠들어도 되죠?” 원장의 눈썹이 꿈틀거릴 때, 양 기자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느긋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폭설로 인해 보육원에 문제가 생겼던 그 날, 원장선생님께는 연락이 닿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도 지시를 못 받았던 것 같더라고요. 핸드폰이든 집 전화든 다 받지를 않으셨나 봅니다. 그래서 집에 안계시고 어딜 가셨나 궁금해서 ‘취재’를 했더니, 아니 세상에? 우연히도 주 의원님도 그 시간에 집에 안 계셨더라고요?” “…….” “그리고 세상에, 우연히도 주의원님과 원장님이 전날 만나기로 약속했었다는 것을 알아냈지 뭡니까? 저녁 약속을 말이죠.” 원장이 눈을 부릅뜨고는 양 기자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세상에, 우연히도 주의원님과 원장님이 만나기로 한 장소도 알아냈지 뭡니까? 인평시 외곽에서 오붓하게 만나기 좋은 그 장소를요.” “양 기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겁니까?” 양 기자가 피식 웃었다. “아시겠지만, 저 정치부 기자입니다. 정치 관련 소스를 찾는 하이에나가 접니다. 그런데 왜 여길 왔겠어요? 냄새가 나니까 왔죠. 그 냄새가 이야길 하더라 이겁니다. 주정호 그 양반, 구린내 풀풀 풍기는데 이제 잡아먹어야겠다, 라고.” 섬뜩한 이야기였다. 원래 양 기자란 사람이 나름 기자로서 발도 넓고 촉이 좋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파고드는 사람인 줄 몰랐다. 실제로 주정호 의원과의 만남은 별 거 아니었었다. 만날 때까지는. 만난 후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일이 커졌고, 감히 밖으로 드러낼 수 없게 되었는데, 그것을 냄새 맡고 여기로 달려온 것이다. “저는 아무것도 이야기 할 게 없습니다.” “작년에 저희가 운을 띄어준 것 기억나십니까?” “예?” 아까도 그러더니, 작년에 무슨 이야기가 있었다는 거지? 원장이 머리를 굴리는 사이, 양 기자는 원장의 뒤편 책장을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아네스 복지원이 참으로 열심히 라고 말입니다.” “그야… 어느 복지원이든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건데요.” “디딤돌.” 세상 무서울 게 뭐가 있을까 싶던 원장의 눈이 전에 없이 커지면서 양기자를 바라보았다. “나 참, 지금까지 표정 잘 지키시더니, 고작 그 한 마디에 무너지시면 어쩌십니까?” 양 기자의 너스레에도 원장의 눈은 작아질 줄 몰랐다. 덜덜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다물고 있는 것만도 힘이 다할 정도였다. “김 원장님, 지금까지는 용케 피하셨겠지만 이번에는 피하시기 어려울 겁니다.” “아니, 양 기자, 저기 잠시만…….” “욕심을 적당히 부렸어야죠. 애들 새 출발을 위해 각지에서 기부한 돈을 그렇게 삥땅치시면 어떡합니까? 복지시스템을 그리도 걱정하시는 분께서.” 원장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넓은 이마에서 흐른 땀이 턱밑으로 떨어질 때, 선혜가 쐐기를 박았다. “오늘 저녁에 보도가 나갈 거예요. 그건 이미 막을 수 없어요. 아마 세무조사랑 검찰 조사 동시에 받으실 겁니다.” “으으….” 초점을 잃은 눈과 벌렁거리는 콧구멍을 감상하던 양 기자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아마 이 이후에는 여기서 뵙는 일은 없겠죠. 아마 구치소나 다른 곳에서 뵐 지도 모르겠군요. 그만큼 저희가 확보한 자료는 확실합니다. 다만 이렇게 된 마당에 원장님이 다 안고 가시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찾아뵌 겁니다. 주정호 의원과의 일, 그냥 속 시원히 털어놓으세요. 그 분도 이 일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원장의 시선이 양 기자에게로 맞춰졌지만, 여전히 그의 머릿속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지난 날, 위기를 헤쳐 나가던 경험과 지식이 수도 없이 저장되어 있지만 현재 이 위기상황에서 해결할 방법은 모두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양 기자는 그 앞에서 하나하나 원장이 저질렀던 일들과 수집한 자료들을 대조해가며 멘탈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기 이 녹취록이라면 재단 이사장이신 구회장님도 원장님과 함께 소환당하시게 될 겁니다. 즉, 원장님의 인맥이 여기서는 아무 힘도 못 쓸 거라는 거죠.” 원장은 머리를 감싼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양 기자는 들고 있던 자료들을 내려놓고 차갑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원장님, 가시기 전에 털고 가시죠. 주정호 의원에 대해.” 원장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 “안 가?” 차로 가던 양 기자가 선혜에게 물었다. “잠깐 보고 갈 아이가 있어요.” 양 기자는 그 아이가 누군지 눈치 챘다. “그러든지. 그런데 너무 미안해 하지 마. 이런 곳에 있는 것보다 다른 곳으로 가는 게 그 아이한테 더 좋을 수 있어.” 선혜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단유의 방을 찾아갔다. “김단유.” “어? 안녕하세요.” 책상에서 책을 읽고 있던 단유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부하는 중이었니? 방해한 거야?” “아니요, 괜찮아요. 어쩐 일이세요? 혹시 또 인터뷰인가요?” “아니, 여기 원장님한테 볼 일이 있어서 왔다가 잠시 들린 거야.” 선혜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그 때랑 크게 변한 건 없구나.” “네.” 선혜는 명수의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같이 방 쓰던 친구는?” “밖에서 공차고 있을 거예요.” 선혜는 단유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혹시 말이야. 여기서 지내는 거, 좋니?”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네요.” 선혜는 머리를 긁으며 설명했다. “어쩌면 이 보육원에서 나가야 할지도 몰라서 말이야. 아니, 나가야 할 거야.” “왜요?” “보육원을 관리하시는 분들이 비리를 저질러서, 보육원 운영에 문제가 생겼거든. 아마 곧 원장을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이 잡혀 갈 거고, 그러면 보육원이 폐원될 지도 몰라.” 단유는 별 다른 감정의 동요 없이 선혜를 바라보다가 한 마디 했다. “그런 이유라면, 제가 보육원이 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아무 의미도 없지 않나요?” “그렇지. 그런데 괜히 미안해서.” “왜 기자님이 미안해요?” “내가 이 사건을 터뜨렸거든?” 단유는 잠깐 뜸을 들였다. “기자님은 이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을 하시는 분이시잖아요. 그러면 당연히 하셔야 할 일을 하신 거 아닌가요?” 선혜는 멍하니 단유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거꾸로 됐네. 난 이 일로 니가 머물 자리를 잃어버리게 될 것 같아서 위로해주려고 했는데, 도리어 니가 나를 격려해주는구나.” 딱히 그런 의도는 없었지만, 단유는 선혜의 감상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떤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폐원이 돼서 여기서 나가야 된다면 어디로 가는 건가요?” “그건 인평시 복지과에서 알아서 할 텐데, 아마 다른 복지원들로 옮겨질 거야. 전학도 해야 할지 모르고.” “그렇다면 여기 있던 아이들이 다 함께 가는 건 아니라는 건가요?” “아마도 그럴 걸?” 이 많은 인원을 한꺼번에 다 받아줄 복지원은 없을 테니까. 그 순간 단유는 선혜가 앉아 있는 침대의 주인을 떠올리고 있었다. ======================================= [157] 변화(2) 그 날 저녁, 인평일보에서 터뜨린 기사는 세간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거대 보육원의 추악한 진실』 ‘거대’한 규모의 보육원은 아니지만, 재단 규모 상 ‘거대’라고 붙여도 나쁘지 않다는 선배의 조언에 살짝 양념을 가미한 이 기사는 그대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이내 중앙지와 공중파 방송에까지 보도되게 되었다. 양 기자의 말처럼 원장을 비롯하여, 행정과장과 전 사무국장까지 줄줄이 잡혀 들어갔고, 서울의 재단이사회에도 압수수색이 들어가면서 관련 인사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 잡혀갔다. 문제는 더 커졌다. 재단내부의 비리였다면, 적당한 선에서 그칠 문제였는데 보궐선거로 당선된 주정호 의원의 이름이 거론되더니, 여의도의 금배지들과도 연계되어 있다는 후속보도가 나오면서 정재계의 파문으로 이어졌다. 횡령과 회계조작이라는 죄목이 외환거래법 위반으로 확장되고 해당 펀드를 운영하던 운용사와 관련자들에게까지 수사가 확대되면서 가히 전국을 뒤흔드는 태풍이 되었다. **** “하여튼 이 나라도 요상해. 여기저기 다 얽혀서 말이야,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생각도 못했어.” 양 기자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중얼거렸다. 그는 ‘뉴스특보’라는 활자를 크게 띄우고 진행자가 격앙된 어조로 뉴스를 보도하고 있는 한 종편 채널을 보고 있었다. “어쨌든, 잘 된 거 아닌가요? 2년인가, 3년인가 추적해오던 비리를 밝혀냈으니 말이에요.” 선혜가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뭐, 이제는 내 손을 떠났으니까. 어쨌든 너나 나나 한 건 올렸으니 올 해 스타트가 좋네. 그치?” “네, 전부 선배 덕이네요.” 겸양의 말이 아니라, 실제로 양 기자의 집념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몇 년 전, 아네스 보육원에서 벌어진 작은 사건―엄밀히 말해서 소미의 성폭행사건은 보육원 내에서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을 접하고, 이를 파고 들던 중 보육원을 관장하는 재단 내에 두 패가 나뉘어서 자리싸움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뭔가 있겠다는 촉이 발동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적확한 진실 보도가 될 때까지 자료를 모으고 모으다 마침내 터뜨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선혜가 도움이 전혀 안됐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양 기자 등에 업혀 간 것은 사실이었다. “보너스는 얼마나 나오려나?” 사실 양 기자가 깨끗하고 정의에 넘치는 사람만은 아니었다. 그간 곁에서 따라다니면서 종종 봐왔던 사실이다. 하지만 양 기자는 묘하게 기자의 명예를 중시하는 면이 있었다. 그리고 기자의 명예는 오로지 특종으로만 지켜진다고 생각하는 특이한 사고를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특종에 따른 보너스를 유난히 좋아했다. “보너스를 받아야 일이 끝난다.” 마무리는 확실하게, 라는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혜는 키보드에서 시선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지금 쓰는 이 글이 보육원 아이들, 특히 단유에게 어떤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기자로서 이 정도는 해 줘야 덜 미안해질 것 같았다. 지금 같아서는, 비록 단유의 격려가 있었다지만, 왠지 그 아이들에게서 집을 빼앗았다는 미안한 감정이 더 컸다. 선혜의 작업을 힐끔 쳐다본 양 기자는 태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거 아무 소용없다.” “뭐요? 이거요?” 선혜가 자신의 노트북 화면을 가리키자 양 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시국에 애들이 보육원 떠나서 떠도니 마니 하는 이야기가 나와 봐야 누구한테 관심이나 끌겠니? 아무 의미 없는 짓이구나.” “그럼 어떡해요?” “어떡하긴? 그게 다 인생이다, 생각하고 감수해야 하는 거지.” 양 기자의 인생론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지만, 선혜로서는 딱히 다른 방도는 생각나지 않았다. 대신 기사 제목을 바꿨다. 『길거리로 내몰린 아이들』 실제로 길거리로 내몰릴 아이들은 없지만, 이렇게 해 놓으면 관심은 끌지 않을까? **** “석고야, 우리 어떻게 되는 거야?” 명수가 밖에 나가지도 않고 방안을 서성거렸다. 아무래도 원의 분위기가 분위기다 보니, 아이들이 놀 생각도 하지 못했다. “형들이 우리 모두 뿔뿔이 흩어질 거라는데.” 단유 역시 선혜에게 들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실제로 진행중에 있었지만, 아이들만 몰랐다. 복지사가 연일 들락날락거리면서 보육교사와 함께 명단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운영주체가 붕 떠버린 보육원의 해체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넌 걱정 안 돼?” 명수는 변함없이 책을 읽고 있는 단유를 바라보며 물었다. 단유는 그제야 책에서 시선을 떼고 명수를 바라보았다. “내 걱정은 안 돼. 어딜 가든, 여기와 다를 게 없다고 하니까.” 선혜는 그렇게 설명해주었다. 조금씩 다른 점은 있겠지만, 다른 곳에 가더라도 지금과 비슷한 생활을 계속 해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어쩌면 더 좋은 데로 갈 수도 있다고 했다. “너 나랑 떨어져서도 잘 살 수 있어?” 명수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듯이 물었다. 단유는 그 묘한 표현과 뉘앙스에 난감해하면서도 명수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모르지 않았기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너랑 떨어지는 것은 반갑지 않지.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잖아.” “왜? 우리 같이 가고 싶다고 말하면 같이 보내주지 않을까?” 선혜의 말대로라면 각 보육원에서 받아줄 수 있는 인원과 나이대가 정해져 있어서, 같은 나이대의 친구라면 같이 갈 확률이 높다고 했다. 다만 확률이 높다는 것이지,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일단 결정을 두고 보자는 심리가 단유에게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명수 말대로 의사를 표시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위에서 결정한대로 따라야 한다지만, ‘의견’을 내는 걸 거부당하지 않은 상황에서 미리 거부당할 거라고 짐작하는 것은 너무 소극적인 행동이었다. 예전의 단유였다면, 그냥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따라갔겠지만, 이제는 변할 때도 되었다. “그래, 한 번 가서 이야기나 해보자.” “좋아! …그런데 누구한테 가서 이야기 해?” 단유는 그 점에서 거침이 없었다. 일단 보육원에서 상대를 할 수 있는 사람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보육교사를 만나면 되리라. “선생님.” 상담실 앞에서 단유와 명수는 노크를 하고 기다렸다. “들어와.” 단유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몇 몇 서류를 테이블 위에 펼쳐 놓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단유니? 명수도 왔네? 무슨 일이야?” 보육교사가 단유에게 물었다. 단유는 침착하고 바른 어조로 이야기했다. “저희가 이 보육원을 떠나야 한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다들 다른 보육원으로 흩어져야 한다고 들었거든요. 사실인가요?” 보육교사는 마주 앉은 복지사를 보며 난감해하다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아마, 그럴 거야. 그런데 어쩔 수 없단다.” “예, 알고 있어요. 그런데 만약 꼭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같이 갈 수 있게 해 주실 수 있나요?” “누구? 명수?” “네.” “명수도?” “네. 저 석고랑 같이 갈 거예요.” 명수가 단유 뒤에서 서서 조용히 이야기했다. 이렇게 의기소침해 있는 명수는 본 적이 없었는데. 보육교사는 잠시 복지사를 바라보았다. 복지사 역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 “그래서 아이들은 모두 보육원에서 나가야 하고?” “네.” “단유도?” “네.” 재훈은 고민에 빠졌다.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 차라리 단유를 데리고 나오는 게 좋을 수도 있었다. 어차피 데리고 나올 거, 2년 일찍 데려온다고 생각하는 게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문제는 지금 너무 급작스럽게 일이 벌어진 터라 준비가 덜 됐다는 것이 문제였다. “굳이 서두르실 필요는 없지 않아요?” “하지만 그냥 둘 필요도 없지. 오히려 잘 된 것 일수도 있어. 이럴 때 입양 신청을 하게 되면 해당기관에서도 편의를 잘 봐줄 수도 있고, 그러면 조금 더 간편한 절차를 밟을 수도 있으니까.” “입양은 안 된다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그냥 후원자의 자격으로 데려와 부양을 해도 될 일이었다. 굳이 ‘입양’이라는 자격을 달 이유가 무엇인가? “왜 안 돼?” 주영은 한숨을 내쉬다가, 이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나가실 준비 하시죠?” “응?” “지금 바로 단유에게 가 봐요. 가서 물어보죠. 입양, 결국 본인의 의지도 중요한 거 아니에요?” 것도 그렇다. 그렇게 해서 서둘러 외출 준비를 마친 재훈을 데리고 주영은 인평시로 차를 몰았다. “난 니가 이렇게 반대하는 이유를 모르겠네.” 차 안에서 조용히 갔으면 좋으련만, 또 저 입을 나불댄다. 주영은 오늘따라 컨디션이 좋지 않은 탓인지, 선배인 재훈에게 막 화가 났다. “팔 집어넣고 창문 닫으세요.” 도대체 한 겨울에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중에 창문을 열고 찬바람을 느끼는 이유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게다가 퇴원한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주영의 날 선 목소리에 움찔한 재훈이 창을 올리자, 주영이 다시 말했다. “제가 반대하는 이유는 단 하나에요. 선배의 인생이 더 이상 꼬이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죠.” “그렇게 말하지 마. 니가 그렇게 말하면 진짜 내 인생이 꼬였던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기분이 아니라 사실이에요.” 재훈은 주영을 훔쳐보더니 피식 웃었다. “주영아.” 이 남자 또 왜 이래? 라는 표정으로 재훈을 흘끔 보다 느끼한 눈을 마주치곤 놀란 토끼처럼 시선을 피해버렸다. “왜요?” “난 내 인생 별로 안 꼬였다고 생각해. 무엇보다 내 인생, 잘 나간다고 생각해. 생각해봐. 금수저로 태어나서, 해외여행 실컷 하다가, 이제 명함 좀 파보겠다고 병원까지 짓고 있잖아?” 병원 짓는 이유가 명함 때문이었어? “게다가 날 위해서 걱정해주는 니가 옆에 있는데, 이게 꼬인 인생이야?” 얼굴이 붉어진 주영이 아무 말도 못하고 전방주시 의무에 전념했다. “내가 원래 이런 달달한 이야기 안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주영이 침을 꿀꺽 삼켰다. “주영아.” 주영은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네가 보여준 신뢰와 믿음은 나중에 니 결혼식 축의금으로 보답할게. 니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두꺼운 봉투를 받게 될 거야.” 주영은 무슨 의미인지 몰라 눈을 껌뻑이다가, 하마터면 급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이 정신 빠진 인간 같으니라고. “주영아, 너무 밟는다, 속도 좀 줄여.” “그냥 같이 죽죠.” “주영아!” **** “입양이요?” 단유는 눈을 느릿하게 껌뻑거리며 단어의 의미를 되새김질했다. “싫어?” “싫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고요, 정확히 어떤 의미로 절 입양하시겠다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재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무슨 뜻이긴, 내가 니 아빠 노릇 좀 하겠다는 거지.” “왜요?” “글쎄다, 그렇게 물으면 할 말이 딱히 없는데? 그냥 니 아빠 노릇 좀 하면서 니가 잘 클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마음?” 단유는 재훈을 바라보면서 잠시 ‘아버지’란 존재의 의미를 되새겨보았다. ‘어머니’와 다르게 ‘아버지’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단유의 기억 속에 편린처럼 남은 아버지에 대한 흔적들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어디갔는지도 모르는 어머니와 다르게, 아버지는 적어도 늘 함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하늘 아래서든, 늘. 그런데 새로운 아버지가 생긴다는, 아니 생길 수 있다는 사실에 단유는 작은 혼란을 느꼈다. “제게 아버지가 없어도 크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요.” “물론 물리적으로 니가 성장을 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 사회에서 니가 평범한 다른 이들처럼 교육을 받을 수도 없거니와, 교육을 받는다고 해도 거기에 들어가는 돈이며 시간에 대한 투자와 그 시간의 위한 다른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에 대해 넌 책임을 질 수가 없는 처지잖아.” “예?” “간단하게 말하면, 입고 먹고 쓰는 돈을 니가 구할 수 없으니까 대신 ‘아빠’가 대준다는 것이지.” “돈이 많이 드나요?” 재훈은 단유를 바라보다가 묘한 괴리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너, 혹시 지금 돈이 필요하니?” “아니요.” “혹시 예전에 돈 필요한 적 있었니?” “아니요.” 주영은 둘의 대화를 들으며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사채업자 놀이라도 하려는 건가? “너, 돈을 모르는구나.” “돈은 알죠. 물건을 살 때 그 가치에 상응해서 주고받는 화폐를 말하는 거잖아요.” “그런 교과서적인 답을 원한 건 아니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알고 있네.” “뭔데요?” “물건을 산다는 것. 넌 단 한 번도 너의 의지로 물건을 사본 적이 없지?” 단유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과연 그랬다. 학교 준비물은 보육원에서 생활지도원이 알아서 준비를 해주었고, 옷은 물려받았고 밥은 식당에 가서 먹으면 되는 일이었다. 책은 도서관에 있고, 교통은 보육원 승합차를 이용했다. 어디에서도 단유가 돈을 쓰거나, 쓸 일은 없었다. “주영아, 얘 경제개념이 없는데?” 재훈이 뒤돌아보며 말하자 주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돈 무서운 줄 모르는 아이가 눈앞에 있었다. ======================================= [158] 변화(3) 단유는 다른 이야기를 물었다. “저만 입양되는 건가요?” “무슨 뜻이지?” 단유는 생각을 정리한 후 이야기를 했다. “저랑 같이 방을 쓰는 명수라는 친구가 있어요.” 주영이 추임새를 넣었다. “그래, 잘 먹는 친구.” “전 그 친구와 함께 있고 싶어요. 그래서 다른 보육원으로 갈 때도 함께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고요. 그런데 만약 제가 입양이 된다면 그 친구랑 떨어져야 한다는 거잖아요? 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왜?” “그 애는 제 가족이니까요.” 재훈과 주영은 입을 다물었다. 단유가 ‘가족’이라고 말할 때의 그 단호함과 의지가 두 사람에게 진정성 있게 들렸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재훈이 만들어주려고 했던 가족이 이미 단유에게 있었던 셈이었다. 물론 그 가족이 생계를 책임져 주지 못하니까, 여전히 단유에게는 부양자의 필요성이 존재했다. “어떡하지?” “뭘요?” “두 아이의 아빠.” 이 사람, 제대로 정신 나간 것인가? 주영은 재훈을 흘겨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냥 제가 이야기했던 대로 하시는 게 제일 좋겠네요.” 후견인으로서의 지위를 얻는 것. 아동복지법 제13조, 보호시설에 있는 고아의 후견 직무에 관한 법률 제2조에 따라 후견인으로서 지정신청을 한다면, 굳이 입양이라는 방법을 쓰지 않더라도 단유가 어른이 될 때까지 지원해주는 것이 가능하다. “난 아들 삼고 싶은데.” 주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단유에게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 아빠가 필요해?” “굳이… 말하자면, 아니요. 전 기억 속의 아버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재훈이 울상을 짓고, 주영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재훈을 바라보았다. “게다가 나이 차도 얼마 안 나는데.” 재훈과 단유는 고작(?) 18살 차이다. 아빠와 아들이 되기엔 사회적 통념상―물론 없지는 않겠지만―무리가 있다. 단유가 나이를 언급하니, 재훈은 멋쩍은 표정으로 대신하는 수밖에 없었다. 젊은 아빠가 좋지 않냐는 말은 주영이 눈을 부라리는 바람에 꺼내지 못했다. “그런데 말씀하시는 그 방법이라는 게 어떤 건데요?” 주영은 후견인제도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법적으로 정식 절차를 거쳐 후견인이 되면, 단유는 보육원에 위탁되지 않아도 된다. 단유가 생각하기에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었다. 다만. “너무 잘해주시니까 좋긴 한데, 제가 이렇게 대우를 받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부담스러웠다. 재훈이 웃었다. “괜찮아. 넌 충분히 그런 대접받을 가치가 있는 아이니까.” 주영은 재훈의 그 말이 단순한 빈말이 아니라고 느꼈다.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금수저’를 언급하기도 하지만, 사실 재훈의 지난 삶이 평탄치 않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 말은 사실 단유가 아닌 자신이 듣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른다, 고 생각했다. 지나친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럼 명수는요?” 재훈이 주영을 바라보았다. 단유가 먼저 이야기했다. “만약 ‘가치’라는 것을 따진다면, 명수는 저보다 더 대단한 가치를 가지고 있을 거예요.” “왜?” 재훈은 물론이고, 가끔씩이나마 명수를 만나왔던 주영 역시도 단유의 호언장담에 의문을 품었다. “명수는 축구를 잘하거든요. 국가대표가 될 지도 몰라요.” 그 시간, 축구 국가대표를 꿈꾸는 명수는 다른 아이들과 TV를 보고 있었다. 단속하는 어른들이 사라지니, 아이들에게 무한한 TV시청시간이 주어졌다. “계속 이랬으면 좋겠다.” TV에서는 가요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조악한 TV스피커를 통해 발랄한 댄스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루 종일 TV를 볼 수 있다면, 난 축구를 안 해도 기분 좋을 거 같아.” 명수가 헤벌레 미소를 지으면서, TV화면에 푹 빠져있었다. 요즘 대세라는 걸그룹이 나와서 멋진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었다. 명수는 행복했다. **** “그래요, 알겠습니다.…방학 잘 보내라고 전해주세요.” 혜린의 어머니는 통화를 마친 후,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정확한 사정은 이미 신문과 방송을 통해 보도된 상황이었고, 지금도 뉴스에 나오고 있었다. 다만 보육원의 이름은 사건 초기에나 한 번 언급된 이후, 지금은 불길이 다른 곳으로 번지면서 보육원의 이름은 잘 나오지 않고 있지만,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모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내일 있을 혜린의 생일이었다. 내부 문제로 단유가 외출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혜린에게 알려 주냐는 것이었다. 방학 이후부터 지금까지 약 2주간 혜린이 보였던 기대감과 설렘을 꺾어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저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혜린아, 엄마가 할 이야기 있는데.” “나도, 나도. 엄마, 이게 좋아, 아니면 이게 좋아?” 드레스와 원피스 두 개를 손에 들고 활짝 웃는 딸의 얼굴을 보니, 괜히 미안해졌다. 마치 자기가 죄를 지어서 이런 사태가 온 것 같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 전에 할 이야기가 있는데….” “옷부터 골라줘, 엄마.” 딸이 애교를 부리면서 선택을 종요하니,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하얀 원피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도 이게 좋던데.” 헤실헤실 웃는 딸에게 마치 사망선고를 내리는 의사의 심정으로 이야기를 전해야 했다. “실은 조금 전에 전화가 왔어….” 딸의 얼굴은 붉은색, 흰색, 푸른색으로 다양하게 변화했고, 신중하게 골랐던 옷은 마루에 널브러졌으며, 환하게 웃던 아이가 2시간에 걸쳐 침대 위에 눈물을 뿌렸고, 이후 시무룩한 얼굴로 TV만 보다가 잠들었다. 어머니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차라리 저 애를 데리고 보육원을 방문해볼까 생각했다. ‘그래, 오지 않는다면 가면 되지.’ 어머니는 딸의 감정을 지켜주기 위해, 생전 처음으로 복지기관 방문을 결정했다. 남자친구 집에 딸을 데리고 가는 엄마들이 없지는 않지만, 남자친구 만나게 해주려고 보육시설로 딸을 데리고 가는 사람은 자기 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해보는 어머니였다. **** “뭐라고?” 핸드폰을 들고 있던 여자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단유 돌봐줄 수 있냐고.」 “내가? 왜?” 「음…개인교사?」 “…개인교사가 무슨 애를 돌봐? 내가 보모니?” 핸드폰에서 소리가 끊어졌다. 그러나 통화가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잠시 후, 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듣기 좋은 남자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들려왔다. “누구…, 재훈 오빠?” 「어, 나다.」 “아, 정말! 왜 오빠가 벌인 일을 내가 수습하는 건데?” 「수습은 무슨. 너 어차피 지금 있는 오피스텔도 내가 빌려준 거잖아.」 “아, 됐어. 그럼 나 그냥 방 뺄게. 어차피 그만두려고 했었어. 서울 올라가지 뭐.” 「올라가서 뭐 하려고? 너 할 거 없다고 그러던데? 주영이가.」 이 기집애가 못하는 소리가 없네. 하은은 신경질이 나서 하이힐로 땅을 콕콕 찔렀다. 그래봐야 자기 힐만 상할 뿐, 재훈이나 주영에게는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알았어, 그럼 관두고 나와.」 재훈이 먼저 포기했다. 그런데 막상 오피스텔에서 나오려니 아쉬운 감정이 들었다. 정말 여자의 변덕이란 어쩔 수 없나보다, 라고 자신을 자책하며 하은은 슬쩍 조건을 들이밀었다. “그래요, 나갈게요. 근데 만약에 조건만 더 맞춰준다면 고려해볼 여지는 있어요.” 「됐어, 그냥 나와. 다른 사람 구할게.」 아니 이 오빠, 아니 이 남자 정말 사람 상대할 줄 모르네. 이러니 주영이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는 거겠지. 하은은 괜히 신경질을 부렸다. “아니, 사람이 왜 이랬다 저랬다 해요? 방금은 맡으라고 했다가, 이제는 나가라고 하고. 도대체 왜 그래요? 사람이?” 수화기에서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어요? 내 말이 말 같지가 않아요? 이제 상대도 하기 싫다 이거에요? 그러니까 주영이가 오빠한테 실망하는 거예요. 아세요?” 요란스런 소리와 함께 통화 상대가 바뀌었다. 「넌 무슨 쓸데없는 소릴 하고 있어? 그건 그렇고, 뭔데? 니가 원하는 조건이.」 “양육비가 필요하지 않겠어?” 「집안 일 봐줄 아주머니 구할 거야. 돈 많이 안 들고, 대신 니 월급만 20% 올려줄게.」 지금은 월급을 받지 않지만, 방학 때 단유를 가르치는 동안 받았던 월급은 꽤 센 편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20%? 그럼 생각해 볼만한 금액이긴 했다. 혼자 돌보는 것도 아니고, 집안일 해주실 분도 있다면 뭐, 어려울 건 없겠다. “좋아, 그럼 언제부터야?” **** “야, 쟤 괜찮냐? 완전 미친 애 아냐?” 재훈이 씩씩거리면서 주영에게 따졌다. 주영은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게, 아마도, 그냥 오늘 좀 불편한 날이었는지도….” “아니, 니들은 그게 무슨 변명거리냐? 뭐 지들 불리하기만 하면, ‘오늘 좀 불편해요’ 이 따위 말이나 하고 앉았고.” “따위라뇨?” 순간 잘 벼린 면도칼 같은 눈으로 재훈을 째려보는데, 이번에는 재훈도 상당히 열이 받은 상태였다. “왜 째려봐? 왜? 뭐? 야, 방금도 지가 싫다고 해서 관두라고 했더니, 뭐? 이랬다저랬다 해? 게다가 주영이가 말라? 마르긴 개뿔이?” 재훈의 말이 이어지면서 움찔했던 주영은 마지막 말에 욱하고 뜨거운 게 치밀어 오르더니 순간적으로 끈이 끊어졌다. “뭐예요? 마르긴 개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어?” 톡 잘라서 발췌해내니, 표현이 거시기 하긴 했다.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너… 날씬하지, 날씬한데….” “지금 말 다했어요?” 재훈은 급격한 피로를 느끼며 자리에서 드러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았다. ‘여자들이란.’ 이런저런 말이 오가던 와중에 단유의 새로운 거취가 결정되었다. “아, 명수는 말 안했네.” 재훈의 중얼거림에, 기관총처럼 연신 입을 털던 주영의 입이 다물어졌다. **** 단유는 명수를 붙잡고 사정을 이야기했다. “니가 만약 좋다면, 같이 재훈 형이 구해준 집에서 같이 살게 될 거야.” “나야, 너랑 같이 사는 거면 좋지. 게다가 우리 둘만 같이 사는 거야?” 명수는 어쩐지 신이 난 얼굴이었다. “방학 때 우리 방에 찾아오시던 여자 선생님 계시지? 그 선생님이랑 같이 살 거래. 대신 중학교 올라가기 전까지만. 그 이후에는 형이랑 같이 살 거라고 그러네.” “그거야 상관없지. 어쨌든 여기서 나간다는 거잖아? 그럼 막 TV도 마음대로 볼 수 있고, 오락실도 갈 수 있고, 군것질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야?” “…하고 싶은 게 많았구나.” 명수는 의외로(?) 하고 싶은 게 많았다. 단유는 그렇게 절실하게 느끼지 못하던 것이었지만, 명수는 몰래 바라던 생활이 있었던 것 같았다. 사실 재훈과 주영이 겪었던 것처럼, 단유는 오직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보육원 안에서나 밖에서나 별 다른 차이가 없는 편이었다. 그러나 단유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은 달랐다. 당장 윤정이만 해도 군것질을 좋아해서 외출이 자유로운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하고, 군것질을 위해 보육원 밖으로 나돌아 다녔었다. 형근이나 철용이 같은 애들도 할 게 없어서 공을 차고 놀았지만, 실은 다른 아이들처럼 오락실도 가고 싶었고, 노래방도 가고 싶어 했다. 명수는 그야말로 욕심의 황제였다. 반 친구들이 가지고 다니는 핸드폰 게임도 마음대로 해보고 싶었지만, 괜한 오해를 부를까봐 신경 안 쓰는 척 하며 더 교실 밖으로 뛰어나갔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먹는 과자나, 가지고 다니는 핸드폰이나, 한 권씩 품고 다니는 만화책 따위는 정말 간절했다. 단유는 명수가 그런 간절함을 지금까지 억눌러가면서도 티를 내지 않았다는 게 놀라웠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에 대한 생각도 그런 식으로 억눌러 왔던 거겠지.’ 명수가 얼마나 인내심이 강한 아이인지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럼 같이 가는 거야?” “콜!” 명수가 두 손을 번쩍 치켜들며 결정에 환호했다. 단유는 방긋 웃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수는 없는 일. 지선이나 유철이, 재민이 같은 동생들은 결국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형들, 특히 철용이 같은 경우는 정말 오랜 시간 함께 했는데 떨어져야만 했다. “철용이 형은 안 될까?” 명수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을 했지만,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이런 식으로 후견인으로서 보살펴주겠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명수는 그렇다 치더라도, 면식도 없는 철용까지 봐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단유로서도 염치없는 일이라 생각되었다. “나중에 성공해서 만나자.” 단유가 나직하게 말했다. 명수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운동장에서 철용을 비롯한 중학생, 고등학생 형들이 모두 나와서 공을 차고 있었다. 그들도 모두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느끼고 있으리라. 그리고 저들 대부분은 다른 보육원으로 보내지겠지. 그리고 새로운 규율과 환경 속에서 적응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단유와 명수는 운이 좋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신이 도운 거야.” 생활지도원 한 분이 둘의 사정을 듣고 그렇게 이야기했다. 후견인지정절차가 마무리 되는대로 두 사람은 보육원을 나갈 것이라는 이야기가 선생님들 사이에 퍼진 것이다. “신(神)….” 단유는 그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려보았다. ‘과연 그럴까?’ ======================================= [159] 변화(4) 2월, 혹독했던 찬바람도 썰물처럼 지나가고 얼었던 운동장의 눈더미가 녹아서 운동장을 적실 무렵, 결국 보육원은 폐원이 확정되었다. 그간 관계기관에서는 새로운 인수자를 찾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끝내 구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그리하여, 안타깝게도, 아네스 보육원은 재단 설립 이후 23년 만에 폐원이 결정되었고 아이들은 보육교사와 생활지도원들의 눈물 섞인 배웅 속에서 각자 새롭게 배정된 보육원으로 이원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친권자들의 협의를 통해 부모의 품으로 돌아간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어른들의 사정과 협의에 의해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잘 가, 형. 나중에 꼭 다시 만나.” “잘 지내고 우리 나중에 꼭 보자. 알았지?” 서로가 서로에게 격려와 위로를 보냈고, 그들은 늘 그랬듯이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것은 어린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잘 지내고, 축구 연습 많이 해야 돼. 그래야 학교에서 무시 안 당한다. 알겠지?” “응.” 명수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격려했고, 재민이와 유철이는 눈물 한 방울로 명수의 마음에 보답했다. 그리고. “…….” 한동안 밝아졌나 싶었던 지선은 다시 굳은 얼굴로 단유와 마주했다. “…미안해. 지선아.” “…….” 감정 없이 바라보는 듯 하지만, 그 눈 속에 담긴 슬픔과 외로움이 단유를 괴롭혔다. “오빠랑 나중에 꼭 다시 만나자. 만날 수 있을 거야.” 어디로 갔는지만 알면, 꼭 볼 수 있을 것이다. 단유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씩씩하게, 건강하게 잘 지내야 돼.” 지선이는 고개를 끄덕여서 단유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러나 끝내 말이 없었다. 하지만 차에 오르기 전, 지선이는 돌아와서 한 마디를 해 주었다. “나중에 봐.” 단유는 지선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어주었다. 동생을 떠올리게 하던 지선을 보내면서, 단유는 가슴이 쓰리다는 감정을 느꼈다. 이렇게 보내도 되는 걸까, 스스로에게 여러 번 물었지만 이 이상 단유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창밖을 바라보는 지선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수밖에는. “다시 볼 수 있을까?” 명수가 넌지시 물음을 던졌다. “꼭 다시 만나야지.” 단유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동생처럼 영원히 못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꼭,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보육교사도 그렇게 말해주었다. 이름과 출신 보육원만 알면, 다시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라고. 지금은 사정이 어려워서 잠시 떨어져 지낼 뿐이라고. 단유는 그 말이 어쩐지 어른들이 보육원에 애들을 맡길 때 쓰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 “우와, 여기 집 넓다!” 명수가 가방을 둘러맨 채 거실을 구경하며 연신 감탄을 했다. 단유가 보기에도 깨끗하고 아늑한, 귀족들이나 살 법한 집이라고 생각했다. “1층 안방은 누나가 사용할거야. 그리고 너희들은 저 방이나 저 방을 골라서 쓰면 돼. 크기는 비슷하니까 각자 알아서 선택해서 쓰기. 알았지?” 하은이 소파에 앉아서 대충 방향을 지정해주며 집 구경(?)을 시켰다. “화장실은 저기. 누나는 안방 화장실 사용할 거고, 니들은 거기 화장실 쓰기 없기. 주방에서 라면 같은 거 끓여 먹고 싶으면 알아서 먹어도 돼. 대신 불조심해야 되고. 그런데 너희 돌봐 줄 아주머니가 늘 계실 테니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그리고… 거실에서는 항상 조용히 하고, 집 안에서는 뛰지 말 것. 층간 소음 심하다고 연락 오면 그 순간 무시무시한 벌칙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명수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이 방, 저 방 왔다 갔다 하며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했다. “우와, 화장실 되게 넓다. 석고야, 여기 봐!” 단유는 명수가 알아서 구경하게끔 두고, 하은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럼 이제 여기서 생활하는 건가요? 저희?” “그래. 그렇게 듣고 온 거 아니니?” “혹시 시간표도 있나요?” “무슨 시간표?” “아침 기상시간, 아침 식사 시간, 저녁 식사 시간, 외출 시간, TV 시청시간….” “아, 됐고. 그냥 니들 알아서 해.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든, 그건 이제 니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너무 늦게만 일어나지 마. 게으른 사람으로 만들라고 재훈 오빠가 후원해주는 건 아닐 테니까. 그리고 식사는, 아주머니랑 이야기해서 맞추도록 하고. 되도록 식사시간은 맞추는 게 좋겠다. 그래야 아주머니가 일하시기 편할 테니까. 오케이?” 하은은 다시 귀찮아하면서도 말문을 트이고 나니 다시 수다 본능이 발휘되는지 말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설마 그럴 나이는 아니겠지만, 벽에 낙서하지 말고, 바닥에 흘리면서 먹지 말고, 만약 흘렸다면 바로바로 청소하고, 청소기는 저기 있는데, 너희 청소기 쓸 줄 아니? 가르쳐 줘야 하나? 그런데 몇 번 만져보면 대충 쓸 수 있을 거야. 방청소도 아주머니가 대신 해주시겠지만, 사소한 청소는 너희들이 직접 하는 게 좋아. 나도 그럴 거고. 그거 하나는 마음에 드네. 예전에 혼자 있을 때는 이 넓은 집을 혼자 청소하려고 했더니, 어찌나 힘이 들었는지. 며칠 전에 아주머니가 와서 대청소를 해주셨기에 이 정도지, 아니었으면 말도 못할 거다. 그렇다고 내가 게으르거나 지저분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는 아니야. 단지 이 집이 너무 커서 관리하기 힘들었다는 이야기야.” 단유는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꿋꿋이 이야기를 다 들었지만, 너무 길어지는 것은 반대였기에 적당히 틈을 봐서 이야기를 잘랐다. “알겠어요. 그럼 저희 방 정리는 저희가 알아서 하는 걸로 할게요.” “누나, 누나! 지금 TV나와요? 지금 볼 수 있어요?” 화장실을 구경하던 명수가 두 볼이 상기된 채로 하은에게 달라붙었다. 하은은 대답대신 손짓으로 리모컨을 가리켰다. 벽에 걸린 65인치 TV에 전원이 들어오면서, 화면에 광고프로그램 하나가 떴다. 단순한 음료 광고일 뿐인데도 명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석고야, 저것 봐. 우와 크다!” 하지만 단유에게는 다른 물음이 있었다. “외출은 어떻게 할 수 있나요?” “외출? 어디 갈 데 있어?” “나중에 도서관이라도 가보고 싶어서요.” 보육원 도서관도 좋았지만, 역시 시립도서관보다 좋을 순 없었다. “어, 거기는 꽤 멀 텐데.” “그래요?” “뭐, 그래도 혼자 못 갈 정도는 아니지. …그렇지만 니가 중학생이라면 모를까, 아직은 혼자 보내긴 어렵겠다. 만약 꼭 가고 싶다면, 누나랑 같이 가자. 그 정도는 내가 에스코트 해줘야지. 분홍색 트레이닝 복을 상하로 입은 하은이 소파에 드러누우며 말했다. “거기 먹보, 뒤로 와서 봐. 눈 나빠져.” 명수는 65인치 TV를 한 눈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거리에서 무릎을 꿇고 경건한 자세로 시청하고 있었다. 하은의 말에 명수는 조금씩 슬금슬금 무릎걸음으로 물러났지만, 시선은 TV에 고정되어 있었다. “쟤 원래 TV를 저렇게 좋아해?” “저도 몰랐네요.” 명수는 소파 아래에 발이 부딪히기 전까지 물러나야 했고, 그 이후부터 저녁 먹으라는 이야기가 나올 때까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TV에 빠져 있었다. **** 방 정리를 마치고 저녁 식사를 위해 식탁으로 나왔을 때, 하은은 각자에게 작은 선물을 하나씩 주었다. 명수가 소리 질렀다. “우와! 핸드폰!” 하은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주의를 주었다. “집 안에서 조용히 하랬지? 목소리 낮추고. 이 폰은 오로지 너희들과의 원활한 연락과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주는 거지, 가지고 놀라고 주는 게 아냐. 만약 일정 이상의 요금이 나온다면 그 즉시 압수다. 알았지? 특히 먹보 너. 게임하는 건 봐줘도 현금 결제하면 용서 안한다. 알았어?” “왜 계속 먹보라고 불러요?” 단유의 물음에 하은이 턱을 괴며 명수를 바라보았다. “혼자서 스테이크 3인분을 해치우는 11살짜리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거든. 그 날의 충격이 생생해.” 단유는 대답대신 건네진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검은색 유광이 빛나는 최신 기종의 핸드폰이었다. 물론 단유는 그게 최신 기종인지 아닌지 알지 못했지만. 하은은 흥분한 명수를 진정시키면서 두 사람에게 간단한 핸드폰 사용법을 알려 주었다. “전화랑 문자 사용법만 제대로 익혀두고, 인터넷은 되도록 집에서만 쓸 것. 집에서는 와이파이가 잡히니까.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현금결제하면 정말 각오해야 할 거야. 특히 먹보 너! …이야기는 듣고 있는 거니?” “예, 예.” 정말 성의 없는 대답의 정석이었다. 명수는 핸드폰 여기저기를 누르면서 첨단 테크놀로지의 향연에 감탄했고, 단유는 식탁 위에 올려둔 뒤 대신 숟가락을 들었다. “단유야, 너는 안 궁금해?” “뭐가요?” “핸드폰.” “전화랑 문자만 쓸 줄 알면 되죠.” 정말 호불호가 확실한지, 관심이 없는 것에는 일절 호기심을 보이지 않는 단유였다. 하긴 과외 때도 저렇게 집중해서 책만 보는 아이가 있을까 싶었으니까. 하은의 기억에 과거 영재학교를 다닐 때도 단유만큼의 집중력을 보였던 아이는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너 좀 매력 없다.” “예?” “책만 보는 남자 말이야. 매력 없어. 책 말고 관심 있는 거 없니?” 단유는 대답을 피했다. 사실 책보다 더 관심이 가는 게 없지는 않았으니까. 이를테면, ‘마법’이라든가. **** 며칠 동안은 새 집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사이에 명수는 틈만 나면 하은에게 지적을 받아야 했고, 청소기 사용법에 익숙해졌으며, 매일 샤워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강요받았다. “먹보야, TV 좀 적당히 봐라.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니?” 아침 먹고 소파에 앉아서 줄곧 TV만 보는 명수를 보며 하은이 한 마디 하자, 명수는 영혼 없는 어조로 답했다. “괜찮아요, 전.” 너 괜찮냐고 물은 거 아니거든? 하은이 삐직 혈관이 솟아오르는 이마를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단유 좀 봐라. 개학 얼마 안 남았는데, 너도 책 좀 봐야 하지 않니?” “예.” 예, 라고 대답했으면 TV를 끄고 방으로 들어가서 책을 본다거나, 아니면 언제까지 보다가 방에 들어가겠다는 약속 정도는 뒤따라 붙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나 명수의 시선은 TV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침 TV에서는 보험 상품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저게 재밌어?” “예.” “뭐가 재밌는데?” “암에 걸리면 천만 원 준대요.” 거기 어디에 재미 포인트가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어쩐지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규칙적인 생활을 강요받았던 보육원에서 무한한(?) 자유가 주어지니 이렇게 풀어지는 것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도가 지나치긴 하지만, 또 아직은 어리니까, 라는 말로 이해 못할 부분만은 아니었다. 반면 도가 지나친 건 명수보다 단유였다. 단유는 아침 먹고 책상에 앉더니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기를 벌써 일주일이었다. 일주일 내내 TV를 보는 명수와 일주일 내내 책만 보는 단유, 둘 중 누가 더 심각한 건지 고민해보았지만 쉽게 답이 나올 문제는 아니었다. **** “예, 알겠어요.…네, 그렇게 전할게요.” 하은은 통화를 마친 후, 단유를 찾았다. 그리고 보육원에서 온 전화 내용을 알려주었다. “혜린이요?” 전화는 혜린의 어머니가 보육원에 찾아왔었다는 내용이었다. 혜린의 생일 전에 터진 문제로 생일파티에 참석하지 못했던 단유는 그 이후로 그 일에 대해 새까맣게 잊고 지냈었다. “…그래서 그 애 어머니가 널 데리러 온다네? 친구끼리 재밌게 놀게 해주고 싶다면서 말이야. …혜린이란 아이가 너 좋아하나보다?” 하은은 놀릴 거리가 생겼다며 좋아했지만, 막상 당사자는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외출하는 것에 대해서는 썩 내켜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때문에 온종일 붙박이장마냥 방안에 처박혀 있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하은은 마침 잘 됐다는 얼굴로 단유를 꼬드겼다. “방에서 계속 책만 읽는 건 건강에도 좋지 않으니까, 잠깐 나갔다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아침에도 나가서 운동하고 왔는데요.” 단호하게 반응하는 단유였다. “아침에 운동 나가는 거랑, 외출해서 나들이 가는 거랑은 또 다르지. 또래 친구들이랑 대화도 나누고, 감정적인 교류를 나누면 정신적으로 환기도 될 테고 더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니?” “그 반대일 거 같은데요.” “여자애잖아? 여자친구 만들고 싶지 않아?” “아니요. 별로 생각 없어요.” 철벽을 두른 듯. “여자 친구가 아니더라도 또래 여자애랑 하루 정도는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원래 다양한 경험이 지식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법이니까.” “경험이 지식을 만들어주지만, 때로는 선입견과 편견을 만들기도 하죠.” 니가 무슨 프랜시스 베이컨이냐? “도대체 나가기 싫은 이유가 뭔데?” “나가기 싫다고는 안했는데요?” “뭐야? 그럼 나갈 거야?” “…그럴게요.” 하은의 김샜다는 반응에도 신경 쓰지 않고, 단유는 아무렇지 않게 방으로 돌아가 외출 준비를 했다. ======================================= [160] 변화(5) “잘 지냈어?” 혜린이 수줍은 얼굴로 먼저 말을 건넸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답했다. “응.” “…많이 바빴어?” “아니.” “그렇구나.” 지켜보던 혜린의 어머니가 가슴을 두들기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둘을 지켜봤다. “어머니 입술이 떨리시는 것처럼 보이는데?” “우리 엄마?” 혜린과 단유의 시선이 혜린 어머니에게로 모이자, 어머니는 호호 억지웃음을 지으며 두 사람을 차로 데리고 갔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서 단유에게 말을 걸어보는 혜린이었다. 지난 달 고대하던 생일파티가 허무하게 무산된 이후, 실의에 빠졌던 혜린이 모처럼 기운을 내서 나온 자리였다. 아침부터 이 옷 저 옷 고르느라 어머니의 신경까지 날카로워질 정도로 예민했었는데, 막상 단유의 얼굴을 보더니 묽은 죽이라도 된 것처럼 헤시시 웃으며 풀어지는 혜진이었다. “그냥 똑같았어. 밥 먹고 책 읽고… 그랬지.” 단유는 전혀 귀찮아서 대충 설명하는 게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잔뜩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내용이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어머니가 룸미러를 통해 단유를 째려보지만, 단유는 미처 거기까지는 신경이 닿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단유의 말을 쉽게 받아들였다. “역시 단유답다. 난 엄마랑 여행 갔었어. 강원도에 바다 보러. 겨울바다가 좋다고 하길래, 엄마한테 졸라서 갔었어. 그치 엄마?” “그, 그래. 좋았지.” 갑작스런 딸의 토스에 무방비 상태였던 어머니가 화급히 대답하며 딸의 자랑에 어울려주었다. “저기 속초 해수욕장에 가서 바다 구경하는데, 바람이 차갑긴 해도, 파란 바다가 멋있었지.” “응, 그래가지구 엄마랑 사진도 많이 찍고 그랬어.” 실은 실연(?)에 빠진 딸을 위로하기 위해 훌쩍 떠났던 즉흥여행이었지만, 의도와 상관없이 아름다운 겨울 바다에 혜린은 무척 만족했다. “그리고, 겨울인데도 갈매기가 날아다니는데 걔네들은 춥지도 않은가봐.” “원래 갈매기는 겨울철에 월동하는 대표적인 겨울새야.” “아, 그래?” 당황해하는 혜린과 아무렇지 않은 단유와 그걸 룸미러로 지켜보는 어머니, 세 사람은 이후 소소한 잡담 없이 조용히 식당으로 이동했다. **** “명수야, 점심 먹어.” “네!” 명수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기 서서 먹을래? 얼른 와라.” 하은이 재차 독촉하니, 그제서야 아쉬운 발걸음을 떼는 명수였다. 거실 소파에서 식탁까지 열 걸음도 되지 않는데, 그 열 걸음이 마치 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신중하다. “인명수!” 하은이 빽 하고 소리 지르니, 명수가 후다닥 자리에 앉는다. 하은이 턱을 괴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도 참 기인은 기인이다.” “기린이요?” “기린이 아니고 기인. 신기한 사람이라고. 어떻게 하루도 안 빠지고 TV에만 목매달고 사니? 지겹지도 않아?” 명수가 못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놀란 얼굴을 하고 되물었다. “저게 어떻게 지겨울 수 있어요? 누나는 지겨워요? 재방송도 아니고 매일매일 새로운 프로가 나오는데 어떻게 지겨워요?” 하은은 못말리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다가, 한 가지 궁금한 게 잇어서 다시 명수의 고개를 돌렸다. 명수는 숟가락을 문 채로 TV를 향해 고개를 돌리다가 붙잡혔다. “너 축구 좋아한다고 안했니?” “좋아해요.” “그런데 왜 난 니가 이곳에 오고 나서 축구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을까? 운동도 안하는 것 같고.” 명수는 한쪽 팔을 식탁 위에 올리며 심각한 얼굴을 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우선 첫 번째로, 축구공이 없어요. 공 없이 어떻게 축구를 해요.” “그럼 공 사달라고 하질 그랬어?” “그래도 돼요? 에이, 미안하게 어떻게 그래요.” 하은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자신감 있게 말했다. “공 사줄게. 축구 공, 당장 사줄 테니까. 운동 좀 해라.” “두 번째 이유 때문에 조금 힘든 데요.” “뭔데?” “아침에 8시부터 드라마를 하더라고요. 그거 때문에 운동을 할 시간이 없어요.” “그 전에 하면 되잖아. 단유도 아침 7시에 운동하러 나가지 않니?” 국을 떠먹으며 명수가 우물거리는 소리로 답을 했다. “석고는 6시부터 운동하고 있어요.” “그럼 그 때 같이 하면 되지.” “졸려서 안 돼요.” 하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가 다시 펴졌다. “그럼 오후에는?” “만화할 시간이랑 겹쳐요.” “만화를 저녁 내내 하진 않을 거 아냐?” “만화를 저녁 내내 하는 채널도 있던데요. 근데 그것 때문은 아니에요.” 의아해하는 하은의 얼굴을 보며 명수가 답을 이야기했다. “5시부터 6시까지 만화하구요, 6시부터는 ‘생생한 정보’라는 방송 보고요, 7시 반부터는 5번에서 일일드라마하고요, 8시 반에는 9번에서 일일드라마 하고요, 9시부터는 7번에서 퀴즈쇼보고요, 10시부터는 드라마 하는 데요, 11번에서 하는 드라마가 재밌다고 해서 그거 봐요.” “됐다, 거기까지 해라. 듣고만 있어도 그냥 징글징글하다. 밥이나 먹어.” 명수는 히죽 웃으며 숟가락을 바삐 놀리기 시작했다. ‘대박이네, 대박이야.’ 하은은 턱에 밥풀이 묻는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밥술을 뜨는 명수를 바라보았다. **** 중국집에서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다음 목적지는 혜린이 그토록―단유와 함께―가고 싶어 했던 놀이공원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단유는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저런 모습을 보면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귀한 인상의, 전형적인 모범생 스타일 남학생이었다. 그런데 유독 딸아이에 대해서만은 무신경하고 무감각하고 무정하기만 한 전형적인 나쁜 남자, 라고 어머니는 생각했다. ‘우리 애가 싫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객관적으로 봐도 혜린이는 날씬하고 예쁜 얼굴을 가진, 소위 아이돌 스타일이라고 어머니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혜린에게 무신경하기만 한 남자애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 이상한 남자애가 지금 굉장히 곤란함 상황에 처했음을 혜린은 물론이고 혜린의 어머니도 알지 못했다. “자, 차에 타.” 그 말에 단유는 식은땀을 흘렸다. 단유는 이제껏 이렇게 차를 모는 사람을 본 적도 없었고, 타 본 적도 없었다. 지금까지 단유가 타 왔던 보육원 승합차는 오랜 경력의 보육교사가 아이들의 안전과 원활한 등교를 위해, 정속주행과 널찍한 안전거리 확보를 통한 안정적인 제동과 가속이 이루어지는 운전이었다. 게다가 자동차로는 그리 멀지 않은 등하교길이다보니 그렇게 멀미가 날 정도로 오래 차를 타지 않았었다. 그런데 혜린의 어머니의 차는 남달랐다. 단유는 갑작스런 제동―사실은 룸미러로 아이들의 반응을 연신 살피다보니, 앞차와의 거리를 종종 놓치면서 발생한 일―과 급작스런 가속―사실은 혜린에 대한 단유의 반응에 속이 울컥하다보니 과하게 힘이 들어가면서 발생한 일―에 노출되면서 심한 멀미를 느꼈다. 차에서 내렸을 때는 조금 괜찮아지나 싶었는데 다시 어머니의 차를 타려니 타기도 전에 멀미가 나고 어지러운 것이었다. “저기 조금 쉬었다고 가시면 안 될까요?” 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서, 단유는 미련하게 뒷자리에 몸을 묻었다. “어머, 단유야? 얼굴이 조금 흰 것 같은데 괜찮니?” 미숙한(?) 운전 때문에 생긴 멀미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단유였다. 그저 장거리 운행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만 생각한 단유는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까봐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희미한 웃음만 지어보였다. “괜찮아?” 혜린이 소곤거리며 묻자, 그제야 어머니에게 들리지 않게 속내를 밝혔다. “조금 어지러워서 그래. 조금 있으면 괜찮을 거야.” 혜린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그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는 놀이 공원에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순간 욕심이 앞선 탓이었다. 참으면 된다니까, 조금 힘들더라도 놀이공원까지 간 뒤에 천천히 쉬면서 놀면(?)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이윽고 놀이공원에 도착했을 때, 단유는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서 정신을 차리기도 힘들었다. 이는 마치 예전에 절벽에서 떨어질 때 느꼈던 공포보다 더 한 기분이었다. 지금 같아서는 차라리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말지, 저 차를 한 번 더 타진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돌아갈 때 다시 차를 타야한다는 사실에 생각이 닿자 속이 메슥거렸다. “괜찮니?” 혜린의 어머니가 부쩍 하얗게 변한 얼굴의 단유를 보며 물었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혜린을 보았다. 혜린의 미간이 살짝 구겨져 있었다. “괜찮아요. 나 괜찮아. 가자.” 세 사람은 공포와 스릴로 가득한 놀이공원에 입장했다. 그 곳은 신세계였다. 여태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사실 듣기는 했다. 그러나 듣던 것과 보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그리고 보는 것과 겪는 것은 또 달랐다. ‘다양한 경험이 지식을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고 했던 하은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전까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지식을 단유는 얻었다. ‘멀미를 할 때는 놀이기구를 타선 안 된다.’ 고양이 귀가 달린 머리띠를 매고 환하게 웃는 혜린 옆에서, 공중으로 비산하는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헝클어지는 줄도 모르고 비명을 질러대는 단유와, 그 둘을 웃으며 바라보는 혜린의 어머니는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 거 먹을래?” “아니, 나 물만 조금 마실래. 아까 너무 많이 먹었던 것 같아.” 혜린이 츄러스를 입에 물고 헤실헤실 웃을 때, 단유는 작은 물병을 입에 물고는 급히 수분을 섭취했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들어가니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심각하게 타격을 받은 내이(內耳)의 전정기관, 반고리관은 쉽게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저것만 타고 가자. 시간이 늦었어.” 혜린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가리킨 것은 ‘바이킹’이라는 놀이기구였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주위를 아득히 메우고 있는 무시무시한 놀이기구였다. 다가갈수록 커져가는 비명소리만큼이나 단유의 이마에 땀방울이 솟아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났다. 왜 거절을 못하는 것일까. 그냥 타기 싫다고 하면 안 될까? “단유야, 아쉽다. 그치?” 타기도 전에 마지막이라는 것을 아쉬워하는 표정을 보니, 단유는 타기 싫다는 말을 하기 어려웠다. 혜린의 어머니가 혜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야기했다. “다음에 또 오면 되지.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야. 알겠지?” 처음에는 틱틱거리는 것처럼만 보이던 단유가 중국집에서 나온 뒤부터는 얌전하게 혜린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모두 맞춰주는 모습이 기꺼웠다. 게다가 혜린이도 처음에는 조금 머뭇대더니, 점점 자신이 주도해서 단유를 데리고 놀이공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마음껏 타고 다니며 즐거워했고, 그런 모습을 보니 자연히 기분이 좋아졌다. 바이킹에 올라탄 두 사람은 제일 뒤에서 4번째 줄에 앉았다. 제일 뒤는 고수들만 탄다고들 하는데, 사실 나이 어린 두 사람의 안전상 가운데로 자리를 옮긴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별반 차이는 없었다. “꺄아!” “엄마!” 바이킹에 탑승한 사람들에게서 각종 비명과 탄식과 감탄과 고성이 텅 빈 허공을 채워가는 와중에, 단유는 무던히도 참고 참았다. 입술을 깨물고 안전바를 쥔 손에 힘을 주고, 배에 힘을 주었다. 눈앞이 캄캄했다가 하애졌다를 반복했고. 숨이 멈추기를 반복했다. 비명이 잠잠해지고, 안전요원의 설명이 스피커를 통해 나오고, 바이킹이 바닥에 안전히 착지했을 때도, 단유의 증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줄을 이어 바이킹에서 내려왔을 때, 혜린의 어머니가 다가와 물었다. “재밌었니?” “네!” 혜린이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며 어머니에게 달려들 때, 단유는 놀이기구 왼편의 화단에 달려들었다. 그리고 단유는 생애 처음으로 놀이기구타고 구토하는 경험을 했다. 주위에 자기 같은 사람이 몇몇 더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고집부리지 말걸.’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라던가? 괜히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 하은은 오늘 일을 단유에게 들은 뒤, 간단하게 답했다. “허세부렸네.” “네?” 히죽 웃음을 짓던 하은은 다리를 꼬고 있던 자세를 풀면서 단유를 바라보았다. “‘여자친구’ 앞에 있다고 억지로 참았던 거 아냐?” “억지로 참기는 했지만, 허세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여자 앞에서 보기 흉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 아냐? 그게 바로 허, 세 라는 거예요. 하여튼 남자들이란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다 똑같애. 어떻게 하는 짓이 다들 그렇대? 어떤 남자는 화장실 가고 싶은데도 일부러 안 가고 참다가 그만 바지에 지려서 울었다는 사람도 있더라만. 그게 뭐니? 미련하게 말이야. 사람이 참는 것도 적당히라는 게 있어야지, 좀 예쁘다 싶은 여자 앞에서는 간이고 쓸개고 다 줄 거처럼 굴면서 곧 죽어도 남자라고, 약한 척은 절대 안하지. 그게 무슨 개똥같은 자존심이야? 아, 물론 너보고 개똥같다고 욕한 건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마.” 단유는 고개를 젓고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하은은 피식 웃으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푹 쉬고, 내일 보자. 그리고 몸도 안좋을테니 내일 아침에는 운동하지 말고 쉬어. 알았지? 굳이 나가겠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선생님 앞에서는 ‘허세’부리려고 하지 마.” 나가는 순간까지도 놀림에 멈춤이 없는 하은이었다. 불을 꺼지고 방문이 닫힐 때, 단유는 이불 속에서 생각했다. ‘허세가 아니에요. 만약 내가 못하겠다고 했다면, 아마 혜린이는 울었을 지도 몰라요.’ 다른 사람은 못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혜린이는 오늘 하루 종일 울음을 참으면서 단유와 함께 했었다. 중국집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 단유는 마주앉은 혜린의 눈에서 그것을 발견했고, 때문에 자신이 망가지는 한에도 차마 ‘못하겠다’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혜린이는 헤어질 때까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단유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쩐지 혜린의 눈물을 본다면, 다시는 혜린에게 ‘친구’라는 표현을 쓰지 못할 거 같았기 때문이다. 단유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한바탕 토해냈더니 속은 시원했다. ======================================= [161] 뉴웨이브(1)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선택의 기로에 선다. 어떤 사람은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고 말하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우연이 아닌 선택이 운명을 결정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진짜 선택의 순간에는 그런 명언 따위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선택의 순간, 절실히 필요한 것은 단지 마음가짐이다.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노라는 마음가짐. 명수는 그런 마음으로 선택했다. “이 공으로 주세요.” 하은은 똑같아 보이는 축구공들을 늘어놓고 고민하는 명수가 이해되지 않았고, 그 공들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사장님의 말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만의 대화를 통해 명수가 선택을 내리는 순간만큼은 기뻤다. 관심도 없고, 재미도 없는 쇼핑은 쇼핑이 아니었다. “일시불이요.” 공을 붙잡은 명수의 표정은 흡사 먹이를 노리는 부엉이 같았다. 동그랗고 새까만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레이저가 축구공을 뚫을 듯 하니, 하은은 명수가 그간 공을 많이 차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건 일정부분은 사실이기도 했다. 공을 산 다음날, 명수는 아침부터 공을 붙잡고 밖으로 나가더니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이 한참이 지나도록 들어오지 않는 명수가 걱정돼서, 전화를 해보려던 찰나, 오피스텔 현관의 문이 철컥거리며 명수가 들어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라는 질문에 명수는 공을 붙잡고 히죽 웃으며 말했다. “공 찰 데를 찾느라고요.” 그러고 보니 근방에 공을 찰 만한 곳이 없던 것 같기도 했다. 공을 차려면 아무래도 넓은 공터가 필요한데, 주변에 작은 동산에 마련된 공원은 있어도, 학교 운동장 넓이의 공터는 보이지 않았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어디까지 갔던 거야?” “다 둘러봐도 없기에, 그냥 저기 뒤에서 트래핑이나 했어요.” 명수가 손으로 가리킨 방향에는 공원이 있었다. 명수는 공원 내에 배드민턴용으로 마련된 좁은 땅 위에서 트래핑이나 간단한 드리블링을 하다가 돌아온 것이었다. “제대로 공 차려면 학교 가서 해야 될 것 같아요.” 명수는 숟가락을 들고 허겁지겁 늦은 점심을 시작했다. “석고는요?” 하은은 방을 가리켰다. 명수는 고개를 주억이며 계란말이를 집어 입 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참 맛있게 먹는 명수였다. **** 개학을 하루 앞으로 다가온 날 아침, 단유는 오늘도 아침 6시에 눈을 떴다. 간단히 차가운 물에 세수를 한 단유는 옷을 갈아입고는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11이 되었을 때, 문이 열렸다. “오늘도 부지런하구나.” 오피스텔 1층 로비의 관리데스크에 앉아있던 흰 머리의 경비원이 단유를 보며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단유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로비를 가로질렀다. “새벽에는 차들이 빨리 다니니까, 차 조심하고.” “예.” 단유는 미소로 답한 뒤, 오피스텔 로비 문을 열고 나갔다. 3월 1일임에도 여전히 새벽의 차가운 공기에는 절로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바로 앞 대로에서 새벽 버스가 실내등을 밝힌 채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단유는 소매를 걷고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오피스텔에서 길 안쪽으로 두 블록 정도를 들어가면 작은 공원이 있었다. 오피스텔에서 공원까지 갔다가 공원 위의 산책로를 한 바퀴 돈 후 바로 집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매일 반복하는 단유였다. 작은 동산이라도 경사가 조금 있어서 코스를 따라 달리면 약간 숨에 차는 정도였다. 등줄기로 땀이 조금 흐를 때쯤 돌아온 단유는 부스스한 머리로 TV를 보던 하은과 마주했다. “단유 왔니?” 하은은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오른손에 든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우아하고 품위 있게 새끼손가락을 치든 자세로. “씻고 올게요.” 단유는 방으로 들어가려다 다시 거실로 나왔다. “왜?” “저희 국기 안 달아요?” 오는 길에 몇몇 집에 달린 국기를 보고 오늘이 3.1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3.1절에 국기를 계양한다는 사실도 떠올렸다. 보육원에 있을 때는 생활지도원이 알아서 국기를 계양했기에 따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오피스텔에도 국기 게양대에 국기를 꽂아 넣은 집이 몇몇 보였기에 하은에게 말한 것이었다. “없어.” “뭐가요? 국기요?” “응.” 그렇구나.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곤 방으로 돌아가려다 다시 몸을 돌렸다. “그럼 우리는 국기 게양 안 해요?” 하은은 단유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우아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단유는 어쩐지 더 물었다가는 하은의 기분이 더 나빠지게 될 것 같아서 그냥 방으로 들어갔다. 단유가 방으로 들어간 뒤, 하은은 소파 앞 테이블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주영아, 응 나야. 아니 별 일은 없고, 그냥 물어볼 게 있어서. 저기…오늘 국기 달아야 돼?” 한 동안 핸드폰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은은 주영의 마음이 자기와 같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 몸을 씻고 나온 단유는 마침 시간 맞춰 출근하시는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한 뒤, 아침 식사시간 전까지 책을 읽었다. 고작 1시간이지만 그래도 글을 읽고 그 여운을 즐길 시간은 됐다. 이사 온 후, 좋았던 점은 자기가 읽고 싶었던, 혹은 읽으면 좋을 책들로만 구비된 책장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아마도 재훈이 고르고 주영이 구입한 책일 것이다. 책의 가지 수가 도서관보다 작다고는 해도 당장 읽기에 무리가 없었다. 특히 재훈은 짧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독서습관을 기르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런 이유로 준비된 책이 철학 서적이었다. 비교적 난이도가 높지 않은, 청소년 필독서 정도로 지정된 책들이었는데, 단유는 그 중의 하나를 아침마다 조금씩 읽으면서 지식을 쌓아나갔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좋은 말이다. 하지만 공자의 의도와는 조금 다르게, 단유가 학습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단지 배움의 기쁨에만 있지 않았다. 배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함에 있었다. 단유에게 학습이란 좋게 말하면 열정이고, 격하게 표현하면 투쟁이었다. 때문에 지금까지의 공부법은 되도록 많은 책을 읽고 지식이든 상식이든 체계화시켜서 기억하는 방식이었다. 즉, 한 구절 한 구절을 음미하면서 행간의 의미를 되새기는 공부법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철학이라는 책은 그렇게 공부하면 안 된다는 재훈의 조언을 따라, 아침에 한 페이지나 두 페이지 정도를 읽으면서 그 챕터의 의미를 되새기는 공부법을 익히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러한 단련이 익숙하지 않은 단유였다. ‘마치 디아트리한테 배울 때랑 비슷한 것 같아.’ 단유가 그렇게 동양 철학에 대한 몇 가지 지식들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고 있을 때, 명수가 하품을 하며 방에서 나왔다. “석고, 안녕?” 단유가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아주면, 명수는 거실로 가서 TV를 보는 하은의 곁에 앉았다. “씻고 와.” 라는 하은의 말에 “예.” 라고 대답하면서 식사시간까지 함께 TV를 보는 일상이었다. **** “아줌마, 이거 더 없어요?” 명수가 계란후라이가 담겼던 접시를 가리켰다.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두 개를 더 만들어 주었다. “너 좀 있는 대로 먹어라. 다른 거 먹을 것도 많구만, 매번 아주머니 귀찮게 그래?” “아유, 난 괜찮아. 애가 얼마나 먹고 싶으면 그러겠어?” 아주머닌 명수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명수는 시금치를 집어먹던 와중에 아주머니를 보며 고맙다고 넙죽 인사를 하곤, 누가 집어들 새도 없이 순식간에 계란 두 개를 입안으로 집어넣고 우물거렸다. “너 요즘 부쩍 많이 먹는 것 같다?” 하은이 젓가락으로 김치 한 조각을 집어들면서 말했다. “운동하잖아요. 운동할 때는 많이 먹어도 돼요.” “넌 먹으려고 운동하는 거지?” “당연하죠.” 하긴 누군들 안 그럴까? 다들 먹고 살려고 일하고, 먹고 살려고 운동하는 거겠지. 하은이 나름의 방식으로 명수를 이해해보면서, 식사를 마쳤다. “아, 단유야. 오전에 국기나 사러 가볼까?” 하은의 말에, 명수가 먼저 반응했다. “국기는 왜요?” 하은은 쓰라릴 정도로 날카로운 눈매로 쳐다보며 물었다. “오늘이 무슨 날이니?” “오늘이요? 오늘 무슨 날이야? 석고 생일인가?” “3.1절.” 단유의 대답에 명수가 이마를 치며 말했다. “아차, 깜빡했네.” 저 어색한 말투라니. 깜빡이 아니라 전혀 모르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굳이 그걸 지적할 필요는 없었다. 명수와의 대화는 늘 그런 식이었으니까. “국가의 기념일에는 국기를 매다는 거야. 사실 선생님도 깜빡하고 있던 거라서 부끄럽긴 한데, 그래도 초등학생이 둘이나 있는 집에서 국기를 안 다는 것도 교육적으로 좋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지. 그런 이유로 오전에 국기를 사서 게양하기로 결정했다. 고로 같이 갈 마음이 있니? 단유야?” “전 왜 안 물어보세요?” “명수, 넌 그냥 따라올 거잖아?” “맞아요.” 헤헤거리는 명수를 잠깐 흘겨본 하은이 단유에게 물었다. 예의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단유가 말했다. “저도 갈게요. 근데 어디로 가야돼요?” 하은은 잠시 인터넷으로 검색했던 바를 말했다. “다른 데는 모르겠고, 주민 센터에서 국기를 판다고 하니까, 거기 가보려고. 멀지 않아. 저기 동산 아래에 주민 센터가 있다고 하니까, 거길 가볼 작정이야. 어때?” “예. 그럼 아침밥 먹고 바로요?” “선생님도 준비를 해야 되니까, 1시간 뒤에 나가자.” 하은이 방으로 들어간 뒤, 명수는 단유를 끌고 TV앞으로 갔다. “왜?” “이거 재밌어. 오늘 저기 저 여자가 시어머니한테 바람피운 거 걸리는 날이야.” “그게 뭐야?” “나도 잘은 몰라. 그런데 보통 이럴 때 시어머니가 여자를 때리는 데 그게 재밌어.” 방에 들어갔던 하은이 허겁지겁 뛰어나와서 TV를 껐다. “야! 인명수! 너 아침에 TV시청 금지야! 절대! 알겠어?” “왜요?” 힘없이 항변해보는 명수에게 눈을 부라리는 하은이었다. 찔끔 놀란 명수는 물가에서 쫓겨난 사슴처럼 방으로 들어갔다. **** 의외로(?) 주민 센터에 태극기를 사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잠깐을 기다려 국기와 깃대를 산 하은 일행은 아침 햇살을 맞으면서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창가에 걸린 깃대에 태극기를 꽂아 넣으니, 하은은 왠지 뿌듯했다. 두 아이를 책임진 ‘선생님’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만족감이었다. “얘들아, 어때? 태극기가 바람에 날려서 펄럭이는 모습이 멋있지 않니? 막 애국심이 솟구치면서 나라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는 것 같지?” “…….” 명수와 단유가 서로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국기가 말이야, 사실 그냥 그린 게 아니라는 거 아니? 각각의 문양에는 다 뜻이 있단다.” 하은은 다소 들뜬 목소리로 국기에 대한 의미를 설명해주었다. 태극문양의 의미와 건곤감리의 4괘의 의미로 시작해서, 태극기가 만들어진 유래와 관련된 비화까지 상식이 닿는 한까지 설명을 이어나갔다. 한참을 듣던 명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시험에 나오나요?” “시험에 안 나와도 배워야 하는 거야.” 명수가 다시 손을 들었다. “안 외우면 어떻게 돼요?” “무식한 사람이라고 욕먹겠지?” 명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럼 별로 상관없을 것 같은데.’ 하은은 가만히 있는 단유를 바라보며 물었다. “단유야, 너는 궁금한 거 없어?” “질문해도 돼요?” “그럼 되지.” “건이 왜 하늘이에요?” “응?” “각각이 상징하는 게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왜 그런 뜻인지 궁금해서요. 작대기의 길고 짧음으로 다른 무엇을 상징한다는 게 신기하고 궁금해요.” 하은은 가만히 단유를 바라보았다. 귀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며 바깥에서 휘날리는 태극기에 시선을 주었다. 단유는 하은의 뒤통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선생님, 저 화장실 좀 갈게요.” 하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유는 일어나 명수의 손을 붙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하은은 한참동안 바람에 휘날리는 태극기를 바라보았다. ======================================= [162] 뉴웨이브(2) 저녁식사를 마친 뒤, 하은이 두 사람을 앞에 앉혀두고 점검을 했다. “방학숙제는 다 챙겼지?” “네.” “내일 아침에 아침 먹고 바로 차 탈거니까, 명수는 일찍 일어나서 씻고 준비해야 돼. 알았지?” “네.” “학교 마치면 그 때는 너희들이 스스로 돌아와야 돼. 길은 알지?” 이미 며칠 전에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돌아오는 방법에 대해 배운 두 소년이었다. 명수가 조금 걱정은 되지만, 단유가 있으니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하은은 그 외에도 몇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주며 당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제가 발생하면 바로 나한테 전화해야 돼. 알았지?” 하은은 보육원을 벗어난 두 아이가 새로운 질서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 동안은 거의 반쯤 집에 가둬놓고(?) 생활해 왔던 터라 걱정이 덜 됐는데, 내일부터는 완전히 새로운 생활을 맞이하는 것인지라 두 아이는 물론, 자신 역시 걱정이 많았다.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면서도 굳이 피하려들지 않았다. 이제는 두 아이의 뒤를 봐줄 ‘선생님’으로서의 의젓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내일부터는 학교 마친 뒤에 선생님이랑 같이 공부할 거야. 특히 명수 너는 공부 좀 많이 해야 되겠더라. 그치?” 명수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면서 명수의 어깨를 톡톡 쳐주었다. “단유는 추가로 1시간 더 공부할거야. 그 때는 지난 방학 때 배웠던 공부의 연장이다. 오케이?” “네.” 잘된 일이었다. 이번 방학 때도 과외를 하려 했지만, 이러저러한 일들이 터지면서 시간이 마땅치 않았기에 할 수 없었던 공부였다. 학교 공부쯤이야 널널하게 해도 시간이 남아도는 편이니, 따로 ‘선행학습’을 더 해도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오늘은 일찍 자고, 내일 늦잠 자면 용서 안 할 거다.” 특히 명수를 바라보는 하은의 눈빛에 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들 자기 방으로 해산!” “저기, 선생님!” 명수가 손을 들었다. “왜?” “오늘 마지막 날인데, TV보면 안돼요?” 하은은 명수를 보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만 제대로 챙겨놓고 봐라.” 명수가 헤벌쭉 웃었다. 빨리 서두르면 5번에서 하는 일일드라마는 볼 수 있으리라. **** 특별한 일이 있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너무나 평범하고 별 볼 일 없는 개학식이었다. 단유는 5학년 1반에 배정되었고, 명수는 운명의 장난인지 5학년 2반에 배정되었다. “누가 일부러 이렇게 하는 거 같지?” 명수는 투덜거리면서 옆 반으로 들어갔다. 단유도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늘 그랬듯이, 명수는 곁에 있었으니까. 5학년이 되면서 달라진 가장 큰 점은 아무래도 교실이 위치한 층이었다. 5학년 교실은 가장 위층인 4층에 있었다. 남는 교실은 교과전담실이나 영어실 등으로 사용되었는데, 6학년이 되면 본관 뒤의 별관 2, 3층으로 밀려나게 된다. 아무튼 가장 위층에 오게 되니, 아이들은 저도 모르게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게 되나 보다. 복도 맨 끝의 1반 교실로 향하던 단유가 지나가던 아이와 어깨가 부딪혔다. “뭐야?” 옆의 아이와 장난치며 뛰던 아이는 마주오던 단유를 보지 못했고, 단유는 피한다고 피했는데, 좁은 복도 가운데를 뛰어다니는 아이에게서 완전히 피하지 못해 어깨가 충돌하는 사고가 벌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힘에 밀린 것은 뛰어오던 아이. 낯선 얼굴의 소년은 단유와 부딪히는 순간,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 했지만 다행히 넘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소년의 입은 전혀 다행스럽지 않았다. “사과 안 하냐, 이 새끼야?” 한 학년에 7개 반이다 보니, 5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같은 반이 되지 못한 아이도 많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였다. “니가 뛰어 왔잖아.” “웃기고 있네, 봤으면 피하면 되잖아? 일부러 부딪힌 거잖아!” 첫날부터 이게 웬 소란인가 싶어, 아이들의 시선이 몰릴 즈음 명수가 교실에서 뛰어나왔다. “석고야, 어? 너 뭐야!” “명수네?” 어깨를 부딪쳤던 아이가 명수를 알아보았고, 명수의 호명에 자기 앞에 선 아이가 단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니가 단유냐? 야, 공부 잘하면 다냐? 공부 잘하면 어깨 치고 다녀도 돼?” “억지 부리지 마. 난 분명히 피했어. 지금 내가 선 자리도 복도 가장자리야.” “말빨 죽이네. 이….” 이 때 명수가 끼어들었다. “성재림, 까불지 마라. 니가 뭔데 석고한테 시빌 걸어?” “너야말로 끼어들지 마. 내가 피해자거든?” 단유는 소란이 더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개 숙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명수야, 넌 그냥 들어가. 난 괜찮으니까.” “석고야.” 단유는 명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명수도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듯, 턱을 살짝 내리고 다리를 벌려 움직이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짧은 한숨을 쉰 단유가 다시 재림을 쳐다보았다. “이 와중에 니가 뛰어오는 모습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을 리도 없고, 그런데도 이렇게 우기면 너만 망신이야. 대신 첫날이니까 그냥 없던 일로 하고 조용히 넘어가자.” “웃기고 있네, 니가 뭔데 조용히 하라 마란데? 응?” 어느새 1반과 2반 아이들은 물론 다른 반 아이들까지 슬금슬금 모여 들면서 신학기 맞이 특급 이벤트를 구경하기 위한 인파가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단유는 이벤트 진행자도 아니었고, 이런 이벤트를 신청한 적도 없었다. 도리어 아이들 입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은 피하고 싶은 심정. 단유는 한 발 다가갔다. 재림도 물러서지 않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가 조금 더 큰 편이지만, 거의 비슷한 신장의 두 사람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가깝게 마주섰을 때, 재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새끼, 한 번 붙을래?” “너, 싸움 잘 해?” 단유가 날씨 어떠냐고 묻는 듯 덤덤히 물었다. 그 침착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재림이 단유의 멱살을 쥐려 할 때, 단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절묘한 타이밍에 물러서는 바람에 재림의 손은 허공을 갈랐고, 순간 중심을 잃고 비틀댔다. 그 때, 오른손을 내밀어 허공을 방황하는 재림의 손목을 붙잡은 단유는 그대로 안으로 잡아 끌었다. 중심을 채 잡지 못했던 재림이 어어, 거리면서 앞으로 넘어지려 할 때, 단유는 친절하게 어깨로 재림을 받았다. 턱이 어깨에 부딪히며 자세가 무너지려던 재림. 손목을 끝까지 붙잡고 있던 단유가 손을 치켜들면서 재림이 넘어지지 않도록 도왔다. 그리고 어깨에 기댄(?) 재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니가 잘못한 거야.” 재림의 손목을 있는 힘껏 쥐려던 그 때, 뒤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니들 뭐하는 거야!” 정어리 떼처럼 모여 있던 아이들은 상어 같은 선생님의 등장에 와, 하며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단유도 때를 같이하여 손목을 놓아주었다. 재림은 얼른 몸을 추슬러 바로 세운 뒤, 단유를 노려보다가 교실로 들어갔다. 단유는 그 모습을 보다가 한 숨을 쉬고는 뒤를 따라갔다. 불행히도 같은 반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소리를 지르며 복도를 가로지른 날카로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5학년 주임이자 1반 담임을 맡은 이경자 선생님이었다. 아이들이 뭉쳐있던 와중에도 가운데서 싸우던 아이들의 모습을 목격했던 선생님은 곧 탐문을 벌였고, 달리 조사할 필요도 없이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사람은 앞에서 1등이라고 떠들던 아이고, 한 사람은 뒤에서 1등이라고 떠들던 아이네. 서로 1등끼리 한 번 붙어 본 거야? 제발 얌전히 좀 지내라, 알겠니? 우리 반에서는 성적 불문, 이유 불문하고 싸우면 무조건 상담실에서 반성문 100장 쓰게 만들 거다. 알았니?” 단발에 검은 스모키 화장을 한 건 아닌지 의심스러운 다크 서클의 중년 담임선생님은 그렇게 가벼운(?) 엄포를 놓은 뒤, 두 사람을 자리에 앉혔다. “한 사람이라도 주먹질했으면 가만 안두겠지만, 첫 날이라서 적당히 봐준 거야. 특히 너, 선생님이 두고 본다.” 선생님들 사이에서 다른 의미로 유명했던 재림은 입을 삐죽이며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건들거렸다. “자세 바로 안하지? 응? 손 빼라.” 재림은 손을 책상 위에 턱 하고 올렸다. 담임은 엄지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다가 신경 끊는 게 상책이라는 듯, 시선을 돌려버렸다. 출석부를 교탁 위에 올려놓은 담임은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그 이후, 자연스럽게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되었고 아이들의 자기소개시간까지 이어졌다. “김단유라고 합니다. 취미는 독서이고 특기는 없습니다.” “특기가 시험 100점이라던데?” 선생님의 너스레에 아이들이 우우, 하는 야유를 보냈다. “시끄러워, 다음.” “손연미라고 합니다. 취미는 그림이고 특기는 춤입니다.” “와!” 반에 반드시 10명 이상은 춤을 특기로 삼는 풍속이라도 생긴 걸까, 담임은 머리를 긁적이며 계속 소개를 이어나갔다. “성재림이고요, 취미는 …오락이고요, 특기는 권투입니다.” “체육관에서 배우는 거니?” “…아니요, 집에서 혼자 연습하는데요.” 어쩐지 ‘집’이 아니라 ‘스트리트’라고 말할 것 같은 인상이었지만, 담임으로서 체통을 지키기 위해 더 캐 묻지는 않았다. 그렇게 긴 자기소개가 끝난 뒤, 선생님은 학생들의 자리를 지정해주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인증된 가장 확실하고 반발이 덜 나는 순서는 바로 ‘키순서’였다. 이 지루한 작업은 매 학년 첫 학기마다 진행이 되는데도 적응이 잘 되지 않았고, 늘 어수선했다. 교실 앞뒤로 남녀를 키순서대로 줄을 세우고, 음표 마디를 구분하듯 분단을 구분해서 자리에 앉혔다. 성장기 아이들의 키는 하루가 다르게 커가기 때문에 작년에 앞에 앉았던 아이가 한 학년이 지나면 제일 뒷자리에 앉기도 했다. 그래봐야 거기서 거기인 아이들이지만, 제일 뒷자리는 선생님으로부터 가장 먼 자리라는 특혜가 주어지기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탐을 내는 자리였다. 그리고 올해 뒷자리의 영광을 거머쥔 사람 중에 단유와 성재림이 있었다. 단유가 방학동안 또 한 번의 폭풍 성장으로 160을 향해 다가가는 중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성재림 역시 단유와 키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고,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 같은 줄에 앉게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짝이 된 것은 아니었다. “반가워.”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털털하게 인사하는 사람은 단유의 새로운 짝이 된 공소연이었다. 어깨 아래로 내려오는 긴 머리에 진한 눈썹이 특징적인 여자아이였다. “니가 그 유명한 단유구나. 우리 엄마가 니 이야길 많이 하더라.” 단유는 지금껏 그와 같은 이야기를 수십 번 들었음에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왜 모두들 자기 어머니가 자길 이야기했다고 이야기할까? 자신은 그 엄마들을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데 말이다. “나도 반갑다.” 그렇다고 방긋거리는 새 짝에게 캐물어 볼 수는 없으니, 평범하고 짤막하게 인사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 와중에 그녀의 머리 건너편으로 날카롭게 쏘아보는 재림의 시선이 신경에 거슬렸지만, 일단은 참아보기로 했다. 올해도 단유의 목표는 ‘조용히’ 1년을 보내는 것이었다. 시끄럽고 야단법석인 상황은 결코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다. ‘아침의 일은 불길함의 징조였을까, 아니면 액땜이었을까?’ 속으로 미래를 점쳐보는 단유였다. **** 수업이 끝난 후, 아이들이 첫날의 풋풋함 따위는 모두 교실에 남겨두고 지긋지긋한 학원과 체육관으로 일상을 전전할 때, 일단의 무리는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아파트로 향했다. 그 아파트에는 외따로 떨어진 놀이터가 있었는데, 어느 곳이나 비슷하겠지만, 이런 장소에 위치한 놀이터는 심심한 일상에 일탈을 꿈꾸는 아이들의 아지트가 되기 일쑤였다. “후, 정말 짜증나네. 아침부터 별 개 같은 놈이 엉겨 붙는 바람에 기분 잡쳤어.” “야, 나는 진짜 큰 일 나는 줄 알았다. 단유 걔, 오늘 완전 사망각이었는데, 그치?” “킥킥, 걔가 재수가 좋았지. 그 때 딱 선생님 올 줄이야. 혹시 몰래 지켜보다가 걔 죽을 거 같으니까 나타난 거 아냐?” “그럴 수도 있겠네. 1등하는 애니까 선생님도 좋아하잖아?” “씨발, 1등이 뭐 대단하다고.” “그래, 너도 1등이다. 뒤에서 1등.” 아이들은 놀이터 가운데 위치한 미끄럼틀 아래의 좁은 공간에 모여서 입으로 하얀 뭉게구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천장에 부딪힌 구름이 스멀스멀 움직이면서 미끄럼틀을 감싸고 오르더니 원뿔 모양의 지붕의 끝에 다다를 쯤에는 스르르 흩어져 버렸다. ======================================= [163] 뉴웨이브(3) 발령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교과 담당만 맡는 교사들의 경우와 달리 담임교사들은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피로를 호소하기 마련이다. 특히 갓 담임을 맡은 선생님들은 아이들과 하하 호호 웃으면서 꿈과 이상의 판타지적인 교실을 꿈꾸며 학기를 시작했다가, 곧 현실을 깨달으면서 좌절하거나 절망하는 경우도 있고 더러는 아예 교직생활을 관두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를 지나 경험과 노련미가 쌓이게 되면, 부처님처럼 아이들을 손바닥 위에 놓고 굴릴 수 있는 스킬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특히 다년간의 노하우가 쌓이면서, 여타의 선생님들이 말하는 수업 진행의 부담이라는 것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로 교육부에서 개선책이랍시고 몇 가지 내놓는 특이한 수업지도서 때문에 머리를 감싸 쥘 때도 있지만, 이 역시도 어느 정도 지나면 별 의미가 없어졌다. “자, 다음 41페이지 문제 있지? 선생님이 시간 줄 테니까 1분 안에 풀어보기, 시작!” 아이들은 익숙하게 노트에 문제를 적고 풀어보기 시작했다. 노트 위에 흑연이 새겨지는 소리가 사각사각 대며 교실을 채울 때, 몇몇 아이들은 샤프 대신 두 손을 맞잡고 기도를 했다. “자, 훈이랑 미진이랑 나와서 칠판에 풀어 봐요.” 두 아이가 어정쩡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설 때, 몇몇 아이들은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하다고 생각했고, 몇몇 아이들은 무사히 넘겼음에 안도했다. 교과서가 개정될 때마다, 수학의 난이도가 조금씩 어려워지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초등학교 수학이라는 게 그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경자선생님은 능숙하게 아이들을 지도해 나갔다. 가끔 시선이 단유에게로 갔지만, 여태 들어왔던 이야기들이 있었던지라 가볍게 무시했다. 단유도 별로 수학시간이나 과학시간, 아니 거의 모든 시간에 튀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선생님도 안심하고 거를(?) 수 있었다. “훈이는 들어가고, 미진이 넌 여기가 틀려서 답이 딱 안 맞게 나오는 거야. 여기서는 더하기를 해줘서 풀어줘야지. 그러면 …이렇게 답이 나오지? 여러분들도 알겠죠?” “예!” “미진이도 이제 들어가.” 미진이는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이 선생님은 다음 페이지를 펼치고 수업을 진행했다. 모든 아이들을 사랑과 정성을 격려하는 것은 초임교사들만의 것이었다. 조금 경험이 쌓이면 초등학생이라고 부르는 이 나이때 아이들의 본성과 특성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러면 마냥 격려하는 게 도움이 되지 않고, 때로는 엄하게 벌을 줄 필요도 있음을 알게 된다. 지침상 매를 들지 않지만, 매를 들지 않고도 아이들을 혼낼 수 있는 스킬에 매년 레벨업했다. “재림이, 넌 니가 뭘 잘못했는지 알아? 몰라?” “…….” “대답 안하고 있으면 선생님이 널 용서해 줄 것 같아? 안 해줄 것 같아?” “……” “응?” “…안 해줄 것 같아요.” “그러면 대답을 해야겠지?” “네.” “니가 뭘 잘못했어?” “수업시간에 떠들었어요.” “또?” “앞에 앉은 애랑 장난쳤어요.” “수업시간에 정구랑 장난쳤지?” “네.”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장난치지 말라고 했는데도 선생님 지시를 어겼고, 니가 장난치면서 떠드는 바람에 니 짝이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지? 또, 선생님이 수업 중간에 너 때문에 수업을 멈추면 다른 친구들도 수업을 계속 못하니까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지? 니가 잘못한 게 맞지?” “…네.” “교실 뒤로 가서 10분간 손들고 서 있어. 그리고 앞으로는 수업시간에 떠들지도 않고, 장난도 안치겠다고 속으로 반성하고 있어야 돼. 알았지?” “네.” “다음에 또 떠들면 학교 끝나고 남아서 선생님이랑 상담해야 돼. 알았니?” “네.” “어떻게 한다고?” “학교 끝나고 남아서 상담이요.” “떠들면 안 되겠지.” “네.” “뒤로 가서 손들고 서 있어.” 아이들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누차에 걸쳐서 지적하고 반성하게 한다. 마음 같아서는 파블로프의 실험처럼 매를 통한 조건 형성으로 아이들을 훈육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몸으로 체감하기 때문에 더 효율적일 수도 있었다. 그 정도 훈육이 아이들의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 시대가 어떠한가? 잘못하면 교육부 감찰이 아니라 경찰서 조서를 마주해야 할 일이니, 몸을 사릴 뿐이었다. 개성 강한 아이들을 모아놓은 교실에서 천편일률적인 교육환경을 구성하여 통제하고 교육하는 현 교육계를 비판할 마음이 없지는 않지만, 자기가 뭐라고 한 마디 한다고 해서 바뀔 일도 아니었기에 이 선생님은 오늘도 철저히 교과지도서의 틀에 맞춰 자신의 노하우를 듬뿍 첨가한 수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대부분 아이들은 잘 따라오는 것 같았다. 쉬는 시간, 몇몇 아이들이 재림을 중심으로 뭉쳐서 수다를 떨었다. “너 졸라 짜증났겠다.” “아니, 별로.” 재림은 먼 산 바라보는 표정으로 느긋하게 대답했다. “왜? 선생님한테 졸라 혼났잖아? 나라면 졸라 짜증 날거야.” “난 좋던데? 뒤에 서 있으면, 책 안 봐도 되고 문제 안 풀어도 되잖아.” 의자를 기울여 두 다리만으로 중심을 잡게 만들면서 앞뒤로 흔들거리는 재림은 여유만만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오오, 졸라 대단해.” “됐고, 점심 때 우리 팀 누구누구하기로 했어?” 아이들은 점심시간에 함께 할 축구시합의 멤버 구성에 열을 올렸다. 그들의 머릿속에 선생님의 훈육 따위는 한 톨이라도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 “자, 지금부터 반장선거를 시작해요. 우선 후보자들 나와서 자기 소개하자. 출석번호 순으로 하고, 우선 민기부터 앞으로 나와.” 1반의 반장 후보는 모두 5명이었다. 이전 학년과 달리 꽤나 많은 아이들이 입후보하여 경쟁을 펼쳤다. 아이들은 각자 집에서 공들여 준비한 듯 더듬지도 않았고, 유머를 섞어가면서 자신의 공약을 설명했다. 진지한 친구들도 있었지만, 대체로 재미있게 선거공약들을 설명했다. 개중에는 단유의 반에서 시행했던, ‘고맙습니다’ 정책을 공약으로 내걸어서 반의 화합을 도모하겠다는 아이도 있었다. “자, 그럼 각자 마음에 드는 사람 이름을 적어서 선생님이 지나갈 때 투표함에 접은 종이를 넣도록 해요. 종이는 두 번만 접어야 돼요. 알았죠?” 단유는 무심코 이름을 적으려다 생각에 잠겼다. 예전에는 반장의 역할에 대해 별로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어차피 반장이 이런 저런 공약을 내걸어봐야 그대로 시행되는 것은 거의 없었고, ‘우리 반이 더욱 활기찰 수 있게 하겠습니다’ 같은 모호한 공약 따위는 있으나마나한 이야기였다. 반장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수업시간 전후로 선생님께 인사하는 정도? 그리고 학급회의 진행을 맡는 정도가 반장 업무의 70, 80%는 될 것이다. 그러니 누가 반장이 되던, 단유에게는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아이들도 비슷하게 생각하던 바였다. 그러나 지난 학년에서 직접 겪은 바, 그리고 지난 겨울의 일들을 통해서 느낀 바, 아무나 반장으로 뽑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말 아무것도 안하면 그냥 이름만 반장인 채로 남을 수 있는 직책이지만, 하고자 한다면 보다 얼마든지 반장의 직위를 이용해 무언가를 바꿀 수도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5학년이 되고 5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반장 선거에 입후보한 것에도 그런 의식의 변화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비록 단유는 ‘조용한’ 생활을 꿈꾸기 때문에 극적인 변화나 무리한 개혁 따위는 원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치게 적극적인 공약을 내거는 후보들은 제외하고 싶었다. 괜히 불붙여놓고 수습도 못하면, 피해는 반 아이들이 책임져야 할 테니까. 가령, 두 번째 후보였던 성재라는 아이는 “반의 환경 미화를 위해 아침과 오후 두 차례 뿐만 아니라, 점심시간에도 청소당번을 만들어서 깨끗한 교실을 만들겠습니다” 라고 했다. 이 공약은 듣기에는 좋지만, 수행해야할 아이들의 피로도는 전혀 고려치 않고 있으니 따르고 싶지 않았다. 물론, 선생님은 이 공약이 나왔을 때 눈을 반짝였다. 네 번째 후보였던 현화는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매 주마다 원하는 짝과 앉을 수 있도록 건의하겠습니다!” 라고 공약을 내걸었는데, 일단 그 번거로움은 차제에 두더라도 가장 큰 문제는 대원칙인 선생님의 방침에 위배되는 공약이었기에 실현 가능성 제로였다. 그런 공약을 내거는 것 자체가 아이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실현 가능성을 제대로 검토도 하지 않았음을 고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들었더니, 막상 적을 이름이 마땅치 않게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종이는 여전히 빈 종이였고, 선생님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단유는 고심하다 결국 한 사람의 이름을 적어 냈다. “…이렇게 해서 반장은 총 15표를 얻은 박경호가 우리 반 반장이 됐어요. 다들 박수.” 아이들은 신나게, 혹은 기계적으로 박수를 쳤다. 경호는 앞으로 나와서 꾸벅 인사를 한 뒤, 당선소감을 발표했다.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우리 반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경호의 공약은 사이좋게 지내는 반을 만들기 위해, 대화의 시간을 따로 만들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하겠다는 공약이었다. 한 마디로, ‘잘 모르겠지만 듣기에 좋은’ 공약이었다. 4학년 국어 시간에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할 때,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발표할 법한 내용이었다. 담임선생님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애들 선거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그 뒤에 남은 PA, 학부모회가 중요했으니까. **** “석고야, 가자!” 명수가 뒷문을 열고 들어왔다. “잠깐만, 가방 덜 챙겼어.” 단유가 가방에 책을 집어넣고 있는데,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야, 인명수. 니네 반도 아닌데 마음대로 들어오고 그러지 말자. 응?”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명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이는 다름 아닌 재림이었다. “뭐?” 명수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 되묻자, 재림이 피식 웃으면서 명수에게 다가갔다. “내가 한 두 번은 참아줬는데, 왜 계속 니네 반인 것처럼 들락날락 거리냐? 니네 집에는 아무나 막 들어와도 아무 말 안하냐?” 재림과 명수가 눈을 맞대고 섰다. “아, 맞다. 니네 집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지? 나도 한 번 찾아갈까? 자원봉사 점수도 얻고 그래볼까?” “이 새끼가!” 명수가 눈을 뒤집으며 재림의 멱살을 붙잡자, 동시에 명수의 멱살을 붙잡는 재림이었다. “야! 성재림, 인명수! 너희 둘 뭐하는 거야!” 교사 책상에서 잡무를 보던 선생님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수업이 끝난 후 아이들이 교실을 빠져나가느라 소란스러웠던 탓에 앞에 계신 선생님의 존재를 잊어먹고 난리를 벌인 두 아이였다. “둘 다 앞으로 나와!” 아이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하교길 이벤트(?)를 감상하기 위해서 시선을 돌렸다. “누가 교실에서 싸우랬어? 응? 그리고 인명수, 넌 왜 남의 반에서 싸움질 하는데?” 명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안 싸웠는데요?” “멱살 잡은 것도 싸운 거나 마찬가지야! 성재림, 너는 선생님이 교실에서 싸우면 어떻게 한다고 했던 말, 기억해, 못해?” “…….” 시선을 아래로 떨군 재림은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주먹을 한 번 세게 쥐었을 뿐이었지만, 선생님은 이를 미처 보지 못했다. “이게 또 대답 안하네? 대답안하면 선생님이 어떻게 한다고 그랬어?” 재림은 명수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명수가 먼저 시비를 걸었어요.” “야, 내가 언제….” 어금니를 꽉 문 선생님은 손바닥으로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조용! 선생님 앞에서도 싸울 거야? 선생님이 그랬지? 이유 불문하고 교실에서 싸우면 가만 안두겠다고. 누가 시비를 걸었던, 교실에서 싸움을 하려는 자세가 나쁜 거라고, 선생님이 이야기를 했어, 안했어?” “…….” “죄송합니다.” 대답은 명수에게서 먼저 나왔다. 보육원에서 단체 생활을 하는 동안 숱하게 지적을 받고 혼나면서 컸던 명수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체득했던 아이다. 선생님은 시선을 돌려 재림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재림은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세만 보면 정말 재림이 억울한 일을 당한건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뒤에서 바라보던 단유의 눈에 재림은 그저 선생님 앞에 서 있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저런 행동을 보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오랜 경력의 선생님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이런 반항아 기질의 아이를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성재림, 대답안하지? 명수 너는 빨리 집에 가. 그리고 성재림, 넌 남아. 알겠어?” 명수는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싸우지 않겠습니다. 가보겠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한 매뉴얼이라도 있는 것인지, 척척 나오는 사과와 인사를 들으며 단유가 쓴 웃음을 지을 때, 명수가 뒤돌아섰다. 단유가 손짓을 하자, 명수가 헤실헤실 웃으면서 단유에게 달려왔다. “가자.” 두 사람이 뒷문으로 빠져나갈 때, 재림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두 소년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 [164] 뉴웨이브(4) “너 성재림이랑 아는 사이야?” 개학 첫 날에도 그랬고, 이후에도 가끔 부딪힐 때마다 이를 가는 모습을 보니 그냥 오다가마 만난 정도는 아닌 것 같아 명수에게 물었다. 명수는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자세로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응, 같은 반이었어. 3학년 때.” 명수는 발 앞에 놓여있는 돌멩이를 걷어찼다. 운동장 가운데 떨어져 있는 돌멩이들은 치워야 한다. 축구하다가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 “사이가 별로 안 좋았어?” “아니, 딱히 그런 일은 없었어.” 명수는 구르다 멈춘 돌멩이를 집어 들더니, 학교 담 쪽으로 집어 던졌다. 날아가던 돌멩이는 담에 톡 하고 부딪히더니 잡초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그 때랑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어떻게?” “그 때는 같은 팀에서 공 찰 때도 있었는데, 저렇게 막 시비 거는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아서.” ‘시비’라고 하니 재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까 화 많이 났었지? 괜찮아?” “응.” 단유는 명수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오늘의 명수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물론 단유는 이제껏 명수가 다른 아이들과 싸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심지어는 화를 내는 모습도 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명수가 재림의 멱살을 잡을 때 한 번 놀랐고, 재림이 명수의 멱살을 잡았을 때 곧바로 뛰어들 심산이었다. 마침 선생님이 제지하셨기에 끼어들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때는 재림의 멱살을 잡을 정도로 화를 내던 아이가 지금은 칠십 먹은 할아버지 모양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니 의아하게 생각되었다. “아까 화났던 거 아냐?” “아까는.” “그런데 지금은 다 풀렸어?” “뭐, 그냥 그래.” 잠시 뜸을 들이던 명수가 말을 이었다. “만약에 걔가 진짜 우리 집에 온다고 상상하니까 웃기더라고. 지금은 아무나 올 수 있는 집도 아니고, 만약에 진짜로 왔다가 선생님한테 붙잡히면, 걔가 막 울면서 빌걸?” “왜?” “선생님이 식탁에 걔를 앉혀 놓고 말하기 시작하면, 한두 시간은 화장실도 못가고 계속 이야기만 들어야 하잖아.” 명수는 이제껏 하은만큼 말이 많고, 빠른 선생님을 본 적이 없었다. 작정하고 입을 열면, 한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명수가 얼이 빠져 멍해 있는 모습과 반대로 선생님은 상당히 개운해 하는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나곤 했다. “진짜 날 잡아서 한 번 데리고 갈까?” 명수가 골똘히 생각할 때, 단유는 명수의 손목을 잡아 끌고는 버스에 올라탔다. **** “아 씨발, 진짜 짜증나서 못 살겠네.” 재림은 아지트인 미끄럼틀 아래에서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후 하고 연기를 뿜어냈다. 유난히 길고 진한 연기가 눈앞을 가렸다가 사라졌다. “그 새끼 한 번 밟을까?” 그러나 다른 아이들은 조금 떨떠름한 모습을 보였다. 사실 다른 아이들 입장에서는 명수가 크게 거슬리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었고, 심지어는 친한 아이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작년부터 빛을 발한 명수의 리더십에 동화된 아이들도 있었다. “그냥 한 번 봐줘라. 괜히 싸웠다가 피 보면 큰일 나. 걔네 선생님도 오고, 고아원에서도 사람들 나오고 그러면 어떡하려고.” 미끄럼틀 기구를 지지하는 기둥 하나에 등을 기대고 앉았던 아이 하나가 침을 뱉다가 말했다. “야, 그 보육원 없어졌어.” 그 말에 다른 아이들이 금시초문이라는 듯 놀란 얼굴을 하고 돌아보았다. “없어졌어?” “응. 우리 엄마가 하는 말 들었는데, 그거 아네스 보육원인가, 그렇잖아? 그거 없어졌대.” 그러자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던 아이가 물었다. “그럼 명수는 지금 어디 사는데?” “모르지, 그건.” 명수와 단유가 재훈이 마련한 집에서 하은과 같이 산다는 사실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1반과 2반 담임 선생님들의 경우에는 미리 이야기를 들어 알지만, 굳이 그 사실을 홍보할 이유도 없어 학부모 중에는 아는 이가 없었다. “야, 그럼 걔네들. 지금 길에서 먹고 자는 거 아냐? 거지처럼?” “어, 진짜 그런가?” “새끼, 단유 그 새끼 봐라. 그게 거지 얼굴이냐?” 단유의 흰 얼굴을 보면, 거지를 상상하기 어려웠다. 흑백 스트라이프 문양의 티셔츠를 입은 아이가 추측해보았다. “모르지, 집도 없는 애들인데 아침에 어디서 씻고 올 수도 있지.” ‘얼룩말 패션’의 추측에 ‘바가지 머리’가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야, 내가 전에 보니까 집 나온 형들이 공원에서 자고 일어나서, 공원 화장실 있잖아? 그런데서 씻고 나오긴 하더라.” “공원 화장실도 있고, 저기 저 빌딩에도 화장실 문 열리던데, 거기서 씻을 수도 있고, 찾으면 많을 걸?” “그런가? 그럼 먹는 건?” “야, 학교에서 먹을 거 주는데 뭐가 걱정이냐?” “저녁에는 배고프잖아.” 그 말에 기둥에 등을 기대고 연신 침을 뱉어대던 아이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우리 형이 그러는데, 편의점에서 날짜 지난 김밥 같은 거 거지들한테 무료로 주고 그런대.” “진짜?” 편의점 김밥은 맛있다. 그걸 무료로 준다고? 아이들의 눈이 빛났다. 재림이 혀를 차며 말했다. “야, 거지도 아니고 우리가 그걸 왜 먹냐?” “먹을 수도 있지, 새끼야. 공짜로 주는 건데 왜 안 먹냐?” “아 씨발, 진짜 거지같이 구네. 야, 그냥 내가 쏠게.” “오오! 웬일이야? 돈 생겼어?” 재림이 만 원짜리를 호주머니에서 꺼내자 아이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아빠 지갑이라도 뽀렸냐?” “묻지 마라. 그냥 가서 좀 먹자.” “콜!” 암굴에서 기어 나오는 환자들처럼 미끄럼틀 아래에서 한 명씩 빠져나오기 시작한 아이들은 놀이터 모래밭에 침을 뱉어대면서 편의점으로 향했다. **** “어서 오세요.” 텅 빈 교실에서 잡무를 보던 이 선생님은 교실 앞문으로 들어오는 여자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반겼다. 노란 카디건을 걸친 중년 여성은 선생님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재림이 어머니 되시죠?” “예, 예. 안녕하세요, 선생님.” 중년 여성은 교실이 어색한 듯, 주위를 둘러보면서 선생님이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아이들 의자라서 조금 불편하실 지도 모르겠네요.” “아, 아니에요, 선생님. 괜찮아요.” “차라도 드시겠어요? 티백 밖에 없지만, 녹차 어떠세요?” “아이고, 선생님. 제가 드려야 하는데.” 이 선생님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안 되죠, 그건. 그럼 큰일 나요.” 우스갯소리라도 되는 것처럼 웃으면서 화답한 선생님은, 이윽고 녹차가 든 종이컵 두 개를 들고 나타나 하나를 어머니 앞에 내려놓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학교에 오신 적이 없다고요?” “예. …사실은 제가 일을 하고 있는데 시간을 빼기가 쉽지가 않아서요.” 사실은 오늘도 겨우겨우 식당 주인에게 사정을 해서 빠져나온 참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까지 꼬치꼬치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재림의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자, 선생님이 예의바른 웃음을 지으며 상담이유를 설명했다. “다름이 아니고요, 원래 매 학기마다 학부모 상담주간이 있어요. 물론 강제는 아니라서 어머니처럼 바쁘신 분은 안 오셔도 상관은 없죠. 그런데 최근에 재림이 학교생활이 조금… 주의가 필요해 보였어요.” “예? 혹시 무슨 사고라도?” “아뇨, 사고를 친 건 아닌데요. 조금 걱정스러운 부분이 많이 보여요.”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요 며칠간 재림이 보였던 행동들을 설명했다. 이야기가 나올수록 재림의 어머니는 표정을 구기기 시작했다. “아시겠지만, 자녀의 교육이란 건 학교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요, 그렇다고 전적으로 가정에서 책임을 져야만 하는 것도 아니랍니다. 학교와 가정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책임을 함께 해야 하는 거죠. 아직 정확한 원인이나 이유를 모르는데 마냥 아이를 혼내는 것도 답은 아니고 말이죠. 그래서 어머니께 이야기를 드릴 겸, 또 가정에서의 재림이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들을 겸 해서 어머니를 모신 거예요.” 어머니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둘러말하지만, 재림이 문제가 가정에 있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사실을 반박하기도 힘든 것이 워낙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아빠 엄마가 모두 밖에서 일을 하고 저녁 늦게 집에 들어오는 탓에 아이들을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재림이 형이 있는데, 나이차이가 좀 나는 형이에요. 걔가 재림이를 돌봐준다고는 하는데 아무래도 부모만큼은 되지 않았던 것 같네요.” 비겁한 변명이지만, 그래서 무작정 방치한 것은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는지 어머니 입에서 형 이야기가 나왔다. 그에 번뜩 생각이 났다는 듯, 선생님이 물었다. “아, 그런데 혹시 말이죠. 굉장히 실례가 될 수도 있는데, 혹시 아버지께서 담배를 태우시나요?” “아, 예. 조금.” “집안에서 태우시나보죠?” 어머니의 눈이 심상치 않게 흔들렸다. “무슨 일 때문에… 혹시!” “아뇨, 그건 아니에요. 그냥 재림이 옷에서 가끔 담배 냄새 같은 게 나서 말이에요. 집 안에서 담배 태우시는 어른이 계시면 가끔 옷에서 그런 냄새가 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여쭤본 거예요. 오해는 하지 마세요.” 재림 어머니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셨다. 정말 깜짝 놀랐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어머니는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은 그 문제 때문에 종종 아이 아빠랑 다투거든요. 여름에는 그래도 가끔 밖에서 태우시는데, 겨울에는 집안에서 창문만 열어놓고 태우곤 하셔서요. 연기가 옷에 밴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애 아빠가 고집이 조금 세셔서….” 선생님은 괜히 집안 분란을 만든 게 아닌가 싶어 머쓱한 마음에 식어가는 녹차를 입에 댔다. 하지만, 아이 옷에서 담배 냄새가 배일 정도라면 지적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도 했다. “아무튼, 재림이가 조금 반항적인 모습도 보이는데 너무 심각한 문제만은 아니에요. 조금 빠르긴 해도 이 나이 때에 사춘기가 오는 아이들도 있거든요. 아시겠지만, 사춘기는 반항을 시작하는 나이기도 하니까요.” 선생님은 말을 고른 뒤, 어머니를 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까도 이야기한 문제지만, 원인을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평소와 다르게 불량하다거나 반항한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를 다그치는 것은 좋지 않을 수 있어요. 다만 아이들이 너무 엇나가지 않게 그 때 그 때 지적해주고 훈계해주는 게 중요해요. 그래야 아이가 너무 엇나가지 않거든요.” 그 이후로도 선생님은 재림의 어머니에게 이것저것 설명하며, 재림의 교육에 대한 가정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함을 설득했다. **** “인명수, 너 반항하니?” 하은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명수가 찔끔하며 입에 물었던 숟가락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선생님이 뭐랬지?” “…쩝쩝 소리 내지 말고 먹으라고요.” “알면서 왜 그래? 일부러 선생님 열 받게 하려고 그래? 분명히 말했잖아. 식탁 예절을 지키라고. 식탁 예절은 어른들과 있을 때만 지키는 게 아니라, 너희 친구들끼리 있을 때도 지켜야 하는 거야. 옆에 단유 봐라. 얼마나 조용히 먹니? 니가 늘 배고파하는 건 알겠지만, 밥 먹는 동안 듣기 불편한 소리를 내서 상대가 불쾌해한다고 생각해봐. 그 상대가 너랑 같이 밥을 먹고 싶겠니? 그런데 니가 그걸 안 고치면 어떻게 되겠어? 너랑 같이 밥 먹을 사람 없어지겠지? 그러다 나중에는 너 혼자 밥 먹어야 할지도 몰라. 너 혼자 밥 먹는 게 얼마나 외로운 지 알아? 내가 니들 오기 전에, 여기서 혼자 살 때 혼자 식탁에 앉아서 혼자 만든 반찬으로 밥 먹는데 얼마나 외로웠는지 알기 때문에 너한테 이런 이야기 하는 거야. 지어내는 게 아니라고. 그 심정을 알기 때문에 니가 그런 외로움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하는 거라고.” 이후로도 하은의 이야기는 줄줄 이어졌고, 그 사이 단유는 조용히 식사를 마쳤고, 하지만 이야기가 끝나지 않아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명수는 숟가락을 들지 못하고 식어가는 국을 바라보았고, 뒤에 서서 바라보던 아주머니는 차마 끼어 들 틈을 찾지 못해 안타까운 눈으로 명수를 바라봐 주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냥 이런 모습이 이 집의 일상이었다. 대신 아주머니는 국이 담긴 냄비를 다시 끓이기 시작했다. ======================================= [165] 뉴웨이브(5) -덜컹 정확하게 맞물리지 않았던 탓에 듣기 괴로운 알루미늄 마찰음이 텅 빈 집안을 울렸다. 문을 열고 들어선 재림은 대충 신발을 벗어두고 거실을 가로질렀다. 화장실 바로 옆에 위치한 방은 형과 자신이 함께 쓰는 방이었다. 방에 들어가 불을 켜니, 아침에 떠날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바닥에 펼쳐진 이불 위에 가방을 던져둔 재림은 책상 서랍을 열었다. 가장 윗 칸에 놓인 담배에서 한 개비를 꺼내들고 나온 재림은 화장실로 가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우.” 어두운 화장실에 담배의 끝이 빨갛게 타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외부의 가로등 불빛만이 실내를 어렴풋하게 비추는 가운데 하얀 연기가 눈앞을 가리면 마치 이 어둠마저 가려지는 착각이 들었다. 재림이 담배를 피운 것은 4학년 때였다. 아버지가 집에 두고 간 담배를 보고 호기심에 한 번 따라해 보았다. 그 때도 지금처럼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형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느라고 집에 늦게 들어왔다. 10시가 넘을 때쯤 형이 돌아오고, 그 이후 어머니와 아버지가 11시가 다 될 무렵 들어오셨다. 때문에 그 시간까지는 재림만의 시간이었고, 재림이 무엇을 해도 집안의 사람들은 잘 알지 못했다. 호기심에 불을 붙여 보았던 담배는 세 모금도 빨지 못하고 변기 속으로 들어갔다. 그 때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역한 맛만 나는 이런 걸 왜 아버지는 매일 피울까? 그러나 아버지는 늘 집에 돌아오시면 먼저 담배를 집어 드셨고, 화장실에서 담배를 태우셨다. 그리고 늦은 저녁을 먹고 난 뒤에 또 화장실로 가셨고,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태우셨다. “재림아, 얼른 자라.” 아버지는 자신을 보면 늘 그런 이야기를 했다. 딱히 공부하라느니, 운동 열심히 하라느니 하는 말씀은 없었다. 밥 먹었냐는 질문도 없었다. 늦은 저녁을 먹을 때 함께 숟가락을 들고 나면, 항상 똑같은 말을 하셨다. “얼른 자라. 늦었다.” 아버지는 늘 피곤해 하셨고, 하지만 피곤하다고 화를 내시거나 짜증을 내시는 경우는 없었다. 형에게는 자신에게 한 말과 다른 말을 하시는 것도 같지만, 내용을 잘 모른다. 하지만 형도 아버지와 오래 대화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형도 집에서는 거의 밥 먹고 잠만 자기 때문이었다. 담배를 모두 태운 재림은 안방에 들어가서 TV를 켜고 보기 시작했다. 어두운 방안에 TV에서 나온 현란한 빛의 군무가 펼쳐지고 재림의 무표정한 얼굴 위에도 색색의 빛들이 가면처럼 덧씌워졌다가 사라졌다. 한참을 보던 재림은 슬그머니 엉덩이를 떼고 다시 화장실로 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기 호주머니 안에 있는 담뱃갑에서 담배를 하나 꺼냈다. 두세 번 찰칵거리는 마찰음이 들리고 담배에 불이 붙었다. “후우.” 처음의 흡연은 역한 맛에 실패를 했지만, 여전히 호기심은 남았다. 담배에 대한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어른에 대한, 아버지에 대한 호기심이 남아 있었다고 해야 옳겠다. 두 번, 세 번 호기심이 거듭되면서 어느 순간 담배의 역한 맛은 사라졌고, 이제는 생각나면 화장실에 가서 담배를 즐기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꽁초를 변기에 버린 후, 이를 닦기 시작했다. 곧 형과 어머니가 올 시간이 되었다. TV를 끄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재림은 드러누워서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밖에서 웬 개소리가 들렸다. “멍, 멍.” 개를 키워볼까? **** “안 돼.” “왜요?” “누가 키울 건데?” “제가요. 제가 할게요.” “니가 씻기고 먹인다고?” “안 돼요?” “응.” “왜요?” “너도 잘 안 씻으면서, 누굴 씻긴다는 거니?” 명수가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하은을 바라보았다. “뭐? 뭐? 너 잘 안 씻는 거 맞잖아? 너 아침에 머리도 안 감고 학교 갈 때 많잖아? 선생님이 모를 줄 알았니? 그리고 개가 똥이나 오줌을 거실에 막 누고 다닐 텐데, 니가 쫓아다니면서 치울 거야?” “할게요. 진짜 잘 할게요.” “못 믿어.” 명수가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하은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봐도 안 돼. 차라리 축구공을 하나 더 사고 말지, 갑자기 왜 개를 키운다는 거니?” 명수는 TV를 가리켰다. 동물농장 재방송이 나오고 있는 TV 화면에 검은색 퍼그 한 마리가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하은이 질색을 하면서 명수를 바라보았다. “넌 저렇게 침 흘리는 개가 좋니?” 명수가 헤헤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개를 키우려면 많은 정성과 노력이 필요한데다, 시간도 많이 필요해. 그런데 넌 학교에 가 있을 때가 많잖아? 그럼 그 개를 돌보는 일을 누가 하겠니? 당연히 선생님이 하겠지? 그런데 선생님도 바쁘잖아? 선생님도 집에서 하루 종일 개만 돌보고 있을 수는 없거든? 그러면 개는 누가 돌보니? 아무도 안 돌봐주겠지? 그럼 생각해봐. 아무도 안 돌봐주는 개는 어떻겠니? 심심하겠지? 외롭겠지? 먹을 것도 안 챙겨줘봐? 배가 고파도 개가 혼자 먹을 걸 챙겨 먹을 수도 없으니까 하루 종일 낑낑거리면서 굶겠지? 그럼 개가 불쌍하겠지?” 명수는 단유를 바라보았다. 도와달라는 의미인데, 단유도 딱히 도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하은은 늘 저렇게 극단적인 예를 들어가면서 명수 기를 죽이는데, 사실 이번에는 틀린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지금 자신들은 좋은 사람들의 호의에 업혀 살고 있는데, 무언가를 따로 요구한다는 게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명수야, 이번에는 그냥 참자. 다음에 우리가 이 집에서 나가면 그 때 키우자.” “스톱. 단유, 너 무슨 소리니, 그게? 나가다니?” 하은이 단유의 말을 끊고 정색을 했다. 단유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설명했다. “명수랑 제가 영원히 이 집에 살 것도 아니고, 또 나중에 나이 들면 더 이상 후원도 받을 수 없잖아요? 그 때를 말하는 거예요. 그 때는 우리도 독립을 해야 되고, 우리가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니까요.” 단유의 말은 의젓했고 바른 말이었다. 하지만 하은은 단유의 말에 작게 충격을 받았다. 단유는 지금 이 삶을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특히 무언가 물질적으로 도움을 얻는 것에 대해 부담스러워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넌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니?” “지금 당장은 필요한 게 없어요.” 단유는 이사한 이후로, 단 한 번도 필요한 것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명수가 축구공을 살 때도 단유는 책 한 권도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물론 그 전에 재훈이 알아서 구입해 준 책이 많았다지만, 사실 책 말고도 필요한 게 얼마나 많을까? 하다못해 군것질을 하기 위해 용돈을 더 달라고 한 적도 없었다. 하은은 둘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쉬고는 둘을 방으로 들여보냈다. 그 이후, 주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 5학년이 되었을 때, 교과과정 상에서 변한 것은 바로 ‘실과’라는 과목이 등장했다는 것이었다. 해당 과목의 교과서를 펼쳐 든 단유가 제일 처음 든 생각은 ‘또?’ 라는 생각이었다. 1학년 때도 겪었던 일이지만, 학년 별로, 그리고 교과과목 별로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주제 중의 하나가 바로 ‘가족’이었다. 1학년 때부터 4학년 때까지 매 학년, 매 학기 초마다 나오는 주제였다. 국어 수업 때도, 영어 수업 때도, 도덕 수업 때도, 사회 수업 때도 나왔다. 그리고 이제 5학년이 되었더니, 실과 과목이 생기더니 첫 수업이 ‘가족은 왜 소중할까?’였다.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아기로 태어난 여러분들이 가족의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이렇게 자라난 것에 대해, 모두들 감사해야겠죠?” 선생님은 프로젝터에 투사된 ‘오붓한 가정의 모습’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이 단원을 통해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가족의 소중함과 가정생활의 중요성을 일깨워야 했다. 또 여러 가지 가족의 모습이 있음을 이해시키면서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배려심도 키울 수 있게 돕도록 지도서에는 나와 있었다. “가족에게 고마웠던 순간을 한 번 발표해 볼 사람?” 머리가 좀 굵어졌다고 5학년쯤 되더니, 아이들은 발표를 위해 손을 번쩍 들던 순수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선생님은 당황하지 않고 머리 굵은 아이들을 즐겁게 괴롭힐(?) 방법을 찾아 시도했다. “자, 보자. 오늘은 18일이니까, 18번?” 쭈뼛대며 일어난 소년은 입을 달싹이다가 어렵게 가족에게 고마웠던 순간을 찾아냈다. “핸드폰을, 사줬을 때, 고마웠, 습니다.” 예시가 발생하면, 아이들의 상상력은 제한된다. “생일 날, 플스를 사주셨을 때, 고마웠습니다.” “아빠가 출장을 가셨다가, 예쁜 신발을 사다주셨을 때, 고마웠습니다.” 고마웠던 순간을 찾기 어려워하는 아이도 있었다. “학원에 빠진 걸 들켰을 때, 엄마가 혼내지 않아서 고마웠습니다.” 선생님은 어색하지 않게 미소를 꾸미면서 어머니의 사랑을 열심히 포장했다. “어머니가 우리 연진이를 너무 아끼고 믿었기 때문일 거예요. 앞으로 학원에 안 빠지고 열심히 다닐 거죠?” “네!” “그래서 어머니가 혼내지 않았을 거예요. 어머니는 연진이에 대해 잘 알 테니까요. 잘했어. 앉아요.” 뿌듯해하는 연진이를 뒤로하고 시선을 돌리던 선생님은 교과서를 들추고 있는 단유를 보았다. 잠깐 고민했지만, 역시나 이번에는 패스. 괜히 잠자는 사자를 깨울 필요는 없으니까. 그리고 바로 옆 분단에 앉은 재림이 눈에 들어왔다. 턱을 괴고 한껏 불량함을 뽐내고 있던 재림과 눈이 마주쳤는데, 이번에는 재림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그래, 잠자는 고슴도치를 일부러 자극할 필요는 없지. “다음 페이지로 넘겨보세요. 다음은 12페이지에요.” 노련한 선생님의 안배에 아이들은 골고루 발표했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무사히 수업이 진행되었다. **** 식당 일을 하시던 재림의 어머니는 설거지를 하다 말고 한숨을 푹 쉬었다. “재림엄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옆에서 잡일을 하던 아줌마가 의아한 듯 쳐다보았다. 평소에도 근심을 달고 사는 재림엄마였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얼굴이 심상치 않아보였기 때문이다. “아니에요. 별 일 없어요.” 어머니는 가벼운 웃음과 함께 고개를 젓고는 다시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굴과 달리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간 일을 핑계로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다만, 큰 아이도 그렇고 작은 아이, 재림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일은 힘들고, 늘 시간에 쫓기는 생활이었지만 큰 애는 학교에서 시험만 치면 전교 수위에 들 정도여서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장남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큰 형이 있기 때문에 재림도 비록 신경을 잘 못쓰더라도 큰 형처럼 잘 자라나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선생님과의 상담 후, 아이의 학교생활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었다. 상담이 있었던 날은, 다시 식당으로 돌아간 뒤 빠진 시간만큼 더 일하느라고 평소보다 집에 늦게 들어갔었다. 때문에 상담내용에 대해 아이 아빠나 재림에게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그 이후로는 시간이 마땅치 않아서 여전히 이전과 똑같은 생활을 하는 중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마음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이야기를 해봐야 할 텐데.’ 아이 아빠한테 이야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다보니 속절없이 시간만 흘렀다. 그렇지 않아도 늘 피곤하고 힘들지만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인지 짜증 한 번 안내고 조용히 돈을 벌어오는 아이 아빠였다. 그런 사람에게 고민거리를 하나 안겨준다는 게 너무 미안했다. 이런 건 엄마가 처리해야 되는 거 아닐까, 라는 생각도 아이 아빠에게 말하는 것을 머뭇거리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재림 엄마. 재림 엄마!” “응? 네?” “정신 차리라고!” 화들짝 놀란 어머니가 돌아보니 싱크대 배수구가 막혀 물이 넘쳐흐르고 있는데도 모르고 있었다. “아이고.” 어머니는 서둘러 수도꼭지를 잠그고, 배수구를 막고 있는 음식 쓰레기를 손으로 건져냈다. “재림 엄마, 아무래도 이상해? 어디 아픈 건 아니지?” 함께 일하던 주방 아주머니가 들고 있던 대야를 내려놓고 다가왔다. 쓴웃음을 지으며 어머니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프긴요. 그냥 잠깐 딴 생각하느라고 그랬어요.” “젊은 사람이 벌써 그럼 쓰나. 그거 딴 생각이 아니라 정신이 그냥 나가는 거야. 그러다가 나중에 치매 온다? 재림 엄마도 매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 요샌 젊은 사람도 정신 놓고 다니다가 치매 걸리고 그런댔어. 재림이 대학갈 때까지는 건강해야지.” 식당에서만 15시간을 일하는 재림 어머니는 동료 아주머니의 걱정 어린 조언에 쓰게 웃으며 건져낸 음식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다시 설거지를 시작했다. 접시에 얼룩이 남지 않도록 신경을 쓰면서. ======================================= [166] 뉴웨이브(6) 그 날 저녁, 재림의 어머니는 남편의 식사를 챙겨주면서, 남편의 식사가 끝날 때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 보니, 늘 피곤해하는 남편을 배려하는 마음에 그 동안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형 아빠, 밥 다 먹고 이야기 좀 해요.” 아버지는 국을 뜨다 말고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무슨 이야기?” “다 먹고요.” 아버지는 잠시 그러다가, 다시 식사를 계속했다. “그냥 말해.” 어머니는 냉장고에서 차가운 물을 꺼내서 컵에 따른 뒤, 아버지 앞에 두었다. “일단 식사부터 해요. 길어질지 몰라서 그래요.” 아버지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냥 식사를 이어나갔다. 식사를 끝낸 후, 언제나처럼 담배를 들고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안방에 이불을 깔고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 곁으로 다가온 아버지는 TV를 켰다. 24시간 뉴스채널에서 배추 값이 올랐다는 뉴스를 하고 있었다. “끄고 이야기 좀 해요.” 아버지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가 리모컨을 들었다. 아나운서의 멘트가 중간에 잘리면서 방 안에 정적이 돌았다. “말해.” “실은요, 며칠 전에 재림이 학교를 갔다 왔어요.” 어머니는 어렵게 이야기를 시작했고, 선생님과의 상담 내용을 알렸다. 다 들은 후, 아버지가 물었다. “재림이가 누굴 때렸대?” “아니요. 그건 아니고요.” “그럼 왕따라도 당해?” “아뇨. 친하게 지내는 아이들도 있는 것 같대요.” “그럼 뭐가 문젠데?” 어머니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재림의 ‘반항’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어머니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귀를 기울여 주었다. 어머니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아버지는 소리를 높였다. “성재림!” 두어 번 더 부르자, 재림이 방에서 나왔다. “너 요새 선생님한테 수업 태도 안 좋다고 지적받았다며?” “…….” “무슨 문제 있어?” “…없는데요.” 아버지가 윗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들었다. TV 옆에 놓인 재떨이를 앞에 가져다둔 후, 불을 붙였다. “엄마랑 아빠가 고생하는 거 알지?” “네.” “그럼 니가 자식으로서 행동을 바로 해야 되겠지?” “네.” “공부 잘하라고 말한 적 없다. 대신 문제 일으키지 말고, 학교생활 잘해라.” “…….” “니가 집에서 보는 게 있으면, 스스로 깨달아야지. 이제 너도 어린애처럼 굴면 안 된다는 거 알 나이 아니냐?” 재림은 고개를 푹 숙였다. 천장으로 담배 연기가 솟구쳤다. “니가 말썽부리면, 바쁜 엄마가 또 학교 가야 되고 그러면 엄마가 더 힘들다. 그거 모르면 너 사람 아닌 거다. 알았어?” 재림은 아버지의 발끝만 바라보았다. 회색 양말에 발바닥 부분이 많이 닳아 있었다. “학교에서 싸움질 같은 거 하는 거 아니지?” “네.” “사고 치지 마라.” “네.” “늦었다. 얼른 가서 자라.” 재림은 느릿느릿 일어서서는 방으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다시 담배를 하나 더 꺼내들고 태우기 시작했다. “여보, 저기 밖에서 담배 태우면 안 돼요? 선생님이 그러는데, 아이 옷에서 담배 냄새가 밴 것 같다고….” “에이….” 아버지는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리고 자리에 드러누우며 말했다. “불이나 꺼.” 어머니는 짧게 한숨을 내쉬곤, 무릎을 짚고 일어나 불을 껐다. **** 재림은 아침 일찍 일어났다. 어머니가 차려놓고 간 밥상에 앉아 대충 몇 숟가락을 챙겨 먹은 후, 반찬을 냉장고에 넣었다. 밥그릇에 랩을 씌운 뒤 반찬 옆에 두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 집에서 가장 일찍 들어오는 사람도 재림이었고, 가장 늦게 나가는 사람도 재림이었다. 화장실에 들어가 담배 한 대를 피운 재림은 양치를 하고 집을 나섰다. 걸어서 20분 정도를 가면 학교 교문 앞에 도착을 한다. “어이, 성재림.” “안녕하세요.” 학교 가는 길에 6학년 형을 만났다. 그 형은 근처의 아파트에서 사는데, 가까운 곳에 살면서 늘 느지막한 시간에 등교했다. 어쩌면 너무 가까워서 여유를 부리는 것일지도. “나 담배 하나 줘라.” 재림은 주머니 안에서 손을 꼬물거리다, 담배 한 개비만 쏙 빼들었다. 손바닥으로 가려서 남들 눈에 띄지 않게 건넸다. “나중에 놀이터 오기 전에 애들 좀 모아라. 오늘 지욱이 생일이라더라.” “예.” 재림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교문을 넘어갔다. 학교 안에 들어서면 갑갑해서 오히려 담배에 대한 충동이 심해지지만, 형들의 가르침에 따라 되도록 피우지 않으려고 했다. 들키면 큰일이니까. 예전에는 하루에 4개비 정도로도 충분했는데, 요즘은 더 자주 땡겼다. 참는 게 고역일 정도.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재수 없게도 가장 보기 싫은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자연히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 나왔다. “뭘 봐, 새끼야.” 그러나 저 아이는 자신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보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로 저런 점이 자신을 열 받게 하는 것이었다. 지가 전교 1등이면 단가? 부모도 없는 고아 주제에 무슨 어른 흉내라도 내는 건지, 하는 행동 하나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씨발, 죽을라고.” 괜히 한 마디 덧붙여보지만,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뭐냐, 왜 그래? 아침부터?” 같은 무리에서 노는 종혁이가 뒤따라 들어오면서 재림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재림은 어깨를 털었다. “됐어. 무거워.” 재림은 가방을 책상 위에 던져놓고, 의자 위로 풀썩 엉덩이를 붙였다. 담배가 땡겼다. 그 뒤로 반 아이들이 재잘거리면서 등교를 했고, 그 재잘거림에 신경질이 나서 재림은 책상 위에 엎드리고 얼굴을 파묻었다. 옆의 짝―자신과 앉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니었고, 다만 키가 크다는 이유로, 자리가 남는다는 이유로 앉혀진 아이였다―이 와서 자리를 정리하는 게 느껴졌지만, 얼굴을 들지 않았다. 굳이 인사 하는 사이도 아닌데 아는 척 할 이유도 없었고, 아침 컨디션도 좋지 않아서 계속 얼굴을 파묻은 채로 있었다. 그러다 교실의 소란이 조금 잦아드는 기운에 부스스한 얼굴을 들어 올리니, 선생님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고 계셨다. 지겨운 하루의 시작이었다. **** 아침부터 욕먹고 좋을 사람은 없지만, 단유는 아무렇지 않았다. 쳐다본다는 이유로 맞기도 했었고, 죽을 뻔 한 적도 있었는데 고작 또래 아이의 육두문자 정도에 감정 변화를 보이기엔 그간의 경험이 녹록하지 않았다. “자, 오늘은 주변의 현상에 대해 가설을 세우고 예상하거나 추리해보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었죠?” 과학시간, 선생님은 교탁 위에 교과서를 펼쳐두고 칠판에 주제를 적었다. “먼저, 지난번에 배웠던 탐구 과정에 대해 복습부터 하고 갈게요. 누구 기억 하는 사람?” 아이들이 손을 들지 않아도, 선생님은 꾸준히 참여를 유도했다. 적당한 시간이 흐르면, 항상 발표를 주도하는 아이들과 늘 발표를 피하려는 아이들이 구분되기 시작된다. 선생님은 그런 아이들 사이에서도 적당히 배분을 해서 모든 아이들이 수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서 균등한 학습 기회를 제공했다. “관찰을 해서 문제를 인식해요.” “맞아요. 그 다음 발표할 사람?” “가설을 정합니다.” 관찰과 문제 인식, 가설 설정, 실험, 결론 도출로 이어지는 과정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 후, 선생님은 수업을 진행했다. “예전에는 새가 많았는데, 요즘은 새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이유를 먹을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지자 새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했고, 그래서 새가 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마도 누군가의 도움을 얻었거나, 혹은 학습지에 나오는 내용일 것이다. 그래도 시작은 좋았다고 판단한 선생님은 발표한 아이를 칭찬하고 계속 수업을 진행했다. “달걀이랑 메추리알이랑 크기가 차이나는 이유는 새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찾아보니까 닭이 메추리보다 훨씬 크고, 타조는 닭보다 훨씬 큽니다. 그래서 타조알이 계란보다 더 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과서에 그 예시가 나오는 내용인데, 예습을 잘한 친구라서 칭찬을 해주었다. 그렇게 몇몇 학생들의 발표에 대해 그 내용이 뭐든 칭찬을 해주면서 참여를 독려하던 중, 재림이 눈에 띄었다. “성재림.” 재림은 선생님의 말을 미처 듣지 못했다. 옆의 짝이 팔꿈치를 툭툭 건드리자, “아이 씨. 왜!” 화를 내는 재림이었다. “성재림. 일어나.” 그제야 선생님이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안 재림은 책을 덮었다. “책 들고 나오세요.” 재림은 머뭇거리면서 자리에서 엉거주춤 섰다. 선생님이 재차 요구하니, 그제야 재림이 책을 들고 나왔다. 시커멓게 변한 얼굴로 책을 꽉 쥐고 있는 모습에 선생님은 속이 타들어갔다.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딴 짓하지 말라고 했었지? 뭐했어?” 재림이 역시나 침묵을 지키니, 선생님의 재림의 손에서 책을 뺐었다. 책을 펼치고 보니, 글자들을 새까맣게 지워나가고 있었던 흔적이 보였다. 앞 장부터 살피니, 글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너 왜 그랬어?” 여전히 석상처럼 굳은 자세로 입도 뻥긋하지 않는 재림이었다. “대답 안할래? 왜 이랬어? 선생님이 묻잖니?” 선생님의 다그침이 계속되자, 재림에게 변화가 생겼다. “아이 씨.” “뭐?” 재림은 선생님의 손에 든 책을 뺐었다. 그리고 낙서를 했던 페이지를 모두 찢어버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아이들은 물론이고 선생님까지 놀라서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었다. “안 하면 되잖아요.” 신경질적으로 종이를 찢더니 책을 집어던지는 재림이었다. 선생님은 격앙된 목소리로 질책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성재림!” “아, 씨발. 침 튀잖아요.” “…너 선생님한테 무슨 말버릇이니? 너!” 재림이 고개를 돌리고 다시 중얼거렸다. “씨발, 졸라 시끄럽네.” 선생님은 순간 혈압이 올라서 머리가 하얘지는 경험을 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무릎에 힘을 줘서 넘어지는 것을 방지한 선생님은 재림의 어깨를 붙잡았다. “성재림, 누가 선생님한테 그렇게 말하랬어? 응? 그렇게 이야기하면 되는 거 알아? 몰라?” 어깨를 쥔 손에 과한 힘이 들어갔었는지, 재림은 얼굴을 찡그리다 어깨를 격하게 털어냈다. 그 몸부림에 어깨를 놓친 손이 허공을 휘저었고, 선생님은 잠시 휘청였다. 그리고 재림은, “몰라요. 됐어요?” “…….” 이토록 반항적인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던 선생님이 반응을 못할 때, 재림이 항변(?)했다. “수업시간에 조용히 있었잖아요. 떠들지도 않았는데 왜 지랄해요?” 정말 지랄(?)맞게도 재림의 입에서 나오는 육두문자는 거침이 없었다. 때문에 교실 전체의 분위기가 급격히 냉랭해졌고, 아이들은 선생님과 재림의 신경전에 전에 없이 진지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선생님은 더 이상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훈계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 따라 나와.” 선생님은 다시 재림의 어깨부분을 붙잡았다. “아, 씨. 잡지 말라고요.” 선생님은 이성을 잃기 직전까지 몰렸다. “그냥 저 새끼 같은 애들이나 데리고 수업하면 되잖아요? 얌전히 있는데 왜 건드려요? 예?” 재림이 가리킨 손가락이 단유를 향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 손가락을 바라볼 정신도 없이 눈앞에서 감히 교권에 대항하고, 어른을 우습게 보는 12살 아이를 노려볼 뿐이었다. “너 정말 안 되겠구나? 이리와, 따라와!” 선생님은 멱살을 꽉 붙잡고는 교실 밖으로 끌었다. 아무리 재림이라도 중년의 노련한 아줌마의 힘을 이기진 못했다.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가 만들어지니 재림도 눈이 뒤집혔다. 주먹을 쥐고 힘껏 휘둘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선생님이 뒤로 밀려났다. 재림이 휘두른 주먹에 어깨부분을 빗겨 맞긴 했어도, 설마 폭력까지 휘두를 줄 몰랐던 선생님은 무방비에 맞고 놀라서 멱살을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눈이 뒤집힌 재림은 거기가 끝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오른손을 휘둘러 어깨를 때린 후, 다시 왼손을 휘둘렀다. 선생님이 밀려난 탓에 왼손은 허공을 헛치고 말았는데, 다시 한 걸음 다가서며 휘두른 오른손은 정확히 선생님의 얼굴을 향했다. 놀란 선생님이 급히 몸을 돌렸기에 주먹은 등을 때렸지만, 오히려 재림은 샌드백처럼 선생님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어어!” 교실이 소란스러워졌고, 아이들은 어쩔 줄 몰라서 엉거주춤할 때, 재림의 뒤에서 그를 말리는 손이 있었다. “그만해라.” ======================================= [167] 뉴웨이브(7) 재림이를 알게 된 것은 3학년 때였다. 당시 재림은 명수와 함께 반에서 축구를 잘 하는 아이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래서 점심시간이면 늘 명수와 재림이 서로 나뉘어서 팀을 먹곤 했다. 하지만 명수는 독보적이었고, 재림은 명수가 공을 다루는 재간을 따라가지 못했었다. 그래서 재림은 수업이 끝나고도 집에 가지 않고 운동장에 남아서 공을 차곤 했었다. 하루는 재림에게 지겹지 않냐고 물었다. “어차피 집에 가도 할 게 없으니까.” 재림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재림과 함께 공을 주고받으며 놀았다. 그 놀이에 가끔 명수가 낄 때도 있었지만, 명수는 보육원 차가 오면 타러 가야 했기 때문에 늘 두 사람만 남아서 공을 찼다. 그렇게 친해진 재림과 함께 어울리며 3학년을 보냈다. 4학년에 올랐을 때, 재림과 또 한 번 같은 반이 되었다. 그러면서 더 자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었고, 함께 축구뿐만 아니라 당시 유행하던 온라인 게임을 하기 위해 피시방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재림아, 나 죽는다.” PC 화면에서는 물고기 얼굴의 몬스터에게 둘러싸인 채로 공격을 받고 있는 캐릭터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기다려봐, 금방 갈게.” 재림의 캐릭터가 나타나 칼춤을 치니, 몬스터가 녹기 시작했다. “야, 니들 집에 안 가니?” 주말도 아닌 평일에 피시방에서 4시간을 죽치고 있는 초딩을 보다 못한 사장님이 말릴 정도였다. 그러나 어차피 두 사람 다 집에 늦게 들어가더라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노는 것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았다. 4학년이 되면서 성적은 떨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쓰는 것은 게임 캐릭터의 레벨이었고, 주의해야 할 점은 용돈이 부족할 때 어떤 식으로 조달하느냐 하는 문제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놀다보니, 어느새 비슷한 패턴으로 노는 형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여름방학이 되었을 때는 아지트를 소개받았다. 물론 곱게 소개받진 못했다. “똑바로 서, 새끼야.” 뱃가죽에 구멍이 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두들겨 맞으면서 신고식을 치룬 후, 미끄럼틀 아래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두 사람은 형들과 새로운 놀이에 빠져들었다. “너 우리 조직에 들어와라.” “알겠습니다. 형님.” 조직놀이는 신선했고, 유치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온라인게임보다 좋았다. 게임 속 동료를 구하듯, 현실에서 함께 할 무리를 구했고, 또래의 좀 논다는 아이들이 모이면서 파티(party)가 만들어졌다. 함께 돌아다니면서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녔더니, 아이들이 눈을 깔았다. 사실 두 사람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그저 적당히 시간을 때울 수 있는 놀이였다. 이것저것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그냥 시간을 때울 수 있는 것. 두 사람은 함께 했고, 그래서 외롭지 않았다. 다른 지역의 패거리들과 싸우고, 돈이 없을 때 쫓아오는 피시방 알바에게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것도 모두 놀이였고 재미였다. 그러나 단 하나, 두 사람의 놀이가 잠정적으로 멈추는 시간이 있었으니, 바로 학교였다. 적어도 학교에서는 놀이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학교에서도 바깥에서와 같이 놀게 되면 더 이상 놀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 재림은 무슨 일인지 아침부터 썩 낯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안하던 어깨동무도 하면서 분위기를 띄우려고 했는데 먹히지 않아서 주시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결국 일이 터졌고, 재림은 거의 반쯤 정신을 잃은 것인지 미친 짓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재림은 하나 뿐인 ‘진정한 친구’였으니까. “그만 해라.” 그 목소리에 즉각 반응한 재림이었다. 어깨를 붙잡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역시 종혁이었다. “그만 해라, 재림아. 위험하다.” 종혁은 ‘위험’이라고 신호를 보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놀면 서도 ‘위험’에 대해서는 철저히 피해 다녔다. 그 둘은 시간을 때우면서 놀 게 필요했던 것이지, 위험한 일들을 저지르면서 위기를 자초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는 그 선을 잘 지켜왔는데, 재림이 지금 그 선을 밟은 것이었다. “놔라. 너도 죽는다.” 그런데 재림의 눈에 이상신호가 들어왔다. “성재림.” “성재림!” 종혁의 목소리 위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덧입혀졌다. 재림이 고개를 돌리자마자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재림은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이경자 선생님이 손을 부들부들 떨고 계셨다. **** 이경자 선생님은 베테랑이었다. 숱하게 많은 불량아들을 만나보았고, 숱하게 많은 경험 속에서 아이들을 달래도 보고, 협박도 해보고, 격려도 하면서 아이들이 엇나가지 않게 지도했다. 성공했을 때도 있고, 실패했을 때도 있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라는 편지를 받았을 때도 있었고, 졸업과 동시에 잊혀진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이경자 선생님이 지켜온 단 하나의 원칙은 결코 매를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매가 효율적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강하게 믿으면서도, 효율을 위해 교육을 포기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매를 들지 않았던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이 제자의 뺨을 때렸다. 그 행위에 교육은 없었다. 오로지 ‘분노’와 ‘증오’와 ‘미움’만 가득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감히… 감히, 선생님을 때려!” 선생님은 교실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그리고 재림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어쩌면 좋은 선생님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학생들이 미워하는 선생님, 혹은 무능한 선생님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런 의심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니,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교사로서의 명예와 자부심은 이경자 선생님이 지금까지 교직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였다. “성재림이! 감히 니가 선생님을 때리고, 교실을 난장판으로 만들고도 무사할 것 같아! 응?” 그런데 지금 12살짜리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교사의 자존심, 자부심, 명예를 짓밟았다. 분노로 머리가 하얗게 변한 이 선생님은 보이는 게 없었다. “내가, 내가 널 가만 안 둘 거야! 안 둘 거라고!” 머리채를 붙잡힌 재림이 선생님의 힘에 끌려 일으켜 세워졌다. **** 혼란스러웠다. 이게 다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단유로서는 생각도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상황이 파국으로 치달을 쯤, 그러니까 선생님이 붉어진 얼굴을 하고 사나운 얼굴로 재림의 뺨을 때렸을 때, 단유는 개입하기로 마음먹었다. 단유는 몰려있는 아이들을 헤치고 나섰다. “선생님.” 단유의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자, 교실에 있던 모든 것이 일순간 멈추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멈춘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은 단유의 목소리에 담긴,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을 느끼고는 지르던 비명을 막고 물러났다. 재림의 머리채를 붙잡고 뒤흔들려던 선생님까지도 단유의 목소리에 멈출 정도였으니까. “그만하세요, 선생님. 이건 옳지 않아요.” 선생님의 동공에 초점이 생기면서 눈빛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 눈을 바라보며 단유가 말을 이었다. “재림이가 잘못한 거예요. 하지만 선생님, 선생님께서도 같은 방식으로 재림이를 혼내시면 안 돼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 하지만 교사와 제자 사이에는 통용될 수 없는 법이기도 했다. “선생님이시잖아요.” 단유의 말에 선생님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잃어버렸던, 내팽개쳐졌다고 생각했던 교사의 명예와 자존심이 고스란히 살아났다. 그리고 동시에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단유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재림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분노와 증오, 공포와 혼란이 뒤섞인 눈빛. 낯빛은 하얗게 질렸고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제대로 자각도 못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단유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발 물러선 선생님, 얼이 나간 종혁이, 침도 삼키지 못하고 상황을 주시하는 아이들. 도대체 이 교실이란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란 것이 어떻게 늘 이런 식인건지. ‘원래 교실이란 이런 것일까?’ 일이 터지면, 늘 이런 관계가 성립했다. 당사자와 관계자, 그리고 방관자. 사고든 사건이든, 일이 터지면 반드시 방관자가 생기고, 방관자는 절대적으로 일에 끼어들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묻고 싶었다. ‘선생님에게 학생이 대드는 행위가 과연 옳다고 생각하는가?’ 또, ‘선생님이 학생에게 모진 말로 상처를 주는 일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옳지 못한 일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고치려고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무엇보다 그것을 그저 방관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두 아이가 싸울 때도 주위에 원을 치고 둘러서서는 구경만 한다. 안타까움 혹은 비명 섞인 탄식을 내뱉으면서도 손 하나 꼼짝하지 않는다. 왜? 한 아이가 선생님에게든, 혹은 다른 어른에게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음을 목격했다면, 그것을 지적하든지 혹은 말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왜 다들 방관자로서 일정 거리에 서서 멈춰 서 있는 것인가? 당사자와 관계자에게는 그럴만한 사정 혹은 이유를 찾아볼 수 있지만, 방관자에게서는 아직 그들의 행동에 대한 정당한 이유, 합리화시킬 만한 사유를 발견할 수 없었다. 과연 그런 게 있기나 할까? “재림아. 할 말이 많지만, 일단 일어서.” 재림은 얼이 빠진 채로 일으켜 세워졌다. “선생님, 재림이 잠깐 양호실에 데려다 주고 올게요.” 선생님이 그 말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그런데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직 감정의 잔재가 남았던 모양이었다. “선생님. 재림이 양호실에 가야 돼요.” 단유가 다시 침착한 어조로 또박또박 이야기를 하자, 선생님은 궁리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단유 니가 같이 갔다 오고, 너….” 선생님이 재림이를 보며 뭔가를 말하려던 찰나, 단유가 선생님을 똑바로 응시하며 무언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 눈빛에 선생님은 입을 열지 못하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단유는 재림의 손목을 붙잡고 양호실로 데려갔다. 아니 데려가려 했다. “내가 갈게.” 종혁이가 단유 앞에 섰다. 단유가 종혁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니가 나설 때가 아닌 것 같다. 일, 크게 만들기 싫다면 지금은 교실에 남아서 ‘수업’ 들어.” 그 말은 모두에게 하는 메시지였다. 방관자였던 아이들은 물론이고, 상황을 채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선생님에게까지 단유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였다. 다행히 선생님은 마지막 단어를 캐치했다. “모두 제자리로 가세요. 어서. 종혁이 너도 자리로 돌아가.” 단유는 재림의 손을 끌고 교실을 나섰다. “무슨 일이야, 너희 반.” 2반 앞을 지날 때, 2반 담임선생님이 문을 열고 나오셨다. 열린 틈으로 2반 아이들의 ‘호기심’에 찬 눈빛들이 보였다. “이 친구가 조금 다쳐서 그랬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2반 선생님이 슬쩍 고개만 빼고 1반을 훔쳐보았다. 교탁 앞에 선 이경자 선생님이 보였다. 한참 수업 중이었어서 1반의 소란을 늦게 깨달았다. 특히 이 선생님의 비명에 가까운 고함소리에 놀랐던 2반 선생님이었다. 고민하던 찰나에 지나가는 단유가 보였기에 말을 걸었던 것뿐이었지만, 1반의 일에 쉽게 개입할 수는 없었다. “그래, 알았다.” 2반 선생님은 호기심과 불안을 억누르고, 단유를 보냈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재림과 함께 양호실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가던 중, 재림이 거칠게 손목을 털었다. “놔라, 이 거.” 단유가 한 칸 아래에서 재림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정신 차렸어?” “…니가 뭔데 정신을 차리라 마라야?” 단유는 물끄러미 재림을 바라보았다. “뭘 봐, 새끼야.” 조금씩 목소리에 힘이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단유가 한 계단을 올랐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이 눈을 마주했다. “넌 잠깐 머리 좀 식혀야겠어.” “뭐, 새끼야.” 단유가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리고 재림의 어깨에 턱하고 붙잡았다. 재림이 미간을 좁히면서, 거칠게 어깨를 털어내려는데 어깨에 붙은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니가 뭘 하건, 사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너한테서 너무 익숙한 모습이 보여서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소리야?” 어금니를 꽉 물고 재림이 단유를 노려보는데, 단유가 말했다. “잠깐 기다려.” 그리고 재림은 정신을 잃었다. ======================================= [168] 뉴웨이브(8) 가습기에서 뻐끔뻐끔 토해내는 증기가 공중에서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을 때, 재림은 눈을 떴다. “헉헉!” 격하게 숨을 몰아쉬면서 정신을 차리려던 재림은 자신이 침대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벌떡 몸을 일으킨 재림이 주위를 둘러보니, 학교 양호실이었다. “뭐야, 이게….” 아래를 내려다보니 옷을 모두 챙겨 입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까끌까끌하기만 한 낡은 천쪼가리를 둘러쓰고 있었는데, 지금은 조금 냄새는 나지만 구멍하나 나지 않은 깨끗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 때, 문이 열리면서 양호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어, 일어났구나. 괜찮아?” 티백이 담긴 종이컵을 든 선생님은 책상 위에 올려두고는 재림에게 다가왔다. 이마를 짚어보더니, 미소와 함께 말을 했다. “열은 없고, 눈도 또렷한 게 큰 문제는 없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정신을 잃었다고 하니까,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긴 하거든?” 재림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양호선생님을 바라보다가, 재차 묻는 선생님의 말에 고개를 젓고는 침대를 빠져나오려 했다. “좀 더 있어. 10분 있다가 쉬는 시간이니까, 그 때까지는 누워서 쉬도록 해.” 재림은 다시 자리에 누웠다. 포근한 베게에 머리를 대고 눕자, 경황이 없던 와중에 잠시 잊고 있었던 조금 전의 일들이 생각났다. “선생님, 오늘 며칠 이예요?” “응?” 양호선생님은 서류를 정리하다 말고, 재림의 엉뚱한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기억 안나?” “저 여기 얼마나 있었어요?” 선생님은 벽에 걸린 동그란 시계를 잠시 바라보다가 답했다. “한 10분쯤?” 10분? 그럼 방금 전까지 자기가 있었던 곳은 뭐지? 재림은 혼란스러웠다. 그 때, 종이 울리면서 조용하던 양호실의 바깥이 아이들 뛰어다니는 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됐어, 이제 그만 교실로 돌아가.” 재림은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침대를 빠져나와서 교실로 갔다. 교실 뒷문을 열고 들어가자 일순 교실이 조용해졌다.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몰리는 것을 느끼면서 재림은 천천히 자기 자리로 갔다. 그리고 재림은 옆 분단에 앉은, 독서 중인 단유를 바라보았다. “으으.” 재림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무릎, 다리가 떨려오면서 한 걸음도 떼기 힘들었다. 갑작스러운 변화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잠시 까먹고 있었는데, 그 일의 한 가운데 저기 저 애가 있었다. 그런데 저 애는 마치 그런 일이 어디 있었냐는 듯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성재림, 앞으로 나와.” 교실 앞 교사책상에 앉아 있던 선생님이 차분한 목소리로 재림을 불렀다. 하지만 재림은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고, 고개를 돌리지도 못했다. 어쩐지 자기 몸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을 듣지 않는 것이었다. “성재림, 선생님 말 안 들을래? 당장 앞으로 나와.”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재림이 억지로 몸을 틀어 움직이려는데,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그대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어어?” 아이들이 놀라서 소리를 지르니, 선생님도 예삿일이 아니다 싶어서 빠른 걸음으로 달려오셨다. “뭐야, 너? 괜찮아?” 재림은 울컥하는 감정을 느끼면서 눈에서 눈물이 났다. “다리가, 안 움직여요.” “뭐?” 선생님은 얘가 무슨 수를 쓰나, 벙찐 얼굴로 재림을 둘러보는데 재림의 얼굴이 여간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눈물까지 머금고 있는데 거짓말 같지 않아서 가슴이 철렁했다. “왜? 갑자기 왜 그러는데?” 그때였다. 드르륵 거리며 단유가 의자를 뒤로 밀면서 일어났다. 소란의 가운데서 아무도 그 것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오직 재림만은 단유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단유가 다가오니 점점 더 입술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단유는 재림에게 다가오더니 재림의 팔을 붙잡았다. 순간 재림의 떨림이 멎었다. 떨림만 멎은 게 아니라 심장도 멎은 것처럼, 몸이 경직되었다. “일어나.” 단유가 재림의 손목을 붙잡고 당기자, 힘없이 이끌려 세워졌다. 그러나 곧바로 다리에 힘이 없어 무릎이 꺾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유가 재빨리 재림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넘어지지 않게 도와주었다. 그리고 재림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신 차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라고 말하면서 재림의 옷을 여유롭게 털어주었다. 그 모습에 아이들과 선생님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단유는 재림의 옷을 털어준 뒤 다시 이야기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 혼자 속에 담아두고만 있지 말고.” 그리고 옆에 무릎 앉은 자세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선생님을 응시했다. “선생님, 학교 끝나고 하셔도 되지 않을까요?” 아직 반 아이들이 들을 수업이 많이 남았는데, 다시 재림이 붙잡고 푸닥거리 하지 마시죠,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선생님은 단유의 말이 틀리지 않다 여겼고, 그래서 일단은 단유와 함께 재림을 부축해서 자리에 앉혔다. 방과 후, 교실에 남도록 지시를 내린 선생님은 다시 교사책상으로 돌아갔다. “야.” 돌아가던 단유를 재림이 붙잡았다. 단유가 돌아보자, 재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아까, 저기… 거기.” “거기라니?” “거기 있잖아. …산 많이 있던 데.” “…무슨 소리야?” 단유는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재림은 단유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 “성재림, 말해 봐. 아까 왜 그랬어.”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고 텅 빈 교실에 선생님과 재림만 남았다. 재림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고,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럼 선생님부터 이야기할게. 우선 선생님도 아까 너 때린 거 미안하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너한테 손찌검하면 안 되는데, 미안했다.” 선생님의 사과에 재림이 고개를 들었다. 어떤 감정인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눈물이 핑 돌았다. “사실 니가 주먹을 휘둘러봐야 얼마나 아프겠니. 그런데 선생님도 그 때는 너무 당황했었어. 그래서 선생님이 잠깐 자제력을 잃었던 거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선생님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재림이 너한테 많이 미안하다.” 눈물이 뚝뚝 흐르는데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를 꽉 깨물고 울음소리를 참아보려 하는데도 참아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그 때 재림의 머리 위로 손이 올라왔다.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는 선생님의 손길에 결국 재림이 무너졌다. “엉엉, 선생님.” 눈물을 쏟아내는 아이를 보니, 선생님도 아까까지 가지고 있던 앙금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 결국 이 아이에게도 선생님이란 존재가 필요했던 것일지도 몰라. 그 뒤로도 한참을 선생님에게 안겨서 눈물을 쏟아낸 재림이었다. 그리고 눈물이 잦아들 때쯤, 재림과 선생님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은 재림에게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눌 사람이 필요했음을 알게 되었고, 재림은 선생님이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길을 찾아주려 하는 사람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사실 재림이가 예전에 어땠는지 모르잖아? 그래서 사실은 재림이가 못된 아이인줄 알았어. 선생님 말도 안 듣고, 공부도 잘 안하고 그러니까 선생님이 그렇게 생각했었어. 그런데, 선생님이 오해했던 거야.” 선생님은 치맛자락을 살짝 움켜쥐었다가 놓았다. “선생님도 사실 모든 걸 알 수는 없거든. 그래서 선생님도 계속 너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가 무엇을 고민하고 걱정하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너랑은 그런 대화를 하지 못했던 거야. 선생님이 실수를 했던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는 너랑 이야기를 많이 했으면 좋겠어. 선생님이랑 고민이든 걱정이든 뭐든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래서 앞으로는 서로를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말이야. 알겠니?” 재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저한테 아무것도 이야기를 안 해요. 제가 뭘 하는지 궁금하지도 않고요. 맨날 늦었으니까 자라고만 해요. 어제는 저한테 학교에서 사고치고 다니지 말라고 했어요. 학교에서 뭐하는지도 모르면서. 아빠는 관심이 없어요, 저한테.” 선생님은 재림의 손을 꼭 붙잡아 주었다. “엄마도 저한테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엄마는 형한테만 관심이 많아요. 집에 들어오면 먼저 그래요. 형 들어왔냐고. 아침에도 형한테 그랬어요. 먹고 싶은 거 없냐고. 그런데 저한테는 그런 거 안 물어요. 형도 마찬가지예요. 형은 우리 집 일에 전혀 관심이 없어요. 집에 들어오면 방에서 책 보다가 자요. 제가 옆에서 뭘 하든 관심도 없고요, 그냥 졸리면 잤다가 일어나면 학교 가고.” 선생님은 재림의 손을 토닥였다. 그 손 위로 다시 눈물이 뚝 떨어졌다. **** “그래서요?”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 저런 게 들어온 거지.” 하은이 소파에 드러누운 채로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하은이 가리킨 방향에는 하얀 털이 복실 하게 자란 포메라니안 종의 강아지 한 마리가 바닥에서 뒹굴 거리고 있었다. 명수가 환하게 웃으면서 하은에게 안겼다. “어? 어?” “고맙습니다! 선생님!” 명수는 금방 몸을 돌려 강아지에게 달려갔다. “석고야, 이것 봐. 귀엽지? 그치?” 강아지 앞에 같이 드러누운 명수는 강아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 참. 저게 털이 얼마나 많이 빠지는데… 저런 걸 키우라고 보내?” 하은이 투덜거렸다. 분명히 저건 주영의 장난질일거라면서. 그러거나 말거나 명수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강아지의 재롱을 보며 즐거워했다. 단유도 명수 곁으로 가서 개를 바라보았다. 조그만 강아지는 자기 꼬리를 잡겠다고 앞발을 버둥거리는데 다리가 짧다보니 꼬리가 잡힐 리 없었다. 그러다보니 벌러덩 드러누워서 다리만 꼼지락거리듯 움직였다. 명수가 손을 뻗어 강아지의 배를 살살 쓰다듬었다. “석고야, 이거 만져봐! 신기해!” 단유도 조심스럽게 손을 겹쳐 보았다. 분홍빛 살결 위에 손가락이 닿는 순간, 손끝에서 밀려온 온기(溫氣)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 거, 이름 짓자.” “이름?” 명수는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이름을 불러보았다. “복실이, 멍멍이, 하양이, 백곰이… 선생님, 얘 남자예요? 여자예요?” “암컷.” “곰순이, 꽃순이, 광순이, 복순이, 영순이….” “순이만 붙인 거 아냐? 작명 실력하곤….” 하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렸다. “석고야, 넌 생각나는 이름 없어?” 단유는 가만히 강아지를 바라보았다. 아마 앞으로 이 집에서 새로운 식구로 함께할 아인데, 쉽게 이름을 짓기가 어려웠다. 모름지기 이름이란, 그 생명의 시작과 끝을 함께할 ‘운명’이나 마찬가지, 라고 했었으니까. “당장은. 원래 이름도 있었을 텐데, 마음대로 짓기도 그렇고.” “원래 이름이 있어? 선생님, 원래 이름도 있어요?” “몰라. 없는 거 아냐?” 모든 생명은 태어나는 순간, 이름을 받는다. 다만 인간이 모를 뿐인 것이지. 단유는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작은 눈을 슬쩍 감으면서 단유의 손길을 느끼는 강아지였다. 작은 머리에도 풍성하게 자란 털이 단유의 손가락에 몇 올씩 묻어나왔다. 청소하기 힘들겠는걸? “그럼 그냥 내가 정할래. 호빵이. 얘 이름은 호빵이야.” 암컷이라고 하지 않았나? “호빵아?” 명수가 은근하게 부르자, 신기하게도 강아지가 명수를 바라보았다. “봤어요? 봤어? 얘가 부르니까 보잖아? 그치 호빵아?” 명수의 부름에 강아지가 코를 씰룩이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모양새를 취했다.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명수는 신이 나서 강아지를 품에 안고 거실을 굴렀다. 강아지가 떨어뜨린 작고 하얀 털들이 명수의 옷에 묻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개인지, 사람인지….” 하은이 쯧쯧 혀를 차면서도 돌리던 채널에 시선을 고정했다. 단유는 둘을 보며 생각했다. 호빵과 명수, 둘은 참 잘 어울린다, 고. ======================================= [169] Faith(1) 재림이 학교 건물을 빠져나올 때, 교문 앞에서 종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야, 많이 혼났냐?” 재림은 종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종혁은 재림의 눈을 바라보며 수상하다는 눈초리를 보였다. “운 거 아냐? 운 거 같은데?” 재림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걸음을 빨리하여 학교를 벗어났다. “야, 어디가? 오늘 놀이터에서 모이기로 했잖아.” 무슨 이야긴가 싶어 기억을 더듬다가 문득 아침에, 6학년 형이 모임을 지시했던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 모임에 갈 수 없었다. 갈 기분이 아니었다. “오늘은 나 빠질래. 너나 가.” 종혁이 후다닥 뛰어와서 재림의 팔을 붙잡고는 속삭였다. “너, 무슨 소리야! 오늘 빠졌다가는 형들이 절대 안 봐줄 거야. 죽을지도 몰라.” ‘죽음’을 이야기하는 순간, 재림의 걸음이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종혁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림은 천천히, 나무늘보처럼 입을 열고 목소리를 냈다. “‘죽는다’고? 넌 진짜 죽는 게 뭔지 몰라서 그래.” “무슨 소리야, 갑자기?” 재림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다리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짧게 숨을 몰아쉰 뒤, 겨우 걸음을 떼기 시작한 재림은 여전히 놀이터 반대방향으로 움직였다. “아무튼, 난 안 갈 거야. 아니, 앞으로도 안 갈 거야.” “왜? 아니, 무슨 일 있어?” 재림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종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짜 죽을지도 몰라.” 종혁은 재림의 눈에서 공포에 떠는 아이를 보았다. **** 재림은 집으로 돌아왔다. 최근에, 아니 거의 2년을 통틀어서 이보다 빨리 집에 온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였다. 집에 들어왔는데도 밖에 해가 떠 있었으니까. 재림은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벗어던지고 이불을 둘러썼다. 어두운 집 안의 정적이 무겁게 짓눌렀다. 평소라면 그 정적이 무서웠겠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큰 혼란과 공포가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재림은 눈을 감았다. ‘꿈이었을까?’ 사실일 리는 없다고 생각해야 옳았다. 멀쩡히 학교에 있던 자신이, 난데없이 산으로 둘러싸인 벌판 한 가운데에 서 있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벌거벗은 채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흙길 위에 맨 발로 서 있는 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재림이 기억하는 바로는, 단유의 손에 교실에서 이끌려 나와 양호실로 가고 있었다. 선생님에게 호되게 맞은 뒤, 머리채를 붙잡힌 채 이리저리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흔들렸었다. 그 때문에 정신이 없던 상황이긴 했는데, 그 이후의 기억은 흐릿했다. 양호실을 가기위해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어느 순간 자신은 벌거벗은 모습으로 벌판 위에 서 있는 것이었다. 잡초가 우거진 벌판에는 몇몇 이름도 모를 잡목들이 서 있었는데, 가장 가까운 곳에는 학교에서도 몇 번 본 적이 있는 등나무가 있었다. 벌판을 가로지르는 흙길이 하나 있었고, 그 흙길 위에 재림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갑작스러운 주변의 변화에 당황해했다. 벌판을 둘러싼 산들은 높기도 엄청나서 중턱 즈음에는 하얀 구름이 걸려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산도 있었다.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이 넓게 펼쳐진 가운데, 벌판의 잡초를 쓸면서 다가온 차가운 바람이 맨살을 때리고 지나갔다. “이게 뭐야?” 재림이 당황한 가운데, 소리를 높여 말했다. “아무도 없어요?” 바람이 풀들을 쓰다듬는 소리만 주위에 가득한데, 인적이라곤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도 없었다. 이런 곳은 상상에서도 그려본 적 없는 곳이었다. 외국 같기도 하고, 한국 같기도 한데, 그 어떤 나라에서도 보기 힘들 거 같은 곳이었다. 재림은 몸을 움츠리며, 뭔가 몸을 가릴 것을 찾아보려 했다. 팬티 한 장 입지 않고 발가벗은 자신의 처지가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추위를 막는 게 더 시급한 과제였다. ‘무슨 일이지?’ 재림은 무서웠다. 왜 갑자기 이런 곳으로 오게 된 건지, 이유도 알 수 없어서 무서웠고, 다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웠다. 그 때, 그의 앞에 짙은 파란색의 염이 된 천쪼가리가 떨어져 내렸다. 갑자기 뭔가가 눈앞을 휙하고 지나가면 바닥에 떨어지니, 놀란 재림이 흙길 위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입어.” 목소리에 반응한 재림이 얼른 천을 주어들면서 앞을 가렸다. 그리고 목소리를 향해 물었다. “누, 누구세요.” 대답은 없었다. 역광을 받아서인지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재림이 고개를 기울여가며 얼굴을 보려했는데 상대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희미한 윤곽 속에서 얼굴이 드러났다. “어? 너?” “입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여기 어디야?” “입어.” 단유의 재촉에 손에 쥔 옷가지를 보던 재림이 이게 뭐냐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방금 전까지도 앞에 있던 단유가 모습을 감춘 것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지만, 그 어디에서도 단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벌판이었다. 그 사이에 나무가 듬성듬성 자라나 있었지만, 그 짧은 시간에 모습을 감출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있던 나무는 없었다. 그 와중에도 차가운 바람이 불어대니 이번에는 참기가 어려웠다. 재림은 서투르게 옷가지를 펼쳐서 입었다. 헐렁하지만, 없는 것보다 나았다. “가자.” 깜짝 놀라는 재림 앞에 어느새 단유가 나타났다. “너, 귀신이야?” “아니야.” “그럼 뭐야? 어떻게 한 거야?” “가자.” 재림의 질문은 깔끔하게 씹어 넘긴 단유는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재림이 허둥지둥 대며 따라갔다. “니가 아무리 선생님을 때리고 욕을 해도, 선생님은 너한테 그렇게 할 수 없어. 왜냐하면 선생님이니까.” 단유의 말에 순간 발끈하며 따지고 들었다. “니가 무슨 상관인데….” 그러나 단유는 그 말을 잘라 먹으면서, 자기 말만 이어나갔다. “그런데, 난 아냐. 난 너한테 똑같이 해 줄 수 있어. 그리고 난 너한테 똑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주고 싶어.” “그게 무슨 개소리야!” 어느새 벌판을 벗어난 두 사람은 산기슭을 오르기 시작했다. “난 예전에 혼자였어. 왜 혼자여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혼자가 되었지. 그 때는 마냥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뿐이었던 것 같아. 그래서 뭐든지 하려고 했어.” 어머니를, 동생을, 동네 사람을 찾으려고 했었다. 그래야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이 가실 테니까.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세상에서, 도시에서, 보육원에서 홀로 살아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얼마나 많이 괴로워하고 외로워했던가. 그래서 더욱 발악했었고, 위험을 앞에 두고도 위험한 줄 모르고 달려들었었다. “왜 내가 이런 처지여야 하는지를 몰랐어. 그리고 늘 외롭다고 생각했었지. 주위의 모든 것들이 나를 몰아세웠고, 난 늘 경계해야 했어.” 산길을 맨발로 걷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재림은 작은 돌멩이를 밟고는 신음을 터뜨렸다. “잠깐만, 나 발 아파.” 단유가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 “엄살 부리지 말고, 서둘러.” 단유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재림이 뒤에서 소리를 질렀지만, 단유는 점점 멀어져 갔다. 순간 아무도 없는 산길에 홀로 남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어, 재림은 이를 악물고 단유를 쫓았다. “한 번은 정말 죽을 위기에 놓였지. 그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의 정체를 당시에는 몰랐는데 지금은 어렴풋이 깨달았어.” 고갯길을 올라가는 단유의 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가만 보니 저만 가죽신을 신고 있었다. “너, 그 신발 어디서 났어!” 단유는 길가로 튀어나온 나뭇가질 꺾어서 바닥을 쓸었다. 작은 돌멩이들이 잎사귀에 쓸려 길 밖으로 튕겨나갔다. 그 후, 그 나뭇가지를 뒤로 던졌다.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운 재림이 단유가 보여준 것처럼 바닥을 쓸어 가면서 단유를 쫓았다. “선생님에게 맞고 쓰러졌을 때, 니가 보여준 눈빛을 보니 알았어. 난 당시에 화가 났었고, 또 무서웠었어. 그런데 그때는 그 기분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그래서 계속 나를 위험한 곳으로 내몰았던 거야.” 그리고 다른 사람까지도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었지. “니가 너를 알지 못하면, 너를 도우려는 사람들마저 위험하게 될 거야. 그러면 나중에 크게 후회할지도 몰라.” “…….” “그래서 도와주려고. 너를.”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도와준다고 하니 귀가 솔깃했다. “어떻게?” “당분간 여기서 지내봐. 그럼 알게 될 거야. 니 주위에 얼마나 고마운 사람들이 많은지. 그리고 그 사람들한테 니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뭐?” 단유는 재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기 밤에 늑대 나오니까, 조심해.” 그리고 사라졌다. “뭐야?” 재림은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이후, 재림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주위를 계속 경계하면서 산길을 돌아다녔다. 다시 내려갈라치면, 자기도 모르게 다시 처음의 장소로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밤이면 늑대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덜덜 떨어야 했고,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찾으려면 깊은 어둠이 자리한 숲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겁이 나서 갈 수가 없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던 단유는 중얼거렸다. “니가 편하게 살아서 그래.” 다른 사람은 이렇게 못한다. 하지만 자신은 할 수 있다. 단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직접 겪은 사람으로서 같은 문제를 앓고 있는 사람에게 적절한 처방을 한 것이다. 단유는 재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죽게 놔둘 순 없으니까. 가끔씩 재림이 졸 때, 다가오는 늑대들을 먼 곳으로 보내는 수고 정도는 서비스로 해주었다. 일주일. 재림이 산 속에서 헤매고 다닌 시간이었다. 공포와 굶주림. 안전한 곳은 없었고, 모든 것이 죽음과 직결되는 환경이었다. 맨발은 상처투성이인데다가 추위와 싸우느라 온몸의 근육이 딱딱하게 굳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신경이 곤두섰는데, 늑대 울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 소리가 먹을 것을 앞에 두고도 먹지 못해 화가 난 소리라는 것을 알지는 못했지만, 그 날카로운 울음소리에 담긴 섬뜩함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재림이 다시 학교에서 눈을 떴을 때, 재림이 혼란 속에서 느낀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그리고 양호 선생님을 봤을 때, 그리고 아이들을 보았을 때, 담임선생님을 보았을 때 재림은 기쁘고 고마웠다. 일주일 사이에 그 사람들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선생님이 자길 때렸다는 사실도 잊을 만큼. 그래서 재림은 바로 집에 돌아갔다. 그리고 가족들을 기다렸다. 평소에는 그토록 무심했던 가족들인데 지금은 너무 보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어두운 방안에서 재림은 이불을 둘러쓰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외로움에 몸부림쳤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저 따뜻하고 포근하기만 한 이불이었다. 이 모든 게 그리웠던 재림이었다. **** “야, 성재림이는 왜 안 왔어?” 6학년 선배의 물음에 종혁이는 우물쭈물하면서도 대답을 못했다. 어떻게 ‘오기 싫었다’는 재림이 말을 전할 수 있겠는가. “이 새꺄, 선배가 묻잖아!” 다른 선배가 종혁의 배를 걷어찼다. 놀이터 모래밭에 허물어지듯 쓰러지는 종혁에게 터벅터벅 걸어간 선배, 지욱이 말했다. “오늘 내 생일이라서 웬만하면 피를 안 보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지욱은 종혁의 얼굴을 걷어찼다.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종혁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요즘 형들이 가만히 있어주니까, 겁도 안 나지? 그래서 니들 꼴리는 대로 해보겠다는 거지?” 다시 걷어찬 발길질은 종혁의 옆구리에 틀어박혔고, 종혁은 눈물을 터뜨리면서 빌기 시작했다.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지욱이 피식 웃었다. “니가 뭘 잘못했는데? 뭘 잘못했는지나 알고 그러냐?” “야, 김지욱. 니가 애들을 풀어주니까 이런 거 아냐? 좀 더 밟아라.” 뒤에서 다른 소년이 담배연기를 뿜으면서 히죽댔다. “그럴까?” 지욱의 눈에 붉은 빛이 돌았다. “야, 그거 가져와봐.” 지욱이 뒤를 향해 손을 내밀자, 한 아이가 그 손에 소위 ‘맥가이버 칼’이라고 부르는 아미 나이프를 쥐어주었다. 종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잠, 잠시 만요!” ======================================= [170] Faith(2) 종혁이 울부짖자, 다가가던 지욱은 걸음을 멈췄다. 그 틈에 종혁은 얼른 미안하다, 살려 달라, 며 애걸복걸했다. “누가 죽인대?” 지욱은 뒤에 선 친구를 불렀다. 그리고 칼을 건넨 뒤, 입고 있던 흰색 점퍼를 벗어 건넸다. “피 튀면 안 되잖아.” 다시 나이프를 건네받은 뒤, 모래 위에 납작 엎드려 있는 종혁에게 다가갔다. 결국 종혁은 눈물을 터뜨리면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조용히 안하면, 입부터 찢는다.” 지욱은 과장된 웃음을 지으면서, 아미 나이프에서 뽑아 든 칼날로 종혁의 볼을 가볍게 쿡쿡 찔렀다. 12살 어린 소년의 탱탱하고 탄력 있는 볼살이 밀려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했다. “그러게, 왜 말을 안 들어? 이 형이 우스워? 우습냐?” 종혁은 눈물을 흘리면서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말 잘 들을 게요. 진짜로요. 잘 들을 게요.” “성재림이는 어떻게 할 거야?” “데리고 올게요. 꼭 데리고 올게요.” “안 데리고 오면, 그 때는 진짜 피 본다. 알았어?” “네, 네.” 지욱이 일어서면서 모래를 걷어찼다. 튀어 오른 모래들이 종혁의 얼굴위로 뿌려졌다. “그런 새끼를 친구라고 둔 니가 불쌍해서 한 번 봐준다. 그 새끼가 니 친구냐? 친구면 같이 왔어야지. 너 혼자 뒤집어쓰라고 하고는 도망친 거 아냐? 새끼, 그런 건 친구가 아니고 배신자야.” 뒤에서 웃던 아이들이 그 말에 동조해서 ‘배신자 새끼’라는 말을 거들었다. “일단 너 가져온 거 다 내놓고, 빨리 데리고 와.” 종혁은 허겁지겁 주머니를 뒤집어서 가지고 온 돈을 지욱에게 건넸다. “한 시간 줄 테니까, 빨리 갔다 와라.” “네, 형님.” 종혁은 더러워진 옷과 얼굴을 정리할 새도 없이 놀이터를 빠져나갔다. 뒤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종혁을 배웅했다. **** 재림은 잠깐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뒤집어 쓴 이불의 안락함과 일주일을 괴롭히던 야생동물의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의 포근함에 절로 눈이 감겼다. 몸과 마음의 피로가 잠이 듦과 동시에 초콜릿 녹듯 스르르 풀렸다. 초콜릿보다 달콤한 잠이었다. 꿈속에서 재림은 학교 옥상의 난간 위를 걷고 있었다. 옆에서 아이들이 사나운 눈길로 바라보는데, 그들은 눈길과 다르게 박수를 쳤다. 무엇을 위한 박수인지 모르겠으나, 박수가 끝나기 전까지는 난간에서 내려오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난간의 끝에 선생님이 서 계셨다. “내려가.” 재림은 걸음을 멈췄다. 그랬더니 이번엔 아이들이 소리를 치면서 박수를 쳤다. 환호가 아닌 비명이었고, 탄식이었다. 박수는 끝없이 앞으로 걸어가라는 신호였다. 이대로 앞으로 가다가는 난간 끝을 가로막는 선생님과 만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 때, 누군가 재림의 어깨를 잡았다. 뒤를 돌아보니 단유가 서 있었다. “신경 쓰지 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단유는 예의 덤덤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입가는 연신 씰룩이는 모습이 마치 껌 같은 것을 씹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대신 전부 네 책임이야. 그러니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재림은 그 말이, 일주일을 산에서 보낸 후 갑자기 나타난 단유가 해줬던 말임을 떠올렸다. 그런데 또 여기에서 마음대로 하라고? 다 내 책임이라고? 재림은 ‘책임’이라는 말의 의미를 숙제를 하지 않으면 선생님한테 꾸중을 듣는다는 정도의 각오로 이해했었다. 아침에 차려준 밥상에서 밥그릇을 깨끗이 비워야 하는 정도의 일로 이해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걸음 하나에 난간 밖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난간 끝에 선 선생님을 밀어뜨릴 수도 있었다. “무서워.” 재림이 울먹거렸다. 그러자 단유가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뭔가 말하는 것 같은데 들리지 않았다. 대신 더 커져버린 박수소리가 귓가를 웅웅거리게 만들 정도로 커졌다. “성재림! 성재림!” 아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전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아이들의 눈빛이 여간 겁나는 것이 아니었다. 박수소리는 쇠를 긁는 소리처럼 더 거칠어졌고, 자신의 호명하는 소리는 점점 하나의 목소리로 변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목소리는 꽤 익숙한 소리로 바뀌었다. “야, 성재림! 너 안에 있지! 문 열어, 어서!” 잠결에도 알루미늄 문을 쾅쾅대며 부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정신을 차린 재림이 이불 속에서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났다. 느릿느릿 현관으로 걸어간 재림이 문을 열자, 얼굴이 엉망인 채로 나타난 종혁이 재림의 멱살을 붙잡았다. “야, 이 개새끼야. 니가 친구야? 응?” 잠이 덜 깬 건지, 아니면 앞에 선 종혁이가 미친 건지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종혁은 재림을 데리러 오는 동안 분을 참을 수 없었다. 몇 번이고 육두문자를 입에 주워 담으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지만, 정작 자신은 그런 시선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개새끼, 씨발새끼.” 두 사람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한 사람은 지욱이었다. 한 살 많은 주제에 잘나면 얼마나 잘 났다고 매일 젠체하면서 사람을 들들볶는다. 부려먹고 시켜먹는 것도 모자라 상납도 시킨다. 물론 종혁이나 재림은 그 형의 위세에 빌붙어 지난 시간동안 꽤 어깨에 힘주고 다녔다. 다른 동네 아이들과 맞붙어도 지지 않았고, 다른 선배들이 무시하지 않았다. 담배 같은 것도 손쉽게 조달할 수 있었던 것도, 지욱의 공이 크긴 했다. 그래서 가끔 지욱이 어울리지 않게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담배를 꼬나 물고 있으면 아니꼬운 때가 있어도 티 내지 않고 헤실헤실 웃으면서 비위를 맞추곤 했다. 하지만, 지욱이 그들을 후배로 대접한 적은 없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후배가 아니라 잡일 봐주는 노예였다. “저거 좀 뽀려와.” 라고 하면 이 악물고 쿵쾅거리는 가슴을 감추며 문구점에서 비싼 장난감을 훔쳤고, 슈퍼마켓 앞에 진열된 과자더미를 들고 수십 미터를 뛰어야했다. 잡혀도 자력구제―훔친 물건을 던져서 놀라는 사이에 도망을 가는 등―해야 했고, 잡히지 않아도 얼굴이 팔리면 그 쪽으로는 갈 생각을 못했기에 불편한 점이 많았지만 항변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성공한 뒤의 칭찬과 포상이 그 때는 어찌나 자랑스러웠던지, 더욱 기를 쓰고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조금 전, 지욱의 얼굴은 정말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서웠다. 종혁은 머리가 하얘질 정도로 무서웠던 나머지 오줌을 지릴 뻔 했었다. 그렇게 각인된 지욱의 얼굴 옆으로 또 다른 얼굴이 떠오르니, 절친한 재림이었다. 아니, 절친했다고 믿었지만, 그 믿음을 배신한 원수 같은 놈이었다. 분명히 아침에 모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면 당연히 오늘 어떤 일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림은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붙잡지 못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이미 종혁의 머릿속에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당해야 했던 일들의 원인 제공자로서 재림이 존재할 뿐이었다. “개새끼, 나는 선생님 앞에까지 가서 보호해주려고 했는데, 개새끼.” 선생님 앞에 나선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 개새끼는 모를 것이 분명했다. 자기는 그 놈과 똑같이 혼날 수 있다는 것도 각오하고 앞에 나선 것이었는데, 그 새끼는 지 혼자 편하자고 자신을 모른 체했다. 친구라는 놈이 그런 행동을 했다. 이윽고 재림의 집으로 뛰어간 종혁은 숨도 고르지 못한 상태에서도 재림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두들겼다. “야, 성재림! 개새끼야! 너 안에 있는 거 다 안다고, 새끼야!” 알루미늄 문을 힘껏 쳐댔다. 삐걱대는 소리와 쇠 갉아먹는 소리가 났지만, 흥분한 종혁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소음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인기척이 나더니 문이 열렸다. 종혁은 자다 깬 듯한 재림의 얼굴을 보자 화가 치솟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곧장 재림의 멱살을 잡고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이 개새끼야!” 재림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헤어진 지 얼마나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바깥에는 해가 지지 않았으니,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 현관문을 두드리고, 멱살을 잡고 신발을 신은 채로 거실 안으로 들어오는 종혁의 태도가 당황스럽기만 했다. “야, 뭔데?” 태연한 재림의 말에 종혁은 자제력을 잃었다. 내가 쳐 맞고 있는데, 넌 잠이 오냐? 종혁은 재림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퍽, 하고 재림이 무너지자 이 때다 싶어서 발로 밟았다. “이 새끼야, 니가, 너만 살면, 다야? 이 개새끼가!”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자신이 얼마나 억울한 일을 당했는지, 그리고 재림이 얼마나 비겁하고 나쁜 놈인지를 일일이 예를 들어가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오로지 ‘개새끼’라는 단어 밖에 없었다. 뭔가 속 시원히 말을 못하니 화가 더 쌓이는 기분이었다. “개새끼야!” 일단은 밟아놓고 데려가야겠다. 그래야 속이 조금은 풀릴 것 같았다. 그래야 조금은 덜 억울할 것 같았다. **** “간만에 몸 좀 풀었더니 좋다, 야.” 더벅머리를 한 아이가 목을 돌리며 기분 좋게 웃었다. “새끼, 그 정도로 몸이 풀리냐? 난 아직도 배가 고프다.” “븅신, 니가 무슨 감독이냐?” 아이들은 켈켈거리며 웃어댔다. 지욱이 담배를 쭉 빨았다가 코로 연기를 뿜으면서 입을 열었다. “근데, 오늘 민주는 왜 안 온대냐?” 그러자 뒤에서 담배를 필터가 타 들어갈 때까지 빨고 있던 소년이 입을 열었다. “친구랑 노래방 간다던데?” 지욱이 뒤를 돌아보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어떤 친구?” “왜, 있잖아? 정흰가 하는 애.” 지욱이 침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노래방 가려고?” 짧게 숨을 토한 지욱이 이를 갈며 말했다. “그래. 내 생일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튀었다 이거잖아?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들 미친 거 아냐?” 더벅머리가 따라 일어섰다. “종혁이 안 기다려? 애들 왔는데 우리가 없어봐. 우습게보지 않을까?” “에이 씨. 이 새끼는 왜 이렇게 안 와?” 여태 몸을 웅크리고 나뭇가지로 모래를 헤집고 있던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2배는 더 큰 몸을 가진 아이였다. “도망간 거 아냐?” “도망? 이 새끼들이 간땡이가 부었나?” “야, 그냥 오늘 그 새끼들 잡아서 족칠까? 버르장머리를 가르쳐야 애들이 말을 잘들을 거 아냐.” “그래도 말 잘 듣던 애들인데, 괜히 따까리 하던 애들만 버리는 거 아냐?” 더벅머리의 변호에 잠시 고민하던 지욱이 모래를 걷어차며 말했다. “다른 새끼 구하면 되지. 선배 말 안 듣는 새끼들은 버릇을 고쳐놔야 돼. 그래야 다른 애들도 말을 잘 듣지. 그치?” 지욱의 말에 여태 말없이 일렬로 서 있던 5학년 애들 네 명이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덩치가 몸을 세우더니 5학년들 앞으로 다가갔다. 5학년들의 눈에는 중학생 형들 못지않게 무서운 형이었다. 저 바위 같은 주먹을 맞으면 정말 뼈가 부러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몸이 경직되었다. “니들도 조심해. 배신 때리려면 각오하고 때려. 안 그러면 내가 제대로 때려줄 테니까.” 더벅머리를 비롯한 6학년 애들이 덩치의 라임에 키득거리며 웃었지만, 5학년들은 목울대만 꿀렁댈 뿐 입을 열지 못했다. “대답 안 해?” “예!” “뭐? 배신 때린다고?” “아닙니다!” 아이들은 바짝 기합이 든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욱은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버린 후, 모래 속으로 꽁초를 꾹꾹 눌러 밟았다. “가자.” 인평초등학교의 일진회가 아지트에서 출발했다. 목표는 건방진 후배의 집이었다. “아, 근데 너 재림이 집 아냐?” 지욱의 말에 더벅머리가 머리를 굴리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눈치 빠른 아이 하나가 손을 들었다. “제가 알아요.” ======================================= [171] Faith(3) 집에 돌아온 단유와 명수는 거실에서 회색 트레이닝 복을 입고 소파에 드러누워 TV를 보는 하은을 보았다. “다녀왔습니다.” “왔니?” 그리고 거실에서 빨빨거리면서 뛰어다니던 호빵이 둘을 향해 혀를 내밀고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명수가 밝게 웃으며 호빵을 두 손으로 집어 들었다. 호빵을 혀를 내밀어 명수의 얼굴을 핥으려했다. 명수가 좋아 죽으려하는 걸 옆 눈으로 보면서 단유는 방으로 들어갔다. 가방을 벗고 나온 단유는 신발장 옆에 놓인 무선청소기를 집어 들었다. “놔둬. 어차피 더러워질 거.” 하은이 졸린 목소리로 단유의 행동을 제지해보지만, 단유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청소기의 전원을 켰다. 모터가 돌아가면서 70데시벨의 소음이 집안을 울리자, 명수의 손에 들려있던 호빵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소음의 정체를 보려고 애썼다. “궁금해? 궁금해?” 명수는 호빵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일부러 청소기를 보지 못하게 몸을 이리저리 돌렸다. “개 멀미하겠다. 그냥 좀 내려놔.” “얘도 멀미해요?” “할 걸?” 하은은 자세를 바꿔 누우면서 대답했다. 그러나 당분간 소파에서 일어날 생각은 없는 듯 했다. 그 사이 단유가 청소기로 바닥에 떨어진 흰 털들을 치우고 있을 때, 설거지 중이던 아주머니가 말했다. “단유야, 이모가 할 테니까 넌 방에 들어가서 쉬어.” “괜찮아요. 금방인데요, 뭘.” 보육원에서도 자기 방 청소는 자기가 알아서 했었다. 지금은 거의 대부분 아주머니가 대신 해주는 형편이라 몸은 더 편해졌다. 그러니 이 정도 손을 거드는 것은 무리도 아니었다. 게다가 무선청소기는 늘 신기했다. 늘 허리를 굽히고 빗자루 질을 하던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하루 종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충전시간의 제한 때문에 그럴 수는 없겠지만. “선생님은 뭐하누? 애가 저리 청소하는데?” “이모, 쟤가 하고 싶어 하는 건데요. 그냥 놔둬요.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고, 말린다고 들을 애도 아니네요.” 아주머니는 피식 웃으면서 설거지를 이어갔다. 자신도 그걸 알기에 말로는 말리면서도 고무장갑을 벗지 않았다. “진짜, 주영이 이 기집애가 사람 괴롭히려고 보낸 거야. 분명해.” 하은이 중얼거리면서 몸을 웅크렸다. 좁은 소파 위에서 용케도 몸을 돌려가면서 가장 안락한 느낌을 주는 자세를 찾아보는 하은이었다. 털들이 보이는 대로 청소기를 이리저리 밀어대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던 단유는 마지막 한 올까지 찾아내려다, 명수가 호빵을 내려놓는 모습을 보고는 청소기를 껐다. 하은이 피식 웃는 소리를 낸 것 같았지만, 애써 확인하려 들지는 않았다. 청소기를 제자리로 돌려놓은 후, 베란다에서 마른 빨랫감을 가지고 나왔다. “아이고, 단유야. 그냥 냅두라니깐.” 설거지를 마친 아주머니가 달려와서 손을 거들었다. “제 꺼만 가지고 갈게요.” 단유는 야무지게 자신의 옷들을 챙겨서 방으로 들어갔다. 하은이 상체만 조금 일으켜서 주위를 둘러보더니, 여전히 가방을 둘러맨 채 호빵과 놀고 있는 명수를 보았다. 호빵이 작은 발로 깡충대며 명수의 코앞에 갔다가 다시 물러났다가를 반복하고 있었고, 명수는 바닥에 바짝 엎드려서 호빵의 재롱에 맞춰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먹보야, 가방은 좀 벗고 놀지?” 하은의 말에도 명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호빵과 눈을 맞추며, 입 꼬리를 당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참 세상 속없이 편안하게 산다. 둘 다.” 하은이 혀를 차며 말하자, 아주머니가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그 말을 받았다. “이그, 선생님도 너무 그러지 마. 명수 나이 때는 저래도 되는 거야. 나중에는 저러지도 못해, 나이 들면.” 하은은 괜히 자길 두고 하는 이야기 같아서 뜨끔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선생님’이고 ‘보호자’인데 저리 둘 수는 없었다. “인명수! 옷 갈아입고 놀아! 안 그러면 저녁에 TV 못 본다.” 명수가 화들짝 놀라며 방으로 뛰어들었다. 명수의 움직임에 놀란 호빵도 뒷걸음질 치면서 물러섰다가, 명수가 뛰어 들어간 방으로 총총 걸어갔다. 아주머니가 걷어온 빨래들을 거실 가운데 러그 위에 올려두고 하나씩 개기 시작하자, 하은도 내려와 손을 거들었다. “쟤들은 그래도 선생님 같은 분 만나서 다행이야. 처음엔 부모 없이 자란 애라고 들어서 성격도 어둡고 침침한 애들이면 어쩌나, 걱정도 했었는데 말이야. 요즘은 명수보고 웃는 일이 많아서 일이 힘들어도 힘든 줄도 모르겠어.” 웃으면서 수건을 정리하는 아주머니의 손길을 따라 해보는 하은은 아직 집안일이 서툴러서, 옷을 개는 것인지 옷을 구기는 것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래도 가르칠 건 가르쳐야죠. 단유 보세요. 단유는 지금 당장 혼자 산다 해도 걱정이 없는데, 명수는 자기 앞가림도 못해서 걱정이라니까요.” “그건 선생님이 기준을 높게 잡아서 그래. 내가 그래도 나름 오래 살았지만, 단유 같은 아이는 본 적이 없어, 본 적이. 만약에 우리 애가 단유처럼 행동했으면 내 얼굴 주름이 반 이상은 줄었을 거야.” “주름은 무슨. 이모님 얼굴 아직 좋거든요?” “좋긴, 내가 요즘 거울 볼 때마다 깜짝 깜짝 놀라는데. 팔자주름은 하루가 다르게 깊어가지, 눈 옆에 주름도 어제는 4개였는데 오늘은 5개지. …나도 선생님 나이 때는 남자들 꽤나 울리고 다녔다고? 정말이야.” 하은은 까르르 웃으면서 자기 허벅지를 두들겼다. 아주머니는 피식 웃으면서 정갈하게 접은 수건들을 한데 모아놓았다. “그런데 선생님은 왜 연애 안 해? 아니면 몰래 하나?” 하은이 눈을 크게 뜨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연애는 무슨. 저 연애 안 해요.” “아니 자기가 무슨 연예인이야? 왜 그렇게 팔짝 뛰고 그래? 그러니까 더 수상하잖아?” “아이 참, 민망하게 무슨…. 지금은 그냥 연애할 기분이 아니라서 그래요.” “연애를 하는데 무슨 기분을 따지고 그래? 남자가 있으면 하는 거고, 없으면 못하는 거지.” “…애들 가르치는 일도 해야 되고.” 아주머니는 하은의 빨랫감 몇 개를 끌어다가 예의 노련한 솜씨로 개기 시작했다. “애들 가르치는 것도 오후에나 잠깐 하는 거지. 낮에는 아무것도 안하잖아?” “안하긴요? 저 부업해요.” “부업?” “주식하잖아요?” “이그, 거 주식하다 망한 사람이 한 둘이 아냐. 그거 하지 마. 우리 옆집 살던 아저씨도 주식하다가 10년간 모은 돈, 한 번에 다 날리고 시골로 내려갔어. 죽으려고 하는 걸 부인이 울면서 말렸대. 난 못 봤는데 그 때 아파트에서 난리가 났다고 하더라고. …내가 여태 살면서 보니까, 주식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손대는 게 아니더라고.” 그럴지도. 개미투자자들이 시장에서 큰 돈 버는 경우는 명수가 수학시험에서 백점 받을 확률보다 낮을 것이다. …갑자기 명수한테 미안해졌다. 하은은 헛기침을 하면서 화제를 돌렸다. “이모님 애들은 뭐해요?” “우리 애들? 큰 애는 중3이고, 작은 애는 중1이야.” “공부는 잘 하고요?” “그냥저냥 하는 편이긴 한데, 학교 선생님은 괜찮다고 하더라고.” “그래요?” 하은은 굳이 성적까지 물을 생각은 없었는데, 본직(?)이 과외교사다 보니 저도 모르게 물었다가 아차, 하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입이 근질근질했던 모양이었다. “사실 큰 애가 말이야, 전교 등수가 4등 정도 하거든? 그래서 별로 큰 걱정이 없어. 선생님도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하면서 내 손을 두들겨 주더라고. 근데 작은애가 등수가 조금 낮아서 걱정이 있어. 중학교에서 성적 좋아도 고등학교 올라가면 성적이 떨어진다며? 그래서 작은 애가 걱정이 많더라고. 근데 내가 뭐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마땅히 없어서 그냥 보고만 있지. 어휴, 우리 애도 제대로 못 보면서 이래도 되나 싶은데, 또 안하면 돈 벌 사람이 없으니까 안 할 수도 없고 말이지.” 반쯤 자랑이 섞인 고민이었다. “작은 아이는 성적이 많이 안 좋아요?” “반에서 겨우 10등 안에 든다네? 고등학교 들어가면 성적이 2배는 떨어진다며? 그럼 20등도 겨우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잖아? 그래서 애가 걱정이 많긴 한데, 자기는 노력을 해도 성적이 안 오른다는 거야. 큰 애가 좀 도와주면 좋겠는데, 큰 애도 자기 앞가림하기 바빠서 도와줄 형편이 안 되는 거지. 그러니 어쩌겠어? 내가 한 푼이라도 더 벌어서 학원이라도 보내줘야지.” 반쯤이 아니라 그냥 자랑이었나 보다. 그래도 진심으로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는 것을 보니, 뭐라도 이야기해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하은이었다. “이모, 걱정 안하셔도 돼요. 중학교 성적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저 공부에 흥미가 떨어지지 않게만 신경써주시면 되겠네요. 그럼 고등학교 올라가도 별 문제 없을 거예요.” 애초에 반에서 10등 하는 아이가 공부에 흥미가 없을 리가 없겠지만. “역시 선생님이라 그런지 잘 아시네? 그럼 우리 애들 별 문제 없는 건가?” “성적만 보면, 뭐 그렇죠.” 하은의 시큰둥한 반응이야 어떻든, 자기애들이 문제없다니까 얼굴이 한껏 밝아지는 아주머니였다. 이대로면 콧노래라도 부르면서 어깨춤 출 기세였다. 그 때, 단유가 방에서 나왔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드는 단유에게 하은이 물었다. “씻었어?” “네.” “그럼 10분 있다가 시작할까?” “네.” 단유는 물 한 컵을 마신 후,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근데, 쟤는 어쩜 저렇게 의젓하대? 진짜 우리 애였으면 내가 평생 업고 다녔겠네.” 아주머니가 웃으면서 수건을 들고 일어섰다. 욕실로 가시는 아주머니에게 시선을 던졌다가 이내 자신의 빨랫감으로 시선을 옮긴 하은은 가볍게 한숨을 내셨다. “그러게요….” 의젓하고 착실하고 바르기만 한 단유였지만, 하은의 눈에 단유는 까맣게 선팅 처리된 고급 세단처럼 속을 알 수 없었다. 처음 단유를 만났을 때, 하은은 단유와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소년이 얼마나 속이 깊고 예민한 아이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 때는 단유가 대화와 소통에 있어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사뭇 달랐다. 마치 주위에 헤파필터를 3중 4중으로 두른 모습으로 말 한마디 하는 것도 신중하게 생각하고 내뱉거나, 행동했다. 특히 아주머니가 있을 때, 그러한 모습은 심했다. 아주머니와 함께 생활한지 이제 겨우 한 달일 뿐인지라, 속단할 수는 없겠지만, 이제껏 보아온 단유의 모습만 놓고 보면 걱정이 되는 부분이 있었다. 예를 들어 아주머니가 있는 자리에서 단유는 길게 말하는 법이 없었다. “제가 청소할게요.” “밥 맛있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정도의 단답형 대답이 다였고, 그 외에는 ‘고맙습니다’ 나 ‘괜찮습니다’ 같은 대답이 주를 이루었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의 속이 드러날 빌미를 주지 않으려 하는 것처럼 비쳐줘서 하은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아주머니는 멀리서 보기에 반듯하고 단정한 모습의 단유만 볼 뿐이었다. 물론 본래의 단유도 그러하지만, 그래도 단유의 얼마나 속이 깊고 생각이 많은 아인지, 걔가 얼마나 절실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아주머니는 모른다. 문제는 집 안에서만이 아니라 집 밖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런 생활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단유가 왜 그런 벽을 두르고 사람을 상대하는 지를, 그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처방도 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단유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 않기는 매한가지네.’ 하은은 머리를 긁적이며 단유의 방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얼른 빨래 갖다놔. 거기 놔두면 또 털 묻어요.” 아주머니가 욕실에서 나오면서 한 마디 했다. 그제야 허둥지둥 대며 옷들을 챙기기 시작하는 하은이었다. **** 저녁식사를 마친 후, 단유가 다시 방으로 들어갈 때 하은이 단유를 붙잡았다. “예?” “잠깐 나와 봐.” 단유가 거실로 나오자, 소파에 앉아있던 하은이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여기 앉아볼래?” ======================================= [172] Faith(4) 하은이 단유를 앉힌 후, 두 사람은 말없이 TV를 보기 시작했다. 7시 반이 되자 호빵과 놀던 명수도 소파로 달려와 단유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선생님, 5번이요. 5번!” 하은은 혀를 차며 리모컨을 명수에게 넘겼다. 명수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받는 얼굴로 리모컨을 건네받은 뒤, 채널을 변경했다. “선생님, 근데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단유가 넌지시 눈치를 보며 입을 열자, 하은은 하품을 하면서 소파 위로 드러누웠다. “없는데?” “그래요? … 그럼 전 방에 들어갈게요.” “아냐, 할 말은 없지만 니가 할 일이 있어.” “뭔데요?” 하은이 눈짓으로 TV를 가리키며 말했다. “TV시청.” 마침 저녁식사 후 뒷정리를 마친 아주머니가 웃옷을 손에 들고는 소파 위 3남매(?)에게 인사를 했다. “이만 갈게요.” 명수와 단유가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은도 자세를 바로 하고 아주머니에게 짧게 인사를 했다. 아주머니는 눈웃음을 지으면서 셋에게 마주 인사를 한 뒤, 집을 나섰다. 호빵이 그 뒤를 졸레졸레 쫓다가 아주머니가 나가자, 다시 거실로 귀환했다. 명수 발밑에 서더니 명수를 올려다보며 열심히 꼬리를 흔들었다. “나중에 놀아줄게.” 명수는 호빵을 한 차례 쓰다듬고는 TV드라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단유가 눈치를 보다가 다시 하은에게 말했다. “저기….” 다시 소파에 드러누운 회색 트레이닝의 하은은 고개를 저으며 턱으로 TV를 가리켰다. 이럴 때 보면 선생님이라기보다는 어느 집 누구 삼촌 같은 모양새였다. TV로 시선을 돌렸을 때, 화면에서는 남녀 주인공이 팔짱을 끼고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그 때, 하은이 무릎으로 단유를 툭툭 쳤다. “저 사람들은 왜 저길 갔을까?” 단유는 하릴없이 소파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 갑갑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넓지 않은 소파 위에서 하은과 명수가 단유를 사이에 두고 앉은 것도 한 몫을 했지만. “쇼핑하러 갔겠죠.” 백화점에는 물건을 사러 간다. 그 정도는 기본 상식이다. “왜 쇼핑하러 갔을까?” 하은이 계속 이상한 걸 물어봤다. 단유가 하은의 의도를 짐작하려 애쓰는 사이, 명수가 입을 열었다. “남자친구가 직장에서 첫 월급을 탔어요. 그래서 그 동안 도와준 여자친구에게 보답하기 위해서 선물을 사려고 하는 거예요. 원래는 몰래 사주려고 했는데, 여자친구가 비싼 거 사면 안 된다고 하면서 같이 온 거예요.” 명수가 자신 있게 소리쳤다. 눈가를 좁힌 하은이 검지를 들어 명수의 입을 가리켰다. 명수가 두 손으로 입을 막는 사이, 하은은 게슴츠레 눈을 뜨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왜 백화점으로 왔을까?” “물건이 많으니까요?” “그런데 비싸잖아? 백화점보다 더 싸게 구입할 수 있는 곳도 있을 텐데, 굳이 여길 온 이유는 뭘까?” “여자가 백화점 주인 딸이라서요. 그런데 남자는 그걸 몰라요. 그래서….” “먹보, 넌 조용히 해.” 명수가 입을 오므리면서 다시 드라마에 몰입할 때, 하은이 단유에게 말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 해. 그런데 여자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 다만 남자가 모를 뿐이지. 하지만 여자는 남자에게 받는 것을 기꺼워하고 있어. 왜 그럴까?” “남자를 좋아해서 그렇겠죠.” “그래, 일단 남자를 좋아하기 때문인 건 맞아. 그런데,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방식이 네가 보기에 어때?” 단유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일단 드라마를 처음부터 보지 않았던 상황인지라, 정확하게 선후관계를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런 걸 물어보는 것 같지는 않으니, 일단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보자. 남자는 여자를 좋아하고, 그래서 선물을 하려고 한다. 그런데 직장에 취직하기 전까지 여자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하니, 물질적으로 받은 것만큼 돌려준다는 의미에서 비싼 것도 감수하겠다는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항상 거래는 1:1, 공정하고 공평하게 하는 것이 상리(常理)니까. 단유의 설명에 하은은 고개를 돌려버렸고, 명수가 혀를 차며 단유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친구야. 넌 세상을 좀 더 알아야겠어.” “무슨 소리야?” “아, 그래서 너한테 여자친구가 없는 거였어.” “응?” 명수가 박수를 치며 깨달음을 얻었다는 표정을 짓자, 하은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명수의 말에 동감을 표시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 같은 이야기인가. 선생님과 친구, 두 사람은 논리적으로 전혀 연관성이 없는 두 사실 관계를 마치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처럼 엮어서 그것이 마치 진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단유야, 앞으로는 수학 공부 말고 인생 공부도 좀 하자.” “네?” “TV 속에 인생이 있다.” 하은의 말에 명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찬동했다. 단유가 난감하고 당황하고 답답해하는 와중에도 하은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댔고, 명수가 코치를 했다. 차라리 수학문제를 푸는 게 더 쉽고, 편하고, 효율적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동시에 명수는 이 복잡한 설정의 드라마를 어떻게 다 이해하고 볼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저 여자는 왜 저렇게 화를 내는 거야?” 단유가 무심결에 질문을 하자, 명수가 신이 나서 대답했다. “계순이가 인주 친군데, 인주가 결혼했다가 이혼했거든. 그런데 인주 남편이 계순이와 만나기 시작한 거야. 그런데 인주는 계순이가 이혼하기 전부터 남편과 만났다고 오해를 했고, 계순이는 저 남자가 인주의 전 남편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다가 알게 되면서 죄책감을 느끼는 거야. 그런데 계순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인주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어. 그래서 두 사람은 굉장히 친한 사이지. 그런데 전남편이 중간에 끼어드니까,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생긴 거야. 계순이는 오해를 풀고 싶지만, 인주는 사실 임신을 한 상태로 이혼을 했어. 그래서 인주는 계순을 미워하는 거야.” 들어도 모르겠다. 단유가 하은을 바라보자, 하은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단유는 다시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일드라마는 1시간도 되지 않아서 끝이 났고, 마지막에 계순이가 인주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에서 롤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 왜! 꼭 저럴 때 드라마 끝나더라?” 명수가 신경질을 내며 리모컨을 들었다. 다시 채널이 변하고 또 다른 드라마가 시작하고 있었다. 대가족이 모여 사는 집에 둘째가 사고를 치고 들어오면서 가족 간에 다툼이 생기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명수가 마치 랩퍼에 빙의된 것처럼 이전 줄거리를 읊어대는데, 하은은 굳이 제지 하지 않았다. 단유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화면에 시선을 두었다. 하지만 눈이 간다고 열심히 보는 것은 아니었으니, 머릿속에서는 이 시간에 왜 이걸 보고 있어야 하나, 라는 의문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끼리 투닥거리는 이야기가 무슨 재미가 있다고.’ 단유는 제발 빨리 드라마가 끝나길 빌었다. 그리고 빨리 수학책을 펼치고 아까 풀다 만 문제를 마저 풀고 싶었다. 드라마 시청 시간은 11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어느 때보다 피곤한 얼굴을 하고 방으로 들어가는 단유를 보며, 하은은 뿌듯함과 미안함을 느꼈다. **** “이 개새끼!” 종혁이 발을 크게 휘두르려는 찰나. “너희들 뭐하는 거야!” 뒤에서 어떤 아주머니의 호통소리가 들렸고, 종혁은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떤 놈이 시끄럽게 떠드나 했더니, 어떻게 애를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때리고 있어? 너 누구니? 너 나와 봐, 얼른!” 바닥에 엎드려 웅크린 자세를 취하고 있던 재림이 밖을 보니, 옆집 아주머니였다. 평소에도 옆집 시끄러운 걸 참지 못해서, 잔소리가 심하던 분이었다. 종혁이 알루미늄 재질의 문을 그렇게 열심히 두드려 댔으니, 화가 날 만도 했을 터. 반면 어두운 거실에서 주춤대던 종혁은 뻣뻣한 얼굴을 하고는 아주머니에게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얘가…먼저 했는데요.” “아줌마가 다 봤는데, 어디서 거짓말이야! 니가 아까 문 두들겼지? 그치?” 종혁은 쭈뼛대면서도 문을 막고 있는 아줌마 때문에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얼른 안 나와! 너 어디 사는 누구야? 학교 어디야? 얘랑 같은 학교야?” 종혁은 큰일 났다 싶은 마음에 침을 꿀꺽 삼키고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아줌마 옆으로 빨리 빠져나갈 수 있을 것도 같은데, 그러다 잡히면 더 큰일이다 싶어, 쉽게 용기를 내지 못했다. 아주머니가 눈을 부라리며 집 안으로 들어오려 하자, 종혁은 굳게 마음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여태 PC방 알바, 슈퍼 아주머니, 문구점 아저씨로부터 도망쳐 온 경험을 살려 도주를 결심한 종혁이 아주머니의 왼쪽 옆구리를 향해 어깨를 밀어 넣었다. “어이쿠!” 작은 몸집의 아이라도 창졸지간에 벌어진 일이라, 순발력이 따르지 못했던 아주머니는 헛손질을 하며 종혁을 놓쳤다. 종혁도 정확히 노렸던 곳으로 가지 못해, 결국 아주머니를 몸으로 떠미는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아주머니는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넘어졌고, 바닥을 구른 종혁은 그 틈에 잽싸게 일어나서 달리기 시작했다. “저 놈의 새끼, 너 어디가! 거기 안 서!” 종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지욱의 무리였다. “저 새끼 졸라 빨리 뛰네.” 키득거리면서도 아이들은 처음의 목표였던 재림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재림의 집 앞에 나동그라진 채 사람 죽네를 연발하는 아주머니 때문이었다. “오늘은 글렀네. 내일 학교에서 손 좀 봐야겠네.” “일단 우리끼리 놀지 뭐. 어떡할래? 민주한테 갈까?” 지욱이 바지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몸을 돌렸다. “일단 가보자. 민주 있으면 같이 놀고, 없으면 우리끼리 놀지 뭐.” 아이들은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함께 있는 이상 그들이 무서워할 건 없었다. **** “성재림. 이리 와.” 아버지가 방에서 식사를 마친 후, 재림을 불렀다. 한쪽 뺨이 부은 재림이 눈을 아래로 깔고 아버지 앞에 무릎 꿇었다. “아빠가 뭐랬어? 사고 치지 말랬지? 근데 오늘 뭐야? 왜 사고쳤어?” 엄밀히 말하면, 재림이 아니라 종혁이 사고를 친 거였지만 그 사실이 중요하진 않았던 아버지다. “아빠가 말하면 대답을 해! 아빠가 그렇게 가르쳤어? 응?”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야? 옆집 아주머니도 다쳤다며?” 불이 붙은 담배를 입에 물 틈도 없이 재림을 몰아붙이는 아버지였다. “학교 때려치울 거야? 응? 소년원 갈래? 거기 가서 니 멋대로 살아볼래? 엄마 아빠도 없이 살아보고 싶어? 응?” 재림은 억울했다. 모처럼 일찍 집에 들어와서, 담배도 안 피고 얌전하게 집에 있었을 뿐인데, 세상의 온갖 사고를 다 친 사람이 된 것처럼 비난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재림은 항변하지 않았다. 해봐야 소용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재림의 침묵 속에서 아버지의 폭언은 20분을 더 이어졌고, 재림의 정신이 너덜너덜해질 쯤 아버지는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내일부터 아버지가 매일 지켜본다. 만약 한 번이라도 더 사고 치면 그 때는 아빠가 꼭 너 보육원에 넣어주마. 가족한테 피해만 끼치는 놈은 이 집안에 필요가 없다.” 그날 재림은 또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물을 참아야했다. 그러나 바로 옆에 붙은 책상에서 공부하던 형은 재림을 위로하지 않았다. 헤드폰을 쓰고 탁상램프 아래서 문제를 풀고 있던 형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대신 한 마디를 해주었다. “시끄럽게 하지 마라.” 떠들지 말란 말 같기도 하고, 얌전하게 행동하란 말 같기도 했다. 어쩌면 둘 다 일지도. 재림은 입술을 깨물었다. **** 정말 학교를 가기 싫었다. 악다구니를 쓰면서 자기를 두들겨 패던 종혁이를 보고 싶지도 않았고, 어제 모임에 불참했다는 이유로 벼르고 있을 6학년 형들도 무서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족들의 차가운 시선이 무서워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오늘 학교에 가지 않았다가는 정말로 보육원에 보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실에 들어서니, 언제나와 같은 정경의 교실이 재림을 맞이했다. 그 누구도 따스한 시선이나 아는 척을 하지 않는 교실. 그들만의 세상에서 재림은 혼자였다. 어제까지는 종혁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 녀석도 적이 되었다. 아마도 오전 중에 한 판 붙을지도. “들어가지 않고 왜 여기 서 있어?”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보니 표정 없는, 아니 오늘따라 유난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의 단유가 서 있었다. “안 들어가?” 단유가 재차 묻자, 재림도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겨 자리로 갔다. 옆을 보니 언제나 그렇듯이, 책상을 정리하고 책을 펴서 시선을 두는 단유였다. 이제까지라면 별 볼일 없는 녀석, 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이제는 달랐다. ‘어쩌면 진짜 꿈일지도 모르지만.’ 꿈이었다고 해도, 초능력자 같은 신비로운 능력을 보여주던 단유였기에 뭔가 달라보였다. “야, 성재림.” 어제의 지옥은 역시 끝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교실 뒷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이는 6학년 형들 중의 한 명인 더벅머리였다. ======================================= [173] Faith(5) 6학년이 교실에 들어오니 동장군이 급습하기라도 한 것처럼 교실안의 온도가 내려갔다. 아이들은 옷깃을 여미는 대신 입을 다물었고, 동장군이 언제가나 두려운 눈치로 더벅머리를 바라보았다. “겁대가리 없게 형들 쌩까고 가더니, 형이 부르는데 대답도 안하네?” 재림의 작은 입술이 달싹거리는 듯 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벅머리가 피식 웃으며 재림의 머리를 내려치자, 찰진 소리가 나면서 재림의 머리가 엉클어졌다. “오늘 점심 때, 별관 뒤로 와라.” 더벅머리가 재림의 머리채를 쥐고 좌우로 흔들면서 겁을 준 뒤, 교실을 쭉 둘러보았다. 눈이 마주칠까 두려웠던 아이들이 서둘러 시선을 내리깔 때, 재림의 바로 옆 분단에 있던 단유는 더벅머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뭘 봐, 새끼야.” 단유가 담담하게 말했다. “너 보는데요.” “뭐?” 단유의 말에 더벅머리는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눈 뜬 심봉사마냥 놀랐던 것은 재림 역시 마찬가지였다. ‘겁도 없이….’ 저 더벅머리로 말할 것 같으면, 인평초등학교에서 주먹질은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강했고, 성격도 더러워서 중학생 형들한테도 시비를 걸 정도라는 소문이 자자한 아이였다. 선생님도 포기했을 정도로 막나간다는 더벅머리에게 단유가 막말을 내뱉은 것은, 분명 단유가 뭘 몰라서 한 행동일 것이다. “다시 말해봐라.” 으르렁거리는 더벅머리에게 단유가 다시 한 번 말했다. “너 본다고요.” “이 새끼가.” 터벅터벅 걸어간 더벅머리는 경고도 없이, 단유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앉아있던 단유가 그대로 주먹에 맞고 뻗을 것을 예상한 여자 아이들 몇몇이 빽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아쉽게도(?) 더벅머리의 주먹은 단유가 잠깐 머리를 뒤로 피한 사이에 허공을 헛치며 지나갔다. 너무 힘을 줬던 걸까, 더벅머리가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지려는데, 단유가 친절하게 의자를 뒤로 밀어 넘어질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쿠다당. 넘어지지 않기 위해 손을 짚는다는 게 하필 책상 가장자리를 짚으면서, 책상과 함께 바닥으로 넘어진 더벅머리였다. 넘어지자마자 벌떡 일어난 더벅머리는 얼굴이 너무 새빨갛게 변해서 사람의 얼굴이 아닌 것 같이 보일 정도였다. 사실 얼굴만 그런 게 아니라, 머릿속도 이미 이성이란 게 사라진 상태였다. “개새끼가!” 의자에 앉은 채로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단유를 향해, 앞발을 내지르는 더벅머리였다. 하지만 단유는 더 이상 이유 없는 폭력에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단유는 날아오는 발을 잡았다. 그리고 만세를 부르듯 위로 추켜올렸다. 날아오는 발의 힘을 맨 손으로 감당한 것은 그간 꾸준히 해왔던 맨손 운동의 효과였지만, 아이들은 알지 못했다. 아이들의 눈에는 전광석화처럼 빠른 발을 잡아챈 후, 들어 올리는 동작으로 인해 더벅머리가 제 때 발을 빼지 못하고 뒤로 넘어가는 모습뿐이었다. 그 동안 한 싸움 한다고 생각했던 재림만이 단유의 놀라운 기술을 알아보았다. 일단 날아오는 발을 두 손으로 잡는다는 발상 자체가 놀라웠다. ‘여태 얌전히 책만 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싸움의 고수?’ 하지만 사실 방금 그 동작이 어젯밤 드라마에서 남자주인공이 보여주었던 동작이란 사실을 알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다만 드라마에서 엑스트라가 이 반격으로 인해 바닥에 넘어지면서 일어서지 못했던 것과는 달리, 현실에서 더벅머리는 넘어지지 마자 금방 몸을 굴려서 일어났다. 하지만 더벅머리는 쉽게 단유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지금까지 당한 것도 개망신인데, 다시 덤벼들었다가 또 당하기만 한다면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었고, 두 번째는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 선생님 때문이었다. “야, 너 뭐야?”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할 틈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도망가는 더벅머리였다. “무슨 일이야?” 순진한 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이 서로의 목격담을 선생님께 알려 순식간에 교실은 경매장처럼 변해버렸다. 중매인이 된 선생님이 아이들 하나하나를 진정시켜 가면서 상황을 파악하더니 이내 경매가 종료되었고, 매물 중 하나였던 재림은 다시 선생님께 불려갔다. “김단유, 너도 나와.” 두 사람은 나란히 선생님 앞에 섰다. “김단유, 선생님이 교실에서 폭력을 쓰면 된다고 했어, 안했어?” “안된다고 하셨어요.” “아는 애가 싸움을 해?” “전 안 싸웠는데요.” “뭐? 그럼 다른 애들이 전부 거짓말을 한 거야?”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저도 싸우진 않았어요.” “그럼 뭘 한 건데?” “정당방위요.” 선생님은 잠시 말문이 막혀 채근할 생각도 못했다. 과연 ‘소문의 단유’는 이렇구나, 라는 걸 새삼 느끼면서 선생님은 다시 추궁했다. “정당방위라고 주장하는 것도 니 생각일 뿐이잖아? 다른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게다가 선생님이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폭력을 반대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너처럼 이런 이유, 저런 이유 갖다 대면서 주먹질을 하다보면 결국 어떤 폭력은 미화될 수밖에 없고, 힘 센 사람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일도 용인될 수 있기 때문이란 걸 몰라?” 단유는 침착하게 반박했다. “선생님의 말씀은 이해하지만, 너무 논리적 비약이 심하신 것 같네요.” “뭐?” “우선 첫 번째로 폭력을 미화하는 게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라는 논리는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 용인되지 않는다면, 폭력이 없어지나요? 아니면 폭력이 미화되지 않나요? 폭력이 미화되거나 말거나 싸움은 언제나 벌어질 수밖에 없는 거 아닐까요? 왜냐하면 싸움이나 폭력의 발생의 원인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서만은 아니니까요. 때로는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에게 싸움을 걸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싸움은 힘의 강약에서 오는 게 아니라, 생각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니까요.” 선생님은 해를 바라보는 드라큘라의 모습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는 별다른 감정 기복 없이, 마치 뉴스 속 앵커처럼 선생님의 시선과 마주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또, 실제 폭력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선생님의 폭력 미화론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폭력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순간에는 폭력이 죄가 되든 미화가 되든 당사자들에게는 단순한 폭력이거든요. 여기서 당사자는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과 폭력에 당하는 사람이고요. 주먹질 하는 사람 앞에서 폭력은 미화될 수 없다고 항변해봐야, 의미가 없잖아요. 결국 맞을 뿐이죠. 또 폭력을 쓰려고 마음먹은 사람이 폭력은 미화되어선 안 된다고 스스로 설득할 리도 없고요. 결국 폭력이 휘둘러지는 상황에서 피해자는 타인이 도와주지 않는 이상, 자력구제를 해야만 되죠. 그런데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반 친구가 다른 사람에게 맞더라도 절대 개입하지 말라는 거잖아요. 설령 다른 어른의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그 시간동안 폭력에 노출된 피해자에게는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하실 건가요?” 숱하게 들어왔지만, ‘소문의 단유’는 역시나였다. 선생님을 비롯해서 아이들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단유를 바라보았지만, 이런 상황이 꽤나 익숙(?)했던 단유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맺었다. “게다가 제가 싸우지 않았다고 하는 이유는, 전 주먹을 쓰진 않았거든요. 그냥 막거나 피했을 뿐이죠.” 깔끔한 마무리. 어지간하면 선생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고 한 번 호통이라도 쳐보겠지만, 선생님은 마치 거품이 되기 전의 인어공주처럼 말문이 막혀 단유를 다그치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오직 재림만이 화끈거리는 기운을 느끼면서 진땀을 흘릴 뿐이었다. 단유가 덤덤히 바라보다가 재림을 흘깃 쳐다보았다. 이마에 굵은 땀이 흐르는 것을 본 단유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참, 아까 그 형이 재림이한테 점심시간에 별관 뒤로 나오라고 했어요.” “뭐, 그게 정말이니?” 재림은 뭐라고 말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이 사실이 선생님 귀에 들어갔으니, 이후 편치 않은 학교생활이 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그 형들은 선생님 눈치 때문에 다른 이들을 괴롭히지 않을 사람들은 아니었으니까. “그건… 선생님이 알아서 할 테니까, 일단 알겠어. 둘 다 들어가. 그리고 단유.” “네.” “이번에는…상대가 6학년이었으니까 봐주는 거지만, 그래도 절대 교실에서는 폭력은 안 돼. 그건 이 교실의 법이야. 법을 어기면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건, 동의하지?” “네. 알겠습니다.” 단유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아이들은 박수라도 치려다가 선생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여, 괜히 숙연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여러분들도 잘 들어요. 단유가 한 말이 옳다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만약 교실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그건 말려야 할 일이지 같이 끼어 들어서 주먹질을 하면 안 되는 거예요. 만약 결국 또 다른 폭력을 낳는 일이예요. 다른 사람을 때려서도 안 되지만, 맞는 걸 지켜보는 것도 나쁜 일이에요. 그리고 만약 말릴 수 없는 싸움이 난다면, 그 때는 빨리 선생님을 불러야 해요. 그것 때문에 선생님이 계속 교실에 있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네.” 짧은 소란이 끝났다. 하지만 선생님은 어쩐지 속이 뒤숭숭하여 찝찝했다. 하지만 이유는 알지 못했다. ‘눈빛 때문이었을까?’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겠지만, 선생님은 보았다. 아니 본 것 같았다. 단유의 덤덤한 표정과 달리 그 아이의 눈 속에서 날카롭게 빛나던 기운을. 마치 새파랗게 보일 정도로 투명하고 차가운 칼날 같던 눈빛을. 그러나 그 눈빛이 12살 아이에게서 볼 법한 것은 아닌지라, 그저 착각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여튼 신기한 아이야.’ 말빨에 휘둘려서 얼이 잠시 빠졌던 모양이라, 생각하면서 선생님은 수업을 준비했다. 그리고 이 사태로 인해 움직임이 제약된 또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종혁이었다. 종혁은 사나운 눈으로 재림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단유 저 새끼 욕하더니, 결국 지가 먼저 기어들어가네. 찌질한 새끼.’ 하지만 하루 종일 경계의 눈빛을 잃지 않는 선생님 덕분에 종혁은 경거망동하지 않았고, 교실은 오전에 액땜한 덕분으로 별 일 없이 편안한 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 “고맙다. 도와줘서.” 재림이 집에 가려던 단유를 붙잡고 이야기했다. “별로 도와준 건 없어.” 말 그대로 단유는 재림을 도울 생각은 없었다. 단지 더벅머리와 눈이 마주쳐서 시비가 붙었고, 약간(?)은 단유가 도발한 면도 있지만, 어쨌든 재림과는 관계없이 싸움이 벌어졌을 뿐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크게 당하지 않았잖아. 점심시간에도 그렇고.” 5학년 주임이었던 담임선생님은 곧장 6학년 주임에게 알렸고, 6학년 주임선생님은 체육선생님과 함께, 별관 뒤에 대기하던 아이들을 붙잡았다. 몇몇은 놓쳤지만, 그래도 호되게 혼난 탓에 감히 학교에서 함부로 행동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됐다. “선생님들이 한 거지, 내가 한 게 아냐.” 재림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으면서 다시 감사를 표하려는 차에, 단유가 말을 잘랐다. “그리고 이런 거 하지 마. 너랑 안 어울려.” 불과 어제까지,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강렬한 이미지를 보였던 재림이―비록 남들이 모르는 일주일의 수련(?)이 있었지만―하루아침에 성격을 바꾸고 다가오니, 어쩐지 등 뒤가 가려운 느낌이었다. 냉정하게 돌아서는 단유는, 그러나 다시 팔을 붙잡는 재림의 손길에 걸음을 떼지 못하고 돌아보아야 했다. “왜?” 재림이 뺨이 붉어지는 줄도 모르고 말을 꺼냈다. “도와줘.” “응?” “나, 어쩌면 집에 못 갈지도 몰라.” “왜?” “6학년 형들이 집 앞에서 지키고 있을지도 몰라.” “부모님은?” “일하러 나가셔서 지금 집에 안 계셔. 그래서 저녁까지 나 혼자 있어야 한단 말이야. 단유는 캐릭터가 변한 재림을 보며 한숨을 내셨다. 책임을 지라고 했지, 책임을 지겠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그럼 경찰서 가.” “경찰서?” “청소년 폭력 범죄가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보호가 필요하다고 신고해.” 재림은 멍한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석고야, 가자!” 교실 뒷문에서 환하게 웃는 명수가 단유를 불렀다. 단유는 책가방을 둘러매고 교실을 나섰다. ======================================= [174] Faith(6) 재림의 예상대로 지욱 패거리는 재림의 집으로 가는 길목 한 편에 모여 있었다. 5학년 후배에게 망을 보도록 한 그들은 좁은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서,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병석이는 많이 혼났대?”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지욱이 물었다. 핸드폰 액정을 열심히 두들기고 있던 덩치가 대답했다. “지금도 상담실에 있을 걸?” 별관 뒤에서 잡힌 아이들 중 한 명이 바로 더벅머리, 병석이었다. 6학년 선생님의 손에 끌려 병석은 상담실로 직행했고 병석은 반성문을 쓰느라 지금까지 학교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병석을 필두로 하여 학교 내의 암덩어리들을 골라내려 했던 선생님들의 작전은 병석이 의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묵비권을 행사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새끼는 왜 이렇게 늦어? 야, 재림이 아직 안 보이냐?” 망을 보던 후배는 선배들의 물음에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피시방 간 거 아냐?” “아이 씨, 오늘 또 돌아다니면서 찾아야 돼? 무슨 숨바꼭질 하는 것도 아니고.” “종혁이 너, 재림이 어디 갔는지 몰라?” 5학년 후배들 무리 속에 얌전히 대기하고 있던 종혁이는 불씨가 튈까 두려운 마음에 서둘러 대답했다. “모르겠는데요. 아까 학교 끝나고 바로 나가는 것만 봐서….” “이 새끼, 눈치 깐 거 아냐?” 슬슬 날도 풀리기 시작한 3월 말인데도 햇볕이 비추지 않는 좁은 골목은 손등이 붉어질 만큼 추웠다. **** “다녀왔습니다.” “왔어?” 오늘도 여전히 화장기 없는 회색트레이닝 복의 하은이 소파에 드러누운 채 손만 까닥였다. 그러다 문득 낯선 이가 아이들 뒤를 따르는 것을 보고 상체를 세웠다. “뒤에 누구니?” 명수가 현관까지 달려온 호빵을 들어 올렸다. 헥헥거리며 조그만 혀를 빼물고 있는 호빵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 얼굴을 비벼대며 말했다. “재림이요. 단유네 반인데 같이 왔어요.” “왜?” 단유가 재림을 돌아보았다. 니가 직접 말씀드려, 라는 표정이었다. 재림이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 소파에 앉아 있는 하은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성재림입니다.” “이름은 들었고, 무슨 일이니? 놀러 온 거야?” 재림은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하는 사이에 호빵과 어울리던 명수가 신발을 벗어 던지면서 말했다. “경찰서 가기 싫다고 여기로 왔대요.” 명수가 대신 대답을 해주었지만, 전혀 의문이 해결되지 않았다. “갑자기 웬 경찰서?” 이대로는 별 것도 아닌 걸로 시간만 잡아먹고 말리라는 위기감에 단유가 나서서 사정을 설명했다. 어제 저녁 6학년 형들의 부름을 거절한 이야기와 오늘 아침의 난동(?) 사건, 그리고 재림이 무서워서 집에 못 가겠다는 이야기까지 했더니, 하은이 눈을 반짝였다. “그럼 니가 그 유명한 일진이야? 나 일진 처음 보는데, 책에서나 보던 일진을 실제로 보다니 뭔가 신기하다!” ‘초등학교 일진’이라는 게 ‘연예인’도 아닐진대, 호들갑을 떠는 하은의 유니크한 반응에 재림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단유는 역시나 가방을 벗어놓고, 청소기를 집어 들었다. 단유가 청소기를 작동시키고, 명수가 호빵을 데리고 소파 위로 가는 동안, 재림은 단유를 도와야 할지, 명수를 따라가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렸다. “넌 저 방에 들어가 있어. 금방 끝내고 갈게.” 단유가 지시해주지 않았다면, 계속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어야 할지도 몰랐다. 재림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방에 들어가려는데, 하은이 불렀다. “어이, 일진. 이리와 봐. 이야기나 들어보자.” 재림이 단유를 바라보니, 단유는 시선을 내리고 청소에 집중했다. 재림은 쭈뼛대면서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을 향해 다가갔다. “너 정말 일진이야? 너네는 뭐하고 노니? 너도 애들 돈 뺏어봤어? 잘 싸우고? 너도 싸움 많이 하니? 다른 학교 애들이랑도 싸우고 그래? 중학생들이랑은 안 싸워봤지? 중학생들이랑은 아직 싸울 힘이 안 되나?” 청소기의 소음을 뚫고 폭풍질문세례가 이어지는 동안 재림은 취업 면접이라도 보는 사람처럼 진땀을 흘렸다. 검은 맨투맨 티셔츠의 목덜미가 땀으로 젖을 때 단유가 청소를 마치고 돌아왔다. “너, 경찰서 가기 싫으면 선생님한테라도 이야기해.” “안 돼. 그랬다가는 더 혼날 거야.” “누구한테 혼이 난다는 거지?” “…부모님.” 단유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물었다. “부모님이 왜 괴롭힘 당하는 아이를 혼을 내?” 재림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이유를 알고 싶은 사람은 누구보다 재림이 먼저였으니까. 가정 문제까지 들춰가면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실례라는 생각에 하은은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종합해보면 아이들이 너한테 해코지할까봐 무서워서 도망쳤다는 건데,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그리고 내일이나 모레는? 그 때도 여기로 도망칠 거고?” 하은의 지적대로 여기에 숨는 것은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어쩌면 단유의 말대로, 경찰에라도 연락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단유가 재림을 대신해 물었다. 어쨌든 이 집안에서 가장 큰 어른이라고 할 사람은 하은 뿐이었으니까. 하은은 머리를 북북 긁으면서 재림을 쳐다보았다. 단유와 비슷한 덩치의 재림은 일진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엔 그저 어리고 겁 많은 12살 꼬마에 불과해 어울리지 않았다. “학교폭력은 신고하라고 배웠는데요?” 단유가 경찰서로 가라고 한 이유였다. 학기 초 선생님이 지시해주는 사항에는 학교 안전 시스템의 일환으로 학교폭력에 대한 주제도 나오고, 그럴 때마다 학교폭력신고센터에 대한 알림이 있었다. “117이요, 117!” 명수가 말을 거들었다. 하은은 곰곰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이 나면 119, 도둑 들면 112, 학교 폭력은 뭐, 117로 전화해보면 알겠지. 전화버튼 세 자리 누르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그래, 우리끼리 이렇게 고민할 이유가 없네. 신고하지 뭐.”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을 들자, 재림이 황급히 이를 제지했다. “잠시 만요.” “왜?” “그게… 안 하면 안 돼요?” 하은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물었다. “왜?” “그게, …괜히 신고했다가 제가 한 줄 알고 복수하면 어떡해요?” “그럴 일 없어. 그리고 신고하면 경찰들이 널 보호해 줄 거야.” …그렇게 해 주겠지? “아빠가 사고치지 말라고 했는데, 전화했다가 아빠가 화낼지도 몰라요.” “그럴 리 없어. 오히려 아들이 피해자인데 어떤 아빠가 널 뭐라고 해? 그리고 그런 문제도 경찰에서 봐줄 거야. 가정폭력 문제도 다루고 있으니까. 혹시 너희 아빠가 자주 널 때리거나 그래?” 당황한 재림이 팔을 휘저으면서 격하게 부정했다. 때리기는커녕 오히려 너무 무관심한 분이신데. “그럼 전화해서 신고하고 상담을 받도록 하자. 그리고 너도 이제 그 쪽 생활 청산해야지. 안 그래?” 청산 후 바른 삶을 살 기회 정도는 줘야겠지. 하은은 핸드폰을 들어 번호를 눌렀다. 간단한 안내 멘트 후 상담사에게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혹시 학교폭력 여기 신고하는 거 맞나요?” 난생 처음 117에 전활 걸어보는 하은은, 살다보니 이런 데도 전활 다 해보는구나 싶었다. **** “어떻게 오셨는지?” 이 선생님은 수업 중간에 연락을 받고 잠시 복도로 나왔다. “신고가 들어와서요.” 경찰서의 학교폭력신고센터에서 나왔다는 경찰과 상담사는 복도에 난 창을 통해 교실 안을 둘러보았다. 수업 중이었던 탓에 아이들은 얌전히 책상에 앉아있었다. 낯선 이의 등장에 주의를 기울이는 아이들의 시선이 모이고 있었다. 선생님은 ‘신고’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재림을 향해 시선을 주었고, 눈이 마주친 재림이 고개를 숙였다. “아, 저기, 그….” 선생님은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며칠 사이에 교실 안에서 벌어진 폭력 사건에 자신도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때 경찰이 먼저 말했다. “저희가 받은 신고는 이 반의 성재림이라는 학생이 윗학년 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서 집 앞을 지키는 바람에 집에도 들어가기 무섭다더군요.” 선생님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러시군요. 제가 담임으로서 부끄러운 점이 많네요.” “선생님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사고까지도 선생님이 책임지실 수는 없으시죠. 그 때문에 저희가 이렇게 신고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겁니다.” 여자 상담사가 웃음기 없이 설명을 했다. “우선 성재림 학생과 면담을 해야 할 것 같으니, 잠시 데리고 가겠습니다. 여기 상담실이 2층이었던가요?” “네, 네. 그럼 지금?” “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선생님은 재림을 불렀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재림이 머뭇거리다 교실을 나왔다. 등 뒤에 꽂히는 아이들의 시선과 호기심이 따갑게 느껴져 걸음을 걷기가 불편할 정도였다. “성재림 학생?” “네.” “나는 학교폭력신고센터에서 상담을 하는 노유경 선생님이야. 선생님이랑 잠깐만 이야기 좀 할래?” 재림이 낯선 사람들과 사라진 후, 담임선생님은 반 분위기를 수습하여 수업을 진행하고자 했으나 정작 본인의 마음이 불편하니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일단, 짝과 함께 문제를 읽어보고 토론을 해보기로 해요. 알았죠?” 내용을 모르는 아이들이라도 눈치는 있어서, 선생님 말에 따랐다. 대신 그들의 토론 주제는 과연 재림이는 어떻게 될까, 였다. “그럼 재림이 감옥 가는 걸까?” “감옥이 아니라 소년원이야. 우리 옆집 형이 거기 갔다고 했어.” “그래? 거기는 감옥이 아니야?” “감옥은 감옥인데, 애들이 가는 감옥이래.” “그럼 거기서 급식 먹는 걸까?” “그렇겠지. 그런데 감옥이라서 여기보다 맛없는 급식 주겠지.” “여기도 별로 맛은 없는데. 여기보다 맛없으면 더 밥 먹기 싫겠다. 밥 안 먹으면 경찰들이 막 혼내고 그러나?” 단유의 짝인 소연의 관심사도 별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바로 건너편에 앉아있던 아이의 일인지라 관심이 지대했던 바였다. “어제 6학년한테 맞은 것 때문에 신고한 걸까?” 단유는 교과서를 짚었다. “‘단군 이야기를 읽고 궁금한 점을 이야기하자’는 게 문제야.” “넌 안 궁금해? 쟤 5학년 시작할 때부터 문제아였잖아. 게다가 아침마다 쟤 만나면 옷에서 담배냄새가 얼마나 많이 나던지. 쟤 진짜 담배 피는 거 아냐?” 단유의 손가락은 여전히 교과서의 한 페이지를 가리켰다. “단군왕검이 세운 나라는 조선인데, 왜 고조선이라고 할까?” 소연이 팔짱을 끼고는 말했다. “너도 어제 6학년이랑 싸웠잖아. 어쩌면 너도 불려갈 지도 몰라. 걱정 안 돼?”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이성계가 세운 조선은 고조선을 따라 한 걸까?” “너 왜 내 말 계속 씹어?” 공격적인 어투로 소연이 반문하자, 단유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차분하게, 조근조근 설명했다. “니 말을 씹은 게 아니고 무시한 거야.” “그게 그 말이잖아. 그럼 왜 무시하는 건데?” “니가 선생님 말을 무시하는 이유와 같아.” “뭐?” “선생님이 문제 풀고 토론하라고 하셨는데, 왜 다른 이야기를 해?” 소연이 칫, 하며 고개를 돌렸다. “재미없게.” “문제나 풀자. 다음 문제는, 우리가 왜 단군왕검에 대해서 공부할까, 라는 거야.” 소연이 단유를 째려보다가 한 마디 뱉었다. “넌 걱정 안 돼?” “뭐가?” “너도 싸웠고, 재림이도 싸웠잖아? 둘 다 경찰에 잡혀 갈지도 몰라.” 단유는 두 손을 내려 무릎 위에 두고 등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소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난 안 싸웠고, 막기만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아. 자기 방어는 법적으로도 분명히 명시된 부분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어. 또 재림이는 맞기만 했지, 6학년과 같이 싸우지 않았어. 그리고 재림이 역시 폭력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우리 두 사람이 경찰에 잡혀 갈 이유는 없어.” “그걸 어떻게 알아?” 단유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사회에는 약자를 보호하는 법이 있고, 그 법이 우리를 지켜 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야.” ======================================= [175] 풍선효과(1) 모든 수업이 끝나고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두가 학교를 빠져나가면, 학교는 생기 잃은 환자처럼 침묵에 빠진다. 늦은 오후의 봄 햇살이 짖쳐 들어올 때, 텅 빈 교실에서 이를 맞이해주는 사람이 없어 그저 텅 빈 책상 위를 훑다가 사그라질 뿐이었다. 공중에 떠도는 하얀 먼지들이 고요한 햇살 위를 부유하는 동안, 교실에 남은 선생님들은 각자 자신의 책상에서 고개를 숙이고 남은 일을 해야 했다. 사실 이 시간이 가장 피곤한 시간이었다. 하루 종일 40명 가까운 학생들을 데리고 수업을 하다가, 들뜬 얼굴로 떠나는 학생들을 배웅한 선생님은 내일을 위한 수업준비와 교육부, 지방교육청에서 내려온 공문에 따른 서류작업을 하느라 누적된 피로를 풀 여유 따위는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시간 학교는 마치 동맥경화에 걸린 환자처럼 늘어져서 피로를 호소한다. 5학년 1반 담임을 맡은 이경자는 복장을 정리하고 눈앞의 문을 천천히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짧게 숨을 토해 낸 선생님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맞은편에 커다란 책상을 앞에 두고, 무언가를 쓰고 있던 늙은 교장이 시선을 아래로 둔 채 입을 열었다. “거기 앉으세요.” 눈짓이나 손가락으로 지칭하지 않아도 교장실에서 앉을 만한 곳은 검은색 가죽의 소파 밖에 없었다.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은 선생님은 교장이 시선을 줄 때까지 정자세로 앉아 기다렸다. 이윽고 교장이 펜을 놓고,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차 드시겠습니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교장은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눈은 웃질 않았다. 머그잔에 따뜻한 원두커피 한 잔을 부어 든 뒤, 선생님의 맞은편에 앉은 교장은 정장 상의 단추를 풀면서 자세를 편하게 했다. 두드러지게 솟아난 뱃살은 아니지만, 원버튼 정장으로 가리기에는 갑갑했던 모양이었다. “부른 이유는 잘 아실 테고.” 뜸을 들이며 말하는 교장에게 선생님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교장선생님.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미리 보고를 드렸어야 하는데.” “아니에요. 이 선생님이 미리 알 수가 없지요. 6학년 애들이 문제를 일으켰는데, 선생님이 무슨 수로 알겠어요?” 선생님도 이 학교에서 4년 이상을 근속했다. 교장 선생님에 대해 모르지 않았다. 때문에 교장 선생님의 말에도 쉽게 마음을 놓지 않았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은 들어요. 그쵸? 선생님 반의 아이가 큰 고초를 겪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이제 겨우 개학하고 한 달이 지났다. 한 달 만에 벌어진 일이라고 하기엔 엮인 아이들의 수가 많다. 그 정도 무리가 지어져서 일탈을 했다면, 지난 시간까지 거슬러가야만 하고, 그렇다면 비단 이 선생님만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선생님이 눈치 채기엔 고작 한 달이란 시간은 부족함이 있었다. “이 선생님이 이번에 5학년 주임이시죠?” “네.” “그 말은 지금까지 우리 학교를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경주(傾注)해 오셨는지를 보여주는 결과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그렇죠?”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럼에도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은, 어쩌면 선생님의 경력에 작은 오점이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물론 선생님을 탓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선생님은 알기 힘들었으니까요.” 같은 말도 반복되니, 그 뜻이 아닌 것처럼 들렸다.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지난해까지도 우리 학교에서 폭력신고가 들어간 일이 지난 5년간 한 건도 없었다는 거, 잘 아시죠?” “네.” “그건 단지 아이들이 착하고 순진해서만은 아닙니다. 그 아이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많은 선생님들이 시간과 노력을 다하여 신경을 썼기 때문에 이루어진 결과지요. 전 그 사실을 매우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까도 생각했었지만, 6학년 아이들이 무리지어서 ‘일진’처럼 행동하고 다녔다면, 그것은 이미 오래된 관습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난해까지도 학교에 암약했던 무리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폭력신고 없는 학교라는 명예는 명예가 아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도 그 일에 결코 결백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작년 6학년 담임을 맡았던 자신도 눈치 채지 못했다. “앞으로는 좀 더 학생들의 안전과 학습 분위기 조성에 만전을 다해주시길 바랍니다.” 책임과 면책 사이를 저울질하면서 상념에 빠져 있는 동안, 교장 선생님은 적당한 결론을 내리면서 이 선생에게 주의를 주는 선에서 끝냈다. 어차피 이런 일(?)로 더한 징계는 내려질 수도 없었다. “아, 그리고 학폭위는 열리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해당 학생의 부모님께도 잘 설명해주시길 바랍니다.” “네?” 학폭위, 즉 학생폭력대책자치위원회는 학교폭력을 예방하고 폭력사건 발생 시 그 대책에 관련된 사항을 심의하기 위한 학교의 자치조직이었다. 피해학생에 대한 보호와 가해학생에 대한 조치 및 학교폭력과 관련된 분쟁조정을 맡는다. 그런데. “왜요? 왜 학폭위가 열리지 않는 거죠?” 이 선생님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엄연히 학교폭력신고센터에 신고가 들어갔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구분된 폭력사건인데? 교장선생님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이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째는 피해자가 당한 폭력 수위가 경미하다는 겁니다.” “네? 아무리 경미하다고 해도 폭력은 폭력입니다. 그리고 향후에도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저희 반 학생, 그러니까 피해자에 대한 보호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문제는 끝까지 들어보시면 알아요. 두 번째는 가해자로 지목된 아이들이 그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선생님은 교장선생님의 말을 들을수록 기가 차는 느낌이 들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당연히 자기가 아니라고 부정한다. 그것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재판정에 들어선 사람들도 똑같이 하는 짓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진짜 죄를 짓지 않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당연히 조사를 하고 검토를 해서 진짜 죄를 지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할 학폭위를 열지 않겠다니? 어이없어 하는 얼굴의 선생님 얼굴을 힐끗 쳐다본 교장 선생님이 헛기침을 한 후, 마지막 세 번째 이유를 말했다. “세 번째로, 이 사건은 경찰에게 일임하기로 했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교장 선생님은 머그컵을 들려다 다시 내려놓고 괜히 넥타이를 한 번 정돈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래봐야 똑같다. “학교폭력신고센터에 들어간 이상, 센터에서 사건을 수사합니다. 때문에 해당 사건의 수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학교에서는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교육청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기도 안 차는 이야기다. 그런데 교육청의 지시라는 말에 예전에 얼핏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그 때도 학교의 폭력사건이 감지된 직후, 학교에서 학폭위를 여는 대신 경찰에 우선 신고하라는 교육청의 지시를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인평초등학교도 마찬가지지만, 학교 내에 학교폭력 전담교사가 없었고, 때문에 해당 사건의 해결을 경찰이라는 공권력에게 미룬 것이다. 학교폭력신고센터라는 곳이 경찰에 설치된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결국 가해자와 피해자 양쪽이 소송전을 벌였다는 뒷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교장선생님, 물론 교육청의 지시도 지시지만, 학교 차원에서도 대처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학교 학생도 아니고 우리 학교 학생들입니다. 가해자든 피해자든 모두 저희 학생들이고 저희가 지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바른 지식과 양식을 가르쳐야 할 저희가 학폭위를 열지 않는다면, 저희의 의무를 방기하는 것이라 봅니다.” 교장 선생님은 오른손으로 두툼하게 살이 겹친, 매끈매끈한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선생님 말씀도 일리는 있습니다. 하지만 말이죠. 교육청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것, 모르시면서 하시는 건 아니죠? 게다가 말입니다. 이미 사회 시스템이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어요. 학교의 일은 학교가, 경찰의 일은 경찰이 하도록 말이죠. 그리고 이 일은 저희의 일이 아닙니다. 센터에서 알아서 합니다. 그렇게 알고, 선생님은 피해자 학생이나 가해자 학생에게 알려주세요. 괜한 ‘오해’를 사지 않도록 말이죠.” ‘오해’라고 지칭한 부분이 사실은 ‘진실’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때로는 ‘진실’이 ‘오해’가 되는 게 현실이다. 결국 선생님은 교장선생님의 현실직면론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선생님은 교장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교장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교장은 식은 머그잔을 들어 남은 커피를 주욱 들이켰다. 쓰디 쓴 커피 찌꺼기까지 입 안에 털어 넣으며. **** “아직도 조사 중이래?” 하은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오후 햇살이 가장 잘 비추는 위치에 드러누워 해바라기를 하고 있던 하은이었다. “네.” 단유가 청소기를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며칠 동안 전담 경찰이 학교에서 조사를 계속하고 있었고, 가해자로 지목된 아이들과 피해자로 지목된, 혹은 피해자로 구분된 아이들이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조사결과를 일일이 알려주는 스타일은 아니었던지, 단유는 그저 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것 외에는 들은 바가 없었다. “그럼 쟤는 계속 이리 오는 거야?” 소파 끄트머리에 앉아서 눈치를 보는 재림을 가리키며 하은이 물었다. 단유가 힐끗 보았다가 대신 변명을 해주었다. “여기서 선생님한테 과외 받는다고 했대요.” “뭐!” 하은이 벌떡 일어났다. “내가 언제 널 가르치겠다고 했어? 나 그런 말 한 적 없어.” 재림은 바지춤을 쥐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던 중에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고요, 지금 집에 가도 아무도 없고요, 또 혼자 집에 있기가 무섭고요, 가다가 형들 만날까봐 무섭기도 하고요.” 구질구질하게 늘어놓는 변명을 끝까지 들을 생각은 없었던 하은이 소파 위 가죽을 찰지게 내리치면서 말했다. “그래서 경찰한테 과외 받는다고 거짓말 했다는 거야? 아니 무서 우면 경찰한테 보호요청을 해야지, 왜 거짓말을 하고 그래?” “경찰이 아니고요, 엄마한테….” “뭐? 엄마한테 거짓말을 했다고?” 재림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힐끗 눈치를 본다. 몇 번 봤더니 이제는 별로 귀여운 지도 모르겠다. 아니 처음부터 귀엽지 않았었다. 저 애는 일진이란 말이다! “왜?” “그게 단유가 선생님한테 공부를 배워서 잘하는 거라고…. 그래서 같이 배울 수 있냐고 했더니 선생님이 괜찮다고… 해서 같이 공부한다고….” 하은은 기도 안찬다는 듯 재림을 바라보았다. 거짓말이 타고난 녀석인가? 어쩌면 맞았다는 것도 거짓말은 아닐까? “단유가 공부 잘하는 건, 물론 내가 잘 가르친 탓도 있겠지. 그런데 내가 언제 같이 배워도 된다고 했어!” 하은이 화내는 모습을 처음 본 재림은 주눅이 들어서 기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단유가 이를 지켜보다가 들고 있던 책을 재림에게 쥐어주고 말했다. “일단 내 방에 들어가 있어.” “선생님이랑 이야기 안 끝났는데 어딜 들어가!” 단유가 재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니, 재림이 눈치를 보다가 방으로 얼른 들어갔다. “선생님. 저랑 이야기 좀 하시죠?” “무슨 이야기? 너도 한 편이니? 넌 선생님 편을 들어야지, 만난 지 한 달도 안 된 일진 녀석의 편을 드는 거니?” 이 상황에서 내 편, 니 편이 어디 있다고. “경찰이 보호한다고 해도 집까지 동행해서 하루 종일 보호해주는 건 아닌가 봐요. 그래서 6학년들이 진짜 나쁜 마음먹으면, 큰 일이 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나봐요. 그래서 겁을 많이 먹어서 저런 거니까 선생님이 이해해 주세요.” “그래도 그렇지, 그런 거짓말을 하면 어떻게 해? 내가 진짜로 쟤를 가르칠 것도 아니고, 아니 그 전에 내가 그런 말 한 적이 없는데 경찰이 물으면 어떻게 해? 나도 거짓말해야 하는 거야? 나는 지금까지 거짓말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야. 법 없이도 살았던 사람이라고. 그런데 고작 12살짜리 일진 꼬마 애 때문에 거짓말을 해야 된다고? 신고를 한 것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인데, 법정에서 선서하고 증언까지 해야 되면 나 어떻게 해? 그 때도 거짓말해야 돼? 그러다 위증으로 잡히면? 위증죄도 굉장히 큰 벌이라던데?” 단유가 지긋이 하은을 쳐다보자, 하은이 입을 다물고 시선을 돌렸다. ‘많이 심심하셨나 보구나.’ 단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어딜 가? 나랑 이야기 하자며?” 단유는 방문을 닫았다. ======================================= [176] 풍선효과(2) 재림은 단유의 방에서 서성거리고 있다가, 단유가 들어오자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거기 앉아. 편하게 있어도 돼.” 침대를 가리키던 단유는 책상에 앉아 앞에 놓여있던 책꽂이에서 책 한권을 집어 들었다. 편하게 있으라지만, 결코 편할 수 없는 처지의 재림은 침대 끄트머리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오늘도 9시까지 있다가 갈 거야?” 재림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재림이 느끼는 두려움을 100%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저토록 두려워하면서 계속 피하려 한다면 단유로서도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피하고 다닐 수 있을지 끝을 알 수 없는데다가, 그 동안에 단유가 뺐기는 개인적인 시간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단유는 특단의 조치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지, 재림을 돕기 위해서라거나, 오지랖을 부리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단유는 의자를 돌려 재림을 보았다. “재림아.” “응?”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거야?” 재림은 시무룩한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자신이 매일 이 집으로 도망치듯 오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라 생각했다. 사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두 사람인데, 재림이 단유에게 빌붙다시피 해서 오는 것이었으니까. “차라리 이 시간에 공부를 하는 게 어때?” “응?” 예상치 못한 전개에 재림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바라보자, 단유가 차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어차피 거짓말이지만 여기서 공부한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렇다면 진짜로 공부를 해. 그게 지금 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5시부터 6시까지 선생님이랑 공부해야 하니까, 그 전까지는 니가 선생님한테 배워. 그 후에는 자습을 하든지 알아서 하고.” “진짜… 과외를 받으라고?” “그래. 대신 거실에 나가서 해. 이 방은 내가 써야 하니까.” 단유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문제가 단유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재림 때문이었으니까. 재림이 이 집에 오는 것이야 굳이 말릴 이유도 없었고,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신경 쓸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재림이 단유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충분히 신경 쓰이고 귀찮고 방해되는 문제였다. 그렇다면 방에서 내보내면 된다. 선생님과 둘이서 거실에 있는 게 불편하다는 이유로 단유의 방에서 멍이나 때리고 있던 재림이었으니, 차라리 거짓말로 시작한 거라도 진짜 과외를 받는다면 단유도 불편함을 감수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단, 이러한 해결책에 또 다른 문제가 있으니. “내가? 왜?” 라고 묻는 하은이었다. “선생님이시잖아요.” 단유의 말에 하은이 발끈했다. “아니, 애초에 선생님이라고 불리긴 해도, 진짜 학교 선생님이나 학원 선생님도 아니고. 고작 방학동안 니 과외나 해주던 건데 왜 갑자기 ‘선생님’이냐고?” “명수도 가르쳐 주시잖아요?” “명수는, 내가 이 집에서 보호자로 있으면서 겸사겸사 가르치는 거지, 제대로 과외를 맡은 건 아니잖아?” 단유가 재림을 가리켰다. “얘도 겸사겸사 가르쳐 주시면 돼요.” “그건 아니지!” 격앙된 하은을 바라보던 단유는 적당히 만족할 만한 회유책을 내놓았다. “재림이도 오래 있을 건 아니니까요, 수사가 끝날 때까지 당분간만 가르쳐 주시면 돼요.” “수사가 언제 끝나는데?” “그건 모르죠.”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아무도 몰라.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그 때까지 나도 원하지 않고, 얘도 원하지 않는 과외를 하라고? 내가 왜?” “선생님이시니까요.” 하은이 가슴을 퍽퍽 두드리면서 답답하다는 얼굴을 했다. “평소에는 그리 영특한 놈이 왜 갑자기 멍청한 척을 하는거야? 니 속셈이 뭐야? 응?” 별로 속셈 같은 건 없었지만, 그래도 가슴 한 구석이 찔리는 느낌이 없지는 않았다. 단유는 포커페이스로 대답했다. “재림이가 시간을 낭비하지 말았으면 해서요.” 재림이 낭비하는 시간과 자신이 방해받는 시간이 동일하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이기적이라고 지적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왜 재림이가 원하지 않을 거라고 단정하세요? 재림아, 너 공부하고 싶지?” 재림은 두 사람의 눈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 하은이 벌떡 일어나 재림을 손가락질하면서 방방 뛰었다. “이것 봐, 딱 걸렸어! 들었지? 얘가 방금 ‘하고 싶어’도 아니고 ‘할 게’ 라고 했지? 니들 아까 방에 있을 때 짰지? 짰어. 짠 거야, 분명히.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야? 그치? 김단유! 네 속셈이 뭐야?” “그런 거 없어요. 짜지도 않았고요.” 실은 방에서 먼저 이야기했고, 재림의 승낙을 받았다. “와, 얘네들 뻔히 다 보이는데도 우기는 것 좀 봐. 김단유, 너 선생님이 거실에서 좀 쉬는 게 그리 맘에 들지 않았어? 그래서 괴롭히고 싶어서 그래? 응?” 단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이럴 때는 그냥 둘만 남겨두고 끝장을 보게 해야지, 자신이 곁에 있으면 흥분한 하은이, 1시간이고 2시간이고, 계속 억지를 부리면서 수다를 떨 게 분명해 보였다. 대신 조언(?)을 한 마디 남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명수랑 같이 가르치면 될 거예요.” 하은은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러나 이후, 명수와 재림을 같이 가르쳐 본 결과, 단유가 남긴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도긴개긴이구나.” 난이도 조정을 할 것도 없고, 따로 문제집을 구할 필요도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명수의 과외 시간에 숟가락만 하나 더 얹는 셈이었다. **** “아니, 우리 아들이 무슨 폭력배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시네?” 마주앉은 경찰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마주 앉은 학부모를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우리 아들은 성격이 여려서 누구 때리고 그럴 애가 아니에요. 어디 이상한 애가 장난으로 신고했는지는 몰라도, 이건 거짓말이에요. 조작이라고요!” 아들을 변호하는 어머니의 모성애가 분노와 결합되니 조사가 제대로 진행될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세요. 우리 애는 거짓말도 못하고 얼마나 착실하게 학교생활 하는 애인지 몰라서 그래요? 담임선생님한테 물어봐요, 뭐라 하는지!” 대질심문을 요구하는 어머니도 계셨고. “나, 참. 기가 막혀서.”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죽어라 노려보는 핏발 선 눈길에 고개를 들지 못할 때도 있었다. “이보세요, 말이라고 아무 말이나 막 하면 되는 줄 알아요! 우리 아들이 어떤 아들인데!” 예상했던 대로 가해자로 지정된 아이들의 학부모들은 펄쩍 뛰면서 경찰과 상담사를 향해 억울함을 호소했다. 해외 유명 메이커의 옷으로 치장하고 나타난 지욱의 어머니를 필두로 해서 여러 어머니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재림을 성토했다. “그 아이를 조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들어보니까, 애가 공부도 못하고 학교생활에 적응도 못했다고 하던데?” “걔네 엄마는 무슨 식당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빠도 일용직 비슷한 것 같고. 집안의 부모들이 애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 애가 삐뚤어지다 못해 모함까지 하고 나선 거 아니냐고요?” “제가 듣기로는 길에서 담배도 피고 다닌다고 하던데, 그런 애들 무리에 우리 애가 낄 리가 없다고요.” “우리 애도요. 진짜 요즘 초등학생들 무섭다는 이야기만 전해듣다가 직접 당하니까 어이가 없네요.” 경찰은 어머니들을 진정시키면서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항변해보지만, 성난 어머니들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경찰서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학교에서도 난리가 났다. 무리를 지어 나타난 가해자 부모들은 도대체 학교에서 학생들을 지켜주진 못할망정, 아이들이 모함에 당하도록 내버려두었냐는 항의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일단 진정들 하시고, 수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시면 안될까요? 수사가 끝나면 모든 게 명명백백하게 밝혀질 것이고, 억울한 아이들의 누명도 자연히 벗겨질 테니까….” “아니, 그럼 그게 끝날 때까지 우리 아이가 억울하게 손가락질 받는 건 어떻게 보상받으라는 이야기죠? 우리 아이가 지금 밥도 제대로 못 먹는다고요!” “무고죄로 고소할거예요!” 선생님들은 진땀을 흘리면서 학부모들의 분노를 받아주었다. 부디 이 사건이 빨리 종결되어서 어느 쪽으로든 답이 나오길 속으로 기도하며. 그런데 어떤 범죄든 범인들은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고 했던가? 아이들의 아지트로 지목된 놀이터 인근의 아파트에서 목격자가 나왔다. “맨날 아이들이 와서 담배를 피워대는데, 몇 번 경고를 해도 들은 척 만 척이더라고요. 아, 예. 이 얼굴 맞아요. 한 번은 이 녀석이 저한테 모래를 집어던지고 도망간 적이 있어서 기억을 해요.” 지목된 아이는 바로 병석이었다. 병석이는 5학년 1반에서 저지른 행동도 있고, 그 행동을 목격한 많은 아이들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 주범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런데 놀이터 인근에서 흡연과 폭력을 행사했다는 주변 거주자들의 목격증언까지 확보된 상황이 된 것이었다. 경찰은 병석을 추궁했다. **** “그리고 그 소년의 진술에 따라 아드님의 행적을 조사한 결과, 일치하는 면도 있고 또 본인의 일부 자술도 있었습니다.” 다만 문제는 아이들이 피해자를 때렸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 아이들은 모두 놀이터에서 모인 것은 인정했으나, 때리지는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병석이만 주먹을 썼다는 것이다. 가해자 학부모들은 태도를 분명히 했다. “이번 사태의 주범은 김병석이라는 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와 우리 아이들이 어울려 놀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결코 주먹을 쓰거나 해코지를 하지 않았습니다. 해당 폭력 사건에 있어서 우리 아이들은 죄가 없습니다.” 말인즉슨 병석이라는 아이가 워낙 싸움을 잘하는 아이여서 마음 약한 아이들이 어울려 주었다는 것. 다시 말해 우리 아이도 피해자입니다, 라는 것으로 변호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지욱 어머니는 과감하게 변호사를 고용하고 민사재판에 돌입했다. 재림에게 무고죄를 묻기로 한 것이었다. “어떻게 하죠?” 재림의 어머니가 선생님을 찾아왔다. 미간을 찌푸린 선생님도 딱히 대답을 내놓을 수는 없었다. 변호사도 아니어서 법에 대해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교사라는 포지션에서 어머니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다. “그냥 상식적인 수준에서 말씀드리자면, 아마도 재림이가 유죄가 되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재판이 끝나지도 않을 것 같고요. 아마, 어쩌면 꽤 오래 싸울 수도 있어요.” 이미 상대 쪽 아이들은 모두 입을 맞춘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짐작을 어머니에게 이야기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확실한 증거나 신빙성 높은 증인이 나온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선….” 재림의 어머니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어젯밤에도 아버지는 소주 한 병을 마시면서 재림을 노려보았고, 그런 긴장된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한 편으로는 피해자였다는 재림이 불쌍하고, 또 한 편으로는 도대체 어떻게 학교생활을 했기에 이런 문제를 만들어내는지 속상하기도 했다. 게다가 오늘도 재림의 문제로 학교에 오는 바람에 식당주인에게 얼마나 많은 눈치를 받아야만 했던가. 그런 와중에 집에서는 큰 애한테 지장이 갈까봐 큰 소리도 못 내고 쉬쉬했다. 하지만 소주 나발을 부는 아버지 때문에라도 눈치를 챘을 것만 같았다. 평화로운 집 안에 위기를 자초한 아들이 밉고 불쌍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어머니.” “네.” “혹시 원하신다면 상대측과 원만한 합의를 보는 방법도 고려해보시라고요.” “합의요?” 양측이 팽팽하게 대립할 경우, 민사소송은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은 아이러니하게도 재림이 피고소인 측이 되어서 방어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맞고소를 하거나 병석이란 아이를 상대로 소송을 거는 방법도 있습니다, 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일단, 법률 자문을 구하시는 게 좋을 거 같네요. 제 입장 상 어머니께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드리기가 어려워서요.” 끝내 입을 달싹이다가 닫기로 결심한 선생님은 미안한 마음을 담아 조언을 했다. 원래 오늘 상담은 재림이 ‘전학’을 원하는가에 대한 문제로 이야기할 참이었는데, 다른 어머니들에 비해 유난히 깊은 주름을 가진 재림 어머니의 얼굴을 보다보니 엉뚱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어머니를 배웅한 선생님은 책상에 앉아서 교실을 보았다. 5시가 넘어가는 이 시간, 텅 빈 교실에 온기가 줄어들고 있었다. ======================================= [177] 풍선효과(3) 이경자 선생님은 모처럼 세무서에 다니는 친구를 만나, 시내 고기 집에서 술 한 잔을 기울이기로 했다. 불판 위에 고기가 노릇노릇 익어갈 때쯤, 소주 한 병이 비워졌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지난 10년간 촉법소년은 4000여 명에서 1만여 명으로 늘었고, 범죄 형태도 흉포화 되었다고 하더라.” “그걸 외우고 다니니?” 이 선생님이 술잔을 비우면서 대답했다. “학교 선생이니까, 이런 정도는 외우고 다니는 거야. 다른 사람이면 촉법소년이고 어쩌고… 이런 거 관심도 없어.” 이 선생님이 술잔에 술을 채울 때, 검지를 내밀어 잔에 갖다 댄 친구는 말려야 할까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화가 많이 나서 빨리 마시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달리면 나중에 어떻게 책임지란 말인가. 친구가 그런 고민을 하든지 말든지, 이 선생님은 연거푸 술잔을 기울인 뒤 친구가 건네준 안주를 입에 물고 다시 말을 이었다. “진짜 이런 일 있을 때마다, 내가 있잖아? 교사가 된 걸 후회한다니까. 내가 이러려고 교사가 되었나, 자괴감이 들 정도라고.” “야, 조용히 좀 말해.” “애들이 순진하다고? 그거 다 옛말이더라. TV, 영화, 만화, 인터넷 같은 미디어를 하루 종일 바라보는 아이들이 순진할 거 같애? 아냐. 걔네들은 몸만 어리지, 머리는 이미….” 이 선생님의 손가락이 꾸물꾸물 대면서 허공을 찔러댔다. “저 끝에 닿았다니까. 성교육? 나 참. 인터넷이 선생이고 드라마가 교재야. 이번 것도 마찬가지야. 지네들이 무슨 조폭이라도 되는 거처럼 굴었다는 거잖아? 걔네들이 그런 걸 어디서 보고 배웠겠어? 이게 다 인터넷, 드라마, 영화에서 보고 배운 거라고.” 조사는 끝나지 않았고,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 정황상 가해자로 지목된 아이들이 실제 가해자일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정황상 유죄인 것이지, 법적으로는 아마 유죄를 받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증거 부족, 신빙성 결여, 또 뭐 있더라?” “몰라, 그런 거. 그리고 그런 걸 왜 니가 신경 써? 넌 니네 반이나 신경 써. 어차피 걔네들 다 전학가고 그럴 거 아냐?” “걔네들이 왜 가? 가면 재림이가 가겠지.” “왜?” “그렇게 합의될 거 같아.” 전학을 가게 되면, 죄의 유무를 떠나 아이가 새로운 학교와 환경에 적응하는 시간이 걸리게 되고, 이것이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 뻔하기에 되도록 전학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게 부모의 입장이었다. 특히 이번처럼 든든한 부모를 뒤에 둔 아이들이라면 더더욱 전학을 갈 리가 없었다. 오히려 불편한 관계에 있을 아이를 전학 보내는 게 좋다고 판단할 사람들이니, 결과적으로 재림이가 전학을 갈 것이다. “내가 웬만하면 이런 이야기 안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사실 교사라는 것도 그냥 직업이야. 그런데 넌 너무 감정적으로 몰입하는 것 같아서 걱정이었거든? 니가 한두 명만 맡는 것도 아니고 여러 명을 붙잡고 살아야 하는데 이런 일 있을 때마다 이렇게 스트레스 받고 고민하는 거, 너한테 안 좋다고 본다, 난. 솔직히 말해서 니 주위를 봐라. 너처럼 고민하는 교사가 몇이나 된다고 그래? 적당히 현실도 고려하면서 교사 생활할 줄 알아야 나중에 교감이라도 해먹지 않겠니?” 이 선생님은 친구를 빤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왜?” “넌 내가 얼마나 속물이고 현실적인지 모르는 것 같아서 그랬다.” “웃기시네. 그런 애가 지금 자기 반 애 때문에 이렇게 술을 푸냐?” 이 선생님은 친구와 건배를 하고 소주를 넘겼다. 싸한 소주의 끝 맛이 혀 끝에 남았다. “아, 생각났다.” “뭐가?” “촉법소년.” 지욱을 비롯한 아이들은 만 14세 미만의 촉법소년이었다. “형사사건도 아니라면서? 게다가 아직 기소도 안 된 사건 아냐?” “그렇긴 하지. 그런데….” 이 선생님은 다시 목소리를 낮추며 술병을 기울였다. “폭력도 형사사건이야.” “아직 기소도 안 된 일인데, 폭력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게다가 정말 학부모 말대로 거짓말이면?” “…….” 이 선생님은 소주를 들이키며 생각을 해 보았다. 재림의 이미지가 좋지는 않았다. 첫날부터 담배냄새나 풍기던 아이, 수업시간에 늘 삐딱했다. 그러다 마침내 선생님을 때리기까지 했던, 문제아 중의 문제아였다. 하지만 자신이 그 아이를 용서하면서, 그리고 사과하면서 그 문제는 가라앉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 아이가 또 다른 피해자로 등장한 이 국면에서 거짓말?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봤다. 이 선생님은 고기를 삼킨 뒤, 다시 소주를 들었다. “짠이나 해.” **** “200 곱하기 9는?” “1800이요.” “1800을 13으로 나누면, 몫은 얼마고 나머지는 얼마야?” 명수와 재림이 노트에 대고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하은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들키지 않게 한숨을 내셨다. 지금 하는 수학문제는 3학년 때 풀었어야 할 문제인데, 이를 지금 낑낑거리며 푸는 모습을 보자니 괜히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재림이는 밥 먹고 집에 갈 준비해.” “벌써요?” 명수가 대신 물었다. 보통은 9시가 되어서야 재림이를 데려다 줬었기 때문이다. “오늘 선생님이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늦게 있어주질 못하거든. 그래서 오늘만 일찍 집에 들어가자. 알았지?” “네.” 기운 빠진 재림의 목소리에 명수가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러다가 하은에게 되물었다. “나중에 단유랑 제가 배웅해 주면 안 돼요?” “안 돼. 니들은 무슨 어른인 줄 아니? 늦은 시간에 돌아다니는 건 허락 못해.” “그러다가 만약에 못된 형들이 재림이 찾아오면 어떡해요?” “그럴 리 없어. 지금도 수사 중인 사건인데 당사자들이 마음대로 움직일 리가 있니? 게다가 걔네들 부모님들도 지금은 애들이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두질 않을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재림은 불안한 마음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래도 하은의 말이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따르겠노라 대답했다. 그 때, 단유가 문을 열고 나왔다. 명수가 재림의 일을 이야기해주니, 단유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별 일 없을 거야. 만약 니가 집에 오기를 기다렸었다면, 집에 늦게 온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았을 거니까 굳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거야. 게다가 늘 선생님이랑 같이 다니는 것도 봤을 테니까 접근하지도 않을 거고. 그러니 걱정 안 해도 돼.” “내 말이 그 말이야.” 명수가 재림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재림이 희미하게 웃음을 지으면서 식탁에 앉았다. **** “집에 들어가서 문 잘 닫고 있어. 그리고 만약에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고. 아, 나 말고 경찰서에 신고하란 소리야. 알겠지?” “네. 안녕히 가세요.” 이윽고 하은의 차가 배기음을 토해내며 멀어져갔고, 리어 램프의 붉은 빛을 보던 재림은 집으로 들어갔다. 해가 지기 전이지만 거실은 어두웠고, 집안은 조용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재림은 방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콩닥거리는 가슴을 붙들고 숨을 죽였다. 마치 집 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누구라도 당장 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올 것 같아서 겁이 났다. 그러기를 한참. 현관문이 열리면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재림이 들어왔니?” 어머니가 돌아오셨다. 재림은 얼른 이불 밖으로 나와서 인사를 했다. “다녀오셨습니까?” “그래, 씻었어?” “네.” 반가운 목소리지만, 기운 찬 목소리는 아니었다. 힘이 다 빠져있는 목소리에 담긴 기색을 느낀 재림은 어느새 시무룩한 얼굴로 방으로 돌아갔다. 거실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는 어머니의 소리가 들렸다. 그릇들이 달그락거리는 사이마다 낮은 한숨소리가 들렸다. 재림은 다시 눈물을 쏟아냈다. 그 때였다. ―퉁퉁퉁. 누군가가 현관을 두들겼다. “계십니까?” 이 시간에 누구지? 이미 10시가 다 되어 가는데, 조마조마한 마음을 누르고 귀를 기울여보는 재림이었다. 어머니가 서둘러 문을 열고 손님을 안으로 들이는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변호사 이광훈이라고 합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변호사는 좁은 실내를 대충 훑다가 어머니가 권한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로?” “아, 다름이 아니고 아드님의 장래를 위해 이야기를 드리고자 왔습니다.” 어머니는 주춤거리다가 변호사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사실 변호사는 가해자 측에서 선임한 변호사였다. 그는 누구의 예상처럼, 재림에게 합의를 종용하러 온 것이었다. 변호사는 다른 이야기는 섞지 않고 곧바로 용건을 꺼내 들었다. “재림이 증언만 해주면, 그리고 전학을 간다면 섭섭지 않게 해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네?” “아시겠지만, 지금 사건에서는 증거가 없습니다. 증언만 있죠. 하지만 증언들도 모두 관계자들의 증언일 뿐이고 서로 대치되는 상황이기에 이대로면 시간과 돈만 잡아먹힐 뿐입니다. 이는 서로에게 모두 좋지 않습니다. 재림이도 안정된 환경에서 학업을 계속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머니는 재림이 들어가 있는 방을 흘끔 쳐다보았다. “이 사태를 질질 끌면서 장기전이 된다면 서로 피곤할 뿐입니다. 그러니 빨리 끝내야죠.” “어떻게요?” 변호사는 가방에서 수첩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페이지를 열어 보면서 말을 이었다. “우선, 재림의 증언에서 가장 중요한 집단 구타 문제인데요. 이 부분에 대한 ‘진실’이 필요합니다.” “진실이라고요?” 구타를 당한 게 진실인데, 진실이 필요하다니? “진단서 있으신가요?” 재림이 집단 구타를 이야기한 것은 작년 여름경의 이야기였다. 지금 그 진단서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니 진실이 필요합니다. 구타가 없었다는 진실.” “네?” “그리고 얼마 전, 지욱이라는 학생으로부터 맞았다, 고 진술했는데 이에 대해서도 진실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가방끈 짧은 어머니라도 이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변호사가 말하는 진실이 무엇인지.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럼 우리 아이는요? 거짓말을 하면, 우리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거짓말이라니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진실’입니다. 그리고 주범은 이미 밝혀졌지 않습니까? 강병석이라는 학생으로요.” 변호사는 여유로운 웃음으로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수첩에 무언가를 써내려갔다. “진실을 말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그것이 이 사회가 요구하는 정의이지요. 그리고 사실 진실을 밝히는 것에 인색한 것이 우리 사회지만, 저는 충분한 대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설득하기 어려웠지만 결국 해냈지요.” 변호사는 수첩을 어머니에게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저희 쪽 부모님들이 진실에 대한 대가로 보답할 금액입니다.” 손의 떨림이 멈췄다. 대신 심장이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을 치기 시작했다. 변호사는 어머니에게 똑똑히 기억하라는 듯 오래도록 수첩을 보여준 뒤, 덮었다. “이 정도면 충분한 대가라고 생각합니다. 진실을 말씀하시고, 전학을 가세요. 그러면 아무 일 없이, 편안하게 학업에 집중할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큰 아드님도 좋은 대학 가셔야죠. 성적이 아깝지 않게.” 어머니의 동공이 크게 열리면서 호흡이 일순 멎는 감각이 느껴졌다. 큰 아들. 우리 집의 희망. 변호사가 활짝 웃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님과 상의하시고, 연락 주십시오. 아, 명함 여기 있습니다.” 변호사가 떠나고, 집 안에 다시 침묵이 돌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녀왔습니다.” 큰 아들이 돌아왔다 그날 밤늦게까지 재림의 부모는 잠들지 못했고, 안방의 불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보통 형이 잠들기 전에 재림이 잠들 곤 했는데, 오늘은 형이 깊은 잠에 빠져 낮은 콧소리를 내는데도 재림의 눈은 말똥말똥했다. 재림의 귓가에는 변호사가 말한 ‘진실’이라는 단어가 떠나질 않았다. ======================================= [178] 풍선효과(4) 며칠간 재림은 단유의 집에 오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별 말이 없었다. 하지만 굳이 왜 오지 않냐고 묻지 않았다. 오히려 재림이 오지 않음으로 인해서 단유는 평소의 리듬대로 생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궁금하지 않아?” 집에 가는 길에 명수가 단유에게 물었다. 단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별로. 걱정하던 일도 일어나지는 않는 것 같고, 재림이도 도와달란 말을 하지 않으니까, 굳이 간섭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말이야.” 명수는 팔짱을 끼고 미간을 찌푸렸다. “왜?” “궁금해서. 그냥 막 궁금해. 막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보면 안 되는 건가 싶어서 또 막 답답하네.” “그럼 직접 물어봐.” “그래도 돼?” “안 될 건 없지. 난 궁금하지 않아서 물어보지 않았던 거고, 넌 궁금하니까 물어보는 거고. 물어보는 게 재림이한테 크게 피해를 주는 일 같지는 않으니까.” 대답 못할 이야기라면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단유는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명수가 재림에게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그러기 전에 재림이 먼저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단유에게 직접. “나 물어볼 게 있어.” “선생님한테 물어봐.” 단유의 말에 잠시 주춤하던 재림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선생님한테는 물어보기 힘들어.” “왜?” “어른이니까.” 단유가 빤히 바라보는데 재림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뭔데?” 재림은 자신이 들었던 이야기를 단유에게 들려주었다. “그게 어른들이 말하는 진실일까?”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그건 그 사람이 말한 진실이지.” “그런데 우리 엄마는 아무 말도 안했어.” 단유는 재림의 행동을 이해했다. 진짜 ‘진실’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고 싶은 건 아니었나보다. 어머니의 반응에 의문을 품은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 엄마한테 물어봐.” “못 해, 난.” 단유는 차분하게 재림을 설득했다. “모르는 걸 묻는 건 죄도 아니고 잘못도 아니야. 특히 우리 나이의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무엇이든 물어도 돼. 학교에서 알려주지 않는 걸 부모가 가르쳐주는 건 당연한 거야. 당연한 걸 두려워하지 마.” 재림은 단유의 말이 그럴 듯 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두려운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어머니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어쩌면 지난 일과 맞물려서 혼날 지도 모른다. 아버지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면 단순히 혼나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 집에서 쫓겨날 지도 모른다. 쫓겨나기만 하면 오히려 다행이랄까, 더 심한 말을 들을 지도 모른다. 그게 어떤 말일지 상상은 가지 않지만. “넌 똑똑하니까 알 거 아냐? 가르쳐 줘.” 선생님들이 놀랄 정도로 똑똑하고 늘 책을 읽는 단유라면 해답을 주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재림은 단유를 붙들고 늘어졌다. 단유는 어쩐지 쉽게 답을 말해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입을 열지 못했다. 자신의 답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생각에 불과했고, 아직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진실’에 대한 객관적인 확신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을 마치 진실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마치 제윅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재림은 단유가 답을 알면서도 일부러 말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단유를 계속 졸랐다. 단유가 자기 집으로 들어갈 때까지 끈질기게 졸랐다. “오랜 만에 왔네?” 하은이 며칠 만에 찾아온 재림을 향해 아는 척을 했다. “안녕하세요?” “안 올 거면 미리 안 온다고 말이라도 해야지. 기껏 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했더니 제멋대로 빠지고 말이야. 그런 태도라면 더 이상 가르쳐 줄 게 없어.” “…죄송해요.” 단유가 청소기를 붙잡고 명수가 호빵을 안아 들 때, 재림은 하은에게 불려가서 혼이 났다. 청소기가 멈출 때까지 계속된 잔소리에 재림의 혼이 빠져나갈 때 쯤, 간신히 단유가 재림을 구해줬다. “재림이가 물어 볼 게 있대요.” “갑자기? 뭐? 못 푸는 문제가 있어서 온 거야? 필요할 때만 찾고 필요 없으면 관심 끊어버리는 녀석이었어, 너? 나쁜 남자네?” “그런 건 아니고요. …니가 말 해.” 단유는 일단 하은의 말을 끊고 재림에게 기회를 주었다. 재림이 주저하다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재림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하은의 얼굴에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나쁜 놈이네, 그거.” ‘그거’라고 지칭되는 게 아마도 변호사를 말하는 것 같은데, 뉘앙스로 유추해보자면 ‘진실’이라는 게 아마도 나쁜 뜻을 포함하는 것 같았다. 재림은 용기내서 물었다. “그래서 ‘진실’이란 게 뭔지 궁금해서요.” 하은 역시 쉽게 말을 하지 못했다. 단유가 입을 열지 못했던 이유와는 다른 의미로 ‘진실’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하은은 이런 부분에서 도망가는 성격은 아니었다. “일단 ‘진실’의 사전적 의미는 니가 알고 있는 그대로일거야. 있었던 일, 혹은 절대 변하지 않는 사실을 진실이라고 불러야 하겠지. 하지만 그 변호사가 말한 ‘진실’은 실제 의미와는 다른 의미로 말한 거야. 요컨대 자기들이 듣고 싶어 하는 사실을 ‘진실’이라고 표현한 거지. 진짜 있었던 일은 아니지만, 진짜 있었던 일이라고 믿고 싶은 것. 절대 사실은 아니지만, 사실이라고 믿고 싶은 걸 ‘진실’이라고 표현한 거야. 예를 들어서, 명수는 수학을 못해. 정말 못해. 그게 진실이야. 그런데 명수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그래서 지난 시험에서 비록 15점 밖에 되지 않지만, 90점이라고 말해. 그리고 그게 ‘진실’이라고 증언하는 거지.” “그건 그냥 거짓말이잖아요?” 재림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되물었다. “그래. 그냥 거짓말이지. 그런데 그 변호사는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얘기하고 싶어 하는 거야.” “말장난이네요.” 단유가 한 마디로 줄여 말했다. 하은은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만약 명수가 수학을 90점 받았다는 사실을 단유가 인정한다면?” “제가요?” 단유가 손가락을 자신을 가리키며 묻자, 하은이 손사래를 쳤다. “예를 들어서 한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 아무튼 단유가 90점이라고 했어. 그럼 난 어떻게 생각할까?” “그래도 못 믿죠.” 단유가 덧붙였다. 피식 웃은 하은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 사실 난 명수를 잘 아니까 못 믿겠지. 못 믿는데, 그래도 내가 단유라는 애를 잘 아는 만큼, 단유라는 아이가 한 말에 대해서도 깊이 신용하거든? 그러니까, 못 믿겠지만 그래도 사실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된단 말이지.” 재림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성적표 보면 금방 알잖아요?” “그래. 성적표가 있다면 말이야. 그런데 성적표가 없다면 난 확신할 수가 없는 거지. 지금 니 상황도 똑같아. 애들이 널 때렸다는 증거가 있다면, 누가 어떤 말을 하든 상관없이 ‘진실’을 알 수 있어. 그런데 증거가 없잖아? 그러니까, 맞은 당사자인 니가 한 말이 맞지 않았다고 말하면 그게 ‘진실’이 될 수 있는 거야.” “거짓말이잖아요.” “그래, 거짓말이라니까? 거짓말인데,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들게 만드는 거짓말인거지.” 재림이 머릿속을 정리하는 사이, 단유가 말했다. “돈을 줄 테니까 거짓 증언하라는 이야기죠, 그건?” “그래.” “그럼 거짓증언을 해야 하나요?” 하은은 재림을 보며 말했다. “넌 어떻게 생각해?” “모르겠어요. 왜 거짓말을 해야 하는지.” “왜긴? 돈 때문이지. 아마 그 변호사는 엄마한테 엄청난 돈을 약속했을 거야. 그러니 어머니가 아무런 말도 못했겠지. 말 한마디에 엄청난 돈이 들어오니까.” 하은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고개를 저었다. 썩은 내 풀풀 풍기는 현실을 아이들한테 알려줘야 하다니. “그런데요.” 호빵을 안은 채로 있던 명수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저 이제 수학 잘하는 거예요?” “응?” “석고가 저보고 수학 잘한다고 했으니까?” 하은은 소파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지난번에 수학 시험, 15점 아니고 10점인데요?” 하은은 등을 돌렸다. 그 위로 은은한 오후 햇살이 내려앉았다. **** 평소보다 30분 일찍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재림을 앞에 앉혔다. 아버지 옆에 앉은 어머니는 초조한 눈치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담배를 입에 물다가 재림의 시선을 눈치 채고는 슬며시 내려놓았다. 그래, 이야기가 끝나고 펴도 되니까. “엄마랑 상의를 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리기 전에 니 이야기를 들어야 될 것 같다.” 재림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양반다리로 앉은 아버지의 검은 양말을 바라보았다. 끝이 많이 해어진 양말이었다. “그 6학년 애들한테 많이 맞고 다녔어?” “…몇 번이요.” “돈을 뺏기거나 그런 적은 없고?” “몇 번 있어요.” “걔네들이랑 어울려 다녔고?” “네.” “너도 애들 때리고 다녔어?” “…….” “대답해!” “네.” 이미 경찰서에서도 진술된 내용이었다. 그것도 2주 전에 진술한 내용이었다. 이제 와서 대답 못할 내용은 아니었다. 다만, 왜 지금에서야 이를 묻는 건지. 아버지는 끝내 담배를 집어 들었다. “내일 마지막 조사가 있다고 들었다. 그 때, 애들한테 맞은 적 없다고 이야기 해.” “왜요?” “왜는! 너도 잘한 거 없잖아! 그냥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덮는 게 너한테도 좋으니까 이러는 거 아냐! 그리고 이번 일 끝나면 전학 갈 거다. 거기서는 사고치지 말고, 착하게 행동하면 다 잘 될 거다.” 버럭 화를 내시는 아버지에게 따지고 들 수 없어서 입을 꾹 다물었지만, 재림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덮는 걸까? 왜 전학을 가야하지? 왜 다 잘 될 거란 거지?’ 기본적으로 아버지의 말에 대해 신뢰가 없어진 재림이었다. “그 형들이 절 때린 건 사실이잖아요?” “그래도 이 놈이! 지가 잘못한 건 생각도 안하고, 반성할 생각이 없는 거야! 아빠가 널 그렇게 가르쳤어?” 주먹을 치켜드는 아버지의 행동에 움찔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여보, 왜 그래요? 옆집에서 다 듣겠어요. 조용히 해요.” 어머니가 아버지를 말렸다. 아버지는 담배를 하나 다 태울 때까지 방바닥만 바라보다가, 재떨이에 꽁초를 비벼 끌 때 입을 열었다. “내일 엄마랑 같이 가서 그렇게 이야기 해. 아무 일 없었다고.” 절대 반론은 없다고 잘라 말하는 아버지의 단호함에 재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어떻게 해야 돼?” 책을 읽던 단유를 졸라 기회를 얻은 재림이 생각을 묻자, 단유는 책을 덮으며 말했다. “니 생각대로 해.” “모르겠어.” “뭘 모른다는 거야?”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고.” 단유는 재림을 올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 앉은 소연의 호기심에 찬 맑은 눈빛도 부담스러웠다. 단유는 재림을 데리고 운동장 스탠드로 나왔다. “언제나 맞거나 옳은 건 없어.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거야. 어떤 때는 가만히 있는 게 옳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주먹을 휘두르는 게 옳을 수도 있어.” “답이 없다는 거야?” “우선 전제를 하나 하자. 이건 순전히 나의 생각이고 나만의 방식이야. 너한테 맞지 않을 수도 있고, 너한테 불리하게 적용될 수도 있어.” “뭔데?”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원칙대로 하는 것.” 재림의 눈빛은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했다. 단유는 잠시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2, 3학년 아이들이 운동장을 뛰어다니면서 어설픈 동작으로 공을 차며 놀고 있었다. “난 강해지고 싶어.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살았어. 그리고, 강해지기 위해서 내가 지켜야 할 것이 몇 가지 있었어. 그 중의 하나가 자신에 대한 확신이야. 내가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모두가 확신과 신념이 있어야 돼. 거기에 거짓이 끼어드는 순간 난 강한 힘을 잃을 수밖에 없게 되거든.” 사람의 말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었다. 말이 생각을 좌우하기도 한다. 마법사였던, 그리고 마법사이길 원하는 단유는 말의 힘을 무시하지 못한다. 이를 자각한 이후부터 단유는 말 한마디에도 신중을 기하려 했다. 특히 자신의 말과 행동에 거짓이 끼어들지 않도록 노력하는 중이었다. “거짓은 진실을 이기지 못해. 그 사람들이 말하는 진실이 아니라 진짜 진실. 절대 변하지 않는 사실. 진실해야 당당할 수 있어.” 조금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마지막 말만큼은 이해했다. 재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너처럼 당당해지고 싶어.” 재림이 단유에게 말했다. 단유가 똑똑해서 당당한 게 아니었다. 단유는 거짓이 없기 때문에 당당했던 것이다. 학교가 끝난 뒤, 재림은 본관 1층에서 기다리던 어머니와 함께 마지막 조사를 받으러갔다. ======================================= [179] 풍선효과(5) 1주일 후, 재림은 전학을 갔다. 가기 전 단유를 찾아와 말했다. “고마워. 앞으로는 너처럼 당당하게 살고 싶어.” 단유는 재림을 빤히 바라보다가 악수를 청했다. “너처럼 극적으로 변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 것 같다.” 3월 초, 이유 없이 시비 걸던 재림이 한 달 사이에 명수처럼 변해버렸다. 명수처럼 착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명수처럼 머릿속을 비워버렸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비운 만큼 채우면 되겠지.” “응?” 단유가 고개를 절레 젓고는 당부 한마디를 남겼다. “그리고 담배 끊어.” “…그래.” 단유는 재림의 손을 위아래로 한 번 흔들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나중에 보자.” “…그래.” 재림은 그렇게 학교를 떠났다. 재림만 떠난 것은 아니었다. 지욱을 비롯해 다른 아이들도 전학이 결정되었다. 학폭위의 결정은 아니었지만, 교내에 퍼진 소문이 파다했던 탓에 아이들이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니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선생님이 쉬쉬했던 사건이지만, 재림이 마지막 조사에서 자신이 기억하는 바를 모두 이야기하면서 전말이 드러났고, 게다가 단유도 재림을 도우면서 일이 커졌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전 별로 없고요, 대신 명수가 먹고 싶은 게 많을 테니까 명수 먹고 싶은 걸로 먹을게요.” “넌 뭐 먹고 싶은데?” 뒷좌석에 앉아 있던 명수가 외쳤다. “스네이크요!” “스테이크.” 단유가 바르게 정정해주자, 운전 중이던 선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가자. 나도 시말서 쓰고 기분 좀 꿀꿀했는데, 고기 좀 썰어 볼까?” 재림이 ‘진실’을 고백할 때, 단유는 재림의 진실이 진짜 진실이 되도록 도와야 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자신이 재림에게 저질렀던(?) 일도 있으니, 이번 일로 되갚는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단유는 인평일보의 사회부기자인 선혜에게 연락을 했다. 교내에서 벌어지던 일이어서 조용히 묻힐 뻔 했던 이 사건은 선혜가 「공교육의 현실―인평초등학교 ‘일진회’ 폭력사건 발생」 이란 자극적인 타이틀로 기사를 내면서 지역사회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애초에 ‘일진회’라는 이름의 조직이 아니었던 바, 해당 학생들의 학부모들과 학교로부터 항의를 받았지만, 그 외에 내용에서 크게 왜곡하거나 과장되게 보도한 면은 없었기에 시말서를 쓰는 정도로 해서 마무리되었다. 대신 학교폭력에 대한 심도 깊은 기획기사로 이어나가면서 선혜는 또 한 번 공을 세울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보답하는 의미로 단유와 명수를 데리고 외식에 나선 것이었다. “그런데, 과외선생님이란 분은 같이 안 가도 되려나?” “괜찮아요. 우리 선생님이 요즘 다이어트 한다고 했어요. 집에서 빈둥빈둥 노니까 살찐다고 그랬어요. 어제부터.” “다이어트?” “네. 그래서 우리 선생님이요, 아침에도 밥을 반만 먹고요….” 명수가 해맑게 웃으면서 하은의 다이어트 전략을 상세하게 밝히기 시작했고, 단유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대화에는 끼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 “뭐라고요?” 변호사는 헛기침을 하면서 다시 한 번 설명을 했다. “더 이상은 민사를 이어나가봐야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성재림이란 학생도 전학을 가버렸고, 여론도 좋지 않습니다. 게다가… 아드님의 죄를 증언할 증인들이 추가된 상황입니다.” 언론사 제보 및 검찰 제보로 형사사건이 진행 중이기에 민사는 의미가 없었다. “그럼 억울하게 당한 우리 아들은 어쩌라고요?” 지욱의 어머니가 변호사 멱살을 잡을 기세로 으르렁거렸지만, 변호사에게는 별 위협이 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억울’이라니. “재림이 쪽도 손해배상소송을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니, 더 이상 민사를 이어나갈 필요는 없다고 보입니다. 현 상황에서는 승소가 어려우니 까요.” 변호사라는 사람이 저런 식으로 이야기해도 되는 거야? 지욱 어머니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지만 변호사는 태연한 표정으로 사건을 잘 마무리할 수 있게 조언을 해 주었다. “그래도 뭐, 죄질이 무겁지는 않으니까 아마도 가정법원 보호처분 정도로 마무리될 겁니다. 그러니 더 이상 이야기가 커지지 않게 이 쯤에서 마무리하시는 것이 그 쪽 아드님에게 좋을 것 같네요.” 말하는 모양새가 뻔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처음에 뭐라고 했던가? 돈 몇 푼 쥐어주면 아들의 무죄는 물론이고, 무고죄를 통한 민사도 이길 수 있게 되면 줬던 돈도 다시 돌려받을 수 있을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쪽 집이 법이나 이런 데 무지한 면이 많아 보여서 쉽게 생각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제 불찰이지요. 하지만 그보다 아드님과 아드님 친구 분들이 이곳저곳에 흔적을 너무 많이 남겨두었어요. 이런 상황이니 저로서도 역부족이지요.” 똥개가 돌아다니면서 오줌을 갈기는 꼴, 이라고 비유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변호사는 최대한 예의를 지켰다고 생각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변호사가 옷을 한 번 정리한 뒤,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만.” 부들부들 떠는 지욱 어머니를 남겨두고 변호사는 등을 돌려, 카페 문을 열고 나섰다. 오늘따라 유난히 화창한 햇살에 변호사는 미소를 지었다. **** 여름방학이 가까워질 무렵이 되니 학기 초의 소란은 거의 잦아 들어서, 아이들은 거의 잊었다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피해를 당했던 아이들도 이제는 기억 속에 깊숙이 묻은 채로 떠올리지 않아도 될 만큼, 흔적은 사라졌고 언제나와 같이 평온한 학교생활이 이어졌다. 학교폭력신고센터는 또 하나의 성과를 기록하면서 학교폭력을 해결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고, 센터장은 초동수사부터 사건해결에 이르기까지의 깔끔한 내용정리에 상부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인평초등학교에는 학교폭력전담교사가 ‘예산 부족’으로 인해 배치되지 못했고, 그러나 학교장이나 여타 선생님들은 그 사실에 대해 크게 불편함을 인지하지 못했다. 학부모들 역시 관계가 되었든, 되지 않았든 그 사실을 일부러 지적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런 사고가 또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었기 때문이었다. “학원가기 바쁜 아이들이 그런 사고를 저지를 틈이 어디 있어요?” “우리 아이는 착해서 그런 일에 말려들 일이 없어요.” “오히려 시간이 한가하니까 더 유혹에 빠지기 쉬운 거죠.” 마지막 학부모의 발언은 학부모회에서 많은 공감을 얻었고, 방과후 수업을 강화하는 방안을 학교에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대신, 자율성도 보장해줘야 돼요. 우리 아이는 학원 시간이 애매해서 수업 끝나자마자 가야 되거든요.” “저희 아이들도요.” 학원에 다닐 여력이 되는 아이들은 빠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반 강제로라도 방과 후 수업에 참여토록 하자는 것. “예산이….” 학교의 응석은 학부모회로부터 질타를 받았다. “방과후학교가 뭐예요? 사교육비 경감과 교육격차 해소, 돌봄 기능 확대 등의 목적으로 학교 본연의 기능을 보완하고 확대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제도 아닌가요? 그렇다면 학교가 좀 더 강하게 밀어붙이지는 못할망정, 예산 핑계를 대다니요! 교육청 지원센터에 저희가 대신 문의라도 해드려야 하나요?” 교감은 양해를 부탁하며 최선을 다하겠노라 다짐했다. 어떤 학교는 학교시설이용료 조로 수용비라는 걸 받는다고 했다. 방과후 교사들은 학교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 세후 월급액의 10% 이내에서 거둔다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예산 절감책이 될 수도 있겠다. ‘위탁업체랑 적당히 합의 보는 것도 방법일 테고.’ 사실 방법이야 찾으면 나온다. 원래 그런 법이다. 그리고 그런 방법을 찾으라고 시킬 사람도 많이 있다. 교사들이 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관리직을 꿈꾸는 교사들이라면 이런 일 저런 일 해봐야 하는 법이다. ‘3학년 주임 선생님이 이런 걸 잘하던가?’ 머릿속으로는 적당한 사람을 물색하면서, 겉으로는 학부모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표정으로 간간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런 식으로 학교는 조금씩 변해갔다. 어느 쪽으로 나아가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학교는 학생들 위주로 변해갔다. 당장 올해만 해도 아이들은 더 이상 기말시험을 보지 않게 되었다. 지난 해 말의 일―상훈이 시험 스트레스로 쓰러진 일―이 학부모회에서 크게 거론되면서, 올해부터 전 학년 기말시험이 사라진 것이었다. 아이들은 여름방학이 다가오는 이 시간을 온전히 즐겼고, 부모님들은 더더욱 아이들을 학원에 열심히 보냈다. 학교에서 성적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학원에서라도 평가를 받아서 아이들이 잘 성장(?)하게끔 지도해야 했던 것이다. 물론 이런 흐름과 전혀 관계없이 학교생활을 이어나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대체로 소외계층의 아이들이었고, 또 단유와 명수가 그랬다. “석고야, 오랜만에 같이 한 게임 콜?” 단유는 부드러운 어조로 명수의 제안을 사양했다. “너 아침마다 운동하잖아? 그거 어디 써먹으려고 그래? 이럴 때 공 한 번 빡! 차고, 빡! 한 번 골 넣고, 빡! 패스 해주고, 응?” 손날로 공중을 휙휙 휘젓는 명수를 보며 다시 한 번 부드러운 어조로 사양했다. 명수는 단유를 흘겨보다 제 풀에 지쳐 고개를 돌렸다. “그럼 갈 때 불러. 그 때까지 놀고 있을게.” 그리고 명수는 운동장으로 뛰어갔다. 운동장에서는 이미 40명가량의 아이들이 공을 차고 있었다. 굳이 단유가 끼지 않아도 충분히 많은 아이들로 붐비는 운동장이었다. “어머, 오랜만이네?” 사서 선생님이 단유를 보며 인사했다. 확실히 5학년 들어서면서부터는 도서관에 오는 일이 줄어들었다. 집에도 읽을 책이 많이 구비된 데다가, 학교도서관에서 단유가 읽을 만한 수준의 책은 찾기 힘들어진 탓이었다. “안녕하세요.” 단유는 꾸벅 인사를 한 뒤, 책장이 즐비하게 늘어선 틈으로 얼른 들어갔다. 사서 선생님도 하은 만큼이나 말이 많아서, 한 번 붙들리면 쉽게 몸을 빼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하은과 달리, 사서 선생님은 조금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듯해서 듣고 있기가 불편했다. 아니나 다를까, 선생님은 미처 몸을 감추기도 전에 단유를 불렀다. “요즘 시험이 없어져서 많이 아쉽지 않니? 그래도 지금까지 니가 계속 1등을 했었잖아? 내가 여기 있어도 니 소문을 워낙 많이 들어서 말이야. 그 정도는 잘 알거든? 그런데 올해부터 시험이 없어져서 어떡하니? 솔직히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야 시험이 없어져서 좋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너처럼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시험을 통해서 자신의 실력을 평가받고 점검할 수 있는 거잖니? 너같이 공부 잘하는 애들이 시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리도 없고 말이야. 사실 너한테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참 안타까운 현실이야. 아이들이 좀 더 학교 교육을 믿고 따를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오히려 학생들한테 끌려 다니다 보니까 너 같은 아이들이 괜히 피해를 보잖아? 안 그러니?” “아닌데요.” “응?” 단유의 재빠른 대답에 선생님은 이어가려던 말을 하지 못하고 단유를 쳐다보았다. “시험이 없어졌다고 해서 제가 피해를 보는 건 아니라고요. 그리고 시험제도가 학생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지만, 그게 항상 옳은 건 아니고요, 오히려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학습하고 생각할 수 있는 틀을 제한한다는 의미에서 오히려 나쁘다고 생각하거든요. 차라리 지금처럼 수행평가나 논술평가가 학업수준을 평가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어쩜, 역시 똑똑한 아이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 논술도 점수 잘 받겠어.” 사서선생님이 어정쩡한 태도로 박수를 치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단유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제가 똑똑한 게 아니고요, 알림장에 나온 내용이에요. 교육청에서 이런 취지로 일제평가를 없애겠다고 알려준 걸 읊은 건데요. 다만 제가 그 취지에 동감한다는 이야기를 드리려고 했던 거고요. 선생님도 공문 받아보시지 않으셨어요?” 선생님의 귀가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지켜보다 고개를 숙여 인사한 단유는 그제야 책장으로 향했다. 선생님은 데스크 위에 놓인 한지 접부채를 집어 들었다. “여름이라 그런가, 덥네.” 사서선생님이 괜히 땀을 식히려고 부채질하는 동안, 단유는 제일 윗 칸부터 차근차근 제목을 확인하며 책을 찾기 시작했다. “아, 여기 있네.” ======================================= [180] 전승(1) 며칠 전, 단유는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하은은 잠시 공부를 줄이더라도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 단유를 붙들었고,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시작된 TV시청은 쭉 이어졌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 명수는 호빵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호빵은 명수 품에서 얌전하게 눈을 감고 잠이 든 것처럼 누워있었다. 처음엔 계속 거실을 뛰어다니려고 몸부림을 쳤는데, 이제는 이것도 훈련이 되어서인지 드라마 시청 시간에는 명수 품에서 얌전하게 있을 줄 알게 된 호빵이었다. 그런데 이상함을 느낀 것은 드라마가 끝날 때쯤이었다. “어, 선생님. 호빵이 이상해요.” 평소와 같이 눈을 감고 명수의 쓰다듬을 기분 좋게 즐기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눈을 못 뜰뿐만 아니라, 콧물도 흘리고 있는데 심상치가 않았다. “어떡해요, 선생님?” 하은 역시 개를 키워 본 경험이 없어서, 이런 상황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했다. 단유는 호빵을 살피다가,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프면 병원을 가야지. 하은이 박수를 치며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다 같이 가까운 동물병원을 찾아 갔다. 단유는 차 안에서 낑낑거리는 호빵을 안고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명수를 달래느라, 오히려 더 힘이 빠질 정도였다. “괜찮을 거야.” “죽으면 어떡해?” 단유는 호빵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래도 사람이 아닌지라 어떻게 아픈지, 얼마나 아픈지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잘 모르겠네.” “죽는 거야?” 명수는 거의 죽는다고 생각했던지, 엉엉 울기 시작했다. “죽지 마, 호빵아. 죽지 마.” 단유는 호빵을 꼭 안고는 오열하는 명수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었다. 그 사이, 하은은 동물병원을 찾았고, 간신히 명수에게서 호빵을 떼어낼 수 있었다. “열이 심하네요.” 강아지의 체온은 보통 38도에서 39도 사이인데, 사람보다 조금 높은 정도라고 했다. 그런데 40도를 조금 넘는 수준이라도 강아지에겐 치명적일 수 있다는 수의사의 말에 다시 한 번 울음을 터뜨리는 명수였다. 다행히, 호빵은 감기라서 향후 치료와 관리만 잘 해주면 나을 수 있다고 수의사가 말했고, 그제야 겨우 울음을 그치는 명수였다. “그런데, 상태로 보면 갑자기 아픈 건 아닌 것 같고, 그 전부터 아팠던 것 같은데 전혀 짐작하지 못했나요?” 그 말에는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수의사의 말대로라면 식욕도 많이 떨어지고, 평소와 달리 기운도 없었을 텐데 몰랐냐는 이야기였다. “저희가 강아지를 처음 키워봐서….” “반려견을 키우실 때는 관심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애들은 아파도 아프다고 말을 할 줄 모르니까요. 그리고 개에 대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들도 많고요. 공부를 하셔야 겠는데요?” 의사가 미소를 지으면서 약을 처방할 때, 명수는 연신 미안하다며 호빵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이 일은 단유에게 새로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되었다. 강아지는 아파도 아프다고 말을 하지 못했다. 강아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니, 전혀 눈치도 채지 못했다. 자칫 하다간 같이 사는 ‘사람’들에 의해 진짜로 죽어도 모를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단유는 결심했다. 강아지에 대해 공부해보기로. 수의사만큼 깊고 자세하게 공부를 할 자신은 없지만, 이왕 개를 키워보기로 한 이상 적어도 개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은 갖춰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단유는 기억 속에서 도서관에 있던 어떤 책을 떠올렸다. 애견 교육에 대한 책이었는데, 예전에는 관심이 없어서 펼치지도 않았던 기억이 난 것이다. 그리하여 단유는 수업이 끝난 뒤, 도서관을 찾게 되었고, 마침내 기억 속의 그 책을 찾아 낸 것이다. “이거 빌려갈게요.” 예전에는 교내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수 없었는데, 이제는 4일간 책을 빌릴 수 있게 정책이 변경되었다. 단유로서는 반길 일이었지만 그간 도서관을 찾을 일이 없어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서비스였다. 도서관을 나와 운동장으로 갔을 때, 명수는 땀범벅인 채로 운동장을 달리고 있었다. 골문 앞에서 현란한 개인기로 아이를 제쳐보지만 워낙 많은 아이들이 수비를 하고 있었기에 결국 공을 놓치고 말았다. 단유는 틈을 보다가 잠시 여유로워진 사이에 명수를 불렀다. “명수야, 가자.” “잠시만!” 명수는 기어코 한 골을 더 넣은 뒤, 인사를 하고 운동장을 떠났다. **** 책을 읽으면서 단유는 신비롭다는 감상을 받았다. 인간과 다른 동물의 습성에 대해 신비롭기도 했지만, 인간도 아닌 것에 대해 이토록 자세하고 면밀하게 관찰하고 연구하여 이런 지식을 만들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개를 자주 씻겨야 한 대. 안 그럼 병이 생긴대.” “그래? 호빵이는 언제 씻었지?” 단유의 기억에 이 집에 온 뒤에 씻겨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럼에도 왜 욕실에 애견목욕용품이 있는지, 신기해서 물었다. 하은은 귀찮다는 눈치를 보이다가 대답해 주었다. “주영이가 놓고 간 거야.” 말하자면, 호빵이 처음 이 집에 올 때 같이 놓고 갔던 거라는데, 왜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았을까? 명수가 하은을 붙잡고 조르니, 별 수 없다는 얼굴로 느릿느릿 소파에서 일어난 하은이었다. “귀에 물이 들어가면 안 된대요.” 단유는 책을 들고 이것저것 주의사항을 읊어대기 시작하자, 얌전히 듣던 하은이 불렀다. “김단유.” “네?” “바꿔.” 단유와 명수가 욕실에서 호빵을 붙잡고 온수를 맞춰서 물을 받은 뒤,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씻기기 시작했다. 단유가 호빵을 지나치게 세게 누르는 바람에 호빵이 낑낑거리기도 했고, 거품이 잔뜩 묻은 호빵이 몸을 터는 바람에 옷이 엉망이 되기도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단유와 명수는 호빵의 첫 목욕을 무사히 완료했다. 명수가 하은이 가져다 준 드라이기로 호빵을 천천히―너무 뜨겁지 않게 조심해가며―말릴 무렵, 단유는 하은에게 물었다. “개 말고도 다른 걸 키우는 사람들도 있나요?” “그럼. 고양이도 있고, 햄스터도 있고, 뱀도 있고.” 명수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뱀도 키울 수 있어요?” “못할 것도 없지. 외국에는 사자를 키우는 사람도 있다더라.” “헐. 그러면 사자한테 물리면 어떡해요?” “그럼 죽는 거지.” “그런데도 키워요?” “물론 사자가 함부로 물지 않도록 교육을 시키겠지. 조심도 하고 말이야.” 단유는 호빵을 바라보다가 청소기를 집어 들었다. 드라이기로 말리던 중에 날린 털이 거실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어쩐지 코가 간지럽더라니. “왜? 다른 것도 키우고 싶어?” 하은이 단유에게 묻자, 단유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아니고요. 그냥 왜 개나 다른 동물을 키우는 걸까, 궁금해서요.” “귀여우니까 키우지.” 명수가 대답했다. 그러나 단유는 괜히 심각한 얼굴로 명수의 말에 반박했다. “당장 이 책을 봐도, 개를 키우기 위해서 조심해야 할 것도 많고, 지켜야 할 것도 많아. 또 지난번처럼 개가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야 하고. 솔직히 너무 할 일이 많아. 굳이 귀엽다는 이유만으로 동물을 데려다 키운다는 건 솔직히 무리인 것 같아.” 하은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단유의 이런 반응도 개를 키운 보람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맞아. 개든 고양이든 반려동물을 키우는 데는 많은 수고와 책임이 뒤따르지. 그걸 감수하고 키우기 때문에 ‘반려’라고 지칭하는 거고. 특히 얘네들은 사람처럼 의사표현을 못하잖아? 언제 배가 고프고, 언제 졸린 지, 언제 심심하고 언제 아픈지를 말로 표현하지를 못해. 그렇기 때문에 주인이 계속 신경을 써줘야 하지. 그리고 항상 평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그게 바로 책임이야. 명수, 너는 그런 책임감을 갖고 호빵을 길러야 하는 거야. 알겠니?” “만약 그런 책임감이 없으면요?” “그럼 개가 죽겠지?” “저 책임감 있어요. 호빵이 잘 키울 수 있어요.” 호빵을 안아들고 소파 위로 올라온 명수였다. 단유는 두 사람과 동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하은에게 다시 질문했다. “선생님도 그런 책임감 때문에 저희랑 함께 있는 건가요?” 하은은 얼굴을 붉히다 단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직구다, 너. 그리고 너흰 이 개랑 다르지. 말도 할 줄 알고, 스스로 청소도 할 줄 알잖아?” “하지만 저희는 아직 어리잖아요. 스스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어요.” 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래서 너희들에게 보호자가 필요한 거지. 물론 내가 그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유는 하은과 명수를 바라보며 책임감의 의미를 되새겼다. 그렇게 생각하다 궁금한 점이 떠올랐다. ‘나는 책임감이 있을까?’ 아직 무언가를 책임져 본적이 없던 단유였다. 작년에 반장을 할 때도 ‘책임감’이라는 말을 별로 사용해 본 적도 없고, 느껴본 적도 없었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다’ 혹은 ‘말에 책임을 지다’라는 관용적인 표현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실제로 단유가 책임을 졌던 일은 별로 없었다. “책임은 의무인가요?” 단유가 물음을 던지니, 하은이 턱을 괴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글쎄, 잘 모르겠네?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단유와 명수를 돌봄에 있어, 책임감을 느끼고는 있지만 그게 의무라고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의무라면 법적 보호자인 재훈에게 의무가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자신은? “단유 넌, 꼭 이런 철학적인 문제를 던져놓더라? 사람 난감하게.” 하은이 투덜거리자, 단유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 그날 밤, 단유는 꿈속에서 위대한 마법사가 된 자신을 보았다. 현란한 마법을 부리면서 하늘을 날아다니고, 땅을 헤집었다. 달려오는 스크로파를 회오리로 날려버리고, 자신을 고문하려고 달려오는 범죄자들 앞에 불기둥을 세워서 접근을 막아버렸다. 녹스 성의 사람들이 모두 성벽에 올라서서 하늘을 나는 단유를 바라보았고, 단유는 그들을 위해 불꽃놀이를 선보였다. 그 때, 아래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바라보니 핀체노였다. “핀체노! 오랜만이네요?” 핀체노가 말했다. “왜 거기서 마법을 쓰는 거야?” 단유가 대답했다. “왜요? 쓰면 안 되나요?” “안 돼.” “왜요?” “안 돼. 마법은 함부로 쓰면 안 돼.” “왜요?” 핀체노가 등을 돌렸다. 그리고 서쪽 산으로 걸어갔다. “핀체노! 가지 마세요. 마법 안 쓸게요.” 핀체노는 느리게 걷는 것처럼 보였는데, 어느새 벌판 끝에 다다랐다. 단유는 핀체노 앞으로 이동했다. 두 팔을 벌려 막자 핀체노가 한숨을 쉬었다. “마법을 함부로 쓰면 안 돼.” “괜찮아요. 어차피 전 마법을 쓰지 못해요.” “마법을 쓸 때는 책임을 져야 돼.” “책임이요?” “그래, 마법을 쓸 때는 책임을 질 각오로 써야 돼. 그런데 봐라. 저 사람들이 전부 니가 마법을 쓴 걸 봤어. 이제 어떻게 책임질래?” “제가 뭘 책임져야 하죠?” 핀체노가 단유를 피해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단유가 다시 핀체노 앞으로 이동하려는데, 마법이 사용되지 않았다. “어?” 단유의 눈앞에 보이는 장소로는 얼마든지 몸을 전이(轉移)할 수 있었는데, 갑자기 되지 않았다. “핀체노! 마법이 안 돼요.” “니가 책임을 지지 않아서 그래.” 단유가 비명을 지르듯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전 책임질 일은 하지 않았어요.” “책임을 져. 그렇지 않으면 아예 마법을 쓰지 마.” “안 돼요! 전 마법사가 돼야 해요. 강해져야 돼요.” “그럼 책임을 져.” 핀체노가 고개를 돌려 단유를 바라보았다. 핀체노의 슬픈 눈빛이 보였다. 언젠가 한 번 보았던 눈빛이었다. “책임을 질 수 없다면, 나처럼 될 거야.” 단유가 목이 찢어져라 핀체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핀체노는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숲 속에 어둠이 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단유는 잠에서 깨어났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이었다. 창밖으로 푸르스름함 하늘이 보였다. 해가 뜨지 않은 하늘에 붓을 흘려 그린 듯한 구름이 보였다. 그 사이로 점점이 박혀 빛나는 새벽별빛이 단유의 눈 속에 박혀 들어왔다. ======================================= [181] 전승(2) 여름방학이 되었을 때, 단유는 재훈을 만나러 갔었다. 오랜만에 만난 재훈은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을 한 뒤였다. 그러나 복학과 사업 등의 문제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재훈은 단유와 오래 있지는 못했다. 그래도 건강한 모습으로 만난 두 사람은 그간의 소회를 풀었다. 또 그 자리에 명수도 함께 했었는데, 재훈은 명수를 꽤 마음에 들어 했다. “정말 잘 먹는구나?” “잘 먹어야, 많이 큰다고 했어요.” “커서 뭐가 하고 싶은데?” “축구선수요.” 재훈은 소스 범벅이 된 명수의 입을 닦아 주며 열심히 지원해주겠노라 약속했다. 헤어지기 전, 재훈은 단유에게 한 가지 당부를 했다. “하은이한테 부탁은 했지만, 너한테도 꼭 당부를 하고 싶어서.” “뭔데요?” 단유의 의젓한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던 재훈이었다. “고민이 있으면 꼭 하은이랑 상담을 하도록 해. 걔가 전문 상담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너한테 도움이 될 거야. 혼자 고민하지 마. 넌 혼자가 아니니까.”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짐작이 가는 부분은 있었다. 최근 단유는 다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던 공부도 집중을 잘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는 모습을 종종 보여 왔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사실 늘 마법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던 단유였다. 언젠가는 되겠지라고 생각하고 지난 시간이 벌써 2년여에 가까웠다. 그 시간동안 특별히 마법을 사용할 일이 없어서 필사적이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저 세계로 넘어갔을 때 죽을 뻔 한 적도 있었고, 이 곳에서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유용하게 해결할 수 있었던 일이 없진 않았다. 무엇보다 할 수 있었던 일을 할 수 없게 되니, 어쩐지 뺏긴 기분이 들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본격적으로 마법을 되찾기 위한 방법을 찾게 된 계기는 얼마 전 꾸었던 꿈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이미 그 전부터 막연히 잃어버린 힘을 되찾고 싶다는 열망은 가지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어찌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알겠어요.”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재훈의 걱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니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단유의 고민과 노력은 여름방학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고, 그러나 아쉽게도 소득은 없었다. 다시 가을이 찾아오고 또 같은 생활이 반복되었지만 단유는 예전처럼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시험도 사라진 마당이니 선호 과목에 대한 공부를 잠시 소홀히 하는 한이 있더라도 마법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기로 했다. **** “아직도 단유, 고민이 많은 것 같지?” 하은이 소파에 앉아서 단유가 들어가 있는 방을 쳐다보았다. 호빵과 눈을 마주치며 재롱을 부리던(?) 명수가 지나가듯 말했다. “괜찮아요.” “뭐가?” “단유요.” “니가 어떻게 알아? 뭐 아는 거 있어?” 명수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뇨, 저도 몰라요. 그런데 알아요. 단유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거.” 그 점에 있어서는 동감하는 바다. 창밖을 보니, 구름이 잔뜩 낀 저녁하늘이 보였다. “눈 오겠다.” 그 소리에 명수도 창밖을 바라보았다. “안 되는데.” “왜?” “내일 체육 수행평가 있어요.” 기말시험이 사라지고 수행평가가 들어왔는데, 하은이 보기에는 조금 어정쩡한 제도였다. 과목별 세부 평가 방법과 기준안이 있다고는 하지만, 단유나 명수가 들고 오는 과제들을 보면, 과연 저게 무슨 소용인가 싶은 것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테이블 위에 놓인 사회 수행평가 과제물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조선의 건국과정 이해하기가 무슨 말인지….” 명수가 들고 온 문제 때문에 노트북으로 조선 건국에 대한 블로그를 찾아주었더니, 그걸 열심히 받아 적은 명수였다. 그리고는 호빵과 놀고 있다. 저걸 가지고 점수를 어떻게 매길지 의문이다. **** 단유는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천장을 향할 뿐, 정작 바라보는 것은 그 너머 어딘가 였지만. “포르마, 샤락티라스, 아나그노리시, 챕터, 컨슈메….” 단유는 입으로 마법 전개 과정을 되뇌어 보았다. 하나라도 잊은 건 없었지만, 그럼에도 마법이 되지 않는 이유는 역시나 포르마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면 원형을 알 수 있을까?’ 풀리지 않는 문제를 붙들고 있는 것만큼 답답한 일은 없었다. 이전에는 세계가 다르다는 이유로 원형을 파악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했다. 세계가 다르면 그 세계에 속한 원형도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후, 어떤 깨달음을 통해서 포르마가 만들어지지 않는 이유가 통찰력에 관한 문제임을 알게 되었다. 이를 이용해서 제윅의 마법을 막아내기도 했고. 그런데 얼마 전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었다. 과연 통찰력이 답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계기는 바로 호빵 때문에 찾게 된 애견교육에 관한 서적이었다. 이곳, 지구에 축적된 과학과 문명은 실로 놀라워서 어린 나이의 단유가 보기에도 언제 그 많은 지식들을 모두 습득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반대로 그 지식들을 모두 습득한다면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한 분야의 지식만을 파고 들어서 해당분야의 깊은 통찰력을 얻는다 하더라도 과연 마법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자문하면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현재 단유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마법, 즉 공간에 대한 마법 때문이었다. 분명히 이 마법의 획득과 사용에 신의 도움이 있었다. 아니 진짜 신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인외의 존재임은 분명했다. 아무튼 그 존재의 도움으로 단유가 얻은 공간에 대한 마법은 마법 그 자체에 대한 거대한 힌트였다. 왜냐하면, 공간 마법의 포르마는 다름 아닌 숫자였기 때문이다. 숫자의 원형은 숫자였다. 다만 숫자는 형이 없었다. 형(形)은 없지만 상(像)은 존재하는 기묘한 상태. 그려지는 이미지가 아니라 떠오르는 이미지. 그리고 여기서 시작된 숫자의 선은 단유의 위치를 중심으로 뻗어 나가며 수많은 동심원과 수많은 기하적 선들을 그려낸다. 0에 0을 더해 0을 만드는 수식이 2차원을 떠나 3차원, 4차원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층을 더하니 공간이 만들어졌다. 숫자는 무한대였고, 단유가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확장될 수도 있었다. 아니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유의 수학적 지식의 한계인지, 아니면 애초에 신의 도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인지 아직은 마음대로 무한대로 공간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 마법이 또 고민이 되는 것은 바로 공간 너머 공간, 즉 다른 세계로의 진입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것이 가장 큰 미스터리인데, 단유가 다른 세계로 넘어가고자 할 때 단유가 알지 못하는 챕터(추가된 특정 성질)가 머릿속에 구현된 피구라에 붙었다. 자동차 엔진에 전혀 알지 못하는 기능의 기계가 붙는 것처럼. 그리고 그 기계 때문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드는 자동차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물론 그 영화 속의 박사님은 자신이 만들었기 때문에 그 기능을 알겠지만, 주인공은 그 기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르면서 사용할 수 있었다. 단유가 바로 그 주인공처럼 어떤 성질인지도 모르는 챕터를 이용해 세계 전이(轉移)를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 챕터에 사용된 수식은 단유의 지식으로는 파악이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통찰력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숫자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했으니까. 또 공간 마법이 온전히 숫자 그 자체로만 포르마가 만들어진다고 보기도 어려웠으니까. ‘익숙하게 느껴지는 무엇인가도 있고.’ 때문에 단유가 고민하는 점은 되돌아 처음의 질문. 과연 마법의 사용은 통찰력 때문인가? 일단 단유는 아니라는 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어 한 가지 더. 불의 마법과 마찰에 관한 마법의 경험으로 볼 때, 단유는 숫자라는 포르마를 이용해 다른 마법의 구현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 다만 그게 어떤 마법으로 구현될지는 모른다. 이것을 찾는 것이 단유가 찾아야 할 숙제일 것이고. “석고야, 밥 먹어.” 오늘도 이렇게 고민과 고민 속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하루를 보내게 될 것 같았다. 만족감도 허무감도 없었다. 조급함도 느긋함도 없었다. 오로지 마법에만 집중하는 단유였다. 다만, 단유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감정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위기감일 것이다. 이성적으로는 느끼지 못하지만 소년이 숱하게 겪으며 몸으로 체득한 위기감이 소년을 독촉하고 있었다. 빨리 힘을 찾으라고. 그렇지 않으면 위험할 것이라고. **** “안녕, 오랜만이네?” 방학식 날, 단유는 교실로 가던 길에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어, 안녕.” 혜린이 활짝 웃으면서 다가왔다. 혜린은 5학년 7반이었다. 교실로만 따지면 거의 끝과 끝이었다. “내년에는 같은 반이었으면 좋겠다.” 혜린이 속내를 드러내자 단유는 머쓱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예전에는 혜린의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요즘은 조금 알 것 같았다. 이것도 TV시청각 교육의 효과라면 효과일 것이다. 때문에 예전처럼 무감정한 미소로 대하기 어려워진 곤란함이 있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단유는 혜린에게 손을 흔들었고, 혜린은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그러고 보면 그간 몇 번 복도나 운동장에서 마주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전의 혜린과 달리 다소 서먹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고, 때로는 아는 척을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처음에는 왜 그렇게 하나 싶었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사실 명수의 도움이 컸다. “부끄러워서 그렇겠지.” 명수는 적어도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정답지를 들고 있는 편이었다. 드라마 마니아답게 혜린을 마치 어느 드라마 여주인공 보듯이 평가하는 것이었다. “니가 보고 싶어도, 다른 아이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혜린이를 놀릴 거 아냐. 혜린이는 그게 부담스러운 거야. 그래서 혜린이는 몰래 미래를 다짐하는 거야. 다음에 만나자. 그리고 결혼하자.” 명수는 좋은 시청자는 될지 몰라도, 좋은 작가는 되지 못할 것이다. 방학식을 마치고, 단유와 명수는 오랜만에 하은과 함께 레스토랑을 찾아갔다. 방학식에 레스토랑을 찾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는데, 어쩐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 같았다. 명수가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다. “누나!” 주방에 있던 윤정이 명수와 단유를 반겼다. 아직은 허드렛일만 하는 윤정이었지만, 내년부터는 보조로 활동할 지도 모른다며 그 때 되면 직접 만든 요리도 선보이겠노라 약속했다. “누나가 만든 음식, 빨리 먹고 싶어요.” 명수의 립서비스에 감동을 받은 윤정이 명수를 꼭 안아주고는 주방으로 사라졌다. “스테이크 정식이지?” 명수가 입이 찢어져라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은이 주문하는 틈에 명수가 단유에게 물었다. “너 이번 방학 때 뭐 할 거야?” “나? 특별히 할 건 없지. 그냥 공부?” 명수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점점 명수의 표현력이 확장되는 것을 보며 단유는 어쩐지 뿌듯함과 아쉬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누나, 우리 이번 방학 때 특별 활동 같은 거 안해요?” “응? 무슨 특별 활동?” 뜬금없는 명수의 제안에 하은이 돌아보자, 명수가 씩 웃음을 지었다. “지난번에 재훈이 형 만났을 때, 재훈이 형이 저한테 그랬어요.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뭐든지 말하라고. 뭐든 도와주겠다고. 그래서 생각을 해봤죠.” 재훈을 만난 건 지난 여름 방학 때의 일인데, 그 때부터 생각을 했다고? 명수가 그렇게 오랜 시간을 두고 고민할 타입은 아니라 생각하면서 되물었다. “그래서 뭘 하려고?” “여행이요!” “여행?” 겨울이니까 어디 오키나와나 동남아 쪽 여행을 말하는 걸까? “강원도요.” “거긴 왜?” 명수가 히죽 웃었다. “썰매 타러요.” 여태 썰매 한 번 타본 적 없던 명수였다. 겨울이면 늘 반에서 썰매나 보드 타러 간다고 자랑하던 아이들이 부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는 마음대로 다닐 수 없던 형편이라 속으로 삭힐 뿐이었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욕심을 부려보는 명수였다. 단유는 명수를 보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단유는 알 수 있었다. 지금 명수가 저렇게 웃으면서 말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엄청나게 두근대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감에 두근거림보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에 두근거림 일거라고 단유는 생각했다. 그 두려움을 감추려고 더욱 열심히 웃는 명수였다. “그래, 가자.” 하은이 밝게 웃으면서 명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182] 전승(3) 수많은 조명들이 비쳐지는 무대 위, 무대 테두리로 화려한 LED 알전구가 빛을 내면서 화려함을 더하고 있었다. 그 무대 가운데에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소녀와 정장을 입은 중년의 남성 아나운서가 웃으면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노래 정말 잘 부르시네요.” “고맙습니다.” 두 손으로 마이크를 꼭 쥔 소녀가 꾸벅 인사를 했다. “우리나라 걸그룹들이 사실 아이돌이란 편견 때문에 가창력에 늘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만, 수련씨처럼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서 여기 계신 방청객 분들은 물론이고, 많은 시청자분들도 즐거워하실 겁니다. 패널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쭤볼까요?” 무대 옆에 마련된 패널석에 앉아 있던 남녀 패널들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수련을 칭찬했다. “목소리가 R&B에 특화된 목소리예요. 유니크하거든요? 들으면 들을수록 감성이 벅차오르는 느낌이 정말 매일 듣고 싶어지는 목소리입니다.” “곡 중간의 간주부분에서 댄스를 하셨어요. 격렬한 댄스는 아니지만 그래도 무대 전체를 활용하는 댄스가 돋보였고요. 그 댄스 직후에 곧바로 이 곡의 하이라이트를 부르는데 음정이 나가질 않아요. 그건 수련씨가 평소에 얼마나 연습했는지를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작곡가 출신의 패널은 수련에게 전화를 거는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꼭 한 번 같이 작업하고 싶어요. 나중에 녹화 끝나고 전화번호 꼭 알려주세요.” “감사합니다.” 수련이 꾸벅 인사할 때, 진행자가 끼어들었다. “저기, 상현씨. 그런 개인적인 부탁은 녹화 끝나고 해 주시길 바랍니다.” 진행자의 능글맞은 대처에 방청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넉넉한 웃음을 짓던 진행자가 마무리 멘트를 하며 정리를 시작했다. “그만큼 수련씨의 노래가 뛰어나다는 반증이겠지요. 오늘 오신 방청객 분들께서도 아마 수련씨의 노래에 크게 마음을 움직이셨기 때문에 수련씨에게 이렇게 많은 표를 던져주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수련은 무대 중앙에서 오른쪽 왼쪽 돌아가며 꾸벅꾸벅 인사했다. “미래가 기대되는 걸그룹, 갤럭시즈의 수련씨였습니다.” 방청객과 패널들에게서 박수가 쏟아졌다. 무대 뒤로 떠날 때까지 수련의 인사는 멈추지 않았다. **** “오늘 모니터 어땠어요?”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고치던 수련이 뒤에 선 매니저에게 물었다. “괜찮게 나왔어. 넌 말만 많이 안하면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그것만 주의하면 돼.” “아까 중간 댄스 때, 너무 무리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나오진 않았어요?” “카메라가 잘 잡아줘서 예쁘게 나왔어. 넌 말만 많이 안하면 다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매니저가 화장대 거울을 통해 수련을 바라보며 싱글벙글 웃음을 지었다. “아니, 왜 맨날 말하지 말래? 요즘 예능에서는 말 많이 해야 한다고 다른 애들한테는 그렇게 교육시키면서, 왜 나는 안 돼요? 내 목소리가 나쁜 것도 아니고, 내가 비속어를 많이 쓰는 것도 아닌데, 왜 말을 하지 말래요? 만약 실수해도 편집하면 그만이지 뭘 걱정을 해요? 그리고 제가 바보도 아니고 이미지 무너질 이야기 하겠어요? 사람 너무 의심하는 거 안 좋아요. 기분 나쁘고요.” 매니저는 푸근한 웃음을 지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아냐, 아냐.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말만 줄이면 돼. 넌 말 안할 때가 카메라에 예쁘게 나오니까 그래.” 올해 데뷔한 걸그룹 갤럭시즈의 인지도 상승을 위해 모든 멤버들이 다방면으로 활동하는 중이지만, 특히 수련은 메인보컬답게 음악성을 강조하는 프로그램을 찾아다니면서 갤럭시즈를 홍보하고 있었다. 멤버 전체가 여성적인 청순함과 아련한 감성을 강조하는 콘셉트인데, 그 중 수련은 그 외모가 눈부실 정도로 뛰어나, 팬들 사이에서도 특히 주목받는 멤버였다. “수련아, 이거 걸치고 나가.” 스타일리스트가 붉은 색 두터운 숄더를 건네주자, 수련이 미간을 찌푸렸다. “녹화 끝냈는데, 무슨. 그냥 저 패딩 줘요.” 수련이 가리킨 것은 새까만 롱 패딩이었다. “야, 방송국 밖에도 기자랑 팬들이 대포들고 서 있는 거 몰라? 당분간은 신곡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의상에 신경 쓰라고 했어, 안했어? 저건 차에 가서 입어.” 매니저의 지적에 수련이 벌떡 일어나 패딩을 집어 들었다. “밖의 온도가 지금 몇 도인지나 알고 그래요? 저런 거 입으면 저 목 상해요. 게다가 사진 좀 찍히면 어때요? 무대에서 잘 보여야 가수지. 그리고 다른 걸그룹 애들도 이런 거 잘만 입더만, 왜 우리만 그래요?” 다른 그룹 애들도 데뷔 초년도에는 그렇게 아무거나 입고 다니지 않는단다. 게다가 패딩을 입어도 꼭 저 같은 걸 입는다. 칙칙한 검은색으로. 매니저가 다시 지적하려는 사이 수련은 이미 패딩 속으로 팔을 집어넣고 있었다. 검은 패딩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린 후, 매니저를 바라보며 수련이 입을 열었다. “가요.” 그러고는 싱긋 웃는다. 그 얼굴에 매니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른 애들은 매니저한테 고분고분하기만 한데, 수련은 성격이 얼마나 대찬지, 첫날부터 떽떽거리더니 저렇게 고집부릴 때는 꺾기도 힘들었다. 그렇다고 아주 말을 안 듣는 것도 아니고, 웬만하면 매니저의 지시에 따르는 편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지각을 절대 하지 않는다는 건 매니저의 입장에서 고맙기도 한 부분이었으니까. “언니, 여기요!” “수련아!” “수련누나! 여기 봐줘요!” 소위 퇴근길이라고 녹화를 마치고 나가는 길에 팬들이 카메라와 핸드폰을 들이밀며 수련의 이름을 외쳤다. 아직 음악프로그램이나 스트리밍사이트의 차트에서 1위 한 번 해 본적 없는 걸그룹이지만, 조금씩 인지도를 쌓아가면서 이렇게 수련이나 갤럭시즈를 찾는 팬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고마워요, 어? 안녕? 어제도 봤었죠? 밥 먹었어요? 안녕? 옷 따뜻하게 입어요.” 수련은 나름 팬서비스라고 팬들에게 한 마디씩을 건네면서 이동했다. 하지만 시간에 쫓기는 걸그룹답게 오래 이야기할 수 없었다. 옆에 따라가던 매니저가 적당히 선을 그으면서 수련을 내몰았다. 곧 밴에 올라탄 수련은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다가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창문을 닫고 몸을 좌석 깊숙이 묻었다. 운전대를 잡은 로드매니저 옆 조수석에 앉은 매니저가 슬쩍 고개를 돌려 물었다. “너 혹시 상현 작곡가님이랑 연락처 교환했어?” “아니요.” 시큰둥한 수련의 반응에 매니저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시간이 없었나? 뭐, 그래도 그 유명한 작곡가한테 같이 작업하자는 이야기까지 들었으니 오늘 꽤 성공한 셈이다.” 나름 오늘의 성공적인 녹화를 칭찬하려는 의도가 보이는 매니저의 이야기에 수련이 피식 웃었다. 그 반응이 의아해서 매니저가 물었다. “왜?” “유명하긴 유명하죠, 그 분. 근데 같이 작업할 정도는 아니에요.” “뭐?” 상현이라는 작곡가는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작곡가 중의 한 명이었다. 그가 초기에 작곡했던 노래들은 지금도 레전드라는 별칭 아래 간간이 TV에서 리메이크 되곤 했다. “20년 전에나 유명했지, 지금 솔직히 제대로 작곡한 곡도 없잖아요? 요즘 트렌드를 못 따라잡는 작곡가의 곡에 노래 부르고 싶지는 않아요. 어쩌면 같이 작업을 하고 음원을 낸다고 해도 크게 화제는 안 될걸요? 반짝 떴다가 2시간도 안 돼서 차트 아웃 할 게 뻔해요.” 수련의 시니컬한 반응에 매니저가 힐끔 쳐다보았다. “옛날에 내 놓은 곡들이 나쁘진 않아서 그 저작권으로 하루하루 먹고 사는 양반인데, 그것도 이제는 약빨 떨어질 때도 되지 않았어요? 아마 본인도 새 곡을 쓸 엄두도 못 내고 있을 걸요? 그러니까 저런 데서 패널이나 하고 있죠.” 매니저는 말없이 수첩을 들여다보았다. “다음은 어디예요?” 수련의 물음에 스케줄을 확인한 매니저가 입을 열었다. “서라 리조트. 다른 애들도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서라 리조트에서 음악방송 공개녹화가 있었다. 겨울철의 별미랄까, 사람들도 많이 모이는 곳이고 게다가 주요 관객들이 10대에서 30대에 이르는 주 타겟층이니 잘만 하면 또 인터넷에서 검색어 순위에 오를지도 몰랐다. “잠시 눈 좀 붙일게요.”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이 광경을 본다면, 절대 초년 데뷔한 걸그룹 멤버의 모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3, 4년 지나면 얼마나 더 심해질까? 만약 차트 1등이라도 한다면?’ 만약 1등을 하고 더욱 기고만장해진 수련의 모습을 잠시 상상하던 매니저는 고개를 저었다. 더욱 시니컬하게 변할지도 모를 수련의 미래를 상상하기보다는 1등 가수를 만들어낸 자신의 화창한 미래를 상상하는 게 더 생산적인 일이었다. 매니저는 수첩을 덮고, 창밖을 보았다. 하늘에 어둑한 구름이 끼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조만간 눈이라도 내릴 모양이리라. “차에 체인 있어?” “예, 준비해 놨습니다.” 로드매니저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 “석고야, 나 하나도 안 추워!” 달리는 차 안, 뒷좌석에 앉은 명수가 차창을 내리고 맞바람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명수야, 창 닫아. 다른 사람은 춥잖니?” “하나도 안 추워요.” 명수가 춥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바로 지금 명수가 입고 있는 옷 때문이었다. 스키장을 가기로 결정한 후, 하은은 아이들을 데리고 백화점에 갔다. 스키장에서 입을 보드복을 사기 위해서였다. 단유와 명수가 하은과 같이 살게 된 뒤, 가장 먼저 했던 것도 바로 옷을 사는 것이었다. 이전까지는 형들이 물려준 옷들을 입다가 처음으로 자기에게 맞는 옷을 사 입는다는 경험을 한 단유와 명수가 무척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 이미 그 당시에 입을 만한 옷들을 충분히 구비했었고, 그 이후에도 계절별로 필요한 옷들을 구입하곤 했다. 하지만 역시 첫 스키장 나들인데 제대로 된 옷을 입혀주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기에 하은은 기꺼이 자기 돈으로 선물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명수는 보자마자 눈에 꽂힌 흰색 밀리터리 무늬의 보드복을 입었는데, 생애 최초로 입은 고가의 보드복에 하루 종일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리고 그 날, 틈만 나면 하은 앞에서 애교를 부리던 명수 때문에 하은도 줄곧 미소를 지었었다. 스키장을 가는 날 아침부터 두툼한 보드복을 걸치고 돌아다니더니, 차에 타서는 얼굴을 세차게 할퀴는 겨울바람에도 춥지 않다고 허세를 떠는 것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명수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눈이 시리울 만큼 바람이 찬데, 춥지 않을 리가 없다. 두건을 쓰고 있다면 또 모를까. 단유가 명수를 말렸다. “그러다 감기 걸리면 오늘 가서 못 놀 거야.” 못 놀면 큰일이지. 명수는 얼른 창을 올렸다. 바람이 멎자, 명수의 뺨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석고야, 가면 뭐하고 놀지?” “우리 뭐해요?” 단유는 명수의 질문을 간단하게 넘겼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하은이 대답했다. “너네하고 싶은 거 다 하면 되지. 어느 친절하고 돈 많으신 분이 고맙게도 리조트에 방까지 잡아주셔서 말이야. 2박3일로 놀 거니까, 하고 싶은 거 다해도 돼.” “재훈 형도 오면 좋을 텐데.” 명수의 말에 하은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하지 마라. 재훈 오빠가 와서 니가 좋을 게 뭐가 있니?” “진짜예요. 재훈 형 오면 좋죠.” “뭐가 좋은데?” “맛있는 거 많이 사주잖아요, 그 형은.” “난 마치 너 굶겼던 것처럼 들린다?” 명수가 헤헤 웃음을 지으며 대답을 피했다. 하은은 화제를 돌려 물었다. “보드도 배워볼래? 너희 나이 때도 보드 타는 애들 많던데.” “저요, 저 배워볼래요.” “단유는?” 창밖을 보던 단유가 하얀 웃음을 지어보이며 답했다. “좋아요, 저도.”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반길 일이었다. 그게 무엇이든. 배워놓으면 언젠가는 다 써먹지 않을까? 하은과 두 아이를 태운 자동차는 고속도로 위를 시원하게 달렸다. 그리고 어느새 하늘 위로 회색빛 먹구름이 잔뜩 끼더니, 보일 듯 말 듯 하얀 눈 조각들이 나풀대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 [183] 전승(4) 고속도로를 나와 리조트로 가기 위한 길로 들어서면서부터 차가 조금씩 막히기 시작했다. 리조트로 향한 도로 위에 새빨간 불들이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몰리는데 길이라도 넓히든가. 이게 뭐야.” 하은의 투덜거림에도 명수는 반응하지 않았다. 이미 한참 전에 잠이 든 명수였다. 오는 내내 그렇게 들떠서 에너지를 마구 발산하더니, 결국 방전이 되었는지 모로 엎어져 있었다. 단유는 명수가 불편하지 않게 머리 아래 쿠션을 받쳐주었다. “너도 피곤하면 자. 이럴 때라도 푹 쉬어둬야 나중에 신나게 놀지.”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만약 나중에 니가 일찍 지쳐버리면, 명수는 누가 어울려준다니? 난 힘없다.” 단유는 싱긋 웃으면서 하은의 걱정을 이해해 주었다. “걱정마세요. 제가 이래봬도 체력이 좋잖아요?” ‘이래봬도’란 말이 어울릴 단유는 아니지만, 확실히 단유가 체력이 좋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었다. 아침마다 운동을 나가는 단유를 보면, 마치 운동선수를 꿈꾸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으니까. 잠시 차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었고, 몇 시간 전부터 어둑해진 하늘 덕분에 해가 질 시간도 아니건만, 거의 대부분 차들이 라이트를 켰다. 리조트를 향한 차선은 막혔지만, 리조트에서 나오는 차선은 휑하니 뚫려 있어서 가끔 라이트를 밝히고 달려오는 차량의 불빛에 눈살을 찌푸려야 했다. “오랜만에 집 밖으로 나오니까 좋지?” “저보다는 선생님이 더 오랜만에 나오시는 거 아닌가요?” 하긴, 오랜만에 나오는 건 단유가 아니라 하은이었다. “그래도 난 예전에 많이 돌아다녔기 때문에 지겨워서 그런 거야. 다 가봤으니까. 넌 처음이잖아? 남들은 이곳저곳 다 가보고 싶어 하는데, 넌 그렇지 않았어?” “별로요.” 굳이 말하자면, 단유가 이 곳에서 많이 돌아다니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그 이유를 따지자면 하은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밥도 물도 없이 몇날 며칠을 걸어 산 속을 헤맨 적도 있었고, 끝이 안 보이는 평야와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에서 늪 사이로 만들어진 나뭇길 위를 뛰어다닌 적도 있었다. 시쳇말로 ‘이불 밖은 위험하다’고 했던가? 단유에겐 그 말이 진실이었다. 그냥 위험한 정도가 아니라, 진짜 목숨이 왔다 갔다 했었으니까. “가끔씩은 이렇게 나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내가 너무 선생님이란 이름에 매여서 너희들을 공부시켜야 한다고만 생각했던 것 같거든? 그래도 나름 위탁을 맡은 보호자인데, 이것저것 구경도 시켜주고 그랬어야 했나봐.” 감상으로 시작해서 반성으로 끝나는 하은의 말에 단유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선생님 덕분에 저희가 편하게 생활하고 있는 걸요?” “…하여튼 넌 너무 어린애 같지가 않아. 그리고 내가 뭘 했다고 편하니? 너희가 편한 건, 집안 일 봐주시는 이모님 때문이지.” 청소, 빨래, 식사를 모조리 책임 져 주시는 이모님 아니었으면, 하은도 버티지 못했으리라.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이모님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요.” “어쩌겠니? 오랜만에 휴가라고 집에서 쉬는 게 더 좋다고 하시니.” 그리고 이모님은 가정이 있으신 분이었다. 본인의 자녀분들도 챙기셔야 하기에, 휴가 겸 해서 집에서 쉬시겠다고 하시니 굳이 졸라서 함께 하자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저 차는 되게 크네요.” 단유가 뒤를 보며 말하자, 하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밴이라는 건데, 보통 연예인들이 타고 다닌다고 하지. 아닐 수도 있지만.” “편한가요?” “그렇지 않을까? 비싼 찬데.” 그리고 비싼 차에 탄 수련은 하은의 말대로 편하게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다만 이 비싼 차에서 편한 사람은 오직 수련뿐이라는 것. 매니저는 연신 시계를 보며 다리를 덜덜 떨고 있었다. “너무 막히는 거 아냐?” 로드매니저도 운전대를 꽉 쥐고 있긴 하지만, 당장 쓸 일이 없는 운전대였다. 오른발로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번갈아 밟지만 100M도 쉽게 나아가질 못하는 차였다. “그래도 아직 시간 여유는 있지 않습니까?” 입술을 핥으며 초조한 심정을 드러낸 매니저가 핸드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어, 나야. 다른 애들 도착했어? 뭐? 거기도 도착 못했어? 왜? 아이 씨. 그럼 언제 도착할 거 같은데? …그래? 거기가 먼저 도착하겠네. 우린 좀 걸릴 것 같아. 우리 얼마나 걸리겠냐?” 로드매니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을 피했다가 사나운 눈초리에 찔끔하며 대답했다. “한, 한 시간이면 도착하지 않을까요?” “우리 한 시간 걸린단다.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거 같으니까, 도착하면 먼저 준비 끝내고 기다리고 있어. 뭐? 공연 적에 뭘 먹는다고 그래? …알았어, 그럼 김밥 반줄씩만 먹어 둬. 아니다. 두 개만 먹으라고 그래. …그래.” 매니저는 전화를 끊었다. 로드매니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쪽으로 질러가볼까요?” 매니저가 로드매니저의 뒤통수를 때리는 폼을 취했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로드매니저를 쏘아보았다. “내가 그 짓하다가 죽은 놈들을 한 두 번 본 게 아니거든? 미친 짓 하려면 혼자 해, 알았어?” 로드매니저는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 딴에는 시간을 맞춰볼까 하는 생각이었지만, 역시 중앙선을 넘어 역주행이라는 건 예전에나 가능할 일이었다. 요즘은 차라리 펑크를 내면 내지, 무리하게 달려서 사고를 재촉하지는 말자는 분위기였다. “애들 도착 안했대요?” 뒤에서 잠이 덜 깬 목소리가 들려왔다. “깼어? 아직 멀었으니까 더 자.” “허리 아파서 더는 못 자겠어요. 이러다 나중에 무대 위에서 허리 삐긋할 거 같아.” 억지로 기지개를 펴며 눈을 뜬 수련이 검게 선팅된 창을 통해 밖을 보았다. 빨간 리어램프가 붉은 눈을 치켜 뜬 사람처럼 보였다. “먹을 거 없어요?” 이쪽도 사실 녹화가 길어져서 식사를 제대로 못했다. 하지만 공개녹화가 코앞인데, 막 먹을 수는 없었다. “막 먹긴 뭘 먹어요? 내가 언제 식탐 부린 적 있다고 그래요? 적당히 배만 좀 채울게요. 그리고 너무 배고프면 힘없어서 노래가 더 힘들다고요.” “미래야? 거기 뭐 있니?” 스타일리스트가 쀼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없는데요.” 평소에는 군것질거리도 잘 들고 다니던 애가 못 먹어서 그런가 반응이 영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도 나도 힘든 시간. 이럴 때 매니저가 잘 조율해야지, 안 그러면 험악한 분위기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는 티를 안내려고 해도 나기 마련이어서 목전에 둔 공연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련아, 조금만 참자. 거기 물이라도 마시던가.” “뭐, 맨날 물배만 채우래?” “물도 너무 많이 마시진 말고. 니 말대로 배 나올지 모른다.” 수련은 쳇 혀를 차며 입을 적실 정도로만 한 모금을 들이켜 입 안에 물고 있다가 조금씩 목 뒤로 넘겼다. “어, 눈 오네요?” 눈이 올 듯 말 듯 하다가도 오지 않기에, 안 내리나 했는데 결국 함박눈이 되어 내리기 시작했다. “와아, 예쁘다.” 수련이 속없이 감탄할 때, 매니저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군대에 있을 때부터 눈을 싫어하기 시작한 매니저였다. 특히 이 쪽 업계에서 일한 뒤부터 눈을 생선 눈깔보다 더 싫어하기 시작했다. “쓰레기네.” “쓰레기네요.” 매니저와 로드매니저가 동시에 말했다. “체인은?” “뒤에 있어요.” 아까도 물었지만,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리조트 가자마자 체인부터 꺼내서 달도록 해.” 마침 앞 유리창에 내린 눈이 스르르 미끄러지며, 와이퍼 위에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같은 시간, 단유도 창밖으로 떨어지는 눈을 보고 있었다. 명수를 깨울까 생각했지만, 차라리 나중을 위해서 깨우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운전 중인 하은을 위해서라도. 하은도 어느 운전자들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보닛에 쌓이는 눈을 바라보았다. “왜 하필 눈이래? 어제 일기 예보에서는 눈 내린다는 이야기가 없었는데.” 하은이 걱정을 많이 하는 것 같아서 단유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하은이 룸미러로 뒤를 보며 말했다. “체인을 안 챙겼거든.” 하은의 말의 요지는 차가 눈길에서는 미끄러질 위험이 커서 체인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타이어와 눈 사이의 마찰력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는데, 단유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마찰력에 대해서만큼은 하은 못지않게, 어쩌면 하은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굳이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다. 이럴 때도 선생님으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려는 하은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아직 도착하려면 많이 멀었나요?” 하은이 내비게이션을 보며 답했다. “내비 상으로는 30분 정도 남은 것으로 나오는데, 그것도 빨리 달릴 때 이야기지, 지금 같아서는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네.” 그 때, 건너편 차선에서 1톤 트럭 한 대가 신나게 속도를 내며 지나갔다. 트럭이 지나갈 때, 후류(後流) 때문에 하은의 차가 살짝 휘청거렸다. “아니, 눈도 오는데 누가 저렇게 무식하게 속도를 내면서 달려?” 신경질적인 반응을 냈다가 문득 단유가 바라보고 있음을 알고, 얼른 입을 다무는 하은이었다. “위험해보여서 그랬던 거야. 신경 쓰지 마.”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옆에 누워있는 명수를 바라보았다. 밖에서 눈이 내리든, 과속을 하든 신경 쓰지 않고 쿨쿨 자는 명수를 보니 어쩐지 다른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명수가 개운하게 잠에서 깨어나, 즐거운 마음으로 썰매를 타기 위해 눈밭을 달려 나갈 수 있기를 바랐다. “어?” 하은이 의문의 감탄사를 뱉어냈다. 그리고 곧장 거친 소리가 창을 뚫고 들려왔다. ―끼이익 단유가 고개를 들었을 때, 맞은편에서 눈이 부시게 환한 불빛이 비쳐 들어왔다. 단유는 저도 모르게 오른손을 들어 눈앞을 가렸다. **** 분명히 아침까지도 일기예보에서는 눈이 내릴 거라는 예보를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점심때는 지역에 따라 눈이 내리는 지역이 있을 거라고 했고, 적설량은 지역마다 다르지만 많이 내리는 지역은 1~2㎝ 정도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리조트나 그 주변에서 나오는 차들이 이 일기예보를 제대로 듣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누구도 체인을 준비할 생각을 못했고, 준비했더라도 당장 눈이 내리지 않는 바에야 누가 체인을 채우겠는가. 게다가 애초에 눈이 많이 내릴 줄 알지 못했다. 드문드문 내리던 눈은 마치 지방(紙榜)을 태운 뒤 날리는 조각처럼 하늘하늘 거리며 떨어졌기에 크게 경각심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순식간에 내리기 시작한 눈은 양이 얼마 되지 않더라도 도로를 충분히 얼어붙게 만들 정도는 되었다. 시야를 가릴 정도로 내렸다면 오히려 사람들이 조심했을까? 눈이 더 많이 내리기 전에 빨리 가자는 생각을 가졌던 것일까? ‘급커브 조심’이라는 표지판이 없었기 때문일까? 차 한 대가 뻥 뚫린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래도 나름 조심은 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해서 도로가 젖어들고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차선을 따라 운전하다 살짝 왼쪽으로 운전대를 돌려 굽잇길을 도는데 돌다보니 타이어가 제동이 되지 않았다. 당황한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연신 밟았다. 꾹꾹 밟는데도 타이어는 계속 미끄러졌다. 이마에 땀이 송글 솟아나고 심장이 툭하고 떨어질 무렵, 갑자기 타이어 제동이 이루어졌다. 길이 살짝 얼어붙었던 지역을 벗어난 차는 간신히 제동을 되찾았고, 운전대를 열심히 움직여 도로 옆 수풀로 튕겨나가기 전에 차를 세울 수 있었다. 운전자는 짧게 한 숨을 쉬고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채 진정시키기도 전에 다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아니 밟으려 했다. ―끼이익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룸미러로 확인하기도 전에 충격이 먼저 왔다. “아이고, 머리야.” 운전자가 목 뒤를 붙잡았다. 크게 부딪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래도 충격 당시 헤드레스트에 심하게 부딪혔던 것 같았다. 절로 신음이 나오는데, 운전자는 일단 차에서 내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운전석 쪽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에 손을 올리는 순간, 커다란 굉음과 함께 몸이 앞으로 툭 튀어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가슴께를 망치로 두드리는 충격이 느껴졌고, 턱이 깨지는 아픔도 있었는데 그 순간 운전자는 정신을 잃었다. “어? 어?” 로드매니저는 왼쪽 앞에서 벌어지는 사고를 처음부터 목격했다. 처음의 승용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하다가 비틀대더니 무사히 차를 바로 세웠다. 그리고 그 뒤를 다른 차가 와서 차의 후미를 박았다. 앞차는 살짝 앞으로 튕기듯 밀려났지만 큰 충격은 없었을 것이다. 후미램프와 트렁크, 리어범퍼만 갈면 되겠네, 라는 게 로드 매니저의 감상이었다. “사고야?” “네.” 매니저가 몸을 기울여 관심을 보일 때, 로드 매니저는 흰색 승합차 한 대가 위험한 속도로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어?” 그리고 그 차는 마치 멈출 줄 모르는 버펄로처럼 앞 서 있던 두 차를 맹렬히 처박았다. 굉음과 함께 앞 차들이 몇 미터씩 밀려나갔고, 승합차는 보닛이 망가진 상태로 미끄러지다 밴을 향해 다가왔다. “피해!” 하지만 그냥 거북이 걸음 하듯 움직이던 차가 어디로 피한단 말인가? 그래도 피해보자고 운전대를 오른쪽으로 꺾으려 하는 찰라, 승합차가 비스듬하게 미끄러지더니 밴을 긁으면서 뒤로 지나갔고, 그대로 밴의 뒤에서 따라오던 차와 충돌했다. “야, 뭐야? 뭐야?” 수련이 운전석을 향해 고개를 들이밀었다. 매니저가 얼른 수련을 말렸다. “야, 위험해, 앉아 있어.” “오빠, 저기!” 수련의 동공이 커지는 것을 본 매니저가 급히 고개를 돌렸고, 그 때 매니저 눈을 가리는 환한 빛이 있었다. “오빠!” ======================================= [184] 전승(5) “안 돼!” 단유의 외침에 명수가 잠에서 깨어났다. 반쯤 눈이 감긴 채로 고개만 들어 올리던 명수를 단유가 감싸 안을 때, 하은도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차 밖으로 거친 마찰음이 들렸고 이내 다가올 충격에 대비하는데, 충격 대신 차 뒤편에서 충돌음이 들렸다. 하은이 고개를 들어보니, 다가오는 줄 알았던 차가 어떻게 방향을 틀었는지 예상했던 결과는 오지 않았다. 대신 하은의 차를 지나치며 갔던 그 차는 뒤차와 부딪혔던 것인지 뒤쪽에서 강한 충돌음이 들려온 것이었다. “괜찮아?” 하은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당연히 부딪힌 일도 없으니 별 일은 없겠지만, 자신도 지금 심장이 크게 뛰고 있는 판이니 어린 애들이야 오죽할까 싶었던 것이다. 단유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하은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이제 막 일어난 명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명수는 여전히 사태가 파악이 안 된 것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러다 바깥을 보더니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사고 났어!” 바깥에서는 경적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교통사고를 목격한 차량들이 경적을 울려서 경고를 하는 것이었다. 비상등의 깜빡임과 경적 소리가 좁은 길을 가득 채우는 중이었다. “많이 다쳤을까?” 명수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하은도 밖을 바라보았다. 사고가 난 차량은 보이는 차량만 세 대이고, 뒤로 지나간 차량도 포함하면 4대 이상이 사고 났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차량 바깥으로 나오는 사람이 없어 슬쩍 걱정되는 마음이 들었다. “나가서 살펴봐야 되는 거 아니에요?” 단유의 말에 하은이 가만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아직은. 그리고 나갔다가 더 큰 사고가 날 수도 있어.” 예전 어떤 교통사고의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교통사고 부상자를 돕기 위해 차에서 내려 사고처리를 돕던 중, 뒤따라 온 차량에 부딪혀서 더 큰 사고를 당했다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하은은 다들 그런 생각 때문에 나가지 않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누나, 저기.” 하은이 선 차선의 차량들이 조금씩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은도 비상깜빡이를 켠 상태로 브레이크에서 발을 살짝 떼고 앞으로 갔다. “저 사람들 많이 다친 거 아닐까요?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단유의 말은 하은을 갈등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당장 자신이 내린다고 해도 도와줄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고, 돕다가 자신도 그 뉴스의 주인공처럼 사고를 당할까 두려웠다. 게다가 혼자도 아니고 두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으니 감히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마찬가지 이유로, 두 아이가 지켜보는 상황에서 부상을 당했을지도 모를 사람들을 구조하지 않고 그냥 간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똑똑.” 누군가가 다가와 창문을 두드렸다. 하은이 흠칫 놀라다가 조심스럽게 창 밖에 선 사람을 바라보다가 창문을 내렸다. “무슨 일이세요?” 바깥에 선 사람은 얇은 패딩조끼를 걸친 남자였다. 선이 굵은 외형의 그 남자가 몸을 숙여 안을 흘깃 보더니, 하은을 향해 말했다.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 “오빠!” 수련의 외침에 매니저가 앞을 바라볼 때, 강한 충돌이 있었다. 차가 앞뒤로 크게 흔들리면서 매니저는 앞으로 몸이 쏠렸다. 그러나 그의 두툼한 뱃살을 죄고 있던 안전벨트 덕분에 매니저는 앞 유리 창에 머리를 박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콜록!” 미처 대비하지 못하고 당한 사고에 놀란 탓인지 가슴이 크게 욱신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고통과 동시에 든 생각은 자신의 안위가 아니었다. “괜찮아? 수련아, 괜찮아?” 목을 부러질 정도로 홱 돌리다가 목에 담이라도 걸린 것인지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 그것보다 더 급한 것은 ‘내 아이’의 안전이었다. “괜, 괜찮아요.” 수련은 허리께를 짚으며 살짝 구부린 자세로 대답을 했다. “뭐야, 너! 허리 다친 거야?” “아니요, 괜찮아요. 그냥 조금 아릿한 정도에요. 저보다 오빠가 더 심한 거 아니에요? 오빠 이마에 땀 장난 아닌데?” 매니저는 수련 뒤에 가려진 스타일리스트의 안부도 물었다. “미래야? 넌 괜찮아? 미래야?” “저도 괜찮아요. 머리를 좀 부딪치긴 했는데, 크게 아프진 않아요.” 앞좌석에 이마를 부딪친 스타일리스트가 이마를 쓱쓱 문지르면서 대답을 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던 매니저는 그제야 옆에 앉은 로드매니저를 바라보았다. “괜찮지?” “네, 전 괜찮….” “그럼, 내려서 함 봐봐라. 차가 움직일 수 있을랑가.” 급한 마음에 어릴 때 쓰던 사투리가 나왔다. 로드매니저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운전석 쪽 보닛을 받은 상대차량은 비스듬하게 중앙선을 걸치고 멈춰 있었다. 로드매니저가 조심스럽게 걸어가서 차 안을 보았다. 50대 정도로 보이는 남성 운전자가 가슴을 움켜쥐고 기침을 하고 있었다. 또 조수석에 동승하고 있던 아주머니는 남자의 몸 이곳저곳을 더듬으면서 괜찮냐고 묻고 있었다. 로드매니저도 거기에 끼어 한 마디 거들었다. “괜찮습니까?” “전, 괜찮아요. 저희 남편이 좀 다친 것 같은데.” 아주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했다. 로드매니저는 운전자에게도 괜찮냐고 물었다. 남자는 연신 기침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부러지거나 피가 나지 않으면 다들 괜찮단다. 로드매니저는 겉으로 보이는 외상이 보이지 않자,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그 안전벨트는 풀지 마세요. 아직 위험하니까요. 아주머니도요.” 아주머니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남편에 대한 걱정에 미간을 좁힌 주름이 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상대에 대한 걱정이 있었는지 되물었다. 로드매니저는 짤막하게 대답을 하고는 차를 살폈다. 미끄러졌던 차는 마지막 순간에 아내가 다칠 것을 두려워했던 것인지 핸들을 크게 비틀며 미끄러졌었다. 그 덕분에 상대 차나 자신들의 밴이나, 모두 운전석 쪽끼리 부딪치는 사고가 나고 말았지만, 속도를 꽤 줄였던 탓에 크게 부서지지는 않았다. 두 차 모두 보닛이 밀려들어가고 앞 범퍼는 떨어져 나갔지만, 그 외는 크게 문제가 없어보였다. 당장은 그랬다. “현철아, 거기 위험하다. 일단 이리로 나와.” 조수석에서 내린 매니저가 로드매니저를 불렀다. 상대의 안전을 묻는 매니저의 말에 현철은 자신이 본 대로 이야기했다. “어떡하죠?” 현철의 말에 매니저는 인상을 썼다. 앞으로 바라보니 조금씩 차가 나가고 있었다. 매니저는 빨리 머리를 굴렸다. “잠깐, 기다려.” 매니저는 앞 차량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리고 슬쩍 안을 쳐다보니, 뒷좌석에는 애들 둘이 타고 있는 것 같았다. ―똑똑. 운전석 창문을 두드리자, 잠시 후 창문이 내려가면서 20대 초반의 여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일이세요?” “저, 다름이 아니라 혹시 괜찮으시면, 동승을 부탁해도 될까요? 보시다시피 저희 차가 저래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나마나, 이미 사이드미러를 통해 상황을 주시하던 하은이 슬쩍 애들을 확인한 후 물었다. “인원이 많으면 저희도 힘든데….” “아뇨, 저를 포함해서 2명이 답니다.” 그렇다면 조수석과 뒷좌석에 한 명씩 태워도 부족함은 없으리라. “괜찮니?” 하은이 애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단유와 명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은은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다시 매니저를 돌아보며 답했다.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매니저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허리를 펴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눈발이 조금 더 세진 느낌이었다. **** “이름이 뭐야?” “저는 인평초등학교 5학년 인명수라고 합니다.” 명수가 씩씩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옷가지를 끌어안고 있던 수련이 한 손으로 명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넌 이름이 뭐니?” “김단유예요.” 단유가 담담하게 소개하자, 수련의 눈에 이채가 띄었다. “혹시 누나 아니?” 명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연예인이요!” “이름도 알아?” “아니요!” 수련은 초년 데뷔생의 비애를 실감하며 명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희가 TV를 잘 안 봐서 그래요.” 룸미러로 바라보던 하은이 대신 변명을 했다. “우리 TV 많이 보는데?” 명수가 눈치 없이 끼어들자, 하은이 부랴부랴 변명을 덧댔다. “넌 맨날 드라마만 보잖아! 쟤가 드라마를 너무 좋아해서요. 다른 예능은 안 보고 드라마만 보거든요. 일일드라마랑 연속극은 다 챙겨보는 애라서.” 수련은 괜찮다고 답하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누나가 연예인인건 어떻게 알았어?” “저런 차 타는 사람은 연예인이라고 했어요.” 대답은 참 잘하는 명수였다. 수련은 그런 명수가 귀엽다며 입 꼬리를 올렸다. 반면 창가 쪽에 앉은 단유는 별 반 관심이 없다는 듯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친구는 되게 과묵하다? 평소에도 말이 별로 없나봐?” “아, 석고가 원래 말을 많이 안 해요. 그래도 저랑 있을 때는 많이 해요.” “석고는 뭐니?” “별명이요. 1학년 때였나? 어떤 애가 석고보고 석고상 닮았다고 했는데, 그 때부터 석고라고 불렀어요.” 참 직관적인 설명이었다. 수련이 단유의 얼굴을 살피니, 옆모습 밖에 보이진 않지만 꽤 잘 생긴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로 각진 얼굴은 아닌 것 같은데?” 수련의 혼잣말에도 여전히 단유는 창밖으로 시선을 주고 있었다. 그 사이 호기심이 폭발한 명수가 이것저것 물으면서 차 안의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다.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네요.” 매니저가 말을 건네자, 하은이 싱긋 웃었다. “그쵸? 어쩔 때는 너무 버겁기도 할 정도예요.” “조카들이신가요?” “뭐, 비슷한 거라고 해두죠.” 나이만 보면 아들은 아닌 것 같은데, 조카도 아니라면 뭘까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매니저는 캐묻지 않았다. 잠시 분위기 전환용으로 말을 던졌을 뿐 머릿속은 온통 이후의 일을 걱정하느라 복잡했기 때문이다. 로드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는 차에 남겨두었다. 공연장에 사고를 알린 후, 갈아입을 옷만 가지고 하은의 차에 동승했다. 이제 로드매니저가 적극적으로 사고 수습에 도움을 주도록 시켜놓았으니 이후 언론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 또 한 번 검색어에 오를 기회가 생길 것이다. 선행이라면 선행이고, 프로페셔널하다는 평가도 받을지 모른다. ‘위기는 기회인 법이니까.’ 매니저가 이 사고를 넌지시 알릴 언론사를 머릿속으로 물색하는 사이, 수련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는 단유에게 호기심을 가졌다. 가끔 팬들 중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 관심 없는 척, 신경 안 쓰는 척, 하지만 먼 거리에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으로 쫓는 사람들. 하지만 단유는 정말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쁜 남자 스타일인가?’ 고작해야 12살인 아이에게 무슨 나쁜 남자 타령인가 싶어서 자신의 머리를 톡 두드리는 수련은 넌지시 단유를 불렀다. “밖에 뭐 있니?” 그 말에 명수도 단유를 따라 밖을 바라보았다. 느리게나마 움직이기 시작한 차는 아까보다는 좀 더 빨리 달리고 있었다. 그래봐야 시속 30㎞도 안 될 것 같지만. 그리고 그런 차 안에서 바라보는 창밖의 경치는 별 거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명수의 대답에 단유가 손으로 어느 지점을 가리켰다. “눈이 점점 많이 오는 것 같아서요.” “눈을 좋아하니?” 수련의 말에 단유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조수석에 앉아있던 매니저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아는 녀석이군. “눈이 심해지는 걸 보니, 불안해서요.” “불안해?” “아까 다친 사람들 말이에요. 괜찮을지.” 그 말에 차 안의 모든 사람들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 차의 사람들을 구하러 가는 사람들이 없었어요. 그 차들, 꽤 심하게 사고 난 거잖아요.” 수련의 밴과 부딪힌 차는 그렇다 치더라도, 앞서 사고가 난 차들은 꽤 심하게 부딪히면서 차가 엉켜있던 상황이었다. “왜 아무도 그 사람들을 구하러 나가지 않았을까요?” 하은이 쉽게 입을 열지 못할 때, 매니저가 말했다. “그건 2차 사고가 걱정이 돼서란다. 만약 그 사람들을 돕는다고 나섰다가, 뒤따른 차들 때문에 또 사고가 난다면 더 사고가 커지지 않겠니?” “사고가 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 사람들을 그대로 둔 건가요?” 애가 조금만 더 컸다면, 그리고 그 말에 조금의 비아냥이 섞인 느낌이었다면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단유의 말은 그런 비아냥도 아니었고, 정말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것처럼 물었기에 되레 답을 하기가 힘들었다. “사실 그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어요. 만약 주변에 다친 사람이 있다면 구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행동하질 않았으니까요. 그럼 아까 같은 상황에서는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 하고요. 그리고 만약 그 상황이 당연한 것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를 생각해봤어요.” “그래서?” “이유를 모르겠어요. 아까 선생님도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위험할 수 있다고. 그런데 물론 구하는 사람이 위험할 수는 있지만, 정작 위험한 상황에 놓인 건 차 안에 있던 사람들 아닌가요? 저는 그게 희생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하은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아니,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후에 그 말을 뒷받침할 다른 주장이 생각나지 않았다. ======================================= [185] 전승(6) 그 때였다. 가만히 단유의 이야기를 듣던 수련이 입을 열었다. “사람을 돕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건 좋지만, 그것도 상황에 따라 다른 법이야.” “상황이요?” 수련은 팔짱을 꼈다. 앞을 바라보니 여전히 빨간 리어램프가 줄을 서서 있지만,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는 차들을 보니 제 시간에 도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를 들어서 처음 사고가 나서 차 세 대가 얽혀 있을 때, 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너희 선생님이 차 밖으로 나갔다고 생각해봐. 그런데 그 때 또 차 한 대가 미끄러졌었지? 그럼 그 뒤에 어떤 결과가 그려지는지는 말 하지 않아도 알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 “그래, 지금은 아니지. 하지만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확률로 사고를 인지하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야. 아까 사고 난 차들도 사고가 날 확률이 많다고 생각했을까? 희생이니 뭐니, 이런 걸 떠나서 자기 목숨보다 중요한 건 없어.” “수련아.” 매니저가 서둘러 수련의 말을 막으려 했지만, 수련은 이제 막 입이 트였다. “때로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앞 뒤 안 가리고 불에 뛰어드는 사람도 있지.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뭐라고 부르는지 아니? 영웅이라고 그래. 대단히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불러. 그런 사람들은 그런 찬양을 들을 만 하지.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당장 너도 말만 그렇게 하지, 나가진 않았잖아? 왜 그랬어? 너희 선생님이 나가지 말라고 해서? 아니면 니가 너무 어려서? 똑같은 거야. 니가 어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듯이, 다른 평범한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가 있어. 괜히 나섰다가 일만 더 커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너희 선생님도 의사나 소방관이나 뭐 그런 직업은 아니지?” 단유는 수련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련은 그 모습을 보다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하은이 룸미러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매니저 역시 어쩔 줄 몰라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뭐, 라는 입모양을 만들어 보인 수련은 고개를 돌려 반대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 누나가 말을 너무 심하게 한 것 같은데, 사실 어려운 처지에 돕는 사람을 구하는 게 맞는 거야.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한 건, 부끄러운 행동이지. 그래서 우린 같이 일하는 동료를 남겨두고 온 거야. 그 사람들을 도우라고. 반대로 우린 일 때문이라는 핑계로 그 현장을 떠난 거고. 그러니까, 단유라고 했나? 사람을 구하는 게 맞는 거야. 앞으로 니가 살면서 얼마나 이런 일을 많이 겪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어려운 처지에 처한 사람들을 보면 우선 구하려고 하는 게 옳은 일인거야. 어떤 핑계를 대든지 말이야.” 매니저가 아이들의 동심과 도덕성을 조금이나마 지켜주려는 의도로 반론을 펼쳤다. 하지만 단유는 표정 없이 고개를 숙여 보일 뿐이었다. 두 사람의 말이 모두 맞는 부분도 있고,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단유에게 가장 의미심장하게 들렸던 부분은 ‘니가 어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듯이’라는 부분이었다. ‘어려서’라는 말은 ‘힘이 없어서’라는 말로 들렸다. 바꿔 말하면 힘이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이리라. ‘어떤 상황에서 능히 극복할 수 있는 힘.’ 적어도 단유에게 그런 힘은 ‘마법’이었다. 비단 이런 상황뿐만 아니라, 살면서 겪을 여러 가지 상황에서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는 상황만은 피하고 싶었다. ‘지겹도록 겪었으니까.’ 어른이 되더라도, 힘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 마치 이 차에 탄 사람들처럼. 정체된 차량의 속도가 점점 붙기 시작했다.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 “고맙습니다.” “아뇨, 별 말씀을요. 저희야말로 연예인도 보고 좋았어요. 그치?” “네! 좋았어요.” 명수가 해맑게 웃었다. 매니저의 시선이 단유에게로 옮겨가니, 단유는 가볍게 목례로 화답했다. “조금 있다가, 저기서 공연할 텐데 보러 오실래요? 이렇게 차를 태워주신 것도 인연인데, 저희가 가까이서 보실 수 있게 이야기 해볼게요.” 하은이 답하기도 전에 명수가 두 손을 번쩍 들어 만세를 불렀다. 하은이 고개를 절레 흔들면서 고마움을 표시했다. “서둘러요.” 수련이 예의 그 시니컬한 목소리로 매니저를 재촉하자, 매니저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애들이라고 해도, 인터넷 정도는 할 나이의 아이들이었다. 행동 하나, 말 하나도 조심해야 할 판국에 이런 모습이라니. “저희 먼저 갈 테니까, 따라오시고요. 스태프들한테 이야기 해둘게요.” 매니저는 수련의 팔을 이끌고 공연장으로 달려갔다. “갈까?” 하은이 돌아보며 묻자, 명수는 히죽 웃으면서 단유의 팔을 잡았다. “가자.” “그래.” 세 사람은 천천히 공연장으로 다가갔다. 이미 공연이 시작된 그 곳에서는 현란한 조명과 노래소리, 그리고 팬들의 함성소리로 가득했다. 함박눈은 아니지만 그래도 천천히 내리는 눈이 적지 않았는데, 피디는 그림이 좋다는 이유로 쇼를 강행하고 있었다. “다음은 누구야?” “인페르노 두 곡 부르고, 그 다음은 갤럭시즈입니다.” 조연출의 알림에 피디가 눈살을 찌푸렸다. 갤럭시즈는 멤버 한 명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며 순서를 뒤로 미룬 그룹이었다. “그 멤버는 왔대?” “지금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더 이상은 못 미룬다고 이야기해.” 비니를 눌러쓴 조연출이 황급히 큐시트를 오른손에 쥔 채로 뒤돌아 달렸다. 무대 뒤, 출연자 대기석을 겸비한 천막으로 달려간 조연출이 전기난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둘러앉은 여자 그룹을 찾았다. “다 오셨어요?” “도착했대요.” 동행했던 매니저 한 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천막을 젖히고 나타난 수련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갤럭시즈 멤버들이 모두 벌떡 일어나더니 수련에게 달려갔다. “언니, 괜찮아요?” “수련아, 다친 데 없어?” 수련은 싱긋 웃으면서 멤버들의 엉덩이를 두들겨 주었다. “그렇게들 걱정이 되셨어요?” 수련의 장난에 멤버들이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수련을 안아주었다. 조연출은 무전기로 상황을 알린 뒤, 다가가 말했다. “인페르노 다음이니까 준비하세요.” “네!” 매니저가 뒤따라 들어와 조연출에게 죄송하다고 인사를 했다. 조연출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짧게 혀를 찬 뒤 몸을 돌렸다. 사고를 당했다는데 뭐라고 말하겠는가. 덕분에 30분 동안 선배에게 잔소리를 들었지만, 그걸 사고당한 사람에게 풀기도 뭣해서 그냥 등을 돌려 대기 중인 인페르노에게 다가갔다. “진짜 안 다쳤어?” “응. 허리가 조금 쑤시는 느낌인데, 크게 다치진 않았어.” “너 그거 지금은 모르는 거야. 나중에 더 심해질 수도 있어.” 가장 맏인 멤버가 수련을 걱정하며 말하자, 매니저가 그렇지 않아도 공연 끝나고 병원에 데려갈 참이라고 이야기했다. “오빠, 아까 애들 건 이야기했어요?” 아까는 그렇게 심통 맞게 대하더니, 또 저리 챙기는 모습이라니. 매니저는 챙겼노라 대답하고는 미리 와 있던 후배 매니저를 만나 스케줄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무슨 애들?” 수련은 오면서 만나 하은과 단유네에 대해 짧게 소개했다. “12살인데 완전 애어른 같더라니까.” 그 때, 갤럭시즈를 부르는 조연출이었다. 갤럭시즈는 힘차게 대답을 하고 무대에 오를 준비를 했다. ****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갤럭시즈였습니다.” 5명의 멤버들은 하나의 동작처럼 꾸벅 허리를 숙여 팬들에게 인사한 후, 함성소리를 들으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수고했다. 얼른 들어가서 몸 좀 녹이고, 옷 갈아입어.” 그 사이에 거세진 눈발 때문에 머리와 옷이 엉망이었다. “이거 카메라에 영 이상하게 나오는 거 아니에요?” “잠깐 모니터 했는데, 비 맞는 것보다는 낫더라.” 매니저의 위로 아닌 위로에 멤버들은 시무룩한 얼굴로 무대 뒤 천막을 향했다. “어, 명수야.” 수련이 무대 옆에 선 명수를 발견하고는 다가갔다. “누나! 되게 멋있었어요. 누나 완전 연예인 같아요.” 같은 게 아니라, 연예인이지만 수련은 싱긋 웃으면서 명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옆에 선 단유를 바라보고 물었다. “넌 어땠어?” “…나쁘진 않았어요.” 수련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하은이 얼른 단유의 어깨를 짚으며 변명을 했다. “얘가 원래 공부만 해서 노래나 이런 걸 잘 몰라요.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공부 잘 할 거 같이 보이긴 하네요.” “수련아!” 마침 지나가다 하은을 보고 인사하러 오던 중, 수련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얼른 뛰어왔다. “너 좀! 말 좀! 응? 제발?” 낮은 목소리로 수련을 다그쳐보지만, 수련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너 아무래도 나랑 이야기 좀 해야겠다. 내가 웬만하면 어린 애라고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봐야겠어.” “무슨 소릴 하려고?” 매니저가 안절부절 못하면서 수련을 말리려는데, 수련은 단유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나 싫어하지?” 매니저가 수련을 붙잡고 천막으로 끌고 갔다. “너 나 따라와!” 매니저가 수련의 입을 막고, 황급히 동행한 후배에게 부탁을 했다. “쟤들 데리고 천막 안으로 데리고 와.” “…외부인 출입금진데.” “너라도 좀! 그냥 내 말 좀 들으면 안 되겠니?” **** 결과적으로 단유와 명수는 천막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다른 진행 스태프들이 이유 없이 외부인을 들이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천막은 갤럭시즈만 쓰는 것도 아니었고, 다른 가수들도 쓰고 있는데 아무나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은은 내심 잘 됐다며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두 아이를 데리고 리조트로 향했다. “단유야, 너 오늘 좀 달라 보인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하은이 단유를 보며 말했다. 막 머리를 감고 나온 단유가 촉촉해진 머릿결을 툭툭 털어대다가 하은을 바라보았다. “왜요?” “아니, 그냥 평소보다 더…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아서.” 본인을 앞에 두고 ‘시니컬’하다든지 ‘흑화’했다든지 하는 표현을 쓰기는 무리가 있어 급히 말을 바꿨다. 12살짜리 아이한테 쓸 말도 아니고. 단유는 대답대신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주스를 손에 들고 소파에 앉았다. 마셔도 되죠, 라는 물음에 하은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 모금 입에 넣고 맛을 음미하는 단유였다. “계속 그 일이 신경 쓰여서 그래?” “…아니요. 그건 이해를 했어요.” “그래?” 단유는 잠시 밖을 바라보았다. 눈이 많이 거세지고 있었다. 마치 작년의 그 날처럼. “아까 그 누나 이야기도 맞는 이야기잖아요. 만약 선생님이 그 사람들을 구한다고 나가셨다가 사고가 난다면, 정말 슬펐을 거예요. 아마 다른 사람들도 똑같겠죠.”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빠, 가족, 친구. 결국 이런 인간관계를 걸치고 있는 이상 사람은 결코 혼자일 순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관계 속에서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쉽게 움직이기 힘들 것이다. 단유는 그렇게 이해를 했다. 다만 이해할 뿐이었다. “저는 그래도 그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다만 힘이 부족해서, 용기가 부족해서, 라고 생각해요.” 하은이 일어나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냈다. 다시 자리에 돌아와 캔을 땄다. 딸깍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마시기도 전부터 청량한 맥주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전 누구를 비난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제 자신이 그 상황에서 아무것도 못했잖아요. 아까 그 누나의 말대로. 제가 나가지 못한 것도 아마 같은 이유였을 거예요.” “만약에, 니가 나가겠다고 했다면, 난 정말 화를 냈을 거야.” 맥주를 한 모금 마신 하은이 단유를 바라보며 말했다. 단유가 가만히 하은을 응시하자, 하은은 소파에 등을 기댄 자세로 말을 이었다. “사람을 구해야 한다. 맞아, 우린 그렇게 교육받았고 그렇게 행동하라고 가르치지. 그러나 실제로 우리 사회를 살펴보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아. 아까처럼 자기 목숨이 위험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말이야.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건 아까 수련이라는 연예인 이야기처럼 방법이나 힘이 필요해. 수영도 할 줄 모르면서 그저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뛰어들었다간 같이 죽을 테니까. 하지만 길가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가는 건 문제가 있지. 그 때는 그 사람을 데리고 병원에 갈 수도 있고, 다른 응급조치를 취할 수도 있어. 그런데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지. 약속시간에 늦어서, 혹은 방법을 몰라서, 혹은 복잡한 일에 얽히기 싫어서.” 하은은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짧게 숨을 내셨다. 겨우 두 모금인데 얼굴이 발그레해진다. “오는 길에 생각을 해봤어. 어릴 때는 너처럼 생각을 했던 거 같아. 그렇게 교육을 받았고. 그런데 요즘은 말이야. 만약 그런 사고가 있더라도 끼어들지 않게 되는 것 같아. 옆집에서 비명이 들려도, 집 안에 가만히 있게 되지. 어떤 사람이 강도를 당하는 걸 본다면, 그 때도 달려들어서 구해낼 수 있을까?” 하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안주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됐어. 휴. 니 말대로야. 그냥 다 핑계고 그냥… 무서운 거야. 위험한 일은 피하고 싶다는 거지. 그런데, 내가 사는 사회가 그래. 그냥 다 무서워. 어지간하면 다 피하고 싶고, 가장 좋은 건 아예 그런 일을 맞닥뜨리지 않는 거지. 그래서 집 안에 경보기도 잔뜩 달아두고 있는 거고. 밤늦게 돌아다니지 않으려 하는 거고.” 하은은 흐릿한 시선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내가 선생님인데, 내가 니 선생님인데, 난 너한테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뭘 가르쳐 줘야 할까? 그냥 수학, 과학 이런 거나 가르치면서 살아야 하나?” 단유는 하은이 술이 취했다는 것을 확신했다. “들어가 쉬세요.” “됐어. 난 안 구해도 돼. 난 안 위험해.” 그 때, 명수가 거실로 나왔다. “어? 선생님 왜 그래?” “어이! 먹보! 어디 갔었어? 일루와. 같이 먹자.” 캔을 머리 위로 치켜 드는 하은을 바라보며 단유가 말했다. “오지 마. 위험해.” 명수가 멀찍이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 [186] My Way(1) “석고야, 나 배고파.” 그러고 보니 이 곳에 오자마자 눈에 젖은 몸을 씻느라 욕실로 바로 직행했었다. 그리고 지금 소파 위에서 반쯤 눈을 감고 눈꺼풀을 바르르 떨고 있는 선생님은 젖은 머리를 말리지도 않고, 맥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선생님, 배 안고프세요?” 손에 들고 있던 맥주 캔을 들어 올리며 히죽 웃는 하은이었다. “난 이거면 충분해.” 역시 위험한 상태인 것이다. 단유는 명수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눈짓을 한 후, 하은에게 말을 건넸다. “그럼 저희끼리 밥 먹고 와도 돼요?” “너희끼리? 안 돼, 위험해.” “아까 올라올 때 보니까 여기 안에 식당 있던데요? 거기서 먹고 올게요.” “오~ 역시!” 하은이 까닭 모를 감탄사를 내뱉으며 발그란 볼을 감쌌다. 단유가 하은의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를 궁금해 할 때, 하은이 테이블 위에 올려진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금색 악어가죽 무늬의 케이스를 쓴 핸드폰의 안쪽에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자.” 단유는 아무 말 없이 카드를 집어 들었다. “꼭 밥만 먹고 와야 돼. 나 빼고 놀면 안 돼. 알았지?” “불, 꺼드릴까요?” 하은은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명수와 방을 빠져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 방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후.” 하은이 눈을 감고 머리를 뒤로 젖혔다. 푹신한 쿠션이 머리를 기댄 채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 전체에 은은한 LED 조명 불빛이 내려와 하은을 감쌌다. 열기도 없는 빛이지만, 그래도 어둠보다는 낫다. 어두웠다면 지금의 우울함이 더욱 커졌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렵구나.”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은 하은은 남은 맥주를 마저 들이켰다. 맥주 캔마저 텅비어버리자, 공허함이 밀려드는 기분이었다. 기분만은 아닐 것이다. 이 넓은 객실 안에 오로지 혼자니까. **** “선생님은 밥 안 먹어도 되나?” 명수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단유가 가만히 생각을 하다가 대답을 했다. “먹을 것 좀 싸 갈까?” 명수가 손뼉을 치며 그러자, 했다. 그리고는 신이 난 얼굴로 복도를 뛰어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명수는 복도가 조용하다느니, 방이 좋다느니 하면서 들뜬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단유는 적당히 장단을 맞추면서도 머릿속으로 조금 전의 대화를 복기했다. 가치관이 걸린 문제는 정답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가치관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많다는 것을 또 한 번 느낀 날이었다. 속으로 잊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식당이 어디야?” “아까 올 때 보니까, 1층에 있다고 했어.” “뭐 먹지? 여기는 비싼 데니까, 음식도 좋은 거 나오겠지?” 단유는 어깨를 으쓱여 보이고는 급하게 나오느라 흐트러진 명수의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얌전히 단유의 손길을 받으면서도 명수의 입은 쉬지 않고, 객실에서 느꼈던 감동들을 나열했다. “아까 방에 들어가 봤어? 침대가 엄청 크고 푹신해! 이불도 완전 부드러워서 눕자마자 잠들 뻔 했어. 배가 고파서 억지로 일어났다니까. 그리고 거실에 TV도 우리 집 것보다 훨씬 크지? 나중에 밥 먹고 가서 봐야지. 그럼 영화 보는 기분일거야. 근데 우리 밥 먹고 밖에 나가서 못 놀아? 나가면 안 될까?” 그 때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알림 음을 울린 후, 문이 열렸다. “일단 상황을 봐야겠지만, 우리끼리는 나가면 안 될 거야. 위험할 수 있으니까.” “우리끼리 밥도 먹는데 안 될까?” “식당은 건물 안에 있으니까 괜찮지만, 바깥에는 눈도 많이 와서 우리끼리 나가면 선생님이 걱정 많이 하실 거야.” 명수는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그래. 선생님 걱정시키면 안 되지.” 로비 한 편으로 식당 입구가 보였다. 그리로 가는데, 로비에 사람이 가득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살펴보니―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난장판이나 다름없는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돈 더 줄 테니까 방 좀 달라니까?” “죄송합니다만, 지금 예약이 다 차서요.” 한 아주머니가 데스크를 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예약한 사람이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온다고 그래요?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는 예약한 사람도 못 온다니깐?” “그래도 손님. 원칙대로 처리해야 하는 저희 입장도 이해해….” 데스크 안쪽에서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 양해를 부탁하는 직원을 상대로 여러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아니, 사람이 융통성이 있어야지. 그럼 지금 여기 이 사람들이 눈 바닥에서 얼어 죽으란 말이야? 어차피 빈방으로 남을 건데, 그거 좀 이쪽으로 돌리라는 게 뭐 그리 문제라고 그래요?” “이봐요. 지금 밖을 봐봐요. 저기 눈 내리는 거 보여요? 저거 때문에 우리도 지금 발이 묶인 거잖아? 예약한 사람들도 못 온다니까?” “그래도 원칙인지라. 대신 지금 예약 취소가 되는 방도 있으니까요, 방이 나오는 즉시 알려드리겠습니다.” 말이 안 통하는 직원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가슴을 퉁퉁 치는 아저씨도 있었다. “나 참, 그게 언제 나올 줄 알고 여기서 덜덜 떨고 있으란 말이야!” 데스크 앞에만 그런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로비 전체에 화려한 패딩과 점퍼를 입은 사람들이 모여서 작금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찾기 위해 숙고하는 모습들을 보이고 있었다. 명수가 단유에게 몸을 기울이고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지 않아도 워낙 로비가 시끄러워서 그냥 말해도 될 것 같은데. “저 사람들 화 많이 난 거 같다, 그치?” “응.” 단유는 명수를 끌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은 커다란 창으로 둘러싸여 바깥이 훤히 보이는 구조였는데, 창마다 하얀 커튼이 달려 고급 레스토랑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만약 날씨가 좋았다면 정말 분위기가 좋았을지도 모를, 그런 곳이었다. 다만 오늘은 날이 아니었는지 로비처럼 사람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엄마 찾으러 왔어?” 식당 입구에 서 있던 직원 한 명이 두 사람에게 물었다. “아니요, 밥 먹으러 왔어요.” 명수가 야무지게 대답하자,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도 아이들끼리 객실에서 내려와 밥을 챙겨먹는 경우가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다. “식당에 사람이 많아서 밥 먹을 데가 없을 것 같은데. 나중에 올래?” 사실 나중에 와도 자리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린 애들 둘만 저 시장통 안으로 밀어 넣는 것은 말리고 싶었던 직원이었다. “혹시 포장되나요?” 직원이 씩 웃으면서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포장 대신 룸서비스라는 게 있어. 메뉴만 고르면 방으로 가져다 줄 테니까 그렇게 할래?” 단유는 잘 됐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메뉴판을 받아 음식을 시켰다. 명수가 고르는데 고민을 했지만, 간단하게 돈가스로 메뉴를 통일했다. 객실 호수를 불러주고 두 사람은 다시 몸을 돌리려는데 두 사람을 부르는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어이, 얘들아?” 명수가 뒤돌아보고는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단유도 뒤따라 돌아보니 아까 그 매니저였다. “안녕하세요.” “거참, 여기서도 너희를 보니까 우리가 인연이 있나보다. 그치?” 매니저의 넉살에 명수가 헤벌쭉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밥 먹으러 왔어요?” “그래. 밥 먹고 가려고 했는데…. 너희들도 밥 먹으러 왔어?” 명수가 ‘저희는 룸서비스요’라고 자랑하듯이 외치자, 매니저가 눈이 동그래졌다. “여기서 묵는 거구나?” “네.” 매니저는 단유의 대답에 머리를 굴렸다. 사실 갤럭시즈도 행사가 끝난 후 바로 이동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폭설에 발이 묶인 상황이었다. 뉴스에 따르면 현재 이 지역에 대략 10㎝정도의 적설량이 예상된다고 하는데, 그것도 내일 아침까지 계속 될 거라고 하니 당장 소속 가수들이 쉴 장소를 구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더구나 조금 전까지 눈을 맞으면서 공연을 치러야 했던 아이들이다. “저기, 아까 함께 계시던 선생님은?” “방에서 주무세요.” 아무래도 긴 시간을 운전하고 오느라 피곤했을 것이다. 남자라도 정체된 구간을 운전하다보면 피로가 쌓이니까. 그래도 매니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움직여야 할 때였다. “아저씨가 선생님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그러는데, 잠깐 같이 만날 수 있을까?” 단유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대답을 했다. “저희가 먼저 여쭤보고 이야기 드릴게요. 아무래도 선생님께 먼저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아서요.” 야무지고 딱 부러지는 성격, 이라고 매니저가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방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같이 올라가자.” 적어도 정체(?)는 확실한 사람이니까 별 문제 없겠지, 라는 판단을 내리며 단유는 명수와 매니저와 함께 객실로 돌아왔다. **** “좁아서 불편한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하은이 붉어진 볼을 가리며 얌전을 떨었다. “아뇨, 이 정도면… 괜찮죠. 네.” ‘자금성’이라는 드립을 치려다가 초면에 너무 과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 말을 줄인 매니저가 헛기침을 하면서 거실을 둘러보았다.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 리조트에서 가장 넓은 객실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었다. 넓은 거실을 보고, 아이들을 잠시 맡겨둬도 부담은 덜하겠다는 이기적인 생각도 잠시 들 정도였다. “너희도 괜찮지?” “저희야 뭐 가릴 처진가요? 이렇게 함께 있게 해 주신건만 해도 감사한데요.” 갤럭시즈의 리더이자 맏인 수영이 맑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금발의 수영은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은 아니지만, 눈웃음이 매력적인 멤버였다. “저희가 계속 방을 구하고 있으니까, 그 때까지만 애들이 쉴 수 있게 해주세요.” “그러세요. 어차피 넓은 거실이고 애들도 심하게 낯을 가리는 성격은 아니니까 부담 안가지셔도 돼요.” “그래도 미안하니깐요. 오늘 하루 종일 부탁만 드리는 것 같아서 말이죠. 나중에 어떻게든 보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보답’이란 말에 하은이 깜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두 사람이 서로 미안하네, 괜찮네 하며 예의를 갖추는 동안 멤버들은 객실을 둘러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야, 일단 너희들 우선 씻어. 옷은 저기 뒀으니까 저걸로 갈아입고.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에게 실례하지 않도록 조심해. 알았지?” 마지막 당부는 차치하고, 아직까지 행사복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있었던 멤버들은 반색을 하며 욕실을 쓸 순서를 정하기 시작했다. 멤버들이 벗은 패딩들을 한데 모아 차곡이 정리한 매니저는 마지막 인사를 하고 객실을 떠났다. “선생님, 저희 밖에 놀다 오면 안 돼요?” “명수야, 저길 봐. 저렇게 눈이 많이 오는데 어떻게 놀겠니? 오늘은 참고, 내일 날씨가 좋으면 그 때 나가서 놀자. 그 때까지는 TV나 봐. 너 TV보고 싶어 했잖아?” “…….” 명수의 입술이 삐죽 나오는 걸 보며 하은이 피식 웃었다. “오늘은 늦게까지 TV봐도 안 말릴 테니까 실컷 봐.” “네.” 단유는 걸치고 있던 웃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을 때, 수련이 단유에게 다가왔다. “어이, 너.” 단 한 번도 ‘어이’라고 불린 적이 없었던 단유는 그 참신함에 놀라면서 고개를 돌렸다. 수련이 허리춤에 손을 얹고는 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이야기 할 거 좀 있지 않았니?” “무슨 이야기요?” “아까 하던 이야기마저 해야 하지 않겠니?” 목소리 톤이 낮아지니까 괜히 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수련아, 너 왜 그래?” 평소에도 수련은 종종 폭주할 때가 있었다. 회사 식구들에게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친 말도 서슴지 않고 내뱉는 수련 때문에 멤버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살짝 눈초리에 힘이 실린 수련을 경계하던 멤버 한 명이 수련의 팔을 붙잡았다. “별 거 아냐. 아까 이 아이랑 하던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무슨 이야기?” 꼬마 애랑 무슨 할 이야기가 있길래, 바깥 날씨보다 더한 싸늘함을 혀에 두르고 있다는 건가? 그러나 수련의 시선은 단유를 떠나지 않았다. 단유도 수련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해요, 이야기.” 수련이 한 걸음 다가서며 입을 열려는 데, 단유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요.” 단유가 수련의 위아래를 훑다가 한 마디 했다. “먼저 씻으시면 안 될까요?” 그리고 한 발 물러섰다. 단유를 바라보던 수련의 얼굴이 붉어졌다. ======================================= [187] My Way(2) 마침 벨이 울리고 주문했던 식사가 올라온 덕에 짧은 대치가 흐지부지 돼버렸다. “얘들아, 밥 먹자.” 명수와 단유가 식탁에 올라온 돈가스를 보며 군침을 흘릴 때, 하은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수영을 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식사를 같이 주문하는 건데요.” “아니에요. 저희도 따로 주문하면 되는 걸요. 저희 지금 룸서비스 시켜도 되죠?” “예, 괜찮습니다.” 수련은 아이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홱 돌리곤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욕실 앞에서 다른 멤버의 제지를 받았다. “넌 마지막 순서야.” “왜!” 신경질 부리는 수련에게 느긋한 표정으로 답해주는 둘째, 지수였다. “너 아까 순서 정할 때 빠졌으니까.” 지수는 고깝게 듣지 말라며 수련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귀엽게 생긴 외모와 달리 기가 세서 군기반장을 도맡은 지수의 말에는 수련도 함부로 대들지 못했다. 물론 수련도 기가 밀리는 편은 아니어서 종종 위태로운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숙소 안에서의 일일 뿐이었다. 그렇게 순서가 정해진 갤럭시즈 멤버들이 욕실을 사용하는 동안, 하은과 단유, 명수는 식사를 시작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단유가 하은을 향해 물었다. “뭐? 나? 괜찮아. 아까는 너무 피곤해서 그랬던 거야. 지금은 술도 다 깼어.” 조명보다 밝은 웃음을 지어보인 하은은 고기를 한 점 썰어 입에 넣었다. 하지만 속은 조금 복잡했다. 어쩐지 하루 종일 애들한테 안 좋은 모습만 보이는 것 같았다. 애들을 달래고 지켜야 할 자신이 도리어 걱정만 끼치고 있으니. “눈 많이 내리네.” 애써 화제를 돌리기 위해 창밖을 보며 날씨로 주제를 옮겼다. “작년에도 저렇게 눈이 많이 내렸던 것 같은데.” “맞아요. 작년에도 눈 엄청 와가지고요, 운동장에 눈가지고 눈사람 만들고 그랬어요. 맞다! 우리 이 앞에서 눈사람 만들면 안 돼요?” “안 된대도.” “멀리 안가고 이 앞에서만 놀게요. 네? 선생님?”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폭설 당시 유난히 들떠서 나가고 싶어 했던 명수였다. 감기가 걸려서 열이 많이 나는 몸이었음에도 명수는 누구보다 신나게 뛰어 놀았다. 단유는 명수의 편을 들어주었다. “여기 건물 현관 앞에서만 놀게요. 로비 불이 밝으니까 위험하지도 않을 거예요, 선생님.” 단유까지 나서서 거들자, 하은은 피식 웃으며 결정을 내렸다. “그럼 같이 나가자. 아무리 그래도 니들끼리 나가게 하는 건 아니지.” “선생님, 피곤하시지 않아요?” 명수가 걱정하는 척을 하지만, 속내를 감추기엔 표정이 너무 밝았다. 하은은 명수의 머리를 살짝 쥐어박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석고야, 빨리 먹자!” 그리고는 진공청소기처럼 돈가스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먹으라는 말에도 여느 때처럼 소스 범벅이 된 얼굴로 씩 웃기만 했다. **** 수련이 마지막으로 씻고 나왔을 무렵, 거실에는 갤럭시즈 멤버들만 모여 있었다. “다른 사람은?” “나갔어. 애들이 놀고 싶다고 해서.” 수련이 혀를 차며 도망간 단유를 잡으러 가야 하나 고민했다. “너도 적당히 좀 해라. 뭘 계속 궁시렁거리면서 그래?” “아니, 애가 말이야.” 수련은 공연하기 전 있었던 일부터 해서, 공연이 끝난 후 단유의 반응까지 낱낱이 밝혔다. “애가 한 마디 한 걸로 뭘 그렇게 쪼잔하게 구니?” “쪼잔하다니? 애가 아까 어떤 눈으로 봤는지 알아?” “야, 누가 보면 너 A형 인줄 알겠다. 왜 그렇게 소심해?” 수련이 발끈하며 일어섰다. “소심하긴 누가 소심해!” 그 때, 벨이 울렸다. 룸서비스가 왔음을 알고 멤버들은 수련을 쳐다보았다. 수련은 투덜대며 문을 열어주었다. 남자 종업원은 들어오다 말고 연예인급 외모의 여자를 보며 살짝 멈칫했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혹시….” 남자종업원이 음식들을 식탁위에 올려놓은 뒤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갤럭시즈 아니세요?” “어? 우리 알아보시네? 팬이세요?” 남자가 환하게 웃으면서 씩씩하게 대답했다. “예, 팬입니다. 정말 좋아합니다.” 갤럭시즈 멤버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종업원은 각자의 싸인이 담긴 종이를 품에 안고 객실을 나갔다. “그래도 우리 알아주는 사람도 있고, 고맙네?” “그게 다 내가 열심히 방송 한 덕분인 줄 알라고요.” “생색은.” 음식이 오자 다들 기분이 업이 되어서는 별 말도 아닌데 웃음을 터뜨리면서 식사를 시작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으로 함박눈이 창문을 소리 없이 두드렸다. 내일 저 눈길을 뚫고 나가야 하는 그들에게 고생이 예약되어 있었지만, 누구도 이를 미리 걱정하는 이는 없었다. 잠깐의 휴식이라도 마음 편하게 누리고 싶은 이들이었다. **** “우와! 진짜 눈 많아!” 시끌벅적한 로비를 뚫고 나온 명수가 현관 앞을 꽉 매운 눈을 보며 소리쳤다. 보드 복에 달린 후드를 쓰고 눈만 빼곰 내놓은 하은이 팔짱을 낀 자세로 리조트 현관 양 옆으로 세워진 기둥 한편에 몸을 기대고 섰다. “멀리 가지 말고, 여기서 놀아.”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인지, 아니면 가로등 불빛의 한계인지 현관 주변을 제외하곤 너무 어두워, 괜한 상상력을 자극했다. “선생님! 같이 눈싸움해요!” 하은은 진저리친다는 듯 도리질을 하며 몸을 숨겼다. 단유가 눈을 뭉쳐서 명수에게 던졌다. “우리끼리 해.” 이내 단유와 명수는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연신 눈뭉치를 만들어 던지기 시작했다. 단유는 그간 운동을 한 이유가 마치 오늘을 위한 것이라도 되는 듯이 지치지 않는 움직임으로, 마치 기계처럼 명수를 향해 던져댔다. 명수는 오늘을 위해 그토록 오랫동안 운동장을 누볐노라 자랑하듯이 쉴 새 없이 눈을 피해가며 반격을 시도했다. 그 모양새가 워낙 치열해서 지켜보던 하은은 물론, 현관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어 모을 정도였다. “엄마, 나도 하면 안 돼?” 부모 곁에 서 있던 아이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한 두 명 씩 참전을 시작했다. 곧 수십 명의 아이들이 떼를 지어 눈싸움을 벌이는 대격돌로 이어졌고, 현관 앞은 어느 때보다 밝은 아이들의 환성소리로 가득 찼다. 그러는 와중에도 로비에 모인 사람들은 몇 시간 전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이 붐비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데, 연장을 신청하는 사람들과 예약취소를 기다리는 사람들, 혹은 어떻게든 방을 구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생떼를 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하은은 잠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저 아우성 속에서 진땀을 흘리고 있을 리조트 직원들의 모습이 그려져 괜히 안쓰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선생님, 여기 계셨네요.” “어? 매니저님! 방은 구하셨어요?” 이런 날씨에도 이마에 땀이 가득한 매니저는 하은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렵네요. 역시 갑작스런 날씨 탓에 옴짝달싹 못하게 된 사람들이 많나봐요. 오늘 공개방송 때문에 온 사람도 있는데, 그 사람들은 공연만 보고 갈 생각이었나 보더라고요. 저기는 방송국 사람들인데, 저 사람들도 방을 못 구해서 저러고 있네요.” 로비 한 편에 한 짐 가득 끌어안고 있는 무리를 가리키던 매니저의 말에 하은이 물었다. “여기 옆에 민박집도 있지 않나요?” “거기도 똑같죠.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은 주변 다 돌아다니고 나서 온 사람들일 거예요.” 매니저는 밖에서 눈싸움에 열중하는 아이들을 보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저 나이 때가 참 좋은 거 같아요. 이런 고생 안 해도 되고 말이죠.” 하은이 가만히 있다가 불쑥 한 마디를 내뱉었다. “꼭 그렇지는 않아요.” “네?” “저 아이들 중에도 어른들이 상상하기 힘든 일을 겪거나 고생한 아이들도 있을 거라고요.” 하은의 말에 매니저는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아까 함께 했던 아이들을 지칭하는 말 같았기 때문이었다. 매니저가 입을 다물고 있자, 하은은 괜한 말을 했다는 자책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매니저님도 저기서 예약 취소된 거 기다리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후배 녀석이 대신 줄을 서고 있거든요.” “아, 네.” 하은이 머쓱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매니저도 괜한 이야기로 분위기가 이상하게 될까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다고 다시 저 뜨거운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서 땀을 내고 싶지는 않았기에, 어색하나마 하은의 곁에 서서 아이들의 눈싸움을 구경했다. 시간이 얼마간 지나고, 눈에 파묻히다시피 했던 아이들이 땀과 눈으로 젖어 지친 몸을 이끌고 전장을 벗어났다. 아이들이 열심히 전투를 치르는 사이, 어른들의 사정도 조금 풀려 리조트에서는 긴급한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구호책을 내놓았다. 바로 지하에 있는 찜질방을 개방하여 사람들이 그 곳에서 쉴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원래는 오후 8시 까지만 운영을 하는데, 특별히 직원을 배정해서 24시간 운영하도록 한다네요.” “잘 됐네요.” 매니저가 머리를 긁다가, 땀에 젖은 머리의 촉감에 흠칫 놀라 얼른 손을 내렸다. “그런데 그렇게 넓지 않은 곳이라, 사람들이 다 수용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군요. 뭐, 그래도 일단은 씻을 수 있는 곳이 생겼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죠.” 지금도 리조트 직원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데스크에선 예약 손님들에게 전화해서 예약 진행상황을 점검하고, 취소분이 있을 경우 기다리는 손님에게 방을 내주는 일을 하느라 손에서 전화기가 떠나질 않았다. 또 몇몇 직원들은 밀대걸레를 들고 현관과 로비에 떨어진 눈을 쓸고 닦으면서 혹시라도 미끄러지는 사람이 없도록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저도 이제 올라가야겠네요. 쟤네들도 이쯤 놀았으면 지쳤겠죠?” “지칠 때까지 기다리신 건가요?” “보셨다시피 워낙 에너지가 넘치는 애들인지라.” 매니저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여전히 눈밭에서 나올 줄 모르는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은의 부름에 단유와 명수도 다른 아이들처럼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나타났다. “이제 올라가자, 더 놀면 내일 힘들어서 못 놀지도 몰라.” “그럴 리 없어요!” 명수의 확신에 찬 대답에 하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 했으나, 억지로 참아내고는 명수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재밌었냐는 하은의 물음에 명수가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는 자기가 얼마나 많은 적중률을 보였었는지를 자랑했다. 눈싸움이라는 올림픽 종목이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선수를 자원했을 기세였다. 다른 아이들도 부모의 부름에 하나둘 씩 나오고 있었다. 그 때 한 어머니의 애타는 목소리가 현관 앞에 울려 퍼졌다. “지온아! 박지온!” 그러나 그 부름에 답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아이의 어머니가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애타게 부르는데도 이름의 주인공은 나타나지 않았다. 옆에 선 아주머니 한 분이 넌지시 물었다. “혹시 먼저 안에 들어간 거 아니에요?” 그러나 어머니는 그럴 리 없다며, 현관 옆에 계속 서 있었다고 답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현관을 벗어난 곳은 어둠이 내려앉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설마 애 혼자 어디 갔을라고요?” 남자 아이의 옷에 묻은 옷을 털어대던 한 아주머니가 또 이야기를 건넸지만, 지온 어머니의 걱정을 덜어주기엔 무리가 있었다. “너희 혹시 이만한 키의 남자 아이 못 봤어?” 결국 주변의 아이들을 상대로 탐색을 하기 시작한 어머니는, 하지만 눈싸움의 와중에 제대로 상대를 볼 겨를도 없던 아이들의 도리질에 가슴만 무거워지고 있었다. “너도 못 봤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단유에게 물어본 하은은 단유가 모른다고 하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어떻게 아주머니를 도울 방법이 없었다. 매니저 역시 안타까운 얼굴을 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목을 빼들고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매니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어머니의 부름에 나타나는 아이는 없었다. “무슨 일이야?” 로비 안에서 대기 중이던 지온의 아버지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나왔다가 어머니에게 사정을 듣고는 밖으로 뛰쳐나가 지온을 불렀다. 발을 동동대던 지온의 어머니도 함께 현관 밖을 나가 주차장이 있는 곳까지 뛰어가며 지온을 불렀다. 그리고 그 사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던 어머니들이 한두 명 씩 로비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가 실종됐다는 이야기에 뛰쳐나온 리조트 직원들이 현관에 모습을 드러내자, 그에 맞춰 다들 로비로 들어갔다. 그 때까지도 지온을 부르짖는 아이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바라보던 단유는 주변을 보다가 몸을 돌려 하은에게로 향했다. 단유의 시선을 의식한 하은이 바라보자, 단유가 물었다. “이것도 아까랑 같은 건가요?” 하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짐을 느꼈다. ======================================= [188] My Way(3) 리조트 직원들이 급히 랜턴을 준비해서 아이를 찾기 시작했다. 갑자기 리조트 주변으로 아이를 찾는 목소리에 상황을 모르던 사람들도 하나 둘씩 로비를 나와 현관에서 구경을 하면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눈이 이렇게 많이 오는데, 꼬마 애가 저길 나갔겠어요?” “혹시 건물 안으로 들어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대요?” 이미 건물 안에도 방송실을 통해서 아이를 찾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 상황이었다. 윗층 부터 해서, 건물 비상계단과 화장실 등 이곳저곳을 찾는 중이었지만 아직까지 소득이 없었다. “실장님, 동쪽 계단에는 아무도 없답니다.” 무전기를 통해 상황을 주고받으면서 수색활동을 하는 직원들이었지만, 로비를 통제하는 직원들도 필요한 상황이라 아무래도 인력이 부족했다. 만약 건물 안이라면 다행이지만, 혹시라도 건물 밖에서 길을 잃은 것이라면 사태가 커질 수 있다는 위기감에 실장은 마른 뺨을 쓸어내리면서 침을 삼켜야 했다. “지온아!” 지온의 부모와 직원들이 눈밭을 헤치며 아이를 부르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릴 때, 현관에 서 있던 사람들은 직원들의 통제와 함께 로비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아이를 데리고 오신 부모님들은 방으로 데려가 주시고요, 방이 없으신 분들은 일단 지하 1층의 찜질방으로 가주시길 바랍니다. 긴급 상황이니 부디 직원들의 통제에 따라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몇몇 젊은 남성들이 직원에게 다가와 물었다. “저희도 수색활동 도와드리면 안 될까요?” “죄송하지만, 기상 상태가 워낙에 좋지 않아서 저희가 통제하기가 힘듭니다. 게다가 저희가 가진 랜턴도 몇 개 없어서 수색이 어렵습니다. 일단 여기서 대기하시든지, 방으로 돌아가 주세요.” 직원은 차분하고 조리 있게 남성들을 설득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단유의 어깨를 하은이 두드렸다. “일단 올라가자. 여기 있으면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 거야.” 단유는 물끄러미 바깥을 바라보다가, 하은을 따라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사람들 속에서 단유는 여러 사람들이 걱정을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게 왜 이런 날씨에 애들을 밖에서 놀게 하는 거야? 부모가 문제 있네.” “아까 다른 애들도 많았잖아요. 그래서 안심하고 내보냈던 거겠죠.” “그래도 부모가 계속 주의를 쓰지 않았으니까 애가 사라진 거 아니겠어? 자기애가 사라지는지, 다치는지도 모르고 말이야.” 속삭이는 듯 나누는 이야기는 엘리베이터 안에 탄 사람들에게 확성기 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 “아, 배불러.” 수영이 수저를 내려놓으면서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다른 멤버들이 깔깔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언니, 너무 귀여운 거 아니에요?” “떽, 언니한테 그럼 못 써.” 수영의 투정이 또 귀엽다며 웃음을 터뜨리는 멤버들이었다. 식사 내내 웃음과 함께 편안한 시간을 보냈던 멤버들은 식사가 끝난 뒤에도 수다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객실에 안내 방송이 들렸다. “어머, 애가 없어 졌나봐요?” 막내 예영이 놀라는 모습을 보이자, 수련이 창밖을 힐끔 보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지금 밖에서 길 잃으면 위험할 거 같은데.” 지수와 셋째 명지가 창가로 다가갔다. 바깥에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보라가 심했다. 그 와중에 지상에서 사람들이 불빛을 비쳐가며 돌아다니는 모습이 어렴풋하게나마 보였다. “밖에서도 찾고 있는 거 같은데요?” 다른 멤버들도 우르르 달려가 창문에 얼굴을 붙였다. “야, 여기서도 이 정도로 보일 정도면 밖에서는 더 안 보이는 거 아냐? 눈 때문에?” “그럴 거 같은데요?” 멤버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들고 있을 때, 수련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그 아이들도 밖에 나갔었는데,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선생님이 따라갔으니 별 문제는 없겠지, 라고 생각은 하지만 실종 아이가 발생했다고 하니 괜한 걱정이 들었다. 모두들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제가 복도에 나가서 한 번 볼까요? 혹시 모르니까?” 막내 예영은 의사를 묻는 것처럼 말을 하면서도, 발은 이미 현관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때, 문이 달칵 열리면서 하은과 단유, 명수가 객실로 들어왔다. “어? 왔네?” 예영이 밝은 목소리로 아이들을 반겼다. 먼저 치고 들어오던 명수가 예영의 인사에 주춤하다가 고개를 반쯤 숙여보였다. 그리고 뒤에 선 단유에게 속삭였다. “우리 방인데 주인이 바뀐 거 같아.” 단유는 피식 웃으면서 창가에 몰려 있는 갤럭시즈 멤버들을 훑었다. 그 와중에 수련과 눈이 마주쳤는데, 단유는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려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실제로 관심이 없기도 했다. 하지만 상대는 아니었나보다. “야, 너.” 단유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자, 수련이 팔짱을 끼고는 도도한 걸음으로 단유에게 다가갔다. 모두의 시선이 돌아갈 때, 하은만은 말없이 큰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누구도 하은의 행동에 주목하는 이는 없었다. 기세등등한 수련의 걸음과 12살 소년의 대치보다 주목받긴 어려웠던 것이다. “너 왜 또 나 무시하는 거니?” “제가요? 언제요?” 수련이 어이가 없다는 듯 파, 하고 탄성을 지를 때 단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했다. “이것 봐? 또 그러네? 왜 계속 내 말 씹니?” 뭔가 직감한 듯 수영이 얼른 뛰어와, 수련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억지웃음을 지으면서 단유에게 말했다. “들어가, 얘가 지금 맥주를 한 잔 해서, 취해서 그러는 거야. 신경쓰지 말고 방에 들어가. 알았지?” 단유는 버둥대는 수련을 흘깃 쳐다보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수련은 더 어이없다는 듯 허공을 휘젓다가 힘으로 수영을 밀쳤다. “아, 왜 막아? 방금 못 봤어요? 쟤가 나 이렇게 꼴아 보는 것 못 봤어요?” “야, 오버 하지 마. 꼴아 보긴 뭘 꼴아봐? 그리고 그게 애한테 할 소리니?” 수련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퉁퉁 치면서 창가에 서서 지켜보던 관객(?)들에게 말했다. “아니, 방금 애가 나 이렇게 쳐다보는 거 봤어요? 못 봤어요? 애가 눈을 이렇게, 이렇게 해서 쳐다보는 거 못 봤어요?” 관객들은 눈을 까뒤집는 흉내를 내는 수련의 연기에 박수대신 피식, 웃음으로 보답했다. “아이, 이게 웃겨? 저 쪼꼬만 애가 나 무시하는 거 다들 봤잖아? 봤잖아요? 근데 이게 웃겨?” “야, 쟤 취했나 보다. 좀 데리고 가서 진정을 시키든 재우든 해라.” 지수가 흘흘 웃음을 흘리면서 수련을 가리키자, 막내 예영이 눈웃음을 지으며 수련의 팔에 매달렸다. 그래봐야 갈 곳이라곤 거실 소파밖에 없지만, 억지로라도 소파에 앉혔다. 수영도 수련 옆에 앉아서 수련을 채근했다. “너 제발 좀 조심해. 아무리 꼬마 애라도 인터넷에 악성 댓글 달 수 있단 말이야. 수련이 인성이니 어쩌니 하면서 글 올라가면 얼마나 타격이 심한지 알아?” “치, 아까 오빠한테도 들었거든?” “들었으면 좀 들어. 너를 위해서도 그렇고 우리 팀을 위해서도 좀 조심해.” 수련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리고 니 성격도 좀 고쳐. 무슨 애한테까지 따지고 들려고 그래?” “보통 애가 아니라니까? 아까도 봤잖아? 나 이렇게 째려보는 거.” 그때 대화를 지켜보던 예영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근데 언니, 쟤한테 무슨 말하려고 하셨던 거예요? 그냥 심술부리려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수련이 사람 안 가리고 독설을 날리는 편이긴 해도, 이유 없이 신경질을 부리면서 몰아세울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던 예영이었다. “그냥…사람이 늘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살 수는 없다는 걸 가르쳐주려고 했었지.” “뭐? 니가?” “언니가요?” 멤버들의 격한 반응에 오히려 어리둥절해진 수련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면서 항변했다. “내가 그런 말 하면 안 돼?” “야, 소크라테스라는 분이 그러셨어. 니 자신을 알라고. 양심이 있어야지, 니가 그런 말 할 자격은 있니?” “내가 뭐? 내가 뭐? 그리고 소크라테스보다 먼저 이오니아 학파의 탈레스가 먼저 그 말을 했었거든?” “애가 별 걸 다 아네. 말을 말지, 어이구.” 다른 멤버들까지 다가와서는 수련을 구박하는 그 때, 조용히 방에 들어간 하은은 침대에 엎어진 채 고민에 싸여 있었다. 단유의 말이 계속 귓가에 남아 잔향을 남기고 있었다. 이번에도 같은 경우냐는 단유의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할 때, 옆에 있던 매니저가 대신 이야기를 해주었다. “정확히 어떤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아까 차에서 들은 이야기의 연장선이라면, 내가 한 마디 해도 되겠니?” 단유가 매니저를 돌아보자, 매니저가 살짝 허리를 숙이고 단유와 눈높이를 맞췄다. “어려운 위기에 처한다는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 착한 마음이고 옳은 행동이야. 그렇지만 말이야. 상황에 따라서는 실천 대신 마음을 전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 지금 밖을 봐. 어둠과 눈 때문에 당장 이 앞을 벗어나면, 한 치 앞도 보기 힘들 정도일 거야.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도구 없이 맨 몸으로 나서봤자 도움이 될 리가 없겠지. 그런데 옆을 봐. 저렇게 플래시라도 있어야 수색에 도움이 되겠지?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저 사람들이 부디 무사히 수색을 해서 아이를 찾아오길 기도하는 거야. 지금 우리가 할 일이란 그런 거지. 괜히 이 사람 저 사람 나서봐야, 또 다른 실종자가 나오지 말란 법도 없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또 다른 실종자가 나오면 또 곤란해질 사람들이 많아. 그러니까 내 말은, 준비가 덜 된 사람들이 나가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기보다는 뒤에서 응원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줄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거야.” 매니저는 최대한 아이가 이해할 수 있을 말들을 골라서 하느라 느리긴 했지만 차분하게 말을 맺을 수 있었다. 단유가 하은을 힐끔 보았다가 매니저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최대한 변수를 줄여서 통제를 하겠다는 거군요.” 매니저가 동그래진 눈으로 단유를 바라볼 때, 직원들이 나와서 사람들을 로비로 들여보냈다. 그리하여 하은과 단유 네는 객실로 들어왔다. 침대 위에 엎드려 있던 하은은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다. 지금까지 자신은 어른이라는 자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았다. 사실 이제 20대 중반에 불과한데, 또래 친구들은 이제 겨우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한 나이인데, 새내기라는 호칭이 아직 어색하지 않은 나이인데, 결혼도 하지 않았기에 ‘어른’이라는 호칭이 어색하기만 한 나이인데 어느새 하은은 ‘어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단유나 명수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시선에서도 ‘어른’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떤 어른인가? 어렸을 적에 되고 싶었던, 보고 싶었던 어른의 모습인가? 아니면 자신이 그토록 경멸해왔던 어른의 모습을 답습하고 있는 것인가? ‘어른’이라는 모호한 기준의 호칭에서 갑자기 커다란 책임감과 의무감이 느껴졌다. ‘떳떳한 어른이 되고 싶다.’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것이 현실로 드러나니, 하은은 부담감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하은이 ‘사춘기’와 ‘오춘기’의 사이를 방황하고 있을 때, 방에 들어온 단유는 옷을 벗지도 않고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희미한 불빛들이 이곳저곳을 비쳐보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안 씻어?” 그새 샤워를 하고 옷까지 갈아입은 명수가 어정쩡하게 서서 물었다. “씻을 거야. 그런데 왜 그러고 있어?” 명수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데, 계속 눈이 문을 향하고 있었다. 단유는 명수의 속내를 눈치 채고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TV보고 싶어서?” 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가서 봐.” “그런데 밖에, 그 누나들 있잖아?”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TV만 보는 건데?” 그래도 명수가 머뭇거리자, 단유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명수의 손을 잡고 방문을 열었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거실 소파에 모여 있던 갤럭시즈의 시선이 단유에게로 몰렸다. 단연 그 중에서도 수련의 활활 타오르는 시선이 가장 압도적이었지만, 이번에도 단유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제 친구가 TV 보고 싶다고 해서요. 혹시 봐도 될까요?” 수영이 얼른 대답했다. “그래 봐. 여기 너희가 주인인데 주인이 TV본다는 걸 누가 말린다고 그래? 우리랑 같이 보자. 괜찮지?” 단유는 명수의 등을 밀었고, 명수는 어울리지 않게 쭈뼛거리면서 소파 가운데 난 자리에 앉았다. 명수를 둘러싼 미녀들(?)은 명수의 행동 하나하나에 시선을 주었고, 명수는 붉어진 얼굴로 리모컨을 쥐고 TV를 켰다. 익숙한 채널로 변경한 뒤, 익숙한 음악과 함께 일일드라마가 나오자 명수는 곧 TV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점점 편안해지는 얼굴과 함께, 드라마의 전개에 맞춰 표정이 다양하게 변화했다. 갤럭시즈 멤버들은, 처음엔, 명수의 표정을 보면서 킥킥대다가 이내 명수가 이것저것 드라마에 대해 설명하면서 열을 올리자 함께 드라마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명수가 다른 건 몰라도, 드라마를 간략하게 설명시키고 이해시키는 것에는 도가 튼 모양이었다. ======================================= [189] My Way(4) 멤버들이 모두 드라마와 명수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렸을 때, 수련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서 단유가 혼자 있는 방으로 찾아갔다. 닫힌 방문의 손잡이를 잡고 슬쩍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다른 멤버들은 TV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소리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방을 들여다 본 수련은 이내 방문을 활짝 열고 몸을 들이밀었다. “어디 갔지?” 방에는 텅 빈 침대만 있을 뿐, 단유가 보이지 않았다. “씻고 있나?” 방에 붙은 욕실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안에 있어?”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또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보았다. 컴컴한 욕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방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안 수련이 본격적으로 탐색에 나섰다. 하지만 아무리 12살 어린 아이라도 좁은 방 안에 몸을 숨길만한 구석은 없었다. “어디 간 거지?” 분명 친구를 자기 멤버들 틈으로 밀어 넣고는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던 수련은 사라진 단유의 행방을 도저히 추적할 수 없었다. 한 눈 판 사이에 밖으로 나간 걸까, 의심해 봤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거실에 있던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나갈 수 있었을까 싶었다. 혹시 몰라 객실에 붙은 테라스로도 나가보았지만, 눈이 덮인 테라스는 발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너 왜 그래?” 멤버 한 명이 수련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고는 물음을 던졌다. 수련은 곧 단유가 사라졌음을 알리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예감이 말을 하지 말아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또 어쩐지 단유가 뭘 하려고 하는 건지 느낌이 왔던 탓이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그랬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냐.” 테라스 문을 닫고 다시 거실로 돌아온 수련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눈으로 쭉 훑다가 확신을 가졌다. 분명 단유가 나갔다가 들어올 때, 그리고 아까도 차에서 입고 있었던 두터운 보드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얘, 단단히 미쳤구먼.’ 수련은 고민을 했다. 지금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어떻게 나갔는지는 둘째 치더라도, 나간 것이 분명한 이상 여기 선생님에게도 단유가 나간 것을 알려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멤버들에게는 괜한 걱정을 끼쳐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조용히 하은에게로 향했다. 어지간하면 조용히 해결하고 싶었다. “주무세요?” “아니요, 들어오세요.” 수련이 방으로 들어서니, 침대위에 걸터앉은 하은이 황급히 머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주무셨던 건 아니시죠?” “아니에요. 무슨 일이시죠?” 수련이 보기에 하은은 아까 보던 모습과 달리 꽤나 어두운 기색이 역력했다. 누가 봐도 고민 중이라는 모습이었다. 무엇을 고민 중인지 모르겠지만, 판다 곰보다 더 검은 눈으로 멍하니 수련을 바라보고 있는 하은이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해야겠지. “저기, 사실 지금 그 단유라는 애가 안 보여서요.” “단유요?” 수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이 방금 돌아본 사실을 알리면서 생각을 밝혔다. “실종됐다는 애를 찾으러 나간 거 같은데….” 하은의 얼굴이 와락 찌그러졌다. “이 녀석이!” 하은은 옆에 벗어뒀던 점퍼를 챙겨들었다. “저기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려던 하은을 붙잡은 수련이 눈썹 끝을 긁으면서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희 멤버들은 몰랐으면 좋겠어요. 이기적일 수도 있지만, 지금 많이 지친 상태거든요? 웬만하면 그냥 편하게 쉬게 해주고 싶어요. 명수도 그렇고요.” 하은은 얼굴에 올랐던 열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수련의 말 그대로 ‘이기적’인 것인데, ‘명수’를 언급하는 순간, 감히 그 말을 부정하기 힘들어진 것이었다. “알았어요.” 두 사람이 방문을 열고 나서자, 거실에서 TV를 보던 이들이 쳐다보았다. “선생님, 어디 가세요?” “매점에 잠깐. TV 보고 있어.” “네. 맛있는 거 많이 사오세요.” 하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패딩을 입으며 나갔다. “나도 같이 갔다 올게.” 수련이 살짝 오른손을 들어 흔들며 하은의 뒤를 따라 나섰다. “수상하지?” 지수의 말에 수영이 고개를 저었다. “쟤 수상한 게 하루 이틀 일이니? 신경 쓰지 마. 피곤해.” 다시금 드라마에 몰입하기 시작한 이들이었다. **** 단유가 아이를 찾으려고 마음먹은 것은 매니저의 말 때문이었다. 응원하고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리라. 하지만, 그것도 전제는 직원들이 전체 상황을 통제하는 가운데 수색이 원활히 이루어질 때의 방법이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은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나서는 게 효율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손전등이니 뭐니 탓을 하지만, 도구는 둘째 치고 당장 영하의 날씨에 폭설로 앞도 안 보이는 지금은 ‘골든타임’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기보다 어린 나이의 아이가 눈 속에서 오래 버틸 리가 없었다. 더구나 아까 아이가 실종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벌써 1시간은 넘게 흘렀다. 이정도면 위험의 정도를 넘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방에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을 때 스치고 지나간 것은, 작년 자신이 잠시나마 안아들었던 아기의 모습이었다. ‘좀 더 빨리 구해냈다면.’ 단유는 생각했다. 이것은 시간 싸움이라고. 단순히 어두운 곳에서 길을 잃은 아이를 찾는 게 아니었다. 느긋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자신의 안전이 보장된 상태에서 구조 활동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라면, 자신은 누구보다 안전이 보장된 상태다. 누구보다 빠르게, 언제라도 방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까. 그런데 무작정 눈보라 치는 어둠 속에서 아이를 찾는다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바람이 어찌나 거센지, 사람들이 아이를 찾는 소리마저 눈보라가 집어삼킨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 따라서 단유는 보다 합리적인 수색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일단 내 쪽에서 바라볼 때, 명수 쪽 아이들 중 다른 곳으로 이탈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가끔 좁은 자리싸움을 하기 싫어서 무리에서 살짝 벗어나 눈을 뭉치기 시작한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가시권 안에서 움직였다. 너무 멀어지면 던져도 닿지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단유는 끊임없이 눈을 뭉치고 던지는 와중에도 시선은 상대 진영에서 떼지 않았다. 우스운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과거 무슬라에게 이렇게 교육을 받은 적도 있었고―목표물에서 눈을 떼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단유의 시선 속에서 상대 진영의 아이들은 계속 담겨져 있었다. 물론 100%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아이들의 동선이나 움직임이 겹치면서 가려진 틈에 다른 곳으로 움직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일단 지금은 그런 자신의 기억과 주의력에 확신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그 아이가 있었던 곳은 내가 있던 진영.’ 그리고 그 가정이 맞는다면, 아이는 결코 건물 주차장 쪽으로는 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 그 쪽 수색을 버리고, 반대쪽, 즉 리조트로 들어오는 입구 쪽을 수색해야 하는데, 이러면 사실 상황이 어려워지는 면은 있었다. 입구 쪽이라면 곧 리조트 밖으로 나갔을 확률도 있다는 뜻이니까.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 그 곳까지 쉽게 진출해서 아이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을 빠르게 정리한 단유는 곧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멀리 입구 근처에 가로등 하나가 켜져 있었다. 사람들이 아직 그 곳까지 가지 않았는지, 아니면 아예 가질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가로등 근처에서 모습을 드러낸 단유는 유심히 주변을 살폈다. 이미 많은 눈이 쌓여서 흔적도 사라졌을 확률이 크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마음으로 눈을 크게 뜨고 길 위를 살폈다. 핸드폰의 후레쉬 기능도 작동시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첫 걸음에 성공할 확률은 역시 없었던 모양인지 소득이 없었다. 단유는 주위를 둘러보다 적당한 장소로 몸을 이동했다. 최대한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대신 다른 이의 발자국을 찾기 위한 전략이었다. 발자국이 아니라도 어떤 흔적이 남을 것이다. 지금 거의 자신의 무릎 가까이 쌓일 만큼의 눈이라면, 더 키가 작은 아이에겐 숨기기 힘든 흔적이 남았으리라. 단유는 핸드폰을 사방으로 휘두르며 흔적을 찾아 나섰다. **** 로비로 내려온 하은과 수련은 여전히 로비를 방황하는 좀비 무리 속에서 매니저를 만날 수 있었다. “왜 내려왔어?” 매니저의 물음에 수련이 빠르게 사실을 전달했다. 매니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더듬거리며 아무도 내려온 사람이 없음을 알렸다. 만약 아는 사람이 내려왔다면 자신이 보았을 거라는 이야기에 하은은 로비를 채우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아까보다는 많이 빠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로비에 진을 치고 있었다. 매니저의 말이 아니더라도, 12살 아이가 로비를 지나갔다면 누군가가 말리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에 곧장 반대 의견이 생각났다. ‘어쩌면 보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 왜냐하면, 남이니까. 그 생각이 드는 순간, 하은은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오늘 벌어졌던 일련의 일들에서 하나로 관통하는 단어가 바로 ‘남’이라는 것이었다. ‘남의 일’이니까 끼어들지 않고, ‘남의 일’이니까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모르겠다. 순간적으로 든 생각이라서 너무 지나치게 생각한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지나가는 아이가 있었더라도 그냥 본 척 만 척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12살짜리 검은색 패딩을 입은 사내 아이 보시지 못했어요?” 수련이 하은을 대신해서 사람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경계를 표시하던 사람들은 수련의 외모에 어, 하는 반응을 보이다가도 물음의 의미를 떠올리고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몇 몇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반응은 똑같았다. 누구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개중 어떤 사람은 ‘또야?’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도대체 이 날씨에 자기애도 관리 못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하은은 직접 들은 것도 아닌데, 마치 그런 이야기가 귓가에 속삭여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갔을까요?” 매니저의 물음에 세 사람의 시선이 바깥을 향했다. 몰아치는 눈보라가 로비 현관의 닫혀져 있는 유리문을 때리고 지나갔다. 부서진 눈 조각들이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 단유는 리조트 밖으로 나갔다. 다른 사람들도 여기까지는 오지 않았던 게 분명한 지 길 위가 너무도 깨끗했다. 아까 아이들이 눈싸움을 할 때는 지금보다 덜 눈이 내렸다지만, 어린 아이가 홀로 눈을 뚫고 여기까지 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어쩌면 진짜 건물 안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랬다면 지금이라도 건물 주위를 맴돌면서 아이를 찾는 목소리는 그쳐야 했던 것이 아닐까? 단유는 고개를 내젓고는 다시 리조트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어!” 리조트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경사길 위쪽으로 이동한 단유는 순간, 발아래가 허물어지면서 뒤로 굴렀다. 다행히 눈이 적당히 쌓여 있어서 큰 사고는 나지 않았지만, 갑자기 발아래가 텅 빈 느낌이 들어서 깜짝 놀란 단유는 가슴이 거칠게 쿵덕거렸다. 자신은 눈으로 보고 위치를 가늠하여 이동할 수 있었다. 아직 시선이 닿지 않는 곳까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입구 밖에서 올려다보고 적당한 자리라고 생각해서 이동을 했던 것인데, 알고 보니 경사로 옆에 조성된 화단의 낮은 회양목 위로 눈이 쌓여 착각을 한 것이었다. 단단한 땅인 줄 알고 이동했다가 회양목 사이로 빠지면서 중심을 잃었으니 크게 사고가 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 순간, 단유는 깨달았다. 어쩌면 이 아이, 지금 대답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까도 이 정도의 눈이 쌓였다면 모르는 상태에서 헛딛다가 넘어졌을 수도 있고, 그러다 사고가 났다면? 단유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리고 리조트 건물 근처로 이동했다.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찾고 있는지 아이를 부르는 소리가 바람 소리에 묻혀 아득히 들려왔다. 곳곳에 사람들의 발자국이 보였다. 단유는 사람의 발자국이 보이지 않는 곳을 중심으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때, 하은과 수련도 단유를 찾기 위해 밖으로 뛰쳐나왔다. “저도 같이 찾아보죠.” 매니저가 뛰어나왔다. 모두 핸드폰을 치켜들고 핸드폰의 후레쉬 기능을 작동시켰다. 어지간한 손전등은 저리가라 할 정도의 밝기로 빛이 나와 발밑을 밝혔다. “어디로?” 수련이 어느 쪽으로 갈 건지를 물었다. 하은이 좌우를 둘러보다가 한쪽을 짚었다. “단유는 똑똑한 아이에요. 어려운 일에 처할 가능성은 극히 적어요. 그러니까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예요. 대신 그 아이를 찾으려면 우리가 영리하게 움직여야 해요.” “그럼요?” 하은이 가리킨 방향은 사람들의 수색이 되고 있지 않은 어둠 속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찾는 곳을 두 번 찾는 일은 하지 않을 아이에요. 그러니 지금 사람들이 미처 가지 않았을 법한 곳으로 가야죠.” “그럼 제가 앞장서죠.” 매니저를 선두로 하은과 수련이 모자를 눌러쓰고 눈보라 속으로 들어갔다. ======================================= [190] My Way(5) 한편, 그 시간 단유는 리조트 건물의 왼편에 위치한 실외수영장 쪽을 살펴보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펴보았지만, 역시 펜스로 둘러싸인 이곳까지는 오지 않은 듯 했다. 문득 한기에 절로 몸이 떨렸던 단유가 손을 들어보니 발갛게 부어오른 손등이 보였다. 나온 지 몇 십분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런 상황이라니. ‘시간이 없어.’ 단유는 혹시 자신의 기억이 잘못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명수 쪽 무리에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본인은 확신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잘못된 확신이었고 믿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주차장 쪽으로 가야하는 걸까? 단유는 일단 실외수영장쪽 펜스의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시선을 멀리 두고 이동할만한 곳을 물색했다. 그 때였다. “으음.” 바람소리가 거세서 정확히 들은 것인지 확신할 수 없어, 제자리에서 다시 소리가 들리길 기다린 단유는 곧 신음소리 비슷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디야!’ 고개를 좌우로 돌려가며 주위를 보았다. 함박눈에 시야가 많이 제한되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이번에는 좀 더 큰 소리가 들렸다. “엄…엄마….” 단유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 지온은 이제 겨우 7살이 된 남자아이였다. 눈이 잘 내리지 않는 남쪽 지방에서 올라온 지온은 눈에 쌓인 리조트의 풍경에 푹 빠졌다. 로비 바깥에서 눈싸움을 하는 아이들을 보고, 자기도 놀고 싶다고 어머니를 붙잡고 칭얼거렸더니 결국 허락을 얻어 밖으로 뛰쳐나온 것이었다. 나오자마자 생각 없이 한 쪽 무리 가장 뒤쪽으로 붙은 지온은 열심히 눈을 뭉쳐 상대를 향해 던졌다. 딱히 누구를 맞추겠다는 생각도 없이 뭉치고 던지는 일을 반복했다. 아이들의 함성소리와 자신의 환성이 뒤섞이면서 아드레날린이 폭발한 지온은 정신없이 놀기 시작했다. “이얍!” 마구잡이로 눈을 던져댔던 것은 비단 지온 뿐만의 일은 아니어서, 어쩌다보니 앞의 사람들을 피해 지온을 맞춘 눈덩이가 있었다. 눈을 피하기 위해 조금 더 물러나야 겠다는 생각으로 뒤로 돌아 멀찍이 서려했던 지온은 눈앞에 펼쳐진 새하얀 눈밭을 보니 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순백의 눈밭에 자신의 발자국을 하나 남겨보는 것이었다. 한 발자국씩 꾹꾹 눌러가며 걸어가던 지온은 어느새 무리로부터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뽀드득 거리며 눈이 밟히는 소리가 귀를 자극했고, 그 소리와 밟는 촉감을 즐기느라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다. 드문드문 켜진 가로등을 따라 걷던 지온은 발아래만 보면서 그 느낌을 즐겼고, 나중에 다시 돌아갔을 때, 한 줄로 난 자신만의 길을 부모님께 자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걷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아이들의 소리가 아득히 들릴 정도로 멀리까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온은 눈앞에 보이는 펜스를 등 뒤로 하고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올 때와 겹치지 않게 거리를 두고 걷기 시작한 지온은 그만 실수를 했다. ―퍽. 하얀 눈에 덮여 있던 바람에 제대로 길을 가늠하지 못했고, 길옆으로 작은 둔턱이 있음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었다. 눈이 쌓여도 둔턱 정도는 구분이 되었어야 할 것인데, 가로등 불빛으로 밝혀지는 영역이 희미하게 사라지는 부분이었다는 점과, 하얀 눈 색깔 때문에 높낮이가 정확히 구별되지 않았다는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실수였다. 디뎠던 발이 길 가장자리의 턱을 헛디뎠고 지온은 중심을 잃었다. 넘어지면서 둔턱 옆에 놓인 바위에 머리를 부딪치고 만 지온은 잠시 정신을 잃었고, 그대로 눈 속에 몸을 묻고 말았다. 지온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너무 추워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목소리만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겁이 난 아이는 엄마를 찾았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바람에 묻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울고 싶은데 눈물도 나지 않았다. 팔에도 힘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심지어는 다리에 감각도 없었다. “엄마….” 지온이 다시 엄마를 찾을 때, 그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엄마.” 오래된 낙엽이 부스러지는 소리처럼 힘없이 뱉어진 엄마 소리와 함께 지온은 다시 정신을 잃었다. 단유는 쓰러져 있는 지온을 들어올렸다. 이마께에 깊이 찢어진 상처가 보였다. 피는 나지 않고 있었지만, 아이가 쓰러져 있던 바닥에는 붉게 물든 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의 입술도 새파랗게 변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단유는 잠깐 고민을 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아이의 목숨을 결정지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잘못된 선택을 작년 겨울에도 한 번 겪어 본 경험이 있었던 단유는 다시 그런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리조트로 돌아가면, 과연 이 아이를 살릴 수 있을까?’ 응급구호조치 정도는 하겠지만, 역시 전문 인력이 없는 이상 병원으로 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눈 때문에 발이 묶인 현 상황에서 과연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있을까? 119에 신고를 해도, 아마 지난번처럼 응급구조사들만 헐레벌떡 뛰어올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병원으로 가야 할까?’ 바로 병원으로 데리고 가는 것도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첫 째는 단유가 이 근처의 지리를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병원을 찾는 데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점. 두 번째는 그 시간에 아이의 증상이 악화될 수 있다는 점. 세 번째는 병원에 데리고 가는 방법에 대한 문제였다. 자신이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데리고 가면 분명 어떻게 왔냐는 둥, 부모나 어른들은 어딨냐는 둥의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지금 이 아이의 부모를 데리고 함께, 그것도 능력을 이용해서 이동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무리수를 두는 격이었다. 단유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을 때, 지온이 점점 몸을 떨기 시작했다. 단유의 낯빛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입술을 꽉 깨문 단유가 고개를 들었다. **** “단유야!” “지온아!” 하은과 수련이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핸드폰 불빛을 좌우로 비추었다. 창밖에서 보면 감수성을 자극할 아름다울 광경이었을 함박눈이 이토록 몸서리치게 싫어질 줄은 몰랐다. 하지만 자신이 힘든 만큼, 아니 그보다 더 힘들 아이들 때문에라도 수련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 쪽에는 아무것도 안보이죠?” 매니저가 물었다. 수련이 고개를 내저을 때, 하은이 한 쪽 방향을 살피다 돌아왔다. “이 쪽은 아닌 것 같아요. 단유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그렇다면 어디든 발자국이나 다른 흔적이라도 남았을 것 같은데, 이쪽은 너무 깨끗해요.” 하지만 수련은 고개를 저으며 그 말에 반대했다.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면 금방 덮일 수도 있잖아요?” “아이라고 해도 이 눈 속에서 걸음을 걷다보면 깊게 발자국이 남을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든 주변과 차이가 날 거예요. 이것처럼.” 하은이 가리킨 방향에는 세 사람이 걸어온 발자국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발목을 덮고도 한참일 정도로 높게 쌓인 눈 속에 깊숙한 음영을 드러내고 있는 발자국들이 어지러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자면 이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해요. 아니 애초에 리조트에서 나온 사람이 없어야 해요.” 세 사람이 수색을 시작하면서 동시에 의문을 품은 점이 바로 그 흔적이었다. 지온의 경우는 시간이 많이 경과되어서 그럴 수 있다 쳐도, 단유의 경우에는 길게 잡아도 십여 분의 차이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리조트 주변에 남겨진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안 나간 거 아닐까요?” 매니저의 말에 하은과 수련 둘 다 고개를 내저었다. 단유의 성격상, 그리고 오늘 하루 단유가 보여준 모습을 돌이켜보면 분명 실종된 아이를 찾기 위해 나섰음이 틀림없었다. 매니저는 머리 위의 눈을 한 차례 툭 털어낸 뒤, 올백 스타일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럼, 저쪽으로 한 번 가보죠. 저기 실외수영장이 있는데, 겨울철에는 쓰지 않는다고 잠가놓는다고 하더라고요.” 어둠 속에 잠겨있는 방향을 손으로 가리키며 매니저가 앞섰다. “많이 힘들어요?” 하은의 말에 수련이 뜨거운 김을 토해내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이 정도는. 걸그룹이라고 체력이 약할 거라고 생각하시면 오산입니다.” 굳이 그런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던 하은이었지만, 구태여 말을 덧붙이긴 싫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눌러쓴 비니 모자 덕에 아마도 저 안에는 뜨거운 땀으로 푹 절어버린 머리카락이 미역처럼 엉켜 있을 것이다. 본인도 힘든데, 자기 일처럼 이렇게 도와주니 고맙기도 했다. “고마워요.” 뜬금없는 하은의 말에 수련이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고맙다뇨?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누구 말처럼 말이에요.” 입에 붙은 예절이 수련을 일깨웠다. 생각 없이 뱉었는데, 그 말이 사실 오늘 하루 종일 수련을 괴롭힌 말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단유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반감이 생겼다. 애초에 꼬마 녀석이 말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없었다면 이런 고생을 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으니까. ‘뭐야. 꼬마애가. 사람을 걱정시키기나 하고. 이거 일부러 이러는 거 아냐?’ 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갈 정도였다. 하지만 당장은 그 꼬마 놈을 찾고 볼 일이었다. 수련은 목에 힘을 주고 소리 높여 이름을 불렀다. “단유야!” “지온아!” 오른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던 하은이 오른손을 눈 옆에 대고 앞을 살폈다. 하은도 목소리를 높여 단유를 불렀다. 가로등 불빛마저 함박눈에 가려질 정도로 시야가 가려질 무렵, 하은은 저 멀리 흐릿하게나마 펜스가 둘러쳐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저기가 바로 아까 매니저가 말했던 실외수영장인가, 라는 생각을 할 때였다. “어?” 한 발 앞서 있던 매니저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왜요? 뭐 있어요?” 하은이 다가가 물었다. “아니 그게….” 매니저가 걸음을 멈추고 눈 위에 손우산을 만들어 전방을 주시했다. 수련이 뒤따라 매니저에게 붙어서는 물었다. “뭔데요?” 매니저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저기 가로등 사이에 뭐가 있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사라졌어요.” “네?” 두 사람은 매니저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쪽으로 뛰어갔다. 달려가는 중에도 시선을 떼지 않았지만, 가까워질수록 그 곳에 아무것도 없음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곧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분명 아무도 없었지만, 아무도 없었던 것만은 아니었는지 그 곳에는 깊게 짓눌린 자국이 있었다. 그리고 붉게 물든 흔적까지도. “여기 있었어요.” 뒤따라 온 매니저가 헉헉거리는 숨을 참으며 물었다. “누구요?” 하은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누구든지요.”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는 발자국까지도. 다시 한 번 살펴보니, 작은 아이 한 명 정도는 여기에 엎드려 있었음을 알 수 있는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지온이리라. “지온이라는 애가 다쳤나봐요.” 수련의 말에 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문제는 다친 아이가 어디로 갔냐는 것이었다. 주변에서 이곳으로 향하는 발자국은 오직 세 사람의 것뿐이었다. 하은과 수련, 그리고 매니저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세 사람의 눈에는 모두 의문투성이였다. 하지만 그 중 누구도 그 의문에 답을 줄 수는 없었다. **** “단유야!” “지온아!” 단유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결심을 했다. 지온을 부둥켜안은 단유는 곧 시선을 먼 곳으로 던졌다. 이제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최대한 신속하게 병원을 찾아야 했다. 유사한 전례가 있긴 했다. 예전 정신을 잃은 라보네를 ‘레카’로 데리고 갈 때, 단유는 무작정 먼 거리로 이동하면서 ‘레카’라는 이름의 마을을 찾아다녔다. 다만 그 때는 어둡지도 않았고, 눈보라도 없었고, 레카라는 마을이 있는 방향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단유는 병원을 찾는 일이 꼭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도시마다 병원이 존재하기 나름이고, 병원은 건물 특성상 멀리서도 잘 관찰될 것이기에, 밝은 불빛만 따라가면 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워낙 도로가 잘 발달된 나라인지라, 길만 잘 찾는다면 문제는 없으리라. 단유는 눈보라 속을 뚫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분도 되기 전, 단유는 병원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운이 좋게도 응급실이 구비된 병원이었다. 붉은 간판에 하얀 글씨로 응급실이 운영되고 있음을 알리고 있던 그 곳에 단유가 모습을 드러냈다. 응급실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던 단유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모습을 감췄다. 응급실은 때 아닌 폭설에 거의 텅 비다시피 한적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응급 동상환자나 주취환자들 몇몇이 침상에 누워있었지만, 긴급을 요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편이었다. 간호사들도 데스크에서 느긋하게 잡무를 보고 있거나 잡담을 나누고 있었고, 당직의사인지 젊은 의사 한 명이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선생님, 뭐 보시는 거예요?” 간호사 한 명이 종이컵에 뜨거운 녹차 한 잔을 건네며 물었다. 의사는 싱긋 웃으며 잔을 받아들었다. “고맙습니다. 별 거 아니고요. 이번에 휴가 나가면 여자친구랑 데이트 할 건데, 예약할 만한 레스토랑이 있는지 보고 있었어요?” “어머, 정말요? 좋겠다.” 옆에서 잡담을 나누던 간호사들도 끼어들었다. “프러포즈하실 거예요?” “아뇨,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요.” “이 선생님, 얼굴 빨개지는 거 봐.” 간호사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한가한 응급실이기에 볼 수 있는 여유로운 풍경이었다. “어? 뭐지?” 잔을 건네준 뒤 돌아서던 간호사가 데스크 위에 올려져 있는 젖은 종이 하나를 발견했다. “박지온, 부모는 ○○리조트에 있음?” 간호사가 가장자리가 젖은 종이를 읽어내자,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무슨 말이에요?” 간호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어느 곳에도 종이를 두고 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둘러보는 와중에 빈 침상 위에 누워있는 아이 한 명을 발견했다. “어? 저 아이 언제부터 저기 있었대요?” 그제야 다른 사람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에게 다가갔다. 가장 먼저 다가간 의사가 아이의 얼굴을 보다, 소리를 질렀다. “이간호사님! 응급 키트 준비해줘요. 박 간호사님! 웜 셀라인(warm saline) 준비해 주세요. Hypothermia예요!” 말을 하는 동안 의사는 아이의 옷을 벗겼다. 그리고 간호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191] My Way(6) “거기 혹시 박지온이라는 아이의 부모님이 투숙하는지 확인할 수 있을까요?” 리조트로 걸려온 전화에 난리가 났다. 도대체 이제 갓 7살이 된 꼬마 아이가 어떻게 몇 십 ㎞나 떨어진 병원에 있을 수 있는지부터 해서, 이 날씨에 부모들은 어떻게 그 병원을 찾아갈 수 있느냐는 문제까지 겹쳐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진 리조트였다. 한편으로는 아이를 찾았다는 기쁨과 무사하다는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리다가도, 응급실에서 응급 구조를 받았다는 이야기에 걱정이 돼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애를 태우는 부모들이었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도로가 완전히 통제돼서 가실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럼 애는 거길 어떻게 갔다는 거예요?” 그 질문에는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이후의 이야기지만, 응급실 입구에 설치된 CCTV 어디에도 아이가 들어오는 장면은 없었다. 응급실 진료안내와 내원객관리를 위한 CCTV도 있었지만, 데스크 주변을 비출 뿐인지라 아이가 누워있던 침상은 전혀 보이질 않았다. 즉, 병원 어디에도 아이가 들어온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또 한 가지의 미스터리는 바로 아이의 신분을 증명하던 종이 쪽지였는데, 이 역시 CCTV에서 확인이 불가능했다. 확인가능 했던 한 가지는 간호사가 의사에게 녹차 티백이 담긴 종이컵을 건네기 직전까지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걸 찾았을 때, CCTV를 보던 관계자들이 모두 팔에 돋아난 소름 때문에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는 후문이었다. 아이는 꽤 심각한 저체온 증상을 보였고, 이마에도 크게 찢어진 열상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너무 늦지 않게 치료를 받은 탓에 위험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 사건은 경찰이 조사를 맡게 되었는데, 일단 해당 리조트에서 병원까지 떨어진 거리가 수십 ㎞라는 사실과 아이가 열상을 입은 채 나타났다는 사실만으로 유괴 가능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사실이 있었다. 아이가 실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간에 이미 주변도로가 폭설로 통제가 되어서 차가 다닐 수 없을 지경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실제 주변 CCTV를 탐문해 보아도 도로 위에는 어떤 차도 지나지 않았다. “저기, 그런데 반장님.” “응?” 수사를 맡은 형사가 3일간 감지 않은 머리를 긁으며 나타났다. “이상한 게 있는데요.” “뭐?” 형사는 말을 할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부모님께 들키기 싫은 성적표를 내어놓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리조트에서 병원까지 가는 길에 놓인 CCTV 중의 하나에 찍힌 영상인데요.” 형사가 태블릿으로 재생시킨 영상에는 희미한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흩어지는 함박눈에 가려져 길 위가 뿌옇게 보이는 가운데, 순간적으로 그림자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빛이 비추는 영역 가장자리에 생겨난 것이라 음영도 불확실하고, 형체도 불분명했지만 뭔가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긴 했다. 그리고 나타난 형체가 무언가를 업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업힌 형체가 아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단정하기 힘들었다. “날씨가 워낙 좋지 않았고, 또 가장자리라서 정확한 건 아니지만….” 반장이 몇 번 들여다보다가, 가슴께에서 담배를 꺼내들었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는 형사를 쳐다보았다. “이걸 어쩌라고?” “예?” “정확히 어떤 형상인지 특정도 할 수 없는 그림자를 그저 니가 그렇게 보인다는 이유로 조사라도 해보겠다는 거야?”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그리고 이게 지금 걸어왔냐, 뛰어왔냐? 아니면 어디서 날아왔냐? 응? 너 지금 나한테 초능력자가 나타났습니다, 라고 보고라도 할 참인거야? 응? 그런 거야?” “아니, 그러니까, 제가 이상하다고….” “왜? 영화 찍게? 나랑 영화 함 찍을까? 니가 주인공하고 내가 조연하고, 여기 이 그림자가 악당 하고. 딱이네? 그림 좋네? 응?” 반장의 비아냥거림이 길어질수록 형사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헛짓하지 말고, 일이나 해, 새꺄.” 형사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동료들이 킥킥거리는데도 가타부타 할 말이 없었다. 자기도 말을 꺼내고 보니 너무 쪽팔렸던 것이다. 역시 사람이 입을 함부로 놀리면 안 된다는 걸 또 한 번 깨닫는 형사였다. **** 아이가 발견됐다는 소식에 현관이 시끄러워질 무렵, 세 사람이 현관으로 돌아왔다. 수련이 발견한 흔적을 알려주려다, 로비를 메운 소란에 걸음을 멈췄다. “찾았다고?” 매니저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둘러보다, 로비에 있던 후배에게 물었다. “네, 찾았대요. 그런데 지금 병원에 있대요.” “병원?” 후배는 자신도 자세히 듣지 못했지만, 어깨 너머로 들은 것을 전해주었다. 매니저와 하은, 수련은 눈을 맞추었다. 이번에는 서로의 눈에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 당황스러움을 진정시킬 만한 답을 가진 이는 없었다. 그러다가 하은이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수련이 뒤따라가다 뒤를 돌아보았다. “오빠는 그냥 여기 계세요.” 매니저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두 사람을 우두커니 서서 바라만 봐야 했다. “실장님, 씻으셔야 할 것 같은데요.” 굳이 후배가 지적하지 않아도, 지금 온 몸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멀찍이 돌아가고 있는 모습만 봐도 당장 씻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쩐지 내팽개쳐졌다는 생각이 들어서 찝찝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단유야!” 문을 열고 객실로 들어선 하은이 소리치지, TV를 보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하은에게로 쏠렸다. “무슨 일이에요?” 명수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단유는?” 하은의 물음에, 왜 단유를 찾는 건지 모르겠다는 눈치로 명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방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때, 잠옷 차림의 단유가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하은을 바라보았다. “왜요?” “너!” 하은이 소리를 버럭 지르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정작 중요한 사실을 확인하지 않았다. “너 아까 어디 있었어?” “아까라뇨?” “아까, 그러니까… 30분 전에 어딨었어?” 단유가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듯 그 큰 눈을 끔뻑끔뻑 거리다가 대답했다. “방에요.” “너 없었잖아? 내가 아까 다 봤는데!” 뒤따라온 수련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소파에 앉아있던 갤럭시즈 멤버들이 안절부절 못하고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수영은 지금이라도 수련에게 달려가 자제시켜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했고, 예영은 언니의 명령이 떨어지기만 하면 누구보다 빨리 달려가 수련을 붙잡을 수 있도록 자세를 취했다. “방에 있었는데?” “와, 쟤 뻔뻔한 거 봐?” “아, 혹시 아까 테라스에 있을 때 말씀하시는 거 아니에요?” “내가 아까 저기 테라스 확인 다 했거든?” 수련이 손가락으로 거실 쪽 테라스를 가리키자, 단유가 방 안쪽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이 방에도 테라스 있어요.” “어? 진짜?” 커튼이 쳐져 있어서 보이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저 방에는 조그만 테라스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본래는 작은 협탁 하나와 의자 두 개만 놓일 공간 정도의 테라스지만, 겨울철이라 잘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두꺼운 커튼으로 입구를 가려놓아서 모르는 사람은 그냥 창문 정도로 착각할 법도 했다. 수련은 얼굴이 붉어졌다. 좀 더 자세히 관찰했다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도 있었을 텐데, 아이가 사라졌다는 마음에 당황하여 건성으로 수색했던 것인가 스스로를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 옆에 선 하은을 바라보았다. 마침 하은도 수련을 바라보는데, 수련은 미안함과 당황스러움에 제대로 항변도 못했다. “아니, 저기….” 하은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수련의 말을 잘랐다. “괜찮아요. 수련씨도 놀라서 그런 거겠죠. 그러니까 아까도 열심히 움직이셨던 거겠죠.” 그리고 단유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너 계속 거기 있었던 거니? 어디 나가지 않고?” 그 말에 단유가 명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석고 어디 안 갔었는데요? 계속 저 방에 있었는데?” 갤럭시즈의 멤버들도 머뭇대다가 명수의 말에 동의했다. “저희도 계속 여기 있었거든요. 그래서 옆에 사람이 지나갔으면 알았을거에요.” 사실 저게 맞는 말일 것이다. 오늘 하루 종일 자신의 가치관과 교육관을 흔드는 이야기 때문에 혼란스러웠던 나머지 이성적으로 판단을 못했던 것이리라. 자신이라도 나가기 전에 저 방에 들어가서 확인을 했더라면 이 고생을 안했을지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은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행이야. 우린 니가 밖에 나간 줄 알고 걱정을 했었거든.” “그러셨군요.”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다. 아니 마무리 된 줄로 알았다. 방으로 들어간 단유의 뒤로 수련이 뒤따라 들어오는 것이었다. “아냐, 괜찮아. 잠깐 이야기만 할 거야.” 방으로 들어오기 전, 수련이 멤버에게 제지를 받는지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수련은 이를 뿌리치고 끝내 단유의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위에 앉은 단유가 그녀를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수련은 먼저 테라스가 있다는 곳을 확인했다. “아니, 무슨 이런 커튼을 쳐놓고….” 커튼을 젖혔더니 과연 좁은 테라스가 있었다. 아니, 테라스라고 하기보다는 베란다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위에 튀어나온 천장이 지붕역할을 하고 있었으니까. 수련은 툴툴거리면서 베란다 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그리고 침대 위의 단유를 바라보았다. 잠시 숨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오늘 할 이야기가 좀 많다, 그치?” “전 별로 없는데요?” 입술을 짓뭉개던 수련의 눈꼬리가 슬슬 올라가기 시작했다. “난 좀 있거든? 어른이 이야기하면 잘 들을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거든?” “그런데요.” 단유가 수련의 말을 잘랐다. “먼저 좀 씻으시는 게 어떠세요?” 그제야 눈밭을 뒹굴다 막 실내로 들어온 자신의 차림새를 눈치 챘다. 머리에 땀이 차기 시작하는데, 냄새도 심하게 나는 것 같았다. 붉어진 얼굴로 씩씩거리던 수련이 고개를 돌렸다. “저 욕실 쓸 테니까, 너 꼭 여기 있어. 알겠지?”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어디 안 가요.” 수련은 쿵쾅거리는 걸음으로 거실로 나가더니 곧 옷을 챙겨서 욕실로 들어갔다. 이윽고 물소리가 나기 시작할 때, 방문이 살짝 열리면서 수영이 들어왔다. 침대 위에 이불을 둘러쓰고 앉아 있던 단유를 보더니, 어색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수련이는?” 단유가 보다시피, 라는 표정으로 욕실을 가리키자 수영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수련이가 좀 성격이 그래. 모난 성격은 아닌데, 나쁜 성격도 아니고 그런데, 뭔가 하나에 꽂히면 자기 직성이 풀릴 때까지 매달리는 편이라서 말이야. 사실 누나도 지금 쟤가 왜 저렇게 저돌적인지 이유를 모르겠지만, 나쁘거나 위험한 누나는 아니니까 너무 겁내지 말았으면 해.” “겁 안나요.” “어? 어, 그래?” 수영은 이마에 땀이 삐질 솟아나는 만화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저기 만약 혹시라도 수련이가 안 좋은 소리해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이해해 줬으면 해. 그리고 만약 괜찮다면 말이야, 인터넷이나 다른 곳에 너무 나쁜 소문은 안내줬으면 좋겠고. 사실 우리 이렇게 함께 한 것도 인연인데 말이야. 그치?” “네.” 단유의 무덤덤하고 성의 없는 대답이 영 못 미더운 눈치지만 자신까지 꼬마아이에게 미운 소리를 할 순 없었다. 혹시 기분이 나빠진 건 아닌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이것저것 말을 붙여보는 와중에 수련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언니 뭐 해?” “야, 너야말로 왜 여기서 씻고 그래?” “잘했어, 언니. 언니가 걔 잘 붙잡고 있었네.” “동문서답하지 말고.” “알았어, 언니는 가서 TV보고 있어. 금방 나갈게.” 수련이 억지로 수영을 일으켜 방 밖으로 쫓아 보낸 뒤, 단유를 돌아보았다. “이제 우리 이야기 좀 해 볼까? 오붓하게 말이야?” 수련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단유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어떤 이야기요?” 수련은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 뭔가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매니저에게 제지당하고, 멤버들에게 제지당하고, 아이가 사라졌다고 착각하고, 눈보라 속을 헤매고, 따뜻한 물로 피로를 씻어내고 했더니, 하려고 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이야길 해야 한다는 것만 생각나고 정작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는지는 생각이 나질 않는 것이다. 수련이 단유의 침대에 풀썩 걸터앉았다. “혹시 나한테 할 이야기 없니?” 단유가 수련의 뒤로 걸려있는 시계에 시선을 잠시 주었다가 말했다. “없어요. 그리고 지금 10시 넘었어요.” “응?” “졸려요.”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는 이야기가 있었지. 수련은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 읽었던 탈무드의 한 구절 같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패배를 선언해야 했다. ======================================= [192] My Way(7) 방에 불이 꺼지고 단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를 살리긴 했나보다. 사실 끝까지 확인을 하진 못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응급실 안으로 들어가진 않았다. 다만 멀찍이서 응급실 안을 살피면서 기회를 노렸다. 그래서 의사가 지온을 발견하는 순간, 단유는 곧장 리조트로 돌아왔다. 사실 이 방에 붙은 베란다 이야기는 반쯤은 사실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니, 외부로 나갈 때도 베란다를 통해 주변을 살핀 뒤 나갔었고, 들어올 때도 베란다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아까 수련이 자신을 찾았다는 이야기에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하나 하고 엄청나게 머리를 굴렸다. 이런 거짓말은 해본 적이 없었기에 더욱 당황했었다. 특히 수련이 방방 뛰는 동안 한 점 동요 없이 자신을 바라보던 하은의 눈빛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었다. 그러나 수련이 거실 테라스를 이야기하는 순간, 길이 보였다. 임기응변식으로 대답한 것이 다행히 통했는지 사태는 잘 마무리 된 것 같았다. 결국 단유는 자신이 원한대로, 의지한 대로 아이를 구해냈고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왔다. 자신은 그 아이를 도울 힘이 있었고, 그 힘을 잘 이용해서 목표했던 것을 이루었다. “하아.” 그럼에도 한숨이 끊이지 않고 나오는 이유는, 역시 하은의 눈빛 때문이었다. 단 한번도 하지 않았던 거짓말을 하는 순간, 어쩌면 하은은 자신의 거짓말을 눈치 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유는 다른 사람을 구한 대신, 자신을 구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당당하게 행동했다면 이렇게 가슴 답답할 리가 없었으니까. 침대 위에서 뒤척이던 단유는 명수가 들어와 코를 골며 잠이 들 때까지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그 시간, 하은 역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거짓말이야.”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거짓말일 확률이 높았다. 다른 사람은 모를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나름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사이여서 그런지, 자신은 아까 단유가 침착함을 잃고 당황해하던 것을 보았다. “어떻게 나갔을까?” 그 질문을 떠올리면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 재수 좋게도 거실에 앉은 사람들의 눈치를 봐 가면서 나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들어올 때는 또 다르지 않는가? 어떻게 들어올 때, 나갈 때 모두를 눈치 채지 못하게 움직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하은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걸 고민해봐야 답이 없었다. 물어봐야 답을 할 리도 없었고, 의미도 없었다. 지금 당장 의미가 있는 것은 단유가 건너 방에서 무사히, 그리고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는 사실이었다. 하은은 믿지도 않는 신을 떠올리며 기도했다. 부디 단유에게 떳떳하고 당당한 어른이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디 단유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생님이 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그래서 부디 단유와 오래오래 함께 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그 날, 하은은 자기 안에 생긴 감정이 ‘모성애’라는 것을 자각했다. **** 수련이 거실로 나오자, 소파 위의 사람들이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너 뭐 했어?” 수영이 수련을 노려보며 말했다. “나 아무것도 안했거든?” 수련은 투덜대며 예영의 옆에 풀썩 주저앉았다. 다시 거실에는 TV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만 먹먹히 울려 퍼졌다. 미녀들 사이에 앉아 있던 명수가 그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졸려. 저 먼저 자러갈게요.” 누가 봐도 어색한 발연기였지만, 멤버들은 명수를 막지 않았다. 예영이 명수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며 잘 자라고 인사를 해 주었다. 명수가 방으로 들어간 뒤, 소파 위에는 기묘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야, 하수련.” 지수가 목소리를 깔고 수련을 불렀다. 평소에도 군기반장 역할을 하던 지수였던 탓에 지수 아래로는 모두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련은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복잡한 탓에 지수의 부름에도 긴장 없이 대답했다. “왜요?” 지수의 눈에 빛이 서렸다. “너 분위기 파악 못하지? 지금 니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 그제야 싸늘한 분위기의 지수를 확인한 수련은 허리를 바로 펴고 손을 앞으로 모았다. “니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곧 죽어도 하려는 것 모르는 건 아니야. 이야기 했었지? 근데 너 지금 혼자야? 넌 갤럭시즈 아냐? 니 마음대로 행동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 했었잖아? 니 행동 하나하나가 갤럭시즈의 얼굴이 되고 이미지가 된다고 이야기 했었지? 그런데 왜 그래?” 지수의 말이 길어질수록 다른 멤버들의 자세도 경건해지고 있었다. 심지어는 가장 맏인 수영까지도 몸을 편하게 할 수 없을 것 같아 경직되고 있었다. 수련은 무릎 위에 올려진 손가락 하나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그랬지? 차라리 할 말 있으면 우리 있을 때만 하라고. 왜 팬들한테까지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못하고 그래?” 수련은 눈동자가 점차 붉어졌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입술을 꽉 깨물고 참아보던 수련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지수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조심하자. 알았지?” “네.” 겨우 지수의 말이 끝나고 다른 멤버들은 시선을 돌렸다. 어색한 시간. 수영이 마무리를 했다. “자자.” 수련이 하은과 나갔던 틈에 정하기라도 했는지, 어느새 거실 한 편에 준비되어 있던 이불들을 들고와 거실에 깔고 잘 준비를 했다. 수련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지수가 수련의 어깨를 툭툭 쳤다. “너 딱딱한 데서 못자잖아. 여기서 자라.” 지수가 소파 위를 가리켰다. 수련이 눈치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언니.” 지수는 말없이 베개를 집어 들어 소파 위에 올려준 뒤, 동생들이 깔아놓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불 끌게요.” 예영이 거실 불을 끄자, 어둠과 함께 정적이 내려앉았다. 수련이 몸을 조금 움직이자, 가죽 소파에서 뿌드득 거리며 작은 소음이 났다. 수련은 뒤척임을 멈추고 그 자세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어쩐지 소리를 내면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특히 자리를 양보했을 언니들한테 미안해서라도 움직일 수 없었다. 조금 불편한 자세가 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깊은 잠에 들 때까지는 움직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낮은 콧소리가 들렸지만, 깊이 잠든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수련은 그 시간동안 생각에 잠겼다. 지수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자신이 단유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었던 건지 기억이 났다. 달려가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지만, 지수의 서릿발 같은 기세에 눌려서 꼼짝도 못했다. ‘난 그저 오해를 풀고 싶었을 뿐이라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곧 죽어도 해야’ 하냐는 지수의 말처럼 수련은 반드시 해야 속이 풀렸다. 그렇지 않으면 조금 과장되게 말해서 미칠 것 같았다. 사실 과거에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데뷔를 앞둔 시기, 간간히 연습생 신분으로 인터넷 리얼리티 프로그램 등에 얼굴을 비추면서 곧 데뷔할 갤럭시즈를 홍보하는 데 앞장섰었다. 그리고 그 때 자신과 갤럭시즈를 향한 사람들의 관심을 댓글을 통해 확인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팬들을 통해 인기를 확인받으려 하는 것은 본능이자 의무였다. 그래서 동영상이 올라온 사이트의 댓글부터 관련 게시글에 올라온 댓글까지 일일이 확인하면서 즐거워하고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수련을 잘 안다며 올린 댓글이 눈에 띄었다. 그 글은 수련의 더러운 사생활과 과거라는 주제로 글을 올려 모함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비슷한 글들이 여러 사이트에 걸쳐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니야, 이건 거짓말이야!’ 처음엔 그 글에 답글을 달고 아니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진 모함과 비아냥거리는 글에 상처를 받았고 멘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장 처음 든 생각은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든 생각은 ‘누명을 벗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수련은 자신의 SNS에 장문의 글을 올렸다. 사람들이 이것을 읽고 사실을 깨닫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오히려 변명이네, 합리화네, 하면서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을 모함하는 글들에 더욱 신뢰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회사 차원에서 대응하기에 이르렀고, 최초 유포자를 잡는데 이르렀다. 회사에서는 말렸지만, 수련은 그 사람을 꼭 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사과를 들을 생각인가 싶었더니, 경찰서에서 그 사람을 만난 수련은 폭풍 같은 말을 쏟아내면서 자신이 결백하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야, 그만해. 저 사람, 자기가 다 지어낸 말이라고 이미 진술했어.” 그러나 수련은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그 당시, 그 과거에 자신이 뭘 했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았었는지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 여자 앞에서 결백을 주장했다. “죄송해요.” 이야기 끝에 여자가 너무 부러워서 그랬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수련은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부러워서 그랬다면, 스스로 노력을 해서 자신의 위치를 끌어올려야지, 왜 다른 사람을 억지로 끌어내려서 자신의 위치에 맞추려는 거죠? 그런 자격지심이 당신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거 아닌가요? 이 일이 어떻게 마무리될 지는 저도 몰라요. 회사에서 결정할 테니깐요. 하지만 어떤 결과든 이번 일을 반성하고 안하고를 떠나 그 생각부터 바꿔요. 당신이 바뀌어야 세상이 변하는 거예요.” 수련은 그렇게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 순간 수련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던 통렬한 쾌감은 잊을 수가 없었다. 오랜 시간 자신을 답답하게 하던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해방감과 엉켜있던 실타래를 깨끗하게 풀어낸 것 같은 성취감에 희열을 느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수련은 속에 있는 말은 참지 않고 뱉어내게 되었다. 오해받지 않고 살고 싶었고, 당당하게 살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은 모두 하면서 살고 싶었고, 상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반드시 해야 직성이 풀렸다. “말이 속에 쌓이면 몸이 무겁고, 몸이 무거우면 정신도 무거워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는 다 털어내려고요. 몸도 마음도 가볍게.” 수련의 직설과 독설에 시달리던 회사 사람들이 걱정이 올라가던 그 때, 대표와의 면담에서 수련이 한 말이었다. 대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회사에서는 니 맘대로 해라. 그것까지는 봐줄게. 하지만 밖에서는 절대 안 된다.” 하지만 수련은 종종 방송국이나 거리를 가리지 않고 직설을 하기 시작했고, 매니저와 멤버들이 그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의 사태에 까지 이르렀다. 사실 단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별 거 아니었다. “우리, 갤럭시즈가 얼마나 멋진 팀인지 알아? 다들 얼마나 오래 연습하고 고생해서 만들어진 팀인지 알아? 니가 그렇게 무시해도 되는 팀이 아니라고. 좋아하지 않을망정, 우리를 우습게 보는 건 절대 내가 용납할 수 없어.” **** 지수가 상체를 일으켜 소파 위에서 뒤척이는 수련을 보았다. 아마도 방금 수련이 한 말은 잠꼬대일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수련의 진심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하니까, 어쩐지 가슴이 찡하게 아린 느낌이었다. 옆에서 자는 동생들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일어난 지수가 소파로 다가갔다. 떨어진 이불을 들어 수련 위로 덮어주었다. 수련이 몸을 뒤척이자 소파가 거친 비명을 질렀다. “쟤 아까는 저 소리날까봐 움직이지도 않더라.” 지수가 뒤를 돌아보자 수영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더 자요.” “됐어. 차에서도 많이 잤잖아.” 수영이 일어나 다가왔다. “맥주 한 잔 할래?”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치 않았던 기상 덕분에 뜻하지 않게 받은 휴가를 나름 알차게 보내는 두 사람이었다. 창밖으로 여전히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약해진 눈보라가 창문을 간지럽히듯 살짝 닿았다 떨어져내렸다. 달빛인지 건물 외벽에 붙은 조명인지 덕분에 테라스 펜스 위에 쌓인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내일 스케줄 많겠죠?” “응.” “내일은 여기서 나가야겠죠?” “응.” “내일부터 또 힘든 하루가 시작되겠네요.” “응.” 그 뒤로 두 사람은 말없이 맥주를 홀짝였다. 하지만 두 사람 다 표정이 어둡진 않았다. 마치 두 사람이 바라보는 테라스 전경처럼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 [193] Don't cry for me(1) 아침이 되자 거짓말처럼 화창하게 갠 하늘에서 비쳐진 햇살에 온 세상이 하얗게 반짝였다. “우와, 저기 산이 아이스크림 같아. 그치?” 명수가 테라스에 발자국을 남기겠다고 뛰어다니다가 리조트 왼편으로 늘어선 왼쪽 산을 가리켰다. 단유는 테라스에서 쪼그리고 앉아 눈을 굴리고 있었다. “얘들아, 아침 먹으러 가자.” 하은이 하얀색 니트를 입고 나타났다. 명수가 단유가 굴리던 눈뭉치를 가리키며 녹지 않을까 걱정을 했지만, 단유가 걱정 말라며 명수를 안심시키곤 거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때 마침 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갤럭시즈 멤버들과 마주쳤다. “저희랑 함께 내려가요.” 하은의 말에 수영이 웃으며 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매니저 오빠가 내려오라네요. 같이 가시죠.” 그 때, 수련과 단유의 눈이 마주쳤다. 사실 수련이 꾸준히 단유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었던 것이지만, 단유는 어지간하면 그 시선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꽤 피곤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이, 꼬마. 왜 계속 피해?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하니?” “수련아!” “나 아무 말도 안했어요? 그리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잘 지내면 좋잖아요?” 수련이 짐짓 삐진 척을 하면서 툴툴대자, 멤버들이나 하은이나 모두 피식 웃음을 지었다. “가자, 밥이나 먹자.” 수련이 손을 내밀었지만 단유는 멀뚱히 서서 바라만 볼 뿐이었다. 수련의 눈초리가 살짝 변하려는 찰나, 명수가 쪼르르 달려가 그 손을 잡았다. “넌 왜?” 수련이 묻자 명수가 해죽 웃으며 답했다. “아무도 안 잡아주면 민망할 것 같아서요.” 그 말이 더 민망하다, 이 녀석아. 모두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수련이 살짝 볼을 붉혔다가 명수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고맙다, 이 녀석아.” 수련은 손을 앞뒤로 크게 흔들며 객실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다른 사람들이 줄줄이 따라 나섰다. 어제 저녁과 달리 로비는 꽤 한산했다. 데스크에 선 직원들은 한가한 듯 보였지만, 얼굴에 잔뜩 피곤함을 묻히고 있었다. 새벽에 청소를 끝낸 모양인지 로비는 깨끗하게 닦여져 어젯밤의 소란은 전혀 떠올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로비 한편에 놓여 있던 소파에 매니저가 축 늘어져 있다가 일행을 보고는 벌떡 일어서 반겼다. “잘 잤어?” “네. 오빠는요?” 그렇게 서로의 안부를 간략하게 묻다가 매니저가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 스케줄이 3개가 있는데, 오전 스케줄은 일단 취소를 해 놨다.” “우와!” 예영과 명지가 폴짝 뛰면서 즐거워할 때, 수영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매니저를 바라보았다. “왜요?” “지금 길을 틔우고는 있다는데, 워낙 넓은 지역에 눈이 많이 쌓인데다가, 어떤 도로에서는 무리하게 길을 나섰다가 교통사고가 크게 나서 쉽게 길이 안날 것 같다고 그러네.” 매니저가 로비를 가리키며 발언의 출처를 밝혔다. “오후에는 갈 수 있는 건가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일단 10시까지는 봐야 할 것 같다. 문제는 오늘 오후에 다시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는 거지.” “정말요?” 역시 매니저가 로비를 가리켰다. 로비를 바라보니, 수화기를 붙잡고 있던 직원 한 명이 뭔가를 열심히 쓰면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 “기상청에서도 지금 난리란다. 어제 폭설도 제대로 예측을 못했는데, 오늘 오후의 날씨도 오락가락인가 보더라고.” “에휴, 무슨 기상청이 그래?” 지수가 혀를 차며 팔짱을 끼자, 매니저가 손뼉을 치며 다시 주의를 환기시켰다. “자, 일단 밥부터 먹자. 너희가 지금 이럴 걱정 할 때니? 모처럼인데 푹 쉬고 있으라고.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오빠, 우리가 스케줄 소화를 못하면 쫄쫄 굶어야 하는데, 마음이 편할 리가 있어요?” “하루 쉰다고 뭔 일이나 나겠니? 그리고 요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했잖아? 그냥 휴가 받은 셈 쳐.” 그때까지도 명수의 손을 잡고 있던 수련이 툴툴거리며 말했다. “오빠가 할 소리는 아니네요.” 하긴 매니저가 초년도 데뷔한 걸그룹에게 할 소리는 아니었다. 지금 누구보다 더 많이 얼굴을 들이밀고 이름을 알려야 할 시기인데, 이런 시골에 몸을 숨기고 있어서야 될 일도 안 될 것이다. “아, 맞다. 우리 인터넷 방송이나 할까?” 명지가 참신한 아이디어라는 듯이 말을 꺼냈다. 그러자 다른 멤버들이 반색을 하며 박수를 쳤다. 요즘 어지간한 아이돌들은 다 한다는 인터넷 방송을 갤럭시즈도 한 번 한 적이 있었다. 성적은 처참할 정도였지만, 몇 안 되는 팬들과의 소통이 그렇게 반가운 적도 없었다. “오빠, 저희해도 되요?” 매니저는 궁리를 해보았다. 즉흥적인 제안이지만, 나쁠 건 없다. “알았어, 일단 준비해볼게. 너희들은 식사부터 하고 와. 그리고 방으로 미래 올려보낼게.” 수련이 반색을 하며 물었다. “미래 왔어요? 현철 오빠도요?” 수련이 코디네이터와 로드매니저의 안부를 묻자, 빨리도 묻는다며 타박하며 식당으로 몰았다. 매니저는 하은을 뒤에서 붙잡고는 양해를 구했다. “들은 바대로 사정이 이러니 좀 더 양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결국 방을 구하지 못해, 매니저는 찜질방에서 새우잠을 잤다. 하은이 그냥 다 같이 올라오지 않겠느냐고 묻자, 매니저가 격렬히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까지 하면 저희가 너무 실례죠. 저희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혹시 저희 애들이 실례를 끼친다면 바로 말씀 주십쇼. 제가 바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아니에요. 다들 너무 좋으신 분들이시던데요.” 겸손한 태도로 일관하던 갤럭시즈 멤버들을 칭찬한 하은은 아이들을 데리고 식당으로 향했다. 매니저는 곧바로 스태프들을 찾아갔다. 방송준비를 하려면,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았다. **** “우와, 여기 누나 얼굴 나와요!” “쉿! 지금은 조용히 지켜봐.” 갤럭시즈 멤버들이 소파에 앉아서 방송을 하고 있을 때, 명수와 단유는 멀찍이 주방 식탁에 앉아서 그들을 구경했다. 사실 단유는 방으로 들어가서 책이나 읽고 싶었지만, 명수가 꼭 붙들고 놔주지 않는 바람에 강제로 촬영현장을 관람하게 되었다. 명수는 핸드폰과 거실 소파 위의 멤버들을 번갈아 보면서 신기해했다. 옆에 섰던 매니저가 슬쩍 보더니 하트를 누르라고 넌지시 주문을 넣었다. 그 시간, 갤럭시즈는 화기애애한 장면을 연출하면서 근황을 소개하고 있었다. “눈이 너무 많이 와가지고 발이 묶였어요.” “여기 댓글 보니까, 눈 많이 온 곳이 많나 봐요. 동네에 눈이 많이 내려서 거기서 썰매 탔다는 사람도 있어요.” “우와, 진짜요? 우리도 썰매 타고 싶다.” 각 멤버들이 번갈아가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수련은 살짝 살짝 미소를 지을 뿐 특별히 많은 말은 하지 않았다. 가끔 ‘우와’ 나 ‘그렇죠?’ 같은 리액션만 간간히 조미료처럼 연출하면서 방송에 임했다. “…그래서 방을 못 구해가지고 있는데요, 고마운 분의 도움으로 이렇게 편하게 쉴 수 있게 되었답니다.” “그럼 이 자리에서 한 번 인사드릴까요?” “그럴까? 하나 둘 셋, 하은 언니 고맙습니다!” “아, 그리고 여기 저희 말고 다른 분도 계신대요, 한 번 소개해 드릴까요?” “그럴까? 여기 정말 귀여운 남자가 같이 있거든요? 부럽죠?” “우리 어제 같이 앉아서 TV도 같이 봤어요. 나란히 앉아서.” 그리고 자기들끼리 까르르 거리면서 웃고 난리가 났다. 매니저가 슬쩍 눈치를 보다가 하은에게 물었다. “애들 방송에 나와도 상관없죠?” “뭐, 상관은 없겠죠? 그래도 애들한테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명수가 냉큼 대답했다. “저 나가고 싶어요!” 명수의 목소리가 조금 컸는지 멤버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손을 번쩍 든 명수를 바라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명수를 향해 손짓을 했다. 명수가 핸드폰을 들고 조르르 달려가 명지가 벌려준 틈으로 쏙 파고 들어 자리를 잡았다. 지수가 카메라를 향해 명수를 소개하며 인사를 권했다. “안녕하세요. 인평초등학교 5학년 인명수라고 합니다.” 씩씩하고 발랄하게 대답하는 명수의 모습이 꽤나 귀여웠던지 채팅창에 난리가 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단유는 턱을 괴고는 그 모습을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넌 나가고 싶지 않아?” 라는 매니저의 물음에 “괜찮아요.” 라고 간단하게 대답하는 단유였다. 굳이 카메라 앞에 서서 할 말도 없었고 딱히 신이 날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기 가운데서 카메라를 바라보는 일보다는 여기서 저 모습을 구경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멤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보다. 손짓을 해도 오지 않자, 수련이 벌떡 일어나 단유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 “싫어?” 대놓고 물으면 단유로선 쉽게 대답할 수 있다. “예.” 수련이 머리를 긁적이다가 하은을 바라보았다. 하은 역시 어깨를 으쓱였다. 수련이 무릎을 꿇고 단유와 시선을 마주쳤다. “도와줄래? 사실 지금 명수가 나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꽤 좋아한단 말이야. 너도 나오면 아마 우리한테 도움이 많이 될 거 같다. 그러니까 좀 도와줘.”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련을 따라갔다. 매니저가 대신 하은에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제가 뭘요. 애들이 결정한 건데. 그래도 뜻밖이네요. 단유가 저기 갈 줄은 몰랐는데.” **** 단유의 얼굴이 카메라 앵글에 걸리자 채팅창에 서서히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우와, 여기 봐. 단유 인기 좋은가봐?” 지수와 명지가 채팅창 반응을 살피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너보고 잘생겼단다. 여러분, 사실 화면보다 실물이 더 좋아요.” “우와, 하트 수 올라가는 거 봐? 질투난다, 너.” 그러거나 말거나 단유는 카메라를 담담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그 자연스러움에 은근히 감탄한 매니저가 슬쩍 물었다. “카메라가 꽤 익숙한 모양인데요?” “글쎄요, 아! 예전에 모델을 했다던가? 그랬던 거 같은데.” “모델이요?” 하은이 피식 웃으면서 시립도서관의 홍보포스터에 잠시 섰던 일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하은 본인도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었는데, 포스터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이야기를 덧붙였다. 호기심이 생긴 매니저가 휴대폰으로 검색을 해보니, 의외로 단유의 이름으로 몇 개의 블로그 사진이 있음을 알았다. “TV출연한 적이 있네요?” 매니저가 놀라면서 연신 손가락을 움직여댔다. 그러는 사이, 채팅창에도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너, 말 좀 해보래.” 단유는 수련을 힐끔 보았다가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12살, 김단유라고 합니다.” “여러분, 되게 잘생겼죠? 근데요, 보기랑 다르게 말수도 적고요, 되게 점잖아서요. 우리 매니저 오빠보다 더 점잖아요.” 멤버들이 박수를 치며 리액션을 취할 때, 지수가 채팅창에서 어떤 글을 읽었다. “어? 단유가 TV에 나온 적 있지 않냐고 그러는데요?” “너 TV에 나온 적 있어?” 그 질문에 단유 대신 명수가 대답했다. “얘, 옛날에 TV나온 적 있어요.” “진짜? 언제? 왜?” 이야기의 주제가 갑자기 단유로 바뀌었다. 단유는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유는 그 당시 자신이 저지른 짓이 떠올라서였다. 마법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해당 촬영분은 통편집이 되었고, 작가 누나가 꽤 어두운 얼굴을 했었던 기억이 있었다. 무엇보다, 조심성 없었던 자신에 대한 자책감이 남아서 그 때 일은 별로 거론하고 싶지 않았다. “어? 너 영재TV에 나온 적 있어?” 누군가의 제보로 단유가 나온 방송이 소개되었다. “너 도서관 모델도 했다고 그러는데?” 단유가 무언가 수긍하거나 대답을 하기도 전에 제보가 이어졌다. “너 실검에도 오른 적 있다는데?” 단유는 그냥 여기서 일어나 밖으로 나갈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단유가 입을 다문 사이에 신이 난 사람은 명수였다. “전부 다 사실이에요. 그래가지고 단유가 우리 학교에서 되게 유명했었어요.” 단유에 대한 제보를 읽는 재미가 남달라서 모두들 방송은 제쳐두고 채팅창만 바라보는 일이 벌어졌을 때, 모두의 낯빛이 변하는 글이 올라왔다. 「김단유 보육원출신이라는데?」 ======================================= [194] Don't cry for me(2) “이 친구 되게 유명하네요. 어쩌면 저희보다 더 유명하겠는데요?” 수영이 목소리를 한 톤 올려 밝게 웃었다. 수영의 의도를 읽은 지수가 역시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갤럭시즈 방송이 아니라 단유군 방송이 되는 건가요?” “주객전도라고 하죠?” “오오~!” 두 사람이 쿵짝을 맞추며 분위기를 띄었다. 어차피 수없이 많은 채팅글 중의 하나였다. 읽지 않고 넘어간다고 해도 별 무리는 없다. 티만 내지 않는다면. 그리고 단유와 명수는 채팅창을 보고 있지 않으니까, 자기들끼리 적당히 걸러서 읽고 진행한다면 방송에 문제가 없었다. “우리보다 유명한 단유군에게 질문하나 해 볼까요?” “그럴까요? 그럼 단유군? 단유야? 뭐라고 불러야 하지?” “우리보다 선배니까 단유선배?” 멤버들이 웃음을 터뜨리자, 단유는 볼을 긁적이면서 멤버들에게 그렇게 부르지 말아달라는 의미의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그런다고 알 턱이 있나? 명지가 은근한 미소를 띤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선배가 보기에 우리 중에 가장 예쁜 사람은 누구?” 나름 짓궂은 질문이지만, 또 어린아이의 대답에 상처받을 일도 없을 테니 무난하다 싶은 질문이었다. 단유가 다시 멤버들을 바라보다가 문든 한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 멤버는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방송을 하는 다른 멤버들과는 달리 핸드폰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핸드폰의 좁은 액정 위로 무수히 많은 채팅창 글들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오, 지금 채팅창에서 단유가 수련이한테 반한 거 아니냐고 그러네요?” “이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우리 단유 선배는 수련이만 보네요? 수련이가 그렇게 예쁜가? 시선을 못 뗄 정도로?” 수영과 지수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화제를 돌리는데 성공을 했는데 사실 마음은 편치 않았다. 편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조마조마했다. 지금 수련이 채팅창에 올라오는 글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이유는 아마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들이 올라오고 있기 때문이리라. 저 시한폭탄 같은 수련이 언제 폭발할까 두려운 마음에 지수는 저도 모르게 말이 빨라지고 있었다. “단유야, 수련이 그렇게 예뻐? 어떤 점이 예쁜지 이야기해줄래?” 손에 든 핸드폰을 보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카메라에는 표정이 잘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사실 수련은 채팅창 중간 중간에 ‘단유 보육원 출신’, ‘고아라는데’ 같은 글들이 보일 때마다 눈썹을 팅기며 입술을 깨무는 중이었다. ‘보육원 출신이면 어떻고 고아 출신이면 어떻다고 이런 글을 다른 사람들도 보는 곳에다가 버젓이 올려? 인신공격 아냐?’ 수련의 머리에 열이 차오르고 있을 때였다. “저 누나 얼굴에 흥미로운 점은 있어요.” “응?” 수련이 고개를 쳐들었다. 단유가 수련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멤버들도 단유의 말에 벙찐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단유가 말을 계속 이었다. “일단 눈썹의 좌우 길이가 달라요. 그리고 눈 크기도 좌우가 미세하게 다르고요. 그 때문에 전체적으로 좌우의 균형이 살짝 안 맞는 느낌이에요. 게다가 코끝에서 눈까지의 거리가 눈꼬리 사이의 거리와 1:1일 때 비율적으로 안정적이라고 보는데, 수련 누나는 코가 조금 길어요. 코가 높은 편이지만, 대신 비율적으로 손해네요. 입술은 가로 세로의 길이 비가 눈과 코 사이의 길이 비와 비슷해야 좋은데, 입술의 세로가 조금 더 길어서 두껍다는 인상을 주죠. 정확히 수치를 잴 수 있다면 좋겠지만, 대략 1:2.5와 1:3 사이의 비율인 것 같아요. 광대와….” 단유가 담담한 어조로 수련의 얼굴을 조각조각 해체하듯 분석을 하자, 멤버는 물론 바라보던 사람들 모두가 입을 쩍 벌리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심지어는 채팅창까지 글이 멈출 정도였다. “얼굴 전체 길이 비는 대략 1:1.2 정도 되는데 대각선 비율까지 고려하면 거의 1:1.1이 되요. 그래서 얼굴이 동글동글하다는 인상을 주죠. 아마도 그 때문에 누나가 옆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게 아닌가 싶네요.” 단유가 분석을 마쳤으나,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당사자인 수련도 조금 전까지 읽고 있던 채팅창의 내용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였다. 다만 단유의 말을 1도 이해하지 못한 명수만이 단유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무슨 말이야? 그래서 누나가 예쁘다는 거야, 안 예쁘다는 거야?” “예쁘고 안 예쁘고는 개인의 취향이지. 다만 내 기준에는 불균형적인 비율이 보인다는 거고.” “불균, 뭐 그런 비율이 보이면 안 예쁜 거야?” “아니, 그래도 예뻐 보일 수도 있겠지. 그거야 사람마다 다른 거 아니겠어? 사람마다 좋아하는 색깔이 다른 것처럼, 좋아하는 얼굴도 다른 거야.” 채팅창에 글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팩트폭력’이란 말부터 시작해서 ‘성형외과 출동’, ‘사장님이 잡으러 갑니다’, ‘성형외과 예약’, ‘미래 성형의 등장’ 등등 온갖 이야기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우와, 너 그런 거 어떻게 알아?” 멤버들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수습한 예영이 단유에게 물었다. “제가 수학을 좋아하는데요, 어떤 형이 가르쳐줬어요. 여러 가지 숫자로 수식을 만드는 것처럼 일상에서 벌어지는 현상도 수학으로 읽을 수 있다면 재밌지 않겠냐고 하셔서요.” 숫자로 수식을 만드는 것과 얼굴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일이 어떻게 대등한 관계로 묶일 수 있는 것인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지수는 일단 수학을 좋아한다는 단유의 말에 포커스를 맞췄다. “단유는 수학을 좋아하는 거야?” “예.” “우리학교 1등이에요.” 명수가 또 끼어들었다. 아무렴, 저 정도면 누가 봐도 범상치 않은 실력이라 하겠다. 그때 쯤 충격에서 벗어난 수련이 발끈하며 말했다. “근데 왜 나만 해? 다른 사람도 해줘야지? 나만 하면 나만 이상한 사람인 것 같잖아? 무슨 불균형이라 그러고 좌우가 안 맞느니 그러고.” 지수가 수련을 달랬다. “워워, 거기까지! 우리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죠, 여러분?” 채팅창에서는 ‘다른 사람도 해라’, ‘수영이 먼저 해 달라’, ‘예영이 해 달라’ 난리가 났다. 그 와중에 ‘수련이 진심 흥분함’, ‘수련 1패’와 같은 글들도 간간히 섞여 올라왔다. “이것 봐, 다른 사람들도 하라잖아! 언니 먼저 해!” 수련이 흥분하자, 지수가 여유로운 웃음으로 수련을 달랬다. “우리 방송시간이 넉넉하지 않아요. 이제 곧 종료할 때가 됐는데 아직 우리 할 이야기 많지 않아요?” 지수는 채팅을 싹 무시하고 진행을 하려했다. 그때 단유가 카메라를 가리키며 말했다. “수련누나가 화면에 비쳐질 때 보면 왼쪽 얼굴이 드러나는 쪽을 선호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오른쪽 얼굴이 드러날 때가 좀 더 비율이 좋아 보이는 면이 있어요. 왜냐하면 카메라 렌즈의 왜곡현상 때문인데요….” 단유의 말이 이어지면서 다시 채팅창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매니저가 놀란 눈으로 하은을 바라보았다. “저 아이는 어떻게 저런 걸 아는 거죠?” 하은으로서도 할 말이 없었다. 여태 함께 살면서 저런 식으로 여자의 얼굴을 낱낱이 뜯어서 설명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문득 자신의 얼굴도 저렇게 분석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원래 수학을 좋아하고 잘 하는 친구긴 해요. 그리고 지금 이야기를 들어봐도, 모두 수학적인 접근법이죠. 비록 단순한 비율론이지만. 문제는 저 비율의 상대적 기준이 필요한 법인데….” 혹시 나를 기준으로 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얼핏 스치고 지나갔다. 실제 단유가 기준으로 삼은 것이 신의 은총을 받은 이의 얼굴임을 모르는 하은은 그녀 나름대로 이해한 점을 매니저에게 설명했다. “예를 들어서, 이쪽 눈썹과 저쪽 눈썹 사이의 거리를 기준으로 눈썹 끝에서 코끝까지의 거리를 비율로 재고 있잖아요? 근데 이게 어느 정도의 비율일 때 보기 좋은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고 있어요. 들어보면 흔히들 말하는 황금비율을 두고 말하는 것 같지는 않고 말이죠. 뭔가 기준이 있으니까 손해라느니, 불균형이라느니 말을 하는 것 일 텐데, 그 기준을 모르겠네요.” 매니저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 그렇군요.” 어쩐지 그 선생에 그 제자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들어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를 저리도 자연스럽게 이야기할까 싶었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점은 채팅창에 올라왔던 글을 하은이나 단유는 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멤버들도 기민하게 대처해서 단유가 상처를 받지 않도록 했다. 덕분에 고마운 사람들에게 미안해 할 일이 없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다만 애초 「갤럭시즈의 불편한 휴가」라는 장난스런 제목의 방송이 진짜 ‘불편’해지고 있다는 점은 불만이었다. **** 방송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그러나 애초에 공지된 시간을 오버할 수는 없었기에 매니저의 지시에 따라 방송을 마무리했다. “우리 다음에 또 단유 데리고 방송하면 재밌겠다, 그쵸 여러분?” 채팅창에는 2탄을 방송하라는 글이 쇄도했다. “저희도 그러고 싶은데, 사실 여기 계신 선배님이 워낙에 바쁘신 분이라 될지 모르겠네요. 그렇죠?” 예영이 단유의 어깨를 폭 안으며 애교를 부리자, 단유가 얼굴을 붉혔다. “어머, 우리 선배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부끄럼 타는 거야?” 명지가 손뼉을 치며 좋아하자, 단유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하지만 단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지수가 주위를 환기하며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수영이 마지막 멘트를 남긴 뒤 손을 흔들면서 방송을 마쳤다. 카메라가 꺼진 뒤, 매니저가 다가왔다. “급마무리였지만, 어쩔 수 없었어. 시간이 정해져 있었으니까. 아무튼 다들 수고했어. 단유랑 명수도 고생 많았어.” 지수가 손부채질을 하며 끼어들었다. “오늘처럼 가슴 조마조마한 적이 있었나 몰라요. 그렇죠, 언니?” 수영이 동감한다는 눈빛으로 수련과 단유를 바라보았다. “수련이 저 기집애는 언제 폭발할까 무서워서 그랬다치고, 단유 너도 어쩜 그렇게 말을 잘 하니?” 너무 잘해서 하마터면, 성형상담 방송이 될 뻔 했다. 그것도 이제 고작 12살이 된 아이에게 성형상담을 하는 촌극이. “죄송합니다.” 단유는 고개를 숙였다. “아냐 아냐, 너무 잘했어. 덕분에 방송 재미있었잖아.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우리 방송 재밌다고 댓글도 많이 남겼고 말이야. 그리고 마지막에 수련이 카메라 포지션까지 챙겨줬다고 사람들이 반응이 좋았어.” “덕분에 컨텐츠 있는 방송이 된 셈이지.” 매니저는 단유의 등을 토닥이며 웃음을 지어주었다. 다른 멤버들도 명수의 단유를 토닥이면서 덕분에 방송 잘 됐다고 고마워했다. 명수야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들뜬 상태라서 표정이 밝았지만, 단유는 평소의 담담한 표정보다 한층 더 어두워진 기색이었다. “신경 쓰여?” 하은이 단유 앞에 다가가 물으니 단유가 속을 털어놓았다. “괜한 말을 한 것 같아서요. 사실 수련누나가 표정이 어둡길래 왜 저런 표정을 지을까 생각하면서 바라보고 있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됐어요.” “근데 언제부터 했어? 책에서 읽은 거야, 아니면 다른 사람한테 배운 거야?” “아까 말한 그대로예요. 수식 만드는 것처럼 그냥 숫자로 표현하는 방법을 찾다가 발견한 거요. 예를 들어서 차번호가 8192면 81이 9의 제곱이라는 수식이 안에 들어있는 거잖아요? 그런 수식 찾는 것처럼 해 본 거예요.” 결과적으로 놀이의 일종이란 소리였다. 하긴 단유가 컴퓨터나 핸드폰이 없던 시절, 딱히 즐길 만한 게 없던 그 때 할 수 있는 놀이라곤 지적유희정도의 놀이 밖에 없었으리라. 하은은 단유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잘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고맙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보니 수련이 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진심이야. 그리고 나, 니 말에 별로 신경 안 쓰니까 걱정하지 말고.”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련이 말을 계속 이었다. “그리고… 아니다. 오늘 정말 잘했어.” 멤버들은 수련이 말을 하다 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수련이 말을 가리는 모습을 볼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듯. 주변을 정리한 매니저가 말을 꺼냈다. “자, 이제 각자 짐 정리해. 30분 후에 내려갈 거야.” “나갈 수 있대요?” “그래. 오후 늦게 눈이 올지 모른다니까, 그 전에 출발하기로 했다.” 멤버들은 서로 손뼉을 부딪쳐가면서 환호했다. 쉬는 것도 좋지만 역시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팬들을 직접 만나는 일이 더 좋았다. 아직까지는 더 열심히 뛰어야 할 갤럭시즈였으니까. “하은씨, 고마웠어요. 덕분에 푹 쉬다 갑니다.” “별 말씀을요. 저희도 즐거웠어요. 너희도 그랬지?” “예!” 명수가 소리를 빽 질렀다. 거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 [195] Don't cry for me(3) 갤럭시즈 멤버들은 단유네에게 인사를 건네고 떠났다. 잠깐이나마 북적대던 거실에 휑하게 변하니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 들 정도…. “누나들, 보고 싶다. 그치?” 명수가 소파에 앉으며 짐짓 어른스러운 말투로 아쉬움을 토로했다. “아니. 조용해서 좋아.” 취향이 명확한 단유는 단호하게 감정을 표현했다. “그래? 난 누나들이랑 같이 이야기하는 거 재밌던데.” 단유는 머리를 흔들었다. “난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아.” “좀 그런 거 같더라. 난 니가 그렇게 말 많이 하는 거 처음 봤잖아. 아까는 깜짝 놀라가지고 내가 계속 입을 이렇게 벌리고 있었는데, 봤어? 하마터면 침 흘릴 뻔 했어.” 그렇게 말하면서 진짜로 침을 흘리려는 명수의 턱을 붙잡고 올렸다. “하지 마. 무슨 뜻인지 알겠어.” “흐흐흡.” 장난기 한 스푼을 눈에 담은 명수가 단유의 손에 제압된 상태로 웃음을 흘렸다. 그 때 배웅을 하고 돌아온 하은이 거실로 들어오자, 명수가 손을 들고 물었다. “누나, 저희 이제 나가서 놀아도 돼요? 썰매 타러 가도 돼요?” 하은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단유와 명수를 데리고 바로 옆의 썰매장으로 간 하은은 두 사람이 지칠 때까지 눈썰매를 타는 동안, 눈썰매장 근처의 휴식처에서 두 사람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서는 오전 중에 있었던 인터넷 방송 당시의 일들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었다. 매니저는 들키지 않으려 했겠지만, 사실 하은 역시 채팅창에 올라온 글 중에서 단유가 보육원 출신이라는 글이 올라온 것을 목격했었다. 고아인 것이 죄는 아니지만, 비아냥이나 까닭모를 지적의 대상이 된다면 분명 상처가 될 일이었다. 다행히도 단유나 명수는 그 내용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문제는 하은은 그 내용에서 그 동안 몰랐던 현실을 깨닫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돌보고 있는 아이들이 바로 고아라는 사실. 자신이야 세상의 시선에 신경 쓰는 스타일도 아니어서 자신을 두고 뭐라 하는 것은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저 아이들에게 쏟아지는 편견의 시선은 불편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갤럭시즈 멤버들은 표정 변화 없이 유연하게 상황을 넘겼다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어땠을까? ‘자신 없어.’ 물론 그들이 방송에 있어서는 프로이고―그들이 갓 데뷔한 신인 걸그룹이긴 하지만, 하은에 비하면 프로인 것은 사실이니까―상황 대처에 발 빠르게 대처하도록 교육받는 아이돌들이란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단유에 대한 배려가 돋보였던 순간이었다. 반면 자신이었다면 불같이 화를 내거나 혹은 주변 사람들이 모두 알아차릴 정도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대처할 말도 생각해내지 못해 어리바리한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방송이 아니라, 현실에서, 마트에서, 거리에서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어떻게 행동할까? 자신은 과연 의젓하게 대응할 수 있을까? “하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선생님, 혼자 있으니까 심심해서 그러죠? 같이 가요.” 언제 왔는지 명수가 눈썰매를 옆구리에 끼고는 서있었다. 옆에 선 단유도 명수와 같이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었다. “재밌어?” “네!” “단유는?” “재밌어요.” 단유가 모처럼 미소를 띠었다. 확실히 단유는 머리를 쓰는 일을 좋아한다. 하지만 몸을 쓰는 일을 싫어하진 않았다. 싫어했다면, 아침마다 운동하러 다니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가끔 단유가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늘 부지런하고 자기 맡은 일은 누가 뭐라든지 묵묵히 해내는 모습을 보면 12살처럼 보이질 않았다. “그럼 선생님도 같이 타 볼까?” 하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수가 히죽 웃으면서 하은의 팔을 붙들었다. “너도 잡아!” 명수의 말에 하은과 단유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하은이 팔을 내밀자 단유가 그 손을 잡았다. 하은은 단유의 손을 꼭 붙잡아 주었다. **** 짧은 시간이지만 별 일을 다 겪고 집으로 돌아온 세 사람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단유는 다시 일상의 루틴대로 방에 들어가서 책을 읽고, 명수는 호빵과 놀다가 공원에 공을 차러 갔다. 하은은 거실에 홀로 남은 호빵을 보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휴가 잘 다녀왔다고 보고하는 거지.” ―그저께도 전화 해놓구선, 무슨. 주영에게는 둘째 날, 갤럭시즈를 배웅한 뒤에 전화를 했었다. 눈이 많이 왔다는 사실 때문에 걱정하던 주영에게 안부를 전하는 전화였다. ―정말 무슨 일인데. “사실은….” 하은은 어렵게 말문을 뗐다. “나, 이거 그만둬야 할 거 같아.” ―…응? 뭐라고? 잘 안 들렸어. “들었잖아?” 주영은 자신이 들은 바를 믿을 수 없었기에 끝내 되물었다. 휴가까지 잘 지내고 온 마당에 왜 갑자기 그만둔다는 거지? 하지만 하은과의 통화가 길어지면서 주영은 점점 고개가 숙여졌다. 하은의 고민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평소 주영이 알던 하은은 가벼운 친구였다. 진짜 가벼운 것이 아니라 가벼운 척을 하는 거였지만 말이다. 보이는 것과 달리 하은은 소위 영재 중의 영재였던 아이였고, 과거의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조기 대학 졸업까지 해낸 친구였다. 그러나 타인과 진심으로 교류하는 법에 대해 무서움을 느끼는 친구여서 방황을 하던 차에 주영이 가벼운 마음으로 과외교사직을 권했고, 상대가 아이라는 사실에 마음의 장벽이 낮았던 하은이 수락을 했던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하은은 평소 다른 사람들에게 느끼던 마음의 장벽과는 다른 벽을 만났다. 그리고 지금 그 벽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이었다. “버거워?” ―응. 내가 함부로 아이들을 가르쳐서는 안 될 것 같고, 그래. 내가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 같아서 미안하고 그래. 너한테도 그렇고. “…언제까지 피할 순 없잖아? 이번 기회에 마음 다 잡고 이겨내 보는 건 어때?” 잠시 수화기에서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바닥을 긁는 숨소리가 들리더니 하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야. 이번에는 이겨보려고. “응? 무슨 말이야?” 하은은 자신의 생각을 천천히 밝혔다. ―제대로 공부를 하고 준비가 돼야 아이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지금으로서는 누가 누굴 챙기는지도 모르겠고 말이야. “지금 애들 보면서 해도 되잖아?” ―안 돼, 지금은. 내 자신이 어떤 결정도 자신 있게 내릴 수가 없어. 어떤 게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안 되는지를 판단할 자신이 없어. 이대로면 아이들한테 폐만 될 거 같아. 난 그러기 싫어. 주영은 하은을 설득할 수 없었다. 하은의 생각은 꽤나 확고했고 고집스러웠다. “아이들이 만약 널 떠나보내기 싫어하면?” ―…그래도 가야 돼. 아이들을 위해서. 통화 중에 몇 번이나 한숨을 내셨는지 모를 정도로 하은은 고민을 했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고민 끝에 나온 결정을 주영은 무시할 수 없었다. “재훈 선배랑 이야기해보고 결정하면 안 될까?” ―상관없어. 하지만 어쨌든 되도록 빨리 아이들을 잘 돌봐줄 사람을 찾길 바랄게. 한숨이 전염되었는지, 통화를 마친 주영은 이보다 더할 수 없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셨다. 그리고 옆을 돌아보았다. 돌아서서 창을 바라보던 재훈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들으셨죠?” 재훈은 투명한 채광창 위로 손을 뻗었다. 차가운 겨울의 태양은 그 빛마저 차갑다.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오는 건 진리지. 그리고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야. 누구나 각자의 계절을 보내며 성장을 하지. 하은이도 이제야 그 겨울에서 벗어날 준비를 하는 거야. 꽤… 오랜 겨울을 보내던 친구였으니까, 우린 하은의 결심을 응원해줘야겠지.” 주영은 모처럼 진지한 재훈의 말을 경청했다. “다른 사람 구할까요?” “…일단 그렇게 해야겠지.” 창 밖의 메마른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떨어질 낙엽도 없어 걸릴 것도 없는데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는 애잔하기 그지없었다. **** “…그래서 선생님이 당분간 떠나야 될 것 같아.” 하은이 울컥하는 마음을 억누르며 이별의 말을 전했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단유와 명수가 서로 쳐다보았다. “사실 선생님이 너희들한테 잘 못해준 거 같아서 말이야. 어쩌면 나보다 더 좋은 선생님이 와서 너희를 봐주는 게 너희들한테 더 큰 도움이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단유와 명수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너희도 잔소리만 하는 선생님은 싫을 거 아냐? 그치?” 마치 세상에서 가장 웃긴 농담이라도 한 것처럼 깔깔거리며 웃는 하은을 여전히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두 사람이었다. 웃음이 잦아들며 머쓱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하은에게 명수가 물었다. “그럼 이제 못 보는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니고. 어쩌면… 가끔씩 찾아올 지도 몰라. 그 때 선생님이 명수 너 공부 잘하나 못하나 계속 검사할 거니까, 평소에 열심히 공부해 둬야 해. 알았니?” 명수는 여전히 뚱한 얼굴이었다. “선생님이 떠난다니까 슬퍼?” 하은이 슬픈 미소를 지으며 명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명수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했다. “슬픈 것도 있는데요, 그냥 실감이 안 나서요.” “왜?” “모르겠어요.” 단유가 말했다. “그래서 언제 돌아오실 건데요? 말씀대로라면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신 다는 이야기 아닌가요?” “그게… 공부를 마치면 바로 돌아오긴 할 건데,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네.” 교육학을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관건은 사실 마음의 공부였다. 자기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고 아이들을 진심으로 대할 수 있을 때 돌아올 수 있을 터. 그런데 문제는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는 사실이다. “기다릴게요.” “응?” “공부가 끝나면 돌아오시라고요. 기다려 드릴게요.” 명수가 씩씩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기다리는 거 잘해요.” 하은은 주먹을 꼭 쥐었다. 고개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어금니에 몰래 힘을 주었다. 그리고 조금씩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래. 그럼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게, 빨리 돌아올게.” “그러세요.” 단유가 담담히 말을 건넸다. “가끔 와서 스테이크도 많이 사주고 가세요. 알겠죠?” 명수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괜히 자기 배를 퉁퉁 두들겨 보이면서. 단유가 소파에서 일어나 하은에게 다가왔다. 하은과 단유의 시선이 가까워지다가, 단유가 하은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두 손으로 등을 감쌌다. 단유의 온기가 하은에게 전해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그렇게 쉽게 안 울어요.” “나두, 나두.” 명수도 발딱 일어나서는 하은에게 달려들었다. 하은이 두 아이를 감싸 안으며 조용히 되뇌었다. “고맙다. 고마워.” 눈앞이 흐려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를 물고 참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놔두었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었다. **** 6학년이 시작하기 전, 새로운 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왔다. 과거 보육교사로 일한 적이 있다는 아주머니 선생님은 포근한 인상으로 두 아이를 반겼다. 아이들의 일상을 시간표로 정하고, 그 시간표에 맞춰 아이들이 활동할 수 있게끔 도와주었다. 강제로 정한 시간이 아니라, 일주일간의 관찰과 개인 상담을 거친 후의 결정이었기에 두 사람 다 불만은 없었다. 다만, 명수가 불만을 가진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안 돼요?” “안 돼요.” TV리모컨 앞에서 선생님은 단호했다. “왜요?” “아이들이 볼 만한 내용이 아닌 걸?” “히잉.” 명수가 투정을 부렸지만, 선생님은 방긋 웃으면서 명수를 방으로 돌려보냈다. 명수 뒤를 쫓아가는 호빵의 꼬리가 힘차게 흔들렸다. “호빵아, 이리 와.” 선생님이 부르자, 금세 돌아서서 선생님에게 달려가는 호빵이었다. “배신자.” 명수가 투덜대보지만, 호빵은 이미 선생님의 손길에 배를 드러내고 누운 상태였다. “공부 끝나고 놀자. 알았지?” “예.” 명수가 방으로 돌아갔다. 선생님은 싱긋 웃다가 간식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명수의 방에 들어가 간식을 주며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마찬가지로 단유의 방에도 간식을 전달했다. 그 때, 단유는 언제나 그랬듯이 책을 읽고 있었다. 그 책은 하은이 떠나기 전, 단유에게 선물한 책이었다. “내가 너한테 TV를 보라고 했던 건, 니가 너무 하나에만 빠져 있는 거 같아서 그랬어. 마치 어릴 때 내 모습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난 니가 나처럼 되지 말았으면 해서 TV를 보자고 했던 건데, 아무래도 방법이 잘못 됐던 거 같아. 그치? 역시 너한테는 책이 제일 좋은 선물인 거 같아서 준비했어. 다음에 만나면 꼭 물어볼 테니까, 다 읽어 놔야 돼. 알겠지?” 단유는 하은의 말에 수긍하며 기꺼이 그녀의 선물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계속 그 책을 읽었다. 처음에는 단유에게도 어려운 단어와 내용이었는데, 억지로 참고 읽다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거 너무 어렵지 않니?” 선생님은 아직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이제 13살이 되는 아이한테 「논어」는 좀 심한 거 아닌가? “그냥 읽을 만 해요.” 단유는 특이한 감상 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대신 그런 생각은 잠시 했다. ‘논어랑 TV드라마는 너무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은의 의도를 잠시 의심해 보는 단유였다. ======================================= [196] Sunrise(1) “오늘 아침 일기예보 상 온도는 영하 4도라고 하지만, 바람 때문에 체감온도는 영하 10도 정도라고 합니다. 때문에 다들 아침에 출근하시는 길이 고통스러울 정도였다고 하더군요. 저도 방송국에 들어설 때, 갑자기 불어온 돌개바람에 새벽부터 준비했던 메이크업이 엉망이 되었어요. 그래서 저희 작가분이 절 보더니 주말에 마신 술이 덜 깼냐고 농담을 하더군요. 한 주의 시작을 알리는 월요일, 게다가 날씨마저 도와주지 않으니 더더욱 출근을 하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는 당신. 바로 여러분들을 위해서 준비했습니다. 첫 곡은 만화영화 Snowman 중에서 Walking In The Air, 엘레인 페이지 입니다.” 라디오에서 청아한 미성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작은 우울하게, 그러나 스트링 세션이 가미되면서 몽환적인 느낌과 판타스틱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음악으로 변하면서 가슴을 진정시키고 차분하게 만들었다. “노래가 너무 음울한 거 아냐? 이런 음악 들으면서 출근하라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야?” 재훈이 투덜대며 말하자, 옆에서 태블릿을 보고 있던 주영이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취향 차이겠죠. 전 좋기만 하네요.” “변태야? 아침부터 이런 음악 들으면 좋아?” 그 말에 주영의 시선이 재훈을 송곳 찌르듯 찔러댔다. 움찔한 재훈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자 주영은 다시 태블릿으로 눈을 돌렸다. “도대체 내가 왜 널 따라 가는지 모르겠네. 난 학생이라고. 바쁘디 바쁜 본과 2학년이라고.” “내일 개강 아닌가요?” “야, 본과에 개강이 어디 있어? 일 년 내내 붙어 있어야 할 판국에….” 재훈은 말을 미처 끝내지 못하고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 왜 이렇게 뾰족하실까? 오늘 혹시 그 날인가요?” 그 말에 재훈이 꼬리 잘린 개구리처럼 발끈하며 소리쳤다. “야! 무슨 기집애가 할 말 못할 말 못 가리고 그래!” “조용히 해요. 여기 선배만 있는 거 아니죠? 죄송해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주영의 사과에 운전을 하던 기사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니가 왜 사과를 해? 하려면 내가 해야지. 그리고 왜 말 돌려?” “그만하세요. 계속 떽떽거리면 오늘 하루 꽤 피곤할 거예요.” “그럼 데리고 가는 이유라도 알려줘야지, 말도 안하고 아침부터 끌고 다니는데 열이 안 받아?” 주영은 태블릿을 건네주었다.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의 재훈에게 주영이 알려주었다. “애들 새 집이에요.” “애들?” “이것 봐. 이래놓고 무슨 후견인이야? 돈만 내면 다야? 그러면서 무슨 입양이야?” 그제야 재훈의 얼굴이 핼쑥해 보일 정도로 하얗게 변했다. “아.” “아, 는 무슨 아예요? 오늘부터 그 집에서 살게 될 거고, 학교는 일주일 뒤 월요일부터. 그 전에 가서 애들 얼굴보고 이야기는 해야 후견인 노릇 좀 한다는 소리 듣지. 솔직히 선배, 그 동안 학업 핑계로 너무 소홀했던 거 알아요?” “니가 잘 챙겨줄 거란 걸 아니까 그랬지.” “내가 후견인이야?” “내가, 는 반말이고.” “그럼 잘하시든가.” 재훈은 입술을 씰룩거리다가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역시 지은 죄가 많다보니 주영에게 이기기가 힘들었다. 슬쩍 앞을 바라보니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는 개인기사 아저씨의 얼굴이 룸미러에 비쳐 보였다. ‘쪽팔리게.’ 재훈은 헛기침을 한 후,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애들은 이사했고?” “집은 일주일전에 준비가 끝났고, 애들은 그저께 와서 적응 중이라고 하네요.” “역시 우리 주영이가 참 일처리가 빠르고 좋아. 그렇죠, 아저씨?” “그럼요. 이 실장님이 일은 똑소리 나게 잘 하시는 분이시니까요.” “두 분 다 아부는 그만 하시고요. 상황파악 되셨으면 저랑 이야기 좀 하시죠.” “뭘?” 주영은 재훈의 손에 들린 태블릿을 뺏어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재훈을 똑바로 바로 보며 물었다. “두 아이, 계속 이대로 챙기실 거죠?” “그럼. 그러려고 후원하는 거 아냐?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주영은 머리도 정리되지 않은 재훈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억지로 끌고 나오긴 했지만, 셔츠에 묻은 치킨소스 자국과 맥주인지 뭐인지 모를 액체에 젖은 소매를 보면 누구도 재벌 3세의 이미지를 떠올리지 못할 모습이었다. 굳이 드라마 속의 재벌 이미지를 따라할 필요는 없다 해도, 사람이 좀 점잖게 생활하면 안 될까, 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물론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상대는 재훈이니까. “왜?” “한심해서.” “야!” 주영이 고개를 털고, 본론을 이야기했다. “한심한 후견인이라도 후견인이니까, 아이들의 자립을 도울 방법을 생각해야 할 때 아닌가요? 그런 점에서 아이들과 한 번쯤은 면담을 하고 그 아이들이 어떤 방향으로 자라길 바라는지 알아야 제대로 후원을 할 수 있는 거죠. 지금까지야 초등학생이니까, 라는 이유로 그냥 두고 봤다지만, 이제는 다르지 않겠어요? 특히 명수 같은 경우는 제대로 이야기를 나눈 경우는 없잖아요.” “왜 없어? 같이 만나서 밥 먹고 이야기 할 거 다했는데.” “그런 거 말고 진지하게요.” “걔 보니까, 딱 내 과던데? 진지한 거 안 좋아할걸?” 주영이 다시 도끼눈을 치켜뜨고 날카롭게 벼려진 도끼날을 재훈의 목 밑에 들이밀었다. “지금은 좀 진지해져 보는 게 어때요? 본과 2학년이 초등학교 2학년이란 소리는 아니잖아요?” 재훈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영이 날을 거두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특히 지금껏 아이들이 살아오던 환경이 완전히 바뀌게 되는데, 이 때 제대로 잡아주지 않으면 오래 방황할 수 있다고요. 이럴 때 부모의 역할이라는 게 중요해요. 그런데 그 아이들한테 부모라면 결국 선배잖아요? 비록 입양은 안했어도, 그 역할을 충실히 해주셔야 앞으로도 그 아이들이 선배를 후견인으로서 존경하고 따르지 않겠어요?”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하면서도 재훈은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굳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자면, 그 아이들은 상담 같은 거 없이도 잘 자랄 아이들이라는 생각이었다. “자기결정권을 가진 아이들이라는 전제하에 그들의 의견을 소중히 생각하고 존중해줄 준비가 된 후견인으로서 한 마디 하자면, 후견인이 너무 참견하는 것도 심리적 거리감을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고 그들의 결정권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요건들은 배제시키는 게 좋을 거 같다고 봐.” 재훈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야기에 주영이 피식 웃었다. “왜 웃어?” “후견인이 너무 참견한다면 문제겠지만, 일단 그 후견인이란 사람이 별 핑계를 다 대가면서 참견을 한 적이 없다는 게 첫 번째 이유고, 아이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왜 자기결정권이란 걸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거라고 생각하는 지 이유를 몰라서 웃은 게 두 번째 이유예요. 마지막으로 이런 소리 할 시간에 진지하게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게 더 효율적일 텐데도 헛소리나 하고 있는 모습이 웃겨서 웃었어요.” 말이나 못하면. 재훈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주영도 더 이상 재훈을 자극할 생각은 하지 않고, 대신 다른 서류를 꺼내서 검토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멈추자 잠시 줄였던 라디오의 볼륨이 커지며 라디오DJ의 멘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다음은 길을 잃은 두 사람이 함께 음악을 만들면서 조화로움을 발견하고 삶의 길을 찾는 모습을 그린 영화 <비긴 어게인>의 OST 중 하나입니다. 애덤 리바인이 부르는 Lost Stars. 들어보실까요?” 어쿠스틱 기타와 가수의 허밍 음이 나오면서 음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겨울의 끝 무렵, 여전히 바람은 차갑고 마른 가지에는 싹이 틔기 전이지만 곧 깨어날 봄의 제전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바쁘기 그지없었다. **** “명수야! 밥 먹어야지!” 검은색 니트 위에 만화캐릭터가 그려진 앞치마를 걸친 푸근한 인상의 중년여성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이윽고 방문이 열리고 검은 그늘을 눈 밑에 드리운 명수가 발을 질질 끌며 주방에 나타났다. “너 어제 밤 샜니?” “…네.” “한 번쯤은 거짓말이라도 해 보는 게 어떠니? 그럼 내가 한 번 속아 넘어가줄게.” “속지도 않으시잖아요.” 명수가 졸음을 미처 쫓아내지 못한 눈을 억지로 뜨고 자리를 찾아갔다. “그걸 아는 애가 밤을 새서 게임을 하니? 선생님이 몇 번을 말해? 내가 그랬지? 또 밤새면 압수라고.” “네.” 명수는 선생님이 뭐라고 말하는지 내용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듯 순순히 대답을 했다. 선생님이 손을 척 내밀었다. “내놔.” “예?” “핸드폰 압수야.” “어? 안 되는데?” “내놔.” 명수는 울상이 되어 선생님을 바라보다가 앙 다문 선생님의 입술에서 의지를 읽어내곤, 뒷주머니에 꽂아두었던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일주일간 압수야.” 명수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인지 눈을 번쩍 뜨더니 맞은편에 앉은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만.” 줄곧 명수를 지켜보고 있었음인지, 명수가 입을 떼기도 전에 선생님이 명수를 제지했다. “단유 꺼 뺏어서 쓰는 게 들키면, 그 땐 단유 것도 압수야.” 명수가 고개를 푹 숙이고 시금치나물을 집어 입에 넣었다. 인생의 쓴맛을 알게 해주는데 좋은 나물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페이스대로 식사를 하던 단유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얼굴을 하고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오늘 재훈이 형 온다고 안했나요?” “응. 아마 점심 전에 올 걸?” 명수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단유가 명수를 힐끔 보더니 입 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럼 오늘 점심은 밖에서 먹겠네요?” “아마도? 참고로 선생님도 따라 갈 거야. 그러니까 괜히 엉뚱한 소리로 재훈이 당황시키지 말고, 버릇없이 구는 모습 보면 바로 혼낼 거야.” 정확히 명수를 바라보며 경고를 하는 선생님의 서슬에 명수는 더욱 어깨를 움츠리고 시금치나물을 입에 집어넣었다. 곱씹으면 고소한 맛도 나는 반찬이었다. “단유야, 이제 여기 주변 지리는 대충 익혔지?” “네.” 매일 새벽마다 운동을 하는 습관은 여기로 이사 오고서도 변하지 않았다. “혹시 주변에 미용실 같은 곳 있니?” “아, 저기 길가 쪽에 있는 거 봤어요.” 명수가 손을 들며 소리쳤다. 선생님이 의심스럽다는 눈치로 단유에게 확인을 구하자, 단유도 그렇다고 대답을 해주었다. 명수가 ‘불신지옥’을 중얼거렸지만 선생님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너희들 머리부터 좀 정리해야겠다. 이제 중학생도 되었으니 머리 깎아야지. 그래도 너희들은 좋을 때야. 예전에는 중학생들은 대부분 까까머리였거든.” “까까머리요?” 명수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익살맞은 표정을 짓던 선생님이 대답을 해주었다. “머리를 빡빡 깎았다는 이야기야. 왜? 관심 있어? 그렇게 자를래?” “네! 나 그렇게 자를래요.” 의외의 반응에 선생님이 당황하며 물었다. “어떤 머린지 알고 그러니?” “차두리요.” 단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명수의 축구 스타일이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소위 말하는 차고 달리는 스타일이라고 하던가?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 “왜요?” 명수의 칭얼거림에 선생님은 거실 테이블에 놓여있던 서류 하나를 들고 왔다. “보자… 앞머리는 눈썹을 넘기지 않도록 하고, 구레나룻은 귀 중간부분까지, 옆머리는 귀를 덮지 않도록 하고… 아, 두발형태는 학생답게 단정하게 하여야 한다. 이거네.” “머리 빡빡 깎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는 없잖아요?” “학생답게 단정하라는 말은 빡빡 깎지 말라는 말이야.” “왜요?” “다른 사람은 모르겠는데, 명수 니가 머리를 빡빡 깎으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무서울 거야. 그럼 단정한 것과 거리가 멀잖아?” “에이, 그게 뭐예요?” 선생님은 웃음을 터뜨리며, 펼쳤던 종이를 다시 원래 자리에 내려놓았다. “아무튼 나중에 미용실가서 머리 좀 깎자. 너희도 재훈이 오랜만에 보는 거라며? 이왕이면 단정한 모습으로 보여야 기분 좋지 않겠니?” 단유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먼저 준비하고 있을게요.” “그래.” 단유는 명수의 어깨를 톡톡 두들겨 주었다. 명수가 뭔 일이냐는 듯 쳐다보자, 단유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넌 긴 머리가 어울려.” 명수가 히죽 웃었다. 입술에 붙은 밥풀이 떨어질 듯 말 듯 했다. ======================================= [197] Sunrise(2) 방으로 들어간 단유는 일단 입고 나갈 외투를 들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사실 준비라고 할 것도 없었다. 정말 준비해야 할 것이라면 명수가 밥을 다 먹고 나오길 기다리는 게 준비일 것이다. 그 동안 잠시 지저분한 거실을 정리하는 것도 좋으리라. 단유가 거실로 나오자, 마침 식사를 마친 호빵이 헥헥거리며 달려들어서 단유의 청바지에 자신의 털을 잔뜩 묻히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포메라니안이라는 견종의 털은 굉장히 약하고 가벼워서 털갈이 시기에 꽤나 고생한다고 했었다. ‘고생’의 의미가 집안 대청소를 세 번을 하고도 두 번을 더한다는 의미의 고생이 아니라, 차라리 이사를 가고 싶어질 정도로 청소해야 한다는 의미의 고생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 단유에겐 참으로 안타까운 점이었다. 봄이 다가오자 점점 빠지는 털이 많아지더니 이제는 하루에 몇 번씩 청소를 하는데도 성에 차지 않는 단유였다. “선생님이 치울 테니까 단유 넌 방에 들어가서 공부해.” 라고 말씀해주시긴 해도, 간간이 물 마시러 나오다가 문 앞에 떨어진 털들을 보면 선생님이 제지를 하기 전에 청소기를 먼저 잡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작고 까만 눈동자가 반짝이며 자신을 올려다 볼 때면, 무장해제 되는 자신을 발견하는 단유였다. 이번에도 단유는 작은 혀로 헥헥거리면서 자신을 안아달라고 다리를 긁어대는 호빵을 안아들고 창가 쪽으로 갔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준비해둔 갈색 빗을 들고 호빵의 털을 빗기 시작했다. 미리미리 털을 빗겨서 털을 빼주면 집안에 날릴 털을 줄여준다는 조언에 따른 행동이었다. 창가에 비추는 아침햇살을 맞으며 눈을 감고 있는 호빵과 그 호빵을 정성스레 쓰다듬는 단유를 보며 선생님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명수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다 먹었어요!” 선생님은 팔을 힘차게 뻗어 명수의 방을 가리켰다. “준비해라!” “옛썰!” 명수가 경례를 한 뒤,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처음에는 반쯤 장난으로 시작했지만, 점점 명수와 어울려주는 일이 즐거워지기 시작한 선생님이었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어도, 환경이 바뀌어도 언제나 쾌활함을 잃지 않는 명수를 보며 그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선생님이었다. “단유도 그만하고 나가자.” “예.” 호빵을 바닥에 내려놓자, 주저앉은 자세로 뒷발을 들어 목 근처를 긁어댔다. 단유는 옷에 묻은 털을 찍찍이 테이프로 뜯어낸 뒤, 때맞춰 옷을 입고 나온 명수와 함께 집을 나섰다. **** 집안에 있을 때와 달리, 햇살이 하얀 구름 사이로 보일락 말락 하고 있었다. 오후에 눈이나 비가 내리지 않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기온이 낮아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어깨를 움츠린 사람들이 거리에 많았다. “넌 언제 여기 와 봤니?” 선생님의 물음에 명수가 히죽 웃었다. “그저께 오자마자요.” “언제 나갔었어? 그 때 짐정리 하느라 바쁘지 않았었니?” “짐 다 정리하고 나서요. 단유가 나가기에 그냥 따라 나왔다가 봤어요.” 선생님이 단유를 바라보자, 앞머리를 비틀어 길이를 가늠하고 있던 단유가 눈치를 채고 대답을 했다. “주변에 운동할 만한 곳이 있나 살펴보려고 나왔어요. 그리고 꼭 그 이유는 아니더라도 처음 온 동네인데, 지리는 익혀놔야 길을 잃어버리지 않죠.” 다른 아이들 같으면 걱정스럽겠지만, 단유라면―지금까지 경험했던 아이들과 비교해서―여느 아이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똑똑한 아이인지라 믿을 수 있었다. 이왕 말문이 트인 김에 그간 바빠서 묻지 못했던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동안 다니던 동네에서 여기로 오면서 친구들과 헤어져야 했잖아? 힘들지 않았니?” 단유와 명수가 서로 쳐다보았다. 누가 먼저 이야기할까 눈으로 순서를 정하기라도 하는 걸까, 바라보고 있던 선생님에게 먼저 말을 건 사람은 명수였다. “전 애들한테 축하받았어요.” “왜?” “여기 학교에 축구부 있다면서요? 인평중학교에는 축구부가 없다던데요?” 말하자면 체육특기생 코스를 밟게 된 명수를 축하해주었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6년간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도 있었는데 이제는 보기 힘든 거니까, 조금 슬프긴 했는데요. 그래도 참을 만 했어요. 단유가 있으니까.” 어쩐지 이 타이밍에 웃음이나 울음 정도는 터져줘야 감정이 폭발할 것 같다는 우스운 생각이 얼핏 스치고 지나갔지만, 선생님은 표정을 관리했다. 뒤를 이어 단유가 말했다. “저도 마찬가지죠. 사실 저는 명수보다는 친구가 많지 않았으니깐요. 명수는 5학년 때까지는 체육부장도 하면서 같이 축구하던 아이들이 많았거든요. 그 중에는 6학년 때까지 같은 반이었던 아이도 있었다고 했나?” “응, 영주.” “그래, 뭐. 그런 친구랑 헤어져야 했으니까 명수가 조금 힘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은 했는데요. 저는 그런 친구가 별로 없어서요.” 그 때 명수가 혀를 쭉 내밀고는 놀리는 표정을 지었다. “거짓말이래요. 선생님, 단유 있잖아요? 여자친구가 엄청 많았어요!” “야, 여자친구 아니라니까?” “아니긴, 그 때 졸업식 때 너 붙잡고 못 만난다고 울던 애는 여자 아니고 남자였어?” “혜린이는 너도 몇 번 봤잖아? 걔가 무슨 여자라고 그래?” “그럼 교문에서 너한테 편지 주던 애는?” “유림이? 걔는 3학년이랑 4학년 같은 반이어서 그런 거고.” “너네 반에서 같이 사진찍자고 붙들고 안 놔주던 애도 내가 봤는데?” “연정이는 6학년 때 짝이라서 그랬지.” “빨간 목도리 했던 애가 연정이야?” “아, 걔는 미진이.” “그럼 나랑 같이 계단 내려갈 때, 너한테 책 선물하던 애는?” “은하?” “매점 옆에서 만난 애는?” “이경이?” 명수가 선생님을 보며 어떠냐는 듯 시선을 던지자, 선생님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너희 둘 다 참 재미있는 학교생활을 했구나.” 그 말에 단유와 명수는 서로 상대의 학교생활이 더 재미있었을 거라며 폭로 아닌 폭로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명수가 참여하고 주도했던 그 많은 축구경기들과 남자 아이들과의 우정들을 단유가 폭로하면, 수많은 여자아이들과 얽혔던 단유의 학교생활을 명수가 폭로하는 식이었다. 곧 길가에 자리한 미용실 앞에 도착을 하면서, 두 사람 사이의 쓰잘데기 없는 폭로전(?)은 끝이 났다. 선생님은 나중에라도 계속 듣고 싶다는 감상평을 남기고 두 사람을 가게로 밀어 넣었다. **** “오오, 단유 머리 잘랐네? 명수 넌 몰라보겠다? 너 키 얼마야?” “163㎝요.” 재훈이 박수를 치며 마치 자기 일처럼 좋아해 주었다. “너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거의 10㎝는 더 큰 것 같다?” “그런가요?” 뒷머리를 긁으면서 우쭐해하는 명수였다. 사실 단유와 명수가 나란히 서면 대부분 단유의 키를 언급했다. 왜냐하면 단유는 벌써 키가 168㎝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꾸준히 운동을 해서 그런지 어깨도 초등학생답지 않게 넓어서 누가 보면 중학교 운동선수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명수가 불만을 가진 점은, 그 정도 몸을 가지고도 과시하지 않으려 하는 단유의 소극성이었다. 만약 자기가 단유정도였다면, 운동장에서 날고뛰는 정도가 아니라 유소년 클럽에 지원을 했을 것이다. “일단 먹을 것부터 고르자. 뭐 먹을래?” 재훈과 주영, 선생님과 단유, 명수는 고기 집을 찾아갔다. “옛날에는 초등학교 졸업하면 부모님이 아이들을 데리고 중국집을 데려갔었대.” 재훈이 자리에 비치된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말했다. 주영이 슬쩍 눈치를 줬지만 재훈은 아무렇지 않게 손가락 마디마디를 꼼꼼히 닦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난 중국집을 안 갔어. 왜? 우리 집은 돈이 많았거든. 돈이 많은 집은 중국집을 안 가냐고? 갈 때도 있겠지. 하지만 축하를 하는 날에는 중국집 대신 레스토랑을 가지. 그 때 생애 처음으로 캐비아를 먹었지.” “무슨 맛이었어요?” 주영과 선생님이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역시 명수에게 중요했던 것은 맛이었다. “아무 맛도 기억이 안나. 그냥 먹었다는 것만 기억날 뿐이야. 사실은 그 때 난 다른 친구들이랑 다 함께 모여서 중국집 가고 싶었거든? 그런데 아버지가 안 된다고 하셔서 결국 레스토랑에 끌려가 맛도 생각나지 않는 캐비아를 먹으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슬픈 이야기야. 슬프지? 눈물 나게 불쌍하지?” “네.” 진짜 불쌍하다는 표정을 짓고 바라보던 명수를 보며, 재훈은 미소로 명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너희들은 그런 슬픈 기억 말고, 행복한 기억을 가지길 바랄게. 너흰 형보다는 행복할 거야. 가장 친한 친구랑 함께 하니까. 그렇지?” “네!” 명수가 잇몸을 드러낼 정도로 크게 웃었다. 단유도 다르지 않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려보였다. “아 혹시 중국집으로 갈걸 그랬나?” “아니요, 괜찮아요. 저희 그저께 자장면 먹었어요.” 이삿날은 자장면이라며 노래를 부르던 명수 덕이었다. 이내 푸짐한 고기로 배를 채운 이들은 근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을 떠먹은 뒤, 아이들이 머물 집으로 이동했다. “이야, 집 좋네?” 재훈이 거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주영이 재훈의 등을 세게 내리쳤지만 다른 사람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윽고 거실에 둘러앉은 뒤 주영이 본론을 꺼냈다. “사실 오늘은 중요한 이야기도 하고, 너희들 의견도 들을 겸 해서 온 거야.” 단유와 명수가 주영을 빤히 바라보자, 재훈이 키득대며 손을 내저었다. “너무 그렇게 분위기 잡지 마라. 애들 긴장하잖아.” 주영은 샐쭉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너희도 중학생이 되었잖아. 그럼 슬슬 너희의 장래와 진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너희들이 원하는 진로에 맞춰 이 분이 후원을 결정하실 거야. 예를 들어서, 명수가 만약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다면….” “예, 축구선수가 될 거에요.” 주영의 말을 자르고 명수가 흥분한 얼굴을 하고 소리쳤다. 단유가 진정하라며 명수의 어깨를 토닥이자, 주영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러면 이 분이 최대한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후원해주실 거란 거지. 어쩌면 유명한 유소년 클럽 쪽에서 활동할 수 있게 봐주실 지도 모르고.” 아무리 명수라도 이 제안이 엄청난 특혜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간 TV에도 빠져보고, 핸드폰 게임에도 빠져보았지만 역시 자신의 길은 축구 밖에 없다고 생각하던 명수였다. 때문에 그 쪽과 관련된 길을 줄곧 고민해왔다. 단유나 선생님의 도움으로 향후 진로를 알아보기도 했었기에 6학년 때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클럽에 들어가려면 테스트 봐야 하죠?” “그럴걸?” 재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일단 테스트는 받아보고 싶어요. 그런데 테스트 떨어지면 안 갈 거예요.” “왜?” “제 실력이 안 되는데 억지로 들어가게 되면, 불공평하잖아요.” 재훈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때, 주영은 속으로 놀라움을 표시했다. 사실 주영은 명수가 저렇게 말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그동안 워낙 명수가 어리광을 피우거나 단순해 보이는 언행을 자주 보였기에 꼭 가고 싶다고 이야기 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명수가 꼭 가고 싶다고 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클럽에서 뛸 수 있게 해 줄 능력이 되는 재훈이다 보니, 주영은 몰래 적당한 유소년 클럽을 알아보는 중이었다. 그러나 재훈은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명수네. 난 그럴 줄 알았어.” 재훈의 칭찬에 명수가 히죽 웃었다. 단유 역시 연한 미소로 친구의 결심을 응원했다. 지금까지 명수가 축구 경기를 하면서 숱하게 승부욕과 골 욕심을 내보였지만, 단 한 번도 명수는 부정한 방법을 선택한 적이 없었다. 반칙을 해도 자신이 먼저 손을 들어 반칙했음을 알릴 정도로 뻔뻔한(?) 친구였으니까. “단유 넌?” 단유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전에 형이 그랬잖아요? 중학교 가면 영재학교로 가서 공부하자고요.” “그래.” “저도 작년에 생각을 좀 해봤는데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어요.” “왜? 솔직히 지금 학교에서 가르치는 수학이나 과학은 니 수준에 안 맞잖아? 더 많이 배우고 싶지 않아?” “더 배우고 싶은 건 맞아요. 좀 더 전문적으로 배우고 실험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고요. 그런데 지금은 굳이 한쪽으로만 집중하고 싶지 않아요.” 재훈은 단유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혹시 요즘 다른 거 공부하는 거 있니?” “없지는 않죠. 저야 여러 가지에 대해 호기심을 많이 느끼니까요.” “어떤 거?” “지금은, 동양 철학이 재밌더라고요.” 주영이 쿨럭, 하더니 사래가 걸린 듯 헛기침을 했다. 재훈이 슬쩍 시선을 주었다가 단유를 바라보며 말했다. “확실히 영재학교에 가게 된다면, 특정 과목에 대한 집중도 때문에 다른 관심분야에 시간 분배를 못하게 될 가능성은 있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가 지금까지 보여 왔던 재능을 고려한다면, 영재학교에 가서 시간을 투자하는 게 너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좋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도 없진 않죠. 저 역시도 더 배우고 싶긴 하니까요. 하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재훈은 턱을 괴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문득 어렸을 적의 단유와 지금의 단유는 단순히 키만 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야 후견인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구만.’ 재훈은 턱을 괴던 손으로 귀밑을 긁었다. 깊은 고민에 빠질 때 나오는 재훈의 습관이었다. ======================================= [198] Sunrise(3) 사실 단유와 명수가 재훈의 질문에 그렇게 응대한 것이 엉겁결에 나온 것만은 아니었다. 6학년 때부터 단유와 명수는 자신들이 받는 혜택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왔었다. 당시 명수네 반의 친구가 유소년 클럽을 가입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명수에게도 클럽에 들어오지 않겠냐는 제의를 했었다. 이에 명수가 단유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 두 사람은 선생님과 함께 컴퓨터 등을 이용해 유소년 클럽에 들어가는 방법 등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 때, 두 소년은 거의 처음으로 현실의 벽을 느꼈다. “가입비가 20만원? 월회비도 있고?” “신발도 10만원인데?” 그 전까지 재훈의 후원 덕분에 돈에 구애받지 않는 삶을 살기도 했고, 두 사람의 성향 상 특별히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진 않았다. 명수가 여태 필요해서 사달라고 한 것도 5학년 초에 축구공을 사달라고 했던 것이 다였다. 그 외에 옷이나 신발 같은 것은 요구하기 전에 시기 때마다 알아서 사다주니, 두 소년은 별로 의식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유소년 클럽 가입을 염두에 두고 알아보다보니 돈이 많이 드는 것이었다. 한 달 용돈을 받아도 군것질 하나 제대로 사먹어 본 적이 없던 두 소년에게 제대로 충격이 왔다. 그리고 두 사람은 후원을 받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되도록 손을 벌리지 말자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우리가 거지는 아니잖아?” “없어도 잘 살았잖아?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야지.” 두 사람은 자신들의 능력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나중에 내가 돈 벌어서 니 신발 사줄게.” “나도 나중에 축구로 돈 벌면, 너 읽고 싶은 책 다 사줄게.” 두 소년의 결심은 지난 1년간 굳게 다져졌고, 그리하여 재훈의 후원에 대해 두 소년은 자신들의 뜻을 다음과 같이 밝히게 된 것이었다. “이제 저희도 되도록 형한테 신세를 지지 않으려고요.” “이렇게 집이랑 옷이랑 도와주시는 것만도 되게 고마워요. 그런데 계속 형한테 기대게 되면 안 좋을 것 같아요.” 어떻게 안 좋은데, 라고 묻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건 그저 심술일 뿐이니까. 다만 재훈은 두 소년이 정신적으로도 많이 성장했다는 사실을 그저 기뻐할 수만은 없음에 안타까울 뿐이었다. 자신의 후원에 부담을 느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알았다. 어떤 뜻인지. 명수는 작년부터 유소년 클럽에 관심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박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어서 물어봤던 거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 그리고 당연히 실력이 안 된다면 들어갈 수 없겠지. 하지만 만약 클럽 감독이 명수 너의 실력을 보고 꼭 데리고 오고 싶다고 하면 갈 거지? 그 때는 내가 도와줄게. 그 정도는 나한테 아무런 부담이 없으니까, 너도 너무 마음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재훈은 허리를 펴고 몸을 세웠다. “단유 너는 좀 더 생각해봐라. 너도 부담스럽다는 이유라면, 그래 이해는 하지만, 영재 학교에 들어가는 일은 단순히 더 많이, 자세하게 배운다는 것과는 의미가 달라. 지금은 괜찮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수준에 맞지 않는 학과 수업을 억지로 듣는 일은 너한테 고문보다 더한 스트레스를 줄 거야.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3년을 보내는 건 힘들지 않겠니?” 단유 역시 자세를 꼿꼿이 하고 대답을 했다. “저도 알아보긴 했어요. 담임선생님한테도 물어봤었고요. 그런데 당장 들어가지 않아도, 그러니까 2학년 때부터 들어가는 친구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결정하는 시간에 쫓기고 싶진 않아요. 사실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게 좋을지 저로서는 아직 결정할 수 없기도 하고요. 일단 중학교 수업을 들으면서 생각을 해 보고 싶어요. 2학기 전까지는 결정할게요.” 재훈이 주영과 눈을 마주쳤다. 넌 어때, 라는 물음이 담긴 눈빛에 주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단유의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어른들은 어른들만의 판단으로 가장 좋은 길을 제시한다고 하지만, 결국 아이의 인생이다. 아이의 인생을 그저 먼저 걸어봤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제단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 주영은 최대한 단유의 의견을 지지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재훈은 주영 역시 단유의 의견에 동의했음을 읽은 뒤 답을 내렸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절대 나에게 후원을 받는 일을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 사실 여기 주영이가 반대만 하지 않았다면, 난 너희들을 입양했을 거야. 말인즉슨 내가 너희들 양아버지가 될 뻔 했다는 이야기지. 부모가 자식들에게 베푸는 걸 부담스러워 하면 안 되지 않겠어? 비록 ‘후견인’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긴 해도, 난 니들이 날 아버지처럼 여겨줬으면 좋겠어.” 재훈이 훈훈한 미소를 띠며 말하자, 명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 그건 아니죠. 형은 형이지, 무슨 아버지야.” 명수의 직설에 재훈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긍정의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왜? 할 수도 있는 거지. 그게 이상해?” “당연히 이상하죠. 형은 그냥 형이에요.” 재훈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실없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이야기를 끝으로 재훈과 주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을 나서기 전, 창가 쪽으로 간 재훈은 밖을 바라보며 한 마디를 남겼다. “뷰가 좋네. 주영이 집은 잘 골랐어.” 재훈은 곁에 선 명수와 단유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잘 봐. 저 넓은 도시를. 저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 여기서는 잘 보이지? 세상을 넓게 보란 말은 다른 의미로 높이 올라가란 뜻이라고 생각해. 낮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자세히 바라다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넓게 보긴 힘들어. 그러니 높게 올라갈 수 있게 노력해라.” “높게 올라가면 자세히 보기는 힘들어지는 거 아닌가요?” 재훈은 동그란 눈을 하고 바라보는 단유의 머리를 엉클어뜨렸다. “10층에 사는 사람은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갈 수 있지만, 1층에 사는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도 10층에 올라오지 못해.” 단유는 재훈을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바깥을 바라보았다. 빌딩과 아파트, 그 사이로 빌라와 단독주택, 거리를 질주하는 승용차와 버스들, 마른 가지의 가로수와 목도리를 한 사람들이 보였다. 그 경치를 바라보던 단유는 피식 웃었다. 다른 사람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해야겠지만, 자신은 마음만 먹으면 되니까. **** 재훈과 주영이 돌아가고, 명수가 호빵을 데리고 산책을 나가는 사이 단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자, 조금 전까지 거실에 남아있던 감정의 여운이 꼬리 잘리듯 잘려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분위기에 취해 잠시 들떴던 마음도 차분해지면서, 단유는 비로소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책상 앞에 앉아 오전까지 보고 있던 책을 펼쳐 들었다. 하은이 주고 간 「고전 강의 : 논어」라는 책이었다. 처음 이 책을 펼쳐 들었을 때는 형이상학적 서술과 뜻 모를 단어의 나열에 혼란스럽기만 했었다. 하지만 끝까지 읽어보자는 남모를 승부욕에 불타 읽기 시작해, 결국 작년 한 해 동안, 수번을 완독한 책이었다. 처음에는 승부욕이었지만 지금은 재미와 추억 때문에 읽게 되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못함을 근심하라(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재미라면, 이런 것이었다. 방금 재훈의 모습은 바로 이 구절을 떠올리게 했다. 재훈은 명수가 축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명수를 도우려고 했다. 명수가 유소년 클럽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대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명수에게 먼저 의견을 물어 그 뜻을 따르고자 했다. 단유의 시선에서 재훈은 정말 ‘남을 알아주지 못함을 근심하는’ 사람이었다. 어린 아이라 무시하지 않고, 직접 묻고, 깊이 생각하고, 작은 의견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추억이라면, 이 책 속에서 공자와 제자들이 나누는 문답이 마치 에르케넨의 지톤들을 떠올리게 했다는 점이었다. 디아트리, 안트, 신테 세 사람과 보냈던 5년의 시간이 당시에는 지루하고 이해하기 힘든 시간이었는데, 그 당시 나누었던 대화들이나 가르침들이 이 책 속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내용이 똑같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뜬금없는 질문과 형이상학적 사유로 그려내는 이야기들이 유사했다. 때문에 읽다보면 문득 그 세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아직도 세 사람이 가르쳐 주었던 내용들을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이 책은 그나마 이해하기 쉽도록 풀이라도 해놓았지, 그들과의 대화는 정말 날 것 그대로의 것들인지라 단유에게는 여전히 수수께기같은 가르침들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노라면 어렴풋이 이해가 갈 듯 말 듯한 것들도 있었다. 그 때문에 더더욱 이 책을 붙잡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공안낙처(孔顔樂處)….” 단유는 한 단어를 입으로 되뇌었다. 논어 「술이」편에 나오는 내용으로 공자와 안회가 추구하는 즐거움, 인생의 의미라고 서술되어 있었다. 공자는 가난해도 그 속에 즐거움이 있다고 했으며, 정의롭지 못한 부귀를 경계했다. “재훈 형은 즐거울까?” 재훈이 가기 전 남긴 한 마디, 높은 곳에 오르라는 그 말이 어쩐지 계속 귓가에 맴도는 느낌이었다. **** 용모단정하게 꾸민 두 사람은 선생님과 함께 새로 진학할 중학교로 향했다. 새로운 학교, 새로운 학년에 접어드는 그 날을 기념해 학교에서는 입학식이라는 거창한 예식을 진행한다. 때로는 번거롭고, 학생들에게는 별다른 유흥도 되지 않는 예식이었지만, 전통적으로 이 예식은 학생들을 위한다기 보다는 학생들의 뒤에 자리한 부모님들을 위한 예식이었다. 박헌영 선생님은 터져 나오려는 하품을 억지로 참으며 앞에 도열한 학생들을 슬쩍 훑어보았다. 미리 전달한 안내문에 따라 두발을 정리하고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보면, 풋풋함이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풋풋함이 1달을 채 넘지 못한다는 사실을 오랜 교직생활을 통해 경험한 선생님은 슬쩍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겨우 10분이 지났다. “에, 오늘 이렇게 장계중학교의 학생으로서 새 출발을 하시게 된 것에 대해 대단히 환영하는 바입니다.” 교장선생님의 인사말은 언제나 거기서 거기였다. 작년에 썼던 인사말을 다시 쓰는 선생님은 없겠지만, 그 형식은 늘 비슷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공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치고 지나갔다. 할 일도 없고, 깊이 고민할 문제도 없어―물론 학기 초에 서둘러 작성해야 할 서류들과 학생기록부 등을 생각하면 끝도 없이 나올 문제들이지만 굳이 아침부터 눈살을 찌푸리고 할 고민 정도는 아니었다―멀뚱히 서서 강당 위를 바라보는 학생들을 구경했다. 어떤 놈들이 자기 반이 될지, 어떤 놈이 문제를 일으킬 지를 추측해보는 것은 오랜 시간 학생들을 관찰하며 지낸 교사로서의 직감을 테스트해 볼 좋은 기회였으니까. ‘어이구, 저 놈은 눈에 살(煞)이 꼈네. 대충 한 달 안에 사고 칠 놈인가? 저 놈은 먹지를 못한 거야, 왜 저렇게 키가 작아? 요즘 애들은 키가 크다더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네. 저 놈은 얼굴이 너무 노란데? 속이 안 좋나?’ 그러다가 한 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사실 입학식이 진행될 때, 교장선생님의 말을 경청해서 듣는 모범생 중의 모범생이란 전체 학생들 중에서도 한두 명 있을까 말까였다. 대부분은 지루함을 못 견디고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기 마련이었다. 마치 지금의 자신처럼. 하지만 그런 와중에 선생님들과 눈을 마주치는 학생들이 있기 마련이고, 또 그런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 먼저 시선을 돌리거나 피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지금 눈이 마주친 저 학생은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보통은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면 시선을 피하기 마련인데 말이다. ‘요 놈 봐라?’ 꽤나 당돌한 놈이라 생각하며 눈에 힘을 주었다. 이제 갓 중학교에 입학한 주제에, 초등학교 티를 채 벗지도 못한 주제에 감히 선생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녀석이라? ‘싹수 노란 놈’이란 딱지를 그 아이의 이마에 붙이고 싶어졌다. ======================================= [199] Sunrise(4) 단유는 박헌영 선생님과는 다른 의미로 주변을 훑어보고 있었다. 지루해서, 할 게 없어서 본다기 보다는 전략적인 의미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앞으로 이곳에서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인데, 그런 시간동안 함께할 이들이 어떤 얼굴에, 어떤 모습일지를 미리 알아보는 것은 필수 과정이었다. 물론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기억하는 일은 불가능했지만,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내 주위에 함께 할지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다만 박 선생님과 다른 점이라면, 단유는 학생들이 아닌 선생님들을 관찰했다는 점이었다. 물론 앉아 있는 위치상 주변의 아이들을 여유롭게 둘러볼 여유를 부릴 수 없었던 탓도 있지만, 얼굴을 마주하고 선 선생님들을 관찰하는 일은 꽤 중요한 일이었다. 그간 초등학교에서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해서도 느꼈던 일이지만, 결국 교실을 통제하는 것은 학생이 아닌 교사였다. 그 교사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쉽게 끝날 일도 학교를 들었다 놨다 하는 정도의 일이 되기도 하고, 반대의 경우도 일어났다. 평범(?)하고 조용(?)하게 학업에 전념하고 싶은 단유로서는 선생님들의 성향이나 행동 양식 등을 대충이라도 알아놓는 것이 좋았다. “…학생의 신분으로 학생의 본업이라고 할 수 있는 학업에 매진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에… 그래서….” 교장 선생님이 유려하지 못한 환영사를 계속하시는 중에 단유는 한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처음에는 시선을 돌리려 했는데, 그 선생님이 계속 자신을 쳐다보았다. 혹시 무슨 이야기라도 하고 싶었던 것인가 싶어서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선생님은 말없이 쳐다볼 뿐이었다. 그냥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혹시 뭔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데, 함부로 입을 열 입장이 아니라서―교장선생님이 평교사보다 높은 직위라는 정도는 알고 있는 단유였기에―신호를 주시는 건가 싶어서 계속 눈을 마주쳤다. 그러나 뜻을 알기 어려웠다. 반면, 덤덤한 눈빛으로 자신과 눈싸움을 벌이고 있는 학생을 바라보던 박 선생님은, 정말 모처럼 골 때리는 놈이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겁이 없던가, 개념이 없던가, 둘 다 없던가. 교장선생님의 환영사가 끝날 때까지 두 사람의 말없는 눈싸움은 계속되었다. 이윽고 박수소리와 함께 교장 선생님이 뒤로 물러날 때, 박 선생님도 시선을 거둬들였다. ‘너 끝나고 보자.’ 박 선생님은 몸을 돌려 강당 무대 위로 올라갔다. 교감선생님이 주임선생님부터 해서 1학년 담임선생님과 담당 교과목 선생님들을 소개했다. “다음은 3반 담임이시며 수학과를 맡으신 박헌영 선생님이십니다.” 강당에 박수소리가 차올랐고, 박 선생님은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주변이 어수선해졌지만 여전히 그 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시선이 마주치지 않았다. 다만 그 학생은 무대 위의 선생님들을 죽 훑어보는 중이었다. 그 묘한 눈빛이 마치 노예시장에 나선 물주의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들자마자 몰래 머리를 털어 생각을 흩어지게 만들었다. ‘너무 나갔군.’ 다만 그 학생에 대해 좋지 않은 선입견이 생겼음을 부정할 순 없었다. **** 교실로 안내받은 뒤, 담임선생님이 교탁 앞으로 나섰다. “반갑다. 이제부터 1년간 함께 지내게 되었다. 내 이름 기억나는 사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선생님은 피식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굳은 얼굴 표정을 유지했다. 하얀 분필을 들고 칠판에 큼지막하게 자신의 이름을 썼다. “읽을 수 있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요즘 아이들은 영어는 기가 막히게 잘해도 한자는 일부터 십까지도 쓸 줄 모르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였으니까. “박자, 헌자, 영자입니다.” 입을 열고 말하려는 찰나, 대답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놀란 눈으로 대답한 이를 찾으려는 때에, 아이들이 먼저 ‘오오’ 하는 탄성과 함께 대답한 주인공을 돌아보았다. “이름이 뭐지?” 동글동글한 얼굴에 안경을 쓴 아이는 또박또박 이름을 말했다. “유지태입니다.” “오, 영화배우!” 아이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릴…리가 없었다. 첫날의 서먹함 때문에 농담이 먹히지 않을 아이들이었다. 굳은 얼굴로 그 아이를 흘끔 쳐다보기만 할 뿐, 누구도 쉽게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실 저런 모습이 일반적이기에 탓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감있게 나선 이에게는 메리트가 주어져야 한다. “선생님 이름을 기억한 거야, 아니면 한자를 읽은 거야?” “할아버지가 한자를 가르쳐 줬습니다.” 똑 부러지는 대답을 하는 아이에게 박 선생님은 미소를 지었다. “좋다. 그럼 오늘부터 임시반장은 너다. 앞으로 정식으로 반장을 뽑을 때까지 우리 반 반장으로서 최선을 다할 것. 알겠지?” “네.” 다소 얼떨떨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지태는 자리에 앉았다. 아니 앉으려 했으나, 선생님의 부름에 엉거주춤 서야만 했다. “한 사람씩 나와서 자기 소개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먼저 지태부터 나와서 소개하고, 그 다음 앞에 앉은 사람부터 한 명씩 하자. 알겠지? 나와.” 지태는 교탁 앞으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중계 초등학교를 졸업한 유지태라고 합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대자, 선생님은 취미나 특기 같은 거라도 발표하라고 도움을 줬다. 선생님의 발언은 곧 매뉴얼이었으니, 이후부터 모든 학생들은 매뉴얼에 맞춰 발표할 게 뻔했다. 그래도 이런 시간이 있어야 아이들이 가까워지기 편할 테니 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특기는 서예고, 취미는 독서입니다.” 10명 중 9명의 취미가 독서이리라. 그래도 특기는 남달라서 기억하기 좋겠다. “안녕하세요, 장계 초등학교를 나온 여민일이라고 합니다.” 특이한 성씨네, 라고 출석부를 보며 선생님이 시선을 돌린 사이, 특기는 춤이고 취미도 춤이라는 민일의 소개가 끝이 났다. 인사를 하고 들어가려는 아이를 붙잡고 장래 희망을 물었더니, 역시나 ‘아이돌’이란다. 그 뒤로도 아이들은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 만큼이나 틀에 박힌 자기 소개를 매뉴얼에 맞춰 진행했다. 가끔 선생님이 끼어들어 물으면 한 문장 이내로 짧게 답을 하곤 자리로 서둘러 돌아갔다. 이윽고 제일 뒤에 있던, 그러나 있는 줄도 몰랐던 아이가 일어서서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출석부에서 이름을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던 선생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안녕하세요. 인평 초등학교를 나온 김단유라고 합니다.” 너로구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단유가 말을 이었다. “취미는 독서고 특기는 없습니다.” 없는 특기도 만들어 내는 것이 자기소개였다. 그런데 당당하게 없다고 이야기한다? “특기가 없어?” “네.” “왜 없어?” 처음부터 인상이 좋지 않았던 탓에, 선생님은 이 아이가 다소 반항기가 다분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생긴 건 멀쑥하게 생긴 놈인데…. 얼굴값이라도 한다고 바람 든 놈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물지만 이른 사춘기를 겪으면서 이성에 일찍 눈이 뜨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런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 자기 얼굴 잘난 줄은 알아서 함부로 까불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실제로 그랬을 거라고 예상되는 아이를 맡아본 적도 있었고. “특기를 가질만한 여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말하는 투가 여간 심상치 않았다. “왜?” “…책을 좋아해서 책 읽는 것 외에는 한 게 없습니다.” 잠깐의 머뭇거림이 보였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의 높낮이 없는 침착하고 조리 있는 말투와 깊이감이 느껴지는 발성에서 오는 안정감이었다. 말하는 투만 보자면, 결코 가벼운 아이는 아니었다. 선생님은 잠시 자신의 선입견을 접어두고 질문했다.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아이들한테 이야기해줄래?” 단유는 잠시 생각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그냥 책이라면 다 좋아해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읽었습니다. 최근에 가장 많이 읽은 책은 ‘논어’입니다.” “논어?” 중학교 갓 입학한, 1학년 학생이 많이 읽은 책이 ‘논어’라고? 그러나 생각이 조금 이어지자 납득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초등학생이 이해하기 쉽도록 삽화와 함께 나오는 책들이 얼마나 많던가? 예전에는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였던가, 그런 책도 있었는데 ‘만화로 보는 논어’나 ‘만화로 보는 사서삼경’ 같은 게 없으리란 법은 없었다. 아니 있을 것이다. “그래, 알았다. 혹시 그거 말고 친구들한테 이야기하고 싶은 건 없나?” 단유는 아이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낯선 이들의 시선이 모여듦을 느꼈다.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의 경계심이 올라가는 것을 느끼던 찰나였다. 이럴 때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는 숱하게 경험했다. 적당히 자신을 숨기는 것. 마치 에르케넨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인식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던 동물들처럼. 특이한 인간, 이라는 인상만 심어주지 않는다면 특별히 경계 대상이 될 리가 없었다. 그리되면 또 1년을 편안하게, 자기 일에만 집중하며 보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단유는 몰랐다. 이미 자신을 매우 특이한 학생 중 한 명으로 꼽고 있는 인물‘들’이 있음을. **** “어이, 박 선생님. 여기 좀 와 봐요.” “네.” 주임선생님의 부름에 헌영은 하던 일을 멈추고 주임선생님에게 뛰어갔다. “선생님 반에 주의할 학생이 한 명 있어요.” “저희 반에요?” 하마터면 ‘또요?’라고 말할 뻔했다. 대신 헌영은 입을 다물고 주임선생님을 향해 눈을 치켜떴다. 그러나 주임 선생님 역시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가볍게 무시했다. 주변을 살피다가 헌영을 자기 옆에 앉히고 말을 이었다. “내가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란 거 박 선생님도 잘 알잖아요?” 잘 안다. 일부러 그러는 거. 소속이 다르다고 차별하는 건 도대체 어느 나라 법인가. 그러나 소속을 떠나 한참 후배인 탓에 헌영은 말을 아꼈다. “어떤 아인데요?” 그리고 만약 그런 아이가 있으면, 아침에 미리 알려줘도 되지 않나? 굳이 쉬는 시간에 이렇게 불러서 급하게 알리는 것은 무슨 심보인가? 생각할수록 가슴속에 피어오른 검은 불꽃이 몸집을 불리는 느낌이었다. “6학년 때, 가정법원에서 보호처분을 받은 전과가 있는 아이라네요.” 헌영은 입술을 짓이기다가 목이 졸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폭력, 인가요?” 주임선생님은 고개를 저었다. “상습절도라네요.” 헌영은 이마를 짚었다. “누군데요?” “이름이… 아, 지욱이네요. 양지욱.” **** “지욱아! 이리와 봐.” 책상에 엎드려있던 지욱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부른 이를 바라보았다. 같은 초등학교에서 올라온 아이였다. “왜?” “오라면 와, 이 새끼야.” 낄낄대면서 지욱을 부른 아이는 책상 위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몸만 보면 중3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키는 대략 165㎝에 몸무게는 70㎏은 훌쩍 넘을 것 같았다. 지욱이 몸을 일으켜 다가갔다. “왜?” “여기 매점 가서 빵 좀 사와.” 우락부락한 인상을 가진 돼지 같은 동창의 발언에 주변에 모여 있던 몇몇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야, 진짜 시키는 거야?” “인마, 내가 이거 얼마나 해보고 싶었는데. 형들이 다들 하나씩 셔틀 만들고 다닌다고 했단 말야.” 자기 말이 우습기라도 한지 키득대던 돼지가 지욱을 보며 말했다. “뭐해, 쉬는 시간 끝나기 전에 갖다 와.” “5분도 안 남았는데….” “갖다 오라고.” 돼지가 목소리를 깔고 으르렁거렸다. 지욱은 눈치를 보다가 교실을 천천히 빠져나갔다. 눈물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사실 지욱은 보호처분을 받는 동시에 전학을 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려는 마음을 가졌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교실에 자신이 ‘도둑질하다 잡힌 놈’이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6학년 때 전학을 가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흔한 경우는 아니었기에 어떤 학부모가 호기심을 갖고 찾아보았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용케 전학사유를 알아낸 그 학부모가 찌라시 돌리듯 학부모들에게 문자를 돌렸고, 아이들까지 알게 된 것이었다. 아무튼 그 때부터, 지욱은 이전 학교에 있을 때보다 더 괴로운 6개월을 보내야 했다. 중학교에 올라오면 달라질까, 싶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자기를 가장 많이 괴롭히던 광종이 같은 반이 되어서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지욱이 교실 문을 열고 나설 때, 교실 안쪽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지욱은 귀를 막고 싶었다. 그 때 교실 안으로 들어오려는 누군가와 마주쳤다. 지욱은 습관적으로 사과했다. “미안.” “…괜찮아.” 단유가 먼저 길을 틔워 주었다. 그 틈으로 지욱이 뛰어갔다. 단유는 그 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웃음소리 가득한 교실로 들어갔다. ======================================= [200] Sunrise(5) 지욱은 서둘러 매점을 갔다 왔지만, 교실에 도착했을 땐 이미 선생님이 들어오신 후였다. 닫혀있던 교실 뒷문을 슬그머니 열었을 때, 교실 안의 모든 시선들이 지욱에게로 향했다. “너, 어딜 갔다가 이제 오는 거니? 빨리 자리로 돌아가.” 지욱은 귀까지 붉어진 얼굴로 목례를 하고 서둘러 자리를 찾아갔다. 킥킥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초등학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빨리 생각을 고치는 게 좋을 거야. 여긴 너희들이 잘못해도 어리광이라고 봐줄 사람들은 없어. 학교에서 지키라고 만들어진 규칙들은 엄격하게 지킬 줄 알아야 돼. 특히 수업 시간 종이 울렸는데도 딴 짓하는 건 초등학생 애들이나 할 짓이지, 중학생들이 할 행동은 아니라는 걸 명심하도록 해. 알았니?” 단발에 검은색 정장 투피스를 입은 선생님이 교실 전체의 아이들을 향해 경고를 했다. 어차피 첫 날은 수업이 될 리도 없고, 가벼운 오리엔테이션 정도로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던 선생님은 이 참에 중학생으로 올라온 아이들의 정신무장을 시키겠다는 각오를 하셨는지, 그 뒤로도 훈계와 설교를 이어나갔다. 국어를 담당하시는 선생님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중년 여성들의 필수 스킬이라서 그런지 잔소리가 보통이 아니어서, 조근 조근한 교양 넘치는 말투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잔뜩 기가 죽는 기분이었다. “중학생이 되고 그랬으면, 자기 주변 정리도 자기가 알아서 해야지, 언제까지 엄마 아빠 찾으면서 도움을 구할 수 있겠니? 그렇지? 옛날에 부모님이 방학 숙제 도와주던 기분으로 선생님들이 내주시는 숙제를 부탁하는 사람도 없어야 할 거고, 준비하라는 과제물이든 뭐든 스스로 할 줄 알아야 하는 거야. 그리고 가끔 보면 아침에 씻지도 않고 나오는 학생들도 있는데, 엄마가 씻겨주지 않으면 못 씻니? 다들 손 있고 발 있는데 왜 자기 스스로 못해서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그래? 만약 오늘까지 그렇게 행동했더라도 이제부터 마음을 고쳐먹고 중학생이 되었으니까 의젓하게 자율적으로 행동하도록 해. 알았니?” 대략 수업시간의 반 이상을 정신교육 타임으로 채우신 선생님은 남은 몇 십분 정도를 국어과목의 중요성과 교육방침에 대한 이야기로 할애하셨다. 수업종이 울린 뒤에야 선생님은 시간 엄수하라는 마지막 경고를 남기시고 교실을 떠났다. “양지욱 이리와.” 지욱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다가가니, 돼지 같은 광종이 입 꼬리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왜 늦었어?” “아니, 저….” “됐고, 빵부터 내놓고 말해, 새꺄.” 지욱은 교복 안쪽에 숨겨뒀던 빵을 꺼내들었다. 선생님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안쪽에 숨겨뒀던 빵이 살짝 눌려서 사이의 크림이 삐져나온 상태였다. “야, 빵 다 터졌잖아. 너나 처먹어, 새끼야.” 광종이 집어던진 빵이 지욱의 얼굴에 맞고 바닥에 떨어졌다. 광종이 던질 때 움찔했던 지욱의 모습이 웃겨보였는지, 광종 주위에 모여 있던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쫄았어, 이 새끼.” “졸라 쫄았네.” 광종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심부름도 제대로 못해가지고 어쩌려고 그래? 아까 쌤이 하던 말 못들었냐? 니가 초딩이야? 시킬 때 제대로 해 새꺄.” 손을 번쩍 들자, 다시 움찔하는 지욱이었다. 아이들이 다시 한 번 피식거리며 웃을 때, 광종이 옆을 둘러보며 물었다. “야, 니들은 뭐 시킬 거 없어?” “나도 시켜도 돼?” “시켜. 가는 김에 하나 더 사들고 오는 건데 뭐가 힘들다고?” 아이들이 이것저것 주문을 넣기 시작했다. 광종은 거들먹거리는 표정으로 지욱에게 눈짓을 보냈다. 지욱이 머뭇대자 광종이 으르렁거렸다. “안가고 뭐해, 새끼야. 빨리 사갖고 와. 또 늦고 싶어?” 벌써 쉬는 시간이 반쯤 흘렀다. 이대로면 아까처럼 수업시간에 늦을 게 뻔했다. 하지만 지욱은 ‘못하겠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야, 쟤 안 갈 모양인데? 니 말 생까는 거 아냐?” 광종의 뒤에서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던 한 아이가 마치 시누이라도 된 양 시비를 걸었다. 그 말에 광종이 화가 난 척을 하며 일어섰다. 지욱의 이마로 검지로 밀자, 지욱이 한 걸음 물러서다 뒤의 책상에 부딪쳤다. “새끼야, 왜 가만히 있는 사람 치고 지랄이야!” 마침 그 자리에 앉아있던 아이도 광종의 놀이에 동참을 결정한 모양이었다. 발을 들어 지욱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지욱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몸의 중심을 잡으려고 몸을 틀었는데, 그 꼴이 우스웠던지 광종의 뒤에 있던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중학교 입학 첫 날 어색하고 낯설어 적응하기 힘들 뻔 했던 아이들이 하나로 뭉쳤다. 원 없이 웃고 즐겼다. 그 때 수업종이 치지 않았으면, 정말 지욱은 창피하고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눈물을 보였을지도 몰랐다. 수업종이 침과 동시에 교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는 남자 선생님 덕분에 자리를 찾아가는 아이들로 교실이 어수선해졌고, 그 틈에 지욱도 끼어 제자리로 향했다. 가기 전 ‘나중에 보자’는 광종의 속삭임을 들었지만, 일단은 앞에 선 선생님의 사나운 눈초리가 더 무서웠다. “수업시간 종이 쳤는데, 자기 자리도 못 찾고 있는 사람들은 뭐야!” 아이들이 제자리에 착석한 뒤, 지태가 ‘차렷’을 외치자 아이들이 일동 침묵 속에 허리를 바르게 폈다. ‘경례’라는 구령과 함께 아이들이 ‘안녕하세요’라고 외쳤지만, 선생님은 굳은 표정으로 ‘다시’라고 말했다. “차렷이라고 했으면, 다들 동작을 멈추고 선생님을 봐야지, 딴 짓하는 놈들은 뭐하는 놈들이야!” 1교시와 같은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될 것임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아이들은 그 뒤로 3번이나 ‘안녕하세요’를 외쳤고, 과학을 맡은 젊은 남자 선생님은 “수업시간이 10분이 지나도록 수업 받을 태도가 되지 않은 놈들이 무슨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하겠냐!” 고 일갈하면서, 1교시의 재탕 같은 정신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 와중에 지욱은 입술을 꼭 깨물면서 이 지옥 같은 시간들이 빨리 끝나길 바랐다. ‘집에 가고 싶다.’ 간절히 바라는 지욱의 소원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공평하게 흘러 점심시간이 되었다. 아니 사실은 점심시간이어야 하지만, 첫날이라서 수업이 4교시까지만 진행이 되었다. 대신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셔서 내일 대청소가 있으니 각자 걸레 하나씩 준비해서 오라고 말씀을 하셨다. “지욱아, 같이 가자.” 오늘 하루 종일 광종과 지욱이 붙어 있는 모습을 봤던 아이들은 몇몇은 웃고 몇몇은 보지 않은 척 하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또 다르게 행동하는 이도 있었다. “야, 그만 좀 해라.”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던 아이들의 고개가 일제히 목소리를 향해 돌아갔다. “너 뭐야?” 광종이 눈가를 좁히며 묻자, 대답은 바로 옆에 있던 아이에게서 나왔다. “아, 아까 춤 좋아한다던 놈이네.” 그 말에 광종이 피식 웃으면서 거들먹거리는 표정을 하고 한 걸음 다가갔다. “왜? 너도 재롱 좀 피워볼래?” 여민일은 비록 키는 크지 않지만, 눈매가 날카롭고 일자로 굳은 입술은 성격이 만만치 않을 거 같다는 인상을 풍겼다. 그러나 성격이라면 광종도 한 성격 하는지라, 결코 꿀리는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 민일은 광종이 시비를 걸어와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첫 날부터 웃기지 말고. 니가 뭐라도 된 것처럼 구는데, 조심해라. 눈에 거슬리니까. 애들 괴롭히면서 일진 흉내 낼 생각도 하지 말고.” 광종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뒤에 섰던 아이들도 얼굴을 굳혔다. “너 어느 학교 나왔냐? 이 근방에서 나 모르는 새끼가 있는 줄 몰랐는데? 알면서 이러는 거면 겁대가리 상실한 놈이고.” 이죽거리는 광종의 발언에도 민일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먼저 한 걸음 다가서는 민일이었다. 심상치 않은 민일의 행동에 아이들이 경계의 시선을 던질 때, 지나가던 다른 반 아이들도 슬슬 눈치를 보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틈에 집으로 도망갈까, 심각하게 고민하던 지욱은 아이들이 만든 벽에 쌓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를 보던 그 때였다. “죽고 싶냐?” 민일이 먼저 선전포고를 날렸다. 이미 변성기가 시작되었던지, 민일의 목소리는 생긴 것과 달리 굵었고, 그런 목소리에 진정성(?)이 들어간 경고가 전달되자, 모여든 아이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흥미진진하다는 표정들을 지었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이 모든 것이 재미난 액션활극일 따름이었으니까. 아이들의 짐작대로, 광종은 쉽게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주먹을 들고 힘껏 뒤로 잡아당겼다. 등근육이 수축되며 잔뜩 힘을 비축한 주먹이 앞으로 뻗어나가길 기다리는 그 때, 그 순간의 틈에 민일의 스트레이트가 광종의 콧잔등을 때렸다. 놀란 광종이 주먹을 휘둘렀지만, 선제공격에 당황한 나머지 힘을 잃고 주먹은 허공을 지나갔다. 그리고 그 틈에 다시 또 다른 스트레이트 광종의 광대와 명치를 치고 지나갔다. 얼굴에 와 닿는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명치에는 제대로 맞았던지 순간 숨이 멈추는 느낌이었다. “와아!” 구경하던 아이들 중 몇이 흥분을 참지 못하고 탄성을 질렀다. 그 탄성은 전염성을 지녔는지 점점 여러 아이들이 흥분에 찬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민일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이미 내지른 이상, 끝을 보겠다는 생각이었는지 민일은 광종의 배를 향해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민일은 싸울 줄 아는 게 분명했다. 처음 광종의 코를 때리는 일격은 가벼운 잽이었다면, 명치를 때리는 스트레이트는 제대로 힘을 실은 공격이었다. 그리고 광종의 움직임이 멈추었음을 보고 확인사살 겸 주먹을 날렸다. 복부를 향해, 몸을 살짝 숙이고, 주먹을 세우며, 크게 스윙을 하는 동작으로 팔을 휘둘러 광종의 갈비뼈 아래 부분, 옆구리를 강타했다. 모래가 가득한 샌드백을 두드리면 저런 소리가 날까, 아이들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광종이 허리를 꺾으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주먹으로 광종의 하루 천하는 끝이 났다. **** 민일이 떠나고, 당사자가 떠나니 더 이상 붙어 볼 이유가 없어진 아이들이 흩어지고, 그 틈에 지욱이 도망을 가고, 광종과 한 무리가 되려 했던 아이들 몇이 사라지면서 남은 자리에는 어금니를 악물고 눈물을 참는 광종과 그와 오래 함께 했던 초등학교 동창 두 사람만이 남았다. “괜찮아?” 광종은 고통 때문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입을 여는 순간, 비명소리가 새어나올 것 같았고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였다. 비록 기습(!)에 당해 이 꼴이 되고 말았지만, 아직 자존심을 꺾은 것은 아니었다. 잠시 시간이 지난 후, 두 친구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난 광종이 눈을 부라리며 교문을 바라보았다. “죽여 버릴 거다.” 두 친구는 잠시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광종을 위로하며 자리를 떠났다. “나중에 도와줄 테니까, 일단 집에 가자.” 그 세 사람마저 사라진 뒤, 교실에는 반장인 지태를 비롯한 몇 명만이 남았다. “이상한 놈들 때문에 집에도 못가고 이게 무슨 꼴이야.” 지태 옆에 있던 소년이 투덜거렸다. 지태는 피식 웃으면서 일어났다. “우리도 정리하고 가자.” “반장, 쌤한테 이야기 할 거야?” 지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히 이런 거 고자질했다가 뒤탈나면 어쩌려고. 게다가 진짜 반장도 아니고.” “너 반장 안 할 거야?” “몰라. 아직은 결정 안했어.” 책상 줄을 맞춰가는 소년의 손은 쉬지 않았다. “너 전교회장도 했잖아? 그럼 반장 정도는 해줘야지.” “무슨 논리냐, 그게.” “너만한 애가 없다는 소리지.” 소년은 익살 궂은 웃음소리를 내며 지태를 바라보았다. 지태는 씩 웃다가, 칠판을 지우고 있는 소년에게 물었다. “넌 어때?” 그러나 칠판을 정리하던 소년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자길 부르는 줄도 모르는 건가 싶어서 지태가 다시 물음을 던졌다. “김단유, 넌 어떠냐고?” 그 소리에 단유가 고개를 돌리고 지태를 바라보았다. “나?” 지태가 맑은 미소를 띠면서 단유를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고급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 [201] Sunrise(6) 단유는 지태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칠판을 깨끗이 지우는 와중에 지태의 물음에 답했다. “안 할 거야.” “왜?” “한 번 해 봤거든.” 지태는 단유의 대답을 해석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한 번 해봐서 그 어려움을 알기 때문에 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한 번 경험해본 거라서 두 번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인지. “넌 반장 잘 할 거 같은데? 한 번 해보지 그래?” 칠판지우개까지 한 편에 가지런히 정리를 끝낸 단유가 뒤로 돌았다. 여전히 단유를 보며 싱글벙글 미소를 짓는 지태였다. 왜 자신에게 관심을 쏟는 걸까?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우리 또래에서 논어를 읽는 애가 평범하지 않다는 정도는 알거든.” 머리를 긁적이던 단유는 곧 교탁 위를 걸레로 닦은 뒤, 청소를 마무리했다. 더 이상의 대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보이는 단유임에도 지태는 끝까지 단유를 응시했다. 단유가 걸레를 접어 청소도구함에 집어넣고 나올 때까지도 그 시선은 집요하게 쫓아다녔다. 다른 청소당번이 빗자루를 집어넣고 청소를 마무리하자, 단유는 자리로 돌아가 가방을 집어 들었다. “보통 이렇게 사람을 쳐다보면 의식을 하지 않나?” 지태가 능글맞은 웃음을 머금고 입을 떼자, 단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함께 청소를 하던 소년을 바라보았다. “쟤 원래 저런 성격이야?” 원래 저렇게 집요한 녀석이냐는 물음이 담긴 질문에 소년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응. 초등학교 때부터 밝은 아이였어. 그래서 좋아하는 여자아이들도 많았어.” 단유는 눈썹 끝을 슬슬 긁다가 가방을 둘러매고 교실을 나가려했다. “야! 나도 기다려 줬는데 좀 기다려주지?” “뭘?” “선생님한테 이야기하고 와야 되니까, 그 때까지 기다려줘라.” 어차피 청소검사가 불량하다는 말을 들으면, 다시 해야 할 일이었다. 단유는 대답대신 주변 책상 위에 걸터앉아서 지태를 향해 턱짓을 했다. “갔다올게.” 지태가 교실을 빠져나간 틈에 같이 있던 소년이 말을 붙였다. “내 이름 알지?” “김채윤.” “여자 이름 같지?” 이름만 여자 같은 게 아니라 생긴 것도 곱상하게 생겼다. 키는 여느 아이 정도여서 자리 배치 할 때, 중간 자리에 앉았던 아이였다. 유독 콧대가 높고, 눈매가 선하다는 느낌을 주는 아이였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아이였는데, 원래 그런 입매를 가진 것 같았다. 물론―이유는 모르겠지만―계속 웃고 있는 모습 때문에 그런 인상을 받았을 지도 모르겠다. 단유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시간은 벌써 1시가 넘었다. 그런데 아무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명수가 자기보다 더 늦는 모양이었다. “너 무슨 게임해?” 채윤은 단유가 핸드폰을 꺼내는 모습에 게임을 하려는 것이라 어림짐작을 했다. 단유는 핸드폰을 집어넣으며 자신은 게임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난 게임 많이 하는데. 요즘 잘나가는 ‘디저트사가’라는 게임 몰라? 나 그 게임 하느라고 새벽 3시까지 안자고 할 때도 있었어. 방학이라서 그렇게 했지만, 이제는 줄여야 겠지? 방학 때는 용돈 받아서 현질해서 다이아 사가지고 장비도 맞췄거든? 그래서 사실 내가 레벨이 좀 높아. 만약에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내가 도와줄 거니까. 대신에 친구 추천할 때 내 아이디 좀 추천해줘. 추천만 해도 너한테 다이아 10개가 무료로 지급되니까. 다이야 10개가 별 거 아닌 거 같아도 초반에는 도움이 많이 돼.” 채윤은 쉬지 않고 알아듣지 못할 용어들을 섞어가며 재잘거렸다. 단유는 별다른 리액션 없이 채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말하는 중간에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리라 생각하면서. 그리고 이렇게 듣고 있자니, 어쩐지 말 많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기분도 들었다. 전화나 해 볼까? 그 때 지태가 나타나서 두 사람에게 하교 허락이 떨어졌음을 알렸다. “집 어느 쪽이야?” 단유는 쇼핑몰 있는 쪽 사거리라고 이야기했다. “우리랑 같은 방향이네. 같이 가자. 우린 사거리 가기 전에 있는 목성아파트에 살거든.”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인데 같은 아파트라서 더 친해졌다는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같이 갈 친구가 있는데, 연락이 없어서 데리러 가봐야 돼.” “석고야!” …정말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땀을 뻘뻘 흘리며 나타난 명수가 헤벌쭉 웃으며 등장했다. “미안, 애들이랑 좀 뛰다가 오느라고.” 어느 반에서는 싸움이 벌어져서 냉랭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는데, 어느 반에서는 축구로 똘똘 뭉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나 보다. 낯선 아이들끼리 모였음에도 축구로 하나 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스포츠란게 대단하다는 생각을 잠시 한 단유는 뒤에 선 지태 등을 보며 말했다. “내 친구야, 같이 갈. 우리 먼저 갈게.” “야, 석고가 얘 별명이야?” 채윤이 명수에게 묻자, 가쁜 숨을 몰아쉬던 명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신나게 설명을 했다. “어쩐지. 처음에 교탁 앞에 섰을 때부터 좀 잘생겼다고 생각은 했는데, 어릴 때부터 그랬구나. 너 여자애들한테 인기 좀 많았겠다?” 채윤의 말에 명수가 입을 떼려는 것을 단유가 재빨리 말렸다. “그만하고 가자.” 그러자 지태가 끼어 들어서 명수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랑 같이 가. 너희 사거리 쪽이라며? 우리도 그 쪽이니까 같이 가자.” 금테 안경을 슬쩍 밀어 올리며 웃음을 짓는 지태를 보던 명수가 또 바보같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단유는 에라 모르겠다, 는 심정으로 돌아보았다. 두 사람이 단유를 향해 반짝이는 눈동자를 들이밀고 있었다. **** 채윤은 생각 외로 밝았고, 지태는 생각한 만큼 넉살이 좋았다. “할아버지한테 서예를 배울 때, 처음엔 천자문을 썼는데, 지금은 논어를 쓰거든? 할아버지가 맨날 그래. 글자만 쓰려 하지 말고 뜻을 헤아려 쓰거라.” 할아버지 성대모사인지는 모르겠지만, 변성기가 오지 않은 지태가 애써 굵은 목소리를 흉내 내자, 그게 또 재밌다고 채윤과 명수가 배를 잡고 웃었다. “얘네 엄마가 만들어 준 떡볶이가 너무 맛있어서, 얘네 집에 일주일 내내 가서 놀았던 적도 있거든? 근데 그 때, 할아버지가 나도 지태 옆에 앉아서 해 보라는 거야. 근데 난 배운 적이 없잖아? 그래서 먹물이 막 튀고 그래서 엉망이 되니까, 할아버지가 가서 떡볶이나 먹고 가거라 그랬어.” 웃음 포인트가 어딘지 모르겠는데, 명수는 재밌다며 단유의 등을 소리 나게 두드렸다. “언제 한 번 놀러와. 우리 엄마는 친구들 놀러오는 거 좋아하셔서 너희들 오면 맛있는 거 많이 만들어 줄 거야. 우리 엄마 요리 솜씨가 되게 좋거든.” 명수는 당장이라도 가고 싶다는 듯 단유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지만, 단유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안 돼. 오늘은.” “왜? 아!” “거기까지.” 단유의 말에 명수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에 젖은 강아지 얼굴을 하고 지태를 바라보며 다음을 기약했다. 채윤이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을 때, 명수가 단유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자, 단유가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 “오늘 우리 집에 손님이 오기로 해서 안 돼.” “친척들이야? 우리 집도 친척들 온다고 하면 일찍 집에 들어가서 기다렸다가 어른들한테 인사하고 그랬어.” “우리 집도! 근데 우리는 그렇게 막 시간 지키고 그렇지는 않았는데.”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새는 분위기지만, 말리지 않았다. 명수도 이 때만큼은 별 다른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굳이 불필요한 신상명세를 이야기할 것 까지는 없다고 생각한 두 사람이었다. “내일 보자!” “그래. 명수 너도 자주 보자!” “안녕!” 두 사람과 헤어진 뒤, 명수와 단유는 둘만의 소소한 잡담을 나누며 집으로 향했다. “너네 반에 싸움 났다며?” “어떻게 알았어?” “아까 어떤 애가 이야기하면서 지나가더라. 3반에 싸움 났다고.” “그런데 왜 그렇게 늦게 왔어?” “네가 싸울 애는 아니잖아? 그리고 싸운다고 해도 맞을 애도 아니고. 게다가 그 때 꽤 중요한 순간이었거든.” “뭐가?” “해트트릭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순간. 첫 날 해트트릭을 딱 터뜨려줘야 애들이 인정해 줄 거 아냐.” “그랬구나.” 지나가던 두 소년은 문득 한 상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정확히는 명수가 멈춰서고, 뒤따라 단유가 걸음을 멈추고 명수를 돌아보았다. “왜?” 명수가 손가락으로 가게 안을 가리켰다. 향초를 파는 가게 안에 다양한 모양과 색을 가진 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개중에 몇몇 개는 불이 붙어서 고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소원 빌자.” “무슨 소원?” “그냥… 자기가 바라는 거.” 단유는 그냥 가자고 말하려다, 생각을 바꿔서 명수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3월 2일,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거의 대부분 학교가 개학하는 이 날, 두 소년은 새로운 시작을 함께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부디 아무 일 없는 평안한 학교생활을 하게 해 주세요.’ ‘부디 학교 최강 스트라이커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 집에 돌아온 두 사람은 어느 때와 같이, 호빵과 어울려주거나, 거실을 청소하거나 했다. 마침 선생님은 장을 보러 나가는 아주머니―인평시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집안 청소와 식사를 도맡아 해주는 아주머니를 새로 구했다―와 함께 외출을 나가셨고, 그 틈에 단유는 거실과 방 청소를 했다. “나도 청소할까?” “니 방 청소나 해 둬.” “내 방 그렇게 안 더럽거든?” 사실 명수의 방은 깨끗한 편이었다. 집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소파에서 지내는 명수였기에 책상 위는 매우 깔끔한 편이었고, 몇 안 되는 책들도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혀져 있어서 깨끗했다. “그래, 그럼 그냥 호빵이 안고 있어.” “응.” TV를 보면서 호빵을 쓰다듬고 있는 명수를 뒤로 하고 단유는 청소기로 방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점점 청소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청소를 끝내고 깨끗한 방에서 책을 읽는 게 기분이 좋았기에 멈출 수가 없었던 단유였다. 그 때, 벨이 울렸다. 거실에 있던 호빵이 킁킁대며 낮은 소리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나갈게.” 명수가 거실을 가로지르는 소리를 들으며, 단유는 청소를 마무리했다. 청소기를 들고 방을 나오는데, 현관에서 하이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갑네? 오랜만이다, 명수야.” “안녕하세요.” 고개를 돌려 현관을 봤을 때, 눈이 마주쳤다. “김단유! 오랜만이야?” 청소기를 끌어안고 있던 단유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붉은 입술 사이로 하얀 이를 드러낸 미인형 얼굴의 손님은 바로 수련이었다. 무릎까지 오는 롱부츠를 벗고 현관을 빠져나온 수련은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명수에게 건넨 뒤 거실을 둘러봤다. “우와, 너네 집 좋다. 거실도 넓고. 명수는 여기서 축구해도 되겠다?” 명수의 시선은 이미 비닐봉지 속 과자에 꽂혀 있어서 수련의 물음에 건성으로 예 예, 대답할 뿐이었다. “선생님은?” “이모랑 장 보러 가셨어요.” “그래? 누나 온다고 맛있는 거 해주려고 그러나?” “설마요.” 단유는 청소기를 제자리에 두고, 수련과 함께 소파로 갔다. “잘 지냈어?” “뭐, 저야 그냥 그렇죠.” “그렇겠지. 김단유의 일상이 참 그렇게 단조롭기 그지없어요.” 놀리는 듯한 말투에도 단유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이제 컴백한다면서요? 바쁠 때 아니에요?” “아무리 바빠도 니들 보러 오는 시간 정도는 되지?” “오버하지 마세요.” 수련이 입꼬리를 늘리며 단유의 머리를 양손으로 헝클어뜨렸다. “어이구, 이 귀염성이라곤 일도 없는 녀석아.” 단유는 고개를 흔들어 두 손을 피하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이미 머리가 엉망이 되고 말았다. 단유는 한숨을 푹 쉰 뒤, 옅은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정리했다. “형은요?” 그 때, 다시 현관의 벨이 울렸다. “왔나보다.” 수련의 말처럼 이번에는 매니저가 현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는 근처에 주차할 만한 곳이 없더라? 불편하게시리….” 매니저가 옷을 탈탈 털며 거실로 들어왔다. 명수와 단유가 일어서서 인사하자, 매니저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어이, 반가워. 국가대표 유망주. 그리고….” 단유를 향한 눈에서 빛이 번쩍였다. “우리 회사의 보물.” ======================================= [202] Sunrise(7) 매니저의 말에 단유는 불편한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잔뜩 이맛살을 찌푸리며 투덜댔다.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저 진짜 생각 없다니까요.” 그러나 매니저는 능글대는 웃음을 지으며 다가와 단유 옆에 앉았다. 한쪽 팔을 들어 단유의 어깨에 걸치는데 희미하게 향수 냄새가 났다. “그러지 마라. 너 정도면 대박난다니까? 이번에 찍은 뮤직비디오 못 봤지? 아주 끝내주더라.” “나도 봤는데, 너 되게 잘 나왔어. 넌 실물보다 화면이 더 잘 나오는 거 같아.” 뭘 모르던 어렸을 때였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단유는 두 사람 사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파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어깨를 두른 매니저가 억지로 앉혀서 일어나지 못하게 막았다. “알았어, 알았어. 장난 그만할 테니까 진정해. 형이 널 위해서 선물도 가지고 왔는데 말이야.” “뭔데요? 선물?” ‘선물’이란 말에 명수가 먼저 반응을 보였다. “니 것도 아닌데 웬 관심?” 수련이 핀잔을 던지자, 호빵을 안고 있던 명수가 실실 웃음을 지었다. “얘께 내꺼고 내께 얘꺼고, 그런 셈이죠.”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책만 아니면요.” 매니저는 피식 웃으면서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끄집어 들었다. 얼핏 보니, 엄지손가락 크기의 USB였다. 매니저는 그 USB를 TV 옆에 붙은 단자에 꽂고 리모컨을 들었다. 단유는 어쩐지 저 선물이란 것이 어떤 것일지 예상이 되었다. “하지 마세요.” “왜? 아직 뭔지도 모르면서?” “알 거 같아요.” 매니저가 빠진 틈에 수련이 팔을 걸치고 단유를 붙잡았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수련은 가까운 사람에게 장난스러운 모습도 종종 보이곤 했다. “섣불리 판단하지 말라고. 니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일 수도 있잖아?” 그 동안 리모컨을 조작하던 매니저는 USB 안의 동영상을 실행시켰다. 명수도 호기심을 갖고 TV를 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TV화면에서 나온 것은 단유가 예상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10초가량 클래식 피아노 전주가 나오다가, EDM 풍의 전자드럼과 스트링이 가세하면서 미디엄템포의 R&B 댄스곡이 화려하게 꾸민 갤럭시즈와 함께 등장하였다. 뮤직비디오는 다른 것들과 비슷한 형식이었다. 군무 컷과 이미지 컷, 스토리 컷 등이 어우러진 뮤직비디오는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인 색감과 함께 연출되었다. 이 영상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역시 갤럭시즈 멤버들의 뛰어난 외모였다. 외모가 주목받는 대신 가창력이 떨어지지 않을까, 라는 대중의 선입견을 깰 만큼 음악도 좋았다. 다만 너무 흔한 R&B 댄스곡인지라 유사장르의 곡들과 비교했을 때 경쟁력이 있다고는 자신하기는 어려웠다. 또 하나, 이 뮤직비디오에서 주목할 점은, “와, 석고다! 대박!” 단유가 출연한다는 점이었다. 단유는 검은 정장을 입은 미소년으로 등장하여 스토리 컷 중간마다 출연하였다. 가끔 클로즈 샷으로 단유를 비출 때마다 명수가 손가락질하며 감탄을 했고, 단유는 보는 내내 얼굴을 가려야 했다. 그러나 호기심이 아주 없지는 않은지라 실눈을 뜨고 영상을 훔쳐보았다. **** 단유가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게 된 계기는 우연이자 필연이었다. 굳이 어느 한 쪽을 고르자면, 예고된 우연이랄까? 단유와 갤럭시즈가 인터넷 방송을 하던 당시, 해당 영상을 본 사람은 1천명도 되지 않았다. 그만큼 갤럭시즈는 인지도가 부족한 걸그룹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단유의 기행(?)은 팬들 사이에서 소문이 났고, 이 때문에 조금씩 녹화 영상의 조회수가 오르기 시작했다. 팬카페에서는 2차 방송을 만들어달라는 주문이 쇄도했다. 그리고 수련 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도 야매성형상담(?)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구체적인 언급까지 나오는 상황이 되었다. 당연히 소속사에서는 팬카페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확인했고, 향후 플랜을 세웠다. “어떻게 할까?” “나쁘지 않겠는데요?” 나쁘지 않다면야 뭐든 해야 할 신인 걸그룹. 약간의 시간을 투자해서 인지도와 유명세를 끌어올 수 있다면 해 볼만하다는 판단을 내린 기획사였다. 의사를 타진하고자 단유에게 연락을 취한 것은 매니저였다. 리조트에서 헤어지기 전, 하은과 연락처를 주고받았던 매니저는 하은을 통해 단유의 연락처를 받았고, 단유와 연락을 한 뒤 인평시까지 한달음에 내려온 매니저였다. 단유는 매니저의 제안에 단호하게 답변했다. “싫은데요.” 매니저는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방송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아느냐, 흔치 않은 기회다, 혹시라도 댓글에 좋지 않은 내용이 올라올 경우에는 법적인 조치도 취해줄 수 있으니 걱정 말라, 출연료는 충분히 지급하겠다는 둥 온갖 제안과 약속과 선물을 제시했으나 단유는 단호히 거절했다. “왜 그렇게 싫어하는데? 혹시 지난 방송 때문에 그래?” 매니저의 기억에 지난 방송에서 단유가 실수를 하거나 혹은 그 때문에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공부할 시간이 줄어들어서 싫어요.” 하루를 빠지든, 혹은 반나절을 빠지든 어느 정도 시간 희생을 감수해야 할 작업인데, 단유로서는 별로 달갑지 않았다. 방송일을 할 생각도 아니었고, 댓글 따위를 신경 쓰는 성격도 아니었고, 돈은 있으면 좋겠지만 딱히 절실한 정도도 아니었기에 매니저의 제안은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1차 접촉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매니저는 이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직감에 2차 방송이 만들어진다면 분명 갤럭시즈의 인지도 상승에 큰 기여를 할 콘텐츠가 만들어질 거라고 확신했다. 2차는 매니저와 갤럭시즈 멤버들이 함께 했다. 난데없는 걸그룹의 습격(?)에 갓 취업한 박 선생님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고, 명수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으며, 단유는 짜증을 감추지 못했다. “아저씨, 진짜 저 하기 싫어요.” 매니저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저씨 아니다. 결혼도 안했고, 너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 호칭을 ‘형’으로 바꾸는 것 정도는 양보할 수 있었지만, 방송 출연은 정말 싫었다. “넌 얼굴도 좋고, 말도 잘해서 사람들이 다들 널 좋아할 거야.” 수영의 말에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얼굴도 모르는 인터넷 속의 사람들이 저를 좋아해주는 건 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뭔가 한다는 게 내키지 않아요. 물론 누나들의 연예인으로서의 활동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전 연예인도 아니고 연예인이 될 생각도 없으니까요.” 수련이 다음 타자가 되어 단유를 설득했다. “지난번에 니가 도와준 덕분에 방송이 잘 된 건 알지? 너 덕분에 우리 팬카페에 난리가 났어. 그리고 그 분들이 니가 한 번 더 출연하길 원해서 이렇게 온 거라는 건 알지? 그럼 지난번처럼 도와준다고 생각하면 안 될까? 연예인으로서 방송을 하는 게 아니라, 선의의 차원에서 말이야.” 단유가 고개를 저었다. “선의의 도움은 지난번에 한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 되는데요? 그리고 그 때도 말씀드렸지만, 저 많이 후회했어요.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늘어놓아서 마치 말만 번드르르하게 늘어놓는 사기꾼이 된 기분이었거든요.” 명수의 손을 잡고 집안을 구경하다 마침 거실로 나온 예영이 단유의 이야기를 듣고는 꾀를 냈다. “그럼 말 안하고 있는 건 괜찮아?” “말을 안 하면 방송을 하는 의미가 없지, 바보야.” 지수의 타박에 예영이 고개를 흔들며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우리도 모니터했지만, 단유 외모가 꽤 되는 편이잖아요? 명수 너도 잘생기긴 했어, 오해하지 마. 아무튼, 예전에 단유가 모델을 한 적도 있다고 하더니 카메라 시선 처리도 그렇게 어색하진 않았어요. 그쵸?” 매니저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니터 화면에서 단유 얼굴 보니까 꽤 비주얼이 좋단 말이죠? 만약 자막을 넣는다면 김단유, 12세, 초절정미소년 이렇게 넣어도 좋을 것 같단 말이죠.” “본론이 뭐니?” 수영이 참지 못하고 예영의 말을 잘랐다. 예영이 씩 웃으며 말했다. “단유, 우리 뮤직비디오에 출연시켜보죠?” 뮤직비디오, 라는 이야기에 다들 얼이 빠진 얼굴로 예영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단유가 2차방송하기 싫다는데 억지로 앉혀서 이야기해봐야 기분도 좋지 않을 거고요. 저 개인적으로도 별로 강요하고 싶진 않아요. 게다가 같은 걸 반복하는 셈인데, 이게 재미있을까 생각하면 별로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래서 여기 오는 동안 생각을 해봤죠. 인터넷 방송 말고 팬들을 만족시킬 수 있고, 단유도 부담이 덜 되고, 우리도 충분히 선전효과를 누릴 만한 게 뭐가 있을까 하고. 그런데 문득 우리가 지금 준비하는 싱글 앨범 타이틀이 생각나더란 말이죠.” “‘미챠(meet yah)’?” “그거요! 지워지지 않는 추억 속, 첫 사랑에 대한 고백. 그런 컨셉이잖아요. 거기에 단유가 들어간다면? 꽤 괜찮은 그림 나올 거 같지 않아요? 오히려 성인 연기자보다 좋은 그림에 컨셉이 될 지도 몰라요. 팬들도 아마 좋아할 거구요.” 매니저는 모처럼 예영이 좋은 아이디어를 줬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 궁리를 하던 매니저는 통화를 위해 밖으로 나갔다. 나가기 전 수영과 지수에게 눈짓을 보냈다. 두 사람이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매니저가 빠진 자리를 채우고 앉았다. “단유야, 어때? 뮤직비디오라면 덜 부담이 가지 않을까?” 단유는 볼 끝을 물들이며―열이 오른 건지, 화장을 해서 그런 건지는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다가오는 두 사람을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더 부담되는 거 아니에요? 아무리 4분짜리 뮤직비디오라도 편집 분량 등을 고려하면 하루 종일 찍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거, 저도 알거든요?” 과거 도서관 홍보용 포스터 2종류를 제작하기 위해, 반나절 이상을 카메라 앞에 섰던 경험이 있던 단유였다. 두 사람은 마주보고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새로운 설득 작전에 돌입했다. “명수야, 너도 단유가 TV나오는 거 싫어?” “아뇨, 그렇지는 않은데….” “그치? 나오면 좋잖아?” 명수를 포섭함과 동시에 단유에게 구애를 펼쳤다. 다섯 사람이 돌아가며 펼치는 구애작전에는 천하의 단유도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마침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매니저가 좋은 아이디어라고 칭찬받았다며 윗선까지 보고됐다는 말에 단유는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 “야, 저 때깔 봐라! 명수야, 니 친구 멋지게 나왔지?” “진짜 멋있어요!” 명수는 2번째로 감상 중이었다. 어째 단유보다 더 좋아하는 명수였다. 매니저는 흐뭇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단유를 향해 넌지시 말을 걸었다. “우리 회사 사람들도 이거 보고 감탄을 했다. 사장님이 직접 이야기하셨어. 너 정도면 충분히 아역 모델이나, 배우도 가능할 거라고. 진짜 연예계 쪽 생각은 없니? 사실 알고 보면 니 나이 때 활동 시작한 아이들 많아. 게다가 우리 회사가 비록 영세하긴 해도, 너 정도라면 얼마든지 전폭적인 지원을 할 수 있단 말이야. 우리 사장님 분위기로 봐선 얘네들보다 널 띄우는 게 더 좋을 거라고 보는 것 같거든?” 매니저가 슬쩍 눈짓으로 수련을 가리키자, TV를 보던 수련이 어찌 알았는지 인상을 확 쓰면서 매니저를 째려봤다. 두 사람이 아웅다웅 하는 모습을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닌지라, 단유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정말 전 생각 없어요. 지금은 오로지 공부만 하고 싶어요. 이게 제일 재밌기도 하고요.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렇게 마음 편하게 공부할 수 있겠어요.” “나 참, 누가 들으면 세상사 다 겪은 아저씬 줄 알겠네.” 매니저의 툴툴거림을 들으며 단유는 물었다. “진짜 이거 주시려고 오신 거예요?” “이것도 이거지만, 니가 이쪽으로 이사를 온 다니까 수련이 쟤가 꼭 가야겠다는 거야. 집들이해야 한다고.” 단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련을 바라봤다. “집주인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무슨 집들이를 해요?” “어머? 얘 좀 봐. 우리 사이에 꼭 불러야 오니? 누나가 동생들 보고 싶어서 올 수도 있는 거지. 그치? 명수야?” 명수는 또 그게 좋다고 속도 없이 헤실헤실 웃음을 지었다. 수련이 명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는 모습을 보며 단유는 혀를 찼다. ‘여우네, 여우.’ 어쩐지 수련이 자주 여기로 찾아들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 건 왜일까? ======================================= [203] Sunrise(8) 보고 싶어서 왔다는 말이 진짜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데 말을 해주지 않는 건지 잘 판단이 서지 않는 가운데, 선생님과 아주머니가 돌아왔다. 이후, 아주머니가 솜씨를 발휘하여 매니저와 수련은 아이들과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잘 먹었어. 다음에 또 보자.” 검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야구 모자를 깊이 눌러쓴 수련은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뒤로 넘긴 뒤 배웅 나온 세 사람을 향해 손을 들 때였다. 갑자기 매니저가 단유를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서 짧은 대화를 나눈 뒤, 매니저는 손을 흔드는 수련을 끌고 돌아갔다. 두 사람이 돌아간 뒤, 명수는 단유를 데리고 TV앞으로 갔다. 또 한 번 더 영상이 재생되고, 이제는 노래가 꽤 익숙하다고 여길 정도가 될 무렵 명수가 물음을 던졌다. “정말 싫어?” “응?” 명수가 손가락으로 TV를 가리켰다. “연예인.” 단유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돈 많이 벌잖아?” 단유는 피식 웃으면서 TV를 껐다. “돈은 니가 더 많이 벌 거잖아? 국가 대표 돼서.” 명수는 잠시 멍하니 있더니, 히죽 웃었다. “맞아.” “그런데….” 단유가 잠시 말을 끌었다. 명수의 눈치를 보다가,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뒷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들었다. “지금은 이 정도로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뭐야?” “아르바이트 비.” 영문을 몰라 눈만 껌뻑이던 명수가 뒤늦게 의미를 알아차리고,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단유도 손을 들어 거실이 울릴 정도로 세차게 손뼉을 마주쳤다. 주방에 있던 아주머니가 무슨 일이냐며 돌아볼 정도로. **** 입학식 이후 3일 뒤, 토요일을 맞이하여 명수는 주영과 함께 유소년 클럽 가입테스트를 받으러 떠났다. “넌 안 갈래?” “괜찮아요. 오늘은 그냥 집에서 기다릴래요. 읽을 책도 있고요.” 주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단유는 명수에게 다가가 잘하라고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명수는 살짝 긴장한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사실 단유도 가보고 싶긴 했는데, 어제 저녁 명수가 혼자 가서 테스트를 받을 테니 따라오지 말라고 부탁을 했다. “갔다 와서 깜짝 놀라게 해줄게.” 단유는 명수의 속내까지는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일단 그 뜻에 따르기로 했다. 그리하여 토요일 오전, 명수는 주영과 함께 유소년 축구 클럽이 있는 축구장으로 향했다. 조수석에 앉은 명수를 흘끔 바라보던 주영은 명수가 중요한 것이라도 되는 듯 소중하게 품에 안고 있는 물건의 정체가 궁금했다. 물어보니 축구화라고 했다. “석고가 사준 축구화요.” 그저께 시내에 나가서 한참을 고르고 고른 신발이라며, 살짝 끝을 보여주는데 유명 브랜드의 로고가 새겨진 빨간 축구화였다. “비쌀 거 같은데?” 이제껏 긴장한 듯 말이 없던 명수는 그 질문을 받자 평소의 명수처럼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단유가 제안을 받은 때부터 해서 며칠 전 갤럭시즈의 매니저가 찾아와 주고 간 영상과 아르바이트비(費)―단유는 단호히 아르바이트였음을 주지시켰다―에 이르기까지 구구절절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축구화 하나를 고르기 위해 얼마나 신중하게 선택을 했는지를 설명하며 뿌듯해했다. “그런데 왜 오늘 혼자 가겠다고 했어? 단유도 따라가면 좋지 않아? 단유가 응원해주면 힘이 나지 않겠니?” 그러자 한참을 밝게 웃으며 이야기하던 명수의 얼굴이 싹 굳었다. 잘못 말했나 싶은 생각이 스치고 지날 때, 명수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요… 석고가 같이 가면 좋긴 한데요, 어쩌면 석고 때문에 제대로 선택을 하지 못할 거 같아서요.”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명수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석고는요, 제가 잘하든 못하든 절 응원할 거예요.” “그렇겠지.” “제가 잘해가지고 클럽에 가입할 수 있게 되면 다행이긴 한데요, 만약에 제가 잘 못해가지고요, 클럽에 못 들어가면요, 석고는요, 포기하지 말라고 말해줄 거 같아요.” “그…렇겠지?” “그러면요, 제가 포기하기 힘들 거 같아요.” “뭘 포기해?” “클럽에 들어가는 거요, 사실 저 클럽 안 들어가도 상관 없거든요. 돈도 많이 들어서 매달마다 돈도 내야 하는데, 제가 돈이 없잖아요. 아, 형이 내준다고 이야기는 했지만, 그래도요. 이 신발도 사실 석고가 사준 거라서 신기는 해도요, 가격이 너무 비싸서요, 다음에는 신발 어떻게 사요, 그리고 체육복도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래서요, 사실은요, 테스트만 받고 그냥 오려고요. 그래도 궁금하잖아요, 제가 어느 정도 실력이 되는지.” 명수의 이야기는 조금 두서가 없긴 해도 이해를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를테면, 지난 번 이야기의 연장선이었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아예 클럽에 가입할 생각이 없다는 점이랄까. 단유도 그렇고, 명수도 마냥 어리게만 볼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성장과정에서 다른 아이들과 다른 과정을 거쳐 온 아이들이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눈칫밥을 먹었을까? 속없이 웃는 것처럼 보이고, 틈만 나면 놀 생각만 하는 명수라도 속에는 저리도 많은 걱정과 부담을 안고 살았나보다, 생각하니 괜히 가슴이 아렸다. 그런 와중에 구김살 없이 자란 것이 대견하다고 해야 할까? “형이나 누나가 도와주는 게 그렇게 많이 부담스럽니?” “어릴 때는 몰랐는데요. 지금은 좀 그래요.” 명수는 호주머니에 넣어뒀던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이것도요, 매달 돈이 나가는 거라면서요? 정말 몰랐거든요. 그런데 그 돈도 되게 많이 나가더라고요. 석고가 계산해줬는데, 1년 동안 나가는 돈이 어마어마해서요. 솔직히 쓰기가 좀 그래요.” “안 그래도 돼. 그 정도는 너희들이 마음껏 써도 형이나 누나한테는 아무렇지도 않아.” “그게 아니고요. 나중에 저희가 이걸 갚으려고 하는데요, 너무 많이 쓰면 나중에 갚기 힘들잖아요.” 주영은 시선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고정된 시선이 흔들리지 않도록 애를 써야 했다. 살짝 흐릿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전방주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선배는 얘들 생각을 알고 있을까?’ 나중에 가서 의견을 나눠봐야겠다, 생각한 주영은 잠시 입을 닫고 운전에 집중했다. 명수도 말할 분위기는 아니라고 생각한 것인지 입을 닫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3월 첫 주의 주말이라 그런지, 아니면 모처럼 날씨가 풀려서 기분이 좋아진 탓인지 나들이를 나온 차량들이 많이 보였다. 사람들이 입은 옷과 차의 색깔은 여러 가지였지만, 사람들의 얼굴엔 봄빛이라 불릴만한 색깔 하나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 “명수야, 늦겠어.” 단유가 현관에서 기다리자 방에서 허겁지겁 튀어나온 명수가 윗 단추도 제대로 채우지 않은 모습으로 달려 나왔다. “가방은 챙겨.” 명수는 빈손을 바라보더니, 제 머리를 툭 치고는 방으로 돌아갔다. “다녀오겠습니다.” 선생님의 배웅을 받으며, 두 사람은 오피스텔을 빠져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명수가 디지털 숫자판을 보며 투덜댔다. “우리 집 너무 높은 거 아냐? 낮은 데였으면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도 될 텐데.” 단유는 잠시 비상구 계단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저었다. 15층에서 1층까지 뛰어 내려갈 시간에 차라리 얌전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물론, 단유 혼자라면 다르겠지만. 이윽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두 사람은 학교까지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우리 자전거 있으면 좋겠다, 그치?” 단유는 그것도 나쁘진 않겠다 생각하면서 동시에, ‘점점 많은 것들이 필요해지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만 해도 점점 더 많은 책이 읽고 싶고, 도서관에 늘 필요한 책들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갖고 싶은 책, 소장하고 싶은 책들이 눈에 들어오던 무렵이었다. 하물며, 축구부에 들어간―클럽은 들어가지 않았다―명수는 오죽하겠는가. 다른 아이들은 축구화도 두 켤레 내지 세 켤레 씩 가지고 있고, 일반 운동화와 체육복, 유니폼, 양말 등을 세트로 들고 다니는 판국이었다. 6학년 때부터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현실에 부딪치자 단유는 훨씬 더 곤란한 문제임을 깨달았다. 어쩌면 재훈의 말대로 지원받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고맙게 쓰면 될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유혹과 반대로 ‘홀로서기’를 꿈꾸는 단유와 명수는 쉽게 손을 내밀기가 어려웠다. 1학년 7반 교실은 동쪽 끝, 3반은 서쪽 건물 중앙부에 위치해 있었다. “나중에 보자.” 명수가 손을 흔들며, 복도를 가로질러갔다. 단유도 교실을 찾아 들어갔다. 교실 문을 열자, 일찍 등교했던 몇몇 아이들의 시선이 날아왔지만 곧 흥미를 잃고 본래 하던 일로 돌아갔다. 입학식으로부터 3주 정도가 흘렀지만, 단유는 반에서 별로 친한 사람이 없…. “김단유! 굿모닝!” “어, 그래.” …아주 없지는 않았다. 엄밀히 말해서 친하다기 보다는 친해지고 싶어서 엉겨 붙는 아이가 있었다. 아니, 친해지고 싶은 건지 그 의도조차 정확히 파악이 되지 않는 아이, 지태였다. “반장! 왜 이렇게 늦어?” 단유의 뒤를 따라 등교한 지태가 모습을 드러내자, 몇몇 아이들이 반장을 반겼다. 단유가 지태의 인사를 적당히 받아넘기고 자리로 돌아갈 때, 지태는 예의 맑은 웃음을 지으며 다른 아이들에게 인사했다. “핸드폰 배터리가 다 돼서.” 우습지도 않은데 지태는 자기가 한 말이 무척 재밌는 농담이라도 된 것처럼 킥킥거렸다. 할아버지에게 서예를 배우면 저런 부작용이 있는 걸까? 단유의 자리는 창가 옆 분단의 제일 뒷자리였다. 반에서 제일 키가 큰 애는 병수라는 아이였는데 그 다음으로 큰 사람이 단유여서 두 사람은 짝이 되었다. “굿모닝.” “응. 안녕.” 병수는 멀대 같이 키만 크다, 고 묘사하기에 적당한 친구였다. 얼굴이 무척 동안이라 얼굴만 보면 초등학생이라 생각이 들 정도로 순진무구하게 생겼다. 젖살이 덜 빠진 동그란 얼굴에 눈썹과 입꼬리가 모두 살짝 내려가 우울한 인상이었다. 큰 키에 비해 몸은 대체로 말라서 허약해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인상과 달리 성격은 꽤나 밝은 편이었다. 단유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정도의 밝음, 이랄까? “이거 봤어? 빌려줄까?” 단유의 기준에서 병수는 꽤나 밝은 소년이었다. 이제 막 등교한 짝에게 보던 만화책을 권할 정도로. “아니, 괜찮아.” 그런 친구에 비하면 자신은 얼마나 어두운 성격인가. 짝의 제안을 무 자르듯 싹뚝 잘라먹는 모습이라니.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요즘 40여명의 낯선 남자들 틈에 있으려니 자신이 저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여질까, 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어쩌면 단유가 주변 아이들의 얼굴과 성격을 남몰래 평가하듯, 다른 사람들도 단유를 평가할 것이다. 과연 그들은 어떻게 자신을 평가할까? 그 때 교실 뒷문이 열리고 한 아이가 묵직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입학식 첫날 사고를 일으켰던 장본인이자, 그 이후 좀처럼 위세를 떨치지 못하고 점점 어둠 속에 파묻혀 가는 광종이었다. “…….” 과묵한 아이는 아니었던 같은데, 점점 과묵함이 그의 지방질만큼이나 깊어지고 있었다. 더불어 그들의 패거리도 함께. 아직까지는 첫날부터 함께 했던, 초등학교 동창 출신의 패거리―그래봐야 이제 3명 정도만 남았다―가 있었다. 그러나 첫 날 우르르 몰려들던 다른 초등학교 출신 아이들은 광종을 못 본척했다. 대신 그들은 또 다른 무리를 지어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새로운 세력의 중심에는, 아직까진 단유가 말 한 번 붙여본 적이 없던 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 그 소년이 교실 앞문을 열고 손을 번쩍 들며 활기찬 모습으로 등장했다. “씨발, 굿모닝이다!” 욕인지 인사인지 구분이 안 되는 소리를 지르며 등장한 이는 ‘백철규’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이었다. “뭐, 좋은 일 있냐? 월요일 아침부터 기분 좋아 보인다?” 첫날의 소란에도 경거망동하지 않는 신중함을 보였던 소년 ‘철규’가 반에서 새로운 세력을 일으키고 그 중심이 된 것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 사연이랄까, 사건이랄까. ======================================= [204] 어른의 의미(1) 학기 초의 선생님들은 늘 일에 치여 산다. 학기 중간이라고 해도 바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특히 학기 초와 말에는 온갖 서류들로 인해 선생님들은 진이 빠질 정도였다. 각종 공문서와 교원잡무와 행정업무 등으로 부담을 느끼지 않는 선생님이 없을 정도였고, 때문에 지난 40여 년간 학교 현장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지적되던 부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업무경감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이루어지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수업이 끝난 후에도, 교무실에 남아 서류작업을 하던 박헌영은 들고 있던 펜을 놓고, 기지개를 폈다. 한껏 뭉쳤던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는 통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고개를 돌려 목근육을 풀어주려 했더니, 창밖으로 주황색 노을이 넘실대고 있었다. “박 선생, 일 많이 남았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희재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헌영은 책상에 남은 생활기록부들과 공문서 다발을 대충 훑다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다 못하겠어. 내일 하지 뭐.” 본래 오늘 일은 내일로 미뤄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오늘을 살 수 있으니까. 희재가 손가락을 꺾어 입가에 대고 시늉을 했다. “한 잔 콜?” 헌영은 피식 웃으며 일어섰다. 의자 등받이에 걸쳐 뒀던 재킷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콜.” **** “크으, 좋네. 오늘 술 좀 잘 들어갈 거 같은데?” 가끔 그런 날이 있지. 소주 첫 잔이 너무 달아서 기분이 상쾌해지는 기분이 드는 그런 날. 헌영은 술잔을 내려놓은 뒤, 앞에 놓인 계란말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 쪽 반은 어때?” “뭐? 앞 뒤 자르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란 거야?” 희재는 평소에도 다소 까칠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영어과를 맡은 희재는 예전 미국 유학 당시, 너무 고생을 해서 그런지 자기가 생각해도 성격이 조금 까탈스럽다는 고백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보기에는 ‘조금’이 아니라 ‘거의 매사에’ 까칠한 면이 있었다. 본인만 그 심각성을 몰라서 고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 “반에 문제가 될 만한 아이들이 없냐는 이야기지. 아니면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 그런 까칠한 성격의 희재가 헌영과 친해지게 된 계기는 별 거 없었다. 둘 다 술을 좋아했다는 것. ‘애주가’와 ‘중독자’의 사이 어디쯤에 위치할 법한 두 사람이었다. 헌영이 아직 미혼인 것에 반해, 희재는 결혼을 한 입장임에도 술자리는 꼬박꼬박 챙기고 다녔다. 심지어는 오늘처럼 먼저 술자리를 제안하기도 했고. “아, 사실 나도 들었지. 너희 반에 문제아 있다며? 다행히 우리 반엔 그런 애는 없어. 근데 모르지. 어디 애들이 ‘나 문제아요’ 하고 사고치나? 예고편도 없이 바로 본편 클라이맥스로 뛰어드는 게 이맘 때 애들인데.” 희재가 김치부침개 하나를 입안에 가득 채워 놓고 우물거렸다. 헌영은 희재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술을 적셨다. “하긴 그런 면에서 보면 예고편도 믿을만한 건 아니지. 어떤 영화는 예고편만 화려하고 본편은 밋밋해서 실망스러운 것도 있으니까. 반면에 예고편은 별 거 없는데 본편이 역대급인 영화도 있지.” “뭔가 의미심장한 이야기 같은데?” 희재가 부침개를 찢다가 헌영을 바라보았다. 헌영은 피식 미소를 짓더니 잠시 술잔을 들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입을 열어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했다. “사실 우리 반 애들 중에 본방 전에 선 공개라고 하나? 미리 간을 좀 보여준 애들이 몇 있어. 한 녀석은 교감선생님한테 인증을 받은 터라 경계를 했는데, 가만 살펴보니까 이 놈, 쭉정이도 보통 쭉정이가 아냐. 비실비실해 보이는 외모도 그렇고, 숫기도 없고. 그냥 설렁설렁 보면 흔해빠진 중딩이더라. 일탈 같은 건 꿈도 못 꿀 애처럼 보이기도 하고 말이야.” “잘 됐네? 사고 안 칠 것 같단 소리 아냐?”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훔치던 희재가 묻자, 헌영이 고개를 절래 저었다. “그건 모르지. 니 말대로 갑자기 홱 돌아버릴 수도 있는 거니까. 괜히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부르겠어? 그런데…사실 지금 모습만 보면 얌전하고 문제가 될 소지는 별로 없어 보여서, 말없이 주의만 기울이고 있는 중이긴 하지.” 희재가 술잔을 들었다. 헌영도 맞잔을 들어준 뒤 말을 계속 이었다. “근데 걔 말고 선공개를 한 놈이 있는데, 이게 골 때린단 말이야.” “왜? 험악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생긴 것만 보면…TV에 나오는 아이돌? 연예인급? 그 정도로 잘 생긴 놈이야.” “그런 애가 있어? 그런 애가 있으면 벌써 소문이 나고도 남을 일 아닌가?” 헌영은 잠시 그 얼굴을 떠올렸다. 말없이 서 있던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키가 커서 줄을 세우면 얼굴이 두드러지게 보일 때가 있었다. “일단 내가 걔한테 관심을 갖게 된 게 입학식 때인데, 애들이 앞에 이렇게 줄을 서 있잖아? 그럼 사실 궁금하잖아? 올해는 어떤 애들이 우리 반에 들어오나, 궁금하잖아? 그래서 이래 둘러보는데, 딱 눈이 마주친 거야. 근데 이 놈이 나랑 눈싸움을 하기 시작하네?” “눈싸움?” “응, 딱 눈을 이래가지고 날 보는 거야. 무슨 생각이 들겠어? 아, 이 놈 심상치 않은 놈이구나, 그런 생각이 탁 스치고 지나가는 거야. 그래서 이 놈 언제까지 그러나보자, 하고 나도 계속 쳐다봤지. 그런데 끝까지 눈을 안 돌려! 계속 날 보는 거야! 와, 이 놈. 이거 처음에 제대로 안 잡으면 큰일 날 녀석이겠구나, 감이 오더라고.” 눈을 부릅뜨고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상황재현을 하는 헌영의 말에 점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희재는 술잔도 내려놓고 경청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고 쳤어?” “사고는 무슨. 그게 선공개였다는 거지. 그런데 말이야….” “그런데?” 헌영은 잔뜩 힘을 주던 눈에 힘을 풀고는 앞에 놓인 술잔을 잡고 들었다. 희재가 궁금하다는 눈으로 맞잔을 부딪쳐주자, 헌영은 한 번에 술을 털어 넣었다. “이 놈이 보통 놈이 아닌 거였지. 이 놈, 영재라네?” “영재?” 학기 초, 헌영은 단유의 보호자를 만났다. 법정 후견인을 대신하여 왔다는 사람은 현재 단유와 명수를 돌보고 있는 보육교사 출신의 박애란 선생님이었다. 박애란 선생님을 통해 단유와 명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헌영은 살짝 충격을 받기도 했고 다른 선입견이 생기기도 했었다. “고아라고?” “응. 그래서 아, 이 놈 한 성격 하겠구나. 언제든 한 번 큰 사고 칠지도 모르겠구나. 경계해야 할 놈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는데, 알고 보니까 이 놈이 그 ‘은둔형 천재’? 뭐 그런 스타일이더라고.”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희재에게 헌영은 몇 주간의 관찰 결과를 알렸다. 거의 대부분 교실에 붙박이처럼 붙어 있는 모습이나, 늘상 책을 끼고 있다거나, 평소에도 거의 있는 듯 마는 듯한 모습으로 존재감을 지우고 살아가는 아이에 대한 관찰이었다. “아마 우리 반에서 제일 얌전한 아이라면, 그 녀석일걸? 내 수업 시간에도 절대 아는 티를 안내고 그래.” 수학과목을 담당하고 있는 헌영은 자신의 수업시간에 몇 번 불러서 시켜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학기 초라 진도가 많이 나가지 않은 상태에서 어려운 난이도의 테스트를 하기란 어려웠고, 때문에 단유가 진짜 영재인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보류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몇 번이고 가졌던 선입견들, 으레 그러겠거니 하고 짐작했던 자신의 생각을 계속 부셔대는 아이라는 점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래서 지금 그 아일 보면, 사실 조금 미안해지는 기분도 들어. 학생들을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 아이의 행동, 말, 생김새 등으로 쉽게 짐작해버리는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헌영의 급작스러운 고해(告解)에 희재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헌영의 고백은 사실 모든 교사들이 가진 고민이기도 했으니까. “사실 다른 선배 교사들에 비하면 이제 겨우 5년?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내가 아이들을 미리 재단하고 평가하는 게 어불성설이긴 하지. 그런데도 나도 모르게 자만에 빠졌던 거 같아. 사실 그 아이는 이유도 없이 나한테 미움을 받은 셈이잖아? 비록 내가 그 아이에게 어떤 해코지를 한다거나, 불이익을 준 일은 없지만 그래도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렇게 말하면, 나도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난 조금 다른 생각이야. 우선 우린 아이들에게 미안해하면 안 돼. 그 아이 한 명에게 붙은 전담 교사도 아니고, 맡은 아이만 무려 40명이야. 헌영아, 우린 교사야. 모두에게 공평하고 모두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할 사람들이라고. 법원의 판사가 그렇듯이, 교단에 선 교사는 그래야 한다고 봐. 그래야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은 관심과 주의를 기울일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헌영은 희재의 열변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이렇게 노력함에도 교실은 언제나 살얼음판이지. 언제 어디에서 금이 가고 구멍이 날지 몰라. 선두에 서든, 뒤에서 밀어주든 교사는 모든 아이들을 관찰하고 이끌어야 하는 법인데, 몇 사람에게 치중한다는 건 다른 사고를 야기할 수 있지 않겠어? 그리고 넌 교사지, 신부나 목사가 아니야. 머릿속에서 저지른 일을 가지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지.” 헌영은 가타부타 말없이 소주잔을 들었다.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올리며 소주를 마신 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니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몇 몇 학생들을 주의하고 경계하는 내 태도가 나쁘지 않다고 봐. 병아리 감별사? 뭐 그런 직업 있잖아? 수없이 많은 병아리들 속에서 암수를 구별하는 그런 거. 교탁 위에서 바라본 아이들이 바로 그런 병아리 같아. 그리고 난 빠른 시간 안에 그 아이들을 구별해내야 돼. ‘근묵자흑’ 맞나? 검은 얼룩이 있으면 빼내고, 녹이 슬면 닦아내고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지. 그런 역할을 교사가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해.” 희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기울였다. 가끔 이런 이야기가 나오긴 해도, 오래 가지 않는다. 오늘의 자리는 가볍게 마시는 자리였으니까. 헌영도 희재와 다르지 않았다. ‘교사의 자질’ 혹은 ‘교사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도 할 기회가 많을 것이다. 오늘 할 일은 내일로 미루는 것이 미덕. “아무튼 그렇다. 우리 반, 조금 스펙터클한 구성이더라고. 문제아로 찍힌 애. 문제아로 찍힐 뻔 했지만 사실은 모범생. 모범생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문제아.” “그건 또 누구야? 문제아는?” “있어. 그냥, 문제아.” 헌영은 피식 웃으며 술잔을 채우려 병을 들었는데, 병이 비어있었다. 희재와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리며 마지막 술잔을 채우고 비웠다. 술자리를 끝내고 나오는 길, 주중이라 간단하게 먹자며 서로 소주 한 병씩만 마셔서 그런지 조금 알딸딸한 느낌 외에는 문제가 없었다. “2차 갈까? 아쉽지 않아?” “내일 수업도 있는데 여기까지 하지 뭐.” 아쉬움을 남기고 두 사람은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헌영은 괜한 이야기를 했다며 자책했다. 이왕 말을 꺼낸 김에 다 털어놓을 걸, 하는 마음도 들었다. 사실, 지욱이나 단유 정도는 그냥 이런 아이도 있더라 하는 정도였다. 긴장감 넘치는 예고편에 비해 심심하기 짝이 없던 본방송이라 다른 의미에서 안심했던 헌영은, 예고편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주연급 인물의 등장 때문에 하루하루가 피 마르는 느낌이었다. “하아.” 별것도 아니지만 괜히 신경 쓰게 만드는 녀석. 다른 문제아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문제아였다. 하지만 이 역시도 어쩌면 자신의 선입견일 수 있었다. 아직까지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는 아이였으니까. 헌영은 술을 마셔서 열이 오른 탓인지, 살짝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다 곧 도착지임을 알고 버스의 차임벨을 눌렀다. 몇 안 되는 승객들은 버스 안을 울리는 벨소리에도 무관심하게 바깥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누가 벨을 누르던, 혹은 버스에서 내리던, 승객들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그게 누구든 그저 잠시 동안 버스 안의 공간을 공유했을 뿐인 ‘타인’이었으니까. ======================================= [205] 어른의 의미(2) 정규수업이 끝나고 교실을 빠져나온 단유는 모처럼 곧바로 집에 가는 대신, 학교 운동장의 스탠드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방을 옆에 내려놓고 운동장에서 뛰고 있는 아이들을 구경하는데, 그 중에 명수가 있음은 물론이었다. “뭐해?” 단유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올려다보았다. 금테 안경을 치켜 올리던 지태와 채윤이 히죽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명수랑 같이 가려고.” 단유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긴 두 사람은 곧 운동장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빨간 운동화의 명수를 찾아 볼 수 있었다. “축구부 끝나려면 오래 걸리지 않아?” “그냥, 오늘 날씨도 좋아서 볕도 쬘 겸 있는 거야.” 마치 마당에 엎어진 늙은 개 마냥 나른한 얼굴을 한 단유였다. 이를 본 두 사람은 잠시 고민을 하는 가 싶더니, 가방을 옆에 내려놓으며 단유 곁에 자리를 잡았다. “그럼 나도 좀 있다가 가야지.” “나도.” 늦은 오후의 따뜻한 햇살을 쬐고 있자니, 마치 온 몸이 아이스크림이라도 된 것처럼 스탠드 위에 녹아드는 느낌이었다. “좋다.” 찜질방에서 느끼는 나른함과는 또 다른 느낌의 여유로움이랄까? 채윤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나왔다. “지태, 넌 학원가야 하는 거 아냐?” “좀 늦어도 돼.” 반장 선거 당시 지태는 별다른 경쟁자 없이 손쉽게 반장이 되었다. 평소 보여주던 똑 부러지는 어투와 흐트러짐 없는 태도가 영락없는 모범생의 그것과 같았다. 때문에 대부분 아이들이 지태를 ‘반장이라 부르기에 적당한 아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고, 임시반장으로서 보여준 모습도 썩 나쁘지 않았기에 선거에서 쉽게 이길 수 있었다. 아이들의 호감을 샀던 또 하나의 요인이라면, 지태가 넉살이 좋은 편이었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친절하다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지만, 누구에게든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게 하는 친근함이 있었다. 다만 단유에게만큼은 너무 일방적이고 급작스러운 친근함이라는 점에서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말이다. “명수는 축구 잘해?” 의외로 그런 점을 부담스럽지 않게 생각하던 명수는 지태와 금방 친해지기도 했다. 종종 함께 하교를 할 때면 단유가 질투가 날 정도로 두 사람이 절친해 보이기도 했으니까. “잘해, 굉장히.” 사실 더 중요한 점은 반 아이들 대부분이 ‘반장’이란 직함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누가 되든 상관없지만 굳이 뽑아야 한다면, 니가 해라’ 라는 식이었다. “그렇구나.” 지태와 채윤이 보여주는 리액션이 다소 밋밋하다는 느낌에 단유는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솔직히 친구를 떠나서, 명수 정도 실력이라면 중학교에서 가장 볼 컨트롤이 좋다고 평가해도 될 정도야.” 하지만 지태와 채윤은 크게 감응(感應)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감응의 정도를 떠나 축구에 대해 거의 모른다고 할 정도로 축구 관련 지식이 부족한 상태였다. 때문에 단유가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한다고 해도, ‘태양은 밝다’란 말을 듣는 거랑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운동장 트랙을 따라 달리는 명수를 바라보던 단유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명수는 허벅지 근육이 또래에 비해 굉장히 발달한 편이야. 게다가 유연하기도 하지. 그래서 순간적으로 달려 나가는 힘이 좋은 편이야. 그래서 방향 전환이나 치고 달리는 주력이 좋은 편이지. 볼 컨트롤이 좋다는 것은 쉽게 공을 뺏기지 않는다는 이야기고, 그래서 공격권을 상대팀에게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는 거야. 이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을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지.” 채윤과 지태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양이 90%를 차지하는 수소와 8%의 헬륨으로 구성된, 지구보다 33만 배나 더 무겁고, 내부 온도가 1천4백만 도에, 표면 온도가 6천도나 되는 화염 덩어리인데, 초당 4백만 톤의 수소가 사라지는 핵융합반응에 의해 엄청난 양의 양전자와 중성미자, 감마선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밝다’라고 한다고 해서 감탄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어느덧 명수는 운동장 가운데서 동료들과 함께 공을 주고받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명수는 지금도 자라는 중이고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있기 때문에 부족한 주력도 언젠가는 채워질 거야. 그리고….” “알았어, 알았어. 명수 잘해. 엄청 잘하는 거 알겠다고!” 지태가 손을 들고 항복을 했다. 그제야 단유는 얼굴을 펴고 명수를 바라보았다. “나, 참. 누가 보면 명수 매니저인줄.” 채윤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지태가 목이 부러져라 끄덕이면서 동의를 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단유는 다리를 쭉 펴고 등을 스탠드에 기대어 몸을 활짝 폈다. 시멘트 계단의 모서리부분이 등을 찔러 배기는 느낌도 있었지만, 온 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늘어나며 느껴지는 개운함이 좋았다. 최근 운동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니지만, 교실에 오래 앉아 있으면서 몸을 제대로 풀어준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오징어 말리냐?” 지태가 한 마디 하자, 채윤이 힐끔 단유를 쳐다보다 말했다. “오징어는 우리가 오징어지.” 채윤의 솔직한 고백에 지태는 괜히 고개를 젖혀 얼굴이 하늘을 향하도록 했다. 햇볕이 얼굴 가득히 쏟아지도록. “그럼 난 바싹 말린 건조 오징어가 되겠다.” 단유는 진지한 어조로 지태에게 부탁했다. “제발 그런 농담 그만해줬으면 좋겠어. 듣기 힘들 정도야.” “내 농담이 어때서? 재밌기만 하구만. 그렇지, 채윤아?” 채윤은 핸드폰을 꺼내들더니 아무런 알림도 없는 메신저 어플을 조작하는 시늉을 했다. 말없이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채윤을 향해, 지태가 주먹을 들어 올리자 채윤이 키득거리며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둘 다 그만하고, 이제 집에 가라. 정신 사나워.” “왜 그래? 난 내 의지로,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거야. 여기 너무 좋네. 따뜻하고.” 지태는 한껏 늘어진 자세로 해바라기를 하며 정말 기분이 좋다는 듯, 입 꼬리를 올리고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덩달아 채윤도 가방을 발밑에 두고 머리 뒤로 깍지를 낀 자세로 누웠다. 두 사람의 태도가 귀엽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해서 단유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 운동장으로 고개를 돌리니, 명수는 다른 축구부 멤버들과 함께 드리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단유야, 나 물어볼게 있는데.” 눈을 감고 햇볕을 쬐던 지태가 입을 열었다. “뭐?” 명수의 화려한 볼 컨트롤 덕분에 빠른 드리블에도 축구공이 발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옆에서 바라보던 감독이 짧게 박수를 치며 칭찬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첫날에 있잖아? 광종이가 지욱이 괴롭힐 때. 그 때 무슨 생각 했었어?” “…….” 명수가 골대 근처까지 공을 몰고 가 힘껏 공을 찼다. 공은 살짝 휘는가 싶더니 오른쪽 골망 안쪽을 뒤흔들었다. 명수가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며 자축하는 모습이 보였다. 단유에게서 답이 들리지 않자, 지태는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난 싸움을 잘 못하거든. 겁도 많고. 그래서 광종이 같은 애들이 있으면 솔직히 무서워. 그래서 걔가 행패를 부린다고 해도 끼어 들어서 말릴 엄두가 안 나. 대신 그런 생각은 하지. 누가 가서 말려주거나 혼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 “…….” 단유는 여전히 말을 아꼈다. “광종이의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알잖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광종의 행동을 지적할 용기도 없었고, 막을 자신도 없었어. 그래서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구경했지. 지욱이가 피해자가 되고 소외되는 것을 방관한 셈이잖아. 그런데….” 단유는 운동장에서 시선을 돌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뜬금없는 고해성사를 하고 있는 지태를 돌아보았다. “그런 내가 과연 반장이 될 자격이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어. 정의롭지도 못하고 도덕적이지도 못하고 비겁하고 자기 안위만 생각하는 내가 과연 반장이라는 책임을 다 할 수 있을까? 반에서 일어나는 불의의 일들에 대해 눈 감는 반장이 과연 반장일 수 있을까?” “그때는 너, 반장이 아니었잖아?” 임시반장이긴 했지만.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난 나설 자신이 없거든. 민일이 같은 애들이 나서지 않는다면 난 봐도 못 본 척 할 게 뻔하니까.” 단유가 잠시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처음에 내 생각을 물은 이유는 뭐야?” “그냥… 넌 어떤 생각이었을까 궁금해서.” “다른 사람도 너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너의 부끄러움과 비겁한 행동이라 자평하는 행위들이 합리화 될 거라고 생각해서?” 지태는 눈을 뜨고 검은 눈동자로 자신을 직시하는 단유를 보았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합리화라든가 뭐 그런 건 아니고…….” 어느새 채윤도 두 사람의 대화를 흥미롭게 지켜보기 시작했다. “사실 넌 우리 반에서 두 번째로 키도 크고, 몸도 좋잖아. 솔직히 넌 힘으로는 광종이한테 밀릴 거 같지도 않고, 광종이도 너한테는 함부로 못할 거 같으니까, 어쩌면 어지간한 아이들은 너한테 겁 먹을걸?” “그래서?” “힘이 있으면 그런 애들한테 고개 숙일 필요도 없고, 그러면 비겁해질 필요도 없잖아.” “그날 내가 나서지 않은 게 비겁하다는 이야기처럼 들리는데?” 지태가 동그래진 눈으로 벌떡 일어나 손사래를 쳤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아니, 저기….” 그러다가 말끝에 힘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사실… 그런 생각도 조금, 없는 건 아닌데…. 만약 니가 나섰다면 민일이 때와는 달리 주먹질 하지 않고도 말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조금 들기도 하고. 지난 며칠 간 함께 다니면서 바라본 바로는 나쁜 아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고 말이야. 그래서 조금 궁금했어. 그 날 니가 나서지 않은 이유가 있었던 걸까, 하고 말이야.” 고해성사 급 자기고백으로 시작해서 용의자 취조 과정으로 넘어간 느낌이었다. 용의자 김단유는 지태를 빤히 바라보다가 변론을 시작했다. “내가 나서지 않은 이유를 먼저 설명하자면, 그냥 타이밍이 안 맞았을 뿐이야.” “응?” 지태와 채윤의 눈에 의문이 한가득 깃들었다. “처음에 광종이가 심부름을 시키는 모습은 보지 못했어. 지욱이 서둘러 나가는 장면을 보았지. 그리고 수업종이 울린 뒤에 지욱이 들어와서 선생님께 혼나는 장면을 봤어. 그런데 지욱이는 자신이 늦은 이유에 대해 아무런 핑계도, 설명도 하지 않았어.” “광종이가 무서워서 그런 거지.”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잠시 예전 일들이 떠올랐다. 어느 학년에나 이런 비슷한 일들이 매번 벌어지고 있었고, 늘 반복되는 일상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만약 지욱이가 광종의 처사를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횡포라고 생각했다면, 우선은 자력 구제를 했어야 한다고 생각해.” “어떻게?” “그거야 방법은 많지. 말로서 광종을 설득하거나, 혹은 같이 힘으로 맞대응하거나.” “에이, 그건 억지다.” 지켜보던 채윤이 단유의 대답에 고개를 저었다. 단유는 채윤의 반응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억지야. 내가 여태껏 지켜본 바에 따르면 거의 대부분은 자력 구제를 못하더라고. 애초에 자력구제가 어려운 상대를 향해 시비를 거는 일이 대부분이기도 했고. 그래서 그럴 때는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야 돼.” “민일이같은 친구한테?” “아니지. 왜 민일이한테 부탁을 해? 가장 좋은 방법은 선생님한테 요청을 하면 돼.” “고자질 하라고?” “왜 그걸 ‘고자질’이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부르든 그게 맞는 방법이지. 학생이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기 힘든 문제를 맞닥뜨렸다면, 당연히 선생님이나 부모님에게 이야기를 해야지. 안 그래?” 틀린 말은 아닌데, 어쩐지 틀린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왜일까? “고자질을 하면, 그 뒤에 보복이 더 커질 수 있지 않을까?” 자기 입장이었다면, 아마도 그 점 때문에 더 선생님께 말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지태는 이어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예를 들어서, 선생님한테 광종이가 빵셔틀을 시키고 괴롭힌다고 고자질을 했다고 쳐. 과연 광종이가 가만 있을까? 광종이는 반성한다고 이야기하고 지욱이에게 사과하는 시늉을 할 수 있겠지. 선생님이 교실에서 주의를 줄 테지.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잖아. 선생님이 보지 않을 때, 혹은 교실 밖에서, 학교 밖에서 광종이가 지욱일 테러하면 어떻게 해? 훨씬 더 심하게, 잔인하게 할지도 모르잖아.” 단유가 바라보니, 두 사람이 보이는 감정은 바로 ‘공포’였다. 귀신을 본 적은 없지만, 귀신이 있을 것 같아서 느끼는 공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보복을 겪은 적은 없지만, 보복이 있으리라 단정하는 태도였다. 실존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공포’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무서운 법이었다. 사고에 제약을 가하고, 이성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대처를 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자력구제를 꿈도 꾸지 못하게 하고, 선생님이나 기타 어른들에게 알리거나, 경찰서에 피해신고를 하는 행위를 막는다. 단유는 한숨을 쉬었다. 얼핏 보니 운동장에서 연습을 하던 축구부의 활동도 거의 정리단계에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보복이 두렵다는 건 인정할게. 그런데 보복이 두렵다는 이유로 옳은 일을 피하게 되면, 그 뒤로도 얼마나 많은 일들에 우리는 눈을 돌려야 할까? 사실 답은 니가 처음에 말한 것에 다 있었어. 비겁하다고? 비겁해지지 않도록 하면 돼. 불의하다면 의를 쫓으면 되는 일이야. 스스로 깨달았으니, 스스로 행하면 그만이야. 논어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 군자지사야, 행기의야(君子之仕也, 行其義也). 군자가 벼슬하는 것은 그 의를 실행하려는 것이라고. 니가 반장으로서 스스로의 책임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은 이해했어. 하지만 니가 정의에 대해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 생각을 실천할 의지만 있다면 반장이 될 자격에 대해 의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넌 좋은 반장이 될 테니까.” 지태와 채윤이 두 눈을 껌뻑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싸움을 말리는 것은 가능해도, 맞서 싸우는 짓은 하면 안 돼. 왜냐하면 우리나라 법에서는 그걸 정당방위로 안 쳐주거든. ‘쌍방폭력’이라고 부르더라고. 무슨 소리냐고? 죄 짓고 살지 말자고.” 단유는 씽긋 웃고는 스탠드로 다가오는 명수에게로 향했다. 반쯤 얼이 나간 얼굴을 하던 두 사람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단유의 뒤를 쫓았다. 명수가 두 손을 번쩍 들며 자신을 마중 나온 사람들을 향해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때, 명수를 바라보던 단유가 다가온 지태를 향해 읊조리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려움과 용기는 한 끝 차이야.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질 때, 그것은 용기로 변해서 너에게 힘을 줄 거야.”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문득 지태는 아까 단유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타이밍이 안 맞았다고 했었지? 만약 타이밍이 맞았다면 어떻게 하려고 했을까?’ ======================================= [206] 어른의 의미(3) “무슨 일인데?” 재훈이 피곤하다는 듯 두 눈 사이를 주무르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가죽이 푹 꺼지는 소리가 마치 오랜 피로로 굳어있던 몸이 지르는 비명처럼 들렸다. “병원, 결정 났어요.” “…….” 재훈의 시선을 들어올렸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올려다보았지만 역시나 주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제길.” 지난 해, 대통령이 바뀌었다. 그리고 영리법인 허가제는 무기한 연기되었다. “솔직히 선배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우리나라로서는 잘된 일이라는 생각, 지울 수가 없네요.” “뭐?” 재훈의 목소리가 뾰족한 창이 되었지만, 주영의 철판은 쉽게 뚫리지 않았다. “사실 선배의 뜻대로 된다면 좋긴 하겠죠. 부자들에게 고급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고수익을 얻고, 그 수익을 저소득층에게 돌려 돕자는 이야기. 하지만 과연 그게 가능할까, 라고 묻는다면 4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거든요.” 재훈은 어금니에서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았다. “그렇지 않아요? 선배가 아무리 도덕적으로 운영을 한다고 해도, 영리병원은 수익성을 먼저 추구할 수밖에 없고, 선배의 눈 밖에서 벌어지는 과잉진료나 인력 감축의 현실을 모두 부정할 순 없을 거예요.” 그 말에 재훈이 반박을 하려 했지만, 주영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게다가 강남의 그 병원 아시죠? 결국 현 정권 들어서 온갖 부패와 비리가 드러나면서 문을 닫고 말았잖아요. 우리나라 현실에서 영리병원은 도덕적으로 운영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고요.” “하지만 결국 이 나라에서 영리병원이 세워지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야.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나서서 제대로 된 기준을 보여주면 돼. 도덕적으로 운영되는 영리병원이 안 된다는 것은 비관론자들의 말일 뿐이지. 이미 검토가 끝난 이야기잖아.” 주영은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현 정권에서는 영리의료법인설립은 불가능해요. 허가가 안날 테니까.” 주영은 들고 있던 서류철을 재훈에게 건넸다. 재훈이 받아보니 보건복지부에서 내려온 공문이었다. 읽어봐야 결국 주영의 말을 보기 좋게 늘린 것에 불과했다. “좋아, 그럼 지금 짓는 병원은 어떻게 할 건데?” “일단은 비영리 의료 법인으로 가야죠. 대신 투자금의 한계가 있으니 규모는 축소할 필요가 있겠죠.” 재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솔직히 수익 창출이 되지 않는 병원을 만들 의지가 있느냐는 물음을 먼저 던져야겠죠?” 비록 재훈이 의사의 길을 걷고는 있다지만, 병원 설립의 이유는 단순하게 보자면 수익 창출이 목적이었다. 단순히 병원 이사가 되거나 하는 건 의미가 없었으니까. 물론 현 의료법 하에서 적당히 법망을 피하며 수익성을 제고하는 방법도 있긴 했다. 강남의 모 병원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하지만 그 병원은 결국 사회적 질타를 받다가 현 정권에서 진보적 성향의 집권당과 정부가 휘두른 망치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대부분 국민들은 환호했고, 소수의 재력가들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생각 좀 해봐야겠어.” 어쩌면 다시 4년이 지난 뒤, 영리의료법인 허가가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때까지 될지 안 될지도 모를 일을 기다린다는 것은 재훈에게 아무런 메리트가 없었다. “연회장님 말씀대로 하위 계열사 하나를 맡으시는 게 좋을지도 몰라요.” 재훈이 주영을 째려보며 물었다. “아버지와 형님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라는 뜻이야?” 두 사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고 싶었기에 선택한 것이 여태껏 손이 닿지 않았던 의료법인이었다. 만약 계열사를 맡는다면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불안에 몸을 떨어야 할지도 몰랐다. “알았어. 일단 시간을 갖고 생각을 좀 해보자. 어차피 엎어진 거 천천히 하자고.” 주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실습 나가신 건, 조금 적응이 되셨나요?” “죽을 맛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재훈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마치 60년대 히피의 재림, 혹은 19세기 말의 보헤미안 스타일의 재훈에게 하루 1시간, 1분, 1초도 자유롭지 못한 실습 생활이란 죽음과도 같았으니까. “그렇게 버티기 힘들면 그만둬요.” 주영이라면 차라리 그 시간에 가진 돈으로 먹고 놀겠다. 가끔 재훈을 이해하기 어려운 주영이었다. 도덕적 영리의료법인을 세우겠다는 재훈의 망상도 그렇고, 의사에 대한 직업적 소명의식에 불타는 것이 아님에도 의사가 되겠다며 저렇게 죽은 얼굴을 하는 꼴이라니. “야, 그래도 응원을 해줘야지. 그렇게 쉽게 포기하란 말이 나와?” “그럼 진짜, 진심으로 이야기 해봐요. 왜 의사가 되려는 거예요?” “뽀대 나잖아? 영리의료법인의 이사가 되겠다는 사람이 단순히 경영만 하는 사람인 것보다는 의사인 게 남들 보기도 좋지.” 어이가 없으면서도 말을 받아주는 주영이었다. “투자자들 입장에서는 의사 출신 이사장보다 전문 경영인 출신 이사장이 더 신뢰가 가지 않을까요?” “그런가?” 머리를 긁적이며 시선을 멀리 두는 재훈을 보며, 주영은 주먹을 꽉 쥐어보였다. 아마 현재 재훈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면, 연회장님을 제외했을 때 바로 자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훈은 쉽게 속을 비추지 않았다. 지금도 대충 장난처럼 어물쩍 넘기려하는 것을 보면 그랬다. 그래서 주영은 늘 재훈에게 벽을 느꼈다. 재훈이 아무리 장난을 치고, 농담을 하고, 주영이 막 대들 때도 허허 웃으며 넘긴다고 해도, 두 사람 사이가 그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애들은 잘 지내고 있지?” 연 초에 아이들을 만난 뒤로는 재훈도 바빠서 제대로 이야기를 전해듣지 못했다. 물론 특별한 일이 있었다면 어떤 경우에라도 이야기가 있었을 터이니, 아무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는 것은 큰 사고가 없었다는 것과 같은 말일 것이다. “잘 지내죠. 누구랑은 다르게 워낙 착실하고 똑똑한 아이들이니까요.” 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앞에 내려놓은 서류를 집어 들었다. 포기해야 하나, 아니면 좀 더 기다려야 하나. 생각은 해보겠다고 했지만 오래 끌 일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할아버지도 오래 기다려주시지 않으실 테니. “교육 사업 어때?” 주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 뜻대로, 라는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재훈도 그냥 꺼내본 말이었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전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주영이 인사를 건네고 먼저 돌아서는데, 재훈이 붙잡았다. “잠시만.” 주영이 돌아보자, 재훈이 소파에서 일어나 다가갔다. 주영이 영문을 몰라 빤히 바라보는데, 재훈의 손이 주영의 얼굴을 향해 뻗어졌다. 주영은 흠칫 놀라며 살짝 얼굴을 뒤로 뺐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기운이 흘렀다. 재훈은 손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자신의 눈 아래를 가리켰다. “눈썹 떨어졌어.” 무슨 말인가, 잠시 궁리를 하던 주영은 이내 붉어진 얼굴을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평범하게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온갖 감정과 사투를 벌였던 자신의 속내를 들킨 기분이었다. ‘억울해.’ 이럴 거면 차라리 그만두면 되는데, 또 그건 쉽지가 않았다. 비교대상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하은처럼 깔끔하게, 뒤도 안 돌아보고 그만둘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 중학생이 되면서, 아이들의 놀이문화가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낀 것은 운동장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초등학교 때 쉬는 시간, 점심 시간 할 것 없이 바글바글 했던 운동장이 한산해 보이는 게 가장 대표적이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초등학교보다 훨씬 작은 수의 학생들이 다닌다는 것도 이유일 것이고, 축구 아니면 제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없던 것에 비해 중학교에 올라오면서 몇몇 아이들은 농구에, 또 소수의 아이들은 테니스에 빠지기도 했기에 운동장을 차지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운동장에서 땀 흘리면서 노는 아이들이 절대적으로 줄었다는 것이 큰 이유 중 하나였다. “고등학교 때는 더 심하대.” 명수가 스탠드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말했다. 옆에 앉아 있던 단유도 아이스크림을 아작 깨물며 으적으적 씹어댔다. 명수가 아이스크림을 천천히 즐기는 것에 비해, 단유는 아이스크림을 씹어 먹는 것을 좋아했다. “그 덕분에 편하게 축구할 수 있는 거 아냐?” “그렇긴 하지. 그런데 축구하려는 아이들이 많지가 않아. 그래서 경기하기가 힘들어.” 운동장이 한산해서 좋은 점이 있다면, 단점도 존재했던 셈이다. “그래서 예전에 반 대항경기 했던 식으로 하려고 하는데, 좀 도와줘라.” 한 반에 40명 정도의 학생들이 있는데, 이 중에서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대략 20명에서 많게는 30명까지. 그런데 축구를 하고 싶어 하는 아이는 20명이 되지 않았고, 그 모든 아이들이 다 같이 나와서 즐기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어서 한 반의 아이들끼리 시합을 벌이기가 곤란할 때가 많았다. “나는 힘이 없고, 지태한테 물어봐. 지태가 우리 반 반장이니까.” “그러니까, 도와달라고.” “응?” “지태는 니가 말하면 금방 오케이할 걸?”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서 명수를 바라보니, 명수는 왜 그러냐는 눈빛이었다. 설명을 요구하자, 명수가 히죽 웃었다. 그냥 웃기만 했다. “…그래서 명수네 반이랑 반 대항 축구시합을 하자고 하는데, 니 생각은 어때?” 다음 날, 등교 이후 만난 지태에게 단유는 명수의 제안을 설명했다. 단유의 이야기에 지태가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 뭐. 우리 반에도 축구 좋아하는 아이들 있을 테고, 반 대항 시합이면 구경하는 재미도 있겠네. 점심시간에 할 일 없이 교정 산책 하는 아이들도 줄어들 테고.” 말은 교정 산책이라지만, 사실은 어둠의 유혹을 받아 방황하는 몇몇 아이들을 일컫는 것이었다. 단유 역시 그 의미를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2, 3달을 함께 지내다 보니 정말 다양한 아이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외부의 일에 큰 관심을 쏟지 않는 단유라도 들리는 귀를 닫고 살지 않는 이상, 어떤 아이들이 어떻게 학교생활을 하는지는 모를 수가 없었다. 광종이는 정말 학기 초 반짝 두각을 드러낸 ‘애송이’였다. 진짜배기들은 말없이 움직이기 시작해서, 점점 무리를 짓고 있었다. 흡연자가 이렇게 많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는데, 신기하게도 선생님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 아이들이 처벌 받는 경우는 드물었다. 조심성 없던 몇몇이 현장에서 적발되는 사례가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흡연자들은 여유로워 보였다. “내가 그 아이들을 모두 선도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되도록 건전한 놀이문화를 제공하는 게 반장으로서의 역할이 아닐까 싶어.” ‘반장역할론’이라고 거창하게 수식할 정도는 아니지만, 일전 단유의 조언을 들은 이후, 지태는 조금 자신감이 과잉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좋게 말하면 적극적인 것이고,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학기 초만 해도, 지태는 모두에게 적당한 호감의 상대였는데, 지금은 몇몇 학생들―그들이 소위 불량스러운 무리의 일원임은 분명했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조금 있다가 쉬는 시간에 잠시 이야기해서 선수 뽑고, 내일 점심 시간에 한 번 붙는 걸로 하면 되겠지.” 단유는 별 다른 고민 없이 쭉쭉 계획을 세워나가는 지태의 추진력에 감탄했다. 1교시가 끝나고 지태가 교탁 앞으로 가서 아이들을 잠시 자리에 붙들었다. “…이런 이유로, 축구 시합 제안을 받았는데 좋을 거 같아. 우리 반에도 선수 구성해서 반 대항 시합을 하면 재밌기도 할 거 같고. 어때?” 반 아이들은 대체로 나쁘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대체로 나쁘지 않다는 것이었지, 모두가 좋아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일부는 기분 나쁘다는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별 것도 아닌 걸로 사람 붙잡고 있네.” 광종이 자리에서 벌컥 일어나더니 뒷문으로 나갔다. 잠시 교실 안이 썰렁해지긴 했지만, 지태는 곧 표정 관리하면서 선수 구성을 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지태가 발견한 이 축구 시합의 또 다른 장점은 ‘통합’이었다. 평소 불량스러움을 마음껏 발휘하던 몇몇 아이들이 선수로 뛰겠노라고 손을 들었기 때문이다. ‘불량’스럽다는 기준과 ‘축구를 좋아한다’라는 것은 상관관계가 없었다. “오케이, 준열이까지 11명.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교체 선수까지 뽑아 놓자. 어때?” 그렇게 해서 14명의 선수가 선출되었고, 이 결과는 명수에게 전달되어 다음날 점심시간, 비공식적 반 대항 경기가 펼쳐지게 되었다. ======================================= [207] 어른의 의미(4) 운동장의 먼지가 아이들의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또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황토 운동장 대신 인조잔디와 우레탄 트랙으로 교체하는 곳이 늘어날 때가 있었다. 붉은 트랙과 푸른색 운동장을 보면 확실히 시각적으로는 깔끔하고 먼지가 덜 나기 때문에 아이들이 뛰어 놀기 좋다고 여겼던 학부모들이 많았기에 이 교체 행사는 많은 환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장계중학교는 그러한 시류에 반하여 황토운동장을 고집한 학교였다. 때문에 학생들과 학부모들로부터 많은 원성을 받기도 했었다. 교육과학기술부의 지원금으로 교체하는 학교들이 늘어나는 가운데, 왜 교체를 하지 않고 버티느냐, 왜 우리 아이들이 먼지구덩이 속에서 콜록거려가며 뛰어다니고 공부해야 하느냐는 원성이 자자했던 것이다. “야, 그런데 축구부도 뛰면 반칙 아냐?” “너희 반에도 축구부 있잖아? 뛰라고 해.” “우리 반에는 1명뿐이지만, 너희 반에는 2명이잖아. 공평하게 한 명씩만 하든가, 아니면 다 빼자.” 오늘따라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어서 먼지가 많이 날렸다. 등을 돌리고 모래 바람을 등져보지만, 눈을 제대로 뜨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고작 그런 바람에 꺾일 의지였다면, 애초에 반 대항 경기 따위는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각 선수들이 운동장에 모여서 몸을 풀고 있었다. “좋아, 우리 반에서는 찬열이 1명만 나가기로 했어. 너희 반은 누구 나올래?” “잠시만. …우리 반은 전, 후반 각각 1명씩 나오기로 했어. 전반전에는 태수, 후반전에는 명수. 콜?” “그래, 그 정도는 우리가 봐줄게.” 두 반장은 악수를 함으로서 선수 명단을 확정했다. “반칙은 알아서 콜 하기.” “업사이드는?” “너무 티나게 하면 반칙. 애매한 건 패스.” 두 사람은 선의의 경쟁을 약속하고 반 아이들에게 합의 사항을 알렸다. 이윽고 두 반의 출전 선수들이 적당히 포지션을 잡았다. 물론 정식 포메이션대로 나뉠 리 없는 구성이었다. 공격에 나설 애들, 수비 전문으로 할 애들, 나머지 애들, 이런 식이었으니까. “공 차면 시작이다.” 호루라기 따위는 사치였으니까. 공격은 3반이 먼저 하기로 했다. 오른발 아래에 공을 두고 있던 소년이 옆으로 공을 굴렸다. 공을 받은 소년은 달려오는 상대가 다가오기 전에 뒤로 공을 뺐다. 일단 정석(?)대로 공을 돌리다가 틈을 노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은 아니었던 듯, 공을 받은 아이는 오른쪽 라인을 따라 드리블을 하기 시작했다. “막아!” 공 하나를 두고 4명의 아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구경하던 아이들은 처음부터 거친 몸싸움이 벌어질 것을 기대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의외다.” “…뭐가?” 운동장을 바라보던 지태는 머리를 긁적이다 입을 열었다. “너도 축구 좋아할 줄 알았거든. 명수랑 같이 지내니까.” “명수는 공부 안 좋아하거든?” 단유의 대답에 지태는 입을 닫았다. **** “박 선생, 뭐해요?” 남교사 휴게실 창가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던 헌영은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 선생님. 식사 맛있게 드셨습니까?” 현재 2학년 수학과를 담당하고 계시는 이해열 선생님이 종이컵을 들고 휴게실로 들어오고 계셨다. 이 선생님은 헌영보다 8년 먼저 교직에 나선 선배 교사였다. “그래요. 박 선생은 뭐보고 있었어요? 꽤 열중해서 보고 계시던데?” “애들 축구하는 거 보고 있었어요. 저희 반 애들이랑 다른 반 애들이 시합을 한다고 해서요.” “그래요? 박 선생 1학년이잖아요? 1학년 애들이 반끼리 시합 붙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2학년 이상 올라가면 모를까, 1학년 때는 친분이 많지 않은 관계로 반 대항 시합이 벌어지는 경우가 드물었다. 사실 한 반의 숫자가 줄어드는 요즘은 시합을 벌이는 경우도 적어진데다가, 먼지 가득한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는 것보단 교실에서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는 아이들이 더 많은 실정이었기에 지금 운동장에서 벌어지는 이벤트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애들은 잘하고요?” “그냥 애들 축구가 그렇죠.” 아직 몸이 덜 자란 아이들의 축구 시합이 요란해봐야 거기서 거기다. 그래도 몸에 힘이 좀 붙는 시기의 남자 아이들인지라 아기자기한 맛은 떨어져도 열정과 힘은 충분히 관찰할 수 있었다. “아이고, 저 먼지 좀 봐. 오늘 선생님 반 애들 난리 나겠네.” 이 선생님의 걱정에 헌영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3반의 5교시 과목 선생님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조금 고생할 것 같긴 했다.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아이들을 앉혀놓고 수업하는 게 쉬울 리 없으니까. “그래도 저렇게 뛰는 모습을 보니까, 옛날 생각도 나고 좋네요.” 예전에는 저렇게 뛰는 아이들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는 첨언이 있었다. 요즘 아이들은 너무 운동을 하지 않는다는 우려도 섞였다. 헌영은 선배교사의 말을 적당히 받아주면서도 시선은 창밖으로 고정하고 있었다. 마침 축구부에 들어갔다던 찬열이가 공을 잡고 골대로 향하고 있었다. ‘골! 골! 골!’ 헌영의 기대가 한껏 투영된 찬열의 슛은 아쉽게도 골대 위를 스치고 지나가버렸다. 아쉬움이 컸던 것일까, 헌영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방금 공을 찬 아이가 선생님 반이었나 봐요?” “예. 축구부에서 뛰는 아인데, 공을 꽤 잘 차는 모양이더라고요.” 이 선생님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내년부터는 저런 모습도 보기 힘들겠네요?” “예? 왜요?” 헌영의 물음에 이 선생님은 종이컵을 창가에 내려놓으며 답했다. “2학기에 운동장 교체공사를 한다고 하잖아요.” “아.” 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1학기 시작 전에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었다. 시공업체 선정만 남겨둔 장계중학교도 운동장을 인조잔디로 바꾸기로 결정을 했던 것이다. 그동안 버티고 버텼지만, 대세의 흐름이란 게 있어 결국 인조잔디 교체가 결정이 되었다. “우습죠. 언제는 안 바꾼다고 뭐라 하더니, 이제는 바꾼다고 뭐라 하고.” 이 선생님의 말에 헌영은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기존에 인조잔디교체에 찬성했던 쪽의 주장은 그랬다. 인조잔디운동장이 황토운동장보다 미관상 좋을 뿐만 아니라 안전성에 있어서도 인조잔디가 훨씬 안전하다는 주장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관리비용도 훨씬 저렴하기에 학교 재정을 고려해도 인조잔디가 훨씬 좋다는 것. 장점만 있는데 왜 교체를 하지 않느냐, 라는 주장으로 학교 측을 궁지에 몰아넣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작년 학부모회에서 결정이 나고 지원금과 예산이 집행되기 전인 상황에서 올해의 새 학부모회로부터 반대의견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인조잔디운동장이 안전하다는 조사가 거짓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어떤 곳은 기준치에 한참을 웃도는 납 성분이 검출되는 운동장도 있다고 하고요. 이런 상황에서 안전에 대한 검증이 덜 된 인조잔디운동장을 왜 설치한다는 겁니까?” 물론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학부모회 임원으로 발탁된 학부모들은 그 의견에 반대했다. “소수 학교에서 벌어진 일들입니다. 그리고 설령 그런 일이 있더라도 충분히 사전 조사를 벌여서 하자보수를 요청하면 막을 수 있는 문제입니다. 때문에 아이들의 일반적인 활동에 보다 안전한 인조잔디운동장 교체에 찬성하는 것입니다.” 지난해까지 아무 말 없던 시민단체에서도 굳이 교무실까지 찾아와서 ‘인조잔디의 위험성’이란 제목이 인쇄된 전단지를 나누어주며 인조잔디교체를 반대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사실 문제가 없을 때는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를 하지 않죠. 문제가 생길 것 같으니까 문제가 있다고 경고를 하는 거죠.” 시민단체의 행동을 변호하는 이 선생님의 발언에 헌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말로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위험성만 강조하는 것도 학교 측에서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거죠. 그리고 만약 시민단체에서 그리 생각했다면 애초에 2, 3년간 이 학교에서 진행되었던 교체 공사 협의건 때 왜 아무 말이 없었냐는 말입니다. 만약 그 때, 학교 측에 서서 학교 측의 주장을 지지해 주었다면, 이런 문제가 나지도 않았을 건데 말이죠. 물론 아무 이해관계가 없던 상황에서 먼저 나서는 게 쉽지는 않더라도, 괜히 심술이 나더라고요. 뒷북이나 치는 것 같아서.” 헌영이 가지는 불만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마치 속담에 나오는 것처럼, 울타리 망가진 뒤에 고치러 들어오겠다는 집주인이면 모를까, 집주인도 아니고 건너 마을 사는 사람이 괜히 동네 한 바퀴 돌다가 울타리 망가질 거라고 오지랖 부리는 행동처럼 느껴졌던 것이리라. “그럼 박 선생 생각은 어때요? 고치는 게 좋을까요, 고치지 않는 게 좋을까요?” 막상 그렇게 물으면 대답하기가 곤란하다. 헌영은 괜히 턱을 쓸면서 답을 아꼈다. 자신이 딱히 환경운동연합의 회원인 것도 아니고, 유능한 사회고발전문 기자도 아닌 이상 두 운동장의 환경 안전성에 관해 전문적인 소견을 가지지도 못했으니까. 그래도 들은 바에 따르면, 그리고 현직 교사로서의 개인적 소견에 의한다면, “고치는 게 그래도 좋지 않을까요? 고양시의 어떤 중학교에서는 인조잔디운동장이 준공된 뒤에 고무 분말이랑 잔디의 안전성 검사를 하고나서 기준에 안 맞으니까 하자보수를 해서 고쳤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그런 식으로 고칠 수 있다면 인조잔디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요.” 그리고 위생적으로도 먼지 나는 운동장보다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이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겠지요. 그런데 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봐요.” “어떤?” 마침 운동장에서는 어느 편도 주도권을 확실히 잡지 못한 채로 공을 뻥뻥 차올리고 있었다. 어느 한 쪽으로 넘어와도 오래 끌지 못하고 상대진영을 향해 롱패스를 날리는, 소위 뻥축구가 시전 되고 있었다. “아이들의 건강, 중요하죠. 그런데 인조잔디나 우레탄에 대한 안전성에 대한 의심과 미세먼지로 인한 건강침해에 대한 우려는 잠시 접어두고,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저 운동장을 활보할 수 있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야죠.” 건강하지 않은 곳에 아이들을 밀어 넣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헌영이 몰래 피어나는 의문을 잠시 붙잡아 둔 사이, 이 선생님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요즘 아이들, 너무 운동장에 나오질 않아요. 지금도 아마 대부분 학생들은 교실에서, 혹은 매점에서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을 걸요? 인조잔디운동장이 된다고 해서 아이들이 운동장으로 나올까요? 제 생각에는 운동장이 문제가 아니라, 운동장을 뛰어다닐 아이들이 문제에요.” 틀린 말은 아니다 싶었다. 이 선생님이 처음 운동장을 보면서 ‘정말 오랜만’이라고 표현한 게 과장된 표현만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핸드폰을 들고 다니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거 아닌가? 한 때 핸드폰 때문에 심각한 토론까지 벌어진 적이 있었던 장계 중학교는 몇 년 전, 학생들의 핸드폰 수거를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만약 다시 핸드폰 수거를 하자고 하면, 또 무슨 말이 나올지,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상상조차 하기 싫을 정도였으니까. “그런 이야기가 있었죠? 아이들이 놀 곳이 없다, 아이들에게 바르게 놀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도 결국 이 사회는 아이들에게 그런 공간을 제시하는데 실패한 셈이에요. 그래서 아이들은 더 이상 공간을 찾지 않아요. 찾아봐야 어른들과 다툼만 벌어지는, 비합법적 공간의 일탈이니까요. 그래서 아이들은 자기들만의 공간을 만들어냈어요. 3.7인치 액정 속에 자신의 공간을 만들고 거기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죠.” 순간 헌영은 눈앞에 선 이 선생님이 사실 수학 담당이 아니라 국어 담당이었던게 아닐까, 고민을 잠시 해 보았다. “말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가, 목이 마르네. 커피나 같이 한 잔 할까요?” 이 선생님이 어깨를 으쓱이며 돌아섰다. 헌영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앞섰다. “제가 사드릴게요, 선생님. 좋은 말씀도 많이 들었는데요.” 이 선생님은 넉넉한 웃음을 지으면서 헌영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때,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던 아이들이 한 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야, 그만해. 야!” ======================================= [208] 어른의 의미(5) 3반의 축구부 소속 찬열의 활약이 대단하긴 했다. 단유가 보기에 찬열의 공 컨트롤 능력은 명수 못지않게 뛰어났다. 밥만 먹고 축구만 하던 명수보다 더 잘할 아이가 있을까 생각했었던 자신이 너무 세상을 좁게 보고 있었던 것일까, 반성하게 만들 정도였다. “찬열이 쟤, 되게 잘하는 것 같은데?” 축구를 잘 모르는 지태가 보기에도 그랬다. 하긴 2, 3명 정도는 간단한 드리블로 제치고 들어가는 모습만 봐도 잘한다, 는 소리가 절로 나왔으니까. “우리 반이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저 정도면 되게 잘하는 거 아냐?” 채윤의 물음에 단유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7반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7반의 태수도 공을 잡으면, 3반 수비진들이 넋을 놓고 있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막아, 앞에 막아!” “가라! 골! 골!” 두 사람의 활약이 커질수록 응원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도 점점 커져갔다. 찬열의 공이 골대 위를 스치고 지나갈 때, 3반 아이들은 마치 하나의 목소리처럼 같은 탄식을 뱉으며 그 순간을 아쉬워했다. 전반 15분이 끝나기 전, 태수가 마지막 드리블을 했다. 3반은 무려 8명이 골문 앞에서 수비를 펼쳤고, 2사람을 제치고 들어가던 태수가 패스할 곳을 찾지 못할 때 흘린 볼을 용케 주웠다. “패스!” 중앙선―물론 중앙선이 그어져 있지는 않았지만, 대충 운동장의 중앙부근이었다―근처에서 기다리던 찬열이 오른손을 흔들었고, 공을 주운 아이가 힘껏 공을 차올렸다. 찬열은 공의 낙하지점을 찾아 열심히 뛰었고, 찬열 외에도 상대편 수비수 두 사람이 찬열을 쫓아 낙하지점으로 달려왔다. 결과적으로 공은 너무 길었고, 마침 반대편에서 달려오던 상대편에게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상대편은 볼 컨트롤이 미숙해 낙하하던 공이 상대의 정강이 부분을 맞고 튀면서, 쫓아오던 찬열에게로 넘겨지는 행운이 뒤따랐고, “우와!” 3반 아이들은 미리 열광의 함성을 질렀다. 찬열 앞에는 3명의 수비수가 지키고 있었지만, 축구부원의 솜씨에는 당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뒤에서 달려오던 이도 만만치 않은 이였으니, 최전방에서 뛰고 있던 태수가 어느새 중앙을 넘어 수비지역으로 건너오고 있었던 것이다. “막아, 막으라고!” 7반 아이들은 수비수들이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기 바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 사이에 올라온 태수가 찬열을 능히 막아낼 수 있다고 믿으면서. 태수 역시 그 믿음에 보답할 마음이 있었기에, 기를 쓰고 달렸다. 태수와 찬열이 축구부임에도 아직 중학교 1학년. 제대로 축구 전략과 전술을 구사할 능력이 되지 않았고, 일반 학생들보다 뛰어나다지만 그래도 중학교 레벨의 축구 실력이었기에 골문 앞을 지키는 3명 이상의 수비수를 능히 뺏는 드리블 실력을 가지진 못했다. 때문에 15분 동안 열심히 뛰었음에도 점수는 0:0. 그리고 전반 끝나기 전 찬열에게 온 찬스는 이 시합을 통틀어서도 몇 안 되는 기회일거란 생각을 찬열은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만도 한 게, 7반의 태수라는 아이는 후반전에는 뛰지 않아. 명수가 뛸 테니까, 체력을 아낄 필요가 없어. 반면에 찬열이는 후반이 되어도 뛰어야 돼. 그래서 체력에 한계가 있지. 아마 찬열이는 지금이 자기가 최상의 컨디션으로 골을 넣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을 거야.” 단유의 중계 설명을 들으며, 지태를 비롯한 주변의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채윤이 기운을 내라는 뜻으로 소리를 질렀다. “김찬열! 김찬열!” 채윤이 찬열의 이름을 외치자, 덩달아 다른 아이들이 합세하여 찬열을 응원했다. 찬열의 이름을 힘차게 외치는 사이, 찬열은 홀로 수비진을 뚫어나가고 있었다. 비록 왼쪽 사이드에서 달리고 있는 공격수가 있었지만, 몇 분, 아니 몇 초 남지 않았을 이 상황에서 패스 성공률이 30%도 안 되는 같은 편을 의지하느니 홀로 공격하는 것이 성공 확률이 높다, 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7반도 결사적으로 진로를 막아섰고, 특히 중앙을 맡던 수비가 전력을 다해 찬열의 공격 루트를 막아내면서 시간을 끌었다. “김태수! 김태수!” 7반의 태수가 달려와 찬열의 공을 향해 발을 뻗었다. 뒤에서 달려든 태수의 공격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찬열은, 뒤늦게 공을 빼려했지만 태수의 태클이 먼저 들어왔다. 그런데 문제는 태수가 다가와 걷어찬 것이 공이 아니라 찬열의 발목이었다는 것이다. 태수가 좀 더 신중했거나, 찬열이 공을 급하게 처리하려 하지 않았거나, 혹은 그냥 운이 좋았다면 사고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태수는 찬열의 공격을 막겠다는 일념하게 빠르게 달렸고, 자신의 몸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할 만큼 빨라서 수비가 정확하지 않았다는 것. 찬열이 늦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뺏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어설픈 컨트롤로 공을 빼려다가 타이밍을 놓쳤다는 것. 두 사람 다 황토 운동장에서 신고 다닐 축구화를 신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불행이었다. “아!” 찬열은 발목을 부여잡고 넘어졌고, 흘러간 공은 상대편 수비수가 앞으로 걷어냈다. 찬열이 넘어지고 옆에서 달리던 공격수와 중앙의 미드필더―역할을 맡았지만, 사실은 공격도 수비도 아닌 어정쩡한 포지션―들이 잠시 찬열에게 시선을 붙잡힌 사이, 날아온 공을 잡은 것은 7반의 어느 공격수였고, 3반의 수비수가 뒤늦게 공을 잡으려 할 때, 7반의 무명(無名)공격수는 오른발을 힘껏 내질러 공을 찼다. “와!” 공은 골키퍼의 발 안쪽을 잘못 맞고 휘어져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7반은 소리를 질렀고, 3반 응원석 아이들은 분노에 찼다. “야! 반칙이잖아!” “와아!” 3반의 항의에도 7반은 골 세레머니에 함께하며 기뻐했다. 그 때, 태수를 향해 달려든 3반 공격수, 기훈이 태수를 힘껏 밀쳤다. 태수는 엉겁결에 밀리면서 땅에 넘어졌다. “새끼, 졸라 비겁하게 하네.” 가만히 있을 7반 선수들이 아니었다. 어느새 넘어진 태수와 밀친 기훈을 향해 굶주렸던 하이에나 떼처럼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스탠드의 아이들 몇몇이 몰려들면서 경기장에는 아이들이 대치하게 되었다. “야! 그만해! 야!” 지태를 비롯한 몇몇 아이들이 시비가 붙어 곧이라도 싸움이 날 것 같은 선수들을 붙잡고 말렸다. 하지만 이미 얼굴이 붉어져 냉정을 잃은 몇몇 아이들은 상대의 멱살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멱살을 잡히는 순간, 또 잡는 순간 모두 이성을 잃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먹이 교환되었다. 제대로 맞는 주먹은 없었고, 서로 빗겨 맞는 주먹에 살갗이 살짝 부어올랐지만 서로의 의사는 확실히 교환되었다. “씨발놈이.” 누가 먼저인지는 몰라도 욕과 주먹질이 시작되었고, 대부분 아이들은 같은 편을 보호하기 위해, 또 싸움을 말리기 위해 두 사람을 뜯어 말리려고 가운데로 몰렸다. 몰리다 눈이 마주치고, 들불처럼 일어난 감정이 교환되고 마침 팔꿈치가 우연히 턱을 건드렸다면,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된다. 그렇게 시작된 싸움에 아이들은 정신없이 말려들었다. “졸라 재밌지 않냐?” 처음부터 애들 장난 같은 짓이라 생각하고 어울릴 생각이 없어 멀리 화단 뒤에서 떨어져 있던 광종은 그 장면을 보며 키득거렸다. “야구장에서 저런 거 있거든? 뭐라더라?” 광종과 같이 있던 아이가 싸움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단어를 떠올리려 했다. “벤치클리어링?” “맞다!” 껌을 씹던 아이가 답을 내놓자, 처음 호기심을 드러냈던 아이가 손가락을 퉁기며 입 꼬리를 올렸다. “야, 그래도 우리 반 애가 맞는데 가만히 있으면 안 되지 않나?” 연신 껌을 씹으면서 입 안의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골몰하던 소년의 발언은 광종의 흥미를 끌었다. 그러나 다른 아이가 반론을 펼쳤다. “우리까지 저기 가서 끼면 일 커져. 우리 주먹 맞고 애들 쓰러지면 누가 책임 지냐? 우리가 덤터기 쓸지도 몰라.” 그 말도 맞다 싶었던 광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구경이나 하자.” 그 때, 처음 야구장 이야기를 꺼냈던 아이가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고 운동장의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너무 멀어서 잘 안 보이는데? 가까이 가서 찍을까?” 그러면서 이미 발은 운동장 스탠드를 향하고 있었다. 싸우지만 않는다면 큰 문제는 없겠다 싶어, 광종 패거리는 촬영 감독 놀이를 하는 아이의 뒤를 따라갔다. “이 개새끼가!” “뭐래, 씨발놈이!” “쳤냐, 이 새끼가! 죽을래!” 이런 싸움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단유는 빨리 아이들을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시간 전, 담임선생님에게도 이미 시합에 대해 이야기를 전한 상황이었는데, 이런 싸움이 벌어진다면 반장인 지태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고, 시합에 참여했던 명수에게―축구부란 이유로―혹시 모를 페널티나 처벌이 주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단유는 아이들을 비집고 들어갔다. 서로 밀고 밀리는 와중이어서 중심을 잡기가 쉽진 않았지만, 단유가 괜히 그동안 몸을 키우고 운동을 열심히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단유가 힘으로 밀고 지나가자 누구도 버티지 못하고 옆으로 밀려났다. 땀과 먼지로 얼굴이 엉망이었던 7반 아이가 주먹을 휘두르려는데, 누군가가 팔목을 붙잡았다. “응?” 붙잡은 것이 누구 손인지 모르겠지만, 힘이 어마어마했다. 그래서 소년은 순간 선생님이 뒤에서 온 것인가, 하는 착각을 했다. 하지만 다가온 이는 선생님이 아니었다. 하지만 선생님이라 착각할 만큼 큰 키와 억센 힘을 보여주었다. “그만해.” 단유는 다소 강하게 나갔다.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아아, 그만! 그만!” 흡사 손목이 비틀리는 느낌에 이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단유는 그 손을 붙잡고 뒤로 천천히 끌었다. 뒤로 끌려 나온 아이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아파하는 모습을 보이니 옆에 있던 아이들이 주춤 물러섰다. “진정해. 너랑 싸우려는 거 아니니까.” 단유는 아이를 뒤로 보냈다. 아이는 아픈 손목을 붙잡은 채 몰려든 아이들 뒤로 밀려나갔다. 단유는 계속 주먹질을 하는 아이들을 한 명씩 제압해 나갔다. 어떤 아이는 팔목을 붙잡았고, 어떤 아이는 팔꿈치를 붙잡았다. 붙잡히는 아이들 모두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고, 눈물을 꼬리에 매단 채 무리 바깥으로 쫓겨나갔다. 3명 정도가 무리에서 이탈되는 현상에 주변 아이들도 이상을 느꼈다. “뭐야, 새끼야.” 7반 아이 한 명이 단유에게 달려들었다. 자기 반 아이들이 당한다는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주먹을 휘두르는데, 단유가 고개를 슬쩍 흔들었다. 주먹이 단유의 고개를 헛치고 지나갈 때, 단유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상대의 몸에 가까이 다가갔다. 오른손으로 상대의 왼쪽 어깨를 짚으며 동시에 엄지손가락으로 쇄골 아래쪽을 힘껏 눌렀다. “아아, 아파! 아프다고!”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주저앉힌(?) 단유는 상대의 오른팔을 붙잡아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막은 뒤, 일으켜 세웠다. “뒤로 가 있어. 그만 싸우고.” 그 순간에도 단유는 고저 없이 침착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광기에 물들지 않은 침착한 단유의 시선을 마주한 아이는 머리가 싸하게 식는 느낌이었다. 단유가 팔을 놔주었음에도 아이는 반항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잠시 단유를 보다 스스로 물러났다. 단유가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싸움이 멈춰있었다. 방금 그 아이가 지른 비명이 너무 컸던 탓인지, 아니면 4명에 이르는 아이들을 제압하며 가운데로 다가온 단유의 행보에 놀란 탓인지는 분명치 않았지만. “모두 한 걸음씩 물러나.” 평균의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에, 어깨도 쩍 벌어져 다부진 몸매를 한 단유가 가운데 서니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더 이상 싸울 생각 하지 말고, 한 걸음씩 물러나라고.” 싸우던 아이들도 말리던 아이들의 손에 붙잡혀 싸움은 멎어있었고, 그 틈에 들린 단유의 명령(?)은 잠시 서로의 손을 쉬게 할 명분이 되어 주었다. 단유는 이 싸움을 일단 말리는데 성공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하지만 이제 어떻게 사태를 진정시키고 조용히 마무리하느냐를 고민하진 못했다. 이를 고민할 때, 스탠드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다 싸웠냐? 존나 아쉽네.” 모두의 시선이 스탠드로 옮겨졌다. “어? 들렸나?” 능글능글 웃으면서 핸드폰을 들이대고 있던 소년이 먼저 보였고, 그 뒤에서 같은 웃음을 짓고 있던 광종이 보였다. “새끼가 뭐래?” “뭐야, 저 씹새끼!” 물러섰던 7반 아이들의 눈에 다시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 [209] 어른의 의미(6) “다들 진정해. 도광종, 너도 그만해!” 지태가 비명을 지르다시피 소리를 질러 아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7반 반장 역시 아이들을 다독이면서 싸움이 나지 않게 말렸다. “야, 내가 뭘 했다고 하라 마라냐?” 광종이 이죽대며 지태에게 시비를 걸었다. 지태가 움찔거리는 모습은 주변 모두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지태는 물러나지 않았다. “니가 뭘 하든 상관없는데, 괜히 애들 자극하는 말은 하지 마라.” “이 새끼, 졸라 자존심 상하게 하네. 야, 씨발놈아. 내가 싸우라고 했냐, 뭘 했냐? 응? 내가 거기서 주먹질을 했냐, 뭘 했냐고?” 광종이 터벅터벅 스탠드를 걸어 내려와 지태에게 다가갔다. 지태는 벼랑 끝에 선 사람 모양으로 옴짝달싹 못하고 광종을 바라보기만 했다. 식은땀이 등 뒤로 주룩 흐르는 느낌이었다. 광종의 광역 도발에 반응한 것은 지태뿐이 아니었다. 한참 주먹질을 날리며 싸우다가 분위기가 식으면서 잠시 주변을 살피고 있던 7반의 경태라는 아이는 광종의 비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새끼, 졸라 미친놈이네. 새끼야, 뒤에서 아가리만 털고 있으면 다냐?” 신경도 쓰지 않던 사람에게서 나온 욕에 광종의 눈꼬리가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갔다. “뭐냐 너는?” “뭐, 씹새끼야.” “이 새끼 존나 허접스러운 새끼가…. 눈 안 까냐?” 조금 전까지 머리에 쌓였던 열기가 채 빠져나가지 않았던 차에 다시 불이 지펴지자, 보이는 게 없어진 경태였다. 짧은 도약과 함께 주먹을 힘껏 내질렀다. 광종은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는 대신 함께 주먹을 날렸다. 애초에 피하는 법 따위는 배운 적이 없던 광종이었다. 두 사람의 주먹이 서로의 얼굴을 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개싸움이 시작되려는데, 다른 사람보다 먼저 나선 이가 있었다. 단유는 더 이상 싸움이 커지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광종이가 처음 등장했을 때도 일단 가운데 모여든 아이들을 서로 갈라서 거리를 두게끔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광종과 경태가 주먹질을 시작하면서, 아이들이 다시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단유는 두 손을 쫙 뻗어서 갈라진 아이들이 서로 뭉치지 않게끔 제스처를 취했다. “그만해.” 단유의 제지에 갈라섰던 아이들이 쉽사리 붙진 못했지만, 결국 일부의 아이들은 엉키기 시작했다. 혼자 힘으로 40명 가량의 아이들이 엉킨 이 싸움을 말리기란 애초에 어려웠던 것일까. “야, 그만하라고 하잖아!” 여태 뒤에서 자기 반 아이들을 말리고 있던 명수가 단유 곁으로 다가와서 단유를 도와 아이들을 가르기 시작했다. 명수도 한 힘을 하다 보니 도움이 되었다. 단유가 자기 반 아이들을 두 팔로 밀어 붙이고, 명수가 7반 아이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면서 밀어붙이니 다시 두 집단 사이가 벌어졌다. “저 봐, 스모 하는 애들 같지 않냐?” 그 모습이 스탠드 위에 있던 아이들에게는 재밌는 구경거리 정도밖에 되지 않은 듯 했다. 그 와중에도 핸드폰을 들고 있던 아이의 시선은 광종과 경태의 싸움에 집중되어 있었다. “둘이 비슷한 거 같네.” 몇 번의 주먹이 오가는데, 워낙 험악해서 주위 아이들이 섣불리 끼어들 틈이 나지 않는 싸움이었다. 그런데 그 때, 그 사이로 끼어든 손이 있었다. “어?” 어느새 단유가 싸움을 말리기 위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것이었다. 단유는 눈앞으로 휘둘러지는 팔들을 용케도 붙잡았다. 각각의 손들을 한 손으로 붙잡으니, 싸우던 두 사람의 주먹이 모두 멈췄다. “뭐야!” 광종이 잡힌 손을 빼려고 이러 저리 힘을 써 보지만, 어찌된 일인지 단유에게 붙잡힌 손을 빼기가 쉽지 않았다. 보이는 것 이상으로 힘이 센 녀석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광종은 발을 먼저 내뻗었다. 경태의 손까지 잡고 있던 터라 허벅지를 걷어차일 수밖에 없었던 단유는, 그럼에도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마침 오른손으로 쥐고 있던 경태에게서 먼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 아! 그만! 아, 안 할게, 그만!” 손이 끊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유의 손아귀 힘이 강했던 탓에 경태는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광종은 받는 고통 이상으로 악이 있었다. “새꺄, 안 놔!” 광종은 다시 오른발로 단유를 걷어차려고 내 뻗었다. 하지만 이 때는 단유가 이미 경태를 잡고 있던 손을 놓은 상태였다. 뻗어오는 광종의 오른발 발목을 다시 낚아챈 단유는 잡은 발을 안으로 끌어들였다. 광종이 놀란 눈을 감출 틈도 없이 단유에게로 끌려오는 틈에, 단유는 오른발을 옆으로 밀었다. 오른팔과 오른다리가 잡힌 상황에서 왼발만으로 중심을 잡고 있던 광종은 몸이 돌아가면서 중심을 잃고 결국 땅바닥에 철퍼덕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다만 넘어질 때도 단유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과 발을 놓지를 않았기에 세게 넘어지진 않았다. 지켜보던 아이들은 기행 같은 단유의 솜씨에 모두 입을 쩍 벌렸다. “무술인가?” “유술인가, 뭐 그런 거 아냐?” 단유가 사람을 때리거나 특별한 힘을 쓰지 않고, 오로지 달려드는 광종의 팔과 다리를 구속하여 중심을 무너뜨려 제압하는 모습을 보이자 아이들은 신기해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단유는 광종을 엎어놓고 그 위에서 팔을 비틀어 올려놓았다. “놔! 새끼야, 안 놔!” 단유는 광종을 누른 상태에서 고개만 들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로 집중되어 있었다. 어쩐지 웃음이 날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광대가 된 거 같네.’ 삐져나오려는 실소를 참으며 단유는 침착하게 말을 건넸다. “지태랑 7반 반장. 애들 진정시키고 물러서. 선생님들 올 수도 있으니까.” 그제야 아이들이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너무 흥분하면 주위가 보이지 않는다더니, 어느새 다른 반 아이들도 웅성거리며 모여들기 시작한 참이었다. 몇 번의 주먹질이 있었지만, 다행히 말리는 사람들이 많았고, 단유나 다른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덕에 싸움은 5분도 채 되지 않아 멈춘 상태였다. 재미난 구경거리를 찾아 온 다른 반 아이들, 혹은 다른 학년 아이들은 단유 밑에 깔려서 꿈틀거리며 온갖 욕지기를 퍼붓고 있는 소년에게 집중하는 상태였지만, 단유가 단단히 제압하고 있는 상태여서 그들이 원하는 그림은 나오지 않을 터였다. “시시비비는 당사자들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자. 지금 서로 흥분해봤자 싸움밖에 안 되니까.” 지태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제안하자, 7반 반장 역시 제안에 수긍했다. 일단은 싸움이 벌어지도록 놔둬선 안 될 일이었으니까. 결국 전반전만으로 두 반의 시합은 끝이 났고, 아이들은 각 반의 반장의 설득 하에 물러났다. 물러나던 중에 단유를 흘깃 보던 경태의 시선이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상태에서는 나서기가 곤란했던지, 경태는 얌전히 반으로 돌아갔다. “석고야.” “나중에 이야기하자. 먼저 들어가.” 명수마저 반으로 돌려보낸 뒤, 그 때까지도 욕지기를 퍼붓던 광종을 풀어주었다. 단유가 힘을 풀고 일어나자, 바닥에서 몸을 굴려 일어난 광종은 눈을 까뒤집고 단유에게 달려들려 했다. 그러나 곁에 와 있던 광종의 패거리 아이들이 광종을 붙잡고 말렸다. “야, 진정해.” “광종아, 일단 참아라. 여기서는 위험해.” 그들 역시 선생님의 시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일단 물러나는 선택을 했다. “너 씹새끼. 나중에 두고 보자.” 정말 흔하디흔한 말이라도 저렇게 악을 담아서, 진정성 있게 말하면 흘려 듣기가 힘들었다. “그래. 나중에 보자.” “이, 개새끼가!” 단유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몸을 들썩여보지만, 이미 팔과 어깨를 친구들에게 붙잡힌 광종은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로 돌아갔다. “괜찮아?” 지태가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 단유는 교복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너 무슨 무술 같은 거 배웠어?” 그게 그리도 궁금했었나보다. 단유는 고개를 저으며 배운 적 없음을 실토했다. 실제로 단유는 누군가와 싸우는 법 따위를 배운 적이 없었다. 다만 오랜 운동과 특유의 호흡법을 통해 또래보다 좀 더 강한 힘을 쓸 수 있었을 뿐이었고, 동체시력과 반사 신경이 뛰어나 날아오는 주먹 따위도 쉽게 피할 수 있었던 것뿐이었다. 만약 기술이라도 익혔다면, 다리를 걸어 넘기거나, 혹은 힘을 덜 쓰고 제압하는 방법을 썼을 테지만 그렇지 못했던 단유는 그저 우격다짐으로 힘을 썼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광종을 제압한 것도 사실은 운이 좋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선생님한테 뭐라고 하지?” “선생님보다 저쪽 반 아이들이랑 먼저 이야기를 나눠야지.” 선생님께 이야기를 해서 사태를 해결하는 법도 있겠지만, 폭력이 끼어든 이상 좋게 해결될 리가 없었다. 그 전에 당사자들이 먼저 이야기를 통해 오해를 풀고 그 사정을 선생님께 보고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바로 가서 이야기하면 다시 흥분할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어. 너랑 나, 그리고 기훈이까지 해서 셋이 먼저 가보자.” 지태는 고개를 끄덕이고 단유의 등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었다. “고맙다.” “응? 뭐가?” 단유는 뜬금없는 감사인사에 어리둥절했다. 지태는 등과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주며 대답했다. “그래도 니가 도와줘서 이렇게 일이 커지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이야.” “그건 내가 받을 인사가 아니지. 나 말고도 그 싸움을 말리려고 나섰던 아이들 모두가 들을 이야기지.” 본인 때문에 싸움이 멈춘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었지만, 지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유가 나섬으로서 두 반이 싸움을 멈췄음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던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굳이 단유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고 설득하려 하진 않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 단유가 되도록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번에도 일이 크게 번지려는 조짐이 없었다면 나서지 않았으리라. 점심시간이 15분 정도 남았을 때, 7반으로 단유와 지태, 기훈이 찾아갔다. 7반 반장과 명수가 아이들을 진정시킨 뒤, 볼이 살짝 부어오른 태수를 데리고 3 대 3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태수는 자신이 과했음을 인정했고, 기훈 역시 자신이 먼저 태수를 때렸음을 시인했다. “일의 시작이야 어쨌든, 우리 반과 너희 반이 싸운 사실은 분명해. 그리고 학교에서 벌어진 일은 선생님에게 보고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각 반 반장이 곧 선생님께 가서 사실대로 이야기할 거야. 그리고 어쩌면 싸움을 일으킨 당사자로서 기훈이나 혹은 몇몇 아이들이 처벌을 받을지도 몰라.”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있었지만, 단유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도 우리가 이미 서로의 잘못을 시인하고, 화해를 했다는 사실을 선생님들께 이야기를 한다면 조금 사정을 봐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있어.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여길 찾아온 거고.” 아이들은 조용히 단유의 말을 기다렸다. “즐겁게 시합을 하자는 애초의 기대는 아쉽게 무너졌지만, 이 일로 우리 두 반이 나쁜 마음으로 지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어. 여기에도, 그리고 우리 반에도 맞은 아이들이 있어. 어쩌면 당사자는 자신이 피해자라는 생각에 억울한 마음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내가 대신 사과한다는 건 아냐. 그런 걸로 마음이 풀리진 않을 테니깐. 하지만 이것만 알아줬으면 좋겠어. 이번 일은 서로가 너무 이기고 싶고, 그 마음이 조금 지나쳤기에 벌어졌던 일이니까.” 단유는 잠시 아이들을 둘러보다가 말을 맺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가 조금씩 양보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라는 반성을 해보자는 거야. 그 반성을 통해서 우리는 앞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주의할 수 있을 거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도 가질 수 있게 될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사실 내가 반장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서 아니 꼽게 생각할 사람도 없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 나 역시 내가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나 싶으니까. 그런 사람들에게는 미안하다는 말을 전할게. 미안.” 몇몇 아이들은 코웃음을 쳤고, 몇몇 아이들은 실소를 터뜨렸다. 단유는 경태에게 다가갔다. 거만한 자세로 앉아있던 경태는 단유가 다가오자 바싹 긴장한 얼굴로 자세를 바로 잡았다. 금방이라도 반격할 준비를 갖추고 단유를 바라보는데, 단유가 다가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미안하다. 아까는 조금 과격하게 힘을 썼어. 진심으로 사과할게. 하지만 싸움을 말리려고 했던 거지, 너한테 악감정이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니니까 부디 이해해주길 바란다.” 경태와 7반 아이들은 진심으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어느 누구도, 단유가 자의적으로 고개를 숙여 사과하리라 예상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단유가 아니라 또래 누구라도 저런 태도로 사과를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다. 게다가 단유가 보인 힘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단유는 고개를 들고 경태를 바라보았다. 경태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단유는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자주 보자는 말은 못하겠고, 친하게 지내자는 말도 못하겠다. 내가 워낙에 숫기가 없는 놈이라서. 그래도 사과는 받아주길 바란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지만, 옅은 미소를 띠고 있는 단유의 손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던 경태였다. 내민 손을 잡으니 단유가 살짝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혹시 보면, 콜라라도 한 잔 살게. 아, 콜라 좋아하나?” “으, 응. 좋아해.” “그래.” 1시간 동안, 액션 블록버스터와 청춘 드라마와 시트콤을 동시에 찍은 느낌이라 어리벙벙해진 7반을 뒤로하고 3반의 사절단은 본진으로 귀환했다. ======================================= [210] 미스터리(1) 5교시가 끝나고 교무실로 돌아온 헌영은 식곤증 때문인지, 50분간의 수업 때문인지 피로가 잔뜩 몰리는 느낌이었다. 의자에 앉아 잠시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면서 넋을 놓고 있는데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반장인 지태였다. “무슨 일이야?” 얼굴을 보니, 아까 점심 때 반 아이들이 7반과 축구 시합을 벌였던 것이 떠올랐다. 선배 교사와 음료수를 마시기 위해 자리를 떠나면서 결과를 끝까지 보지 못했었기에 지태의 얼굴을 보니 결과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지태는 잔뜩 얼어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실은요.” 지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헌영은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시합 중에 충돌이 있었고, 과격한 몸싸움이 있었고, 싸움이 벌어졌지만 말렸고, 화해했다는 내용이었다. 그게 점심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라고? “화해를 했다는 건 무슨 뜻이야?” 지태가 시선을 돌리자, 헌영도 지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마침 7반 담임도 반장의 보고를 받다가 고개를 돌려 헌영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약속이라도 한 듯, 반장들을 데리고 상담실로 향했다. **** “그래서?” 채윤의 물음에 지태는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일단 수업 다 끝나고 보자시네. 종례 때 말씀하시겠지.” “누구누구가 싸웠는지도 다 이야기했어?” “구체적으로는 이야기 못했지. 시간도 부족했고. 선생님도 일단 자세한 내용은 종례 때 듣기로 했으니까, 그 때까지는 별 수 없이 가슴 졸이며 기다릴 수밖에 없지.” 지태는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교실을 쭉 둘러보았다. 점심시간에 주먹질을 했던 아이들이나 싸움을 말리던 아이들이나 특별히 다른 점은 보이지 않았다. 얼굴이 부은 아이도 있고, 입술이 터진 아이도 있었지만, 심각하게 엉망이 된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일까? 짝과 함께 수다를 떠는 아이, 매점으로 나들이 가는 아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아이, 책상에 엎드려 자는 아이. 늘 그래왔던 것처럼, 평범한 쉬는 시간 교실의 전경이었다. “이렇게 보면, 아까 싸움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채윤은 오른쪽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난 아까 싸우는 거 말리다가 팔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어. 누가 내 팔을 잡아당겼는데, 누군지 모르겠네. 이거 근육에 문제 생긴 거 아냐?” “그건 그냥 근육이 놀래서 그런 거야. 별 거 아닐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지태가 별 거 아니라는 듯, 채윤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주었다. 단유는 짧게 한숨을 토하며 말을 걸었다. “근데 왜 내 자리에 와서 이러고 있어?” 지태와 채윤은 서로 짝이었다. 자기 자리에서 서로 마주보고 미주알고주알 알콩달콩 이야기를 나눠도 될 일을 왜 신경 쓰이게 뒤에 서서 이러고 있을까? “뭐 어때서? 여기서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치?” 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 너도 당사자야. 너도 이 사태에 책임감을 느낄 필요가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다들 그렇게 생각할 걸? 가장 적극적으로 싸움판에 들어온 사람은 너라고.” “표현이 이상하네. 난 말리려고 했던 거지.” “그게 그거야. 아무튼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고.” 지태는 어물쩍 넘어가려했다. “넌 선생님이 어떻게 나올 거 같아? 설마 때리진 않겠지?” “누굴 때려?” “싸운 애들이나 싸움이 나게 만든 책임으로 반장을 때릴 수 있지 않을까?” 채윤이 지태를 대신해 대답했다.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은 없다고 봐.” “왜?” “여기 학교 선생님들은 체벌 금지거든.” 각 주요 도, 시, 광역시 등에서 교육감의 권한으로 체벌이 금지되어 있는 상태였다. 서울특별시야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래도 얼차려 받을 수도 있잖아?” 엄밀히 말하면 얼차려도 간접체벌로서 금지였다. 하지만 그 정도는 융통성(?) 있게 시행되는 곳도 있었다. 그리고 만약 선생님이 얼차려를 부여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거부하기가 힘들다.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우리가 잘한 것도 아닌데. 반 전체가 싸움에 말려든 거나 마찬가지잖아.” 단체 생활에 있어 의도치 않게 폭력이 발생하는 경우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렇게 집단으로 싸움이 벌어지는 경우는 드물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라면 선생님이 ‘연대 책임’과 ‘정신 무장’과 같은 이유로 단체 기합을 주더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넌 걱정 안 돼?” 지태가 단유에게 물었다. 물론 단유는 걱정하지 않았다. 걱정을 할 부분이 전혀 없었으니까. 다만 지태의 물음을 통해, 지태가 상당히 겁을 먹고 있음은 짐작할 수 있었다. 겉으로 티는 안 내지만, 속은 귀신의 집 입구에 선 6살 꼬마 같이 겁을 잔뜩 집어 먹었나보다. “혹시 억울해?” “응? 뭐가?”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반장이라는 이유로 벌을 받는 게?” “나 벌 받는 거야?” “예를 들어서 말이야. 벌을 받는다면 억울하겠냐는 이야기야.” “억울하지. 억울한데… 책임도 있으니까.” 단유는 지태의 엉덩이를 툭툭 쳐주며 말했다. “역시 지태네. 내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반장은 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게 중요한 거 같아. 물론 다 책임질 수는 없겠지. 그래도 책임지려는 마음과 자세가 중요해. 그만큼 자신이 맡은 직에 대한 무거움을 아는 것이고, 반을 소중히 하려는 마음도 있는 거니까.”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맙긴 한데, 그래도 무서워.” “너 학교에서 혼나 본 적 없구나?” 지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했다. “초등학교 때는 선생님들한테 귀여움을 독차지 할 정도였지. 공부도 잘해서 칭찬도 많이 받았고.” 채윤이 마치 자기 손으로 뱃살을 잘라내는 돼지를 보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니 입으로 그런 말하면 쑥스럽지 않냐?” “뭐가? 사실을 말한 건데?” 의외로 지태가 저런 농담도 할 줄 아는구나. 단유가 피식 웃는데 지태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농담 아냐. 사실을 말하는 게 왜 창피해? 나 초등학교 때 상도 많이 받고 그랬어. 선생님들이 혼낼 구석이 없다면서 얼마나 칭찬했는데?” 단유는 책을 폈고, 채윤은 자리로 돌아갔다. 마침 종이 울렸기에 지태는 자리로 돌아갔다. 오늘의 마지막 수업시간이었다. 시간 맞춰서 교실의 앞문이 열리면서, 노란 머리에 하얀 얼굴을 가진 전형적인 ‘백인 스타일’의 남성이 들어왔다. “Hello, Everyone? 영어 과목 전임교사는 미국 유명 대학교에서 학위를 따고 한국으로 ―놀러온 건지, 취업하러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와서 교사가 된 이였다. 어느덧 경력 4년이 된, 풋내기 티는 벗은 교사 ‘헤럴드 와이즈먼(harold Wiseman)’이었다. “Attention.” “Bow.” 처음에는 학생들로부터 인사를 받는 게 어색했는데, 이제는 이런 절차가 수업을 집중시키는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인사를 받는 데 익숙해진 30대 초반의 영어교사였다. 넉넉한 얼굴과 팔자주름, 붉은 뺨 때문에 특정 연예인을 떠올리게 만들어서 아이들 사이에서는 ‘구라’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그의 성을 떠올리면 참 언발란스한 별칭이 아닐 수 없었다. “Today, Let’s talk about hobby.” 단유로서는 참 곤란한 시간이었다. 사실 지난 3년간, 영어 시간에 말 한 마디 제대로 해본 적 없는 단유였다. 다만, 그동안 남들 모르게 애쓴 탓에 상대가 영어로 말한다는 것을 알 정도는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 자신의 입으로 나오는 언어가 한국말인지, 영어인지 구분이 잘 안갈 때가 있었다. 워낙 말을 하지 않은 탓에 의식적으로 구분하여 말하기가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섣불리 입을 열기란 쉽지 않았다. ‘듣는 걸 구분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단유는 고개를 숙이고 책을 보았다. 어쩌면 조만간 저 선생님과도 특별한 1:1 면담을 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날이 부디 오늘은 아니길 바라면서, 책만 뚫어져라 보았다. “You, ok. Could you tell me what you did with your family last weekend?” 선생님과 눈이 마주친 학생은 일어나서 지난 주말 가족들과 영화관에 갔었다고 이야기를 했다. 영화를 좋아하냐는 물음에는 ‘yes’, 영화 내용을 말해주겠냐는 물음에는 ‘hero movie’ 라는 간단한 대답으로 대화를 마무리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수업이 어느 정도 진행이 되면서, 선생님은 짝과 주말에 했던 취미활동이나 혹은 가족과 함께 보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가지도록 했다. “난 그냥 들어주기만 할게. 이야기 해봐.” 단유는 미리 자신은 말하기를 못한다고 짝인 병수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병수는 이미 단유가 ‘영어로 말하기’를 극도로 피한다는 사실을 지난 몇 번의 수업을 통해 체험했기에 이번에도 자신만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신기하게도 단유는 말하기는 못하면서 듣기는 잘하는 건지, 자신이 말하는 내용을 잘 들어주었다. 아니, 말하기를 못하는지 잘하는지 확신하기도 어려웠다. 종종 자신이 틀리게 말하면 고쳐주기도 했기에. “I, I like the figure. So I make the figure last weekend.” “피규어를 만든다고?” “응, 그러니까 조립 같은 거.” “그럼, make 대신에 assemble이란 동사를 쓰는 게 좋을 거 같아.” “I make, 아니 I assemble the figure?” “과거형으로.” “I assembled the figure last weekend. 맞아?” “응.” 아무렇지 않게 표현을 고쳐주는 단유와, 덕분에 모르던 단어도 배우고 익혀가는 병수였다. 평소에도 단유는 수업시간에 말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영어시간에는 특히나 말소리가 작아져서 들릴 듯 말 듯 했다. 그래서 병수는 고개를 숙인 단유에 맞춰 책상에 엎드릴 정도로 몸을 낮추어 귀를 기울여야 했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오히려 두 사람의 자세가 선생님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Hey, there! Two in the back?” 단유가 고개를 들까 말까 고민했다. 분명히 자기를 부르는데,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에 병수가 어리둥절하는데, 다시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들 뭐하니?」 어느새 선생님은 병수 옆으로 다가오셨다. 아이들의 시선이 모여드는 느낌에 병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선생님은 두 사람의 책상 위를 훑어보았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었다. 「왜 엎드려 있었는지 이야기 해보겠니?」 병수가 우물쭈물하다가 단유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단유는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죄를 지은 느낌이 드는 병수였다. 「주말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왜 엎드려 있었지?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니?」 「아니요. 아무것도.」 선생님이 보기에도 자세가 불량(?)했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긴 했다. 그러다 문든 병수 옆에 앉은 아이가 한 번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거기 너.」 단유는 자신을 부른다는 걸 알았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름이 뭐지?」 단유는 교실이 조용해졌음을 깨달았다. 이전 같으면 선생님이 어떤 학생을 붙잡고 지적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조용해지진 않았다. 하지만 점심시간 있었던 일의 여파 때문인지, 단유는 어느새 반 아이들의 주요 관심대상이 된 것이다. 학기가 시작되고 나서도 줄곧 베일에 싸여있던 단유였다. 수업시간에 특별히 두드러진 면을 보인 적이 없었고, 종종 반장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건 반장이 두루두루 사람을 챙기는 모습 정도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오늘 점심 때, 단유가 보여준 힘(!)은 평소 가지고 있었던 인상을 깨뜨릴 정도로 엄청났고, 때문에 단유라는 아이의 존재감이 부쩍 커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번, 단유의 비밀스러움이 드러날 계기가 마련되었다. 과연 단유, 저 아이는 어떤 행동 혹은 말을 할 것인가? 아이들의 눈에 별빛보다 더 밝게 반짝이는 호기심이 가득 차올랐다. ======================================= [211] 미스터리(2) “Why don’t you say about your fault?” 뭘 잘못했는지 말해보라는 선생님의 말에 단유는 더 이상 버티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가졌다. 게다가 최대한 수업에 지장을 주지 않으려 조심했던 자신의 태도가 ‘잘못’이라는 지적에 얼굴이 붉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단유는 이것이 선생님과 학생이라는 위치에서 발생된 관점의 차이가 아니라, 명백한 자신의 잘못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마음먹었다. “It was wrong to have been keeping silence.” “What?” 말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 잘못이라는 단유의 말에 선생님은 어리둥절했다. “As impossible an experience as talking English through time may be, it should become the precious time when I can learn. But I couldn’t best my way, and it is my fault, of course. So, I’m sorry.” 아이들과 선생님은 모두 얼이 빠진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외계인이 나타났다는 심정으로 단유를 바라보았고, 선생님은 1달여간 이상 좀처럼 존재감을 드러낸 적 없던 아이가 이토록 유려한 발음과 문장력을 구사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야, 방금 단유가 뭐라고 한 거야?” “내가 어떻게 알아?” 영어 좀 잘한다고 생각했던 아이들도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애초에 영어만 썼던 사람인 것처럼, 자연스러운 발음과 학교에서 배운 적 없는 문장에 놀란 탓이었다. “쟤 교포야?” “아닐걸?” 곳곳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리는 와중에도 선생님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다만 조금 시험하고픈 욕심이 생겨, 평소보다 빠르게 말을 해 보았다. 「수업시간이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 지금까지 참여를 하지 않은 이유가 뭐죠?」 「개인적인 이유입니다.」 ‘private’ 이란 이유라도 일단 수업시간에 벌어진 일이기에 선생님은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수업시간이 끝나고 따로 이야기를 할까요?」 「알겠습니다, 선생님.」 「하지만 이번 수업 때는 더 이상 고개를 숙이거나 수업에 비참여적인 행동은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시겠죠?」 「네.」 단유는 선생님이 말을 빠르게 하든, 어려운 단어를 섞든 다 알아듣고 제대로 대답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수업 중이라 한 사람과 오래 대화할 수 없어 이 정도로 마쳤지만, 굳이 레벨 테스트를 해 본다면 아마도 ‘High intermediate’ 혹은 ‘Advanced’ 정도의 단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단유가 말하는 개인적 이유가 굉장히 궁금해졌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교실 앞으로 돌아갔고, 단유는 제자리에 착석했다. 「아, 이름이 뭐죠?」 단유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생각한 탓에 많이 차분해진 상태였다. 깊은 숲속의 차가운 샘을 떠올리게 하는 차분한 어조로 이름을 밝혔다. “My name is Kim, dan-yu” **** 수업이 끝난 뒤, 가장 먼저 단유에게 달려온 이는 역시 지태였다. “너 영어 엄청 잘하네? 왜 그 동안 말 안 한 거야?” “뭘 말하라는 거야?” “영어 잘 한다는 거? 왜 감추고 있었어?” “내가 영어를 잘 하든 못 하든 그걸 너한테 말하는 게 더 웃기지 않아? 넌 니가 뭘 잘한다고 자랑하고 그래?” 지태가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말했잖아? 나 서예 잘한다고. 할아버지한테 배워서 서예도 잘하고 한문도 잘한다고.” 아, 맞다. 지태는 이런 아이였다. 자기애(自己愛)가 풍부한 녀석. “난 그런 성격이 아니고, 굳이 떠벌리면서 자랑할 만한 꺼리는 안 돼.” “그게 왜 자랑거리가 아냐? 우리 반에서 제일 영어 잘할 거 같은데? 그치?” 어느새 단유 주위로 몰려든 아이들을 둘러보며 동의를 구하는 지태의 말에 몇몇 아이들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 지금까지 너처럼 발음 좋은 아이들은 본 적이 없어!” 발음이 영어를 잘하고 못하고를 구분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리고 되게 어려운 단어도 많이 썼지?” 그 단어가 어려운지 쉬운 지를 구분할 능력이 되지 않지만. “아까 했던 말은 무슨 말이야? 임파서블 어쩌고저쩌고 한 거. 영화 제목 이야기는 아닌 거 같은데?”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영어로 말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기 때문에, 지금이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어야 하는데 난 최선을 다하지 않았고, 그래서 죄송하다고 이야기 한 거야.” 아이들은 오오, 하며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온갖 질문이 이어졌다. 외국에서 살았던 적이 있느냐, 부모님이 영어를 잘 하시냐, 학원을 다니느냐, 어떤 학원을 다녔느냐, 공부는 어떻게 하느냐, 영어 발음은 어떻게 해야 잘 할 수 있냐는 질문들이 쏟아졌다. 순식간에 청문회처럼 단유를 앉혀놓고 둘러선 아이들의 폭풍 질문에 단유는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굳이 회피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서 하나씩 ‘진실 되게’ 대답해주었다. “외국에 나간 적 없고, 부모님 안계시고, 학원 다닌 적 없고, 공부는 책만 보고, 발음은 그냥 어쩌다보니.” 단유의 진실하고 솔직한 답변은 무성의와 무책임의 극치였다. 적어도 아이들의 귀에는 그랬다. 그래서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고 어떻게 영어를 그토록 잘 할 수 있단 말인가? “부모님 안 계신다고? 외국에서 일하시는 거 아냐?” 한 아이의 질문에 당황한 건 오히려 단유가 아닌 지태였다. “야, 그런 개인적인 질문은 하면 안 되지.” 하지만 단유는 지태를 말렸다. “괜찮아. 나 부모님 안 계셔. 그래서 초등학교 때는 보육원에서 살았어.” 아이들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질문을 한 아이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표정 안 지어도 돼.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그리고 보육원에서 살았기 때문에 학원 같은 곳에 간 적은 없어. 그리고 책만 보고 공부한 것도 사실이야. 그것 말고는 공부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초등학교 때도 그랬지만, 단유는 보육원에 살았던 사실이나 부모님이 안 계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에 부끄러움이나 창피함을 느끼지 않았다. 전혀 그럴 이유가 없는 일이었기에. “그럼 초등학교 때 영어 수업 듣는 거랑, 책 외에는 따로 영어 공부 한 적 없고?” “응.” 그야말로 수능 만점자가 교과서만 보고 수업 열심히 들었어요, 대답하는 격이었다. 아이들은 지난 시간동안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공부했던 것들이 다 부질없는 짓이었던가, 자괴감에 빠졌다. 만약 종례를 위해 선생님이 오지 않았다면, 아이들의 자괴감에 계속 깊어만 갔을지도 모르겠다. “뭣들 하는 거야, 거기! 제자리로 돌아가!” 선생님은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주의를 환기했고, 사냥꾼에 등장에 놀란 새들처럼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자리로 찾아갔다. 선생님이 교탁 앞에서 학생들을 바라보는 가운데, 교실은 사고 난 유조선처럼 점점 혼탁해지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단유가 드러냈던 놀라운 모습 때문에 흥분과 열기가 남은 상태에서 선생님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검은 기름 같은 죄책감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점심시간에 3반이 저질렀던 일들이 선생님께 보고되었음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처벌이나 결과는 아직 알지 못하는 상태. 이제 그 죄를 물을 심문관이 앞에 서 있으니, 아이들은 어깨를 움츠리고 심문관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아까 반장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솔직히 반장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선생님은 너희들이 자못 기특하다는 생각도 했었기에 지금 선생님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배신감을 크게 느끼고 있다.” ‘배신감’이란 용어를 통해, 아이들은 이야기의 결말이 좋게 끝나지는 않으리라 짐작했다. “반의 단합을 위해서 축구 시합을 허락했더니, 주먹질로 단합을 해? 그것도 학교 운동장에서, 다른 사람들도 버젓이 보는 가운데에 싸움을 벌여? 그게 학생들이 할 짓이야!” 헌영의 격앙된 목소리에 다들 고개를 들지 못했다. 매운 떡볶이 3인분을 먹고 물을 안 마신 것처럼 붉어진 헌영의 얼굴을 똑바로 볼 용기가 아이들은 없었다. “반장 일어나.” 지태가 머뭇대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장은 이 사태를 어떻게 책임질 거야?” 지태는 입을 열지 못했다. 이미 7반에 가서 사과까지 하고 화해를 했다고 밝힌 상황.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봐야 선생님의 화를 재우진 못할 것 같았다. 동시에 이미 화해를 해서 오해를 푼 상황인데 왜 화를 내실까, 하는 생각도 들었기에 더욱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반에서 폭력사건이 일어나도 화가 날 판에, 다른 반 애들이랑 패싸움을 해? 그래놓고 니들끼리 오해를 풀었으니 봐달라고? 그러면 아무 일 없는 게 돼? 응?” “…아닙니다.” 선생님은 지태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그 부분을 지적했다. 사실 헌영의 입장에서 이 싸움은 자기들끼리 풀었으니 괜찮다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게 되면, 나중에 또 다른 문제가 벌어졌을 때도 자신의 통제 밖에서 자기들끼리 일을 해결하겠다고 나설 게 분명해보였기 때문이었다. “학교에 왜 규칙이 있고, 이 사회에 왜 법이 있는데? 너희들끼리 싸우고 해결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생각은 도대체 누가 먼저 한 거야? 게다가 아무도 선생님한테 싸움이 벌어졌을 때 안 왔어. 사고가 터졌으면 먼저 선생님한테 와서 이야기를 해야 할 거 아냐!” 지태는 이를 악문 채로 고개를 숙였다. “반장, 왜 바로 안 왔어?” 지태는 머뭇대다가 선생님의 추궁이 이어지자,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이들 말리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야!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헌영이 탁자를 세게 두드리면서 지태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진짜 지태는 막다른 길에 몰린 느낌이었다. 어떤 대답을 해도, 선생님으로부터 긍정적인 이야기는 들을 수 없을 것이란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말만 하면 다냐고! 너나, 너희들이나, 지금 이 일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했던 일인지 몰라? 만약 또 다른 사고가 났을 때도 너희들끼리 해결하겠다고 선생님한테는 이야기도 안 하고, 응? 그러면 어떻게 되겠냐고!” 지태는 주먹을 쥐었다.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엄청나게 큰 죄를 지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선생님께 이야기하러 가기 전, 그러니까 7반에 가서 화해를 하러 가기 전, 하고 난 후, 단유로부터 긍정적인 이야기도 들었고, 오해도 잘 풀렸기에 마음 한 구석에는 안심하는 마음도 없진 않았었나 보다. 그런데 그 마음이 일순간에 부서지고 짓밟히니, 더욱 두렵고 분하고 죄스러웠다. “싸운 사람 다 일어나 봐.” 싸운 사람이라고 하니, 정확히 누굴 지칭하는지 알 수가 없어 다들 머뭇댔다. “안 일어나!” 결국 최초 7반 공격수를 떠밀었던 기훈을 시작으로 몇몇 아이들이 일어섰다. 그리고 그 사이에 단유도 함께 일어섰다. “몇 명이야? …8명? 이게 다야? 어디서 눈치를 보고 있어! 안 일어나?” 주춤대던 몇 명이 더 일어섰다. 사실 싸운 아이도 있고 말린 아이도 있었지만, 분위기상 다 일어서야 할 것 같았기에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략 20명 정도가 일어나자, 선생님의 눈에 불길이 서렸다. “니들 뭐야? 응? 깡패야? 일진이야? 어디 학교에서 함부로 주먹질을 해!” 헌영은 소리를 지를수록 차오르는 분노와 열기를 참을 수 없었던지 팔을 걷어 올리고, 목을 죄던 카라넥 티셔츠의 단추 하나를 풀었다.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뭐야! 딴 애들이 싸우고 있으면, 이 중에서 한 명이라도 선생님한테 와서 이야기를 해야 할 거 아냐? 다들 구경만 하고 있었어?” 일어서지 않은 아이들도 좌불안석이 되어 불편한 표정이긴 마찬가지였다. 할 말이야 왜 없겠는가, 마는 지금 입을 열면 그야말로 불난 곳에 기름뿌리는 짓이리라. 일어선 아이들의 면면을 보자니, 어떤 아이들은 입술이 터져 있고, 어떤 아이들은 볼이 벌겋게 부어오르기도 했다. 헌영은 속에서 터져 나오는 열을 참기가 힘들 정도가 되었다. ======================================= [212] 미스터리(3) 광종은 지금 이 상황이 심히 불만이었다. 자기는 애들 축구 시합하는 걸 구경하지도 않았고, 뒤늦게 운동장을 지나다가 아이들이 싸우는 걸 구경했을 뿐이고, 어쩌다 7반 아이랑 싸우긴 했지만 축구 때문에 싸운 건 아니고―본인은 결코 축구 때문이 아니라 상대가 시비를 걸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도리어 저 뒤에 뻔뻔한 얼굴로 서 있는 단유라는 놈한테 기습을 당해서 제압당했던 터였다. 오롯이 피해자이기만 한 자신이 이런 분위기에서 죄인으로 취급당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겁도 없이 불만을 티나게 털어놓는 멍청이도 아니었기에, 입은 꾹 다물고 있었지만 삐죽 나온 입술과 찡그린 미간, 혀끝에서 감도는 욕지기가 그의 불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앉아있는 놈들도 다 일어나!” 생각할수록 저 앞에 선 선생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을 공평하게 처리할 줄도 모르고 죄 없는 자기 같은 아이들한테까지 책임을 물으려 하다니. “너희들은 모두 학생으로서의 자각이 없어! 너희들이 아직도 초딩인 줄 알아! 언제까지 니들 마음대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너희들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허용될 거라고 생각해? 규칙과 법도 따르지 않고, 따를 줄도 모르면서 무슨 중학생이야! 기본적인 것도 지키지 못하는 인간들이 공부해서 고등학교 가고, 대학교 가고 사회에 나가서 제대로 살 수 있을 거 같아!” 지태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기분이었다. 죄가 없다고는 말 못하겠다. 단유와 채윤에게 계속 말했듯이, 자신은 책임을 져야 하는 반장이고 어느 정도 책임을 질 각오를 다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선생님의 말을 들으면서 뭔지 모르겠지만, 억울하다는 생각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잘못했나?’ 그러나 날카로운 가시를 한껏 담은 선생님의 훈계에 지태는 도저히 머리를 차갑게 하고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비단 지태 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씨발, 그냥 한 대 때리고 말지.’ 광종이 티 나지 않게 발로 책상을 툭 밀어 찼다. 그러나 살짝 밀어찬거라 선생님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광종으로서는 나름의 반항심을 보인 것으로 만족했고, 옆에 앉았던 짝이 흘깃 광종을 보고는 입모양으로 참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짝의 반응을 보니, 어쩐지 우쭐거리는 마음이 들었다. 남들은 다 찍소리 못하고 고개 숙이고 있을 때, 적어도 자신만은 선생님을 향해 불만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헌영은 일어선 반 아이들을 둘러보다 일갈했다.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면서 반성했다고 말하는 것은 진짜 반성도, 뉘우침도 아니야. 그런데 잘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반장부터가 오늘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는데, 너희들은 자기가 오늘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아? 알아야 고칠 거 아냐? 말만 잘못했다고 말하고 고개 숙이고 있으면 고쳐지냐고!” 마침 옆 반에서 종례가 끝난 아이들이 교실을 나서는 소리들로 인해 복도가 소란스러웠다. 개중 일부는 야외극장에라도 온 것처럼 창가에 서서 구경하는 이들도 있었다. “야, 뭐야! 구경났어? 조용히들 못해!” 3반 앞 복도가 휑하니 텅 비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물론 눈에 띄지 않게 멀찍이서 구경하는 이들이 없진 않았지만, 적어도 헌영의 눈에 띄게 서 있는 아이들은 없어졌다. 헌영은 앞자리에 선 아이부터 뭘 잘못했는지 말하도록 했다. “저는…싸움이 났을 때 애들 말렸는데요.” “말린 게 잘못이야!” “…아니요.” “잘못한 걸 이야기해보라고 했는데, 왜 말을 못해!” “…….” “잘못한 게 없어?” 싸움을 말리던 소년은 억지로 자신의 잘못을 떠올려야 했다. “…더 적극적으로 싸움을 말리지 못했습니다.” “또?” “또…싸움이 났을 때 선생님께 알리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노려보던 선생님은 그 옆의 아이를 지목했다. “넌!” 모범 답안인지는 확신이 서질 않았지만, 선생님이 반장을 꾸중하며 언급했고, 짝도 그 대답을 한 뒤 차례가 넘어갔으니, 아마도 그게 선생님이 원하시는 답이리라 생각했다. “저도, 바로 선생님께 알리지 않았습니다.” “또?” “…….” “그것밖에 없어?” 아이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지만, 그 대신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다른 아이들이 싸울 때 말리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키가 작고 왜소했다. 때문에 싸움이 벌어졌을 때, 섣불리 끼어들기가 무서워서 응원을 하던 운동장 스탠드에서 내려가지 않고 끝날 때까지 지켜만 봤었다. 때문에 싸우지도 않았고, 말리지도 않았다. 지금까지는 죄가 아니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게 큰 죄가 되었다. 선생님의 입에서 바람이 새는 소리가 살짝 들린 것 같아, 어깨를 잔뜩 움츠렸는데, 선생님은 다음 아이에게 배턴을 넘겼다. 그 뒤로 비슷한 사례가 이어졌다. 선생님께 알리지 않았습니다, 싸웠습니다, 말렸습니다, 지켜만 봤습니다 같은 죄들이 고해졌다. 3째 줄에 이르러 이전과 다른 대답이 나왔다. “교실에 있었습니다.” “뭐?” “교실에서 음악 듣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의 대답이 이해가 되지 않아,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교실에 있었지? 그러나 그 순간 시합이 점심시간에 있었고, 그 시간에 모든 아이들이 나왔을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과 달리 운동장에 나가지 않은 아이들도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교실에 계속 있었던 사람 손들어 봐.” 그랬더니 콩나물 머리 자라듯, 아이들 머리 위로 주먹 7개 정도가 올라왔다. “이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서 기다려.” 아이들은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내지 않으려 주의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너희들도 잘못이 없는 건 아니다. 싸움 이전에 반 전체가 단합을 위해 시합을 하기로 했는데 개별 행동을 하면서 반의 행사에 불참한 것도 문제는 있어. 하지만 이건 나중에 따로 이야기 하자. 알겠지?” “네.” 그 뒤로 아이들의 고해성사가 재개되었다. 지태에 이르렀을 때, 지태는 이유도 정체도 알 수 없는 감정이 뱃속을 꿀럭거리며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반장은 됐고. 그 옆에 말해 봐.” 채윤이 겁먹은 목소리로 자신의 죄를 고했다. 그렇게 줄줄 이어지던 고해성사가 다시 의외의 상황에 멈춘 것은 단유에 이르러서였다. 번호순으로 왔다면 단유는 가장 마지막쯤이어야 했지만, 분단별로 고해성사가 진행되던 터여서 1분단 끝줄에 섰던 단유가 다른 이의 주목을 받으며 고해성사를 해야 했다. 단유는 처음 선생님이 들어온 순간부터, 지금 고해성사를 하기 이전까지 엄청나게 많은 생각과 고민과 의문에 휩싸여 있었다. 고민은 답이 없었고, 의문은 풀어줄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머리가 복잡하던 때에 선생님에 의한 강제 고해성사식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전, 우선 아이들에게 힘을 써서 고통을 줬습니다.” “무슨 소리야?” 때렸으면 때렸다고 할 이야기지, 저렇게 풀어서 할 이야긴가? “아이들을 말리는 과정에서 과도하게 힘을 써서 통증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게 때린 거야, 임마. 헌영은 차마 욕은 못하겠고, 일단 이야기를 계속 듣기로 했다. “그리고 반장에게 7반과 먼저 화해한 뒤, 선생님께 보고하도록 조언했습니다.” “뭐!” 아이들이 줄곧 자기 죄라고 알렸던 중요 죄목의 성립을 야기한 용의자가 자신이라는 고백에 아이들과 선생님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단유는 오늘따라 이와 비슷한 상황에 많이 놓인다는 생각을 잠시 하면서 말을 이었다. “당시에는 당사자가 오해를 푼 뒤에 선생님께 보고해야 옳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만, 저의 조언으로 반장을 비롯한 반 급우들 전체를 이런 상황에 놓이게 한 것에 대해 반성합니다.” 선생님은 단유에 대한 신상명세를 떠올렸다. ‘고아, 영재, 초등학교 전교 1등.’ 그리고 거기에 하나를 더 붙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거 완전히 문제아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왜 니 맘대로 보고를 하니 마니야? 뭐가 중요한 지 구별이 안 돼? 그것도 못할 나이야?” 하지만 단유는 쉽게 수긍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구별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당시에는 싸운 당사자들이 오해를 풀어서 싸움의 빌미를 없애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걸 왜 니가 마음대로 결정하냐고!” 선생님의 일갈에도 단유는 차분히 대답을 이어나갔다. “제가 마음대로 결정한 것은 분명 잘못이지만, 당시에는 그게 합리적이고 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합리? 순리? 이게 어디서….” 어디서 꼬박꼬박 말대답이냐고 으름장을 놓으려 했는데, 단유의 눈빛을 보자 말을 잇기가 어려워진 헌영이었다. 그 순간 단유의 눈에서 나온 빛은 뭐랄까, 가장 차가운 금속을 벼려 만든 칼날을 햇빛에 비추었을 때 비치는 서늘함? 혹은 뜨거운 열풍이 부는 한 낮의 사막에서 홀로 고요함을 유지하는 오아시스의 차분함? “선생님께서 걱정하셨던 다른 사고가 발생했다면 당연히, 선생님께 먼저 알려드려야 함이 옳습니다. 이번에도 싸움이 벌어졌을 때 그 즉시 선생님께 알려드렸어야 할 것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저희 누구도 잘못이 없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그 당시 대부분 아이들은 싸움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고 때문에 흥분한 몇몇 아이들 간의 싸움을 말리는 데 다들 전력을 다했습니다. 싸움은 순식간에 일어난 급작스럽고도 우연한 사고였기에 경험이 많지 않은 이상, 이성적인 사고를 하기란 어려웠음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급우들의 노력이 싸움을 곧 끝낼 수 있게 해 주었고, 더 큰 싸움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각자의 교실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반장은 선생님께 보고를 해야 한다고 했었고, 제가 말렸습니다. 당시 시간은 점심시간이 끝나기 15분 전이었고, 그 시간이라면 우선 상대 반을 찾아가서 서로의 오해를 푸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반장에게 조언했고, 고맙게도 반장은 저의 조언을 따라 7반에 가서 오해를 풀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곧 수업이 시작되었기에, 5교시가 끝나자마자 선생님께 사태에 대해 보고했습니다.” 단유의 브리핑을 들으며 헌영은 자칫 설득될 뻔했다. 찌푸려진 두 눈을 뜨지 못하고, 그럼에도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언급했다. “왜 오해를 푸는 게 먼저라고 판단했어?” 여전히 격앙된 목소리였지만, 단유는 어쩌면 대화로 자신의 의문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었다. “선생님은 모든 사건에 대해 해결에 앞서 선생님께 보고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사건’이라고 칭할 일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나 그 모든 일들을 선생님께 선보고 후조치한다는 건 어렵기도 하거니와 그 일의 성격에 따라서는 선조치가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가령 어떤 친구가 운동장에서 넘어져서 다쳤을 때, 그 때도 물론 선생님께 급우가 다친 일이 있었음을 보고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는 선생님께 보고하기 전에 그 친구를 양호실에 먼저 데려가는 일이 우선일 것입니다. 즉, 사건의 경위나 그 정도에 따라 선조치가 필요한 일도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켜보던 지태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이번 일의 경우, 선생님께 보고를 먼저 한다면, 과연 각 반 아이들이 화해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점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솔직히 지금도 모든 아이들이 화해를 한 상황은 아닙니다. 대신 반장과 저, 그리고 기훈이가 대표로 찾아가서 저희의 잘못을 먼저 이야기하고 사과를 했습니다. 그리고 상대로부터도 사과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반 전체가 모여서 오늘의 일을 이야기하고 화해할 시간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애초에 싸움이 일어난 계기가 사소한 오해와 승부욕 때문에 벌어졌던 일이니 그 점만 풀어낸다면 두 반의 화합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단유가 말을 마쳤을 때, 교실에는 벽에 걸린 시계 초침만이 틱틱 거리며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헌영은 자신을 바라보는 단유를 바라보며 조금 질린 기분이 들었다. 분명 눈앞의 아이는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온, 자기보다 무려 20살 이상 어린 아이인데도 전혀 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이의 말한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아니 그것도 심히 문제이긴 한데 그보다는 말하는 동안 아이가 보여준 침착함과 눈빛이 문제였다. 이 나이 또래 중에 어떤 아이가 선생님 앞에서 저런 태도로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미 ‘또박또박 말대답’하는 수준을 넘어선 단유였다. “그리고 그 당시 선 조치를 선택한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는데,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답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선생님은 되묻는 대신 단유를 응시했다. “당시, 전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먼저 한다면 과연 두 반의 아이들이 화해를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들은 두 반의 학생들을 어떤 방식으로 화해를 시킬까,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 답은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비록 저희끼리 화해하는 방법을 먼저 선택하고 선생님께 보고를 드렸지만, 그 방법이 옳은지에 대해 확신은 못하고 있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선생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두 반의 학생들을 화해시키시려고 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 건방지다. 매우 건방지다. 너무 건방진 녀석인데,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라는 게 헌영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대답이었다. ======================================= [213] 미스터리(4) 헌영은 재빨리 정신을 수습하고 입을 열었다. 제자들 앞에서 못난 꼴을 보일 순 없다는 교사로서의 자존심이 무너지도록 둘 순 없었다. “김단유랑 반장은 나 따라오고, 나머지는 교실에서 대기해.” 선생님은 몸을 돌려 교실 밖으로 나갔다. 아이들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하지 못해 어리둥절했다. 단유가 솔로토크콘서트를 벌이는 동안 다들 반쯤 정신이 가출한 상태였기에, 선생님의 대응 또한 바로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지태 역시 다른 아이들과 다르지 않아서,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을 못했다. 만약 복도로 먼저 나갔던 선생님에게서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언제까지 그러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반장! 빨리 안 따라와!” 지태가 그제야 머릿속을 하얗게 지우고 ‘따라오라’는 선생님의 명령을 입력한 뒤,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서둘렀다. 급하게 나오느라 뒷자리 책상 모서리에 허벅지가 찍히는 사고가 있었지만, 아픈 줄도 모르고 교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미 선생님 뒤를 졸졸 따르던 단유가 언제나와 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나, 아니면 표정으로라도 괜찮다고 해주면 좋겠다, 는 생각을 잠시 품어보지만 단유는 이내 고개를 돌리고 앞서 가는 선생님의 뒤를 따라 뚜벅뚜벅 복도를 걸어갔다. 이미 다른 반은 텅텅 비어있던 터라 복도를 걷는 발걸음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복도를 걷는 동안 심사가 어지러웠던 것은 비단 지태 뿐만은 아니었다.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하지?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야 하지?’ 헌영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화도 나고, 당황도 하고, 어이도 없는데, 그 모든 감정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당최 알 수가 없어 더욱 갑갑하고 열 받았다. 순간적으로 치솟는 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손을 올렸다면, 일은 더 커졌으리라. 그걸 참은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칭찬할 만 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 자리를 벗어나는 선택을 한 것에 대해서는 후회가 되기도 했다. 단유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는데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표정을 다른 아이들한테 들켜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무작정 교실을 빠져나오는 선택을 하고 말았는데, 복도를 걷다보니 어떻게든 교실에서 해결을 봤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드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복도를 걷는 동안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까는 자기 스스로의 감정에 너무 취했던 탓에 이성적으로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보면 화를 내기 전에 아이들의 이야기를 침착하게 들었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살짝 솟아났다. ‘아니야. 이제 중 1학년이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들을 데리고 무슨 성인군자 노릇을 하겠다는 거야! 박헌영, 정신 차려! 넌 풋내기 교사도 아니고 경험 많은 베테랑이야. 이 나이 때 아이들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거, 잘 알잖아!’ 철이 덜 든 아이들이다. 엄마 아빠 품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그래서 어른의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이다. 언제,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르는 아이들이고, 아직 사회의 규칙을 제대로 따를 줄 모르는 아이들이다. 말보다 행동이 먼저 앞서는 청개구리 같은 아이들이다. 충동적이고 생각이 얕은 아이들이다. ‘그런 아이들을 선도해야 할 교사가 흔들리면 안 돼!’ 하지만 이미 교실을 나온 이상, 다시 들어가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단유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다. 헌영의 발걸음은 교무실 옆 학생상담실로 향했다. 교무실이 있는 본관 건물 2층에 오른 세 사람은 곧 상담실로 향했다. 교무실을 지나쳐야 나오는 상담실로 가는 동안에도 헌영은 어떤 이야기를 해서 단유를 가르치고 따르게 해야 할지, 그 첫마디를 고르느라 머리가 복잡했다. 이윽고 상담실 문을 열려는 때였다. “Hey, you. I thought you’re not coming here today. Why are you late?”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던 선생님은 교무실을 나오던 헤럴드가 단유에게 말을 거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Sorry, Harold. It’s hard to talk to you now.” “What? Why?” “As you see, I will talk to my teacher first, and I will explain it next time because it is not suitable to explain the detailed reason. Sorry again, Harold.” 헌영은 두 눈을 껌벅이며 단유와 헤럴드의 대화 장면을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알던 단유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단유가 아니라 그냥 외국사람 둘이서 대화하는 줄 알았다. 헤럴드가 헌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오래 걸려요? 이야기?” “예? 아, 예. 조금….” 헤럴드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다시 단유에게 말을 했다. 「그럼 다음에 다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죠. 그런데 혹시 무슨 사고라도 친 건가요? 이 시간에 선생님과 상담을 한 다는 건 매우 의심스러운 상황이에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지금은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 드릴 수 없어요. 대신 나중에 이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선생님에게 오해를 받기는 싫으니까요.」 「알겠어요. 그럼 단유 학생? 나중에 다시 만나죠. 선생님, 시간 뺏어서 죄송합니다.」 “Ok, ok. that’s all right.” 말꼬리에 자신을 바라보며 sorry라고 말하는 것을 어떻게 알아들은 헌영은 더듬거리긴 했지만 대답을 해주었다. 헤럴드가 손을 살짝 들고 다시 교무실로 들어가자 복도에는 다시 세 사람만 남았다. 상담실 문고리를 잡은 채 단유를 바라보는 선생님, 그 선생님을 차분하게 바라보는 단유, 그리고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지태. “선생님?” 단유의 말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 헌영은 상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단유와 지태가 따라 들어갔다. 상담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앉은 선생님과 제자 둘은 잠시 아무 말 없이 대치상태를 이루었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하나 고민하던 헌영은 ‘단유, 그는 누구인가’라는 물음표가 머릿속을 가득채운 탓에 입을 쉽게 열지 못했고, 선생님이 아무 말없이 있으니 아이들 역시 아무 말도 못하고 바른 자세로 기다릴 뿐이었다.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헌영이 입을 열었다. “반장.” “네? 네.” “교실로 돌아가서 아이들 모두 집에 돌아가라고 해라.” “네?” “그리고 내일 지각하지 말라고 하고. 오늘은 딴 데 들리지 말고 모두들 곧장 집으로 얌전히 가라고 전해. 그리고 너도 바로 집에 가도록 하고.” 지태는 고개를 얼른 숙여 보이고는 상담실을 빠져 나갔다. 교실로 돌아오니 수군거리면서 현 사태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 졸라 열 받은 거 같지?” “응. 아까 얼굴 이렇게 벌겋게 변해가지고. 난 아까 선생님이 단유 때리는 줄 알았어.” 어떤 아이들은 단유가 던진 화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까 단유가 뭐라고 한 거야?” “자기가 잘 했다, 뭐 그런 거 아냐?” 지태가 교실 앞으로 가자, 아이들이 입을 닫고 주목하기 시작했다. 지태가 선생님의 전언을 알리자, 유리잔 같던 긴장이 깨지며 곧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로 교실이 메워졌다. 아마 저 아이들 대부분은 오늘 겪은 일들에 대해 주변으로 열심히 퍼다 나를 것이다. 지태 본인이 그럴 마음을 품고 있듯이. 아이들이 우르르 교실을 빠져 나가는 가운데, 채윤이 넌지시 물음을 던졌다. “단유는?” “선생님이랑 1:1.” “많이 혼날까?” “모르지, 뭐.” 두 사람도 가방을 챙겨들고 교실을 나와 운동장으로 나섰다. 마침 운동장에서 공을 차던 명수가 두 사람을 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다 끝났어? 아까 갔을 때 보니까 되게 분위기 안 좋던데?” “일단은. 근데 단유는 아직.” “왜?” “선생님이랑 1:1 면담.” “왜?” “어… 단유가 선생님한테 한 소리 했거든.” “응?” 보통은 선생님이 학생에게 ‘한 소리’ 한다고 표현하지,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 법이다. “어휴. 요즘 단유가 얌전히 지내나 했더니.” 그러나 역시 단유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명수는 단유가 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어떤 상황을 연출했을 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지태와 채윤은 명수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럴 수 있지’라는 태도를 보이는 것에 신기해하며 물었다. “그런데 단유, 영어 되게 잘하더라?” 명수가 눈을 끔뻑끔뻑 거리며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명수는 한 번도 단유가 영어를 유창하게 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잘 모르겠네, 그건. 근데… 단유가 못하는 게 있을까?” 명수는 머리를 긁적이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아래에 놓인 공을 툭 차서 골대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등을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축구 한 게임 할래?” 오늘 그 일이 벌어져서 난리가 났음에도 천연덕스럽게 축구하자는 이야기를 꺼내는 명수의 얼굴을 보니, 두 사람의 얼굴에 실소가 피어났다. “할까?” “난 잘 못하는데?” 채윤이 살짝 빼는 모습을 보이자, 어느새 공을 들고 온 명수가 채윤의 앞으로 공을 굴려 주었다. “잘 할 필요 없어. 그냥 시간 때우기 용으로 놀자는 건데, 부담 갖지 마. 그냥 공만 굴려도 돼.” 채윤이 발바닥으로 공을 살짝 눌러 세웠다. “이왕이면 저기로 공을 차 봐.” 명수가 손가락을 들어 골대를 가리켰다. 채윤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자, 명수는 손뼉을 쳐서 주의를 줬다. “힘껏 차. 괜찮아. 못 찬다고 욕할 사람 없으니까.” 초등학교 때 몇 번 공을 차 본적은 있지만, 거의 공과 친하지 않았던 채윤은 공을 앞에 두고 망설였다. 그러나 명수가 계속 응원하며 골을 권하니, 채윤도 한 번 공을 세게 차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가방을 내려놓고 두 발쯤 물러선 채윤은, 총총걸음으로 달려와 힘껏 공을 찼다. 가만히 있던 공을 차는 건데도 너무 힘이 들어갔던지, 자세가 안 좋았던지 제대로 맞지 못하고 공이 옆으로 튀었다. “잘 차네. 대신 이번에 찰 때는 공을 바로 보고, 여길 차려고 해봐. 집중해서.” 명수가 공을 주워 와서 채윤의 앞에 내려놓았다. 몇 번 차는 시늉을 보이면서 알려준 뒤 채윤에게 기회를 주었다. 심호흡을 한 채윤이 공만 보며 달려와 힘껏 다리를 내뻗었다. 발등으로 때리라는 명수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채윤은 발끝으로 공을 찼다. 조금 아랫부분을 찼는지 공은 높이 치솟았다. 그러다 곧 힘을 잃고 아래로 떨어진 공은 몇 번 바닥에 튕기다가 골 안쪽으로 들어갔다. “골!” “우와!” 채윤은 두 손을 위로 치켜들며 명수와 같이 만세를 불렀다. 그 옆에서 쭈그리고 앉아 턱을 괴고 바라보던 지태는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채윤은 처음 넣은 골에 괜히 기분이 좋아서 연신 만세를 불렀다. 명수가 다시 골대 안에서 공을 가지고 나와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내가 단유만큼 말을 잘 못해서 그렇긴 한데 말이야.” 채윤이 명수를 바라보았다. “선수들처럼 멋있게 차든, 아니면 방금 니가 한 것처럼 차든, 결국 저 선만 넘으면 골이야. 그런데 차는 방법만 제대로 알면 저 선을 넘기는 게 어렵지 않아. 누구나 골을 넣을 수 있어. 처음 차는 사람이든, 오래 차던 사람이든 말이야.” 명수는 쪼그리고 앉은 지태를 보다가 씩 웃었다. “난 축구를 좋아해서 그런지 다 그런 식으로만 생각이 돼. 아무리 앞에 많은 사람이 지키고 있다고 해도, 공만 제대로 차면 골을 넣을 수 있고, 아무리 많은 사람이 방해해도, 공을 제대로 찰 줄 아는 사람에게 패스하면 골을 넣을 수 있어. 그러니까 내 말은, 공을 찰 줄 알면 된다는 이야기야.” “무슨 소리야?” “단유는 공을 잘 차는 사람이라고.” “응?” 명수는 머리를 긁다가 헤픈 웃음을 지어보였다. “단유 걱정 하지 말라고. 단유는 골을 넣을 줄 아는 사람처럼,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아는 아이니까.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골을 넣는 것과 같다면, 단유는 초 슈퍼 울트라 골게터라고.” 지태가 고개를 끄덕이다 물었다. “그럼 패스한다는 건 무슨 소리야?” “응? 어… 단유가 있으니까, 내가 골을 넣을 필요가 없다고.” 채윤은 명수의 말을 알 듯 말 듯 했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기로 했다. 지금은 그냥 한 번 더 공을 차고 싶었기 때문이다. ======================================= [214] 미스터리(5) “여기다.” 헌영은 가게 안으로 들어오다, 가장자리에서 아는 척을 하는 동료 교사 남희재가 손을 들어보였다. 헌영은 희재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좀 늦었네. 오래 기다렸어?” 별 이상한 소리 다한다는 눈으로 헌영을 바라보던 희재가 피식 웃으면서 앉으라고 권했다. 가방을 옆에 놓인 파란색 플라스틱 간이의자 위에 올려놓고 벽에 걸린 앞치마를 빼어들었다. 고추장 양념 자국이 묻어있는 남색 앞치마를 목에 걸고 펼쳐서 앞을 가렸다. “얼굴 보니까 오늘 일 좀 많았나 보네?” “얼굴? 왜? 이상해?” 젓가락을 집어 들려다가 괜히 얼굴이 이상하다는 소리에 양 뺨을 만져보는 헌영이었다. 희재는 피식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고는 옆에 놓인 소주병을 땄다. 병을 들어 올리니 자동으로 건너편에서 잔이 올라왔다. 잔을 가득 채워주고 가득 채워 받은 두 사람은 갈증이 났던 사람처럼 한 번에 잔을 털어 넣었다. “무슨 일인데? 회의 시간에도 안 보이기에, 무슨 일이 있어서 먼저 집에 간 줄 알았다.” “주임선생님한테는 말씀을 드렸는데, 사실 반 학생이랑 상담 했다.” “상담? 이 시기에?” 헌영은 다시 잔을 들어 올렸고, 이야기 값으로 소주 한 잔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라는 첨언과 함께 희재는 소주를 따랐다. 안주로 시킨 양념 주꾸미 볶음이 매운 향을 내며 불판 위를 뒹굴었다. 젓가락으로 몇 번 뒤적이다가 적당한 놈으로 골라 입 안에 넣으니 매운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매우면서도 달달한 맛이 혀를 녹이고 긴장을 녹였다. “이거 맛있네?” “이 집 유명해. 매운 거 먹고 싶다고 하길래, 마침 이 집이 생각나더라고. 무식하게 맵지도 않고, 그렇다고 싱겁지도 않고. 게다가 소주 안주로 딱이다 이거야. 아, 조금 있다가 계란탕도 나오는데 그거 한 번 먹어봐라. 죽음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주꾸미 하나를 더 집어든 헌영은 절로 소주잔에 손이 갔다. 다시 잔을 부딪치고 한 잔을 더 들이킨 뒤에야 헌영은 오늘 반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큰일 날 뻔 했었네? 너 오지게 당할 뻔 했어. 알지?” “알지.” 학내 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이전처럼 학교 안에서 쑥덕쑥덕해서 넘어갈 수 없었다. 그 즉시 학교 측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별하고 적당한 제재를 가해서 재발을 방지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교사도 그냥 넘어가질 않는다. 관리 책임을 물어 시말서는 물론이고 공식 혹은 비공식적 제재도 감수해야 했다. 감봉 2개월 정도면 경징계, 그 이상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패싸움을 했고, 자기들끼리 화해를 했다며 5교시 마치고 보고하더란 이야기까지 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으니. 헌영은 연신 소주를 들이켜 대면서 이후의 이야기들을 풀기 시작, 안주가 반쯤 사라질 때쯤 이야기를 마칠 수 있었다. 어느새 희재 역시 헌영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소주잔을 붙잡았다.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냥 그렇게 끝났지.” 헌영은 술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답을 이어나갔다. “너라면 뭐라고 했겠어?” “글쎄. 잘 모르겠네? 헌영은 희재의 뻔뻔한 대답을 들으면 고개를 떨궜다. **** “김단유. 의도가 뭐야?” “네?” “아까 교실에서 그렇게 말한 의도가 뭐냐고!” 돌아갈 집을 찾지 못해 당황한 들개가 낯선 이를 만나면 저리 짖지 않을까, 단유는 머릿속을 정리하고 차분하게 대응했다.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 모르겠지만, 교실에서 했던 제 발언의 의도는 제 행동과 제 생각을 선생님께 알려드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싸움이 일어났을 당시 저는 저 뿐만 아니라 저희 반 모두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공자가 말씀하시길, ‘군자는 형벌을 생각한다’(君子懷刑, 小人懷恩 중)고 했는데, 이는 자신의 잘못을 분명하게 알고 인정하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뒤에 공자는 ‘어떤 일을 놓고 해결책을 찾아야 할 때, 정의로운 방법을 먼저 찾으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정의로움’에 주목했고, 싸움을 일으킨 각자가 화해를 하는 것이 정의로움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이 아이 뭐지? “그 생각을 상세히 말씀드리려 했던 것이 제 의도이며 그 외에 다른 사특한 이득을 얻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21세기 현대 한국, 법과 도덕이 땅에 떨어졌다는 비판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이 시기, 온갖 청소년 범죄로 인해 청소년 선도의 중요성이 부각될 정도로 걱정스러운 시선이 한 가득인 이 시대에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중학교 1학년이라니! 게다가―분명 기록부에 기록된 바로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5학년 때까지 보육원에서 생활한 것으로 나오는―고아인데 마치 현지인과 비슷한 영어회화가 가능한 아이라고? 헌영은 잠시 ‘보육원이 우리나라 보육원이 아니라 미국이나 외국 어딘가의 보육원을 착각했던가’, 돌아볼 정도였다. ‘아니야, 정신 차려! 박헌영!’ 시쳇말로 멘붕이 계속되는 중이다. 정신을 다잡고 단유를 다그쳤다. “그걸 물은 게 아니잖아?” “그럼요?” 아, 정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분명 질문은 그걸 물은 거긴 한데, 원하던 대답이 나오지 않아 답답하다. 시쳇말로 고구마, 라던가? “그럼 넌 아무 잘못도 안했다는 거야?” “…서두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단유가 입을 뗄 때, 괜히 물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단유의 대답은 계속 이어졌다. “…잘못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만약 선생님께서 물으시는 것이 일을 처리하는 순서에 관한 것이라면, 그 점에 있어서는 저 역시 확신을 하지 못하겠다는 것을 교실에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물론 선생님께서 꼭 답을 해 주실 필요는 없겠지만, 말씀해주신다면 경청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저도 고쳐야 할 점이 있다면 고치고 다시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단유는 말을 마친 뒤 선생님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답이 뭔가요?’라고 묻는 눈이었다. 헌영은 술이 땡기기 시작했다. 아니, 그냥 눈앞에 있는 놈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전혀 중학생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술 한 잔 나누면서, “새꺄, 까라면 까야지, 뭔 말이 많아! 형이 말야, 말씀을 하시면 예, 하고 고개 숙이고 어깨춤이나 털 것이지.” 라고 농담이나 떨어야 적당할 것 같은 놈인데. 이 시간에 차라리 희재를 붙잡고 술이나 마시는 게 정신건강에 더 좋을 것 같다. **** 단유와의 대화는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탁자 위에는 어느새 소주 3병이 텅 빈 채, 오묘한 녹색 빛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모, 여기 계란탕 하나만 더 주세요.” 희재가 숟가락을 들고 소리쳤다. 주문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 희재는 자작하려는 헌영의 손에서 소주병을 빼앗았다. 소주병을 기울여주자, 짧은 숨을 토해낸 헌영이 소주를 받아 자기 앞에 놓았다. “왜 혼자 달리고 그러냐?” “진짜, 오늘 술 많이 땡기더라고. 넌 진짜, 그 때 그 자리에 니가 없어서 모르는 거야. 진짜 거기 있었으면, 너! 진짜 술 생각 많이 났을 거다.” 아직까지는 술이 많이 취하지 않은 건지, 말을 못 알아들을 정도로 단어를 뭉개서 발음하진 않는 헌영이었다. 희재는 한 손으로 얼굴을 한 번 훔치고는 잔을 들었다. “니 이야기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겠어. 그리고 잘 했어. 그렇게 한 것만으로도 너, 충분히 니 역할 한 거야. 걔도 네가 걱정하는 게 뭔지 이해했다며?” 헌영은 자동차에 달린 인형처럼 고개를 툭툭 떨구면서 희재의 말을 받았다. “머리가 좋은 놈이니까. 바로 알더라고. 그런데 그 놈도 고집이 있는지 끝까지 묻더라고.” “어떤 게 먼저냐고?” “그것도 그렇고, …선생님은 어떻게 화해시킬 거예요…라고 묻는데, 할 말이 궁한거지. 궁하니까 아무 말이나 하게 되고. 그러니까 괜히 내가 밉고, 불쌍하고, 자존심도 상하고, 그런 거지.” 희재는 식어서 양념이 굳은 주꾸미 하나를 집어 헌영의 입에 넣어주었다. 헌영은 반쯤 감긴 눈으로도 희재가 주는 안주를 잘 받아먹었다. **** “야, 선생님이 응? 너희들을 화해를 시켜도 응? 먼저 절차가 있는 법이잖아! 재판도 절차가 있고, 지하철을 타도 순서를 지켜야 하는데, 빨리 간다고 새치기 하면 되냐고! 그럼 규칙을 지켜서 순서를 지키는 사람들은 뭐가 돼? 넌 그 사람들이 바보라서 순서를 지키는 것 같아?” 지금까지 차분하던 단유의 눈에 동요가 생겼다. 하지만 그 동요를 바라보는 헌영의 마음은 아프기만 했다. 단유에 대해 아픈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지금!’ 눈앞에 있는 놈보다 배워도 한참을 더 배우고, 한참을 더 살아온 자신이었다. 교사로 재직하면서 눈앞에 있는 놈 또래의 아이들을 벌써―담임이든 교과목 강사로든 상대한 아이를 모두 합해서―천여 명 가까이 돌봐 온 경력이 있는 몸이다. 그런 주제에 지금 무슨 추태를 보이는 걸까? “물론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순서를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말씀이 옳죠. 하지만 모든 일에 순서를 지키고만 있다면 융통성이 부족하다는 평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고가 났는데, 순서를 지킨다고 한시가 급한 환자를 뒤로 물릴 수는 없는 법이지 않겠습니까?” 말빨로 질 거란 생각은 못했는데. 이럴 때 국어과 담당 선생님이나 사회과 담당 선생님들이 유리할 거란 생각이 잠깐 들었다. 희재도 영어과이긴 하지만 다른 문과 선생님들에 비하면 부족하겠지? ‘내가 문과를 전공했다면 달라졌을까?’ 헌영은 이를 악물고, 논리로 대응했다. 이과지만 논리라면 수학과를 이길쏘냐. “니 말대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 어떤 경우에는 순서보다 시급한 일을 챙겨야 할 때도 있을 거다. 하지만, 이번 일이 과연 그런 경우였을까? 당장 화해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까? 선생님께 보고하는 것보다 먼저 화해해야 할 만큼 급한 일이었을까?”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아까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저는 확신이 없고, 정답도 모릅니다. 다만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행동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만약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알려주신다면 반성하고 고치겠다는 이야기를 드린 것입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저희들을 화해시켜 주시려고 하신건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십여 년 전 대기업의 압박 면접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당시 교사보다는 평범한 직장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곳저곳에 이력서를 집어넣고 있던 때였다. 다행히(?) 이력서를 넣은 곳이 모두 떨어졌기에 이렇게 교사직을 수행하고는 있지만. 그 때 어떤 기업에서 면접 전형까지 올라간 적이 있었는데,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서 그런지 곡해된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차라리 그 자리가 이 자리보다 훨씬 마음이 편했으리라. 도저히 대답을 피하기가 어렵다. “내가 유치원 선생님도 아니고 말이야, 내가 너희들을 모아놓고 서로 화해하자고 손이라도 붙잡게 할 줄 알았어? 아니면 서로 안고 포크 댄스라도 추게 해줘야 화해를 하냐? 화해는 너희들이 하는 거지, 선생님이 해 주는 게 아냐. 선생님 말의 요지는, 너희들이 절차를 지키지 않고 멋대로 행동했다는 것에 화가 난 거란 말이다!” 그렇다. 둘러말했지만, 애초에 아이들을 화해시키는 것은 선생님의 역할은 아니었다. 처벌을 하거나 제재를 해서 재발을 방지하는 것이 선생님의 역할이다. 헌영은 저도 모르게 씩씩대며 단유를 바라보는데, 단유의 얼굴이 어쩐지 뚱한 표정이었다. “뭐야, 그 표정은? 선생님 말을 듣기 싫다는 거야?” “아니요, 그게 아니고요.” 단유는 볼을 긁으면서 어렵게 입을 뗐다 “포크댄스가 뭔지 몰라서요.” “응?” “그리고 사실은, 제가 유치원을 가본 적이 없어서요. 포크댄스가 정확히 어떤 건지 모르거든요. 제가 아는 댄스는 아닌 것 같고, 그게 어떤 화해의 방법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서 저도 모르게 이상한 표정을 지었나 보네요. 거슬리셨다면 죄송합니다.” 헌영은 속으로만 해야 할 한탄이 입 밖으로 삐져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젠장.” 그 외의 것은 모두 이해했다는 듯, 앞으로 절차를 지키겠다는 단유의 반성이 있고나서 단유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반성’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반성’ 다운 반성은 아니었다. “그러네요. 굳이 급할 일도 아니었는데 서둘렀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학교의 규칙과 절차를 따르는 데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원하던 대답은 들었는데, 개운하지 않았다. “희재냐? 응. 나. 술 먹자.” ======================================= [215] 어그로(1) 두 반의 화해. 그리고 선생님과의 긴밀한 면담. 이 걸로 사건은 종결되었다, 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교내 폭력 사건의 발생이 담임선생님 선에서 끝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음 날, 교감선생님에게 경위서를 제출하고 그 후 교장선생님에게까지 보고가 들어갔다. 교감 선생님은 얼굴을 붉히며 ‘패싸움’이란 단어를 강조했다. “선생님들이 얼마나 아이들을 허술하게 관리를 했으면, 점심시간에 아이들이 싸움을 벌이는데 그 누구도 몰랐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두 반이 서로 시합을 한다는 건, 그 만큼 많은 아이들이 한 자리에 몰렸다는 건데 어떻게 누구 하나 가서 감독할 생각도 하지 않은 겁니까?” 예상했던 바였고, 각오했던 일이었지만 역시 교감 선생님은 책임 운운하면서 담임선생님들을 힐난하였다. “휴게실에서 지켜봤다고요?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박 선생님? 그리고 끝까지 지켜보지도 않으셨다는 거잖아요? 그러면서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급한 용무라니요? 선생님은 담임으로서 자각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점심시간에 급한 용무라고 마음대로 학교를 나가도 된다니요? 보고도 없이 학교 밖으로 나가는 행위가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3반과 7반의 각 담임선생님들은 그저 죄송합니다, 만 연발할 따름이었다. “아이들이 화해한다고 해서 이게 끝날 일이에요? 이러니까 학교 폭력이 계속 문제가 되는 겁니다! 정신들 좀 차리세요! 가해자가 피해자와 어떤 식으로 화해를 하는지 지켜보지도 않고, 그저 말만 듣고 그랬구나, 하고 넘어가면 도대체 선생님들은 왜 여기 계신 겁니까? 선생님들 각자가 무슨 책임감을 갖고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그렇게 아침 조례 분위기는 매우 심각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반전은 있었으니. 3반과 7반의 반장 및 주동자(?)들이 교장실로 불려갔을 때였다. “화해했다고요?” “네.” “허허, 이거 참.” 은퇴를 앞둔 교장선생님은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고개 숙인 아이들을 쭉 훑었다. “고개들 드세요.” 아이들이 두려움을 가득 담은 눈으로 교장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넓은 책상 뒤편에 자리한 교장 선생님의 넙데데한 얼굴을 보니, 무섭기도 하지만 살짝 긴장이 풀리는 느낌도 있었다. “스스로들 화해를 한 거 맞아요?” 교장 선생님의 물음에 7반 반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의 애들이 저희 반 와가지고요, 고개 숙여서 사과했어요.” “오, 그래요? 거기 키 큰 학생.” “네.” “학생이 반장인가요?” “아니요, 반장은 옆의 이 친구고, 저는 최초 시합을 주선했던 입장이었던 데다가 싸움을 말리기 위해 끼어들기도 했었기에 같이 간 것입니다.” 교장 선생님은 눈을 살짝 치뜨면서 단유를 바라보았다. “혹시 학생 이름이 김단유군?” “네.” 다시 교장 선생님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담임선생님들에게 구체적인 경과보고를 들은 터였기에, 특히 김단유라는 학생의 신상명세를 외워놓은 상황이었다. ‘영재라고 했던가?’ 갑자기 왜 학생 자랑을 하나, 궁금하기도 했었는데 보고를 듣다보니 김단유라는 아이가 꽤 독특하다는 인상을 받은 교장 선생님이었다. “그래서 학생 생각에 이 일이 어떻게 마무리되면 좋을 거 같아요?” 단유는 거침없이 생각을 밝혔다. 다른 아이들은, 비록 교장 선생님의 인상이 푸근한 할아버지 같다고 여길지라도, 학교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선 분인지라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비해 단유는 그런 게 없는 모양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7반 반장과 이야기를 나눴고, 점심 때 매점에서 다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습니다. 매점에서 보기로 한 이유는 다른 곳보다 학생들이 모이기 좋은 공간이고, 먹을 게 있으면 아무래도 마음이 쉽게 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였습니다.” 무슨 화해추진위원회 회장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귀엽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해서 교장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자발적으로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고 나아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시간을 가진다면, 말릴 이유가 없지요. 또한 비록 폭력이라는 잘못된 수단을 이용했다지만, 이를 반성하고 있음이 보이니 학교가 굳이 여러분들에게 벌을 내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벌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아이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런데 듣기로는 학생이 보고 절차를 지키지 않고, 선생님에게 대들기까지 했었다면서요?” 단유는 심각할 정도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니요, 대들지는 않았…는데요.” 절로 목소리가 위축되기 시작한 단유는 더듬거리면서 변명을 했다. “혹, 혹시 제 행동이 담임선생님께 불쾌함을 드리는 행동이었다면, 사과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결코 선생님께 대들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어린 아이가 ‘다, 나, 까’를 쓰면서 의젓하게 말하는 모습이 귀엽게 보이기도 했다. 저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그래도 아직은 어린 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농담이에요. 학생이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밝혔기에 그쪽 담임선생님도 이해를 해주셨고, 저한테도 선처를 부탁하시더군요. 그러니 너무 당황하지 말아요, 학생.” “네, 선생님.” 교장선생님은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책상을 돌아 나왔다. 앉아 있을 땐 몰랐는데, 키가 그리 크지 않으셨다. 단유보다 작았고, 지태랑은 키가 비슷한 정도였으니, 대략 155 근방이리라. “아까도 말했다시피, 여러분 반의 아이들에게 처벌을 내리진 않겠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도 없겠죠?” 벌을 내리지 않겠지만,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면? 아이들이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키는데, 교장 선생님이 앞에 놓인 소파에 엉덩이를 묻었다. “두 반 모두, 교내 봉사활동 3시간을 이수하도록 하세요.” 아이들은 봉사활동이란 말에 살짝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그 중 한 시간은 오늘 점심시간, 매점에서 청소를 하면 좋겠군요?” 그제야 아이들의 얼굴이 풀렸다. “아시겠어요?” “네!” 학교폭력대책위원회는 열리지 않게 되었고, 그날 아이들은 점심시간에 선생님의 참여 아래 매점에서 화합의 시간을 가졌다. 다소 어색하고 낯설기도 했지만, 곧잘 웃음을 만들어내는 쾌활한 명수와 반장들, 또 반에서 나름 개그를 담당하는 아이들이 주도해서 이내 편안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다음에 제대로 시합 하자. 콜?” “콜!” 아이들은 제2차 대전, 아니 시합을 약속하고 청소를 시작했다. 아이들은 스스로에게 뿌듯한 느낌을 받았고, 선생님들은 일이 조용히 마무리돼서 다행이라는 얼굴을 하고 교무실로 귀환했다. **** “석고야! 이것 봐봐.” 거실에서 단유를 부르는 명수의 목소리에, 단유는 읽던 책 사이에 펜을 하나 끼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을 열고 나서니, 어느새 호빵이 조르르 달려와 다리 밑에서 헥헥 거리며 버둥거리고 있었다. “뭔데?” 호빵을 안고는 머릴 쓰다듬어 주며 명수에게 다가갔다. 명수는 TV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손가락질을 해댔다. “나온다! 나온다, 너!” 그렇지 않아도 익숙한 노랫소리가 TV에서 나오고 있었다. “어머, 단유네? 방송으로 보니까, 단유 더 잘생겼네?” 어느새 명수 뒤로 다가온 선생님과 이모가 TV를 보며 품평을 시작했다. 단유는 머쓱해져서 고개를 돌리고 싶었는데, 명수가 어찌 알았는지 단유 팔을 끌어당겨 자기 옆에 앉혔다. “누나들 컴백한 거지?” 방송제작진의 이름 등이 스크롤로 지나가는 20여초의 짧은 시간동안 갤럭시즈의 컴백곡 ‘미챠(meet yah)’의 뮤직비디오가 나오고 있었던 것을 명수가 보고 흥분한 것이었다. “금방 컴백할 줄 알았더니, 왜 이렇게 늦게 나왔대?” 3월에 컴백할 줄 알았던 갤럭시즈는 결국 5월이 되어서야 컴백이 된 모양이었다. 20여초가 금방 지나가고 TV에는 뚱뚱한 연예인이 라면사발을 맛있게 먹는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전화해봐.” “무슨 전화?” “누나한테 뮤직비디오 봤다고 전화해야지?” “왜?” “컴백했으니까 축하한다고 해줘야지!” 가요프로 1등한 것도 아닌데, 무슨 축하를 하나 싶었지만 핸드폰을 쥐어주는 명수 때문에 단유는 어쩔 수 없이 수련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바쁜가봐.” 그 때, 신호가 끊어지고 ‘여보세요’ 라는 말이 들렸다. “여보세요?” 「누구? 단유?」 굵은 남성의 목소리인데, 단유의 이름을 대뜸 말했다. “네. 태호형이세요?” 「그래 나다. 녀석, 감히 수련이한테 전화를 해!」 장난스러운 매니저의 말에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물었다. “그게, 명수가 지금 TV에서 누나 뮤직비디오 나왔다고 축하하라고 해서요.” 「그래? 명수, 그 놈 기특하네. 명수 옆에 있어?」 단유가 명수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명수는 활짝 웃으면서 매니저와 즐겁게 통화를 했다. 한참을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더니, 다시 단유에게로 폰이 넘어왔다. 「너도 좀 연락 좀 해라. 우리가 남이냐?」 “남이죠. 그리고 형한테 전화해봐야 계속 계약하자는 소리밖에 안하시잖아요.” 「고작 그게 싫어서 전화를 안했다고? 에이, 이런 쩨쩨한 녀석.」 쩨쩨하거나 말거나, 괜히 계약가지고 실랑이를 벌이고 싶진 않았다. “근데 왜 수련누나 핸드폰을 형이 가지고 있어요?” 「원래 활동기간에는 특별한 사유 없이는 내가 가지고 있는 거야. 활동에 집중해야 하니까.」 그런 것도 매니저의 일이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단유는 통화를 마무리했다. “활동 잘하시고요, 1등하세요.” 「그래 고맙다. 조만간 1등하면 밥 쏠게.」 통화가 끝나고 명수를 바라보니, 어느새 명수는 자기 핸드폰으로 갤럭시즈를 검색하고 있었다. “이것 봐봐. 누나들 노래가 차트에 있어.” 비록 순위는 50위권 밖이었지만, 그래도 아는 사람이 이런 사이트에 이름이 올라오는 게 신기했던 명수는 그 날 하루 종일 갤럭시즈를 검색하고 스트리밍을 했다. “이렇게 해야 순위가 올라간대.”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문을 단단히 닫는 것을 잊진 않았다. 그냥 혼자 들어도 될 것 같은데, 굳이 소리를 키워서 집안 전체에 다 들리게끔 하는 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명수를 말리진 않았다. 대신 귀마개를 찾아서 귀에 꽂았다. **** “야, 너 맞지?” 책을 보던 단유가 돌아보자, 민일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갤럭시즈.” 아,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볼이 빨개진 민일의 얼굴을 보고 의아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어떻게 알았어?” “뮤직비디오에 나오니까 알지.” 단유는 볼을 긁적였다.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갤럭시즈가 컴백하고 2주가 지난 지금, 갤럭시즈의 노래는 차트 아웃을 했다. 처음 방송 가요 프로에 몇 번 나온 것 같기도 한데,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전혀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뮤직비디오를 보고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 “너 갤럭시즈 좋아해?” 민일의 얼굴이 좀 더 붉어진 것 같기도. “좋아하면 안 돼?” “안 될 건 없지.” “왜 대답 안 해? 너 맞아, 아냐?” “맞아.” “우와! 너 갤럭시즈 알아? 친해? 너도 기획사 들어간 거야? 연예인이야? 연습생이야? 어떻게….” “쉿.” 단유는 흥분한 민일을 진정시켰다. 병수가 얼떨떨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 다른 아이들은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지금은 점심시간이었고, 이 시간에 교실 안에 남아 있는 애들은 대부분 귀에다 이어폰을 꽂고 한참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때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거 아니고. 그냥 우연히 알게 돼서, 우연히! 한 번 출연한 거야. 그걸로 끝.” 민일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는데, 민일은 단유의 부담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소개시켜 줄 수 있어?” “누구? 갤럭시즈?” 민일이 입술을 살짝 적시고 말을 이었다. “그것도 좋지만, 그쪽 회사 매니저나 실장님도 소개시켜 줄 수 있어?” 단유는 눈을 돌리고 싶었지만, 도저히 민일의 뜨거운 시선으로부터 도망갈 수가 없어서 난처하기만 했다. ======================================= [216] 어그로(2) 그 날, 민일은 자신이 얼마나 춤과 노래에 열정이 많은지 피력했다. 자신의 꿈이 기획사 연습생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여태 인연이 닿지 않아, 그리고 집안의 반대가 조금(?) 있어서 들어가지 못하고 있지만 들어만 가게 되면 최선을 다할 것이란 다짐도 했다. “그런 말, 나한테 해봐야 아무 소용없어. 난 아무런 관계도 없는걸?” 그러나 민일은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매달린 과일을 따기 위해 손을 뻗는 원숭이만큼 필사적이었고, 단유는 곤란해 하다 결국 민일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수업이 모두 끝난 후 다들 집으로 돌아갈 때, 단유와 민일은 교실에 남았다. “여보세요? 형? 아, 저 단유요. 예. 아뇨, 별 일은 아니고요, 부탁 드릴 게 있어요. 아뇨, 계약은 안 할 거예요.” 단유는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는 대신,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내 들었다. “친구 바꿔드릴게요. 걔가 형한테 할 말 있대요.” 민일은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건네받은 뒤, 우물쭈물 대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단유 친군데요, 네… 아, 아뇨, 갤럭시즈 팬이 아니고요, 아니 팬은 맞는데요.…아뇨, 통화하고 싶어서가 아니고요, 아니…저기 통화하면 좋긴 한데요. 그게 아니고요.” 민일은 어렵게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고, 본래 목적을 이야기했다. 그 후 말없이 한참을 듣기만 하다가 핸드폰을 단유에게 건넸다. “네? 네. 예.” 단유는 전화를 끊은 뒤, 민일을 바라보았다. 민일은 멍한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다가 고맙다며 짧은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지켜보던 병수가 눈치를 보다가 물었다. “뭔데? 뭐라고 한 건데?” “…연습생 안 뽑는데.” 병수가 안타까운 눈으로 민일을 바라보지만, 이미 민일은 조용히 교실 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하긴 갤럭시즈를 관리하는 현 기획사가 유명한 3대 기획사도 아니고 갤럭시즈 하나만 관리하기에도 벅차서 다른 연습생을 받아 관리할 여력이 없긴 했다.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관리하는 연습생들도 언제 데뷔를 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인지라 새로운 연습생을 뽑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민일은 단유 덕분에 기획사에 들어갈 기회가 생겼다는 희망에, 과일이 거의 손끝에 닿을락 말락 하는 차였던 터라, 오히려 더 큰 실망과 안타까움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민일이 갤럭시즈의 뮤직비디오를 본 것은 굉장히 우연에 가까웠고, 사실 대부분 사람들은 갤럭시즈를 알지 못했다. 한 마디로 인지도가 거의 바닥이었던 셈이다. “노래가 좋으면 뜰 수 있었을 텐데.” 셋째인 명지의 투덜거림을 들은 실장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야, 그런 소리 할 시간에 안무를 한 번 더 맞추고 보컬 연습을 더 해야 할 거 아냐? 노래? 니들이 지금 노래가 안 좋다고 불평할 때야?” 연습실에 둘러앉아서 시간을 죽이던 멤버들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리고 말을 꺼낸 명지는 차마 시간을 돌리지 못해 그저 죄인이 된 얼굴을 하고 바싹 엎드렸다. “옆 동네 하이걸스들이 왜 떴는데? 노래가 좋아서 떴어? 아냐, 걔네 노래 안 좋아. 알잖아? 근데 왜 떴어? 걔네 춤 때문에 뜬 거 아냐? 걔네 무대에서 봐봐? 춤 잘 추고, 자신감 있게 소리를 지르니까 뜨는 거 아냐? 명지 너 뭐야? 니 파트 때만 웃고, 다른 사람 파트일 때는 웃지를 않아서 사람들이 뭐라고 해? 정색한다고 지랄하는 거 몰라? 파트 아닐 때도 카메라가 돌아가는 거 몰라?” 명지는 그저 죄송합니다 입으로 되뇌면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리고 지수 너. 왜 자신 있게 노래를 못해? 리드보컬이잖아? 노래 처음 시작할 때, 왜 너한테 파트를 줬는데? 말해 봐. 왜 너한테 파트를 줬어?” “…자신감 있게 부르라고.” “그래, 알잖아? 근데 왜 못해? 그저께 공개방송 때, 너 라이브 할 때 니 표정 모니터링 해봤어? 엉망이야, 엉망. 사람들 다 알아, 너 자신 없는 거. 그러니까 사람들이 노래 시작부터 관심을 안 갖는다고. 잡은 지 한 달 넘은 고등어도 너 같은 표정은 아냐, 임마.” 왜 굳이 고등어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수련이 너. 니가 이 팀에서 뭐야? 메인보컬 아냐? 그런데 메인보컬이란 놈이 노래를 맹탕으로 부르는데 사람들이 무슨 흥을 느끼겠어? 응?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때는 행동, 몸짓, 눈빛 다 써야 한다고 했어, 안 했어? 니 파트는 그냥 너 빼고 오디오로 물려도 똑같다고. 있으나 마나야, 알아? 걸그룹에서 메인보컬 한다는 애가 힘이 안 느껴지니까 사람들이 재미없어 하는 거잖아!” 가수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장수영.” “네.” “너 리더지?” “네.” “리더가 뭐 해야 돼?” “…….” “뭐 해야 돼냐고!” “…팀을 이끌고, 아이들 관리라고….” “아는 놈이 이 꼴을 만들어? 봐봐. 이게 뭐냐고? 메인 댄서라는 놈은 안무가 엉망이고 메인 보컬은 무슨 목석이 노래 부르는 꼴이야. 리드보컬은 자신감이 없어서 목소리가 기어들어가. 뭐야, 이게?” 수영은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를 하지만 이미 사과를 듣고 지나갈 분위기는 아니었다. 실장은 신랄하게 멤버들을 다그쳤고, 그 와중에 자신의 이름은 거론조차 되지 않은 예영 역시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예영은 막내로서 가장 에너지가 넘쳤지만, 역시 활약을 하기엔 모자랐다. 하긴 활약할 무대가 주어져야 할 일이지만 말이다. “너네 지금 컴백한 지 한 달 됐어. 근데 이게 뭐야? 이 시간에 니들 여기 있으면 돼, 안 돼?” “…….” “대답 안 해, 새끼들아!” “안 돼요.” 암 말기 환자의 그것과도 같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멤버들이었다. “노래가 좋네, 안 좋네 하기 전에 너희가 실력이 부족하단 생각을 먼저 해야 할 거 아냐! 어제 제일 늦게까지 연습실에 남아서 연습한 사람 누구야?” 그제야 예영이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은 이유가 밝혀졌다. 예영이 슬며시 손을 들었다. “너 몇 시에 집에 갔어?” “11시 쯤이요.” “봐라. 너희 중에 제일 실력 떨어진다는 애가 11시에 집에 들어가고 있다. 너희 현실이 이래. 연습도 안하고, 준비도 안 해. 위기의식도 없어. 그러니까 이런 꼴이라고. 너희 가수하기 싫어? 그만 둘까? 다 접을까? 넌 뭘 잘했다고 울고 지랄이야!” 눈물을 닦던 명지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배 앞에 가지런히 모았다. “연습해라. 응? 노래가 어떠니, 홍보가 어떠니 불평불만 늘어놓을 생각 하지 말고, 실력을 기르라고. 알았어?” 한참 동안 육두문자까지 섞어가며 갤럭시즈를 비난에 가깝게, 아니 그냥 비난하던 실장이 나가고 난 뒤, 연습실은 곧 소리 없는 눈물로 가득 차올랐다. 잠시 통화를 위해 나갔다가 들어온 매니저는 안타까움 반 원망 반의 심정으로 갤럭시즈를 바라보다가, 옆에서 눈칫밥을 먹고 있던 현철에게 눈짓을 보냈다. 현철이 얼른 구석에 놓여 있던 두루마리 휴지를 집어다가 멤버들에게 가져다주었다. 손에 둘둘 말아서 눈을 찍어대는 멤버들 앞으로 다가간 매니저는 잠시 말없이 그들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실장님이 말은 과격하게 하셨어도 틀린 말은 없었어. 알잖아, 니들도? 첫 날 모니터링 했을 때, 이미 우리끼리 지적했잖아? 근데도 변한 게 없었잖아? 고쳐지지가 않으니까, 실장님이 더 화가 나신거야. 고깝게 듣지 말고, 반성하도록 해.” “예.” 수영이 대표로 대답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끅끅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면서 눈물을 닦아낼 뿐이었다. “노래가 대중성이 없는 것도 이유는 있겠지. 명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 잘 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거 생각할 때가 아냐. 노래가 안 좋으면, 춤으로, 눈빛으로, 자신감으로 극복을 해야 하는 거야.” 언제부터 노래를 자신감만으로 불러서 성공시켰단 말인가? 태호 스스로 생각해 봐도 조금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말이긴 했다. “연습이나 해.” 말이 길어져봐야 상처만 더 될 뿐이니 이쯤에서 달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 왔는데요?” 로드매니저인 현철이 분위기 깨는 한 마디를 던졌다. 그러고 보니 밥 시켜놓고 잠시 쉬는 틈에 이 사달이 났었다. 태호는 애들끼리 먹을 수 있게 자리를 피해주었다. 눈치 없는 현철의 어깨를 붙잡고 연습실을 나가니, 드디어 다섯 멤버만 연습실에 남았다. 잠시 눈치를 보던 예영이 신문지를 가지고 와서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음식들을 세팅했다. 수련과 명지가 예영을 도와 음식을 세팅하는 와중에 수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습실을 나가버렸다. 미어캣처럼 수영이 나간 문을 바라보던 세 사람을 부른 것은 지수였다. “그만 쳐다보고, 밥 먹자.” 지수는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라고 중얼거리며 도시락 뚜껑을 열고 젓가락을 들었다. 다들 눈치를 보면서도 지수가 먼저 스타트를 끊어주자 그제야 밥술을 뜨기 시작했다. 밥이 조금 넘어가니, 흐르던 눈물도 말라가면서 몸에 힘이 붙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없이 밥을 먹던 중, 예영이 슬쩍 물었다. “언니 건 어떡해요?” 명지가 슬쩍 보더니, 따로 빼놓으라고 턱짓을 했다. 다시 침묵 속에서 식사가 이어지는데, 이번에는 지수가 입 안 가득 우물거리다가 눈물을 쓱 훔쳤다. 소리도 없이 흐르는 눈물을 보니,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 수련이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눈물은 전염이 되고, 울음은 위로가 된다. 울다보니 그간 알게 모르게 쌓인 서러움이 폭발하며 좀처럼 울음을 멈출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 때였다. “뭐!” 연습실 바깥에서 들려오는 매니저, 태호의 고성에 멤버들은 울던 것도 멈추고 문을 바라보았다. 벽에 가려 보일 리도 없는 매니저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던 멤버들은 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리는데, 바깥에서 쿠당탕 물건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서로를 바라본 들, 누구도 답을 줄 순 없는 상황. 이럴 때 행동력은 수련이 가장 빨랐다. 벌떡 일어나 연습실을 나가자, 뒤따라 세 멤버들도 달려 나갔다. 문을 벌컥 열고나서니, 매니저가 씩씩거리는 모습으로 복도 가운데 서 있고, 그 옆에는 아까 나갔던 수영이 고개를 숙인 채, 등을 돌리고 있었다. 바닥에는 정수기에 꽂아 두었던 생수통이 뒹굴고 있었고, 그 뒤에서 로드인 현철이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지수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오, 오빠? 무, 무슨 일이에요?” 매니저가 흘끔 눈을 치뜨는데, 여간해선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이 화를 내고 있으니 눈을 마주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수련은 멀찍이 서 있던 현철에게 물음을 던져야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뭐예요, 갑자기? 무슨 일 있어요?” 현철이 태호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 대다가 말했다. “저기, 우리 뮤직비디오가….” “뮤직비디오가 뭐요? 뭐 잘못 됐어요?” 뮤직비디오가 방송에 송출된 지도 한참이 지났기에, 뒤늦게 심의에 걸려서 방송 금지가 된 다거나 하는 일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수련이 재차 추궁하자, 현철은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척을 하다 입을 열었다. “우리 뮤직비디오, SNS에서 난리 났어.” 난리? “그럼 잘 된 거 아냐?” “그게… 좋은 쪽 말고 나쁜 쪽으로.” “응?” 섹시 컨셉도 아니었고, 병맛 컨셉도 아니었는데 문제가 될 게 있나? 수련이 잠시 자신들의 뮤직비디오 영상을 떠올려 보았다. 오히려 너무 컨셉이 약해서 밋밋하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는데. 수련이 잠시 입을 닫은 사이, 궁금함을 참지 못한 예영이 불안감에 발을 동동 구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럼 뭔데요? 뭐가 문제가 된 거에요?” 현철이 우물쭈물 하는 사이, 언제 핸드폰을 꺼내 들었는지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태호가 대답했다. “단유야.” “네?” 뜬금없는 대답에 일동 시선이 태호에게 몰렸고, 태호는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단유가 문제가 됐다고.” ======================================= [217] 어그로(3) 두 반이 화해를 하고, 재시합을 결정하고, 시합 출전 선수를 고르고, 비밀 훈련(?)도 하면서 우애를 다진다고 해서 갑자기 청소년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화기애애한 교실이 연출되지는 않았다. 이전까지는 이제 갓 초딩티를 벗어던진 아이들이 중학교라는 새로운 질서에 적응하려는 모습이었다면, 이젠 그저 흔하디흔한 여느 중학생 교실 같은 모습으로 변할 뿐이었다. 1학기도 중간 쯤 지나다보니, 이제 슬슬 중학교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해서,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이 되면 교실엔 온통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나는 정겨운 대화가 넘쳐흐르고, 수업 시간에는 교사와 학생 간의 핸드폰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까똑. “어, 선생님! 저 아닌데요!” “내놔, 얼른!” -까똑. “누구야!” 아이들이 학교 수업 시간에도 핸드폰을 뺏기지 않고 소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선배들의 덕분이었다. 나름 치열한 토론―‘핸드폰 수거, 과연 정당한가’―과 싸움―과격한 몸싸움은 물론, 학부모까지 참여했던 멱살잡이가 벌어지기도 했다―끝에 얻어낸 그들만의 권리를, 아무런 수고 없이 그 혜택만을 받아쓰게 된 아이들은 그 소중함을 몰랐다. “선생님이 제일 처음에 뭐라 그랬어?” 걸린 아이는 못난이 인형처럼 불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수업시간에 핸드폰 소리 나면 어쩐다고 했었어?” “…압수한다고 했습니다.” “내놔.” 아이는 내밀어진 선생님의 손 위에 코발트블루 색의 핸드폰을 올려놓았다. “너희 담임선생님한테 맡겨 놓을 테니까, 알아서 찾아가.” “아아, 쌤!” “어허? 이거 안 놔? 어디서 되도 않는 앙탈을 부려!” 어린 꼬마 아이라면 이해를 하겠다. 중학생이나 된 놈이, 그것도 사내놈이 콧소리를 내면서 앙탈을 부리면 귀엽기는커녕 징그러울 뿐이었다. 반사적으로 주먹이 올라가려는 것을 억지로 참아낸 선생님이 교탁 앞으로 가는 사이, 다른 아이들은 각자 책상 밑에서 메시지를 확인했다. 사실 반 전체 SNS방에 글이 올라오면서 알림 벨이 울린 것인데, 다른 아이들이 모두 무음으로 해놓은 것에 반해, 걸린 녀석만 벨 소리를 무음으로 바꿔놓지 않았던 탓에 압수를 당하고 만 것이었다. “야야, 봤어?” “동영상이던데?” 아이들의 낮은 수군거림도 여러 사람이 함께 떠들면 소음이 되는 법. 선생님은 교탁을 세게 두드리며 아이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런 소동이 잠시 가라앉은 뒤 수업이 재개되었지만, 아이들은 단체 메시지로 온 내용에 온 신경이 쏠려 제대로 수업이 진행되지 않았다. 오로지 선생님 혼자 수업을 하다 말았다. 수업이 끝나고, 교실은 시장통처럼 변했다. “야, 봤어?” “씨발, 보고 있잖아? 보는 거 보면서 묻냐, 븅신아?” “븅신아, 그럼 보는 거잖아.” “야, 새끼들아 좀 조용히 해 봐라. 감상하고 있는 거 안보이냐?” “그게 무슨 영화냐? 감상이나 하고 자빠졌게?” 이러쿵저러쿵 하면서도 아이들의 전체대화방에 올라온 영상은 핫했고, 대부분 아이들의 관심을 쏙 빼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광종도 예외는 아니었다. 입술을 일그러뜨리면서 보다가, 앞자리에 앉은 친구의 뒤통수를 때렸다. “야, 이거 니가 올렸냐?” 뒤통수를 맞은 아이는 억울한 눈을 하고 광종을 바라보았다. “올린 건 맞는데, 여기 올린 건 아니거든? 그리고 편집도 이렇게 안했거든?” “씨발놈아, 어쨌든 인터넷에 올린 건 맞네, 개새끼야. 새끼야, 내가 두들겨 맞는 게 그리 좋았냐? 응?” 두들겨 맞은 건 아니지, 대충 그런 의미로 항변하려 했지만 입 안에서 맴돌 뿐이었다. 뒤통수를 문지르던 성구는 대신 억울하다는 얼굴을 하고 시선을 피했다. 실제로 성구는 당시 운동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핸드폰으로 찍었던 장본인이었다. 싸움이 한참이던 순간부터 단유가 광종을 제압하는 장면까지 근거리에서 촬영했었다. 그리고 이후 약간의 편집을 해서 인터넷 페북에 동영상을 게시한 것이다. 영상은 패싸움 버전과 단유 제압 버전의 두 가지로 업로드 되었고, 비공개로 올리긴 했지만, 친구들끼리는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그런데 이 영상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고, 마침 그 영상 속의 주인공이 최근 공개된 어느 걸그룹의 뮤직비디오 속 인물과 동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가 또 약간(!)의 편집으로 영상을 만들어 업로드 한 것이었다. ‘#실제싸움 #갤럭시즈 #뮤직비디오_주인공’ 등의 해시태그를 마구 달아서 어떤 검색에도 영상이 노출될 수 있게끔 해 놓았더니, 점점 입소문을 타고 번지기 시작해서 어느새 핫한 영상이 되어버렸다. 성구는 억울했다. 자기가 올렸던 원본 영상은 추천도 많이 받지 못했는데, 이차 가공한 해당 영상물은 추천만 2만을 넘긴 인기 게시물이 된 것이다. 그런 사정도 억울한데, 광종에게 뒤통수까지 맞으니 분한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그럼에도 성구는 광종에게 아무 말도 못했다. 자신은 광종보다 싸움을 못하기 때문이었다. 한편, 영상을 보던 다른 아이들의 반응도 뜨겁긴 마찬가지였다. “나 그 때 제대로 못 봤었는데, 단유 싸움 되게 잘하는 거 아냐?” 혹시라도 광종에게 들릴까봐, 조용히 짝에게 들릴 정도로만 물었다. 짝 역시 눈치를 보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다시 보니까, 무시무시하네? 이것 봐, 여기. 날아오는 주먹을 한 번에 잡잖아? 이거 거의 권투 선수 수준 아냐?” “이종 격투기 선수들도 이런 기술 쓰거든?” “단유가 이종 격투기를 배웠다고?” 온갖 풍문이 떠도는 교실 안은 소란스럽기 그지없었고, 단유의 주변 역시 그 소란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지태는 대스타를 영접한 팬에게 빙의된 듯 단유 주변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야, 이거는 뮤직비디오 같은데? 너 모델도 했었어? 모델이냐, 아니면 연습생이야? 연예인도 하고 막 그래?” 사정을 들은 바 있던 병수가 단유를 대신해 아는 척을 했다. “그거 갤럭시즈라는 그룹 뮤직비디오래. 단유는 특별출연인가, 우정출연인가 뭐 비슷하게 한 거고.” “니가 어떻게 알아?” “지난번에 쟤랑 단유가 이걸로 이야기하는 거 들었거든.” 병수가 손가락질 하는 곳을 바라본 지태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그럼 연예인 하는 거야? 아니지, 이미 연예인 아냐?” “그런 거 아냐.” 단유가 단호하게 대답하곤 시끄럽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지태와 채윤에게 자리로 돌아가라는 의사를 밝혔다. 물론, 두 사람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럼 단유 너, 이 사람들도 잘 알아? 갤럭시즈?” “조금.” “진짜? 와, 연예인 어떻게 알아? 친척이야?” “그냥 어쩌다가 알게 된 거야. 잘 알진 못해.” 단유의 대답에도 호기심이 샘솟는 두 사람의 질문 세례는 쉬는 시간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단유는 이 일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그저 반 아이들이 자기가 아는 얼굴이 영상에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요란 떠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영상을 제대로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외로 이 영상은 반 아이들 뿐만이 아니라, 인터넷을 즐기는 몇몇 유머사이트에까지 소개되면서 인기를 끌었고,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좋은 의미로 모였다면 다행이겠지만,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다. 영상은 뮤직비디오 속 단유와 광종을 제압하는 단유를 교차편집해서 드러내고 있었는데, 특히 광종을 제압하는 단유의 모습은 앞 뒤 다 자르고 광종의 주먹을 막고, 다리를 걷어 올리고, 팔을 비틀어 광종을 제압해 바닥에 쓰러뜨리는 장면까지 재생되도록 편집이 되어 있었다. 제목은 《초전박살! 길거리 싸움 고수, 뮤비 출연》 이었다. ―이거 뭐임? ―학교에서 싸우는 거 아님? 교복 같은데? ―살벌한데? 주먹 잡아내는 거 보면, 완전 싸움 잘하는 듯. ―바닥에 쓰러지는 아이, 우는 거 아님? ―졸라 심하게 넘어졌는데, 저 정도면 갈비뼈 2개는 나감. ―뮤비랑 동일인 맞아? 나 저 뮤비 어디서 본 것 같긴 한데, 저기는 되게 착하게 생긴 것처럼 나옴. ―무슨 멍청한 소리야? 얼굴 생긴 거랑 싸우는 거랑 무슨 관계라고? ―그래도 저건 아니지. 학교에서 주먹 쓰는 아이가 제대로 일리가 없잖아? 요새 학교에서 싸우면 학폭위에서 가만 안 두는데? 그런 애를 뮤비에 쓴 거 아냐? ―저 영상 뒤에 위에 있던 애가 누워 있는 애 해머링 시전! ―진짜? 애는 괜찮고? 그리고 뒤를 이어 단유의 신상털이가 시작되었다. 사실 단유의 신상털이는 어렵지 않았다. 이미 한 번 털린 적이 있었던 단유였기에, 이런 사이트에 상주하는 몇몇 네티즌에게는 꽤 익숙한 얼굴이기도 했다. 곧 단유의 과거가 쏟아져 나오고, 갤럭시즈와의 연관성을 알리는 인터넷 방송 장면도 캡처되어서 나왔다. ―고아였음. 완전 사회 반항아 컨셉? ―편견 ㄴㄴ. 영재였다고 하는데? ―영재였던 애가 왜 영재학교 안가고 일반 학교 가나? 저기 서울 장계중학교 교복인데? (내 사촌동생이 저 학교 나왔다) 말은 와전되고, 소문은 부풀고, 의심은 확신이 되고, 싸움은 폭력이 되어 이미 인터넷에서 단유는 문제아, 그 이상의 무언가가 되고 있었다. ―내 동생이 저 학교 다니는데, 학교에서 패싸움 했대. 그 때 찍힌 영상인 듯. 그런데 문제는 저 아이들 아무도 처벌 안 받았대. ―미친. 선생들은 뭐하고? 학교에서 패싸움이 벌어지는데 학폭위 출동해야 하는 거 아냐? 어느 학교냐? 교육청에 신고하자! 불똥은 갤럭시즈에게도 튀었다. ―저런 애를 뮤비에 쓴 건 문제 있는 거 아냐? ―회사에서 제대로 검증 안했네. 법원에 가는 애 중간에 빼돌려서 촬영장에 보낸 거야? 그런 거야? ―씨X, 얼굴만 잘 생기면 장땡이냐? 인성은 X도 없는 새끼들이 연예계에서 판치는 꼴을 언제까지 두고 볼 거냐? ―개나소나 나와서 설치네. 저런 애들이 나와서 하든 말든 니가 무슨 상관인데? 니 얼굴이나 보고 깝쳐라. ―위에 분탕질 치는 놈 누구냐? 설마 본인이냐? IP추적 들어간다. 핸드폰을 잡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 때, 불쑥 두꺼운 손이 나타나 자신의 핸드폰을 채갔다. 수련이 고개를 들자, 매니저가 눈썹을 치켜 뜬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습하고 있으랬더니, 누가 이런 거 보고 있으래?” “지금 연습하게 생겼어요?” “그럼 니가 뭘 할 건데? 여기 악플 다는 애들 하나하나 다 찾아가서 조질래? 너 잘하는 말 빨로 한 명씩 다 조지고 다니면, 일이 해결 되냐고?” 수련이 힘껏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그럼 어쩌라고요! 단유가 왜 이런 애들한테 이상한 소리나 듣고 있어야 하는데요?” 매니저가 뚱한 표정으로 수련을 보다가 말했다. “단유 때문이야?” “그럼요? 아니면 뭣 때문에 화를 내요?” 매니저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야… 우리 회사랑…너희들 욕먹으니까….” “나 참. 두 눈 뜨고 봐요. 회사랑 우리 욕먹는 거는 쥐꼬리만큼도 안 되거든요? 그리고 우리가 이런 악플 한두 번 받아요? 그런데 단유는 아니잖아요? 단유가 이런 싸움 할 애냐고요? 그리고 10초도 안 되는 이런 영상만 보고 단유가 문제아니 뭐니 떠들어대는 게 말이 되요? 사람들이 말이야, 앞 뒤 사정도 알아볼 생각 안하고 말이야.” 여간 흥분한 게 아닌지, 수련은 예의 속사포 신공으로 매니저를 쏘아붙였다. 애초에 오해를 한 것도 매니저였고, 수련의 마음을 이해 못할 일은 아니어서 태호는 머쓱한 표정만 짓다 돌아섰다. “연습하고 있어. 일단 이 문제는 실장님이랑 이야기 좀 해 보고 어떻게 해결할지 결정할 테니까.” “결정 잘 해야 할 거예요. 이번 일 잘 못하면, 단유 걔, 영원히 우리 회사 안 들어올 거예요.” “응?” “오빠가 늘 그랬잖아요? 단유보고 계약하자고. 그런데 단유가 이런 헛소문 때문에 우리랑 안 보고 살면 누가 손해겠어요?” 딱히 손해 볼 건 없는데, 라는 마음이 솔직한 매니저의 심정이었지만, 그간 보여줬던 모습을 보고 진심이라 생각했던 건지 수련의 태도가 진지해 보였다. 아니라고는 말을 못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연습실을 나온 태호는 곧장 실장실로 달려갔다. “이게 회사차원에서 대응할 일이야?” “그게… 조금 애매하긴 한데. 그래도 우리 애들 뮤직비디오에 안 좋은 이미지가 깔릴 수 있잖아요?” “야, 솔직히 이번 곡, 망한 거잖아? 그치? 이미 전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차트 아웃했고, 인지도가 엉망이라서 행사도 잘 섭외 안 되는 판국인데, 이미 망한 뮤직비디오 출연자 갖고 싸워봐야 우리가 무슨 이득이 있어?” 실장은 냉정하게 이 사태를 바라보았다. “굳이 말하자면, 얘한테 우리가 손해배상청구를 해야지. 안 그래? 얘 때문에 이미지가 망가진 거잖아? 그리고 뮤직비디오 출연료도 줬다면서?” “아, 그거는 그냥 용돈 겸 해서 조금 준 거죠.” 고작 20만원 정도였다. 조금 많이 주긴 했지만, 이전에 인터넷 방송에 출연해 준 보답이기도 했기에 당시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돈까지 줘가면서 출연시켰더니, 문제가 된 거잖아? 그리고 회사 차원에서 일 벌이면 나중에 갤럭시즈한테 더 큰 부메랑이 될 거란 생각은 안 해봤냐? 응?” 했으니까 더 고민이 되고 갈팡질팡 하는 것이다. 태호는 실장 앞에서도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일시적일 수도 있으니까, 일단은 좀 더 지켜보는 쪽으로 가고. 그리고 나중에 일이 더 커지면 그 때 다시 이야기하는 것으로. 오케이?” “…네.” 태호는 힘없이 실장실은 나왔다. 나오기 전, “야, 애들 연습이나 좀 시켜. 지금 그깟 소문이 문제야? 애들이 완전 비리비리 해가지고 말이야. 저런 애들한테 곡 주는 게 아깝다는 이야기는 안 나오게 해야 할 거 아냐!” 그 이야기 모두 실장님 입에서 나온 거라는 거 알거든요? 태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실장실을 나와 계단을 쿵쿵 걸어 내려갔다. ======================================= [218] 어그로(4) “야, 이거 봤어? 주먹 잡아채는 거? 여자들은 잘 모를 수 있겠지만, 말이야. 소싯적에 주먹 좀 써본 사람들이라면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한 눈에 알 수 있다고. 오, 여기 이거! 보통 아래에서 날아드는 공격은 피하기가 쉽지 않거든? 기껏해야 엉덩이를 뒤로 빼는 식으로 피하는 게 다란 말이야. 근데 이것 봐, 살짝 몸을 틀어서 잡는 거 보여? 대박인데?” 서울 도심의 한 병원 옥상에서 까치집으로 써도 될 머리를 하고 벤치에 널브러져 있던 재훈은 3.7인치 핸드폰 액정 안에서 벌어지는 액션무비를 보며 연신 감탄사를 토해내고 있었다. “지금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요?” 옆에 앉으라는 말은커녕 벤치 전체를 홀로 쓰는 재훈 때문에 심술이 난 주영이 뾰족한 말투로 재훈을 찔러댔다. 당연히 재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우와, 이건 절묘하게 몸의 중심을 흩뜨려서 쓰러지게 만드는 기술이라고! 얘 진짜 무술 같은 거 안 배운 거 맞아? 기술이 보통이 아닌데? 얘 어릴 때 싸움 많이 했던 거 아냐?” “명수 말로는 싸운 적이 없다던데요?” 점점 더워지기 시작한 5월이었다. 다행히 옥상 위로 불어오는 바람이 더위를 식혀주었지만, 그와 별개로 주영은 열기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신나게 떠들어대는, 태연하기 만한 재훈을 보고 있자니, 열이 날 수밖에. “모르지, 명수 모르게 싸웠을 수도 있고. 여기 뒤에서 백마운트를 잡고 제압하는 이 부분이 절정이지. 순식간에 상대를 제압하고 옴짝달싹도 못하게 만드는 이 부분은 몇 번을 봐도 멋있다니까?” “…저기요, 선배. 그럴 때가 아니라니까요?” “그럼?” “…….” “솔직히 사태가 이렇게 커질 때까지 너나 나나 몰랐던 건 마찬가지 아냐? 나야 보시다시피 일에 치여 살면서 눈코 뜰 새 없던 터라 그렇다고 해도, 너도 몰랐던 건 마찬가지잖아.” 이 병원에서 본과 실습중인 재훈은 물론이고, 주영 역시 재단 일 때문에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솔직히 단유가 연예인도 아닌데, 인터넷에 이런 글들이 올라올 거라고 예상이나 했겠어요? 아니면 이제라도 단유에게 마케팅 전담팀이라도 만들어서 붙여야 한단 건가요?” “이거 왜 이래? 그냥 농담 한 번 한 걸 가지고 그렇게 죽자고 달려들면 안 되지. 그리고 왜 나한테 소릴 질러? 이거 알려준 사람은 나라고? 내가 안 알려 줬으면, 너 평생 몰랐을걸.” 깐죽거리는 재훈이 유난히 미웠다. 하지만 재훈의 말마따나 주영은 이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었다. 재훈이 알려주기 전까지는. 재훈이 이 일을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소아과를 실습 중이던 재훈이 소아병동을 돌아다니며 환자들의 기본적인 처치들, 이를테면 체온이나 혈압 측정과 같은 기초적인 것들을 하던 와중이었다. 한 남자 아이가 무릎 맡에 올려놓은 노트북으로 어떤 영상을 재미있게 보는 것을 보고, 재훈이 넉살좋게 다가갔었다. “뭐 보니?” 나이 어린 환자들 중에는 처치에 대해 두려움 갖는 아이들이 많기 때문에 의사들은 대게 친근하게 다가가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재훈이 미소를 띠며 묻자, 아이가 최근에 인터넷에 화제가 된 영상이라며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지금 핸드폰으로 다시 보고 있는, 문제의 그 영상이었다. “됐어요. 그래서 어떡하실 거예요?” “글쎄다. 어떡해야 하나?” “이미 도가 지나치다고요.” 머리를 긁적이며 잠시 고민을 하던 재훈이 손가락 냄새를 맡으며 물었다. “단유는 뭐래?” “싸운 것도 이야기 안했던 앤데, 이런 걸 이야기하겠어요?” “그래도 뭐라고 이야기했을 거 아냐?” “별로… 신경 안 쓰던데요?” 애초에 인터넷에 영상이 올라온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단유였다. 꼼꼼하게 댓글들을 체크하며 감정 싸움할 아이는 더더욱 아니었고. “흠…뭐 인터넷을 자주 하는 애도 아니었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래도 이렇게 놔두는 것도 문제겠지?” “여기저기서 올라오는 댓글 보면서 얼마나 열이 받았는지 알아요? 이건 단순히 인격모독 정도가 아니라니까요? 완전히 인격살해 수준이에요. 지들이 언제 단유를 봤다고, 무슨 강력범죄자 취급이더라니 까요?” 말로만 듣던 인터넷 마녀사냥을 직접 목격한 주영은 특히 그 대상이 자신이 아끼는 아이라는 것에 매우 격분한 상태였다. “…그래서 니 생각은 어떤 데?” “연예인도 아닌 일반인을 상대로 이렇게 하는 건 심각한 범죄라고 생각해요. 변호사를 고용해서 엄중 처벌 하도록 해야죠.” “그냥 경찰에 신고하는 걸로 끝내.” 뭘 굳이 변호사까지, 라고 중얼거리는 재훈의 태도에 더욱 불이 붙은 주영이었다. “그 정도로는 안 돼요! 민사까지 걸어서 아주 탈탈 털어야 한다니까요?” “당사자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는데?” “당사자야 원래 이런 걸 모르는 아이니까 그렇죠. 그리고 보호자라는 사람이 이런 일을 두고만 보고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이 일이 향후에 단유에게 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잖아요!” 재훈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사실 재훈이라고 속이 편하진 않았다. 하지만 주영이 너무 흥분한 탓에 도리어 자제를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와 별개로 이 일을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과연 변호사까지 써가면서 일을 키울 일인가, 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물론 주영의 말도 맞다. 인터넷에 떠돌던 과거의 치부가 미래에도 영향을 미친 사례는 손쉽게 찾아볼 수 있었고, 오죽하면 ‘잊혀질 권리’라는 주장이 나올까? 재훈의 고민을 구체적으로 알 순 없었지만, 그렇게 고민한다는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주영은 재훈에게 마지막으로 의사를 밝혔다. “이 일은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선배는 신경 끄세요.” “뭐?” 황당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재훈을 무시하고, 주영은 백에 넣어두었던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병원 실습 때문에 머리가 많이 복잡하신 것 같은데, 이런 ‘사소한’ 일은 저한테 맡기시고 선배는 선배 일이나 하시라고요.” “야, 그런 게 어딨어? 걔네 보호자는 나라고.” “그리고 그 보호 임무를 저한테 일임하셨죠.” 또각또각 걸어가는 주영의 뒷모습을 보던 재훈은, 문득 저 높은 하이힐 아래 찍혀나갈 이름 모를 이들을 향해 위로라도 할까 생각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쓰잘데기 없는 망상으로 자신을 위로하는 짓이라니. 스스로 생각해봐도 문제가 심했다. ‘주영이 앞에서는 진지해지질 못하네.’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보다, 피식 웃음을 터뜨린 재훈은 곧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단유의 일은 마무리되는가 싶었다. **** “언니, 이거 봤어요?” 연습실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연습에 매진하고 있던 수련은 잠시 물마시러 나간다면서 연습실을 나갔던 막내 예영이 소란을 떨며 들어오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야, 정예영! 조용히 해. 지금 분위기가 어떤지 몰라서 그렇게 떠들어?” 그룹의 막내라지만 나이가 벌써 22살이 넘었다. 최근에 나온 다른 걸그룹들에 들어가면 맏언니라도 맡을 나이였다. 그런데도 저리 철이 없다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이거 보세요!” 예영이 핸드폰을 들이밀자, 수련의 시선이 절로 핸드폰으로 옮겨졌다. 마침 액정에 떠 있던 것은 기사의 헤드라인이었다. 「포장이 벗겨진 미소년의 진실 - 충격적인 ‘캐스팅’ 비화」 ‘미소년’이란 단어와 ‘충격’, ‘비화’라는 단어가 만들어낸 헤드라인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기사의 첫머리가 시작하기도 전에 삽입된 자료사진은 그들의 뮤직비디오 ‘미챠’의 한 장면. 단유가 의자에 앉아있고, 그 옆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갤럭시즈가 선명하게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친절하게도 이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뮤직비디오의 제목과 그룹명까지 자세히 적어놓았다. 이름 모를 인터넷 신문사의 뉴스 꼭지도 아니고, 연예·스포츠 쪽과 관련해서 가장 큰 언론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그런 곳에서 난 기사였다. “이게 뭐야? 왜 이게 뉴스로 나오는 거야!” “제 말이요!” 손가락을 밀어 올리면서 기사를 읽는 동안, 조금 전까지 흐르고 있던 땀이 바싹 말라갔다. 기사를 마저 읽었을 쯤, 누군가가 수련의 등 뒤에서 어깨를 짚었다. 돌아보니 리더인 수영이었다. “줘 봐.” 수영 역시 핸드폰을 읽다가, 손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곧 전 멤버들이 기사를 읽게 되었고, 그 아래 댓글까지 읽다가 하마터면 수련이 핸드폰을 집어던질 뻔 했다. “이게 무슨 기사야! 완전히 소설이잖아!” 기사의 전체 요지는 외모만 보고 뽑아서 그 아이의 인성이나 평소 행실에 대해 검증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캐스팅으로 연예인이 되려 하는 사회 비판이 주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간 갖가지 내용들이 갤럭시즈 멤버들을 분노케 하였다. “아니, 무슨 10초짜리 영상 하나로 인성 운운하는 거야? 이 사람 제정신이야?” 멤버들이 분을 터뜨리는 또 한 부분은 바로 다음의 것이었다. 「회사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우연히 캐스팅 된 소년의 외모가 너무나 뛰어났고, 뮤직비디오의 컨셉과 잘 맞을 것으로 판단한 매니저의 독단으로 벌어진 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며, 곧 해당 뮤직비디오를 자체적으로 수정할 것임을 밝혔습니다.」 “언니, 이거 무슨 소리에요?” 명지가 수영과 지수를 바라보며 물었지만, 두 사람 다 뮤직비디오 수정과 관련하여 들은 바가 없었다. 그런데 기사에는 버젓이 ‘회사 관계자’란 용어를 써가며 인용하고 있으니, 뜬금없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다. “매니저 독단이라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에요?” 당연히 말이 될 리 없었다. 그렇게 분개하고 있는 사이, 연습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이는 장태호 매니저였다. “니들 연습 안하고 뭐해? 또 실장님에게 혼나고 싶어?” 그러나 이미 연습은 의식 저 멀리 날아가고 없었던 멤버들이었다. 예영이 매니저에게 쪼르르 달려가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오빠, 이거 무슨 소리예요?” 기사를 읽던 매니저의 얼굴이 처음에는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가, 점차 하얗게 질리더니, 마지막에는 불덩이라도 속에 품은 사람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눈에 희미한 핏줄이 서릴 정도로 분개한 티를 내던 매니저가 핸드폰을 예영에게 돌려주었다. “니들은 일단 연습하고 있어. 알아보고 올 테니까.” 등을 돌리고 저벅저벅 걸어 나간 매니저는, 연습실 문을 닫고 나온 순간부터 발걸음을 빨리하여 실장실로 내달렸다. ‘이 새끼!’ 속으로는 욕이 치밀어 올랐지만, 일단 얼굴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판단해도 늦지 않으리라. 실장실 문 앞에 선 매니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킨 뒤 문을 두드렸다. “들어가겠습니다.”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푸른 색 와이셔츠를 입은 실장이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 다시 통화 드리겠습니다. 네. 네.” 실장이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고성이 터져 나왔다. “이게 무슨 짓이야? 들어오란 말도 없이 마음대로 문을 처 열고 들어와! 어디서 배워먹은 짓거리야, 이게!” 실장의 고성에 오히려 머리가 식는 느낌이었다. 매니저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실장을 향해 또박또박 질문을 던졌다. “실장님이 던진 겁니까?” “무슨 소리야? 앞 뒤 자르고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먹어!” “기사 말입니다. 우리 뮤직비디오 언급된 기사.” 고리눈을 뜨고 있던 실장이 그제야 눈에 힘을 풀었다. 천천히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더니 느긋한 시선으로 매니저를 바라보았다. “봤어?” “안 볼 수가 없겠던데요? 올라온 지 1시간도 안 된 기사가 벌써 여기저기 새끼까지 치고 다니던데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동안, 자신의 핸드폰에서 갤럭시즈를 검색어로 검색했더니 벌써 관련 기사가 3개 이상이었다. “봤으면 알 거 아냐? 뭘 묻고 그래?” “…실장님이 밑밥 던지신 겁니까?” “오, 장매니저. 이제 눈칫밥 좀 먹은 티내네? 맞아, 내가 던졌어.” 태호는 아랫입술을 아프도록 깨물었다. “무슨 의도로 그러시는 겁니까?” “몰라 물어? 이게 다 애들 위해서 하는 짓 아냐! 니가 제대로 니 할 일을 못하니까, 실장인 내가 나선 거잖아!” 실장의 의도는 아주 단순했다. 인지도. 악플도 관심이고, 악명도 명성이었다. 캐스팅 비화에 얽힌 기사에 실린 걸그룹 이름과 뮤직비디오. 당분간은 호기심에라도 사람들이 뮤직비디오를 한 번 더 찾아 볼 것이고, 갤럭시즈 멤버들의 얼굴을 한 번은 더 들여다보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그 따위(?) 노래도 좋다고, 취향에 맞다고 좋아할 이도 있을 것이고, 그러다보면 인지도도 조금 오르는 효과를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비겁한 짓입니다! 애들 인지도 올리겠다고, 이제 겨우 중학생인 아이를 팔다니요! 게다가 전부 거짓이잖아요?” 격분한 듯 따지고 드는 태호를 바라보던 실장은 깍지 끼고 있던 손을 빼고 검지를 흔들어 보였다. “먼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 그 아이, 이미 뮤직비디오에 나온 순간 팔린 거야. 팔리려고 뮤직비디오 나온 거야. 파는 방법이야 이렇게 팔든, 저렇게 팔든 그건 우리 소관인거고, 그 아이는 팔리는 것에 동의를 하고 돈을 받은 거야. 그건 분명히 하자, 응? 두 번째. 거짓이라니? 어디가 거짓인데? 폭력 사건? 그건 기자가 학교 가서 확인했대잖아? 뭐가 거짓인데? 매니저 독단? 맞잖아? 니가 독단으로 추천한 거 아냐?” 부들대던 태호가 주먹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한다고 아이들 인지도가 오릅니까? 그리고 설령 그렇게 인지도를 올려도 아이들에게 악영향만 미칠 뿐이라는 거, 몰라서 그러십니까?” “너야말로 몰라서 묻냐? 애들한테 악영향 미칠 일 없어. 다 회사에서 한 거라고 나오잖아? 정확히는 니가 한 거라고 했지만. 그리고 설령 조금 때가 묻는 들, 그게 어때서? 어차피 이미 망한 싱글이야. 이런 식으로 인지도라도 올려놓으면 다음 앨범에 도움이라도 되지. 그리고 그 때 되면 그런 이미지? 그런 거 바꾸는 것도 한 순간이야. 기사 하나만 적당히 만들어서 꾸며도 애들 이미지 세탁하는 건 껌도 아니라고. 물론 세탁할 이미지도 없지만 말이야. 얼마나 좋아? 위에서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다 찬성한 거니까, 건방 떨지 말고 가서 대기해.” “…대기라뇨?” 마지막 말이 묘하게 들렸다. “야, 솔직히 기사도 이렇게 났고, 실제로도 니가 독단으로 처리한 거잖아? 형식적이지만 대기 발령 흉내는 내야 할 거 아냐? 보는 눈도 있는데. 그래도 자르진 않을 거니까, 걱정 말고. 잠깐 쉬고 있어. 그리고 그 동안 놀지만 말고, 원기회복이라도 하면서 기다리라고. 알겠어?” 마치 거대한 포상 휴가라도 주는 냥, 실실대는 실장의 얼굴이 이토록 얄밉게 보일 수가 없었다. 태호는 주먹이 하얘지도록 힘을 주었다. ======================================= [219] 어그로(5) 『루머와 폭력으로 얼룩진 연예계에 또 한 번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최근 컴백한 아이돌 그룹 ‘갤럭시즈’의 타이틀 곡 ‘미챠’의 뮤직비디오에 한 소년이 등장을 하는데, 이 소년의 행실에 관한 루머가 인터넷을 강타하고 있습니다. 한 유머 사이트에서 처음 문제 제기된 이 영상에는 뮤직비디오 속 소년이 다른 소년에게 폭력을 가하는 모습이 촬영되어 있습니다. …(중략)… 학교 측에서는 해당 폭력 사건을 인지했지만, 따로 처벌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증언에 대해 인정을 했습니다. 추가적으로 학교 측은 당시 폭력 사건이 자체적으로 해결되었다고만 밝히며…(중략)… 얼마 전, 한 유명 아이돌이 사소한 시비로 지나가는 행인을 향해 폭력을 행사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바 있었는데, 그 일이 잊혀지기도 전 또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에 대해 많은 관계자들이 우려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대형 기획사에서 근무하는 한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연예계에 입성하는 나이대가 점점 어려지고 있는 것과 맞물려 미성숙한 아이돌 연예인들의 사고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중략)… 특히 대중의 선망을 받는 직업으로 아이돌이 부각되는 요즘은 더욱 철저한 자기관리와 함께 기본적인 인성과 사회규범 준수의식이 투철해져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단지 얼굴이 잘생겨서, 혹은 노래나 춤을 잘 해서, 라는 이유로 기본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등용되는 사례가 더 이상 발생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 현 사태를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선이었습니다.』 헌영은 보던 인터넷 화면을 꺼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 속에 답답함이 한가득 차오르는데 풀 길이 없었다. ‘왜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아침부터 학교가 발칵 뒤집혔는데, 뒤늦게 이유를 알게 된 헌영이었다. 뉴스에 난 학교가 장계중학교임이 학부모들이 공유하는 SNS에서 퍼지면서 사달이 나고 만 것이다. 부모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이에게 물었더니, 그간 별 일 아니라 생각해서 입을 다물고 있던 아이들이 입을 연 것이었다. ―우리 애가 얼굴이 부어왔는데도 애가 싸웠다는 소리를 안 해서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이게 도대체 뭔 일이래요? ―우리 애도요. 들어보니까 3반이랑 싸움이 크게 났는데, 지들끼리 화해해서 괜찮아졌다는 거예요. 듣고 얼마나 화가 나던지. ―학교가 너무 무책임 한 거죠, 이건. 그저 학교의 평판만 생각해서 싸움이 일어난 것도 쉬쉬하면서 감추려 했으니까요. 정작 지켜야 할 우리 아이들은 폭력에 그대로 노출된 채 살아가는 거잖아요? 나중에 우리 아이가 맞고 와도, 자기들끼리 해결했으니 그만이다, 라고 이야기하면 어떡하란 거죠? 시끌시끌한 SNS의 난리는 그대로 학교로까지 이어졌다.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맞고 돌아다니는데, 선생님들은 대체 뭘 하신 거예요!” “학교에서 주먹을 휘두른 애들이 있는데, 학교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돼요?” “저기, 어머님. 진정 좀 하시고요.” “제가 진정 하게 생겼어요? 무슨 일만 나면 진정하라 뭐하라, 가만있으라는 소리만 하고 앉아 있고 말이야! 책임을 져야 할 선생님들이 가만히 있으니까 학부모들이 나서게 되는 거 아니에요!” 그 당시 맞았던 아이들의 어머니들이 학교로 항의 전화를 해 왔고, 말렸던 아이들의 부모님들 중에도 학교에서 일어난 폭력 사고가 뉴스에서 날 때까지 쉬쉬하고 감추려했던 학교의 행태에 화를 참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억울하기까지 한 헌영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고!’ 안이한(?) 교장 선생님의 대처 때문에 일이 커졌다고 생각한 헌영은 일단 아침 조례를 위해 반으로 향했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어제와는 전혀 다른 교실이라는 것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마치 이 교실에만 빙하기가 찾아온 것 같았다. 심지어는 반장마저 얼어붙었는지,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반장, 인사해야지.” 지태가 엉거주춤 일어나 구령을 붙이고 인사를 했다. 그러나 힘이 쭉 빠진 듯 아이들의 인사소리는 바닥에 들러붙은 기운 빠진 문어처럼 흐물거리는 느낌이었다. 죽 둘러보던 헌영은 괜히 아랫배가 아려오는 느낌이었다. “다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거 같으니까, 긴 말은 안하겠다. 너희들은 학생이고, 학생의 본분이 공부라는 건 누차 설명했으니까. 수업시간에 핸드폰 하는 사람 없길 바란다. 그리고 김단유.” 제일 뒷자리에 앉아 있던 단유가 고개를 들었다. 반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쏠리는 가운데에서도 태연한 얼굴이었다. 마치 이 모든 소동이 자신과 전혀 상관없다는 얼굴인지라, 오히려 그 속이 궁금했다. “넌 나 따라와.”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난 후, 단유는 교실 밖으로 나가는 선생님의 뒤를 쫓았다. 교실의 웅성거림을 뒤로 한 두 사람은 곧 상담실로 향했다. **** “자, 마셔라.” 헌영은 자판기에서 뽑은 코코아를 타서 단유에게 건넸다. 단유는 담임선생님의 갑작스런 친절에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에만 그칠 뿐, 말로 드러낼 의지는 없었다. “고맙습니다.” 단유와 다시 마주한 헌영은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 사실 기사를 보는 순간 헌영은 두 가지 생각을 했다. 한 가지는 자신의 판단이 그르지 않았다는 생각. 물론 자기 생각대로 보고가 먼저 온다 한 들, 이런 기사가 안날 것이라고 장담할 순 없었다. 이미 사고가 난 마당에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어쨌든 자기가 우려했던 상황이 바로 이것이었다, 라는 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이었다. 두 번째는 바로 단유에 관한 것. “괜찮냐?” 사실 기사 자체만 보면, 학교에서 벌어진 사고는 잠깐 언급되는 정도에 불과했다. 다만 그 일로 학부모들이 사고를 알게 되고 이 사달이 났다는 것이지만. 더 큰 문제는 단유 개인에 대한 것이었다. 마치 폭력 사고의 주범인 것처럼 묘사된 것도 그렇고, ‘미성숙’, ‘이기적’, ‘인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묘사된 것이 안타까웠다. 혹시 그 기사 때문에 상처를 받은 게 아닌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짧은 물음이었지만, 단유는 담임이 묻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침에 학교에 오자마자 지태를 비롯한 아이들이 달라붙어서 가장 먼저 하는 말이 ‘괜찮냐’는 물음이었으니까. 어제 오후에 난 그 기사를 단유나 명수는 전혀 몰랐다. 아침에 교실에 오고 난 뒤에야 기사를 제대로 읽은 단유는, 사실 별로 개의치 않았다. “괜찮아요.” 다른 사람들이, 그것도 일면식 하나 없는 사람들이 자길 두고 뭐라고 해봐야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자신이 결백하다면 아무 의미 없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던 단유였다. “…괜찮다니 다행이다만, 그래도 선생님으로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선생님은 기사를 읽기 전까지 니가 그런 뮤직비디오에 나온 줄도 몰랐으니까. 혹시 연예인 데뷔를 준비하는 거냐?” “아니요. 그건 그냥, 우정 출연 같은 거였어요.” ‘매니저의 독단’이란 문구가 잠시 떠올랐지만, 헌영은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래, 알겠다. 그런데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기사가 나와서 니가 곤란해질까봐 선생님은 걱정이다.” “왜요?” 단유가 진심으로 묻는다는 걸 알고, 헌영은 잠시 당황했다. “전혀 몰라서 묻는 거야, 아니면 알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야?” “둘 다네요. 곤란해질 이유가 없다는 것도 그렇고, 설령 문제가 있다고 해도 제가 죄를 지은 게 없는데 문제가 될 게 있나요?” 헌영은 잠시 헛기침을 한 뒤,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물론 니가 결백하다는 것을 나는 물론이고, 우리 반, 그리고 7반의 아이들도 다 알거다. 하지만, 문제는 그 외의 사람들이지. 넌 공인도 아니고 그냥 일반인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상대로 이런 악의적 소문이 퍼져나가면, 일상에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어떻게요?” “사람들이 널 손가락질 할 거다.” 그게 뭐 어떠냐, 는 생각이 먼저 들었는데, 마치 그 생각을 읽은 것처럼 담임선생님은 고개를 저었다. “니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생각할 상황은 아니다. 앞으로 널 알아보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닐 거야. 뮤직비디오에 니 얼굴까지 나왔다니 말이다. 학교에서, 거리에서 사람들이 널 알아보고 욕을 할 수도 있고, 손가락질을 할 수도 있고, 모함을 할 수도 있다. 이미 모함을 받는 수준인 것 같지만. 이런 소문은 사람들에게 어떤 선입견을 심어준다. 그래서 니가 제대로 해명하지 않는다면 너에게 ‘폭력’이나 ‘문제아’라는 꼬리표가 달리게 될 거다. 이 꼬리표가 언제까지 갈 거 같니? 인터넷이 존재하는 한, 니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고, 사회에 나갈 때까지도 그 꼬리표가 널 따라다니는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 앞으로 니가 살아가는 동안 만날 사람들이 모두 널 그렇게 바라본다고 생각해보거라. 그게 과연 쉽게 생각할 일이겠니? 어쩌면 누군가가 나서서 너에게 욕을 할 수도 있다. 그럴 때마다 넌 니가 한 짓이 아니다, 혹은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다, 라고 해명을 해야 할 거다. 그걸 앞으로 오랜 시간동안 그렇게 지내야 한다면, 넌 참을 수 있겠니?” “예전에도 제가 TV에 나온 적 있었는데, 사람들은 잘 모르던데요?” 헌영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축이더니 말을 이었다. “원래 사람들은 좋은 건 쉽게 잊어버린다. 그리고 나쁜 건 오래 기억하지. 독립 운동가는 잊지만, 매국노는 오래 기억하듯이. 선행으로 표창장을 받고 TV에 나온 사람의 이름은 몰라도, 강력 범죄를 저지르고 수갑을 찬 사람들은 오래 기억한다.” 단유는 잠시 숨을 고르는 헌영을 바라보다가, 물음을 던졌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헌영은 잠시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우리나라의 5월은 참 잔인한 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만 보면 한 달 내내 기분 좋은 일들만 가득해야 할 것 같고, 늘 상쾌함을 느껴야 할 것 같은데 사실 사람살이가 어디 그렇게만 되던가. 슬프고, 억울하고, 화가 나더라도 저토록 청명한 하늘을 봐야 한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했다. “너네 보호자란 분께서는 아직 아무 말 없으셨고?” “…그저께 경찰에 연락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저께라면 이 기사가 나기 전이니, 지금의 사태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다는 말이었다. “선생님 생각에는 적극적으로 해명을 해야 할 것 같다. 니가 폭력 사태를 벌인 것도 아니고, 그 영상도 사실은 싸움을 말리던 중에 찍힌 것이라고.” 말을 하면서도 헌영은 자신의 대답이 꽤나 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예인도 아닌데, 기자회견 같은 것을 할 수도 없는 일이고, 기자에게 말한들 과연 정정기사를 내 줄 것인가, 생각해보면 경험적으로 볼 때 그런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았으니까. “알겠습니다. 선생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려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지도요.” 과연 제대로 아는 것일까, 의심스럽기만 한 헌영이었다. 안다는 녀석이 저리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을까? “혹시 어떻게 할 건지 먼저 이야기해줄래? 이런 문제에 대해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담임으로서 학생이 더 큰 문제에 봉착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거 같으니까.” “음. 그냥 역순(逆順)으로 풀어나가면 될 거 같아요.” “역순?” “수학도 그렇잖아요? 답이 다르게 나오면 거꾸로 찾아가잖아요?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해결책도 나오겠죠.” 기발하다고 해야 할지,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헌영은 코코아를 입에 물고 옅은 웃음을 짓는 단유를 보며, 머리가 복잡해졌다. ======================================= [220] 어그로(6) 단유가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교실로 돌아올 때는 1교시 수업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곧 수업 종이 울리고 수업이 시작될 터라, 서둘러 교실로 돌아온 단유는 생각지도 못한 장면과 마주했다. “야, 말려! 말리라고!” “하지 마, 야! 야!” 복도에서부터 아이들이 몰려들어 있는데, 소란의 중심은 다름 아닌 3반 교실이었다. “내 놔! 내 놓으라고!” 그리고 그 소란의 가운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바로 명수의 목소리였다. 단유가 교실로 들어오기 10분 전. 단유가 선생님을 따라가고 난 뒤 교실에서는 아이들이 수군대는 소리로 가득했다. “단유 처벌 받는 거 아냐?” “바보냐? 걔가 왜 처벌을 받아? 무슨 잘못을 했다고?” “동영상도 있잖아?” “야. 그런 이유로 걔가 처벌받는 거면, 우리는? 우리는 괜찮겠냐?” 또 어떤 아이들은 이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하게끔 원인을 제공한 기사에 대해 떠들었다. “단유 걔 연예인 되려고 했던 거야?” “모르지. 근데 그 기사만 보면, 이제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거 아냐? 얼굴 다 팔렸는데, 어떻게 연예인 하겠어?” “그런데 걔 노래도 잘 부르나? 아이돌 하려고 그랬던 거야?” “모르지. 그런데 설마 노래까지 잘 부르겠어?” 이미 단유에 대해 생각이상으로 놀랬던 아이들이지만, 여전히 놀랄 게 남았다는 게 신기하기만 한 아이들이었다. 싸움, 공부, 영어, 게다가 얼굴까지 잘생겼으니 도대체 못하는 게 뭘까 싶었다. “졸라 꼴좋네. 새끼. 꼴값 떨 때 알아봤어.” 광종의 이죽거림에 앞에 앉았던 성구가 실실 웃었다. “거봐라. 내가 찍어놓길 잘했잖아.” “잘했다, 새끼야. 때려서 미안타, 됐냐?” 성구와 광종이 죽이 맞아서 히죽대는 와중에, 이들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너구나.” 돌아보니 같은 반이 아니었다. 광종이 ‘누구지’하고 머릿속을 되짚는 사이, 성구가 먼저 얼굴을 알아봤다. “어? 너 7반 아냐?” 명수는 성구를 향해 얼굴을 일그러뜨려 보이더니 손을 내밀었다. “내 놔.” “뭐?” “핸드폰. 너 그 때 우리 다 찍고 있었잖아. 방금 다 들었어.” 단유와 마찬가지로 명수도 이 사건이 벌어진 것에 대해 알지 못했다. 교실에 오고 나서야 난리가 났다는 것을 알고 뒤늦게 기사를 찾아봤다. 명수는 단유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다는 것에 분개했다. 그리고 앞뒤 안 가리고 교실을 뛰쳐나와 곧바로 3반에 쳐들어왔다. 명수의 목적은 하나였다. 그 때 영상을 찍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놈에게 본때를 보이는 것. 처음 소셜사이트에 업로드가 됐을 때도 벼르고 있었지만, 단유가 다독였기에 참고 있었던 것인데 일이 이렇게 벌어지고 나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눈을 뒤집고 3반에 날아든 명수는 단유가 없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챘다. 그리고 자신을 제지하는 손이 없으니 곧장 목표를 향해 갔다. 얼굴을 정확히 알진 못했는데, 마침 교실에 들어서서 둘러보는 와중에 들린 이야기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 “내 놔.” 명수는 일단 성구의 핸드폰을 뺏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 핸드폰 동영상 때문에 일이 이렇게 커졌으니, 증거로 삼아야 자기가 때린 명분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씨발 놈이, 니가 뭔데 남의 반에 와서 지랄이야!” 명수의 태도에 뿔이 난 광종이 먼저 도발을 했다. 명수가 먼저 주먹을 날리는 순간, 자신에게 기회가 생길 것이다. 단유가 그랬던 것처럼 주먹을 피하고, 반격을 가하면 명분도 생길 것이고. “이 싹바가지, 고릴라같이 생긴 게 왜 끼어들어?” 하지만 진짜 도발은 명수에게서 시작되었다. 사실 명수는 욕을 잘 했다. 그동안 수백 번의 시합을 하면서 깨끗한 승부만 했을 리가 있나. 거친 몸싸움과 시비를 거치며 명수는 나름 도발에 대응하는 방법을 체득한 베테랑이었다. “뭐? 고릴라?” “뭐, 왜 쳐다보는데? 사람 같지 않게 생긴 놈이.” “이 새끼가!” 광종이 의자를 뒤로 밀치면서 벌떡 일어나 명수와 마주섰다. 교실 뒤편에서 난 소란에 반 아이들이 뒤늦게 사태를 눈치 챘다. “야, 뭐야? 뭐야?” “또 싸우는 거야?” “씨발, 말려. 좀!” 아이들이 몰려드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물러서지 않았다. “X같은 게, 죽고 싶냐?” “미쳤냐? 너 같은 삼겹살한테 죽게?” “아오, 이 새끼가!” “혓바닥에 오줌을 발랐냐, 아침에 똥을 처먹었냐? 냄새 난다, 새끼야.” 광종의 얼굴이 붉어지는데, 타이밍 좋게 아이들이 뛰어들었다. 이제 더 이상 싸움을 방관할 수 없는 아이들이었다. “야, 안 놔? 안 놔, 새끼야!” “참아. 안 돼! 지금은 안 돼!” “놔 봐, 안 싸워, 안 싸운다고.” 강제로 두 사람 사이가 멀어졌지만, 입씨름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런 소란 때문에 옆 반의 아이들까지 복도로 나와 3반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구경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단유가 나타난 것이다. “명수야, 너 왜 여기 있어?” “저 새끼가 그 때 동영상 찍은 놈이잖아. 저 놈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거잖아. 저 놈 손 안 보면 오늘 잠 못 잘 거 같다.” 단유는 이마를 잠시 짚었다가 고개를 들었다. “명수 놔줘.” 단유의 말을 들은 아이들이 명수를 놔줘도 될까 주춤하다가 재차 단유의 말이 이어지자, 명수는 아이들의 손에서 풀려났다. “명수, 넌 니네 반에 돌아가.” “왜! 싫어. 저 놈을 내가 꼭….” “명수야.” “…….” 단유를 바라보던 명수가 아랫배에서 끌어올린 듯 깊은 한 숨을 토해내더니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 알았다, 알았어. 그냥 가만히 있을게.” 그 때 눈치 없게 광종이 끼어들었다. “씨발 놈아, 가긴 어딜 가! 개새끼, 넌 오늘 내가 죽인다!” 단유가 고개를 돌려 광종을 바라보았다. 단유와 눈이 마주친 광종은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광종을 붙잡고 말리던 아이들도 광종의 변화를 눈치 챘다. 단유는 광종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붙잡힌 터라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광종은 바싹 마르는 입술을 꽉 깨물며 버틸 뿐이었다. 사실 단유가 다가오는 순간 광종을 붙잡고 있던 아이들이 손에 힘을 풀었지만, 그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광종이었다. “광종아.” “뭐, 뭐 새끼야.” “내가 나중에 보자고 했었지?” “…….” “그게 지금 보자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할 말이 생겼어.” 광종은 지금 이 순간이 굉장히 쪽팔린 순간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그렇게 느끼는 것과 달리 몸은 전혀 움직이질 않았다. 마치 몸이 자기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이유가 뭐지? 광종의 눈을 잠시 응시하던 단유가 시선을 돌렸다. 단유의 시선이 옮겨진 곳에 있던 성구가 움찔거리며 한 발 물러섰다. “너 그 때 찍은 동영상, 아직 있어?” “으?” 뭔가 입에서 대답을 해야 하는데, 입이 제대로 벌려지지 않아 저도 모르게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그 사실을 인지한 성구의 얼굴이 원숭이 엉덩이보다 빨갛게 변했다. “그 영상 나한테 다 보내줄래?” “어? 어.” “지금 보내줄래?” 성구가 당황해하면서도 핸드폰을 조작해 동영상을 전송하려고 하다가, 용량이 너무 크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안하다는 얼굴을 했다. “용량이 너무 커서….” 단유가 볼을 긁적이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근처에 지태가 보였다. “지태야, 어떻게 해야 돼?” 대답은 채윤이 했다. “그거 이걸로 받으면 돼.” 채윤이 호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조그만 USB였다. 모바일 전용 USB디스크였는데, 채윤이 보충 설명을 했다. “이거 그냥, 애니메이션만 있는 거야.”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굳이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단유는 채윤에게 부탁을 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광종아.” “…….” “우리, 반에서는 주먹질하지 말자. 분위기 안 좋잖아? 그리고 너한테도 좋을 일 없고. 잠깐 기분이 상해서 그럴 수 있겠지만, 되도록 참고 대화로 해결하려고 해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하는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는 광종이었다. 아니 대부분 아이들이 광종과 같은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먹으로 해결하려는 건 지양하도록 하자. 만약 폭력을 썼는데 그게 인터넷에 이야기가 올라가면, 평생 남는다더라. 그럼 평생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아야 하고, 평생 해명하며 살아야 한다고 하더라. 그렇게 평생을 살 순 없잖아?” ‘그거 니 이야기잖아!’ 모두의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단유가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띠며 광종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단유의 손이 닿을 때마다 광종이 움찔거렸지만 그 누구도 그 모습을 비웃지 않았다. “싸움이란 거 하지 마. 난 여태까지 감옥에 가는 게 가장 큰 벌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까 인터넷에 이름이 올라가는 게 가장 큰 벌인가 보더라고. 우리, 아니 너희들도 다들 조심해.” 뭔가 묘하게 핀트가 벗어난 대화가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단유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르지 않는 아이들은 대꾸하지 않았다. 채윤이 단유에게 동영상을 다운 받은 USB디스크를 건넬 때, 수업 종이 울렸다. “명수야, 너도 사고치지 말고.” “알았어. 수업 잘 들어.” 명수가 한 차례 손을 흔들고 반으로 사라졌다. **** “그래서 동영상을 구했는데요, 이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요. 누나가 이런 거 잘 알지 않을까 생각해서 전화 드렸어요.” 핸드폰 스피커가 찢어질 정도로 큰 한숨소리가 들렸다. “왜 그러세요?” ―이런 일 아니면 누나한테 전화할 일도 없겠지, 라는 생각이 들어서. 도대체 보호자라는 사람이 아이들한테 신경도 안 쓰고 사는데다가, 일이 터져도 제대로 처리해주지 못하니까 한심하고 답답하고 그렇지? 그래서 전화도 안 하고 이야기도 안 하고 그런 거지? 주영의 넋두리를 계속 들어주고 싶지 않았던 단유는 단호하게 주영의 말을 끊었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전화를 안 했던 건, 굳이 일하는 누나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괜히 저희들 때문에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 ―너흴 신경 쓰는 게 내 일이거든? 전화 안하는 게 오히려 더 큰 방해라고!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한숨소리가 들린 뒤 주영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동영상을 구했다고? 싸우는 장면만 편집된 거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찍은 영상이에요. 이거면 진실은 규명되는 거잖아요?” ―그래. 그거면 일단 너에 대한 사람들의 여론은 바꿀 수 있을 거야. 증거가 있으니까. 그리고 정정보도 요청도 하고, 변호사도 고용해서 악성 댓글을 다는 사람들 모두 본 때를 보여주면…. “저기요.” ―응? 단유는 핸드폰을 쥐고 있던 손을 바꾸며 말을 이었다. “그 악성 댓글 다는 사람들을 고소한다는 거 말이에요. 안 하면 안 돼요?” ―왜? 그 놈들이 너한테 무슨 말을 하는지 아니? “그건 모르는데요. 근데 중요한 건 그 사람들이 오해를 한 거잖아요? 오해해서 싸우는 사람도 있는데, 오해 때문에 욕하는 거 정도는 있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니가 정말 댓글을 안 봤구나. 그런 오해 정도로 쓰는 사람들을 말하는 게 아냐. 내가 말하는 악성 댓글이란 건 허위 사실을 유포하거나 심각하게 명예를 훼손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거야. 어떤 사람들은 니가 그 동네 일진이라서 너한테 돈을 뺐긴 사람도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고. 더 심한 것도 있고. “그래요?” 그 정도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없는 사실도 만들어서 퍼뜨리는 사람도 있다니. 단유는 인터넷이란 곳이 정말 신기한 곳이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저 현실의 일을 기록해서 잊지 않게 하는 건 줄만 알았더니, 없는 사실도 만들어서 기록해 놓는다면, 그리고 그 사실이 지워지지 않는다면 상황이 심각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건 누나가 알아서 해 주세요. 그리고 누나, 저….” ―뭐? “아, 아니에요. 그냥 알아서 처리해주세요. 동영상은 어떻게 드릴까요?” ―저녁 때 내가 찾아갈게. 이번에 너 얼굴도 좀 보고 혼 좀 내야 겠어.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느껴져 단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명수도 같이 보는 거죠? 명수 좋아하겠네요?” ―명수가 왜 좋아하는데? “명수는 누나 만나는 거 되게 좋아해요. 몰랐어요?” 주영이 올 때면 늘 맛있는 간식을 사들고 오기 때문에 명수는 주영을 좋아했다. 저녁 때 만나기로 약속을 정한 뒤, 통화를 마쳤다.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넣고 단유는 두 손을 뒤로 뻗고 상체를 살짝 뒤로 젖혔다. 점심시간, 배도 부르고 바람은 따뜻하고 문제도 잘 해결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아, 이번에 인터넷이란 거 좀 알아볼까?’ 그동안은 명수가 핸드폰으로 보여주는 것만 잠깐씩 봤을 뿐이어서 연예기사나 동영상 사이트를 탐색하는 정도로 이해했던 인터넷이었다.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니, 앞일을 위해서도 좀 더 연구해 볼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글이 올라온 사이트가 어딘지 명수에게 물어보면 되려나?” 한 때 핸드폰 게임에 빠지기도 했고 드라마에 빠지기도 했던 명수였지만, 축구부에 가입한 이후 다시 축구에 미쳐 살고 있었다. 그런 명수가 자신보다 더 잘 알까, 의문이 들었지만 단유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눈을 감았다. 아이들이 뛰어 노는 운동장을 한 차례 돌고 나온 따뜻한 바람이 단유를 살포시 안았다가 놓아주고 있었다. ======================================= [221] 유령(1) 그 날 저녁, 단유는 그동안 집에 있었지만, 제대로 써 본 적 없던 컴퓨터를 켜고 하루 종일 키워왔던 호기심을 풀어보기로 했다. 모니터에서 나오는 밝은 빛이 단유의 얼굴을 오래 비출수록, 단유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갔다. ―얘 어릴 때부터 우리 동네에서 유명했어. 툭하면 애들 삥 뜯고 중학교 형들이랑 같이 어울려 다니면서 행패는 다 부리고 다녔어. 책 읽을 시간도 부족해서 교실이나 방에서 나가지 않는 단유가 언제 밖을 싸돌아다녔단 말일까? ―꼴값한다고 학교 여자애들 다 건드리고 다녔어. 어릴 때부터 발랑 까진 애였던 것! 여자애들을 건드려? 왜? 그 시간에 미분 방정식을 한 번 더 건드려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안 그런 고아들도 있겠지만, 가정에서 채우지 못한 욕구 불만을 바깥에서 푸는 종족이 있음. 이 새끼도 딱 그런 종족임. 각이 나오네. 단유는 글을 읽으면서 생소한 경험을 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책들을 읽으면서 세상을 알아왔던 단유였다. 게다가 폭력을 쓰기 이전에 대화를 통해 갈등을 푸는 것이 바른 방법이라고 배우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지금 댓글을 읽는 동안, 단유는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불쑥 튀어나오려는 생소한 감정을 억누르느라 애를 써야 했다. 몇 줄의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게 만들다니. 단언컨대 단유는 단 한 번도 이렇게 악의에 찬 글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대화를 나눠도 이런 감정에 치우친 대화는 나눠본 적이 없었다. 거친 욕설을 입을 담으며 극한 대립 상황에 서 본적도 있긴 했지만, 이렇게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사람들이 자길 향해 악의에 찬 말을 던지는 경우를 상상해 본적이 없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관심도 갖지 말고, 읽지도 않았다면 좋았을 걸. 학교에서 따뜻한 바람을 쐬며 상쾌함을 느꼈던 것이 마치 거짓말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아마 이런 것 때문에 주영이나 담임선생님이 걱정을 하셨던 것이리라. “뭐 하니?” 마침 집으로 주영이 찾아왔다. 단유에게서 동영상을 받을 겸, 얼굴도 보면서 혹시 울적해한다면 달래줄 겸 해서 찾아온 주영은 역시나 평온한 얼굴의 단유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유가 본래 멘탈이 좋은 아이라는 것도 있지만, 인터넷을 거의 하지 않는 아이였기에 이런 소동에 무감각한 것이리라. 주영은 앞으로 진행될 일들, 예를 들면 경찰에 명예훼손죄로 고소한다거나 민사소송을 걸어서 본 때를 보여준다거나 하는 일들을 일러주었다. 단유는 다른 것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애초에 법을 통해 일을 처리하는 방식은 자신이 관여할 부분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고, 지금은 다른 것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도 저기에 글 써도 돼요?” 댓글러가 되려 하는 단유의 태도에 잠시 당황한 주영은 댓글을 다는 것, 혹은 인터넷에 글을 남기는 행위가 이번 사례에서 보듯이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얘기했다. 그런 전제 하에서라면 굳이 막을 이유가 없던 주영이었다. 영상을 확인하고 자신의 클라우드 계정에 옮긴 주영은 혹시라도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꼭 연락을 달라는 당부를 남기고 돌아갔다. 법적인 문제가 생기지 않는 선에서,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 자신의 호기심을 풀 수 있는, 꼭 필요한 말만 남겨야 한다면, 그 말은 어떤 것일까? 단유는 이것저것 고민하다가 결국 짧은 한 마디를 남겼다. ―저 아세요?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아무 말이나 쓸 수는 없었고, 대화라는 게 그렇듯이 상대가 어떤 대답과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자신의 대화법도 바뀌게 된다.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자니,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을 잘 모르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어떤 생각으로 이런 글을 썼는지를 단유는 전혀 모르기 때문에 가벼운 대화의 시작으로 저 물음을 던졌다. ‘저’라는 물음 속에 자신이 게시물의 주인공인 ‘단유’임이 드러나고, ‘아세요?’라는 물음에서 대화를 하려는 의도를 보였으니 곧 상대의 대답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대답에 맞춰 대화를 나눠보면 되리라. 하지만 그 날 자정이 되도록 대답이 없었다. 거실에서 모니터 빛을 쐬고 있던 단유를 본 박 선생님이 억지로 방으로 데려다 놓은 뒤에야 단유의 첫 인터넷 댓글러 체험이 끝이 났다. 얼마 뒤 각 사이트에 영상이 하나 올라왔다. 무편집본이라는 이름으로 올라온 영상은 당시 학교에서 일어난 싸움과 그 싸움을 말리려는 아이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편집본에서도 그랬지만, 워낙 좋은 핸드폰으로 찍어서 그런지 사람들의 얼굴이며 목소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얼굴에는 모자이크가 되어 있었다. 「해당 영상을 통해 진실이 규명되길 바라며, 아울러 초기 편집 영상 게시물에 악성 댓글을 단 네티즌들을 일괄 고소하였음을 밝힙니다. 또한 편집 영상의 내용만으로 추측성 기사를 쓴 XX기자 역시 고소하였습니다. 향후 해당 영상의 누군가를 대상으로 악의적 댓글이나 허위사실을 적시하는 이가 있을 경우, 즉시 고소 및 민사소송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과연 주영의 힘은 대단했다. 살짝 재단의 힘을 과시한 듯도 하지만, 구체적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인터넷에는 ‘마녀사냥’에 대한 토론이 펼쳐졌지만, 곧 다른 이슈들에 묻혔다. ****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돼요?” 얇은 금테 안경을 추켜올릴 틈도 없는지 손바닥을 비비며 잘못을 구하는 남자는 회사에 반차를 내고 경찰서로 달려왔다고 했다. 전날 저녁 출두요구서와 함께 송달로 도착한 고소장에 정신이 반쯤 가출 나간 상황이었다. 스트라이프 정장 차림의 붉은 하이힐을 신은 주영은 팔짱을 풀지 않은 채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서 꾹 참는 중이었다. “진짜 아무 생각 없이, 아니 그냥 남들이 그렇게 말하기에 진짜인 줄 알고 그런 거예요. 일부러 그런 거 진짜 아니에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 라고 따지고 들고 싶었지만 주영은 그렇게 말하는 대신 눈가를 좁혔다. 하지만 주영 대신 그 사람에게 물음을 던진 이는 바로 단유였다. “저기요?” “으응? 아, 미안하다. 진짜 미안하다. 내가 잠깐 심심해서 그냥 장난치듯이 한 거야. 장난으로 한 걸, 죽자고 달려들면 안 되잖아? 응? 너도 많이 해 봤을 거 아냐? 장난 같은 거?” “아니요.” 단호한 대답에 남자는 입을 다 물었다. “저기요?” “으으?” “저 아세요?” “…아니.”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터넷에서는 물어도 대답을 안 해주더니 얼굴을 마주하고 물으니까 대답을 해 준다. ‘역시 대화란 서로 마주보고 해야 하는 거구나.’ 사실 댓글을 다는 이들의 주 활동시간이 심야시간대였기에 단유가 기다렸던 시간대와 달라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었지만, 이를 단유가 알 수는 없었다. “진짜 장난으로 하신 거예요?” “응? 진짜야. 정말이야. 그냥 서로 웃자고 하는 소리잖아? 농담처럼.” “아무런 의도도 없고요?” “그럼 의도 없었어. 없었다니까?” 단유가 손에 든 복사지를 보면서 물었다. “여기에는 제가 여자애들 다 건드리고 다니는 종마 같은 놈이라고 적혀 있는데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누나한테 물어도 대답을 안 해 주던데.” 남자는 힐끗 주영을 바라보다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옆에 있던 형사도 팔짱을 끼고 남자의 촌극이 어떻게 진행되나 구경하는 자세였다. 애초에 저 복사지도 자신이 건네 준 것이었으니 구경하는 재미는 있었다. “아, 저기 그게 말이야.” 바싹 마르는 입술을 닦으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눈앞의 아이는 어떻게 보면 순진한 얼굴로, 어떻게 보면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처럼 태연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다 볼 뿐이었다. “저기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될까?” “대답부터 해 주시면 안돼요?” 고집스럽게 대답을 듣고자 하는 아이였다. “야,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래? 그게 뭐? 그거 그냥 조크잖아!” 남자가 자신이 처한 상황도 잊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물론 지른 순간 깨달았다. 내가 미쳤구나. 단유는 복사지를 형사에게 건네주었다. “아저씨, 제가 아직 어리긴 하지만 그래도 준법정신이란 게 뭔지는 배웠거든요? 우리나라는 사회의 영속과 발전을 위해서 법을 지켜야 하는 사회에요. 아저씨는 그걸 어긴 거구요. 그게 잘못이에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냥 웃자고 쓴 글이잖아!” “제가 만약 웃고 싶어서 아저씨를 고소하는 거라면요?” “…뭐?” “아저씨가 웃자고 쓴 글이라면서요? 저도 제가 웃고 싶어서 아저씨를 고소하는 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야, 경우가 다르잖아! 이건!” “그걸 설명해 주세요. 어떻게 경우가 다른 건지.” “…….” “아저씨의 경우와 저의 경우가 어떻게 다른 건지 설명해 주세요. 납득이 가도록.” 남자는 깨달았다. 이 아이, 보통 말빨이 센 아이가 아니구나. 자신의 빈약한 논리로는 저 아이에게 어떻게 대항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저씨는 법을 어겼대요. 사실 저도 그게 법을 어긴 건 줄은 몰랐지만요. 다른 건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법을 어기고 살면 안 되잖아요. 법을 어겼으니 처벌을 받는 건 감수하셔야죠. 그래도 심한 벌은 아니라니까 그건 위로가 될 듯 하네요.” 놀리는 것도 아니고 뭐야, 싶은데 형사가 툭툭 어깨를 쳤다. 아래를 가리키는데 자기 앞에 놓인 그것은 진술서였다. “지장 찍어요.” **** 오늘 하루 동안에만 5명의 사람을 만났다. 금테 안경을 쓴 남자가 5명 째 였는데, 하나같이 단유의 물음에 답을 하지 못했다. 스스로가 궁색한 변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정론적인 단유의 물음에는 답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제 속이 좀 풀려?” 주영이 음료수를 하나 건네며 물었다. 어느새 늦은 저녁이 된 시간, 경찰서 로비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들락날락 거렸다. “풀릴 것도 없고, 그냥 그래요. 사실 아무도 대답을 제대로 해 주질 않았잖아요. 누나나 형사님도 대답 잘 안해주시더만.” “그런 니가 알아서 좋을 내용이 아닌 것들만 물으니까 그렇지.” ‘종마’나 ‘조폭’같은 용어는 물론이고, 온갖 욕으로 도배된 글들, 혹은 성드립이 판치는 댓글들의 의미를 묻는데 어찌 대답해줄까. “그리고 혹시 하는 말이지만, 그거 전부 알아서 좋을 거 없으니까 알려고 들지 마. 그런 것까지 호기심가지고 찾아보는 건 안 좋아. 알았지?” “확답은 못 드리겠지만, 노력해 볼게요.” 오렌지 주스를 들이키며 대답하는 단유였다. “몇 명 남았어요?” “14명 정도? 그런데 그 사람들은 아마 더 늦게 오던지, 아니면 내일 올 거 같아. 넌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고. 다 만나야 하는 건 아니잖아?” “다 만나보고 싶긴 한데, 그것도 참을게요.” 악의를 가진 사람들의 진면목을 일일이 확인하고 싶었다. 사실 단유에게 악의를 가진 이라면 예전 감옥에서 만나 자신을 고문하던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게 했었는데, 이곳에서 만난 이들의 얼굴은 의외로 평범한 얼굴들이었다. 나이도 많게는 45살부터 자기 또래 아이까지. 길에서 오다가다 만날 법한 얼굴들이 그런 악의를 내보였다는 게 믿기지 않았던 단유였다. “참 사람이란 다양한 것 같네요.” 오렌지 주스를 다 비운 뒤, 한참을 멍하니 있다 꺼낸 말에 주영이 단유를 돌아보았다. “저 사람들 감옥에는 안 가는 거 맞죠?” “아마 그럴 거야. 초범인 경우에는 대부분 가볍게 벌금 정도로 끝난다고 하더라고. 그것도 몇 십만 원 선에서.” “다행이네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주영 역시 단유의 말에 진심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알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왜?” “…감옥은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니잖아요.” 감옥에 가는 것만 아니라면, 심한 벌은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는 단유였다. 반면, 마치 감옥에서 살아본 것처럼 말하는 단유의 말에 주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 겨우 14살이 된 단유가 감옥은 물론이고 유치장이라도 가봤을 리 있을까? 그저 애가 아직 순수하고 착해서 저런 말을 했겠지, 라고 걸러들은 주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집에 갈 시간이야.” “네.” 단유는 다 마신 캔을 구석에 놓인 파란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경찰서를 빠져나왔다. 시원한 저녁 바람이 단유의 앞머리를 쓸고 지나갔다. ======================================= [222] 유령(2)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 방송 무대 녹화를 마친 후, 갤럭시즈는 형식적인 환호를 보내는 방청석과 제작진들에게 90도로 허리를 꺾어 인사를 하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대기실로 가는 짧은 시간 동안 수십 번 허리를 꺾으며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인사를 하다가, 마침내 대기실로 돌아와 문이 닫힌 후에야 다섯 사람은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조금 있다가 다시 나가야 하니까, 긴장 풀지 말고 있어.” 실장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한 마디 뱉은 후, 대기실을 나갔다. “대기실에서까지 긴장을 풀지 말라는 게 할 소리야?” 예영의 투덜거림에 지수가 눈빛을 쏘아 보냈다. 찔끔 놀란 예영이 입을 다물고 눈치를 보았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막방인데도 오빠가 없으니까, 조금 섭섭하네.” 물론 섭섭함의 대상은 태호가 아니었다. 갤럭시즈 멤버들은 모두 태호가 피해자라고 생각했으니까. 드러난 피해자가 단유였다면, 드러나지 않은 피해자는 매니저, 태호였다. 말은 대기 발령이었지만,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대기발령이란 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암묵적인 퇴사 명령과 같았다. 덕분에 회사에 대한 불만이 커져가는 갤럭시즈였다. “배고픈데 뭐 먹을 거 없나?” 어차피 이제 방송도 없고, 스케줄도 없다. 간간히 들어오는 지방행사마저도 자숙의 의미로 모두 캔슬을 시킨다는 회사 측의 방침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별 수 있는가. 아직은 어떤 목소리도 낼 수 없는 2년차 신인 걸그룹의 비애였다. “언니, 오늘 술 한 잔 할까?” 명지가 슬쩍 수영에게 달콤한 제안을 하자, 모두의 시선이 수영에게 몰렸다. 미성년자가 포함된 걸그룹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갤럭시즈에는 미성년자가 없었다. 그보다, 애초에 스케줄이 없으면 회사에서 특별한 관리도 하지 않는 갤럭시즈였다. 좋게 보면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이고, 솔직히 말하면 소속사가 자기 일을 제대로 못하는 셈이었다. 다행히 갤럭시즈의 멤버들이 모두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는데다가 리더가 멤버들을 잘 다독인 덕분에 아직까지는 크게 일탈하지 않은 이들이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아무래도 곱게 집에 들어가긴 글렀다. “그러자. 간 김에 오빠도 불러서 한 잔 하자.” “콜!” 그 때, 대기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조연출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클로징입니다. 다들 나오세요.” “네.” 갤럭시즈는 의상을 점검하고 무대로 향했다. 많은 아이돌 그룹들이 붐비는 가운데 서열상 가장 뒤에 설 이들은 1위가 정해지고 앵콜곡을 부르는 그 순간까지 뒤에서 박수를 쳐주다 돌아오는 임무를 맡았다. 언젠가는 박수를 받는 갤럭시즈가 되길 바라며 다섯 사람은 무대 위에 올랐다. **** “저녁 때? 알았어. 먼저 가서 자리 잡고 있어. 나? 난 일이 좀 있어. 그래, 그럼 나중에 보자.” 태호는 전화를 끊고 잠시 놓았던 조이스틱을 집어 들었다. “야! 치사하게 그럴래? 형 전화 받는데 그 순간을 노려?” “원래 경기는 심판이 휘슬 불기 전까지 계속 하는 거예요. 몰랐어요?” 명수가 뻔뻔하게 자신을 합리화하며 곧 슛버튼을 눌렀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태호가 허둥댈 때, 공은 골대를 가르고 있었다. 화면 속 축구 캐릭터가 세리머니를 펼치는 동안, 명수도 두 손을 흔들면서 세리머니를 펼쳤다. 단유에게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기 위해 찾아온 태호는 오히려 단유로부터 위로를 받았다. “전 괜찮아요. 고소도 하고, 소송도 하고, 그렇게 할 수 있지만, 형은 그렇게 못하잖아요.” 억울해도 그걸 풀 길이 없는 태호의 처지를 이해한다는 듯한 단유에게 고마움을 표시한 태호는 그 후로 아이들이 하교하는 시간에 맞춰 집으로 찾아왔다. 게임기를 하나 사들고 나타난 태호 덕에 명수는 신이 났고, 박 선생님은 아이들 공부시간 뺏는다며 열을 냈다. 하지만 며칠간 집 분위기도 그렇고, 태호라는 매니저의 마음도 이해 못할 부분은 아닌지라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형 어디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 저녁에 갤럭시즈 애들이랑 술 마시려고.” 명수가 끼어들었다. “저도 가도 돼요?” “못 들었니? 술 마신다고. 미성년자는 출입 불가!” 그게 뭐 대수로운 일이라고 명수는 풀이 죽고 태호는 의기양양한 웃음을 띠었다. 거실 한 켠에서 인터넷을 하던 단유가 말했다. “위로 좀 해주세요, 누나들.” “반대로 된 거 아니냐? 지금 위로받을 사람은 너라고.” “전 괜찮잖아요. 그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한들 저한테 피해가 가는 것도 아니고. 대신 누나들은 뮤직비디오도 방송에 못나간다면서요?” “지금은 풀렸을 거야. 너희 보호자 분들이 워낙 힘이 좋으셔서.” 애초에 방송 심의에 걸리지도 않았건만, 회사 차원에서 뮤직비디오 송출을 막았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또 기사화시켜서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격으로 일을 크게 키우기도 했었다. 하지만, 최초 기사를 쓴 기자를 고소하면서 회사는 지레 겁을 먹고 지금까지의 방침을 모두 철회했다. 물론, 소형 기획사의 방침이 어찌되든 신경 쓸 방송사는 없었지만. “그리고 애들한테 할 말 있으면 직접 전화해.” “활동기간이라 전화 못한다면서요?” 아, 그랬지. 태호가 쑥스러운 듯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이제 괜찮을 거야. 활동 끝났으니까.” 활동이 끝났음에도 활동 종료 기사 한 줄 나지 않는 인지도 폭망의 걸그룹 갤럭시즈의 매니저, 태호는 마지막 방송 날에도 남의 집에서 게임이나 하고 앉아 있었다. 단유는 그 사이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통화를 끝낸 단유가 태호에게 말했다. “이리로 온대요.” “응?” “형, 여기 있다고 하니까, 이리로 온다는데요?” “애들 참.” 단유 때문에 태호가 한눈을 판 사이, 명수가 또 한 골을 넣었다. “예이!” 명수가 두 손을 들고 단유에게 다가왔다. 단유가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해 주었다. **** “광종아, 이리로 좀 와봐라.” “예.” 구석자리에 앉아있던 광종이 벌떡 일어나 상석에 앉은 선배에게 다가갔다. “광종아.” “네, 선배님.” 사복을 입은 선배가 담배를 입에 물자, 얼른 라이터를 집어 들어 불을 붙여 주었다. 길게 담배 연기를 뿜어낸 선배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광종이 고개를 숙이자, 그 위로 손이 얹어졌다. “요새 많이 힘들 다면서?” 머리 위를 토닥거리는 선배의 손길이 수치스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광종이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니긴. 너 발렸다는 소문이 장계동 전체에 다 퍼졌던데? 잘 하면 저기 일산까지도 소문나겠더라?” 광종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지만, 다행히 실내가 어두워 티는 잘 나지 않았다. “아닙니다. 그 때는 제가 잠깐 방심해서 그런 겁니다.” “그래가지고 1학년을 너한테 맡길 수 있겠냐? 재중아, 안 그러냐?” “그렇습니다, 형님.” 2학년 일진의 자리를 맡고 있는 재중이 선배의 말에 동의를 표시했다. 이 자리에 앉은 선배들만 모두 15명 가까이 되었다. 1학년은 고작 4명. 서열상 가장 낮은 자리인 광종은 그나마 4명 중에서는 주먹으로 최고라고 자부했건만, 지금은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 상태였다. “우리가 안 도와주면 힘들겠어?” “아닙니다. 혼자 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런데 왜 아직도 애들이 널 못 믿냐?” 광종은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단유에게 졌다는 이미지가 너무 크게 작용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누군가와 싸움에서 진 아이가 학년에서 일진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선배의 말은 왜 빨리 일을 해결하지 못하냐는 추궁이었고 압박이었다. “하겠습니다. 곧 하겠습니다.” “7월 되면 할래? 방학 되고 애들 없을 때 하려고?” “아닙니다! 그 전에 하겠습니다.” 선배가 담배 연기를 광종의 얼굴로 뿜었다. 잠시 숨을 멈추고 담배연기가 흩어지기를 기다리다 조금씩 숨을 내뱉고 들이쉬었다. 선배의 눈빛이 날카롭게 광종의 미간을 찔러댔다. “지켜본다, 광종아.” “네, 선배님.” “방학 때 내 생일 있는 거 알지?” “네, 선배님.” “선물 기대해도 되지?” “네, 선배님.” 선배는 광종의 뺨을 톡톡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다시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90도로 인사를 하고 돌아선 광종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이윽고 천장의 사이키 조명이 돌아가며 방 안에 화려한 불빛이 비춰지기 시작했다. 싸구려 스피커를 통해 노래방 반주음악이 나오고 곧 선배들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막간을 이용해, 광종에게 압박을 가했던 선배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음을 질러가며 노래를 불렀고, 광종을 비롯한 후배들이 각종 후렴구와 박수, 환호를 질러가며 분위기를 맞춰주었다. 그 때 옆에 앉아 있던 또 다른 선배가 광종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돌아보니 선배가 귓가에 대고 소리쳤다. “맥주 사와.” 그 즉시 광종은 돌 맞은 개구리처럼 펄쩍 뛰어 방을 나왔다. 으슥한 분위기의 복도를 걸으며 광종은 몰래 한숨을 쉬었다. 일진이 되는 이유, 되어야 하는 이유. 모두 돈 때문이었다. 돈이 있어야 분기별로 생일을 맞는 대선배의 선물도 사고, 돈이 있어야 맥주도 사는 것이었다. 그런데 광종의 현재 처지로서는 돈을 수금(!)하기가 영 곤란했기에, 선배들이 신경을 쓰는 것이었다. 돈도 못 벌어오는 후배 따위는 효용가치가 없으니까. **** “오랜만이다. 단유야!” 왁자지껄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들어오는 갤럭시즈를 보며 단유는 밝게 웃음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저들의 웃음이 다소 과장돼 보이기는 하지만, 굳이 그걸 짚을 필요는 없으리라. 사시사철 늘 맑을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사시사철 늘 맑은 티를 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기에 그들의 웃음에 섞인 묘한 감정도 이해를 해줘야 하리라. 이전이라면, 이렇게까지 그녀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단유였지만, 최근의 일을 겪으며, 또 인터넷을 통해 자신뿐만이 아니라 그녀들까지 덩달아 욕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들이 어떠한 처지에 처해있는지를 깊게 숙고할 수 있었던 단유였다. 태호에게도 말했었지만, 자신은 자신을 손가락질 하는 사람을 고소할 수도 있었고, 신고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녀들은 철저히 회사의 관리 속에서 움직여야 하는 이들이었고, 그런 속박을 겸허히 받아들여야만 하는 직업이었기에 설령 불공평하고 불만족스럽더라도 자기처럼 마음대로 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니 지금 그녀들의 웃음 뒤에 가려진 저 모습들을 보고 누가 가식적이라고 욕할 수 있을까. “우리 단유 많이 힘들었지? 우쭈쭈.” “술 드시고 오신 건 아니죠?” “어머, 얘 좀 봐? 누나들이 위로를 해준다는데 기껏 한다는 얘기가 그거니?” 별 거 아닌 이야기에도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들이 고맙기도 했다. 힘들고 아파도 티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서 저리 마음을 써주는 것이 고마웠다. “음료수 좀 드릴까요?” “그럼 고맙지.” “술도 깨실 겸.” “야, 우리 술 안마셨어!” “알았어요. 그렇다고 쳐요.” 단유가 그 답지 않게 농담을 하는 모습을 보고 놀란 이는 오직 명수와 박 선생님 뿐이었다. 그렇지만 단유가 나름 저 사람들을 마음으로 허락했기에 저런 농담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저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갤럭시즈 멤버들은 태호를 옆에 두고도 단유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집중했다.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단유를 걱정했었는지, 그리고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라는 이야기를 하며 단유를 위로했다. “누나들이야말로 걱정 많으실 텐데, 왜 절 걱정하고 그래요. 괜히 제가 더 미안하잖아요. 저만 아니라면 노래 대박 났을지도 모르는데.” “무슨 소릴. 우리 노래 원래 안 좋았어.” “야, 하수련!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뭐? 내가 틀린 말 했나?” “아니, 맞는 말.” 갤럭시즈 멤버들은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태호의 얼굴이 살짝 굳었지만, 금방 풀렸다. 대신 속으로 갤럭시즈에게 사과했다. 어쨌든 곡을 잘못 선택한 것도 매니저의 실수나 다름없으니까. 자기가 좀 더 발로 뛰고 노력해서 좋은 작곡가, 좋은 작사가와 선을 연결했어야 했는데. 이번 활동은 여러 가지로 미안한 일이 많았고, 반성할 일이 많았다. 그럼에도 속이 답답한 이유는, ‘내가 다시 이 아이들을 맡을 수 있을까.’ 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처럼 웃고 떠드는 멤버들 앞에서 얼굴을 굳힐 순 없는 노릇이었기에, 같이 맞장구치며 웃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단유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 [223] 유령(3) 나쁜 놈들은 나쁜 쪽으로 머리를 잘 쓴다고 들었다. 어디 듣기만 했던가. 선배들이 하는 짓을 보면 어떻게 저런 방법을, 이란 생각이 절로 들 때가 많았다. 숱하게 나쁜 짓을 저지르면서도 단 한번 걸린 적 없는 걸 보면 확실히 배울 게 없진 않은 선배들이었다. 나쁜 놈들은 나쁜 쪽으로 머리를 잘 쓴다. ‘그리고 난 나쁜 놈이지.’ 객관적(?)으로 봐서 자신은 나쁜 놈 축에 낀다고 할 것이다. 담배 빼고 나쁜 짓은 다 하고 다니는 것 같으니까. 길 가는 사람한테 시비걸기―물론 자신보다 어리고 약해보이는 대상, 후배들 삥 뜯기―정기적으로 헌납을 받기도 하지만, 뒷골목에서 주먹 한 번 쥐어 보이고 옆구리 한 대 때리면서 받는 돈이 더 효과적이고 재미있다, 술 마시고 행패부리기―솔직히 아직 술 맛은 잘 모르겠지만, 알딸딸해지며 유쾌해지는 느낌이 좋아서 종종 술을 마신다, 그 외 여러 가지 나쁜 짓들은 다 하고 다녔다. 다만 담배는 이상하게 잘 안 받는데, 혀가 민감해서인지, 목이 약해서인지 담배 연기 몇 번 들이키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담배는 피지 않았다. 아무튼 그런 나쁜 놈이 바로 자신이다. 그런데. ‘왜 난 머리가 안 돌아가지?’ 나쁜 놈들은 나쁜 머리 잘 쓴다며? 그럼 자신도 그런 쪽으로 머리가 발달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단유를 이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사실 이기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며칠 전에도 느꼈지만, 단유의 눈빛만 봐도 자기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고 긴장이 돼서 손가락 하나도 꼼짝하기 힘들어졌다. 선배들도 무섭지만, 단유는 더 무서웠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되지 않는데 그랬다. 선배들 중에는 호주머니에 작은 칼을 품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언젠가 한번은 그 칼로 사람을 찔러 본 적도 있다고 자랑을 늘어놓는 것을 본 적도 있었다. 만약 무서워할 대상이 있다면 바로 그렇게, 장난스럽게 사람을 찌르고도 아무렇지 않을 선배가 무서 워야 했건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게 분명한 단유가 더 무서운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런 단유를 어떻게 해서 이길 수 있단 말인가. ―똑, 똑 “들어가겠습니다.” 쟁반에 캔 맥주를 한가득 담아 방으로 들어간 광종은 테이블 위에 맥주를 올렸다. 동급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맥주를 선배들에게 전달하기 시작했다. 광종이도 맥주 하나를 집어, 대선배에게 건넸다. “맛있게 드십시오.” 선배는 두꺼운 입술을 옆으로 늘리면서 비릿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우리 광종이, 수고했네. 난 너 믿는다. 알지?” “네, 선배님. 감사합니다, 선배님.” 푸식, 하고 캔을 따서 들이키는 선배를 뒤로 하고 자리로 돌아간 광종은 자신의 몫으로 배정된 캔 하나를 집어 마셨다. 따끔한 탄산이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 “오빠, 언제 돌아오실 거예요?” “야, 그게 내 맘대로 되냐? 위에서 불러야 가지.” “그럼 그 때까지 뭐하고 있으려고요?” 태호는 음료수를 홀짝 홀짝 마시고 있는 명수를 곁눈질 해보였다. “쟤랑 놀아주면서 기다리는 거지, 뭐.” 명수가 자기 이야기인 줄 알았는지, 고개를 돌렸다가 태호와 눈이 마주쳤다. 명수와 태호가 동시에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어차피 너희도 이번에 활동 종료 됐다며? 행사 뛰는 거야, 회사에서 알아서 관리할 거고, 현철이도 있으니까….” 자조적인 웃음을 띠며 음료수를 입에 무는 태호를 바라보던 갤럭시즈 멤버들은 동시에 시무룩해졌다. 자신들이 만약 탑스타 급, 아니 2군 급만 돼도 회사에다 목소리를 낼 수 있을 텐데, 3군이라 해야 할지, 바닥이라 해야 할지, 하여튼 이 쪽 업계에서 바닥을 기는 실태라 자신들의 매니저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우린 언제 뜰 수 있을까?” 명지의 말에 수련이 등을 쓸며 위로했다. “그러지 마요. 우리 조바심내지 않기로 했잖아요?” “그래도 계속 이런 일이 벌어지니까, 답답하잖아.” “우리 처음에 연습실에서 만났을 때, 이야기 했었잖아요. 이런 일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 때마다 서로 위로하면서 이겨내자고.” 명지는 연습생 생활만 3년을 했다. 5년을 한 사람도 있고, 그 이상 한 사람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3년이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몇 번이나 데뷔의 기회를 잡지 못해 팀 결성 직전에 번복되기 일쑤였다. 연습생 2년차에 수련을 만났을 때, 명지는 그렇게 이야기 했었다. “그 때 언니가 저한테 한 이야기, 아직 기억해요. 데뷔가 끝이 아니다. 데뷔하고 나서가 시작이다. 그리고 그 때가 더 힘들 것이다, 라고. 오히려 그 때가 사람들이 가장 많이 포기할 때라고.” 그 말에 명지뿐만 아니라 수영과 지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다른 팀들을 봐도, 데뷔하고 나서 팀원이 교체되는 사례가 빈번한 이유가 그런 거지.” 데뷔하자마자 성공하는 사례는 사실 찾기 힘들었다. 대형 기획사의 몇몇 팀들이 데뷔 싱글을 내자마자 1위를 달성하며 성공가도를 달리는 경우가 있긴 해도, 중소기획사 출신의 걸그룹들은 그렇게 되기가 어렵다. “레드 오션이니까.” 태호가 한 마디 덧붙이며 멤버들의 시선을 끌었다. “지금이 제일 힘들 때긴 해. 누가 성공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시장, 규칙이나 법칙도 없는 걸그룹 시장에서 너희 시기쯤 되면 고민을 하게 되지. 과연 이 길이 내 길인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이 아닌가봐, 라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학업을 위해’ 혹은 ‘꿈을 위해’, ‘미래를 위해’라는 이름으로 탈퇴 혹은 은퇴를 하는 아이들이 주변에 널리고 널린 이곳이 바로 연예계였다. “하지만 포기하기도 이르지. 내가 너희들 매니저라서가 아니라, 이 업계에 오래 몸을 담은 선배로서, 객관적으로 너희들을 평가한다면 말이야. 너희들은 결코 다른 그룹에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정말이야.” “에이, 안 그러셔도 돼요. 저희가 그런 위로 받을 만큼 풀이 죽은 건 아니에요.” “어허? 왜 이러실까? 내가 빈말하는 거 같아?” 태호는 음료수로 입을 축인 뒤 말을 이었다. “우리 메인보컬, 3옥타브 파까지는 가볍게 소리를 낼 수 있는 실력 있지? 게다가 음정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안정성까지 갖춘 메인보컬이 어디 흔한 줄 알아?” 수련은 괜히 낮 뜨거워지는 느낌에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리드보컬, 명지랑 수영이 너희 둘 다, 솔직히 다른 팀에 가면 메인 보컬 맡고도 남을 실력이란 건 누구나 다 인정할 걸?” “에이, 오빠 왜 그래? 사람 앞에 두고 민망하게?” “민망하긴? 우리 애들 내가 칭찬 좀 하겠다는데 그게 뭐 어때서? 그리고 지수랑 예영이 너희 둘. 다른 걸그룹 봐봐, 너희만큼 춤 되는 애들 많은 줄 알아?” 지수는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태호의 말을 받았다. “많죠. 요즘 우리만큼 춤추는 애들 널렸어요. 음방 안 봐요?” “야! 걔들 백 명 데려다 놓고 춤 시켜봐라. 그래도 니들이 훨씬 잘 춘다고 할 거야. 춤 선이나 느낌이 천지차이라고.” 지수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애들 기 세워주겠다고 용쓰는 느낌이 싫진 않았다. “노래되고, 춤 되고, 얼굴 되고, 몸매 좋고, 키도 크고. 도대체 안 되는 게 어딨어? 응? 안 그러냐?” 갑자기 화살이 단유와 명수에게로 돌아왔다. 명수가 히죽 웃으며 엄지를 치켜 들었다. “누나들이 제가 본 가수들 중에서는 최고예요!” 단유는 머리를 긁적였다. “저는, 잘 모르겠네요. TV를 안 봐서.” 단유는 미안하다는 듯 변명을 했다. 수련이 웃음을 터뜨리며 단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이구, 괜찮아. 너 TV안보고, 인터넷 안 하고 사는 거 다 아니까. 그리고 저 오빠가 우리 기 세워주려고 오버한 거야. 그러니까 너까지 끼어 들어서 그러지 않아도 돼. 완전 오글거리니까.” 수련의 말에 태호가 발끈하며 손가락질을 했다. “뭐? 오글? 야!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데 그게 왜 오버냐? 니들도 그렇게 생각해? 내가 오버한 거야? 니들은 그렇게 자신이 없어? 되든 안 되든 자신감을 갖고 살아야 하는 거야, 응? 난 성공할 수 있다, 난 누구보다 뛰어나다, 인정하란 말이야!” 수영은 손사래를 치며 술도 안마셔놓고 마신 척 술주정이라며 태호를 나무랐다. “그러지 말아요. 우리가 언제 자신이 없대? 우리도 자신 있으니까, 데뷔하고 노래하고 무대 뛰는 거지. 그냥 하도 안 풀려서 한 소리 한 걸 가지고 그렇게 추켜세우니까 민망하잖아요.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애들도 있는데서 말이야. 알았어요, 알았어. 오빠 말이 다 맞네요. 다 맞아.” 지수가 손뼉을 치며 화제를 돌렸다. “자, 여기서 아웅다웅 하면서 시간만 보낼게 아니라, 어디 나가서 맛있는 거라도 먹을까요?” “소맥 해요, 우리!” 최근 술맛을 알아버린 막내 예영이 소맥을 강력히 원한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나가서 뭐라도 마시지 뭐.” “우리는요?” 명수가 슬쩍 끼어들었다. “너? 안 되지. 애들이 무슨 술이야?” “술 말고 그냥 먹기만 해도 되잖아요.” 역시 먹는 게 우선이었던 명수가 숟가락을 얹으려 했다. “어허, 어른들 노는데 애들이 껴서 어쩌겠다는 거야! 니들은 얌전히 집에서 공부나 해.” 짐짓 어른스러운 척을 하는 예영의 말에 명수가 토라지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이 또 귀여워서 바라보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선생님, 어떻게 같이 나가실래요? 저희야 가볍게 한 잔 하면 되고, 애들 데리고 맛있는 거라도 먹이죠. 모처럼 우리 애들도 이렇게 다 모였는데 그냥 헤어지긴 아쉬우니까요.” 소파에 앉아 있던 박 선생님도 살짝 입맛을 다시다가 태호의 말에 잠시 고민을 했다. “너희들은 괜찮겠어?” 결국 아이들의 의사를 묻기로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예상한 대답을 들으며 결정을 내렸다. “가자.” 우선 근처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완전 매운 거 어때요?” “애들은 매운 거 못 먹잖아?” “애들은 싱거운 걸로 시키면 되지, 뭘 그래요? 사람이 융통성이 없어. 그러니까 이렇게 대기발령이나 당하고 있지.” “뭐!” 예영과 태호의 다툼 아닌 다툼을 막은 건 수련이었다. “이 근처에 맛집 있다는데, 거기 한 번 가볼래요?” “니가 여기 맛집을 어떻게 알아?” 자주 여길 오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맛집을 아냐는 지수의 말에 수련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 흔들어 보였다. 곧 어떤 블로거의 추천을 받은 집을 찾아간 사람들은 칼칼한 아구찜으로 소문난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곧 식탁 위에 음식들이 차려지고, 두 아이를 제외한 어른들의 앞으로 탁한 금빛 음료가 담긴 컵들이 놓여졌다. 태호가 헛기침을 한 뒤 컵을 들었다. “자, 일단 가볍게 한 잔들 합시다. 음… 다음 앨범 성공을 기리며!” “뭐야, 오빠. 쪽 팔리게….” “뭐, 어때? 내 아이들 내가 챙기겠다는데? 선생님, 괜찮으시죠?” 박 선생님은 흐뭇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 노래방 안은 어느새 너구리 굴처럼 뿌연 연기로 가득 메워졌다. 한 두 사람도 아니고 7, 8명의 아이들이 한꺼번에 뿜어낸 담배 연기 때문이었다. 광종은 연기 때문에 눈앞의 사물이 흐릿하게 보이는 신기한 현상 때문에 눈을 뜨기 힘들었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옆에 앉은 선배에게 귀띔을 한 광종이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야, 광종아.” “네, 선배님.” “안주 다 떨어졌는데, 안주라도 좀 사와라.” “네, 선배님.” 광종이 일어서는데 다시 뒤에서 그를 불렀다. 돌아보니 뭔가가 툭 내던져졌다. 뭔가 하고 받았는데, 빈 가방이었다. “가방 안에 가득 채워서 와.” 이런 친절이라니, 아주 눈물 나게 고맙다. 결코 연기 때문에 눈이 매운 건 아니리라. “다녀오겠습니다, 선배님.”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온 광종은 그제야 마음껏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손에 들린 가방을 잠시 바라보다가 등에 매었다. 원래 심부름은 가장 낮은 서열이 해야 하는 게 맞다. 그리고 광종은 가장 낮은 서열, 중학교 1학년이었다. 그런데 중학교 1학년이 광종이 혼자는 아니었고, 아직 저 방 안에는 3명의 동급생이 더 있었다. 하지만 심부름은 오직 광종이만 했다. 이유는? 약하니까. 노래방 입구 쪽으로 나가는데, 문 옆의 데스크 안쪽에 앉아있던 아주머니가 흘깃 쳐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벽에 붙은 15인치 TV를 보는 아주머니의 무료함은 사실 불법을 눈감아주는 뻔뻔함이리라. 광종은 말없이 문을 열고 노래방을 나섰다. 어느새 각종 네온사인 간판이 범람하는 저녁이 되었다. 느린 걸음으로 번화가 거리를 걷던 광종은 문득 전면 통유리로 된 가게 안으로 시선을 던졌다. 머리가 희끗한 아버지와 수수한 옷차림의 어머니, 그리고 마냥 해맑은 아이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가정이 부럽냐고? ‘개나 줘버려.’ 침을 모아 길바닥에 뱉고 고개를 돌리려는데, 문득 눈에 익은 사람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돌아보니 식당 안쪽 그 곳에, 하하 호호 하는 분위기가 연출되는 사람들 속에, 단유가 있었다. 광종은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 [224] 유령(4) ‘내가 저놈을 이겨야 하는데.’ 광종은 그 생각만으로 머리가 가득 찰 것이라고 예상했다. 7월이 오기 전, 어떤 수를 써서라도 단유를 처리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단유를 보자, 싸움에서 이기거나 지거나 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부럽다.’ 부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통유리 안쪽에서 해맑게 웃는 그 웃음이 부러웠다. 그놈이 입고 있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티셔츠도 부러웠고, 그놈이 들고 있는 음료수 한 잔도 부러웠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을 식당 안쪽의 따뜻함이 부러웠고, 선배들의 뒤치다꺼리 걱정도 할 필요 없는 그놈의 여유가 부러웠다. 왜 자신은 가지지 못한 것을 저놈은 다 가지고 있는 것일까? 광종의 눈시울이 뜨거워질 무렵, 우연히 단유와 눈이 마주쳤다. “…….” 곧 단유의 시선이 옆으로 옮겨졌지만, 그 짧은 순간 단유의 담담하기 짝이 없는 눈동자에서 비웃음이 느껴졌다. “저 새끼, 감히 날 비웃어?” 그래 좋다. 니가 다 가졌다, 이거지? 난 못 가진다 이거지? 그래, 다 해라. 다 니거 해라. 대신 그냥은 못 주겠다. 광종이 돌아섰다. 돌아서 사라지는 광종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단유는 문득 불안감을 느꼈다. 불안감이랄까, 예감이랄까? 너무 평안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늘 주변의 상황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는 단유였다. 인터넷이란 공간에서 떠들어대는 악의쯤이야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주변에 널린 악의들이 얼마나 많은데. 보이지도 닿지도 않는 공간에서 떠들어대는 악의쯤이야, 게다가 직접 그 실체를 확인하고 나니 그 정도는 우습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의 주변은 달랐다. 수없이 많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담담함을 유지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듣기 위해서였다. 그래야만 위험을 감지하고, 위험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인간 레이더 단유의 시야에 방금 위험이 감지되었다. 직접적일 수 있는 위험에 대해 예방이 필요한가, 라는 물음을 스스로 던졌다. 지난 시간 동안 광종이 보여준 폭력적이고 반이성적인 행동들을 돌이켜 보자면, 그저 지켜보기엔 함께한 이들이 걱정되었다. 인기가 없다고 해도 연예인, 대중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들이었다. 괜히 눈에 띄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 게 좋으리라. “단유야, 뭐하니?” 젓가락질도 하지 않고 밖만 멍하니 바라보는 단유를 보고, 수련이 그의 눈앞에 손을 휘저어 보였다. 단유는 수련을 향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양해를 구했다.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왜?” “답답해서요.” 단유의 대답이 어색하진 않았다. 실제로 맛집이라 그런지, 가게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그럼에도 그 많은 사람 중에 자신들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없다는 사실이 조금 슬프기도 했다. 화장을 안 해서 그런가? “나도 같이 나갈까?” “아뇨, 제가 어디 멀리 갈 것도 아닌데. 이 앞에 잠시 나갔다 들어올 거예요.” 그래도 혼자 보내기가 조금 마음에 걸린 수련이 명수를 바라봤더니, 명수는 접시에 코를 박고 아귀 살을 뜯어 먹는데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단유가 수련의 의도를 눈치채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괜찮아요. 그리고 한참 먹기 바쁜 애를 방해하면 미안해져요.” 명수에게 ‘쉬엄쉬엄 먹으라’는 말을 건네기도 미안할 정도로 명수는 먹는 데 열중을 하고 있었다. 박 선생님은 괜히 집에서 먹을 걸 안 챙겨주는 것처럼 보일까 봐 안절부절인데, 다른 사람들은 그저 귀엽다며 명수 접시에 붉은 양념의 콩나물과 아귀 살을 올려 주었다. **** 광종은 심부름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잊었다. 그보다는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봤다. 번화가라 사람이 많기도 했지만, 그 많은 사람들이 어쩌면 도움이 되리라. 여기는 골목이 많아서, 잘만 하면 얼마든지 퇴로를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까 나쁜 쪽으로 머리가 안 돌아간다고 한탄하던 광종은 저도 모르게 범죄 모의를 하고 시뮬레이션까지 머릿속으로 구현해냈다. 식당가 사이에 난 좁은 골목―이라기보다는 그냥 건물과 건물 사이에 난 작은 틈―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간 광종은 벽에 붙은 에어컨 실외기 아래에서 벽돌을 하나 주워들었다. 실외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놓은 듯했지만, 벽돌 하나쯤 없다고 문제가 있겠어? 실외기가 바닥에 쿵 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났지만, 주변 거리의 소리가 더 컸기 때문에 아무도 듣지 못했으리라. 그리고 이 골목 안쪽으로는 불빛이 비치지 않았기에 지나가는 사람들도 이쪽으로는 시선을 던지지 않았다. 벽돌을 바라보던 광종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디서 그런 말을 들은 것 같긴 했다. 못 가질 바에야… 부순다? 없앤다? 파괴한다? 뭐였더라? “씨발, 그게 뭐 중요해.” 지금은 그냥 이 답답한 기분을 풀어버리고 싶었다. 자신과 단유 사이를 가로막았던 통유리만 깨뜨리면 될 것 같았다. 그럼 단유는 아마 당황한 표정을 짓겠지? 그 표정을 한번 보고 싶었다. 언제나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온한 얼굴의 단유였다. 그 단유의 얼굴에 금이 가는 일이 생겨도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인생, 한 방이지.” 벽돌을 들고 중얼거린 광종이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어?” 광종 앞에 검은 그림자가 서 있었다. 그림자의 등 뒤로 빛이 비쳐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광종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자기보다 살짝 더 큰 키와 어깨, 머리, 그리고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익숙한 눈빛. 그런 실루엣들이 광종에게 하나의 신호를 보냈다. “그걸로 뭐하려고?” 목소리마저 감출 수 없는 그놈이었다. “뭐, 뭔 상관인데?” “상관있을 거 같아서.” 광종은 침을 꿀꺽 삼켰다. “내려놔. 위험한 물건이야. 여기서 필요한 것도 아니고.” 광종은 벽돌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생각해보니 자기 손에는 무기가 들려 있었다. 한 방에 보낼 수 있는 무기. 그리고 단유는 자기 사정거리 안에 있었고. 두 사람이 있는 이 골목은 어두웠고, 보는 사람도 없었다. 빠르게 처리한다면 아무도 모르게 물러날 수도 있었다. 들키지만 않으면 되리라. “하지 마.” 단유의 목소리가 광종의 머리를 멈춰 세웠다. 광종의 눈이 크게 뜨이는데 단유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걸로 뭘 하든 하지 마. 그냥 너 가던 길 가.” “내, 내가 뭘 하든 니가 무슨 상관이냐고? 내가 뭔 짓을 했다고 그래? 니가 무슨 경찰이야?” 단유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너한테 조심하라고 말하는 거야.” “응?” “앞뒤 안 가리고 사고 칠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너나 나나. 넌 좀 더 미래를 생각할 필요가 있어. 니가 한 행동이 나중에 어떻게 너에게 되돌아올지, 그 반향에 대해 고민하고 움직이도록 해. 그래야 후회를 안 할 거야.” “뭐? 후회? 지랄한다.” 후회라고? 웃겼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일진 시다바리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잔뜩 힘이 들어갔던 어깨에 힘이 풀렸다. 굳었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단유는 광종의 입술 사이로 하얀 이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웃지? 그때, 광종은 손에 쥔 벽돌을 휘둘렀다. 스스로 긴장을 풀었던 사이에 휘두른 벽돌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단유의 머리를 향했다. 단유는 재빨리 머리를 뒤로 뺐다. 하지만 잠시 방심했던 탓일까, 아니면 너무 가까이 붙어 있었던 탓일까, 벽돌 끝이 단유의 관자놀이 부분을 치고 지나갔다. ―찌익 실제 저런 소리가 나진 않았지만, 광종은 그런 소리를 들은 기분이었다. 기대했던 둔탁한 충돌음은 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운 첫 공격이었다. 단유의 왼쪽 관자놀이 부근이 붉게 변했기 때문이었다. “씨발 놈아, 내가 후회를 해? 응? 후회? 지랄한다. 내 인생 내가 살아, 새끼야. 니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니가 공부 좀 한다고 설교질이냐, 응?” 잠시 고개가 돌아가긴 했지만, 큰 충격을 받은 건 아니었는지 단유는 쓰러지지 않았다. 단유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다행히 골목 안이 어두운 탓에 저 눈빛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게 다행이다, 라고 생각한 광종이었다. 잘 보이지 않음에도 눈빛에 서린 서늘함에 살짝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지만. 광종은 다시 한번 벽돌을 휘둘렀다. 단유는 이번에는 제대로 고개를 뺐다. 눈앞을 지나가는 벽돌에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는 단유의 시선은 그대로 광종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벽돌을 휘둘러 살짝 중심이 흐트러진 틈에 발을 뻗었다. 광종은 배를 걷어차이면서 뒤로 물러서다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광종은 서둘러 일어났지만, 단유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 개새끼가.” 광종이 다시 벽돌을 휘두르려는데, 손이 허전했다. 바라볼 것도 없이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넘어지는 순간까지도 손에 들고 있었는데? 바닥을 둘러봐도 벽돌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간 거지? 그때 단유가 한 걸음 내디뎠다. 단유의 한 걸음, 그 한 동작에 광종의 사고가 마비되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벽돌 하나에 의지했던 용기가 깡그리 사라진 듯, 광종의 입안이 바싹 말라갔다. “오, 오지 마. 새끼야!” 단유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광종은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두려움에 빈손으로 맞설 용기는 없었다. 이럴 때 광종의 판단은 빨랐다. 즉시 몸을 돌려 달아난 광종은 곧 골목을 빠져나와, 도움을 요청할 사람들을 찾아갔다. 찾아가려 했다. 몇 걸음 안 되는 골목을 벗어나서 밝은 곳으로 뛰어나가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여긴 어디야?” 골목을 나서니 낯선 곳이 눈앞에 나타났다. **** “안주 사러 간 새끼는 안주 만들고 있다냐?” 선배의 농담에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던 아이들이 쿨럭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야, 정태야. 나가서 좀 찾아봐라. 이 새끼 너무 갈군다고 튄 거 아니지?” “예, 선배님.” 정태가 문을 고개를 숙여 보이곤 곧 노래방 문을 여는데, 마침 광종이 방으로 들어왔다. “어, 뭐야? 너?” 광종은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서, 선배님. 사, 살려주세요.” 광종의 얼굴은 이보다 하얘질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주 사러 간 새끼가 왜 저래?” 광종은 대답할 겨를도 없다는 듯, 노래방 가장 구석으로 도망을 갔다. 그리고 몸을 웅크리고 들었다. 광종의 기행에 다른 아이들이 모두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광종을 바라보는 사이, 문 앞에 섰던 정태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뭐야?” 정태의 앞에 선 이, 단유는 잠시 룸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담배 냄새로 가득한 방 안은 차마 들어가기가 싫은 분위기였다. 어두컴컴하고 고약한 냄새를 뿜어내는 그 방에 발만 들여도 곧 오염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옥보다 더하네.” 중얼거린 단유는 눈앞에 선 이의 얼굴을 보고, 그 뒤를 바라보았다. “니들이 광종이 선배라는 사람들 인가 봐?” “뭐야, 이 새끼?” 방 안에 있던 이들이 모두 현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단유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없으니까, 이런 곳에서 애들이 일탈을 벌여도 사람들이 알기 어려웠겠지. 눈에 보이는 것만큼 고약한 이들이 고약한 곳에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고약한 악취미를 모의하고 있었음이다. 시원한 바람이 필요하다. **** “어디 갔다, 어? 너 머리 왜 그래?” 단유는 관자놀이 부근을 더듬었다. 미처 피를 닦지 못했던 걸까? “부딪쳤어요. 심하진 않아요.” “안 심하긴? 잠깐 봐봐.” 수련이 먼저 달려들었다. 왼쪽 머리에 축축하게 붙어버린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정리하다, 살갗이 길게 찢어진 것을 확인하고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야, 너 많이 찢어졌어, 이거!” 그제야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단유는 끝까지 괜찮다고 손을 저었지만, 수련은 오히려 단유의 등을 세차게 두드리면서 단유의 무심함을 탓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씻고 올걸.’ 시간도 많았는데. 자신의 어설픈 뒤처리를 스스로 반성하며 단유는 박 선생님을 따라 응급실로 향했다. 갤럭시즈 멤버들에게는 기어코 괜찮으니 따라오지 말란 말을 남겼다. “명수랑 먹고 계세요. 금방 올게요.” “그래요, 드시고 계세요. 저만 따라가면 될 거 같으니까.” 하지만 끝내 수련이 자신도 같이 가야겠다며, 단유와 함께 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어쩐지 아까 너 혼자 밖에 내보내기 싫더라.” 단유는 무심코 머리를 긁적이려다, 상처가 있음을 알고 슬며시 손을 내렸다. 단유는 두 사람의 잔소리를 들으며 응급실로 향했다. 향하는 동안에도 머릿속에는 한 가지 물음이 계속 맴돌았다. ‘법이 안 통하는 사람도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준법정신을 강조하던 이들의 얼굴과 법망을 교묘히 피해가며 악행을 이어가던 이들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어쩐지 오늘 밤엔 잠을 잘 자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 [225] 유령(5) 1시간 전. 광종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네온사인 가득한 번화가 거리로 뛰쳐나왔건만, 눈앞에는 낡은 흙집들만 가득했다. 아니 흙집이라고 해야 할지, 나무집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광종의 지식수준에서 이런 집은 본 적도 없었고, 배운 적도 없었으니까. “뭐야?”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빈 공터와 으슬으슬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골목과 어둑해진 하늘과 어울리지 않게 밝은 빛을 뿌리고 있는 하얀 달까지. 어느 것도 익숙하지 않은, 그런 공간에 홀로 서 있음을 알게 된 광종이 살짝 두려움을 느낄 때쯤,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야기 좀 하자.” 흠칫 놀란 광종이 목소리에 반응하여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몸을 돌렸다. 달빛으로도 밝혀지지 않는 어두운 골목 안쪽으로 보이는 희미한 실루엣은 그 녀석의 것이었다. “너, 너 뭐야! 여, 여기 어디야?” “…일단 이거라도 걸쳐.” 실루엣이 던진 천을 받아든 광종은 그제야 자신이 벌거벗은 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자신이 옷을 벗고 있다는 것도 잊었던 것이었다. 뒤늦게 찾아온 수치심은 재빨리 천을 뒤적거리게 하였다. 그러나 평소에 입는 옷과 달라서 어디로 머리를 넣고 팔을 집어넣어야 할지 헷갈렸다. 광종이 원피스 형태의 옷을 입기 위해 허둥대는 사이, 실루엣은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이윽고 광종이 옷을 걸친 후 실루엣을 바라보니, 골목 사이로 드리워진 검은 그늘 아래로 번들거리는 하얀 눈빛만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여기 어디야?” 광종은 기가 죽은 듯, 목소리에 잔 떨림이 느껴졌다. “여긴, 평소라면 올 수 없는 곳이야.” 실루엣의 대답은 마치 익숙한 주소를 부르는 것처럼 평이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서, 설마?” 광종의 눈에 두려움이 가득 찰 때, 실루엣의 담담한 말이 이어졌다. “여기가 어디냐는 질문보다, 여기에 왜 왔냐는 이유가 더 중요해.” 하지만 광종의 귀에 실루엣의 이야기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평소라면 오지 않을 곳, 하지만 평소와 달리 오게 된 낯선 곳이라면? “나, 나 죽은 거야? …진짜?” 실루엣에게서 즉각적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광종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질 때, 다소 당황한 듯한 어조의 대답이 들려왔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죽은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 어떻게 죽었어? 넘어져서 죽은 거야? 어떡해? 나 죽었을 때 기억이 안 나.” 울먹거리는 광종은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어이없는 광종의 반응에 실루엣은 한숨이 나오는지 바람 빠지는 소릴 내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광종아.” 소리를 높여 광종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려 바라보는 광종이었다. “이야기 좀 하자.” 광종은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쥐고는 죽었어, 죽은 거야, 라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실루엣은 몇 번 더 차분하게 광종을 달랜 후에야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광종의 눈빛은 달빛 아래에서도 흐리멍텅하게 빛을 잃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 “니 이야기.” 실루엣은 차분한 어조로 광종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폭력을 휘둘렀던 것인지, 평소에 어떤 감정을 가지고 사는지, 자신의 삶에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는지 등을 물었다. “…부러워서 그랬어. 단유, 넌 모든 걸 다 가졌잖아.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잘하고, 선생님들도 널 좋아하고, 아이들도 널 따르고. 그런데 난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광종은 눈앞의 실루엣을 저승사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이 저승에 가기 전, 이승의 잘못을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하는 규칙에 따라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어쩐지 예전에 들었던 전래동화에서 이런 장면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단유의 외형과 단유의 목소리를 닮은, 하지만 단유가 아닌 실루엣의 물음에 광종은 솔직한 답변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아빠는 집에 안 들어와. 지방에 있다고 하는데, 정확히는 잘 모르겠어. 가끔씩 집에 들어오시긴 하는데, 와도 잠만 자고 나가. 그래서 아빠를 봐도 아빠 같지 않은 느낌이야. 그리고 우리 엄마는 나한테 관심이 없어. 내가 공부를 하든, 어디서 놀든 관심이 없어. 자기 일만 중요하고 다른 일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그래, 무관심한 부모님 때문에 비뚤어졌던 거야. “선배들이 그랬어. 일진이 안되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그 선배들은 무서운 사람들이야. 사람을 칼로 찌른 적도 있다고 그랬어. 만약에 내가 그 선배들 말을 듣지 않으면 나도 당할 거야. …그런데 이미 난 죽었는데? 이제 상관없네? …개새끼들. 난 억지로 해야만 했어. 나라고 애들을 괴롭히고 싶었겠어? 그냥…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거라고. 나도 살고 싶었다고! 살려고 그랬던 거라고! 아무도 날 지켜주지 않았으니까. 아무도 날 보호해주지 않았으니까. 아무런 힘도 없던 나는 그냥 선배들의 말에 따랐을 뿐이야. 그래서 다른 친구들을 때렸고, 돈을 뺐었어. 돈을 뺏았어도 내 마음대로 쓴 적은 없어. 전부 형들에게 바쳤다고. 형들이 주는 용돈만 조금 썼을 뿐이야.” 나쁜 형들이 날 이렇게 만든 거야. “나라고 이렇게 살고 싶었겠어? 그런데 내 주변에 있는 새끼들부터가 다 그런 놈들뿐이잖아? 난 정말 착하게 살고 싶었는데, 옆에서 부추기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야. 안 그럼 내가 당하는데 어떡해?” 변명인지, 고백인지, 합리화인지 모를 이야기들이 뒤섞인 광종의 이야기를 실루엣은 묵묵히 들어주었다. 광종은 그 뒤로도 줄줄이 이어지는 선배들의 악행, 가끔 자신이 남몰래 했던 선행―예컨대, 원래는 삥을 뜯으려 했는데 불쌍해 보여서 봐줬다거나, 떨어진 지갑을 주워서 주인을 찾아줬다거나 하는 드문 행동―들을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역시 솔직해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나 보다. 이야기를 듣던 실루엣이 한마디 했다. “만약에 말이야,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살고 싶어?” “예전?” 광종은 예전이란 말에 불현듯 6학년 여름방학 때가 생각났다. 광종이 본격적으로 일탈을 걸었던 시점. 선배들을 만났던 그때. 자유와 해방감이 폭발했던 그때. “이렇게 안 살지. 착하게 살아야지. 나도 한때는 공부 좀 하고 살았단 말이야. 공부 잘하는 모범생으로 살고 싶어.” 광종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그냥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왜 다른 사람도 있는데, 자신만 이런 처지에 처하고 말았는지. 더 오래 살고 싶은데, 더 많은 걸 누릴 수 있는데 왜 자기만 이런 처지에 처하고 말았는지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 났다. 자신이 불쌍했고, 자신의 인생이 한심했다. “흑.” 감정이 북받쳐 오른 광종은 결국 입 밖으로 숨을 토해내며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뜨거운 눈물이 바닥에 떨어지며 자국을 남겼다. 차가운 질감의 바닥에 점점이 늘어나는 눈물 자국을 보니 더욱 슬프고 억울함이 커져만 갔다. “쟤 왜 저래?” “중딩 같은데?” “무슨 일 당한 거 아냐?” “오빠, 경찰에 신고할까?”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검은 구두를 신은 누군가가 다가와 광종의 어깨를 짚었다. “괜찮아?” 흠칫 놀란 광종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 반응에 덩달아 놀란 남자가 주춤거리는 모습이 광종의 시야에 들어왔다. “어?” 한참 쏟아져 나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광종이 주위를 두리번거려 살피자 몇몇 사람들이 광종의 주위에 서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호기심 반, 걱정 반의 눈빛들이었다. 불콰해진 얼굴로 뜨거운 입김을 토해내는 사람들, 핸드폰을 들고 자신을 찍는 사람들. 또 어떤 이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슬쩍 눈길을 주다 사라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학교 입구에서 병아리 팔던 아저씨가 생각났다. 조그만 종이 박스 안에 지저분한 신문지 몇 장을 깔고 삐약대는 병아리들을 깔아놓고 구경시켜주던 아저씨. 자신을 비롯해 여러 아이들이 호기심에 상자 안을 구경했다. 그저 삐약대는 소리가 재밌어서, 작고 노란 병아리가 귀여워서 구경하던 친구들과 자신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병아리를 사는 사람들은 없었다. “요즘 누가 이런 걸 사냐?” 누군가 던진 말이었다. 아무도 병아리 따위를 사진 않는다. 집에 들여 놓아봤자, 곧 죽어버릴 거니까. 그 정도는 안다. 지금 자신을 구경하는 이들도 그런 눈이었다. 호기심, 걱정. 하지만 누구도 손을 내밀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런 이들이니까. 하지만 그런 눈빛들을 통해 광종은 깨달았다. 현실로 돌아왔다는 것을. ‘이게, 뭐, 뭐야? 돌아온 거야? 나, 다시 살아났어?’ 광종은 돌아왔다는 사실이 오히려 믿기지 않았다. 죽은 줄 알았는데? “쟤, 약 먹은 거 아냐?” 상황을 제대로 인식할 여력이 없던 광종은 우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너편에 익숙한 가게 간판―평소 탐내던 옷가게의 간판―과 익숙한 거리―먹자골목과 술집거리가 시작되는 사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주변을 훑어보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자신이 단유와 함께 있었던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어두운 골목 가운데에서 여태 상황을 지켜보던 단유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헉!” 광종은 덜컥 겁이 났다. 골목 어둠 속의 단유와 저승(?)의 실루엣이 겹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순간 광종은 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끼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밀치며 달리기 시작한 광종은 우선 눈에 익은 거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거친 숨을 토하며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광종의 질주에 사람들은 헛바람을 삼키며 물러섰다. “뭐야, 쟤?” 뜬금없는 질주에 주변 사람들이 다양한 추측들을 하는 사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단유는 머리를 긁적였다. 저대로 두고 갈까, 하는 생각이 우선 들었지만, 곧 광종이 마지막에 보인 일그러진 표정이 떠올라 선뜻 발을 떼기가 힘들었다. 무시하자니 뭔가 일을 저지를 것 같고, 간섭하자니 괜한 시간과 노력만 낭비하는 것 같고. 그렇게 고민할 때, 상황을 지켜보던 몇 사람은 골목에서 나온 단유를 주목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같은 또래로 보이는 데다가 광종이 달아나는 모습이 마치 단유를 보고 도망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게 사실이기도 했지만. “너 뭐야? 쟤 왜 저래?” 단유는 무의식적으로 볼을 긁적이다, 손에 진득한 피가 묻었음을 알았다. “어, 피다?” “야, 너 피 많이 흘리는데?” 그제야 단유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된 사람들이었다. 축축히 젖은 옆 머리와 붉게 물든 어깨가 번화가의 불빛 아래 선명히 드러났다. 사람들의 관심이 몰리는 사이, 단유는 잠시 광종이 뛰어간 길을 바라보다,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광종은 자신을 향해 벽돌을 휘두르기까지 한 아이였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고 완전히 그 사람을 파악했다고 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보고 들은 광종을 평가하자면 ‘믿을 수 없는’ 쪽에 속했다. 단유는 광종을 쫓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모습을 보며 또 수군거리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단유를 붙잡는 사람들은 없었다. 몇몇 사람들은 투철한 시민의식으로 전화기를 들기도 했지만, 그 누구 하나 단유나 광종을 붙잡거나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의 시민의식은 전화번호를 누르는 데까지였다. 30분 전. 어떻게 뛰어왔는지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광종이 노래방을 찾아온 것은 정말 본능적인, 생존 의지의 발로였다. “살려주세요!”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 광종은 선배들의 시선도 개의치 않고 방의 가장 안쪽, 가장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 웅크렸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자기 눈을 가리면 다른 사람도 자신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듯이. 병아리가 상자 가장 안쪽에 머리를 박고 숨듯이. 선배들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광종을 바라보다가 뒤이어 나타난 아이 때문에 광종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너 누구야!” 단유는 슬쩍 방 안을 쳐다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 곳이 광종이 언급했던 ‘못된 선배들’이 있는 곳이라는 걸 눈으로 확인했다. 과연 그들은 못된 선배들답게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이 순간, 단유에게 방 안에 들어간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몸을 돌려 방 안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복도로 되돌아가는 듯한 아이의 모습을 본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명령했다. “야, 잡아 와.” 곧 지명하지 않아도 이럴 때 나서는 아이들이 있었다. 누구보다 빨리 달려나간 아이들이 방을 나와 도망간 아이를 찾았다. 그런데 복도로 나오는 순간 아이들은 당황했다. 늦지 않게 뛰쳐나왔는데 복도는 마치 늘 그랬던 것처럼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어?” 당황은 순간이었다. 엄청 빨리 도망갔구나, 라는 생각으로 아이들은 복도를 가로질러 노래방 입구로 향했다. 그곳에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TV를 보는 노래방 주인아주머니만 있을 뿐이었다. “아줌마, 방금 나간 애 어디로 갔어요?” “누구? 아무도 안 나갔는데?” “방금 나간 애 있잖아요? 키 좀 큰 애.”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는 표정을 짓던 아주머니가 되물었다. “좀 전에 니네 후배라는 애가 뛰어들어가는 건 봤다.” “…지금 나간 애는 없고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나간 사람은 없다는 아주머니의 말에 소년은 재빨리 다른 아이들에게 흩어져서 찾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어차피 이 입구만 막으면 다른 곳으로 도망갈 길은 없으니까. 하지만 어느 방에서도 아이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이 새끼 어디로 튄 거야?” 수색조는 다시 본래의 방으로 돌아가 보고 했다. “없는데요?” 수색조가 방으로 돌아갔을 때, 방에는 가운데 테이블이 벽으로 밀려나고 대신 광종이가 중앙에서 엎드려뻗쳐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안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더니, 어디서 뻘짓을 하다가 뒤늦게 나타나서는 미친놈처럼 살려달라고 울부짖다가 이제는 죄송하다며, 용서해달라고 빌고 있는 광종이었다. “이게 어디서 죽으려고 용을 써?”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무슨 저승사자를 만나서 심판을 받았니 뭐니 하는 헛소리나 하고 자빠졌다. “이 새끼 일부러 미친 척하는 거 아냐?” 그때 돌아온 수색조의 보고를 들으며 선배들은 모두 이맛살을 찌푸렸다. 조금 전까지 신나게 음주가무를 즐기며 흥겨웠던 기분이 미친놈 하나 때문에 잡쳤다는 생각이 들자, 선배들은 광종을 이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담배를 꼬나문 선배가 광종의 머리를 짓밟으면서 추궁을 시작했다. “너랑 같이 온 새끼 누구야? 말해, 얼른?” 하지만 제정신이 아닌 광종의 이야기는 뒤죽박죽이었다. “저승사자요, 아니 우리 반 앤데요, 걔가 저승사자였거든요? 그래서 잡히면 죽을 지도 몰라요.” “이 새끼, 뭐라는 거야?” 말을 못하면 하게 만들고, 정신을 못 차리면 차리게 만들면 된다. 그것이 그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일이니 어려울 건 없었다. 곧 광종이 선배들의 발길질에 술과 담뱃재로 얼룩진 발자국을 온몸에 새길 무렵, 다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어? 너희들 누구야? 무슨 짓이야?” 룸의 닫힌 문을 열고 들어온 이가 어벙벙한 목소리로 물었다. 광종을 밟던 아이, 상석에서 담배를 피던 아이, 캔 맥주를 들이키던 아이들 모두가 문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이들은 그 사람을 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226] 유령(6) 신고가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고 거리로 나간 이는 지역 순찰 중이던 인근 지구대의 김 경장이었다. 빈번하게 신고가 들어오는 곳이라, 위치를 확인한 김 경장은 그 즉시 신고받은 장소로 향했다. “저기로 갔어요.” 마침 상점 앞에서 구경 중이던 가게 주인이 김경장을 알아보고 아이가 사라진 방향을 가리켰다. “요즘 어린 애들이 너무 자주 보이는 데 걱정스러워요.” 라고 하는 한탄은 흘려듣고 김경장은 걸음을 재촉하여 아이를 찾으러 떠났다. “벌써 멀리 간 거 같은데 찾을 수 있을까요?” 뒤따라오던 박순경이 인파를 헤치며 걷다가 고개를 저으며 이미 텄다는 듯, 툴툴댔지만 김경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어떤 놈인지 얼굴은 봐야 속이 시원하겠다, 이놈들.” 최근 무리를 지어서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취객들을 털고 다니는 애들이 있다는 신고가 줄을 잇고 있었다. 그런데 이놈들이 어찌나 약삭빠른지 도저히 꼬리가 잡히질 않았다. 피해신고만 늘어나는데 목격자 신고는 좀처럼 걸려들지 않으니 인근 지구대에서도 걱정이 많던 차였다. 때문에 번화가 인근 순찰도 잦아서 피로도 많이 쌓이던 즈음이었다. 마침 수상한 아이 둘이 서로 싸운다는 신고 전화를 받고 출동한 참에 꼭 그 꼬리를 잡았으면 하는 희망을 품고 있던 김경장이었다. 어느덧 번화가 끝에 다다랐지만, 아이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놈들, 어디로 사라진 거지?” 싸우는 중이었다면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을 텐데, 라고 추리를 해보는 김경장은 잠깐 어지러움을 느꼈다. “어, 뭐지?” 흔들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눈에 초점을 맞추니, 눈앞에 문이 하나 있었다. **** 답답하고 고약한 냄새에서 벗어나고픈 생각뿐이었던 단유가 길에 나왔을 때, 마침 저 멀리서 걸어가고 있는 경찰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래 이런 문제는 경찰에게 맡겨야지.’ 법을 어긴 사람이 있다면, 경찰에게 맡기면 될 일이다. 저 아이들, 몰라도 대략 법 한 개 이상은 어기고 있었던 걸로 보였으니까. 멀리 갈 것 없이 저 분들에게 가서 이야기하자고 마음 먹고 발을 떼던 찰나, 단유는 멈칫거렸다. 생각해보니, 단유는 혼자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의 일행들은 아직도 식당 안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잠깐 바람 쐬고 오겠다고 나간 애가 돌연 경찰과 함께 나타난다면 뭐라고 변명해야 하나? 그리고 괜히 이 일로 또 누나들에게 안 좋은 소문이라도 붙는다면 단유는 정말 그 누나들을 볼 낯이 없을 것이다. 전화를 걸어서 신고하자니, 마침 핸드폰을 식당에 두고 나온 참이었다. 일부러 두고 나온 거였는데, 이런 상황에 닥치고 보니 후회가 됐다. 역시 또 한 번 선택의 기로에 섰다. 그냥 지나가자니 눈으로 봤던 그 ‘나쁜 선배들’이 걸리고, 또 경찰에게 다가가자니 일행이 마음에 걸린다. ‘안 봤으면 모를까.’ 이미 벌어진 판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문제가 되는 상황을 봤음에도 그냥 방관자처럼 행동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뜻을 세우면, 실천하라고 했지.’ 뜻은 내 마음이 가는 방향이라고 주희는 말했다. 그리고 인(仁)을 실천하라고 했다. 지금 단유의 마음이 가는 방향으로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다만,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니 마침 번화가의 끝이라 사거리에 비해 어둡고 사람도 별로 없었다. 단유는 골목에 몸을 감추고, 고개만 내밀어 상대를 살폈다. 단유는 걸어가고 있는 둘 중 누구를 보내야 하나 고민을 했다. 그런데 마침 그 고민을 도와주려는 듯 걸음을 멈춘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부탁해요.” 들리진 않겠지만, 일단 그 사람을 보냈다. 사실 두 사람 모두 보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직 두 사람을 동시에 이동시키는 방법은 터득하지 못한 단유였다. 대신 그다음 사람을 재빨리 보내면 될 일이니 문제는 없다. **** “어? 김경장님?” 김경장이 열린 문 안을 들여다보다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바라보니 박순경이 얼이 빠진 얼굴을 하고 쳐다보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무슨 일이죠? 여기… 어디죠?” 박순경의 물음에 답할 거리가 궁색한 건 김경장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김경장은 손가락으로 룸 안을 가리켰다. 대충 봐도 노래방이었고, 노래방의 어두운 룸 안에 우르르 몰려서 매캐한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아이들이 있었다. 담배만 있다면 그렇다 치더라도, 수많은 캔 맥주가 테이블과 소파 위에 뒹굴고 있으니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비행 현장이었다. 게다가 룸 한가운데서 여러 사람의 신발에 멍든 학생이 있음에야,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모두 꼼짝 마.” 김경장이 경찰봉을 빼 들었다. 박순경이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김경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야, 니가 그러면 어떡해?”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박순경이 머쓱해 하며 다가왔다. 김경장 뒤에 선 박순경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떡하시려고요?” 김경장은 살짝 눈치를 줘서 박순경의 입을 막았다. 사실 경찰봉을 빼 들었지만 휘두를 생각은 없었다. 아니 휘두를 일이 없기를 바랐다. 경찰봉을 휘둘러 저 아이들 중 누군가가 맞는 순간, 자신은 바로 근신(勤愼)행일 것이니. 방어 차원에서라도 휘두를 일이 없기를 속으로 바라며 박순경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지원 요청이나 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무전기를 빼 든 박순경이었다. **** “몇 바늘이나 꿰맨 거야?” 예영이 단유의 옆 머리에 칭칭 감긴 붕대를 슬쩍 건들며 물었다. “3바늘이란다.” 수련이 맥주를 벌컥 들이킨 후, 쓴 사탕이라도 삼킨 얼굴을 하고 말했다. 단유는 그저 미안한 얼굴을 하고 걱정 끼쳐 죄송하다는 사과를 할 뿐이었다.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팔고 다녔길래 그렇게 다친대?” “너 혹시 누구한테 맞은 건 아니지?” 단유는 습관적으로 머리에 손을 가져가는데 붕대가 손에 걸렸다. 그 모습을 보던 수련이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한소리를 하려는데, 명지가 말렸다. “아픈 애한테 무슨 소릴 하려고 그래. 그만둬.” 덕분에 즐거웠던 자리는 분위기가 식으면서 더는 자리를 이어나가기 힘들게 되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는 단유였다. 거리를 나서는데 큰 길가에서 싸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다가 지나가는 것이 들렸다. ‘그래. 위험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것 좋지 않아.’ **** 집으로 돌아온 단유는 자리에 누워 오늘의 일을 복기했다. ‘만약 경찰이 없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분명히 단유는 스스로 손을 쓰는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위험을 감지하고 대비하는 것은 단련이 되어 있지만, 확률이 낮은 위험에 대해서까지 나서는 것은 오버였으니까. 그리고 ‘나쁜 선배들’로 인한 위험은 등급으로 따지자면 가장 낮은 등급의 위험이었다.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한 적도 없었고, 그들이 특별한 인과관계도 없이 자신들에게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판단 되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단유가 경찰을 부를 생각을 한 것은 그것이 ‘사회 정의’ 혹은 ‘준법정신’이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행동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번 악플러들에게 단유가 했던 말처럼. 그런데 단유의 신경에 거슬리는 하나는 자신의 행동이 너무 지나친 게 아니었나 하는 반성이었다. 지난 댓글 사건 때, 악플러들을 고소하면서 단유는 느꼈다. 법이 모든 것을 예방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속담 중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했던가? 그것의 영향도 없잖아 있었던 것 같았다. 일이 벌어지기 전에 막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미 그 사람들은 글로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 뒤였다. 그 이후에 그 사람들에게 처벌을 내린들 상처가 사라지는가? 갤럭시즈 누나들은 이미지에 타격을 입었고, 매니저 형은 대기 발령인지 뭔지로 타격을 입었다. 그런 마당에 악플러들을 고소한다고 그들에게 어떤 극적 반전이 일어났던가? 아무것도. 결국 그런 상황들이 심리적으로 단유를 압박했고, 단유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한 것인지도 몰랐다. 심지어 자신의 비밀스런 힘을 노출하면서까지 말이다. 하지만 오늘, 그 ‘나쁜 선배들’은 예방의 정도를 벗어났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단유는 그저 광종에게 말로만 들었을 뿐이었다. 실제로 그들이 나쁜 짓을 하는지, 혹은 하고 있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즉 굳이 힘을 써가며 모험을 할 정도의 상황은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만약, 단유가 거리로 나왔을 때 경찰을 보지 않았다면, 그래서 조금 더 차분하게 판단을 했다면 어쩌면 단유는 경찰에게 신고를 하는 일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럼 그게 옳은 일인가? 당연히 옳지 않은 일이다. 나쁜 짓을 보고도, 혹은 나쁜 짓을 할 게 보이는 데도 눈을 감은 꼴이니까. 그럼 자신의 마음을 속이는 짓이니까. 결국 어느 쪽을 선택했더라도 지금의 번민은 이미 피할 수 없었던 결과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 일을 계기로 광종이 착하게 살게 된다면, 그럼 다행이지.’ 그럴 것 같진 않지만 혹시나 광종이 착하게 살게 된다면, 그리하여 교실에 분란이 생기지 않는다면, 단유는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안전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만 된다면 오늘 과하게 손을 쓴 것도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단유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늦은 잠에 빠져들었다. **** 그날 지구대에 근무하는 인원들 중 10명 가까이가 지원을 와서 아이들을 잡아갔다. 술에 취한 몇몇 아이들이 난동을 부리기도 했지만, 곧 제압을 당하고 모두 지구대로 끌려갔다. ―김경장, 수고했어. 그 아이들이 요즘 취객털이 한다던 그 아이들이라며? “운이 좋았습니다, 서장님.” 관할 경찰서장이 직접 전화를 해서 치하하는 일도 벌어졌다. 물론 본격적인 수사가 이루어진 뒤에야 나올 말이지만, 이번 일은 아마도 김경장의 인사고과에 큰 점수를 부여할 일이 될 것이다. 특진은 어려워도 그게 어딘가? 다만 김경장은 조금 불편한 마음이 없잖아 있었다. “신고를 받고 가던 길에 수상한 노래방이 있어서 들어갔다?” “…네.” “그리고 그곳에서 미성년자들이 술을 마시고 한 아이를 집단 폭행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 뒤, 바로 지원 요청을 했다, 이거지?” “네.” “노래방을 특정한 건 그냥 직감이었고?” “…네.” 그 외는 할 말이 없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어떤 논리적인 수사도 불가능했으니까. 박순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경장님. 여기.”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김경장이 고개를 돌리니 박순경이 종이컵 한 잔을 내밀고 있었다. “어, 고마워.” 잠시 지난 일을 떠올리느라 넋을 놓고 있었던 김경장은 힘없는 웃음을 지으며 잔을 받아들었다. 지구대 건물 옆에 설치된 조그만 쉼터에서 저녁 하늘을 바라보던 김경장은 두서없이 말을 꺼냈다. “이상하지?” 박순경은 가타부타 말없이 김경장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홀짝 마셨다. “전… 아직도 모르겠어요. 꿈을 꿨던 건지, 아니면 제가 잠시 정신을 놨던 건지.” “니가 꿈을 꿨다면, 같은 꿈을 꾼 거고, 정신을 놓은 거라면 같이 미쳤던 거겠지.” 김경장은 종이컵 끝을 살짝 깨물었다. 일그러진 종이컵의 가장자리를 바라보다가 다시 한 모금을 마셨다. 달달한 커피믹스의 느끼함이 입안 전체를 감쌌다. “이야기, 해야 하지 않을까요?” “누구한테?” “…누구한테든요.” 김경장은 저녁 하늘에 떠오른 달을 바라보다가 종이컵을 비웠다. “미쳤다는 소리밖에 더 들을까.” 박순경도 따라서 종이컵을 비우고, 비워진 종이컵을 구겼다. 멀리 떨어진 쓰레기통에 집어 던졌더니 통에 닿지도 못하고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그런데요, 걔들 중에 한 놈이 비슷한 이야기를 했대요.” “들었어.” 어떤 놈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는데 누군지 모르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신경 쓰는 동료들은 없었다. 오직 박순경과 김경장만이 그 진술을 듣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을 뿐. “혹시 그 아이, 찾을 수 있다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 찾아? 얼굴도 모른다는데.” 박순경이 한숨을 토하는데, 김경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거나 버려.” 김경장이 건네준 종이컵을 받아든 박순경은 바닥에 구르는 종이컵과 함께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김경장을 따라갔다. 그런데 김경장은 지구대 건물로 들어가지 않았다. “어디 가십니까?” 김경장은 허리에 찬 경찰봉을 툭툭 두드려대다가 박순경의 물음에 답했다. “그 노래방에.” “왜요?” “CCTV 한 번 보려고.” 결국, 호기심을 참아내지 못한 김경장이었다. 박순경은 김경장 뒤를 졸졸 쫓아갔다. **** 예상을 못했던 일 중의 하나는, 광종이 학교에 오지 못했다는 사실―단유는 자신이 자리를 떠난 직후, 광종이 집단 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이었다. 그것 때문에 며칠간 담임의 머리가 복잡했지만, 단유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담임은 반 아이들에게 넌지시 경고를 날렸다. “최근에 안 좋은 일도 많았는데, 학교 끝나고 엉뚱한 짓을 하는 사람이 없길 바란다. 제발 너희들, 사고 좀 치지 마라, 응?” 담임의 당부가 경고로 들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평소라면 피시방이나 번화가로 돌아다닐 애들도 얌전히 귀가하는 일이 이틀간 이어졌다. “야, 이틀이나 게임을 못했어! 그 시간이면 벌써 10렙은 올리고도 남았을 건데.” “나도, 이번에 불칸에서 이벤트 했단 말야. 접속만 해도, 갑옷 셋트 준다고 했는데.” 겁 많은 아이들은 순진하게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하지만 말없이 눈동자만 데룩데룩 굴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선생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피시방을 전전했고, 혹시나 증거가 남을까봐 말 한마디도 아끼는 조심성을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교실은 한동안 차분한 분위기를 연출했고, 일주일 뒤 광종이 학교로 나왔다. “야, 너 무슨 일 있었어?”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했던 광종의 패거리는 광종의 등장과 함께 잠시 움츠렸던 어깨를 폈다. 그러나 그런 패거리의 분위기와 다르게 광종은 수줍음(?) 많은 아이로 변해 있었다. “아무것도 아냐.” 연신 흘끔대며 눈치를 보는 모습을 보이는 광종이었다. 왜 그러냐 물어도 대답 없는 광종의 시선이 닿는 곳에 단유가 있었다. 지레 짐작하기로 광종이 단유에게 크게 한 번 당한 후유증이라 판단한 아이들은 광종이 모르게 핸드폰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광종이 쫀 거 맞지? ―쫄았네, 쫄았어. ―그럼 이제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냥 아무렇지 않게 지내는 거지. 아무렇지 않게 지내되, 광종과도 가까운 티를 내지 않는 것. 그것이 그들이 선택한 방식이었다. 점점 광종 주위에 아이들이 다가오지 않게 되었고, 방학이 가까워질 무렵 광종은 혼자가 되었다. 왕따는 아니지만, 왕따 같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 그렇게 광종은 변해갔다. ======================================= [227] 좀비(1) 단유가 눈을 떴을 때는 이제 막 새벽 안개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바닥에 늘어지게 가라앉고 있을 때였다. 여름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아니면 대도시의 열기 때문인지 안개의 생명력은 인평시에 있을 때보다 못했다. 거실 창밖으로 복잡하게 얽힌 건물들 사이로 가라앉고 있던 안개를 보던 단유가 푸른 색 바람막이의 지퍼를 올리며 현관으로 향했다. ―컹. 단유의 부지런함 때문에 눈을 뜬 호빵이 단유의 발밑에서 코를 킁킁대며 졸졸 따라왔다. “너도 더 자.” 단유는 호빵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준 뒤, 소리 나지 않게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문을 닫기 전, 현관 안쪽에 선 호빵이 젖은 눈으로 단유를 배웅하는 모습이 보였다. 살짝 눈웃음으로 인사를 보내고 단유는 집을 나왔다. 오피스텔 건물을 벗어나니 상쾌한 공기가 단유를 포장하려는 듯 둘러쌌다. 언제나와 같이 힘껏 공기를 빨아당기니 폐 속으로 에너지가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어제 하루 동안 쌓였던 온갖 불순한 것들이 순식간에 압착되고 분해되어 사라져갔다. 이 기분을 느끼기 위해 이 시간에 나서는 것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천천히 다리에 힘을 주고 뛰기 시작했다. 뛴다, 고 했지만, 걷는 것보단 빠르게, 전력 질주를 위한 예비 운동 겸으로 천천히 달렸다. 서서히 예열되어가는 다리와 심장의 뜨거운 기운을 느끼며 동시에 호흡을 가다듬었다. “호흡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말 못하는 식물부터 먼바다를 누비는 대형생물들까지, 모두 호흡을 한다.” 디아트리는 호흡의 깊이를 알려주며 또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호흡을 제대로 하게 되면, 너를 완전히 통제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디아트리를 비롯한 구도자(지톤)들은 ‘통제’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었다. 자신을 통제해야 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던 이들이었으니까. 그리고 최근 동양 철학―주로 논어에 한정되어 있긴 했지만―서적들을 탐독하며 두 종류의 철학 사이에 묘한 공통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전혀 다른 세상에서 발전된 두 학문의 사이에 발견된 공통점은 흥미롭기만 할 뿐 아니라, 단유 개인의 공부에 힌트가 되어 주었다. “후우, 흡.” 호흡을 조절하여 폐 속에 신선한 공기가 최대한 많이, 그리고 최대한 오래 유지될 수 있도록 조절하며 뜀박질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뛰다 보니 어느새 근린공원에 오르는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황토가 살짝 덮인 나무 계단 주위로 살짝 이슬을 머금어 촉촉해 보이는 사철채송화가 선명한 자줏빛을 뽐내고 있었다. 톡톡 리드미컬하게 계단을 밟으며 뛰어 올라간 단유는 마침내 공원 초입에 다다라 크게 기지개를 필 수 있었다. 이른 시간이지만 단유보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이들이 없진 않았다. “안녕하세요?” “오, 왔니?” 공원의 가장 좋은 목, 돋을양지 주변에 놓인 벤치에 앉아서 이른 햇볕을 쬐고 있던 할머니 한 분이 단유의 인사를 받았다. 이름은 모르지만, 자주 만나다 보니 어느새 인사를 주고받기에 이르렀다. 다만 단유가 워낙 숫기가 없는 데다 먼저 말을 건네는 넉살도 없어, 두 사람 사이에는 첫인사가 끝인사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단유는 공원 안쪽으로 천천히 뛰어갔다. 계단을 뛰어오르며 잠시 흐트러졌던 호흡을 다듬는 시간이고 또 본격적으로 운동하기 전 몸의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다. 본격적인 운동은 공원 안쪽에 있는 체육시설에 도달한 이후부터니까. “안녕하세요?” 무릎이 살짝 늘어난 회색 츄리닝을 입고 트위스트 운동기구 위에 올라서서 좌우로 몸을 돌리고 있는 할아버지가 단유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오냐, 어여 와.” “네.”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단유는 근처의 철봉으로 갔다. 풀업(Pull up), 소위 턱걸이라고 부르는 운동부터 하는 이유는 가장 가까운데 있는 기구였기 때문이다. “이야, 볼수록 대단하네, 그려.” 허리를 돌리며 몸을 풀던 할아버지의 감탄사에 마주 보고 허리를 돌리고 있던 할머니도 시선을 돌려 단유의 운동을 감상했다. “역시 젊으니께 저리 하는 것이제. 영감은 젊었을 적에 저리 했소?” “저리만 했겠는가? 더한 것도 했지.” “뭘 했는디?” “보시오, 내가 소싯적에 쌀 세 가마니는 가볍게 들던 몸이었다고.” “꼴랑?” 할머니가 비웃듯 이를 드러내자, 할아버지가 발끈했다. “에헤, 이 사람 보게? 두 가마면 90㎏고 세 가마면 150㎏이여?” 따져보면 이상한 셈법이지만, 그걸 계산하고 있을 할머니는 아니었고, 설령 계산했다 쳐도 따지고 들 마음이 없었다. “그럼 뭐 혀, 지금은 밥상도 지 손으로 못 드는데?” “뭔 소리야, 그게?” “언제까지 늙은 마누라 수발들 생각이냐고 타박하는 중이유.” 할머니의 투정이 재밌다는 듯 할아버지는 콜록거리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 뒤로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지만, 단유는 이미 다른 운동으로 넘어갔기에 더 이상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단유는 그런 만담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새벽 공원만의 여유가 좋았다. 어느덧 근력운동을 시작한 지 30분이 지났다. 휴식을 갖지 않고 계속 운동을 이어나가는 고강도 트레이닝법이었지만, 익숙해진 단유는 언제나와 같이 운동을 끝까지 마칠 수 있었다. 조금씩 개수를 늘리는 식으로 운동 강도를 더해갔지만, 그날의 목표량은 반드시 채우는 단유였다. 근력운동을 끝낸 단유가 이어 유산소운동, 즉 전력 질주를 하기 위해 준비를 했다. 마무리 운동 겸, 호흡의 절제와 통제를 위해 전력 질주는 좋은 운동이었다. 이미 충분히 예열된 신체는 곧바로 전력 질주에 들어가도 무리가 되지 않았다. 점차 짧아지는 호흡을 최대한 길게 끌며 여유를 가지되, 무릎은 높게, 디딤발은 멀리, 시야는 살짝 아래쪽을 향하게 두고 뛰었다. 이렇게 뛰면 가슴이 금방 타들어 가는 기분도 느껴지지만, 고통스러운 만큼 돌아오는 만족감도 컸다. 단유가 달릴 때, 뒤쪽에서 타닥 뜀박질 소리가 들렸다. 보통 이 시간에 운동할 때, 자기처럼 뜀박질하는 사람은 없었다. 때문에 보통은 자신의 뜀박질 소리를 들으며 뛰었는데, 오늘은 웬일로 자기처럼 뛰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살짝 호기심이 가려는 찰나, 뜀박질 소리가 가까워졌다.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려는데, 소리의 주인공이 단유의 곁을 지나갔다. 단유도 빠르지만, 옆에서 달리는 사람이 더 빨랐던 것이다. 검은색 후드티를 눌러쓴 그 사람은 하얀 입김을 토해내며 단유의 곁을 스쳐 지나가더니 금방 멀어져갔다. 단유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자신의 페이스를 잃지 않았다. 애초에 누군가와 경쟁을 하려고 하는 운동도 아니었을뿐더러, 자신은 자신만의 리듬이 있었고, 그 리듬을 깨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자기보다 빠르게 달리는 이의 뒷모습을 보고 든 생각은, 꽤 어깨가 넓은 사람이라는 감상이 다였다. **** “씻었어?” 단유가 김이 모락 나는 욕실에서 나왔을 때, 마침 명수도 땀을 흘리며 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응. 다 썼어.” 처음엔 명수도 단유와 함께 운동하길 원했다. 같이 운동하는 게 혼자 하는 것보다 덜 심심하고 재미있을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몇 번의 동행 결과, 명수는 혼자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첫 번째는 단유가 너무 일찍 일어난다는 점이었다. 무려 1시간이나 일찍 일어나서 몸을 풀고 집을 나서는 단유의 페이스를 맞추기가 힘들었다. 두 번째는 단유의 운동이 너무 격렬했다. 자신이 따라 할 만한 운동이 아니었고, 자기가 따라 할 필요도 없을 것 같은 운동만 죽어라 하는 것이었다. 특히 축구부에 들어간 이후, 체계적인 운동법을 배운 명수는 단유의 운동법을 거부했다. “머리도 똑똑한 애가 운동은 왜 그렇게 무식하게 해?” 라는 게 명수의 총평이었다. 그 후부터는 명수는 스스로 만족할 만한 시간에 일어나 적당히 충분한 땀을 흘릴 정도의 운동―주로 조깅―을 주변 도로를 따라 뛰다가 들어왔다. “얼른 씻고 밥 먹어라.” 오늘도 단아한 차림으로 두 아이를 맞이하는 박 선생님이었다. “명수 너 요즘 너무 고기만 챙겨 먹는 거 아니니? 채소랑 같이 골고루 먹지 않으면 몸에 안 좋아.” “원래 클 때는 고기 많이 먹어도 된다고 그랬어요.” 명수는 살짝 데운 불고기 반찬을 집어 들며 대답했다. “학교에서 그러디?” “예.” 학교에 다니는 친구가 이야기해 주었다. 정확히 말하면 명수의 짝이었다. “그래도 채소 안 먹으면 병 생겨. 이거 먹어.” 직접 시금치 집어 명수의 숟가락 위에 얹어 주는 선생님이었다. “아, 그리고 단유 너, 지난번 중간고사 성적표는 왜 안 보여줘?” “깜빡했어요. 그때, 저 머리 다쳤을 때여서 잠깐 잊고 있었네요. 드릴까요? 가방에 있을 거예요.” 라고 말하면서 이미 엉덩이를 떼고 방으로 향하는 단유였다. “먹고 해.” “금방 갖고 나올게요.” 행동 하나는 재빠른 단유였다. 사실 단유의 성적표가 궁금하진 않았다. 예상 가능한 성적표였고, 언제나 비슷한 성적표였으니까. 그럼에도 물었던 이유는 두 아이를 위탁 관리하는 보호자로서의 두 사람의 성적을 관리해야 하는 의무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언제나 먼저 성적표를 가져다주던 단유가 명수보다 늦었기 때문이었다. 명수에게 생각이 닿자, 얼마 전 명수가 보여준 충격(?)의 성적표를 봤던 기억이 났다. “명수야.” “예?” 불고기와 밥이 입안에서 뒤섞인 가운데, 또 하나의 고기를 집어넣다 걸린 명수가 눈을 끔벅거리며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공부 좀 하자, 응?” 그 말에 명수가 잠깐 뇌가 정지된 듯 초점을 잃은 눈을 하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 배시시 웃으면서 턱을 움직이는 명수였다. “바빠서 그랬어요.” 도대체 중1이 얼마나 바쁘면 공부할 시간이 없었을까? “이제는 공부도 해 가면서 운동해야지, 운동만 해서는 성공할 수가 없어요. 예전 초등학교 때처럼 느긋하게 운동만 할 수 없단 말이야.” “알아요. 축구부 있는 고등학교 들어가려면 엄청나게 운동을 잘하거나, 아니면 공부를 잘해서 좋은 고등학교에 가야 하는 거죠?” “그것도 그렇지만, 요즘 축구선수들은 모두 머리가 좋다며? 니가 진짜 축구선수가 되고 싶으면 적어도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뇌는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니?” “에이, 제가 얼마나 상식적인 사람인데요?” 마침 단유가 나와서 성적표를 선생님께 건네고 자기 자리에 앉아 식사를 이어나갔다. 성적표를 흘깃 본 선생님은 그럼 그렇지, 라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잠시 멈췄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얼마나 상식적인 사람인지 내가 잘 알지. 영어랑 수학은 아예 손을 놨더라? 0점짜리 시험지가 세상에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 “그건 선택과 집중이에요. 축구를 선택하는 대신, 영어랑 수학은 포기한 거죠. 그 시간만큼 더 축구에 집중할 수 있다면 제 실력도 오르지 않겠어요?” 단유와 선생님이 놀란 눈으로 명수를 바라보았다. 명수가 저런 말을? 명수는 두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데, 선생님이 물었다. “그 말, 누가 가르쳐줬어?” “가르쳐 주긴요, 제 생각이에요, 제 거.” 힌트를 준 사람이 있긴 했다. 학교에 가면 옆자리에 앉는 사람이었다. 오늘 가면 빵이라도 하나 사줘야 할 것 같다, 고 생각하며 명수는 히죽 웃음을 지었다. **** 6월 중순이 되니 한낮의 온도가 더 이상 따뜻하지만은 않았다. 점심시간에 운동장 가운데 서 있으면, 살짝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는 되었다. “온난화 때문이래.” 단유는 이마의 땀을 훔치다가 이 더위의 원인을 설명하는 지태를 돌아보았다. 지태는 채윤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빨면서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난화가 심해져서 점점 더워지는 거야. 언젠가는 대구의 특산물이 파인애플이 되고, 부산의 특산물이 바나나가 되는 날이 올 거래.” 단유는 대꾸하지 않았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라는 생각이었고 그게 뭐, 라는 생각이었다. 중요한 것은 더위가 문제가 아니라,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광경이었다. “전반전에만 두 골을 먹었네.” “명수가 후반전에는 안 나온다며? 그럼 우리 반에도 기회가 있겠지.” 예전에 이런 스코어 차이가 나면 감정이 격해져 싸웠던 두 반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열띤 응원전으로 속풀이를 하는 중이었다. 사실 열띤 응원전이란 표현도 적당하진 않았다. 가만 앉아 있어도 더운 날씨 때문에 그냥 열이 나는 중이었으니까. “그런데 쟤 축구 잘하는 것 같다?” “누구?” 지태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자, 티셔츠를 들어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경준이?” 지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 [228] 좀비(2) 1학년 3반은 총인원이 40명에 이른다. 그래서 3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대부분 아이의 얼굴과 이름 정도는 다 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름을 외우는 것과 한 사람 한 사람의 성격이나 성향 등을 아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특히 단유는 그 특유의 조심성 혹은 경계심 때문에 여러 사람과 친하게 지내려는 성격이 아니었던지라 아직도 잘 모르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경준이었다. 사실 경준이는 단유의 시선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편이었다. 단유는 창가 쪽 1분단의 가장 뒷자리였고, 경준이는 4분단의 3번째 줄에 앉은 아이였기 때문이다. “니가 보기에 어때?” 일전에 단유가 축구 지식을 뽐냈던 것을 기억하는 지태가 단유의 식견을 테스트하려는지 경준에 대해 물었다. 잠시간 바라보니, 나쁘진 않았는데 그렇다고 좋다고 말하기엔 모호한 점이 있었다. “공을 많이 차던 애는 아닌가 보네. 그런데 달리기가 빠르고 운동신경이 좋아서 공을 잘 다루는 거야.” 달리기 실력만으로 보자면 레프트 윙에 어울릴 것 같은 경준이었다. 게다가 드물게 왼발을 잘 쓰는 아이였기에 왼쪽에서 밀고 올라간다면 어지간해선 막기 힘들 것 같았다. 물론 반 대항 시합 정도의 수준에서 말이다. “그런 거야? 니 말을 들어서 그런지 빠른 것 같긴 하네.” 지켜보니 또 하나 짚을 부분이 보였다. 바로 공간 장악력. 경준은 공과 사람이 밀집되는 지역은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몸싸움이 약하거나 아니면 몸싸움을 피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대신 그 주변에서 얼쩡거리면서 튀어나올 공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경준이 자리 잡는 곳으로 공이 흘러나왔다. “와아!” 경준이 공을 차고 달리자, 이를 막기 위해 7반의 아이들이 경준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경준의 달리기는 다른 아이들보다 2발은 더 앞서는 것처럼 보였다. 공을 멀리 차 보내고 그 뒤를 쫓는 방식은 스피드가 느리면 무소용이지만, 경준에게는 유용한 드리블 방식이었다. 경준이 중앙선을 넘어 상대편 골대 근처로 다가가자, 3반 응원석의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뒤에서 지켜보던 담임선생님까지 주먹을 불끈 쥘 정도였다. “잘 달리네.” 최전방에 있던 명수까지 수비를 위해 되돌아왔다. 거리 차이가 있었다지만 그래도 달리기가 느리지 않은 명수였는데,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이윽고 상대편 골대 앞에 골키퍼와 망부석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던 수비수 한 명만이 달려가는 경준 앞에 버티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흐르던 공을 먼저 잡아챈 경준이 망부석 앞에서 잠시 멈칫했다. 공이 멈춘 순간을 노린 거였는지, 망부석이 다리를 뻗어 공을 뺏으려 했다. 그 순간, 경준은 왼발 바깥쪽으로 공을 밀어 망부석의 스틸을 피했다. 곧 망부석을 지나친 경준은 골키퍼와 1:1이 되었고, 그때 경준은 기합을 넣었다. 그 순간 경준이 외친 기합성은 모두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어쩌면 평생 이 순간을 잊지 못할지도 모른다, 고 단유는 짐작했다. 왼발로 공을 컨트롤하여 앞으로 살짝 구르게 만든 경준은 디딤발을 디디며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개씨밥바 레알트루 슛!” 왼발을 힘껏 뻗어 공의 가운데를 정확하게 찬 슛은 곧게 뻗어 나갔다. 날카로운 창처럼 일직선으로 날아간 슛은 정확하게 골키퍼의 가슴을 쳤다. 너무 빨라서 골키퍼가 잡지도 못할 정도였다. 가슴에 맞고 튀어나온 공은 뒤를 따라오던 망부석이 옆으로 걷어내며 공격이 마무리되었다. 고요해진 응원석의 앞자리에서 채윤이 지태에게 물었다. “저게 무슨 뜻이야?” 지태는 고개를 저었다. 단유를 바라보니, 단유 역시 황당한 얼굴로 경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뜻이야?” 단유는 잠시 자신의 귀에 들렸던 소리를 해독하려 애써봤다. 어지간한 외국어는 모두 해석이 될 텐데, 신기하게도 해석이 안 되는 소리였다. “나중에 직접 물어봐.” 모르면 물어보는 게 해답이다. **** 평소에는 자신에게 해가 되거나 혹은 위험이 될 만한 아이들을 주시하는 정도였는데, 점점 지내다 보니 이 좁은 교실 안에 정말 다양한 군상이 모여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개레, 매점 가자.” 이제 반에서 경준이를 이름으로 부르는 아이는 없어졌다. 모두들 ‘개레’라고 불렀고, 격렬히 저항하던 경준이도 이제는 지쳤는지 ‘개레’라고 부르면 저절로 고개가 돌아가며 ‘왜’라고 대답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 이후부터 개레는 종종 이해하기 힘든 단어를 내뱉곤 했는데, 보통은 뭔가 답답하고 분이 안 풀릴 때 욕 대신 쓰는 말처럼 보였다. “그게 욕 아냐?” 채윤이 갸우뚱거리며 묻자, 지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욕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근데 들어도 별로 기분 안 나쁜 욕?” “기분이 안 나쁜 게 아니라, 그냥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어서 그런 거겠지.” 게다가 경준은 사람을 향해서는 그런 말을 쓰지 않았다. 청소시간에 청소하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거나, 계단을 걷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할 때 소리를 질렀다. “쑝트라무스 니믈렛!” 점점 발전하는 것은 덤이었다. **** 경준이 말고도 두고 보면 재밌는 아이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어떤 아이는 늘 귀에 이어폰을 꽂고 노트에 낙서를 했다. 수업시간에는 단유 못지않게 침묵을 지키며 존재감을 지웠는데, 쉬는 시간마저도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아 주의하여 보지 않는다면 있는 줄도 모를 아이였다. 그 아이가 단유의 눈에 띄게 된 이유는 단지 단유의 바로 앞자리에 앉았다는 것 때문이었다. 단지 앞에 앉은 이유 때문이라면 단유는 그 아이를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정확히는 단유가 영어를 모국어처럼 잘한다는 사실을 교실 전체가 알게 된 이후의 어느 날, 존재감이 없던 존재가 뒤를 돌아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단유야, 물어볼 게 있는데.” 단유는 말하는 마네킹을 보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의 간절함에 정신을 차렸다. “뭔데?” “너 영어 잘하지? 영어 좀 해석해 줄래?”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그의 부탁을 허락했다. 쑥스러운 얼굴을 하고 노트를 꺼내든 마네킹, 아니 태훈이 노트를 펼쳐 보였다. 노트에는 비뚤비뚤한 영어 가사로 채워져 있었고, 여백에는 기괴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을 쳐다보는 것을 알았는지, 태훈이 씩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냥 낙서야.” 낙서라기엔 디테일하다. 그런데 잘 그렸다고 칭찬하기엔 그림이 너무…. “그로테스크하지?” 단유는 적당한 표현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연필로 명암을 새긴 해골이 혀를 빼물고 있는 모습이 꽤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그 밑에는 기어 다니는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의 오른팔에는 잘려나간 다리 한쪽이 들려져 있었다. 그림의 대부분은 기어다니거나, 절단되거나, 절단되기 직전이거나, 절단하는 중인 그림들이었다. “아무튼, 이것 좀 해석해줘.” 단유는 노래 가사라고 지칭된 글의 첫 줄을 읽었다. “Scurrilous, wide spread death(비열함, 넓게 퍼진 죽음) Punitive, stagnant mess(전복, 정체된 혼란). 이게 노래 가사라고?” 태훈은 중간쯤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그냥 단어라서 대충 이해가 가는데, 여기는 잘 모르겠어.” 태훈이 짚은 부분을 읽는 단유의 눈이 절로 좁혀졌다. “The act of mudering so empowering / Exact number of dead will be unkown / Intact corpse are few and far between(강력한 힘을 부여하는 살인 행위 /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알 수 없다. / 훼손되지 않은 시체는 거의 없고 멀리 떨어져 있다) 단유가 입 밖으로 꺼내기가 내키지 않는 문장을 읊어주자, 태훈이 보기 드문 미소를 띠며 고마워했다. “고마워. 종종 부탁할게.” 부디 부탁하지 말란 말을 전하기도 전에 몸을 돌리고 귀에 이어폰을 꽂는 태훈이었다. 그제야 태훈이 듣는 음악의 실체를 알게 된 단유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위험한 거 아냐?” 어쩌면 저 멀리 입 다물고 있는 광종보다, 눈앞의 태훈이 더 위험한 인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가져보는 단유였다. 그 이후 단유는 태훈 덕분에 영어공부를 많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절대 즐겁지 않았지만, 태훈을 경계하는 마음으로 상대하던 단유는 원치 않은 단어들과 수사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몇 번의 문답 이후, 태훈은 단유를 가깝게 여기는지 종종 대화를 시도했다. “이 가사는 정말 의미심장해. 아마 굉장히 감성적인 순간에 툭 튀어나온 가사이지 싶어. 결코, 머리로 만들어낼 수 없는 가사라고.” 단유는 두려운 마음을 억누르며 태훈이 감탄하던 글을 읽어보았다. “You spoon fed us Saturday morning mouthfuls of maggots and lies(토요일 아침, 너는 우리에게 구더기와 거짓말을 숟가락 가득 담아 먹였다).” 진심이냐고 묻지 않았다. 자신이 입을 다물고 있어야 이 대화가 끝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태훈은 지치지 않게 쉬는 시간 내내 그 노래를 부른 가수를 찬양했다. “조심해. 사실 다른 아이들이 쟤한테 안 붙는 이유가 저것 때문이었어.” 태훈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태훈의 앞자리에 앉아 있던 채윤이 다가와서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단유는 몰랐지만, 이미 학기 초에 태훈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던 채윤이었다. “지태가 반장이라서 공부를 잘할 거라고 생각했나 봐. 그래서 지태한테 가사를 묻더니, 그다음부터 자기가 듣는 음악에 대해 설명을 하는데, 솔직히…취향에 안 맞으면 좀 그렇잖아? 그런데 너무….” “열정적이라고?” 대충 단유가 순화된 단어로 표현해주자 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무 열정적이어서 지태도 질려 했거든. 그런데 그거 빼고는 애가 나쁜 애는 아니라서, 또 막말하기가 그래. 그래서 지태가 먼저 피하기 시작했지.” 단유는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채윤을 바라보았다. “혹시 지태랑 너랑 쉬는 시간마다 내 뒤로 와서 수다 떨던 이유가 그거야?” “…어. 솔직히 우리 반에서 니가 제일 상대하기 어려운 이미지였으니까, 우리가 여기 있으면 태훈이도 우리한테 말을 잘 안 걸 거 같았거든.” 그리고 그 노력이 빛을 본 건지, 쉬는 시간에 말을 잘 걸지 않게 된 태훈이었다. 대신 태훈의 사냥감(?), 아니 태훈의 제물(?), 아무튼 뭐 그런 대상으로 지목된 것이 바로 단유라는 이야기였다. 채윤이 볼을 긁적이다가 한 마디를 남기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래도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으니까, 잘 부탁해.” 마침 자리를 피했던 태훈이 교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단유야, 나 좋은 거 하나 구했는데, 같이 들어보지 않을래?” ‘니가 좋다는 게 어떤 의미로 좋은 건지 알기가 두렵다.’ 는 게 단유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단유의 눈치를 보던 태훈이 슬쩍 주변을 둘러보더니, ‘왜 눈치를 보는 건데?’ 가방에서 시디플레이어를 조심스럽게 꺼내들고, ‘무슨 폭약 다루듯 하는 거야?’ 이어폰 대신 소형 스피커를 꽂았다. “야, 그거….” 단유가 말리기도 전에 태훈이 씩 웃으며, 버튼을 눌렀다. 그 날, 단유는 신세계를 접했다. 언제나 배움에 한계가 없고 알면 알수록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단유의 기준이 흔들리는 날이었다. 그리고 개레, 아니 경준이 새로운 욕, 아니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낸 날이었다. “야 이 씹탱자 너구리 세 마리야!” 태훈에게 외친 걸까, 그르렁거리는 짐승의 소리를 뱉어대는 스피커에게 외친 걸까? 아무튼 점심시간이 끝나기 10분 전, 교실에서 벌어진 소란의 후유증으로 한동안 태훈은 의기소침하게 지내야 했다. 단유로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 [229] 좀비(3) 그 일로 의기소침해진 태훈의 전도행위는 그렇게 끝나나 싶었다. 그러나 태훈은 그리 쉽게 포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거 한 번 들어볼래?” 태훈이 눈을 반짝이며 작은 스피커를 들이밀었다. 단유가 살짝 당황해하는 사이, 태훈의 스피커에서 지난번보다는 조금 약하지만, 여전히 쟁쟁거리는 기타 사운드와 숨 가쁘게 달리는 드럼 소리가 뒤범벅된 음악이 흘러나왔다. “내가 지난번에는 너무 강한 걸 들려줘서 그래. 사실 요즘 빠르고 강한 음악을 선호하다 보니 그랬는데, 처음 입문할 때는 이 정도가 적당할 거야.”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확실하게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말하지만, 이건 내 스타일이 아냐.” 단호한 단유의 대답으로 태훈이 돌아갈 것으로 예상했다면, 그건 태훈의 전도 의지를 얕봤던 것이었다. “아냐, 듣다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이게 90년대 초반에 나온 건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멜로디인 데다가 귀에 쏙쏙 박히는 기타 리프가 매력적인 노래거든? 끝까지 한 번만 들어봐. 아마 나중에 계속 듣고 싶어질걸?” LA메탈이니, 펑크록의 연장이라느니, 리드 기타의 솔로가 뛰어난 곡이라느니 해도 단유에게는 외계어나 다름없었다. 다만 확실히 지난번처럼 귀를 고문하는 형태의 음악은 아니었고, 인내심을 가지고 들을만한 곡이긴 했다. “I know it's hard to keep an open heart // When even friends seem out to harm you // But if you could heal a broken heart // Wouldn't time be out to charm you” (친구들조차 당신에게 상처를 줄 때 마음을 열고 있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당신의 상처 입은 마음을 치료할 수 있다면 시간이 당신의 고통을 덜어줄 거예요.)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선율이 함께 나오며 음악에 풍성함을 더하는 곡, 이라는 태훈의 설명을 들으며 곡의 마지막까지 함께 했다. 대략 9분 가까이 되는 긴 곡이 끝난 후, 태훈이 물었다. “어때?” 감상을 묻는 태훈의 말에 단유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이건 들을만하네.” 태훈은 이를 활짝 드러내 보였다. “그치? 괜찮지? 사실 록이라는 게 알고 보면 꽤 좋은 음악이라니까? 이런 노래 괜찮지? 비슷한 음악도 들려줄까?” 신이 난 태훈이 가방을 뒤적거려 또 다른 시디를 찾기 시작했다. 도대체 저 가방에 얼마나 많은 시디가 들어가 있는 것일까? 교과서는 안 들고 다니나? 무겁지 않을까? 그때, 일단의 무리가 태훈과 단유의 곁으로 다가왔다. 가방을 뒤적거리던 태훈이 이를 깨달았을 때, 그 무리의 가장 앞에 선 소년이 눈썹을 치켜세운 채 태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적당히 좀 해라. 여기가 너 혼자 쓰는 공간도 아니고 왜 시끄럽게 떠들어? 공중도덕이 뭔지 몰라?” 태훈을 향해 독설을 날린 사람은 다름 아닌 철규였다. **** 철규는 학기 초 광종과 민일의 싸움 이후, 잠잠하던 교실에서 한 무리의 리더로 등극한 이였다. 사실 무리라고 해봐야 7명 정도의 아이들이 떼로 몰려다니는 수준이었지만. 철규의 등장은 그다지 극적인 장면은 아니었다. 하지만 반 전체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거한 환영식을 펼치며 두각을 드러냈다. 3월 말의 어느 날, 아직 서로에 대해 낯섦이 가시지 않은 때였다. 점심시간에 맞춰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피자 배달부였다. “피자 시키신 분?” 무려 20판의 라지 사이즈 피자가 교실로 배달이 되었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아이들이 어리둥절할 때, 교실 앞으로 나선 이가 바로 철규였다. “내가 시켰다. 다른 뜻은 없고, 그냥 잘 지내보자는 인사 차원에서 시킨 거니까 맛있게 먹길 바란다.” 두 사람당 피자 한 판씩이 주어졌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뇌물이니까 맛있게들 먹고 앞으로 일 년간 친하게 지내보자.” 익살맞은 눈웃음을 지으면서 아이들을 바라보는 철규는, 그 이후로도 종종 지갑을 열었고 곧 아이들에게 ‘큰 손’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하였다. 돈을 쓰는 데 아낌이 없었고, 가끔 친구들과 피시방을 갈 때도 자기가 모든 계산을 다 하는 대인배의 면모를 보였다. 한 친구가 너무 미안해하자, 그런 걱정은 접어두라며 웃음을 터뜨리는 철규였다. “나 돈 많아. 집에 가진 게 돈밖에 없어.” 얄미울 수도 있지만, 헤프게 돈을 쓰는 스타일이라기보단 써야 할 때 통 크게 쓰는 스타일이어서 그런지 아이들의 반감도 크진 않았다. “친구들에게 돈 쓰는 걸 아끼지 말라고 하셨어, 우리 아버지가.” 우정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듯한 철규의 발언은 그의 ‘대인배’ 이미지를 한층 더 키웠고, 마침내 철규는 1학년 3반에서 나름 리더십을 가진 우두머리 역할을 수행하기에 이르렀다. 반장인 지태가 공식적인 직급을 맡아 반을 이끈다면, 철규는 가장 현실적이고 이타적인 행위―돈으로 마음을 얻는 행위를 통해 아이들의 신임을 끌어낸 것이다. 반의 운영에 대해서는 철저히 지태의 리더십에 따르지만, 사소한 다툼이나 불만들에 대해서는 철규가 나서서 해결하는 식이었다. 그리하여 이날, 급식을 먹고 교실로 돌아왔다가 소란스러운 포교활동(?)을 벌이고 있던 태훈을 목격한 철규는,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는 아이들을 대신하여 나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 “응?” 태훈은 아직 철규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이상한 음악이나 들고 와서 주위 사람들한테 민폐 끼치지 말란 말이야.” “이상한 음악 아냐. 이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대 명반이야!” “인정은 개뿔. 정신 사납게 만드는 음악도 음악이냐? 차라리 개소리를 녹음해서 듣는 게 낫겠네.” 록음악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태훈에게 철규의 말은 참고 넘기기 힘든 것이었다. “야! 너 뭔데? 뭔데 개소리니 뭐니 하는데? 개소리는 니 말이 개소리다!” “뭐? 이 새끼가 미쳤나? 개소리?” 철규는 와락 얼굴을 찡그렸다.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 너야, 라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얼굴을 붉히며 태훈을 바라보는 철규였다. “이 개새끼가…. 와, 나, 어이없네. 병신, 찐따 같은 새끼가 말 졸라 함부로 하네? 엿 같은 고물 CDP나 들고 다니는 주제에 말이야. 개 같은 새끼, 아니, 개만도 못한 새끼가 좋게 말하니까 아주 내가 만만하지, 응?” 태훈은 이보다 커질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철규를 바라보았다. **** “태훈아, 어떠냐? 좋지?” 태훈의 아버지가 이를 드러내며 아들의 반응을 살폈다. 초등학교 1학년인 태훈이 머리를 까닥이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태훈의 아버지는 젊었을 적부터 광적으로 록을 좋아하는 이였다. 소위 빽판이라고 부르는 불법복제 레코드판을 구하기 위해 청계천을 돌아다닐 정도였고, 특히 이 시기 구했던 오지 오스본의 ‘Diary of a madman’은 아버지의 보물 1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태교 음악을 록으로 할 정도로 광적이었던 아버지 아래에서 록 음악을 듣고 자란 태훈이 록을 좋아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자, 선물이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졸업선물이라는 명분으로 태훈에게 시디플레이어를 선물했다. 태훈이 오랫동안 탐내던 아버지의 보물 2호였다. 오랫동안 돈을 모아서 산, 그 당시로써는 최고급 기술과 품질을 갖춘 뛰어난 플레이어라고 자랑하신 제품이었다. 따지고 보면 무손실 음원을 재생하는 최근의 MP3 플레이어가 더 좋을 수 있겠지만, 태훈은 집 안 가득 쌓인 시디들을 들을 수 있는 이 시디플레이어가 훨씬 좋았고, 그래서 오래도록 탐내던 물건이었다. “니가 공부 안 하고 놀았으면 안 줄려고 그랬어, 임마.” 아버지는 특유의 이를 드러내는 웃음을 지으면서 시디플레이어를 받고 기뻐하는 태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머리가 헝클어지거나 말거나 태훈은 시디플레이어를 바라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시디플레이어를 눈앞의 인간이 고물이라고 무시했다. 태훈은 참을 수 없었다. **** 철규가 드물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아이들이 생경하다는 얼굴을 하고 철규를 바라보는데, 단유는 철규보다 태훈이 더 걱정스러웠다. 철규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태훈의 무릎 위에 올려진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끼, 눈 안 깔아? 사람이 만만하고 좋은 말만 하니까 귓구멍에 아무것도 안 들리지? 듣지도 못할 귓구멍 찢어서 개나 줘, 이 씨발 놈아.” 이마에 핏줄이 드러나도록 으르렁대는 철규는 상처 입은 야수의 그것과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태훈도 다를 바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철규와 머리를 맞대는 태훈. “내가 싸울 줄 몰라서 가만있는 줄 알아, 이 새끼야? 보자 보자 하니까 못하는 소리가 없네, 이 씨발놈아. 돈 많다고 사람 깔보는 거야, 이 개새끼야? 존만한 새끼야?” 태훈의 기함에 갑자기 철규는 이성을 잃은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하얀 침을 튀기며 소리를 버럭 지르는 철규의 모습에 주위에 있던 아이들이 모두 놀랬다. 하지만 얼굴에 침이 닿는데도 피하지 않고 철규를 노려볼 뿐인 태훈이었다. “아, 씨발. 진짜 자존심 상하네. 이 뭣 같은 거지새끼가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씹새야, 뒤질래?” 철규가 태훈의 멱살을 붙잡자, 태훈 역시 그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태훈이 자신의 멱살을 잡았다는 게 도저히 참기 힘든 모욕을 받은 것인 양, 얼굴이 붉어진 철규는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주먹은 어느새 일어선 단유의 손에 제지당했다. 철규의 손목을 붙잡은 단유는 뒤이어 철규의 멱살을 잡은 태훈의 손목까지 붙잡아 멱살을 풀게 하였다. 그 둘을 강제로 떨어뜨린 뒤에야 주변의 아이들이 뒤따라 철규를 감싸고 말리는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참으라며, 붙잡고 말리는 아이들에 의해 강제로 뒤로 밀려난 철규를 바라보던 태훈이 욱하는 심정으로 달려들려는데 단유가 다시 태훈을 뒤로 밀었다. “그만해라, 너도.” “뭘 그만해, 새끼야!” 단유는 태훈의 거친 욕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싸움 때문에 난리 난 게 언제라고 또 이래? 이번에 싸움 일으키면 절대 지난번처럼 조용히 지나갈 리 없는 거 알잖아. 진정해라.” 씩씩거리며 움찔대는 것은 철규도 마찬가지였다. “놔, 놓으라고! 저 새끼 오늘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인다고!” 철규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옆에서 말리는 아이들이 땀을 뻘뻘 흘릴 정도였는데, 단유가 그런 철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백철규. 너도 진정해라. 서로 오해가 있으면 대화로 풀어.” “오해는 무슨 오해야! 저 새끼가 나한테 하는 말 못 들었어? 못 들었냐고? 너도 같은 편이야, 새끼야?” “같은 반인데 편은 무슨 편이야. 진정하고 말로 해.” 철규는 단유와 대화를 하기 싫었다. 아니, 지금은 누구와도 대화하기 싫었다. “놔.” 철규는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아이에게 명령했다. 아이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팔을 놓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도 지금 싸움이 나면 결코 좋은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철규는 더욱 단호하고 분명하게 의지를 드러냈다. “놓으라고, 새끼야. 확 죽여버리기 전에.” 철규가 눈을 부라리자, 아이는 철규의 팔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철규가 평소와 다르게 흥분한 모습을 보이고 욕을 한다고 쳐도, 일단은 소중한 ‘물주’였으니까 그의 말을 어길 수 없었다. 반대 팔을 잡고 있던 아이도 다를 바 없어, 철규를 놓아주었다. 철규는 팔을 한 차례 털고는 태훈에게 다가왔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다가오는 철규의 눈에는 이성이 보이지 않았다. 다가오던 중 옆에 놓인 책상을 손으로 대충 훑어 아무거나 집어 올렸는데, 마침 커터칼이 잡혔다. 야무지게 커터칼을 잡은 철규는 번들거리는 눈을 하고 태훈을 향해 다가갔다. “씨발 새끼가….” 단유는 그 앞을 막았다. 뒤에서 나서려는 태훈을 등으로 막으며 철규를 바라보았다. “비켜.” 단유는 입을 꾹 다물고 철규를 바라보았다. 삼 일 굶은 닭이 저럴까? 붉은 닭 볏만큼이나 붉은 얼굴을 하고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예사롭지 않았다. 눈은 단유의 뒤에 있는 태훈을 향한 채로 다시 입을 열었다. “비켜라. 안 봐준다.” “철규야.” “닥쳐! …상관하지 마라.” 철규의 뒤에서 누가 말리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곧 철규의 고함에 밀려 입을 다물어야 했다. “두 번 말 안 한다. 비켜라.” 그러나 단유는 오히려 뒤에서 버둥거리는 태훈이 뛰쳐나오지 못하게 가로막는 데 더 힘을 쓸 뿐이었다. 이를 꽉 깨문 철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230] 좀비(4) 단유는 철규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철규가 비록 칼을 들었다고 해도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날 봐.” 단유는 낮은 어조로 천천히 철규를 불렀다. 철규의 시선이 태훈에게서 단유로 옮겨질 때, 단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너랑 싸우기 싫어.” “그럼 비켜, 임마!” 공격적인 철규의 폭언에도 단유는 흔들리지 않았다. “니가 아까 그랬지? 혼자 쓰는 공간도 아닌 곳에서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철규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나도 니 말에 동의해. 교실은 다 함께 있는 곳이니까 서로서로 배려하면서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말 아니었어? 내 생각에도 니 말은 맞아.” 단유의 등 뒤에서 태훈이 발끈하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단유는 철규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난 너와 충분히 대화가 가능할 거로 생각하는데? 대화로 상황을 풀 수 있을 정도로 넌 영리하고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니라고 말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영리하고 이성적인’이란 수식어는 그야말로 철규 본인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는 중이었으니까. 철규는 저도 모르게 손에 들어간 힘이 풀렸다. “그래서?” 허나 아직은 경계의 끈을 놓지 않은 철규는 단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봐. 지금 교실에서 또다시 폭력 사건이 벌어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단순히 처벌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거란 거, 너도 알잖아?” 솔직히 말하자면, 철규는 처벌 이상의 큰일이 뭐가 있을지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진지한 얼굴로 큰일이 벌어질 거라고 이야기하는 단유의 말을 무시하기가 곤란했다. 그리고 만약 큰일이 벌어지고 그것을 자신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결과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철규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지금의 일도 사실 서로가 인내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면 충분히 해결 가능한 일일지도 몰라. 지금 서로가 잠시 흥분해서 이성적인 판단을 조금씩 미루고 있지만, 어쩌면 대화로 잘 해결할 수 있는 일일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이 일의 본질을 생각해봐. 결국, 태훈이가 스피커로 음악을 틀었기 때문이잖아. 그럼 음악 소리를 줄이거나 아니면 스피커를 사용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야. 이런 일로 괜한 감정싸움으로 몰고 가버리면 두 사람 모두에게 손해가 될 거야. 태훈이 너도 좀 진정하고.” 태훈은 단유가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그래서 소리를 지르려는데, 그 타이밍에 단유가 자신을 돌아보았다. “너도 내 이야기를 들어. 침착하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야. 넌 단지 나한테 음악을 들려주고 싶은 거잖아? 음악을 들려주고 거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거였잖아.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게 돼버렸지만, 나중에 너랑 진지하게 이야기하도록 할게. 너랑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려 했던 내 잘못도 있으니까 말이야.” 단유가 자신의 행동을 사과하자 태훈도 그만 입을 다물었다. 분명 지금 자신의 화를 돋운 것은 단유가 아닌 철규였다. 철규가 자신을 무시하는,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선물해준 소중한 시디플레이어를 무시하는 말을 뱉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사과는 단유가 하고 있고, 게다가 자신과 진지하게 음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약속하니 태훈으로서도 딱히 무턱대고 화를 내기가 곤란해져 버렸다. 단유는 다시 철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너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봐온 바로는, 그리고 아까 처음 태훈이한테 와서 했던 이야기도 생각해보면, 넌 분명히 이성적이고 사리분별이 정확한 사람이라는 게 내 판단이야.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거고. 그렇지?” 철규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도 충분히 좋게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싸움을 일으킬 이유도 없어. 물론 내가 말 몇 마디 한다고 니 화가 다 풀리진 않았을 거야. 그렇지? 그러니까, 일단은 조금 진정할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 너도 그렇고, 태훈이도 그렇고 지금은 서로가 많이 힘드니까 잠시 떨어져 있다가, 나중에 수업 끝나고 다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해. 그리고 그때는 차분하게 서로의 입장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방향으로 대화를 풀어나가 보자고. 원래 그게 네가 하려던 거 아냐?” 대화로 풀려는 생각이 있었던가, 라는 물음이 잠깐 스쳐 갔지만, 철규는 그게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자신이 원했던 방식이라고 인정했다. “맞아. 그게 내 방식이야.”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점심시간도 거의 끝날 때가 다 되었으니까, 너도 쉬어야겠지? 자리로 돌아가서 잠시 쉬는 게 어때? 그리고 수업 끝나고 보자. 그때는 나도 같이 자리해서 니 이야기를 들어줄게.” “…그래, 알았어.” 철규도 살짝 눈을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고는 단유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너무 짧은 시간에 지나치게 감정 소비를 한 탓인지 피곤하기도 했으니까. “김태훈. 너 나중에 보자.” 그래도 아직은 태훈에 대한 앙금이 남았는지, 끝내 시비조의 한 마디를 남기고 돌아서는 철규였다. 다시 발끈하는 태훈은 남들 모르게 자신의 상의를 살짝 쥐어 잡는 단유 때문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주변에 있던 아이들은 단유의 놀라운 말재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철규가 듣고 있었기 때문에 겉으로 티는 못 내지만, 흥분해서 칼까지 든 아이를 말로서 달래는 단유의 모습이 가히 솔로몬급이라 생각했다. 철규가 자기 무리 애들과 자리로 돌아간 뒤, 아이들끼리 속삭였다. “대단하지 않냐? 말로 어르고 달래고?” “나 입 벌리고 봤다. 완전 말빨이… 와!” “철규 표정 봤어?” “칭찬 몇 마디 했다고 금방 얼굴 풀리는 거? 완전 대박. 나 무슨 드라마 보는 줄. 표정이 개쩔.” 그 뒤로 아이들은 점심시간 동안 밖에 나가 있느라 전혀 사정을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단유의 새로운 능력을 영접한 목격담을 전하느라 바빴다. **** “어떻게 거기서 그렇게 태연할 수 있었어?” 진이 빠져 기력이 바닥난 것은 단유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록 조그만 커터칼이라고 해도 칼이었다. 찔리면 상처가 나고, 베이면 갈라지는 것은 다른 칼과 마찬가지였으니 무섭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다행히 사태가 잘 마무리되어서 다행이었지, 사실 위험천만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나도 겁 많이 났어.” “거짓말.” 지태와 채윤은 단유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단유는 보통 강심장이 아니었고, 드르륵거리며 칼날을 삐죽이 드러낸 커터칼 앞에서 한치의 동요도 보이지 않던 ‘철인’이었다. 단유는 괜히 자기를 치켜세우는 듯한 두 사람이 부담스러워 시선을 돌렸다. 5교시가 마친 후, 교실 안에 있기가 부담스러워 운동장 근처 벤치로 나온 참이었다. 학교 담벼락을 따라 푸른 수목들이 울창한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계절이었다. 벤치에 앉아있으면 자장가 같은 나뭇잎 부대끼는 소리에 절로 눈이 감기는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그런데 철규는 왜 갑자기 화를 낸 거지?” 채윤이 물음을 던졌지만, 단유는 눈을 뜨지 않았다. 대답은 지태에게서 나왔다. “글쎄다. 나도 좀 갑작스러워서 당황스럽긴 하던데. 혹시 정신병 같은 거 있는 거 아냐? 급성흥분증 이런 거?” “그게 뭐야?” “아니, 그냥 지어낸 말인데, 왠지 그런 이름의 병이 있을 거 같아서.” 그 말에 채윤이 눈을 가늘게 뜨며 지태를 바라보았다. “좀 야시시한 표현 같은데? 너 몰래 밤에 뭐 보는 거 아냐?” 금방 얼굴을 붉히며 당황하는 지태가 황급히 변명을 시작했다. “야. 우리 집에서 그런 거 못 하거든? 컴퓨터가 거실에 있는 데다가 할아버지가 항상 거실에 계셔서 보고 싶어도 못 본다.” “보고 싶긴 한가 보네?” “당연히 보고 싶지. 사내로 태어나 야동 한 번은 보고 죽어야 하지 않겠냐?” “오버하기는….” 단유가 생각해도 철규의 분노는 사실 뜬금없긴 했다. 정확히 어떤 포인트에서 철규가 화가 났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던 것이다. 어떤 부분에서 화가 났는지를 알아야 확실히 중재할 수 있을 텐데, 이를 모르면 나중에 대화하다가도 다시 아까와 같은 상황이 재현될지도 몰랐다. “자기 분을 못 이겨서 화를 낸 거 같긴 한데….” 단유의 중얼거림에 한참 야동 얘기로 꽃을 피우던 두 사람이 돌아보았다. “아까 그랬잖아? 말 함부로 한다고. 그런데 어떤 말이 그렇게 사람을 순식간에 바꾸게 했을까,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단 말이지.” 지태가 가만 생각을 하더니, 조심스럽게 자기 생각을 밝혔다. “자기 말 안 들어준다고 화를 낸 건 아닐까?” 채윤이 반론을 펼쳤다.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갑자기 막 화를 내면서, 칼까지 집어 든다고? 화가 난다고 앞뒤 안 가리고 칼을 집어 드는 게 정상은 아니지 않나?” “너무 화가 많이 나서 눈이 확 뒤집힌 거 아냐?” “야, 무슨 애도 아니고. 화가 난다고 칼 휘두르는 게 말이 되냐?” 지태가 그 말도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지만 이어지는 말은 그 반대였다. “그렇지. 그런데 가끔 뉴스 보면 그런 사람들 나오잖아. 화가 나서 친구 찔렀다는 사람도 있고, 가족을 찔렀다는 사람도 있고.” “그건 정신병 있는 사람들 얘기지. 우울증이나 뭐 그런 거.” “혹시 알아? 철규도 그런 병이 있는지.” “어? 그럼 조심해야 하는 거 아냐? 혹시라도 나중에 걔 미쳐서 막 칼 휘두르고 그러면 더 큰 일인 거잖아?” 지태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이거 되게 위험한 거 같은데? 선생님께 이야기해야 하나?” 반장으로서, 교실에서 일어날지도 모를 위험에 미리 대비하는 차원에서 선생님께 ‘고자질’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지태였다. “오버하지 말고. 조금 있다가 직접 물어보면 되지.” 단유의 말에 지태가 돌아보았다. “뭘? 철규한테? 정신병 있는지 물어본다고? 안 돼. 그러다 진짜 큰일 나면 어쩌려고?”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무슨 정신병이야? 그냥 왜 화를 냈었는지, 어떤 게 그렇게 화가 났던 일인지 물어보겠다는 거야.” 지태와 채윤이 걱정 반, 두려움 반의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을 때 스피커에서 알림 벨 소리가 들렸다. “가자, 수업종 쳤네.” 단유가 무릎을 곧게 펴고 교실로 향했다. 그 뒤를 어미 새 쫓는 새끼들처럼 두 사람이 졸졸 따라갔다. **** 수업이 끝난 후, 단유와 태훈, 그리고 철규는 미리 말한 대로 대화를 위해 교실에 남았다. 철규와 함께 하는 아이들이 함께 자리하려 했지만, 세 사람만 차분히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는 단유의 의견을 다른 두 사람이 동의하면서 교실에 세 사람만 남았다. “오래 이야기할 문제는 아니야. 난 사과만 받으면 돼.” 쿨하게 자신의 제안을 먼저 밝힌 것은 철규였다. “무슨 사과? 사과를 받으려면 내가 받아야 하는 거 아냐?” 태훈은 철규의 뻔뻔함에 화가 난다는 듯, 몸을 들썩였지만 단유의 제지로 엉덩이를 의자에 붙여야만 했다. “니가 무슨 사과를 받아? 넌 누가 봐도 잘못했잖아? 단유도 아까 이야기했지? 교실에서 떠드는 건 잘못된 거라고. 니가 잘못을 했고, 거기에 대해 내가 지적을 한 것 뿐인데 내가 무슨 사과를 해?” 단유는 일단 철규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태훈을 대신해 철규에게 물었다. “넌 어떤 사과를 듣고 싶은 건데?” “나? 아까 저 새끼가 나 모욕하는 거 못 봤어? 나 태어나서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모욕당해본 적 없는 사람이야. 아 놔, 생각하니까 또 열 받네.” “진정하고. 잠깐만.” 단유는 얼른 철규에게 진정하라는 손짓을 보였다. 철규의 눈에 금방 핏줄이 서는 듯해서 불안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두 사람 사이에 여러 이야기가 오고가서 정확히 어떤 점이 널 모욕했는지, 어떤 점이 불쾌했는지를 정확하게 짚어주지 않으면 또 오해가 생길 것 같아서 그러니까, 분명하게 말해줄래?” 철규는 태훈을 노려보며 단유의 물음에 답했다. “저 새끼가 나한테 개소리라고 하는 거 들었지? 지 잘못한 건 인정 안 하고 나한테 개소리니 뭐니 막말하는 거 들었잖아!” 진술(?)하는 동안 점점 격앙되어 가는 철규였다. 단유는 잠시 이마를 짚었다가 철규에게 말을 걸었다. “알았어. 니 말의 요지는 태훈이가 널 모욕했다는 거지?” “그래!” “그 전에 니가 먼저 나한테 개소리를 녹음해서 들으라니 CDP가 고물이라느니 하면서 막말했잖아, 새끼야!” 단유가 제지하기도 전에 태훈이 반박을 했고, 철규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새끼가!” “그만!” 단유도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 [231] 좀비(5) “그만들 해, 둘 다. 차분하게 대화하기로 했잖아. 태훈이 너도 무조건 화를 내기보다 상대방 이야기를 다 들은 뒤 생각을 밝혀. 감정적으로 대응해봐야 너만 손해야.” 태훈이 억울하다는 듯 단유에게 하소연을 했다.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모욕을 받아도 내가 모욕을 받았어. 그런데 왜 내가 사과를 해야 돼?” “알았어, 알았다고. 잠시만 기다려.” 단유는 다시 철규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자리에 앉은 철규는 팔짱을 낀 채 태훈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백철규.” “…왜?” “나도 궁금해서 그런 거니까, 하나만 묻자. 괜찮아?” 철규가 고개를 끄덕이자, 단유는 내내 생각했던 물음을 던졌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나눈 이야기에 대해 모두 들었어. 그렇지?” 철규는 가만히 말을 기다렸다. 단유도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듯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처음에 넌 태훈이에게 공중도덕을 지키라는 이야기를 꺼냈어. 그리고 ‘이상한 음악’으로 주위 사람들한테 민폐를 끼치지 말라고 이야기를 했어. 맞아?” “그래. 난 정당한 요구를 한 거야. 그게 뭐 어때서?” “그리고 태훈이가 이렇게 말했지. ‘이상한 음악이 아니다’라고. 그랬더니 니가 그게 음악이냐며 개소리를 녹음해서 듣는 게 낫다고 이야기했어.” 순간 철규는 단유가 어디 녹음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그런 말을 한 거 같긴 한데, 정확히 저렇게 말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철규는 그 말에 대해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난 그 점에서 의문이 들어. 태훈이가 듣는 음악이 너한테 이상하게 들렸을 수 있고, 또 조금 지나칠 수는 있지만 ‘이상한 음악’이라고 표현하는 게 니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해. 하지만 개소리를 녹음해서 듣는 게 낫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내가 듣기에도 태훈이에게 모욕적인 발언이었다고 생각해.” 철규는 발끈했다. “그게 무슨 모욕이야! 이상한 음악을 듣는 거잖아? 무슨 짐승 소리같이 웩웩거리면서 노래하는 게 안 이상해? 그냥 있는 대로 말한 게 뭐가 문제야! 그걸 이상하게 받아들이는 쟤가 문제지.” 단유는 다시 태훈의 입을 막았다. “일단 내가 정리하고 너한테 말할 기회를 줄게. 말싸움하자고 지금 이 자리 만든 거 아니잖아. 그리고 철규야. 그 말이 있고 나서 태훈이 그랬어. 철규 니 말이 더 개소리 같다고.” “그러니까!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를 솔직하게 표현했을 뿐인데, 내가 한 말을 개소리라고 한 거잖아, 저 새끼가!” “그래, 너는 그게 너한테 모욕이었다는 거지.” “그래!” 단유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만 하는 데도 지치는 이 기분은 뭘까? “철규야. 난 결코 태훈이를 대변할 생각은 없고, 또 니 편을 설 생각도 없어. 그 점은 분명히 하자. 난 어디까지나 중립적으로 이야기하고 싶고, 그래서 지금도 너에게 말할 기회를 준 거야. 그렇지만 지금 여기서 난 너에게 한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니가 모욕감을 느낀 건, 태훈이가 널 깔본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일 거야. 그렇지? 그런데 내가 보기엔 너도 상대방의 취향을 깔본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태훈이가 듣는 음악이 이상하다고 해도, 면전에서 이상하다고 표현하는 건 이미 상대를 무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봐도 무방할 거야. 예를 들어서 니가 굉장히 좋아하는 옷을 입고 외출을 했는데 누군가가 너에게 이상한 옷을 입고 있다고, 그런 옷 입지 말라고 하면 넌 어떤 기분일 거 같아? 게다가 차라리 그 옷으로 개나 주라고 하면? 넌 분명히 속이 상할 거야. 안 그래?” “그거랑 이건 다르지!” “어떻게?” “미치겠네. 야, 김단유. 내가 그런 옷을 입을 리도 없지만, 내가 입은 옷을 보고 지적하는 사람이 패션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일 수 있는 거 아냐? 패션도 모르는 사람이 지껄이는 말이랑 내가 하는 말이 같아? 그리고 없는 말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한 거잖아? 솔직하게 말하는 게 모욕이 된다고 생각해? 말이 안 되잖아?” 단유는 두통이란 게 이런 거구나, 하고 느꼈다. 무한히 돌아가는 모래시계 같았다. 위에 쌓인 모래가 아래에 쌓일 때쯤 다시 돌려놓고, 그럼 또다시 위의 모래가 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상황. 단유가 보기에 철규는 굉장히 높은 철탑 위에 사는 사람 같았다. 너무 높은 나머지 주위에 보이는 게 없다고나 할까. 굉장히 이기적이고 자아도취적인 감성을 가진 아이가 바로 백철규란 아이였다.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하면서 어떤 식으로도 상대를 비하하거나 깔보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말이야?” “그렇지. 난 그냥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를 말한 것뿐이야.” “개소리를 녹음해서 듣는 게 낫겠다는 말이?” 철규는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긍정의 뜻을 밝혔다. “당연하지.” “태훈이가 너한테 개소리라고 표현한 것에는 비하의 의도가 있었다?” “당연하지.” “어떠한 의도도 가지지 않고 한마디만 하자.” “뭐?” “난 니가 굉장히 이성적이고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뉘앙스가 굉장히 부정적이다. 철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넌 너무 이기적이야.” “뭐!” “니가 이기적이라고 표현한 내 말이 널 모욕한 거야?” “내가 뭐가 이기적인데? 내가 애들한테 얼마나 돈을 많이 쓰는데? 너도 내가 사준 피자 먹었잖아! 태훈이 너도! 그리고 매점에서 애들한테 사준 게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 내가 이기적이라고?” “미안. 그 표현은 잘못된 것 같다. 사과할게.” 즉각 튀어나오는 단유의 사과. 철규가 잠시 무슨 일인가 싶어 바라보는데 단유가 곧 입을 열었다. “넌 너무 자기중심적이야.” 철규가 다시 한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넌 너무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거 같다. 대화하는 동안에도 넌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감정을 느낄지에 대해서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고 느껴져. 만약 반박하고 싶다면 이 물음에 대해 반박해 주길 바란다.” 철규가 부들부들 떠는 사이 단유가 물음을 던졌다. “니가 개소리나 듣는 게 낫겠다고 말했을 때, 태훈이는 어떤 감정이었을까?” “뭐?” “너랑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태훈이가 어떤 감정이었을지 짐작하겠냐는 물음이야.” “그,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걸 물어본 거야. 니가 아는지 모르는지.” 철규는 조금 당혹스러운 느낌이었다. “내가 왜 알아야 하는데? 내가, 저 새끼가, 무슨 감정인지를 내가 왜 알아야 하냐고!” “왜 알아야 하는지가 아니고, 그냥 알려고 하면 알 수 있는 거야. 저 사람이 어떤 감정일까, 하는 건. 그게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거잖아.” 단유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철규와 눈을 마주했다. “니가 모욕받는 걸 싫어하듯이, 다른 사람도 모욕받는 걸 싫어해. 당연하잖아? 니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듯이, 다른 사람도 인정받고 싶어 해. 똑같은 마음이라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우리는 대화를 하는 거지, 누군가와 싸워서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니야. 그런데 넌 계속 이기기 위한 말만을 하고 있잖아? 아까도 말했지만,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대화를 하자는 것이지, 누군가의 잘잘못을 가리려는 게 아니야. 그런데 넌 줄곧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또 태훈의 언사가 잘못되었다는 식으로만 입장을 내세울 뿐이니까 대화가 안 되는 거잖아. 그 말인즉슨, 니가 다른 사람과의 소통에 관심이 없다는 증거지. 오직 너의 기분만 중요하고, 너의 말만 옳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할 뿐이지. 그러니까 니 말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설득력도 없는 거야.” 철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 말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박하고 싶은 거야? 그렇다면 물음에 답만 하면 돼. 점심때나 지금이나 이야기를 하는 동안 태훈이 과연 어떤 감정일지, 니 생각을 말해 봐. 그러면 나도 내가 말한 것을 철회하고 사과할게.” 단유가 입을 다물고 철규를 바라보자, 교실 안이 조용해졌다.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초침 소리와 운동장 너머에서 들려오는 아이들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올 무렵, 철규의 입에서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줄곧 들썩이던 태훈마저 얌전히 철규의 반응을 기다리는데, 철규는 그저 부릅뜬 눈으로 단유와 태훈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철규가 소리쳤다. “개소리 집어쳐!” 철규는 뒤돌아 가방을 집어 들고 교실을 뛰쳐나갔다. 복도 너머로 뜀박질 소리가 멀어지더니 어느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제야 태훈이 단유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 거야?” “뭘?” “아니, 그냥.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아무것도.” 단유라고 딱히 지금 이 상황을 좋게 만들겠다는 의도는 없었다. 처음부터 의도한 바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게 하는 데 있었을 뿐이었으니까. 대화가 비록 파투는 났지만, 두 사람이 칼이나 주먹으로 싸울 일은 없을 것이라고 예상됐다. 왜냐하면. “도망간 사람은 어지간해서는 돌아오지 않더라고.” 철규는 도망을 갔고,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내일도, 모레도, 그다음 날도. ‘대답을 들고 오지 않는 한, 철규는 돌아오지 않는다.’ 단유는 가방을 집어 들었다. “가자.” 태훈은 다소 어리둥절한 눈으로 가방을 집어 들었다. “아, 그리고 한 가지만.” 단유가 몸을 돌려 태훈을 붙잡았다. “앞으로 교실에서 스피커로 음악을 트는 행위는 삼갔으면 좋겠어. 그건 분명 철규 말이 맞아. 공공시설에서의 예의니까 지켜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음악에 관해서도 이야기하자면, 난 사실 음악을 잘 몰라. 음악에 취미도 없고. 만약 언젠가 니가 듣는 음악에 대해 취미나 호기심이 생긴다면 꼭 너에게 물어볼게.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거 같아. 그러니까 부디 그 음악만큼은 거절할게.” 태훈은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단유의 말을 받아들였다. 이후 태훈은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었고, 두 번 다시 스피커를 가지고 오는 일은 없었다. 또 록의 전도사 역할도 당분간 휴업을 맞이했다. 그렇다고 혼자가 되었냐 하면, 그렇진 않았다. 지태나 채윤과 함께 단유 곁에서 수다를 떠는 무리로 끼어든 태훈은 눈치를 많이 보긴 해도 단유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부류에 속하게 되었다. “오늘 날씨 좋다, 그치?” “흐린데?” “원래 흐린 날이 좋은 거야. 눈부시지도 않고, 시원하고 딱 좋잖아?” “그래?” “이런 날 들으면 딱 좋은 음악이 있는데 말이야.” “그렇구나.” “혹시….” “아니.” “응.” 철규는 단유의 예상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여전히 그들의 무리 속에서 떠받들어지며 살고는 있지만, 마치 태훈이나 단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하며 지냈다. 단유 근처로 오지도 않을뿐더러, 혹 가깝게 오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단유가 이것을 불편하게 여길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귀찮은 일이 줄어 다행이라고 여길 뿐이었다. “말 거는 사람이 하나라도 줄어드는 게 차라리 낫지. 게다가 말도 안 통하는 사람이 말을 걸면 피곤하기만 하고, 그렇더라고.” 그 말에 명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 그런 애들은 그냥 멀리하는 게 낫지. 돈 많다고 돈 지랄이나 해대면서 사람 깔보는 새, 애기들은 없는 듯 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아.” 단유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물었다. “넌 철규 만난 적 없잖아? 어떻게 아는 것처럼 그래?” 그러자 명수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석고야, 세상에 철규 같은 애가 한둘인 줄 알아? 니가 그동안 운이 좋아서 지금에야 그런 녀석을 만난 거지만, 형은 지금까지 그런 애들 수도 없이 만났다. 초등학교 때도 있었고, 지금 우리 반에도 그런 애들 있어.” 단유는 순간 명수가 낯설게 느껴졌다. “너도 고생 많이 했나 보네?” “고생? 많이 했지. 지금도 우리 반에 있는데 걸핏하면 막 돈 지랄을 해대는데, 어우, 눈꼴시려.” “그래?” “매점 갔다가 오면 맨날 맛있는 거 얼마나 많이 사오는지 알아? 진짜 내가 먹고 싶은 것만 골라서 오는데, 아주 정말… 먹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다. 한 입 달라고 하기엔 쫀심이 상하고 말이야. 아우, 생각만 해도 배가 고프네.” 단유는 명수를 슬쩍 째려보다가 등을 한 차례 세게 내리쳤다. “아야! 왜 그래!” “앞으로 내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 게.” “그러지 말고, 오늘 사러 가자.” “오늘?” 명수가 음모를 꾸미는 악당 같은 표정을 지으며 손을 비볐다. ======================================= [232] 업타운걸(1) 보통 시장을 보는 일은 대부분, 집 안 청소와 식사를 준비해주시는 이모님의 몫이었다. 아침, 혹은 오후에 한 번씩 장을 봐 와서 해결하는데, 가끔 박 선생님이 이모님과 함께 외출해서 장을 보기도 했다. 단유와 명수 두 사람은 심부름도 거의 하지 않을 정도로 가사에서 배제되어 있었는데, 이는 주영의 부탁 때문이었다. 최대한 학업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달라는 주영의 부탁을 박 선생님이 들어준 탓인데, 사실 그런 부탁이 없더라도 딱히 두 사람에게 심부름을 시킬 일도 없었다. 기껏해야 쓰레기 버리는 심부름 정도였는데, 그것도 거의 이모님이 알아서 제때 처리하셨기 때문에 두 사람은 남들이 보기에 팔자 좋은 생활을 영위하는 중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명수는 박 선생님 앞에서 반기를 들었다. “우리도 이모랑 선생님, 돕고 싶어요.” 호빵이 명수의 바지 끝단을 물고 뒹굴어도 명수는 곧은 시선으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뜬금없는 명수의 제안에 멀뚱히 바라보다 대답했다. “뭘, 어떻게 도와준다는 거니?” “저희가 가서 장 봐올게요.” 선생님은 나가서 아르바이트라도 하겠다는 소리를 하진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이었다가, 다소 안심하는 기색을 보이며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그런 건 안 도와줘도 돼. 그리고 이모가 어련히 알아서 잘 봐주시고 있는데 뭣 하러 그래? 안 그래요?” 주방에서 마늘을 다듬던 이모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의 말씀은 계속 이어졌다. “집에 필요한 건 이미 다 있고, 필요할 때마다 너희들 학교 간 뒤에 마트 가서 다 사오고 있는데, 굳이 심부름시킬 일도 없어. 그러니까.” 선생님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단유와 명수를 죽 훑은 뒤, 미소를 띠었다. “공부나 열심히 해. 공부할 시간도 부족하잖니?” 다른 집 같으면 꼭 공부가 아니더라도, 컴퓨터 오락이나 TV에 빠져서 운동이 부족한 아이들을 위해 일부러 심부름을 시킬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앞에 선 두 아이는 누가 깨우지 않아도 스스로 아침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체력관리를 하는 기특한 아이들이니, 일부러 밖으로 내돌리며 몸을 움직이게 할 필요가 없었다. “저 집에서 공부 안 하잖아요? 저 시간 많아요.” 명수는 뻔뻔스럽게도 당당한 얼굴을 하고 학생으로서 저래도 되나 싶은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하긴 그 말도 사실이긴 하지.’ 명수는 단유와 달리 호빵과 놀면서 TV를 보는 게 낙인 아이였다. 처음 선생님이 두 아이를 맡았을 때, 명수를 공부시키려 했지만, 자긴 공부에 재능이 없다고 당당하게 밝히던 아이였다. 몇 번 다그쳐보았지만, 슬금슬금 거실로 나와서 호빵을 끌어안고 TV에 푹 빠져 사는 모습을 지켜보다 보니 이제는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저래 보여도 제 딴에는 축구에 올인하겠다며 아침마다 운동도 하고, 오후 늦게까지 축구부 활동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즐겁게 이어나가는 중인 명수였다. 학교 공부도 완전히 손을 놓은 건 아닌지, 숙제 같은 건 제대로 하는 모습도 보여서 선생님도 더는 공부하란 소리는 하지 않게 되었다. 단유와 함께 생활하다 보니 저절로 두 사람을 비교하게 되기도 했지만, 둘 앞에서 서로 비교하는 말은 절대 꺼내지 않는 선생님이었다. 그것이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실과 별개로, 박 선생님은 혹시 명수에게 숨은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 물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뭐 사고 싶은 거 있니?” 명수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니요. 딱히… 그냥 돕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학교 숙제니?” 초등학생도 아니고 중학생에게 가사일 돕기 같은 숙제가 있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물어보게 되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가만 바라보니 눈동자가 좌우로 요동치는 명수였다. 역시 뭔가 있구나, 싶었던 선생님은 이번 한 번은 넘어가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한 번 갔다 올래? 아, 이모님. 애들 간식 많이 남았어요?” 이모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다 떨어졌다고 알려 주었다. “마침 간식도 떨어졌으니까, 먹고 싶은 것도 사오고. 아, 가서 사올 거 몇 가지 적어 줄 테니까 그거 보고 사오도록 해.” 선생님은 메모지와 이 만원을 단유에게 쥐여 주었다. “왜 제게?” 단유가 물음표를 달자, 선생님은 오히려 단유에게 반문했다. “그럼 누구한테 줘?” 단유의 시선이 명수에게 옮겨졌다가 이내 선생님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애초에 명수에게 돈을 주는 옵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은 선생님이셨고, 그것을 바로 이해한 단유는 명수의 손을 잡고 오피스텔을 나섰다. 두 사람은 오피스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대형마트를 찾아갔다. 사거리 근처에 있는 대형마트는 그동안 오고 가며 보긴 했는데, 실제로 마트 안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하은과 함께 지냈던 인평시에서는 가끔이지만 다 함께 마트를 다니기도 했는데, 서울에 와서는 처음 마트 구경을 하게 된 셈이었다. “보자, 먼저… 사과를….” “저기 가자!” 카트를 끌고 나와 먼저 살 물건을 찾으려 하는 단유의 앞을 가로막고 길을 인도하는 명수였다. “어디?” “그냥 따라와.” 어쩐지 무척 신이 난 얼굴을 하고 카트를 끌고 가는 명수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마트를 가고 싶다고 그랬던 것일까, 궁금했던 단유였다. 하굣길에 잠깐 언급한 것처럼, 먹고 싶은 걸 사려는 걸까? 하지만 명수는 식품 코너를 지나, 시식 코너도 건너뛰며 달려간 곳은 디지털/IT 코너였다. “뭐야?” 단유가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명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뭔갈 찾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마침내 명수가 찾았다는 듯, 카트를 밀고 달려간 곳은 할인 이벤트가 진행 중인 매대였다. “찾았다!” 명수가 신이 난 얼굴로 바라보는 그곳은 게임 타이틀들이 즐비하게 전시된 매대였다. 그제야 예전 태호 형이 집에 두고 간 게임기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단유였다. “게임 사려고?” “응. 맨날 같은 것만 하는 것도 지겹잖아. 그리고 그건 같이 할 사람이 있어야 재밌는데, 넌 게임 안 하니까. 그런데 오늘 반에서 누가 이야기해주더라고. 게임 할인하는데 가서 싸게 샀다고.”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물었다. “그런데 돈은 있어?” “응. 그동안 용돈 모아 놓았지. 그리고 이런 건 선생님께 사달라고 하기가 좀 그렇잖아? 나도 염치는 있다고.” ‘염치’라는 단어를 써가면서 자신의 처지를 밝히는 명수가 우습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고, 뭐 그랬다. 단유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 굳이 심부름을 자청한 이유는?” “그래야 마트에 오지.” “그냥 와도 되잖아? 학교 끝나고 마트 들렀다 집에 가면 되잖아?” “그럼 집에 늦게 들어가게 될 거 아냐. 그럼 선생님이 걱정하실 수도 있으니까 그랬지.” 나름 머리를 굴린 명수였다. 어떤 게임을 사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간 축구부 활동을 하면서도 집에는 늦지 않게 들어갔던 명수는 넉넉한 쇼핑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나름 시나리오를 짜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선생님한테 게임 사러 간다고 말하긴 창피하고, 그래서 심부름 핑계로 마트를 들려서 게임 타이틀을 산 뒤에 돌아가겠다는 생각인 듯한데, 뭔가 어설프다. “주말에 시간 내서 와도 되고, 학교 끝나고 빨리 마트로 와서 물건 산 뒤에 집에 들어가도 되고… 생각해 보면 다른 방법도 있을 것 같은데?” 굳이 심부름 핑계를 댈 필요가 있었냐는 물음에 명수가 답답하다는 얼굴을 했다. “평소에는 그렇게 똑똑한 애가 왜 이렇게 머리가 안 돌아간대? 주말에는 할인이 끝날 수도 있고, 그 전에 재미있는 게임들이 다 팔릴 수도 있으니까 되도록 빨리 와서 사려는 거지. 학교 끝나고 빨리 마트로 온다고 해도 어떤 게임을 사야 할지 골라야 하는데 그게 금방 되겠어? 시간이 걸릴 거 아냐? 그러니까 넉넉하게 쇼핑할 수 있게 이런 방법을 쓴 거 아냐? 석고 넌 책 보는 데만 머리 쓰지 말고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도 좀 공부하고 그래라. 걱정된다.” 단유는 초점 잃은 눈으로 명수를 바라보다 고개를 흔들었다. 명수에게 ‘걱정된다’는 소리를 들으니, 정말 걱정이 됐다. ‘나, 정말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카트 손잡이를 붙잡고 자신의 어떤 판단이 명수에게 그렇게 어리석게 보였던 것일까, 단유가 고민하는 사이, 명수는 신나게 게임 타이틀을 뒤적거리며 고르고 있었다. “잠깐 비켜줄래요?” 단유는 등 뒤에서 난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짧은 단발머리를 한 여자아이가 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코와 입은 작은데 눈이 큰 여자아이였다. 나이는 비슷한 또래 같기도 하고, 조금 더 많은 것 같기도 한데 정확히는 모르겠다. 앞머리로 이마를 살짝 가리고 있어 시각적으로 얼굴이 작게 보이는 모습이긴 한데, 굳이 가리지 않아도 본래 얼굴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눈썹이 가늘고 연한데, 아마 화장을 하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수련도 눈썹이 연한 편이었는데, 그 때문에 외출을 나갈 때는 항상 눈썹을 진하게 그리고 나간다고 했으니까. “저기요?” “네?” 단유는 자기도 모르게 낯선 여자의 얼굴을 분석(?)하느라 얼이 빠져 있었다. “비켜 달라고요.”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에 그제야 단유가 얼른 카트를 옆으로 치워주었다. “별꼴이네.” 라고 중얼거리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단유는 방금 자신이 보인 추태가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왜 그랬지?’ 한동안 안 그러다가 갑자기, 그것도 처음 본 여자의 얼굴을 뜯어보느라 넋을 놓고 있었던 것이 너무 이상하게 여겨졌다. 아무래도 명수가 한 말을 좀 더 진지하게 고찰해봐야 할 것 같다고 단유는 생각했다. 단유가 비켜준 틈으로 지나간 여자아이는 명수가 게임을 고르고 있는 매대로 향했다. 그리고 명수처럼 게임 타이틀을 고르기 시작했다. 명수가 그 모습을 힐끔 보더니, 게임을 고르는 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세로로 세워져서 타이틀의 제목만 눈에 들어오는 상황이라, 표지까지 확인하면서 꼼꼼히 게임을 고르던 명수의 손과 눈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자아이의 행동도 조금씩 변했다. 처음에는 느긋하게 게임 타이틀 하나를 집어 들고 앞뒤로 확인하던 여자아이는 명수의 손이 바빠지면서 자신이 게임 하나를 들여다볼 때, 명수는 세 개 혹은 네 개를 확인하는 것을 인지했다. 그러자 여자아이의 손도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게임 타이틀을 빼내고 표지를 확인하고 집어넣고, 다음 타이틀을 꺼내고 확인하고 집어넣는 절차가 빨라지더니 명수가 확인하는 개수와 비슷한 숫자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명수도 이를 알았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아도 빠르게 움직이던 손이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제대로 표지를 확인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뺐다가 넣었다가 뺐다가 넣는 동작이 이어졌다. 단유는 두 사람이 펼치는 속도전을 구경했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경쟁이 붙어서, 누가 더 빨리 게임을 뽑고 꽂는지를 시합하는 듯했다. 명수는 그렇다 쳐도, 저 아이는 대체 어떤 아이길래 명수와 저런 무의미한 경쟁을 하는 걸까, 궁금했다. 그렇다고 처음 보는 아이한테 다가가서 ‘왜 이런 쓸데없는 짓에 열을 올립니까?’라고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라 가만히 구경만 했다. 구경하는 사이에 단유는 여자아이를 좀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콧등에 난 작은 점과 다소 뾰족한 턱, 그리고 머리가 짧아서 더욱 두드러지게 보이는 긴 목선. 하얀 프릴이 달린 노란색 티셔츠와 물 빠진 청바지를 입은 여자아이는 명수보다 5㎝ 정도 작은 키를 가졌다. 얇고 작은 입술에 살짝 힘이 들어간 듯한데 결코 질 수 없다는 의지가 조금 과하게 들어간 인상이었다. ‘도대체 저게 뭐하는 짓이지?’ 분명 뭔가를 고르려고 하는 것 같은데 저래서는 뭐라도 고를까,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야, 너희들 뭐하니!” 마침 지나가던 점원 한 명이 그 장면을 목격한 뒤에야 두 사람의 보이지 않는, 아니 너무 티가 나게 다투던 경쟁이 끝이 나고 말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얼굴을 붉힌 뒤,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본래의 목적을 먼저 떠올린 여자아이가 타이틀을 ‘천천히’ 고르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종료되었다. “골랐어?” 단유가 혹시나 하고 물었지만, 역시나 명수는 고개를 절레 흔들어 보이고는 다시 게임을 고르기 시작했다. 이미 3분 전쯤에 빼서 보았던 타이틀을 다시 뽑아 들기 시작한 명수였다. 저래서야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못 고르겠는걸, 이라고 홀로 생각해 보는 단유였다. ======================================= [233] 업타운걸(2) 잠시 후, 명수가 기어코 게임 하나를 골랐다. “그거야?” 명수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려다 문득 옆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무의미한 경쟁을 펼치던 예의 그 여자아이가 명수를, 정확히는 명수가 들고 있는 게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절절해서 단유는 물론이고 명수마저 쉽게 등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거 할 거예요?” 아까는 경황이 없어 몰랐는데, 여자아이의 목소리는 얼굴처럼 앳된 미성이었다. “이, 이거요?” 명수가 타이틀을 슬쩍 들어 보이자, 여자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동자가 마치 새벽 운동 나가기 전 자신을 바라보는 호빵의 그것과 비슷해 명수는 잠시 멈칫했다. “예, 예.” 좀처럼 보기 힘든, 쑥스러워하는 명수의 모습이었다. 여자아이는 살짝 볼을 붉히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힘겹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거, 저 양보해 주시면 안 돼요?” 하지만 명수로서도 어렵게 고른 게임일뿐더러, 이미 많은 시간을 지체한 탓에 더 이상 게임을 느긋하게 고를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저 눈동자를 바라보며 ‘안 돼’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던 명수는 단유를 향해 바라보았다. ‘도와줘!’ 라는 눈빛이었다. 단유는 머리를 슬슬 긁다가, 마음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제 친구가 이미 고른 거니까요. 거기 찾아보시고 다른 거로 하시죠? 거기 똑같은 거 또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여자, 아니 소녀는 같은 눈동자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저거랑 같은 건 안 팔거든요?” 그럴 리가, 라는 생각으로 명수를 바라보자 명수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거, 원래 할인 안 되는 타이틀로 유명한데… 저 가격에 살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우연히 생긴 게임기가 집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게임을 사려는 명수나, 게임 자체에 관심이 없는 단유가 그런 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러나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단유는 나름 합리적으로 소녀의 말을 이해하려 했고, 그에 따라 합당한 추론과정을 통해 설득력 있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더더욱 저희가 양보하기 힘들다는 걸 이해하시겠네요. 그쪽에서 탐내시는 만큼 저희 쪽에서도 충분히 소장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는 뜻이니까요. 저희가 먼저 선택했고, 제 친구도 그걸 양보할 생각이 없으니 그쪽…에서 포기하셔야겠네요.” 단호한 단유의 대답에 소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우는 거 아냐?’ 라는 물음을 가득 담은 눈으로 바라보는 명수를 무시하고 카트를 붙잡은 단유였다. “가자.” 드르륵 카트를 돌려 가려는데, “저기요!” 소녀가 등 뒤에서 단유를 불렀다. 단유가 고개만 슬쩍 돌리자, 머리를 쓸어올리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는 소녀였다. “아니, 여자가 좀 양보해달라고 하는데 그거 좀 양보해 주면 어디 덧나요? 왜 그렇게 매너가 없어요?” 단유는 순식간에 눈빛이 변한 소녀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요?” “왜요는 뭐가 왜요에요?” “왜 우리가 양보해야 하냐고요.” 기가 찬다는 듯, 헛바람을 뱉은 소녀가 허리에 손을 걸쳤다. “매너 몰라요?” “그게 무슨 매넌데요?” “아, 나 참. 진짜 말 안 통하네.” 단유는 잠시 소녀의 짜증 섞인 시선을 마주하다가 고개를 절레 저었다. “이봐요. 그거 뭐예요? 지금 그거 무슨 뜻으로 고개를 흔들어요?” 소녀의 날카로운 반응에 옆에 있던 명수가 오히려 안절부절못했다. “무슨 뜻이긴요. 말 안 통하는 사람이랑 대화하려니 답답하다는 뜻이었어요.” “뭐라고요?” 단유는 오늘날 한 번 제대로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에는 학교에서 그러더니, 저녁에는 마트에서 이러고 있다. “지금 그쪽에서 계속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몰아가고 있잖아요.” “네?” 단유는 카트를 밀고 갔다. 명수에게 카트를 넘기고 소녀와 마주한 단유는 차분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여자가 양보하라고 하면 양보해야 한다는 건 처음 듣는 이야기에요. 그런 게 매너라는 소리를요. 혹시 그게 사회 전반에 걸쳐 통용되는 매너인데 제가 모르고 있었던 거라면 제가 사과할게요. 됐죠?” 소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단유는 옆에서 구경하는 직원에게 물음을 던졌다. 아까부터 말리거나 중재하긴커녕 재밌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베물고 있던 사람이었다. “계속 들으셨죠?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철저히 구경꾼으로 남아있고 싶어 했던 직원은 단유가 물어볼 줄 몰랐던지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어? 아니, 저기 난….” 여자애도 지지 않고 직원에게 물었다. “어디 한번 말씀해보세요.” 입 잘못 놀렸다간 가만두지 않겠다, 는 의사를 온몸으로 드러내는 여자애 때문에 직원은 더더욱 입을 열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창고 정리나 하러 갈걸. 그 사이에 단유는 직원 옆에 있던 또 다른 구경꾼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앗 뜨거, 하는 눈으로 다들 카트를 몰고 다른 곳으로 사라져갔다. 그렇게 강제적으로 주위 사람들을 물리친 단유는 직원을 향해 말했다. “아저씨도 그만 가보세요. 고작해야 애들 싸움인데, 그렇게 곤란 해하지 마시고요.” 직설적인 단유의 말에 직원이 머뭇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그러지 말고 있잖아… 여기서 큰 소리 내면서 싸우면 안 되거든?” “잘 알고 있어요. 절대 소란 피우지 않을 테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아이 같지 않은 아이의 말에 직원은 떨떠름한 얼굴을 하다가 얼른 몸을 돌렸다. “뭐하는 짓이야?” 여자애가 고리눈을 뜨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사람들 많은 데서 그쪽이 창피당하는 것 같아서 일부러 그랬어요.” 여전히 돌려 말할 줄 모르는 단유였다. “내가 왜 창피를 당해?” “아시잖아요? 왜 창피한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억지 쓰는 모습이 다른 사람들한테 어떻게 보이겠어요? 아까 어떤 사람들은 핸드폰도 들었던데, 요즘은 금방 촬영해서 인터넷에 올린단 말이에요. 그럼 누가 창피하겠어요?” 이미 경험이 있던 단유였다. 아마 지금 이 모습이 인터넷에 올라가면 또 한 번 유명세(?)를 치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지난 일을 통해 겪어본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사람은 아마도 여자애일 것이다. 여자애도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참.” 더는 말을 못 잇는 소녀에게 단유는 다시 차분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분명하게 말씀드릴게요. 이건 저 친구가 먼저 골랐어요. 저 친구가 변심해서 저걸 내려놓거나 혹은 나중에라도 환불을 하는 등의 사유로 저 물건에 대한 소유권을 반환하지 않는 한은 저 친구에게 소유권이 존재해요. 법적으로요. 그리고 우리가 일전에 알던 사이도 아니고, 마트에서 우연히 만난 사인데 어떤 양보를 바라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요? 게다가 자발적인 양보도 아니고 강압적인 양보는 양보가 아니겠죠? 그러니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만, 양보해드릴 수 없으니 그쪽 분은 다른 원하시는 것을 찾으시길 바랄게요.” 단유는 할 말 다했다는 듯, 입을 다물고 등을 돌렸다. “잠시만.” 단유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첫째는 포기할 줄 모르는 소녀 때문이었고, 둘째는 행동이 굼뜬 명수 때문이었다. 빨리 자리를 뜨고 싶은데도 명수는 왜 저렇게 엉거주춤 서 있는 걸까? “니 말 무슨 뜻인지 잘 알겠어. 포기할게.” 굳이 가려는 사람 붙잡고 선언할 거까진 없지 않나, 라는 생각을 떠올릴 때 소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억지 부려서 미안해.” “?” 단유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다시 머리를 쓸어넘기며 소녀가 단유를 바라보았다. “너 이름 뭐야?” “응?” “이름 뭐냐고?” “김단유라고 해요.” 대답은 명수가 했다. 아니, 얼굴은 왜 붉히고 있대? “난 상미라고 해. 유상미.” 도대체 무슨 상황이래? 단유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바라보는데 소녀, 상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계속했다. “일면식도 없는 사인데 무턱대고 양보해달라고 하면 어렵겠지. 그래, 이해했어. 그러니까,” 상미는 입꼬리를 올렸다. “얼굴 좀 알고 지내자고.” 문득 단유는 자신의 머리를 막 긁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머리 구석구석 느껴지는 가려움증이 참기 힘들 정도였다. 보는 시선만 없다면, 체통도 신경 안 쓰고 그냥 드러눕고 머리를 긁고 싶다는 충동이 느껴졌다. 맥락 없는 자기소개, 어리벙벙한 얼굴의 명수, 이야기의 흐름을 쫓아가지 못하는 단유였다. **** “이거만 사면 돼.” 어느새 주문지에 적힌 것들을 모두 카트에 담아낸 단유였다. 카트를 밀고 나가는데, 계속 뒤가 신경 쓰였다. “이게 처음 플레이하면 말이야….” “나도 이야기로만 들었는데….” 상미는 뭔가를 계속 이야기하고, 명수는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는 분위기였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너 집에 안 가?” 알고 보니 상미는 같은 학년이었다. 게임을 무척 좋아한다는 그녀는 게임 할인 이벤트를 뒤늦게 알고 찾아온 거라고 했다. 그래서 딱히 다른 급한 일이 없어서 그렇다고 했다. 이미 그녀의 손에도 게임 타이틀 2개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진짜 원했던 것은 명수의 것이었다는 듯, 명수 옆에 서서 그 게임에 대한 이런저런 지식들을 늘어놓는 중이었다. “어차피 나도 이거 계산하고 갈 거야. 왜? 그렇게 꼴 보기 싫어 죽겠어?” 한 가지 더 알게 된 사실은 꽤 넉살이 좋은, 털털한 성격이라는 것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여자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자기 입으로 하긴 했지만, 사실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럼 왜 그런 말을 했냐고 했더니, “그만큼 그 게임이 탐이 났던 거지.” 자기 생각과 신념에 반하더라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잠시 자신을 속일 만큼 영악한(?) 면도 있다는 본인 소개였다. 어처구니없는 본인 소개였다. 그런데 상미만큼 답답한 건, 명수의 태도였다. 연신 헤벌쭉해서는 상미가 무슨 말을 하든 고개를 끄덕이는 명수였다. “너 왜 그래?” “뭐?” 뻔뻔함까지 갖춘 명수는 상미와의 대화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때문에 애초 맛있는 걸 사 먹겠다고 결심했던 것도 잊을 정도였고, 그래서 주 미션(main mission)인 ‘게임 타이틀 구매’는 성공했지만, 부 미션(sub mission)인 ‘간식 구매’는 실패하고 말았다. 마트를 나와 봉투를 들고 터벅터벅 길을 걸어가던 단유는 인상을 쓰고 뒤를 돌아보았다. “집에 안 가?” 명수와 알콩달콩(?) 대화를 나누던 상미가 눈을 껌뻑거리며 대답했다. “가는 중인데?” “어딘데?” “저기.”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은 우연히도 단유의 오피스텔이 있는 방향과 일치했다. 단유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집에 가자마자 수학책을 꺼내야겠다고. 수학 문제나 풀면서 복잡하게 꼬인 머릿속을 풀어야겠다고. 어느덧 오피스텔 앞에 다다른 단유는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명수와 무슨 이야기를 그리도 심각하게 하는지, 서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명수야, 가자.” 명수가 고개를 번쩍 들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어, 그래.” 명수는 옆에 선 상미한테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보자.” “어, 그래. 안녕.” 상미가 손을 흔들어 보이곤 계속 걸어갔다. 단유 옆을 지날 때는 단유에게도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잘 가, 친구야.” 친구? 누가? 나? 단유가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긁을 때, 명수가 히죽 웃으며 다가왔다. “너 뭐냐?” “뭐가?” “…됐다.” 단유는 오피스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던 단유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명수에게 물었다. “다시 보기로 했어?” “응?” “아까 걔가 나중에 보자고 했잖아.” “아, 응. 조금 이따가 보기로 했어.” “뭐?” 단유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명수를 바라보았다. “상미네 집이 우리 오피스텔 뒤에 있는 빌라더라고. 저녁 먹고 놀러 온다고 했어.” “…왜?” “이거같이 하려고. 도와주겠대.” 단유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방문을 잠그겠다고 다짐했다. ======================================= [234] 업타운걸(3) “다녀왔습니다.” 단유는 인사와 함께 주방으로 가 이모님께 봉투를 건넸다. “저녁 다 됐어. 식탁에서 기다려.” 단유는 곧장 방으로 들어가 수학책을 펼치고 싶었지만, 참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명수는 곧장 거실로 내달려 게임기를 실행시켰다. “명수야, 밥 안 먹어?” 선생님이 명수를 보며 묻자, 명수는 “먹어요!” 라고 대답을 하면서 손은 이미 새로운 게임 타이틀에서 꺼낸 시디를 게임기 속에 집어넣는 중이었다. 타이틀 화면이 나오는 것까지 확인한 명수는, 그제야 식탁으로 왔다. “저거 산 거야?” 선생님이 묻자 명수가 곧바로 시인했다. 그간 모으던 용돈으로 산 거라면서 선생님이 장 보라고 주신 돈으로 산 게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선생님은 그저 미소로 지으며 명수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고, 단유는 갑갑한 머릿속을 어떻게든 시원하게 풀고 싶었다. 잠깐 가서 한 문제만 풀어볼까, 라는 충동이 느껴질 때 식탁 위로 뚝배기에 담긴 빨간 김치찌개가 올라왔다. “먹자.” 선생님이 국자로 명수와 단유 앞에 놓인 작은 국그릇에다 김치찌개를 조금씩 담아 주었다. 살짝 시큼하고 살짝 맵지만 화끈한 기운이 도는 김치찌개의 얼큰함이 단유의 속을 풀어주었다.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먹어.” 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명수는 듣지 못했는지 허겁지겁 먹을 뿐이었다. “명수야, 천천히 먹어라. 그러다 체할라.” 그러나 명수는 괜찮다며, 그저 입안으로 밥과 찌개를 동시에 집어넣는 중이었다. “너 천천히 안 먹으면 게임 못하게 한다.” 명수의 숟가락이 멈칫하더니 선생님을 향해 불쌍한 눈동자를 들이밀었다. “왜?” “…아니요.” 하지만 단유가 짐작하기에 아마도 상미라는 아이가 오기 전에 식사를 마치고 게임을 같이 할 준비를 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그런 짐작을 이야기하자 선생님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걔가 누군데?” 단유는 마트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는데, 그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반면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선생님은 두 사람에게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에 반가워했다. “우리 집에 처음 오는 친구네?” 그러고 보니 여태 이 집으로 초대되어 온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학교에서도 그렇고 하굣길도 같이 하는 지태나 채윤이 있었지만, 그 둘도 아직 집에 초대되어 온 적은 없었다. 그럴 만도 한 게 게네들이 집에 온다고 해서 딱히 뭔가 할 것도 없었고, 그렇다고 수다나 떨자고 집에 초대한다는 것은 단유의 성격에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상미는 집에 오지 않았다. 전화번호를 몰라서 왜 안 오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래서 명수는 시무룩한 얼굴로 게임기를 꺼야 했다. “왜 안 해?” “그냥.” 명수는 방으로 조용히 들어가 문을 닫았다. 단유는 머릴 시끄럽게 하던 아이가 오지 않아 좋긴 했지만, 반면 명수가 저리 시무룩해 하는 걸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오늘만은 조금 이기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다시 상미를 보면 잠도 제대로 못 잘 것 같아서. **** 다음 날 등굣길에 단유는 눈 밑이 검은 명수를 보며 물었다. “너 걔 좋아해?” “응? 아… 뭐, 아니.” 뭔가 대답이 시원찮다. 단유는 명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다시 물었다. “그럼 왜 그러는데? 걔 때문에 잠도 못 잔 거 같은데?” 그러자 고개 숙인 채 시무룩하게 걷던 명수가 오히려 단유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넌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갑자기 뭐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야?” “난 걔처럼 예쁜 여자애는 처음 봤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단유가 어안이 벙벙하여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명수는 가만히 상미의 얼굴을 떠올려보는 듯 아련한 눈동자를 하고 입을 열었다. “얼굴도 하얗고, 눈도 크고, 순하게 생겼잖아? 근데 또 말도 잘하고, 입술도 작고, 빨갛고. 안 그래?” “…그렇긴 뭐가 그래?” 뭔가 두서없이 자신의 감상을 밝히는 명수를 보아하니 분명 푹 빠져버린 것 같긴 했다. 문제는 단유가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부분에 명수가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단유는 명수의 그릇된 환상을 깨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진실을 정확히 인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니까. “눈이 대략 이 정도 되지? 그런데 눈의 크기에 비해서 다른 이목구비의 비율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어. 특히 입이 너무 작다는 느낌 안 들었어? 그렇게 작으면 비율이 좋지 않기 때문에 이쁘다는 인상을 받기 힘들지. 그리고 눈썹도 흐릿하던 거 안 봤어? 눈썹이 연하다 보니 실제로는 그렇지 않겠지만, 이마의 경계선이 흐릿해지지. 그래서 앞머리로 가리고 다니는 거였겠지만. 그리고 귀도….” “그만! 오케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명수가 단유의 말을 잘랐다. 단유는 더 할 말이 남았다는 얼굴로 명수를 바라보았다. “니가 여자 보는 눈이 굉장히 높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그 정도로 해. 그래도 심하다, 너. 어떻게 그 얼굴을 보고도 예쁘다고 못 느끼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 얼굴은….” “거기까지.” 명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반했다는 거야?” “응?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거지.” 명수가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앞서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단유는 그 뒷모습을 보며 걷다가 미처 말하지 못했던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걔, 말 못하는데.” **** 단유는 그렇게 상황이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명수가 잠을 설칠 정도이긴 했지만, 그리 오래 가진 않으리라 판단한 것인데. “안녕하세요.” 방에서 공부하던 단유는 순간 잘못 들은 것으로 생각했다. 닫힌 방문 너머로 들리는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단유의 집중을 방해했다. “어? 안녕?” “안녕? 어젠 미안. 집에서 시간이 너무 늦었다고 해서 가지 말라고 해서 말이야.” “아, 그랬구나.” “전화번호라도 알고 있었으면 전화를 했을 텐데 말이야. 많이 기다린 건 아니지?” “응? 아니야, 아니야.” 아니긴. 밤새도록 잠도 설칠 정도였으면서. “현관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지 말고 들어오지 그러니? 명수가 초대한 첫 번째 친군데, 이렇게 대접할 순 없지.” 선생님도 약간 들뜬 목소리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제 걔는?” 흠칫, 놀란 단유는 고개를 돌려 방문을 바라보았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지금 열심히 과학 문제집을 푸는 중이었단 말이야. 이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단 말이야. ‘열지 마. 열지 마. 열지 마.’ 그때 벌컥 문이 열리면서 명수가 이보다 더 환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야!” 너 왜 그렇게 밝은 건데? “상미 왔어.” 그리고 열린 틈으로 상미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안녕?” 단유는 어색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인사를 했다. “안녕.” 명수는 히죽 웃으면서 상미에게 엄청난 비밀을 이야기한다는 식으로 목소리를 낮추고 이야기했다. “단유는 공부를 좋아해서, 지금 시간에 방해받는 거 별로 안 좋아해.” 그러면서 문을 닫아주는 명수였다. 고맙다, 명수야. 그러나 문이 닫히기 전, 쿵 소리 나게 닫히는 문을 막으며 몸을 들이민 상미가 곧 방으로 들어왔다. “우와. 방 되게 깨끗하다? 책 좀 봐. 정말 공부 좋아하나 보네. 이건 뭐야? 고등학생 책 아냐? 이런 것도 보는 거야? 어, 이건 뭐야? 논어? 어려운 책도 많이 보나 봐?” 잠시 당황하던 명수는 이내 상미 옆에 붙어서 이것저것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건 전에 같이 살던 선생님이 선물해준 거야. 단유가 워낙 머리가 좋아서 이런 책도 잘 읽어. 저기 저 책도 친한 형이 선물해준 건데, 초딩 때부터 저런 책 읽었다니까.” 명수는 눈에 익은 책들을 중심으로 마치 박물관 큐레이터처럼 책의 연원과 단유가 얼마나 저 책을 좋아하는지를 상미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나저나 왜 그걸 니가 설명하는 건데? “와, 보기만 해도 머리 아프다. 야, 나가자.” 응? 단유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상미를 바라보는데 상미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놀 때는 다 같이 놀아야 재밌는 거야. 나와.” 그리고 먼저 거실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명수가 잠시 눈치를 보다가 단유를 보며 말했다. “나오래.” 그러고는 상미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잠시 후, 상미는 익숙하게 게임기를 작동시키고 게임을 시작했다. “어? 너 어제 안 했어?” “응.” “왜 안 했어? 난 게임 사면 바로 해봐야 직성이 풀리던데. 어제 산 게임도 난 어제 바로 다 해봤는데.” 차마 니가 안 와서 흥이 안 났어, 라는 말은 못하고 명수는 그저 머리를 긁으면서 히죽 웃기만 했다. “뭐, 같이 하면 되지. 아, 단유 넌 뒤에서 구경하고 있어. 조금 있다 시켜줄게.” “안 시켜줘도 돼.” 단유는 소파에 기대고 앉아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관찰할 준비를 했다. “아니야. 이런 건 구경만 하는 것보다 직접 하는 게 더 재미있단 말야. 그렇지?” “그럼, 그럼.” 명수는 상미가 무슨 말을 해도 다 좋다고 할 기세였다. 단유는 들리지 않게 혀를 차며 팔짱을 끼고 몸을 소파에 묻었다. 그리고 만약 상미가 게임패드를 자신에게 쥐여준다고 해도 절대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이렇게 나와서 구경해주는 것만으로도 단유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게임이 시작되면서 그런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자기들 뒤에 단유가 앉아있다는 사실도 잊었는지 신나게 패드를 조작하면서 게임을 즐겼다. 1시간이 지나도록 두 사람은 전혀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고, 컨트롤러를 내려놓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단유는 슬며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누구도 단유를 부르지 않았다. 단유가 한참 수학 문제를 풀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돌아보니 선생님이셨다. “저녁 먹자.”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생각하며 주방 식탁으로 향했는데 식탁에는 상미랑 명수가 벌써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우와 이거 되게 맛있어요! 우리 엄마가 한 거보다 더 맛있어!” 이모님은 슬쩍 웃으면서 고맙다고 사례한 후, 접시 위에 황태 양념구이를 한 마리 더 얹어 주셨다. “너 집에 안 가?” 그 말에 명수가 먼저 대답했다. “저녁 먹고 간다고 전화했어.” 그걸 왜 니가 말하고 있는 건데? 상미가 황태를 오물오물 씹으며 말했다. “넌 돌려 말하는 법이 없구나? 어제도 바로 눈치채긴 했지만.” 단유는 말없이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너 나 싫어?” 순간 식탁 위에 숟가락이 동시에 정지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단유는 아랑곳하지 않고 젓가락을 들어 황태구이를 집어 들었다. “아니.” “그런데 왜….” “싫은 게 아니고, 그냥 신경 쓰기 싫은 거야.” 다시 식탁 위에 수저들이 멈추는 느낌이 들었지만, 또 상미의 수저가 달그락거리며 밥그릇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게 싫다는 말 아냐?” “그냥 내 일상의 리듬이 흐트러지는 게 싫어서 그런 거야. 너라는 사람을 싫어하는 건 아냐. 그러니까 나 신경 쓰지 말고 놀아. 그러면 괜찮을 거야.” 상미는 열심히 턱을 움직이면서도 시선은 단유에게 주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계속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단유에게 상미가 말했다. “너 삐졌니?” “뭐?” 단유가 무슨 뚱딴지냐고 반문하려는데 상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 게임 안 시켜줬다고 삐진 거 아니냐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사실 나도 게임기를 붙잡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드는 성격이라서 말이야. 나중에야 니가 방에 간 걸 알았어. 미안해. 조금 있다가 밥 먹고 시켜 줄 테니까, 마음 풀어.” “…그런 거 아니거든. 그리고 나 게임 안 좋아해.” 상미는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거짓말! 세상에 게임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어? 아무리 책 좋아하고 공부 잘하는 애들이라도 게임은 다 좋아해!” “거짓말 아니거든?” 명수도 그 말에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단유는 게임 안 좋아해. 그래서 저 게임 한 번도 안 해봤을걸?” “안 돼. 게임 한 번 안 해보고 좋아한다, 안 한다 말하는 건. 한번 해보고 나서 말해봐. 재미있는지, 재미없는지 말이야.” 그때 식사를 마친 단유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 게임 안 해도 돼. 난 그 시간에 책을 읽는 게 더 즐거우니까.” “너 학교에서 무슨 외톨이 같은 거야? 뭐라더라?” “히키코모리?” “어, 뭐 그런 거. 너 그런 거 아냐?” 단유는 머리를 흔들며 물었다. “게임을 안 하는 거랑 외톨이랑 도대체 무슨 상관인데?” “비슷하잖아? 사회성 부족한 애들이 방 안에 틀어박혀서 대화도 안 하고 숨어지내는 사람처럼 있는 거 말이야.” “전혀 안 비슷하거든?” “그럼, 게임 한 번 해봐. 해 보고 말해봐. 재미있는지 없는지.” 어제의 재탕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단유는 약한 두통이 느껴졌다. ======================================= [235] 업타운걸(4) “자, 해봐.” 상미는 진짜 단유의 손에 패드를 쥐여주었다. 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얼굴에 드러내고 있음에도 전혀 모른다는 눈으로 방으로 들어가려는 단유의 손목을 붙잡고 거실에 앉힌 상미는 패드 사용법을 알려주면서 말했다. “원래 재밌는 건 같이 해야 친구인 거야.” “맞아, 맞아.” 오늘따라 명수가 얄밉다고 느끼는 단유였다. 곧 게임이 시작되고 단유는 캐릭터를 움직여 전장을 누볐다. 칼인지 몽둥이인지 모를 거대한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적들을 무찌르는 캐릭터의 동작은 소위 ‘타격감’이라고 부르는 맛이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오른쪽! 오른쪽!” 상미가 옆에서 코치하면서 단유의 게임을 돕고, 명수가 단유의 뒤를 쫓으며 단유가 흘리는 적들을 무찌르는 식으로 게임을 진행했다. 한 에피소드가 끝나고 잠시 손을 쉴 수 있는 때가 왔다. 단유는 패드를 내려놓자, 상미가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재밌지?” 단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래. 재밌어.” “거 봐. 재밌다니까.” 단유는 패드를 상미에게 넘겼다. “더 해.” “아니, 난 충분해. 난 잠깐 쉴게.” “그럴래?” 애써 거절하지 않는 상미였다. 이미 한 에피소드를 단유에게 넘겨주었고, 또 단유도 게임이 ‘재미있다’고 인정을 했으니까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상미가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가기 전, 맵을 보면서 명수와 전략을 짜고는 에피소드 시작 버튼을 눌렀다. 곧 명수와 상미는 아까보다 더 복잡해진 미션 수행과 더 강한 적들을 맞아 정신없이 게임에 집중해야 했고, 그 사이 단유는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마침 방에서 책들을 정리하고 계시던 선생님이 단유를 보며 물었다. “왜 더 놀지 않고?” “다 놀았어요.” 단유는 덤덤한 얼굴로 대답하고는 책상에 앉아 보고 있던 책을 펼치고 샤프를 집어 들었다. 역시나, 싶은 생각이 들어 선생님이 살짝 미소를 짓다가 물었다. “그런데 저렇게 예쁜 애한테 너무 차갑게 대하는 거 아니니?” 단유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는데, 그 얼굴이 마치 더 이상 읽을 책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의 그것과 같았다. “말도 안 돼요. 쟤가 예쁘다고요?” “그럼, 예쁘지? 저 정도면 남자 아이들이 많이 쫓아다니겠는걸?” 물론 얼굴만 그랬다. 말하는 모양새나 행동은 거의 명수 복사판 같았지만. “선생님, 진지하게 여쭤볼게요. 쟤가, 그러니까 저 얼굴이 여기 사람들이 말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에 부합하는 얼굴이라는 건가요?” “여기 사람들?” “아, 저기… 그러니까 서울 사람들이요.” 선생님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단유의 머리를 콩 하고 쥐어박았다. “네가 TV를 안 보고 살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만, 저 정도면 어디 아역 배우라고 해도 믿을 거다. 굳이 TV를 보지 않아도, 객관적으로 저 정도면 예쁜 얼굴 아니니?”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는 말이 이래서 나오는구나, 라고 속으로 되뇌며 단유는 몸을 돌려 책을 보았다. “단유야.” 선생님이 다시 단유를 불렀다. 단유가 돌아보자, 침대에 걸터앉은 선생님이 단유를 향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선생님은 네가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게 얼마나 기특한지 몰라. 내가 여태 살면서 여러 아이를 봤지만, 너처럼 바르고 착하게 사는 아이를 본 적이 드물단다. 그런데 단유야. 선생님이 세상을 살다 보니까 말이야. 그냥 공부만 하는 게 다는 아닌 것 같더라. 명수처럼 아예 공부랑 담쌓고 사는 것도 문제긴 하겠지만, 어쨌든 주위의 아이들처럼 TV도 보고, 영화도 보고, 게임도 하고, 여자 친구도 사귀면서, 그렇게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편하게요?” 단유는 말의 요지를 정확히 짚어냈다. 비록 상미와 불편해 보이는 단유가 걱정스러워 말을 시작했지만, 사실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평소 단유가 가지고 있는 ‘강박’에 대한 것이었으니까. “그래. 선생님이 보기에 넌 너무 여유가 없이 사는 사람 같아.” “저 여유로운데요. 학교에 지각하는 일도 없고, 숙제를 밀려서 하지도 않고, 책이나 식사도 되도록 천천히 하려고 하고요.” “…우리 똑똑한 단유가 왜 갑자기 딴소리할까? 선생님 말이 뭔지 알면서?” 물론이다. 단유는 선생님이 말씀하시려는 게 뭔지 잘 알고 있었다. 어느덧 이곳에 온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단유는 생존을 제1의 가치로 보고 있었다. 명수라는 좋은 친구와 재훈이라는 보호자가 생겼지만, 그리고 눈앞에 계신 선생님이나 하은, 태호, 수련과 같은 이들이 주위에 있지만, 여전히 단유는 ‘생존’이 행동법칙 제1항으로 등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장 효율적으로 이 세계에 생존하기 위해, 즐길 거리, 여유를 조금 미루는 면이 있음을 단유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이 사회에서 단유의 그런 행동방침은 ‘모범생’이라는 타이틀로 포장되어서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장려되는 터였기에 지금까지 단유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생존을 위한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을 돌보며 그것을 업으로 한 선생님의 눈에는 단유의 ‘강박’이 잘 보였던 모양이었다. 특히나 한 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시간이 길고, 또 부모도 아니니 제삼자로서 객관적으로 단유를 바라볼 수 있었기에 그런 평가를 할 수 있었던 선생님이셨다. “지금 이 방을 봐. 깨끗하지?” 당연하다. 단유는 늘 방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살았다. 침대는 마치 새로 산 것처럼 깨끗했고, 책장에는 책들이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바르게 정리·배열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먼지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게 닦여져 있었고, 책상 위에는 필기구와 노트, 그 밖에 여러 가지 것들이 쓰임새에 따라 일정한 구역을 정해 정리되어 있었다. 이모나 선생님이 청소하러 방에 들어와도 할 게 없어서, 대충 둘러만 보다가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일 정도였다. “너 예전에, 그러니까 6학년 때는 이렇게 심하지 않았어. 그런데 중학생이 되면서 이게 더 심해졌어. 주위가 흐트러지는 것, 혹은 더러워지는 것을 심리적으로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된 거지. 물론 깨끗하게 사는 거, 나쁘지 않아. 정리 잘하고 깨끗한 게 뭐가 흠이겠니. 하지만 그게 너무 심해지면 그것도 일종의 병으로 본단다. 선생님이 보기에 넌 작년보다 더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는 것처럼 보이거든.” 선생님은 한동안 기회가 없어 꺼내지 못했던 말들을 이때를 빌어 털어놓기로 하셨는지 줄곧 생각해왔던 단유에 대한 자기 생각을 밝혔다. 단유는 선생님이 자신을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는 것에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러웠다. 자신을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고맙지만, 자신의 생각과 숨기고 싶은 비밀까지 속속들이 알아낼까 두렵고 부담스러운 것도 진심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니가 정말 다른 아이들처럼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물론 선생님도 알지. 요즘 교육 시스템에서 너희들이 마냥 편하게 지낼 수만은 없다는 걸 말이야. 어쩌면 너처럼 공부 잘하는 아이에게 이런 말 하는 게 이상할 수도 있어. 그런데 선생님은 네가 단지 공부만 잘하는 아이로 크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하는 말이야. 선생님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네.” 단유는 곧바로 인정했다. “그렇다고 너무 명수처럼 놀지는 말고. 적당히. 적당히, 라는 말이 참 어렵긴 한데, 그래도 단유 넌 똑똑하니까 중심을 잘 잡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조금 어긋나더라도 네 주위에는 주영씨나 재훈씨, 그리고 선생님이나 이모님도 계시니까 너무 걱정만 하지 말고, 부디 편하게 생활하길 바랄게.” “네, 선생님.” 선생님은 그래, 어련히 알아서 하겠어, 라는 생각으로 단유의 머리를 쓰다듬고 방을 나섰다. 똑똑한 아이니까, 스스로 생각하고 옳은 길로 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니까. 선생님이 나가신 후, 단유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베개를 침대 가운데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페이지를 마저 읽기 전, 베개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자신이 편하게 살지 않고 있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한번 곰곰이 따져봐야 할 것 같았다. 문이 벌컥 열리며 상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 간다.” “…가는 건 좋은데, 앞으로는 노크 좀 해줬으면 좋겠어.” “그 말은 앞으로도 자주 보자는 뜻?” “…그렇게 들리니?” “응!” 상미는 손을 흔들어 보이곤 문을 닫았다. 다시 조용해진 방에서 단유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밤 9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제2의 명수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옳았다. 무려 4시간 동안 게임만 하다 돌아가는 상미였다. 다음 날, 등교하는 명수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밝고 환해 보였다. 마치 얼굴에 빛이 나는 크림이라도 바른 것 같았다. “뭐가 그렇게 좋아?” 단유의 물음에 히죽 웃던 명수가 대답했다. “날씨가 좋잖아?” 날씨가 좋긴 했다. 아침부터 뜨거운 공기에 길 위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정도였고,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과 탁한 공기가 뒤섞여 여름이 다가오고 있음을 절절히 알려주는 아침이었으니까. “다행이다. 어제보단 얼굴이 좋아 보여서.” “그래? 뭐 그런 날도 있고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명수는 콧노래를 부르며 앞서 나갔다. 잠시 그 뒤를 쫓던 단유는 문득 자신이 단 한 번도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콧노래로 부를 만한 노래가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음악이라고 해도 초등학교 음악 시간에 배운 노래가 다였다. 그런 노래를 콧노래로 부르자니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도 안 들고. “흠흠.” 콧소리를 내보려고 시도하려다 괜히 창피한 생각이 들어 관두고, 앞서가는 명수를 쫓았다. **** 그 뒤로 상미가 종종 집에 놀러 와서 게임을 하고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갔다. “우리 집보다 TV가 크고, 우리 집보다 반찬이 많고, 게다가 여기서는 같이 게임 할 친구가 있잖아?” 라며 명수의 어깨에 팔을 거는 상미였다. 명수의 입이 이보다 더 커질 수 없다는 듯이 길게 찢어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선생님도 상미를 두고 뭐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미가 올 때마다 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반겨주시는 선생님이셨다. “너희들 학교 가고 없을 때, 상미 어머니가 한 번 찾아왔었거든. 이야기를 나눠보니까 상미가 외동이라서 많이 외로움을 탔다고 하더라. 취미가 또 게임이다 보니 같이 어울릴 동성 친구도 많지가 않고 말이야.” 선생님은 함께 있는 아이들에 대해 상미 어머니에게 자세히 알려 주었다. 공부를 잘하는 단유와 축구부 활동을 하고 축구에 재능이 많아서 꿈이 축구선수인 명수에 대해 이야기를 드리니 어머니는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 단유가 전교에서 1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기뻐했다. 단유 같은 아이라면 상미가 공부에 취미를 가질 때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게다가 선생님과 이모님이 계속 집 안에 계시니, 혹시라도 아이들이 일탈할 가능성도 적어 보이니 나쁘지 않다고 여긴 것이다. “시험 기간이 되면 말씀해 주세요. 그럼 여기에서 공부방 겸해서 아이들이 모두 공부할 수 있게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예요.” 어머니가 기뻐한 것은 당연했다. 비록 이성 친구이고,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라는 게 걸리긴 하지만 고리타분하게 그런 외적인 문제로 상미를 걱정하는 어머니는 아니었다. 오히려 동성 친구들이랑 잘 놀지 못하는 상미가 걱정스럽던 차에 이런 성향(?)의 아이들이라면 잘된 일일 수도 있겠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상미 어머니는 단유와 명수가 있을 때도 한 번 찾아오셨다. 특히 단유를 보며 눈에 빛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그건 찰나의 순간이었다. “니가 명수구나. 상미가 네 이야기 많이 하더라.” 명수가 헤벌쭉 웃으며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를 했다. 뭐가 고마운 건지 모르겠다만. 뒤이어 단유를 바라보는 어머니는 단유에게 상미를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네?” “나중에 같이 공부도 하고, 상미가 모르는 거 있으면 많이 가르쳐 주고 그러라고.” “아, 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상미는 더 자주, 라고 표현하고 싶지만 이미 매일 출근 도장을 찍고 있던 터라 의미가 없다. 다만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이전에는 9시쯤이었던 것이 이제는 10시쯤으로 늘어났다는 것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바뀐 것이 상미의 귀가 시간뿐인 것은 아니었다. 세 사람의 관계도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 [236] 업타운걸(5) 7월이 되는 첫 주, 기말고사가 예정되어 있던 단유와 명수는 본격적인 시험공부에 돌입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명수를 단유가 특별과외 하는 식이었지만, 어쨌든 두 사람은 중학교 첫 기말고사를 잘 치르기 위해 준비에 들어갔다. 초등학교 때도 이런 식이었지만, 다른 점이라면 초등학교 때보다 더 많은 과목과 더 어려워진 난이도 때문에 준비 기간을 길게 가져가기로 했다는 점이 첫째였고, 두 번째는 단유가 가르치는 대상이 명수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선생님, 질문 있어요.” 단유는 짧게 혀를 차며 대답했다. “나 선생님 아니거든? 그렇게 부르지 말아 줄래?” 상미는 키득거리면서 문제지를 내밀었다. “이거 잘 모르겠어.” 단유는 상미가 내민 문제지를 힐끗 바라본 뒤, 간단하게 문제 풀이 과정을 설명했다. 상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문제지를 회수하자, 뒤이어 지태가 문제지를 내밀었다. “이건 너도 풀 수 있는 거 아냐?” 지태는 단유의 말에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이게 이해가 안 가서.” 단유는 간단한 방정식을 이용해서 해를 구하는 방법을 설명해준 뒤, 채윤을 바라보았다. 채윤은 지태 다음에 물어보려고 문제지를 들고 있다가 단유의 시선에 찔끔 놀라는 얼굴을 했다. “괜찮아.” 채윤이 헤실 웃으면서 문제지를 내밀었다. 오직 명수만이 문제지를 내밀지 않았다. 어차피 모르는 거 나중에 몰아서 물어보는 게 효율적이기 때문이었다. **** 처음에는 단유의 집에 상미와 명수만 있었다. 상미 어머니는 마침내 단유라는 아이의 쓰임새(?)에 만족하며 고마워했고, 상미의 손에 간식거리를 들려서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시험공부 하는 2주간은 11시에 들어와도 된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넌 학원 안 가?” “내 체질이 아니라서.” 그보다는 게임 할 시간이 줄어들어서겠지, 라고 단유 나름대로 상미를 이해하며 명수랑 같이 공부를 가르쳤다. 상미네랑은 교과서가 다르지만, 어차피 중학교 1학년의 과목이고 거의 비슷비슷하기 때문에 문제집으로 공부하게 되면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그래서 상미도 두 사람과 함께 공부하게 되었다. “우리 애가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머리는 좋은 편이에요.” 라고 선생님께 말씀하시던 상미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머리가 좋아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결론적으로 상미와 명수는 도긴개긴이었다. **** “벌써 시험 준비를 한다고?” 지태가 명수의 말에 놀랐다는 듯 반응했다. 아직 학교에서 시험 범위나 구체적인 일정이 나오지 않은 탓이었다. “그래도 기말고사잖아. 나올 범위라는 것도 뻔하고 7월 첫 주에 시험 친다는 걸 다 아는데 기다릴 게 뭐 있어?” 라는 게 단유의 입장이었다. 그리고 명수는 평소보다 더 길게 기간을 잡고 공부를 해야 하는 처지기에 미리 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축구부 활동도 겸해야 했던 명수였다. “다른 축구부 애들 보면 별로 시험 준비 않던데?” “난 시험성적 잘 나오지 않으면 집에서 쫓겨나.” 명수의 말에 지태와 채윤이 얼굴을 굳혔다. 두 사람도 어느 정도 단유와 명수의 사정을 알기 때문에 명수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고 느낀 것이다. “거짓말이야.” 단유가 장난치지 말라며 명수의 등을 쳤다. 명수가 오버하면서 아픈 척을 했다. “완전 거짓말은 아니지. 재훈이 형이 시험성적 잘 안 나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잖아.” 본래 뜻은 ‘기본만 하자’라는 것이었지만, 명수에게는 그 기본도 철저히 준비하지 않으면 어려운 경지인지라, 나름 집에서 쫓겨날 각오로 공부하고 있었음이다. “아무튼, 시험공부를 하는 중이다, 이거지? 단유가 가르쳐주고?” “가르쳐 준다기보다는, 그냥 조금 알려주는 정도지.” “그게 그거 아냐? 그럼 우리도 같이하자.” 이미 중간고사 때 단유가 전교 1등을 하면서 그의 실력이 드러난 참이었다. 지태와 채윤은 전교 1등의 노하우도 배울 겸, 시험공부도 할 겸 해서 단유의 집에 가고 싶어 했다. “괜찮아. 여러 사람이 모여서 공부하면 더 잘 될 거야.”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명수 니가 그런 말을 하면 신빙성이 떨어진단 말이야.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문제가 아닌데.” “뭐 문제 있어?” 채윤이 단유의 눈치를 보면서 물었다. 채윤이 보기에 단유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기는 성격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책을 읽을 때 방해받는 걸 싫어하는 모습을 종종 봤었기 때문에 혹시 지태와 자신이 단유네 집에 가는 게 싫은 건 아닐까, 염려하는 중이었다. “선객이 있어, 우리 집에.” “선객?” “그게 뭔데?” 지태는 선객이 있다는 말에 호기심을 드러냈고, 명수는 ‘선객’이란 단어가 뭔지 몰라 물었다. “1주일 전부터 우리랑 같이 공부하는 애가 있다고.” “아, 그거야?” 명수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지태와 채윤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다. “우리 집 뒤에 사는 앤데, 평소에 같이 놀던 사이야. 시험공부도 같이하기로 해서 같이 단유한테 배우는 중이거든.” “배우긴 뭘 배워. 그렇게 말하면 이상하잖아?” 단유의 말은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는 듯, 지태는 오히려 잘 됐다는 얼굴을 했다. “그럼 우리도 같이해도 되겠네. 한 사람이 있으나 두 사람이 있으나 똑같잖아.” “그게 어떻게 똑같아? 그리고 두 사람이 아니고 세 사람이 되는 거지.” 채윤이 지태의 말을 정정하면서 또 단유의 표정을 살폈다. 여전히 덤덤한 표정인지라 딱히 꺼리는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 단유야?” “상관없지. 노는 것도 아니고 공부하겠다는 건데. 서로에게 방해만 안 된다면 모여서 공부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단유는 지태나 채윤이 평소에도 공부를 곧잘 하는 아이들임을 알고 있었고, 수업시간 태도가 불량한 이들도 아니었기에 별문제가 없으리라 판단했다. 다만. “그런데 상미한테도 물어봐야지. 걔가 불편하다고 하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니까.” “그런가?” 명수가 고개를 갸우뚱할 때, 지태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상미? 이름이 상미야?” “응.” “…혹시 여자애야?” “응.” “여자애라고! 진짜? 어떻게…, 진짜야?” 단유는 갑자기 왜 이러나 싶은 얼굴로 지태를 바라보는데, 지태는 걸음도 멈추고 얼이 빠진 얼굴로 진짜냐고만 물을 뿐이었다. 명수가 히죽 웃으면서 지태의 어깨를 툭툭 쳤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너 여자애 본 적 없어? 초등학교 때 여자 친구들 없었어?” 쥐죽은 듯 조용해지는 지태였다. 채윤이 슬쩍 두 사람을 본 뒤 단유에게 물었다. “여자애랑… 같이 공부하는 거야?” 단유가 입을 열기 전에 명수가 먼저 대답했다. “여자애라고 생각하지 마. 그냥, 친구라고 생각해. 걔도 1학년이거든.” “어떻게 그래? 여자앤데? 안 부담스러워?” 지태가 명수의 팔을 붙잡고 흔들며 물었지만, 명수는 다 안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지태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전혀. 너도 보면 알 거야. 전혀 부담스러울 필요 없어. 걔가 얼굴은 여잔데, 성격은 그냥 남자야, 남자.” 단유는 눈을 가늘게 뜨며 명수를 바라보았다. 불과 몇 주 전까지 얼굴 붉히면서 상미를 대하던 인간이 지금 눈앞에 저 인간이었다. 단유의 시선을 느꼈는지 명수가 헛기침하면서 변명을 했다. “나도 처음에는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고 그랬는데, 좀 지내다 보니까 괜찮아졌어. 그러니까 니들도 아마 괜찮을 거야.” 전혀 설득력 없는 주장인데, 지태와 채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꼭 가서 보겠노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 “친구들? 상관없어. 데리고 와. 너희 친구를 너희 집에 데리고 온다는 데 내가 뭐라고 그래? 난 상관없어.” 역시 쿨하게 받아치는 상미였다. 단유와 명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상미의 말을 받았고, 이튿날부터 단유의 집에 지태와 채윤이 찾아왔다. “안녕? 나 장계여중 1학년 유상미야. 반갑다.”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상미였다. 두 남자아이는 상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상미가 손을 휘젓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붉히는 반응을 보였다. 잠시 후, 단유와 명수가 지태의 손에 이끌려 단유의 방에 들어왔다. 단유의 집에 처음 왔기 때문에 방을 구경하고 싶다는 핑계로 들어온 뒤, 지태는 화난 얼굴로 따지기 시작했다. “저렇게 예쁘다는 말은 안 했잖아?” 그게 화낼 일인가? 단유가 눈을 껌뻑이며 지태를 바라보는데, 명수가 여유만만한 웃음을 띠면서 지태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어쩐지 요즘 들어 자주 보는 광경이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냐. 중요한 건 마음이지.” 라며 지태의 가슴을 손가락을 찌르는 명수였다. 무슨 뜻이냐며 명수를 바라보는 지태에게 명수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조금만 같이 있다 보면 알 거야.” 지태는 물론이고 덩달아 방에 들어왔던 채윤마저 명수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궁금해했다. 그리고 1시간 뒤, 두 사람은 열심히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문제만 풀었다. 그리고 그 시간 단유는 명수와 상미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있었다. “여기서 이거랑 이거 더하면 얼마야?” “몰라.” 상미의 즉답에 단유가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계산은 하고 대답하지?” 잠시 문제를 들여다보던 상미가 대답했다. “모르겠어.” 단유의 눈가가 꿈틀했다. “더하긴데?” “아, 그래?” 상미가 연필을 들고 노트를 앞으로 끌어당겼다가 다시 내밀었다. “뭐랑 뭐를 더해야 하는데?” 단유는 짧게 숨을 토하고 가만히 있는 명수를 바라보았다. “넌 왜 아무 말 안 하는데?”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잖아.” 단유는 짧게 혀를 차며, 노트에다가 더하기부터 시작해서 가장 기초적인 방정식을 설명했다. “…이렇게 줄이면 3a 더하기 4는 28이란 식이 되지? 그럼 3a는 24가 되잖아? 그럼 a는 얼마야?” 두 사람은 가만히 노트를 바라보다가 서로를 바라보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모르니까.” 상미와 명수가 히죽 웃었다. 단유는 혀를 차며, a=8이란 숫자를 써넣으며 설명을 마무리했다. “3 곱하기 a는 24니까, 구구단만 해도 답은 나오잖아. 3 곱하기 몇을 해야 24가 되는지.” “아! 이게 곱하기야? 그런데 곱하기 표시 없잖아?” “…곱하기 기호는 생략된 거야.” “아, 그래?” “…아까 이야기했잖아?” “아, 그래?” “….” “왜 나만 갖고 그래? 명수한테 물어봐. 명수도 모를걸?” 명수는 뜨끔한 얼굴로 단유의 시선을 피했다. “왜 나한테 그래? 모르면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야지,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됐고, 명수 너도 다음 문제 풀어봐.” “네, 선생님.” “선생님 아니라고!” 명수는 입을 지퍼로 채우는 시늉을 하고는 연필을 들었다. 그 옆에서 상미도 연필을 들고 단유가 내 준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그렇게 단유가 거실에서 상미와 명수를 데리고 진땀을 흘리는 동안, 두 사람은 식탁에 앉아서 각자 가지고 온 문제를 풀고 있었다. “의외다.” “그렇네.” “명수가 두 명인 거 같다.”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명수야.” 그때, 상미가 머리를 들고 식탁을 바라보았다. 속삭이던 두 사람이 놀라서 고개를 숙일 때, 상미가 외쳤다. “선생님, 쟤들 공부 안 하고 논대요!” “신경 끄고 문제나 풀어. 그리고 나 선생님 아니라고!” “쟤들이 떠들어서 문제가 안 풀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저기서 속삭이는 소리가 어떻게 들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문제나 풀어.” 상미가 명수에게 너도 그렇지, 라고 묻자 명수도 고개를 심하게 흔들며 자신도 그 때문에 문제가 안 풀린다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던 선생님이 간식거리를 접시에 담아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 단유의 희생 덕분에 명수는 꼴찌를 면했다. 그러고 보면 단유가 잘 가르치기도 하지만 명수가 아예 공부를 못하는 머리는 아닌가 보다고 선생님은 생각했다. 그리고 때를 같이하여, 상미의 어머니가 상미를 데리고 집에 나타났다. “아이고, 단유야. 고맙다. 덕분에 우리 상미가 지난번보다 성적이 두 배로 올랐어.” 도대체 어떻게 하면 성적이 두 배로 오를까, 라고 몰래 고민하던 단유는 상미 어머니가 쥐여 주는 선물을 받았다. “책을 좋아한다고 하길래, 이거면 괜찮을까 싶어서 사 왔어. 앞으로도 우리 상미랑 잘 지내고, 또 나중에도 상미 공부하는 것 좀 부탁할 게.” 상미 어머니의 뇌물과 청탁을 받아든 단유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어머니의 얼굴에 환한 빛이 서렸다. 어머니는 상미에게도 인사하라고 시키려 했지만, 어느새 상미는 명수랑 거실에서 게임패드를 붙잡고 있었다. “1달 동안 참느라 죽는 줄 알았어. 그치?” “응. 지난번에 애매한 데서 끝내는 바람에 꿈에 계속 생각나더라.” “나도, 나도! 오늘은 엔딩 보자, 오케이?” “오케이!” 두 사람은 열혈 모드로 바뀌어 게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 [237] 파도(1)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나는 계절이 돌아왔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나는 판에, 뛰어다니는 사람은 오죽 힘들까? 그런데 그게 좋다고 열심히 뛰어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패스!” 명수의 외침에 공간을 넘어 날아오는 하얀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명수의 가슴에 와 닿았다. 절묘하게 공을 컨트롤한 명수는 공을 발 앞에 두고 빈 공간을 치고 달렸다. “막아!” 상대편 팀의 주장이 외치지 않더라도, 근처에 있던 수비수 2명이 명수를 향해 달려왔다. 그러나 명수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고, 하얀 잔상을 남기는 공을 향해 내 달렸다. 죽죽 나아가는 명수가 어느덧 골대 앞에 다다를 무렵, 골키퍼가 앞으로 나오고 동시에 오른쪽에 치우쳐 있던 수비수가 마주 오는 공격수를 포기하고 명수를 상대하기 위해 달릴 때, 명수는 반 박자 빠른 타이밍에 공을 걷어찼다. 왼발로 살짝 감아 찼던 모양인지, 공은 묘한 궤적을 그리며 골대를 향해 나갔고, 골키퍼의 손끝을 스치며 지나간 공은 곧 골망을 흔들었다. “나이스!” 명수와 같은 편이던 아저씨가 뒤에서 소리를 지르며 명수를 향해 달려갔다. “아이고, 요 녀석! 요 귀여운 녀석!” 동네에서 조그만 막창 가게를 하는 아저씨는 명수가 귀엽다며 머리를 힘껏 흔들어댔다. 명수가 아픔을 호소하기도 전에 다른 아저씨들까지 달려와 명수를 꼬집고 때리고 비볐다(?). “아, 그만 좀요!” 명수가 버럭 화를 내자, 아저씨들이 또 좋다고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명수의 등을 한 대씩 때리고 자리로 돌아갔다. 명수는 인상을 살짝 쓰긴 했어도, 굳이 싫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것도 나름 아저씨들이 자신을 반겨주는 행위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여름이 되고 상미와 함께 주변의 맛집을 찾던 중, 우연히 한 가게에 붙은 조기축구회 포스터를 본 명수가 가게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학생이라고?” “네.” “축구 잘하냐?” “네.” “뻔뻔한 거냐, 자신감이냐?” “자신감이죠.” “뻔뻔하구나.”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죠.” 구경하던 상미가 협상을 시도했다. “명수가 한 골 넣을 때마다 삼겹살 1인분 어때요?” “내가 왜 그렇게 해야 하는데?” 상미는 히죽 웃었다. “재밌잖아요? 이렇게 귀여운 애가 공 가지고 노는 것만 봐도 좋은데, 골까지 넣어봐요? 아저씨네 팀에 사기도 올라가고, 승률도 올라가고 좋잖아요.” “…어릴 땐 안 그러더니, 상미 너 되게 뻔뻔해졌구나?” “얘랑 같이 다니면서 변했어요.” 상미는 뻔뻔하게 명수의 탓으로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저씨는 썩 나쁘지 않다는 생각으로―조기축구회가 골이 잘 나는 편이라고는 해도 중학생이 쉽게 덤벼서 골을 넣을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다―상미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게다가 여름 동안에만 한시적으로 받아주기로 한 탓에 크게 부담이 안 간다는 것도 한 이유였다. 그리고 격동의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다. 오전에 축구부 활동이 잡혀 있었지만, 새벽에 잠시하고 가는 거라면 크게 무리가 없을 거라고 판단한 명수가 활약을 보인 건 3번째 시합부터였다. 첫 시합 때는 조기축구회의 수준을 체감하는 수준에서, 가볍게 몸을 푼다는 개념으로 뛰었고, 두 번째 시합 때는 첫 시합의 후유증인지 아저씨들이 선수교체를 해 주지 않았다. “레프트 윙?” “네.” 그 포지션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 줄 수 있다고 어필하는 명수의 말에 한 번 시험이나 해보자며 스타팅으로 뛰기 시작한 게 세 번째 시합. 그리고 운이 좋게도 시합 시작 10분 만에 명수는 한 골을 넣었다. 상대 팀이 앞선 시합의 팀들과 달리 약체였던 것도 한몫했지만, 축구부 활동을 하는 동안 제대로 파이팅 넘치는 시합을 하지 못했던 명수가 모처럼 아드레날린을 폭발시켜 뛰었던 것도 한 이유였다. 그 날, 명수는 해트 트릭을 했고, 저녁에 단유와 상미를 불러 아저씨네 가게에서 삼겹살 3인분을 먹었다. 그 이후, 명수는 시합마다 골을 넣기 시작했고 아저씨들은 인근 조기축구회에서 가장 주목받는 팀으로 선정되기에 이르렀다. “단유야! 골 넣었어!” “봤어.” 상미가 호들갑을 떨며 명수 파이팅, 을 외칠 때 단유는 기지개를 켜고는 쉬었던 푸쉬업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잠시 명수가 골을 넣는 순간을 보느라 식었던 근육이 다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사실 단유가 이곳까지 끌려온 것은 전부 상미 때문이었다. 상미는 뭘 하든 ‘다 같이 해야 재미있다’는 철칙이 적용되는지, 뭘 할 때마다 단유든 명수든 불러서 같이 하자고 꼬셨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 근처의 맛집을 잘 모른다는 명수의 한 마디에 두 사람을 데리고 온 동네를 순회하듯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도 상미의 추진력 때문이었다. 명수가 조기축구회에서 뛰게 되면서, 상미는 굳이 그걸 구경하겠다고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는 ‘단유와 함께’ 운동장으로 향했다. 상미의 부모님이야, 평소 게으르던 상미가 아침 일찍 일어나니 좋아하셨지만, 평소 운동하던 코스가 있던 단유의 입장에서는 왜 굳이 그래야 하냐고 반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친구가 시합하는 데, 응원해주면 좋잖아? 그리고 니가 가는 공원이나 거기 운동장이나 시설은 비슷해. 아니, 그 운동장이 더 좋을걸? 거기서 운동하면서 응원도 하고. 좋잖아?” 결국, 단유는 상미를 따라 운동장에 나가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상미를 깨우러 단유가 상미네 집에 가고, 눈 비비며 일어난 상미가 대충 머리만 빗고 눈곱을 띠며 단유의 뒤를 따라 인근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가는 것이다. 단유가 운동장 주위를 크게 돌며 달리기를 하고 철봉과 평행봉에서 근육 운동을 할 때, 상미는 스탠드에 앉아서 스트레칭을 하면서 운동장 가운데서 몸을 푸는 명수를 응원했다. “물 줄까?” “아니, 괜찮아.” 땀을 흠뻑 흘린 단유를 보던 상미가 물통을 내밀었다가 거절당하자, 대신 자기가 물 한 모금을 마신 뒤 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몇 개 했어?” “몰라.” 단유는 숫자를 세지 않았다. 힘들 때까지 하고, 못 할 거 같으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힘들 때까지 반복할 뿐이었다. “나도 운동이나 할까?” 가만히 앉아서 응원하는 게 편하긴 하지만,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으니 좀이 쑤시는지 다리를 들썩거리는 상미였다. 운동장에서 시합이 잠시 정체되는 분위기가 되자, 상미는 스쿼트를 하는 단유를 보며 물었다. “마음대로.” 단유가 쉬지 않고 앉았다 일어서는 모습을 보던 상미는 이윽고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하면 돼?” 단유가 잠시 흘깃 상미를 보다가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이렇게 하면 근육을 다칠 수 있으니까, 이렇게 하고… 여기까지 앉았다가 이쪽 근육을 쓰면서 일어나는 거야.” 단유의 설명을 들으며 상미는 스쿼트를 몇 번 하더니, 이내 죽는소리를 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많이 힘들 거야. 그래도 이거 많이 하면 건강에도 좋고, 몸매 관리에도 좋대.” “그래?” 상미도 나름 한 고집하는 성향이 있어, 쉽게 포기한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다만 얼굴이 붉다 못해 터질 것처럼 변하는 모습을 보다 못한 단유가 말리니 그제야 바닥에 주저앉아서 다리를 주무르는 상미였다. “처음에는 가볍게 해. 너무 몸을 혹사하면 오히려 병이 생겨.” “알겠어. 근데 나도 너무 운동을 안 했나 봐. 이거 조금 했다고 금방 근육이 당기네?” 상미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운동하겠다고 자세를 잡는데 얼굴이 금방 일그러졌다. “하지 마. 오늘은 적당히 하고, 내일부터 조금씩 횟수를 늘리면서 운동하는 게 좋을 거 같다.” “…으읔. 그, 그럴까?” 자기도 모르게 삐져나오는 신음에 상미는 별수 없다는 듯 운동을 그만두고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잠시 운동장에서 펼쳐지는 후반전 경기를 바라보던 상미가 결심했다는 얼굴을 하고 단유를 돌아보았다. “단유야.” “응?” “나 내일부터 운동할래.” “…그러든가.” “도와줘.” “응?” “나 운동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니까, 니가 도와달라고. 넌 운동 오래 해서 잘 알 거 아냐?” 상미가 단유의 팔에 불끈 솟아난 근육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실 명수처럼 축구도 하고 싶은데, 그건 무리인 거 같고. 그냥 너처럼 맨손으로 할 수 있는 운동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거 같아.” “근데, 왜 갑자기 운동하겠다는 건데?” 운동 목적에 따라 운동의 강도나 방향성이 정해지기 때문에 단유는 상미의 의도를 물어보았다. “체력이 약해진 거 같아서 말이야. 요즘은 게임 하다가 졸 때가 있거든? 아마 체력이 약해서 그런 거 같아. 어릴 때는 안 그랬는데, 지금은 게임도 오래 못하겠어.” 그런 이유라면 뭐.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그냥 달리기만 해도 충분하겠다.” “그래?” “응. 달리기만 오래 해도 체력은 길러지니까.” 게임을 오래 하기 위해 운동하겠다는 상미의 정신 상태나 현재의 체력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어서 관두었다. 다만 달리기만 해도 충분히 운동한다는 보람은 있을 테고, 따로 단유가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리라. 다음 날, 단유와 상미는 운동장 주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 정도 리듬으로 달려.” “응.” “호흡은 이렇게.” “응.” “천천히.” “후우.” 대충 오래 달릴 수 있는 팁들을 알려준 뒤, 단유는 자기 페이스대로 내달렸다. 달리던 와중에도 상미의 달리기를 틈틈이 봐주었다. “빨라, 조금 더 천천히.” “호흡이 거칠어.” “발바닥 전체를 써야지.” “조금 더 속도를 내고.” 상미는 나름 뚝심 있게 달렸다. 그러고 보면 상미는 결코 우는소리는 하지 않았다. 힘들다거나, 못하겠다거나, 어렵다거나 하는 소리는 없었다. 공부할 때도 그랬지만 운동할 때도 고집스럽게 밀고 나가는 경향이 있었다. “그만 달려. 더는 위험할 거 같다.” “조금만, 저기까지만.” 상미가 바라보는 곳에는 작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 선을 통과한 뒤에야 상미는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면서 운동장 스탠드에 주저앉아 쉬기 시작했다. “그렇게 쉬지 말고, 일어나서 조금씩 근육을 풀어. 그냥 주저앉아버리면 오히려 다칠 수 있어.” 쉬는 법까지 알려준 뒤에야 상미 곁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단유는 다시 자기 페이스대로 운동을 시작했다. 명수가 2골을 넣고, 상미가 명수 파이팅을 목이 쉴 정도로 외치고, 단유가 온몸이 땀으로 젖을 만큼 운동한 뒤에야, 세 사람은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있잖아.” “응?” “아까 너 달리기 할 때, 왜 거기까지 가는 거였어?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야?” “그거?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응. …사실 거기까지 해야 레벨업이 될 거 같아서 말이야.” “레벨업?” “딱 그 선까지 달려야 경험치가 완전히 충족되면서 레벨업 하는 기분이랄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아, 나 무슨 뜻인지 알 거 같다!” “넌 알겠지?” “응! 나도 막 뛸 때 그런 생각 많이 하거든? 공을 찰 때도 딱 30개만 더 차면 레벨업 하는 기분!” “응! 응! 맞아!” 명수와 상미가 죽이 맞아서 서로의 경험들을 늘어놓을 때, 단유는 머릿속으로 오전 중에 읽을 책들의 목록을 점검했다. **** 7월 말 때쯤의 어느 날, 상미가 제안했다. “놀러 가자.” “어디?” “바다!” 명수와 단유가 서로 바라보다가 물었다. “어디?” “바다, 바다 가자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단유는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나 바다 본 적이 없었네.” “나도.” 명수도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예전 아네스 보육원에 있을 때, 보육원 차원에서 여러 곳을 다니긴 했지만, 대부분 주변 산의 계곡이나 도시 내의 문화시설이 다였지, 바다로 가본 적은 없었다. “바다를 가본 적이 없어? 정말?” “응. 그러고 보니까 초등학교 때 수련회도 전부 계곡으로 갔었네.” “그러네. 신기하네.” “난 니들이 더 신기하다. 어떻게 바다를 한 번도 못 봤대? 그럼 바다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 명수가 발끈했다. “야, 내가 바보냐? 바다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게? 바다를 가본 적이 없다는 거지, 모르긴 왜 몰라?” “뭘 화내고 그래. 알았어. 그럼 갈 거지?” “근데 누구랑?” “나랑.” “셋이서?” “바보니? 우리끼리 바다를 어떻게 가? 우리 부모님이 여름에 바다에 가는 데 너희들도 같이 가고 싶으면 가자고 물어보랬어.” 단유와 명수는 당연히 선생님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이야기를 듣던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연락받았고, 너희들이 오케이만 하면 다 같이 갈 거야. 그런데 너희 정말 바다 본 적 없었니?” “네.” “잘됐네. 그럼 이번 기회에 바다 가면 되겠네.” 그렇게 여름 방학 특별 이벤트, 바다 구경이 ‘Select’ 되었다. ======================================= [238] 파도(2) 상미네 부모님과 단유네가 함께 한여름 바캉스의 목적지는 강원도 속초 인근이었다. 바닷가로 갈 줄 알았더니 한참을 굽이진 시골길을 따라가나 싶더니, 인가가 드문 한 마을 어귀에 차를 세웠다. “주차할 데가 여기 밖에 없어서.” 이후 짐을 나눠서 지고 여섯 사람은 한참을 걸었다. 푸른 들판과 작은 수림(樹林)을 지나 나온 곳은 뜻밖에도 바다였다. “사람 많은 해수욕장에서 노는 것보다 이런 곳에서 쉬는 게 더 좋을 거야.” 군사경계지역 근처라서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다는 상미네 아버지의 말처럼 그곳은 아주 작은 해변이었다. 주위로 시커먼 암석층이 병풍 두르듯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끝에서 끝까지 걸어도 100걸음이 채 될까 말까 할 정도로 작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프라이빗(private)하고 미니멀리즘(minimalism)적인 해변이지. 괜찮지?” 상미의 아버지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꺼낸 소개말을 뒤로하고 명수와 상미는 히죽 웃으면서 물가로 뛰어갔다. 파도가 쓸고 간 젖은 모래 위에 맨발로 자국을 남기면서 즐거워하는 두 사람과 달리 단유는 멀찌감치 서서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마음에 안 들어?” 상미의 어머니가 굳은 얼굴의 단유를 보며 물었다. “아니요. 마음에 들어요. 사람이 많지 않은 것도 좋고, 조용한 것도 좋고. 다 마음에 들어요.” “그럼 저기 가서 같이 놀지 그러니?” 단유는 잠시 두 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발을 조용히 벗고 바짓단을 걷어 올린 뒤, 천천히 바다를 향해 걸어나갔다. 시선은 수평선에 둔 채 천천히 걸어나간 단유. 단유는 지금 눈으로 가늠할 수 없는 넓은 바다의 크기에 압도당한 상태였다. 말로만 듣던 바다라는 것이 이렇게 장엄한 것이었던가? “단유야, 일로 와 봐. 여기 꽃게 있어!” 상미의 부름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와 넘실대는 파도와 하얀 거품이 시각적으로 단유를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이토록 거대함이란 상상해본 적 없었다. 높은 산과 넓은 하늘을 마주하던 때랑은 또 다른 장관(壯觀). “단유야!” 상미가 재차 부르니,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는 단유는 어느새 발목 어름까지 치고 들어오는 바닷물을 느꼈다. “뭐해?” “…바다 구경.” “바다 처음… 본다고 그랬지? 맞다. 깜박했네. 어떤데? 처음 본 느낌이?” 단유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멋지네.” “그게 뭐야? 끝이야?” 예전에 숲의 바다라고 부르던 에르케넨을 볼 때도 그 압도적인 넓이에 입을 다물지 못했던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진짜 바다는 달랐다. 소리가 다르고, 냄새가 달랐다. 몸에 와 닿는 공기가 다르고 보이는 색이 달랐다. 그 모든 게 단유에게는 충격이었고, 신선한 자극이었다. “얘 봐? 정신 못 차리네?” 명수가 익살맞은 표정을 짓더니 손으로 바닷물을 가득 담아 단유를 향해 힘껏 뿌렸다. 그런데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손을 들어 얼굴을 막는 단유였다. 하지만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얼굴과 몸에 바닷물이 끼얹어졌다. 젖어버린 단유의 꼴이 재밌다고 명수와 상미가 배를 잡고 웃을 때, 단유는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 바닷물의 맛을 보았다. 책으로만 접하던 짠 소금물 맛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라는 걸 실감했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어도 결국 직접 경험한 것만 못하구나.’ 신선한 자극은 감동이 되어 단유의 온몸을 뒤흔들었다. 가만히 있는 단유의 모습이 조금 이상해 보였던지, 상미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단유야?” “…응?” “혹시 기분 나빠서 그래?” 상미는 단유가 옷이 젖은 게 기분 나빠서 저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단유가 하얀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젓자 덩달아 미소를 짓는 상미였다. “그럼 이리와. 같이 놀자.” “그래.” 이후 세 아이는 옷이 젖는 것도 잊은 채 신나게 물놀이를 즐겼다. 그러는 동안 어른들은 텐트를 치면서 아이들이 물놀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쉴 수 있도록 준비해나갔다. 세 아이들이 흠뻑 젖은 몸으로 왔을 때, 상미 어머니가 세 사람을 데리고 인근의 별장으로 데려갔다. 별장이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하고, 그냥 작은 창고 같은 집이었는데 정수시설이 되어 있어서 몸을 씻을 수 있도록 기본적인 설비가 갖춰져 있었다. “원래 이 동네 사람들이 여기서 몸을 씻을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건데, 넓지가 않으니까 한 사람씩 들어가서 씻고 나오도록 해.” 상미가 먼저 씻으러 간 사이에, 단유는 상미 어머니로부터 이름 없는 해변에 오게 된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상미 아버지가 어릴 때 여기 주변 마을에서 자랐는데, 당시 사람들이 가끔 놀러 오던 해변이라고 했다. 동해안을 따라 만들어진 해안국도도 여기에서 거리가 멀어서 대부분 외지 사람들은 이곳을 잘 모른다고, 그래서 아는 사람만 와서 놀다 가는 곳이라는 설명이었다. 상미가 개운한 표정으로 나온 뒤, 명수와 단유가 번갈아 씻었고, 세 사람이 다시 해변으로 돌아갔을 때, 해변에서는 아이들이 먹을 바비큐가 한창 구워지는 중이었다. “자, 어서 와서 먹어.” 상미네와 단유네는 자리를 잡고 한참 동안 즐긴 물놀이의 여파로 굶주렸던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저녁을 다 먹을 때쯤, 길었던 해도 지고 붉은 노을에 물들었던 바다도 점차 검게 변해가는 중이었다. 단유는 색색이 변하는 바다의 모습을 한순간이라도 놓치기 싫다는 듯, 한 자리에 서서 바다를 지켜보았다. “아까부터 뭘 계속 보는 거야?” 명수가 단유 곁으로 와서 물었다. “바다.” “신기해서?” “응.” “야, 처음 보는 나도 계속 보니까 금방 질리는데 뭐가 그렇게 볼 게 있다고 계속 보는 거야?” 단유는 수평선 아래위를 번갈아 보면서 입을 열었다. “노을에 점점이 빛나는 바다도 신기하고, 바다의 물결처럼 일렁이는 수평선 끝의 하늘도 신기하고, 바다 끝에 걸린 구름도 신기하고, 다 신기해.” “우와 너 시 써도 되겠다! 시인이네, 시인.” 옆에서 듣고 있던 상미가 손뼉을 쳤다. “근데 이제 뭐 하고 놀아?” 명수의 물음에 상미가 뒤를 슬쩍 바라보았다. 어른들끼리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그러게? 뭐하지?” 단유가 보아하니, 상미는 이미 속에 무언가 꿍꿍이를 감춰둔 표정이었다. 다만 그 속을 꺼낼 타이밍을 재고 있을 뿐. 문득 생각해보니, 상미의 표정을 보고 속을 읽을 만큼 가까워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상미는 속을 읽는 게 어렵지 않은 아이였다. 명수와 마찬가지로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 얼굴로 드러나는 타입이랄까? 처음에야 어떤지 몰라서 서로 각을 세우기도 했지만, 함께 지내다 보니 또 이렇게 솔직한 아이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하고 싶어서 고집도 부리고 영악하게 꾀를 부리기도 하지만, 결코 거짓으로 포장하거나 속을 감추고 두루뭉술하게 표현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명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상미를 이해하고 보니, 이제는 그냥 명수 대하듯 대해도 편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에 명수는 상미의 그런 점 때문에 더 이상 상미에게 여자로서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상미를 잘 모를 때는 얼굴이 예뻐서, 그리고 여성미가 느껴지는 얼굴 때문에 뭔지 모를 호감을 느꼈던 명수였는데 한 달간 함께 게임 하고 공부를 하는 동안 상미에게 감쳐진 매력 따위는 쥐뿔도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덕분에 명수는 ‘여자친구’는 잃었지만, 대신 ‘여자 사람 친구’를 얻었다. “숨바꼭질이나 할까?” “에이, 유치하게 무슨 숨바꼭질이야?” “왜? 여기 숨을 데 많잖아?” 상미가 주변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는데, 어두워질수록 음영이 짙어지면서 곳곳에 검은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다. 저곳에 서서 움직이지만 않으면 가까이 가지 않는 한은 보이지도 않을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그런 지형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겨우 세 사람이, 그것도 중학생이나 된 이들이 숨바꼭질이나 하고 노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명수는 극렬히 반대했다. “그럴 바에야, 그냥 앉아서 쉬는 게 낫겠다.” “야, 그래도 해 보면 재밌을 거야!” “재미는 개뿔. 됐어, 안 해.” 상미가 도와달라는 듯, 단유를 바라보자 단유 역시 명수와 같은 의견임을 밝혔다. “난 명수 말대로 저기 앉아서 바다나 구경할래.” 명수가 괜한 말을 해서 단유가 빠진다고 생각한 상미가 주먹으로 명수의 팔을 세게 두드렸다. “아야!” “못됐어, 정말.” “뭐! 야, 아무리 그래도 숨바꼭질은 아니다.” “그럼 넌 뭐 하고 놀건대? 진짜 단유처럼 바다나 구경하고 있을래? 할아버지도 아니고.” “야, 그럼 단유가 할아버지야?” “단유 쟤는 원래 좀 그런 게 있잖아.” 상미의 말에 또 아니라고는 말을 못하는 명수였다. “여기 좀 둘러봐도 돼요?” 어른들에게 다가간 단유가 넌지시 물었더니, 상미 아버지가 흔쾌히 그러라며 허락해 주셨다. “너무 멀리만 가지 말고.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이 군사경계지역이니까 철조망 보이면 가까이 가지 말고 도로 이쪽으로 와야 해. 알겠지?” 아버지의 주의를 들으며 단유는 몸을 돌렸다. 다른 아이들이, 특히 상미의 손에 붙잡히기 전에 먼저 몸을 빼려는 단유였다. 상미가 명수와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단체활동에 대한 집착이었다. 뭘 하든 다 같이 하는 게 좋고, 다 같이 먹는 게 좋고, 다 같이 노는 게 좋다는 식이었다. 비록 공부를 싫어하는 상미지만, 공부를 해도 다 같이 해야 좋다는 식인데 도저히 단유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명수도 단유와 함께 하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단유가 혼자 있고 싶어 할 때는 결코 귀찮게 들러붙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상미는 귀찮다, 고 여길 정도였다. 그렇다고 또 같이하기 싫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단유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단유 못 봤어?” 명수와 말다툼을 하느라 뒤늦게 단유가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된 상미가 어머니에게 다가가 물었다. 옆에서 커피를 마시던 아버지가 대신 대답을 해 주자, 눈썹을 가운데로 모은 상미가 명수에게로 몸을 향했다. 상미의 얼굴을 본 명수가 찔끔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 무섭게?” “단유, 혼자 놀러 갔대.” 무슨 말이냐고 되묻자 상미가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런 이유로 지금부터 시작이다.” “뭘?” “단유 찾기 놀이.” “그게 뭐야?” “단유 먼저 찾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 진 사람은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솔깃한데? 명수가 관심을 보이자 상미가 입술을 끌어올려 보였다. “준비, 시작!” “야, 잠깐만. 단유가 어디로 간 줄 알고?” “알아서 찾아봐.” 상미는 대뜸 몸을 돌려 모래사장 끝 언덕을 향해 달렸다. 어딘지 몰라도 일단은 상미만 따라가다가 단유가 보이면 상미를 앞질러 나가겠다는 계산을 마친 명수가 뒤를 쫓았다. 그 시간, 단유는 올 때 봤었던 수림을 따라 오른쪽으로 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수림 사이를 걷는 단유는 느긋한 걸음으로 숲의 향기를 만끽했다. ‘향수(鄕愁)’라는게 이런 거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걷던 단유는 잠시 고개를 들어 저 멀리 보이는 산마루를 바라보았다. 저 정도 위치라면 아마 주위가 잘 보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높은 곳에서 보는 경치는 또 어떻게 다를까, 라는 기대를 하며 단유는 산마루로 향했다. 이윽고 산마루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던 단유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 시원한 산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아래에서는 한참 어둑해졌던 것과는 달리 산마루에서 내려다보는 하늘과 바다는 아직 노을이 완전히 지기 전, 끝물에 붉은빛이 살짝 감돌고 있었다. 아래에서 볼 때도 길게 쭉 뻗은 수평선에 감탄했었는데, 올라와서 보니 더더욱 장대한 바다의 위용이 느껴졌다. ‘저 바다에 고래가 살겠지?’ 엉뚱하게도 디아트리네 집 근처에서 잡았던 거대한 고래를 떠올려 보는 단유였다. 한편, 단유를 찾아 쫓던 상미와 명수는 수림 근처에서 흐릿하게 그림자가 보여 달려왔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명수도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주변을 훑어봤지만, 수림 주변에는 들판이라 딱히 숨을 곳도 보이지 않았다. “저쪽으로 갔으려나?” 명수가 가리킨 쪽은 수림이 끝나고 작은 암석이 장작처럼 쌓인 조그만 돌산이었다. “일단 가보지 뭐.” “근데 넌 무슨 소원 빌 건데?” “바보냐? 그걸 말하면 재미없지.” “어? 그런가?” “그리고 그만 쫓아다녀. 너도 다른 데 좀 찾던가 그래. 왜 계속 졸졸 쫓아다녀?” “야! 나도 이쪽에 단유가 있을 거 같아서 가는 거야. 너 따라다니는 거 아니거든?” “웃기시네.”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시커먼 돌산에 다가갔을 때, 그 주위로 철조망이 처져 있었지만, 어두운 탓에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239] 파도(3) 구름 때문인지, 아니면 지형의 특성상 원래 어두운 것인지 눈앞의 돌산은 굉장히 어두웠다. 좁은 소로(小路)가 보이는데, 어쩐지 그쪽으로는 단유가 가지 않았을 것 같았다. 굳이 저런 음산한 곳으로 갈 아이가 아니었으니까. “여기 아닌 것 같아.” 그러나 상미는 그 길옆에 위치한 철조망을 발견했다. “이거 잡고 올라가면 되겠다!” 상미가 철조망을 더듬어가며 길을 따라 오르자, 명수도 할 수 없이 상미를 따라갔다. 왜 철조망이 거기에 있는지는 명수나 상미도 알 수 없었지만, 그게 무슨 문제겠는가? 그러나 뜻밖에도 일은 꽤 빨리 벌어졌다. “아야!” 상미의 비명이 정적을 깨뜨렸다. 명수가 놀란 얼굴을 하고 상미에게 다가갔다. “다쳤어?” “응. 아파.” 울먹이는 상미의 소리에 놀란 명수가 얼른 몸을 굽히고 상미를 살폈다. 철조망 가장자리에 제대로 마감을 하지 못해 튀어나온 철사 한 가닥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두운 틈에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지나다가 긁혔는지 상미의 상의 왼쪽이 찢어져 있었다. “야, 좀 봐봐.” 명수가 상미의 웃옷을 들쳤다. 옆구리에 찢어진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피도 나는 것 같았다. 명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안 되겠다. 빨리 돌아가자.” “힝.” 상미는 옆구리에 화끈거리는 상처를 입은 게 억울했다. 또, 미션을 포기해야 한다는 게 억울하고 분했다. “단유 찾아야 하는데.” “야, 지금 단유가 문제야? 이거 빨리 치료해야지, 멍청아!” 명수가 상미의 팔을 붙잡고 돌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명수가 앞장서서 길을 내려갔고, 바쁜 와중에도 명수는 상미를 계속 돌아보며 상태를 살폈다. 돌산을 내려올 때까지 명수는 상미의 손을 놓지 않았다. 한편, 산 위에서 경치를 구경하던 단유가 해가 완전히 지는 것을 본 뒤에야 다시 수림으로 돌아왔다. 대략 30분 정도였을까? 너무 오래 지체하면 어른들이 걱정할 것 같다는 생각에 나름 시간을 재며 경치를 구경하던 단유였다. “어?” 해변 텐트로 돌아가던 중, 단유는 저 멀리서 뛰어가는 명수와 상미를 보았다. 멀찍이서 두 사람을 보니, 명수가 상미의 손을 붙잡고 달리는 중이었고, 상미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어떤 사정이길래 저런 모습을 연출하는 걸까, 궁금했지만 서두르진 않았다. 되도록 혼자만의 시간을 오래 가지고 싶었으니까. 텐트로 돌아간 뒤에야 단유는 사정을 알게 되었다. “많이 다쳤어?” “아니. 조금 긁혔는데 얘가 오버했어.” “웃기시네, 아까까지는 아프다고 징징대던 애가?” “안 그랬거든?” “그랬거든!” “시끄러워! 둘 다 조용히 해.” 상미 어머니가 버럭 하자 동시에 입을 꾹 다물고 눈치를 보기 시작하는 두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상미의 옆구리를 소독하고 살피더니 밴드로 살짝 마무리만 했다. 치료가 너무 대충인데, 라고 생각하는 틈에 무릎을 굽혔던 상미 아버지가 일어났다. “일단 가까운 병원에 갔다 와야겠어. 철사에 긁혔다니까, 파상풍도 염려되니까.” “파상풍? 그게 뭔데?” 상미가 죽는 병인가 싶어 두려움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걱정 안 해도 돼. 얼른 병원 가서 치료받으면 괜찮을 거야.” 상미 아버지는 여러 사람 모인 앞에서 괜히 큰 소리는 내고 싶지 않았던지, 계속 조곤조곤 조용하게 말씀하셨다. 그 마음을 눈치챈 어머니도 덩달아 차분한 모습으로 선생님에게 양해를 구했다. “걱정돼서 그러니 잠시 아이 아빠랑 같이 병원엘 좀 다녀올게요.” 선생님은 그러시라고, 손짓하며 세 사람을 배웅했다. 선생님 입장에서는 괜히 잘못한 거 같고 미안했다. 줄곧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선생님은 세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명수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어쩌려고 그런 위험한 데를 올라갔어! 이렇게 어두운데 말이야. 기다리는 사람 마음이 어떡했겠어!” “죄송합니다, 선생님.” 명수는 시무룩한 얼굴로 선생님에게 사과했다. “선생님이 너한테 사과받자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사과는 아까 상미 어머니랑 아버지한테 했었어야지. 그리고 명수 넌 남자잖아? 그럼 네가 상미를 지켜줘야지. 아무리 상미가 먼저 원했다고 해도 위험해 보인다면 네가 가지 못하게 막던지 했어야지, 어린 애들처럼 이게 뭐니? 명수 너도 이제 중학생이잖아? 그럼 이제 어릴 때처럼 철없이 굴 나이는 지났잖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명수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선생님의 꾸중을 들었다. 덩달아 단유도 명수 옆에서 두 손을 모으고 얌전히 자리를 지켰다. “너희 둘 다 이제는 초등학생이 아니잖아. 스스로의 행동에 무조건 책임을 지라고는 안 해도 스스로 위험한 거, 위험하지 않은 건 구별할 줄 알아야 하잖아? 그리고 너희들이 평소에도 상미를 그냥 친구처럼 대하는 게 크게 문제는 안 될 것 같아서 아무 말도 안 했었지만, 상미는 여자애야. 만약 잘못해서 얼굴에 상처라도 났으면 어떡했겠어? 명수 너 생각해봐. 상미 얼굴에 상처가 나면 상미 부모님 마음이 어땠겠어?” “잘못했어요, 선생님.” 그 뒤로도 선생님의 꾸중은 계속되었다. 평소 잔소리나 꾸중을 하지 않으시던 분이 화를 내시니 더욱 무섭고 미안했고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명수는 물론이고, 단유도 선생님께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김단유.” “네.” “집에서는 혼자 공부할 시간도 필요하고 해서 방에 들어가 있는 거에 대해서는 선생님이 아무 말 안 했어. 하지만 이렇게 밖에 나와서까지 혼자 행동하는 모습 보기 안 좋아.” “네, 선생님. 안 그럴게요.” 선생님은 단유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지금 이 사태도 어쩌면 너 때문에 일어난 것일 수도 있어. 알지?” “네.” 물론 단유에게 책임을 전가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참에 단유의 성격이 조금 변화되길 바라는 마음에 선생님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잔소리를 계속했다. 이런 야외에서, 특히 다른 가족들과 함께 나온 자리에서 혼자 행동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 특히 친구들이 버젓이 함께 있음에도 혼자 있으려고만 하는 단유의 성향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었다. 단유도 그 지적이 틀린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조금 전만 해도 명수와 상미가 자기보다 앞서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애써 그들을 불러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것은 분명 자신이 그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리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어울리지 못할까?’ 단유는 자신이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막지 않고, 그래서 어울려 지내고는 있지만, 그런데도 자신은 그들과 잘 섞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저 넓은 바다에 홀로 떠 있는 저 달처럼. 달은 바다와 섞이지 못하고 오직 그림자만 띄울 뿐이었다. 바다는 달의 그림자를 안아주지만, 달은 점점 더 바다에서 멀어질 뿐, 가까워지지 않는다. “김단유!” “네, 선생님.” “무슨 생각 하고 있어! 선생님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죄송합니다.” 단유는 고개 숙여 사과했다. 선생님은 이 기회를 빌려 하고 싶었던 말을 모두 뱉을 요량으로 이것저것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하셨고, 단유와 명수는 묵묵히 듣고, 사과하고, 반성해야 했다. **** “이놈의 기집애, 내 사고 칠 줄 알았어! 이그.” 어머니는 병원을 찾아가는 내내 차 안에서 상미를 구박했다. 상미는 짜증을 내면서도 미안한 마음에 큰 소리는 내지 못했다. “미안하다고 했잖아.” 상미는 한껏 찌푸린 얼굴을 하고 옆 자리에 앉은 어머니를 흘겨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곧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미안하면 다니? 미안하면 다야? 지금 네 꼴을 봐. 다른 사람이 봤으면 다 비웃었어, 이것아.” “다친 걸 갖고 비웃으면 그 사람이 이상한 거지, 내가 이상한 건가?” 상미는 창밖을 보면서도 어머니의 말에는 꼬박꼬박 대꾸했다. “아이고, 기집애가 말이나 못 하면.” “말이라도 잘하니까 이렇게 지내지.” 상미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바라보는데, 그 틈에 머리를 쥐어박는 어머니였다. “정신 차리고, 좀 조신하게 행동해. 친구들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니?” “왜 부끄러워? 친구들끼리 있는데?” 친구가 무슨 뜻인지 엄마 알아, 라고 묻고 싶어 하는 표정을 짓는 상미였다. “아이고, 내 속이 속이 아니네. 쟤들이 말로는 안 해서 그렇지, 속으로는 여자애가 천방지축이라고 혀를 찰 거다.” “그런 애들 아니거든? 모함하지 말지?” 그때, 아버지가 버럭 소리를 질러 두 사람의 대화를 중단시켰다. “둘 다 조용히 해!” 그리고 조용해진 틈에 아버지도 한소리 하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상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에 집에서 나오기 전에 아빠가 뭐랬어? 사고 치지 말랬지? 나가서 얌전하게 지내랬지? 그런데 이게 뭐야? 아빠랑 아침에 한 약속도 금방 잊어먹고 이게 뭐냐고? 이러니 아빠가 너한테 맨날 잔소릴 하는 거잖아.” “그런 거 아닌데….” 핸들을 쥐고 있는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룸미러로 바라보는데 시선을 피하는 상미의 얼굴이 보였다. “그런 게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리고 다른 사람들 있는 데서는 제발 좀 여자처럼 행동하라고 했어, 안 했어? 응? 도대체 누가 널 보고 여자애라고 생각하겠어?” “여자 같은 게 뭔데? 소꿉놀이하고 노란 옷 입고 막 그래야 여자 같은 건가? 맨날 치마만 입고, 입 가리고 웃고 그러면 여자 같은 건가?” 상미가 빈정거리며 시치미를 떼자, 어머니가 버럭 화를 내셨다. “누가 그런 걸 말한대? 행동을 조신하게 하라는 거잖아, 행동을!” “그런 게 어딨어? 그냥 편한 대로 사는 거지, 남자 여자 행동이 뭐 따로 있나?” 남자는 서서 싸고, 여자는 앉아서 싸는 거 말고 다른 게 뭐 있어, 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어머니의 귀에도 들렸다. “아이고, 저 계집애를 누가 데려갈지 참 걱정이다.” “딸애 교육을 잘못해서 그래.” 무심코 뱉은 말에 어머니가 아버지를 째려보기 시작했다. “그거 저 들으라고 하는 소리예요?” “으흠.” 차마 룸미러로도 어머니의 눈빛을 받기가 곤란했던 아버지는 괜히 사이드미러를 번갈아 바라보는 시늉을 했다. 그 와중에 상미는 왜 자길 못 잡아서 안달이냐며 화를 냈다. “나 참. 누가 교육을 잘못 받았다고 그러셔? 나 초등학교 제대로 졸업했거든?” “어이구, 너랑 얘기하느니 차라리 앓지.” “됐고, 빨리 병원이나 가요. 나 여기 따끔해.” 아픈 사람한테 이럴 수 있냐는 상미의 말에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잘났다, 정말.” **** 상미가 돌아온 것은 밤이 깊어서였다. “괜찮아?” 명수가 얼른 가서 상미의 안부를 물었다. 상미는 옷을 살짝 들추며 치료된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 주사 맞고 꿰매고 난리도 아니었다. 나 완전 아파서 죽는 줄.” 명수가 눈가를 찡그리다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러게 거기 가지 말자고 했잖아! 왜 꼭 가서 일을 내냐.” “야. 나 병원 가고 오는 동안 차에서 실컷 들었거든? 니가 그런 말 안 해도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들었으니까, 그만하자. 응?” 명수는 상미의 살벌한 경고에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픈 애한테 이런저런 소리 해봐야 아무 소용 없는 짓이니까. 곁에 있던 단유도 상미한테 사과했다. “미안해. 내가 혼자 돌아다니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니까, 나도 사과할게.” 무슨 이상한 소리냐며 상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 그게 무슨 니 잘못이야? 너 거기 철조망 있는데 갔었어?” “아니.” “거기 가지도 않아본 애가 무슨 그런 사과를 하고 그래? 니가 혼자 돌아다닌 게 괘씸하긴 하지만, 그거랑 내가 다친 거랑은 아무 상관 없는 일이지.” 단유는 머리를 살짝 끄덕여 보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같이 놀지 않고 말없이 혼자 빠져나와서 돌아다닌 거에 대해서는 사과할게. 나 찾다가 그렇게 된 거라고 하니까, 나도 이렇게 사과를 하는 게 마음이 편해.” “알았어,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하다면, 니 사과 받아줄게.” “고마워.” “그런데 말로만 끝낼 건 아니지?” “응?” 상미가 히죽 웃었다. “아까 명수랑 내기했었거든? 누가 빨리 너 찾는지. 그리고 진 사람이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를 했거든.” “그래서?” 마음속에 불길함이 자라는 와중에 상미의 말이 이어졌다. “내 소원 니가 들어줘.” ======================================= [240] 파도(4) 머리를 긁적이던 단유가 상미의 요구에 답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야기해봐.” “꼭 들어준다고 약속해야 돼.” 단유는 잠시 입을 닫고 생각을 거듭했다. 이런 게 조금 어렵다. 잘 어울리고 싶고, 함께 즐기고 싶은데 이렇게 순간순간 자신의 이성에 브레이크가 들어온다. 만약 명수가 그랬다면, 그냥 들어준다고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이―비록 상미가 조금은 편해졌다고 해도 여전히 ‘다른 사람’의 경계에 선 아이다―무턱대고 요구를 하면, 마냥 받아들이지 말라는 브레이크가 머릿속에서 제동을 건다. “그래.” 하지만 일단 오늘은 선생님의 말씀도 있었고, 상미가 다친 일이 마음에 걸리기도 하니 일단 브레이크를 무시하고 달려보기로 한다. 그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법, 이라고 자신을 설득하면서. 상미는 잠시 단유의 눈을 바라보더니, 입을 삐죽거렸다. “아니야.” “응?” “그냥 나중에 얘기할게.” 상미는 뒤로 돌아서 부모님에게로 달려갔다. 난데없는 상미의 돌발행동에 단유는 물론이고 명수까지 황당한 얼굴로 상미를 바라보았다. “왜? 아파?” 갑자기 아이들과 있다가 달려온 상미를 향해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물었다. 그러나 상미는 고개를 젓고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피곤해서 잠깐 쉬려고.” 그러고는 텐트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어머니는 텐트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딸의 뒷모습과 바닷가에 서서 멀뚱히 이쪽을 바라보는 두 소년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하던 뒷정리를 마저 하기로 했다. 딸아이의 변덕이야 그 나이 때 애들이 늘 하는 것이니, 별로 개의치 않으면서. 텐트 안으로 들어온 상미는 무릎을 굽히고는 두 팔로 껴안은 자세를 취했다. 소원을 들어달라는 자신의 이야기에 순간적으로 단유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상미는 보았다. 어두워서, 혹은 텐트 근처에 켜놓은 불빛 때문에, 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변화였고, 상미는 말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을 느끼면서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말았던 것이다. 사실 별거 아니었던 소원이었는데도, 예감이 그랬다. 무엇을 말하든 단유는 자신을 꺼릴 것이라는 느낌. 아니면 직감? 자신도 정확히 형용할 수 없지만, 단유와 오래, 함께 친하게 지내고픈 마음이 상미의 입을 틀어막았다고 보는 게 옳겠다. 덕분에 두 소년은 해변에 우두커니 서서 조금 전 자신들 앞에서 벌어진 기행에 대해서 심각한 토론을 나누어야 했다. “너 뭐 했어?” “하긴 뭘 해? 너도 옆에 같이 있었잖아.” “그런데 쟤 왜 도망가?” “…도망간 거야?” “도망가는 것처럼 보이던데?” 명수의 말이 더 이해가 가지 않는 단유는 볼을 슬슬 긁다가 머리를 휘저었다. “모르겠다. 신경 안 쓸래. 넌 뭐 할 거야?” 딱히 이 시간이 되고 나니, 주변이 어둡기도 하고 같이 놀 친구가 단유 밖에(?) 없기도 하니 마땅히 할 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는 명수였다. “그냥 게임이나 할래.” 명수도 단유네 텐트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렇게 모두 텐트 안으로 사라지고 나니, 별빛 쏟아지는 하늘 아래 파도 소리를 들으며 여유를 즐길 수 있게 된 단유였다. 해변에 앉아 먼바다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잔잔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먹먹하기도 했다. 먼바다에는 바람이 많이 부는지 너울이 높게 솟구쳐 오르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다가도 이 주변으로만 오면 각종 암초와 지형들에 부딪히고 갈라지다가 한껏 힘을 잃은 작은 파도만이 해변 모래를 적시다 사라지고 말았다. 보면 볼수록 넓고 광대했다. 사실 낮에 상미와 명수가 있을 때는 둘러 표현하느라고 기대도 안 했던 ‘시인’ 소리를 듣긴 했지만, 단유의 눈에 보이는 바다는 그냥 ‘광대함’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냐고 묻는다면 평범하게, 보이는 대로 대답하기 곤란함이 느껴질 정도의 모습이었다. 왜냐하면, 바다는 지금껏 단유가 보아오던 세계를 막론하고 가장 넓은 넓이의 공간이었고, 그 공간을 아우르는 온갖 숫자들이 단유의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바다를 보고 있지만, 눈으로 확인하고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온갖 숫자의 향연은 끝나지 않았다. 좌표라고 해야 할까, 특정한 공간을 구성하는 은밀한 수의 비밀이라고 해야 할까. 온종일 보고 있어도, 끝이 없는 공간이 바로 바다였다. 그래서 보고만 있어도 즐거운 것이 바다였다. 쉴 틈 없이 나누고 더하고 계산하고 역산하며 즐겁게 지내고 있으니, 남들이 보는 것처럼 심심할 리가 없었다. “단유야, 그만 들어와라. 감기 걸리겠어.” 선생님이 해변에 앉아 넋을 놓고 있는 단유를 불렀다. 단유는 잠에서 깨어난 눈을 하고 선생님에게로 향했다. “잤니?” “아니요. 바다 보고 있었어요.” “그렇게 좋아?” “…좋네요.” 단유가 옅은 미소를 띠며 텐트 안을 보았다. 어느새 핸드폰을 쥔 채로 잠든 명수가 보였다. 단유가 텐트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선생님이 붙잡았다. “잠깐 이야기 좀 할래?” “네.” 선생님은 단유를 데리고 텐트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까 낮에는 선생님이 너무 흥분해서 너한테 너무 모진 말을 한 것 같아서 말이야.” “아니에요, 선생님. 괜찮아요.” “그래,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그래도 선생님 진심은 알지? 다 널 걱정해서 하는 소리였어.” “네, 알아요.” “너보다 오래 살아온 선생님의 경험에 비추면, 지금 네 나이 때에 많은 친구와 만나고 소통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너와 명수가 친구들을 데리고 집에 왔을 때 선생님이 아주 기뻤단다.” 단유는 말없이 선생님의 말씀을 경청했다. 잠시 말을 멈추고 단유를 살피던 선생님은 먼바다 위에 떠오른 달을 보며 말을 이었다. “사람과 소통하고 지내는 건 쉬운 일은 아니야. 하지만 이 세상 혼자 살 수는 없는 일이잖아? 안 그래? 게다가 이런 말 꺼내긴 미안하지만, 너나 명수는 부모님도 안 계시잖아? 주영씨나 재훈씨가 너희들의 보호자를 자처하고는 있지만, 그리고 선생님도 있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없다는 게 어쩌면 너희들이 사는 동안에 어떤 편견이나 걸림돌이 될 수도 있어. 그럴 때 너희들을 지켜줄 수 있는 게 어쩌면 친구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 사귐을 이어온 친구들이 우리 어른들이 해주지 못하는 부분들을 봐주고 위로해주기도 하고 격려해주기도 할 거야. 그래서 친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말이 있잖니?” 단유는 선생님이 바라보는 광경을 함께 지켜보았다. 마침 오늘이 보름달이 뜨는 날이었는지, 일그러짐 없는 둥근 달이 바다 위에 둥실 떠올라 있었다. 날씨는 어쩜 또 그리도 좋은지, 달빛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가끔 네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기특하기도 하지만, 안쓰럽기도 한 게 선생님 마음이다. 네가 책상에 앉아 책을 읽을 때면 주위에 벽을 두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 물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업을 얻는 것이 이 사회를 살아가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지만, 좋은 친구를 만나고 사귀는 것 또한 이 사회를 살아가는 좋은 방법이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구나.” 선생님이 말을 마치고 단유를 돌아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단유가 선생님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선생님. 명심할게요.” 선생님은 옅은 미소를 띠며 단유를 바라보다 괜히 머쓱해져서 맨살이 드러난 팔을 쓰다듬었다. “밤바람이 차갑네. 들어가자.”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갈게요. 달이 예뻐서요.” “그럴래? 너무 오래 있지 말고.” 선생님은 단유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먼저 자리를 피해주었다. 모래사장을 저벅저벅 밟아가는 소리가 단유의 등 뒤로 멀어질 무렵, 단유는 하늘에 떠오른 하얀 달을 시야에 가득 품었다. 하얀 달 아래로 울렁이는 바다의 너울들이 쉬지 않고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다. 그 너울들이 마침내 긴 거리를 옮겨와 단유의 발밑에 다다를 때쯤은 작고 하얀 물거품으로 분해되어 흔적만 남기고 돌아갔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그랬다. 마치 파도처럼, 단유의 마음에 와 닿기를 바라며 몰아쳐 오지만, 단유와 상대의 사이에는 거친 너울도 하얀 포말로 변해 버릴 만큼의 긴 거리가 존재했다. 그래서 선생님의 이야기도 좋은 말이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단유는 모래사장 위에 서서 먼바다를 구경하듯 볼 뿐이었다. 가끔 힘을 얻어 단유에게 와 닿는 말조차도 결국에는 발끝을 잠깐 적실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발바닥을 젖게 하는 소금물의 위력 때문일까,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니, 단유는 생각했다. ‘왜 어울리지 못할까.’ 낮에도 던졌던 질문인데, 선생님의 조언 덕분에 또 되새기는 물음이었다. 문득 에르케넨에서 안트가 자신에게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지 마라.” 모든 것을 부정하고, 부정한 뒤에 남는 것을 긍정하라. 당시에는 검증을 철저히 하란 이야기로 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뭔가 다른 의미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모든 것을 부정한다.” 안트는 그렇게 이야기했었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부정한 뒤에야 긍정할 수 있었기에 안테는 자신의 신념에 확신이 있었다. 반면 단유는 현재 확신이 없다. 확신을 가지기엔 자신이 가진 지식이 부족하고 경험이 부족하기에 안테처럼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한계가 존재했다. 그래도 안트의 말을 떠올리며 모든 것을 의심하고 부정하려 하는 심리적 저항선이 존재하다 보니, 단유는 자기도 모르게 주변과 거리를 두었다. 단유의 이런 사고체계는 공부할 때는 도움이 되었다. 적어도 자신의 지식수준에 맞춰 공부하는 동안에는 검증에 어려움이 없고, 그래서 문제에 대한 답에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삶에 대해서만큼은 답이 없다. 그러니 늘 조심하고 경계하고 거리를 두는 습관이 생긴 것이리라. 단유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 나름의 분석으로 현 상황을 파악했지만, 이것 역시 확신이 없었다. 너무 많은 변수와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가 완전히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사회 시스템 속에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일상에서 단유는 홀로 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중얼거리며 바다를 보는 단유의 눈에 높이 떠오른 달과 수면에 비친 달이 동시에 보였다. 수면 위에 비추는 달과 하늘에 떠 있는 달은 같은 달이지만, 어디에 존재하는냐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진다. 외형과 모양은 변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 하얀 달. 단유는 자신도 저 달처럼 살아가고 싶다는 소원을 빌어보았다. **** 다음날, 상미는 깊은 바다에 들어가는 것만 아니라면 놀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어제 잠시 어색했던 것은 잊은 듯, 평소의 상미로 돌아와 단유와 명수를 괴롭혔다. “야! 눈 따가.” 명수가 등을 돌리고 눈을 비볐다. 뒤에서 까르르 대며 웃던 상미가 몰래 명수 뒤로 다가와 명수 등 위에 업혔다. “어어!” 명수가 무게를 버티기 위해 버둥대다가 결국 물에 온 몸을 담그고 말았다. 단유는 물 속에 손을 집어 넣었다. 그리고 살짝 손바닥을 구부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빠르게 손을 내뻗었다. 손을 휘두르는 방향에 맞춰 물덩어리가 날아가더니 함박웃음을 짓던 상미의 얼굴을 강타했다. “어푸후. 뭐, 뭐야?” “뭐긴, 복수지.” 단유는 웃음기 없이 명수의 복수라며 오른손을 연신 휘둘러 상미에게 물을 뿌려댔다. 상미도 지지 않겠다는 듯, 등을 돌리고 단유를 향해 물을 뿌렸다. 그리고 중간에서 엎어져 있던 명수는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 모양으로 엉금엉금 기어 전장을 빠져나왔다. “단유, 잘한다!” “야! 명수 너! 구경만 하지 말고 너도 해!” 손을 휘젓던 상미가 버럭하자, 명수는 잠시 누구 편에 설까 고민을 했다. 그러다 히죽 입꼬리를 올린 명수. “에라 모르겠다!” 명수는 상미와 단유를 가리지 않고, 팔을 마구 휘두르며 다가갔다. 목적없이 그냥 되는 대로 팔을 휘둘러 사방팔방으로 물을 뿌려대는 명수 때문에 상미는 물론, 단유까지 물을 피해 등을 돌려야 했다. “그만들 하고 씻고 와! 밥 먹어야지?” 텐트에서 상미 어머니의 외침에 아이들은 서둘러 씻으러 달리기 시작했다. 상미와 명수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릴 때, 단유는 슬쩍 하늘을 보았다. 새파랗게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짙은 바다 위에 그림처럼 얹어져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하얀 구름 너머를 바라보던 단유가 미소를 지었다. 어젯밤 파도소리를 들으며 자신을 고찰하던 단유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선생님 말이 맞았다. 혼자 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혼자 할 수 없으면, 도움을 받아야 한단 것도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단유는 도움을 받기로 했다. 조만간, 시간이 난다면 말이다. ======================================= [241] 배틀트립(1) 올여름은 예년보다 더욱 더워지고 있다는데, 더위에도 굴하지 않고 열심히 몸을 굴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막아!” 명수가 찬 회심의 골을 막아낸 골키퍼. 그 놀라운 선방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를 때, 명수네 팀 아저씨들은 명수를 위로했다. 오늘따라 명수의 골은 번번이 골키퍼의 손에 막히거나, 골대 옆을 아슬아슬한 수준에서 빗겨나고 있었다. “오늘 명수가 날이 아닌가 보다.” 상미가 턱을 괴고 앉아서 운동장 위에서 터덜터덜 걸어가는 명수를 보며 말했다. 바다에서 놀고 온 후유증일까, 명수가 좀처럼 힘을 못 내는 것처럼 보여 안타까운 상미였다. “상대편이 잘하는 거야.” 그간 붙었던 상대와 달리 이번에 붙은 상대 팀은 실력이 꽤 좋다고 생각했다. “특히 상대 수비수가 명수한테 좋은 위치를 허락하지 않아서 명수가 쫓기듯이 공을 차는 게 문제야.” 물론 명수가 최상의 컨디션이 아닌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상대 수비수가 잘한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뭐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거지. 그리고 명수는 아직 성장하는 중이니까, 지금 못한다는 건 아무런 흠이 되지 않아.” 단유는 상미가 저런 말을 할 줄은 전혀 상상도 못 했기에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왜?” “아니, 그냥.” 상미는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명수를 바라보았다. “명수 실력이라면 나중에 프로선수가 되겠지?” “응.” 아주 오랜 시간 축구에 꿈을 가지고 살아가던 명수였다. 어떻게든 실력을 키워서 축구선수가 되는 것만을 그리며 살아왔고, 지금도 또래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명수였기에 프로선수가 되는 것이 단지 말로만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넌 뭐가 되고 싶어?” 상미가 단유를 돌아보며 물었다. 순간 치고 들어오는 질문에 입이 절로 닫혔다. 그러고 보니,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묻는 말들이 ‘이름’과 ‘장래’였다. 한때는 이름이 가장 말하기 힘든 질문이었는데, 이제는 ‘장래희망’이 가장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 되었다. “넌 뭔데?” 단유는 대답 대신 질문으로 되받았다. 상미는 턱을 괴던 자세 그대로 단유를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난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어.” “뭐?” “…그래서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게임을 하는 거야.” 단유는 상미의 옆모습을 지켜보다가 장난은 아니라는 생각에 진지하게 되물었다. “그렇게 게임을 좋아하는 거야?” “응. 종일 게임만 하면서 살면 정말 행복할 거 같아.” 단유가 상미의 꿈에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보였는지 상미가 몸을 돌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전에는 게임단에 중학생들도 많았는데 요즘은 협회 차원에서 중학생의 진출을 막는 추세라며, 그래서 게임단에 들어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고. 그래서 빨리 고등학생이 되어서 게임단에 들어가는 게 목표라는 이야기였다. 그 꿈이 유치하다느니, 장래성이 어떡하다 느니 판단할 기준이 없던 단유는, 자기보다는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 생각을 읽었는지, 상미가 눈을 흘기면서 물었다. “그런데 네 꿈은 뭔데 말을 안 해줘? 말해주기 어려운 거야?” 말해주기 어려운 것은 꿈이 없기 때문이다. “없어.” “뭐가?” “꿈이.” “꿈이 없다고?” “응.” 상미는 재차 물으려다 명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명수가 바닥으로 패스가 이어진 공을 받아 치고 나가던 중이었다. “그럴 수도 있지, 뭐.” 수비수를 앞에 둔 명수가 같이 달리고 있던 동료에게 공을 넘겼다. “사실 나도 예전에는 그랬던 거 같아. 우리 어릴 때 그러잖아, 너 뭐가 되고 싶냐고. 내 친구들은 연예인이 되고 싶다는 애들도 있었고, 학자나 교수가 되고 싶다는 애들도 있었고, 경찰이 되고 싶다는 애들도 있었잖아. 근데 난 공부도 잘 못 하고, 하고 싶은 것도 별로 없고 그랬거든. 그래서 니 맘 이해해.” 단유는 상미의 말에 처음으로 흥미가 솟았다. “그럼 어떻게 해서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야? 계기가 있어?” 상미는 눈웃음을 지으면서 대답을 해 주었다. “계기라고 말할 건 없고, 그냥 우연히 TV를 보다가 여자 게이머를 보게 된 거야. 근데 그 선수가 남자 선수랑 경기했는데, 아쉽게 지고 말았어. 경기 끝나고 인터뷰를 하는데 다음에는 꼭 이기겠다면서 눈물을 흘리는 거야. 그거 보고 나도 게이머가 되겠다고 결심한 거야.” “응?” 뭔가 조금 극적인 계기가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납득이 잘 가지 않는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그 눈물 때문에 결심한 거라고?” “아니, 눈물이 아니라 인터뷰를 하는 모습을 보고 결심했다고.” 단유는 잠시 스토리를 꿰맞춰 보다가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그 게이머가 게임에서 진 게 분해서 다음에는 이기겠다고 결심하는 모습 때문에 결심했다는 거지?” “비슷해.” 비슷하다는 상미의 대답에 오히려 답답해진 단유였다. “정확히는 뭔데?” “인터뷰하는 모습.” 단유는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내가 이해를 못 하는 거야, 아니면 니가 설명을 제대로 못 하는 거야?” “니가 이해를 못 하는 거지. 그 선수가 다음에는 꼭 이기겠습니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꼭 저런 게이머가 되겠다, 고 결심했다는 이야기가 어려워?” 같은 이야기를 두 번 들었는데도 상미의 결심에 대한 이유가 정확히 와 닿지 않았다. 단유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이해를 해보기 위한 시도를 했다. “그러니까, 그 여자 선수가 게이머의 인터뷰를 보고 결심했다는 거지?” “응.” “그 인터뷰가 너한테 어떤 의미였는데?” “프로게이머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게 해 준 거.” “아니, 그러니까 그 인터뷰를 보면서 니가 느낀 감정.”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멋있구나, 라는 거?” “아, 그러니까 그 인터뷰가 너한테 멋있게 느껴졌다는 거지?” “응.” 단유는 눈가를 굳히고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그 인터뷰의 어떤 모습이 너한테 멋있게 느껴진 거야?” “전부 다. 그냥 다 멋있던데?”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전에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고. 상미가 틀린 건 아닐 것이다. 그냥 자신이랑 다르기 때문에, 그래서 상미의 말을 이해 못 하는 거라고. 이해 못 하는 게 틀린 건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이해시키며 자리에서 벗어났다. “어디 가?” “운동하러.” 좀 뛰면서 머리를 비워야 할 필요성이 있다. “같이 뛸까?” “아니. 괜찮아.” 상미는 이미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서 쫓아오는 중이었다. **** 여름 휴가 차원으로 바다를 다녀온 후, 단유는 본격적으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번 방학 때 다녀와야 앞으로 이곳에서의 생활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곳에 가기 위해 전처럼 병원에 쓰러질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개인적인 시간을 뺄 방법이 필요했다. 혼자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하면 가장 편하겠지만, 절대 허락하지 않을 방법이기에 단유는 머리를 굴려서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게다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가늠할 수도 없는 상황. 지난번처럼 그곳에서 5년을 지낸다고 가정할 때, 이곳에서 3일이 지났던 사실을 떠올리면 적어도 3일까지는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그 3일 동안 혼수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사실까지 고려한다면, 주위 사람들―특히 선생님과 명수―에게 걱정을 시키지 않는 선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계획이 필요했다. 호빵과 함께 거실에서 TV를 보는 명수의 눈치를 본 후, 단유는 주방에서 이모님과 함께 냉장고를 정리하던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응?” “잠시만요.” “왜?” 단유는 선생님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저기 혹시요.” “응? 왜?” “저 혼자 전국 일주, 하고 오면 안 될까요?” 선생님은 단유가 이런 파격적인 계획을 들이밀 줄 몰랐기에 처음에는 단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뭐라고?” 단유가 차분하게 계획을 이야기하자, 선생님은 걱정이 먼저 들었다. “단유야, 혹시 무슨 걱정 있니?” “네?” 걱정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으니, 속으로 뜨끔한 단유가 선생님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 그렇지 않고서, 갑자기 전국 일주라니? 게다가 혼자?” “…안 되나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데?” 단유는 미리 준비한 멘트를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자립성, 독립성을 키우기 위한 준비라는 것부터 해서, 국내 자연환경의 아름다움을 직접 체험하고 싶다는 이야기, 교과서와 책에서 벗어나 현실에서 경험하고 느끼고 싶다는 감성적인 부분까지 빈틈없이 꽉꽉 채워서 선생님에게 전했다. 기대를 안고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단유를 지켜보던 선생님이 단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벌써 그런 생각까지 하다니, 기특하구나. 그런데 아쉽지만, 지금은 안 되겠다.” “왜요?” “아직 혼자 전국을 돌아다니기에는 넌 너무 어려. 물론 니가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똑똑하고 철이 든 아이란 건 알지만, 그래도 아직 너 혼자 나다니기에는 세상이 너무 험해. 오늘만 해도 뉴스에서 뺑소니니 강도니 하며 나오는 거 같이 봤잖니?” 그런 놈들, 솔직히 한주먹거리도 안 될뿐더러, 아예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도 있어요, 라는 말은 할 수 없었던 단유였다. “나중에, 고등학생만 돼도 선생님이 허락하겠는데, 지금은 조금 이른 거 같구나. 아니면 선생님이랑 같이 가는 게 어떠니?” “아, 아니요. 그냥 혼자 다녀야 자립심도 기르고 그러죠. 어릴 때는 사서 고생도 한다면서요.” “그것도 어느 정도지. 지금 넌 너무 어려서 안 돼.” 결국 선생님의 허락을 받지 못한 단유는 이 방법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고집을 꺾어야 했다. “그런데 왜 굳이 혼자여야 하니? 혹시 명수랑 무슨 문제라도 있니?” 도리어 선생님께 이상한 오해나 하게 만들었다. 단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저었다. 격렬하게 부정하는 단유를 가는 눈으로 쳐다보던 선생님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명수랑 문제가 있으면 말로 잘 해결하라는 엉뚱한 해결책만 내놓은 채 방을 나갔다. 단유는 머리를 감싸고 책상 위를 쳐다보았다. “좋은 방법 없을까?” 밖에서 점심 먹으라는 선생님의 부름이 있기 전까지 고민에 빠져 있던 단유는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방을 나왔다. “와, 맛있다!” 오늘의 점심은 스파게티였다. 명수가 특히 좋아하는 메뉴였는데, 구운 마늘과 기름에 볶은 양파를 곁들인 토마토소스 베이스의 붉은 스파게티는 감칠맛이 뛰어났다. 명수는 허겁지겁 한 접시를 비운 후 다시 한 접시를 더 내밀었다. “한 그릇 더요!” “배 안 부르니?” 이모님이 이미 많이 담아줬었는데 그게 다 들어가냐는 물음이었다. 명수는 자기 배를 두드리며, 이 정도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다고 항변했다. 다시 한 접시를 건네받은 명수는 포크를 쉴 새 없이 움직여댔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이모님이 단유에게도 물었다. “너도 더 줄까?” “아니요, 먹어보고 모자라면 더 부탁드릴게요.” “그래.” 단유는 다시 포크로 스파게티 면을 감다가, 멈칫했다. “아!” “왜?” 선생님과 이모님이 왜 그러냐는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는데―명수는 먹느라 시선을 돌릴 틈도 없어 보였다―단유가 급히 손사래를 치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변명했다. “맛있네요. 저기…한 접시 더 주실래요?” 원치 않게 한 접시를 더 받아서 먹은 단유였다. 하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한 접시였다. ‘한 번에 다 담을 필요는 없지. 조금씩 담아서 먹어도 배는 부를 수 있으니까.’ 굳이 예전처럼 5년을 통으로 지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지금은 언제든지 오갈 수 있으니까. 익숙하지 않았던 탓에 단유는 저도 모르게 예전처럼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기 힘들 거라고만 생각해서 계획을 짰던 것인데,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별거 아닌 일인데도, 이렇게 일상에서 힌트를 얻었다는 게 꽤 재미있고 신기하고 놀라웠다. 깨달음은 언제, 어디서 올지 모른다던 신테의 말이 떠올랐다. ‘아! 어쩌면 상미도 이렇게 깨달음을 얻었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 나간 생각 같았다. ======================================= [242] 배틀 트립(2) 고약한 냄새가 회갈색 진흙탕 아래에서 스멀스멀 올라올 때, 부리를 집어넣고 이리저리 뒤적이던 큰 눈동자의 새가 문득 고개를 들어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한여름의 열기 때문인지 아지랑이가 시야를 방해했지만, 그래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시선을 고정한 새는 이윽고 넓적한 날개를 짝 펴더니 부채질하듯 크게 퍼덕였다. 하지만 무거운 몸 때문에 여느 새처럼 날아오르진 못하고 다만 바닥에 고정된 듯 박아놓았던 다리를 천천히 들어 올려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오랜만이네?” 새는 어느새 자기 앞에 나타난 소년을 향해 부리를 끄덕여 보였다. 새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아니면 익숙한 얼굴이라서 아는 척을 하는 것인지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소년은 새의 움직임에 반가워했다. 적어도 예전처럼 마냥 무서움에 떨지는 않게 된 것이었다. 비록 여전히 지독한 냄새 때문에 오래 이곳에 머물고픈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새를 보니 반갑기도 해서 잠시 걸음을 멈췄을 뿐이었던 소년이었다. “널 금방 이렇게 볼 줄 알았다면, 먹을 거라도 챙겨올 걸 그랬어. 그런데 도대체 넌 뭘 먹는 거야?” 새는 큰 눈동자를 소년에게 고정한 채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소년은 굳이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자기 할 말만 계속해 나갔다. “내가 여기 오래 있을 수가 없어서 지금은 그냥 가지만, 만약 다음에 또 보게 될 일이 있다면, 그때는 네가 먹을 만한 거라도 챙겨서 올게. 잘 지내라.” 짧은 작별 인사를 남기고 소년은 다시 모습을 감췄다. 새는 갑자기 사라진 소년을 찾는 시늉을 하는 대신, 날개를 크게 퍼덕여 보였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진흙 바닥 속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부리를 넣고 헤집기 시작했다. **** 소년은 금방 돌산의 맨 위에 올라섰다. 소년이 이 돌산이 자신의 인지적 한계로 인해 드러난 허상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이 허상을 쉽게 무너뜨릴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보이니까 믿게 되고, 믿으니까 오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그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실체에 대해, 그 진실에 대해 모르지는 않으니까. 그냥 보이는 대로 둘 뿐이었다. 그랬더니 이렇게 돌산 위에 오를 수 있게 되었고, 돌산 위에서 넓게 펼쳐진 운해(雲海)를 구경할 기회도 얻게 되었으니까. 잠시 그 장관을 지켜보던 소년은 이내 그 속으로 들어갔다. 지난번처럼 떨어지는 스릴을 만끽할 필요는 없게 되었으니, 곧 소년은 푸른 초원과 이제는 적당히 넓은 지역에 자리 잡은 수림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 있었는지 모를 사슴 한 쌍이 먼 나무 그림자에서 불쑥 나타나 소년을 쳐다보다가 곧 느긋한 걸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아리 소리 같지만, 알고 보면 사납게 생긴 황조 1마리가 높은 가지 사이를 날아다니며 울음을 터뜨렸고, 고양이 소리 같지만, 알고 보면 노란 눈동자의 검은 비단을 두른 맹수가 갸르릉 거리며 바위 위에 드러누워 오수(午睡)를 청하고 있었다. 소년이 지나가도 맹수는 눈을 뜨지 않았고, 좋은 꿈을 꾸는지 입맛을 다시는 시늉도 하지만 움직이지는 않았다. 마른 듯 갈라진 자작나무 껍질 틈으로 검은색 풍뎅이가 꿈틀대며 삐져나와서 몸을 떨었고, 이슬 맺힌 풀잎 사이로 귀뚜라미가 펄쩍 뛰어올라 시냇가에 걸쳐진 한 뼘짜리 널조각 위로 내려앉았다가 다시 건너편 수풀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시간이 많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여유는 부려도 되겠지, 라는 마음에 소년은 느릿느릿 주위를 둘러보며 보고 싶은 거, 듣고 싶은 거, 느끼고 싶은 거 다 찾아보면서 숲길을 걸어나갔다. 그리고 어느새 익숙한 집이 소년의 시야에 들어왔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건만 커다란 나무 사이에 난 그 집은 여전히 기억 속 그 모습 그대로였고, 소년은 천천히 현관으로 다가갔다. 집 왼편에 있던 그루터기도 여전했고, 현관 앞에 걸린 마른 가죽도 여전했다. 가죽을 들추고 현관을 두드렸더니 반응이 없었다. “아무도 안 계세요? 디아트리? 안트? 신테?”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주인 없는 집에 들어가는 건 꺼려져서 소년은 잠시 집 주위를 둘러보기로 했다. 맑은 햇살이 공터처럼 뻥 뚫린 숲 천장을 지나 집 주위를 환하게 비추고 있어 주위를 둘러보는 게 어렵지 않았다. 빛이 덜 드는 숲 안쪽에서 고라니 한 마리가 슬쩍 소년을 보다 반대 방향으로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 외에는 사람도 동물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낚시하러 갔나?” 소년은 기억을 더듬어 세 사람과 함께 낚시하던 곳으로 향했다. 오래된 기억임에도 5년을 머무르는 동안 숱하게 갔던 곳이라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였다. 서울에서 살 때도 주변 지형지물을 익히는 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바로 소년이 가진 관찰력 때문이었다. 다 비슷비슷한 나무처럼 보여도 소년의 눈에는 슈퍼마켓과 철물점을 지나 오른쪽 골목에 있는 오락실의 맞은편, 붉은 지붕의 서점을 찾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윽고 자신이 자주 오르던 나무를 찾아낸 소년.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높기도 엄청 높았다. 지금처럼 키도 크지 않았고, 힘도 많이 없던 시절의 자신이 이렇게 높은 나무를 올랐던가, 떠올리니 새삼스러웠다. 소년이 나무 위에 오르자 숲의 그늘에 막혀있던 뜨거운 햇살이 가장 먼저 소년을 반겼다. 살짝 눈을 가늘게 뜨며 손우산으로 눈 위를 가리는데, 소년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소년은 뒤로 돌아보았다. 두툼한 볼살에 장난기 가득한 눈매가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신테?” 볼살이 출렁이며 소년에게로 고개를 돌리는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루치드?” 신테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루치드를 바라보다가 들고 있던 낚싯대를 던지고 겅중겅중 가지를 건너 루치드에게로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야? 너 나갔잖아? 아니 나갔지. 나갔는데, 그런데… 얼굴이 왜 이래?” “신테야 말로 얼굴이 왜 그래요? 몰라볼 뻔했어요!” 신테의 머리는 새하얗게 변했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마치 혼자 늙은 사람처럼…. 늙어? “넌 어떻게 20년간 얼굴이 안 변한 거야?” “…20년이요?” 루치드는 3년이란 시간의 흐름만을 기억하다가 20년의 격차를 눈으로 확인하자 굉장히 혼란스러운 느낌이었다. 물론 이곳과 지구 사이에 시간 차이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크게 벌어질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루치드의 이야기를 들은 신테가 머리를 긁적이다가 집어던졌던 낚싯대를 챙기기 시작했다. “오늘은 반가운 손님도 왔으니, 여기까지구나. 같이 집에 가서 배나 채우면서 마저 이야기하자.” 신테는 루치드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낚시 바구니는 루치드가 들었는데, 바구니 안에는 돔 5마리가 빠져나가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중이었다. “이렇게 손님이 올 줄 알고 낚시가 잘 됐나 보구나. 난 괜히 오늘따라 손맛이 좋다고 여겨서 신이 났었는데 말이야.” “낚시가 많이 늘었나 봐요? 예전에는 디아트리나 안트보다 늘 적었잖아요?” “세월의 힘은 무시 못 하는 거란다. 20년을 낚시만 쉼 없이 했더니, 이제는 눈감고 한 손으로 범고래를 낚는 수준이라고.” 허풍도 세월만큼이나 늘었나 보다. 루치드는 그마저도 반가워서 입꼬리가 계속 올라가 있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신테는 능숙하게 생선을 잡아서 칼질을 쓱쓱 하더니 금세 접시 위에 갓 회를 뜬 하얀 생선 살이 담기기 시작했다. 식탁 위에 몇 가지 음식들과 함께 한 상을 차리더니 구석에서 커다란 물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한잔할래?” 이곳에서는 미성년자라는 개념이 없었으니, 신테의 제안은 거리낌이 없었고, 신테의 분위기에 동조한 루치드는 스스럼없이 잔을 내밀었다. “뭐예요, 이거?” 붉은빛이 도는 맑은 액체가 컵 안에서 루치드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냥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열매들을 모아다가 담근 거야. 그렇게 센 술은 아니니까, 너한테도 맞을 거야.” 잔을 부딪치고 맛을 보니 달달한 맛 뒤에 쓰고 비린 맛이 느껴졌다. 비리다는 느낌에 미간이 찌푸려질 때쯤, 상쾌하고 시원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신기한 맛이네요.” “열매가 이것저것 들어가서 그래. 나쁘진 않지?” 하나하나 따지면 이상할 것 같은데, 어울리니 묘하게 맛있다는 느낌이었다. 특히 생선 살과 같이 먹으니 계속 술을 마시게 되는 부가효과도 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요?” 얌전해진(?) 신테와 술을 나누다 보니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보통 먹을 것이 있으면 다 같이 모여서 먹곤 했는데 말이다. “디아트리랑 안트는 나갔어.” “나가다뇨?” “인지의 경계선 너머. 세상으로 나갔어.” 아, 이들은 인지의 경계선을 아는 사람들이니 그것을 넘는 것도 가능하겠구나. 루치드는 일단 그 점을 이해하고 다음 질문을 했다. “왜요?” “지톤은 자신이 그동안 갈고 닦은 진실의 길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할 시기가 있다. 디아트리와 안트는 그 시기에 맞춰 세상으로 나간 거야.” 루치드는 ‘도를 아십니까’가 생각났다. “전도(傳道) 같은 건가요?” “…비슷하네.” 디아트리와 안트가 자신만의 진리를 찾아내고 나간 지 벌써 5년이 넘었다는 것. 그리고 신테는 아직 진리를 찾지 못해서 안 나가고 있지만, 곧 찾아서 나갈 거라는 이야기였다. “만약 신테까지 나갔다면, 전 아무도 못 만나고 돌아갈 뻔했네요.” “그럼 이제 네 이야길 들어보자. 왜 다시 돌아온 거니? 아니 왜 여기로 온 거야?” 루치드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제윅과의 만남, 근위대에게 쫓겨 죽음의 위기에 처했던 순간을 이야기할 때는 도저히 차분하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루치드가 그 상황을 떠올려 흥분하기 전에 신테가 이미 흥분해서 식탁을 세차게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런 미친놈이 다 있냐? 마법사란 놈들은 그래서 안 돼. 지들이 제일 잘난 줄 아는 놈들.” “성주라는 사람이 사람들 눈이나 가리려고 하고, 진실이 드러나는 걸 두려워하여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 그런 놈이 어찌 성주가 되었을꼬?” 신테는 지구에서 있었던 이야기도 들으며 놀라워했다. “역시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인가 보구나.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이 가능하니, 말의 힘이 큰 것인가, 말 한마디에 흔들리는 사람이 나약한 것인가.” 하지만 역시 가장 놀라운 것은 두 세계 사이의 시간의 격차였다. “예전에도 듣긴 했지만, 이토록 크게 차이가 나리라곤 생각을 못 했다.” “저도요. 늙은 신테를 보니 이상해요.” “늙었다는 말이 이렇게 낯설게 들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20년 전이나 똑같은 얼굴을 하고 앉은 너를 보니 이상하긴 이상하구나.” “신테는 되게 점잖게 변했어요.” “그 말도 어린 너에게 들으니 더 이상하고.” 두 사람은 지나간 시간을 되짚으며 잠시 추억을 나누고 회포를 풀었다. 술의 힘이었을까, 아니면 처음 마신 술의 충격 때문이었을까. 결국, 루치드는 본래 자신이 찾아온 목적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사담만 나누다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잠에 빠져 버렸다. 하지만 루치드는 그것이 나쁘지 않았다. 스승이자 친구였던 이를 만난 기쁨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 **** “흠. 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들고 왔구나.” 신테는 턱을 긁적이며 루치드의 말을 받았다. 루치드는 접시에 담긴 과일을 두고도 먹을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신테의 대답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아침에 일어난 루치드는 신테를 도와 주변 정리를 하고, 숲 외곽에서 몇 가지 과일을 따는 등, 일과를 도운 뒤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루치드는 자신이 고민하던 문제, 왜 자신이 다른 사람과 벽을 지고 살게 되었는지를 토로하고 과연 이런 삶이 자신의 생존에 도움이 될 수 있는지, 또 안트가 알려준 진실에 다가가는 법―부정의 부정, 긍정의 부정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자신이 가지지 못하는 ‘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테는 곤란하다는 얼굴을 하다가 접시에 담긴, 하얀 과즙이 흐르는 과일을 한입 베어 물고 천천히 오물거렸다. 그 모습을 보니 어쩐지 루치드도 군침이 돌아 덩달아 과일을 하나 집어 들었다. “일단 대답하기 쉬운 것부터 알려주자면, 안트의 방법은 말 그대로 방법일 뿐이야. 이전에도 말했을 테지만, 디아트리나 안트나 나나 모두 각자의 방법으로 세계의 진리를 찾고 있었어. 안트가 말한 부정의 부정, 긍정의 부정은 그저 방법론일 뿐이지, 유일한 방법은 아니야. 거기까지가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는 최선이구나. 난 그 방법에 대해 안트만큼 치열하게 다루지 않았으니 말이다.” 신테는 곤란할 때면 귀 뒤쪽의 머리를 벅벅 긁는 습관이 있었다. 지금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여간 곤란한 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잠시 루치드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렇게 긁다간 두피도 벗겨지겠다 싶을 정도로 심하게 긁어대던 신테가 다시 입을 열었다. “벽에 대한 문제는 내가 해줄 수 없는 물음이다. 그것은 네 삶의 문제이고, 네 삶을 니가 제대로 통찰해내면 저절로 알 수 있는 답이지 않을까 싶다. 어떤 이의 삶의 태도를 단지 몇 마디로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 없는 문제 인만큼, 그 ‘벽’의 존재에 대해서도 지금의 나로서는 대답을 줄 수 없다. 하지만,” 신테는 물을 한잔 마셔 입을 축이곤 말을 이었다. “하지만 꿈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고 싶구나. 그러니까 넌 미래에 뭘 하고 싶은지 정확히 모르겠다는 것 아니냐.” “네.” “그 부분은 지금 네가 직면한 가장 큰 숙제라는 생각이 든다.” 신테는 목을 쭉 빼서 루치드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니, 루치드의 눈동자를 좀 더 가까이 보려고 다가온 것일까? 신테의 푸른 눈동자가 루치드의 눈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 [243] 배틀 트립(3) “루치드.” 신테가 진지한 목소리로 루치드를 불렀다. 루치드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네.” “우린 너에게 정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야. 네가 답을 찾을 방법들을 알려준 것이지.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난 너에게 답을 줄 수 없어. 그러니 지금 그 숙제 역시 네가 풀어야 한다.” 루치드는 그 말이 옳다 여겨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대로 너에게 맡겨버리면 네가 여기까지 온 수고가 없으니, 조금 도와주도록 하지.” 루치드는 신테의 말을 기다렸다. “사람들이 말하는 꿈이 뭘까?” “…되고 싶은 것? 아니면 하고 싶은 것?” “그런 의미에서 넌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는 거지?” “네.” “두 가지 물음을 주마. 넌 뭐가 되어야 하는 사람이니? 아니면 뭔가 해야만 하는 게 있니?” 루치드는 잠시 그 물음에 고민을 했다. 되어야 하는 사람? 그런 건 없다. 주변에서 루치드에게 똑똑하다고, 공부를 잘한다고 칭찬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공부만 해서 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혹자는 의사, 변호사 같은 직업을 이야기하지만, 꼭 그게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게 그 직업이 마땅히 되어야만 하는 직업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뭔가 해야만 하는 게 있냐고 물으면, 정확한 대답은 아니지만 없다고 말하기가 곤란한 부분이 있었다. “그래, 그 부분이 아마 니가 풀어야 할 숙제라는 거다. 직업이 꿈이 될 수도 있겠지만, 꼭 꿈이 직업은 아니잖아? 내 경우를 이야기하자면, 난 어릴 때 ‘지톤’이 꿈은 아니었거든. 내 꿈은 세계의 진리를 아는 거였지, ‘지톤’이 되자는 게 꿈은 아니었어. 세상의 숨겨진 진리, 진실, 혹은 다르게 불릴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을 알기 위해 꼭 지톤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어. 기사가 되든, 푸줏간 주인이 되든 직업과 상관없이 할 수 있는 일이잖아. 사람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마을을 만들고 싶다는 친구의 장래 희망이 꼭 기사나 치안감 같은 직업일 필요는 없잖아? 백정 일을 하든 목수가 되든 불의에 맞서고 용기와 시간만 있다면 얼마든지 꿈을 이룰 수 있으니까.”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확한 답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지구의 생활과 시스템을 몰라서 그런 대답을 한 것일 수도 있다. 지구라는 곳은 세분된 직업과 그 직업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이 엄격히 구분되는 사회이니까. 경찰이 아니면 마을 치안을 위해 힘을 쓸 수 없고, 써서도 안 되는 사회였다. 괜한 일에 말려들어서 오히려 치안을 위협한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 있으니까. 세계의 진리를 알고 싶다는 꿈이 직업과 관계없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생활의 영위를 위해 직업에 종사하다 보면 그 꿈을 이루기는커녕 발도 못 내밀 경우가 생긴다. 루치드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이 그것이었다. “먹고 살기 힘든 데, 그런 데 신경 쓸 여유가 어딨어?” 나이 불문, 직업 불문 남녀노소 할 거 없이 가장 많이 쓰는 말이 그랬다. 한두 사람이면 모를까, 그 많은 사람이 입을 모아 그렇게 말을 할 정도라면 이미 사회 시스템이 직업과 꿈을 나눌 수 없게 만들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테의 말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 말대로 루치드는 당장 자신이 오랜 시간에 걸쳐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테제에 루치드가 바로 떠올린 것은 있었다.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뭔데?” 루치드는 오래도록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얼굴이 저도 모르게 일그러지며 힘겹게 뱉은 대답. “가족을 찾아야 돼요.” ****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를 핑계로 제대로 하지 못했던 일. 그러나 이제는 원한다면 얼마든지 시간을 내서 할 수 있는 일. 그렇지만 현재와 같은 능력을 갖추게 된 것도 한참 전의 일임에도 여태까지 시도하지 못했던 일. 바로 가족을 찾는 일이었다. “그런데 20년이나 지났잖아요? 사실 여기 시간으로만 따지면 20년이 아니라 그보다 더 지났을 거예요. 그럼 우리 가족들도 그만큼 나이를 먹었겠죠. 그럼 어떻게 우리 가족들을 찾을 수 있을까요? 게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증거도 하나 남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말을 할수록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가고 덩달아 루치드의 어깨도 아래로 축축 처져만 갔다. “거기에 대해서는 나로서도 답을 줄 수가 없구나. …이것 참 결국 난 아무것도 답해주지 못하는 사람이었구나. 이래서야 세상의 진리를 찾는다는 사람이라고 소개한 내 꼴이 우습게 되었네.” 신테는 씁쓸한 미소를 입에 담으며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어둑해진 숲속이었다. 신테가 느릿느릿 일어나 벽에 걸린 등에 불을 밝혔다. 지나가는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가 다시 꼿꼿이 일어서 주위를 밝히는 등불이었다. 돌아서서 루치드를 바라보던 신테가 한 마디 했다. “내가 지금껏 세상의 진리를 찾기 위해 오랜 시간을 공들였지만, 지금 내가 깨달은 게 뭔 줄 아니? 세상에 진리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없다는 거야. 정확히 말하면 정해진 게 없다는 거지. 어떤 때, 어떤 조건에서는 진리였던 것도, 또 다른 때, 또 다른 조건에서는 진리가 아니게 되기도 하지. 그래서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 신을 만나면 물어보고 싶다고. 도대체 당신이 감쳐둔 진리는 무엇입니까, 라고 말이야.” ‘신’이라는 말에 루치드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신의 저주’를 가진 여자와의 만남에 대해서, 그리고 그 여자가 들려준 이야기에 대해서. 조금은 신테가 놀라는 반응을 보일 거라 기대했는데. “그러니? 하긴 그쪽 집안이 대륙에서 유명하긴 하지.” 라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신의 저주를 부정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그게 과연 신의 저주, 혹은 축복인지 그 사실 여부를 떠나서 우리같이 세상의 진리를 찾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이야기야. 왜냐고? 그건 단지 불규칙적인 현상에 불과하니까. 단순한 오류 혹은 의도된 신의 기획일지라도, 그것이 세상의 보편적 진리에 다가가는 데는 방해일 뿐이거든.” 요는 이 세상의 규칙 속에서 보편성을 찾는 일인데, 불규칙한 특성에 집착하게 되면 보편성을 보지 못한다는 이야기였다. “특정한 누군가에게만 적용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닌 법이지.” 잘 모르겠지만, 이걸 가지고 토론을 하기에는 루치드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전 이만 가봐야 되겠어요.” “그래. 그런데 원한다면 언제든지 다시 올 수 있다는 거지?” “네. …일단은요.”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도 100% 확신을 갖지 못하는 루치드. 신테는 고개를 끄덕이며 루치드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넌 아직 시간이 많다. 얼마든지,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서 고민할 수 있는 문제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라.” ‘조급하다’라는 이야기를 얼마 전에도 들었던 것 같은데, 루치드는 신테의 격려에 감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뜬 단유가 창으로 눈을 돌렸다. 푸르스름하게 동이 터오는 바깥이 보였다. 서둘러 침대에서 벗어난 단유가 책상 위에 놓인 탁상시계를 바라보니 6시 3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거의 8시간 가까이 지났네.’ 그곳에서 이틀을 보냈는데, 이곳에서는 8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다행히 시간에 맞춰 돌아온 셈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래서야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더구나 가족을 찾는 일이 가능할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미뤄서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못 찾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포기해서도 안 될 일이었다. 어떻게든 찾는 노력과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단유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 “너 오늘 되게 피곤해 보인다?” 상미가 쭈그리고 앉아서 턱걸이를 하다가 잠시 쉬고 있던 단유를 보며 말했다. “그래? 난 괜찮은데.” “잠을 잘 자지 못한 사람처럼 얼굴이 어두워.” 가끔, 아주 가끔 상미가 여자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는데, 바로 이럴 때였다. 늘 털털한 모습만 보이고, 마치 명수처럼 행동하고 말하던 아이가 가끔 날카로운 감각을 드러낼 때, 단유는 상미도 여자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단유는 대답 대신 다시 철봉을 잡고 턱걸이를 시작했다. 피곤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 피곤함은 오랜 시간 잠들지 못해서 오는 피곤함보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물음과 숙제 때문에 피곤했던 것이 더 컸다. 그래서 오늘 아침 운동은 거를까, 하고 고민도 했었다. 하지만 차라리 운동으로 땀을 쫙 빼고 나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온 단유였다. “넌 이제 운동 안 해?” “응. 역시 현실에서는 레벨업이 안 되니까 흥이 안 생겨.” …모르겠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기로 마음먹었다. 오늘 밤, 저곳 세상에서 자신이 해야 할 행동지침을 떠올리고 정리하느라 복잡한 머리였다. 오늘 새벽, 그러니까 저곳 세상에서는 해가 저물던 저녁 무렵, 신테는 헤어지기 전에 조언 한마디를 해 주었다. “너에게 한계를 짓지 마라.” 그냥 격려차원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면 좋으련만, 신테는 그 말만 남기고 숲속 집의 문을 닫아걸었다. ‘나도 모르게 나에게 한계를 지었던가?’ 일부러 한계를 짓지 않음에야, 그 물음에 딱히 떠오르는 답은 없었다. 하지만, 신테가 마지막에 남긴 말이었다. 그 의미가 없지는 않을 테니 궁리는 계속해봐야 할 것이다. “석고야! 가자! 상미야!” 어느새 시합을 마친 명수가 수돗가에서 단유와 상미를 부르고 있었다. 머리 전체가 물에 빠진 것처럼 흠뻑 젖어서 윗옷까지 축축이 젖어 들고 있는 상태였다. 앞뒤 할 거 없이 머리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너 그렇게 머리하고 있으면, 머리에 비듬 생긴다?” 상미가 놀리듯 말하자, 명수가 입꼬리를 내리며 대답했다. “마르면 괜찮지 않을까?” 명수가 하늘을 가리켰다. 과연 아침부터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어, 햇볕 아래서 5분 정도만 걸어도 저 정도 젖은 머리는 금방 마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날씨였다. “그래도 집에 빨리 가서 머리 말리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럼 엄청 가려워.” 경험이 투영된 상미의 말에 명수가 서두르자며 먼저 등을 보였다. 문득 옆머리를 심하게 긁어대던 신테가 떠오른 단유는 피식 웃음 짓고는 명수의 뒤를 따라갔다. 집에 도착한 단유는 아침을 먹은 뒤,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전처럼 책을 읽는 대신, 의자에 앉아 명상에 잠겼다. 명상이라기보다는 밤에 시도할 이세계 탐험의 계획을 세우는 일이었다. ‘역시 처음에는 녹스로 가는 게 좋을까? 아니면 서쪽 대산맥을 넘어가 볼까?’ 어느 쪽이든 뚜렷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녹스로 가면 사람들이 있고, 사람들을 통해서 이야기를 듣고 행동할 수 있는 지침이 설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녹스에서 실패했던 경험이 있기에 그 방법이 효과적일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했었잖아.’ 이야기를 제대로 나누기도 전에 경비대장 포우에게 붙잡히고 미친 마법사 제윅과 얽히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다시 한번 탐문을 시도해도 좋으리라. 반면 대산맥 쪽은 완전히 불가해의 영역이었다. 잠깐 산맥 아래쪽으로 간 적은 있지만, 그때는 자신이 너무 어린 나이였고, 함께 있었던 마법사 핀체노가 급변하면서 제대로 조사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무도 넘을 수 없는’ 대산맥이 마치 ‘아무도 가지 못하는’ 남쪽 인지의 경계선 같아서, 한 번쯤은 넘어갈 시도를 해봄직도 했다. 다만 그런 시도도 단유니까 할 수 있는 것이지, 마을 사람들이 과연 그런 시도를 했을까 추측해보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결국 두 선택 모두 가능하되, 가능성은 낮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딱히 선택할 만한 옵션이 없으니 어느 한쪽을 고르기는 해야 할 것이다. 단유의 고민은 점심시간이 지나서도 멈추지 않았고, 저녁 시간이 될 때쯤에도 여전히 가능성과 효율성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단유야, 밥 먹어라.” “네.” 식탁에는 시원한 오이 냉국과 뜨거운 된장 찌개가 함께 올라와 있었다. 명수가 두 개를 가리키며 물었다. “어떤 걸 먹어야 돼요?” 이모님이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먹고 싶은 거 먹으면 되지.” 명수는 우선 오이 냉국을 숟가락을 떠서 먹더니, 그 시큼한 맛에 살짝 눈을 찡그렸다. 밥을 한 숟가락 떠 넣은 뒤, 이번에는 된장 찌개에 숟가락을 얹었다. “맛있니?” “네!” 명수는 어떤 반찬도 마다치 않고 좋아했기에 이모님은 명수 먹는 것만 봐도 기분이 좋다 하셨다. 단유도 뒤이어 수저를 들어 식사를 시작했다. 시원한 냉국과 뜨거운 찌개가 모두 입에 맞았다. 굳이 어느 하나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었던 것일까? 식사를 마친 단유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잘 먹었습니다.” ======================================= [244] 배틀 트립(4) 어제는 제대로 살필 겨를도 없고, 마음도 급해서 보지 못했던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 마을은, ‘마을’이라고 부르기보다는 그냥 ‘집터’ 정도로 부르는 게 나을 듯싶었다. 번듯해 보인다 싶었던 벽들은 거의 갈라지고 부서져 간신히 외형만 간직한 듯 보였고, 어떤 집은 아예 무너져 내린 곳도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이 지켜주리라 생각했던 나무 골조들은 가운데가 수수깡처럼 부러져 바닥을 뒹굴고, 멀쩡한 식탁을 찾는 일이 어려워 보였다. 주위를 둘러보던 루치드는 고개를 돌려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바라보았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하자고 마음먹고 왔지만, 역시 갈등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여름철이라 그런지 바람마저 더워서 가만히 서 있어도 정수리 끝이 후끈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오래 생각해봐야 소용없어, 라고 알려주는 것 같아 루치드는 곧 선택했다. 무릎 위에까지 오를 정도로 길게 자란 풀들로 덮인 들판을 지나 들짐승의 으르렁거림이 멀리서 들려오는 산을 넘어, 루치드는 곧 녹스 성을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녹스 성은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예전처럼 거대한 성벽과 그 성벽 위를 돌아다니며 순찰 중인 경비대원들의 복장에도 변화는 없었다. 마치 20년의 세월이 사람에게만 적용된 것처럼. 줄을 서서 녹스 성안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여전히 성문 출입구에서 간단한 신분 조회 후에 성안으로 입성할 수 있었다. 쉽게 들어갈 수 없고, 쉽게 나갈 수 없는 녹스 성과 조우한 루치드는 긴 줄의 끝에 서서 천천히 한 걸음씩 나아갔다. 동문 앞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경비대원들은 역시 한 번도 본 적 없는 인물들이었다. 생김으로만 추측해보자면, 이전의 난리가 났을 때 아직 젖도 떼지 않았을 얼굴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루치드는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름?” “루치드요.” 조카뻘 혹은 나이 어린 동생뻘로 보이는 애가 동그란 눈을 하고 자신들을 바라보는데, 그 순진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직업정신이 투철했던 경비대원은 쉽게 인상을 풀지 않았다. “용무는?” 루치드는 기다리는 동안 준비했던 대사를 읊었다. “일자리를 찾으러 왔습니다.” “일자리?” 거짓말도 아닌 것이, 사실 이곳에서 오래 머물지는 못할지도 모르지만, 이 세계에 자주 오게 될 것이라면 당연히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라면 돈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러니 예전처럼 일자리를 얻어서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준비는 해야 했다. “도망자인가?” “아니요. 가족이 갑자기 사라져서, 그들을 찾는 중인데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어요. 그래서 일단 살기 위해서 일자리를 찾는 중입니다.” 루치드로서는 달리 할 말도 없었고, 그저 솔직하게 털어놓는 전략을 취했다. 다만 불필요한 사실을 말하지 않을 뿐. 두 경비대원은 잠시 서로 마주 보더니, 이윽고 루치드를 향해 말했다. “통과.” 루치드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녹스 성안으로 들어서니, 예전과 달라진 점이 몇몇 보였다. 가장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라면, 큰길을 중심으로 포장이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지구의 보도블록처럼 칼 맞춤을 한 것은 아니지만, 또 비록 크기가 일정치도 않고 반듯하지도 않았지만, 네모난 석재를 바닥에 깔아서 길 위를 덮은 것은 루치드가 보기에도 신기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한 남자가 루치드를 힐끗 보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다가왔다. “너 이곳이 처음이구나?” “네?” “촌뜨기처럼 바닥만 보고 다니는 꼴을 보니, 누가 봐도 처음이란 걸 알 수밖에. 바닥에 돌을 깐 게 신기하냐?” “…네.” “이것 덕분에 비 오는 날에도 길을 걷기가 수월해진 건 물론이고, 말들이 이곳을 지날 때도 먼지가 나지 않게 되어서 얼마나 좋아졌는지 몰라.” “언제 만든 거죠?” “음, 아마 2년도 안 된 거 같긴 하네. 처음에 이 도로를 공사한다고 했을 때, 상인들이 엄청나게 반대를 했었지. 이 공사 때문에 사람들이 통행을 못 하니까 장사가 안된다고 말이야. 그런데 이곳 성주님이 비전이 있으셨던지, 공사를 강행하셨고, 결국 이런 길이 만들어진 거야. 사실 수도나 큰 도시를 가면 이런 길이 많다고 하더라만, 녹스에서도 이런 길이 만들어질 줄 누가 알았겠니? 그치?” 사정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루치드는 남자의 설명에 장단을 맞춰주느라 그저 고개만 끄덕여 보일 뿐이었다. “지금은 이 도로 때문에 사람들이 더 많이 돌아다니게 돼서 장사도 잘되고, 그래서 세금도 더 많이 내게 되었지.”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려는 루치드를 남성이 붙잡았다. “그런데, 여기 처음 온 건 맞지?” “네, 그런데요?” “혹시 일자리 찾으러 온 거냐?” “어? 어떻게 아셨어요?” 다시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사내가 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니 나이 또래 애들이 자주 일을 찾으러 여길 오거든. 경비대원들이 아무 말도 안 하디?” “별로요.” 그러고 보니 경비대원들이 딱히 경계의 시선을 보내지 않았던 것이 수상하긴 했다. “하긴, 좀 많아야지. 요즘 이 거리에 애들이 넘쳐나서 오히려 문제야, 문제.” 뭔가 일이 있다는 생각에 루치드가 호기심을 드러내자, 남자가 그 시선을 눈치채고는 말을 돌렸다. “아무튼, 일을 찾으러 왔다니까 하는 말인데, 마침 일할 사람을 찾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같이 가보지 않을래?” 마침? 이렇게 우연히? 뭔가 수상하다 여겨졌지만, 루치드는 깊게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사내의 제안을 수락했다. 어느 정도의 위기라면 얼마든지 피해낼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보니까 힘은 잘 쓰게 생겼는데, 어떠냐?” “괜찮은 편이에요.” 줄곧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었다. 또래 친구들에 비해 월등한 체력을 자랑하던 루치드였으니. 사내는 또 기분 좋은 웃음을 짓고는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여행 가이드라도 된 것처럼 이곳저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녹스 성에 대해 안내하기 시작했다. “녹스는 5개의 지구(地區)로 나뉘어 있다. 가운데가 상업지구. 사실 가운데에서부터 포장된 도로를 따라 거의 상업지구라고 봐도 과언은 아니지만, 특히 가운데 사거리 부근에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가게들이 밀집되어 있어서 그곳을 상업지구로 분류한다. 그리고 동문과 북문 사이를 경관(京官)지구. 주로 공무를 담당하는 기관들이 모여 있지. 성주의 집무실도 여기에 있다. 바로 저기야.”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높은 건물 사이로 우뚝 솟은 하얀 3층 석조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한 기억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없던 건물이었다. 게다가 성주 집무실? “성주님은 성에 사시는 거 아니에요?” “녹스에는 성주님의 성이 없다. 아주 오래전에 성에 침입자가 빈번히 출입한 전례가 있어서, 성주가 아예 성을 없애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 정확한 내용은 모른다. 아무튼, 당시 그 성주가 성을 없애도 대신 최신식 집무실과 대저택을 마련했다는데, 그게 지금까지 이어진 거지. 그리고 집무실도 몇 번이고 개조해서 치안에 있어서는 대륙 귀족가의 그것들과 비교해도 절대 밀리지 않는다고들 하지. 물론 확인할 방법은 없어. 자기들 말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루치드는 다시 하얀 건물을 바라보다가 성큼성큼 걸어가는 사내의 뒤를 쫓아 뛰어갔다. “그리고,” “근데요.” “응?” “아저씨, 라고 해야 하나,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하죠?” “…내가 아직 내 소개도 안 했었나? 이런 급한 마음에 너무 서둘렀나 보네.” 사내는 볼이 빨개지도록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눈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다위. 로히메르 다위(Darwīh)야.” “전 루치드라고 해요.” 다위는 루치드를 생경스럽게 쳐다보다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 루치드. 반갑다. 자, 더 자세한 이야기는 가서 하기로 하고 일단 움직일까?” 그 뒤로도 다위는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소개를 해 주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크게 바뀐 게 없다고 여겼던 녹스가 세부적으로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넓은 길이 석재 포장된 것은 차치하고라도, 집들의 구조나 배치들이 모두 달랐다. 마치 5개년 개발 계획에 따라 도시 전체가 변화된 것 같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작은 실골목들은 여전히 흙바닥으로 익숙함(?)을 주고 있었고, 도시 전체가 내뿜는 냄새는 여전히 똑같았다. 각종 오물의 향취로 버무려진 석벽과 목조 건물들이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도 했다. 중앙 상업지구를 지나 서문과 남문 사이로 향할 때, 루치드는 잠시 서문 쪽으로 난 길을 바라보았다. 예전, 감옥이 바로 저기쯤에 있었다. 잠시 걸음이 느려진 것을 눈치챈 다위가 재촉하는 바람에 감상에서 벗어난 루치드는 다시 다위의 뒤를 따라갔고, 마침내 도착한 곳은 ‘구관(舊慣)지구’였다. 다위의 설명에 따르면, 다른 지구들이 변화해 나갈 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변화를 겪지 않았고, 덕분에 예전 모습 그대로를 지켜나가는 곳이라고 했다. 설명만 들으면 마치 남산한옥마을 같은 분위기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실상은 그냥 슬럼가였다. 다른 곳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석조 건물이 단 한 곳도 보이지 않았고, 칙칙한 나무껍질이 지붕에 덕지덕지 덮여 부실하다는 인상을 풍기는 집들이 시야에 가득했다. “따라와라.” 다위는 루치드를 데리고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오른쪽 왼쪽 번갈아 가며 골목을 따라 들어가던 두 사람이 마침내 다다른 곳은 유독 낡은 집들 중에서 그나마 나은―벽에 푸른 넝쿨이 가득해서 낡은 토벽(土壁)이 잘 보이지 않았다―집이었다. 널빤지를 잇대어 만든 것 같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식탁에서 일렁이는 촛불을 제외한 어둠이 루치드를 맞이했다. 식탁 근처로 다가간 다위가 루치드를 자리로 안내했다. “여기 앉아라. 조금 기다리면 곧 사람이 올 거다.” 루치드는 그 말대로 식탁 근처의 의자를 빼다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다위는 전혀 낯설어하지 않고, 게다가 불안해하지도 않는 루치드를 보며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사실 이 집의 조명을 일부러 어둡게 만들어 놓긴 했는데, 이런 가운데에서도 저렇게 태연한 모습을 보인 아이는 루치드가 처음이었다. “잠시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가서 데리고 올게. 아, 뭐 좀 마실래?” “물이 있으면 주시겠어요?” “어, 그래.” 다위는 벽 한편에 걸린 물주머니를 빼내어 컵에 물을 따라 주었다. 루치드는 컵을 받아서 입술을 적실 정도로만 맛을 보고는 컵을 내려놓았다. “그럼 기다리고 있어.” 다위가 나간 뒤, 실내는 암흑과 정적으로 가득했다. 촛불의 밝기가 집 안을 온통 환하게 비출 수 있을 정도는 되지 못했던 탓인데, 형광등 아래 살던 루치드에게는 갑갑한 마음이 절로 들 정도였다. ‘그래도 감옥보다는 낫지, 뭐.’ 그렇게 생각하며 루치드는 다시 컵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그리고 그 시간, 다위는 바로 옆집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제대로 구했어. 힘도 잘 쓴다고 하니까, 몫을 잘 쳐줘야 돼.” “알았어, 뭘 새삼스럽게.” 턱수염이 난 사내가 서류를 뒤적거리면서 다위의 말에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다위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까닥거리며 좀 더 자신의 노력을 알아달라는 시늉을 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포세 패거리한테 뺏길 뻔했다고. 내가 잽싸게 달려갔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또 뺏겼을걸?” “알았다니까. 거 참 사람 되게 들들 볶는다, 응?” “그러니까, 되지도 않는 그런 거 보지 말고, 가서 빨리 견적 좀 뽑아 보라니까.” 결국 턱수염이 툴툴대며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야 다위의 치근거림이 멈췄다. 턱수염과 함께 돌아온 다위는 여전히 자리에서 편안한 표정으로 기다리는 루치드를 보았다. 보통 이 정도 기다림을 주면 얼굴에 긴장이 좀 어리고, 입술이 말라서 연신 혀를 내두를 타이밍인데 루치드는 마치 이 집에서 10년을 살던 사람처럼 보였다. “인사해. 이쪽은 일꾼을 구하는 토엔. 그리고 이쪽은….” “루치드입니다.” “키가 크구나.” 들어오자마자 루치드를 아래위로 훑던 토엔은 대뜸 루치드의 견적을 뽑아냈다. “팔이나 어깨를 보아하니, 힘도 적당히 쓸 것 같고. 적당하네.” “그렇지?” 다위가 히죽 웃다가 급급히 표정 관리하는 모습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토엔은 루치드에게 다가가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도망, 은 아니지?” “예.” “일자리가 필요하고?” “네.” “좋아. 그럼 오늘부터 일하는 거로 하고.” “잠시만요.” “응?” 토엔은 자신의 말을 막은 루치드를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오늘부터라고요?” “급한 거 아니었어?” 뭐, 빨리 구하면 좋긴 하겠지만 이렇게 쉽게 자리를 구하게 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 사람은 자신이 뭘 잘할 수 있는지, 뭘 하고 싶은지를 전혀 물어보지 않았다. “그럼 오늘부터 바로 하는 게 좋지 않냐? 조금 있다가 교대시간이니까 같이 나가서 어떻게 하는지 보고 배우는 게 좋을 거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오늘은 실습이고 본격적인 것은 내일부터다. 알겠지?” 루치드가 입을 열려는 중에 토엔이 말을 막지 말라는 듯 손가락을 내밀었다. “잠은 이 집에서 자면 된다. 저기 문 보이지? 저기가 침실이니까 저기서 자고, 여기는 보이는 대로 식탁. 일당은 매일 챙겨주니까, 그 돈으로 각자 알아서 먹고 살면 된다.” 각자? “일이 끝나면 나한테 와서 확인을 받아야 하고, 그때마다 일당을 지급할 거다. 나는 이 집 바로 왼쪽에 있는 집에 있을 거니까, 거기로 찾아오면 된다. 그리고 그 밖에 궁금한 사항은 다른 애들한테 물어보고. 이상.” 다른 애들? “저기요?” 루치드가 손을 들었다. 다위와 토엔이 그런 루치드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는데, 마침 거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 [245] 배틀 트립(5) “다녀왔습니다. 어? 여기 계셨네요? 토엔.” 키는 루치드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커 보이는 것에 반해 뼈만 남은 사람처럼 말라 보이는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왔군. 인사해라, 너랑 교대로 일하게 될 루치드라고 한다.” 문을 닫고 들어오는 남자가 식탁으로 다가오면서 그의 표정이 식탁의 불빛에 의해 보이기 시작했다. 마른 몸매만큼이나 광대가 불거져 보이는 마른 얼굴의 사내가 유난히 붉은 입술을 길게 늘어뜨렸다. “와, 잘됐네요. 반갑다. 난 게리라고 해.” 루치드는 핼쑥한 얼굴의 게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루치드라고 해.” 그리고 다시 토엔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물어볼 게 있는데요?” “흠. 질문이 많구나.” 토엔은 입술을 씰룩이다가 턱짓으로 말해보라는 듯한 시늉을 했다. “어쩌면 제가 계속 일을 못 할지도 모르거든요.” “뭐?” “가끔씩만 도울 수 있는 일이었으면 좋겠는데요.” 토엔은 소리 나게 고개를 홱 돌려 다위를 쳐다보았다. 다위는 당황해서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아, 아니. 그, 그런 말은 없었잖아? 일,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그랬단 말이야.” “이야기하려 했는데, 다위가 무작정 끌고 왔잖아요?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오는 동안에도 계속 말을 하시니, 할 틈이 없었죠.” 다위는 손을 내저으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토엔의 고리눈은 다위의 입을 다물게 했다. 토엔은 그렇게 다위를 보다가 다시 루치드에게로 옮겨졌다. “나와.” 루치드는 자신에게 말하는 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닫혀있던 안쪽 문이 열리면서 헝클어진 머리를 한 덩치 두 사람이 나타났다. 팔에는 기이한 문양의 타투를 새긴 덩치 두 사람은 토엔의 뒤에 섰다. 그 뒤에야 토엔이 말했다. “일하겠다는 놈이 준비가 덜 됐구나. 일할 마음이 없는 거지? 아무래도.” ‘정신 교육을 시켜줘야겠구나’라는 말을 하려는 찰나에 루치드가 말을 끊고 나섰다. “잠시만요, 일단 말을 끊어서 죄송한데, 매번 이런 식으로 대화하실 요량이라면 저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중간에 끊고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부디 상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말씀해 주지 않으시겠어요?” 토엔은 루치드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멍청하게 ‘엉?’ 하고 되물었다. 그 모습이 우스웠던지, 게리가 피식 웃고 말았다. 웃고 나서야 자신이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급히 입을 막아 보지만, 이미 토엔의 뒤에 섰던 덩치 한 사람이 게리를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하지만 덩치가 무언가를 하기 전에 방 안의 정적을 깨는 목소리가 있었다. “어차피 일당이라도 주신다니, 어쩌면 일의 성격상 매일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아닐까 생각이 들긴 하는데, 그건 제가 어떤 일인지 몰라서 그런 것일 테고, 그건 뒤에 천천히 조율하기로 하고요. 제가 일할 수 있는 조건은, 일단 다음과 같아요. 첫째, 비정기적인 일. 제가 자주 자리를 비울 수 있거든요. 대신 일을 할 때는 얼마든지 길어도 상관은 없어요. 자리를 비운 시간만큼 채울 수 있다면 노력할 테니까요. 두 번째는.” “그만.” 토엔이 조금 전보다 훨씬 낮은 목소리로 루치드의 말을 잘랐다. “맹랑한 녀석이구나.” 다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토엔이 저런 목소리, 저런 분위기로 말을 걸 때는 보통 화가 난 게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말릴까, 도망갈까를 진지하게 고려할 때, 토엔의 말이 이어졌다. “감히 털도 안 난 조그만 새끼가 내가 누군지 알고 깝죽대는 것이냐?” 기시감이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루치드는 문득 제윅이 했던 말을 떠올랐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을 가리켰던 제윅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이런 요구와 질문은 이 사회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20년이 지나고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은 녹스 성의 성벽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토엔, 잠시만요.” 토엔을 말린 것은 게리였다. 게리는 땀을 뻘뻘 흘리며―언제 그렇게 많은 땀을 흘리기 시작했는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토엔의 앞을 막아섰다. “토엔, 이 꼬마애는 분명 토엔을 몰라서 그러는 것 같아요. 잘 모르니까 저렇게 건방진 얘기도 하는 거고요. 그런데 토엔이 여기서 화를 내고 저 아이를 쫓아내면, 토엔의 기분은 풀리겠지만, 내 후임은 또 없어지는 거잖아요? 나 안 불쌍해요? 날 봐서라도 한 번만 봐줘요, 토엔. 다위도 한 마디 해봐요.” “응?” 다위는 뜬금없이 소환된 자신을 가리키며 게리를 바라보았다. “다위, 당신이 데리고 온 아이 맞죠? 그럼 당신도 책임이 있는 거잖아요? 이봐요, 다위. 나 혼자서는 이 일 절대로 못 해요. 토엔 알잖아요? 나 지금 죽기 일보 직전이라고요. 내가 언제 토엔 말에 싫다 한 적 있어요? 나 지금까지 열심히 일했잖아요? 그러니까 토엔, 제발 날 봐서라도 화를 가라앉히고 이야기를 해 봐요.” 게리는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다위가 눈치를 보다가 덩달아 토엔을 말렸다. “토엔, 내 잘못도 있어. 맞아. 내 잘못이야. 그러니까, 일단 화 좀 참고 이야기를 하자고.” 게리와 다위가 동시에 토엔을 말렸다. 루치드는 한 편의 희극 같다는 생각을 뒤로하고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래요?” 게리가 고개를 돌려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오물처리.” “네?” **** 극적으로 토엔은 화를 다스리고 루치드와 대화를 시도했다. 루치드도 최대한 상대를 고려하여, 아니 사회 분위기를 고려하여 말을 아끼면서 협상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루치드는 일을 얻었다. “좋다. 너 말대로 일이 최대한 밀리지 않는다면야 나도 더는 말 하지 않겠어. 하지만 일이 밀려서 게리의 부담이 커진다거나, 혹은 구덩이가 넘치는 일이 발생하면, 그때는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다. 혹시라도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라. 녹스 성 사대문 모두에 내 눈과 귀가 있으니까, 만약 달아날 시도라도 한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알겠지?” “콜.” 루치드는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토엔은 어정쩡한 눈치로 손을 마주 잡았다. 게리가 루치드를 데리고 거리로 나갔다. “난 정말 니가 이 일을 하게 돼서 기뻐. 사실 이 일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냐. 녹스 성이 보기보다 넓단 말이지. 이 넓은 곳을 나 혼자 감당할 수가 없다고. 2주 전까지는 같이 하던 친구가 있긴 했는데, 불의의 사고로 함께 할 수 없게 되었거든. 덕분에 지난 2주가 나한텐 지옥과도 같았어. 그래서 니가 온 게 이보다 기쁠 수 없다고. 알겠어?” 루치드는 사정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가 보이는 것 이상으로 기뻐하고 있음은 알 수 있었다. 게리는 집 뒤편에서 바구니와 이륜 수레를 꺼내왔다. “내가 앞에서 잡을 테니까, 넌 뒤에서 밀어. 그리고 길은 기억하는 게 좋아. 알겠지?” 그리고 게리와 루치드는 수레를 밀고 끌어서 골목 사이 사이를 지나갔다. “한 가지 철칙이 있다면, 절대 큰 거리로 나서면 안 돼. 특히 포장도로 위를 따라가는 건 금물이야. 잡히면 벌금 정도로 끝나지 않아. 알겠지?” 게리와 루치드는 ‘구관지구’를 지나 북문 쪽에 있는 ‘신관(新慣)지구’를 향해 갔다. ‘신관지구’는 북문과 서문 사이에 있는 민가 지역이었다. 구관지구와 달리 최신식(?) 석조 건물들이 여럿 들어서 있었다. “여기서도 최대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골목을 따라가야만 하고, 소란을 피워서도 안 돼. 여기는 꽤 높은 분들이 많이 사는 곳이거든.” 하얀 석벽의 이층집의 문을 두드리자, 하얀 두건을 둘러쓴 붉은 뺨의 중년 여성이 얼굴을 드러냈다가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게리가 먼저 들어가고 뒤따라 루치드가 따라 걸어갔다. 게리는 구석에 놓인 항아리를 들어다가 수레로 옮겼다. 그리고 항아리의 뚜껑을 열고 수레 위의 커다란 주머니에다 옮겨 담았다. 흐물흐물한 대형 가죽 주머니가 꿀렁대는 게 보였다. 게리가 다시 항아리를 집 안에 들여다 넣은 뒤, 다음 집으로 건너갔다. 그 사이에 루치드를 보며 말했다. “예전에는 주머니 대신 커다란 자르(Jar)를 쓰기도 했다는데, 무겁고 깨지기도 쉬워서 주머니로 바꿨대. 보기에는 그렇지만, 처리하긴 훨씬 쉬워져서 나도 지금이 낫다고 생각해.” 주머니를 보며 루치드가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썼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걸 본 게리가 루치드를 위로하기 위해 한마디를 던진 것이리라. 그런 배려가 싫지 않아, 루치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집에서는 게리를 대신해서 항아리를 들었다. 그렇게 한 지구를 모두 돌았더니, 주머니가 빵빵하게 부풀어 올라서, 수레를 끌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이제 이 주머니를 비우고, 다음 지구로 건너가야 돼.” 북문으로 나간 게리와 루치드는 경비대원의 손짓에 멈춤 없이 계속 수레를 끌어 성 밖으로 나갔다. 성을 나오자마자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40걸음 정도 나가니, 시커먼 구덩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근처에는 토엔의 근처에 서 있던 덩치와 비슷하게 보이는 사람이 서 있었다. “안녕, 밀리헤온.” 덩치가 손만 들어 게리의 인사를 받았다. 게리는 수레를 구덩이 가까이에 대고는 주머니의 아랫부분에 있던 마개를 열었다. 푸스슥 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내용물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밀리헤온은 냄새를 맡지 못해. 원래 못 맡는지, 아니면 이 일을 하다가 막힌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래.” 그 와중에 심심했던지 게리가 다가와 이것저것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담당 지구를 돌고 난 뒤, 구덩이에 옮기는 것이 1차. 그 후에 다시 이곳으로 와서 구덩이의 것을 다시 옆의 구멍으로 한 칸씩 옮기는 것이 2차. 그렇게 일을 마치고 밀리헤온에게 확인을 받으면, 토엔에게로 돌아가 일당을 받고 하루 일을 마무리하는 식이었다. 빈 주머니를 다시 정비하여 녹스 성으로 들어오던 중에 루치드가 물었다. “녹스 성 전체를 우리가 다 해야 하는 거예요?” 게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신관지구’랑 ‘경관지구’만 담당해. 상업지구랑 남쪽의 ‘경남(京南)지구’는 포세 애들이 하고. 사실 그쪽이 더 돈이 되는데, 보시다시피 우리가 인력도 모자라고, 게다가.” 게리는 듣는 사람도 없건만 굳이 목소리를 낮춰서 속삭이듯 말했다. “토엔이 포세에 비해 세력이 약해. 그래서 알짜는 먹지를 못한 거야. 소문에는 말이야. 곧 경관지구도 뺏길 거라는 소문이 있어.” “그 소문이, 소문이 아닌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게리가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루치드도 돌아보니, 게리 뺨치게 마른 몸매에, 게리보다 훨씬 강퍅한 인상을 풍기는 남자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테일, 무슨 소리야?” “못 들었나? 오늘부터 경관지구 우리가 맡는다고.” “뭐?” 테일이라 불린 남자는 히죽거리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앞에서 수레 3대가 덜거덕거리면서 달려와 게리와 루치드의 앞을 막았다. “지금 이 순간부터 경관지구는 우리가 맡으니까, 너희들은 이리로 올 필요 없어.” “…토엔에게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어.” “그럼 이제 가서 들으면 되겠네. 그만 돌아가.” 수적으로도 밀린다는 생각이었던지, 게리는 감히 나설 생각도 못 하고 수레를 돌려 돌아가는 선택을 했다. 루치드야 당연히 분위기를 모르니 일단은 게리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고. 다만 게리를 향해 음흉한 미소를 짓던 테일의 표정이 어쩐지 과거 감옥에서 봤던 칼잡이와 인상이 비슷하다는 느낌에 기분이 불쾌해졌을 뿐이었다. “제기랄.” 토엔은 단지 그 한마디만 하고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게리는 루치드를 데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집 뒤에서 수레를 둔 뒤, 게리는 루치드를 데리고 북문으로 갔다. “그래도 일은 마쳐야지.” 루치드는 일이 줄었으니 잘 된 거 아니냐고 말했다. “그럴 리가. 일당이 줄어드는 판인데, 이걸 누가 좋아해?” “일이 많아서 힘들다고 했잖아요?” “많은 만큼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거잖아?” “힘들어도요?” “힘들어도.” “죽을 것처럼 힘들어도?” “죽을 것처럼 힘들어도, 그만큼 벌 수 있으니까. 죽기 전까지는 좋은 거야.” 루치드는 그 말에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그냥 게리를 따라가기로 했다. 구덩이에서 게리와 함께 삽을 들고 옆 구덩이로 한 칸씩 퍼 나르는 일을 했다. 임시로 담는 구덩이와 영구적으로 담는 구덩이를 따로 두는 이유에 대해서는 게리도 모른다고 했다. “그런 이유까지 알아야 돼?” 그냥 시킨 대로 할 뿐이라는 게리의 말에 루치드도 더 이상은 질문하지 않기로 했다. ======================================= [246] 배틀 트립(6) 일을 마친 후, 숙소로 돌아온 게리와 루치드는 숙소에 가기 전 토엔의 집에 들렀다. 토엔은 여전히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게리는 그런 토엔의 눈치를 보느라 마론인형처럼 쭈뼛댔다. 긴 팔을 뻗어 토엔에게 확인장을 건네는 게리와 이를 흘겨보는 토엔. “…….” 토엔은 말없이 책상의 서랍을 열어, 동전 몇 개를 집어 책상 위에 던졌다. 굴러서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동전을 주운 게리는 허리를 숙여 보이곤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루치드에게도 눈짓을 하니, 루치드도 들고 있던 확인증을 보여주었다. 토엔이 힐끔 보고는 게리보다 작은 양의 동전을 주었다. 몇 개 되지도 않는 동전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왜 이것만 주시는 거죠?” 무슨 뜻이냐는 눈으로 바라보던 토엔이 눈썹을 꿈틀대다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실습 기간이잖아.” “실습 기간이지만, 일은 같이했는데요? 같은 일을 했다면 같은 보수를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뒤에 선 게리가 발을 동동 구르며 루치드를 말리려 했지만, 루치드는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마른 게리가 힘으로 이겨내기 힘든 상대이기도 했고. “이 새끼… 야!” 결국 토엔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루치드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잖아요. 똑같은 일을 했는데, 실습 기간이라는 이유로 보수를 작게 받는다는 건 이상한 거잖아요. 만약 제가 실습생이었기 때문에 오늘 하루분의 일이 정규직에 비해 모자랐다면 이해를 하겠어요. 하지만 같은 양의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아저씨가 거두는 수입은 똑같을 거 아닌가요? 그럼 아저씨가 저에게 ‘실습’이란 이유로 보수를 적게 지급하고, 그만큼 챙기셨다는 뜻인데 이건 불합리한 거 아닌가요?” 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루치드가 그 말을 하기 전에 게리가 루치드의 입을 막고 토엔에게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교육을 다 못 해서, 아직 애가 잘 몰라서 그런 거예요. 제가 잘 교육 시킬게요. 잘 타이를게요. 토엔, 그러니 이번만 용서해줘요. 네?” 게리는 연거푸 고개를 숙이면서 루치드를 억지로 끌고 집 밖으로 나섰다. 루치드의 동전을 대신 챙겨주는 것도 잊지 않고. 잠시 후, 끌려 나온 루치드는 게리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하소연하는 것을 들어야 했다. “너 도대체 왜 그러니? 왜 그렇게 불만이 많은 거니? 응? 토엔이 정말 화가 나면 아무도 못 말린단 말이야. 심지어는…. 아니다. 아무튼, 제발 평화롭게 살자고.” 루치드는 게리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불합리한 처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게다가 루치드 본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는 것이라면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냥 봐도 불쌍한 게리가 저렇게 불쌍한 눈을 하고 사정을 하니, 그의 눈앞에서 거절의 의사를 밝힐 수가 없었다. “알았어요. 안 그럴게요.” 어차피 실습은 내일까지라고 했으니까. 내일까지만 참으면 되겠지, 라고 생각하며 루치드는 숙소로 돌아가려 했지만, 이번에도 게리가 루치드를 붙잡았다. “먹을 거 사야 돼.”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종일 먹은 게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게리를 따라 골목길을 걷던 중에 물었다. “하루에 한 번만 먹는 거예요? 점심은 안 먹어요?” “점심이라니, 그런 사치를 어떻게 부려? 아침이나 잘 챙겨 먹으면 다행인 줄 알아야지.” 게리는 식료품점에 와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기 시작했다. 거창한 요리를 사는 건 아니었고, 간단한 비스킷과 우유만을 샀을 뿐인데 하루 일당이 거덜 나는 것 같았다. “매일 이렇게 하는 거예요?” 게리는 고개를 저으며 원래 받는 보수는 이보다 많았다고 설명했다. ‘경관지구’의 담당을 잃으면서 보수가 반으로 줄었고, 둘이 같이 일을 해서 보수가 또 줄었다는 것. 원래는 교대로 번갈아가며 일하기 때문에 한 사람당 받는 일당이 컸다는 게리의 설명인데, 어차피 교대라면 거기서 거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루치드의 속마음이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조삼모사’라던가? “내일부터는 너 혼자 해야 돼. 그다음 날은 내가 해야 하고. 알겠지?” 루치드는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제가 이틀 동안 일할게요. 그리고 다음 이틀은 게리가 해요. 제가 이틀간은 다른 일을 해야 돼서 같이 일을 할 수 없을 거예요.” 게리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루치드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식료품을 들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루치드가 물었다. “그런데 여기 ‘구관 지구’는 누가 담당해요?” “아무도 담당 안 해.” “안 해요? 그럼 여긴 어떻게 처리해요?” “저렇게.” 마침 골목 안쪽에서 문이 열리고 칙칙한 색깔의 두건을 둘러쓴 중년 여인이 항아리를 들고나오더니 거리에 뿌렸다. 하루종일 오물을 맡았더니 후각이 마비되었던 건지, 거리 전체에서 나는 오물의 냄새를 맡지 못하고 있던 루치드였다. 루치드는 발아래를 쳐다보았다. 과연 바닥 곳곳에 검은 얼룩들이 보이는데, 굳이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몸을 숙일 생각은 없었다. “여기는 돈을 주고 청소를 맡길 집은 없어. 그 정도 여유가 없으니까.” 숙소로 돌아온 두 사람은 곧 식탁에 가지고 온 비스킷과 우유를 놓고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게리는 그러지 않아도 마른 몸인데, 먹는 것도 비스킷을 잘게 쪼개서 조금씩 입안에 넣고 오물거리는 중이었다. “오늘은 이거 남겼다가 내일 아침에 또 먹어야 하거든.” 그렇게 설명한 게리는 대충 식사를 마무리하고 다시 종이봉투에 우유와 비스킷을 담아서 봉투 끝을 돌돌 만 뒤, 자신의 침실로 가지고 갔다. “너도 먹다 남기면 이렇게 침대맡에 올려놔. 그래야 다른 이들이 안 가져가니까. 아, 그리고 니 침대는 저걸 쓰면 돼.” 여러 사정으로 이제 처음 침실을 구경하게 된 루치드는 자신의 침대라고 가리킨 것을 보게 되었다. 낡은 매트가 나무 프레임의 침대 위에 올려져 있는데, 빈촌에서 쓰던 침대를 떠올리게 하는 침구였다. 매트에서 삐져나온 짚들이 일부는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었다. “저 침대들은요?” “저건 다른 애들 꺼.” “다른 사람도 있어요?” 게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숙소를 사용하는 이들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우선 이 숙소에서 일하는 무리를 굳이 따지면 다 해서 3부류였다. 게리와 루치드처럼 오물처리를 하는 부류가 있고, 또 한 부류는 거리 청소를 주로 하는 이들인데 보통 인파가 적은 시간대에 나가서 청소하는 탓에 저녁부터 새벽까지 일한다고 했다. 녹스 성의 포장도로가 생긴 이후부터 생긴 직업인데, 일당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라고. “거리 청소도 사실 만만한 게 아니야. 쓰레기나 오물을 처리하기도 하고, 깨진 석재가 있으면 교체를 하거나, 보수해야 하거든.” 또 한 부류에 관해 설명하려 할 때, 숙소 문이 열리고 일단의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들어왔다. “어? 게리, 너 오늘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이야, 게리가 우리보다 일찍 올 때가 있네?” 게리는 처연한 눈을 하고는 ‘경관지구’를 포세에게 뺏겨서 일이 줄었다는 설명을 했다. 그리고 옆에 선 루치드를 소개했다. “오늘부터 같이 일하기로 했어.” “루치드라고 해요.” 아이들―이라고 해야 할지 애매하긴 한데, 얼굴은 대체로 어려 보였다―은 호기심이 깃든 눈으로 루치드를 바라보다가, 루치드의 인사를 받은 뒤 서로 나서서 인사를 했다. “안녕, 난 포셉이야. 이름이 포세랑 비슷해서 종종 놀리고들 하는데, 그러지 말아줘. 난 포세 정말 싫어하거든.” “난 제니스. 잘 지내자.” “나 휴고라고 해. 너 정말 잘 생겼다?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얼굴인걸?” “쓸데없는 소린 하지 마, 휴고. 실례야.” 자기들끼리 인사하고 떠들고 난리가 났다. 원래 쾌활한 건지 보통 소란이 아니었는데, 덕분에 조용한 숙소에 활기가 넘치는 느낌이었다. “쟤들은 지붕청소부. 신관지구랑 경관지구 지붕은 쟤들이 도맡아서 하고 있어. 그런데 너희들은 경관지구를 안 뺏긴 거야?” “지붕 쪽 일은 하기 힘들지. 걸핏하면 떨어져서 팔이나 다리가 부러지는 일인데 하려는 사람들이 많을까? 포세 쪽도 아직 사람을 많이 구하지 못해서 그나마 경남지구만 겨우 하는 거 같은데. 그런 거 보면 역시 일은 우리가 제일 힘들어. 그치?” “그럼. 똥 치우는 일이야 냄새만 적응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그러니까 우리 보수가 더 센 거 아냐?” 어느새 식탁에 둘러앉은 지붕청소부들은 각자의 종이봉투에서 먹을 것을 꺼내 들고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게리네와 다른 점이라면, 그들은 비스킷 대신, 순대같이 생긴 소시지와 맥주를 꺼내 들었다는 점이었다. 맥주를 담은 주머니도 빵빵하게 부풀어 있진 않았고, 조금 홀쭉했는데 들어보니 오던 길에 조금씩 홀짝 마시면서 오느라 그랬단다. 아무래도 그들이 쾌활했던 것은 술의 힘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볼 수 있었다. “그만 자자. 내일 일찍 일어나려면 일찍 자야지.” 루치드는 게리를 가만 보다가 물었다. “안 씻어요?” “씻다니? 왜?” 루치드는 순진한 게리의 얼굴을 보며 저도 모르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저기, 그러니까 오늘 일하느라 땀도 흘렸고, 오물도 많이 묻었고, 그러니까 씻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데요?” 게리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대답했다. “니가 여태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여기서는 물이 귀해. 우물을 사용할 돈도 없는 데다가, 공짜로 물을 쓰려면 산에 올라가야 하는데, 그러면 어차피 씻으나 마나 아니야? 그리고 어차피 내일 또 더러워질 텐데 뭐하러 그래?” 게리의 말에서 추리 가능한 부분을 짚어보면, 우선 이곳에는 물을 마음대로 쓸 수 없고, 마을 내에 있는 우물도 유료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 두 번째로, 물을 사용하기 위해서 산에서 흐르는 냇물을 찾는 사람도 있다는 것. 세 번째로, 이곳에는 위생 개념이 없거나 희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을 데리고 박테리아와 위생 보건에 관해 이야기를 늘어놓아 봤자 이해도 못 할 테니 루치드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홀로 밖으로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금방 돌아올게요.” 어둑해진 거리로 나선 루치드는 잠시 먼 산을 향해 시선을 두고 살폈다. 그리고 잠시 후, 개운해진 얼굴을 하고 돌아온 루치드는 숙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들 침실에서 자는 것인지, 왁자지껄하던 식탁은 꺼질락 말락 하는 촛불 하나만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침실문을 열기도 전에, 이미 코 고는 소리가 문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루치드는 자신의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얇은 천으로 된 시트 한 장이 덮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다행히 여름이라 그렇게 필요로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쩐지 덮고 자야 할 것 같았다. 목 아래까지 끌어올리고 몸을 웅크린 채 눈을 붙여보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나…뭐 하는 걸까.” 루치드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고갯짓을 하고는 방금 떠올린 질문 자체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114의 제곱. 38의 소수, 12의 공배수….” 루치드는 다른 생각이 날 틈이 없도록 열심히 숫자를 되뇌었다. 그리고 부디 빨리 잠이 들기를 빌었다. **** 다음 날, 새벽 동이 틀 무렵 게리가 루치드를 깨웠다. 게리가 몸을 일으킬 무렵 이미 루치드도 정신이 들었기에 게리는 걱정을 덜었다. “나가자.” 루치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아직 일어나지 못한 세 사람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나갔다. “거리 청소한다는 분들은 언제 오나요?” “우리가 나간 뒤에나 올 거야. 시간이 그렇게 맞물리거든. 그래서 평소에는 보기 힘들어. 아마 나중에 교대 시간쯤에나 얼굴 한 번 볼 수 있으려나? 인사는 그때 하도록 해.” 하품하던 게리는 숙소 뒤에 두었던 수레를 끌고 나왔다. “오늘은 제가 끌게요.” “뭐? 아냐, 괜찮아. 길도 잘 모르잖아.” “알아요.” “안다고?” “네. 다 외웠어요. 혹시 어제랑 다른 곳도 있나요?” “아니, 똑같긴 한데, 그래도 다 외웠다고?” 루치드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수레 앞으로 가서 손잡이를 잡았다. 게리는 불신이 가득한 눈을 하고 루치드를 보다가 뒤에서 수레를 밀기 시작했다. 일단은 두고 볼 심산으로 뒤에 자리하긴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게리의 눈에는 놀람으로 가득 찼다. 그날 루치드는 어제 게리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문을 두드리고 인사를 하고 용무를 밝힌 뒤, 항아리를 들어다 비우고, 다음 집을 방문했다. “너 정말 다 외운 거야? 어떻게? 하루 만에?” 게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루치드는 그저 묵묵히 일을 해 나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게리가 도우려 했지만, 마땅히 도울 일이 없을 정도였다. 힘도 훨씬 좋은 루치드였기에 항아리를 맞들 일도 없었고, 수레를 끌어도 힘이 좋은 루치드가 앞에서 끌다 보니, 움푹 파인 곳을 지날 때도 어려움이 없었다. “너 정말 이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아!” 구덩이 앞에서 가죽 주머니를 비울 때, 게리가 뱉은 칭찬의 한마디였다. ======================================= [247] 배틀트립(7) 루치드가 워낙 빨리 움직인 탓에 일이 빨리 끝나고 말았다. 구덩이까지 말끔히(?) 치운 두 사람은 빈 수레를 끌고 숙소로 돌아왔다. 시간으로만 따지면, 거의 점심시간 무렵. 토엔은 두 사람을 보자마자 인상을 쓰며 물었다. “왜 벌써 와? 또 무슨 일 있어?” 하지만 게리와 루치드가 내민 확인증을 확인하고는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인상을 일그러뜨리더니 포세놈, 하고 중얼거리며 서랍에서 동전을 꺼내다 책상 위에 던지듯이, 아니 그냥 던졌다. 게리가 서둘러 동전을 주워다가 호주머니에 집어넣고는 곧바로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아마 포세한테 뺏긴 경관지구 때문에 그럴 거야. 그런데 걱정할 필요 없어. 저래 보여도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니거든? 아마 곧 포세한테서 다시 지구를 되찾을 거야.” 루치드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숙소로 들어가려는 게리를 붙잡았다. “왜?” “점심 먹어요.” “점심을? 돈 없어.” 자기 돈으로 먹자고 할까 봐, 호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는 게리에게 루치드가 말했다. “혹시 이 시간 이후로 할 일이 있나요?” 게리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일단 점심을 먹어요. 그리고 저녁은 다른 거로 먹어요.” “어떤 거?” “기대하셔도 돼요. 대신 부탁하나만 들어 줘요.” 두 사람은 돈을 모아서 비스킷과 우유를 사서, 그 자리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그 후, 루치드는 게리와 함께 상업지구로 향했다. 첫날에만 잠깐 보았던 포장도로를 다시 보니 엄청나게 넓고 깨끗하다는 인상이 느껴졌다. 아마도 오물 범벅인 뒷골목만 전전하다 보니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루치드의 부탁은 간단한 것이었다. “녹스 성의 안내라고?” “네. 녹스 성에 들어오자마자 거기로 끌려간 터라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거든요.” 게리는 루치드를 데리고 상업지구에서 시작하여 경관지구와 경남지구를 소개해주기로 했다. 신관지구야 이틀 동안 돌아다녔으니, 다른 곳도 구경하고 싶다는 루치드의 제안이었다. “여기가 녹스 성의 중심. 예전에는 성이 있었다는데, 난 보질 못했으니 뭐라고 할 말이 없네. 아무튼 그 대신 저렇게 사거리 가운데에 동상을 만들어놨지. 듣기로는 어떤 신의 동상이라고 하는데, 정확히는 모르겠어.” 루치드가 동상에 다가가 살펴보니 동상 앞에 동판이 붙어 있었고, 그 동판에는 ‘불의 여신’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불의 여신이라는데요?” “너 글도 읽을 줄 알아?” 게리는 깜짝 놀라서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루치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게리는 입을 쩍 벌리고 바라보다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 그런데 왜 이 일을 하는 거야?” “네?” “글을 읽을 줄 아는 녀석이 왜 똥이나 치우냐고?” 그렇게 말해봐야 루치드로서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일자리를 찾아준다길래 따라왔더니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덥석 일을 맡긴 게 바로 토엔과 다위 아니던가. “글도 읽을 줄 아는 애가 바보는 아닐 텐데, 왜 이러지?” 게리는 되려 자기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쿵쿵 때렸다. 그러다가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구, 모르겠다. 니 사정이지, 내 사정이냐.” 그러더니 게리는 등을 돌려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렇게 걸어가길 잠시, 게리는 조금 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주위를 안내해 주었다. “저 가게가 녹스에서 제일 오래된 가게야. 저기 붉은 기둥 보이지?” 가게 앞에 내놓은 천막을 받치던 두 기둥 중 하나가 붉은색이었다. “성주가 이 가게의 오랜 전통과 녹스 성에 대한 충성을 신뢰하고 존중한다는 뜻에서 내린 상이야.” 예컨대, 마치 무궁화 등급 매기는 식이라고나 할까? 루치드는 붉은 기둥이 세워진 가게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길을 따라가며 세워진 붉은 기둥의 가게들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저 가게는 샤피로 아저씨한테 와서 시네디움을 사가던 유리 아저씨네 가게. 저기는 맨날 나한테 와서 계산 좀 해달라고 조르던 베이커 아저씨네 가게.’ 옛 추억과 현재가 뒤섞이며 루치드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느꼈다. 어떤 가게는 아예 분위기가 바뀌어서 알아볼 수도 없었지만, 또 어떤 가게는 20여 년 전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던 곳도 있어서 금방 알아볼 수 있는 곳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매대 앞에서 장사하는 이들은 거의 다 젊은 사람들 혹은 중년의 나이여서, 예전에 봤던 아저씨들이나 아줌마들은 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들의 자식들 혹은 손자들이 가게를 물려받은 것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아예 주인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래된 가게인 만큼 과거의 일을 추적하자면 저런 곳에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일단 그냥 지나가기로 했다. “여기서부터 경관지구야.” 남쪽의 구관 지구에서부터 상업지구를 지나 북쪽으로 향하니 자연 경관지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큰 거리 주변으로는 상점들이 줄지어 있지만, 그 뒤로 최신의 석조 건물들이 다양한 양식으로 건설되어 있어, 한눈에 다른 곳과 구별되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여기는 경비대랑 근위대들이 수시로 순찰하는 곳이라서 수상한 모습을 보였다간 금방 잡힐 거야. 그러니까, 최대한 태연하게 길을 가야 돼. 근데, 여기 안에도 봐야 하는 거야?” 루치드의 생각으로는 여기도 꽤 중요했다. 현대 지구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과거의 자료나 기록물들이 관리되고 있을 만한 곳은 공공기관이 자리 잡은 이곳뿐일 테니까. 확실히 이 공간은 다른 곳과 달랐다. 심지어는 신관지구보다 훨씬 깨끗하고, 정돈된 느낌이 강한 곳이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복식 또한 정갈하다는 느낌을 주는 고급스러운 재질의 옷을 입고 있는데, 사실 여름에 입기에는 조금 답답하지 않을까 싶은 옷도 있었다. 그와 비교하면 두 사람의 복장이 너무 허름해서 오히려 눈에 띄었다. 그러나 이런 복장을 가진 이들이 이 거리를 지나는 모습을 보지 못할 것도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본척만척하며 갈 길을 갈 뿐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게리는 얼마 전까지 경관지구를 돌아다니며 오물 수거일을 했었기 때문인데, 그래서 루치드가 경관지구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특히 어떤 건물의 어떤 사람의 성격이 특이하여서 주의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까지 들려줄 정도였다. 그렇게 아무 일 없이 경관지구를 둘러보다가 경남지구로 건너갈 무렵이었다. “어이, 게리? 여긴 어쩐 일이야? 니들 여기서 일 못 한다는 얘기 못 들었어?” 테리라는 녀석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비웃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냥, 이 친구가 여기 온 지 얼마 안 되었다길래 지리를 알려주는 것뿐이야. 신경 쓰지 말고 가던 길이나 계속 가.” 그 말처럼 테리의 뒤에는 수레를 이끄는 두 사람이 서서 루치드와 게리를 보고 있었다. “여기 지리를 알아서 뭐하게? 여기 올 일이 뭐 있다고? 왜? 경비대 들어가서 자수라도 하게? 제가요, 도둑질했거든요, 잘못했어요?” 게리 흉내를 내려는 건지 이상하게 목소리를 변조하고 우는 얼굴을 지어 보이는데 전혀 똑같지가 않았다. 게리도 딱히 기분 나빠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저 그러려니 하는 체념처럼 보이기도 하고, 일이 더 커지는 것을 꺼리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됐어. 우리도 이제 그냥 갈 거야.” 게리는 루치드의 팔을 잡고 테리를 피해 옆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려 하는데, 역시나 테리는 심심했던 모양이었다. 놀아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리라. “어딜 그냥 가?” “뭐?” “그냥 가게?” “그냥 가지, 그럼 뭘 하란 거야?” “에이, 그럼 쓰나? 니네가 놀 동네도 아닌데 멋대로 와서는 우리 길도 막고 방해나 하다가 그냥 가겠다고? 누구 허락 맡고 여길 와서 돌아다니는 거야? 응?” 우리가 언제 막았다고 그래, 라고 항변하고 싶은 걸 참는 게 분명한 게리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는 이를 악무는 모습이지만, 끝내 입을 열지는 않았다. 씩씩거리며 테리를 보던 게리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조심스럽게 의사를 전했다. “너나 나나 여기서 소란 피우면 어찌 되는지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니지? 여기까지만 하자. 응?” 그러나 테리는 그 모습에 승기를 잡았다는 듯, 비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찌 되다니? 무슨 말이야? 이상한 소리나 늘어놓으면서 도망가는 거야? 갈 길 바쁜 사람 길까지 막아놓고선 하는 소리가 그냥 간다고? 와, 이거 참 너무하네. 안 그래?” 테리의 말에 뒤에 선 이들도 동의한다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가 산 테리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게리 앞에 다가왔다. “가고 싶어?” 게리가 아무 말 하지 않고 노려보기만 하자, 테리가 게리의 머리를 한 대 때렸다. 세게 때리지는 않았지만, 그 자체로 굴욕적인 폭력이었다. 그러나 게리는 반항하지 않았다. “여기 무릎 꿇고 사과해. 방해해서 미안하다고, 앞으로 여기 오지 않겠다고 사과해. 우리가 저 골목 끝까지 갈 동안.” 그것이 테리의 요구였다. 게리는 테리의 말에 어찌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웅성거림이 들려 주변을 보았다. 어느새 몇몇 사람들이 재미난 구경거리를 발견한 눈으로 모이고 있었다. 게리는 머리가 텅 비어버리는 느낌에 순간 무릎에 힘이 풀릴 뻔했다. 이곳은 루치드에게 말한 것처럼 경비대와 근위대가 자주 순찰을 돌아다니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소란을 피웠다간 결코 그냥 두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테리와 그의 일행들은 마치 자기들은 그런 소란에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을 것처럼 구는 게 이상했다. 하지만 그들이 처벌을 받지 않는다고 자기까지 처벌을 받지 않는 건 아닐 테니 겁이 나기 시작했다. 게리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걱정 앞에 두려움이 앞서니, 행동이 빨랐다. 철퍼덕하며 곧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테리의 웃음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미안해.” “뭐라고?” “길 막아서 미안해.” 게리는 빨리 끝내고 싶었다. 빨리 이 사태가 끝난다면, 그래서 빨리 이 경관지구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이까짓 거 열 번도 더 할 수 있었다. “새끼, 키만 커 가지고 겁대가리는 졸라게 많아요.”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던 테리는 몸을 돌리려다가, 가만히 서서 이 사태를 바라보던 루치드를 발견했다. “뭐냐?” “…….” 루치드는 대답 대신 그냥 테리를 바라보기만 했다. “넌 왜 그러고 서 있냐? 사과 안 해?” 테리가 이상한 놈 본다는 얼굴로 루치드에게 무릎을 꿇을 것을 강요했지만, 당연히 루치드는 그 말에 따르지 않았다. “왜 내가 사과를 해야 하는데?” “니 옆에 사과하고 있는 애 안 보여? 걔가 하는 데 왜 넌 안 하는데?” 루치드는 잠시 테리의 눈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첫째, 게리는 사과하는 게 아니라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냥 무릎 꿇은 것이야. 더구나 사과할 일이 없는데 사과를 왜 하겠어. 그리고 너희들이 사과하라고 한 내용이 일단 진실에서 거리가 멀지. 우리가 너희들이 가는 길을 막지도 않을뿐더러 우리 둘이 막는다고 해서 이 길이 막힐 길이냐? 이렇게 넓은데? 그리고 너희는 세 사람이고 우리는 두 사람이야. 싸우기 싫어서 무릎도 금방 꿇는 게리가 어떻게 너희를 막았다고 주장하는 거지? 애초에 니 말이 틀렸다는 사실이야. 그러니 결론적으로 게리는 너에게 사과하는 것이 아니고, 사과할 필요도 없어.” 멍하니 루치드를 바라보는 테리 일행을 향해 루치드는 다음 말을 이었다. “둘째, 게리가 사과하니까 내가 사과해야 한다는 말은 전혀 인과관계가 없는 일인데, 왜 나한테 사과하라는 것이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주장 아냐? 만약 내가 너한테 사과를 해야 한다면, 사과할 만큼의 잘못이 있음을 지적하고, 그 잘못에 따라서 사과하라고 요구해야 옳지. 옆의 사람이 사과하니까 너도 사과하란 말은 논리적으로 옳지 않은 말이야.” 테리는 외국어를 듣는 느낌으로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주변 사람들 마저 빠른 말발굽 소리를 듣는 느낌으로 루치드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런 시선에 상관없이 루치드는 마지막 말을 꺼냈다. “셋째, 너를 방해하는 건 차치하고라도 왜 여길 오지 말라고 요구하는 거지? 이곳 거리의 통행권을 너희가 가지고 있는 거야? 어떤, 누구에게서 그런 권리를 얻었기에 마음대로 사람을 오지도 가지도 못하게 통행권을 행사하겠다는 거야? 만약 너에게 통행권을 위임한 사람이 있다면 이야기해봐. 그 사람에게 확인을 받아서 만약 니가 위임받은 사실이 없다면 넌 위조 혹은 사기죄로 처벌받아야 할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마지막 위조, 사기죄로 처벌받아야 한다는 소리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든 테리였다. “무, 무슨 소리야! 내가 무슨 죄, 죄를 지었다고 그래!” “니가 아까 그랬잖아. 여기 ‘누구 허락’ 맡고 여길 돌아다니냐고. 그리고 ‘오지 말라’고 했잖아. 마치 너한테 통행권을 단속할 권리라도 있는 사람처럼 굴었잖아.” 이건 억지였다. 하지만 이런 이들에게 유용하게 먹힐 억지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잘 먹혔다. 테리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도와달라는 듯, 뒤를 돌아보았지만, 뒤에 선 이들이라고 마땅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진 않는 것처럼 보였다. 대신 그들은 어떻게 이 자리를 조용히 피할 수 있을까 궁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말해봐.” “뭘!” “항변해 보라고. 죄가 없으면 없다고 항변해봐. 여기 있는 사람들이 증인이 되어줄 테니까.” 루치드는 말을 뱉는 순간 매우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구에서도 이런 사례가 많았는데, 이렇게 또 써먹고 있다. 역시나 테리는 우물쭈물하다가 주변 사람들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제 딴에는 이 난국을 타개할 방법을 모색 중이겠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를 리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일이 익숙한 이라면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이런 시선 속에서 냉정해지기가 힘드니까. 이때 테리를 돕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 테리를 더 곤란에 빠지게 하였다고나 할까? “나도 궁금하군. 자네 어떤 할 말이 있는가?” 잘 다듬어진 턱수염을 가진, 딱 봐도 고급스러운 복장의 중년 신사가 다가오며 말했다. 중년 신사의 위풍도 대단했지만, 그 뒤에 선 군사의 시선이 더 대단했다. ‘말 한마디라도 잘못 꺼냈다간 죽는다!’ 라는 생각을 하는 테리는 곧 적절한 방법을 찾아냈다. “죄송합니다. 행정관님!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테리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그때, 루치드는 테리의 무릎이 깨지는 것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테리는 빠르게 엎드렸다―고개를 조아렸다. “죽을죄를 지을 정도로 잘못한 것이란 말이지?” “네?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럼 저 소년의 말대로 누군가가 자네에게 통행권을 단속할 임무라도 주던가? 똥쟁이한테?” 테리는 기겁하며 이마를 바닥에 붙였다. “아니요, 아닙니다. 그런 일 없습니다! 제가 헛말을 한 것입니다. 절대 그런 일 없습니다.” 행정관은 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그런 일 없지?” “네, 네. 그렇습니다.” 행정관은 턱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래, 그래야지. 감히 똥쟁이한테 그런 일을 시키는 놈이 있어선 안 되지. 안 그러냐?” 뒤의 병사들은 한 차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 그럼 이놈은 잡아서 경비대에 끌고 가라.” 행정관의 지시에 병사 한 명이 테리의 팔을 붙잡고 일으켰다. “아니, 왜 저를!” 행정관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이 거리에서, 이렇게 소란을 피워놓고선 아무 죄도 없다 하려고? 게다가 똥 수레를 저렇게 거리에 방치시켜 놓고도?” 어느새 똥 수레를 지키던 테리의 일행 두 사람은 행정관이 얼굴을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달아났다. 그래 봐야 테리가 잡힌 마당에 그들이 무사할 리는 없었지만. 테리는 발광하며 한 번만 봐달라고 사정을 했지만, 행정관의 명령에 변화는 없었다. 그리고 병사가 그를 데리고 간 후, 다른 병사에게는 똥수레를 치우도록 명령했다. 병사는 똥 수레를 치울 사람을 찾기 위해, 그러니까 경관지구의 오물 수거 담당인 포세를 찾아 떠났다. 이제 남은 사람은 게리와 루치드, 그리고 행정관이 남았다. “넌 무슨 할 말이 있느냐?” 행정관이 루치드를 향해 물었다. ======================================= [248] 배틀 트립(8) 행정관은 루치드와 게리를 데리고 집무실로 데리고 갔다. 집무실 바로 앞에 놓인 조그만 책상에 비서가 앉아서 일을 보다가 행정관을 보더니 벌떡 일어났다. “홀리, 일이 있어서 ‘시설부’에 가지를 못했는데, 그곳 부장에게 가서 다음에 다시 뵙겠다고 전하고 약속 좀 다시 잡아줘.” “알겠습니다.” 비서는 행정관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나오던 중 허름한 옷차림의 루치드와 게리를 훔쳐보았다. 호기심이 일었지만, 행정관도 다른 언급이 없었던지라 우선은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서둘러 나갔다. “이리 앉게.” 주단(朱丹)이 깔린 긴 의자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붙이는 게리는 연신 주변을 훑으며 눈치를 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반면 루치드는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앉아서 행정관의 말을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그 모습이 행정관에게도 인상적이었던지, 콧바람 빠지는 소리를 살짝 내더니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지?” “루치드입니다.” 턱을 쓸면서, 눈을 살짝 게슴츠레 뜨던 행정관은 게리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주위를 보느라―솔직히 루치드의 눈에 행정관의 집무실이라는 곳은 굉장히 소박한 모습이어서, 그다지 볼 게 없었지만 게리는 그렇지 않았던지―정신이 없던 게리는 루치드가 팔꿈치로 여러 번 신호를 주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이름을 말했다. “그래, 아까는 인상적이었다, 루치드. 혹시 따로 글을 배운 적이 있던가?” 루치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디서? 어느 정도로 공부한 거지?” 루치드는 대답을 고르다 신중하게 답했다. “어릴 때, 글과 셈을 조금 배웠습니다.” “셈도 배웠다고?” 행정관이 눈을 반짝이며 루치드를 보기 시작했다. 늘어져서 축 처진 볼살을 쓸어내리던 행정관이 잠시 눈동자를 옆으로 옮겼다. “저기 서가가 보이느냐?” 루치드가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행정관이 문제를 냈다. “저기 서적 중에 빨간 표지와 검은 표지가 모두 몇 개이냐?” 루치드는 힐끔 쳐다보고 대답했다. “빨간 표지가 5권이고, 검은 표지가 12권이니 총 17권이죠.“ 행정관은 루치드의 빠른 셈에 놀란 눈을 감추지 못했다. “혹시 그보다 복잡한 셈도 가능한가?” “저 책장은 총 5칸으로 되어 있어요. 그리고 제일 위 칸에는 11권의 책이 꽂혀 있네요. 만약 칸마다 같은 권수가 꽂혀 있다고 가정한다면, 총 55권이겠죠. 하지만 책마다 두께도 다르고 어떤 칸은 책이 빠진 자리도 보이네요. 그래서 각 줄을 모두 개별 합산한다면 저곳에는 총 47권의 책이 꽂혀 있다고 대답할 수 있겠고요. 음, 특별히 계산할 만한 내용이 없어서 저도 뭐라고 대답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놀랍구나!” 행정관은 손뼉을 쳤다. 그리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책상에 놓인 서류 중 하나를 골랐다. 루치드가 그 서류를 건네받으니, 예산 집행 문서 중 일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서류를 이해할 수 있겠느냐?” “앞뒤가 빠져 맥락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전월에 이월된 480만 720젠 중에 이번 달에 보수공사비로 책정된 돈이 300만젠이라고 나와 있네요. 300만젠 안에는 재료비 150만젠과 인건비 50만젠, 기타 시설비로 100만젠이 책정되어 있고요.” 그 안에는 좀 더 복잡하게 개별 품목과 개당 가격이 매겨져 있었으나, 루치드가 빠르게 계산해서 단순하게 읊었다. 당연히 행정관은 루치드의 놀라운 연산속도와 빠른 이해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행정관은 루치드에게서 서류를 받아 책상에 올려놓고 다시 루치드 앞에 앉았다. “솔직히 놀랍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내 밑에서 일하는 수많은 부하 중에서도 너처럼 빠르게 셈하고 일을 처리하는 이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너 정도라면 충분히 최고 수준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의심스러운 점이 있구나.” 루치드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신중했건만, 또 어떤 점이 행정관의 눈에 거슬렸던 것인지 궁금했다. 궁금했고 초조했다. “그런 능력을 가지고 왜 오물수거를 하는 것이냐?” 아, 그런 이유라면. 루치드는 혹시라도 ‘마법사’라는 오해(?)를 받을까 봐 두려운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간신히 굳은 얼굴을 풀며 대답했다. 루치드가 녹스에 들어온 뒤 다위를 만나게 된 사연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하지만 행정관은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처럼 똑똑한 녀석이 그런 수작에 말려들었다는 것 자체가 의심스럽지 않느냐?” “네?” “아닌가? 아직 어려서 그런가?” 행정관은 머리가 복잡하다는 듯, 이마를 톡톡 두드리며 장고에 들어갔다. 나름 똑똑하다는 이들을 끌어모아 수하로 쓰고 있지만, 단언컨대 눈앞의 아이만큼 똑똑한 아이는 본 적이 없던 행정관이었다. 그렇다 보니 자기 수하들 수준으로 아이를 바라보게 되는데, 수하들은 어엿한 성인임은 물론이고 일자리를 주겠다는 거간꾼의 꾐에 빠져 오물 수거일을 맡는다는 게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외견상으로만 보면 아직 어린아이였고, 그러니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가능했다. “오물 수거일을 계속할 생각이냐?” 루치드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왜?” “사실 제가 매일 일을 할 수가 없고요, 저 나름대로 볼일이 있거든요. 그런데 담당자? 맞나, 아무튼 토엔이 그랬어요. 격일로 해도 된다고요. 그런 조건에 맞춰서 일할 수 있다면 오물 수거일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죠.” “넌 왜 그 일을 하려는 것이냐?” “네? 아니 방금 설명해 드린….” 행정관이 손을 뻗어 루치드의 말을 막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행정관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아래로 깔고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넌 니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더 높은 급여를 받을 수 있고, 환경도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느냐?” “…….” 당연히 안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모를 리 없다. “눈치를 보니 아는 것 같구나. 그러니 묻는다. 넌 왜 일을 하는 것이냐?” “…먹고 살려면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 “같은 이야기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있다. 네 능력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넌 그런 일을 찾을 생각이 아예 없는 것 같구나. 격일이라고? 내 입장에서 솔직히 너 정도라면 격일로라도 일을 맡기고 싶어질 것 같은데, 다른 곳이라고 다를까?” 루치드는 눈을 아래로 깔았다. “머리는 똑똑한지 모르겠지만, 아직 제대로 머리를 쓰는 법을 모르는 아이구나.” 차마 행정관의 눈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는 루치드는 고개도 절로 내려가는 듯했다. 오후 햇살이 창을 넘어 주단을 반짝거리게 비추고 있었다. 그 빛은 루치드의 무릎까지만 와 닿다가 그 위로는 비추지 못하고 있었다. “너는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이냐, 아니면 너를 속이고 있는 것이냐?” 루치드는 고개를 들었다. “니가 스스로 오물 수거일을 선택했다는 것은 잘 알겠다. 다른 선택지는 들여다보지도 않았거나, 혹은 들여다볼 필요도 없다고 여긴 탓일 거다.” 행정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덕분에 무릎까지 비추던 햇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예전에 이런 적이 있었다. 한 농부가 자신이 경작하던 밭에서 귀한 약초를 구했지. 농부는 그 약초를 들고 고민했다. 그러다가 날 찾아왔다. 당시 난 상인조합에서 일을 배우고 있었던 때였는데, 상인조합에 찾아오는 이들을 안내하거나 간단한 상담을 해 주곤 했지. 그 농부는 나에게 그 약초를 보이면서 물었다. 이 약초가 뭐냐고. 난 처음에 그 농부가 날 가지고 장난치는 줄 알았다. 그건 꽤 유명한 약초였고, 약을 잘 모르는 이들이라도 모습만 보면 ‘아 그거!’라고 알아챌 정도로 유명한 약초였으니까. 내가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 농부가 뭐라고 했는지 아느냐? 고맙다고 했다. 자기는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었다고. 그래서 다른 이에게 확인받고 싶어 그랬다며 말이다.” 행정관이 몸을 돌려 루치드를 보았다. “누구나 다 아는 약초를 보고도 자신을 의심해서 타인에게 확인받으려 하는 농부의 모습은 사실 특별한 게 아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습성이 있지. 나에게 이런 행운이, 같은 거랄까? 넌 어떠냐?” 루치드는 행정관의 말을 이해하려 했지만, 어딘가 막힌 것처럼 이해가 가질 않았다. “너의 재능은 누구나 다 알 정도로 뛰어나다. 의심스러우냐? 네 옆에 있는 이의 눈을 봐라. 아까부터 놀라서 눈을 감지도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니.” 그제야 게리가 자신의 표정을 수습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행정관은 말을 이었다. “너도 너의 능력을 잘 알 것이다. 그럼에도 오물 수거일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를 속일 마음이 있다는 것이겠지. 타인이거나, 혹은 자신이거나.” 타인을 속인다는 의심은 이해가 간다. 그런 의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자신을 속이다니? “약초는 약방에 팔거나, 혹은 직접 달여서 먹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비싸고 팔 수도 있고. 그런데 만약 그 약초를 땔감으로 쓰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넌 무슨 생각을 하겠느냐? 아마 내가 지금 너에게 갖는 생각과 같을 것이다.” 행정관이란 사람은 통렬하게 루치드의 속을 찌르고 들어왔다. “하지만, 너의 눈을 보아하니 그렇게 나쁜 마음을 가진 이처럼 보이지는 않으니 이 정도로 하마. 다만 속을 모르는 이를 단지 능력만 보고 일을 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으니 처음 널 데리고 올 때 가졌던 내 생각만 고치면 아무 문제가 없겠구나.” 행정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치드와 게리가 서둘러 일어나자, 행정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살펴 가라는 짧은 인사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행정실을 나온 두 사람은 어느새 자기 키보다 길어진 그림자를 옆에 두고 터덜터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말없이 한참을 걷던 게리가 문득 루치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너 왜 이 일 하는 거야?” “네?” “솔직히 난 아까 행정관님이 하신 말씀은 잘 이해가 안 돼서 잘 모르겠고. 니가 엄청나게 똑똑한 녀석이란 건 알겠어. 그런데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야?” 더 좋은 대접을 받으면서, 더 많은 보수를 받으면서 일을 할 수도 있을 텐데, 라는 게리의 질문에 루치드는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너무 튀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긴 했지만, 그보다 더 큰 의지가 작용하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려웠다. “편해서요.” “응?” “편해서 하는 거라고요.” 게리는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루치드는 솔직하게 말한 것이었다. 오물 수거일은 루치드에게 편했다. 몸의 부담이 덜 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편했다. **** 두 사람이 나간 뒤, 심부름을 보냈던 병사 한 명이 돌아와서 보고를 올렸다. 가만히 보고를 듣던 행정관은 혼자 있고 싶다는 말로 병사를 내보내고 창가에 서서 넓은 거리를 바라보았다. 거리 끝에서 허름한 옷차림의 두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이 작게나마 보였다. “약초를 팔면 부자가 될 수 있었던 농부는 끝내 약초를 팔지 않았어. 그리고 죽을 때까지 밭을 매다가 갔다.” 농부는 약초가 있어도 제대로 쓸 줄을 몰랐다. 자신에게 큰 행운이 찾아왔다는 사실에 고맙고 감사해 하면서도 그 약초를 다른 사람에게 팔지도, 자신이 먹지도 않았다. 그저 행운의 징표라며 집 안 깊숙이 모셔놓았다고 했다. 그 농부가 죽은 후, 약초를 챙긴 사람은 바로 행정관 본인이었고, 행정관은 그 약초를 팔고 그 돈으로 관직에 들어섰다. 이후 승승장구하여 행정관에까지 오른 후, 오랜만에 옛 생각을 떠올려 본 셈이었다. “얼마든지 부유하게 살 수 있음에도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고 자신을 속인 것이다, 그 농부는. 너도 그런 것이냐?” 행정관의 얼굴에 어두운 노을이 드리워졌다. ======================================= [249] 배틀트립(9) 토엔은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빴다. 너무 나빠서 지나가는 누구라도 붙잡아서 시비를 걸고 싶었고, 평온한 낯짝을 하고 지나가는 이라면 누구든지 자빠뜨려서 그 얼굴을 짓밟고 싶었다. 예전에는 그렇게 했다. 철이 없을 때. 하지만 이제는 거느린 식구도 있고, 사업을 벌이는 사업가의 입장에서 함부로 처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생겨도 제대로 풀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이런 이들은 존재했고, 이런 이들을 위한 장소와 수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풀고 싶어도 풀 수 없는 이들을 위해, 극한의 스트레스를 극한의 쾌락으로 맞바꾸어 주는 이들이. “어서 오세요.” 구관 지구는 어쩌면 상업지구의 오래된 가게들 만큼이나 오래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오래되었다. 붉은 기둥이 없다뿐이지, 더 오래전에 지어진 집들도 많았다. 하지만 복잡한 골목과 골목 사이로, 촘촘하게 들어선 집들에는 수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의 거주자들이 머물고 있어서 함부로 집을 철거할 수도 없었다. 좁은 성안에서 생긴 난민(?)은 그대로 거리의 부랑자로 전락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미 부랑자인 이들의 경우에는 차라리 구석에 처박아두는 편이 낫다는 위정자들의 판단 덕분이기도 했다. 그런 오래된 집 중의 하나인 검은 대문을 열고 들어간 토엔은 회색 드레스를 걸친 중년 여인의 환대를 받았다. “있어?” “이쪽으로.” 긴말이 필요 없었다. 토엔은 이 집의 단골이었고, 회색 드레스는 토엔의 말이 짧을수록 그가 많이 화가 난 상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여인이 안내한 방 앞에서 토엔은 따라온 덩치들을 문밖에 세워두고 홀로 안으로 들어갔다. 텅 빈 방 안에는 묘한 향이 나는 향초가 작은 협탁 위에서 홀로 타들어 가는 중이었다. 토엔은 익숙하게 조끼를 벗어 벽에 걸어두고, 내의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걸친 게 많진 않아서 금세 토엔은 우람한 가슴 근육을 드러내었고, 그 시간에 맞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토엔의 허락 이후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온 이는 검은 머리의 여인이었다. 위로 살짝 올라간 눈초리와 다소 뭉툭한 콧대는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렸고, 윗입술보다 두꺼운 아랫입술에는 진한 붉은색이 입혀져 있었다. 여자는 쟁반을 하나 들고 있었다. 익숙하게 들고 온 쟁반을 협탁 위에 올려놓고, 향초를 벽 등장 위에 올려두었다. 누구냐, 혹은 오랜만이다, 같은 인사는 없었다. 여자는 말없이 입고 있던 얇은 슬립형 슈미즈를 벗어 한쪽 구석에 있던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 사이 토엔은 금이 간 나무 쟁반 위에서 장갑을 들었다. 채찍과 회초리와 같은 것보다는 맨손이 편했다. 여인은 벽 한쪽에 마련된 흙이 담긴 나무 상자에 긴 종이 심지를 하나 꽂고 그 위에 불을 붙였다. 종이가 타들어 가면서 향초와는 또 다른 향이 방안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누워.” 여자는 침대 위에 엎드렸다. 토엔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여자의 엉덩이를 바라보면서 바지를 벗었다. 곧 토엔 역시 몸 위에 걸친 것이 없어진 상태에서 오직 장갑을 낀 손만이 불끈불끈할 뿐이었다. “시작한다.” 여자는 엎드린 상태에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방안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즈음, 처음 토엔을 맞이하던 중년 여인이 연초를 물었다가 긴 연기를 토해냈다. “너무 상하는 거 아닌가 몰라.” 옆에 있던 턱이 뾰족한 사내가 여인의 연초를 뺏어다가 한 모금 깊게 빨아 마셨다. “돈 벌려면 별수 있나?” “저놈 한 번 오면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은 기분이야.” “그건 기분일 뿐이고. 라시오도라, 당신 돈이 나가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부르지 마. 기분 나빠.” “라시오도라가 어때서?” “차라리 거미라고 불러.” 라시오도라는 거미와 비슷하게 생긴 몬스터로 숲속에서 은신하고 사는 종이었다. 이 근방에는 잘 나타나지 않아서 볼 일이 별로 없지만, 대륙에서는 흉포하고 잔인하기로 소문난 몬스터의 대표 격인지라 모르는 이가 없는 이름이었다. 용병들 중 라시오도라의 타투를 새긴 이는 사람을 고문하고 잔혹하게 절단하는 것을 즐기는 이들이 많았다. “당신 때문에 이 근방 여자들이 숨어 지낸다는 이야기가 있어.” “지들이 돈 벌려고 나한테 오는 거지, 내가 게네들을 억지로 끌고 온 적은 없어.” 빌린 돈을 안 내놓으면 죽인다고 협박을 한 적은 있다던데. 뾰족 턱이 피식 웃음을 지으면서 말을 아꼈다. 이제는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고 이렇게 얼굴 마주 보며 연초도 같이 피우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니 지금도 라시오도라는 이 일대에서 가장 악명이 높은 여성 중 한 명이었다. 악명으로만 따지면 뒷골목 대장 격인 부르스 보다 더 할지도? “그나저나 토엔은 왜 저런데?” 라시오도라가 연초를 입에 물었다가 뾰족 턱을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뾰족 턱이 히죽 웃으며 안주머니에서 조그만 동전 몇 개를 꺼내 놓았다. 라시오도라가 그걸 받아 소매 안쪽으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포세한테 자리를 뺏겼대.” “에이, 우리끼리 이러지 맙시다. 포세한테 자리 뺏긴 걸 누가 몰라? 그리고 고작 그것 때문에 토엔이 저렇게 화가 났을 리가 없잖아요?” 정보를 사고파는 업을 하는 뾰족 턱의 주요 정보원은 라시오도라였다. 늘 이런 식으로 놀러 오듯 찾아와서 한마디씩 묻고 정보를 얻어갔다. 라시오도라는 소매를 들어 살짝 흔들었다. 소매 속 동전이 짤랑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이 소리만큼의 정보야.” 정보업자는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가 동전 몇 개를 더 꺼내 들었다. “우리 웬만하면 후불제 합시다. 내가 셈을 제대로 안 치러준 적 없잖아?” “됐고. 토엔의 부수입 있지? 그게 줄었다는 소문이야.” 말만 들으면 별거 아닌 것처럼 들리지만, 꽤 중요한 정보가 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네? 설마, 선이 끊긴 건가요?” “그런가 봐.” 라시오도라는 딱 그 정도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말이라는 듯 이후로는 입을 닫았다. 하지만, 정보업자는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숙여 보였다. 토엔의 부수입은 마약이었다. 대륙 쪽의 조직과 선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선이 갑자기 끊어졌다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어떤 사정으로 끊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곳의 권력 분포도를 새로 그려야 할 일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혹은 생길지도 모른다. 정보업자는 라시오도라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며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 “저녁 어떻게 할 거야?” 게리는 화제를 바꿀 겸 루치드의 최초 제안을 상기시켰다. 루치드는 멀리 산을 보고 아직 늦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일단 서문으로 가요.” “서문?” 현재 있는 곳이 중앙 상업지구였기에 죽 서쪽으로만 가면 서문이 나올 것이다. “거기에 뭐가 있는데?” “거기 있는 게 아니고, 거기서 가져와야 할 게 있어요.” 게리는 호기심을 드러내 보였지만, 루치드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서문으로 간 두 사람은 경비를 서고 있는 이에게 인사를 했다. “구덩이에 잠시 볼 일이 있어요.” 인상을 찌푸리던 경비 두 사람은 곧 손짓으로 통과를 허락했다. “구덩이는 왜?”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요. 저 혼자 갔다 올게요.” 게리를 서문 근처에서 기다리게 한 후, 루치드 혼자 나가려는데 게리가 붙잡았다. 왜 그러냐는 눈으로 바라보자, 게리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 도망가는 건 아니지?” 루치드는 빤히 게리를 바라보다가 한 마디만 남기고 돌아섰다. “아직은요.” 불안한 시선이 루치드의 등에 와 닿았지만, 루치드는 모른 척하고 성문을 나섰다. 얼마 후, 루치드는 등에 자루를 하나 지고 나타났다. “뭐야?” 게리의 물음에 루치드는 게리를 데리고 성문에서 조금 떨어진 성벽으로 가서 주위 사람들이 별로 없음을 확인한 후, 자루를 열어 보였다. “어? 노루네?” 노루 한 마리가 목이 꺾인 채로 자루 속에 담겨 있었다. 그렇게 보니 이 무거운 걸 아무렇지 않게 들고 온 루치드의 힘도 힘이지만, 역시 노루를 가지고 온 수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리의 물음에 루치드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해 주었다. “사냥이요.” 그 잠깐 사이에 사냥해서 노루를 잡았다고? 사냥 천재? 사냥꾼의 신? 그러다 게리는 그것이 루치드가 말한 저녁이라는 걸 깨달았다. 게리는 화색을 띠며 말했다. “이게 우리 저녁인거지? 우리 오늘 저녁에 고기 먹는 거야? 바비큐야?” 루치드는 고개를 저었다. “요리할 자신도 없고요, 이 가죽도 그냥 버리긴 아까우니까 상점에 팔고 돈으로 받을 생각이에요.” “아, 그렇구나. 우와 역시 넌 똑똑해!” ‘역시’라는 수식어가 절로 붙을 만큼 오늘 하루 동안 루치드에 대해 많이 놀라고 감탄하는 중인 게리였다. 상점으로 가서 돈으로 바꾼 후―가죽에 상한 흔적이 없어 더욱 돈을 많이 받았고 차후에도 이런 거래라면 환영한다는 가게 주인의 지지도 있었다―야외 식당에 가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원하시는 대로 드세요.”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시켜도 아무 말 않을 거지?” “보셨잖아요? 얼마 받았는지. 마음껏, 한도 내에서 시켜 드세요.” 게리는 그 한 마디에 여태껏 보아온 중 가장 밝은 표정을 하고 종업원을 불렀다. 루치드는 게리가 메뉴를 정하고 시키는 동안, 홀로 생각에 잠겼다. 농부의 이야기나 행정관의 지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실 지구에서도 이와 비슷했다. 누구나 다 천재라고, 영재라고 떠들어대지만, 본인은 전혀 나설 생각이 없었고 나서고 싶지도 않았다. 불가피하게 나설 경우에도 최대한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선에서 움직였다. 비록 그 선이 때로는 과하게 적용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가장 적정한 선을 지켰다고 봤다. 그러나 문제는 루치드 본인의 성향이었다. 단순히 튀지 않는다는 선이 아니라는 것을 행정관이 지적했다. 나를 속이고 있다는 말이 왠지 가슴에 걸린 루치드는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나를 속이는 것이 무엇인가?’ 희미하게나마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그 부분은 말 그대로 희미해서 마치 불투명한 거품에 쌓여 있었다. 혹은 먼지가 자욱하게 덮인 유리병 같았다. 거품을 터뜨리든, 먼지를 닦아내든 해야 보일 것 같은데, ‘꼭 그래야 하나?’라는 생각이 그것을 방해했다. ‘그냥 그대로 둬.’ 속삭임인지, 아니면 체념인지. 이명(耳鳴)인지 위로인지. ‘넌 잘하고 있잖아. 왜 엉뚱한 질문에 널 혹사하는 거야. 바른 질문에 바른 답을 한다. 니가 지금껏 배운 것을 잊은 거야?’ ‘나를 속인다’는 명제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한 질문이었던가? 실은 아무 문제도 없는데, 그저 나를 떠볼 생각으로 던진 질문이었던가. 아무 의미도 없는 질문에 혼자 심각하게 속을 파헤치며 괴로워하는 것일까? “여기 놔주세요.” 루치드가 목소리에 반응하여 고개를 돌리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테이크가 담긴 접시를 받고 기뻐하는 게리의 얼굴이 보였다. “잘 먹을게. 너도 얼른 나이프 들어.” 게리는 곧 소스를 입 주위에 묻히면서 스테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게리를 보던 루치드가 나이프를 드는 대신 인사를 남겼다. “저 먼저 갈게요.” 루치드는 멍한 눈으로 보는 게리를 향해 아까 가죽 상인에게 받았던 돈을 모두 주었다. “이걸로 계산하고 남는 건 가지고 계시다가 나중에 제게 주세요.” “넌?” “전 볼 일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 돼요. 늦어도 모레 새벽에는 다시 올 거예요.” “모레?” 게리가 눈을 껌뻑이며 묻자, 잠시 궁리를 하던 루치드는 정정해서 말했다. “그 전에라도 잠시 중간에 올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일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양해해 주세요. 토엔에게도 그렇게 전해 주시고요.” 게리에게 인사를 하고 루치드는 가게를 나갔다. 게리는 잠시 루치드의 뒷모습을 보다가 손에 들린 동전을 바라보았다. 5젠 짜리 동전 3개. 이 정도면 오늘 저녁을 해결하고도 동전 2개가 남는다. 게리는 동전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시 식사를 이어나갔다. **** “너 웬일로 늦잠을 다 잤어?” 명수가 단유를 보며 물었다.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냥 생각할 게 많아서 늦게 나온 거야.” “그래? 그럼 운동은?” “같이 나가자.” “콜!” 조기축구회 시합을 뛰러 나가는 명수의 뒤를 따라가는 단유는 잠깐 명수의 뒷모습에서 누군가가 연상되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젓고는 조금씩 다리에 힘을 불어넣고 뛰기 시작했다. 운동으로, 땀을 흘리며 머릿속을 비워나가야겠다는 욕구가 강하게 들었다. ======================================= [250] 원망(1) 게리는 모처럼 늦잠을 자다가 일어났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상쾌하기도 하지만, 늦은 아침 햇살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켜는 일상도 나쁘진 않았다. 단점이라면 땀에 젖은 채로 일어나 뜨거운 햇살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 정도는 게으름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면 편했다. 침실을 나와 거실로 나오니, 까맣게 타버린 작은 심지가 위태롭게 붙은 꼬마 양초가 식탁 위에 지난밤의 흔적을 남긴 채 눌어붙어 있었다. 하품을 한 차례 크게 한 게리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집 밖으로 나왔다. 창으로 들어오던 햇살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양의 뜨거움이 정수리를 관통하고 눈꺼풀을 찔러댔다. “팔자 좋구나?” 옆에서 들려오는 걸걸한 목소리에 즉각 반응한 게리는 돌아보자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일어나셨어요?” “일어나긴 한참 전에 일어났지. 니가 나보다 더 신세가 좋구나?” 토엔은 뭔갈 씹고 있는지 질겅거리면서 게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치드 덕분이죠.” “나 참.” 시비를 걸고 싶어도 걸 거리가 없다. 확실히 루치드가 일을 맡은 이후, 비록 일거리가 줄어든 탓도 있다고는 하지만, 소위 효율이란 게 좋아졌다. 밤낮없이 일하던 게리의 얼굴에 피로가 사라지기 시작했고, 덕분에 시간이 지체되는 일도 줄었고, 평판이 좋아지니 신관지구에서 일을 맡기지 않았던 집들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점점 의뢰가 늘어나니 신관지구 내의 벌이가 쏠쏠해지는 추세였다. 루치드 개인으로만 봐도, 사실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인 게, 어찌나 빨리 일을 처리하는지 게리가 점심시간이 지난 뒤에 빈 수레를 끌고 오는 경우라면, 루치드는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빈 수레를 끌고 왔다. 그리고 이후 수금을 위해 집마다 돌아다니며 인사를 드릴 때도 들어보면 확실히 루치드가 일을 잘한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거 어린 녀석이 일을 잘하데? 저 무거운 걸 번쩍번쩍 들고 옮기는 게 예사 힘이 아니야?” “어찌나 빨리 움직이는지 눈 깜짝할 사이에 변기를 비우고 사라지는데, 집 안에 냄새도 안 나는 것 같아서 좋아.” 좋은 평판이란 사업주의 관점에서 당연히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신관지구의 주민들 중 반 이상이 공관지구에서도 일하는 이들인지라, 이런 평판이 전해진다면 공관지구의 일을 되찾는 것도 금방일 것 같았다. 다만 업주의 입장에서, 아랫사람이 일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는 모습을 보면, 그것이 비록 그에게 주어진 권리라 할지라도 기분이 좋지만은 않은 것이다. 뭐라도 시켜서 움직이게 만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랄까? 당장은 시킬 일도 없으니 빨리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게 상책이다. “일어났으면 가서 밥이나 처먹던가, 아니면 성 밖에 나가서 구덩이라도 치우던가 해.” 구덩이 치우는 일은 매일매일 해도 똑같으니까, 굳이 시키자면 매일 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루치드가 구덩이를 모두 비워놔서 당장 할 게 없어요.” 그랬다. 루치드는 무슨 수를 썼는지, 구덩이를 말끔히 비워놨다. 구덩이를 지키던 수하의 말에 믿을 수 없어 직접 가서 확인까지 했다. 구덩이 아래에 찰랑거리는 물과 밑바닥이 보일 정도라니. “계속했더니 어느새 이렇게 됐네요.” 라는 미심쩍은 대답이나 듣자고 물었던 게 아닌데, 정작 본인이 저렇게 답변을 하니 더는 추궁할 수도 없어 그냥 돌아서고 말았다. 그게 바로 엊그제 일이었다. 다시 떠올리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고, 웬 복덩어리인가 싶을 뿐이었다. 게리는 토엔이 잠시 멍을 때리는 사이에 얼른 자리를 피했다. 어차피 곁에 있어 봐야 잔소리 말고는 오붓하게 나눌 대화도 없는 터라 있어 봐야 무소용이었다. 당장 자리를 피한 뒤에 골목을 나선 게리는 가까운 식료품점으로 향했다. 사실 이렇게 늦은 아침에 식료품점을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루치드가 일을 시작한 지는 일주일이 넘었지만, 그사이에는 사실 불안한 마음이 커서 늦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루치드가 일어날 때 같이 일어나서, 식탁 위에서 멍하니 있다가 루치드가 돌아온 뒤에 같이 점심을 먹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러나 이틀 전, 토엔이 루치드의 성과를 눈으로 확인하고 입으로 찬탄해 마지않은 다음에야 비로소 늦잠을 결행한 게리였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게리는 히죽 웃으며 몇 가지 먹을거리를 손에 들었다. 오늘은 어쩐지 여유를 부리고 싶은 마음에 먹으면서 거리를 걷기로 했다. “어이, 게리? 일 쫓겨난 거야?” “게리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일 안 해?”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게리를 보며 물었고, 게리는 웃으면서 설명했다. 사람들은 게리에게 행운이 찾아들었다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유유자적 걸어가던 게리는 어느새 상업지구로 향했다. 매대 앞에서 호객 행위를 하던 이들을 여유롭게 구경하며 입안에서 감도는 싱싱한 채소와 뻑뻑한 빵의 질감을 만끽했다. 평화로운 하루의 시작으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 북쪽 성문 앞을 지키던 도순은 오늘따라 피곤함을 이기지 못해 몇 번이고 창을 놓쳤다. “무슨 일 있었어? 왜 그래?” 파트너가 걱정할 정도로 도순의 얼굴에는 그늘이 가득했고, 짙은 다크서클이 눈동자를 집어삼킬 것처럼 검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집에 일이 있어서 그래.” “무슨 일인데?” “…돈 문제야.” 파트너는 입을 다물고 지나가는 행인들을 검속(鈐束) 하는 데 집중했다. 도순도 파트너의 추궁을 피하려는 의도로 뱉은 말이었기에 파트너의 반응에 개의치 않았다. 다만 이렇게 약 먹은 닭처럼 졸다가 경비대장의 순찰에 걸리기라도 하면 간단히 지적받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쓸 뿐이었다. “수고하십니다.” 오물이 담긴 수레를 끌고 오던 남자가 경비병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경비병들은 수레만 보고도 인상을 찌푸렸다. “얼른 지나가. 냄새난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수레를 힘겹게 끌고 성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또 다른 수레가 경비병들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엔 어린아이였다. 어린데 힘은 좋은지, 아까 남자보다 훨씬 가볍게 수레를 끌고 있었다. 게다가 아까 수레는 뒤에서 밀어주는 이도 있었는데, 이 아이는 혼자 수레를 끌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경비병들은 인사 대신 코를 막으며 턱짓으로 지나가라는 뜻을 알렸다. 소년은 씩씩하게 수레를 몰고 성 밖으로 나갔다. “도대체 왜 북문인 거야? 지들은 남쪽에 살잖아? 그럼 남문 쪽 가서 버려야 하는 거 아냐?” “그러게 말이야.” 굳이 대꾸하자면 남쪽의 귀족들과 부유층이 사는 경남지구에 폐를 끼칠 수 없으므로 북문 쪽에 구덩이를 만든 거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대꾸를 하는 것도 귀찮았던 도순은 그냥 대충 말을 받아주는 정도로만 대했다. 도순이 몰려드는 잠과 싸우고 있을 때, 그가 그토록 기대하던(?) 일이 벌어졌다. 경비대장이 일련의 병사들을 끌고 나타난 것이다. 물론 정기적인 순찰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순찰이 끝난 후에는 교대 인원이 올 때까지 경비대장은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 순간만 무사히 넘기면, 파트너에게 양해를 구해서라도 잠시 눈을 붙여야 할 것 같았다. “이상 없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 왜 이러나? 도순.” “…….” “무슨 일 있어? 얼굴이 말이 아니잖아?” 도순은 입을 열고 말을 하려는데, 이상하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에 뭔가 막힌 것 같기도 하고, 입안의 혀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기분도 들었다. 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혀 천장에 붙어있는지, 아랫니 쪽에 붙어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니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혀가 잘렸나? 방금까지 눈앞에 멋진 콧수염을 기른 경비대장이 서 있었는데, 지금은 경비대장도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그보다 자신이 뭘 바라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얼굴 전체에 둔탁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같은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도순이 그렇게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도순 주위의 사람들도 모두 혼란스러워하는 중이었다. 경비대장이 부르는데도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초점을 잃은 눈으로 서 있더니 갑자기 바닥으로 쓰러져 버린 도순이었다. 놀란 경비대장이 움직이기도 전에 옆에 서 있던 병사들이 먼저 반응하여 한 명은 경비대장 앞으로, 한 명은 쓰러지는 도순을 붙잡으러 뛰어갔다. 도순은 팔을 뻗어 부상을 막으려는 본능적인 움직임도 없이, 마치 나무토막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머리를 강하게 바닥에 부딪힌 도순은 이마가 깨졌는지 피를 철철 흘리는데, 그래도 눈은 게슴츠레한 상태 그대로였다. “이거 무슨 일이야? 갑자기 왜 이래!” 병사들이 도순을 둘러싸고 도순의 정신을 차리게 노력을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대장님, 여기!” 도순의 상태를 살피던 병사가 도순의 코 밑에 난 피를 가리켰다. 새까만 피였다. “독인가?” 보통 새까맣게 오염된 피는 독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당장 의무대로 데리고 가게.” 병사들은 주머니에서 천을 꺼내어 얼굴에 두르고 코와 입을 막았다. 그 후 정신을 잃은 도순을 한 사람이 업고 뛰기 시작했다. “자네 둘이 이곳을 지키도록 하고, 수상한 사람이 없는지 살피도록. 토우즈, 넌 따라와.” 도순의 파트너 토우즈는 난데없이 벌어진 일에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경비대장이 다른 사람에게 업무를 맡기고 따라오라고 하니 한 것도 없이 덜컥 겁이 났다. 경비대장을 따라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뭔가 오늘 하루가 불길하게 흘러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 이미 최악의 하루가 되어버린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 구덩이에 수레에 싣고 온 오물을 모두 버린 뒤, 오물이 마르고 굳을 때까지 다른 구덩이를 청소하는 일을 하기로 했다. 사실 잘 마르지 않기도 했고, 가장 아랫부분은 늘 축축해서 구덩이를 말끔히 청소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루치드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깔끔하게 처리했고, 그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정리를 끝내고 구덩이에서 약간 떨어진 감시소―감시인이 사는 집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집에서 구덩이가 잘 보이지 않았다―에 가서 일이 끝났음을 알렸다. 감시인은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느릿느릿 구덩이가 보이는 언덕을 올라갔다. “잘 치웠네.” 잘 보이지도 않지만, 구덩이 주변이 깨끗해 보인다는 것만으로 확인을 마친 감시인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 확인증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확인증을 가슴에 넣고 돌아서려는데, 감시인이 멈춰 세웠다. “오늘은 이걸 들고 가.” 감시인은 작은 자루를 하나 주었다. 호기심을 보이려는 찰나 감시인은 경고를 던졌다. “열어볼 생각 말고. 수레에 실어. 똥주머니 아래에 밀어 넣어서 남들이 보지 못하도록.” 그리고 돌아앉았다가, 다시 일어섰다. 투덜거리면서 일어난 감시인은 루치드의 손에 들린 자루를 빼앗았다. 그리고 집 옆에 세워둔 수레로 가더니 직접 오물 주머니 아래를 들추고 그 밑에 자루를 숨겼다. “오늘은 처음이니까 시범을 보여준 거야. 다음부터는 직접 하도록 해. 알았지?” “그게 뭔데요?” “알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그냥 가서 토엔에게 물건 왔다고만 전하면 돼.” 감시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루치드를 째려보았다. “만약 니 마음대로 자루를 열었다간 그날로 넌 끝장이다. 알겠어? 자루는 열면 그 흔적이 남게 되어 있으니까, 절대 열어보지 말길 바란다.” 감시인은 집으로 들어갔다. 루치드는 잠시 수레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휘휘 저으며 수레의 손잡이를 잡고 끌었다. 늦지 않게 도착한다면, 오늘도 점심은 게리와 함께 먹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 [251] 원망(2) 루치드는 성문을 지날 때, 아까와 다른 분위기라는 것을 눈치챘다. 아직 교대 시간이 아닌데도 경비병이 바뀌어 있던 데다가, 경비병들의 분위기도 제법 삼엄한 눈치였다. “안녕하세요.” 원래 경비병들을 만나면 인사를 하라고 사전교육을 받았다. 성밖을 나갈 때는 ‘안녕하세요’, 들어올 때는 ‘수고하세요’라는 말로 인사를 건네도록 교육받았으나, 지금 성문 앞에 선 경비병은 들어올 때 봤던 경비병도 아닐뿐더러, 북문 쪽에서 경비를 서던 사람들도 아니었다. 경비병은 힐끔 루치드를 보곤 빨리 지나가라는 눈치를 줬다. 루치드가 수레를 잡은 손잡이에 힘을 주고 지나가려는데, 다른 경비병이 창을 뻗어 길을 막았다. “어이, 어딜 그냥 가려고?” 대답은 루치드가 아닌 눈치를 줬던 경비병에게서 나왔다. “왜 그래?” “조사를 해야지?” “이 봐, 이 녀석은 보아하니 매일 오가는 놈들인데, 뒤에 저거 안 보여?” 아무리 가죽 주머니의 입구를 밀봉한다 쳐도 새어 나오는 냄새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지금 조사는 제대로 해야지. 일도 터진 마당에.” 루치드가 호기심을 드러내 보였다. “무슨 일, 있나요?” “…알 거 없다.” 창을 든 경비병은 단호하게 대답을 거절하고는 루치드에게 수레를 놓고 앞으로 나올 것을 명령했다. 루치드는 별로 거리낄 게 없었기에 경비병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만, 너무 가까이 다가오진 말고.” 경비병은 어느새 코를 막는 천을 꺼내 들고는 창대 끝으로 루치드를 쿡쿡 찔렀다. “돌아봐.” “호주머니 다 뒤집어 봐.” “윗옷 들춰 봐.” 역시나 걸릴 게 없었다. 성문 밖으로 나가는 이들을 검문하던 경비병이 보다 못해 빨리 끝내라고 재촉할 정도였다. 경비병은 뒤이어 수레 쪽으로 다가갔다. 창으로 수레를 툭툭 건드리는데, 루치드는 차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조심하세요, 잘못하면 가죽 찢어져요.” 그렇지않아도 늘 젖어있는 가죽이다. 어지간해선 잘 찢어지진 않겠지만, 날카로운 창으로 찌르면 성할 리 없었다. “뭐?” ―부욱.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주머니 안에 남아있던 잔여물들이 냄새와 함께 쏟아졌다. 수레를 적시며 아래로 흐르더니 금세 바닥에 뚝뚝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경비병은 당황해서 황급히 창을 잡아당겼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다. 오늘 막 수거했던, 그리고 여름 햇살을 받아 적당히 달궈졌던 오물이 북문에 향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이런 제기랄.” “이봐, 조심하지 그랬어.” 사람들이 물러서면서 오롯이 경비병과 루치드만이 오물의 향에 빠졌다. “야, 당장 이거 치워. 얼른!” 그렇게 말해도 어떤 도구도 없는 판에 어떻게 치운단 말인가. 게다가. “지금 이 수레 여기 두면 더 안 좋을 거 같은데요.” “그렇네. 야, 너 얼른 수레부터 치워.” 루치드는 수레를 끌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경비병이 창을 들어 막았다. “어딜 들어오려고?” “예?” “나가. 나가서 고치든지 알아서 해. 냄새나는 그걸 성안에 흘리면서 다니겠다는 거야!” 할 수 없이 루치드는 수레를 끌고 다시 성 밖으로 나가야 했다. 수레가 멀어지는 사이, 남은 경비병들은 인상을 쓰며 바닥에 흐른 오물들을 바라보았다. “야, 니가 치워.” “내가 왜?” “니가 사고 친 거잖아. 그러니까 내 말 좀 듣지.” “아오, 이 새끼. 얄밉게도 말한다.” “칭찬 고맙고, 빨리 치워.” 결국, 사고 친 경비병이 창대 끝으로 바닥을 긁어보지만, 그걸로는 어림도 없었기에 결국 사람을 시켜 삽을 구해오도록 했다. 그 사이, 루치드는 다시 감시자가 있는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뭐야?” 루치드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감시자가 인상을 푹 쓰면서 머리를 긁었다. 하얀 가루가 바닥에 떨어지는 게 보여, 루치드는 조용히 한발 물러섰다. 감시자는 신경질을 부리다가, 막 생각난 듯 수레로 다가가 주머니를 들쳤다. 다행히 주머니는 그대로 있었다. 감시자는 주머니를 꺼내어 입구를 살폈는데, 루치드는 그의 말대로 열어보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때, 루치드가 손가락을 들었다. “저기요.” 루치드가 가리킨 방향은 바로 자신의 발아래였다. 시선을 옮긴 감시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의 발아래로는 주머니에서 떨어지는 하얀 가루가 쌓이는 중이었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주머니를 살피니, 조그맣게 찢어진 부분이 있었다. “새끼야, 이거 언제부터 그런 거야!” 루치드로서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려 보일 뿐이었다. 애초에 열어보지 말라고 해서 호기심을 누르고 그 자리 그대로 놔뒀는데, 언제 어떻게 저리됐는지 알 수 있겠는가? 다만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으니, 아까 경비병이 창으로 이리저리 찔러댈 때, 그래서 오물 수거 주머니가 찢어질 때 같이 뚫린 게 아닐까 하는 점이었다. 그 추측을 들려줬더니, 감시자는 낭패라는 듯 혀를 찼다. 주머니를 뒤집어 더 이상 새지 않게 만든 후, 감시자는 길 위를 살폈다. 애당초 크게 뚫리지는 않았던지 가루가 샌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만약 흘렀더라도 작은 가루라서 바람에 흩어졌을 확률이 높지만, 당장 감시자의 눈에 이상이 없어 보인다는 게 중요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내용물의 손실 없이 이 주머니를 토엔에게 전달할 방법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와.” 루치드에게 주머니를 건넨 후―구멍 쪽을 다른 손으로 막아서 가루가 새지 않도록 주의를 줬다―성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한 감시자는 이윽고 성문이 아닌 성벽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성벽의 어느 한 지점에 도착한 그는 해자가 파여있는 쪽으로 루치드를 안내했다. “저기로 들어가면 반대쪽으로 나갈 수 있다. 지금은 몬스터의 공격이 없는 시기라서 해자의 물을 반밖에 채우지 않았으니까, 충분히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하수구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수달이 낸 구멍 같기도 한 검은 통로가 물 위로 살짝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거 젖지 않을까요?” “머리 위로 들고 가면 되잖아. 그거 조금이라도 젖었다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루치드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조심스럽게 해자 아래로 내려갔다. 거의 가슴께에 차오르던 물은 그 이상은 넘지 않았다. 이게 원래 차는 양의 반이라고 하니, 원래라면 쉽게 지나가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며 루치드는 수면 위로 살짝 보이던 통로로 들어갔다. 입구만 좁을 뿐, 그 안쪽은 도로 넓어져서 가죽을 들고 지나가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통로 가운데쯤에서 루치드는 걸음을 멈췄다. 이쯤이면 어느 쪽에서도 자신이 보이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루치드는 주머니를 들고 있던 한 손을 떼어서 구멍을 막고 있는 손 쪽에다 손가락을 집어넣었다가 뺐다. 손가락 끝에 하얀 가루가 묻어 있었다. 눈으로 그 가루의 결정을 관찰하다가 조심스럽게 혀 끝에 가루를 대 보았다. **** “어이, 너.” 게리는 혹시나, 하고 고개를 돌려 보았다. 역시나 커다란 덩치를 가진 사내가 자신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도망가자, 라는 것이었다. 인파가 많은 중앙 거리다 보니, 잘만 숨어들면 피할 수 있으리라. “그만 생각해. 니 뒤에도 있으니까.” 피식 웃던 덩치의 고갯짓에 조심스럽게 돌아보니, 어깨 가득히 타투를 새긴 덩치가 팔짱을 끼고 길을 막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험악한 인상에 놀라서 다들 옆으로 피해 다니는 중이었다. “조용히 따라가지 않을래? 잘못했다가는 니 팔이 부러질 거 같아서 그래.” 사내는 조곤조곤 차분한 목소리로 게리를 꾀었다. 목소리와 달리 담긴 내용은 뼈를 분지르겠다는 협박이었기에 게리는 팔에 소름이 돋았다. 결국 게리는 사내를 따라가야 했다. 사내는 덩치와 게리를 데리고 남문 쪽으로 향했다. 이들이 경남지구로 갈 리는 없을 테니, 역시 구관 지구로 가는 것일 테고, 구관 지구에서도 남쪽이라면 역시 포세쪽일 확률이 높다. 분명 오늘 아침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는데. 결국, 중앙 거리로 나온 게 잘못이었던 걸까? ‘나는 중앙 거리로 나서면 안 되는 거였구나.’ 자신은 구관 지구의 냄새 나는 뒷골목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역시 사람은 난대로 살아야 하는 법이구나, 라는 걸 깨닫는 게리였다. 게리를 끌고 간 남자는 남쪽 빈민가의 골목을 따라 들어가다가 어느 허름한 집 안으로 게리를 집어넣었다. 바닥을 구른 게리에게 엄살 부리지 말라며 머릴 한 대 쥐어박더니, 지하실로 끌고 갔다. “어이, 너. 이름이 게리였던가?” 굉장히 짙은 구레나룻을 기른 사내가 게리에게 다가왔다. 게리는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군. 안 그래도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 말이야.” 물어본다고 해도, 아는 게 없어서 답할 것도 없던 게리는 열심히 자신의 처지를 항변했다. “하루 종일 똥만 푸는 일만 해요. 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정말이에요. 오늘만 파트너가 대신 일 해 준 덕분에 쉬는 거란 말이에요. 전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구레나룻이 히죽 웃었다. 앞니 하나가 빠졌는지 누런 이 사이에서 바람이 쉬쉭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래. 안다고. 똥쟁이 게리를 모르는 사람이 없어. 그치?” 구레나룻 뒤에 선 덩치 둘이 멍청한 웃음을 지으면서 게리를 놀리듯 쳐다보았다. “그런데 말이야. 넌 아마도 내가 궁금해하는 걸 풀어줄 수 있을 거 같거든? 그러니까 잘 생각해서 대답하도록 해. 나한테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니까.” 게리는 겁에 질린 얼굴로 두리번거렸지만, 정작 눈앞에 선 사내를 바라보지는 못했다. 시선을 피하는 게리를 보며 웃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토엔 밑에서 얼마나 일했지?” “…….” 겁에 질린 게리는 여전히 패닉 상태였다. 정신을 차리게 해줄 겸, 이라고 해야 할까? 사내는 손을 세차게 휘둘렀고 게리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왼쪽 뺨을 부여잡고 정신을 차린 게리는 두 다리를 후들거리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느긋한 여유를 보이며 손가락을 들었다. “앉아.” 게리는 주춤거리다 사내가 발을 까닥하자, 얼른 일어나서 의자에 앉았다. “손내리고.” 게리는 멈칫했지만, 얼른 손을 무릎에 딱 붙이고 정자세로 사내의 물음에 답할 자세를 취했다. 왼쪽 뺨이 붉게 타오르듯 붓고 있었다. “두 번 묻기 싫은데, 대답을 안 해줘서 한 번 더 물을게. 잘 대답해 줘. 토엔 밑에서 얼마나 일했지?” “사, 삼년 입니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고 있던 조끼를 벗었다. 그리고 그 조끼를 뒤에 선 덩치에게 맡긴 후,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 정도면 이것저것 보고 들은 게 많겠네.” “아, 아닙니다!” “뭐?” “…….” 게리는 괜한 소리 했다는 후회를 하며, 입을 다물고 또 다른 고통에 대비했다. 그러나 사내는 손을 쓰지 않았다. 다만 질문을 할 뿐이었다. “심부름, 해봤지?” “네?” 사내가 눈을 부라리자, 얼른 대답하는 게리였다. “네, 네! 해 봤습니다.” “어떤 심부름?” “그, 그러니까 우유 심부름도 해 봤고, 채소 사 오라는 심부름도 있었고, 수레바퀴 고쳐오라는 심부름도 있었고, 또….” 게리는 생각나는 모든 심부름을 줄줄 읊었다. 사내는 표정 없는 눈으로 게리를 바라보다가 손을 슬며시 들었다. 저절로 게리의 입이 다물어졌다. “토엔의 심부름. 해 봤지?” “에?” “토엔에게 아무도 몰래, 누구도 모르게 배달하라는 심부름, 해 봤지?” 딸꾹. 게리는 저도 모르게 긴장한 탓에 횡격막이 경련을 일으켜, 딸꾹질하기 시작했다. “이게 또 대답을 안 하네?” “아! 해, 했습….” 게리의 말은 끝내 이어지지 못했다. 다시금 게리의 뺨을 강타한 손바닥 때문에 게리는 바닥을 굴렀고, 아무리 굴러도 뺨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지르면 안 된다는 본능의 경고를 무시하지 못했던 게리는 끅끅거리는 소리만 낼 뿐이었다. “앉아.” 게리는 급히 정신을 수습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다시 정자세를 취하고 손을 무릎에 댔다. 하지만 얼얼함을 지나, 찢어지는 고통이 느껴지는 왼쪽 뺨 때문에 왼쪽 눈이 경련이 난 듯 꿈틀거렸다. “심부름했지?” “네, 했습니다.” “뭔지 알아?” “…모릅니다. 정말 모릅니다. 알려주지 않았어요. 알아서도 안 된다고 협박해서 정말 모릅니다. 정말이에요. 믿어주세요!” 혹시라도 거짓말하는 것처럼 들릴까 봐, 게리는 비명을 지르듯 변명을 했다. “누구한테 받아서 누구한테 줬는지 이야기해봐.” 게리는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모두 털어놓았다. “좋아. 그럼 토엔이 또 너한테 심부름도 시켰겠지?” “…네.” 사내는 히죽 웃었다. “토엔이 시킨 심부름에 대해서 설명해 봐.” 게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 [252] 원망(3) 달걀을 바닥에 떨어뜨려도 금방 익을 것 같은 뜨거운 한낮의 열기 속에서도 사람들이 일상을 견딜 수 있는 이유는 한 줄기 바람 때문일 것이다. 비록 바람마저 뜨거운 온기를 담았으나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포세는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멀리 보이는 산의 능선을 구경하고 있었다. 푸른 산의 능선은 높아졌다 낮아지기를 반복하는데, 포세는 자신이 현재 가파른 능선을 오르는 중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힘들고 위태롭지만, 이 고비만 넘기면 정상에 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포세, 투키입니다.” 포세는 뒷짐 진 손을 풀며 뒤를 돌았다. 구레나룻을 기른 투키가 포세와 눈이 마주치자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알아냈습니다.” “수고했다.” 포세는 투키를 치하하고는 옆에서 땀을 비 오듯이 흘리고 있는 덩치에게 말했다. “투키와 함께 가서 마무리를 지어라.” “네.” 덩치가 고개를 숙여 보인 뒤, 곧 돌아섰다. 투키와 함께 길을 거슬러가자 대기하던 다른 부하들도 분분히 일어서 덩치의 뒤를 따라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포세가 다시 몸을 돌려 능선을 바라보았다. 꽤 오랫동안 토엔의 등을 바라보며 걸어왔다. 하지만 토엔은 체력이 다해서 능선을 오르다 포기한 것처럼 멈춰 서있었다. 이때 자신이 토엔을 제치고 오른다면 능히 정상을 먼저 선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상은 선점하는 자의 것이다. “포세, 이제 토엔의 돈줄도 우리 쪽으로 끌어오게 되었고, 비자금도 거두게 되었으니, 남은 것은 토엔 뿐이지 않습니까? 그냥 토엔을 재껴도 될 것 같은데요.” 포세는 뒤에서 조언을 하는 친우(親友)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 손으로 직접 하는 게 보기도 좋겠지.” “그렇습니다.” 포세는 이날을 위해, 이때를 위해 줄곧 땀을 흘려 왔다. 지금 목 뒤에 흐르는 땀은 긴장해서 흘린 땀이 아니라,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고 흘린 땀이었다. 이제 이 땀을 식힐 때가 되었다. “가자.” **** “뭐?” 토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조심성 없는 토엔의 움직임에 책상 위에서 결제를 기다리던 서류들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포세 애들이… ‘다섯 번째 집’으로 향하고 있답니다.” ‘다섯 번째 집’은 암호였다. 사실은 토엔의 비자금과 비밀장부가 숨겨진 장소였다. 그 장소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꽤 조심스럽게 움직였기 때문에 포세는 물론이고 외부 사람들은 알아낼 수 없는 안가(安家)였다. “우연히 그쪽으로 향할 확률은…없겠지.” “…….”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토엔은 대답을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움직일 수 있는 애들은?” “마침 애들이 간식 먹는다고 나간 틈이라….” 말은 ‘간식’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주먹 패거리들이 인근 상가들과 하위 조직들의 수금을 하러 간 것이었다. “당장 부르고, 신관 지구에 일 나간 애들도 다 불러!” “걔들 까지도요?” 토엔이 책상을 발로 차며 소리쳤다. “포세가 그쪽만 노릴 거라고 생각해? 멍청한 놈아!” 덩치는 붉어진 얼굴을 하고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토엔은 잠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생각을 해 보았다. 포세가 단순히 돈이나 벌자고 경관지구의 오물 수거 업을 맡은 것은 아니었다. 사실 오물 수거는 마약 보급선의 확장을 위한 눈가림이었다. 다른 어떤 직업보다 사람들에게 개별적인 접근이 가능한 직업이었기 때문에 공급의 확장과 경비대의 눈가리개용으로 적당했다. 이러한 수단을 제일 처음 고안한 것은 다름 아닌 토엔이었다. 토엔은 이를 통해 안정적이고 높은 이익을 거두었고, 이를 발판으로 더 큰 사업으로 진출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토엔이 이 일에 적극적으로 나설 때, 다른 어떤 조직의 우두머리도 굳이 오물 수거 일까지 진출해서 토엔의 사업을 막으려고 생각하지 않았고, 때문에 토엔이 독점으로 담당할 수 있었다. 애초에 오물 수거가 푼돈밖에 되지 않았고, 냄새나고 뒤처리도 까다로운 일이었기에 토엔의 독점을 방기(放棄)한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포세가 토엔의 독점에 반기를 들고 끼어들었다. 처음 경남지구를 먹을 때도 토엔은 그러려니 했다. 오히려 너무 나서서 포세를 몰아세우면, 다른 조직들이 의심의 눈초리로 대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포세도 한동안 경남지구의 오물 수거만을 담당했고, 다른 지구로의 진출은 거의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기에 토엔도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경관지구를 먹어치웠다. 당연히 윗선이 있을 테지만, 당장은 그 윗선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경관지구를 먹어치우는 순간, 동시에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지속적으로 거래를 하던 대륙 쪽의 마약 공급처에서 거래를 끊겠다는 통보를 해 왔다. 토엔이 공급책으로서 신뢰를 잃었다는 것인데, 그들이 내세운 핑계가 바로 경관지구였다. “녹스에서 두 번째로 많은 수요가 있는 경관지구를 잃은 토엔과 함께 파트너십을 이어나갈 수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런 이유라면 되찾으려는 노력을 봐주던가, 아니면 되찾을 시간을 주든가 했어야지, 저렇게 공급을 일방적으로 끊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날 이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며 어떻게든 빼앗긴 지구를 되찾기 위해, 윗선에 계시는 분들을 차례로 만나가며 설득을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포세가 ‘다섯 번째 집’을 노린다? 모든 아귀가 맞춰진다. 아니, 애초에 좀 더 영리하게 굴었다면, 더 빨리 눈치챌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너무 느긋하게 있었던 탓인지, 토엔은 본인이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실책을 저지른 셈이었다. 이제 포세가 눈에 띄게 움직였다는 말은 곧 자신에게도 칼을 들이밀 준비가 끝났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비밀 장부를 뺏기면, 그의 모든 것을 뺏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떤 공급처를 확보하고 있는지, 어떤 수급지가 있는지, 어떤 계산으로 거래를 해왔는지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이를 뺏긴다? 차라리 자신의 간을 꺼내서 보여주는 편이 더 마음이 편할지도 모르겠다. 토엔이 서둘러 집을 나서려는데, 먼저 집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토엔은 우뚝 멈춰 서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침을 꿀꺽 삼키고 목소리를 냈다. “누…구냐?” 곧 문밖에서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루치드입니다.” 토엔은 얼른 문을 열었다. 원래도 얼굴이 하얀 편이던 루치드는 평소보다 더 하얗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 다른 사람의 얼굴색이나 감평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무슨 일이냐?” “이거 심부름으로 주라던데요.” 눈에 익은 주머니가 루치드의 손에 들려 있었다. 얼른 받아들려는데 루치드가 주머니의 아래쪽을 받쳐 들며 말했다. “여기 찢어졌어요.” “뭐?” 루치드는 북문에서 있었던 일부터 감시인의 으름장까지 자세하게 알렸다. 토엔은 가죽 주머니를 먼저 챙긴 뒤,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이게 뭔지도 들었어?” “아니요.” 루치드는 토엔의 살기 어린 시선에도 태연하게 표정을 감추고 토엔을 바라보았다. 토엔은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 아이는 일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비록 시기적으로 의심스러운 면도 없잖아 있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포세와는 연관이 없을 확률이 높다. 게다가 아직 어린아이기에 싸움에는 무소용이리라. 그렇다면 시간벌기로라도 이용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요.” 루치드가 틈을 노려 입을 열었다. “뭐?” “그거 마약이죠?” 순식간에 토엔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루치드를 노려보았다. 혹시 이 녀석은 첩자? “어떻게 알았냐?” “떨어진 가루 맛을 봤죠.” “뭐?” 마약을 먹었다고? 사실 이 마약을 사용하는 방법은 얇은 종이 위에 올려놓고 그 아래 양초를 대는 것이었다. 양초의 열기에 종이가 타기 전 마약이 먼저 증기를 내며 녹게 되어 있었다. 그러면 그 증기를 코로 흡입하는 것이 이 약의 올바른 흡입법이었다. 만약 이것을 그대로 녹여 먹는다면? 혀가 마비되고 온몸이 굳으며 뇌가 녹는 느낌이 들 정도의 열이 발생한다. 그래서 한참 동안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고, 움직이더라도 지금 루치드처럼 멀쩡하게 대화를 나눌 수 없다. “거짓말하지 마라. 이 약을 먹고 그렇게 서 있을 수 없다!” 루치드는 토엔의 흔들리는 동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아저씨가 이 마약을 사람들한테 팔고 있다는 사실이죠. 그건 범죄라고요.” 토엔은 갑작스러운 루치드의 설교에 잠깐이지만 얼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감히 누구 앞에서 저딴 소리를 한단 말인가? 겁대가리를 상실한 녀석인가? “너, 미쳤냐?” **** “대장님, 잠시 여기 좀 와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멋진 콧수염의 경비대장은 콧수염의 끝을 손으로 다듬던 중에 부하의 외침을 들었다. “무슨 일인가?” 경비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복장을 가다듬고는 뚜벅뚜벅 걸어서 경비대를 나섰다. 문을 열고 나서니, 밖에는 경비대원 두 명이 서서 대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요상하게도 삽을 든 채였다. “뭐냐, 그건?” 경비대원들에게 보수공사나 삽질을 시킨 기억은 없는데. 경비대원이라면 엄연히 이 성의 치안을 책임지는 병사로서 한순간이라도 사람들에게서 눈을 돌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하던 경비대장에게 그 삽은 심히 거슬리는 모양새였다. “실은 북문에서 일이 있었는데.” 경비대원은 북문에서 조기교대를 하고 경비를 서던 이였다. 북문에서 일어난 해프닝을 설명하고는 오물을 치우기 위해 삽으로 치우던 중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는 설명이었다. 대장은 코를 막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결론이 뭔데?” “마약 같습니다.” “뭐?” 경비대장의 눈이 크게 떠지는 순간이었다. 얼른 다가와 삽을 살폈다. 오물 섞인 진흙 위에 하얀 가루 같은 게 설탕처럼 뿌려져 있었는데, 설탕은 아닐 것이다. 소금처럼 굵지도 않고. “정말이냐?” “사실, 확신은 못 했습니다만….” 그 경비병의 말을 옆에 선 경비병이 대신 받았다. “오전에 북문 순찰 중에 쓰러졌던 도순 말입니다. 조금 전에 죽었습니다.” “뭐?” “그런데 의사의 말이… 마약 중독 같다고 합니다.” 경비대장의 눈이 이보다 커질 수 없다는 듯이 동그랗게 떠지며, 동시에 입이 벌어졌다. 마약은 ‘마법사의 저주’라고도 불렸다. 또 다른 사람들은 ‘마법사의 축복’이라고도 불렀다. 당연히 마약을 애용하고 상습 복용하는 이들의 말이었다. 마약이 사람들한테 정확히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막연하게나마 환상의 끝을 보여준다는 식으로만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저주’인 이유는 마약이 퍼지면, 곧 그 성 혹은 도시가 몰락 직전에 이르는 상황에 도달하기 때문이었다. 마약은 중독성이 강해서 한 번 복용하면 끊을 수가 없고, 의도치 않게 공기 중으로 소량만 흡입하더라도, 중독되어서 마약을 찾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실제로 마약 때문에 지역 봉쇄가 결정된 곳도 있었으니 단순히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경고만은 아니었다. 심한 중독의 경우에는 곧 죽음에 이르게 되고, 심하지 않은 중독이라도 가정의 파탄, 경제의 파탄을 불러온다. 어떤 이유든, 흡입 한 번만 해도 죽음으로 향하는 마차에 오르는 격이었다. “범인은? 범인의 얼굴은 아느냐?” “그게, 똥쟁… 아니 오물 수거용 수레에서 떨어졌습니다.” 대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포세냐, 토엔이냐?” “그것까지는….” 업무를 주로 보던 곳이 북문이 아니었던 경비병으로서는 루치드가 토엔의 소속인지, 포세의 소속인지를 분간할 능력이 없었다. 그리고 그걸 알아보고 있을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당장 병력을 준비해라. 구관 지구로 가봐야겠다. 어느 놈이든 붙잡아서 문초를 해봐야 하겠다.” 경비대원은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명을 수행하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 [253] 원망(4) 성벽 아래, 해자의 틈에서 가루의 맛을 보았을 때, 루치드는 매우 강렬한 ‘환각’을 느꼈다. 루치드도 바보가 아닌 이상, 소금이나 설탕도 아닌 하얀 가루를, 그것도 경비대 모르게 비밀리에 옮겨야 하는 하얀 가루를 보고 ‘마약’을 떠올리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맛을 본 것은 첫째는 마약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엉뚱하게도 호기심에 맛을 보고 싶다는 충동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그것은 ‘의무감’이었다. “네. 미친 것 같아요.” 당연히 그런 의무감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루치드는 알 수 없었다. 돌이켜보건대,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먹어야 한다’고 누가 명령한 것도 아니고, 다만 ‘먹어야 한다’는 의무감이라니. 먹지 않으면 어찌 될 것인가? 그런 의문도 없이, ‘먹어야 한다’니. “뭐?” “이거요. 완전히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물질이네요. 사실은 그냥 버리려고 했어요. 이거, 사람들에게 전해져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너무 궁금해서요. 도대체 이게 뭐죠? 뭐길래 지금 절.” 다만 그 사실을 토엔에게 이야기할 순 없었다. 토엔 아닌 누구에게라도 말할 수 없었다. 루치드는 잠시 말을 끊었다. 토엔은 느긋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도 잊고 루치드의 뒷말을 기다렸다. “뭐?” “와.” 갑자기 생각이 났다. 마치 인지의 경계선에 섰을 때, 이랬던 것 같았다. 넘어서는 안 될 선.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이 ‘넘어서는 안 돼’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이 금기가 되어 행동의 제약을 가져왔던 것처럼. 이번에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누구도 먹어, 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먹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루치드는 히죽 웃었다. 뜬금없는 루치드의 감탄사에 토엔은 황당해하고 있다가 약의 효능 때문에 루치드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런 미친놈이.” 미친 꼬마 녀석 때문에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언제 포세가 칼을 들이밀고 등장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인데, 여기서 꼬마랑 노닥거리며 여유 부릴 때가 아니었다. 토엔은 주머니의 터진 쪽을 꼭 쥔 채로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런데 루치드가 그 앞을 막았다. 막을 뿐만 아니라 손을 들어 토엔의 가슴을 툭 밀었다. 토엔은 방심했다고 생각했다. 방심했으니까, 저 꼬마의 손장난에 말려서 이렇게 바닥을 구르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주먹 좀 쓴다는 녀석들도 자기 앞에서 실실 기는 판국에 어린 꼬마 아이와의 힘 싸움에 밀려 바닥에 쓰러지는 자신의 모습은 인정할 수 없었다. 토엔은 언제 쓰러졌냐는 듯 벌떡 일어났다. 넘어질 때 등과 머리를 심하게 찧은 것 같긴 한데, 쪽팔림이 더 컸던지 고통은 없었다. “이 새끼가 죽으려고 환장했나?” “그거 뭐예요? 뭐길래 절 이렇게 만드는 거죠?” “뭐?” “지금 제 눈에 토엔이 이상하게 보이는 거 알아요?” 심한 중증 중독자들이 저런 소리를 내뱉곤 했다. 하늘에서 금덩어리가 쏟아져요, 입에서 무지개가 나와요, 물고기를 갈랐더니 아이가 나왔어요, 같은 헛소리들. 더는 말장난을 할 시간이 없었다. 토엔이 우격다짐으로, 아니 한방에 루치드를 때려눕힐 심산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그런데 루치드가 사라졌다. 아니 루치드는 가만히 있었는데 주먹이 루치드를 치고 지나갔는데 치질 못했다. 토엔은 방금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분명 정확하게 맞춘 것 같은데, 루치드가 사라진 것 같다는 느낌은 있는데, 눈앞에 루치드는 그대로 서 있고, 다만 자신의 주먹이 지나갔는데, 무언가를 맞췄다는 기분은 들지 않으니 이게 무슨 일인가? 토엔은 당황스러워하다가 문득, 자신이 터진 주머니를 쥐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설마 중독된 것인가? “이런 썅!” 토엔은 이번엔 발을 크게 휘둘렀다. 역시나 발이 루치드가 있던 곳을 지나가는데, 루치드를 헛쳤다. 잔뜩 힘이 실린 발차기에 몸이 돌아가며 그대로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정면을 바라보는데, 똑같은 위치에서 똑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루치드였다. “안 돼요. 그건 밖으로 나가면 안 되는 물건이잖아요. 나가려면 그걸 두고 나가시든가.” “이런 미친 새끼! 뭐라 씨불여대는 거냐!” 약이 잔뜩 오른 토엔이 몸으로, 어깨로 밀고 나가려는 자세를 취하고 달려들었는데, 루치드가 손바닥을 뻗었다. 그리고 토엔은 잠시 세상이 뒤집히는 느낌을 받았다. 뭐지, 하고 혼란스러워할 때, 머리에 강한 충격이 느껴지고 뒤이어 등과 다리, 팔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가 밝아지면서 자신이 강한 힘에 밀려 쓰러졌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믿을 수 없었다. 고개만 겨우 들어 바라보니, 역시 루치드라는 작은 꼬마밖에 보이지 않았다. 자기보다 머리 두 개는 작은 신장에 덩치는 반의반도 되지 않을 몸인데, 어떻게 자신을 이렇게 바닥에 눕힌단 말인가? 게다가 자신은 어떻게 쓰러졌는지 그 방법도 유추할 수 없었다. 루치드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토엔, 아저씨가 지금 어떻게 보이는지 알아요? 토엔은 이해할 수 없는 힘을 가진 루치드가 두려워졌다. “토엔, 도대체 그 약이 뭐죠?” 토엔은 한 걸음 다가서는 루치드를 피해 등과 다리로 바닥을 밀며 물러났다. “저리 가! 안 가?” 루치드는 천천히 토엔에게 다가왔고, 토엔은 뒤로 물러났다. “토엔, 제 머리가 터질 거 같아요. 토엔.” 심하게 중독된 듯하다. 어쩌면 저 꼬마 놈, 곧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런 놈들이 죽기 전에 지랄발광하면 자기도 다칠 수 있었다. “저리 가라고!” “토엔, 머리가 터질 거 같아요.” 말하는 건 마치 머리가 터져 죽겠어요, 라고 고통을 호소하는 것 같지만, 정작 루치드의 얼굴은 평온 그 자체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토엔.” 토엔은 뒤에 벽이 닿는 느낌을 받았다. 더 이상은 물러설 수 없게 되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현 상황에서 루치드가 자신을 향해 선언했다. “토엔, 당신을 인수분해 해야 할 거 같아요.” “뭐?” **** 포세는 느긋하게 걸어갔다. 그렇지 않아도 더운 날씨인데, 굳이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을 적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어차피 토엔은 도망갈 곳이 없을 것이다. 그의 집, 아니면 그의 안가. 그 두 곳 외에는 갈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마당이다. 당연히 다른 곳을 포세의 부하들이 점거하고 있으니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복잡하게 얽힌 골목들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저 멀리 토엔의 집이 보였다. “포세, 저희가 먼저 가보겠습니다.” 부하들이 만일에 대비하겠다는 뜻을 비치자, 포세는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조끼를 단단히 동여매고, 긴 나이프를 고쳐 잡은 부하들이 굵은 허벅지를 당기며 땅을 울리고 먼지를 뿌리며 달려갔다. 그들의 쿵쾅거림이 보기 좋았다. 언제나 열심히 산을 오르는 그들이다. 그들이 밀어주기에 포세는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생각만 그럴 게 아니라, 조만간 남쪽의 저 산에 비밀터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정도 높이에서 바라보는 녹스 성은 장관일 테지. 녹스를 자기 손에 둔 뒤에, 이를 바라보며 웅비의 꿈을 키우는 것이다. 대륙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자신의 꿈을. 문을 벌컥 열고 소리를 지르는 부하들이 보였다. 부하들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도 보았다. 저 덩치들이 날뛰면 허름하기 짝이 없는 토엔의 집 정도는 금방 부서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 느긋하게 기다릴까?’ 바깥에서 뒷짐을 지고 여유롭게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면 부하들이 곧 피범벅이 된 토엔을 질질 끌고 나오겠지. 자신은 천천히 다가가 무릎 꿇은 토엔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토엔은 어떤 눈을 하고 있을까? 살려달라고 빌려나? 아니면 깡이라도 보여주겠다고 소리를 지를까? 아니면 생각도 못 한 제안을 들고나와서 협상을 시도할까? 생긴 것과 다르게 머리가 좋은 놈이니 어떤 짓을 할지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짓을 하든 자신은 가볍게 웃어주리라. 그리고 그의 머리를 밟고 진흙에 비벼주리라. 그것이 정상에 선 자의 여유이리라. 생각이 길어지는데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 집이 코 앞인데, 생각보다 집이 조용했다. 무너질 생각도 하지 않았고, 다투는 소리도 없었다. 더구나 들어간 부하들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거리에는 자신과 뒤따르는 부하들이 만들어내는 소음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저곳에는 그런 소음마저도 없었다. “야, 애들 왜 안 나와?” 한 녀석이 눈치 빠르게 뜻을 알아채곤, 옆의 선 사람의 어깨를 툭 쳤다. 그리고 두 사람이 포세를 앞질러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침묵. 어느새 포세 무리는 집 앞에서 걸음을 멈췄고, 열린 문 안으로 짙은 어둠이 자리하고 있음을 두 눈으로 지켜보는 중이었다. 어둠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방금 들어갔던 사람들마저 어둠에 잡아먹힌 듯했다. 조금 전까지 더워서 땀이 흘러내리던 팔이 바싹 마르며 소름이 돋았다. 털들이 삐죽 서는 느낌까지 들어, 포세는 괜히 쪽팔렸다. 뒤에 선 부하들이 혹시 자신의 팔에 선 털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포세는 일부러 크게 팔을 휘두르며 명령했다. “애들 다 데리고 나와.” 다시 무리의 앞에 섰던 세 사람이 집으로 들어갔다. 다만 이전의 부하들과는 다르게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키튼, 제호, 얀도?” 들어간 이들의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아무도 대답을 안 하는데요?” 한 녀석이 돌아보며 멍청한 소리를 했다. 아무래도 겁이 난 것이리라. 포세는 눈가를 좁히며 들어가라고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세 사람이 눈치를 보다가 한 사람이 용기를 내서 어둠 속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어둠이 그를 잡아먹는 것처럼 보였지만 포세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으허어!” 처음으로 집 안에서 비명이 들렸다. 단말마의 비명이랄까? 짧은 비명은 곧 그의 운명처럼 사그라들었고, 더 이상 집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제길,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포세는 한 차례 발을 굴러 짐짓 화가 난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는 화가 아니라 겁을 먹은 것이지만, 그런 모습을 부하들에게 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모두 들어가!” 부하들은 머뭇거리다 열린 문 앞으로 다가갔다. 다가가는 순간까지도 누가 먼저 들어갈지는 결정하지 못한 듯, 다들 주춤거리는 모습이었다. 이럴 때, 다른 조직의 우두머리였다면 먼저 칼을 뽑아 들고 앞장을 섰겠지만, 포세는 안전제일주의였다. “빨리 들어가라고, 새끼들아!” “들어가긴 어딜 가, 이 개 쌍놈의 종자들아!” 골목 어딘가에서 울려 퍼지는 우렁찬 목소리, 그리고 그 뒤를 잇는 힘찬 함성. “모두, 저자들을 제압하라!” 명령과 그 뒤를 따르는 복창의 함성이 있고, 골목에서 우르르 빠져나오는 사람들은 바로 녹스의 치안을 맡은 경비대원들이었다. **** 게리는 절뚝거리면서 길을 걷고 있었다. 얼굴 한쪽이 심하게 부어서 눈도 제대로 뜰 수 없는 지경이었다. 오른쪽 허벅지도 심하게 부풀었는데 제대로 힘을 주지 못하는지, 계속 절룩거렸고 그 외의 다른 곳도 자세히 보면 성한 곳이 없다 할 정도로 상처투성이였다. 협박과 고문에 장사가 없다지만, 특히 두려움이 많았던 게리는 괜한 고문을 받기 전에, 더 심한 폭력을 행사하기 전에 자신이 아는 바를 모두 토설했다. 구레나룻이 지하실을 나간 뒤, 자신도 곧 풀려날 줄 알았다. 하지만 남은 덩치들이 심심하다면서 자신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말했잖아요! 다 말했잖아요! 풀어준다고 하셨잖아요!” 덩치가 게리의 머리끄덩이를 비틀어 잡고 히죽 웃었다. “언제?” 그 뒤로 손발을 가리지 않고 휘두르는 덩치들이었다. 비명을 질러도 멈추지 않았고, 눈물, 콧물을 다 짜내어도 힘이 약해지지 않았다. 혼절했으면 좋겠는데, 또 매번 고통이 주어질 때마다 각성한 것처럼 정신이 들어서, 결국 게리는 끝날 때까지 고통을 맛봐야 했다. 고문은 때리는 게 지겨워질 때까지였다. 간단한 식사를 마친 것처럼 포만감을 느끼는 얼굴을 하며 얼굴과 목, 손에 묻은 피와 땀을 닦아낸 덩치들은 게리를 그대로 버려두고 지하실을 나가버렸다. 게리는 한참을 지하실에서 버둥대며 꿈틀거리다가 더 이상 덩치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질 때쯤에야 겨우 일어나서 지하실을 나왔다. “개새끼, 구역질 나는 새끼, 똥물을 퍼다 마실 새끼.” 지나가는 사람들이 듣지 못할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길을 걷는 게리였다. 어차피 지나가는 누구도 게리를 붙잡지도,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거리를 멀찍이 두고서 돌아가는 형국이었으니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말해도 누구 하나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게리는 지하실을 나온 뒤, 바로 숙소로 향했다. 숙소 매트리스 안쪽 깊숙이 숨겨놓은 돈을 꺼내 들고 달아날 생각이었다. 그간 나름대로 먹을 거 아껴가며 돈을 모았다. 벌이 자체가 시원찮은지라 큰돈은 아니겠지만, 이곳을 벗어나 다른 도시로 갈 경비 정도는 될 것이라 기대하면서 게리는 걸었다. 마른 흙바닥에 먼지가 풀풀 날리며 게리의 흔적을 길게 남겼다. ======================================= [254] 원망(5) “다 모였습니다.” 경비대장은 모처럼 출격(?)을 나가는 마당에 확실하게 복장을 갖춰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던지, 허리띠에 긴 예식용 칼과 실전용 칼 두 자루를 꽂아 넣고 가슴에는 검은색 조끼에 붉은색 휘장까지 달아서 누가 봐도 경비대장임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붉은 짧은 망토(short cape)까지 두르고 나서니 이 날씨에 가당키나 한가, 하는 불충한 생각마저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경비대장은 오히려 당당한 포즈로 연단에 서서 모인 병사들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우리 동료에게 일어난 불행한 사고에 대해서 모두들 들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일은 바로 우리가 담당하는 성 내에 마약이 들어왔다는 첩보다.” 병사들은 들고 있던 창과 칼을 굳게 쥐고 경비대장의 연설을 들었다. “우리 경비대가 그토록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눈을 피해 마법사의 저주가 우리 녹스에 들어왔다는 충격적인 소식에 본관은 심히 걱정스러움을 감출 길이 없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본관은 우리 경비대가 지금이라도 빠르게 움직인다면, 얼마든지 우리 눈을 피한 악의 무리를 포도(捕盜)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한다. 어떤가, 제군들. 자신 있는가?” 경비대원들은 함성을 지르며 자신감을 표출했다. 되도록 크게, 우렁찬 목소리로 함성을 질러 경비대장의 콧수염 끝이 위로 올라갈 수 있게끔. 경비대장은 빛나는 눈동자로 경비대원을 바라보며 마지막 구호를 외쳤다. “녹스의 정의를 위하여!(Dikaio gia ta Nox)” “디키오 지타 녹스!” 경비대장은 말에 올라타고 곧장 중앙대로로 향했다. 그 뒤를 경비대원들이 무장을 갖추고 뒤따랐다. 이윽고 구관 지구에 도착한 이들은 미리 와서 사태를 파악하기 시작한 경비대원의 첩보에 따라 토엔의 집 주위로 포위망을 갖추기 시작했다. “잘하면 어둠의 무리를 모두 일망타진할 수도 있겠군.” 정확히 표현하자면, 녹스 성내에 암약하는 어둠의 조직 중 두 집단을 잡는 것이지만, 굳이 그 점을 지적하려는 참모는 없었다. 대신 구체적인 작전 개요를 설명하는 것으로 경비대장을 만족하게 했다. “현재 포세가 토엔에게 거의 도착했다고 하니, 이쪽 길로 진출해서 퇴로를 막는 것도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때문에 이쪽 루트에서 일부 병력을 돌려 여길 막으면 확실히 도망갈 곳이 없을 것입니다.” 교대병력과 휴식 중인 병력까지 총동원한 까닭에 인원에 부족함은 없었다. 개별루트로 따지면 수가 많지 않을 수 있지만, 포세나 토엔이 눈치채기 전에 포위망을 갖추고 전열을 짜면 절대 뚫리지 않을 것이라 자신한 참모의 작전에 경비대장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치하했다. “이대로 시행하게.” 그리고 마침내 토엔과 포세가 마주 보는 상황이 연출되었을 때, 경비대장은 외쳤다. “모두, 저자들을 제압하라!” 경비대장의 명령에 경비대원들은 모두 복창하며 골목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적들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재빠른 경비대원들의 전열에 포세를 비롯한 건달패거리들은 패닉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였다. 경비대장은 가슴을 쭉 내밀고 말을 몰아 다가갔다. “이런 제기랄!” 포세는 나름대로 조용히 움직인 것인데, 어떻게 알고 경비대원들이 나타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또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직 포세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부하 몇 사람을 집 안으로 들여보내긴 했지만, 겉으로 봐서는 어떤 싸움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전쟁을 일으킨 것도 아니었으니, 경비대가 어떤 이유로 왔는지 몰라도 자기 때문은 아니리라 판단했다. 게다가 토엔의 집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경비대원들이 아닌가? 비록 그 숫자가 많다지만, 아직 길은 있다고 여긴 포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대장님, 여긴 어인 일이십니까?” “낯짝도 두껍구나. 감히 중범죄를 저지르고도 본관에게 안부나 묻고 있으니, 과연 감옥에서도 그리 할 수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중범죄라니요? 저희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토엔과 사업적인 문제로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다 여겨서 이렇게 모였을 뿐입니다. 만약 사람을 모은 게 죄가 된다면, 당장에라도 사람을 물리겠습니다.” “살쾡이 같은 놈이로고. 어디서 본관을 우롱하는 것이냐! 너희나 토엔이라는 놈이나 모두 같은 놈들임을 내 모를 줄 알았더냐!” 포세는 줄곧 강하게 나오는 경비대장의 태도가 자못 의심스러웠다. 혹시, 하는 마음이 없잖아 있었지만, 경비대가 알 리가 없다고 여겼다. 무려 3년간 들키지 않고 사업을 확장해온 토엔은 물론이고, 자신도 여간 조심했던 것이 아니니 경비대원들이 어찌 알 것인가. 마침 자신의 무리에서 두뇌를 담당하는 이에게 눈을 돌려 봤지만, 그 역시도 영문을 모르는 모습이었다. 포세는 용기를 내서 다시 항변했다. “어떤 오해가 있으신지 모르겠으나, 저희는 정말 사업적인 문제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왔을 뿐입니다. 아시겠지만, 저랑 토엔이 오물 수거업 때문에 약간의 마찰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하러 온 것입니다. 부디 이를 참작하여 주시고, 혹 토엔에게 볼 일이 있으시다면 저희는 이대로 조용히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경비대장은 코웃음을 치며 포세를 내려다보았다. “영악한 놈인지, 아둔한 놈인지 모르겠구나. 내 너희들이 오물 수거업을 핑계로 마약을 다루는 놈들인 줄 모르는 줄 알았더냐? 너희들 모두 죗값을 달게 치러야 할 놈들이다!” ‘마약’이 나온 순간, 포세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어디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경비대원에게 걸린 것이다. 이런 위기의 순간, 포세의 머리는 평소보다 3배 이상 빨리 돌아간다. “집으로 들어가!” 외침과 동시에 먼저 토엔의 집을 향해 뛰기 시작한 포세는 어차피 주위를 포위한 경비대원들을 뚫고 나가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고 토엔의 집에서 항전하다가 틈을 뚫고 나가겠다는 계산을 한 것이다. 일단 자기편도 전열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다들 빨리 들어와라!” 포세의 뜻을 알아챈 친우이자 참모인 커세가 소리치자, 패거리들이 서둘러 집으로 뛰어들었다. 경비대장은 코웃음을 쳤다. “그런다고 도망갈 길이 열릴 것으로 생각하느냐? 어차피 너희는 단 한 명도 도망갈 수 없을 것이다! 모두 포위하라.” 경비대는 서두르지 않고 토엔의 집을 향해 완벽한 전열을 갖춘 채로 다가섰다. 하지만, 경비대들은 집 안에 들어선 패거리들이 꽤 숫자가 많았다는 것과 집에 들어갈 때도 소란스럽게 비명을 지르며 들어갔던 이들이 정작 집 안에 들어간 뒤에는 쥐죽은 듯이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점을 이상하게 여기지 못했다. 그리고 그 시간, 포세는 경비대를 만났을 때보다, 마약 공급이 들켰을 때보다 더 크게 당황하는 중이었다. “이게 뭐야?”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목소리에도 누구 하나 답하는 목소리가 없었다. 집 안은 밖에서 볼 때보다 더 어두웠고, 심지어는 방금 들어왔던 문이 보이지도 않았다. 오로지 어둠만이 존재하는 공간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이었다. 아니, 서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이런 느낌을 느껴본 적이 없어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굳이 말하면 ‘떠 있는 느낌’이랄까? 포세가 토엔의 집 앞에 오기 전, 토엔이 루치드를 피해 벽으로 물러섰을 때, 루치드가 나직이 말한 문장을 토엔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듣기는 들었는데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뭐?” 저도 모르게 뜻을 되물었다. 하지만 루치드는 감정 없는 눈으로 토엔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토엔의 시각에서 그렇게 볼 뿐, 실상 루치드는 토엔을 보고 있지 않았다. 눈은 토엔을 바라보지만, 루치드의 눈을 거쳐 신경을 지나 뇌로 들어와 조합되는 이미지는 평소의 눈으로 보는 이미지가 아니라 복잡한 숫자의 나열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숫자와 끝없이 연산 되는 계산식과 끝없이 출력해내는 결괏값들이 루치드의 머릿속을 채우는 중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숫자들을 보고 읽고 계산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루치드는 토엔이 자기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심지어는 토엔이 드러누워 있다는 사실과 토엔이 벽에 부딪혀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토엔이 기대고 있는 벽이―더 세밀하게 표현되지만, 간단히 나타내자면―두께 18.7㎝라는 것과 토엔의 머리에서 위로 13㎝, 왼쪽으로 3㎝ 정도의 위치에 조그만 구멍이 나 있고, 그 구멍으로 꼽등이가 머리를 내밀었다가 숨었다는 것까지 알 수 있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신비였다. 모든 세상과 사물과 심지어는 인간을 포함한 생물체까지 수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니! 끊임없이 변화하는 수식을 자신이 이해할 수 있다니! 심지어 어떤 수식은 자신이 배운 적도 없는 역학 관계식이 구성되는 중인데, 그것마저 어찌 된 일인지 그냥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또 그 현상마저도 이해가 되는 것이, 본래 인간이란 눈으로 보이지 않는 복잡한 현상도 간단하게 외물(外物)만 보고 ‘이해’를 한다고 착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가령 길가에 핀 꽃을 볼 때, 그 꽃이 씨앗에서 발아하는 순간부터 꽃을 피우는 순간까지의 모든 과정을 보지 못해도 꽃의 성장을 ‘이해’하는 것과 같았다. 같은 이유로 인간은 본래 시간의 틈을 보지 못하지만 이해한다. 매 순간 복잡한 생물학적,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는 꽃의 변화를 인간은 보지 못해도, 길가에 핀 꽃을 보고 예쁜 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과 같았다. 시간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움직이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은 사진이란 형태의 예술에, 미술이란 형태의 예술에 매료된다. 인간이 파악하지 못하는 시간의 틈을 시각적으로 구현해내니까. 그런데, 지금 루치드는 그 시간의 틈을 보는 중이었다. 끊임없이 변화해서 눈 한번 깜짝하면 지나가고 말 수의 향연에서 루치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보고, 읽고, 이해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의 틈에서 쏟아지는 엄청난 정보들로 인해 매 순간 깨달음을 얻는 루치드였다. 다만 한 가지 문제라면, 루치드의 뇌가 그 정보들을 모두 받아들이는데 과부하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환희와 격통. 그 두 가지가 현재 루치드를 짓누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루치드의 눈에 ‘읽히는’ 토엔은 그냥 복합적 생물학적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인간이 아니었다. 토엔에게서 ‘정상적’으로 흘러야 수의 중간중간 불규칙적이고 수식을 방해하는 ‘또 다른 수식’이 끼어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수는 굉장히 불편하고 불쾌하고 부자연스러웠다. 마치 정교하게 맞물린 체인의 중간에 색이 다른, 혹은 크기가 다른, 혹은 엇갈리게 맞물린 블록이 끼어든 느낌이랄까? 그래서 그 수를 제거해야만 마음이 편할 것 같고, 그래야 안정된 수의 흐름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워낙 복잡하게 꼬인 흐름 속에 끼어든 불순물을 그냥 제거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루치드가 떠올린 방식은 ‘인수분해’였다. ‘정상의 흐름으로 식을 전개하고 남은 불순물을 드러내어 그것들을 제거하는 방식.’ 이란 것이 루치드의 인수분해였다. 세밀하게 따지고 들자면, 항등식의 성립을 만족하는 다항식으로 치환하되, 그 과정에서 걸러지는 불순물의 존재를 밖으로 드러내게 하는 법이었다. 문제는 어떻게? 라는 것인데, ‘인수분해’를 떠올렸을 때, 루치드는 자신이 그 방법을 쓸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시작할게요.” 루치드가 ‘의지’를 드러내자, 토엔의 주위가 시커멓게 물들었다. 토엔이 보기엔 ‘물드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토엔이 존재하는 공간이 변화된 것이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 단어로 표현하자면 ‘공(空)’의 영역이었다. 모든 것이 비어버린 공간에 오로지 토엔만이 존재하도록 두었다. 루치드로서는 토엔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고, 다른 변수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기에 수를 다루는 것이 쉬워졌다. 이윽고 루치드는 토엔을 이루는 수의 구성을 변화시켰다. 정상과 비정상, 순수와 불순물을 나누었다. 토엔은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정신이 갈가리 찢어지고 해체되는 느낌은 육체에 가해지는 고통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고, 그 고통을 말로도 설명할 수 없었고 겉으로 드러낼 수도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토엔이란 존재 자체를 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얼마 후, 정확히는 포세가 선발대를 토엔의 집에 밀어 넣기 직전, 루치드는 토엔에게서 불순물을 걸러냈다. 그 과정이 토엔에게 어떤 고통을 주고,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루치드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불편함을 주는 수열과 수식을 ‘보기 좋게’ 정리했다는 기쁨만 있을 뿐이었다. 예컨대 자전거 기어로부터 고장 나 돌아가지 않는 체인을 떼어내 고친 후, 다시 기어에 꽂아 넣고 페달을 돌렸을 때, 페달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고 느끼는 기쁨 정도이리라. 루치드는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격통 속에서 작은 기쁨을 만끽하던 중, 또 다른 불순물이 자신의 영역으로 끼어드는 것을 알았다. 고장 난 것을 고치는 기쁨은 세상을 다 얻은 기쁨 만큼은 아니지만 소소한 즐거움 정도는 되었다. “이것들도 고쳐야겠구나.” 루치드는 영역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을 미루고 다시 ‘수리’에 들어갔다. ======================================= [255] 원망(6) 평소의 게리였다면, 숙소로 가는 길이 유난히 한산하다는 사실에 의아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뒷골목이라지만, 구관 지구의 특성상 골목마다 온갖 부랑배들이나 비렁뱅이들이 어슬렁거리며 진을 치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서 되도록 눈을 마주치지 않고 걸으려 애썼던 게리였다. 그런데, 지금 고통과 분노, 두려움에 휩싸인 게리는 제대로 주변을 파악하지 못했고, 마침내 숙소에 도착할 무렵에야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야, 저게.” 게리는 숙소 주위를, 정확히는 숙소 옆 토엔의 집을 포위하고 있는 경비대를 발견했다. 게리는 덜컥 겁이 났다. “설마, 내가 이야기해서 저렇게 된 거야?” 지금까지는 토엔에게 적대적인 부랑패 패거리에서 자신을 고문한 것으로 생각했는데―그리고 그게 사실이었지만, 게리는 몰랐다―지금 상황을 보니 자신이 말한 것 때문에 경비대가 출동한 것으로 보였다. 적대 패거리의 준동 정도와 경비대의 출동은 비교할 수 없었다. 게리는 토엔과 같은 패거리로 엮여서 잡혀가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져 바로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있는데도 이렇게 조용할 수 있나, 라는 생각이 들어 게리는 다시 몸을 숨긴 채로 고개만 내밀어 상황을 주시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상한 점이 한 둘이 아니었다. 일단 토엔이 붙잡혀서 끌려가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분명 토엔의 집을 목표로 경비대가 둘러싸고 있음은 분명한데, 토엔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토엔을 붙잡으려는 경비대의 모습치고는 너무 얌전한 게 아닌가? 침을 꿀꺽 삼킨 게리는 잠시 눈을 돌려 숙소를 보았다. 바로 옆의 집이긴 하지만, 경비대가 포위망을 좁힌 까닭에 숙소 쪽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숙소의 뒷문 쪽에는 경비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지금 게리가 서 있는 지점에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경비대의 현 위치 등을 감안하면 아무래도 그쪽까지 경비대가 서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쩌면, 몰래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게리는 눈동자를 열심히 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게리는 몸을 돌려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 시간, 누군가의 접근을 경계할 생각을 전혀 갖고 있지 않던 경비대장은 다른 경비대원과 마찬가지로 토엔의 집이 수상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봐, 저거 이상한 거지?” 경비대장은 평소 본업에 충실하기보다는 대장직이라는 지위에 더 관심이 있긴 했지만, 멍청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경비대장의 물음을 들으니, 아둔함을 직위로 감추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경비대원 함머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수상합니다. 쉽게 덤벼들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내부 상황을 면밀히 파악한 뒤에 기습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혹시 몰라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정면돌격은 안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경비대장이 알아듣고 잘못된 명령을 내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경비대장은 함머의 말을 듣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집을 바라보았다. 원래라면 말에서 내려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집 안으로 들어가 체포된 포세와 토엔을 내려다볼 작정이었는데, 이래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몇 명 보내서 살펴봐.” 함머는 눈이 좋고 날랜 경비대원 2명을 손가락으로 지목했다. 두 명은 곧 앞으로 나서 집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창문 따위는 만들어놓지 않은 집이고, 환기구는 한참 위쪽이라 키가 닿지 않기에 접근할 수 있는 경로는 오직 정문뿐이었다.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순식간에 어둠 속에 도사리는 독사가 되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입안이 바짝 말랐다. 다가선 경비대원 한 명이 한껏 몸을 숙이고 발을 재게 놀려 정문 옆 흙벽에 다가갔다. 뒤이어 반대쪽에도 같은 자세로 다가간 경비대원과 눈으로 신호를 주고받은 대원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이밀어 집 안을 살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집 안은 조용하기만 할 뿐 아니라 너무 어두워서 도통 실내를 파악할 수 없었다. 이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비록 지금이 한낮이라 태양이 정수리 위에 있어 그림자가 가장 짧을 때라지만, 이렇게 실내가 어두울 수는 없는 법이었다. 심지어는 정문에서 손 한 뼘 안쪽으로는 아예 빛이 어둠에 잘려 먹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뭐야? 왜 그래?” 한참 동안 집안으로 고개를 들이밀고도 보고가 없는 경비대원이 답답했던 경비대장이 소리쳐 불렀다. 경비대원은 경비대장을 향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 들어가서 살펴!” 경비대장의 명령에 화들짝 놀란 함머가 다급히 대장을 말렸다. “아직 내부 상황을 모르는 지금, 대원을 안에 들일 수는 없습니다. 괜히 애꿎은 동료의 희생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면 명령을 철회해 주십시오.” “그럼 어떻게든 상황을 알아봐! 저기서 멍청하게 모른다는 소리만 하지 말고!” 부하들이 꾸물거리는 이유가 자신이 엄하게 대하지 못해서라고 생각했던지, 경비대장은 소리를 질러 자신이 얼마나 화가 나고 답답한지를 알렸다. 효과가 통했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린 함머가 경비대장을 달래려는데 정찰을 담당했던 경비대원이 그보다 먼저 집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단 한 발만 밀어 넣고 저 어둠 속에 머리를 집어넣으면 뭐라도 보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한 행동이었다. 그 순간, 경비대원의 몸이 무언가에 붙잡힌 것처럼 빠르게 어둠 속으로 끌어 당겨졌다. 빨려 들어가는 경비대원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는데, 옆에서 대기하던 또 다른 대원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다급히 안으로 들어가는 대원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쿵, 하며 잡은 대원 마저 바닥에 심하게 넘어졌고, 그 순간에도 바지를 놓지 않은 대원의 의지와 용기는 과히 칭찬할 만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 대원 역시 집안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아니 어둠에 먹혔다. 그리고 다시 정적이 흘렀다. 경비대장은 물론이고 모인 이들 모두가 식은땀을 흘렸다. 이제는 저 집의 입구가 그냥 평범한 현관이 아니라, 괴물의 아가리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을 집어삼키는 괴물은 소리도 내지 않고 다음 희생자를 기다리는 것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대장님.” 경비대장의 정신을 깨운 것은 함머였다. “어, 어?”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그렇지? 일단…물러났다가 다시 정비해서 올까?” 경비대장의 아둔함에 질려버렸다는 표정을 감히 드러낼 수 없어 이를 꽉 깨문 함머는 고개를 저으며 의견을 밝혔다. “저희 대원 2명이 이미 저 집 안에 있는데, 이대로 물러나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저 옆에 벽을 부수고 들어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입구를 막고 양옆에서 벽을 부수고 들어가서 양동으로 진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입구가 좁은 탓에 대원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적을 제압하는 작전을 쓰기 어렵다면, 벽을 부수고 들어가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붙잡힌 대원을 구하는 것은 물론, 안에서 기다리는 적들을 제압하기에도 좋을 것 같았다. “그, 그럴까? 그럼 준비해.” 다른 좋은 생각이 없던 경비대장은 함머의 제안을 채택했고, 곧 함머는 다른 대원을 시켜 벽을 부술 수 있는 해머를 가지고 오게 했다. 그렇게 바깥에서 혼란을 수습하고 집으로 들이닥칠 준비를 하는 동안, 집 안은 또 다른 혼란이 수습 중이었다. “다 됐다.” 루치드는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눈에 보이는 모든 고장 난 것들을 고쳤다. 만약 어떤 경고등이 집 안에 달려 있었다면, 계속 적색 경보를 보내던 경고등이 파란 불로 바뀌며 정상적인 흐름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신호를 보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왔던 또 다른 불량품(?)도 고치고 나니, 주위의 모든 것이 바르게 흘렀다. 온몸의 힘이 쭉 빠지며, 다리가 후들거리는 느낌에 루치드는 근처에 있던 의자에 앉아 잠시 쉬기로 했다. 오랜 노동의 결과로 맞이한 휴식은 달콤했다. 반면, 그런 달콤한 휴식을 즐기지 못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토엔이었다. 토엔은 갈가리 찢어졌던 정신과 육체가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뭐지?” 조금 전까지 토엔이 느꼈던 감각은 단순히 고통 혹은 괴로움 따위로 묘사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녹슨 톱에 목이 천천히 썰려도 이토록 고통스럽진 않을 것 같았고, 코르크 따개로 가슴을 찌르고 심장을 도려내더라도 이렇게 미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감각이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니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사실 토엔은 오랫동안 충치 때문에 고생했다. 어찌나 심각한지 시시때때로 턱을 부숴버리는 듯한 통증 때문에 인상을 쓰는 게 습관이 될 정도였다. 그 때문에 사정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토엔의 표정을 보고 오해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토엔은 그 치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고통 때문에 아픔을 못 느끼는 것이 아닌가, 라는 가정도 했지만, 곧 진짜 아프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금니를 꽉 깨물어도 전혀 턱과 잇몸에 가해지는 충격과 고통이 없던 것이다. “세상에….”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 잘못 몸을 놀려 무릎을 다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무릎 역시 제대로 펴지지 않았고, 억지로 곧게 펴려 하면 온몸을 찌릿하게 만드는 통증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리 다리를 곧게 펴고 뻗어도 전혀 아프지 않은 것이다. 이쯤 되니, 토엔은 평소 아팠던 여러 부위를 모두 점검했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생긴 어깨의 결림이나, 얼마 전 생긴 종기 때문에 간간이 괴로워야 했던 등의 통증도 전혀 없었다. “이게,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늘 자신을 괴롭히던 만성 통증이 사라지니 이토록 상쾌할 수가 없었다. “일어나셨네요.” 옆에서 들려온 평온한 목소리에 토엔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서서히 어둠이 옅어지면서 주위가 밝아졌고 곧 자기 앞에 앉아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루치드가 보였다. 그리고 그때 토엔은 자신의 시력마저 좋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언제부턴가 시력이 저하되어 가까운 사물도 흐릿하게 보이곤 했는데, 지금은 마치 자신이 십 대의 나이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 만큼 선명하게, 루치드가 보였다. 땀에 젖은 새까만 머리카락이 이마 위에서 흔들거리는 모습과, 미세하게 위아래로 흔들리는 턱, 잘게 떨리는 눈꺼풀의 움직임까지,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다. “뭐 한 거야? 나한테 뭐 한 거야?” 토엔은 조심스럽게 루치드에게 물었다. 사정은 모르지만, 루치드가 ‘시작하겠다’는 선언 이후 자신의 변화가 생겼다는 점을 떠올린 토엔은 루치드에게 목소리를 높일 수 없었다. “그냥, 고장 난 걸 고쳤을 뿐이에요.” ‘고장’이란 말이 만약 ‘병’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니가 날 ‘치료’한 거냐?” 루치드는 아래로 향해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눈동자를 올리는 것뿐인데도 매우 힘겨워 보인다고 토엔은 생각했다. “치료요? 아뇨, 그냥 ‘고장’난 거였어요.” 토엔은 루치드의 대답에 다소 혼란스러웠지만, 더욱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저기, 혹시, 그러니까….” 토엔은 머릿속에 떠도는 단어들을 고르고 골라 힘겹게 뱉어냈다. “의사…는 아닌 거 같고, 누, 누구시죠?” 루치드는 토엔을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지었다. “누구라뇨? 전 루치드에요. 아침에도 봤었잖아요.” “아니, 근데, 어떻게 똥쟁…, 아니 죄송합니다. 저기….” 토엔이 하는 모습이 우스웠던지 루치드는 키득거렸다. 그러다 사레가 걸렸는지 콜록거렸다. 간신히 목을 가다듬고 다시 토엔을 바라보던 루치드는 통증이 있는지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아까보다 훨씬 보기 좋네요.” “뭐?” “아까는 너무 보기 흉할 정도로 엉망이었는데, 이제 보기 좋다고요. 토엔을 바라보는 게 편하니까 말하기도 편하네요.” 잠시 숨을 고르던 루치드가 말을 이었다. “이제 고장 내지 마세요.” 토엔은 머리를 저었다. 지금까지의 대화를 나름대로 해석해서 지금의 말을 이해해 보자면, ‘건강하세요’라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자신은 루치드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짓을 하지 않았다. 직업을 구해주긴 했지만, 사실 솔직한 말로 제대로 된 직업도 아니고 똥물이나 퍼다 나르는 더럽고 모두 기피하는 일인 데다가 일당도 많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일이나 주선한 주제에, 오랜 세월 자신을 괴롭혔던 병들을 말끔히 낫게 해준 분(!)에게 ‘건강하라’는 인사말까지 들을 자격이 있을까? “저기 근데, 왜 날 고쳐준 거…에요?” 루치드는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유는 말씀드렸잖아요. 보기 흉할 정도였다고. 보기 편하려고 고친 것뿐이에요.” 토엔은 루치드가 겸양을 떠는 것으로 생각했다. 멋쩍음에 머리를 긁적이던 토엔은 머리를 긁어도 가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늘 머리가 가렵고 긁으면 비듬이 쏟아지곤 했는데. “아니, 사실 말이야. 내가, 아니 제가 그렇게 잘해준 것 같지도 않고 말이죠. 제가 그…쪽 분한테 이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해서요.” 루치드는 가만히 토엔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저었다. “오해세요.” 루치드의 대답에 토엔은 자기가 뭘 오해했는지, 자기가 루치드에게 잘 대해줬던 게 무엇이 있었던지 떠올리려 노력했다. “그냥 제가 보기 편하려고 고친 것뿐이에요. 길 가다 떨어진 쓰레기 줍는 거랑 똑같은 거예요.” 토엔은 멍하니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쓰레기? “그러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그쪽 분들도요.” 토엔은 소리 나게 고개를 돌렸다. 멍한 얼굴로 자신과 루치드를 바라보는 포세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 [256] 상승(1)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감히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 일을 겪고도 자신의 수준에서, 지금까지 수십 년을 살아오며 수천, 수만 단어의 어휘들을 배우고 익히고 써먹었을 텐데도 지금의 현상, 지금의 체험을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내가 없다가, 갑자기 내가 다시 생겼다.’ 정도나 될까? 그런데, 이렇게 표현하면 자신이 겪은 고통과 절망과 공포에 대해서는 전혀 묘사되질 않으니 부족함이 많았다. ‘엄청난 고통 속에 내가 사라졌다가, 사라지고도 계속되는 고통과 죽음을 뛰어넘는 공포와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의 시간이 영원히 이어지다가 갑자기 내가 다시 생겼다.’ 라고 표현해도 이상했다. 특히 마지막의 ‘생겼다’는 표현은 다른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던 와중에, 멀지 않은 곳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문득 자신 역시도 대화 속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기적(!)을 체험했음을 깨달았다. 포세는 아주 오래전에 적대 패거리와 싸움질을 하다가 오른쪽 귀를 다쳤다. 그 후, 오른쪽 귀가 전혀 들리지 않았고 늘 희미한 이명(耳鳴)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이명이 전혀 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매우 선명하게 대화가 들리니, 오른쪽 귀의 청력이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또 며칠 전, 사소한 실수로 팔꿈치 부근에 심한 타박상을 입었었는데, 지금 그 부위에 전혀 통증이 없었다. 손으로 꾹꾹 눌러도 아프지 않기는 마찬가지. 게다가 조금 전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상쾌한 기분이 들어서 의아해했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속이 편해서였다. 세력 다툼과 본격적인 확장에 앞서 준비를 하는 기간에 신경을 너무 썼던 나머지 소화가 잘 안 되고, 속 쓰린 통증이 발병했고, 그 때문에 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심지어는 속 쓰림이 너무 심해서 잠을 자지 못할 때도 잦았는데, 그 지긋지긋한 통증이 전혀 느껴지질 않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자잘하게 있던 부상들이 말끔히 사라졌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자신의 몸에 생긴 변화도 당황스럽고, 귀에 들려오는 대화의 내용도 혼란스러운 포세였다. 그래서 자신이 왜 여기에 왔는지 그 목적마저 잠시 망각했던 포세가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몸을 일으켜 세울 무렵, 목소리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러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그쪽 분들도요.” 그리고 그때, 포세는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토엔과 눈이 마주쳤다. “어?” “아!” 토엔은 포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이유를 몰라 의문을 표했고, 포세는 토엔의 얼굴을 보자 왜 자신이 여기에 왔었던지를 떠올렸다. 거의 조건 반사적으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간 포세는 칼집에 손을 가져갔다. “너 뭐야? 니가 왜 여기 있어?” 토엔이 얼떨떨해하며 물음을 던졌으나, 포세는 대답 대신 칼을 뽑아 들었다. 자신에게 생긴 변화는 둘째치고, 오랜 시간 동안 벼르고 벼려왔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에 집중한 포세는 지금이 기회임을 알았다. 생김에 맞지 않게 늘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깔아보던 토엔이 저렇게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면 언제 저 녀석을 제칠 수 있겠는가. 포세는 칼을 든 손에 힘을 주고 토엔을 향해 힘껏 달려들었다. **** 게리는 헐떡이는 숨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어 주변을 훑었다. 조금만 가면 금방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경비대의 눈에 띄지 않게 돌아오느라 다친 몸을 혹사한 것도 모자라, 갑자기 흩어지는 경비대원 때문에 갑자기 숨느라고 몸을 급히 움직였던 터라 신음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숨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억지로 두 손바닥으로 입을 막고 버텼더니, 가슴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그런 노력 덕분에 게리는 경비대에게 들키지 않고 숙소 근처까지 다가올 수 있었다. 이제 눈앞에 드러난 골목만 들키지 않고 건넌다면 숙소로 들어가는 뒷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분주해진 경비대원들 때문에 들킬까 봐 차마 움직일 수 없었다. 녹스 성의 경비대원들이 모두 출동한 듯 사람이 몰려든 와중이라 거리를 돌아다니는 행인 한 명도 보이지 않는데, 여기서 모습을 드러내면 단순히 의심만 사는 정도로 끝나지 않으리라. “하아.” 게리는 가쁜 숨을 억지로 누르며 조금씩 천천히 숨을 내쉬다가 마침내 숨을 고른 뒤, 계획을 세워보았다. 너무 많은 눈들이 골목과 주변을 살피는 중인지라, 이렇게 몸을 숨긴 것도 용했다. 하지만 저들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모르는 상황인데 여기서 오래도록 기다릴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궁리해봐도 자신의 능력으로서는 저 눈들을 피해 거리를 지나갈 수 없었다. 뭔가, 저들의 시선을 빼앗는 어떤 일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은. “어? 안이 보입니다!” 토엔의 집 앞을 지키고 있던 누군가의 외침에 기적같이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게리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외침이었지만, 자신이 기다렸던 기회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게리는 절룩거렸던 다리의 고통도 잊고 오로지 ‘건넌다’는 일념 하나로 거리로 몸을 던지다시피 뛰쳐나갔다. 큰 걸음으로 네 걸음이면 지나갈 수 있는 거리가 왜 그렇게 넓은지. 첫발이 땅에 닿고, 발을 땅에 딛는 소리가 너무 크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 번째 발이 땅에 닿을 때, 허벅지로부터 시작되어 전신을 관통하는 통증에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신기하게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야 하는데, 깊게 새긴 음각(陰刻)처럼 지워지지 않는 한 단어는 ‘뛰어라’였다. 세 번째 발이 땅에 닿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네 번째 발이 땅에 닿을 때는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의 보폭이라면 4걸음이면 건널 텐데, 지금 자신의 몸의 부상을 고려하지 않고 뛰었던 터라, 의지와 달리 몸은 정직하게도 통증과 긴장을 호소했다. 한 걸음, 아니 두 걸음을 더 뛰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다섯 번째 발이 닿을 때, “저기다!” 라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부디 자기만 아니길 바랐다. 여섯 번째 발이 닿을 때, 다시 생각이 사라지면서 대신 눈앞까지 하얗게 변하는 통증이 왔다. 그것은 흐르는 물을 손날로 갈랐을 때, 순간적으로 물의 흐름이 끊어지는 순간보다 더 짧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게리는 숙소의 뒷문으로 향하는 골목 안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계속 뛰어야 한다고 하는데,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조금 전의 뜀박질이 마지막 힘을 다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력이 다해 앞으로 고꾸라지고만 게리였다. ‘안 돼! 빨리 움직여! 도망가야 돼!’ 게리에게는 삶의 원칙이랍시고 되뇌는 경구 따위는 없었다. 그냥 되는 대로 사는 삶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무의식적으로 게리가 지켜온 신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살아남는 것’이었다. 그냥 사는 것이었다. 똥물을 퍼든, 지붕 위를 뛰어다니든, 먹고 살 수 있는 일이라면 무조건 하는 것이고,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든, 욕을 하든 먹을 수 있을 때 먹고 잘 수 있을 때 자는 것이 그의 신념이라면 신념이었다. 그리고 지금, 게리는 자신의 생존 본능이 이토록 강한 것이었나 하는 자각을 할 만큼 가슴속에서 뜨겁게 불타올랐다. 잡히면 죽는다, 늦으면 죽는다, 빨리 도망가야 한다, 여러 가지 추측들이 게리의 생존 본능을 자극하고 통증마저 극복했다. 쓰러진 것과 동시라고 할 만큼, 빠르게 몸을 일으킨 게리는 몇 걸음 앞으로 다가온 뒷문을 향해 걸어갔다. 뛰어가고 싶었지만, 그것만은 의지로 되지 않았다.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라도 눈앞의 문을 열고 들어가겠다는 일념으로 나아가던 게리가 마침내 숙소의 문고리를 잡았다. “꼼작 마!” 그 순간 게리의 마음속에, 머릿속에 깃든 절망과 좌절의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토록 힘든 길을 왜 걸었던가. 왜 땅에서 구르고 가슴이 타는 통증을 참으며 숨소리를 막았던가. 불과 4걸음밖에 안 되는 거리를 6걸음이나 걸으면서 뛰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넘어지면서 이마가 깨졌는지 위에서 흘린 피가 시야를 붉게 적시는 중인데도 참아낸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게리는 혀끝을 살짝 깨물며 솟구쳐 오르는 감정을 참았다. 돌아서서 상대에게 보일 자신의 모습이 너무 비참하게만 보이지 않았으면 했다. 울컥하는 감정은 다시 막연한 분노로 변했다. 자신을 이 꼴로 만든 이들에 대한 분노, 이 고생을 하고 눈앞에 목표물이 다가왔는데도 이를 좌절케 한 이들에 대한 분노, 뒤에서 자신에게 창을 겨누고 있을 이들에 대한 분노, 거슬러 올라가 녹스에서 똥물이나 푸게 하였던 토엔에 대한 분노, 조금 더 참지 못하고 토엔에게 대들다가 오물 속으로 사라진 파트너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이 모든 분노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맞서지 못한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분노. “돌아서!” 게리는 천천히 돌아섰다. 돌아서는 동작마저도 힘겨워 다리가 후들거리고 무릎이 꺾여 나갔다. 마침내 돌아선 게리의 얼굴은 그야말로 흉악한 범죄자의 그것과 다를 게 없었다. 머리에서 흐른 피가 오른쪽 눈을 지나 광대뼈를 타고 턱선을 따라 흐르다 아래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입가에도 피가 한가득한데, 입술 끝으로 새어 나온 피가 입술 아래에 거뭇하게 난 잔털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누구냐?” 경비대원 한 명이 엄중한 어조로 창을 겨누고 물었다. 게리는 눈 앞을 가리는 피를 닦으려고 손을 들어 눈을 훔쳤다. “…게리입니다.” 입을 열자, 입안에 고여있던 피가 쏟아졌다. 이름을 말해봐야 정체를 알 도리가 없는 경비병은 재차 물었다. “뭐하는 놈이야? 여긴 왜 온 거냐!” “뭔데?” 경비병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또 다른 경비병이 게리에게 시선을 주었다. 피범벅이 된 얼굴의 게리가 심상치 않게 보인 것은 당연한 일. 함께 창을 겨누면서 게리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어차피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나 게리의 현 상태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오물 수거 담당일을 하는데, 여기가…제 숙소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교환한 후, 게리에게 다가왔다. “꼼짝 말고 손들어!” 게리는 입안에서, 정확히는 상처가 난 혀에서 난 피 때문에 계속 메슥거리는 느낌이었다. “제기랄….” 게리는 다시 눈을 가리는 피 때문에 손을 눈으로 가져갔다. 머리에서 피가 나는 게 아니라, 눈에서 피가 나는 것 같았다. 뭐가 그렇게도 끝없이 솟아나는 건지. **** 경고 따위는 없었다. 그저 머릿속에서 내린 단 하나의 명령, 혹은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포세는 달려들었을 뿐이었다. 토엔은 아직 정신이 수습되기 전이었고,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조금 전에 겪었던 혼란이 너무 컸다. 그래서 포세가 몇 걸음도 안 되는 거리에서 달려드는 것을 멍청하게 바라만 봤다. 그러나 토엔 역시 녹스라는 성에서 목에 힘 좀 주고 다니던 사람이었다. 수없이 많은 습격과 싸움의 경험이 몸에 밴 사람인데, 무방비로 당하고만 있을까? 생각보다 몸이 조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게다가 몸의 상태가 좋은 까닭인지, 평소보다 훨씬 날렵하게 칼날을 피했다.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라면, 상대 역시 평소보다 훨씬 몸이 좋은 상태였다는 점이다. 첫 공격이 아슬아슬하게 무위로 지나갔을 때, 포세 역시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아마 다시 하라면 못할 것 같은 그런 동작으로, 쥐고 있던 칼을 순간적으로 고쳐잡으며 칼날의 방향을 틀어버린 포세는 연속 동작으로 칼을 휘둘렀다. 마치 첫 공격이 피할 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그 동작은 매섭고 빠르고 강했다. “새끼!” 토엔은 말을 마칠 수 없었다. 놀랍도록 빠른 칼날이 그의 뱃가죽을 뚫고 들어와 내장을 가볍게 찢어 놓았다. 그러고도 힘을 잃지 않은 칼날은 비스듬히 비틀리며 토엔의 배를 가르고 올라갔다. 칼날 끝에 걸린 내장이 비틀려 찢어지고 동시에 동맥까지 건드렸던지, 순식간에 뱃속이 피로 가득 찼고, 나갈 곳은 오로지 칼이 들어왔던 구멍뿐이었다. 찢어진 뱃살에서 뿜어져 나온 피로 포세는 금방 붉게 물들었다. “흐흐.” 숨이 가쁘기도 하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환희에 휩싸인 포세는 입에서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상이다!’ 힘을 주느라 한껏 찌푸렸던 얼굴이 환하게 펴지던 포세는 뒤에서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루치드를 보지 못했다. “쯧.” 루치드는 짧게 혀를 찼다. ======================================= [257] 상승(2) 루치드는 토엔과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자신에게 생긴 변화, 혹은 능력에 대해 고민을 했다. 아까까지는 너무 머리가 아파서 도저히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 하지 못했지만, 정돈된 숫자를 보며 편안해진 덕분에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찾게 되었다. 가장 큰 이유라면 역시 마약이 문제였다. 마약을 먹고 난 뒤에 생긴 변화였으니 원인은 마약 때문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지구에서 듣고 알게 된 마약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에서 이런 현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약 때문에 환상을 보는 것이라고 치부하기엔 눈앞의 숫자들을 단순히 환상이라고만 할 수 없었고, 환상이 아니라고 하면 자신의 시각을 빼앗으며 나타난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만약 마약 때문이라고 가정했을 때, 마약의 약효가 떨어지면 이 현상도 사라지는 것인지, 아니면 약효와 무관하게 계속 이렇게 ‘숫자’로만 이뤄진 세상을 바라봐야만 하는 것인지, 지금으로써는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의 숫자가 급격하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멀미가 날 정도로 어지럽게 변하는 수의 변화에 루치드는 ‘짜증’이 났다. 자신을 방해하는 것도 모자라, 고쳐놓은 것을 다시 고장까지 내고 있었다. “쯧.” 루치드는 다시 의지를 발현했다. 주위가 다시 어두워졌고, 모든 사물이 공간과 시간으로부터 괴리되기 시작했다. **** 마약은 환각제였다. 환각에 시달리다 약효가 떨어지면 심각한 금단증상을 유발하여, 다시금 마약에 손을 뻗게 하는 강한 부작용을 지닌 약이었다. 특히 토엔이 거래하던 마약은 매우 강력한 환각 작용과 흥분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소량의 흡입만으로도 신체에 심각한 데미지를 입히고, 폐인으로 만드는 약이었다. 그런데 루치드는 호기심에, 그리고 본인도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마약에 손을 댔다. 비록 매우 미미한 양이라 할지라도 신체에 가해진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루치드에게는 보통 사람과 다른 환각 작용이 발생했다. 어떤 뇌의 작용이 있었던 건지, 루치드는 빛의 굴절과 반사에 의한 시각적 이미지를 눈으로 받아들이고 뇌로 해석하는 과정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문제’인지 ‘축복’인지는 차치하고, 루치드는 세상을 ‘수(數)’로 보게 된 것이다. 루치드가 보고 이해하는 세상은 온통 수로만 가득하였다. 색, 모양, 혹은 그 어떤 시각적 이미지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었다. 오로지 숫자만이 존재했고, 숫자만이 루치드가 볼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숫자들이 어떤 형태를 지닌, 예컨대 지구에서 배운 것과 같이 아라비아 숫자의 형태를 지녔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루치드에게 있어 그것들은 어떠한 형태도 지니고 있지 않으면서, 또 가장 익숙한 형태를 지닌 것들로 인식되었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루치드는 ‘숫자’라고 인식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개념’으로서의 숫자일 뿐, 형태로서 숫자임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직관적인 이해의 대상으로서 숫자가 존재했고, 숫자를 받아들였으며, 그 숫자로 세상으로 해독해나가는 루치드였다. 어쩌면 이 역시도 루치드가 바라보는 환상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환상이 너무나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루치드는 미칠 듯한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 부작용이 있었을 뿐이다. 숫자는 쉼 없이 변했다. 그런데 루치드는 그 숫자들을, 여러 가지 수식으로 이해할 수 있었고, 여러 가지 등식으로 분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숫자들이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알려주는 정보임을 깨달았을 때, 토엔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앞선 사건들이 벌어졌다. 루치드의 눈, 아니 뇌에 해독되는 수의 행렬에 규칙성을 깨뜨리는 것들, 혹은 거대한 흐름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제거하거나, 혹은 변형시켜서 흐름에 따라 맞추기를 원했더니, 루치드의 뜻대로 그 수들이 사라지거나 혹은 버려졌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버린 덩어리도 있었고, 또 어떤 것은 변형되어 거대한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게 된 것들도 있었다. 그런데 거대한 수의 흐름은 또 다른 수의 흐름과 맞부딪쳤다. 조화롭지 못한 수의 충돌은 루치드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고, 마치 파란 물감만 있어야 할 캔버스에 붉은 물감이 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차라리 그게 어떤 예술적 의도를 가진 조화였다면 이런 불쾌함은 없었겠지만, 그것은 완벽하게 구성된 흐름을 깨뜨리는 부조화였고, 그래서 거대한 수의 흐름을 감상하는 숭고한 감상자의 평온을 깨뜨렸다. ‘일단은….’ 먼저 한 것은 수의 흐름을 멈추게 하는 것. 예컨대 동영상 편집과 같았다. 재생 중인 동영상을 편집하는 것은 어렵지만, 재생을 멈춘 동영상을 프레임별로 분석하여 편집하기는 쉽다. 그 후, 일단 가장 눈에 거슬리는 것, 바로 흐름을 정상화하는 것이었다. 52개의 흰 건반과 36개의 검은 건반이 조화롭게 구성되어야 완벽한 88개의 건반이 되듯이, 빠진 건반이 있다면 채워 넣으면 된다. 마찬가지로 저기 보이는 수의 흐름에서 빠진 수는 주변의 수에서 유추하면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간단한 수열 문제였으니까. 쉽게 답을 구하고 나니, 곧 빠진 공백을 채우는 수의 흐름이 생겼다. 그 수는 기존의 흐름에 합일되면서 다시 거대한 수가 되었다. 보기 좋았다. 끼어든 수가 보였다. 전체의 흐름에 불필요한 수를 찾는 것은 방정식이었다. 등식을 만족하는 해(解)를 구하는 법을 찾으면 된다. 그래서 루치드는 몇 가지 수식을 이용하여 해를 찾았다. 그리고 그 해와 맞지 않는 수를 제거해 나갔다. 그리하여 모든 수가 정상이 되었다. 그러고 나니 루치드는 고민이 되었다. ‘분명 저대로 두면 또다시 충돌이 벌어질 것 같은데.’ 생각해보면, 지금 이 순간 루치드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든지 수를 고쳐서 반대로 흐르게 할 수도 있고, 잘못된 수를 일부러 집어넣어 ‘고장’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루치드는 고개를 저으며 방금 자신이 한 생각을 부정했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짓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언제까지나 저 숫자들을 감상하고 만족하는 감상자로서 있고 싶었지, 저 숫자들을 조작하여 어떤 수의 흐름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수를 만드는 행위는 창작자의 역할이고, 창작자의 의도를 제삼자인 자신이 해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무의식적인 생각의 끝에 나온 것이지만, 루치드는 저 수들을 창조한 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저 수는 의도적인 흐름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각각이 목적을 지향하고, 전체가 다시 어떤 목표를 향해 변화하고 있었으니까. 자신은 그 흐름을 바라만 봐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루치드는 다시 숫자가 흘러가도록, 수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도록 의지를 드러냈다. **** 토엔은 다시 한번,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포세에게 칼침을 맞고 난 후,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못한 자신을 후회하며. ‘겨우 살아났더니, 이렇게 죽는구나.’ 그리고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졌다가 다시 정신을 돌아왔을 때, 토엔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직 할 일이 너무나 많은데 그것들을 다 포기해야 한다는 억울함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 그때, 그의 귀에 들린 소리에 반응하여 시선을 돌리니 멍청한 얼굴을 한 포세의 역겨운 얼굴이 자기 코앞에 있었다. 물론 포세 역시 토엔을 찌른 후, 아득히 먼 곳으로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고, 정신을 차렸을 때, 멀쩡한 얼굴로 서 있는 토엔을 바라보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만들 하세요, 이제. 정말 정신 사나우니까.”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토엔과 포세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아까와 같이, 아니 더 지쳐 보이는 얼굴의 루치드가 두 사람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만 떨어져 봐요.”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루치드가 손을 내저으니, 두 사람이 서로 주욱 밀려났다. 귀신을 본 것 마냥, 두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도 어찌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던 토엔과 포세가 입을 벌리고 있는데, 루치드가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다 가만히 서 있어요. 한 번만 더 문제 일으키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포세와 토엔이 이런 협박에 눈 하나 깜짝할 리 없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분명 칼로 찌르고 배를 가른 토엔이 멀쩡한 몸으로 서 있었다. 분명 자기 코앞에서 역겨운 냄새를 풍기던 포세가 가벼운 손짓에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루치드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누, 누구십니까?” 루치드의 정체를 모르는 포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루치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부탁이니 가만히 있어 줘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여러분들이 움직일수록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으니까. 그 뒤에 분들도요.” 포세가 돌아보니, 집 안에 수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언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는지,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이 이 좁은 집에 들어올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여러분들. 부탁이 있어요.” 사람들이 모두 루치드에게 주목할 때, 루치드가 힘겹게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제발, 순리대로 행동하세요. 순리에 맞지 않는 행동은 여러분들 본인에게 좋지 않아요.”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 어떻게 사람들에게 일일이 당신을 구성하는 숫자가 이러이러한데, 당신들이 이런 이런 행동을 할 때마다 이렇게 변하고, 저렇게 비틀려서 변형된다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변형된 숫자가 수의 흐름에 영향을 주어서, 결국 전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루치드는 최대한 간단하게, 그리고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했다. “바르게 행동하면 오래 살 수 있을 거예요.” 말을 마친 루치드가 힘에 겨워 주저앉으려다, 멈칫했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돌려 막힌 벽을 향했다. “게리….” 게리에게서 매우 불쾌한, 그리고 매우 불합리한 흐름이 보였다. **** 게리는 분노를 터뜨리지 못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저 시킨 대로만 일하고, 시킨 대로만 심부름하고, 시킨 대로 토설했을 뿐이지 않은가? 자신하건대,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음해하거나 해칠 의도를 가진 적도 없었고, 나름 착하게 살았다고 자부하는 바인데, “왜!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 결국, 울먹거림 속에서 피를 토하는 고성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뭐, 뭐야?” 다가오던 경비병이 놀라 창을 쭉 뻗었다. 위협과 경고의 목적으로 뻗은 창이 비틀대는 게리의 가슴을 향했고, 게리는 그 창날에 가슴을 틀어박았다. 가슴을 찢는 고통이 실감 나게 전달되었다. 이제껏 겪은 고통과 다른 고통이 온몸을 짓눌렀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고, 화끈한 격통이 뒤따르며 동시에 전신을 마비시키는 충격이 흘렀다. “씨…발….” 게리는 피를 뿜어내며 악에 받친 눈으로 창을 뽑아 드는 경비병을 향해 손을 뻗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 순간, 지옥의 사자가 찾아드는 것인지 주변이 천천히 어둠으로 물들어갔다. 눈에 보이는 것이 사라져가자, 게리는 생각했다. ‘나, 이렇게 죽는 거구나. 이렇게 죽으려고 그렇게 아등댔구나.’ 게리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은 아니에요, 게리. 아직은.” 게리는 그 목소리가 아주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죽음의 사자가 마중 나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뭔가를 말하려는데, 입이 열리는 대신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이 조각나는 느낌? 입을 열려고 했던 생각이 오른쪽으로 흩어지고, 살고 싶다고 소원하던 희망이 왼쪽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다시 게리가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조금 전의 체험이 죽음이라고 생각한 게리는 눈물을 흘렸다. “죽으면 고통도 사라지는구나.” 게리가 흐느껴 울 때, 뒤에서 예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니까, 그런 생각 마시고요.” “응?” “게리, 앞으로도 부디 착하게 살아요.” 그 뒤로 목소리가 사라졌다. 게리가 몸을 일으키니 앞에 멍청한 얼굴로 서 있는 경비원 두 명이 보였다. “어, 너? 어떻게….” 경비병은 말을 잇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가, 심지어는 가슴이 창에 찔려 피를 뿜어댔던 녀석이 멀쩡한 얼굴을 하고, 가슴의 상처도 온데간데없이 말끔하게 ‘치료’된 채로 일어섰다. “부, 불사신?” 한 경비병이 멍청한 어조로 툭 내뱉었을 때, 다른 경비병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뒷걸음질 쳤다. 그런 반응을 살필 겨를이 없던 게리는 뒤로 돌아서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보았다. “루치드?” ======================================= [258] 상승(3) 시간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다고 공간에 변화가 생기지는 않는다. 건물, 책상, 의자, 식탁 위에 놓인 그릇에 특징적인 변화가 생기지는 않는다. 외적인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주변 환경이 저절로 위치를 이동한다거나 모양을 바꾼다거나 색을 변화시키는 일은 없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은 일견 개별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 있다. 적어도 과거의 일반인들―평범하게 하루를 살고,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 삶의 목표이자 제 일차 과제였던 이들―에게는 그저 해가 뜨고 지는 정도의 흐름 속에서 일과를 묵묵히 해 나가는 것에만 인식의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현대 철학의 사유에서 시간과 공간은 전혀 개별적이지 않다. 굳이 철학을 논할 필요도 없이, 시간과 공간의 접합점은 현대 문물을 향유하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쉽게 인식하고 변화를 느낀다. GPS가 그렇고, 인터넷, TV, 라디오가 그렇다. 정교한 톱니바퀴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시계, 현미경으로 관찰되는 미시 세계의 변화가 그렇다. 관찰 도구가 부족하던 시대에는 상상할 수도 없던 미시 세계가 관찰됨으로써 인간은 시간을 본격적으로 누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시간에 종속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사람들은, 시간의 흐름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시간은 멈추지 않으며, 시간이 멈추지 않으니 공간도 멈추지 않는다. 공간이 멈추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역시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사람의 상상력과 의지는 끝이 없으니, 사람들은 흐르는 시간을 멈추고 싶다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과거에도 일부의 사람들은 붓과 목탄을 들어 하얀 도화지 위에 그 순간을 새겨넣었다. 더 이전에는 단순히 날카롭기만 한 돌멩이를 손에 쥐고 동굴의 벽에, 넓은 바위에, 큰 나무에 그 순간을 새겨넣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도 엄밀히 말하면 시간의 한순간을 포착하기란 어려웠다. 사람들은 멈추지 않았다. 끊임없이 시간의 흐름을 멈추게 하려고 시도했고, 드디어 과학의 힘을 빌려 사람들은 한순간을 포착해내는 기술을 발명해냈다. 사진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시간을 붙잡았다는 희열에 감동했다. 그러나 과연 사진은 시간의 흐름을 붙잡았던가? 결론적으로 시간은 현실의 외형을 ‘복제’한 모조품이며, 그것도 전체가 아닌 일부의 한 장면을 복제하는 데 그쳤다. 웃는 사람의 얼굴을 사진으로 찍었을 때, 그 순간의 표정은 담아냈을지 모르지만, 그 사진이 찍히는 순간, 인간의 단백질 구조가 변화하며 생기는 양상, 카메라 앞에 선 사람의 감정까지 모두 포착해내지는 못했다. 복제물의 한계였다. 그런데 이 순간, 루치드는 마약 때문에, 혹은 마약으로 인해 야기된 어떤 능력 때문에 시각을 잃었다. 정확히 말하면, 빛의 굴절과 반사로 야기되는 시각적 이미지를 해독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대신 루치드는 이미지가 아닌 숫자로 표기되는 본질을 보게 되었다. 수(數)는 본질이었다. 어떠한 형태로도 가공되지 않으며, 그 자체로 원형과 동일한 본질이고 개념이었다. 왜곡 없이 사물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자, 루치드에게 가장 친숙한 형태의 개념이었다. 그런데 그 수에 변화를 일으켜 보겠다고 다짐한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기보다는 그저 무의식적인 의지의 발현이었다. 루치드 본인이 표현했듯이, 길가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것과 같은 자연적인 의지의 발로(發露)였다. 그리고 그 의지는 환상의 공간, 혹은 초현실적, 마법적 역장을 구성하여 발현되었다. 그 공간에서 루치드는 시간을 멈추고 그 틈에서 본질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모조품이 아닌 진짜 세계였다. 그것은 세계가 지금껏 감쳐두었던 진실이었고, 진리였다. 어쩌면 이것이 지톤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루치드는 그 진실을 눈앞에 두고도 제대로 해석할 지식이 없었고, 경험이 없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인간에 대해, 사회에 대해, 세상에 대해 사유를 해본 바가 없던 루치드였기에 오직 단편적인 진실에만 몰두했고, 그래서 루치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흐름을 방해하는 것을 고치거나 없애는 수준에 그친 것이다. 예컨대, 수천수만 페이지의 책에서 오·탈자를 찾아 수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글자를 안다면 오·탈자를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오·탈자를 찾는 수고만 하느라,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는 못한 셈이니, 이후 루치드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아쉬움이 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장 루치드가 원하는 바는 따로 있었으니. “토엔, 저 가야겠어요.” “응?” 갑자기? 토엔으로서는 아직 루치드에게 물어볼 게 많았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평생 루치드를 곁에 두고 모시고 싶은 심정이었다. 루치드는 아니라지만, 자신이 보기에 루치드는 ‘신(神)’이거나 그를 따르는 천사임이 틀림없었다. 악마는 아닐 것이다. 악마였다면, 자신을 이렇게 치료해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 어딜 가신다고 그래요?” “찾아야 할 사람들, 가족이 있어요.” 루치드는 토엔에게 작별을 고했다. 루치드의 단호함에 토엔은 머리를 굴려볼 생각도 못 했다. 루치드는 포세와 그 외 집 안을 꽉꽉 채운 사람들에게도 말을 건넸다. “여러분은 모두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분들이에요. 부디 그 이유를 잃지 마시고, 바르게 살아가시길 바랄게요.” 루치드는 초점 없는 눈으로 사람을 쭉 훑은 뒤, 모습을 감췄다. 기현상에 어느 누구도 감히 움직일 생각을 못 했다. 경비병 한 명이 옆 사람에게 속삭였다. “너도 다 나았어?” 목적어가 불분명한 물음에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경비병이 물음에 대꾸했다. “다 들었잖아. ‘고장’ 난 거라고.” 물론 듣기는 다 들었다. 토엔과 루치드 간의 대화는 모든 이들이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마치 머릿속에 박제되듯이 박혀 있었다. 다만 모두 그것을 ‘들었다’로 인식할 뿐이었고, 그 차이를 구분해내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 말이야, 바르게 살아가라는 말이 무슨 뜻이지?” 경비병은 주위 사람들을 눈짓하며 대답했다. “이놈들 보고 착하게 살라는 말 아냐?” “우리도 포함된 말 아냐? 그렇게 들리던데?” 경비병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뭔들 어때. 착하게 살면 되지. 솔직히 지금 이 기분이라면 평생 착한 짓만 하면서 살 수 있을 거 같은데?” 경비병은 수년간 앓아왔던 치질이 사라져서 기분이 매우 좋았다. **** “루치드?” 루치드는 게리의 부름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게리. 저 이만 가봐야 할 거 같아요.” “어딜?” 루치드는 자신의 이 현상이 얼마나 지속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속하는 동안에 이 능력을 제대로 써먹을 수 있을 곳이 떠올랐고,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족을 찾으러요.” “아.” 일전에 루치드가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루치드가 이틀 동안 자리를 비운다고 했을 때도 이해를 했었다. “그렇구나.” 게리가 고개를 주억거리다,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근데 혹시 말이야, 니가… 니가 날 살려준 거야?” “살리다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렇게 거창하게 표현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 루치드였다. “길게 말할 틈이 없어 죄송해요. 그만 가볼게요. 게리. 그리고 부디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살아요.” “응?” 루치드는 다시 한번 미소를 띠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 애초에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마냥, 사라진 루치드를 찾아 게리가 여기저기를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루치드는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살피다 등 뒤에서 멍청한 얼굴로 창을 들고 있는―창끝은 바닥을 향해 있었다―경비병을 보게 되었다. “방금 보셨어요?” 경비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갔는지도요?” 경비병이 고개를 저었다. 게리는 목 옆을 긁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가슴을 더듬었다. 게리의 반응에 경비병 역시 호기심을 보였다. “저, 저기, 거기… 괜찮아?” 이번에는 게리가 경비병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이 일은 경비대에게 전설처럼 회자 될 일이었지만, 결국 크게 번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에 소외된 경비대장이 화를 냈기 때문이었다. “뭐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나 보고 믿으라는 거야?” 한 경비병이 자신의 병이 나았음을 증언해보았지만, 콧방귀나 뀌며 무시하는 경비대장이었다. “다들 마약상 집에서 함께 마약이라도 마신 거야, 뭐야!” 경비대장은 두 번 다시 ‘그따위’ 소리는 입 밖으로 내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했고, 한 번 더 자기 귀에 이 일이 들리면 자신을 농락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하여 엄히 처벌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포세와 토엔은 그대로 경비병에게 붙잡혔고, 포세의 일당 역시 경비병에게 붙잡혔다. 포세와 토엔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기적’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할 능력이 부족한 데다, 경비대장이 그 일만 언급하면 불같이 화를 내는 통에 결국 마약 소지와 유통에 대한 죄를 인정하는 선에서 심문이 마무리되었다. “제 죄를 인정합니다.” 토엔은 죄를 인정했다. 그게 ‘순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닙니다, 전 그냥 토엔과 사업적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간 것입니다.” 포세는 죄를 부정했다. ‘기적’은 기적이고, 기적을 행사한 그는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심문 결과는 경비대장의 보고서에 옮겨져 성주에게 전달되었다. “오랫동안 마약 유통을 해왔을 뿐만 아니라, 그들 역시 마약에 심각하게 중독된 상태여서 심문하는 동안 계속 헛소리를 했습니다.” 성주는 두 사람을 비롯, 마약과 관련된 모든 사람을 사형에 처했다. 그리고 경비대장은 마약유통조직 소탕의 성과를 거둔 이로 치하받으며, 훈장과 상여금, 그리고 근위대 소속 부장으로 승진하게 되었다. 경비대장이 경비대를 떠나며, 입단속을 확실히 시켰음은 물론이다. “어떤 경로로든 이번 일에 대한 헛소리가 내 귀에 들리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경비대장의 으름장에 경비대원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것도 순리지?” “글쎄?” 경비대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그냥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눈앞에 선 이의 포승줄을 풀어주었다. “가라.” 게리는 큰 눈에 눈물을 가득 담아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경비병은 그저 손을 저어 빨리 가라는 시늉만 보였다. 심문 결과도 그렇고, 당시 자기 눈앞에서 보였던 기적도 무시할 수 없었던 경비병은 게리를 풀어주기로 했다. 그의 파트너 역시 그에 동의하였다. “그 아이와 되게 친해 보였는데, 죄가 없다고 하니까 풀어주는 게 맞는 거지.” 두 경비병은 그게 순리라고 생각했다. **** 루치드가 녹스를 떠나 도착한 곳은 바로 빈촌이었다. 사실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빈촌에 와야겠다고 결정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없을지라도, 감춰진 정보는 볼 수 있겠지.’ 루치드는 단 하나의 단서라도 찾을 수 있길 바라면서, 빈촌으로 향했다. 오는 동안 루치드의 불안은 점점 심해졌는데,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시력이 돌아오는 중이었다. 숫자가 살짝 흐릿해지는 느낌이 들더니 점점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정보의 양이 줄어드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안 돼!” 루치드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이동에 박차를 가했다. 다행인 점은, 현재의 상태에서 이동이 매우 빠르고 편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무조건반사(無條件反射)적으로 실현되니 눈으로 위치를 가늠하고 이동할 때보다 빨랐다. 그리하여 곧 루치드는 빈촌으로 올 수 있었다. “제발, 제발….” 루치드는 부디 제시간에, 이 능력이 다하기 전에 단 하나의 단서라도 찾을 수 있길 바라며 주위를 훑어보았다. 확실히 줄어든 정보의 양 때문에 한 번에 다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빠르게 움직여야 할 때였다. 루치드는 가장 먼저 자신의 집이었던 곳으로 향했다. 루치드가 문고리를 붙잡고 문을 열어젖혔을 때, 오랫동안 묵힌 실내의 공기가 빠져나오며 루치드의 귀환을 환영했다. ======================================= [259] 상승(4) 거실에서 호빵이 흘린 털들을 치울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동물은 이렇게 흔적을 남기는데, 과연 사람은 어떤 흔적을 남기며 살까?’ 가만 보면, 호빵은 정말 집안 곳곳에 그 흔적들을 진하게 남겨두었다. 거실에서 호빵이 오줌을 지리지 않은 곳이 없었고, 그가 움직이는 곳곳마다 털들이 날리는데, 매일 청소하지 않으면 발이며 무릎에 호빵의 하얀 털들이 들러붙어서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은 달랐다. 가만 보면 사람은 주변에 흔적을 그토록 부주의하게 남기는 이들이 드물었다. 없는 건 아니다. 명수만 봐도, 그 친구는 호빵과 버금갈 정도로 흔적을 남기니까. 흐트러진 소파의 쿠션, 변기에 남긴 흔적, 정리되지 않은 신발, 아무렇게나 접힌 침대 등 열거하면 끝이 없을 정도다. 반면에 이모님과 선생님은 거의 흔적이 없었다. 이모님이 출근하셔서 요리하시는 주방을 제외하고는 이모님이 앉았던 의자, 소파, 화장실, 방에서 이모님이 사용하였다는 흔적은 거의 보기 힘들었다. 루치드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루치드도 집 안에 흔적을 잘 남기지 않았다. 언제나 정리된 침구와, 늘 어제와 같은 책상, 언제나 같은 자리에 꽂혀 있는 책들과 늘 그랬듯 먼지 하나 없는 방바닥이 그랬다. 하지만, 고작 그런 정도의 흔적 때문에 고민할 것이었다면 애초에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명언에도 있지 않던가.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고. 이름 따위를 기억하는 것도 그 사람이 특별한 사람일 경우였다. 루치드는 오피스텔에 사는 사람들의 이름을 잘 모른다. 얼굴도 잘 모른다. 그들 중 한 명이 사라지거나 죽는다고 해도 루치드는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그 사람들의 이름을 모를 것이다. 그런 마당에, 대륙에 그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은, 사람들의 기억에 존재하지도 않는 작은 빈촌 마을의 사람들을 누가 기억할까? 그래서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찾는 일은 시작부터 매우 곤란하고 막막한 일이었다. 틈날 때마다 신관 지구, 구관 지구, 상업 지구를 돌아다니며 빈촌에 대해 물어보지만, 단 한 명도 기억하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그들을 기억하는 유일한 존재가 있으니, 바로 루치드 자신이었다. 그들을 기억하기 때문에, 그들의 흔적을 되짚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루치드는 마을로 돌아왔다. 그가 기억하는 이들의 혹시 모를 흔적들을 찾기 위해서. 부디 그들이 호빵처럼, 명수처럼 작은 흔적이라도 남겼길 바라며. 그 흔적들이 오랜 세월에도 고이 간직되어 있길 바라며. 그리고 루치드 본인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자, 묵은내가 후각을 자극하는 동시에 희미해지기 시작한 숫자들이 루치드에게 달려들었다. “아.” 모든 숫자는 변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말이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모든 사물과 세상은 변하게 되어 있었다. 영원히 같은 것은 없었다. 루치드가 받아들인 숫자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어. 왜냐하면, 모든 것은 변하니까.’ 겉으로는 아직 쓸만해 보이던 나무 탁자도 삭아서 다리 한쪽이 부러지기 직전이었고, 비록 금이 갔지만 그래도 튼튼해 보이던 침실 쪽 흙벽도 심각할 정도로 훼손이 되어 있었다. 집안의 모든 것들이 오랜 세월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지 모두 변했고, 또 변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도 느리지만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사람의 흔적, 어머니의 흔적, 동생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수십 번을 들락거렸던 자신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안 돼.” 숫자가 더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루치드는 재빨리 집 안을 수색한 뒤, 다른 집으로 건너갔다. 최대한,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찾아야 했다. 점점 희망이 사라져갔다. 그러던 중, 루치드가 마을 중앙의 공터에 왔을 때, 루치드는 바쁘게 움직이던 걸음을 멈췄다. 바람이 루치드의 앞머리를 쓸고 지나가며 이마에 흐르던 땀을 식혀주었다. “누구세요?” 루치드는 입을 열어 눈앞에 선 이에게 물었다. 루치드 앞에 선 그는 대답이 없었다. 루치드는 다시 한번 물었다. “누구신가요? 혹시….” 그가 대답했다. “이제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니?” 그리고 루치드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원해서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다리에 힘이 빠져서 절로 쓰러지고 만 것이었다. 너무도 심한 무력감과 탈력감(脫力感)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루치드는 고개를 떨어뜨리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턱이 잘게 떨려왔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눈앞에 선 흐릿한 형체를 바라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시죠?” “내가 누굴까?” 루치드는 마지막으로 봤던 수를 떠올렸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람.” 그가 피식 웃었다. “사람?” 루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자신의 말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그의 실소에 대한 인정이었다. “신이신가요?” 모든 것이 변할 때, 전혀 변하지 않는 숫자가 있었다. 그 수는 가장 완벽한 숫자였다. 그 자체로 완벽했고, 변화를 허용치 않는 숫자였다. 그래서 그 숫자는 고정되어 있었다. “뭐, 그건 부르기 나름이겠지.” 이제는 숫자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루치드 역시 더는 숫자로 된 세상이 필요하지 않았다. 숫자는 루치드에게 어떤 답도 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눈앞에 나타난 이는 답을 줄 수 있는 존재, 라고 생각했다. “가르쳐주세요. 우리 가족들, 어디 갔어요?” ‘영원불멸의 존재’는 루치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왜 여전히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거야?” “쓸데없다뇨?” “완벽해질 기회가 있는데도, 넌 불완전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잖아?” “네?” 루치드는 그 존재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완벽해지고 싶지 않아? 완전해지고 싶지 않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들은 모두 불완전한 이들이잖아? 완전해지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지 않는 거야?” 완전해진다고? 그게 어떤 의미지? 그러다 루치드는 자신이 들여다보았던 숫자들을 떠올렸다. 포세, 토엔, 경비대, 게리, 그 밖에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들. “생각해봐. 그들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그들은 늘 결핍되어 있어. 그래서 늘 충족시키려 하지. 하지만 너도 봐서 알 거 아냐? 그들은 충족될 수 없어. 결핍된 채로 태어난 존재들. 그리고 영원히 그 결핍을 채울 수 없는 존재들이야. 반면에 넌 어때? 넌 완전해질 수 있는 기회를 얻었어. 그런데 왜 굳이 불완전한 삶을 영위하려고 노력하는 거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뭐가 결핍되었다는 건지, 그래서 뭘 충족시키려 한다는 거죠?” 그 혹은 그녀는 루치드의 대꾸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넌 이미 알고 있잖아. 너무 긴 시간이 지났다고. 이제는 모른 척하지 마.” “뭘요?” “넌 마치 버려진 것처럼 굴잖아? 사실은 니가 버린 거잖아? 안 그래?” 루치드의 눈에 경악이 담겼다. **** 푸른 하늘과 그림 같은 구름. 짙은 녹음과 하얀 바위들. 그 사이를 오가는 시원한 바람이 아래로 내려와 열에 들뜬 지면을 식혀주었다. “엄마! 엄마!” 한 아이의 외침에 밭을 매던 중년 여성이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았다. 조그만 남자아이가 해맑은 웃음을 지으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짧은 다리가 앙증맞게 엇갈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던 아이는 아슬아슬한 움직임 속에서도 끝내 넘어지지 않고 여자에게 다가왔다. “엄마, 이것 봐.” 아이는 자신이 가져온 것은 여자에게 내밀었다. 여자가 바라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돌멩이였다. 의아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니, 아이는 자랑하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예쁘지? 보물이다, 이거.” “응?” “이거, 여기 보면 사람 얼굴 같잖아? 그런데 이쪽에서 이렇게 보면, 강아지 얼굴 같지? 또 이쪽에서 보면 도끼처럼 생겼어. 그치?” 아이는 돌멩이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여자에게 자신의 자랑스러운 습득물을 자랑했다. 하지만 여자의 눈에는 그저 작은 돌멩이였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저기 가서 엄마 일 끝날 때까지 기다려.” 여자는 다시 밭으로 시선을 돌려, 들고 있던 호미로 땅을 팠다. 여자의 관심이 자기 생각보다 약하자, 아이는 심통이 났다. 하지만 포기하기엔 이르다고 판단했는지, 아이는 다시 한번 여자에게 자신의 습득물이 얼마나 큰 발견이고, 위대한 것인지를 강조했다. “여기 봐봐. 이쪽은 새까만데, 여기는 하얗잖아? 신기하잖아?” 여자가 대충 보느라고 이 돌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파악했던 아이는 색의 반전이 가져다주는 시각적 아름다움과 그로 인한 착시작용으로 돌의 외형이 동물의 얼굴처럼 보이는 기묘한 현상을 지적했다. “그래서 이쪽에서 보면, 봐봐, 여기가 강아지 같잖아?” 여자는 호미를 땅에 내리꽂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무 오래 쭈그리고 앉았던지, 허리에서 두둑 거리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허리 참에 두른 앞치마의 주머니에서 거칠어 보이는 누런 천을 꺼내 땀을 닦고는 위로 올려다보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엄마 일하는 거 안 보이니? 방해하지 말라고 했지?” 아이는 들고 있던 돌을 슬며시 내렸다. “그리고 정 심심하면, 옆집 형이랑 같이 저기 가서 놀아.” 어머니가 가리킨 방향에서는 푸른 나뭇잎으로 가득한 숲이 어둠을 품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질척거리는 행동은 좋지 않은 결과만 야기할 뿐이었다. 그 정도는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돌이라면, 이 신기한 돌이라면 여자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적당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여자―엄마에게서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패였다. 아이는 숲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옆집 형을 따라갔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혼자 숲을 갔다. 옆집 형이 했던 방식을 답습했고, 아주 예전에 들었던 기억을 더듬어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귀한 약초를 우연히 구할 수 있었다. “이거 먹을 수 있다고?” “응. 옛날에 아빠가 이거 먹어도 된다고 그랬어.” 여자는 아이가 들고 온 버섯을 바라보다가 집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여자는 웃으며 돌아와 아이를 칭찬했다. “맨날 쓸데없는 짓만 하는 줄 알았더니, 이런 것도 잘 구했네.” 그 날, 여자는 버섯을 구워 조각을 내고 버터 바른 빵에 버섯구이를 올려 식탁에 내놓았다. 아이는 숲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힘이 붙으면서 아이는 좀 더 많은 것을 숲에서 구할 수 있게 되었고, 좀 더 많이 집으로 들고 왔다. 하지만 처음과 같은 반응은 없었고, 그마저도 점점 시들해져 이제는 숲에서 여러 가지를 구해와 등에 잔뜩 메고 들어와도 그러려니 하셨다. “그걸 여기 들고 오면 어떡해? 저 밖에 내려놓고 와야지.” 아이는 집 밖에 나무껍질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정리해놓고, 겨우 구한 약초들을 잘 씻어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식탁에는 빵이 있었다. “먹어.” 어머니는 이미 먹었다고 했다. 아이는 빵을 먹으면서 생각했다. 늘 뭔가를 하지만, 항상 부족했다. 언제나 등에 가득 짊어지고 오는데도, 늘 부족했다. 부족하므로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리라. 그런데 이 이상은 자신이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냐.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야.’ 아이는 포기하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하며 빵을 뜯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이는 가방을 메기 시작했다. 가방을 들고 다니면, 양손이 자유롭게 되고, 그러면 그 손에도 뭔가를 들 수 있다. 즉, 더 많은 양을 들고 다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옆집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가 되었다. 어린아이가 대단하다고, 칭찬했다. 쑥스러워서 그만 헤헤 웃고 말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니, 엄마는 말했다. “먼지 나는 걸 왜 들고 들어와? 밖에다 놓고 오라고 몇 번을 말하니?” 아이는 생각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냐. 나는 잘못한 게 없어. 잘못된 건 엄마야.’ 아이는 집 밖으로 나갔다. **** “아니요, 아니에요.” 루치드가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적 없어요. 그런 일은 없었어요.” “그래?” “네, 없었어요. 그건…사실이 아녜요.” “그럼 사실이 뭔데?” 사실. 루치드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잘 생각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잘 떠올랐는데, 지금을 잘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구에서 오랜 시간을 지내다 보니 더 어린 시절의 기억이 희미해진 것 같았다. “어머닌 앞치마를 입고 저녁을 준비하셨어요. 그리고 숲에서 돌아오는 절 기다려주었어요. 따뜻한 수프와 갓 구워낸 빵을 접시에 담아서 제가 돌아올 때까지 먹지 않고 기다려주었어요.” “그리고?” “제가 들고 온 가방을 받아다 주고, 저한테는 수고했다며, 씻고 오라고 하셨어요. 제가 씻고 오면, 어머니도 정리를 끝내놓고 다 같이 식탁에 앉아요. 그 후에 우리 가족은 식사했어요.” “가족?” “어머니와 저, 그리고 동생이요.” “동생? 동생이 있었어?” 루치드는 입을 다물었다. 동생…이 있었다. 이름이 에이미, 였던가? 루치드는 아직 마약의 후유증이 남아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이렇게 머리가 혼란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속할래?” 어쩐지 눈앞에 있는 존재가, 비록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 [260] 상승(5) 루치드는 아까와는 다른 혼란스러움에 머리가 아파 왔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과, 미지의 존재가 이야기하는 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루치드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가, 혹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완전(完全)이란 무엇이냐?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다. 그럼 왜 완전해야 하느냐? 완전이야말로 자유이며, 해방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가 홀로 서기를 원하며 홀로 완벽하기를 원한다. 그것이 네가 바라본 이 세상의 진실이다. 모두의 목표와 모두의 진실이 무엇이더냐? 완전이다.” 루치드가 바라본 수의 세계에서 모든 사람들은 목적과 목표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향하는 목적과 목표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목적은 숭고했고, 목표는 뚜렷했다. 그래서 루치드는 그 수들의 변화와 진화에 대해 손을 대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미지의 존재가 말했다. 그것은 ‘완전’을 향한 진화이며, ‘완벽’해지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일부는 의식적으로 진화해나가고, 일부는 깨닫지 못한 채로 그 길을 걸어나간다. 그 사람의 성격, 성향, 환경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그렇게 ‘완전’의 길을 걸어간다. 다만 이를 빨리 깨닫는 사람과 늦게 깨닫는 사람이 있고, 그 길 위를 빨리 달리는 사람과 천천히 걷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존재는 단언했다. 루치드는 혼란의 와중에도 존재의 이야기를 흘려 들을 수 없었다. 그것은 자신이 은연중에 원했던 것, 이라고 이해했다. 자신이 그토록 생존의 갈망으로 지식을 갈구했던 것도 어쩌면 그런 ‘완전’의 길을 걸었던 것이 아닐까? 역사적으로도 인류가 나아가는 방향을 살피면, 모두 완전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닐까? 과학의 발전, 철학의 깊이, 학문의 진보가 모두 그런 완전의 길을 걷는 와중에 발생한 여파가 아닐까? “그렇다. 그리고 너는 다른 누구보다 빨리 완전의 길을 깨닫고 걸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렇지 않으냐?” 루치드는 중간이 생략된 존재의 말에 궁금증을 드러냈다. “어떤 기회요?” 그는 쉽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우습구나. 여전히 ‘완전’이 무엇인지를 모르다니. 완전함이란 부족함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홀로 완벽한 것이라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유를 갈구한다. 자유가 무엇이냐? 자신을 얽매는 것들로부터의 해방이다. 자신을 얽매는 것은 자기 안의 부족을 채우려는 욕심과 욕망의 산물이다. 하지만 주변의 것들로 자신을 채운들 그것이 채워질 성질이냐? 그러니 사람은 ‘홀로’ 서야 한다. ‘함께’해서 완벽해지는 경우가 있을까? 없다.” 루치드는 동의할 수 없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어요. 그뿐만 아니라, 사람은 모두 홀로 태어날 수 없어요. 그래서 부모님이 있고, 가족이 만들어지는 거잖아요?” “그들이 있기 때문에 결핍이 시작되는 것이라는 걸 왜 모르느냐?” “네?” 존재는 뒷짐을 지고 루치드 주변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가족이 있어서 행복하느냐? 그럴 것이다. 그들이 너의 부족함을 채워주니까. 가족이 있어서 힘이 생긴다고? 그럴 것이다. 그들이 너의 허약함을 가려주니까. 그러니 생각해보아라. 가족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가족이 없기 때문에, 너의 부족함을 니가 원하지 않더라도 채워주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넌 오롯이 혼자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너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너의 힘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너의 결핍을 없애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녀는 머리를 쓸어넘기는 동작을 하며 루치드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부모가 없이 어린 아이가 어떻게 자랄 수 있어요? 부모가 없으면 아이는 먹지도, 자지도 못할 거에요. 그리고 배우지도 못할 거고요.” 그는 다시 뒷짐을 지고는 루치드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그래서 사람은 완전에 다다르기 어려운 이들인 것이다. 홀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모두 배제된 채 태어나니까 말이다. 그래서 빨리 걷는 이와 느리게 걷는 이의 차이가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도 ‘완전’에 이른 이가 고금을 통틀어 열이나 될까 할 정도로 적은 이유다.” 그리고 다시 허리를 펴더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저 하늘 너머, 또 다른 세상이, 더 넓은 세상이, 더 많은 세상이 존재함을 아느냐? 그 세상에 사는 사람들마저도 완전을 꿈꾸지만, 쉽게 다다르지 못한다. 그런데 말이다. 너는 다르다. 너 역시 다른 이들과 같이 선천적으로 결핍을 안고 태어난 아이다. 그런데 너에게는 다른 길이 주어졌다. 넌 누구보다 빨리 그 길을 깨달은 아이다. 누구보다 빨리 완전에 다다르고자 하는 욕망을 가졌고, 그 길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아이다. 그래서 니가 마침내 택한 답이 무엇이더냐?” 루치드는 저 질문에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답이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답이 자신의 입으로 나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래. 니가 선택한 길이다. 니가 여기 있는 이들을 버렸다. 여기 있었던 이들은 물론, 너의 가족도 버렸다.” 루치드는 귀를 막았다. “그리하여 니가 얻은 능력을 보아라. 너의 결핍이 채워지면서 드러난 권능이다. 오로지 완전에 다다른 이들에게 주어지는 권능들이 너에게도 나타났다. 물론! 아직은 완벽하지 않지. 그러니 너에게 나타난 그 권능 역시 완벽하진 않지.” 루치드는 이런 능력을 얻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그냥 생겼을 뿐이다.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자. 시공간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넌 어디에도 갈 수 있고,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다. 아직 자각 능력이 떨어져서 그 능력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깝다.” “아뇨! 아니에요! 전… 이런 거 원한 게 아니었단 말이에요.” “말했잖니? 권능이라고. 그것은 네가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능력이다. 네 심장이 원래 그 위치에 있던 것처럼, 너의 권능 역시 원래 있던 것이다.” 하지만 전제가 틀렸다. “난, 난 가족을 버리지 않았어요!” “가족을 찾으려고?” “예! 찾고 싶어요! 찾아야 돼요!” “그래. 그게 바로 결핍을 채우려는 사람의 본능이다. 가족에게서 보살핌을 받고, 성장하여, 다시 자신만의 가족을 만들려는 사람의 본능. 그것이 바로 결핍이다. 너는 그저 그 결핍을 채우려는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고.” “좋아요, 다 좋아요. 그러니까, 우리 가족을 찾게 해주세요!” 그는 루치드에게 다가와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루치드와 시선을 마주했다.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존재의 눈은 암흑이었다. “어머니를 떠난 것도 너의 의지였다. 있지도 않은 동생을 만들고, 거기에 이름까지 붙여준 것이 너의 의지였다. 그리고 이제 다시 찾으려 하니, 그것도 너의 의지. 그러니, 정 원한다면 그렇게 해라. 하지만 나, 언제나와 같이 멀리서 지켜만 볼 뿐이다. 다만 오랜만에 완전자(完全者)에 다다른 이를 보고 안타까움에 조언을 해주고 싶어 이렇게 나타났으니, 이제 다시 나는 나의 길로 가야겠구나. 그리고 너, 그렇게 너의 길로 가거라. 다만, 너의 길에서 부디 길을 잃지 말아라. 이 역시 어쩌면 너의 길에 반드시 거쳐 가야 할 관문일지도 모르니.” 그 존재가 루치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가 머리에서 손을 떼었을 때, 루치드는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꿈은 너무나 요상해서 그 뜻을 헤아릴 길이 없었다. 커다란 석벽 앞에서 통곡하는 기분도 들었고, 명수와 함께 갔던 그 바다를 홀로 바라보며 그 장대함에 위축되는 기분도 들었다. 그때, 누군가가 어깨를 흔들었다. “정신이 드니?” 루치드는 힘겹게 머리를 털고 상체를 들어 올렸다. 땅을 짚고 있는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허약한 팔이었던가? “루치드, 정신이 드니?” “네.” 그러다가 루치드는 번뜩 고개를 들어 자신을 부른 사람을 쳐다보았다. “어? 안트?” 안트가 예의 차가운 표정으로, 하지만 예전보다 훨씬 늙어버린 얼굴로 루치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루치드였군. 왜 여기서 자느냐? 잘 데가 없어서 그러냐, 아니면 오랜만에 찾아온 고향이 그리워서 바닥의 흙이라도 핥고 싶었던 것이냐?” 안트식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루치드는 고개를 털었다. 그리고 안트에게 인사를 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신테에게 듣기로는 대륙으로 나갔다고 들었는데?” “신테도 만났던 것이냐? 흠, 뭐 어쨌든 그 말대로 대륙에 나가긴 했지. 그리고 이제 돌아올 때가 된 거 같아서 돌아오던 길이었는데…. 그나저나 넌 정말 여기 왜 이러고 있느냐?” 안트는 루치드를 일으켜 세우고, 몸을 털어 주었다. 루치드는 잠시 자신이 왜 여기 있었던 가를 생각한 뒤 안트에게 대답했다. 녹스에 일자리를 찾으러 갔던 일, 오물 수거일을 하면서 간간이 빈촌에 대해 물었던 일. 그리고 우연히 마약을 접하고, 손을 댔던 일. 그리고 그 후의 일들까지. “그러니까, 세상이 온통 숫자로 보였다?” “네.” “그리고 혹시나 가족에 대한 흔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곳으로 왔고?” “네. 그리고 여기서 약효가 떨어졌던 것인지, 더 이상 숫자가 보이지 않게 됐어요. 그리고 힘이 다했던지 쓰러졌나 봐요.” 루치드는 마지막에 느꼈던 극심한 탈력감에 관해 설명했다. 안트는 그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요즘 대륙에서도 마약 때문에 말이 많은 것 같더라만, 네가 말한 것 같은 마약은 들어본 적이 없구나. 아마도 네가 좀 특별한 녀석이라 그런 것인지도 모르지.” 세상을 숫자로 치환하여 바라보게 한다는 루치드의 환상은 루치드 만의 특별함 때문이라 생각하며 안트는 화제를 바꿨다. “혹시 다른 문제는 없느냐? 나도 잘은 모르지만, 마약을 직접 섭취하는 경우에는 몸에 심각한 후유증이 생긴다고 하던데.” “잘은 모르겠어요. 그런데… 지금 몸에 힘이 없긴 하네요.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어요.” 안트는 루치드를 일으켜 세운 뒤, 가까운 집으로 들어갔다. 다 낡은 문은 안트가 손을 대자, 그대로 뒤로 넘어가며 부서져 버렸다. “내가 디아트리도 아니고 이렇게 힘이 셀 리가 없는데?” 안트식 농담에는 대꾸하기가 어려웠다. 루치드는 말없이 집 안으로 들어가 적당한 의자 위에 앉았다. 다행히 의자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래서, 흔적은 찾았느냐?” 루치드는 고개를 저었다. “거의 숫자가 사라지기 직전이긴 했어요. 그런데, 적어도 우리 집 안에서는 어떤 흔적도 나오지 않았어요.” “잘은 모르겠다만, 내 생각에 30년 전의 흔적을 찾으려는 노력이 가상하긴 하다만, 애초에 찾을 수 없을 것 같구나.” 주위를 둘러보는 안트의 시선을 따라 움직인 루치드 역시 그 의견에는 동의했다. 아무래도 마약에 취해서, 평소라면 하지도 않을 생각을 했던 것 같았다. 마약이 이래서 무서운 거구나, 라고 생각하며 루치드는 안트를 돌아보았다. “안트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안트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대륙에 나가서, 깨달음을 이어나갈 자를 찾았고, 찾아서 수련할 수 있게 도와주었고,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지.” “그게 끝이에요?” “그럼 더 있겠느냐? 다른 이야기는 모두 불필요한 것들일 뿐이다. 설마 내가 어떤 밥을 먹고, 어디서 잠을 잤는지를 모두 들어야 만족하겠냐?” 루치드는 끝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안트를 만나서 반갑네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쓰러졌던 걸 들켜서 창피하기도 하지만요.” “그런 건 창피할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이런 곳에서 널 만난 게, 지난 10여 년간 겪었던 일 중에서 가장 극적인 일이구나.” 루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루치드는 잠시 ‘극적인 일’을 떠올리다가 피식 웃었다. “왜 그러느냐?” “제가 마약인 줄 알고도 먹었다면, 미친 거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루치드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그 때는 마치 먹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꼭 그 맛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아무래도 안트에게 교육을 잘 받은 거 같아요.” “내가 언제 너에게 마약을 먹어보라고 가르쳤던가? 비록 이 나이가 되어서 기억도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너에게 그런 걸 알려줬던 기억이 없는데?” “그게 아니고요.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하셨잖아요.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도 하셨고요. 마약을 먹으면 안 된다는 건 당연한 일이니, 제가 한 행동은 어쩌면, 안트의 말을 잘 따른 결과가 아닐까 하는 거죠.” “부디 농담이길 바라고, 그게 농담이더라도 굉장히 불편한 농담이구나. 의심할 여지 없는 곳까지 의심해보라는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까지 의심했길래 마약을 먹어도 된다는 결론을 냈는지 들어보고 싶구나.” 루치드는 웃음을 터뜨렸다가, 사래가 걸려 콜록거리기까지 했다. “농담이었어요. 아무튼 그 때는 그냥 마약을 먹어보고 싶다는 충동이 강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후에는 마치 제가, 제가 아닌 것처럼 행동했어요.” “어떻게?”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요?” 안트는 턱을 쓰다듬더니 대꾸했다. “어쩌면 그게 너의 원래 성격일지도?” “농담인가요?” “아니, 이건 진담. 예전에 널 봤을 때도 좀처럼 감정표현이 많지 않았던 것 같아서 말이야.” “뭐, 아무튼 그때의 전 제가 아닌 것 같았어요. 그게 마약의 부작용이겠죠.” “이미 숫자로 된 세상을 봤을 때, 부작용이 시작되고 있었다는 생각은 안 드니?” “그것도 그렇네요.” 루치드는 최대한 가벼운 이야기로 안트와 대화를 나눴다. 그래야만 마약의 잔재가 모두 떨어져 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가슴속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무거운 감정 때문에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안트는 루치드의 그런 마음을 이해해주기라도 하는 듯, 마치 잘 짜여진 대본을 읽어주는 상대역의 역할을 맡은 것처럼 충실히 대화에 응했다. ======================================= [261] 상승(6) 그 뒤로도 루치드는 안트에게 자신의 신기한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루치드의 기억은 잃어버린 가족의 흔적을 찾아 마을을 헤매다가 공터 중앙에 이르러 쓰러지는 것에서 끝이 났다. 안트는, 이제는 하얗게 새버린 머리를 쓸어넘기며 루치드의 경험에 관한 자기 생각을 밝혔다. “재밌는 경험담이구나. 어떤 부분은 믿기 힘들고, 또 어떤 부분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기도 하고 그렇구나. 특히 세상을 숫자로 바라본다는 발상은 재밌기도 하다.” 안트는 자세를 고쳐 앉은 뒤, 이제는 차분한 얼굴로 돌아온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 동안, 진리를 탐구하는 것에 매진했던 나의 경험에 비춰볼 때, 이 세상을 숫자로 본다는 것은 흥미로운 발상임이 분명하다. 숫자란 어떤 의미에서는 수많은 말과 의미를 함축하는 동시에 그 자체로 왜곡되지 않는 의미를 지니니까 말이다.” “어떤 뜻이죠?” 루치드는 오랜만에 안트에게 수업을 듣는 기분으로 가르침을 청했다. “1이란 숫자를 보자. 1은 유일함이다. 또 그 자체로 완결성을 지닌다. 그래서 1은 ‘태양’을 의미하기도 하지. 2는 어떠냐? 2는 두 번째란 의미도 있지만, ‘함께’라는 의미도 있다. 또 하나에 하나를 더 했다는 뜻에서 행복을 의미한다. 3은 ‘균형’이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니 평등하다. 그래서 3은 ‘우주’다. 해와 달과 별을 가진 우주를 의미하지. 4는 둘에 둘을 더했다. 그래서 ‘대립’과 ‘갈등’을 의미하지. 동시에 4는 4가지 길, 즉 ‘방위’를 뜻한다. 5는 방위에 하나의 점을 찍어 ‘현재’를 의미한다. 또한 사람의 몸에 난 다섯 가지를 의미하니, ‘건강’한 숫자다. 6은 이미 건강한 5에 하나가 덧붙었으니 ‘쓸모없음’이다. 한편으로는 현재를 의미하는 5에 하나가 덧붙었으니 ‘장애물’이다. 7은 장애물을 뛰어넘었으니 ‘극복’이다. 극복하니 앞이 보인다. 그래서 7은 ‘목표’이며 ‘지향점’이다. 8은 목표에 다다르니 ‘성공’이며 ‘성취’이다. 또 8은 4에 4를 더한 수다. 그래서 전 방위를 뜻하니, 온 세상을 아우르는 바람이다. 9는 나중에 설명하고, 10부터 설명하자. 10은 5에 5를 더한 수다. 사람의 손가락 수이며, 발가락 수이다. 그래서 10은 꽉 찬 수다. 모든 것이 꽉 들어찼다는 의미에서 10은 가장 완벽한 세계, 이상적인 세계를 뜻한다. 이보다 건강한 수는 없다. 그래서 무병(無病)의 세계, 근심이 없음이니 완벽함이다.” 물론 루치드는 그 의미를 알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환상(?) 체험에서 느낀 바와 연결지어 들으니,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9는요?” “완벽함에 하나가 모자라는 수다. ‘불완전’이다. 또한, 완벽한 세계에 모자람이 있으니 ‘현생’이다. 근심이고 고민이다.” “그럼 9가 가장 안 좋은 수인가요?” 안트는 고개를 저었다. “좋은 수와 안 좋은 수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모든 것에는 좋은 의미와 안 좋은 의미가 함께 있다. 10이 완벽하다고 해서 좋겠느냐? 완벽한 세계에 인간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늘 근심을 앓고 늘 미래를 걱정하는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0은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반대로 9가 근심과 고민, 불완전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다. 그래서 9는 ‘인간’을 의미한다.” 어쩐지 ‘음양설’이 떠오른 루치드가 이를 안트에게 알려주었다. 안트는 진지하게 들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저쪽 세계의 철학이란 것인가? 과연 그곳에서도 진리를 탐구하고 고민하는 이들이 있긴 하구나. 과연 한 측면이 음(陰)이고, 다른 측면 양(陽)이라! 그 둘을 세계의 변화와 발전의 원인으로 보는 시각은 타당하다. 나 역시 모든 사물에는 두 가지 측면이 모두 존재한다고 보니까. 그러니 말하지 않았더냐? 의심하라고. 보이는 것만을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도 가정하고 추측하라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리라.” 어쩐지 뿌듯해하는 것 같은 안트의 모습이었다. 루치드는 진중하게 가르침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안트는 루치드를 빤히 바라보더니,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한 가지만 더. 사실 이번에 넌 운이 좋았다고 봐야 할 거다. 마약을 그렇게 섭취하고도 이리 별 탈이 없는 경우는 내 듣지도 보지도 못했으나, 내가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니 너의 경우가 어떠한지를 딱 잘라 말하기 힘들구나. 그러니 지금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해서 안심하지 말 것이며, 그렇다고 혹시 모를 부작용이나 후유증을 걱정하며 근심하지 말아라.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흐를 것이되, 넌 그저 이겨내려는 의지를 가지면 될 것이다.” 어쩐지 익숙하게 들리는,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는 생각을 잠시 하던 루치드. 그가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지를 보던 안트는 루치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의 의지가 널 지켜줄 것이다.” 아마도 환상에서 겪은 이야기 때문에 ‘의지’를 강조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역시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 루치드였다. “알겠어요.” 안트가 다시 손을 무릎으로 가져가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나저나. 이렇게 볼 때마다 달라지니, 다음에는 널 볼 수나 있을지 모르겠구나.” “자주 올게요.” 안트가 고개를 저었다. “굳이 날 보기 위해서 올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제까지와 다른 무거운 목소리로 루치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이제는 되도록 이곳으로 오지 말아라.” “네?” “여기서 니가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은 것 같구나. 더 얻으려 하는 것은 욕심이고 지나침이다. 6에 대해 설명했던 것, 기억하느냐?”” 루치드는 안트가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렸다. “쓸모없다는 뜻인가요?” “불필요하다는 뜻이다. 이 세계가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기에 니가 마약에 취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니가 계속 무언가를 얻기 위해 노력할수록 오히려 건강을 해칠 뿐이니까.” “그럼 계속 5에서 머물러야 하는 건가요?” 안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 수의 의미들을 그렇게 즉물적(卽物的)으로 해석하지 말아라. 애초에 그 숫자들 각각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건강한 인간이 된다는 의미가 어떤 의미겠느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굳이 욕심을 낸다면… 나나 디아트리, 신테처럼 지톤의 삶을 살아야겠지만, 그 삶이 행복해 보이더냐?” 마지막 말을 뱉으며 살짝 웃은 것 같기도 했지만, 원체 차가운 인상인지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건강한 삶을 되찾거라. 단지 신체의 건강함이 아니라 정신의 건강함도 일컫는 것임은 잘 아리라 믿는다.” 루치드는 머뭇거리며 꺼낼까 말까 하던 질문을 꺼냈다. “그럼… 저희 가족은요?” 안트의 얼굴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루치드.” “네?” “너의 이름의 의미를 아느냐?” 예전에 핀체노에게 들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밝은 새벽’이란 뜻이라고 들었어요.” “맞다. 그리고 그쪽 세계의 이름은?” “…단유요. 김단유.” “혹시 그 이름에도 뜻이 있느냐?” 루치드는 기억을 더듬어 말했다. “단련할 단(鍛)에 도울 유(侑)를 쓴다고 들었어요. 듣기로는 제가 열심히 공부해서 받았던 것을 갚으라는 뜻이라고 했어요.” 안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어느 세상이나 마찬가지구나.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이름대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거지. 너 역시 그렇다. 그런데 예전에 우리가 너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었지. 너의 삶과 이름의 의미가 맞지 않다고.” “네.” “너의 시간, 새벽의 시간은 동이 트기 전의 시간이고 그래서 동이 트고 나면 끝이 나는 시간이다. 매우 짧지. 짧지만 그렇기에 소중한 시간이다. 너의 이름은 그런 소중함의 마음이 깃든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여기서 떠났구나.” 루치드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트는 고개를 들었다. 한쪽 지붕이 무너진 탓에 뻥 뚫린 천장을 통해 하늘이 보였다. 해가 점점 기울어가는 중인지, 그 하늘도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반대로 저쪽 세상의 이름은 지금의 너를 그대로 보여주는구나. 단련한다는 의미도 좋고, 돕는다는 의미도 좋구나. 무엇보다 너의 삶이 너의 이름에 걸맞으니 더는 다른 이름으로 불릴 이유가 없구나.” “하지만, 하지만….” “다만, 너의 원래 이름을 잊지 말아라. 새벽은 순환이다. 밤이 가고 낮이 오는 그 짧은 순간이 매일 반복되는 것을 잊지 말아라. 언젠가, 넌 또다시 다른 밤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또 다른 낮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너의 숙명이니, 비록 너의 삶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을 숙명이며 끝내 마주칠 운명이다. 하지만 지금은 새벽의 시간이 끝났으니 돌아갈 때가 되었구나.” 루치드가 묵묵부답으로 안트를 바라보자, 안트가 눈을 돌렸다. “가족을 찾고 싶은 너의 마음은 잘 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너의 뜻대로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런데, 지금 너에게서 보이는 운명은 여기에 없으니, 너의 이름 또한 의미를 잃었다. 이름의 의미를 잃는다는 게 무엇인지 아느냐? 삶의 길을 잃었다는 의미이거나, 혹은 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방황하는 방랑자나 혹은 죽음을 목전에 둔 노인이 그렇다. 하지만 넌 어떻느냐? 다행히 다른 삶이 마련되어 있으니, 그 삶 속에서 너의 이름에 부여된 사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그럼, 가족을 찾지 말아야 하는 건가요?” “찾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니라,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물론 내 말을 따를 필요는 없다. 그건 너의 의지니까. 얼마든지, 또 이곳으로 여행 오듯이 와서 가족들을 찾고, 또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면 되니까. 그런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 어느 한쪽의 삶도 충실히 하지 못하니, 결국 두 삶의 의미가 모두 사라지는 부작용이 생길지도 모른다.” 안트는 거기까지 말하고 말을 아꼈다. 그 이상은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루치드는 안트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침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소리 없이 흘러내린 눈물이 바닥을 적셨고, 안트는 그 눈물이 그칠 때까지 앞에서 자리를 지켜주었다. **** “어? 단유야? 너 왜 그래? 울었어?” 명수는 눈이 퉁퉁 부어서 나타난 단유를 보고 물었다. “아, 자다가 슬픈 꿈을 꿔서 그래.” “무슨 꿈?”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꿈.” 명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단유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그를 위로했다. “나도 그럴 때가 있어. 사실 밤새도록 꿈을 꾸는데, 진짜 기억나는 건 10분도 안 되잖아? 그래서 잠이 깨고도 슬플 때가 있지. 나도 그런 적 있어서 잘 알아. 그러니까, 울고 싶으면 울어. 형이 지켜줄게.” “형은 무슨.” “어허. 괜찮아, 괜찮아. 쑥스러워 하지 마. 형이 다 지켜줄게.” 단유는 피식 웃으며 어깨에 걸친 팔을 털어냈다. “됐다. 그냥 운동이나 가자. 오늘은 좀 많이 뛰어야 할 거 같아.” “그럴래? 좋다, 그럼 나도 같이 뛰어줄게.” “같이 뛰다가 먼저 나가떨어지려고? 그럼 너 오늘 축구 못 뛸 텐데?” “너 나 무시하냐? 내가 그 정도 체력은 되거든?” “널 아니까, 이런 충고도 하는 거다.” “오케이, 그럼 오늘 내기하자. 누가 더 오래 뛰나.” 단유는 먼저 뛰어가 버리는 명수의 등을 보며 하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새벽 안개처럼 희미한 미소였다. “그래, 오늘 죽을 때까지 뛰어보자.” 단유도 뒤따라 뛰기 시작했다. **** 여름이 지나갔다. 너무나 더운 여름이었다는데, 덕분에 어떤 곳에서는 일사병으로 쓰러져 죽은 사람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더위 속에서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녔던 명수는 얼굴만 조금 탔을 뿐, 건강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건강함이 감독의 눈에 띄었다. “2학기에, 추계 축구대회에서 주전 선수로?” 명수는 뻐기듯이 가슴을 쭉 내밀고 거드름을 피웠다. “테스트를 했는데, 내가 2학년 형들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았다는 거 아냐? 결과가 딱 나오니까, 아, 석고가 평소에 이런 기분이겠구나, 라는 게 느껴지더라니까?” “거기서 왜 날 걸고넘어지냐?” “너 맨날 1등만 하잖아. 평소에는 잘 몰랐는데, 오늘 1등 해보니까 알겠더라고.” “어떤 기분인데?” 채윤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명수가 히죽거렸다. “딴 애들이 다 내 아래라는 생각? 별거 아니네, 이런 기분?” “거만 떨긴.” 지태가 명수를 보며 툴툴거렸다. 그러더니 단유를 향해 눈을 흘겼다. “왜?” “너도 저런 생각이었던 거야?”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떤 기분인데?” “아무 느낌도 없어. 1등을 하든, 꼴찌를 하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와, 이게 더 기분 나빠.” “나도, 나도.” 지태와 채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역시 1등도 못해 본 녀석들은 이런 기분 몰라. 그치, 석고야?” 단유는 잠시 명수를 힐끗 바라본 뒤, 지태와 채윤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같이 가.” 개학 첫날. 모처럼 다 같이 모여 즐거운(?) 마음으로 등교를 하는 네 사람이었다. ======================================= [262] 파동(1) 단유는 자신의 이름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선생님께 물었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신 분이니까, 자신의 이름을 잘 해석하지 않을까 하고. 그랬더니 선생님은 과연 노련하게 대처하셨다. “이런 것도 있어요?” “요즘 세상에 안 되는 게 어딨니?” 선생님은 핸드폰으로 역술 사이트를 찾아가 단유의 이름을 넣었다. 사주도 넣어야 하는데, 단유는 보육원에서 쓰던 생일을 알려주었다. “보자, 사주팔자는 태어날 때 정해지지만 이름은 원하는 대로 지을 수 있습니다. 타고난 사주에서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이름에서 보완해 주어야 합니다?” 첫머리에 등장한 글귀를 읽고 선생님이 피식 웃었다. 이게 다 ‘상술’이라며 그냥 재미로 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단유의 이름을 해석한 결과를 읽어주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예의가 있어 대내외적으로 성공하여 안락하고 부귀영화를 누려 후손에게까지 전달되고 건강 복까지 장수하는 운이 유도된다.” “우와, 단유 너 성공한대!” 옆에서 호빵을 안고 있던 명수가 더 신이 난 모습이었다. 선생님은 계속 읽어나갔다. “의사, 정치가, 관공직 계통이 적성에 맞아 성공한다. 너, 의사 할 거니? 너 성공할 수 있다는데?” 선생님의 장난스러운 질문에 단유는 볼을 긁적일 뿐이었다. “천(天), 인(人), 지(地) 삼재(三才)가 나를 돕는 격으로 대내외적 활기가 충만하고 대길하며 심신이 건강하여 천수(天壽)를 누릴 수 있다, 고 하는데?” “우와 좋겠다. 단유, 너 이름 되게 좋은 거구나?” 명수가 한껏 부럽다는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럼 네 것도 봐줄까?” 기다렸다는 듯 명수가 대답했다. “네!” 선생님은 잠시 시간을 들여 명수의 이름과 사주를 넣고 결과를 기다렸다. 결과 페이지가 로딩된 후, 선생님은 그 결과를 명수에게 알려주었다. “보자. 이건…아까 똑같은 작명소 안내문이고, 여기부터네. 감수성이 예민하고 예의가 있어 대내외적으로 성공하여 안락하고 부귀영화를 누려….” 명수는 자신도 성공한다는 말에 들뜬 얼굴이 되었다가, 선생님의 말씀이 이어질수록 조금씩 얼굴이 굳어갔다. “선생님, 그거 제 거 맞아요?” “맞아, 봐봐.” 선생님은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과연, ‘인명수’라는 이름이 똑똑히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왜 단유랑 똑같아요?” 선생님은 웃음을 터뜨리며, 명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도 단유만큼 좋은 이름이라는 뜻이겠지. 여기 봐. 심신이 건강하고 천수를 누린다고 되어 있지? 너도 좋은 이름이란 뜻이야.” 실상은 작명 사이트의 상술에 따른 일이지만 이를 알지 못하는 명수는 자기도 좋은 뜻이라고 이해해 버렸다. 다만 단유는 흥미를 잃고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 2학기의 시작은 처음이 낯설었을 뿐, 그다음은 마치 언제 방학이 있었냐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살짝 그을린 얼굴도 있고, 아주 하얗게 변해버린 아이도 있었다. “넌 얼굴이 왜 그러냐?” “왜?” “너무 하얗잖아? 무슨 병에라도 걸린 거야?” “아니, 햇빛을 못 봐서 그런지도.” “무슨 일 있었어?” “악마의 게임에 손을 대고 말았다.” 친구는 엄지를 추켜세워 그 아이에게 존경심을 표현했다. 익숙하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은 아이들의 머리 위로, 1교시를 알리는 알림 소리가 에어컨 바람을 타고 내려와 들뜬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여름도 다 지났는데, 누가 에어컨을 켰어!” 1교시를 맡은 수학 선생님이 문을 열자마자 쏟아지는 냉기에 인사 대신 에어컨 스위치를 찾았다. “아직 더운데요!” “더운데 함 봐주세요, 쌤.” 아이들은 마치 짠 것처럼 하소연했다. 선생님은 이 녀석들, 혀를 차며 한 번 봐준다는 식으로 아이들을 둘러본 뒤, 교탁에 섰다. “방학 잘들 보냈고?” “네.” “방학 동안 놀기만 했다, 손!”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선생님은 얼굴에 웃음을 담아 말했다. “좋다. 학생이 방학이라고 놀기만 하면 안 되지.” 선생님은 준비해온 쪽지를 분단 별로 나누어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쪽지 시험 치고 가자.” “아아! 쌤!” 아이들의 저항은 가볍게 묻혔고, 선생님이 전해준 쪽지는 손에 손을 거쳐 가장 뒷줄에까지 이르렀다. “5문제밖에 안 되니까 10분이면 되지?” “아아! 쌤!” “좋다. 20분.” 그리고 20분간 교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늦여름, 혹은 초가을이라 더위가 가시지 않은 탓인지, 아직 학교로 복귀하지 못한 정신을 수습하느라 정신없던 이들에게 쪽지는 특효약이었다. 단유는 문제를 보자마자, 답이 떠올랐다. 애초에 10분 만에 풀―하지만 선생님의 배려로 20분간 풀 수 있게 된―간단한 문제였기 때문에 어렵지도 않았지만, 예전보다 훨씬 빨리 수식이 머릿속에 완성되고 그 해가 구해진다는 느낌이었다. 저쪽 세계의 마약이 여기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 며칠을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특별히 의심스럽거나 걱정스러운 증상이 발현되지 않았기에, 나름대로 안심하고 있던 단유였다. “다 풀었냐?” “네.” “역시 전교 1등은 다르다. 그치?” 주변의 아이들에게 동의를 구하려 했건만, 아이들은 문제를 푸느라 바쁘거나, 혹은 그냥 대답을 피했다. 1교시가 끝난 후, 돌아온 정신을 수습한 아이들은 빠르게 학교에 적응했다. “2교시가 영언데, 이것도 쪽지 시험 치는 거 아냐?” “에이, 설마.” 아이들은 혹시 몰라 영단어 숙어집을 꺼내거나, 교과서를 살펴보거나, 혹은 책상에 엎드려 부족한 수면을 채웠다. 하지만 또 일부는 방학 동안의 진귀한 체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아키하바라 가봤냐? 와, 죽이더라.” “진짜? 혼자?” “형이랑 같이 갔지. 엄빠는 호텔에서 쉬고, 형이랑 나랑만 갔거든. 근데, 완전 대박.” “왜?” “만다라케라고 알아? 거기 있잖아, 8층짜리인데, 거기 있잖아, 별의별 거 다 팔거든? 막 피규어도 팔고, 게임도 팔고, 만화책도 파는데 우리 형이 거기서 하나 샀거든?” 아이는 가방에서 책을 하나 꺼냈다. “씨발, 인터넷에서나 봤지, 실제로 이렇게 파는 건 처음 봤다. 근데, 졸라 대박.” 아이는 형 몰래 가져온 책을 펼쳐 친구들에게 진귀한(?) 구경거리를 선사했다. 지태와 함께 있던 채윤이 고개를 빼고 흘끔 구경하려는 모양새를 보이자, 지태가 말했다. “그렇게 궁금하면 가서 보고 와. 여기서 그러고 있지 말고.” “아냐, 괜찮아.” 볼이 빨개진 채윤이 고개를 저었다. “뭐 어때서? 궁금하면 볼 수도 있는 거지. 그런 거 창피해하지 마.” “뭘 어쨌다고 그래? 괜찮다니깐.” 지태가 짓궂게 놀리자, 채윤이 격하게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채윤의 반응이 재밌어서 더 놀리려다, 무심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는 단유의 모습에 화제를 돌렸다. “너 무슨 일 있어?” 단유는 지태를 보았다. “아니, 없는데?” “그래? 근데 오늘 좀… 이상하다?” “뭐가?” 지태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뭔가 예전이랑 다른 분위기인데, 뭐가 달라졌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다르거든?” 지태의 말에 채윤이 즉각 반응했다. “책을 안 보잖아.” “아! 맞네.” “그리고 머리 스타일도 좀 바뀌었고. 방학 전에는 4:6? 3:7? 뭐 그 정도 가르마를 탔었는데, 지금은 가르마를 안 탔잖아.” “아! 우와 대박.” 채윤은 계속 단유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얼굴이 조금 탔나? 그건 좀 애매하긴 한데, 조금 탄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그리고… 앉은키도 커진 거 같긴 한데, 그냥 키가 커진 걸까?” “너 무슨 단유 스토커냐?” 지태가 채윤을 지긋이 쳐다보며 물었다. 채윤은 고개를 저으며, 그런 게 아니라고 변명했다. “그 정도는 관찰력이 좋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거야. 오히려 그걸 모르는 니가 너무 눈치가 없는 거 아냐?” “굳이 그런 걸 알아야 하냐?” “굳이 알려고 아는 게 아니라, 그냥 보이는 거지.”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그만해. 내가 무슨 틀린 그림 찾기도 아니고, 뭐냐?” “음. 이것 봐. 말투도 조금 변한 거 같다.” “말투?” 지태가 또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또 바로 이해했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그렇네. 내가 이상하다는 게 그거다.” “뭐?” “너 변성기야?” “응?” 단유가 무슨 뜻이냐고 묻는 얼굴로 지태를 바라보는데, 채윤이 덩달아 손가락을 퉁기며 지태의 말에 수긍했다. “아, 그러네. 단유, 너 변성기다.” “어?” 단유는 저도 모르게 목에 손을 가져갔다. 어떤 조짐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변화, 변성기였다. **** 단유는 꿈을 꿨다. 숲속을 뛰어놀던 아이가 숲을 뛰쳐나오는 꿈이었다. 그 아이는 숲에서 약초를 구한다거나, 나무껍질을 뜯는다거나, 떨어진 가지를 줍는 일은 하지 않았다. 오직 빛이 새어 들어오는 숲속을 뛰어다닐 뿐이었다. 숨이 가쁘도록 뛰어다니다, 마침내 숲속을 빠져나오는 게 다였다. 아이는 언덕을 지나,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을 향해 달음박질했다. 높은 자작나무 2그루가 뒤편에 심어진 목조 건물의 두꺼운 현관을 열었더니, 구수한 냄새가 아이의 코를 찔렀다. “엄마!” 아이의 부름에 어머니가 고개를 돌려 아이를 보았다. 어머니는 화사하게 웃으면서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팔을 벌려 뛰어오는 아이를 맞이했다.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이를 번쩍 안아 든 뒤, 어머니는 밖으로 나가 떠 놓은 물로 아이의 얼굴과 손을 간단히 씻긴 후, 다시 집안으로 들어와 식탁에 앉혔다. “배고파.” 어머니는 웃으면서 곧 화덕에서 갓 구운 빵을 꺼내어 도마에 올렸다. 그리고 아이가 먹기 편하도록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접시에 놓은 뒤, 아이에게 가져다주었다. 아이가 급히 손을 뻗어 먹으려 하자, 어머니가 손을 내밀어 막았다. 눈웃음을 짓던 어머니는 곧 컵에 하얀 우유를 담아서 아이 앞에 내놓았다. 그렇게 식사 준비가 끝난 후에야 마주 앉은 어머니는 아이가 식사해도 되냐는 눈으로 쳐다보자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잘먹겠습니다, 라고 외치며 빵에 손을 가져가는데, 어머니가 아이에게 물었다. “몇 개니?” 아이는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뻗던 손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짙은 눈썹의 어머니는 여전히 고아한 얼굴을 하고 눈웃음을 지으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빵, 몇 개니?” 아이는 고개를 숙여 접시에 올려진 빵을 세어 보았다. “몇 개니?” 다시 한번 묻는 어머니의 물음에, 아이는 대답했다. 아니 대답을 하려고 했다. “단유야.” 단유는 번쩍 눈을 떴다. “우와, 너 잘 잔다? 이렇게 시끄러운데 잠이 와? 어제 잠 못 잤어?” 상미가 단유를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단유가 정신을 수습하고 보니, 명수를 따라 조기축구회를 나온 참이었다. 물론 명수만 뛰고 단유와 상미는 관중석에서 명수를 응원하는 역할이었다. “뭐라고 했어?” 단유는 상미가 자신에게 뭔가 말을 걸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막 응원하는데 갑자기 니가 어깨를 들썩거리길래 보니까, 자는 거 같더라고. 그래서 그냥 보는데, 니가 눈을 뜬 거야.” 단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아저씨들이 요란스럽게 소리를 내며 운동장을 누비는 중이었다. 누가 보면 발 대신 입으로 축구하냐고 한소리 했을 장면이었다. 그런 와중에 잠이 들었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에 스스로에게 놀라는 단유였다. “무슨 꿈이라도 꿨어? 너 조금 전에 얼굴 되게 심각했어.” 단유는 기억을 더듬어보니 대충이나마 조각난 기억들이 연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꿈에서 깨기 전, 빵이 몇 개냐고 묻던 질문에 답하려던 그때, 자신이 깨어났다는 사실에 이르렀다. ‘몇 개였지?’ 어쩐지 그 숫자를 알고 싶었다. 그런데 그것만 생각나지 않았다. 생각나지 않아서 더 알고 싶은, 그런 꿈이었다. ======================================= [263] 파동(2) 사실 이 나이 때의 아이들, 특히 남자 아이들의 성장은 눈이 부실 정도로 빠르다. 그래서 방학 한 번씩 지날 때마다 몰라보게 달라진 모습으로 등장하는 아이들이 한 반에 한두 명씩은 있기 마련이었고, 단유 역시 그런 아이들 중의 한 명이었다. 하지만 단유보다 더 놀라운 모습을 연출한 아이가 있었다. “너 키 얼마나 큰 거냐?” “안 재봐서 모르겠는데? 그렇게 컸나?” 시치미를 떼고는 있지만, 사실 얼마 전에 키를 잰 적이 있었던 민일은 괜히 능청을 떨었다. 사실 키가 큰 것도 좋지만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있었다. “사실은 말이다.” 말을 길게 끌던 민일이 품에서 카드를 하나 꺼냈다. “어? 뭐야?” 그냥 체크 카드 정도로 생각하고 보던 짝이 카드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넥서스 엔터테인…먼트?” 민일이 입꼬리를 길게 늘이며 답했다. “드디어 넥서스 연습생이 됐다.” “진짜? 와, 대박!” 그 소란에 주변의 아이들이 관심을 보이고 달려들었다. 곧 민일이 들고 온 출입증 카드는 보물처럼 다뤄지며, 마치 성공을 기원하는 부적이라도 되는 양, 한 번씩 만져보기를 원했다. “거기 누구 유명한 사람 있어?” 괜히 시비를 걸고 싶은 건지, 아니면 민일이 재는 꼴이 보기 싫었던 건지 한 아이가 뾰로통한 어조로 질문했다. 그러나 지금은 누가 뭐라고 해도 너그럽게 받아들여 주고픈 민일은 친절하게, 그리고 모두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PDG(Pretty Darling Girl)알지? 그 그룹이 넥서스 소속이잖아.” 3년 차 걸그룹 PDG는 초기 앨범을 말아먹고 망하나 싶었는데, 유명 작곡가의 곡을 받은 두 번째 싱글이 대박을 치면서 대세가 된 걸그룹이었다. 소규모 기획사를 중견 기획사 정도로 끌어올릴 정도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진짜? 와, 완전 대박! 야, 지니 만나봤어?” PDG의 얼굴마담이라고 불리는 지니는 남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연히 만나봤지!” 사실은 만나지 못했다. 기획사에 들어간 지 이제 겨우 2주 정도밖에 되지 않은 민일은 엊그제 체력 테스트를 비롯한 몇 가지 테스트를 받은 뒤, 회사에서 정해준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완전, 얼굴 이만해.” 꽉 쥔 주먹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민일의 퍼포먼스에 아이들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민일은 어쩐지 우쭐거리고 싶은 기분에 취해서 몇 마디 덧붙였다. “몸매도 완전 예술인데, 진짜… 딱 보면 와, 소리밖에 안 나. 그래 가지고 처음에 인사할 때, 나 완전 얼어서 아무 말도 못했잖아. 근데 나한테 잘해보자고 어깨를 두드려주는데, 나 바로 기절하는 줄.” “오오!” 아이들의 환상과 민일의 망상이 합쳐져 묘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교실이었다. 한편, 모두가 그런 들뜬 분위기에 편승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언제나 마이웨이 스타일인 단유는 물론이고, 걸그룹이나 가요를 즐겨 듣지 않는 채윤 또한 그 분위기에 다소 떨어져 있었다. “뭐하냐?” 다음 수업을 준비하느라고 책상 서랍에서 책을 꺼내 들던 지태가 채윤을 돌아보며 물었다. 채윤은 종아리와 허벅지를 열심히 주무르고 있었다. 아침에는 그냥 어디가 안 좋아서 그러나, 싶은 마음에 그냥 넘어갔었는데, 매 쉬는 시간마다 계속 다리를 주무르는 채윤의 행동이 기이하게 보여 결국 채윤에게 물음을 던져보는 지태였다. “아, 그냥….” “어디 아파?” “아니. 아픈 건 아니고.” 채윤은 눈치를 보더니 중얼거리듯 답했다. “난 키가 안 크는 거 같아서.” 애초에 반에서 제일 작은 정도는 아니었고, 중간 정도였던 채윤은 방학이 끝난 후 교실에 왔을 때, 솔직히 충격을 받았다. 예민한 채윤의 시선에 반 아이들 대부분이 방학 전보다 커져서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대놓고 재보진 않았지만, 어쩌면 앞자리로 자리를 옮겨야 할지도 몰랐다.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 언젠가는 크겠지.” 지태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국어책을 펼치며 다음 시간에 배울 내용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넌 키가 컸으니까, 그렇게 여유만만하게 말할 수 있는 거다.” 채윤의 대답에 지태가 피식 웃었다. “크긴 뭐가 커? 고작 2㎝나 컸으려나?” “단유도 3㎝는 더 큰 거 같고, 너도 그렇고. 근데 나만 키가 안 크잖아.” “야, 키는 언제라도 클 수 있어. 지금 안 큰다고 계속 안 크겠냐?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고, 수업 준비나 해.” 채윤은 지태의 대답에 발끈하며 화를 냈다. “야, 니 일 아니라고 그렇게 막말할래?” “뭐?” 채윤은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별거 아닌 거로 괜한 사람한테 신경질을 부렸다는 생각에 곧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그게, 그렇잖아. 우리 아빠도 키가 작고, 우리 엄마도 키가 작단 말이야. 다들 키가 크는데, 나만 키가 안 크니까…불안하기도 하고.” 지태는 평소에도 별거 아닌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채윤인지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뿐인데, 나름은 꽤 심각한 고민이었던 모양이라 판단했다. “그럼, 우유나 뭐 그런 거 있잖아? 칼슘 보충제 같은 것도 먹고, 운동도 하고 그래 봐. 아, 단유가 운동 많이 하니까, 한번 물어봐라. 혹시 알아, 키 쑥쑥 크게 하는 운동법이라도 알고 있을지.” 단유가 무슨 트레이너도 아닌데, 그런 걸 알고 있을까 싶지만, 또 단유니까 그런 걸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윤이 돌아보니,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는, 혹은 잠이 든 건지도 모를 단유가 보였다. 만약 잠이 든 거라면, 깨우기 미안한데. “점심때, 물어봐야겠다.” “가서 물어봐.” “…나중에.” 지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조금 전에는 드물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여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마음이 여린 채윤의 성격이 어디 가는 건 아니어서, 금세 목소리를 줄이고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친구한테 말을 거는 건데도, 그조차도 쉽게 하질 못한다. ‘어쩌면 키보다 성격이 더 문제일지도.’ 하지만, 지태는 속으로만 생각할 뿐 적극적으로 도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도울 수도 없을뿐더러, 이런 문제는 스스로가 바뀌어야지, 옆에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며. 한편 턱을 괴고 있던 단유는 눈만 감은 채, 귀로 들어오는 온갖 소음들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사실 이것은 일종의 실험이었다. 시각적 정보를 숫자로 받아들였던 지난 날의 환상을 돌이켜보던 단유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또 그런 방식을 마약에 취하지 않은 멀쩡한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일으킬 수 있을까 궁금했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도 책을 보는 대신, 창밖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여전히 푸른 잎사귀가 풍성한 교내의 나무들이지만, 눈으로 보이지 않는 미시세계에서는 눈으로 감지할 수 없는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단유는 알고 있었다. 비록 책으로 배운 내용이지만, 그 내용을 머리에 되새기면서 나뭇잎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특별한 작용으로 이전의 그 현상을 재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나뭇잎은 그저 나뭇잎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문득, 명수가 책상 위에 지우개를 올려놓고 염력으로 옮겨 보겠다고 노려보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 자신이 하는 꼴이 그거랑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바보 같애.’ 자책하던 단유는 생각을 전환하여, ‘정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시각적 정보를 숫자로 치환하는 방식은 체험해 본 바로는 굉장히 효율적이고 동시에 의미의 손실이 없는 방식이었다. 시각적 정보가 착시나 혹은 시야의 한계 등으로 사물 자체의 의미를 100%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단유는 ‘정보’의 올바른 습득과 이해라는 방향성을 탐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정보’가 단지 시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청각’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시각적 정보는 선택적 취합이 가능한데, 청각은 선택이 어렵다.’ 시각적 정보의 경우, 시선을 돌려 원하는 사물을 바라볼 수 있고, 혹은 눈을 감아서 아예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는 선택도 할 수 있는 반면, 청각적 정보는 취사선택이 거의 어려운 편이었다. 게다가 다양한 정보들을 ‘한꺼번’에 취합하기도 어렵다. ‘한꺼번에 정보를 받아들이는 게 가능할까?’ 물론 가만히 생각해보면, 시각적 정보 역시 한꺼번에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굳이 시간을 따지면 거의 동시에 여러 가지 사물에 대해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청각’의 경우에는 쉽지 않은 방식이었다. 두 사람이 한꺼번에 떠들 때, 그걸 한 번에 다 들을 수 있다면? 갑자기, 명수와 상미가 양옆에 서서 떠드는 경우를 떠올렸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상상이었다. 상상만 했는데, 귀가 피곤해지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이왕 생각난 김에 한 번 시도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이런 점을 보면 확실히 단유도 변한 게 틀림없었다. 예전이라면 특별히 호기심을 느끼더라도 합리적으로 따지고 든 뒤에 그 결과가 자신에게 유용할 것인가를 한 번 더 생각하고 효율성을 고려한 뒤에야 시도해 볼 문제였다. 아무런 도움도 안 될 일에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는 것은 비효율이라는 생각이 컸던 단유가 이리 행동하는 것도 어쩌면 마약의 부작용일지도. 그리하여 단유는 눈을 감고 가장 편한 자세로 몸의 긴장을 풀고 귀에 들어오는 모든 소리들을 거르지 않고 모두 듣는 중이었다. 시끄러운 걸 꽤나 싫어하는 성격임에도 오직 실험이라는 목적 아래 멈추지 않는 단유는, 앞에서 지태와 채윤이 나눈 대화도 들었다. 그 때문에 민일과 그의 친구들이 나누던 대화의 뒷부분은 듣지 못했다. ‘첫째는 지태와 채윤이의 대화가 더 흥미로운 내용이어서 그랬고, 두 번째는 민일이가 하는 말들이 너무 시시해서 그런 것이고, 세 번째는 지태 쪽이 더 가까운 곳에서 나누던 대화라서 멀리 있던 민일이의 이야기가 잘 들리지 않은 탓이겠지.’ 분명히 귀에는 두 집단의 대화가 모두 들렸지만, 의미를 분석하고 해석한 쪽은 지태 쪽이었고, 그 때문에 민일이 쪽은 목소리나 웃음소리는 계속 들었지만,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청각적 정보를 받아들이는 귀가 문제가 아니라, 그 정보를 해석하는 뇌의 문제가 아닐까?’ 단순히 듣기만 해서는 정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단유는 한 가지 가정을 해 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좀 더 빨리 정보를 분석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단유는 쉬는 시간 내내 눈을 뜨지 않았고, 채윤은 진짜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 “다시.” 단유가 가만히 서서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앞에서 숨을 헐떡이던 채윤이 거의 울기 직전인 눈으로 단유를 올려다보았다. “다시.” 그러나 인정 사정 봐주지 않겠다는 듯, 단유는 단호하게 말했다. 결국, 깊이 숨을 몰아쉬던 채윤은 다시 허리를 굽히고, 손으로 땅을 짚고, 다리를 뒤로 뻗었다. “더 쭉 뻗어야지. 몸이 완전히 펴지게.” 채윤은 역동작으로 다리를 끌어당기고, 손을 땅에서 떼고, 일어서는 동시에 손을 힘껏 위로 뻗으며 뛰었다. 그리고 다시 처음의 동작을 반복했다. “저거 힘들어 보인다.” 구경하던 지태가 명수에게 넌지시 말하자, 명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되게 힘들어. 익숙하지 않으면 20개도 겨우 할 수 있을걸. 게다가 단유는 자세랑 호흡을 되게 중요하게 생각하거든. 그거 지키면서 하려고 하니까, 몸만 힘든 게 아니라 머릿속도 막 꼬이는 기분이 들고 그래.” 명수가 예전의 경험을 떠올리며 대답해 주었다. “10번만 더 해.” 그 사이, 단유는 채윤의 자세를 교정해주며 마지막 10번, 이라고 알려주었다. 채윤은 젖먹던 힘까지 모두 끌어내, 악을 쓰면서 10번을 마쳤다. 끝나자마자 땅에 널브러지는 채윤에게 단유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뒤 말했다. “앞으로도 꾸준히 이 운동을 하면 키도 클 뿐만 아니라, 몸도 꽤 좋아질 거야. 철봉이랑, 팔굽혀펴기랑, 버피(버피테스트) 같은 맨몸 운동도 자세만 잘 잡아서 하면 다른 어떤 운동 못지않게 효과를 발휘하니까.” 그리고 농구나, 다른 구기 종목도 추천해준 뒤, 쓰러진 채윤을 일으켜 주었다. “그리고 만약 생각이 있으면 새벽에도 운동하러 공원에 나와. 명수랑 나는 매일 새벽에 나가니까, 거기서 같이 운동하는 것도 좋을 거야. 솔직히 지금 이 시간은 내가 시간 내기 어려우니까, 계속 봐주기가 힘들어.” 채윤은 숨을 몰아쉬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진짜 아는 것인지 그냥 너무 힘들어서 아무렇게나 대답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런 것도 정보란 말이지.’ 상대가 보여주는 몸짓, 호흡, 눈빛, 말투 모두가 정보였다. 하지만, 자신은 그 정보를 100%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단유는 그 정보들을 알아내는 것이 자신이 해내야 할 과제라고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 [264] 파동(3) 새벽 운동을 마치고 학교 갈 준비까지 마친 단유가 명수에게 갔다. “뭐 해?” 명수는 아직 교복도 챙겨입지 않은 채였다. 바닥에 주저앉아서 웅크리고 있는데, 등을 돌린 채여서 뭘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 그냥 좀.” 고개만 돌려 대답하는 명수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단유는 다가가서 명수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곧 명수의 발목이 빨갛게 부어오른 것을 보았다. 명수는 애써 대수롭지 않은 척했다. “아까 운동하다가 살짝 접질렸는데, 조금 아프네.” 하지만 목소리의 떨림을 감출 수는 없었다. 주전으로 뽑힌 후, 얼마 남지 않은 추계 축구 대회 준비 때문에 운동량을 늘린 명수였다. 이번에 확실하게 자신의 실력을 보여서 입지를 다지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던 명수에게 비상이 걸린 셈이었다. “많이 아파? 병원 가봐야겠어?” “아냐, 그 정도는. 걸을 수는 있어. 아까 같이 왔잖아.” 모르는 사람들은 명수가 까불고 가볍다 하지만, 진짜 속내는 잘 드러내지 않는 명수였다. 일부러 밝은 모습만 보여주려 한다는 걸 모를 리 없는 단유는 그가 일부러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했다. “선생님께 이야기하고 올게. 무리하다가 나중에 더 큰 일 만들지 말자. 알았지?” “병원 가야 돼?” 굳이 단유에게 확인받지 않더라도 알 수 있지만, 명수는 물었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후, 명수는 선생님의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고, 단유만 홀로 학교로 향했다. **** “많이 다친 거야?” 채윤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명수의 안부를 물었다. 채윤은 결국 새벽 운동을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신의 키에 대한 걱정보다, 새벽에 일어나는 부담이 더 컸던 것 같았다. “정확히는 모르겠어. 그런데 괜찮을 거야. 더 심해지기 전에 빨리 병원에 갔으니까, 낫기도 빨리 나을 테고.” 확신은 못 하지만,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대답했다. 채윤의 뒤를 이어 지태가 물었다. “그럼 이번에 축구 대회 나가기 힘든 거 아냐?” 확실히 대회가 한 달도 안 남은 상황이라 부상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었다. 설령 명수가 괜찮다고 하더라도, 팀에서는 명수를 대신해 뛸 사람들이 많았고, 굳이 명수가 뛰어야 한다는 것도 없었으니 출전이 불확실할 수도 있었다. “중학교 축구팀이라 아무래도 아이들의 건강이 우선이겠지.” 단유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칫했다. 아직은 결정된 게 없는데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걱정을 안고 등교를 한 단유는 수업시간에도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늘 생각하던 부분이긴 했지만, 이 세상에서 단유가 진정으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명수였다. 때문에 더욱 각별하고 마음이 쓰였고, 그래서 책을 들여다보는데도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럴 때, 그 능력이 있다면….’ 이런 상황이고 보니, 더욱 그 능력이 갖고 싶어졌다. 칼에 찔린 상처도 완치시키던 능력이었는데, 접질린 부상 따위야 금방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김단유!” 단유는 옆에서 쿡쿡 찌르는 느낌에 정신이 들며, 고개를 들었다. 도덕 선생님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수업 시간에 딴생각이나 하고 있고…. 전교 1등은 공부 안 해도 선생님이 아무 말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아이들이 오오, 하는 기묘한 탄성을 질러댔다. 단유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잘못을 시인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한 줄 알면, 정신 차리자, 응? 1등이 모범을 보여야지, 안 그래? 아니면 별로 중요한 시간이 아니라서 집중 안 하고 그러는 거야? 아니지?” 단유는 고개를 저으며 결코 그런 생각이 아님을 밝혔다. “아닙니다.” “그래, 그럼 집중해라. 다른 사람들도 집중하고, 거기 너. 이제 잠 깼니? 잠 깬 김에 수업 좀 듣자?” 짧은 웃음소리를 끝으로 다시 수업이 시작되었다. 교과서를 읽고 짧은 주제에 대한 선생님의 설명과 몇 가지 테마를 주제로 한 발표 수업이 이어졌다. 하지만, 선생님에겐 미안하게도 단유는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고 눈은 칠판을 향하지만, 정신은 계속 명수에게 향했다. 예전에 명수가 심한 감기에 걸렸을 때도 이렇게까지 심하게 걱정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괜한 불안과 초조함이 단유를 잠식해갔다. “단유야.” 또 정신을 팔고 있었던지, 단유가 정신을 차리자 눈에 걱정을 담은 지태와 채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이상하다? 오늘 완전히 정신이 나갔는데?” “멘탈이 나가는 정도가 아닌데, 이건? 얼굴색도 안 좋은 거 같고.” 단유는 괜히 볼을 쓰다듬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아마 수업시간이라서 선생님이나 명수가 연락하지 않은 것이리라. 하지만, 자기가 이렇게 걱정을 하는데도 연락이 없다는 것에 괜히 화도 나고, 또 걱정도 들었다. 잠시 시간을 확인한 단유는 핸드폰 단축번호를 누르고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몇 번의 울림 뒤에 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전데요.” 「아, 단유니? 쉬는 시간이야?」 “예.” 「그렇구나. 아, 명수는 괜찮아. 크게 다친 건 아니라서 지금 깁스하고 학교 가는 중이다.」 단유는 다행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깁스’를 했다는 말에 신경이 쓰였다. “깁스까지 한 거예요?” 「부상이 빨리 나으려면 깁스를 해야 한다더구나. 단유야, 선생님이 운전해야 하니까,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 “네.” 단유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두 친구가 달려들었다. “명수 깁스했어?” “많이 다친 거야?” 단유는 들은 대로 알려주었다. “다음 쉬는 시간에 가서 보면 되겠네.” “그래.” 지태와 채윤은 자리로 돌아갔지만, 단유의 정신은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한 시간이 지난 후, 단유는 명수네 교실로 향했다. 교실 앞에 다가가니 단유의 얼굴을 아는 7반 아이들이 묻지도 않았는데, 명수를 가리키며 “아까 왔어.” 라고 알려주었다. 단유는 고개를 간단히 끄덕여 보이곤 명수에게로 향했다. “왔어?” 태평한 명수의 목소리에서 미세한 떨림을 느꼈다. ‘느꼈다’고 생각했다. 100% 장담할 수는 없지만. “괜찮아? 많이 다친 거야? 의사선생님이 뭐라셔? 오래 있어야 돼?” 명수는 진정하라는 듯, 손을 저었다. “아냐, 1주일만 깁스하고, 2주일 정도 안정을 취하면 바로 뛰어도 아무 문제 없대.” 밝은 얼굴의 명수였다. 다만 공교롭게도 명수가 말한 기간은 3주였고, 바로 그 3주가 지나면 바로 추계 대회라는 점. 명수 역시 그 점을 생각하고 있었던지, 말을 이었다. “그래서 깁스 풀고 대회 출전해도 괜찮을 거야.” 명수가 단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너무 적당하게 맞춰진 기간인지라 단유는 의심이 들었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무리하면 안 되는 거 아냐?” “아냐, 진짜 괜찮아. 별거 아닌데, 더 빨리 나으려고 깁스 한 거야.” 단유가 시선을 내려 명수의 오른쪽 발목을 바라보았다. 푸른색의 깁스가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의식한 명수가 발을 까닥거려 보였다. “싸인이나 하고 가라. 쉬는 시간 다 끝났어.” 단유는 손에 쥐여주는 펜을 들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윽고 끄적거렸다. “응? 뭐야?” 명수가 바라보니, 단유는 단순히 싸인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마치, “야, 그게 무슨 공책이라도 되는 줄 알아? 왜 거기다 계산을 하고 있어?” 단유는 명수의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쓰던 것을 마저 썼다. 끝까지 쓰고 난 후에야 펜을 돌려주었다. “이거 지우지도 말고 그대로 둬. 알겠지? 부적 같은 거야.” 명수는 멋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단유가 직접 써 준거라, 알겠다고 대답했다. “근데, 이게 뭔데?” “건강을 기원하는 숫자.” 그런 것도 있냐는 듯 눈동자를 동그랗게 굴리던 명수는 아무렴 어떠냐는 식으로 씩 웃음을 지어 보였다. **** “발목 내측의 삼각 인대가 손상되었는데, 정확히는 2도 염좌라고. 그래서 회복 기간이 대략 4주에서 8주 정도가 되는데, 깁스는 1주일 뒤에 풀더라도, 지금의 부상 정도라면 재활치료와 동반해서 치료해도 완전 회복을 하는 데는 4주 이상이 걸릴 거라고 하더라.”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단유는 인상을 와락 썼다. 불안한 예감이 빗나가지 않은 것에 화가 났고, 중요한 기회를 맞은 명수에게 생긴 불행에 대해 화가 났다. 그리고 함께 운동했던 자신이 빨리 눈치채지 못했던 것에 화가 났다. 요즘 쓸데없이 이상한 데 꽂혀서 신경을 분산시키고 있지만 않았어도 명수의 부상쯤은 빨리 눈치챌 수 있었을 텐데. 아니, 명수가 다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자신 때문에 명수가 다쳤다는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네 탓 아니야.” 단유가 고개를 들어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명수 다친 것 때문에 마음 쓰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그걸 네 탓이라 생각하면 안 되지. 네가 신도 아니고, 사람이 다치는 걸 어떻게 막을 수 있었겠니? 그것도 그냥 달리다가 접질렸을 뿐인데. 다만 좀 심하게 접질렸던 모양이지만.” 단유는 선생님께 물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뭘?” “명수 다친 게 제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요.” 선생님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단유야. 내가 그래도 너희랑 지낸 시간이 있는데, 네 얼굴에 드러난 표정 하나 못 읽겠니? 아주 얼굴에다가 내 탓이요, 하고 써놓았는데 그걸 모르겠니?” 단유는 당장 자기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고 싶었다. 그 일로 명수는 추계 축구 대회가 어렵다는 통보를 받았다. 명수가 억지를 쓰는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결국 무리하게 할 수 없다는 축구팀 감독님의 결정에 따라야만 했다. “니가 무슨 만화책 주인공도 아니고, 지금이 영광의 시간인 것도 아니잖아? 앞으로 남은 네 미래를 지금 이 순간에 고집부려서 날려 버릴래? 지금 아니더라도 기회는 많으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회복에만 신경 써라. 일단 깁스 풀 때까지는 훈련에 안 나와도 된다.” **** 집으로 돌아온 명수는 소파에 엉덩이를 묻고 깁스한 다리를 스툴 위에 올린 뒤, 손에 게임 컨트롤러를 들었다. “야, 야. 좀!” “입으로 게임 하나?” “야, 나 다쳤잖아?” “다리를 다쳤지, 손을 다친 건 아니잖아?” 상미는 인정사정없이 버튼을 연타하여 캐릭터를 경기장 끝까지 끌고 갔다. 곧 골키퍼와 1:1이 된 상황, 상미는 여유롭게 골을 집어넣었다. “이예!” 상미가 두 손을 번쩍 들었고, 명수는 입술을 삐죽였다. “넌 어떻게 다친 사람한테도 봐주는 게 없냐?” “야, 게임에 봐주면 재미없어.” 상미는 명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하지만, 상미가 있어서 명수는 심심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 저렇게 툴툴대는 동안에도 게임 패드를 놓지 않는 것이리라. “그런데 단유는 뭐하는 거지?” 그렇게 상미와 명수가 어울리고 있을 때, 단유는 방에 들어가 있었다. “공부하나 보지.” 명수가 메뉴 키를 조작해서 다음 게임을 설정했다. “나오라고 할까?” 상미가 넌지시 묻자, 명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냥 둬.” “왜?” 상미는 이럴 때일수록 곁에서 힘도 북돋아 주고 하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물었던 것인데, 명수는 다 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래 보여도, 나 때문에 걱정 많이 했어. 차라리 이렇게 있는 게 서로 편해. 나도 단유가 나 때문에 신경 쓰고 걱정하는 모습은 보기 싫으니까.” 이게 바로 남자의 우정이란 거다, 라며 이죽대는 명수를 바라보고, 단유가 있을 방을 한 번 쳐다보다가 이윽고 시작된 게임 화면을 바라보았다. “한 번 봐줄까?” “됐어. 꼭 이기고 말 테니까.” 명수는 각오를 다지며, 버튼을 눌렀다. 그 시간, 책을 보고 있으리라는 두 사람의 예상과 달리 단유는 책상 앞에 앉아서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해보자, 꼭.” 단유는 힘이 필요했다. 이제까지 추구했던 ‘힘’과 다른 진짜 ‘능력’이 필요했다. ‘한 번 했던 거야. 할 수 있을 거야.’ 단유는 이를 꽉 깨물었다. 명수를 위해서였다. ======================================= [265] 파동(4) 그렇지만 마음먹는다고 될 일이었으면, 이렇게 고생할 일도 없었을 터. 평소에도 책을 읽을 때나 혹은 자신이 의도한 상황에서 집중력이 남달랐던 단유였지만, 집중력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결국 한 시간을 책상 앞에 앉아있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단순한 집중만으로는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단유는 슬그머니 최후의 수단으로 미뤄뒀던 방법을 꺼내볼까 궁리했다. 어쩌면 가장 확실한 방법일지도 몰랐다. 마약으로 얻었던 능력이었으니, 다시 한번 마약을 섭취해서 일시적이나마 능력을 재현해보자는 생각.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면, 안트가 두 번 다시 마약을 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던 부분이었다. 어쩌면, 단유의 호기심과 힘에 대한 집착을 알고 있던 안트였기에 이런 상황이 닥칠 것을 미리 알아채고 단유에게 경고를 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단유는 꼭 그 능력이 얻고 싶었다. 명수의 다리를 고치는 것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진실도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유혹 때문이었다. ‘이곳은 그곳보다 더 복잡한 세계. 마법이 원천적으로 차단된 세계. 이 세계의 비밀을 그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어릴 때야 주위에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도 없었고, 혈혈단신으로 낯선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힘을 갈구했지만, 어느 정도 이 사회의 시스템과 환경에 대해 익숙해지고 나니, 굳이 마법과 같은 비현실적, 혹은 초과학적 능력이 필요한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 능력 없이도 잘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쩌면 그런 능력을 개발할 시간에, 돈 잘 버는 방법을 생각하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때가 늘고 있던 즈음이었다. ‘마법이나 물리적 힘이 그렇게 필요하지는 않아도, 이 세상의 실체를 파악하는 눈 정도는 쓸모가 있지 않을까?’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질 자원이 ‘정보’라는 것이라면, 단유가 경험한 ‘눈’은 마법보다 더 큰 무기가 될지도 모른다. ‘아니야. 그런 무기 따위를 얻으려고 하는 게 아니야. 난 명수를 위해서 그 힘을 쓰려고 하는 거야.’ 단유는 잡생각을 버리려 애썼다. 그리고 오직 명수를 위한 것임을, 정말 순수하게 다른 사람을 위한 행동임을 스스로에게 이해시켰다. ****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어쩐지 새삼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단유는 다른 곳에 눈을 팔지 않고 곧 녹스로 향했다. 녹스에 도착하자마자, 숙소로 향했던 단유는 무너진 숙소와 토엔의 집을 볼 수 있었다. 단유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마침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다. “저 집 왜 저래요?” 무너진 잔해에 잠시 눈길을 주던 행인이 혀를 차며 되물었다. “그건 알아서 뭐하게?” “아, 그냥 저 집만 무너진 게 이상해서요. 게다가 치우지도 않고 저대로 두는 걸 보면 뭔가 사연이 있지 않을까 해서요.” 모르는 척 능청을 떠는 게 썩 익숙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행인은 과연 그렇다, 고 고개를 끄덕이며 사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경비대가 범죄자의 집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앞으로 또 다른 범죄가 나올 가능성에 대비한다는 이유로 집을 부셔버렸다는 이야기였다. “멍청한 놈이라니까, 경비대장이란 놈. 집을 부순다고 범죄가 안 생길 거라고 생각하는 그 발상이 참. 그 때문에 한동안 욕 좀 많이 먹었지, 그 녀석.” “그런데 왜 안 치우고요?” “저걸 치우는 것도 일이잖냐? 그런데 그 일을 시킬 사람이 마땅히 없다는 게 문제지. 돈을 주고 사람을 시키면 간단한 일일 텐데, 또 그렇게 지급할 돈은 없다고 하니 누가 나서서 하겠나? 결국 저런 흉물을 만들어 내고 만 거지. 하여튼 위에 놈들 머릿속에는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다니까. 지가 사는 곳이었어 봐. 저렇게 놔뒀겠어? 당장 그날 새벽에 사람 불러다 치우게 했을 거야.” 행인은 한참을 욕하다가 기분이 조금 후련해졌는지,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하고 사라졌다. “너도 이런 곳에 서서 있지 말고 갈 길이나 가거라. 괜한 오해나 받을지도 모르니까.” 아저씨가 사라진 후에도 가만히 그 잔해들을 바라보던 단유는 다시 발품을 팔아서 토엔과 그 일당들이 어떻게 됐는지를 확인했다. 모두가 처형당하고, 그 덕에 경비대장은 근위대로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사람들이 아는 이야기의 전부였다. “게리? 그런 이름은 모르겠는데?” “글쎄? 잘은 모르지만, 그때 심각한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모두 교수형에 처했던 것 같은데. 그렇지?” “아, 그렇지. 나도 일만 없었으면 처형식에 가볼 생각이었는데, 가지 못했단 말이지.” 하지만 단유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선에서 게리는 죄가 없었고, 그러니 처형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때, 떠올린 것은 게리가 자주 가던 식료품점. “오랜만이네? 그동안 어디 갔었어?” 가게 주인은 단유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게리에 대해 묻자, 금방 빼빼 마른 놈, 이라며 기억해내는 모습이었다. “그 녀석은 안 죽었어. 죄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경비대에서 풀어주더라고. 하긴 그 녀석, 하루 종일 일만 하던 놈인 걸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말이야. 어, 잠시만. 미코! 배달 심부름 좀하고 와라.”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나타난 가게 주인은 게리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도 바로 풀려나진 못했고, 나흘 정도인가, 붙잡혀 있다가 풀려났던 모양이야. 전보다 더 수척해진 얼굴을 하고 나타나서는 동전 몇 개를 가지고 와서 먹을 것 좀 달라고 하지 뭐냐. 난 순간 거지로 전업이라도 한 줄 알았다. 아무튼, 그동안 봐온 정도 있고 해서 돈에 상관없이 먹을 것 좀 챙겨줬지. 그리고 그 녀석이 먹는 동안, 이것저것 좀 물어봤었다.” 주인은 들어온 주문을 처리하기 위해 이것저것 봐주면서도 단유를 귀찮아하지 않았다. “일도 잃어버린 마당에, 그 녀석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냐? 불쌍하다고 우리 집에서 일을 시켜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보다시피 우리 집에도 오랫동안 일하는 놈이 있잖니. 아무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게리 그 녀석,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하더구나. 안 그렇겠냐? 모질게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는데, 손에 쥔 건 하나도 없으니 말이야. 그런데 또 아이러니하게도 손에 쥔 게 없으니 녹스를 나가지도 못했나 보더라고. 몇 일간 거지꼴을 하고 나타나길래 먹을 것 좀 쥐여주긴 했는데, 그러다가 다시 일을 구한 모양인지 나타나진 않더라.”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고요?” “잘은 모르겠고, 대신 경남지구 쪽에서 무슨 일자리를 구한 모양인데, 워낙 그쪽은 높으신 분들만 사는 곳이다 보니, 들려오는 게 별로 없어. 그러고 보면 어떻게 그쪽으로 갔는지 모르겠군. 별 능력도 없는 녀석이 말이야.” 단유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나려는데 가게 주인이 붙잡았다. “그런데, 넌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냐? 너도 혹시, 무슨 일 있었던 거냐?” 걱정하는 듯한 가게 주인의 얼굴에 단유는 잠시 멈칫했다. “거의 두 달? 석 달 정도 안 보였던 것 같은데 말이다. 만약 니가 계속 녹스에 있었더라면, 게리 그 녀석도 이리 고생은 안 했을 텐데. 넌 워낙 똘똘한 녀석이었으니 말이야.” 단유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대신 주인의 말을 들어주었다. 좀 전과 다른 분위기의 단유를 보고 주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 “…아뇨. 제가 무슨 일이 있겠어요.” “그런데,” 단유는 주인의 말을 잘랐다. “일은 아저씨한테 있는 거 아닌가요?” 주인의 얼굴색이 싹 변했다. “무, 무슨 말이냐?” “게리 이야기는 관심이 많아서 그냥 들었지만, 지금 아저씨는 일부러 계속 말을 거시는 거잖아요. 마치 저를 붙잡아 두어야 하는 것처럼.” “응?” “그리고 방금의 그 표정, 거짓이잖아요.” 주인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곧 그의 얼굴은 다급한 기색을 띠더니 단유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이 녀석이오, 이 녀석! 이 녀석도 토엔과 한 패였소!” 뒤가 소란스러워 돌아보니, 경비대 수 명이 단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뒤에서 눈치를 살피는 미코라는 점원의 얼굴도 보였다. 아마도 심부름 배달이라는 것이 경비대로 가서 알리라는 심부름이었던 모양이었다. “네 이놈! 허튼 짓 하지 말고 순순히 따라와라!” 앞장선 경비대원 한 명이 날카로운 창을 뻗어 단유를 가리켰다. 그러나 단유는 요지부동,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그저 가만히 경비대원들이 하는 모양새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뒤에 선 경비대원 한 명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어?” 경비대원의 눈이 커졌다. “어?” 말은 하지 않고, 계속 어버버 거리기만 하는 동료의 모습이 이상했는지 옆에 선 경비대원이 물었다. “왜 그래?” “어… 저기 그러니까, 저기 저 사람, 아니 저분은….” “뭐?” 경비대원은 창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뒷걸음질했다. “야, 왜 그래?” “저, 저 사람이야! 아니, 저분이야! 그때, 기적을 일으키신 분!” “뭐?” 아직 앳된 얼굴 가득한 단유를 가리켜 존칭을 쓰는 동료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가운데, 경비대원의 말이 이어졌다. “있잖아! 그때, 집 안에서 기적을 일으키셨던!” 다른 사람들은 이야기만 전해 들었을 뿐, 실제로 단유를 본 이는 몇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몇 안 되는 경비대원들 중 한 사람이 바로 지금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나는 이였다. 하지만, 말로만 들었던 이들은 눈앞에 선 평범한 아이를 그렇게 높게 평가하기가 힘들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너! 따라 와라.” 가장 앞에 선 이가 창을 고쳐 잡으며 외쳤다. 목소리에 약간의 떨림이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경비대의 기개가 무너지진 않았다. “죄송해요.” “뭐?” 단유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선 경비대를 살피며 말했다. “제가 웬만하면 같이 가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시간이 별로 없어요. 그러니 나중에 다시 올게요. 그때는 꼭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무슨 유명인과의 대담을 나누고 싶어 하는 것도 아니고, 용의자가 바쁘다고 나중에 보자는 식으로 말하는데, 그 앞에서 그럽시다, 하고 말할 경비대원들이 아니었다. “무슨 헛소리야!” 단유는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 뒤, 말했다. “정말 죄송해요.” 그들은 그들의 일을 할 뿐이고, 단유 역시 거리낄 것이 없기에 피할 필요는 없다. 마음 같아서는 함께 가서 서로 궁금한 점을 묻고 답해서 오해도 풀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단유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되도록 이곳에서 체류하는 시간을 줄여야만 했다. 혹시라도 선생님이나 명수, 혹은 상미가 자신의 방문을 열고 들어올지 모르니까. 단유는 다음을 기약하고 사라졌다. “…….” 당연히 남은 이들은 모두 입을 쩍 벌리고 텅 빈 허공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들이 정신을 수습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어디 가는 데?” 선생님보다 명수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잠깐 바람 좀 쐬려고.” “같이 갈까?” “아냐. 다리도 아픈데 무리하지 말고 집에서 쉬어.” “나 안 힘든 데.” 단유는 상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쟤 움직이지 못하게 잘 보살피고 있어.” “오케이.” 상미가 한쪽 눈을 깜찍하게 찡긋거려 보이더니 이내 TV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뒤이어 터져 나오는 함성. “야, 이럴 때 넣는 게 어딨어!” 명수가 뒤늦게 패드를 조작했지만, 이미 화면에서는 상미네 팀 선수의 풀샷이 나타나 골 세레머니를 펼치고 있었다. “그니까, 한눈팔지 말고 집중하라고.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문만 바라보고 있지 말고.” “에이 씨. 다시 해.” 두 사람이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단유는 선생님께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집을 나섰다. 아무래도 저세상에서는 그 약을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마약을 다루던 무리가 모두 처형당했다는 사실은 녹스로 들어오는 마약의 공급선이 모두 끊어졌다는 것이나 다름없고, 설령 남은 마약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찾아낼 능력도,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게리에게서 혹시 모를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함께 다녀본 바로는 게리 역시 거기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비록 게리를 찾아서 만나면 반갑긴 하겠지만, 게리를 통해 목적을 이룰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판단한 단유였다. 굳이 게리를 찾으려 한 것도, 마약 때문이라기보다는 모두가 처형된 마당에 게리의 안위가 걱정스러워 잠시 ‘변덕’을 부렸을 뿐이었다. 다시 목표에 집중하니, 게리를 만나고 안 만나고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고, 그래서 단유는 목표를 재설정했다. ‘이왕에 재현해 낼 거라면 모든 조건을 똑같이 맞추는 게 좋겠지만, 상황이 이러니 비슷하게라도 조건을 맞춰보자.“ 단유는 현실에서 마약을 찾아보기로 했다. 진짜 마약은 찾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마약성 의약품이란 게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까. ======================================= [266] 파동(5) 단유가 가장 먼저 간 곳은 공원이었다. 반 친구 중에는 심야의 음침한 공원에서 이루어지는 검은 손과의 거래 같은 걸 상상하기 좋아하는 아이도 있었지만, 단유는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저녁 시간대의 공원은 일을 마치고 온 직장인들이 하루의 피로를 풀 겸, 혹은 가족과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산책을 나온 이들이 많았다. 단유는 그 행렬 속에서 조용히 묻혀 걸어가다가 비교적 인적이 드문, 공원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벤치로 향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인터넷을 시작하였다. 아마도 어린 시절의 단유와 지금의 단유를 비교할 때,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역시 현대문물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있을지도 몰랐다. 특히 방학 전에 있었던 인터넷 악성 댓글 사건 이후, 단유는 인터넷이란 도구를 활용하는 법을 터득했다. 효용성에 대해서는 아직 100% 확신하지는 못하지만―그리고 그것은 단유가 인터넷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했다―그래도 특정한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이란 사실에는 동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특정한 정보란 바로 지금과 같은 경우가 그럴 것이다. 「마약」 주제어를 검색창에 넣고 검색을 했더니, 주르륵 검색결과를 보여주었다. 집에 있는 컴퓨터로 하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컴퓨터는 거실에 있었고, 거실에는 명수와 상미가 있고, 선생님의 눈도 쉽게 닿는 곳이라 이런 단어를 여유롭게 검색할 수는 없었다. 좀 더 구체적인 주제어로 검색결과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으로 단유는 이것저것 집어넣어서 검색을 했다. 4인치도 되지 않는 조그만 액정에서 단유만 볼 수 있는 화면이건만, 괜히 사람이 지나가면 슬그머니 핸드폰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눈앞에 들고 검색을 계속했다. 30 여분을 소비한 후, 단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약 구입이 어려울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단유 역시 ‘정당하게’ 구입할 생각은 없었다. 그럴 수도 없거니와, 그럴 돈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검색 도중에 합리적인 방법을 떠올린 단유였다. ‘어둠 속에서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 단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단유 어디 멀리 갔나?” 식사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는 단유를 걱정하는 선생님을 보던 명수가 말했다. “전화해 볼까요?” 그러면서 이미 핸드폰을 들었다. 그러나 신호만 갈 뿐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상하네? 전화기 두고 갔나?” 하지만 단유의 방에서는 핸드폰이 발견되지 않았다. “오늘 단유 좀 이상하지 않았어요?” 상미가 숟가락을 입에 물고 있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어떻게?” “그게…나도 정확히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냥 느낌이 평소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어. 사실, 오늘만이 아니라 요즘 계속 잠도 못 자는 거 같고, 늘 피곤해 보이고 그렇던데.” 그런 이유 때문에, 아까도 방에 홀로 들어가 있는 단유를 부르려다 그만두었던 상미였다. 피곤해 보이는 애를 더 피곤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그런 상미의 말에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금 그렇긴 한데, 2학기도 시작되고 하니까, 좀 더 무리해서 공부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일단 그냥 두고 봤는데, 니 눈에도 그렇게 많이 피곤해 보였다면, 아무래도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는걸?” 상미와 선생님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명수는 말없이 핸드폰만 들고 있었다. 사실 명수는 자신이 다친 사실보다 단유의 이상이 더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다른 사람은 이상한 것 같은데, 라고 느끼는 중이었지만 명수는 이상하다, 고 확신을 하던 중이었으니까. ‘분명히 요즘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성격이 변했다고 느낄 정도로 차분함이 많이 사라지고,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느낌도 들었다. 그렇지만 일상의 루틴이 무너진 건 아니어서, 새벽에 일어나 함께 운동하고, 등교하고, 하교하는 시간은 꼬박꼬박 지켰던 단유였다. 그저 느낌이 이상하다고 해서 단유에게 무언가를 지적하기에는 그간 단유가 보여온 완벽함이 걸렸다. 자신만 해도 새로운 도시,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느라 힘이 들었는데, 아무리 단유라지만 아무렇지 않을 리 없다는 게 명수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자책이 밀려들었다. “아무튼, 우리끼리 우선 먹자. 국 식겠어. 단유는 나중에라도 데워서 주든가 해야지. 먹자.” 두 아이가 기다리고 있는데, 단유 때문에 식사를 참는 건 아니라고 판단한 선생님이 먼저 숟가락을 들었다. 명수와 상미 두 사람도 말없이 숟가락을 들어 식사를 시작했다. **** 휘황찬란한 네온 싸인이 빛나는 거리, 일전에 갤럭시즈를 따라서 와 본 적이 있던 유흥가 거리였다. 그때는 의도치 않게 이상한 일에 말려들면서 정체가 드러날 뻔도 했지만, 다행히 별 탈이 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유흥가의 뒷골목에 꽤나 음험한 지역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소위 ‘불량배’라고 칭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마치 토엔이나 포세와 같이. 그런 이들을 붙잡고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는 게, 단유의 생각이었다. ‘이 세계나 저 세계나 결국 사람들이 사는 동네니까, 비슷할 거야.’ 비슷하기를 바라며, 단유는 뒷골목을 전전했다. 과연 유흥가의 뒷골목은 처음에 가졌던 생각과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초저녁인데도 이미 흥청망청 취해서 비틀거리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남녀가 허리를 부둥켜안고 저렇게 걸으면 힘들 텐데, 하는 자세로 걷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간간이 이마에 인상을 쓰고 다니는 무리도 볼 수 있었는데, 불량배인지 아니면 그냥 인상이 좋지 않은 대학 체육과 학생들인지 구분이 잘 안 되었다. 애초에 겉모습으로 판단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갔다. 그들은 단유를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어차피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이니까, 라는 생각으로 지나갈 뿐이었다. 뒷골목을 전전하는 중학생에게 훈계를 하려는 마음을 먹은 이들은 그 이후에도 없었다. 때문에 단유는 편하게 뒷골목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역시나 생각과 현실은 많이 달랐다. 지난번 일도 있고 해서 어쩐지 ‘암흑의 소굴’ 혹은 ‘악의 발상지’ 같은 기분도 있어서 찾아와 봤는데, 악은커녕 술 냄새와 구토의 흔적만 발견될 뿐이었다. 핸드폰을 보지 않아도, 이미 주변 환경과 하늘의 색을 통해 많이 늦었음을 깨달았다. 단유는 일단 철수를 결정했다. ‘한 번에 이룰 수는 없는 법이구나.’ 생각해보니, 원래 자신은 운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차라리 별 탈 없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음에 만족해야 할 것 같았다. “다녀왔습니다.” 왜 이렇게 늦었냐, 는 말 대신 선생님은 밥 먹었냐는 질문을 먼저 던졌다. 그리고 이미 국을 데워서 식탁을 다시 차려주는 이모님이셨다. “이것만 차려주고 난 퇴근해야겠네. 설거지는 단유 네가 해야겠다. 늦었으니까, 벌이야. 알겠지?” 웃음기 가득한 이모님의 말에 단유는 고맙습니다, 라고 답했다. **** 단유가 방에 홀로 들어와, 이후의 계획을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단유가 대답을 하자, 천천히 문이 열리고 명수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들어가도 돼?” 단유는 벌떡 일어나 명수를 부축했다. “야, 그 정도는 아냐. 혼자 걸을 수 있어.” “무리하지 마. 빨리 나아야 할 거 아냐?” 명수는 연신 괜찮다고 하면서도 단유의 부축을 애써 거절하지는 않았다. 단유의 침대에 앉은 명수를 향해 단유가 궁금증을 드러냈다. “갑자기 웬일이야?” 혹시 상미가 집에 가서 심심해서 그런가, 라는 생각을 잠시 하던 단유의 귀에 명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요즘 무슨 일 있어?” “…왜?” 명수는 팔을 뒤로 뻗어 몸을 살짝 뒤로 기울였다. “역시 무슨 일이 있긴 있구나.” 단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 요즘 이상한 거 알아? 다들 너 걱정해. 나도 그렇고.” 단유는 가만히 있다가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별일 없다. 그리고 니가 그런 말 하니까 이상하다. 무슨 청춘 드라마 찍는 것도 아니고. 너 너무 TV를 많이 본 거 아니야?” 그러나 명수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지금 니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이상해. 너 그런 식으로 말하는 애 아니잖아?” 단유는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그런 식이라니?” “예전의 너라면, 걱정할 거 없다, 아무 일 없다, 라고 확신을 주는 말을 했을 거야. 아니면 이러이러한 일 때문에 고민이 있지만, 곧 해결될 거다, 라는 식으로 사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했겠지. 그런데 지금 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려고 하잖아. TV도 안 보는 니가 청춘 드라마니 뭐니 하는 거 어울리지도 않아.” 명수의 말에 단유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확실히 명수의 말대로였으니까. 그러고 보면 명수가 단유를 잘 알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간단한 문답에서 단유의 이상한 점을 바로 캐치해 내니까. “맞아, 사실 일이 조금 있어. 그리고 니 말대로 금방 해결될 문제야. 다른 사람들한테 걱정 끼치기 싫어서 그랬어. 그러니까 너도 신경 쓰지 마. 그리고 그 시간에 니 다리나 신경 써. 빨리 나아야 하잖아.” “내 다리는 내가 알아서 할게. 너처럼.” 명수가 다소 심술이 난 어조로 대답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계속 뭔갈 감추려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안 좋다. 너 지금까지 그런 적 없잖아?” 아니, 사실 제대로 이야기하자면 감춘 게 너무 많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걸리지 않았는데, 지금은 걸렸다는 게 다를 뿐. “감추는 거 아니고, 정말 시답잖은 일이라서 말하지 않는 것뿐이야. 그러니까 진짜 괜찮다.” “시답잖은 일이 뭔데? 정말 별거 아니면 이야기해봐. 내가 다리가 이래서 도와주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들어는 줄게. 고민이 있으면 나누라는 말도 있잖아?” “그렇게 나누고 자시고 할 문제도 아니니까, 그냥 넘어가자.” 명수는 끈질겼다. “솔직히 방학 전부터 너 이상했거든? 그런데 다들 아무 말 안 하고 있고, 너도 크게 달라지는 게 없어서 내가 아무 말 안 하고 있었을 뿐이야. 너무 더워서 그렇던지, 아니면 1학기 때 있었던 일 때문에 고민이 많아서 그런 것인지 확신은 못 해도 대충 그런 이유겠지, 라고 생각하고 넘어간 거야. 그런데, 지금 너 나아지지 않잖아? 상미도 오늘 너보고 좀 심한 것 같다고 그랬어. 알아?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너 조금 문제 있다고.” 단유는 갑자기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야, 명수야. 내가 아무 문제 없다고 했지? 내가 지금까지 너랑 함께하면서 거짓말 한 적 있어? 없었지? 내가 문제가 없다고 하면 없는 거야. 왜 사람 말을 못 믿어서 그래? 게다가 고작 상미 걔가 한 마디 했다고 그러는 거야? 걔가 날 잘 알아? 걔보다 니가 더 날 잘 알잖아? 그럼 니가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냐?” 명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 뭐 때문에 고민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몰아세우면 어쩌자는 거야? 내가 말이야….” 단유는 입을 급히 다물었다. 명수의 얼굴이 새파랗다 싶을 정도로 질린 표정이었다. 반대로 그의 눈은 불신의 빛이 서리는 중이었다. “김단유.” 단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 정말 이상해졌다.” 단유는 시선을 돌렸다. 책상 위에 하얀 지우개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손을 뻗어 그 지우개를 원래 자리에 돌려놓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다들 지금 널 걱정하는데, 넌 왜 화를 내는데? 내가 널 욕했냐, 뭘 했냐? 응? 내가 물으면 안 될 거라도 물었냐? 응? 제기랄, 나는 그냥 니가 하자는 대로 그냥 입 처닫고 따라만 가면 되는 거야? 응? 말해봐, 씨발놈아.” 점점 격앙되는 명수의 목소리. 단유는 가슴 속에서 온갖 감정이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에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왜 이러지?’ 하지만 그런 생각도 소용돌이에 묻혀버렸다. ======================================= [267] 파동(6) 상대의 악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단유지만, 지금은 비록 명수가 거친 언사를 뱉으며 단유를 압박해도 할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명수의 말에 악의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왜 진심을 몰라주냐는 억울함을 토로하고 싶지도 않았던 탓이다. 단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가려 했다. “야, 말하다 말고 어디가?”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아.” 명수는 단유의 소매를 붙잡고 흔들었다. “새끼야, 지금 도망가는 거냐? 응?” 단유는 거칠게 소매를 뿌리치지는 못했다. “놔, 이거.” “못 놔.” “나중에 얘기하자.” “뭘 나중에 얘기해? 그냥 지금 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명수에게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던 단유는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킨 후, 입을 열었다. “서로 감정이 격해진 상태니까,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지금 얘기해봐야 제대로 대화가 안 될 테니까.” 하지만, 명수는 쉽게 놓지 않았다. 다리가 불편해서 거동이 자유롭지 못했던 탓에 그저 소매만 붙잡는 수밖에 없었기도 했지만. 아니었다면 단유를 한 대 쳐서라도 잡았을지도 몰랐다. 단유는 명수가 잡은 손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살짝 힘을 주고 그러쥐더니 소매를 놓게 하였다. “나중에 이야기하자.” 단유는 문을 열고, 명수에게 눈짓을 보냈다. 명수는 단유를 노려보다가 절룩이는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잠시 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명수의 방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니들 무슨 일 있어?” 선생님이 단유에게 다가와 물었다. 단유는 고개를 저으며 사소한 오해, 라고 대답했다. 문을 닫고 들어와 침대 위에 걸터 앉으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자기는 그저 명수를 돕고 싶은 마음에, 위험을 무릅쓰고 마약을 구하려 했던 것뿐인데. 괜히 걱정 시킬까 봐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을 뿐인데. 그래도 지금은 후회든, 분노든 뒤로 미뤄야 했다. 오늘 밤, 단유는 아까 미뤄뒀던 일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 도시의 밤은 화려하다. 불이 꺼질 줄 모를 정도로 밝고 활기차다. 게다가 그곳이 대도시 유흥가의 중심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간이지만, 강남대로 변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골목에는 사람들의 통행을 막을 정도로 많은 길거리 음식 매대가 하얀 김을 뿜어내며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고, 홀린 듯 지나가던 이들이 멈춰 서서 싸지만 않은 음식들을 꾸역꾸역 먹어댔다. “오빠, 우리 저거 먹자.” “이거 얼마에요?” “3천 원이요.” 시크한 아주머니의 대답에 남자는 가볍게 지갑을 열고 지폐를 내밀었다. 그리고 종이컵에 겨우 담길 먹거리를 담아서 여자에게 건넸다. 술에 취한 볼 빨간 여자는 짙은 마스카라로 가린 눈으로 웃음을 지으며 컵을 받았다. 또 한 편에서는 술주정 부리는 사내들이 붙어서 목소리를 높였고, 복잡한 인파들로 가득 찬 골목을 기어코 차로 지나가 보겠다고 경적을 울려대며 사람들을 갈라 새우는 장면도 연출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거리에서 유명한 한 클럽 앞에서는 파란 네온사인으로 불을 밝힌 간판 앞에 여러 사람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야, 여기 물 좋은 거 맞아?” 남자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같이 온 친구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친구가 보기에도 과연 그런 의심이 들 법했다. “애들 마스크가 영, 그렇네. 딴 데 갈까?” 줄 선 여자들의 얼굴을 살피던 친구의 말에 괜히 시계를 보는 척하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딴 데 가면 줄 선 게 아깝잖아. 다음에 딴 데 가면 되지 뭐.” “그러자. 그리고 혹시 아냐, 안에는 물이 좋을지.” 그렇게 줄 선 여자들의 짧은 치마와 노출된 가슴을 보며 품평을 펼치던 두 남자가 어두운 클럽 입구를 지나갈 때, 그들을 보던 다른 여자들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방금 들어간 애들 봤어?” “난 무슨 회사 면접 보러 오는 애들인 줄 알았다.” “아니, 저런 애들은 가려서 받아야 하는 거 아냐? 여기도 이제 다 됐나 보다.” “여기 실장이 바뀌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가?” 하지만, 그 여자들 역시 클럽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들어가 버렸다. 진공청소기처럼 사람들을 끌어당기던 클럽 입구는 여전히 어두웠고, 간간이 뱉어낸 사람들은 입구 옆의 으슥한 곳으로 몸을 숨기고 힘겨운 소리를 뱉어냈다. 뱃속 가장 깊은 곳에서 암반수 끌어 올리듯 끌어올려 입으로 토해내는 토사물들이 시큼한 냄새를 풍기며 발을 적시지만, 이를 가늠할 정신이 없던 이들은 그저 구토 소리에 귀가 먹먹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클럽 주변의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던 그 시각, 단유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몸을 숨기고 주위를 살피는 중이었다. 이곳은 어둠이라고 해도 안전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일부러 어두운 곳만 찾는 것처럼 찾아 들어오는 탓에, 수시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상한 기미가 느껴지면 곧바로 몸을 피하기 일쑤였다. ‘…클럽에서 엑스터시와 같은 환각제를 복용하는 사례가 경찰에 적발되어….’ 와 같은 인터넷 기사를 찾아본 단유는 클럽 주위에서 마약을 거래하는 현장을 목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주위를 살폈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추태와 구역질이 나오는 토사물의 흔적뿐이었다. ‘안에 들어가 봐야 할까?’ 얼굴이 노출되는 것은 아닐까, 염려되는 마음이 있어 선뜻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시간을 오래 지체할 수 없었던 단유는 한 번쯤은 괜찮지 않을까, 라는 마음으로 입구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입구 근처에는 헐렁한 옷을 입을 덩치 두 사람이 살벌한 표정을 짓고 들어오는 이들을 선별하여 받고 있었다. ‘선별’이라고는 했지만, 거부당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나이가 너무 많은 이들을 막는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어지간해서는 별다른 제지 없이 클럽 안으로 입장하고 있었다. 단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 쿵쾅거리는 베이스의 묵직한 울림이 온몸을 뒤흔드는 느낌에 단유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클럽 밖에서도 조금씩 새어 나오던 음악인지라 요란스럽다는 인상은 가지고 있었지만, 클럽 안에서 터져 나오는 음악과 사람들의 함성은 쉽게 적응이 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불빛이 번쩍이지만, 전체적으로 어두워서 사람들의 얼굴이나 인상을 정확히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고, 정신없이 몸을 뒤흔드는 사람들과 정신이 나갈 정도로 큰 음량의 음악 때문에 주위를 제대로 살펴보기가 힘들었다. 단유는 한쪽 벽에 손을 짚고는 그 벽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 모두 스테이지에서 믹싱을 하는 DJ를 쳐다보는지 바깥쪽 벽을 따라 움직이는 단유를 보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워낙 많은 사람이 들어찬 곳이다 보니 눈에 띄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 같았다. “어머, 얘, 너 어떻게 들어왔어?” “얼래? 얘 너무 어려 보이는데? 너 우리보다 어리지?” 살짝 혀가 꼬인 발음으로 단유를 향해 질문을 던지는 두 여자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단유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단유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 뒤, 눈을 마주치지 않게 지나가려 했다. “어딜 가?” 한 여자가 단유의 어깨를 잡았다. 단유는 어깨를 털어 손을 뿌리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주위에는 이동할만한 공간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계속 이렇게 비집고 나갈 수밖에 없을 듯했다. 단유는 더욱 몸을 움츠린 자세로 벽을 따라 나아갔다. 뒤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 같지만, 그 소리가 자신을 향한 것인지, 스테이지를 향한 것인지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목적지도 없이 나아가던 단유는 어깨를 부딪치고, 앞을 가로막는 이들을 헤집으며 나아가다 마침내 클럽 가장 안쪽에 있는 복도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복도에는 여러 개의 룸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과연 사전에 알아본 것과 같이 그 룸들은 창문 하나 없이, 두꺼운 가죽시트로 뒤덮인 문 외에는 들어가거나 나올 구멍이 보이질 않았고 안을 훔쳐볼 방법도 없어 보였다. 복도 건너편을 바라보니, 붉은색 계열의 등이 드문드문 점멸하듯 불을 밝히고 있을 뿐, 전체적으로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듣기로는 이런 곳에서 거래가 있다고 했는데.’ 하지만, 인터넷의 속성상 그 말을 100% 믿을 수도 없었고, 설령 믿는다 해도 그런 거래 현장이 우연히 단유의 눈에 발각될 확률은 극히 드물다 하겠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마당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만 문제는 저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고, 그런 까닭에 단유가 저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면 여러 사람이 자신의 얼굴을 볼 것이라는 점이었다. 들어온 뒤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곳에서 자신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눈에 띌 복장과 외모였다. 그러다 문득 룸에서 나온 사람들이 복도 건너편을 가로질러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또 다른 룸에서 나온 사람들도 그곳으로 갔다가 잠시 후 다시 모습을 나타내고는 나왔던 룸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단유는 복도 건너편으로 향했다. 과연 그곳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유는 화장실 문을 열었다. 술 취한 한 남성이 비틀거리면서 일을 보는 중이었다. 남자는 가래 끓는 소리를 내더니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그러다 화장실 출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 분명히 누가 들어왔던 것 같은데, 일을 볼 생각은 하지 않길래 무슨 일인가 해서 고개를 돌렸던 것인데,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들어왔다가 그냥 나갔나보다, 라고 마음 편하게 생각한 사내는 마저 일을 봤다. 그때, 뒤에서 딸깍거리는 마찰음이 들렸다. ‘큰 거 보러 왔구나.’ 사내는 냄새가 나기 전에 화장실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서둘러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화장실 안에는 변기 칸에 단유가 코를 막고 벽에 기대어 선 채로 기다렸다. 솔직히 무엇을 기다려야겠다는 목적은 없었다. 어떤 일이 있을지 전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래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간절함, 혹은 절박한 마음에 단유는 화장실에서 때를 기다리기로 한 것이었다. ‘어쩌면 이러다가 날이 샐지도 모르잖아.’ 제발 그렇게만 되지 않기를 바라며 화장실 한 칸에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 단유였다. **** “야, 나 화장실 갔다 올게.” “야, 나도.” “씨발, 니들 뭐냐? 게이냐? 화장실을 왜 같이 가냐?” “개새끼야, 좆같은 소리 하지 마라. 아까부터 화장실 가고 싶은 거 참다가 가는 거다, 새끼야.” “지랄한다. 빨리 꺼져, 새끼야.” “딱 기다려, 이 새끼야. 갔다 와서 두고 봐.” “지랄하다가 바지에 지리지나 말고 빨리 가, 새끼야.” 그렇게 정겨운 대화를 나눈 뒤, 두 사람이 룸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룸 안에는 여자 셋과 남자 하나가 남았다. “아, 씨발. 졸라 뻘줌하네.” 남자는 괜히 툴툴거리면서 잔을 들었다. “한잔하자.” “그래, 자, 건배.” 치렁거리는 노란 머리를 목 뒤로 넘기던 여자가 앞에 놓인 노란 잔을 들어다 잔을 마주쳤다. 뒤이어 다른 여자들도 깔깔거리면서 잔을 들어주었다. “니들은 화장실도 안 가냐?” “왜? 우리 가고 나서 미지, 쟤랑 뭐 좀 할라고?” 붉은 단발머리의 여자애가 익살맞은 눈을 하고는 농담을 건넸다. 사내는 그 농담을 넙죽 받아먹었다. “당연하지. 야, 니들 때문에 진도가 안 나가잖아?” “웃기시네. 여기서 무슨 수줍음 배틀 할 일 있어? 그냥 하면 되지, 사내 새끼가 빼고 그래?” 가슴이 반쯤 드러난 짧은 탱크톱 차림의 여자애가 잔을 기울이면서 흉을 보자, 사내는 잔을 탁 내려놓더니 콧김을 뿜어냈다. “와, 이것들이 또 야마 돌게 만드네.” 사내는 잔에다 양주를 들이붓더니, 이내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여자애들은 흥미롭다는 듯 사내를 보면서 기대를 높이고 있었고, 마침내 사내가 잔을 내려놓자, 눈을 반짝였다. “야, 일로 와.” 사내는 거칠게 옆에 앉은 ‘미지’라는 여자의 어깨를 끌어당기더니, 입을 맞췄다. 미지는 거절하지 않았고, 다른 두 여자애가 오오, 하면서 방청객 리액션으로 사내의 액션에 화답했다. 진한 키스의 와중에 손이 거침없이 미지의 허리와 등을 쓸어내렸고, 이내 엉덩이를 강하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야, 야. 적당히 해라.” “판 깔아주니까, 아주 덮치네, 덮쳐.” 여자 둘은 키득거리면서 자기들끼리 잔을 나눴다. “근데, 화장실 간 애들은 왜 오질 않는 거니?” “얘들, 진짜 게이 아냐?” 그 소리에 사내가 침과 립스틱으로 범벅이 된 입을 떼고 항변했다. “아니라고!” “니가 왜 그래? 누가 너보고 게이래?” “야! 내 친구들한테 게이라고 하는데 누가 기분이 좋겠냐?” 하지만 여자 둘의 걸쭉한 입담에 사내는 이길 도리가 없었다. “야, 그럼 사내 둘이 화장실에 가서 이렇게 시간 보낼 일이 뭐 있냐? 전립선이 터졌거나, 똥꼬가 터졌거나 둘 중의 하나 아냐?” 빨간 단발의 농담에 다른 두 여자가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사내는 붉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일어나?” 미지가 물었다. “내가 데리고 올게.” 사내의 대답에 탱크탑이 입꼬리를 늘리며 말했다. “왜? 너도 대주게?” 다시 터진 웃음바다 속에서 미지가 사내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냥 나랑 하지?” 사내는 얼굴이 붉어진 가운데, 못 이긴 척 미지에게 끌려갔다. 다시 하나가 되듯이 얼굴을 겹친 두 사람을 보며 두 여자가 뜨거운 농담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 시간, 화장실에 간 두 남자는 위기에 봉착했다. ======================================= [268] 파동(7) “오늘 술 잘 안 받는다.” “네가 요즘 운동을 게을리해서 그래.” “일이 많아서 그래. 내가 요즘 잘 나가는 중 아니냐.” 이런 대화가 두 남자 사이에 오가는 중이었다. 물론 좀 더 거친 방식으로 주고받는 와중이었지만, 단유가 걸러 들은 대화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용은 단유가 기다리던 것과 거리가 먼 내용이었다. “오늘 누구 먹지?” “야, 니가 원하면 다 먹을 수 있냐?” “광철이는 미지한테 꽂힌 거 같은데.” “나도 눈치 있어, 임마.” “그럼 솔직히 니 스타일은 누군데?” “나? 난….” 그런 대화의 중간에 화장실에 또 다른 남자가 들어왔다. 이미 다른 사람이 점유하고 있던 탓에 남자는 소변기를 사용할 수 없었고, 투덜대면서 닫혀있던 좌변기 칸을 사용하려 했다. 그러나 좌변기 칸은 잠겨서 열리지 않았고, 그 사실이 짜증 난 남자가 끝내 신경질을 부렸다. “아, 씨발. 화장실 혼자 쓰나!” 소변기 앞에 섰던 두 사람은 힐끔 눈치를 보다가 모른 척했다. 그런데 그 시선이 영 못마땅했던지, 뒤에 들어온 사내, 하얀 드레스 셔츠를 입은 남자가 이를 갈며 말했다. “뭘 봐, 새꺄.” 하얀 셔츠와 대비가 될 정도로 붉은 얼굴과 붉은 눈에서 남자가 얼마나 술이 됐는지를 짐작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남자만 술에 취한 것이 아니었다. 앞춤을 대충 정리하고 돌아선 사내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어디서 시비야? 응?” 돈 좀 있어 보이는 차림에 곱상한 얼굴이 꽤 만만하게 여겨졌던지, 사내는 바지를 탁탁 털면서 턱을 쳐들었다. 곁에 선 친구가 말렸다. “야, 참아라. 딱 보니까 꽐라네.” 말리는 척하면서, 실은 친구와 같이 어울려서 시비라도 걸고 싶었던 것일까? 두 친구가 쿵짝을 맞추며 사내를 압박하자, 드레스 셔츠의 사내는 한숨을 쉬며 눈을 치켜떴다. 앞의 선 남자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작은, 그러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꽤 왜소한 타입의 남성이었기 때문에 종종 이런 자리에서 시비가 붙곤 했다. 하지만 이런 싸움에서 단 한 번도 손해를 본 적이 없는 남자가 바로 드레스셔츠의 사내였다. “이 미친 새끼들이… 죽고 싶냐?” 드레스 셔츠가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 바라보자, 한 친구는 위험을 감지했고, 한 친구는 이성을 잃었다. “뭐, 이 새끼야?” 단유는 화장실 안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아니 그냥 끼어들지 않으려 했다. 끼어들 분위기도, 명분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런 생각은 했다.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꽤나 사소한 문제로도 저렇게 다투는구나.’ 일단 서로 오가는 말부터가 욕으로 주고 욕으로 받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서로 쳐다봤다는 이유만으로 저렇게 다툼이 생긴다는 게 단유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가끔 저런 이유로 학교 안에서도 아이들끼리 싸우기도 하던데, 나이를 먹어도 저러고 있으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자신이 끼어들 일은 아니었고, 부디 자신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없기를 바라면서 자리를 지켰다. 말로 붙은 시비는 가볍게 밀치는 것으로 시작하여 결국, 주먹이 오가는 싸움으로 커져 버렸다. 좁은 화장실 안에서 세 사람이 주먹질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는 상황에서 단유는 부디 다른 사람이 와서 이들을 말려주길 바랐다. ‘아니지. 다른 사람이 오면 나도 위험해지려나?’ 단유는 이럴 때,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문득 왜 자신이 이런 더러운 꼴을 사서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명수의 말이 생각났다. “너 정말 이상해졌다!” 단유는 그 말이 생각나는 즉시,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자신은 이상해지지 않았다. 언제나와 같이, 늘 냉철하게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뿐이었다. 지금, 이 고생을 하는 것도 오로지 명수를 위해서였다. 그런 생각의 와중에 바깥이 조용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유가 다른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그사이에 다른 사람이 와서 싸움을 말렸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싸움을 말리더라도 이렇게 갑자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조용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고. ‘싸움이 끝났나?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그때, 단유가 있던 화장실의 문이 덜컥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씹새끼야, 문 안 여냐?” 단유는 그 목소리가 가장 뒤에 들어온 남자의 목소리라는 것을 눈치챘다. 아마도 그 남자가 앞선 두 사람을 제압했던지, 아니면 두 사람이 남자를 피해 도망을 갔던지 둘 중 하나라 생각했다. 그런데 왜 화장실 문을 열려고 하는 걸까? 굳이 따지면 옆 칸도 있는데 말이다. 그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화장실 문에 강한 충격이 가해졌다. 단유는 곧 바깥의 사내가 화장실 문을 발로 찬 것임을 알았다. 단유가 자신의 행동 방침을 세우기도 전에 화장실 문은 두 번째 발길질과 함께 걸쇠가 뜯겨나가면서 문이 열렸다. 단유는 사내와 눈을 마주했다. 사내의 붉은 눈이 단유를 응시했다. “개새끼가 어디서 사람을 갖고 놀려고 그래?” 단유는 사내의 눈보다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한 사람은 꿈틀대고 있었고, 한 사람은 미동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 드레스 셔츠의 사내는 왜소한 몸 때문에 종종 시비가 붙곤 했다. 그런데 사내는 사실 싸움을 잘했다. 어렸을 때부터 잘했고, 그래서 학교도 특수한 곳, 소년원에서 지내다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도 가끔 사람들이 자신의 외모만 보고 만만하게 봐서 그런지 시비가 붙곤 했다. 본인은 잘 모르지만, 사실 싸움의 원인 제공자를 굳이 따지자면 드레스 셔츠의 사내가 대부분 시비를 거는 쪽이었다. 다만 본인이 그걸 못 느끼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만만하게 봐서 시비를 건다고만 생각할 뿐이었지만. 조금 전의 일도 그랬다. 만약 화장실에 들어와서 괜한 욕설을 내뱉지 않았어도, 그리고 자신이 소란을 떠는 통에 그들이 돌아본 것일 뿐인데, 거기에 대고 시비를 먼저 걸었다는 것도 그의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기억 속에서는 두 사람이 자신을 만만히 보고 달려드는 모습만이 있을 뿐이었다. 드레스 셔츠는 일단 수를 줄이기 위해, 한 사람의 턱을 날렸다. 턱이 꺾일 듯이 맞은 남자는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짧은 순간에 기억을 잃은 충격이었지만, 넘어질 때는 제대로 넘어졌다. 화장실의 자기(瓷器)형 타일에 머리를 찧었다. 타일이 산산조각이 날 정도의 충격에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사내는 그대로 바르르 떨다가 움직임이 멎었다. 또 다른 남자는 친구의 그 모습을 지켜보지 못했다. 드레스 셔츠가 한 사내를 넘어뜨린 즉시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꽤 빠르게 반응한다고 주먹을 던지긴 했지만, 드레스 셔츠는 그 주먹을 왼팔로 가볍게 막고, 오른쪽 주먹으로 명치를 강타했다. 순간 호흡이 멎을 정도의 충격에 얼굴이 파래진 사내는 눈앞으로 달려드는 무릎을 보았고, 그 뒤로는 아무런 기억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두 사내를 쓰러뜨린 드레스 셔츠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잠겨있는 변기 칸을 노려봤다. 사내는 그 안에서 얌전한 숨소리를 들었다. 그 차분한 숨소리가 기분이 나빴다. “야, 당장 안 나와?” 말로만 하고 끝날 사내가 아니었다. 굳이 대답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발로 화장실 문을 찼다. 아드레날린이 가득 차오른 사내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문이 열리고, 눈을 마주한 순간, 사내는 어이가 없었다. “뭐, 이런 쥐 새끼 같은 놈이….” 척 봐도 어린 꼬마 아이였다. 키는 자기랑 비슷해 보이는데, 얼굴이 꼬마였다. 아주 동안이거나, 아니면 진짜 꼬마거나. “너 몇 살이냐?” 단유는 사내의 손에서 눈으로 시선을 옮겼다. “14살인데요.” 사내는 절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런 꼬마가 있는 줄 알았으면, 그냥 말로 할 걸 그랬다. “난 또 웬 미친놈이, 사람 싸우는데 가만히 있는다 싶었다.” 사내는 단유에게 다가갔다.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단유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새끼가. 어른이 묻는데 대답은 안 하고 새끼가….” 사내는 단유의 머리를 툭 쳤다. 아니 치려고 하는데, 단유가 머리를 뒤로 빼면서 손을 피했다. “어쭈? 요놈 봐라?” 사내가 피식 웃으면서, 소매를 천천히 걷어올렸다. 아까 싸울 때도 올리지 않던 소매를 올리는 것은 단순한 겁주기 용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먹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 단유는 감정 없이 사내를 바라볼 뿐이었다. 사내는 단유의 눈에서 그것을 읽었다. “와, 이 새끼 눈깔 한 번 이상하네?” 사내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이죽거렸다. “초점 빠진 눈이 열라 기분 나쁘게 만드네?” 사내는 다시 한번, 빠르게 손을 날려 단유의 뺨을 치려 했고, 단유는 또다시 머리를 흔들어 그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뒤이어 날라오는 주먹에 구석에 몰린 단유로서는 피할 공간이 없었다. 사내의 주먹은 그대로 뻗어 나가 단유에게 닿기 직전이었다. “!” 사내가 순간 이상을 느꼈다. 하지만 이상을 느끼기에는 너무 늦었던지 그의 주먹은 힘차게 화장실 내벽을 향해 나아갔고, 곧 강한 충격이 주먹에 전달되었다. “악!” 참을 수 없는 충격에 비명을 지른 사내가 주먹을 다른 손으로 움켜쥐었다. 너무 아파서 손을 펼 수도 없었다. 인기척을 느낀 사내가 고개를 뒤로 돌리자 뒤에서 단유가 감정 없이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뭔 짓 한 거야!” 단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상황을 분석했다. 이 이상은 자신의 얼굴이 팔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게다가 더 있어 봐야 자신이 원했던 약은 구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단유가 몸을 돌려 걸어나가려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어디 가, 이 씨발 놈아. 너 씹새끼, 이대로 가면 괜찮을 줄 알지? 개새끼야, 내가 네 얼굴 똑똑히 봐뒀어. 새끼야? 내가 애들 풀어서 너 잡으려면 못 잡을 거 같아!” 단유는 걸음을 멈췄다. 단유가 돌아보자, 여전히 주먹을 펴지 못하고 인상을 쓰고만 있는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과 하얗게 질린 얼굴, 하지만 아직도 붉게 충혈된 눈동자는 기괴하기만 했다. “개새끼야, 쫄았냐. 좆같은 새끼가.” 사내는 단유가 싸움 좀 하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눈치도 못 챌 만큼 빠르게 사각으로 빠져서 몸을 피하는 수는 어른들이라고 해도 쉽게 하지 못할 동작이었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싸움을 잘한다 해도, 고작 14살이라는 꼬마였다. 꼬마한테 당하고 말면, 자신의 자존심은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아직 무기는 남아 있었다. “저한테 왜 그러세요?” “왜 그러세요? 웃기고 자빠졌네. 개새끼야, 넌 사람 이 꼴로 만들고 그냥 튀려고 하냐, 이 새끼야?” 아픈 주먹을 억지로 들어 보이는 사내였다. “저는 아저씨한테 손도 안 댔거든요?” 단유의 변명에 기도 안 찬다는 듯,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야, 씹새끼야.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고, 일로 와, 이 새끼야.” 단유는 움직이지 않고 지켜봤다. 사내는 순간적으로 무릎을 구부렸다가 어깨로 밀어붙였다. 단유는 재빨리 몸을 틀어 사내의 공격을 피했고, 사내는 단유가 있던 자리를 지나 입구로 향했다. 단유도 그 방향을 알고 있었기에 자리를 피했고, 부디 저대로 나가버리기를 바랬다. 하지만 단유의 바람과는 달리, 사내는 크게 힘을 실은 공격은 아니었던지, 곧 몸을 세운 뒤 화장실 문을 닫아버리는 액션을 취했다. 단유가 사내의 행동에 놀라워할 때, 사내가 뒤로 돌며 인상을 썼다. “개새끼, 넌 오늘 그냥은 못 나간다. 씨발, 어디 한 군데라도 부러뜨려서 보내줄게.” 사내는 아픈 손을 그대로 늘어뜨린 채, 다른 손에 힘을 주고 주먹을 쥐었다. 단유는 사내의 악의에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지금의 상황에서 자신이 이러한 악의와 맞닥뜨려야 할 이유가 있던가? “제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세요? 아저씨도 지금 많이 다치셨잖아요?” “이 새끼가, 갑자기 혀를 굴리네? 씹새끼야? 나만 다치면 억울하니까, 너도 죽어봐, 이 새끼야.” 단유는 뒷걸음질을 하려다 발에 걸리는 무언가를 느꼈다. 쓰러진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머리에 발 뒤꿈치가 닿아 있었다. 순간 시선을 들어 올렸을 때, 이미 드레스 셔츠의 주먹이 단유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 [269] 파동(8) 단유는 생각할 여유도 없이 선택해야 했다. 단유는 그대로 몸을 뒤로 눕혔다. 쓰러진 사람에게 걸려 그대로 넘어진 덕에 단유는 엉덩방아를 찧어야 했지만, 대신 사내의 주먹은 피할 수 있었다. 준비하고 넘어진 덕분에 곧 옆으로 몸을 굴려 일어난 단유는 다시 자신을 향하는 사내를 향해 두 손을 뻗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새끼, 졸라 빠르네? 응?” 단유는 입을 여는 대신 달려들 준비를 하는 사내의 눈을 바라보며 머리를 굴렸다. 답답하다고 하소연한들, 들어줄 사내도 아니었고, 자신도 말로서 이 상황을 해결할 생각은 없었다. 단유가 자세를 취하니, 사내는 비웃음을 날렸다. “이제 한 번 제대로 해보자, 이거지? 응?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맞먹자고 지랄하는 거지?” 사내 역시 말을 하면서도 눈으로는 단유의 틈을 찾는 중이었다. 어지간해서는 자신의 주먹을 피할 사람이 없는데, 벌써 두 번이나 자신의 주먹을 피한 아이였다. 무턱대고 주먹을 날렸다간 되려 자신이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경각심이 생긴 탓이었다. 이럴 때는 말로 주의를 산만하게 만드는 것도 일종의 노하우였다. “이런 데 와서 노는 새끼가 제정신일 리는 없고, 왔으면 조용히 놀다 갈 것이지, 어디서 건방지게 굴어!” 몇 가지 거친 욕을 곁들인 사내의 말에도 단유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 정도야 지난 시간 동안 찰지게 들어왔던지라, 단유의 정신을 흩어놓기에는 부족했다. 강렬한 악의에 앞에 선 단유는 도리어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다른 여러 가지를 생각할 필요 없이,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하게 만드니 어쩐지 홀가분한 느낌도 들었다. ‘오른쪽, 왼쪽….’ 상대의 시선이 훔쳐보는 방향을 놓치지 않았다. 자신이 상대에게 어떤 틈을 보이는지 스스로는 알기 어려웠지만, 상대의 시선을 따라가면 상대의 공격이 들어오는 방향을 알 수 있었다. 비록 제대로 싸움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지난 경험들이 그 정도는 알 수 있게 해준 것이다. 하긴 주먹 정도야 맞아도 아플 뿐이지만, 창을 든 병사들에게 당하면 아픈 정도로 끝나지는 않으니까. 사내는 속으로는 망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이의 움직임과 달리 자세는 전혀 싸움꾼의 그것처럼 보이지 않아서, 비웃기까지 했는데, 막상 달려들려고 하니 아이가 바라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자신의 동작 하나하나를 모두 검열하는 듯한 시선이었고, 그 시선 아래에서 자신의 공격 따위는 모두 무위로 돌아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단유는 사내의 공격이 쉽게 들어오지 않는 까닭은 짐작할 수 없었지만, 그 덕분에 조금씩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비록 시선을 돌려 주위를 둘러볼 수는 없어도, 주변에 쓰러진 사람과 주위의 사물들을 눈에 담을 수는 있게 되었다. 보이는 시야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금 전까지 주변을 봤던 기억을 되돌려 주위의 상황을 머릿속에서 조립하여 주위의 모든 것을 자신의 머릿속에 넣을 수 있었다. 사내는 한 발을 앞으로 미끄러뜨리며 조금 전진하였다. 어차피 쉽지 않을 공격이라면, 자신의 장점을 살리는 공격이 이루어지도록 해야겠다는 판단에서였다. 다행히도 지금 이 화장실은 그렇게 넓은 편은 아니고, 게다가 주위는 모두 벽으로 막혀 있었다. 나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자기 뒤에 있는 화장실 출입구밖에 없었다. 그러니 조금씩 거리를 좁히며 몰아세우면, 결국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질 수밖에 없고, 자신의 공격이 닿는 거리 안에서 피할 수 없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리라 판단했다. 단유도 사내의 접근을 알아챘다. 그리고 상대의 생각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뒤가 막힌 이상, 결국 이렇게 몰리다가는 피하기 어려운 곳까지 밀려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피할 곳이 없겠지만, 단유에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다만 이대로 지지부진한 흐름을 이어나가는 것은 본인에게도 좋지 않았다. 주정뱅이와 싸움이나 하려고 여기에 온 것은 아니니까. ‘아.’ 단유는 문득 어떤 생각에 닿았다. ‘왜 내가 물러서야 하는 거지?’ 물러서지 말자고, 적극적으로 가자고 다짐했던 것이 얼마 전의 일이었는데, 왜 또 물러서서 피하려고만 하는 거지? ‘그러고 보니, 나 뭔가 계속 쫓기는 느낌이었구나.’ 방학 이후로 단유는 계속 쫓기는 느낌을 가지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계속 단유를 잡으러 달려들고, 단유는 무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단유는 당당하지 못했다.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도 계속 주제에서 피하려는 모습이었고, 혼자 있고 싶어 했다.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변명을 스스로에게 했지만, 사실은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견딜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 그들에게서 떨어지고 싶었고, 자신을 격리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명수가 이야기한 것 중의 단유의 감정을 들끓게 했던 한마디. “넌 왜 화를 내는데?” 단유는 자신이 화를 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이성적으로 상대와의 대화를 통해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자신을 이해시키려 노력했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그런 자신에게 화를 내느냐고 따지듯이 묻는 명수의 말에 단유는 울컥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단유는 화를 내고 있었다. 그때도 화를 내고 있었고, 지금도 화를 내는 중이었다. 이성적이었다면, 악의를 보이는 상대 앞에서 ‘내가 뭘 잘못했냐’고 따지듯이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유 스스로가 생각하는 본인의 평소대로라면, 상대방의 악의에 대해 냉정하게 대응했을 것이다. 상대의 악의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지적하든가, 혹은 아예 그 악의 자체가 자신을 향하지 못하도록 만들던가. ‘내가 뭘 잘못했는데, 라니.’ 조금 전 자신이 뱉은 말이 창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창피함이 느껴지고 나서야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게 된 단유였다. 말로는 길었지만, 감정의 동요로 인한 생각의 흐름은 순간적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라도 흐트러짐이 보인다면? 사내는 단유의 눈에 초점이 살짝 흐려진다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멍 때리는 사람 같달까? 순간이지만,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아직 구석까지 몰지 못했어도, 이번 공격은 들어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단유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사내의 ‘훅’ 공격에 다소 늦게 반응하였다. 위기감을 느낀 순간, 단유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었다. 급히 들이마신 숨은 가슴으로, 그리고 다시 아랫배로 흘러갔다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호흡과 함께 온몸에 전달된 힘은 긴장으로 인해 근육을 굳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속도에 맞춰 몸이 움직이게끔 해주는 전도체 역할을 했다. 위기감을 느낌과 동시에 무릎이 살짝 구부러지며 몸에 탄력을 주었고, 시선은 끝까지 다가오는 주먹에서 떨어지지 않으면서 동시에 주먹의 궤적을 계산하고 간격을 가늠했다. 수치를 표현하기도 전에 직관적으로 이해한 단유는 목을 뒤로 밀며 동시에 얼굴이 주먹의 궤적에서 살짝 떨어지게끔 움직였다. 주먹이 날아와 단유의 턱을 스치려고 할 때쯤, 좀 더 미세하게 반응한 몸이 주먹을 피했고, 사내의 주먹은 끝내 단유를 헛치고 지나갔다. 대신 단유의 오른쪽 볼에 붉은 상처를 남겼는데, 어지간히 빠른 주먹에 살갗이 스치면서 난 자국이었다. 사내는 주먹을 피한 단유의 움직임에 놀라움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지난 두 시간 동안 마신 술이 모두 사라지는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어떻게 그걸?’ 단유는 자신이 싸움을 앞에 두고 쓸데없는 생각에 빠졌음을 인정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인정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녔지만, 일단 이 상황을 원만히(?)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단유는 상대가 이미 두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한 점, 그리고 자신에게 아무 이유 없이 악의를 드러내고 상해를 가하려 한 점에 대해 자신의 의지를 드러냈다. 사내는 무릎에 힘이 꺾이면서 풀썩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눈을 까뒤집으면서 쓰러진 사내는 마치 줄 끊어진 인형처럼 보일 정도였다. 단유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원인을 따지자면.’ 이 모든 일의 죄를 이 사람에게만 덮어씌우는 것 같아 불편했다. 아직까지도 자신이 화를 내는 것인지,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있는 것인지 확신이 서질 않아서 불편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불편한 마음인 채로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단유는 사내의 정신을 다시 돌려놓은 뒤, 자리를 떠났다. 단유가 떠난 뒤,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일행을 찾으러 온 사내가 화장실에서 상황을 확인하고 119를 부르기에 이르렀고, 클럽이 아수라장이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물론 그 이전부터 클럽은 아수라장이었고, 앞으로도 아수라장일 것이다. **** 집으로 돌아온 단유는 조용히 침대에 앉아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지난 시간 자신을 돌아보았다. 분명 클럽을 가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그리고 이해가 되던 자신의 행동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이해가 되지 않길 시작했다.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왜 저런 말을 했을까. 단유의 고뇌와 반성은 밤을 새워 이뤄졌고, 마침내 단유는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안트의 말은 사실이었어.” 단유는 오로지 자신의 만족을 위해 마약을 찾아 헤맸다. 토엔이 그랬던가? 소량의 마약을 직접 섭취했으니 보통이 아닐 것이라고. 자각하지 못했지만, 분명 단유는 마약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음이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 달리 신체적 부작용이 아니라 정신적 부작용을 앓았던 것이고, 그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이 쉽게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명수만이 단유의 모습에 강한 이상 현상을 느꼈고, 단유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다. 친구의 친절에 대해서, 바르지 못한 반응을 보인 자신이 부끄러웠다. 지금까지 살면서 부끄러운 일, 창피한 일이 어디 없었겠는가? 하지만 오늘, 아니 이제는 자정이 지났으니 어제의 일이다. 어제저녁, 명수와의 대화에서 자신이 보였던 추태보다 더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은 없다고 여겨졌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았다.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 사과만 한다고 해서 명수가 용서해 줄지 모르겠다. 이런 상황 자체가 지금껏 없었기 때문에, 더욱 명수의 반응이 두려운 단유였다. 단유는 이번 일이 스스로에게 꽤 위험한 순간이었음을 인정했다. 다행히 마약을 구하기 어려웠던 탓에 이렇게 된 것에 감사해야 할 정도였다. 만약 마약을 구해서 또 마약을 복용했다면, 어쩌면 단유는 이대로 쭉 쫓기는 기분으로 살았을지도 몰랐다. ‘아마 그게 죄책감이란 거겠지?’ 보이지도 않는 그림자가 금방이라도 자신을 틀어쥘 것 같은 초조함, 그래서 계속 도망가고 회피하면서 자신을 부정하려는 태도가 아마도 죄책감이란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안트와의 대화에서도 스스로는 죄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주제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고. ‘안트는 알고 있었을까?’ 어쩐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유 스스로가 깨닫기를 바라서 아무 말 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건강한 삶을 되찾거라.” 아마도 지구의 삶을 살라는 의미만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때 이미 단유의 정신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던 안트였기에, ‘이곳으로 오지 말라’거나 ‘건강한 삶’을 살라는 말을 했던 것이리라. 그 말의 뜻도 제대로 해석할 여유가 없었던 걸 보면, 스스로에게 분명 문제가 많았던 것이리라. 밤새 생각에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어느새 새벽이 되었다. 푸르스름한 새벽의 하늘이 열리며, 서늘한 가을 공기가 창을 타고 넘어와 단유의 볼을 만졌다. “새벽은 순환이다…넌 또다시 다른 밤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또 다른 낮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안트의 말처럼, 단유는 언제나 맞이했던 것과 다른 밤을 맞이했었다. 길었던 밤이었고, 밤의 유혹에서 헤매었다. 하지만 이렇게 새벽을 맞이하니 이제는 또 다른 낮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부끄러운 기억이고, 창피한 순간들이었지만, 단유는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지우지 말고, 영원히 되뇌고 또 되뇌어 두 번 다시 이런 실수는 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문밖에서 소리가 났다. 단유가 몸을 일으켜 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부스스한 머리로 눈을 비비던 명수와 마주쳤다. 명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다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너 볼 왜 그래?” 단유는 씩 웃음을 지었다. “반성하느라고.” “무슨 반성?” “친구한테 바보짓 한 거 뉘우치는 반성.” 명수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다가, 이내 단유를 따라 웃음을 지었다. “반성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단유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명수가 말했다. “이런 뜻.” 명수는 단유의 어깨를 짚고 몸을 돌려세우더니, 그 위에 올라탔다. “가자, 새벽 공기나 쐬러.” 단유는 명수를 업고, 오피스텔을 나섰다. ======================================= [270] 소란(1) 긴 소매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지구 온난화’와 ‘짧아진 계절’이 긴소매를 입는 이유였다. 더러 어떤 이는 긴소매만이 아니라 검은 마스크까지 하고 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감기예요?” “아니.” 수련의 대답에 단유는 마스크를 가리켰다. “사람들이 알아보잖니? 이래 봬도 연예인이랍니다.” 수련의 능청에도 단유는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예전이야 잘 몰라서 그랬지만, 지금은 갤럭시즈가 얼마나 인기가 없는 그룹인지 잘 알고 있었다. 반에서도 갤럭시즈라는 걸그룹을 아는 이는 평소 연예계에 관심이 많던 민일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를 정도였으니까. 물론 지금은 다르다. 단유와 엮이면서 갤럭시즈의 이름 정도는 다들 알게 되었으니까. “무관심보다는 낫지.” 수련의 보충 설명에 따르면 인지도를 올리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는 연예인들이 많다고 했다. 한 번이라도 들어본 이름이라야 인터넷에서 동영상이라도 한 번 보게 되고, 음악사이트에서 스트리밍이라도 한 번 한단다. 이름도 모르는 가수의 노래 따위는 조용히 묻힐 뿐이라고. “이름을 모르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단유는 어쩐지 그 말이 남다르게 들렸다. “그런 의미라며, 오히려 얼굴을 드러내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닌가요?” 갤럭시즈의 얼굴을 아는 이는 드물었다. 가요프로그램에도 몇 번 나오고 예능에도 몇 번 나왔다고 하는데도 주변의 반응은 ‘그게 누구’ 같은 반응뿐이었으니까. “그냥 기분이라도 내려고 한 거니까, 그만 딴지 걸래?” 수련이 툴툴거리며 마스크를 벗었다. 그리고 거실에 앉아서 게임을 하는 명수를 쳐다보았다. “누구?” 명수 옆에 앉은 상미를 가리키는 수련에게 단유는 간단하게 소개했다. “동네 아는 애예요.” 상미가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뒤에야 두 사람은 게임 패드에서 손을 놓았다. “안녕하세요, 언니 너무 예뻐요.” “어머, 고마워요.” 예전에 인터넷 방송할 때, 수련이 저런 목소리를 냈던 기억이 났다. “접대용 목소리가 따로 있나 봐요?” 명수도 그걸 인지했던 모양인지, 대놓고 물었고 수련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집에 있던 사람들과 인사를 한 후에, 다시 게임에 중독된 두 사람은 게임 패드를 잡았고, 수련과 단유는 식탁에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요즘 바쁘지 않아요?” “바쁘긴. 스케줄이 완전히 끊겨서 지금은 레슨받는 시간만 빼면 완전 자유다, 자유.” 바쁜 연예인에게는 금 같은 시간이겠지만, 수련과 같은 경우라면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라고 했다. 시간이 널널할수록 초조하고, 쫓기는 기분이라고. 텅 빈 달력을 볼 때마다 한숨만 나온다는 첨언에 단유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 허무한 것은 없으리라. 수련은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넌 좀 어때?” “저요? 별일 없는데요?” 돌이키기 두려울 정도로 후회가 되던 일이 있었지만, 굳이 그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었기에 단유는 별일 없이 잘 지냈노라 답하며 어물쩍 넘겼다. 그런데 수련의 경우는 조금 달랐던 모양이었다. “사실 너 보러 오기가 조금 미안해서 말이지, 시간이 있어도 자주 오질 못하겠더라.” “왜요?” “얼굴 보기가 민망해서?” 지난 사건 이후, 갤럭시즈는 인지도를 올리긴 했다. 그런데 그 인지도라는 게 좋은 이미지가 아니었던 탓에 방송을 자제했고, 대신 인터넷 개인 방송 등으로 팬들을 만나는 데 주력을 했다는 수련의 설명이었다. 사실, ‘방송을 자제’했다는 표현은 오해가 있을 수 있었다. 스케줄을 잡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야 할 매니저가 업무에서 배제되어 있던 탓에 방송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실장이라는 사람은 애초에 갤럭시즈를 밀어줄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조차 없었고 말이다. 아무튼 수련의 입장에서는 단유의 희생을 발판삼아 인지도를 올리려 했던 회사의 태도에 분노했고, 그런데도 결국 회사에 소속된 가수로서 그 혜택을 온전히 누리려 했던 자신에게 실망감이 컸다는 이야기였다. “팬들의 입장에서는 갤럭시즈도 피해자로 생각했던 모양이지.” 인터넷 페이지에 ‘갤럭시즈’라고 적혀 있으면, 클릭이라도 한 번 더 하게 되고, 들어가서 ‘피해자’들이 어떻게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지를 듣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런 소통에서 시작해, 갤럭시즈의 팬이 되는 이들도 적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피해자’라고 말하는 수련의 말에 묻어난 미안한 감정에 단유는 개의치 않는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팬이 늘었나 봐요?” “조금?” 이전보다 인터넷 방송을 시청하는 시청자 수도 늘었고, 욕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활동이 재개하기를 기다리는 응원의 글도 많아졌다는 수련의 말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갤럭시즈를 알게 되어 지난 앨범들을 찾아 듣고 팬이 되었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단다. 이래서 ‘인지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했다는 수련의 고백이었다. 그래서 또 단유에게 미안하다고. “태호 오빠가 다시 매니저를 맡긴 했는데, 지난번에 반강제로 활동이 종료된 탓에 지금은 다른 행사 스케줄을 잡기도 힘들어. 그래도 뭐라도 하려고 움직이는데, 그래서 바쁜 것도 있고. …뭐 그런 이유도 있지만, 역시 지난번 일이 마음에 많이 걸리나 봐. 그래서 널 보러 오기가 미안하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 전 전혀 신경 안 쓰니까요. 저한테 무슨 피해가 있던 것도 아닌데요, 뭘.” 인터넷에 남은 기록들과 사람들의 기억들이 단유의 미래에 악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둥의 말들이 있었지만, 단유는 현재를 살아가는 중이고, 현재의 단유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단유의 일상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단유 역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도 오빠 입장에서 또 안 그런가 봐. 그 뒤로 연락도 잘 안 하잖아? 그치?” 농담처럼 계약하자고 말하던 태호 형의 방문이 잠잠한 이유가 그런 것이라면, 썩 좋지는 않았다. “괜찮다고 전해줘요. 정말 전 신경 안 쓴다고. 아, 그리고 형이 준 게임기는 명수가 아주 잘 쓰고 있다고 전해주세요. 보시는 것처럼.” 그 말처럼 명수와 상미는 게임 패드에서 손을 놓을 줄을 몰랐다. “그나저나 저렇게 예쁜 애가 친구라니. 둘 다 싱숭생숭한 거 아냐?” 은근한 어조로 묻는 수련의 눈웃음에도 단유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저 짧은 한숨을 쉬면서, ‘진짜 모습을 몰라서 그런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진짜 모습? 그게 뭔데?” 뭔가 뒷담화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단유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진짜 모습’을 감춘 것은 눈앞의 여인 역시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원래 여자들은 그래요?” 저도 모르게 입 밖에 나온 말이었다. 수련은 피식 웃었다. “그럼.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여자들보고 구미호 같다고 하잖아?” 본인이 그렇게, 능청스럽게 대답하니 단유로서는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나저나 이제 뭐 하나?” 상미와 명수에게 시선을 던진 수련이 턱을 괴고 한숨을 쉬었다. “뭘 하다니요?” “심심해서.” 심심해서 놀러 왔는데, 또 심심하시다니 같이 놀아달란 말인가? “다른 누나들이랑 같이 놀지 않고 왜 오셨어요?” 그 말에 수련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수련이 단유를 보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 이대로 끝날지도 몰라.” ‘우리’가 ‘갤럭시즈’를 뜻하는 것임을 알았지만, ‘끝난다’는 말의 의미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끝나다니요?” “…해체한다고.” 조금 전까지 인지도가 늘어서 팬도 늘었다고 하지 않았나? “팬이 늘었으면 다음에 컴백할 때 좋은 성적도 기대할 수 있던 거 아닌가요?” “그렇긴 한데….” 수련은 말을 잇지 못했다. **** 걸그룹이 아니더라도, 아이돌 그룹이라면 스케줄을 소화하는 중에도 레슨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약 주간에 시간이 나지 않는다면 새벽에라도 레슨을 받아야 하는 게 아이돌 그룹들의 일상이었다. 물론 긴 연습기간을 거쳐 완성형 아이돌로 데뷔하는 경우라면 그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긴 연습생 생활을 거치더라도 완성형에는 한참이 모자라는 경우가 많았고, 회사의 사정상 빨리 데뷔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서, 데뷔하고도 레슨을 받으면서 ‘완성형’에 도달코자 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중소기획사의 아이돌 그룹에 이런 경우가 많았다. 엄청난 돈을 투자해서 아이돌 그룹을 양성하는데, 수익이 없이 3년, 5년 연습만 시키고 있을 순 없기 때문이었다. 대형기획사야 비교적 여유가 있어서 긴 연습시간을 주고 그 기간을 버틴 이들을 완성형으로 무대에 올리지만, 중소기획사는 적당히 연습시킨 후 무대에 올려 대중에게 선을 보인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얻는 수익을 다시 레슨에 투자하여 천천히 완성형으로 끌어올린다는 전략이었다. 갤럭시즈 역시 그런 전략으로 활동을 시작한 그룹이었다. 리더인 수영은 20살에 회사와 계약을 맺고 4년을 연습한 뒤에 갤럭시즈로 데뷔했다. 반면, 수련의 경우에는 1년 만에 데뷔한 케이스였다. 수련이 갤럭시즈에 합류하기 전까지 그룹 내에 확실하게 보컬 실력을 보일만 한 멤버가 없었는데, 수련이라는 뛰어난 메인보컬이 합류하면서 데뷔가 가시화된 것이었다. 회사 입장에서는 좀 더 빨리 아이들을 데뷔시키기 위해 수련이라는 멤버를 충원한 셈이지만, 그룹 내에서 보면 수련은 다른 아이들과 친해질 시간이 부족했던 셈이기도 했다. 더구나 수련의 성격이 남달랐던(?) 탓에 언니들과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었다. 사실 그런 문제만 없었다면, 수련이 합류하자마자 데뷔를 했겠지만, 멤버간 화합이 문제가 되면서 1년이나 데뷔가 늦춰진 셈이었다. 아무튼, 이러저러한 문제들을 봉합한 뒤, 데뷔한 갤럭시즈는 모두의 소망과 달리 저조한 성적을 거두면서 첫 번째 활동을 마무리했었다. “괜찮아. 우린 이제 시작한 거니까, 좀 더 노력하면 얼마든지 톱그룹이 될 수 있어. 우리 서로의 실력을 믿자. 다들 열심히 노력했잖아.” 태호가 아이들을 다독이면서 실력을 운운했지만, 그래도 가요계에서 ‘완성형’에는 미치지 못한 면이 많았기에 밤마다, 혹은 새벽마다 보컬 레슨과 댄스 레슨을 받아야 했다. “자, 이번에 곡도 좋아. 이번엔 꼭 성공할 수 있어. 알았지?” 첫 번째 활동이 실패한 이유는 곡이 좋지 않아서라는, 회사의 높으신 분들이 들으면 화를 냈을 이야기지만, 아이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과장스레 말하는 태호의 응원이었다. 그리고 그 응원에 힘을 얻고 갤럭시즈는 늘 밝은 모습과 에너지 넘치는 무대를 선보였다. 첫 번째 활동 때보다 더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회사의 덕분인지 스케줄도 첫 번째 활동 때보다 두 배로 많아졌고, 지방행사 스케줄도 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갤럭시즈의 음원 성적은 형편없이 차트 아웃이 되었고, 사람들의 기억에 이름 한 줄도 남기지 못한 채 마무리되었다. 세 번째 활동은 모처럼 좋은 곡도 얻었다고 서로들 좋아했지만, 역시나 이유도 모른 채, 스케줄이 줄었고, 게다가 인터넷에 이상한 이야기가 퍼지면서 공중파 방송 자체를 줄여버렸다. “이번 곡 좋지 않았어?” 보컬 레슨 중간에 잠시 쉬던 차에 명지가 물을 마시며 말했다. 명지는 수련이 들어오기 전 메인보컬로 인정되던 멤버였다. 나름대로 실력에도 자신이 있었건만, 수련이 들어오면서 메인보컬에서 리드보컬로 밀려났다. “좋았죠.” 막내 예영이 명지에 이야기에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지수가 냉큼 말을 받았다. “좋긴. 솔직히 그 곡이 어디가 좋아? 킬링 파트도 없고, 싸비도 평범하기만 하고. 난 그 곡 받고 진짜 사람들이 듣는 귀가 없나 의심했어.” 그런 곡을 활동곡으로 지정한 윗대가리들이 문제야, 라는 지수의 말에 명지는 입을 다물었고, 내심 동의한다는 듯 예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는 이왕 입을 연 김에 속에 꾹꾹 눌러놨던 것들을 다 풀어보자는 심산인지 멈출 줄 몰랐다. “그리고, 안무도 노래랑 어울려? 노래가 하나도 안 섹시한데, 무슨 섹시컨셉이야? 그래 놓고서는 무슨 대중성을 운운해? 곡이나 제대로 만들고 대중성 이야기하라고 그래.” 평소에 회사에 불만이 많았던 것은 다른 멤버들 역시 비슷했다. 좀 더 활동할 수 있다는 멤버들의 의견도 묵살하고, 활동을 중시시킨 예가 몇 번이나 있었다. 그리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지방행사에나 출연시키고 있으니 힘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굳이 그런 이야기를 여기서 해야 할까? “그만해. 너도 잘하는 거 없이 그렇게 불만만 말한다고 뭐가 좋아져?” 연습실 유리에 기대어 있던 수영이 지수에게 제동을 걸었다. “이런 말이라도 안 하면 답답하잖아요. 언니는 안 그래요?” 아무래도 지수의 오늘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언니인 수영의 말에 이렇게 대꾸할 리가 없었으니까. “우리가 실력이 모자란 것도 사실이잖아. 태호 오빠 말처럼, 실력만 좋으면 곡이 구려도 커버할 수 있어.” “그것도 어느 정도지.” 툴툴대는 지수의 태도가 영 못마땅했던 수영이 끝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무대에서 음정도 제대로 못 맞추는데, 라이브도 안 되는 그룹이라는 소문이 나면 사람들이 찾아서 들을 생각이 나겠어?” 지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거 나보고 하는 소리예요, 언니?” 땀으로 가득 찼던 연습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냉동창고처럼 가라앉았다. ======================================= [271] 소란(2) “언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지수가 수영을 향해 뾰족한 날을 들이밀었다. “심하긴 뭐가 심해? 그리고 지금 네 태도가 심하다는 생각은 안 하니?” 그룹 내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두 언니의 다툼에 동생들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나마 수영과 오래 연습생으로 함께 했던 명지가 수영을 말리는 시늉을 해 보았지만, 수영은 듣질 않았다. “너도 마찬가지야. 수련이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 그룹에서 나름 메인보컬 급이라고 자신했잖아? 그런데 너 요새 목 관리는 제대로 하고 있어? 그래 가지고 방송에서 보컬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겠니?” 수영은 지금 다들 너무 풀어져서 그렇다고 판단했다. 물론 스스로도 현 상황이 갤럭시즈에게 좋지 않고,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상태임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가장 맏인 데다가 리더라는 직책까지 맡은 바에, 자신이 쓴소리라도 해서 아이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랑 함께 한 명지라면 자기 뜻을 헤아릴 거라는 생각에 조금 더 독하게 이야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댄스 레슨 시간에는 왜 매번 늦는 건데? 우리가 각자 따로 추니? 다 같이 동선 짜서 함께 동작을 맞춰야 하잖아? 한 사람이라도 늦으면, 그만큼 다른 사람들도 그 시간을 허비해야 하는데 미안하지도 않니? 동생들 보기에 미안하지도 않아?” “죄송해요, 언니. 앞으로 늦지 않고 일찍 일찍 다닐게요. 화 푸세요, 언니.” 라는 반응을 기대했던 수영이지만, 명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제가 뭐 노느라 그랬어요? 저도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늦은 건데, 여기서 그렇게 말하면 전 뭐가 돼요? 그러면 언니는 뭐 아무 잘못도 없어요? 다들 언니한테 불만이 없어서 그냥 가만히 있는 줄 알아요?” “뭐?” 명지가 붉으락푸르락하며 대들자, 수영은 순간 멍해져서 제때 대꾸하지 못했다. 내용은 둘째치고 평소에 자신을 잘 이해하고 잘 따른다고 생각했던 명지가 이렇게 나오니 당황하고 만 것이다. “리더가 뭐하는 자린데요? 그냥 우리들만 들들 볶으면 되는 자리에요? 회사의 의견을 우리한테 알려주기도 하고, 우리 의견을 회사에 제대로 밝히기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왜 맨날 회사 입장만 강요하고, 우리는 아무 뜻도 없는 것처럼 굴어요? 우리가 아무 소리도 안 내고 예 예 거리니까, 회사에서도 우릴 만만하게 보고 지난번처럼 마음대로 활동 종료시키고 지방으로나 돌리는 거 아니에요? 언니가 그때 제대로 한마디라도 했어 봐요, 지금 우리가 이렇게 한가하게 있을 리가 있겠냐고요!” 수영은 명지의 반격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말문이 막힌다는 게 이럴 때를 말하는 건가,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갈 때, 또 다른 비수가 날아와 박혔다. “곡이나 안무도 마찬가지예요. 지금이 무슨 90년대에요? 리더라면 안무나 컨셉에 대해서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까지 언니가 우리한테 이런 거 이야기한 적 있어요? 한 번도 없죠? 언니가 리더라고 하는 일이 뭐 있어요? 맨날 누가 지각하나 감시만 하고 있고, 지각하면 팀장님한테 달려가서 조르기나 하고. 그게 무슨 리더야?” 지수가 명지의 어시스트를 받아서 빈틈을 노리고 들어왔다. 결국, 방심했던 수영은 두 충신의 칼날에 쓰러지고 말았다. “언니들, 왜 그러세요? 그만 하세요. 조금 있다가 보컬쌤 오실 건데.” 예영이 발을 동동 구르며 언니들을 말리려 했지만, 날 선 눈으로 리더를 바라보는 두 여자의 기세를 꺾기에는 부족했다. 하지만 기세로 따지자면, 두 여자 못지않게 강한 이가 있었으니, 수련이 참전을 선언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요.” “뭐?” 명지가 비스듬히 고개를 틀어 수련을 바라보았다. 수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른 언니들과 시선을 마주했다. “지금 언니들 하는 말은 그냥 억지나 마찬가지라서 하는 말이에요. 수영 언니가 물론 리더로서 부족한 점이 있을 순 있지만, 회사에다 우리 입장을 밝힌다느니, 곡이나 안무에 대해 우리 의견을 밝힌다느니 하는 속 좋은 소리를 할 수나 있는 처지예요? 우리가 무슨 순위권에 드는 그룹도 아니고, 인기가 없어서 지방이나 전전하는 마당인데 회사에서 뭐가 좋다고 우리 의견을 듣니 마니 한다는 거예요?” 지수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수의 날을 세웠다. “회사에서 아낀다고 이제는 위아래도 안 보이고 그러지? 응? 회사에서 뒤를 봐주니까, 언니들 따위는 아주 우습게 보이고 그러지?” 수련은 욱하는 마음이 들었으나, 간신히 눌러 참았다. “제가 누굴 우습게 본다고 그래요? 언니들이 수영 언니한테 억지를 쓰니까 하는 말이죠!” “억지는 무슨 억지야! 우리가 틀린 말이라도 했어? 지금이 어떤 시댄데 회사에서 시킨 대로만 해? 그럼 넌 회사가 시키면 그게 뭐든 아무 말 없이 따라야 한다는 거야?”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왜….” 논점을 벗어난 이야기를 하느냐고, 말하려는데 지수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럼 넌 회사에서 술자리에 좀 나오라고 해도 옳다구나 하고 나가겠구나?” “네?” 지수가 준비한 칼은 독이 묻은 칼이었다. 의미를 해석하니, 절로 얼굴이 붉어지고 머릿속이 하얗게 텅 비는 느낌이었다. ―짝. 지수의 고개가 세차게 돌아갔다. 뺨을 부여잡고 돌아봤을 때, 수영이 차가운 눈으로 지수를 쳐다보았다. “너,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어. 그런 것도 가릴 줄 모르면 지금 당장 나가.” 수영이 생각하기에 지수는 지켜야 할 선을 넘겼다. “너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면서 철부지처럼 아무 말이나 다 해대면, 우리가 그저 웃어주면 받아 줄 거로 생각했어? 뭐? 술자리? 너 제정신으로 그런 말이 입에서 나와? 그런 말이 너 스스로를 싸구려로 만든다는 걸 몰라서 하는 소리니?” 당연히 지수 역시 말을 뱉고 나서 바로 후회를 하긴 했다. 요즘 말로 ‘아무 말 대잔치’라도 벌인 느낌인데, 지금 상황은 단순히 NG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방송 사고급 멘트였다. 하지만 이왕 친 사고, 돌이킬 수 없었다. “누가 진짜 나가래?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거잖아? 그러니까, 언니가 제대로 리더 역할을 했으면 우리가 이렇게 다툴 일도 없는 거 아니야?” 눈시울이 붉어진 지수가 말을 맺을 때쯤에는 거의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되었다. 그 와중에도 칼날은 여전히 수영을 향하고 있으니, 수영도 이번에는 그냥 참지 않았다. “언제까지 남 탓만 할 건데? 니가 잘났어? 아무 말이나 뱉어도 용서할 만큼 잘났냐고? 니가 예영이만큼 어리면 또 모를까, 밑의 동생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니?” “니들 뭐하는 거야!” 수영의 말을 막은 것은 태호였다. 퇴근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보고 가려던 태호는 소란스러워진 연습실 풍경에 버럭 화를 냈다. “누가 연습실에서 싸우래? 엉?” 수영은 열중쉬어 자세로 고개를 숙여 보였고, 지수와 명지는 등을 돌렸고, 수련은 여전히 멍한 눈으로 바닥만 바라볼 뿐이었다. 예영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입술을 달싹거렸다. “다 같이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장수영!” “네.” “이게 무슨 짓이야! 맏언니가 돼서 이 판국이 될 때까지 뭐했어? 설마 너도 같이 싸웠어?” 수영은 대답하지 못했다. 태호의 시선은 등을 돌린 채 얼굴을 보이지 않는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신지수. 박명지.” 두 사람을 불러 보지만, 두 사람은 돌부처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것들 봐라?” 분위기가 그냥 다툰 정도는 아니라는 느낌에 태호는 연습실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달칵. 연습실 문이 잠겼고, 보컬선생님이 왔을 때, 태호는 양해를 구한 뒤, 오늘 있을 레슨을 직권으로 취소시켰다. 그리고 그 뒤로도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 “싸웠어요?” 단유의 목소리가 들린 다음에야 수련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조금.” 어쩐지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수련이 말을 아끼는 모습은 상상도 못 했었으니까. “왜요?” “그런 일이 있어.” 굳이 이유를 말하자면, 활동이 침체된 3류 걸그룹의 비애가 빚어낸 갈등, 이라고 축약할 정도의 이유였지만 스스로의 입으로 말하기가 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들 너무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은 까닭이라고 밖에는 생각이 되지 않았다. 지수나 명지도 평소에 그렇게 막말을 하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오히려 속에 있는 말을 필터 없이 내뱉는 수련을 말리는 스타일이었다. 만약 지수나 명지가 평소에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냐고 묻는다면, 수련은 고개를 저을 것이다. 언제나 수영을 곧잘 따르던 명지도 그렇고, 맏언니가 리더로서 부담을 느낄 때 오히려 옆에서 위로하고 다독이는 역할을 하던 게 지수였으니까. ‘그래도 심하긴 심했어.’ 그런 탓에 현재 수련과 멤버들은 숙소에서든 연습실에서든 불편한 마음으로 함께 해야 했다. 숙소와 연습실 외에는 달리 갈 곳도 없었고, 단지 싸웠다는 이유만으로 연습을 빠진다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싸움 이후 3일 동안 멤버들은 서로 대화 없이 지내는 중이었다. 그래서 수련이 미안한 와중에도 그나마 쉴만한 곳이라고 생각해서 단유를 찾아온 것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이곳에 와서도 단유에게나 명수에게나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쉰다는 느낌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많이 힘들어 보이시네요.” 단유가 수련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음이 힘든 사람은 얼굴에도 그 표정이 저렇게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단유였다. 아마 명수도 자신의 얼굴에서 저런 모습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사실…조금 힘들긴 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수련을 보던 단유가 도울 일이 없냐고 물었지만, 이제 중학교 1학년인 아이가 어찌 도울 일이 있을까? “괜찮아. 이렇게 말 상대 해주는 것만으로도 편하네. 덕분에 힘내서 레슨 받을 수 있을 거 같다.” 힘들어도 레슨을 받으면서 길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수련의 모습이 멋있다고 단유는 생각했다. 수련 역시 불완전한 인간이고, 그래서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어 하고, 그러면서 또 꿈을 꾸는 인간이었다. 연예인의 길을 걷고 있지만, 사실은 그냥 평범하게 사는 사람일 뿐이었다. 예전이라면 그냥 넘어가겠는데, 어쩐지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수련에게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무슨 이야기라도 해보세요. 혹시 알아요? 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수련은 눈만 끔뻑끔뻑하면서 단유를 바라보았다. “왜요?” “너야말로 이상해서. 예전 같으면 그러시든가, 이런 표정으로 관심 없는 척 시크하게 넘어갔을 것 같아서 말이야.” 확실히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누구라도 의심을 하긴 하나 보다. 단유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며칠 전에 제가 명수한테 도움을 받았거든요. 그러고 나니까, 누군가를 돕는다는 게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누나가 전혀 모르는 남도 아니고, 이렇게 우리 집에 찾아올 정도라면, 딱히 친구도 없는 것 같아서요. 제가 친구 노릇을 잘할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 이야기는 잘 들어주는 편이잖아요.” 수련은 손을 뻗어 단유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나도 친구 있거든?” 그 말만 안 했어도 되게 감동 먹었을거다, 라며 혀를 빼무는 수련이었다. “오예! 딱밤 한 대!” 명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넌 여자애한테 이기고 좋냐?” “여자애한테 이긴 건 별론데, 너한테 이긴 건 좋다! 일루 와!” “진짜 때리려고?” “얼른 대라. 나 그동안 많이 맞아줬다!” 상미는 패드를 내려놓고 가만히 이마를 들이미는가 싶더니, 냉큼 몸을 빼내어 도망을 쳤다. 그리고 단유에게로 달려와 단유 뒤에 몸을 가렸다. “야, 쟤 좀 봐. 우락부락하게 생긴 게 막 연약한 여자를 때리려고 그래.” 단유는 상미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명수가 우락부락하게 생기지는 않았지. 그리고 니가 연약한 여자도 아니고.” “뭐? 연약한 여자가 아니면 뭔데? 남자야?” 상미의 말에 단유가 고개를 저었다. “약아빠진 애.” “우와, 니들 친구라고 서로 감싸기냐?” 명수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단유는 거짓말 못 하거든?” “웃기시네.” 상미는 수련 뒤로 달아났다. “언니, 쟤들 좀 봐요. 막 연약한 여자애를 때리려고 서로 연합하고 막 저래요. 쟤들 좀 혼내줘요, 네?” 수련은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이 집에 온 이유는 바로 이런 일상이 그리워서가 아닐까? 수련의 맑은 웃음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 [272] 소란(3) 이야기는 종종 들었다. 콩나물시루 같다고. 콩나물시루를 직접 보지 못해서 표현이 적당한지 모르겠지만, 단유가 직접 체험해본 바로는 시내버스를 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정도였다. 굳이 비교하자면, 시내버스가 수학책이라고 할 때, 지하철은 국어책 정도랄까? “그게 무슨 뜻이야?” 단유의 비유에 수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학책에는 글자가 많지는 않잖아요. 반면에 국어책에는 글자가 빼곡하고요.” 중학교 교과서에서 손을 뗀 지가 오래인 수련은 단유의 비유를 실감하지는 못했지만, 전혀 이해 못 할 부분도 아니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단유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수학책은 푸는 재미가 있는데, 국어책은 그냥 글만 읽어야 해서 조금 심심하기도 하고요. 시내버스는 바깥 풍경 보는 재미가 있는데, 지하철은 그냥 컴컴하기만 하고 그렇네요.” ‘그 반대가 아닐까?’ 싶지만, 단유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고 납득하면서 대꾸해 주었다. “지금은 지하라서 그렇지만, 지상으로 올라가는 노선에서는 또 다른 재미가 있을 거야. 한강을 건널 때, 구경하는 재미도 있지. 특히 해 질 무렵? 그때 강물에 반사되는 노을빛이 보기 좋아.” 그 말을 기억해두겠다고 대답한 단유는 이어서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 물었다. “그런데, 보통 연예인들은 지하철 잘 안 타지 않나요?” 듣기로는 시커멓게 선팅한 밴이나 타고 다니는 줄 알았던 단유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수련을 처음 만났을 때도, 당시에 밴을 타고 이동 중이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나올 질문이었지만, 수련에게는 씁쓸하기만 일일 뿐이었다. “그때는 공중파 방송 녹화를 가는 거라서 급하게 대절한 밴이었고, 공식 스케줄이 없으면 그냥 대중교통을 이용해.”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수련을 알아보는 눈치가 아니었다. 검은색 마스크를 끼고 있어서 못 알아보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딱히 관심을 가지고 쳐다보는 이도 드물었다. 게다가 간간이 수련처럼 검은 마스크를 끼고 있는 이들이 눈에 띄기도 해서, 결코 수련이 특별히 뭔가를 감춘다는 기색마저도 옅어지는 분위기였다. “그게 유행이에요?” 검은 마스크를 가리켜 보이는 단유에게 글쎄, 라고 얼버무리는 수련이었다. 유행이라기보다는 그냥 패션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패션이라고 부르기엔 또 너무 심심한 느낌? “마스크 없어도 사람들이 못 알아본다는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네요?” 수련은 애써 대답하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한강은 가 봤어?” “아직 못 가봤어요.” 수련은 시간을 확인한 뒤 물었다. “아직 레슨 시간까지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잠깐 한강에 들렀다 갈까? 어차피 오늘 오후 시간은 수련과 함께 보내기로 하고 나온 참이니 뭘 하든 상관은 없겠다 싶어 단유는 수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수련의 이야기를 들어주겠다던 단유의 말에 수련은 이야기하는 대신 연습하는 거 구경하러 오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다. 딴에는 단유가 있으면 분위기가 조금 풀리지 않을까 하는 발상이었는데, 다른 멤버들도 단유를 좋아하기 때문에 즉석에서 생각해낸 거치고는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단유는 잠시 고민한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서 흔쾌히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연습을 구경하러 간다면, 꽤 많은 시간이 소비될지도 모르고, 그 시간 동안 자기만의 시간을 ‘뺏긴다’고 생각해서였다. 대충 예상해봐도 그 정도 시간이면 한 권의 책을 탐독하고도 남을 시간이 아닐까? 그러나 단유는 곧 생각을 고쳤다. 모처럼 ‘돕겠다’고 생각해놓고선 자기 시간 뺏기는 게 아깝다고 물러서면, 자신의 결심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라,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질 거 같아서였다. 마약을 구하겠다고 야밤에 클럽도 간 녀석이 고작 이 정도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면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냐, 라는 생각에 이르자 대답이 곧 튀어나왔다. “그래요. 같이 가봐요.” 이유를 붙이자면, 오랜만에 다른 누나들 얼굴도 한 번 본다는 핑계였고―굳이 볼 필요가 있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지워버렸다―,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이들에게 자신은 아무렇지 않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굳이 자신이 가서 해명할 필요가 있나, 라는 생각이 또 들었지만 애써 누르며―가는 것이라고 이유를 들었다. “나도 가고 싶은데.” 명수는 무리하면 안 된다는 단유의 제지에 고집을 꺾었고, 상미는, “넌 명수랑 놀아줘야지.” 라는 단유의 말에 막혔다. “야, 내가 무슨 애 돌보미야?” “누가 돌보래? 같이 놀라는 거지.” 게다가 갤럭시즈의 현재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낯선 이를 데리고 가는 것은 실례가 아닐까, 라는 생각에 단유는 상미를 제외했다. “나중에 같이 가자. 그때는 언니가 맛있는 것도 사줄게.” 수련 역시 비슷한 이유로 상미에게 미안함을 표현했고, 나중에 또 보자는 말로 인사하고 집을 나섰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가을바람에 흩날려 헝클어지는 걸 몇 번이고 고쳐 다듬던 수련은 이윽고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단유를 안내했다. “저 처음 타봐요.” 단유는 지하철 안에 들어가며 신기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울 생활을 시작한 지 벌써 반년이 지났는데, 이제야 처음으로 지하철을 탄다는 단유의 말에 수련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완전 시골 촌놈이네?” 자기 말이 재밌다는 듯 까르르 웃는 수련과 달리, 단유는 그저 주위를 구경하기 바쁠 뿐이었다. 개찰구를 지나 계단을 타고 내려가 자동문 앞에 줄 선 이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굉장히 좁은 세계에 갇혀 있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오늘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주위를 감상했다. 비교적 한산한 역의 분위기를 살피던 수련이, 출근이나 퇴근 시간이면 시내버스보다 더 복잡하고 정신이 없다며 부언했다. 그렇게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던 두 사람은 갑작스럽게 한강을 구경하기로 결정을 내린 뒤, 몇 번의 환승을 거쳐 여의도역으로 나왔다. “여기서 바로 넘어가도 되긴 하지만,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여의도 공원은 구경하고 가야 하지 않겠니?” 제대로 가이드 역할을 해보겠다는 듯 수련은 단유의 손을 잡고 앞서 나갔다. “봄이 되면, 여기서부터 저 길 끝까지 벚꽃이 피거든. 그래서 사람들이 데이트하러 많이들 찾아오고 그래. 특히 저기가 여의도 벚꽃 축제할 때 사람들이 제일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고.” 수련은 쉴 새 없이 떠들면서 자신의 잡다한 지식을 방출했고, 단유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주위 풍광을 구경하기 바빴다. 벚꽃 축제가 열리는 곳이라 생각해서 한적한 이미지를 떠올리기도 했지만, 실상은 차들이 쉴 새 없이 지나다니고, 길을 걷는 사람들도 어쩐지 바쁘게만 보이는, 그냥 평범한 도로였다. 시큰둥해 보였는지, 수련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봄에 오면 다를 거야.” 두 사람은 여의도 공원으로 향했다. 평일이라서 그런지, 여의도 공원은 한적했다. 더러 몇몇 넥타이를 맨 이들이 지나가는 모습도 보이고, 정장 차림의 여성들이 손에 커피를 든 채 지나다니는 모습도 보였지만, 가끔 TV에서 보던 것처럼 그렇게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다만 어지간한 학교 운동장보다 넓어 보이는 공원을 보며 뛰어다니기 좋겠다는 생각은 잠시 해보았다. “어때? 탁 트인 느낌이 들지?” 녹스성 앞 평야에서 오물을 푸던 기억을 떠올리면 ‘겨우’ 이 정도로 탁 트였다고 말하긴 어려웠지만, 딱히 설명하기도 어려워 그렇노라 대답했다. 다시 수련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한강이었다. 여의도 공원에서 이어지는 지하터널을 지나니, 공원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몰려 있는 한강 변의 산책로가 보였다. “여기서 운동하는 사람이 많아. 저렇게 자전거 타고 다니는 사람도 많고, 운동 삼아 걷기에도 공원보다는 경치가 좋아서 그럴 거야.” 형광색 운동복을 걸치고 팔을 휘젓는 아주머니들부터 안전모까지 갖추고 자전거를 타는 어린아이들까지, 다양한 연령의 다양한 사람들이 한강공원을 메우고 있었다. 마침 시간이 노을이 들기 시작할 무렵이어서, 서쪽으로 붉게 물든 하늘과 깃털 같은 구름들이 잘 보였다. “예전에는 자주 여기 와서 구경하곤 했었는데….” 옆에서 수련이 하늘을 보며 쓸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조금 오래 걸었던 탓에 숨이 거칠어 답답했던지 마스크는 턱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데뷔하기 전에 멤버들이랑 여기 와서 강물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어. 사실 내가 들어온 순서로 따지면 제일 마지막이어서 언니들이랑 별로 친하지 않았는데, 언니들이 먼저 날 데리고 여길 와줬거든. 그때, 난 고3이어서 대학도 준비해야 했고, 그래서 되게 마음으로 힘들었는데, 언니들이 위로를 많이 해줬어. 용기도 많이 주고.” 수련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감상에 젖었다. 마치 툭 건들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눈을 하고 눈물 대신 노을을 눈에 담고 있었다. “예영이가 20살이 되었을 때도, 한강에 와서 같이 맥주를 마셨어. 다 같이 모여서 맥주캔 하나씩 붙잡고 원샷하고, 그러다 예영이가 사래가 걸려서 켁켁 대는데 그게 너무 귀여워서 다들 웃고 난리가 났었지.” 마침, 한강공원의 잔디밭에 남녀 둘이서 캔을 부딪치며 마시는 모습이 보였다. 살짝 서늘하기도 한 강바람을 맞으며 마시는 맥주 한 잔이 속을 시원하게 해줄 것 같았다. “그때 우리끼리는 그랬어. 꼭 갤럭시즈로 성공하자고. 그래서 나중에 여기서 무대 한 번 가지자고. 저기에 앰프 하나만 갖다 놓고 팬 미팅 같은 거 하자고. 팬이랑 함께 맥주 한잔하면서 이야기하면 분위기 좋지 않겠냐고…그런 이야기도 하곤 했었지.” 수련이 가리킨 야외무대 쪽에는 몇몇 어르신들이 운동에 지쳐서인지 관람석 쪽에 앉아서 무릎을 주무르고 있었다. 여기저기로 시선을 돌리며 주위를 구경하던 단유가 물었다. “그렇게 힘들어요?” “응?” “지금 말한 것들을 이루지 못할 거로 생각할 만큼 힘드냐고요.” 오는 동안 단유가 물었던 질문들이 어쩌면 하나같이 비수처럼 콕콕 찌르는지,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지금의 질문도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 마음과 달리 입은 쉬이 열리지 않았다. 단유는 주변을 쭉 둘러보다가, 수련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가요, 너무 늦겠어요.” 수련은 고개를 끄덕이고 등을 돌렸다. **** 연습실에 도착할 때까지, 수련은 너무 감상에 젖은 탓인지 입을 꾹 닫아버렸다. 동행한 일행이 뻘쭘해지지 않을까 싶지만, 단유가 겨우 그 정도로 어색해 할 인물은 아니었기에 두 사람은 별다른 일 없이 연습실로 올 수 있었다. “늦은 건 아니죠?” 가을이라서 그런지 하늘이 벌써 어둑해졌다. 하지만 아직 시간은 초저녁이라 연습 시간에 늦은 건 아니라는 수련의 설명이었다.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이미 레슨을 받기 위해 준비 중인 멤버가 있었다. 명지가 가장 먼저 수련을 발견하고,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뒤를 이어 수련을 본 지수가 손을 허리에 얹었다. “너 왜 이렇게….” 하지만 말은 이어지지 못했고, 대신 수련의 뒤를 따라 들어온 단유가 지수를 향해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지수는 한 것도 없이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어, 어. 오랜…만이네?” 명지도 고개를 돌려 단유를 보더니 미소를 띠려다가 얼른 얼굴을 굳혔다. “웬일이니?” 수련을 가리키며 따라왔다고 대답한 단유는 연습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연습실 바뀐 거죠?” 예전에 세 번째 싱글의 뮤직비디오 참여 때문에 몇 번 와본 적 있던 단유는 그때랑 조금 달라진 연습실 인테리어를 지적했다. “어떻게 알았어?” 수련의 물음에 단유가 손가락으로 벽을 가리켰다. “예전에는 그냥 베이지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는데, 지금은 하얀색이잖아요. 그리고 저기까지가 연습실이었던 것 같은데, 더 커졌고요. 위의 조명도 LED 아닌가요? 훨씬 밝아진 것 같아요.” 명지가 감탄해서 손뼉을 쳤다. “우와 너 진짜… 그때 한 번 봐 놓고선 그걸 다 기억하는 거야?” 단유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때의 이미지가 꽤 강해서요.” 명지가 되물었다. “어떤 이미지?” 단유는 볼을 긁더니, 천천히 기억을 소환했다. “저기쯤에서 명지 누나가 서서, 2절 파트를 거울을 보면서 연습하고 있었고, 그 옆에서 예영이 누나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면서 누나 연습하는 걸 구경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저기쯤에서 수련 누나가 안무를 추고, 그 앞에서 수영이 누나가 팔짱을 끼고 수련 누나 춤을 봐주고 있었어요. 팔이 이렇게 꺾이면 안 된다면서 직접 동작을 보여주고 있었죠. 그리고 지수 누나가 저기서 쟁반을 들고 들어와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물을 나눠줬어요.” 단유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연습실 안의 세 멤버는 입을 다물고 이야기를 들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제게는 꽤 강한 이미지였어요. 다 따로 있는데도 하나처럼 보이는 모습이랄까? 그래서 각자의 모습과 이 연습실 전체가 모두 하나로 보이는 느낌이었네요.” 달칵, 걸쇠가 걸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수영이 들어와 문을 닫고 있었다. ======================================= [273] 소란(4) 레슨에 나오는 게 힘이 들었다. 2시간씩 받는 레슨이 체력적으로도 힘들지만, 특히 최근의 일로 서로 얼굴을 대면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만나서 함께해야 한다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너무 컸다. 그래서 이럴 때는 차라리 리더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리더만 아니었으면, 그냥 레슨을 빠지고 놀러 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리더이기에, 수영은 오늘도 힘들게 회사의 연습실로 출근을 했다. 숙소에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회사에 나오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하다. 연습실에서 땀을 흘리며 안무를 연습하는 게 숙소에서 동생들 눈치 보는 것보다 나았다. 그리고 동생들도 자신이 없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숙소를 나올 때, 아무도 어디 가냐고 묻지 않았고, 나중에 연습실에서 얼굴을 마주해도 누구 하나 인사하는 이가 없었다. ‘회사에서는 이러는 걸 알고 있는 걸까?’ 분명히 태호가 위에 보고했을 텐데도 여전히 아무런 지침이 없는 걸 보면, 아예 갤럭시즈에게 관심이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차피 망한 그룹, 이대로 해체되어도 별 상관없다는 것인지도 몰랐다. 지우고 지워도 계속 잡생각이 나서 도저히 집중이 되질 않았다. 수영이 연습실 바닥에 주저앉아서 풀어진 신발 끈을 묶고 풀기를 반복하고 있을 때, 또 다른 연습생들이 연습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연습생들에게 데뷔 3년 차 갤럭시즈는 대 선배였다. 게다가 수영은 갤럭시즈 이전에 가장 오랜 연습생 시절을 보낸 이였으니 다들 존경의 마음을 담아 인사를 보냈다. “어, 안녕.” 수영은 엉거주춤 일어나 손 인사를 하고는 땀을 닦으며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연습생들이 마음 놓고 연습할 수 있게 자리를 피해주려는 배려이기도 했지만, 최근의 사태로 눈치가 보인 탓도 있었다. ‘쟤네들도 다 알겠지?’ 갤럭시즈 곧 해체한대. 정말? 얼마 전에 대판 싸웠다던데? 그런데 왜 회사에서 아무 말이 없대? 아마 새로운 걸그룹 데뷔조가 결성되고 나서 이야기할 건가 봐. 진짜? 그럼 우리도 데뷔할 수 있는 거야? 나 이번에 꼭 데뷔하고 싶어. 솔직히 우리가 하면 갤럭시즈보다 더 잘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갤럭시즈는 너무 어중간해. 선배들이긴 해도 노래나 춤이 별로잖아. 수영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아니야.’ 계속 안 좋은 생각만 머릿속에서 맴도는 기분이었다. 덩달아 마음도 우울해지고, 시선도 바닥만 향했다. 다들 자기들 흉만 보는 것 같고, 자신이 등을 돌린 사이에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회사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자기편은 한 명도 없는 것만 같았다. 외로웠다. 레슨시간이 다가올수록 속이 쓰린 기분이었다. 기분만이 아니라, 진짜 쓰려 오는데 아무래도 소화가 안 돼서 그런 것 같았다. 비활동기간이지만, 몸매 관리에 신경 쓰지 않으면 금방 몸이 붓는 체질이라서 평소에도 식사에 신경을 써야만 하는 수영이었다. 그래서 오늘 점심도 샐러드와 고구마 반 조각으로 가볍게 해결하긴 했는데, 그것마저도 소화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레슨이 시작하기 10분 전에 회사 밖으로 나가 대로변에 위치한 약국에까지 찾아갔다. “소화제 좀 주세요.” 이마를 살짝 덮은 앞머리를 정리하던 약사가 수영을 보더니, 익숙하게 소화제 두 알과 액상 소화제 한 병을 꺼내 놓았다. “요즘 또 힘든가 봐.” “아, 네.” 수영은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그 자리에서 소화제를 모두 삼켰다. “요즘은 잘 안 찾아오길래, 얼굴 까먹을 뻔했어.” 약사는 가벼운 농담이라고 뱉었는데, 그 말도 어쩐지 수영에게는 심상치 않게 들렸다. 얼굴이 기억되지 않는 아이돌그룹이라니. “수고하세요.” 수영은 짧게 인사를 건네고, 약국을 나왔다. 짙은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한 하늘이 건물들 사이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저 어둠이 바닥에 닿을 때까지 레슨을 해야 했다. 수영은 가슴을 툭툭 두드리며 연습실로 향했다. 연습실에 다가가니 평소와 달리 조곤조곤 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내가 없을 때는 자기들끼리 대화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급격히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다가갈수록 낯선 이의 목소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호 오빠는 아닌 것 같은데?’ 연습실 문을 열자, 세 멤버와 익숙한 아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연습실 입구의 반대편에 설치된 거울을 통해서 그 아이가 단유란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명지 누나가 저기 서서… 그리고 지수 누나가 저기서 쟁반을 들고 들어와서 한 사람 한 사람에 물을 나눠줬잖아요.” 수영은 다른 세 멤버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단유의 이야기를 들었다. “각자의 모습과 이 연습실 전체가 모두 하나로 보이는 느낌이었네요.” 라고 말하는 단유의 말이 가슴에 쿡 박히는 느낌이었다.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 여태 붙잡고 있던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걸쇠가 걸리는 소리가 나면서 연습실 안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모두 수영에게로 모였다. 멤버들의 얼굴들이 신기하게도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다들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아마도 자기 역시 비슷한 표정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단유가 이 미묘한 침묵을 깨뜨려 주었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 수영이 반갑다는 듯 얼른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아주니, 단유가 설핏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나요?” “어? 어.” 단유는 입술 한쪽을 씰룩거렸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수영을 가리켰다. “잘 지내신 거 맞아요? 약이라도 드신 거 같은데?” 그 말에 아래로 시선을 내리니, 손에 액상 소화제 병이 들려 있었다. 약국에서 급하게 나오다 보니 저도 모르게 소화제 빈병을 계속 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 그냥… 소화가 안 돼서.”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전환했다. “오늘 수련 누나 따라 잠시 들렀어요. 누나들 연습하는 거 구경해보지 않겠냐고 하길래,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요. 봐도 괜찮죠?” “…어? 어, 괜찮지. 괜찮…지?” 단유의 말에 대답했다가, 얼른 다른 멤버들에게도 의사를 구하는 수영이었다. 갑자기 돌려진 화살에 명지와 지수도 당황했다. “어, 괜찮아.” 지수가 멍청한 얼굴로 대답했더니, 명지도 괜찮다고 했다. 그러고 나니 문득 일주일 만에 서로 대화(?)를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을 붉히는 세 사람이었다. “그럼, 잠깐만 구경하다가 갈게요.” 그때, 연습실 문이 열리며 예영이 들어왔다. 예영은 늦지 않게 오느라고 뛰어왔던지 살짝 숨을 몰아쉬고 있었는데, 문 앞에 수영이 있자 깜짝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 죄, 죄송합니다.” 느닷없는 사과에 무안해진 수영이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사이, 또 단유가 끼어들었다. “안녕하세요?” “어? 단유네?” 예영이 단유를 보더니 화사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물론 2초도 안 돼서 사라진 웃음이었지만, 단유를 보는 순간에는 무장 해제가 된 듯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일주일 만에 편하게 웃음을 지어 보인 순간이기도 했다. “어쩐 일이야?” “연습하는 거 구경하고 싶어서 수련 누나 따라 왔어요.” 수련은 단유가 너무 고마웠다. 눈치 빠르게 타이밍에 맞춰서 인사를 건네고 대화를 이어 나가주는 단유가 기특하고 고마웠다. 그리고 역시 잘 데리고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연습실 문이 열리고, 보컬 레슨을 담당하는 선생님이 들어왔다. “어? 니들 왜 이 앞에 서 있어?” 그때까지도 문 앞에서 얼쩡거리던 두 사람은 얼른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길을 열어주었다. “넌 누구니?” 단유는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한 후, 조용히 구경만 하겠다고 했다. 보컬 선생님이 미간을 찌푸리자, 수련이 나섰다. “그냥 구경만 하게 해주세요. 얌전한 아이라서 별 일 없을 거예요.” 선생님은 수련을 보고 살짝 놀란 눈치였다. 그럴 만도 한 게, 일주일간 거의 시체처럼 죽은 얼굴을 하고 있던 수련이 모처럼 생기있는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었다. “저희도 불만 없으니까, 잠깐 있게 해줘도 되지 않을까요?” 수영까지 나서자, 선생님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시작하자.” 어쩐지, 어제까지와 다르게 아이들의 분위기가 살아난 것 같다는 느낌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너 너무 늦는 거 아니야?” 수련이 연습실 한 편에서 마치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단유에게 미안한 얼굴을 하고 다가갔더니, 단유는 괜찮다고 손을 저었다. “오랜만에 보니까 괜찮네요. 가끔은 집 밖으로 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시쳇말로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말이 있다던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가보다, 라며 단유 답지 않게 능청도 떠는 모습에 수련이 웃음을 지었다. “끝나고 밥이라도 먹자. 괜찮지?” 단유가 연습실 벽에 걸린 시계를 흘깃 바라보니,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 시간에 밥을 먹어도 되는 거예요?” “이만큼 땀을 흘렸으니, 조금은 먹어줘야 내일도 움직이지.” 과연 수련이 입은 헐렁한 티셔츠는 땀으로 흠뻑 젖어 든 상태였다. “그럼 다 같이 먹는 건가요?” “어? 그건… 물어봐야겠는데?” 단유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다들 쉬는 척하고 있지만, 귀는 다 수련과 자신의 대화를 향해 있는 것 같았다. “다들 같이 먹는 게 좋죠. 오랜만에 얼굴도 봤는데, 그냥 헤어지면 섭섭하지 않겠어요?” 단유 니가 돈 낼 거도 아니면서, 그런 식으로 말하기야! 라는 말은 속으로 눌러두고 수련은 고개를 돌려 멤버들을 향했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말은 두 입술 사이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혀 끝에서 맴돌았다. “수영 누나, 같이 밥 먹죠?” “응? 저기….” 수영은 솔직한 마음으로는 같이 가고 싶지 않았다. 단유를 봐서 반가운 마음은 있지만, 그리고 솔직히 단유의 말에 감동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멤버들에게 서운한 점이나 미안한 점이 많았고, 그 마음이 쉬이 풀리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유는 머뭇거리는 수영이나 눈치를 보는 지수나 어정쩡한 태도로 등을 돌린 명지, 예영이나 모두 선뜻 나서지 않을 것처럼 보였기에, 특별히 한 마디 더 던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왕 돕기로 했으면, 이 정도 창피함은 무릅써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누나, 저한테 미안한 거 많지 않아요?” “응?” “미안하지 않아요? 그 이야기 좀 제대로 해보고 싶은데?” 수영은 얼굴이 빨개졌다. 솔직히 그 일에 대해서 단유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다면, 그건 사람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당사자가 그 이야기를 먼저 들고 나서니, 여태 사과 한마디도 하지 못한 사람의 입장에서 피하기가 곤란했다. “아니, 저기.” 단유는 수영의 말을 자르고 단답식 대답을 원했다. “같이 밥 먹으면 이야기해요. 알았죠?” 어떤 책에서 그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상대에게서 쉽게 ‘Yes’라는 대답을 받는 방법은, ‘Yes’를 말하기 편하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라고. “으응.” 저것도 굳이 말하면 ‘Yes’니까. 이어서 다른 멤버들에게도 질문을 던져 ‘Yes’를 받아낸 단유는 이후로 레슨이 끝날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아, 창피해.’ 자기 입으로 그 일을 언급하는 것도 쑥스러운데, ‘사과’하라고 강요하는 듯한 인상을 보였으니…. 창피함에 얼굴을 들고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사과를 받을 필요도 없고, 들을 이유도 없는 일이건만, 괜히 사람들을 모이게 하려고 상대의 약점을 찌른 기분이어서 미안하기까지 하니, 괜히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창피했다. 하지만 단유의 이런 노력으로 다섯 멤버는 일주일 만에 한 식탁에 둘러앉게 되었다. “아줌마, 여기 치킨 한 마리요.” 한 마리 가지고 되겠어, 라는 눈치를 주는 주인 아주머니에게 수련이 덧붙여 주문했다. “맥주도 5잔 주세요.” 아주머니는 매몰차게 등을 돌리고 카운터로 향했다. 카운터에 주문을 입력하며 주방에 소리쳤다. “치킨 하나!” ======================================= [274] 소란(5) “얘, 치킨 한 마리로 되겠어?” 지수의 딴지에 수련이 핑계를 대려다, 말을 바꿔 미안하다고 이야기했다. “아, 죄송해요. 너무 들떠서 신경을 못 썼네. 미안.” 마지막 사과는 단유를 향해서였다. “이모, 여기 치킨 한 마리 더 주세요.” 뒤늦은 주문에도 아주머니의 얼굴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나, 언니 왜 그랬는지 알 거 같아. 보통은 한 마리만 시켜서 나눠 먹곤 했으니까, 습관적으로 주문한 거야, 그치?” “역시, 예영이 니가 알아주는구나!” 오랜만에 멤버들이 다 같이 모여서 식사를 한다는 생각에 들뜬 나머지 습관적으로 주문을 넣었던 수련이었다. 수련은 예영과 하이파이브를 나눈 뒤, 단유에게 물었다. “음료수 시켜 줄까?” “물이면 충분해요.” 평소 탄산음료를 즐기지 않는 단유였기에, 수련의 배려를 정중히 거절했다. “여기 자주 오는 곳이에요?” 단유는 일부러 명지에게 시선을 두고 물었다. “뭐, 그냥 이 근처에 올 만한 곳이 여기 밖에 없어서 말이야.” “우리 연습생일 때부터 여길 다녔거든. 오면서 봤겠지만, 이 동네에는 제대로 먹을만한 곳이 없어. 가려면 큰길까지 나가야 하고.” 식탁 위에 팔꿈치를 대고 슬쩍 주방 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던 지수가 명지의 말에 덧붙였다. “그런데 듣기로는 연습생 때부터 몸매관리 시킨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기름진 음식 먹어도 돼요?” “안 되지, 당연히. 태호 오빠 있었으면 당장 말렸을걸? 그런데 뭐 어때? 지금은 활동도 없고, 다음 활동도 언제 있을지 모를 판국에 하루쯤은 이렇게라도 먹고 싶은 거 먹어야 스트레스를 풀지.” 이쯤에서 아주머니가 맥주를 들고 와서 단유를 제외한 다섯 명에게 나눠주었다. 막상 맥주를 받고 나니 괜히 서먹해지는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자, 언니들. 짠 해요.” 이럴 때는 막내가 애를 써야 하는 법이다. 예영이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면서 맥주잔을 들자, 수련이 먼저 잔을 들고 뒤따라 다른 멤버들도 맥주를 들었다. “건배!” 수련이 특별한 건배사 없이 건배를 외치자, 다른 이들도 어물쩍 잔을 들어 부딪쳐 주는 시늉을 했다. 그래도 빼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며 수련은 기분 좋게 원샷을 했다. “우와, 언니 술 고팠나 보다?” “크, 당연하지. 내가 이걸 그렇게 먹고 싶어 했다.” 예영이 짧은 웃음을 터뜨리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이런 가벼운 웃음과 대화가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꿔놓을 순 없었다. 대화가 멈추고 다시 서로의 시선이 엇갈리는 시간이 찾아오니, 식탁 위에 서먹함이 깃들었다. ‘이대로는 안 돼.’ 라고 생각한 건, 수영이었다. “단유야, 일단 너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할게. 우리 때문에 고생 많았지?”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를 잠시 고민했다. “사실은, 별로 신경 안 쓰고 있었어요. 몇몇 사람들이 악성 댓글을 달았다고 해서 제 인생이 막 변하고 우울해지고 그러는 건 없더라고요. 게다가 주영 누나가 잘 처리해주기도 했고요.” 수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행이라고 중얼거렸다. “누나들은 악성 댓글 받으면 많이 힘들고 그래요?” 단유의 물음에 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렇지. 게다가 여자 아이돌이라 만만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좀 심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심하기만 해? 어떨 때는 잠도 못 잘 정도로 괴로운 것도 있다고.” 명지의 투덜거림에 다들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무관심이 관심보다 무섭다고들 이야기하지만, 난 그런 악성 댓글을 받느니 차라리 무관심한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말을 하곤 맥주를 들이키는 지수를 보던 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그럴 때도 있지. 특히 지수가 우리 그룹에서 섹시 컨셉을 맡고 있다 보니까, 지수한테 안 좋은 댓글이 달릴 때가 많았지.” “안 좋은 정도가 아니었다니까? 그때 지수 언니가 댓글보고 이틀 동안 밥을 못 먹을 정도였어.” “그 정도로요?” 놀란 표정의 단유를 향해 보충 설명을 하려다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젓는 수련이었다. “아유, 애한테 할 말이 아니어서 못하겠다만, 진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독하고 나쁜지 처음 알았어. 만약 그런 사람들만 주변에 있다면 난 차라리 가수 안 할 거야.” 꿈을 접고 싶을 정도로 심한 악성 댓글이라면, 회사 차원에서 어떤 조치가 있지 않았냐는 단유의 물음에 명지가 분하다는 어조로 대답했다. “했지. 그리고 나름 언플(언론플레이)도 하고. 그런데 정작 잡고 나서는 대승적 차원에서 합의를 봤다고, 용서해 줬다고 하는데. 도대체 누가 봐주고, 누가 용서해 주는 거야?” 소속 연예인의 이미지 보호 차원에서 택한 결정이라는데, 갤럭시즈에게는 한 마디 상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때, 지수 언니가 얼마나 많이 울었는데.” 지수는 다시금 그때 생각이 나는지 술잔을 들어 남은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천천히 마셔.” 수영이 지수를 말리자, 지수가 잔을 탁 내려놓고 수영을 째려봤다. 그 눈빛에 수영이 새삼 미안하다는 눈을 하고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수영도 지수의 시선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리더의 자격. 과연 자신은 리더로서 충실했는지 되물으면 자신이 없었다. “뭐, 지수 언니뿐만 아니라 다들 악성 댓글 하나씩은 달려 봤을걸?” “인터넷 방송 같은 거 해도 종종 그런 댓글들이 올라오니까.” “예전에 콘도에서 인터넷 방송했을 때도 그런 댓글이 올라왔어요? 나 못 본 거 같은데.” “넌 아예 댓글을 안 보는 것 같더만. 수련이 얼굴만 보느라고.” 예영이 농담처럼 꺼낸 말이지만, 무거워진 분위기를 깨기 어려웠다. “하아.” 수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다 놀라서 숨을 멈추고 동생들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딱히 다들 수영의 한숨 소리에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지수는 갑자기 화제가 되는 바람에 떠올린 예전 일과, 최근의 일들이 모두 버거운 짐이 되어버렸다. 그 짐이 너무 무거웠던 탓에 입을 열기가 어려워 술만 홀짝 마셔댈 뿐이었다. 명지 역시도 험난했던 과거의 일과 여전히 나아질 줄 모르는 지금의 상황이 답답했다. “우리, 미래가 있을까?” 저도 모르게 뱉어낸 그 말에 다들 명지를 쳐다보았다. “…답답해서요.” 수련이 뭔지 알겠다는 듯, 명지의 어깨를 두드려주었지만 굳은 얼굴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치킨 두 마리가 식탁 위에 올라왔지만, 누구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음.” 단유가 소리를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결국, 서로 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직업적인 문제도 겹쳐 있던 거네요.” “응? 뭐, 그렇지.” 수련이 굳이 대답을 해주자, 단유는 수련을 보며 물었다. “가수로 성공하는 게 꿈이에요?” “그렇지.” “다른 누나들도요?” “그렇지 않을까?” 라고 대답하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다들 입을 열진 않았다. “솔직히.” 지수가 고심 끝에 술잔을 들었다. “난 아니었어.” “응?” 지수의 폭탄 선언에 다들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알다시피, 난 노래도 잘 못 하고, 춤도 잘 못 따라 하잖아.” 갤럭시즈의 팬들에게는 춤을 잘 추는 멤버로 지수를 뽑지만, 정작 지수 본인은 춤을 잘 못 춘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처음 데뷔하기 전에 춤 때문에 나 엄청 고생한 거 알잖아. 그때, 백실장님이 그러셨어. 1년만 버티라고. 1년만 고생해서 얼굴이 알려지면, 그때 배우로든 뭐든 바꾸자고.” 다들 몰랐던 사실을 알았다는 눈치였다. “그때가 이미 연습생으로 1년을 보낸 참이었어. 백실장님 이야기 듣고 바로 데뷔할 수 있을 줄 알았지. 그런데, 알다시피 우리 예전에 데뷔하기 직전에 엎은 적 있었잖아? 우리 집에서는 나보고 차라리 대학이나 제대로 다니지 헛바람 들어서 연예인하겠다고 나가냐고 잔소리하고, 회사에서는 실력이 부족해서 당장은 데뷔가 어렵다고 하고.” 지수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래서 솔직히 그때 나 포기하려고 했었어.” “그런데 왜 안 했어요?” 예영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추임새를 넣자, 지수가 씁쓸한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수영 언니가 그랬지? 1년 고생했는데, 1년 더 못 참냐고. 그동안 다른 연습생들보다 더 열심히 했는데, 아깝지 않냐고? 사실 내가 다른 애들보다 더 많이 하긴 했거든? 그 당시에는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었어. 연습량만큼은 다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타고난 실력은 부족할지 몰라도 연습으로 극복해 보겠다는 오기도 있었어. 그런데 실력이 부족해서 데뷔가 안 된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마음이 꺾였던 거지. 그런데 그런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이 수영 언니였던 거야.” 수영은 무안해지는 기분에 괜히 술잔을 들어 올렸지만, 잔의 바닥이 보일 정도로 찰랑이는 술 때문에 그냥 내려놓고 말았다. “그래서 버텼어. 수영 언니가 1년만 더 하자고 꼬셔서. 지금 생각하니까 참 바보 같다.” 자조 섞인 웃음에 다들 숙연해졌다. 어디 지수만 그런 경험이 있겠는가. 다들 힘든 연습생 생활을 거치면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녔으니까. “가수로서의 성공? 난 잘 모르겠어. 그냥 데뷔하고 얼굴 알리는 게 목적이라고만 생각했어. 대신 다른 멤버들한테 피해는 주지 말자는 생각으로 연습은 열심히 했어. 나를 제외하고는 다들 진지하게 가수를 꿈꾸던 친구들이었으니까.” 지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악성 댓글 일도 그렇고, 최근의 일도 그렇고,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내가 못 버티겠어. 억지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지수는, 그래서 수영이 미웠다. 왜 억지로 자신을 붙잡고 여기까지 데리고 왔냐고 토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게 말도 안 되는 억지라는 것은 자신이 더 잘 아니까. 그냥 누군가를 탓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컸기에 수영에게 화를 냈을 뿐이었고, 실제로 화를 내고 싶은 대상은 자신이란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내 선택이었고, 그 선택이 잘못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이제는 바른 선택을 하고 싶을 뿐이야.” 수련은 눈을 질끈 감았다. ‘끝이구나.’ 저렇게 마음을 먹었다면, 아무래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 언니. 언니한테 화내서 정말 미안해. 수련이 너한테도 너무 심한 말 했던 거, 후회하고 있어. 정말 미안해, 수련아.” 수련은 감은 눈을 뜨지 않고 대신 고개만 세차게 저었다. 눈을 뜨면 왈칵 쏟아질 뜨거움을 참느라고 이까지 꽉 깨물었다. 데뷔 쇼케이스를 앞두고 무대 뒤에서 파이팅을 외치던 모습, 첫 공개방송 무대를 마치고 내려와 서로 부둥켜안았던 모습, 자신들을 좋아해 준다는 팬레터를 받고 숙소 안에서 뛰어다니던 모습. 그런 모습들이 ‘추억’이 되어 사라질 것으로 생각하니 가슴이 너무 아팠다. 비단 수련만이 아니라 다른 멤버들 역시 비슷한 듯, 예영은 이미 울음이 입술 끝에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너희들한테 부끄러운 모습 보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노력해왔는데, 마지막에 이렇게 창피한 모습을 남겨서 너무 미안해. 특히 언니한테도. 그때 연습실에서 그렇게 말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그런 말 하지 마. 니가 우리들 중에서 제일 열심히 연습하고 노력했다는 건 다들 아니까, 그런 말 하지 마.” “그래요, 언니. 언니가 가장 늦게까지 연습실에 남아서 춤 연습했던 건 다들 아는 걸요.” 단유는 말없이 다섯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이런 자리가 되고 보니, 딱히 자신이 도울 일이 없기도 했고, 또 이들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게도 되었다. “꿈이라.” 나지막이 중얼거려보던 단유는 식탁 위를 톡톡 두드렸다.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기는 단유를 보던 수련이 왜 그러냐고 묻자, 반개(半開)한 눈으로 대답하는 단유였다. “서로 다른 꿈을 꾸더라도, 꿈이 있는 거잖아요? 전 아직 꿈이 뭔지 몰라서요. 부러워서 그래요.” “이 상황에 부럽다니, 너도 참 별나다.” 지수가 피식 웃음을 짓자, 단유는 목을 긁으며 멋쩍다는 듯 답했다. “그래도 누나는 계속 연예인을 할 거죠? 배우가 꿈이니까?” “뭐, 일단은 그렇긴 한데….” “왜 그 꿈을 꾸게 된 거에요? 동경? 아니면 재능?” “재능은 무슨. 그냥 다른 삶을 연기한다는 게 매력적이어서 나도 하고 싶다고 생각한 거지.” 단유는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라고 중얼거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군.” 단유 일행의 시선이 모두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향했다. 밝은 쥐색의 자켓을 걸친 태호가 멤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275] 소란(6) “왜 다들 전화도 안 받고 그래?” 말하는 것과 달리 태호는 별달리 화난 모습이 아니었다. 조금 지쳐 보이는 것 같았지만, 워낙 성실한 모습을 보이던 매니저인지라 일이 없어도 찾아서 하는 성격임을 알기에 멤버들은 그저 그러려니 했다. “연습 끝나고 핸드폰을 켜지 않았나 봐요.” 연습하는 동안에는 핸드폰을 켜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다들 꺼놓고 레슨을 받다가 필(?) 받아서 밥 먹으러 나오느라고 핸드폰을 켤 생각을 못 했던 것이다. “그랬어?” 태호는 가을 바람이 차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무심하게 넘겼다. 그리고 수영이 옆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자리를 차지했다. “나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이야기 계속해.” 태호는 아무도 손댈 생각을 않고 있던 닭 다리에 손을 가져갔다. “아, 이거 누가 계산하는 거야?” 딱히 누가 계산하자고 나온 게 아니라 대답을 못 하고 있었더니, 태호는 닭다리를 오물거리며 말했다. “아무도 없으면 내가 계산할게.” 이쯤 되면 이상함을 못 느끼는 게 이상한 거였다. “오빠, 무슨 일 있어요?” 태호는 손을 높이 치켜들고 아주머니에게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그리고 맥주가 올 때까지 계속 닭 다리를 뜯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무섭게.” 명지가 태호를 바라보며 물었지만, 그래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주문한 맥주가 나오자, 10년 동안 목말라 있었던 사람이 그러할 것처럼 벌컥벌컥 입에 들이붓다시피 했다. 입가에 묻은 거품을 손등으로 훔치며 감탄사를 내뱉던 태호는 닭 다리를 마저 뜯더니 뼈를 내려놓은 다음에야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단유야, 자주 못 찾아봐서 궁금했는데, 이렇게라도 보니 반갑다.” 정작 대화의 시작은 단유였다. “아, 예. 반갑네요. 경황이 없어서 인사도 제대로 못 했어요.” 경황이 없었다기보다 태호가 난데없이 나타나 분위기를 끌어가는 통에 단유마저도 휩쓸렸던 탓이지만, 태호는 손을 저으며 괜찮다고 다독였다. “뭐, 그런 걸 가지고. 내가 말이야, 진짜 니 얼굴 보기 너무 미안해서 자주 못 봤다. 그래도 내 마음 알지?” “그럼요. 형이 저 신경 많이 써주셨던 거 잘 알아요. 아, 그리고 형이 주신 게임기는 명수가 잘 사용하고 있어요. 거의 매일 게임기를 붙잡고 있어서 선생님이 조금 화가 나신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요즘은 게임기 덕분에 명수가 우울해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하네요.” “명수가 왜 우울해?” 단유는 명수가 다리를 다친 이야기를 해주었고, 태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에 시간 나면 병문안이라도 가야겠다고 말을 남겼다. 다시 맥주 한 잔을 시키고, 단유에게 닭을 권한 뒤, 애써 닭 다리 하나를 집어 단유의 입에 물렸다. 맥주가 나오고, 입맛을 다실 틈도 없이 금세 또 입에 털어 넣어서 잔을 비운 태호가 트림을 뱉어낸 뒤, 참다못한 지수가 태호에게 말을 걸었다. “도대체 뭐예요, 지금? 우리한테 뭐 못 할 짓이라도 했어요? 왜 못할 말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딴청이나 피우고 그래요?” 태호는 빈 잔을 꾹 쥐고 있다가, 살짝 머리를 저었다. 눈을 찌를 만큼 길어진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갤럭시즈 멤버들을 둘러보는 태호였다. “그래도 걱정이 많았는데, 이렇게 다들 모여 있는 모습을 보니까 좋긴 하네. 다행이다.” “설마 우리가 모여서 다행이다, 속으로 걱정 많이 했다, 뭐 이런 이야기 하려고요? 감동먹었다느니 뭐 그런 낯간지러운 이야기 하려고 하는 거면 관둬요. 닭살 돋으니까.” 지수의 능청에 태호가 피식 웃었다. 태호가 웃으니 그제야 분위기가 살짝 풀리는 기분이었다. “가게 들어오다가 잠깐 들었는데, 이제 갤럭시즈 않을 거라며?” 능청 떨던 지수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아니, 꼭 그게…지금 그런다는 이야기는 아닌데요…죄송해요.” 태호는 만년설 쌓인 설산에서 10년을 면벽한 수행자처럼 고아하고 우아하게, 너그러운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백 실장님이 퇴사하시기 전에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귀띔이라도 해줬다면 참고했을 텐데, 전혀 듣질 못했던 상태라서 조금 놀랐을 뿐이야. 그런데 너처럼 생각하고 가수 준비하는 케이스가 없는 것도 아니고. 니가 특별히 유난을 떨었던 것도 아니어서 크게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어.” 바로 옆에 앉은 수영은 태호의 말이 이어질수록 긴장감이 높아지는 기분이었다. 태호가 아무리 갤럭시즈에게 잘하는 매니저라고 해도, 이런 이야기를 듣고 저렇게 남 일 말하듯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태호라는 사람 자체가 활화산처럼 열정이 끓어오르는 편이었는데, 이렇게 차분하게 있는다는 게 평소 같지 않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본론이 나오지 않았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에이, 오빠. 그래도 이런 이야기 들으면 섭섭하지 않아요?” “섭섭하긴. 내가 잘해준 것도 없는데. 잘해준 게 있어야 섭섭하기라도 하지. 내가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하기만 하다야.” 수영이 포크로 태호가 쥐고 있는 잔을 두드렸다. 텅 빈 유리잔에서 청명한 울림이 들렸다. “오빠, 그냥 얘기해 봐요. 이 시간에 퇴근도 안 하고 여기 온 것도 그렇고, 급히 할 이야기가 있었으면 벌써 했을 텐데, 여태 말을 빙빙 돌리는 것도 그렇고, 수상한 게 한두 가지 아니에요.” 예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오빠. 괜히 무섭게 왜 그래요? 그냥 이야기해줘요? 네?” 태호는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별 이야기는 아니야. 니네 숙소 갔다가 아직 안 들어왔길래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여길 찾은 거고, 할 말은 뭐…천천히 해도 되니까. 그리고 야, 니들은 감히 치느님을 이렇게 영접해놓고 제사라도 지낼 참이야? 왜들 안 먹어? 빨리 먹어, 식기 전에.” 수련은 포크 대신 돋보기 안경을 든 셜록처럼 태호의 말을 조각조각 뜯어내고 거기서 의문점을 찾아냈다. “숙소에도 갔다고요? 왜요?” “아, 그게.” “스케줄이라도 잡혔어요? 지방 행사?” 만약 스케줄이 잡힌 거라면, 오기 전에 문자로 알려 줬을 거였다. 직접 대면하고 말을 해주고 싶어 달려왔던 거라면, 또 모르겠지만. “스케줄은 아니고.” 태호는 한숨을 쉰 뒤, 맥주 한 잔을 더 주문했다. 맥주가 나오길 기다리면서, 기본 안주가 없네, 라고 말하는 듯한 분위기로 입을 열었다. “숙소에 새 연습생 들어올 거야.” 다들 얼굴을 굳혔다. “새 멤버가 들어온다는 뜻인가요?” 단유가 물었더니, 태호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아직.” 태호의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수영이 어깨를 부들부들 떨면서, 주먹을 쥐었다. 지수나 명지도 오랜 연습생 시절을 보낸 탓에 그게 어떤 의미인지를 모를 수 없었다. 원래 데뷔하기 전, 그러니깐 연습생들끼리 숙식을 할 수 있도록 회사차원에서 숙소를 마련해준다. 회사 사정이 좋다면야, 좋은 집, 넓은 집을 구해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세 칸짜리 월세 집에 8명, 9명도 집어넣고 숙소 생활을 시킨다. 그런데, 이것도 데뷔하기 전이었다. 데뷔조가 확정되면, 데뷔조를 제외한 연습생은 숙소를 나와야 했다. 데뷔조의 단합을 위해서, 또 데뷔조에 대한 특혜로서 단독 숙소를 제공하는 이유도 있고, 데뷔조에 포함되지 않은 연습생들의 박탈감에 대한 우려와 배려 때문이기도 했다. 데뷔조가 아침저녁으로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는 동안, 다른 스케줄로 움직이면서 얼굴을 마주한다는 건 고문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런데 데뷔조도 아니고 데뷔를 한 그룹의 숙소에 새로운 연습생이 들어온다는 것은 두 가지 경우였다. 한 가지는 새로운 멤버의 구성. 바로 투입될 수도 있고, 혹은 더 오랜 기간을 가지고 연습하다가 투입될 수도 있다. 하지만, 투입되기 전에 그룹 내 멤버들간의 단합을 도모하기 위해 미리 숙소에 배정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경우가 아닐 때, 또 다른 경우라면. “우리 해체해요?” 명지가 울먹이는 소리로 물었다. 태호는 턱을 긁으면서 대답을 망설였다. “아니, 해체는 아니고. 아직 해체가 결정되진 않았어.” “아직이란 말은 해체가 될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그건 다른 그룹도 마찬가지지. 어느 그룹이든 해체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그런 거잖아.” 태호는 여전히 턱이 가려운지 검지로 계속 긁어댔다. 면도를 덜 해서 그런가? “단유도 있는데, 이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애가 벌써 민망해하고 있잖아?” 단유는 다른 누나들의 눈치를 보다 말했다. “별로 민망하진 않아요.” “너 때문에 내가 더 민망하네.” 농담처럼 허허 웃는 태호에게 수영이 물었다. “회사에서 결정이 난 거죠?” “…응.” “오빠도 동의한 거예요?” “…내 동의가 중요한가?” “제 의견은 안 중요하고요?” 태호는 입을 다물었다. “매번 이런 식이잖아요. 사장님은 왜 저한테 리더를 맡긴 거예요? 이런 일이 있으면 저한테 이야기해줄 수 있잖아요? 아니, 저한테 먼저 물어봐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러니까 애들이….” 울컥한 수영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미용실 가서 애들 머리하고 나올 때, 인사 구호 외치는 거. 무대 가서 스탭들한테 인사할 때 구호 외치는 거. 대기실에서 마이크 챙기는 거. 그런 거 말고 리더로서 제가 하는 일이 뭔 줄 알아요? 없어요. 회사에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도 않고, 맨날 이런 식으로 일을 진행해요. 그러니까 애들이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놓고 또 이런 식으로 일을 진행하면 어떻게 하란 거예요? 우리보고 그냥 나가든지, 아니면 다시 연습생으로 돌아가라는 그런 소리나 마찬가지 아니에요?” 태호는 말이 없었다. 태호도 별로 할 말이 없었다. 그 역시 비슷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솔직히 태호 역시 회사에서 역정을 내고 나온 참이었다. 전화로 숙소 인원 충원을 고지하는 실장에게 득달같이 달려가 따지고 나온 참이었다. 따져봐야 바뀌는 것도, 앞으로 달라질 것도 없었지만, 이런 충격적인 내용을 아이들에게 알리는 역할은 또 늘 태호의 역할이었다. “형, 궁금한 게 있어요.” “뭐?” 단유는 화장지를 하나 빼서 손에 묻은 기름기를 닦아내며 물었다. “갤럭시즈라는 그룹이 왜 인기가 없다고 생각하세요?” “응?” 난데없이 디스전이라도 펼치자는 뜻? “형이 오기 전에도 들은 바로는 그런 것 같아서요. 인기가 없는 그룹이어서 오래 가지 못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들 하시더라고요, 누나들. 그런데 인기가 없는 게 문제라면 그 문제의 원인을 찾아서 해결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니 말이 맞아. 문제가 있으면 문제를 찾아서 해결하면 되지. 그래서 아까 지수 말처럼 실력이 모자라면 연습을 더 해서 실력을 쌓고, 혹은 새로운 멤버를 충원해서 그룹에 모자라는 부분들을 채워 넣는 방법을 쓰기도 해.” 태호는 수영에게 손에 든 맥주 마실 거냐고 물었다. 수영이 맥주를 건네주자, 맥주잔을 들어 올린 뒤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나도 처음에 일할 땐, 그렇게 하면 되는 줄 알았어. 그런데, 참 우스운 게 세상일이란 게 그렇게 도식적이지가 않아. 얘들이 안 뜨는 이유? 몰라. 나도 모르고, 얘네들도 모르고, 회사도 몰라.” 맥주를 들이켰다. “니가 보기에 이 누나들 어떻게 보이니? 노래 못 부르는 거 같아? 노래야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 생각에는, 내가 얘네들 매니저라서가 아니라, 그냥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얘네들 노래 잘해. 실력 안 떨어져. 지수, 저게 실력이 조금 떨어진다고 푸념하는데, 지수 쟤도 타고난 음색이 있어서 결코 안 밀려. 스킬이야 조금 떨어지지만. 그치?” 지수는 고개를 들어 올리지 못했다. “수련이야, 이미 가요 예능에도 단독으로 출연해서 인정을 받을 정도고, 명지도 솔직히 회사에서 지원을 잘 못 해줘서 미안하긴 하지만 메인보컬 급이지. 안 그래?” 메인보컬은 맥주를 입에 물었다. “춤? 안무? 뭐, 우리 안무가가 조금 싸구려긴 하지만, 이런 소리 지영쌤한테는 하지 마라, 아무튼 꽤 센스가 좋은 사람이라서 안무가 나쁘지 않아. 그리고 얘들도 춤 잘 추고. 비보이 댄스대회라도 나갈 생각이 아니라면 방송 무대용으로는 합격점이야.” 수영에게 뺏은 맥주잔을 살짝 기울였다. 마시지 않고 오래도록 잡고만 있었던 맥주였던지라 거품이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 외모. 이런 말 하면 팔불출 같지만, 이런 외모 어디 가서 쉽게 못 본다. 안 그러냐?” 단유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예전에 한 번 디스 아닌 디스를 한 적도 있지만, 이곳(?) 기준에서는 나쁘지 않은 모양이니까. “자, 그럼 노래, 춤, 외모 다 되는데 왜 안 뜰까? 지난번에 니들이 싸운 것처럼 노래가 안 좋아서? 너 당장 핸드폰으로 차트 꺼내서 봐봐. 그 차트에 좋은 노래라고 부를 만한 게 과연 몇 곡이나 있는지. 안 좋은 노래도 많아. 세상에 이런 노래가 뜨네? 라는 것도 있어. 왜 그럴까?” 태호는 맥주를 입안에 들이부었다. 다시 원샷. 그리고 목에서 끌어올린 감탄사가 입 밖으로 삐져나오고, 맥주잔이 식탁에 부딪히며 달그락거릴 때, 태호는 답을 말했다. “운이야.” “…운이요?” “그래, 운. 그냥 보니까, 운이더라고. 운이 좋으면 뜨는 거고, 운이 안 좋으면 안 떠. 백날 해도 안 떠. 그리고 그렇게 묻힌 가수와 노래가 이 바닥에 널리고 널렸어.” 태호는 고개를 쭉 빼서 멤버들을 훑었다. “니들이 안 되는 이유? 회사 탓? 노래 탓? 실력 탓? 아니야. 그냥 운이 없어서 그래.” 태호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단유가 옆에 앉은 수련에게 물었다. “태호 형, 취한 거예요?” “…그런 거 같은데.” 단유는 물끄러미 태호를 바라보다가, ‘운’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운이 안 좋다, 라….’ 그 순간에 생각나는 건, 운을 좋게 만드는 법이 있을까, 라는 물음이었다. ======================================= [276] Unbelievable!(1) 술에 취한 태호는 로드 매니저인 현철의 등에 업혀 갔다. “어째 흐지부지 돼버렸네.” 택시 안에서 수련이 쓸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운전석 쪽 룸미러에 달린 인형이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던 단유가 수련에게 물었다. “아쉬워요?” “응? 뭐가?” “데뷔하고도 성공을 하지 못해서 아쉽냐고요.” “당연히 아쉽지. 성공을 목전에 두고 아깝게 포기해야 하는 상황 같은 건 아니니까, 주변 사람들 입장에서는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당사자인 우리 입장에서는 회사가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지 않는 상황도 아쉽고, 태호 오빠 말대로 이유도 모른 채로 이렇게 묻혀야 된다는 것도 아쉽고 그렇지.” 고작 3년 만에 그룹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해서 이러한 조치를 취한 회사의 입장이 여간 섭섭한 게 아니라는 수련의 말이었다. 잠시 도시의 야경을 감상하던 수련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직 정식 앨범도 한 번 못 내고 끝내는 것 같아서 아쉬워. 지금까지 디지털 싱글만 겨우 3장이야. 발표된 음원도 5곡이 전부고. 고작 5곡에 우리 그룹의 가치가 결정된다는 게 아쉬워.” 목소리가 좋은 명지, 춤 잘 추는 예영, 은근 애교가 많은 리더 수영,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그러면서 뒤에서 받쳐주는 역할에 충실했던 지수. 모두 끼도 많고 재밌는 사람들이어서 예능 프로 같은데 나가면 빵빵 터뜨릴 자신이 있는데도, 어디 하나 불러주는 곳이 없었다. 인터넷 방송을 해도 팬들이 재밌다고, 레전드라고 호응해주지만, 인지도가 떨어지는 그룹이어서 찾아보려는 이가 없었다. “미안해서 어떡하니? 분위기가 그래서 제대로 먹지도 못했지?” “괜찮아요. 그래도 이렇게 싸 가지고 가잖아요? 아마 명수가 좋아할 거예요.” 하얀 비닐 봉지 안에 은박지로 대충 둘러서 싼 치킨을 흔들어 보인 단유는 달리 수련을 위로하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의 위로가 먹히지도 않을뿐더러, 그쪽 업계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었기에 번득 생각나는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잘 될 거예요’, ‘성공할 수 있어요’ 같은 공수표를 남발하고 싶지는 않았다. “가수, 계속하실 거죠?” 수련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지금 분위기로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노래하는 게 좋고, 노래로 성공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집만 부리기에는 불확실한 미래가 선택을 막고 있었다. 단유가 집에 돌아왔을 때, 시간은 거의 자정에 가까워져 있었다. 수련은 이미 늦을 거라고 연락을 했었지만,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사과를 드렸다. “나한테 미안할 건 없어요. 하려면 단유에게 해야지.” “저도 괜찮아요. 덕분에 잠시 머리도 식히고, 좋았어요.” 수련은 다음에 보자며 손을 흔들어 보인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늦었네?” 명수가 졸린 눈을 하고 현관 앞에 서 있었다. “그거 뭐야?” 명수는 은박지에 싸인 물건이 예사롭지 않음을 눈치챘다. “치킨이야.” “진짜?” 졸린 눈이 크게 뜨이면서 손을 내미는데, 선생님이 재빠르게 손등을 쳐서 막았다. “늦었어. 오늘은 그냥 자고, 내일 먹어.” “내일 먹으면 눅눅해진단 말이에요.” “그래도 안 돼.” 단호한 선생님의 제지로 명수는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단유는 치킨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운이라.” 사전에서는 ‘이미 정해져 있어, 사람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되어 있고, 역학에서는 ‘후천적으로 그 사람에 관련하여 발생하는 사항’이라고 했다. 우주의 삼라만상이 인간의 인생을 주관한다는 비과학적 신앙 혹은 신념이 빚어낸 개념이라 하겠다. 운이 좋다는 건, 별다른 노력 없이도 좋은 결과를 맞이했다는 의미였고, 운이 나쁘다는 건, 어떤 노력을 해도 바꿀 수 없는 결과를 맞이했을 때였다. 즉, 갤럭시즈가 운이 좋지 않다는 건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 그룹, 이라는 결과가 정해져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인생이 의미 없지 않은가? ‘난 운이 좋을까?’ 별로 오래 살지도 않은 인생이건만, 그래도 나름 굴곡진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단유였다. 생각해보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 사람들 덕에 지금의 자신이 있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하면 운이 없는 편이기도 했다. 가족을 잃었고, 가족같이 지내던 친구들, 동생들, 형들과 헤어지기도 했고, 친한 친구를 잃을 뻔도 했고, 그 외에도 온갖 사건, 사고를 경험했다. 그러다 문득, 단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뭐하는 짓이람.’ 운이라니. 애초에 그런 정해진 운명 따위가 있었다면, 자신이 이토록 애가 타게 바짝 긴장하고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모든 사건의 발생 가능성은 결국 확률에 불과하다. 여러 가지 조건들에 의해 구성된 발생 가능성의 확률에 따라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 ‘천체의 움직임에 의해, 신의 의지에 따라 정해지는 운명 따위는 없어.’ 그건 인간의 이성에 대한 모독이고, 단유의 삶에 대한 부정이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단유는 생각해보았다. ‘운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확률에 대한 오류에서 발생한 것이다.’ ‘우연’이란 것도, 거시적으로 살피면, 다양한 연계 고리들 속에서 발생 가능성의 확률에 따라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 길을 걷다 떨어진 돈을 줍는다고 해도, 그것은 그 길 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돈을 떨어뜨릴 확률과, 그 돈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할 확률과, 마침 자신이 그 돈을 발견하여 주울 확률의 연산에 의해 벌어지는 일에 불과하다. 물론 그 확률이 지나치게 낮은 확률이라는 사실은 접어두더라도, 벌어지지 않을 가능성보다 높기에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다만 피상적으로 따지면, 그 확률이 너무나도 낮기에 ‘그런 일은 벌어지기 어려워’라고 인식하게 되고, 그래서 ‘운이 좋았어’라는 대답으로 이어질 뿐인 것이다. 어쨌든 ‘우연’ 역시 크게 보면 인과관계였다. 바닥을 보며 걷는 사람과 보지 않는 사람 중에서 자신이 바닥을 보며 걷는 이에 속한다는 사실과, 돈을 흘릴 정도의 부주의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중 부주의한 쪽에 속한 사람이 자기보다 앞서 그 길을 지나갔다는 사실이 겹쳐진 인과라고 봤다. ‘그러니까, 갤럭시즈도 사실은 인과관계가 있을 거야.’ 결론은 그렇다. 원인을 모른다는 태호의 말은 틀렸다. 아니 틀렸지만 맞기도 했다. 태호가 지적한 여러 가지 이유 외에도 다른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에까지 눈을 돌리지 않았던지, 혹은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던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단유는 생각했다. 여기에 생각이 이르자, 단유는 얼마 전의 일이 생각났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주위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통제하던 그 순간을. 그랬다. 그 순간, 단유는 거의 신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인지가 미치는 범위 내에서 완벽한 ‘통제’를 해낼 수 있었던 그 경험은 마약을 다시 찾게 만들 만큼 매력적이었고, 충만한 느낌이 들게 해주었다. 그때 그 순간만큼은 어느 누구도, 아니 세상 그 무엇도 단유의 눈에서 벗어나지 못했었으니까. 단유는 머리를 세게 헝클어뜨리다가 침대에 푹하고 엎어졌다. 더 이상 생각을 하다가는 다시 위험한 세계에 발을 들이밀 것 같은 충동이 느껴져서였다. 발을 동동 구르던 단유는 호흡을 천천히 가져갔다. 들이마시고, 멈추고, 내쉬는 호흡에만 신경을 쓰던 단유는 몇 십 분 정도 지난 뒤 잠이 들었다. **** “그랬구나. 누나들 힘들겠다.” 다음날 점심시간, 학교 스탠드에 앉아 운동장을 바라보던 명수는 입에서 다리뼈를 뽑아내서 빈 봉지에 집어넣고, 새로운 치킨 조각을 집어 들어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치킨 살만 골라 발라먹던 명수가 언제 저런 스킬을 터득했는지, 입안에 치킨 조각을 집어넣고 오물거리다가 뼈만 발골해내는 이상한 기술을 보였다. 그 점을 물었더니, 명수는 TV에서 보고 따라 하다 보니 되더라, 이야기했다. “그럼 넌 그 누나들 돕고 싶다는 거네?” 지태가 뼈를 쪽쪽 빨면서 뼈에 붙은 살을 남김없이 뜯어 먹는 반면, 채윤은 손 끝으로 세심하게 살을 골라내서 씹어대고 있었다. “응. 인연도 있고, 또 개인적으로 잘 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 그런데 내가 뭘 해줄 수 있는 건 없으니까, 그냥 생각만 하는 거야.” “그런 건 민일이한테 물어보면 잘 알지 않을까?” 채윤의 말에 지태가 고개를 저었다. “지 앞가림도 못 하는 애한테 뭘 물어보냐? 그리고 걔도 이제 겨우 연습생일 뿐인데. 그리고 내 생각에는 말이야, 이런 건 전문가가 필요해.” “전문가? 누구? 매니저?” 지태가 뼈다귀를 흔들어 보였다. “아니. 원래 연예인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하는 전문가는 따로 있는 법이야.” “그게 누군데?” 단유도 그런 전문가가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들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우리 반에도 있어.” 교실에? 지태의 대답에 기대감이 한풀 꺾이는 느낌이었다. 지태는 히죽 웃으면서 단유를 가리켜 보였다. “니 짝 말이야.” “…병수?” 병수는 1학기 때부터 단유의 짝이었다. 2학기 이후 새로 짝을 정할 때도 또 병수가 단유의 짝이 되었다. 어쩔 수 없었던 이유는 병수가 반에서 가장 키가 큰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다음으로 큰 사람이 단유였고. “병수가 전문가야?” “응. 걸그룹 전문가. 소위 덕후라고 하지.” 지태가 씨익 웃고, 채윤이 손뼉을 쳤으며, 명수는 또 한 조각을 입에 집어넣고 있었다. “니가 걸그룹에 대해서 잘 알아?” 단유의 물음에 책을 보던 병수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으응?” “지태가 그러는데, 니가 걸그룹 전문가라던데?” “아아.” 병수는 쑥스럽다는 듯 팔뚝을 매만지다가 이내 수긍했다. “조금 알아.” “혹시 어디 회사에라도 속해 있는 거야? 마케팅 부서 같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는 얼굴로 단유를 보던 병수가 고개를 젓고는 책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화보집, 시디, 각종 스크랩북과 카드 집까지. “이게 다 뭐야?” “내가 덕질하는 그룹 애들 꺼.” 단유는 갑작스런 병수의 덕밍아웃(?)과 덕질, 덕후라는 용어가 낯설어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병수는 용어에 대한 간단한 설명부터 해서 화보집과 시디집 등을 보여주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매력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얘가 원래는 별로 말이 없는데, 매니저가 바뀌면서 완전히 성공한 케이스. 새침한 게 매력이었는데, 드라마에만 나오면 완전히 사람이 바뀌어서 팬들 중에는 얘만 좋아하는 팬들도 많아. 따로 팬클럽이 만들어졌는데, 기존 그룹의 팬들이랑 팬 사인회 같은 데서 싸우기도 하고 그래.” 이번에 새로 영화도 찍었는데, 그게 대박이 나서 해외 유명 영화제에도 갔다는 첨언이 붙었다. 하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단유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쨌든 걸그룹에 대해서 잘 안다는 거지?” “뭐, 얘네들 좋아하기 전에도 다른 걸그룹 좋아하기도 했고. 사실 내가 잡덕이라.” 모르는 용어는 패스하고 단유는 다시 물음을 던졌다. “갤럭시즈 알지?” “알지.” 적어도 단유네 반에서는 갤럭시즈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반 친구가 걸그룹 뮤직비디오에 나왔다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럼 그 누나들이 왜 뜨지 못하는지도 알아?” “뭐, 대충은.” 단유는 회사도 매니저도 모르는 이유를 안다는 병수의 말에 귀가 뜨였다. “그게 뭔데?” 병수는 볼을 긁적이다가 말했다. “말해줄 수는 있는데,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줘.” “무슨 부탁?” 병수는 어차피 주위에 듣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주위 눈치를 살피는 시늉을 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갤럭시즈에 수련 있지? 그 누나 싸인 좀 받아줄래?” 뭐, 그 정도야. “그런데, 너 갤럭시즈도 좋아해?” “아니, 원래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너 때문에 입덕했어.” 무슨 ‘덕’, ‘덕’ 하는데 도대체 그게 어떤 덕인지 모르겠지만, 그 덕 좀 보자는 의미로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받아줄게. 이유가 뭔데?” “갤럭시즈는 말이야. 아닐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너무….” 단유는 뜸을 들이는 병수의 입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심심해.” ======================================= [277] Unbelievable!(2) 단유는 허공을 떠다니는 비닐봉지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갸우뚱거리던 단유가 그 뜻을 물으니, 병수는 다른 표현으로 이해를 도왔다. “개성이 없어.” 글쎄, 그 말에는 동의하기 어려웠던 단유는 나름대로 자신이 느낀 개성에 대해 설명했다. 각각의 멤버가 특화된 면이 있어 개성이라면 다른 누구 못지않게 강하다고 느끼던 단유였지만, 병수는 단유의 설명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너만 아는 개성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런 개성을 모르잖아. 그리고 그런 건 개성 축에 들지도 않고.” “그래?” “그럼. 모름지기 걸그룹이라고 한다면 뭐니 뭐니 해도 컨셉이 중요해. 걸크러쉬라는 말 들어봤어? 예전에는 청순, 섹시, 힙합 정도가 컨셉이었다면, 요즘은 걸크러쉬 혹은 비글미 같은 컨셉이 추가가 되었어. 이게 무슨 뜻이냐고? 대중의 기호가 더욱 다양해졌고, 걸그룹들에게 구체적인 컨셉을 요구한다는 의미야.” 단유는 알 듯 말 듯 했다. 하지만 역시나 평소에 이런 쪽으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탓인지, 병수의 설명을 곧바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갤럭시즈는 이런 컨셉이 없어. 우리 사이에서는 그냥 밍숭밍숭한 듣보잡 그룹의 하나지.” “가수가 노래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야?” 병수가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인정하면서도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지금 현재 시장에 나와 있는 걸그룹이 얼마나 되는 줄 알아? 공식적으로만 100에 가까운 걸그룹들이 나와서 각축을 벌이고 있다고. 그런데 그저 평범하기만 한 걸그룹들이 과연 성공할 수 있겠어? 실력이 좋아야 뜬다는 말도 옛말이야. 지금은 정말 상향 평준화가 돼서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주목받기 힘들거든. 이런 상황이다 보니 다들 다른 그룹들과 차별점을 보이려고 노력하는 거야.” 단유는 물끄러미 병수를 바라보았다. 병수는 단유의 반응에 상관없이 열변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단지 컨셉만 잘 잡는다고 성공하느냐? 그런데 그게 또 아니란 말이지. 무려 100이야. 어지간해서는 경쟁력을 돋보이기도 힘들다고. 그래서 필요한 게 뭐냐? 예능감이란 거지. 아이돌이란 게 순수 예술을 지향하는 아티스트랑은 또 다르단 말이야. 계속 방송에 나와서 얼굴을 알리고 이름을 알리고 노래를 소개해야 하는데, 만약 방송에 나와서 재밌지도 않고, 웃기지도 않고, 뭔가 임팩트를 남기기에 부족하다, 그러면 팬들도 관심을 두지 않거든.” 이 부분은 어제도 잠깐 들었던 것 같은데. 단유는 선생님께 질문하는 사람처럼 손바닥을 들어보였다. “뭐?” “누나들이 예능감이 좋다고 그러던데? 실제로 이야기해봐도 예영누나나 명지누나는 꽤 재밌게 말을 하는 편이고.” 병수는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예능감이란게 그냥 말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 예능이란 거 기본적으로 웃음이 있어야 하거든? 그리고 평소에 지금처럼 대화를 나누듯 말하는 게 아니란 말이야. 카메라 앞에서 개인기를 보여주거나, 방송 가운데 툭툭 핵심을 찌르는 멘트가 필요한데, 이게 보통 센스로는 되는 게 아니야. 다른 그룹을 예로 들고 싶지만, 갤럭시즈만 이야기하면, 갤럭시즈는 아직 그런 예능에서 검증이 되지 않았지. 그런데 사실 갤럭시즈의 불행은 여기서 시작이야.” 병수는 어려운 수술을 앞둔 의사의 모습처럼 팔짱을 끼고 진지한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자, 방송에서 갤럭시즈를 출연시켰어. 그런데, 누나들이 나온 방송분이 형편없이 재미없어. 그러면 방송국에서 누나들을 출연시키려고 할까? 안 해. 출연시킬 걸그룹이 수두룩한데 굳이 재미없는 걸그룹을 출연시켜서 무슨 득을 볼까. 게다가 팬도 많지 않은 걸그룹인데? 결국 방송 출연을 못 해. 방송 출연을 못 하니까, 인지도가 계속 떨어져. 인지도가 계속 떨어지니까, 방송국에서도 안 써. 이게 계속 반복되는 거야. 악순환이지. 안되는 걸그룹들은 대부분 이런 테크를 타지. 노래도 마찬가지야. 만약에 어떤 노래를 들었는데, 이게 별로야. 그럼 다음에도 그 가수의 노래를 찾아서 들으려고 할까? 안 들어. 안 들으니까 기억에서도 잊혀져. 그리고 설령 이름을 기억해도 노래가 별로인 그룹으로 기억되니까, 안 찾아 듣는단 말이지. 아까도 말했듯이, 들을 그룹이 수두룩하고, 그중에는 자기가 아끼는 걸그룹들이 굉장히 많단 말이야. 그런데 기억에 남지도 않고, 혹은 기억에 별로라고 저장된 걸그룹의 노래를 찾아 들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단유는 언뜻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했다. 자기의 경우로 예를 들면, A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수학책의 문제는 꽤 사고력도 요구하고 푸는 재미가 있는 문제들로 구성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반면 B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수학문제집은 단순 풀이용 문제들만 수록되어 있어서 푸는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그 출판사의 문제집들은 잘 찾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집을 고르다가도 B출판사의 이름이 적힌 문제집은 건너뛰는 경우가 많은데, 아마 이런 경우와 비슷하지 않을까? “대충 알겠어. 그럼 말이야, 갤럭시즈가 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병수는 눈을 껌뻑껌뻑하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슨 뜻이야?” “나도 모른다고.” 단유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문가라며?” “응? 누가?” 아, 생각해보니 ‘전문가’라는 타이틀은 지태가 이야기했던 것일 뿐이었다. “어쨌든, 뜨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 “뭐, 굳이 생각해보자면 말이야… 이건 내 경우에 한해서인데, 갤럭시즈는 아까도 말했듯이 컨셉이 분명하지 않아서 다른 걸그룹과의 차별성이 느껴지질 않아. 물론 수련 누나 같은 튀는 멤버가 있긴 한데, 노래 빼고는 별로 주목할 부분은 없고. 외모는 내 개인 취향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매력 있다고 말하긴 부족하지.” 어렵다는 듯 말하는 병수의 말이었다. “사실 반전을 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기본이지.” “기본?” “시대에 남을 명곡.” 병수는 눈동자를 위로 치켜들었다가, 배시시 웃었다. “너무 거창한가? 그런데 결국 기본이 돼야 다른 수도 쓰지. 갤럭시즈를 대표하는 명곡이 나와야 팬들도 노래를 듣고 가수를 찾지, 아니면 답 없어.” 긴 이야기의 끝은 기본이었다. 하지만 그게 가장 중요한 문제긴 했다. 멤버들도 타이틀 곡이 별로라는 이야기를 몇 번이고 했었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응? 뭐?” 병수가 뭐든 물어보라는 식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너 말 되게 잘하는구나. 평소에 워낙 조용히 있어서 이렇게 말 잘하는 줄 몰랐어.” 병수는 쑥스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분야라서 이렇게라도 말하는 거지. 솔직히 내가 공부를 잘 못 하잖아? 그러니까 공부 이야기는 할 게 없고, 그렇다고 잘 모르는 정치 이야기를 할 수도 없는 거 아니야?” “그래도 이런 모습 보니까 조금 신기하긴 하네. 우리 거의 6개월간 같이 앉아 있었는데도, 니가 그 ‘덕후’? 뭐 그런 건지도 몰랐고.” “그야, 니가 늘 책만 읽고 주변에 관심이 없으니까 그렇지.” 단유는 병수의 말에 조금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옆자리에 앉은 짝에 대해서도 무관심했다는 사실이 민망했다. “앞으로도 궁금한 거 있으면 종종 물어볼게. 괜찮지?” “그럼. 대신, 이쪽 관련해서만. 다른 건 물어도 대답 못 해줘. 그런데 기분 좋다야. 천하의 단유가 나한테 질문도 하고.” 병수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책상 위에 얹어 놓았던 물건들을 조심스럽게 가방 안에 담아 넣었다. 병수와의 대화를 통해, 단유는 걸그룹이란게 노래만 잘 부르고 춤만 잘 춰서 성공할 수만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동안 명곡이라고 덕후들에게 인정받는 곡을 남기고 사라진 비운의 걸그룹들이 많다는 병수의 말에 갤럭시즈 또한 그 운명을 따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아니야. 운명이라니. 모든 건 인과관계가 존재한다. 다만 시야가 좁은 인간의 한계로 인해 다양한 인과관계를 파악하지 못해서 ‘운명론’을 들먹일 뿐인 것이다.’ 단유는 머릿속에서 숫자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분이 들어, 재빨리 머리를 저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이번에는 내 힘으로 알아보자. 약에 취하지 않고도, 알아낼 수 있다면 더는 유혹에 시달리지 않을 거야.’ 단순히 갤럭시즈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이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결심한 단유였다. ‘아, 그리고 병수랑 이야기할 때는 미리 준비 좀 하고 대화를 해야겠다.’ 대화를 하는 동안 전혀 들어보지 못한 단어―예컨대, 덕후, 덕질, 테크 같은 단어들이 수시로 불쑥 튀어나와서 단유의 머리를 어지럽혔기에 나온 결론이었다. **** “안녕하세요. 정나윤이라고 해요.” 이제 회사에 들어온 지 6개월이 되었다는 18살의 푸릇푸릇한 아이였다. “반가워.”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가운데, 수영이 나서서 나윤을 반겨주었다. 그리고 나윤이 들고 온 두 개의 캐리어 중 하나를 들어주었다. “어, 괜찮은데.” “아니야. 가자, 네 방은 저쪽인데 우리 막내랑 같이 쓰기로 했거든. 우리가 마음대로 결정했는데, 괜찮지?” “아, 당연하죠. 괜찮아요, 전.” 나윤이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무려 데뷔 3년 차의 갤럭시즈였다. 이제 갓 연습생이 된 나윤에게는 하늘보다 높은 대선배이기도 했고, 나이로도 한참 언니뻘인 수영이었기에 어렵기만 했다. “안녕하세요.” “안녕.” 예영이 다소 쌀쌀맞다 싶게 인사를 받았다. “너 때문에 그러는 거 아냐. 요즘 안 좋은 일들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마.” 또 수영이 변명 비슷하게 설명하자, 나윤은 괜찮다며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원래 독방을 쓰던 수영은 명지랑 같이 방을 쓰게 되었고, 지수는 수련과, 그리고 막내인 예영이 신입과 같이 방을 쓰기로 되었다. 민주적인 방법―다수결에 의해 결정된 사항인지라, 예영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불만이 없나, 하면 사실 신입이나 언니들에게는 불만이 없었다. 오직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회사에 불만이 있을 뿐이었다. 언니들에게 불만이 있다면 차라리 지난번처럼 말을 꺼내서 속을 드러내고, 다투고, 풀면 그만인데 대상이 회사이기에 속으로만 끙끙 앓을 뿐인 예영이었다. “밥은 먹었니?” “아, 아니요. 나중에 연습실 가서 친구들이랑 같이 먹으려고요.” 그러다 입을 급히 틀어막는 나윤은 눈치를 보며 물었다. “혹시 숙소에서 다 같이 밥 먹어야 하는 건가요?” 수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런 거 없으니까, 그냥 편하게 지내. 그리고 나중에 저녁때 다 같이 모여서 청소 당번 다시 정할 테니까, 그때 늦지 않게 오면 돼.” “아, 네.” “18살이라고?” “네.” “그럼 학생?” “네. 예고 다니고 있어요.” “그렇구나.” 그렇게 대화는 끝이 났다.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 예영 대신 말을 붙여주던 수영은 뻘쭘하게 거실과 주방을 둘러보는 나윤을 보다가 다시 말을 붙였다. “오늘 스케줄 어떻게 돼?” “아, 조금 있다가 연습실 가는 것 말고는 없어요.” “그래? 그럼 같이 가자. 나도 조금 있다가 가려고 했으니까. 짐 정리하고 갈 거야?” “아니요, 지금 바로 갈 거예요. 괜찮아요.” 지금 바로 간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수영은 말을 정정해주는 대신 예영을 향해 물었다. “예영아, 회사 갈 거지?” “네.” “준비해.” “네.” “나도 옷 갈아입고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네, 선배님.” 수영은 호칭을 ‘선배’에서 ‘언니’로 편하게 부르라고 정정해 주려다 말았다. 잠시 멈칫하던 수영이 방으로 들어간 뒤에야, 남몰래 숨을 내쉬는 나윤이었다. 처음 숙소가 배정됐다는 이야기에 살짝 들뜬 마음도 있었는데, 선배들을 직접 보고 나니 괜히 위축되는 느낌도 들고, 환영받지 못하는 외부인이 된 거 같아 조금 서러운 느낌도 있었다. 마치 오랜 시간 정든 친구들을 떠나 전학을 갔을 때, 새 학교 새 학급의 낯선 아이들을 마주하면 이런 기분일까? “뭐하니?” 얼른 고개를 들어보니, 예영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와, 진짜 연예인.’ 예영은 자신보다 고작 2살 많을 뿐인데도 연예인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너 그러고 나갈 거니?” “네? 아, 네.” 자기는 딱히 준비할 게 없기도 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방에서 나온 수영은 푸른색 트레이닝 재킷에 발목이 드러나는 청바지를 입고 나왔다. “가자.” 수영을 필두로 두 사람이 숙소를 따라 나와 회사로 향했다. 문득 저녁 때 일찍 와서 짐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보는 나윤이었다. ======================================= [278] Unbelievable!(3) 단유는 갤럭시즈가 지금까지 발표한 음원들을 찾아 듣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 유행하는 아이돌 음악도 찾아 들어 보았다. 처음에는 핸드폰에서 음원사이트에 접속하여 듣던 단유는, 거실로 나와 컴퓨터로 동영상 사이트에 접속하기에 이르렀다. 동영상 사이트에서 찾다 보면, 뮤직비디오 뿐만 아니라 음악프로에서 방송한 무대까지 볼 수 있어 다양한 모습을 관찰하는 게 가능했다. 갤럭시즈의 경우, 세 싱글이 모두 공중파에서 한 번씩 무대를 가진 케이스였고 덕분에 안무를 곁들인 그들의 무대를 감상할 수 있었다. 500회도 안 되는 해당 영상의 처참한 조회수가 갤럭시즈의 현 위치를 확연히 드러내 주는 결과였다. ‘심심하다는 말이 이런 뜻인가?’ 갤럭시즈의 멤버들에게 개인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는 단유임에도, 그들의 음악에서 썩 끌리는 부분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단유가 아이돌 그룹의 음악들에 무지하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음악이 단유와 비슷한 성정(?)을 지닌 이들에게는 매력을 어필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였다. “뭘 봐?” 모처럼 방에 있지 않고, 거실의 컴퓨터를 차지하고 앉은 단유의 모습에 호기심을 느낀 명수가 다가왔다. “아, 누나들 거 찾아보는 중이야?” “응. 넌 누나들 무대 본 적 있어?” “당연히 봤지. 난 예전에 다 봤어.” 그래 봐야 동영상 사이트에 갤럭시즈의 이름으로 올라온 영상이 20개도 되지 않았다. 20개 중의 2개는 뮤직비디오였고, 4개는 무대 영상, 나머지는 예능에 출연했던 수련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었다. 마음잡고 몰아서 찾아본다고 해도, 모든 영상을 보는데 하루는커녕 3시간도 걸리지 않을 터였다. “어땠어?” 명수에게 감상을 묻자, 명수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뭐, 나쁘진 않지.” “좋지도 않고?” “뭐, 대충.” 단유는 문득 궁금해져서 명수에게 좋아하는 그룹이 있는지 물었다. 평소에도 TV를 자주 보는 명수였고, 보육원 시절에도 가요프로를 즐겨보던 명수였으니까 좋아하는 그룹이 있을 것 같았다. “최애는 플루토라는 걸그룹인데, 그중에서도 ‘설아’라는 멤버가 좋아.” “최애?” “제일 아낀다는 뜻이야. 파워 걸스힙합인데 너도 한 번쯤 들어 본 적 있을걸?” 명수는 익숙하게 마우스를 조작해서 플루토라는 걸그룹의 무대 영상을 보여 주었다. 전주가 나오자, 단유는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 거실에서 명수가 자주 듣던 음악이었다. “그게 이분들 노래였구나.” 치렁치렁한 액세서리들과 화려한 무대의상이 눈에 돋보이는 가운데, 격렬한 안무와 방긋방긋한 외모가 매력적인 걸그룹이었다. “멋있지?” 말은 단유에게 걸면서도 시선은 모니터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명수였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 어깨를 들썩이던 명수는 노래가 끝나자,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근데 왜 갑자기 누나들 음악 찾고 있었던 거야?” 단유는 며칠 전 있었던 일들부터 해서, 자신이 도울 일이 없을까를 고민하는 내용까지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그에 대한 명수의 대답은 심플했다. “안 될 거 같은데?” “…돕기 어렵다고?” 명수는 깁스를 한 발 쪽으로 다가와 코를 킁킁대는 호빵을 안아 들며 말했다. “니가 무슨 작곡을 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유명한 ‘찍덕’처럼 화제를 불러일으킬 만한 ‘직캠’을 찍을 것도 아니잖아?” 이해하지 못하는 단유에게 간단하게 용어설명을 마친 명수는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가장 기본적으로 노래가 좋아야 찾던지 말던지 할 텐데, 솔직히 말해서 계속 듣고 싶다고 여길만한 노래는 아니니까.” 단유는 병수에게서 들은 것과 비슷한 결론을 내는 명수의 답에 짤막하게 알겠다고 답을 한 뒤,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누나들이 우리랑 가까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뭘 해 줄 수 있을까? 우린 아직 중학생밖에 안 되는데? 고작해야 악플 찾아서 ‘키배(키보드배틀)’나 뜨는 정도밖에는 없을 것 같다.” 명수 말처럼 단유가 해줄 수 있는 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단유가 갑자기 작곡을 배워서 곡을 줄 수도 없는 일이었고, 설령 배운들 대중에게 먹힐만한 곡을 만든다는 게 쉬울 리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여러 음악을 찾아 들으면서 느낀 문제이지만, 단유의 감성이 대중적이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갤럭시즈의 노래가 매력적이지 않게 들리기도 했지만, 현재 대세라고 알려진 그룹들의 노래를 들어도 썩 좋다는 느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단유는 순수하게(?) 음악을 듣는 행위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음악, 아니 소리라는 것 자체가 결국 공기라는 매질에 운동성을 가미해 만들어낸 음파의 구성을 인간의 귀가 포착하여 느끼는 감각이었다. 음량, 음정, 박자를 음파의 구성에 집어넣어 ‘음악’을 만들고, 그 음악을 감각적으로, 감성적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였기에 단유에게는 특정 음악이 특별히 감성적이지는 않았다. 모든 음성, 소리는 사인함수로 표현할 수 있었고, 음악은 복합적 사인함수의 데이터가 모인 집합체였다. 음악을 수학책으로 배운 단유에게 듣기 좋은 화음이란 피타고라스의 발견처럼 진동수가 단순 정수들의 비율이 되는 소리로 이해되었고, 다양한 음정의 진폭들은 보기 좋은 비율의 수열과도 같았다. ‘이래서는 제대로 평가하기도 어렵잖아.’ 단유가 동영상으로 갤럭시즈의 무대를 찾아보는 이유였다. 청각이 아닌 시각적으로 자극이 될만한 걸 찾아보기 위해. **** “안녕하세요. 이번에 같이 지내게 된 정나윤이라고 합니다. 보컬 레슨 전에 연습실에서 간단히 몸을 풀고 있던 갤럭시즈 멤버들은 수영, 예영과 함께 나타난 나윤의 인사를 받을 수 있었다. “반갑다.” 지수가 먼저 손을 내밀어 나윤을 반겼다. “잘 지내보자.” “네, 언니.” 지수는 살짝 미소를 지어준 뒤, 연습실을 나갔다. 그 태도에 나윤은 지수가 자신을 반기는 것인지, 아니면 반기는 척만 했던 것인지 분간이 잘 안 되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할 틈도 없이 명지가 다가왔다. “나윤이라고? 너 연습실에서 몇 번 본 거 같다?” “아, 네. 토요일에 몇 번 뵌 적 있어요.” 연습생들이라고 연습실을 무한으로 쓸 수는 없어, 각자 시간표를 짜서 정해진 시간에만 연습실을 사용할 수 있었다. 데뷔한 갤럭시즈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연습생들과 같이 연습실에서 만나는 경우는 꽤 드물었는데, 그럼에도 가끔 시간이 겹쳐서 잠깐씩이나마 얼굴을 마주할 때가 있었다. 나윤의 경우도 그래서 토요일 오후 시간에 갤럭시즈와 얼굴을 마주할 때가 있었던 것인데, 갤럭시즈 멤버들 중 나윤의 얼굴을 기억하고 이를 지적한 이는 명지가 유일했다. “너 열심히 연습하는 것 같더라. …잘 지내자.” “네, 언니.” 그리고 수련의 차례. 나윤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느낌에 진정하기가 어려웠다. 다른 멤버들도 사실 일반 연습생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적어도 나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연예인이었지만, 특히 예영과 수련은 그중에서도 특별한 이들처럼 보였다. 예영의 경우는 막내임에도 외모만큼은 다섯 멤버 중 가장 뛰어난 외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차갑게 보인다거나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도도하고 고고한 탑 연예인의 얼굴처럼 보였기에 가까이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수련의 경우, 물론 외모가 뛰어난 편이긴 하지만, 다섯 멤버 중 가창으로는 가장 최고의 실력을 보여 주는 멤버였고 다른 또래 걸그룹들과 비교해봐도 손색이 없는, 뛰어난 실력을 보여 주는 이였기에 또 다른 의미에서 나윤에게 ‘스타’라는 이미지를 심어준 멤버였다. “반가워. 이렇게 보니까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하네. 잘 지내자.” 그리고 잠시 뒤의 시선을 신경 쓰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지수 언니나 다른 언니들이 너한테 악감정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냐. 알겠지만, 요즘 회사 분위기도 별로 좋지 않고 해서 조금 다운이 돼서 그런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알았지?” “네, 언니. 고마워요.” 나윤은 진심으로 고맙다는 얼굴을 하고 수련이 내민 손을 맞잡았는데, 그때 연습실의 문이 열리면서 태호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어, 나윤이도 벌써 왔구나. 넌 연습시간 지금 아니지 않아?” 나윤의 연습시간은 1시간 뒤였지만, 이 자리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기가 곤란했기에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는 나윤이었다. “미리 와서 보컬 연습 좀 하려고요.” “그래? 그래. 그럼 지하 내려가서 자리 있는지 보고 연습하고 있어. 그리고 나중에 다 같이 모여서 이야기하도록 하고. 너한테도 고지할 내용이 있으니까, 연습 끝나면 집에 가지 말고, 여기로 오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나윤은 얼른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나윤이 떠난 뒤, 태호는 멤버들을 연습실 바닥에 앉힌 후, 그 앞에 섰다. 헛기침을 한 태호은 태연한 척, 볼을 살짝 붉게 물들이며 말을 시작했다. “어제는 내가 너무 무리해서 달렸던 모양인데, 추태를 보이지 않았기 바란다.” “에이, 언제는 안 그랬나? 오빠는 늘 추태예요.” 라는 농담이라도 나오면 쑥스럽게 받아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지만, 멤버들은 굳은 표정으로 태호를 바라볼 뿐이었다. “흠, 어쨌든 미안하고. 그래서 오늘 나윤이 안내도 내가 못했는데, 인사는 다 했지?” “…….” “야, 대답은 좀 하고 살자. 무슨 청문회장에 온 것도 아니고, 이러면 내가 뭐가 되니?” “…….” 분위기는 쉽게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알았다. 아무튼, 어제 이야기한 것처럼, 나윤이랑 같은 숙소를 쓰게 되었는데, 박이사님 말씀으로는 아직 결정된 건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갤럭시즈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하셨다.” 태호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멤버들은 긴장감이 더해져 가는 기분이었다. 마치 재판에서 판사의 주문(主文)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태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다. “우선 오늘 오전에도 잠깐 이야기가 나왔는데, 일단 해체는 없다.”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태호의 말이 이어졌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공식적인 해체는 없어.” 응? 무슨 말이냐는 뜻으로 태호를 바라보는 갤럭시즈의 시선이 감당하기 어려워, 태호는 시선을 살짝 들어 올리고 연습실 천장의 조명들을 쳐다보았다. 대낮인데 이렇게 환하게 조명을 켜고 있을 이유가 있나? “일단 다음 싱글 제작은 무기한 연기야. 알다시피, 갤럭시즈 다음 싱글을 내년 봄에 맞춰서 하려고 했잖아? 그런데 일단 그건 스톱.” 왜 이런 잔인한 이야기를 지금 이 시간에 하는 걸까? 정 하려 했으면 어제저녁에나 하지. 술도 없이 맨정신에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모르는 걸까? 라는 생각이 스칠 무렵, 수영은 태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보컬이랑 안무 레슨 일정도 조금 변화가 생길 것 같은데, 그건 수영이한테 알려줄 테니까, 나중에 듣고 참고했으면 좋겠고. 수영이 너는 이야기 끝나고 나 따라와. 사무실에서 따로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태호는 거기까지 이야기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금한 거 있는 사람?” “그럼 나윤이는 왜 숙소에서 지내게 되는 거예요?” 데뷔 조도 아닌데, 왜 숙소 생활이냐는 물음에 태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입술을 달싹이던 태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살짝 한숨을 내쉬던 태호는 물음을 던진 명지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이건 위에서 시킨 거라, 나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도 동의하는 부분이 있어서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다는 걸 밝힐게.” 태호가 의미심장하게 서두를 던진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결론만 이야기하면, 유닛으로 싱글을 낼 모양인갑다.” “네?” 태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이왕 내친김에 이야기한다는 식으로 털어놓았다. “갤럭시즈로는 현 시장에 마땅히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다고 판단했나 봐. 하지만, 지금까지 투자한 것도 있고, 너희들이 그렇게 형편없는 팀은 아니라는 실무진들의 항의도 있어서 해체는 하지 않기로 했어. 하지만, 이대로 놀 수는 없잖아? 게다가 이미 계약한 작곡가에게서 받기로 한 곡도 있고. 그래서 나온 게 탄력적으로 운용해서 시장에 유동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유닛으로 출격시키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게 누군데요?” 예영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한 명은 나윤이라는 거겠죠?” “그래.” “그럼 다른 사람은 누군데요?” 태호는 망설였다. “아직 결정이 안 된 거예요?” 태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인원이 확정된 거예요?”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인즉슨, 갤럭시즈에게 이야기만 하지 않았을 뿐, 이미 오래전부터 유닛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언제부터였을까? 단유의 스캔들이 터진 후? 아니면 그 전? 수련의 생각이 이어지고 있을 때, 태호가 입을 열었다. “유닛은 듀엣이 될 거야.” ======================================= [279] Unbelievable!(4) 명수는 진지한 얼굴로 미간에 주름이 생길 정도로 모니터에 열중하는 단유가 낯설었다. “가요 들으면서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는 건 너밖에 없을 거야.” 단유는 입꼬리를 씰룩이다가 변명하듯 말했다. “사실 말이야, 이 노래들이 왜 좋은지 모르겠어서.” 단유는 등을 돌려 명수를 바라보았다. 단유가 음악을 들을 때 음악이 좋고 나쁨을 판단하기 전에, 이 음악이 수학적으로 어떻게 분석될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한다는 말에 명수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너 되게 심각하구나.” 명수는 단유가 평소에 이어폰도 귀에 꽂지 않고 산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 중증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명수는 호빵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좋아, 오늘은 이걸로 정했다.” 단유가 무슨 말이냐는 듯, 명수의 대답을 기다리니 명수는 단유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단유 대신 컴퓨터를 조작했다. “내가 이래 봬도 음악에 일가견이 있거든? 그래서 생각한 건데, 이 세상에 좋아하는 음악, 싫어하는 음악은 있을 수 있어도 음악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봐. 너도 아직 좋아하는 음악을 못 들어봐서 그렇지, 찾아보면 분명히 있을 거야.” 명수는 어쩐지 신이 난 얼굴이었다. “괜히 너 바쁜데 시간 뺏는 거 아냐?” “아냐, 아냐. 전혀 안 바빠. 알잖아?” 명수는 장르별로 음악을 찾아서 틀기 시작했다. “이건 어때?” 최근의 히트곡부터 시작해서, 200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댄스곡과 90년대의 히트곡, 발라드, 트로트 등 유명한 음악은 다 찾아서 들려주었다. 그런 노력에도 시큰둥한 단유의 반응에 명수는 더욱 오기를 부려 락, 메탈, 재즈, 클래식 등까지 동원했다. “이건, 너무 단순한데?” “재밌긴 한데, 딱히….” “잘 때 들으면 좋긴 하겠네.” 해골이 관에서 튀어나오는 동안, 거친 그로울링 창법의 보컬이 소리 지르는 뮤직비디오를 보며 자장가로 좋겠다는 단유의 감성에 명수가 혀를 내두를 때, 머리를 뒤로 질끔 묶은 상미가 집에 들어왔다. “뭐해?” 명수의 설명을 들은 상미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내기하자.” “응?” “누가 먼저 단유가 좋아하는 음악 찾는가로 내기하자.” 단유는 상미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명수도 뒤이어 대꾸했다. “콜!” 명수에게로 시선이 옮겨질 때, 명수와 상미는 악수를 했다. “이긴 사람이 호라이즌 하루.” “콜!” 며칠 전, 둘이서 돈을 모아서 산 게임은 1인용 게임이라서 서로 번갈아가면서 해야만 했다. 둘의 내기는 그 게임을 먼저 플레이할 사람을 고르는 것이었다. “그게 내기가 되는 거니?” 단유가 두 사람의 정신연령을 살짝 의심하기 시작할 때, 두 사람은 누구보다 진지한 얼굴로 게임(?)을 시작했다. 명수가 컴퓨터로 음악을 찾으려 할 때, 상미가 명수를 제지했다. “핸드폰으로 찾자. 같은 조건으로 해야지.” “야, 나는 핸드폰 쓰기 어려운데?” 핸드폰으로 타이핑하는 것이 어렵다는 명수의 말에 상미가 샐쭉한 얼굴로 인정해 주었다. “내가 한 번 봐줬다.” 두 사람의 꼴을 보던 단유는 방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명수와 상미가 억지로 단유를 붙잡아 의자에 앉혔다. “널 위해서야.” 핑계도 좋다. 졸지에 두 사람의 놀이감으로 전락한 단유는, 그래도 두 사람의 노력을 인정해 주자는 뜻에서 기다려주었다. 그 날, 저녁을 먹을 때까지, 두 사람은 세상 모든 음악을 다 찾아서 들을 기세로 달려들었고, 단유는 세상 모든 음악을 다 들은 기분이 들어 평소보다 몹시 피곤한 기분이었다. **** “누구랑 하는 거죠?” 예영의 물음에 태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설마 아직 안 정했다는 건 아니죠? 우리들끼리 경쟁시켜서 한 사람을 고르겠다거나 뭐 그런 가혹한 이야기를 하시려는 건 아니죠?” 태호는 고삼차라도 마신 얼굴로 대답했다. “야, 여기서 무슨 오디션 프로라도 찍기라도 할 줄 알았니? 그런 거 아니야.” 태호는 차마 미안하다는 말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일단 위에서 정한 건, 수련이야.” 수련을 제외한 멤버들은 다들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노래 하나로 뽑힌 수련이었고, 노래 예능에도 출연해서 인정을 받았던 수련이기도 하니, 회사 차원에서야 수련을 뽑을 만했다. 다만 이런 상황이고 보니 다시 무대에 설 기회가 영영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운 마음이 드는 탓에 마음이 불편한 멤버들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멤버들이 전혀 할 일이 없는 건 아니야. 솔직히 위에서는 너희들을 너무 빨리 데뷔시켰던 것이 아닌가 판단을 했고, 그래서 재정비 차원에서 좀 더 시간을 들이자는 것뿐이니까 너무 실망하지 말길 바랄게. 이런 경우가 없던 것도 아니고, 또 어떤 그룹은 3년 뒤에 새 앨범을 내고 성공한 사례도 있었으니까, 너희들도 너무 처져 있지 말고 실력을 기르도록 해. 그리고 이건 내 개인적인 소망인데, 부디 다음 갤럭시즈 앨범은 싱글이 아니라 정규 앨범으로 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 너희들도 정규 앨범이 나오면 좋잖아? 그렇지?” 정규 앨범을 내길 원하지 않는 가수는 없을 것이다. “꼭 정규 앨범 내주실 거예요?” “…노력할게.” 그러나 그 말이 얼마나 무의미한 공약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고작해야 아직 팀장 직함도 얻지 못한 일개 매니저의 다짐일 뿐이니, 3년은 물론이고 1년 뒤의 태호가 어디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야, 너 왜 그래? 울어?” 고개 숙인 채 있던 수련을 보던 지수가 고개를 기울이니 수련의 얼굴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보였다. “왜 울어? 울지 마.” 하지만 다른 멤버들에게 미안하기만 한 마음에 수련은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니가 잘해서 또 우리 이름 알리면 되잖아, 안 그래?” 명지가 수련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래, 니가 더 열심히 활동해서 갤럭시즈 이름이 한 번이라도 더 언급되게 해야지. 혹시 알아? 덕분에 역주행이라도 할지?” 지수와 명지의 응원에 수련은 더욱 울컥한 마음이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언니, 미안해요. 언니.” 울음이 섞인 수련의 목소리에 수영을 비롯한 멤버들이 모두 수련을 안아주었다. 솔직한 마음으로, 태연하게 수련을 위로하기에는 각자의 마음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3년 이상 함께 땀 흘리고 고생했던 멤버인지라 그녀의 마음을 또 모르지는 않았다. “괜찮아, 수련아.” 수영도 눈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수련을 응원했다. “꼭 잘해서 너라도 성공했으면 좋겠어.” “아니야, 나, 우리, 같이 해야지. 같이 성공해야지.” 수련은 울먹이며 말하느라 제대로 문장을 만들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 말을 이해 못 할 정도는 아니어서 다들 먹먹한 마음으로 수련을 위로하고 응원했다. 태호는 그 분위기를 깨기가 미안해서 그들끼리 시간을 가질 수 있게 자리를 피해 주었다. 밖에서 보컬 선생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다 선생님이 오시자, 그제서야 안에 들어가 분위기를 정리해주고 나중에 다시 보자는 말을 남긴 태호는 이후 사무실로 돌아와 보고를 했다. “아이들에게 이야기는 다 했습니다.” 박 이사는 서류를 들여다보면서 태호에게 질문을 했다. “불만은 없고?” 불만이 있을 걸 알면, 직접 가서 사정을 설명해주고 일을 진행시킬 것이지, 이렇게 위에서 일을 벌여놓고 정작 부담스러운 일은 자신한테 다 맡기다니. “별로 없었습니다.” 박 이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 제일 앞장에 서명을 했다. “하긴, 지금 상황에서 불만이 있으면 도둑놈 심보겠지.” 태호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수고했어. 일 봐.” 태호는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등을 돌렸다. “아, 잠깐만.” 돌아보니 박 이사가 금테 안경을 고쳐 쓰며 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애들 그만둔다고는 안 해?” 분명히 방금 불만이 없다고 이야기했는데도, 저렇게 뭔갈 기대한다는 눈치로 묻는 건 그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직장 상사에게 쓴소리할 수는 없는 법. 욱하는 마음을 누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열심히 하겠답니다. 3년 뒤에 정규 앨범 낼 수 있도록….” 거기까지 말했을 때, 박 이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 나가봐.” 태호는 문을 닫고 나가면서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누군가가 지금의 태호 얼굴을 본다면 분명히 한소리를 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너 왜 그래?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지금 표정관리가 되지 않는 태호였다. 비록 입사 3년 차가 되도록 팀장 소리 한 번 못 듣는 매니저이지만, 그리고 그렇게 된 이유가 뜨지 못하는 갤럭시즈의 성과 때문이지만, 그래도 갤럭시즈와 함께 한 3년간 자기 자식처럼 아끼고 돌보며 지냈다. 그런데 그런 자식을 향해 저런 장난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박 이사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저 아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연습하는지는 보지 않고, 오직 서류 속의 숫자로만 아이들의 노력을 폄하하고 그 미래를 재단하려 하는가. ‘그래, 그게 이곳의 룰이지.’ 성공하면 세상 누구보다 귀하게 대접하지만, 성공하지 못하면 최저시급 받는 알바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 게 이곳, 가요계의 현실이었다. “젠장.” 태호는 자기 책상으로 돌아가는 대신, 밖으로 나갔다. 담배가 몹시도 땅겼다. **** “누나? 저예요.” 전날, 명수와 상미에게 시달렸던 단유는 주말을 맞아 먼저 수련에게 연락을 했다. 무슨 일이냐는 수련의 말에 단유는 이틀간 고민한 결과를 알려주었다. “돕고 싶은데 도울 방법이 생각나질 않아서요.” ―말만으로 고마워. 단유는 핸드폰은 든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누나 무슨 일 있어요?” ―응? 아니. 왜? “목소리가 이상해서요. 감기예요?”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잠시 끊긴 듯 싶다가 다시 들려왔다. ―아니야, 어제… 조금 무리해서 그런 가봐. 단유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이유만으로 수련을 추궁할 근거가 부족하기에 원래 하려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누나들을 도울 방법을 찾으려다 보니까 알게 된 건데, 제가 좋아하는 음악이 없더라고요.” 무슨 이야기냐는 수련의 물음에 단유는 어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곧 수화기에서 수련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한참을 웃는 소리만 들려주는 수련이었다. ―와, 정말 명수는 기가 막히는구나. 그래서 어제 하루 종일 음악을 들었다고? “네. 그런데 매력적이라고 생각되는 음악이 없더라고요.” ―그럼 그동안 우리 노래도 별로라고 생각했던 거겠네? “사실은 그렇죠.” ―이야, 이거 실망인데? 수련이 농담조로 뱉은 말에 단유가 사과를 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누나 보컬 레슨 받는 거요, 다시 한 번 들을 수 있을까요?” 단유는 이왕에 시작한 거, 좀 더 학구적으로 파고들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다. “보니까, 보컬 선생님이 꽤 체계적으로 설명을 해주시는 것 같던데, 그땐 제가 별로 관심이 없던 터라 주의 깊게 듣지를 못했거든요. 그래서 이번에 만약 다시 레슨을 들을 수 있다면, 음악에 대해서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너무 제 욕심만 부리는 것 같아 죄송하네요.” ―아냐, 뭘 그런 걸 가지고. 괜찮을 거야. 어차피 지난번처럼 조용히 듣기만 하는 거면 선생님도 별말씀은 안 하실 거야. 조금 있다가 레슨 있는데 한 번 와 볼래? 단유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고, 통화를 마친 단유는 곧바로 준비해서 집을 나섰다. ======================================= [280] Unbelievable!(5) 몇 번 와봤다고, 벌써 회사의 근처 지리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단유였다. 총 5개 층으로 이루어진 건물은 지하 1층과 지상 2층과 3층을 기획사에서 사용하고 있었다. 1층에는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자리하고 있으며 4층과 5층도 전혀 다른 업종의 회사들이 사용하는 중이었다. 기획사를 가기 위해서는 커피숍의 입구 쪽이 아닌 건물 오른편에 난 계단으로 들어가야 했다. “빨리 왔네?” 단유를 마중 나온 것인지, 아니면 바깥에 볼일이 있어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수련이 입구 근처에서 단유를 발견하고 손을 들어 인사했다. “지하철을 타니까 시간이 딱 맞는 것 같네요.” “그렇지? 지하철 타는 게 어렵진 않았고?” “한 번 타봤는데, 어려울 게 뭐 있겠어요? 괜찮았어요.” 사담을 나누며 두 사람은 지하 연습실로 들어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입구를 지나면, 대략 100여 평에 달하는 넓은 공간에 연습생들의 땀과 눈물이 배인 연습실들이 구획에 맞춰 만들어져 있었다. 가장 넓은 연습실은 역시 안무연습실로 총 2개의 연습실이 만들어져 있었고, 더 안쪽으로는 1인 보컬 연습실―연습생들은 ‘독방’이라고 불렀다―이 줄지어 만들어져 있었다. 넓지 않은 공간에 여러 개의 연습실을 만들려다 보니 자연히 복도는 좁은 느낌이었다. 안무연습실로 가려면 자연스럽게 1인실 보컬 연습실을 지나야 하는데, 단유가 돌아보니 이미 방마다 연습생들이 들어가 맹연습 중이었다. “아직 10분 정도 남았는데, 어떻게 할래?” “그냥 옆에서 구경할게요.” 단유는 수련이 열어준 문을 통해 안무연습실로 들어갔다. 주 용도는 안무연습실이지만, 보컬 연습실도 겸하는 A 연습실이었다. B 연습실이 안무만 주로 연습하는 공간으로 음악을 재생하는 오디오 외에는 아무런 장비가 없는 곳이지만, A 연습실에는 보컬 레슨도 받을 수 있게 한쪽 구석에 건반과 마이크도 같이 세팅되어 있었다. 단유가 연습실에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반긴 것은 공기 청정기가 돌아가는 낮은 소음과 볼륨을 낮춘 음악 소리, 그리고 허밍 음이었다. “달콤한 입술의 향기, 지워지지 않는 그의 기억.”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 못 했던 단유가 잠시 머뭇거릴 때, 뒤따라 들어온 수련이 등을 돌린 채 연습에 매진하고 있던 여자를 발견하고 이름을 불렀다. “나윤아.” 하지만 나윤은 귀에 꽂은 이어폰 때문에 그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여전히 허밍을 곁들여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누구예요?” 수련은 대답 대신 나윤에게 다가가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의를 일깨웠다. 나윤이 화들짝 놀라며 일어나 수련을 보자마자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허둥지둥 이어폰을 잡아당겨 챙기는 모습이 군기가 바짝 든 군인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일찍 왔네?” “네. 아무래도 첫 연습이라서 그런지, 조금 긴장돼서요.” 그러다가 수련의 뒤에 서 있는 단유에게로 시선이 닿았다. 누구냐는 물음을 눈으로 전하는 나윤에게 단유 역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김단유라고 합니다.” “연습생?” 얼마 전까지 연습생들과 종일 함께 했던 나윤이었기에 이 회사에 저런 얼굴의 연습생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그 외에는 정체를 유추할 만한 단서가 없었기에 연습생이냐고 물었다. 대답은 수련에게서 나왔다. “그냥 내가, 아니 갤럭시즈 멤버들이랑 개인적으로 친한 아이. 보컬 연습하는 거 보고 싶다고 오라고 했어.” “아.” “혹시 본 적 없어? 얘 우리 ‘미챠(meet yah)’ 뮤직비디오에도 나왔었는데.” “아!” 그제야 손뼉을 치며 단유를 알아보는 나윤이었다. “저 봤어요! 되게 잘 생긴…. 와, 그러고 보니 실물이 장난 아니네요? 연예인? 모델?” “아무것도 아니고요, 그냥 학생입니다. 평범한.” 평범하지 않은 얼굴을 하고 ‘평범’하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단유를 신기한 동물 바라보듯 하는 나윤에게 수련이 물었다. “혹시 얘 때문에 연습하는 데 문제 있을 거 같으면 말해. 아무래도 레슨 받는 데 지장이 있으면 안 되니까.” “아뇨, 그런 거 없어요. 전 괜찮아요.” 있어도 없다고 할 판이었다. 무려 선배님이 데려오신 ‘귀인’을 어찌 어렵다 할 수 있겠는가? 수련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단유에게 물었다. “저기 앉아서 기다릴래? 우린 먼저 목 좀 풀고 있을게.” “근데, 저쪽 분도 소개 좀 해주시죠?” “아.” 수련이 자신의 이마를 찰싹 때리며 나윤에게 사과했다. “내가 정신이 없었네. 미안하다. 이쪽은 우리 회사… 아니, 이제 좀 있으면 데뷔할 정나윤.” ‘연습생’이라고 소개하려다, 이미 듀엣이 결정되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쳐, ‘데뷔 준비’로 정정해서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에이바운스(A-Bounce) 연습생 정나윤입니다.” “…안녕하세요. 김단유라고 합니다.” 나윤의 공손한(?) 인사에 단유도 덩달아 인사를 했다. 그 모습에 수련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니들 뭐하니? 지금 무슨 미팅 하니?” “네?” 나윤이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자, 수련이 키득거리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너 말고, 단유 말이야. 왜 또 인사하고 그래?” “저분이 예를 갖춰서 하시니까, 저도 다시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럼 나이랑 사는 곳도 이야기를 하지 그러니?” “14살이고 장계동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진짜 말하니?” 단유가 이렇게 하란 뜻으로 말해준 거 아니냐고 수련을 바라보았다. “14살? 진짜?” “더 들어 보여?” 수련이 장난스레 묻자 얼굴을 붉히는 나윤이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어리게 보이긴 하는데… 저보다 4살이나 어리네요?” 단유가 키도 크고, 목소리도 살짝 허스키한 느낌이 있어서 중학생이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못해도 고등학교 1학년 정도라고 생각했기에 살짝 놀랐을 뿐이었다. “너 설마…?” “네? 아, 아니에요, 그런 거.” 당황한 나윤의 모습에 수련이 재밌다는 듯이 놀렸다. “그런 거라니? 그런 게 뭔데?” 나윤은 수련이 자신을 놀린다는 걸 알면서도, 대꾸하지 못했다. 말할수록 자신만 곤란해질 뿐일 테니까. 나윤을 곤경에서 구해준 것은 보컬 트레이너였다. “일찍 왔네?” 수련은 보컬 트레이너에게 인사를 한 뒤, 단유의 사정을 알렸다. 지난번에도 얌전히 앉아만 있다가 갔던 단유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트레이너 역시 별말 하지 않았다. “목은 못 풀었다고?” “네.” “그럼 목 먼저 풀고 시작하자.” 트레이너는 스트레칭부터 시작했다. 목소리는 목에서 나오지만, 노래는 온몸으로 부르는 것이라며, 가슴, 배, 허리, 다리까지 골고루 운동이 되도록 스트레칭을 시켰다. 수련이나 나윤은 어렵지 않게 스트레칭을 소화한 뒤, 본격적으로 목을 푸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정확히 어떤 말을 낸다기보다는 입에서 바람이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목에 진동을 주고, 입 안쪽 근육을 풀어주는 법이라는 트레이너의 설명이었다. 그 뒤로도 음이 높아졌다, 낮아지는 소리를 내거나, 멈추지 않고 길게 소리를 내는 방식 등으로 목을 푼 두 사람은 거의 20여 분이 지나서야 본격적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직 두 사람이 부를 노래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다른 곡으로 연습하고, 노래 나오면 본격적으로 하자. 알았지?” “네.” 두 사람은 트레이너가 지정한 곡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수련이 미성에 단단한 목소리를 가졌지만, 나윤은 살짝 허스키하면서 고음과 저음의 레인지가 넓은 목소리였다. “나윤이는 평소에 연습을 많이 했나 봐? 음감이 좋은데?” “고맙습니다.” 트레이너의 칭찬에 나윤이 살짝 웃으면서 답례 인사를 했다. “수련이 넌, 뭐 잘하니까. 목소리가 굳지 않게 만드는 것만 신경 쓰자.” 실은 노래에 감정이 안 실린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최근 갤럭시즈에 닥친 일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할 거라 짐작한 트레이너는 괜한 이야기로 수련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말한 대로 목소리가 뜨거나, 흔들리지만 않게 해주고, 감정이나 그 외에 디테일한 부분은 새 노래가 나와서 본격적으로 연습해야 할 때 잡아주면 될 거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렇게 레슨을 마무리하려는 때였다. “선생님.” 그때, 지켜보던 단유가 조심스럽게 트레이너를 불렀다. “응? 왜?” “혹시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어차피 끝낼 시간이라 달리 방해가 될 것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트레이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 어떤 목소리가 좋은 목소리라고 생각하세요? 그러니까… 인기를 얻을 수 있는 가수의 목소리로서 좋다고 판단할 수 있는 목소리가 어떤 건가요?” “응?” 단유는 며칠간 고민했던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최근에 관심이 생겨서 이것저것 노래들을 찾아 듣다가 생긴 궁금증인데요, 어떤 글을 읽어보니까 어떤 사람의 목소리는 요즘 노래에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라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어떤 목소리는 꿀이 떨어지는 목소리라고 칭찬하는 글도 있고요. 물론 노래가 좋아야 사람들의 관심을 끌겠지만, 노래를 부르는 가창자의 목소리도 한 몫을 차지하는 것 같더라고요.” “음, 그렇지. 아무래도 듣기 좋은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가 더 좋게 들리긴 하지.” “그럼 그런 목소리는 인위적으로 가질 수 없는 건가 해서요. 만약 그렇다면, 타고난 목소리가 좋은 사람이 인기를 얻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단유의 질문에 나윤과 수련 역시 흥미롭다는 얼굴을 하고 트레이너를 바라보았다. 트레이너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예전에 그 문제 때문에 고민했었거든. 그리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래서 난 가수를 포기했어.” 갑작스런 고백에 수련과 나윤이 당황하는 차에 트레이너의 고백이 계속되었다. “단유, 라고 했나? 맞지? 단유 너 말대로 목소리, 보통은 음색이나 톤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는데, 이걸 타고난 사람들이 있어. 사람들의 목소리가 다 비슷하지는 않아도 대중의 귀에 좋게 들리는 음색과 톤이 있는 건 사실이야. 멀리 가지 않아도, 수련이나 나윤이 음색이 그렇지. 수련이의 미성은 누가 들어도 좋아할 만하지. 나윤이의 허스키한 음색은 최근에 주목받는 음색이기도 하고. 반면에 내 목소리는 솔직히 평범한 축에 속하지. 과거에는 목소리가 평범해도 고음을 잘 낸다거나 가창 스킬이 좋다면 가수를 하는 데 무리가 없기도 했었다고 봐. 하지만 요즘은 가요계에 워낙 노래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스킬로는 경쟁력이 약하지. 그래서 주목을 받게 된 게 사람의 음색이야. 답만 이야기하자면, 음색은 거의 변하지 않지. 일부러 목을 긁는 창법으로 허스키하게 만들 수 있지만, 타고난 음색 자체가 변하는 일은 드물어.” 트레이너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단유와 두 학생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최근에는 또 트렌드가 변했어. 목소리만으로 좋은 가수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냐고 한다면, 대답은 노야. 결국, 노래는 감성이야. 얼마나 상대에게 진정성 있게 들려줄 수 있는가, 라는 본질로 돌아가서 봐야 한다고 말들을 하게 되었어. 목소리가 평범하든, 특이하든, 부르는 가수의 진심이, 감정이 오롯이 상대에게 전달되도록 부르는 게 중요해진 거지. 이건 단순히 스킬이나 음색으로 훈련될 수 없는 거야. 가수라는 직업 자체의 기본적인 마인드에 관한 문제가 된 거야. 단순히 돈 벌려고, 인기나 얻으려고 가수가 되려는 이가 과연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스튜디오에서 아무리 믹싱을 기가 막히게 한다고 해도, 가수의 진심은 믹싱을 할 수 없으니까.” 두 학생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단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노래에서 그런 게 느껴지나요?” “그럼, 당연히 느끼지. 넌 한 번도 못 느껴봤어?” “네.” 단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트레이너는 잘됐다는 심정으로 두 학생을 바라보았다. “자, 우리 청강생이 진심이 담긴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는 말 들었지? 어때, 도전해 볼 사람?” 수련과 나윤은 서로의 눈을 쳐다보았다. ======================================= [281] Unbelievable!(6) “왜? 진심을 담아서 부르기 힘들어?” 두 사람이 머뭇대기만 하고 먼저 불러보겠다고 나서지 않자, 트레이너가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을 하고 두 사람을 재촉했다. “제가 먼저 해 볼게요.” 역시 이럴 때는 나이 어린 사람, 아니 후배가 먼저 해야 미움을 덜 받는 법이었다. 나윤이 먼저 손을 들어 트레이너 앞으로 섰다. “날 보지 말고, 단유를 보면서 해. 관객이라 생각하고.” 나윤이 얼굴을 붉히면서 머뭇거리자, 트레이너가 다시 말했다. “앞으로는 수십, 수백 명 앞에서 자연스럽게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 고작 한 사람 앞에서 진심을 담아 노래 부르기를 어려워하면 어떻게 하니?” “아뇨, 어렵지 않아요. 할 수 있습니다.” 나윤은 그저 낯선 사람 앞에서 부르는 게 경험이 없어 잠시 망설였을 뿐이었다는 등,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거려 보이곤 마이크를 잡았다. “그런데 반주는?” “그냥 불러. 목소리가 악기라잖아?” 트레이너는 이 상황이 재미있었다. 사실 트레이너가 주로 하는 역할이라는 게 가수의 음정을 잡아주고, 음의 벤딩이나 슬라이드, 그 밖에 디테일한 스킬을 조정해주는 역할이 대부분이었기에, 감정을 담아서 부르라거나 하는 식의 조언은 그다지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마침 수련의 연습곡을 들으며 가졌던 생각을 이런 식으로 풀어나갈 수 있게 돼서 흥이 나던 중이었다. “무반주라도 음정, 박자 잘 지켜야 정말 좋은 가수가 되는 거야. 뭐 부를래?” 나윤은 고심 끝에 박효신 선배의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다. 트레이너도 단유 옆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나윤의 노래를 감상할 준비를 마쳤다. 나윤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뒤, 살짝 눈을 감고 노래를 시작했다. “오늘 하루 쉴 숨이, 오늘 하루 쉴 곳이….” 진지하게 부르기 시작한 나윤의 노래는 읊조리듯 낮은 음역에서 시작되어 점점 감정이 고조되기 시작하더니, 원곡자 특유의 감성과 고음이 묻어나는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나윤은 목에 핏줄이 설 정도로 열창했다. 노래가 끝나고, 잠시 숨을 고른 나윤이 감았던 눈을 뜨자, 세 사람이 손뼉을 쳐주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잘하네, 나윤이?” 트레이너의 칭찬에 나윤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고음이 살짝 불안한 느낌이 있지만, 역시 음역대가 넓으니까 대체로 잘 소화한 편이야.” “고맙습니다.” 트레이너는 단유를 돌아보았다. “어땠어?” 트레이너는 일부러 나윤의 감성적인 면에 대해서는 멘트를 하지 않고, 대신 단유의 감상을 물었다. “잘 부르네요.” “끝이야?” 단유는 나윤의 눈치를 보면서 머뭇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트레이너의 물음에 단유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말했다. “처음 들어보는 노래라서 그럴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냥 잘 부른다는 감상 외에는 다른 느낌이 없네요.” 나윤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아, 가사가 잘 들리더라고요. 발음이 좋으신 거 같아요.” 노래 감평을 하랬더니, 발음이 좋다는 이야기나 하고 있다. “고음 음정이 불안하다고 하셨는데, 저 정도면 꽤 높은 음 아닌가요?” “높지.” “그러면 고음도 잘 내시고. 저음에서도 목소리가 잘 들리고. 노래는 잘 부르시는 것 같아요. 그런데, 솔직히 진심까지는 잘 모르겠네요.” 트레이너가 나윤을 바라보았다. “나윤아, 어떤 마음으로 노래를 불렀어?” “어, 그냥 노래 가사를 생각하면서 불렀어요. 노래 가사가 마치 제 이야기 같다고 생각하면서요.” “노래 가사를 어떻게 해석했는데?” 나윤은 지난 몇 년간, 연습이 힘들고 고돼서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마음을 다잡으며 꿈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하루하루를 떠올리며 불렀다고 설명했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난 잘 들었어. 그리고 충분히 다른 사람들도 이 노래를 들었으면 마음에 들어 했을 거로 생각했어. 하지만 단유의 진심을 흔들기에는 부족했네. 단유가 귀가 너무 고급이던지, 아니면 마음에 빗장을 걸어뒀던지 둘 중 하나라고 생각되네?” 마지막은 장난스럽게 농담조로 뱉었는데,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고급 귀는 아닌 것 같고, 오히려 노래를 잘 몰라서 그럴지도 몰라요. 진심을 담아서 부르는 노래라는 게 어떤 것인지 감이 잘 안 와서요.” 트레이너는 빙긋 웃으며 그럴 수 있다고 단유의 어깨를 두드려 준 뒤, 수련을 바라보았다. “도전?” “…예, 해볼게요. 그런데 그 전에요.” 수련은 단유를 보며 물었다. “너 우리 노래 들어본 적 있지?” “네.” “그럼 우리 노래 들으면서 한 번도 좋다고 생각해 본 적 없다는 이야기야?” 예전에 노래가 좋다고 칭찬해줬던 단유를 기억하던 수련의 말에 단유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좋긴 한데요, 그게 그냥 듣기 불편하지 않은 정도랄까요? 누나한테는 말씀드렸잖아요? 명수랑 상미가 종일 노래를 찾아서 들려주었다고요. 그런데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노래가 하나도 없던 걸 어떡해요. 아까 질문도 그래서 한 거예요. 제 기준이 아니라, 전문가의 기준에서 좋은 노래가 어떤 건지, 좋은 목소리가 어떤 건지 궁금해서 여쭤본 거예요.” 수련은 짧게 한숨을 쉬고, 마이크 앞에 섰다. 이러고 있으니 마치 오디션 프로에 나온 도전자가 된 기분이었다. “23번 서울에서 온 하수련이라고 합니다.” 트레이너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울리네. 뭐 부를 건데?” 수련은 잠시 생각하다가 팝송을 부르겠다고 했다. “머라이어 캐리의 「My all」이요.” 트레이너는 재밌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 다 자기 목소리, 자기 음색의 장점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에게 잘 맞는 곡으로 선택하는 동시에, 나윤은 남자의 곡을, 수련은 팝송을 선택해서 살짝 변주만 줄 뿐이었다. “I’d give my all to have/Just one more night with you.” 진성과 가성을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그리고 원곡 못지않게 자연스러운 그루브감으로 곡을 소화해낸 수련의 노래에 트레이너와 나윤은 박수를 보냈다. 특히 나윤은 수련의 노래 실력에 감동을 받을 정도였다. “언니, 완전 대박!” 끓어오르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내는 나윤에게 수련이 고맙다고 미소를 보냈다. “뭐, 말할 필요도 없네. 역시 수련이야.” 트레이너 역시 두말할 필요 없다는 듯, 찬사를 보냈다. 노래를 듣는 동안 애절함, 절절한 여인의 감정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 느낌에 흠뻑 젖었던 트레이너였다. 잠시 감동에 젖었던 트레이너가 깜빡했다는 듯 단유를 보며 감상을 물었다. 수련도 괜히 긴장해서 단유의 감상평을 기다렸다. “좋네요.” 얼굴이 붉어진 단유가 박수를 쳤다. “끝이야?” “…노래 가사가 조금….” “노래 가사?” 트레이너는 잠시 가사를 떠올려 본 뒤, 물었다. “야해?” “아, 아뇨? 그런 게 아니고, 좀 답답한 느낌이라서요.” “답답해?” 트레이너와 수련, 나윤의 시선이 단유에게 몰렸다. “그렇잖아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걸 바치겠다는 둥, 그런 맹목적인 감정을 호소하는데, 상대가 그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잖아요?” 세 사람은 갑자기 합죽이가 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상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설파하는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긴 해요. 별에게 소원을 비는 화자의 모습도 서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대에 대한 어떤 정보도 주어지지 않은 채 자신의 감정만 토로하고 있으니 답답하죠.” “노래를 들으면서, 그런 걸 생각한 거야?” “네? 아니 그냥, 그렇게 들려서 그런 거뿐인데….” 나윤은 뭔가 질렸다는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진심을 못 느꼈다는 거야?” 트레이너의 말에 단유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절절한 느낌, 이라는 건 느낄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전혀 공감되질 않으니까 그렇게 와 닿지는 않네요.” 수련은 물론이고 트레이너도 단유를 상상 속의 동물을 바라보는 듯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눈치챈 단유가 황급히 변명을 했다. “그러니까, 제 말은요. 가수가 인기를 얻으려면, 적어도 그 노래가 사람들에게 계속 듣고 싶다는 충동을 불러일으켜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계속 듣고 싶어지려면, 목소리도 듣기 좋아야 할 거고, 노래 역시 여러 번 들려도 질리지 않는 멜로디가 있어야 할 거고, 뭐 그래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거죠.” “그 말은, 내 노래는 여러 번 듣고 싶지 않다는 뜻이야?” 수련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모처럼 눈썹을 위로 치켜세웠다. 단유는 다시 변명하듯, 미안한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 “그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좀… 노래를 잘 몰라서 그런 거죠. 아까 나윤…누나는 누나 노래가 감동적이었다고 박수 치고 그랬잖아요? 제가 좀 특이해서 그런 걸 수도 있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이런 판을 벌여놓고 신경 쓰지 말라니! 라고 생각했다가 수련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저게 단유지. “니가 그럼 그렇지.” “무슨 뜻이야?” 트레이너가 수련에게 물었다. “단유 쟤요, 조금 특이하거든요. 보는 눈만 특이한 줄 알았더니, 듣는 귀도 특이한가 봐요.” 수련은 비하의 의미가 아니라, 사실 그대로 ‘특이함’을 강조하며 단유와 인터넷 방송을 했던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외모를 수학적으로 분석한다고?”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새 단유는 세 사람에게 둘러싸여서 가장 예쁜 외모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을 받기 시작했다. 괜히 땀이 나기 시작했다. **** “안 데려다줘도 돼요?” “응, 괜찮아.” 수련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나윤과 함께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단유 되게 똑똑해. 전교 1등도 하는 애거든.” “정말요?” ‘전교 1등’이란 단어에 놀라던 나윤은 아까 연습실에서 보던 모습과 연계해서 생각해보았다. “전교 1등 하는 애랑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원래 전교 1등 하는 애들은 저래요?” 아무래도 공부만 하다 보니 감성이 무뎌진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며 수련에게 물었다. “글쎄다.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고. 나도 아는 애가 단유밖에 없어서 말이야.” 제1회 단유배 오디션(?)이 끝나고 잡담을 하던 와중에 단유가 소리를 파동으로 분석하게 되면 결국 음악도 수학으로 분석할 수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꺼내 놓았고, 세 사람은 단유를 풀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애초에 건드릴 상대가 아니었다.’ 라는 게 세 사람의 공통된 심정이었고, 단유가 그나마 노래에 관심을 가진 게 갤럭시즈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는 것에 고마워하며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런데 뮤직비디오로 볼 때보다 훨씬 잘 생긴 것 같은데, 연예인 아니었어요? 난 우리 회사에서 계약한 줄 알았는데.” 나윤의 말에 수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하려고 했지, 태호 오빠가 계속 단유 찾아가서 계약하자고 조르기도 했는데, 단유가 거절했어.” “왜요?” “공부해야 한다고.” “아.” 나윤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확실히 단유가 잘생기긴 했지?” 수련의 말에 나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진짜 모델인 줄 알았다니까요. 키도 크고 얼굴도 작고. 아마 길거리 캐스팅도 받을 거 같은데요?” “그건 어려울 거야.” “왜요?” “집 밖에 잘 안 나가.” “…왜요? 혹시….” 수련은 나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성격 문제가 아니고, 공부한다고 집 밖에 안 나가.” “네?” 수련이 이해를 못 하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어요?” “왜 못해? 너도 아침에 연습실 들어가서 해질 때까지 연습실 안 나가고 연습하는 애들 봤을 거 아냐.” 나윤은 수련의 명쾌한 비유에 손뼉을 쳤다. “그렇네요. 저도 그런 적 있어요.” “그거랑 똑같아. 다만 쟤는 책을 좋아해서 책 읽는 시간에 많이 투자할 뿐인 거고, 우리는 노래 부르는 시간에 투자할 뿐인 거고.” 이해는 되지만, 그래도 책을 읽는 시간이 즐거워서 밖에도 안 나갈 정도라는 건 사실 와 닿지 않았다. 공부를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다리에 힘이 빠져서 걷기 힘든 나이가 아니고서야, 한참 혈기왕성한 나이의 남자아이가 책이 좋아서 밖에 안 나간다고? “그런데 몸은 좋아 보이던데?” “그 새 몸도 봤어?” 나윤이 얼굴을 붉히자, 수련이 웃음을 터뜨렸다. “새벽마다 운동한단다. 하루도 안 빠지고 운동을 하니까, 당연히 몸은 좋겠지. 그런데, 너 너무 관심 가진다?” “네?” “반했니?” “아,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4살이나 어린데. “그런 거 아니면, 왜 그렇게 관심이 많은 것처럼 보일까? 지금도 봐. 너 얼굴 터지겠다야.” 나윤은 언니가 놀려서 그래요, 라는 말은 못하고 입술을 달싹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관심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적어도 주위에서 보기 힘든 캐릭터였으니까. 신선하달까? 놀랍달까? ‘알고 지내도 나쁘지 않을 아이.’ 정도라고 속으로 생각하는 나윤이었다. ======================================= [282] 서바이벌(1) 단유는 돌아오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올 때는 앉아서 올 수 있었던 반면, 가는 동안에는 주말이라 그런지 퇴근 시간이 아님에도 사람들이 가득해 서서 와야만 했다. 손잡이를 잡은 채인 단유는 지하철의 작은 진동을 두 발로 느끼면서, 슬쩍 앉은 이들을 구경했다.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색다르게 느껴졌다. 아마도 저기 앉은 사람들은 서로 일면식 하나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누구 하나 옆 사람을 쳐다보는 이 없었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 손에 핸드폰을 쥐고, 조그만 액정 속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이든 이든, 젊은 이든 상관없이 모두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었다. 더러 핸드폰을 쥐고 있지 않은 아주머니들은 눈을 감고 있거나, 눈을 떠도 딱히 초점이 잡히지 않은 눈으로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들이 대중이구나.’ 다른 얼굴, 다른 취향,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지하철 한 칸에 모여서 엉덩이를 붙이고 나란히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는 사람들이 수련이나 다른 가수, 혹은 연예인들 대상으로 하는 대중이었다. 저 사람들이 모두 좋아할 만한 노래나 목소리가 있을까? 그러다 갑자기 단유는 앉아 있던 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보려고 해서 본 건 아니었고, 서로가 눈 둘 데가 마땅치 않아 여기저기를 보다가 마주친 것이었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시선이 곧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1초도 안 될 시간이겠지만, 그 순간의 마주침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단유는 얼른 눈을 돌렸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사과를 해야 하나’, 라는 생각을 잠시 떠올렸다. 뭔가 민망하게 만든 것 같기도 하고, 훔쳐보고 있었다는 느낌을 준 것 같기도 했다. 의도와 달리 다른 사람에게 이상한 오해를 줄 수도 있겠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은 단유는 이후로는 창밖에 시선을 던진 채로 도착역까지 갔다. 그래 봐야 시커먼 터널의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 터라, 거울 보듯 자기 얼굴을 보면서 시간을 보낸 단유였다. “야, 나 오늘 지하철에서 잘생긴 애 봤거든?” ―또 지랄한다. 그 놈의 도끼병은 나이 먹어도 안 고쳐지냐? “내가 무슨 말 할 줄 알고, 도끼병이래?” ―그래, 그럼 계속 말해봐라. “안 할래.” ―하지 마라. “너 계속 그럴래? 앞으로 영원히 안 보고 살래?” ―나는 상관없는데? “야!” ―아이참, 왜 소릴 지르고 그래? 너 때문에 네일 튀었잖아? “그러니까 얌전히 이야기나 들어.” ―알았다, 알았어. 뭔데, 얘기나 해봐. “난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거든. 그런데 뭔가 시선이 느껴지는 거야. 내가 원래 감이 좋잖아?” ―개뿔. “뭐라고?” ―아냐, 계속해. 아세톤 찾는 중이라서 혼잣말로 중얼거린 거야. “…내가 감이 좋잖아? 그치? 그래서 누가 또 도촬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그래서 가만히 눈만 돌려서 주위를 보니까, 딱 하고 눈을 마주친 거야. 고등학생처럼 보이는데, 핸드폰을 들고 있지는 않았고, 그냥 쳐다보기만 하고 있더라고. 그래서 도촬은 아닌가 보다, 생각하는데 가만히 보니까 얼굴이 장난이 아닌 거 있지? 난 무슨 원빈 젊었을 때 보는 줄 알았다니까?” ―……. “듣고 있어?” ―어. “얼굴이 완전히 그림 같은데, 무슨 만찢남이 현실 출몰한 줄 알았다니까? 그런데 딱 시선 마주치니까, 애가 얼굴이 빨개지면서 고개를 푹 숙이는데, 완전 귀여운 거 있지? 눈 마주친 뒤로는 내 눈을 못 보고, 계속 창밖만 보는 거야. 그래서 계속 쳐다봤는데, 옆모습도, 이야, 이건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 진짜 내가 도촬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니깐. ―그렇구나. “뭐야, 그 심심한 반응은? 내가 진짜 사진을 찍었어야 하는데, 차마 옆에 눈치가 보여서 찍지를 못하겠더라고. 그런 거 보면, 지하철에서 도촬 찍는 애들은 간덩이가 엄청 부은 애들이 분명해. 난 내가 너무 소심하고 마음이 여려서 그러질 못하겠더라고. 진짜 내가 2살만 더 어렸어도, 가서 전화번호 물어봤을 거다. 너 알지? 나 눈 높은 거.” ―어. “…너 계속 대답이 시원찮다.” ―어, 야, 밖에서 누가 부른다. 나가야 돼. 나중에 통화하자 안녕? “야, 야!” 여자는 핸드폰을 핸드백에 집어넣고, 지상으로 올라왔다. 지나가는 남자들이 왜 이렇게 못 생겨 보이는지. 여자는 인상을 살짝 찌푸린 뒤, 선글라스를 꺼내 끼고는 당당하게 길을 걸어갔다. 턱 끝에 힘을 주고 도도한 이미지가 잘 드러나도록 허리를 곧게 펴는 것도 잊지 않았다. **** 나윤의 합류 이후에도 갤럭시즈의 스케줄은 그다지 변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같은 시간 같은 곳에서 안무 연습과 보컬 연습을 병행하며 하루 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는 멤버들이었다. “예영아, 안 나갈 거야?” “나중에 레슨 시간 맞춰서 나갈게요.” 수영은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예영을 잠시 바라보다가 등을 토닥거려 준 뒤, 방을 빠져나왔다. 갤럭시즈 멤버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리지만, 그래서 더 많이 밝은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고 애를 쓰던 친구였는데, 지금은 가장 먼저 의욕을 잃어버렸다. 그나마 보컬과 안무 연습 시간에는 빠지지 않지만, 그 외 시간에는 숙소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평소 가까이 지내던 명지가 예영을 달래보기도 했지만, 명지 본인도 의욕이 다소 꺾인 상태여서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거실로 나온 수영이 가방을 메고 나오려다 주방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나윤을 발견했다. “어, 너 아직 안 나갔니?” “네. 저 빨래만 널고 나갈게요.” “도와줄게.” 수영이 다가오자 나윤이 얼른 손사래를 치며 수영의 도움을 거절했다. “괜찮아요, 언니. 제 일인데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원래는 나윤과 예영이 같이 해야 할 일이었다. “혼자 하기 힘들어. 도와줄게.” 이미 수영은 가방을 다시 내려놓고, 나윤에게로 다가온 참이었다. 결국, 나윤과 수영은 두 바구니에 가득 담긴 빨래를 건조대에 가지고 가 널기 시작했다. “힘들지?” 말없이 빨래를 널던 중, 수영이 물었다. 이제 나윤이 들어온 지 일주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처음보다는 긴장이 많이 풀린 것 같긴 하지만, 여전히 갤럭시즈 멤버들을 어려워하는 나윤이었다. 특히 나이 차가 많은 수영을 어려워하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아뇨. 괜찮아요.” 웃음을 지어 보인 후, 다시 빨래를 널기 시작하는 나윤은 몰래 귀 옆으로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솔직히 말해서 힘들지 않을 수 없었다. 숙소 생활을 하면서 안 하던 빨래를 맡아 하게 된 것도, 눈치 보지 않고 살다가 갑자기 5명의 무서운(?) 언니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 것도 힘들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었다. 물론 나윤은 꿈이 있었고, 목표가 있었기에 이런 것쯤은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더 열심히 웃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일주일을 함께 지내는 동안 알게 모르게 눈칫밥을 먹게 되고, 갤럭시즈라는 그룹의 미래가 마치 자기 때문에 불투명해진 것 같아 불편했다. “다 끝났네?” “네.” “그럼 회사 갈 거지?” “네.” “가자. 가면서 언니가 커피 사줄게.” “네, 고맙습니다.” 그나마 수영은 먼저 다가와서 말도 먼저 붙여주는 형편이라 고맙긴 했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불편한 건 불편한 거지만. 맏언니라서 오히려 그녀의 접근이 마냥 편하지마는 않은 게 솔직한 나윤의 심정이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웃으려고 노력했다. 반대로 가장 불편한 사람은 같은 방을 쓰는 예영이었다. 나이 차이도 겨우 2살밖에 나지 않는 터라, 가까워지려면 얼마든지 가까워질 수도 있을 멤버지만, 나윤이 숙소를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서로가 나눈 대화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게다가 늘 불만 섞인 얼굴을 하고 있어, 가끔은 그녀의 미모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녀오겠습니다.” 나윤은 방에서 짐을 챙기고 침대에 누워있는 예영에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예영은 진짜 자는 것인지, 자는 척을 하는 것인지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나윤은 조용히 문을 닫고 몸을 돌렸다. “너 노래 잘한다고 수련이 칭찬하더라?” 갤럭시즈의 기존 멤버들과는 같이 연습을 받지 않았다. 회사에서 일부러 시간을 다르게 배정한 탓이었는데, 나윤은 회사의 배려가 고맙게 여겨질 정도였다. “아니에요. 수련 언니가 정말 대단하던걸요?” “수련이야 뭐 다른 회사 사람들도 인정하는 보컬이니까.” 수영은 가방 앞에서 지갑을 꺼내어 손에 들고는 회사 건물의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뭐 마실래?” “아메리카노요.” “여기 아메리카노 2잔 주세요.” 나윤이 노력하는 것 중의 또 하나는 바로 커피였다. 사실 나윤은 커피를 잘 마시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 수영과 함께 길을 나섰을 때, 수영이 커피 마시겠냐는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네’라고 말했던 게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하루에 3잔 이상씩 커피를 마시는 중이었다. 그래서 숙소 첫날, 그 힘든 와중에도 잠이 오지 않아서 고생을 많이 했었다. “고맙습니다.” 나윤은 커피를 손에 들고 수영과 함께 지하로 내려갔다. “수고해.” “예. 언니도 수고하세요.” 나윤은 ‘독방’이라 부르는 1인 보컬 연습실로 들어가고, 수영은 명지와 지수가 연습하고 있을 안무 연습실로 향했다. 독방에 들어와 문을 닫고 의자에 앉자, 괜히 온몸이 노곤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 힘들다.” 절로 한숨이 나오며 책상에 철퍼덕 엎드리는 나윤이었다. 요즘은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과연 산다는 게 뭘까?’ 자신이 뭘 위해서 살고 있는지, 과연 자신이 목표로 하는 그 지점에 이르기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지, 그리고 거기에 이르기까지 몸과 마음이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 들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특별히 자신의 진로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 “네가 하고 싶은 건 해 봐라. 요즘은 그쪽 직업도 나쁘지 않은 것 같으니까.” 성실하게 공부해서 대학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는 평범한 인생을 바라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연예인도 예전처럼 나쁘게만 보지는 않아서, 나윤도 부모님의 허락하에서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다. 물론 순수하게 딸의 꿈을 지지하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쟤는 배우 생활해서 번 돈으로 자기 부모님한테 건물을 사줬다네?” “요즘은 가수도 돈 잘 버나 봐? 역시 세상이 바뀌는 것 같아, 그쵸, 여보?” “자기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차도 가지고 싶은 대로 다 사고도 몇억씩 번다니까 할 만하지.” 나윤이 회사와 계약한 후, 계약금이 부모님의 통장에 들어왔을 때, 부모님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잊을 수 없었다. 물론 이후 2년간 연습생 생활을 하면서 쓰는 돈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 정도는 용납해 주겠다는 부모님이셨다. “하려면 꼭 성공해라. 자기 꿈을 이룬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해냈을 때의 성취감도 클 거다. 그러니 만약 포기하려면 빨리 포기하고, 아니면 끝까지 성공을 향해 노력해라.” 나윤은 그저 자신의 꿈을 반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 하며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고, 마침내 듀엣 데뷔가 결정되었음을 알렸을 때, 부모님들은 소소하게 술잔을 부딪치며 딸의 성공을 기원했다. “성공이라.” 나윤은 양팔을 포개고 그 위에 턱을 얹은 채, 생각에 빠졌다. 부모님이 바라는 성공과 자신의 성공이 같은 것일까,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요즘은 그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갤럭시즈라는 모범적인 예가 있다 보니, 단순히 데뷔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는 않았다. 점점 나윤의 머릿속에는 성공이란 희망찬 미래보다는 ‘버티고 살아남자’라는 현실적인 목표가 자리 잡고 있었다. **** “그럼 갤럭시즈는 없어지는 거야?” 명수의 물음에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결정된 건 아니래. 그런데 컴백은 무기한 연기라고 하더라.” “음, 그럼 거의 망삘인데.” ‘망삘’이란 단어의 의미를 듣고 난 뒤에야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안 좋은 상황이긴 한데, 그래도 누나들이 실력이 떨어지진 않으니까, 아마 기회만 된다면 잘 될 거 같아.” 명수는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잠시 생각을 곱씹는 것 같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 기회라는 게 쉽게 오지 않으니까 그렇지.” 명수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단유는 수련이나 나윤의 목소리나 노래에서는 진심을 느끼지 못했지만, 명수의 목소리에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이런 말을 했는지를 금방 포착할 수 있었다. “너도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이제 겨우 1학년일 뿐인데 뭐.” 단유는 명수의 등을 토닥인 뒤, 앞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러저러한 사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경기장 입구에 다다랐다. “축구부 애들 보러 갈 거지?” “그래야지. 넌 미리 가서 자리 잡고 있어. 나 혼자 갔다 올게.” 단유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먼저 등을 돌렸다. 중학교 추계 축구대회가 열리는 시합날. 명수가 그토록 바라던 주전 출전 경기가 부상으로 빠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깁스는 풀었지만, 명수는 2주를 더 물리치료를 받으며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고, 결국 추계 대회 출전 자체가 무산되었다. 내년이 있다고 다독거려주는 단유와 축구부 감독님의 위로에도 명수의 굳은 미간은 쉽게 풀리지 못했다. 단유는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 관중석을 둘러보았다. 중학교 대회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볕이 잘 들지 않는, 그래서 경기를 관전하는 데 불편함이 덜 할 자리를 찾아 앉은 단유는 곧 운동장으로 뛰어나오는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가볍게 공을 돌리면서 몸을 푸는 소년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긴장과 기대가 뒤섞인 표정들을 감추지 못하는 어린 소년들의 시합이 곧 시작될 것이다. “자리 좋네.” 어느새 명수가 단유를 찾아와서 옆에 앉았다. “인사는 잘했고?” “응.” 명수는 운동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단유도 아무 말 없이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저곳이 언젠가는 명수의 꿈이 펼쳐질 무대이리라. 하지만 지금은 명수가 존재하지 않는 무대. 각자의 꿈이 격돌할, 치열한 전장이 될 경기장이 단지 명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단유는 흥미를 잃었다. ======================================= [283] 서바이벌(2) 장계 중학교 축구부는 예선 1차전에서 2:1로 승리를 따냈다. 같은 학교의 학생으로서 축하해야 마땅할 일이지만, 마냥 신나지는 않은 일이었다. 승리의 주역으로 명수가 저 자리에서 손을 치켜들고 있었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써는 그저 담담하게 박수를 보내주는 것으로 감상을 끝낸 단유였다. “잘하네.” “잘하지. 솔직히 나 없어도 저 정도는 충분히 이겨야지.” 명수는 뿌듯하다는 얼굴을 하고 열렬하게 박수를 보내고, 환호성을 질렀다. “들렀다 갈까?” “그래.” 감독은 명수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주고 다음번에는 같이 뛰자고, 그러니까 열심히 재활에 신경 쓰라고 응원해주었다. 명수의 친구들, 선배들은 뛰지 못한 명수의 어깨를 두드려주었고, 명수는 그들과 어울려서 소리를 질렀다. 단유는 한발 물러서서 그들을 바라보다가 슬쩍 자릴 피했다. ‘논어든 뭐든, 다 무소용이구나.’ 이성적으로는 승리를 거둔 이들의 편에서 감동을 맛보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실제로는 썩 즐겁지만 않은 자신의 마음 상태가 불편하게 여겨졌다. ‘이런 것도 프라이밍 효과라는 걸까?’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분석해보면, 아무래도 최근의 갤럭시즈가 관련된 것 같았다. 대중에게 인정받는 가수가 되고 싶어서 그토록 열심히 노래하고 춤을 연습했지만, 정작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는 다른 사람에게로 향하고 그들은 스포트라이트의 그늘 속에서 박수만 치다가 내려왔다. 아무도 그들의 꿈을 막지도 않았고, 그들의 꿈을 비판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꿈을 향해 전진하던 그들은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 상황이 명수에게로 대입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명수가 축구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발목을 다쳤을 뿐이지만, 그 일로 명수는 경기장에서 환호성을 받는 선수들의 대열에서 빠졌다. 두 가지 일 모두 이성적으로, 정말 냉철하게 따지면 별거 아닐 수 있는 일이었다. 갤럭시즈는 굳이 지금이 아니더라도 1년 뒤, 혹은 2년 뒤에라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 성공한 가수의 반열에 설 수도 있는 것이고, 명수는 다음 경기부터라도 인정을 받아서 승승장구할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런 미래를 낙관할 수 있는 머리와 달리 마음은 현재 벌어진 일에 불편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단유야, 가자. 어? 너 왜 그래?” 명수가 선수 탈의실에서 빠져나와 밖에서 기다리던 단유를 보고 물었다. “뭐가?”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그러면서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려 보는 명수였다. “아무 일 없었다. 가자, 집에.” 명수는 단유 옆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단유는 명수의 걸음에 맞춰 보폭을 조절했다. “표정이 너무 안 좋은데?” 단유는 잠깐 고민하다가 자신의 감정에 대해 털어놓았다. “저 자리에 니가 없다는 게 아쉬워서 그랬어.” “아, 난 또 뭐라고. 괜찮아, 난. 다음에 뛰면 되는데 뭘.” “나도 알아. 다음에 뛰면 되고, 다음에 뛰면 다른 누구보다 더 주목받을 수 있는 실력이라는 걸 알아. 하지만 그런 실력을 오늘은 보여주지 못했잖아. 그냥 그게 찝찝하달까, 뭐 그런 기분이 들어서 그랬어.” 명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무슨 말인지 알 거 같아. 나도 게임 할 때, 보스전에서 죽으면 화가 나거든.” 단유는 무슨 소리냐는 듯 명수를 바라보았다. “원래 보스전이 조금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공략법만 알면 이길 수 있어. 이길 수 있게 만든 게 보스전이고. 그런데도 실수를 해서 보스전에 지면 고작 게임에서 한번 죽은 것뿐인데도 온몸에 힘이 빠지고 욕이 나온단 말이지.” “…내가 말한 거랑 다른 상황인 거 같은데?” “같은 거야. 왜 같은 줄 알아? 비디오 게임이나 이 경기나 결국 지나고 나면 별거 아닌 거 거든. 게임에서 죽어도, 다시 리스타트 눌러서 보스전에 도전하면 되고, 계속하다 보면 깰 수 있잖아? 이것도 마찬가지야. 고작 한 경기이고, 아쉽긴 해도 그렇게 표정 굳힐 정도의 경기는 아니란 말이야. 나중에 국가대표 선발전 같은 거라면 모를까, 고작 중학교 추계 예선 1차전에 불과한데, 이 정도는 체력관리 겸해서 잠깐 쉰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야.” 어쩌면 명수가 자신보다 더 마음공부가 제대로 된 친구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모르는 게 아니라 그게 사실이었다. 자신은 골방에 처박혀서 책이나 보고 있을 때, 명수는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는 걸 즐겼고, 그런 가운데서 몸으로 체득한 경험이 자신의 수 배는 될 것이니까. 단유는 명수의 머리를 문질렀다. “뭐야?” “대견해서.” “뭐? 웃기고 있네. 대견하긴 니가 더 대견해, 임마.” 단유는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내가 왜?” “난 고작 공만 찰 뿐이지만, 넌 전교 1등만 죽어라 하잖아? 모든 선생님과 어른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주제에 누굴 보고 대견하대?” “그거야, 내가 책을 좋아해서 책을 많이 읽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지?” “우와, 너 그 말 다른 데 가서 하지 마라. 돌 맞는다.” 너 빼고 다른 300여 명의 아이들은 책도 읽지 않는다는 소리냐며 명수가 장난스럽게 단유의 어깨에 매달려 단유를 흔들어댔다. 피식 웃으며 단유도 명수의 어깨에 손을 걸고, 명수를 부축해서 집으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단유는 마음의 작용에 대해 좀 더 고민해보기로 했다. 노래를 들어도 감흥이 없는 모습이나, 사소하다는 걸 알면서도 쉽게 토라지거나 울적해지는 등,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 “주예영, 일어나.” 예영은 힘겹게 눈을 뜨고, 얼굴을 가린 이불을 내렸다. 환해진 방 안에 명지와 수영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언니? 무슨 일이에요?” “너, 일어나 봐.” 예영은 꾸물거리면서 이불 밖으로 나왔다. 만사가 귀찮다는 게 손끝, 발끝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너 왜 오늘 안 나왔어?” 명지의 말에 예영은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기분이 울적하더니 도저히 몸을 움직이기가 싫었다. 심지어는 밥을 먹으러 주방에 가는 일까지도 귀찮았던 나머지, 지금까지도 밥을 먹지 않고 있었다. ‘지금’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몇 시인지 궁금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어느새 11시를 가리키는 시계였다. 젖은 머리의 명지가 눈앞에 있으니, 아마도 연습이 끝나고 난 후의 11시일 것이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네.’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주예영, 너 무슨 생각해? 언니 말 안 들려?” 명지가 톤을 높여서 예영을 꾸짖자, 다시 정신이 돌아온 예영이 흐린 눈으로 명지를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잘 못 들었어요.” 명지는 기가 찬다는 얼굴로 예영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어깨를 잡는 수영의 손에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수영이 앞으로 나서며 예영을 불렀다. “너 어디 아프니?” “…아니요.” “그럼 왜 오늘 레슨 안 받았어?” 예영은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도 변명 같았고, 실제로 변명에 불과했다. “대답도 하기 싫어?”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는 예영이 답답했던지, 명지가 수영의 뒤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예영은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냥요.” “뭐?” “그냥 나가기 싫어서 안 나갔어요, 됐어요?” 예영의 말에 명지가 씩씩거리며 나서려는데 수영이 말렸다. “예영아, 진짜 너 무슨 일 있어? 얼굴도 정말 말이 아니다.” 아무래도 오늘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수척해 보이는 탓이겠지. 예영은 오늘처럼 지낸다면 다이어트는 걱정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리고 ‘다이어트’를 떠올렸더니, 이제는 다이어트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닐까 하는 데로 생각이 이어졌다. “너 포기 한 거야?” 물끄러미 예영의 낯빛을 살피던 수영이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수 없었다. 예영은 입을 열려고 했다. ‘아니요, 포기는 안 했어요. 제가 언제 포기한다고 한 적 있어요?’ 라고 말하려고 했다. ‘포기는 배추 셀 때나 하는 거죠.’ 라는 농담으로 받아치려고 했다. ‘제가 언니들보다 인내심이 강하다는 거 아시잖아요?’ 라고 되물으려 했다. “네.” 그런데 정작 입이 열리면서 나온 말은 자기 생각과 다른 말이었다. 예영은 스스로 말해놓고도 머릿속이 헝클어지는 기분이었다. “포기한다고?” “네, 이제 그만할래요. 지긋지긋해요. 레슨도, 다이어트도, 다 지긋지긋해요.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못 알아봐 주는 가수가 무슨 가수에요. 회사도 가망이 없다는 걸 알고 그만둔 거잖아요. 그런 마당에 제가 뭘 할 수 있어요. 안 되는 거 그만 포기해야죠.” “주예영!” 명지가 씩씩거렸다. 예영은 명지의 눈을 힐끔 바라보았다가 얼른 시선을 돌렸다. 시선이 살짝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따귀를 100대는 맞은 느낌이었다. 머릿속은 하얗게 질려가는데 입에서 나오는 말은 청산유수였다. “누구는 음원 차트에서 순위가 오르내리는 걸 보면서 마음을 졸인다지만, 우리는 음원을 내도 차트에 오르지도 못하잖아요? 우리 가족들 빼고는 다운받는 사람도 없잖아요? 정식으로 CD 앨범으로 낸 적도 없으니, 남는 것도 없고. 어떤 가수는 시즌 그리팅이라도 내는데, 우리는 화보 한 장 제대로 찍은 것도 없잖아요? 인터넷 방송을 한들 하트 수가 오르지도 않고, 보는 사람도 호기심에 잠깐 들어왔다가 죄다 나가버리고, 채팅창에는 이상한 글들만 올라오고.” 수영의 눈에는 그동안 막내로서 밝게 웃으며 언니들에게 ‘화이팅’을 외치던 예영과 지금의 예영이 겹쳐졌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우리 가족들은 예전부터 저보고 그만하라고 그랬어요. 이대로 시간 보내는 게 아깝지 않냐고? 허송세월 보낼 거냐고. 정 하고 싶으면 다른 회사로 가라고.” “야, 주예영! 너 언니 앞에서 그게 무슨 소리야!” 명지는 예영의 말에 살짝 당황했다. ‘회사를 옮긴다’는 얘기는 사실 이전에도 둘이서 살짝 한 적이 있었다. 회사를 같이 옮기자고 논의를 한 것이 아니라, 가족들에게서 그런 이야기가 나와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내용이었지만, 두 사람은 다른 멤버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하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 말이야말로 갤럭시즈를 먼저 깨자는 소리나 다름없었으니까. 명지가 당황한 것은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점점 예영의 말에 수위가 높아지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회사도, 팬들도 가망 없다고 버린 게 갤럭시즈에요. 뭐 때문에 레슨을 받고, 연습을 해요? 차라리 그만두는 게 나아요.” 명지는 화가 났다. 화가 나는데 눈앞은 눈물로 흐려져서 잘 보이지 않아,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예영의 눈에도 자기처럼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했다. 예영은 머리만 하얗게 변한 게 아니라, 눈앞도 하얗게 변해서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게, 수영인지 명지인지, 아니면 그냥 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언니들도 관둬요. 이런 거, 아무 의미 없잖아요.” 예영의 말이 끊어졌을 때, 명지의 눈에 흐르던 눈물도 멈췄다. 명지가 고개를 들어보자, 수영의 등이 움직이고 있었다. 수영은 예영의 마음이 자기 안으로 급류처럼 걷잡을 수 없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예영의 차갑고 따가운 말보다, 더 절절하고 가슴 아픈 감정이 먼저 자기 안으로 들어와 수영의 몸을 떨게 만들었다. 그리고 예영이 ‘관둬요’라고 말했을 때, 수영은 한 걸음을 디뎠다. 예영은 자신을 감싸 안는 손길을 느꼈다. “미안해.” 그리고 자신의 귓가에 들리는 축축한 목소리를 들었다. “언니가 몰라줘서, 미안해.” 하얗게 변했던 머리와 눈이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이 했던 말들이 메아리처럼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 ‘니가 했던 말이 이런 거였어’라고 알려주었다. “많이 힘들었을 텐데, 언니가 내 생각만 하느라고 너를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해.”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그 사이를 비집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언니, 죄송해요.” 라는 말을 하고 싶은데, 울음소리가 말을 집어삼켜 버린 바람에 정작 입에서는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기성(奇聲)만 흘렀다. 어느새, 두 사람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부둥켜안은 채로 눈물과 통곡을 했고, 명지와 뒤늦게 들어온 지수, 수련도 문가에서 서로 눈물을 닦아주며 흐느꼈다. 갤럭시즈에게 무기한 컴백 연기가 선고되고 일주일. 처음으로 멤버들은 다 같이 눈물을 터뜨렸다. ======================================= [284] 서바이벌(3) 갤럭시즈의 컴백이 불투명해지고 듀엣이 결성되었다고 해서 단유의 계획이 무산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단유가 계획했던 것은 갤럭시즈가 인기를 얻지 못하는 이유를 찾아보는 것이었고, 이 과정에서 혹시라도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 노래. 하지만 단유 본인이 음악에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 뒤, 학술적(?)으로 접근하고자 했다. 보컬 트레이너의 입을 통해 단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그녀의 대답은 갤럭시즈가 보컬 실력이 다른 그룹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는 편애적인 수준에 그쳤다. ‘편애’라고 판단한 것은, 보컬 트레이너가 보컬의 수준을 점수 매기듯 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전제를 두고 설명한 탓이었다. “수련은 걸그룹계에서 가장 뛰어난 보컬 실력을 갖춘 아이 중 한 명이야. 솔직히 좋은 노래만 만나면 금방 대중의 귀를 사로잡을 수 있다고.” 다른 멤버들도 수련만큼은 아니더라도 다른 걸그룹의 수준에 뒤지지 않는다는 모호한 표현으로 칭찬할 뿐이어서 단유는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생각해보면 결국 대중의 기호에 맞게 활동해야 할 운명인 걸그룹인 이상, 대중들의 평가가 전문가의 평가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겠어.’ 하지만 대중이란 표현하지만, 그 대상이 너무나 광범위하고 모호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태호에게 물었더니, 태호 역시 단유의 말에 공감을 하며 몇 가지를 덧붙였다. “보통 회사에서 걸그룹이든 아니면 가수를 데뷔시킬 때, 전 연령층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 사람들의 기호와 취향이 다양해진 요즘에 그런 노래를 만들 수도 없고, 오히려 거기에 맞추려다가는 오히려 어중간해질 뿐이니까. 솔직히 말해서, 갤럭시즈의 노래도 살짝 어중간한 느낌이 있긴 해. 내가 만약 곡을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면, 이런 노래를 고르지 않았겠지. 그래서 내 개인적인 생각은 그래. 갤럭시즈의 타겟층이 불분명하다는 거. 10대에서 20대의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30대 이상의 남성 혹은 여성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어중되게 90년대식 팝댄스를 지향하고 있다고 할까? 아, 이런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한테 하면 안 된다. 특히 갤럭시즈에게는.” 아직 권한이 없는 매니저가 소속 가수들의 노래에 대해 이렇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윗분들에게 좋지 않게 보일 수 있다는 말이었는데, 단유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태호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우리도 요즘 나오는 곡들처럼 발랄하게 가고 싶기도 한데, 사실 우리 이미지가 그런 발랄함이랑은 어울리지 않잖아. 예영이나 수련이 같은 애들만 있다면 모를까, 지수나 나는 그런 이미지 하고 싶어도 못해. 생각해보니 말이야, 역시 이미지가 정해지지 않은 게 문제가 아닐까 싶어.” 이미지 혹은 컨셉의 문제가 클 수도 있겠다고 자아비판을 하는 수영이었다. 보통 이런 미묘한 컨셉이 문제가 될 때, 보통은 섹시 컨셉으로 전환하는 수를 쓰기도 한다고 수영은 덧붙였다. 하지만 갤럭시즈는 ‘섹시’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룹이라서 회사 내부에서 포기했다고 했다. “원래 세 번째 싱글이 살짝 섹시 컨셉이었거든? 그런데 연습실에서 복장 갖추고 안무를 쳤더니 사람들이 전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거야. 결국 섹시를 버리고 레트로 컨셉의 락으로 장르를 바꾼 게 ‘미챠’였지.” ‘레트로’와 ‘락’을 결합 시킬 생각을 한 윗분들의 아이디어에 무릎을 탁 쳤다고. 붓과 색연필을 하나로 묶어서 쓰자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보다시피 망했잖아? 다른 걸 떠나서 그 곡은 컨셉 자체가 아주 엉망이었어.” 자기가 좀 더 소신 있게, 리더답게 회사에 강하게 요구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라고 중얼거리는 수영에게 인사를 하고 연습실을 빠져나온 단유는 지수가 보이지 않아 보컬 연습실에서 연습하고 나오는 명지에게 물었다. “지수 언니, 아르바이트 중일걸?” 가수가 아르바이트도 하냐고 놀란 얼굴로 물었더니, 씁쓸한 얼굴로 답하는 명지였다. “지수 언니는 가정 형편이 좋은 편이 아니어서, 생활비를 직접 벌어서 쓰거든.” 이전에도 회사 몰래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는데, 지금은 대놓고 하는 중이라고. 회사에서도 굳이 말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며 슬픈 눈을 드러내 보이는 명지였다. “어차피 낮에 할 거도 없는데, 아르바이트라도 하는 게 낫지.” 단유는 더 캐묻지 않고 명지에게 인사를 하고 회사를 나왔다. 함박눈이 내리는 무대 위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춤을 추던 갤럭시즈를 기억하는 단유에게 지금의 갤럭시즈는 안타깝기만 했다. 대략적인 조사를 끝내고 집에 돌아온 단유에게 명수가 들러붙었다. “역시 단유네.” “뭐가?” “며칠 하다가 말 줄 알았더니, 계속 갤럭시즈 도우려고 하는 거 아냐?” 꼭 돕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개인적인 호기심이 더 컸다. “어쨌든 돕는 거 아냐? 결과만 좋으면 다 좋은 거지.” “동기가 다른 이유인데, 결과가 좋다고 동기까지 포장될 이유는 없어. 그리고 아직 결과가 나온 것도 아니고.” 명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래서 뭐 좀 도울 방법은 생겼어?”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도 갤럭시즈의 문제점은 몇 가지 발견했어.” “문제점? 뭔데? 노래?” “아니.” “그럼 춤?” “아니.” 노래도 아니고 춤도 아니면 뭐가 문제지?“ “얼굴이 문젠가?” 단유가 눈썹을 긁으며 말했다. “누나들 외모가 인기에 큰 문제가 돼?” “되지! 당연히 되고도 남지! TV에 나오는 사람들인데, 외모가 안 되면 사람들이 쳐다볼 생각을 안 할 거 아냐? 게다가 걸그룹이라면 당연히 외모는 탑을 찍어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걸?” “넌 외모를 많이 보는구나.” “나? …아니지. 나 같은 사람은 이미 외모에 꾸준히 단련된 터라, 외모 정도로 걸그룹을 평가하는 단계는 지났지. 음악적으로 수준 높은 음악을 하는 가수를 좋아한다고, 난.” 명수의 대답이 미심쩍게 들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니, 명수가 시선을 돌렸다. “그럼 음악적으로 수준 높은 음악을 하는 가수가 누군데?” 명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씩 웃었다. “플루토?” 현재 차트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걸그룹이었다. “어련하시려고.” 단유는 명수가 게임을 하다가도 시간만 되면 게임을 끄고, TV 가요프로그램에 채널을 맞추고, 플루토가 나오기를 기다리다, 눈도 못 떼도 입을 헤 벌린 채, 그녀들의 안무를 감상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음 단유가 한 일은 ‘팬 카페’를 찾는 일이었다. 갤럭시즈 역시 팬 카페가 있었다. 비공식적인 팬 카페였지만, 그래도 ‘갤럭시즈’라는 걸그룹을 좋아해서 모인 사람들의 모임이 있다는 것이 고무적이라 생각했다. 비록 팬 카페 가입 인원이 400명도 채 되지 않았지만, 존재 자체가 신기했다. 카페의 글을 보기 위해서는 가입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단유는 명수의 도움을 받아 카페에 가입해 보았다. “우리 또래 중에 이런 거 혼자 가입 못 하는 애는 너밖에 없을 거다.” “나만 그럴 거라는 편견을 버려. 우리 나잇대 애들이 전국에 얼마나 많은데. 그중에 나 같은 애가 하나 없을라고.” “없을걸?” 단유는 명수와 입씨름을 하는 대신 팬 카페를 둘러보기로 했다. 몇 번의 클릭으로 게시판을 찾아 들어간 단유는 같은 제목의 글들이 한 페이지를 도배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여기도 망했네.” 뒤에서 지켜보던 명수가 중얼거리며 말했다. 그 말처럼 게시판은 온갖 광고들로 가득 차 있었고, 갤럭시즈에 대해서 쓴 글들은 거의 없었다. 굳이 찾기 위해 뒤적이다 보니, 카페 생성기 때쯤에나 겨우 찾을 수 있었다. 글들은 평범했다. 평범하게, 갤럭시즈의 미래가 기대된다거나, 어떤 멤버가 좋다거나, 하는 편향적인 애정표현이 대세였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가 오래 지속되지 않아서, 지금은 광고글로 가득 찬 게시판이 되어버렸다. 단유는 팔짱을 끼고 게시판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갤럭시즈의 문제점은 소통이야.” “응?” “소통이 전혀 없어. 외부의 팬들과 소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소통이 전혀 없어. 회사와 가수 간에도 소통이 없고, 회사가 조율하지 않으니까 가수와 팬들 사이에도 소통이 없어. 태호 형 말로는 갤럭시즈가 인터넷 방송을 하는 것도 회사에서 막았대.” “왜?” “이미지 안 좋아진다고.” 회사와 가수가 서로 생각하는 이미지가 일치되지 않았다. 회사는 오랜 시간 기획해서 만든 컨셉을 밀고 나가려 하는데, 가수들이 그 컨셉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미지를 망친다고 생각했다고. 이미지가 흐려진 탓에 갤럭시즈의 곡이 제대로 어필되지 못했다는 설명이었다. 특히, 수련과 같은 멤버가 방송에서 솔직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못마땅하게 여겨졌다는 부연설명이 있었다. “회사는 회사 나름의 입장이 있지. 오랜 시간과 많은 돈을 들여서 투자한 걸그룹이 망하길 바라는 회사가 어디 있겠어. 그런데 가수들이 그 컨셉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해서 좋은 곡을 받고도 뜨지 못했다는 평이야.” 태호와의 비밀스런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었다. 갤럭시즈 멤버들에게는 결코 해줄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그들의 사기를 꺾을 염려도 있고, 회사와의 갈등을 부추기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회사와 가수들이 서로 소통을 하지 않으니까 문제가 생겼어. 회사가 일방적으로 컨셉을 밀어붙이려 한다고 가수들은 생각하고 있고, 반대로 회사에서는 가수들이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고 오히려 곡을 망치려 든다고 생각하지.” 처음에는 다양한 색깔의 멤버들을 조합해서 내놓는 전략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시행착오’라고 판단한 회사의 운영진이 내놓은 카드가 바로 듀엣. “다양성을 줄이고 대신 확실한 컨셉과 이미지로 대중에게 어필하겠다는 전략이래.” 그럴듯하게 들리는 전략에 명수가 수긍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태티서나 오카 같은 유닛들도 그런 비슷한 전략이긴 하지.” 명수가 말하는 유닛이 누구를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 전략이 기존에도 쓰던 전략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단유는 귀밑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갤럭시즈의 문제점은 ‘소통’이라는 생각이 들어. 서로를 배려했던지, 아니면 서로를 믿지 않아서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대로라면 갤럭시즈는 아무런 지원을 받을 수 없을 거야.” 명수가 단유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원래 사람들 사이의 문제는 대화로 풀어야 하는 법이야.” 대원칙 중 하나는 대화였다. “그리고 원활한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서로 간의 이해가 필요한 법이지.” 이해는 서로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법이다. “서로가 서로를 알 수 있게 준비를 해야겠지.” 물론 단유가 대화의 장을 열어줄 필요는 없다. 하지만 궁금했다. 과연 자신이 생각한 문제점과 그 해결책이 실제로 적용될 수 있는지. 단유의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상황들이 고려되고 결과들이 예측되는 중이었다. ****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퇴근 준비를 하던 태호는 핸드폰을 어깨에 낀 채, 책상 위의 서류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형한테 도움받을 일도 있고, 부탁하고 싶은 일도 있고 해서요. “뭔데?” ―형네 회사 이사님, 뵐 수 있을까요? “뭐?” 태호는 놀란 눈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왜?” ―전에 그러셨잖아요? 박 이사님인가 하는 분이 갤럭시즈의 운영 총괄을 맡고 있다고. “그런데?” ―그분께 직접 여쭙고 싶은 것도 있고 해서요. 태호는 머리를 긁었다. “그건 좀 무린데?” ―역시 그런가요? 아무렴, 박이사가 이제 겨우 중학교 1학년인 애랑 이야기를 나눌 짬밥은 아니었다. 그렇게 한가한 사람도 아니고. “갤럭시즈 때문이지?” ―그렇죠.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니가 무슨 팀장인 줄 알겠다.” 요즘 단유가 회사에 자주 나와서 갤럭시즈 멤버들과 만났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과도 깊이 있는 내용까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어떻게 하다가 그런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는지, 자신도 모를 정도였다. 그런 모습을 통해, 단유가 갤럭시즈의 성공을 간절히 바란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래 봐야 회사의 시선에서 단유는 그저 한 명의 팬에 불과했다. 관계자도 아니고 그저 갤럭시즈와 개인적 친분을 나눈 ‘팬’이라는 게 단유의 위치였다. 그런데 단유와 박이사가 이야기를 나눈다?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럼 그 전에 형이랑 먼저 이야기하면 괜찮을까요? “뭘?” ―갤럭시즈의 문제점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단유가 말하는 ‘문제점’이라니 솔직히 궁금해졌다. “어딘데? 집이지? 내가 갈까?” 집에 조금 늦게 들어가면 어때? 잠깐 시간 내서 이야기 좀 나누는 건데. 태호는 시계를 흘깃 바라보며 단유의 대답을 기다렸다. ======================================= [285] 서바이벌(4) 단유가 집이 아닌 밖에서 보길 원해서, 단유네 집 근처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은 태호는 서둘러 차를 몰았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고작 중학교 1학년에게 휘둘리냐고 비웃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태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의 강렬한 인상도 있지만, 그 이후에도 단유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나이를 잊고 감탄을 할 때가 적지 않았다. 적어도 통찰력이라는 부분에서 자신을 능가하는, 아니 자신이 만나본 다른 누구보다 뛰어난 면을 보이기도 해서 나이를 의심할 때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 친구가 자신이 담당한 갤럭시즈의 ‘문제점’을 거론하니, 혹시나, 하는 마음과 어쩌면, 하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요. 저도 조금 전에 왔어요.” “저녁은?” “벌써 먹었죠. 시간이 몇 신데.” 태호는 재킷을 벗어 옆자리에 두며 물었다. “그럼 뭐 마실래? 아직 커피는 안 될 거고, 차?” “홍차요.” “그것도 카페인이 있어서, 안 좋을 텐데?” “저는 별로 모르겠던데요?” 태호는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은 핀 조명 여러 개가 불빛을 드리우는 카운터로 가서 주문을 넣었다. 곧 음료를 받아서 자리로 돌아온 태호는 대화에 앞서 입부터 축였다. “맛은 잘 모르겠고, 따뜻해서 좋네.” 쌀쌀한 가을 날씨에 따뜻한 홍차 정도라면 썩 나쁜 조합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다시 한 모급을 더 마셨다. “시간도 많이 됐으니까,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고.” 단유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솔직히 형의 이야기가 많이 도움됐어요.” “내가 한 이야기? 야, 그거는 정말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하면 안 돼. 알았지? 어? 혹시 박 이사님 만나서 그 이야길 하려고 했어?” “설마요. 그런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을 거예요. 할 필요도 없고요.” “그래? 그럼 도대체 갤럭시즈의 문제점이 뭔데?” 자기가 맡아 관리하는 애들이라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갤럭시즈가 뜨지 못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물론 톱스타급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뜨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평가하던 태호였다. “갤럭시즈는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음악이 없어요.” “뭐?”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얼굴을 하고 단유를 보다가 물었다. “애들이 그런 말을 해?” 자기가 회사의 입장을 말해 주었듯, 아이들이 단유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걸까? “아니요. 그러지는 않았고요. 그냥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그런 거 같아요.” 단유는 자신이 며칠간 조사하고 고민했던 내용을 정리해서 알려주었다. “형도 알다시피 전 특별히 노래나 음악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어요. 그래서 어떤 노래가 좋다, 나쁘다를 판단한 기준도 특별히 있지는 않고요. 그래서 갤럭시즈의 노래가 좋은지, 나쁜지, 대중에게 통할 수 있는 음악인지, 아닌지도 몰라요. 그래서 전 몇 가지 객관적 기준을 통해서 음악을 평가해봤어요.” “어떤 기준?” 단유는 언제 가져왔는지 옆에 두었던 노트를 꺼내 들었다. “첫째는 이 노래가 과연 사람들이 듣기에 좋은가 나쁜가에 대한 문제였어요. 그런데 이건 순전히 대중의 평가로 이루어져야 하잖아요. 설령 제가 듣기 좋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제 느낌은 아무런 의미가 없죠.” “하지만, 대중의 평가는 노래가 나오기 전에는 판단하기 어려워. 우리 회사뿐만 아니라, 이 업종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고민하는 문제이기도 하고.” 단유는 태호의 말에 수긍한다는 뜻으로 턱을 끄덕여 보인 뒤, 말을 이었다. “네. 그리고 노래가 나온 뒤에는 보통 스트리밍 사이트의 차트를 통해서 대중성을 평가하죠. 물론 스트리밍 사이트의 차트 결과가 노래의 대중성을 모두 드러내는 것은 아닐지도 몰라요. 이번에 조사하면서 알았지만, 역주행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대중에게 선택되는 곡들도 있고요. 그래서 제가 선택한 선별 기준은….” 단유는 노트를 뒤적거려 한 페이지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 페이지를 태호에게 보여주었다. “이게 뭐니?” 노트에는 온갖 숫자들이 정신없이 나열되어 있었다. “어떤 노래가 대중에게 인기가 있는지, 분석한 거예요.”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던 태호는 잠시 후 웃음을 터뜨렸다. 카페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볼 정도로 큰 웃음소리가 태호의 입에서 오래도록 흘러나왔다. 간신히 자신을 추스른 태호가 여전히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 채로 단유에게 말을 건넸다. “야, 이거 정말 너답다고 해야 하나? 일단 네 노력에는 내가 정말 박수를 보낸다. 그런데 노래를 어떻게 ‘분석’하면 이런 숫자들로 표기할 수 있는 거냐?” 단유는 태호의 웃음에도 개의치 않았다. 이미 명수와 상미에게 검증(?)받은 반응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찾아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많은 노래를 분석했고요, 대상은 주간 차트의 노래들을 대상으로 했어요. 제일 처음 계획했던 것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여겨지는 노래들이 어떤 구성 혹은 구조를 가졌는지를 분석하는 것이었고, 어떤 구조를 가진 노래들이 대중성을 얻는지, 그 공통점을 찾아보자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해당 구조의 노래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중에게 어떤 평가를 받는지 관찰하는 게 목표였어요.” 단유의 계획은 거창하다면 거창하고, 무모하다면 한없이 무모하기만 한 계획이었다. 아니, 애초에 그런 게 분석될 리가 없다는 것이 태호의 생각이었다. 대중가요의 대중성을 평가하는 게 이런 숫자로 표기될 수 있던가? 사람의 감성을 다루는 노래를 과학적으로 분석한다? 그건 마치 사랑의 크기를 리터(ℓ)로 잰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단유는 계속 말을 이었다. “노래 구조를 분석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어요. 처음에는 노래의 구조를 분석하기 위한 기초 지식이 부족해서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확실히 인터넷이 좋긴 하더군요. 별의별 자료가 다 있더라고요.” 학술자료라고 올라온 글도 여럿이었고, 특히 해외 사이트에는 별의별 자료들이 다 올라와 있어서 찾아서 읽는 데만도 많은 시간이 소비되었다. 하지만 덕분에 단유는 자신이 애초 기획한 대로 노래를 분석하는 데 성공했다. “노래의 구조는 단순히 전주부, 벌스, 후렴부를 나누는 구조가 아니고요, 멜로디 라인의 구성, 보컬과 악기 등의 구성력, 곡의 스케일(scale), 비트와 리듬, 그리고 곡의 길이와 음역 등도 모두 고려했어요.” 단유의 추가 설명에 잠시 웃음을 멈추게 된 태호였다. 그 뒤로도 단유는 곡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에 관해 설명했고, 그 요소들이 어떤 조합을 이루는지, 또 복합적인 요소에 따라 달라지는 구조의 변화를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각각에 대해 숫자로 치환해서 읽는, 일종의 알고리즘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렇게 분석된 노래에 대중성이라는 모호한 표현 대신 ‘차트의 성적’과 ‘차트 순위의 변화’라는 변수를 대입해서 그 변화도를 다시 알고리즘으로 풀어냈다고 설명하는데, 여기서 태호의 머리는 일시 정지가 되었다. “뭔가 복잡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예를 들어서, 지금 차트 1위를 하는 플루토는요, 곡의 구성은 38, 92, 75, 24의 결과값을 가지는 구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이 구성은 과거 유행했던 노래들의 기본 구성인 38, 92, 75와 차이가 크게 없죠. 그런데 다만 24라는 멜로디 라인의 구성력이 차이가 있죠. 그런데 이 구성력은 최근 유행하는 흐름의 라인이라고 볼 수 있어요. 여기 보시면, 이 곡들도 모두 멜로디 구성 값이 24로 되어 있잖아요?” 하나도 이해를 못 하겠는데 뭔가 그럴듯해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태호는 여러 개의 노래 제목들 옆에 적인 수두룩한 숫자들의 의미를 물어보지 않기로 결심했다. 대신, 단유가 내린 분석 결과만 간단하게 듣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갤럭시즈 노래는?” 단유는 다음 페이지를 열었다. 역시 익숙한 갤럭시즈의 세 싱글의 제목이 적혀 있고, 그 옆으로 여러 가지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첫 번째 싱글의 경우 결과값이 36, 45, 11, 22 에요.” 그렇게 말해도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고.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면, 이 곡은 과거의 유행했던 노래 중 꽤 장기간에 걸쳐 사람들의 선택을 받은 곡들의 구조와 비슷한 곡이기는 해요. 다만 노래가 다소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어서 사람들의 귀를 오랫동안 사로잡기에는 부족함이 있어요.” “장기간 유행했던 곡과 비슷하다며?” “과거의 대중이 선택했던 취향이 지금과는 다르니까요.” 더 이상 태호는 웃지 않았다. 대신 머리 한쪽을 부여잡고는 이 믿을 수 없는 단유의 결과물을 믿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할 뿐이었다. 이성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부분이 70%를 차지한다면, 감성적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부분이 29%를 차지했다. 단 1%의 영역에서 ‘혹시’라고 되물으며 태호를 흔들 뿐이었다. “첫 번째 싱글의 경우, 곡 자체만으로 봤을 때는 차트에서 중위권 이상은 차지할 수 있었던 곡이라고 봐도 무방해요.” 태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단유를 보았다. “그런데?” “그런데, 이 곡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두 가지로 분석이 되는데, 한 가지는 여기 22라고 적혀 있죠? 이건 이 곡의 멜로디 라인이 다수의 대중을 만족하게 하는 다른 노래들에 비해 부족하다는 뜻이에요. 이거는요.” 그리고 단유가 넘긴 페이지는 바로 갤럭시즈 첫 번째 싱글의 악보였다. 그리고 악보의 위에는 알아보기 힘든, 마치 지구에서 출발해 목성에 도착하는 로켓의 비행 경로를 계산하는 공식처럼 보였다. 물론 태호가 그런 공식을 알 리 없었지만, 그렇게 보였다. 단유는 그중 한 부분을 짚으며 설명했다. “22는 이 공식에 따라 나온 값이에요. 그리고 여기 보면, 이게 이 곡의 도입부가 유사 구조의 곡들에 비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부분이에요. 그리고.” “잠깐만.” “네?” 태호는 머리를 저었다. “결론만 이야기해줄래? 니가 아무리 이…숫자들을 설명해줘도 내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으니까.” “그래도 어떤 원리에 의해서 이런 결괏값이 나왔는지를 설명해 드려야 이해하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냥 이해만 할게. 결론만.”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인 뒤, 등을 바로 세우며 말을 했다. “첫째, 도입부의 편곡에 문제가 있어요. 두 번째, 보컬의 목소리가 노래와 안 맞아요. 세 번째, 만약 이 노래가 그 시기보다 5년 전에 나왔다면 성공했을지도 모를 노래라는 거죠.” 태호는 머리를 저었다. “솔직히 말해서, 너 말은 믿을 수 없어. 아니, 이 계산들이 맞나 안 맞나의 문제가 아니고, 애초에 이런 계산으로 곡을 분석한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 아냐? 게다가 5년 전이었으면 성공했을 거라느니 하는 건 말 그대로 추측일 뿐이잖아?” “그렇죠, 추측이죠. 하지만, 전 이런 근거를 가지고 추측한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은 거였어요.” 일단 알고리즘을 만들고 난 뒤, 그 알고리즘에 맞춰 다른 노래들을 분석했다. 그 시간이 무려 일주일이었다. 덕분에 그동안 다른 공부는 전혀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 시간이 단유는 너무 즐거웠기에 후회는 하지 않았다. “설마 이걸 박 이사님에게 보여드리려고 했던 거야?” “네.” 태호는 말리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아직은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이런 복잡해 보이는 계산을 하는 아이지만, 그래도 아이는 아이인 것이다. “그리고 부탁드릴 것도 있다고 했잖아요.” “…뭔데?” “듀엣으로 나온다고 했잖아요? 수련 누나랑 나윤 누나. 그분들 노래가 혹시 있으면 미리 알 수 없나 해서요.” “그걸로 분석해 보려고?”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호는 앞에 놓인 홍차를 벌컥 들이켰다. 이미 식어서 차가운 홍차였지만,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목을 타고 지나는 홍차의 차가움이 열을 식혀주었다. **** “단유야, 잘 갔다 왔어?” “응.” 명수는 집으로 돌아온 단유를 보자마자 단유를 끌고 거실로 갔다. “왜? 또 하자고?” “신기하잖아?” 명수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졸랐다. 하지만 단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미안한데, 지금은 조금 지쳐서 말이야. 나중에 하면 안 될까?” 그러고보니 단유의 표정이 썩 밝지는 않았다. “왜? 잘 안 됐어?” “그냥. 뭐, 예상했던 결과긴 한데, 그래도 조금 씁쓸하네.” 단유는 문득 갤럭시즈도 이런 마음이지 않았을까, 싶었다. 회심의 준비를 하고 나서, 잔뜩 기대감에 부풀어 무대에 올랐더니 대중의 관심을 전혀 끌지도 못하고 다시 무대에서 내려와야만 했을 때, 그녀들도 이런 기분으로 집으로, 숙소로 돌아와야 했을 것이다. “알았어. 그럼 쉬어. 대신 내일 상미 오면 하자. 상미는 아직 못 봤잖아.” 단유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터벅터벅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니 자기들보다 일찍 수업이 끝났던 모양인지 상미가 집에 와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야, 주인도 없는 집에 혼자 와서 뭐하는 거야?” 명수의 지적에 상미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주인이 없긴 왜 없어? 선생님이 문 열어주시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셨거든?” 명수는 할 말이 없어, 괜히 쳐다만 보다가 갑자기 손뼉을 쳤다. “아, 맞다. 너, 신기한 거 보여줄까?” 상미는 이미 TV 화면에서 플레이 중인 게임에 시선이 꽂혀 있던 터라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나중에.” “지금 못 보면 후회할걸?” “안 할걸?” “할걸?” 명수의 채근에 상미는 한숨을 나직이 내쉬며, 게임 패드를 내려놓았다. “뭔데?” 명수는 히죽 웃으며 컴퓨터 앞으로 상미를 데려갔다. 그리고 단유를 불렀다. “여기서 아무 노래나 눌러 봐.” “아무거나?” “응.” 노래를 재생시켰으나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보라는 명수의 말에 잠시 기다렸더니, 노래가 끝난 후 명수가 물었다. “몇 등?” 그러자 소파에 앉아 있던 단유가 말했다. “12위. 아니면 13위.” 상미가 무슨 말이냐고 묻자, 명수가 입꼬리를 늘리며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그 손가락 끝에는 방금 재생시켰던 노래의 차트 순위가 떠 있었다. “뭐야? 겨우 이거?” 상미는 단유가 차트 순위를 외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명수는 차트에 적힌 기간을 변경한 뒤, 상미에게 아무거나 눌러보라고 했다. 잠시 후, 단유가 말했다. “언제 거야?” “3년 전.” “그럼, 대충 34위에서 37위 사이겠는데?” 상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이걸 다 외웠어?” “외운 거 아냐.” “그럼?” “지난번에 단유가 말해줬던 거 있잖아? 노래 판별법인가, 감별법인가 뭐 그런 거. 그거 쓴 거래.” 상미는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 [286] 서바이벌(5) 몇 번의 테스트를 통해 단유의 신기한 능력을 체험한 상미가 놀란 눈으로 비법을 물었다. “비법 같은 거 아냐. 그냥 공식에 맞게 계산하면 나오는 거야.” “더하기 빼기 같은 거야?” “뭐, 그것보다는 조금 복잡하지만 크게 다르진 않아.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고.” 단유의 시큰둥한 반응에 상미가 참지 못하고 단유가 앉아 있던 소파로 뛰어가 앉았다. “그래도 이렇게 정확하게 맞출 수 있는 거라면 대단한 거 아냐?” 상미의 큰 눈이 반짝 빛나는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어서 단유는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정확하지 않아. 대충만 맞출 수 있고, 또 전혀 안 맞는 곡도 있어.” 드물게 결괏값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단유는 그 부분을 점차 줄여나갈 수 있게 좀 더 다양한 변수를 고려하고 계산에 포함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의욕이 다소 사라진 상태라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 정도면 대단한 거지? 진짜 여기 있는 거 다 외워서 맞춘 건 아니지?” 단유는 상미에게 대답하는 대신, 명수에게 방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래?” 상미가 괜히 자기가 뭘 잘못했나 싶어서 물었다. 단유는 그냥 기분이 별로라서 그렇노라 대답해 주고 방으로 돌아왔다. 상미나 명수가 대단하다고 이야기해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다지 대단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자신은 그저 예전의 체험을 토대로 수작업(?)을 했을 뿐이었다. 그때는 그냥 절로 보이던 것이었는데, 그걸 억지로(?) 재현해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완벽하지 않아서, 정밀도가 떨어졌다. 그래서 단유는 계속적인 연구를 통해 정밀도를 보충할 생각이었다. 어제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어제 태호와의 대화 이후, 단유는 조금 의기소침해졌다. 하지만 단순히 이 알고리즘을 인정받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 “니가 얼마나 노력하고 고민했는지는 이 노트만 봐도 알 수 있어. 그 마음이 정말 고맙다. 하지만 말이야, 가수가 대중적인 노래만 가지고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까? 그건 아니라고 본다. 이를테면 원 힛트 원더(One-hit wonder)라는 게 있어. 뭔지 알아?”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나라의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집계하는 차트의 원조는 바로 미국의 빌보드라는 잡지의 차트일 거야. 보통 미국, 혹은 전 세계의 음반 시장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가를 이야기할 때 거론되곤 하지. 보통은 대게 유명한 가수나 혹은 정말 뛰어난 음악들이 상위권을 차지하곤 해. 그런데 가끔 단 한 곡만 크게 흥행을 거두며 이 빌보드 차트의 상위권에 기록을 남기는 가수가 있어. 그런 가수들을 ‘원 히트 원더’라고 표현하지. 단 하나의 싱글만 대성공을 거둘 뿐, 나머지는 대중에게 외면받는 가수가 있다는 거야. 왜 그럴까?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보통은 ‘대중의 변덕’이라고 하지.” 태호는 단유의 덤덤한 얼굴을 바라보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좋은 노래로 대중의 호감을 얻는 것이 좋지만, 때로는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반응도 있다는 것이야.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야기하자면, 예전에도 어떤 곡이 대중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지를 예측하는 모델이 없었던 건 아냐. 너도 알다시피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냐? 날씨를 예측하고, 행성의 진로를 예측하는 시대가 아니니? 그리고 핵물리학의 연쇄반응도 예측하는 시대가 요즘 시대야. 그런데도 어떤 곡이 성공할 수 있을지를 예측하려는 시도가 없었을까? 그런데 그 많은 시도가 결국에는 모두 실패로 끝났어. 다양한 변수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도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대중의 기호와 취향에 대해서는 정확히 측정할 방법이 없다는 거지.” 태호는 비어버린 잔을 쥐었다가 다시 놓았다. “고작 매니저에 불과한 나도 이 정도는 아는데, 나보다 더 오랫동안 이 업계에 몸담았던 박 이사님이 이 정도를 모를까? 아마 니가 이걸 들고 박 이사님에게 갔다가는 좋은 소리는커녕 바로 쫓겨나고 말 일이라서 하는 이야기야.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외국의 수많은 학자들이 도전했고 실패했던 일이니까.” 결국 아까 이야기했던 ‘곡을 분석한다는 거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라는 주장의 연속이었다. 단유는 고개를 숙였고, 태호는 잠시 일어나 카운터에서 따뜻한 커피를 한 잔 더 주문했다. 쌀쌀한 날씨에 차가운 홍차를 들이켰더니 속이 너무 냉한 느낌이었다. 커피를 들고 돌아온 태호에게 단유가 말했다. “알겠어요. 사실 저도 이 알고리즘이 아직 완벽하게 정리된 게 아니라서 이대로는 보여드릴 생각이 아니었으니까, 좀 더 보완하도록 할게요.” 그런 말이 아닌데. ‘보완’한다고 해서 계측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걸 강조하려다 태호는 다음에 이어지는 단유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누나들이 하고 싶은 음악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태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조금 난감한 문제이긴 한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회사와의 타협이 필요한 부분이긴 해. 사실 제일 좋은 건, 애들이 원하는 음악과 회사가 지향하는 음악이 같으면 좋겠지. 하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는 회사가 양보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게 사실이야. 우리는 솔로 아티스트를 키우는 게 아니라, 대중에 먹힐 만한 걸그룹을 키우는 것이니까. 걸그룹은 이런 노래를 해야 한다, 고 정해진 것은 없지만 그래도 걸그룹이 지향해야 할 음악의 성질이란 건 있다고 보거든. 걸그룹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자신의 음악적 성향을 잠시 접어두는 게 맞다고 봐. 예를 들어서 어떤 멤버가 자기는 거친 락을 하고 싶다고 해도, 락을 하는 걸그룹은 만들기 어려운 게 사실이거든.” “하지만, 여기 표를 보시면…, 아니 이건 안 보시더라도 일단 제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너무 세 싱글이 너무 달라요. 특히 세 싱글 모두가 차트에서 뚜렷한 성적을 내지 않은 상태라 대중의 평가를 짐작하기도 어렵다는 게 문제지만, 제가 보기에는 대중성을 떠나서 누나들의 음색이나 보컬 성향이 곡과 안 맞는 부분이 많아서 곡 자체의 특징을 잘 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보거든요.” “뭐, 그 점은 잘 지적했네. 회사에서도 그 점에 대해서는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듀엣이 결정된 거니까.” 단유는 태호를 바라보다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지적한 문제점들을 회사에서는 대부분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네요.” “뭐, 그런가?” “그런데 왜 그런 사실을 가수들과 공유를 하지 않는 거죠? 만약 그런 사실이 있다면 서로 이야기를 나눠서 형의 말대로 ‘타협’을 한다면 다음에 더 좋은 기회를 만들 수도 있는 것 아니었나요?” 태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마른세수를 하며 잠시 숨을 골랐다. “갤럭시즈가 회사가 계약한 연습생들 중 고르고 고른 멤버라는 사실은 분명해. 하지만 그렇다고 갤럭시즈가 최고의 멤버들이냐고 묻는다면, 회사는 솔직히 말할 거야. 아니라고. 왜냐하면, 연습생들 중에 더 좋은 기량을 보이는 연습생들이 있으니까. 또 그런 연습생들을 꾸준히 찾고 발굴하고 있으니까. 물론 개인적으로 갤럭시즈는 내게 가장 소중한 새끼들이야. 누가 내 새끼 욕하면 못 참거든. 그런데 회사 입장은 조금 다르지. 갤럭시즈는 회사가 만든 브랜드야. 회사의 지향점이 반영된 브랜드지, 멤버들을 위해서 회사가 만들어준 게 아니란 거지.” “말하자면, 멤버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 예를 들어서 LG가 만든 TV가 좋다고 해서 삼성이 LG의 TV를 가져다 팔지는 않잖아? 삼성은 삼성만의 브랜드를 드러낼 TV를 만드는 거지. 유사하게 만들 수도 있고, 차이가 나게 만들 수도 있지만, 성능과 상관없이 삼성은 삼성만의 TV를 만드는 거야. 갤럭시즈도 그런 상품인 거지.” “그래도 소속 가수잖아요? 노래를 직접 부르는 가창자들이고, 갤럭시즈를 대표하는 얼굴들이잖아요? 그럼 그들의 의사도 중요한 거 아닌가요?” “중요하지. 중요하니까 계속 함께 가려고 하는 거지. 하지만 회사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는 거야. 그게 회사가 지향하는 음악이고.” 단유는 잠시 태호의 말을 되뇌어보다 물었다. “다른 회사도 그런가요?” 태호는 씁쓸한 미소를 입에 담으며 혀를 찼다. “안 그런 회사도 있겠지만, 내가 아는 대부분 회사들은 그런 식으로 운용을 해. 그룹이 지향하는 음악이 보통 멤버들의 지향점과 달라서, 가끔 멤버들이 탈퇴하는 경우도 있지.” 태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나직이 말했다. “그게 현실이야.” ****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지낸다고 해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법이다. 단유는 어제 그 점을 깊이 깨달았다. 자신이 뭔가를 잘 못 생각하고 있었던가를 반성해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어제의 대화는 유의미했지만, 그 반성이 이토록 길어지는 것은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단유는 또래들과 다른 경험과 시간을 소비하며 지냈다. 남들이 3일을 살 때, 단유는 숲에서 5년 동안 명상을 하며 지냈고, 남들이 평범하게 직장생활, 학교생활을 보낼 때, 단유는 늑대에 쫓기고 몬스터와 범죄자들에게 죽음의 위협을 받았고, 칼을 든 상대와 맞서 싸우기도 했다. 그런데 단유는 여전히 이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어렵고 두려웠다. 남들은 공부도 잘하고 교우관계도 좋다고 말하지만, 단유 본인은 여전히 자기 안에서 벽을 쌓고 주위를 경계하며 지낼 뿐이었다. 두려운 것? 돌이켜보면 결국, 사람이었다. 엄청나게 많은 독서량을 자랑한들, 단유는 결국 사람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사람을 제대로 모르니 ‘현실을 모른다’는 이야기나 듣는 것이리라.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현실을 모르면 바보 소리나 듣지.’ 태호와의 대화에서 느낀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단유는 자신이 바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난 바보야.” 단유의 말에 같이 길을 걷던 이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다들 걸음을 멈추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가 뒤를 돌아보자, 지태가 채윤에게 물었다. “방금 지가 지 입으로 바보라고 그랬지?” “응.” “우리보고 들으라고 한 소리지?” 채윤은 잠깐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채윤의 생각에 단유는 혼잣말을 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지태는 자기한테 한 말이었다고 생각했던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덤덤한 표정의 단유를 손가락질했다. “야, 전교 1등 하는 녀석이 자신을 바보라고 하면, 우린 뭐가 되냐? 나는 뭐, 바보 천치야?” “난 원래 바보니까 괜찮아.” 명수의 말에 지태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야 이 바보야! 아니지. 지가 바보라니까, 이건 욕도 아니네. 아무튼, 이 멍청아! 기분 좋게 대화를 나누다가 왜 갑자기 그런 어마무시한 발언을 한 건데! 그 저의가 무엇이냐!” 채윤은 분명 지태가 심심해서 꼬투리를 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장계중학교 축구부의 추계대회 1차전 승리가 별로 재미있는 대화 주제는 아니었으니까. “저의 같은 거 아니고, 그냥 내가 바보 같다고 생각돼서 중얼거린 건데, 그게 들렸나 보다.” “들렸나보다? 야, 바로 옆에 붙어 있는데 그게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리고 니 말은 너 혼자 딴생각하고 있었다는 거잖아?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길래, 그런 말도 안 되는 결론이 나오는 거냐?” 단유는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놓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냥. 요즘 내가 얼마나 바보같이 살았는지를 깨닫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드네.” 지태는 채윤에게 속삭였다. 속삭였지만, 다들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였다. “쟤 사춘기 온 거야?” “그럴지도 모르겠네. 갑자기 자기 삶을 반성한다느니, 뭐 그런 거 사춘기의 특징이라고 한 거 같은데.” 도덕 시간에 배운 내용을 떠올려보는 채윤에게 지태가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어쩌면 사춘기가 아니라 병일지도 몰라.” 채윤은 바로 눈치챘다. “중2병?” 지태가 손을 팅기며 말했다. “그래! 쟤는 머리가 좋으니까, 이미 정신연령이 중 2수준으로 올라가 있는 거야. 그래서 미리 중2병에 걸린 거지.” 단유는 지태와 채윤의 ‘아무말 대잔치’를 보고 있을 이유가 없어, 그냥 등을 돌렸다. 명수가 얼른 달려가 단유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야, 같이 가. 바보들아!” 지태가 얼른 달려왔고, 뒤따라 채윤이 못 말리겠다는 듯 혀를 내두르며 달렸다. ======================================= [287] 서바이벌(6) “아우, 젠장.” 욕으로 시작하는 아침이 기분 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절로 나오는 걸 어떡하겠는가. 태호는 온몸을 꽁꽁 싸매고 있던 이불을 옆으로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리 이사를 가던지 해야지.” 낡은 집이라서 그런지, 가을인데도 웃풍에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찌뿌둥한 몸을 억지로 굽혀 허리 스트레칭을 해보는 태호는 시계를 본 뒤, 곧 욕실로 들어갔다. 갤럭시즈가 휴업상태인지라 바쁜 일은 없었지만, 회사에 소속된 일인으로서 일이 없지는 않았다. 설령 일이 없더라도 정상적인 출근 시간에 맞춰 출근해야 하는 일상이 태호는 별로 반갑지 않았다. 갤럭시즈의 스케줄이 있을 때는 새벽 3시에 일어나서 회사로 출근했다가 로드매니저와 함께 숙소에서 갤럭시즈 멤버들을 픽업한 뒤, 미용실로 가는 일과에 질린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차라리 그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태호는 일부러 큰 소리로 아침 인사를 던진 뒤, 인사를 받아주는 몇몇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책상에 앉은 뒤, 컴퓨터를 켜고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괜히 ‘갤럭시즈’를 한 번 검색해보고, 마지막 기사가 여전히 3개월 전임을 확인한 후, 오늘 자 연예뉴스를 훑었다. 전날 저녁 방영된 드라마에 관련된 ‘기사’를 가장한 ‘시청소감문’을 대충 보고, 열애설이라는 제목 뒤에 붙은 ‘물음표’를 보고 ‘어뷰징’이라 판단하여 클릭을 하지 않는 대신, 요즘 대세가 된 ‘플루토’의 2배속 안무 버전에 관한 기사를 클릭해서 별 내용이 없음을 확인한 후, 창을 껐다. 오전 일과가 10여 분만에 끝이 났다. 나머지 시간은 일부러 일을 찾아서 하지 않는 이상,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태호는 ‘에이 바운스’의 로고가 찍힌 바탕화면을 바라보다가, 다시 인터넷을 켜고 스트리밍 사이트를 찾아가 차트 순위를 확인했다. ‘요즘 이 노래가 많이 들린다 싶더니….’ 실시간 급상승한 곡들 중에는 최근 길에서 자주 들리던 노래가 순위에 올라와 있었다. 확실히 ‘계절송’이라는 게 분위기만 잘 타면 성공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대중가요들의 유행이 워낙 빠르게 떴다가 빠르게 사그라드는지라 오랜 시간 차트에 머무르며 대중의 관심을 받는 곡이 드문데, 계절송과 같은 건 해당 계절만 되면 다시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니 시쳇말로 ‘연금’이라 부를 만했다. ‘물론 노래가 좋아야겠지만.’ 입맛을 다시듯 혀로 입술을 살짝 적신 태호는 다시 포털 사이트를 돌아갔다.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충동적으로 뉴스 페이지를 클릭했다. 연예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빠삭하게 알지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 사회에 어떤 사고가 있었고 어떤 이슈가 쟁점이 되고 있는지는 까막눈처럼 몰랐다. 어떤 정치인의 발언이 이슈가 돼서 사람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고도 하고, 어떤 지역에선 공사 현장이 무너지면서 인명 피해가 있었다고도 했다. 전화 사기가 많아서 피해자들이 읍소한다는 내용도 있고, 새로운 핸드폰이 혁신적인 기능을 탑재하여 출시를 앞두고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국내 판매는 10월 중 시작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현재 ○○전자는 ○○일 현재 4.05% 급등마감하여 기대를 모으고 있다. 태호는 자신의 핸드폰을 바라보고 ‘바꿀 때가 되었나’라고 중얼거려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바꾸려면 핸드폰을 바꿀 게 아니라 집을 바꿔야지, 라고 생각하며 창을 끄려고 했다. 하지만 문득 생각나, 태호는 금융 페이지로 들어가 보았다. 붉은 그래프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남는 돈 좀 있으면 해볼 텐데….’ 주식하다 망한 사례는 연예계에도 수두룩하게 많았다. 하지만 반대로 주식으로 성공한 사례 역시 눈에 띄게 많았고, 그들을 부러워한 적도 많았다. 태호는 그래프를 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차라리 주식 예측이나 하지.” 전날 단유가 온갖 숫자로 뒤덮인 노트를 보여주던 기억이 떠올랐다. 갤럭시즈를 생각해 그 정도의 노력을 보여준 것은 진심으로 고마웠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야 회사에 소속되어 있고, 갤럭시즈의 매니저로서, 갤럭시즈가 성공하면 자신도 성공할 수 있기 때문에 신경을 쓴다지만, 단유는 갤럭시즈가 성공한다 한들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 가끔 팬심으로 가수들에게 고가의 선물을 주는 팬들이 있었다. 물론 갤럭시즈에는 그런 팬들이 없었지만, 그래도 편지나 소소한 선물을 하는 팬들이 없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팬심’이었고 좋아하는 가수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 역시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유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았고, 심지어는 갤럭시즈의 노래를 잘 모르던 친구였다. 그런데도 갤럭시즈가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대중성을 판독하는 방법’을 만들어오기까지 하니, 실현 여부를 떠나 그 마음이 참으로 기특하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태호는 단유의 그 ‘알고리즘’이라는 것이 ‘허황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그런 것을 들고 자신 있게 설명하던 모습을 떠올리니, 앞으로 뭐가 되도 될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모도 받쳐주고, 머리도 뛰어나니까 꽤 괜찮은 재목이란 말이지.’ 회사가 여유만 있다면, 당장 단유와 계약을 하는 게 좋을 것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어제와 같은 돌발행동? 아니, 조금 특이한 행동 정도는 자신이 잘 커버 한다면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요소가 훨씬 더 많다고 판단했다. “유승호가 별건가? 단유도 잘만 키우면 훨씬 잘 될걸?” “누구?”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박 이사가 안경을 고쳐 쓰며 태호의 모니터 화면을 훔쳐보고 있었다. “아, 이사님.” 태호는 얼른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요즘 주식하나?” “네? 아, 아니요. 그냥 궁금해서…. 주식 안 합니다. 할 돈도 없고요.” “하지 마. 개미들이 괜히 개미인가? 큰 손 손가락에 쉽게 짓눌리니까 개미야. 애초에 생각도 하지 마.” “안 합니다. 아시잖습니까? 저 돈 없는 거.” “없는 돈으로 주식하려고 빚을 내는 인간들이 있으니까 걱정인게지.” 박 이사는 허리를 펴고, 태호를 바라보았다. “일이 없지?” 태호는 당황해서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일이 없는 건 박 이사도 잘 아는 사실이겠지만, 그렇다고 직장 상사 앞에서 ‘일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건 또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일없으면, 논현동에 잠깐 갔다 와.” “논현동이요?” 심부름인가, 생각하던 태호에게 박 이사의 말이 이어졌다. “가서 곡 좀 받아와. 듀엣곡 완성됐다고 하니까.” “아.” 대한민국은 인터넷 강국이다. 어지간한 블루레이 사이즈 영화도 인터넷으로 주고받아도 무리가 없을 만큼 인터넷이 빠르고 간편하다. 당연히 용량이 적은 노래 한 곡 정도는 인터넷 메신저로 주고받아도 되고, 메일로 받아도 별문제는 없다. 하지만, 작곡가에게 직접 가서 곡을 받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하나는 작곡가가 아주 대단한 이여서, 회사가 작곡가에게 성의를 보여야 할 때, 작곡비와 별도로 선물을 주고 파일을 받아오는 경우였다. 또 하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계약을 치러야 하는 경우였다. 보통은 먼저 곡을 확인받은 후, 수정지시를 보내서 수정하면, 그 뒤에 다시 제작된 곡을 확인받고 계약을 한다. 그런데 또 요즘은 퍼블리셔라는 새로운 중간 단계가 만들어져서, 작곡가와 계약을 하는 것이 아니라 퍼블리셔와 계약을 한다. 당연히 해당 퍼블리셔와 계약을 맺은 작곡가인 경우다. 그리고 이번의 경우는 바로 첫 번째 케이스였다. 태호가 알기로 이번 듀엣곡의 경우, 작곡가 이상섭에게 맡겼다고 들었다. 이상섭 씨는 한국 대중가요에서 꽤 이름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그가 작곡한 곡들 중에 대박 난 곡이 한두 곡이 아니었고, 저작권료도 순위권에 들 정도의 작곡가였다. 회사는 이번 듀엣에 사활을 걸었다시피 했는데, 이번 곡의 성공 여부가 갤럭시즈의 부활과도 연계될 가능성이 많았다. “여기.” 박 이사는 태호에게 법인 카드와 쪽지를 하나 내밀었다. 쪽지를 슬쩍 보니, 어떤 제품의 이름과 모델넘버가 적혀 있었다. “압구정에 가서 그거 사서 가면 될 거야.” “네. 알겠습니다.” 박 이사가 철두철미하다는 것은 이런 의미였다. 나이에 맞지 않게 감각이 뛰어나다는 말도 있지만, 솔직히 갤럭시즈의 케이스를 보면 그렇게 감각이 뛰어난 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에이 바운스에 오기 전에 대형 기획사에서 오래 일한 경험이 있어, 이쪽 업계에서 ‘제대로’ 일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고, 작곡가에게 선물 하나를 할 때도 받는 사람의 취향을 정확히 파악하여 선물을 지시할 만큼 꼼꼼한 면이 있었다. ‘조금 꼰대 성질이 있어서 문제지.’ 속으로 살짝 불만 섞인 투정을 해보는 태호는 표정을 관리하며 카드를 받아들었다. 할 말을 끝낸 박 이사는 몸을 돌리려다가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태호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런데, 아까 누구 말한 건가?” “네?” “아까 유승호보다 더 잘 될 거라고 했던 거 말이야.” “아.” 태호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단유’의 이름을 말했다. 언급된 이름을 되뇌던 박 이사가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흔들어댔다. “들어본 거 같은데, 그 친구 아니야? 지난번에 폭력 사건으로 논란 일으켰던 친구?” “맞습니다. 그리고…갤럭시즈 3번째 싱글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했었습니다.” “맞아, 맞아. 그 아이, 기억나.” 태호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박 이사의 기억에 단유는 ‘폭력’이라는 스캔들로 기억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정작 당시 그 문제로 갤럭시즈를 띄우려 했던 실장은 이후에 다른 이유로 회사를 옮겼다. 결국, 모두에게 상처만 되고 만 사건인데, 그 사건이 다시 언급되니 태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친구가 유승호보다 잘 될 거라고?” 유승호는 아역 배우로 시작해서 대세가 된 남자 배우의 표본이었다. “제 생각엔, 그렇습니다.” 박 이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외모는 괜찮은 편이었지.” “네.” “그런데 그 아이가 잘될 거라고 판단하는 이유가 있나?” 태호는 빠르게 박 이사의 의도를 추측해보았다. 갑자기 단유에 관해 묻는 이유가 뭘까? 그저 자신이 흘리듯 말한 걸 가지고 호기심이 생겼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어 보이는데. “외모도 그렇지만, 머리가 굉장히 좋은 친구입니다. 지금 중학교 1학년인데 전교 1등이랍니다.” “오호, 그래?”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는 박 이사의 리액션이 사뭇 과장되게 보이는 기분이었다. “중학생이라도 전교 1등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 머리는 조금 있는 모양이네. 그럼 그것 말고 다른 건 없나?” “어….” 태호는 지금 이 시점에서 단유에 대해 강하게 어필을 해야 좋을지, 아니면 별거 아닌 이야기였다고 흘려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대답을 기다리는 박 이사 앞에서 머뭇거리는 건 더 좋지 않았다. “사실 요즘 단유라는 아이를 자주 만났는데요.” 최대한 간결하게, 단유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기로 마음먹은 태호는 최근 단유가 벌인 일련의 일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갤럭시즈에게 강한 팬심을 가진 아이로 해석하든, 아니면 연예계 업종에 관심을 둔 아이로 해석하든, 그것은 박 이사에게 맡기기로 하고. “재밌는 친구네.” 결론은 ‘재밌다’로 나왔다. 박 이사는 눈가에 깊은 주름이 남겨질 만큼 웃더니 몸을 돌렸다. “조만간 한 번 데리고 와봐.” “네?” “이야기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박 이사는 그렇게 이야기를 남기고, 사무실을 나갔다. 태호는 도대체 자신의 이야기 중 어떤 부분이 재밌었고, 어떤 부분이 그의 관심을 끌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장 매니저, 잠깐 비켜 줄래?”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놀라 얼른 몸을 비켰더니, 큰 몸으로 통로를 막고 있다고 투덜거리던 여사원이 서류철을 들고 태호를 지나갔다. 태호는 정신을 수습하여 여사원을 뒤따라 사무실을 나왔다. 생각은 가면서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선은 박 이사가 지시한 일을 수행하는 것이 먼저였다. **** “요즘 너 계속 ‘그것’만 하는 것 같더라?” 병수가 단유를 보며 물었다. 바로 옆에서 단유의 작업을 바라보고는 있지만,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양한 수와 수식들과 복잡한 선들이 오고 가는 노트 위의 그것들을 병수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 그냥 할 게 없어서.” 말을 뱉은 후에야 단유는 자신이 요즘 ‘그냥’이란 단어를 많이 쓰고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말 그대로 지금의 작업은 ‘그냥’ 하는 것이었다. “뭔데?” “음. 이건 어떤 노래를 구조적으로 풀어서 분석하고 그것을 수학적으로 치환해서 간략하게 이해해보려는 작업이야. 노래 그 자체가 과연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을 수 있는지 알아보는 건데, 다양한 변수들을 고려해야 하는 터라 조금 복잡하긴 해.” 한국말인데 알아듣지를 못하겠다. 노래를 어떻게 하겠다는 거 같은데 노트에는 콩나물 대가리 대신 숫자들만 빼곡했다. “이 정도만으로도 대충 사람들의 관심을 얻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추측할 수 있지만, 좀 더 다양한 변수들을 고려해서 정확도를 높이는 작업이야.” 이를테면, 대중의 취향과 변덕이란 부분을 계량화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 중인 단유였다. 태호의 말처럼, 사람의 감정은 예측하기 어렵다. 하지만 단유는 생각이 달랐다. 개인의 감정은 예측하기 어렵지만, 대중의 감정은 예측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개별적 차이는 있어도 함께 모인 사람들의 감정은 대체로 통일되는 경향이 있었다. 단유는 토엔의 집 앞에서 그걸 ‘본’ 적이 있었다. ‘봤던 걸 재현하는 거뿐이니까.’ 대중의 변덕도 다양한 변수만 고려한다면 얼마든지 예측할 수 있으리라. 갑자기 다리가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사고만 아니라면, 그런 돌발 변수를 제외한 일반적인 상황에서 고려 가능한 변수들을 계량화시켜 공식에 집어넣고 그 공식에 따라 방정식을 풀어낸다면, 충분히 정확도를 올릴 수 있으리라. 단유는 새로운 것을 하는 게 아니라, 봤던 것을 재현할 뿐이었다. 이건 단순히 알고리즘의 정확도를 올리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사람’을 읽어내는 ‘단서’를 찾기 위함이었다. ======================================= [288] Sing for me(1) “선생님, 저 도서관 좀 다녀올게요.” 학교에서 돌아온 단유는 오자마자, 교복을 벗어 던지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까지 거리가 조금 되지만, 그래도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버스를 타고 30분을 가면 나오는 도서관에 도착한 단유는 곧바로 열람실로 향했다. 그리고 미리 검색해놓은 책들을 찾아 뽑아 든 뒤, 책상 위에 올려놓고 탐독하기 시작했다. 「인간행동과 심리학」 같은 책이나 「합리적 행동이론과 계획행동이론 비교」와 같은 학술지 기사를 찾아 펼쳐놓고, 보는 동안 틈틈이 노트에 기록을 해 나갔다. “저기요?” 두어 번을 불린 뒤에야 정신을 차린 단유가 고개를 들어보니 도서관의 사서가 퇴실 시간이 되었음을 알렸다. “아, 저기 혹시 이거 대출 가능한가요?” “회원 등록 하셨어요?” “아니요.” “회원 등록 하시고 대출하시면 될 거예요.” 단유는 들고 간 가방에 책들을 담아서 집으로 돌아왔고, 집에 와서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책을 보는 시간만큼 노트의 페이지도 빼곡히 채워져서, 3일이 지날 때쯤 노트 한 권이 다 채워졌다. “너 완전 열심이다?” 밥숟가락을 뜨던 명수의 말에 단유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간의 노고를 눈 밑의 다크 서클로 드러내 보이는 단유였다. “그냥 조금.” 조금이 아닌데. 명수는 깍두기 김치를 하나 집어 입안에 넣으며 물었다. “그런데 그거 학교 공부는 아니잖아? 중간고사 준비 안 해?” 그러고 보니 중간고사가 바로 다음 주 월요일부터였다. “어. 이번엔 그냥 평소 실력대로 하려고.” “선생님, 들으셨죠? 쟤가 저렇게 재수 없어요.” 선생님은 물 한잔을 따라 명수에게 건네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단유라면 평소 실력대로 해도 상관없지. 꼭 1등 해야겠다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지?” 물론, 단유 실력이라면 1등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네.” “그래. 지금은 자기 하고 싶은 공부 하면서 지내도 돼.” 아직은 중학생이니까, 라는 마음이 반, 단유니까 형편없지는 않겠지, 라는 마음이 반이었다. 명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선생님이 건넨 컵의 물을 모두 마셔버렸다. “우와. 정말, 다른 사람이 없으니 망정이지.” 명수는 자기니까 이런 재수 없는 말도 받아주는 거라며 능청을 떨며 밥을 떴다. “그렇게 말하는 명수 넌 중간고사 준비는 하고 있니?” “저요? 에이, 잘 아시면서.” 갑자기 넉살을 떠는 명수의 태도에 선생님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안 하니?” “예.” “왜?” “다리 다쳤잖아요?” “다리 다친 거랑 공부랑 무슨 상관이길래?” “글쎄, 저는 몸 한 군데가 안 좋으면 공부가 안되더라고요.” “다리가 성할 때도 공부를 잘 안 했던 것 같은데?” 명수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단유를 가리켰다. “이번에 단유가 공부를 안 도와줘서 그래요.” 시험 기간이면 단유가 예상 문제들을 뽑아줘서 명수를 도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단유가 다른 공부에 빠져서 예상 문제를 뽑아주지 않았고 그 때문에 덩달아 휴업에 들어간 명수였다. 선생님은 혀를 차며 명수의 머리를 살짝 쥐어박았다. “웬만하면 이제 스스로 공부 좀 해라. 너 그러다 진짜 바보 된다.” “천천히 하면 되죠.” “공부에 ‘천천히’가 어딨어?” 명수는 히죽 웃으며 다시 밥을 떠서 입안 가득히 집어넣고 볼을 잔뜩 부풀린 채 오물거렸다. “아, 그리고 이제 물리치료 끝났지?” “네. 그런데 다음 주가 중간고사라서 다다음주부터 축구부 훈련에 참여할 거예요.” 선생님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다 먹고 얘기해. 밥풀 다 튀잖니?” “네.” 명수가 히죽 웃으며 부푼 입안으로 붉은 황태구이 한 조각을 집어넣었다. 그 모습이 어이가 없어 선생님은 풋 하고 웃음을 지었다. **** 2학기가 시작된 이후 첫 번째로 치러지는 시험이었다. 어느 시험이든 마찬가지지만, 교실에는 긴장과 스트레스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단유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내려놓고 가방에서 책을 꺼내어 펼친 뒤, 노트에 필기하면서 책을 읽어갔다. “시험준비 안 해?” 병수가 단유를 보더니 물었다. 단유는 펜을 잡은 손으로 머리를 몇 번 긁적였다. “지금은 여기에 꽂혀서 손을 떼기가 힘드네.” “그러다 전교 1등 놓치는 거 아냐?” ‘다들 그 소리네.’ 괜히 민망해져 숨을 깊게 들이켜는 시늉을 해 보던 단유는 집에서처럼 ‘평소 실력대로 하는 거지’라는 말 대신 ‘1등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대답하고는 다시 책에 시선을 주려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평소 같으면 지태나 채윤이 수업 종이 울리기 전에 다가와서 수다를 떨 시간이지만, 시험을 앞둔 터라 그들도 각자 노트를 보면서 시험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1학기 때 약간의 다툼(?)이 있었던 철규도 멀지 않은 자리에서 그 뒷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돈을 잘 쓰고 다니는지, 무리를 끌며 다니는 모습이 보였지만 철규가 단유에게 시선 한 번 던지지 않고 조용히 지내던 터라 같은 반임에도 같은 반이 아닌 것처럼,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지내는 중이었다. 아니, 어쩌면 단유가 조용히 지내서 서로 부딪칠 일이 없었던 것이리라. 생각해보면, 철규는 큰 계기가 없는 한 크게 변화된 모습을 보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지난 학기에 단유의 바로 앞에 앉았던 태훈은 멀리 떨어졌다. 지금도 노트를 보면서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아마 그가 좋아한다던 락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1학기 때와는 다르게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권하는 모습은 보기 어려워졌다. 그 일이 태훈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이후로 교실에서 태훈의 음악을 스피커로 듣게 되는 일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았다. 단유의 기준에서 명수만큼이나 축구를 잘하던 경준이도 지금은 열심히 노트를 보며 시험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실 경준이 역시 명수 못지않게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 아이였고, 수업 시간에 제대로 집중하는 모습을 잘 보이지 않았다. 경준이 집중하는 때는 오직 체육 시간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리고 체육 시간에만 경쟁심을 불태우며 수업 시간에 과묵하던 그 입에서 온갖 욕들이 쏟아냈다. 단유는 그 외에도 아이들을 둘러보며 그 아이들이 평소에 보이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개성이 넘치는 아이들이었고, 각자의 개성에 맞게 말하고 행동했다. 하지만 개성이 넘친다고 해서 그 아이들의 행동 양식을 전혀 알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어떤 아이가 어떤 환경에서 어떤 조건에 따라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유추할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이 단유에게 의미가 있었다. ‘다양한 변수들을 고려하여 연립방정식을 세우고 각각의 교점들을 연결하면 다음 교점을 유추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 그것이 단유가 지금 하는 작업의 기본 주제였다. 즉, 아무리 다양한 양식을 가진 사람들이라 해도, 구체적이고 분명한 조건들만 주어진다면 다음 행동이나 말을 유추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경준이 체육 시간이 되면 가장 먼저 옷을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나간다거나, 점심이 끝나면 철규가 자신과 친한 아이들을 데리고 매점으로 간다거나, 쉬는 시간이 되면 태훈이 귀에 이어폰을 꽂고 책상에 엎드린다거나, 학교가 끝나는 시간이면 지태가 채윤의 팔목을 잡고 단유에게 온다거나 하는 행동들이 예측 가능하다는 것이다. ‘규칙.’ 모든 선택이 열려 있고, 모든 가능성이 존재함에도 확률적으로 가장 높은 행동을 유추할 수 있는 이유는 규칙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규칙들을 찾는 일련의 작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만 된다면, 다른 상황에서도 규칙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규칙성이 불확실성의 확률을 넘어 예측 가능한 미래를 보여주리란 믿음이 있었다. 솔직히 학과공부가 조금 답답해지고 있던 차여서 지금의 작업은 단유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고 있었다. 학교의 수업이 예전에 비해 많이 바뀌어서 학생들의 사고력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선생님이나 어른들의 말씀은 예전의 것과 비교해볼 수 없었기에 비판하기 어려웠지만, 현재 수업을 받는 단유의 입장에서는 결국 암기식에 반복 학습에 불과했던 터라 공부에 흥미가 떨어지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이런 재미난 공부가 있으니 어찌 시험공부 따위가 손에 잡힐까. ‘사람의 행동을 서술형 문장 대신 숫자로 치환해서 공식에 집어넣게 되면 좀 더 보기 편하고 빠르게 계산할 수 있을 거야.’ 단유는 점점 주위를 잊고 노트 위의 공식에 빠져들었다. **** “와, 끝났다!” 종례가 끝나자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교실 밖으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선생님도 그 정도는 봐주겠다는 듯, 미소를 살짝 머금은 채 교무실로 향했다. “야, 시험도 끝났는데 놀러 가자.” 지태도 그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들뜬 목소리로 단유에게 제안을 했다. 하지만 단유 대신 채윤이 그 질문을 받아 되물었다. “어디 가자고?” “그냥 아무 데나. 놀만 한 데가 없을까?” 1학기 때의 시험과 다르게 엄청 힘이 들었다는 개인적인 소감을 늘어놓았던 지태가 해방감을 표출할 창구가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하지만 평소에도 다 같이 어딜 놀러 가거나 해 본 적이 없는, 소위 말하는 ‘범생이파’여서 막상 어딜 가고 싶다고 해도 갈 곳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아, 상미도 시험 끝났겠지?” 지태가 손가락을 퉁기며 묻자,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상미는 다음 주부터 시험이래.” “아, 정말?” 턱을 문지르던 지태가 채윤을 바라보았다. “너 어디 생각나는 곳 없어?” “어, 피시방?” “야, 피시방 가서 뭐하냐? 무슨 게임하는 것도 아니고.” 확실히 학급에서 돌연변이 취급을 받는 이들답게, 요즘 아이들이 즐기는 게임 같은 건 전혀 하지 않는 세 사람이었다. 명수 역시 이들과 비슷한데, 게임을 좋아하지만, 온라인 게임은 즐기지 않았다. “노래방?” “어? 노래방 갈까?” 가족들끼리 노래방은 몇 번 가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친구들끼리 가본 적은 없던 지태는 채윤과 단유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노래방 가볼까?” “너 노래 잘해?” 채윤이 묻자, 지태가 채윤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야, 그냥 스트레스 풀러 가는 건데 노래 잘하고 못하고가 어딨어? 안 그래?” “나 아는 노래 별로 없는데?” 채윤이 슬쩍 발을 빼는 모습을 보이자 지태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그냥 소리나 지르고 마는 거지, 뭘 빼고 그러나? 단유 넌 어때? 괜찮아?” “난 한 번도 가본 적 없어?” “진짜? 명수랑도?” “응.” “그럼 명수랑 이번에 같이 가보면 되겠네.” 좀 많이 업이 된 지태의 주도로 친구들은 노래방으로 놀러 가기로 했다. 명수도 노래방은 처음이라서, 지태의 제안을 듣자마자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생각해보니 단유는 노래방을 가본 적이 있긴 했다. 물론 노래를 부르러 갔던 것은 아니었지만, 담배 연기로 자욱하던 노래방의 풍경이 생각나 조금 꺼려지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태가 이들을 끌고 간 노래방은 그런 노래방이 아니었다. “와, 좁다?” “그래도 네 사람 충분히 놀 공간은 되니까 괜찮지 않아?” 만약 친구들 중에 철규처럼 돈이 많은 애가 있었다면, 룸으로 이루어진 노래방을 찾았을 테지만, 푼돈을 모아 놀아보자고 모인 이 네 사람은 그런 곳을 갈 여력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찾은 곳이 오락실에 붙어 있는 코인 노래방이었다. “야, 빨리 노래나 골라.” 지태가 책을 펼치고 채윤과 함께 목록을 살폈다. 명수도 남은 책 한 권을 집어 펼쳐 들고는 단유에게 말했다. “너 부를 노래 있어?” 명수가 물을 만도 한 게, 단유는 아는 노래가 없었다. 그리고 명수가 기억하기로 단유가 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 자체를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난 일단 구경만 할게.” “구경만 하는 게 어딨어? 너도 골라.” 지태가 단유의 말에 딴지를 걸고 나서며 자신이 보던 책을 단유에게 던져 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곧바로 번호를 눌렀다. 이윽고 조명이 어두워지고 스피커에서 반주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여자 노래 아냐?” “요즘 이 노래가 좋더라고.” 대세 걸그룹 ‘플루토’의 노래를 부르겠다고 마이크를 잡은 지태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 보였다. “댄스곡을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부르는 사람이 어딨냐!” 라는 명수의 지적에 지태가 어색한 미소를 띠며 긴장된 듯, 입술에 침을 발랐다. 그리고 명수에게 말했다. “노래 알면 같이 부르자.” 명수가 마이크를 잡고 서자, 지태가 기분 좋게 웃음을 던졌다. ======================================= [289] Sing for me(2) 사실 단유가 아는 노래가 많지는 않아도, 최근의 일들도 있었던 데다가 명수가 집에서 자주 듣던 노래였던지라, 지태가 선곡한 노래에 대해서는 아는 편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갤럭시즈의 회사에서 보컬 레슨을 청강하기도 했던 단유는 지태의 노래를 조금 기대하기도 했다. 어느 유명한 심사위원은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평소 말하는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게 유행이었던지, 청강했을 때도 보컬 트레이너는 나윤의 노래에 그렇게 지적해주면서 목소리 음색이 바뀌지 않게 주의를 시켰다. 평소 지태의 목소리를 잘 아는 단유였기에, 그런 목소리로 어떤 노래가 나올지를 기다리는데, 지태가 첫 소절을 불렀다. “어디 가면 안 돼, 날 두고 가면 안 돼.” 지태의 첫 소절에 단유는 물론이고, 명수와 채윤도 얼어붙었다. “…끊어진 전화, 다시 시작된 밀당.” 플루토의 노래는 최근 유행하는 곡답게 리드미컬한 곡의 구성도 구성이지만, 걸그룹 특유의 톡톡 튀는 발랄함이 주가 되는 노래였다. 그 때문에 지태의 노래가 기대되기도 했지만, 이런 노래가 나올 줄은 누구도 몰랐다. 친구들의 반응을 챙기지 못한 지태는 후렴부까지 부른 뒤에 명수에게 다음을 부르라고 마이크로 신호를 줬지만, 명수는 손을 저으며 자리에 앉아버렸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지태가 2절까지 마저 부른 뒤에야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야, 니들 왜 그래?” 노래가 끝난 뒤에도 어색한 반응을 보이는 친구들이 이상해 보였던지 지태가 물었다. 명수와 채윤이 눈치를 보다가, 명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와. 난 무슨 할아버지가 부르는 줄 알았다.” “뭐?” “무슨 댄스곡을 트로트 부르듯이 부르냐?” 구성진 가락에 어깨춤을 추며 불러야 할 것 같은 곡조로 자체 편곡을 해서 불렀던 지태였다. 다만 지태 본인은 친구들의 반응에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였다. “이상했어?” “어, 완전.” 지태의 반응에 그만 웃음을 터뜨리는 명수와 채윤이었다. 명수는 다른 노래도 그렇게 부르는지 궁금하다며, 다른 노래를 골랐고 채윤은 그 사이 지태에게 노래를 누구한테 배웠길래 그러냐고 물었다. “난 이상한 줄 모르겠던데.” 고민하던 지태가 슬쩍 털어놓기를, “할아버지 때문에 그런가?” 라고 했다. 말인즉슨, 집에서 할아버지랑 오래 있다 보니, 할아버지가 노래를 틀어 놓고 부르는 모습을 자주 봐서 그런지도 모르겠다는 설명이었다. 명수가 다시 최신곡을 골라서 시작 버튼을 누른 뒤 지태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다시 지태가 노래를 부르고, 두 친구는 배를 잡고 웃으면서 지태의 노래를 편하게 감상했다. “야, 차라리 트로트를 불러라.” 이어진 트로트 선곡은 그야말로 지태의 곡이었다. 나이답지 않게 구수한 창법과 완벽한 꺾기로 좌중을 압도했다. 명수와 채윤이 기립박수로 지태의 노래를 칭찬했다. 한바탕 웃음 폭탄을 터진 코인 노래방은 덕분에 처음의 낯설음은 많이 가셨다. 이어진 주자는 명수였고, 명수는 뜻밖의 노래 실력을 뽐냈다. “배에 힘주고, 목에는 힘을 빼고! 필요한 부분에서만 힘을 줘야 노래가 듣기 편하지.” 라고 했던 보컬 트레이너의 교습법을 떠올려보면, 명수는 평소 운동으로 체력과 힘을 기른 상태여서 목소리에도 힘이 있었다. 그래서 노래 자체가 듣기 좋을 정도로 정확하고, 음정의 흔들림이 적었다. 고음도 듣기 좋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올라가서 지태와 채윤의 환호를 받을 수 있었다. 다만, 노래를 많이 불러보지 않은 탓인지 기술적으로 능수능란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노래가 깨끗하고 순수하다는 느낌이었다. “명수 노래 잘하네?” “야, 여기서는 마음대로 소리를 크게 내도 상관이 없으니까 기분이 좋다야. 자주 와야겠어?” 코인 노래방의 매력에 푹 빠진 명수가 마이크를 채윤에게 넘기고 다시 선곡 책을 집어 들었다. “너도 어서 골라봐?” “난 아는 노래가 없잖아?” “없긴. 여기 있네. 이거.” 명수가 가리킨 노래는 바로 갤럭시즈의 노래 중 두 번째 싱글의 곡이었다. 아무리 인기 없는 걸그룹의 노래라도 노래방에는 있구나, 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 번 불러봐. 소리 지르면서 부르니까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 이미 채윤의 노래가 시작된 참이어서 반주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스트레스는 무슨.” “야, 너 요즘 스트레스 받는 거 내가 모를 거 같아? 아침마다 너 다크서클 자랑하고 있는 거 몰라?” 내가 그랬나, 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수는 곧바로 그 노래를 예약하고 한참 열창을 하던 채윤의 노래에 맞춰 손뼉을 쳐 주었다. “야, 박수 치지 마. 발라드에 무슨 박수야!” “그럼 탬버린이라도 칠까?” 말 만이 아니라 진짜 치려는 듯 명수가 벽에 걸린 탬버린을 집어들자, 지태가 엉덩이를 들고 일어나 명수를 말리는 시늉을 했다. 그 와중에도 채윤은 모니터에 뜬 가사에만 집중해서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아웅다웅하는 소란마저도 흥을 돋웠고, 단유마저 웃음을 터뜨리며 낯설었던 분위기를 털어냈다. 아이들은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어느새 여러 개의 곡을 예약해놓게 된 반면에 네 사람이 가진 돈은 점점 바닥을 보였다. “야, 몇 곡 못 부르겠는데?” 반주기 위에 쌓아둔 동전이 줄어드는 것을 보며 걱정하는 아이들이었다. “야, 그래도 단유 노래는 듣고 끝내야지.” “어? 맞네! 단유 노래 들어야지?” 그들의 기대감이 사뭇 부담스러워, 마이크를 들고 싶지 않았지만, 명수가 끝내 손에서 마이크를 떼지 못하게 붙잡아 주는 통에, 그리고 억지로 자리에서 세운 통에, 단유는 답지 않게 쭈뼛대며 일어섰다. 명수와 지태, 채윤은 잔뜩 기대감을 안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모범생 중의 모범생. 평소에 목소리 한 번 높인 적 없는, 차분함의 대명사. 매일 책만 들여다보는 책벌레가 부르는 걸그룹의 댄스곡이 기대가 되지 않을 리 있나. 설령 단유가 음치라고 해도, 그건 그것대로 재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15초 정도의 짧은 반주가 끝나고 첫 소절이 시작되었다. “나에게 다가와 속삭이던 당신의 눈동자에/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였어요.” 변성기가 찾아온 단유의 목소리는 다소 거친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짧은 호흡 속에서 박자를 쪼개며 들어가는 노래의 흐름을 정확히 지켜가며 부르는 단유의 노래는 듣기에 나쁘지 않았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잘 부르네?” “잘 불러.”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의견을 교환하던 이들은 단유가 생각 외로 노래를 잘 부른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얘 노래 못 부른다며?” 채윤의 말에 명수가 고개를 저었다. “노래를 못 부르는 게 아니라, 부르는 모습을 못 봤다는 거지.” “근데 저렇게 잘해?” 지태는 낯선 노래임에도 썩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단유의 노래를 들었다. “야, 이거 노래 괜찮은데?” “그치? 나도 단유가 부르니까 괜찮은 것 같다.” 진작에 이 노래를 알던 명수도 색다르다는 생각을 가지며 단유의 노래를 감상했다.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고, 꼿꼿하게 서서 입만 열어서 노래를 부르는 단유였지만, 신기하게도 노래는 꽤 듣기가 좋아서 마치 남성 솔로의 댄스곡인 것 같았다. “여자 노래인데도 남자 노래 같다야.” 그러고 보니, 노래의 음정이 원곡에 맞춰져 있었다. “확실히 단유가 운동을 많이 해서 힘이 좋은가보다.” 고음부가 아님에도 여자의 음역대라 꽤 고음인데 단유는 표정 변화 없이 노래를 불렀다. 단유도 자신이 이 정도로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아무래도 보컬 트레이너의 레슨을 청강한 도움이 컸다고 생각해보는 단유였다. 두 번밖에 되지 않는 청강이었지만, 수련이라는 확실한 모범 답안을 보며 배운 탓인지, 그럭저럭 흉내는 낼 수 있구나, 라고 생각하며 노래를 마친 단유였다. “우와! 대박!” 아이들이 환호를 보내자, 그제야 얼굴을 붉히며 얼른 자리에 앉은 단유였다. “민망하네.” “야, 너 못하는 게 뭐냐? 노래까지 잘해? 완전 사기 캐릭터네.” “잘하긴, 그냥 흉내 낸 거야.” “흉내는 무슨? 야, 그 정도면 가수 해도 되겠다.” 마침 노래방 기계에서 ‘가수 해도 되겠어요’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야, 기계가 인정했다. 김단유, 너 가수 해라.” “그만해라.” 단유는 마이크를 명수에게 쥐여주고 얼굴을 굳혔다. 그 모습이 기분 나빠서가 아니라 쑥스러워서 그러는 것임을 아는 친구들은 더더욱 신이 나서 단유를 놀렸다. 몇 곡의 노래를 더 부른 후, 아이들은 코인 노래방에서 나왔다. “와, 시원하다. 저기 안이 덥긴 덥네.” “겨울에 오면 딱 좋겠다.” “그럼 기말고사 끝나고 또 올까?” “콜!” “야, 그 전에도 한 번 더 오지, 뭘 기말고사 때까지 기다려? 가끔 놀러 오고 싶을 때 오면 되지 뭐.” “다음에는 올 때, 과자라도 사 들고 올까?” “과자가 아니라, 음료수를 사서 와야겠다. 목이 칼칼해.” “야, 돈 없지?” “응.” 채윤이 호주머니에서 100원짜리 동전 몇 개를 집어 보였다. “에이, 그럼 그냥 가자.” 네 사람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 “여보세요?” 단유는 저녁 늦게 걸려온 전화에 겨우 책에서 눈을 뗄 수 있었다. ―나 태호형이다. “예, 형. 어쩐 일이세요?” ―아, 저기…요즘은 회사에 안 오더라? “아, 학교에 시험도 있었고요, 제가 따로 공부하는 것도 있고 해서 시간이 잘 나지 않아서요.” 잠시 수화기에서 목소리가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혹시 내가 저번에 한 이야기 때문에 마음 상해서 그러는 건 아니지? “에이, 아니에요. 그런 거로 무슨 마음이 상해요. 형이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닌데요. 그렇지 않아도 형이 그렇게 이야기해주신 덕분에 지금 그 공부도 하는데요.” ―응? 뭔데? “그때 말씀드렸던 알고리즘이요. 좀 더 보완해서 정확도를 높여볼까 하고요.” 태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단유는 그 정도로 의기소침해질 아이는 아니었다. 단유가 준비해온 그 ‘방식’에 대해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일침을 놨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더 보완하겠다고 공부를 한다고 하니, 역시 단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너무 거기만 매달리지 말고, 학교 공부도 하고 그래야 한다. 물론 니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느냐마는. “네, 알겠어요. 그 때문에 전화주신 거예요?” 태호는 다시 머뭇거렸다. 별거 아닌 이야기인데도, 조금 꺼내기가 어려운 이유가 뭘까? “저기 다름이 아니고. 우리 회사의 박 이사님이 있잖아? 널 조금 보고 싶다고 하시네.” ―박 이사님이요? “응. 내가 너에 대해서 조금 바람을 잡았거든.” ―무슨 바람이요? 태호는 쑥스러워하면서 박 이사에게 이야기했던 내용을 설명했다. ―유승호가 누군데요? 태호는 윗머리를 마구 긁은 뒤, 차분하게 머리를 정리하며 유승호라는 배우에 대해 설명을 했다. “아직도 계약에 부담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일단 박 이사님이랑 이야기해보고 결정하는 건 어떻겠어? 물론 이야기한다고 당장 계약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또 너도 박 이사님이랑 이야기해보고 싶다고 했잖아? 분위기 봐서 네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나눌 수 있을 테고 말이야.” 되도록 그때의 이야기는 안 했으면 좋겠다는 게 태호의 개인적인 소견이었지만, 그 부분은 말하지 않았다. 괜히 그 이야기를 꺼내서 박 이사가 단유를 ‘실없는 아이’ 혹은 ‘망상에 빠진 아이’라는 판단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지만, 또 단유가 보통 아이가 아니라는 것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면 자연히 알 수 있는 일이기에 사람 잘 보기로 유명한 박 이사라면 충분히 단유의 재능을 알아보고 인정해 줄 것이라는 판단도 들었다. “그래서 시간을 맞출 수 있다면, 한 번 회사로 나와보지 않겠냐고 물어보려고 전화를 한 거야.” 단유는 태호의 제안에 대해 잠시 생각을 해 보았다. 물론 아직도 계약을 거절했던 당시의 이유, 여전히 공부하고 싶은 것이 많다는 이유는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이유에도 불구하고 박 이사와 이야기를 나눠본다는 것은 현재의 단유에게 나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은 뭐든 경험해보는 게 중요하니까.’ ‘현실’을 산다는 것을 ‘체험’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단유는 곧 태호에게 제안을 받아들이겠노라 답했다. 그리고 며칠 뒤, 단유는 회사 앞에서 태호를 만났다. “왔어?” 태호 옆에는 수련도 같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 이사님 만난다며?” “네.” “이사님이 시간을 내주셨다니 대단하네? 우리 이사님 보통 바쁜 분이 아니시거든.” 단유는 볼을 긁적였다. 바쁘기로 따지면, 자신도 바쁘기는 매한가지라고 생각하며. ======================================= [290] Sing for me(3) 지하 연습실의 열기와 방음차단문으로도 막지 못하던 음악 소리를 기억하던 단유는 3층 기획사 사무실의 조용한 분위기가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교무실에 갈 때도 이렇게 엄숙하고 진지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역시 회사라서 그런 걸까, 라고 잠시 생각해보던 단유였다. 앞서 걷던 태호가 흘깃 돌아보며 ‘긴장 안 해도 돼’라고 말해주었지만, 단유가 보기에 자신보다 태호가 더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었던지, 태호는 이사실 앞에서 자신이 문을 두드리고도 두드린 소리에 흠칫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이사님, 장태호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태호는 잠시 기다리라고 속삭인 뒤, 혼자 이사실로 들어갔다. 문밖에서 기다리던 단유는 다시 한번 사무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하얀색 벽과 먼지 하나 보이지 않는 바닥이 마음에 들었다. 이사실로 들어오는 복도 중간쯤에 열린 문을 통해 살짝 들여다보니, 사람들이 모두 자기 책상에 앉아서 열심히 업무를 보는 중이었다. 기획사 사무실을 생각했을 때, 다소 소란스러운 이미지를 떠올렸던 것에 반해, 실제로는 굉장히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여서 단유는 몰래 감탄을 했다. “단유야.” 얼른 고개를 돌려보니, 문이 반쯤 열려있고 그 사이로 얼굴만 살짝 내민 태호가 단유를 부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김단유입니다.” “어서 와요. 거기 앉아요.” “네.” 박 이사라는 분을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지만, 어쩐지 분위기가 낯설지 않았다. 마치…예전 보육원의 원장을 보는 기분이랄까? 다만 보육원 원장보다 훨씬 예의를 지키려는 단정함과 표현되지 않는 엄숙함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말로만 듣다가 이렇게 직접 만나니 반갑네요. 단유 학생에 대해서는 여기 장 매니저 통해서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단유는 달리 대꾸할 말이 없어,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음, 잠깐만.” 박 이사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가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책상으로 돌아가 몇 가지 서류들을 확인한 뒤, 단유에게 물었다. “밥 먹었어요?” 저녁을 말하는 것이라면, 아직 시간이 5시를 겨우 넘긴 시간이라 원래 먹는 시간대는 아니었다. “아직 안 먹었는데요?” “그럼 같이 저녁이나 먹으면서 이야기할까요? 사실 내가 점심을 챙겨 먹질 못해서 말이죠. 괜찮죠?” 단유는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여서 사인을 보냈고, 박 이사는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인 뒤, 태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장 매니저는 시간이 어떻게 되나? 괜찮으면 같이 갈 텐가?” “아닙니다. 전 일이 남아서.” 태호는 재빨리 답을 했다. 그리고 가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박 이사의 스타일상, 만약 진짜 같이 밥을 먹으러 가고 싶었다면, 저렇게 묻기보다는 ‘같이 가자’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지금 저렇게 둘러서 표현하는 것은 ‘웬만하면 두 사람이 이야기할 수 있게 자리를 피해 주게’ 라는 내용이었으리라. “그런가? 아쉽군. 그럼 다음에 같이 먹도록 하고, 단유 학생은 같이 일어나지.” **** “어? 단유만 두고 혼자 내려오신 거예요?” 연습실 앞 정수기에서 물을 받던 수련이 태호를 보고 물었다. “박 이사님이랑 단유는 식사하러 갔어.” “왜 같이 가지 않으시고요?” “…이사님이 단유랑 따로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눈치껏 빠졌어.” 수련은 물컵을 들고 가만히 서 있다가 태호에게 말했다. “단유, 혼자 괜찮을까요?” “야, 걔가 어디 보통 애도 아니고, 괜찮을 거야. 그리고 박 이사님이 무슨 혼을 내겠어, 아니면 처음 만난 사이에 화를 내겠니? 별문제 없을 거야.” 하지만, 그래도 아직 14살인 단유인데 그런 어려운 자리에 홀로 보내는 게 편치 않게 느껴졌다. 수련은 미지근하게 온도를 맞춘 물을 천천히 마시면서 단유를 걱정했지만, 여기서 무슨 걱정을 한들 도울 방법 따위는 없었다. “그만 생각하고, 연습이나 해. 곡은 어땠어?” “나쁘진 않았어요. 아니, 좋아요.” “그래? 나윤이도 좋대?” “네. 그런데 노래가 조금 부르기 어렵게 나와서 연습할 때 조금 힘들긴 해요.” “그래? 그래도 수련이 너라면 잘할 거야.” 태호의 믿음이 담긴 응원에 수련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연습실로 돌아가는 수련의 뒷모습을 보던 태호는 잠시 자신이 직접 받아왔던 곡을 떠올려 보았다. 태호가 매니저라서 그런 게 아니라 확실히 좋은 곡이었다. 하지만 좋은 곡이라고 생각하고 활동했던 곡들이 꼭 성공하지는 못했던 경험이 있는지라, 자신감이 생기지는 않았다. 잠시 애들이 연습하는 모습이라도 볼까, 하다가 그냥 고개를 털고는 위층으로 발길을 옮겼다. 한편, 연습실로 돌아온 수련은 같이 떠온 물을 나윤에게 건넸다. “고맙습니다.” 원래는 나윤이 가서 물을 떠 와야 하건만, 수련이 기어코 공기도 쐴 겸해서 떠오겠노라며 나간 터라 연습실 안에서 좌불안석으로 기다리던 나윤은, 수련이 등장하자 벌떡 일어나 두 손으로 공손하게 컵을 받아들었다. 시원한 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목을 보호해야 한다’는 수련의 의지로 미지근한 물을 마셔야만 했던 나윤은 그래도 마른 목에 수분이 보충되니 기운이 나는 느낌이었다. “아, 맞다. 아까 단유 왔었는데, 인사 못 했지?” “단유? 단유요? 걔 왔어요?” “어머, 얘 봐라? 단유 이야기하니까 얼굴 빨개지네?” “네? 아니에요, 놀리지 마세요. 그런데 단유는 오늘도 레슨 청강하러 오는 거예요?” “아니. 이사님이랑 독대하러 갔어.” “이사님이랑 독대요?” “응.” 이사님과 독대를 한다고 생각하면 괜히 주눅이 드는 나윤이었다. 나이가 많으신 어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회사에서의 위치가 대표님 다음으로 높으신 분인지라 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대상은 아니었으니까. 하물며 자기보다 어린 단유가 과연 이사님이랑 편하게 대화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안무는 다 외웠어?” “대충은요.” “그럼 이제 맞춰볼까?” “네.” 듀엣이라서 그런지, 예전보다 안무를 맞추는 시간은 줄었는데, 대신 안무가 좀 더 어려워졌다. 그래도 복잡하게 동선을 옮기는 안무가 아니어서 외우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음악이 흘러나오고 두 사람은 거울을 보며 안무를 맞추기 시작했다. “다시.” 나윤은 서둘러 음악을 껐다가 다시 재생시키기를 반복했다. 수련은 사실 춤보다 노래가 나은 멤버였지만, 팀에 피해를 끼치기 싫다는 생각에 안무 연습에 가장 열심인 멤버이기도 했다. 오랜 연습과 노력으로 자신의 부족한 실력을 메우는 멤버였기에, 듀엣 안무를 맞추는 지금도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 “어서 오세요, 이사님. 오랜만이시네요.” “안녕하세요. 자리 있죠?” “그럼요. 안쪽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박 이사의 뒤에 따라오는 단유를 보더니 사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분…이신가요?” 박 이사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배고파서 온 거니까, 편하게 해주세요.” “아, 예.” 사장은 안쪽의 룸으로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이윽고 넓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박 이사는 단유의 기색을 살피며 웃음을 지었다.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내가 배가 고파서 온 거니까, 온 김에 같이 먹자는 것뿐이에요.” “전 괜찮습니다.” “그래요?” “혹시 마음대로 와서 불편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여기가 맛은 있으니까 아마 입에 맞을 거예요.” 그 사이 종업원이 들어와 반찬을 놓아주었다. “한식 A코스로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나무 무늬를 그대로 살린, 밝은 원목 소재의 창틀과 푸른 창호의 조화가 잘 어우러진 커다란 창이 박 이사의 뒤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해가 떨어지기 전의 시간대라 그런지 빛이 서린 푸른 창과 은은한 조명 덕분에 고즈넉한 분위기가 감도는 룸이었다. “어린 친구 취향에는 안 맞을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이곳이 맛도 있고,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에도 좋은 곳이라 불렀어요.” “분위기가 좋네요.” “그래요? 허허, 어린 친구 취향에도 맞다니 다행이로군요.” 단유는 잠시 박 이사의 눈을 마주하다가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말을 편하게 하시죠?” “아, 그래도 되겠어요?” “네.” “그래, 알았다. 아, 거기 앞에 있는 녹두전이 꽤 맛있어. 간장을 살짝 찍어서 먹어보게.” 단유는 일단 박 이사의 지시에 따랐다. 그 뒤로도 박 이사는 말은 편하게 하면서도 정작 본론이라 여길만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단유는 박 이사가 평범하게 사담을 늘어놓으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관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아이라면 모를까, 단유는 이런 대화가 낯설지만은 않았다. 그가 만났던 여러 사람과의 대화 속에서 이런 대화 방식도 존재했었으니까. 뭐 그래도 대화 끝에 감옥에 끌려간다거나 하는 결과는 없을 테니 겁을 먹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식사가 나오고 잠시 조용해지나 싶었는데, 한동안 여러 가지 가벼운 질문을 던지던 박 이사가 이번에는 단유의 학교생활에 대해 듣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역시 가벼운 이야기였지만, 식사하면서 나누기에 나쁘지는 않았다. 식사를 마친 뒤, 가볍게 입가를 정리하던 박 이사가 말했다. “젊은 친구가 참 차분하네.”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박 이사가 단유를 관찰하듯, 단유 역시 박 이사를 관찰했다. 차라리 박 이사 같은 사람이 단유는 편했다. “그래, 사실 이 이야기를 먼저 해야 했는데, 자네 학교 이야기를 듣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하지 못했네. 나도 과거 학창 시절을 보냈던 기억도 새로 하게 돼서 기분이 좋았거든.” “네.” 박 이사는 물수건을 손가락 하나하나를 세심히 닦아냈다. “듣기로 장 매니저가 자네에게 계약 이야기를 꺼냈는데, 자네가 싫다고 했다면서?” “아, 네.” “이유를 직접 들어볼까?” 단유는 차분하게 태호에게 얘기했던 것과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음, 그래. 학업이라. 확실히 자네 학교 성적을 보면 그쪽으로 대성할 가능성도 보이지. 게다가 재미까지 느끼고 있다면, 이쪽 업계 쪽으로 관심을 쏟을 여력이 없기도 할 테고. 이해는 가네.” 박 이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말이야. 사실 이쪽 업계도 요즘은 많이 바뀌어서, 고학력자임에도 연예계에 진출한 이들이 적지 않단 말이지. 단순히 국내 최고 클라스의 대학을 나온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해외 유수의 대학에서 학위를 딴 이들도 연예계로 진출하고 있지. 그 이유가 뭘까? 단순히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 대한 동경? 혹은 몇 안 되는 억대 재벌이 되기 위해?” 박 이사는 단유의 대답을 기다렸다. “글쎄요. 제가 그쪽으로는 관심이 별로 없어서 말이죠. 평소에도 잘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이라, 방금 말씀해주신 분들이 누구인지도 잘 모릅니다.” “그런가? 뭐, 그럴 수도 있지.” 박 이사는 싱긋 웃음을 짓고는 손깍지를 끼고 단유와 시선을 마주했다. 50대 박 이사의 눈이 나이에 맞지 않게 초롱초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는 그랬어. 연예인을 하찮게 보거나, 혹은 딴따라라고 낮게 보는 경향도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선망의 대상이고 동경하는 아이돌들이 돼버렸어. 왜일까? 잘생겨서? 노래를 잘해서? 연기를 잘해서? 어쩌면 다 맞는 말이겠지. 그런데 내가 보는 연예인은 조금 다른 관점이야. 다른 직업도 그렇지만, 연예인이란 직업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바뀌고 있거든.” 박 이사의 목소리는 조금씩 무거워지고 있었지만, 그 안에 깃든 진심은 생생하게 전달되는 중이었다. “더 이상은 남이 써준 노래를 그저 부르기만 하는 가수는 없어. 더 이상은 남이 써준 대본을 그저 따라 연기하는 배우는 없어. 현장에서 자신의 감정을 살려서 노래하는 가수가 더 인기를 얻고, 대본에 나오지 않는 대사와 감정으로 현실감을 덧입히는 배우가 더 인기를 얻어. 예능도 마찬가지야. 남이 써주는 대본대로 움직이는 연예인은 마네킹이나 마찬가지야. 현장에서 분위기에 맞춰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는 연예인이 방송을 만들어내고, 프로그램을 살리지. 이게 무슨 의미일까? 난 연예인도 하나의 크리에이터(Creator)라고 생각하네. 이제는 예전 방식의 연예인들은 성공할 수 없어. 점점 더 자기 것을 가지고 있고, 자기 것을 만들어내는 연예인이 성공할 수 있다고. 바로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크리에이터가 되어야만 이 연예계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거지.” 박 이사는 살짝 입을 축이고 호흡을 고른 뒤, 여전히 정자세로 자신을 마주하는 단유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이걸 아무나 하지 못하더란 말이지. 아무나 했으면 다 성공했겠지만, 아쉽게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더란 말이야. 방송에 익숙한, 나이가 많은 연예인들은 이전의 방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어서 자기 것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거나, 혹은 이전에 만들어놓은 자신의 이미지를 재활용하는 수준밖에 되지 않아. 이래서는 빠르게 변화하는 최신 유행에 발을 맞추기 힘들지. 반면에 젊은 사람들, 그중에서도 이,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잘 해내. 개성이 넘치는, 이라고 수식어를 붙이곤 하지만, 사실 개성을 넘어서 자기 것을 만들어내는 콘텐츠 크리에이터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있는 거야.” 단유는 몇 가지 의문이 생각났지만, 일단 박 이사의 말이 끝날 때까지는 얌전히 기다렸다. “그런데, 자네에게서 그 모습을 봤어.” “저요?” 단유가 놀란 눈으로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박 이사가 등을 바로 세우며 웃음을 지었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머리 좋은 연예인들이 많이 유입되는 이유? 그들은 ‘연예인’이 아니라 ‘크리에이터’가 되기 위해, ‘크리에이터’로서 성공하기 위해 이 시장에 들어오는 것이야.” 박 이사의 눈에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이 보였다. ======================================= [291] Sing for me(4) “아마 자네는 왜 자신인지 궁금할 거야, 그렇지?” 단유는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자네에 대해서 조금 조사를 했네. 너무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장 매니저가 자네랑 계약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장 매니저의 말만 믿고 아무렇게나 덜컥 계약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물론 자네가 반대했다는 건 들었지만, 그래도 회사 입장이란 게 있어서 말이야.” 박 이사는 옆에 두었던 태블릿을 들어서 살짝 흔들어 보였다. “요즘은 확실히 세상이 바뀌었어. 그렇지?” 박 이사는 익숙하게 태블릿을 조작하며 말을 이었다. “우리 회사는, 아니 나는 말이야, 아무나 회사에 들여서는 안 된다고 보네. 과거의 방식대로 그저 잘생기고 노래 잘 부르는, 혹은 끼가 많은 이들을 데리고 와서 연습만 시킨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고 보거든. 어쨌든 회사인데, 회사에 영입할 대상이 인성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 문제가 있지 않겠는가?” 태블릿을 조작하던 도중 살짝 눈동자만 올려 단유를 바라보는 박 이사였다. “자네의 구설수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건 이미 밝혀졌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야.” 곧 화면 조작을 멈추고, 화면에 뜬 글들을 읽어내려가는 박 이사의 입에서는 단유의 과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7살 경에 아네스 보육원이란 곳에 입소를 했는데, 그 전의 기억은 없다고?” 어떻게 알았을까? 단유의 표정이 드러났는지, 박 이사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지역 도서관 모델도 했었고… 갤럭시즈와의 방송 이전에 이미 SNS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군. 공중파에도 잠깐 출연한 적 있고, 성적은…들었던 것보다 훨씬 좋네.” 단유는 자신의 과거를 간추려 이야기하는 박 이사의 말을 조용히 듣기만 했다. “보육원 생활은 했지만, 특별히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고, 학교에서도 특별히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은 없다고 보고가 되어 있어. 그렇지만, 그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인지 경력으로 인정받을 만한 기록은 없었나 보군.” 박 이사는 태블릿을 내려놓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이 보고서를 통해 알 수 있었던 사실은 자네가 꽤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내는, 평범한 중학생이란 사실이야. 성적이 전교 1등이라지만, 그건 전국에 있는 중학교 수만큼의 학생들도 가진 성적이지. 그 외에는 특별히 눈여겨볼 점이 없지. 아까도 말했지만, 자네 외모나 성적은 우리가 계약을 위해 참고해야 할 필수 고려사항은 아니란 말이야.” “…….” “그런데 왜 내가 이런 말을 늘어놓을까? 그건 자네가 다른 아이들과 다른 한 가지가 있기 때문이고, 그 점이 내가 자네를 눈여겨보게 된 이유거든.” 태호의 추천이 그 이유가 아니란 것은 알 수 있었다. 박 이사는 입술 끝을 살짝 올렸다. “하나는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라는 점이야. 듣기로 자네,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서 운동한다지? 그렇지 않아도 외견이 중학교 1학년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좋다고 여기던 참이었는데, 그런 보고가 있더군. 이런 건 경력에도 남지 않지만, 분명 회사 차원에서는 그 사람이 얼마나 인내심과 성실함을 갖추고 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지.” 고작 그런 이유로? 그게 뭐 대수라고? “두 번째는, 자네가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고 보여서야.” “이야기를 만든다고요?” “하나는 예전에 갤럭시즈와 인터넷 방송을 했을 때지. 솔직히 난 그 방송을 보지 못했어. 하지만 뒤에 이야기를 들었고, 이번에 찾아봤어. 자네가 갤럭시즈의 얼굴을 가지고 말한 이야기들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솔직히 점수를 주기가 어렵지만, 이야기의 참신함과 재미만을 따지자면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 거야. 특히 낯선 카메라 앞에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한다는 게 쉽지 않은데도, 자네는 꽤 차분하더란 말이지. 또 하나는 얼마 전 장 매니저에게 들은 이야기 때문이야. 수학을 이용해서 어떤 노래가 성공을 할 수 있을지를 분석했다고 하더군. 맞나?” “네.” “그때는 재밌다고 생각했어. 이쪽 업계의 마케팅 전공자도 아닌, 중학교 1학년생이 그런 발상을 가지고 직접 공식을 만들 궁리를 했다는 게 말이야. 그래서 그때는 재밌는 친구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앞서 이야기한 것과 연결하니까, 재밌다는 정도가 아니더라 이 말이지.” “그런가요?” “그래서 생각했지. 아, 김단유라는 아이는 콘텐츠를 만들 줄 아는 아이구나, 라고. 물론 지금은 어설프고 설익었지만, 그 부분은 내가 케어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그리고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좀 더 훈련된다면 충분히 대한민국 탑 클래스 크리에이터가 될 거라고 생각하네.” 단유는 머리를 긁적였다. 자기가 그 정도로 거창한 호칭으로 불릴만한 일을 하지도 않았고, 그런 호칭으로 불리길 바랐던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네 혹시 노래는 할 줄 아는가?” “노래요?” 단유는 뜬금없이 이어진 물음에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노래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아는 노래가 없는데요.” “자네 목소리를 들어보니 변성기가 온 것 같긴 한데, 그런데도 목소리에 힘이 있단 말이지. 아무래도 오랜 시간 운동으로 다져진 덕분이 아닐까 추측은 되는데, 뭐 그건 천천히 확인해 보면 될 일이고.” 짧은 문답 사이에 그런 것까지도 생각했단 말인가? 단유가 속으로 혀를 내두를 때, 박 이사는 다시 깍지를 끼고 단유와 눈높이를 맞췄다. “내 생각은 그렇네. 아직은 검증도 되지 않았고, 훈련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네의 성공 가능성을 점쳐 볼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하네. 하지만 만약 이 업계에서 일해볼 마음을 가지고 훈련을 받는다면 빠른 시일 내에 이쪽에서 두각을 드러낼 수 있을 거라고.” 단유는 긴 열변 끝에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오는 박 이사의 언변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생각이 없습니다.” “아직까지는?” “사실… 태호 형과 얘기할 때는 그랬어요. 연예인이 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고. 실제로도 그랬고요. 그런데 요즘은 조금 바뀐 것도 사실이에요. 만약 연예계에서도 제가 하고 싶은, 혹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해보고 싶다고요. 그래도 그건 연예계에 종사하는, 이를테면 태호형 같은 일이지, 제가 직접 연예인이 되는 것은 아직도 자신이 없네요.” “자신이 없다라… 뭐 내 칭찬 같지만, 난 자네가 충분히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봤고, 그래서 자네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지만, 만약 자네가 자신감이 없다면, 그리고 할 마음이 없다면 억지로 제안하지는 않을 거야.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은 다른 모든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을 테니까.” 단유 역시 그 말에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리와 계약을 하고 연습생 생활을 시작해보는 것은 자네가 연예인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왜요?” “연습생이 된다고 해서 꼭 연예인이 된다는 법은 없네. 물론 회사는 데뷔를 시켜서 성공시키려고 하지만, 연습생 본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다른 곳에서 쉽게 받기 힘든 레슨을 받으면서 자신의 잠재력을 끄집어낼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까. 내 생각이지만, 자네가 자신감이 없는 이유는 자네 스스로의 잠재력을 자네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해서라고 생각하네. 연습생으로 있는 동안 자네의 잠재력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래서 자네가 이 길을 가게 된다면 아마도 내게 고마워하지 않을까, 하는 욕심도 들고 말이야.” 너무 오랫동안 말을 많이 한 탓인지 목이 말랐던 박 이사는 잠시 이야기를 끊고 차를 주문했다. 식탁이 정리되고 차가 나온 뒤, 박 이사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회사는 연습생이던, 소속 연기자에게든 가혹하게 대하지 않네. 항간에 떠도는 노예계약 같은 건 없을뿐더러, 불공정한 대우를 하지도 않네. 그러니 자네가 연습생으로 들어와 꿈을 키우다가도 만약 자네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서로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계약을 해지할 수도 있네.” 그때 단유는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하지만 물음을 던지기 전에 박 이사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 든 생각인데 말이야, 설령 자네가 가수나 배우 쪽으로 가지 않더라도 말이야, 자네랑은 계약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군. 어쩌면 국내 기획사들 중 최초로 유명대학 교수를 배출해낸 기획사가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걸?” 마지막 말은 반쯤은 농담인지, 눈에 가득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 이사님. 질문이 있어요.” “어, 뭔가?” “‘대우’를 말씀하셔서 생각이 난 건데요, 갤럭시즈는 왜 복귀가 어렵다고 하는 거죠? 그리고 제가 듣기로는 회사와 소속 가수가 ‘소통’이 안된다고 들었거든요? 그건 꽤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대우, 아닌가요?” 박 이사의 눈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다시 아까 열변을 토하던 때의 진지함으로 돌아온 박 이사는 잠시 입술을 꽉 다물고 생각을 정리하는가 싶더니, 손가락을 내밀었다. “갤럭시즈는 내게 손가락이야.” “예?” “그런 말 있지?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냐고. 갤럭시즈가 그래. 내게 갤럭시즈는 손가락이야.” 박 이사는 손가락을 천천히 거둬들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야, 갤럭시즈는 아까 내가 얘기했던 콘텐츠 크리에이터로서 평가하자면 실패작이야.” 단유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내가 말한 콘텐츠 크리에이터의 정의를 기억하나? 그 정의에 따라 갤럭시즈를 보게. 그들에게 과연 자신만의 것이 있는가. 안타깝지만 그들은 레슨받은 것, 원래 가진 것 이상의 것을 만들어내는 데 실패한 셈이야. 개성이 없으니, 다른 여타의 걸그룹과의 차별점이 없고, 차별점을 만들어내지 못하니 여타의 그룹들처럼 진흙에 묻혀도 빛을 내지 못하는 거야. 내가 ‘진흙’이라고 표현했나? 흠… 맞아, 여기는 진흙탕이야.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면, 결국 묻혀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진흙탕. 스스로 빛을 내고 대중의 손에 들려 올려진 것들이 바로 ‘스타’라고 부르는 것들이지.” 박 이사는 술을 마시듯 차를 마셨다. 단유는 그런 박 이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가장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 순간이 있다면, 바로 마지막 ‘진흙탕’ 부분이었다고 단유는 생각했다. **** “이야기는 잘했어?” 박 이사와 함께 회사로 돌아온 단유는 홀로 지하 연습실로 내려왔다. 태호는 보이지 않았지만, 수련을 비롯한 갤럭시즈 멤버들이 모두 연습실에 있었다. 다들 반가운 얼굴로 단유와 인사를 나눴고, 마침 단유의 사정을 알던 수련이 물었다. “무슨 이야기?” 명지가 묻자, 단유가 대답했다. “좀 전에 박 이사님이랑 이야기를 했어요.” “박 이사님이랑? 설마?” “계약 문제이긴 했는데, 일단 나중에 결정하기로 했어요.” 예영이 손뼉을 치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우와, 박 이사님이 직접 너랑 이야기했다고? 박 이사님이 진짜 너 마음에 둔 거 아냐?” “표현이 이상하다? 마음에 두다니?” “언니? 왜 그래? 일상 생활 가능해?” 명지와 예영이 아웅다웅하는 사이, 수련이 단유에게 물었다. “나중에 결정한다면, 너도 생각이 있긴 한가 보네?” “아니, 전혀 없지는 않은데, 솔직히 오늘 박 이사님이랑 이야기하면서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어요.” “그래? 그럼 진짜 한 식구 되는 거 아냐?” 지수가 끼어들어서 단유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가만 보면 지수는 매번 단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걸 좋아했다. “그건 아직 모르고요. 그리고요….” “뭐?” 단유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피식 웃었다. “누나들이 아픈 손가락이래요.” “아픈 손가락?” 수영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 듯 눈썹을 올렸다. “누나들 다섯 명이 손가락 같아서, 깨물면 아프다고요.” “아, 그 말.” 수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른 말은 없었어?” 지수가 단유에게 물었지만, 단유는 말없이 싱긋 웃었다. 차마 ‘실패’한 손가락이라는 박 이사의 말은 전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 [292] Sing for me(5) 이사실로 돌아온 박 이사는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곧 찾아낸 서류를 다시 한번 정독하기 시작했다. ‘김단유….’ 성적 우수하고, 차분하고, 품행이 바르다는 기본적인 내용과 함께 그의 취향, 이를테면 자주 먹는 음식이라든가 좋아하는 패션 컬러와 같은 사소한 것들도 적혀 있었다. 특별히 외식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 아니란 점에서 양식이나 일식 같은 음식보다 한식 위주로 선택했고, 특히 값비싼 한식을 선택해서 분위기를 잡았다. 고작 연습생 한 명을 데리고 오는데 이런 사소한 것들까지 조사해야 하나 싶겠지만, 사실 단유는 말처럼 평범하지만은 않았다. “연재훈이라.” 김단유의 후원자로 이름을 올린 이가 바로 연재훈이었고, 연재훈은 국내 굴지 그룹 연성그룹 연회장의 손자였다. 비록 상속 서열에서 밀린 이라 해도 충분히 주목할 만한 인물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연회장이 가장 아끼는 손자라는 말도 있고, 연성그룹에서 운영하는 연성 재단에도 한 발 걸치고 있다는 말이 있었다. 다른 건 다 떠나서 연재훈―연회장으로 이어지는 커넥션에 김단유도 있다고 봐야 했고, 그런 이유에서 충분히 주목할 만한 인물이었고 라인을 잡을 이유가 있는 아이였다. 서류를 내려놓은 박 이사는 의자를 돌려 어두컴컴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하늘과 대조적으로 지상에는 화려한 불빛들이 별들을 대신해 빛나고 있었다. ‘하늘의 별만 별인가?’ 사람들은 굳이 하늘을 바라보고 별을 찾지 않는다. TV 속에도 별들이 반짝 빛나고 있으니까. 박 이사의 역할은 그렇게 빛날 별들을 찾아서 빛이 나도록 해 주면 된다. 별을 찾고, 만들고, 빛나게 해주는 역할. 그 별들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고맙다고. 엔터테인먼트. 지상의 사람들에게 별과 희망을 보여주는 직업이다. **** “집에 갈 거야?” “가야죠. 이제.” 단유는 다른 멤버들에게도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아, 나윤이한테도 인사하고 가.” 수련이 웃으면서 나윤이 연습하고 있는 연습실을 알려주었다. 단유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수련이 친하게 지내라며 ‘혹시 모르잖아’라고 덧붙였다. 단유가 연습실을 나간 뒤, 예영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뭐?” “나윤이랑 혹시 모른다니?” “아, 그냥 농담이야.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도, 인사하고 지내면 좋잖아.” 라고 둘러대는 수련이었다. 한편, 단유는 연습실을 나와서 복도를 거슬러 올라가다 수련이 알려준 보컬 연습실에 있는 나윤을 보았다. 문을 두드리니, 나윤이 돌아보고 문을 열어주었다. “어? 단유네? 오랜만이야?”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를 풀어헤친 나윤은 오른손을 살짝 들어 반가움을 표시했다. “예, 안녕하세요.” “박 이사님이랑 이야기한다고 왔다면서? 이야기는 잘했고?” “네.” “계약하는 거야?” 단유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제가 결정을 내리지 못했어요?” “그래? 뭐, 자기 선택이 중요한 법이니까. 그래도 같이 일할 수 있으면 좋을 거 같은데. 우리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해주면 좋고.” “뮤직비디오 찍어요?” “아, 아니. 아직 계획은 없는데, 그래도 곡이 나왔으니까, 뮤직비디오도 찍지 않을까 해서 말이야.” 당황하는 나윤을 바라보던 단유는 귓가에 흐르는 낯선 멜로디를 감지했다. “이 노래가 새로 나온 노래인가요?” “어. 이거 연습 중이었어. 그런데 아직 발표 전이라 들려줘도 되나 모르겠네.” “그래요? 연습하시는 데 방해하면 안 되니까, 그만 가 볼게요.” “어, 그래?” 단유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뒤돌아서는데 나윤이 다시 불렀다. “단유야?” “네?” “저기, 노래 한 번 들어볼래? 그냥 듣기만 하는 거면 별 상관없을 거 같긴 한데.” “그래도 돼요?” 굳이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면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단유는 나윤의 의사를 재차 물었고, 나윤은 뭐 대수겠어, 라고 호기롭게 답한 뒤 단유를 연습실 안으로 불러들였다. “밖에 들리면 안 되니까….” 나윤은 연습실 문을 닫았다. 1평도 되지 않는 좁은 연습실 안에 두 사람이 있으니, 조금 비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 앉아.” “누나가 앉으셔야죠.” “아니, 난 서서 부르는게 더 낫거든.” 직접 불러주려는 거였어? 단유는 녹음된 음악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에 살짝 당황했다. 사실 나윤 역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는데, 플레이어 안에는 AR과 MR이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노래를 들려주려고 했다면 AR만 들려줘도 되는데, 자기도 모르게 MR을 틀어서 노래를 부르겠다고 말한 것이다. 핑계를 대자면, 계속 MR로 노래 연습을 하고 있었던 탓에 미처 AR로 들려주면 된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이고, AR은 가이드 녹음된 버전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럼 잠시만 실례할게요.” 단유가 먼저 자리에 앉자, 나윤은 에라 모르겠다, 라는 심정으로 MR을 틀기 위해 플레이어 앞으로 다가갔다. 작은 책상 위에 놓인 플레이어를 조작하기 위해 몸을 숙였을 때, 단유는 나윤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나는 향기를 맡았다. 살짝 꽃향기 같기도 한 샴푸 냄새가 나윤의 머리에서 나고 있었다. “됐다, 잠시만.” 전주가 나오고 곧 나윤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살짝 눈을 감고 목소리에만 집중하는 나윤의 모습은 프로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게다가 지난번에 나윤이 레슨을 받을 때 들었던 것보다 훨씬 감정을 많이 쏟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집중하고 있었다. 노래는 대략 3분 정도였고, 미디엄 템포의 팝댄스 장르였지만, 멜로디 라인은 마이너 조성(調性)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해서 듣기에 부담이 없었다. 특히 음역대가 넓은 나윤의 허스키한 보이스가 잘 어울려서 듀엣인 줄 모르고 들었다면, 그대로 나윤의 솔로곡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잘 맞는 곡이었다. “어때?” 싸비 부분에서 자연스럽게 고음을 처리하고 다시 감정을 추슬러 마무리를 지은 뒤, 나윤은 이마에 땀이 흐르는지도 모른 채 단유에게 감상을 물었다. “좋네요.” 단답형의 대답에 나윤이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살짝 찡긋거렸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너 너무 대충 듣는 거 아냐?”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어떻게 들으면 혹평 중의 혹평일 수 있는 감상을 꺼내놓았던 단유였기에 살짝 긴장하고 있었건만, 단유는 유난스럽게 감동을 받은 표정을 짓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심각한 얼굴로 난색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윤은 별거 아닌 것처럼 넘어가려고 웃음을 지었다. “멜로디 라인은 대중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37…, 그러니까 좋은 멜로디라고 생각해요. 음… 이런 멜로디 라인에 리듬감을 주는 화성 악기들의 받침이 꽤 감상에 도움을 준다는 생각이 들어요.” 단유가 사뭇 진지한 태도로 손가락을 살짝 까닥거리면서 평을 늘어놓자, 나윤이 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곡의 전반에 흐르는 리듬은 확실히 최근의 유행과 유사한 진행을 보이네요. 솔직히 이런 리듬의 곡들이 요즘 많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멜로디 라인이 평범하게 구성되었다면, 다소 평이하게 들릴 수 있었을 텐데, 두 가지 요소가 곡의 분위기를 살리고 개성적인 곡으로 들리게끔 해주고 있어요.” 얼마 전에 보았던 단유와 지금의 단유가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는 멜로디인데요. 멜로디는 흔한 장르적 멜로디를 차용하는 대신 변주가 심한 마이너 조성의 멜로디를 이용해서 곡의 개성을 잡았다고 생각해요. 아마도 작곡가 분께서 이를 굉장히 염두에 두고 작곡하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요. 그리고 멜로디가 너무 처지게 들리지 않게끔, 베이스와 드럼의 비트를 잘게 쪼개서 넣은 전략도 나쁘지 않고요.” 단유가 마치 전문 음악 평론가에 빙의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아니, 어쩌면 원래 음악을 잘 아는 아이였을 수도 있다. ‘그럼 진심이 담겨있지 않다는 말도 사실이라는 거잖아?’ 새삼 단유의 지난 직설(直說)이 뒤늦게 가슴을 후벼 파는 느낌이었다. “또 하나는, 누나의 노래에요. 목소리가 또 하나의 악기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잘 어울릴 거란 생각은 못 했네요. 확실히 누나는 빠른 템포의 노래보다는 다소 느린 템포의 노래에 더 잘 어울리긴 하네요. 누나의 호흡이 조금 길다 보니까, 느린 템포에서는 오히려 장점이 되는 것 같아요.” 호흡이 길다는 말은 선생님에게 가끔 듣긴 했다. 그게 자신의 ‘쪼(습관)’라고 지적받긴 했는데, 그걸 단유가 알 리가 없으니, 아마도 이번에 노래 부를 때도 그런 ‘쪼’가 나왔고, 그걸 단유가 캐치한 것이리라. “그런데 이게 듀엣곡이라서 수련 누나도 같이 부를 거잖아요? 지금처럼 한 곡을 누나 혼자 부를 리는 없으니까. 그러면 또 어떻게 들릴지는 알 수가 없네요. 하지만 누나랑 수련 누나의 노래가 잘 어울리는 편이었으니까, 아마 같이 이 노래를 부른다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고 예상하네요.” 단유는 굳이 예상 가능한 차트 순위가 40위권 내,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우와, 너 정말 대단하다? 원래 노래 잘 안 듣는다고 하지 않았어?” “조금 관심을 두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사실은 듣는 동안 나름의 알고리즘으로 분석을 했다. 그리고 그 결괏값을 그대로 이야기해주는 게 가장 편하겠지만, 또 태호 때와 같은 반응이 나올까 봐 둘러 표현하느라고 공부한 지식을 모두 쏟아낸 단유였다. 나윤이 원했던 감상도 말했고, 더 길게 꺼낼 이야기도 없었던 단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할 말도 없는데 좁은 연습실에 둘이 있을 이유도 없었고, 계속해서 코를 자극하는 향기도 부담스러운 단유였다. “어, 왜?” 갑자기 일어나는 단유의 반응에 살짝 당황한 나윤은,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키며 ‘가려고요’라고 대답하는 단유의 반응에 얼굴을 붉혔다. 나윤은 대신 문을 열어주겠다고 손을 뻗었다가 단유와 부딪치자 얼른 손을 뺐다. 그런데 그 동작이 너무 격했던 나머지 팔꿈치가 벽에 세게 부딪혔다. “아야!” 저도 모르게 나온 비명에 단유의 시선이 내려갔다. “괜찮으세요?” 팔꿈치를 부여잡은 채, 민망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나윤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어, 괜찮아, 괜찮아.” 단유는 나윤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땀에 젖어 얼굴에 찰싹 달라붙은 머리를 조심스럽게 귀 옆으로 넘겨주었다. “무리하지 마세요.” 단유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문을 열고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고, 연습실에 홀로 남은 나윤은 음악 소리보다 더 크게 울리는 심장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왜 이러지?’ “아야.” 통증이 느껴져서 바라보니, 그새 팔꿈치에 파랗게 멍이 들고 있었다. “아프네.” 나윤은 팔꿈치를 문지르며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중얼거렸다. “무리하지 말라니, 무슨 말이지?” 나윤은 붉어진 얼굴로, 잠시 단유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자리에 서 있었다. **** 집으로 돌아온 단유에게 명수가 들러붙었다. “뭐 먹었어?” “응?” “저녁 먹고 온다고 했잖아? 너 높은 사람 만났다며? 그럼 맛있는 거 먹었을 거 아냐?” “그게 그렇게 해석되나?” “스테이크? 1등급 한우 꽃등심? 뭔데? 뭔데?” 단유는 잠깐 자신이 뭐 먹었더라,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답했다. “밥.” “밥? 야, 밥은 당연히 먹었겠지.” “진짜, 그냥 밥 먹었어. 밥이랑 반찬 나오는 한식이었어.” “진짜? 나가서 외식한 거 아냐?” “외식으로 한식을 먹었지.” “뭐야, 그게.” 김빠진 얼굴로 돌아서는 명수였다. “야, 넌 궁금한 게 그게 전부야?” “그럼 뭐가 더 궁금해?” 명수의 말에 단유는 볼을 긁적였다. “예를 들면, 계약을 한다거나 뭐 그런 거?” “안 했잖아?” “…어떻게 알아?” “계약했으면, 먼저 나한테 할 말 있다고 이야기를 해줬겠지.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려는 걸 붙잡은 사람이 나다.” “…가끔 말이야, 예전의 명수가 그리워져.” “무슨 소리야?” “예전의 명수는 이렇게 똑똑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야.” “나도 예전의 석고가 그립다.” “넌 또 무슨 소린데?” “예전의 석고는 날 이렇게 놀리지 않았을 테니까!” 명수는 단유의 목에 헤드락을 걸고 흔들었다. 단유도 웃음을 터뜨리며, 목이 붙잡힌 채 명수를 들어 올렸다. “어, 야야!” 명수가 화들짝 놀라 손을 풀자, 그제야 바닥에 내려놓았다. “얘들아, 밤에 조용히 해야지! 아래층 사람들에게 피해가잖니?” “네!” 두 사람은 히죽 웃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 [293] Sing for me(6) 하루가 다르게 아침 온도가 떨어지기 시작해 11월이 되자 마치 이제 겨울이라고 선언하듯 온도가 뚝 떨어져서 맨손으로 철봉을 잡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장갑이라도 가져올걸.” 명수가 엄살을 부리면서 손바닥을 문지르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는 늘 그렇듯, 묵묵히 자기 운동을 계속했다. “너 어제 보니까 힘 정말 세더라?” 장난 중에 자신을 번쩍 들어 올렸던 일을 거론하자, 단유는 철봉에서 손을 놓고 내려왔다. 손을 탁탁 털면서 어깨를 으쓱거리는 단유의 몸에서 하얀 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너도 계속 운동하면 나처럼 될 거야. 그러니까 웬만하면 내가 가르쳐 준 대로 호흡을 좀 하지그래?” “야, 그건 너무 어려워.” “어렵긴? 그냥 숨 쉬는 건데 뭐가 어려워?” “아, 몰라. 그냥 어려워.” 그냥 생각 없이 운동만 하기에도 벅찬데, 숨 쉬는 법까지 고려하면서 하려니 시쳇말로 ‘머리에서 쥐가 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걸 지키면서 하면 운동 효과가 더 좋다니까?” “그거 안 해도 충분하다고, 난. 타고난 몸이 좋아서 괜찮아.” 팔을 구부려 알통을 만들어 보이는 명수였다. 사실 명수도 또래에 비하면 몸이 많이 단련된 편이긴 했다. “근데, 단유야.” “응?” “너 혹시 격투기 같은 거 배워 볼 생각 없어?” “격투기? 왜?” 명수는 철봉 근처의 의자에 철퍼덕 앉아서 어깨를 빙빙 돌리며 말을 이었다.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그냥 이런 맨손 운동하는 것 보다는 그런 거 있잖아? 뭐라고 그러지? 막 관장님이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고, 그거 따라서 막 이렇게 하고.” “체계적으로?” “응. 그런 체계적으로 운동하는 거 어때?” “지금도 충분한데, 굳이 그런 걸 배워야 하나 싶다.” “그래도 기술 같은 것도 알면 좋잖아? 그러면 지난번처럼 싸움이 났을 때도 막 힘으로 안 하고 기술적으로 막 하면 막 좋잖아?” “막 좋을 것도 없고, 그런 기술 없어도 싸움은 안 하면 되니까, 상관없어.” “야, 싸움이 네가 하고 싶다고 하고 안 하고 싶다고 안 하냐? 옆에서 시비를 걸면, 하기 싫어도 하게 되는 게 싸움인데?” 단유는 명수를 흘겨보며 물었다. “너 최근에 싸운 적 있어?” “나? 아니, 난 안 싸우지. 알잖아? 우리 반에 누가 나한테 싸움을 걸어?” 썩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명수였다. 명수의 말처럼, 어지간해서는 명수에게 싸움을 거는 일은 드물었다. 일단 명수가 겉보기에도 몸이 크기도 했지만, 성격이 워낙 활달하고 교우 관계가 좋은 편이라서 아이들이 명수에게 중재를 맡기면 맡겼지, 시비를 거는 일은 없었다. 특히 명수는 시비를 만들 일이 없는 게, 먹는 것만 아니면 대부분 친구에게 양보를 하는 편이었고 고집을 세우는 일이 적었다. 단유가 다소 고집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가려는 경향이 있음을 상기해 보자면, 확실히 명수가 단유보다는 시빗거리로 고생할 확률이 적은 편이긴 했다. “나도 그래.” 명수랑 비교할 수 없지만, 단유도 최근에는 시비가 없었다. 시비 걸 사람이 없어졌다고 해야 옳겠다. 그 난리(?)를 피우고 동영상까지 뜬 마당에 누가 단유에게 시비를 걸까? “그런데, 왜 갑자기 격투기 타령인 거야?” “아니, 그냥. 진짜, 순수하게, 진심으로, 니가 체계적으로 운동하는 게 어떨까 해서 말했던 거야. 신경 쓰지 마.” 다른 운동도 많은 데, 왜 하필 격투기? 명수가 딴청을 피우며 자리를 피한 탓에 더 묻지는 못했다. 단유는 머리를 털고 다시 운동을 이어나갔다. 솔직히 격투기를 배워볼까 하는 생각은 초등학교 때 하긴 했었다. 그 당시에는 ‘종합 격투기’ 따위는 생각지도 못했고, 그저 잘 피할 수 있는 운동으로 ‘권투’를 고려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런 운동을 배우는데도 돈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이내 포기해버렸던 기억이 있었다. 돈을 들여가면서 꼭 배워야 할 만큼 절실하지 않았던 것도 한 이유였다. 그리고 그 이유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맞지만 않으면 되지 뭐.’ 단유는 운동법을 가르쳐준 디아트리에게 속으로 감사를 표하며 운동을 이어나갔다. **** 1학년 3반 교실이 뒤집힐 정도로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기쁨의 환호성이 아니라 놀람의 탄성이었다. 정작 그 놀람을 제공한 주인공, 단유는 아무렇지 않게 교탁 앞으로 나가 선생님 앞에 섰다. “너 요즘 무슨 일 있냐?” “아니요.” “정말?” “네.” “…그럼 나중에 수업 다 끝나고 잠깐 선생님이랑 이야기 좀 할까?” “네.” 단유는 선생님께 꾸벅 인사를 하고, 조용히 ‘성적표’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옆자리에 앉은 병수가 힐끔 보더니, 물었다. “너 진짜 공부 안 했어?” “봤잖아?” “어떡해?” “뭘 어떡해?” “이럴 때 위로해줘야 하는 거 아냐?” 단유는 피식 웃으며 병수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난 아무렇지 않아. 말했잖아? 등수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단유는 ‘3/315’ 라고 적힌 성적표를 곱게 접어서 가방에 넣었다. “솔직히 말하면, 위로를 해야 할지 아니면 축하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쉬는 시간에 언제나처럼 달려온 지태의 말이었다. “무슨 말이야?” “전교 1등을 놓친 것에 대해 위로를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공부를 하지 않고도 전교 3등을 하는 너의 무시무시한 능력에 축하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소리야.” “별말씀을.” “별말씀이라니! 솔직히 너 그런 식으로 나오면 너무 재수 없다고!” “최근에 재수 없다는 소리를 몇 번 듣긴 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재수 없는 게 맞는가 보다.” “헐. 그거 농담이라고 하는 거냐?”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쉬는 시간 다 됐으니까, 자리로 돌아가.” “알았다, 알았어.” 지태는 채윤과 자리로 돌아왔다. 채윤은 책을 챙기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단유는 언제나 그렇듯 담담한 표정으로 책을 보는 중이었다. 확실히 자신의 말처럼 단유는 전교 1등을 놓친 것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 같았다. “단유, 조금 변한 것 같지 않아?” “응? 뭐가?” “딱, 한마디로 정의하긴 어려운데, 조금…편해졌달까?” “야,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어? 친구가 편한 게 당연한 건데, 너, 그럼 지금까지 단유가 불편했다는 소리야?” “아니, 그런 말은 아니고.” 채윤은 말을 이으려다 말았다. 지태야 워낙 눈치가 없고, 또 친구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성격이라 단유의 딱딱한 성격에도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지만, 늘 조심하고 눈치를 보던 습성이 있던 채윤에게 단유는 다소 어려운 점이 있던 친구였다. 동갑이고 같은 교실에 있는 이였으니 ‘친구’라고 부르지, 만약 길에서 만난 낯선 이였다면 ‘동갑’이라고는 볼 수 없을, 그런 어른스러움이 있는 친구였다. 그런데 최근 중간고사도 등한시하고 뭔가에 매달리는가 싶더니, 조금 대하기 편해졌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단순히 전교 1등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좀 더 근원적인, 단유의 변화가 있었다고 보이는데 정확히 그게 무엇인지는 말로 꼬집어 표현하기 힘들었다. ‘말을 편하게 받아줘서 그런가?’ 말을 잘 들어주는 친구임은 분명했지만, 대화가 편한 상대는 아니었다는 ‘느낌’이 있던 단유였는데, 오늘의 단유는 뭔가 대화가 자연스러운 ‘느낌’이 있었다. 마치 또래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라고 표현하고 싶은데, 그렇게 표현하려니 그동안의 대화는 뭐였냐는 자문(自問)에 적당한 대답이 없었다. ‘느낌일 뿐이니까.’ 마침 선생님이 들어와서 교탁을 두드려 주의를 환기시키는 노력에 채윤은 단유에 대한 생각을 깊숙이 밀어 넣고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 “야! 단유야! 놀자!” 집에 돌아왔더니 상미가 대뜸 소리를 지르며 반겼다. “갑자기 뭐야?” “나 시험 끝났어! 놀자! 명수야! 놀자!” “그래! 놀자!” 역시 명수는 뜬금없는 상미의 제안도 반갑게 받아들였다. “노래방 갈까?” 명수는 며칠 전 시험 끝나고 갔던 노래방에서의 일이 기억에 남아 물었다. “오오! 괜찮은데? 난 니들 올 때까지 뭐 하고 놀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역시 인명수!” 두 사람은 거실이 울릴 정도로 파이팅 넘치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며칠 전에 갔다 왔는데, 또 가?” “뭐야? 니들끼리 노래방 갔었어?” 상미에게 명수가 사정을 이야기하자, 상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주먹으로 명수의 어깨를 툭 쳤다. “어쩔 수 없지, 그건. 그때 나 시험이었으니까. 오케이, 가자! 레츠 고!” 단유는 업이 잔뜩 된 상미를 보다가 물었다. “시험 잘 봤어?” 상미는 순식간에 얼굴을 마귀처럼 일그러뜨리며 단유를 노려봤다. “김단유! 안 본 사이에 너 왜 그렇게 못되졌어? 이번 시험 때는 공부도 안 가르쳐주더니, 이제 막 시험 끝내고 홀가분해진 마당에 그런 걸 묻기 있기야, 없기야?” 허리에 손을 얹고 콧김을 과장되게 뿜어내며 들이대는 상미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은 뒤, 상미의 어깨에 손을 올려 다가오는 것을 막았다. “형식적인 인산데, 뭘 그렇게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그래? 오늘은 널 위해서 시간 내줄 테니까 걱정 말고 나가자. 아, 명수야. 이번에는 동전 좀 많이 챙겨가자.” “어, 그래.” 단유가 다시 미소를 짓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상미가 방으로 들어가는 명수를 붙잡았다. “야.” “왜?” “단유, 쟤 왜 저래?” “뭐가?” “쟤, 좀 이상해졌는데?” “뭐가 이상해? 알아듣게 말해.” “넌 단유 안 이상해? 단유 변한 거 없어?” “없는데?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 나도 옷 갈아입고 나올게.” 명수마저 방으로 들어간 뒤, 상미는 거실에서 장부를 정리하고 있던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단유 쟤 좀 변하지 않았어요?” 선생님은 펜을 멈추고 잠깐 상미를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다? 잘 모르겠는데? 왜 어떻게 변했는데?” “애가…갑자기 착해졌어요.” ‘착해졌다’는 소리를 누가 들을까 봐 속삭여서 말하는 상미였다. 선생님은 피식 웃으면서 상미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주었다. “단유는 원래 착했어.” “아니에요. 아니, 착한 것도 있지만, 저렇게 착하게 말하는 애가 아니라고요. 맨날 나한테 뭐, 왜, 아니, 이렇게만 말하던 애란 말이에요.” “그럼 오늘 기분이 좋은가 보지.” “기분이 좋아요?” “그래. 상미를 오랜만에 봐서 기분이 좋은가?” “네?” 상미는 괜히 얼굴을 붉히며 뒤로 물러났다. “야, 가자.” 명수의 목소리가 상미의 정신을 깨웠다. 상미는 얼른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고는 명수에게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던 선생님이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조심해서 놀다 오라고 당부의 말을 전했다. **** “선생님.” “응?” “제 호흡이 그렇게 길어요?” “뭐?” 보컬 트레이너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나윤은 단유가 해줬던 말을 트레이너에게 전했다. “확실히 니 노래에 쪼가 있어. 그런데 걔 말대로 이런 노래에는 또 잘 맞아들어가는 것도 사실이지. 이야, 그렇게 들으니까 걔가 음악을 전혀 모르는 애는 아닌가 보네?” 옆에서 듣던 수련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때 단유가 그렇게 말했어?” “네.” “그리고 또 다른 말은 없었고?” “솔직히… 잘 기억이 안 나요. 뭔가 어려운 말들이 있었는데, 제가 기억력이 나빠서 그런지…. 그런데 우리 노래가 좋다고 했어요. 아, 그리고 언니랑 같이 노래 부르면 잘 어울릴 것 같다고도 했어요.” “그래? 흐음. 그건 좋은데? 우리의 공식 팬 1호가 좋다고 했으니 출발이 좋은 셈이잖아?” “그렇죠.” 수련이 잠시 나윤을 쳐다보다 물었다. “그런데 나윤아.” “네, 네?” “너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 “네?” “너 얼굴이 빨간데? 귀도 빨갛고?” “네? 그래요?” “누가 보면 머리랑 얼굴이랑 같이 염색한 줄 알겠어?” 나윤이 놀라서 연습실 벽에 붙은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한 뒤, 두 손바닥으로 뺨을 가렸다. “왜 이러지?” “왜 그럴까? 갑자기 왜 그럴까?” 수련이 능청스럽게 운율을 붙여가며 나윤을 몰아붙였다. 나윤은 죄지은 것도 없이 죄지은 사람마냥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돌렸다. “저, 잠깐만 바람 쐬고 오, 올게요.” 대답도 듣지 않고 연습실 밖으로 뛰어나가는 나윤이었다. “쟤 왜 저래?” 트레이너가 그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리자, 수련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튼, 저 나이 때 애들이 다 저래요.” “응?” “연습생들 보면 다들 저렇게 놀더라고요.” 특히 나윤은, 수련이 보기에 순진함으로는 1등급 수역에 사는 생물이었다. “이거 남의 귀한 팬, 뺏기는 거 아냐?” 수련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흐뭇한 마음으로 원기회복하여 다시 연습을 매진해야지, 다짐해보는 수련이었다. ======================================= [294] Defuser(1) 단유가 전교 1등을 놓친 일은 단유 본인에게는 별거 아닌 문제였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보통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오랜만이시네요?” 하교 중이던 단유에게 걸려온 전화는 다름 아닌 주영이었다. 최근 주영은 갑자기 바빠진 탓에 단유와 명수를 자주 보러 오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한 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혹시 요즘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선생님께 듣기는 했는데, 그래도 혹시 몰라서 말이야. 만약 선생님한테도 말하기 힘든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 전화했어. 일 핑계로 바쁘다고 자주 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이런 말 하는 게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그래도 걱정이나 고민이 있으면 이야기해주지 않을래? 단유는 담담하게 별일 없노라고, 잠깐 다른 ‘재미있는’ 일에 매달리는 바람에 시험공부를 하지 않아서 그랬다며 사정을 이야기했다. “혹시 누나는 제가 계속 전교 1등을 하는 걸 바라시는 건가요?” ―뭐? 아냐, 아냐. 그런 건 아니지. 굳이 전교 1등 같은 거 안 해도 학교생활 잘하고, 다른 아이들처럼 꾸준히 공부만 한다면 내가 뭐라고 터치하겠어? 그냥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한 거니까. …설마 내가 전화해서 귀찮다거나 간섭당하는 거 같아서 불편하다거나 한 건 아니지? “그런 거 없어요. 오랜만에 누나 목소리 들으니까 좋기만 하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전교 1등 놓쳐 보는 건데 그랬어요.” 단유의 농담에 마음이 풀렸는지, 주영의 목소리도 느슨하게 긴장감이 사라졌다. ―얘는 무슨 농담도. 굳이 할 필요는 없어도 하면 좋잖니? 남들은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게 전교 1등이란 타이틀이잖니? “누나는 전교 1등 하니까 좋았었나요?” ―나? 나는 뭐, 나쁘진 않았어. 그런데 내가 당시에는 욕심이 별로 없어서 금방 놓았지만 말이야. “저도 그래요. 별로 1등 자리에 연연하고 싶지도 않고, 아직은 제가 하고 싶은 공부 마음대로 하면서 지내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그럼, 그래도 되지. 너라면 뭘 하든 믿음직스러우니까 괜찮아. 웃음이 섞인 목소리 뒤에 ‘그래도 명수는 공부 계속하도록 해야 돼’ 라는 말을 덧붙였다. “재훈이 형은 잘 지내나요?” ―아마도? 요즘 실습 2년 차라던가? 게다가 시험도 있어서 아마 정신없을 거야. 그러고 보면 참 사람이 무신경하다, 그치? “지금이 한참 바쁜 시기라고, 지난 봄에 말씀하신 적 있잖아요. 괜찮아요. 저희는.” ―그렇게 이해해 주니까 고맙네. 몇 마디 사담이 더 오간 뒤에 단유는 핸드폰을 명수에게 건넸다. “안녕하세요.…예. 공부 잘하고 있어요. …아뇨, 굳이 와서 검사하실 필요는 없어요.” 통화가 끝나고 명수가 히죽 웃으면서 핸드폰을 건넸다. “왜?” “다음에 오면 스테이크 사준대.”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단유의 성적 하락(?)이 미친 영향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단유의 전교 성적이 떨어진 와중에도 반 1등을 놓치지 않는 기염을 토한 덕분에 줄곧 반 2등을 놓치지 않던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의 등짝을 한 번 때렸고, 처음으로 전교 1등을 차지한 아이의 어머니는 전화기에 불이 나도록 전화를 돌렸다. “엄마, 그러지 마.” “뭘 그러지 마? 사람들한테 다 알려놔야 우리 아들이 다음에 또 전교 1등 하려고 기를 쓰지 않겠어?” “그렇게 한다고 나 1등 못해.” “어머? 얘 좀 봐? 그렇게 자신감이 없어서 어떡해?” “들어보니까, 이번에 단유 걔, 전혀 공부를 안 해서 그렇대.” “걔가 앞으로도 공부할지 안 할지 어떻게 알아? 그리고, 한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 전교 1등 하는 거 안 어려워. 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이제부터는 니가 계속 전교 1등 하는 거야. 아, 엄마가 내일 너네 반에 피자라도 사서 갈까?” “엄마!” “그래, 그래야겠다. 너희들 피자 같은 거 좋아하지?” “엄마!” “조용히 해봐, 엄마 계속 전화 좀 하자. 넌 들어가서 공부해.” 아이는 현실을 모르는 엄마가 답답했고, 이럴 줄 알았으면 전교 1등 하지 않는 건데, 라며 후회를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이는 답답한 마음에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책상의 책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책을 접어 책장에 꽂아 넣은 뒤, 할 수 있는 한 가장 힘차게 침대를 향해 몸을 던졌다. 쿠션의 반탄력에 살짝 몸이 튕겼다가 떨어진 아이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 아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단유 네 반을 직접 찾아갔다. “나 한경재라고 이번에 니 덕분에 전교 1등 했어.” “…축하해. 그리고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들었어. 니가 이번 시험 준비 별로 안 했다고. 그런데 물어볼 게 있어서.” “뭐?” “다음 시험 때는 공부 할 거지?” “응?” “다음, 그러니까 2학기 기말고사 때는 다시 전교 1등 할 거지?” “그건 모를 일이지.” “그냥 니가 전교 1등 해라.” “응?” “다른 사람이 1등 하면 내가 공부를 안 했다는 소릴 듣지만, 니가 1등 하면 그런 소리 들을 일 없으니까, 제발 1등 해라.” 아이는 손에 들고 있던 피자 한 상자를 단유에게 건넨 뒤, 건투를 빌며 자리를 떠났다.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며, 아이의 뒷모습을 보다가 반으로 돌아와 아이들에게 피자를 주었다. 얼마 안 되는 피자가 치열한 경쟁 끝에 아이들의 손에 갈가리 찢겨서 분쇄되다시피 조각난 채, 입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리고 단유의 소식을 들은 또 한 사람, 상미가 달려왔다. “너 전교 1등 못했다며?” “그런데?” “왜 이야기 안 했어?”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그래?” “우리 엄마가 니 걱정 하더라.” “너희 어머니가 왜 걱정을 해?” “나 때문에 너 성적 떨어진 거 아니냐고. 아니지? 내가 놀러 와서 공부 방해한 거 아니지? 아니면 아니라고 우리 엄마한테 이야기해줘. 엄마가 이제 니네 집에 자주 가지 말래.” 단유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나 때문 아니지? 그치?” “아니야.” “알았어.” 상미는 단유를 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너 요새 무슨 일 있어?” “무슨 일? 전교 1등 떨어진 일 말고 또 다른 일이 있어야 돼?” “설마 전교 1등 놓쳤다고 이럴 리는 없는데.” “무슨 말이야?” 상미는 아무래도 친절해진(?) 단유의 태도가 조금은 어색하고, 조금은 부담스러워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런데 너 어디 가?” “아, 호빵 산책이나 시키려고.” 단유는 마침 들고 있던 목줄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같이 갈까?” “너 게임 하러 온 거 아냐? 명수가 오늘 학교에서 올 때부터 벼르고 있던데?” 상미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대답했다. “솔직히 내가 봐줘서 그렇지, 걔가 나한테 상대가 안 돼. 지가 벼른다고 이길 수나 있겠어? 아, 비교하면 그런 거야. 내가 너 같은 거지.” “무슨 비교가 그래?”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전교 1등을 할 수 있지만, 일부러 안 한 거잖아? 나도 얼마든지 명수를 이길 수 있지만, 일부러 한 번씩 져주는 거야. 그래야 명수가 날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덤비지. 난 말이야, 만만한 상대로는 만족할 수 없다고.” 확실히 이럴 때 보면, 상미는 남자 같은 성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부분에서는 모르겠는데, 게임에 있어서만큼은 남자처럼 허세도 부리고 어깨에 잔뜩 힘을 주기도 했다. “둘이서 놀아. 나 혼자 잠깐 주변 돌다 올 거니까. 가자.” 말하는 사이 호빵의 목에 줄을 채운 단유는 호빵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호빵은 혀를 빼물고 깡충깡충 복도를 뛰어다니면서 기분이 좋다는 표시를 했다. 단유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호빵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확실히 사람들을 분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호빵이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단유를 올려다보았다. “넌 그냥 뛰고 싶을 때 뛰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잖아? 니 행동은 어느 정도만 관찰해도 이해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겠는데, 사람은 그게 어렵다는 소리야.” 호빵이 흥 하고 콧김을 내뿜으며 머리를 살짝 털어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호빵이 먼저 안으로 뛰어들었고, 그 뒤를 단유가 천천히 움직여 들어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소음이 나직하게 울리는 가운데, 단유가 혼잣말을 하듯 호빵에게 말을 건넸다. “상미 쟤도 알고 보면 착한 구석이 있어? 그치? 자기 엄마 핑계 대면서 저렇게 이야기하는 거 보면 말이야.” 아마 상미네 어머니 역시 단유가 전교 1등을 놓쳤다는 이야기는 들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상미가 이야기한 것처럼 상미에게 단유네 집에 놀러 가지 말라느니, 상미 때문에 성적이 떨어졌느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미는 엄마 핑계를 대면서 단유의 마음을 떠보려 했던 것이고, 이를 단유가 알아챈 것이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대화하는 게 사람들의 마음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긴 하네.” 계속된 단유의 말에 호빵이 또다시 흥하고 콧김을 뿜어냈다. 짖지 못하는 호빵의 습성이었다. 단유는 호빵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햇살 비추는 거리에 나온 호빵이 신나게 거리를 뛰기 시작했다. **** “저요? 괜찮아요?” “위에서는 괜찮다고 하는데, 니 의사가 중요하지.” 모처럼 집으로 찾아온 태호는 식탁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단유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듀엣곡 나온 지 얼마 안 되지 않았어요? 벌써 활동하려는 거예요?” “뭐, 이번에 사활을 걸기도 해서 단단히 준비하고 나가는 게 좋긴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시간만 잡아먹고 있을 순 없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급한 편도 아니야. 뮤직비디오 찍는다고 바로 방송하고 활동하는 건 아니니까.” 뮤직비디오를 찍고 편집하고 공개를 한다고 해도 그 시간만 따지면 한 달 이상이 걸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 회사에서 듀엣 출격 날짜를 12월로 잡고 있었다. 특별히 계절을 타는 노래는 아니지만, 아련한 감성의 미디엄 템포 댄스곡임을 감안하면 12월에 불러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작전도 있었다. “예전 같으면 12월에 새 곡을 내는 경우가 드물었어. 아무래도 연말 분위기도 있고, 크리스마스라는 최대 이벤트가 끼어있는 달이다 보니 다른 노래가 나와도 묻힐 확률이 높았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요즘은 크리스마스라고 해도 별로 그런 분위기가 잘 나지 않는 사회 분위기다 보니, 오히려 이런 때에 음원을 내서 빈집을 노려보자는 전략이 먹힐 것 같기도 해.” 단유는 ‘네’하고 짤막하게 대답을 했다. “아무튼, 위에서는, 특히 박 이사님이 너를 뮤직비디오에 쓰는 게 나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하더라. 지난번 뮤직비디오에서는 신비감을 가진 소년의 이미지였다면, 이번에는 제대로 남성미가 묻어난 여린 소년을 연기해달라는 주문이 있었고. 이 두 개가 어떻게 어울리냐 했더니, 너를 지목하더라고.” 단유는 박 이사의 제안이 지난번 대화의 연장선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박 이사라는 분은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던지지 않았다. 살짝 꼬아서 간접적으로 메시지를 알아듣게 하는 화법을 구사하는 이라는 것을 느꼈고, 그런 화법에 뭔가 감추려 하는 의도가 숨어 있다는 사실도 느꼈던 단유였다. 좀 더 많은 대화를 통해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면 좋겠지만, 박 이사는 정보를 꺼내야 하는 대화는 의식적으로 피하는 경향이 있어서 깊이 있게 알아내기 어려웠다. “박 이사님의 지지가 있다 보니, 지난번 일은 우리 회사 내부에서 없던 것처럼, 뭐 그렇게 흐지부지 덮기로 했는데, 사실 니가 가장 큰 피해자였으니까, 당연히 이렇게 네 의견을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해서 내가 직접 온 거야. 그런데 형이 왔는데, 명수는 왜 얼굴을 안 보이는 거냐?” “명수는 축구부 활동 때문에 늦을 거예요.” “아, 다리 다 나았구나?” “네.” “이제 곧 겨울인데, 축구부 활동이 가능하냐?” “사실, 추계대회 시합도 2번째 시합에서 지는 바람에 더는 없고요. 그래서 대신 내년 봄을 대비해서 훈련을 받기로 했대요.” “벌써 봄을 준비해? 이야, 중학교 축구부도 빡세구나.” 앞에 놓인 물을 살짝 마신 태호가 단유를 힐끔 보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듀엣곡 들어봤다며?” “네.” “괜찮았다며?” “네.” “…솔직히 말하면 아직은 반신반의이긴 한데, 그래도 니가 그때 이야기한 알고리즘인가, 뭐 있잖아? 그걸로 분석해봤어?” 단유는 볼을 긁적이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럼 니 예상에 이번 노래는 어떻게 될 거 같아?” 태호는 아기동자가 빙의한 무당 앞에서 점을 보는 마음으로 질문했다. ======================================= [295] Defuser(2) “굳이 노래만 따지자면, 제 생각에는 충분히 차트 중위권 정도는 오를 정도의 수준이라고 생각해요.” “중위권?” 애매한 얼굴이 된 태호가 눈을 껌뻑거리며 단유의 대답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단유는 조금 더 보충해서 태호의 이해를 도왔다. “제가 들은 건 나윤 누나가 부른 노래예요. 그래서 수련 누나와 같이 불렀을 때의 노래는 듣지를 못해서 정확하진 않아요. 더 오를 수도 있고요….” “그런데, 중위권이라는 게 무슨 말이야? 노래가 좋다는 거냐, 아니면 안 좋다는 거냐?” 역시나 태호는 다른 부차적인 설명은 차치하고 결론만 듣고 싶어 했다. “좋아요.” “좋아?” “네.” “그런데 왜 중위권이야?” “좋은 노래가 모두 상위권을 차지하는 건 아니라는 말, 예전에 형이 직접 하신 이야기잖아요?” “…그거는 다른 문제지. 아무튼, 니 말은 좋은 노래인데 상위권을 차지할 정도로 좋은 노래는 아니다?” 단유는 긍정도 부정도 표시하지 않았다. “형이 원하시는 대로 답만 드리자면, 이 노래는 두 가지 조건에 따라 성적이 달라질 거예요.” “그게 뭔데?” “하나는 나윤 누나와 수련 누나의 조화예요. ‘케미’라고 하던가요? 두 사람의 시너지가 어느 정도로 발휘되느냐가 관건이겠죠.” 그건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듀엣뿐만 아니라 걸그룹도 그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멤버들 간의 시너지가 어떻게 폭발하느냐에 따라 그 그룹의 흥망성쇠가 결정된다고도 하니까. 아기 동자의 말씀을 경청하던 태호의 등이 서서히 펴지면서, 단유와의 시선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그 행동은 태호가 단유의 말에서 흥미를 잃어가는 중이라는 뜻이었다. “두 번째는….” “두 번째는?” 단유는 텅 빈 거실로 시선을 던졌다. 단유의 시선을 따라 움직인 태호는 특별한 무언가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단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형이 가져온 저 게임이요. 사실 저는 저 게임을 몇 번 해보지 않았어요. 그런데, 저 게임 CD 한 장에도 수많은 사람의 노력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알았거든요? 어떤 회사는 게임 하나를 만들기 위해 수년을 투자하고 개발한다고 하고요, 어떤 사람들은 빚까지 지면서 게임을 만들기도 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게임들이 매년 쏟아지고요. 그런데 그 게임 중에서 소비자의 선택을 받는 게임들은 소수라고 하더라고요. 저기 있는 저 게임도 요즘 가장 인기 있는 게임이라고 해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지 태호는 감이 오지 않았다. 단유는 답답함을 느끼는 태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 밑에 작은 떨림부터 시작해서 무의식적으로 턱 근육을 움직여 턱 아래가 울룩불룩해지는 모습, 긴장으로 꿀렁거리는 목울대의 움직임도 눈에 담았다. “게임의 질을 높이는 것은 개발비이지만, 게임의 판매를 돕는 것은 마케팅 비용이라고 하더군요? 마케팅은 노래 외적인 영역에서도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저의 알고리즘에 마케팅은 포함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아직 그 부분까지 확실하게 계산할 수 있는 제반 요건들이 계산되지 않아서요. 하지만 그것만은 인정해요. 마케팅 비용이 추가될수록 차트 순위가 올라간다고요.” 다만, 마케팅이 노래를 좋게 바꿔주는 것은 아니었다. 노래 자체는 대중들이 열광할 정도의 노래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걸 차트에 반영하게 되면, 계산상으로는 중위권, 정확히는 40위권과 30위권 사이까지 오를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마케팅이라는 이름으로 투자되는 홍보 비용에 따라 해당 노래는 차트에서 위로 올라갈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홍보 비용이 노래의 질을 결정해주지 않는 것처럼, 오랫동안 차트에 머무르게 해주진 못했다. 그래서 오히려, 노래 자체의 질적 향상이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니 말은, 결국 회사가 홍보를 잘하면 순위가 올라갈 거란 뜻이잖아? 에이, 그런 건 나도 말하겠다.” 단유는 멋쩍은 웃음을 던졌다. “그렇죠? 사실 별거 아니죠.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별거 아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그걸 형네 회사, 에이바운스는 안 했더라고요?” 태호는 어, 하고 입을 벌렸다. “갤럭시즈 관련해서 제가 자료 조사 차원에서 인터넷을 뒤져봐도 특별한 홍보 활동이 거의 없더라고요? 굳이 비교하면, 지스탑 엔터테인먼트인가? 거기의 브룸레이디(Broom lady)라는 그룹과 거의 비슷한 정도랄까?” 태호는 브룸레이디라는 그룹이 있는 줄도 몰랐다. 같은 업계에 있는데도 모르는 이름의 걸그룹을 단유가 언급한 것도 황당한 일이지만, 그런 그룹과 비교될 정도로 회사의 지원이 적었던가를 떠올려보니 딱히 대꾸할 말이 없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겠죠. 나윤 누나가 유명한 작곡가님에게 곡을 받은 거라고 자랑을 워낙 해서요.” 유명 작곡가, 라는 타이틀이 이미 홍보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에이바운스가 여타의 기획사들 정도의 홍보 활동을 한다고 가정한다면, 단유가 들은 노래 역시 계산에 맞게 30위권 정도까지는 오를 수 있으리라. “아, 그런데 그 노래요. 제목이 뭐예요? 누나도 아직 결정이 안 됐다고 그러던데.” “그거.” 태호는 정신을 수습한 뒤 대답해 주었다. “리모트(remote)” **** “뭐 하세요?” “응? 기획서.” “우와, 기획서 쓰는 모습 처음 보는데?” “저기요, 저도 기획서 몇 번 썼었거든요? 저도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거든요?” “누가 뭐래요? 열심히 하세요.” 여직원이 웃음을 던지며 태호의 곁을 지나갔다. 하지만 저 여직원은 아직 모르리라. 자신이 쓰는 기획서가 통과만 된다면, 저렇게 웃으면서 여유롭게 걸어 다닐 시간이 없어질 것이란 걸. “두고 봐라.” 차라리 잘 됐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참에 회사에서 놀고먹는 것들―물론 그들도 나름 자기 일을 하고 있겠지만, 태호의 성에 차는 모습은 아니었다―제대로 일할 수 있게 만들겠다는 다짐을 하며 기획서 작성에 박차를 가했다. 인터넷을 뒤져가며 기획서 양식부터 해서 기획서 쓰는 법을 수없이 검색한 뒤에야 겨우 쓰기 시작한 이 글이 언제 마무리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태호가 모처럼 일다운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이를 갈 때, 나윤과 수련 역시 이를 갈고 있었다. “안 돼, 다시.” 두 사람은 온몸으로 땀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특히나 데뷔가 코앞으로 다가온 터라 나윤은 부쩍 수척해진 상태였다. 제대로 식사도 못 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자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성공적인 데뷔를 꿈꾸며 억지로 버티고 있는데, 불행하게도 두 사람이 맞춰야 할 안무는 지금 벌써 4번째 수정이 된 판국이었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이동해야지. 정신 안 차릴래?” 안무 선생님은 나윤을 호되게 질책하며 다시 음악을 처음으로 돌렸다. “수련이 너도 동작 크게 해야지? 두 사람이 무대를 책임져야 하는데, 그렇게 동작을 작게 하면 누구 눈에 보이겠어? 더 크게 뻗으란 말이야.” “네, 선생님.” 다시 음악이 시작되고, 나윤은 무릎이 후들거리는 느낌을 무시한 채 격하게 손과 발을 움직였다. 서정적인 멜로디라인과 다르게 안무는 리듬에 맞춰서 조금 격하게 움직이도록 만들어졌다. 속으로 ‘이러면 라이브는 불가능한 거 아닐까’라고 생각했는데, “라이브는 가수의 생명이지.” 라는 박 이사의 한 마디에 생고생을 다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럴 때 수련이 정말 대단하다고 여긴 것은, 그런 격한 안무에도 라이브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어지간히 단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것 같은 모습이어서 더욱 수련을 존경하게 된 나윤이었다. 나윤의 존경을 받는 수련은, 수련 나름대로 고생 중이었다. 나윤은 본인이 워낙 훈련되지 않은 덕에 라이브로 노래하는 것이 어려워서 그렇다지만, 훈련된 수련도 억지로 노래를 부르는 실정이었다. 특히 고음 부분에서는 음정이 자꾸 플랫이 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명히 이런 점을 고려해서 안무가 두 번째로 수정되었을 때는 노래를 부르기가 편했는데, 안무가 너무 평이하다는 지적 때문에 수정이 되면서 점점 노래하기가 벅차지고 있는 것이었다. “안 되겠다. 10분간 휴식.” 레슨 선생님의 선언에 맞춰 동시에 바닥으로 풀썩 쓰러지는 두 사람은 마치 젖은 나뭇잎처럼 고동색 바닥에 붙어서 미동도 하지 않고 숨만 쉬었다. “언니, 저만 힘든 거 아니죠?” “나도 힘들어.” “이러다가 데뷔하기 전에 병원부터 갈 거 같아요.” 수련이 슬쩍 눈동자를 돌려보니, 말만 그런 게 아니라 얼굴색이 창백한 게, 여간 위험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너 얼굴 너무 안 좋다. 혹시 어디 아픈 데 있어?” “…사실은요.” 수련은 혀를 찼다. 하지만 지금은 도울 방법이 없었다. 평소 생리통을 심하게 앓던 지수도 연습할 때는 다른 핑계 없이 연습에 몰두해야 했었다. “진통제는 먹었어?” “먹긴 했는데, 조금 힘드네요.” 생리통의 통증은 줄일 수 있을지 몰라도, 격한 안무 연습으로 인한 체력 저하가 가져오는 복합적인 통증은 약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리라. “이럴 때 남자 친구가 와서 위로해주면 좋을 텐데. 그치?” “남자 친구요?” “남자 친구 없어?” “…없죠.” “없구나. 그럼 단유 불러줄까?” “네?” 창백했던 나윤의 얼굴에 붉은 기가 돌았다. “갑자기, 왜 단유를 불러요?” “글쎄다. 그런데 단유 생각만 하면 얼굴이 빨개져?” “…놀리지 말아요. 힘없어요.” 나윤은 다시 바닥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잠시 그러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단유 걔요. 우리 뮤직비디오에 나온다면서요?” “응, 출연하겠다고 태호 오빠한테 이야기했다던데?” “…단유 걔요. 좀 남다른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뭐가?” “그냥, 타고난 연예인이랄까? 뭔가 저보다 어리게 느껴지지 않고요, 좀 우러러보게 하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막 아우라가 느껴지고 그래?” “비슷해요.” 수련은 연습실 천장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왜요?” “나도 걔 처음에 만났을 때, 조금 비슷한 생각을 했어.” “처음에요?” 수련은 두서없이 단유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을 꺼내놓았다. “…로비에서 걔를 딱 보는데 주위 사람들과 상관없이 어떤 아우라 같은 게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 있는 거야.” 나윤은 어느새 몸을 돌려 수련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눈 속을 헤매던 이야기가 나올 때쯤, 안무 선생님이 손뼉을 치며 들어왔다. “자자, 다시 연습하자.” 수련은 얼른 상체를 일으켜 세운 뒤, 수련에게 찡긋거려 보였다. “나중에 숙소가서 다시 이야기하자.” “네.” 나윤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여전히 다리가 후들거리는 느낌이 있지만, 그래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더니 무거웠던 기분만큼은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자, 이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조종한다는 설정으로, 이렇게 수련이가 이쪽으로 이렇게 손을 뻗으면, 나윤이 니가 안무팀이랑 같이 이렇게 동작을 하는 거야. 그리고….” 레슨은 자정이 지나고, 새벽별이 떴다가, 새벽달이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 11월 중순이 되자, 성급한 사람들은 겨울철에나 입을 법한 두꺼운 코트를 꺼내 들 정도로 날이 추워졌다. “이게 다 온난화 때문이야.” 라는 말을 누구나 한 번씩 입에 주워 담을 정도로 유행이 되었고, 유행에 맞춰 사람들의 복장도 두터워지고 겹겹이 쌓이기 시작했다. “명수야!” “저, 진짜 괜찮아요. 진짜로요.” “안 돼. 추워.” “그래도 이건 너무…갑갑해요.” 명수는 목에 머플러를 둘러주려고 하는 선생님의 손길을 피하기 바빴다. 속마음이야 겨울도 아닌 가을에 아줌마들이나 하는 머플러를 목에 두르는 게 창피하다는 것이었지만, 이를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어 그저 갑갑하다고 둘러댈 뿐이었다. 반면 단유는 얌전하게 머플러를 두르고 명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명수야.” “응?” “포기하면 편해.” “야!” 이후 두 사람은 정답게 머플러를 하고 등굣길에 올랐다. “안 풀 거야?” “응.” “진짜?” 명수의 채근에도 단유는 고집스럽게 머플러를 하고 길을 걸었다. 명수는 풀까 말까를 심각하게 고민하면서도 풀지 못해 손만 왔다 갔다 하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안 했으면 모를까, 했으면 하고 가야지. 그게 선생님에 대한 예의지.” 명수의 말에 단유가 싱긋 웃었다. “그런데 이거 말야. 난 예전부터 목도리 같은 게 하기 싫더라?” “그러고보니, 넌 예전에도 목도리 잘 안 하고 다녔구나.” 단유의 말에 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 목도리 같은 걸로 목을 두르는 게, 마치 목을 조르는 기분 같고, 그런 느낌 있잖아. 뭔지 알겠지?” “느낌은 잘 모르겠고, 그냥 니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는 알겠어.” “이상하게 막 목이 졸리는 기분이야.” 명수는 머플러를 푸는 대신, 조금 느슨하게 목을 죄도록 하였다. 단유는 그런 명수를 바라보다가 앞으로 시선을 향했다. 신호등 건너편에서 손을 흔드는 지태와 채윤이 보였다. “쟤는 뭐가 좋다고 저렇게 손을 흔들고 그래?” “쟤네들 코트 입었다.” “어, 그러네? 지태는 벌써 겨울이다, 겨울.” 두 사람은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가 건넜다. 네 사람이 다정하게 등교를 하는,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 [296] Defuser(3) 추워진 날씨 탓에 사람들은 모두 앞섶을 꼼꼼하게 싸매고 빌딩 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느라 고개를 숙인 채 거리를 걸었다. 더러 가볍게 옷을 입었던 이들은 얇은 재킷으로 막을 수 없는 추위 탓에 볼이 빨갛게 부풀기도 했다. “안 춥니?” 카페 안에서 따뜻한 모카향을 맡으며 커피로 입을 적시던 갈색 머리의 중년 여자가 손을 들어, 방금 들어온 이를 맞이했다. “당연히 춥지.” “그런데 옷을 왜 그렇게 입고 나왔어.” “내 말이. 애들 옷은 그렇게 챙겨 입혔으면서 정작 나는 이러고 나왔다.” 보통의 가을 계절이라면 적당히 어울릴 법한 베이지색의 트렌치코트를 입고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단유네 보육 선생님인 ‘김희정’ 이었다. “일은 할 만하고?” “할 만하지.” 어느새 애들과 2년여를 함께 지냈다. 유치원교사로 시작해서, 어린이집과 공립 보육원에서 경력을 쌓은 희정은 우연히 지인의 소개로 일자리를 소개받았다. “너 처음에는 할까 말까 고민 되게 많이 하더니, 그래도 꽤 오래 일한다?” 희정은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확인하며 말했다. “나도 이렇게 오래 일할 줄은 몰랐어. 그런데 생각보다 편하고 좋더라고. 애들도 말 잘 듣고.” 화장을 고치던 희정은 잠시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두 아이를 맡아서 하루 20시간 이상을 함께 보내야 한다는 점이 굉장히 불편하다고 여겼었다. 그래도 당시로서는 꽤 큰 보수를 제시한 주영의 제안을 쉽게 거절하기 어려웠기에 며칠 정도 일 해보고 결정하겠다고 해서 시작된 일이었는데, 결국 2년을 넘게 일하는 중이었다. 이렇게 큰 애를 돌본 적이 없었던 희정은 솔직히 걱정이 많았지만, 걱정보다 아이들이 얌전하고 착해서 별문제는 없었다. 가끔 단유가 대답하기 난감한 문제들을 들고 올 때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그런 일도 줄어서 특별히 신경 써야 할 일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여름인가, 봄인가 그때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 카운터에 가서 주문하고 돌아온 친구의 물음에 희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난리도 아니었다. 애들은 아무 일 아니란 듯이 지내는데, 그 후원자 쪽에서 매일 전화하고 애들 어떻냐고 묻고 하는데, 나도 진이 다 빠지더라고. 학교 찾아가서 담임 선생님도 만나고, 변호사 찾아와서 이야기도 해야 하고, 정말 그때가 제일 정신이 없었지. 뭐, 그래도 돈의 힘이 크긴 크더라. 비싼 변호사 쓰니까, 금방 일이 해결되더라고.” 아무렴, 역시 우리나라는 돈만 있으면 안 될 일이 없지, 라며 대꾸하던 친구가 ‘주문 나왔습니다’라는 소리에 일어나서 커피를 가지러 갔다. 그 사이, 잠깐 실내를 둘러보니 아직 이른 오전이라 그런지 카페에는 사람이 없었다. 페인트를 칠하지 않은 거친 질감의 회색 벽과 주황색 LED 핀 조명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인테리어가 눈에 띄었다. “자, 여기.” “고마워, 잘 마실게.” 희정은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니, 남았던 추위가 싹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왜 보자는 거야?” 희정은 친구를 보며 물었다. “갑자기는 무슨. 나도 간만에 시간이 나서 얼굴 좀 보자고 부른 거지. 솔직히 너야 시간이 널널할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거든? 다른 사람들을 네 기준에서 보지 말라고.” “알았어. 그냥 이유 한 번 물어본 건데, 뭘 그렇게 민감하게 받아치고 그래? 아무튼, 전화로만 이야기 나누다가 이렇게 얼굴 보니까 반갑네. 넌 하나도 안 늙은 것 같다?” “안 늙긴. 내 나이도 이제 내후년이면 50이야. 시간 가는 게 빠르다고 느꼈지만, 점점 빨라지는 거 같아. 엊그제 결혼한 거 같은데, 벌써 애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더라니까?” “아, 애가 벌써 초등학교를 들어갔어? 시간 정말 빠르다? 그때, 어린이집 있을 때 결혼하지 않았었나?” “그게 벌써 15년 전이다.” 희정의 친구인 숙희는 희정이 어린이집에서 근무할 때 만난 동갑내기 친구였다. 처음 만났을 때는 동갑이라서 쉽게 친해진 것도 있었고, 숙희가 결혼을 준비할 때, 희정이 많이 도와주면서 더욱 친해진 것도 있었다. 결혼을 서른이 넘은 나이에 한 숙희는 일 때문에 아이를 늦게 갖길 원했고, 그래서 첫 아이는 결혼 3년 차에 태어났다. 그 시기에 희정은 이미 다른 어린이집으로 옮겼었는데, 숙희의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이를 축하하려고 일부러 시간을 빼서 숙희를 만나러 올 정도였다.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빠르긴 하다. 그럼 지금 몇 살이지? 12살인가?” “나이는 그런데, 생일이 빨라서 지금 초등학교 6학년. 내년에 중학교 들어가.” “동우 많이 컸겠네? 건강하지?” “그럼.” 숙희는 모카커피에 입술을 대고 한 모금을 마신 뒤,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넌 어떠니? 어린이집에 있을 때보다 수입이 배로 늘었다며?” “일하는 시간이 두 배니까, 당연히 수입이 두 배로 느는 건 당연하지.” “야, 그래도 거기서는 일지 쓰는 일은 없잖아? 장기자랑 준비한다고 옷 만들고, 노래 편집하고 하는 일 안 하지?” “그런 건 없지.” “그러니까, 완전히 놀면서 돈 버는 중이란 거잖아?” 부러움이 가득 담긴 숙희의 말에 희정은 부정하지 않고 같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러우면 너도 얼른 일 찾아.” 한 달 전, 통화했을 때, 일을 그만두었다는 숙희의 말을 기억해낸 희정은, 숙희가 일이 없다 보니 자신의 직장을 부러워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에휴, 나도 얼른 일을 찾아야 하는데.” 혼잣말하듯 꺼내는 숙희의 말에, 희정이 피식 웃다가 잠시 갸웃했다. “일이 급해? 신랑은 뭐하고?” “우리 신랑? 요즘 일이 좀…힘든가 봐.” 숙희의 낯빛이 어두워지는 걸 보니, 어쩐지 말을 잘못 꺼낸 것 같았다. 그리고 혹시,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힘들어?” “힘들지. 요새 안 힘든 사람이 어딨니? 너처럼 신의 직장이라도 찾지 못하면 다들 힘들게 살 거든?” “왜 계속 ‘신의 직장’ 타령이야? 사람 민망하게.” “부러워서 그러지. 아무튼, 큰 애도 내년이면 중학교 들어가는데, 그러면 돈도 많이 들 거고…. 아무래도 남편 수입만으로는 부족하니까, 내가 빨리 일을 찾아야 하긴 해.” “하긴, 요즘은 돈 없으면 애도 못 키우겠어. 물가가 왜 이렇게 올라갔는지.” “내 말이. 요즘 집값 많이 올랐다는 이야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라니까. 나라가 망하려고 그러는지….” 주부의 애환 대신 넉넉한 삶에 대한 동경이 잔뜩 묻어난 대화가 시작되었다. 물가에서 시작해, 부동산 정책에 대한 비판과 옆집 아줌마 지인이 돈 번 이야기, 사촌 언니 남편의 직장동료가 주식에 실패해서 한강에 갔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런데 희정아.” “응?” “너네 아이들 후원자란 사람 말이야.” “응.” “연성 그룹의 막내 손자라는 말, 사실이야?” “맞다니까?” “그런 사람이 왜 고아들 후원자가 되겠다고 나선 거야?” 희정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요즘은 덜하지만, 처음 이 일을 맡았을 때는 자주 듣던 질문이었다.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몇 번 보니까 그냥 애들을 좋아하고 도와주고 싶어서 그런 것 같아.” 숙희가 고개를 살짝 내리고 목소리를 줄여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무슨 숨겨둔 아이, 같은 건 아니고?” “그건 아닌 것 같더라. 솔직히 나도 의심하긴 했는데, 생김새도 많이 다르고, 2년 동안 지켜본 결과 그런 건 아닌 거 같더라고.”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잖아? 애가 외탁을 해서 안 닮아 보이는 걸 수도 있고. 솔직히 아무 득도 없는데 애들 둘을 그렇게 조건 없이 돌본다는 게 말이 돼?” 확실히 그런 의심을 할 만하다고 희정은 생각했다. 자기도 처음에는 그렇게 의심을 했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의심을 품기에는 재훈이나 단유의 태도가 너무 자연스럽달까, 무언가 숨기는 기색 따위는 찾기 어려웠다. 주영 역시도 아이들이 어려움 없이 평범하게 자라기를 바랄 뿐, 특별히 관리한다거나 또는 방치하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자기 일이 바빠서 자주 찾지는 못하는데, 그렇다고 관심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아. 나한테 자주 전화해서 묻는 것도 그렇고, 애들하고도 통화는 종종 하는 것 같으니까. 그냥 맞벌이하는 아빠 같달까, 뭐 내 느낌은 그래.” 그런 설명을 들은 숙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애들을 많이 사랑한다는 거지?” “그렇지.” 숙희가 잠시 커피를 마시며 정적이 흘렀다. 그러고 보니 카페에서 조용한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었는데, 대화를 열심히 했던 탓에 음악이 나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점심은?” “나온 김에 밖에서 먹고 들어가겠다고 이야기해놨어.” “아, 너네 집에서 일해주신다는 분?” “응.” “진짜, 너 자리 잘 잡았다.” “그렇게 생각해.” 이어서 두 사람은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지 이야기 나누기 시작했다. **** “날씨 좋다.” 병원 옥상에 올라온 재훈이 넉살 좋게 웃으며 팔을 펴자, 뒤따라온 친구가 피식 웃었다. “좋기는요. 옷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코가 막힐 지경이구만.” 같은 학교 동기이자, 재훈보다 3살이 어린 ‘주례’가 코를 찡그리며 투덜댔다. 조금 전에 어떤 환자가 구토를 하는 바람에 신발과 바지, 가운에 토사물이 잔뜩 튄 참이었다. 그런데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임시변통으로 이렇게 쉼터에 나와 냄새를 몰아내는 중이었다. “야, 바람이 이렇게 부는데 냄새가 맡아져? 니 코는 개코냐?” “추워요, 빨리 내려가요.” “밑에는 쉴 곳이 없잖아. 여기 말고는 우리 같은 실습생이 쉴 만한 곳이 없어요.” “…추운데 이게 뭐야.” 연신 투덜대기만 하는 주례는 그래도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입술을 삐죽이다가,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햇볕을 쬐는 재훈에게 말했다. “다른 선배님들한테 걸리기 전에 내려가시죠?” “정 추우면 혼자 내려가던가?” “어떻게 혼자 가요. 오빠랑 같은 팀인데, 오빠 없으면 저만 혼나잖아요.” “화장실에서 똥때린다고 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고요.” “알았다, 알았어. 무슨 애가 이렇게 여유가 없어?” 재훈은 주례의 머리를 한 차례 헝클어뜨려 주고는 몸을 돌렸다. “그런데요.” “응?” “오빠, 그 소문 들었어요?” “무슨 소문?” “오빠한테 숨겨놓은 자식이 있다는 소문.” “뭐?” 재훈이 놀란 눈으로 주례를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큰 웃음소리에 쉼터에 올라와 있던 환자 가족들이 모두 돌아볼 정도였다. “왜, 왜 그렇게 웃어요?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요?” 그래도 재훈은 쉽게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아니면 아니라고 하면 되지, 사람 민망하게 그렇게 웃어요?” “야, 웃음이 나오는 걸 어떡하냐? 그리고 애인도 없는 사람한테 애는 무슨 애야?” “없어요?” “자식은 없어. 숨겨놓지도 않았고.” “네?” “자식 아니고, 숨겨놓지 않은 아이가 있는 건 사실이야?” 주례는 무슨 말이냐며 되물었다. 재훈은 싱긋 웃으며, 보육원에서 만난 단유와 명수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걔가 얼마나 똑똑하냐면,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팔불출처럼 자식 자랑하는 아버지랑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건만, 자식은 아닌 후원자라는 재훈의 설명을 들으며 주례는 흥미를 가졌다. “진짜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시나 봐요?” “솔직히 양아들 삼고 싶었는데, 주변에 반대가 심해서 못했어. 그래도 지금은 착한 동생 생긴 셈 치고 살아. 항상 천덕꾸러기 막내로 살아만 오다가 이런 동생 생기니까, 책임감도 생기고 든든하고 좋아.” 가족보다 더 든든한 동생이 있다고 믿는 재훈이었다. “자주 만나요?” “자주는 못 보지. 너는 니네 가족 자주 보니?” “못 보죠.” “똑같애. 병원에서 24시간을 보내는 판국에 어떻게 시간을 빼니? 그래도 가끔 통화는 하니까, 괜찮아.” 슬쩍 미간을 찌푸리는 재훈은 요즘 단유가 전교 1등을 놓쳐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걱정했다는 소리를 덧붙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학교 공부 대신 다른 공부가 재밌어서 거기에 빠지는 바람에 시험공부를 전혀 안 했다는 거야. 전혀 안 했는데 전교 3등이래. 지금 자랑질하는 거냐고 찌르니까 한다는 말이 뭔줄 알아?” “뭔데요?” “전교 3등이 무슨 자랑거리라고 그러냐는 거 있지?” 실실 웃음을 짓는 재훈은 영락없는 ‘아들 바보’ 아빠의 그것이나 다름없었다. “어, 콜 왔다. 내려가자.” 재훈이 핸드폰을 흘겨본 뒤, 쿵쿵거리며 쉼터 출입구로 향했다. “같이 가요.” 주례가 졸레졸레 뒤따라 뛰어갔다. “지금 콜 온 걸 보니, 제 시간에 점심 먹긴 글렀네.” 주례는 재훈의 투덜거림에 맞장구를 치며 비상구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 [297] Defuser(4) 벨이 울리자, 선생님은 교탁 위에 펼쳐놨던 교과서를 덮었다. “반장, 인사.” 반장은 다른 수업 때보다 훨씬 빠른 템포로 차렷, 인사를 시켰고, 아이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다. 선생님은 무덤덤하게 인사를 받으며 교과서를 챙겨 교실 앞문을 열었고, 그 문이 열리는 순간,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아이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우사인 볼트 뺨치는 속도로 교실 뒷문을 향해 달려갔다. 병목 현상에 신경질 난 드라이버들이 경적 대신 범퍼 없이 앞차를 밀어대는 통에 뒷문에서 꾸역꾸역 튀어나온 아이들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누구 하나 넘어지지 않고 용케도 균형을 잡으며 복도로 뛰어나온 아이들은 급식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야야, 다쳐!” “네!” 대답하라고 외친 말도 아닌데, 아이들은 선생님의 주의를 건성으로 넘기며 복도를 횡단했다. 두세 계단쯤은 한꺼번에 넘어주는 게 예의. 본관 건물 오른편에 있는 대강당 쪽 급식실을 향해 달리는 아이들에게 브레이크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뛰었음에도 급식실 앞에는 언제 이렇게 뛰어왔는지, 많은 학생들이 이미 긴 줄을 형성하고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조금이라도, 단 한발이라도 먼저 앞서고자 달려간 이들이 그나마 큰 충돌 없이 줄을 섰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덕분에 추운 날씨에도 아이들의 이마에는 뜨거운 땀방울이 송글 맺혔다. 모두가 빨리 뛰어갈 때, 누군가는 천천히 걷기 마련이었다. 어차피 빨리 뛰어봐야 이미 앞에 선 이들이 많을 테니 괜한 힘 빼기 싫다고 걸어가는 무리가 있었고, 빨리 가나 천천히 가나 먹는 건 똑같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걷는 무리가 있는가 하면, 이왕이면 줄 서서 기다리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에, 혹은 줄 서는 게 싫다는 단순한 이유로 남들보다 훨씬 늦게 교실을 빠져나오는 이들도 있었다. “야, 빨리 가자.” “빨리 가나 천천히 가나 똑같아.” “아우, 답답해.” 지태는 애써 달리려던 걸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단유가 어슬렁거리듯, 여유롭게 뒷문을 빠져나오는 중이었고 그 옆에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채윤이 단유와 보조를 맞춰 걷고 있었다. “늦게 가면 반찬 적단 말이야.” “내 거 줄게.” “야, 누가 네 거 달래?” 채윤의 말에 지태가 버럭하며 발을 쿵쿵 굴렀다. “오늘 점심 메뉴가 뭔데?” “돼지 두루치기, 가지 볶음, 김치. 맞나?” 채윤이 핸드폰으로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돼지 두루치기 때문에 그러는 거야?” 단유의 물음에 지태가 당연한 걸 묻는다며 투덜대곤 앞서 걷기 시작했다. “저기 명수 있다.” 바라보니 명수는 빨리 뛰는 무리였던지, 줄의 앞쪽에서 반 아이들과 농담을 나누는지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는 중이었다. 그러다 단유네가 눈에 띄었던지 손을 들어 보였다. 지태 역시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려 인사를 하고는 단유에게 말했다. “너 요새는 연구 안 해?” 한동안 ‘연구’라는 이름으로 이것저것 책을 읽는 모습을 보였던 단유가 오늘은 책을 읽지 않고 있기에 궁금해서 물었다. “하고 있어.” “하고 있다고?” “응.” “어떤 건데? 명수 말로는 어떤 노래가 좋은지 맞추는 거라며?” “그건 그냥 일부분이고, 지금은 대중의 속성에 관해 공부하는 중이야.” “대중의 속성?” 지태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행동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를테면, 어떤 조건에서 사람들이 동일한 반응을 보이는가, 혹은 사람들이 동일하게 반응하도록 만드는 작용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같은 거야.” “모르겠다. 도대체 그런 거 왜 하냐?” “재미있어서 하는 거야.” 지태는 채윤을 돌아보며 말했다. “확실히 머리 좋은 애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단유야, 그럼 그런 게 어떨 때 필요한 거야?” “딱히 어떨 때 필요하다기 보다는…. 예를 들면, 파블로프의 실험이라는 게 있대. 배고픈 개에게 먹이를 줄 때마다 종소리를 들려줬더니, 나중에는 종소리만 듣고도 개가 침을 흘리며 먹이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이더란 실험인데.” “우와, 신기하다. 진짜 그래?” “진짜 있었던 실험이고, 유명한 실험이야. 아무튼, 그런 실험처럼, 사람도 어떤 조건에서 특정한 반응을 부르는지를 확인하는 게 지금 공부하는 내용이야. 그리고 이게 언제 필요하냐면, 예를 들어 어떤 노래가 나왔을 때, 이 노래가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끌어낼지, 아니면 불편한 반응을 끌어낼지를 유추해볼 수 있게 하는 거야.” “그런 게 가능해?” “이건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서 실험되었고 검증된 사실이야. 사람들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음들을 연결하는 방식을 화음이라고 표현하고, 그 화음의 전개에 따라 장조니, 단조니 하면서 곡을 만들어 나가는 거지. 불협화음으로 이루어진 곡이 없는 이유는 그 곡이 사람들에게 생소하고 불편하고 낯선 느낌을 주기 때문이거든.” “그렇게 말하니까 너 되게 있어 보인다.” 단유는 흥미를 드러내는 지태와 채윤에게 계속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꼭 노래가 아니더라도, 이런 반응을 기억해두었다가 써먹으면 좋은 일들이 있어.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어떤 말, 단어, 행동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되는지를 안다면,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거나 교감을 나눌 때 도움이 되겠지?” 그쯤에서 단유네는 배식 순서가 되어, 식판에 음식을 받아들기 시작했다. 단유의 이야기는 음식이 가득한 배식판을 들고 자리를 잡은 뒤에 이어졌다. “사람들이 대체로 좋아하는 말이나 어투, 억양, 행동 같은 게 있다면, 그런 걸 이용했을 때 상대방에게 호감을 끌어내기가 쉽겠지?” “그렇겠지?” 다소 시큰둥한 지태의 대답은 곧 돼지고기 한 젓가락과 함께 우걱우걱 씹혀 들어갔다. “만약 이성의 상대에게 이런 방식을 적용한다면, 좀 더 편하게 이성과 대화를 할 수도 있고, 호감을 끌어낼 수 있겠지. 이런 걸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고.” “이성?” 지태의 눈이 크게 떠진 이유가 돼지고기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이성’이란 단어와 화제로 이야기했을 때, 지태 너의 주의를 끌 수 있다는 것도 그렇고.” 채윤이 웃음을 터뜨리느라 입안에 든 밥알이 튈 뻔했지만,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반대의 의미로 군중을 제어하는 방식이 있어. 우리 주위에도 알게 모르게 이런 방식은 다양하게 적용되고 있어. 학교에서 종이 울리는 것도 그렇지.” “종? 그게 왜?” “종이 울림으로서 학생들은 시간의 경과를 알 수 있겠지만, 종소리를 통해 학생들을 제어하는 방식이라고도 볼 수 있지. 종소리가 울리기 전까지는 마음껏 쉬어라, 하지만 종소리가 나면 수업준비를 하고 마음대로 행동하려고 하지 마라, 라는 뜻으로.”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신호체계’는 가장 익숙한 형태의 제어방식이야. 녹색불이 켜지면 건너라, 이건 녹색불이 켜지지 않으면 건너지 말라는 명령을 함께 포함하지. 즉, 사람들의 행동을 녹색 신호로 제어하는 셈이야. 4교시가 끝나는 종소리가 울리기 전에 교실을 뛰어나가는 아이들이 있어? 없잖아. 종소리는 학생들의 행동을 제어하는 신호체계이기 때문이야.” “이해가 되는 것도 같은데 복잡하다. 그래서 그런 걸 연구하는 거란 거지?” “‘연구’가 아니고 ‘공부’. 또 하나 예를 들어보자면 말이야.” “야, 먹고 하자. 먹는 데 체하겠다.” 지태는 손가락 대신 숟가락을 좌우로 흔들어 보인 뒤, 식판에 든 음식을 허겁지겁 집어 먹기 시작했다. “난 계속 듣고 싶은데?” 채윤은 오물거리면서 단유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는 중이었다. 단유는 슬며시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대부분 선생님들은 수업시간에 열심히 수업 듣는 걸 좋아하잖아?” 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어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는 걸 좋아하시지. 그런데 만약 눈을 마주치지 않는 학생이 있으면, 반드시 수업시간 중에 한 번은 그 아이를 지목해서 질문을 던져. 국어 선생님이 평소 수업시간에 질문을 많이 던지시지만, 확률적으로 따지면 눈이 마주치지 않는 학생을 골라서 질문을 던지는 경향이 있어.” “진짜?” “응. 그러니까 만약 국어 시간에 지목당하기 싫다면 오히려 선생님의 눈을 계속 쳐다보며 수업을 듣는 게 좋지.” 숟가락을 멈춘 지태도 관심 있게 듣기 시작했다. “수학 선생님은 보통 수업 중에 교과서를 교탁 위에 올려 둔 뒤, 거의 쳐다보지 않고 수업을 하시잖아? 그런데 가끔 교과서를 오른손으로 들 때가 있어. 그때는 기분이 안 좋으시다는 뜻이야.” “응?” “수학 선생님은 준비가 철저하신 분이어서 거의 수업과정을 머릿속에 다 집어넣으신 채로 자연스럽게 수업을 진행하시는 스타일이셔. 그런데 가끔 컨디션이 좋지 않다거나, 혹은 사적인 문제로 준비가 되지 않으셨을 때 교과서를 들어서 확인을 하시지. 그런데 그럴 때 수학 선생님은 기분이 안 좋으셔.” 단유가 보기에 수학 선생님은 완벽주의자적 성향이 강한 사람이었는데, 특히 학생들 앞에서 완벽한 선생님으로서의 모습을 보이려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떤 개인적 사유로 그런 준비가 덜 되었을 때, 그래서 교과서를 확인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때, 학생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와 상관없이 본인이 매우 불쾌함을 느끼는 듯했다. 게다가 그런 경우도 그냥 교과서를 확인하지 않고 오른손으로 들어서 얼굴을 가리듯 높이 들어 확인하는 것은, 마치 재채기를 할 때 입을 가리고 하는 것과 같은 무의식적 행동으로 보였다. 즉,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기 싫다는 무의식적 표현이랄까? 그럴 때 수학 선생님은 꽤 기분이 좋지 않다는 뜻이고, 그러면 가끔 히스테리적인 분노가 학생들에게 투영될 때가 있었다. 하지만 단유는 이런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진 않았다. 마치 수학 선생님에 대한 뒷담화를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지태와 채윤은 놀라운 발견물, 마치 해변 모래사장에서 금동반가사유상을 발견한 얼굴을 하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또, 또?” “국사 선생님은….” 단유는 지난 며칠간 관찰하고 파악한 몇 가지들을 지태네에게 알려주었다. 이야기는 식사가 끝나고 급식실을 나오는 순간에도 계속되었다. 채윤이 흥미롭게 이야기를 듣다가 생각나 단유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런 게 다 네가 하던 ‘공부’ 때문에 알게 된 거야?” “그런 셈이야. 대중의 속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대중을 관찰할 필요가 있었고, 대중의 관찰은 개인의 관찰로도 이어지니까. 대중과 개인은 다른 개체이지만, 그 사이에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고, 그런 속성이 대중과 개인을 잘 이해하게 하더라고.” 단유는 지태를 가리켰다. “신호등의 이야기를 꺼낸 참에 하는 말이지만, 우리 반에서 가장 신호를 잘 지키는 사람은 지태야.” “나? 내가 신호를 잘 지키긴 하지.” “대부분 사람들은 지키라는 신호를 잘 따르는 편이긴 해. 그런데 아까도 말했듯이 신호는 일종의 약속이고 명령이야.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은 명령을 지키고 완수하는 데 익숙하긴 해도, ‘반드시’ 따라야 하는가, 라고 물으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어. 노란불에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건널목을 빠르게 질주하는 차라든가, 녹색불이 들어오기 전에 건널목을 건너려고 발을 떼는 사람이라든가. 혹은 빨간불임에도 지나는 차가 없으면 그대로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도 있지. 종소리가 울리기 전까지 움직이지 말고 수업을 들으라고 하지만, 종소리가 울리기 전에 이미 교실 밖으로 뛰어나가려고 준비하는 애들이 있는 것처럼. 그런데 그런 약속을 가장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이 바로 지태야. 지태는 종소리가 울리기 전까지, 종소리가 언제 울릴까를 고민하거나, 종이 울리면 바로 뛰어나가야지 같은 고민이 없더라고. 그렇지?” “그런가?” “넌 종이 울리기 전까지는 생각이 없거든.” “뭐!” 채윤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좋은 말이야. 신호 잘 지킨다는데 뭘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그런 뉘앙스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가 생각하기에 너의 그런 모습이 보이는 것은 아무래도 집에서 할아버지한테 오랫동안 교육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아. 예절 교육을 잘 받은 탓에 사회적 약속과 질서를 따르는 데도 거부감 없이 잘 따라가는 셈이지.” “어, 그런가?” 지태가 고개를 갸웃거려 보이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채윤은 ‘일리가 있는 말’이라며 단유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네가 하는 거, 나도 같이할 수 있을까?” “재미있어 보여?” “응.” “내가 책 하나 알려줄 테니까 한 번 읽어봐. 거기에 잘 나오니까.” 책을 보란 말에 살짝 거리감을 느끼는 채윤이었지만, 그래도 단유가 던진 이야기의 흥미가 컸던 탓에 거부하진 않았다. 단유가 알려준 책 제목을 핸드폰 메모장에 기록한 후, 나중을 기약했다. “이야기하면서 먹느라고 너무 시간을 끌었나 보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추운데, 빨리 들어가자.” 지태가 과장되게 두 손으로 양팔을 비비며 동동 구르기 시작했고, 단유와 채윤이 그 뒤를 역시 느긋하게, 마치 옛 선비의 고고함이 이러한 것이다, 라는 것처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여유로움이 한껏 깃든 가을 오후의 시작을 알리는 햇살이 교정에 내리쬐고 있었다. ======================================= [298] Defuser(5) 오후가 되자 화창한 햇살과 함께 오전 내 낮았던 기온이 풀리기 시작했다. 물론 운동장에서 공을 차거나 던지고 있던 아이들은 그런 날씨가 무색하게 붉어진 얼굴로 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교문 밖에서 걸어가던 사람들은 한결 편안해진 얼굴을 하고 학교를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여전히 얼굴을 찡그리고 몸을 움츠린 채 서 있는 사람도 있었다. “추워 뒤지겠어.” ―엄살 부리지 마. “그럼 네가 와서 있든가.” ―시끄럽고. 이제 마칠 시간 다 됐으니까 잘 살펴. “알았어.” 야구모자 아래로 짧은 머리가 살짝 드러난 20대 중반의 남자는 두꺼운 입술을 삐죽 내밀어 보이다가 통화를 마쳤다. 엄살이 아니라 실제로 교문 밖에서 두 시간 정도 움직임 없이 가만히 서 있다 보니 온몸이 꽁꽁 얼어붙은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수능이 치러지는 11월 중순경이 되면 유난히 날씨가 추워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생각을 떠올린 본인 역시 과거 수능을 치러 갈 때, 두터운 점퍼와 목도리로 온몸을 꽁꽁 싸맸던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능을 치러 온 것도 아니고, 수능 날짜도 아니었다. 야구모자는 시간이 다 되었다는 것을 상기한 후, 핸드폰을 꺼내서 자신이 찾아야 할 아이의 사진을 확인했다. 이 아이는 SNS 같은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아서, 직접 찍은 혹은 간접적으로 찍은 사진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동료가 요 며칠간 뒤를 쫓으면서 직접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공유한 사진을 꺼내 얼굴을 확인한 야구모자는 가래침을 모아 바닥에 뱉었다. “사고 치기 전에 사고 나겠네.” 야구모자는 두 손을 힘껏 비벼 열을 낸 후, 가죽 재킷 호주머니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다시 교문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시간은 어느새 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한편, 인적 드문 골목에 작은 승용차를 두고 대기 중인 남자들이 있었다. 그들 역시 춥기는 매한가지였는데, 오랜 시간 대기해야 돼서 자동차 시동을 걸 수도 없었던 탓에 차가운 시트의 냉기를 참으며 버텨야만 했다. “야, 시간 다 됐는데, 이제 히터 좀 틀자.” “임마, 아직 안 돼. 좀만 기다려.” “기름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그래? 어차피 돈 들어오면 그거 다 푼돈인 거 알면서 지랄이야.” “뭐 같은 소리하지 말고 참어, 새끼야. 니가 돈 낼 것도 아니면서.” “야, 그냥 내가 돈 낼게. 좀 틀자. 추워서 몸이 제대로 움직일지도 모르겠다.” “새끼야, 전화 오면 그때 틀어도 안 늦어 이놈아. 그때는 땀띠 나게 틀어줄 테니까.” 두 남자는 아웅다웅, 말로 열을 내며 버티는 중이었다. “혹시 말이야.” “씨발 놈이. 적당히 좀 해라.” “개새끼가. 내가 뭐 말할 줄 알고?” “몰라, 새끼야. 알기도 싫다. 그냥 재수 없는 말일 것 같으니까 그냥 하지 마라.” 입을 열었던 장발의 갈색으로 염색한 남자는 코가 뾰족해서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남자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뾰족이의 말처럼, 장발이 생각하고 있던 말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낸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거 보수는 제대로 받을 수 있는 거지?”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새끼야. 작업 뜨기 전에 그런 소리 하면 재수 없는 거 몰라? 돈 다 받을 수 있으니까, 제발 그 입 좀 다물고 집중 좀 하자, 응?” 뾰족이가 날카롭게 받아치자, 장발은 ‘씨발, 씨발’ 중얼거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간간이 지나가던 행인들이 검게 선팅된 차 안을 의심스럽게 쳐다보기는 했지만, 누구도 다가와서 본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자기 갈 길 가기 바쁜 사람들뿐인 것 같았다. 문득 장발은 그 바쁜 사람들이 부러워졌다. 그들은 적어도 자신들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자기 일이 있는 사람들일 테니까. 자기 일이 없는 사람들은 저렇게 바쁘게 걸을 일이 없을 것이다. 마치 자신처럼. 늘 흐느적대는 걸음으로, 슬리퍼나 끌면서 동네 슈퍼에 가서 소주 한 병 사 오는 게 일과의 다였던 장발은 창틀에 팔을 얹고 턱을 괸 채로 행인들을 구경했다. 낙관적인 이라면, 작업이 성공하고 큰 보수를 손에 쥔 뒤, 그 돈으로 무엇을 할까를 궁리하며 시간을 보냈을 테지만, 태생이 비관적인 장발은 뾰족이 말처럼 ‘재수 없는’ 생각들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이럴 때 ‘괜찮아, 꼭 성공할 수 있어.’ 라든가, ‘떼돈 벌어서 인도네시아 가자, 가서 비키니 입은 백마들 구경하며 놀자!’ 같은 이야기로 의욕을 고취 시켜줬으면 좋겠지만, 툴툴대는 뾰족이도 사실은 자기만큼 긴장하고 있어서 그런 이야기는 입에 올릴 여유가 없을 것이다. 학교 앞에서 망을 보다가 자기들에게 연락을 줄, ‘꼬마놈’도 별로 기댈만한 인물은 아닌지라 그저 이렇게 자기 속만 까맣게 타들어 갈 뿐이었다. “꼬마 새끼, 놓치는 거 아니겠지?” “아오, 진짜. 이 새끼!” 뾰족이가 눈을 치켜뜨며 주먹을 번쩍 들어 때리려고 시늉했다. “알았다고, 새끼야. 안 하면 될 거 아냐!” 장발은 오른손으로 머리를 뒤로 넘기며 짐짓 여유롭게 행동하며, 전혀 쫄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필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리고 두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애들 나온다. **** “오늘은 명수랑 같이 안 가?” “응. 명수는 5시까지 훈련이래.” 단유의 대답에 지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다리 나은 뒤부터는 계속 훈련이구나. 안 힘들데?” “오히려 놀 때가 더 힘들었지. 몸은 편할지 몰라도, 마음이 불편했는데, 지금은 다 좋대.” “하긴 명수니까.” 지태의 대답에 단유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왜?” “아니, 가만 생각해보니까 사람들이 명수한테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명수니까’ 더라고.” “그런가? 그렇네. 어쩐지 명수는 명수니까 명수인 거 같다.” “무슨 말이 그래?” 채윤의 핀잔에 지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세 친구는 사이좋게 나란히 서서 교문을 빠져나왔다. “아, 학원 가기 싫다.” 지태의 말에 채윤이 공감하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 정도만 되면 학원 안 가도 될 텐데.” “아니. 단유정도 되도 우리 집에서는 학원 보내려고 할걸? 우리 엄마는 할아버지랑 있는 것보다, 학원에서 선생님과 있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하시거든.”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할아버지랑 함께 있어 봐야, 이제는 서예도 안 하고, 그냥 TV나 보고 있을 뿐이고, 아니면 라디오나 들으면서 책이나 읽어야 하는데, 재미가 없으니까.” 채윤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지태를 돌아보며 물었다. “너희 할아버지 연세가 어떻게 되셔?” “우리 할아버지? 이제 73인가? 그 정도 되실걸?” “우와. 연세 많으시네?” 지태는 가방 끝을 잡아당기며 딴짓을 하는 시늉을 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할아버지가 꽤 정정하시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할아버지도 몸이 많이 안 좋으셔서 집에서 거의 누워 계시는 편이야.” “걱정 많으시겠다, 너희 부모님.” “그렇지 뭐.” 시큰둥하게 대답하던 지태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단유야, 아까 점심때 이야기한 거 있잖아? 선생님들 말고 또 다른 거 없어?” “다른 거?” “너 요새 갤럭시즈 누나들 보러 자주 갔었다며?” “…연예인 뒷담화가 듣고 싶은 거냐?”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 있으면 듣고 싶다는 거지.” 단유는 잠깐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사실 갤럭시즈 누나들을 보긴 했어도, 오래 대화를 나눈 게 아니라 결론을 낼 만큼의 정보가 모이지 않아서 뭐라고 하기 힘드네. 수련 누나랑은 대화를 좀 많이 했지만.” “그럼 수련 누나만이라도.” 가만히 듣고만 있는 채윤도 구미가 당기는지 단유를 쳐다보며 눈을 반짝였다. “수련 누나는 일단 가장 노래를 잘하지.” “그건 나도 알아.” “미성이야.” “안다고.” “그리고 굉장히 성실한 편이야. 주위의 평가가 노래를 잘한다고 칭찬하는 게 대부분인데도, 스스로는 만족하지 않는 것 같아. 그래서 더 많이 연습하지.” “그건 좋은 거잖아?” “그럼 뭐 싫은 거라도 이야기해달라는 거야?”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솔직히 그렇게 예쁘고 노래 잘하는 연예인한테 단점 하나 없을까?” “단점이 없진 않지.” “뭔데?” 단유는 말을 고르다가 지태를 보며 입을 열었다. “수련 누나는 만족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잖아?” “응.” “그래서 연습을 많이 한다고.” “그래, 그래.” 지태는 빨리 이야기해보라고 재촉하듯 대답했다. “수련 누나는 자신감? 혹은 자존감이 조금 낮은 편이라고 해야 하나? 남들에게 칭찬을 받아도 그걸 100%라고 믿지 않는 편이야. 굳이 표현하면 자기가 그렇게 잘할 리가 없어, 라고 생각한달까? 그래서 자기 노래에 대한 만족이 없는 거지.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자기가 가수로서 정상에 섰다는 인정을 받기 전까지는 계속 지금과 같은 연습을 계속할 거 같아.” “그것도 좋은 말이네. 결국, 수련 누나가 열심히 연습하고 노력한다는 뜻이잖아?” “그건 겉으로 보는 것의 문제지. 진짜 문제는 자존감이 낮은 편인데, 최근의 일 때문에 더 의기소침해 있다는 게 문제야.” “최근의 일이 뭔데?” 아직 지태와 채윤은 갤럭시즈가 해체 직전에까지 몰렸던 사정을 몰랐다. 그리고 단유는 그 사정을 친절히 설명할 이유가 없었고, 할 마음도 없었다. “그런 게 있어. 아무튼, 그래서 수련 누나가 보이는 건 되게 세게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방어기제 같은 거라는 게 내 생각이야.” “그런 식으로 마무리 지으면 어떻게 알아먹냐?” “알아먹으라고 한 소리 아니고,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연예인도 고생 많이 하는 직업이란 소릴 해주고 싶어서 그래. 겉만 보지 말고, 그 속을 들여다보란 말이야. 투정부리지 말고 학원이나 가.” “네,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장난스럽게 대꾸한 지태는 채윤과 함께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단유는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다시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 “한 명 안 보인다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친구 둘은 자기 집으로 가고, 키 큰 애 혼자 집에 가는 중이라는데?” “에이 씨.” 뾰족코는 자동차 핸들을 크게 두드렸다. 그래 봐야 자기 손만 아플 뿐인데, 라고 생각하던 장발은 들고 있던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곧 이쪽을 지나겠는데?” “…나가자.” 뾰족코는 대답과 동시에 기어를 넣고, 천천히 악셀을 밟아 차를 앞으로 몰기 시작했다. 여전히 골목 한편에 있지만, 곧 아이를 붙잡아 차에 태우는 즉시 큰길 쪽으로 튀어나갈 수 있게끔 만반의 준비를 해놓은 상태였다. “실수하지 마라.” “안 해, 새끼야.” 장발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하고는 차문을 열고 나갔다. 여전히 핸드폰을 귀에 댄 채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장발은 곧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건 발견했어.” 약 100m 앞에 목표로 삼았던 아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야!” 목소리를 죽인 채로 상대방을 부른 장발의 귀에 야구모자 ‘꼬마놈’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저렇게 키가 크다고는 안 했잖아?” 저게 중학교 1학년이라고? 사진으로 볼 때는 얼굴이 워낙 어려 보여, 짧은 머리에 교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면 초등학생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초등학생은커녕,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키를 가진 아이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새꺄, 지금 상황에 키가 무슨 소용이야! “이 새끼야, 저렇게 큰놈을 어떻게 한 번에 제압해?” ―미친놈아. 그럼 ‘도마뱀’ 새끼랑 같이 잡든가! 장발은 고개를 돌려 핸들을 잡고 있는 뾰족코 ‘도마뱀’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입으로 ‘뭐’라고 모양을 만들어내는 ‘도마뱀’에게 턱짓으로 이리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용케 그걸 알아들었는지, 서둘러 차문을 열고 나서는 ‘도마뱀’이었다. “이 새끼야, 왜 불러!” “새끼야, 눈 있으면 봐라. 저게 나 혼자 될 일인가.” 장발의 타박에 ‘도마뱀’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척, 시선을 돌려 목표물을 확인하더니 다시 장발에게로 고개를 돌려, 진짜 신경질을 냈다. “저 새끼, 뭔데? 중학교 1학년이라며?” “내 말이.” 아이는 이제 고작 50걸음 안쪽으로 들어왔다. “씨발, 모르겠다. 잡자마자 끌고 와.” “어떻게?” “몰라, 새꺄. 운전 할 사람은 있어야 할 거 아냐?” 작전의 생명은 기동성. 운전수 역할을 맡은 ‘도마뱀’의 역할도 중요했다. 다시 뛰어가는 도마뱀을 흘깃 본 뒤, 장발은 여전히 들고 있던 핸드폰에 대고 말을 했다. “시끄러워 새꺄.” 도마뱀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도 뭐라고 계속 떠들어대던 ‘꼬마놈’에게 한소리 한 후, 비장하게 한 마디를 날렸다. “시작한다.” 목표물이 4걸음 앞으로 왔을 때, 장발은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천천히 집어넣었다. 그리고 곧 자연스럽게 한 발을 내디디며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2걸음이 되었고, 이내 나란히 선 상태가 되었다. ======================================= [299] Defuser(6) 단유는 다가오는 장발의 남자가 여간 수상한 게 아니었다. 삐죽이 튀어나온 입술은 연신 욕을 뱉고 있었고, 머리카락에 가려졌지만, 사납게 노려보는 눈매가 영 심상치 않았다. 무엇보다 장발의 남자에게서 풍기는 악의(惡意)의 방향이 자신을 향해 있다고 느껴졌다. 이건 어떤 계산이나 관찰에 의해 알게 되는 것이 아닌, 몸이 저절로 반응하는 수준으로 깨닫는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남자가 풍기는 악의는 강해지고 있는데, 반대로 남자는 여전히 핸드폰을 들고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남자의 시선이 왼쪽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했을 때, 단유는 남자의 왼쪽, 자신에게는 오른쪽이 되는 곳에 누군가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단유는 남자가 악의를 품는 원인을 궁리해보았으나 도저히 알 방법이 없었다. 일단 남자가 초면인 데다, 평소 인간관계가 넓지 않은 단유로서는 저 남자가 난데없이 드러낸 악의의 인과를 밝힐 단서들이 부족했다. 곧 두 사람이 지나치기 직전, 그러니까 서로 나란히 서게 됐을 때도 남자는 특별히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단유가 조금 전에 지태에게 말했듯,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말처럼, 장발의 남자가 드러낸 긴장도는 최고조에 이르고 있었다. 단유는 남자를 지나치려다 걸음을 멈추고 남자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단유보다 고작 머리 하나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았기에 얼추 눈높이가 맞았다. “뭐죠?” “응?” 남자의 반응은 다소 멍청했다. 친구들이 흔히 쓰는 표현으로 ‘얼빵하다’고 말하는 게 적절해 보일 정도였다. “저한테 용건 있으신 거 아닌가요?” “엉?” 남자는 분명 당황하고 있었는데, 악의의 강도가 옅어진 느낌이었다. 당황인지, 아니면 애초에 단유가 악의의 방향을 잘못 짚었던 것이 헷갈릴 정도였다. 혹시 자기 뒤에 다른 사람이 있는데 착각이라도 한 것일까, 라는 생각에 슬쩍 뒤로 돌아보았더니, 누군가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 단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별안간 눈앞으로 시커먼 것이 달려들고 있었다. **** “저 병신새끼!” 나직이 욕을 내뱉은 ‘도마뱀’은 차 핸들을 또 한 번 세차게 내리쳤다. 멍청한 ‘쭈꾸미’는 아이를 사로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서로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잠시 너를 데리고 어디로 모셔야 하니, 조용히 따라오지 않을래?” 따위의 말로 회유하는 것이 아니라면, 저런 상황이 연출될 필요가 있을까? “병신 좆같은 새끼!” 남자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기어에 손을 가져갔다. 그때 아이가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보였고, 그 순간 각성을 했는지 ‘쭈꾸미’가 손을 뻗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가 피하려고 고개를 뒤로 빼는데, ‘쭈꾸미’는 한 손으로 아이의 뒷머리를 잡고 또 다른 손으로 아이의 입을 막아서 꽉 누르는 모습이 보였다. ‘도마뱀’은 거의 순간적으로 기어를 ‘D’에 두고 악셀을 거칠게 밟았다. 차가 순간적으로 토크가 올라가며 굉음을 냈고, 이어 차는 곧 두 사람 옆에 도착했다. “밀어!” 창문을 내린 상태라 들렸는지 모르겠는데, 급한 마음에 그냥 소리치고만 ‘도마뱀’은 ‘쭈꾸미’ 뒤에 ‘꼬마놈’이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꼬마놈’은 핸드폰으로 열심히 떠들어댔다. “개새끼야, 제기랄! 이 미친 새끼야, 지금 키 따위가 중…, 야 이 씹새야! 안 들리냐고! 개새끼야!” 속사포처럼 아는 욕이란 욕은 다 퍼부으며 빠른 걸음으로 뒤쫓던 ‘꼬마놈’은 ‘시작한다’는 말에 핸드폰을 집어넣고,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와중에도 시선은 진짜 ‘꼬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이와 마주친 ‘쭈꾸미’가 금방 아이를 제압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압은 하지 않고 대화를 하는 듯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뭐야, 저 새끼!’ 열불이 나서 못 참겠다. 아이가 아니라 저 새끼 면상을 먼저 주먹으로 힘껏 때려야 할 것 같았다. ‘저런 새끼랑 같이 일을 하겠다고 했으니, 내가 병신이네.’ 그때 상황이 변했다. 아이가 뒤를 돌아보며 자신을 볼 때, ‘쭈꾸미’가 정신을 차렸는지 아이를 제압하기 시작했다. 가끔 ‘헤라클레스’냐고 놀리기도 할 정도로, ‘쭈꾸미’는 힘이 좋았다. 그래서 일부러 사내가 눈꼴사납게 머리를 기른다고 해도 눈감아주던 형편이었다. 그런 ‘쭈꾸미’가 힘을 쓰니 아이는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바로 그때, 차가 튀어나왔다. “넣어!” 라고 들린 것 같은데 확실하진 않았다. 정황상 그런 말이었겠지. ‘쭈꾸미’가 아이와 몸싸움을 할 때, ‘꼬마놈’이 도착했고, ‘꼬마놈’은 차문을 먼저 연 뒤, ‘쭈꾸미’와 같이 아이를 차에 밀어 넣었다. 밀어 넣는 동시에 위에서 짓누르듯 아이 위로 올라탄 ‘쭈꾸미’가 외쳤다. “씨발!” 그 말이 ‘출발!’이라는 단어로 들렸는지, ‘도마뱀’이 곧바로 악셀을 밟았고, 서둘러 조수석에 탄 ‘쭈꾸미’가 미처 차 문을 닫기도 전에 차가 튕기듯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곧 급하게 이어지는 우회전, 다시 우회전, 직진 후 좌회전에 이어 다시 우회전을 하면서 차는 큰 도로 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 단유는 황당했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아니 조금은 당황하기도 했다. 갑자기 손이 뻗어져서 자신의 입을 막을 때, 금방 뿌리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던 것과 달리 남자의 손은 여간 억센 게 아니어서 조금 놀라긴 했다. 그리고 뒤이어 차가 바로 옆에 달려와 붙고, 달려오던 남자가 자신과 자신을 붙잡고 있던 남자를 동시에 차 안으로 밀어 넣는데, 정신이 없을 정도…는 솔직히 아니었지만, 그래도 황당한 경우라서 어이가 없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차 안에서 자신을 붙잡은 남자가 자기 위로 올라타서 몸으로 짓누르는 상황도 황당하고, 도로 위를 질주하던 중에 자기들끼리 손바닥을 부딪쳐가며 낄낄대는 모습도 황당했다. 그래서 생각했다. ‘그래, 어디 뭐하려고 그러는지 구경이나 해보자.’ 만약 칼을 들고 자신을 노려보는 근위대 정도였다면, 이미 사달을 냈겠지만, 어리숙하고 ‘얼빵’한 모습을 보이던 남자도 그렇고 전속력으로 달려와서는 한다는 게 두 사람을 억지로 차 안에 밀어 넣는 남자도 생각해보면, 웃겼다. 다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왜 자신일까 하는 점이었다. 아마 이게 말로만 듣던, ‘납치’라는 거 같은데, 자신이 그 대상이 되었을 때의 이점(利點)이라는 게 있나, 의문이 들었다. “저기요.” “조용히 해, 새끼야!” 위에서 짓누르던 장발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보아서는 많이 당황한 듯 보였고, 또 많이 불안한 것 같았다. 그런 반응을 살피니 오히려 단유는 점점 더 침착해져 갔다. “숨쉬기 힘드니까, 좀 내려오실래요?” “새끼야, 어디서 수를 써!” “야, 꼬마 놈아 단단히 붙잡고 있어라.” “잔소리하지 마 새끼야. 니가 말 안 해도 꼼짝 못 하게 하고 있거든?” 자신을 부르는 줄 알았더니, 장발의 남자가 ‘꼬마놈’이란 것을 알게 된 단유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앞의 두 남자는 ‘꼬마놈’이 지금 얼마나 불안해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지나치게 힘을 주다 보니 팔이 덜덜 떨리고 있는 ‘꼬마놈’이었는데, 정작 자신은 자기 팔이 그런 지경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제가 여기서 어떻게 도망가요? 달리는 차 안인데. 그리고 정 의심스러우면 그냥 ‘팔’이나 붙잡고 계세요. 다리는 아저씨 엉덩이로 누르고 있으니까, 움직이지 못할 거 아니에요?” 운전하던 ‘도마뱀’은 룸미러로 흘깃 뒤를 살핀 뒤,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중학생이라는 놈이 말하는 모양새가 보통이 아니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야, 꼬마놈. 절대 움직이지 마라. 저 새끼 보통 놈 아니다.” ‘쭈꾸미’도 그렇게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시선은 단유에게 둔 채 ‘꼬마놈’에게 말했다. “알았다고! 새꺄! 너도 조용히 닥쳐, 새끼야!” 아마 이 차 안에서 가장 평정심을 잃은 사람을 꼽으라면, 아마 ‘꼬마놈’일 것이다. 단유는 애써 흥분한 남자를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 풀어달란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꼬마놈’의 힘이 점점 빠지고 있어, 숨쉬기가 처음보다 나아진 상태기도 했으니까. 차는 열심히 달려, 한강 옆을 지나더니 어느새 빌딩 하나 보이지 않는 외진 곳까지 달려왔다. 마침내 차가 선 곳은 서울 주변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산속의 허름한 쉼터 같은 곳이었다. 간이 시설로 만들어진 그곳은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았는지 오래 묵은 먼지가 바닥에 쌓여 한 발 걸을 때마다 풀풀 올라오는 진회색의 구름이 꽤 불쾌하게 여겨졌다. 만약 단유에게 언제가 제일 힘들었냐고 묻는다면 바로 이때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 차에서 내린 단유는 곧바로 ‘도마뱀’이 구해온 밧줄에 손이 묶이고 입속으로 정체를 알기 싫은 천 더미가 쑤셔 넣어졌다. 그리고 ‘쭈구미’와 ‘꼬마놈’에게 잡힌 채, 창고 같은 곳으로 밀어 넣어졌다. “들어가, 새끼야.” 단유가 들어간 뒤, ‘도마뱀’이 가지고 온 자물쇠로 창고문을 걸어 잠갔다. 여기까지 일이 끝나고 ‘도마뱀’이 돌아서자, 그제야 마음을 놓은 듯 세 사람을 서로를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 “야, 전화해야지.” “일단 보고부터 해야 하지 않나?” “보고는 무슨. 우리가 시다바리냐? 보고나 하고 앉았게?” 셋은 서로 으르렁거리며, 옥신각신하다가 ‘도마뱀’이 핸드폰을 잡은 뒤로는 입을 다물고 사태를 주시했다. ‘도마뱀’은 헛기침을 하고 상대방과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끝났어요.” ―수고했다. “그런데 아이가 한 명이에요.” ―한 명? 왜? 두 명이라고 했잖아? “한 명만 나왔다는데 어떻게 해요. 혼자 집에 가는 걸 겨우 붙잡았는데.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요.” ‘도마뱀’은 ‘꼬마놈’을 째려보며 말을 이었다. “아니, 애가 덩치가 저렇게 크다는 이야기는 왜 안 했어요? 하마터면 놓칠 뻔 했잖아요? ―이놈들아. 고작 중1인 애인데, 덩치가 크고 작은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씨발, 그러면 직접 해보시고 말씀을 하시든가? ―뭐? “걔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고 그런말이쇼? 아무리 ‘꼬마놈’이 힘이 좋기로서 혼자서는 힘들 뻔했단 말요. ‘도마뱀’의 엄살이 먹혔는지, 잠시 핸드폰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때, 말빨을 잘 살려서 엎치고 뒤쳐야 손에 들어오는 게 커지는 법이리라. “그러니 우리 수당 좀 올려야겠어.” ―…이 새끼들이 무슨 헛소리를. “닥치고. 계속 말 그 따위로 할 거면 우리도 안 봐줘요? 엉? …그러니까 빨리 영감한테든, 애비한테든 전화 걸어봐. 빨리 일 마무리 짓고 가게.” ‘도마뱀’은 전화를 끊고는 ‘쭈꾸미’를 쳐다보았다. “쭈꾸미.” “왜?” “저기 밖에 가서 땅 좀 파.” “내가 왜?” “이 새끼야, 넌 저 새끼 이마에 땀 흐르는 거 안 보여? 저 새끼도 좀 쉬어야 일을 할 거 아냐? 혼자 안 시킬 테니까, 가서 땅 좀 파고 있어.” “아우, 내가 진짜. 이번 일만 끝나면 봐라.” ‘쭈꾸미’는 투덜대면서 집 옆에서 발견했던 삽을 가지러 갔다. “도마뱀.” “왜?” “오늘 끝내게?” “야, 원래 저런 놈 오래 데리고 있는 거 아냐. 영화나 드라마에서 왜 범인들이 멍청하게 잡혀서 다 좆되는 줄 알아? 인질 따위를 놔두고 드라마나 찍고 있어서 그래. 저거? 안 필요해. 우리는 그냥 저놈이 납치되었다는 사실만 알려주면 그만이야. 사진 몇 장 찍어 두었다가, 필요할 때 한 장씩 보내서 살아있다는 것만 확인시켜주면 돼.” ‘도마뱀’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마른 입술을 적셨다. “연성 쪽에다가는 저녁쯤에 전화해서 새벽까지 돈 가지고 오라고 하면 돼. 그리고 우리는 그 전에 여기서 자리를 이동해야 하고. 같은 자리에서 오래 있는 건 경찰보고 잡으러 오세요 하는 거나 마찬가지거든.” ‘도마뱀’은 오랜 시간 동안 연구한 결과라며 가슴을 내밀었고, ‘꼬마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말 끝났으면, 너도 가서 쭈꾸미 새끼나 도와. 저 새끼 혼자 땅 파려면 한세월이니까.” “넌?” “새꺄, 난 머리를 써야지? 앞으로 탈출 루트랑 돈을 받고 나르는 동선도 짜야 하고, 할 일 많아 새끼야. 방해하지 말고, 가서 쭈꾸미나 도와.” ‘꼬마놈’은 팔뚝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으로 나오니 산속이라 그런지 어둠이 꽤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새끼 어디서 땅 파고 있는 거야?’ 땅을 파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꼬마놈’은 ‘쭈꾸미’를 찾으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벌써 땅을 다 파진 않았을 테니, 아마도 자기가 나와서 도울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리고 있었음이리라. “새끼, 존나 만만한 게 나지.” ‘꼬마놈’은 투덜거리면서, 집 뒤로 돌아가 보기로 했다. 집 뒤는 불이 없어서, 앞쪽보다 훨씬 어두웠다. “쭈꾸미!”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최근 단유가 관심을 두고 있는 ‘대중의 속성’이란 것이었다. 그리고 대중의 속성을 알기 위해서는, ‘개인의 습성’에도 관심을 두어야 했다. ‘개인의 습성’은 단순한 관찰로만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상호작용 속에서 개인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습성이 발견되곤 했기 때문에, 단유는 단순한 관찰자에서 한발 더 나아가 상호작용을 발생시켜보는 중이었다. 예를 들면, 상대에게 말을 건다거나, 혹은 가볍게 스킨십과 같은 행동으로 주의를 끈다거나, 혹은. ―퍽. 때려본다거나. ======================================= [300] Defuser(7) 단유는 손과 발이 묶인 채 창고에 널브러져 있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텅 빈 시멘트 포댓자루가 굴러다니고 있고, 부서진 벽돌이 조각나 흩어져 있었다. 그 외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천 조각들과 둘둘 말린 포장지 같은 게 눈에 들어왔지만, 무엇하나 ‘무기’로 쓸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닥에 자욱이 깔린 먼지들이었다. 깔끔한 단유에게, 호빵이 거실에 날리는 털 하나도 보는 즉시 치워야 하는 단유에게 다른 무엇보다 이 먼지들이 가장 큰 고문이었고,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급선무였다. 그래서 단유는 가장 빠르고 편한 방법, 탈출을 선택했다. “퉤.” 창고를 나온 단유는 손발을 묶고 있던 줄들도 가볍게 벗겨낸 뒤, 창고 안으로 ‘이동’ 시켰다. 자유로워진 손과 발로 가장 먼저 한 일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 일이었다. 창고를 탈출하는 시간보다,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겨우 참을 수 있을 정도로 몸단장(?)을 마친 단유는 사내들이 들어간 집 근처로 갔다. 누군가는 전화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시시껄렁한 이야기로 긴장을 털어내는 중이었다. ‘무슨 이름들이 저래?’ 별명도 참 이상한 별명으로 부른다, 고 생각하며 단유는 잠시 후 집을 나와 창고 주위의 공터에서 땅을 파기 시작하는 ‘쭈꾸미’ 뒤를 쫓아 다가갔다. “어?” ‘쭈꾸미’의 말이 이어지기 전에, 놀란 눈이 한 번 깜빡거리기도 전에 단유는 그를 기절시켰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깊은 숲속으로 옮겨진 뒤였다. “정신 차렸어요?” “뭐, 뭐야?” ‘쭈꾸미’는 정신이 없었다. 땅을 파다가 누군가 뒤에서 다가온다는 사실에 놀람을 표현하려는 차에, 갑자기 세상이 뒤집히는 느낌이 들더니 낯설고 황량한―처음에는 꿈이라 생각했고 나중에도 꿈이었던가 헷갈릴 정도로 이상했던―곳에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곳이 어딘지 알아볼 새도 없이 다시 정신을 잃었고, 다시 정신을 차렸더니 어느새 손과 발이 두꺼운 밧줄로 단단히 동여진 채, 숲속에 널브러진 상태로 놓여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거 풀어!” ‘쭈꾸미’는 앞에서 지켜보는 단유를 보고 소리를 쳤다. 어떻게 묶었는지 손을 비틀 공간조차 주지 않고 꼼꼼하게 매어 놓은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을 단유는 물끄러미 쳐다볼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쭈꾸미’는 더 크게, 마치 단유를 위협하려는 듯했지만 실상은 목소리를 듣고 동료들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 “죽여버리기 전에 얼른 풀어, 새끼야!” 단유는 천천히 다가가 허리를 굽혀 ‘쭈꾸미’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과 마주치자 ‘쭈꾸미’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아저씨.” “뭐! 왜!” 도대체 이렇게 소리를 치는데도 주위에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 걸 보니 수상하기도 했고, 무섭기도 했다. 아니 무서워서 오금이 저리는 중이었다. “겁먹지 말아요. 전 아저씨 해칠 마음이 없으니까요. 아직은요.” 애새끼가 말을 하려면 곱게 하든가, ‘아직’이란 말을 굳이 저렇게 섬뜩한 눈빛을 보내면서 말을 하면 어떻게 겁을 먹지 말란 말인가. “새, 새끼야. 겁 안 먹어, 새끼야!” 나름 목에 힘을 주고 소리를 쳐보지만, 말이 이어질수록 목소리가 약해지는 바람에 창피함을 느끼는 쭈꾸미였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봐요. 혼자 있어도 되죠?” “뭐?” 단유가 허리를 펴더니 터벅터벅 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이곳이 산 중턱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야, 야!” 그런데, 산속이 어두워진 탓인지 아이가 금방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발걸음 소리도 나지 않는 것이 여간 무서운 게 아니었다. 뒤늦게 아이를 불러보지만, 아이는커녕 다른 어떤 소리도 들리는 것이 없었다. 들리는 거라곤, 차가운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며 내는 소리뿐이었다. 그러고 있자니, 문득 어릴 때 TV에서 보았던 ‘전설의 고향’이 생각났다. “야! 야! 새끼야! 안 들려 새끼들아!”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보지만, 누구 하나 대답하는 이 없었다. 오히려 자기가 외치는 소리에 에코가 덧씌워진 것처럼 울리는 소리에 더 겁이 났다. 불과 5분 전까지, 이런 상황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는데 마치 귀신에 씐 것 같았다. ‘귀신’을 떠올리자 등줄기로 소름이 확 끼치면서, 눈물이 찔끔 나는 기분이었다. 한편, ‘쭈꾸미’를 찾아 공터로 나섰던 ‘꼬마놈’은 후두부를 강타하는 일격에 살짝 정신을 ‘잃었다가’ 돌아왔다. “뭐야!” 뒤를 돌아보니, 아까 잡아 왔던 꼬마가 오른손을 매만지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새끼 어떻게 나온 거야?” 라고 외치며 두 손을 번쩍 들려는데, ‘꼬마놈’이 순간적으로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놀란 ‘꼬마놈’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다시 후두부를, 아까보다 더 강하게 타격하는 충격에 뒷 머리를 감싼 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단유는 이번엔 왼손을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명수 말대로 기술이라도 배워둘 걸 그랬나.” 나중에라도 다시 고민해봐야겠다, 고 생각하며 일어서고 있는 ‘꼬마놈’을 바라보았다. ‘꼬마놈’은 씩씩거리면서 단유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단유는 얼른 고개를 뒤로 빼며 주먹을 피했다. “이런 쥐새끼가!” 하지만 굳이 이런 곳에서 주먹질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단유는 ‘꼬마놈’의 주먹을 피하며 말했다. “저기요.” “왜 새끼야!” “진정 좀 하시고, 옆 좀 보세요.” “뭐 새끼야!” 확실히 ‘꼬마놈’은 단순하고 성질이 급하며, 시야가 좁은 사람인 데다가 어휘력도 많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추정컨대, 학교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했거나, 혹은 학교를 제대로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힘은 좋은데, 그 힘을 적절하게 사용할 줄 모르고 무조건 휘두르는 걸 보면, 제대로 싸움판을 전전한 이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힘은 지금껏 만난 이들 중 가장 세다고 할 정도로 보통을 넘는지라 기술도 없이 맞싸움을 벌일 상대는 아니어서 계속 피하기만 했다. “여기가 어딘지는 좀 보고 말씀하시죠?” “뭐?” 씩씩대면서 어떻게 잡을까만 궁리하던 ‘꼬마놈’은 불현듯 주위를 둘러보다, 맥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어디야?” 공터에서 단유와 마주쳤다고 생각하고 있던 ‘꼬마놈’은 주위에 울창한 나무들을 보며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주위를 보다 태연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단유를 보니,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새끼가 사람을 갖고 놀아!” ‘꼬마놈’은 다시 멧돼지처럼 밀고 들어와 단유의 허리춤을 껴안으려 했고, 그의 재빠른 행동에 단유는 허리를 붙잡히고 말았다. ‘됐다!’ 고 생각하던 찰나, 양팔 사이가 허전해지며 순간적으로 중심이 흐트러진 ‘꼬마놈’은 꼴사납게 바닥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어이쿠, 하며 놀람과 동시에 정신을 잃었다. “야, 꼬마새끼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언제 와 있었는지 뒤에 ‘쭈꾸미’가 팔다리가 묶인 채 자신을 보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어? 너 왜 거기 있어?” “야, 이 새끼야, 한참을 불렀어, 이 새끼야?” “…못 들었는데?” “정신 차려 이 새끼야.” ‘꼬마놈’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런데 몸이 꼼짝을 하지 않았다. “어?” 알고 보니, 그의 몸은 낡은 장판에 둘둘 싸여 줄까지 단단하게 동여매진 상태였다. “이거 왜 이래?”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 새끼야?” ‘쭈꾸미’로서도 황당한 것이 단유가 사라진 산 아래쪽을 향해 소리를 지르던 중에 갑자기 위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 힘겹게 몸을 돌렸더니, ‘꼬마놈’이 저 꼴을 하고 버둥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너 언제 여기 온 거야?”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새꺄. 넌 언제 여기로 온 건데?” “나? 난 조금 전까지 꼬마애 잡으려고….” 말이 이어질수록 ‘꼬마놈’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게 변해버렸다. 자기는 그저 도망친 꼬마를 잡으려고 주먹 몇 번 휘둘렀을 뿐인데 이 꼴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여기 어디냐?” ‘쭈꾸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무서움은 덜했다. **** “이 새끼들 어디 간 거야!” ‘도마뱀’이 신경질을 내며 주위를 둘러볼 때였다. ‘저기요’라는 미성의 목소리에 반응하여 고개를 돌린 ‘도마뱀’은 급히 몸을 뒤로 물리면서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너, 뭐야?” ‘도마뱀’은 ‘쭈꾸미’처럼 덤벙대지 않았고, ‘꼬마놈’처럼 성급하지 않았다. 신중한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조심성이 많다고 봐야 할 것 같았다. “물어볼 게 있어요.” “다른 녀석들, 니가…한 짓이냐?” 아무래도 신중하고 머리도 쓸 줄 아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주변을 훑다가 말했다. “그냥 여기서 이야기하죠. 조금 쌀쌀하긴 해도, 여기가 이야기하기가 더 편하긴 하겠네요.” ‘도마뱀’은 어리다고 섣불리 다가가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그가 지금껏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조심’했기 때문이었으니까. “저한테 원한이 있으세요?” “…없어.” “그럼 왜 절 납치하신 거죠?” ‘도마뱀’은 단유가 너무 태평한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다른 놈들이 풀어줬을 리가 없으니, 스스로 풀려나왔거나 외부의 조력이 있었음이리라. 스스로 묶인 줄을 풀었을 리 없다고 단정할 수 없고, 외부자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단언할 수 없으니, 더욱 조심해야 할 때였다. “그럴 사정이 있는 거야.” “무슨 사정이요? 무슨 사정이길래, 납치만 하지 않고 붙잡아서 죽이려고까지 하셨던 거죠?” “뭐?” “저기 땅 파라고 지시하셨잖아요. ‘오래 데리고 있으면 안 된다’든가 인질을 놔두면 안 된다는 뉘앙스로 말씀하시기도 하셨고.” ‘꼬마놈’과 대화하는 걸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도마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니가 들어서 좋을 내용 아니니까 신경 끄고, 다른 놈들 어디 있는지나 말해.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정말 너한테 안 좋은 일이 생길 거다.” “또 아까 들어보니까, 저 말고 다른 사람도 납치하려고 했던 거 같던데.” 통화하는 걸 들었구나. ‘도마뱀’은 이 녀석을 놓쳤다가는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빨리 저 녀석을 붙잡아야 할 거 같다는 생각에 손에 땀이 배어들기 시작했다. 눈동자를 굴리며 조금의 빈틈이라도 찾아내기 위해 애를 썼다. 마찬가지로 상대를 관찰하고 있던 단유는 ‘도마뱀’의 행동에서 긴장을 느꼈다. ‘죽이라’는 말보다 ‘통화내용’을 언급한 부분에서 더 큰 긴장을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통화가 중요했단 의미일 것이고, 통화내용만큼이나 통화한 상대가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 사람의 행동과 사고에 대한 관찰은 그만 끝내기로 했다.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반응이긴 했지만, 특별히 오랜 시간에 걸쳐 관찰해야 할 대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또 다른 호기심의 대상이 된 ‘통화 상대’를 알기 위해서는 이런 대치 상황이 의미가 없었다. “아, 마지막으로요.” ‘도마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혼자 대답을 들었다는 양 고개를 주억거리다 ‘마지막’ 질문을 던지는 단유에 대해 경계심이 들었다. 처음부터 수상하고 미심쩍은 부분이 있던 아이였지만, 지금은 수상함을 넘어 1급 경계 경보를 울리고 주의해야 할 대상으로 격상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중이었다. “왜 이름이 ‘도마뱀’이에요?” “뭐?” “다들 이상한 이름이잖아요. ‘꼬마놈’, ‘도마뱀’, ‘쭈꾸미’.” ‘도마뱀’은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생각에 잠시 집중력이 흩어졌다. 사실 세 사람의 별명이 만들어진 계기는 사우나를 함께 가게 되면서였다. 사우나에 함께 간 세 사람은 서로의 진면목(?)을 관찰하게 되었고, 누가 먼저랄 거 없이 그렇게 ‘별명’이 만들어졌다. 그 일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고, 그 짧은 순간 머릿속에서 재현된 그 날의 기억이 집중력을 흩어 놓았고, 그때 단유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도마뱀’ 역시 다른 이들처럼 정신을 잃고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 [301] Defuser(8) 단유는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앞뒤로 둘러보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도마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오른손 검지를 들어, 핸드폰의 지문인식 버튼에 가져다 대었더니 핸드폰의 잠김이 풀렸다. 마침 이 남자의 핸드폰이 병수가 쓰던 핸드폰과 같은 모양이길래 혹시나 했는데 역시 그 방법이 맞았다. 최근 주변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고 있던 터라 가능했던 거지, 만약 여름 전이었다면 이런 걸 알지도 못했을 단유였다. 통화목록에서 번호를 확인한 단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이 새끼들 믿어도 돼?” “그놈들 원래 오늘만 사는 놈들이라 뵈는 게 없긴 한데, 그래도 시킨 일은 잘한다고 하더라.” “그런 놈들이 이렇게 건방지게 굴어? 전화도 지가 먼저 끊잖아.” “지금 막 작업 끝나서 아마 신경이 날카롭겠지. 당신이 이해해.” 숙희는 짜증 난 얼굴로 들고 있던 핸드폰을 소파 위에 던져 놓았다. 그리고 손톱 아래의 살을 뜯기 시작했다. “네일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면서?” “뭐? 아, 그냥 긴장돼서 그런 거야. 그리고 나중에 또 받으면 되지.” 어차피 일이 잘 마무리만 된다면, 이깟 살 조금 뜯겨 나가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니까. 게다가 손에 쥐어질 돈을 생각한다면 네일 따위 1년 매일 바꿔도 무방하리라. “당신은 집 좀 알아봤어?” “이미 예전에 알아놔 뒀으니까, 신경 쓰지 마.” 문득 시선을 내려 손가락을 살피니, 손톱 아래 굳은살이 깊게 뜯겨 나가면서 아릿한 통증과 함께 붉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어? 피?” “호들갑 떨지 마. 별거 아니야.” 맞은 편에서 말동무를 해주던 젊은 남자가 얼른 탁자로 달려가 티슈 몇 장을 뽑아왔다. “…고마워.” “잘 될 거야.” 숙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남자를 보다가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눈가의 깊게 새겨진 주름이 남자의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선한 웃음을 지으며 숙희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였다. 숙희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숙희가 화들짝 놀랐다가 핸드폰을 바라보니 망할 녀석들의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뭐야?” 그런데 핸드폰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여보세요?” 잠시 후, 핸드폰이 끊어졌다. 붉은 얼굴의 숙희가 벌떡 일어나자, 순박해 보이던 남자 역시 얼른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뭔데?” “몰라. 그런데 이상해. 뭔가 불길해.” 숙희가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상대편에서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15초 정도가 울린 후, 통화를 연결할 수 없다는 음성이 나왔다. 숙희가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남자를 바라보자, 남자 역시 입술을 살짝 깨물며 숙희를 바라보았다. **** “이거 누구예요?” 물어보는 단유의 눈은 여전히 침착했다. “몰라, 난. 통화는 다 ‘도마뱀’이 했어.” 사라질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보이지 않는 사각에서 소리 없이 나타난 단유가 핸드폰을 들고 와서 물었다. ‘쭈꾸미’는 정말 잘못 걸렸다는 생각에 입이 바싹 말라, 대답도 쉽지 않았다. ‘도마뱀’은 보이지도 않는데, 귀신 같은 꼬마는 ‘도마뱀’의 핸드폰을 들고 와서 통화목록을 들이밀고 있었다. 게다가 조금 전까지 옆에서 무슨 일이냐고 어리둥절해서 멍청하게 굴던 ‘꼬마놈’은 또 어느 사이엔가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정말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데, 웃어넘길 수 없는 소리라는 현실에 ‘쭈꾸미’는 미칠 것 같았다. “아실 것 같은데요?” “…진짜 몰라.” “아시는 내용을 말씀해 주신다면, 아저씨 발은 풀어드릴게요.” “…진짜 모른다니까.” “팔도 풀어드릴게요.” “…진짜?” “다리 먼저 풀어드릴까요?” ‘쭈꾸미’는 눈치를 보다가 몸을 움직여 묶인 다리를 단유 쪽으로 밀었다. 단유가 스스럼없이 다리에 묶인 밧줄을 풀어주자, ‘쭈꾸미’의 얼굴빛이 변했다. 희망이 생긴 것이다. “이제 말해주세요. 말해주시면 팔도 풀어드릴게요.” “…그 여자, 성은 모르겠고 이름은 숙희라고 하는데, 그 여자가 정보를 줬어. 우리한테 너희들 정보를 주면서 납치를 해 달라고 했어. 그리고 성공하면 50% 보수 주기로 했고.” “숙희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단유가 의아해하자, ‘쭈꾸미’는 자신이 아는 정보를 털어놓았다. 어차피 일은 그르쳤다. 어차피 그르친 거, 자신은 도망가더라도 깽판이나 놓자는 심정이었다. 애초에 그쪽에서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아서 이 사달이 난 것이니까. “내가 알기로는 너희 집에 같이 사는 ‘선생님’인가 하는 사람 친군가 보더라고. 그 사람한테서 정보를 얻었대.” “정보요?” “그래. 니가 연성 그룹 연회장 막내 손자의 숨겨진 아들이라고.” “제가요?” ‘쭈꾸미’는 너무 놀란 표정을 짓는 단유를 보며, 잠깐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연성 그룹 회장의 증손자, 아냐?” “전 김씨잖아요?” “숨겨진 아들이니까, 니네 어머니 성을 붙인 거 아냐?” “저 부모님 안 계신대요?” “…웃기시네?” 아닐 거라고, 부정해보려 했지만, ‘쭈꾸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 년이 진짜 헛소리한 거 아냐?’ 단유의 표정만 봐서는 진짜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부터 제대로 된 정보를 줄 의도가 없었다고 봐야 하는 걸까? 마찬가지로 단유 역시 ‘쭈꾸미’와의 대화에서 자신이 왜 납치되었던 것인지를 알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 부분은 이 사람에게 물어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고, ‘숙희’란 사람을 만나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둠이 매우 짙어진 상태였다. 조금 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단유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쭈꾸미’가 황급히 외쳤다. “이거 풀어줘야지!”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쭈꾸미’의 손을 풀어주었다. 그는 손이 자유로워지자 손목을 쓰다듬으며 단유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일단 손발이 자유로워지니 당장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많아졌다. 욕심이 조금씩 올라오는 것도 같았고. ‘진짜 연회장 증손자인데 연기하는 것일 수도?’ 단유와 ‘쭈꾸미’의 눈이 마주치자, 단유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입술을 가리켰다. “응?” “거기 흐르는 침이나 닦으시라고요.” ‘쭈꾸미’는 얼른 손을 들어 입 주위를 훔쳤다. 아무것도 없는데, 라는 생각이 들 무렵, 정신을 잃었다. 단유는 ‘쭈꾸미’를 다른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옮겨 놓은 뒤, 집으로 ‘이동’했다. **** “너 왜 이렇게 늦었어? 옷도 되게 더럽고?” 단유의 위아래를 살피던 명수가 말했다. 단유는 명수에게 그럴 일이 있었다고 대충 대답한 뒤, 선생님을 찾았다. “선생님.” “응?” 단유는 선생님의 반응을 살피다가 물었다. “숙희…라는 분 아시나요?” “숙희? 강숙희? 니가 걜 알아?” “잘은 모르고요. 이름만 들었어요.” “어디서?” “아시는 분이신 건 맞고요?” “알긴 알지. 오늘도 만났는데?” “오늘요?” “응, 아까 점심 무렵에 나가서 잠깐 봤었지.” 단유는 ‘숙희’라는 이름을 듣고 놀라는 선생님의 반응을 관찰하며 말을 이었다. “우연히 그분 이름을 들었는데, 그분이 저에 대해서 이야기를 조금 이상한 이야기를 하셨나 봐요.” “응? 걔가?” “연성 그룹 연 회장님의 증손자라고.” “에이, 설마.” 선생님은 단유에게 그런 소문이 돌긴 했고, 오늘 오전에 숙희를 만났을 때도 그 이야기가 나왔지만, 자신이 정정해주었다는 이야기를 해주며 혀를 찼다. “혹시 그 때문에 학교에서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거니?”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선생님의 눈초리는 쉽게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고, 단유 답지 않게 더러운 옷차림을 하고 있는 상태를 살피며 미간을 좁혔다. “학교에서는 문제없었어요.” 라고 말한 단유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 숙희라는 분이요, 혹시 자기 물건을 잘 잃어버리시나요?” 뜬금없이 왜 그런 걸 묻지, 라고 생각하며 선생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오히려 자기 주변 정리가 깨끗하기로 유명했지. 예전에 같이 일할 때도 보면 애들 한명 한명을 잘 챙기기도 했고, 반 관리 상태도 우수해서 원장님한테 칭찬도 받을 정도였거든.” 단유는 말이 길어지기 전에,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한 후 몸을 돌렸다. “밥은 먹었니?” “나중에 먹을게요.” 라고 대답하며 다시 현관으로 가는 단유였다. “어디 가니?” “아, 하던 연구가 있었는데 마저 하려고요.” “무슨 일인데 지금 이 시간에 하는 거니?” “금방 끝내고 올게요. 다녀오겠습니다.” 문이 닫히고 명수가 방 안에 있다가 튀어나왔다. “얘 나갔어요?” “응. 이상하네. 오늘 뭔가 평소랑 다른데?” 선생님은 현관을 보며 중얼거렸다. **** 단유는 다시 산 중턱의 쉼터로 돌아갔다. 창고의 문을 열고, 그 안에서 잠든 것처럼 정신을 잃고 있는 세 남자를 확인한 뒤, 그중에서 ‘도마뱀’을 데리고 옆의 집으로 이동했다. 낡은 식탁 근처에 있던 의자에 ‘도마뱀’을 앉힌 뒤, 그를 깨웠다. “뭐야?” ‘도마뱀’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나 ‘도마뱀’은 문제를 인식함에 있어 늘 주변의 상황을 먼저 확인한 후에 그에 맞게 행동하는 습성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도 그랬다. 의자에 묶어놓은 것도 아닌데, 섣불리 움직이는 대신 주위를 살며 사람이 없다는 것을 먼저 확인하는 ‘도마뱀’이었다. 사람이 없다는 확신과 움직여도 되겠다는 가능성을 철저하게 따진 이후에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던 ‘도마뱀’은 식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찾아내었다. “뭐야!” 잠겨있던 화면을 풀자, ‘숙희’의 연락처 화면이 가장 먼저 튀어나왔다. 마치 이 사람에게 당장 전화 걸라고 지시하는 것처럼. 이것은 단유의 마지막 실험이었다. 지금까지가 일종의 관찰 실험이었다면, 이번에는 조작 실험이었다. 몇 가지 변수를 주고 변수에 맞게 행동하는지, 그리고 자신의 조작이 실험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것인지를 알아보는 실험이었다. **** “야, 뭐야! 갑자기!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코트를 걸친 채 집안을 돌아다니던 숙희는 걸려온 전화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이 미친년아! 너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수화기를 통해 이어지는 욕설에 숙희는 순간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욕에서 욕으로 이어지는 소리 중간중간, ‘정보가 잘못되었다’느니 ‘애가 애가 아니라는’ 둥, 이해하기 힘든 말들이 섞여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이 욕이라서 제대로 이해하고 듣기 힘든 지경이었다. “이리 줘봐요.” 숙희가 핸드폰을 든 채 멍 때리고 있는 모습에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아냐, 괜찮아. 내가 이야기할게.” 숙희는 자기가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나긋나긋하게 웃고 있던 남자가 짐짓 무거운 얼굴을 하고 손을 내밀자, 조금 흔들리는 기분도 들었다. “자기는 저기 가서 잠깐 쉬어요. 제가 할게요.” 그러고는 빼앗듯이 핸드폰을 건네받은 뒤, 돌아서서 통화를 시작했다. “나야.” 그러자 잠시 욕이 끊기는가 싶더니, 또 새로운 욕들이 이어지면서 핸드폰에서 괴성이 새어 나왔다. ‘기둥서방’이라든가 ‘작전’이라든가 ‘공갈’이라는 단어들이 섞여서 온갖 추잡한 욕지거리는 다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애는? 애는 어디 있는 데?” 그 말에 상대의 목소리가 잠잠해졌다. 잠시 후,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통화가 이루어지는지 더는 핸드폰에서는 괴성은 나오지 않았고 남자는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짤막한 대답만 하면서 대화가 이어지고 있어, 숙희는 그저 궁금증을 참으며 기다릴 뿐이었다. “알았어. 그럼 일단 거기서 기다려. 내가 곧 갈게.” 남자는 핸드폰을 끊었다. 그리고 숙희에게로 돌아섰다. “뭐래?” “가서 봐야겠는데요. 상황을 봐야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남자는 싱긋 웃으며 숙희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같이 가실래요?” “…그래.” 숙희는 그렇지 않아도 나가려는 참이었다는 듯, 얼른 일어섰다. 남자는 숙희를 향해 선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다 잘 될 거예요.” **** 느긋해 보이던 남자였지만, 운전은 꽤 격해서 가는 동안 몇 번의 경적이 울렸는지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마 카메라에도 몇 번 찍혔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남자는 능숙하게 차를 몰아서, 사내들이 숨어있던 곳으로 진입했고, 곧 집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집 앞에는 ‘도마뱀’이 핸드폰을 든 채 서성거리고 있다가 차의 불빛을 발견하고 몸을 숨겼다가 나타났다. “어떻게 된 거야?” 차에서 내린 숙희가 ‘도마뱀’을 향해 달려가 물었다. ‘도마뱀’이 쌍심지를 켜고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입을 다물고 대신 뒤의 눈치를 보았다. ‘도마뱀’의 시선을 따라 돌아보니 남자가 차 문을 닫고 천천히 다가오는 중이었다. “다른 애들은?” 남자의 질문에 ‘도마뱀’이 손가락으로 창고를 가리켰다. 창고 안에는 정신을 잃은 두 남자가 맨바닥에 누워 있었다. “깨워도 일어나질 않아.” “죽은 건 아니고?” “숨은 쉬고 있어.” 남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애는?” ‘도마뱀’이 고개를 저었다. 숙희가 얼굴을 붉히고 침을 튀기며 ‘도마뱀’의 얼굴 앞에 대고 외쳤다. “어쩌려고….” 그러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도마뱀’이 힘껏 뿌린 손길에 숙희는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씨발년이….” 숙희는 통증보다 더한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저놈이 물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행패를 부리다니! “됐어, 그만해. 나와.” 뒤의 선 남자가 천천히 창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뒤를 ‘도마뱀’이 뒤따라 나가자, 숙희가 얼른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다 다시 ‘도마뱀’의 발길질에 배를 얻어맞고 바닥에 나뒹굴어야 했다. 이번에는 아까와 다른 통증이 온몸을 강타해서 숨을 쉬기 힘들었다. “잠가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고, 뒤이어 창고의 문이 닫히고 바깥에서 자물쇠가 채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숙희는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 [302] Defuser(9) 남자는 ‘도마뱀’과 함께 공터 쪽으로 향했다. ‘도마뱀’이 손전등으로 땅을 비추자 거친 흙바닥과 깊지 않은 구덩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땅을 파던 흔적은 있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삽만 빈 땅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남자가 ‘도마뱀’에게 손을 내밀자, ‘도마뱀’은 그의 손에 손전등을 올려주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남자가 말없이 주위를 향해 빛을 뿌려보지만, 눈여겨 볼만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 아이가 스스로 풀고 나왔다고?” “응.” “어설프게 묶었던 것은 아니겠지?” “당연하지.” 남자는 혀를 차며 다시 한번 빈 땅 주위를 살폈다. 혹시나 발자국 같은 것이 있지는 않을까 싶었지만, 너무 어두웠던 탓인지 아니면 눈썰미가 없는 것인지 그런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여기서 내려가는 길은 저 길밖에 없잖아?” 손전등으로 이 집으로 올라오는 유일한 산길을 가리켜 보인 남자의 말에 도마뱀이 동의하며 대꾸했다. “그렇긴 한데 길 아닌 쪽으로 갔을 수도 있지. 아니면 위로 올라갔을 수도 있고.” 산 위는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가운데, 드문드문 하얀 별이 빛을 내고 있었다. “어쨌든, 저 길로는 내려가지 않은 게 분명하겠지.” “갔다면, 니가 올라오면서 봤겠지.” 남자는 말없이 손전등을 도마뱀에게 건넨 후, 집으로 들어갔다. “정환아.” 도마뱀이 뒤를 쫓아와 남자를 불렀다. ‘정환’이라 불린 남자가 고개를 돌려 도마뱀을 쳐다보자, 도마뱀은 침을 꿀꺽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어떡하지?” 정환의 눈을 딱히 특정할만한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때가 정환이 가장 무서워지는 순간임을 도마뱀은 알고 있었다. 예전에 호스트바에서 같이 일할 때도 그랬으니까. **** 정환은 호스트바에서 꽤 유명했다. 손님들은 순진하고 선한 웃음을 짓는 정환을 좋아했다. 왜 여기서 일하냐고, 그 마스크라면 오히려 연예계로 진출해도 되겠다고 말하면 정환은 예의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누님 만나려고 기다린 거죠.” 이런 오글거리는 멘트를 스스럼없이 내뱉는 정환이었지만, 진지해질 때는 순식간에 눈에서 감정의 찌꺼기가 사라지고 마치 새까만 구슬을 박아넣은 듯한 눈으로 사람을 압박했다. 당시 호스트바에서 심부름을 도맡아 하던 도마뱀은 그런 정환을 자주 봤었다. 한번은 대기실에서 정환이 직장 동료(?)와 대치한 적이 있었다. 룸에서 있었던 일로 마찰이 생겼던 것 같은데, 룸에서는 손님 때문에 아무 말 않고 있다가 대기실로 돌아온 뒤, 두 사람이 붙은 것이다. 그때 정환이 그런 눈으로 동료를 바라보았다. “이 새끼가? 눈깔 안 치워?” 정환은 먼저 몸을 돌려 자리를 피했다. 그래서 그때는 사람들이 모두 ‘정환이 쫄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다음 날부터 그 상대가 출근하지 않았다. 출근만 하지 않은 게 아니라 연락도 닿지 않았다. 만약 무슨 돈을 챙겼다거나, 물주를 꼬셔서 도망을 간 것이라면 어떻게든 소식을 들었을 테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기에 다들 의문을 품었다. 그러다가 소문이 나기를 ‘정환이가 손을 썼다’는 것이었다. 정환도 그 소문을 들었을 텐데 아무런 반응이 없어, 소문은 잠시 부풀어 올랐다가 꺼지는 계란 거품처럼 사라졌다. 그런데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면 어떻게 될까?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정환과 충돌이 생기는 경우가 생기면 반드시 그다음에는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일이 생기자, 사람들은 정환을 의심하게 되었다. 하지만 증거도 없는 일을 가지고 추궁할 수는 없었고, 추궁할 용기를 가진 이도 나오지 않았다. 도마뱀 역시 정환이 손을 썼다고 믿는 사람 중 한 명이었지만, 정환을 추궁하진 않았다. 오히려 정환에게 더 잘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감으로 볼 때, 정환은 반드시 가게의 ‘베스트’가 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고, 또 정확히 이유를 설명하긴 어렵지만 정환과 각을 세우기보다는 그를 따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정환은 그렇게 다가오는 도마뱀을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몰래 용돈을 챙겨주는 등, 자기 사람으로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야, 이거 뭐야?” “뭐긴, 담뱃값이야. 챙겨둬.” “담배? 아, 어제? 그건 어제 줬잖아?” “고마워서 그러니까 그냥 넣어두고, 앞으로도 잘 부탁해.” 정환은 선한 미소를 지으며 도마뱀의 어깨를 툭 쳤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라인이 생기면서, 도마뱀은 이것저것 뒷일을 봐주기 시작했고, 두 사람의 인연은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날. “도마뱀, 나중에 연락하면 삼거리 가는 길 쪽 시장 입구로 나와.” 새벽에 걸려온 전화에 도마뱀은 잠도 자지 않고 전화를 기다리다가 정환의 연락을 받고 나갔다. 시장 입구에는 파란 와이셔츠를 걸친 정환이 담배를 피우며 도마뱀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가갔더니, 그의 밑에 축 늘어진 한 사람이 있었다. “뭐야?” 정환이 말없이 남자를 들쳐메려 하자, 도마뱀이 얼른 반대쪽으로 서서 정환을 도와 남자를 들었다. 그때 도마뱀은 남자가 죽은 게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고 있어 술에 취한 것인가 싶기도 했는데, 술 냄새는 나지 않았다. 혹시 하는 마음에 둘러보니 재래시장 입구 근처에 CCTV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정환은 남자를 업고 옆에 주차해둔 차로 데려가 남자를 뒷좌석에 태웠다. 그리고 차를 몰아 데리고 온 곳이 바로 서울 외곽의 이름도 모를 산 중턱의 허름한 집이었다. 공터까지 정신을 잃은 남자를 데리고 온 뒤, 도마뱀에게 삽을 건넸다. 도마뱀은 2시간에 걸쳐 땅을 팠고, 하늘이 살짝 푸르스름하게 변할 무렵, 작업이 끝났다. 도마뱀은 무엇이라도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차가운 눈을 한 정환을 보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정환은 구덩이 속에 남자를 집어넣은 뒤, 삽날을 세워 정신을 잃은 남자의 목을 찍었다. 정신을 잃은 남자가 눈을 번쩍 뜨는데, 그 순간의 모습이 너무 섬뜩해서 지금도 가끔 잠을 자다가 그 광경이 떠올라 잠을 깨는 도마뱀이었다. 반면, 여전히 감정 없이 삽날로 정확하게 목을 찔러대는 정환은 남자가 죽었음을 확인한 뒤, 삽을 도마뱀에게 던졌다. “덮어.” 정환은 담배를 입에 물고 공터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그루터기로 가 연기를 내뿜었다. 도마뱀은 입술을 깨물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피 묻은 삽 위에 흙더미를 얹어 구덩이 속으로 뿌렸다. 땅을 팔 때보다 더 빨리 끝나야 할 작업이 더디기만 했다. 겨우 땅을 메운 뒤, 정환이 다가왔다. “수고했어.” 도마뱀의 어깨를 두드려준 뒤, 가슴께에서 돈뭉치를 꺼내 도마뱀의 호주머니에 찔러 넣어줬다. “이제 우리 계속 함께 하는 거다.”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그 이후 정환은 호스트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웬 노티 나는 여자랑 살림을 차렸다. 그 여자는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특별히 예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의아하게 생각하던 차였는데, 그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기…무슨 일이든 다 처리한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도마뱀은 무슨 소리냐고 말하고 싶은데, 때마침 문자가 같이 들어왔다. ―무조건 맞다고 하고, 일 맡는다고 해. 정환의 문자였다. 도마뱀은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 “네, 맞아요.” 여자가 어렵게 꺼낸 말은 ‘납치’를 해달라는 이야기였다. **** 단유는 바닥에 널브러져서 침을 게우고 있는 숙희를 바라보았다. 숙희는 복부를 가격당한 통증과 정환의 돌변에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옆에 누가 서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눈물을 흘리며 짐승 같은 신음 소리만 내는 중이었다. “괜찮으세요?” 흠칫 놀란 숙희가 고개를 들어보니, 창고 위의 조그만 환기창을 통해 들어온 불빛에 의지해 어슴푸레 보이는 실루엣을 발견하게 되었다. “누, 누구세요?” 단유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숨을 내쉰 뒤, 쪼그려 앉았다. “누군지도 모르면서 납치하려고 했어요?” 숙희는 놀란 눈으로 비명을 지르려다 단유의 손짓에 입을 막았다. “소리 크게 지르지 마세요. 안 좋아요.” 단유는 숙희의 머리를 짚었다. 숙희는 그 손을 피하려 했지만, 자세가 바닥에 누워있어 피할 수 없었다. “선생님 친구분이신데,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냥 아주머니라고 부를까요?” 그 말에 숙희는 아이의 정체를 확신했다. “너, 도망갔다고 들었는데?” “…물어볼 게 있어서요.” 숙희는 소리를 질러서 정환과 ‘미친 도마뱀’을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달려와 이 아이를 본다면, 조금 전의 해프닝은 말 그대로 해프닝으로 넘어가리라. 정환은 다시 자신에게 웃음을 지어줄 것이고, 따뜻한 손으로 자신을 일으켜 세워주리라. 도마뱀은 무릎을 꿇고 석고대죄하며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사과하리라. 그리고 작전대로 정환이 연재훈에게 전화를 걸어서 돈을 받아낼 테고, 그럼 그 돈으로 정환과 둘이서 해외로 가, 따뜻한 해변 근처에서 둘만의 로맨스를 매일 매일 연출할 수 있을 것이다. “저기요.” 아이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숙희가 아이를 바라보자, 아이가 미미하게 고개를 젓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이미 저 쪽에게 버림받으신 거예요. 현실을 부정하려 하지 마세요.” 숙희는 조금 늦게 그 말을 이해했다. 아니라고 부정하려는데, 아이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저쪽에서는 아주머니를 먼저 처리해야겠다고 이야기하는 중이던데요?” 거짓말. “거짓말 아니에요. 그리고 설령 그 말을 믿지 않더라도, 방금 ‘도마뱀’ 아저씨랑 그…남자의 태도만 봐도 아주머니가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아주머니 정도 나이시면 그 정도는 아실 수 있지 않아요?” 그 정도 나이가 되도록 사람을 많이 만났다면, 상대의 말과 행동을 통해 상대가 무슨 의도를 가졌는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도는 알지 않느냐는 말이었지만, 숙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어!” 단유는 사람이 위급한 상황에 닥쳤을 때, ‘현실 부정’을 한다던 심리학책의 구절을 떠올렸다. ‘우울 다음이 부정이고, 그다음이 분노던가?’ “그 남자는 누구예요? 같이 오신 분이요.” “…정환이?” “그분이 남편이세요?” 숙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 숙희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어린이집 등에서 보육교사로 근무할 때, 너무 버겁고 지쳐서 결혼만 하면 당장 일을 그만두고 집안일만 하며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원하던 결혼을 했건만,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일에 투자해야 할 판이었다. 결혼 전에 꿈꿨던 낭만과 로맨스는 어디로 가고, 치열한 삶의 투전판이 신혼집에 펼쳐졌다. “뭐? 주식?” “…….” “언제부터 주식을 한 건데? 아니, 지금 그래서 주식으로 돈을 다 날렸다고? 지금 그걸 자랑이라고 말하는 거야?” “앞으로 벌면 되잖아!” “앞으로? 당신이 벌이가 되면 얼마나 된다고 그걸 번다는 거야?” “나만 버나? 당신도 돈 벌잖아? 호봉도 많이 돼서 돈 많이 번다며?” “뭐?”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미 닥친 현실 앞에서 숙희는 저항할 힘이 없었다. 결국, 오랜 꿈을 접고, 미친 듯이 일에 몰두했다. 가끔 집에 들어가면 밥 차려라, 청소는 안 하냐 같은 남편의 잔소리에 맞상대하다가 다투는 것이 일상이었다. 신혼에 터진 일 때문에 아이도 빨리 갖지 못했다. 하지만 남편이 주식으로 날린 돈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랄까, 아니면 결혼 전에 남편이 가지고 있던 재산이 많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랄까. 두 사람 사이의 갈등도 3년 뒤, 잃었던 재산을 복구하면서 멈췄고 그 시기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아이가 생겼다. 아이가 생기면서 가정에 변화가 생겼다. 남편은 가정적인 남편의 역할에 충실했고, 숙희는 맞벌이 부부의 운명에 순응하며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하기 위한 계획에 집중했다. 아이를 데리고 어린이집으로 출근했고, 아이와 함께 퇴근했다. 남편은 전보다 신경질을 덜 냈고, 돈은 착실하게 모였다. 돌아보면 이 시기가 숙희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아닐까, 싶었다. 둘째도 생겼다. 둘째가 생기면서 부부 사이는 더 좋아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변수가 있었다. “전셋값이 올랐다고?” 남편의 말에 숙희는 신경질을 내며 통장을 뒤적거렸다. “이 동네 전셋값이 다 올랐다고, 이번에 계약 끝나면 나가라잖아!” 물가는 말도 못하게 오르고, 아이들 키우는데 드는 돈도 두 배로 드는데, 들어오는 돈은 늘어나질 않으니 빠듯한 생활이 이어졌다. 게다가 맞벌이 부부다 보니 아무래도 가정에 조금씩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고, 얼마 전까지 서로를 이해해주던 푸근했던 자비심도 바닥이 났는지 다시 서로에게 날카로운 비수를 꽂아대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거 통장이 하나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안 보여. 어디에다 뒀지?” 숙희가 서랍장을 뒤질 때, 그녀는 남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음을 보지 못했다. ======================================= [303] Defuser(10) 그 후, 숙희 부부네에서는 싸움이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 집을 구해서 이사를 하게는 되었지만, 전에 살던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허름한 곳이 되었다. 숙희는 점점 쌓이는 화를 주체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니 ‘화’가 아니라 ‘우울증’이라고 해야 옳겠다. 우울하고 짜증 나고 화가 나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아이 우는 소리만 들으면 손이 먼저 올라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숙희의 속도 모르고 동료 교사들과 원장 선생님은 속 편한 소리나 하고 있었다. “숙희쌤, 이번에 애들 장기 자랑하는 거 잘 준비해 주세요. 작년처럼 준비하시면, 학부모들한테 또 클레임 들어올지도 모르잖아요. 아시겠죠?” 내가 지금 애들 장기자랑 준비물이나 챙길 정신이 있을 거 같아? “쌤. 애들 점심식사 지도 좀 잘해 주세요. 어제 잔반이 제일 많이 나왔다고 주방 선생님이 이야기하시던데.” 애들이 먹기 싫다고 숟가락을 내던지는데 내가 무슨 수로 먹여? “쌤, 취침시간에 애들이 장난치지 않게 해주세요. 다른 반 아이들까지 잠을 잘 자지 못하잖아요.” 하나부터 열까지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어떤 아이가 밥을 먹기 싫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먹기 싫으면 먹지 마, 라고 했으면 좋겠지만, 애가 밥을 안 먹으면 학부모에게 항의가 들어온다. 어떻게든 밥을 먹여야 했다. “먹어.” 싫다고 떼를 쓰는 애를 앞에 앉혀 놓고 숟가락을 들게 시켰다. 아이는 핑크빛 볼을 부풀리며 손을 가랑이 사이에 넣고 가만히 쳐다만 볼 뿐이었다. ‘니가 어쩔 건데?’ 라고 놀리는 표정 같았다. 숙희는 큰 소리로 숟가락을 들라고 명령했다. 너무 큰 소리에 놀랐는지, 애가 겁을 먹었지만, 숙희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숙희의 눈에는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고 떼를 쓰는 아이만 보일 뿐이었다. **** 숙희가 정환을 만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정환을 만나기 전, 숙희는 작은 식당에서 식당보조로 일하면서 하루하루를 사는 신세였다. 식당보조지만 혼자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그리고 식당보조라서 다행인 점도 있었다. 뉴스에 자신의 얼굴이 나온 적도 없는데 주변 사람들은 자신을 알아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폭력 교사’, ‘무정한 교사’, ‘인면수심’ 따위의 수식어로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힘들었던 숙희는 사람들과 많이 마주치지 않아도 되는 주방 보조로서 식재료를 다듬거나 설거지를 하는 일이 편했다. 일이 끝나면 손가락 끝이 퉁퉁 부어있을 뿐만 아니라, 손등에 공기라도 집어넣은 듯 부풀어 오르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먹고 살려면 이 정도 고통은 감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일을 마치면 자정이 다 되어갔다. 어둠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면 어둡고 차가운 임대 아파트의 차가운 공기가 그녀를 맞이했다. 이혼했을 당시에는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이 적응의 동물이라고 느끼게 된 것은, 이 차가운 공기가 점점 익숙해지고 또 편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지겨운 아이들을 보지 않아서 또 잘 된 것 같기도 했다. ‘원래 어린이집 같은 건 그만두려고 했었잖아.’ 예전에는 가끔 집에 돌아와 빈 소파 위에 드러누워 TV를 보고 있으면, 자신의 두 아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두 해 연락이 닿지 않고, 어쩌다 연락이 닿아도 전 남편에게 모진 소리를 들으며 통화가 끊어지는 일이 수차례 반복되자, 이제는 전화도 하지 않게 되었다. 신기한 점은 그토록 심하게 앓던 ‘우울증’이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우울하지는 않았다. 가끔 기분이 다운되긴 해도, 우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잠시 자신의 삶이 비참하다고 느끼긴 해도, 그저 스쳐 가는 생각일 뿐이었다. ‘난 원래 자유롭게 살아야 할 운명이었던 거야.’ 숙희는 정신승리로 극복했다. 그렇지만, 숙희는 가끔씩 외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외로움을 해소하고 싶은 생각에 친한 이들에게 연락했다. 대부분은 숙희의 사정을 알고 있었지만, 더러 숙희의 사정을 모르는 이가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연락해서 허세를 떨며 짐짓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음을 지을 때 기분이 좋았다. 그중 한 명이 ‘희정’이었다. “그래, 언제 한 번 만나서 밥이라도 먹자.” ―난 시간 많으니까, 언제든지 전화해. ‘희정’과 전화를 하면 기분이 참 좋았다. 얼마나 기분이 좋으냐면, ‘희정’을 상대로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욕을 퍼부을 수 있었기 때문에 좋았다. “씨발년. 옛날에는 애들 옷 하나 입히지 못해서 덤벙대던 게, 맨날 좀 도와달라고 부탁하던 년이 운 좋게 좋은 직장 잡았다고 쪼개기는.” 숙희는 설거지하면서도 중얼거렸고, 그렇게 중얼거릴 때마다 조금씩 속이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가끔 숙희는 주방일을 보는 아주머니들과 식당 근처의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셨다. “그런데 자기가 요즘 맨날 말하는 걔 있잖아?” “누구요?” “왜 맨날 욕하는 애 있잖아?” “아.” “도대체 걔가 뭘 잘못했길래 그렇게 욕을 해?” “다 들었어요?” “어머, 자기가 중얼대는 소리가 그릇 깨지는 소리보다 더 큰 거 몰라?” “창피하게, 그러면 진작 말을 하지 그랬어?” “자기가 너무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어서. 아무튼, 무슨 일이길래 그래?” 자고로 뒷담화란 여러 사람을 두고 해야 재밌는 법이라. 숙희는 ‘희정’이 얼마나 재수 없고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스타일이었는지를 설명했고, 그런 애가 재수 좋게도 ‘연성 그룹’의 핏줄을 돌보는 일을 맡으면서, 팔자가 폈다고 이야기했다. “어머, 진짜?” “진짜. 걔가 거기서 뭐 하는지 알아요? 아무것도 안 해요. 그냥 아침에 가서 애들 등교하는 거 도와주고, 하루종일 놀다가 애들 돌아오면 그거 확인하고 애들 자는 거까지만 보고 퇴근하는 게 일이래요.” “선생이라며? 그럼 뭐 가르치는 게 있을 거 아냐?” 숙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술잔을 꺾었다. “크, 아무것도, 아무것도 안 가르쳐요. 그냥 앉아있다가 나온다니깐요. 그런데 그런 일 하면서 얼마 받는지 알아요? 무려 500만 원을 받는다니까.” “어매, 그렇게나 많이?” “진짜 줄 잘 잡아야 한다는 게 걔를 보면서 느낀다니깐요. 걔가 일한 지가 이제 2년이 다 되어가는데, 저기 강남 논현동에 집을 샀대요.” 하루 12시간 이상을 꼬박 일하고도 월 200만 원을 받기 힘든 주방 사람들은 아무것도 안 하면서 500만 원을 받고, 집을 샀다는 사람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욕하기 딱 좋은 대상이랄까? “진짜 세상 불공평하다는 게 이런 거야. 이런 세상 확 뒤집혀야 하는 거 아냐?” “윗대가리들이 다 한통속인데 바뀌긴 뭐가 바뀌어? 백날을 촛불 들고, 태극기 흔들어봐라. 세상이 바뀌나. 바뀌어도 지네들만 바뀌지, 우리 같은 서민들은 그냥 죽어 나가는 거야. 지들이 우리한테 눈곱만큼의 관심이라도 있어 봐. 우리가 이렇게 살겠냐고.” “거, 선거 때만 TV에 나와 가지고 다 같이 살기 좋은 세상, 막 이러는데 내가 막 화가 나서 뭐라도 집어던질 뻔했다니까.” “이러니까, 옛날이 좋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야. 옛날에 우리 얼마나 먹고살기 힘들었어? 그런데 대통령이 손가락질 한 번 하니까 나라가 뒤집히고 세상이 뒤집혔잖아? 그 덕에 다 잘 먹고 잘사는 거 아냐? 요즘 젊은것들은 그런 고마운 걸 모르고 말이야.” 갑자기 어디서부터 정치 이야기로 변질하였는지 모르겠지만, 상관없었다. 편하게 욕할 대상만 있다면야. 아줌마들의 수다가 이어질수록 뒷자리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맞은 편 사람이 말리는 일이 있었지만, 아줌마들은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을 눈곱만치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수다에 집중했다. 그리고 아줌마들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주의 깊게 듣고 있던, 파란 와이셔츠의 잘생긴 남자가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 정환이 그 소문을 들은 것은 사실 포장마차가 처음은 아니었다. “언니, 그 이야기 들었어?” “뭐?” “연성 그룹의 막내 손자 있잖아?” “의사한다는 애?” “걔한테 숨겨진 애가 있다네?” “걔가? 그런데 개한테 숨겨진 애가 있다고 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걔는 어차피 상속 서열에서 밀리지 않나?” “그게 모르는 일이라는 게, 지금 연성의 연회장이 제일 아끼는 손자가 그 애라잖아.” “그거 나도 들었는데, 그거 다 의미 없어. 이미 실권은 연병호한테 넘어갔다며. 연병호는 지 아들 중에서 막내아들을 제일 싫어해서 거의 연을 끊고 산다며?” “그래도 아직은 연회장이 살아 있는데, 연병호 사장 마음대로 내칠 수야 있겠어? 그런 데다가 숨겨진 애가 있다잖아?”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딱 그림이 안 그려져?” “무슨 그림?” “연회장이 아끼지만, 연병호 사장과는 거의 절연하다시피 한 막내 아들이 돌보는 아이가 있다. 이게 팩트잖아?” “그러니까, 그게 뭐? 막내아들이 사고 쳐서 낳은 애가 연회장 눈에 들기라도 했다는 거야?” “아이참. 막내가 사고를 쳤다 해도 숨길 필요까지는 없잖아. 결혼도 안 했다는데.” “그냥 결론만 말해.” “…사실은 그 애가 막내가 사고 쳐서 낳은 애가 아니라, 연회장의 애라는 소문이야.” “…미친년아. 그게 말이 되니?” “안 될 건 또 뭐래? 남자는 나이가 80을 넘어도 애를 보겠다고 떡을 친다는 데, 연회장은 아직 80은 안 됐잖아.” “그게 말이냐, 방귀냐? 야, 니 생각은 어때?” 그때까지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정환은 양주를 들어 빈 잔에 따라주며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제가 뭘 알겠습니까? 그쪽 사람들 이야긴 저한테는 먼 나라 이야기라서 들어도 모르겠네요.” 정환은 자기 잔을 들고 말했다. “그런 골치 아픈 이야기, 전 이 한잔에 비워버리렵니다. 전 이 술처럼 화끈하게 살고 싶지, 이것저것 따지면서 사는 인생 골 아파서 못 삽니다.” 하지만 자신의 말과 달리, 정환은 이런 정보들을 어느 하나 허투루 다루지 않았다.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기억해두었다가 기회만 닿는다면 곧바로 쓸 수 있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뜻밖의 장소에서 정환은 준비된 지식을 이용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계획을 세운 며칠 뒤, 호스트 바를 그만둔 정환은 천천히 숙희에게 접근했다. ‘주방 보조? 어림없다.’ 상대가 여자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자기 발아래 놓을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자신감처럼, 얼마 후 정환은 자기 배 아래 숙희를 깔아볼 수 있었다. **** “남편도 아니지만, 남편보다 더한 정신적 유대감과 정서적 기둥의 역할을 하는 남자라.” 단유의 중얼거림에 숙희가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걸 어떻게?”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걸 설명할 시간이 없고, 설명할 의무도 없네요. 아무튼, 그런 남자라는 거네요?” 숙희가 차에서 내려서부터 지금까지 그 남자 곁에서 보인 행동과 동작, 눈짓과 말 등에서 추정해 본 것뿐이지만, 방금 숙희의 반응을 통해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숙희의 대답이 있기도 전에 단유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저희, 그러니까 저랑 명수한테 개인적인 원한이라도 있으신가요?” 숙희는 그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를 악 깨물었다. “내가 고작 너희 따위한테 원한 같은 게 있어서 이러는 줄 알아?” 단유는 굽혔던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갑작스러운 단유의 행동에 숙희가 움찔거렸다. 단유가 창고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을 때, 창고 바깥의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손전등을 들고 나타난 사람은 정환이었다. “자, 자기야.” 숙희가 정환을 불렀지만, 정환은 숙희에게 관심이 없었다. “방금 누구랑 대화한 거야?” 숙희가 얼른 턱으로 단유가 숨은 구석 쪽을 손가락질했다. “저기, 꼬마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전등 불빛이 구석을 향했다. “꼬마?” “어?” 손전등 불빛이 비친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 방금 같이 있었는데?” 숙희가 무릎걸음으로 앞을 짚고 나가 구석으로 가보았지만, 가서 벽을 더듬어보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빠져나갈 구멍도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 있었는데?” 갑자기 땡그랑 소리가 나며 불빛이 크게 흔들렸다. 숙희가 놀라서 돌아보니 정환이 보이지 않았고, 정환이 들고 있던 손전등만 바닥에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정환은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짝다리를 짚은 채 고개만 좌우로 돌리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세 걸음 앞에 서 있는 남자애, 단유를 보며 물었다. “너냐?” 정환의 눈은 새까맣게 물든 것처럼 짙은 어둠을 품고 있었다. ======================================= [304] 주목(1) 하얀 나무줄기가 달빛에 어스레하게 보이는 자작나무들을 바라보는 정환은 태연하게만 보였다. 갑작스러운 ‘이동’으로 정신을 살짝 잃었을 테지만, 누구보다 빠르게 정신을 추스르는 모습을 보인 정환이었다. “우습군.” 정환의 태도, 눈빛, 표정, 말에 담긴 감정 등을 종합하여 살피던 단유는 순수하게 놀라움을 표시했다. “대단하시네요?” “뭐가?” 마주 선 단유를 아래로 내려다보는 정환은, 마치 계속 이 자리에 서 있었던 사람처럼 짝다리를 짚고 서서는 턱을 살짝 치들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다리라도 떨면서 엎어져야 당연했던 건가?” 그 말은 지금 정환이 처한 상황이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임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도마뱀처럼 경계하는 눈길을 보내지도 않았고, 꼬마놈처럼 단유에게 미쳐서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는 것도 아니고, 쭈꾸미처럼 두려움에 덜덜 떠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기에 단유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렇게까지는 아니지만, 조금은 놀라실 줄 알았는데 전혀 놀라는 모습이 아니라서요.” 단유가 뱉은 말의 어디가 웃겼는지, 정환은 코웃음을 쳤다. “이 정도로?” 단유가 눈에 의아함을 품자 정환은 천천히 몸을 돌려 자작나무들을 향해 다가가 손으로 하얀 껍질들을 쓰다듬었다. 정환의 걸음마다 부스럭거리며 낙엽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파문(波紋)이 번지듯 울려 퍼졌다. 말없이 여유를 부리는 태도가 진짜인지, 아니면 그저 허세를 부리는 것인지 단유는 파악하기 어려웠다. “왜 절 납치하려고 하셨어요?” 그래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이야기를 이어가다 보면 저 사람의 본 모습 혹은 성격이 관찰되리라. 정환은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는 않았다. 잠시 단유를 흘깃 본 뒤, 다시 고개를 돌려 하얀 자작나무들을 하나씩 훑어보고 만져보는 여유를 부리다 단유가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하나, 고민할 때 입을 열었다. “니가 연성그룹 연회장의 숨겨진 핏줄이라는 소문이 있었지.” 이미 쭈꾸미에게 들은 내용이었다. 역시 돈이 목적이었던 거구나. 돈만 되면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도 납치할 수 있고, 죽일 수도 있구나, 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려는데 정환의 말이 이어졌다. “난 그 말을 안 믿었어.” 정환은 나무 중간쯤에 난 작은 잔가지 하나를 꺾어 집어 들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야. 무려 연회장의 숨겨진 자식을 고작 막내 손자의 손에 맡겨서 숨긴다? 말이 안 되거든. 어디 외국에 숨겨놓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람들의 눈이 잘 닿지 않는 지방에 숨겨놓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정환이 가지를 살랑 흔들며 웃었다. 묘한 의미가 담긴 미소, 라고 단유는 생각했다. “내가 아는 어떤 부잣집에서는 말이야, 며느리와 사통(私通)해서 낳은 아이를 제주도로 보냈대. 제주도에 좋은 국제학교가 있는데, 거기가 사람들 시선이나 눈이 잘 닿지 않는 곳이라 하더라고. 비록 불륜이라도 핏줄인데 그냥 버릴 수가 없으니 잘 먹고 잘살게 해주자는 의미에서 그랬다더라. 일개 부잣집도 그렇게 하는데, 무려 연성 그룹의 연 회장이 이렇게 허술하게 둔다? 말이 안 되지.” “그런가요?” 그런 쪽으로는 들은 바도 없고, 아는 바도 없었기에 단유로서는 달리 대꾸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적당한 거리에 두고 관리를 하는 아이, 라고는 생각했지. 어떤 이유에선지 더 가까이 둘 수는 없지만, 그래도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게 두고 후원이라는 방식으로 가까이 두어야 하는 아이. 과연 그 이유가 뭘까 궁금했었지.” 정환이 손에 든 가지의 끝이 단유를 향했다. “이 정도 능력이 있으니까, 연회장이 너를 키우려 했던 거겠지.” 단유는 자신이 가진 능력을 과대포장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과소평가할 수도 없었다. 과연 이 세상에 자신과 같은, 혹은 비슷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라고 묻는다면 거의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마법이 존재할 수 없는 세상인데. 그렇지만 정환은 ‘능력’을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건 너무 억지 아닌가요? 게다가 전 연 회장님이란 분이랑 전혀 관련이 없는데요.” “그건 네 이야기지.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야기하는 법이니까. 수많은 증거를 제시해도 나 모른다, 난 죄 없다 말하는 거 못 봤어? 니가 부정한다 해도 드러난 정황만 살피면,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결과라고 생각하는데?” “저 같은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는 건가요?” 물어보는 단유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두려움? 아니, 그것은 긴장이라기보다는 기대감이라고 해야 옳겠다. 정환은 단유의 의도를 읽었는지 또 한 번 코웃음을 쳤다. “설마. 이런 능력을 쓰는 사람이 많았다면 이 세상이 이렇게 돌아갈 리가 있겠어? 그리고 난 음모론자가 아니야.” “그럼, 왜 아저씬 놀라지 않으셨던 거죠? 마치 예전에도 겪어본 적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아까도 말했지만, 니가 보통의 평범한 아이는 아닐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고, 분명히 재벌가에서 탐낼만한 재능이나 능력은 있을 거로 추정하고 있었으니까. 똑똑하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냥 똑똑한 정도로는 재벌가에서 관심을 보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거든.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할 정도의 천재라도 된다면 모를까. 그런데 이런 능력을 가진 이라면 재벌에서 탐을 내고 소중히 할 만하다고 생각되는데?” 정환이 천천히 단유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나, 놀라지 않은 건 아니야. 이런 일을 벌이는데 놀라지 않을 리가 있겠어? 다만 크게 놀랄 정도의 일은 아니란 거지.” “그럼 아저씨의 기준에서 놀랄 일이란 건 어느 정도인 거죠?” 어느새 단유와 두 걸음 정도로 가까워진 정환이 단유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허리를 살짝 굽혔다. “놀랄 일이라. 예전에 말이야, 어렸을 때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어. 사람은 정말 쉽게 죽지 않는구나. 총을 맞아도 유언을 남길 때까지 눈을 감지 않았고, 배에 칼을 맞아도 잘 누르고만 있으면 또 얼마든지 살아나는구나. 그런데 그건 영화니까, 과연 실제로도 그럴까, 궁금했지.” 눈앞에서 바라보는 정환의 눈빛은 이제껏 봐왔던 이들의 그것과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새까만 눈동자. 짙은 검은색으로 꽉 채워진 눈동자에 다른 어떤 의미도 읽을 수 없었다. 흔들림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동자에는 ‘악의’도 존재하지 않았다. “총을 구할 수만 있었다면 좋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총을 구하는 건 쉽지 않더라고. 그래서 칼로 실험을 했었지. 뱃속에다 깊숙이 찔러넣었더니, 어떤 줄 알아? 핏줄이 선 눈으로 나를 보며 부들부들 떨다가 죽어. 유언? 말할 힘도 없어 보이더라. 물론 내가 좀 힘이 과하게 썼는지 배를 좀 많이 헤집어 엎긴 했지만 말이야. 어쨌든 배에 칼이 들어오고도 말할 힘을 내는 사람은 별로 없더란 사실이지. 비명도 크게 못 지르더라고. 몇 번 더 해봐도 결과는 같았어.” 정환은 즐겁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웃지 않았고, 오로지 단유의 눈동자만을 직시할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사람이 15층 높이 아파트에서 떨어지는 걸 봤어. 보통 사람이 그 정도 높이에서 떨어지면 즉사한다고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 그 사람, 안 죽더라고. 시멘트로 포장된 길 위에 떨어져서 머리가 깨지고 뇌수가 흘러나오는데, 바로 안 죽더라고? 10초? 그 정도를 숨을 쉬더라고? 나를 보면서 살려달라고 손까지 들어 올리더라니까? 생각해보니 그 순간이 아마 내가 가장 놀랐던 순간이 아닌가 싶어.” 단유는 어쩐지 정환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확률적으로 사람이 아파트 15층 높이에서 떨어져 머리가 깨진다면 즉사할 가능성이 거의 99%일 것이다. 단 1%, 아니 그보다 더 작은 확률로 정환이 이야기한 것과 비슷한 반응을 보일지는 몰라도,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닐 것이다. 1% 미만의 확률을 가진 사건을 접할 때, 사람은 놀라게 된다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다음 놀랐던 순간이 아마, 10년 전 만났던 여자 때문이었던 것 같은데.” 정환이 허리를 펴며 처음과 같은 자세로, 단유를 아래로 내려다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 여자는 손에서 불을 만들어내는 여자였어.” 단유의 눈동자가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그 반응이 정환을 즐겁게 했던 모양인지, 정환이 이를 드러내며 웃음소리를 흘렸다.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해. 일이 끝나고 집에 가던 무렵, 담배를 피우려고 담배를 꺼내 물었는데 불이 없는 거야. 주머니를 뒤져도 라이터가 나오지 않아서 담배를 버려야 하나, 하는데 어두운 골목에서 한 여자가 나와 나를 보며 싱긋 웃더니 그러더라고. 불, 필요하세요, 라고.” 단유는 몸이 움찔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정환이 여자를 언급하는 순간, 그가 처음으로 드러낸 감정 때문이었다. “그러더니 맨손에서 갑자기 불을 피어 올리는 거야. 난 담배에 불을 붙이지 못했지. 그랬더니 그 여자가 웃으면서 내 입에 물렸던 담배를 빼더니 자기 입에 대고 불을 붙이더라고. 그리고 한 모금을 빨아서 연기를 뱉고는 다시 내 입에 담배를 물려주더군.” “그래서요?” “고맙다는 한 마디만 남기고 사라졌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 여자 뒤를 쫓았지만, 더는 그 여자를 볼 수 없었다.” 여전히 정환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기 어려웠다. 판가름하기에는 정환이 드러내는 정보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약 방금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정환이 만난 여자는 ‘마법사’일지도 모른다. “그다음부터는 이 세상에 내가 잘 알지 못하는, 혹은 나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인간들이 존재할 거라고 믿게 되었지. 손에서 불을 만들어내는 사람도 봤는데, 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도 있지 않겠어?” 정환이 다시 한 걸음 더 다가와 다시 허리를 숙이니 코가 맞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너처럼 말이야.” 단유는 얼른 한 발을 뒤로 빼며 고개를 뒤로 젖혔지만, 살짝 스친 것인지 목에 가느다란 줄이 생겼고, 그 줄에서 붉은 피가 몽글 솟아났다. “어떻게 알았어?” 단유는 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손을 보니 붉은 피가 묻어나 있었다. 다시 앞으로 보니 정환의 손에는 잔가지 대신 날카로운 접이식 칼이 하나 들려 있었다. 정환은 선한 웃음을 지으며 야구공 저글링을 하듯, 칼을 위로 던졌다 받으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여자 이야기를 하실 때, 아저씨가 적개심을 보이셨잖아요?” “적개심? 내가? 이런 실수 했구만.” 정환은 칼을 든 손을 들어 머리를 긁었다. 어지간해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정환이었건만, 여자를 언급하는 바로 그 순간에는 단유가 움찔할 만큼 강렬한 적개심을 드러냈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다 해도 단유는 그 적개심을 알아채고 경계심을 높였던 것이다. “내가 그 여자를 만나고 느낀 게 있는데 말이야.” 정환이 왼쪽 다리를 살짝 앞으로 내밀며 거리를 좁혀왔다. “하나는 방심하지 말자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선제공격이 답이라는 거야. 너희 같은 녀석들은 틈을 주면 안 되더라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 정환의 손에서 공격이 시작되었다. 곧게 날아온 칼은 살짝 궤도가 비틀리며 마치 종이를 그어 내리듯 비스듬히 단유의 볼 아래를 스쳤다. 하지만 단유 역시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한 뒤, 정환의 뒤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게 실수였다. 마치 자기 뒤에 설 것을 알았던 것이지, 단유가 사라짐과 동시에 뒤쪽으로 시선을 재빨리 던진 정환은 단유가 다른 어떤 행동을 하기도 전에 칼을 집어 던졌다. 칼을 집어 던질 거라는 옵션을 예상하지 못했기도 하거니와 너무나도 빨랐던 탓에 단유는 칼을 제대로 피할 수 없었다. 칼을 인식하는 즉시 자리를 옮겼음에 불구, 오른쪽 어깨에 깊게 틀어박힌 칼날이 화끈거리는 통증을 선사했다. ======================================= [305] 주목(2) 정환은 다시 옅은 미소를 지으며 통증으로 얼굴을 찡그린 단유에게 다가갔다. “넌 2가지 실수를 했어. 한 가지는 니 능력을 나한테 보여준 것. 솔직히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런 능력이 있는 걸 아는데 멍청하게 당할 리 없잖아?” 단유는 정환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정환은 별다른 악의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비웃음을 날리고, 칼을 집어 던져 상해를 입히고도 악의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라니. 예전 감옥에서 고문을 받을 때도 이런 사람은 없었다. “또 한 가지는 다시 여기로 돌아왔다는 거지. 멍청하게도 말이야. 이왕 도망쳤다면 아주 멀리 도망이나 갈 것이지, 왜 다시 돌아왔을까?” 놀리는 듯한 말투에 담긴 순수한 즐거움이 너무 아이러니라 느꼈다. 달빛에 비친 하얀 얼굴과 그 얼굴에 떠오른 선한 미소만큼이나 역설적이었다. “호기심. 그게 사람을 성장시키기도 하지만 반대로 파멸에 이르게도 하지. 그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해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넌 모를 거다.”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예요?” 정환은 몰라서 묻냐는 식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돈 때문에 납치극을 벌였던 것 아닌가요?” “맞아.” 싱긋 웃는 정환에게 단유가 통증을 참으며 되물었다. “지금 아저씨가 보이는 모습은 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잖아요?” “그게 중요해? 돈이라도 줄 테니까 살려달라고 빌 셈이야?” 단유가 답을 하지 않자, 정환은 그게 답이라고 생각했던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단유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단유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사실 이렇게 잡담하는 건 내 성격에 맞지 않는데 말이야. 밤이 길면 꿈도 길다고 하지? 난 별로 꿈꾸며 사는 성격은 아니라서 말이야.” 정환은 단유의 어깨에 꽂힌 칼을 거칠게 뽑아냈다. 단유가 신음을 내며 얼굴을 찡그릴 때, 정환은 사정없이 칼을 내리그었다. **** 비록 단유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부딪히며 다양한 경험을 했다고 하지만, ‘사람’에 대해 관심을 쏟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예전의 단유는 ‘사람’을 경계의 대상으로만 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나이부터 혼자가 되었고 누군가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살아남는 법’을 터득해야 했던 단유로서는 주위의 모든 것이 두렵고 경계해야 하는 것들이었을 터였다. 게다가 보육원 뒷산에서 동인과 마주했던 경험부터 시작해서, 학교에서 맞닥뜨렸던 다양한 종류의 악동들과 악의를 품은 어른들의 저열함, 저 세계에서 마주쳤던 수많은 사건들과 사람들, 위기들을 통해 단유로 하여금 사람에게 관심을 갖기보다 멀리하게끔 하였다. 하지만 중학교 이후, 다양한 사건과 사람들을 만나고 겪으면서, ‘사람’에게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했고, ‘사람’을 관찰하면서 ‘관심’을 두게 되었다. 단순히 주변의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만이 다가 아니었으니, 과거 만났던 인물들을 다시 한번 떠올리고 그들의 행동, 행적들을 돌이켜보는 작업도 수행했다. 그리고 단언컨대, 지금 눈앞의 정환은 지금껏 만난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동인’과 ‘제윅’이 보여주었던 잔인함이 정환에게도 있었지만, ‘동인’처럼 악의를 드러내지도 않았고 ‘제윅’처럼 계산적이지도 않았다. 표정은 선하지만, 마음은 악으로 가득 차 있고, 하지만 상대를 향해 악의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하는 행동과 말은 악의(惡意) 그 이상의 악(惡)을 드러낸다. 만약 시간이 넉넉하고, 단유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다면 좀 더 긴 시간을 대화에 할애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환은 대화보다 더 효율적인 행위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고, 불행히도 그 행위는 단유의 상해로 이어졌다. 정환이 지금 자신의 어깨에서 뽑은 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훤히 눈에 보이는 판국에도 단유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우습게도 아주 오래전 들었던 조언이었다. “대화로 해결해.” 인간은 기본적으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대화를 통해 갈등을 해소하고 대화를 통해 서로의 의견을 조정하면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하다던 기웅의 말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 말을 잘 지켰던가, 떠올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말이 어떤 주문(呪文)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떤 상황에서든 가장 먼저 떠올리는 해결책이 ‘대화’라는 것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또 매번 느끼는 것은 ‘대화’가 늘 최선의 방침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적어도 단유에겐 그랬다. 대화의 끝에서는 대부분, 정환의 경우처럼, 제윅의 경우처럼, 또 여러 경우에서 겪었던 것처럼, 무력이 행사되고 자신은 그 무력이 투사되는 것을 지켜만 봐야 했었다. “넌 감히 그 가벼운 혀를 놀려 우리를 장난감처럼 다루려 하였구나.” 근위대 대장이 자신을 향해 칼날을 드리우며 했던 말이었다. 결론적으로 대화는 자신이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상대 역시 자신을 이해하려는 자세가 바탕이 되어야만 진실한 ‘대화’가 될 뿐, 그렇지 않고서는 오히려 갈등만 더 조장될 뿐이었다. 단유는 조금 더 빨리 깨달았어야 했다. ‘대화’를 하려면 상대방이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있거나, 혹은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놓이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단유가 대화 테이블을 앞에 두고 혼자 앉아서 떠들어봐야 상대가 맞은편에 앉지 않으면 대화는 없었다. **** 정환이 내려그은 칼은 그대로 땅바닥에 꽂혔다. 즉시 정환이 시선을 빠르게 돌려 주변을 훑었다. 어리석은 꼬마 아이는 자신의 곁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호기심이 강한 녀석은 늘 그런 식으로 자기 명을 재촉하는 법이니까. 그리고 자신이 직접 그 명을 끊어주는 수고를 여러 번 하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의 능력이 궁금하지 않냐, 고 누가 묻는다면 정환은 당당히 고개를 저을 것이다. “궁금하다. 하지만 내 능력이 아닌 것을 탐내지 않는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탐내다 추락한 사람들 역시 수두룩하게 보았다. 이 세상에서 탐낼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돈이었다. 오직 돈만이 자유롭게 손과 손을 오가며 돌아다닐 수 있는 재화였고, 능력이었다. 그깟 순간 이동 쯤이야, 과거 과학이 발전되지 않은 시대였다면 모를까, 지금은 그런 순간 이동은 하나도 부럽지 않은 시대였다. 그것보다는 값비싼 롤스로이스 세단을 타고 운전수를 부리며 이동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 좋다. 일등석에 올라타서 승무원의 접대를 받으며 해외여행을 가는 것이 편하고 좋다. 그러니 꼬마의 능력은 부럽지도 않았고, 탐나지도 않았다. 다만 그 아이의 능력을 알게 되었으니 좋은 점은 하나 있었다.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 정환은 그걸로 충분했다. “어디 갔니? 도망갔니? 도망가면 안 될 텐데?” 눈에 보이진 않지만,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너 친구 있다며? 명수라던가? 걔는 어쩌려고 그러나?” 정환은 웃음을 지었다. 입꼬리가 길게 찢어져 광대뼈를 찌를 정도로 올라갔다. 정환은 맞은편에 나타난 단유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친구 걱정은 조금 되나 봐?” “아저씨.” 단유는 담담하게 말하려 했다. 하지만 어깨에 당한 상처에서 오는 통증은 쉽게 누그러뜨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왜?” “아저씨, 혹시 친구 있어요?” “아니? 그런 건 없는데?” 능글대는 정환의 대답이었다. “그래서 그렇구나.” “뭐가?” “아저씨가 왜 다른 사람과 다른지를 알 수 있을 거 같아요.” 정환의 눈이 호기심을 띠었다. “내가 다른 사람과 달라?” “많이 다르네요.” “어떻게 다른데?” 정환은 말을 잇는 순간에도 칼을 천천히 고쳐잡았다. 멍청한 꼬마는 또 같은 패턴에 당할 것이다. 천천히 여유롭게 한 걸음씩 다가가며 거리를 좁히자. “말을 듣는 척만 하시지, 실제로는 들을 생각을 하지 않으시잖아요?” 정환이 저도 모르게 발을 멈췄을 때, 단유가 말을 이었다. “친구나 다른 사람과 대화를 자주 하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경청을 하게 되는데, 아저씨는 그런 게 없잖아요? 듣는 척만 하죠. 그래서야 상대방을 어떻게 이해하겠어요? 아마 아저씨는 주변 사람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살아온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모든 것이 가식이고 꾸며진 표정과 말로 이루어진 거죠.” 정환의 눈이 꿈틀거렸다. 정환의 표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음을 단유는 느꼈다. “아저씨는 줄곧 혼자였을 거예요. 사람을 죽였다고요? 호기심 때문에? 아마 아저씨는 상대를 이해할 방법이 그것뿐이었던 거겠죠? 상대의 뱃속을 헤집고, 칼로 상처를 주면서 비명을 듣고, 그 비명을 통해 상대가 가진 감정과 행동을 이해하는 방식이요.” 정환이 손에 힘을 주었다. “제가 그 비슷한 경우를 어릴 때 봤어요. 주변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앞으로 달리는 것, 앞의 놓인 것을 부수는 것, 그리고 벽 뒤에 숨은 사람의 피를 갈구하는 것만이 세상의 모든 것인 양 행동하던 놈을요. 우리는 그놈을 몬스터라고 불렀어요.” “이 새끼가.” “몬스터는 몬스터로 대우했어야 하는데.” 정환은 힘차게 땅을 박차고 달려들어 단유에게로 향했다.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정확한 움직임이었지만, 이미 단유는 그 거리에 없었다. 정환이 몸을 틀고 다시 다른 방향에 나타난 단유에게로 달려드려 할 때, 정환의 몸은 위로 떠올랐다. 아니, 위로 떠올랐다기보다는 위로 ‘이동’했다. 정환은 당황하지 않았다. 몸이 아래로 떨어질 때도 시선은 단유에게로 향했고, 단유의 몸에 단 한 번의 치명적인 칼침 한 방만 놓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단유는 그런 기회를 선사할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단유와 싸움이 되지 않는 상대였다. 솔직히 단유 본인도 자신이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신을 그 힘을 사람에게 투사하는 것에 대해 억누르고 있었던 점이 있었기에 비등한, 아니 단유 본인이 상해를 입는 순간에까지 이르렀던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몬스터’를 상대하면서, 그런 억제는 필요하지 않았다. 정환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단유는 주변을 훑으며 적당한 물건을 찾았다. 그러다 다시 정환에게 시선을 주었을 때, 정환과 눈이 마주쳤다. “새끼.” 바닥에 떨어질 때, 용케도 몸을 굴러 부상을 최소화시킨 정환이 구르는 동작에 연계해서 몸을 일으킨 뒤 단유를 향해 달리며 손에 쥔 칼을 던졌다. 아니 던지려 했는데, 손안이 허한 느낌이었다. 그 느낌의 원인을 알아차리려 하는 찰나, 맞은 편에 선 단유가 칼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단유가 칼을 집어 던지자, 정환은 옆으로 몸을 틀면서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그 덕에 세차게 날아가던 칼은 허무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다시 정환이 일어나 단유에게로 달려갈 때, 그리고 정확히 세 걸음 앞에 두었을 때, 정환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동시에 단유는 빗나갔던 칼을 다시 손에 쥐고 정환에게 집어 던졌다. 노리고 던졌을까? 정환이 황급히 피하려 했지만 날아온 칼이 생각보다 빠르고 강했다. 칼은 정환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화끈한 통증이 이어졌고, 공중에 핏방울이 튀었다. 꽤 깊이 스친 까닭에 길게 그어진 상처가 벌어졌다. 붙잡은 손가락 사이로 피가 뭉클 솟아났다. “이 새끼….” 정환의 붉어진 얼굴이 단유를 향할 때, 단유의 손에는 다시 칼이 들려 있었다. “니가… 그걸로 뭘 할 건데?” “예전에 야생동물 가죽 벗기는 걸 배우긴 했는데, 그렇다고 아저씨 가죽을 벗길 수는 없잖아요?” “웃기시네.” “아저씨.” “…….” “앞으로는 착하게 사세요.” “뭐?” “가끔 생각나면 놀러갈게요.” 단유는 뒤로 돌았다. 그리고 곧 모습을 감췄다. 자작나무 숲 사이로 하늘 높이 뜬 달빛이 내려와 바닥에 점점이 찍힌 핏방울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핏방울만 보일 뿐, 그 어디에도 정환의 모습은 없었다. ======================================= [306] 주목(3) 피가 물든 티셔츠 위를 손으로 누르고 있던 단유는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상처로 인해 붉게 물든 손을 흘깃 내려다보다가 다시 한번 깊게 숨을 토해내는 단유였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가르쳐 주지는 않았겠지만, 디아트리의 호흡법은 이럴 때도 유용해서 통증을 완화하고 기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을 줄여주었다. 하지만 상처를 낫게 해주는 것이 아닌 이상 급히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건 분명했다. 어깨에 난 상처가 보통은 아니었지만, 단유는 해야 할 일을 미루거나 얼렁뚱땅 넘길 생각은 없었다. 단유는 도마뱀에게 찾아갔다. “어? 너!” 도마뱀의 이야기는 더 들을 가치가 없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도마뱀을 둘러업은 뒤, 창고로 데려갔다. 갑자기 사라진 단유 때문에 정신이 없던 숙희는 정환마저 눈앞에서 사라진 이후, 창고를 빠져나가려다 뒤늦게 나타난 도마뱀에게 다시 일격을 맞고 창고에 쓰러져 있던 상태였다. 그래서 다시 단유가 창고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숙희는 이미 창고 한편에 조용히 기절해 있던 쭈꾸미, 꼬마놈과 함께 맨바닥에서 뒹굴던 중이었다. 도마뱀을 창고 바닥에 내려놓고 잠시 생각에 빠진 단유였다. ‘경찰에 신고해야 할까?’ 경찰에 신고하면, 경찰은 분명히 이곳으로 와서 조용히 자빠진 이들을 체포할 것이다. 어르고 달래든, 협박하고 공갈을 치든, 혐의를 드러내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정도도 못할 경찰은 아닐 테니까. 하지만 두 가지 문제점이 단유의 선택을 가로막고 있었는데 한 가지는 단유가 지나치게 많은 능력을 선보여서 경찰들이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었고, 또 한 가지는 경찰들에게 신고하는 것만이 최선인가 하는 단유의 마음이었다. 이제까지는 법과 경찰이라는 사회적 치안 시스템에 믿음이 있었지만, 번번이 이런 일을 겪으면서 드는 생각은 과연 시스템이 믿을만한 것이냐는 점이었다. 애초부터 대낮에 중학생이 길에서 납치를 당했는데, 경찰들이 움직이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또 차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도로 위에서 폭주에 가까운 질주가 이어져 옆 차선 차량들에게 위협이 되었음에도, 그리고 이런 짓(?)을 벌이는 상황이 전개되었지만, 경찰과 사회 시스템에서 적절히 대처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바닥에 엎어진 이들을 보니, 참 구질구질한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돈 때문에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을 납치하고, 협박하려 했다니. 만약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예를 들어 명수였다면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을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면, 단지 ‘구질구질’하다는 감상으로 끝날 일은 아니었겠지만, 어쩌겠는가. 솔직히 단유의 입장에서 이들은 겁 없이 달려드는 강아지보다 더 가련하고 연약한 이들인 것을. 생각난 김에 일단 다 모아서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속 깊은 곳에 처박아 두었던 정환까지 다시 데리고 나왔더니, 그 황량했던 창고가 북적북적했다. 뒤죽박죽 뒤섞여서 널브러진 모습보다는 정렬시켜서 보기 좋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수고를 감수하고 한 사람씩 가지런히 눕도록 했다. 두 손을 가슴 위로 올려서 바르게 눕혔더니 보기가 좋았다. 네 남자와 한 여자를 창고 바닥에 눕혀둔 뒤, 단유는 창고를 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는 자작나무들이 참 많은 것 같았다. 단유가 많이 돌아다닌 것은 아니지만, 주변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던 나무들이 소나무나 전나무였던 것을 떠올리면 이 산의 식생이 조금 독특한 것이리라. 단유는 정환이 짚어보던 자작나무의 하얀 껍질에 손을 가져갔다. 예전에는 이보다 더 큰 나무―이름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크다는 인상만 주었던 나무―의 껍질을 벗겨 땔감으로 쓰곤 했었는데. 정환은 이 나무를 짚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단유는 뒤돌아 창고를 바라보았다. 다들 몸은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지만, 그들의 진체(眞體)는 이세계를 떠돌고 있을 것이다. 이대로 두면 거기서 죽든, 여기서 말라죽든 죽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이고, 자기 손으로 직접 하느냐, 시간에 맡기느냐의 차이만 있지 결국 단유가 이들을 죽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사람을 죽일 수 있냐고?’ 단유는 스스로에게 묻고는 피식 웃었다. 이미 예전에도 살인(殺人)은 했다. 새삼스럽게 도덕감, 죄책감을 떠올릴 이유는 없었다. 명분과 핑계가 모두 단유에게 있으니, 꺼릴 이유가 없었다. **** 거친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숙희는 달리고 또 달렸다. 뒤에서 달려오는 짐승의 구린내가 바로 뒤에 임박한 것 같아서, 뒤를 돌아보기가 두려웠다. “살려줘!” 있는 힘을 다 짜내서 소리를 쳐 봤지만, 앞서 달리는 사내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자기 몸을 유린할 때도 거침이 없더니, 버리고 도망갈 때도 주저함이 없는 새끼들이었다. “제발!” 숙희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은 도마뱀을 비롯한 이들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자신들이 눈을 떴던 유령마을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처음 유령마을에서 눈을 뜬 꼬마놈이 멍청하게 마을 공터에 앉아서 다리를 떨고 있을 때, 쭈꾸미가 찾아왔다. 쭈꾸미와 꼬마놈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해봤지만, 도저히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벌거벗은 몸뚱어리를 가리기 위해 집집을 돌아다녀 봐도 다 헤진 넝마 외에는 입을만한 옷이 없었다. 결국, 넝마로 허리 아래만 간신히 가릴 수 있게 두르고는 먹을 것을 찾아 나섰다. 만약 꼬마놈이 생긴 것 답지 않게―꼬마놈의 외형만 보면 장발에 락을 좋아하는 도시 불량배처럼 보였다―시골 생활이 익숙했던 것인지, 식용 구근류 식물을 구해와서 허기를 달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마을 안팎을 오가며 지리를 익힐 때, 마치 마술처럼 마을 공터에 숙희가 나타났다. 숙희 역시 처음에는 어딘지 몰라 헤맸고, 당황하다, 두 남자를 만났다. 숙희는 남자 둘의 도움을 받아 천조각으로 위아래를 겨우 가릴 수 있었지만, 펑퍼짐한 엉덩이가 노출되는 것은 구할 수 있는 재료의 한계상 어쩔 수 없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인 것은 정환이 나타나고부터였다. 정환은 신경질적으로 마을을 부수고 다녔다. 좀처럼 폭력적인 모습을 보지 못했던 숙희는 두려운 마음에 다가가지 못했고, 두 남자는 정환이 매우 화가 난 상태라는 것을 알고 가까이 가지 않았다. 정환이 화풀이를 끝내고 사람들을 모았다.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여기가 어딘지는 몰라도, 한국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졌다. 어쩌면 북한의 어느 구석진 시골 동네일 수도 있었다. 정환은 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이곳에 오게 된 날짜가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날짜의 차이가 나는 이유에 대해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단유가 분명 마지막에 ‘놀러 갈게요’라고 자신에게 건넸던 말을 떠올려보면, ‘그 빌어먹을 놈이 이곳에 올 때가 기회다.’ 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정환은 생각을 고쳐야만 했는데, 주변에 먹을 것이 없었던 탓이었다. 다 낡아 쓰러지기 직전인 집터는 물론이고, 밤이 되면 정체가 유추되지 않는 들짐승의 소리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하루 뒤, 도마뱀이 나타나면서 네 사람은 더욱 곤궁해졌다. 꼬마놈이 구해오는 조그만 식물 뿌리만 가지고 끼니를 잇는 것도 한계였던지라, 결국 다른 마을을 찾아보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나도 데려가!” 숙희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짐덩어리에 불과해서 정환은 신경쓰고 싶지 않았지만, 꼬마놈과 쭈꾸미가 반대했다. “어디든 쓰임새가 있지 않을까?” 어지간하면 꼬마놈과 쭈꾸미도 버리고 따로 행동하고 싶다는 것이 정환이 속내였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두 남자의 힘은 쓰임이 많았기에 그럴 수 없었다. 걱정스러운 것은 두 사람의 멘탈이었는데, 정환이 오기 전부터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정신적으로 불안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두 사람이었다. 급기야는 다 늙어빠진 여자를 겁탈하기에 이르렀다. 고작 일주일 만에 저렇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두 남자가 믿음직스럽지는 않았지만, 계륵이라 생각하며 정환은 마을을 떠날 채비를 했다. 꼬마놈과 쭈꾸미가 주변 정찰을 꾸준히 했던 덕분에 다섯 사람은 들판 쪽으로 나가야 한다는 판단을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어두운 숲속에 들어가는 것은 꺼려졌던 탓이었다. 널찍한 들판을 지나자 가파른 산길이 유난히 불길해 보이는 산이 가로막았다. 도마뱀이 허리를 두른 넝마 아래로 손을 넣고 그곳을 긁어대면서 말했다. “저긴 좀 위험하지 않을까?” 도마뱀도 다른 두 놈처럼 불안증세를 보이는지,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마치 틱 장애라도 있는 사람처럼, 입으로 이상한 소리를 내거나 다리를 심하게 떤다거나 피부가 붉어져 피가 나기 직전에 이를 때까지 긁는 모습이 관찰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저기에 있을 순 없잖아.” 정환이 가리킨 들판에는 정말 풀만 자랄 뿐, 먹을 수 있는 과실수 따위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정환을 비롯한 다섯 사람은 넘어지고 발이 찢어지는 상처를 입으면서도 산길을 올랐다. 부디 산 너머에 인적이 있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다섯 사람은 사람 대신 산짐승을 만났다. 늑대도 아니고 개도 아닌, 하지만 그 어딘가 비슷해 보이는 외형에 덩치는 성인 남성 이상인 짐승이 침을 흘리며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고 싶어 떠난 길이 짐승의 아가리에서 끝이 나길 바라는 사람은 없었다. 다섯 사람은 짐승을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다섯 사람은 뿔뿔이 흩어졌다. “제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는 정환이었다. 곧 여자의 비명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정환은 여자를 데리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계속 다리에 힘을 주었다. 짐승이 고작 여자 한 명에게 만족하여 걸음을 멈춘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한 마리뿐인지도 확실하지 않고.’ 정환은 흩어진 다른 남자들을 찾아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으나, 이를 위해 다시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갈 생각은 없었다. 일단은 발길이 닿는 대로 산에서 내려가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했고, 모자란 녀석들이지만 부디 그들도 자신처럼 생각해주길 바랐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남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쭈꾸미’의 비명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정확히 누구라고 단정 짓기 어려웠다. 처절하고 고통에 가득 찬 비명소리가 아스라이 들리는 가운데 정환은 잠시 느려졌던 뜀박질에 힘을 더했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공포? 우습다. 이제껏 공포의 대상으로 만약 상을 받는다면 대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우수주연상은 받을 수 있을 정도로 활약했던 정환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가해자에서 피해자가 되어 도망을 쳐야 하는 운명이라니. 정환은 입술을 깨물었다. 반드시 살아남겠다고. 살아남아서 그놈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말리라 다짐했다. 이틀 뒤, 그 산을 빠져나온 이는 정환 뿐이었다. **** 단유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기로 했다. 경찰을 믿을 수 없고, 자신의 능력이 노출되는 것과 더불어 자기를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드러내지 않더라도 자기 선에서 해결 가능했던 문제이니 이대로 덮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판단했다. 다만 한 가지 꼭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는데, 실은 이 문제 때문에 더 고민하고 결정이 지체되었다. 하지만 이와 자신의 선에서 해결을 보기로 한 이상, 그 문제도 자기 손에서 해결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집으로 돌아온 단유는, 컴컴한 거실에 홀로 앉아 있는 선생님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 안 돌아가셨네요?” “어? 언제 왔어? 들어오는 소리 못 들었는데?” 선생님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단유에게 달려왔다. “어머, 너 이거 왜 이래? 다쳤어?” 단유는 선생님의 호들갑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담담하게 행동했다. “병원에 가서 치료받아야 돼, 이건! 도대체 어떻게 다친 거길래, 아니 이제껏 뭐하다가 이렇게 된 거야?” 선생님은 서둘러 외투를 챙겨 들고 나와 단유를 끌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가는 동안 단유는 말없이 선생님을 따랐다. 병원에서는 깊은 자상이 난 이유를 물었다. 당직 의사는 깊은 상처기 때문에 당장 봉합수술과 입원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주영 누나 불러주실래요?” 단유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뭐?” 선생님이 되묻자, 단유는 다른 말 없이 주영을 불러달란 말만 했다. 그때까지도 왜 다쳤는지, 말을 하지 않던 단유였기에 선생님은 미간을 찌푸렸다. 단유가 핸드폰을 꺼내 들자, 자기가 하겠다며 선생님은 뒤돌아섰다. 잠시 후, 주영이 헐레벌떡 응급실로 찾아왔다. “어떻게 된 거야!” 단유는 싱긋 웃으며, 조금 다쳤다고 말했다. “조금 다친 게 아니잖아? 무슨 일이야? 깡패라도 만났던 거니? 아니면 누가 너한테 해코지라도 한 거야?” “죄송해요. 늦은 시간에 불러서.” “죄송하면 다치지를 말았어야지, 이게 무슨 일이야. 선생님, 선생님은 뭘 하셨길래 애가 이 지경이 되도록 연락 한 번 없으셨던 거예요?” 갑은 주영이었고, 을이었던 선생님은 그저 고개를 조아리며 죄송하다고, 미안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응급 처치를 받고 1인실로 이동된 단유는 걱정스런 얼굴을 한 주영과 선생님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말했다. “누나.” “응?” “저 목이 좀 마른 데,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 [307] 주목(4) “목이 마르다고?” “네.” 단유의 여상스러운 대답에 주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뒤에 선 선생님의 얼굴을 보니 어딘가 불안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직장에서 잘릴 것을 걱정하는 것일까, 책임을 다하지 못해 미안해서일까. 주영이 병실을 나간 뒤, 단유는 선생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생님.” “으응?” “선생님이 소문내신 거죠?” 선생님의 얼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왜 그러셨어요?” 선생님은 이를 악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입에서 우는 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았다. 어떻게 지켜온 직장인데. “숙희가…그렇게 이야기해? 내가 소문냈다고? 아니야. 아까 말했잖아? 숙희가 그런 오해를 하긴 했는데 내가 정정해줬다고.” “저 오늘 납치당했었어요.” “뭐?” “숙희라는 분과 그분의 지인이 주도하신 것 같아요. 세 사람을 고용해서 하굣길에 저를 납치했었고, 저를 빌미로 재훈이 형에게 협박하려 했던 것 같아요.” “그, 그럼 경찰에 신고를 해야 되지 않아?” “경찰에 신고하세요.” “응?” “직접 하세요.” 선생님의 두 눈이 잘게 흔들리더니, 입술이 미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숙희라는 분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소문이 그렇게 났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연 회장님의 증손자라고.” “아니야.” “제가 아까 낮에 숙희라는 분의 이름을 여쭤봤을 때, 선생님은 단순히 놀라기만 하셨던 게 아니었어요. 감춘 것이 들킬까 봐 조마조마한 표정을 지으시더라고요. 마치 지금 그 표정처럼.” 선생님은 단유의 말이 이어질수록 어쩔 줄 몰라 했다. “예전에 바닷가에 놀러 갔을 때, 선생님이 제게 그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좋은 친구를 만나고 사귀는 것 또한 이 사회를 살아가는 좋은 방법이라고 말이죠. 선생님의 기준에서 친구란 어떤 의미였던 거죠?” 선생님의 표정을 읽고 있자니 조금은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당시에도 그랬지만, 단유는 타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타입은 아니었다. 선생님의 조언 역시 잘 듣겠다고 대답했지만, ‘따르겠다’고 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난…몰랐어. 숙희가, 숙희가…….” “그건 거짓말이네요.” 흠칫 놀라는 선생님을 바라보는 단유의 눈은 담담하게 선생님의 표정을 머릿속에 기록하고 분석했다. “선생님은 숙희라는 분이 어떤 분인지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물론 그분이 납치라는 범죄를 저지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셨겠죠. 하지만 추정컨대 선생님은 숙희라는 분 외에도 여러 사람에게 저나 명수의 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군요. 그런 이야기가 선생님에게 어떤 도움을 주길래 그랬을까요?” 선생님은 무릎에 힘이 빠져서 서 있기가 힘들었다. 단유가 지적하는 내용들이 모두 자신의 가슴 깊은 곳의 어느 지점을 아프게 찌르고 있었다. **** 희정은 아이들을 돌보는 게 천직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천직이라는 게 반드시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다. 자신과 같은 과를 나온 동기들이 으레 그랬던 것처럼, 희정 역시 처음에는 보수가 많은 직장에 들어가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희정이 남들보다 우수했던 것도 아니고 내세울 것도 없었던바, 매번 입사에 실패하기 일쑤였다. 결국, 희정은 역시 다른 동기들이 선택했던 것처럼 유치원 교사직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러나 유치원 교사 역시 마음처럼 쉽게 갈 수 있는 직장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렵게나마 유치원 교사로 취업이 되면서 희정은 반강제로 마음 수련을 쌓게 되었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쉽지 않을 거란 것은 알았지만, 이토록 어려운 일이라고는 공부하는 동안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기본적으로 아이들은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자신이 어렸을 때는 선생님이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면 그대로 따랐던 기억이 나는데 요즘 아이들은 선생님 말씀을 개 풀 뜯는 소리로 착각이라도 하는지, 전혀 들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스트레스가 쌓이고 울화가 치미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런 희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천사 같은 아이’, ‘해맑은 웃음’, ‘귀여운 표정’ 등의 이미지로만 아이를 바라보는지 유치원 교사의 어려움 따위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닌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다 보니 서로의 어려움을 이해해주고 위로해주는 이는 동료 교사들밖에 없었다. 특히 동갑내기인 숙희가 희정을 많이 위로해주고 도움을 많이 주어서 친해진 면도 있다. 하지만 다른 동료 교사들 역시도 희정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들이 되어주었다. 학교에서 공부할 때의 유치원 교사에 대한 이미지가 무너졌다. 이미지가 무너지니, 신념도 무너졌다. 직업적 만족도가 떨어지고 자긍심이 바닥을 향하지만, 자신이 배운 게 이것뿐이고,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는 생각에 최선을 다했고, 점차 적응이 되니 이 일도 할 만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결국 돈을 벌려고 하는 일이니까.’ 다른 직업들이 으레 그렇듯이, 자신도 돈을 벌기 위해 선택한 직업일 뿐이었다. 그런 일에 이것저것 이유를 갖다 붙이면서 자긍심이니 뭐니 하는 건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마치 무역회사에 들어간 신입사원이 ‘대한민국 수출역군의 동량(棟梁)이 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대신 희정은 다른 것으로 자신의 공허함을 달랬다. “이번에 학부모가 너무 고맙다면서 이런 선물을 준 거 있지?” “애 생일인데 학부모가 지금까지 잘 돌봐줘서 고맙다면서 이런 걸 주잖아. 계속 거절했는데도 꼭 가져가 달라고 사정을 하더라.” ‘친구’들이 부러움에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 만족감이 들었고 뿌듯한 마음이 느껴졌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자신의 일을 가장 잘 이해하고, 알아주는 이들이 바로 ‘친구’들인데 그 친구들이 부러워하고 인정해주는 ‘성과’라면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것이지 않을까? 희정이 결혼을 할 때, 그 만족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어머, 신랑 너무 멋지다?” “너희 남편이 그 회사의 부장이라며?” “유치원 교사라서 좋다고 했다며?” 희정은 ‘친구’가 소중했고, ‘친구’가 많을수록 자신의 마음속 공터가 가득히 메워지는 기분이었다. “이번에 구한 직장이 있는데 말이야….” “어머, 정말? 그렇게만 일하면서 돈을 그렇게 많이 줘?” “신랑이 좋아하겠다.” “난 어디 그런 직장 안 구해지나?” “우리 나이가 솔직히 애들 돌보기가 쉬운 나이는 아니잖아? 그런데 희정이 너처럼만 되면 10년은 더 일할 수도 있겠다.” “10년이 뭐니, 20년은 더 하겠네.” 대화가 풍성(?)해질수록 희정의 만족감도 커졌다. “이건 비밀인데….” “진짜? 와, 어쩐지. 그냥 돈을 주는 게 아니구나.”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돼.” “안 하지,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해. 아무튼, 희정이 너 그쪽에 제대로 눈도장 받았구나? 나중에 애들 큰 뒤에도 계속 이 일 할 수 있는 거 아냐?” “그럴지도 모르지?” “연씨 집안 애들만 전문적으로 돌보는 유모 같은 건가?” “얘, 재벌가 유모라도 희정이처럼 외부에서 애들 보는 거면 정말 꿀이지. 어르신들 눈치 안 봐도 되고, 밥, 청소해주는 사람도 따로 구해주니까 이보다 좋은 직장이 어디 있겠어?” “희정이 말년이 아주 폈다, 폈어.” 숙희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숙희의 사정을 모른 척해주는 건 기본이었다. 그런 걸 일부러 집어서 말하는 건 친구로서의 자세가 아니었으니까. 숙희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대부분 얼버무리면서 진심을 보이지 않지만, 희정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진심 어린 반응을 보여주었다. 친구가 부러워할 정도의 직장과 높은 대우를 받는 희정의 모습이 대화에 투영되면, 어쩐지 본인의 위신도 덩달아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연씨 집안 증손자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기분이 어떨까?” “나중에 모른 척하지는 않겠지?” “얘들 인성이 얼마나 착한데. 내가 또 그렇게 교육하고 있기도 하고. 애들이 똑똑하고 착해서, 마음 같아서는 평생 돌보고 싶다니까.” “부러운 소리다, 정말.” 그런 대화의 말미에 터지던 웃음소리가 귓가에 잔향처럼 울렸다. “선생님.” 단유의 부름에 희정이 정신을 차렸다. “그만 하세요. 그런 식으로 현실을 피하는 건 선생님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될 거예요.” 희정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감히 선생님한테 이따위로 말을 해? 내가 지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단유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지금 선생님이 느끼시는 감정, 하고 싶은 말, 하려는 행동 모두 참으세요. 어른이시잖아요. 선생님이시고. 침착하게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선생님은 지금 저를 이용해서, 아니 재훈이 형을 이용해서 허세를 부렸던 거예요.” “허, 허세라고? 허, 허세라니!” 떨림이 짙어지는 목소리에 물기가 섞인 기분이었다. 자기 귀로 들리는 자기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선생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선생님이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해, 어떤 마음으로 그런 소문을 퍼뜨리신 건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물어본들 선생님이 제대로 대답을 해주실 리는 없겠죠. 예전에도 그랬듯이 선생님은 또 다른 핑계로 합리화하시려 하겠죠. 그런 건 시간 낭비니까 묻지 않을래요. 다만 한 가지만 이야기 드리죠.” 단유는 다리를 덮고 있던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링거줄이 길게 늘어졌지만, 불편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저랑 명수는 선생님의 트로피가 아니에요.” 선생님이 아래턱을 내리고 단유를 바라볼 때, 단유는 시선을 들어 올렸다. “들어오세요.” 곧 병실 문이 열리고 주영이 들어왔다. 주영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굳어있었다. “누나.” “응.” “잘 마실게요.” 단유가 먼저 손을 내밀었고, 주영이 어색하게 손을 뻗어 음료수를 건넸다. 달칵, 거리며 캔 입구를 딴 단유가 한 모금을 마신 후 싱긋 웃었다. “고마워요.” 그때까지도 선생님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고개를 들지 못했고, 주영은 말없이 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좀 쉬고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 “…그래.” 주영은 또각거리는 걸음으로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일어나세요.” 선생님은 일어서지 못했다. “누나.” 주영이 단유에게 시선을 돌리자, 침대에 엎드린 단유가 고개만 돌려 주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 죄를 지은 건 아니니까요.” 죄를 짓지 않았다, 라는 단유의 말에 희정은 뭔가 가슴 속에서 울컥하고 솟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죄’라고 명시된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 말 속에 숨은 칼날이 희정의 양심을 깊숙이 찌르고 들어왔다. 주영 또한 단유의 말에서 아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아직은 ‘선생님’이었고, ‘죄를 짓진 않았으니’ 부디 모질게 내치지는 말라는 뜻이겠지. 조용히 보내드려 달라, 는 게 아마도 단유의 뜻일 것이다. 또한, 최근의 소문이 더 부풀지 않게, 조용히 처리하고 싶다는 단유의 배려일 것이다. “알았어.” 단유의 웃음을 보며 주영은 희정의 한쪽 팔을 붙잡았다. “일어나세요.” 나직하지만 단호한 주영의 명령에 희정은 엉거주춤 일어나야 했다. 주영은 희정을 부축하는 모양새로, 하지만 실은 연행에 가깝게 희정을 끌고 병실을 나갔다. 간신히 조용해진 병실에 단유는 눈을 깜빡이다 혀를 찼다. “명수 생각을 못 했네.” **** “어? 단유야? 선생님도 안 계시네?” 새벽에 일어난 명수가 단유의 방과 거실을 둘러보며 의아해하고 있을 때, 새벽시장에 들러 찬거리를 사서 온 이모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오늘 선생님이 안 나오신 거 같아요.” “아, 저기 주영 아가씨한테 이야기 들었는데, 오늘 선생님 안 나오신대.” “그래요?” “아, 그리고 단유는 밤에 좀 아파서 병원엘 갔다네?” “병원에요? 많이 아프대요?” “글쎄, 그것까지는…. 전화해보면 되지 않겠니?” 그제야 휴대폰을 떠올린 명수가 자기 머리를 '탁' 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야! 괜찮아?” 로 시작된 명수의 통화는 점점 목소리가 줄어들더니, 나중에는 가끔 대답하는 목소리만 남았다. “알았어. 그럴게. 그럼 학교 끝나고 갈까? 아, 그래? 알았어.” 잠시 후 통화를 끝낸 명수가 걱정 가득한 눈으로 주방에 나타났다. “이모, 오늘 저녁에는 집에 아무도 없을 거니까 오지 않으셔도 된대요.” “그래? 그럼 오늘은 아침만 해 주고 청소 좀하고 가야겠네.” “단유가 내일까지 휴가라 생각하시고 푹 쉬시래요.” “내일까지?” “나중에 주영 누나가 따로 연락할 거래요.” 이모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곧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채소를 꺼내 싱크대에 넣고 씻기 시작하셨다. 그러다가 돌아보니 명수가 식탁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늘은 운동 안 가니?” “아, 맞다. 깜빡했어요.” 명수가 허둥지둥하며 일어나 곧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이모님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시곤, 다시 채소들을 다듬기 시작했다. ======================================= [308] 주목(5) “단유야! 괜찮아?” 명수가 병실로 쳐들어오는 소리에 단유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괜찮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조금 다쳤어.” “조금 다쳤는데 입원을 해?” 라고 말하던 명수가 병실을 둘러보더니 입을 헤 벌렸다. “우와 이렇게 넓은 데를 혼자 쓰는 거야?” “그러게. 부담스럽지만 그렇게 됐다.” 깨끗하게 정리된 병실에 하얀 병원복을 입고 있는 단유의 모습이 썩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명수는 가방을 아래 내려놓았다. “언제 퇴원하는데?” “많이 다친 게 아니라서, 금방 할 거야.” “수술해야 돼?” “아침에 치료받았고 이제 약만 먹으면 된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해서 잠시 있는 거야. 아마 내일은 퇴원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잘 모르겠다.” “조금 있다가 상미도 온다고 했는데, 오지 말라고 할까?” “상미가? 왜?” “왜긴? 친구 병문안 오는 건데 왜는 무슨 왜야.” “그냥 오지 말라고 해. 어차피 내일 퇴원해서 보면 되는데.” 병문안을 받을 만큼 심각한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잠시 치료를 위해 있는 건데 너무 일이 커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 단유가 부담스럽다는 뜻을 보였다. “혹시 몰라서 책도 들고 왔는데, 그럼 필요 없으려나?” “무슨 책?” “그냥 니 책장에 있던 책 중에 하나 가지고 왔어. 두꺼운 책 좋아하니까, 제일 두꺼워 보이는 거로 가지고 오긴 했는데, 금방 퇴원할 거면 필요 없는 거 아닌가?” 라며 내려놓았던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드는 명수였다. “고맙다.” 단유는 진심을 담아 웃음을 지어 보이곤 명수가 건넨 책을 받았다. “확실히 두꺼운 책이긴 하네.” 제목에 끌려서 샀던 책이긴 했는데, 아직 읽어보지 못하고 있던 책이어서 이참에 읽어보면 좋을 것 같기도 했다. “근데 집에서 고를 때는 급히 고르느라고 제목을 제대로 안 봤었는데, 제목이 좀 수상하네.” 명수는 단유의 손에 들린 책 표지를 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긴 「살인의 해석」이란 제목이 어린 명수의 눈에는 수상하게 보일 법도 했다. 그 뒤로 명수와 시시한 잡담을 나눈 후, 명수는 집으로 돌아갔다. 다시 조용해진 병실에 남게 된 단유는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살인이라.” 책은 정신분석학자들이 범인을 찾아가는 내용이었지만, 단유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어젯밤 벌어진 사건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셈이었다. 단유는 가습기에서 올라오는 하얀 수증기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마음속의 혼란함만 더하는 것 같았다. 이런 상태로는 책을 읽어도 집중이 잘 안 될 것 같아, 잠시 게으름을 피우기로 마음을 먹었다. 가끔은, 그냥 머리를 텅 비우고 시간을 보내는 시간을 가져도 좋으리라. 1분 1초도 쉬지 않고 주위를 살피며 머릿속으로 온갖 것들을 계산하느라 노곤해졌던 뇌가 이제는 쉬고 싶다고 말하는 기분이었으니까. **** 새벽 무렵, 단유는 인기척을 느끼고 잠이 깼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자신보다 더 느리게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단유의 인사에 들어오던 이가 멈칫했다. “깼냐?” “네.” “미안하네.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재훈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젖은 머리가 덜 말랐다는 것을 깨닫고는 긁던 것을 멈췄다. 병실 문을 닫고 침대 쪽으로 다가오는 재훈을 보며 단유는 몸을 일으켰다. “그냥 누워 있어.” “괜찮아요.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몸이 가렵기도 하네요.” “그건 목욕을 안 해서 그래.” 실없는 농담을 뱉으며 침대 옆에 놓인 의자를 가져다 앉은 재훈은 이후 말없이 단유를 바라보기만 했다.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아, 요즘 잠을 잘 못 자서 말이야. 원래 병원 실습이란 게 힘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피곤할 줄은 몰랐네.” 달빛처럼 희미한 웃음을 짓는 재훈을 보던 단유는 옆에 놓인 냉장고에서 초콜릿을 꺼냈다. “낮에 주영 누나가 잠시 들렀다가 주고 간 건데, 형한테 더 필요해 보이네요.” “고맙다.” 재훈은 애써 거절하진 않고, 단유가 내민 초콜릿 하나를 집어 포장지를 뜯어낸 뒤 입안에 넣고 천천히 녹이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말없이 시간을 보내다, 한참 후 재훈이 뱉은 첫 마디였다. 그 한마디가 그렇게 꺼내기 어려웠던 건지. 재훈은 내친김에 말을 이었다. “나 때문에 니가 고생을 하는구나.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내가 생각이 짧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형이 왜 미안해요? 형은 잘못한 게 없잖아요.” “…그래도 미안해. 내가 신경을 쓰지 못한 것도 그렇고, 내 출신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 그것도 미안하고.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널 입양하기로 했을 때 주영이 반대했던 게 고맙기까지 하네. 만약 입양이었다면 더 심한 일도 벌어졌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형.” 재훈이 고개를 들어 단유를 보았다. “저랑 명수는 진심으로 형한테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형 덕분에 저희 두 사람, 지금까지 편하게 생활할 수 있었고, 공부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물론 이런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형이 어떤 마음인지 모르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그런 이유라면, 과연 사건의 원인을 어디까지 거슬러가야 하는 걸까요? 만약 제가 ‘부모님이 안 계셔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미안해하면 형이 이해하시겠어요?” “…….” “저랑 명수가 고아이기 때문에, 형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기에, 그래서 형의 후원을 받으며 생활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러니 결국 원인은 저랑 명수가 고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에게 심려 끼쳐 죄송하다고 사과를 한다면, 형이 받아들이실 수 있으시겠어요?” “…그건 억지지.” “형도 억지를 부리신 거예요. 형이 연성그룹과 관련 있다고 해서, 그것이 이 일의 원인이라고 말씀하시면 안 되죠. 이번 일은…….” 단유는 잠깐 말을 멈추고 병실의 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불투명한 창으로 희미한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달빛이라기엔 너무 밝은 빛이어서 아마 주변 상가의 간판에서 비친 불빛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요. 이번 일은 그냥 사고였어요. 욕심, 욕망, 동정, 은혜와 같은 감정들이 전력으로 질주하다가 교차로에서 난 사고였어요.” 사람의 보이지 않는 감정들이 그렇게 치달았고 맞부딪치며 피를 흘리고 상처를 헤집었던 사고였을 뿐이었다. “물론 한 사람의 욕심이 신호위반을 한 것 같지만, 뭐 그 정도는 어디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잖아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달빛 같은 웃음으로 재훈을 달래는 단유였다. 재훈은 고맙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다. 애초에 자신이 단유를 입양하려 할 때 가졌던 가벼운 마음도 조금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비로소 재훈은 ‘책임감’이란 것이 이토록 무거운 것이라는 사실을 통감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형.” “응?” “씻었으면 좀 말려요. 그러다 머리에 비듬 생겨요.” 단유가 재훈의 젖은 머리를 가리키며 말하자, 재훈이 방긋 웃었다. “그게 보여?” “번들거리는데요?” 두 사람은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병실을 나가기 전, 재훈이 물었다. “주영이한테 들었는데, 경찰에게는 신고를 안 했다며?” “별일 없었는데, 그냥 조용히 덮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요.” “그것도 설마, 나 때문이야?” “형, 그러다 피해의식 생기겠어요. 그게 왜 형 때문이에요? 저 때문이죠.” 빈말이 아니라 정말 단유 본인을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하지만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조금 달랐나 보다. 주영도 그러더니, 재훈 역시 ‘고맙다’는 말로 인사를 건네고는 병실을 나섰다. **** 퇴원할 때도 주영이 와서 도와주었다. “바쁘신데 저 때문에 곤란하게 해드리는 것 같아 죄송하네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김단유씨.” 주영은 싱긋 웃으며 단유의 손을 붙잡았다. “저희가 너무 소홀했던 것 같아 미안해서 더 유난 떠는 거랍니다.” “그러지 마세요, 누나. 진짜 부담스러워요.” “그렇게 부담스러우면 이제부터는 사고 좀 치지 말고.” “그럴게요.” “1등도 다시 하고.” “1등이요?” “공부, 해야지?” “지난번에는 그런 말씀 없으시더니, 은근 걱정하고 계셨나 봐요?” “걱정이야 당연히 하지. 물론 니가 알아서 잘하는 아이라는 걸 모르진 않지만, 그래도 갑자기 그렇게 성적이 뚝 떨어져 버리면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잖니?”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진짜 친누나 같네요.” 주영은 단유의 손을 꼭 붙잡고 앞뒤로 크게 흔들며 걸어갔다. “너 같은 동생이라면야 친누나 백번도 더 하지.” “명수도 있고요.” “음…명수는 조금 고민해봐야 겠는데?” “명수가 들으면 섭섭하겠어요.” “걔가 공부에 조금만 더 관심을 쏟는다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지.” “그렇게 전할게요.” 집으로 돌아온 단유에게 일주일간 통원치료하는 거 잊지 말라는 당부를 남기며 주영은 돌아갔다. “밥 줄까?” 아직 점심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이모님은 반가운 마음에 다른 말 대신 식사를 권유했다. “네, 먹을게요.” 이모님은 냉장고에서 밑반찬들을 꺼내고, 김치전을 노릇하게 구워 접시에 내 주었다. “학교는?” “내일부터 가려고요.” “괜찮고?” “의사 선생님이 괜찮다고 했어요.” “그래도 조심해. 다친 곳 덧날 수 있으니까.” “네. 고맙습니다.” 단유는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숟가락을 들었다. 오후에는 상미가 집으로 찾아왔다. “야, 너 왜 내가 간다는데 오지 말라고 한 거야?” “상미야.” “왜!” “그 전에 먼저 할 말 있지 않냐?” “뭐?” “예를 들면, 아픈 데는 괜찮냐는 둥 뭐 그런 거.” “아, 맞다. 괜찮아?” “이럴 때 ‘엎드려 절받기’라는 말을 쓴다지.” “…니가 너무 괜찮아 보여서 깜박해서 그렇지. 진짜 괜찮아? 안 아파?” “괜찮고, 안 아파.” “거기야?” “응. 궁금하다고 손대면 안 된다. 누르면 아파.” “내가 그럴 애로 보여?” “응.” “…역시 넌 나를 너무 잘 아는 거 같아.” “됐고, 아직 명수 안 왔는데, 혼자 놀고 있어.” “야, 같이 놀자.” “나 아픈 사람이야.” “방금은 안 아프다며?” “사람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습관은 좋은데, 그래도 융통성 있게 듣도록 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래. 그게 너지.” “…그거 놀리는 거지?” “됐다. 난 그냥 옆에서 구경만 할 테니까, 너 혼자 해.” “그럼 옆에 붙어 있어. 내가 설명해줄게.” “설명 안 해줘도 되니까, 그냥 혼자 놀아.” 화냈다가 미안해했다가 삐졌다가 웃다가 하며 얼굴로 ‘열일’하던 상미는 결국 단유를 옆에 앉혀놓고 혼자 게임을 했다. 가끔 단유를 흘깃 바라보며 괜찮은지 표정을 살피는 모습은 또 어린애 같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상미야.” “응?” “너네 기말고사 일정 나왔지?” 상미는 게임 패드를 툭 떨어뜨렸다. “왜 재밌게 노는데 그래?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다음 주부터 같이 공부하자고.” “…그럼 다음 주에 이야기하면 되잖아?” “미리 얘기해줘야 마음의 준비를 하지. 넌 마음의 준비를 해야 공부를 할 수 있다며.” “에이, 참.” 상미는 다시 게임 패드를 손에 쥐고 몇 번 틱틱거리더니 다시 손을 놓았다. “너 진짜 못 됐어.” “뭐가?” “너 나 싫어하지?” “아니.” “그럼?” “좋아하지.” “진짜?” “응.” “그런데 왜 사람 놀려?” “놀리긴. 그냥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 것뿐인데.” “너 때문에 게임도 못 하겠어.” “잘됐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미리 공부나 좀 할까?” 상미는 얼른 게임 패드를 손에 쥐고는 다시 게임을 재개했다. 단유는 피식 웃으며 몸을 뒤로 젖혔다. 상미는 그런 단유를 몰래 훔쳐보았다가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생각해보니 단유와 이렇게 편하게 대화를 나눠본 적이 별로 없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다친 게 어깨가 아니고 머린가?’ 슬쩍 단유의 머리를 쳐다보는 상미였다. ======================================= [309] 주목(6) 명수가 지태와 채윤까지 데리고 나타났다. 지태와 채윤은 유난을 떨며 다가왔고, 옆에 앉아 있던 상미가 손을 뻗어 두 사람을 제지했다. “단유 아직 아프니까, 손대지 마.” 지태와 채윤이 얼굴을 붉혔고, 명수가 어리둥절해 하고 상미는 그저 날 선 눈으로 다른 사람을 쳐다볼 뿐이었다. “너 왜 그래?” 단유가 묻자, 상미가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아까 아프다면서 손대지 말라고 했잖아, 나한테.” “너는 조심성이 없으니까 그런 거지. 쟤들이 너랑 같아?” “내가 왜 조심성이 없어? 나 조심성 많아.” 명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단유는 괜한 거로 다투고 싶지 않아 상미를 억지로 앉히며 손에 패드를 쥐여줬다. 지태는 단유가 빠진 이틀간 아이들이 걱정을 많이 하더라는 믿지 못할 이야기를 전했고, 채윤은 이틀간 공부한 내용을 필기한 노트를 빌려주겠노라 말했다. “야, 얘가 그런 게 필요하겠냐?” “왜 필요 없어? 그래도 수업 때 무슨 내용으로 공부했는지는 알아야 하잖아?” “넌 여태 단유를 보면서도 모르냐? 단유는 이런 거 없이도 교과서를 달달 외우는 아인데, 어쩌면 선생님보다 더 교과서를 많이 읽었을걸?” 그건 너무 과장이고.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채윤이 니 글씨는 너도 못 알아보지 않냐?” “그 정도는 아니거든? 다 알아볼 수 있거든? 내가 이것도 못 알아보면 시험공부는 어떻게 하겠어?” 채윤은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이라 글씨도 그럴 것 같지만, 의외로 악필 중의 악필이었다. 단유는 마침 말 나온 김에 이야기를 꺼낸다는 식으로 시험공부 이야기를 꺼냈다. 다음 주부터 같이 공부하자는 이야기에 지태와 채윤은 좋아했고, 한발 물러섰던 명수는 인상을 썼다. “좀 더 천천히 해도 되지 않아?” 명수의 불만은 가볍게 묵살 되었고, 다음 주 월요일부터 다 함께 모여 시험공부를 하기로 했다. 다음 날, 단유가 교실에 등장했을 때, 일단의 아이들이 인사를 하며 안부를 물었다. 개중에는 별로 말을 나눠본 적 없던 아이들도 있었는데, 단유가 생각하는 거리감과 아이들이 느끼는 거리감에는 차이가 있었던 것인지, 스스럼없이 다가와 괜찮냐고 물어봐 주었다. 담담하게 괜찮다고, 걱정해줘서 고맙다고 대꾸하며 자리로 향한 단유는 솔직히 꽤 놀라워하는 중이었다. 평소 자신이 아이들과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부러 거리를 뒀다기보다는 그냥 거리가 멀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컨대, 다른 아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아이들과 모여 잡담을 나누거나 장난을 치는 건 성격에도 맞지 않았고, 그 시간에 한 글자라도 더 보고 지식을 채워나가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아이들과 특별한 주제를 두고 나누는 대화―과제에 대한 이야기, 틀린 문제 풀어주기, 수업시간에 제시된 주제로 토론하기―를 제외하고는 사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일이 거의 없었고, 대화가 없는 만큼 심리적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아이들에게서는 그런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전혀 없지는 않아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깝게 다가오는 아이들이었다. 단유는 그 아이들에게서 ‘순수함’을 보았다. 그리고 ‘순수함’을 발견한 순간, 스스로에게 되묻고 싶었다. ‘나는 순수하지 않은 걸까?’ 그러고 보니 상미도 어쩌면 이 아이들과 비슷한 ‘순수함’을 지녔던 것 같았다. 자신이 어떤 모진 말을 해도, 때로는 상처를 받지만 또 금방 털어내고 다가와서 살갑게 굴기도 하는 상미의 모습이, 반 친구들에게서도 보였다. “단유는 괜찮니?” “네, 괜찮습니다.” “다행이다. 그래도 당분간 무리하지 말고.” “네.” 담임 선생님은 장난 심하게 치지 말고, 다치지 말고 수업 열심히 듣자는 평범한 훈계로 조회를 마무리했다. 단유는 담임 선생님과의 거리감이 자신이 느끼는 거리감과 일치한다는 사실에 쓴웃음을 지었다. 1학기 때의 일 이후, 담임과 단유 사이에 생긴 미묘한 거리감이 이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더더욱 반 친구들, 동급생들에 대한 단유의 판단이 더 복잡해졌다. **** “어? 너 다쳤어?” 태호는 단유를 보고 깜짝 놀랐다. 단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어쩐 일이세요?” “많이 다친 거니? 낫는 데 오래 걸려?” “글쎄요, 아직 통원 치료 중이긴 한데, 금방 낫지 않을까요?” 실제로는 깊은 자상을 입은 터라, 금방 상처가 낫지는 않을 것이다. 단유가 조금 욕심을 부려서 통원치료를 받게 된 것이기에, 어쩌면 낫는데 좀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었다. “어쩐 일이신데요?” “아, 사실은 뮤직비디오 때문에.” 일전에 단유는 수련과 나윤 듀엣의 싱글 ‘리모트(remote)’의 뮤직비디오 출연을 허락했었다. 태호는 뮤직비디오의 일정이 나온 탓에 스케줄을 맞추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는데, 단유의 부상이 걸리게 된 것이었다. “설마 제가 맨몸으로 벗고 다니는 걸 찍으시려는 건 아닐 거 아니잖아요? 상관없을 거 같은데.” “그래도 부상이 심하면 좀 무리하지 말고 그래야 하지 않겠니? 시키는 내 입장도 조금 꺼림칙하고 말이야.” “크게 힘을 써야 하는 일만 없다면 별 문제는 없을 거예요.” 그 전에 나을 수도 있다는 말을 덧붙이는 단유에게 태호가 스케줄표를 보여주었다. “2주 뒤네요?” “그래, 시간이 조금 애매하지?” 태호는 부상의 회복을 염두에 두고 물었던 말이었지만, 단유는 다른 의미로 그 말을 인정했다. “애매하네요. 3주 뒤 월요일부터 저희 학교 시험인데.” “어? 그래?” 더 골치 아프게 됐다면서 머리를 긁는 태호였다. “내가 그 생각을 못 했네. 니가 학생이라는 걸 깜빡했다.” 그런 걸 깜빡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냐고 묻는 대신, 나윤도 학생이지 않냐고 물었다. 듣기로는 고2라고 들었는데. “걔는…뭐 그런 게 있어.” 태호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아무리 가까운 단유라고 하지만, 그래도 외부자인데 소속 가수의 치부를 밝힐 수는 없는 법이었다. 게다가 단유는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는 모범생 아니던가. 춤과 노래 연습하느라고 공부도 잘 안 하고 시험 성적에도 관심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를 해서 나쁜 이미지를 심어줄 필요는 없으리라. “뭐, 바쁘니까 그럴 수도 있겠죠.” 어? 아는 건가? 태호는 단유의 대답에 헷갈린다는 표정을 짓다가 금세 추스르고 본래 이야기로 돌아갔다. “아무튼, 니 생각은 어떤데?” “저 하나 때문에 미룰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렇지. 사실 12월에 발표할 타이틀이라서 일정이 좀 빡빡하게 정해진 면이 없잖아 있어.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특별한 사유가 없는 이상 촬영은 스케줄대로 갈 공산이 커. …만약 니가 촬영을 못 한다고 해도 괜찮아. 대신 롤(role)을 대신할 사람을 구하는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하겠지만 말이야.” 단유는 태호가 기대하는 대답을 들려주기로 했다. “제가 할게요.” “진짜?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어.” “괜찮아요, 진짜.” “너 그러다 또 전교 1등 놓치는 거 아냐? 지난 번에는 몰라도, 이번에 또 전교 1등 못하면 전부 내 탓이 돼버리는 거잖아?” 단유는 왜 이렇게 자기 탓을 하는 사람이 많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전혀 그런 거 아니고요, 1등에 별로 집착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이런저런 이야기가 더 오고 갔지만, 결론은 단유가 촬영에 참여하기로 결정을 봤고, 그 날짜에 맞춰 태호가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하며 이야기는 마무리가 지어졌다. “그런데 선생님은?” 혹시 대화에 방해가 될까 봐 안방에서 나오시지 않는 건가, 라는 생각을 했던 태호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선생님을 찾았다. 들어올 때는 단유가 다쳤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와 미처 챙기지 못했어도, 나갈 때는 제대로 인사를 하고 나가야 보호자에게 면이라도 세울 것이 아닌가. “아, 저희 선생님 그만두셨어요.” “그만두셨다고? 왜?” “개인적인 사정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 그럼, 너희는 어떡하고?” “그래서 주영 누나가 다른 선생님을 찾으신다고 하셨어요.” 태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3주 뒤에 찾아오마. 그 전에도 내가 틈틈이 전화할게.” “네.” “잘 쉬고, 아, 이제 아침에 운동 못 하겠네?” “천천히 뛰는 정도만 하고 있어요.” “그래. 그래도 웬만하면 다 나을 때까지 무리하지 마라.” “알겠어요.” 태호가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향할 때, 현관에서 벨이 울렸다. “어, 누구?” 명수는 축구부 연습이 있어서 아직 올 시간이 아닌데, 라고 중얼거리며 단유가 태호를 앞질러 현관으로 향했다. “누구세요?” 라고 물으려고 하는데,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걸쇠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 단유가 놀람을 표시하기도 전에 상대의 입이 벌어졌다. “어? 단유야! 오랜만이다. 주영이한테 듣긴 했는데, 혹시나 하고 번호를 눌러보니까 문이 열리네. 아직 학교에 있을 시간 아니었니? 들어보니까 요즘 공부도 잘 안 한다고 들었는데, 농땡이 부리고 있는 거였어? 사춘기라 이건가? 어머? 매니저님 맞으시죠?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매니저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변하지 않으셨네요? 조금 살이 찌신 건가?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패스하고, 혹시 단유랑 이야기하러 오셨던 거예요? 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 “…아니요.” 태호가 더듬거리며 대답하자, 손뼉을 치며 말을 이었다. “다행이네요. 단유 너는 키 많이 컸다? 몸도 훨씬 좋아진 것 같고. 애들이 쑥쑥 자란다고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넌 너무 변했다야. 이제는 남자네, 남자. 그래도 공부는 계속해야 되는데, 벌써부터 놀면 나중에 고등학교 들어가서 고생할지도 몰라. 혹시 전교 1등 놓쳤다고 쇼크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지? 그런 거면 더 힘내서 다음 기말고사 때 전교 1등 하겠다고 마인드 컨트롤을 해야지, 안 그래? 어머, 너랑 이야기를 나누느라고 집을 못 봤네? 우와, 집 너무 좋다? 거실 좀 봐. 이거 예전 우리 집보다 훨씬 좋은 집 아니니? 바깥 풍경도 너무 잘 보이네? 대박이다. 이런 데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만 했었는데 여기 너무 좋다.” 단유는 오른손으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약간 소리를 높여서 말을 끊었다. “선생님.” “여기 소파도 바뀐 거지? 예전 거…응?” “안녕하세요.” 단유는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 탓에 상대의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정말 선생님은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어머, 얘 좀 봐. 야,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하는 거 아니다? 그런 말도 있잖니?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라고. 난 아직 죽을 때가 아니거든?” “선생님, 제가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요, 한 가지는 알겠네요.” “뭔데?” “선생님 다시 보니까 반갑네요.” 단유의 말에 선생님, 하은이 싱긋 웃었다. “나도.” **** 태호가 떠난 뒤, 하은과 단유는 소파에 앉아서 지난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은의 말이 길어질 때마다 단유는 적당히 틈을 봐서 잘랐고, 그 덕분에 두 사람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최근에 주영이랑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긴 했어.” “그래요?” “이래 보여도 나, 석사다?” 약 2년의 시간을 들여 공부했다는 하은은 자기가 원하는 석사 학위를 땄다고 자랑했다. “그래서 슬슬 복귀 여부를 점치고 있었지.” 하은의 말에 단유가 피식 웃었다. “왜 웃어?” “취업 못 하셔서 그냥 돌아오신 거네요?” 하은은 입술을 일자로 굳게 다물고 단유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단유는 그저 미소를 지은 채 하은을 바라보았다. “예전에도 종종 느낀 거지만, 넌 너무 직설적이야.” “사람은 쉽게 변하는 건 아니라면서요?” “그런 건 좀 변해도 돼.” 이후 명수가 집에 들어와 하은을 발견하고는, 괴성을 지르며 하은의 품으로 안겼다. “보고 싶었어요, 선생님.” “그렇게 보고 싶었어?” 명수는 정말 좋았던지, 눈물을 찔끔 보일 정도였다. “너도 명수 좀 보고 배워라.” 단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전 방에 들어갈게요.” “왜?” “공부해야죠.” “야, 선생님 첫 복귀일인데 그러기냐?” “아까는 공부 좀 하라면서요?” 결국 단유는 하은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오랜만에 셋이서 외식을 했다. 웃음소리가 계속 이어지는, 즐거운 외식이었다. ======================================= [310] Make-up(1) 본래 교과서란 학년별 혹은 학기별로 설정된 교과과정을 가장 효율적으로 교육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교재이지만, 때로는 한 학기, 학 학년을 넘어 한 인생을 좌우하는 가르침이 담긴 교재가 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교과서가 낙서로 가득 차 있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각양각색의 형광펜으로 정성스럽게 꾸며 넣기도 한다. 그렇지만 교과서의 본질은 교육을 위해 사용되는 지도서이며 지침서이다. ‘교육’이 강조될수록 ‘교과서’의 중요성은 커지기 마련이다. “이번 시험 범위 너무 많은 거 아냐?” “새삼스럽게 왜 그래? 시험 한두 번 치는 것도 아니고.” “야, 다른 사람들이 전부 너 같은 줄 알아?” “나 같은 게 뭔데?” “교과서는 줄줄 외우고 다니는 거.” “아니거든?” 지태는 자신의 말에 동조해달란 의미로 시선을 돌려보지만, 다들 단유가 내준 문제를 푸느라 정신이 없었다. 단유는 이번에도 자기 나름의 기준에서 시험에 나올법한 부분들을 문제로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제공했다. 가끔 명수가 시험 두 번 치는 것 같다고 투덜거렸지만, 효과가 입증된 단유식 예상문제집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 “너네는 교과서가 달라서 어떨지 모르겠다.” 상미는 볼펜 위 버튼노브(knob)를 반복적으로 누르며 똑딱거리는 소리를 내는 중이었다. “크게 차이 나는 것도 아니고 상관없을 거야.” “그래? 난 니가 문제를 안 풀고 있길래, 혹시 교과서가 달라서 그런 건가 생각했어?” “…안 푸는 게 아니고 생각 중이잖아? 보면 몰라?” “지나치게 오래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그러지. 뭐가 문젠데?” “…여기가 헷갈려.” 단유는 상미가 짚은 보기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을 해주었다. 상미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게도 그런 식으로 과외를 해 주고 있을 때, 음료수를 마시고 돌아온 하은이 단유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단유 옆에 자리했다. “우리 단유, 이제 다 컸네? 이렇게 애들 가르쳐주기도 하고?” “이 정도 가지고 공치사하긴 싫은데요?” “어유, 그래요?” 우쭈쭈, 라며 턱을 간지럽히려는 하은의 손길을 피한 단유는 시선을 책에 고정하고 하던 공부를 이어나갔다. “자, 선생님도 쉬었으니까 어디 좀 볼까?” 그러자 명수가 먼저 달려와 못 풀고 있던 문제들을 가리켰다. 뒤이어 지태와 채윤도 하은에게 문제집을 내밀며 도움을 부탁했다. 하은은 싱긋 웃으며 한 사람씩 문제를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 새로운 하숙생(?)이 온 것에 대한 환영식이 끝나고, 잠깐의 혼잡함―하은이 가지고 온 옷과 책과 가구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있었지만 금세 예전의 평화로운 분위기로 돌아가며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제자리로 돌아갔다는 정도가 아니라 좀 더 활기가 넘친다고나 할까? “솔직히 말하면, 그 전의 선생님은 좀…그렇잖아?” 싫은 말 못하는 명수마저도 이전 선생님의 느슨했던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던 것이 아니라고 말할 정도였으나, 그것이 진짜 선생님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하은에 대한 상대적 비교로 인해 그런 것인지는 구분이 잘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하은이 등장이 명수의 활기를 북돋을 뿐만 아니라, 단유에게도 정서적 안정을 주는 효과를 발휘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 다 어리광을 부리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투정을 부린 적도 없지만, 그래도 정서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리라. 특히 인간관계가 넓지 않은 단유의 경우가 더 그랬다. “어머, 예뻐라? 이렇게 인형같이 생긴 너의 정체가 뭐니? 언제 이렇게 예쁜 여자 친구를 사겼대? 우리 단유 능력도 좋다? 이그, 그렇게 보지 마. 솔직히 거울 좀 봐라. 너처럼 우락부락하게 생긴 애를 누가 좋다고 쫓아다니겠니? 호호호, 농담인 거 알지? 그래도 선생님은 우리 명수가 남자다워서 더 좋다? 진짜야?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손님을 이렇게 현관에 세워두고 있으면 안 되는 건데. 어서 들어와. 뭐 먹을래? 먹을 게 있나? 이모! 먹을 거 있어요?” 얼이 빠진 얼굴을 하고 들어온 상미를 거실에 앉힌 후, 선생님을 소개한 단유는 적절하고도 익숙한 ‘말 자르기’ 스킬을 이용하여 대화를 해 나갔다. 상미는 금방 하은에게 익숙해졌고, 같은 여자라서인지, 아니면 유쾌한 성격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두 사람은 마치 친자매였던 것처럼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단유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리에서 쫓겨나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너희들 친구라고? 너희 둘 다 너무 잘생겼다?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다들 잘 생겼대? 먹을 걸 잘 챙겨 먹어서 그런가? 우리 명수도 잘 챙겨 먹는데 왜 그러지? 이그, 명수야. 농담인 거 알지? 누누이 말하지만, 선생님은 명수가 남자다워서 좋다니까. 어서 들어와. 그래도 단유나 명수 친구들이 이렇게 집에까지 온다니, 예전에는 생각도 못 했던 일인데, 진짜 우리 애들 많이 컸구나. 얘들이 어렸을 때 어땠는지 알아? 난 우리 애들이 정말 왕따인 줄 알았다니까? 친구를 안 사귀는 건지, 안 만드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고. 게다가 명수 얘는 지금도 시커멓지만, 예전에는 잘 씻지도 않아서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데, 정말 보는 사람이 힘들 정도였다니까. 이그, 그래도 지금을 잘 씻고 다니는 거 선생님도 잘 안다니까 그러네? 선생님은 명수가 정말 좋아. 선생님 마음 잘 알지?” 지태와 채윤도 선생님의 환영 인사를 받으며 단유네 집에 입성했다. 단유가 아이들과 시험공부를 하겠다고 말했더니, 하은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손바닥으로 바닥을 '탁' 쳤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 선생님도 도와줄게.” 하은을 잘 모르는 아이들은 첫인상에 질려, 살짝 겁을 먹은 인상이 엿보였다. 하지만 하은의 가르침을 받은 아이들은 단유가 그랬고, 명수가 그랬듯, 곧 하은의 매력에 푹 빠져서 헤어나오지를 못했다. 적어도 공부라는 과목에 한하여 하은은 누구보다 쉽고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노하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주저하던 지태나 채윤은 물론이고, 명수와 맞먹을 만큼 공부에 거리감을 느끼던 상미도 하은의 교습방식과 가르침에 흥미를 느끼고 폭풍 질문을 해댔다. 덕분에 상미는 벌써 네 번 이상 자리에서 일어나 차가운 물을 마시며 마른 목에 수분을 보충해야 했고, 두 번 이상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다. 단유는 아이들의 선생님 역할을 할 필요가 없어져 편했고, 자기 공부에 열중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 좋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하은은 고마운 존재였다. 그리고 어느새 시험이 한 주 앞으로 다가왔고, 단유네 뿐만 아니라 전 학교가 시험공부 대비 모드로 전환하여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단유는 태호와 함께 집을 나서고 있었다. “이거 진짜 미안해서 어쩌지?” “괜찮아요.” 태호가 왔을 때도 거실에는 한창 시험공부에 매진하는 아이들로 인해 공부방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때문에 태호가 단유를 부를 때, 다른 아이들이 부럽네, 재미있겠네, 같이 가고 싶네, 라며 떠들어도 내심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특히나 공부를 좋아하는 모범생, 전교 1등 단유 아니던가. “오늘 하루 쉰다고 해서 어떻게 되겠어요? 그리고 그 전부터 시험 준비는 완벽하게 해 놨으니까, 별로 걱정도 안 되고요.” 단유는 조금 과장되게 자신감이 넘친다는 표현으로 태호의 부담을 덜어주려 했다. 태호는 씩 웃으며 차 문을 열어 단유가 타기 쉽게 도왔다. “자, 그럼 가는 동안 간단하게 컨셉 이야기해줄게.” 듀엣의 명칭은 ‘The Goddess rule’을 줄여 ‘가디스R’이라고 부르기로 했으며, 지구로 내려온 여신이 남자를 ‘조종’하여 자신의 뜻대로 맞추려고 하지만, ‘사랑’은 ‘조종’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사랑의 의미’를 반추하는 컨셉이라는 태호의 설명이었다. “괜찮을 거 같지?”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말로는 뭐든 못할까. 결국 결과물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달린 것인데.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단유는 그 설명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신이 왜 지구로 와요?” “음, 사랑을 찾기 위해?” “왜 굳이 사랑을 지구에서 찾아요? 여신들이 사는 곳에는 사랑을 찾을 수 없는 건가요?” “그게, 내가 만든 게 아니라서 뭐라고 말은 못하겠지만, 신화에서 보면 신들이 인간을 꾀어서 사랑하는 장면도 나오고 그러잖아. 그리스 신화는 알지? 뭐 그런 내용의 연장선이 아닐까 싶은데.” 단유는 가만히 있다가 되물었다. “그거, 위에서 결정한 건가요?” “뭐, 그렇지.”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위에서 머리를 맞대고 뽑아낸 최선의 선택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리고 그 맞댄 머리에 두 가수의 의견은 포함되지 않은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어. 적어도 아직까지는 밑에서 신뢰를 주지 못한 면이 있고. 게다가 나윤이는 아직 고등학생이니까.” 고등학생이라는 사실이 음악적 감수성을 드러낼 수 있는 아이디어 회의에 빠져야 할 핑계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단유는 이번에도 결국 갤럭시즈와 비슷한 결과물이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는 뜻을 전했다. “나도 그런 고민을 많이 하긴 했는데, 이번에는 조금 다를지도 몰라. 객관적으로 생각해봐도 곡이 잘 나왔잖아? 그리고 지난번에 니가 아이디어를 준 것도 있고 해서, 내가 이번에 기획안을 낸 게 있는데, 그게 또 받아들여지기도 했고.” “기획안이요?” “아, 말 안 했나? 저번에 니가 그랬잖아? 홍보 마케팅에 좀 더 신경을 쓴다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고. 그래서 그와 관련된 기획안을 제출했거든.” 구체적인 내용까지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태호가 낸 새로운 기획안에는 다변화된 미디어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기획 아래 공중파 뿐만 아니라 다양한 매체들에 출연하여 인지도를 올리고 노래를 알리는 방안을 제시했다. 위에서도 이미 그럴 생각이었다는 듯이 말은 했지만, 결과적으로 태호의 기획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그에 따라 인터넷과 소수 미디어 매체 출연에 힘써보기로 했다는 태호의 말에 단유는 잘됐다며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다. 그런 출연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아직 예측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전처럼 무기력하게 활동을 접어야 하는 일은 줄어들 것이고, ‘가디스R’에게도 나름 의욕을 북돋는 일이 될 것이니까. 촬영장에 도착했을 때, 마침 비슷한 시간에 로드 매니저의 차를 타고 온 수련과 나윤을 만날 수 있었다. 주차장 가운데에서 단유를 발견한 수련이 단유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 “글…쎄요. 그다지 오랜만이라는 생각은 안 드는데?” “그래? 한동안 자주 보다가 안 봐서 그런가? 난 되게 반가운데, 넌 아닌가 보네?” 단유가 대답에 곤란함을 느끼는 표정을 짓자, 수련이 웃음을 터뜨리며 단유의 어깨를 감싸고 세트장으로 끌고 갔다. 그 뒤를 따르는 나윤에게 단유가 간단하게 인사를 하자, 나윤이 싱긋 웃으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쟤가 너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한가 봐.” “언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는데 나윤이 달려와 수련의 팔을 붙잡고 말렸다. “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요?” “아니야? 너 그랬잖아? 보고 싶다고?” “언니! 그렇게 말하면 쟤가 진짜인 줄 알잖아요? 농담 좀 그만 해요.” 수련은 나윤의 볼을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며 ‘진짠데? 진짠데?’라며 놀려댔다. 나윤은 붉어진 얼굴로 수련의 손가락을 피하려는 몸짓을 하며 세트장 안으로 들어갔다. “수련이, 많이 변했지?” 뒤따라오던 태호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렇네요.” 변하긴 변했다. 처음의 수련은 그저 직진만 하던 코뿔소처럼 뿔을 드러내고 각을 세우기 일쑤였는데, 점점 시간이 가면서 그 뿔이 닳고 닳더니 어느새 자기 속의 말을 잘 하지 않게 변해갔었다. 그것이 갤럭시즈의 운명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 같아, 주변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주기도 했고. 그런데 최근 밝은 모습을 자주 보이고, 저렇게 장난을 치면서 긴장한 후배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애를 쓰는 모습도 보이니 지켜보는 매니저로서는 참으로 다행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단유 역시 그런 변화가 보여서 태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들어가자.” “네.” 장난치며 세트장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을 따라 단유와 태호도 걸음을 옮겼다. ======================================= [311] Make-up(2) 이전에도 겪어본 일이긴 했지만, 촬영장은 언제나 분주했다. 좁은 장소에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탓에 분주해 보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빠지더라도 수없이 많은 조명과, 촬영장비들, 정리되지 않은 채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전선들과 정리를 기다리는 소품들, 세트 수리용 망치와 목이 콱 멜 것 같은 먼지들이 돌아다니는 탓에 분주해 보이는 것도 있었다. 분주해 보인다는 것은 활기 차다는 것과 일맥상통할까? 하지만 풀풀 날리는 먼지들을 휘휘 젓는 대본들과 고성과 아우성 속에서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흐느적거리는 스태프들을 보면 활기 차다는 인상보다 안타까움을 느끼는 게 옳을 것 같았다. 주인공은 두 사람 혹은 세 사람. 몇 안 되는 출연진들이 보다 화려한 이미지 속에서 살아날 수 있게끔 돕는 그들의 노고를 잊어선 안 되겠지만, 그리고 그들 역시 그들의 피땀 서린 노력의 결과물이 화려하게 세상에 선보일 때의 희열을 희망하고 있겠지만, 당장은 시간에 쫓겨 신경질을 부리거나 잠을 쫓기 위해 악을 쓰거나 이도 저도 아닌 이유로 지적받는 것에 화가 나 발을 구르는 ‘약자들’이었다. “수고하십니다.” 그리고 그 ‘약자들’을 살살 달래며 부디 무사히 촬영이 마쳐질 수 있도록 신경 써야 할 사람은 바로 태호였다. 차에 싣고 왔던 음료수 박스들을 꺼내서―수련과 나윤을 데리고 왔던 로드 매니저가 눈치 빠르게 다가와 태호를 도왔다―스태프들에게 하나씩 건네며 인사를 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독님.” “저희가 할 말이죠, 매니저님.” 부디 애들이 긴 시간에 녹초가 되어 얼굴을 찡그리거나, 계속된 NG 컷에 늘어지는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잘 다독여달라는 뜻을 함축하여 전달하는 감독이었다. 태호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다른 스태프들에게도 음료수를 돌렸다. 그리고 그 시간, 스타일리스트가 수련과 나윤, 단유를 데리고 임시로 꾸며진 대기실로 데리고 가 정성껏 매만지기 시작했다. 수련과 나윤의 경우는 오기 전에 샵에 들러서 꾸며놓은 터라 간단하게 정리만 하면 되는 수준이었지만, 단유의 경우는 집에서 바로 왔기 때문에 얼굴부터 머리까지 모두 손을 봐야 했다. “도경아, 옷은?” “저기요.” 태호의 물음에 스타일리스트는 단유의 머리를 만지던 중에도 손을 떼지 않고 대신 턱짓으로 구석을 가리켜 보였다. 태호는 의상들을 확인한 뒤, 수고하라는 짤막한 말을 남기고 대기실을 나갔다. 수련이 살짝 지친 얼굴의 나윤을 보며 장난을 치려다, 자신도 조금 지치는지 소파에 기대서 숨을 길게 토해냈다. 그 낌새를 눈치챈 나윤이 얼른 일어나 화장대 위에 놓여 있던 음료수 하나를 꺼내 건넸다. “마셔요, 언니.” “고마워.” 사실 수련도 긴장하긴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나윤보다 더 긴장했을 수도 있지만, 오랜 경력과 선배로서의 자존심이 긴장감을 감추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갤럭시즈로서 세 번의 활동이 모두 망했었고, 다시 새롭게 출발할 기회를 얻은 유일한 멤버로서 이번 활동에 갤럭시즈의 향후 활동 방향이 정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가디스R’로 나서긴 해도, 수련의 고향은 ‘갤럭시즈’였고 수련은 멤버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눈 좀 붙여요.” “괜찮아.” “새벽까지 연습하느라고 피곤하실 텐데.” “야, 넌 같이 안 했니? 너야말로 눈 좀 붙여. 나중에 졸려서 실수하면 큰일 나.” “전 아직 어리잖아요?” “야, 너랑 나랑 몇 살 차이 난다고 그러니? 웃긴다?” 장난스러운 수련의 말에 나윤이 배시시 웃으며 수련의 팔에 매달렸다. “어리다고 놀리지 말아요~.” 나윤의 선창에 수련이 따라 부르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만들어질 때, 스타일리스트가 한마디 했다. “자더라도 머리 눕히지 말고 자.” “네.” 단유는 여전히 거울 속 자신의 모습만 쳐다보면서 자신의 변신과정을 머릿속에 새겨넣고 있었다. 별달리 하는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스타일리스트가 몇 번 매만지면 평소 보던 자신과 전혀 다른 얼굴과 인상을 가진 사람이 나타났다. “괜찮지?” 스타일리스트는 머리를 끝내고 단유에게 물었다. “괜찮은데요?” “전의 뮤직비디오 찍을 때도 미래가 했었나?” 미래는 이전 갤럭시즈 때의 스타일리스트였다. “예. 그 누나는 그만둔 거예요?” 대답은 수련에게서 나왔다. “미래 언니는 다른 팀에 붙었어.” 갤럭시즈가 활동을 쉬는 동안, 놀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다른 팀에서 활동하는 모양이었다. “그 전 뮤직비디오 나온 거 봤을 때는 꽤 어리게 봤었는데, 실물은 좀 다르네.” “요즘 아이들은 금방 쑥쑥 자라서 그래요. 단유 쟤는 더 그렇고요. 일주일만 있다가 봐도 몰라보게 커져 있다니깐.” 수련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그럼 이제 누나가 계속하시는 거예요?” 스타일리스트는 단유의 얼굴에 프라이머를 콕콕 찍어 펴 바르기 시작했다. “아니, 일단은 오늘만. 입 열지 말고. …나중에 어떻게 계약이 잘 되면 계속하겠지만, 아직 회사랑 계약은 안 했거든.” “언니, 계속했으면 좋겠어요.” 나윤의 말에 스타일리스트가 호방한 웃음을 터뜨렸다. “말만이라도 고맙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언니 정말 실력이 좋은 거 같아요.” “그 말 나중에 미래한테 해도 돼?” “에이, 언니. 잘 알면서 그런다.” 소소한 대화가 살짝이나마 긴장감을 떨어뜨려 주는지 아까보다 훨씬 편안한 웃음소리처럼 들렸다. “그런데 넌 어쩜 피부가 이래? 여자 피부보다 더 고운 거 같아.” “걔 피부 좋죠? 가만 보니까 해를 안 봐서 그런 거 같아.” “해를 왜 안 봐?” “걔 공부 되게 잘하는 애예요. 맨날 공부만 한다고 학교랑 집에서 책만 보고 있을 걸요?” “공부 잘하니?” 단유의 피부가 아무리 하얗다 한들, 조명 앞에서 균일한 피부색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파운데이션이 필요했다. 스타일리스트는 쿠션에 잔뜩 파운데이션을 묻힌 후, 단유의 얼굴에 찍어 바르려다 수련의 말에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대답은 수련에게서 나왔다. “전교 1등이래요.” “진짜? 이거 보통 사람이 아니었구나? 잘생기고 공부도 잘하고. 혹시 노래도 잘하는 거 아니야? 그러면 완전 사기 캐릭터겠는데?” “어, 그러고 보니 단유 노래는 들어본 적이 없네? 단유야, 노래 한 번 불러봐라. 나윤아, 박수!” 나윤이 실눈을 뜨며 손뼉을 마주쳤다. 수련이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으며 나윤의 눈을 살짝 덮어주었다. 나윤은 다시 눈을 감고,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기 시작했다. “저런 거 보면 얘네들도 참 고생은 고생이다.” “이게 무슨 고생이라고. 그렇게 따지면 언니도 고생이죠. 우리가 새벽에 일어나면, 언니도 같이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인생인데.” “그래, 그 말도 맞다. 이 업계에 들어온 이상 다 거기서 거기지. 거기서 거긴데, 그래도 너네는 대박만 나면 그야말로 우상이 되는 거잖니? 반면에 우리는 그런 성공이 없다는 게 차이지.” “가끔 TV에 유명한 스타일리스트 나오는 분들 있잖아요?” “우리나라에 수많은 스타일리스트 중에서 단 몇 사람이지. 대부분은 다 배 쫄쫄 굶으면서 화장품 챙기고, 의상 챙기고 야단법석을 떨어야 먹고 산다. 나도 그렇고.” 너 다크 서클이 좀 있네, 라고 중얼거리며 단유의 눈 밑을 중점적으로 가리기 시작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그래도 언니는 먹고 살 기술이라도 있지만, 우린 뭐예요. 성공 못 하면 밤무대 가수도 못하는 아이돌이라고요. 쫄쫄 굶는 정도가 아니라 미래가 달린 일인걸요.” “에휴, 내가 말을 잘 못 꺼냈네.” 아이라이너를 들고 단유의 눈 주위를 섬세하게 그려나가던 스타일리스트는 수련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 어떤 여자 아이돌 그룹이 연말 시상식에서 무대를 꾸미고 있을 때, 어떤 그룹은 연습실 바닥에서 치킨 먹으면서 그 장면을 TV로 보며 눈물 흘렸다고. 생각해보면 정말 냉정한 세계야. 여긴.” 노력이 성공을 결정짓지 못해, 라는 말은 속으로 삼키는 스타일리스트였다. 그들이 늘 외치는 말이 ‘열심히 하겠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라는 말이 아니던가. 하지만 얼마 안 되는 경력이지만 이 바닥에서 몇 년을 굴렀더니, ‘노력’이란 단어가, ‘최선’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허망하고 슬픈 의미인지를 깊이 체감할 수 있었다. 수련의 말대로 자신은 기술이라도 있지만, 저들은 그저 춤추고 노래하는 기술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이 바닥에서 그 기술이 먹히지 않으면, 대중들에게 인정받지 않으면 그대로 낙오하고 만다. “혹시 너 그거 들었니?” “뭐요?” 잠시 눈을 감았던 수련이 눈을 뜨고 스타일리스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나윤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솔깃하게 들렸다. “하이튠 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 한 명이 자살한 거.” “아.” 수련은 보일 듯 말 듯 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수련의 분위기에 스타일리스트는 대답을 들은 셈 쳤다. 걸그룹이 되기 위해 오래 시간에 걸쳐 연습하는 연습생들이 넘쳐나는 시대였지만, 그 모두가 데뷔의 길을 걷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는 스스로 포기하고 다른 길을 선택하지만, 또 어떤 이는 오로지 꿈을 위해서 묵묵히 정진하기도 한다. 그 연습생도 묵묵히 정진하던 연습생들 중 하나였다. 무려 8년을 연습했고, 그 사이 몇 번의 데뷔 기회가 있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데뷔가 엎어지면서 연습 기간이 길어졌다. 8년을 연습한 끝에 그녀에게 날아온 것은 회사의 계약 해지 통보였다. 더 이상 걸그룹으로 데뷔할 기회가 없음을 확인한 연습생은 그날 짐을 싸서 숙소를 나섰고, 지방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밤, 13층 아파트에서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뉴스에서는 짤막한 단신으로만 났던 일이지만, 연습생들 사이에서는, 그리고 걸그룹들 사이에서는 사건이 터지자마자 널리 알려진 일이었다. “부탁이니까, 제발 너희들의 성공을 그런 기준으로 잡지 말았으면 좋겠어. 나도 처음부터 스타일리스트를 꿈꿨던 것은 아니고 어쩌다 보니 이 일을 하게 되면서 지금 벌써 7년째 일하고 있긴 하다만, 사람의 운명이란 게 한 가지만 있는 건 아닌 것 같더라. 한 가지 길이 무너졌다고, 인생이 무너지는 건 아니야. 또 다른 인생의 길이 열렸고, 그 길을 향해 다시 도전하는 것 또한 인생 아니겠니? 에구, 내가 지금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무슨 말 하는지도 모르겠다.” 스타일리스트는 단유의 입술에 립밤을 바르는 것을 메이크업을 마무리했다. “사람이 꿈을 꾸는 건 좋지만, 그 꿈에만 매달리는 건 아니라고 봐. 삶에 대한 고민도 꽤 중요하다고. 알겠니, 꼬마야?” 스타일리스트는 단유의 입꼬리를 엄지로 살짝 훔쳐내며 윙크를 했다. “준비 다 됐어?” 그리고 때마침 태호가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 분위기 왜 이래?” 태호는 이질적인 대기실 분위기를 알아챘다. “죄송해요. 제가 이상한 소리를 해서….” 스타일리스트의 사과는 수련에게 막혔다. “아니에요. 조금 피곤해서 그래요. 카메라 앞에 서면 또 다를 거예요. 프로잖아요, 우린.” 수련은 맑은 웃음을 지어 보인 뒤, 나윤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어, 언니?” 잠이 덜 깬 목소리에 수련이 나윤의 귀에 속삭였다. “단유가 너 침 흘리며 자는 거 봤어.” 나윤은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는 즉시 몸을 틀었다. 수련을 바라보는 나윤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진짜요? 어떻게? 많이 흘렸어요?” 수련은 피식 웃으며 잠 다 깼으면 일어나, 라고 말을 건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 잠깐만요, 언니! 언니!” 덩달아 대기실을 나서던 나윤이 흘깃 단유를 쳐다보았다가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대기실을 나갔다. “저는요?” “너는 좀 더 대기해도 돼. 쟤들 뷰티 컷부터 찍어보자고 해서 말이야.” 태호가 다시 나가고, 외부의 분주함이 다시 차단되자 하얀 조명이 비치는 화장대 거울에 낯선 얼굴이 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부 잘한다고 했지? 너도 공부 열심히 해.” 낯선 얼굴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혹자는 꿈을 이루기 위해 새벽잠도 줄이고 연습을 하고 무대에 오르는데, 또 어떤 사람은 꿈이 좌절되었다는 이유로 죽음을 선택했다. 도대체 ‘꿈’이 뭐길래? ‘내 꿈은 뭘까?’ 참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이었다. 이제는 속 시원하게 나왔으면 좋으련만. 거울 속 얼굴의 낯설음 만큼이나 거리감이 느껴지는, ‘꿈의 정체’였다. ======================================= [312] Make-up(3) 수련과 나윤의 뷰티컷이 마무리된 후, 단유의 차례가 왔다. “나오세요.” 연출팀 막내가 대기실 문을 두드려 알려주었다. 단유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스타일리스트가 마지막으로 헤어 스타일링을 점검한 후, 눈을 찡끗거려 보였다. “수고해.” 대기실을 나오니 분주한 세트장의 열기가 확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세트장에 처음 들어올 때와 다른 점은, 분주함 속에 긴장으로 가득한 차분함도 함께 서려 있다는 것이었다. 그곳을 카메라 한 대가 노려보고 있었다. 단유는 그곳에 자신이 서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일단 조명 좀 맞추고 시작하자.” 단유가 카메라 테스팅을 위해 앞에 선 후, 조명팀이 조명의 거리와 밝기 등을 조절했고, 감독은 연신 모니터를 바라보며 색감을 조정해 나갔다. 감독의 신호가 떨어진 후, 조연출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슛 들어갑니다!” 촬영장에 ‘가디스R’의 싱글곡이 계속 반복되며 울려 퍼지는 가운데 단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 사람의 실수가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는 현장이었다. 단유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 감독이 설명했던 컨셉에 맞춰 연기를 보여야 했다. 감독은 단유가 전문적인 배우가 아님을 알았기에 복잡한 주문 대신 간단한 표정만 요구했다. “저기서 이렇게 서서, 저거 보이지? 저쪽을 바라보면서 서 있다가 사인을 주면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리는 거야. 표정은 신경 안 써도 되지만, 웃지만 않으면 돼. 되도록 무표정하게. 오케이?” 검은색과 흰색의 광목천이 천장에서 길게 늘어뜨려진 가운데 하얀 셔츠와 하얀 바지, 맨발의 단유가 감독이 지시한 방향을 향해 서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는 것으로 촬영이 시작되었다. “괜찮죠?” 태호가 슬쩍 물음을 던졌다. 보통은 감독이 촬영하는 중에 말을 걸지 않아야 하지만, 이번 촬영을 맡은 감독은 매니저와 대화를 나누면서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에 거부감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수련과 나윤의 뷰티컷을 찍을 때도 먼저 태호에게 감상을 물어보던 감독이었다. “네. 마스크가 좋기도 한데, 화면으로 보니까 분위기가 좀 있는 친구네요. 그쪽 연기자 아니죠?” “네. 그냥 일반인이에요. 아직은요.” “아직?” “예전에 갤럭시즈 뮤비 촬영 때도 출연한 적이 있던 친군데, 아직 계약은 안 했거든요.” 감독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연기는 조금 어설프지만, 배운 적이 없는 친구라니까 그걸 감안하면 확실히 싹이 보이는 아이긴 하네요. 당장 마스크만 따서 모델을 시켜도 될 것 같은데요?” 단유에 대한 칭찬에 태호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몇 번의 테이크 이후, 감독이 오케이 컷을 외쳤다. “컷! 잠깐 카메라 좀 돌려서 찍어봅시다.” 촬영팀 막내들이 우르르 달려와 카메라를 들고 감독이 지시한 방향으로 세팅을 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감독은 카메라 감독과 새로운 방향에서 찍을 컷을 상의한 후, 단유에게 다가갔다. “힘드냐?” “아뇨, 괜찮아요.” “이번에는 이쪽에서 찍을 건데, 방금처럼 똑같이 연기하면 돼. 대신 보는 방향은 이쪽, 그러니까 저기쯤을 보면서 하면 되고, 아까랑 비슷한 속도로 팔을 들어 올리면 돼. 그리고 팔을 올릴 때, 너무 힘없이 올리지 말고 끌려간다는 느낌이 들게, 그래서 저항하려는 느낌이 들게 연기할 수 있겠어? 한 번 해봐.” 단유가 몇 번 시연을 보이자,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가자. 타이밍 맞춰서 천천히 올리기만 해라. 그리고 표정은 좋았어. 계속 무표정으로 가는 거야.” 카메라와 조명이 다시 세팅된 후, 단유가 다시 촬영에 들어갈 때 수련과 나윤은 대기실로 돌아갔다. 촬영이 더 길어질 것 같은 분위기가 되니 태호가 잠시라도 눈 좀 붙이라며 대기실로 몰아넣은 것이었다. “오빠, 뭐 먹을 거 없어요? 당이 떨어지는 기분이야.” 수련의 말에 태호가 주머니를 뒤적거려 초코바 2개를 꺼냈다. “전 괜찮아요.” “먹어 둬. 나중에 도시락을 먹긴 하겠지만, 그래도 먹어 둬. 힘이 있어야 촬영도 잘 끝낼 수 있으니까 주는 거야. 그리고 내일부터는 이런 거 없어. 오늘이 마지막일걸?” 태호가 나간 뒤, 나윤은 손에 쥐어진 초코바를 조심스럽게 뜯어 입안에 넣었다. 애써 필요 없다고 말하긴 했지만, 입에 들어오는 달콤한 초콜릿의 풍미가 긴장을 조금 녹여주는 느낌이었다. “얼른 먹고 눈 좀 붙여. 하루동안 촬영을 마쳐야 해서 꽤 피곤할 거야. 틈틈이 자두지 않으면 피곤해서 못 버틸 거야.” 뮤비 촬영 경험이 있던 수련이 관록을 드러내니 나윤이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런데, 언니. 저 괜찮았어요? 아까는 너무 긴장해서 표정을 어떻게 지었는지도 생각이 안 나요.” “잘했어. 그리고 그런 걱정도 할 필요 없어. 만약 문제가 있었다면 감독님이나 태호 오빠가 다시 찍자고 했을 테니까.” 실제로도 나윤의 촬영 때 감독의 뒤에서 모니터했던 수련은 나윤이 잘했었노라고 덧붙였다. 나윤은 수련의 손에 들린 초코바 비닐까지 집어서 쓰레기통에 버린 후 소파에 몸을 묻었다. 썩 안락하다는 느낌은 없지만, 그래도 앉아 있다 보니 절로 눈이 감겼다. 아까는 너무 긴장해서 눈도 안 감길 거 같더니. 눈을 감고 있노라니, 귀에 신경이 몰리는지 바깥에서 새어 들어오는 음악 소리가 크게 들리는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물려서 더 듣고 싶지 않다고 하겠지만, 나윤에게는 자신의 생애 첫 데뷔곡이었으니 몇 번을 들어도 질린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언니.” “응?” 수련의 목소리가 살짝 잠겨있었다. 나윤은 계속 눈을 감은 채로 조용히 물었다. “우리 노래, 좋죠?” “응.” 다시 대기실이 조용해졌다. 노래는 어느새 2절을 다 부르고, 다시 1절 도입부가 연주되고 있었다. 나윤은 자신이 잠을 자는 건지, 음악을 듣느라 잠을 못 자는 건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몽롱한 기분으로만 따지면, 잠을 자는 것도 같은데, 귓가에 들리는 노래는 끝없이 시작되고 또 시작되었다. 나윤은 소파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섰다. 환한 조명에 눈이 부셔서 눈을 뜨기 힘들 정도였다. 실눈을 뜨고 간신히 앞을 바라보니 천장에서 수십 개의 조명이 비추는 무대가 바로 앞에 있었다. 화려한 레이스가 목과 소매를 꾸미고 있는 하얀색 블라우스와 플리츠 주름 디자인의 핑크색 치마를 입은 모습은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모습 그대로인데, 어느새 촬영장만 무대로 바뀌어서 나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명 너머는 어둠으로 가득 차 그곳에 사람이 있는지도 파악할 수 없었다. 나윤은 자석에 끌리듯 무대 가운데로 향했다. 조명 가운데 하이라이트를 주는 핀 조명이 나윤의 머리 위에서 작열하고 주위에 화사한 꽃들이 무대를 꾸미고 있었다. 나윤은 손에 든 마이크를 바라보다가 전주가 흘러나오자 홀린 듯 마이크를 들어 입에 가져다 대었다. “그런 아무래도 좋아, 사랑이 아니어도 좋아. 내게 필요한 건 그저 너였던 거야.” 나윤은 잔뜩 감정을 끌어모아 자신의 파트를 불렀다. 그리고 노래가 끝났다. 여전히 무대 바깥은 어둡고 조용했다. 나윤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가 끝난 뒤의 무대가 무섭고 두려웠다. 왜 조용한 걸까? 노래가 듣기 싫었던 걸까? 내 노래가 이상했을까? “나윤아.” 나윤이 정신을 차리자, 태호가 소파에 엎드린 나윤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아주 깊게도 잠들었던 모양이네. 너 진짜 침 흘렸어.” 얼른 몸을 바로 세우고, 입가를 훔쳤다. “가서 화장 고치고 나와.” “저희 차례에요?” 수련이 기지개를 켜며 묻자 태호는 물병을 건네며 답했다. “그래. 단유가 NG를 많이 안 내서 금방 끝냈다. 이제 같이 스토리컷 찍고 단유 먼저 집에 보내야 하니까 서두르자.” 대기실을 나와 잠시 촬영장을 밖을 보니 벌써 해가 지고 어둑해져 있었다. 화장을 고친 나윤이 서둘러 빠져나오니 촬영장은 이미 세팅이 끝나고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촬영이 끝난 것은 그 뒤로 3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편집하게 되면 1분이 채 안 될 컷이지만 디테일을 꼼꼼하게 챙기는 감독과 첫 촬영에 연기가 어색했던 나윤의 NG컷이 나오면서 조금 늦게 끝이 났다. “수고하셨습니다.” 단유가 예의 바르게 허리를 굽혀 감독과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했고, 태호는 로드에게 데려다주라고 일렀다. “수고했어, 단유야.” 단유는 수련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화답했다. “누나도 수고하셨어요. 끝나려면 아직 멀었죠?” “그렇지. 나윤이랑 남은 스토리 컷도 찍어야 하고, 안무 컷도 남았지. 새벽에나 끝날 수 있으려나.” 단유는 힘내라고 말한 뒤 나윤에게도 응원의 말을 남겼다. “우리 때문에 고생 많았어.” “뭘요.” “회사에 또 올 거지?” “오더라도 누나들 볼 시간이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왜? 무슨 일 있어?” “저한테 일이 있는 게 아니라, 누나들한테 일이 있는 거죠. 데뷔를 앞두고 있는데 시간이 있겠어요? 전에도 보니까, 거의 안무 연습실에서 나오지들 못하던데.” 갤럭시즈가 두 번째 싱글을 발표했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며 말했다. 나윤도 그 말에 아, 하고 탄식을 뱉으며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와서 응원도 해주고 그래.” “그럴게요. 누나도 열심히 하시고요.” “고마워.” 단유는 다시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촬영장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부러운 듯 쳐다보던 나윤의 어깨를 툭툭 치는 손길이 있었다. “왜?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그래?” “언니!” 두 사람은 까르르 웃음을 지으며 촬영장으로 돌아갔다. **** 촬영은 다음 날 해가 뜰 때쯤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두 사람이 찍든, 다섯 사람이 찍든, 끝나는 시간은 똑같다며 투덜거리는 수련이 먼저 차에 오르고 그 뒤를 말할 기운도 없어 반쯤 눈을 감은 지친 얼굴의 나윤이 차에 올랐다. 두 사람은 차에 탄 뒤 바로 곯아떨어졌다. 태호 역시 조수석에 탄 뒤, 로드에게 회사로 갈 것을 주문한 후 눈을 감았다. 하지만 곧바로 잠이 들지는 않았다. 이제 겨우 뮤직비디오 촬영스케줄을 마쳤을 뿐이었다. 앞으로 데뷔일까지 빼곡하게 채워놓은 스케줄을 상기하며 머릿속으로 정리하던 태호는 숨을 토해냈다. “답답하세요? 창문 좀 열까요?” 핸들을 돌려 촬영장을 빠져나가던 로드매니저가 물었다. “아냐. 날씨도 추운데 그냥 가자.” 분명 스케줄대로 가고 있지만,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지금껏 성공의 맛을 보지 못했던 불운한 매니저의 자격지심 때문일 것이다. 기회가 날 때마다 생각나는 신들에게 기도드리는 매니저의 마음을 누가 알아줄까. “사고 안 나게 조심해. 나 좀 잔다.” “예, 그러세요.” 혹시나 싶지만 그래도 이런 중요한 시기일수록 더욱 몸을 사려야 하는 법이니, 태호는 로드매니저에게 주의를 시킨 후 비로소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지끈거리던 두통도 피곤은 이기지 못했던지, 금방 잠이 든 태호였다. 태호의 걱정과 달리 스케줄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각종 레슨과 표지 촬영, 그리고 데뷔를 위한 방송 촬영 스케줄 등이 진행되는 것과 달리 데뷔일이 가까워질수록 태호는 긴장감에 잠을 못 이루는 날이 많아졌다. 만성 속 쓰림 정도는 가벼운 병치레에 불과했고, 푸석해진 피부와 눈 밑의 다크 서클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혀를 차게 만들 정도였다. 반대로 방송일이 잡히고, 방송화면에 잘 나올 수 있게 매일 피부과를 들락거리며 피부관리와 마사지를 받는 수련과 나윤은 갓 태어난 아기 피부처럼 반들거렸다. 그리고 방송일 하루 전, 마지막으로 점검하자는 차원에서 노래와 안무를 맞춘 후, 수련과 나윤, 태호와 스타일리스트가 안무 연습실 가운데 둘러앉아서 내일의 일정을 점검했다. “내일 4시에 일어나서 샵에 들렀다가, 방송국가서 대기. 그리고 사전녹화로 촬영이야. 사전녹화라고 긴장 풀면 안 되는 거 알지?” “네.” 수련의 대답에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열심히 했잖아? 그치? 이번에 노래도 좋고, 안무도 잘 나왔고, 나윤이도 연습 열심히 했잖아? 자신감 가지고 내일 방송국 가면 인사 열심히 하고, 수련이 너도 새로 데뷔한다는 기분으로 기운 넣어서 큰 소리로 인사하고.” “알았어요.” “나윤이 너도.” “네.” 태호가 손을 내밀었다. “화이팅하자.” “뭐야, 촌스럽게.” 뒤에 앉아서 구경하던 스타일리스트가 비웃음을 터뜨리자, 태호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이게 우리 전통이야! 안 그래, 수련아?” “전통이랄 거까지야.” 그래도 수련은 빼지 않고 두터운 태호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 그 위로 나윤이 손을 얹자, 태호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파이팅을 외쳤다. “파이팅!” 수련과 나윤도 지지 않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파이팅!” 태호는 씩 웃으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목 아껴야 하니까, 말들 많이 하지 말고, 물 마시고 자도록 해. 알았지?” “네.” “대답도 하지 마.” 그리고 다음 날 해가 뜨기도 전, 숙소 앞에서 두 사람을 실은 밴이 출발했다. ======================================= [313] Make-up(4) 샵을 들러 치장을 마치고 방송국으로 향한 밴이 곧 목적지에 도달할 무렵, 단유도 잠에서 깨어났다. “가자.” 명수도 졸린 눈을 비비며 단유를 따라 집을 나섰다. 인근 공원에 도착하여 몸을 풀기 시작할 때, 명수가 하품하다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오늘 맞지?” “…응.” “내일이었으면 같이 가서 응원도 했을 텐데, 아쉽다.” “내일도 촬영 있을걸?” “아, 그래? 그럼 같이 갈래?”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하다 결정을 미루기로 했다. “정신없을 텐데, 우리가 가서 괜히 방해만 하면 어떡해? 일단 태호 형한테 물어보고 결정하자.” “오키.” 단유는 언제나 해왔던 익숙한 운동으로 몸을 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덤덤해 보이는 표정과 달리,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신경이 쓰이는 것도 부정할 순 없었다. 이번 활동에 사활을 걸었다는 회사나 태호형의 태도도 그렇지만, 특히나 사명감을 느끼며 무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만큼 필사적인 수련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들의 성공이 단유에게 어떤 물질적 이익을 주는 것도, 가시적 혜택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렇게 신경이 쓰인다는 것은 그만큼 수련과 갤럭시즈라는 그룹의 멤버들 모두가 단유에게 가까워졌다는 방증이었다. 알게 모르게 이만큼이나 가까워졌다는 것이 스스로도 신기하고, 또 겁이 나는 단유였다. 운동을 마치고 아침을 먹은 뒤, 다시 등교하는 동안 명수가 태호형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첫날이니까 바쁘겠지.” 단유는 적당한 거리를 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자기 일상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결심에도 좀처럼 수업에 집중이 잘되지 않아 애를 먹던 단유는 1교시가 끝날 무렵에야 겨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공부해야지. 집중하자.’ 어차피 시험도 끝난 마당이라 느슨한 수업이긴 했지만. “단유야.” 명수가 핸드폰을 들고 와서 화면을 보여줄 때, 단유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신인 걸그룹이래. 그래도 출근 사진이 이렇게 찍힌 거 보면 별로 문제는 없는 것 같지?” “그렇네.” 새벽에 방송국으로 ‘출근’하는 가수들을 찍어, 그것을 기사화 시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단유는 그 화면이 신기하기만 했다. ‘출근 중인 신인 걸그룹 「가디스R」, 팬들에게 90도 인사.’ 라고 적힌 기사 제목도 유치하고, 찍힌 사진도 썩 잘 나온 사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환하게 웃고 있는 두 사람을 보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었다. “야, 노래 괜찮던데?” 어느새 옆에 와서 단유와 함께 명수의 핸드폰을 보던 지태가 말했다. “너 들었어?” “당연히 들었지.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말이야. 호기심에 듣긴 했는데 나쁘지 않던데?” “스트리밍은 계속했냐?” “아니,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냐?” “야, 오늘부터 스트리밍해. 아니 지금부터 해.” 명수는 자기가 직접 해주겠다며 지태의 핸드폰을 뺏으려 들었고, 지태는 놀란 얼굴로 명수의 손을 피해 달아났다. 두 사람이 복도를 뛰어다니며 놀고 있을 때, 채윤도 듣기 좋았다며, 이번 노래는 성공할 것 같다, 고 말해 단유의 기분이 한결 좋아지도록 한몫을 했다. “잘 될 거야.” 딱히 채윤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채윤은 단유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사전녹화를 마치고 다시 대기실로 돌아온 수련과 나윤은 함께 대기실을 쓰던 이들에게 인사를 한 뒤, 구석 쪽 자리로 이동했다. “수고했어, 나윤아.” “언니도요. 실수할까 봐 죽는 줄 알았어요.” “이 정도로 죽긴 왜 죽어. 실수 좀 하면 어때?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 “그래도 첫 무대잖아요.” 쇼케이스도 없이 방송으로 데뷔무대를 가진 듀엣 ‘가디스R’의 나윤은 비록 시작은 초라하지만, 끝은 창대하겠지, 라고 중얼거렸다. “수고했다.”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돌아온 태호가 두 사람을 다독였다. “조금 있다가 모니터를 하겠지만, 두 사람 다 실수 없이 잘했다. 솔직히 라이브라서 걱정을 했는데, 두 사람 다 잘했어.” “저 중간에 음정 나갔던 것 같은데, 아녜요?” “티 안 났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안무 중에 음정 조금 나가는 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일단은 쉬고 있어. 이제 오후 생방 때까지 대기해야 하니까.” 만약 두 곡을 들고 나왔다면, 사전녹화로 한 곡을 부르고 이후 생방에서 한 곡을 더 부를 수도 있었겠지만, 가난하고 자비 없는 기획사의 전략 덕택에 단 한 곡의 싱글로 승부를 보는 가디스R은 그런 혜택을 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수영이한테서 전화 왔었다.” “언제요?” “녹화 들어가기 전에. 긴장할까 봐 말은 안 했는데 열심히 하라고 응원하더라. 다른 멤버들도 다 같이 모여서 생방 기다리고 있나 본데, 나중에… 아니다. 지금 전화해 봐.” “네!” 수련은 태호에게 핸드폰을 받아 멤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멤버들이 전화를 받자 눈에 눈물이 고여, 얼른 고개를 치켜든 수련은 나윤에게 핸드폰은 건넸다. 나윤이 대신 인사를 하면서 대화를 했고, 잠시 후 수련이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대화를 이어갔다. 「울지마, 바보야.」 명지의 장난스런 대꾸에 피식 웃음을 터뜨린 수련은 억지로 눈물을 참아내며 멤버들의 응원에 감사를 전했다. 긴 통화가 끝난 뒤 나윤에게도 통화를 하라며 핸드폰을 건넸다. 나윤은 오래 망설이다가 겨우 통화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엄마.” 이름만 뱉어도 목이 메는지, 나윤은 말을 잇지 못했고, 겨우 목에 힘을 주고 문장을 맺지 못하는 대화가 이어지면서 나윤의 눈물샘도 폭포수처럼 터져버렸다. 그리고 그때 태호는 아이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제 시작이다. 나윤아.’ 두 사람이 똑같이 눈물을 흘려도 그 눈물의 의미는 판이하였다. 수련의 경우, 앞으로 닥칠 힘겨운 싸움에 대한 부담감과 멤버들에 대한 그리움, 소명, 사명감이 눈물샘을 자극했을 터이고, 반대로 나윤은 데뷔에 대한 기쁨, 첫 무대를 무사히 마친 것에 대한 안도가 눈물로 드러났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눈물의 의미를 헤아려봐야 무슨 소용인가. 저들이 앞으로 고통과 좌절의 시간을 겪지 않게끔, 팬들 앞에서 밝은 웃음을 지을 수 있게끔 도울 방법을 찾기에도 바쁜데 말이다. ‘이번에는 꼭 성공하자.’ 소속 가수가 대박 나서 음원차트에서 1위 하는 것도 성공이지만, 태호는 목표를 조금 낮추기로 했다. ‘부디 웃으면서 활동을 마무리할 수 있기를.’ 태호는 수첩을 꺼내 들고, 당장 오늘 저녁 스케줄과 내일 아침 스케줄을 점검했다. “여기요.” 나윤이 토끼처럼 빨간 눈을 하고 태호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태호는 손짓으로 스타일리스트를 불러 나윤의 얼굴을 가리켜 보였다. “근데요.” 다시 수첩으로 시선을 돌리려는 태호를 붙잡은 나윤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 몇 등 했어요?” 레슨을 받느라 바빴던 것도 있지만, 일부러 첫방송 끝날 때까지 음원 순위는 보지 말라고 말해뒀던 탓에 수련과 나윤은 아직 음원의 순위를 알지 못했다. 보지 말라 한 것은 행여 첫 방송 준비에 차질이 생길까 걱정했던 마음 때문이었고, 첫 무대를 마치고 나니 3일 밤낮을 물 없이 살았던 사람처럼 목마른 사람 얼굴을 하고 순위를 물어보는 나윤이었다. “생방 끝나고 말해줄게. 생방도 방송이야. 특히 표정 연기가 잘 안 되면 그대로 전파를 타고 전국에 얼굴이 팔려야 하는데, 괜찮겠어?” “…그렇게 안 좋아요?” 좋으면 당장 말해줄 일인데, 저렇게 말하기를 꺼리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결과가 좋지 않은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태호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핸드폰으로 음원사이트에 들어가 차트를 열어 나윤의 눈에 들이밀었다. “됐어?” 나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한참을 액정만 바라보더니, 수련을 향해 뒤돌아서며 외쳤다. “언니!” 수련은 나윤의 반응에 혹시 하는 기대감과 설마, 하는 의혹이 동시에 들었다. 수련 역시 궁금하긴 마찬가지. “왜 그러는데?” “언니! 언니!” 수련에게 다가와 폴짝 뛰는 나윤의 반응이 마치 실시간검색 1위, 아니 음원 1위를 찍은 가수처럼 보일 정도였다. “1등이라도 했어?” “네? 아, 아니요. 그래도 그것만큼 좋아요!” “무슨 말이야, 그게.” “우리 이름이, 저기 있단 말이에요.” 한참 후에야 음원 차트에 자신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좋아 방방 뛰었다는 나윤의 설명에 수련이 혀를 차며 딱밤을 때렸다. 이마를 문지르면서도 좋다고 실실대는 나윤의 표정에 수련도 어이없다는 듯 웃어버리고 말았지만, 사실 음원 성적도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조금 애매하지만 적어도 갤럭시즈보다는 괜찮았다. 하지만 이런 이들과 달리 애매한 표정으로 순위 차트를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59위?” 명수는 팔짱을 끼고 책상 위에 올려진 핸드폰을 보며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이거 좋은 거야, 나쁜 거야?” “글쎄. 아직은 잘 모르지만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정확히 알 수 있지 않을까?” 단유의 대답을 다 듣기도 전에 명수는 핸드폰을 조작해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진구냐? 아까 아침에 이야기했던 거, 그래. 가디스R, 리모트,…스트리밍 하고 있지? 그거 계속해라. 오늘 계속해야 돼. 끊는다. …여보세요? 나다. 아침에 이야기한 거 있잖아.…하고 있어? 역시! 오늘 계속해야 순위 올라가니까, 열심히 해라. 그래, 수고.” 명수는 열심히 전화를 돌려 영업(?)을 했고, 단유는 뒤돌아서 방으로 돌아갔다. 저럴까 봐 거리를 둬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단유는 고개를 저으며 책장에서 책을 꺼내 펼치고는 천천히, 꼼꼼하게 책을 읽어나갔다. 그리고 10분 후, 단유는 책을 덮었다. “선생님.” “응?” “뭐 하세요?” 하은은 핸드폰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무음으로 해놓긴 했지만, ‘리모트’가 열심히 스트리밍되는 중이었다. “명수가 이래놓고 갔다. 끄면 반항할 거라고 협박하길래.” 짓궂은 웃음을 지으면서 핸드폰을 소파에 던져둔 하은은 단유에게 용건을 물었다. 단유는 솔직하게 이 일 때문에 집중이 잘 안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선생님이랑 같이 공부하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요.” “비슷할 거 같은데?” “…그렇죠?” “가족, 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너랑 명수, 그리고 그쪽 분들이 가까운 사이긴 하잖아. 니가 그렇게 마음 쓰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야.” 하은은 단유를 옆에 앉히고 어깨동무를 했다. “내가 공부할 때 말이야, 그런 경우가 있었어.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을 되게 쑥스러워하고 앞에 나서는 걸 불편해하는 아이들. 또 다른 사람의 시선이 겁이 나서 고개를 숙이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고, 심하면 사람을 무서워하면서 사람을 만나는 걸 꺼리는 아이들도 있더라고. 그런 아이들을 만나서 상담할 때 말이야, 중요한 건 같은 편이라는 생각을 심어주는 일이었어. 우리는 함께야. 같이 살고 같은 밥을 먹으면서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의 생각을 존중하고, 상대의 미래를 걱정해주고 도와준다는 걸 느끼게 하는 것이지.” 단유는 하은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했다. “상대에 대해 편하게 느끼고, 따뜻한 감정을 받으며, 호의를 주고받는 관계라면 같은 편이야. 그리고 같은 편에게는 더 아껴주고, 더 신경 쓰게 되는 거야. 때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걱정보다 더 많이, 더 깊게 걱정해주고 안타까워하고 위로해주는 거지. 마치, 니가 명수를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고 내가 너희들을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리고 지금 니가 신경 쓰는 것도 그분들이 너의 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럼 그게 시간 낭비일까? 감정의 불필요한 소비일까? 그건 아니야. 그 사람에 대해 신경 쓰고 걱정해주는 그 마음은 반드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돼 있어. 니가 신경 쓰는 만큼 너의 마음도 자라고 튼튼해지고 따뜻해지지.” 단유는 하은을 눈과 코, 입술과 미소를 지켜보았다. “선생님.” “응?” “심심하셨죠?” 하은은 단유의 어깨에 걸친 팔에 힘을 주고 단유를 흔들었다. “이 쪼꼬만 놈이 이제는 선생님을 가지고 놀려고 그래!” 단유는 웃음을 터뜨렸다. ======================================= [314] Make-up(5) 수련과 나윤은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콩닥거리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오빠! 우리 순위 올랐어!” “이제 50위야!” 나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수련에게도 이 정도로 높은(?) 순위의 성적표를 받아본 적이 없었던 터라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알아, 알아. 나도 봤어. 그만 좀 쉬고, 다시 연습해.” 태호는 그녀들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빼앗은 뒤, 연습실을 나가려다 다시 두 사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볼이 빨갛게 물든 것은 단순히 기뻐서만은 아니었다. 지금 현재 시각은 새벽 1시. 내일 오전과 오후에도 스케줄이 있지만, 그렇다고 레슨과 연습을 빼먹을 순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연습이 벌써 두 시간째였다. 하지만 이들은 아직도 가수로서 성장해야 할 부분들이 많았고, 지금의 땀과 노력이 팬들의 사랑과 응원으로 보답하리란 것을 알기에 늦은 시간까지 밤잠을 줄여가며 연습에 매진하는 것이었다. “30분만 더 하고 자러 가자. 알았지?” “네.” 두 사람은 짧은 휴식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윤이 입은 하얀 티셔츠의 앙증맞은 캐릭터가 땀에 젖어 꾸깃꾸깃해졌지만, 그녀의 표정은 더없이 밝아있었다. “셋, 둘.” 반주에 맞춰 수련이 카운트를 세고, 정박자에 정확히 안무를 맞춰나가는 두 사람을 보며 태호는 연습실을 나왔다. 사실 태호도 기쁜 마음이긴 했다. 일단 순위가 떨어지지 않고 오른다는 것이 어딘가? 대형 기획사 소속의 걸그룹도 아니고, 예능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며 인지도를 쌓은 걸그룹도 아니고, 그야말로 신인 중의 신인이라 할 수 있는 이 아이들의 음악이 대중에게 버림받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소소한 행복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당장 회사에서는 연일 기획 회의가 열리는 중이었다. 박 이사를 중심으로 지금의 순위를 유지 혹은 상승시키는 방안을 모색하는 중이었고, 태호뿐만 아니라 부장급에서도 방송 스케줄을 하나라도 더 잡기 위해 인맥을 최대한 활용하는 중이었다. “아, 뮤비.” 그러고 보니 오늘이 뮤직비디오 공개일이었다. 뮤직비디오만 생각하면 또 속이 쓰렸다. 원래 뮤직비디오는 첫 무대를 갖기 전, 그러니까 보통 음원 발매일과 함께 공개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야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가지고 음원 구매로도 이어지기 때문인데, 이번에 ‘가디스R’의 뮤직비디오는 제날짜에 공개가 되지 못했다. 들어본 바로는 뮤직비디오 편집본이 담긴 컴퓨터가 갑자기 고장이 나면서 새로 편집을 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백업 본이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백업 본마저 모종의 이유로 쓰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에 회사가 발칵 뒤집혔었다. 이 과정에서 해당 프로덕션의 조연출과 연출팀의 몇몇 사람들이 시말서를 쓰거나 퇴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그건 태호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니, 부디 하루라도 빨리 뮤직비디오가 나올 수 있게만 해달라고 감독을 찾아가 빌기까지 했었다. 한편 에이바운스 엔터테인먼트에서도 이 일로 인해 여러 가지 말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이번 그룹 활동 역시 밝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하기도 했고, 그와 반대로 악재(惡材)를 발판 삼아 도약하자는 말도 안 되는 낙관론을 펼치기도 했다. 그리고 뮤직비디오를 연출했던 감독은 그날부터 지금까지 밤을 새워가면서 재편집을 해야 했고, 일주일 넘게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씻지도 못해 악취를 풍기던 감독은 며칠 전 겨우 재편집본을 완성했다고 회사에 통보했다. 부랴부랴 유통사에 연락해서 뮤직비디오 공개 일자를 새로이 잡고, 그 외 다양한 매체를 통해 뮤직비디오가 나올 수 있도록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그리하여, 자정에 뮤직비디오가 동영상 사이트들을 비롯해 음원 사이트에도 공개가 되었으니, 이미 한 시간 전에 뮤직비디오가 나왔을 것이다. 자기도 일이 많아 깜빡하고 있었으니, 음원차트 순위도 파악할 시간이 없던 두 사람이야 당연히 모른 채로 있었으리라. 어차피 시간도 1시를 넘었고, 무작정 연습만 계속하는 것도 아이들 컨디션에 좋지만은 않을 테니 오늘만은 잠시 걱정은 접어두고, 연습을 끝내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얘들아.” 음악에 맞춰 안무를 맞추고 있던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려 태호를 바라보았다. “이리와 봐.” “왜요?” “보여줄 게 있어서.” 영문도 모른 채, 수건으로 이마를 훔치며 태호를 따라간 두 사람은 컴퓨터가 놓인 곳으로 향했다. 태호가 동영상 사이트를 열어 ‘리모트’라고 타이핑하자, 수련이 설마, 하며 태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잠시 후, 모니터 화면으로 ‘리모트’의 뮤직비디오가 나오기 시작했다. **** 이제 2학기의 남은 날도 겨우 4일, 이번 주 금요일이면 방학을 맞이하는 학생들은 비록 몸은 교실에 있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방구석과 요란한 피시방에 가 있었다. 선생님들도 그런 마음을 모르지 않아, 고지식한 선생님들만 아니면 대부분 학생들을 통제하려 하기보다는 적당히 ‘지킬 것만 지키자’는 주의로 학생들을 풀어주었다. 수업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나가신 뒤의 교실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누구누구 목소리가 더 큰가 내기라도 하는 양, 왁자지껄 떠들어대니 책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단유야, 대박!” 차라리 운동장 근처 벤치로 가서 책을 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심각하게 고민하던 단유는 지태의 호들갑에 무슨 일이냐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갤럭시즈 뮤비 대박이더라?” “갤럭시즈 아니고 가디스R.” “그래, 그거나 그거나. 아무튼 완전 멋지더라. 특히 나윤이라던가? 새 멤버 있잖아? 완전 여신!” 채윤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봤는데, 완전 예쁘더라? 수련 누나는 원래 예뻤으니까 그러려니 했는데, 나윤이는 거기, 나무에 기대서 노래하는 장면 있잖아?” “아, 그래, 거기!” “완전 인형인 줄 알았다니까.” “야, 하이파이브! 인정, 진짜 인정!” 병수까지 끼어들어서 지태와 손뼉을 맞추며 난리를 떨었다. “그래?” 나윤이 그렇게 예쁜가, 라고 생각하던 단유는 이내 고개를 휘젓고 대신 지태에게 왜 수련은 ‘누나’고, 나윤은 그냥 ‘나윤’이라고 부르는지 물었다. “보통은 그냥 이름만 부르지, 누가 누나, 형 이런 걸 붙여? 솔직히 수련 누나야 이 노래 나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고, 또 너 때문에라도 자주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냥 ‘누나’같은 이미지라서 그렇게 부르는 거지. 안 그래?” “응. 그런데 단유야. 나윤 ‘누나’ 직접 봤지?” 채윤의 물음에 단유가 그렇다, 고 대답하니 배시시 웃으며 단유의 손을 잡았다. “싸인 좀.” 채윤의 말에 마치 선착순 경쟁이 붙은 사람 모양으로 지태랑 병수가 동시에 단유에게 들러붙어 ‘나도, 나도’를 외쳤다. “노래는 어때?” 단유는 받아주겠노라 약속한 후에야 궁금했던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좋다고 했잖아? 계속 들어도 질리지 않고 좋더라. 특히 여신님의 이미지가 딱 그려지니까 더 좋은 거 있지? 나윤‘님’의 목소리에 완전 반했어!” “그 정도로 좋아?” “아, 그런데 스트리밍으로 들을 때랑 뮤직비디오랑 조금 다른 게 있던데, 뮤직비디오 처음에 들어가는 목소리는 뭐야? 그거 되게 분위기 있던데?” 병수의 질문에 단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유는 아직 뮤직비디오를 보지 않은 탓에 병수의 질문이 가리키는 부분을 알지 못했다. 그 사실을 이야기했더니, 어떻게 지가 출연하면서도 보지 않았냐고 타박하는 지태 옆에서 채윤이 재빨리 핸드폰으로 검색해서 단유 앞에 들이밀었다. 주위가 여간 소란스러운 게 아니어서, 채윤은 볼륨을 최대로 올린 후 영상을 재생시켰다. 영상의 시작은 암전에서 불이 밝혀지며 시작되었다. 작은 전구에 들어온 불은 마치 촛불처럼, 혹은 별빛처럼 은은하게 그러나 어둡지 않게 빛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단유가 기도하는 자세로 손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단유의 등장과 동시에 무반주로 허밍이 시작되었다. 나직하지만 청명하게 들리는 허밍이 아련한 감성을 자극하다가 여러 악기가 겹쳐지고 이어 허밍 대신 ‘리모트’의 전주가 이어지면서 노래가 시작되는 뮤직비디오였다. “내가 이거 듣자마자 탁 알아챘지.” “뭘?” “이거 단유, 니가 부른 거지? 노래방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딱 이거더라고. 그래서 금방 알았지.” “진짜 너야?” 병수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여전히 영상을 바라보는 단유는 가볍게 고갯짓으로 그 사실을 인정했다. “얘 노래 잘해?” “잘하더라? 변성기라고 하는데 변성기 같지도 않고 듣기 껄끄럽지도 않고.” 병수는 단유가 정식으로 불렀을 때의 노래 실력에 대해 호기심을 품으며 지태와 대화를 나눴고, 단유는 뮤직비디오의 끝까지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단유가 시선을 들었을 때, 채윤이 감상을 물었다. “좋은 것 같다.” “좋은 게 아니라, 이 정도면 히트지.” “그건 모를 일이지.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고 선호도가 다른데 모두가 이런 스토리의 뮤직비디오를 좋아할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지.” 채윤이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한데, 그보다 더 분명하게 장담할 수 있는 건 있지.” “뭐?” “남자는 예쁜 여자를 좋아하고, 나윤누나랑 수련누나는 예쁜 여자이고, 따라서 남자들은 이 뮤비를 좋아할 거란 사실.” 단유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 수련과 나윤은 새벽에 일어나 샵에 들렀다가 오전 스케줄을 소화하고, 다시 오후 스케줄을 위해 이동을 하느라 많이 피곤했다. 잠깐의 시간도 빼기 힘들어 점심은 차 안에서 김밥을 먹는 것으로 대체하고 이동 중이었다. “그만 보고 다 먹었으면 눈이라도 붙여.” “좀만 더 보고요.” 수련과 나윤은 연신 새로 고침 버튼을 눌러 뮤직비디오 밑에 달린 댓글들을 읽어나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특히 나윤은 생애 처음으로 사람들로부터 ‘칭송’이라 할 만큼 과한 칭찬을 받은 탓에 피곤함도 무릅쓰고 샵에서부터 댓글 정독(精讀) 중이었다. “오빠, 근데 단유 나래이션은 언제 녹음했대요?” “나도 나중에 들었는데, 감독이 그냥 호기심에 시켜보았다가 괜찮아서 집어넣은 거래.” “그냥요?” “즉흥적으로.” “대박이네. 단유도 나중에 노래 시켜야 하는 거 아냐?” 수련과 태호의 대화를 듣던 나윤이 자기가 읽던 부분을 들이밀며 외쳤다. “사람들도 단유 목소리 분위기 있다고 좋다는데요?” “알았으니까, 적당히 좀 보고 눈 좀 붙여, 이것들아! 니들 지금 눈이 시뻘겋다고!” “약 넣으면 돼요.” 시크하게 답하면서 수련 역시 나윤처럼 댓글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노래에 대한 것보다 뮤비 자체에 대한 감상평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나윤 여신’, ‘수련 미모 역대급’ 같은 댓글들을 읽는 게 즐겁지 않을 수 없었다. 태호도 즐겁긴 마찬가지였다. 뮤직비디오 공개 이후 뜻밖에 반응이 뜨거웠고, 덩달아 음원 순위도 상승해서 현재 42위까지 상승한 상태였다. 쟁쟁한 음원 강자들이 포진한 차트에서 42위라는 성적을 거둔 것만으로도 이미 회사에서는 난리가 난 상황. 하지만 박 이사가 거드름을 피우며 ‘돈값은 해야지’라는 말에 다시 열혈 모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튼, 비록 시작은 초라했지만 끝은 창대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싹을 틔우긴 했다. 이제 태호 자신의 역할은 그 싹이 비바람에 꺾이지 않고 계속 잘 자랄 수 있게 지키고 보호하고 가꾸는 일이었다. “야, 이 싹…아니, 이것들아! 핸드폰 뺏기 전에 빨리 닫고 자.” 태호가 버럭, 하자 그제야 핸드폰을 허리 뒤로 감추며 눈을 감는 두 사람, 가디스R이었다. **** 하지만 모두가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으니, 수영은 보고 있던 모니터를 꺼버리고 연습실 벽에 붙은 소파에 드러누웠다. 아직 다른 사람은 연습실로 오지 않은 상태. 그리고 지수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늦거나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지는 않겠지만, 지수는 거의 반쯤은 가수를 포기한 사람처럼 보였다. 일전 멤버간의 갈등이 있었을 때, 그리고 그 갈등이 해결되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현실의 벽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청개구리같은 성격이라고 자부하는 자신도 이제는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말고,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니,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은 지수는 어지간할까 싶었다. 가디스R의 성공은 갤럭시즈의 차기작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말에 희망을 품었던 것이 바로 엊그제였는데, 지금은 가디스R 때문에라도 갤럭시즈를 해체하려 들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만약 갤럭시즈가 해체한다면?’ 갤럭시즈에는 수영의 자리가 있지만, 다른 곳에는 자리가 없었다. 새로 걸그룹이 생긴다고 해도 자신의 자리가 있을지는 미지수였고, 확률로 따져도 굉장히 낮은 확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걸그룹의 평균연령이 점점 낮아지고 있는 현실에서 갤럭시즈 외의 걸그룹이 만들어질 경우, 자신은 내침을 당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양(陽)이 있으면 음(陰)이 있다던가? 가디스R의 성공을, 아끼는 동생의 승승장구를 진심으로 축하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수영은 눈을 감았다. 긴 눈썹 끝에 촉촉함이 배어 나왔다. ======================================= [315] Make-up(6) 처음에는 악재로, 그리고 골칫거리로 전락했던 뮤직비디오가 뒤늦게 공개되었음에도 화제가 되면서 한순간에 ‘가디스R’의 날개가 되었다. 인터넷에서든, 학교에서든 화제가 되기 시작했고, 가디스R의 이름이 커뮤니티에서 자주 거론되기 시작했다. - 왜 이제 나온 거냐? - 인사해라. 내 여자친구다. - 완벽하다. 이보다 완벽할 순 없다. - 나윤이 장면만 계속 돌려봤다. - 노래랑 너무 잘 어울리는 거. 노래도 좋다. - 겨울 감성 저격했음. 겨울 여신 나윤이를 숭배하라. - 나윤이라니! 나윤님이라고 해라. 뮤직비디오는 어느새 공개 일주일째에 4백만 회에 가까워지는 기록을 세우는 중이었다. 뮤직비디오 시청 횟수와 비례하여 음원 순위도 상승하더니 어느새 차트 35위에까지 이르렀다. “지금 인터넷에 화제가 되는 신인 그룹, 가디스R입니다.” “안녕하세요, 가디스R입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도 뮤직비디오를 봤습니다.” “정말요? 고맙습니다.” “뮤직비디오 보니까 두 분의 미모가 눈이 부실 지경이더군요. 그런데 청취자 여러분, 그거 아세요? 실물은 훨씬 더 합니다. 그래서 방송 들어오기 전에 급히 매니저한테 선글라스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까지 했어요.” 수련과 나윤이 진행자의 말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우선 화제의 신곡, ‘리모트’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수련의 소개가 끝난 뒤, 라디오에서는 ‘리모트’가 흘러나왔다. “노래 잘 들었습니다. 두 분도 대단하시지만,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상대역에게도 많은 관심이 몰리고 있는데, 아시나요?” “네, 사람들이 많이 궁금해한다고 들었어요.” “그럼 혹시 그분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어요? 누구, 수련씨?” 수련이 살짝 손을 들어 대답하겠다고 신호를 보냈다. “그 친구는 이제 중학교 1학년인 친군데, 연예인은 아니고요. 저랑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서 뮤비 출연을 부탁했던 거였어요.” “중학교 1학년이라고요? 동안이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진짜 어린 친구였네요?” “네. 예전에 갤럭시즈로 활동할 때, 갤럭시즈의 두 번째 싱글 곡 뮤직비디오에도 참여한 적이 있었어요.” “아, 그렇군요.” 진행자는 모니터에 뜬 작가의 메시지에 살짝 고갯짓을 했다. “그럼 말이 나온 김에 갤럭시즈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요? 솔직히 수련씨는 예전에 갤럭시즈라는 걸그룹의 메인보컬로 활동하셨잖아요? 그러면 갤럭시즈는 해체를 한 건가요?” “아니요, 해체는 아니고요. 지금도 저희 멤버들은 열심히 연습하고 있어요. 가디스R은 이를테면 프로젝트 듀엣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아, 그러면 혹시 이번 활동이 마지막이라거나 그런 건가요?” “아니요. 그건 아니고요. 팬분들에게 다양한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는 저희 멤버들과 회사의 의견에 따라 그에 맞는 활동 방향을 정한 거라고 봐주시면 좋겠어요. 갤럭시즈는 걸그룹답게 활달하고 밝은 음악으로 팬들에게 보답할 예정이고, 가디스R은 좀 더 보컬과 감성에 집중해서 팬들과 소통하려는 의도로 나선 것이라고 봐주시면 좋겠어요.” 부스 바깥에서 대기중이던 태호는 수련의 대답에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작가에게 미리 부탁해서 준비한 질문과 대답이었는데, 아마 방송을 통해 나가면 꽤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사실 갤럭시즈라는 걸그룹이 인지도가 많이 약한 그룹이잖아요? 많이 힘들지 않으셨어요?” “솔직히 힘들지 않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고요. 그래도 저희끼리는 즐겁게 연습하고 무대 준비를 하고 활동을 했었거든요. 언젠가는 저희의 노력을 팬분들께서 알아주실 거라고 믿으면서요.” “그런 노력이 아마 이번 가디스R의 신곡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봐도 되겠군요.” “네. 그렇죠. 그래서 저희 멤버들도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좋아해 주셨어요.” “그럼 나윤씨, 나윤씨는 갤럭시즈 멤버가 아니었죠?” “네. 저는 이번이 첫 데뷔입니다.” “하하, 그렇군요. 그런데 나윤씨 조금 긴장하신 거 같은데?” “예, 사실 라디오 방송이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요. 이렇게 말하는 것도 신기하고 그래요.” “그래요?” “예전에 연습생 시절 때 이 방송 자주 들었거든요. 그리고 그때는 저도 이런 라디오 나오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나오니까 너무 긴장돼서 말이 잘 안 나오고 그래요.” “뭘요? 잘하시는데요? 준비 많이 하셨나 봐요?” 대답 대신 웃음으로 화답하는 나윤에게 진행자는 최근의 화제가 된 미모부터 시작해서, 인터넷에서 ‘여신’으로 추앙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그에 대한 감상은 어떤지 등을 물으며 쇼를 진행했다. 사실 나름의 준비를 해서 내보낸 방송이긴 해도, 라디오가 익숙하지 않은 나윤이 걱정돼서 좀처럼 앉아서 기다릴 수 없었던 태호는 무사히 3부가 끝나고 4부를 준비하는 아이들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 사이 작가가 휴지를 건넸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 쳐다보고 있으니 핑크색 후드 티셔츠를 입은 작가는 태호의 이마를 가리켰다. “땀을 많이 흘리시네요.” “아하, 네. 추운 데 있다가 들어와서 그런지 몸에서 열이 좀 나네요.” 태호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작가에게서 휴지를 받아 이마를 찍어 눌렀다. 그러고 보니 애들보다 더 긴장한 것이었던 모양이었는지, 휴지는 금세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젖은 휴지를 돌돌 굴려보다가 잠시 양해를 구하고 라디오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특별히 뭐가 괜찮은지 묻지 않았고, 뭐가 괜찮은 건지 말하지 않았지만, 수련과 태호는 그 정도 문답으로도 충분했다. “아까 잘 대답했어. 그리고 너무 긴장하지 말고, 편안하게 해.” “네. 오빠.” “나윤아, 너도 잘했어. 이제 20분 남았으니까, 마무리 잘하자. 알았지?” “네.” “자, 이거.” 태호는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나윤에게 건넸다. “혹시 긴장 때문에 손에 땀이 많이 나면 닦으라고.” “오빠, 저는요?” “넌 긴장 잘 안 하잖아?” “편애하시는 거 아니에요?” “씁, 쓸데없는 소리. …잘해.” “네.” 수련은 웃음으로 태호에게 대답했고, 나윤은 손수건을 받자마자 손바닥에 배어난 땀을 훔쳐냈다. 태호는 잘하라고 속삭이듯 응원한 뒤, 부스 바깥으로 나왔다. 콘솔 쪽에 있던 작가가 슬쩍 보더니 웃음을 지었다. “매니저님, 되게 자상하시네요?” “뭘, 이 정도 가지고요.” 태호는 웃음을 지은 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노라 말하고는 스튜디오를 빠져나왔다. “장 매니저님!” 스튜디오를 나오자마자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예전 갤럭시즈 때부터 얼굴을 익혀 온 다른 기획사의 매니저였다. 아니, 이제는 실장이라고 해야 하나? “양 실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저도 오랜만이네요. 요즘 잘 나가신다고요?” “잘 나가긴요? 그냥 조금 반짝인기에 편승한 거죠.” “반짝이라도 그게 어디에요. 예전에는 그 ‘반짝’이라는 거 어디서 사야 하냐고 농담까지 해 놓고선.” “그러게요. 그래도 오랜 노력이 빛을 보는 것 같아 기쁩니다.” “장 매니저님 웃는 모습 보니까 저도 좋네요.” “아, 오면서 보니까 유리아도 이번에 성적 좋던데요? 10위권이죠?” “저희도 운이 좋았죠. 마침 대형가수들이 다 빠진 틈이라서. 사실 이 시기 아니면 이런 성적 얻기 어디 쉬운가요?” “그렇죠.” 태호는 애써 웃으며 말을 아꼈다. 딱히 악의를 가지고 말한 것은 아니겠지만, 대형가수도 없고 성적 올리기도 쉬운 타이밍에 신곡을 내고도 누구는 10위인데 누구는 30위권 언저리다 보니 비교가 되어서였다. “방송 때문에 오신 건가요?” 이것도 삐딱하게 보면 기분 나쁠 수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태호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3 스튜디오에서 방송 중이에요.” “아, 그래요. 마침 저희가 올 때 라디오를 켜지 않아서 몰랐어요. 반응은 당연히 좋겠지요?” “다행히도 좋은 거 같더라고요.” “잘됐네요. 앞으로도 승승장구하시길 바랄게요.” “양 실장님도요.” 태호는 고개를 숙여 양 실장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양실장도 마주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바쁜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 모습을 보던 태호는 몸을 돌려 화장실로 향하려다, 그대로 바깥으로 나갔다. 현관을 나와 주차장을 가로질러 구석에 마련된 흡연실로 향했다. 쌀쌀하다 못해 뺨을 매섭게 후려치는 겨울바람에 절로 어깨가 움츠려졌다. 흡연실로 들어간 태호는 담배를 꺼냈다. ‘되도록 안 피려고 했는데.’ 하지만 생각과 달리, 손가락은 담배를 집고, 다른 손은 부지런히 움직여 라이터를 꺼내고 불을 붙였다. 의지한 바와 달리 입술에 붙은 담배로부터 흡입한 연기가 목을 타고 폐에까지 침입하여 구석구석에 타르를 비롯한 온갖 유해물질들을 뿌려댄 뒤, 정화된 하얀 연기가 다시 목을 타고 혀를 넘어 입술을 비집고 나와 공기 중으로 흩날렸다. 담배 한 모금에 찝찝했던 기분이 날아가길 바랐던 것은 사치라는 듯 다시 입술은 담배를 물었고, 그렇게 몇 번의 흡입과 배출을 반복했더니 팽창한 실린더처럼 가슴속에서 폭발하던 감정이 옅어지는 기분이었다. 분명 성공은 성공이었다. 계속 과거와 비교해서 그렇지, 지금 현재를 두고 봐도 가디스R의 성공은 분명 유의미한 업적이었다. 다른 기획사에서도 이런 순위를 얻기 위해 엄청난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곳이 많을 것이니, 그런 치열한 싸움판에서 이 정도 성적이라면 충분히 뻐길만한 것이리라.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답답한 마음이 드는 것은 역시 ‘갤럭시즈’ 때문이었다. 지금 당장은 가디스R에 집중을 해야 하지만, 갤럭시즈라는 꼬리표를 떼어낼 수는 없었다. 조금 전 라디오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도 ‘갤럭시즈’가 나온 이유였다. ‘가디스R이 성공하면, 그 성공을 그대로 갤럭시즈에게로 잇는다.’ 라는 게 회사의 기본 방침이라고 믿고 싶었다. 애초에 그런 의도로 듀엣을 만들었던 것이고. 하지만 가디스R의 성공이 과연 최초의 기획대로 갤럭시즈에게로 이어질 수 있을까? 방금 만났던 양 실장이 관리하는 유리아도 처음에는 걸그룹의 멤버였다. 데뷔 때부터 시장을 선도하는 대세 걸그룹으로 떴던 그 그룹은 이후 후속곡들이 데뷔곡만큼의 인기를 얻지 못하면서 점점 컴백 주기가 늦춰졌고, 그러다 보니 여유 시간이 많아졌다. 여유 시간이 많다고 해서 아이들을 놀릴 수 없는 일. 개별 활동을 시작했고, 뜻밖에 유리아가 연기에 재능을 보이면서, 연기와 가수를 겸업하게 되었다. 그리고 유리아가 점점 인기를 얻으면서, 반대로 그룹의 활동은 부진해져 갔다. 의도적이었든, 아니든 유리아의 본진은 정체를 벗어나지 못했고, 유리아의 성공이 이어질수록 더욱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지금, 해체를 언급하진 않았지만, 비활동기간이 무려 3년을 넘어가고 있었다. 가디스R도 어쩌면 비슷한 길을 갈지 모르겠다. 가디스R이 성공할수록 그 성공에 더욱 집착하여 회사는 더 많은 인력과 예산을 투자할 것이고, 더 큰 성공을 누리리라. 굳이 세 번이나 실패했던 걸그룹에 투자하느니, 투자 대비 성과의 효율에도 우수한 듀엣 그룹에 투자하는 게 더 좋다는 계산서가 눈앞에 있는데, 누가 그 계산서를 찢고 새로운 계산서를 발행해달라고 발버둥을 치겠는가. 태호는 이왕 나온 김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한 개비를 더 집어 들었다. 가디스R의 성공은 태호 본인도 바라던 바였다. 하지만 그럼 갤럭시즈는? 3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연습실에서 구르며 땀을 흘렸던 수영, 지수, 명지, 예영이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어쩌면 자신이 고작 ‘매니저’인 탓에 정에 이끌려 계산을 잘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엔터테인먼트도 산업이고 사업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윤을 추구해야 마땅한 일이고, 그렇다면 갤럭시즈의 멤버들에겐 미안하지만, 가디스R에 더욱 집중하는 게 옳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들은? ‘그녀들에게는 누가 지난 세월을 보상해 줄 수 있을까?’ 태호는 담배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끈 뒤, 다시 찬 바람 몰아치는 주차장으로 나왔다. 이 주차장에 자신들의 차는 없었다. 인기 없는 연예인의 차량은 방송국 주차장에 주차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방송국 근처의 유료 주차장이 그렇게 장사가 잘된다고 한다. ‘돈 모아서 주차장이나 하나 만들어서 먹고 살면 좋을 텐데.’ 몇억짜리 고급 승용차를 관리하는 게, 사람을 관리하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할 테니까. ======================================= [316] 지금 이 순간(1) 가디스R이 승승장구하며 스케줄을 늘려가고 있을 때, 전국의 초중고교는 겨울방학을 맞이하고 있었다. 단유네 교실에도 각양각색의 두꺼운 패딩을 걸친 학생들이 각자의 자리를 벗어나 끼리끼리 뭉쳐서 방학식 이후의 스케줄을 조정하는 중이었다. “오늘 승급전하는데 같이 하자.” “오케이! 콜!” “나는?” “야, 넌 이제 겨우 골드잖아?” “너는 임마, 저번에 정글 크립 먹지 말자고 약속해놓고는 시작하자마자 바로 들어가서 바론 처먹고 들어왔으면서?” “새꺄, 언제까지 그걸로 우려먹을래? 딱 한 번 했다, 한 번.” 투덜대고 틱틱대고 옥신각신해도 결국 같이 가서 해가 질 때까지 엉덩이 붙이고 놀 친구들이었다. 또 한 편에서는 어제 새벽 펼쳐진 해외축구를 감상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후반기 프리미어리그의 결과를 예측해보는 진지한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비록 방학이라도 그들은 여전히 학원을 다니면서 내년을 준비해야 했지만, 지금의 들뜬 분위기에서 그런 암울한 이야기는 하고 싶을 리 없었다. 하지만 담임 선생님은 생각이 다르셨던지,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아이들에게 각종 안전사고와 주의해야 할 것들을 고지하며 경각심을 일깨우기에 애를 쓰셨다. 빨리 방학식을 마치고 싶어하는 아이들은 건성으로 대답했지만, 그들이 맞이해야 했던 것은 대망의 성적표였다. 2학기를 마무리하고 최종적으로 그들에게 매겨진 점수를 확인하는 시간. “결국, 단유가 전교 1등을 탈환했다. 박수.” 자기가 1등을 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반에 뺏겼던(?) 1등을 되찾아왔다는 것에 의의를 둔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단유가 예의 덤덤한 표정으로 성적표를 받아들 때도 아이들은 박수를 쳐 주었다. 어쩌면 지난번 단유가 부상으로 학교를 쉬었다가 왔을 때와도 비슷한 분위기라고 할 수 있겠다. “좋겠다.” 병수가 자리로 돌아온 단유에게 축하와 부러움의 한마디를 던졌다. “그냥 그래.” “역시! 여유가 넘쳐.” 단유는 병수에게 웃음을 보인 뒤, 성적표를 접어 가방에 집어넣고 다른 아이들이 성적표를 받고 보이는 표정들을 관찰했다. 사람의 개성만큼이나 다양한 표정들을 연출해내는 아이들이었다. 성적이 올라서 좋아하는 친구들 중에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는 아이도 있었고, 단유처럼 표정을 감춘 채 성적표를 받아드는 아이도 있었다. 성적이 떨어져서 우울한 아이들 중에도 과장되게 울상을 지어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웃음으로 넘겨버리는 사람이 있었다. 매년 겪은 일이었지만, 이번 방학식은 단유에게 조금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방학식 자체가 특별하다기보다는 지난 1년간 겪었던 수많은 일들이 단유에게 특별함을 선사했다. 어느 때보다 반 아이들과 많이 부딪쳤던 1년이었다. 개중에는 주먹이 오갔던 친구도 있었고, 생각보다 가깝게 지내며 친해진 친구도 있었다. 또 특별히 많은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오랜 시간을 관찰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쓰이는 친구도 있었다. 일부는 2학년이 되어서도 같은 반이 되어 자주 보게 될 것이고, 또 일부는 일부러 자리를 만들지 않는 한, 대화 한 번 못하고 졸업하고 헤어지게 될 이도 있을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공부 잘하는 아이? 말 없는 아이? 사교성이 없는 아이? 평소 사람들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살던 단유였지만, 갑작스레 든 궁금증에 단유는 호기심이 생겼다. 어쩌면 댓글 사건이나 지난 결석 이후의 환대 때문에 생겨난 관심일 수 있었다. “니가 생각하기에 말이야, 난 어떤 사람 같아?” 병수는 갑작스러운 단유의 질문에 멀뚱히 바라보다가, 과장되게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팔을 벅벅 긁었다. “뭐야? 갑자기?” “왜?” “오글거리잖아?” 단유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질문은 하면 이상하구나.’ 단유는 그동안 짝으로서 고생했다고 병수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냥 안 하기로 마음먹었다. **** “가자!” “어딜?” “노래방!” 미리 준비한 동전을 손에 쥐고 있다가 짤랑, 흔들어 보이며 웃음 짓는 지태 때문에 네 사람은 노래방으로 향했다. “상미도 오라고 하면 안 돼?” 지태가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꺼내자, 명수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곧 전화를 끊고 통화내용을 알려 주었다. “자기 친구들이랑 쇼핑하기로 했대.” “여자애들은 이상해. 이런 날 무슨 쇼핑이야?” 지태의 투덜거림에 채윤이 지태의 어깨를 말없이 두드려주었다. 어차피 노래방도 좁은데 사람 많아서 좋을 것 없지 않냐는 단유의 말에 명수와 채윤이 동의하자, 지태는 자기도 그렇게 생각했다며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아, 근데 단유 너? 계약 안 해?” “계약? 아, 에이 바운스랑?” 지태와 채윤도 단유가 그 회사의 이사님이랑 식사하면서 계약 이야기를 했었다는 사실을 들었기에 그 뒷이야기가 궁금했던 참이었다. 명수의 질문에 단유가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니 지태가 채근했다. “너, 머리도 좋고 잘생겼으니까 연예인하면 성공할 거야.” 연예인의 성공 조건이 그렇게 단순한 걸까? “노래도 잘하잖아? 나중에 가디스R이랑 같이 노래 부르면 사람들이 많이 좋아할걸?” 활동방향까지 잡아주는 채윤이었다. “돈 벌면 니가 사고 싶은 책 마음대로 살 수 있으니까 좋지 않을까?” 버는 김에 내 옷도 사주고, 라는 명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단유가 말했다. “아직은 솔직히 모르겠어. 그리고 방학하고 나서 재훈이형이랑 이야기하기로 했으니까, 이야기해보고 결정하지 뭐.”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게임센터 앞에 섰을 때, 네 사람은 기이한 풍경을 목도 하게 되었다. 오락실, 혹은 게임센터라고 부르는 이곳은 이 주변에서 유일하게 아케이드 게임들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최근 수많은 게임센터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혹은 기타 여러 가지 사정으로 폐업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러다 보니 인터넷에는 영업 중인 게임센터의 위치를 명기한 지도가 있을 정도였다. 피시방에 손님을 뺏겨 이제는 장사하기 어렵다는 점주들의 말은 사실이겠지만, 아케이드 게임을 즐기는 매니아가 많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매니아들은 인터넷 동호회에 가입하여 정보를 주고받거나 친목을 나누면서 점점 입지가 좁아져 가는 아케이드 게임 시장에서 자신들의 취미활동을 효율적으로 즐기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동네 형들이 게임 하고 있을 때, 맞은 편에 앉아 ‘Challenger’를 자처했을 테지만, 이제는 그런 사람도 찾기 힘든 마당이라 그들이 즐기는 방법 역시 변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것이 ‘정모’였다. “저기 왜 저렇게 사람이 많아?” 평소의 3배? 4배는 넘을 것 같은 인원들이 게임센터 앞에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싸움이라도 났나?” 다가가 보니 싸움이 나긴 났는데, 게임기 안에서 싸움이 났다. 치열한 대전 격투가 이루어지는 게임기를 둘러싸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응원을 하고나 비평을 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비단 한 대의 게임기에서만 그런 모습이 연출되는 것이 아니라, 게임 센터 안의 게임기들 대부분에서 그런 모습들이 연출되고 있었다. 게임 센터 바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경기를 치른 후, 잠시 쉴 겸 센터를 나와 수다를 떠는 이들이었다. “아쉽네. 여기도 다음 달까지만 한다니.” “그러게요. 한때는 최신 게임을 제일 빨리 수입하던 곳이었는데.” “여기 사장님도 격투 게임 매니아라잖아요.” “확실히 이제는 이런 게임 하는 사람이 줄긴 줄었어.” “우리도 구식인 거죠.” “나이도 어린 게 어디서 구식 타령이냐?” “형님도 나이 많은 편은 아니시면서.” “니 때는 HOT가 최고였지? 내 때는 소방차가 최고였다.” “와, 그렇게 말하니까 완전히 옛날 사람 같아.” 지태가 선두에 서서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구석에 설치된 코인 노래방으로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센터 안에서 북적대고 있었지만, 다들 게임기만 붙잡고 있던 탓에 이쪽은 비교적 한산했다. “저기 봐.” 노래방 밖에서는 서 있을 틈을 찾지 못할 정도로 붐벼서 제대로 보지 못하다가, 노래방 안에 들어오고 나서야 작은 틈으로 센터 안 풍경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저 게임 하는 사람도 있네?” 몇 번 오지 않았지만, 올 때마다 화려하게 생긴 저 게임은 누가 할까, 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어떤 남자가 게임기 앞에서 서서 현란한 손기술을 보이며 버튼들을 누르고 있었다. “되게 어려워 보인다.” 리듬 게임이라는 게 저렇게 하는 거구나, 라는 생각들을 하며 네 사람은 바깥 풍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다들 입은 옷들은 그렇게 화려하지도 않았고, 어떤 사람은 진짜 동네 마실 나온 사람 마냥 허름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저 사람들은 각자 놀면서도 함께였고, 함께 할 때는 더욱 신난 얼굴을 하고 스틱을 조종하거나 버튼을 눌렀다. “계속 보고 있었더니,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드네.” 채윤의 말에 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집에서 하는 거랑은 또 다른 맛이 있겠지?” “여기 게임기가 크니까 더 좋지 않을까?” “크기가 무슨 상관이야? 요즘 컴퓨터가 크기로 성능 따지는 시대도 아니고.” 지태의 면박에 채윤이 얼굴을 붉혔다. “야, 그냥 노래나 부르고 가자. 무슨 사파리 구경 온 것처럼 이게 뭐냐?” 지태는 준비해온 동전을 가지런히 놓아둔 뒤, 책을 펼쳤다. 다른 사람들이 각자 부를 노래를 고르는 동안, 단유는 계속 바깥의 풍경을 지켜보았다. 추운 겨울임에도 좁은 실내 안에 뭉쳐 있다 보니, 절로 땀이 나고 온갖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는, 어찌 보면 불쾌감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거기에 대해 불편함을 토로하는 이는 없었고, 다들 표정만 보면 인생 최고의 순간을 누리고 있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즐거움을 평소에 느껴볼 일이 없던 단유로서는 그 모습들이 꽤 신기하고 부러웠다. 부러움은 오늘 방학식 때 봤던 모습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행복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밥 한 숟가락에 행복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수 천만 원을 손에 쥐고도 불행할 수 있다. 단유는 책을 읽을 때 행복했고, 혼자서 사색을 즐기는 시간에 행복했다. 그러나 오늘 이러저러한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저런 즐거운 표정을 짓는 순간을 만끽하는 것도 행복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학식을 맞아, 성적표를 받는 아이들이나 방학 동안에 학원을 두 군데 더 다녀야 한다는 아이들이나 모두 행복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방학식’이라는 순간을 즐겼기 때문이었고, 게임센터 안의 사람들이 추위와 냄새와 기다림이라는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표정을 짓는 것은 같은 취미활동을 함께 하는 ‘이 순간’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단유야, 노래 골라.” 단유는 채윤에게서 책을 건네받아, 부를 수 있는 노래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딱히 부를 만한 노래는 없었다. “너, 저거 불러봐.” 명수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벽에 붙은 「1월 신곡」이라는 제목의 포스터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디스R이 부른 ‘리모트’란 곡이었다. “저게 벌써 나왔네? 저 정도면 성공한 거 아냐?” “야, 이미 예전에 성공했어. 지금 31위던가? 아마 다음 주 되면 20위권도 할 수 있을 것 같던데?” 채윤이 단유를 보며 물었다. “너, 지난번에 30 몇 위 한다고 하지 않았어?” “맞다! 너 지난번에 신곡 나오면 30등 정도 한다고 했었다. 맞지?” 단유는 헛숨을 뱉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 건 잘도 기억하네?” “야, 그럼 만약 순위가 여기까지면 단유 말이 맞는 거 아냐?” “단유야, 가디스R이 20위 못 올라가면 니 탓인 거다.” 명수의 말에 단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게 어째서 내 탓, 이냐고 물었다. “니가 저주를 한 거잖아? 30등 밖에 못 한다고.” “맞네, 단유가 저주를 걸었네.” 단유를 제외한 아이들은 서로 쿵짝을 맞추며 단유 놀리기에 재미를 붙였다. 단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마이크를 들고 일어섰다. 반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단유는 음정을 기억해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 [317] 지금 이 순간(2) 마니아란 어떤 특정한 관심 사항에 대해 ‘열광’하는 이들을 일컫는다. ‘마니아’란 단어의 쓰임을 보자면, 과거에는 ‘건담 마니아’나 ‘축구 마니아’같이 특정 스포츠 혹은 특정 영상물에 대해 광적인 집착과 애정을 보이는 이들에게 사용되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마니아’란 말 대신 ‘덕후’라는 시쳇말이 이용되면서 ‘치킨 덕후’, ‘애니 덕후’, ‘게임 덕후’ 등 범용적으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덕후’든 ‘마니아’든 관심 사항에 대해서만큼은 일반인들보다 월등히 전문적이고, 전문가들과 비교해서도 꿇리지 않는 전문 지식과 애정을 보인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이런 경향에 새로운 변화가 있으니, 단 하나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것들에 관심을 두고 집착하는 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과거보다 훨씬 소통이 편리한 인터넷과 다양한 매체들을 주위에 두다 보니 생긴 경향이 아닐까 싶은데, 이런 경향을 반영한 사람들의 등장에 따라 이에 맞는 용어가 등장하였으니 ‘잡덕’이라 부른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뜻인데, 아무래도 과거 ‘마니아’라는 본래의 의미와는 조금 멀어진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잡덕’ 역시 좋아하고 열광한다는 순수한 의미에서 접근하자면 ‘덕후’이며 ‘마니아’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오성근은 ‘잡덕’이었다. 잡덕이긴 한데, 취향이 조금 독특해서, 직접 하는 것보다 구경하고 관람하는 것을 즐기는 덕후였다. 성근은 어렸을 때 ‘오락실’에 가는 것을 즐기는 아이가 아니었다. 친구 따라 오락실에 갔다가, 동네 형들의 시비에 겁을 먹고 두 번 다시 찾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트라우마가 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단지 성근은 남들이 100원 넣고 게임을 할 때, 자신은 1,000원을 넣고도 금방 죽어버려서 게임에 재능이 없음을 확인했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성근은 돈이 떨어졌다고 오락실을 나가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하는 건 재미없지만, 뒤에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이었다. “야, 저기서 뛰어야지.” “불! 불 날려!” “점프!” 왁자지껄한 오락실에서 조용히 팔짱을 끼고 다른 사람의 플레이를 보며 즐기는 여유가 좋았던 오성근은 ‘게임은 안 하고 어슬렁거리면서 기분 나쁘게 한다’는 동네 선배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집 근처 오락실에 가지 않게 되기 전까지, 즐겁게 구경하며 다녔다. 나이를 먹으면서 스포츠를 알게 되었고, 특히 야구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야구 역시 하는 것보다 보는 즐거움이 많은 스포츠였다. 특히 자신과 이름이 비슷한 감독님의 야구를 보며 속을 태우기도 했고, 가슴 벅찬 희열을 느끼기도 하면서 야구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취업할 시기가 되었고, 불행히도 취업이 쉽게 되지 않아 우울한 날들을 보내며 방에 틀어박혀 있을 때였다. 인터넷을 하다가 문득 동호회라도 가입해서 활동하면 삶이 즐거워지지 않을까 하는 충동적인 마음으로 가입하게 된 것이 ‘아케이드 게임 동호회’였다. 대부분은 게임을 하는 것을 즐겼지만, 몇몇 사람들은 자신처럼 게임을 보는 것을 즐기는 이들이 있었고, 그런 이들이 모이니 정모도 할 만했다. 게임 잘하는 이들의 뒤에 서서 ‘직관’하는 재미가 있었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관람 인생 30년, 게임 해설자 수준으로 평가할 수 있는 정도에 오른 성근은 오늘도 한 격투 게임 현장의 옆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열심히 해설을 하면서 경기를 관람하는 중이었다. “잠시만요.” 교복을 입은 아이 한 명이 사과하며 자신의 뒤로 지나갔다.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여 뒤에서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치지 않게 움직였던 성근은 뒤따라 지나가는 세 아이 때문에 살짝 불편함을 느꼈다. 뭔가 싶어 바라보니 아이들은 센터 안쪽의 코인 노래방으로 가는 중이었다. ‘혹시 우리 때문에 게임을 못 해서 자리를 피한 건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 살짝 미안해하려는 그때, 노래방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아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성근의 잡덕 성향은 바로 아이돌 그룹에 대한 편애에서도 나타났다. 특히 성근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아이돌 그룹을 애써 찾아보는 스타일이었는데, 언젠가 그들이 성공하게 될 때의 기쁨과 희열을 함께 맛볼 수 있다는―물론 자신만 느끼는―장점이 있었다. 그리고 좋아하는 아이돌 중의 하나가 바로 갤럭시즈였다. 갤럭시즈가 첫 번째 싱글을 내고 단 2주간 활동을 할 때, 우연히 그 모습을 보게 된 성근은 한눈에 자신이 ‘평생을 두고 덕질을 하게 될’ 그룹임을 직감하였다. 그리하여 두 번째 싱글이 나왔을 때는 그들이 직접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기 위해 방송국을 찾아갈 정도였다. 갤럭시즈가 간간이 인터넷 방송을 할 때도, 핸드폰으로 알림이 오면 그 즉시 하던 일을 멈추고 핸드폰으로 갤럭시즈의 방송을 즐기며 채팅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열성팬이었다. 「여러분, 되게 잘생겼죠?」 라고 물으며 수련이 한 소년을 소개했던 방송을 기억하던 그는 이후 갤럭시즈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했던 소년이 바로 이전 인터넷 방송에 함께 나왔던 소년임을 바로 알 수 있었고, 최근에 그 소년이 가디스R이라는 듀엣 그룹의 뮤직비디오에 다시 나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년이 지금 저 코인 노래방에 들어가는 소년과 인상착의가 일치한다는 사실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에이, 설마.’ 연예인이 아니란 사실은 들었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보게 될 인물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쩐지, 갤럭시즈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게 분명한 소년이, 아무리 연예인이 아니라고 해도 자신에게는 연예인에 준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확신을 얻기 위해 성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태후야. 방금 지나간 중학생 봤어?” “방금요? 아, 아까 교복. 그런데 그게 중학생이에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마지막에 지나간 애 혹시 본 적 없어?” “아뇨. 제가 이 동네에 사는 것도 아니라서요. 왜요? 유명한 사람이에요?” “너 혹시 가디스R이라고 알아?” “알죠. 요즘 되게 핫하잖아요?” “그럼 그 가디스R에 나온 남자애도 기억나?” 태후는 동그란 눈으로 시선을 돌려 코인 노래방 쪽을 보다가 성근에게 물었다. “방금 지나간 남자애가 그 애예요?” “나도 확실치 않아서 물어본 거야.” “와, 진짜면 대박인데? 연예인이잖아요? …모델인가?” 성근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물었고, 누구 하나 분명하게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다들 긴박감 넘치는 경기에 열중하고 있었던 탓에 교복 입은 남자아이 따위에게 관심을 쏟을 리 없었다. “가서 물어봐요.” 태후는 정확히 모르면서도, 연예인 실물로 처음 본다며 들뜬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 소년이 연예인이 아니란 사실을 아는 성근은―갤럭시즈가 속한 연예 기획사 ‘에이 바운스’의 홈페이지에서도 그 소년의 사진이나 프로필 등은 나오지 않았다―쉽게 다가갈 생각을 못 했다. “니가 물어봐.” “제가요?” 태후가 슬쩍 노래방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들 나올 때 한 번 물어보죠.” 성근은 그게 좋겠다며 태후의 의견에 동의했고, 다시 게임으로 화제가 돌아가는 듯했다. “아, 근데 쟤 방금 노래방 간 거잖아요? 그럼 혹시 노래도 직접 들어볼 수 있는 찬스 아니에요?” 태후의 말은 오락실 코인 노래방이 그렇게 방음이 좋은 편도 아니니 근처에서 노래를 들어볼 수 있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성근은 태후의 말에서 소년의 정체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노래방에서 노래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음치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연습생일 수 있어. 외모가 되는 연습생인데, 얼굴을 알리자는 차원에서 이번 뮤직비디오에 출연했던 것일지도…. 그리고 이제 곧 출격하는 남자 아이돌 그룹의 멤버인 거지. 그렇다면 데뷔를 준비하는 연습생의 노래를 현장에서 미리 들어볼 수 있는 건가?’ 성근의 ‘잡덕’ 본능이 깨어났다. “옆에 가보자.” 두 사람은 인파를 헤치고 나와 노래방 쪽으로 다가갔다. 마침 옆 칸이 비어 있어서 두 사람이 들어가기 적당했다. “여기 있으면 들릴까?” 라고 중얼거렸던 것이 무색하게, 음악을 틀지 않아서 그런지 옆 칸의 노랫소리가 바깥에 있을 때보다 더 잘 들리는 것 같았다. 에코가 많이 묻어서 울리는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듣기에 불편함은 없었다. 다만, “이러면 누가 부르는지 모르잖아?” 들어간 사람이 네 사람이었는데, 그중 누구의 목소리가 그 아이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코인가왕이네요.” 복면가왕이나 코인가왕이나 정체를 모르기는 마찬가지라는 걸까? 아케이드 게임 동호회 정모 때문에 왔다가 갑자기 이렇게 상황이 변해버린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노래 한 번 몰래 들어보겠다고 이러고 있는 꼴이 우습기도 했다. 하지만 혼자라면 모를까, 같이 장단을 맞춰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아까 들어간 애들 얼굴 기억나?” “정확히는 모르죠.” “아쉽네. 얼굴이라도 알고 있었으면 누가 무슨 곡을 불렀는지 알아맞히는 재미라도 있었을 텐데.” “얼굴만 보고 어떻게 그걸 맞혀요.” “왜 못해? 그거 있잖아? 너의 목소리가 ‘들려’ 였던가 ‘보여’ 였던가, 아무튼 그 프로 있잖아.” 태후는 성근의 말에 재밌다고 무릎을 치며 웃으려다, 성근이 황급히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는 동작에 웃음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들린다.” 반주가 나오고 노래가 들리기 시작했다. “잘 부르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럼 걔 말고 다른 애겠지.” “혹시 다른 애들도 가수나 연습생, 뭐 이런 건 아니겠죠?” “모르지. 요즘은 노래 못해도 가수하고 아이돌하고 다 하니까. 댄스 담당일 수도 있고.” 두 세곡이 지난 뒤, 잠깐 반주가 멈췄다.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는데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방음 공간인 탓도 있었고, 오디오가 물린(?) 탓이기도 했다. 간간이 가디스R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 같기도 하고, 순위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형, 저기 어떤 애가 가디스R 음원 순위를 맞췄나 본데요?” “그게 들려?” “제가 이게 좀 좋아요.” 자신의 귀를 가리키며 씩 입꼬리를 올리는 태후는 리듬 게임을 좋아해서 음악을 많이 듣다 보니, 듣는 귀가 좀 있다고 자랑을 덧붙였다. 자랑은 곧 옆 칸에서 시작된 반주에 중단이 되었고, 성근은 곧 그 음악이 가디스R의 신곡 ‘리모트’임을 알 수 있었다. “어, 이거 그 곡이네요?” 태후 역시 최근 화제가 되는 곡을 모를 리 없었다. 곧 남자아이의 목소리로 부르는 ‘리모트’가 들리기 시작했다. 3분 10여 초가 지난 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대박.” “남자가 불러도 괜찮네요?” “남자가 불러도 괜찮은 게 아니라, 쟤가 잘 부른 거야.” 성근은 방금의 노래가 그 소년이 부른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방금의 노래를 부른 소년이 예사 실력이 아니란 것은 장담할 수 있었다. “목소리가 완전 커.” “원 키 그대로 부른 거 같은데.” “그런가? 그건 잘 모르겠네.” 성근은 태후만큼 듣는 귀가 좋지는 않아서,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긴 해도 음악을 잘 안다고 표현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인받아 놓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얘 데뷔하면 완전 대박이겠는데? 생긴 것도 잘생겼고.” 이제는 성근보다 태후가 더 들뜬 모습을 보였다. “아까 걔랑 지금 노래 부른 애랑 같은 애인지는 모르잖아.” “그냥 제 느낌이긴 하지만, 분명히 같은 사람일 거예요.” 두 사람이 가수의 정체를 두고 이야기를 나눌 때, 옆 칸에서는 아이들이 가방을 챙겨 들고 부스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항상 마지막은 단유 노래로 끝을 내야 하나 보다.” “솔직히 대박이었다, 이번 거는.” “100% 진심인데, 너 가수 해라. 해도 되겠더라.” “야, 네가 가수 하라고 하면 얘가 가수 해야 하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뭘 또 그렇게 죽자고 달려드냐? 왜? 너도 그런 말 듣고 싶어? 그럼 너도 그 정도 실력이면 프로 해도 되겠다. 프로축구선수나 되라.” “뭐야!” 명수와 지태가 서로의 어깨, 팔, 머리를 두드려대며 장난을 칠 때였다. 옆의 부스가 열리더니 건장한 남자 둘이 나왔다. ‘어, 옆에 사람이 있었네.’ 라고 단유가 생각했고, ‘어, 우리가 떠들어서 방해했나?’ 라고 채윤이 생각했고, ‘어, 무섭게 생겼는데?’ 라고 지태가 생각했고, 명수는 슬쩍 눈길만 줬다가 한눈파는 지태의 머리를 한 대 더 때리고는 아무 생각 없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까불지 말라고.” 그때 서로의 눈치를 보던 태후와 성근, 둘 중 나이가 어린 태후가 나서는 게 보기 좋다는 생각에 성근이 눈을 부라렸고, 태후가 다부지게 나서서 아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보다 한 참 어린 애들한테 ‘저기요’가 뭐냐, 며 성근이 속으로만 혀를 찰 때, 붉어진 볼을 애써 감추지 않는 태후가 말을 끝까지 뱉어냈다. “방금 마지막에 부른 노래, 누가 불렀어요?” 아이들은 서로 쳐다보며, 무슨 일인지 상황을 파악하려 할 때, 명수가 단유를 가리켰다. “얘요.” 지태는 잘 알지도 못하는 수상한 사람에게 함부로 정보를 주는 명수가 못마땅해서 명수의 옆구리를 쿡 찔렀고, 단유는 굳이 감출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명수의 말에 긍정을 표했다. “전데요. 왜 그러시죠?” 태후가 더듬거리며 노래가 좋았다, 요즘 이 노래를 자주 듣는다, 원래 노래를 잘하냐는 등의 말들이 두서없이 뱉어댈 때, 성근이 용기를 내서 태후의 말을 잘랐다. “너, 갤럭시즈 뮤직비디오에 나왔었지?” 단유는 가디스R이 아닌, ‘갤럭시즈’의 이름이 언급된 사실에 신기하다는 듯 성근을 바라보았다. ======================================= [318] 지금 이 순간(3) “장수영, 다들 어디 갔어?” 갑자기 연습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태호의 말에 수영은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해 입만 뻥긋거렸다. 요즘 가디스R의 스케줄이 너무 많아서 새벽에나 회사에 잠시 들리는 정도라고 알고 있었는데, 해가 중천에 뜬 이 시간에 나타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한편, 스케줄이 붕 떠서 저녁에 협력 회사의 행사만 챙겨도 되는 날이라 모처럼 낮에 회사를 찾았던 태호는 열이 확 받치는 느낌이었다. 누구는 바쁜 와중에도 갤럭시즈를 어떻게 컴백시킬가를 고민하는데, 정작 당사자들은 컴백에 관심이 없는지 연습을 무단으로 빠진다? “이것들이, 진짜….” 태호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통화 신호가 가는 동안에 태호의 이가 으드득 갈렸다. “…이것 봐라?” 전화를 받지 않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태호는 종료 버튼을 누르고 다시 다른 멤버에게 전화를 걸었고, 수영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 모습을 훔쳐봤다. 일어선 자세에서 1㎜도 움직일 수 없었다. “…너 어디야?” 나직한 태호의 목소리는 분명 화가 났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전화 너머의 목소리도 그것을 짐작한 것이 분명했다. “빨리 튀어와!” 버럭 소리를 지르는 태호의 얼굴은 그야말로 분기탱천이라 하겠다. 다른 멤버들이 올 때까지 연습실에는 태호와 수영만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대화가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10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으니 태호는 연습실을 나갔다. 손을 등 뒤로 모으고 있던 수영은 그제야 어깨에 힘을 풀며 숨을 몰아쉬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서.’ 정작 자신은 방관하고 말았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자신도 다른 멤버들처럼 출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더 솔직히, 본심을 꺼내본다면 더 이상 희망을 꿈꾸지 않게 되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럼에도 연습실에 출근한 이유는 그저 습관 때문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말이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 수영은 반사적으로 벌떡 튀어 올랐다. “언니? 태호 오빠는?” 명지가 문을 슬그머니 열었다가 수영만 있는 모습을 보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작게 옅은 숨을 뱉은 수영은 명지를 타박하는 대신 손짓으로 들어오라는 뜻을 전했다. 깨금발로 달려온 명지에게 수영이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잠깐, 밖에 나갔는데 못 봤어? 2층에 갔나?” 명지는 조심스럽게 복도 밖을 둘러본 뒤, 다시 연습실 안으로 들어왔다. “화 많이 났어?” “응.” 명지는 그저 한숨으로 심정을 대변했다. 그때, 벌컥 문이 열리며 태호가 들어왔다. 태호가 다가오자, 짙은 담배 냄새가 확 풍겼다. “…예영이는?” 입을 꾹 닫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수영과 달리, 명지는 눈치를 보다가 태호에게 예영의 행적을 고자질했다. “시내에 잠깐….” “시내? 이 시간에?” 오후 3시. 한참 연습으로 인해 땀이 범벅되고도 남을 시간, 이라고 기억하던 태호는 가디스R을 맡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시간표가 변경이 되었던 것인지 물었다. “그건 아닌데요….” 수영이 명지의 말을 가로챘다. “오빠, 예영이도 나름 힘들어서 그래요.” “힘들어? 누가? 예영이가? 왜?” 저건 분명히 시비조였다. 하지만 태호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며 불만을 털어놓아 봐야 무슨 소용일까. 수영은 그저 오랜 시간 함께했던 태호가 이해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태호는 ‘나태한’ 모습을 보이는 멤버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이 니들 힘들다고 투정부리고 놀 시간이야?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 니들 컴백 안 할 거야?” 수영과 명지는 열중 쉬엇 자세로 태호의 잔소리를 묵묵히 감내했다. “수련이가 왜 저렇게 발악을 하는데? 니들이랑 같이 하고 싶다고 저러고 있잖아? 근데 니들은 활동 안 한다고, 스케줄 없고 시간 남아돈다고 그렇게 놀아서 어쩌겠다는 거야? 왜 그렇게 니들 생각만 하는 건데? 응? 언제는 계속 같이 가자고 해 놓고선, 이게 뭐냐고? 아무런 준비도 안 되어 있는데 회사에서 어떻게 너희들을 컴백시키겠냐고? 나는 무슨 낯짝으로 회사에다 말을 하겠어? 애들이 시간이 많이 남아돌아서 주체를 못 하는데, 할 거 없으면 컴백이나 시킬까요, 이래? 응?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 그러냐고?” 명지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을 때, 수영이 얼른 팔꿈치로 명지를 쳐서 나서지 못하게 말렸다. 하지만 그 모습을 눈뜬장님도 아니고, 태호가 못 봤을 리 없었다. “뭔데? 왜? 그냥 말해 봐. 나 모르게 니들 뭐 하는 거 있냐? 지수처럼 아르바이트라도 한다고? 솔직히 지수 걔도 말이야, 지금이 아르바이트나 하고 있을 때냐? 하도 간청을 하길래, 허락은 해 줬지만 말이야, 이건 아니잖아?” 태호는 이들이 이렇게 기가 빠지고 해이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자신이 자리를 지키지 않아서,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면 열심히 하고, 안 보면 농땡이나 부리는 거야? 그래? 니들이 애야? 하기 싫다고 출근도 안 하고 지 편할 대로 행동하고 그래? 하기 싫으면 하지 마. 그냥 나가! 괜히 연예인이나 하겠다고 팀에 민폐 부리지 말고 나가라고! 내가 직접 계약서 찢어줄 테니까 나가라고!” 태호는 자신이나 수련이나 잠 못 자고 새벽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빽빽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 이유가 갤럭시즈 때문임을 알아주길 원했다. 그런 노고를 알아주고, 반성하며 다시는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모습을 보길 원했다. 그리고 이전처럼, 악바리같이, 온몸에서 증기를 뿜어내며 연습실이 뿌옇게 보일 때까지 연습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원했다. “저거 보십시오. 저 아이들, 저렇게 열심히 연습하고 있습니다! 저 아이들, 준비 끝났습니다! 당장 컴백해도 됩니다. 이번에는 분명 팬들이, 대중들이 저 땀을 알아봐 줄 겁니다!” 라고 회사에, 박 이사에게 외치는 모습을 상상했다. 쉴 틈 없이 빡빡한 스케줄에 몸이 부서질 것 같지만, 그래도 갤럭시즈 아이들의 다음 스케줄을 관리하며, 밴에서 쪽잠을 자는 아이들을 보며 웃음 짓는 자신을 상상했다. 너무 오랜 시간을 붙어 있다 보니 서로를 편하게 생각했던 것은 아닌가, 그래서 자신도 느슨하게 아이들을 관리했고, 아이들도 자신을 너무 만만하게 봤던 것은 아닌가, 그래서 지금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게 아닐까, 그러니 좀 더 강하게, 좀 더 모질게 채찍을 가해야 할 때가 아닌가, 라는 계산을 했다. 하지만 계산 이전에 울컥한 감정과 이성이 통제하지 못한 분노가 먼저 단어와 문장을 입 밖으로 뱉어냈고, 그다음에야 ‘이 정도는 아이들에게 쓴 약이 될 거야’라고 합리화 과정이 이루어지며, 계산에 의한 핑계가 자기 위로가 되어주었다. 명지의 눈이 붉어질 때, 수영이 명지의 손을 붙잡아 주었다. 태호도 그 모습을 보았고, 자신의 말이 심했다는 자책과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이 계산을 헝클어뜨리며 어떤 말로 이 사태를 잘 무마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할 때였다. “찢어주세요.” “뭐?” 태호는 둥그래진 눈으로 수영을 바라보았다. “저 나갈게요.” “장수영!” “언니!” 수영은 야무지게 입술에 힘을 주고 태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빠도 아시잖아요? 지금 회사 분위기. 갤럭시즈가 컴백을 해요?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요. 갤럭시즈가 컴백할 거 같냐고.” 태호는 며칠 전 자신이 고민했던 그 순간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냐고 하셨죠? 잘 알죠. 특히 저요, 이제 25살이에요.” 태호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젖은 눈망울로 자신을 직시하는 수영에게서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가수가 되겠다는 꿈으로 서울로 왔던 게 벌써 10년이에요. 여기서도 연습생으로 몇 년을 보냈는데요. 겨우 갤럭시즈로 데뷔하나 싶었는데, 지금 이렇게 됐어요. 제가 이 바닥 사정을 모르겠어요? 저도 알 만큼은 안다고요.” 입장이 뒤바뀌었다. 이제 태호가 열중 쉬엇을 하고 수영의 말을 들어야 할 것 같았다. 다만 수영은 태호처럼 소리를 지르는 대신, 나직하게 읊조리듯 말하는 것이, 마치 소나기 내리는 8월의 눅눅한 지하실이 연상될 정도로 젖어 있다는 것이 달랐다. “명지도 알고, 예영이도 알아요. 지수도 알아요. 아르바이트요? 솔직히 저도 아르바이트를 해야 돼요. 안 그러면 먹고 살 일이 막막하니까요. 차라리 엄마 말처럼 기술이라도 배워서 공장에라도 나가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고요. 그런데 제가 여기 있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멍청해서예요. 멍청해서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어디 갈 데도 없어서 출근한 거예요. 그런데 명지나 예영이는 저랑 달라요. 똑똑해요. 똑똑하니까, 자기 앞가림 하려고 준비하는 거예요. 이대로 시간만 보내면 죽도 밥도 안 될 걸 아니까. 저처럼 멍청하게 연습실에서 시간만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까.” 태호는 어찌나 주먹을 꽉 쥐었던지, 새끼 손가락이 펴지질 않았다. 하얗게 변한 주먹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수영의 얼굴을 보았다. ‘하긴 내가 생각한 걸 이 아이들이 생각하지 못할 리 없는데.’ “그냥, 계약서 찢어주세요. 그래야 저도 편하게 마음을 접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용기가 안 나서 미련하게 여기까지 왔다고 고백하는 수영의 말을 더 들을 수 없었다. 조금 전처럼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아니라고, 네 말은 틀렸다고, 내일 당장이라도 컴백할 수 있게 해주겠노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커다란 찹쌀떡이라도 걸린 것처럼, 입술은 강력접착제로 붙여놓은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끝내 명지가 눈물을 흘리며 수영을 안아주었고, 수영은, 독하게도 끝까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는 수영을 바라보는 태호였다. **** “너 예전에, 2년 전인가? 갤럭시즈 인터넷 방송할 때 나온 적 있었지?” “네.” “그때 나도 그 방송 봤었거든? 니가 막 애들 얼굴을 이상하게 분석하고 그랬잖아?” ‘이상하게?’ 단유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는 것을 보며 성근은 얼른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내가 갤럭시즈 팬이어서 니 얼굴을 알고 있었거든. 이번에 가디스R 뮤직비디오도 찍었지?”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무슨 일이신지?” 단유는 이유를 물었다. 딱히 이유를 물어도 대답이 궁색했던 나머지, 성근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어? 그냥, 저기…. 혹시 연습생이야?” “아니요.” “연습생 아니야? 그럼 데뷔조?” “저, 계약 같은 거 안 했어요.” 말인즉슨, ‘일반인’이라는 건데, 그러면 더 이상하다고 여긴 성근은 뮤직비디오 출연 계기를 물었다. 그냥 친해서, 라는 답변에 잠시 멍을 때리던 성근은 태후의 질문으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너 노래 되게 잘하던데, 가수 될 생각 있었던 거 아냐? 그래서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하고, 그…가수들이랑 친하게 지내고 그랬던 거 아냐?” 단유는 두 아저씨(?)의 호기심을 이런 식으로 채워줘야 할 필요성이 있는지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가졌다. “친한 건 그냥 우연히 알게 되면서 친해진 거고요, 지금은 제가 친구들이랑 같이 가야 해서요, 이만 실례할게요.” 단유는 두 사람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등을 돌렸다. 딱히 단유를 붙잡을 이유가 없던 두 사람은 그렇게 단유를 돌려보냈다. “와, 쟤 한 성격 하는데요?” 성근은 근처의 빈 의자에 앉으며 답했다. “성격도 성격이지만, 우리가 갑자기 말을 걸어서 당황한 것일지도 모르지.” “당황했다기에는 너무 침착해 보이던데.” “그리고 계약도 안 하고, 연습생도 아니면, 그냥 우리랑 같은 거잖아. 연예인이 아니니까, 그럴 수도 있지.”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연예인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팬 서비스’ 마인드가 저 아이에게는 무의미한 것이니까. “아, 맞다. 아까 그 노래 녹음해서 페북에 올렸으면, 대박이었을 건데. 그쵸?” 확실히 오랜 잡덕으로 나름 노래를 평가할 수준의 청력은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성근에게 단유의 노래는, 비록 바로 옆에서 깨끗한 소리로 듣지 못했음에도, 여느 아이돌 가수들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성근은 지금 태후의 말을 들으며 어떤 직감이 자신을 후려치는 느낌을 받았다. ‘저 아이의 노래를 꼭 들어야 한다.’ 부스 안에서 건너편 부스의 노래를 들으며 가슴이 간질거리던 그 느낌을 제대로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근은 사람들을 밀치며 센터를 나갔다. 멀지 않은 곳에 아이가 친구들과 무리를 지어 걸어가고 있었다. “형!” 뒤에서 쫓아 온 태후가 무슨 일이냐며 물으려는데, 성근은 돌아보지도 않고 아이에게 달려갔다. “자, 잠깐만.” 중학생 4명이 한꺼번에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자, 괜히 무섭다는 생각과 괜한 짓을 벌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덕후들 사이에 그런 말이 있었다. 갈까 말까 할 때는 가라. 할까 말까 고민할 때는 해라. “저기, 부탁이 있는데.” 말을 꺼내던 성근은 불현듯 재킷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내가 돈을 많이 가지고 왔던가?’ 애들이 보는 앞에서 추접스럽게 지갑을 열어 돈을 확인할 수는 없는 일. 없으면 태후에게라도 빌려야지, 라고 생각하며 성근은 단유를 바라보았다. “같이 노래방, 안 갈래?” 아이들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성근은 눈치채지 못했다. ======================================= [319] 지금 이 순간(4) 성근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게, 충동적으로 단유에게 달려들었던 것뿐이지만, 아이들의 시선에서 성근은 변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저씨, 뭐예요?” 명수가 먼저 나서서 성근을 노려보았다. 게임 센터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땀을 잔뜩 흘리는―단유의 노래를 듣고 흥분한 직후, 직접 말을 걸어 보려는 생각에 긴장해서 흘린 땀이지만―모양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기다 갑자기 달려와서는 ‘노래방’에 같이 가자며 붙잡는 남자가 정상으로 보이지 않으니, 명수는 단유를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선 뒤, 여차하면 걷어찰 생각으로 오른발을 살짝 뒤로 뺐다. 명수의 면박에, 그제야 자신의 진짜 추태를 깨달은 성근은 얼른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나 이상한 사람 아니고, 아까 말했듯이 갤럭시즈 팬인데, 얘가 아는 얼굴이고, 노래도 잘 불러서, 제대로 노래 듣고 싶어서, 노래방에서 노래 들을 수 있으니까, 노래 들으면 기분도 좋을 것, 아니 그런 게 아니고 표현이 이상하긴 한데, 얘 노래가 좋으니까 그런 거 있잖아, 가수의 노래를 가까이서 듣는 거, 그래 라이브! 라이브 듣는 느낌을 느껴보고 싶어서.”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이나 주워 담은 성근은 그 와중에도 나름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급히 핑계를 댔다. “아저씨 랩 하면 잘하겠네요.” 지태가 속없이 뱉은 말에 명수가 홱 고개를 돌려 눈치를 줬다. 그리고 다시 성근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어린 명수라도 눈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아, 성근은 잔뜩 긴장해야 했다. “아저씨 말은 우리 단유 노래를 듣고 싶다는 거네요?” “이름이 단유야?” 성근의 말에 명수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태가 ‘자기도 실수하면서 째려보고 난리야’ 라며 명수의 어깨를 툭 밀었다. 이때, 단유가 나서며 말했다. “싫어요.” “응?” “제가 왜 아저씨를 위해서 노랠 불러야 하죠? 제가 그래야 할 이유를 모르겠네요.” 당황하는 성근을 보며 단유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처음 뵙는 분이라 이렇게 말하는 게 실례인지는 모르겠지만, 전 가수도 아니고 광대도 아니에요. 그리고 설령 가수라고 해도, 이렇게 무턱대고 붙잡고서는 노래를 불러달라고 하는 건 실례겠지요. 아니면 제가 가수가 아니고, 아저씨보다 어리기 때문에 아저씨가 아무렇지 않게 부탁해도 들어줘야 하는 상대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건 아닌지 의심스럽네요.” “아니, 그건 아닌데….” 단유의 매몰찬 거절에 성근이 당황한 것은 물론, 단유의 친구들 역시 살짝 당황한 눈치를 보였다. “어쨌든, 전 지금 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려고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시간을 아저씨를 위해 써야 할 필요성도 근거도 찾을 수가 없네요. 아저씨도 본인의 여가를 빼서 부탁하셨다는 건 이해를 하지만, 제 친구들의 시간 역시 소중하기 때문에 저로서는 제 친구들 쪽의 손을 들어줘야 해요.” 애초에 이런 대화를 상정하지 못해, 당황하기도 했고 거리에서 매몰찬 거절을 받다 보니 주변 사람들의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져 창피함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아, 알았다.” 성근이 돌아서는데, 태후가 얼른 성근에게 붙었다. “얼른 가요.” 태후가 센터로 가자고 재촉할 때였다. “잠시만요.” 이번에 성근을 부른 것은 지태였다. **** “야, 너무 심한 거 아냐?” “심하긴. 맞는 말이지.” “그래도 저 아저씨 불쌍한데.” “불쌍한 거 좋아하시네.” 단유가 거절의 말을 읊으며 변태스러운 아저씨의 면상에 불을 지르고 있을 때, 지태와 명수가 속삭이듯 대화를 나눴다. “어차피 우리도 딱히 할 건 없잖아?” “없긴, 왜 없어. 집에 가서 게임 하면 되지.” 하지만 단유네 집에 가서 게임을 한들, 게임기의 한계로 모두가 함께 즐기기엔 무리가 있었고, 솔직히 명수가 패드를 붙잡으면 웬만해서는 패드를 넘겨줄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할 기회도 많지 않았다. 게다가 명수가 즐기는 게임이 주로 명수의 취향인 터라, 딱히 끌리는 게임은 아니었다는 것도 지태의 속마음이었다. 또 지태의 마음을 흔든 것은, 적어도 저 아저씨가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 길거리에서 면박을 당하면서도 화를 내기는커녕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 그리고 자신 역시 단유의 노래를 듣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다는 점이었다. 지태는 돌아서는 성근을 불렀다. “아저씨!” 명수가 뭐하는 짓이냐는 눈으로 지태를 쳐다볼 때, 지태가 씩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노래방 가면 음료수도 사주시나요?” “응?” “아, 우리 아직 밥 안 먹었는데. 혹시 뭐 먹을 것도 사주실래요? 그러면 저희 시간을 ‘빌려’ 드릴게요. 대여료는 식비 및 노래방 비용으로 대체하면 되고.” 단유가 가끔 생각하던 것인데, 명수 이상 가는 ‘악동’이 있다면 바로 저기, 익살맞은 표정을 지으며 감히 ‘낯선’ ‘어른’에게 겁도 없이 ‘딜’을 거는 지태라는 놈이었다. 저런 모습을 보면, 학기 초에 할아버지에게서 각종 고서를 배웠다며 진중하게 말하던 모습 사이에 괴리감이 느껴졌다. 지킬 선은 지킨다는 지태 본인의 말과는 달리, 가끔은 너무 허물없이 다가오는 통에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는데, 지금도 처음 보는 아저씨에게 저렇게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행동은 단유나 명수로서는 도저히 시도해볼 수 없는 태도였다. “야, 단유가 싫다잖아?” “단유가 그랬잖아. 우리랑 시간을 보내는 게 중요하다고. 우리가 저 아저씨랑 같이 시간을 보내면 되는 거잖아. 그리고 잘됐지 뭐. 밥도 먹고 노래도 부르고.” 저렇게 말하는 지태가 만약 여자였다면, 성근과 태후는 일찌감치 도망가고도 남았으리라. “단유야, 나도 니 노래 좀 많이 들어보고 싶은데, 어때? 채윤아, 너도 단유 노래 듣고 싶지?” 지태는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채윤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감이 통했는지 채윤도 얼떨떨해하다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거 봐. 채윤이도 괜찮다잖아. 아저씨, 어떡하실래요? 빨리 말해 주세요. 아니면 저희 그냥 가요.” 지태는 팔을 들어 손목시계를 보인 뒤, 좌우로 흔들어 보이며 ‘시간 가요’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태후가 성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잘못 걸린 것 같아요. 그냥 가죠?” 성근이 태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돈 있냐?” 태후가 인상을 쓰며 성근을 바라보았다. **** “이야, 좋네, 여기!” 지태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먼저 분위기를 이끌었다. 코인 노래방의 좁은 부스 안에서 복닥거리며 노래를 부르다, 넓은 룸과 테이블이 완비된 진짜 노래방에 오니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한쪽 구석에 비치된 마이크 스탠드를 발견한 지태가 붙잡고 흔들자,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가 사라졌다. 그 사이, 명수가 단유를 옆에 두고 그사이에 채윤을 끼워 넣은 뒤 물었다. “너 왜 아까 지태 말에 오케이 했어?” 채윤이 지태 말에 동의한 이후는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지태처럼 단유네 집에 가더라도 같이 놀만한 게 없다는 것이었다. 지태가 명수의 게임기 독점에 대해 품은 생각은 지태만의 생각이 아니라 지태와 채윤이 종종 나누던 대화의 소재 중 하나였다. 그래서 지태가 자신만만하게 채윤에게 물었던 것이기도 했다. 또 하나는, 딱히 변태스러운 아저씨가 걱정스럽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 아저씨보다 자신의 친구들이 더 든든했고, 이들과 있으면 별문제가 없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그냥, 괜찮을 거 같아서.” “…에휴, 너도 참. 지태 뒤 봐주는 것도 적당히 해라. 니가 계속 그러니까 쟤가 저렇게 설치는 거야. 쟤 저러다 나중에 큰일 날 수 있어.” 채윤은 단유를 쳐다보며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단유는 대답 없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지 않느냐는 미소였다. ‘하긴… 지태나 명수나.’ 핸드폰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두고, 손을 비비는 성근에게 태후가 다가와 물었다. “진짜 오늘 형 이상하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태후야. 형이 사실 취업도 제대로 못 하고 방구석 폐인 형편이긴 하다만, 오랜 시간 여러 아이돌들을 연구하며 쌓아온 감이라는 게 있거든. 이게 말로는 설명을 못하겠는데, 이 감에 따르면 지금 이 순간 반드시 저 아이의 노래를 들어야 해.” “왜요?” “들어보면 알 거야. 그리고 너도 핸드폰 꺼내서 녹화시켜 놔.” “…혹시 애들이 사고 치면 증거자료라도 쓰게요?” “아니. 이거 분명히 나중에 돈 된다.” 이 형이 지금 제정신인가, 하는 의심이 든 태후는 인상을 쓰며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까불거리는 지태와 여전히 못마땅해서 투덜대는 명수,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따라오는 얌전한 채윤과,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있지만 자신은 관심이 없다는 듯 그저 물 흐르는 대로, 같은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는 단유. 어찌 보면 평범한 중학생 아이들의 모습이고, 어찌 보면 희대의 꼬마 꽃뱀 사기단의 모습이었다. 「최근 들어서 여자들을 ‘등쳐먹는’ 남자 꽃뱀들도 상당수 있다는 것이 유흥가 관계자들의 증언이다…남자 꽃뱀에게 당한 여자들은 가정파괴의 위기에까지 몰리고,…자신들의 사연을 쉽게 하소연하지 못해 피해 사례가 늘고 있다.」 마침 그런 기사의 글을 본 기억이 떠오른 태후는 저들이 그런 꽃뱀과가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봐서 그런지, 단유라는 저 아이는 얼굴도 잘생겼고, 노래도 잘 부르니 전도유망한 ‘꽃뱀’이 될지도 모르겠다. 지태라는 저 아이는 ‘삐끼’, 그리고 명수는 ‘바람잡이’, 채윤은 ‘부채꾼’ 정도? “형, 우리 당한 거 같아요.” 라는 말이 입 밖에 나오려 할 때, 지태가 먼저 마이크를 붙잡았다. “우선 이렇게 저희를 후원해주시고, 시간 내주신 두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태후의 머릿속에 빨간 비상등이 요란한 알람과 함께 번쩍였다. “아무쪼록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라며, 혹시 흥이 나신다면 같이 노래 불러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선 이 책 받으시고, 아저씨도 이 책 받으시고. 네. 자, 그럼 우선 아저씨가 먼저 요청하셨던 우리 김단유 군의 노래를 먼저 감상하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박수!” 채윤이 박수를 쳐 주었다. 지태가 씩 웃으며 기계에 직접 번호를 눌러 입력했다. 그리고 마이크를 단유에게 건네려다가 다시 붙잡았다. “아, 아저씨?” 건네준 책을 받고 목록을 살피던 성근이 고개를 들었다. “마실 거 먼저 주문하면 안 돼요?” 성근은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말아서 사인을 보냈다. 지태는 마이크를 단유에게 건네고, 명수에게 말했다. “야, 마실 거 가져와.” “내가 왜?” 지태는 몸을 살짝 돌려 성근에게 표정이 보이지 않도록 했다. “너 지금 얼굴이 아주, 막, 이래. 그런 얼굴로 무슨 즐거운 노래를 부르냐? 잠깐 나가서 얼굴에 열 좀 식히고 오라고. 그리고 니가 마실 거 니가 고르는데, 뭐가 불만이야? 아니면 같이 가줄까?” “됐다.” 명수는 입술을 삐죽이며 방을 나갔고, 그 사이 전주가 끝나면서 단유가 입을 열었다. 성근과 태후가 핸드폰을 들어 올렸음은 물론이다. **** “새끼, 처음에는 되게 시큰둥하더니, 나중에는 잘 놀더라?” 지태의 말에 명수가 괜히 역정을 내는 척을 하며 입술을 삐죽였다. “놀 때는 놀아야지, 그러면 나 혼자 가만히 있을까?” “어이구? 아까 너 춤 출 때, 노래방 지진 나는 줄 알았다?” “오버하지 마, 새꺄.” 키득거리는 두 사람은 동시에 콜록거리며 목을 붙잡았다. “목 많이 쉬었다.” “소리를 많이 질러서 그래.” “그 아저씨들도 목 많이 쉬었더라.” “근데 조금 웃겼다. 나중에 헤어질 때 아저씨라 부르지 말고, 형이라고 부르라고 할 때.” “외모 가지고 사람 평가하면 안 돼.” “안 되지. 외모만 가지고 생각했으면 그 아저, 아니 그 형들 지금 감옥 가야 돼.” 정작 자신들이 ‘꽃뱀’으로 몰린 줄 모르고 농담 따먹기나 하는 지태와 명수였다. “근데 단유 넌 목 괜찮아?” 단유는 노래방에서부터 가지고 있던 음료수를 손에 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야, 근데 그거 왜 들고 있어?” “버릴 데가 없어서.” “노래방에 그냥 두고 오지.” “그때는 조금 남았었어.” “그럼 좀 전에 식당에서 버리던가.” “식당 쓰레기가 아닌데, 거기 버리면 미안하잖아.” 지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명수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저런 애랑 같이 살면 피곤하겠다.” “나 말이야?” “응.” “난 적응돼서 괜찮아. 그리고 단유가 깔끔해서 청소도 잘해서 난 좋던데?”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 “아니야?” 또 별거 아닌 이야기로 옥신각신하던 중, 핸드폰에서 수신 알람음이 울렸다. 지태가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야, 이거 봐봐.” “벌써 올렸네?” 아까 그 ‘형’들이 찍은 영상이 인터넷에 업로드된 뒤, 그 영상이 게시된 주소가 지태의 핸드폰으로 전송되었다. 주소 끝에 ‘다음에 또 한번 보자.’는 성근의 메시지는 가볍게 무시하며 영상을 재생시켜 보았다. 채윤도 호기심에 달려가 함께 보기 시작했다. 단유만 자신의 모습을 그런 식으로 모니터링한다는 게 이상하게 여겨져 그냥 지나갔다. 며칠 뒤, 그 영상은 SNS 화제의 영상이 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 [320] 지금 이 순간(5) “오빠!” “응?” 태호는 수첩을 든 채로 있다가 수련의 부름에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뭐예요? 잤어요? 아니면 무슨 사고라도 났어요?” “아니, 왜?” “계속 불러도 대답은 없고, 계속 딴생각만 하는 것 같아서요.” 자는 것 같지는 않은데, 바로 뒤에서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던 태호가 수상했다. 하루 이틀 지낸 것도 아니니, 태호의 이상 행동은 곧바로 수련의 레이다에 걸렸다. 태호는 그런 수련의 얼굴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어서 대답을 회피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현철아, 얼마나 남았냐?” “10분이면 도착할 거 같은데요.” 태호는 수련의 옆자리에서 반쯤 감긴 눈으로 정신을 잃기를 반복하는 나윤을 깨웠다. “나윤아, 이제 졸면 안 돼. 눈 떠. 도경아, 애들 의상 좀 체크해 봐.” “아까 다 했거든요?” “그래도 한 번 더 해.” 오빠나 정신 차려요, 라는 말을 도로 삼키며 태호의 굳은 얼굴을 보던 수련이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거 같은데, 그렇다고 물어봐야 대답은 해주지 않을 것으로 보였기에 뾰로통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수련의 따가운 시선이 뒤통수에 꽂히는 것이 느껴졌지만, 애써 모른 척하며 차량 전방을 주시하던 태호는 여전히 귓가에 환청처럼 들리는 목소리에 괴로웠다. “찢어주세요.” “희망이 없어요.” 결국, 위로도, 사과도, 아무것도 못 하고 연습실을 나왔던 그 날, 그 순간의 기억들이 끊임없이 반복되며 태호를 괴롭혔다. ‘뭐라고 말이라도 하고 나올걸.’ 후회해 봐야 시간을 되돌린 순 없었다. 태호는 머리를 흔들고 가디스R의 스케줄에 집중하기 위해 정신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지금은 가디스R과 함께 움직이는 중이고, 자신은 프로이니까. **** “가만 보면 있잖아? 명수보다 니가 더 많은 사고를 치는 것 같아.” 명수가 손뼉을 치며 드디어 세상 억울함을 다 풀었다는 얼굴로 하은의 말에 맞장구쳤다. “와, 선생님! 그걸 이제 아셨어요? 전 별로 사고를 안 친다니까요?” “니가 그런 말 할 처지는 아니지. 지금 당장 니 방에 가봐. 도대체 잠만 자는 매트리스가 어떻게 하면 그렇게 찢어질 수 있는지 궁금할 정도다.” “에이, 그건 매트리스가 저절로 그렇게 된 거라니까요?” “의자는?” “팔걸이가 불량인 거죠.” “네 옷들 중에 성한 게 거의 없다는 것도 다 그런 이유야?” “네. …그리고 솔직히 큰 사고는 친 적 없잖아요?” 마치 바닥에 떨어진 떡을 집어 들고, 여기는 흙이 안 묻었잖아요, 라고 말하는 듯한 명수였다. 하은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단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 이번에도 SNS 스타로 등극하신 기분이 어떠신가?” “아무렇지 않은데요?” 말만 그런 게 아니라 표정도 담담하니 애써 말을 꺼낸 보람이 없었다. “단유 너도 참 별나긴 별나.” 하은이 슬쩍 명수를 보자, 명수는 찔끔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전 그때 가자고 안 했어요. 지태가 가자고 꼬셔서 그렇지.” 명수는 자기도 노래방에서 등이 흠뻑 젖을 정도로 신나게 뛰면서 탬버린을 흔들어댔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됐다. 그리고 아까 주영이한테 전화 왔었는데, 너랑도 통화했니?” “네.” “뭐라든?” “…노래 잘 들었다고.” “칭찬 들었네?” ‘칭찬 들으니까 기분 좋아?’라고 비꼬는 말임을 모를 수 없었다.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조심하라는 소리는 아니야. 니가 여러 사람들의 입에 거론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니까 하는 말이야. 다들 니 노래 좋다고 칭찬하는 글들인데 뭘 조심해. 다만 이런 일이 있기 전에 이야기를 해주면 좋겠다는 거지. 주영이는 또 다시 니 이름이 인터넷에 거론되니까 가슴이 두근거려서 힘들었다더라. 걔 심장 안 좋은 거 알지? 몰라? 걔가 예전에 말이야….” 촬영한다는 것도 알았고, 인터넷에 올리는 것도 알았지만, 그 영상이 이렇게 화제가 될 줄은 몰랐다. 특히 성근이 그렇게 영업(?)을 열심히 할 줄은 몰랐다. 하은이 화제를 넘나들면서 수다의 신기원을 기록하려 할 때, 명수가 슬쩍 말을 걸었다. “밥 사준대.” 명수의 말에 하은이 눈을 찌그러뜨리며 명수를 보았다. “그 아저씨, 아니 그 형이 그랬어요. 단유 노래방 영상으로 부가수입인가가 있다고. 되게 신기하지 않아요? 그런 거로 돈도 벌 수 있고.” 하은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해맑은 명수와 관심 없는 단유를 앞에 두고 혼자 열을 올려 봐야 무슨 소용일까. 차라리 혀를 내밀고 헥헥거리는 호빵이랑 대화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단유의 노래방 영상은 처음에 성근의 SNS 페이지에 업로드되었다. 그리고 아케이드 게임 동호회 카페에도 동영상이 소개되면서 소수의 사람들에게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이후 성근은 해당 영상을 대형 커뮤니티에도 올렸는데, 여기서 본격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점차 여러 커뮤니티로 동영상이 전파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되었고, 특히 노래방에서 핸드폰으로 찍은 조악한 화질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선명하게 녹음된 단유의 목소리와 노래가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이거 무슨 노래임? ―가디스R 신곡 ‘리모트’입니다. ―요즘 대세 노래인데 모르는 사람이 있네. ―대세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한 듯. ―두 개 다 들어본 입장에서 이 남자가 부른 노래가 훨씬 귀에 잘 들어박히는 느낌. ―에코가 많아서 그런 듯. ―전문가 나셨네. ―뮤직비디오는 애들 얼굴 보는 맛으로 보고, 노래는 이걸로 들어야겠다. ―취향 존중해드립니다. 이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가디스R의 뮤직비디오가 더 많은 조회수를 올릴 수 있게 되었고, 음원 성적도 소폭 상승하는 효과가 발생하여 어느새 20위권에 진입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상을 바로 캐치하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알게 된 에이 바운스는 급히 회의를 열었다. 박 이사가 주도한 이 회의는 박 이사의 의견을 수렴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곧 단유에게도 이 회의의 결과가 통보되었다. “녹음이요?” “회사 공식 계정으로 니 녹음본 영상을 올리자는 의견이 나왔어. 회사에서 제공하는 스튜디오에서 정식으로 노래를 불러, 깨끗하게 녹음된 노래를 영상과 함께 만들어 인터넷에 올리면, 일거양득이라는 거지.” 태호는 하은이 준 음료수를 받아들며 감사 인사를 표했다. 바쁜 와중에도 단유의 일로 회사가 좋은 의미에서 뒤집혔다는 소리를 듣고 자청해서 단유에게로 달려온 태호는 이번 기회에 계약까지 하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꺼냈다. “계약은 좀.” 여전히 단유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하은과도 잠시 이야기를 나눈 바가 있었는데, 역시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선택을 쉽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매니저님.” 단유가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하은이 끼어들었다. “단유는 아직 중학교 1학년이에요. 게다가 연예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며 살았던 아이도 아니고요. 매니저님도 아시다시피 단유는 노래나 춤을 부르는 것보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며 지식을 쌓는 즐거움을 더 크게 느끼는 친구죠. 단순히 노래에 재능이 있다고 해서 덜컥 계약하게 되면, 이 아이의 즐거움을 빼앗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네요, 개인적으로. 아직 어린 친구니까 좀 더 길게 두고 보는 게 어떨까 싶어요.” 하은의 생각은 명확했다. 단순히 재능만으로 학교를 선택하고, 과를 선택하고, 회사를 선택하고,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 단유가 아무리 수학에 재능이 있다 해도, 스스로가 원하지 않기에 영재원에도 보내지 않았던 것처럼, 노래에 재능이 있다고 말해도 그 재능 하나만을 보고 기획사와 계약을 맺고 연예인으로서의 길을 걷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재능이 보통의 재능이 아니라면요? 인생의 방향은 누구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 연예인이 꿈이 아닐 수 있고, 단지 취미로 노래를 즐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만약 가수로 데뷔를 하게 된다면요?” “그건 그때 가서 선택하면 될 일이죠.” “이 업계가, 아니 이 직종이 빠를수록 좋다는 이야기는 아시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준비해야 더 완벽한, 완성된 모습으로 대중들 앞에 설 수 있게 됩니다. 누구보다 한발 앞서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단유가 조기에 계약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설령 연예인이 되지 않겠다 하더라도 그 부분은 계약서상에서 조절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하지만….” “한 가지만 더 말씀드려도 될까요? 현실적으로 말입니다. 이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직 어리고 사회 경험이 적은 단유로서는 알 수 없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것입니다만, 선생님은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재능이요? 그건 가장 큰 요소입니다. 재능으로 성공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태호도 이번에는 나름대로 준비를 단단히 하고 왔다. 이전처럼 어리바리하게, 무조건 계약하자는 식으로 나서는 것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단유가 듣는 앞에서 하기는 어려운 말도 있었다. “아무튼, 녹음본만 뜨는 건 어떠니? 그건 계약과 상관없이 진행할 거고,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도 지급할 예정이라니까, ‘아르바이트’라 생각하고. 그리고 잘 되면 가디스R이랑 …갤럭시즈에게도 좋은 일이 될 수 있으니까.” 태호의 머뭇거림이 단유에게 보이지 않았을 리 없었다. 하지만 단유는 그 점을 지적하지 않고 대신 검지를 들어 볼을 슥슥 긁다가 하은을 바라보았다. 하은이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아르바이트라잖아.” 아르바이트 삼아 저 정도 하는 건 경험으로 삼아도 별문제는 없으리라. 어쨌든 가장 중요한 건 단유 본인의 의지였고 결정이었으니, 하은은 단유의 뜻을 존중할 생각이었다. 크게 엇나가는 일만 아니라면 자신이 막을 일도 없었고. 날짜를 정하고 인사를 한 뒤, 태호는 하은을 따로 불렀다. 태호를 배웅한다는 명목으로 오피스텔을 나선 두 사람은 가까운 커피숍으로 갔다. “일단 단유의 보호자 중 한 사람이시니까 말씀드리는 겁니다. 보통 이런 결정을 내릴 때, 부모님이 함께 하시는 거 아시죠? 그런데 그 부모님들이 괜히 법 때문에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시나요? 아이들은 아직 이 사회를 모릅니다. 이 사회가 얼마나 추악한지, 얼마나 성공하기 어려운 곳인지를 모른다고요. 대학교를 나와서도 취업하기가 어려워 하는 청년 백수가 늘고 있다고 하죠? 석박사 학위를 따고도 공무원이나 하는 요즘입니다. 좋아하는 거 하는 게 좋다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좋아하는 것만으로 직업을 선택한다는 건 더 어려운 일입니다.” 태호의 말을 모를 리 없는 하은이었다. 하은이 바로 그 경험을 몸으로 겪은, 그리고 겪고 있는 당사자였으니까. “이럴 때 부모님이 계시는 겁니다. 자기 아이에게 좋은 미래를 선사하고 싶은 부모님은 아이를 대신해 현명한 선택을 해주실 수 있으니까요. 예전이라면 불평등계약, 노예계약 등으로 말이 많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가수들에게 더 유리한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어쩌면 다른 어떤 직업보다 더 각광받는 직업일 수 있어요. 게다가 단유의 재능 정도라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거,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어쩌면 단유에게 연예인, 가수라는 이 직종이 천직일 수 있어요.” 평소 말하기 좋아하는 하은이라도 이 순간에는 말없이 커피만 홀짝이며 태호의 말을 경청했다. “가진 재능 다 발휘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금은 즐거움을 못 느끼고 있다지만, 이쪽 일을 하면서 재미도 붙여나가면 또 모를 일 아니겠습니까? 부디 신중하게 고려해보시고 단유에게도 좋은 조언 부탁드릴게요.” 꼭 단유가 이쪽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더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끔 도와달라, 는 말로 끝을 맺은 태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 마디를 남겼다. “부모님이 없는 단유에게 선생님이 부모님 역할을 하셔야 합니다. …이쪽 업계의 종사자로서가 아니라 친한 형으로서 단유의 미래를 걱정하는 제 마음 아시죠?” 태호가 떠난 뒤에도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한 하은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한 사람의 보호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은 지난번에도 느꼈던 일이고, 그래서 자신의 부족함에 ‘도망’이라고 표현하기는 그렇지만, 잠시 자리를 떠났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2년이란 시간 동안 나름 여러 가지 공부를 하고, 마음의 준비도 다 끝내고 다시 돌아왔건만, 또다시 골치 아픈 숙제에 맞닥뜨려 하은은 쓴 커피잔의 바닥만 몇 번이고 훑어내려야 했다. ======================================= [321] 지금 이 순간(6) 적막한 방에, 숨소리도 나직하니 들릴 듯 말 듯 해서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자는 게 아닐까 싶겠지만, 단유가 책에 집중하면 저렇게 자기 몸에서 나는 소음까지도 최소한으로 줄여 방해 요소를 줄였다. 그래서 가끔 수업 중에 병수가 단유를 돌아볼 때가 있을 정도로 존재감이 사라질 때가 있었다. 책 페이지가 사르르 거리며 조용히 넘어가는 소리 외에는 언제나 조용하기만 한 단유의 방이 오늘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여보세요? 응. 응. 그래, 나중에. 응. 잘 지내.” 단유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깊은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책을 덮은 뒤 거실로 나왔다. 나른한 표정의 하은이 언제나처럼 소파에 누워 있다가 거실로 나오는 단유를 바라보았다. “오오, 스타님!” “…그러지 마세요.” “그러지 말긴? 오늘만 벌써 전화를 몇 번이나 받은 거니?” 단유는 고개를 저으며 하은 옆에 털썩 앉았다. 그 모습을 보니 확실히 단유가 진이 빠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떠니? 유명세에 시달리는 기분이?”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하은이 보고 있던 TV 화면으로 시선을 던졌다. 노래방 영상이 「쩌는 일반인 가창력」이라는 제목으로 커뮤니티를 돌아다닐 때도 그 영상을 보고 놀란 친구들이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단유 본인이 맞는지, 맞다면 왜 여태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 언제 시간 나면 같이 노래방이나 가자는 제안까지 별별 이야기가 오갔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애교라 생각했는데, 어제저녁 에이바운스가 올린 영상의 파괴력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노래방의 조악한 영상이 불쏘시개였다면, 스튜디오 녹음 영상은 아궁이에 다이너마이트를 집어넣은 격이었다. 오늘 하루에만 수십 통의 전화를 받은 것은 물론이고, 친구뿐만 아니라 담임선생님과 몇몇 기획사에서까지 전화가 왔다. “제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셨어요?” 원래 이쪽 계통은 물어물어 알게 되는 법이라는 설명에 고개가 갸웃했지만, 약간만 생각해보면 또 이해 못할 부분은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 전화를 건 기획사는 단유가 에이바운스와 계약을 맺지 않은 일반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전화를 건 것이고, 그렇다면 에이바운스 내에서 정보를 얻은 뒤에 전화를 걸었음이 분명했다. 회사가 대놓고 그 사실을 알렸을 리는 만무하니, 아무래도 내부 직원 중에 어떤 사람이 그 사실을 이야기해주었을 것이고, 그 사람이 서비스로 전화번호까지 알려주지 않았을까? “죄송합니다만 아직은 제가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단유는 정중하게 대화를 받아주고, 통화를 마쳤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이면 모를까, 수십 통에 이르게 되면 지치게 마련이었다. “전화 꺼놓으면 되지.” 결국 단유는 하은의 조언을 받아들여 전화기를 껐다. “세상이 다 조용하네.” 하은이 웃으면서 단유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뭘?” “계약이요.” “…갑자기 이렇게 훅 들어오는 거야?” “계속 생각하시고 계셨잖아요?” “…그게 보여?” 단유가 지긋이 바라보자, 하은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글쎄다. 솔직히 선생님도 잘 모르겠다. 주변에 친구들 중에도 연예인 쪽으로 간 친구는 아직 없어서 말이야. 만약에 니가 연예인이 된다면, 내 주변에서 처음으로 연예인이 된 사람이 되겠는걸?” “그러길 바라시는 건가요?” “농담은 농담으로 받아들여 주기!” 하은은 눈을 찡긋거려 보였다가, 표정에 웃음기를 감추고 진지한 얼굴로 만들었다. “선생님은 말이야.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니 선택을 존중할 거야. 하지만, 솔직히 내 개인적인 생각을 이야기하자면, 연예인? 그것도 나쁘진 않다고 봐. 우선 돈도 잘 벌고, 대중들의 관심에 피곤해질 수는 있지만, 그만큼 대중의 선망을 받는 명예로움도 있으니까 직업적으로도 나쁘지는 않다고 보거든?” 단유가 고개를 끄덕여 잘 듣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자, 하은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한다는 게 쉽지도 않거니와, 설령 그 일을 하게 된다고 해도 평생 좋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배가 고파도 좋아, 라는 건 내 기준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니까, 차라리 니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해서 돈도 벌고 성공도 하면 좋잖아?” 하은은 리모컨을 들어 TV를 껐다. 거실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꼭 즐거운 일은 아니지.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그만두거나, 직종을 변환하는 것 중의 하나가 직업 만족도가 낮아서라는 말을 들었거든? 뭐, 급여나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좋아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도 무시 못 한다고 봐.” 그렇지 않아도 스트레스받으며 사는 세상인데 일에서까지 스트레스를 받으면 힘들지 않겠니, 라며 웃음을 짓는 하은이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좀 더 많이 생각하고 치열하게 고민을 해야 할 거야. 결국 선택은 니가 해야 하니까. 명수나 나나 주영이나 재훈 오빠가 해 줄 수 없는 거잖아. 네 미래, 네 시간을 결정하는 선택이니까.” “만약 하다가 그만두면요?” “그래도 되지. 그것도 니 선택인걸. 그리고 그것도 나쁘진 않지. 경험을 쌓았다 생각하면 그만이니까. 아, 그런 말 있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란 말. 만약 하다가 그만두는 일이 생겨도, 그걸 실패라고 생각하지 말길 바랄게. 가끔 그런 경우에 사람들이 스스로 ‘실패했다’라고 비관하며 자책하는 경우도 있는데, 실패가 아니라 경험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거야.” “너무 멀리 가신 거 같은데요?” “그런가? 그런데 또 다르게는,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도 있다고 봐. 실패를 두려워해야, 좀 더 신중해지고 조심스러워지지.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가 좀 더 나은 결과와 선택을 만들 수 있다고 봐.” “너무 왔다 갔다 하시는 거 아닌가요?” “원래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는 거야.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있는 거고, 좋은 면만 생각하지 말고 나쁜 면도 함께 고려해야 하는 거고, 좋은 사람이 있으면 나쁜 사람도 있는 거야.” “화제가 점점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너 머리 좋잖아? 선생님이 두서없이 이야기해도 이것저것 연결해서 스토리를 만들어봐. 그 정도는 되는 머리 아냐?” “아무래도 명수가 빨리 와야 되겠는데요? 선생님, 너무 심심해하시는 것 같으니까.” “니가 있는데 왜 심심해? 이렇게 무슨 말을 해도 꼬박꼬박 말대꾸하면서 지지 않는 니가 있는데.” “져 드릴까요?” “일부러 그럴 필요는 없고, 적당히 눈치 봐서 져주고 그래라. 그래야 선생님도 말할 맛이 나고, 선생님으로서의 위신도 서고 그러는 거야. 그리고 이런 것도 선생님이니까 봐주지, 어디 밖에 나가서 이래 봐. 버릇없다고 혼날걸?” “그래서 결론이 뭔가요?” “인생에 결론이 어딨어? 죽기 전까지 결론을 내지 못하는 게 사람 인생이야. 이렇게도 살아보고, 저렇게도 살아보면서 경험을 해야지.” “막살라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막사는 것도 삶의 한 방식이야. 폄하하지마. 설마 선생님이 막사는 것처럼 보이니? 선생님, 절대 막사는 거 아니다? 내가 비록 이렇게, 응? 이런 츄리닝 입고, 이런 고급스런 집에서 햇볕이나 쬐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말이야, 막사는 건 아니다? 선생님도 나름 고민도 많이 하고, 특히 너나 명수가 어떻게 하면 좋은 어른이 될까, 를 매일매일 고민하고 지낸단 말이야. 어디 가서 사고 치면 안 되는데, 어디 가서 욕먹으면 안 되는데, 어디 가서 모자란다는 소리 들으면 안 되는데, 생각하고 있단 말이지.” “설마 명수가 밖에서 사고치고 욕먹고 모자란다는 소리 듣는다고 생각하시고 계셨던 건가요?” “그런 건 우리끼리 있을 때 조용히 이야기하는 거야. 나중에 명수 왔을 때, 막 이야기하고 그러면 안 돼. 그러면 선생님이 앞으로 너랑 편하게 이야기할 수가 없어져.” 단유는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연락처를 검색해, 통화버튼을 눌렀다. “뭐하니?” “주영 누나한테 전화해서 선생님이랑 놀아줄 사람 찾아달라고 말하려고요.” 하은이 단유의 핸드폰을 뺏으려고 덮쳤고, 단유는 핸드폰을 뻗어 뺏기지 않으려 애를 썼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주영아, 전화 받지 마! 받으면 안 돼!” 이미 전화를 받은 마당에 ‘받지 마’라는 건 뭔가. 주영은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내놔’, ‘싫어요!’, ‘밥 안 줘!’, ‘밥은 이모님이 주잖아요!’, 따위의 대화를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 “이 팀장님?” 핸드폰을 들고 있다가, 옆에서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주영은 변호사가 노랑 봉투를 건네는 것을 받았다. “아, 고마워요.” 주영은 핸드폰을 끄고 테이블 위에 올려둔 뒤, 봉투를 열어 그 안의 서류들을 확인했다. “계약서에 문제는 없었죠?” “네. 면밀히 검토하느라 늦긴 했지만, 특별한 문제점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요즘도 계약서에 장난을 치는 회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번 경우는 단발성이고, 게다가 연성이 뒤에 있다는 걸 아는지 꽤 저자세더라고요. 수익 부분 발생 시의 분배비율도 단유 군에게 유리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우리 쪽에 유리하게 하면 또 말이 나오지 않을까요?” “단유 군에게 유리하다는 의미였지만, 그쪽도 손해를 보는 비율은 아니었습니다. 정산비율은 그쪽 업계의 평균적인 수준에서 조금 높은 편이긴 해도, 그들이 이번 일로 얻을 부가적인 수입들을 생각하면 결코 손해는 아닐 겁니다.” “수고하셨어요.” 단유가 미성년자인 터라, 계약을 위해서는 보호자가 동석해야 했고, 법적 보호자의 대리인으로서 참석한 주영과 변호사는 어느 때보다 꼼꼼하고 치밀하게 계약서를 확인하고 계약을 맺었다. 에이바운스는 단유의 영상을 자사 홈페이지와 동영상 사이트에 게재하고, 음원까지 내기에 이르렀다. 사실 가수가 아닌 일반인의 노래를 음원으로 출시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례 대부분이 음악 예능에 출연한 일반인―하지만 이 역시 ‘일반인’의 기준이 모호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연습생 혹은 버스킹이나 라이브카페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들을 음원으로 출시했던 것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대부분은 녹화 당시의 음원을 출시하며 스튜디오 레코딩 버전은 거의 없기에, 단유의 사례는 특이한 케이스였다. 한 기획사에서 독점적으로 진행하여 이름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일반인, 그것도 중학교 1학년밖에 안 되는 소년의 노래를 음원으로 출시한 경우였으니 말이다. 회사의 입장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그들 말대로 수익을 바라고 만든 음원은 아니었고, 이를 바탕으로 가디스R의 음원이 화제에 힘입어 더 많이 팔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도한 일종의 마케팅이라 하겠다. 어제 영상이 업로드되고, 오늘 정오, 그러니까 조금 전에 음원사이트에 음원이 공개된 마당이니 아직 그 효과를 이야기할 단계는 아니지만, 적어도 회사는 매우 긍정적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주영은 전해 들었다. 변호사 사무실을 나오며 주영은 재훈에게 전화를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이 시간에 전화를 받을 리 만무했고, 최근에는 PK(폴리클)을 마치고 인턴이 되기 위해 여러 병원에 지원서를 넣는 중이라고 했다. 재훈을 생각했더니 괜히 머리에 두통이 이는 것 같았다. ‘바람둥이.’ 가끔은 재훈이 진짜, 사람들 모르게 아이를 안고 나타나서 얘가 내 아이, 라고 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주영은 잠시 후 하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회사에 도착할 때까지 수다를 떨면서 헛헛한 마음을 달랬다. **** 가디스R의 신곡 ‘리모트’가 발매된 지 한 달이 지났다. 보통 다른 그룹들의 경우, 한 달 정도 지나면 방송 활동은 마무리하고 행사 위주로 활동하면서 다음 곡을 준비하게 된다. 하지만 가디스R은 중반쯤부터 갑자기 불이 붙으면서 사람들의 높은 관심을 얻었던 탓에, 그리고 중형도 아닌 소형 기획사 소속의 가수로서 이전에도 없던 인기를 얻고 있던 탓에 방송 스케줄이 계속 이어지는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가디스R입니다.” “어서 오세요. 사실 한 달 사이에 두 번이나 출연한 경우는 가디스R이 처음이라고 하네요?” “정말요? 감사합니다.” “청취자 여러분께도 한 말씀 하시죠?” “네, 청취자 여러분, 가디스R의 수련입니다. 저희가 두 번이나 나왔다고 지겹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사실 요즘 너무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서 과분하다고 생각하는 중인데요, 그래도 이 사랑을 다시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활동하고 더 많이 찾아뵙는 게 팬들에 대한 저희 역할이라고 생각해서 창피함을 무릅쓰고 나왔습니다. 예쁘게 봐주시고요, 저희 노래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마치 엔딩 멘트가 돼버렸네요.” “아, 그래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수련 씨, 전에 봤을 때는 많이 떠셨던 것 같은데 오늘은 긴장을 많이 안 하신 것 같아요?” “두 번째다 보니 편해졌나 봐요.” “편해졌다고 저한테 반말하시면 안 됩니다.” “네?” “농담이었고요. 오늘은 특별히 보는 라디오라서 저기 카메라 있죠? 네. 저기 손 한 번 들어 주시고요.”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수련과 나윤이 손을 흔들며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농담을 섞으며 편하게 말을 주고받던 진행자는 최근 화제가 된 동영상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요즘 가디스R 만큼이나 화제가 되는 영상이 있습니다. 보셨나요?” “아, 네. 봤어요.” “저도 어제 보긴 했는데요, 그 소년이 혹시 지난번 방송에서 언급했던 소년 맞나요?” “네, 맞아요. 저희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했던 그 친구예요.” “그런데 요즘 이 소년의 노래가 가디스R이 부른 노래보다 더 분위기 있고 좋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가끔 잘 때 듣는데요, 목소리가 너무 좋은 거 같아요.” “잘 때 듣기에는 노래가 너무 비트 있는 거 아닌가요? 네, 알겠습니다. 여기 보니까, 가디스R의 뮤직비디오 시작할 때 나오는 허밍도 이 소년의 목소리, 라고 되어 있네요? 나윤 씨?” “네, 저희도 몰랐는데 뮤직비디오 감독님 추천해서 넣었다고 들었어요.” “그럼 뮤직비디오 감독님께서 제일 먼저 이 친구의 재능을 발견한 셈인가요? 네, 그렇군요. 정작 주인공은 가디스R인데 너무 다른 사람 이야기만 하는 것 같네요. 아무튼 이 친구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신곡 ‘리모트R’이 순위가 계속 올라서 지난번 출연했을 때보다 두 배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고 되어 있네요?” 진행자는 능숙하게 화제를 가디스R로 돌려, 그녀들의 최근 근황과 노래에 관한 이야기, 그 외 팬들이 듣고 싶어 하는 신변잡기들을 이야기하며 라디오를 진행해 나갔다. 덕분에 가디스R, 나윤과 수련은 1시간의 라디오 방송시간 내내 행복이 가득한 미소를 입에 머금고 즐겁게 방송에 임했다. ======================================= [322] 적자생존(1) 약육강식, 적자생존이란 말이 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말이고,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는 표현으로 쓸 때도 있다. 요지는 하나다. 강해져라. “사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서는 학교에서도 배웠고, 따로 책을 통해서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확실히 많은 사람이 진화론에 동조하고 진화론적 세계관, 진화론적 가치관에 공감을 표하더군요.” 테이블 위에 올려진 투명한 유리잔, 그 안에 담긴 불그스름한 홍차에서 풍겨 나오는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하지만 제 성격 때문인지, 진화론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더라고요. 물론 진화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화론은 현대 과학 전반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친 패러다임이기도 하지요. 그걸 부정하는 건 현대 과학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잖아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모든 사안에 대해 진화론적 설명을 가져다 붙이면서 합리화시키려는 것들에 대한 반감(反感)에 대해서입니다.” **** “얼마 벌었어?” 명수가 단유에게 공을 넘기며 물었다. 단유는 오른발을 살짝 들어 날아오는 공의 힘을 줄여 발 앞에 떨어뜨렸다. 발바닥으로 공을 굴려 차기 좋은 위치에 놓은 뒤, 한쪽 발을 뒤로 뺐다가 공의 아랫부분을 가볍게 차올렸다. “아직 정산 안 됐대. 그리고 정산해도 얼마 안 될 거라는데?” “그래도 많이 들어오지 않을까? 연예인들 돈 잘 번다면서?” “그런 식이라면 갤럭시즈 누나들은 벌써 부자였어야지.” “그 누나들은 좀 다르지. 노래가 망했잖아. 니 노래는 좋다는 사람도 많고. 많이 팔리지 않았을까?” 명수가 찬 공은 정확하게 단유의 무릎을 향해 날아왔고, 단유는 가볍게 발을 들어 받아주기만 하면 되었다. 점점 킥의 정확도와 힘의 분배가 좋아져서, 이제는 확실히 일반인 수준은 뛰어넘었다. 조만간 명수가 대회에 나갔을 때 펼칠 활약이 기대되었다. “석 달 뒤에 정산이 된다는데, 그때는 2학년 시작하고 나서야. 그러니까 느긋하게 기다려야지.” “돈 들어오면 뭐 살 거야? 책?” “사긴 뭘 사. 쓸데도 없는데 일단 모아놔야지. 왜, 선물이라도 사다 달라고?” “사주면 좋지. 신발도 좋고. 이 신발도 좋긴 한데, 조금 조이는 느낌이랄까?” 하긴 명수도 계속 성장 중이고 그러다 보니 발도 커질 게 분명했다. ‘조금 조인다’는 표현을 쓰고는 있지만 아마 무리해서 신고 다니는 걸지도 모른다. 단유 본인이 그렇게 신고 다니는 것처럼. 단유는 이번에는 살짝 힘을 줘서 높이 차올렸다. 명수는 두 걸음 정도 뒤로 물러서더니 가슴으로 공을 받아 바로 아래로 떨어뜨렸다. “아르바이트 같은 거 해 볼까?” “아르바이트?” “우리 옛날에 그런 이야기 했었잖아. 웬만한 건 손 벌리지 말고 우리가 돈 벌어서 사자고.”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의 이야기였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이야기를 했었고, 중학생이 되면 초등학생은 하지 못하는 ‘어른스러운’ 일들도 곧잘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어도 여전히 다른 이들에게는 ‘어린아이’에 불과했고, 여전히 어른들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철부지’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가 뭐가 있을까?” “전단지 알바, 식당 서빙, 연회 준비….” “벌써 알아봤구나?” 명수는 공을 발등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흔들면서 균형을 잡아나갔다. 원래 신발에 붙어있는 옵션인 것마냥 찰싹 붙어서 흔들릴 생각도 하지 않는 공이었다. “알아보기는 했는데, 거의 대부분 고등학생부터더라. 중학생 받아주는 곳이 없어.” 신문지를 돌리는 아르바이트도 중학생은 받지 않는다는 명수의 말이었다. 고객 응대에 문제가 있거나, 혹은 성인에 비해 체력이 부족해서 효율이 나지 않는다는 핑계라도 댔다면 이해를 할 텐데, ‘중졸 이상이 아니면 안 돼’라는 말로 딱 잘라 거절하더라는 이야기에 단유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음원인가 그거, 되게 좋은 거 같아. 돈을 많이 벌고 못 벌고를 떠나서 우리가 돈을 벌 수 있는 거잖아.” 축구는 암만 잘해봐야 돈이 안 된다. 향후 실업팀을 가거나, 프로팀으로 가게 되면 모를까, 지금은 그저 돈 먹는 하마처럼 우걱우걱 처먹기만 할 뿐이니 명수의 부담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아, 배고파. 집에 가자.” 명수는 공을 높게 띄었다가 두 손으로 낚아챈 뒤 옆구리에 공을 꼈다. 단유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니들 무슨 일 있니?” 점심을 같이하는 동안 아이들의 얼굴이 평소와 달리 기운이 없다는 생각에 하은이 물었다. “아뇨, 아무 일 없는데요?” “그런데 왜 그렇게 우울해 보여? 잘 안 되는 일이라도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선생님한테 물어보라고 했잖아? 뭐든 말해 봐. 선생님이 다 해줄 수 있다고 약속은 못 해도, 들어는 줄 테니까. 들어보고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좋지 않니?” 명수는 젓가락 끝을 입에 잠깐 물었다가, 김치 위로 가져갔다. “김치가 너무 시어서 그래요.” “명수 넌, 그래서 안 돼.” 하은의 눈썹이 살짝 튕기듯 올라간다 싶더니 명수를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너 거짓말 되게 못하는 거 알지? 얼굴에는 고민 있어요, 라는 표정인데 고작 김치 시어서 못 먹겠다는 소리나 하고 있으면 내가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것 같았어? 내가 널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고, 설마 2년 동안 보지 못했다고 네 생각을 못 알아볼 것 같니? 아마 10년이 지나도 명수 니 속은 내가 훤히….” “다른 게 아니고요.” 단유가 하은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운동장에서 둘이 나눴던 대화의 요점만을 골라 이야기했다. “중학생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어린 애 취급을 받는 것 같아서 고민이네요.” “뭐야. 고작 그런 거로? 그리고 니들이 아직 애지, 뭐니?” “네. 그래서 빨리 크고 싶다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런 거였어요.” 단유는 차마 하은에게 돈 때문에 고민한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하은은 단유를 흘깃 바라보다가, 명수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그래? 어른이 되고 싶어?” “…네.” 하은은 씩 웃음을 지었다. “어른이 되면 뭘 하고 싶은데?” “어른이 되면, 지금 못 하는 것들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지금 못 하는 게 뭔데?” 단유는 하은의 속을 읽었다. 단유는 코를 찡그려 명수에게 신호를 보내려 했다. 명수가 그 신호를 알아차리길 바라며. 그런데 그 신호는 하은에게 먼저 발각되었다. “코 간지러워? 여기 휴지. 저기 가서 코 풀고 와.” “…괜찮아요.” “식탁에서 실수할 수 있으니까, 가서 풀고 오지 그래?” “진짜, 괜찮아요.” 하은은 다시 명수에게로 고개를 돌려 답을 요구했다. “예를 들면….” “예를 들면?” “어른이 되면 가고 싶은데도 갈 수 있고….” “선생님은 터키에 가고 싶지만 못 가고 있는데?” “왜요?” “돈이나 시간의 여유가 없어서기도 하고, 나라에서 여행 금지를 해서이기도 하고. 뭐 여러 가지 이유지. 가고 싶은데 다 가는 건 아니라는 소리니까, 신경 쓰지 말고. 그리고?” “그리고, 사고 싶은 것도 살 수 있고.” “사고 싶은 게 있어도 못 사는 것도 많아.” 명수는 하은을 째려보면서, 입을 삐죽였다. “자기가 먹고 싶을 때 아무 때나 먹을 수 있고.” “그건 지금도 니가 원하면 그렇게 해 줄 수 있고, 또 솔직히 니가 원할 때 먹고 있잖아? 어젯밤에도 몰래 나와서 냉장고에 있던 빵 꺼내 먹었던 것 같던데?” “…그래도 제가 진짜 먹고 싶은 건 못 먹잖아요?” “진짜 먹고 싶은 게 뭔데?” “치킨이나 족발이나 피자나….” “피자 시켜줘?” “네! 아니… 그게 아니고, 아무튼 그래요. 그냥 어른이 되면 다 할 수 있는데 지금은 못 하잖아요.” “흠.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네. 그런데 만약에 니가 돈이 많으면 다 지금 할 수 있는 것들 아냐?” “그러니까요. 돈만 있으면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사고 싶은 신발도 마음대로 살 수 있고, 옷도 살 수 있고 그렇잖아요.” “아하, 그러니까 요지는 지금 사고 싶은 신발이 있는데 돈이 없어서 못 사고 있다?”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하은은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코가 많이 간지러우신 단유 씨?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아니, 딱히….” “단유야. 이런 거로 눈치 보지 말자? 응? 전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냥 니들이 하고 싶은 거 마음대로 해.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그런 걸 왜 눈치 보면서 말을 하니? 괜히 사람 미안하게.” 하은은 숟가락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뒤,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만약 지금 무언가를 받아서 쓰는 게 부담스럽다면, 나중에 어른이 돼서 갚으면 되잖니? 꼭 돈으로 갚지 않더라도, 니들이 성공해서 그 성공의 명예를 돌려주는 식으로 말이야. 대부분의 가족들이 그렇게 하듯이. 우리도 가족이야. 지금처럼 눈치 보고 어려워 하는 모습이 보이면 선생님은 물론이고, 주영이나 재훈이 오빠나 너희한테 미안해진단 말이야. 마치 죄를 짓는 것 같아서.” “다른 사람들은 아르바이트 같은 거로 돈 벌어서 자기가 필요한 것들을 사잖아요?” “명수야,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돼. 아까 니들이 어린애 취급을 받는다고 했었나? 그건 니들이 아직은 법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어린아이들이기 때문이야. 너무 조바심 내지 마. 시간이 지나면 얼마든지 방금 니가 말한 것들 다 할 수 있어.” 단유는 앞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그동안 정리했던 생각을 펼쳐 보이기로 했다. 하은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으니, 한번은 꺼내놓을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저나 명수나, 되도록 저희 힘으로 살아보자고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초등학교 졸업식 때요. 그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축구 클럽이나 영재교육원 입학 같은 것도 하지 않았던 거고요. 재훈 형이나 주영 누나, 선생님께 미안한 생각 들게 하려는 게 아니고, 단지 저희들이 홀로 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예요. 지금은 조금 다르지만, 그때 우리끼리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행동하려 했던 거예요.” “왜?” “…운 좋은 고아, 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서요.” 명수가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하은이 명수를 빤히 바라볼 때, 단유가 설명을 덧붙였다. “돈 많은 후원자 만나서 철부지처럼 막산다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도 한 이유였고요, 우리랑 다르게 여전히 보육원에서 생활하고 있을 사람들 때문에도 그랬어요. 비록 우리가 운이 좋아서 이렇게 생활하지만, 떳떳하게 살고 있었노라고 말하고 싶었거든요.” 하은은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떳떳해지고 싶다’라는 마음 때문에 평소에도 누구보다 열심히 생활해 왔던 것일까? 항상 아침 일찍 일어나는 이유가, 해진 옷을 입으면서도 ‘괜찮다’고 말하던 이유가,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더 열심히 뛰겠다고 웃던 모습이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우린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강해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한테 기대선 안 된다고 생각했고요. 그래야 몸과 마음이 모두 강해질 거로 생각했어요.” 명수는 숟가락으로 밥을 헤집으며 고백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철이 든 아이들, 하지만 아직은 그 순수함이 가시지 않아 조금은 어리숙하기도 한 아이들이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아이들을 그렇게 바라봤던 건, 그저 자신의 편견으로 바라본 아이들의 모습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하은은 이 아이들의 순수함이 자신은 가지지 못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해지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겠노라고 했다는 아이들의 말에는 강직함이 느껴지는데, 자신의 경우에는 그런 강직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적당한 타협과 이기적인 목적 추구.’ 하은이 생각한 어른의 구성요건이었다. 하은은 두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최대한 그들의 의지를 꺾지 않겠노라는 이야기까지 해주었다. 그와 동시에 ‘어른’으로서 하은은 두 아이에게 제안했다. “일단 받아라. 물질적 풍요는 아니더라도, 기본은 지켜야 하지 않겠니?” 단유와 명수는 식사 후 하은의 손에 끌려가 ‘억지로’ 신발 두 켤레를 품에 안고, 새 옷가지 몇 벌을 손에 든 채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명수의 볼이 씰룩거렸던 것을 본 하은이 명수의 머리를 몇 번이고 헝클어뜨리며 놀렸던 것은 보너스였다. ======================================= [323] 적자생존(2) 맞은편에 앉은 상대에게서 거북함이 느껴졌다. 아마도 이런 대화를 예상치 못했기에 그런 것일지도 모르고, 혹은 주제가 거슬렸던 이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왕에 꺼낸 말을 물릴 수는 없었고, 보다 확실하게 자기 뜻을 밝히기 위해서라면, 좀 더 선명한 주장과 근거가 필요했다. “우주가 생성된 원리, 인간의 시초에 대한 과학적 설명 등은 모두 아직까지는 이론에 불과할 뿐, 어느 것 하나 분명하게 드러난 바가 없다고 들었어요. 사람들의 호기심과 합리적 이성은 설명을 요구했고, 과학자들은 가장 이성적인 방식과 합리적 수단을 이용하여 호기심을 충족해 나갔다는 것입니다.” 상대는 여전히 왜 이 대화가 이렇게까지 진행되어야 하는지 의문을 품는 중이었다. 그 사실을 알지만, 그럼에도 지금 당장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상대에게 뱉는 선언이자, 자신에게 하는 다짐과도 같았다. “사람들의 호기심과 합리적 이성이라는 두 요소가 재미있는 것은 단순히 과학적, 철학적 사고의 근원이라는 점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 전반, 일상생활에 이용되고 있다는 점이죠. 가령, 왜 사람은 돈을 벌어야 하는가? 라는 철학적 물음이 있다고 할 때, 분명 여기에는 ‘왜’라는 물음에 대한 호기심과 그 원인을 분석하는 과정에 대한 합리적 검토 절차가 뒤따르죠. 그런데 조금 변형시켜서, 왜 저 사람은 돈을 벌려고 하는 걸까, 라는 물음이 있다고 해봐요. 같은 의미로 사람들은 호기심을 느끼고, 그 호기심이 정당하고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해석되기를 기대합니다.” **** “장 태호, 어딨어!” 문이 벌컥 열리며 박 이사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깜짝 놀란 직원들 중 몇몇은 그대로 고개를 든 채 얼어붙었고, 또 몇몇은 벌떡 일어나서 반사적으로 허리를 굽혔다. “장 태호!” 박 이사의 외침에 사람들은 시선을 교환하며 답을 찾아보았지만, 누구 하나 답을 내놓는 이가 없었다. 만약 이곳이 회사가 아닌 다른 장소였다면, 그렇게 수군대는 와중에 제풀에 지친 박 이사가 다른 곳으로 답을 찾으러 떠나는 장면을 그려볼 수도 있었겠지만, 불행히도 이곳은 회사였다. 불행히도 회사에는 직급이 있고, 불행히도 박 이사는 직급이 높은 사람이었다. 또 불행히도 이 자리에 있는 사원들 간에도 직급이 있는데, 박 이사의 호령에 답을 해야 하는 사람의 직급 역시 정해져 있었다. 해당 직급의 남자, 강 부장이 얼른 파티션 밖으로 튀어나와 박 이사의 물음에 답했다. “여기 없는 것 같은데요.” 정답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정답이 아니면, 궁색하지라도 말았어야 했는데, ‘같은데요’라는 식의 종결어미는 박 이사의 화를 돋우는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같은데요?” “어, 없습니다.” “이 양반이… 점심 먹으니까 배부르고 등 따시지? 그래서 정신 못 차리고 아주 꿈속을 헤매지?” 졸지 않았노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럴 때는 입 다물고 그저 ‘죄송합니다’를 말해야 했다. 그게 ‘상식’이니까. “장 태호 어디 갔어?” ‘어딨어’라는 질문이 ‘어디 갔어’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분명 눈앞의 사자는 ‘모릅니다’라는 답변을 기대하는 걸 거야. 모릅니다, 라고 답변하는 순간 잘 됐다, 는 마음으로 눈을 빛내며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목을 물어뜯을 테지. 따뜻한 피와 연한 육질이 잘근잘근 씹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야 오늘 하루 일했다는 마음으로 기분 좋게 퇴근할 테지. 그런 사람이지, 박 이사는. 하지만 강 부장도 바보는 아니었고, 모릅니다, 라는 말로 상황을 대처할 생각은 없었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니까. 대답 대신 얼른 부하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니, 빨리 답 안 찾으면 죽여버린다, 는 눈빛으로 오른쪽에 있던 대리를 노려보았다. 다른 누구보다 눈치 빠른 한 대리라면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지. “아, 지금 가디스R이랑 스케줄 마치고 오는 중일 겁니다.” 강 부장은 한 번 더 눈을 부라렸다. “지금 바로 전화해 보겠습니다.” 말과 동시에 핸드폰을 꺼내서 태호에게 연락하는 한 대리의 태도에 강 부장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새끼, 일 하나 똑바로 처리 못 하고 말이야. 굳이 자기가 간다고 자청해서 보냈더니 이게 뭐야!” 화를 내고는 있지만, 분명히 그 방향은 강 부장을 비껴간 듯 보였다. 박 이사는 뒤끝이 없는 사람이었다. 얼마나 뒤끝이 없나 하면, 자신이 방금 강 부장을 물어뜯으려 했다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뒤끝이 없었다. “강 부장, 장 매니저 오면 내 방으로 오라고 해.” 박 이사는 머리를 조아리는 강 부장을 뒤로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폭풍이 휩쓸고 간 탓에 강 부장뿐만 아니라 모두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깊은숨을 토해냈다. “아니, 지금 일 잘하는 태호 씨는 왜 못 잡아먹어서 저런대?” “왜 그거 있잖아요? 리모트 부른 남자애. 걔 때문인가 봐.” “걔? 아, 설마 계약한다는 거? 고작 그거 때문에 저 난리야?” “쉿. 단어는 가려 쓰자고.” 하지만 사원들이 모르는 윗분들만의 사정이 있는 법. 박 이사가 단순히 단유의 재능만을 가지고 계약하려는 마음을 품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순진한 장태호나 할 법한 것이었다. “예, 회장님. 태호 오면 단도리 쳐서 진행 시켜 보겠습니다. 아, 그럼요. 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데도, 이렇게 하는 이유는 자신의 미래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유를 풀어쓰면 간단한 것이었다. 단유의 후원자, 연성 그룹으로부터 적당한 투자금을 지원받아 상장사로 발돋움한다. 물론 단유의 후원자가 연성 그룹에서 내쳐진 것으로 알려진 막내 손자라는 점은 계산이 복잡해지는 변수가 되지만, 그래도 이 점은 천천히 풀어나갈 수 있는 문제라는 게 윗분들의 생각이었고, 박 이사의 아이디어였다. “한때 찌라시에서 암암리에 돌던 소문은, 100% 믿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연성 그룹의 영향력이 전무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즉, 김단유와 연재훈, 그리고 연 회장님에게로 이어지는 커넥션은 분명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른 성질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박 이사는 자신 있게 프리젠테이션 했었다. “그 후, 빠른 시일 내에 그 아이를 데뷔시키고 저희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성공시킵니다. 다행히 그 아이도 재능 면에서는 충분히 성공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여러 차례 검증받았으니 다행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후, 본격적으로 투자지원을 받으며 규모를 확장, 최대한 빠르게 자격 요건을 갖추어서 상장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회사가 작다고? 키우면 된다. 회사가 커지면? 사람들은 몰려들기 마련이다. 돈 더 준다는 곳으로 올 사람이 적을까? 아니. 이쪽 업계는 모름지기 돈이었다. 돈이 힘이고, 힘은 돈으로 드러난다. 돈이 돈을 부르니, 돈이 배우를 부르고, 가수를 부르고, 연예인들을 부른다. 돈이 구르고 돈이 불리고 돈이 커지니, 더 큰 스타들이 들어온다. 이미 많은 사례가 있고, 학술적으로도 검증된 방법이다. “자본의 확충은 에이바운스의 성공과 직결됩니다.” 회장은 허락했고, 박 이사는 총대를 멨다. 그리고 잠시 화약을 태호에게 건넸더니 터뜨리라는 화약은 안 터뜨리고 구경만 하고 앉았으니, 박 이사의 심정이 오죽할까. “부르셨습니까?” 어떤 서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 책상만 두드리며 생각을 정리 중이던 박 이사는 태호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순간적으로 열이 오르며 가슴이 터질 듯 뛰는 기분이었다. “장태호! 너!” 라고 부르며 벌떡 일어섰던 박 이사는 물에 젖은 화약처럼 목소리에 힘이 떨어지고 눈빛이 온순해지는 변화를 체험했다. “…왔구나.” 태호의 뒤에, 이제는 태호의 어깨 위로 정수리가 솟을 만큼 키가 커진 단유가 모습을 드러냈다. **** 가디스R의 노래 ‘리모트’의 순위가 미친 듯이 상승했다. 더이상 방송 스케줄을 진행할 여력도 없고, 회사의 경비 제한과 아이들의 체력 저하가 눈에 보일 정도가 되니, 더 이상은 방송이 어렵다고 생각해 공식 활동 마감을 선언해야 했다. 이후에는 행사들만 따로 스케줄을 빼서 활동을 이어나가겠지만 말이다. “진짜 우리 성공한 거 맞죠?” “아니면 이렇게 활동할 수 있었겠어? 무려 2주를 더 했다.” “조금 전까지는 피곤해서 죽을 것 같았는데, 막상 끝난다니까 너무 아쉽네요.” 수련의 엄살에 나윤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기 역시 그렇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제 몸이 이렇게 약한 줄 처음 알았어요.” 평소 연습실에서 12시간, 혹은 15시간까지도 붙박이처럼 붙어서 지내기도 했던 나윤은 체력만큼은 다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데뷔 이후 첫 활동은―물론 신이 나서 카메라 앞에 서면 헤죽거리며 웃었지만―하루 2시간도 채 잠들기 힘들 정도로 빡빡한 스케줄을 진행하다 보니 강철 체력은커녕, 수수깡 같은 체력으로 픽픽 쓰러지는 모습만 보이고 말았다. “아냐, 잘했어. 데뷔라 긴장도 많이 했을 텐데도 너무 의연하게 잘 버텨서 오히려 고마울 정돈데?” “에이, 언니는. 전 오히려 언니 덕분에 버텼다고요. 진짜 언니 체력이 강철이네요. 어떻게 한 번도 피곤한 내색을 안 보인대요?” “넌 눈 밑의 이 시커먼 게 안 보이니? 나도 아주 죽을 맛이다.” 말이 나온 김에 피로 좀 풀어야겠다며, 옆자리에 두었던 찜질용 가리개를 눈 위에 덮는 수련이었다. “둘 다 아주 수고했다. 일단 다음 행사 스케줄까지는 레슨도 빼줄 테니까 좀 쉬도록 해.” “행사가 언제 또 있어요?” “내일.” “에이, 그럼 쉬는 게 아니잖아요?” “레슨만 빼도 니들 10시간 이상은 잘 수 있다. 지금부터 숙소 들어가서 잠만 자. 푹 자고 내일 오전 10시에 데리러 갈 테니까, 그때까지 쉬면 되겠네. 아니면 그냥 행사 캔슬할까?” “아뇨, 괜찮아요. 당연히 행사 가야죠.” 나윤의 말에 수련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입꼬리가 슬슬 내려오는 것이, 졸음이 밀려오는 탓이리라. 태호는 살짝 목소리를 낮춰서 나윤에게도 말했다. “일단 너도 좀 쉬고 있어. 렌즈는 집에 가서 빼. 지금 여기서 빼면 눈 다칠 수 있으니까. 수련이처럼 찜질이라도 하든가.” 알겠다며 나윤 역시 찜질용 가리개로 눈을 덮은 뒤, 입술을 다물었다. 태호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차들도 많이 막히지 않아 숙소까지는 30분 내로 도착할 것 같았다.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여보세요?” 회사에서 온 전화에 태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박 이사가 ‘행차’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뭐 때문인지 감이 왔다. 시계를 보니 이제 오후 7시. 조금 서두르면 늦지 않게 회사에 도착하리라. ‘그 전에.’ 태호는 한숨을 내쉬고 연락처에서 ‘김단유’를 검색했다. **** 식사를 끝내고 방에 들어와 책을 보려 했던 단유는 익숙한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그래. 잘 지냈지? “저희 본 지 한 달도 안 된 거 아닌가요?” ―이틀을 못 봐도 잘 지냈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런 이유라면, 잘 지냈어요. 스케줄 끝나신 건가요?” ―어. 이제 공식 활동 마감이다. “잘됐네요. 축하드려요. 아, 수련 누나는 어때요? 지난번에 전화 통화할 때는 힘들다고 우는소리를 하시던데?” ―걔가 우는소리를 해? 하여튼 걔도 별나다. 내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왜 니 앞에서 그런데? 단유는 핸드폰 너머에서 ‘내가 뭘요!’라고 외치는 수련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대꾸한 태호는 다시 단유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지금 시간 되니? “예, 괜찮아요.” ―그럼, 집 앞에서 잠깐 볼까? “안에 들어오지 않으시고요?” ―음, 뭐, 그럴까? 비밀리에 진행해야 할 일은 아니지만, 여러 사람이 듣는 자리에서 편하게 할 이야기도 아니었기에 태호가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 보호자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이니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럼 도착해서 다시 전화할게. “네. 아, 수련 누나랑 나윤 누나한테 축하한다고 전해주세요.” ―그래, 알았어. 단유는 핸드폰을 끄고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다, 핸드폰을 검색해서 음원 사이트의 창을 열었다. 그리고 검지를 위로 밀어 올리며 화면을 살펴보았다. 「21위 - 가디스R 『리모트』」 누군가에게는 어중간한 순위일지 모르지만, 당사자나 관계자들에게는 어느 때보다 높은 순위였고, 성공의 샴페인을 터뜨려도 무방할 성적이었다. 단유는 곰곰이 생각하다 검색창에 ‘갤럭시즈’를 쳐 보았다. 화면을 훑어보던 단유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 [324] 적자생존(3) “강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고, 살아남지 못하면 도태되는 것은 자연의 법칙. 그러니 순순히 받아들여라? 당사자가 아니라면 쉽게 뱉을 수 있는 말이지만, 과연 당사자도 그럴까요? 아시잖아요? 이 세상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들이 얽혀 있는지. 그런데 실패라는 한 현상을 단순히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논리로만 해석하려 하다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상대를 쳐다보되 노려보듯 쳐다보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지금의 대화는 자기 뜻을 상대에게 알리기 위한 순수한 의미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이어야지, 상대의 뜻을 꺾고 짓밟으려는 전투적인 대화가 되어서는 안 되니까. “그래서 네 눈에 강해지려고, 이 사회에서 살아남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의 노력이 우습게 보이더란 말이냐?” 물론 화자의 뜻이 청자에게 100% 순수하게 전달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다른 환경, 다른 세월을 살면서 쌓아온 가치관과 생각의 차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당연히 단어 한마디도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고, 간단한 문장도 개인마다 다르게 해석될 수 있었다. 심지어 전혀 적대적이지 않으려 함에도 상대는 ‘건방진’ 것으로 읽고 화를 내는 중이었다. “아니요. 저도 강해지려고 노력하는 걸요. 하지만, 강해진다는 것의 기준이 ‘진화론적’ 해석으로는 해석될 수 없다는 것이죠. 가령 제가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돈도 벌지 못하고, 취업도 못 하는 상태가 되었다고 가정을 할게요. 그렇다면 저는 약한 건가요? 실패한 건가요?” “늙어서까지도 돈 없이 살아보면 그런 말은 나오지 않을 거다. 이 사회에서 돈이 얼마나 중요한데. 돈 없이 밥은 먹고 살 수 있을 거 같으냐? 돈 없이 이 사회에서 뭔가를 할 수 있을 거 같으냐?”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노려보는 눈빛이 날카롭기만 했다. ****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아니요, 들어오세요.” 붉은색 계열의 치마를 입고, 검은색 스웨터를 걸친 하은이 붉은 입술을 늘어뜨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립스틱이 입꼬리를 살짝 벗어난 것처럼 보이고, 치마도 준비된 것이 아니었는지 아랫단에 가로로 주름이 가 있는 게 눈에 보였지만, 태호는 이를 언급하는 대신 단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단유랑 잠시 이야기 좀 하려고요.” “저도 들어야 하나요?” “어… 일단 단유랑 둘이서만 대화를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단유는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하은을 바라보았고, 하은도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읽었다. “그러세요.” 태호는 단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왜 왔는지는 잘 알 테니까, 용건만 간단히 이야기할게. 혹시 결정은 내렸어?” “아뇨, 아직 못 내렸어요.” 하긴 보통 신중한 녀석이 아니니까. 태호는 머리를 긁다가 말을 꺼냈다. “혹시 연예인이라는 직업, 아니 가수라는 직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볼 수 있을까?” “노래를 부르는 직업이죠.” 간결한 설명에 태호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혹시 가수라는 직업에 대해 선망이 있는지, 연예인이라는 직종에 대해 사견을 물으시는 거라면, 솔직히 그런 건 없어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제가 노래를 잘한다는 이야기도 최근에야 들은 거니까요. 대중들 앞에 나서는 건, 글쎄요. 30명 안팎의 아이들 앞에 서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는데, 그보다 수천 배는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이 제 성향에 맞다고 볼 수는 없죠.” 단유의 부정적인 의견에 태호는 얼굴이 굳어졌다. “물론 모두가 성공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성공한 가수들을 보면 얼마나 멋있어? 자신들이 잘하는 노래로 대중들을 만족시켜 주고 위로해주고 그걸로 돈까지 벌 수 있잖아? 대중의 사랑을 받는 직업이라는 게 때로는 피곤하겠지만 그만큼 보람도 있고, 자부심도 느낄 수 있는 직업이라고 보거든.” 태호는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에라 모르겠다, 라는 심정으로 말을 뱉었다. “솔직히 이런 말 하면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지만, 갤럭시즈의 경우를 봐서 성공하지 못한 가수들이 고생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근처에서 본 경우라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고 겁이 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연예계의 전부는 아니란 말이야. 오히려 더 많은 돈을 벌고, 생활에 여유가 생기니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고.” 태호는 단유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며칠 전, 사무실에서 인터넷을 하다 우연히 읽게 되었던 기사의 한 토막이 떠올랐다. “직장인의 비애란 말 들어본 적 있어? 장시간 노동과 과로에 시달리면서도 용돈이 부족해서 점심값도 줄이고, 원치 않는 저녁 회식에도 상사의 부름이라면 당장 달려가야 하는 실정이라는 말이 있대. 그분들을 비하할 생각은 없지만, 그런 곳에서는 자신의 개성, 능력 등이 온전히 발현될 가능성이 적다고 본다. 그에 반해서 이쪽은 얼마든지 자신의 능력이 닿는 한도 내에서 마음껏 자신의 끼와 재능을 펼칠 수 있고, 여유가 된다면 자기 공부를 하는 것도 가능하잖아.” 단유는 고개를 저으며 태호의 말을 막았다. “그 비유는 잘못된 것 같네요.” “뭐?” “직장인에 대한 거요. 저도 요즘은 인터넷을 하니까 그런 글들 종종 읽어요. 방금 말씀하신 것도 며칠 전 인터넷 신문사의 한 칼럼에서 읽은 기억이 나고요.” “아, 그래.” 머쓱해 하는 태호에게 단유가 말했다. “직장인의 비애가 단지 특정 회사나 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라고 봐요. 당장 형만 봐도, 형 역시 직장인이죠. 갤럭시즈 누나들도 엄밀히 따지면 직장인이죠. 해당 칼럼에서 통계를 낼 때는 기업에서 근무하는 샐러리맨을 대상으로 했을지 모르지만, ‘직장인’이라는 용어로 지칭되는 사람들은 현대 사회에서 직업을 가진 대부분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봐요. 오로지 혼자 일을 하는 사람, 자영업자 같은 경우라도 ‘직장인’이죠. 자신의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 사람들 역시 말씀하신 바와 같은 비애를 겪고 있어요. 동네에서 고깃집 운영하는 사장님들만 봐도 그렇죠. 그분들에게 직장 다니시는 분들보다 편하냐고 물으면 아마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실 걸요?” 태호는 단유가 생각보다 직업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실 단유가 자신의 꿈을 정확히 확정 짓지 못해 미래에 대해, 혹은 직업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하지 않았던 것뿐이지 이미 초등학교 4학년 때 직업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아이였다. 단순한 관심도 아니고, 선망과 동경에 의해 관념적으로 직업관을 가졌던 것도 아니었다. 어떤 직업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를 면밀히 살피면서 살아왔다. 그러니 태호의 비유는 단유에게 좋지 않은 이미지를 남긴 셈이었다. “아, 그렇구나. 그 점에 대해서는 내가 생각이 짧았네.” 사과는 짧게. 그리고 다시 주제로. “어쨌든 말이야, 연예계가 그런 직장인들 혹은 자영업자들에 비해 훨씬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기 좋은 직장이고, 성공했을 때의 보수가 다른 직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는 건 알겠지?” 말을 꺼내놓고 보니, 태호는 자신이 뱉은 말에 스스로 자신이 없어졌다. 잠깐의 고민 끝에 스스로 답을 내놓자면, 보통의 경우 연예인이라는 직업에 대한 동경과 꿈이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그 꿈들이 어떻게 현실화될 것인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단유에게 말할 때는, 계속 연예인이라는 ‘직업’으로 한정 짓고, 그 직업이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경하는 직업인가에 관해서만 설명이 집중되는 형편이었다. ‘속물.’ 태호 스스로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 태호의 목소리도 점점 죽어 들어갔다. 이를 단유가 의아하게 여기자, 태호가 피식 웃으며 손을 털었다. “미안하다. 욕심이 앞섰는지, 아니면 내가 애초부터 생각을 잘 못 했던 건지 계속 너를 유혹하는 쪽으로만 이야기를 꺼내는 것 같아서 말이야.” “유혹은 굉장히 유효한 설득 수단이죠. 그 점을 비난할 생각은 없어요.” 그 말에 태호는 속이 들킨 것 같아 얼굴을 붉혀야 했다. 이어지는 말이 없어 확신은 못 하지만, 생각해보면 마치 자신이 앞에서 떠들었던 그 모든 말들의 속내를 모두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런데 형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조금 정리되는 면도 있어요. 확실히 이런 건 대화를 해야 하나 봐요. 복잡하던 것들도 정리되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면도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막연하게 이야기한 단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이 시간에 오신 건, 아마 박 이사님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 맞나요?” 태호는 뜨끔한 표정을 지으며 단유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알았어?” “형 성격상 아무리 급하다 한들 이 시간에 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형은 자신의 마음이 급해도 일단은 상대를 먼저 생각하니까요. 반면에 박 이사님은 자신의 결정과 시간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타입이니까, 스케줄 마치고 돌아가는 형을 저한테 보내실 정도라고 본 거고요.” 확실히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단유를 보통의 아이들처럼 상대하려다가는 큰코다칠 게 뻔했다. 박 이사 코가 크던가? “가요. 이왕 생각난 김에 저도 확실히 정리해야 마음이 편하겠네요.” “어딜 가?” “회사로요. 박 이사님, 아직 형 기다리고 계실 걸요?” 시계가 8시를 향해 가고 있지만, 아직 퇴근하지 않았을 거라는 단유의 말처럼 박 이사는 책상을 두들기면서 속을 태우는 중이리라. “선생님, 저 잠깐 갔다 올게요.” “밖에 춥던데, 목도리하고 가.” “아, 그럴게요.” 회색 그라데이션 무늬의 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단유는 태호와 함께 집을 나섰다. **** 중간에 태호가 내리고 수련과 나윤만 숙소로 돌아왔다. “내일 10시까지 올게.” “네, 오빠. 조심해서 들어가요.” 로드매니저 현철이 손을 살짝 들어 보인 후, 곧 골목 끝으로 차를 몰고 사라졌다. 그리고 그사이 숙소 문을 열고 들어온 수련과 나윤은 휑한 거실과 맞닥뜨렸다. “언니, 저 먼저 들어가서 쉴게요.” 차에서 잠깐의 수면을 가진 정도로는 몸에 누적된 피로를 풀기에 역부족이었던 모양인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방으로 사라지는 나윤이었다. 나윤이 문을 열었을 때, 그 잠깐의 틈으로 들여다본 방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예영아.’ 수련은 보이지 않는 막내의 이름을 속으로 한 번 되뇌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같은 방 멤버인 명지도 역시 자리에 없었다. 시간은 7시를 넘어가고 있으니 어쩌면 이 시간에도 연습실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으리라. ‘명지 언니.’ 차마 언니들 방까지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기척도 없는 숙소의 분위기 상 두 사람 역시 집에 없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 시간에 숙소로 들어온 게 오랜만이라서 낯설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아무도 없는 숙소라는 게, 시각적으로도 휑한 느낌이지만 감정적으로도 뭔가 보이지 않는 칼들이 쑥쑥 날아와 박히는 기분이었다. 조용하고 차가운 숙소의 공기만큼이나 벌어진 간격이 느껴졌다. 비록 수련이 가디스R의 활동으로 성공의 맛을 보았지만, 그래도 스스로는 여전히 ‘갤럭시즈’의 넷째이자 메인보컬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하는데, 왜 이런 거리감이 느껴져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우선 씻으면서 리프레쉬라도 해야겠다.’ 위에 걸친 것들을 벗어 던지고 샤워실로 들어간 수련은 부딪치는 물살에 몸을 떨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흔들리지 말자. 흔들리지 말자.’ 가디스R은 프로젝트 그룹. 자신은 갤럭시즈. 3년 이상 동고동락하며 성공을 향해 달려왔던 멤버들. ‘잊지 말자. 잊지 말자.’ 설령 다른 사람들이 흔들리더라도, 자신만은 흔들리지 말고 잊지 말자고 되뇌었다. 젖은 머리를 하고 나온 수련은 머리를 말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위에 놓여 있던 캡 모자를 집어 들고나온 수련은 나윤이 깊은 잠에 들어 나직하게 코를 고는 모습을 확인한 후, 숙소를 나섰다. 덜 마른 머리 위에 모자의 챙을 깊이 눌러 쓰며, 수련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회사로 향하고 있었다. ======================================= [325] 적자생존(4) 단유가 태호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박 이사는 얼른 표정을 고쳤다. “왔구나. 어서 와라.” 박 이사는 푸근한 미소로 단유를 반기며 얼른 자리로 안내했다. 단유는 공손한 인사 뒤에 박 이사의 안내에 따라 소파에 자리했다. “장 매니저는 잠깐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까?” 집에 가지 말란 소리구나. 태호는 허리 숙여 인사한 뒤, 문을 닫고 사무실을 나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이 태호에게 눈짓을 주었다. “퇴근들 안 하세요?” 태호는 그들의 눈빛에 다른 말로 답변했다. 지금 누구 때문에 좌불안석, 다리를 떨면서 자릴 지키고 있는데! 강 부장이 헛기침을 터뜨리며 박 이사님에 대해 물었다. “지금 면담 중이신데, 별일 없을 겁니다. 그리고 어차피 제가 남을 텐데 다들 퇴근하셔도 되지 않을까요?” 강 부장은 빠르게 계산기를 눌렀고, 조금 덜컥거리는 계산기는 ‘가도 될걸?’이라는 애매한 답을 내놓았다. “다들 퇴근해.” 잠시 후, 사람들이 빠지고 텅 빈 사무실에 태호와 강 부장만 남았다. 강 부장 역시 곧 퇴근할 사람처럼 두꺼운 코트를 걸친 채 태호와 마주 섰다. “장 매니저, 고생이 많다.” 활동 마감에 대한 격려일까, 성공적인 가디스R에 대한 치하일까. “고맙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장 매니저, 이번에 진급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이미 이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니 장 매니저의 급을 올려도 되지 않겠냐는, 내부 의견이 있었다는 강 부장의 이야기가 놀랍지는 않았다. 태호도 오랜 생활 끝에 얻은 ‘귀’가 있었으니까. 그래도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 것과 지원팀 강 부장에게 직접 듣는 건 또 다른 일이다. “진짜 진급하게 된다면 제가 강 부장님께 한턱 쏴야 겠습니다.” “에이, 뭘 나한테 쏘나.” “강 부장님이 평소에 저희를 많이 지원해주셨잖아요. 그 노고 덕에 제가 덕을 본 셈인데, 그냥 넘어갈 수 있나요.” 적절한 처세는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만든다. 특히 직장에서의 처세술은 그 이상의 부가 효과도 가져온다. “이 사람, 괜찮아. 고생은 자기가 다했으면서. 특히 이번에 자네가 올린 마케팅 기획안 좋았어. 덕분에 이런 성과도 올리지 않았던가? 회사에서도 자네 공을 인정할 거야.” 능숙하게 공을 돌리는 강 부장의 말솜씨야말로 본을 받아야 하리라. “박 이사님이 최근에 그 아이 영입에 열을 올리는 것 같은데, 자네가 친하니까 또 이렇게 가운데 껴서 고생이구먼. 그래도 만약 이번 일까지 잘 해내면 자네 입지도 튼튼해질 테니까 좀 더 고생하게.” 태호는 손사래를 치며 겸양을 떨려다가 문득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강 부장의 말에서 단순히 단유의 재능을 보고 계약을 맺으려는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유의 영입이 자신의 ‘입지’를 튼튼하게 한다, 는 표현은 아직까지 가능성만 보이는 단유를 두고 할 말은 아니었으니까. “강 부장님. 김단유, 혹시 다른 이유라도 있습니까?” 강 부장은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아닐세. 다른 이유는 무슨. 워낙 뛰어난 아이다 보니 박 이사님이 욕심을 내는 거고, 그렇다는 거지.” 괜히 부장 노릇 하려다가 입방정을 떤 것은 아닌지 내심 후회를 하며 강 부장은 가방을 챙겨 몸을 돌렸다. 하지만 태호도 이대로 강 부장을 보낼 생각이 없었다. 뻔히 보이는 물음표를 앞에 두고,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단유의 일이 아닌가. “무슨 일인데요? 말씀해 주세요.” “응? 에이, 이 사람아. 일은 무슨.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갑자기 이렇게 달려들어? 혹시 내가 모르는 사정이라도 있나?” 발뺌하는 강 부장의 연기가 태호의 눈에 어색해 보였다. “박 이사님이 단유를 데려오려 하는 이유, 따로 있는 겁니까?” 강 부장은 붙잡힌 팔을 뿌리치려 했는데, 의외로 장태호의 힘이 억셌다. 역정이라도 내려 하는데, 태호의 표정이 무시무시해서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강 부장은 오늘 마가 낀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이 사태를 어떻게 잘 무마할 수 있을지,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연습실로 내려간 수련은 불 꺼진 연습실을 보고 조금 당황했다. 이 시간에 연습실이 불 꺼진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옆의 연습실로 갔더니, 마침 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이던 연습생 5명이 수련과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남녀 연습생 5명이 동시에 허리를 직각으로 굽히며 인사를 했다. 고압적인 선배도 아닐진대 이런 모습으로 인사를 받은 적이 없던 수련은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러지 마세요. 아, 안녕하세요.” 수련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연습생들에게 옆 연습실의 상황에 대해 물었다. “오늘은 선배님들이 안 나오신 것 같던데요?” “그래요?” 이상하다 여길 때, 다른 연습생이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사실, 요즘 선배님들 잘 안 오시는 것 같아요.” 얼굴이 익은 여자 연습생의 말이었다. “레슨도 안 받고요?” “그것까진 잘 모르겠고요. 그래서 아까 배 실장님이 오셔서 나중에 남녀 따로 나눠서 연습실 쓰게 해주겠다고 이야기도 하시던데요.” 그 말에 수련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아무래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갤럭시즈에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대충 인사를 한 뒤, 연습실을 빠져나온 수련은 핸드폰을 열어보려다 먼저 위층으로 올라가서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멤버들에게 직접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아서였지만, 회사 사람들, 특히 다른 팀을 맡고 있는 배 실장님에게 가서 물어보는 게 빠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층으로 올라간 수련은 배 실장님이 이미 퇴근하고 안 계시다는, 잔업으로 눈 밑이 검은 여자 직원의 말에 인사하고 사무실을 지나가다가 다른 사무실에 있는 태호의 모습을 목격했다. ‘이 시간에?’ 아까 단유에게 간다고 들었는데, 왜 사무실에 있을까를 궁금해하며 다가가는데, 살짝 열린 유리 문틈으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박 이사님이 단유를 영입하려는 목적, 혹시 다른 속셈이라도 있는 건가요?” 수련의 귀가 쫑긋거렸다. “속셈이라니!” 표현이 거슬린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리는 강 부장에게 태호는 좀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단유, 쟤! 저한테 진짜 친동생 같은 아이라서 이러는 겁니다. 저 아시잖아요? 어지간하면 회사의 입장대로 일해왔고, 불평불만 잘 말 안 하고 다니는 거. 갤럭시즈 활동, 위에서 마음대로 자르고 일부러 멀리 있는 행사 위주로 잡으라고 할 때도 저 아무 말 없이 따라갔습니다. 그것도 갤럭시즈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불만 있어도 말 안 했습니다. 애들 고생하는 거, 제가 다 욕받이 해가며 지켰습니다. 그런데 아직 들어오지도 않은 저 아이, 진짜 그냥 보통의 아이 아닙니다.” 보통의 아이가 아니란 건 강 부장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 부장이 아는 ‘보통’과 태호의 ‘보통’이 다른 의미라는 것은 몰랐다. “말씀해 주세요. 강 부장님.” “보통이 아니란 걸 알면, 이미 다 아는 건데 뭘 그래.” 태호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이질적인 느낌을 또 한 번 포착해냈다. 그리고 이번에는 분명히 다른 포인트를 집어낼 수 있었다. “강 부장님. 부장님이 아시는 단유, 어떤 아이입니까?” 강부장인 눈을 가늘게 뜨고 태호를 보다가, 뒤를 살폈다. 사원들이 사무실을 나가며 소등을 한 탓에, 강 부장의 자리만 흐릿한 형광등 불빛이 비추고 있었다. “…연성 그룹.” 태호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어떻게라니? 자네만 아는 비밀이라고 생각했었나?” 태호는 몰랐었다. 단유가 갤럭시즈 뮤직비디오에 처음 출연하였을 때, 단유의 보호자 자격으로 주영을 만났고, 주영의 언급으로 눈치를 챘을 뿐이었다. 주영은 물론이고 단유 역시 그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는 것을 꺼린다고 여겨 태호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설마….” 연성이라는 이름표가 단유의 가슴에 붙자, 박 이사의 유난스러운 영입 의지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태호가 떠올린 시나리오는 박 이사만의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연예계 전반에서 펼쳐지는 M&A,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링 위에서 펼쳐지는 무규칙 레슬링처럼, 시뻘건 눈으로 티켓을 들고 침을 튀기며 외치는 사람들의 무리 안에서 펼쳐지는 투견들의 싸움판처럼,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태호가 등을 돌리자, 이번에는 강 부장이 태호의 팔을 붙잡았다 “뭐하려고?” “부장님, 이거 놓으십시오. 저, 이건 아니라고 봅니다.” 정말 순수하게 단유의 미래를 위해, 물론 곁다리로 자신의 커리어와 성공을 함께 그려보긴 했으나, 진짜 순수하게 단유를 위해 영입을 시도하려 했던 태호는 이 일이 자칫하면 단유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봐, 장 매니저. 진정하고, 침착하게 행동해. 지금 자네, 뭔가 오해하는 게 있는 거 같아.” “오해라뇨? 저도 이 바닥에 있을 만큼 있었고, 볼 만큼 봤습니다. 저게 무슨 뜻인지 모를 것 같습니까? 단유, 어떻게 연성과 연결된 걸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엮어서 들어오게 할 일은 아닙니다.” “이봐, 이러니까 자네가 오해하는 거라고. 우리도 알아. 그 친구 재능 있는 거. 마스크도 좋고, 노래도 잘하고. 아직 변성기라서 앞으로 목소리가 어떻게 변할지 가늠할 수 없다는 말은 있지만, 지금 당장의 이미지만으로도 충분히 성공 가능성이 있다는 거 잘 알아. 그런 점도 고려하지 않고, 그저 투자금 목적으로 영입하는 거 같은가?” “그래도 이건 아니죠. 아직 이쪽 업계에 대해 잘 모르는 아이기도 하고, 연예계에 꿈을 가진 아이도 아니란 말입니다. 제가 저 아이에게 뭐라고 했는데요? 꿈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된다고 말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이면 제가 그 아이의 꿈을 돈에 팔아 먹은 것과 뭐가 다릅니까?” 강 부장이 잠시 태호를 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붙잡고 있던 태호를 놓았다. “자네, 요즘 가디스R이 잘 나간다고 해서 뭔가 착각하나 본데.” 태호는 강 부장의 눈이 미소 짓는 것을 보았다. 즐거운 미소가 아니라, 어딘지 비웃는 느낌이었다. “꿈? 이 바닥에서 꿈을 찾아? 누가 꿈을 찾는단 말인가? 갤럭시즈가 꿈 때문에 그 고생을 했는가? 가디스R이 꿈을 꿔서 성공했던가? 꿈? 솔직하게 말해. 여기도 결국 자본과 경제가 판치는 시장이야. 핸드폰에 꿈을 담아 만드는 기업이 있다던가? 컴퓨터에 희망을 담아 만드는 기업이 있다던가?” 태호의 가슴이 바스락거리며 갈라지는 기분이었다. “그 아이가 꿈을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고? 그럼 잘 된 거지. 헛된 꿈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현실에 눈을 뜨고 사는 게 바른 삶을 살 수 있게 도울 테니까.” 그리고 사무실 입구, 유리로 된 문 옆에서 몸을 감추고 이야기를 듣던 수련은 이를 꽉 깨물고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다. 강 부장의 말이 이어졌다. “현실, 을 이야기한 김에 말하는 건데, 갤럭시즈 애들, 계약해지 통보가 갈 거야.” “네?” “가망성이 없는 상품을 부여잡고 있는 건 미련한 짓이란 거 알잖아? 요즘 연습도 잘 안 한다며? 지들도 이미 알고 있는 거겠지.” “부장님!” “장 매니저, 아니 장 실장. 지금부터가 중요해.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라고. 이제는 자네도 더 위로 올라갈 준비를 해야 할 시기야. 가디스R의 성공이 그걸 도울 거고. 갤럭시즈는 자네의 발목을 잡을 뿐만 아니라, 그 아이들 스스로의 발목을 붙잡는 족쇄야. 그 아이들도 빨리 자기 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꿈? 망상과 꿈을 헷갈려 하면 안 되지 않겠어? 여기는 꿈이 아니야. 현실이라고.” 벽에 기댄 수련의 무릎에 힘이 풀려, 스르르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갤럭시즈의 해체. ‘현실’이라는 강 부장의 말이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 “생각은 많이 했다고 들었는데?” 박 이사의 말에 단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니까. 그래도 이렇게까지 온 걸 보니, 어느 정도 결론은 난 거 같고. 그렇지?” “네.” 박 이사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책상 서랍에서 서류를 하나 꺼냈다. “한 부는 지금 여기서 확인하면 되고, 다른 한 부는 보호자에게 보내야 하는데, 내가 직접 보내서 확인하실 수 있게 해드리지. 복잡한 내용이긴 하지만, 어려운 건 아니야. 일단 계약금부터 보면,” “박 이사님.” 단유의 부름에 박 이사가 눈웃음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왜?” “여기 오기 전에 태호 형이랑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장 매니저, 이 어린놈이 또 무슨 얘기를 했을까? 혹시 쓸데없는 이야기로 아이를 흔들어 놓은 건 아니겠지? “그런데?” “박 이사님의 이야기도 듣고 싶어서요?” “…어떤? 뭐, 지원 방향이라든가 그런 거?” “아뇨. 박 이사님이 생각하시는 성공에 대해서요.” “성공?” “지난번에 박 이사님을 처음 만났을 때, 박 이사님도 그렇게 언급하셨고, 태호 형이나 여기서 근무하시는 분들 이야기를 들어봐도 대부분 ‘성공’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 주시더라고요. 성공하려면 여기 와야 한다. 너라면 성공할 수 있다.” “그럼 그럼. 너라면 꼭 성공할 수 있지.” 재능과 재력을 겸비한 너라면 말이야. “그래서 좀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어서요. 박 이사님이 생각하시는 성공.” ‘아, 고민이네.’ 중학교 1학년, 이제 겨우 초등학교 졸업한 아이한테 어려운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질게 곧이곧대로 이야기해서도 안 되고. 듣기 좋게, 받아들이기 쉽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하는데. 높으신 분들 앞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것은 익숙해도, 20살도 안 된 어린아이에게 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성공이라….” 박 이사는 앞에 놓인 홍차를 들어 입을 적신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 [326] 적자생존(5) 어둠이 깊게 내려앉은 사무실 복도에서 쭈그려 앉아 있던 수련을 발견한 것은 강 부장이었다. “어? 수련아?” 사무실 안에서 넋을 놓고 있던 태호가 그 소리에 움찔 놀라더니 허겁지겁 뛰쳐나왔다. “니가 왜 여기 있어?” “우리 진짜 해체해요?” 머리를 덜 말렸는지 축축하게 젖은 머리끝이 어깨에 드리워져 있던 수련이 고개를 들었다. 태호는 글썽거리는 수련의 눈을 보며 가슴이 덜컹하는 심정이었다. “…그래.” 강 부장이 대신 대답을 해 주었다. “왜요? 우리 잘 할 수 있어요. 언니들 열심히 한 거 아시잖아요?” 수련의 애절한 목소리에 강 부장은 머쓱해하며 한 다리를 빼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렇게 말해도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서….” 하지만 수련은 당장이라도 통곡을 할 것 같은, 그런 울림을 가진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지난 3년동안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아시잖아요? 활동을 하든 안하든 밤을 새가면서 연습하고 무릎에 멍이 들고 발톱이 빠지는 일이 있어도 우리, 계속 연습했다고요. 명지 언니도 얼마나 열심히 노래 연습했는지 아시잖아요?” “그런 이야기, 나한테 해도 소용없다는 거 잘 알잖아.” “그래도, 그래도….” 이쯤에서 태호가 나섰다.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계속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수련의 컨디션도 조절해야 하는 매니저로서, 이런 대화는 좋지 않다고 판단했다. “수련아, 일단 나가자. 오늘 많이 피곤했잖아. 내일도 스케줄 있는데, 여기서 이러면 안 돼.” “오빠, 우리 성공하면 갤럭시즈 컴백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우리 더 열심히 했던 거 아시잖아요?” “수련아….” 그때였다. “그럼, 만약 갤럭시즈가 컴백할 수 없다고 했다면 이렇게 열심히 활동하지는 않았을 거란 말이냐?” “강 부장님!” 눈살을 찌푸린 채 수련을 바라보던 강부장의 물음에 태호가 기겁을 하며 말리려 했다. 하지만 박 이사와 태호에 이어 수련에게까지 붙잡혀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야 하다보니 속이 말이 아니었던 강 부장은 풍성하지 못한 머리를 길게 쓸어올리며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애 같은 소리 하지 마. 너도 이 바닥에 갓 들어온 애 아니잖아? 이제 어느 정도 분위기는 알잖아? 3년 이상을 활동하면서 이렇게 대중의 반응이 없는 아이돌 그룹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래?” “강 부장님, 그만 하세요. 제가 수련이 잘 다독일 테니까….” 강부장의 말이 수련의 인내심을 자극했던 모양인지, 한동안 잠잠하던 직구 본능이 터져나왔다. “너무 매정한 거 아니세요?” “수련아!” “알아요, 저도 안다고요. 그래서 불안했고요. 그래서 더 열심히 연습하고 불평 안 하려고 했어요. 그래도 이건…너무 하잖아요? 우리가 아직 기회가 안 돼서 그렇지, 기회만 닿는다면 얼마든지 대중들의 호감을 끌어낼 수 있는 팀이라는 거 아시잖아요.” 그 기회를 회사에서 제대로 주지 않았잖아요, 라고 말하려는 수련의 말은 강 부장의 대답에 가로막혔다. “몰라.” “네?” “모른다고. 대중들이 지난 3년간 너희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는 알지. 마치 길가에 세워진 공중전화 박스 보듯 했지. 언제 철거될지 궁금한 전화 박스. 가끔 비를 피하기 위한 용도로나, 쓰레기를 버리는 용도로나 쓰던 전화 박스였지, 너희들은.” “부장님!” 수련이 말실수 할까 봐 조마조마하던 태호는 오히려 독설을 날리는 강 부장 때문에 더 미칠 것 같았다. 평소 이런 양반인 줄 모르고 있었기에 태호도 놀람이 컸지만, 수련만 할까. “내가 이렇게 심하게 말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도 너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너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니? 지금 가디스R로 활동하니까 어때? 공중파 방송에 나가면 팬들이 몰려들어서 사진찍고 이름 연호하고, 녹화하면 응원 해주잖아? 과거에 비하면 성공했지. 그런데 그것도 아직은 반쪽 자리야. 반쪽이긴 한데, 고지가 얼마 안 남았어. 이제 진짜 성공을 눈 앞에 두고 있는데, 고작 과거에 발이 묶인 채로 물러날래? 니 꿈이 원래 그거야? 인기 없는 걸그룹의 메인보컬이라는 이름을 평생 안고 사는 거? 가수로서 성공하고 싶다는 욕심이 없어? 있다면 이렇게 철부지처럼 행동하지 마.” 말이 나온 김에 아주 다 털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강 부장의 직설(直說)에 주저함이 없었다. “회사 입장에서는 상품성이 떨어지는 갤럭시즈가 해체되어야 또 다른 상품을 기획, 전시 할 수 있어. 그런데 단지 회사의 이익 때문일까? 갤럭시즈가 해체 되어야 너도 가디스R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다는 거, 모두가 아는 사실이야.” 그래, 이게 다 너희들을 위한 거고, 너를 위한 거야, 라는 듯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뜨린 강 부장은 마침 생각이 났다는 듯, 코트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회사에서 이미 기사 띄우기로 했고, 아마….” 핸드폰을 꺼내서 몇 번 조작을 하더니, “지금쯤… 나왔네.” 핸드폰을 돌려 액정을 보여주었다. 어두운 복도라서 더 밝게 보이는 액정 속에는 한 인터넷 신문 기사가 큼지막한 제목을 기사 윗머리에 박은 채 게시되어 있었다. 「갤럭시즈, 활동 중단 선언.」 수련과 태호의 눈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 “성공이란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말한다. 가령 내가 이 업계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목표를 설정했을 때, 그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이 바로 성공의 순간이겠지. 그러니 난 아직 성공을 하지 못한 거고, 성공을 위해 남들이 편히 쉬는 이 시간에도 회사에 남아 일을 하는 거지. 누가 뭐라고 하든 말이야. 너도 지하에 있는 연습실에 가봤으니 알겠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구슬땀을 흘리며 연습에 매진하는 연습생들이 있다는 걸 알 것이다. 그 아이들도 자신의 목표가 있어. 최고의 가수, 최고의 아이돌이 되겠다는 꿈이 바로 그 목표일 것이다. 그 목표가 달성되는 순간이 바로 성공인 거지.” 홍차를 손에 들고, 한쪽 다리를 꼰 채로 정신적, 물질적 여유를 즐기는 ‘위너Winner’의 이미지를 상상하며 단유에게 교훈을 ‘내렸다’. “성공은 자신만의 기준에 따라 결정된다는 거군요.” “…물론 자신의 뜻이 중요하지. 하지만, 목표의 성격에 따라 성공의 척도가 달라지기도 하겠구나. 만약 어떤 아이가 난 데뷔가 목표야, 라고 하면 과연 데뷔를 했을 때 성공이라고 할 수 있느냐, 라고 물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건 성공이 아니지. 왜냐하면 목표가 바르게 설정된 것이 아니거든. 데뷔는 시작일 뿐인데, 그걸 목표라고 할 수는 없잖느냐.” 박 이사는 다시 홍차를 한 입 마시며 생각을 정리했다. ‘인생의 성공’에 대한 성공론을 어린아이 앞에서 그럴싸하게 늘어놓으려니 뭔가 잘 안 통하는 느낌이었다. “사람마다 성공의 기준이 다르다는 건 차치하고, 이 사회에서 통념적으로 사용되는 ‘성공’의 기준을 보렴. 대기업에 입사한 신입사원에게 ‘성공’이란 딱지를 붙일까? 박사 학위를 딴 대학원생에게 ‘성공’의 딱지를 붙일까? 아무도 그렇게 안 부르지. 반대로 자수성가한 젊은 사업가에게 ‘성공’이란 딱지를 붙이고, 대통령이나 장관직을 맡은 이들에게 ‘성공’한 인생이란 직함을 부여한다.” 박 이사는 단유, 저 아이가 자신의 말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자신도 눈앞에 앉은 ‘자신’처럼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게끔, 그런 이미지가 연출되도록 노력했다. “즉, 성공은 힘이다. 이 사회가 말하는 성공은 바로 ‘힘’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는 힘, 누구에게도 비굴하지 않고 홀로 우뚝 설 수 있는 힘. 그 힘을 가질 때, ‘성공’이란 직함이 주어질 수 있다. 당연히 우리는 그런 ‘힘’을 목표로 해야 진정한 ‘성공’의 댓가를 누릴 수 있을 거야. 가수도 마찬가지. 모두의 선망을 받는 직업, 누구도 그 사람의 실력, 재능을 무시하지 못할 단계에 오른 가수가 되는 것이 바로 ‘힘’이고 ‘성공’이다.” 힘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추구하는 절대 가치 중 하나. 특히 중학생이라면 ‘힘’이라는 단어의 마력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우린 널 그렇게 만들어 줄 거야.” 아마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에게 모든 종류의 쾌락을 제공하겠노라 약속했을 때,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박 이사는 씁쓸해지려는 표정을 의지로 버티며 계속 여유로움을 가장했다. “가끔 사람들은 복잡한 설명을 어려워할 때가 있어요. 복잡한 것도 간단하게 설명해주길 바라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데 그게 가능한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그게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단 말이에요.” 단유의 말에 박 이사는 의아해 할 때, 단유는 앞에 놓인 홍차의 컵 위로 손을 가져갔다. “홍차에서 따뜻한 증기가 올라오는 거 보이시죠? 이 증기가 왜 보일까요?” 뚱딴지 같은 물음에 박 이사가 대답을 머뭇거릴 때, 단유는 자기도 굳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증기가 만들어지고 올라오는 다양한 물리학적 법칙과 화학적 변화를 설명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설명이 왜 필요하냐는 눈으로 바라보더라고요. 그냥 ‘하얀 연기’가 난다고 표현해도 될 일을 굳이 어렵게 설명하냐고요. 그 연장선에서 사람들은 복잡한 것보다 간단하게 현상과 법칙을 설명하길 즐겨하는 것 같습니다. 사과가 떨어지고, 사람들이 땅을 밟고 다니는 현상들에 대해 ‘만유 인력’이라는 이름으로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처럼요.” 김 단유, 이거 조금 꼴통이다, 라는 생각이 박 이사의 뇌리를 스쳐 지나갈 때, 단유가 박 이사를 바라보았다. “성공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힘’이라는 설명으로 축약하신 바에 대해서 모르지는 않지만, 과연 그게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될 부분인가 싶네요.” 하마터면 홍차를 든 컵을 떨어뜨릴 뻔 했다. 박 이사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강해지는 것이 성공이다….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과 같은 말이 떠오르네요. 다윈의 진화론은 사회적 현상과 법칙을 설명하는데 매우 유용한 설명법을 제시하죠.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를 진리로 받아들이면서, 다양한 선택의 결과들을 모두 진화론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단유는 컵에서 손을 떼고 몸을 바로 세웠다.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거나, 성공한 사람이 성공한다는 둥의 동어반복적인 해석들이 ‘진화론’에 기대어 설득력을 얻지만, 실상을 살펴보면 사회적 성공과 진화론은 맥락의 연결 없이는 해석되기 힘든 점이 있어요.” 손에 가로 막혔던 홍차의 향이 다시금 올라와 코를 간지럽혔다. “진화론적 설명으로 이것저것 합리화시키려는 설명들에 반감이 생기는 이유죠. 맥락이 없으니까요.” 박 이사는 등을 소파에 깊게 묻으며 단유를 노려보았다. 심기가 불편했던 박 이사의 눈빛은 어둠 속 포식자의 눈으로 변해있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난 말을 길게 늘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용건만 간단히 해.” “이사님의 성공담은 흥미롭지만, 저는 그 성공론에 동의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박 이사는 소파의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가죽이 우그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그래서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네.” 박 이사는 한숨을 쉬었다. “혹시 우리가 작은 회사라서 그러냐? 그렇다면 니 말도 우습다. 만약 큰 회사라면, 그래서 데뷔하자마자 빵빵하게 밀어주는 회사라면 이리 거절하지 않았겠지? 결국 너도 우리 회사가 작으니까, 힘이 없으니까 거절한 것일 뿐이지 않느냐? 현학적인 표현으로 가장해도 결국 니 속내는 뻔하구나.” 박 이사의 냉소에도 단유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호기심에 대한 정당하고 합리적 해석이 복잡하다는 이유로, 혹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간편하고 이해하기 쉬운, 다른 말로 범용적인 해석을 끌어와 자신의 이해를 돕죠. 전 결코 이 회사가 힘이 작아서 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말은 뱉은 적이 없는데도, 이사님은 그런 식으로 제 말을 이해할 뿐이네요.” “내가 니 속을 모를 줄 알아?” “저도 이사님이 저에게 감추고 있는 게 있다는 걸 알아요.” 박 이사의 눈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이사님이 직접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대화의 주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을 하지 않을 뿐이에요. 하지만, 그렇게 속내를 감추고 저에게 ‘성공’이라는 간편한 해석으로 미래를 결정지으라 하시니, 저는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 [327] 적자생존(6) “바보 같은 소리! 밖에 나가서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라. 돈 없이 살 수 있냐고! 돈이 중요하지 않냐고! 정신 나간 놈들 빼고, 대부분이 돈이 중요하다고 할 거다.” “이제는 성공 대신 돈인가요? 한계효용의 체감 법칙과 같은 경제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돈이 전부가 되지 않는다는 건 아실 것 같은데요? 저는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한 게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돈이 목적인 삶을 살 필요가 없죠?” “돈 없이 살아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아시겠지만, 저 고아예요. 고작해야 용돈 받아 사는 수준이에요.” “웃기는군. 내가 네 뒤에 누가 있는지 모를 것 같으냐?” 단유는 박 이사의 표정 변화를 감지했다. 하지만 일단 모른 척하기로 했다. “제 뒤에 누가 있든, 그건 저의 경제활동이나 가치관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은데요?” 박 이사도 애써 그 화제를 들먹이지 않으려 했다. “그럼 너는… 가난해도 행복하면 그만이다, 뭐 그런 논리로 말하는 것이냐? 그런 거라면 정말 현실을 모르는,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부탄이 꼽혔던 적이 있었지. 하지만 그건 부탄의 사람들이 제대로 문명의 혜택을 즐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발달된 문명의 이기와 혜택을 누리지 못한 채, 그저 자족하며 사는 사람들의 미소를 행복이라 부르는 게 정당하다고 생각하느냐? 진짜 행복은 사회 최상위권, 먹는 것에 고민이 없고, 무엇이든 살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진짜 행복이다.” “이사님은 행복하세요?” “행복하냐고? 당연히 행복하다. 비록 회사는 작아도 어디 가서 비굴해질 필요 없고, 내가 원하는 집에서 내가 꿈꾸던 가정을 꾸리고 사는데 내가 불행할 것 같으냐? 많은 사람들이 내가 사는 집을 부러워하고, 내가 입은 옷을 보며 감탄한다. 사치냐고? 없는 사람들에게나 사치지, 나에게는 적당한 수준에 불과하다. 그게 여유다. 그러니 난 성공한 삶을 사는 것이고, 행복한 것이다.” 단유는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애써 이사님의 행복을 깨뜨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네요.” 단유는 자리에서 일어나자 박 이사의 입에서 호통이 튀어나왔다. “누구 마음대로 일어나!” “이미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나요? 전 분명히 계약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왜 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이사님. 이럴까 봐, 제가 처음에 이유를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저 혼자 장황하게 늘어놓고 그따위를 이유라고 말하는 것이냐?” “이사님.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세상 모든 일을 간단하게 이해하려 하지 마세요. 세상의 복잡함 만큼이나 복잡한 이유와 사연이 얽혀 있습니다. 만약 진심으로 이해하고 싶으시다면, 그 이유들을 찬찬히 읽어보시고 공감을 해보세요. 자기식으로 해석하고 자기 마음대로 이유를 짚어가는 행위는 서로의 오해만 쌓을 뿐입니다.” 단유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진화론에 대한 반감이 생기는 이유죠. 복잡한 자연 현상과 사유들을 진화론으로 치환시켜 이해하려는 습성을 만드니까요.” “앉아! 말 안 끝났어!” 이제 계약은 어떻게 돼도 상관이 없었다. 박 이사는 맹랑한 꼬마가 감히 자신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꼴이 보기 싫었다. ‘감히 내가 누군데!’ 단유는 박 이사를 보다가 다시 소파에 앉았다. 바지에 잡힌 주름을 펴 단정한 모습을 갖춘 뒤, 고개를 들어 박 이사에게 시선을 던졌다. “말씀하세요.” “이런 건방진…. 니가 지금 니 뒤에 선 이들의 권세에 빌어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지내고 있지만, 그게 언제까지 이어질 거 같으냐! 니가 만약 진짜 그들의 핏줄이라도 된다면 모를까, 언제라도 내쳐질 수 있음을 몰라? 그때가 되면 니가 어떻게 될 거 같아? 응? 가진 것도 없고, 권력도 없는 이들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 이유도 없이 서류에서 탈락하는 좌절을 맛보는 사람들. 수도 없이 면접장을 들락거리며 온갖 질문을 빙자한 폭력에 멍이 들면서도 취업이 되지 않는 사람들. 어렵게 취업을 한 뒤에는 그동안의 배움이 다 무소용이었다는 듯, 전혀 관련 없는 업무를 맡아 꾸중과 눈칫밥을 먹으며 업무를 배워야만 하고, 때로는 상사의 폭언에도 고개를 조아리며 죄송합니다를 연발해야 하는 사람들. 쥐꼬리만 한 월급에 감사해 하다가도 각종 카드값, 공과금 등으로 흔적만 남은 텅 빈 통장의 숫자들. 그런데도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좌충우돌하다 결국 퇴직하고 자영업으로 돌아선 이들은 또 다른 현실의 벽에 좌절하고, 값싼 소주를 마시며 신세를 한탄하고, 시대를 탓하며, 나라를 욕한다. “너 역시 그렇게 살 것이다. 현실을 깨닫지 못하면 말이야.” “그래서 그들이 불행하다고요?” “그럼! 불행하지. 그들 스스로도 불행하다고 할 거다. 자기 성장, 자기 계발 같은 허영덩어리 책을 부여잡고 있다고 한들, 그들이 그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 같으냐? 그러니 그들은 실패자들이다. 성공의 맛을 보지도 못했고, 볼 수도 없으니, 그들은 영원히 실패자들인 것이야.” “이사님, 정말….” 박 이사는 말을 쉽게 잇지 못하는 단유를 보며 피식 비웃음을 지었다. “왜? 내가 모질게 보이냐? 악당처럼 보여? 그런데 어떡하냐, 그게 현실….” “아니요.” “응?” “이사님, 정말 단순한 사람이네요.” 어쩐지 ‘악당’이라고 불리는 것보다 더한 모욕을 받은 느낌이었다. “조금만 생각해도 그것 이상으로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건데 말이죠. 한 사람의 삶이 그렇게 단순하게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을 앞서 지적했음에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시네요. 취업을 못 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죠. ‘취업을 못 한’이라는 수식어에 한정해서 그 사람의 사회적 맥락을 모두 끊을 필요가 있나요? 그 사람을 걱정해주는 가족들은요? 그 사람을 사랑하는 연인은요? 그 사람과 오랜 시간에 우정을 쌓은 친구들은요? 또, 그 사람의 취미는요? 그 사람이 여가 시간에 즐기는 것들은요? 그 사람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사건들을 모두 잘라내고 오직 ‘취업 못한’이라는 맥락에서만 설명하면 결국 그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한 셈이잖아요?” “처음부터 궤변이나 늘어놓는구나!” “그럼 이해하기 쉽게 이사님의 경우로 옮겨드리죠.” 아무래도 오늘이 지나면 이사실의 소파는 가죽을 모두 갈던지, 혹은 소파를 바꿔야 할 거 같았다. 늘어난 가죽의 흐물거림이 손에 느껴질 때, 단유가 입을 열었다. “이사님의 직급상 위에 누군가 계시겠죠?” 박 이사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이사님은 그분이랑 있을 때 행복하세요?” “아, 씨….” 하마터면 육성으로 욕을 하는 추태를 보일 뻔했다. 행복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질문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이사님은 가족분들이랑 계실 때, 언제나 행복하신가요? 그래서 24시간 늘 함께하고 싶으신가요?” 진심으로 욕할 뻔했다. 눈앞에 앉은 꼬마의 얼굴이 점점 악마로 보이기 시작했다. 개구쟁이 악마 새끼. 악마 새끼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 시선의 끝에 골프장에서 받은 트로피가 있었다. “가족분들이랑 골프 치러 가신 적 있으세요?” “그게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되는….” 단유는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 이사가 골프를 치러 가는 경우는 대부분 접대였고, 접대의 끝은 지저분한 거래가 있었다. 때문에 단유가 일부러 ‘골프’를 화제로 가족과 연결지었다고 생각해 화를 벌컥 낸 박 이사였다. 물론 화를 낸 뒤에야, 그렇게 화를 낼 문제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겨우 몇 가지 상황에서 박 이사님이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발견되네요. 게다가 가족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원만하지 않으신 것 같고요. 가족이라는 맥락을 끌고 왔더니, 이사님의 ‘성공’은 빛이 바래졌네요. 이사님의 행복이 그러하듯, 다른 사람의 불행도 그럴 겁니다. 온전히 불행한 경우는 없어요. 불행을 느끼다가도 행복을 느끼는 게 사람이니까요.” “가게가 망해서, 사업이 망해서 주저앉은 사람에게 가서 말해 봐라. 당신은 불행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아마 돌이나 주먹이 날아들 거다!” “정말….” 단유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숨을 짧게 토해냈다. “손으로 셀 수도 없는 돈을 벌고, 궁전 같은 집에서 살면서, 사람들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삶이 성공이라고 머릿속에 틀어박아 놓으셨으니, 다른 사람의 삶에는 관심이 없으시군요. 이사님, 어쩌면 이사님의 말처럼 돈 잘 버는 직업 얻어서 돈 잘 벌고 잘 먹는 게 성공한 삶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진짜 삶의 목적이 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제가 어려서, 라는 이유로 깎아내리셔도 할 말은 없지만, 적어도 전 제 삶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금 이 삶을 살아가는 이유 말이에요.” “이제는 운명론자 행세냐?” “단지 잘 먹고 잘사는 게 이유인 사람도 있을 겁니다. 다른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이요. 초원에서 살아가는 야생동물들이나, 도시의 뒷골목을 전전하는 도둑고양이나 모두 잘 먹고 잘살아서 오래 사는 게 이유인 것처럼요. 그건 아마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제1과제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인간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게다가 제가 ‘이곳’에서 다양한 지식들을 습득하게 된 까닭에 단순히 삶을 지속하는 것 이상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 때문에 여태 남들이 말하는 ‘꿈’이라는 걸 갖지 못했지만 말이죠.” 박 이사는 열이 올라서 단유의 덤덤한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놈이 무슨 말을 하든, 귀에는 모기가 앵앵대는 소리로만 들렸다. “비유를 하면 전 여행 중이에요. 꿈을 찾는 여행이요. 이사님이 말씀하신 가수, 연예인이라는 직업도 어쩌면 제 꿈이 될지도 몰라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여전히 전 확신이 없고, 게다가 이사님 같은 분과 일하는 건 어쩐지 답답할 거 같네요.” “이 녀석이!” “이사님. 그런 독단적이고 이기적인 고집은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할 거예요. 좀 더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고 포용하려 해 보세요. 그럼, ‘갤럭시즈’처럼 실패하는 경우는 적어질 겁니다.” “미친놈! 아무 곳에나 다 갖다 붙이면 다 말이 되는 줄 알아! 니가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지껄여! 감히!” 부들대는 박 이사의 볼살을 지켜보며 단유는 말을 끝냈다. “갤럭시즈는 ‘소통’이 되지 않아서였어요. 대중과의 소통보다 회사 내부에서 소통이 되지 않아서, 실패했다고 봐요. 만약 이사님이 갤럭시즈라는 그룹, 그들 개인의 삶과 생각들에 관심이 있으셨다면 그들에게 더 잘 어울리는 음악, 노래를 찾을 수 있으셨을 거예요. 그랬다면 더 좋은 음악이 만들어졌을 것이고, 그 노력이 대중들에게 충분히 어필되었을 겁니다. 분명히.” 단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말은 마쳤다. “앉아!” 더 이상은 서로 했던 말을 반복하는 대화뿐이고, 그런 대화는 시간 낭비였다. 당장은 박 이사를 설득할 수 없었지만, 굳이 설득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때론 저렇게 귀를 막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경험해보지 않았던가? 그저 단유 본인이 그런 사람들과 가까워지지 않으면 된다. 지금은 그런 정도가 딱 좋다. “수고하세요.” 박 이사는 벌떡 일어나서 등을 돌린 단유의 뒷덜미를 붙잡으려 했는데, 헛손질했다. ‘어?’ 잠깐 어지럽더니, 정신을 차리니 소파 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이미 단유는 사무실을 나가고 없었다. 악마 새끼 때문에 열이 올라서 흥분하다가 혈압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라 생각하며, 테이블 위의 컵을 집어 들었다. 식은 홍차라도 마시려 했는데, 홍차도 깔끔히 비어 있었다. “에이, 씨발 새끼가.” 분을 삭히기 위해 박 이사는 창가로 가,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겨울 바람에 눈 알갱이가 섞여 들어왔다. 눈의 불순물이 몸에 해롭더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나서, 이내 창을 닫고 말았지만 잠깐이라도 쐰 바람이 열기를 식혀 준 것 같았다. ‘최악이군.’ 박 이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코트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일단 오늘은 독한 술로 귀를 씻어내야 할 것 같았다. 꼬마 놈한테 훈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까닭에 기분이 더럽기도 했고. 꼬마에 대한 ‘처분’은 내일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았다. 1층으로 나온 단유가 두리번거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하로 내려갔다. 그리고 불이 켜진 연습실에서 태호를 찾을 수 있었다. ‘어, 누나도 있었네?’ 단유는 수련에게 인사를 하려다 멈칫했다. 수련의 얼굴이 엉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 [328] 구슬(1) 태호는 지하 연습실에서 남아 연습하고 있는 연습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수련을 데리고 연습실로 내려왔다. “오빠, 저희…정말 해체하는 거예요?” 「활동 중단」이라는 기사는 ‘해체’와 다를 바 없었다. 계약 기간이 남은 문제와 ‘수련’이라는 멤버가 속한 탓에 바로 ‘해체’를 선택하지 못했을 뿐, 해체는 기정사실이 된 셈이었다. “나도 방금 알았어.” 연습실의 적막이 태호의 목소리까지 잡아먹은 것처럼 음울한 느낌이었다. 작게 흐느끼는 소리를 내는 수련은 눈물을 멈출 수 없었고, 태호는 수련의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이 그렇게 각자의 슬픔을 담아내고 있을 때, 단유가 내려왔다. “어? 단유야?” 생각지도 못한 문제로 인해 ‘단유’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던 태호가 당황스러워했다. “무슨 일이세요?” 수련은 고개를 숙인 채 울었고, 태호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이야기는 다 끝났어?” “네.” 지금 상황에서 계약 운운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고 여겼고, 태호는 우선 단유를 돌려보내려 했다. “데려다주지 못해서 미안한데, 오늘은 이만 돌아가는 게 어떻겠어?” 단유는 수련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몸을 작게 움츠린 채 울고 있던 수련 앞에 다가간 단유는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수련을 바라보았다. “누나.” 단유의 나직한 부름에도 수련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단유는 수련이 우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수련에게서 보이는 절망감과 슬픔은 잘 알 수 있었다. 마치 목소리라도 빼앗긴 사람처럼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의 그것과 같다고나 할까. 부모의 손을 놓친 아이가 길 한복판에서 우는 모습이랄까. 아주 예전,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기억 속에 생생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홀로 되었던 그 날의 자신의 모습과도 같다고나 할까. “포기하지 마세요.” 단유의 말에 수련은 물론 태호도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찾아보면, 분명 길이 있을 거예요.” 수련은 젖은 눈으로 단유와 시선을 마주했다. **** 유난히 차가운 바람이 매정한 시어머니보다 더한 싸늘함으로 볼을 때리고 지나갔다. 그나마 눈이 오지 않아 다행이라지만, 이렇게 차가운 바람과 싸워야 하는 거라면, 하루쯤은 운동을 미뤄도 되지 않을까? “무슨 소리야! 이 정도 쯤으로 악으로 버텨야 진짜 사나이라고.” 명수가 부들부들 떨리는 턱을 힘껏 올려 철봉 위에 간신히 닿는가 싶더니 빠르게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으, 차거.” 손을 비비는 명수의 손바닥이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미련하게 그러지 말고, 장갑을 껴.” “악력을 기르려면 맨손으로 해야 한다고 했어.” “니가 농구선수도 아닌데, 악력을 왜 길러?” “…….” 명수는 상미가 내민 장갑을 낀 뒤에도 장갑 밑으로 입김을 불어 넣는 시늉을 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가야겠다, 너.” 상미가 시계를 확인하더니, 조기 축구회 모임 시간이 되었다고 알렸다. 지난 방학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조기 축구회 활동을 하게 된 명수였다.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고깃집 사장님이 먼저 제안을 했다. “그래? 단유야, 가자.” 옆에서 팔굽혀 펴기를 하고 있던 단유가 몸을 펴며 일어섰다. 얇은 티셔츠 한 장만 입고 있을 뿐인데도 몸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하얀 김으로 변해 단유를 감싸고 있다고 느낄 정도였다. “신기하다. 땀은 안 흘리면서, 몸에서 저렇게 열이 나네?” 상미가 단유의 팔뚝을 손가락으로 푹푹 찌르면서, 마치 감자가 익었는지 살펴보는 사람 모양으로 단유를 살폈다. “그만하고, 가자.” 단유는 호흡을 정리한 뒤, 곁에 두었던 잠바를 손에 들고 천천히 걸었다. “그런데, 단유야. 연락해봤어?” 명수는 며칠 전 인터넷에 올라온 갤럭시즈의 활동 중단 기사를 언급하고 있었다. ‘누구?’, ‘듣보잡’, ‘이게 뭐?’ 같은 댓글만 4, 5개 달렸을 뿐인 그 인터넷 기사는 곧 다른 것들에 조용히 묻혔다. 하지만 명수를 비롯 갤럭시즈를 아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나름 호기심을 자아내는 기사였다. ‘충격’까지는 아니었다. 솔직히 가요계에서 ‘갤럭시즈’의 위치를 고려하면 언제 해체해도 무리가 아닌 팀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나마 활동 중단 기사도 ‘가디스R’의 성공 때문에 기사화된 것이지, 아니면 ‘기삿거리’가 되지 않을 내용이었다. “연락 안 되더라.” 어차피 가디스R도 공식활동은 마감한 상태라 수련이나 나윤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은 없었다. “누나들, 지금 많이 힘들겠다.” “…그렇겠지.” 상미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방법 없을까?” 그 말에 단유나 명수는 입을 다물었다. 명수는 혹시 그런 방법이 있을까 싶어 궁리하느라 입을 다물었지만, 단유는 다른 의미로 입을 다물었다. ‘그런 사람이 있는 곳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음악은 할 수 없어.’ 가디스R의 성공도 단유가 보기에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단순히 자신의 예상치를 뛰어넘은 성공이라서 그 결과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었다. 그들의 음악과 별개로 대중의 호기심을 자아냈던 마케팅이 효과적이었기에 부가적인 효과가 발휘된 것뿐이며, 실제로도 지금 가디스R의 리모트는 공식활동이 끝나자마자 곧 방송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가끔 길에서 노래가 흘러나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빈도를 따지자면 확연히 줄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애당초 박 이사는 그들을 아티스트로 봐줄 생각도 없었고, 길게 보는 여유도 없었다. 당장의 효과가 떨어지는 게 보이니, 벌써 다른 곡으로 컴백을 준비하고 있을 게 뻔했다. 그리고 그 작업의 연장선에서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기 위해 갤럭시즈에로 가는 지원을 끊겠다는 선언을 한 셈이니, 갤럭시즈의 부활은 힘든 일이었다. “단유야, 무슨 아이디어 없어?” 명수의 물음에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명수도 단유의 말에 동의했다. 사실 두 사람이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반칙 같은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방법은 결코 쓸 수 없는 방법이기도 했다. 결코 쓸 수 없는, 반칙과도 같은, 힘을 가졌지만 힘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재훈은 지금 오랜만에 연회장과 독대를 가지는 중이었다. 아침 7시부터 시작되는 조찬에 오랜만에 함께 된 재훈은 피곤한 눈을 억지로 부릅떠가며 숟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면접 준비로 한참 피곤한 시기임에도 갑자기 전날 연 회장의 호출을 받은 재훈은 이를 거절할 수 없었다. “젊은 놈이 영 먹지를 못하는구나.” 둘러 표현하는 연 회장의 말에 재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앞에 놓인 컵을 들었다. 시원한 목이 입 안을 헹구며 들어가자 숨통이 조금 트이는 느낌이었다. “요즘 일이 많아서요.” “내 말 하지 않았더냐.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라고.” 연 회장은 재훈이 영리병원 설립을 위해 남은 재산을 털어 넣으려 할 때 반대했다. 당시의 정권에서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다음 정권으로 바뀌게 되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것이 현재의 대한민국이었다. 게다가 다음 정권이 야당 쪽으로 기우는 사회 분위기를 일찌감치 파악했던 연 회장은 그룹 전체의 전략 역시 잠시 몸을 숙이는 방향으로 잡았던 터였다. 하지만 재훈이 그답지 않게 고집을 세우는 바람에 연 회장이 소원 한 번 들어주는 셈 치고 병원설립을 도왔었던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일인데요.” “쯧.” 재훈은 애써 화제를 자신에게로 돌려,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느라 힘들다는 식으로 말을 바꾸었다. 그 뜻을 읽은 연 회장이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재훈은 식사를 대충 마무리하고 할아버지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연 회장은 식사를 물린 뒤, 차를 주문했고, 우전 녹차가 단아한 향을 풍기며 앞에 놓였다.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재훈은 빨리 대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잠을 청하고 싶었다. 연 회장은 녹차를 한 모금 입에 물고 맛과 향기를 음미했다. 천천히 목을 타고 넘어가는 연한 차 향의 마지막까지 즐기다가 입을 열었다. “의사 계속할 거냐?” “네.” 연 회장은 녹차를 다시 들려다가 내려놓고는 한숨을 쉬었다. “재훈아, 이 할애비도 이제 나잇살을 먹을 만큼 먹어서 그런지 기력이 예전 같지가 않다.” “그런 말씀 마세요. 할아버지는 여전히 정정하십니다.” 재훈의 말은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니었다. 당장 아침에 문안인사를 드릴 때도 또렷한 초점과 형형한 눈빛을 보면, 십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호랑이 같은 기세를 가지고 있다 하겠다. “아니다. 이제는 다리 하나 들어 움직이는 것도 힘들고, 뭔가를 결정할 때도 겁이 많아져서 선뜻 결정하기가 힘이 든다. 다행히 너희 작은 아버지와 큰 형들이 도와줘서 기업에는 문제가 없다만, 그래도 사람의 일이란 게 어디 그것뿐이더냐.” 재훈은 할아버지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 아이들이 있어 내가 지금은 짐을 많이 들 수 있었고, 덕분에 이렇게 편하게 여생을 즐기는 것 같구나.” “아닐 겁니다, 할아버지. 아직 할아버지의 힘이 많이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녀석. 회사 일에 관심도 없는 녀석이 그리 말하니 믿기가 힘들구나. 아무튼 말이다, 요즘 이 할애비가 시간이 많이 남는다. 그러다보니 적적하기도 하고 생각도 많아지더구나.” 연 회장은 재훈에게로 시선을 맞췄다. “니가 이랬겠구나 싶더구나. 적적하고 넘치는 시간, 할 일은 없으니 생각만 많아지고,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다른 식으로 시간을 보내려 했겠지.” 연 회장은 재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분명했다. 확실히 어린 시절 재훈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나이임에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주변의 경계와 상황으로 인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때문에 밖으로 나돌게 되었고, 나돌다 못해 해외로 도망가기에까지 이르렀었다. 재훈은 입을 다물고 차 위에 떠오른 희미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조그만 계열사 하나라도 맡는 게 어떻겠냐 했더니, 단칼에 거절했다 하더구나.” 병원설립허가가 무산되고 나서의 일. “난 그때, 니가 또 다른 일을 찾으려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의외로 의사 일을 계속하겠다고 했을 때, 너의 진심을 묻고 싶었다.” “진심입니다. 지금도.” “그래, 알겠다. 하긴 회장 손자라고 꼭 경영만 하란 법은 없으니.” 서열에 밀려난 손자가 무슨 경영입니까, 라는 말은 속에 묻었다. “그렇다면 하나 묻자.” “네.” “니가 돌보는 그 아이들.” 재훈의 시선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예전에 물었다면, 당연히 변명할 말도 있었고, 훌륭한 핑곗거리도 있었다. 하지만 왜 지금 그걸 물을까? 여태 아무 말도 없으시다가? “그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왜… 왜 이제야 그걸 궁금해하시는 건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당시에는, 병원설립 허가권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했다. 돈만 밝히는 사업주가 아니라, 불쌍한 고아를 돌볼 줄 아는 자애로운 의사의 이미지를 피력해서 허가 취득에 도움을 받을 생각이라고.” 재훈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런데 이제 병원은 물 건너가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여전히 아이들을 보육원에 보내지 않고 돌본다? 이해가 되지 않더구나.” 할아버지는, 연 회장은 여전히 호랑이와 같은 기세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재계 서열 순위권에 드는 거대 기업을 세울 때 가졌던 통찰력도 무뎌지지 않았다. “그리고 최근에 그 아이와 관련돼서 몇 가지 일도 있었고 말이야.” 여전히 할아버지의 경계 안에서 관찰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묻는 거다. 의사도 하겠다고 그러고, 아이도 계속 돌보겠다고 하는 너의 생각을. 이제는 정말, 예전에 내가 알던 재훈과 달라진 것 같아서 말이야.” 재훈은 잔을 들려다가 손끝이 떨린다는 기분에 다시 손을 내렸다. 손만 내려간 게 아니라, 시선도 같이 내려갔다는 것을 재훈은 의식하지 못했다. 그런 재훈을 끝까지 관찰하는 연회장의 시선도 의식하지 못했다. ======================================= [329] 구슬(2) “니가 이 할애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이 할애비가 그래도 나름 성공한 축에 들지 않았느냐?” ‘나름 성공한 축’이라고 표현하기엔 이룬 것이 너무 거대했다. “하지만 여기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살았는지를 아느냐?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게 쉽지 않았지만, 그렇게 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이 자리였다.” “…….” “모든 것을 가지려 한다는 것은 욕심이고, 욕심쟁이는 성공하지 못한다. 고작 성공했다고 외쳐봐야 욕심쟁이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성공은 포기를 대가로 피를 흘린 뒤에 온 것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그 당시에는, 포기해야만 했던 그 순간에는 피눈물을 흘리며 땅을 쳐야만 했고, 후회하기도 했다.” “지금도…후회하십니까?” “후회라…. 그런 것 같지는 않구나. 그런 과정이 있었으니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눈으로 웃음을 짓는 연 회장의 말은 진심이리라. “지금 하시는 말씀은, 제게 포기하란 말입니까?” ‘무엇을’이라는 목적어는 빠졌지만, ‘성공’이란 목표를 상정하고 나누는 대화였기에 ‘무엇’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그럴 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건 모두 너의 선택이고, 너의 결정이다.” ‘선택’과 ‘결정’이라는 단순한 용어도 심상치 않게 들렸다.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결정하란 말일까? “의사, 할 거냐?” 몇 분 전, 연 회장이 물었던 똑같은 질문에 재훈은 즉시 대답하지 못했다. **** 눈감고 들으면 창밖으로 비가 내리는 소리처럼 들리고, 후각을 사정없이 자극하는 육향(肉香)과 침샘이 폭발할 정도로 윤기가 흐르는 육즙이 올라오는 고기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명수의 허기진 손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안 돼, 덜 익었어.” 단유가 사전에 명수의 젓가락질을 막으며 주의를 줬다. “이 정도는 다 익은 거 아냐?”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니까, 천천히 먹어.” 그런 단유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명수는 초조해서 연신 한쪽 발을 덜덜 떨어댔다. 명수는 보기 좋게 구워지는 고기에 시선을 던졌다가 맞은 편에 앉은 상미에게 시선을 던졌다. “하나씩 먹기다.” “알았어.” 건성으로 대답하는 상미 역시 고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럴 때 보면 둘 다 나이를 거꾸로 먹은 것 같았다. 단유는 피식 웃으며, 고기 한 점을 뒤집었다가, 보기 좋게 익었음을 확인한 후 가위로 먹기 좋게 썰었다. 집게에 들려 있던 고기가 가위질에 썰려 불판 위로 떨어질 때, 총성 없는 신호라도 들린 것처럼 양쪽에서 날 선 젓가락들이 달려들었다. 순간적인 반응은 명수가 빨랐지만, 젓가락질은 상미가 더 능숙했다. 명수의 젓가락이 고기를 집었을 때, 상미의 젓가락이 달려와 명수의 젓가락 하나를 세차게 쳤다.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았든, 순간적인 충격이 젓가락을 붙잡고 있던 손가락 힘을 약하게 만들었고, 다시 고기가 불판 위로 떨어져 내렸다. 상미는 매우 놀랍고도 간결하게 젓가락을 내려 떨어지는 고기의 위를 집는 대신, 날카로운 끝으로 고기를 찔러서 시간 낭비를 줄였다. 명수가 반격의 젓가락질을 하기도 전에 고기는 상미의 입으로 들어갔고, 상미의 얼굴에 득의양양한 웃음이 지어졌다. 하지만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다. 단유의 가위질이 계속될 때마다 고기가 한 점씩 불판 위로 떨어졌고, 떨어진 고기들은 따뜻한 불판의 온기를 느낄 틈도 없이 사나운 포식자들의 흉기에 찔려 사라져갔다. “천천히 좀 먹어라. 그러다 체해.” 고기 한 접시를 더 가져다주던 사장님이 명수의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이미 양 볼 가득히 고기를 채워놓고도 지기 싫어서 젓가락을 들고 틈을 노리던 명수는 상미와 불판을 번갈아 보면서 집중을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아무튼 오늘 명수 너 수고 많았다. 아, 콜라 줄까?” 단유가 대신 대답했다. “제가 가져갈게요.” 단유가 집게를 놓아야, 불판에도 평화가 찾아오리라. 단유가 콜라를 가지러 간 사이, 아저씨는 자리 하나를 가지고 와서 명수 옆에 앉았다. “들어보니까, 너 대회 나간다며?” 입안에 든 걸 우물거리느라 발음이 정확하진 않았지만, 의사를 전달할 수는 있었다. “네. 봄에 대회가 있는데, 예선전을 다음 달부터 한다고 해서요. 아마 그때부터는 나오기 힘들지도 몰라요.” “니가 안 나오면, 우리 팀 골은 누가 넣어주나?” “아저씨가 넣으면 되죠. 저기 대리 아저씨가 넣어도 되고.” “김 대리 그 양반은 아직 안 되지. 포지셔닝이 너무 약해.” “그래도 빠르시잖아요? 안쪽으로 길게 찔러 주면, 기회가 생길 거 같은데요?” “그럴까? 그런데 트래핑도 약해서 그렇게 찔러줘도 제대로 컨트롤을 못하면 슛을 못 하잖아?” “요즘 보니까, 시합 전에 연습하실 때도 트래핑 위주로 연습하시는 것 같던데요?” “그래? 나도 내 공 차느라고 안 봐서 몰랐네? 그럼 이제 김 대리를 위로 올려야 하나?” “그건 좀 위험하죠. 아저씨 말대로 포지셔닝이 아직 안 좋으신 데다가 치고 들어가는 공격에 능한 분을 위에 두면 효과가 덜하잖아요? 그 아저씨는 계속 지금처럼 미들에 두시고, 아저씨가 옆에서 가운데로 오시면 되지 않을까요?” 상미의 대답에 아저씨가 그렇게 해 봐야겠다며 웃음을 지었다. “넌 할 줄도 모르면서 입만 살았어.” “야, 내가 모르긴 뭘 몰라? 맨날 나한테 지면서.” “야, 그건 게임이잖아. 진짜로 하면 넌 나한테 상대도 안 돼.” “아이구, 잘나셨어요. 그래서 여자한테 이기면 기분 좋냐?” “웃기시네. 이럴 때만 여자냐?” “그래, 이럴 때만 그런다, 어쩔래?” 단유는 콜라를 각자의 컵에 따라 건네주며 말싸움을 말렸다. “조금 있다가 집에 가서 한 번 붙자. 내가 오늘은 꼭 이겨주고 말겠어.” “야, 니가 아무리 현실에서 잘해도, 게임은 내가 선배야.” “아우, 정말.” 아웅다웅하는 두 사람과 상관없이 단유는 계속 고기를 굽고, 자르며 조달했고, 단유의 공급이 넘치지 않도록 두 사람은 쉴 새 없이 젓가락을 놀렸다. 간간이 입안에 넘쳐서 들어가지 않을 때, 쌈을 사서 단유의 입에 넣어주는 여유도 부려보는 두 사람이었다. **** 점심이 다 될 무렵 눈을 뜬 나윤은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방문을 열고 나왔다. 조용한 거실은 언제나와 같이 텅 비어 있었다. 좀비 같은 몰골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주방을 향한 나윤은 먼저 물을 한 컵 따라 마셨다. 보통은 가습기를 틀어놓고 잠을 자는 게 좋겠지만, 어머니가 ‘가습기 쓰지 마라’고 하셔서 가습기 대신 젖은 빨래를 방에 널어두고 자는 나윤이었다. 그러나 가습기보다 효과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겨울이라 더 건조한 방 안 공기에 목이 빨리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물을 먼저 찾게 되는 나윤이었다. 물을 마신 뒤, 낮은 소리로 허밍을 하며 목을 풀어준 나윤은 고개를 두어 번 꺾으며 굳은 근육을 풀어주고, 다시 거실로 나섰다. 조용한 숙소의 짙은 적막감이 온몸으로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며칠이 지나도 쉽게 적응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숙소로 왔던 초기에 느꼈던 어색함과는 완전히 다른, 곱절로 무거운 쇳덩어리 바닷속을 유영하는 느낌이었다. 그때였다. 다른 방의 문 경첩에서 비명 같은 기성(奇聲)이 나오더니 열린 문틈으로 수련이 고개를 내밀었다. 정리되지 않은 머리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인 수련은 꾹꾹 눌러서 도저히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물 좀.” 나윤은 언제 흐느적거렸냐는 듯, 재빨리 주방으로 달려가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꺼내 컵에 담아 수련에게 바쳤다. 깊은 산 속 시원한 옹달샘을 만난, 20년 심마니 업에 종사 중인 중년의 그것과 같은 목소리로 트림을 한 수련은 잠이 덜 깬 눈으로 나윤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나윤은 자신이 왜 일어났던지 떠올려보다가 생각해냈다. “아, 조금 있다가 레슨 있어요.” “무슨 레슨?” “안무 레슨, 이라고….” 나윤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레슨은 수련도 같이 받아야 하는 것이었고, 전날 태호가 일러주었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수련은 전혀 들어본 적 없다는 눈으로 나윤을 보며 껌뻑거렸다. “몰라, 나는 더 자야겠어.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아.” 술 때문에 속이 부대껴 눈을 뜬 차에 나윤을 보고 물을 부탁했던 수련은 다시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윤은 닫힌 문을 보며 잠시 망설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대충 세면도구를 챙겨 욕실로 들어간 나윤은 클렌징으로 얼굴을 문지르다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하아.” 이런 걸 기대했던 게 아니었는데, 점점 더 마음이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면 나윤은 그야말로 성공적인 데뷔를 한 셈이었다. 중소기획사 출신 가수들 중에서 데뷔하자마자 이렇게 격렬한 호응을 받은 사례가 있던가? 데뷔와 동시에 많은 팬들이 만들어졌고, 음원 성적도 좋아서 회사는 물론, 가족들도 모두 환호성을 질렀었다. 음악 방송 외에 다른 방송에서도 ‘화제의 신인’으로 불리며 출연했고, 방송이 낯설었지만 수련의 도움으로 큰 실수 없이 막방 활동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데뷔만 하면 된다, 고 생각했던 연습생 때의 목표 이상으로 높은 성적을 거둔 탓에 앞으로 꽃길만 있으리라 생각했다. ‘막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그날을 기점으로 엉망이 되어버렸다. 모두는 아니더라도, 갤럭시즈 멤버 대부분이 숙소에 있다가 자신들을 반겨주곤 했었는데, 그날은 텅 빈 숙소가 자신들을 반겼다. 그래도 그때는 피곤해서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다음 날 인터넷에 오른 기사를 보고 사정을 알게 되었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불편해졌다. 그 마음이 겉으로 드러났었는지, 막방 다음 날 오후에 잡혀 있던 행사에서 나윤은 처음으로 노래를 부를 때 실수를 했다. 표정은 굳어 있었고, 사람들은 ‘많이 지쳤나 봐요’라고 위로했지만, 태호에게서 크게 혼이 나고 말았다. “가수가 무대에서 집중을 안 하니까 그런 실수를 하는 거잖아!” 태호가 평소와 달리 신경질적이라고 느끼기도 했지만, 자신의 실수가 더 크게 느껴져 달리 변명은 하지 못했다. 이후의 행사에서는 실수를 하진 않았다. 하지만 마음은 더 답답해졌고, 지쳐갔다. 표정은 웃어야 하는데, 그 뒤에서는 슬픔, 미안함, 자책과 비난이 오갔다. 사람들은 화려한 면을 보며 박수를 쳐 주지만, 자신이 느끼는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았고, 그래서 혼자 삭혀야만 했다. 수련은 나윤처럼 티를 내지 않았다. 대신 밤마다 술을 마셨다. 그래도 여러 행사를 다녔던 경력이 한몫해서인지 무대 위에서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고, 태호도 수련에게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수련 역시 태호에게 말을 거는 일이 없었지만. 나윤은 잡념을 털어버리려는 듯 거친 손길로 얼굴을 문질렀다. 하얀 거품이 얼굴을 뒤덮었다. 하얀 거품으로 얼굴을 모두 가렸지만, 슬픔이 가득한 눈만은 가릴 수 없었다. **** “이거 맞나요?” “맞아. 이제 이 정도쯤은 쉽게 풀 수 있나 보네.” 한동안 정체되었던 단유의 수학 실력이 하은을 만나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다른 여러 지식에 대한 갈증 때문에 잠시 손을 놓기도 했었지만, 하은이라는 뛰어난 선생님 덕분에 단유는 흥미를 잃지 않으면서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면 고등학교 2학년 수준은 훨씬 뛰어넘겠는걸?” 수Ⅱ에 손을 대기 시작한 건 한참 전이었지만, 이제야 거의 전 범위를 학습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특히 기하와 벡터 부분은 하은이 깜짝 놀랄 정도의 수준으로 이해도와 계산이 빨랐다. “가끔 수학 외에도 특정 과목의 특정 부분에 장점이 보이거든? 그 점을 염두에 두면서 전공을 미리 찾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하은은 단유의 대입까지 생각하며 조언을 했다. “선생님.” “응?” “대학, 꼭 가야 하는 건가요?” 단유의 질문에 하은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물었다. “왜? 가기 싫어?” “가기 싫다기보다는 과연 대학을 가는 것이 제게 유리한지를 모르겠어서요.” “왜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냥 뉴스 같은 거 보면, 대학을 가도 취업이 되지 않느니, 비싼 등록금 때문에 공부가 하기 힘들다느니 하잖아요?” 취업이 되지 않는 대학 교육의 질에 대한 고민, 비싼 등록금이 매년 매 학기 뉴스 꼭지를 차지하는 현실적 고민이 단유가 가진 갈등의 원인이었다. 하은은 모처럼 신중하게 이 문제에 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330] 구슬(3) 기억들을 되짚어 보아도 단유가 본인의 미래에 관해 이야기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기껏 해봐야 ‘너 커서 뭐 될래?’라는 물음에 ‘뭐든 되겠죠’ 라든가, ‘잘 모르겠는데요’ 라는 식의 싱거운 농담 같은 대화만 있었을 뿐이었으니. “내가 모든 전공을 다 겪어본 적이 없어서 정답을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대학에서 배우는 학문의 질이 높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 학문에 대한 욕심이 있다면 확실히 대학에서 공부하는 건 나쁘지 않다고 봐.” “학문에 대한 욕심이 없다면요?” “그런 말이 있지?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고. 취업을 위해서라면 어중간한 전공을 선택해서 대학을 가느니, 차라리 안 가는 게 좋을 수도 있어. 어차피 회사를 위한 자격증 삼아 대학 졸업장이 필요한 것일 뿐이니까. 그런데 같은 의미로 이 자격증이 없으면 좋은 직장, 또는 원하는 직장에 취업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지. 때문에 대학을 가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 거고.” 단유는 의미 없이 펼쳐져 있는 수학 교과서를 덮었다. “그런데 제가 처음에 제기했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 것 같은데요?” “대학을 가느냐 마느냐의 명분은 방금 말한 것에 따라 결정될 수 있지만, 결국 현실적으로 고려해볼 때는 또 다른 변수가 있지. 대표적인 경우가 등록금일 거야. 뉴스에서 보면 그러잖아? 사회 초년생이 해결하기에 부담스러울 정도의 빚을 떠안고 시작하는 청년들이라고. 아르바이트로 해결하기 힘든 금액인 건 물론이고. 누군가는 그러지. 투자라고. 좋은 직장 들어가서 열심히 일해서 갚으면 되지 않느냐고. 시작하기도 전에 불평만 늘어놓는다고. 다른 이야기지만 이런 경우가 있어. 요즘은 모르겠는데 예전에는 영업직 사원들에게 비싼 차를 사게 해놓고 벌어서 갚게 한다는 이야기. 운동선수도 이런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말하자면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동기 부여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하더라? 만약 잘되면 비싼 할부 다 갚고 원하는 차를 얻는 최상의 결과겠지만, 안 되면 전부 빚으로 돌아오는 거잖아? 사람들이 그런 관행에 대해서 미련하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판하곤 했었는데, 지금 대학생들이 바로 그런 꼴이야.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직장 들어가서 갚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꼴이.” 단유는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하은은 단유의 신호를 캐치하지 못했다. “또 다른 현실의 벽으로 느끼는 게 바로 최근의 취업난이지. 기성세대에 비해 많아진 인구 탓이라고도 하고, 힘든 일을 하기 싫어하는 청년들의 나태함이라는 비판도 있지. 하지만 결국은 늘지 않는 일자리가 문제인 거야. 과거의 예처럼 무지막지한 성장률을 보이던 시대도 아니고, 기업의 확장도 한계가 있는 데다가, 정년 퇴임이 늦춰지면서 기업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인력의 한계가 온 건데 말이다. 그리고 등록금 이야기할 때 말한 것처럼, 이미 빚을 산더미처럼 쌓아둔 고급 백수들이 어떻게 빚을 해결할 수 있을까? 좋은 직장, 혹은 고소득 직장을 노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울며 겨자 먹기로 그런 직장들만 찾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만들어놓고, 놀기 좋아한다느니, 정신이 어떻다느니 말하는 인간들은 정말 제정신인 거야, 뭐야?” 단유는 시선을 비스듬히 돌렸다. 처음에는 상담해줄 것처럼 보이던 ‘선생님’은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어느새 친구와 수다를 떠는 평소의 ‘하은’으로 변해 있었다. 이럴 때 보면 역시 하은은 외로움을 많이 타는 것이 분명했다. 방학인 데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집 밖을 잘 나가지 않는 단유 덕분에 그런 성향이 많이 줄었다지만, 또 이렇게 말이 길어지고 있다 보니 듣는 사람이 지치는 기분이었다. 그러고보니 최근에는 이모님도 하은을 슬슬 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집안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 보이는데, 쓸었던 곳을 또 쓸고, 닦았던 곳에 한 번 더 걸레를 가져다 대보는 이모님의 뒷모습이 자주 보였던 이유랄까? “뉴스 보면 대학 들어오자마자 공무원 시험 준비하겠다고 도서관에 들어간다는 사람 이야기 있잖아? 우리 때도 그런 애들이 있긴 해도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거든? 요즘은 개학 첫날부터 도서관에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꽉꽉 찬다며?” 모르죠. 가보질 않았는데. “누구는 그게 영리한 선택이라고 하는데, 진짜 그런 이유라면 굳이 대학을 들어오는 이유가 뭐냐고. 비싼 등록금 내면서 어디서도 쉽게 듣기 힘든 높은 수준의 학문 강의를 들으면서, 정작 취업은 전혀 관련 없는 엉뚱한 곳으로 가려 하다니. 그게 시간 낭비고 돈 낭비 아니니?” 그러니까, 모른다니깐요? “대학 축제 때 도서관에 들어가서 공부하면서 시끄럽다고 말하는 애들 말이야, 난 이해가 안 돼. 시끄러운 게 축젠데, 시끄럽게 하지 말라면 조용한 곳을 찾아가든가, 아니면 시끄러운 걸 감수해야지. 아니면 지가 뭔데 축제를 하라 마라야?” 잘은 모르겠지만, 저건 분명히 하은 개인의 경험담이 섞인 사연인 게 분명해 보였다. 유난히 열을 내는 모습이 그랬다. “선생님.” “응?” “선생님 생각에는 제가 대학을 가는 게 좋을까요?” “갈 수 있다면 가는 게 좋다고 본다, 나는. 넌 똑똑하고, 학구열이 뛰어나고, 특히 지식욕이 많은 아이니까. 더 많은 지식과 학문들을 배울 기회를 하찮은 이유로 팽개칠 아이는 아니라고 보거든. 취업은 그다음 문제고. 일단 대학이란 영역의 순수한 의미를 되새겨 보자면, 넌 꼭 대학에 들어가야 하겠지.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고, 역시 현실을 고려해보면 다른 대답이 나올 수도 있지 않겠어? 물론 니가 등록금을 걱정할 필요는 없고 말이야.” “왜요?” “왜긴? 재훈 오빠가 있는데, 니가 등록금 걱정을 왜 하니? 설마 그것도 부담이라고 생각하는 거니?” 단유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인생에 반칙이 있다면 재훈이 형 같은 사람이 반칙일지도. **** “명수야!” 빈 공간을 노리고 달려드는 명수를 본 팀원에게서 패스가 이어졌다. 동시에 명수를 막으려고 달려들던 상대 팀 수비수 역시 공을 향해 달렸다. 먼저 도착한 것은 명수였고, 몸으로 위치를 잡은 뒤 등으로 상대 수비수를 막았다. 그리고 날아온 공을 가슴으로 받아 땅으로 떨군 뒤, 지체하지 않고 능숙한 발재간으로 공을 다뤄 수비수를 제쳤다. 제쳐진 수비수가 중심을 잃고 살짝 비틀거리긴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명수에게로 달려들 때, 명수는 페널티 에리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페널티 아크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최종 수비수 역시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듯 달려들었고, 명수는 앞뒤에서 수비수들에게 둘러싸이는 형국이 되었다. 이러한 전개를 처음부터 지켜보던 감독은 날카로운 눈으로 명수를 지켜보았다. 명수는 평소의 활발함과 가벼움을 잊게 할 만큼 축구장 위에서 진지한 선수였다. 건성으로 훈련을 받는 것 같지만, 날이 다르게 변화되는 모습을 보이는 선수 중 한 명이었고 그래서 감독이 눈여겨보는 신입생 중 하나였다. 처음의 계획대로라면, 지난 추계대회 때 큰 대회 경험을 한 번 쌓게 해주고 싶었다. 단순한 동정이나 편애로서 내린 결정이 아니라, 장계 중학교 축구부의 미래를 위한 결정이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유소년 축구 클럽에는 발 한 번 내민 적 없는, 순수하게 초등학교 운동장 축구만 하던 소년임에도 실력이 뛰어난 이였고, 발전이 빠른 아이였으니 집중적으로 길러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도 한 이유였다. 불행한 사고와 그로 인한 추계대회 결장, 그리고 오랜 연습 불참이 불안한 마음을 들게도 했지만, 연습에 다시 참여한 직후 그런 불안은 말끔히 씻겨 내려갔을 뿐만 아니라 더욱 큰 기대를 품게 만드는 모습을 보이는 명수였다. ‘균형감각이 좋아.’ 상하가 고르게 발달한 몸과 후천적인 노력과 선천적 재능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트래핑 실력이 저런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휘했다. 최종 수비수 앞에서 오른쪽으로 한껏 기울여진 명수의 다음 행동은 분명 오른쪽으로 빠져나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공이 먼저 왼쪽으로 빠져나가며 수비수들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뒤따라 명수의 몸이 용수철처럼 왼쪽으로 퉁겨지듯 빠져나가니 이미 몸의 중심을 잃은 수비수들은 명수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말은 어렵지만, 결국 가장 간단한 페이크 동작과 드리블의 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 기본적인 동작도 명수의 훌륭한 바디 컨트롤이 섞이면 저렇게 가볍게 상대를 제치고 나아가 슛을 쏠 기회까지 만들어 주었다. 감독은 순간적으로 박수를 칠 뻔했지만, 움찔하는 정도에서 참을 수 있었다. 겨우 연습경기일 뿐이고, 다른 아이들이 보는 앞인데 감독이 체통을 잃고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교육적으로도 좋지 않으리라 판단한 탓이었다. “명수, 나와. 재진이 들어가고.” 그래도 부상에서 나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명수였기에 최대한 관리를 해줘야 했다. “조금만 더 뛰면 안 돼요?” 헉헉거리면서도 더 뛰고 싶다는 명수의 머리를 헝클어뜨려 보는 정도는 괜찮으리라. “나중에. 대회 나가면 뛰기 싫어도 뛰게 해 줄 테니까.” 춘계 대회 예선전은 이제 한 달이 남았다. 이번에는 지난번과 같은 일이 있어선 안 되리라. 명수는 장계 중학교 축구부 에이스니까. **** 연초라서 행사가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끔 지역 행사와 몇몇 기업 신년회 행사에 초대되어 가는 경우가 있었다. 보통은 특정 장르, 예를 들어 트로트 같은 장르의 가수들이 섭외되곤 하지만, 그것도 옛말이라 요즘은 여러 장르를 섞어서 무대를 연출하곤 했다. 트로트 가수 한 명, 발라드 가수 한 명, 인기 아이돌 한 팀이 기본 세트처럼 꾸며지고, 여기에 합창단 혹은 중창단, 또는 민속 공연 등의 특별 공연이 곁들여지곤 했다. 이런 자리에 신인 아이돌 그룹 ‘가디스R’이 초대되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그래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지난 연말부터 시작해서 감히 ‘대세’ 신인 그룹 타이틀을 얻은 그룹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오늘 수고 많았다.” 행사에서는 보통 두 곡이나 세 곡을 불러야 하는데, 싱글로 데뷔한 ‘가디스R’은 신곡 하나와 팝송 하나, 그리고 과거에 히트한 대중가요를 리메이크해서 불렀다. 팝송과 리메이크곡은 라디오 출연 시에 불렀다가 반응이 좋아서 행사에서도 종종 부르게 된 곡이었다. 하지만, 갤럭시즈의 곡은 부르지 않았다. “나윤이 너도 오늘은 괜찮더라.” 말이 없는 수련 대신 나윤에게 칭찬을 덧붙이는 태호였다. “고맙습니다.” 나윤 역시 건조하게 대답을 하곤 몸을 의자에 깊게 묻었다. 그래 봐야 딱딱한 시트 때문에 몸을 숨기기도 힘들지만. “모레는 행사가 두 개야. 오전 오후로 있는데, 오전에 대전을 가야 하니까 8시까지 숙소로 데리러 간다.” “내일 이야기해요.” 수련의 대꾸에 태호가 잠시 말을 멈췄다. 운전석 옆에 앉은 태호의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도 미간을 좁히며 깊은 골을 만들어 냈으리라, 예상해보는 나윤이었다. “내일은 레슨만 받으면 된다. 점심 먹고 회사로 2시까지 출근하면 되니까, 시간 맞춰서 데리러 갈게.” 과거와 달라진 또 하나는 어딜 가든 태호가 데리러 온다는 점이었다. 갤럭시즈 때는 회사로 출근하는 길은 각자에게 맡겼었지만, 이제는 그 짧은 거리도 밴으로 오고 가게 되었다. “너희는 그럴 자격이 있어.” 음흉하게 느껴지던 박 이사의 말이었다. 수련은 기분 나쁜 목소리가 귓가에 남은 것 같아 인상을 쓰며 눈을 감았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각자의 생각에 빠진 터라 조용해진 차 안의 서늘한 분위기가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된 나윤이었다. “아, 나윤아.” 검게 선팅된 밴의 바깥을 보며 빠르게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들을 세어보던 중에 태호의 물음에 나윤이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수첩을 향해 시선을 주고 있던 태호가 말을 이었다. “너 예능 하나 잡혔어.” 굳이 그 이야기를 왜 지금?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시선이 저절로 수련에게로 옮겨졌다. 여전히 찡그린 얼굴로 눈을 감고 있던 수련을 확인하고 얼른 태호에게로 시선을 돌린 뒤, 물었다. “언니는요?” “너만.” 괜히 물었나. “별로 할 거 없어. 그냥 적당히 리액션만 하다 오면 되는 거고. 대신 리액션은 좀 과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카메라에 자주 잡힐 테니까.” ‘얼굴마담’이라는 걸까? 연습생 때, 가끔 예능을 보면서 얼굴마담 역할 하는 아이돌들을 보며 웃었던 적이 있었다. 말 한마디도 안 할 거면 거길 왜 나가, 라고 친구들과 함께 수다를 떨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얼굴마담이라도 해서 얼굴을 알리고, 이름을 알려야 했다. 사람 욕심이라는 게 참 묘해서, 데뷔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더니, 그다음에는 이왕 한 김에 사람들에게 기억될 정도로 많이 순위가 높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랬더니 이제는 가요 프로에서 1등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기적인 걸까.’ 1등을 하면, 지금의 힘겨움과 짜증과 스트레스가 모두 사라지지 않을까? “다음 주 월요일 촬영이니까, 그 전에 다시 한번 미팅해서 이야기할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알아 둬.” “근데, 무슨 프론데요?” “그냥 토크 예능 쇼야.” 태호는 심드렁하게 대답한 후, 수첩을 덮었다. ======================================= [331] 구슬(4) “다녀왔습니다!” 명수가 우렁찬 목소리로 귀가를 알리자 집안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거실에 죽은 듯이 누워있던 호빵이 헥헥거리며 뛰어다니기 시작했고, 단유가 그 뒤를 쫓아 떨어진 털을 찍찍이 롤을 이용해 수거해 나갔고, 하은이 방긋 웃으며 수고했다는 의미로 명수의 등을 팡팡 때렸고, 호빵과 하은의 집중 공세를 피해 명수가 도망 다녔고, 그런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던 이모님은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샤워 후 머리를 덜 말린 채로 등장한 명수는 식탁에 앉자마자 밥그릇을 씹어먹을 듯한 기세로 허겁지겁 식사를 했다. 천천히 먹으란 말이 무소용이라 여길 정도로 기세가 대단해, 사람들은 못 본 척하며 각자의 식사를 이어나갔다. “아, 맞다. 단유야. 너 혹시 내일 시간 괜찮지?” “괜찮냐고 묻는 것도 아니고, 이미 단정 짓듯 말해버리면 내가 뭐라고 대답할까?” “그건 그냥 넘어가고, 내일 같이 학교에 가자.” “왜?” “축구부 사람이 모자라서 대타 좀 뛰어달라고.” 명수의 말에 따르면 축구부원 몇 사람이 개인적인 문제로 연습을 못 나오게 되어서 사람이 모자라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 있어?”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무슨 학원 가야 한다고 축구부 활동을 못 하게 하더래.” 하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치맛바람’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단유의 관심사는 그 부분이 아니었다. “근데 왜 나야?” “내가 너 추천했거든?” “날?” “응.” “왜?” “시간이…, 아니 너 축구 잘하잖아.” 시간이 남아돌잖아, 라는 말을 하고 싶어 했음을 모를 리 없었지만, 역시 넘어가기로 했다. “감독님이 아무 말씀 안 하셔? 아무나 써도 된다고 그래?” 그래도 춘계 대회를 준비 중인데 이렇게나 무성의하게 대체 선수를 뽑아서 연습을 시킬까? “괜찮아. 어차피 우리끼리 연습하는 건데 수가 안 맞아서 그런 거니까.” 이후의 설명에 따르면, 11명 대 11명으로 연습시합을 가지고 싶어도 숫자가 맞지 않아서 10명 대 9명으로 연습을 하는 중이었다는데, 그러다 보니 전술 연습도 제대로 되지 않고 시합을 하는 기분도 나지 않더라는 이야기였다. 한 명만 더 있어도 숫자가 맞으니까 나름 구색을 갖춰서 경기를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명수가 ‘먼저’ 제안을 했다고 말했다. “먼저?” “응.” 입술 근처에 여러 개의 밥풀이 대기 순번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나란히 붙어 있다가 명수가 혀로 핥아내자 하나씩 차례대로 쏙쏙 사라져갔다. “내 생각에는 니가 그냥 나를 써먹고 싶어서 이야기를 꺼낸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써먹긴 뭘 써먹어? 니가 뭐 대단하다고.” 라고 하지만, 히죽 웃는 명수의 모양새는 그의 대답과 영 달랐다. “잘됐네. 너무 집 안에만 있지 말고 잠깐 나가서 뛰는 것도 좋겠지.” 하은의 지원 사격이 있자, 명수가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고, 몇 알의 밥알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아래로 낙하했다. 단유는 낙하지점을 확인하는 대신 숟가락을 놓고 물로 입 안을 헹궈 식사를 마무리했다. “그러고 보니, 단유는 겨울에는 동면하는 곰처럼 밖에 잘 나가지 않는구나.” “아침마다 나가는데요?” “그건 빼고.” 그걸 왜 빼나? 그럼 논리가 전혀 안 맞는데? “그쵸? 제가 봐도 그래요. 예전에는 겨울에 얇은 티 한 장만 입고도 잘 돌아다녔던 것 같은데, 갑자기 겨울에 잘 안 나가더라고요.” 생각해보니 그건 맞는 말이었다. 어지간해서는 겨울철에 밖으로 나가는 일이 드물었다. 물론 집안에서 공부에 집중하느라 그런 것도 있지만, 어릴 때의 모습과 비교하면 확실히 잘 나가지 않는 편이었다. 사실 두 사람에게 말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한때는 겨울의 추위가 ‘추위’로 와 닿지 않았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겨울의 차가움이 맨살에 와 닿는 기분이 좋지 않아서였다.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한달까? **** 오늘도 수련은 주방의 식탁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안주는 마른 육포가 전부였다. “크으.” 소주잔을 비우고 탁 소리 나게 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고개를 들었을 때 텅 빈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북적거리던 거실이 휑하게 변한 현실이 이제는 눈에 익어버렸다. 드라이기를 찾으러 이방 저 방을 기웃거리던 명지의 모습도, 자기 드라이기를 선뜻 내주면서 카랑카랑한 웃음을 짓던 예영의 목소리도, 그런 모습과 별개로 혼자만의 여유를 즐기겠다며 거실 바닥에 드러누워 책을 읽던 지수와 옷가지들을 정리하며 내일을 준비하던 수영의 모습도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어버렸는데, 그게 눈에 익어버렸다. 철컥, 걸쇠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나윤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수련은 대답 대신 소주병을 기울였다. 나윤이 조용히 걸음을 옮겨 방으로 들어갈 때, 다시 현관문이 열리며 태호가 들어왔다. 양손에 짐을 든 태호는 수련을 흘깃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또 술이냐?” “…상관 마세요.” “목 상한다.” 대답은 쓴 소주의 끝 맛을 느끼는 소리로 대신했다. 태호는 들고 있던 짐을 들어 나윤의 방에 넣어주고 다시 나왔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던 태호는 잠시 멈칫하고 고민을 하더니, 현관문을 닫고 들어왔다. 그리고 수련의 맞은편 의자를 뺐다. “왜요?” 태호는 그 자리에 앉은 뒤, 수련의 잔을 뺏었다. 그리고 남은 술을 입안에 털어 넣고, 바로 술을 한 잔 더 따라서 마셨다. 그리고 다시 술을 붓더니, 잔을 수련에게 넘겼다. 수련은 가만히 술잔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잔을 붙잡고, 천천히 소주를 들이켰다. 비어버린 잔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태호가 다시 잔을 가져다가 술을 붓고 마신 뒤, 다시 채워서 수련 앞에 놓았다. 그러기를 2번 정도 반복하니, 소주가 텅 비워졌다. 수련은 게슴츠레 뜬 눈으로 태호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더 마실래요?” 붉어진 얼굴을 하고 앉은 태호의 눈에는 살짝 핏줄이 선 것처럼 보였다. “더 마실 거냐?” 태호가 되묻자, 수련은 일어나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 들었다. 느릿느릿한 움직임에 생기가 없다고 여겨질 표정으로 뚜껑을 따고 다시 잔을 채웠다. 태호는 찰랑거리는 소주잔을 노려보다가 신경질적으로 잡아채고 입안에 털어 넣었다. 혀끝에 남은 소주의 쓴맛을 침으로 희석시켜 삼킨 후,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길 바라는데?” “뭘요?”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냐고!” 태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음에도 수련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나른한 표정, 권태로운 표정, 생기를 잃은 눈으로 태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것도요.” “젠장.” 태호는 거칠게 소주잔을 비우고 또 비웠다. 수련은 막지 않았고, 태호는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나윤은 몸을 돌렸다. 눈을 질끈 감아보지만, 새어 나오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결국 저런 식으로 이 사태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그저 쓰린 속을 쓴 소주로 달래는 수련과, 뭘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미친 듯이 소주잔을 비우는 것밖에 없는 매니저였다. 두 사람 다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상황에 직면하여 벌거벗은 민낯을 서로에게 보여주고 있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그 모습은 위로가 아닌 상처였다. 언젠가는, 소주를 비우고 비우다 그 맛이 둔감하게 여겨질 정도로 감각이 없어질 때, 기억도 상처도 둔감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 전까진 저렇게 쓴 소주 맛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얼굴을 찌푸리고, 눈물을 쏟아내고, 비명을 질러대고, 쓰러질 때까지 쓰린 속을 부둥켜안고 살아야 하리라. “수련아.” 태호의 목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수련의 대답이 들렸다. “네.” “넌 포기할 수 있겠니?” “…….” “난 못하겠다. 못 할 거 같다. 이렇게는 안 될 거 같다.” 어쩌면 수련보다 더한 애착을 보이는 게 태호일지 모른다. 아니, 다른 멤버 모두를 합친다 해도 태호보다는 못할지도 모른다. 태호에게 갤럭시즈는 친자식 그 이상이었고, 그 이상의 믿음과 그 이상의 집착이 서려 있는 팀이었으니까.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우리.” ‘우리’란 말에 태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우리’란 말이 이렇게 와 닿았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가슴에 콱 꽂히는 기분이었다. “…없지는 않아.” 몇 번이고 입술을 짓이기다가 힘겹게 꺼낸 그 말에 수련이 고개를 들었다. 술김에 하는 말일까, 싶어 보지만 취한 듯해도 아직 눈빛이 형형한 태호였다. “어떻게요?” 하지만 태호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혹시….” 태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수련의 말을 막았다. “하지 마.” ‘여기서 하지 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여기서는, 나윤이 같이 있는 이곳에서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 말은, 실현 가능성을 떠나 나윤에게 너무 미안한 말이었고, 나윤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될 말이었다. “뭔데요, 그게.” 수련의 시선이 태호 뒤로 옮겨졌고, 태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말씀해보세요. 그런 방법이 있으면…저도 알고 싶어요. 저도 돕고 싶어요.” 태호는 말하지 못했다. 수련도 입을 닫았다. 나윤은 두 사람이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쉽게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나윤이 갤럭시즈를 돕고 싶다는 말은 반쯤은 진심이었다. 나윤 스스로는 지금의 성공에 만족할 뿐만 아니라 이대로 쭉 ‘가디스R’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지만, 또 한편으로는 ‘갤럭시즈’가 부활해서 선배 그룹으로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무대 바깥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조금은 줄어들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은…너무 힘들어.’ 이기적인 년, 지밖에 모르는 년, 이라는 말을 속으로 되뇌며 나윤은 두 사람을 향해 되물었다. “방법, 알려주세요.” 두 사람이 침묵을 지키자, 나윤은 태호 앞에 있던 술잔을 채갔다. 태호가 말릴 틈도 없이 나윤은 잔에 든 술을 꿀꺽 마셨다. 생애 처음으로 마시는 소주의 맛은, ‘독’했다. “저는 알면 안 되는 거예요? 저도 수련 언니랑 같은 팀이잖아요? 수련 언니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모습 보기 힘들단 말이에요. 도와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있다면 어떻게든 같이 노력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런 거 아냐.” 수련의 대답이 꽤 차갑게 느껴져서, 잠깐 사이 달아올랐던 열기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수련아.” “오빠. 오빠가 하려는 말, 정확히는 몰라요. 그런데, 짐작은 가요.” “수련아.” “근데, 그건…안 되잖아요. 못하는 거잖아요.” 안 되는 일이고, 못 하는 일. “뭔데요, 그게. 왜 나만 빼고 그래요? 나는 알면 안 되는 일이라는 듯이, 그렇게 이야기하지 마요. 왜 그래요? 이러니까 제가 무슨 따돌림당하는 기분이잖아요!” 울먹거리는 나윤의 목소리에 태호도 당황했다. “아냐, 그런 거.” “그럼 뭔데요!” “계약 해지.” “네?” 수련의 대답에 나윤의 눈물이 그쳤다. 그리고 동그란 눈으로 수련과 태호를 번갈아 보았다. “맞아요?” 수련의 질문에 태호가 대답을 망설였다. “계약 해지 후 소속사 이전. 그렇죠?” 태호의 대답은 없었지만, 나윤은 그 말이 태호가 하고 싶었던 말, 아니 생각하고 있었던 계획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어차피 회사는 갤럭시즈 멤버들과 계약 해지를 진행 중에 있었다. 그렇다면 단체로 계약을 해지한 이후, 다른 소속사로 이전하여 똑같은 그룹으로 재데뷔를 하는 방법, 이 태호가 계획했던 방법일 테다. 그리고 그렇게 진행할 경우, 태호 역시 회사에 사표를 내고 같이 옮겨간다는 계획인 것 같았다.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건, 수련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갤럭시즈의 메인보컬은 수련이었으니까. 그런데 만약 수련이 계약을 해지하고 옮긴다면? ‘나는?’ 나윤은 멍한 눈으로 수련을 바라보았고, 수련은 고개 숙인 태호를 바라보았으며, 태호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가볍게 놀린 자신을 탓했다. ======================================= [332] 구슬(5) 화려한 장식들로 꾸며진 침실 안에 가득 들어찬 진득한 살내음을 지우려 재훈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 냄새가 거북했던 것인지, 아니면 재훈이 일어나면서 흘러내린 이불 때문에 추위를 느낀 것인지, 옆에 누워 있던 여자가 살짝 몸을 떨었다. 재훈은 침대를 빠져나와, 여자의 위로 이불을 덮어준 뒤 거실로 나왔다. 살내음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거실의 서늘함이 다가왔다. 재떨이를 소파 앞 테이블에 올려두고, 재훈은 천장을 향해 연기를 뿜었다. 방 안에는 실습 기간 만난 여자 후배가 벌거벗은 채 누워있고, 저 멀리 또 다른 공간에는 자신이 후원해야 하는 ‘아이들’이 있었고, 멀지 않은 곳에 살고 계신, 새벽 잠이 없는 할아버지가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몇 시간 뒤엔 주영이 출근준비를 하고 있을 테고, 또 그 후에는 그의 아버지와 형이 회사에 나가서 오전 회의를 하고 있을 것이다. 어떤 친구는 가업을 이어받기 위한 경영 수업을 받고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친구는 전날 마신 술이 덜 깬 채로 호텔을 나서고 있을 것이다. 모두 다른 모습, 다른 형태로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뭘 해야 하지?’ 할아버지의 도움 따위 필요 없어, 라는 건 아니었지만, 할아버지처럼 혼자 일어서겠어요, 라고 자신만만하게 외쳤던 어린 날의 치기가 지금은 부러울 정도다. 중간에 길을 잃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자는 생각에 그 힘든 의료실습도 버텼는데, 이제야 이런 공허함을 느끼는 이유가 뭘까? 굳이 핑계를 대자면 할아버지가 일깨워준 덕분이라 하겠지만, 연 회장의 말이 나오기 전에 재훈은 자기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을 잔뜩 하고 있었다. 특히 다친 단유를 병문안 갔을 때, 재훈은 ‘책임감’의 무게를 느꼈다. 그리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책임감을 떠안을 준비가 되었는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아니라고. 또래에는 벌써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친구도 있지만, 여전히 솔로인 친구들도 있었고, 솔로로 지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난 아직 가족을 책임질 자신이 없어.” 핑계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저 지금 당장 여자가 없으니까, 혹은 그냥 인생을 즐기고 싶으니까, 라고. ‘책임감’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실감해본 적이 없었던 재훈은, 마치 자기가 그렇게 살아가듯, 그들도 그렇게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의 대화를 나눈 여자를 집으로 끌고 들어와 침대에 눕히는 일을 할 때처럼. 그러나 이제는 바뀌었다. 모든 게 그대로인데, 모두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데, 자신만 달라졌다. ‘아니, 실은 그 반대일지도.’ 재훈은 담배를 재떨이에 꾹 눌러 꺼버렸다. 조금의 불티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힘껏 비벼 껐다. **** “막아!” 페널티 아크를 지나 골대를 눈앞에 둔 공격수가 힐끗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골키퍼가 지키지 못할 빈 공간을 노려 오른발을 힘껏 휘둘렀다. 뒤에서 쫓아오던 수비수가 놓쳤다는 생각에 다리가 풀릴 때쯤, 단유는 몸을 날렸다. 그리고 날아오던 공을 주먹으로 힘껏 쳐냈다. “우와!” 단유의 슈퍼세이브에 수비수와 몇몇 상대 선수들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잘하는데요?” “그래.” 코치가 눈을 번뜩이며 단유를 보았고, 감독은 심각한 얼굴로 단유와 그 뒤의 플레이들을 지켜보았다. 대략 30분 정도의 플레이 타임 동안 단유가 보인 플레이는 꽤 주목할 만한 것이었고, 코치는 왜 저런 실력을 갖춘 아이가 축구부에 들지 않는지 궁금해했다. “축구부 가입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려울걸.” 감독은 턱을 문지르며 센터라인을 지나는 공격수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왜요?” 외부초빙 형식으로 데리고 온 코치는 감독의 대학 후배였고, 그래서 장계중학교 내부 사정을 잘 몰랐다. “쟤, 전교 1등 하는 애야.” “…뭐가요?” 코치는 감독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공부요?’라고 물었을 때, 감독이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 했을 때, 코치는 ‘세상에 저런 녀석도 있구나’라고 중얼거리며, ‘그래도 트라이 해봐야 하지 않을까’라고 물었다. “1년 전에 물어봤었다.” 명수가 축구부에 가입할 무렵, 구경나온 단유가 같이 뛰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었던 감독은 단유에게 권유했고, 단유는 거절했다. “공부해야 돼요.” 그리고 감독이 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지난 1년간, 단유라는 녀석이 1학년 전교 1등을 매번 차지한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사실 축구선수가 되는 것보다, 공부 쪽으로 가는 게 훨씬 낫지.” 매일 근육통에 시달리고, 토가 나올 정도로 뛰어도 특출난 실력과 확실한 인맥이 없으면 주목받기 힘든 것이 프로축구 선수였다. 대한민국 베스트 일레븐에 꼽힐 정도의 선수가 된다면 모를까. 코치도 감독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입을 굳게 닫고 경기를 지켜보았다. 어중간한 실력 때문에 중학교 임시 코치직이나 하는 수밖에 없는 미래를 저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기는 어려웠으니까. “뭐, 그래도 동아리 활동인데 한 번 물어나 볼까.” 코치는 감독을 째려보았다가 신경질적으로 기록지를 넘기며 투덜댔다. “진짜 선배 변덕은 알아줘야 합니다.” “변덕이 아니라 중학교 축구부 감독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마인드야.” 그러는 사이, 명수에게 이어진 패스는 그대로 골키퍼의 빈틈을 노려 골망을 가르는 골이 되었다. “이예!” 명수가 터뜨린 환호를 보며 단유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가끔은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언제까지 겨울바람을 피하고만 있겠는가. “그래도 골키퍼는 좀 그러네.” 단유는 팔뚝을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황량한 겨울 산 위에 걸친 파란 하늘에 찢어진 솜뭉치 같은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는 중이었다. **** 경기가 끝나고 사이좋게 집으로 돌아온 단유와 명수는 하루 종일 심심해하던 하은과 수다를 떨며 저녁 식사를 기다렸다. “감독님이?” “네. 2학년 때 동아리 활동 삼아 하는 게 어떻겠냐고.” “그래서? 뭐라고 그랬는데?” “할 시간이 없다고 했죠.” 단유는 자신이 축구부에 들어가는 게 민폐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큼 축구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축구선수로서의 꿈을 키우며 필사적인 아이들의 훈련에도 자신은 방해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않은 것은, 감독이 또 다른 말로 자신을 꾀려 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고, 그래서 고집스럽게 ‘공부’를 핑계로 감독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다. “같이 하면 좋을 텐데.” “주말에 가끔 같이 하는 정도면 되지, 뭐.” 그때, 벨 소리가 울렸고, 하은은 자신의 핸드폰을 집었다. “여보세요? 아, 매니저님! 안녕하세요.” 명수와 단유가 서로 쳐다보며 무슨 내용일까를 궁리할 때였다. “수련 씨요? 아뇨. 연락 없었는데. 잠시만요. 혹시 수련 씨한테 연락 온 적 있었니?” 단유와 명수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없다는데요.…네. 네, 알겠습니다. 들어가세요.” 통화를 마친 하은에게 명수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수련 씨가 안 보인다고, 혹시 우리 집에 온 건 아닌지 묻더라.” “또 무슨 일 있는 거예요?” “글쎄다.” 하은과 명수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 단유도 깊이 생각에 빠졌다. ‘지난번 수련 누나가 불안해 보이던데, 그 때문일까?’ 연습실에서 눈물을 보이던 수련의 모습이 떠올랐다. **** 태호는 핸드폰을 집어 던지려다, 꾹 눌러 참은 뒤 깊은 심호흡으로 가슴을 진정시켰다. ‘어디 간 거지?’ “연락 안 돼?” 태호는 옆에서 핸드폰을 붙들고 있는 나윤에게 물었지만, 나윤은 고개만 가로 저었다. 시계를 본 태호는 이를 악물었다. “여보세요? 아, 저 에이바운스 장 실장입니다. 네, 다름이 아니고요, 저희 가디스R의 수련이가요, 지금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응급실에 갔습니다. 네, 그래서 불가피하게 금일 행사에 갈 수 없을 것 같아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예. 아뇨, 불참은 아니고요, 나윤이는 갈 겁니다. 네. 혼자라도 잘할 수 있습니다. 가서 말씀드리는 것보다 미리 말씀을 드리는 게 맞을 것 같아서요. 네. 예, 죄송합니다.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태호는 연신 굽신거리면서 통화를 한 뒤, 핸드폰을 노려보다가 가슴 안쪽 포켓에 집어넣었다. “가자.” “저 혼자요?” “…그래.” 어떻게요, 나 저 못해요, 같은 말은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나윤은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밴에 올라탔다. 조수석에 앉은 태호는 눈짓으로 로드매니저에게 신호를 보낸 뒤,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 “걱정할 필요 없어. 안 될 거니까.” 수련의 말에 나윤이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울먹거리듯, 화가 난 듯했던 수련의 목소리가 다시 이전처럼 나른하게 변했다. “그렇죠? 계약 해지 후 소속사를 이전한다고 한들, 어느 소속사에서 저희를 받아주겠어요?” 소주잔을 빙글 돌리면서 안에 담긴 술을 보던 수련은 피식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소주를 들이켰다. 눈꼬리에 달린 눈물방울이 보였다. 나윤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려다가, 본심이 드러난다는 생각에 급히 숨을 들이켰다. 그러다 사레가 들려 콜록거리자, 수련이 소주잔 대신 물컵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태호가 느릿한 어조로 수련의 말에 답변했다. “그래. 받아줄 소속사는 없지.” “그리고 저도 이 회사에서 나올 방법이 없죠.” 다른 멤버와 달리 수련은 아직 계약 기간이 남은 데다, 회사에서 놓아줄 리가 없었다. 안 되는 일이었고, 못 하는 일이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데, 무슨 방법을 생각했을까. 우리 태호 오라버니는.” 나윤이 보니, 수련은 이미 한계를 넘은 것처럼 보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주를 들이키는 수련은 감정 기복이 심한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는 나른한 모습을 보이더니, 이제는 비웃는 듯이 입꼬리를 올리고 흐릿한 시선으로 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라버니도 마찬가지잖아? 못 그만두잖아? 돈 벌어야지? 돈. 이제 오라버니도 돈 많이 벌 거잖아? 그치? 실장도 됐으니까 돈 많이 벌 거잖아. 괜히 우리 위하는 척하지 말고, 그냥 일해요, 일.” 수련의 말이 자극되었을까? 태호가 눈을 부라리며 고개를 들었다. “말이 심하다.” “심하긴? 이게 현실이지, 뭐. 출중한 능력을 갖추신 우리 박 이사님이 늘 하시는 말씀처럼 ‘현실을 깨달아라.’ 이거잖아. 안 그래요? 응?” 태호는 손바닥으로 오른쪽 눈을 꾹 누르며 비볐다. “오빠도 정신 차리고, 나도 정신 차리고, 나윤이는…원래 똑똑하니까 우리처럼 방황하지도 않고. 좋네. 이렇게 가자고.” 꿀럭꿀럭 거리며 소주잔이 채워지는 소리가 들릴 때, 태호가 말했다. “그깟 회사, 차리면 된다.” 소주 채워지는 소리가 멈췄다. ======================================= [333] 구슬(6) 태호의 말에 수련과 나윤은 모두 경직된 얼굴로 태호를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태호는 집을 나왔고, 수련도 흐느적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나윤이 주방을 치우고 방에 들어간 뒤, 거실에 적막이 찾아왔다. 그 뒤, 수련은 물론 태호나 나윤도 그 일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말을 꺼내는 일이 없었다. 세 사람이 온종일 대화도 없이 움직이니, 함께 따라다니던 로드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도 덩달아 침묵에 동참했다. 불편한 동행이 이어지면서 각자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리고 저녁 행사 때문에 다시 숙소를 찾게 된 태호는 거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나윤을 발견하게 되었고, 나윤은 수련이 사라졌음을 알렸다. “아까 행사 끝나고 숙소 올라간 거 아냐?” “뭐 좀 살 게 있다고 저 보고 먼저 올라가라길래.” “너희 지금 마음대로 움직이면 안 되는 거 몰라!” 이제는 인지도가 없던 시절과 다르다. 언제 어디서 어떤 사진이 찍혀서 인터넷에 화제가 될지 모른다. 그래서 필요한 게 있어도 매니저가 대신 사다 주는 형편이었는데. 나윤은 이번에도 근처 슈퍼마켓에서 술을 사러 간 거겠거니 생각했던 것인데, 시간이 지나도 수련이 나타나지 않아서 당황하던 차였다. “전화는?” “안 받아요.” 결국 행사까지 한 시간이 남은 상황에서 더 기다리지 못하고, 수련의 불참을 통보한 태호는 나윤만 데리고 차에 올랐다. “샵 갈 시간 없으니까, 여기서 대충 얼굴만 하고, 도착해서 머리 좀 손 보자.” 스타일리스트는 나윤의 옆자리에 앉아 메이크업을 시작했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도 스타일리스트는 능숙하게 해냈고, 도착할 무렵 썩 좋지도 않지만, 나쁘지도 않게 꾸며졌다. 무대에 오르기를 기다리는 나윤을 본 태호는 대기실을 나와 복도 한 편에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역시나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제기랄.”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 태호가 생각한 소속사 이야기는 홧김에 나온 말은 아니었다. 사실 이런 일이 있기 전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일이 급하게 되다 보니 저도 모르게 편법을 생각하게 되었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바로 ‘단유’였다. 아니, 단유 뒤에 있다는 ‘연성’이 먼저 떠올랐다. 솔직히 태호는 연성과 아무런 접점이 없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유를 통해 주영을 만난 적도 있었기에, 어렵지만 부탁만 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단유가 갤럭시즈를 좋아하기도 하고, 자신이 단유를 잘 챙겨줬다고 생각했기에, 단유와 주영이라는 라인을 타고 올라가 작은 소속사를 만들 수 있게 도움을 달라고 부탁해 보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는 만나기도 어려울뿐더러, 만나더라도 거절당할 게 분명해 보였기에 계획만 했을 뿐 실행은 꿈도 꾸지 않았다. “자, 여기.” 박 이사가 내민 계약 해지 통보서를 보기 전까지는. “뭡니까?” “뭐긴. 갤럭시즈 계약 해지 통보서지. 계약 기간이 남았지만, 여기 있는 불가피한 상황이라는 조항에 따라 정식으로 계약 해지를 하는 거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정말 이렇게 되는 겁니까?” 박 이사는 등을 돌렸고, 태호는 굽은 등을 펴지 못한 채 이사실을 나와야 했다. “수영이니? 응. 나다. 어디, 집이야? …잠깐 볼 수 있을까?” 태호는 전화를 끊었다. 회사 주차장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그 앞에서 수련을 만났다. 수련은 태호가 들고 있는 서류봉투에 눈을 주었다. “뭐예요.” “…들어가 있어.” “뭔데요, 그거.” “아무것도 아냐.” 수련은 날 선 눈으로 태호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하지만 수련의 눈빛은 계속 뇌리에 남아 태호를 자극했고, 결국 태호는 결심에 이르렀다. ****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저 장 태호라고 합니다.” ―알아요. 몇 번 뵀었잖아요? 단유가 도움을 얻기도 했고요. “도움이라뇨. 오히려 제가 도움을 받았죠.” 주영과 통화를 하는 태호의 마음은 절박함 뿐이었다. 수영에게 건네줄 서류를 끝내 넘기지 못하고 잘 지내고 있어라, 조만간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로 헤어진 직후의 일이었다. 영업직을 뛰어보진 않았지만, 술 취한 친구들이 하소연할 때 들었던 것처럼, 절박하면 뭐든 하게 된다는 그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며 주영의 번호를 누른 태호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만나서 이야기할까요? 주영과 약속을 잡은 태호는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동시에 머릿속으로 완벽한 계획을 세워야 했다. 그래야 모두가 덜 상처받고 빨리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 “…그런 일이 있었군.” 주영은 심드렁한 재훈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 있으세요?” “일은 무슨.” 좋게 말하면 재기가 넘치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그저 까불거림이 심한 정도인 평소의 재훈과 달리, 지금의 재훈은 어쩐지 흐리멍덩해 보였다. “도와주실…건가요?”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돈이 한두 푼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비전이 확실하지도 않은 사업이 분명해요. 단유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도 아니고, 단유에게 도움이 될 일도 아니죠. 우리가 도울 어떤 명분도 찾기 힘드네요.” “만약 도와주면?” “좋아하겠죠. 그들이.” “애들은?” “네?” “애들은 좋아할까?” “…아마도요? …진짜 무슨 일 있어요?” 재훈은 손을 저었다. 그리고 소파에 더욱 깊게 몸을 묻더니 눈을 감아버렸다. 주영은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한 채 곁에 서서 멀뚱히 그 모습을 바라보아야 했다. “주영아.” “네?” “나, 이 짓 못 해 먹겠다.” “네?” 주영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혹시 의사가 되는 일이 힘들어서 그런 걸까? 연성이란 타이틀을 과시하지 않고, ‘연재훈’이란 이름으로 인턴 면접을 보러 다닌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되어서,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겠다는 말일까? “할아버지가 독일로 가라네.” “네?” “독일에서 해외 지사 하나 맡아서 머리 좀 식히라네.” 이번에는 되묻는 대신 재훈의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아니면 거기서 그냥 자리 잡고 살던가. 뭐,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여긴…너무 지긋지긋해.” “선배.” “아, 정말 이제는 안 되나 보다. 확실히 해도 해도 안 되는 일이 있긴 있어. 그치?” 벌떡 일어난 재훈이 거실 창가 쪽으로 향했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보며 눈이 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며 재훈은 말을 이었다. “알잖아, 넌. 내가 왜 병원을 지으려고 했는지. 왜 계속 그룹 안에 들어가지 않고 겉으로 나돌았는지. 기회를 잡으려고. 틈이 보이길 기다리다 기회가 오면 바로 비집고 들어가려고. 그런데 그냥 들어갈 수 없으니 준비를 단단히 해서 어지간한 공격에 당하지 않으려고 그랬던 거, 너도 알잖아?” 물론 주영도 알고 있었다. 자신도 그런 이유로 안에 심어져 있던 사람이었고. “그런데 틈이 안 보이네, 틈이. 확실히 우리 집안 사람들이 철두철미해. 이렇게 허술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도 경계를 늦추지 않잖아.” 오히려 더 정신을 쏟지 못하게 일부러 이상한 소문을 만들어 찌라시에 뿌릴 정도니까. “할아버지가 더는 못 봐주겠나 보더라.” “그럼….” “안 되는 걸 억지로 붙잡고 있어서 뭐하냐? 포기해야지.” “의사는요?” “그냥 시간 때우기였지, 뭐.” 하지만 주영이 보기에 분명 재훈은 과거의 재훈과 달랐다. 특히 단유나 명수를 만나고, 그들의 후견을 자처한 이후 조금씩 변했다. 그래서 재훈이 계속 의사를 계속하려고 한다고 믿었다. “주영아.” “네.” “오피스텔 명의는 단유 앞으로 옮겨줘라. 세금 문제도 해결해 주고.” “설마….” 재훈은 큰 손바닥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깊이 막힌 숨골이 트인 듯 길게 숨을 토해낸 재훈은 주영을 돌아보았다. “후견인 포기신청 내고, 난 그만할래.” 웃음을 짓는 재훈을 보는 주영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 “네? 정말입니까?” 태호는 전화기를 붙잡고 말했다. “네, 네. 아뇨,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할 겁니다! 네!” 태호는 핸드폰을 끊고 주먹을 꽉 쥐었다. 주영이 기획사 설립 자금을 투자하는 것은 어렵다고 이야기했을 때, 실망감과 좌절감에 진흙탕 깊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융자’ 형식으로 빌려주겠다는 말이 이어지며 태호는 100m 전력 질주를 한 사람처럼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는 것을 느꼈다. 진흙탕을 벗어나 하늘 위로 도약하는 새가 되었달까? 태호의 목소리를 들으며 씁쓸한 웃음과 함께 전화를 끊은 주영은 카페 바깥을 쳐다보았다. 도와줄 이유가 전혀 없지만, 재훈은 도와주기로 했다. “이런 것도 지겨워. 내가 애들 후견을 보겠다고 했지, 지들 후견을 보겠다고 했냐고?” 찌라시에 돌던 소문도 못 들은 척, 그냥 지나가는 바람인 것처럼 넘겨버리는 것같이 행동했지만, 속으로 쌓이는 스트레스는 어쩔 수 없었다. 모두 재훈 본인을 ‘돈’으로 보고 ‘사립 은행’ 정도로 여겼다. 그러니까 단유가 납치당하는 일도 생겼던 것이고, 자신에게 ‘투자’를 바라는 이상한 시선들도 늘어났던 것이리라. “그냥 이걸로 털자.” 태호를 돕는 것은 사실 태호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에 대한 마지막 미련을 끊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이 있는 한 이런 제안은 수도 없이 들어올 것, 이라고 생각한다는 재훈은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후견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래도 이거는 해주고 떠나자고. 그래야 애들한테 덜 미안하지.” 재훈은 집을 정리했고, 가정법원에는 ‘법정 후견인 포기 신청서’를 제출했고, 출국 전까지 연 회장의 집으로 들어가 있기로 했다. 상념에 빠져있던 그때, 카페 문에 달린 종이 딸랑거리더니 하은이 나타났다. “어이, 오랜만!” 방긋 웃으며 나타난 하은을 보며 주영도 손을 내밀었다. “뭐니, 이게. 악수라도 하자고?” “아, 미안. 습관이 돼서.” “관두고. 뭐 마셨니? 아니면 뭐 시킬까?” “너 마시고 싶은 거로.” 카페 안을 둘러보던 하은이 주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뭐냐, 그 묘한 반응은?” “…….” “어라? 이것 봐라? 너 무슨 일 있어? 남자 생겼어? 고백했다 차였어? 아니면 회사에서 짤렸니? 에이 그건 아니다. 너처럼 열심히 일하는 애를 짜를 회사는 아니지. 아니면 큰 실수라도 한 거야? 시말서 같은 거 쓰고 그러나? 그거 반성문 같은 거 아니지? 학교 다닐 때 반성문 한 번 써본 적 없는 니가 그런 걸 쓰려면 고민 많이 되겠다.” “그런 거 아냐.” 하은은 주영을 보다가, 등을 등받이에 기댔다. “그럼 뭔데?” 주영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 어렵게 재훈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하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하은은 탁자를 거세게 내려치며 말했다. “그게 말이 돼? 갑자기? 그게 뭔데? 와, 그 사람 성격 고쳤나 했더니, 여전히 똘아이네. 내가 그래서 말했잖아, 그런 사람이랑 같이 있지 말라고. 그 사…아니, 그 새끼는 말이야, 전형적인 재벌 3세야. 위아래도 없고, 오직 저 혼자 사는 척하는 놈이라고. 주변에서 아무리 잘해줘 봐야, 그게 당연한 줄로만 알고, 지 기분 내키면 그때만 좋은 사람인 척하는 그런 새끼라고. 내 언젠가 이럴 줄 알았다. 이래서 내가 그 사람을 안 만나려고 했던 건데. 젠장.” “…오피스텔은 단유 명의로 돌렸어.” “진짜, 이렇게 끝?” 주영은 피식 웃었다. “그런데 가정법원에서 포기 사유가 정당치 않다고 신청 각하 결정을 내렸어.” “뭐? 그럼 어떻게 되는데?” “그래도 독일로 간대. 어차피 지금처럼 돈만 대주면 되는 거 아니냐고. 3년만 있으면 애들도 성인이 되니까, 그러면 자연스럽게 후견인 자격도 말소가 될 테니까.” “인간 정말….” “아무튼, 그래서 말이야. 넌 어떻게 할래?” “나? 무슨 말이야?” “내가 니 월급은 챙겨줄 수 있긴 해. 그러니까 지금처럼 지내는 것도 괜찮고, 아이들한테는 좋을 수 있지. 하지만 예전과는 조금 다를 거야. 지금까지처럼 전폭적인 지원 같은 건 없어질 테니까. 아마, 지금보다 돈이 줄어들 거야. 이모님도 더는 고용하기 힘들 거 같고.” “…아주 관계를 끊겠다는 거네?” “…응.” “아주 씨발 놈이네.” ‘애들이 무슨 다마고친줄 아나’라고 씰룩거리며 뱉는 하은의 거친 욕설에 주영은 씁쓸한 미소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 태호는 빠르게 움직였다. 흩어진 아이들을 불러 모으는 데 성공했고, 계획을 설명했다. 아이들은 망설였지만, 태호의 설득과 자신감에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가졌다. “계약금은 못 줘. 미안하게도 말이야. 하지만, 그래도 난 꼭 너희들과 같이하고 싶다. 대중이 알아주지 않았다고? 아니야, 난 너희들이 꼭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내 눈과 귀가 그렇게 말하니까.” 오글거린다며 눈물 글썽이던 명지가 주먹으로 태호의 등을 두들겼다. 지수는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태호의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고마워요.” 수영은 한 걸음 뒤에 서 있다가 태호와 시선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다. “우리, 함께 가요.” ‘우리’가 된 멤버들과 태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 “뭐야, 이게!” 박 이사의 책상에 날아온 서류는 ‘전속계약효력 부존재’ 소송에 관한 것이었다. “수련이 어딨어?” “숙소에서 벌써 짐 뺐던데요.” “야! 지금 니가 그렇게 느긋하게 말할 처지야! 당장 나가서 찾아와!” 새로 매니저로 발탁된 남자는 박 이사의 호통에 헐레벌떡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 시간, 연습실에는 멍한 눈으로 거울을 바라보는 나윤이 있었다. “같이 갈래?” 수련은 그렇게 물었고, 자신은 대답하지 못했다. “난, 가야 돼.” “언니.” “너도 가자. 가서 같이 해. 우리같이 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나윤은 가지 못했다. 집에서도 반대했고, 자신도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멍한 눈으로 거울을 바라보고 있을 때, 연습실 문이 열렸다. “여기 계셨네요.” 단유가 연습실 안으로 들어왔다. ======================================= [334] 도하(1) 주영과 대화를 마치고 돌아오던 하은은 운전에 집중할 수가 없을 정도로 심란한 마음이 들었다. 때문에 두 번이나 노란 불에 페달을 깊이 밟아야 했고, 옆에서 끼어드는 차를 보지 못하고 박을 뻔한 것이 세 번이었다. “야, 정신 나갔어!” “죄송합니다.” 결국 하은은 차를 적당한 자리에 주차를 시킨 후, 마음의 평화를 위해 평소 듣던 음악 대신 라디오로 클래식 채널을 맞추고 음악을 들으며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과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를 위한 전주곡 Prélude à L’après-midi d’un faune」을 들으며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주영의 앞에서는 괜히 센 척하며 기세등등하게 행동했지만, 실은 혀가 바싹 마를 정도로 침착하지 못했던 하은이었다. 때문에 주영 앞에서 더 과장되게 떠벌리며 화를 내는 척했다. “어떡하니.” 하은의 마음을 심란하게 했던 것은 역시 두 아이의 얼굴이었다. 그 천진한 아이들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져야 하는 걸까. 아니 어떻게 이 이야기를 전달해야 하는 걸까. 주영이 직접 말하겠다는 걸 괜히 말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주영이라면 아이들에게 너무 매정하게 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섰을 뿐이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저녁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 말하는 게 낫겠지?’ 음악과 바람이 도움되었던 것인지, 일단 당장 하은이 해야 할 일은 결정됐다. 차를 몰고 다시 도로 위에 오른 하은은 앞만 보며 달렸다. 당장의 일은 결정했지만,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을 짓지 못했다. 마치 당장의 목적지인 오피스텔로 향하는 것 외에는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미래 따위는 일단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일이었다. ‘천천히 생각해도 되겠지.’ 지금 당장 자신의 문제를 걱정하는 것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았고,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만약 그런 생각에 몰두하게 되면 자신도 재훈과 다를 바 없어진다고 여겨지는 탓도 있었다. 하은은 제시간에 도착하기 위해 조금 빠르게 차를 몰았다. 집에 도착했을 때, 단유와 명수는 거실에서 하은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어요?” 라고 환하게 인사해주는 두 아이에게 미소를 지은 하은은 얼른 밥 먹자, 고 재촉해 식사를 시작했다. “아, 아까 태호 형한테 전화 왔었어요.” “매니저님한테?” “회사 그만뒀대요.” 단유는 태호에게서 온 전화 내용을 일러주었다. 이미 주영에게 언질을 받은 터라, 내용은 대충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갤럭시즈를 위해 세운 것이라는 사실은 단유에게서 처음 듣게 되었다. “그럼 갤럭시즈로 다시 컴백하는 건가?” “그런가 봐요. 수련 누나도 그 회사로 옮겼다네요.” 완전체로 컴백하기 위해 준비를 시작했다는 태호의 말에 단유는 일단 축하의 말을 전하긴 했다. “가디스R은?” “그건 모르겠네요.” 태호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사실을 들은 하은은 그쪽도 나름의 사정이 있겠거니, 라고 넘기며 화제를 마무리했다. “그건 나중 일이고 일단 밥부터 먹어.” 이미 열심히 먹고 있던 명수는 물론이고 단유도 이후에는 특별한 대화 없이 식사를 끝냈다. 정작 말을 꺼낸 하은이 깨작거리며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지만, 명수와 단유는 거기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 하은은 식탁을 떠나지 않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미안하다고 느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묻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이 뭔가 할 말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저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또 한 번 저 두 사람이 그동안 알게 모르게 눈칫밥을 먹으면서 살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미안함이 가중되었다. 하은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되도록 두 사람이 불편하지 않게 표현을 가려가며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마쳤을 때, 명수의 표정은 확실히 처연하달까, 슬프달까 그런 표정이었는데 반해 단유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덤덤했다. 하지만 눈가의 주름이 살짝 잡힐 정도로 깜빡거림이 잦아지는 것을 보니 뭔가를 깊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선생님은요?” 명수는 재훈에 대해서 언급하는 대신 하은의 향후 거취에 대해 물었다. 아마도 하은까지, 모두 떠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을 느껴서 그런 질문을 했을 것 같았다. 하은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우선순위에서 밀렸던 일인지라 아직 생각을 마치지 못했던 탓이다. “난 너희들과 계속 같이 있을 거야.” 라고 말해야 한다, 생각은 하면서도, 앞으로의 일은 모르는 거니까 그렇게 장담할 수는 없는 일. “일단은 같이 있을 거야.” 라고 말해도 ‘일단’이라는 조건이 불안감을 안겨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이 아이들을 두고 떠날 생각은 아니었기에, 다른 옵션은 생각나지 않았다. “선생님도.” 그때, 단유가 하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도 언제까지나 우리와 같이 있을 수는 없을 거야.” 단유의 말이 하은을 아프게 했고, 화나게 했다. “우리가 보육원을 떠날 때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 화가 났고,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주는 것 같아 슬펐다. 그래도 하은은 쉽게 말을 뱉지 못했다. “선생님도 오늘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 그러면 선생님도 아직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갖지 못하셨을 거 같으니까,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요.” 하은은 침묵을 지키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자. 그런데 단유야, 명수야. 그래도 재훈 오빠, 너무 원망하지 말자.” “원망 안 해요. 오히려 고맙죠. 지금까지 저희에게 해주신 것만 해도 평생을 고마워해야 하는데요.” 명수도 단유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럼 다행이고.…그래도 너희가 나보다 낫네. 난 재훈 오빠의 결정이 잘 이해가 안 되거든.” “…그 결정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해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봐요.” “왜?” “사람마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거잖아요?” “이해심이 넓네, 단유는.” “그런 건 아니고요. 이를테면 미로 풀기 같은 거예요.” “미로 풀기?” 단유는 젓가락 끝으로 식탁 위에 뭔가를 그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복잡하게 그려진 미로를 푸는 문제요. 언뜻 보면 출발지에서 출구까지의 길이 잘 보이지 않지만, 차분하게 길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출구는 찾을 수 있게 되잖아요.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도 그런 것 같아요. 아무리 복잡한 미로라도 출구까지 가는 길이 있듯이, 한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도 그렇게 하나하나 짚어가다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봐요. 당장 눈에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출구로 나갈 수 없다고 단정할 순 없듯이, 당장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 지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은 그만큼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전 그렇게 생각해요.” “이제 보니까 우리 단유 다 컸네?” “단유는 지금도 우리 중에서 제일 키가 큰데요?” “분위기 깨고 있어.” 명수의 말에 세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은은 이 두 아이가 강한 이유는 이런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 단유는 방학이 끝나기 전, 에이바운스로 향했다. 오전에 회사에서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 “오늘 중으로 정산이 될 건데, 서류에 서명할 게 있어요.” 단유는 주영에게 전화를 걸어 이전에 계약할 때 도움을 줬던 변호사를 회사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잘 지내지?” 라고 묻는 주영의 말에 단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전 괜찮아요.” “그래? 다행이네.” “누나.” “응?” “혹시 이렇게 전화를 걸면 안 되는 건가요?” “아니 안 될 건 없지. 아니, 자주 걸어. 혹시 도움 필요하면 말하고.” “그럴게요.” 단유는 간단하게 통화를 마치고, 회사로 향했다. 지하철을 이용해 가는 동안 사람들의 면면을 관찰했다. 몇 번이고 지하철을 탈 때마다 하는 관찰이지만, 그때마다 느낌은 매번 달랐다. 사람들의 표정은 다른 듯 같았고, 같으면서 달랐다. 무표정이라는 간단한 표현 앞에는 ‘다양한 감정들을 숨긴’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옳을 것이다. 저마다 다른 삶을 살고, 다른 일을 겪으니 어느 누구 하나 같은 사람은 없을 테지만, 또 그 감정들을 겉으로 드러내는 이는 드물어서, 하나같이 ‘무표정’으로 일관한 모습들이었다. 저 표정만 보고서 저 사람의 일생을, 생활을, 생각을 평가한다거나, 예측한다거나, 이해한다는 건 어려운 일일 것이다. 재훈 역시도 눈앞에 있는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다. 저 사람들처럼 또 다른 무표정으로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자신의 길을 가듯이. 그러니 재훈을 오롯이 이해하지는 못해도, 납득하지 못 할 정도는 아니다. 섭섭하긴 하지만, 비난할 정도는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나를 보면 그런 생각을 하겠지.’ 자신도 종종 표정 때문에 ‘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라는 말을 듣곤 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혹은 아무 감정 없이 사는 건 아니었으니까. 남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자신은 나름의 이유와 합리적인 과정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니까. 남들이 자신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듯, 자신도 남들을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말할 순 없는 법이다. 그러니, 재훈의 결정을 받아들인다. 언젠가는 그 결정의 이유를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라며. 회사에 도착한 단유는 변호사와 함께 사무실로 향했다. 이전과 다른 분위기의 사무실에서 단유는 변호사와 함께 몇 가지 서류를 확인하고 대리인의 자격으로 변호사가 서명하고 공증한 뒤, 정산을 받았다. “앞으로는 그냥 통장으로 들어갈 테니까, 다시 올 필요는 없을 거야.” 이전에 봤을 때도 그렇게 생기 넘치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할 일이 많아 죽겠다는 엄살을 부리던 사람이 지금은 할 일 없고, 귀찮기만 하네, 같은 표정으로 있으니 단유는 호기심이 들었다. 아마도 얼마 전에 태호에게서 들은 일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볼 따름이었다. 사무실을 나온 단유는 집에 데려다주겠다는 변호사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한 뒤, 홀로 지하 연습실로 향했다. 4개의 보컬 연습실은 모두 텅 비어 있었다. 복도를 지나 안무 연습실로 향하니, 갤럭시즈 멤버들이 자주 쓰던 ‘제 1 연습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간 단유는 그 안에서 거울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윤을 발견했다. 사람의 표정만 보고 사람을 이해하긴 어렵다고 했었나? 그러나 가끔 감춰진 감정이 드러나면 그 사람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이해할 수 있을 때도 있었다. 그 경우가 바로 지금의 경우였다. 초점 잃은 눈으로 거울을 향한 나윤의 표정에서 단유는 ‘상실감’을 읽었다. “여기 계셨네요.” 단유의 말에 나윤이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초점이 조금씩 돌아오더니 얼굴이 붉어졌다. 저건 ‘민망하다’는 뜻일까? “어, 어쩐 일이야?” “정산받으려고요.” “정산? 아, 음원 때문에?” “네. 그런데 얼마 안 되네요. 솔직히 조금 기대했었는데.” 나윤은 단유의 말에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니가 나보다 낫네. 난 정산 받으려면….” 힘이 빠지며 말이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정산받으려면 아직 멀었다’고 농담조로 이야기하려 했는데, 그 순간 ‘정산받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가디스R은 끝났어.’ 그 말은 자신의 컴백도 불투명하다는 뜻. 만약 이 상태로 시간만 흐른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거지? “저기요?” 단유는 다시 초점을 잃기 시작하는 나윤을 불러 정신을 일깨웠다. “응?” “…식사하셨어요?” 그러고 보니 이제 점심시간이었다. “아니.” “그럼 같이 밥이나 먹을래요?” “왜?” 말한 뒤에야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조금 시비조로 들리지 않았을까? 그러나 단유는 안개 속에서 빛나는 달빛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정산받았으니까요?” 나윤이 머쓱해 하지 않게 재치있게 받아친 단유는 나윤과 함께 연습실을 나섰다. ======================================= [335] 도하(2) “내가 사줘야 하는데.” “괜찮아요, 오늘은.” 단유는 수저통에서 수저를 꺼내 나윤 앞에 가지런히 놓아주었다. “고마워.” “별말씀을.” 나윤은 앞에 놓인 수저를 만지작거리며 할 말을 찾아보았지만, 딱히 생각나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어두운 분위기로 만들 게 뻔한 단어들만 연상될 뿐이었다. “많이 바쁘세요?” 단유가 먼저 물음을 던졌다. 기다렸다는 듯 나윤은 대답했다. “아니.” 그리고 또 대화가 끊겼다. 그러다 보니 계속 단유를 보는 거도 힘들었다. 이럴 바엔 차라리 음식이라도 빨리 나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까 보니까 연습실이 좀 썰렁하던데, 춥진 않으시고요?” “어? 어. 괜찮아. 연습하면 열이 나니까.” 어떻게 생각해도 말이 이어지질 않는다. ‘아무 말이나 해봐’라는 생각에 나윤은 입을 열었다. “잘 지내니?” 나윤은 말을 꺼내고는 얼굴을 붉혔다. 기껏 생각한 게 ‘잘 지내냐’는 말이라니. “네. 잘 지내고 있어요. 보시다시피 지갑도 두둑해졌고요.” “그 돈으로 뭐할 거야?” 진짜 이제는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내뱉고 있었다. 나윤은 도대체 자기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길래 이러는 건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대화를 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모습을 자신이 봤다면, 바로 옆에 붙어서 박장대소를 했을 것이다. “별로 큰돈은 아니라서요. 아마 명수 신발 사주고 나면 끝날 거 같네요.” “신발?” “아, 혹시 이전에 말을 했었나 모르겠는데, 명수가요, 축구부 활동을 하거든요. 그런데 워낙 연습을 많이 하다 보니 신발이 다 떨어졌더라고요. 그래서 이 돈으로 신발을 사주려고요.” “대단하다, 너! 친구를 위해서 돈을 쓰다니.” “명수는 가족이나 마찬가지거든요.” ‘가족’이란 말에 또 마음이 쿵, 하고 충격을 받는 느낌이었다. “아, 이 돈으로 누나 밥도 사주고요.” “어, 그래.” ‘가족’과 연상되는 것들이 또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하자, 나윤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누나는 연습할 때도 화장을 해요?” “응? 아니, 안 하는데?” “그런데 입술이 되게 붉으시네요.” “아, 이거는 그냥 립밤 바른 거야.” “그래요? 립스틱 같은 거예요?” “비슷해. 그런데 색깔은 별로 안 들어간 건데.” “그럼 원래 입술이 많이 붉어요?” “응, 조금.” 그 사이에 음식이 나왔다. 단유가 시킨 것은 떡볶이, 나윤이 시킨 것은 김밥이었다. “맛있게 드세요.” “어, 고마워. 너도 많이 먹어.” “전에 명수가 가르쳐 준 건데요, 김밥을 여기 소스에 찍어 먹으면 맛있대요.” “원래 그렇게 먹는 거야.” “그래요? 몰랐어요. 전.” “분식 잘 안 먹어?” “네. 별로 먹을 기회가 많지 않아서요.” “그렇구나.” 나윤은 김밥을 하나 집어서 떡볶이의 붉은 소스에 찍은 뒤, 입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매콤한 소스와 김밥이 어우러지면서 입안에 자극이 가득했다. “맛있어요?” “응. 맛있어.” 단유는 미소를 지으며 나윤의 먹는 모습을 보다 자신도 떡볶이 하나를 집어서 먹었다. “맛있네요.” “맛있지? 여기가 회사 근처에서 제일 맛있는 분식집이거든. 연습생들이 자주 와.” 비슷한 말을 들은 기억이 있던 단유는 연습생들마다 다니는 가게가 다른가 보다, 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미성년자인 연습생들은 치킨 가게에 가서 음식을 먹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문득 그날 갤럭시즈 멤버들이 잔을 들어 올리던 모습을 떠올린 단유는 얼른 잡생각을 떨쳐내고 나윤에게 집중했다. 자극적인 맛의 음식이 입안에 들어가니, 그나마 얼굴이 나아 보였다. 얼굴이 굳어질 때마다, 할 말을 찾지 못해 당황할 때마다 단유는 일부러 별 의미 없는 말이라도 굳이 꺼내서 대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대화로 나윤이 한 곳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했고, 그 덕택인지 아까 나윤을 보았을 때의 음울한 분위기는 많이 가신 것 같았다. 그래도 말이 끊어지거나, 아니면 대화 중간에 연상되는 무언가가 있으면 곧 입술이 닫히고 동공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단유가 보기에 굉장히 불안하기만 한 나윤이었다. 지금 단유의 대처는 나윤의 ‘증세’를 낫게 하는 방법은 아니었다. 그저 잠시 증상이 발현되는 것을 미룰 뿐이었다. “물 좀 가져다 드릴까요?” “어? 아냐, 내가 가져올게.” “앉아 계세요. 제가 가져올게요.” 단유는 단답형으로 끝내도 될 말을 굳이 한 마디 덧붙이는 식으로 대화를 이어 상대가 자신에게 집중하게끔 했다. 그 덕에 나윤은 정신없이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허겁지겁 먹었던 것은 아닌데, 별 거 아닌 주제로라도 대화하면서 젓가락을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텅 빈 접시만 남았다. “언제 먹었는지 모르겠네.” “더 드실래요?” “아냐, 괜찮아.” 이제는 다이어트를 할 필요도 없지만, 그래도 춤을 출 때 무거운 몸은 방해가 되니까 꾸준히 몸 관리를 해주는 게 좋았다. 가디스R이 어떻게 될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준비는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니…….’ 수련의 얼굴이 떠오르자, 눈 아래의 살이 떨리다 굳는 느낌이었다. “누나.” 그 순간을 포착하여 다시 나윤을 부른 단유. 나윤이 쳐다보자 단유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많이 힘들어요?” 나윤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단유, 저 아이도 이미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아니, 알 것이다. ‘언니랑 친하니까, 태호 오빠랑도 친하니까, 이미 다 들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긴 왜 왔을까? 정산받으러 왔다면, 그냥 돈만 받아서 가면 되지, 왜 굳이 날 보러 왔을까? ‘내가 어떻게 있는지 궁금해서? 언니가 나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오라고 해서? 언니 말 안 듣고 남았다가 쭉정이 신세가 된 내 모습을 보려고?’ “누나, 혹시 수학 좋아해요?” 나윤의 눈에 서리는 아픔을 보던 단유가 질문을 던지자, 나윤은 뜬금없는 질문에 어리둥절해 했다. “제가 요즘 고등학교 수학을 배우거든요. 자랑인가? 아무튼 고등학교 수학 중에요, 삼각함수가 있어요.” 비록 연예기획사에 소속된 연습생 신분이지만, 고등학생이기도 한 나윤은 학교에서 정규수업을 들어야 했고, 당연히 ‘삼각함수’를 배운 기억이 있었다. 정확히 표현하면 ‘삼각함수’라는 게 있다는 사실을 알 뿐이지만. 나윤의 눈치를 살피며 단유는 말을 이었다. “선생님이 삼각함수에 대해 가르쳐 주실 때요,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삼각함수는 인생과 같다고. 물론 이제 겨우 15살인 제가 인생을 어찌 알겠냐 물었더니, 그래도 들어두면 좋다고 하시면서 ‘억지로’ 알려주시더군요.” 나윤은 단유의 옅은 미소와 선한 눈동자를 보며 귀를 기울였다. “삼각함수에는 기본함수로 사인함수(Sin), 코사인함수(Cos), 탄젠트함수(Tan)가 있대요.” 살짝 머리가 아파져 오는 느낌은 정말 느낌일 뿐이겠지. “여기서 사인함수가 이런 모양이잖아요?” 단유는 젓가락으로 공중을 저으며 사인함수의 그래프를 그려보았다. “사인함수의 시작은 0이고, 끝도 0이에요. 그래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을 표현한다고 그래요. 그리고 코사인함수는요, 1에서 시작해서 1로 끝나요. 1이 삼각함수에서 가장 큰 수거든요? 그래서 인생의 황금기를 뜻한다고 해서, 코사인함수는 사랑을 의미한대요.” 그런 의미도 있구나, 라고 생각하며 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탄젠트함수는 이런 모양이에요. 이 끝은 Y선에 수렴한다고 하죠? 붙는 모양으로 이렇게 진행되지만, 영원히 만나지 않아요. 마이너스든 플러스든 말이죠. 결코 만날 수 없는, 혹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이란 뜻에서 이별을 상징한다고 해요.” 단유는 공중을 휘젓던 젓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사인 나누기 코사인은 탄젠트(Sin/Cos=Tan)이란 기본 공식이 있죠? 여기에 대입해 보면, ‘인생을 사랑으로 나누면 이별’이란 공식이 나오네요. 결국 사랑을 하다 보면 이별도 나오고, 이별은 또 다른 사랑을 만들기도 한다, 는 뜻이래요.” 나윤은 피식 웃었다. “그게 뭐야.” “뭐긴요. 그냥 이리저리 끼워 맞춘 거죠. 재밌죠?” “재밌네.” “아까 탄젠트함수 그래프가 이런 모양이라고 말씀드린 거 기억나시죠? 위로 뻗든, 아래로 뻗든 결국 교점은 0이에요. 다시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관계이니 결국 0, 모두 빈손으로 돌아오는 거죠. 그리고 다시 시작하죠. 0에서 다시 위로, 혹은 아래로. 다시 0에서 위로, 혹은 아래로. 최대값과 최소값이 없는 탄젠트는 그렇게 무한대로 뻗어 나가요. 그리고 각에 따라 또 다른 0에서 시작하죠.” 단유는 원을 그리고 탄젠트 그래프가 만들어지는 모양을 그려 보였다. “시간이 흐르면요, 이렇게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결국, 이별을 향하지만, 또다시 이별을 준비하는 것처럼 다시 시작하고, 시작하죠. 이별이란, 그런 건지도 몰라요. 아프지만, 또다시 시작하는 거요.” 나윤은 입술을 깨물며 식탁 위를 바라보았다. 단유가 젓가락으로 그린 그래프가 눈에 보일 리 만무하건만, 마치 선명하게 식탁 위로 도드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이야기는 좀 그렇긴 한데, 저도 지금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하는 중이거든요. 그리고 누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누나, 아프다고 가만히 있으면 그 끝은 없어요. 계속 아플 뿐이에요. 그러니 0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는 게 어때요?” 이번에는 참기 힘들었다. 나윤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배어 나올 정도로 많은 눈물을 흘렸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하다 보니 더 많은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단유는 그 자리에서 계속 그 모습을 지켜봐 주었다. 이제 단유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으니까. **** 단유는 명수를 데리고 축구화를 사러 갔다. 명수는 부담스럽다면서도 기쁘게 선물을 받아들었고, 단유는 명수의 웃음으로 값을 대신한다며 명수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춘계대회에서 꼭 1등 할게.” “우승하겠다고?” “아니, 우승 말고 1등. 제일 골 많이 넣는 사람이 1등이야.” 명수는 단유를 끌고 운동장으로 갔다. 그리고 새 신발을 꺼내 신고 축구를 하기 시작했다. 단유는 골키퍼 역할을 하고, 명수는 스트라이커였다. “자, 이번에 3골만 넣어보자.” “3골 넣으면?” “그럼 아마 이번 대회 득점 1위일 걸?” “그럼 봐줘야겠네.” “봐주면 안 되지. 봐주지 말고 해. 진심으로. 그래야 나도 실력이 늘지.” “알았어.” 단유는 빈말 따윈 하지 않았다. 열심히 뛰고, 열심히 막았다. 덕분에 명수는 1골만 기록했다. “아, 진짜. 못 해 먹겠네.” 바닥에 풀썩 앉아서 지쳤다는 시늉을 하는 명수에게 다가간 단유가 왜 그러냐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널 이길 수 있냐?” “잘하면 되지.” “내가 지금 못 해?” “잘해.” “근데 왜 골을 못 넣는데?” “그 정도는 안 되나 보지.” “야, 그냥 니가 축구해라. 내가 공부할게.” “진짜?” “농담도 못 하냐?” 명수는 ‘다 쉬었다’ 고 외치며, 후반전을 시작하자고 졸랐다. 그리고 결국 명수는 후반전이라 외치고 줄창 공만 찬 끝에 1골을 더 넣을 수 있었다. “우연히 들어가도 골이다.” “누가 뭐래?” “우연도 실력이다!” “아무 말 안 했어.” 두 사람은 사이좋게 집으로 돌아갔다. 방학 마지막 날, 그렇게 땀을 흘린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 내일을 준비했다. ======================================= [336] 도하(3) 언제나와 같이 새벽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단유와 명수가 집으로 돌아와 씻고 나왔을 때, 하은은 나갈 채비를 마치고 현관 앞에서 구두를 고르는 중이었다. “밥 차려놨으니까 알아서들 챙겨 먹고 나가.” “선생님도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구두를 신던 하은이 문득 단유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그냥 너한테 이런 인사를 들으니까 조금 신선해서.” 늘 인사를 하며 배웅하던 쪽에 있다가 배웅을 받으며 출근을 하게 되니 낯설기도 했다. “금방 적응되실 거예요.” 단유의 말에 피식 웃은 하은은 구두를 마저 신고 몸을 바로 세웠다. “다녀올게.” “다녀오세요!” 뒤늦게 젖은 머리를 하고 나타난 명수가 손을 크게 흔들며 하은에게 인사했다. 하은은 명수의 머리를 가리키며 ‘머리 꼭 말리고 가라’ 고 당부를 한 뒤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동안, 하은은 한 번 더 엘리베이터에 부착된 거울을 통해 복장 점검을 했다.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 층수를 확인하니, 마침 지하주차장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또각거리는 하이힐의 굽소리를 들으며 차로 향한 하은은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잠시 엔진의 열이 오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룸미러를 통해 또 한 번 화장한 자신의 얼굴을 살폈다. 오른쪽 눈의 마스카라가 왼쪽에 비해 너무 진한 건 아닌지 헷갈렸지만, 당장 손을 댈 정도는 아니었다. 볼 터치를 약하게 하긴 했는데, 너무 어려 보이려고 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에 지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깊이 고민해야 했다. 비록 학원 강사라도 ‘선생님’으로서의 권위를 세워야 할 위치인데, 이런 화장은 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몰랐다. 브러쉬를 꺼내고 화장을 고치려다 보니, 또 봄인데 너무 창백하게 보이면 생기 없어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좀 연하게 하는 정도로 할까.’ 브러쉬로 약하게 볼을 쓰다듬으니, 다소 진하다고 생각했던 볼의 색이 옅어졌다. 그러고 보니 턱 쪽의 음영이 또 너무 옅어진 기분이었다. 쉐도우브러쉬를 가지고 나왔던가 확인한 하은은 다행히 잊지 않고 챙겨온 자신을 칭찬하며, 룸미러를 보며 턱 쪽의 음영을 더 했다. 그러고 다시 룸미러로 확인하니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얼굴선이 나오는 것 같았다. 문득 시계를 바라보니 벌써 지하주차장에 내려온 지 15분이 지났다. 아직 시간 여유는 있지만, 조금 빠듯한 시간. 잠깐의 갈등 끝에 하은은 마스카라까지 꺼내서 눈을 손본 뒤에야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출근 첫날, 하은은 그렇게 준비를 끝내고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전방을 바라보며 자신의 새로운 직장이 된 학원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30여분 뒤, 명수와 단유도 오피스텔을 나섰다. 두 사람도 원래 등교하는 시간보다 10분 일찍 나온 셈이었는데, 아무래도 개학 첫날이다 보니 설레는 마음도 있었던 탓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명수가 많이 들떠 있었다. “어? 너 벌써 가?” “안녕? 너희도 벌써 학교 가?” 오피스텔을 나와 큰 길가로 걷던 단유와 명수는 상미를 만났다. “나 먼저 간다! 안녕!” 상미는 바쁜 척을 하며 손을 젓고는 다른 길로 사라졌다. 어차피 방향이 달라서 같이 갈 수는 없으니 그러려니 했다. “아침부터 쟤를 보다니. 오늘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아.” 명수의 중얼거림에 단유가 이유를 물었다. “상미가 평소와 다른 패턴을 보일 때마다 안 좋은 일이 벌어졌어.” 명수는 평소 4-3-3 전략을 쓰던 상미가 갑자기 4-4-2나 4-3-1-2 같은 전략을 쓰면 게임이 잘 안 풀리고 갑자기 패드가 먹통이 되는 일이 생겼다며 자신의 예측이 맞을 거라는 근거를 들었다. 당연히 단유는 으레 그렇듯 못 들은 척하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근데 상미, 작년에는 자기 아버지 차 타고 가지 않았나?” “맞네? 왜 안 탔지?” 아마도 그래서 서둘렀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 생각하던 단유는 마침 집에서 나오던 또 다른 친구, 지태를 만났다. “오, 역시 빨리 나오니까 이렇게도 보네. 어쩐지 오늘 집에서 나오는데 어쩌면 너 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거든.” “그래?” “역시 모범생이니까 첫날에는 일찍 가겠구나, 라고 생각했지.” “그건 아닌데. 오늘은 명수 때문에 일찍 나왔어.” “니가 일찍 나오자고 했다고?” 명수의 고갯짓에 지태가 이유를 물었다. “난 학교 일찍 가면 안 돼?” “안 될 건 없지만, 니가 학교에 일찍 가려고 했다는 게 이상하다는 것도 사실이지. 마치 단유가 공부하기 싫다고 자퇴서 내는 것 같잖아?”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그래서 일찍 가는 이유가 뭔데?” “그냥. 올해부터는 좀 부지런해지려고.” 지태는 이해하지 못할 내용이지만, 단유나 명수는 좀 더 자신들의 삶에 충실해지기로 약속했다. 딱히 거창하게 무언갈 하자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좀 더 자립심을 길러야 한다는 의견에 서로 동의한 뒤의 결심이었다. “안녕!” 채윤이 멀리서 손짓을 하며 인사를 하는 모습을 명수가 먼저 발견했다. “쟤도 일찍 나온 거 아냐?” “그러네.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채윤은 건널목에서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 사람은 채윤을 기다려주기로 하고 맞은편 건널목에서 기다렸다. “근데, 너 춥냐?” “아직은 추운데? 너야말로 안 추워?” “이 정도로 춥다고 하면 엄살이지.” 명수가 가슴을 쭉 내밀며 거드름을 피웠고 지태는 비록 3월이지만 그래도 날씨가 쌀쌀하다며, 엄살을 피웠다. 초록불로 바뀌며 채윤을 비롯한 사람들이 건널목을 건널 때였다. “어?” 건널목을 지나던 몇 사람이 사거리 쪽을 보며 걷다가 당황해했고, 덩달아 시선을 옮겼을 때는 이미 중앙선을 넘어 달리던 승용차 한 대가 정지선을 넘고 있었다. **** 방학 동안 늦잠을 자버릇하던 습관이 남았던지라, 상미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날이었다. 개학날이기도 하지만, 아버지가 마침 출장을 가신 날이기도 했던 탓이었다. 즉, 오늘 상미는 아버지의 차를 타고 등교할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상미의 학교는 집에서 조금 먼 편이었다. 어른의 사정으로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집에서 살지만, 아버지가 매일 아침 태워다준 덕에 지각은 하지 않았고, 모자란 잠도 승용차 안에서 마저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어 상미는 불평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홀로 학교에 가야 했고, 그래서 보통 때보다 훨씬 일찍,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했지만, 상미는 결국 어머니에게 등을 두들겨 맞으며 아침을 맞이했다. “으이구, 어제 그렇게 일찍 자라고 했는데 말 안 듣더니, 이게 뭐야! 빨리 일어나!” “아! 엄마! 아퍼!” “얼른 안 일어나!” 상미는 꿈틀거리며 침대를 벗어나 세안을 마친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엄마! 지금 깨우면 어떡해!” 상미의 어머니는 식탁 위에 올려진 숟가락을 아무렇게나 집어서 던지는 시늉을 했다. “이게 죽으려고!” 움찔한 상미는 얼른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식탁에 앉았다. 어머니는 상미를 물끄러미 보다가 턱으로 시계를 가리켰다. 밥 먹을 시간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확인한 상미가 울상이 된 채로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다 기어코 한 숟가락 입안에 집어넣은 뒤, 어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단유 같은 모범생이랑 친하게 지내면, 좀 차분해지고 얌전해질 줄 알았더니, 명수 같은 애랑 붙어 놀면서 오히려 더 왈가닥이 된 것 같다고 어머니는 생각했다. 물론 걔네랑 어울리면서 상미의 성적이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지만 말이다. “차 조심해.” 그래도 딸에 대한 걱정에 한 마디를 또 덧붙이는 어머니였다. 상미는 히죽 웃으면서 엄지를 내밀었다. “알았어요, 엄마!” 저 못 말리는 성격 같으니라고. 현관에서도 허둥대며 신발을 신은 상미가 집을 나선 뒤에야, 집 안에 고요함이 찾아왔다. 어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돌아서다가 식탁 위에 남겨진 밥그릇을 보았다. 한숨을 쉬며 상미가 앉았던 자리에 앉은 어머니는 상미가 들었던 숟가락으로 남은 밥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안녕! 벌써 학교 가?” 상미는 버스를 타러 달려가다가 만난 단유와 명수에게 허겁지겁 인사한 뒤, 서둘러 정류장을 향해 달렸다. 달리며 생각해보니 등굣길에 두 사람을 만나는 건 꽤 오랜만의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끔 아버지 차를 타고 나가다가 걸어가는 두 사람을 본 적이 있었으니까. ‘인사는 처음이네.’ 아침부터 친한 친구들의 얼굴을 보고 인사를 나눴더니 상미는 기분이 좋아졌다. 어쩐지 오늘은 꽤 기분 좋은 하루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달린 덕인지, 상미는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학교로 향하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 몇몇이 안에 보였지만, 얼굴을 잘 모르는 이들이었기에 그냥 모른 척하며 적당한 자리에 서서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도로에 아침 출근 차들이 몰려나올 시간인지라, 빠르게 달리는 차들이 줄어드는 형편이었다. 특히 이 동네는 신호등이 많고 신호가 조금씩 어긋나서 자칫하면 가다 서기를 반복해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아버지 차를 탈 때도 조금 늦게 집을 나서면 꼼짝없이 도로 위에 붙잡혀서 속을 태워야 했던 적이 많았던 상미였다. “도대체 시에서는 이런 거 알면서 안 고치는 거야, 모르고 못 고치는 거야.” “왜요? 아빠?” “신호등 4개가 전부 따로 불이 들어오니까, 앞으로 나갈 수가 없잖아. 봐라, 또 빨간 불이다.” “이거 신고하면 안 돼요?” 아버지는 신고할 시간이 없다며 불평을 늘어놓으시다가 녹색 불에 급하게 튀어나가곤 했다. 답답해도 일단은 딸 아이가 지각하지 않도록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이셨을 것이다. 상미는 이전 기억을 떠올리며 바깥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역시나 또 한 번 빨간 불이 들어오면서 버스는 정류장을 출발하기가 무섭게 다시 멈춰야 했다. 고작 몇 분에 불과할지라도, 그 몇 분이 지각을 좌우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녹색불이 들어왔을 때, 맞은편 차선에서 텅 빈 도로를 빠르게 질주하는 검정색 승용차가 보였다. 저 사람도 아마 급한 마음에서 저러는 거겠지, 라고 생각하며 상미는 또 한 번 시계를 바라보았다. ‘순간 이동으로 학교에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예전에 게임에서 조종했던 캐릭터의 능력을 떠올리면서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는 상미였다. **** 검은색 승용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신호등에 열이 났던 것인지도 모른다. 급한 사람이 자기 혼자만은 아닐 테지만, 마음은 급하고 재수 없게도 신호란 신호는 다 걸리는 것만 같아 화가 났는지도 모른다. 노란불에 앞차가 브레이크를 밟으며 속도를 줄이자, 검은 승용차는 옆 차선, 중앙선 너머가 비었음을 인지한 즉시 핸들을 꺾었다. 빨리 달리면 큰 사고 없이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노란 불이 빨간 불로 바뀌는 시간은 대략 1~2초 정도라 판단했고, 그 시간에 자신의 승용차는 충분히 속력을 얻어서 지나갈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정지선을 넘었을 때, 이미 빨간불이었지만 앞은 훤하게 트여 있었다. 악셀을 보다 빨리 밟으면 괜찮을 것이다, 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녹색불에 건널목을 건너기 시작한 사람들 중에는 빨리 이상함을 느끼고 걸음을 멈춘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의 경우, 검은 승용차 이상으로 마음이 급한 사람도 있었고, 또 몇몇은 아예 이어폰을 낀 채로 앞만 보고 걷는지라 주변 상황에 둔감해진 경우도 있었다. 검은색 승용차의 후면 램프에 빨간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에서 운전자의 선택을 알 수 있었다. “저 미친….” 검은 승용차 뒤에서 속도를 줄이던 운전자들이나 건널목에 서 있던 사람들이나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 명수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들었을 때, 단유의 시선 역시 자동차로 옮겨져 있었다. 엔진의 RPM이 올라가는 소리를 모두가 들었던 순간이었다. ======================================= [337] 도하(4) 건널목을 건너던 채윤이 걸음을 멈춘 것을 확인한 단유가 차로 시선을 돌렸을 때, 중앙선을 넘었던 차가 1차선으로 돌아오기 위해 비스듬히 주행하는 것을 보았다. 어쩌면 저대로 빠르게 지나갈 수도 있겠지만 잘못하면 인명 사고가 날 가능성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단유는 생각 대신 ‘의지’를 품었다. 검은 승용차가 건널목에 다다를 때쯤, 사람들은 신기한 현상을 목격했다. 순간적으로 차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가속을 한 것이었다. 얼마나 빠른 가속이었는지, 진짜 눈에 보이지 않았다. 또 다른 의미로 ‘어?’ 하며 차를 쫓던 시선들이 잠깐 방황하는 사이, 검은 승용차는 건널목을 지나 텅 빈 도로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와, 미쳤다.” 지켜보던 지태가 중얼거릴 때였다. 검은 승용차가 갑자기 비틀거리더니 귀가 먹먹할 정도로 타이어가 도로에 끌리는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를 뿜으며 승용차는 인도로 향했다. 그리고 인도에 서 있던 가로수와 들이받고는 뒤집힐 듯 한쪽이 들렸다가 쿵 소리를 내며 도로에 주저앉아 흰 연기를 뿜어내는 승용차였다. “사고다, 사고.” 그 사이 건널목을 빠르게 건너온 채윤도 사고현장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와, 개학 첫날 죽을 뻔했네.” “아침에 일찍 나오니까 이런 것도 보네.” 사람들이 웅성대는 가운데 몇몇 갈길 바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건널목 반대편에 서서 그 장면을 목격했다. 건널목을 지나갔던 이들 중에 몇 사람이 사고현장으로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도와주려고 그러나 봐.” “돕긴 뭘 도와. 내 그렇게 달릴 때 알아봤다.” “난 사람 치는 줄 알았다니까.” “그런데 갑자기 차가 사라진 것 같이 보이던데.” “저도 그랬어요.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너무 빨라서 순간적으로 놓친 거 아닐까요?” “난 다 봤는데. 갑자기 건널목에 사람이 있으니까 속력을 높인 거 같던데?” “아냐, 갑자기 사라진 거 맞아. 내 앞에서 차가 사라졌는데?” “너무 당황해서 그랬겠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지는 가운데, 단유가 명수의 팔을 붙잡았다. “가자.” “저기 어떻게 되는지 보고 가면 안 될까?” “시간 없어.” 지태도 명수의 말에 따르기를 원했다. “조금만 보다 가자. 아직 시간 많이 남았잖아.” 채윤은 여전히 놀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더듬거리듯 천천히 말했다. “난 조금 있다 갈래. 다리가 안 움직이는 거 같아.” 그 말대로 채윤의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게 눈에 선명히 보일 정도였다. 몇 사람이 다가가 차 안을 보다가 물러서는 모습이 보였다. “죽었을까요?” “가 볼까?” “됐어요. 그냥 가요. 이러다 늦겠어요.” 어떤 사람은 빨리 회사에 가서 자신이 목격하고 체험한 사고를 전파하기 위해 몸을 돌렸고, 어떤 사람은 개인적 호기심과 인간적 동정심 사이를 오가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단유네는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빨리 걸음을 돌려야 하는 쪽에 속했다. 사건 현장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오자, 단유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에서는 능력을 쓰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무심코 쓰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건널목 사이를 건너뛸 공간만큼만 움직이게 했던지라, 어떤 사람들은 차가 갑자기 속도를 올린 게 아니냐고 착각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차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되도록 현장에서 벗어나고픈 생각이었다. “단유도 많이 놀랐나보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거 같아.” 저렇게 큰 물체를, 게다가 빠르게 위치가 변하는 물체를 옮긴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사실을 경험했기 때문이지만, 그것을 말할 수는 없었다. “채윤이가 사고당하는 줄 알고 놀랐던 거 아냐? 나도 순간적으로 얼마나 놀랐었는데?” 지태의 말에 명수도 자기도 엄청 놀랐다며, 과장되게 손뼉을 마주치며 맞장구를 쳤다. “야, 지켜보는 사람보다 당하는 사람이 더 놀라는 법인 거 몰라? 난 진짜 오늘이 내 제삿날인 줄 알았어. 요단강 건넌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생각이 들었다니까. 검은색이 눈앞으로 다가오면서 막 옛날 기억들이 쏟아지는데, 아, 이게 주마등이라는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막 눈물도 쏟아지려고 그러고.” 채윤이 보기 드물게 말을 길게 늘어놓자, 지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채윤이 많이 놀라긴 놀랐나 보다. 갑자기 이렇게 말이 많아지냐. 그런데 채윤아. 너 뻥이 너무 심한 거 아냐? 그 차랑 너랑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데.” “아냐, 얼마 안 떨어져 있었어. 너희야 멀리서 지켜보니까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지만, 눈앞에서 차가 달려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내가 정확하지, 니가 정확하겠어?” “으구으구, 그러셨어요?” “정말이야! 차가 이만큼 달려들었을 때, 순간적으로 시간이 느려지는 느낌이 들면서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다 드는데, 중학교 입학식 생각도 나고, 초등학교 때 외갓집 갔던 생각도 나고, 유치원 때 생각도 나고 그러는 거야. 지금 생각하니까 완전 신기하네.” 이번에는 명수도 웃음을 터뜨렸다. “유치원 때 생각나는 건 좀 심하다.” “뭐가 심해? 진짜라니까?” “왜, 갓 태어났을 때 기억도 난다고 하지그래.” “와, 진짜 못 믿네. 사람들이 주마등, 주마등 하는데 그게 뭘까 했더니 오늘 내가 그걸 체험했네.” 지태는 명수를 보며 말했다. “사람이 사고를 겪고 정신이 이상해지는 경우도 있다고 하잖아. 얘가 그런 거 같지 않아?” “그런 거 같다. 채윤이가 저렇게 수다스럽고 과장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말이야.” “내 말이.” “야! 사람이 죽을 뻔했는데, 그걸 가지고 놀리냐?” 채윤이 열을 올리며 주먹을 쥐어 보이자, 키득거리던 지태와 명수가 주먹을 피해 달리기 시작했다. “니들이 친구냐, 새끼들아!” “우와, 죽다 살아난 좀비가 화났다!” 단유는 장난을 치며 달리는 친구들을 바라보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사고현장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걸어온 탓에 아무것도 알 수는 없었지만, 단유는 좀 더 조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여기며 학교로 발걸음을 돌렸다. 운전자의 생사여부? 그런 건 단유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 개학식을 마치고 찾아간 교실은 2학년 3반이었다. “이번에도 너랑은 같은 반이 아니네.” “그러게.” 명수는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한탄하며 2반 교실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교실로 들어갔더니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단유에게로 몰려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오, 전교 1등.” 어느새 같은 학년에게 전교 1등으로 유명해진 단유였다. “쟤야?” “응.” “세상 너무 불공평한 거 아냐?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고.” “현실이 그렇다, 친구야.” 전교 1등이자 한때 신드롬이었던, 대세 걸그룹 가디스R의 커버곡을 발표하기도 했던, 준연예인급 대 스타의 왕림에 아이들의 입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단유는 그런 아이들의 시선을 덤덤히 받아넘기며 뒷자리로 향했다. 하지만 가장 뒷자리 8개가 이미 가득 차 있어서 단유는 뒤에서 바로 한 칸 앞자리에 앉아야 했다. 겨울방학 동안 또 한 번 쑥쑥 자란 탓에 덩치가 작지 않은 단유였기에 뒷자리 아이들은 아무래도 자리를 양보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선생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누구도 먼저 일어서려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게다가. “쟤냐?” 단유를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지는 무리가 뒷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탓이기도 했다. “쟤가 작년에 학교를 발칵 뒤집었던 그놈이구나. 그런데 어떻게 한 번도 못 봤지?” “교실 밖을 잘 안 나간대.” “왜?” “책보는 걸 좋아해서 교실 밖에 잘 안 나간다더라. 점심때도 교실에만 있는다던데?” “완전 범생이네. …근데 싸움을 잘해?” “일단 동영상만 보면 그렇긴 한데, 정확하진 않아. 솔직히 광종이 그 새끼 좀 허접이잖아.” 단유를 응시하는 시선에 불쾌감이 깃들어있었다. 잘난 새끼. 수군대는 소리가 작지 않았지만, 단유는 아무렇지 않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자연스럽게 책상을 정리하고 최근에 보던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별난 새끼네.” 보통 첫날이면 주위에 누가 있는지 살피거나 혹은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과 모여서 무리를 짓는데 단유는 주위 분위기와 상관없이 ‘고고한 자태’로 책을 읽는 것이다. 그 ‘꼴’이 보기 싫었다. “존나 잘난 척할 거 같은데.” “애들이랑 말 잘 안 한대.” “어떤 스타일인지 알겠다.” 제 잘난 맛에 사는 놈이리라.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들려온 소문에 따르면 그런 놈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모습을 봐도 그렇고. “야, 언제 한번 까자.” “언제?” “그거야 분위기 봐서 까야지.” 무식하게 아무 때나 성질부리는 것은 자신과 맞지 않았다. 거리낄 것 없이 행동하고픈 청춘이라도 눈치껏 살아야 하는 세상이니까. 그들의 대화는 담임 선생님의 등장으로 멈췄다. “자, 반갑다. 아까 강당에서 소개했지만, 다시 소개한다. 나는 정강구라고 한다. 이름 가지고 선생님 놀리면 안 되지만, 만약 놀리고 싶어도 선생님 귀에 들어오지 않게 해라. 만약 선생님 귀에 들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다소 익살스러운 선생님의 소개에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일단 개학 첫날이고, 다들 서먹할 테니까 간단하게 자기소개하고 시작하자. 아, 그리고 지금 앉아 있는 자리는 일단 오늘 오후까지 계속 앉도록 하고, 오후에 자리 바꾸자. 오케이?” “네!” 아이들은 앞자리에서부터 한 사람씩 일어나 자기소개를 했다. 단유의 차례가 되었을 때, ‘김단유’란 이름이 나오고 아이들이 유난스런 반응을 보였을 때는 선생님도 관심을 보였다. “어이, 김단유 학생?” “네.” “이름 많이 들었다.” “네.” “잘 부탁한다?” 무엇을 부탁하는지 모르겠지만, 단유는 얌전하게 대답했다. 그때 한 아이가, 혹은 두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노래해’ 라는 연호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곧 반 전체가 ‘노래해’를 외치기 시작했다. 단유가 아무 반응 없이 멀뚱거리는 표정으로 선생님만을 바라보며, ‘다음 사람’이라는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말 나온 김에 노래 한 번 하지그래? 시간도 많은데.” “오오!” 아이들의 환호 속에서 단유는 선생님의 손짓에 따라 교실 앞으로 나갔다. “어떤 노래요?” “그건 니가 정해야지. 아니면 아이들이 불러달라는 거 다 불러 줄 수 있어?” “아뇨.” 역시 이번에도 아이들은 ‘리모트’를 외쳤다. 그 모습이 초빙 가수에게 앵콜을 요청하는 것과 같은 모습인지라 선생님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단유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인 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조용해지기 전에 갑자기 시작된 노래에 아이들은 살짝 뭔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노래가 이어지면서 점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노래가 끝난 뒤, 아이들의 박수를 받으며 단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자, 그 다음.” 다시 아이들이 일어나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가장 뒷자리에 있던 아이들의 순서가 되었다. 그 중 단유를 아니꼽게 여기던 덩치가 일어났다. “진도하입니다.” 이름만 말하고 자리에 털썩 앉는 껄렁한 소년을 보며 선생님은 보일 듯 말 듯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이름 말고 다른 건 없어? 취미나 특기나 그런 거.” 앞의 아이들이 한 것처럼, 이라는 선생님의 말에 도하는 입술을 씰룩이다 책상을 툭 쳐서 앞으로 살짝 밀어낸 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봐도 ‘나 불량해요’라는 자세였지만, 선생님은 딱히 지적하진 않았다. “취미 없고요, 특기는…격투기입니다.” “격투기?” “네.” “어디 도장 같은 데서 배우나?” “아니요.” “그럼.” “그냥, 할 줄 압니다.” 이번에는 선생님도 혀를 차며 눈가를 좁힐 수밖에 없었다. “그 이야기는 내가 널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한다는 소리 같네. 맞아?” “…아닌데요.” “됐다. 다음.” 도하는 역시 입술을 씰룩이더니 자리에 풀썩 앉았다. 그리고는 다리를 꼬며 턱을 치켜들어 보였다. 그러다 단유에게로 시선을 옮겼는데, 단유는 자신을 보지 않고 있었다. 마치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창밖을 향해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저 새끼.’ 도하는 왠지 단유라는 놈과 사이좋게 지내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338] 도하(5) 쉬는 시간 단유는 복도에서 지태 등을 만났다. “너 3반이야? 아, 아쉽다. 같은 반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다른 반이어야 네 등수가 하나 더 오르는 거 아냐?” “어? 그러네? 그럼 잘 된 거네? 단유야, 너 나랑 평생 같은 반 하지 말자.” 그게 마음먹는 대로 되는 일이더냐. 단유는 그저 실소를 터뜨려 보이는 정도로 화답했다. 지태와 채윤은 또 같은 반이 되었기에 그들 사이의 만담은 1년간은 계속 이어질 듯했다. 뿔뿔이 흩어졌던 작년의 친구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잡담을 나누는 풍경은 비단 단유네만은 아니었다. 많은 아이들이 1교시를 마치고 복도로 나와서 정보를 교류하며 친목을 다지는 와중에, 몇몇 아이들은 굳이 건물 바깥까지 나와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야, 다른 반 됐다고 쌩까면 안 되잖아?” “미안.” “당연히 사람이면 미안한 줄 알아야지. 우리 우정이 그렇게 싸구려는 아니잖아?” 입꼬리가 삐죽 올라가는 모양새가 영 불편하지만, 면전에서 그 모습을 지적할 힘이 없던 아이는 어깨를 움츠리고 사과만 할 뿐이었다. “미안해.” “그래, 적당히 미안해하고 얼마 가져왔어?” “오늘, 은 별로 없어.” “너 그러다 걸리면 죽는 걸 알잖아? 왜 괜히 말 돌리고 그래. 피차 피곤하게 그러지 말자.” 그때 뒤에서 망을 보던 덩치가 다가와 어깨를 움츠리고 있는 아이의 턱을 붙잡았다. “야, 시간 끌지 말고 빨리 꺼내, 새끼야!” 턱을 붙잡힌 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덩치를 쳐다보았다가 노려보는 눈동자의 살기에 움찔 놀라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야, 진태야. 왜 괜히 겁주고 그래. 좋게 말로 하자니까.” 한 발 뒤에 있던 소년, 도하가 덩치를 달랬다. “새끼가 괜히 시간 끌면서 꼼수 부리잖아.” “괜찮아. 오늘 시간 많아. 그치? 지철아?” 도하의 말에 얼굴이 새파랗게 변한 지철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야, 가자. 지철이는 오후에 다시 보자, 응?” 도하는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몸을 돌렸다. “에이 씨. 매점 갈 시간도 없겠네.” 진태가 지철을 째려보며 한마디 하자, 처음 지철이를 붙잡고 있던 소년, 우성은 또 한 번 입꼬리를 올리며 지철의 머리를 가볍게 내리쳤다. “나중에 보자?” 지철은 지금이라도 지갑을 꺼내야 하나 싶었는데, 오히려 빠르게 코너를 돌아 사라지는 아이들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고 자리에 서 있어야 했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도하는 호탕해 보이는 성격과 중위권 이상을 차지하는 성적 때문에 특별한 경계대상은 아니었다. 접점이 없어 자주 마주치는 편은 아니어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지철의 도하에 대한 인상은 썩 나쁜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뒷자리에 틈만 나면 가래침을 뱉는 진태나 표정 자체가 불량스러운 우성이만이 경계대상이었다. 소심한 지철은 특별히 반에서 두드러지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유난히 더웠던 어느 날 매점 앞을 지나다가 도하가 자신을 불렀다. “지철아.” 도하가 자신의 이름을 저렇게 자연스럽게 부른다는 게 이상했지만, 지철은 달리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하고 도하를 바라보았다. “목이 마른 데, 돈이 없네. 음료수 사 먹게 1,000원만 좀 빌려줄래?” 그게 악연의 시작이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지철은 별생각 없이 돈을 꿔줬고, 도하가 1,000원짜리 지폐를 손에 쥐고 웃음을 짓던 모습을 바라보았다. “고맙다, 지철아?” 도하는 이후 종종 지철을 불렀다. 그리고 어느 날 도하 뒤에 진태와 우성이 붙었고, 돈의 액수가 점점 커졌다. 도하는 방학 때도 종종 지철을 불렀다. “같이 피시방이나 갈래?” 지철은 아이들의 유흥비를 책임졌다. 하지만 용돈에도 한계가 있으니 지철이 돈이 없다고, 미안하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세 사람은 본색을 드러냈다. 그날 지철은 진태와 우성에게 이보다 심하게 맞을 수 없다는 듯 두들겨 맞았다. “얼굴은 안된다, 진태야.” 도하는 주먹을 쓰지 않았다. 뒤에서 담배를 문 채 지철이 맞는 장면을 구경할 뿐이었다. 주먹질이 끝났을 때는 도하가 담배를 두 개비를 피우고 난 후였다. “지철아.” “…….” “대답이 없네? 어떡하지?” “으, 응.” “그래, 친구가 부르면 바로바로 대답해야 돼.” 지철은 고통에 찬 신음도 마음대로 내지 못했다. “오늘은 많이 피곤할 테니까, 들어가서 좀 쉬어. 이렇게 놀면 몸 상해. 푹 쉬고, 몸 좀 나으면 그때 보자. 그리고 그때는 꼭 ‘같이’ 놀자.” 도하는 지철의 뺨을 토닥여 준 뒤, 몸을 일으켰다. “아, 혹시나 하는 말인데. 만약에 오늘 일이 이상하게 소문이 돌잖아? 그러면 나도 움직일 거야.” 진태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도하 네가 움직이면 쟤, 그냥 죽는 거 아냐?” “죽긴 뭘 죽어. 그냥 좀 힘든 정도지.” 대수롭지 않게 대화를 나누며 도하의 무리는 사라졌다. 지철은 꺽꺽거리며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지철도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도하 같은 아이가 손을 쓰면 더 독하게 쓴다는 사실을. 반 광분 상태에 빠진 애들과 달리 끝까지 자신을 즐기듯 바라보던 그 시선을 지철은 잊을 수 없었고, 무시할 수 없었다. 2학년이 되면서 지철은 2반이 되었다. 다른 반이 되었다는 것에 기뻐한 것도 잠시, 3반의 도하와 우성, 1반의 진태가 자신의 반 복도에서 불렀을 때 절망감에 쓰러질 것 같았다. **** “단유야, 오늘 축구부 단체 연습이 있어서 같이 못 가겠다.” “알았어. 연습 잘하고 와.” 이번 주 주말에 바로 춘계대회 예선전이 벌어질 예정이었다. 그에 대비한 훈련이니 아마도 오늘 축구부 감독님은 단단히 기합을 넣어줄 예정이리라. 점심을 먹고 다시 교실로 돌아올 때, 단유는 명수네 반 교실로 향하는 아이의 교복이 심하게 구겨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단순히 심하게 놀다가 구겨졌다기 보기 힘든 모습과 아이가 내뿜는 음울한 기운에 단유는 다른 무언가를 추측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단유는 관심을 끊고 반으로 들어갔다. 저런 아이들을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당장 자신과 관련이 없는데 괜한 오지랖을 부릴 이유도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단유는 본인의 성장에 더욱 집중할 때였으니까. 자리로 돌아온 단유가 책을 펼쳤을 때, 도하가 우성과 같이 반에 들어왔다. 도하는 교실 뒤에 붙은 거울을 보기 위해 걸음을 옮겼고, 때문에 단유의 뒤를 지나가야 했다. 단유는 도하가 지나갈 때, 짙은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도하는 머리를 매만지며 얼굴 이곳저곳을 확인하다가, 우성에게 치약이 있냐고 물었다. 우성은 가방에서 치약을 하나 꺼내 흔들어 보였고, 도하는 그 치약을 건네받아 서랍에서 칫솔을 꺼내 화장실로 향했다. 그렇게 그냥 나가는 줄 알았던 도하는 다시 몸을 돌렸다. “야, 너 뭐 보냐?” 단유는 힐끔 돌아보았다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냥 가라.” “응?” 단유는 대답 대신 무시를 선택했다. “이 새끼 봐라? 야, 내 말 씹냐?” 도하는 치약으로 단유의 머리를 툭툭 쳤다. 단유는 손을 저어 도하의 그 행동을 막으려 했는데, 그게 오히려 도하에게는 재밌는 장난처럼 여겨졌나 보다. “우성아, 이것 봐라.” 단유의 손을 피해 머리를 툭툭 치는 모습을 보고 우성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단유가 인상을 쓰며 도하를 바라보자, 도하도 장난을 멈췄다. “새끼야, 얼굴 풀어. 친구끼리 장난치는데 진지 빨고 지랄이냐.” “친구?” “그래, 새끼야. 같은 반이면 친구지 새끼야.” 도하의 히죽거림이 눈에 거슬렸다. “갑자기 시비를 거는 녀석이 내 친구는 아니지.” “뭐?” 단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도하 역시 단유와 시선을 마주했지만, 단유가 조금 더 컸던 탓에 시선이 약간 올라갔다. “그냥 화장실에나 가. 가서 더러운 냄새나 지우고 말해. 토 나올 거 같으니까.” 도하는 자신에게 이렇게 강하게 말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게다가 그 상대가 책이나 보는 ‘모범생’이라는 사실에 더 지금의 상황이 당혹스럽고, 화가 났다. “개새끼가, 적당히 해줄라니까…. 야, 뒤질래?” 우성이도 도하 옆으로 다가왔다. “도하야, 비켜봐라. 뒤에서 그냥 보고 있을라니까 존나 열 받게 만드네.” 우성은 도하 앞으로 몸을 들이밀고는 단유의 가슴을 밀쳤다. “야, 야.”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우성은 살기 가득한 눈으로 단유의 가슴을 한 번 더 밀치려 했다. 단유가 그의 손목을 붙잡지 않았다면 말이다. 어, 하는 사이에 손목이 붙잡힌 우성은 강한 악력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아!” 짧은 탄성과 함께 우성은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놔, 새끼야! 아프다고!” 하지만 단유는 여전히 시선을 도하에게 던졌다. “학기 초마다 시비 거는 놈들이 한두 명씩 있는데, 도대체 너희들은 어떻게 살아가길래 매번 이러냐? 담배나 피우면서 어른 흉내나 내면 진짜 어른이라도 된 거 같애? 너보다 약한 애들 괴롭히면서 자위하면 인생이 즐거워? 고작 30명 정도인 교실에서 왕 노릇하면서 사는 게 인생의 목표야? 그런 거 아니면 정신 차리고 살아.” 단유의 말에 도하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여전히 우성은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지만, 그저 한 손목만 붙잡혀 있을 뿐인데 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욕을 하고 폭력을 쓴다고 니들이 진짜 강한 줄 알면 그건 착각이야. 그런 건 전혀 강한 것도 아니고, 너희보다 강한 사람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니가 보는 세상보다 이 세상은 넓어. 조심하면서 살아.” 단유는 우성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우성은 자신의 손목을 부여잡으며 뒤로 물러났다. 조금이라도 단유에게서 멀어지려는 힘겨운 몸짓이 도하는 못마땅했다. “존나 잘난 새끼였네. 그러는 니는 지금 한 게 폭력 아니냐, 새꺄? 작년에도 광종인가 하는 새끼 패고 다녔더만, 니는 얼마나 깨끗하다고 훈계 질이야, 씹새끼야!” “그게 훈계로 들려? 난 충고를 한 거야. 훈계라면 너희들이 바른길로 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해야 훈계지. 너희들이 바르게 살든 엉망진창으로 살든 내 알 바 아니거든.” “이 새끼가.” 단유는 도하가 계속 화를 내든 말든 자신의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그래도 얼굴 맞대고 1년을 함께 할 녀석이라서 충고를 한 거야. 그렇게 가볍게 살다가 큰 코 다칠 수 있다는 진실을 알려 준거니까, 머리가 있으면 받아들여. 그런 머리도 없으면 할 수 없고.” 도하는 붉어진 얼굴로 단유를 노려보았다. 주변의 아이들이 웅성거림도 멈추고 두 사람을 지켜볼 때, 도하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럴게. 주의하지 뭐.” 의외의 반응에 주위 아이들이 어리둥절할 때, 도하는 쓰러진 우성의 허벅지를 툭툭 걷어찼다. “일어나라. 꼴사납다.” 우성이 힘겹게 일어서자, 도하는 단유에게 치약을 흔들어 보였다. “김단유, 너. 꽤 잘난 놈이네. 잘났다. 아주 잘났어.” 그리고 돌아섰다. 아이들은 어쩐지 싱겁게 끝난 싸움에 도하가 졌네, 봐줬네 등으로 속삭임을 나눴고, 도하는 우성을 데리고 화장실로 갔다. “도하야.” “조용해, 새끼야.” 도하는 방금 전과 또 다르게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오후에 시간이 좀 많이 필요하겠다.” 입안에 하얀 거품을 가득 베어 문 도하가 화장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 [339] 도하(6) 오후에는 구름이 끼면서 날이 어둑해졌지만,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아 훈련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가벼운 몸풀기와 체력 훈련에 이어 실전을 방불케 하는 연습이 시작되었다. 방학 때 빠진 아이들도 돌아왔기에 두 팀으로 나뉘어 경기를 진행할 수 있었다. 중앙선을 넘어온 공이 앞선에서 자리를 지키던 명수에게로 이어졌다. 명수는 빠르게 몸을 돌려 수비수 한 명을 제친 뒤, 곧바로 골문을 향해 드리블했다. 그 앞에 또 다른 수비수 2명이 달려들었다. “명수야, 패스해!” 반대편에서 뒤쫓던 같은 팀의 외침이 있었으나 명수는 우직하게 앞으로만 달릴 뿐이었다. “명수야!” 명수는 두 수비수와 맞닥뜨린 뒤 공을 세웠다. 아니, 세우는 듯했던 명수는 발바닥으로 공을 옆으로 빼는 모양새를 취했고, 거기에 한 사람이 몸을 살짝 기울일 때 그 찰나를 노려 명수는 교묘한 발재간으로 공을 차올려 두 수비수 사이로 넘겼다. 두 수비수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공으로 옮겨지며 명수가 시야에서 멀어지는 그 순간을 노려, 명수는 앞으로 튀어나가며 두 수비수를 뚫었다. “막아야지!” 골키퍼가 달려오는 명수와 공을 향해 달려나가며 각을 좁혔다. 명수는 가볍게 공을 띄웠고, 골키퍼의 머리 위로 넘어가던 공은 골문 안으로 통통 튀기며 들어갔다. “명수, 저런 플레이는 지적해야 할 거 같은데요.” 팔짱을 끼고 경기를 지켜보던 코치가 감독에게 요구했으나, 감독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 그냥 지켜보자.” 평소에는 이타적인 플레이 위주로 하던 명수가 갑자기 저런 식으로 나오는 게 이상하긴 했지만, 감독은 차라리 저런 식으로 골을 넣으려 하는 명수의 의지가 스트라이커로서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연습 때는 충분히 테크닉을 보이던 명수가 시합만 들어가면 상대와 맞붙어 싸우기보다는 같은 팀 동료에게 공을 돌려 골을 넣게 해주는 플레이를 했었던 게 명수의 단점이라 생각했던 감독이었다. ‘몸싸움을 즐기지 않는 스타일의 축구선수도 있지만, 그래서는 크게 될 수 없다.’ 고 여기면서도 중학 레벨이기에 특별히 지적은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명수가 보인 플레이는 언뜻 보면 독단적인 플레이지만, 달리 보면 골에 대한 욕심을 드러낸 스트라이크의 면모라 판단했다. “야, 인명수! 왜 패스 안 해?” “내가 넣을 수 있었거든.” “거기서 뺏기면 어떡하려고?” “안 뺏길 자신이 있었어.” 코치가 호루라기를 불고 몰려드는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아이들은 다시 각자의 포지션으로 돌아가 경기를 시작하려 하는데, 감독이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명수는 스트라이커다. 스트라이커가 골을 욕심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방금의 플레이는 위험하긴 했지만, 충분히 돌파할 수 있음을 명수가 보여줬다. 그러니 이번 명수의 플레이에 관해서는 칭찬한다. 하지만, 인명수. 다음에도 이번처럼 할 수 있겠어?” “네. 할 수 있습니다.” 망설임 없이 외치는 명수의 눈빛을 보던 감독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동계에서 확실히 실력을 보여라. 실력으로 동료들을 설득해라. 그게 축구선수로서의 대답이다. 다른 사람들도. 알겠나.” “예!” 아이들은 다시 흩어져서 시합을 재개했다. 말보다 행동으로, 실력으로 자신의 말을 증명하라는 감독의 주문은 좀 더 자신감 있는 플레이로 팀에 기여하란 것임을 이해한 아이들이었다. 감독은 올해 춘계대회에서는 꽤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으며 아이들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 단유는 지태와 채윤과 함께 하교하는 중이었다. 채윤은 아침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들뜬 모습이었다. “말도 마라. 오늘 하루 종일 그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 반 애들이 전부 외울 정도였다니까.” “그 정도는 아니었어. 그리고 그때 선생님 한 분도 계셨었나 봐. 우리 담임도 교무실에서 이야기를 듣고 왔었대.” “그래가지고 얘가 완전 신이 나서, 지 죽을 뻔한 이야기를 계속 떠드는데 보는 내내 한심해서 원.” “야, 너 말이 심하다?” “얘, 봐라. 어휴. 보는 사람은 얼마나 가슴이 졸였는데, 얘는 왜 이런대? 보통 나이가 한 살 더 들면 철이 들어야 하는데, 얘는 왜 거꾸로 간대?” “웃기시네? 솔직히 터놓고 이야기해서 철이 덜 든 건 너지.” 두 사람의 만담을 웃으며 듣던 단유는 문득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왜?” “아니, 그냥.” “뭐 있어?” 단유를 따라 뒤를 돌아보던 두 소년은 아무런 이상도 찾지 못했다. “뭔데?” “아냐, 가자.” 단유네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시 시작된 만담을 들으며 집으로 향하는 내내, 단유는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딱히 보이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계속 따라오며 지켜본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만약 누가 따라온다면, 아마도 자신에게 해코지할 마음을 가진 ‘진도하’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가능성일 뿐 눈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니, 일단 옆의 두 친구와 헤어진 뒤에 확인해도 늦지 않으리라. 아침의 사고가 벌어졌던 건널목에 이르러 채윤은 다시 건널목을 건너기 위해 멈춰 섰다. “와, 다시 오니까 가슴이 또 뛰네. 나 진짜 평생 잊을 수 없을 거 같애.” “단유야. 혹시 이런 사고가 날 뻔한 일 때문에 머리에 충격을 받고 어려지는 경우가 있냐?” “책에서 그런 경우를 보지 못했지만, 없으리란 법은 없지.” “김단유. 너까지 그러기냐?” 단유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채윤을 배웅한 뒤, 곧이어 지태와도 헤어졌다. 집으로 걸음을 옮기던 단유가 오른쪽으로 난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잠시 후, 한 소년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단유가 사라진 골목 쪽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나 그곳에 이미 단유는 없었다. 당황한 소년이 걸음을 재촉해 여기저기를 살펴보지만, 단유가 어느 길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떡하지?” “뭘 어떡해?” 소년은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단유가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누구야?” 소년은 대답 대신 뒷걸음질 쳤다. “왜? 뭐? 왜 그러는데?” 단유가 말없이 다가오자, 소년은 다시 한 걸음 물러서며 주저리 말을 늘어놓았다. “왜 그래? 갑자기? 나 아무 잘못 한 거 없어. 내가 안 그랬어.” “난 아무 말 안 했는데?” “그럼 오지 마.” “니가 먼저 날 쫓아 왔잖아? 무슨 용건이 있을 거 아냐?” 소년은 도하가 아니었다. 하지만 경계를 풀지 않고 다가간 단유에게 소년은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그, 그런 거 없어.” 단유는 소년의 가슴에 붙은 명찰을 보았다. “권순욱? 혹시 나 알아?” “아, 아니. 몰라.” “모르는데 왜 쫓아 왔어?” “쫓은 거 아니라니까.” “그럼 어디 가는 중이었는데?” “그걸 왜 말해? 니가 무슨 경찰이야?” 단유는 꽤 뻔뻔한 순욱의 대답을 들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이래서야 순욱이 왜 자신을 쫓아 왔는지, 이유를 알기 어려웠다. “일단 너희 집이 이쪽이 아니란 건 맞지?” “아닌데? 우리 집 이쪽인데?” “그래?” 일단 거짓말을 하고 있음은 확인했다. “집에 가는 길이야?” “그, 그래. 그러니까 비켜.” 단유는 한숨을 짧게 내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권순욱. 일단 너희 집이 이쪽이 아니란 건, 니가 들고 있는 핸드폰에 붙은 카드만 봐도 알 거 같은데?” 카드란 말에 순욱은 자신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정확히는 핸드폰 뒷면에 꽂아둔 교통카드였다. “지하철 카드잖아? 자주 쓰니까 그 앞에 두고 쓰는 거겠지. 그런데 이쪽은 지하철이 없거든? 그러니까 너는 이곳이 자주 오는 곳이 아니란 거야.” “아니거든. 이건…학원 갈 때 쓰는 거거든.” “니가 다니는 학원이 어딘데?” “…그걸 왜 말해야 하는데?” “니 알리바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하지만 순욱은 대답하지 않았다. “비켜, 너랑 이야기할 시간 없어.” 순욱이 억지로 가려 하자, 단유는 몸을 옆으로 틀어 길을 열어줬다. 그에 오히려 순욱이 멈칫거리며 눈치를 봐야 했다. “가.” 순욱은 단유를 째려보다, 얼른 걸음을 옮겨 다시 큰길로 나갔다. “그러니까, 집에 간다는 애가 왜 다시 돌아가냐고.” 단유는 중얼거리면서 몸을 돌렸다. 잠시 후 사라진 줄 알았던 순욱이 고개를 내밀고 골목을 살피다, 다시 빠른 걸음으로 단유가 간 방향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단유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아, 씨발. 큰일인데.” 순욱은 핸드폰을 쥔 채로 발을 구르다, 결국 통화버튼을 눌렀다. “어, 나야. 미안. 아니, 안 들켰어. 들킨 건 아닌데 골목이 많은 곳으로 가서 길을 놓쳐서 그래. 응. 아냐, 꼭 알아낼 수 있어. 진짜야.” 순욱은 통화를 마치고 이마에 난 땀을 닦았다. “가지가지 한다.” 그 모습을 보던 단유가 중얼거리다, 다시 몸을 돌렸다. 순욱은 단유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줄도 모르고 투덜대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리고 그 시간, 도하는 먼지 가득한 방안에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방금의 통화내용을 떨쳐냈다. “실패야?” “그런가보다.” “병신, 그 새끼는 진짜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다니까. 그러게 그런 놈을 왜 시켜?” “주변에 사람이 없다.” 도하가 쓸쓸한 어조로 넋두리하듯 한마디를 뱉고는 다시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았다. 뿜어지는 연기를 바라보던 도하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고개를 돌렸다. “진태야, 적당히 좀 마셔라. 나중에 또 토하지 말고.” 고주망태가 되기 직전이던 진태는 흔들거리는 시선으로 도하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적당히 마시라고.” 진태는 도하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다. 도하는 슬쩍 그곳을 쳐다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우성아, 전화해서 이리로 오라 그래.” “여기로?” “그리고 올 때 물 좀 사 오라고 해. 목마르다.” 진태의 주문까지 접수한 우성이 순욱에게 전화할 때, 도하는 일어나서 집을 나섰다. 언덕에 위치한 이 집은 빈집이 된 지 꽤 오래되었는데도, 사람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도하가 아지트로 사용할 마음을 품으면서 지금까지 요긴하게 사용하는 중이었다. 오히려 집보다 더 오래 머물다 보니, 마치 자기 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러운 게 흠이지만.’ 다음에 날 잡아서 애들한테 청소라도 시켜야 할 것 같았다. 집을 나와 보니 시원한 바람이 언덕길 아래에서부터 불어와 도하의 앞머리를 쓸고 지나갔다. 구름 낀 하늘이 자줏빛으로 물들고 있는 경치가 보기 좋았다. 잠시 후, 진태가 삐거덕거리는 문을 열고 나왔다. “왜 여기 있어. 들어가자.” 얼굴이 하얗게 변한 듯한 게 아무래도 속을 게워냈던 것 같아 보였다. “토했냐?” “응? 아. 뭐.” “그리고 애들 좀 보내라. 조용히 있고 싶다.” “…그럴래?” 진태가 히죽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문이 열리며 여자애 두 명이 엉거주춤하는 걸음으로 나왔다. 여자애는 도하를 흘겨보면서도 눈치를 보았다. “빨리 가라.” 여자애는 지가 불러놓고, 라고 중얼거리며 콧방귀를 뀌고는 골목길 아래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단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니가 어른이나 되는 줄 알아?” “씨발놈.” 도하는 기분이 더러워졌다. 다시 빈 집으로 들어간 도하는 자리를 정리하던 우성에게 말했다. “술 남았냐?” “지난번에 사 온 거 있을걸?” 찬장을 뒤져보니 소주병이 하나 나왔다. 도하는 뚜껑을 따고 소주병을 통째로 들고 마시기 시작했다. 벌컥벌컥 들어가는 소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마시던 도하는 반쯤 마시다 병을 내렸다. “윽.” 물을 급히 마셔도 사레가 들릴 판에 소주를 들이부었으니, 목이 여간 따가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더러운 기분을 잊으려면 이 방법이 제일 좋았다. 가장 ‘어른스러운’ 방식으로. **** “나 왔어.” “오셨어요?” “이야, 이게 누구야? 우리 단유가 날 다 마중 나오네?” “전 안 보이시나 봐요?” “이야, 이게 누구야? 웬일로 우리 명수가 게임을 안 하고 있어?” “밥 차려놨어요.” “밥? 누가? 니가?” “같이 했어요.” “우와, 완전 대박.” 하은은 씻는 건 뒤로 미루고 식기 전에 먹자며 식탁에 앉았다. “맛있겠네.” 식탁에는 3인분 라면이 김을 내며 기다리고 있었다. 적당히 라면을 덜어서 한 젓가락을 들어보는 하은은 면을 씹으면서 웃음을 지었다. “맛있어요?” 명수의 질문에 하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라면 맛이야.” “뭐예요, 그게. 맛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라면 맛이 라면 맛이지. 그리고 누가 끓인 거야?” 명수는 단유를 가리켰다. “다음에는 라면에 꼭 건더기 스프 넣자?” “네.” 하은을 비롯 세 사람은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 [340] 인본(1) 개학일 다음 날, 다행히도 등교하는 길은 무사 평안했고 단유는 아무 일 없이 학교에 도착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으니, 단유답지 않게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찾아갔다. 전날, 정규수업시간이 모두 끝난 뒤, 선생님에 의해 자리가 재배치되었고 단유는 다시 제일 뒷자리로 오게 되었다. 2학년이 되면서 단유의 키가 170대 중반에 이르렀지만, 단유보다 키가 큰 학생이 2명은 더 있었다. 덕분이랄까, 단유는 창가 쪽 분단에 자리를 갖게 되었고, 위치만큼은 대만족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다만 문제라면 짝으로 배정한 소년이 문제였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소년은 아침부터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교실로 들어오더니 뚜벅뚜벅 걸어 단유가 있는 자리로 다가왔다. 그리고 단유 옆자리에 가방을 내던지듯 올려놓고 거칠게 의자에 앉았다. 책을 읽고 있던 단유는 옆자리에서 들려온 소음보다 시비조로 다가오는 소년의 말투에 인상을 찌푸려야 했다. “얼굴 펴라, 새끼야.” 반 아이들 모두에게 불친절한 소년, 도하였지만 유독 단유에게 더 심하게 뿔을 세웠다. “그럼 말이나 곱게 하던가.” “좆 까.” 단유는 잠깐 능력을 써서 없애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자제심. 쓰더라도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써야 안전할 일이다. 심호흡으로 마음을 안정시키려 하는데, 숨을 들이켤 때마다 코의 점막을 자극하는 냄새 때문에 오히려 마음이 불편해지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단유는 1교시가 시작될 때까지 꽤 오랜 시간 책에 집중도 못 하고 불쾌한 마음으로 아침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단유가 그러거나 말거나, 도착하자마자 건너편 자리에 앉은 우성과 시시껄렁한 이야기나 나누며 시간을 보내다가 1교시가 시작되자, 할 일이 끝났다는 듯,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하는 도하였다. 그러다가도 쉬는 시간만 되면 어떻게 정신을 차리는 건지, 벌떡 일어나서 우성과 함께 매점으로 향하는 도하는 매시간 무언가―빵이나 과자나 껌이나―를 입안에 집어넣은 채로 교실로 돌아왔다. “뭘 봐, 새끼야. 책이나 쳐 봐.” 단유는 눈을 감고 다시 심호흡을 했다. 깊게 들이쉬고, 호흡의 따뜻한 기운을 가슴 속 아래까지 밀어 넣었다가 잠시 후 천천히 내뱉는다. 숲속의 청량함 속에서 심신의 안정과 도약을 위해 배운 호흡을 이런 곳에서 쓰게 될 줄이야. “같잖은 게 꼴값 떠네. 진짜 죽도록 맞아야 정신 차리지?” 이제는 우성까지 시비를 걸고 있었다. 단유는 그들의 표현대로 ‘같잖은’ 악의에 신경질이 났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평소의 자신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 정도 도발에 말려드는 거지?’ 너무 쉽게 화를 내고, 도발에 신경질을 내는 모습은 자기답지 않다, 고 단유는 생각했다. ‘고작해야 어린애들 장난 수준이지 않은가.’ 돌아보니 최근 충동적으로 행동한 게 적지 않았다. 당장 어제 능력을 발휘했던 것도 그랬고, 그전에는 나윤에게 오지랖을 부렸던 것도 그랬다. ‘왜 그랬을까.’ 계기가 있다면 아마도 ‘재훈’의 일 때문일 것으로 생각하는데, 정확히 그 일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가끔 하은이 수건을 개면서 중얼거리던 노래가 생각났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어찌 알겠느냐.” 단유는 좀 더 스스로에 대해 집중해서 분석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전에 옆에 있는 도하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할 것 같다. 어디서 또 누구를 괴롭히고 온 모양인지, 누군가를 패는 시늉을 하며 낄낄대고 있었다. 제일 뒷자리까지 선생님들이 잘 오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인지, 아니면 선생님이 알아도 상관없다는 것인지 수업시간임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마침 도하는 누군가로부터 강탈한 것이 분명한 지갑 한 개를 가방 뒷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그 모습을 흘깃 본 단유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2층 교실에서 내다보는 창밖은 작년보다 훨씬 먼 곳까지 보였다. 학교 밖 단층 건물 옥상에 녹색의 방수 페인트가 칠해져 있는 것도 잘 보였다. 단유는 적당한 위치라 생각했다. 다시 또 한 시간이 지나고, 눈을 게슴츠레 뜬 도하가 우성과 함께 교실을 나가기 위해 가방 뒷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어? 어디 갔지?” 도하는 가방 이곳저곳을 뒤졌지만, 숨겨둔 지갑은 전혀 보이질 않았다. “왜?” “아까 삥 뜯은 거 없어졌다.” “딴 데 둔 거 아냐?” “아냐, 씨발. 여기 넣어뒀는데.” 우성은 자기 걸 줄 테니까 일단 갔다 오자고 도화를 꾀었다. 도하는 자리에서 일어나다 슬쩍 단유를 쳐다보았다. 단유는 아무런 동요 없이 책을 읽는 중이었다. “아, 씨발. 볼 때마다 성질나네.” “빨리 가자.” “알았어, 새끼야.” 도하가 우성과 함께 나가는 모습을 보던 단유는 볼을 긁적였다. 아무래도 우성이 저놈의 것도 같이 처리해야 할 것 같았다. **** “반갑네. 우리 처음 보제? 내 아는 사람?” 몇몇 아이들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그래, 그래. 됐다. 내 이름은 김승민이라고 한다. 오늘부터 내랑 1년 동안 이 교과서를 탈탈 털어 먹을기다. 알긋제?” 선생님이 수학 교과서를 들고 흔들어 보이자, 몇몇 학생들이 ‘어우’하는 탄식을 내뱉었다. “그래, 이 정도 리액션이 나와야 내도 재밌게 수업을 하지. 아, 그리고 여기 이 반에 전교 1등 있다며?”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한쪽으로 쏠렸다. “니가?” “1학년 때 성적은 그랬습니다.” 단유의 말에 선생님이 히죽 웃음을 지었다. “니 쪼매 유명하대? 연예인이가? 연습생?” “아무것도 아닌데요?” “그렇나? 근데 니 노래도 냈담서? 마, 됐다. 니가 뭘 하든 믄 상관이고? 학생이 공부 잘하면 장땡이지. 맞제?” 아이들이 ‘에이’하고 야유를 하자, 선생님은 키득거리며 교탁을 몇 번 쳤다. “야들이 왜이리 호들갑이고. 됐고, 니 수학 잘하제? 어디 학원 다녔나?” “학원 안 다녔는데요?” “그럼 니 혼자 공부했나?” “…공부 도와주시는 선생님이 계십니다.” “과외하네? 그래서 잘하나? 어디까지 했는데?” 갑자기 수업은 안 하고 웬 호구조사인가 싶었지만, 일단 단유는 성실히 대답했다. “중학교 수학 과정은 다 배웠습니다.” 굳이 고등학교까지라고 이야기하는 건 너무 자신을 드러내는 것 같아 말을 바꿨지만, 그 정도로 이미 아이들의 야유를 받기에 충분했다. “맞나? 그럼 내 시간에 되게 지루하겠네?” “네?” “지루해도 내 시간에 졸거나 딴짓하면 전교 1등이라도 안 봐준대이. 알겠나?” “네.” “딴 놈들도 단디 기억해라. 내 시간에 뭐하면 안 된다고?” “딴짓이요.” “그래. 딴짓하다 걸리면 가만 안 둔다. 알긋제? 몇몇 놈들이 선행학습이라고 학원 가서 배웠다고 잘난 척하면서 수업시간에 딴짓하는 놈들 있던데, 내는 그런 놈들 절대 그냥 안 봐줬다. 알긋나?” “네!” “그럼 수업 시작하자.” 유쾌한 듯 웃으며 말씀하시는 것과 달리 눈초리는 매우 살벌해서 아이들도 더는 웃음이나 야유를 내지 않았고, 진중한 가운데 수업이 시작되었다. “아, 씨발. 뭐야.” 도하의 중얼거림을 무시하고 단유는 몸을 꼿꼿이 하고 수업을 들었다. 선생님의 과장된 사투리 억양과 독특한 표현법으로 나름 재미있게 수업이 진행되었고, 덕택에 아이들은 어렵게 생각될 법한 수학 시간을 즐거운 마음을 집중할 수 있었다. “어이, 거기 고개 안 드나? 선생님 목이 이리 쉬도록 설명하는 데 집중 안 하면 어찌한다고 안 그랬나? 고개 들어, 알았지?” 도하 역시 이번 시간에는 전혀 잘 수 없었다. 일단 처음 만나는 선생님인 데다 만만하게 보기 힘든 아우라가 있어, 고개를 들고는 있지만 뭔갈 알아듣고 있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야말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누군가에겐 즐겁고, 누군가에겐 고통스러웠던 수학 시간이 지나자, 도하는 신경질적으로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났다. “왜?” 우성이 묻자, 가방을 뒤집어 탈탈 터는 도하였다. “진짜 좆 같네.” “없어?” “…씨발.” 결국 제 화를 못 이기고 가방을 집어 던지는 도하였다. 그 행동에 주변 아이들이 눈치를 봤다. 단유는 고작 그런 이유로 저렇게 요란스럽게 행동할 이유가 있을까 싶지만, 본인이 아닌 이상 저 속을 어찌 알까? 괜히 ‘나 화났어’를 자랑하듯 행동하는 도하에게서 신경을 끊는 게 마음이 편하리라. “어?” “왜?” “여기 넣어 놨는데, 없다.” “아, 씨발! 뭐야!” 도하는 발을 구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흘끔거리던 아이들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누구야! 씨발!” 화를 내던 도하는 고개를 홱 돌렸다. 얌전하게 책을 읽는 단유를 본 도하는 이를 갈다가 물었다. “야, 김단유.” 그러나 단유는 듣지 못한 듯,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와, 이 새끼, 또 씹네.” 도하는 단유의 뒤통수를 밀치며 단유의 시선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뭐야?” “새끼야, 사람이 부르면 봐야 할 거 아냐? 새끼가 어디서 쌩 까고 지랄이야!” “…뭔데?” 차분하기만 한 단유의 눈빛에 더 화가 났는지, 눈을 부라리는 도하였다. “니가 그랬냐?” “뭘?” “지갑 뽀린 게 너냐고!” “내가 왜?” “아우, 씨발.” 하긴 단유는 계속 자기 옆에 앉아 있었다. 심지어 2시간 동안, 쉬는 시간에도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도하는 단유를 윽박지를 핑계가 없었다. “아, 미치겠네.…야, 눈깔아, 새끼야.” 단유는 얌전히 시선을 돌려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딱히 도하의 말을 듣고 시선을 내렸다 보기 어려운 분위기인지라, 더 열이 받은 도하는 단유의 뒤통수를 때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만약 진태가 그 순간에 교실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야, 뭐해?” “야, 너 시간 있어?” “있지.” “수금이나 하러 가자.” 도하와 우성은 일단 씩씩거리면서 교실을 나갔다. 아이들은 그 모습을 못 본 척하면서 각자의 일을 봤다. 모두가 시선을 돌릴 때, 단유만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끝이 없네, 끝이.’ 단순히 뺏은 물건을 되찾아오는 것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았다. 근본적인 문제가 처리되지 않는 이상, 이 불편한 관계는 계속되리라. ‘결국 문제는 도하니까, 도하를….’ 단유는 순간적으로 품은 생각에 흠칫 놀랐다. ‘왜 이러지? 나….’ 단유는 문득 자신이 힘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너무 쉽게 일을 해결하려는 것이 아닌가, 라는 반성을 했다. 고작 자기 편하자고 한 사람의 생명을 손쉽게 저울질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런 녀석 따위 없는 게 이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지금껏 봐왔잖아? 저런 애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가깝게는 ‘광종’이란 케이스가 있고, 멀게는 보육원에서 자신에게 악의를 드러냈던 ‘동인’의 경우가 떠올랐다. ‘저런 애 하나 없어진다고 세상이 달라지진 않겠지만, 적어도 교실에 평화는 오지 않을까?’ 모두를 위한 평화를 추구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할 테니까. 단지 편하게, 불필요한 곳에 신경을 쓰면서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환경을 ‘개선’하고 싶은 마음이 들 뿐이었다. ‘덕지불수, 학지불강…(德之不修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 공자가 말했듯, 덕을 닦고 학문을 익히고 의로움을 따르고 선하지 못한 것을 고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못하는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지금의 경우는 과연 지키지 못하는 경우인가, 아니면 방법이 잘못된 것인가. 공자는 말씀하셨다. 지혜로운 사람은 미혹되지 않는다고(知者不惑). ‘나는 지금 어떤 유혹을 받고 있는 걸까?’ 단유는 결국 책을 덮었다. 「지능의 탄생」이란 책의 표지가 문득 허망하게 느껴졌다. 당장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마당에 이런 책을 읽어봐야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책을 읽다가 ‘부질없다’라는 느낌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나중에 갚을게. 들어가라.” 우성과 도하가 시끌벅적하게 교실로 돌아왔다. 단유는 시빗거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새끼, 밖에 UFO라도 있냐?” 도하는 물론이고 우성까지 시비를 걸고 싶은가보다. 인내심이라면 누구 못지않게 길렀다고 생각했는데, 단유는 조금 전 고뇌하던 문제는 싹 잊어버렸다. 마침 종이 울리고 사회과를 맡은 여 선생님이 들어오시자, 도하는 바로 자리에 엎드렸다. ‘그래, 한 시간 정도라면.’ 단유는 한 시간 동안 도하가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그건 도하의 문제일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면서. **** “와, 씨발. 무슨 꿈이 이따위야.” 도하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말했지만 외친 말의 의미와 달리, 꿈이 아닐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벌거벗은 채인 자신의 처지는 둘째치고 휑한 산골에 홀로 떨어진 도하는 도대체 이곳이 어딘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이곳에 도하의 의문을 풀어줄 이는 없었다. “아, 씨발.” 아랫도리를 덜렁거리며 추위를 피할 곳을 찾던 도하는 강한 통증에 주저앉고 말았다. 작은 조약돌을 밟으면서 통증을 느낀 도하는 평소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신발의 중요성을 되새겼다. “여기가 어디야!” 괜히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지만, 메아리도 없이 허망하게 사라지는 목소리였다. 누군가 자신도 모르게 납치를 한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리 바보라도 그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쯤은 알 수 있었다. 문득, 먼 곳 어디서 모골이 송연하게 만드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안전’하지 않은 곳, 이라는 직감은 도하를 두렵게 만들었고, 도하는 벌떡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바닥이 아파서 뛰지는 못해도 이곳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에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금방이라도 뒤에서 날카로운 이를 가진 짐승이, 자신을 노리고 달려들 것 같다는 공포심에 도하는 추위와 상관없이 진땀을 흘려야 했다. “아, 씨발.” ======================================= [341] 인본(2) 수업 종이 울리고 단유는 책을 덮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야, 도하야.” 우성이 뒤로 돌아보며 도하를 불렀다. 깊은 잠에 들었는지 도하는 여전히 책상에 엎드린 채였다. “야, 진도하.” 단유가 눈을 뜸과 동시에 도하가 화들짝 놀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억.” 깊은 물 속에 잠겨 있다가 튀어나온 사람처럼 컥컥거리며 뒷걸음질 치는 와중에 의자가 바닥에서 구르며 요란한 소음을 냈다. 아이들의 시선이 뒤로 몰린 와중에 도하는 교실 뒤 사물함이 있는 곳까지 물러나더니 벽에 바싹 붙어서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야, 너 왜 그래?” 우성의 의아한 시선에도 도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다가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 틈에 단유가 슬그머니 일어나 여유로운 걸음으로 도하의 앞을 지나 교실을 나갔다. 그런데도 도하는 전혀 그 모습에 신경 쓰지 못했다. “여, 여기 어디야?” “…너 꿈 꿨냐?” 보통은 수업시간에 잠을 자도 조금씩 꿈틀대며 인기척을 내던 애가 너무 조용하게 엎드려 있었던 탓에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 라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저렇게 ‘발작’을 하면서 정신 못 차리는 모습을 보니 우성은 도하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속내를 드러낼 수 없어, 대신 걱정하는 시늉을 했다. “괜찮냐?” “야, 야.” “응.” “지금… 낮이냐?”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자다가 일어나서 시간이 혼동되는 경우. 보통 저녁 무렵과 새벽이 헷갈려서 시각을 착각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렇게 밝은 햇살이 들어오는데 밤낮을 못 가리는 경우는 처음 본 우성이었다. “너 왜 그래? 무슨 꿈을 꿨길래 그래?” “꿈? 꿈이라고.” 도하는 인정할 수가 없었다. 산길을 내 달리다, 발바닥이 찢어지고 배는 고픈데 먹을 건 보이지 않고, 마실 물도 보이지 않아 목구멍이 갈라지는 체험을 하던 중이었다. ‘물’을 생각하니 갑자기 목이 말랐다. “물 있냐?” 우성은 갸우뚱거리다, 다급해 보이는 도하의 눈빛에 뒤를 돌아보았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아이들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우성이 외쳤다. “물 있는 사람?” 대답이 없었다. “야, 물 있는 새끼 없냐고!” 그래도 대답이 없었다. “아오, 이 존만한 새끼들이.” 도하는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교실을 나가려다 통증에 무릎을 굽혔다. 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야, 또 왜?” 도하는 조심스럽게 신을 벗기고 양말을 벗었다. 찢어진 발바닥이 보이자 눈을 크게 뜨며 소리를 질렀다. “워어어!” “야, 너 발 왜 이래? 유리라도 들어간 거야?” 급히 도하의 신발을 거꾸로 세워 들고 흔들어보지만, 아무것도 나오는 게 없었다. “무슨 일인데?” 마침 진태가 교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야, 도하 좀 부축해봐. 양호실 가야겠다.” “왜?” “이 발 좀 봐라?” 이윽고, 도하가 부축을 받으며 사라지자, 아이들은 곧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황을 짐작할 단서가 없어 그저 추측만 난무할 뿐이었다. 그 사이 단유가 볼일을 보고 느긋하게 교실로 들어왔다. “야, 단유야.” “응?”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한 아이가 다가왔다. “도하, 그 새끼한테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 단유가 눈을 껌뻑거리며 묻자, 당장 할 말이 궁해진 아이였다. “방금, 막 미친 듯이 소리 지르고 넘어지고 한 거 못 봤어?” “못 봤어. 화장실 갔다 왔잖아.” “수업시간에 도하, 그 새끼 뭐 했어?” “아무것도. 그냥 잤어.” “아, 뭐지?” 두 사람의 대화에 솔깃한 단서라도 들을 수 있을까 모여들었던 아이들이 실망감을 드러내며 자리로 돌아갈 때, 단유는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이틀 만에 만족스러운 수업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하는?” “양호실 갔는데요.” “왜?” “발바닥을 다쳐가지고요.” “어? 왜?” “모르겠는데요.” 우성의 대답에 담임선생님은 머리를 긁었다. “언제 그랬어?” “조금 전 쉬는 시간에요.” “도대체 너희들 쉬는 시간에 뭘 했길래 그래?” 딱히 대답할 말이 없는 우성의 표정을 보며 곤혹스러워하던 담임선생님은 일단 수업부터 하자며, 수업을 진행했다. 단유는 여유롭게 교과서를 펼치고 수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반면, 양호실에 간 도하는 깊지 않은 상처라는 진단을 받고 간단한 치료와 함께 침대에서 10여 분간 쉬다 갈 수 있는 여유를 처방받았다. 하지만 깨끗하게 소독된 하얀 면포의 침대 위에 누워있어도 여유는커녕, 불안감에 계속 두리번거리는 도하였다. ‘뭐였지? 그게 꿈이라고? 그럼 지금은? 내 발은?’ 도하는 10여 분간을 벌벌 떨다가, 양호 선생님에 의해 교실로 쫓겨났다. “왔으면 자리로 돌아가.” 선생님은 간단하게 상태를 물어본 뒤, 자리로 돌아가 수업받을 것을 요구했고, 도하는 어울리지 않게 순순히 대답했다. “네.” 목소리만 들으면 중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되는 것 같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문제는 크지 않아 선생님은 일단 수업에 집중하기로 했다. “자, 자. 다시 칠판 봐.” 선생님은 칠판에 필기하면서 설명을 이어 나가셨고, 그사이 도하가 단유 옆에 얌전히(?) 앉았다. 아니 옆자리에 단유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는 못하는 눈치였다. 흘깃 시선을 던졌던 단유는 덤덤한 표정으로 수업에 집중했다. “야, 도하야. 괜찮냐?” 우성의 질문에도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지만,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고, “도하야, 우성아. 삥 뜯은 걸로 매점이나 가자.” 며 다가온 진태는 호주머니에서 지갑이 또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해했다. 그 뒤로 단유는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하루를 마칠 수 있었고, 앞으로도 종종 이 방법을 써먹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추측이지만, 앞으로도 도하는 두세 번은 더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하리라 생각했다. 다음 날. 역시나 도하는 껌을 짝짝 씹으며 교실로 들어왔다. “뭘 봐, 새끼야. 재수 없게.” 좀 더 신경질적이고, 좀 더 날카롭게 변했다. 사람은 하루아침에 변하는 경우가 없다는 것을 또 한 번 확인한 단유였다. 1교시는 수학이었다. “아침부터 수학 공부하려니까 즐겁제? 아이가? 안 즐거운 사람 손들어봐라. 없제? 그럼 다들 즐겁게 수업하는기다.” 유쾌한 수학 선생님은 즐거움을 강제 소환하여 아이들을 세뇌시키며 진도를 나갔고, 단유는 이미 아는 내용이라도 선생님의 독특한 교습법에 흥미를 느끼면서 수업에 집중했다. “자, 이 문제는 조금 어렵데이. 누가 풀어볼래?” 수업이 즐거운 것을 떠나, 수학 시간에 수학 선생님과 반 아이들이 지켜보는 와중에 칠판에 적힌 문제를 푸는 일은 어느 학생이나 꺼려지게 마련이었다. “니, 나와 봐라.” 선생님은 단유를 지명했다. 보통의 선생님들은 단유를 잘 지적하지 않았다. 물어봐야―좋은 의미로―뻔한 결과였고, 수업 태도 자체가 좋은 아인데 굳이 나오게 해서 시킬 이유가 없었다. “이게 쉬운 문제가 아니거든? 니들을 무시하는 게 아이고, 니들 친구가 어찌 푸나 보라고 부른 거니까, 잘들 봐라.” 단유는 ‘x/24와 x/35를 모두 유한소수가 되게 하는 자연수 x의 값 중 가장 작은 값을 구하라’는 문제의 풀이를 머릿속에 그림과 동시에 분필로 칠판에 풀이과정을 막힘없이 풀어냈다. “잘 하네,잘 해.” 수학 선생님의 추임새를 들어가며 단유가 마침내 답을 도출해내자, 선생님이 박수를 쳤다. “잘했다. 들어가라.” 단유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곤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수학 선생님이 불러 세웠다. “아, 잠시만. 들어가는 김에 니 짝꿍 정신 좀 차리라 캐라. 애가 계속 넋이 나가 있는데 보기 안쓰럽네.” ‘안쓰럽다’는 표현으로 돌려 말하긴 했지만, 도하를 지적하는 말임을 모를 리 없는 아이들의 시선이 일순 뒤로 몰렸다. 도하가 눈을 부라리자, 얼른 고개들이 돌아가긴 했지만. 이후로 도하 역시 눈을 부릅뜨고 앞을 쳐다보고는 있는데, 역시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는 것을 옆에 앉은 단유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뻣뻣하게 고정된 얼굴과 달리 손가락은 연신 움직이면서 샤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서 불안인가?’ 그런 추측이 맞았는지 수업이 끝나자마자 가방에서 또 자기 지갑이 아닐 게 뻔한 지갑을 꺼내 호주머니에 넣고 교실 밖으로 달려가듯 나가는 도하였다. 물론 이번에도 단유는 도하가 집어넣은 지갑의 위치를 몰래 옮겼다. 이러다 학교 밖 녹색 페인트칠 된 옥상이 지갑들로 꽉 차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얼굴이 붉어진 채로 돌아온 도하가 ‘한 놈만 걸려라’는 눈치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수업이 시작된 뒤, 습관적으로 엎드렸을 때, 단유는 또 한 번 도하를 깊은 숙면에 취하게 만들었다. 직접 손대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점이 많은 방법이라 생각하며 단유는 수업에 집중했다. **** 도하는 미칠 것 같았다. 어제 몇 시간 동안이나 내달리고 내달렸었는데, 도로 제 자리에 와 있으니 말이다. “이게 뭐야, 씨발!” 도하의 울부짖음은 또 다른 이름 모를 짐승의 화답으로 묻혔다. 가까운 곳에서 들린 것 같은 으르렁거림에 도하는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수풀 속에서 빛나는 눈동자를 본 것도 같았다. ‘그리고 왜 또 맨몸이야!’ 보는 사람도 없으니 상관은 없겠지만, 그래도 나름 다 컸다고 생각하는데 맨몸으로, 가운데가 덜렁거리는 볼썽사나운 꼴을 하고 있으려니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자괴감은 둘째치고 일단은 도망을 가야 했다. 이틀 째라 그런지, 맨바닥을 달리는 일이 나름 숙달된 것인지, 발바닥을 다치게 할 만한 돌들을 피해가며 달릴 수 있게 된 도하였다. 하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미지의 장소에서 보이지 않는 위협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도하는 침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계속 앞으로 내달려야만 했다. 만약 단유가 적당히 안전이 보장된 장소로 도하를 이동시켰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렇게 열심히 달리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도하에 대한 제2차 정신교육 겸 체력단련이 끝이 났을 때, 단유는 이 교육의 장점에 100% 만족감을 보였다. 하지만 이후 교육의 부작용을 발견되기 시작했다. 첫째는 심해진 정서불안이었다. 이제 도하는 수업시간에 졸지 않았다.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가는 곧바로 미지의 세계로 옮겨져 밥도 물도 없이, 죽음과 외로움의 공포와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여기까지라면 만족할 만한 수준이었건만, 수업시간 내내 꼼지락거림이 심해졌다는 것이 부작용이었다. 주위를 계속 둘러보며 확인하는 습관과 손과 발을 가만두지 못하고, 계속 연필이나 책을 집었다가 놓는다거나 30분 내내 다리에 경련이 생긴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다리를 떠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둘째는 소리였다. 첫째와 같은 이유인지 아무 이유 없이 호흡이 거칠어지면서 듣기 불편한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앞에 앉은 우성은 물론이고 주위 아이들이 모두 돌아볼 정도로 거친 호흡 소리를 내는데, 정작 자신은 그런 소리를 낸다는 의식이 없었다. 셋째는 부산스러움이었다. 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일어나려고 엉덩이를 들썩거린다거나, 선생님의 시선이 와 닿는 것 같으면 과장되게 고개를 숙이고 움찔거리는 모습이 옆에서 지켜보기에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하루가 지나면서 조금씩 증상이 완화되긴 했지만, 그런 부작용에 오히려 신경이 쓰이면서 단유는 자신의 방법을 마음대로 쓰기 곤란해졌다. ‘역시 통제가 되지 않으니까 문제구나.’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일을 하는지를 알 수 없다 보니 이런 부작용이 생겨도 이유를 알기가 어려웠다. **** “야, 진도하? 너 괜찮냐?” 우성과 진태가 가는 눈초리로 도하를 쳐다보았다. “뭐, 임마.” “너 요즘 이상해?” “설마 어제 말한 그것 때문에 그러냐?”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하는 ‘정신교육’의 일환으로 이세계를 다녀왔던 일을 두 친구에게 이야기했을 때, 두 사람은 꿈도 야무지게 꿨다며 도하를 타박했었다. “…나 오늘도 갔다 왔다.” “어딜? 어제 거기? 산속에?” 뜬금없이 산속에서 죽도록 달렸다는 도하의 말은 믿으려야 믿기 힘든 이야기. 발가벗고 산을 뛰어내렸다는 이야기에 웃기도 했지만, 넋 나간 표정의 도하를 보니 그냥 둬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진태가 우성에게 말했다. “얘, 아무래도 진정제가 필요하겠는데?” “진정제?” 진태는 엄지와 검지로 동그랗게 만 뒤, 다른 손가락으로 원 안을 집어넣는 제스처를 보였다. “미진이 부를까?” “불러. 난 먹을 것 좀 사 가지고 올게.” 진태가 녹슨 철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릴 때쯤, 우성도 상대와 통화를 시작했다. “나다. 응. 이리 와라. 놀자고. 그래. 진태, 먹을 것 좀 사러 갔다.” 우성의 통화를 들으면서도 도하는 여전히 몽롱한 기분이었다. 몇 시간을 내달렸던 기억이 너무 생생했던 탓이리라. “후우.” 피곤한 탓인지 주변이 흐릿하게 보였다. 차라리 몸이 힘든 쪽이 마음이 편했다. 차라리 귓속을 막는 게 편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게 마음의 안정을 되찾게 해주는 것 같았다. “후우.” 누군가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도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 [342] 인본(3) “라면도 좀 먹어라.” “쟤는?” “쟤 지금 조금 맛이 갔다.” “도하가? 왜?” “몰라, 씨발.” 우성은 라면 국물을 한 번에 들이킨 뒤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그릇을 내려놓았다. 진태도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는데, 그렇지않아도 험악한 얼굴이 더욱 험악해 보이는 효과가 발생했다. 미진과 함께 따라온 효정은 과자 한 봉지를 해치운 뒤, 껌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도하를 흘겨봤다. “저 새끼 약했냐?” “약은 무슨..” 효정은 중3이었지만, 소년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탓에 우성이나 진태는 말을 편하게 놓고 대화를 했다. 효정도 딱히 반발하지 않은 탓도 있었고. “야, 미진아. 저놈 좀 정신 차리게 해줘라.” “어떻게?” “발로 까버려.” 키득대는 아이들을 흘겨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미진은 도하에게 다가갔다. “야, 진도하. 진도하!” 하지만 도하는 멍한 눈으로 한 곳만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안 들리는 거야, 들리지 않는 척하는 거야?” 미진은 뒤를 돌아보았다가 흥미롭다는 듯 쳐다보는 아이들의 시선을 확인한 뒤, 다시 도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내 도화의 머리를 툭툭 때리기 시작했다. “내가 이런 짓까지 해야 하냐고.” 미진은 도하의 머리를 계속 때려댔지만, 도하가 전혀 요동이 없으니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우성은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 킬킬거리며 과자를 우적우적 먹을 뿐이었다. 미진은 투덜대면서 도하를 세게 밀치고는 정신 차려보라고 말을 걸어보지만, 벽에 기댄 채 앉아 있던 도하의 자세가 허물어지며 반쯤 누운 자세가 됐지만, 그 자세 그대로 허공만 응시할 뿐, 미진의 물음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이 새끼, 일부러 이러는 거 맞지?” 자기 말을 일부러 무시하는 거라고 생각한 미진이 입술을 삐죽였다. “모르겠는데?” 우성이 놀리듯 말했지만, 그가 보기에도 도하가 일부러 정신을 놓은 척하는 것 같았다. 미진은 발로 도하의 머리를 툭툭 쳤다. “야, 이것 봐라.” “보긴 뭘 봐.” “지랄한다.” 미진은 축 늘어진 도하를 보다 손을 가져갔다. “쯧.” 누군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미진이 돌아보자, 아이들은 여전히 자신을 보며 키득대며 웃을 뿐이었다. ‘뭐지?’ 분명 가까운 데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는데, 눈앞의 도하는 그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미진은 살짝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록 방 안이 어둡긴 해도,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지는 않았다. 방의 입구 근처에서 정신없이 놀고있는 아이들의 얼굴도 정확히 보일 정도인데, 그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야, 뭐해? 그냥 밟아버려.” 미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도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일 때였다. “더는 못 봐주겠네.” 중얼거림을 들었다고 인식하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미진의 모습에서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아이들은 호기심에 먹던 것도 멈추고 다음 장면을 기대하며 바라보았다. 하지만 고꾸라진 미진과 도하 두 사람 모두 가만히 있을 뿐인지라, 금방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뭐야? 야! 양미진! 진도하!” 우성이 벌떡 일어났고, 뒤따라 진태와 효정이 일어났다. 그리고 방 안으로 들어갈 무렵, 세 사람은 동시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 “여긴 어디야?” 미진이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돌아보았을 때, 푸른 잡초가 우거진 들판 가운데에 홀로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동시에 발가벗고 있다는 사실도. “꺄악!” 무의식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은 미진은 들판에 난 긴 잡초들이 자신의 맨몸을 가리기에 불충분하단 사실을 알면서도 웅크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게 뭐야….” 주위를 둘러봐도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 높은 산이 있긴 하지만, 그 산은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았고 그 외에는 집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으음.” 뒤에서 들려온 신음에 놀란 미진이 ‘엄마야!’라고 외치며 주저앉았다. “아이고, 머리야….” 정신이 덜 깬 효정은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곧 들판을 가로지르는 시원한 바람이 효정의 맨살에 와 닿자 그제야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진의 경우처럼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효정아….” 흠칫 놀란 효정이 시선을 돌렸을 때, 울먹거리는 듯한 표정의 미진을 볼 수 있었다. “야, 양미진, 이거 뭐야? 여기 어디야?” “몰라, 나도.” “어떻게 온 거야? 옷은?” “모른다니까!” “왜 소릴 질러!” “모르는데 계속 모르는 걸 묻잖아! 니가!”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효정은 머리를 부여잡다 얼른 손을 끌어내려 이제 살이 차오르기 시작하는 가슴께를 가리며 물었다. “너 언제 왔어?” “모른다고!” “몰라?” “…나도 방금 정신이 들었단 말이야.” 미진은 울먹거림 속에 짜증을 섞어 대답했다. 효정은 고개를 좌우로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산과 들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보니 짙은 보랏빛이 마치 저녁노을처럼 보이기도 했다. “추워, 효정아.” 한가지는 분명했다. 우선은 몸을 가릴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 수치심을 떠나 점점 추워지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다 여긴 효정이었다. 한편, 우성과 진태 또한 낯선 곳에서 조우하여 웅크린 자세로 마주했다. “여기 어디야?” “너도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왜 나한테 소리 지르고 지랄이야!” “뭐, 이 새끼야?” 두 사람 다 아랫도리를 가린 손을 들추기 싫어 앉은 채로 말로만 옥신각신할 때,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단유는 머리를 감싸 안은 채 고뇌하는 중이었다. ‘아, 진짜 왜 이러지.’ 한 사람도 아니고 다섯 사람을 모두 이곳으로 불러들이고 말았다. 영원히 이곳에 묶어둘 것이 아닌 이상, 저 아이들은 다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서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할 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히 떠벌일 게 분명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빈촌에서 멀리 떨어진, 길도 없는 벌판으로 옮겨 놓긴 했는데 이제 저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평소 잘 돌아가던 머리도 지금은 전혀 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저 충동적으로 선택한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는 데 쓰일 뿐이었다. 저 언덕 너머로는 두 여자아이가 말다툼을 하는 중이었고, 이곳에서는 두 소년이 말싸움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도하는…. “헉, 헉.” 또 달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이전과 달리 들판에 내려놓았는데, 역시나 파랗게 질린 얼굴로 목적지도 없이 계속 내달릴 뿐이었다. 왜 뛰는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저렇게 달리도록 놔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은 도하 역시 자신의 시야에서 벗어나려면 한참이 남았으니, 그동안 자신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야 할 것 같았다. 단유는 산 중턱에 솟아난 넓적 바위 위에 올라앉아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 도하는 뒤에서 달려오는 무시무시한 괴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내달렸다.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로, “이리 와, 이리 오라고.” 라고 유혹하는 괴물이었다. 도하는 울먹거렸다. “싫어요, 싫어요!” “어린 노무 새끼가 말을 쳐 안 들어!” “싫어요!” “너희 엄마가 대신 맞는다?” “싫어요!” “병신같은 놈! 구구단도 제대로 못 외는 놈! 인간 못 될 놈!” “아니에요, 아니에요!” 도하는 귀를 막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더 빨리, 더 멀리 멀어지기 위해 달릴 뿐이었다. 풀밭이라 산길보다 달리기 편하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도하는 계속된 괴물의 협박과 조롱에서 벗어나기 위해 달렸다. 어릴 때는 매를 피해서 거칠게 포장된 시멘트 도로 위를 내달렸다. 그때는 지금보다 여린 피부 탓에 발바닥이 쉽게 갈라졌다. 하지만 어린 애가 달려봐야 지금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을 리 만무했고, 금방 억척스러운 손에 잡혀 집 안으로 끌려 들어가야 했다. 소주병이 날아들고, 등 긁는 막대가 부러지도록 맞아야 했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엄마가 그 남자와 헤어지고 이사를 온 다음에도 도하는 집에 잘 들어가질 않게 되었다. 고작 두 입이라도 먹고 살려면 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보험영업에 뛰어든 엄마는 밤이 늦도록 집에 들어오질 않았고, 집 안에 홀로 있는 게 무서웠던 도하는 집에 들어가질 않았다. 대신 홀로 숨을 곳을 찾는 일로 시간을 때우기 일쑤였다. 한 번은 가스통을 보관하는 조그만 창고 비슷한 구조물의 안쪽에 틈을 마련하고 그곳에 숨어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비좁고 습했지만, 누구도 자신을 찾지 못할 것이라는 안도감에 오래도록 시간을 보내다 엄마가 자신을 찾는 목소리가 들릴 때쯤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당연히 엄마는 밤늦도록 밖에서 논다고 생각하며 혼을 냈다. “엄마가 너를 위해서 얼마나 고생하는데, 넌 종일 노니? 놀아?” 남자의 손에서 어머니의 잔소리로 바뀌었다. 도하는 떠올렸다. 잔소리가 다시 손으로, 매로, 술병으로 바뀌는 건 시간문제라는 사실을. 중학생이 되었을 때, 도하는 꽤 괜찮은 아지트를 발견했다. 그리고 중학교에서 만난 친구들과 아지트를 공유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서로 치고박고 싸우며 친해졌다. 다른 애들의 돈을 뺐기도 했고, 밤거리를 쏘다녔으며, 전혀 다른 이유겠지만 비슷한 생활을 갈구하는 여자들도 만났다. 그중 몇몇에게는 아지트를 공유했다. “씨발 놈아, 뒤질래?” 아지트에서는 도하가 대장이었다. 주먹으로, 발길질로 상대를 무력화시켰다. 모두가 도하의 밑에서 굽신거렸다. 여기에서는 온전히 살아 숨 쉴 수 있었고, 도망갈 필요가 없었다. “언제까지 숨어 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잡생각이 난 사이에 괴물이 등 뒤에 붙었다. “으아악!” 도하는 힘껏 팔을 내저으며 달렸다. 계속 달렸다. 숨을 곳이 필요했다. **** 재훈은 말없이 떠났다. 단유는 원망하지 않았다. 원망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재훈과의 이별이 가족과의 이별을 떠올리게 하였다. 사실 가족이 사라진 것과 같으면서 달랐다. 가족은 ‘이유 없이’ 사라졌고, 재훈은 ‘이유 없이’ 떠났다. 어머니가 사라진 현상은 초월적 힘이 작용한 것이었고, 재훈은 스스로의 의지로 떠난 것이다. 그러나 결국 두 사건은 모두 단유를 홀로 두었다는 사실에서 일치한다. ‘어쩌면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인지도 몰라.’ 다른 이유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것은 단유 본인의 합리화인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 요인이 원인이 되어 이런 결과를 창출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냐, 이건. 너무 자기비하적 결과론에 불과해.’ 단유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분명 두 사건이 교묘하게 고리를 지어 단유의 트라우마를 자극한 것이리라. ‘그래서 본래의 자신에서 퇴행하여 유아적(幼兒的) 충동심을 느낀 것일까?’ 조금 억지스럽긴 하지만, 타당한 면도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어른스럽게’ 행동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또래 아이들처럼 천진난만하게, 단순하게 생각하며 시간을 보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적어도 한국이란 공간으로 오게 되면서부터는 그랬다. 그래서 사람들은 단유에게 ‘어른스럽다’거나 ‘점잖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특히나 세 명의 ‘지톤’에게 가르침을 받은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보다 말이, 행동이 앞선 경우가 낯설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이런 행동은 바보 같은 짓이야. 내 삶과 생존에 스스로 칼을 들이미는 꼴이나 마찬가지.’ 단유는 자신의 행동을 반성한 뒤, 다신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그리고 새벽마다 하는 운동으로 몸만 가꿀 것이 아니라 정신도 가다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책을 읽고 지식을 얻는 것으로 정신이 자라진 않는다. 지식을 내 것으로 삼고 그 지식을 실천해야 비로소 내 정신이 자란다.’ 공자의 말씀 중 ‘지혜가 넘치더라도 덕이 없다면 얻어도 반드시 잃을 것이라(知及之 仁不能守之 雖得之 必失之)’ 했으니, 덕은 곧 자신의 인격이며 지성이다. 단순히 안다는 것만으로 이룰 수 없으니, 스스로가 깨닫고 실천을 해야 옳을 일이라는 그 말을 되뇌며, 단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넓은 하늘을 보며 단유는 그 말씀의 뒷말을 떠올렸다. ‘모든 것을 갖추어도 예로 대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을 것이다(知及之 仁能守之 莊以涖之 動之不以禮 未善也).’ 단유는 보라색으로 물든 하늘을 보다,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은 주변의 사람들을 잃기 싫었다. 명수도, 하은도. 그리고 앞으로 또 만나게 될 사람들도. **** 도하는 들판이 끝나는 곳까지 내달렸다. 그리고 산 아래 굽이진 길을 발견했다. 저 길을 따라가도 어디로 향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도하는 보이는 그 길로 발을 내딛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들몰 부근 오른쪽 모롱이에 시선이 닿았다. 정확히는 산모롱이 사이에 움푹 들어간 동굴 같은 것이었다. 도하는 본능적으로 그곳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자신의 키보다 조금 더 큰 정도의 작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비록 동굴 속은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아 어두웠지만, 차라리 그 속이 도하에겐 편안함과 안락함을 주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동굴 바깥을 경계하던 도하는 문득 뒤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웬… 미친놈이 남의 집에 말도 없이 들어오는 것이냐.” 쇳조각을 입안 가득 굴리며 말하는 듯한 목소리에 도하는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 [343] 인본(4) “누, 누구세요?” 도하의 물음이 있자 동굴 안쪽에서 헛바람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도하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바닥을 급하게 밟으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백발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노인이 부릅뜬 눈을 하고 도하 앞에 나타났다. “너, 너 누구냐!” 더듬거리며 외치는 노인의 기세에 놀란 도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입을 벌린 채 겁을 잔뜩 집어먹은 도하의 모습에도 노인의 기세는 더 강해질 뿐이었다. “누구냐고! 누구야! 누군데….” 도하는 뒤로 물러나려고 발을 버둥거렸지만, 엉덩이가 바닥에서 밀릴 낌새가 없어 고작 발뒤꿈치만 상할 따름이었다. “도대체… 너… 혹시 한국 사람이냐?” 도하는 노인의 물음에 어리둥절했다. 한국에서 한국 사람에게 한국 사람이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한단 말인가? 도하는 노인이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큰일 겪기 전에 이곳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하지만 필사적인 것은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오랜 세월에 헤진, 엉성한 천 조각으로 몸을 대충 두르고만 있을 뿐인 노인은 도하의 어깨를 붙잡아 흔들며 대답을 재촉했다. “한국 사람이냐고!” 눈앞에서 붉은 눈동자를 들이밀고 역한 입 냄새를 풍기는 미친 노인의 발작 같은 외침에 기절할 것만 같던 도하였다. 게다가 노인답지 않게 강한 악력 때문에 어깨에 가해지는 아픔이 말도 못했다. “네, 네!” “이, 이럴 수가.” 이름도 모를 이곳에서 보낸 세월이 몇 년이던가. 노인은 소년의 어깨를 잡고 있던 두 손에 힘이 빠지며, 마주한 소년처럼 힘이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겨우, 이제야….” 도하는 노인의 중얼거림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인은 계속 중얼거렸다. 발음을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목소리가 거칠고 노쇠했지만 도하는 그 대부분의 중얼거림이 욕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빌어먹을…. 제기랄. 40년인가, 50년인가. 개좆같은 이곳에서 지낸 게….” 노인은 갑자기 눈을 번뜩였다. “어떻게, 어떻게 이곳으로 온 것이냐! 다시 나가는 곳이 있는 거냐? 응? 말을 해! 말을 하라고!”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다, 미친 사람처럼 버럭 소리를 지르며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도하를 노려보니, 도하는 차라리 기절이라도 해서 모른 척하고 싶었다. ‘살려 줘.’ 어쩌면 노인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하가 살려달라고 생각했지만, 입이 얼어붙었는지 생각이 말로 전달되지 않았다. 그런 도하를 구해준 것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여기 있었네.”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인지함과 동시에 도하는 고개를 돌렸다. 동굴 밖은 동굴 안쪽만큼이나 어두워지는 중이었다. 그러나 달빛이라고 추정할만한 옅은 빛이 있어 동굴 입구에 선 실루엣의 윤곽은 확실히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실루엣의 얼굴은 확인하기 어려웠다. 다만 목소리가 낯익다는 생각은 들었다. 반면 노인의 반응은 도하보다 훨씬 극적이었다. “너, 너는!” 실루엣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잠시 후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반응을 보였다. “오랜만이네요.” “너!” 노인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격정에 쌓인, 단 한마디를 내뱉고 입을 닫은 노인은 그저 야윈 주먹을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 처음 이 세상으로 왔을 때, 그렇게 걱정을 많이 하진 않았다. 농담조로 낯선 곳에 떨어져도 주먹 하나만 있으면 어디서든 살 수 있다고 말하곤 했었던 자신이었다. 거친 산길과 굶주린 산짐승들의 습격 때문에 도망을 치는 동안 함께 이곳으로 왔던 동료들이 모두 유명을 달리하고 오직 자신만 살아남았다. 그래도 특별히 겁을 먹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자신은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고, 복수를 꿈꿨다. 긴 시간이 지나고 겨우 사람이 사는 곳을 찾았다. 그런데 사람 사는 곳이라도 현대에서 보기 힘든 구조물과 보기 힘든 복장의 사람들을 보니 조금 마음이 흔들렸다. 차라리 영화 세트장이라고 생각하고 싶을 정도로 현대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성벽을 보다가, 사내는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비록 벌거숭이였지만, 그게 뭔 대수인가. 일단은 살고 볼 일이었기에 남자는 당당하게 성으로 향했다. 곧 성문 앞에 당도한 남자는 낯선 얼굴의 문지기와 맞닥뜨렸다. “여기가 어디요?” 사내는 호기롭게, 전혀 위축되지 않은 양 당당하게 물었다. 하지만 물음에 대한 대답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사내는 당황했다. 상대의 말을 못 알아들었기에 당황했고, 창날을 세우고 자신을 향하는 상대의 적대심에 당황했다. 언제라도 찌를 수 있다는 듯 날카롭게 벼린 창날 앞에서 사내는 당당할 수 없었다. 사내는 일단 자존심을 버리고 머리를 조아리는 비굴함을 보여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깟 자존심, 나이 많은 여자들을 위해 봉사할 때마다 버리곤 했었다. “옷이랑 돈을 모두 강도들에게 뺏겼소. 부디 도와주시오.” 하지만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 둘의 대치는 오래 지속 되었다. 하지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손을 비는 사내의 행동에 문지기들도 더 이상 적대적으로 나올 순 없었다. 창을 거둬들이고 둘이 무언가를 속닥거리는 모습에 사내는 희망을 품었다. 결과적으로 사내는 성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수상한 사람을 성안에 들일 수 없다는 경비대장의 방침 때문이었지만, 이 사실을 알 수 없는 사내는 고작 빵 한 조각과 허름한 옷가지를 얻은 채 쫓겨나야 했다. 사내는 그 후로 성문 근처를 배회했다. 잠은 들판에서 야숙(野宿)을 하고, 잠이 깨면 성문 근처로 다가와 지나가는 사람들―약초꾼이나 사냥꾼들―에게 동냥을 했다. 그러다 한 사냥꾼의 눈에 띄었다. 그리고 사냥꾼의 보호 아래 성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사내는 사냥꾼의 집에서 지내며 사냥꾼의 심부름을 하며 지내게 되었다. ‘심부름’이라고 했지만, 거의 모든 잡일을 돌보거나, 잡은 짐승의 가죽을 벗기거나, 사냥에서 미끼 역할을 하는 등의 역할을 해야 했다. 처음엔 먹을 것이나 입을 것 등이 해결되면서 살만하다고 생각했던 사내는 점차 먹을 것이 줄고, 일을 잘 못 한다는 핑계로 얻어맞기 시작했다. 폭력의 강도는 점점 더 강해지고, 사내가 담당해야 할 일들은 더 많아졌다. ‘노예.’ 사내가 떠올린 그 단어 그대로의 생활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쓰이는 말을 익히기만 하면 이곳을 떠나 혼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며 꾹 참고 버텼다. 그러나 아무리 배우려고 해도 배울 수 없는 언어였다. 이상한 발음과 문법 체계는 사내의 머리로는 도저히 익혀지지 않았다.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다 보니 사람 취급도 못 받는 것 같았다. 마치 집에서 기르는 개 같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렇게 지낸다고 해서 사내의 성격이 집 지키는 개처럼 온순하게 변하는 건 아니었다. 결국, 버틸 수 없는 매질에 사내는 곧잘 하던 방식으로, 사냥꾼의 뒤를 노려 칼을 휘둘렀다. 사냥꾼이 죽자 사내는 당장은 홀가분해졌으나, 이내 깨달았다. 이제는 성안에서 지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몇 가지 물품들을 챙겨 사내는 도주를 시도했다.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들의 눈을 피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지만, 기어코 해냈다. 사내는 쫓아오는 경비대의 추적을 피해 다시 처음의 길로 향했다. 산을 넘고 짐승들의 습격을 피해 도망쳤다. 그리고 우연히 동굴을 찾았다. 사내는 사냥꾼의 집에서 훔쳐 온 칼과 도끼 등의 도구로 작은 동물들을 잡아가며 연명했고, 그 시간이 끝도 없이 길어지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머리는 백발이 되었고 근력이 떨어져 사냥도 힘들어질 무렵이었다. 돌아갈 길은 막막하고 이대로 동굴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가, 좌절하고 있던 때에 찾아온 불청객은 뜻밖의 말을 뱉었다. “누구세요?”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는 소년이었다. 격정과 흥분에 휩싸인 사내가 이성을 되찾기도 전에, 또 다른 불청객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너, 너는!” “오랜만이네요.” 자신을 이곳으로 오게 만든 원흉. 객사(客死), 아사(餓死)를 걱정하게 만들고, 외로움과 좌절감에 몸부림치게 만들었던 범인. “아직 살아계셨군요.” 정환은 소리를 질렀다. “이놈!” 동굴이 쩌렁쩌렁하게 울렸지만, 소년, 단유는 아무렇지 않게 노인을 쳐다보았다. “내가, 내가 몇 년을, 몇십 년을 이 동굴에서 보냈는지 알아! 내가…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냐!” “아저씨가 지은 죄, 몰라요?” “나만 그랬냐? 나만 그러냐고? 세상 사람 다 그렇게 산다! 그런데 왜 나만 이런 지랄을 겪어야 하냐고!”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지만, 아저씨. 제게는 고작 몇 달 전의 경험이었고 기억이어서 너무 생생하네요. 아저씨는 절 납치했고, 절 죽이려 했어요.” 정환은 그제야 그 기억이 떠올랐다는 듯, 눈을 크게 치켜뜨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며, 몇 달?” “공자가 말하길, 소인은 가까이하면 불손하게 굴고 멀리하면 원망한다 했습니다. 그래서 다루기 어렵다 하셨죠(爲難養也). 아저씨가 행한 죄의 무게를 그 세월이 지나고도 깨닫지 못하시니,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나 봅니다.” “헛소리 마라!” 정환의 목소리는 심하게 갈라져 마치 성대가 찢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환과 단유 사이에서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던 도하가 정환의 분기(憤氣)에 놀라 겁을 먹을 무렵, 단유가 다가와 도하의 어깨를 짚었다. 그러자 도하는 곧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아저씨.” “…….” “전 이제 완전히 잊을 겁니다.” “뭐?” “제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아저씨는 잊을 겁니다.” 단유의 선언이 심상치 않게 들렸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도하가 사라졌다. 그 현상에 놀라던 정환은 곧 그 의미를 깨닫고 단유를 향해 다가왔다. “나, 나도!” 하지만 단유는 정환의 손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나도! 돌아가고 싶어! 돌아가게 해줘!” 단유는 미미하게 고개를 젓고는 몸을 돌렸다. 이를 악문 정환이 맨발로 바닥을 차며 달려들 때, 단유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개새끼야!” 동굴 안을 울리는 처절한 비명만이 메아리치며 남았다. **** “헉!” 놀란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도하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긴 시간을 보낸 것 같은데, 여전히 붉은 노을로 물든 하늘이 창밖으로 보였다. “뭐, 뭐야?” 잇따라 터져 나오는 경악성에 돌아보니 희미한 의식 속에서 술판을 벌이던 친구들의 존재가 떠올랐다. 그 친구들이 하나같이 경악성을 입에 담으며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우성은 자신을 바라보는 도하와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안부를 물었다. “너, 괜찮아?” “응.” 진태나 효정, 미진도 다를 바 없었다. 자신의 몸에 걸쳐진 옷의 소중함을 깨달으면서 동시에 서로가 겪은 기이한 체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꿈은 아닌 거 같지?” “꿈일 리가 없잖아!” 진태가 문득 주위를 돌아보다 싸늘한 집안의 분위기에 어깨를 떨었다. “혹시, 이 집. 귀신 붙은 집 아냐?” “뭐?” “그래서 오랫동안 빈집으로 있는 거 아닐까?” “그럼 귀신이…?” 효정과 미진이 먼저 비명을 지르며 집을 뛰쳐나갔고, 그 소리에 덩달아 놀란 진태와 우성이 서로 먼저 나가겠다고 어깨를 부딪쳐가며 밖으로 뛰어갔다. 도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궜다. “그 목소리….” 실루엣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목소리나 체형은 어딘지 낯이 익다 싶었다. 당장은 정체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실루엣이 노인으로부터 구해주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꿈? 현실? 친구들의 말마따나 귀신 놀음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몇 번의 경험으로 보건대, 그것은 리얼이었고, 노인의 눈동자가 보인 살의와 악기(惡氣) 역시 진짜였다. 도하는 끌어내려 진 바지를 추켜올려 제대로 입은 뒤, 밖으로 향했다. 아마 앞으론 이 집에 오지 못할 것 같았다. ======================================= [344] 인본(5)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새벽이슬의 여운이 가실 무렵 찾아온 까치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도하는 잠에서 깨어났다. 밤늦게 들어온 엄마는 방 안에서 여태껏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하가 씻고 나왔을 때, 퉁퉁 부은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늘어진 티셔츠에 그려진 캐릭터가 손가락으로 브이(V) 자를 만들어 보였다. “학교 가니?” “네.” 엄마는 벽에 걸린 고동색 외투 안쪽에서 지갑을 꺼낸 뒤 만 원짜리 지폐 하나를 건넸다. “자.” 도하는 돈을 받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방으로 들어가 등교 준비를 했다. 사실 등교 준비라고 해봐야 라이터랑 담배만 챙겨 넣은 빈 가방을 들고 나설 뿐이지만. 습관적으로 서랍을 열고 그 안에 숨겨둔 담배를 꺼내 들려던 도하는 어젯밤 남은 담배를 모두 아지트에 두고 왔음을 깨달았다. 받은 돈으로 담배나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빈 가방을 둘러메고 나온 도하는 터벅터벅 느릿한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어제와는 달리 흐릿한 하늘을 보며 우산을 챙겨야 했나, 라는 생각을 잠시 하다 이내 돌아가길 포기하고 가던 걸음을 이었다. ‘까짓거 오면 맞지.’ 도하는 학교 근처에 다다라 곧장 학교 교문을 통과하는 대신, 교문 반대편의 주택가 골목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오늘도 저 두 친구는 하얀 연기를 뿜어내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왔냐.” “응.” 도하는 다소 무기력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두 친구 역시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모두 생기 없는 얼굴인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필래?” 내민 담배를 보다, 도하는 고개를 저었다. “됐다. 오늘은 담배도 필 기분이 아니다.” 그 말에 우성도 인상을 쓰며 피우던 장초를 바닥에 비벼껐다. “에이 씨. 날씨 때문인가, 존나 꿀꿀하네.” 전날의 귀신 놀음에 홀린(?) 탓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구체적인 단어로 그 일이 연상되는 순간,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던 탓이리라. “가자.” 도하가 먼저 발을 뗐고, 그 뒤를 우성과 진태가 뒤따랐다. 껄렁한 걸음걸이야 워낙 오래된 습관이라 그렇다 쳐도, 핏줄이 선 눈동자에 드리운 그림자는 지나가는 학생들을 움찔하게 할 만큼 서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딱히 세 사람은 주변을 전혀 신경 쓰지도 않았고, 일부러 겁줄 생각도 없었지만 말이다. 워낙 일찍 학교로 온 터라 교문에는 지도 선생님이 나오기 전이었다. 보통 담배 냄새를 들키기 싫어 일찍 오는 게 평소의 패턴이었지만, 오늘 같은 날이라면 늦게 왔어도 상관없었을 거 같았다. 평소라면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운동장을 가로질렀을 테지만, 오늘은 서로 말을 아끼며 교실로 향했다. “들어가라.” 진태는 2반으로 향했고, 우성과 도하는 교실 뒷문을 열고 들어갔다. 미닫이문이 열리며 레일 위를 구르는 바퀴의 소음이 울렸다. 그리고 도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지난 3일간 봐왔던 모습과 판박이처럼 똑같은 단유였다. 등을 곧게 세워 등받이에 가볍게 닿은 듯한 바른 자세에, 한 손으로 책의 아래를 바치고 다른 손으로 책 페이지를 조심스럽게 넘겨 가는 그 모습. 어제까지만 해도 그 모습에 화가 나고 심술을 부리고 싶어졌었는데, 오늘은 조금 껄끄럽다는 정도의 느낌이 들었다. 바라보는 것조차 불경스럽다 느껴지는 생소한 감각에 도하는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자리로 다가가―평소와 다르게―얌전하게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으려다 도하는 멈칫거렸다. 어쩐지 눈앞의 의자에 앉는 순간 다시 그 이상한 세계로 끌려갈 것 같다는 두려움이 들었던 탓이다. “야, 왜 그래?” 우성이 우연히 그 모습을 보고 의아하다는 듯 묻자, 도하는 아무 일 아니라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몸을 낮춰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누가 봐도 어색한 것이, 마치 똥 싼 의자 위에 앉는 듯한 불편함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도하는 빈 책상 위에 책 대신 손을 올렸다. 맞잡은 두 손의 깍지 낀 손가락이 손등을 파고들 것처럼 하얗게 변했지만, 스스로는 자각을 하지 못했다. 단유는 그 모습을 힐끗 보았지만 못 본 척,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하는 그 자세로 마치 망부석이 된 것처럼, 1교시가 시작될 때까지도 움직이지 못했다. 주변 아이들은 굳은 표정의 도하를 보고 지레 겁을 먹고 주의를 기울이며 최대한 도하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담임 선생님의 조례와 1교시의 국사 선생님이 들어올 때까지도 도하는 미동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너무 긴장한 탓인지, 눈 아래의 근육이 미미하게 떨리고 턱으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잠시라면 모를까, 긴 시간 부동자세로 있다 보면 오히려 눈에 띄게 마련이다. “야, 저기 저 녀석 이름 뭐야?” 국사 선생님의 시선을 따라간 아이들 중 한 명이 이름을 말했다. “진도하,요.” “도하? 야, 진도하. 너 화장실 가고 싶은 거 참는 중이냐?” 선생님의 우스갯소리에 몇몇 아이들이 실소를 터뜨렸다.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지만. “진도하?” 선생님의 부름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학생의 모습에 이상함을 느껴, 국사 선생님이 교실 뒤편으로 향했다. “진도하.” 어깨를 짚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벌러덩 넘어지는 도하의 모습은 과장된 연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면에서 관찰한 선생님은 도하에게 문제가 있음을 눈치챘다. “야, 얘 왜 이래?” 팔다리를 벌벌 떠는 도하를 보며 당황한 선생님이 도하의 짝이었던 단유에게 물었다. 단유는 잘 모르겠다는 대답과 함께, 도하에게 다가갔다. 턱을 떨며 팔로 얼굴을 가리는 도하를 보며, 단유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작용이 이렇게 심할 줄이야.’ 우성이나 진태의 경우는 별문제가 없는데, 유독 도하만 이런 부작용이 발생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게도 도하는 줄곧 뛰기만 했었지. 단유는 생각을 뒤로 미루고 국사 선생님에게 여쭸다. “양호실에 데려다주고 와도 될까요?” “어? 어, 그래라.” 단유가 도하의 한쪽 팔을 목에 걸고 일으켜 세웠다. “선생님, 저도….” “뭐?” “저도 같이 가면…안 될까요?” “왜?” “저, 친구…가 걱정돼서요.” “아서라. 꼼수 부리지 말고 책 페이지나 제대로 펴. 지금 진도가 어디까지 갔는데 거길 펴 놓고 있어?” 우성은 괜히 나섰다가 본전도 못 챙기고, 선생님께 혼만 났다. 그 사이 단유는 도하를 부축하여 교실을 나갔다. **** “1교시부터 환자라니, 참.” 긴 갈색 머리를 위로 올린, 눈썹이 짙은 양호 선생님은 열이 좀 있는 것 같으니 잠깐 누워 있다 가라는 정도로 처방해주었다. “잠깐 지켜보다 가도 될까요?” 양호 선생님은 단유의 부탁을 가볍게 수락하고는 일지 작성에 집중했다. 도하 옆으로 간 단유는 눈을 감은 도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꺼풀이 잘게 떨리는 모습을 보니 역시 깨어있음이라, 단유는 나직하게 도하를 불렀다. “진도하.” 도하의 떨림이 멎었다. 그러나 그것은 안정을 찾아서가 아니었다. 숨을 쉬는 것까지 멈춘 경직이랄까? ‘이 목소리!’ 어제저녁 들었던 목소리. 그리고 밤새 기억을 되짚으며 찾으려 했던 그 목소리였다. 도하는 눈을 떴다. 단유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쉴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에 반해 단유는 들판에서 달리던 도하를 떠올렸다. 길을 찾기 위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쫓기면서, 달아나기 위해 달리던 그 절박한 뜀박질을 떠올렸다. “무서웠던 일이라도 있었어?” 단유의 질문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가 된, 입술을 떨던 도하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너지?” “뭐가?” “너… 니가….” 도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니가 그랬지?’라고 묻는 게 마치 ‘너 귀신이지?’라고 묻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 질문에 대한 단유의 대답도 듣기가 두려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도하가 입을 다물고 바라보니, 단유의 눈은 너무도 담담하고 고요해서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의 눈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자신이 묻고자 하는 말의 의미가 전혀 그에게 와 닿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단유는 도하의 눈에 깃든 나약함과 두려움을 읽었다. 그래서 잠시 망설이다 신중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승려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길에 쓰러져 있는 여자를 발견했대. 한 승려가 급히 다가가 그 여자를 업어서는 안전한 곳으로 옮겨주어서 그 여자는 살아날 수 있게 되었어. 그런데 이후 두 승려가 다시 길을 나설 때, 다른 승려가 말했어. 승려가 여자에게 손을 대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도하는 차분하게, 옛날 이야기하듯 말해주는 단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중저음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발작하듯 뛰던 가슴이 점차 제 박동수를 찾는 기분이었다. “그랬더니 여자를 업었던 승려가 이렇게 이야기했대. 나는 여자를 일찌감치 내려놓았는데, 자네는 계속 여자를 마음에 안고 있구만, 이라고.” 무슨 뜻이지? “마음에 담고 있으면 언제까지고 너를 괴롭힐 거야. 마음이 가벼워져야 몸도 가벼워지는 법이거든.” 잊으라는 뜻일까? 뭘? “니가 가진 두려움, 그건 니 마음의 짐일 거야. 뭔지 모르겠지만, 그 짐을 내려놔야 두려움도 사라질 거다.” 도하는 단유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직은 도하가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을까? 단유는 도하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무조건 도망친다고 답은 아니야.” ‘도망’이라는 단어에 도하의 눈이 홉뜨더니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내가…도망친다고?” “…….” 단유는 말을 아꼈다. 더 이상은 불필요한 오해만 불러일으킬 테니까. 대신 원래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매일 아침 운동해. 운동을 통해 건강을 챙기려는 의도도 있지만, 힘을 기르기 위한 목적도 있어. 아마 너랑 팔씨름하면 내가 이길걸? …나도 한때는 힘이 우선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 힘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 과연 힘이 전부일까? 힘이 있으면 무서운 게 없어질까? 두려움이 사라질까? 아니더라고.” 요즘도 가끔 단유는 숲속을 헤매는 악몽을 꿨다. 어린 시절 나약했던 자신을 떠올리며 자책하다가 잠에서 깨어나 주먹을 쥔다. “만약 힘이 인간의 본질이라면, 이 세상은 온통 싸움 뿐이었을 거야. 인간과 동물을 구분할 때 ‘힘’이 기준이 되지 않는 것 또한 ‘힘’이 인간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겠지. 사람의 본질은 내 생각엔 ‘이성’이라고 생각해. 그것이 동물과 구별되는 것이고,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이유라고 본다, 난.” 단유는 말을 늘어놓다가, 도하의 눈을 보곤 피식 웃었다. 아마도 하은과의 대화가 이런 부작용을 낳은 것이 아닐까? 자기 말에 취해서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방금 말은 못 들은 거로 해라. 내가 너무 앞서나갔네. 하고 싶은 말은 넌 나한테 힘으로도 안 된다는 거야. 그러니까 괜히 힘 내세우지 말고 다른 거로 시비를 걸어봐. 그러면 받아줄 테니까.” 어쩐지 보육원에서 어린 애들을 계도하던 선생님을 떠올리게 하였다. ‘사람 경험이란 게 참 무시할 수 없는 거긴 한가 보네.’ 씁쓸한 웃음을 남기며 단유는 일어섰다. “얘.” “네?” 돌아보니 양호 선생님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턱을 괴고 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불교 믿니?” “…아니요. 종교 없는데요?” “그래? 마치 어느 선사님이 강론하는 걸 듣는 기분이 들어서 말이야. 니가 김단유지?” 양호 선생님도 아는 이름이라. 단유는 괜히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네.” “너 종교 가지면 위험하겠다.” “왜요?” “여신도들이 막 꼬일 거 같아.” 단유는 표정을 굳히고 장난스레 웃는 양호 선생님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잘 가. 다음에 보자?” 돌아서며 단유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연상의 여자들은 어린 남자를 놀려먹는 취미 같은 게 있는 것 같다고. 한편, 도하는 단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누워있는 터라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고, 그저 흐린 구름으로 가득한 하늘만 보였다. 이럴 때 구름이 갈라지면서 빛이 내려온다면, 그게 무슨 계기라도 되는 양 마음을 고쳐먹는다거나 신의 계시를 받은 양 거룩한 마음으로 다시 태어난다거나 하는 일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하늘은 회색빛 구름으로 꽉 막혀 그저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도하는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웃겨서 피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어라? 이제 좀 살만한가 보네?” 도하의 웃음소리를 들었던지 양호 선생님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네.” “그 친구 말빨 한 번 죽이네. 말 한마디로 사람을 낫게 하고.” 양호 선생님이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려 한다는 것을 느낀 도하는, 불편하다기보단 살갑게 느껴져서 더 마음이 가벼워졌다. “예.” 도하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갑갑한 하늘인데, 차라리 눈부시게 밝은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남은 시간은 많았으니까,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언젠가는 밝은 하늘을 바라보며 상쾌함을 느낄 날도 있겠지. **** 단유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어. 왜냐하면 이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거든. 다만 확률적으로 볼 때 변할 확률이 턱없이 낮을 뿐이겠지. 그런데 확률이 낮다는 건, 반대로 낮은 확률로 사람이 변할 수도 있다는 뜻이잖아? 그러니까 특이한 경우에는 사람이 변할 수도 있는 거야. 내 생각엔 로또 맞을 확률보단 높은 확률이 아닐까 싶은데.” “로또가 당첨되기 어렵다는 뜻이죠?” “…너무 또 그렇게 직설적으로 밀고 들어오면 할 말이 궁해지지 않겠니?” “하지만 손에 들고 계신 그게 너무 눈에 띄네요.” 하은은 손에 들고 있던 로또 번호 선택 용지를 흔들어 보였다. “그러니까 너무 기대는 하지 말고, 그냥 재미 삼아 하는 건 괜찮다는 말이야.” “어떻게 이야기가 그렇게 진행되죠?” “김단유. 선생님이 지난번에 너무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지 말라고 했지?” 하은은 카운터로 가서 남자 알바생에게 용지를 내밀었다. “오천 원입니다.” 하은은 지갑에서 오천 원을 꺼내 건넸다. 그리고 단말기에서 발급된 용지를 받아 반으로 곱게 접어 지갑에 넣었다. “이건 이번 주까지 싹 잊는 거야. 명수 경기가 토요일이지? 그 경기가 끝나고 딱 열어보는 거야. 어때, 괜찮지?” “뭐가 괜찮아요?” 하은은 단유의 목을 끌어안고는 꿀밤을 먹이려 했다. “이 녀석이, 이 녀석이!” “아, 죄송해요.” “너, 계속 선생님 놀릴래?” 이제는 하은보다 4㎝정도 키가 더 커졌지만, 여전히 선생님에게는 어린 단유였다. ======================================= [345] 인본(6) 단유는 오늘도 변함없이 책을 펴들고 한 문장, 한 문장을 되새기며 독서에 여념이 없었다. 등교하는 아이들의 인사와 잡담하는 소음들이 귓가에서 어른거리지만 단유의 집중을 흩어놓지는 못했다. 다만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만큼은 예외였다. 단유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왜? 뭐.” 단유는 입을 열려다 말았다. 그리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며 생각했다.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아.’ 그리고 다음 주에는 코마개라도 준비해서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도하는 이전처럼 단유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대신 무언의 질타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담배 끊는 게 쉬운 줄 아냐? 씨발.” 끝에 붙은 욕은 단유에게 했다기보다는 그냥 습관처럼 붙는 욕이었다. 사람은 쉽게 변하는 게 아니니까. 단유는 신경 끄고 책에 집중하려 했다. “야, 김단유.” 단유는 또다시 집중을 흩어놓는 도하 때문에 짜증이 났다. 진짜 짝을 바꿔 달라고 청원이라도 해야 하나 싶었다. “왜?” “니가 못하는 게 뭐냐?” “뭐?” “너한테 시비 걸려면 니가 못하는 거로 하라며?” 수학책인 줄 알고 챙겼다가 꺼내보니 국어책이었다는 걸 깨달은 사람처럼, 어이없다는 눈으로 도하를 바라보았다. “…굳이 시비를 걸어야 돼?” “하라며?” 말이 안 통하는 녀석이다. 단유는 고개를 저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못 하는 거 없다.” “…재수 없는 새끼.” 다시 책에 집중하려는데, 또 도하가 불렀다. 미간을 좁힌 단유가 돌아보자 도하가 물었다. “운동 잘하냐?” “왜?” “한번 붙어 보자고.” “…왜?” “니가 진짜 잘난 놈인지 확인해야 속이 후련할 거 같다.” 별 시답지 않은 놈이라 생각하며 단유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책에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다 잘한다.” “웃기시네.” “…….” “야, 김단유.” “아, 정말.” 단유는 책을 덮었다. 기껏 깨달음도 얻었고 나름 마음의 수양을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한 짝 때문에 다 엉망이 되는 기분이었다. “팔씨름 해 보자.” “뭐?” “확인 해야 속이 후련할 거 같다.” 단유는 우선 약속을 받아내기로 했다. “내가 이기면 책 읽는 동안 방해하지 말기.” “콜.” 도하는 대답과 동시에 책상을 돌렸다. 책상이 끌리는 소리에 교실에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뒤로 몰렸다. 우성도 관심을 보이고 돌아보다 곧 상황을 눈치채고는 도하 뒤로 다가왔다. 그 뒤로 몇몇 아이들이 다가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 사람은 책상 위에 팔을 올렸다. “넌?” “뭐?” “내 조건은 말했으니까, 니 조건도 말해.” “나?” 준비되지 않은 질문에 당황한 도하가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공부 가르쳐 줘라.” 아이들이 놀란 건 물론이고, 단유도 놀랐다. 단유만 놀란 게 아니라 말을 꺼낸 도하도 놀랐다. 마치 자기가 무슨 말을 한 건지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단유는 ‘맥락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도하의 조건을 수락했다. 어차피 도하의 조건 따위, 라고 생각하며. “준비, 시작.” 우성의 심판으로 시작된 팔씨름은 아이들에게 흥미진진한 유흥거리가 될 것, 이라는 처음의 예상을 산산조각내며 싱겁게 끝이 났다. “한 번 더.” 단유는 한 번 더 해줬다. 잠시 후, 멍한 눈으로 팔목을 주무르는 도하를 뒤로하고 우성이 나섰다. 그의 눈에서 호승심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야, 나랑 한 번 하자.” “왜?” “그냥 한번 해, 새끼야.” “그럼 조건은?” “뭐?” “너도 나 책 읽을 때 방해하지 마라.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그래.” 그 까짓거야. 그리고 잠시 후, 두 명의 희생자를 뒤로하고 다른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야, 나도 하자.” “나도.” “나랑도.” 어쩌다 보니 조례 시간이 될 때까지, 팔씨름이 계속 이어졌다. 이참에 아주 교실 전체를 공동묘지처럼 조용하게 만들어버릴 생각으로 단유는 그들의 도전을 받아주었다. “야, 뭐하는 거야? 다들 자리로 안 가!” 담임 선생님의 호통에 다들 빠르게 자리를 찾아갔다. “거기서 뭐 한 거야?” “단유랑 팔씨름했는데요, 단유가 우리 반 애들 전부 이겼어요.” 한 아이가 들뜬 목소리로 고자질(?)했다. “뭐? 팔씨름? 우리 반 전부랑?” 선생님이 못 믿겠다는 듯 단유를 바라보며 묻자, 이곳저곳에서 속속 증언들이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이 마치 부흥회에 참석한 신도들이 간증하는 모양새라 우습지도 않을 정도였다. 쉬지 않고 30명이랑 대적하면서 한 번도 지지 않았다는 목격담과 체험담에 선생님이 신기하다는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보기에는 호리호리하게 생긴 놈이 힘이 좋은가 보네?” “지 말로 못 하는 게 없다는데요!” 도하의 외침에 아이들이 멈칫, 했다가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김단유, 너 선생님한테도 이길 수 있어? 내가 이래 봬도 우리 동네 팔씨름 왕이었는데?” 선생님이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선생님, 단유는 조건 없으면 팔씨름 안 한대요?” “무슨 조건? 내기 한 거야?” 선생님의 눈에 불편함이 감돌려는 때에 앞에 앉은 한 학생의 진술이 나왔다. “자기 책 읽을 때는 방해하지 말아 달래요.” 단유 답다며 웃음을 짓던 선생님이 호기롭게 외쳤다. “좋다, 그럼 만약에 단유 니가 선생님을 이기면, 선생님도 너 방해 안 하마.” 단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런 무의미한 약속 따위는 하나 마나였으니. “그보다 다른 조건을 걸고 싶은데요.” “뭐?” “제가 이기면, 내일 우리 학교 축구부 예선전에 우리 반 전체가 응원가는 거요.” 솔직히 학교 전체가 가는 게 좋겠지만, 예선전에 그런 동원을 할 리가 없었다. 예선전이라 해당 축구부원들의 학부모 외에 다른 응원단이 있을 리 없으니까. 적어도 우리 반 30명이라도 가서 응원해주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내일이 예선전이야?” 선생님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괜찮냐?” 학교를 나와서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주말이기도 하니 잠깐 구경 가는 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단유의 조건에 수락했다. 아니, 그보다는 선생님과의 대결을 보고 싶었던 게 더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되지만, 그것은 단유가 고려해야 할 문제가 아니었다. “좋다, 그럼 나와봐.” 단유는 교실 앞으로 나갔다. **** “그래서, 내일 너희 반 전부 응원 온다고?” “설마 전부 오겠냐마는, 그래도 몇몇 빼고는 나올걸? 일단 선생님도 와주신다고 했으니까.” “그래도 그게 어디냐? 잘 됐다!” 명수는 단유의 말을 들으며 손뼉을 쳤다. 지태나 채윤은 신기한 물건을 본다는 식으로 단유의 팔을 바라보았다. “TV에 보면 팔씨름 잘하는 사람들 나오잖아? 그런 사람들 보면 팔이 막 이만하던데, 넌 어떻게 그렇게 힘이 세냐?” “야, 저래 보여도 아침마다 운동하는 거 보면 말근육이 따로 없어. 아주 속이 꽉 찬 근육이 저런 거라고.” 명수가 단유의 팔을 쿡쿡 찌르며 마치 1등급 한우 품평하듯 말했다. “운동한 보람이 있어, 보람이.” 명수의 말에 단유는 딴청을 피웠다. 기껏 누구 앞에서는 힘이 본질이 아니니, 어쩌니 해놓고선 결국 힘자랑을 한 꼴이었으니 말이다. “오늘은 훈련 없고?” “응. 오늘은 간단히 컨디션 조절 차원에서 가볍게 몸만 풀고 끝날 거야.” “그럼 나중에 같이 가자.” 마침 쉬는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벨소리가 교내에 울려 퍼졌다. “나중에 보자.” 단유는 교실로 돌아가 수업준비를 했다. 마침 헐레벌떡 뛰어온 도하가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 앉는데, 심각한 구취에 단유는 토가 나올 것 같았다. “그게 그렇게 끊기 힘들어?” “…그래, 임마. 너도 한 번 피워봐라. 그래야 얼마나 끊기 힘든지 알 거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앉았네. 단유는 보란 듯이 교과서를 펼쳤고, 도하는 고개를 앞으로 돌려 마치 단유가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도 되는 듯 굴었다. 약속이라도 지켜줘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단유는 수업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 점심시간이 끝나고 모든 학생이 식곤증과 싸우고 있을 무렵, 여러 종류의 난이 창틀 위에 줄지어 서서 고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사실 안에서 교장 선생님과 이사장이 독대하는 중이었다. “교장 선생님.” 나직한 목소리가 방 안의 침묵을 깨뜨렸다. 교장 선생님은 손안에 든 찻잔을 바라보다 시선을 들어 이사장을 바라보았다. 이사장의 뒤쪽 벽에 걸린 액자 속 전대 이사장들까지도 함께 시선을 보내는 착각이 들었다. “네, 이사장님.” “차는 입에 맞으십니까?” 여유를 담은 미소로 가볍게 대화를 풀어나가는 이사장의 속을 모를 리 없지만, 일단은 맞춰주기로 마음먹은 교장은 눈썹을 누그러뜨리며 대답했다. “좋은 차네요.” “구하기 쉬운 차는 아니라고 들었는데,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이사장은 선물 받은 차에 관해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분위기를 이완시키려 했고, 교장 선생님은 오랜 연륜이 녹아든 여유로 맞대응했다. 이사장은 따뜻한 차 한 모금으로 입을 축인 뒤, 본론을 꺼내 들었다. 어쭙잖게 여유만만인 척해 봤자, 교장은 못 당한다. 그렇다면 직구로 승부하는 수밖에. “다음 주 월요일 정기 이사회 건에 관한 겁니다만.” “네.” 이사장은 하얀 김이 나는 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등을 뒤로 기댔다. 이태리 명품 소파의 질 좋은 가죽은 소리 없이 이사장의 몸을 받아주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한영이 이야기가 나오지 않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이죠.” 약간의 머뭇거림이 있었지만, 이 일은 교장으로서도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긴급발의로 안건이 상정될 경우에 어떤 핑계로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비록 교내에 소문이 나지 않게 선생님들에게 입단속을 시켜 놓은 상황이었고, 한 주간의 분위기를 보아도 대부분 사람들이 지한영의 사고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보이긴 했지만, 앞일은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리고 이번에 전혜숙 이사의 임기만료 건이 있죠?” 보나 마나 연임에 대한 것이리라. 교장 선생님은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문제…없을 겁니다. 선화 재단에 꼭 필요하신 분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리고…올해 법인비 및 학교비 추경예산안 있죠? 문제 생기지 않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문용희 교장 선생님.” “네, 이사장님.” 굳이 자신에게 이리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지 않은가. 이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지씨 집안 사람들이 서로 쿵짝을 맞춰 진행하면 될 일을. 하지만 포장 좋아하는 이사장은 꼭 교장을 끼워서 마치 공정한 척, 자기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했다. 거수기 역할만 제대로 하라는 소리임을 모르지 않지만, 말년에 이런 일로 심기가 불편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문 교장은 이사장과의 독대가 불편을 넘어 불쾌했다. ‘2년만 참자.’ 2년만 지나면 정년 퇴임이다. 평생을 여유롭게 살 수 있게 도와줄 연금과 명예를 위해 2년만 참으면 될 일이다. 지금까지도 별문제 없었으니, 앞으로도 문제없으리라. 직장 생활하는 사람 중에 이런 불편 안 겪는 사람 어디 있으랴? 나이를 먹었다고 갑을이 바뀌지 않으니, 이 정도는 가볍게 넘겨버리자. 그게 진정한 연륜 아니겠는가.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한영이 말입니다.” “네.” “그래도 우리 학교의 행정실을 책임지는 행정실장인데 말입니다. 아무리 소문이 나지 않도록 했기로서니, 병문안도 가지 않는 건 조금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역시 돌려서 말하지 않는 이사장이었다. 만약 교장 본인이 저 이야기를 한다면―물론 그런 이야기를 하지도 않을 성격이지만 굳이 한다면―, ‘외로움을 많이 타는 아이’라거나 ‘이사회 소속’이라는 이야기로 둘러 말할 것 같은데 말이다. “알겠습니다. 조만간 찾아가 뵙죠.” “그, 누구더라. 김지연 선생님이던가? 그분이 오셔서 한 말씀 해주시는 것도 좋겠다고 하더군요. 평소 많이 친했다고 하던데.” 순간 교장은 표정관리를 못 할 뻔했다. ‘이런 개 잡놈의 새끼가! 그렇게 친하면 벌써 갔겠지! 그걸 교장 명령으로 가게 하란 소리야? 여기가 학교지, 룸살롱이야!’ “선생님?” 이사장의 부름에 급히 교장은 마음을 다스리며, 가볍게 목례했다. “잘…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수고하시고요.” 문 교장은 이사실을 나와 문을 닫은 뒤, 잠시 그 자리에서 속을 진정시켰다. 지한영 행정실장. 주말 내내 술이나 처먹다가 출근 시간 맞춰 온다고 차를 미친 듯이 몰았단다. 그러다 방향을 잃고 인도의 가로수를 들이받았다는 이야기에 교장은 혀를 찼었다. 역시 적은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무섭다고, 이사장의 적은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아들이리라. ‘이래서 자식 농사를 잘 지어야 한다는 거겠지. 그래 봐야 그놈은 안 돼. 천성이 글러 먹은 놈이라’ 문제는 그 빌어먹을 농사꾼이 아들 뒷바라지를 위해 자신을 머슴 대하듯 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교장실로 향하는 교장의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복도에 잔향(殘響)을 남겼다. ======================================= [346] 주의(1) 토요일 오전, 보통은 늦잠을 자고 있을 아이들이 보기 힘든 사복 차림으로 상설운동장으로 앞으로 몰려들었다. “오오, 상철이 패션!” “니가 내 패션을 지적하냐? 아침에 거울은 봤냐?” “발목에 피 안 통하는 거 아냐?” “지랄이다, 새꺄.” 왁자지껄 떠드는 분위기가 마치 소풍이라도 온 것 같았다. 아니, 사실 거의 소풍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왁스로 헤어스타일링에 신경을 쓴 아이들도 있었고, 비싼 브랜드의 바람막이를 걸치고 나와 주목을 끄는 아이들도 있었다. 평소 교복으로 가려졌던 아이들의 개성이 이런 곳에서 드러났다. 그래 봐야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새파랗게 어린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야, 저기 온다?” “누구?” “프랑키!” 한 소년의 외침에 모여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너도나도 할 거 없이 ‘프랑키’를 연호했다. “그게 뭔데?” ‘프랑키’라 불린 소년은 그 의미를 몰라 어리둥절해 했지만, 누구 하나 가르쳐 줄 생각은 하지 않고 프랑키, 라고 부르기만 할 뿐이었다. “프랑키, 사복 입으니까 더 키 커 보인다?” “프랑키, 오늘 시합 몇 시 부터야?” “야, 프랑키. 나중에 다른 반 애들이랑도 한 번 붙어봐.” “야, 그러면 팔씨름도 전교 1등 하는 거 아냐?” “그럼 재밌겠다!” ‘프랑키’는 아무 말도 안 하는데 자기들끼리 신나서 쿵떡쿵떡 떡방아를 찧고 있었다. 아이들의 입심에 자근자근 씹히는 떡처럼 흐물흐물해질 때까지도 ‘프랑키’는 입을 떼지 못하다가 손가락을 들었다. “저기, 선생님.” 선생님의 도착과 함께 ‘프랑키’는 ‘단유’라는 이름을 얻었다. “야, 김단유. 너 때문에 팔에 파스까지 붙였다!” 팔을 빙빙 돌리는 선생님의 제스처에 단유는 희미한 미소를 입에 문 채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히죽 웃으면서 농담이야, 라며 단유의 등을 토닥였다. 주위를 둘러본 선생님은 출석부터 확인하셨다. 번호로 체크한 선생님은 두 사람이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2번 홍진호랑 27번 김전일은 안 왔네?” “진호는 아파서 못 온다고 했고, 전일이는 할아버지 댁에 간다고 하던데요.” 어차피 강제가 아니었으니, 그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었다. “지각 상습범들이 오늘은 일찍 왔네?” 선생님의 농담에 상습범으로 지목된 몇 아이들이 머쓱한 듯 웃음을 지어 보였다. “평소에도 좀 이렇게 일찍 와라? 응?” “네!” 어쨌든 시합이 끝나는 시간까지는 이 아이들의 보호자 역할을 해야 하는 선생님은 인원 체크를 마친 후, 몇 가지 주의사항―개인 활동 금지, 시합 중 선(先)귀가 시 보고할 것 등―을 주지시켰다. “그럼 들어가자.” 선생님이 앞장서고 그 뒤를 아이들이 얌전히 두 줄로 서서 따라가는, 일은 없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입구를 향해 달려간 아이들은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혹은 선착순 1명에게 주는 선물 따위를 위해 달렸다기보다는, 그냥 기분 좋은 날씨에 들뜬 젊은 혈기를 발산하기 위해 달렸을 뿐이었다. 그래서 선생님도 굳이 아이들을 말리지 않았다. “야, 프랑키.” 단유는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도하가 퉁명스러운 표정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왔었냐?” 반 아이들이 단유의 등장과 함께 몰려든 터라 감히 끼어들기 어려워 뒤쪽에서 멀뚱히 서 있다가 겨우 틈이 나서 다가온 도하였다. “근데 프랑키가 뭔데 다들 프랑키라고 불러?” “프랑키, 몰라?” “몰라.” “있어, 그런 게.” 어떤 만화의 팔뚝 굵은 캐릭터의 이름이라는 사실이 뭐 그리 중요한 비밀일까 싶지만, 모르는 게 없는 단유가 모른다는 사실이 흥미롭고 재미있어서 도하도 가르쳐주기를 피했다. 단유도 애써 답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중에 명수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라 생각했고, 아이들이 부르는 별칭에 악의는 별로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안 들어가?” “여기서 만나기로 한 애들이 있어.” “누구?” “단유야!” 때마침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단유와 도하, 우성의 고개가 돌아갔다. 넓은 주차장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지태와 채윤, 그리고 상미였다. “어?” 도하와 우성에게서 동시에 감탄사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둘의 시선이 고정된 사이에 지태네가 다가왔다. “야, 니네 반…애들은?” “벌써 들어갔다.” 지태가 단유 옆에 선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같은 반?” “응.” “난 유지태. 5반이다. 반갑네.” 지태가 특유의 넉살로 먼저 인사를 했다. “…진도하다.” “유우성.” “오, 나랑 성이 같네? 얘도 유 씬데.” 지태가 손가락으로 상미를 가리키자, 사내들끼리의 어색한 인사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도하와 우성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홍일점에게로 옮겨졌다. “안녕? 난 유상미야. 반갑다.” 쾌활하기만 한 상미의 인사에 두 사람은 얼굴을 붉히며 마주 손을 들어 보였다. “됐어. 우리도 들어가자.” 단유가 먼저 몸을 돌렸고, 이어 지태와 상미가 뒤에 붙으며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어?” 채윤은 ‘왜 난 빼먹어?’ 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이미 소개 타이밍이 지났고, 도하와 우성 역시 단유의 뒤를, 아니 상미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 경기가 시작되기 전, 장계중학교 축구부 선수들이 운동장에 나와서 몸을 풀고 있었다. “우리 학교 축구부 잘하냐?” “몰라.” 시큰둥한 태도로 운동장을 바라보며 있던 아이들의 대화는 축구보다는 시합이 끝난 뒤의 일과에 집중되어 있었다. 결국 이들이 나온 것은 그저 주말에 친구들과 모여 놀 핑계가 필요했을 따름이었다. 그와 달리, 축구부가 몸을 푸는 모습을 주의 깊게 보며 금일 시합의 결과를 짐작해보는 무리들도 있었다. “애들 몸이 조금 무거워 보인다?” “기온이 낮아서 그래. 시합 좀 뛰면 슬슬 풀릴 거야.” “그러다 상대 팀이 먼저 열이 오르면?” “저쪽도 우리랑 비슷하네.” 운동장의 중앙에서 약간 빗겨난 곳에 앉은 지태네는 단유네 반 아이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했다. 단유는 ‘개별행동 불가’라는 담임선생님의 지시 때문에 같은 반 아이들과 함께 앉아야 해서 불가피하게 떨어져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태 쪽은 상미라는 ‘소녀’ 때문에라도 단유네 반 아이들과 같이 앉기 힘들었고. 지태네는 경기장 오른쪽에서 몸을 푸는 장계중학교 축구부와 왼쪽에서 몸을 푸는 상대 중학교 선수들을 비교하며 신중하게 결과를 예측했다. “넌?” “난 2:1 승.” “그럼 난 2:0 승에 건다.” “단유야, 넌?” 지태의 물음에 단유는 핸드폰을 든 채로 지태 쪽을 바라보았다. 뜬금없이 전화가 오길래 보니, 고작 한 블록 옆에 앉은 지태였고, 받았더니 ‘승부 결과’ 따위를 묻기 위해 걸었다며 너스레를 떠는 것이었다. “모르지.” [점심 내기야. 무조건 걸어야 돼.] “돈 없어.” [빌려줄게.] “돈 빌리는 거 아니랬다.” [누가 그래?] “선생님이.” [그럼 넌 점심 안 먹을 거야?] “집에 가서 먹으면 되지.” [혼자?] “그래.” 대화의 방향이 잘못됐다고 여긴 지태는 순수하게(?) 축구를 즐겨보자는 의미에서 예측해보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단유는 모른다로 일관했고, 흥이 떨어지기 전 지태는 상미에게로 타겟을 옮겼다. “상미야, 넌?” “3:0? 아니, 3:1.” “누가 3인데?” “당연히 명수가 해트트릭이지.” “명수가 무슨 메시냐?” 지태의 핀잔에도 상미는 끄떡없었다. “내가 그동안 봐온 명수의 스펙이라면 충분히 해트트릭할 수 있어. 그치?” 상미는 몸을 기울여 지태가 들고 있는 핸드폰에 대고 물었다. 그에 단유는 다소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그래’라고 짤막하게 답변해 주었다. “그럼 단유 너도 3:1에 거는 거다?” 지태가 건수 잡았다는 듯 눈을 빛내며 단정 짓는 어조로, 확인을 받으려 물었다. [마음대로 해.] 지태는 채윤에게 ‘단유 3:1이라고 적어’라고 속삭였고, 채윤은 들고 있던 핸드폰에 입력했다. “근데 정답자 없으면?” “근사치로 해.” 핸드폰에 글을 입력하던 채윤이 물었다. “야, 니들은 우리가 질 수 있다고 생각 안 해?” 지태는 채윤을 바라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응, 안 해. 명수가 있으면 질 수가 없거든.” “…하긴.” 그동안 조기축구회에서 봐온 명수의 진기명기를 본 사람으로서의 확신이었다. 어마어마한 승률을 남긴 명수의 기록을 기억하는 이들은 대부분 지태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채윤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도하는 운동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시선을 떼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들어선 사람보다 빈자리가 더 많아 휑하기까지 한 운동장 스탠드였다. 하지만 따뜻한 봄바람이 오전의 한기를 몰아낸 덕인지, 적적하다는 느낌보다는 한가롭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와 닿았다. ‘단유네, 아니 단유 저 녀석과 같이 있으면 이런 것도 느낄 수 있네.’ 이전까지 추구해온 즐거움이나 쾌락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오히려 머리가 상쾌해지고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어 신선하고 좋았다. ‘짐을 벗으라’더니 이런 식으로 짐을 벗는 것이냐는 생각도 들었고. 그러고 보니 오늘은 운동장 오기 전에 피웠던 담배 한 개비가 끝이었다. ‘신기하네. 담배 생각도 안 들고.’ 같은 도시에 있는 공간인데, 어쩐지 이곳이 더 상쾌한 공기로 가득 찬 기분이었다. 반면, 우성은 고개를 돌려 건너편에 앉은 상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여태껏 만난 여자애라곤 효정이나 미진이 같이 납작한 가슴을 가진 애들 뿐이어서 만져도 별 감흥이 없다시피 했는데, 저런 가슴을 가진 아이라면 어떡해서든 한 번 주물럭거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쟤 지태라는 애 여자친구일까?” “…모르지.” 우성의 속삭임에 도하는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도하는 계속 이 기분을 즐기고 싶을 따름이었으니까. 하지만 우성은 연신 관심을 드러내며 도하를 귀찮게 했다. “저런 애는 처음 보지 않냐? 저렇게 예쁜 애는 우리 동네에서도 처음 보는데. 어느 학교지? 혹시 미진이랑 같은 학교 일라나?” 별로 대꾸하고 싶지도 않았고, 대답도 원치 않는 것 같아 도하는 입을 닫은 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렸다. 처음에야 원체 보기 힘든 미모의 여자애라서 시선이 따라갔었지만, 지금은 득도한 승려 이상의 고양감을 느끼던 도하인지라 별 관심이 가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 속을 모르는 우성은 도하가 멍하게 있는 이유가 자신과 같으리라 속단하여 속삭임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머릿속에서 상미를 아지트로 끌고 가는 중이었던 우성이었다. “잠시만.” 단유가 옆에 앉은 아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화장실.” 단유는 아이를 지나 통로로 나섰다. 몇 계단을 오르던 단유는 도하와 우성에게로 향했다. “유우성.” “응?” 우성이 의아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단유가 나직이 말했다. “따라와라.” 네가 뭔데 오라 마라야, 라고 외치며 눈을 부라리려던 우성은 단유의 눈빛에 찔끔 놀라 대꾸하지 못했다.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단유의 엄정한 눈빛에 말문이 닫힌 까닭이었다. 단유가 다시, 한 음절마다 강세를 주어 또박또박 ‘따라와’라고 말하자, 우성은 주춤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아직 속에 남은 자존심 때문인지 눈빛에 기가 죽은 듯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성이 단유의 뒤를 따라가자, 도하도 얼른 그 뒤를 따라갔다. 단유가 우성을 부른 이유가 궁금해서이기도 하고, 또 막연하게 걱정이 되기도 해서였다. 주말 중학교 축구 시합 예선전이 열리는 경기장은 사람이 많이 찾지 않은 탓에 곳곳이 텅텅 비어 있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시합이 열리는 줄도 모를 정도였다. 심지어 매점도 열지 않은 정도였으니. 매점 근처 화장실 쪽으로 향한 단유는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 후, 돌아섰다. 단유와 눈을 마주한 우성이 또 한 번 움찔 놀랐다가, 이번에는 지기 싫다는 오기가 생겨 같이 홉뜬 눈으로 대응했다. “뭔데, 이 새끼야!” 일단 기선 제압을 선택한 우성. 비록 단유가 힘이 세다고는 하지만, 싸움은 힘이 아닌 기술이다, 라고 생각하며 강하게 나섰다. 뒤따라 온 도하가 누굴 말려야 하나를 고민하기도 전에, 단유가 먼저 선택권을 없앴다. 우성이 반응하기도 전에 손을 뻗은 단유는 우성의 목을 잡아채고 밀어붙였다. 어어, 하는 반응과 함께 넘어지지 않기 위해 뒷걸음질 치던 우성은 외벽에 강하게 부딪히며 짧은 신음을 토해야 했고, 단유는 그런 우성을 향해 담담히 말했다. “죽을래?” 우성은 기선 제압용으로 흔하게 뱉었던 그 말이 이렇게 살벌하게 들릴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목을 죄는 단유의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기세에 침도 삼킬 수 없을 지경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보다 더 우성의 심장을 조이게 한 것은 바로 단유의 눈빛이었다. ======================================= [347] 주의(2) 만약 단유를 아는 이들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꽤 놀랐을 것이다. 평소 단유가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드물기도 하지만, 상대를 윽박지르는 스타일도 아니었으니까. 단유 스스로도 상대를 향해 위협을 가한 경우는 처음이라 할 수 있었다. 숱하게 위기를 겪고, 악의와 맞닥뜨렸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그리고 직접 행위를 취한 적은 없었으니까. “야, 김단유.” 도하가 와서 단유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아니, 말하려 했다. 하지만 우성을 바라보는 단유의 눈빛에 도하 역시도 움찔 놀라고 말았다. 이제껏 단유에게 시비를 먼저 걸면서도 절대 저런 식으로 자신을 바라본 적 없던 단유였던지라, 저런 눈빛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단유는 도하가 말리려고 옆에 붙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람처럼, 오직 우성만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니가 누구랑 뭘 하든 상관 안 하는데, 내 친구한테 그따위 흑심을 가졌다가는 결코 가만 안 둔다.” 이전에 아지트에서 우성이 하던 짓을 지켜봤던 단유였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불쾌한 마음과 더러운 눈빛도 참기 힘들었지만, 그 눈빛이 향하는 대상이 자신의 친구라는 사실이 역겨워서 참기 힘들었다. “나한테 시비를 걸든, 양아치 짓을 하든 상관 안 한다. 그런데 내 친구한테 그랬다간 가만 안 둘 거다.” 단유의 말은 높낮이 없이 평이했고, 그래서 담담했지만, 결코 그 속에 든 의미는 담담하지 않았다. 분노? “경고했다.” “…….” “대답해.” 우성은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아, 알았…어요.” 저도 모르게 높임말을 쓴 우성의 눈에 단유는 동급생이나 전교 1등 같은 수식어로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순간적이지만 단유가 마치 자기보다 한참 윗대의 어른처럼 느껴졌었다. 도하 역시 단유의 다른 모습을 본 것 같아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교실에서는 늘 표정 변화가 없어 ‘공부하는 기계’처럼 느껴지기도 했었고, 어제와 같이 ‘팔씨름’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요구―도하는 종일 자신이 건 내기 내용 때문에 부끄러워했다―에도 핀잔하는 대신 묵묵히 받아주던 모습에 수더분한 성격이라고 여기기까지 했었다. 그랬던 단유가 이리 나오니 당사자가 아님에도 가슴이 철렁했다. 물론 몰래 짐작하던, 실루엣의 주인이라는 것도 한몫하긴 했지만 말이다. 단유는 우성의 대답에도 한동안, 마치 그 속에 든 것이 진심인지를 판별하는 것처럼 우성의 눈을 직시하며 손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손을 떼는 순간, 우성은 이제껏 숨도 못 쉬고 있었다는 듯 격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단유는 유성의 그런 모습에 관심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려 스탠드로 돌아갔다. 도하와 우성이 제 자리로 돌아온 것은 한참이 지난 뒤였다. 곧 시합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유는 시합에 집중하지 못했다. 화가 나서는 아니었다. 화? 그것은 분노였다. 일찍이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그때에도 느끼지 못했던 분노였다. 하지만 분노가 치밀어 올라 충동적으로 우성을 겁박했던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단유가 힘을 쓴다면, 마치 정환에게 그러했듯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그 세계에 우성을 처박아둘 수도 있었다. 현실에서야 몇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겠지만, 단유에게 화살이 돌아올 염려도 없을 터였고. 다만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우성이 자신과 동갑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어리니까.’ 단유도 이제는 세상 물정 모르던 어린 철부지가 아니었다. 이 세상이 어떤 시스템으로 돌아가는지, 어떤 군상들이 모여 살아가는지를 파악하고 있었다. 때문에 우성이란 놈이 지금의 인성과 버릇대로 컸을 때, 성범죄자가 될 수도 있고 혹은 범죄조직의 칼받이 정도로 성장할 수 있음을 예상할 수 있었다. 혹은 어떤 계기로 개과천선해서 모범생이 되고 대학에 들어가 번듯한 회사에 취직하고 가정을 꾸리며 평범하게 살게 될 확률도 있었다. 때문에 ‘세상에 해악이 될 놈’이라 낙인찍을 생각은 없었다. 미래는 알 수 없으니까. 물론 지금 현시점에서 우성은 ‘해악’이고 ‘해충’같은 놈이라고 판단할 여지는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상관인가. 제 놈이 그렇게 살았고, 살아가는 것을 단유가 신경 쓸 이유는 없었으니까. 다만, ‘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다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더 이상은 사람을 잃기 싫었다. 그 상황이 벌어진 연유에 자신이 핑계가 되든, 되지 않든 말이다. 그래서 단유는 뒤통수를 간지럽게 만들던 우성의 음심(淫心)을 강하게 ‘경고’하는 선에서 정리하기로 결심했고 이를 행동에 옮겼다. 경고에 그친 이유는 전술한 바와 같이, ‘어리기’ 때문이었다. 정환과 같이 다 큰 어른도 아니었고, 그래서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기엔 부족함이 많은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15살이라면 다 큰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을 테지만, 단유는 아직 자신이 ‘다 컸다’는 자각이 없었다.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모자란 ‘아이’라는 게 단유의 열다섯, 본인에 대한 평가였다. 여전히 모르는 게 많았고, 그래서 더 많이 배우고 익히고 고민하고 성장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와 같은 나이의 아이들도 아직 ‘어리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힘이 세다는 것도 동년배 한정으로 생각하는 단유였으니. 단유가 자기도 모르게 자기 주위에 둘렀던 경계선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가고 있을 때, 가장 먼저 경계선 안으로 들어와 지금은 경계선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친구의 시합이 시작되었다. 상대는 비슷한 나잇대의 중학생. 이제껏 아저씨들만 상대해오던 명수가 동갑, 혹은 한 살 밖에 차이 나지 않는 아이들과 겨루게 되었다. “어리다고 봐주지는 마라.” 단유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시합에 집중했다. **** “다들 집으로 돌아갈 거지?” “네!” 하지만 대답이 시원찮다. 담인 선생님은 눈초리를 샐쭉하게 뜨고 학생들을 돌아보았다. “…부탁이니까 제발 사고 치지 말고 다들 얌전하게 ‘놀다가’ 집으로 가야 한다. 알았어?” “네!” 이번에는 좀 더 큰 환호성이 곁들어진 대답이었다. “그럼 해산.” “와!”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져 내달리는 모습을 보며 담임선생님은 피식 실소를 지어 보였다. “이것들이, 선생님한테 인사도 안 하고 가네.” 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모르지 않아, 담임선생님은 미소로 아이들을 배웅했다. 그러다가 아직 자리를 뜨지 않는 아이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너흰 안 가?” 단유가 대표로 나서서 대답했다. “저희는 명수랑 같이 가려고요.” “그럴래? 그런데, 옆에 저 친구는 네 여자친구냐?” 상미를 흘끔 본 단유가 고개를 저었다. “‘여자’친구 아니고, 그냥 ‘친구’인데요.” 니 속을 내가 모르겠냐, 는 식으로 웃는 담임선생님의 오해를 적극적으로 풀어야 하나 갈등하던 단유의 등을 토닥여 준 뒤, 선생님은 등을 돌리려다 한 마디를 더 남겼다. “아, 그리고 네 친구 공 잘 차더라. 잘 봤다고 전해라.” “네.” 선생님은 시야에 들어온 도하에게도 한마디 했다. “야, 스트리트? 너도 단유랑 같이 가려고?” 개학 첫날, 도하의 소개가 인상적이었던지, 선생님은 도하를 ‘스트리트’라고 불렀다. “네.” “녀석, 참. 괜히 공부 잘하는 애 물들이지 말고.” 경고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을 남기고 담임선생님이 먼저 떠나셨다. “너 안 가?” “…왜?” 심통인지 불안인지 정확히 분간이 안 가는 묘한 느낌으로 단유를 바라보는 도하였다. “우성이 갔잖아? 같이 갈 줄 알았지.” “내가 걔 보모냐?” 단유는 ‘맥락 없는 녀석’임을 재확인하곤 고개를 저었다. 그때, 출구로 뛰쳐나오던 명수가 단유의 이름을 외쳤다. “와, 저 새끼 나는 얼굴도 안 보이나? 야, 임마! 네 눈에는 단유 밖에 안 보이냐?” 지태의 타박에도 명수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단유에게 달려왔고, 두 사람은 손을 높이 치켜들고 하이파이브를 했다. “어땠냐?” 정작 대답은 상미에게서 나왔다. “고맙다, 명수야.” 명수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니가 왜 고마워?” “네 덕분에 오늘 점심 한 끼 해결됐거든.” “응?” “그런 게 있어.” 상미는 명수의 어깨를 툭툭 친 뒤, 호기롭게 외쳤다. “가자! 밥 먹으러!” “잠깐, 난 못 가.” “왜?” “감독님이 회식시켜 준댔어.” 오늘의 경기는 나름 대승이라 할 만했다. 단유네는 별로 정보가 없었지만, 상대팀은 지난 추계대회에서 4강에 들 정도로 강한 팀이었다. 그런 팀을 상대로 3골이나 얻으며 승리를 따냈으니, 지도자로서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판이었다. 더구나 자식들의 승전보에 학부모들도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은 터라, 성대한(?) 회식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오오? 그럼 우리도….” 지태의 말은 채윤의 손에 막혔다. 눈치 없이 굴지 마, 라는 채윤의 말을 뒤로하고 단유가 입을 열었다. “알았어. 그럼 있다가 보자. 나 먼저 집에 갈게.” 그리하여 명수는 다시 운동장으로 돌아갔고, 어느새 주변을 배회하던 반 친구들이나 몇몇 외부인들도 사라져, 넓은 주차장에는 단유네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럼 밥 먹으러….” “난 그냥 집에 간다.” “아, 왜.” 지태와 상미가 같은 표정을 하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나 돈 없다니까?” “사준다고.” “왜?” “내기에서 졌으니까.” 지태와 상미는 끝까지 같이 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단유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등을 돌려야 했다. 그리고 그 뒤를 도하가 뒤따랐다. 잠시 후, 도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 때문이냐?” “뭐가?” “나 때문에 니 친구들이랑 밥 먹으러 안 간 거냐고.” 비록 시선이 도하에게로 와 닿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자기 때문에 단유가 친구들과 가지 않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유는 뜬금없다는 눈으로 도하를 쳐다보다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맥락 다음에는 자격지심이야?” “…무슨 소리야?” 두 단어 모두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의미를 모르겠다. 그래도 욕은 아니겠지, 라며 도하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단유에게 물었다. “됐고, 너 때문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라. 진짜 그냥 집에 일찍 갈 일이 있어서 그래.” “집에 꿀이라도 발라 놨냐?” 아, 이놈의 미친 맥락. 단유는 도하와의 대화가 어릴 때의 명수랑 하던 대화보다 더 어렵다고 느꼈다. “도대체 집에 왜 꿀을 바르냐? 그리고 집을 꿀로 바르려면 얼마나 발라야 하는지 알고 말하는 거야?” 집 내부의 실내 면적을 계산해서 정확한 수치로 말을 해줘야 하나, 를 고민하던 단유를 보며 이번에는 도하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면 됐고, 밥이나 먹자.” 이 새끼, 진심으로 단유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새끼!’ 라고. “넌 조금 전에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할 말이 있어서 그래.” 그제야 단유는 걸음을 멈추고 도하에게로 몸을 돌렸다. “할 말 있으면 여기서 말해.” “여기서?” 길 한가운데 서서 이야기를 하자고? “여기는 조금 그렇고, 그냥 둘이서 이야기할 만한 곳이….” “말 안 하면, 나 저 버스 타고 간다.” 마침 다가오는 버스가 집으로 가는 방향의 버스였다. 도하는 어물거리다 단유가 몸을 돌리려는 모양새를 취하자 황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부탁이 있다.” “뭐.” 시큰둥한 단유의 표정을 보며 침을 삼킨 도하가 말했다. “담배 끊는 거 도와줘.”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미친놈.” 단유는 냉정하게 돌아섰다. 그리고 마침 정류장에 선 버스를 향해 가려는데 또 도하가 붙잡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애정행각으로 착각할 법한 행동이기도 했고, 원체 스킨십이 익숙하지 않은 단유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도하를 보았다. “도와줘.” “야, 그걸 내가 어떻게 돕냐? 그리고 왜 내가….” “친구 하자, 우리.” 단유는 온몸에 돋는 소름 때문에 아찔할 지경이었다. ======================================= [348] 주의(3) 산 중턱을 에둘러 싼 짙은 안개에도 가려지지 않는 우람한 산봉우리가 옛 산수화에나 나올 법한 모양새로 펼쳐진 가운데, 대나무들이 우거진 산길 어딘가에서 대치상황이 벌어졌다. 금빛 실올로 화려한 문양이 자수된 하얀 견포(絹布)의 사내가 펼쳤던 섭선을 접어 앞으로 뻗었다. 그 단순한 동작에 달려들던 험악한 인상의 산적(山賊)들이 바닥을 뒹굴어야 했다. 하지만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으니, 출수와 동시에 거둬들이는 섭선에 흡(吸)자 결이 공명하여 나뒹굴었던 산적들이 사내에게로 끌려 들어왔다. 이어 사내가 반대편 손으로 장법을 펼쳐 주위를 아우름과 동시에 폭(爆)자 결로 기운을 떨치자, 커다란 굉음과 함께 산적들은 붉은 피를 뿌리며 조각난 채로 흩어졌다. 사내가 펼친 무공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한 힘에 탄성이 쏟아졌다. “존나 세네.” “레벨 몇인데?” 키보드로 스킬을 누르던 아이가 별거 아니라는 듯 ‘79’라고 말하자 고개를 내밀고 구경하던 아이들이 소리를 질렀다. “대박!” “야, 나 버스 좀.” 그사이 쓰러진 산적들에게서 아이템을 줍던 소년은 인벤토리를 열어서 획득한 아이템을 확인했다. 그러던 중 한 아이템에 커서가 닿고 아이템 스펙창이 뜨면서 아이들은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와, 일장 떴다!” “씨발, 저게 저기서 뜨네?” “보스몹도 아닌데?” 캐릭터를 조종하던 소년도 잠시 게임을 멈추고 손바닥을 비벼 땀을 식혀야 할 만큼, 이번 앵벌이는 대박이었다. 게임에서 몇 안 나오는 희귀 아이템인 만큼 소년도 꽤 흥분했다. “와, 잘 나가는 놈은 뭘 해도 되네.” “좋겠다.” 소년, 병호는 신이 나서 외쳤다. “씨발. 야? 뭐 먹을래? 내가 쏜다!” “와아!” 함께 피시방을 찾았던 친구들이 환호성을 터뜨리며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카운터에 먹거리를 주문하는 사이, 병호는 오늘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축구에 별로 관심은 없었지만, 원래 니편 내편 정해진 대항전을 보면 저도 모르게 흥이 오르지 않던가. 마침 장계 중학교 축구부가 큰 점수 차로 승리해서 신이 나던 마당인데, 친구들이랑 피시방에 와서 득템까지 했으니 오늘 하루는 정말 ‘땡’ 잡은 날이었다. 옆에 놓인 탄산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가슴속에서 개운함이 터져 나오는 느낌이 정말 끝내줬다. **** “뭐?” 도하는 어물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친구?’라고 재확인시켜주었다. 결국 단유는 버스를 타지 못했다. 들러붙는 도하를 떼어놓고 주위를 둘러보다 정류장에서 조금 떨어진,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관심을 주지 않을 것 같은 장소를 골라 도하를 데리고 갔다. 상설 운동장 옆에 있던 아파트의 놀이터에는 몇몇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낯선 어른(?)의 등장에 경계의 시선을 던지기도 했지만, 단유는 모른 척하고 놀이터 경계에 설치된 벤치로 가 앉았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곳이라 살짝 눈이 부시기도 했지만, 봄 햇살은 언제나 환영이라 단유에겐 최적의 장소였다. 도하는 쭈뼛거리며 단유를 따라와 단유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햇살에 반짝이는 모래들 위로 굳은 얼굴의 꼬마들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니 눈치를 주고 있었다. “다 큰 놈들이 여기 와서 뭐하니?” 라고 묻는 것 같은 새초롬한 표정의 양갈래 꼬마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이제 말해봐.” “응?” 잠시 잡생각에 빠졌던 도하는 단유의 물음에 즉각적으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까 말하려던 거. 도와달라며?” “아, 그거.” “친구, 그거 해 달라는 거 아니지? 진짜 원하는 게 뭔데?” 친구 맞는데, 라고 대꾸하려다 도하는 그 말을 삼켰다. 확실히 아까는 조금 당황해서 막 뱉어내긴 했는데, 사실 진짜 원했던 것은 단유 말대로 따로 있었던 것 같았다. “도와달란 말은 진심인 거 같은데, 친구? 아까 너 친구 해달란 말이 마치 분식집에서 김밥 한 줄이요,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 거 알아?” 도하는 뜨거운 햇살이 얼굴에 와 닿는 거 같아 고개를 숙였다. 잠깐 앉은 건데도 햇살이 꽤 따갑다. 고개 숙인 도하를 슬쩍 훔쳐보던 단유는 얕은 숨을 내쉬며 눈을 감고 햇살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사실 지금 이렇게 도하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단유는 단 한 번도 상상한 적이 없었다. 도하를 이세계에서 데려온 이후, 양호실에 데려갔던 것도, 그곳에서 도하에게 말을 걸었던 것도, 이런 식으로 도하와 나란히 앉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때는, 당시의 단유를 자극하던 순수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공포에 휩싸여 미친 듯이 달리던 모습, 현실로 돌아오고도 지나치게, 강박적으로 느껴질 만큼 심하게 떨며 두려워하던 도하의 심리에 대한 호기심. 딱히 친절하게 대하려던 것도 아니었고, 친하게 지내자고 손을 내밀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상대가 이렇게 ‘들러붙을’ 줄은 단유로선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림이었다. “나….” 조심스럽게 입을 연 도하의 목소리에 단유는 상념을 지웠다. “지금이 좋아.” 부탁이다, 제발 말을 하기 전에 앞뒤에 제대로 설명을 붙여줘. 단유가 이마를 짚으며 고뇌하는 표정을 짓는 걸 못 봤는지, 도하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지금처럼, 아무 생각도 안 해도 되고 편안하게 햇볕 맞으면서 살고 싶어. 니 친구들처럼.” 단유는 눈썹을 찡그린 채, 도하의 말을 해석해보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 좋은 단유라고 해도, 햇볕을 맞는 것과 자신의 친구 사이에서 접점을 찾아내기란 어려웠다. “내가 잘 이해가 안 가서 그러니까, 하나씩 풀어보자. 우선 햇볕을 맞는 게 좋다고?” “응.” “아무 생각을 안 해도 되니까?” “응.” “그럼 평소에는 어떤 생각을 하는데?” 도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것저것.”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말하기 힘든 거야?” 도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생각’이라는 언급만으로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온갖 기억과 소리들 때문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머리 속 뇌가 마치 심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두근거리다, 점점 그 박동이 커지더니 마침내 뇌를 터뜨리고 나갈 것 같았다. 도하가 터질 것 같은 머리를 붙잡고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도하의 어깨에 손이 올라왔다. 그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숨 쉬어.” 그제야 도하는 자신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했고, 밭은 숨을 내쉬며 가슴을 진정시켰다. 단순히 어깨에 손이 얹어졌을 뿐인데도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짓누르던 통증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김 단유, 이 녀석은 혹시 마법사일까? 숨을 고르던 도하는 천천히,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어. 그냥 여러 사람이 떠드는 소리야. 그리고 이해하기 힘든 장면들도 순서 없이 튀어나오는데, 그게 다 섞여서 마치 팝콘처럼 막 나와. 그래서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파.” “그런데, 지금처럼 가만히 햇볕을 맞고 있으니까 아프지 않다?” “으응.” “이전에는 이렇게 쉬어 본 적이 없어?” “쉬어도 계속 생각나고 떠들어서 정신이 없고, 그래서 화가 나고 그랬지.” “…그럼 ‘내 친구들처럼’은 무슨 뜻이야?” “니 친구들은 안 아프잖아.” 도하는 아픈 사람이었다. 단유로서도 그 증상만으로 어떤 병이다, 라고 확언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도하는 병을 앓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병원, 안 가봤어?” 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하게 말할게. 난 널 도울 수 없어. 내가 의사가 아닌 이상은 말이야. 차라리 병원에 가서….” “너랑 같이 있으면!” 단유의 말을 자르고 나온 도하의 외침에 단유가 놀란 눈으로 도하를 바라보았다. 단유만 놀란 게 아니라, 놀이터에서 눈치를 ‘주던’ 아이들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제발, 그런 식으로 말을 시작하지 말아 달라고, 단유는 사정하고 싶었다. “너랑 있으면 머리가 개운해져서, 니 친구들처럼 편한 얼굴로 지낼 수 있을 거 같아. 그러니까, 너랑 같이 있으면 안 될까?” 제발! 다른 좋은 표현 다 놔두고 왜 그런 식으로 말하냐고! 단유는 저도 모르게 좁혀진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둘이’ 있을 때는 아프지 않다?” “응.” “그래서 내 친구들처럼 나랑 어울려 지내면 아프지 않게, 편하게 지낼 수 있겠다는 거지?” 단유는 조금 목소리를 높여서 사정을 물었다. 이래야 나중에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이 집에 가서 ‘이상한 형들’이나 ‘이상한 오빠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저 아이들과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텐데.’ 도하와 있으면서 부동심(不動心)이 조금 흔들린 모양이다. 단유는 호흡으로 정신을 다잡은 뒤, 도하에게 말했다. “그건 임시방편이야. 근본적인 원인을 모르는데 어떻게 그 병이 나을까?” “그래도, 일단 이렇게 함께….” “그러니까!” 애절한 눈빛으로 ‘함께’라느니, ‘너랑’ 같은 단어로 우리 관계를 재설정하려 들지 말아 달라고. 단유는 조금 더 냉정한 시선으로 도하를 바라보며 물었다. “병원에 가기 싫어?” “그것도 그런데, 같이 갈 사람이 없어.” 도하의 어머니는 보험판매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는 도하의 이야기는 어쩐지 초등학교 때 만났던, 재림이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사실 여러 가지 점에서 재림이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담배를 핀다거나, 교내 생활이 불량하다거나, 부모님이 바쁘시다거나. “아버지는?” 도하는 이를 악물었다. “없어.” 단유는 도하가 ‘아버지’란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물어봐선 안 될 것 같았다. 어쩌면 ‘아버지’가 트라우마의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부분은 단유의 영역이 아니었으니 넘어가는 것으로 마음을 정하고, 단유는 선을 그었다. “일단 내 입장을 정리하자면, 난 너랑 친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단유의 직설에 도하는 일순 얼굴을 구겼다. “정확히 표현하면 없었어. 그렇다고 지금 막 생겼다는 뜻도 아니야. 이런 식으로 친구를 사귀어본 적도 없을뿐더러, 굳이 그렇게 정해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드니까. 니가 나랑 있으면 편하다고 하니까, 그건 안 막을게. 그런데 그렇다고 우리가 막 마음을 터놓을 정도의 친구가 되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나한테 말을 걸 일이 생기면, 제발 말하기 전에 먼저 생각 좀 하고, 생각도 그냥 하지 말고 깊이! 아주 깊이! 신중하게! 한 다음에 말을 꺼내도록 해. 그 정도만 해준다면 옆에서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도하는 도리어 애매하게 매듭지어진 단유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친구를 한다는 말이야, 안 한다는 말이야?” “‘친구’라는 이름으로 친한 척은 하기 싫다는 거야. 솔직히 니가 지난 한 주간 보인 행동을 생각해봐. 아무리 속없는 사람이라도 너랑 친구하고 싶을까?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너가 어제까지의 너랑 같은 사람인지도 헷갈릴 정도라고. 그리고 어제까지의 너라면 난 너랑 이렇게 말을 나누는 것도 싫어. 하지만 오늘은 적어도 담배 냄새는 전혀 나질 않으니까, 이렇게 대화를 해주는 거야.”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도하는 담배를 피우지 않고 있었다. 단유가 확실한 금연제 역할을 수행 중인 것이다. 도하는 단유와 가까이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셈이었고. “알았어. 그럼…그냥 같이 다니는 정도는 상관없다, 이거지?” “…그래. 주의사항은 꼭 지키고.” “오케이.” 도하는 뭔가 중요한 고비를 넘긴 말기 암 환자의 표정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개운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데, 순간 단유는 자신의 결정을 철회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앞으로 평탄치 않을 일이 계속 벌어질 것만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도하를 돌려보낸 후, 단유는 바로 집으로 가진 않았다. 친구들에게 ‘할 일’이 있다고 말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집에서 할 일은 아니었다. 단유가 기억을 더듬어 향한 곳은 바로 서울 근교의 산들 중의 하나였다. 고작 몇 달 사이에 폐가처럼 녹슬어가고 있던 산 중턱의 산장과 마주한 단유가 무거운 걸음으로 걸어간 곳은 바로 거대한 나무가 쓰러져 무너진 창고였다. ======================================= [349] 주의(4) 단유는 나무를 멀리 치워버리고 창고로 다가갔다. 여덟아홉 걸음 앞에서도 코를 찌르는 악취가 단유의 걸음을 머뭇거리게 하였다. 창고의 문은 찌그러진 경첩과 구조물 때문에 쉬이 열리지 않았다. 몇 번 힘주어 당긴 뒤에야 거친 비명을 토하며 부서진 경첩을 매달고 떨어져 나왔다. 눈살을 찌푸린 단유가 코를 막고 내부를 살피니, 이미 썩어서 부패하기 시작한 시체들이 창고 바닥에 나란히 누워있었다. 몇 달 전 단유가 이들을 여기 눕혀뒀던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다른 이들이 이전의 모습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반면, 정환은 며칠 전 보았던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었다. “후우.” 단유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몸을 돌렸다. 예전 이곳에서 바라본 어두운 하늘과 달리, 밝은 대낮에 바라본 전경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좌우에 드리워진 산등성이들이 마치 가운데 드러난 하늘을 떠받드는 형국이었고, 산 아래로는 넓은 평지 위에 크기가 제각각인 논들이 타일 조각들처럼 달라붙어 전원(田園)의 풍경을 즐기기 좋았다. 악취만 없었다면 오래도록 이 자리에 서서 저 풍경을 즐겨볼 테지만, 지난날의 악의를 떠올리게 할 만큼 지독한 악취가 이를 방해했다. ‘어쩌면 이리도 비교될까.’ 저리 좋은 경치를 가슴에 담기도 벅찬 마당에 다른 한쪽에서는 악의로 가득한 눈깔로 소년들을 납치하고 죽이려 했다는 사실이 너무 아이러니했다. 만약 자신이 아무런 힘도 없는 아이에 불과했다면, 그래서 저 뒤에 누운 이들의 손에 죽었다면, 저들은 일을 마치고 손을 털며 이곳에 서서 저 경치를 여유롭게 구경하고 있었을까? “나도, 아이러니지.” 과연 자신이 ‘인간의 본질’에 대해 운운할 자격이나 있을까? 물론 명분도 있었고, 핑계도 있었지만, 등 뒤에 누운 이들을 시체로 만든 자신이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 아닌가? 지금도 굳이 핑곗거리를 찾자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배우고 익힌 바, 사람을 죽이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였는데, 단유는 저 시체들을 눈에 담으면서도 평온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으니 자신에게 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들었다. ‘어쩌면 나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병을 앓고 있는 걸까?’ 도하처럼. 문득 도하를 생각했더니, 짜증이 확 밀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단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까지 ‘살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며 걱정을 하던 와중이었는데, 고작 도하를 생각했다고 짜증을 부리다니. ‘어른들이 말하던 간사함 마음이란 게 이런 걸까?’ 안트가 말했었지. 모든 걸 의심하라고. 단유는 자신의 공부부터 다시 되짚으며 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누구를 평가하고 예측한단 말인가. “그나저나, 진짜 걱정은 걱정이네.” 조금 전, 도하를 떠나보내며 보았던 표정을 생각하며 단유는 머리를 긁적였다. 잠시 후, 소년은 그 자리를 떠났고, 그곳에 있던 무너진 창고는 나지막한 언덕처럼 변해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길 중간에 솟아난 언덕 정도로 착각할 법한 지형이 되어버렸다. 몇 달간 방치되었던 그들은 이제야 땅속에서 영면을 취하게 되었으니, 단유의 마지막 배려랄까. ****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지 조용한 병실 복도에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검은 광택의 하이힐이 복도에 규칙적인 울림을 주더니 어느 병실 앞에 멈춰섰다. 지연은 얕은 한숨을 내쉰 뒤, 병실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드르륵거리는 레일 소리와 함께 열린 문 안쪽에서 가슴을 동여맨 붕대맨이 어울리지 않게 히죽 웃으면서 지연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선생님.” “네, 안녕하세요.…몸은 괜찮으세요?” “괜찮다마다요. 아, 그건 저기 놔두시면 됩니다.” 지연은 붕대맨이 가리킨 수납장 위에 과일 바구니를 올린 뒤, 붕대맨에게로 몸을 돌렸다. 얄팍한 인상을 가진 사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웃는 얼굴로 손짓했다. “여기 앉으세요, 선생님.” 지연은 살짝 입술을 깨물고 다가가 권해준 의자에 앉았다. “굳이 안 오셔도 되는데, 이렇게 와주시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하하.” 그러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던가, 왜 다른 사람 통해서 오라 마라야, 라는 외침이 혀끝에서 맴돌다 침과 함께 삼켜졌다. “제가 몸만 좋았어도 버선발로 나가서 반길 텐데, 보다시피 이래서 죄송합니다. 결례라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진심이라곤 1도 느껴지지 않는 빈말이 혀끝에서 쏟아져 나와, 지연은 현기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저런 말에 어떤 대꾸를 하리.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학교 밖에서 보니 감상이 새롭습니다, 선생님. 정말 아름다우세요.” 요즘 ‘아무말 대잔치’란 말이 유행이라던데, 여기는 ‘빈말 대잔치’가 펼쳐지고 있었다. 저렇게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아름답네 어쩌네 해 봐야 지연은 발가벗겨진 채 희롱당하는 느낌만 받을 뿐이었다. ‘1시간, 아니 30분 정도 말벗이나 해 주고 오세요, 김 선생님.’ 교장 선생님의 명령 아닌 명령이 떠오른 지연은 절로 시계로 눈이 갔다. 이제 병실에 들어온 지 겨우 5분여가 지났는데, 남은 20여 분은 어떻게 버틸까. “남자친구, 없으시죠? 선생님?” “네?” “아, 그냥 예의상 여쭤봤습니다, 선생님.” 히죽 웃는 면상을 하이힐로 찍어버리고 싶었다. ‘남친’ 유무를 묻는 말이 어떻게 ‘예의’냐? “…….” “하하하.” 지연의 대답 대신 침묵을 지키자 머쓱해진 붕대맨, 한영은 웃음으로 넘기며 다른 말로 화제를 돌렸다. “선생님도 운전하시죠?” 당연히 한영은 지연이 몰고 다니는 국산 경차의 번호를 외울 정도였지만, 괜히 한 번 더 물었다. 지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영은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경험담을 늘어놓았다. “제가 아침에 출근하는데요….” 처음엔 당황스럽기만 했던 일이었지만, 사람들이 모두 관심을 보이고 흥미로워하는 모습을 보이자 당사자인 한영은 왠지 모르게 우쭐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남들이 쉬이 겪지 못할 일을 겪었다는 자부심이랄까? 물론 본인도 처음에는 전날 마셨던 술의 취기가 남아 벌어진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지금은 그저 기적과도 같은 일을 겪은 당사자로서 간증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원래 이런 간증은 스스로를 도취시키게 마련이다. “…그래서 브레이크를 잡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눈앞의 건널목이 사라지는 겁니다! 그 순간에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사람이 너무 놀라면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잖아요?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달리던 속도가 있다 보니 차가 흔들리는데 이건 제힘으로 어찌할 수 없잖아요? 제가 나름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라 어지간해서는 핸들을 컨트롤해서 중심을 잡을 텐데,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아무것도 못 하겠더라고요.” 간간이 개인 자랑을 섞어가며 그 날의 일을 마치 전래동화 이야기하듯 말하는데, 사정을 대충 파악하고 있던 지연은 우습지도 않았다. 음주운전으로 과속하다 사람을 칠 뻔하고, 어떻게 운이 좋아서 사람을 치는 대신 가로수를 들이받아 끝난 사고를, ‘급발진’과 ‘기적’이라는 요소를 섞어서 미담으로 만들어 버렸다. “마지막 순간에 정신을 차렸죠. 이대로 가면 큰 사고가 나겠구나. 차라리 나만 다치는 게 좋겠다. 그래서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핸들을 틀어서 사람이 없는 쪽으로 향했죠. 결국 …쾅! 뭐, 이렇게 됐죠.” ‘세상에, 그 순간에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다니, 한영씨 멋져요!’라는 말을 기대했던 것일까? 한영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지연의 리액션을 기다렸다. “아, 네.” 지연의 심심한 반응에 한영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씰룩거리던 입술이 진정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말을 많이 했더니, 목이 마르네요. 괜찮으시면 물 좀 가져다주실래요?” “아, 네. 사올까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는 지연에게 한영은 또 한 번 씰룩거리는 입술을 꼭 깨물어 보였다. “물, 저기 냉장고 안에 있어요.” 지연은 냉장고의 위치를 확인한 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실망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는 얼른 돌렸지만. 하지만 어차피 한영의 시선은 얼굴에 있지 않았기에 의미가 없었다. 잘록한 허리와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엉덩이를 보며,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두른 한영은 엉덩이를 감싸고 있는 치마 아래 있을 속옷을 상상했다. ‘천천히 옷을 벗기고…아니, 꼭 천천히 할 필요가 있나? 확 찢어버려도 되지 않을까? 앙탈을 부리려나? 여린 손목을 한 손으로 붙잡아 머리맡에 두고 다른 한 손으로 남은 속옷들을 벗기는 거야. 위의 것도, 아래 것도.’ 음흉한 상상의 대상이 된 줄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연은 서두르지 않으며,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고 컵에 물을 따랐다. 최대한 늦게 시간을 끌어서라도 한영에게서 떨어져 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 돌아서던 지연은 한영의 눈과 마주친 뒤, 멈칫거렸다. 개미, 지렁이, 바퀴벌레…. 떠올릴 수 있는 온갖 곤충들을 모두 모아놔도 지금 한영이 보인 눈빛만큼 소름 돋게 할 수는 없으리라. ‘그냥 학교 때려치울까?’ 울고 싶은 마음으로 지연이 시계를 바라보니, 이제 15분 정도 남았다. **** 병호가 친구들과 기분 좋게 피시방을 나왔을 때는 벌써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아직은 3월이라 그런지 해가 그리 길지 않았던 탓이었다. “다음에 또 같이하자?” “그래.” “야, 다음에는 나도 버스 좀 태워 줘라.” “알았어.” 아이들은 환한 미소로 헤어졌고, 병호는 자신감 가득한 걸음으로 길을 걸었다. 이때를 위해 방학 동안, 모진 구박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학원을 땡땡이 쳐가며 게임을 했었나 보다. 1학년 때는 별 장기도 없고, 특기도 없으면서, 말재간도 없던 터라 친구들이 많지 않았다. 친구가 없어도 편하게 지낼 수만 있었다면 상관이 없겠는데, 친구도 없이 혼자 책상에 덩그러니 남은 아이는 다른―질이 좋지 않은―아이들에게 맛좋은 먹잇감처럼 여겨졌던 모양이었다. 병호는 흔히 말하는 ‘셔틀’이었다. 다만 다른 아이들과 다른 점은, 병호는 다른 아이들에게 맞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맞기 전에 나섰으니 그럴 수도 있지만, 어쨌든 빠릿빠릿하게 행동했더니 ‘힘 좋은’ 친구들이 병호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들은 병호를 ‘셔틀’이라고 부르는 대신, ‘친구’라고 불러줬다. “친구야, 빵 좀 사와라.” “친구야, 목마르다.” “친구야, 체육복 좀 빌려와라.” 그래서 병호는 자신이 ‘셔틀’이라는 자각이 없었다. 힘 좋은 ‘친구’들이 병호를 데리고 피시방을 가기 시작했을 때, 병호는 새로운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당시 오픈한 무협 게임이었는데 의외로 병호가 소질을 보였던 것이다. 병호는 게임에 점점 빠져들어 갔다. 어떻게 해야 빨리 캐릭터를 레벨업 시킬 수 있는지, 어떻게 설정해야 캐릭터를 강하게 만들 수 있는지, 어떻게 조종해야 전투에서 유리한지를 고민하고 연구했다. 그리고 그 성과가 마침내 2학년에 이르러 빛을 보았다. 당시의 ‘힘 좋은 친구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지만, 겨울 방학 동안 단련한 게임 덕분에 병호는 ‘좋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나도 더는 혼자가 아냐.’ 가끔 힘 좋은 친구들과 같이 있어도 외롭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던 병호는, 한 살이라도 더 먹은 김에 스스로 바뀌겠다는 결심을 했다. 친구도 생겼으니 그 결심은 꼭 좋은 결과를 맞이하리라. **** “선생님? 왜 이렇게 서두르세요?” 단유가 어리둥절해 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실로 급히 뛰어든 하은은 명수의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소파 위를 둘러보았다. 한쪽에 처박힌 리모컨을 찾은 하은은 서둘러 리모컨을 조작, 곧 화면에서 색색의 공이 돌아가는 기계가 번쩍이는 불빛 속에서 숫자를 토해내는 장면으로 전환되었다. 손을 부들부들 떨며 말없이 화면을 바라보던 하은은, 이윽고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두 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멋쩍은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한 하은이 입을 열었다. “밥 먹었니?” 그녀의 손에서 로또 용지가 갈가리 찢기고 있었다. 잠시 후, 식탁에 저녁이 준비되고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한쪽 무릎을 굽혀 의자 위에 올린 하은이 힘이 빠진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역시 사람은 요행을 바라는 게 아니야. 묵묵히 정진하는 것이 사람의 바른 자세지. 알겠니?” “어차피 재미 삼아 하는 거라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하은은 숟가락을 치켜들고 선언하듯 말했다. “사행성 게임은 재미 삼아 하는 게 아냐.” “그럼 왜 하셨어요?” “이게 다, 너희들에게 사행성 게임이라는 게 얼마나 유해한지를 보여주려고 한 거야. 이것 봐라. 돈 낭비에, 시간 낭비까지. 할 짓 아니지 않니? 그러니까, 요행을 바라지 말고 너희들도 꾸준히 공부해서 좋은 직장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이 되는 거지.” “5천 원짜리 복권 용지에 엄청난 의미가 들어있었군요.” “김 단유, 비꼬는 거니?” “설마요?” 하은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숟가락을 국그릇에 집어넣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5천 원이면 육개장이 한 그릇인데.” 단유와 명수는 못 들은 척했다. “아, 맞다. 명수 오늘 시합 어땠어?” “이겼어요.” “명수가 두 골 넣었어요.” “정말? 잘했네! 그럼 기념으로 치킨이나 먹을까?” “5천 원짜리 치킨이 있나요?” “이게!” 명수가 숟가락을 물고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선생님은 왜 내가 말할 때만 그래요!” “니가 말하면 열 받아서 그래, 열 받아서!” 단유는 문 하나를 두고 씨름하는 두 사람에게서 신경을 끄고, 묵묵히 젓가락으로 김치를 집어 먹었다. 신맛이 단유의 입에 딱 맞았다. ======================================= [350] 주의(5) 어느새 3월이 지나가고 남쪽 지방에서는 이른 벚꽃이 만개하기 시작한 4월이 되었다. 서울은 아직 날이 덜 풀린 탓인지 벚꽃을 보긴 힘들었지만, 각종 화사한 봄꽃들이 도처에 피어서 눈을 즐겁게 하고 있었다. 덩달아 사람들이 입은 옷들도 점점 얇아졌고, 밝은 색깔의 패션으로 봄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색의 여유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칙칙한’ 색의 교복을 입고 등교를 하는 학생들이었다. “이게 뭐가 칙칙해? 하늘색이잖아?” 채윤은 이게 뭐 어떠냐며 밋밋한 반응을 보였지만, 지태는 불만이 많다는 표정이었다. “비 오기 전의 하늘색도 하늘색이긴 하지.” 투덜대던 지태는 와이셔츠 위에 걸친 조끼를 늘려 보이며 말했다. “다른 학교 애들은 교복 되게 예쁘던데, 우린 이게 뭐냐? 남중이라 그런가?” “그래 봐야 사람들 눈에는 그냥 교복이야.” “야, 요즘은 교복도 패션이야. 다른 데는 일부러 교복 디자인을 바꾼다던데.” “바랄 걸 바라라. 우리 이사장님이 직접 디자인 옷이라잖아.” “칫.” 지태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부루퉁한 얼굴을 하다, 명수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모레가 준결승?” “응.” 명수는 보도(步道) 위에서 구르던 작은 돌멩이를 발끝으로 톡하고 찼다. 힘차게 굴러가던 돌멩이는 보도 아래로 툭 떨어지더니 차도 바깥쪽의 하수구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대박이다. 작년에는 본선도 못 갔다면서?” “내가 없어서 그래.” 명수가 의기양양한 웃음을 짓는 걸 보며 지태가 못 말린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니가 지금까지 넣은 골 개수만 세어봐도 알겠다.” 예선전 포함 5경기를 치루는 동안, 11골을 넣는 대기록을 세웠음은 물론 그중 한 경기에서는 해트트릭까지 세워 관계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명수였다. “모레 준결승하고, 금요일 결승?” “그래. 금요일에 경기 끝나고 또 고기 파티 벌일 예정이다.” 예선 1차전 승리 이후 가졌던 회식의 여운을 잊지 못하는 명수였다. 그날 누구보다 많은 고기와 콜라를 뱃속에 집어넣은 뒤,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야, 너무 일찍 샴페인 터뜨리는 거 아냐? 모레 경기에서 질 수도 있잖아?” “안 져. 내가 있는데 왜 지냐?” “너 혼자 축구 하냐? 니가 아무리 잘해도 상대 팀 11명은 놀고만 있겠냐?” “그럼 우리 팀은 구경만 하고 앉았게? 나 없어도 우리 팀 잘해. 내가 있어서 더 잘하는 거지.” 채윤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단유에게 물었다. “우리 모레 경기할 때 갈 수 있나?” “못 갈걸? 결승전을 하면, 학교 전체가 응원하러 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준결승은 아마 못 갈 거 같은데.” “그렇지? 못 가지? 지태가 계속 갈 수 있다고 하길래.” 목요일 준결승 전은 오후 1시에 공설운동장에서 진행될 예정이었고, 결승은 금요일 1시였다. 준결승도 응원이 필요한 경기가 아니냐며 참여를 부르짖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응원’보다 ‘땡땡이’가 목적이라고 판단한 것인지, 학교 측에서는 결승전만 응원을 간다고 선언한 마당이었다. “이번에 우승하면 상금 같은 거 있나?” “그런 거 없고, 그냥 기록이 남지.” ‘춘계대회 우승’이라는 기록이 고등학교 진학 시에 꽤 도움이 될 거라는 명수의 기대였다. 물론 단유가 보기에, 우승을 못 하더라도 이미 명수가 보여준 결과만으로도 여러 고등학교가 탐을 낼 거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 그런데 말이야. 너, 도하란 애랑 친하게 지낸다며?” 채윤의 말에 단유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누가 그래?” “다들 그러던데? 전교 1등이 불량한 녀석 한 명 갱생시켰다고.” 헛소리. 갱생은 무슨. “그러고 보니, 너 요새 걔랑 자주 다니더만? 점심 먹으러 갈 때도 같이 가고. 질투 날 정도야.” 지태의 농담에 단유는 날 선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지태는 쉽게 기죽지 않았다. 얼굴에 익살맞은 광대처럼 장난기가 잔뜩 오른 지태였다. “그런 거 아니다.” “내가 봤는데? 봤는데?” “…걔가 따라오는 거야.” 이때 명수가 한마디 거들었다. 단유가 아닌 지태를. “그게 그거지. 완전 브로맨스네.” 지태네와 달리 대충이나마 사정을 아는 명수이기에 지금 하는 말이 자신을 놀리려는 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굳이 계속 대꾸를 하면 놀림만 더할 거 같아 입을 닫아 걸은 단유였다. 아이들이 모처럼 놀릴 거리를 잡았다는 듯, 단유와 도하의 브로맨스를 각본 쓰듯 확장해가며―점심시간 이후의 밀회, 수업시간 중에 나누는 은밀한 대화 등―놀려대다 보니 어느새 학교에 도착해 있었다. 교실 안에 있던 몇몇 학생들과 수인사를 나누며 자리로 향한 단유는 책상을 정리하고, 오늘 들을 학과목에 맞춰 책들을 서랍 속에 집어넣은 뒤, 최근 읽고 있던 책을 꺼내 독서에 들어갔다. 속속 등교하는 학생들이 많아지면서 교실 안의 분위기가 점점 소란스러워지는 가운데, 조례가 있기 얼마 전에 도하가 등교를 했다. 아침에 담배를 피우지 않게 된 도하는 교문을 지키는 지도 선생님을 피할 필요가 없어져서인지 느지막하게 등교하기 시작했다. 도하는 말없이 자신의 자리에 앉은 뒤, 멀뚱히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견디다 못한 단유가 책을 덮고 도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도하가 무표정한 얼굴로 한 손을 들며 말했다. “안녕.” 단유가 왜 인상을 쓰는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제발 평범하게 인사 하면 안 되겠어?” “평범하게 한 거 같은데?” “그냥 말로 해. 왜 가만히 보고 있는 건데?” “책 볼 때 방해하지 말라며?” “방해하지 말란 소리가 인사도 하지 말란 소린 아니잖아?” “그래? 몰랐어. 그럼 내일부터는 책 읽을 때 말 걸어도 돼?” 단유는 한숨을 내쉰 뒤, 정확한 기준을 제시했다. “인사를 할 요량이라면, 그냥 책을 읽고 있든 말든 해도 돼. 굳이 내가 쳐다볼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대신 그 외에 쓸데없는 이야기는 내가 책을 보고 있지 않을 때 해줬으면 좋겠어.” “니들 또 사랑싸움하냐?” 건너편에 앉아있던 한 친구의 농담에 주변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도 변화라면 변화인데,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농담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에는 도하가 워낙 험악하게 행동한 탓에 말을 걸지 않았고, 단유가 워낙 사교적이지 않다 보니 말을 걸지 않았는데, 도하와 단유의 ‘이상행동’이 빈번히 관찰되면서 아이들이 스스로 세운 벽을 허물고 말을 걸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놀리는 말이라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지만. “그런 거 아니거든?” 장난스레 입꼬리를 올리는 전일이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내 촉이 딱 그건데?” 또 한 번 얕은 한숨을 내쉰 단유가 도하에게 ‘왜 가만히 듣고만 있냐’는 물음을 던지자, ‘딱히 할 말이 없다’는 식으로 대꾸했고, 그 모습이 또 아이들에게 놀림거리가 되었다. “인정? 인정?” 이럴 때, 소설에서는 ‘지랄도 풍년이다’라는 표현을 쓰던데. 이때 단유의 곤란함을 풀어준 것은 담임선생님이었다. “이놈들아. 선생님이 오면 조용히 하는 척이라도 해라. 반장!” “차렷!” 반장이 일어나 아이들의 주의를 환기했다. 여느 때와 같은 평범한 조례로 시작하여, 마무리는 ‘오늘도 열공하자’는 내용으로 끝이 났다. 다만, 나가기 전 한 마디를 덧붙이셨다. “아, 2주 뒤에 시험 있는 거 알지?” “아아.” 아이들의 탄식과 야유 소리를 즐겁게 들으며 나가시는 선생님을 바라보던 도하가 단유에게 물었다. “김단유.” “왜?” “너 지난번에 공부 가르쳐 준다고 안 했어?” “내가?” “응.” “언제?” “내가 공부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단유는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니가 갑자기 친구 해달란 말로 바꾸면서 어영부영 지나갔던 말 아냐?” “그랬나? 알았어.” 도하는 이내 고개를 돌리고 1교시에 있을 국어 교과서를 꺼냈다. “뭐야, 가르쳐 달란 거야, 말란 거야?” “가르쳐 주려고?” “아놔.” 단유는 가슴을 두드리다 도하가 꺼낸 교과서를 짚었다. “넌 다른 거 말고, 이 책이나 열심히 공부해라.” “가르쳐 줄 거야?” ‘아놔.’ 그러나, 신경질을 조금 부리더라도 화는 내지 않는 단유였다. 아픈 사람에게 화를 내봐야 무슨 소용일까, 싶은 생각이었던 것. 단유는 책을 펼쳐 페이지를 휙휙 넘기는 도하를 보며 아주 오래전, 피를 무서워하던 친구를 떠올렸다. 도하와 놀이터에서 대화를 한 이후, 단유는 나름 호기심을 가지고 도하를 관찰했다. 그리고 동시에 도서관과 인터넷을 오가며 도하의 병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를 찾으려 노력했다. 의사가 아닌 이상, 분명하게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유사한 병명은 찾을 수 있었다. ‘집중력 과잉행동 장애.’ 더 흔히 쓰이는 표현으로 ADHD라는 병이었다. 보통은 초등학교 시절에 심하다가 중고등학교로 진학할 무렵이면, 정신적 성장과 함께 증상이 완화된다고. 하지만 더러 병세가 호전되지 않을 경우, 심각한 불안증세와 함께 과도한 폭력성을 야기하기도 한다고 설명이 되어 있었다. 물론 아닐 수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내버려 둬서는 나을 수 없는 병이라는 점에 단유는 주목했고, 그래서 도하에게 병원에 내원하거나 혹은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알려서 도움을 요청하라는 충고를 해주었다. “싫어.” “왜?” “지금은 괜찮으니까.” 일시적일 뿐이라고 설명해도 도하는 꺼렸다. “너한테 얘기하는 건 괜찮은데, 다른 사람한테는 이야기하기 싫어.” 설령 그게 부모님일지라도. 그 대답에 단유는 더는 이 화제로 이야기하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이유는 모를지언정, 도하의 눈에 깃든 아픔을 자기가 자극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도하의 모든 행동을 좋게만 봐줄 수는 없었고, 특히 껌딱지처럼 자신만 졸졸 따라오는 행동에 짜증이 안 난다면 거짓말이리라. 조금 전의 일처럼, 자신이 쳐다봐줄 때까지 빤히 바라보고 있는 행동을 무신경하게 모른 척할 수 없는 노릇이었고, 지태의 말처럼 점심을 먹으러 갈 때도 목줄 묶인 강아지마냥 졸졸 따라오는 모양새에 반 아이들까지 놀려대는 판이니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 없었다. “도하야.” 도하가 의미 없이 페이지를 넘기다 단유를 돌아보았다. “…읽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 단유는 그 말만 남기고,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 “김지연 선생님?” 지연은 곧 있을 수업 때문에 책을 챙겨 교무실을 나가려던 참이었다. “네?” 교감 선생님은 주먹을 말아쥐고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했다. “잠깐 시간 되십니까? 잠깐이면 됩니다.” 이제 몇 분 후면 종일 울릴 텐데,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교감 선생님이 시간을 내 달라 하니 김지연 선생님은 차마 거부하지 못하고 교감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출석부를 가지러 교무실을 가로지르던 몇몇 선생님들의 시선이 잠깐 닿았다가 사라졌다. 교감 선생님은 커다란 돋보기안경 위로 눈동자를 들어 지연을 바라보았다. “혹시 이번 주말 시간 되십니까?” 지연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예, 약속이….” “급한 약속 아니시면, 저랑 함께 병원 좀 다녀오지 않으시겠습니까?” 말하는 당사자도 부끄러워할 내용이 분명할 텐데, 교감 선생님의 얼굴에서는 딱히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토요일 오후에 갈 텐데, 시간 좀 내주세요. 김지연 선생님.” 이 학교에 온 지 이제 겨우 2년밖에 되지 않는 햇병아리 신세라 교감 선생님의 지시를 거부할 깡이 없던 지연은 결국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종이 울린 뒤에야 교무실을 나오게 된 지연은 빈 복도를 걸으며 온갖 상념에 휩싸였다.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이 이사장의 아들, ‘지한영’에게 찍혔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제 대학 졸업한 지 겨우 3년. 대학 때도 주변 남자들에게 꽤나 호감을 받던 처지라, 자신이 남성들에게 인기가 있는 외모를 가졌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그런 외모가 하필 독사를 연상케 하는 ‘지한영’ 행정실장의 눈에 들고 말았다. 한영이 학교를 장악한 이사장의 권력을 등에 업고 자신을 옭아매려 한다는 게 심히 불쾌했다. 문제는 그 불쾌함을 풀 방법이 없다는 것. 또 다른 문제는 이 불쾌함 때문에 수업에 집중하기 힘들다는 것. 멋있는 교사가 되고 싶다는 지연의 포부가 고작 여색이나 밝히는 남자 때문에 꺾여야 한다는 게 짜증 났다. 얼른 머릿속에 가득한 불쾌함을 털어내고, 학생들에게로 주의를 옮겨야 하는데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답답한 지연이었다. “차렷.”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교탁 앞에 선 자신을 발견했다. 그 와중에도 반을 틀리지 않고 들어왔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오늘 배우는 내용도 시험에 나올 거니까, 다들 수업 집중하세요. 알겠죠?” “네!” 정작 집중할 사람은 자신인데. 씁쓸함을 담은 미소가 지연의 입에 잠시 걸렸다 사라졌다. ======================================= [351] 너는 어디에 있었어?(1) “그 날 어디에 있었어요?” 허리를 굽히고 얼굴을 들이민 사내의 얼굴은 평소 보던 사람들의 평균적인 얼굴 크기의 두 배는 되는 것 같았다. 얼굴이 커서 그런지 눈도 커 보였고, 그래서 두 눈에서 쏟아져 나오는 활활 타오르는 안광도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대답 안 한다고 해서 수사가 진행되지 않는 게 아닙니다.” 보통 영화나 드라마 보면, 형사취조는 한 사람만 취조실에 들어와서 독대하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두 사람이 들어와서 자신을 상대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어르고, 한 사람은 달래는, 소위 ‘당근과 채찍’ 전략? “이 봐요! 지금 묵비권 행사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 당신이 그곳에서 나오는 CCTV 영상이 있어요!” 뒤져보면 그곳에서 나오는 영상이 수십 개는 될 터이다. 그중 하나가 우연히 걸려든 게 아닐까? “증거가 있다고요, 증거가.” 그깟 증거. “그 시간, 어디에 있었어요?” 그 시간. “대답해요!” 나는 뭘 하고 있었지? “김지연 씨!” 왜 거기 있었던 거지? **** 지연은 자신의 중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졸업한 지 10년도 넘었지만, 당시의 기억이 생생했다. 여자는 호르몬 때문에 남자보다 빨리 성장한다고 하던데, 유난히 키가 작아서 자신은 키가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슬퍼하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은 그런 자신을 귀엽다고 안아주고 이뻐해 주었다. 정작 본인은 느린 발육 때문에 고민이 많았었는데. 그래도 그런 친구들 덕분에 밝은 학창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즐거운 기억도 많았고, 평생을 함께할 친구도 얻었다. 친구들과의 기억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친구들과 함께 책 한편을 두고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은 오래도록 남아, 지금의 자신을 만드는 1등 공신이라 하겠다. 얼마나 좋았으면, 그 당시 지연은 평론가를 꿈꾸기도 할 정도였다. 책 한 권을 읽고, 그것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며 토론하는 법도 익히고 논리력과 상상력, 추리력, 어휘력 등을 기를 수 있었다. “선생님은 그런 경험들을 너희들에게도 나눠주고 싶어요. 분명히 여러분들의 국어 점수 향상에 큰 도움이 될 테고 말이죠.” 아이들은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지연이 아무리 진심을 담아 말한다 한들, 아이들에겐 그저 여느 선생님의 훈계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더 많은 숙제를 내주기 위한 핑계로 들렸고. “다음 페이지 넘겨 보세요. 작품 이름이 뭐죠?” “송아지요.” “황순원의 송아지 일부분이 실려 있죠? 다음 시간까지 소설 전체를 찾아서 읽고 독후감을 써오세요. 다음 시간에 발표할 거예요.” 아이들의 입에서 일제히 야유가 쏟아졌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너무 가혹한 숙제라는 불평도 나왔다. “시험에 나올 거예요.” 아이들의 목소리가 쏙 들어갔다. 때를 맞춰 종이 울렸다. 지연은 숙제를 다시 한번 숙지시킨 뒤 교실을 나섰다. “단유야.” 단유는 도하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수업 내내 조용히 침묵을 지키던 도하였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았다는 점이었고, 대신 수업시간 내내 편안한 자세로 넋을 놓고 있었을 뿐이었다. “왜?” “그때 너 맞지?” “뭐?” “동굴에서.” “무슨 소리야?” “이상한 할아버지 있던 곳에서 나타났던 거, 너 아냐?” “무슨 소린지 알아듣게 말해.” “…아냐.” “수업시간 내내 그 생각 하고 있었던 거야?” “아니. 그냥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니.” “숙제가 뭔지는 아냐?” “아니.” 단유는 자신의 노트 한쪽에 ‘황순원의 송아지를 읽고 감상문 써오기’라고 적은 뒤, 페이지를 찢으려다 멈칫했다. “너 내가 숙제 적어주면 해 올 거야?” “아니.” “그래.” 단유는 노트를 덮었다. **** 금요일이 되었다. 전날 장계중학교는 1:1의 스코어에서 팽팽하게 맞서다가 후반 종료 직전 얻은 코너킥에서 명수의 헤딩이 골키퍼의 선방으로 막힌 직후, 바닥에 떨어지는 공을 3학년 선수가 발로 밀어 넣으며 2:1의 신승을 거두게 되었다. 전교생의 등교가 끝난 시간에 맞춰 장계중학교는 출정식을 대신해 운동장에서 전체 조회를 가졌다. 전교생이 모인 가운데, 가장 앞줄에는 장계중학교 축구부 선수들이 도열했고, 교장 선생님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모처럼 거창한 훈화를 할 수 있었다. 장장 20분에 달하는 긴 훈화 끝에 결승에 나선 학생들을 독려하였고, 학생들은 지친 얼굴로 조회를 마치게 되었다. “잘 갔다 와!” 축구부는 일찌감치 짐을 싸서 학교에서 출발했고, 그 와중에 단유는 명수를 격려했다. “VIP 할게.” “MVP.” “그거나 그거나.” 이후 장계중학교는 단축수업을 실시, 3교시까지 마친 후 이른 점심을 먹고 운동장으로 출발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어디 갈 때는 꼭 선생님한테 보고하고 가야 하고, 말없이 빠졌다가는 절대 안 봐준다. 알겠지?” “네!” “응원할 때는 큰 목소리로 하고. 그럼 앞번호부터 차례대로 줄 서서 들어가자.” 결승전이라 그런지 관람석은 꽤 많은 사람들이 들어차 있어 지난번과 많이 비교되었다. 특히 운동장 반대편에는 상대 중학교의 학생들이 격렬한 응원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와, 이러니까 진짜 결승전 분위기 난다.” “우리 학교가 이기겠지?” “들어보니까, 경기마다 두 골 이상씩 넣은 팀은 우리 학교밖에 없다던데?” “존나 세네? 우리 학교?” “그런가 보더라.” 왁자지껄 떠들면서 자리를 찾아가는 가운데, 단유와 도하도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이윽고 장계 중학교도 응원전을 벌이기 시작했고, 운동장에 선수들이 집합하여 몸을 풀기 시작하자, 아이들의 응원 소리는 더욱 커졌다. “단유야.” “왜?” “내가 뛰는 것도 아닌데, 떨린다.” 단유는 조금 놀랍다는 듯 도하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경기 시작하면 더 재미있을 거다.” 도하의 얼굴에 모처럼 ‘즐거움’이란 감정이 떠 있음을 발견한 단유는 다시 운동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십 명의 아이들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명수였다. 아침에도 봤었지만, 오늘 명수의 컨디션은 최고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래도 시합 중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부디 평소와 같이, 다치지 말고 제 실력을 다 발휘하길 속으로 빌며, 단유는 경기의 시작을 기다렸다. **** “김 선생.” “점심 먹었어요?” “아직이요.” 평소 12시 반에 점심을 먹던 습관 때문인지, 허기를 느끼지 못해 교무실에 남아 업무를 보던 지연이었다. “그럼 나가서 밥이나 먹고 올까요?” 음악 과목을 맡은 박 선생님의 제안에 지연은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거절했다. “교무실에 남아서 지킬 사람 필요하잖아요? 지금 제가 제일 막내인 것 같은데, 다른 분들이랑 드시고 오세요. 선생님들 드시고 오면 그때 먹을게요.” “아…그럴래요?” 지연은 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들과 선생님들 대부분이 결승전이 열리는 공설운동장으로 향했지만, 몇몇 선생님은 학교에 남아야 했다. 당연히 교무실을 지켜야 하는 이유도 있었고, 담임선생님이 아닌 선생님들의 경우에는 2주 뒤에 있을 시험을 대비한 시험문제를 만들기 위해 남은 경우도 있었다. 남들 다 놀 때 놀지 못한다는 단점도 있지만, 억지로 끌려가야 하는 경우보단 낫다고 생각하며 교무실에 남은 지연은 다시 펜을 들고 학습지를 참고해서 시험문제를 만들려 했다. 하지만 ‘점심’ 이야기를 들은 탓인지, 갑자기 배가 고파오는 것만 같아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먹을 게 있으려나?” 자리에서 일어난 지연은 기지개를 켜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용도실로 향했다. 여기저기 뒤져봐도 먹을 게 없어 지연은 티백으로 우린 녹차 한 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이제 곧 시작하겠네.’ 1시부터 시작이라고 했던가? 녹차 한 모금을 머금고 창가 쪽으로 향한 지연은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애들로 가득 찼을 운동장이 비어 있으니, 요일 감각이 헷갈리는 기분이었다. 돌아보니 넓은 운동장만큼 넓은 교무실이 눈에 들어왔다. 유난히 날이 좋다 보니, 이렇게 교무실에 처박혀 있기 싫어졌다. ‘나도 참. 시험문제도 만들어야 하고 공문 작성도 마쳐야 하는데, 뭐람.’ 한숨을 토해내며 자리로 돌아간 지연은 팔을 걷어붙이고 다시 펜을 들었다. 남들은 컴퓨터를 이용해 일사천리로 문제를 만들어내던데, 교무실에서 가장 어린 주제에 가장 구식의 방법으로 문제를 만드는 지연은 펜을 들어야 머리가 돌아가는 기분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김지연 선생?] “네.” [나, 이사장이에요.] 지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학교에 있으시다면서?] “…네.” [잠깐 제 방으로 오실래요?] “어, 저기…지금 교무실에 저밖에 없어서요. 교무실을 지켜야 하거든요.” [잠깐이면 되요. 내려오세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끊어지는 전화를 보며 지연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날이 좋아서 모처럼 기분이 좋다 했더니, 이렇게 순식간에 기분을 잡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지연은 교무실을 핑계로 조금 더 있어 볼까 했지만, 그랬다가 괜히 다른 말이 나올까 걱정도 되었다. “김 선생님? 저희 왔어요. 식사하고 오세요.”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박 선생님의 미소가 거북하게 느껴졌다. **** 껌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운동장을 바라보던 우성은 몇 단 아래쪽에 앉은 단유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씨발….” 무식하게 힘만 센 놈. 아니지 유식한 놈이지. 유식한 데다 힘까지 좋으니 그야말로 ‘엄친아’라. 자신과는 출신 성분이 다른 녀석이었다. 저런 놈한테 잠깐이라도 비굴하게 굴었다는 게 쪽팔리고 열이 받았다. ‘도하 저 새끼는 갑자기 약이라도 처먹은 거야, 뭐야?’ 어미 쫓는 강아지처럼 단유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단유 앞에서 해롱해롱 하는 꼴이 여간 눈꼴 시린 게 아니었다. ‘시다바리 새끼.’ 이제 무서운 살기를 뿌려대며 학교를 주름잡던 도하는 없었다. 도하가 없으니 이곳의 ‘통’은 누가 될 것인가. “진태야. 우리가 그 새끼를 한 번 족쳐야 한다.” “저 새끼 힘이 장난 아니라며?” “힘만 센 놈이다. 힘이 세다고 해도 머릿수에는 못 당하거든.” 도하가 있을 때도 머리 쓰는 일은 우성의 몫이었다. “도하 저 새끼도 담가야 돼. 그래야 딴 놈들이 우릴 얕보지 않아. 광종이 봐봐. 저 새끼한테 당한 다음에 지금 어떻게 됐냐? 우리가 광종이 꼴이 날 수 있어.” 진태에게 위기의식을 가지란 의미로 광종의 예를 들었던 것은 유효했다. “7반 대형이 있지? 걔가 지금 2학년 통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작년에 걔 완전히 좆밥이었잖아?” “그랬지.” “도하한테 존나 발리고 숨도 못 쉬던 놈인데, 지금 점점 기어오른단다.” “그 새끼 나한테도 발렸는데.” “그니까. 그래서 우리가 저 새끼를 확실하게 담가야 하는 거야.” 우성은 진태와 계획을 세웠다. 별로 거창하진 않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끝을 낼 수 있는 계획이라 우성은 생각했다. ‘그래, 지금은 그렇게 웃지? 어디 나중에도 그렇게 웃을 수 있나 보자.’ 받은 만큼 돌려준다? 아니 받은 거의 10배는 되돌려 주리라. 턱을 조이면서 껌을 질겅대던 우성은 갑자기 돌아보는 도하의 시선에 움찔 놀라고 말았다. “뭐야, 씨발.” 중얼거리는 우성의 말이 도하에게까지는 들리지 않았으니, 도하는 우성을 살피다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그 후, 간간이 단유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는데 그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단유가 물었다. “왜?” “아니 그게….” 도하는 우성에게서 느껴지는 미묘한 독기(毒氣)를 경고하려 했다. 하지만 단유가 먼저 도하의 말을 자르며 대답했다. “신경 쓰지 마.” “뭐?” “말했잖아. 신경 쓰지 말라고.” 도하는 단유의 말을 곱씹다가 그것이 지난번 우성을 위협할 때 했던 말임을 기억했다. 경쾌하게 고개를 끄덕인 도하는 휘슬이 불리며 시작된 경기를 관람하기 시작했다. ======================================= [352] 너는 어디에 있었어?(2) 명수는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한 뒤, 경기장을 넓게 보려고 고개를 좌우로 한 번 돌렸다. 푸른 잔디밭에서 올라오는 습한 기운을 느끼니, 새벽 공원을 뛰어다닐 때가 떠올랐다. 부상을 당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뛰어다녔던 그 공원에서 명수는 새벽이슬에 젖은 풀잎들이 내는 향을 즐겼다. 최근 벌어지는 경기 때문에 운동장 관리를 맡은 이들이 매일 아침 물을 뿌리며 관리를 한 덕임을 모르는 명수는 그저 공원을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가 좋았고, 그래서 오늘의 경기도 즐겁게 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삐이익.” 휘슬과 함께 명수는 발아래 놓인 공을 옆으로 밀어준 뒤, 곧장 상대 진영으로 뛰어들어갔다. 상대 팀 역시 명수의 진입에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이번 춘계대회에서 제일 주목을 받는 명수가 시합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쾌활한 표정을 지으며 뛰어들어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곧 한 소년이 달려와 명수의 곁을 마크하기 시작했다. 소년은 시합 전에 임무를 하나 맡았다. “명수를 밀착 마크해.” 경계 대상 1호인 인명수를 제대로 마크하지 않으면, 이번 시합 질 수 있다며 엄포를 놓는 감독의 눈을 바라보며 소년은 외쳤다. “자신 있습니다.” 신장이 비슷하다고 했다. 상대의 100m 달리기 속도는 알려진 바가 없어 비교할 수 없지만, 자신이라면 충분히 명수보다 빨리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슷한 몸에 명수보다 빠르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으리라, 소년은 자신했다. “제길.” 명수가 멈칫했다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몸을 돌리며 언제 날아들었는지 모를 공을 왼발로 받아내고 있었다. 소년이 무리해서라도 명수를 막으려고 어깨 싸움을 걸었지만 도리어 소년이 튕겨 나가고 말았다. ‘무슨 힘이!’ 다행이라면, 수비수가 소년 혼자는 아니라는 점이랄까. 공이 찔러 들어 오는 순간 왼쪽을 수비하던 선수가 협력 수비를 위해 달려들었고, 소년이 젖혀진 순간에 맞춰 명수의 진로를 막아 세웠다는 점이었다. 소년은 혹시 하는 마음으로 발을 뻗었고, 다행히 공이 먼저 발에 닿으면서 명수에게 넘어갔던 공격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다행이네요.” 코치의 한숨 소리를 뒤로하고, 그에 반응할 새도 없이 감독은 목청을 높여 지시를 내렸다. 조금 다혈질인 감독은 묵묵히 서 있는 명수네 학교 감독과 다르게,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면서 아이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패스해! 패스! 오른쪽 비었잖아! 장태동! 태동아!” 경기 초반부터 저러다 나중에 목소리가 안 나오는 게 아닐까, 설핏 걱정이 들었던 명수네 팀 감독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오늘 명수 컨디션 좋아 보이지?” 그에 코치가 코웃음을 쳤다. “언제 안 좋은 날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감독은 공을 뺏겼음에도 여전히 웃는 얼굴의 명수를 확인한 뒤, 공의 행방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과연 결승에 올라온 팀이라 그런지 공격력이 여간 날카로운 게 아니었다. 날카로운 창들이 사방을 찔러대며 위협하는 꼴이라 자칫 방심하면 여지없이 골을 먹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저쪽이 창이라면, 이쪽은 총, 아니 대포지.’ 평소 축구부를 관리하며 오랫동안 아이들을 관찰해온 감독도 이번 시합에서 명수가 보인 활약에는 조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연습 때는 마냥 해맑게 웃으면서 별다른 투기를 보이지 않았던 명수였기에 이 정도로 폭발적인 득점력을 보일 것으로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지금도 웃는 얼굴로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명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결승전이 아니라 동네 친구들이랑 공 차며 노는 꼴로 착각할 정도다. “야, 준호야! 붙어! 붙어야지!” 상대팀 감독의 목소리를 걱정하기 전에 우리 팀 코치의 목소리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소리 안 질러도 돼. 놔둬도 괜찮아.” 감독이 코치에게 한마디 할 때쯤, 수비에 성공한 장계 축구부가 공을 빼앗아 반대편으로 넘기면서 숨을 돌리고 있었다. “충분히 강한 팀이야, 우리 애들은.” 감독은 두 다릴 곧게 펴서 땅 위에 박고, 팔짱을 낀 채 묵묵히 경기를 지켜보았다. 마치 광화문 광장에 우뚝 선 동상의 영웅처럼. **** 짙은 적갈색의 문 앞에서 지연은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몇 번의 심호흡 후, 지연은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들어갔더니 근엄한 표정의 이사장이 금테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지연을 반겼다. “안녕하세요, 이사장님.” “네, 우선 여기 앉아요.” 문 앞에서 발을 떼지 못하는 지연에게 착석을 권한 이사장은 상석에 자리한 뒤 지연의 위아래를 가볍게 훑어내렸다. “식사는 하셨어요?” “아니요, 아직.” “아, 그래요? 그래도 차 한 잔 정도는 괜찮으시죠?” 몸을 기울여 테이블 위에 있던―미리 준비돼 있었음이 분명한―다관의 손잡이를 잡고 지연 앞에 놓인 하얀 잔에 차를 따랐다. 쪼르르 소리를 내며 잔을 채우는 차에서 따뜻한 향이 피어올랐다. “한영이한테 이야기 들었어요. 덕분에 상처가 낫는 속도가 빠르다고 하더군요.” 이사장이 입을 열자 향이 싹 사라지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병문안 몇 번 간 거로 나을 부상이었으면, 병원이 왜 필요할까? “한영이가 김 선생님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요. “사실 부모 된 처지에서 이러는 게 좋지 않다고 생각도 하지만 말이에요. 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나 있는 아들이 그렇게 좋아한다는 사람이 누군가 궁금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리 불렀지만, 너무 긴장하지 말았으면 해요.” 하지만 인사를 한 이후 지연은 쉽사리 입을 떼지 않고, 줄곧 긴장된 시선으로 이사장의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을뿐더러, 말은 공손하게 하는 척하지만 마치 며느리 심사하는 시아버지 흉내를 내는 꼴이라 불편했다. 그런데도 직장에서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이라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지금 지연이 겪고 있는 어려움의 정체였다. 그런 힘겨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알면서 모른 척하는 것인지 이사장은 자기 잔에 채운 차의 향을 맡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팔불출 같지만, 우리 아들 말이에요, 꽤 괜찮은 녀석이랍니다. 어릴 때부터 고집이 조금 있는데, 목표로 한 건 꼭 해내고 말더라 이 말입니다. 책을 한 번 붙잡으면 다 읽기 전까지는 옆에서 뜯어말려도 놓질 않아요. 또 어릴 땐 용돈을 모아서 자기가 사고 싶은 걸 사서 자랑하기도 하더라고요. 지금도 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으고 있어요. 제 아들이지만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녀석이죠.” 목표가 여자라면, 그 여자를 자빠뜨릴 때까지 쫓아다니고, 목표를 이루면 초개와도 같이 다루며 등을 돌린다는 이야기는 왜 하지 않는가? 사치는 부리지 않지만 도박을 좋아해서 날린 돈만 모아도 집 두 채는 샀을 거란 이야기는 왜 하지 않는가? 책을 그렇게 좋아하는 녀석이 대학교는 외국의 이름 모를 곳을 나와선, 아버지 밑에서 한자리 해 먹고 있다는 건 왜 이야기하지 않는가? ‘눈 가리고 아웅’이라더니, 정말 이사장의 얼굴을 가리고 아웅하고 싶다. 지연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잔 속에 들어갈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축였다. ‘정말 모르나? 이사장 아들의 대한 소문은 이미 교무실 여자 선생님들 사이에 파다한데?’ 슬쩍 고개를 들었더니, 마침 차 한 모금을 마시고 지연을 바라보는 이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지연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아버지나 아들이나, 함께 있으면 왜 이렇게 시간이 가질 않는 것인지. “이렇게 보니, 김지연 선생님, 참 조신하고 정숙하시네.” “…과찬이십니다.” “아니에요, 아니야. 정말 우리 아들이 이야기할 때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렇게 보니 탐이 나요, 탐이 나.” 탐내지 마세요. 그냥 지나가는 돌 보듯 해 주세요. 제발. “그래, 양친은 모두 잘 계시죠?” 진짜 머리를 뜯고 싶은 지연이었다. **** 전반전이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자 운동장의 양쪽 스탠드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시합은 팽팽하게 전개되어 0:0이었지만, 어린 선수들의 투지와 학교의 명예가 걸렸다는 명분이 묘한 경쟁심을 부추겼다. “저쪽도 꽤 하네?” “우리 학교가 공격은 좋은데, 마무리가 안 되네.” “아까 우리 팀 애가 공 잡았을 때, 상대 팀에서 3명이 붙는 거 봤잖아? 3명이면 프로도 하기 힘들어.” “명수였나? 걔가 빠르긴 빠르더라. 아까 공 나가는 줄 알았는데, 끝까지 쫓는 거 봐봐.” “진짜, 그걸 살려야 했는데, 그랬으면 진짜 한 골 넣을 수 있었는데.” 전반전이 끝났음에도 열기는 쉽게 가라앉기는커녕 더욱 불타올라서 몇몇은 화장실을 가는 것도 잊고 열띤 응원전에 동참하여 소리를 질러댔다. 상대 응원석 쪽의 목소리보다 더 크게 소리를 질러야 한다면서 목에 핏대가 서도록 고함을 지르는 아이들이었다. “화장실 안 가냐?” 도하의 물음에 단유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도하는 단유의 대답을 들은 뒤, 고개를 운동장으로 돌린 채 가만히 있었다. “가고 싶으면 갔다 와.” “안 가도 돼.” “그럼 왜 물었어?” “그냥 물어봤어.” 단유는 못 말리겠다는 눈으로 도하를 한 번 본 뒤,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10분간의 휴식 시간을 이용하여 벤치 선수들이 운동장으로 나와 몸을 풀고 있었다. “진짜 열심이네.” 도하의 중얼거림에 단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애들도 후반전을 대비해야 하니까.” 도하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단유에게 물음을 던졌다. “저 애들이 후반전에 나올 수 있을까?” 단유는 도하의 물음이 심상치 않다 여겨 도하를 바라보았으나, 도하의 시선은 여전히 아이들이 몸을 푸는 광경에 머물러 있었다. “나올 수도 있지.” “못 나올 거야. 이전에도 못 나왔고, 앞으로도 못 나올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실력이 안 되니까, 못 나온 거지.” 단유는 도하의 지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했다. “작전 때문에 못 나온 것일 수도 있어. 축구는 전 후반으로 나뉘는 경기이고 체력을 많이 소진해야 하는 스포츠니까. 전반에 뛸 선수와 후반에 뛸 선수를 구분해서 전략적 이익을 취해야 하는 게임이야.” “교체 선수가 3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건, 결국 저 중 대부분 선수는 나오지 못한다는 말이잖아.” 단유는 입을 다물었다. 도하도 잠시 말을 멈췄다가 한참 후에야 말을 다시 이었다. “왜 저렇게 열심히 할까?” 도하는 저 아이들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혹시 자신을 투영해서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보는 세상을 투영시켜 보고 있는 것일까? 단유도 도하의 시선이 머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꿈, 때문이 아닐까?” “꿈?” “비록 지금은 후보 선수일 뿐이지만, 앞으로도 후보 선수로 계속 지내란 법은 없잖아. 언젠가는, 저렇게 자투리 시간도 노력하다 보면 주전 선수로 올라갈 수 있고, 프로 선수로 진출할지도 모르고, 국가 대표가 될 수도 있잖아.” “진짜 그렇게 생각해?” 단유가 돌아보니 도하가 호기심이 깃든 눈으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단유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본인의 꿈도 정하지 못한 마당이었다. 그저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며 필사적으로 하루하루를 살 뿐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전교 1등이나 하면서, 선생님께 칭찬만 받고 사는, 남부러울 것 없는 학창 생활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일 테지만 정작 단유로서는 남들에게 말하지 못한 어려움을 안고 사는 편이었으니. 많은 사람을 떠나보냈고 남겨진 사람도 몇 없어 정붙일 곳 없이, 외줄 타기 하듯 위태로움 속에서 한 걸음씩 내딛는 중이었다. 초월적인 힘을 가졌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띌까 두려워서 함부로 힘을 쓰지도 못하고,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자신의 비밀을 눈치챌까 봐 전전긍긍하는 중이었다. 노력, 최선은 단유의 일상이었지만, 그래서 미래가 보이냐고 묻는다면, 단유는 아니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상상도 못 했던 미래를 맞이한 지금이 그렇듯이, 지금 이 시점에서 생각하는 미래가 실제로 다가올지도 확신할 수 없는 단유였다. 더구나 어린 시절에는 보지 못했던 현실의 명암을 보고 체험하는 요즘은 더욱 어떤 미래가 찾아올지 알 수 없었다. 때문에 도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이기면, 폭죽 같은 것도 터지려나?” 도하의 말에 단유가 뜬금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보통 경기 승리하면 운동장 뒤편 저쯤에서 폭죽이 팍! 하고 터지면서 막 종이꽃들이 날리고 그러잖아? 그런 거 하는지 궁금해서.” 단유는 피식 웃었다. “안 할걸.” “재미없네. 상금도 없고, 축포도 없고, 꽃다발은 있으려나?” 아마 학부모들이 준비하지 않았을까? 도하는 그 이후로도 트로피는 누가 가지나, 상장은 다 같이 받는 걸까, 저 공도 기념품이 되는가, 라는 엉뚱한 질문을 해댔다. 단유는 모처럼 마음이 동해, 도하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해주었다. 트로피와 상장은 학교에, 학교장 이름으로 따로 상장을 제작하여 축구부 전원에게 하달하고, 상금 대신 내신 점수에 도움이 될 기록이 학생 기록부에 기록될 것이며, 저 공은 다시 다른 공들과 섞여서 다른 대회에 이용될 것이다. “고작 중등부 대회니까.” 고작 중등부였고, 고작 중학생이니까. 중학생은 아직 어리니까. 그러니까 ‘꿈’을 꾸며 미래를 좇는 정도는 격려하며 봐줘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며 단유는 몸을 다 풀고 다시 벤치로 향하는 선수들을 응원한다는 의미로 손뼉을 쳐 주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몰라도, 지금 최선을 다하는 저 모습은 비웃으면 안 되는 거잖아?” 도하는 단유의 눈치를 보다 말했다. “나 화장실 갔다 올게.” 단유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353] 너는 어디에 있었어?(3) 문을 닫고 나선 직후, 지연은 쉽사리 걸음을 떼지 못했다. 가는 이사장의 눈매가 지한영을 떠올리게 했었다. ‘독사 같은 인간들.’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갑질이나 하는 인간들. 겉으로는 교양있는 척, 정중한 척을 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더러운 욕망들이 지연을 소름 돋게 하였다. 문제는. ‘힘없는 내가 참아야지.’ 마음 같아서는 ‘내가 이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아!’ 라고 소리치면서 사직서를 이사장의 얼굴에 내던지거나, ‘어디 그 더러운 눈으로 쳐다봐! 이 색골!’ 이라고 외치며 한영의 뺨을 때리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엉덩이에 종기가 나도록 도서관에 앉아 시험공부를 했고, 두 번 만에 임용고시에 합격한 후, 1년의 기다림 끝에 어렵게 학교에 들어왔다. 들어오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으니…. 그런데 이런 직장을 고작, 남자 때문에 때려치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남들은 못 들어와서 안달인 직장인데, 그 고생을 하고 들어온 직장인데 그렇게 쉽게 나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고작 이런 이유로 나간다는 것은 어쩐지 저들에게 굴복하는 모양새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좀 더 현명한 방법으로 이 문제를 돌파해야 한다. 현명하게, 어른스럽게. “참자.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데.” 한영의 집적거림과 이사장의 팔불출쯤이야, 어른스럽게 참으면 그만 아닌가? 문득, 학교 첫 출근 하기 전 어머니가 해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좋은 남자 시집만 보내면 되겠네.” 그 말씀이 있기 전에는 온갖 신세 한탄이 있었고, “난 니가 취직도 못 할 줄 알았다.” “어릴 때 하도 말썽을 많이 피우길래 뭐가 되려고 저러나 했다.” “너 공부시키느라고 등골이 부서질 뻔했어, 이것아.” 말씀 후에는 치열한 언쟁이 벌어졌지만, “내 나이가 몇 살인데 벌써 결혼 얘기를 해?” “으이구, 니가 제대로 된 남자를 데려올런가 걱정이라 그런다. 직장이라도 잘 구했으니 이런 걱정이라도 하는 거지.” “엄마는 딸내미한테 그러고 싶어?” “후딱 치워버리고 싶네. 어휴, 아주 징글징글해.” 그런 기억들은 사라지고 ‘시집 가’란 말씀만 남았다. ‘빨리 남자 만나서 가는 게 정답일지도.’ 어디 좋은 남자 없으려나? 좋은 남자 있으면 뭘 하나, 만날 시간이 없는데. 상념에 빠져 있던 지연은 교무실로 올라가려다 아직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일단 교무실에서 지갑을 챙긴 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큰 길가에까지 나가서 맛있는 식당을 찾아 들어가야겠다. 가서 맛있고 양 많은 음식을 배가 터지게 먹어서 스트레스라도 풀어야겠다, 고 마음을 먹었다. ‘아, 혼자 먹어야 하잖아.’ 지연은 학교 앞 분식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떨궜다. **** 후반전이 시작되고 다시 아이들은 큰 소리로 ‘장계중’을 외치면서 응원전을 펼쳤다. 경기장에서 펼쳐지는 치열한 몸싸움에 환호를 보냈고, 공을 뺏어가면 야유를 보냈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경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경기에 집중하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어디 갔지?’ 분명 아침에는 가지고 있었다. 집을 나설 때도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 손으로 꼭 쥔 채로 등교했다. ‘그것만 있으면, 랭킹 1위도 껌인데.’ 병호는 연신 주머니를 뒤지고, 가방을 헤집었지만, 그 조그만 USB는 행방이 묘연했다. 병호가 찾는 USB는 며칠 전, 중국 해커 그룹이 만든 해킹 프로그램이었는데 정체된 캐릭터의 레벨업을 위해 어렵게 구한 것이었다. 병호는 최근 들어 살맛 나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이제는 1학년 때처럼 ‘친구’들의 우정을 구걸할 필요가 없었다. 아이들은 매일매일 업데이트되는 병호의 아이템 목록들을 보며 질투와 시기 섞인 환호를 보냈고, 병호는 하나씩 선물을 하사하면서 칭송받는 스타의 삶을 누리고 있었다. 물론 이를 위해 매일 무리하다시피 게임을 즐겨야 했지만, 결코 본인은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컵라면을 대접받으면서 친구들의 레벨업을 도울 때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른다. 그래서 잘 따라오지 못해 버벅거려도 웃으면서 가르쳐줬고 친구들이 호의에 고마워할 때, 속으로 득의양양해 했었다. 물론 그걸로 만족할 생각은 아니었다. 남들은 아이템을 팔아서 돈을 벌기도 한다는데, 병호라고 그 생각을 못 했을 리 없었다. 실제로도 아이템 거래 사이트에 아이템을 팔았다. 최초의 거래는 10만 원이라는 목돈에 거래되었고, 이후로도 거래를 계속해서 불과 몇 주 사이에 30만 원이라는 거금을 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 병호의 캐릭터는 정체기에 다다랐다. 좋은 아이템으로 돈을 벌고, 남는 아이템을 적선하여 아이들의 환심을 살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마당에 쉽게 포기할 순 없는 일.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캐던 중, 우연히 중국 해커 그룹에서 만들었다는 해킹 프로그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병호는 그동안 모은 거금을 들여 그 프로그램을 구매할 수 있었다. 크기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작은 USB였지만, 그 안에 든 가치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 마침 오늘은 단축 수업이 진행될 게 뻔했고, 그렇다면 일찍 끝난 이후 바로 피시방으로 출동할 수 있었다. ‘전장에 나가는데 무기는 필수지.’ 라는 생각으로 가지고 왔던 USB가 지금 병호의 손에 없었다. ‘아침에 학교에서 급히 나오는 바람에 떨어뜨렸나?’ 병호는 손톱을 깨물며 생각했다. 차라리 학교 교실에 떨어뜨렸길 바랐다. 길거리에서 떨어뜨렸다?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다. ‘가서 찾아야 돼.’ 병호는 빨리 경기가 끝나길 기다렸다. ‘아냐, 아프다고 하고 조퇴할까?’ 병호는 고개를 돌려 뒷자리에 앉은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한참 경기에 빠져 있었다. 아이들처럼 소리를 지르진 않았지만, 꽉 쥔 주먹이 들썩거리는 게 경기에 집중해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 만약 가서 아프다고 한다면? 하지만 전반전 내내 소리를 질러대며 열성적으로 응원하던 병호에게 적당히 하라며 어깨까지 두들겨주시던 선생님이었다. 그러니 아프다는 변명은 통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이 문제를 현명하게 풀어야 했다. 어떤 방법으로 해결해야 할까? 병호의 시선은 경기장에 있지만, 머릿속에는 온갖 시나리오가 만들어지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 경기는 팽팽하게 진행되었다. 명수가 아무리 날고뛴다 해도 혼자서 축구를 할 수는 없는 법. 상대 팀에서 두 사람 이상이 달려들어 집중 마크를 하니 애초에 패스 자체가 어려웠다. “명수가 완전히 막혔는데요?” 코치의 중얼거림을 들은 감독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타개책을 생각해 보려 했다. 만약 프로축구선수, 아니 고등부 정도만 되어도 다양한 전술을 훈련하고 그 전술을 즉시 적용하여 경기에 반영할 수 있겠지만, 중등부에게는 무리가 있었다. 전술이 어려우니 결국 개개인의 실력에 맡겨야 하는데, 명수를 제외하고는 기량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으니 탈출구가 마땅히 보이지 않았다. 반면 상대팀 역시 상황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상대팀이라고 월등한 기량을 뽐내는 것도 아니었고, 명수를 막기 위해 무리를 하다 보니 공격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골이 안 나오네.” “11번(명수)한테 공이 못 가게 막고 있는 거 봐라. 쟤들은 센터 라인을 넘을 생각 자체가 없어 보이잖아?” “그럼 나중에 승부차기 가려고 그러나?” “그럴지도 모르지.” 비록 골이 나오진 않지만, 그래서인지 공 하나를 두고 두 팀이 벌이는 격렬한 몸싸움과 신경전에 양 팀의 학생들 모두가 목이 터져라 응원을 했다. 상대팀 감독은 후반전에도 전과 같이 목청을 높여 지시를 내렸다. “경균아! 공 가잖아! 막아! 지원아! 지원아! 센터로! 센터!” 하지만 그 역시 머릿속이 복잡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대로는 안 돼.’ 지금까지도 명수를 잘 마크하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이대로라면 실점하지 않고 갈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아이들의 체력이었다. 명수가 두 사람 사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공간을 오가며 뛰어다니는 터라 평소보다 더 빨리 체력이 떨어지고 있음을 짐작할 순 있었다. 하지만 명수보다 더 많은 체력을 소진하고 있는 게 수비수들이었다. 물론 방법은 있다. 아직 교체 카드를 사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인데, 한 장은 공격용을 위해 남겨두더라도 두 장의 카드는 곧 소진 시킬 타이밍이 올 거 같았다. 문제는 타이밍. 교체된 수비수가 빨리 적응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명수는 금방 우리를 탈출한 야수처럼 거칠게 수비수를 제치고 페널티 라인 안쪽으로 들어갈 것이다. 너무 빨리 교체해버리면 또 체력 문제가 야기된다. 제일 좋은 건 명수가 교체되는 일이지만, 자신이 상대 감독이라면 절대 명수를 빼지 않을 테니 그건 바라지도 않는다. ‘언제 써야 하지?’ 아이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와중에도 감독의 시선은 명수를 쫓았다. 양 팀 감독 모두의 시선을 받는 명수는 지금 죽을 맛이었다. 전반전에는 그래도 간간이 공을 받아내기라도 했는데, 후반전에는 이마에 붙은 젖은 휴지조각처럼 찰싹 달라붙는 수비수들 때문에 도저히 공을 받을 수 없었다. 공을 받지 못하고 뛰어다니기만 하니 신경질도 나고 짜증도 나고 그랬다. 공을 잡아 수비도 제치고, 전력 질주도 하고, 그러다가 힘을 끌어모아 강하게 차서 골도 넣고 그래야 재미있는데, 지금은 재미도 없을뿐더러 스트레스만 받는다. 이러다 한 골도 못 넣고 끝나면 정말 재미없는 경기가 되고 말 일이다. 그뿐인가? 만약 상대 팀이 한 골이라도 넣는다면, ‘그럼 내 탓이야. 내가 골을 못 넣어서 지는 거야.’ 명수의 붉어진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이 눈을 따갑게 만들었다. 다리를 멈추고 옷자락을 들어 얼굴에 흐르는 땀을 훔쳐냈다. 옆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리길래 시선을 돌렸더니, 자신을 따라다니던 선수들의 얼굴이 차라리 검게 보인다 싶을 정도로 붉어져서는 자기 못지않게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좀 따라오지.’ 분명 지쳤음이다. 보아하니 앞으로 10분? 아니 5분 이상은 못 뛸 것처럼 보였다. “명수야!” 그때 센터라인 너머 빈 공간으로 침투한 팀 동료에게서 패스가 왔다. 마침 땀을 닦느라 걸음을 멈췄던 명수 때문에 수비수들의 긴장이 약간 풀렸던 것일까? 명수의 스타트를 두 수비수가 따라가지 못했고, 결국 명수의 발이 먼저 공에 닿았다. ‘됐다!’ 명수가 고개를 돌려 방향을 확인하는 찰나, 어느 방향에서 뛰어왔는지 자신을 막던 선수가 아닌, 또 다른 아이가 사나운 얼굴을 하고 달려들었다. 명수도 오랜만에 잡은 공에 흥분하면서 잠시 집중력이 흩어졌는지도 모르겠다. 태클을 피하기 위해 공을 옆으로 굴렸는데, 미처 컨트롤을 완벽하게 하지 못해 공은 아쉽게도 옆줄을 벗어나고 말았다. 운동장 전체에 탄식과 야유와 함성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삐익!” 명수가 머릴 싸매고 무릎을 꿇었을 때 들린 호각소리에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다. 상대팀의 교체 선수가 팔짝팔짝 뛰면서 운동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팔팔한 얼굴로 투지를 불태우는 그 선수는 이내 명수에게로 다가왔다. 대신 금방이라도 운동장을 침대삼아 드러누울 것처럼 보이던, 체력이 간당간당하던 선수가 빠졌다. “덥네.” 봄인데도 유난히 더운 것 같았다. 명수는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명수, 많이 지친 거 같은데?” 도하의 목소리를 들으며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이 선을 벗어난 후, 실망감을 드러내며 무릎을 꿇던 모습과 이후 다시 일어서는 모습까지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는 단유도 명수가 체력고갈로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조기 축구회를 할 때도 이 정도로 집중 견제를 받은 적이 없었던 터라, 명수는 많이 당황하고 있었다. 아직 후반전이 끝난 건 아니지만 이 시간까지도 골이 나지 않은 채로 무기력하게 경기를 치렀던 적이 없었기에 명수는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게다가 오전에는 그저 따스한 정도라 생각했던 날씨가 오후가 되면서 더워지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가만히 앉아만 있는데도 이마에 땀이 송글 맺힐 정도로 더워졌다는 것 역시 명수를 힘들게 하는 요소였다. 그리고 그런 요소들이 한꺼번에 명수에게 부담감으로 작용했고, 명수는 어느 때보다 힘겹게 경기를 뛰고 있었다. 단유는 명수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이 자리에서 명수를 도울 방법이 있을까? 물을 뿌려주고 싶지만, 닿지도 않을 거리. 명수는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고 일어나는 중이었다. ‘명수야.’ 명수는 단순히 이 한 경기를 위해 뛰는 것이 아니었다. 중간 브레이크 타임 때 다른 후보 선수들이 그랬듯이, 명수도 미래를 위해 뛰는 중이었다. 너무 한길만 파느라, 다른 길―예를 들어 공부라든지―은 전혀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욱 집중했고 더욱 노력했음을 단유는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뛰어난 재능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 오랫동안 함께 했던 단유는 재능 이상의 노력과 땀이 배어든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던 운동과 연습들을 함께 지켜보지 않았던가. 부상으로 인해 지난 추계 대회 참석이 어려웠을 때, 티는 내지 않았지만 얼마나 힘들어했었던가. 유일한 가족, 이기에 단유는 명수를 돕고 싶었다. 문득 예전 생각이 났다. 그때도 유난히 더웠던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보육원 앞 조그만 운동장에서 골대를 향해 달리며 어설프게 공을 차던 명수와 이를 지켜보던 자신의 기억. 그때도 단유는 명수가 흘리는 땀을 보다가 그 땀을 식혀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당시 단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으로 명수의 더위를 식혀주었다. 그때는 가능했던 그 방법. ‘바람. 공기의 이동. 기압, 전향력, 마찰력, 지형, 온도….’ 갑자기 머릿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개념과 이미지와 숫자들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개념들은 순차적으로 정리되었고, 각각의 이미지들은 논리적으로 조합되었다. 다양한 수식들이 단순하게 또는 복잡하게 얽히고 구성되어 연산 되었다. ‘디아포(깨달음).’ 단유는 무의식적으로 예전의 배움을 떠올려 전개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컨슈메(재현).’ 바람이 불었다. ======================================= [354] 너는 어디에 있었어?(4) 명수는 허리를 짚으며 공간을 둘러보고 있었다. 사나운 눈매의 상대 팀 선수가 시퍼런 눈으로 명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후반 20분이 되어서야 들어온 선수는,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아직 경기장의 열기를 제대로 만끽하지 못했으니, 빠르게 적응하진 못하겠지? 이 순간만 지나면 곧 적응을 끝내고 다시 아까와 같은 협력 수비로 꼼짝 못 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니 지금뿐이야.’ 명수는 밭은 호흡을 내뱉으며 숨을 고르려 했다. 그때 주위로 바람이 불었다. 그렇게 센 바람은 아니었지만, 땀을 식히기엔 충분한, 시원한 바람이었다. ‘살 거 같다.’ 열이 올랐던 머리도 식는 것 같았다. 머리가 식으니 점점 시야가 넓어졌다. 넓어지기 전까지는 자신의 시야가 좁았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다가, 넓어지고 나니 깨달았다. 명수 옆으로 다가오는 선수 외에도, 언제라도 협력 수비에 가담하기 위해 준비 중인 선수들에게 둘러싸인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같은 편 선수들 중에서 레프트 윙을 맡은 선수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공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더 나아가 운동장에서 다른 아이들이 어떻게 움직임을 가져가려는지도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의 명수는 운동장을 넓게 보는 편이었다. 자기가 골을 넣는 것도 좋아하지만, 주변 친구들에게 어시스트를 해서 골을 만들어내는 것도 좋아했다. 명수는 보육원 때부터 같이 어울려 하는 축구를 좋아했다. 그런데 첫 대회, 첫 결승전이라는 압박감, 협력 수비에 막혀 제대로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무력감,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에 시야가 좁아졌던 것이었다. 명수가 공을 받을 위치를 잡고 몸을 가볍게 움직이던 찰나, 공을 던지기 위해 팔을 치켜든 선수 뒤쪽, 관중석에 앉아 있던 단유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도 이런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 유난히 더운 날씨에도 공차기에 열중하던 시절, 학교의 넓은 운동장을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공을 쫓던 시절, 누구보다 빨리 앞서나가 공을 잡고 골문을 향해 달리던 그때, 골문을 지키는 단유를 보며 꼭 한 골 넣겠다고 다짐을 할 때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혀주곤 했었다. 그러면 명수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공을 힘껏 걷어찼고, 공은 힘차게 날아가…단유의 손에 걸리곤 했었다. ‘그때, 축구 재밌게 했었지. 너랑.’ 명수의 눈빛을 읽은 것인지, 단유가 미소를 짓는 게 보였다. 그때 단유의 얼굴을 가리는 공이 눈에 들어왔다. 명수는 재빨리 몸을 틀고 발을 들어 올려 공을 받았다. “막아!” 이제는 옆에서 아이들이 질러대는 소리도 들렸다. 명수는 다가오는 상대 수비의 힘을 어깨로 버티며 공을 차고 나갔다. “막으라고!” 아마 저 목소리는 전반 내내 귀가 따갑도록 소리를 지르던 상대 팀 감독님의 목소리이리라. 후반 들어서 조용하나 싶었더니, 계속 저러고 있었나 보다. ‘목이 많이 쉬었나 봐요.’ 명수는 공을 인사이드로 잡아채며, 수비수 한 명을 제쳤다. 허벅지에 힘을 주고 가속을 하듯 앞으로 튀어나가며 상대 진영 깊숙이 들어갔다. 아웃 사이드로 공을 차서 바깥으로 빠지는 척을 하다, 다시 인사이드로 잡아채는 단순한 트릭에 또 한 명의 수비수가, 이번에는 자리에서 넘어질 정도로 균형을 잃었다. 그리하여 페널티 라인을 코앞에 두었을 때, 뒤쫓아 온 수비수들이 명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여기서 태클을 당하면, 페널티킥은 무리려나?’ 좀 더 안쪽으로 밀고 들어갈 시간은 부족해 보이니, 욕심은 내지 말아야지. 명수는 공을 반대편으로 패스했다. 그리고 즉시 위로 뛰어올라, 아래에서 밀고 들어오는 다리를 피했다. 공은 반대편에서 보조를 맞추어 달리던 선배의 발에 넘겨졌고, 선배는 냅다 공을 걷어찼다. 가죽 터지는 소리를 내며 날아간 공은 상대의 골문을 향해 날아갔고, 상대 골키퍼가 힘겹게 뛰어오르며 손을 뻗었다. “와!” 그러나 상대 골키퍼의 손을 지난 공은 골포스트마저 지나 뒤쪽으로 떨어졌다. 힘이 조금 과도하게 쏠린 탓에 골대를 아슬아슬하게 넘기고 만 것이었다. 상대 팀의 응원석에서 환호 소리가 터져 나왔고, 동시에 장계중학교 응원석에서는 아쉬움의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괜찮아.” 명수는 히죽 웃으며 선배를 향해 손뼉을 쳐주었다. 또 한 번 바람이 불어 명수의 이마를 적시던 땀을 식혀주자 원인을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일어난 명수는, 남은 시간 열심히 괴롭혀 주겠다고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악동 같은 미소에, 마크를 하려고 붙던 수비수는 등에 소름이 돋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 단유는 두근대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느라 애를 쓰는 중이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자신이 ‘마법’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운동장 전체에 바람이 불게 할 정도의 마법은 아니었지만, 명수 주위에 인위적인 바람이 불게 할 정도는 되었다. ‘돌아왔다!’ ‘돌아오다’라는 표현이 적당한지 모르겠지만, 단유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갑자기 마법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왜 그래?” “응?” 단유가 놀란 얼굴로 돌아보니 도하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 “아니, 갑자기 심하게 숨을 들이쉬길래 무슨 문제라도 있나 해서.” 그러고 보니 저도 모르게 헐떡이고 있던 단유였다. 살짝 현기증도 나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텅 비는 기분이랄까? “아냐, 아무것도.” 수상쩍게 바라보던 도하는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니 친구, 명수. 갑자기 컨디션을 찾은 모양이다. 움직임이 좋아졌어.” 도하의 말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두 수비수 사이에서 힘겹게 빠져나오려고 애를 쓰던 명수가, 체력이 좋은 선수로 교체된 마당에도 가볍게 제치고 나와 공간을 차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장계중의 공격에 활기가 솟아나고 있었다. 단 한 명의 선수라도 파괴력이 뛰어난 선수다 보니, 자연히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의 공격은 많이 아쉬웠지만, 남은 시간 동안 명수가 보여줄 활약이 더 기대되는 터라 응원석의 열기도 경기장 못지않게 타오르는 중이었다. “장계중! 장계중!” 단유는 일단 마법에 대한 고민은 시합 이후로 미루기로 했다. 우선은 명수가 트로피를 올리는 순간까지의 과정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집중해야 할 시간이었다. **** “김지연 선생님은요?” “아, 아까 밥 먹으러 간다고.” “아, 그랬지. 그런데 시간이 너무 늦는 거 아닌가요?” “이사장님 뵙느라고 그런가 봐요. 이사장님이 김 선생님 부르셨다고 하던데.” 이사장이 부른 이유? 교장이나 교감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 모르게 병문안을 권했다. 뭐 좋은 일이라고 그런 일을 떠벌리고 다니겠는가. 지연 역시 괜히 이야기해봐야 답도 없는 상황인 것을 알기에, 괜한 입방아에 오르기 싫어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꼭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비밀이 비밀로 남을까? 수상한 행적이 호기심을 낳고, 의심을 불러, 억측과 추측 사이를 오가다 마침내 비밀이 비밀이 아니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눈이 몇이고, 입이 몇이던가. 이 많은 눈과 입을 가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그건 순진해 빠진 것이리라. “지연 선생님, 이러다 진짜 이사장 댁으로 들어가는 거 아니에요?” 한 선생님이 자판기에서 뽑은 종이커피잔을 들다가 물었다. “그럴 수도 있지.” 선배교사는 등을 등받이에 기대며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는 법이니까’라는 늬앙스로 대답했다. 후배 교사는 커피를 살짝 입에 머금었다가 ‘혹시’하는 느낌으로 자신의 추측을 꺼냈다. “솔직히 행정실장 소문도 소문일 뿐이잖아요?” “선생님 말씀은, 행정실장의 행실이 나쁘지만 않다면 권세가의 며느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렇죠. 이사장님 산하 재단에 학교만 몇 개예요? 그 정도면 대기업 재벌 못지않은데.” 대기업 대리급에게 결혼을 해도 호사라 하는데, 준재벌급 집안에 시집을 간다면 호사 중의 호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래도 문제는 행정실장이야. 소문이 아니더라도, 학교에서 하는 것 좀 봐. 하는 것 없이 거들먹거리기나 하지. 행정실에서는 이미 ‘능력 없는 실장’이라고 욕하는 소리가 가득해.” ‘망나니’라는 말은 포장마차에서나 꺼낼 말이지, 교무실에서 대놓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선배교사는 순화시켜서 말했다. “그래요?” “그뿐인가?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선생님이라면 우리 이사장님 며느리 되고 싶어?” “…에이.” “그러니까. 이사장이 돈독이 올라서는 학교를 무슨 하청 공장쯤으로 아는 양반인데, 그런 사고방식 가진 양반이 집안에서 제대로 하겠냐고. 학교 선생들도 아랫사람 부리듯이 하는 양반인데, 며느리는 또 오죽하겠어?” “근데요, 우리 학교, 감사 뜨면 걸릴 거 많겠죠?” “안 떠. 내가 이 학교에서만 지금 10년째 있는데, 한 번도 감사에 안 걸리더라고.” “왜요?” “라인이 있어, 라인이.” 후배교사는 발끈했다. 아니, 발끈하는 시늉을 했다. “이래서 교육 개혁이 안 되는 거예요. 아래에서, 현장에서 우리가 아무리 쇠가 빠지게 노력하면 뭘 해요? 위에서는 건성건성 하면서 공문이나 잔뜩 내려보내기나 하고, 정작 자기 일들은 제대로 하지를 못하는데.” “새삼스럽기는. 이미 몇십 년 전부터 줄곧 그랬어. 나 봐. 그냥 포기했잖아? 그냥 이대로 무탈하게 정년까지 가는 게 내 꿈이야, 꿈.” ‘포기하면 편해.’라는 우스갯소리를 덧붙이는 선배교사였다. 한때 전교조 출신 교사들에 의해 교육 개혁에 대한 열망과 학교 비리 폭로가 줄을 잇기도 했었다. 새로운 교육, 참교육에 대한 선망과 동경이 현실화될 거라고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으니, 어느새 전교조는 지탄의 대상이라도 된 듯이 손가락질을 받고, 아이들에게 불온한 사상이나 가르치는 그릇된 선생들로 인식되면서 교무실 내에서도 터부시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교무실에서는 더는 ‘참교육’과 같은 캐치프레이즈가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마치 불온한 교육을 위한 선전물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며 교사들은 입을 다물어야 했고, 교사들은 그저 정해진 기간 착실하게 따박따박 월급을 모아 무사히 정년퇴직할 수 있기를 걱정하도록 만들었다. 아이들의 미래, 나라의 미래를 위한 교육적 토론 대신, 사학연금이 줄지 않을까 걱정하는 내용들로 주를 이루었고, 학과 수업을 위한 조언을 나누는 대신 학생 혹은 선생님들의 뒷담화를 주로 나누는데 시간을 쏟았다. “아이고, 난 모르겠네. 아, 선생님은 시험 문제 다 만드셨어요?” “시험 문제가 다 뭐야. 이거 안 보여?” 교육청에서 내려온 공문 처리하기 바쁜 선생님의 하소연에 후배 교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전 교육부 지침 일지 작성하는데요.” “아, 그것도 있구나.” 이렇게 잡담하며 놀 시간이 없다. 단축 수업이 되면서 시간이 난 김에 처리해야지, 안 그러면 계속 미뤄질 게 뻔했다. “일이나 하자고요.” “예, 선생님.” 마침 커피도 다 마셨고, 뒷담화도 마쳤으니 다시 현실의 업무로 돌아올 때였다. “다녀왔습니다.” 뒤늦게 지연이 교무실로 올라왔다. “어머, 선생님. 왜 그렇게 땀을 흘려?” “아, 밖이 좀 덥더라고요. 갑자기 날이 더워졌네요.” “하긴, 우리 밥 먹고 들어올 때도 덥긴 하더라.” 그래도 저렇게 땀을 흘릴 정도로 더운가, 라고 생각하며 선생님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과 따가울 정도로 밝은 햇살을 보면 더울 것 같기도 했다. “천천히 먹고 와도 되는데, 뛰어온 거야?” “네? 아, 네.” 천천히 오면, 천천히 온다고 흉볼게 뻔해서 뛰어왔습니다, 라는 말은 속으로만 하면서 대신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요, 알았어요. 일 보세요.” “네, 선생님.” 지연은 선배 교사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자리로 찾아갔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손수건으로 목을 닦으니, 금세 흥건해지는 것이 정말 땀을 많이 흘리고 있긴 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시간은 세 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경기 끝날 때가 됐으려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더운 날 뛰어다니려면 고생이 많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던 지연은 상념을 털어버리고 앞에 놓인 펜을 들었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니지.’ 땀이 천천히 식는 동안, 지연의 집중력도 더해져 갔다. ======================================= [355] 너는 어디에 있었어?(5) “내가 부를게.” “니가?” “내가 부르는 게 어색하지 않을 거야. 너는 먼저 가서 애들 준비시켜 놓고.” 우성은 자리에 거의 눕다시피 등받이에 기대어,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자세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주변의 아이들은 한참 경기에 빠져들어 있었지만, 진태와 우성만 그 분위기에 젖어 들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축구 룰을 잘 모르기도 했고. “알았어.” “만약에 안 나온 애들 있으면 꼭 기억해놔라. 나중에 손 볼 애들이니까.” “알았다.” 룰은 모르지만 끝날 시간이 다 되어간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전광판 시계도 그렇고, 관중들의 분위기도 그랬다. 다만 경기 막판으로 갈수록 열이 식기는커녕 더 불타오른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었다. “여기서 이긴다고 밥이 나와, 돈이 나와?” 우성은 세상 누구보다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경기장 위의 선수들이 개미 같다고 생각했다. 부지런히 먹이를 나르는 개미처럼, 공 하나를 두고 열심히 뛰어다니는 꼴이 우스웠다. 발 한 번 구르면 잔디밭에 납작하게 짓눌려버릴 것처럼 보이는 애들이 개처럼 혀를 빼물고 뛰어다니는 꼴이 우스웠다. **** 병호는 게임만큼이나 축구를 좋아했다. 국가 대표뿐만 아니라 해외축구도 간간이 찾아보면서 경기를 즐기는 소년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우승이라는 타이틀이 걸린 시합에서 팽팽하게 진행되는 경기를 보면, 세상이 무너져도 이 경기는 꼭 봐야 한다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것이 월드컵이든, 챔피언스 리그든, 아니면 중등부 결승이든. 그러나 지금은 전혀 경기를 즐기지 못했다. 후반전 시작 후 약 30분이 흐른 지금, 병호는 확신할 수 있었다. ‘USB가 진짜 없구나.’ 일찌감치 잃어버렸음은 알았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자신이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곳에 USB를 숨겨둔 탓에 찾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기대감으로 구석구석을 찾았다. 옆에서 뭐하냐고 물어도, 개의치 않고 가방을 탈탈 털어서 수납 주머니와 필통과 지갑 사이와 책, 노트 사이를 뒤졌지만, USB는 나오지 않았다. 너저분하게 떨어진 것들을 주우며, 자기도 모르게 다른 곳으로 굴러간 것은 아닐까 생각되어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나오지 않았다. 주변 아이들의 발을 들어 올려 신발 밑까지 찾아보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나오지 않았다. 오늘 얼마나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아침부터 USB를 만지작거리면서 그 해킹 프로그램으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상상하며 등교를 했었는데. 그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 생각하니, 상실감이 보통 큰 것이 아니었다. “와아!” 경기장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커다란 함성과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에이, 씨발!” 병호는 그 함성 속에 욕을 섞어 질렀다.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될 리 없지만. 함성이 터져 나온 그때, 또 한 번의 기회를 놓친 장계중 축구부의 에이스, 명수는 몸을 돌려 센터라인 쪽으로 이동했다. ‘아직 시간은 남았어.’ 끝나려면 10분 이상이 남았고, 만약 추가 시간까지 포함한다면 20분도 더 남은 시간이었다. ‘조급해하지 말자.’ 그때 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열을 식혀 주었다. 명수는 기분이 좋았다. 전반까지 너무 꽉 틀어막혀서 답답했는데, 이제는 단순히 돌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움직여 동료들에게 공간을 열어주는 역할도 수행 중이었다. 원래 축구는 다 같이 하는 스포츠였다. 자신이 축구를 좋아했던 것도 다 같이 놀 수 있어서 좋아했던 것 아닌가. 어릴 때도 혼자 드리블해서 공을 넣는 것보다 주고받으면서 상대를 압박하는 플레이를 더 좋아했다. 경기가 안 풀리다 보니, 골을 넣어야 한다는 욕심이 앞서다 보니 전반전 내내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래서 더 힘들고 지치고 재미가 없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방금 전도 자신에게 수비가 밀집된 탓에 선배에게 공을 밀어주었고, 또 한 번 선배의 슛이 상대 골키퍼의 선방으로 막혔지만, 이제는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이기는 게 재미있지.’ 결정적인 기회를 모두 선배에게 밀어주었다. 이제까지 3차례. 여전히 수비수들은 명수를 경계하겠지만, 또다시 기회가 온다면, 그래서 다시 수비수들이 밀집하더라도, 반대편에서 기회를 노리는 선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 느슨해진 틈을 노리는 것이 명수의 전략이었다. 그 생각을 응원한다는 듯, 또 한 번 바람이 불었다. ‘그래, 고맙다.’ 몸은 적당히 불타오르고, 머리를 죄던 열기는 바람에 식으니 어느 때보다 몸이 가볍고, 뜻한 대로 움직인다. ‘바람아, 다른 사람한테는 불지 말고, 나한테만, 우리 팀한테만 불어라.’ 얼토당토않은 소원까지 가슴에 담으며 명수는 눈을 빛냈다. 물론 명수는 모를 것이다. 그 얼토당토않은 소원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 “명수 분위기가 묘한데?” “명수가요?” 감독이 명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후반전에 갑자기 체력이 살아나고 있어.” 떨어져야 할 체력이 살아난다? 무슨 자가 충전 배터리도 아니고, 전후반 합쳐 거의 한 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달리는, 이제 겨우 15살인 아이가 어떻게 저렇게 힘을 낼 수 있을까? 평소 감독이 명수에게 하던 말, ‘넌 투쟁심이 부족해’ 란 말이 오늘만큼은 전혀 맞지 않았다. 오늘의 명수는 투쟁심을 넘어선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순재를 뒤로 뺄까요?” 명수의 컨디션이 좋다면, 명수에게 공이 잘 전달 되도록 미들 쪽을 강화하는 것도 한 방법이리라. “아니. 이대로 가는 게 좋겠어. 명수도 그걸 노리는 것 같고.” 감독이 보기에 명수는 축구 센스가 남다른 아이였다. 어릴 때부터 유소년 클럽을 다니며 전략 전술을 배운 것도 아닌데, 경기장 위에서 포지션이 잡혔을 때 역할 수행을 잘하는 선수였다. 게다가 시야가 넓어서 어떤 전술에도 잘 대응했다. 지금은 전반보다 더 심한 압박과 견제를 받는 데도, 자연스럽게 순재에게 패스를 해서 골 찬스를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그랬다. 그 순간, 센터 라인에서 다시 공을 차단하는 장계중 축구부였다. 명수가 살아나니 더 수비 쪽에 치중하게 된 상대 팀은 공격이 부실했고, 그 때문에 장계중학교의 스틸이 많아지던 참이라 그리 놀라운 현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공격 차단에서 이어지는 장계중의 공격은 이전과 달랐다. 3학년 순재는 패스를 받았다. 명수가 집중 마크를 받는 터라 자주 패스를 받았다. 상대가 자신을 무시한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것도 기회인지라 순재는 다른 생각은 접어두고 상대 진영을 향해 드리블을 해 나갔다. 명수에게 몰려든 수비 외의 또 다른 선수가 달려들었다. 앞과 옆에서 달려와 막으려 드니, 두 수비수를 제치고 앞으로 가던가, 아니면 다시 뒤로 공을 돌려서 기회를 봐야 할 것 같았다. 명수 쪽으로는 너무 많은 견제가 들어가 있어 패스를 하기가, “응?” 명수 쪽을 슬쩍 바라보았다가 우연히 눈이 맞았다. 그리고 그 순간에 순재는 명수가 간절히 바라는 한 단어를 발견했다. ‘패스!’ 해도 될까, 를 염려하기 전에 먼저 발이 나갔다. 엉뚱하게도 공을 두 수비수 사이를 뚫느라 명수에게서 조금 떨어진 공간으로 흘러갔다. 이대로 두면 명수를 막던 수비수가 몸을 돌려 그 공을 잡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명수가 움직였다. 공이 없는 상황에서도 선수들은 페인트를 쓴다. 특히 명수의 경우와 같이 집중 견제를 받을 때, 특정 방향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공보다 공격수의 움직임을 제한하려 할 때, 공격수는 이를 뚫기 위해 다양한 페인트를 쓴다. 명수는 공이 패스가 되기 전에 이미 페인트를 걸었다. 뒤로 물러나서 순재의 패스를 받을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 몇 십분 동안이나 명수와 붙어 다니며 몸의 움직임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수비수들은 명수의 생각을 읽고 방향을 막으려고 움직였다. 그런데 명수가 지금까지의 모든 움직임이 거짓이었다는 듯, 이제까지 움직였던 것 중 가장 빠른 몸놀림으로 방향을 틀었다. 허리를 숙이고, 굽혀진 다리에 힘이 들어가나 싶더니, 바닥을 강하게 박차고 튀어나가며 수비수 사이를 뚫었다. 어, 하는 사이에 명수는 옆 공간으로 탈출했고, 왜 저리 차나 싶던 공이 명수의 발에 걸렸다. “막아!” 뒤늦게 상대 팀 감독과 지켜보던 선수들의 입에서 비명같은 지시가 터져 나왔다. 명수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절묘한 볼 컨트롤로 공의 방향을 바꿔 드리블을 해 나갔다. 골대까지 직선으로 이어지는 루트. 사람들은 순재의 패스 실수를 명수가 살렸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이건 약속된 플레이였다. 빈 공간에 먼저 공을 밀어 넣고 그 뒤 명수가 달려가 공을 받는 방법은 특히 명수의 순간 가속력이 뛰어나기에 유효한 방법으로 자주 연습 되곤 했었다. 사실 어느 팀에서나 하는 연습이었지만, 이 순간의 플레이는 너무나 절묘했고, 그래서 관중들의 환호를 끌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명수는 관중들의 함성과 탄식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옆과 뒤에서 뒤늦게 달려오는 수비수의 움직임은 느껴졌지만, 명수의 가속력이 더 빨랐기에 시간은 벌 수 있었다. 건너편에 선배가 달려들고 있음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수비수들의 시선이 분산되었다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 명수와 선배 사이의 공간을 점유하기 위해 달려드는 수비수가 있음을 확인한 순간, 명수는 시합을 결정짓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니, 이번엔 꼭 해야 돼!’ 상대 팀은 확실히 결승전에 오를 만한 실력을 갖춘 팀이었다. 아무리 중학생이라지만, 이렇게 수비를 잘하는 팀은 만나본 적이 없었다. 본래 수비를 잘하는 팀이 축구를 잘하는 팀이었다. 만약 명수가 없었다면, 장계중과 상대 학교와의 레벨 차이는 분명 현격한 수준이리라. 심지어 이번 춘계대회의 다크호스, 주목받는 신인, 장래가 기대되는 유망주, 인명수의 골잡이로서의 능력도 이제까지 훌륭하게 봉쇄하지 않았던가. 기회는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이 그 기회였다. 명수는 옆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시원함을 느끼며, 개운해진 기분으로 다리를 들어 올렸다. ‘이걸 넣으면 얼마나 더 개운할까?’ 왼 다리로 바닥을 강하게 딛고, 오른발을 강하게 휘둘렀다. 가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절묘하게 맞은 공이 빠르게 날아갔다. 적당한 거리에도 골키퍼는 날아오는 공을 향해 몸을 던지지 못했다. 놀랍도록 빠르게 날아든 공은 골망을 뒤흔들었다. 경기장이 터져나갈 것 같은 함성이 울려 퍼짐을 들은 것은 그 순간이었다. 명수가 입을 잔뜩 벌리고 소리를 질렀음에도 경기장을 뒤흔드는 함성에 묻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달려드는 장계중학교 선수들 역시 입을 뻥긋거리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달려와 명수를 바닥에 눕히고 그 위를 짓눌러 댈 뿐이었다. **** “와, 저기서 넣네?” 함성이 잦아들 때쯤,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환호를 보내던 도하도 이성을 찾았다. 자리에 털썩 앉으면서 방금 보았던 그림 같은 슛을 떠올렸다. “쟤, 원래 저렇게 잘했어? 아니면 뽀록인가?” 확실히 중학생 정도의 선수가 저런 슛을 구사한다고 하면 믿기 힘들만도 하다. “실력이지.” “…쟤도 너만큼 힘이 좋은가 봐?” “응.” “누가 더 힘이 센데?” 와, 정말 맥락 없는 건 여전하구나. 여기서 그런 질문이 왜 나오나? “몰라.” “나중에 한번 붙어봐라.” 단유는 대꾸하지 않았다. 도하도 딱히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는지, 세레머니를 마치고 자기 위치로 돌아가는 선수들을 바라보았다. “프로 축구 선수?” 아마도 명수의 꿈을 묻는 것이리라. “응.” “우리 나이 때 저 정도면 진짜 국가 대표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지금 국대는 저것보다 더 잘했을까?” “글쎄다.” 도하는 물끄러미 명수를 보다가, 혼잣말하듯 말했다. “표가 있으면 좋겠다.” “무슨 표?” “그런 거 있잖아? 몇 살의 표준 키는 얼마고, 몇 살 때 표준 몸무게는 얼마인지 하는 거. 그런 표처럼 몇 살 때 이 정도 하면 나중에 이거 할 수 있다, 이런 거.” 단유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자못 심각한 얼굴로 상념에 빠진 도하였다. “담뱃갑에도 있잖아? 니코틴이 몇 퍼센트고 타르가 몇 퍼센트고 이런 게 적혀 있잖아? 그런 게 있으니까 자기 취향에 맞는 담배도 고를 수 있고. 그것처럼 표가 있으면 그 표에 맞춰서 자기 취향에 맞는 재능을 계발할 수 있으면,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비유는 이상했지만, 도하의 아이디어는 우습게 치부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단유 본인도 사람들이 입을 모아 잘한다 칭찬하는 것도 있고, 자신이 그냥 좋아서 빠져 있는 것도 있지만, 그걸 토대로 미래를 생각하기에는 아직 너무나 많은 부분들이 미지수였다. 예전의 누군가는 공부를 잘하니까 의대나 법대를 가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지만, 단유의 생각에 의대와 법대는 그 분야가 너무 상반된 것이었다. 단지 대학 입학 점수가 높다는 공통점을 제외하곤 직업적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데, 단지 공부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두 가지를 추천한다는 게 너무 이상하다고 여긴 적이 있었다. 친구들이 노래를 잘한다고 칭찬도 해줬고, 실제로 음원을 출시할 정도기도 했다. 하지만, 본인이 노래 부르는 걸 별로 즐기지 않는데 ‘가수 해라’고 말한들 단유의 귀에 솔깃할 리가 없었다. 수학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만 가지고 대학을 가서 수학과 교수가 된다? 하지만 물리도 좋고 화학도 좋고, 최근에는 철학 분야에도 관심이 많아서 관련 서적들에 흥미를 붙이고 있는데? ‘난 뭘 하고 싶은 걸까?’ 차라리 명수처럼 명확하게 한 가지만 파고들 수 있었다면 좋겠지만, 다양한 영역에 호기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중인 단유로서는 고르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다 보니 도하의 아이디어가 솔깃하기도 했다. “니 말대로 그런 표가 있으면 미래를 결정하는 데 도움은 되겠네.” “정말?” “그런데, 잘은 모르지만 적성 검사 같은 거 하면 그런 거 나올걸?” “아, 그래? 그럼 적성 검사받아볼까? 어디서 받는데?” 단유도 어디서 주워들은 터라 정확히 알지 못했다. “나중에 선생님께 물어봐.” “니가 대신 물어봐 줘라.” “왜? 니가 직접 물어도 되잖아.” “난 안 친하잖아.” 단유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 정말 ‘도하’ 이 녀석은 쉽게 적응하기 힘들다. ======================================= [356] 너는 어디에 있었어?(6) 마침내 경기장에 휘슬이 울렸다. 선수들의 얼굴에 희비가 교차하는 가운데, 함성과 환호, 탄식과 탄성이 공설운동장을 가득 채웠다. 최종 스코어는 2:0. 한 골을 실점한 이후 이를 만회하기 위해 공격으로 방향을 전환했다가 되려 반격을 당해 한 골을 더 헌납해야 했던 상대 중학교 선수들은 눈물 콧물을 흘려대며 경기장 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수선한 장내가 진정된 이후, 시상식이 이어졌다. 트로피를 들고 승리를 만끽하는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3반.” “예!” “재미있었지?” 아이들은 더욱 큰 소리로, 악을 지르듯 대답했다. 선생님도 소속 학교의 승리를 즐기는 얼굴로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밖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릴 것 같아, 여기서 바로 종례한다. 여기서 나가면 괜히 엄한 데 돌아다니면서 사고 치지 말고 곧바로 집으로 가야 한다.” “네.” “내일 아침에 지각하지 말고.” 각 반마다 그런 식으로 현장 종례를 마친 후, 아이들은 들뜬 얼굴로 경기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명수야, 오늘 회식인가?” “응. 회식할 거래. 오늘 내 배가 터지나 안 터지나 시험하고 가려고.” 붉게 물든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고 있었다. “알았어. 그럼 선생님이랑 둘이서 저녁 먹어야겠네.” “내 몫까지 많이 먹어.” “알았어.” 명수는 경기장 펜스에서 물러나며 손을 크게 휘저었다. 단유도 손을 들어 화답하곤 뒤로 돌았더니, 도하가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아냐. 그냥 집에 가는 거야?” “응.” “잘 가.” 싱겁긴. 단유는 피식 웃고 가방을 어깨에 둘러멨다. 도하는 뭔가 아직 남은 말이 있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 단유를 불렀다. “근데 있잖아.” “뭐?” “저기…, 우성이 말인데.” “신경 쓰지 마라니까.” “아니, 너무 심하게 때리지 말라고.” 단유는 교복을 정리하던 걸 멈추고 도하를 바라보았다. “뭐?” “그냥 우성이도 불쌍한 애니까 좀 살살 다뤄주라고.” 도하는 바닥을 발뒤꿈치로 툭툭 치며, 시선을 피했다. “내가 지금 싸움 나가냐?” 단유와 눈이 마주친 도하가 얼른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싸울 거 아냐?” “아닌데?” “그래? 알았어. …그래도 우성이 불쌍한 애니까 적당히 때려.” 단유는 관자놀이 부근을 통통 때리며 지끈거리는 통증을 다스려야 했다. “준비해.” “문자 넣었어. 다들 거기 모여 있을 거야.” 작전(?)지역은 지난번에 왔을 때, 눈여겨 두었던 공설운동장 뒤편의 작은 공원이었다. 공설운동장 주변의 부대시설로 사람들이 잠시 쉬었다 갈 수 있게 몇 개의 벤치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큰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터라 사람들의 출입이 많지 않았고, 눈에도 잘 띄지 않을 곳이라 작업을 하기에 좋은 장소라 우성은 판단했다. “넌 먼저 가 있어.” “근데, 여기 출입구가 많잖아? 만약 다른 데로 빠지면 어떡해?” “2층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데리고 갈게. 반대쪽 관중석으로 넘어가서 나가지 않는 이상은 다 그쪽으로 나올 테니까 거기서 기다리면 돼.” “…혼자 괜찮겠냐?” “그냥 데리고 가는 정도라면 괜찮을 거야.” 우성은 펜스에 붙어 명수와 이야기하던 단유를 떠올렸다. ‘잠깐 조용한 데서 이야기 좀 하자.’ ‘할 이야기 없어.’ ‘난 꼭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그럼 여기서 이야기해.’ ‘보는 눈이 많아. 여기서 할 이야기가 아니야.’ ‘알았다.’ 이런 식으로 대화를 이끌어가면 되리라. 우성은 혼자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며 자신의 시나리오에 자신감을 가졌다. 비밀 이야기인 것처럼 하려면 주변에 사람이 없어야 하니, 당연히 진태도 눈에 보이지 않아야 했다. “그럼 먼저 갈게. 뭔 일 있으면 바로 콜해라.” “알았다.” 진태가 먼저 운동장 바깥 통로를 통해 아래로 내려가고, 우성은 뒤를 힐끔 보며 단유를 기다렸다. 도하가 뭔가를 이야기하는 듯했는데, 도하가 단유보다 먼저 출구로 나오고 있었다. ‘잘 됐어.’ 도하가 있어도 상관은 없지만, 없는 게 낫다. 도하는 출구를 빠져나오다가 우성을 보았다. “뭘 봐?” 우성은 입술을 까뒤집듯 끌어내리며 한껏 불량스러운 인상을 지어 보였다. 도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배신자 새끼.” 도하가 나간 후에도 우성은 도하의 아지트를 이용했다. 아니, 이제는 우성의 아지트였다. 도하는 그 뒤로 전혀 모습을 드러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니. 한때는 우성도 도하를 두려워했지만, 그때는 도하의 눈에 어린 독기 때문에 그랬다.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것 같은 눈. 망설임 없이 사람을 죽이고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무자비한 기운이 느껴져서 도하가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광종이란 녀석보다 더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터라 우성은 도하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주먹, 싸움 기술, 이런 건 부수적인 문제다. 진짜는 바로 세상을 향해 내지를 줄 아는 독기. 그런 독기가 있는 애들이 ‘진짜’였고, 그런 독기 없는 애들은 그저 엄마, 아빠 뒤나 졸졸 쫓아다니며 콧물이나 흘려대는 ‘가짜’였다. 시간이 흘렀는데도 단유가 나오지 않았다. 우성은 의아함을 느끼고 출구 안쪽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몇몇 애들이 가방을 메고 느긋하게 나오고 있었는데, 그중에 단유는 보이지 않았다. “어? 이 새끼, 어디 갔어?” 당황한 우성이 서둘러 단유를 찾았지만, 단유는 어디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야, 진태야.” [왜? 무슨 일 있어?] “애들 다 데리고 나와봐. 단유 안 보인다.” [도망 간 거야?] 도망인지,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놓친 건지 확실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단유를 찾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빨리 애들 데리고 나와서 찾아봐. 몇 명은 운동장으로 보내서 지금 운동장 남문 쪽으로 가봐.” 남문 쪽이 큰길과 가까우니 대중교통을 위해서는 대부분 그쪽으로 나올 터였다. 문제는 그쪽에 선생님들도 다수 자리하고 계실 거란 문제였지만, 지금은 그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결론적으로, 우성네 패거리는 단유를 찾지 못했다. 갑자기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날았는지 몰라도 단유는 운동장에서 사라졌다. **** 장계중학교 행정실에서 근무하는 여직원은 학교 중앙 현관을 가로지르는 복도를 지나는 중이었다. “깜짝이야!” 여직원은 갑작스레 나타난 인기척에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들고 있던 커피를 쏟으며 옷이 젖을 정도였던지라, 단유는 얼른 손을 내밀며 사과했다. “괜찮으세요?” “어머, 어머. 깜짝이야.…괘, 괜찮아요.” 여직원은 크게 당황했는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다, 커피로 물든 옷을 발견했다. 황급히 앞섶을 추스르며 얼룩을 가린 여직원은 ‘어떡하지’를 연발하며, 자리를 피했다. 단유를 흘끔 바라보는 눈에 깃든 당황 때문에 더 민망해진 단유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죄송합니다’ 사과를 했다. 여직원이 잔걸음으로 단유를 지나 행정실로 들어간 뒤, 단유는 한숨을 내쉬었다. 학교에 아무도 없을 줄 알고 온 것이었는데, 행정실에서 근무하는 사람과 마주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단유는 다른 사람과 마주치기 전에 얼른 이 층으로 올라갔다. 단유가 학교에 온 이유는 바로 ‘마법’ 때문이었다. 분명 자신이 마법을 사용했다는 자각은 있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실험을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지금 이 시간이라면 교실에 아무도 없을 테고, 운동장도 비어 있으리라. ‘바람’의 마법이라면, 학교의 황토 운동장에서 시현해 보기 딱 좋다고 생각하며 이곳으로 온 단유였다. 교실 창가로 향한 단유는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밝은 햇살이 내리비추는 황토 운동장에는 약하게 불어오는 봄바람에 먼지가 살짝 뜨다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심호흡을 한 후, 적당한 세기의 바람을 설정하고 ‘컨슈메(재현)’ 했다. 마법은 즉각적으로 발동했다. 인위적인 힘의 이동이 느껴질 만큼 강한 바람이 운동장을 쓸면서 한쪽 축구 골대에서 다른 쪽 골대까지 이동했다. 이번에는 반대방향으로 바람을 일으켰다. 역시 모래 구름이 반대편 골대를 향해 이동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게 되는구나.’ 머릿속에서는 바람에 대한 다양한 지식들과 그 지식에 기반한 다양한 수식과 함수들이 여러 방식으로 조합되고 해체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움직임의 바람들이 재현되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에 신고할 만한 장면이었다. ‘귀신의 장난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단유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 시간, 진짜 귀신의 짓인가 의심하며 운동장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선, 선생님! 저거 봐요!” 교무실에서 한 선생님이 창가를 지나다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왜 그래요?” “저, 저기 봐요!” 또 다른 선생님이 뭔가 하는 호기심에 다가갔다가 경악에 찬 소리를 질렀다. “저, 저게 뭐예요?” 지연도 호기심에 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창가로 다가갔을 때, 운동장에는 굵은 기둥 같은 회오리가 운동장 가운데에 생겨나 있었다. “우와, 저 정도의 회오리는 처음 보네요?” 지연도 예전 학창 시절, 운동장에서 생겨난 회오리를 본 적이 몇 번 있었지만, 저 정도로 큰 걸 본 적은 없었다. 봄철 지면 부근의 대기 불안정으로 회오리바람이 분다는 상식이 있던 터라, 놀랍다기보다는 신기하다는 느낌이었다. “방금 전까지는 저런 회오리가 아니었어요. 양쪽에서 회오리가 생겨서 합쳐서 저렇게 됐다니까요? 선생님은 보셨죠?” 다른 선생님이 맞장구를 치며 창가에 얼굴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지연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두 개가 합쳐져요?” “이럴 게 아니라, 핸드폰! 핸드폰 어디다 뒀었지?” 구경하던 선생님들이 책상으로 돌아가 핸드폰을 챙겨올 때, 지연은 가만히 서서 회오리를 구경했다. 얼마 전 우연히 본 해외 토픽에, 중국 어느 초등학교의 운동장에서 발생한 회오리에 초등학생이 공중으로 말려 올라가더라는 기사가 있었음을 떠올렸다. ‘저 정도면 중학생도 떠오를 수 있겠는데.’ 라고 생각할 무렵, ‘마법같이’ 회오리가 사라지며 말려 올라가던 모래들이 모래 안개를 만들며 운동장에 가라앉았다. “어? 끝났어?” 촬영을 하지 못해 아쉬움 가득 담긴 표정을 짓던 선생님들은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품은 채 ‘과거에 난 이런 신기한 것을 봤다’라는 주제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지연은 거기에 끼지 못하고 조용히 물러났고, 자리로 돌아온 지연은 조금 전 사라진 회오리의 잔상을 떠올리며 펜을 들었다. 「갑자기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진 그대여. 운명이여.」 펜을 끄적이다 피식 웃으며 종이를 구겼다. 천성이 선생이라, 작가는 되지 못할 팔자인가보다, 라고 자조하며 지연은 다시 교과서와 참고서로 눈을 돌렸다. 오늘 중으로 시험문제를 끝내야 주말을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창가에서 수다를 떠는 선생님들도 잊고, 신기한 회오리의 잔상도 잊고 오직 문제에만 집중했더니, 어느새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경기장에 갔었던 선생님들도 학교로 돌아와 잡무를 보기 시작했고, 간간이 인사를 하면서도 시험지에 집중을 하던 지연은 퇴근 시간에 이르러서야 문제 출제를 끝낼 수 있었다. “끝났네.” 이제 남은 것은 홀가분하게 퇴근해서 주말을 맞이하는 것만 남았다. 오늘 교무실을 지켰기 때문에 내일은 학교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 모처럼 편하게 주말을 보낼 생각을 했더니 지연은 기분이 좋았다. **** 토요일에는 늦잠을 자고, 일요일에는 날이 좋아서 나들이를 생각하던 오전, 누군가가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김지연씨?” “네?” “경찰입니다.” 두 사람 중 연회색 바람막이를 입은 중년 사내가 품에서 신분증을 꺼내 확인을 시켜주었다. “무, 무슨 일이시죠?” “장계 중학교 교사 맞으시죠?” “네.” “잠시 저희와 동행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인지….”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연은 나들이 갈 마음에 들떠서 입었던 화려한 복장 그대로인 채 경찰서로 향했다. "지강목 이사장 아시죠?" "네." "살해당했습니다." "네?" 지연은 황망한 눈으로 두 형사를 바라보았다. ======================================= [357] 내 알 바 아닌데(1) 지강목 이사장이 발견된 것은 토요일 오후, 점심시간이 지날 무렵이었다. “신고가 왜 그때 들어왔지?” “집에서 학교로 연락이 온 게 그때였대요.” 평소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집에 들어오지 않는 때가 빈번했던 이사장이라 이번에도 그렇겠거니 생각했던 집에서, 오전이 다 지나도록 연락이 오지 않자 수상하다는 생각에 학교로 연락을 취했다. “점심을 먹고 들어온 직원이 들어갔다가 사체를 발견, 그 즉시 119로 연락을 했다는군요.” 살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걸까? 뭐, 요즘은 대부분 119로 전화를 하니까 그렇겠거니 생각은 하지만, “그 여직원은 조사했고?” “조사하고 말고 할 게 없는 게, 행정실에 두 명의 직원이 있었는데, 그 여직원이 말단이었다나 봐요. 그 여직원을 시켜 이사장실에 보낸 직후 바로 신고 전화가 들어왔으니.” 장 형사는 학교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를 마시며, 아이들이 먹는 거라 일부러 이렇게 달게 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인은?” “둔기에 의한 상처와 날카로운 도구로 추정되는 것에 여러 번 찔린 상처가 발견되었어요. 정확한 건 국과수에 넘겨봐야 알겠지만, 출혈 과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장 형사가 고개를 돌려 이사장실 안쪽을 봤더니, 바닥에 깔린 흑갈색 러그가 보였다. 아마, 처음부터 흑갈색이었던 건 아니었겠지. 장 형사는 종이컵 속 커피를 전부 입안에 털어 넣었다. 밀크커피는 너무 빨리 식는 것 같다. “몸싸움을 크게 하지는 않았나 봐.” 실내는 크게 어질러지지 않았다. 시체가 누워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은 소파 부분이었는데, 소파 앞 테이블에는 깨진 잔들의 잔해가 보였다. “여직원이 손댄 곳은 없고?” “문 열자마자 바로 신고를 한 터라, 안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답니다.” “여기!” 장 형사는 안에서 조사 중인 감식반 사람들을 불렀다. “뭐 나온 거 없어요?” “너무 많이 나와서 문제네요.” 한숨을 내쉬던 감식반 반장이 손가락으로 구석을 가리켰다. “저기 있던 골프채로 내려 쳤나 봐.” 그리고 손가락을 이동해서 책상 아래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기로 집어 던졌고.” 다시 손가락이 위로 올라갔다. “피해자가 쓰러져서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애. 그때 범인은 책상 위의 저 칼로 찔렀어.” “칼이요?” “봉투 자르는 칼인데, 그냥 저렇게 위에서 돌아다니니까 발견하기도 쉬웠겠지.” 책상 위에는 칼을 거치해 둔 것으로 추정되는 미니 칼 거치대가 보였는데, 마치 옛 고검(古劍)들을 거치해 두던 모양과 유사했다. “취향도 참.” 장 형사는 혀를 차며 빈 종이컵을 구겼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결정적? 장 형사가 눈을 빛내며 반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사장실에 들어온 여자가 있었어.” “여자요?” 장 형사의 머릿속에 여성이 관련된 다양한 범죄들이 영화 하이라이트 묶음처럼 지나갔다. 감식반이 감식 중인 부하에게 손을 내밀자 그 손에 증거채집용 비닐이 올려졌다. 그 끝을 잡고 별거 아닌데, 같은 느낌으로 흔들거려 보이는 반장이었다. “찻잔. 여기 립스틱 자국.” 장 형사는 고개를 들이밀고 그 자국을 유심히 보며 말했다. “결정적?” “뭐, 아닐 수도 있지만.” 한발 물러서는 감식반 반장의 말에 장 형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 “여기 있는 립스틱 자국이랑 선생님의 DNA를 비교하면 어떨까요?” 조각난 도자기지만 지연은 이사장실에서 손에 들었던 찻잔의 문양과 똑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제 것 맞을 거예요.” 드디어 지연이 입을 열었다. 사실 경황없이 끌려와서 이사장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전해 듣고 얼이 빠져 있었던 탓에 쉽게 말을 하지 못했을 뿐, 지연이 계속 침묵을 지킬 이유는 없었다. “저 아니에요.” “그건, 조사해 보면 나올 겁니다.” 형사는 차분하게 몇 가지 조사된 정황들을 이야기하며 지원의 알리바이를 검증해갔다. 교무실 직원들의 증언으로 이사장실에 갔었음이 증명되었고,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행정실 직원과 학교 근처 분식집 식당에서의 증언을 통해 점심을 먹으러 갔던 식사 시간도 증명되었다. 지원은 타인의 입으로 자신의 행적이 하나하나 밝혀진다는 사실이 묘하게 느껴졌다. “점심 드시기 전에 30분에서 40분 정도 이사실에 머무르셨죠? 그때 무슨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그리고 타인에게 자신의 행적과 감정을 가감 없이 밝혀야 한다는 게 거북했다. 하물며 형사 앞에서야 두려움과 불편함이 더 할 뿐이었다. “그럼 이사장에게 꽤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셨겠네요?” 형사는 돌려 말할 줄 몰랐다. 구체적 사실을 증언하는 것 외에는 단답형으로 대답하라는데, 감히 그럴 수야 있겠는가. ‘당신의 증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전술한 주제에, 이런 식으로 사람을 몰면 어떻게 대답하나? “식사하시고 뭐 하셨습니까? 보니까 식사 마치신 후에 바로 교무실로 가시지는 않으셨던 것 같은데.” 어떤 의도로 묻는 걸까? 지연은 당시 워낙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상태라서, 먹는 거로도 해소가 되지 않았다. 그런 기분으로는 교무실에 들어가도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할 것 같아 주변을 산책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때 동행하신 분은 계셨습니까?” 있을 리가 없었다. 혼자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산책을 하는데 누가 같이 따라다닌단 말인가. 그런데 생각해보니, 만약 그때 누군가가 있었다면 차라리 더 나았을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이 당한 수모와 불쾌감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울적한 자신의 마음을 위로해줄 수 있는 친구가 있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날…죽은 건가요?” 서류를 들여다보며 다음 질문을 고르던 형사가 지연의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이제껏 형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지 않아 몰랐는데, 형사의 눈은 꽤 익숙한 눈빛이었다. 아침마다 거울을 볼 때 느꼈던 무기력한 눈빛, 일상에 찌든 눈빛이 형사에게서 느껴졌다. 지연 본인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불편함에 잔뜩 가슴을 졸이고 있는 반면, 형사는 늘 겪는 일이라는 듯 무덤덤하게 진술을 받고 조사를 하는 중이었다. ‘역시 드라마랑 현실은 다르구나.’ 그렇다고 해서 편해질 리 없는 취조실이었다. **** 명수는 어제보다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공원을 뛰어다녔다. 어제는 그 전날의 경기 여파 때문인지 근육통 때문에 제대로 새벽 운동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몸에 열을 내는 게 근육을 푸는 데 더 좋다는 의견 때문에 명수는 느릿하게라도 몸을 풀었고, 그 덕택인지 오늘은 어제보다 훨씬 기운차 보였다. “원래 명수는 기운이 넘치지.” 하품을 하면서도 나온 상미가 명수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넌 왜 나왔어?” “그냥, 이제 나도 운동 좀 할까 싶어서.” “그 말, 내가 들은 것만 벌써 4번쯤 된 거 같은데?” “그런 건 잊읍시다, 김 선생.” 상미는 너스레를 떨며 한쪽 팔을 잡고 늘리면서 스트레칭을 하는 시늉을 했다. “근데 되게 아쉽다. 나도 가서 봤으면 좋겠는데.” “그 정도는 아니야.” 명수가 어쩐 일인지 몰라도 겸손을 떨었다. “앞으로 더 좋은 게 많이 나올 테니까. 솔직히 그저께는 너무 못했지. 수비한테 막혀서 제대로 뛰지도 못했다니까.” “그런 수비를 뚫고 골을 만들어냈으면 잘한 거야.” “그치? 잘했지?” 눈을 빛내며 속내를 드러내는 명수는 칭찬이 고픈 아이였다. “그래. 잘했어.” 단유와 명수의 대화가 웃겼는지 상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말이야, 오늘 승리 축하 기념으로 놀까?” “그냥 놀 핑계가 필요했던 것처럼 보이는데?” “김 선생, 김 선생. 너무 그러지 맙시다? 예?” 중간고사가 끝나고도 명수의 시합 때문에 제대로 뭉치지 못했다는 상미의 말에 명수도 동의했다. “핑계야 어쨌든 오늘 한 번 제대로 놀아보자.” “난 안 돼.” “왜?” “공부해야 돼?” “와, 이런 날도 공부해야 돼?” “그러고 보니, 단유 너 어제부터 좀 미친 듯이 책 읽더라?” 어느새 가볍게 땀을 낸 후, 스쿼트를 시작한 명수였다. 아직까지는 몸을 심하게 굴리면 안 된다는 단유의 조언에도 명수는 괜찮다며 씩씩하게 앉았다 일어서기를 했다. “공부할 게 생겨서 그래.” 원래 그렇지 않냐는 상미의 물음에 명수가 평소에도 열심히 하긴 했지만, 어제는 정말 미친 듯이 하더라고 덧붙였다. “원래 하나에 꽂히면 미친 듯이 파고들긴 했지만, 어제부터는 정말 밥 먹는 것도 잊을 정도로 책만 파더라니까?” 한 세트를 끝내고 숨을 고르던 명수가 단유를 보았다. “그래도 단유야, 오늘은 같이 놀자. 시험 끝나고 제대로 뭉치지도 못했잖아? 지태랑 채윤이도 불러서 놀자. 응? 스트레스는 풀어야지?” “니 스트레스는 그날 고기 먹는 거로 끝냈던 거 아냐?” 금요일, 우승 후 명수는 혼자 고기 10인분을 먹어치우는 대식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 자리에 모였던 감독님과 학부모들이 깜짝 놀라더라는 뒷이야기가 있었다. “에이, 그거랑 비교하면 안 되지. 아무튼 오늘, 같이 나가자. 오랜만에 노래방도 가고.” “오예! 콜!” 상미가 명수와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결정이 났다. 단유는 피식 웃음을 지음으로써 그 결의(?)에 동참하기로 뜻을 전달했다. 일요일 오전부터 노래방을 찾아가는 만행은 피하기 위해, 명수와 상미는 오전 시간 동안 놀 거리를 찾았고, 마침 합류한 채윤의 아이디어로 다섯 사람은 보드 게임방을 찾았다. “간판만 보다가 실제로는 처음 봐.” “그냥 카페 같은 분위기네?” 명수와 단유가 생소한 광경에 두리번거리자, 상미가 얼른 자리를 잡고 두 사람을 앉혔다. 촌티 내지 말라며, 핀잔을 던질 때 지태는 음료수를, 채윤은 게임을 하나 골라왔다. “「로코」?” “이건 단순히 머리가 좋다고 잘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거든? 상대의 심리를 잘 파악해야만 할 수 있으니까, 단유 너도 방심하면 안 될 거야.” “어떻게 하는 건데?” “원래 룰은 하면서 배우는 거야.” 지태의 익살맞은 표정을 따라 짓는 채윤과 상미였다. 지난 중간고사 대비해서 세 사람이 단유에게 배움을 청하는(?) 동안 받았던 서러움(?)을 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번 기회에 코를 납작하게 해 주지.” 30분 후, 채윤은 지태의 성에 못 이겨 게임을 바꿔와야 했다. “이거 너무 쉬워서 그래. 다른 거로 바꿔와.” 30분 후, 이번에는 상미가 게임을 바꿨다. “좀 잘 골라와. 이런 단순한 게임으로는 못 이긴다니까.” 20분 후, 지태와 상미는 들고 있던 카드를 내 던질 뻔 했다. “야, 너 내 거 봤지?” “보긴 뭘 봐.” “그런데 어떻게 그 카드를 내냐?” 네 사람은 단유에게 한 번도 이기지 못했고, 되려 스트레스만 받았다. “이거 머리 안 쓰는 게임 없어요?” 그래서 고른 것이 ‘할리갈리’. 지태나 상미는 지겹게 플레이한 게임이라 고르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 게임은 머리보다 순발력이 필요한 게임이기에 이 정도라면 무난히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골랐다. 물론, 10분 후 명수마저 카드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냥 져 주면 안 되나?” “져 주긴 뭘 져!” 지태가 열이 오른 모양새로 다른 아이들의 손에 들린 카드를 끌어모았다.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며 손에 들고 있던 카드를 내려놓았다. “…그래도 재밌네.” 그 말에 모두가 살짝 놀랐다는 듯 단유를 바라보았다. 곧 지태가 짧은 한숨을 토해내며 투덜대는 시늉을 했다. “너만 계속 이기니까 재밌겠지.” 그러면서 투덜거리는 시늉으로 시치미를 뗐지만, 아이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단유가 재밌어하는 게임도 있구나.’ 매일 공부하는 것만 좋아하는 단유가 공부 외에 좋아하는 게 뭐가 있을까, 한 번 찾아보자, 며 쑥덕거렸던 아이들도 이제는 지쳐서 ‘역시 단유는 책밖에 없다’고 생각할 무렵, 발견하게 된 것이다. ‘자주 와야겠어.’ 친구가 좋아하는 걸 발견한 기쁨은 꽤 오래갔다. 점심 먹는 것도 잊고, 매 게임 승자 독식이라는 양상에도 아이들은 쉽게 보드 게임방을 떠나지 못했다. 이기지 못해도 상관은 없었다. 어느새 분위기는 ‘단유를 이겨라’는 양상으로 변질 되긴 했지만,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 [358] 내 알 바 아닌데(2) 모처럼 단유는 ‘즐겁게’ 하루를 보냈다. 단순한(?) 룰 안에서 벌이는 게임이 이렇게 재미있게 느껴질 줄은 스스로도 기대하지 못한 일이었다. 덕분에 그동안 아껴왔던 용돈마저 털어야 했지만 별로 아깝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1시간에 3천 원이라는 비싼 이용료에도 불구하고, 다섯 사람은 무려 4시간을 그곳에서 머물렀다. 처음에는 단유의 독식 때문에 게임이 싱겁게 흘러가나 싶었지만, 2등을 누가 차지하느냐의 싸움으로 전개되면서 아이들은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1등의 주인공은 정해져 있지만, 2등은 여러 가지 변수에 의해 결정되기에―특히 단유가 누구를 공격하느냐에 따라 희비가 엇갈렸다―더 치열한 게임이 펼쳐졌다. 게임에 너무 몰입하다 보니 소리를 지르는 일도 많았고, 때문에 직원에게 몇 번의 제재도 받았다. 룸을 이용했지만, 바깥 테이블에서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몇 번 제재를 요청할 정도로 소란스러웠던 탓이어서, 몇 번이고 사과해야 했다. “야, 이럴 게 아니라 단유 원정 보내자.” 그 와중에 상미가 괴상한 아이디어를 냈다. ‘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오직 단유 뿐이었는지, 아이들은 박수를 치며 좋은 아이디어라 칭찬했다. 가끔 인원수가 많이 필요한 게임 때문에 낯선 이들과 ‘조인’을 한다는 설명에 단유는 납득을 하면서도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냐’고 되물었다. “니가 없어져야 평화가 온다.” ‘그럼 애초에 너희들끼리 놀면 되는 것 아니었냐’는 반론은 가볍게 묵과되었고, 지태는 단유의 손목을 붙잡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저희가 너무 시끄럽게 해서 죄송합니다’로 운을 뗀 지태는 특유의 너스레로 살갑게 다가간 뒤 단유를 ‘팔았다’. “같이 해보시면 저희 마음을 아실 거예요.” 라며 익살도 부리는 지태 덕분에 단유는 거부감 없이, 대학생으로 추정되는 여자 무리 속에 섞였다.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지태의 말빨’ 때문이라고 단유는 생각했다. 다른 아이들까지 나와서 ‘구경만 하다 갈게요’라며 테이블 주위에 서서 몇 게임 정도를 지켜보았다. ‘이거 사기다!’라며 한 사람이 말을 집어 던질 듯한 시늉을 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릴 때는 다 같이 한마음 한뜻으로 벙글거렸다. 몇 게임만 하고 일어설 수 있을 줄 알았던 단유는 룸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승부욕이 발동한 누나들이 단유를 놓아주지 않은 탓인데, 몇 번의 게임이 있고 난 뒤에야 단유는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곧 단유는 관심을 보이던 다른 테이블의 부름을 받고 자리를 옮겨야 했다. 얼마 후 곧 그쪽 테이블에서도 ‘포기’라는 선언이 나오면서, 게임방 내의 사람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결국 보드 게임방의 여러 가지 게임들이 동원되면서 단유를 꺾기 위한 도전이 시작되었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까지 보드 게임방에 머물다 나오게 된 것이었다. “나 목이 쉰 거 같애.” “노래방은 스킵 하자.” “돈도 없어.” “너무 오래 했어.” “그래도 게임방 사장님이 돈을 깎아 줘서 다행이야.” 게임방 사장님은 단유 때문에 매상이 올랐다는 것에 기뻐하며 특별히(!) 만 원을 깎아 주었다. 덕분에 각자 만 원만 내고 나올 수 있었다. 물론 중간중간 먹거리를 사느라 쓴 돈까지 계산하면 더 되겠지만. **** “아까 걔 진짜 잘하더라.” “근데 걔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나도 그랬어.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얘들 봐라? 야! 걔 아직 중학생이라잖아? 어디 어린 애를 넘봐?” “넘보긴? 그런 거 아니거든?” “어쩐지 아까 계속 걔 쪽으로 들러붙는다 싶었어. 걔가 너 피하느라고 슬금슬금 움직이는 거 못 봤어? 너 그거 성추행이야.”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아!” “왜?” “나 기억났다.” “뭐? 걔?” “뮤직비디오에서 봤어.” “뮤직비디오?” “그 뭐더라, 「리모트」란 노래 있잖아?” “그게 뭔데?” “가디스R 몰라?” “여자 그룹이야? 여자 그룹이면 관심 없어.” “아, 난 알겠다. 남자애들이 눈이 빠져라 보던 거 말이지?” “그래. 거기 나왔던 애다.” “어, 그러고 보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한데. 그럼 연예인이네?” “싸인 받을 걸 그랬다.” “게임 잘하는 거 보니까 보드 게임방 자주 오는 거 같은데, 그 게임방 가면 또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이구, 그러다 바람난다?” “바람은 무슨.” “니 남친한테 다 일러야겠다. 현진이가 영계한테 눈 돌아갔다고.” “진영혜!” “아이구, 내 귀가 다 따갑네.” 햇살 좋은 일요일, 오랜만에 뭉친 4인의 여대생들의 수다는 포근한 봄바람에 실려 조용히 흘러갔다. “야, 마스크 써야겠다.” “황사 때문에 피부 다 상하겠어.” **** 간단하게 패스트푸드점에 들러 늦은 점심을 해치운 이들은 어떻게 남은 시간을 보내야 하나를 이야기 나누다, 결국 시간이 늦어지는 관계로 그대로 헤어졌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패스트푸드 점에서만 1시간을 넘게 앉아 수다를 떨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온 명수는 뒤따라 온 상미와 일요일의 남은 시간을 마지막까지 불태우겠다는 듯 패드를 붙잡았고, 그 틈에 풀려난 단유는 방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아.” 하루를 돌아보며 단유는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그랬겠지만 낯선 이들과 스스럼없이―물론 처음에는 낯을 많이 가렸지만―게임을 하는 자신의 모습도 생소했고, 그런 게임 하나로 웃음을 공유할 수 있었다는 게 즐거웠다. 평소의 단유라면 결코 즐기지 못할 놀이문화였기에 그런 곳에 데려가 준 친구들이 또 고맙기도 했다. 고마운 건 고마운 것이고, 이제는 다시 본래의 과제에 집중해야 할 때라 생각한 단유는 노트를 펼쳐 들었다. 노트에 빼곡히 기록된 것은 그동안 단유가 배우고 익혀온 것들이 축약되어 있었는데, 금요일 저녁부터 적기 시작했는데 벌써 노트의 반을 채워가는 중이었다. 단순히 책을 보고 쓰는 게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머릿속에서 잠든 지식들을 꺼내서 눈으로 확인하고 재정리해보려는 계산에서 하는 작업이었다. 당연히 이유는 ‘마법’ 때문이었다. 단유가 마법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나그노리시’, 즉 완벽한 요소들의 객관적 인식이 가능했기 때문이리라. 문득, 보드게임을 하는 동안 흥미를 느끼게 해주었던 한 가지 요소가 떠올랐다. 불, 물, 바람, 흙의 네 가지의 원소를 이용한 마법으로 상대를 무찌르는 카드 게임을 하면서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런 마법을 상상으로라도 만들 수 있다니.’ 사람들의 상상력에는 끝이 없달까. 어쩌면 자신도 지금의 작업이 끝나면 그런 마법을 구현해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미소를 짓던 단유는 이내 미소를 지우고 작업에 몰입했다. 이제껏 쌓아온 지식들을 재점검해 볼 시기라 생각한 단유는 하루 동안 즐거웠던 기억과 감정들을 의식 너머로 묻어버리고 오롯이 노트에만 집중했다. **** 월요일이 되어 학교로 갔을 때, 단유는 어딘지 모르게 어수선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몇몇 학생들이 수군대는 모습도 그렇고,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도 분위기 때문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모습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되었다. 교실에서만이 아니라 학교 전체에서 그런 광경들이 눈에 띄었다. “무슨 일 있나?” 도하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몰라 어리둥절해 할 때였다. “김단유.” 우성이 단유에게 다가왔다. 단유는 앉은 자리에서 고개만 들어 우성을 바라보는데, 다가오는 우성을 막은 것은 도하였다. “거기서 말해.” “뭐? 야. 진도하. 뭐냐, 이거? 손 떼라.” 도하는 우성의 어깨를 짚었던 손을 내렸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고 우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 크게 벌이지 마라. 오늘 분위기도 안 좋은데.” “지랄 떨지 마, 새꺄. 어디서 되도 않는 개소리야! 야, 김단유. 일어나 봐. 일어나 보라고 새꺄.” 우성이 강하게 나서는 이유는 금요일 경기장에서 단유가 도망을 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도하가 눈치를 줘서 계획을 알게 된 단유가 도망갔으리라, 고 결론을 내린 우성은 등교하자마자 단유에게 한 방 먹이리라 마음을 먹었다. 더는 단유가 두렵지 않은 우성이었다. “안 일어나? 쫄았냐? 쫄았어, 새끼야!” 당연히 한숨밖에 안 나올 상황이라 단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새끼가 사람을 물로 보나? 도망이나 치는 주제에.” 도하가 힐끔 뒤를 돌아보며 눈치를 보다 밀고 들어오려는 우성을 막았다. “안 놔? 너라고 봐줄 거 같애, 새끼야?” “하룻강아지도 강아지라서 귀엽게 봐주는 거다. 봐줄 때 가라.” “…무슨 개좆같은 소리야? 니가 나를 봐줘? 허, 참나.” 이미 교실에 보는 눈이 많았다. 여기서 확실히 기를 꺾어 놔야 한다. 혀를 차는 듯했던 우성이 갑자기 주먹을 휘둘렀다. 도하는 빠르게 물러서며 주먹을 피하려 했지만, 우성의 재빠른 기습을 피할 만큼의 스킬은 부족했다. 완전히 피하지 못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간 주먹에 금방 코가 빨갛게 부어올랐다. 하지만 도하도 얌전히 주먹을 기다렸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 얌전해졌다 해도 한때는 진짜 정신 나간 하룻강아지 짓을 일 년 내내 하고 살았던 아이였다. 자기 입으로 ‘길거리 싸움꾼’이라 칭할 만큼의 실력은 있었던 것이다. 물러섬과 동시에 휘두른 주먹은 우성의 턱에 꽂혔다. 다만 포인트가 제대로 먹히지 않았던 탓에 충격이 온전히 가해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우성도 맞았지만,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한 차례 주먹이 교차한 후, 서로 눈치를 보며 기회를 노리는 싸움, 같은 건 없었다. 주먹은 지칠 때까지 뻗는 것이고, 맞을 때까지 휘둘러야 하고, 맞으면 또 때리는 게 이들의 싸움이었다. 그래서 난장판이 될 거란 기대감(?)에 교실의 아이들이 우르르 모여들려는 찰나였다. 두 사람 다 주먹을 휘두르는데 한 방만 걸려라, 는 심정으로 휘두르고 있던 터라 정타가 들어가는 경우가 없었지만 대신 엄청나게 빠르게 휘둘러지고 있었다. 빗맞으면서 얼굴 살갗을 스치고 가는 주먹들 사이로 뜬금없는 손이 들어와 두 사람의 팔목을 붙잡았다. “와!” 지켜보던 한 아이가 무의식적으로 탄성을 터뜨렸다. 그 아이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그 광경을 목격하는 순간, 작년 유행했던 한 영상을 떠올렸다. 단유는 교차하는 주먹 사이로 손을 뻗어 정확하게 두 사람의 손목을 붙잡았다. 붙잡는 즉시 아래로 끌어내려 두 사람을 바닥에 고꾸라뜨렸다. 보기 흉하게 바닥에 구르는 일은 없었지만, 두 사람 다 손목이 차가운 바닥에 붙을 정도여서 몸을 굽힌 채로 단유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침부터 왜 힘을 빼고 그래.” 단유는 느긋하게 우성을 보며 말했다. 두 볼이 벌겋게 부어오른 우성은 잇소리를 내며 단유를 노려보지만, 그 눈 안에는 두려움도 곁들여 있었다. “내가 말했잖아. 신경 쓰지 말라고.” 이번에는 도하를 보며 꺼낸 말이었는데, 도하는 조금 전까지의 흥분이 가라앉았는지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러다가 쟤 죽이려고?” 말하자면, 도하는 우성이 해를 입힐까 봐 막은 것이 아니라, 당할까 봐 막은 것이란 소리였다. “무슨 그런 섬뜩한 소릴 하냐. 내가 왜 죽여?” “그 할아버지처럼 하려고 했던 거 아냐?” “…나 참.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김이 샜다는 얼굴로 단유는 두 사람의 손목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하는 곧바로 일어났지만, 우성은 무슨 일인지 바로 일어서질 못했다. 그를 힐끔 쳐다본 후, 단유는 주위의 아이들에게 말했다. “다들 자리로 돌아가. 선생님 오신다.” 그 말에 둘러쌌던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자리를 찾아갈 때, 선생님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리를 찾아가느라 분주한 아이들을 보면서도 선생님은 특별히 말이 없으셨다. 대신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강병호.” 아이들은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주목을 받은 병호가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따라 나와. 나머지 애들은 1교시 수업 준비하고.” 아이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지만, 아무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렇게 시선을 끌며 교실을 나간 병호를 데리고 나선 선생님은 학생상담실로 향했다. “금요일에 학교 왔었냐?” 상담실을 앞에 두고 선생님이 병호에게 물었다. “…네.” “왜?” “…뭐 좀 찾을 게 있어서요.” “교실에?” “네.” 선생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상담실 문을 열고 병호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상담실 안에는 사복 차림의 남성 두 명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강병호 학생?” “…네.” 병호는 낯선 이들의 눈빛이 여간 날카로운 게 아니라 생각하며 문 근처에서 주춤거렸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사내, 장 형사가 나름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른다고 불렀는데, 병호에게는 섬뜩한 느낌만 들 뿐이었다. ======================================= [359] 내 알 바 아닌데(3) 선생님이 나가신 후에도 교실은 다소 어수선했다. 갑작스러운 난투와 뜬금없는 호출의 여파로 아이들의 호기심이 자극된 탓에 곳곳에서 웅성거림이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의 관심이 멀어진 틈에 눈 밖에 났던 우성은 여전히 교실 맨 뒤에서 몸을 굽힌 채였다. “일어나라.” 우성이 고개를 들어보니 단유가 우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우성의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다. 어느 누가 싸움 중간에 끼어들어서 그렇게 정확히 주먹을 낚아챌 수 있을까? 동영상으로 봤던 단유의 실력은 진짜배기였다는 생각에, 힘과 기술을 겸비한 단유와 맞붙으면 결코 이득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우성은 어떻게 행동을 취해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사과를 하는 것은 너무 약해 보일 것 같았다. 반 아이들이 전부 자신을 만만하게 볼 것 아닌가. 그렇다고 강하게 뻗대기에는 단유의 힘이 두려웠으니, 순간 광종이 쥐죽은 듯이 지내는 모습이 이해됐다. ‘이럴 바에는 저 새끼 눈에 안 띄는 곳에서 조용하게 지내는 게 좋겠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성은 ‘그 새끼’의 바로 앞자리에 앉아야 했고, 하루 종일 단유의 시선을 뒤통수로 느끼면서 버텨야만 할 텐데, 우성은 도저히 참기 힘들 것 같았다. 우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유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말했다. “따라와.” “어디가?” 도하가 물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올게. 아직 시간 있으니까.” “죽….”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제발.” 도하의 말문을 막은 뒤, 단유는 우성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조례가 진행 중인 반도 있어 복도는 조용했다. 우성을 데리고 나간 단유는 우선 화장실로 향했다. 우성은 화장실의 제일 끝 칸에 끌려가 뒤지게 맞는 자신을 상상했다. 머리가 좋은 녀석이니 아마도 얼굴은 때리지 않겠지만, 복부를 제대로 맞으면 숨도 못 쉴 정도로 고통스럽다는 것을 경험해 본 우성은 다리가 덜덜 떨리는 기분이었다. 호주머니 속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진태라도 호출을 할까 싶었지만, 조례 중인 진태가 나오지 못할뿐더러 괜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가 단유가 핸드폰을 빼앗아 바닥에 던져버리는 만행을 저지르면 그것 또한 자신의 손해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폭행을 가한 뒤, ‘까불지 말랬지’라고 다짐받으려는 단유에게 결코 무릎을 꿇거나 비굴한 모습은 보이지 말자고 다짐하던 우성은 단유를 따라 화장실로 들어갔다. “씻어라.” “뭐?” 단유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얼굴 주위를 돌리며 원을 그렸다. 그 동작에 우성이 거울을 바라보니, 거울 속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 “씻어.” 우성은 얼른 소매로 얼굴을 훔쳤지만, 눈물과 먼지로 엉망인 얼굴이 그 정도로 나을 리 없었다. 단유의 말대로 세면대에서 물을 틀고 얼굴을 대충 닦아내는데, 쪽팔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언제부터 울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교실에서부터 울고 있었다면 이만저만 쪽팔린 게 아니었다. 차라리 싸움에서 지는 게 낫지, 바보같이 눈물을 보이다니. 얼굴을 대충 닦았을 때, 단유가 손가락으로 변기 칸을 가리켰다. 이제 저 안으로 들어가서 맞을 차례인가? “휴지.” 우성은 황급히 달려가 휴지를 뜯어 얼굴의 물기를 훔쳐냈다. 그러면서도 이게 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도무지 단유의 의도를 파악하기 힘든 우성이었다. “가자.” “뭐?” “곧 수업 시작해.” “…그럼 여기 왜 왔는데?” 단유는 가만히 있다가, 얼굴을 가리켰다. “너 씻으라고.” 그러고 보니 교실에서 나올 때도, 다른 교실을 지날 때도 단유는 우성의 옆에 서서 걸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시선을 가려주는 보디가드처럼. 하지만 진짜 그 때문이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지나친 억측일지도 모르고, 대놓고 물어보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단유는 가볍게 손을 씻고 화장실을 나왔다. 그 뒤를 아까와 같이 뒤따라갔다. 이번에는 분명히 단유가 자신보다 한발 앞서 걷는 모양새였다. 우성은 단유가 정확히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때 단유가 걸음을 천천히 하며 나직하게 말했다. “역지사지란 말 아냐?” “뭐?” “만약 내가 널 24시간 내내 때리고 괴롭히면 넌 어떨 거 같애?” 깜짝 놀란 우성이 자리에서 멈춰 서고 말았다. 단유도 걸음을 멈춰 서서는 우성을 돌아보았다. “학교 안에서나 밖에서나 눈에 띌 때마다 머리를 때리고 팔을 부러뜨릴 듯이 꺾고, 다리가 저릴 정도로 때리면 어떨 거 같애?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주먹으로 입을 때리고, 밥 먹으러 갈 때 니 목을 조르면 어떨 거 같애?”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단유였기에 우성은 더 큰 두려움을 느꼈다. “…혀, 협박하는 거야?” “그냥 물어보는 거야. 어떨 거 같냐고.” “…….” 우성은 단유라는 아이가 혹시 사이코패스 같은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진짜로 방금 말한 것처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경기장에서 자신의 목을 조를 때 보였던 눈빛도 심상치 않았던 것 같고. “선생님한테 이르면 두 대 때리고, 집에 가서 이야기하면 세 대 때리고, 경찰한테 이야기하면 네 대 때리고. 아무 말 안 하면 한 대만 때린다고 할 때, 넌 어떤 기분이 들어?” 우성은 저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그게 니가 추구하는 힘이란 것의 성질이야. 당장 주먹질이 오가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을 주눅 들게 하고 떨게 만드는 것. 24시간 내내 맞는 기분이고, 주변 사람들한테는 보복이 두려워서 말도 못 하게 하는 거. 그게 니가 추구하는 힘이야. 그런 힘을 원하는 거야?” 힘. “그런 식으로 주위 사람을 굴복시키려는 게 좋아? 그렇게 살고 싶은 거야?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어?” 단유는 몸을 돌렸다. “모든 건 상대적인 거야. 니가 추구하는 그 힘이 너에게 향할 때 어떤 기분일지 생각해.” 그러고도 모른다면 어쩔 수 없고. 단유는 교실로 들어갔지만, 우성은 교실로 들어가는 게 무서웠다. 단유 앞자리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뒤통수를 때리면 어떡하지? 그때,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손길이 느껴져 우성은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왜 이래? 너.” 오히려 때린 선생님이 더 놀라서는 우성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냐?” “아, 아니요.” “수업 종 친 거 몰라? 빨리 교실로 들어가.” 우성은 교실로 달음박질쳤다. **** “그러니까, USB를 찾으려고 학교에 왔다?” “네.” 장 형사는 머리를 긁적였다. “알았다. 일단 수업 시작한다니까 들어가 보고, 나중에 다시 부를 수도 있어.” “네.” 병호가 상담실을 나간 뒤, 장 형사는 호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여기 금연이랍니다, 선배.” “에이 씨.” 장 형사는 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린 뒤, 몸을 뒤로 기울였다. “두 명 더 있지?” “네.” “빨리하고 가자.” “한 시간 기다려야 할 걸요?” 사건 발생 후, 여러 가지 증거들이 수집되면서 꽤 빠르게 사건 수사가 진행되고는 있는데 범인만 윤곽이 잡히지 않았다. 지연이라는 선생이 제일 유력한 용의자임은 틀림이 없지만, 이렇다 할 확정적인 증거가 없어 송치를 못 하고 있는 판국이었다. 그 와중에 피해자 강상묵 이사장이 죽은 시간이 대략 금요일 3시부터 5시 사이라는 국과수의 의견에 더더욱 김지연의 알리바이가 흐릿해진 상황이었다. “1시 전에 이사장과 독대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후 김지연은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나갔고 그때까지도 이사장은 살아 있었단 말이지. 그런데 김지연이 다시 학교로 돌아온 시간이 3시 부근이고.” “김지연에게는 범행동기가 있어요.” “그렇지.” 이사장의 아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김지연의 진술은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교차 확인된 사항이었다. “범행동기로 보기엔 너무 어설프지만 말이야.” 장 형사가 못마땅한 눈으로 서류를 뒤적거렸다. “그래도 우발적으로 일을 저지를 수도 있지 않습니까?” 피해자는 골프채로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그 후, 책상 위에 놓인 중세 환도(環刀) 모양의 편지 칼로 경동맥에 자상을 입혔고, 이로 인한 과다 출혈이 원인이 되어 사망. “도구는 그대로 두고, 지문만 싹 지워나갈 정도라니.” 그 외에는 너무 많은 지문들이 남아 있어 범인을 특정하기 어려울 지경. 이사장실이라는 특성상 교장, 교감부터 행정직원과 몇몇 학생들까지도 들락날락했던 탓이었다. “아, 담배 피우고 싶네.” “조금만 참으십쇼.” “다음 누구야?” “어, 3학년인데요.” 그나마 당일 학교 외부 행사로 인해 학교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 용의자를 추릴 기회였다. 그런데 학교 정문 CCTV를 조사하던 와중에 묘한 장면이 몇 개 걸렸다. 아무도 없어야 할 그 시간에 몇몇 학생들이 정문을 조심스럽게 지나 본관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50만 화소도 안 되는 조악한 화질임에도 대략적인 얼굴을 알아볼 수 있어서 용의자를 추가 확보한 상황. 문제는 용의자가 학생이라는 점이었다. “얘가 담치기한 애야?” 4시쯤이 되었을 때, 학교 정문이 아닌 동쪽 담을 넘어 본관으로 들어가는 학생이 발견되었다. 한 명이 아니라 세 명이었는데, 화질 때문에 누구인지 알지 못할 뻔 했으나, 다행히 나갈 땐 정문으로 나간 덕에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네.” “나 참.” 장 형사는 범인이 학생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추측일 뿐이지만, 감이 그랬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일거리를 늘리는 작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 되겠다. 나 좀 나갔다 올게.” “학교 바깥으로 나가셔야 하는데요.” “교문 밖으로?” “네.” “요즘 애들은 학교 뒤에서 담배 피우고 안 그러나?” 후배 형사는 서류를 뒤적거리며 대답을 회피했다. “담이나 보고 올게.” 장 형사는 느릿하게 움직여 상담실 문을 열었다. 조용한 복도를 보니 괜히 어릴 적 생각도 나고 할 법한데, 장 형사는 괜한 짜증만 났다. “내 때는 화장실에서도 폈는데.” 설마 남선생님들 중에 화장실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이 없을까? 장 형사는 휘파람을 불면서 화장실로 향했다. ‘똥 때리면서 피우는 담배가 제맛인데.’ 장 형사의 걸음은 느긋했다. **** 교실로 돌아온 병호는 수업 시간 내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경찰이 들어와 금요일의 행적을 조사할 정도라면 뭔가 그 날 큰일이 났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날 벌어진 큰일이라면 역시, ‘USB!’ 해킹 프로그램은 불법 프로그램이고, 게임 회사 측에서 고발하면 형사 소송까지도 갈 수 있는 사항이었다. 즉, 병호는 범법자란 소리.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미친 듯이 땀이 나고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형사들에게는 중요한 ‘USB’ 디스크라고 했지, 그 내용물에 대해서는 진술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병호는 후회 중이었다. ‘USB 말고 다른 걸 찾으러 왔다고 말할걸.’ 너무 주눅이 든 상황이라 저도 모르게 USB라고 토설(吐說)을 하고 말았으니, 어쩌면 경찰들이 눈치를 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들이 먼저 찾은 걸까? 아니면 거래처가 들켜서 여기까지 쫓아온 거?’ 갖가지 망상과 상념들이 머릿속을 헤집는 통에 병호는 선생님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강병호!” 짝이 팔을 쳐서 알려준 뒤에야 병호는 선생님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잤어?” “…아닌데요.” “아닌데 왜 불러도 대답을 못 해? 뒤로 나가.” 병호는 의자를 끌며 일어나, 교실 뒤로 향했다. 아이들의 시선이 따라오는 게 느껴져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했다. 허나 그보다 더 심한 건 역시 사라진 USB의 행방과 경찰의 조사였다. ‘만약 경찰이 집에까지 찾아오면 뭐라고 해명해야 할까.’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어쭈? 야, 너 왜 울어?” 울먹거렸던 게 선생님의 눈에 걸렸다. “강병호. 너 왜 울어?”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병호에게로 쏠렸다. ‘왜 우냐’는 선생님의 물음이 더 병호의 가슴을 할퀴었다. 눈물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쏟아졌다. 병호도 왜 우는지 알 수 없는, 그런 눈물이 쏟아졌다. 마치 미취학연령의 아이처럼 고개를 저으면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아 소매로 눈을 가리는 병호를 보며 우성은 진한 동질감을 느꼈다. ‘무서워서 그래.’ 병호가 무엇을 무서워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렇게 우는 건 정말 너무 무서워서,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것이리라. 우성은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이게 역지사지란 걸까?’ 단유가 우성의 속내를 알았다면, 혀를 차고 말았을 일이지만 우성은 병호의 기분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 [360] 내 알 바 아닌데(4) “비공개 수사?” 장 형사가 흡연 후 상담실로 돌아왔을 때, 후배는 반장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비공개 수사라서 소문 안 나게 조심하라고.” 후배는 혹시라도 들릴세라 핸드폰을 한 손으로 덮으며 조용히 말했다. “미친.” 장 형사가 후배에게 손을 내밀자, 후배는 격렬하게 고갯짓을 했다. 의미 없는 짓이란 걸 알면서도. 장 형사는 후배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았다. “여보세요? 반장님? 반장님이시네. 우리 반장님이시네. 우리 반장님이 또 세상 물정 모르는 윗분들 때문에 전화하셨네. 그렇죠? 그니까 윗분들한테 이야기 좀 전해줘요. 여기에 사람만 천 명이 넘게 돌아다니고 있는데 비공개 수사가 말이 되냐고. 네? 아니, 그건 그쪽 사정이고, 우린 우리 사정이 있는 법이잖아? 에이, 반장님도 그렇게 이야기하면 섭섭하지. 여기 입이 몇 개고, 눈이 몇 갠데 그게 막는다고 막아져? 네? …반장님. 나 진짜 반장님이라서 내가 존나 참고 있는 거 알죠? 아니면 나 벌써 핸드폰 집어 던졌어.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 이렇게 스트레스 주는 거 아니다, 진짜. …맘대로 하라 해! 맘대로! 아 씨.” 장 형사는 진짜 핸드폰을 집어 던지려다 멈칫하더니 후배에게 가볍게 던졌다. 기겁하던 후배가 두 손으로 핸드폰을 잡아챈 뒤, 몰래 한숨을 쉴 때, 장 형사는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있어.” “뭐라고…하시는데요?” “몰라. 신경 꺼. 애들이 무슨 까막눈이야? 당장 이사장실 앞에 폴리스 라인을 대놓고 쳐놓은 마당에 말이야. 그걸 모르게 하라는 게 말이야, 방귀야!” 마침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가서 다음 애들 불러와.” 후배가 나간 틈에 좌우로 목을 꺾어보던 장 형사는 또다시 치밀어오르는 흡연 욕구를 참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거려 껌을 하나 꺼내 씹기 시작했다. 껌 속에 욕지기도 함께 섞어 질겅거리는 장 형사였다. ****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1교시가 끝이 났다. 병호 때문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 때문인지 선생님도 집중을 못 하고 수업이 진행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끝이 났다. 그런 분위기를 느낀 것이 단유 혼자만은 아니었는지, 수업이 끝났음에도 떠들썩하게 소란을 피우는 아이들이 많지 않았다. 두런두런 속닥이는 속에 차분히 쉬는 시간이 지나가나 싶은 때였다. “야, 이것 봐.” 한 아이의 외침에 마치 미어캣들처럼 한쪽으로 시선이 몰렸다. “뭔데?” “살인사건이란다. 이사장 죽었대.” 핸드폰을 치켜든 아이, 전일이 목청을 높여 떠들었다. 그러자 마치 무덤 속 좀비들이 부활한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괴성을 지르며 몰려드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전일은 핸드폰으로 받은 문자 메시지를 보여주며,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는 듯 들뜬 얼굴로 마치 속보를 알리는 앵커처럼 주절댔다. “주말에 이사장이 죽은 채로 발견됐나 봐. 그래서 아침에 이사장실 앞 복도를 사람들이 막고 있었나 봐.” 장 형사의 예측대로 눈과 귀가 많은 이곳에서 비밀이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도 10시가 될 때까지 사정이 밝혀지지 않은 채로 유지되었다는 게 오히려 더 신기한 상황이었다. 누구의 입에서, 혹은 누구의 눈에서 진실이 밝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번 드러난 이상 그 사실이 전교생에게로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문자와 SNS를 통해 전파된 ‘이사장의 죽음’은 곧 모든 학교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까지 알려졌고, 교무실에는 곳곳에서 걸려오는 확인 전화 때문에 선생님들은 쉴 틈이 없이 전화 응대를 해야 했다. “조용하게 넘어갈 리가 없지.” 상담실에 앉아 있던 장 형사는 벽을 넘어 전해지는 난리부르스(?)를 음미하며 껌을 씹었다. 그쯤에 상담실로 들어온 학생은 3학년이었는데, 중간고사 시험지를 훔치려 했다고 털어놓았다. 요즘도 이런 애가 있네, 라고 생각하던 장 형사는 학생의 머리를 때렸다. “착실하게 공부나 할 것이지…. 그리고 그것도 범죄야, 이 녀석아. 절도 미수라고!” “…죄송해요. 그런데 진짜 살인은 안 했어요.” 학생들도 다 알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잠시 스쳐 갔다. 장 형사는 범행에 참여했던 다른 아이들의 이름도 모두 대라고 윽박질렀으나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인지 소년은 입을 열지 않았다. “너 지금 용의자야.” “진짜, 진짜 살인은 안 했어요.” “니 말만 듣고 어떻게 믿어. 어느 범인이 내가 범인이요 하든? 제대로 안 밝히면 의심만 더 산다.” 소년은 침을 한번 꿀꺽 삼킨 뒤, 공범자 4명의 이름을 댔다. 후배 형사가 이 이름을 선생님에게 알려주었고, 선생님이 쿵쾅거리는 걸음으로 해당 학생들을 찾으러 갔을 때, 장 형사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절도 미수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교무실에는 늘 사람이 지키는 걸 몰랐어?” “그 날, 학교 축구부 결승이 있고 다들 경기장에 간다고 했으니까, 교무실에 아무도 없을 줄 알고….” “교무실 문이 잠겼으면? 따고 들어가려고? 너 자물쇠 따는 기술이라도 있냐?” “…….” 이런 얼치기 같은 ‘절도 미수범’ 같으니라고. 몇 마디를 더 나눈 뒤, 진짜 얼치기임을 확신한 장 형사가 혀를 찰 때, 선생님이 다른 학생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학교 와서 혹시 수상한 거 목격한 사람, 손?” 모두가 맞춘 것처럼 똑같이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침입한 시간은 CCTV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4시를 훨씬 넘긴 시간이었고, 때문에 범죄 발생 추정시간과 맞지 않았기에 또 한 번 장 형사는 혀를 찼다. 손을 내저으며 아이들을 선생님에게 넘겼다. “얘들은 학교에서 알아서 하세요.” 선생님은 달궈진 주전자처럼 콧김을 뿜어내면서 아이들을 끌고 교무실로 향했다. 다시 조용해진 틈에 후배가 장 형사에게 물었다. “잠깐 나가보니까요, 교무실이 꽤 시끄럽더라고요.” “여기서도 들린다.” 후배가 잠시 입을 다고 귀를 기울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비공개, 물 건너갔지?” “그런 것 같네요.” “됐다. 그게 뭐 중요하냐. 우린 범인만 찾으면 돼. 저건 저쪽 소관인 거고.” 말끝을 줄이던 장 형사는 탁자를 거세게 내리쳤다. 쿵, 하는 울림이 상담실을 채우고 후배를 움찔 놀라게 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범인이 안 나오는 거야?” “혹시 외부 인물은 아닐까요?” “CCTV 봤잖아? 범인은 이 안에 있는 게 틀림없어.” “아까 걔들처럼 담을 넘어서 왔을지도 모르잖아요.” 하지만 장 형사는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다. 계획범죄의 정황이 없는, 우발적인 살인인데 담을 넘어서 침입을 한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형사의 감은 ‘내부의 범인’을 가리켰다. “우발적 살인치고는 너무 깨끗하게 자신의 흔적을 지운 거 아닌가요?” “범인은 이사장의 목을 그은 뒤에도 한참을 이사장실에 남아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데 시간을 썼다. 그 말은 이사장실에 사람이 잘 출입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아는 내부자의 소행이란 뜻이기도 해.” “우발적 살인 후에 차분하게 자신의 흔적을 지운다고요?” “차분하지는 않았지.” 장 형사는 사진 몇 장을 꺼내 짚었다. “범행도구는 그 자리에 모두 뒀어. 몸만 빠져나간 거야.” “…….” “지문만 닦아내고 이사장실을 나갔어. 즉 도구들을 처리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는 거지. 용케 지문을 지우긴 했지만, 그렇게 넉넉한 시간은 없었다는 거다. 제대로 숨기지도 못했으니까.” 때문에 내부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자신의 공석이 길어지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 장 형사의 껌 씹는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 “넌 뭘 그렇게 열심히 하냐?” 도하는 옆자리에 앉은 단유가 반의 소란은 전혀 신경도 안 쓴다는 듯 미친 듯이 노트를 채우고 있는 모습을 보다가 물었다. 하지만 단유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도 계속 그러고 있더만.” 옆에서 훔쳐봐도 도대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본인의 지식이 부족한 탓에 알아볼 수 없는 점도 있었으니, ‘원소’라든가 ‘플라즈마’라든가 하는 단어가 한국사와는 관계가 없다는 정도 외에는 조금도 이해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사장이 죽었다는데 놀랍지 않아?” “놀라워?” 단유는 여전히 펜을 움직이는 채로 입을 열었다. “응.” “니 눈에 저게 놀라서 저러는 것처럼 보여?” 단유가 턱짓으로 가리킨 곳에는 마치 스탠딩 코미디쇼에 참석한 코미디언과 관중들의 공연장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놀라서 저러는 거지.” “…‘유희’야.” 한 시간 이상 쉬지 않고 노트를 빼곡히 채우던 단유는 잠시 펜을 놓고 손목을 돌리며 그 광경에 시선을 두었다. 우성과 도하가 싸울 때 둘러싸던 아이들의 눈빛이나, 지금 이사장의 죽음에 대해 요란스럽게 토론을 벌이는 모습이나 똑같았다. 지루한 일상에 던져진 이레귤러는 흥미 이상은 되지 않았다. “이사장이 죽었다고 당장 학교 문을 닫는 것도 아니고, 시험이 미뤄질 것 같지도 않고, 수업이 중단되지도 않을 테니까. 결국 똑같은 일상이겠지. 그런 생각이 기저에 깔렸다 보니, 살인이 벌어져도 실감이 안 나는 거야. 마치 TV 속 쇼 같은 느낌이겠지.” 현실과의 괴리감이 아이들에게 걱정이나 슬픔보다 흥미를 이끌어냈다. “유희가 뭔데?” 도하는 정말 궁금하다는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흥미거리, 같은 거야. 왜 죽었을까, 어떻게 죽었을까, 누가 죽였을까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재미있는 거야.” 저곳에 죽은 사람을 위한 애도는 없었다. 단지 살인이라는 사건에 대한 흥미만 가득할 뿐. 그때였다. “야, 강병호. 너 아까 경찰한테 갔었던 거지?” 한 소년의 물음에 주제가 바뀌었다. 질문을 받은 병호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고, 질문을 던진 이와 대답을 기다리는 이들의 얼굴은 기대감에 상기되었다. “혹시!” “설마!” “맙소사!” 몇몇 아이들의 과장된 몸짓은 분명 병호를 놀리려는 목적이 다분했다. 하지만 당사자는 그렇지 못했으니, 눈에 보일 정도로 어깨를 떨며 고개를 숙였다. “진짜 니가 했냐?” “에이, 설마.” “저 봐, 말 못하잖아? 니가 했어? 했어?” “했네, 했어.” 몇 번이고 느꼈던 일이지만, 이 나이의 아이들은 악의 없이도 짓궂게 굴었다. 아이들은 병호 옆에 다가와 어깨를 툭툭 치며 말 좀 해보라고 시비를 걸었다. 하지만 주눅이 든 병호가 입을 열 리가 없었다. 무섭고, 두렵고, 배신감이 들었다. ‘내가 지들한테 얼마나 많이 퍼줬는데.’ 아이템을 달라고 빌 때는 간이고 쓸개고 내놓을 것처럼 사근사근하게 굴더니, 갑자기 이렇게 돌변해서 괴롭히기 있기냐? “어머, 무서워라.” “어이쿠, 죄송합니다. 어이구, 그렇게 쳐다보지 마십쇼. 그러다 죽겠습니다.” 아이들은 깔깔대면서 병호를 놀렸다. “너 좀 있다 잡혀가는 거 아냐? 은팔찌 차는 거야?” “수업 중에 짭새들이 와서 은팔찌 채우면 웃기겠다. 그치?” 키득거리는 아이들을 보던 단유는 다시 펜을 집어 들자 도하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건 왜 하는데?” “공부.” “시험공부?” “아니.” “그럼 왜 하는데?” “…재미있어서.” 재미가 있으니까 하는 거다. 재미가 있으니까 집중해서, 몰입해서 빠져드는 것이다. 학교 수업을 등한시 할 만큼. 쉬는 시간이 끝날 때까지, 병호는 눈물이 핑 돌만큼 어깨를 떨어야 했고, 아이들은 그저 ‘장난으로’ 병호를 놀리다가 종이 치고 나서야 자리로 돌아갔다. 이번 시간은 수학 시간이었다. 수학 선생님이 근엄한 얼굴로 교실을 들어왔을 때, 평소와 다른 인상의 선생님을 보고 아이들은 수군댔다. 하지만 그런 수군거림에도 수학 선생님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전 시간에도 그랬고, 남은 시간에도 아이들이 보일 반응이 크게 다르지 않을 걸 알기에 그런 걸까? “수업 시간에 쓸데없는 잡담 말고, 잘 따라와라.” 평소라면 가벼운 농담으로 아이들의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수업을 진행했을 수학 선생님은, 대신 엄포를 놓았다. “다들 이빨 보이지 마라. 오늘 이빨 보이면 가만 안 둔다?” 아이들은 달라진 분위기에 바짝 얼어서 긴장한 채로 수업에 임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트 필기에 집중하는 단유 같은 케이스도 있었지만, 떠들지만 않는다면 선생님도 딱히 수업을 끊을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수업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수학 시간이었다. ======================================= [361] 내 알 바 아닌데(5) “저기, 형사님.” 장 형사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의 얼굴을 확인하니, 마른 턱에 눈이 퀭한 교감이 몸을 기울여 눈치를 보고 있었다. “예? 무슨 일이시죠?” 교감은 문을 닫고 상담실로 들어왔다. 실내에 사람이라곤 두 형사와 교감뿐이건만, 뭔가 눈치를 보는 사람 같았다. “혹시 김지연 선생님…이 한 건 아니죠?” 장 형사의 미간이 좁혀지는 것을 본 교감은 괜한 말을 꺼냈나, 하는 후회가 밀려듦을 느꼈다. “왜 물으시죠?” “아니, 그냥….” “아직은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기에, 답을 드릴 수 없군요.” 굳은 형사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단호함에 기가 눌린 교감은 말을 얼버무렸다. “아, 네.” “…혹시 달리 해 주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네? 아, 아닙니다.” 장 형사는 교감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딱히 어떤 감정이 깃든 것도 아니건만, 현직 형사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버텨낼 깜냥이 없던 교감은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그 시선을 피했다. “잠시 주변 좀 둘러봐도 될까요?” “주변이요?” “학교 전체가 현장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아, 예. 그러시죠.” 어찌 보면 엉뚱하다 여길만한 제안이었지만, 교감은 반갑다는 듯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후 장 형사는 후배와 함께 상담실을 나와 학교 중앙현관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표정이 많이 안 좋으신데요?” 나올 때까지 선배의 눈치를 보던 후배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나? 아냐. 안 좋긴.” 사실 장 형사는 조금 불쾌감을 느끼고 있긴 했었다. 어제 하루 동안 지연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교장이나 교감과 있었던 일까지 전해 들은 터였기 때문이다. “자기 딸이었으면 그렇게 했겠냐?” “네?” “아니다.” 학교가 신성한 교육의 장이란 것도 옛말이지, 라고 중얼거리며 장 형사는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후배도 어제 장 형사와 함께 자리했던 터라, 대충 선배의 마음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해서 후배는 말없이 선배의 뒤를 따랐다. “흠.” “왜요?” “어제 저기 다 뒤졌지?” 어느새 학교 뒤를 돌고 있던 두 사람 앞에는 쓰레기가 수북이 쌓인 쓰레기장이 보였다. 아직 치울 시간이 되지 않았던 탓에 제법 많은 쓰레기가 쌓여 있는 모습이었고, 일요일에 경찰들이 뒤졌던 탓인지 주위에 많이 흩어져 정리가 덜 된 모습이기도 했다. “네.” “우리 때는 소각장에서 다 태웠었는데.” “저희 학교는 제가 다닐 때 소각장을 없앴어요. 불법이잖아요.” “환경에 안 좋긴 하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둘러보다 돌아선 장 형사는 다시 학교 중앙현관으로 향했다. 중앙현관에서 오른쪽은 교장실과 이사장실이, 왼쪽은 행정실과 기타 부속실과 1학년 교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양쪽을 번갈아 보던 그는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가려다 몸을 돌려 행정실 방향으로 움직였다. 행정실을 지나면 부속실이 하나 나오고 그 뒤로 1학년 교실들이 기억자 복도를 지나서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수업 중이라 조용한 복도였다. 그 복도를 거닐며 수업 중인 교실들을 훔쳐보던 장 형사는, 가끔 눈이 마주치는 선생님을 봐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뒤에서 바라보면 진짜 산책을 하는 한량의 모습과도 같았다. “여긴 왜 오신 겁니까?” 아무리 봐도 수사 때문이라고 보긴 어려웠던 후배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그냥. 옛날 생각도 나고.” “옛날 생각이요?” “몇십 년 만에 학교를 찾았더니 이것저것 생각이 나네.” 말만 들으면 마치 향수에 젖은 노인네가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 추억을 더듬는 모양새지만, 당사자의 얼굴은 이보다 무심할 수 없다는 듯 감정이 깃들지 않은 눈으로 주위를 살펴볼 뿐이었다. “예전에 말이야.” 1학년 교실이 있는 1층 복도의 끝에 다다를 무렵, 장 형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예전에 체육 시간에 나가면, 바지를 벗겼어. 내복을 입고 있는지, 없는지 검사를 하기 위해서. 내복을 입으면 건강하지 않다고, 튼튼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나 봐. 그래서 ‘내복 안 입기 운동’ 같은 걸 하고 그랬지.” 그런 것도 있었나 싶어 어리둥절해 하는 후배의 의문과 상관없이 장 형사는 말을 이었다. “교실에서 담배를 피우던 친구가 있었어. 쉬는 시간이었는데 선생님한테 안 들키려고 커튼을 두르고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담배 연기를 뿜었지. 담배 연기를 뿜어낸 후에는 우리를 보면서 웃었어. 아마 자신이 그만큼 용기 있다고 뽐내고 싶었던 거겠지. 그런데 창밖으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걸 선생님이 보셨나 봐. 교실로 달려 들어와서는 그 아이의 머리를 붙잡고 미친 듯이 때리더라고.”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 동안에도 주절주절 장 형사는 과거의 이야기를 떠들었다. “손에 쥐고 있던 담배를 놓쳤는데, 그게 커튼에 검은 구멍을 냈지. 별로 크진 않았지만, 그게 또 선생님의 눈에 띈 거야. 그 아이는 얼굴이 부풀어 오르도록 맞았어. 나중에는 고막이 나갔다는 거야.” 후배는 선배의 이야기가 사건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몰라 계속 머리를 굴렸다. “결국, 아이는 전학을 갔어. 정학당하는 대신 말이야.” “예?” “선생님은 그 뒤로도 계속 학생 주임을 맡았고.” “아이가 그렇게 심하게 다쳤는데도요?” “내게 학교는 그런 곳이야.” 2층에 오른 장 형사는 다시 교실 안을 훔쳐보며 복도를 걸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 말 없었나요?” “다른 사람들? 누구?” “뭐 학생들이라던가, 학부모들이라던가.” “승진가산점을 덜 받았을지도 모르지.” “네?” 장 형사는 2층 복도를 지나 교무실에 이르렀다. 교무실 안에는 아까보다는 덜해도 전화가 많이 울리는 중이었다. 몇 안 되는 선생님들이 전화를 받으며 응대를 하는 중이었는데,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장 형사는 상담실로 돌아갔다. “영식아.” “네.” “지한영이 조사 좀 해봐라.” “지한영이요?” 살인사건 당시 병원에 있었음이 확인된 상태였다. “범인이 누구든, 동기는 학교 문제는 아닐 거 같다.” “왜요?” “학교에 동요가 없어.” 그걸 그냥 둘러본 것만 가지고 안다고? 요즘 시대가 어떤…. “1학년 4반, 2학년 2반에서 수업을 하고 있던 선생님들이 당시 지연과 함께 학교에 남았던 선생님들이었어. 그런데 그 선생님들, 날 보면서도 동요가 없었어. 그리고 김지연 씨에 대해 물어본 사람도 교감 선생님뿐이야. 물론 그것도 자신이 벌인 짓이 어떤 관련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어서겠지.” “하지만 전부 추론일 뿐이지 않나요? 증거가 없잖아요.” 장 형사는 탁자 위에 놓여있던 메모지에 ‘지강목’이라는 이름을 적었다. 이름 주위로 원으로 그리고는 사방으로 줄을 그었다. “죽은 이사장의 사회적 위치를 고려하면 여러 방향으로 동기를 생각해 볼 수 있어. 그중 한 줄기가 학교야.” ‘학교’라고 적는 장 형사의 펜이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만약 학교 내부 문제가 범행동기라면, 김지연 씨가 용의자로 붙잡혀 있는 이 상황에서 다들 그 문제가 어떻게 변화될 것인지 관심을 기울일 거야. 하지만 특별히 그런 낌새가 느껴지지 않는, 보통의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는 건, 학교 내부에서 논란이 될 만한 문젯거리가 없다는 거지. 그렇다면 다른 쪽으로 방향을 살펴보는 게 좋지 않겠어? 예를 들면.” ‘학교’와 반대편에 선을 죽 긋더니 ‘지한영’이라고 이름을 적었다. “괜히 김지연 씨가 용의자로 지목된 것은 아닐 거란 말이지.” ‘지한영’이란 이름 위에 덧씌워지는 원이 점점 두꺼워지고 있었다. 영식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상담실을 빠져나갔다. 나가기 전 다시 확인했다. “그럼 학교에서는 조사할 게 없나요?” “나 혼자 해도 충분해. 가봐.” “네.” 영식은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몸을 돌렸다. **** 지나치게 엄숙했던 수학 시간이 끝나고 다시 쉬는 시간이 되었어도, 교실의 화제는 단연 ‘이사장의 죽음’에 있었다. 그리고 몇몇 아이들은, 병호에게 달라붙었다. “말해봐. 응? 경찰이랑 무슨 말 했었는데?” “…….” “금요일에 학교에 왜 왔는데? 진짜 이사장이랑 한 판 뜨려고?” “병호야, 현실은 게임이 아니라니깐?” “게임중독이라 그래.” “이래서 사람들이 중독, 중독 하는구나.” 병호가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멀리 앉은 도하에게도 보일 정도였다. 도하가 단유를 돌아보니, 여전히 노트에 필기 중이었다. 살면서 이토록 필사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던 도하는 신기하다는 듯 단유를 보았다. “왜?” 시선의 집요함을 못 이긴 단유가 물었다. “아니. 이렇게 공부하니까 전교 1등을 하나보다 싶어서.” 단유는 펜을 놓았다. 너무 오래 펜을 쥐고 있었는지, 손바닥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방해한 거야?” “조금. 그런데 손이 아파서 놓은 거니까 신경 쓰지 마.” “넌 누가 너 신경 쓰는 거 되게 싫어하나 보다.” “…꼭 그런 건 아닌데.” “넌 착한 놈은 아니지?” 단유는 한쪽 눈을 살짝 찡그리며 뜬금없는 인물평의 의미를 물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만약 나나 우성이가 너한테 시비를 걸지 않았다면, 우리가 뭘 하든 신경을 쓰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건데?” 도하가 병호를 가리켰고,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사정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일에 시시비비를 가릴 수는 없잖아. 그리고 저런 일이라도, 저건 내가 도울 문제가 아니지.” “그래?” 단유는 병호 쪽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너 성격 이상한 거 아냐?” “내가 왜?” “지금 저쪽을 가리킨 의도가 있을 거 아냐? 정 마음이 동하면 니가 직접 해.” “내가? 왜?” 단유는 도하가 시치미를 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는 별로 말도 걸지 않던 애가, 이제는 틈만 나면 툭툭 건들면서 말을 건다. 편해지려고 같이 있고 싶다더니, 진짜 편해졌나 보다. “아니라고!” 병호 쪽에서 거친 소리가 터졌다. 병호가 시뻘게진 눈으로 벌떡 일어나서 고함을 친 것이다. “이 새끼야! 놀랐잖아!” “새끼가 왜 이래? 야, 너 미쳤냐?” “왜 장난을 진심으로 받고 지랄이냐? 너 진짜 뭔 짓 했냐? 아니면 왜 그러냐?” 아이들은 도리어 병호를 타박했다. 병호는 분기를 참지 못해 소리를 질렀지만, 곧 주위 아이들의 타박에 거품 빠진 사이다처럼 기운을 잃고 힘이 풀렸다. 그때 쾅,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반의 학생들이 순간적으로 놀라 입을 닫고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야. 적당히 해라.” “어?” 아이들이 돌아보니 도하가 주먹을 쥐고 책상을 강하게 내려쳐 소리를 낸 것이었다. 한동안 조용히 지내고는 있었다지만, 도하의 클래스(?)가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시끄러워서 단유가 공부를 못하잖아. 단유 공부 못하면 니들이 책임질 거야?” 단유의 이마에 힘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야, 임마. 거기서 왜 내 핑계를 대?” “어? 너 나한테 욕했어?” “와, 이놈아! 지금 그게 중요하냐?” “너도 욕할 줄 아는구나.” “아놔.” 아이들이 영문을 몰라 할 때, 단유는 한숨을 내뱉고 병호와 그 주위의 아이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야. 니들 하던 거 계속해.” “뭐?” “병호 괴롭히던 거 계속하라고. 신경 안 쓸 거니까.” “…….” “다른 애들도 별로 신경 안 쓰는 거 같으니까, 계속하던 거 해. 도하는 내가 얌전하게 있도록 할 테니까.” 아이들의 시선이 병호 쪽으로 몰렸다. 이제 병호 주위의 아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당장 멍석을 깔아주면, 머뭇거리게 마련이었고, ‘괴롭힌다’고 정의까지 내린 마당에 누가 계속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누구 하나 제자리로 돌아가지도 않았으니 묘한 대치 형국이 되었다. “안 할 거면 그만 괴롭히고 돌아가.” 이게 참 3반의 묘한 분위기 중 하나였다. 분명 단유는 반장도 아니고 그의 말을 따를 이유가 하나 없는데도, 기존의 단유라는 아이가 가지고 있던 ‘전교 1등’이라는 이미지와 도하와 우성이라는 두 ‘주먹’을 힘으로 누른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겹쳐서 그를 무시하지 못하게 하는 게 있었다. 아이들은 그것에 대해 정확히 정의를 내리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일종의 ‘권위’였다. 그리고 ‘권위’에 복종하도록 교육받는 아이들은, 단유의 말을 쉽게 무시하지 못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슬금슬금 움직이는 아이들은 스스로도 그렇고 지켜보는 이들도 이 모습에 대해 비웃을 수 없었다. ‘김단유’가 돌아가라고 했으니까. 그리고 마치 이 모습을 예상했다는 듯, 도하가 씩 웃음을 지었다. “왜 웃어?” “욕먹어서?” “아놔.” 단유는 도하의 뒷머리를 툭 쳤다. “이제 때리기도 하네.” “너랑 있으니까 진짜 사람 이상해지는 것 같다.” “좋은 게 좋은 거야.” “진짜 말 좀 생각하고 말해.” “조용하니 좋잖아?” 단유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다시 펜을 들었다. 어쨌든 교실은 조용해졌고, 다시 노트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으니.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지 뭐. ======================================= [362] 내 알 바 아닌데(6) 어수선한 교실 분위기는 오전 내내 계속되었다. 수업 시간에도 아이들은 좀처럼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분위기였고, 몇몇 선생님들이 다그치기도 했지만, 효과는 별로 없었다. “시험이 며칠 남았다고 정신들 빠져 있어? 오늘 수업에서 시험 문제 나온다고 했지? 정신들 차려!” 사실 선생님들이라고 온전히 수업에 집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솔직히 학생들이야 이사장이 무슨 관계가 있겠냐 만은, 선생님들의 경우에는 마치 회사 사장님이 살해당한 꼴이나 마찬가지니 부하직원으로서 영향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 점심시간이 되었다. 단유와 도하는 점심을 먹기 위해 중앙계단을 지나 식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아이들이 모여있는 모습이 눈에 띄어 살피니, 이사장실 앞에서 힐끔거리며 정황을 파악하려는 아이들이 모여있던 탓이었다. 이사장실 앞 복도에 서 있던 사복 차림의 두 사람이 경찰로 판명되었음에도 두 사람은 정복으로 갈아입지 않았는데, 윗분들이 여전히 ‘비공개’를 원칙으로 정한 탓이었다. “저리 가라.” 점잖게 아이들을 물리려는 경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호기심이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동물원 원숭이도 이보단 낫지 않을까, 란 생각에 이맛살을 찌푸리는 경찰들은, 그래도 차마 중학생에 불과한 아이들에게 큰소리를 내기 힘들어 묵묵히 버텨낼 뿐이었다. 물론 단유는 그런 쪽에 관심이 없었다. 머릿속에는 얼른 식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하던 작업을 이어가는 것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도하도 달리 호기심을 보이지 않은 채 그저 단유의 옆을 지켜 걸음을 맞출 뿐이었다. 두 사람이 중앙현관을 빠져나올 무렵, 단유의 이름을 부르며 따라오는 이가 있었다. “단유야.” 돌아보니 병호였다. 귓불이 빨갛게 물든 병호는 단유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인사는 도하한테 해. 난 아무것도 안 했어.” 쭈뼛대며 도하에게도 고맙다, 인사하는 병호는 분명 도하를 두려워하고 있음이다. 도하도 딱히 인사를 바라지 않았는지 쿨하게 손을 저어 별거 아니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인사가 끝났음에도 병호는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뒤에서 두 사람을 따라왔다. 식판을 받아 테이블에 앉을 때도 잠시 주저하긴 했으나 단유네와 마주 앉아 식사하기 시작한 병호였다. 그런 병호를 살펴보니, 단유와 도하의 눈치를 볼 뿐만 아니라, 주변 아이들의 시선까지도 신경 쓰는 모습이라 단유는 병호의 속내를 짐작해볼 수 있었다. 도하 역시도 병호의 속내를 짐작했던지, 침묵을 깨트리고 입을 열었다. “우린 보호자가 아냐.” 병호가 무슨 말이냐는 듯 도하를 바라보다 또 한 번 얼굴을 붉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나가던(?) 도하였다. 도하 옆에 줄 서 보겠다고, 붙어서 ‘셔틀’ 하던 애들이 없었을까? “아니, 그게 아니고….” 도하는 이미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는 듯, 병호에게 관심을 끊고 식사를 이어나갔다. 그 모습을 불안하게 보던 병호는 힘겹게 말을 꺼냈다. “사실은 금요일에 학교에 왔었거든. 경기 끝나고. 그런데 그게 학교 CCTV 있잖아? 정문에. 거기에 찍혔나 봐. 그래서 경찰이 왜 학교에 왔냐고 물었던 거야. 절대 이사장 이야기는 안 나왔어.” “안 물어봤다.” 도하는 국을 한 입 떠먹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너무 짠데?” “그냥 먹어.” 딱히 까다로운 입맛도 아닌 단유인지라, 대신 밥을 두 숟가락 정도 먹고 반 숟가락 정도 국을 떠먹는 식으로 자체 해결 중이었다. “금요일에 살인 사건이 난 거야. 그 시간쯤에. 그런데 그 시간에 학교에 있던 사람이 몇 없잖아? 그래서 다 조사 중이었던 거고. 그래서 조사받은 건데, 난 알리바이가 있어서 아무 죄가 없대. 난 4시쯤에 왔으니까, 그 전에 사건이 난 거지.” 실제로는 누구도 병호에게 ‘죄가 없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 ‘무죄’라고 확신을 주려는 듯, 악센트를 넣어 강조하는 병호였다. “안 궁금하니까, 그냥 밥이나 먹어라.” 도하는 젓가락을 들어 병호를 가리켰다. 병호는 그 위협적인 동작에 입을 다물었다. 이후 다시 얌전하게 식사를 재개한 도하는 김치도 짜네, 라며 중얼거렸다. 반면 단유는 잠시 숟가락질을 멈추고 병호를 바라보았다. “왜? 뭐, 궁금한 거 있어?” 뭐든 물어봐, 다 대답해줄게, 라는 자세로 질문을 기다리는 병호를 보던 단유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밥 먹어.” 단유는 머리를 긁적였다. 생각해보니, 조금 수상한 점이 마음에 걸렸다. ‘학교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수사 중이다?’ “야, 비듬 떨어져.” 도하의 말에 단유는 무의식적으로 아래를 바라보았다가 도하를 쳐다보았다. “농담이야.” 단유는 입을 살짝 벌렸다가 이내 포기하고, 다시 식사를 재개했다. 그게 다 무슨 상관이야. 지금은 빨리 밥 먹고 교실로 들어가서 뉴턴의 제2 법칙에 관한 지식을 정리해야 한다. **** 한편 비슷한 시각, 상담실에서 마지막 학생까지 조사를 끝낸 장 형사는 기지개를 켜며 찌뿌둥한 몸을 움직였다. 수업에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게 학생들을 부르다 보니, 몇 안 되는 학생들을 조사하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린 탓이었다. 마침 핸드폰에서 기본 벨소리가 울렸다. “여보세요.” 파트너인 영식이 짧은 시간에도 조사가 충분했던지, 중간보고를 했다. 몇 사람 안 만나봤지만, 공통적으로 ‘지한영’이란 인물이 소위 ‘개망나니’같은 짓을 저지르고 다녔다는 진술이었고, 이런 아들의 뒤치다꺼리를 ‘이사장’이 줄곧 해오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원래 자식새끼가 사고 치면 부모가 뒤치다꺼리하는 거야.” 평범한 아들이었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돈 많고 인성이 그릇된 젊은 남자라면 좀 더 과격한 사고를 칠 수도 있다는 영식의 설명이었다. 폭력, 음주, 강간 등의 혐의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는 말에 장 형사는 혀를 찼다. [지금 병원에 입원한 것도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일으켜서라는데요.] “음주운전? 그런데 왜 아무 말이 없어?” [그러니까 아버지가 뒤처리를 했다는 거죠.] “경찰에도 힘을 썼다는 이야기야?” 장 형사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영식은 제가 한 것도 아닌데 괜히 기가 죽어서는 ‘그런 것 같아요’라고 답변했다. “더 알아보고, 서에서 보자. 나도 여기 대충 마무리 짓고 서로 갈 테니까.” 장 형사는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지연의 증언에 신빙성이 더해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범행동기로서 충분하다고 여길 부분이기도 했다. 아들이 치근대는 여자를 따로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지연의 말처럼 ‘며느리’로 생각하며 일상적인 대화만 나누었을까? 그 이상은 소설 같은 추리에 불과하니, 일단은 조금 더 조사를 해봐야 하겠다. 우선 지연을 다시 소환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장 형사는 중앙계단을 내려왔다. “야, 니들 뭐야. 저리 가.” 이사장실 근처에서 서성대던 아이들을 말 한마디로 내쫓으니,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장 형사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경찰들이었다. “바보냐? 지금 학교 전체가 다 알고, 학부모들도 다 아는 일이야. 조만간 언론사에서도 와서 취재하려고 달려들 텐데, 멍청하게 시치미나 떼고 있으니 그런 구경거리나 되는 거잖아? 그냥 사건 현장이라고 말하고 다가오는 사람 있으면 다 내쫓아.” “하지만 반장님이….” “반장 같은 소리 하고 앉아있네. 야, 내가 책임질 테니까 그냥 내쫓아. 뭐냐, 이게. 경찰 가오 떨어지게.” 장 형사는 경찰들의 경례를 받으며 중앙 현관을 벗어났다. 바깥 공기를 쐤더니 도리어 담배가 생각났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오전 중에 봤던 쓰레기장을 떠올렸다. 그 뒤편이 주변의 시선을 잘 끌지 못할 것 같더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걸음을 옮긴 장 형사는, 그곳에서 미리 자리를 잡고 있는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 새끼들이….” 헛웃음을 짓는 장 형사를 보고 급히 담뱃불을 꺼뜨리는 학생들이었다. “동작 그만.” 지금 이 시각, 선생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험악한 인상의 사복 차림 남자라면 당연히 ‘경찰’임을 모를 수 없던 아이들은 굳은 얼굴로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리며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 시작했다. “머리 돌아가는 소리가 아주 요란하다 못해 시끄럽다, 시끄러워. 내가 니들 얼굴 모를 것 같아서, 지금 튀면 괜찮을 것 같냐? 어디 한 번 튀어봐. 내가 한 놈만 잡아서 수갑 채운다.” ‘수갑’이란 단어에 아이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하지만 학교에서 흡연을 할 정도의 아이들이라면, 당연히 깡이 있기 마련.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수갑 차요? 뻥 치지 마요.” “허? 이것 봐라?” 장 형사가 기도 안 찬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며 아이들을 꼬나보기 시작했다. “그래, 흡연이 당장 무슨 죄는 아니지. 그런데 니들 담배는 어디서 났냐? 설마 청소년 담배 구입이 합법이라고 우길 건 아니지?” 아이들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느끼며 장 형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씨발!” 누군가의 욕설에 장 형사의 눈썹이 꿈틀댈 때, 아이들은 재빨리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요놈들 보소?’라는 생각으로 장 형사 역시 쫓아가려는데, 아이들이 여간 날쌘 게 아니었다. 게다가 미리 탈출 경로(?)를 정해 놨던 것인지, 무작정 달리는 게 아니라 주변 지형지물을 활용하며 몸을 피해 달아났다. 그러다 보니 장 형사가 쉽게 그들을 쫓기가 어려웠다. 물론 장 형사도 적극적으로 그들을 쫓을 생각은 없었다. 당장은 자리에서 쫓아낸 것만 해도 충분했으니까. “아이구, 개새끼들. 커서 뭐가 되려고. 쯧.” 장 형사는 아이들이 버리고 간 장초들을 발로 툭툭 쳐서 모은 뒤에 뒤꿈치로 살살 비벼 불씨를 완전히 없앴다. 그 상태에서 곧 자신의 담배를 꺼낸 뒤 불을 붙이고 연기를 뿜어냈다. 하얗게 구름을 만들어 흩어지는 연기를 바라보며 장 형사는 ‘인생무상이라’ 중얼거렸다. 밥을 먹고 나와서 다시 교실로 돌아가던 단유와 도하는 학교 본관 건물 뒤편에서 달려 나오던 한 무리와 마주쳤다. 2, 3학년이 섞인 학생들은 두 사람을 지나 운동장으로 달려가는데, 도하가 불렀다. “야, 유우성.” 무리 중에 섞여 있던 우성이 도하의 부름에 뜀박질을 멈추고 단유와 도하를 바라보았다. 단유와 눈이 마주쳤을 때, 살짝 눈꼬리가 올라가는 듯도 했지만, 몸은 단유에게서 멀어지려는 듯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모양새를 취했다. “선생님한테 걸렸냐?” “…뭔 상관인데? 신경 쓰지 말라며!” 단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냥 가.” 우성이 단유를 노려보며 사라지는 것은 보던 도하가 짐짓 감탄하는 척을 했다. “저 새끼가 저런 놈인 줄 몰랐네.” “뭐?” “아니, 저렇게 깡다구가 센 놈인 줄 몰랐다고.” 어지간하면 단유에게 기가 죽을 만도 한데, 금세 잊어버리고 또 저렇게 날을 세우는 모습을 보니 보통 깡이 아니다 싶었다. 단유는 뭔 얘긴가 했다 싶어 피식 웃음을 보인 뒤, 교실로 들어가려 했다. “누구 남았나 본데?” “뭐?” “저 뒤에.” 비록 거리는 멀지만, 저렇게 드러내고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모습을 보이면 누구라도 눈치를 채지 못할 리 없었다. 보통 아이들은 연기가 잘 보이지 않게 아래로 연기를 뿜어냈으니까. “가 보자.” “너 혼자 가.” “같이 가 보자.” “왜?” “착한 짓 좀 하려고.” ‘얘가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됐나?’라는 생각이 들 때, 도하는 단유의 팔을 붙잡고 학교 건물 뒤로 향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것은 학생이 아닌 어른이었다. 눈에 익은 사람이 아닌 것을 보니 이 학교 선생님은 아니었고, 복장도 선생님의 복장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분명 ‘경찰’일텐데. “경찰은 학교에서 담배 피워도 돼요?” 도하는 ‘착한 짓’을 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인지, 아니면 ‘경찰’에게 한 방 먹일 기회를 잡아서 신이 났던 것인지, 아니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지른 것인지 경찰에게 ‘훈계’를 시전했다. “뭐?” “민중의 지팡이가 학교에서 담배 피우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래가지고 무슨 법을 지킨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도하를 바라보는 장 형사의 시선이 옆에서 관자놀이를 툭툭 치고 있는 아이에게로 옮겨졌다. “니들 뭐냐? 설마 니들도 여기 담배 피려고 왔냐?” “아닌데요.” “그럼 여기 왜 왔어?” “저기서 보니까 담배 연기가 보이길래, ‘선도’하려고 왔어요.” “선도부냐?” “우리 학교는 선도부 없어요.” “선도부가 없는 학교도 있어?” “요즘은 선도부 없는 학교도 있어요.” “그럼 아침에 학교 앞에서 복장 검사 같은 거 안 하냐?” “그건 지도 선생님이 하시는데요.” “학생들은 안 하고?” “네.” “하긴 선도부가 약간 불량 써클처럼 변한 곳도 있으니까, 없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 시간에 공부나 하는 게 낫지.” 흡연이 불법인 학교 내에서 버젓이 담배를 태우는 경찰과, 어디로 튈지 모르게 마음 내키는 대로 말을 꺼내는 ‘맥락 파괴범’ 도하의 대화는, 옆에서 지켜보는 단유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 [363] 예언과 예측 사이(1) “나 간다.” 애초에 흥미도 없이 끌려왔던 단유가 걸음을 옮기자 도하가 ‘같이 가자’며 단유 옆에 붙었다. “어이, 거기.” 이번에는 장 형사가 두 사람을 불렀다. 돌아보는 두 사람을 보며 장 형사는 불씨를 바닥에 비벼 꺼뜨린 뒤 물었다. “너희들 혹시 아까 도망친 놈들 패거리 아냐? 내가 갔나 안 갔나 확인하러 온 거 같은데?” “그런 거 아닙니다.” 단유가 단호하게 선을 긋고서,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뒤 몸을 돌렸다. 도하가 아무 말도 안 했다면, 그대로 교실로 들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얘, 전교 1등인데 싸움도 잘해서 걔들은 찍소리도 못할 걸요?” “진도하!” “오호? 전교 1등? 뭐로? 싸움으로?” “전교 1등을 무슨 싸움으로 해요? 공부로 하지.” 장 형사의 눈이 조금 커졌다. “진짜 전교 1등? 공부로?” “네.” “진도하!” 도하를 노려보던 단유는 혼자 가겠다며 발걸음을 뗐다. “잠깐만, 거기.” “김단유에요. 쟤 이름.” 단유는 걸음을 멈추고 순진한 얼굴인 ‘척’하는 도하를 째려보다가, 형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왜요?” “진짜 전교 1등이야?” “그게 왜요?” “아, 신기해서 그러지. 전교 1등 하는 애들은 어찌 생겨먹었나 궁금하기도 하고.” “아, 네. 볼일 끝나셨으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잠깐만, 왜 이렇게 급해? 화장실 가고 싶어서 그래?” “그런 거 아니고요, 가서 공부할 게 있어요.” “이야, 전교 1등은 핑계도 멋지구나.” 진심인지, 놀림인지 모를 장 형사의 어투에 살짝 짜증이 난 단유는 그 마음을 담아 물었다. “그게 끝인가요? 신기한 얼굴 다 보셨으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하나만 물어보자.” 장 형사는 얼굴에 미소를 지웠다. “이 학교 이사장에 대해서 혹시 아는 이야기 같은 거 있니?” “어떤 거요?” “뭐, 이를테면….” 장 형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 그런 이야기들 있잖아? 사립 학교라면 으레 건물 공사비와 관련된 비리라든가, 운동장 부속시설 건립을 핑계로 학교공금을 횡령한다든가.” 단유는 헛바람을 뱉으며 조소하듯 답변했다. “이제 겨우 중학교 2학년인 저희가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알 거라고 생각해요?” “중 2면 알 거 다 알지 않나?” 엉뚱하게도 도하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단유는 도하를 흘깃 본 후,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그런 이야기는. 관심도 없고요.” “너는?” “저도 모르겠는데요?” 장 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이사장과 관련해서 너희들이 아는 소문 같은 건 없단 말이지? 이사장이든, 이사장 아들이든, 이사 재단에 대해서든?” “네.” 깨끗한 재단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학생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였고, 게다가 주변의 가십거리에 관심 없는 단유로서는 알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혹시 범인이 누구예요?” “이사장 말하는 거냐?” “네.” “됐어, 진도하. 그냥 가자.” 단유는 도하를 제지했다. 더 할 말 있냐는 듯 형사를 바라보니, 형사도 더 이상은 궁금한 게 없다는 듯 고개를 살짝 저었다. 자신의 추측대로 학교 내부에 논란이 될만한 문제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저 아이가 좀 특별한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학교의 논란이 발생했을 때 아이들이 모를 수 없는 법이니까. 굳은 얼굴로 상념에 빠진 형사를 보던 단유가 교실로 향하려다 멈칫했다. 잠깐 주저하더니 형사를 향해 물었다. “학교에 있던 사람들을 조사 중이었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응? 뭐, 그래.” “그럼, 금요일에 학교에 있던 사람들을 다 조사 중인 거죠?” “…근데 그걸 어떻게 알았어?” “우리 반 애도 조사받았다던데요?” 도하의 대답에 장 형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쉬쉬하며 불러도 알 사람은 다 아는 법이다. 이러니 ‘비공개’가 어림도 없는 거지. “너희들한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아무튼 고맙다. 이만들 가라. 가서 공부나 열심히 해. 그리고 니 관상을 보니까, 딱 공부 못하게 생겼는데, 옆의 친구 좀 본받고 그래라. 건방지게 경찰한테 따박따박 말이야.” 끝말은 분위기를 좀 풀어보려고 농담조로 한 말이었기에, 도하도 딱히 기분 나쁘지 않다는 듯, ‘수고하세요’라는 말로 인사를 끝냈다. 반면 단유는 그런 형사를 잠시 바라보다 이내 도하와 함께 몸을 돌렸다. 중앙현관을 지나칠 때쯤, 도하가 단유에게 물었다. “아까 경찰한테 무슨 말 하려고 했던 거 아냐?” “…별거 아냐.” 여전히 1층 중앙현관의 오른쪽 복도는 두 경찰관이 가로막고 있었고, 왼쪽의 행정실을 지나는 복도는 어수선한 분위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지나가면서 눈치를 볼망정, 멈춰 서서 구경하는 모양새는 줄었다. **** “니네 학교에 살인 사건 났다며?” 정말 소문이란 게 이렇게 빠르구나, 라는 걸 느꼈다. “어떻게 알았어?” “소문 다 퍼졌던데?” 상미는 호들갑을 떨면서 무슨 일이냐고 캐물었고, 어떻게 이야기를 들었는지 명수가 패드를 내려놓고 자기가 들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지태와 채윤이 드레싱을 곁들이듯 설명을 덧붙이다 보니, 단유도―원치 않았지만―나름의 사정을 파악할 정도가 되었다. “와, 그럼 혹시 선생님이 한 거 아냐? 그때 애들은 전부 경기장에 갔었다며?” “처음부터 경기장에 안 간 애들도 있고, 경기 끝나고 학교로 간 애들도 있대.” “정말? 그래도 애들이 살인을 했다고 하기엔 좀 그렇지 않나?” “모르지. 솔직히 사람 죽이는 게 어렵나? 그냥 칼로 푹 찔러도 죽더만.” “마치 해 본 사람처럼 말한다?” “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영화 보면 그렇잖아? 칼로 배 한 번 찌르면 다 죽는데.” “안 죽는 사람도 있어.” “그건 주인공이니까 그런 거고.” “주인공 친구도 안 죽어.” “죽을 때도 있어.” “얘들아.” 단유는 손가락을 튕겨서 아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시험공부 하러 왔으면 공부를 해야지?” “선생님, 화났어요?” 상미가 장난스레 애교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랬지?” “알았어요, 선·생·님!” 단유는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애들에게 건넸다. 단유가 줄곧 지식을 정리하느라 채웠던 노트가 아닌, 특별히 친구들의 시험공부를 위해 만든 노트였다. “과목당 암기해야 할 부분이랑 중요한 부분 체크해 둔 거니까, 그거 보고 공부해.” “어?” 평소라면 단유가 하나하나 짚으며 설명을 해 줄 텐데, 이번에는 노트 보고 ‘알아서’ 공부하라고 하니 의아해진 지태가 물었다. “화나서 그래?” “아냐. 난 따로 할 게 있어서.” “따로?” “응.” 단유는 자신의 노트를 챙겨 방에 들어갔다. 펜을 들어 화학 분자식을 쓰고 공유결합(covalent bond)에 관한 지식들을 채워 넣으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공유결합은 결합 되어 있는 원자들이 전자를 서로 공유한다. 그리고 이 결합을 끊는 데 필요한 에너지는….’ 화합물의 다양한 결합방식 중 하나인 공유결합은 원자가 보유한 전자를 서로 내놓고 이를 결합하여 분자를 형성하는 형태를 설명한다. 안정된 형태의 분자들을 설명하는 유효한 방식인 공유 결합에 대해 지식을 정리하던 단유는 문득 펜을 멈췄다. ‘공유, 결합, 안정.’ 이 세 단계는 여러 방식으로 패러다임화 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식의 예를 들어도,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여 결합하면, 혼자만의 지식보다 풍부한 지식을 재정립할 수 있고, 편견이나 오류를 범할 위험을 줄이면서 안정적인 지식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 실제로도 그런 방식으로 학습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여러 사람의 지식을 모아 교과서를 만들고, 이를 통해 학생들은 검증된 지식을 보충받는다. 반면 홀로 공부를 하면, 저도 모르게 발생할 수 있는 편견과 오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늘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 안트의 가르침은 그런 이유일 것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라.’ 진짜 그 사실을 의심하라는 말보다, 지식과 정보를 얻는 스스로를 의심하라는 말일 테다. 단유는 처음으로 홀로 공부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들었다. 지금은 교과서든, 책이든 혼자 보고 공부하는 게 익숙해서 그렇게 하고는 있지만, 과연 그 책의 내용을 오롯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지 의심해봐야 할 것 같았다. 어쩌면, 자기도 모르게 무비판적으로 책의 내용을 지식의 진체(眞體)라 생각하고 받아들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제윅이 그랬지 않던가. 제윅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자신만의 아집으로 세상을 보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아집이란 사실을 모르지 않았던가. 단유는 노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펜을 놓았다. “생각이 많아서 그래, 생각이.” 단유는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심도 좋지만, 그렇다고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까지 흔들리면 어떡하냐고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왔더니, 거실에는 아이들이 모여서 열심히 토론을 빙자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수다의 내용도 며칠 남지 않은 시험에 대한 것이 아니라, ‘누가 범인일까’에 대한 내용이었다. 범인을 알면 공부가 잘되기라도 한단 말인가? “추리 게임 같은 거야. 마피아 찾기 같은 거.” 하지만, 게임이라도 단서가 있어야 찾지, 아무런 단서도 없이 추측만으로 이러쿵저러쿵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냥 니들끼리 노는 거지.” “그럼 넌 누가 범인이라고 생각해? 선생님? 학생? 아니면 다른 또 다른 인물?” “그러니까, 그게 누구인지 어떻게 아냐고.” “그냥 재미로 맞혀 봐.” “그게 재밌어?” 단유만 이해 못 하는 재미를 아이들은 느끼고 있었나 보다. “선생님은 아닐 거야. 다른 선생님들도 같이 있었다고 하니까.” “몰래 할 수도 있지.” “사람을 막 죽이는데 큰 소리가 나지 않았을까?” “큰 소리가 안 나게 할 수도 있지. 닌자처럼 막 이렇게 몰래 들어가서 쑥 하는 거야.” 몸동작을 곁들이는 명수의 설명에 상미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어쩌면 아이들일 수도 있어. 너희 학교에도 막가자는 식으로 다니는 애들도 있을 거 아니니?” “그때는 애들이 전부 경기장에 있었다니까?” “학교로 돌아온 애도 있다며?” “그건 시간이 안 맞는대.” 지태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이건 틀림없이 외부자의 소행이야.” “왜?” “내부자였으면 벌써 경찰들이 찾았겠지. 며칠째 학교를 들락날락하면서 조사를 했는데, 왜 범인을 못 찾겠어? 거꾸로 말하면, 학교에 범인이 없기 때문에 경찰들이 범인을 못 찾고 있는 거야.” 학교 밖에 주차된 자동차의 블랙박스와 골목마다 서 있는 CCTV를 모두 조사해봐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지태의 말을 끊고 단유가 끼어들었다. “거기까지.” “왜?” “공부 좀 하자. 니들 2학년 첫 시험인데, 망칠 거야?” “그럼 같이하든가.” “그래, 니가 없으니까 공부할 맛이 안 난다.” 단유는 한숨을 푹 쉬며, 명수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근데 단유야.” “응?” “넌 범인이 누구일 거 같아?” “내가 경찰도 아닌데 어떻게 알아?” “그래도 한번 말해봐.” “모른다니깐.” “에이, 재미없게.” 이런 지식의 결합은 사양하고픈 단유였다. “공부하자.”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단유 역시 속으로 학교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생각 중이었다. 다만 다른 이들과 다른 점이라면 호기심이 아니라 의문 때문이었다. ‘왜 나를 안 부르지?’ 단유는 스스로에게 되물어도 그 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단유 본인으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만약 조사를 충분히 했다면 분명히 자신을 불러야 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게 수상한 것이다. ‘수사를 제대로 안 하나?’ 게으르거나 무능하거나. 단유는 고개를 휘휘 내젓고는 아이들과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아니, 시험에 나올 법한 부분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 “와, 이거 진짜 미치겠네.” 김지연은 추가 소환 이후로는 부르지 않았다. 다만 김지연 주변으로 상시 대기조가 붙어 감시를 진행 중이었다. 그녀의 증언과 주변 정황으로만 봐서는 범행 사실이 입증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의심을 거둘 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장 형사는 그런 조치와 무관하게 머리를 싸매고 책상에 고개를 묻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선배님.” “응? 아, 도저히 모르겠어서 그런다. 분명히 뭔가 놓친 게 있는데, 뭘 놓쳤는지 모르겠어.” 일요일부터 수요일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학교로 출근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당시 학교에 남았던 선생님들뿐만 아니라 알리바이가 충분한 선생님들까지도 조사해서 용의점을 털어낸 상태였다. 외부의 침입도 고려했지만, 그 시간 학교 주변에 시선을 끌 만한 사람이나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내일 다시 한번 학교에 가봐야겠어.” “내일 또요?” 영식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록 수사를 핑계로 대고는 있지만, 눈치 보면서 상담실을 쓰는 것도 그렇고 학생들이 자신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선배란 양반이 걸핏하면 교내에서 담배를 피우려고 해서 그걸 말리는 일도 힘들었고. “음.” 침음(沈吟)을 뱉으며 장 형사는 문득 한 아이의 눈빛을 떠올렸다.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간절하다 보니 문득 그 아이가 물었던 질문이 떠오르게 되었다. [학교에 있던 사람들을 ‘다’ 조사 중인 거 맞죠?] “다?” 장 형사가 눈빛을 반짝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364] 예언과 예측 사이(2) 봄철이라 황사가 심했던 탓에 서울 하늘이 오래된 흑백TV 마냥 뿌옇게 보였다. 매년 심각해지는 황사와 미세 먼지는 TV 뉴스의 단골 소재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더럽지 않냐?” 장 형사는 자동차 문을 열려다, 손가락에 묻어나는 두꺼운 먼지의 양을 보며 투덜거렸다. “세차할 시간이 없어서 그래요.” 영식은 아무렇지 않게 운전석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안전벨트를 매던 장 형사가 이맛살을 찌푸린 채, 앞 유리창을 문질렀다. 바깥쪽은 말할 것도 없고, 유리창 안쪽도 먼지가 배어 나오긴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냐?” “…조만간 하려고 했어요.” 이윽고 영식이 차를 몰아 장계 중학교로 가는 길 위에 올랐을 때, 장 형사가 물었다. “알아보라고 한 건?” “재단에 돈 문제가 없는 건 아닌 거 같아요.” 영식은 레버를 당겨, 워셔액으로 대충 전면 유리창을 닦아보려 했지만, 워셔액은 나오지 않고 와이퍼만 양쪽으로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워셔액도 보충해야겠네요’라며 머쓱하게 대답하는 영식을 한심하게 보던 장 형사는 설명이나 계속하라며 재우쳐 물었다. 추경예산안에 비정기지출항목을 집어넣은 뒤, 특정 관계에 있는 기업을 끼워 넣는 식을 혜택을 주고, 리베이트를 이사장 개인에게 돌려주는 형식이라는 영식의 말에 ‘늘 그런 식이지’라며 중얼거리는 장 형사였다. “얼마 전에도 그런 식으로 추경 예산안이 잡혔고, 화단공사 명목으로 선정된….” “됐고. 그런 구체적인 것까지 알 필요 없잖아. 그래서 그게 관련이 있어, 없어.” “그게…특별히 원한 관계나 다툼이 벌어질 부분은 발견되지 않았어요.” “다음.” 영식은 1차선에서 깜빡이를 켜고, 좌회전을 준비하는 동안 다음 조사 내용을 보고했다. “골프를 치러 지방 출장이 잦고, 그래서 사건 당일 외박에도 신고가 늦은 이유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그런데 부인이 남편의 외박을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는 게 이상해서 말입니다.” 이상한 포인트에서 의심을 하네? 라는 눈으로 후배를 바라보던 장 형사는 ‘로맨티스트 새끼’라고 중얼거렸다. “네?” “아냐. 계속해 봐.” “예. 그래서 혹시 부인이 뭘 숨기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주변 인물들을 탐문해 봤는데요.” “너 시간 많나 보다? 세차할 시간도 없다는 놈이?” “네?” “신호 들어왔어.” 장 형사의 언급에 영식은 부랴부랴 핸들을 돌려 좌회전을 시도했다. 다시 주행을 시작한 영식은 마저 보고를 끝냈다. “부인이 호스트바를 다니나 보더라고요. 남편이 12시 전에 들어오지 않으면 거의 대부분 청담동에 있는 호스트바로 향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기둥서방이라도 심어놨다고? 그래서 그게 이 사건과 또 무슨 연관이 있는데?” “어, 거기까진 아직 관계가 밝혀진 바는 없지만 말입니다. 아내의 부도덕한 유흥을 눈치챈 남편이 손을 썼고, 이에 앙심을 품은 아내와 호스트가….” “됐고. 너 이제 영화 그만 봐, 새끼야. 도대체 왜 이렇게 현실 감각이 떨어지지? 너 그래 가지고 제대로 수사하겠냐?” “그래도 여러 가지 방향으로 생각해 보는 것이….” “애초에 학교 안에서 벌어진 사건이야. 평소의 학교라면 외부인이 마음대로 이사장실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 아무한테도 안 들키고? 즉, 이번 사건은 학교 행사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사람의 소행이다, 이거야. 게다가 학교 행사에 교장, 교감은 모두 갔는데 이사장만 가질 않았어. 만약 외부인이라면 이사장이 경기장을 갔을지, 학교에 남았을지를 어떻게 알겠어?” “그럼 내부인의 소행이란 말씀이십니까?” “아니. 니가 조사한 것들이 전부 잘못됐다는 이야기다, 새끼야.” ‘용의자 특정’에 있어서도 단순히 원한 관계 위주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사건의 정황을 고려해서 유효한 용의자들을 집중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선배의 핀잔에 영식은 주눅이 들었다. “지한영이는?” “크흠. 어, 아들은 그냥 좀 노는 정도인데요. 지난번 조사한 내용에서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습니다.” 강남 유명 클럽을 자주 드나들고, 과거에는 여자관계가 복잡해서 그 때문에 길 한복판에서 싸움이 날 정도였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은 바가 있었다. 얼마 전의 음주운전도 다시 재조사가 들어가서, 아마 지한영은 병원을 나오자마자 구속 수사를 받아야 할 것이다. “아들이 의심스러워.” “아들이요?” 이유는 없었다. 알고 보면 가족들이 모두 재단에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으면, 아내는 얼마 전 이사직 연임이 결정되었고, 아들은 이사이면서 동시에 학교 행정실장으로 일하는 중이었다. 행정실 직원들의 진술에 의하면 출퇴근 시간이 자유로운 것 외에는 일 적인 측면에서 딱히 무능하지도, 유능하지도 않은 정도의 아주 평범한 모습이라고 했다. “하지만 ‘평범’할 리가 없잖아.” 매일 밤 클럽을 다니다시피 하고,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아침 출근 시간에도 술이 덜 깬 채로 출근하는 이가 ‘평범’? 고의로 진술을 하지 않았거나, 혹은 진술하지 못하도록 입막음을 했을까? 선생님들 역시 행정실장에 대해 특별한 언급이 없었음을 떠올려보면 수상한 점이 있긴 했다. 다만 공통적으로 ‘여자관계’가 복잡하더라는 소문이 있다는 진술만 나올 뿐이었다. [‘다’ 조사 중인 거 맞죠?] 장 형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보다가, 영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전교 1등이면 보통 애들이랑 다를까?” “전교 1등이요? 글쎄요. 제 때는 전교 1등 하던 애가 미국에서 살다 들어온 애였는데, 특별히 영어를 잘한다는 거 말고는 별로 다른 점을 못 느끼겠던데요?” “넌 몇 등 했는데?” “에이, 선배님. 그런 건 묻는 게 아니죠.” “몇 등 했는데?” “에이.” “몇 등?” “…30등 안에는 들었습니다.” “오호? 공부 잘했네? 전교 순위?” “아뇨, 반 순위요.” “전교에서는?” “…중학교 때는 좀 방황하던 때라서 말입니다. 별로 잘하진….” “몇 등?” “한 350등 정도? 그래서 저희 때는 전교 인원이 500명은 됐지 말입니다.” 갑자기 이상한 말투로 자기 변명을 하는 영식을 보며 장 형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공부가 뭔 상관있냐? 형사질 하면서 그런 건 써먹어 본 적이 없다.” “그렇죠? 사회 나오니까 말이죠, 그게 다 쓸모가 없더라고요. 별로 쓰지도 않을 것들을 그때는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매달렸는지 모르겠어요. 차라리 그 시간에 쓸모있는 걸 배웠으면 훨씬 유용했을 텐데 말입니다.” “유용한 게 뭔데?” “뭐… 대충… 사회에서 쓸만한 것들, 이죠. 뭐.” 딱히 생각이 나지 않던 영식은 말을 얼버무리다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다 왔습니다, 선배님.” 하얀 먼지를 풀풀 날리며 장계중학교 교문을 들어서는 낡은 승용차는 학교 외곽 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가 본관 뒤편 주차장으로 향했다. ****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아이들의 주 관심사는 여전히 ‘살인 사건’에 있었다. 아이들 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 사람들의 관심이 쏠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뉴스에도 보도가 되면서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사건은 발생 일주일이 지나도록 범인이 잡히지 않은 채, 여전히 경찰들이 이사장실 앞 복도를 점거한 중이었다. 그리고 김지연 선생님이 복귀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며칠간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고 하지만, 알 사람은 다 아는 상황이었다. “선생님,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웃음으로 심정을 대변해 보려 했지만,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 담긴 복잡한 감정을 볼 때면 쉽게 웃음이 나지 않아 곤혹스러웠다. 자리에 앉아 업무를 정리하려니 일주일 사이에 밀린 서류들이 책상에 한가득이었다. 연구부 평가 서류도 작성해야 하고, 교육청, 교육부에서 내려온 공문도 처리해야 하고, 학기 초에 작성을 끝냈어야 할 수업계획 평가 수정안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반려되어서 책상 위에 올려져 있다. 그나마 시험문제 출제가 끝난 상황이라 다행이지만, 당장 2, 3일은 야근을 해서라도 마쳐야 할 서류들이 짜증을 불렀다. 정확히 말하자면, 짜증은 서류가 아니라 서류를 보는 자신을 훔쳐보는 선생님들의 시선 때문이었다. 마침 수업 종이 울렸고, 지연은 출석부를 챙겨 들고 교무실을 나갔다. “무리하지 마세요, 선생님.”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지연을 격려하는 다른 선생님들에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스스로 느끼기에도 볼살이 경직된 느낌이었다. 조금 느릿한 걸음으로 가더라도, 2학년 교실은 교무실에서 가까워서 금방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간 교실이 갑자기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아마 아이들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것이겠지. ‘무죄 추정의 원칙도 모르냐!’ 고 창문을 열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 일주일 뒤에 시험이지? 그동안 선생님이 사정이 있어서 수업을 못 했지만, 오늘부터는 좀 빠르게 갈 테니까 잘 따라와야 한다. 알았지?” “네.” 대답이라도 해주니 다행이랄까? 지연은 아이들에게 신경을 끊었다. 지금부터는 오로지 책과 싸우면서 진도를 빼는 것에만 집중할 것이다. 아이들이 수군대든 말든, 공부하든 말든, 오로지 진도만 쭉쭉 나가리라. 그 와중에 잘 듣고 따라오면 문제 하나 더 맞힐 수 있을 것이고, 아니면 틀리는 거고. 그건 니들 하기 나름이야. 그 시간, 단유는 열심히 노트를 채우는 중이었다. 집에서는 아이들 때문에라도 시험공부를 하고는 있지만, 당장 단유는 시험보다 이 노트를 채우는 일이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도하가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로 수업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야, 선생님 범인 아냐?” “아니니까 풀려난 거 아닐까?” “증거가 없어서 풀려났을 수도 있어. 하지만 증거가 없다고 해서 범인이 아니라고는 말 못해. 선생님이니까 영리하게 증거를 숨겼을 수도 있잖아?” “그래도 일주일 넘게 조사하고도 경찰이 알아내지 못한 거면, 진짜 아닐 수도 있는 거잖아?” “미국에는 한 달 동안 조사를 받고도 증거가 없어서 풀려났다가, 몇 년 뒤에 진범으로 밝혀져서 다시 잡힌 경우도 있대. 즉, 당장 밝히지 못했다고 해서 범인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다는 거지.” 전일은 책을 앞에 세워두고 얼굴을 그 뒤에 파묻은 채, 짝과 속삭거렸다. 속삭이는 소리가 조금 커서 선생님 귀에 들릴 정도였다는 게 문제였지만. “누가 떠드니? 수업 중에 조용히 하랬지.” 잠시 조용해지면, 다시 또 숙덕거리는 아이들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일까마는 오늘따라 유난히 귀에 거슬리는 지연이었다. 전일 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최초 용의자’로 선정된 선생님의 범죄 유무에만 관심을 보였다. “누구야!” 결국 지연이 책을 던지듯, 교탁 위에 내려놓고 교실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빛은 자신을 두려워한다기보다, 호기심을 품고 자신을 관찰하는 눈빛이었다. 지연의 입술이 저도 모르게 덜덜 떨렸다. “선생님, 경찰이 뭐라고 안 했어요?” 한 아이의 질문. “선생님, 왜 의심받으신 거예요?” “선생님, 조사 때문에 학교 안 나오신 거 맞아요?” “선생님!” “선생님!” 주먹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쥐어진 주먹이 교탁 위에서 덜덜 떨려왔다. 머릿속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 때문에 눈앞이 흐려지는 기분이었다. 아이들은 갑자기 낯빛이 변하며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선생님을 보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왜 저러시지?” 한참 칠판에 필기하시던 선생님이 갑자기 소리치며 돌아서더니, 화가 난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계셨다. 아이들은 영문을 몰라 물끄러미 바라보지만,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없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정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도하가 단유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단유가 눈썹을 찡그리며 돌아보자 도하가 턱 끝으로 앞을 가리켰다. 시선을 돌려 앞을 보자, 얼굴을 붉히고 덜덜 떠는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들었다. 단유는 몸을 바로 세우고 선생님을 바라보다가, 주변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수군대고는 있지만 다들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안 좋은데.” “뭐가?” 도하의 물음에 답할 생각은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단유가 보기에 지금 선생님은 정신적 공황 상태인 것 같았다. 가빠진 호흡과 초점을 잃은 눈, 어깨뿐만 아니라 몸 전체에 과하게 힘이 들어가 경직된 근육들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처럼 부들부들 거리는 것이다. 단유는 허리를 등받이에 기댄 채로 선생님을 바라보다가 일차적으로 바람을 불렀다. 잠시 후, 창문도 닫혀서 밀폐된 교실임에도 지연의 앞머리가 바람에 나부끼듯 슬쩍 흔들렸다. 짙은 홍조가 든 볼도 색이 가라앉듯 진정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초점이 돌아오지 않는 눈이었다. ‘이걸로는 부족할까?’ 저대로 두면, 몸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단유는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났다. 그 소리에 아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단유는 교실을 나섰다. 그리고 바로 옆 반, 2학년 4반의 앞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들어오세요’ 라는 소리에 단유는 문을 열었다. 어리둥절해하는 선생님과 4반 아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단유는 선생님에게 다가가 조용히 사정을 알렸다. “너희들, 조용히 하고 있어.” 옆 반에서 수업을 진행 중이던 사회과 선생님이 아이들을 조용히 시킨 후 단유를 앞세워 3반으로 향했다. “선생님? 선생님?” 들어와 보니, 이미 선생님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몸을 약하게 떨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근육의 경련 때문일거라, 단유는 판단했다. 사회 선생님은 얼른 선생님을 등에 업었다. “반장, 애들 조용히 시키고, 넌 따라와.” 단유는 선생님을 따라 복도로 나섰다. 양호실은 1학년 교실이 있는 1층에 있었는데, 중앙계단을 통해 내려가는 게 빨랐다. 그리고 중앙계단을 반쯤 내려갔을 때, 단유는 장 형사와 마주쳤다. “뭡니까?” 장 형사의 물음에 사회 선생님은 잠시 멈칫했다. “선생님, 먼저 가세요. 급합니다.” “아, 그래.” 단유의 말에 다시 걸음을 옮기는 선생님이었고, 그 뒤를 단유와 장 형사가 뒤따랐다. ======================================= [365] 예언과 예측 사이(3) 이사장실 앞을 지키는 경찰들에게 간단한 손 인사를 보낸 후, 2층 교무실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던 장 형사는 쿵쾅거리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곧 2층에서 허겁지겁 내려오는 남자 선생님과 그의 등에 업혀 늘어진 낯익은 여자 선생님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뭡니까?” 왜 저기 김지연씨가 저런 모습으로? 라는 생각을 가질 때, 정신을 깨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급합니다, 선생님.” 앳되지만 나직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장 형사의 시선을 돌리게 했고, 멈춰섰던 선생님의 발걸음을 다시 떼도록 만들었다. 지나가는 소년의 시선이 잠시 장 형사에게 머무를 때, 장 형사 역시 소년의 시선을 마주했다. 아, 장 형사는 속으로 아이의 정체를 떠올렸고, 이내 아이의 뒤를 따랐다. 양호실에 들어선 선생님은 급히 김지연을 침대에 눕혔고, 양호 선생님이 호들갑을 떨며 상황을 물었다. “…호흡이 가빠지고, 팔과 어깨에 경미한 정도의 근육 경련이 관찰돼서 위험을 감지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4반에서 수업하는 선생님에게 도움을 부탁할 요량으로 찾아뵈었고….” 장 형사는 소년의 브리핑(?)을 들으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전교 1등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요즘 아이들이 다 저 정도가 되는 건지 가늠이 되진 않았지만, 확실히 자신이 만나오던 아이들에 비하면 월등히 구별되는 점이 있었다. 조리 있게 설명을 한다거나 하는 점을 떠나, 일단 침착한 모습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브리핑을 들어봐도, 그 순간에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우선순위를 구별하여 행동에 옮긴 것은 어른들이라고 해도 쉽게 하기 힘든 일. 마치 이런 상황에 대비한 매뉴얼이라도 외우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차분한 대응이었다. “양호실에서 처치할 수준은 아닌 거 같으니까, 우선 119를 불러야겠어요.” 양호 선생님의 말에 사회 선생님이 동의했고, 곧 119에 전화를 걸어 구급차를 요청했다. 장 형사가 바라보니 김지연은 정신을 잃긴 했지만, 그리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낯빛이 다소 파랗게 질려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위험한가, 라는 의심만 해볼 뿐이었다. “지연 선생님 많이 말랐네요.” “그간…마음고생이 심했을 테니까요.” 두 선생님의 대화를 들으며 장 형사는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혹시, 진짜 범인이 아니라면, 김지연은 자기들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소년은 선생님들의 대화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이내 교실로 올라가 보겠다고 먼저 밝혔다. 그제야 사회 선생님도 교실로 올라가 봐야 겠다며 양호 선생님께 자리를 양보했다. “아, 잠시만요.” 장 형사는 급히 두 사람을 불러세웠다. 무슨 일이냐는 시선에 장 형사는 사회 선생님께 양해를 구해야 했다. “저 아이랑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수업 시간인데요.” “잠시면 됩니다. 그리고, 어차피 지금 수업 못 받지 않습니까?” 장 형사가 지연을 가리키자, 사회 선생님은 소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소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너무 많은 시간 뺏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네, 그럴 겁니다.” 잠시 후, 장 형사는 소년, 단유를 데리고 학교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야외에서 조용히 대화하자며 끌고 나온 것인데, “아, 먼지. 어, 선배님. 여기 계셨습니까? 위에도 안 계셔서 찾으러 나왔는데… 왜 나와 계십니까? 공기도 안 좋은데, 안에 들어가 계시지 않고.” 주차하고 뒤늦게 따라왔던 후배, 영식의 말에 장 형사는 단유를 데리고 다시 상담실로 향했다. **** 장 형사와 단유는 상담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장 형사는 기이하다는 듯 단유를 바라보았다. “너, 중학생 맞니?” “예.” “요즘 중학생들은 다 너처럼 키가 크냐?” “과거에는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요즘은 학생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해서 키 큰 사람도 있고, 키 작은 사람도 있습니다.” 단유는 장 형사가 대화의 물꼬를 엉뚱한 곳으로 틀지 않기를 바랐다. 시간은 금이니까. “물어보시고 싶으신 게 뭔가요?” “급한 일이라도 있냐?” “공부해야죠.” 학생이 공부를 해야 한다는 데 무슨 할 말이 필요할까? “너 지난번에 나한테 한 말 있지?” “무슨 말이요?” “왜, 너 그때 그랬잖아? 학교에 있는 사람들 다 조사해 봤냐고?” “아, 네.” “그때 왜 그런 말을 했던 거야?” 단유는 대답을 하는 대신 앞에 앉은 두 사람을 관찰했다. 이 시간이 되도록 범인을 못 찾았을 뿐만 아니라, 학교의 분위기를 흐리고 있는 주범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다만 흐려진 분위기 덕에 수업 시간에 딴짓을 해도 걸리지를 않으니, 단유로서는 나쁘지만은 않은 상황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온종일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공부하는 것도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으니, 기분을 찝찝하게 만드는 요소를 아예 배제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갑자기 그걸 물어보시는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단유의 되물음에 두 형사가 각기 다른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영식은 선배의 물음에 답을 하지 않는 ‘건방진’ 학생의 행동에 열이 올라서 콧김을 뿜었고, 장 형사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본인은 인정한 적이 없지만, 어지간한 사람들은 장 형사와 대면해서 저토록 차분하게 말을 하는 이가 없었던 탓이었다. 형사가 아니면 조폭, 이라는 반장의 말마따나 장 형사의 얼굴은 험악한 인상이었기 때문에 15살의 어린 아이가 저리 차분하게 대꾸한다는 게 이상할 따름이었다. “너….” 장 형사는 영식의 말을 막았다. “수사는 지금 잘 진행되고 있어. 조금만 있으면 금방 범인을 잡아낼 거다. 그런데, 내 성격이 좀 지랄 맞아. 사소한 거라도 놓치고 가는 게 없었으면 하거든? 그런데 니가 한 말이 마치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말이야.” “그때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시지 않으셨나요?” “사람이 꼭 제때 밥 먹냐? 밥 시간이 돼도 배가 안 고프면 미뤘다가 나중에 배고파져서 밥솥 열 때도 있는 법이야.” 비유가 마치 명수 같다. 단유는 보이는 것만큼이나 단순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말을 꺼냈다. “아까 김지연 선생님이요, 저희 반 수업이었거든요?” 갑자기 왜 김지연 선생님 이야기지? “솔직히 전 수업에 듣지 않고 있었어요. 따로 공부하는 게 있었거든요.” 전교 1등이라는 녀석도 수업 시간에 딴짓한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걸까? “갑자기 짝이 제 팔을 툭툭 쳤어요. 그래서 봤더니 선생님이 교탁 앞에서 돌아서서 저흴 보고 있는데, 보는 순간 위험하다고 느꼈어요.” “위험하다?” “얼굴빛이 붉고, 호흡이 가쁘고, 초점이 불분명할 정도로 잘게 떨리고 있었거든요. 어깨 근육이 가늘게 떨리는 것도 보였고, 땀이 턱을 따라 흐르는 것도 보였죠. 그 정도면 의사가 아니더라도, 이상이 있다는 걸 느낄 정도는 되죠?” “관찰력이 뛰어나다, 는 걸 자랑하고 싶은 건 아닐 테고.” “그런데 다른 아이들은 그 모습을 보고도 가만히 있었어요.” “왜?” “안 보였으니까요.” “안 보여?” 단유는 자신이 예로 든 5가지 증상을 손가락으로 꼽았다. “이 중에 2가지만 빼볼까요? 얼굴빛이 붉고, 호흡이 가쁘고, 어깨가 가늘게 떨린다. 이 증상 3가지만 가지고 ‘위험’이라는 신호를 떠올릴 수 있을까요?” 영식은 무슨 말장난인가 싶어서 단유의 말을 끊으려 하는데, 장 형사가 먼저 단유의 말을 받았다. “어렵겠지?” “얼굴빛이 붉고, 호흡이 가쁘다는 두 가지만 놓아도 상대의 몸에 이상이 생겼구나라고 판단할 사람은 없겠죠. 그냥 화가 났겠거니, 혹은 무슨 슬픈 일이 생겼다거니, 판단하겠죠. 제 말은 결국 상대를 제대로 보지 않으면 상대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 수 없다는 말이죠.” “니가 예로 든 게 무슨 뜻인지는 알겠다. 하지만 우리들도 나름은 이 사건을 제대로 보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을 관찰하는 것과 달리 사건이란 게 보고 싶다고 다 볼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렇겠죠. 그러니 상대가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도 모르는 거겠죠.” “응?” “지금 이쪽 형사님은 저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으신데, 형사님 때문에 말을 못 하셔서 많이 답답하신가 봐요.” 장 형사가 영식을 쳐다보자, 영식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린 나이에 불과한 제가 감히 형사님의 자존심을 건든다고 생각하신 건지, 불쾌하시기도 하고요.” “어, 어….” 말을 잇지 못하고 어버버 거리는 영식을 보던 장 형사는 다시 단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태까지와 달리 이번에는 마치 살인범을 마주하고 취조할 때의 것과 같은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반면 덤덤하기로는 세계 최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단유였다. 저 정도 눈빛이야 살면서 너무 많이 겪은 터라. “반대로 형사님은 보이는 것과 달리 이런 문답을 꽤 즐기시나 봐요. 마음이 급하실 텐데도 여유롭게 이 대화를 즐기시려는 게 보이네요.” “…비유가 아니었구나.” 장 형사는 단유의 말이 수사에 대한 비유라 생각했는데, 실제 사람을 상대하고 관찰하는 것에 대한 언급이었다. “거짓말을 했다는 거냐? 누가?” “그 전에, 저도 최소한의 자기방어는 해야 하지 않겠어요?” “응?” “형사님에게만 따로 이야기를 드리고 싶은데?” “뭐!” 이번에는 진짜 영식이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난 김에 잠깐 바람 좀 쐬고 와라.” “선배님!” “잠깐이면 된다.” “아니, 그게….” 잠시 후, 둘만 남게 된 상담실에서 장 형사는 단유를 독촉했다. 그리고 단유는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를 했다. “그날, 저도 학교에 있었어요.” “뭐!” 이번에는 장 형사도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날 뻔했다. “설마….” 단유는 장 형사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 시나리오를 막았다. “자수는 아니고요. 그날 그냥 학교에 있었어요. 개인적인 사정이니까 자세한 건 묻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으니까.” “그, 그럼 범인이라도 목격했다는 말이야?” “아니요.” 그 말에 또 장 형사는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고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날 절 본 사람이 학교에 있어요.” 그 말에 장 형사는 단유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날, 학교에 있었던 사람들을 전부 조사했냐는 말은, 그럼에도 왜 자신을 부르지 않았냐는 말과 같은 말이었다. 단유도 학교에 있었는데 왜 단유를 불러 조사를 하지 않았을까? 그건 단유를 본 사람이 봤다는 증언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지 않았을까? “누구지?” 장 형사의 목소리가 바닥을 구르는 묵직한 쇠구슬처럼 흘러나왔다. “행정실 여자분이신데, 이름은 잘 모르겠네요. 급식비 수납할 때 빼고는 만날 일이 없는 분이셔서.” 행정실에 여직원은 한 명이다. 장 형사가 벌떡 일어났다. 바로 상담실을 나갈 듯하다, 돌아보며 물었다. “넌 그때 뭐하려고 학교에 왔었지? 아니, 어떻게 학교에 들어온 거야?” “그건 묻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안타깝게도 제게는 알리바이가 없어요.” “그렇다면 너도 용의자에 들어간다는 거, 알겠지?” “동기가 없지 않나요?” “우발적으로….” “아, 우발적 범행이었구나.” 형사는 입을 다물었다. 공개수사로 전향이 되지 않아서 수사에 대한 정보가 밖으로 나간 적이 없던 차였다. 당연히 학내의 아이들이 알 턱이 없는 정보였다. “아무튼, 학교에 어떻게 들어왔고, 무엇을 했는지 말해야 할 거야.” “그게 중요한가요?” “중요한 거다.” “지금 제가 알려줬던 정보보다 더요?” “…….” 단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부분을 설명하기 싫어서 장 형사님에게만 이야기한 거예요. 사실 말 안 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데, 그러면 학교 안에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있는 거잖아요? 그거 되게 찝찝하더라고요. 그래서 빨리 잡아가시라고, 이렇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헛다리 짚지 말고 일이나 하세요,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무능력한 형사들이 학교를 휘젓고 다니든 말든 상관 안 하려 했지만, 놔두면 괜히 귀찮은 일만 벌어질 것 같다는 예감 때문에. “그 날 시간은 2시 30분 정도였던 걸로 기억해요. 중앙현관에서 그분과 만났는데, 계단을 오르려고 올라가던 저를 미처 발견하지 못해 그분이 자리에서 넘어졌죠. 넘어지면서 들고 있던 커피를 옷에 쏟았고요. 아무 옷을 버려야 했을 거예요.” “버려?” 커피 때문에? 순간, 장 형사는 어느 때보다 빠르게 머리를 굴렸고, 곧 단유의 말을 이해했다. “버려야 했구나.” “아무튼, 그분은 많이 당황하셨는지, 심하게 땀을 흘리셨고, 그런 채로 행정실로 곧바로 들어가셨죠. 들어가시는 걸 보고, 전 2층의 교실로 올라갔고요.” 장 형사는 단유를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돌아서기 전 한 마디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지금은 일단 이렇게 가는데, 조만간 따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게 있을 것 같다.” “한 가지만 부탁드릴게요.” “…뭐냐?” “제 이름은 거론해주지 말아주세요.” “뭐?” “한 학생이 당신을 만났다더라, 정도만 해도 충분할 거 같으니까요. 목격자로 이름을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요.” 장 형사는 가타부타 말없이 상담실을 나섰다. 문을 거칠게 열고 나간 틈에, 단유는 여유롭게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섰다. 중앙계단을 통해 쿵쾅거리는 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지만, 단유는 신경 쓰지 않았다. ======================================= [366] 예언과 예측 사이(4) “고순영씨?” “네?” 행정실에 들어온 장 형사는 순영의 눈을 보았다. 잘게 흔들리는 눈동자와 살짝 상기된 두 볼의 변화를 발견했다. ‘전에도 저랬을까?’ 이미 예전에 이야기를 나눴고, 김지연이 학교로 들어온 시간에 대한 알리바이를 이야기해 준 이도 순영이었다. 그런데도 지난번과 다르게 보이는 건, ‘꼬마 녀석의 말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보지 못했던 걸까?’ 장 형사는 행정실에 근무하던 다른 남자 직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순영을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무슨 일이시죠?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전에 다 말씀드렸잖아요?” ‘미묘하지만 분명 말의 템포도 빨라지고 있다.’ 장 형사가 날카로운 눈으로 순영을 관찰하고 있을 때, 파트너인 영식은 영문도 모른 채로 따라와서는 장 형사의 모습을 뒤에서 지켜만 볼 뿐이었다. “금요일 오후 3시가 되기 전쯤에 여기 이곳을 지나는 모습을 보셨다고 증언하셨죠?” “네.” “그때 여기서 뭘 하고 계셨죠?” “말씀드렸다시피, 그때 제가 실수로 커피를 엎지르는 바람에요, 씻으려고 저기 저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커피는 왜 엎지르신 겁니까?” “네?” 머뭇거리는 순영을 보며 눈을 빛내는 장 형사였다. “시, 실수로….” “옷이 물들어버릴 정도로 말이죠?” “네? 네.” “그 옷은요?” “그게 왜 중, 중요하죠? 그건 아무 상관 없잖아요?” 장 형사는 눈을 빛냈다. 끝까지 나오지 않는 이름. 분명 숨기고 있음이다. “고순영씨. 그날 이 자리에서 만난 학생 있었죠?” “네? 아니, 그게….” “그 학생에게서 증언을 받은 게 있습니다. 계속 숨기실 겁니까?” 순영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학생에 대해서는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마주친 시간이 짧아서 별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내심 생각하곤 있었지만, 만일에 대비해서 그 학생의 존재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형사들이 어떻게 그 아이를 찾았을까? 그리고…진짜 봤을까?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마는 순영을 보며 장 형사는 영식을 불렀다. 영식이 순영을 일으켜 세울 때, 장 형사는 미란다 원칙을 고지했다. **** 순영은 처음 일 주일간 굉장히 떨었다고 했다. 그 학생이 어디까지 봤는지 모르겠지만, 혹시 이사장실에서 나오는 모습을 봤던 건 아닌지 두려워했단다. 그래서 학생에 대해 일부러 언급을 피했고, 다행히도 일주일이 지나도록 자신에게 접근하는 형사가 없어 어쩌면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단다. 하지만 ‘학생의 증언’이 있었다는 이야기에 모든 게 밝혀졌다고 생각하자, 그간 억지로 버텨내던 긴장이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고. 그래서 경찰서로 간 뒤, 고순영은 모든 게 드러났다는 생각에 순순히 자신의 범죄를 털어놓았다. 물론 그 전에 장 형사가 언급한 ‘커피 쏟은 옷’도 결정적이었다. “그러니까, 이사장을 살해한 뒤, 옷에 틘 피를 처리하기 위해 일부러 커피를 들고 있었다?” 최초의 계획은 커피를 들고 행정실 안으로 들어가다가 스스로 넘어지면서 커피를 제 몸에 쏟고, 목격자를 만듦과 동시에 더러워진 옷을 자연스럽게 처리할 수 있게 되리란 계획이었다고 순영은 밝혔다. 이를 위해서 커피가 조금 식은 뒤에 행정실에 들어갈 생각에 복도 밖에서 서성거릴 때, 갑자기 나타난 학생과 부딪혔다. 순영은 당황해서 ‘진짜’ 넘어졌고, ‘진짜’ 옷을 더럽혔던 탓에 더 자연스럽게 옷을 처리할 수 있었다는 부연설명이었다. 이어진 순영의 범행동기를 듣고 장 형사는 혀를 찼다. “그러니까, 지한영이 혼인빙자간음이다?” 행정실장이었던 지한영은 결혼을 약속하며 고순영과 잠자리를 여러 번 가졌다. 그런데 어느 날 지한영이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김지연 선생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문제로 지한영과 다투기도 했지만, 지한영은 오해라며 고순영을 달랬다. 그러던 중 금요일, 이사장이 부탁한 차를 들고 들어간 이사장실에서 이사장이 김지연을 앉혀놓고 ‘아들이 마음에 들어 하더라’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 배신감을 느꼈다고. 특히 고순영이 배신감에 치를 떨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임신이었다. “임신했어요?” “네.” 일주일 전 임신테스트에서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를 한영에게 알리려 했는데, 한영은 병원에 있어서 알리지 못했다. 병원에도 찾아오지 말라고 해서 순영이 의심을 하던 차였다. 그런데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행정실에 틀어박혀 있던 차에, 지씨 부자는 김지연을 지한영의 배우자로 삼으려고 작정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김지연이 떠난 후, 순영은 이사장실로 들어갔다. 몇 마디 말이 오가다, ‘감히 니가’ 따위의 말을 듣고 분개한 순영이 옆에 놓인 골프 클럽을 휘둘러 이사장을 쓰러뜨렸다. 순영은 이사장이 정신을 차리면 일이 커질 것 같다는 생각에 책상 위에 있던 나이프를 손에 집었다. “아니, 살인이 더 큰 죄라는 걸 모르십니까?” “그날은…학교에 사람도 없었고, 이사장만 조용히 만들면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니, 그냥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차라리 시체로 만드는 게 후환이 적을 것 같다는, 범상치 않은 결론을 내린 순영이 손을 쓴 후, 곧바로 행정실로 돌아가는 대신 알리바이를 만들려 했다. 자신이 건드렸던 도구들을 닦아 지문을 지운 후, 조용히 이사장실을 빠져나와 화장실에서 손을 씻을 때, 옷에 묻은 피를 발견했다. 그래서 전술한 바와 같이 ‘커피’를 이용해서 옷을 처리할 방법을 떠올린 것. 돌이켜보면 굉장히 허술한 방법이었기에 일주일간 가슴 졸이며 상황을 지켜보았는데, 의외로 자신에게로 수사방향이 옮겨지지 않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아이에게 들킬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들켜요? 순영씨 안 들켰어요.” “네? 아까 학교에서는 증언했다고.” “학교에서 순영씨랑 1층에서 마주쳤다고 증언했다고요.” “예? 그럼…그 아이, 제가 범인인 줄 모르고…?” “아마 모를 겁니다.” 아마. 아니, 어쩌면 알려나? 어쨌든 단유가 증언한 건 만났다, 는 내용까지뿐이었으니. 결국 순영이 어림짐작으로 털어놓았을 뿐인 일이었다. “아아, 이런….” 취조실 책상에 엎드려 우는 순영을 지켜보던 장 형사는 그녀를 그대로 두고 취조실을 빠져나왔다. 담배를 하나 꺼내무는 장 형사에게 영식이 말했다. “선배, 실내 금연입니다.” “밖에 나가서 피려고 했어, 임마.” 장 형사는 담배를 입에 문 채로 경찰서를 빠져나왔다. 불을 붙이고 연기를 뿜어내니, 이제야 콱 막힌 속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이후의 이야기지만, 지한영에 대한 조사 중에 그가 만났던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그리고 지한영의 주변 인물들 중, 고순영을 언급한 이도 있었다. 고순영이 사건 일주일 전 산부인과를 들렀다는 것도 밝혀졌는데, 행정실 직원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부인과 질병 때문에 병원에 간다고만 알고 외출을 허락해 주었다고. “결국, 우리가 계속 수사를 했다면 밝혀낼 수도 있었겠네요.” 이사장실에서 나온 다양한 지문 중에는 고순영의 것도 많았다. 다만 행정실 직원이라는 특성상, 자주 이사장실을 들락날락한다는 사실 때문에 혐의점을 크게 두지 않았던 것뿐이지만, 계속 수사를 했다면 고순영의 행적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건 모르지.” 어이없는 실수로, 혹은 부주의로 범인을 놓치는 경우가 없는 것도 아니고, 미결사건이 되는 경우도 허다했으니 장 형사는 사건이 해결됐다는 후련함과 동시에 찝찝한 기분도 느꼈다. 소년, 단유의 말대로 그의 행적은 이 사건과 전혀 무관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 시간에, 학교 안과 밖의 CCTV에도 걸리지 않은 채로 학교에 들어왔다는 소년의 증언은 장 형사의 더듬이를 마구 자극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닌데. 그보다는 장계 삼거리에서 벌어진 사건에나 집중하시죠?” 장 형사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계속 단유의 트릭을 밝히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 “되게 무섭다.” “그럼 거의 일주일 동안 살인범이랑 같이 학교에 있었던 거 아냐?” 고순영이 범인으로 지목되어 잡혀들어갔단 소식은 SNS를 통해 급속도로 퍼졌다. “나 그 여자한테 아침마다 인사도 했었는데.” “왜? 관심 있었냐?” “미친 새끼. 아침에 학교 올 때 시간이 겹치길래 자주 봤을 뿐이다, 새끼야.” “이 새끼, 수상한데? 응? 수상해.” “야, 이 새끼야, 아니라고!” “어디서 냄새가 나는데?” 극장에서 영화 엔딩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그것과 같은 모양새로 모여있는 아이들을 슬쩍 쳐다본 도하는, 여전히 변함없이 노트를 미친 듯이 채워나가는 단유를 보았다. 도하가 보기에 단유는 중간고사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 같았다. 비록 공부를 하지 않는 도하라도, 단유가 하는 작업이 시험공부와 거리가 멀다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2학년 첫 중간고사가 이제 코 앞인데도 시험공부랍시고 교과서를 뒤적거린다거나, 문제집을 푸는 ‘일반적’인 형태의 시험 준비는 전혀 하지 않는 단유였다. “넌 시험공부 안 해?” “집에서 하고 있어.” 그렇다면 할 말 없고. 하지만 도하가 보기에 단유는 확실히 지금껏 만나본 모범생들과 다른 점이 많았다. 아니, 주변 아이들과 달랐다. 초탈한 듯 주변 세사에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관심사에만 집중할 따름이었다. 어찌 보면 천재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자폐증 환자 같기도 했다. “너 들었냐?” “…….” “국어 선생님, 학교 그만둔대.” “…….” “‘그일’ 때문에 충격이 심했는지, 학교를 그만둔대.” 트라우마라도 생겼을까? 생각해보면 김지연은 이 사건에서 이사장 다음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뭐 문제가 있을까? 지금 단유가 신경 쓸 문제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인데. ‘어떤 함수의 역함수가 존재한다면, 역함수는 단 하나뿐.’ 역함수의 정의역과 치역이 반대가 될 수 있어야 하기에 1:1대응을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공식을 풀어나간다면…. “조용, 조용! 수업 종 쳤는데 뭐하니?” 선생님이 들어와 교탁을 두드리자, 교실의 소란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여전히 단유는 노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선생님은 그런 단유를 발견했지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적어도 저 친구가 지금 저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전교 1등을 놓치기 싫어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못 봐줘도, 저런 애들은 봐줘야지. 그렇게 선생님의 묵인 아래, 단유는 공간 좌표 형성에 대한 단초를 풀어내고 있었다. **** 사건이 종결된 후, 뉴스에서는 단신으로 보도되었지만 곧 잊혀졌다. 이사장의 죽음이라는 제목은 거창했지만, 분노로 인한 우발적 살인이라는 설명은 임팩트가 약했다. 지한영은 혼인빙자간음이라는, 지금은 형법상 삭제된 죄목으로는 아무런 구속력을 갖지 못했다. 다만 방패가 사라져 맨몸이 드러난 이상, 그에 대한 경찰 조사는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음주운전과 폭력, 폭행, 사기 등의 각종 죄목들이 붙기 시작했고, 결국 구속 기소가 결정되었다. 전혜숙 이사라고 이와 무관할 순 없었으니, 비록 기소받을 만한 죄는 없었지만 남편과 아들의 일 때문에 더는 정상적으로 이사직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판단, 자진해서 물러나야 했다. 김지연은, 학교를 그만두었다, 고 소문이 났지만 실상은 병가처리가 되어 장기간 학교를 쉬게 되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양극성 장애와 망상 장애 등의 진단을 받은 터라 다시 학교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리고 이 사건 초기, 학생들 중 가장 먼저 조사를 받았던 병호는, “같이 가.” “너 왜 이렇게 쫓아다녀? 딴 애들이랑 다니라니까?” “같이 가자, 응?” 단유네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별로 귀여운 얼굴도 아닌데, 괜히 도하 앞에서 귀여운 척을 하는 병호를 보면 단유도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적당히 해라.” 도하가 저렇게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면 대부분 거리를 두게 마련인데, 최근 도하가 워낙 풀어진 탓인지 병호는 오히려 ‘필사적으로’ 다가와서 친한 척을 했다. “에이, 같이 점심 먹는 거 가지고 그런다. 가자, 빨리 가.” 딱히 병호랑 같이 가려는 건 아니지만, 가는 방향이 같으니 어쩔 수 없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별로 관심을 두지 않던 단유는 중앙현관을 빠져나오던 중에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경찰도, 누구도 지키지 않는 이사장실이지만 아이들은 암묵적으로 그곳 근처를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원한에 쌓인 귀신이 나올지도 모른다며 꺼린 탓이었다. 교장실도 옮긴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아이들이야 오죽할까. “귀신은 무슨.” 단유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밖으로 나왔다. 맑은 하늘과 하얀 구름과 시원한 바람이 단유를 반겼다. ======================================= [367] 예언과 예측 사이(5) 중간고사가 시작되기 전 벌어졌던 사건은 중간고사가 끝나는 시점과 맞물려 끝이 났다. 때문에 몇몇 음모론자들은 시험 귀신이 붙어 생긴 일이라며 호들갑을 떨었고, 몇몇 아이들은 귀신이 어디 있냐며 이사장실 안에 몰래 들어가서 인증을 하는 등의 허세를 부리기도 했다. 물론 그러다 걸리면 학년 주임 선생님과 오붓한 상담 시간을 가져야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 학교가 당한 피해는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이사장의 죽음, 아니 살해라는 불명예를 떠안아야 했으며 이로 인한 이미지 실추는 쉽게 회복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사유가 아들의 문제로 인해 벌어진 일이기에 재단으로서는 난감할 따름이었다. 두 번째는 수업 문제였다. 사건 발생 후부터 시험이 끝나고 난 뒤까지도 수업이 정상적으로 진행이 되지 않는 분위기가 있었다. 학생들이 수업에 제대로 집중을 하지 못하는 문제도 있지만, 선생님이라고 다를 바 없는 것이 선생님들끼리 모일 때면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면서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두 사건이 모두 시간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라면, 다른 한 문제는 현재 학교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였다. “큰일이군요.” “면목 없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난 이야기 해서 뭐합니까?” 교장 선생님은 앞에 놓인 서류를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서류는 이번 중간고사의 결과가 요약된 문서였다. 한 마디로 이번 중간고사는 대대적으로 ‘망했다’. 심각할 정도로 점수가 내려가 아이들의 내신에 굵은 주홍글씨가 새겨질 정도로 심각했다. 한두 학생이면 모를까, 학교 전체 학생들의 내신이 떨어질 정도가 돼버리면, 내신관리를 잘못한 학교 측에 문제가 있다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었다. 살인 사건의 범인이 잡히고, 종료된 시점이 중간고사가 시작되기 며칠 전이었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차라리 중간고사를 미뤘을 텐데, 이미 시험문제가 모두 출제된 마당인 데다 사건까지 마무리되니 학교 측에서는 굳이 계획된 일정을 연기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거의 2주 넘게 수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던 점과, 살인 사건의 여파가 이리도 깊이 남을 줄 몰랐던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학생들은 시험을 잘 보지 못했고, 결국 대량 낙제에 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1학년 수학은 평균이 32점, 2학년은 41점, 3학년은 29점? 이게 말이 됩니까?” 각 학년 수학 선생님들이 단체로 미쳐서 수학 난이도를 올렸다면 모를까, 이런 평균 점수가 나오도록 시험문제가 만들어진다는 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몇 주간 마음고생이 심했던지, 살이 마르고 터서 볼이 핼쑥했던 교감은 더욱 마른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영어도, 국어도…. 엉망이네요.” “…죄송합니다.” 교장 선생님은 얼마 남지 않은 머리숱을 붙잡고 뱃속 깊이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토해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일단, 기말고사 때….” “교감 선생님, 지금 시험만 문제인 게 아니잖습니까? 눈이 없어요, 귀가 없어요? 여기서도 보이는 문제가 선생님 눈에는 안 보인답니까?” 교장 선생님은 임시로 교무실 가장 안쪽에 파티션을 설치하여 교장실을 대체한 업무공간을 마련하고 있었다. 아마 이것도 일선의 선생님들이 불편하게 느낄만한 요소이리라. “이사장실 없애죠.” “네?” “아예 이사장실 구조변경해서 창고 같은 부속실로 만들고, 교장실도 옮기죠.” 좋은 핑계다. 아마 교장실을 옮기고 싶었던 거겠지, 라고 생각하며 교감 선생님은 다시 한번 고개를 조아렸다. “조치 취하겠습니다.” “이사장실 폐쇄는 제가 직접 재단에 알리겠습니다.” ‘학교 면학 분위기 정상화’를 위한 핑계가 곧 재단에 전달될 것이다. “그리고 기말고사 때 평균 점수 좀 많이 올라가도록 하시고요.” “알겠습니다, 선생님.” 그것으로 이야기가 모두 마쳤다고 생각한 교감 선생님이 자리를 물러나려 할 때, 교장 선생님은 다시 그를 붙잡았다. “이사장실과 교장실 변경을 맡을 업체는 재단에서 선정한 업체로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손대지 말란 소리겠지. 애초에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교감 선생님은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물러났다. **** “김단유.” 이름이 불린 단유는 교실 앞으로 나가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2학년 첫 스타트를 또 전교 1등으로 시작하는구나. 수고했다.” “고맙습니다.” 단유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대단하다, 대단해.” 도하의 말은 순수한 칭찬이자 감탄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 옆에서 지켜봤기에 더 신기한 모습이었다. 도하가 알기로 학원에 다니는 것도 아니니, 다른 아이들처럼 선행학습을 하는 친구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수업 시간에 열심히 집중하는 스타일인가 싶었는데, 3월 초반까지는 그런 모습을 보이다가 4월에 들어서는 거의 수업을 듣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전교 1등이라는 성적을 거두니, 아무래도 평범한 녀석들과 아예 차원이 다른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도하.” “네.” “넌 니 짝한테 좀 배우라니까 뭐 했어?” “…….” “좀 배우자, 응?” 도하가 받은 성적표는 그야말로 최하위권이었다. 반에서 꼴찌라는 사실도 그렇고, 전교 순위로 보아도 제일 뒤에서 두 번째였다. “재밌지 않아?” “뭐가?” “전교 1등과 전교 꼴찌가 같이 앉아 있는 게?” 단유는 피식 웃었다. “정말 심각함과는 거리가 멀다, 너.” “심각할 상황이야? 이게?” “아니야?” “말했잖아. 난 편하게 지내고 싶다고. 난 이제껏 살아오면서 요즘처럼 편하게 지낸 적이 없다니까.” 단유는 그렇게 말하는 도하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확실히 그의 말이나 행동에서 그림자 같은 어둠은 보이지 않았다. 명수처럼, 그러니까 공부에 아예 관심이 없는 대신 다른 쪽으로 집중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말마따나 이전과 달리 얼굴에 그늘 한 점 보이지 않는, 탈속한 도인의 얼굴에서나 볼 법한 여유로움이 엿보이는 도하였다. 단유도 귀가 있어, 이번 시험이 별로 어렵지 않았는데도 점수가 잘 나오지 않았다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상대 평가에 의해 순위가 정해지는 것과 달리 내신이 엉망이 됐다며 울상을 짓는 아이들도 보였다. 시험을 망쳐서 우는 아이가 있고, 도하처럼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라며 무관심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성적이 급상승해서 기뻐하는 아이도 있기 마련이었다. “미친 거 아냐?” 지태는 명수의 성적표를 보고 부들부들 거렸다. “넌 왜 이렇게 점수가 많이 오른 거야! 난 떨어졌는데!” 비련의 여주인공 코스프레라도 하는지 애절한 얼굴을 하고 명수를 향해 울부짖는 시늉을 하는 지태에게 명수가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원래 세상이 이래. 좋을 때가 있으면 나쁠 때가 있고, 나쁠 때가 있으면 좋을 때가 있는 법.” “인생이란 너울의 높낮이가 있듯이.” 명수의 말에 채윤이 맞장구를 쳤다. 둘은 히죽 웃으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이들에게도 놀라웠던 일이 벌어졌으니, 명수가 무려 2학년 전체에서 중간 등수를 차지했다는 점이었다. 늘 하위권을 차지하던 명수의 성적이 무려 중간 이상이 된 것은, 물론 명수의 노력도 있지만 결국 학교 전체를 장악했던 사건의 여파 때문이었다. 명수도 그 일에 흔들리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그게 나랑 뭔 상관?” 이었다. 애초에 그런 일에 관심을 두는 성격은 아니었던 명수였기에 덜 흔들렸고, 집에서 단유와 시험공부를 했던 효과가 제대로 발휘된 탓이었다. 채윤 역시 명수와 비슷한 이유로 성적이 그리 높지 않음에도 전교 등수가 오른 케이스. 반면 지태는 특유의 사교력을 바탕으로 아이들과 어울려 온갖 음모론과 초자연적 발견물에 대한 토론을 나누느라 공부에 소홀했던 측면이 그대로 시험에 반영되고 말았다. “이럴 수가. 만약 이러다가 명수한테 지게 되면, 난 더 이상 공부를 할 의욕을 갖지 못할 거야.” “오버한다, 자식. 야, 오늘은 기분도 좋은데 내가 떡볶이 쏜다!” “이예!” 명수의 제안에 가장 먼저 손을 들고 기뻐한 것은 지태였다. “스트레스는 먹는 걸로 풀어야 제맛이랬다!” 라며 명수에게 ‘가방 들어줄까’라고 제안을 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4 사람이 교문 밖을 나설 때였다. “야, 저기.” 채윤이 가리킨 방향에서 단유네는 눈에 익은 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 사람 역시 단유네를, 정확히는 단유를 발견했다. 손을 들어 아는 척을 하더니, 단유에게로 다가왔다. “형사 아냐?” “…맞아.” 단유는 씁쓸한 미소를 띠며 형사를 기다렸다. “무슨 일이세요? 설마 저 때문에 오신 건가요?” “어른을 보면 임마, 인사부터 해야 하는 거야.” “혼자이신 걸 보면, 개인적인 용무로 오신 거라고 봐도 되나요?” “야, 요녀석 빈틈이 없네?” 형사는 히죽 웃으면서 단유 뒤에 서 있던 명수네를 바라보았다. “친구들?” “네.” “어디 가는 중이었냐?” 지태가 나서서 대답했다. “얘가 떡볶이 사준다고 해서 분식집 가는 중이었는데요?” “그래? 그럼 같이 갈까?” “형사님이 사주시는 거예요?” “그래, 사주마. 뭐, 그게 별거라고.” 학교 앞 분식점에 친구들과 우르르 모여서 이쑤시개 하나로 떡을 집어 먹으며 수다를 떨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형사는 호기롭게 외쳤다. 몇 분 뒤, 형사는 분식집 메뉴판에 적힌 가격을 보고 한 번 놀랬다. 아이들이 시킨 양에 또 한 번 놀래고, 끝도 없이 ‘처먹는’ 일에만 집중하는 명수와 지태를 보며 또 한 번 놀랬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형사는 단유와 따로 이야기하기를 청했고, 단유는 다른 아이들을 먼저 돌려보냈다. “뭐 마실래?” “아뇨, 그냥 이야기만 하시죠. 이미 많이 쓰신 거 같은데.” “얼굴에 티가 나든?” “저 말고 다른 아이들도 알았을걸요?” “요즘 떡볶이는 왜 그렇게 비싼 거야? 우리 때는 학교 앞 떡볶이라고 하면 한 접시에 천원이고, 두 사람이 배를 채우고도 남았어.” “그런 경우에 시대가 변했다, 는 표현들을 자주 쓰시더군요.” 단유는 슈퍼에서 생수 한 병 사서 운동장 근처의 벤치로 향했다. 형사는 단유 옆에 앉아 운동장을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거의 매일 학교로 출근해서 익숙할 줄 알았는데, 또 여기서 보니까 낯설게 느껴지네. 이 운동장.” “보는 시점이 달라지면 익숙한 대상도 낯설게 보일 때가 있죠.” 형사는 의외라는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너 되게 똑똑하구나,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제 말이 아니고 러시아의 빅토르 쉬클로프스키라는 분의 말이에요.” “응?” “러시아 형식주의자인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 하기’라는 표현법에 그런 설명이 나오더라고요.” “…음, 뭐 그런 전문적인 건 모르겠고. 아무튼, 뭐.” 장 형사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한 후, 본론을 꺼냈다. “실은 아무래도 그날 너의 행적이 궁금해서 말이야.” “사건과 전혀 상관이 없잖아요.” “상관은 없지만, 나한테는 중요한 문제다. CCTV와 경찰의 감시망을 벗어나 있을 수 있다는 건 큰 문제거든. 비록 너는 사건과 관련이 없었지만, 앞으로 벌어질 또 다른 사건들에서 너와 같은 경우가 있다면, 난, 아니 우리 경찰들은 꼼짝없이 당하고 말 테니까.” ‘니가 범인이 아니어서 다행일 정도라니까’라며 너스레를 떠는 장 형사에게 단유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이렇게 찾아와서 물어볼 줄은 몰랐으니까. 애초에 자신의 행적을 밝힐 때 각오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앞으로 조금 귀찮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사건의 범인이 빨리 잡히면서 단유는 귀찮은 일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다가와서 캐물을 줄이야. 갑자기 웃음이 났다. 행정실의 그 여자분도 나처럼 방심하고 있었겠지, 라고 생각하며. “왜 웃냐?”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개인적인 일로.” “어쩐지 경찰을 비웃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만.”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됐다. 그럼 털어놔 봐.” 단유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 [368] 예언과 예측 사이(6) “내부고발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뜬금없이 시작된 단유의 이야기에 장 형사는 고리눈을 하고 바라보았다. “내부고발자를 보호해주는 제도가 없다면, 양심선언도 없을 것이고 비리 척결에 어려움을 겪을 거라는 취지의 사설이었던 것 같아요.” “니가 내부고발자라도 된다는 이야기야?”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언론에는 취재원을 보호하기 위해, 법정에서도 묵비권을 행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경찰도 정보를 제공해주는 이의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 비밀을 지킨다는 이야기도요.” “미안하지만, 넌 그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 것 같다만?” “제가 아저씨한테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 제 행적에 대해 묻지 말아주십사 부탁을 드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너의 증언이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인정한다만, 그것과 너의 행적은 전혀 별개의 것으로 보이는구나. 혹시 말 못할 비밀이라도 있는 것이냐?” “그럼요. 말 못할 비밀이니까, 이렇게 말씀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더더욱 호기심이 생기는걸? 만약 너의 그 비밀이 범죄나 좋지 않은 일에 이용될 경우 꽤 곤란해질 것 같아서 말이야.” 오늘은 전교생이 모두 성적표를 받았을 것이다. 그 말은 지금 운동장에서 약 먹은 원숭이들처럼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아이들 역시 성적표를 받았다는 뜻이다. 어쩌면 성적이 좋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 분풀이를 저렇게 해소하는 것일지도 모르니. 단유는 운동장에 시선을 둔 채 말을 이었다. “예언과 예측은 달라요. 둘 다 미래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예측이 주장의 근거를 바탕에 두고 한다면, 예언은 증빙할 수 있는 근거 없이 미래를 짐작하는 것이죠.” 아이들이 찬 공이 공중을 비행하다 운동장 끝머리쯤에 다다라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아이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쉴 새 없이 뛰어다닌다. 아마도 공을 차는 게 목적은 아닌 것 같았다. 공을 차는 게 목적이라면, 저렇게 비효율적으로 우르르 몰려다닐 이유가 없으니까. “범죄에 이용될 소지가 있다고 하셨는데, 그 근거가 있나요?” “…….” 꼬마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영락없이 예언자가 될 판이었다.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내부고발자든 취재원이든 정보원이든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의 신빙성을 의심할지언정, 그 사람의 정체를 드러내서 알리려고 하지는 않아요. 그 사람들 역시 나름의 각오를 했겠지만,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추궁당하지는 않잖아요? 만약 그렇게 추궁하는 사람이 있다면, 부당하다고 느끼지 않을까요? 제가 지금 그렇게 느끼는 것처럼요.” “너 참 말 잘하는구나.” 장 형사는 감탄을 터뜨리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중학생이니까, 전교 1등이든 뭐든 얼마나 하겠냐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다르구나.” 장 형사는 히죽 웃으면서 단유의 머리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난 좀 들어야겠다. 이제는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서 내 감이 꼭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하거든.”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되도록 이런 식으로 해명하고 싶진 않았는데. “마술사가 흔히 쓰는 트릭 중의 하나로 미스디렉션(misdirection)이란 게 있는 데 아세요?” “미스, 뭐?” “미스디렉션. 예를 들면 사람의 시선을 한쪽으로 유도한 뒤, 다른 쪽 손으로 마술을 완성 시키는 거예요.” 단유는 양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을 펼쳐 앞뒤로 흔들어 보였다. 아무것도 없음을 보여준 뒤,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오른손과 왼손의 간격을 벌렸다. 장 형사의 시선이 오른쪽과 왼쪽을 번갈아 오가며, 어떤 변화를 찾으려 함을 단유는 알 수 있었다. 어깨보다 좀 더 넓게 손을 벌렸을 때, 오른손을 펼쳤다. 그 손 위에는 동전이 하나 놓여 있었다. “마술사냐? 어떻게 한 거야?” 장 형사는 놀란 얼굴로 동전을 보며 물었다. “간단한 트릭이에요. 두 손이 벌어지는 틈에 동전을 꺼내는 거죠. 미스디렉션, 간단하죠?” “동전을 어디에서 꺼냈는데?” “아저씨. 그건 아저씨가 찾아야 할 문제지, 제가 알려줄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요? 마술을 볼 때마다, 마술사에게 찾아가서 어떻게 마술을 하는지 물어볼 심산이신 게 아니라면요.” 장 형사는 입이 벌어진 줄도 모르고 단유의 얼굴과 손을 바라보았다. 소매를 걷은 상태라 소매 안에 숨겨둔 것도 아닌 것 같았고, 그렇다고 주머니 근처로 손을 가져간 것도 아니니, 마치 공중에서 동전을 끄집어낸 것 같았다. “간단하죠? 그래서 ‘보는 법’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장 형사는 감히 어린 꼬마라고 얕볼 수만은 없는 단유를 평소 후배 대하듯 윽박지르지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아야 했다. ‘뭔가 계속 홀리는 기분이야.’ 단유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다시 운동장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기 저 공 보이시죠?” 이번엔 또 웬 공인가 싶어, 시선을 돌렸더니 시커먼 땀방울을 턱 끝에 주렁주렁 달고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보였다. 그 아이들 무리 속에서 치열한 공 뺏기가 진행 중이었다. ‘저 공이 왜?’ 라는 의문을 가지고 잠시 바라보다가 문득 옆으로 돌렸더니, 조금 전까지 옆에 있던 단유가 보이지 않았다. “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장 형사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단유를 찾아보았지만, 주변에는 그림자 하나 없었다. “뭐야?” 조금 전까지도 바로 옆에 있던 아이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사라지다니. 황급히 교문 밖으로 뛰어나가 보았지만, 역시 단유는 보이지 않았다. 꼭 귀신에 홀린 것만 같은데, 귀신은 아닐 테니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미스디렉션이라고 했나?” 장 형사는 머리를 긁적이다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다음에 꼭 비밀을 알아봐야겠다고 다짐하며. 또 다음에는 절대 한눈팔지 않겠다 다짐하며. **** 학교가 정상 분위기를 찾는 데는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살인사건이라는 흔치 않은 일이 벌어졌는데, 아무렇지 않게 넘길 아이는 드물다 할 수 있었으니, 선생님들이 꽤 고생을 많이 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의 흐름마저 잊어버릴 만큼 혹독하고 치열한 상반기 학사일정을 보내야 했다. 원래 4월 말 중간고사가 끝난 뒤 가질 예정이었던 수련회는 취소가 되었고, 5월의 체육대회 역시 잠정보류에서 취소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학업 진도를 위해 모든 과정을 보류 및 취소로 전환할 수만은 없었으니, 학부모 수업 공개도 해야 했고, 체력검사도 해야 했다. 그 와중에도 인정 사정 볼 거 없다는 듯, 상위 부서로부터 쏟아지는 서류와 공문과 보고서 더미들에 허우적대느라 더욱 정신없는 상반기를 보내야 했던 선생님들이었다. “1학기 기말고사는, 최대한 내신 보충이 되도록 부탁드립니다.” 라는 교감 선생님의 지령은 곧, 최대한 난이도를 떨어뜨려서 전반적인 성적 향상으로 이끌어내라는 뜻으로 해석되었으며, 때문에 변별력을 상실한 기말고사가 학생들의 손에 들리게 되었다. “미친 거 아냐?” 불과 2달 전에 들었던 말 같은데, 라고 생각하던 차에 명수가 히죽 웃으며 지태의 어깨에 손을 걸었다. “문무를 겸비한 지성인이 바로 나란 말씀이다.” 날이 갈수록 족집게 선생이 다 되어가는 단유 덕분인지, 아니면 어처구니없게도 난이도가 대폭 하락한 시험 때문인지, 명수가 무려 100점짜리 시험지를 자랑하기에 이르렀다. “살다 살다 명수가 100점 받는 경우를 다 보네.” 하은이 얼이 빠진 모양으로 명수의 시험지를 바라보다, 명수를 안아 주었다. “어, 왜, 왜 이러세요?” 명수는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다른 하은의 모습에 당황했다. “선생님이 바빠서 챙겨주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성적도 좋으니까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너무 고마워서 그래. 고마워서.” “언제는….” 명수는 허우적대다 단유와 눈이 마주친 후, 뒷말을 삼켰다. “단유가 많이 도와줘서 그래요. 제가 뭘 한 게 있다고….” “그래도 우리 명수가 이렇게 공부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준다는 게 고마워서 그래.” 하은에게 안긴 상태라 하은의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하은의 목소리가 젖어 있다는 사실을 안 명수는 가만히 서서 하은을 마주 안았다. “저도 고마워요, 선생님.” 잠시 후, 명수에게서 떨어져나온 하은은 명수를 보며 씩 웃었다. “자, 그럼 명수가 백 점 맞은 기념으로 외식이나 할까?” “진짜요?” “마침 선생님도 월급을 탔으니까, 내가 쏜다!” “우와!” 명수는 옷 갈아입고 오겠다며 허겁지겁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사이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찍어내며, 손에 들린 시험지를 천천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근데 너희 선생님들도 대단하다. 어떻게 이런 문제를 다 내니? 이건 틀리는 게 더 힘든 거 아냐?” “그래도 틀리는 애들은 틀리더라고요.” 점수를 맞춰보던 아이들이 시험지를 움켜쥐고 울부짖던 모습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이렇게 쉬울 리가 없어’라며 머리를 한 번 더 써서 답을 고른 아이들은 여지없이 틀리고 말았다. 덕분에 또 한 번 대(大)파란의 시험이 벌어졌고, 아마 오늘내일, 혹은 일주일 정도 선생님들은 학부모들의 심한 항의에 시달릴 것이다. “넌?” “글쎄, 일부러 틀리기가 힘들 정도?” “역시. 나이를 먹을수록 겸손보다 거만함을 배우는구나, 김단유.” “어떤 선생님 덕분이죠.” “그 어떤 선생님은 늘 겸손하라고 가르친 것 같은데.” “그 어떤 선생님은 늘 자기 자랑에 여념이 없으시더라고요.” “난 아닌 거 같은데?” “착각도 심하시네요.” 하은은 단유의 머리를 붙잡고 헤드락을 걸었다. “이 녀석!” “선생님, 밥 먹으러 가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사복으로 갈아입은 뒤, 신발까지 신으면서 선생님을 부르는 명수였다. **** 우여곡절 끝에 방학이 다가왔다. 선생님들은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며 방학식을 반겼고, 아이들은 귀신 나오는 학교에서 떠나게 되었다며 아쉬움(?)의 한숨을 지었다. 교장선생님은 여전히 새 교장실이 완전히 꾸며지지 않아, 교무실의 임시 거처에서 방송으로 방학식을 진행하였다. “학생 여러분들은 더운 여름에도 지치지 말고,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지키며, 방학 중에도 학업에 대한 끈을 놓지 마시길 바랍니다.” 도하는 턱을 괸 채 교실 앞 모니터를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공부하란 소리를 왜 저렇게 늘인대?” “넌 조금 새겨들을 필요가 있어.” “나?”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수도 점수가 올라서 생애 최고일지도 모를 내신 성적을 얻은 바로 그 시험에서 최하위권을 차지한 도하였다. “난 별로. 어차피 대학도 안 갈 건데, 공부해서 뭐해.” “생각해 둔 게 있어?” “아니. 천천히 찾아보지 뭐.” 한결같이 여유로운 도하는 하품을 늘어지게 하더니 책상 위에 철퍼덕 엎어졌다. 과거에는 주변과 담을 쌓을 요량으로 엎드려 잠을 청했다면, 지금은 햇볕 따뜻한 양지에서 꾸벅 조는 새끼 고양이처럼 오수를 즐기는 도하였다. “방학 잘 보내라.” 단유는 도하의 잠을 깨우지 않았다. 방학식이 끝날 때까지. 차마 깨우기 미안할 정도로 곤히 자는 도하의 얼굴이 평화스러워 보였던 탓이었다. 짝도 깨우기 미안할 정도인데 다른 아이들이라고 오죽할까? 결국 교실에 홀로 남아 잠을 청하는 도하였다. “단유야!” 중앙 현관 근처에서 단유를 기다리던 명수와 지태, 채윤이 보여 그 곳으로 향했다. “오늘 제대로 한 번 놀아볼까?” “또?” “또는 무슨 또 야? 어디 갈까? 보드겜방?” 단유가 고개를 젓자, 지태가 왜 그러냐고 물었다. “거기 너무 비싸.”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 오늘 같은 가서 즐겨야지.” “됐어.” “가자, 응? 아니면 노래방?” 하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굳이 변명하자면. “오늘은 영 컨디션이 안 좋네. 놀 기분이 아니야.” 지태가 허리에 손을 얹고 혀를 찼다. “니가 언제는 놀 기분이라서 놀았냐? 그냥 따라와. 우리가 책임지고 즐겁게 해 주마.” 지태의 말에 명수와 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눅눅한 공기가 와 닿는 느낌이 좋지 않은데. 단유는 어깨를 으쓱여 보이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셋이 열심히 새로운 놀 거리를 궁리하며 교문을 나설 때였다. “어?” 먼저 발견한 것은 채윤이었다. “저기, 저…맞지?” 채윤이 단유의 팔을 붙잡고 소심하게 손가락만 들어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단유가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을 때, 그곳에서 의외의 인물을 발견했다. “누나?” 눈이 마주치자 그녀, 나윤이 슬쩍 손을 들어 아는 척을 했다. ======================================= [369] 노는 게 좋아(1)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도 오래여서, 비록 방학식이 진행되는 학교 안은 에어컨 덕분에 더위를 몰랐지만, 바깥은 가만히 서 있어도 따가운 햇살 탓에 코끝이 불에 닿은 듯 화끈거리는 날씨였다.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지만, 더욱 모자를 깊이 눌러쓴 나윤은 낯선 남자 중학교의 교문 앞을 바라보면서 심란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창피해.’ 오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이대로 가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어렵게 발을 뗀 김에 얼굴이라도 보고 가야 후회를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오락가락하는 마음에 귀를 기울이며 갈팡질팡하던 나윤은 느닷없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오는 남학생들 무리를 보고는 급하게 몸을 돌렸다. 방학식인 줄 모르고 온 탓이기도 했지만, 이렇게 이른 시간에 아이들이 뛰쳐나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마음의 준비가 덜 됐던 나윤이었다. ‘어떡해.’ 나윤은 고개를 조금 숙이고 가끔씩 고개를 살짝 들어 교문을 지켜보았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수많은 남학생들이 밝은 얼굴을 하고 뛰쳐나오는 걸 보며 나윤은 결심했다. ‘안 되겠어. 그냥 가자.’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 순간에 나윤은 단유와 눈이 마주쳤다. **** 단유는 나윤을 데리고 버스 정류장 근처의 카페로 들어갔다. 비록 학교 근처지만 중학생이 이런 카페에 들어오는 일은 드물었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몰릴 법도 한데, 다행이랄까 아직 점심시간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이어서 사람이 많지 않았다. “여기, 괜찮아요?” “응. 괜찮아.” 단유는 다른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해서 먼저 보낸 후, 나윤과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눌 만한 곳으로 데리고 왔다. 정작 찾아온 나윤은 별말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카페 가장 안쪽, 사람들의 시선이 덜 닿는 곳에 자리한 두 사람은 차가운 아이스티를 앞에 놓고는 침묵을 지켰다. “오랜만이네요?” “그, 그렇지? 오랜만이네.” “어떻게 오신 거예요? 방학이에요?” “아니, 우리 학교는 다음 주 방학이야.” 고등학교는 대부분 다음 주에 방학을 한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 시간에 나윤이 올 수 있었던 것은 ‘가수’라는 신분 때문이었다. 평소에도 1, 2교시 정도만 수업을 받고 ‘조퇴’를 해서 회사로 가는 일정이었던 나윤은, 모처럼 땡땡이를 쳤다. 날이 더워서이기도 했고, 맑아서이기도 했고, 덥고 햇볕이 뜨거운 반면에 마음은 서늘해서이기도 했다. “깜짝 놀랐어?” “놀랬죠. 당연히.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는데 놀라지 않을까요?” “그런데 전혀 반가운 눈치가 아니다?” “반가움을 느낄 겨를도 없을 만큼 놀랐다는 거죠.” 나윤은 작은 티스푼으로 컵을 휘젓다 단유의 대답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우스운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단유를 보며 또 한 번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진짜 어쩐 일이에요, 이 시간에.” “어, 그냥.” 자신도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냥, 조퇴를 하고 학교를 나와서 회사로 가야지, 라고 마음을 먹고 있을 때, 문득 회사 말고 다른 곳에 가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고, 충동에 이끌려 발걸음을 옮기다 정신을 차려보니 단유네 학교 앞이었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이유라. ‘어떤 이유로 여기 왔을까? 난?’ ****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선 나윤은 ‘후배’들의 인사에 황망히 답하다 도로 연습실을 나왔다. 가디스R로 데뷔를 하면서 ‘선배’가 돼버린 나윤은 줄곧 같이 연습했던 이들이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라고 소리쳐 인사하는 게 그렇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팀이 깨져서 이후의 활동이 막막한 지금은 더 그랬다. “넌 에이바운스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차지한 ‘선배’라는 걸 잊지 마.” 기존 매니저였던 태호가 독립을 하면서 나윤에게 새로 배정된 매니저는 태호보다 엄격했다. 태호가 느슨하게 풀어줬던 것은 아니었지만, 새 매니저는 연습생 간 서열까지 신경 쓸 정도로 엄격했다. 그렇지 않아도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과 성공적인 데뷔 활동에도 불구, 짧은 경력 때문에 ‘선배’로서의 자의식이 부족했던 나윤은 연습실에서 편하게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가디스R의 주 멤버인 수련이 회사를 떠나면서 가디스R의 후속 활동이 불투명해졌다. 하지만 회사 측은 계속 가디스R이라는 이름으로 행사를 잡았고, 나윤 홀로 무대에 올라서 책임을 다해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비는 스케줄이 늘어났고, 회사 측은 후속 활동을 위한 기획에 들어갔지만, 딱히 방안이 없었다. 한 마디로 ‘오리무중’,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차트 순위 20위까지 오른 가수야, 너는. 다시 연습생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게 아니면 더 열심히 연습해. 언제라도 출격할 수 있게 준비가 되어 있어야 돼.” 식단조절과 타이트한 레슨 일정은 연습생 때가 행복하다 여길 정도였다. 물론 ‘리모트’ 공식 활동 기간에는 이보다 더 심해서, 하루에 2시간도 못 자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꿈이 충족되는 하루를 보내느라 힘들어도 힘든 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후속 활동을 준비한다는 회사의 말과는 달리 차갑게 식은 눈빛들, 마치 데뷔를 기다리는 연습생 때로 돌아간 것처럼 답이 없는 시간만 계속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에 나윤은 점점 지쳐갔다. 그리고 오늘, 활동도 없는데 의례적으로 조퇴를 신청하고 회사로 가려던 나윤은 교실을 나올 때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저들은 한 걸음씩 천천히 준비하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 자신은 제자리에서 보이지도 않는 미래를 허망하게 외치는 이들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0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는 게 어때요?” 단유가 남긴 말이 떠올랐다. ‘힘들어.’ 투정을 부리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단유의 말이 틀렸다고 따지고 싶었던 것일까? 나윤은 어느새 핸드폰으로 ‘장계중학교’를 검색하고 발길을 돌렸다. **** 처음의 어색했던 침묵은 금방 사라졌다. “안 무서웠어?” “솔직히, 무서워하는 아이들도 있었던 것 같아요. 만약 누나 학교에서 살인 사건이 났다고 생각해봐요. 당사자가 아니라고 해도 무섭지 않겠어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야.” “그래도 경찰이 금방 범인을 잡았으니 망정이죠, 만약 안 그랬으면 정말 학교 분위기가 엉망이 됐을 거예요.” 뉴스에도 몇 번 나왔지만, 애초에 그런 사회 뉴스는 고사하고 연애면도 보지 않는 나윤은 단유네 학교에서 일어난 사건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하지만 덕분에 오랜만에 만난 단유와의 어색함이 조금 줄어든 것 같았다. “아무튼 전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지냈네요. 누나는 어땠어요?” 어떻게 보면 그냥 일상적인 물음이고 편하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나윤은 대답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힘들죠?” 나윤이 눈을 부릅뜨고 앞에 놓인 잔을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계속하는 동안에도 입 한번 대지 않은 아이스티였다. 커다란 조각 얼음이 반 토막이 나서, 아마 지금은 꽤 싱거워지지 않았을까? “다시 시작한다는 게 힘들 거에요. 아, 그때 이야기한 거 기억나요? 저도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한다고. 여태 지낸 것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다 보니 조금 서투를 때도 힘들 때도 있는데, 그래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 뿌듯하기도 하고 그렇네요.” 마치 지금처럼. 과거의 단유였다면, 이렇게 오지랖을 부렸을까? 만약 나윤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대화를 하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라며 등을 돌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쩐지 나윤에게만큼은 조금 무뎌지는 단유였다. ‘아마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겠지.’ 나윤에게서는 여러 가지 모습이 발견된다. 과거 홀로 살아남으려고 애를 쓰지만, 방법을 몰라 그저 벽을 쌓고 살았던 자신의 모습도 보였고, 기자들에게 둘러싸이자 어쩔 줄 몰라 주저앉아 눈물을 보이던 초등학교 동창 ‘장혜진’―실제 이름은 강혜진이지만, 단유의 기억에서는 여전히 ‘장혜진’이란 이름으로 기억되었다―의 모습도 보였다. 또 어떨 때는 더러운 진흙탕 위에서 꼿꼿이 목을 세우고 자신을 바라보던 큰 날개를 가진 이름 모를 새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뿌듯해?” 나윤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네?” “뿌듯하냐고.” 스푼을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이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다 똑같애. 매니저 오빠도, 수련 언니도, 너도.” 단유는 말없이 나윤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든 나윤의 눈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젖어 있었다. “자기들만 만족하고, 자기들만 위로받으면 다야? 나는? 준비할 시간도 없이 버려진 나는? 다시 시작하라고? 그래, 그랬어. 니가 그렇게 이야기해줬을 때, 다시 시작할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야. 아무도 나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안 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방법도 안 알려 주는데 어떻게 해? 노래하고 춤추는 거? 아무리 해도, 어떤 방법을 써도 안 돼. 안 된다고.” 나윤의 혀끝에 돋아있는 가시가 꽤 따갑게 느껴졌다. 차라리 그 가시로 상대를 찌른다면 모를까, 나윤의 가시는 자기 자신을 찌르고 있었다. 날카롭게 찌르고 후비고 상처를 내고, 다시 찔러서 상처가 덧나게 하고 있었다. “힘들어요?” “그래! 힘들어! 노래하는 것도 힘들고, 마냥 기다리는 것도 힘들어. 사람들을 보는 것도 힘들어. 연습실에 혼자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전부 쳐다봐. 학교에서도 아이들이 계속 날 보고 속닥거리는 거 같다고. 실패했다고, 버려졌다고 속삭이는 것 같다고!” 언성이 높아진 탓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드는 것이 느껴졌지만, 단유는 그저 나윤을 바라만 봐주었다. 나윤은 그런 시선을 의식하지 못했는지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어? 매니저 오빠한테, 수련 언니한테 내가 뭘 잘못했는데? 혼자 무대에 올라가야 할 때도, 너무 긴장돼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데도 여태 실수 한 번 안 했어. 불평도 안 했어. 그런데 내가 회사에 무슨 잘못을 했는데? 내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 건데?” 단유는 나직하게 숨을 토해내고는 고개를 저었다. “잘못하지 않았어요.” “잘못 안 했으면, 잘했으면, 그러면 나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 난 열심히 하려고 했던 것뿐이잖아. 잠 못 자고 힘들어도 말 안 했던 건 같이 열심히 하자는 뜻에서 그런 거잖아. 당연히 괜찮지 않은 거잖아? 그런데 왜… 왜 내가 이렇게 돼야 해….” 나윤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진짜 하고 싶은 것은 하소연을 하는 것이리라. 하소연을 들어줄 이가 필요했던 것이리라. 탁자 위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던 나윤의 손 위로 단유의 손이 얹어졌다. 떨림이 멎고 대신 빨갛게 변한 눈동자가 단유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친구들의 심정이 이해가 가네요.” “무, 무슨 말이야.” “누나 오늘 안 바쁘죠?” 안 바쁠 리가 없지만, 이미 회사에 가기로 한 시간을 훌쩍 넘긴 상황이었다. 더 기분 나쁜 건, 그런데도 전화 한 통 오지 않는다는 거. 처음의 엄격했던 매니저는 활동이 줄어들면서 동시에 점점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럼 저랑 놀죠.” “응?” “아, 정확히는 저희들이랑 놀아요.” 단유는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무음으로 한 탓에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계속 핸드폰으로 문자가 오는 중이었다. “스트레스, 풀러 가죠.” 단유가 그답지 않게 진한 미소를 띄며 웃었다. 나윤의 눈에 서렸던 붉은 기운이 아래로 내려왔는지 두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 [370] 노는 게 좋아(2) “안녕하세요! 팬이에요!” 지태의 호들갑에, 가볍게 미소를 지어주는 것으로 답례한 나윤은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겨울 이후로 특별히 인상적인 방송활동을 하지 않은 탓에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특히 평범한 사복 차림으로, 화장도 하지 않으면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일이 일상이 될 정도였으니까. 더러 자신을 알아보고 다가와서 ‘가디스R 맞죠’라고 물으면, 어색한 미소로 화답하긴 했지만, 지태처럼 열성적으로 떠드는 팬은 최근에는 거의 만나본 적이 없던 차였다. “그만해. 누나 곤란해 하잖아.” 채윤이 옆에서 말려도 지태는 연신 방긋방긋 이었다. “혹시 몰라서 근처 피시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어. 그치?” “그래, 그래. 덕분에 스트레스가 더 쌓였다.” 명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태와 온라인 축구 게임을 했는데, 어찌나 못하는지 상대편에게 계속 지기만 했고, 때문에 열만 받은 명수였다. “더 잘됐네. 가자!” “어딜 가자고?” “어? 일단 가자!” 아무래도 이번에는 단유가 말려야 할 것 같았다. “여기서 결정하고 가자. 길에서 헤매지 말고. 누나, 혹시 가고 싶은데 있어요?” “아니, 딱히….” “단유야, 보드 게임방 갈까? 누나 보드 게임 좋아해요?” 나윤이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보드 게임방이면 사람들의 시선을 덜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유는 나윤을 슬쩍 훔쳐보고는 볼을 긁적였다. “가디스R 맞죠?” 보드 게임방 사장님이 단유네를 보더니 대뜸 그렇게 물었다. “맞네. 지난번에 왔을 때, 같이 합석했었던 손님들이 그렇게 말하더라고. 오늘은, 어? 가디스R 진짜 멤버네? 솔직히 제가 잘 몰랐거든요? 이 친구 왔다 간 뒤에 뮤직비디오를 찾아봤어요. 노래 좋더라고. 그래서 가끔, 아니 자주 노래 틀기도 했어요. 팬이 됐다니까요?” 사인과 사진까지 부탁한 사장님은 ‘1시간 공짜’라는 대찬 서비스까지 제공했다. 머무는 동안 ‘리모트’를 몇 번이고 들어야 했지만, 곧 게임에 빠져든 나윤은 아무 생각 없이 웃고 즐겼다. 이번에는 단유도 같이 게임을 했다. ‘적당히’ 하라는 친구들의 조언에도 불구, 자연스럽게 플레이가 진행되는 동안 단유의 독주가 이어졌고, 지태가 단유의 어깨를 붙잡고 하소연하는 시늉까지 했다. 그 모습이 여간 우스꽝스러운 게 아니었던지, 나윤은 눈물을 흘릴 정도로 웃었다. 서먹함이 사라진 뒤, 단유네가 향한 곳은 이번에도 노래방이었다. “꼭 듣고 싶습니다!” 라며 간절한 눈을 하고 나윤을 바라보는 지태와, 그 못지않게 기대하는 심정으로 두 손을 모은 채윤과 명수를 보며 나윤은 웃음을 터뜨렸다. 매일 음정, 박자, 감정 등을 지켜가며 부르는 일에 지쳐가던 나윤이었지만, 음정, 박자, 감정 따위 개나 줘라며 마이크를 붙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의 모습에 긴장이 풀렸다. 나윤이 마이크를 잡자, 경건하게 경청할 모양으로 눈을 반짝이던 아이들은 나윤의 노래가 끝나자, 마치 미니콘서트에 온 것처럼 두 손을 치켜들고 ‘누나, 누나!’를 연호해, 나윤을 또 한 번 웃게 만들었다. 그다음부터는 서로 어울려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 가야겠다.” “벌써요?” “전화가 계속 왔는데, 안 받고 있었거든.” 나윤도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이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단유를 바라보았을 때, 단유가 말했다. “데려다 줄까요?” ‘괜찮다’ 라고 답하려던 나윤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래.” 친구들의 야유(?)를 받으며 단유와 나윤은 노래방을 빠져나왔다. 많이 놀았던 것 같은데, 여전히 밝은 대낮의 도심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회사 가시는 거죠?” “응.” “지하철 역으로 갈까요?” “그래.” 조금 전까지 온몸을 들썩이며 놀았던 것이 마치 거짓말처럼 차분해진 나윤은 단유와 둘만 있으니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친구들이랑 이렇게 놀아?” “보통은요. 보드 게임방은 아까 들었다시피 두 번째고, 노래방은 좀 자주 갔었네요.” “노래 부르는 거 좋아해?” “아니요. 아까도 전 별로 안 불렀어요.” 그랬던가? 나윤이 기억을 떠올려보니 과연 단유가 노래 부르는 모습은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그보다는 자신이 마이크를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내가 너무 들떴었나 봐.” “뭘요. 누난 역시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던데요.” “그런가?” 레슨을 받을 때처럼 이것저것 챙겨가며 부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몸으로 체득한 탓에 저도 모르게 고음으로 올라갈 땐 벨팅 창법(흉성으로 고음을 내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고, 두성으로 목을 보호하기도 했다. “연습할 때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은 것 같긴 하네.” “놀러 왔는데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되죠.” 나윤은 단유를 힐끔 쳐다보았다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아까는 왜 놀자고 했어?” “…아까보다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았어요?” “조금.” 회사에서 걸려오는 연락도 무시하고 생각 없이 놀았더니, 확실히 스트레스가 풀리는 느낌은 들었다. 하지만 다시 회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진 않았다. “친구들이 저만 보면 그렇게 놀자고 졸라요. 뭐 억지로 끌려가는 건 아니지만, 가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왜 쟤들은 나만 보면 못 놀아서 안달일까? 지들끼리 놀아도 잘 놀 애들인데.” 단유의 말에 나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처음 어울렸을 뿐이지만, 지태나 채윤, 명수는 자기들끼리 잘 놀 것 같았다. “그런데 오전에 카페에서 누나를 보고 있으니까, 그 애들 마음이 이해가 가더라고요.” 분명 카페에서 자신에게 놀자고 제안할 때도 저 말을 했었지. “아마 그 애들 눈에는 제가 옆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가는 모습이 답답해 보였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니, 그렇게 보였을 거예요. 옆도, 뒤도 없이 앞으로만 가는 사람들은 여유가 없어 보이거든요.” “내가 그렇게 보였어?” “조금요?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까, 불안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거죠.” 나윤은 문득 자신이 중학생일 때 어땠나, 떠올려보았다. 현대인의 불치병 ‘스트레스’는 중학생이라고 비껴가지 않는다. 그런데도 어른들이나 선생님들은 ‘니들이 무슨 스트레스냐’고 핀잔을 주기 일쑤였다. ‘우리도 힘들어요!’ 라고 말했던 나윤이었는데, 지금의 자신과 비교해보면 별로 스트레스 받을 일도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 당시에는 고작해야 ‘공부’만 하면 될 일이었지만, 지금은 불확실한 미래와 싸워야 하는 ‘사회인’으로서의 걱정이 더 많은 탓이었다. 누구도 도움을 주지 않고, 누구도 방향을 제시해주지 않으니, 홀로 걱정하고 홀로 선택해야 한다. “너도 스트레스 많이 받니?” “스트레스라고 표현할 것까진 안 되죠. 저는 제가 좋아하는 공부를 하는 건데요.” “나도 차라리 공부를 좋아했으면 좋았을걸.” “그럼 스트레스를 덜 받았을까요?” “그렇지 않을까?” “누난 노래하는 걸 좋아하잖아요.” 나윤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 지금 난 좋아하는 걸 하고 있지. 그런데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예전에 절 가르쳐 주셨던 스승님 중에 이렇게 말해주신 분이 계세요.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다고.” 나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뜻이야?” 단유는 나윤을 붙잡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앞을 보세요. 뭐가 보여요?” 별거 없었다. 차도 쪽에는 흔하게 생긴 차들이 지나가고 있었고, 인도에는 가로수와 지나가는 행인들, 그리고 여러 종류의 가게들이 문을 열어놓고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높은 빌딩들이 보였고, 빌딩 사이로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보였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지나가는 사람들?” 뭔가 특별한 거라도 있나 싶어서 주의를 기울여봐도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없었다. “저기 오른쪽에 지나가는 사람 보이세요? 빨간 가방을 멘 사람.” “응.” “저 사람은 이 동네가 처음인가 봐요. 계속 두리번거리고 있죠? 아마 약속장소를 근처로 잡은 거 같은데,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모르나 봐요. 그래서 주로 가게 간판들을 위주로 살피며 걷고 있죠.” 나윤은 단유의 설명을 들으며 조금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아이 손을 잡고 있는 아주머니는 화장실이 급한지도 모르겠네요. 아마 본인이 아니라 아이가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보채는 것이겠죠. 근처에 있는 공용 화장실을 알려주면 좋아할 것 같은데요?” 과연 아이가 계속 울상을 짓고 발을 동동 구르는 모양새였다. “저기 정류장 바로 옆의 가로수 보이시죠? 저 가로수는 지금 다른 가로수들에 비해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요. 다른 가로수들에 비해 잎이 많지 않고, 시든 잎도 많이 보이죠? 그 옆 나무들도 시들어가는 것 같네요. 아마 방충, 방제 작업이 필요할 것 같아요.” 단유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눈앞의 세상이 달라지는 기분이었다. 평범한 오후의 한적한 거리가 풍부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냥 눈을 뜨고 있어도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보려고만 하면 볼 수 있는 것들이죠.” 단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윤이 얼른 옆에 붙어서 물었다. “그런 건 어떻게 아는 거야? 훈련 같은 걸 받았니?” “뭐, 비슷해요. 그런데 중요한 건 스스로 보려고, 들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에요.” 단유는 잠시 말을 끊었다. 지하철역 입구에서 나오는 사람이 많았다. 단유는 나윤의 팔을 잡고 옆으로 자리를 이동해서 부딪치지 않게 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걸어가자, 뜨거운 지상의 열기가 한풀 꺾이는 기분이었다. “누나는 지금 너무 옆을 보지 않는 것 같아요. 보지 않고 추측만 하려고 드니까, 불안한 마음만 앞서는 거예요. 제대로 보면, 무섭지도 불안하지도 않을 거예요.” 나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왜요?” “마치 철학관에서 상담받는 기분이 들어서.” “다행이네요.” “뭐가?” “농담할 여유가 생기신 것 같아서요.” “농담이라고 생각해?” 나윤이 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어디까지 갔다 왔어?” “지하철역까지.” “우와, 좋았겠다. 손잡았어?” 지태는 채윤이 옆에서 말리는데도 굴하지 않고 눈을 반짝였다. “손을 왜 잡아?” “사귀냐?” “왜 이야기가 그쪽으로 튀냐?” “에이, 빼지 말고 이야기해봐. 그 누나가 너 보려고 학교까지 왔으면, 너 좋아하는 거 아니야?” 단유는 혀를 차며 지태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런 거 아니다.” 지태는 끈질기게 매달렸다. 마치 단유가 중요한 이야기를 숨기고 있다는 걸 안다는 듯이. 그걸 들으려고 집에도 가지 않고 단유네 집에서 단유가 돌아오길 기다렸단다. “그럼 용건 끝났으며 돌아가. 난 공부할 거야.” “매정한 새끼!” “그래, 나 매정해. 그러니까 돌아가.” “그러지 말고, 썰 좀 풀어봐.” “너 요새 외롭냐?” 지태가 연극 무대에 선 배우처럼 가슴을 부여잡고 울부짖듯 독백을 시작했다. “외롭냐고? 외롭지! 외롭다고! 우리 학원에서 솔로는 나뿐이란 말이야! 왜 나만 솔로야!” 쟤 연극학원 다녀, 라고 묻는 단유의 말에 채윤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 학원 안 늦었어?” “저녁에 가면 되니까 아직 시간 많이 남았어. 그러니까 이야기 좀 해 봐라.” “무슨 이야기를 계속 해 달래?” “언제부터 사겼어?” “명수야.” “응?” “내쫓아.” “너무한 거 아냐? 내쫓으려면 밥이라도 먹이고 날 내쫓아라!” 아직 친구들의 유흥은 끝이 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결국 네 사람은 라면을 끓여서 먹고 TV 예능을 보면서 한껏 수다를 떨다가 헤어졌다. **** “정나윤! 너 왜 이렇게 늦었어! 연락은 또 왜 안 되고! 레슨 선생님이 얼마나 기다리셨는 줄 알아!” 매니저가 노기 띤 얼굴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무슨 가수를 하겠냐며, 때려치울 거냐고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나윤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하다고 말이면 되는 줄 알아! 니가 지금 얼마나 해이해졌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겠어? 다시 연습생으로 돌아가야 정신을 차릴래? 응?” 회사의 지원을 끊니 마니 하면서 발을 굴러대는 매니저의 폭언에도 나윤은 그저 고개 숙여 ‘죄송합니다’고만 했다.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고? 그래서 보려고 했다. 보려고 했더니, 매니저의 얼굴이 보였다. 속 좁은 인간의 전형. 소심한 사람. 회사의 눈치만 보면서 자기 잇속만 챙기려는 사람. 나윤에 대한 걱정은 없고 오로지 자신에게로 향하는 손가락질만 걱정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겠거니 라고 생각하자, 나윤은 매니저가 별로 무섭지 않았다. 굳이 맞상대해서 자신에게 상처를 낼 필요가 없으니까. 매니저가 잔소리를 끝내고 위층으로 올라간 사이에 나윤은 정수기의 물을 받아 입을 축였다. 그리고 잠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다 피식 웃음을 지었다. “패잔병 같네.” 거울 속에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전쟁에 지고 난 사람의 모습 같았다. 아직 단유처럼 정확하게, 숨겨진 정보들을 파악해낼 수준이 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보려고 노력을 하니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낯설게 웃는 자신을 보며 나윤은 또 한 번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 [371] 노는 게 좋아(3) 나윤이 레슨 중에 살펴보니, 레슨 선생님은 ‘돈 받고 하는 일이라 억지로 시간을 때우고는 있지만, 이렇게 못 하면 답답해서 어떻게 가르치니’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능력도 안 되는 게 수련 언니 옆에서 인기 좀 얻더니, 꼴 좋다’는 얼굴을 하고 나윤을 훔쳐보다 들킨 연습생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나윤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쟤 불쌍해서 어떡하니, 하지만 이 바닥이 다 그런 걸 어떡해. 나는 그냥 월급이나 루팡하면서 지내야지’라는 얼굴로 책상을 지키던 팬매니저에게 다가가 정산 금액을 알아본 나윤은 ‘왜 이렇게 할 일이 없지’라는 얼굴로 모니터를 보던 실장님에게 다가가, 일정 변경을 요청했다. “무슨 일정 변경?” “다음 주부터 방학인데, 저도 마냥 여기서 시간만 때울 순 없잖아요?” “시간을 때우다니?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 줄 몰라서 그래? 후속곡 나오면 바로 컴백할 거야. 그때까지 준비가 되어 있어야지?” “후속곡 언제 나오는데요?” “뭐?” 평소와 다른 반응의 나윤을 보며 ‘나 진심으로 당황’이라는 얼굴을 한 실장이 적절한 대답을 찾아 헤매다가 겨우 꺼낸 말이, ‘곧 나올 거야’ 였다. “그럼 그때 다시 일정을 되돌리죠.” “뭐야!” “저 이제 고3이에요.” 저 눈은 분명 ‘전혀 몰랐어’라는 뜻이리라. 너무 당황했던지 표정을 채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실장에게 나윤은 마지막으로 이야기했다. “대학은 가야죠.” 갈 수 있는지 여부는 둘째고, 일단은 여기에만 머무르는 건 좋지 않다고 판단한 나윤이었다. 그렇게 실장에게까지 이야기를 끝낸 나윤은 회사를 나왔다. 지난봄부터 나윤은 숙소가 아닌 집에서 출퇴근했기에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나오던 나윤은 평소의 평범했던 길이 더 이상 평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꽃 가게는 꽤 늦게까지도 문을 열어놓고 있었구나. 저 집 간판은 저런 모양이었네.’ 편의점에서 늘 만나던 알바생이 혼자 있을 때 짓는 표정도 처음 봤다. 골목 어귀가 어두워서 조금 두렵다는 생각만 하고 지나다녔는데, 오래된 전봇대 옆에 쌓인 쓰레기봉투 사이로 몸을 숨긴 길고양이와 삼거리로 나뉘는 곳에 있는 석벽에 그려진 낙서의 장난기가 나윤을 웃음 짓게 하였다. 서점과 빵집 사이로 난 작은 골목을 지나면 큰 길이 나오고 빵집 쪽으로 방향을 틀면 그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시간이 어느덧 오후 11시를 넘겼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였다. 이전에는 이어폰을 꽂고 고개를 숙인 채로 버스가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이제는 차분하게 거리를 둘러보며 흘러가는 풍경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회사를 나온 직후 줄곧 입을 다물고 풍경을 즐기던 나윤은 처음으로 입 밖으로 소리를 냈다. ‘여유가 없었구나.’ 옆으로 보지 않는다는 둥, 앞만 본다는 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윤은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어른들이 흔히들 사용하는 말의 용례를 따라 한 거라고만 생각했던 것인데, 단유를 흉내 내 보려고 보는 시늉을 하던 중에 처음으로 그 행동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이제껏 나윤은 자신만 생각했다.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없이, 오직 자신의 하루와 자신의 미래만을 바라보고 생각했다. 그래서 갑갑했던 것일까? 그런데, 단유의 말처럼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보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더니 나윤의 세계가 갑자기 넓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넓은 세계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자 갑자기 홀가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갑갑하기만 했던 우리에 갇혀 있다가 탁 트인 초원으로 풀려난 기분이랄까? 나윤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원 없이 드러내고 싶었다. 누군가와 이 감정을 나누고 싶었고,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다. **** “니 전화 아냐?” 거실에서 하은과 가볍게(?) 오일러 공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단유는 방에서 들려온 전화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단유가 전화를 받으러 간 뒤, 홀로 노트를 끄적거리면서 단유가 던진 물음, ‘미적분을 쓰지 않고 오일러의 공식을 유도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을 정리해 나갔다. 하지만 전화를 받으러 들어간 단유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야? 왜 안 나오지?” 3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는 단유를 의아하게 여긴 하은이 일어나 단유의 방으로 향했다. 문이 닫혀 있지 않은 탓에 하은은 단유가 통화하는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네.…네.…그럴 수도 있겠죠.…네.” 주로 단유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쪽이었는지,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고 간단하게 대답만 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야기길래 30여 분이 지나도록 저렇게 통화를 하는 걸까? 단유가 고개를 돌리더니 문밖에 서 있는 하은을 바라보았다. 핸드폰을 가리키며 ‘통화가 길어질 것 같다’고 양해를 구하는 단유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하은은 문을 닫은 뒤, 명수의 방을 두드렸다. “예.” 역시나 명수는 시계가 11시를 넘은 이 시간까지도 잠이 들지 않았던지 곧바로 대답이 나왔다. 방에서 열심히 만화책을 읽고 있던 명수에게 다가간 하은은 단유의 방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단유가 누구랑 통화하는지 혹시 알아?” “단유요?” 알 리가 있나. 명수는 줄곧 만화책을 열독하는 중이었는데. “30분 넘게 통화를 하는 경우는 보기 힘든데. 남자애랑 저렇게 이야기할 리는 없고, 여자애 같은데.” “아.” ‘여자’라는 포인트에 명수가 뭔가 눈치를 챈 듯 감탄사를 터뜨리자, 하은이 눈을 빛냈다. ‘어서 빨리 니가 아는 모든 걸 실토해’라는 눈빛으로 명수를 바라보니, 명수 역시 입이 근질거렸는지 방학식 이후 나윤이 찾아왔던 일부터 해서 하루 종일 어울려 놀았던 일들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설마…그럼 단유에게 여자 친구가 생긴 거야?” “본인은 아니라고 하는데, 잘은 모르겠어요. 제가 봐도 사귀는 것처럼 보이진 않더라고요.” “그래? …하지만 이 늦은 시간에 저렇게 통화하는 일은 드문 일이잖아?” “그럼 혹시?” 두 사람이 눈을 빛내더니, 단유네 방을 돌아보았다. 통화가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단유를 덮쳐서 속내를 들어보기로 마음을 맞춘 두 사람은 단유네 방 앞으로 조용히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드문드문 들리는 목소리는 여전히 단답형의 대답이었지만, 하은은 목소리에 꿀이 묻었다며 키득거렸고 명수는 단유가 통화를 즐기고 있다고 확신했다. 밖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줄 모르던 단유는 끝없이 이어지는 나윤의 이야기를 들어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매니저님이 뭐라고 해도 별로 신경이 안 쓰이는 거야. 그냥 그러려니 생각하게 되니까, 내가 거기에 발끈할 이유가 없어진거야. 그게 너무 신기한 거 있지?] “네.” [예전에는 별거 아닌 말에도 상처받고 괴로워했는데, 오늘은 ‘내가 늦었으니까 저런 말을 들어도 되지’라는 생각이 드니까 별로 아프지도 않고 기분도 크게 나쁘지가 않았다니까?] “네.” [아, 그리고 우리 회사 앞에 편의점 있잖아?] “네.” [거기 일하는 남자 알바가 있는데, 평소에는 되게 표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오늘 보니까, 혼자서 되게 많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혼자서 막 눈썹을 올렸다 내렸다 하기도 하고, 아, 입술을 막 오물오물 거리는데 난 무슨 껌 씹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계속 보니까 입에 아무것도 없는 거 있지? 그냥 그게 습관인 거야? 입술을 오므렸다가 늘렸다가 하는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보니까 웃긴 거 있지? 그런데 내가 훔쳐보고 있는 걸 들킬까 봐 계속 보진 못하고 금방 나와야 했는데, 계속 그 표정이 생각나서 웃긴 거야? 그래서 혼자 걷는데 그걸 흉내 내고 있더라? 내가?] “네.” 평소 하은에게 단련된 덕인지 단유는 나윤의 긴 수다를 불평 없이 들어줄 수 있었고, 나윤은 낮에 같이 놀 때보다 더 즐겁다는 듯 들뜬 채로 통화를 이어갔다. 그렇게 수다를 떨던 나윤이 시간을 깨달은 건, 집에 가서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났어?” [네,…벌써 1시가 지났네요.] “미안해, 나 때문에 못 잔 거 아냐?” [아니에요. 그렇게 피곤하진 않아요.] 그제야 핸드폰이 터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뜨거워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윤은 단유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나 혼자 너무 신나서 막 떠들었네. 미안하다, 단유야.” [아뇨. 저도 재밌었어요.] “진짜?” [네.] “괜히 나 때문에 빈말하는 건 아니지?” [아니에요. 누나가 제 이야기를 듣고 따라 해보려고 했다는 것도 재밌었고요, 누나 나름대로 바라본 세상 풍경 이야기도 재미있었어요.] “정말?” [사람마다 보는 세상이 다르니까요.] “그래? 어떻게 다른데?” […그 이야기를 하면 또 시간이 길어질 것 같은데요?] “아.” 나윤은 쑥스러운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배시시 웃었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괜히 민망해진 나윤은 얼른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럼, 그 이야기는 나중에 알려줘.” [그럴게요.] “나중에…다시 전화해도 되지?” [그래요.] “혹시 이러다 귀찮다고 전화 안 받는 거 아냐?” [아니요, 안 그럴게요.] “그래. 그럼 나중에 또 통화하자.” [예.] “끊을게.” [주무세요.] “너도 잘 자.” [네.] 통화를 마친 뒤에도 나윤은 핸드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 화들짝 놀란 얼굴로 얼른 핸드폰을 책상 위에 던지듯 올려놓은 뒤, 침대 위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아, 씻어야지.” 여태 씻지도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통화만 계속했다는 사실을 떠올린 나윤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얼른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 시간, 단유는 문밖에서 쓰러져 자는 두 사람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을 조심히 들어 각자의 방으로 옮긴 단유는, 본인도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오일러 공식을 못 물어봤는데.’ 누구는 오일러 공식을 제일 아름다운 공식이라고 하길래, 과연 어떤가 싶어서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공부하면 할수록 모르는 것, 궁금한 것만 늘어나는 중이었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만 늘어나는 것 같네.’ 그래서 더 재밌는 것이다. 지식을 하나씩 늘려가는 것은. 단유에게는 어떤 놀이보다 재밌는 것이 바로 공부였으니까. ‘내일 일찍 일어나서 물어볼까.’ 토요일에도 하은은 출근을 해야 한다. 출근하느라 정신없는 하은에게 물어보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하은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참기 힘들 것 같았다. ‘내일 한 번 따라가 볼까?’ 학원이란 곳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단유는, 가능하다면 따라가서 구경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일이 기대되는 단유였다. **** “가자.” “괜찮아요?” “뭐 어때?” 하은이 가르치는 대상이 비록 고등학생들이긴 하지만, 단유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청강이 가능한 수준이니까. “청강이요?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전 그냥 구경만 하다가 돌아올게요.” “그럴래? 뭐, 그러든지.” 하은은 쿨하게 단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너도 따라갈래?” “전 오늘 학교 가야 돼요.” 추계대회 연습을 위해 모인다는 명수는 춘계 대회의 우승 때문에 학교 측의 지원이 많아졌고, 덩달아 기대도 커져서, 작년과 달리 연습량이 늘었다고 덧붙였다. “그럼 오늘은 갔다 와서 설거지해야겠네?” 하은은 빈 접시를 싱크대에 올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선생님 준비하실 동안 제가 할게요. 전 별로 준비할 것도 없으니까요.” “그럴래?” 빨리 준비할게, 라는 말을 남기고 하은이 욕실로 향한 사이에 명수가 고무장갑을 끼는 단유에게 다가왔다. “단유야.” “응?” “너, 어제 나윤 누나랑 전화했지?” “응.” “두 사람 진짜 사귀는 거야?” “아니.” 명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단유를 보다가, 방긋 웃음을 지었다. “난 좋다고 생각해.” “뭘?” “두 사람 사귀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안 사귄다니까?” “알아. 아는데 사귀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고.” 명수는 혼자 싱글벙글 웃으면서 방으로 돌아갔다. 단유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거품을 내며 중얼거렸다. “세제가 떨어졌네.” 수세미의 거품이 조금밖에 나지 않았다. ======================================= [372] 노는 게 좋아(4) 오랜만에 하은의 차를 같이 타게 되었다. 각오(?)했던 바였지만, 역시나 하은은 학원으로 가는 30여 분 동안 쉬지 않고 수다를 떨었다. 애초에 생각했던 ‘오일러 공식’에 관한 수다였다면 즐겁게 들을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하은의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이성 교제는 신중해야 돼. 잘못하면 죽도 밥도 안 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특히 걱정되는 건, 널 흉보려는 건 아니지만, 니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다니는 편은 아니잖아? 특히 이성과의 교류가 많지 않으니까 선생님으로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는 거야. 이성에게 너무 빠져서 해야 할 공부를 소홀히 한다거나, 혹은 좋지 않은 교제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젊은 혈기에 실수라도 하면, 오랜 시간 동안 후회와 상처로 고생할 수도 있고 말이야. 물론 넌 똑똑하고 현명하고 착하니까 그런 일은 없겠지. 그래도 선생님으로서는 걱정이 돼. 니가 선생님 입장이 되면 이해할 거야. 내가 괜히 꼰대처럼 구는 건 아닌지 걱정은 되지만 말이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좌측 깜빡이 신호를 넣고 기다리는 동안에도 하은의 입은 쉬질 않았다. “많이 좋아해? 니가 좋아하는 거야, 아니면 그쪽이 널 좋아하는 거야? 명수에게 듣기로는 너보다 나이가 많다고 들었는데, 설마 연상 취향이었어? 젊은 남자들이 연상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되게 신기하다. 진짜 사랑이라는 감정인지, 아니면 단순한 호감인지, 그도 아니면 연상의 여인에 대한 동경인지 잘 구분해야 돼. 자칫 자기 마음도 제대로 읽지 못하면 그게 또 서로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단 말이야.” 병목 구간에 접어들면서 차량의 속도가 점차 느려졌지만, 하은의 수다는 여전히 정속 주행 중이었다. 아니, 과속인가? “나이 많은 나도 연애할 시간이 없어서 이렇게 허덕이는데, 새파란 꼬마 놈은 벌써 연애질이나 하고 있고. 세상 참 불공평하네. 어디 돈 많고 잘 생긴 남자가 떡 하니 나타나서 첫눈에 반했습니다, 라고 고백해주면 안 될까? 그럼 한 번 고려해 볼게요, 라면서 새침이라도 떨어볼 텐데. 설마 내가 그런 새침이랑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이래 봬도 남자들한테 청순가련형으로 어필한다고. 내가 그래서 이 긴 머리도 안 자르고 매일 아침 고생하는 거 아냐. 가끔은 머리를 확 잘라버리고 가볍게 하고 싶은데, 이제껏 기른 게 아까워서 도저히 자르지를 못하겠더라고. 어때? 니가 보기엔? 여름인데 확 잘라버릴까?” “선생님이 결정하셔야죠.” “내가 결정하기 힘드니까 물어보는 거지. 이럴 때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줄 사람이 필요한데. 하긴 너나 명수가 이런 걸 알 리가 없지. 그래도 이런 걸 대답할 때는 신중하게 이야기해야 돼. 안 그러면 여자 친구가 화낸다.” “여자 친구 없는데요.” “지금 없어도 나중에는 있을 거 아냐? 아니지. 지금 사귀는 여자 친구 있잖아?” “그런 거 아닌데요?” “그럼 짝사랑이야? 짝사랑 그거 힘든데? 그쪽이 널 짝사랑하는 거야? 여자가 짝사랑하는 게 얼마나 고달프고 애달프고 안타까운 일인지 알아? 받아주던지, 아니면 빨리 포기하게끔 선을 그어줘야 돼. 괜히 어장 관리하는 것처럼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건 진짜 몹쓸 짓이라고.” 하은의 수다는 학원에 도착할 무렵에야 겨우 끝이 나는 줄 알았다. 진짜 끝일 줄 알았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의 학원 교무실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하은의 말은 끝이 없었다. “혼자 올 때는 그렇게 심심하고 따분하더니, 역시 옆에 누가 있으니까 출근길도 신이 나고 좋네.” “선생님.” “응?” “남자친구를 구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왜? 내가 지겨워졌어?” “그런 대사도 남자친구에게 하심이 어떨는지요?” “이 자식이!” 학원 교무실에 들어선 하은은 출근해 있던 원장선생님에게 단유를 소개했다. 사정을 들은 원장선생님은 흔쾌히 청강을 허락했다. “중학생인데 청강이 되겠어? 아니면 중학생 반 수업 청강해 볼래? 보자… 30분 뒤에 강 선생님 수업 있는데.” “아뇨, 괜찮습니다. 굳이 청강까지 할 필요도 없고요. 괜찮다면 잠시 둘러만 보고 갈게요. 제가 학원은 처음이라서요.” “그럴래? 그런데 너 덩치가 좋구나? 몸만 봐서는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겠어. 얼굴은 많이 어려 보이지만 말이야.” “고맙습니다.” 단유는 교무실을 나서서 학원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학원은 주변의 동종 업종들에 비해 규모가 큰 편이었는데, 3층부터 5층까지 3개 층을 사용했다. 교실 숫자도 많았고, 한 교실당 수강 가능한 학생 수도 많은 편이었다. 교습과목은 기본 과목인 국어, 영어, 수학 외에 과학과 국사 등의 과목을 추가로 교습할 수 있게 배정이 되어 있었다. 교실에는 미리 와서 수업을 기다리는 아이들로 채워져 있었다. 학교 교실과 다른 점이라면, 선생님이 없어도 시끄럽지 않다는 점이었다.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대체로 문제집을 풀면서 공부하는 애들이 대부분이었다. “열심이지?” 따라온 하은이 그 모습을 보며 물었다. “그렇네요.” “이 학원 자체가 공부 좀 하는 애들이 오는 거라, 다들 공부에 대한 열의가 상당해.” “그런 거라면 혼자 공부하는 게 더 좋지 않나요?” “물론 혼자 공부하는 게 좋을 수도 있겠지만, 요즘 선행학습을 받지 않는 아이가 없을 정도니, 혼자서 하기엔 무리가 있겠지. 너 같은 애들은 빼놓고 말이야.” 하은의 말은, 혼자서 공부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하긴 따지고 보면, 단유도 선행학습을 한 셈이었고, 학원 대신 하은에게 과외를 받았으니 다를 바는 없겠다. “애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래. 학원 다니지 않고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기 힘들다고.” 단유는 등만 보인 채 자습에 열중하는 아이들을 지켜보다 하은에게로 향했다. “정말 열심히 하네요.” “보고 있으니까 너도 막 공부하고 싶어져? 괜히 경쟁심에 불타올라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 들고 그래?” 하은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입에 문 채로 물었다. “아뇨. 딱히 그런 생각은 안 드네요.” “그래?” 단유가 괜히 점잔을 뺀다고 생각하며 넘어간 하은이었지만, 정말 단유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최근 학교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던 단유였기에 더 그런 기분이 들었을 수도 있었다. 칠판에 적힌 선생님의 필기를 머릿속에 새기며, 교과서에 담긴 지식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며 즐겼던 재미가 요즘은 시들해진 참이었으니까. “시험 점수를 위해서 공부하는 게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응?” 단유의 중얼거림을 제대로 듣지 못한 하은이 되물었지만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교실 안의 아이들에게서는 ‘재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후 남는 시간 동안 하은과 못다 한 질문과 답변을 나눈 단유는 점심시간이 될 무렵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 먹고 갈래? 어차피 집에 가면 혼자잖아?” “괜찮아요. 혼자서 먹는 게 어때서요?” “설마, 여자 친구 만나기로 한 거니?” “여자 친구 아니라니까요.” “에이~.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던데?” “그럴 리가요. 그리고 강하게 부정하지도 않았습니다만.” “요거, 정색하는 거 좀 봐?” “몇 번이고 말씀드렸지만, 부디 빠른 시일 내에 남자친구라도 만드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어디 남자라도 소개 시켜 주고 그런 말을 해라!” 하은에게 인사를 건넨 단유는 건물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구 쪽 계단을 이용했다. 올 때야 하은과 같이 했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간단하게(!) 능력을 사용하는 게 편했으니까. 집으로 돌아온 단유는 후다닥 달려온 호빵을 안아 들고 텅 빈 집을 둘러보았다. 명수는 제 말처럼 연습을 위해 학교로 간 모양이었다. “뭘 먹지?” 단유가 잠시 주방 쪽을 바라보며 점심을 궁리할 때,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 아침 햇살에 눈을 뜬 나윤은 곧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어차피 오늘 연습실에 늦게 출근할 예정인 까닭도 있었지만, 어제저녁 느꼈던 흥분과 감동 때문에 잠을 늦게 잔 탓도 있었다. 하지만 한 번 돌아온 의식은 쉽게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정신이 명료해지는 기분이었다. 몸은 피곤한데 정신만 또렷하니 그 괴리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에휴.” 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이왕 이리된 김에 얼른 씻고 나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침대에서 꾸물거리며 일어난 나윤은 침대 바로 옆의 화장대에 앉아서 얼굴을 살폈다. 눈두덩이 부어서인지 꼴이 우스꽝스러웠다. 볼도 퉁퉁한 게 아침을 먹지 않아도 배부를 것 같았고. 입술이 살짝 터서, 약지 끝으로 살짝 문질렀더니 꺼끌꺼끌한 느낌이 마치 부직포를 잘라 입술에 붙인 것 같았다. 그렇게 얼굴을 살피던 나윤은 눈 밑을 손끝으로 꾹꾹 눌러서 붓기가 빨리 사라지라고 마사지를 했다. 세수하기 전에 이렇게 눌러준 후, 차가운 물에 세안을 하면 좀 더 빨리 부기가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눈 밑을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윤은 화장실로 가려다 걸음을 멈췄다. 화장대에서 돌아섰을 때, 침대맡에 놓인 핸드폰이 눈에 들어온 까닭이었다. “아.” 새삼 어제 기억이 떠오른 나윤은 얼른 핸드폰을 주워들었다. 통화목록을 살폈더니, 가장 상단에 단유와 전화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렇게나 오래 전화를 했어?’ 두 시간을 조금 넘는 긴 통화 시간을 보고 괜히 발그레 볼을 붉히는 나윤이었다. 지금은 차가워진 핸드폰이었지만, 어제는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어제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했었는지 제대로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의식이 가는 대로, 기분이 내키는 대로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았다. ‘말이 잘 통했었지?’ 실제로는 일방적인 수다였지만,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하게 리액션을 해준 단유였기에 나윤은 ‘대화’를 나눴다고 생각했다. 자기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단유는 좋은 ‘대화 상대’였다.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자신이랑 다르게 부지런한 친구니까, 벌써 일어나서 뭐라도 하고 있을 것이다. ‘아침은 먹었을까?’ 어쩐지 버터를 두른 팬에 식빵을 살짝 구워서 달달한 잼을 바르고 아삭하니 싱싱한 샐러드를 곁들여 먹는 모습이 상상됐다. 커피보다는 우유가 잘 어울리는 나이였지만, 우유 거품이 윗입술에 묻은 단유의 얼굴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햇살 내리쬐는 창가에서 책을 읽는 모습이 잘 어울리지.’ 아니면 아침 운동 겸해서 외출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긴 단유가 몸은 꽤 좋은 편이었으니까. 그런 몸을 운동 하나 하지 않고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에구, 무슨 생각 하니.’ 나윤은 자기 머리를 콩 하고 쥐어박았다. 정신을 차린 줄 알았더니, 우주 저 멀리 가려고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방을 나오니 조용한 거실이 나윤을 반겼다. 아마도 엄마는 이른 시간에 일을 하러 가신 모양이었다. 엄마는 지난겨울 나윤이 나오는 TV 프로그램을 다 챙겨보지는 못하셨다. 하지만 자신의 딸이 가수로서 사람들의 입에 오른다는 게 신기하고 좋으셨던 모양이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쑥스러워서 ‘저 딸이 내 딸이다’라고 자랑은 안 하셨지만, 숙소에 가 있는 딸과 통화를 할 때면 목소리에 뿌듯함이 한가득이었다. 그러다가 나윤이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응원해주셨고, 격려해주셨다. 오히려 집에서 출퇴근하는 게 마음이 놓인다며 좋아하셨다. 엄마를 생각했더니 괜히 마음이 급해졌다. 얼른 욕실로 들어가 세안을 마친 나윤은 젖은 머리를 말리며 화장대로 돌아왔다. 음이온도 나오지 않는 낡은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며 얼굴을 보던 나윤은 문득, 목소리가 듣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주책이야.’ 여자가, 그것도 ‘누나’가 돼서 철없이 행동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걱정이 됐다. 오전에 전화하는 걸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통화를 오전 오후 나눠서 기호를 따질까마는, 그래도 사람 속은 알 수 없는 법이니까 그냥 이른 아침부터 전화하는 게 좋지 않을 것 같다고 나윤은 생각했다. ‘언제 전화해볼까?’ 어제도 그렇게 오래 통화를 했는데, 24시간도 안 지나서 다시 ‘먼저’ 전화하는 건 좀 꺼려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차가 있는 것도 아닌데 누가 주기를 구분해서 통화를 시도하겠냐마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너무 자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안 좋을 것 같다고 나윤은 생각했다. 냉장고를 열고 배를 채울 만한 것을 찾다 보니, 석류즙이 눈에 띄었다. ‘석류즙이 몸에 좋다던데.’ 몸에 좋은 건 나눠 먹어야 좋은데. 하나 챙겨볼까, 라고 생각하던 나윤은 고개를 저었다. 이러다가 또 한 번 찾아갈 것만 같았다. ‘가면 어때?’ ‘아니야, 이상하게 볼 거야.’ 나윤은 즙을 꺼내 쪽쪽 빨면서도 끝없이 이어지는 상념에 냉장고 앞을 쉽게 벗어나지 못했고, 끝내 팩에 든 석류즙이 마를 때까지 빨던 나윤은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물론 그러고도 한참의 시간을 거실에서 서성거리며 보내야 했지만. ======================================= [373] 노는 게 좋아(5) “여보세요?” [어디야?] “집인데?” [할 거 없지?] “딱히 할 거라고 한다면, 공부?” 명수가 코웃음 치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나중에 시간 줄 테니까 학교로 와라.] “왜?” [같이 운동이나 하자고.] “또 안 왔어?” 지난겨울에도 사람 수가 부족했던 축구부였다. 솔직히,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하면 될 일인데, 라고 단유는 생각했지만, 명수는 굳이 그를 불러서 골키퍼를 시켰었다. 당연히 명수 혼자 원한다고 될 일은 아니었고, 감독 혹은 코치의 허락이 있었으니 가능했을 테다. 아마 이번에도 그렇겠지? [따로 할 일 없으면 와서 같이 하자.] “알았어.” 학원에 다녀온 후, 괜히 싱숭생숭하던 차였다. 땀 좀 흘리면서 몸을 움직이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지난번에도 이렇게 생각하고 나갔던 같은데.’ 공교롭게도 단유가 생각이 많을 때마다 명수가 불러주니, 과연 ‘베스트 프렌드’구나 싶어서 단유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치? 명수가 내 속을 참 잘 알아.” 호빵을 향해 중얼거리자, 호빵은 흥, 하고 콧바람을 뿜으며 혀를 내밀었다. 헥헥거리며 단유를 보는 호빵의 눈에 간절함 비슷한 게 보였다. “목마르니?” 급수기에 물을 채워줬더니 좋다고 달려들어서 물을 마셔댄다. 옆에서 쭈그리고 앉아 호빵을 바라보던 단유는 문득 호빵이 흘린 털들이 거실에 지저분하게 널려있음을 깨달았다. “아예 털을 다 밀어버리면 깨끗해지려나?” 말을 못 알아들을 호빵이지만, 섬뜩한 기운을 느꼈는지 물 마시기를 멈추고 단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마치 ‘진짜 그러기 없기다’라고 확언을 받고 싶어 하는 눈치라, 단유는 호빵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잠시 후, 털갈이 전용 빗으로 호빵의 털을 정리해 준 단유는 호빵을 안아 든 채로 거실에 작은 회오리를 만들었다. 크지 않은 작은 회오리가 거실을 누비자 바닥의 먼지들과 털들이 회오리에 묶인 것처럼 쓸려 올라갔다. 그렇게 올라간 털들은 쓰레기통으로 ‘이동’하였고, 그렇게 간단히 청소를 마친 단유는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후, 호빵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녀올게?” 킁, 하고 헛바람 뱉는 소리를 낸 호빵을 뒤로하고 단유는 집을 나섰다. 잠시 후, 학교 근처로 이동한 단유가 느긋한 걸음으로 운동장에 들어서자, 멀리서 물을 마시고 있던 명수가 단유를 발견하고는 손을 저었다. “금방 왔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야?”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라든가 혼자 있으니까 무서웠어? 같은 명수의 말은 흘려들었다. 호빵 털갈이하고 거실 청소까지 끝낸 후 여유롭게 왔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가 없겠지. “감독님한테 인사부터 하고.” “아, 그래.” 운동장 스탠드 근처의 그늘에서 연습 장면을 지켜보던 감독에게로 향하는 두 사람의 뒤로 뜨거운 7월의 햇살에 열이 오른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 결국 나윤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갈등만 하다 내려놓고 말았다. 아무래도 괜히 속없는 사람처럼 비칠까 두려운 까닭이었다. ‘참자.’ 과연 그게 참을 일인가 싶지만, 나윤은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핸드폰을 뒤집어서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싱숭생숭한 이 마음을 가라앉히려면 생각 없이 뭔가에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의 생각과 달리 출근하기로 마음먹은 나윤은 일부러 서둘러서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어제보다 더 맑은 하늘과 따뜻한 바람이 나윤의 외출을 환영했다. “나오길 잘했어.” 나윤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갔다. 가는 동안 어제의 느낌을 떠올리며 주변을 둘러보니, 어제와 같이, 하지만 어제와 다르게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 느낌 없이 지나던 골목 담벼락 아래 핀 민들레. 슈퍼마켓 아저씨가 가게 앞에 물을 뿌리는 순간 만들어진 투명한 폭죽. 시장 골목에 줄지어 선 알록달록한 캐노피는 낡기도 했고, 높이도 제각각이었지만 그래서 마치 무명 작곡가의 오래된 음률같이 느껴지는 재미가 있었다. 어제와 다른 점은 귀로 들려오는 소리도 꽤 많다는 점이었다. 큰길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차들이 지나다니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건 기본이었고, 어느 집에선가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 같이 노이즈가 낀 대화 소리도 들렸다. 조금 더 기울이니, 바닥을 구르는 깡통 소리 비슷한 소리도 들렸고, 어느 곳에선가 아이들끼리 장난을 치는 소리도 들렸다. 길에서 이렇게 많은 소리와 이야기들이 숨어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는 게 억울할 정도여서, 나윤은 평소 늘 착용하던 이어폰도 꺼내 들지 않았다. 밤에 느꼈던 것과 또 다른 즐거움, 재미가 나윤을 흠뻑 젖게 하는 동시에, 나윤은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당장에라도 그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고,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만약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는 동시에 다가온 버스만 아니었다면, 그래서 조금이라도 고민할 생각이 주어졌다면, 핸드폰을 꺼내 들었을지도 몰랐다. 버스의 빈자리에 앉아서도 나윤은 바깥을 보며,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들을 살피며 재미를 만끽했다. 그러다 보니 마치 옆자리에서 단유가 손가락으로 이곳 저곳을 가리키며 설명을 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지나가는 여자 보여요? 좀 털털한 성격처럼 보이지 않아요? 아마 남자친구한테 먼저 다가가서 어깨동무를 할 것 같아요. 저 아저씨가 신은 낡은 워커 보여요? 좀 오래된 유행인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아요. 저 노란색 간판 보여요? 간판 밑에 벌집 같지 않아요? 저런 건 119에 신고해야 할 텐데 말이에요.” 마치 그 목소리가 들린다는 듯, 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를 끌어올린 나윤은, 자신의 손가락이 연신 핸드폰을 더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 “잘하는데요?” 코치는 조금 전 단유가 해낸 선방 장면을 떠올리며 탄복을 했다. “잘하지.” 감독의 시선은 이미 공을 쫓아 달리는 아이들에게로 옮겨가 있었다. “뭔가 여유가 있어요.” 조금 전 상황은 수비수의 실수로 공격 측의 숫자가 많은 상황이었다. 공격수가 두 명이었고, 골키퍼는 그 둘 중 한 명을 예측해서 막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단유는, 축구 경험이 없음에도 딱히 조급해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차분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한 선수가 공을 차는 순간에 맞춰 진로를 막아 공을 쳐 냈다. “눈이 좋아.” 어느 선수가 안 그렇겠느냐마는 특히 골키퍼는 눈이 좋아야 했다. 상대가 어느 순간, 어느 발로 공을 밀어 넣을지를 빠르게 보고 판단해야 한다. 동시에 누구보다 빠른 반사신경으로 몸을 움직여 다가온 공을 잡거나 쳐내야 하는데, 단유는 그걸 뛰어나게 잘하는 편이었다. 코치는 여전히 단유의 플레이를 머릿속으로 재생시키며 여운을 즐기다가 감독에게 말했다. “안 하겠죠? 축구?” “안 한다고 했었으니까.” 감독이라고 욕심이 안 날 리가 없지만, 학교 클럽 축구의 한계, 그리고 축구보다 더 주목받는 학업 성취도를 자랑하는 단유였기에 제안하기가 꺼려지는 게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본인 입으로 축구를 장래 희망으로 삼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그런 이야기가 오가는 줄은 모른 채, 허리에 손을 올리고 경기장에서 오가는 공을 바라보던 단유는 발로 땅을 툭툭 찼다. 생각 없이 몸을 움직여보고 싶다고 충동을 느꼈던 게 신기루였던 것처럼, 지금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렇게 가만히 서 있을 바에야, 그냥 집에서 책이나 볼걸.’ 움직여서 열이 나는 것이 아니라, 뙤약볕 아래 서 있느라고 열이 나고 땀이 났다. 단유가 예전부터 골키퍼를 했던 것은 굳이 뛰기 싫어서이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크게 주목받기 싫어서였던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신경 안 쓰고 그냥 달리고 싶었다. ‘지겨워.’ 단유는 처음으로 지겹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원체 욕심을 내보인 적이 없던 단유였던지라, 싫다는 소린 못 하고 그저 맨바닥만 툭툭 찰 뿐이었다. “단유야!” 굳이 명수가 소리를 질러 알려주지 않더라도 상대편이 공을 잡고 달려오는 것을 모르지 않았던 단유였다. 하지만 상대 공격수는 골키퍼가 방심하고 있다고 여겼는지 조금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골대 깊숙한 곳을 목표로 골을 시도했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렇듯, 단유는 그보다 한 템포 빠르게 몸을 이동해서 여유 있게 공을 캐치해냈다. 그리고 팀 동료들이 환호를 내는 순간에 이미 상대 진영을 향해 공을 차올렸다. “킥력도 좋고요.” “그래.” 코치의 목소리에 묻어난 아쉬움은 감독도 동의하는 바였다. 지난 대회 때, 비록 명수가 대활약을 하면서 공격력이 좋은 팀이라는 평가를 받긴 했지만, 반대로 수비 진영에서 많은 빈틈을 보이기도 했던 장계 중학교 축구부로서는 단유 같은 골키퍼만 있어도 수비의 단점을 대부분 커버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때, 단유가 감독을 향해 손을 들었다. 딱히 승부에 욕심이 없던 단유로서는 가만히 서서 골문을 방어해야 하는 지금 이 순간이 꽤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긴박감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어디로 어떻게 공을 찰지가 보이는 단유로서는 긴박감은커녕 지루함만 더 할 뿐인 시간이었다. 그래서 단유는 욕심을 내보기로 했다. 어차피 연습 시합이고, 같은 축구부 내 선수들끼리 붙는, 전혀 욕심을 낼 필요가 없는 경기였다. 게다가 부외자로서 아무런 의무도 없이 도와주는 입장으로 서 있는 것이다보니, 조금 욕심을 낸다 한들 크게 문제는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가봐.” 감독은 혹시 조금 전의 수비에서 뭔가 보이지 않는 잘못이 있어 단유가 다친 건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코치 역시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서둘러 단유에게로 달려갔다. 잠시 후 코치가 단유와 이야기한 후 돌아와서 보고한 내용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필드에서 뛰고 싶다고?” “네.” “흠.” 뜻밖의 제안이었고, 당장 골키퍼를 봐줄 선수가 없어 곤란했지만, 감독 역시 필드에서 뛰는 단유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성식이랑 자리 바꿔줘 봐.” 미들에서 뛰는 선수를 골키퍼로 보내고 단유를 위로 올려보냈다. “명수야. 나중에 나한테 공 좀 줘 봐.” “알았어.” 명수는 키득거리면서 위로 올라갔다. 이후 몇 번의 공방전이 이어지는 동안 단유는 서서히 움직이면서 몸을 풀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공이 센터 라인을 지나 공격수에게로 전해질 때 단유가 뛰기 시작했다. 사이드 라인을 따라 치고 올라가는 단유를 발견한 명수가 앞으로 패스를 줬다. 단유의 스피드에 조금 못 미치는 패스여서 어쩔 수 없이 단유가 잠시 스피드를 줄여야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단유에게로 향한 공을 뺏기 위해 달려오는 수비수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절묘하게 앞으로 찬 공이 상대의 가랑이 사이를 뚫고 지나갔고, 공과 동시에 출발한 것처럼 단유의 몸도 상대를 지나가고 있었다. “빨라!” 단유는 가볍게 공을 툭툭 차며 앞으로 향하는데, 공 없이 힘껏 달리는 아이들이 스피드를 쫓지 못할 정도였다. 감독은 팔짱을 풀었고, 코치는 입을 벌렸다. “막아!” “안 돼! 가운데 명수도 막아야지!” 수비수들은 가운데와 사이드에서 치고 올라오는 두 사람 중 누구를 먼저 막아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두 사람 다 스피드가 남다르다 보니 선택해야 할 시간을 얼마 없었고, 잠깐의 망설임은 곧 수비진의 붕괴를 일으켰다. 공을 먼저 선택한 수비수가 단유의 앞을 가로막는가 싶었는데, 역시 큰 문제가 아니었다. 수비수는 공을 향해 발을 뻗기도 전에 지나간 단유를 붙잡으려고 손을 뻗어야만 했다. 물론 잡히지 않았다. 페널티 에어리어까지 진입한 단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속근은 에너지를 한 번에 다량으로 주입하여야 하며, 지근은 오랜 시간 분산하여 주입하여야 한다. 그 에너지를 다루는 방법이 호흡이다.” 디아트리의 가르침이 절로 떠올랐다. 호흡을 통해 힘을 비축한 단유는 있는 힘껏, 가슴 속의 답답함을 뚫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힘을 터뜨렸다. 마치 공이 터지는 듯한 엄청난 굉음과 함께 공이 쭉 뻗더니, 골키퍼가 어쩌지도 못하는 사이에 골망을 휘감았다. 그 뒤에도 넘쳐나는 에너지를 감당 못해 골망을 뚫고 나아가려 애를 쓰다가 결국 바닥으로 떨어졌다. “와아!” 명수가 환호을 지르며 다가와 단유의 골을 축하해주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환호를 지른 사람은 명수뿐이었다. 다들 어안이 벙벙해져서는 조금 전 본 광경이 진짜였는지를 의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뭐죠?” “…….” 감독과 코치가 놀란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았지만, 단유는 그저 명수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 [374] 노는 게 좋아(6) “자네, 축구 해 볼 생각 없나?” 라는 말이 절로 나올 상황이었지만, 감독은 입을 꾹 다물었다. 오히려 코치가 안달을 하다못해 감독의 멱살을 잡을 지경이었다. “감독님, 저 선수 놓치면 안 됩니다!” “쟤, 선수 아니다.” “아무튼요! 그게 중요합니까? 저건 이미 고교 급, 아니 고교 급 중에서도 에이스급이란 말입니다!” 어디서 저런 무시무시한 ‘캐논슛’을 볼 수 있을까? 사실 단유가 키가 크고 덩치가 좋아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고등학생이라고 볼 법도 했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이 워낙 발육이 좋다 보니, 키가 큰 아이를 보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키가 큰 것과 힘이 좋은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게다가 힘이 좋은 것과 그 힘을 고스란히 발에 실어서 골을 넣는 것은 또 전혀 다른 이야기였고. “저거는, 아니 저 애는 꼭 축구를 시켜야 합니다! 안 시키면 국가적 손해라고요!” 뭘 굳이 ‘국가’까지 들먹이나 싶을 수도 있지만, 솔직히 감독도 같은 생각이었다. 비록 유명하지 않은 프로축구 선수 생활이었지만, 프로에 몸을 담아 수백 경기를 치러 본 감독의 경험과 눈에 비쳐 봐도 저 정도 재목이라면 반드시 축구로 성공하고도 남을 아이였다. ‘라이언’? 저 정도면 ‘라이언’은 브런치 샐러드 감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무슨 문제 말입니까?” “첫째는…저 녀석 전교 1등이다.” “그건 지난번에도 말씀하신 거잖습니까? 그리고 방금 본 녀석의 실력이라면 전교 1등 중의 1등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실력이라고요.” 그렇긴 했다. 전교 1등이라고 해봐야, 전국에 3천여 곳이 넘는 중학교 중 하나인 장계 중학교의 1등에 불과(?)하고, 그렇게 따지면 3천 명 중의 1명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저런 실력을 갖춘 중학생을 찾자면, 전교 1등이 아니라 전국 1등 정도의 실력이라야 비슷하리라. “두 번째는….” 하지만 감독은 두 번째 이야기를 잇지 못했다. “뭡니까?” 코치가 재차 물어봐도 감독은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이를 악물어 도드라진 턱의 근육이 감독의 심정을 대변할 뿐이었다. “감독님! 이 신발이요, 단유가 선물해 준 거예요!” 라고 자랑하던 명수의 눈빛이 떠오른 감독은 쯧, 혀를 찼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프로축구 선수로 가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단연 필요한 것은 ‘돈’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사정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는 감독으로서는 감히 그 길을 걸으라고 말하기가 미안했다. ‘재능만으로 미래를 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게 안타깝구나.’ 하지만 곧, 감독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네?” “저 정도 재능이라면 권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지. 내가 너무 세상의 때를 탄 모양이다.” 꿈을 가져라, 꿈을 키워라, 버릇처럼 말하던 것과 달리 지레 포기부터 하는 습성은 언제 생겨난 것일까. 감독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화가 났다. “지도자라면, 당연히 현실보다 꿈, 희망을 이야기해줘야 하는 법인데.” 코치는 감독의 혼잣말을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단유!” 감독이 큰 소리로 불렀다. “네?” 감독의 손짓에 단유가 성큼성큼 뛰어 왔다. 단유의 접근에 도리어 코치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과연 어떤 말로 단유를 꼬실까? “너, 저기 남형이랑 바꿔서 뛰어봐.” “네?” “남형아! 단유랑 자리 바꿔봐.”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코치가 상황을 보니, 명수와 상대 팀으로 서로 붙어보라는 소리였다는 걸 알았다. “너희 둘이 한 팀인 건 너무 반칙이야.” “아, 예.” 단유가 다시 운동장으로 뛰어들어간 사이에 코치가 물었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아무래도 라이벌이 있어야 경기가 재밌지 않을까?” 쉬우면 재미가 없잖아, 라는 말은 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 생각하며, 감독은 남은 연습 경기를 흥미롭게 지켜볼 요량으로 다시 팔짱을 꼈다. **** 회사에 도착한 나윤은 먼저 사무실로 올라가 팀장님을 뵀다. “뭐야? 어제는 안 나올 것처럼 굴더니?” ‘기껏 큰소리치더니 불안하던가 보구나’라는 얼굴로 핀잔을 던진 팀장을 향해, 나윤은 담담히 말했다. “연습하고 갈게요.” 받아쳐 봐야 좋은 소리를 들을 것도 아니니, 그냥 간단하게 용건만 말하되, 절대 당신의 뜻대로 끌려가지만은 않겠다는 각오를 표정으로 연기하며 돌아섰다. 연습실로 내려와 거울 앞에 선 나윤은 그제야 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팀장의 떠죽거림과 사무실 직원들의 시선을 견디며 내려오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회사에 오지 않는 거였는데,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이랬던가. “하아.” 한참을 그렇게 있던 나윤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초에 이런저런 생각을 잊기 위해서 왔던 거 아니었나? 그냥 다 잊자, 다 잊고 미친 듯이 연습이나 하자. 나윤은 연습실에 비치된 컴퓨터를 조작해 음악을 튼 뒤, 연습실 가운데 섰다.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을 보며, 그 얼굴에 깃든 어둠을 땀과 함께 씻어내자 다짐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시작하려 했다. 때마침 울린 핸드폰 벨 소리만 아니었다면. **** 팀을 바꾼 후 뛴 10여 분간, 두 팀은 정말 맹렬한 폭격에 시달려야 했다. 단유는 원했던 대로 미친 듯이 뛰어다녔고, 앞에 있던 수비수들이 움찔 놀라며 물러설 정도로 쾅쾅 소리를 내며 공을 찼다. “기술은 다소 약하군요.” “힘으로 기술을 압도하는군.” 처음의 임팩트가 컸던 터라, 잘 몰랐는데 자세히 살피니 세밀한 기술은 확실히 부족한 면이 있었다. 다만 공을 정확히 차는 타점과 드리블 시의 힘의 분배는 여타 아이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반면, 명수는 비록 단유에 비해 힘이 모자란다는 소릴 들을지 모르나 다른 아이들에 비해 월등한 체력과 힘, 그리고 기술을 이용해 수비를 헤집고 다녔다. 그리고 적절한 포인트에서 정확한 공격과 패싱을 통해 골을 만들어냈다. “저 정도 실력이면 수비가 막지 못하는군요.” “확실히 명수도 실력은 고교 급이지.” 코치는 콧등을 긁다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저 둘이면….” 굳이 말을 잇지 않아도 감독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아마 저 둘이 한 팀으로 전방에 선다면, 과연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재능도 재능이지만 절친으로서의 호흡 역시 주목할 부분이니, 최고의 투 톱이 되리라 예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리라. 10여 분의 맹폭 같은 공격이 오고 간 뒤, 점수를 세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의 점수가 만들어졌다. 고작 10분이었지만, 마치 농구 게임을 하듯 한 사람이 넣으면 다른 한 사람이 넣는 식으로 골을 주고받았다. 덕분이랄까, 감독과 코치는 선수들의 수비 시 문제점을 파악해 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주혁아, 공격이 오면 공보다 먼저 공간을 차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잖아? 그리고 단유 같은 애가 또 있을지는 몰라도, 상대가 오는데 피할 생각부터 하는 수비수가 어딨어? 결코 지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단 말이야!” “시원아, 명수처럼 기술이 화려한 선수가 또 있을지는 몰라도, 혼자가 안 되면 두 사람이 협력 수비를 해야지, 너한테 오는 거 아니라고 가만히 있으면 어떡해?” 아이들은 ‘저런 애 또 없어요!’라고 소리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감독의 조언을 새겨들었다. 그 사이 수돗가로 가서 머리를 식히던 단유가 젖은 머리를 말리며 다가왔다. “수고했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머리가 좋고, 예의가 바른 친구다. 하지만 감독은 미소 대신 더 굳은 얼굴로 단유를 바라볼 뿐이었다. 미소를 지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에. “재밌었지?” 단유는 바로 답을 하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잘 됐군. 혹시….” “하지만, 축구는 제 길은 아닌 것 같네요.” 미리 선을 그어버리는 단유였다. “공부가 더 재미있다는 거냐?” “…네.” 하지만 속사정은 조금 달랐다. 대답한 바와 같이 ‘재미’는 있었다.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이며 흘리는 땀과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시원함과 힘을 실어 공을 차는 통쾌함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그저 ‘놀이’였다. 그저 달리고 공을 차는 행위가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지도 않았고, 끈질기게 매달려야 할 필요성도 없었다. 공부가 재미있고 없고를 떠나, 축구는 그저, 보드 게임방에서 게임을 하는 수준 이상의 의미가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쉽구나.”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단유는 달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 감독님과 코치님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드린 뒤, 스탠드에 놓아둔 겉옷을 가지러 가려 했다. “그런데 말이다.” “네?” “혹시 축구부를 도울 생각은 없니?” 단유는 감독의 말이 무슨 의미인가를 궁리해도 알기가 어려웠다. 머쓱한지 헛기침을 두어 번 한 감독은 쓰고 있던 모자를 고쳐 쓰며 입을 열었다. “알다시피 우리 팀에는 서브 골키퍼가 없다. 그래서 만약 주전 골키퍼가 나오지 않으면 대신 봐줄 선수가 없지. 비록 시합 때는 다른 포지션 선수를 서브로 넣고 있긴 해도, 전문적으로 골키퍼를 준비하는 선수가 아니다 보니 어려움이 있다.” 감독은 단유의 표정을 살핀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추계대회가 또 있거든? 그런데 사실 추계대회 때 강한 팀들이 많이 참여한단 말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그런데 그러면 제가 다른 선수의 기회를 뺏는 거 아닌가요?” “어디까지나 서브다. 주전은 계속 원래 멤버가 할 거야. 다만 불가피하게 주전이 골키퍼를 서지 못할 때 도와달란 이야기다. 오히려 니가 도와줌으로써 서브를 번갈아가며 맡는 선수들이 원래 담당으로 뛸 수 있게 되니 도움이 더 된다고 할 수 있겠지.” 단유는 연습에 열심히 참여하지 못함을 이야기하며, 그로 인해 선수들 사이에 불만이 생길 수 있지 않겠냐는 걱정을 드러냈고, 감독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마 니가 도와준다고 하면 다들 좋아할 거다.” 지금까지 몇 번의 연습 경기를 가지면서, 아이들 역시 단유의 골키퍼 실력을 높게 평가했다. 게다가 오늘의 실력을 보면 결코 거부할 리 없다고 감독은 확신했다. “이름만 올려놓았다가 시합 때 벤치를 지켜주면 고맙겠구나. 가끔 연습 때 나와주면 더 고맙겠고.” 결국 단유는 부담을 최대한 줄여주려는 감독의 배려를 고려해 제안을 받아들였다. 감독이 그 사실을 아이들에게 알렸고, 아이들은 박수로 단유의 결정을 환영했다. 명수가 달려와 단유의 등에 업히며 기쁨을 표현했고, 단유는 명수를 업은 채로 스탠드로 향했다. “지금 바로 가려고? 점심 먹고 가. 우리도 이제 점심 먹으러 갈 거야.” 춘계 대회 우승 후, 학부모와 학교의 지원이 많아져서 이렇게 오전 연습 후 단체로 점심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단다. 단유는 괜찮다며, 옷을 주워들었다. 겉옷 주머니에 들었던 핸드폰을 꺼내 바지에 집어넣으려던 단유는 읽지 않은 문자 메시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누구지?’ **** “여보세요?” [전데요, 단유.] 그 순간, 나윤은 사고 회로가 정지하는 기분이 들었다. [여보세요?] “어, 어. 왜?” 나윤은 자신이 더듬거리고 있다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왜 전화했지?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는 걸까?’ ‘내가 보고 싶어서 전화했다고 말하면 뭐라고 대답하지?’ ‘사실은 나도….’ ‘어머, 너 왜 그러니?’ ‘우린 아직 학생이고….’ ‘사실은 나도….’ ‘차분하게 대답해야 할까, 아니면 웃으면서 이야기할까, 진지해야 하나?’ [그게, 누나 문자가 와 있어서요.] “…어?” 나윤은 단유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30분 전쯤에 문자가 왔던데요?] 나윤은 부랴부랴 핸드폰을 조작해서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보고 싶어.」 나윤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니 힘이 풀려 쓰러졌다. 그 바람에 꽤 큰 소리가 빈 연습실을 울렸다. [여보세요? 무슨 일이에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어딘데요?] “나 회사…아, 아냐.” 나윤은 눈물이 핑 돌았다. 갑자기 쓰러지면서 바닥에 찧은 무릎이 아픈 까닭이리라.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나윤은 대신 빈손으로 머리를 힘껏 쥐어뜯었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회사에요?] “아냐, 아냐…. 그, 무, 문자를 내가 보….” ‘문자 내가 보낸 거 아냐’ 라고 말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언제 이런 ‘민망한’ 문자를 보냈던 거지? 30분 전이면…. ‘버스 안에서 보낸 건데. …도대체 버스에서 내가 뭘 했었지?’ 그저 바깥을 보고 있었을 뿐인데. 가끔 버스 안에 서 있는 사람도 보고, 그러다가 핸드폰도 잠시 보…았었나? ‘아무리 그래도 저건 너무 적나라하잖아! 바보! 멍청아!’ [여보세요?] “으, 응?” [잘못 보내신 거예요?] 뭐라고 하지? 잘못 보냈다고? 그럼 다른 남자한테 보낸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런 오해를 받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너에게 보낸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는 입장이라 나윤은 그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여보세요?] “으, 응?” 갑자기 핸드폰 속에서 웃음소리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왜 웃지? 그때였다. 똑똑, 연습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 나윤은 고개를 홱 돌렸다. “누구세요?” 아마도 자신이 넘어지면서 큰 소리를 낸 바람에 옆 연습실에 있던 사람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문이 열리며 들어온 사람은 단유였다. “여기 계셨네요.” 나윤은 입을 쩍 벌린 채, 미소를 지으며 연습실 안으로 들어오는 단유를 바라보았다. ======================================= [375] 돌아보지마(1) “괜찮아요?” “어.” “다친 거 아니에요?” “…괜찮아.” “그런데 왜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어요?” 나윤은 붉어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전에 오늘 단유를 만날 거라고 전혀 생각을 안 했기 때문에 집을 나올 때 아무런 준비도 안 했다. 화장도 안 한 ‘진짜’ 민낯이란 말이다! “어디 봐요.” “괜찮아.” 단유는 나윤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윤은 자신을 향한 시선이 여간 뜨거운 게 아니라 생각하며 더욱 어깨를 움츠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하은이 말한 ‘여자 친구’란 단어가 떠올라 단유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왜 웃어?” 나윤의 목소리가 바늘처럼 뾰족했다. 엉망인 꼴로 연습실에 주저앉은 모습을 보고 단유가 웃었다고 생각하니 괜히 심술이 나고 그가 미워졌다. “오전에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가 생각나서요.” ‘선생님’이란 단어에 잠시 의아해하던 나윤은 곧 ‘하은’의 존재를 떠올렸다. “뭐라고 하셨는데?” 여전히 뾰족한 나윤의 대꾸에도 단유는 개의치 않았다. “여자 친구 생겼냐고 묻더라고요.” 나윤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100m, 아니 500m 상공에서 번지점프를 하는 것 같았다. “어제 누나랑 오래 통화했었잖아요? 그걸 선생님이 들었나 봐요. 아, 선생님만 아니라 명수도 같이 엿들었나 봐요. 통화 끝내고 방을 나섰더니 문 바깥에 명수랑 선생님이 잠들어 있더라고요.”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단유의 목소리였다. 듣기 좋아서, 계속 듣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을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그러더니 오늘 오전에는 선생님이 그러더라고요. 여자 친구 생긴 거 아니냐고. 그 말이 생각나서 웃었어요.” “뭐라고 했어?” “네?” 나윤은 자신의 입을 때리고 싶었다. 아니, 입안에 재갈이라도 물려서 말을 못 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쁜 입, 나쁜 손, 나쁜 핸드폰. 그런데도 대답은 듣고 싶었던지, 나윤은 고개를 들어 단유의 눈을 쳐다보았다. 연습실에 들어올 때 본 이후, 두 번째로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보려고 하면 보인다고 했던가? 어리둥절해 하는 눈. 마치 ‘그 대답이 중요한가’라고 되묻는 표정이었다. “선생님께 뭐라고 대답했냐고.” “…여자 친구 없다고, 했죠.” 대답하기 전 잠깐 주저함이 있었지만, ‘거짓말 아님’이라는 눈빛으로 나윤을 보는 단유였다. 그래서 또 한 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아까 500m라고 했던가? 이번에는 1㎞에서 자유 낙하하는 기분이었다. “왜 그래요?” “됐다.” 나윤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단유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물었다. “내가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어? 혹시 2층 사무실 가려다가 그냥 들어와 본 거야?” 스스로가 듣기에도 꽤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였다. 나윤은 기운 빠지게 만드는 단유의 대답에 섭섭함을 금치 못하는 한편, ‘나 삐졌어’를 눈치채게 만드는 목소리처럼 들릴까 봐 걱정되었다. 반면 단유로서는 달리 대답할 말이 없었다. “아뇨, 그러니까 그냥 왔어요.” 라는 말 외에는. ‘보고 싶다’고 문자를 보낸 것도 나윤이었고, 통화를 하다 갑자기 쿵, 하는 큰 충격음이 나 걱정시켰던 것도 나윤이었다. 어디 있냐는 물음에 ‘회사’라길래 회사 지하실로 ‘이동’을 한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됐어, 그럼 이만 돌아가.” 등 돌린 나윤은 더욱 쌀쌀맞게 단유의 말을 받아쳤다. 단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나윤이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는지도 모르겠지만, 단유는 비록 나윤이 등을 돌렸어도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윤이 마주 선 쪽이 연습실의 거울이 있는 방향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거울 속,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나윤의 얼굴은 말과는 다른 표정이었다. “왜 슬퍼해요?”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이성에 대해 무지한 단유라도 그 말을 내뱉으면, 더 나윤의 얼굴이 일그러질 것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상대의 아픔을 모른 척해줄 필요가 있었다. “저기 그럼 먼저 가볼게요.” ‘운동하고 나서 아직 씻지도 못했거든요’ 라는 말을 덧붙이며 연습실을 나가는 단유였다. ‘이 씨!’ 나윤이 고개를 홱 돌리며 나가는 단유의 등을 바라봤다. 아니 노려봤다. 하지만 단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연습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도 설마 설마 했는데, 끝내 나가버렸다. 평소 똑 부러지는 성격이라며, 똘똘한 아이라며 칭찬받던 나윤은 왜 자기 할 말도 못하고 멍청하게 상황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답답했다. 게다가, ‘나가란다고 진짜 나가냐!’ 사람 마음도 몰라주는 저 ‘키만 큰’ 남자애가 미워 죽을 것 같았다. ‘보면 보인다며! 들으면 들린다며! 그런데 왜 난 안 보는데!’ 사기꾼같이 ‘목소리만 좋은’ 남자애가 남긴 말이 전부 거짓말 같았다. “야!” 결국 분을 못 이겨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 타이밍에 맞춰 연습실 문이 열렸다. “왜요?” 단유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내밀고 나윤을 바라보았다. 나윤은 얼굴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단유는 ‘정겹게’ 웃으면서 물었다. “점심 먹었어요? 안 먹었으면, 같이 드실래요?”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나는’ 얼굴을 가진 남자애가 능청스럽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그냥 가버릴까 봐, 차마 ‘싫다’고 당당하게 소리치지 못하는 자신이 미워졌다. **** 주방 안쪽에서 보글보글 끓는 소리와 함께 가게 안을 메운 맵고 구수한 향이 식욕을 한껏 돋우고 있었다. 모퉁이의 칠이 벗겨진 낡은 식탁 위에 올려진 반찬들은 소담하게 쌓여 당장에라도 젓가락을 가져가 맛을 보고 싶게 만들었지만, 나윤은 젓가락은커녕 테이블 아래로 숨겨진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왜 이렇게 말이 없어요?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라는 거니?” “보고 싶다고 문자를 보낸 사람은 누나였잖아요? 그래놓고 왜 말이 없대?” 나윤은 확신했다. 지금 단유는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이라고. “내가, 안….” “누나가 보낸 거 아니었어요?” “…….” 그러니까 그렇게 곤란한 질문만 하니까 할 말이 없는 거 아니야! 나윤의 곤란함을 해결해준 건 식당 아주머니였다. 황동 냄비에 보글보글 끓는 김치찌개의 비쥬얼도 입맛을 돋우었지만, 그 안에 든 커다란 돼지 목살 덩어리가 더 눈길을 끌었다. “잘라 드세요.” 아주머니는 집게 가위를 내려놓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셨다. “맛있게 보이네요.” 나윤은 차마 티 나게 가슴을 치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을 뿐이었다. 연습실에 고개를 들이민 단유가 ‘점심’을 제의했을 때, 나윤은 못이기는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먹고 이야기하자’고 툴툴댔더니, ‘무슨 이야기요’라고 되물어서 또 한 번 발끈할 뻔했지만, 인생 최고의 인내심을 보여주겠다는 의지로 입을 꾹 다물었다. 연습만 하다 가려고 나온 터라 제대로 옷을 갖춰 입지도 못했고, 얼굴도 제대로 꾸미지 못했다. 대충 말린 머리 위에 모자만 쓰고 나온 부끄러운 모습으로 번듯한 식당을 가긴 힘들 거 같아 향한 곳이 바로 이곳, 김치찌개 전문 식당이었다. 예전 숙소 시절, 회사로 걸어오는 길에 있던 식당이었는데, 당시에는 다이어트 때문에 맵고 짠 음식을 피하느라 모른 척해야만 했던 곳이었다. ‘왜 하필 이곳이 생각난 거야!’ 게다가 마침 입고 나온 티셔츠도 하얀색이다. 여기에 김칫국물이라도 틔면 정말, 두 번 다시 단유의 얼굴을 보기 싫을 것 같았다. ‘이런 꼴로 만나기 싫단 말이야!’ 속으로 외치는 소리가 단유에게 들릴 리가 없었다. 앞접시에다 한 국자 푸짐하게 담아 나윤에게 건네던 단유가 말했다. “드세요.” 그리고는 먼저 숟가락을 들어 밥 한술, 국 한 숟가락을 떠먹었다. “뜨거운 거 못 드세요? 저도 잘 못 먹긴 하는데, 이렇게 덜어 먹으니까 그렇게 뜨겁진 않네요.” ‘후후 불어 드세요’ 라고 친절하게 안내까지 해주는 단유의 ‘매너’를 마냥 칭찬할 수만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정작 가게를 소개한 것은 나윤이었고, 당장 눈앞에 있는 음식을 보니 군침이 돌기도 했다. 어렵게 숟가락을 들고 하얀 쌀밥을 입에 넣어 오물거렸더니, 금세 입안을 가득 메우는 단맛에 혀가 녹는 기분이었다. ‘밥 잘 지었네.’ 철없이 그런 생각이나 하고 앉은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 이어 단유가 떠준 김치찌개를 한 입 떠먹었다. 달고 맵고 짠맛이 입안을 가득 채우니 머리가 아찔할 정도였다.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은 정신없이 먹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옷에 틔지 않게끔 조심해서 먹긴 했지만, 먹는 일이 나의 최우선 과제라는 듯 집중해서 식사를 계속했다. 그러다 문득 시선을 들어 올렸더니, 단유가 또 ‘정겹게’ 배시시 웃었다. “많이 배가 고프셨나 봐요.” …매워서 얼굴이 빨개진 거다.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켜 얼굴을 달아오르게 하는 열기를 식힌 나윤은 단유를 노려보듯, 째려보듯, 바라보았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뭐가요?” “아까부터 나 놀리는 거잖아?” “제가 누날 왜 놀려요?” “막, 아까도, 응? 막, 집에 가는 척하고, 응? 지금도! 막, 막, 사람 먹는 거 구경하면서, 응? 배가 고프네 마네 하면서 놀리는 거잖아!” “잘 드시길래, 배가 고프셨구나, 라고 생각한 거죠.” 난 결백해요, 라는 표정. “그럼, 뭐, 넌, 뭐, 배 안 고프고 그래?” “저도 배고파요. 아까 말했잖아요. 운동하고 왔다고. 명수네 축구부에 같이 껴서 격렬하게 운동했더니 배가 꽤 고팠거든요. 그러고 보니까 괜히 죄송하네요. 운동하고 나서 씻지도 않고 바로 와서. 땀 냄새 나지 않아요?” 땀 냄새는 무슨. 지금 내가 니 땀 냄새를 신경 쓸 처지인 거 같애? 그래도 말 몇 마디 나누니까 조금 긴장된 기분이 사라진 것 같았다. 나윤은 입술을 삐죽이면서, 조금 전보다는 천천히 식사를 이어나갔다. 생각해보니 아침에 생각했던 게 맞았다. 아침에 운동하러 갔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던 게 기가 막히게 들어맞은 셈이었다. 뭔가 통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 식사를 마치고 나온 단유와 나윤은 햇볕 뜨거운 길 위에서 마주 섰다. “어디 가실 거예요? 다시 연습실?” “어, 글쎄….” 나윤은 이렇게 헤어지는 건가 싶어 단유의 눈치를 보았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그 말이 저렇게 쉽게 나오다니! “옷도 갈아입어야겠어요. 운동복도 안 챙기고 이 꼴로 뛰었더니…. 영 보기 안 좋죠?” “내가 더 엉망인데 뭐.” 나윤은 고개를 내려 자신의 꼴을 들여다보았다. 밝은 햇볕 아래 서 있으려니 더 엉망인 것 같았다. 분명 집에서 나올 때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사람 많은 버스를 탈 때도 딱히 사람들의 눈총을 받을 패션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름이니까. 얇은 티셔츠와 숏 팬츠 정도는 상관없지 싶었다. 물론 지금은 주저앉아서 온몸을 가리고 싶을 뿐이었고. 드러난 맨살이 왜 이렇게 부끄러운 건지. “괜찮아요, 누난. 예전에 수련 누나도 연습실에서는 그런 복장으로 하던걸요.” 나윤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아, 그리고 그 복장도 예뻐요. 누나한테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치. “여기서 이럴 게 아니고 연습실까진 같이 가도록 하죠. 거기서 전 지하철 타러 가면 되니까요.” ‘날이 많이 덥네요’라며 먼저 앞장서는 단유의 뒤를 나윤이 쫓았다. “그런데 그거 알아요?” “…뭐?” “누나랑 있으면 저, 말이 많아지는 거 같아요.” 무슨 뜻? 무슨 뜻이지? 무슨 뜻일까? “저도 말이 별로 없는 편이긴 한데, 누나는 더 말이 없네요. 누나랑 있으면 제가 더 말을 많이 해야 할 거 같나 봐요.” 고개를 끄덕이는 단유를 지켜보던 나윤이 불식간에 입을 열었다. “나도 너랑 많이 이야기하고 싶어.” “네?” “뭐?” “…네?” “…….” ‘에휴, 정나윤, 오늘 정말 왜 이러니.’ 나윤은 입술을 한 번 삐죽였다가 한 번 더 말했다. 진심을 담아. “너랑 이야기 많이 하고 싶다고.” 이번에는 단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뜻일까? “어제 너랑 통화하는 거 되게 즐거웠어.” “아, 저도 즐거웠어요.” “니가 해준 이야기, 보는 법 듣는 법도 재미있었고.” “다행이네요.” “오늘도 회사에 오는 동안 보고 들었어. 평소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니까 신기하고 재미있었어.” “그렇죠? 사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그렇지, 관심을 가지고 보려고 하면 얼마나 많은 것들이 보이는지 몰라요.” “그랬어. 그래서 그런 이야기들, 너랑 많이 나누고 싶어.” “그래요. 연습하다가 지칠 때, 아니 생각날 때마다 전화 주세요. 되도록 잘 받을 테니까요.” 어느새 회사 입구에 다다른 두 사람이었다. “들어가 보세요.” 하지만 나윤은 회사 입구를 한번 슬쩍 쳐다볼 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이래도 되나, 라는 생각과 왜 이걸 내가 해야 돼, 라는 생각이 교차하면서 번민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지금은 머리보다 마음으로, 이성보다 감성으로, 미래보다 지금 당장의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싶었다. 그런 충동이었다. “너랑 계속 이야기 나누고 싶어.” “예. 저도….” “전화도 자주 하는 거 좋지만, 자주 만나고 싶어.” 단유의 눈이 ‘무슨 뜻이에요?’라고 묻고 있었다. “너, 나랑 사귀자.” 그래, 용기 있는 사람이 얻는 법이야. 그리고 여자가 먼저 하는 게 멋있는 거야. 비록 상대가 자신에게 고백을 하면 더 좋았겠지만, 내가 먼저 하는 것도 좋은 거야. 나윤은 눈에 힘을 주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사귀자, 우리.” ======================================= [376] 돌아보지마(2) 눈을 껌뻑거리던 단유가 볼을 긁적였다. 매끈한 볼이 살짝 붉어진 것 같은데 부끄러워서 그런지, 난감해서 그런지, 아니면 해가 뜨거워서인지 알기 어려웠다. 쉽게 입이 열리지 않는 단유를 보며, 나윤은 괜히 입안이 바싹 마르는 느낌이었다. “저기….” 단유의 입술이 살짝 열리며 뭔가를 이야기하려 하는 순간, 그 입술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울 때였다. “거기서 뭐 해?” 나윤은 익숙한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회사 입구에서 걸어 나오는 이는 바로 실장님이었다. 실장 곁에는 같은 사무실 직원 몇몇이 뒤를 따르다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춘 상태였다. 나윤은 혹시나 자신이 고백하던 장면을 들킨 게 아닐까 싶어 창피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무슨 정신으로 회사 입구에서 그랬던 걸까? “실장님.” 살짝 떨리는 나윤의 음성을 실장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너 연습한다고 내려가더니 여기서 뭐 해? 어, 넌?” 실장은 단유를 알아보았다. 단유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넌 또 웬일이냐? 혹시 정산 때문에 왔어?” 단유라는 애가 올 일이 몇천 원도 안 될 정산금 때문일까 싶지만 그 외의 이유는 생각나지 않던 실장이었다. 단유는 아무렇지 않게 손가락으로 나윤을 가리켰다. “누나 보러 왔어요.” 실장의 눈빛이 살벌하게 변했다. “왜? 설마 너희들 연애하냐?” 나윤의 얼굴이 신호등 정지 신호처럼 붉게 변했다. 그 모습을 힐끔 바라본 단유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아니요. 같이 밥이나 먹으려고요.” 나윤은 단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니요’라는 단어에 놀란 탓이리라. “왜 같이 밥 먹어? …야, 정나윤! 너 여기 놀러 왔어? 연애하러 왔어?” 이상한 방향으로 정곡을 찌르는 실장에게 단유가 말했다. “연습하고 있던 걸, 제가 데리고 나왔어요. 어차피 점심시간이기도 했고요. 혹시 그게 잘못이라면 사과드릴게요.” “당연히 잘못이지! 니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 본데, 얘는 연예인이야. 연예인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잘못 오르면 그 날로 연예계 활동은 끝이라고. 나윤이 너도 몸가짐을 조심해야 시기란 거 몰라서 그래?” 실장은 마침 좋은 건수를 잡았다는 듯 눈을 빛내며 독한 혀를 휘둘렀다. 뻔뻔한 실장의 말에 나윤으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 눈이 신경 쓰였다면 제대로 관리나 해줄 것이지, 가디스R 앞으로 배정되었던 밴도 렌트 회사에 돌려주고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이제껏 별말 없다가 이제 와서 사람들 시선을 걱정한다? 기가 막힐 노릇이라 나윤이 볼을 부풀릴 때, 단유가 한 발 나서며 실장에게 말했다. “그럼 여기서 이러실 게 아니라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죠. 주변에 지나다니는 사람도 많은 거리에서 이러면 입방아는 물론이고 사진도 찍힐 것 같은데요?” 그 말에 실장의 얼굴이 살짝 굳으며 주위를 눈으로 둘러보았다. 넓지 않은 회사 앞 골목은, 비록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진 않았지만, 공개된 장소인지라 충분히 주위의 이목을 끌 장소였다. 게다가 1층은 커피숍이어서 비록 회사로 직행하는 계단 입구와 거리가 있지만, 큰 소리를 내서 좋을 건 없었다. 실장은 나윤을 향해 말했다. “난 이들이랑 점심 먹고 올 테니까, 나윤이 넌 연습실로 가 있어. 단유는 이만 돌아가고.” “조금 있다 돌아갈게요.” “뭐?” 단유의 대답에 실장은 다시 쌍고리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밖에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일이 걱정되신다니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겠다고요. 그것도 안 되나요?” “뭐 이런 개념 없는 경우가 다 있어? 방금 안 된다고 이야기했잖아?” “그 개념부터 설명해주셨으면 좋겠네요.” “뭐?” 단유의 대답에 실장을 비롯한 사람들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실장님이 두려워하시는 게 만약 불명예스러운 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일이라면, 전 두 가지 모두에서 벗어날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한 겁니다. 회사 내부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이니, 사람들의 시선에 띌 일도 없고요, 그렇다면 딱히 우려하실만한 상황도 없을 것 같네요.” “허, 나, 참.” 실장은 허리에 손을 얹은 채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나이도 어리고 얼굴도 어린데, 키는 실장보다 조금 더 큰 수준인지라 아래로 내려다보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인 실장은 기를 죽일 요량으로 한껏 눈에 힘을 주었다. “똑똑하다고 들었는데 말을 못 알아듣는 거냐, 아니면 못 알아듣는 척하는 거냐? 응? 만나지 말라고. 이야기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왜요?” “하지 말라면 하지 마!” 버럭 소리를 지른다고 기가 죽을 단유가 아니었다. “이상하네요. 제 귀에는 굉장히 불합리하고 부당하게 들리는 요구를 하시는군요.” “이 새끼가.” “단유야. 그만해.” 기가 죽은 건 오히려 나윤이었다. 단유의 팔을 붙잡고 단유를 말리려 했지만, 단유는 그저 실장만 바라볼 뿐이었다. “나윤 누나랑 알고 지낸 지가 1년 가까이 됩니다. 전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가벼운 주제로 대화를 나눌 정도입니다. 게다가 실장님의 말씀처럼 외부 사람들의 눈에 오해를 살만한 행동도 하지 않았고, 혹시 오해를 살 일이 있다는 실장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회사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실장님께서 걱정하시는 부분들은 대부분 해소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도 무작정 안 된다고 하시면 저로서는 납득하기 힘들지 않을까요?” “야, 김단유. 어디서 못된 것만 처배워서 주둥이를 나불대는지 모르겠지만, 어른이 시키면 얌전히 따라, 이 새끼야. 오냐오냐해주니까 아주 겁도 없이 기어오르려고 하고 있어, 이 새끼가.” 나름 험한 세계에서 밑바닥부터 헤치며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자부하는 실장은 단유의 행동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히 누구한테 고개를 빳빳이 들고 개기는 거야? “방금 하신 말씀은 꽤 불쾌하네요. 그저 제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실장님의 말씀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허, 진짜 이 새끼. 고아 새끼라는 걸 알고는 있었는데, 이렇게 악질인 줄은 몰랐네.” 특정 단어에 사람들의 얼굴이 싹 굳었다. 말한 당사자만 의식하지 못하는지 분에 찬 얼굴로 단유를 노려볼 뿐이었다. “실장님, 그만 하세요.” “실장님이 참으세요.” 실장 뒤에 있던 직원들이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실장을 말리려 했다. 하지만 어설픈 부채질이 불길을 더 키우는 법이다. “놔봐, 내가 오늘 이 새끼 버릇 제대로 가르쳐야겠어. 대체 어디서 이런 종자가 나타나서 말이야, 어른한테 꼬박꼬박 말대꾸나 하고 말이야, 응? 사람들이 오냐오냐해주니까 아주 기가 올라서 말이야. 야, 어디 니가 잘나서 사람들이 오냐 오냐 해준 줄 알아?” ‘연성만 없었으면 넌 죽도 밥도 안 될 놈이었어, 알아!’라고 말을 잇는 실장의 폭언에도 단유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차분해진 얼굴이었다. “연성이요?” “그래, 새끼야? 이제 정신 좀 차리겠냐? 고아 새끼가 운이 좋아서 돈줄을 잡았던가 본데, 이제는 아니라며? 그럼 새끼야, 정신 차리고 똑바로 살 생각을 해야지, 어디 버릇없게 거만이나 떨고 지랄이야. 혹시 박 이사님이 너한테 스카우트 제의도 하고 그러니까 그게 네 실력 때문에 그런 줄 알아? 웃기지 마. 너 같은 얼굴, 이 바닥에 널리고 널렸어. 아, 그렇네. 너 박 이사님 만나려고 왔지? 그래서 회사 근처에서 기웃거린 거지? 괜히 나윤이 핑계 대고 회사 안으로 들어와서 얼쩡거리다가 박 이사님 만나면 한 번 빌어보려고? 꺼져, 거지새끼야. 너 같은 놈은 줘도 안 써.” “실장님!” 나윤이 먼저 폭발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닥쳐!” 나윤은 너무 놀라서 헛바람을 들이키다 딸꾹질을 했다. “너도 지금 정신 못 차리고 이러면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래? 후속곡? 야, 네가 준비가 안 되어있는데 어느 회사가 후속곡을 만들어줘? 응? 가디스R? 웃기고 있네. 솔직히 수련이 그년 아니었으면 말이야, 너….” “실장님. 실장님!” 주위 사람들이 허겁지겁 실장을 말렸다. 하지만 실장은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았기에 그들의 만류에도 말을 계속 이었다. “됐어, 놔봐. 할 말은 해야 애가 정신 차릴 거 아냐? 정나윤, 네가 네 실력으로 가디스R이 된 거 같아? 웃기지 마. 너 혼자로는 10년이 지나도 턱도 없는 일이야. 고작 그런 실력으로 니가 뭐라도 된 줄 알고 말이야. 뭐? 일정 변경을 해 달라? 고3이라고? 차라리 공부해. 다 때려치우고 공부나 해. 그게 더 낫겠네. 응? 이럴 거면 차라리 때려치우고 집에 들어가시라고.” 실장의 폭언에도 직원들은 적극적으로 말릴 생각은 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그나마 한가한 오후 시간대라 골목을 지나는 사람이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 터였지만, 주변 주택가에 사는 사람들이 듣지 말란 법도 없으니,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만 궁리하며 눈치를 보았다. 나윤의 빨개진 눈에 눈물이 맺혔다. 입술을 너무 꽉 깨물어서 입술 아래가 하얗게 변할 정도였다. 솔직히 그동안 실장에게 심한 말을 여러 번 듣긴 했어도, 오늘처럼 심한 말은 평생에 들어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자신에게 한 말은 이해할 수 있었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는 면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단유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에게 저토록 무자비한 언어로 폭력을 행사함에도 자신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프고 화가 났다. 그때 단유가 언제 뒤를 돌아섰는지, 자신을 향해 돌아보고 있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에는 ‘괜찮아요?’라는 말이 숨어 있었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울컥하는 감정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눈을 감으니, 더 심한 감정의 격류가 몸을 타고 흐르는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감정을 제어해보려 했다. 사람도 많은 이 자리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단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실장님의 말씀 중에 단 한 마디도 제가 귀 기울여 경청해야 할 부분이 없네요.” “하, 이 새끼 진짜….” “솔직히 저한테 하신 말씀은 그냥 참을 수 있어요. 본인이 그렇게 느끼신다는데 제가 뭐라고 말할까요. 하지만, 누나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 정말 참기 힘드네요.” “안 참으면 어떡할 건데? 응? 어떡할 거냐고?” “소속 연예인에게 이렇게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시면서 어떻게 실장이라는 직함으로서 회사를 위해 일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이 새끼, 듣자 듣자 하니까.” “그렇죠, 박 이사님?” 나윤은 얼른 눈을 떴다. 단유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뒤로 돌린 실장과 어쩔 줄 몰라하는 직원들, 그리고 그 직원들 뒤로 멋들어지게 머리를 뒤로 넘긴 박 이사가 굳게 입술을 다문 채로 실장과 나윤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강 실장. 아니, 강 동수 씨.” “아니, 저기 이사님, 그게 아니고요.” “강 동수 씨 말이 맞아요.” 실장은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박 이사를 보는데, 박 이사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단유 저 아이, 연성이라는 연줄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죠. 저런 얼굴? 널리고 널렸어요. 굳이 내가 저 아이를 스카우팅해야 할 이유가 없죠.” 자기 말이 맞다는 이사의 말에 실장은 얼굴을 일그러뜨려야 했다. 말의 의미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말이 나온 타이밍이 중요했다. 즉, ‘저기서부터 듣고 있었구나.’ 그렇다는 이야기는, “그런데, 나윤이는 아니지. 지금 나윤이까지 우리 회사 나가면, 그 대신 누굴 키워? 응? 니가 수련이를 내쫓은 거로도 모자라서 나윤이까지 내보내겠다고?” 실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니, 수련은 제가 내보낸 게 아닌데.’ “니가 뭔데 애들을 나가라 마라야? 내가 뽑은 애야, 내가 키운 애야. 근데 숟가락 얹는 것도 모자라서 어디서 밥투정이야? 응? 아예 밥그릇 빼앗아 줄까? 방구석에서 숟가락만 쪽쪽 빨게 해줄까? 그러고 싶어?” 박 이사가 이 바닥에서 구른 시간에 비하면 실장은 하룻강아지도 못 된다. 게다가 위계 상으로도 한참 위에 있는 분이다. 실장은 고개를 조아리며 사태를 수습하려 애썼다. “그게 아니고요, 이사님. 말이 좀 헛나오긴 했는데요, 그런 뜻이 아니고요….” “나윤이만큼 하는 애 찾으라고 시켰더니, 나윤일 내쫓겠다고? 너 스파이지? 그치? 우리 회사 망하게 하려고 들어온 놈이었지? 그러고 보니까 너 들어오고 나서 엉망이 됐네. 아, 이제 알겠다. 우리 회사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게 너 때문이었네. 그렇지? 다들 그렇게 생각하시지들? 됐네, 너만 나가면 되겠네. 되겠어.” “이사님….” “지금 어디 가는 길인가? 점심 먹으려고? 그래 먹고 와. 먹고 와서 짐 싸. 마지막 점심인데 내가 사줄게. 법인 카드 빌려줄까? 거하게 먹고 올래?” “이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더위를 먹어서 잠깐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여태 시원한 에어컨 나오는 사무실에 있다가 나온 주제에 더위는 무슨. 박 이사는 끌끌 혀를 차며 실장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너희 둘.” 단유와 나윤을 바라보며 박 이사가 불렀다.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하고. 자네들은 밥을 먹든, 짐 싸는 걸 도와주든 알아서 해.” “이사님, 그게….” “정 남길 말이 있으면 기다려. 난 이 애들이랑 먼저 이야기 좀 해야겠으니까.” 박 이사는 두 사람을 데리고 1층 커피숍 입구 쪽으로 향했고, 실장과 직원들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어쩌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돌아보았다. 돌아본들, 답은 없었다. 실장이 주차장을 향해 멍한 시선을 던지고 있을 때, 대리 한 명이 말없이 손가락으로 방향을 알렸고, 잠시 후, 직원들은 실장을 남긴 채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회사 입구 앞에서 실장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복잡한 상념 속을 헤맸고, 뜨거운 7월의 햇살에 얼굴이 푹푹 익어가고 있었다. ======================================= [377] 돌아보지마(3) “밥은 먹었나?” 앞서가던 박 이사가 힐끔 돌아보며 물었다. 단유가 먹었다고 대답하자 박 이사는 말없이 커피숍으로 향했다. 커피숍의 점원이 얼굴을 알아보고 인사를 하지만, 박 이사는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두 사람을 데리고 칸막이가 있는 자리로 데리고 갔다. “난 약속이 있어서 오래 시간을 내지 못한다. 그러니 짧게 이야기를 하지.” 나윤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긴장한 상태였다. 실장과 다르게 박 이사는 존재 자체가 카리스마였다. “정 나윤.” “네.” “아까 말한 것과 같이 넌 내가 뽑았다. 기억하지?” “네.” “가디스R의 처음을 내가 만들었듯, 끝을 내도 내가 낼 거야.” 나윤은 괜히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눈도 쳐다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나 아직 손 뗄 생각 없다. 비록 지금 당장 널 내보내기엔 시장 상황도 좋지 않고, 팀 문제도 있다. 솔직히 강 실장 말대로 너 혼자로서는 역부족이라는 생각도 들고.” 솔로 가수로 성공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현 가요계에 고등학생 시절 데뷔하여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은 인물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은 워낙 독보적인 실력을 갖춘 터라 가능했던 것. 나윤은 스스로 돌아보건대 그 정도 실력까지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욕심을 낼 생각도 없었다. “다음 팀 메이트가 될 사람을 물색 중이지만, 아마 …수련이 걔 만큼은 안 될 거다. 그러니 그때는 니가 주축이 되어야 한다. 네가 수련이가 했던 역할을 해야 한단 소리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박 이사의 성에는 차지 않는 반응이었나보다. “노래, 춤, 연기 모든 면에서 수련이보다 앞서야 함은 물론, 네 옆에 올 사람을 네가 끌고 나갈 만큼의 실력이 되어야 한단 말이다. 그런데 지금처럼 느슨하게 하면 회사에서, 아니 내가 어떻게 널 믿을 수 있겠나?” 나윤의 시선이 저절로 아래를 향했다. 자신이 수련 언니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지금 당장은 그랬다. “강 실장이 말은 험하게 했지만,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아. 회사가 너한테 기대하는 바를 네가 100% 부응해도 될까 말까인데 적당한 수준으로 컴백이 가당키나 하겠냐는 거다. 물론 너도 회사에 불만이 있겠지.” “아뇨, 불만 없어요.” “없다면 다행이지만, 있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다.” 이때쯤에 박 이사는 단유의 눈치를 힐끗 본 뒤, 말을 이었다. “갤럭시즈가 떠난 건, 솔직히 회사 차원에서는 오히려 잘 된 거라고 생각한다만, 수련이 떠난 건 아쉬움이 많이 남는 일이고 손해도 크다. 때문에 회사가 향후 전략을 짜는데 많은 차질이 생긴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더더욱 너한테 기대하는 바가 많다는 점, 명심해주었으면 한다.” 말을 맺을 때쯤 다시 단유를 바라본 박 이사는 예전에도 단유가 갤럭시즈에 대해 꽤나 많은 관심을 보였던 것을 기억하기에, 자신의 발언에 어떤 반응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처음과 같은 표정으로 박 이사의 시선을 받아들이는, 침착한 단유였다. “그리고 단유 군?” “네.” “너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는 일전에 말한 바와 같네. ‘크리에이터’로서의 자질은 오늘도 확인했어.” 박 이사의 칭찬에도 단유의 눈동자는 어떤 동요를 일으키지 않았다. “물론, ‘연성’이라는 이름은, 그래, 솔직히 말해서 ‘연성’이라는 이름에 기댔던 부분도 사실이야. 하지만, ‘연성’이 아니더라도 자네는 여전히 탐낼만한 구석이 많은 인재야.” 자기 딴에는 위트였다고 생각했는지, 박 이사가 입꼬리를 늘렸지만 단유는 그 뒷말이 본론이라고 생각해 여전히 침착한 자세를 유지했다. 과연 박 이사의 본론은 지금부터였다. “하지만, 나윤은 지금 조심해야 할 단계네. 아니 조심을 떠나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리면 안 될 상황이지. 솔직히 나윤이가 모든 걸 포기하고 공부만 하겠다고 해도 붙잡고 말려야 할 상황이란 말이지. 하물며 사적인 관계를 핑계로 시간을 낭비하는 꼴은 용납하기 힘들지.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네.” “역시, 자네는 영민한 친구야.” 박 이사는 소매 속에 숨어 있던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이만 가봐야 할 것 같군.” “그런데 이사님.” 단유의 부름에 박 이사는 들었던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붙였다. “무슨 일인가?” “이건 순전히 즉흥적으로 떠오른 이야기여서 설득력이 떨어질지도 모르겠지만,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조금 전, 회사 입구 앞에서 실장을 대할 때의 모습과 달리 예의를 갖추는 모습이라 박 이사는 내심 기분이 좋았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이야기해 보게.” “예전에 저한테 해주신 말을 떠올려보면, 제가 이사님의 눈에 든 이유가 두 가지 있다고 하셨어요. 첫 번째는 자기관리가 철저해서이고 두 번째는 컨텐츠를 만들 수 있어서라고 하셨죠.” “그랬지.” 자신이 했던 말을 상대가 잘 기억하고 있다는 건, 분명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런 이유들이 ‘크리에이터’의 자질이라고 말씀해주셨고요. 이를 근거로 생각해보면, 박 이사님이 지향하시는 아티스트는 모두 이런 자질을 가지길 원하시는 것이라 보이네요. 맞나요?” “맞네. ‘크리에이터’가 이 시장에 오래 살아남을 유형이라고 생각하니까.” “그 말씀은 나윤 누나 역시도 그런 크리에이터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가지길 원한다는 말씀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박 이사의 웃음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굳은 입매를 들키기도 전에 눈을 아치형으로 기울이며 표정을 바꿨다. “맞네. 나윤이 역시 그런 자질을 가지고 있지.” “네. 그럼 분명 자기관리라는 첫 번째 이유에 근거해서 요구하는 박 이사님의 말씀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라도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란 말씀이시겠죠.” “그렇지!” “그런데 두 번째 이유라면 조금 생각이 다르다 느껴집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에 근거한 것이라 반론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생각만 많다고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몸으로 부딪히고 경험해봐야 더 많은 것을 깨닫고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24시간 365일을 연습실에서 연습한 들, 노래나 춤 실력은 좋아질지 모르겠지만 컨텐츠를 만들어내는 크리에이터로서의 자질을 배양하기에는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단유의 합리적 지적에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던 박 이사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 보일 뿐이었다. “당시에도 제가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부분이 그 부분이었거든요. 전 나이도 어리고 삶의 경험도 부족하고 제 생활 방식이 학교와 집을 오가는 것에 불과했는데, 제가 어떻게 크리에이터로서의 자질을 드러낼 수 있을까, 의심이 들었던 거죠. 노래도 제대로 불러본 적 없던 저와 계약을 하겠다고 하시니, 당연히 확신이 없던 저로서는 이사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고요.” 그런 이유였던가, 박 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눈앞의 어린 친구는 남들과 다른 면이 있었다. 저 나잇대의 연습생들과 비교해봐도 저렇게 조리 있게 자기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는 아이들은 드물었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울 뿐 아니라 생각이 빠르고 깊다. 저러니 ‘연성’이 아니더라도 탐이 날 밖에. “그럼….” “물론 이사님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어요. 이전과 같은 핑계지만, 공부가 더 재미있습니다. 연예계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여겨지지 않기도 하고요.” “그렇군.” 박 이사는 자리에서 일어나자, 덩달아 나윤과 단유도 일어섰다. 박 이사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두 사람을 바라보다 말했다. “언젠가는 자네가 꼭 생각을 바꿔서 내게 찾아오는 일이 생겼으면 좋겠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정나윤.” “네.” “시간이 없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지. 그리고… 단유군의 이야기는 충분히 이해하겠지만, 그래도 그 부분은 좀 더 고려해야 할 문제라고 보네. 현재의 나윤이 너에겐 경험을 쌓는 시간보다 실력을 쌓는 게 더 급선무라고 생각하니까. 변덕이라 생각할지 몰라도, 내 판단은 그렇네.” “네, 이사님.” 나윤은 조용히 이사의 말을 받아들였다. 적어도 누구처럼 윽박지른 것도 아니고, 미래에 대한 구체적 롤(role)까지 제시해 준 마당이 아닌가. 100% 신뢰할 수는 없다 해도, 그 말대로 따르고 가 볼 만하다고 판단한 나윤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이사의 뜻을 따르겠다는 생각을 드러냈다. **** 박 이사가 약속을 위해 나간 뒤, 두 사람은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조용히 연습실로 들어왔다. 조용한 연습실 한쪽 벽에 마련된 의자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그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 사실 나윤은 생각이 너무 복잡했다. 먼저 고백한 마당인 데다 그 대답을 듣기도 전에 벌어진 일 때문에 마음이 복잡했고, 박 이사의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 머릿속마저 잭슨 폴록의 그림처럼 복잡해진 탓이었다. 마음이 식은 건 아니었다. 실장의 폭언에 자기보다 그가 더 상처받지 않았을까 걱정했던 나윤이었다. 하지만 박 이사의 말처럼, 실력을 향상시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주변을 보지 않고 달릴 필요가 있다는 것에도 공감하는 나윤이었다. 솔직히 회사의 미온적 태도에 불만이 있었지만, 박 이사의 말대로라면 그런 것과 무관하게 자신을 중심으로 컴백을 시킬 요량이니 그렇다면 준비가 되어야 하는 게 맞다. 그렇다면 단유와 어떻게 되는 걸까? 아니, 단유와 어떻게 지내야 하는 걸까? 현실의 벽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굽혀야 하는 걸까? 아니면 당장 이 ‘남자’를 내 곁에 두게 만들어야 하는 걸까? “누나?” “응?” “이사님 말씀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 뭐. 응. …그래.” 나윤은 어쩐지 단유의 얼굴을 보기 힘들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왜 하필이면 오늘일까? 왜 오늘 이런 일들이 벌어진 걸까? “누나는 꿈이 가수잖아요.” 나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쩐지 단유의 입에서 나올 말들이, 그 뉘앙스가 결코 듣기 좋은 내용을 아닐 것 같았다. “비록 지금 힘들어도, 포기 안 할거잖아요?” 잠깐 주저함이 있었지만 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부터의 꿈이었고, 3년 전 기획사를 들어올 때부터 꺾이지 않은 미래였고, 작년 데뷔 이후 손에 닿았던 희망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누나의 의지가 중요한 거네요.” ‘나의 의지?’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나윤은 단유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도대체 어떤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그래서 사귀지 말자고? 아니면 일도 사랑도 포기하지 말란 말인가? “힘들 때도 있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어요. 그럴 때마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는 거죠. 이번처럼 말이에요.” “이번처럼?” “처음 저희 학교 앞에 왔을 때요, 그때 누나 얼굴이 정말 힘들고 지쳐서 쓰러질 것처럼 보였었는데, 지금은 얼굴에 약간의 피곤함이 묻어있을지는 몰라도 훨씬 밝아졌어요. 역시 쉬지 않고 달려온 탓이라 생각해요. 그러니까, 이제 다시 누나의 꿈을 향해 달려요. 응원할게요.” ‘응원할게요’라는 말에 나윤의 미간이 좁혀졌다. 고개를 홱 들어 단유를 바라보는데, 눈꼬리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 말은, 나랑 사귀지 않겠다는 뜻이야?” 단유는 난감해하다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일단 가정을 해서요, 만약 제가 누나랑 사귀자고 하면, 누나는 사귈 거에요? 지금?” “당연히….” 나윤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대답이 쉬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갈팡질팡하는 마음 때문이리라. 사귀면 좋을 것 같은데, 막상 사귄다 생각하면 이사님의 말이 걸렸다. “당연히?” “…….” 되묻는 단유의 말에도 역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나윤은 맨살이 드러난 허벅지를 움켜쥘 듯 손에 힘을 주었다. 나윤의 그런 갈등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유는 태연하게 대답을 기다리며 반응을 살피다가 피식 웃었다. “누나.” 단유가 불러도 나윤은 돌아보지 않았다. 자신에게로 돌려진 물음에 대답할 용기도, 정답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채로 단유를 보기 싫었다. 그때 단유가 나윤의 손 위로 자신의 한 손을 올렸다. 그 따뜻한 스킨십에 놀란 나윤이 황급히 손을 뺐다. 그리고 단유를 바라보니, 단유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손을 들어 보였다. “흠, 어쩐지 격한 반응이네요.” “아니, 그게 아니라….” 갑자기 그렇게 훅 들어오면 당연히 놀라지! “사실, 전 사귄다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예전부터 그랬거든요.” 예전? 나윤의 눈이 홱 돌아가며 단유를 째려보았다. 예전이라니? 예전의 여자 친구? 여자관계 복잡한 남자였어? 라는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니, 단유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제껏 누군가와 사귄다는 전제로 교제를 나눠본 적이 없네요. 아마 제가 아직 어려서 그런 거겠죠.” 자기 입으로 그런 말 하면 너무 설득력이 떨어져! “뭐, 그래서 누나의…‘고백’?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아무튼 ‘사귀자’는 제안은 쉽게 받아들이긴 힘들고요. 대신 이렇게 해요. 아무 때나 전화해요. 힘들 때, 외로울 때,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이야기를 나눠요. 답답한 속이 풀릴 때까지. 그리고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만나요. 만나는 거야, 뭐 어때요? 연습실에서 만나도 되고,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거나, 아니면 도시락을 사서 여기서 먹어도 되고. 안 그래요?” 나윤은 단유의 ‘천진난만’한, 아니 ‘순진한’, 아니 얄미운 입꼬리를 쭉 늘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고민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유는 모르겠지만 발끈하는 기분이 들어, 나윤은 단유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게 뭔데?” “네?” “그래서 사귀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 “네?” “사귀자! 나랑 사귀자고!” 답은 정해져 있어! 넌 대답만 해! ======================================= [378] 돌아보지마(4) 집에 돌아온 단유는 우선 샤워부터 했다. 사실 나윤을 만나러 가기 전 온몸을 감싸는 ‘냉풍’으로 땀을 바짝 말리긴 했지만, 그런다고 몸이 깨끗해질 리 만무했기에 종일 찝찝함을 참아야만 했다. 게다가, “에휴.” 단유는 떠오르는 잡념을 한숨에 실어 보내고 차가운 물로 샤워를 했다. 수도 레버를 가장 끝으로 옮겨도 여름이라 그런지 원했던 차가움이 느껴지지 않아 아쉽긴 했지만, 몸은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씻고 나올 무렵, 축구부 연습을 마친 명수가 집에 돌아왔다. “어? 이제 씻었어?” “응.” 점심도 고사하고 먼저 떠났던 단유가 이제야 씻었다? 욕실에서 몸을 불리고 때를 밀었다해도 남을 시간인데? “뭐하다가 이제 씻는데?” 단유는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해 은근히 화제를 돌렸다. “…물이 미지근하더라.” “왜?” “…여름이라서?” 단유는 머리를 대충 수건으로 툭툭 털며 아무렇지 않게 방으로 들어갔다. 뜻 모를 대화에 명수는 갸우뚱거리다 일단 씻자는 생각으로, 얼른 욕실로 들어갔다. “아이씨, 차갑잖아!” 욕실에서 들려오는 명수의 비명같은 불평쯤은 귀에도 들리지 않는 단유였다. 가벼운 바람을 일으켜 머리를 말리니 가만히 둬도 잘 마른다. 머리가 길었다면 모를까, 짧은 머리라 헤어스타일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애초에 신경도 쓰지 않는 단유였다. 단유의 신경은 오로지 눈앞의 노트에 가 있었다. 아니, 노트 너머에 있는 선명한, 기억의 단상(斷想)에 붙들려 있었다. **** 나윤은 거친 숨을 토해내며 바닥에 누웠다. 이럴 땐 연습실이 지하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른 기획사에는 연습실이 위층에 있는 곳도 있다고 들었다. 연습하다가 지치면 창가에 서서 바깥 풍경을 보며 심신의 안정을 달랜다고 들었다. 과연 그게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하에만 있다 보면 위로 올라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기에 그런 연습실에서 연습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하지만 오늘같이 더운 여름날이면, 차라리 햇볕이 들지 않는, 서늘한 이곳이 더 도움되는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에어컨이 있긴 해도 에어컨 바람에 머리가 아픈 것보단 서늘한 지하실이 더 낫지 않을까?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바닥에 미역처럼 들러붙었다. 얇은 티셔츠도 땀에 젖어서 곧 다른 옷으로 바꿔입어야 할 것 같았다. 원래 연습실에 올 때는 갈아입을 옷도 기본적으로 챙겨오는 편이기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진짜 문제는 더위도 잊게 할 만큼의 고된 연습도 아니었고, 땀에 젖어 몸에 달라붙은 민망한 티셔츠도 아니었다. 천장을 봐도 떠오르는 얼굴, 고개를 옆으로 돌려 거울을 봐도 떠오르는 얼굴, 눈을 감아도 남아 있는 잔상(殘像)이 문제였다. “아, 미치겠네.” 나윤은 벌떡 일어나 거울을 바라보았다. 오프숄더 티셔츠도 아닌데 어깨가 살짝 드러나면서 숨겨져 있던 쇄골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보였다. “안 돼, 연습해야 돼!” 주문을 걸 듯, 자신에게 다짐하는 나윤은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고 일어나 다시 음악을 틀기 위해 컴퓨터로 향했다. 컴퓨터를 조작하기 위해 마우스를 잡으려 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왜 핸드폰을 잡고 그래!’ 스스로를 타박하면서도, 손가락은 이미 주인의 뜻을 거스르며 핸드폰 액정 위를 미끄러져 통화목록을 누르고 있었다. 잠시 주춤거리던 손가락은 선택의 순간에 ‘문자’를 선택했고, 이성이 나윤을 제지하기 전에 손가락이 재빠르게 메시지를 완성 시키고 있었다. 「어디야?」 나윤은 자신이 고심한 끝에 만들어낸 메시지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어디긴, 집이겠지. 집일 거야. 고작 물어보고 싶은 게 그거야? 스토커니? 어디냐고 왜 물어봐? 니가 진짜로 궁금한 게 그거야? 아니잖아. 「뭐해?」 뭐 하는지 알아서 뭐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라도 하고 싶은 거야? 미저리야? 왜 이렇게 질척거려? 니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이 그거야? 아니잖아? 「보고 싶어.」 조금 전까지 계속 같이 있어 놓고 또 보고 싶다고? 그러고 싶니? 그러다 이상한 여자라고 욕하면 어쩌려고 그러니? 물론 그럴 애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넌 자존심도 없니? “연습 좀 하자! 좀!” 하라는 안무 연습 대신 모노드라마를 연습하는 듯 나윤은 혼자 중얼거리고 소리치고 팔을 휘젓다가, 제풀에 지쳐 쭈그리고 앉아 손가락으로 바닥을 쓸었다. ‘거절하면 어쩌지?’ 나윤은 단유가 언제 대답할지, 뭐라고 대답할지가 두렵고 기대됐다. 솔직히 ‘비장의 수’를 쓰긴 했는데, 통할지 모르겠다. **** 1시간 전. “대답해.” 단호한 나윤의 태도에 단유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저, 그게요….” “잠깐.” 나윤은 손을 들어 단유의 말을 막았다. “생각해보니까, 지금 듣는 건 별로 안 좋은 거 같아. 너한테도 생각할 시간을 줘야 할 거 같아.” “아니, 굳이 시간을….” “아니야. 지금 안 들을래. 생각 ‘충분히’ 하고 대답해줘. ‘충분히’하고 ‘신중하게’ 대답해. 알았지?” 특정 단어에 강하게 악센트를 준 나윤은 단유가 뭐라고 대꾸를 하기도 전에 먼저 소파에서 일어났다. “가봐.” “네?” “집에 가서 생각해보고 연락해. 아니 와서 대답해줘. ‘충분히’ 생각하랬다. 대충 생각해보고 대답할 생각 하지 마.” 이런 문제를 대충 생각할 단유도 아니었지만, 나윤은 단유에게서 반드시 다짐을 듣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 단유를 노려보았다. “그, 그럴게요.” “됐어. 그럼 일어나서 가봐. 나 연습할래.” 단유는 나윤의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갈팡질팡하는 기분이었다. 대답하지 말라는 의미는 알겠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그냥 집에 가라고? 괜찮은 걸까? “니 말대로 꿈 포기하지 않을 거고, 이사님 말처럼 나 실력 모자란 건 아니까, 더 열심히 할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죽을 각오로 연습할 거야. 다른 거 신경 안 쓰고 연습만 할 거야. 그러니까, 방해되니까, 너 가. 가서 생각하고 생각 끝나면 연락해. 아니, 연락하지 말고, 직접 와서 말해. 전화로 듣는 거 별로 안 좋아. 얼른 일어나.” 계속 오락가락 하는 건, 나윤의 본심과 이성이 충돌하는 까닭일 테다. 하지만 이를 제대로 눈치채지 못한 단유는 나윤의 박력에 놀랄 따름이었고, 곧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속 이래도 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어 갈피를 못 잡는 마당인데 나윤은 아예 등을 떠밀며 단유를 연습실 밖으로 몰려 했다. “알았어요. 그럼 가볼게요. 나중에….” “그래, 나중에 연락하고 찾아와.” “그럼, 언제?” “생각이 정리되면.” 그러니까, 그게 언제까지라는 거지? 만약 생각이 정리가 안 되면 1년이 지나도 상관없다는 소리인가?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라고 단유가 생각했다. 아무래도 시간을 정확히 정해주는 게 서로에게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윤은 이미 몸을 돌려 전면 거울을 보며 손목을 이리저리 꺾고 있었다. ‘나 이제 너 안 보고, 연습만 할 거야’라는 의지를 손목에 담은 듯 꽤 격하게 꺾는 모습이 되려 걱정될 정도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럼…나중에 연락드릴게요.” 단유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해도 나윤은 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돌아볼 필요가 없었다. 지금도 거울을 통해 슬쩍슬쩍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가봐.” 결국 단유는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연습실을 나섰다. 일부의 전등에만 불이 들어와 어둑한 복도를 지나던 단유는 대충 이쯤에서 ‘능력’을 이용하려 했다. 최대한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었는데, “김단유.”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지 마.” 응? 이건 또 무슨. 타닥타닥 복도를 총총걸음으로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단유를 뒤에서 껴안는 나윤이었다. 단유는 저도 모르게 ‘헉’하고 소리를 지를 뻔 했다. 하지만 소리를 내기도 전에, 나윤의 입에서 나오는 거친 숨소리가 입을 막았다. “김단유.” 한참을 껴안고 있다가 겨우 삐져나온 나윤의 목소리는 비브라토처럼 떨리고 있었다. “용기 내게 해줘서 고마워.” 단유는 어둑한 복도의 끝을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진심이야. 진심으로 고맙고, …좋아해.” 그렇게 잠시 있던 나윤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 다시 타닥타닥 걸음소리가 들리더니 연습실 문이 달칵 닫히는 소리와 함께 복도에는 정적만 남았다. 그런 와중에도 단유는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여전히 시선은 어둑한 복도의 끝, 흐릿한 출입구를 향했다. **** “선생님.” “왜?” “단유가 이상해요.” “내가 봐도 그래.” 명수와 하은은 식탁에서 단유를 가리키며 이야기를 나눴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데도 단유는 멍한 눈으로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씹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단유야.” “예?” “김치가 질겨?” “네?” 무슨 말이냐고 묻는 단유에게 하은이 김치를 가리켰다. “김치 한 조각을 그렇게 열심히 씹고 있으니까 이상해서 그러지.” 언제부턴가 단유가 신김치를 좋아한다고 느껴져서, 슈퍼에서 신김치만 골라 사놓고 있긴 했지만, 저렇게 곱씹을 정도인가 싶었다. “아.” 단유는 자신이 얼이 빠져 있다는 것을 자각한 뒤, 얼른 식사를 마칠 요량으로 서두르기 시작했다. “너 오늘 무슨 일 있었니?” “아뇨.” “아, 맞다.” 명수가 손뼉을 치자 단유가 흠칫 놀란 얼굴로 명수를 바라보았다. 하은은 명수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명수는 씩 웃음을 지었다. “단유, 이제 축구부에요.” 명수는 오늘 감독님이 단유에게 했던 제안과 단유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하은에게 알려 주었다. “혹시 그것 때문에 걱정이었니?” “아뇨, 뭐 그런걸 가지고….” “만약 너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하지 마. 니가 이것저것 잘하는 팔방미인이라도 결국 정해진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건 한정되어 있으니까. 니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도 시간이 모자라니까, 만약 그런 게 걱정이 되는 거라면 다시 감독님께 이야기 해. 혹시 미안해서 못하는 거라면, 선생님이 가서 대신 이야기해줄 수도 있고.”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리고 감독님도 꼭 연습에 참여 안 해도 된다고 했고, 시합 있을 때도 이름만 올릴 뿐이라고 했으니까요.” 진짜 골키퍼가 부상을 입지 않는 이상은 단유가 경기장 위로 오를 일은 없을 것이다. “뭐, 니가 알아서 잘 할 건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 걱정이 되니까 그래.”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하지만 전혀 문제 될 거 없으니까 괜찮아요.” “그럼 다행이고.” 이후로는 단유도 머릿속을 비우고 식사에만 전념하려 했다. 하지만 가끔 그녀에 대한 생각이 날 때마다 단유의 젓가락은 허공에서 멈칫하곤 했다. **** 나윤은 그날 레슨까지 모두 받은 뒤, 회사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나윤이 연습실을 나왔을 때는 이미 밤이 한창인 11시 무렵이었다. 1층의 커피숍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지만, 손님은 많지 않아 보였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나윤은 손에 들린 핸드폰을 계속 만지작거리다 혹시 전화나 메시지가 온 것은 없는지 확인했다. 그렇지만 부재중 통화도 없는 조용한 핸드폰이었다. “생각하랬다고 백날천날 생각만 할 거야?” 불과 하루도 안 지났건만, 나윤의 마음은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물론 애초의 제안은 본인이 했지만, 당장 말을 얼버무리는 단유의 태도에 불안감을 느껴 상황을 반전시키고픈 마음에서 즉흥적으로 저질렀을 뿐이었다. 그 시점에서 만약 단유가 ‘싫다’ 고 했다면 그 충격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지.’ 사실 단유 정도로 ‘잘 생기고’, ‘머리 좋고’, ‘멋이 있는’ 남자라면 나윤 ‘따위’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보다 예쁘고 잘난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윤의 자기 비하와 단유의 대답에 대한 두려움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씻고 나와 침대에 누울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무심코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어?’ 핸드폰에서 메시지가 보내질 때 나는 기묘한 효과음이 나윤의 정신을 깨웠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분명 낮에 이것저것 문자를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었다. 하지만 겁이 나서 보내지는 못하고 그냥 뒀었다. 그런데 그 메시지가 여태 남아 있다, ‘실수’로 ‘보내기’가 된 것이다. 「보고 싶어.」 미치겠다.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꾹 눌러도 보고, 밀어도 보고, 여러 번 누르기도 해봐도, 취소는 되지 않았다. 입에서 ‘어떡해’만 연발하는데, 갑자기 메시지 도착 알람음과 함께 새로운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요?」 “악!” 나윤은 핸드폰을 침대 이불에 집어 던지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거실에 계시던 어머니가 나윤의 비명을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후 입속에 이불을 집어넣고 소리를 질렀다. 읍읍 소리를 질러도 속이 안 풀렸다. 그때, 또다시 들려오는 핸드폰 알람음. 차마 보기가 두려웠지만, 나윤은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들었다. 「누나 집이 어딘지 몰라서 가지를 못하겠네요.」 알면 오려고? 이 무슨 답인가 싶어 나윤은 눈만 꿈뻑꿈뻑 거리며 메시지의 의미를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도저히 의미가 파악이 안 된다. 자기도 보고 싶은데 정말 집을 몰라서 아쉽다는 뜻인지, 별로 보고 싶지 않아서 집을 핑계 대는 것인지. “얘는 왜 이렇게 매번 사람 헷갈리게 만들어?” 나윤은 다음 메시지로 집 주소를 알려줘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 [379] 돌아보지마(5) 숱한 상상과 번민 속에서 괴로워하다 악몽까지 꾸며 잠을 설쳤던 나윤은 창으로 들어온 밝은 햇살에 고문을 받는 투사처럼 괴로워하다 힘겹게 눈을 떴다.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감상과 연습실에 갈 시간이 되지 않았나, 하는 초조함이 먼저 나윤을 덮쳤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나윤의 볼을 붉히게 만든 것은 ‘단유’였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 든 나윤은 핸드폰의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악몽은 악몽일 뿐이지.’ 나윤은 입꼬리를 슬쩍 늘리며 문자들을 확인하다,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고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리는, 듯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욕실의 거울을 보며 탱탱한 피부를 톡톡 건드려보고, 어느 때보다 꼼꼼하게 세안을 하고, 눈썹이라도 제대로 정리해야 하나, 고민도 하다가 통통 튀는 걸음, 을 걷는 기분으로 욕실을 나왔다. 신중하게 옷을 고르고, 어제와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화장도 했다. 혹시 모르니 가진 것 중 가장 예쁜 가방에다 이것저것 짐을 챙겨 넣고 어깨에 메었더니 뭔가 허술했다. 거울을 보니 역시 머리가 허전했다. 하지만, 활동 스케줄도 없는데 굳이 샵에 가서 요란을 떨 일까지는 아니라 생각해서 나윤은 그나마 예쁜 모자로 머리를 가리고 집을 나섰다. **** 단유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 운동을 나섰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스케줄로 하루 운동량을 소화한 후, 집으로 돌아와 씻었다. 전과 다른 점은, 욕실에 있는 동안은 아무도 볼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하여 마음껏 능력을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두 겹의 회오리를 만들어 하나는 단유의 몸으로부터 일정 범위 안에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 물보라가 세차게 돌면서 단유의 몸을 감싸니, 마치 세탁기 안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또 다른 회오리는 바깥으로 물방울이 튀는 것을 막아주니, 단유의 샤워는 놀랍도록 깨끗해서 명수나 하은은 매번 놀랬다. “명수 너도 좀 본받아라. 저렇게 욕실을 깨끗하게 사용하니까, 다음 사람이 쓰기에도 얼마나 마음이 편하니?” 명수의 투덜거림을 배경음으로 깔고 단유는 방에서 외출을 준비했다. 옷이야 집히는 대로 입을 뿐이었고, 애초에 옷이 많지가 않은 탓에 고민의 대상도 아니었다. 벽에 걸린 작은 거울로 옷매무새를 확인하고 단정하다 싶으면 끝이다. “다녀오겠습니다.” “어? 너 어디 가니?” “약속 있어요.” “그럼 점심도 밖에서 먹을 거야?” 거실에서 게임패드를 붙잡고 있던 명수가 고개를 뽑아 들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어.” “아까 상미가 피자 사 온다고 했는데?” “너희끼리 먹어.” “알았어! 안 남긴다?” 명수는 입 하나 줄었다고 좋아하며 손을 흔들어 단유를 배웅했다. 오피스텔을 벗어나자 뜨거운 햇살이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지리를 잘 몰라서 오늘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이동할 생각이었던 단유는 우선 가까운 버스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 “단유는?” “약속.” “무슨 약속인데?” “몰라.” ‘관심 없어’라는 얼굴로 입에는 피자를 오물거리며 두 손으로는 연신 게임패드를 격렬하게 조종하는 명수였다. 상미가 화면을 보다가 피자 한 조각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느낌이 싸한데.” “응?” “그냥 느낌이 별로 안 좋아.” “무슨 소리야, 갑자기.” “단유가 갑자기 일요일에 약속이 있다고 나갔다고 하니까, 느낌이 안 좋다고.” 명수가 피식 웃으면서 또 한 조각의 피자를 입에 구겨 넣었다. 너무 큰 덩어리였는지 씹는 데 힘이 들어 보였지만, 명수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단유가 저래 봬도 은근히 바빠.” “걔 친구 없잖아?” “친구가 왜 없어? 지태랑 채윤이도 있고, 나도 있고, 너는 친구 아냐?” “그런 친구 말고. 일요일에 밖에서 부를 친구 말이야.” “에이, 모르지 그건.” 하지만 상미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계속 의심스럽다며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명수의 팔뚝을 힘차게 때렸다. “아야!” “야, 너 혼자 다 처먹냐!” “그게 아니고, 넌 배가 불러서 안 먹는 줄 알았지!” “이 돼지야!” “야, 하나 남았네.” “이 돼지야!” 괜한 화풀이를 한다며 명수가 투덜댔지만, 상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신경질적으로 남은 피자 한 조각을 씹어댔다. “야.” “응?” 명수는 TV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영화 보러 가자.” “영화?” 갑자기 웬 영화, 라며 돌아보니 상미가 볼을 씰룩이며 말했다. “공포영화나 보러 가자.” “왜?” “그냥 오싹해지는 영화가 보고 싶어.” “무서운 거 별론데.” “가자.” “그냥 이거 하면 안 될….” “일어나.” “응.” 시무룩한 얼굴로 패드를 내려놓은 명수는 상미를 따라 집을 나섰다. **** 어제보다 더 뜨거운 햇살에, 비록 선크림을 발랐지만, 혹시라도 얼굴이 타진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노린 것은 아니었지만 모자라도 가지고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를 탄 나윤은 곧 가장 안쪽에 빈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핸드폰의 잠긴 화면을 풀고 어제의 문자들을 확인했다. 「집 주소라도 알려줄까?」 「지금 오라는 말씀이신가요?」 「올래?」 「너무 늦은 시간 아닌가요?」 「그럼 집은 왜 물어본 건데?」 「보고 싶다고 하시니까 그랬죠.」 「내가 보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 오겠다는 거야?」 「그러겠다고 했잖아요?」 나윤은 연습실에서 단유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너 나 좋아해?」 「예.」 어? 이게 아닌데? 이렇게 쉽게 답이 나오나? 나윤은 잠시 손가락을 멈추고 단유의 마지막 메시지만 바라보다 다시 물었다. 「진짜?」 「좋아하죠.」 「그럼 사귀는 거야?」 「그거랑은 또 다른 문제 아닐까요?」 이게 진짜 누굴 놀리나? 나윤은 미간을 좁히고 신경질적으로 자판을 눌렀다. 「나랑 그렇게 사귀기 싫어?」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말씀드렸다시피 사귄다는 관계 설정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서 그래요.」 무슨 말을 이렇게 어렵게 하니? 「사귀는 게 별거니? 서로 좋아하고 만나고 같이 지내는 게 사귀는 거잖아.」 「단순히 그런 의미로 교제를 이야기해선 안 될 것 같은데요. 제가 비록 이성관계에 대해 잘 모르긴 해도, 이성의 교제가 단순히 같이 시간을 보낸다는 것을 떠나 서로를 배려하는 의무와 존중받을 권리에 동의해야 가능하다고 봐요.」 와, 얘 뭐야? 살짝 입을 벌린 나윤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는데, 이어서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런 것들이 합의되지 않은 사항에서 교제가 이루어진다면,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밖에 되지 않을까요? 일방적인 배려나 존중되지 않는 관계는 서로를 미워하게 될 테니까요.」 나윤은 잠시 손을 놓았다. 만약 단유가 저런 것들을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면, 오히려 자신이 너무 가볍게 사귀자고 말한 건 아닌지 반성이 됐다. 그의 말처럼 상대를 존중할 마음을 가졌던가, 서로를 배려할 준비를 했던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미안해.」 「뭐가요?」 「내가 너무 가볍게 굴었던 것 같아서 말이야.」 「안 그래요.」 「아니야?」 「많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말씀해주셨다는 거 알아요. 눈에 보이던걸요.」 「그런 것도 보여?」 「보려고 하면 보여요. 특히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이라면.」 나윤의 심장이 덜컥 멈췄다. 이 남자, 꽤 고수다. “좋아해?” 들리지 않을 걸 알면서도 중얼거려 보던 나윤은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작성했다. 「좋아해?」 「네. 좋아해요.」 나윤은 다 집어 던지고 침대에 얼굴을 묻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내일 만나자.」 「어디서요?」 장소 따위가 중요할까? 어디서든 만나면 그만인데.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 당장에라도 만나고 싶은데. 그래도 일단은 정확한 장소를 지정하는 게 좋겠다. 어렵사리 고민해서 나윤이 장소를 정하고, 단유가 이를 받아들였다. 몇 마디의 말이 더 오가다, 내일을 기약하며 문자 ‘데이트’를 종료했다. 잠드는 순간까지, 나윤의 마음은 단순히 좋지만은 않았다. 혹시 이게 꿈은 아닐지, 아니면 자신만의 착각은 아닐지. 직접 만나서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어야 실감이 날 것 같았다. **** 나윤을 만난 단유는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슴 쪽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안녕?” “인사가 왜 그렇게 어색해요?” “그걸 꼭 집어서 말해야겠니?” 단유의 웃음에 나윤의 심장이 또 한 번 덜컥거렸다. 사랑을 하면 심장이 고장 난다는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나윤의 심장이 계속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아무래도 이러다 진짜 병이 날 것 같았다. 심근 경색 뭐 이런 거로. “밥은?” “같이 먹자고 했잖아요?” “아, 그렇지. 먹어야지, 밥.” “어디 안 좋아요? 얼굴이 하얀데.” “…너 나 놀리는 거지?” “아닌데요? 진짜 누나 얼굴이 너무 핼쑥해 보여서 그래요. 배고파서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잠을 못 잤어요?” “그러고 보니, 넌 얼굴색이 ‘참’ 좋다?” “비꼬는 말투처럼 들리는데요?” 나윤은 얼른 정색을 풀고 배시시 웃었다. “그렇게 들렸어? 아니야, 내가 뭘 비꼰다고 그래. 맞다, 얼른 가서 밥 먹자. 배고프지?” “별로 배는 안 고픈데, 일단 자리를 잡죠. 누나 너무 피곤해 보여요.” 하나도 안 피곤하지만, 나윤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가까운 식당에 들어가 가볍게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너무 긴장한 것인지, 아니면 진짜 단유 말대로 몸이 안 좋은 것인지, 밥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이제 뭐 하지?” “뭐 하고 싶어요?” 하고 싶은 건 많다. 조용한 카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도 싶고, 손잡고 거리를 활보하고도 싶고,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라는 남산 타워 전망대에 올라가 보고 싶기도 했다. 나윤은 눈을 돌리다 마침 들어오는 광경에 손가락을 뻗었다. 단유가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가 나윤에게 물었다. “영화요?” 나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단유도 나쁘지 않겠다며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나윤은 가만히 앉아서 쉴 필요가 있지 싶었다. 심하게 떨리는 동공과 가쁜 호흡이 불안하게 보인 탓이었다. 무인 판매대에 서서 볼 만한 영화를 고르고 있자니, 어떤 영화를 골라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뭐 보고 싶어요?” 나윤이라고 딱히 눈에 들어오는 영화는 없었다. 이럴 땐, 빨리 시작하는 영화를 고르는 게 나으리라. 하루는 짧았고 할 일은 무척 많았으니까. “팝콘 먹을래?” “팝콘이요?” “혹시 영화 볼 때 뭐 안 먹어?” 단유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딱히 그런 건 없는 거 같아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라서요.” “두 번째?” “처음은 예전 초등학교 시절에 보육원에서 다 같이 관람하는 거였거든요. 이렇게 보고 싶은 영화 골라서 보는 건 처음이네요.” 아까는 심장이 덜컹거리더니, 이번엔 목이 울컥 막히는 기분이었다. “미안해.” “뭐가요?” “혹시 아픈 기억을 건드린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이야.” “에이, 아니에요. 그렇게 슬픈 추억도 아닌걸요.” 단유는 연한 미소로 나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가요. 시간 보니까 곧 시작하겠네요. 아, 팝콘 먹을래요?” “아냐, 방금 밥 먹었는데, 별로 생각이 없네.” “그래요. 그럼.” 단유가 몸을 돌릴 때였다. 나윤이 단유의 손을 붙잡았다. 단유가 손을 내려다보고 나윤을 바라보니, 나윤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손잡고 가자.” 단유는 나윤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래요.” **** “이거야?” “여기 봐봐. 올해 가장 무서운 영화라고 되어 있잖아?” “그건 광고잖아? 광고는 늘 그런 식인걸?” “모르지, 난. 사실 난 이번이 두 번째인걸.” “뭐가 두 번째야?” “영화관에 오는 게 두 번째야.” “진짜?” “응.” “처음은?” “옛날에 보육원에 있을 때, 아이들이랑 단체 관람한 거.” “아, 그렇구나.” 상미는 잠시 명수의 눈치를 보다 씩 웃으며 명수의 팔을 툭 쳤다. “짜식, 그럼 누나 덕분에 좋은 구경 하게 됐네? 고맙게 생각해라.” “웃기네. 나 무서운 거 안 좋아하거든?” “괜찮아. 무서우면 누나가 눈 가려줄게.” “웃기시네. 그리고 니가 무슨 누나야?” “오구오구, 우리 명수 무서워요?” “하지 마라.” 상미는 키득거리며 명수를 뒤에 두고 매표소로 향했다. 그 사이 명수는 주위를 둘러보며 영화관을 살폈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다양한 사람들이 붐비는 영화관 매표소 앞은 한쪽에 만들어지고 있는 팝콘 탓에 고소한 향이 퍼지고 있었다. 피자 한 판을 거의 혼자 먹다시피 했음에도 괜히 팝콘으로 눈이 가던 명수였다. “어?” 명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는 무리 가운데서 익숙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가 자신도 아는 ‘여자’의 손을 잡고 가는 모습도 발견했다. “명수야!” 뒤에서 상미가 명수를 불렀다. “이제 곧 시작이라는….” 명수가 상미를 붙잡고 돌려세웠다. “뭐냐?” “어? 아니 그, 무서운 영화 꼭 봐야겠냐고.” “왜? 그렇게 무서워?” 명수의 시선은 상미에게서 벗어나 그녀의 어깨너머로 힐끔거렸다. “바꿔줄까?” “아니, 그게 있잖아.” 곧 상미도 명수의 시선을 알아챘다. “뭔데? 뭐 있어?” “아니, 잠깐만!” 명수가 급히 상미를 불러세웠다. “돌아보지 마.” “왜?” “…보면.” 상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주위를 살피던 상미가 천천히 명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뭔데,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난 것처럼 굴어?” 명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 사실은 저기 팝콘 말이야. 보면 괜히 먹고 싶어질까 봐. 아예 보지 말자고.” 피자도 한 판 먹고 왔는데, 팝콘까지 먹으면 살찐다, 는 명수의 변명에 상미가 피식 웃으며 명수의 팔을 툭 쳤다. “먹기는 니가 다 먹었지, 돼지야.” 상미는 시크하게 돌아서며 말했다. “팝콘 대(大)자로 하나 사와.” ======================================= [380] 돌아보지마(6) 명수는 상미가 원하는 팝콘과 콜라를 양손에 사 들고 상영관으로 향했다. “무거워.” “엄살은.” 상미는 명수의 품에서 팝콘만 골라 들었다. 그리고 하나를 집어 오물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명수는 이내 고개를 털고 뒤를 쫓았다. 작년 늦가을 무렵, 단유가 어디선가 어깨를 다쳐서 왔을 때였다. 생각해보면 그때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서울에서 함께 지내던 선생님이 무슨 이유에선지 일을 그만두고 떠나고, 대신 하은이 다시 돌아와 집안에 활기를 더했었다. 평소 과묵하던 단유도 그때를 기점으로 가끔 농담도 하고 친구들한테 더욱 살갑게 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변화는 좋은 점이었지만, 반대로 그 시기에 재훈은 돌연 후원을 끊겠다고 했다. 사정을 모르는 명수로서는 날벼락과도 같은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슬퍼할 이유는 없었다. “우리가 이제 더 단단해져야 돼.” 단유의 언질이 없었더라도 명수는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솔직히 그 전까지는 별로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고 해야 옳겠다. 정훈의 후원 아래 너무 편안히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저 축구만 하면서 현재의 생활에 젖어 있었던 것이리라. 마음가짐이 달라지니 주변의 것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소 느끼지 못했던 것도 느껴졌다. 예를 들면, 상미의 시선. 솔직히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명수로선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상미가 단유를 보는 시선이 다른 친구들을 볼 때랑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해?” “응? 아냐.” 명수는 서둘러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더듬거리며 자리를 찾아간 두 사람은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다행이라면, 상미가 보고 싶어 하던 공포영화는 연령제한에 걸려 볼 수 없었다는 점이고, 불행이라면 그럼에도 이왕 온 김에 ‘영화 한 판 때리고 가야지’라며 발권한 영화가 연애물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이었다. 다행이라면, 여자들이 좋아하는 류의 뽀송뽀송한 색감으로 화면을 채워서 상남자 같은 상미도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는 점이고, 불행이라면 연애의 1도 알지 못하는 상남자 명수는 전혀 즐겁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재밌네.” “그래? 다행이네.” 빈 팝콘 통을 휴지통에 버릴 때였다. “명수야.” “응?” 명수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 “이런 영화 괜찮아?” “저요? 좋고 말고가 어딨어요. 아직 내용도 모르는데.” 단유의 여상한 대답에 나윤은 괜히 이 영화를 고른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단유는 줄곧 자신에 맞춰주는 포지션이었다. 뭐든 나윤이 원하는 대로 따라와 주고, 싫다는 말 한마디 없이 계속 미소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보기에 이런 애니메이션은, 특히 이런 연애물은 남자들이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액션 히어로가 나와서 우주를 넘나들며 부수고 소리치고 욕도 하고 주먹질하다가 키스도 하는 영화를 남자들이 좋아한다는 것은 상식이잖는가? “여기네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자리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왜 그래요?” 주변을 둘러보던 나윤에게 단유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응?” “떨고 있잖아요?” 단유가 나윤의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계속 손을 잡고 있었다. 나윤은 얼른 손을 뺐다가 ‘아’ 하고 탄식하며 후회를 했다. “미안.” “뭐가요?” 나윤은 고갯짓을 했다. 기껏 자신이 먼저 손잡자고 해놓고선, 또 이렇게 오해받을 행동을 하고 말았다. “손에 땀이 많이 나서.” “괜찮아요.”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미소를 지닌 단유의 얼굴을 힐끔 보며 얼굴을 붉혔다. 곧 광고도 끝나고 극장에는 빗소리 같은 효과음과 함께 영화가 시작되었다. “계속, 손잡고 있어도 괜찮아?” 몸을 기울여 물었더니, 단유가 피식 웃으며 나윤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무 여자가 매달리는 것처럼 보일까 봐 걱정되지만, 일단 그런 고민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나윤은 스크린으로 시선을 옮겼지만, 손등에 와 닿는 단유의 손가락과 손바닥에 와 닿는 그의 온기에 온 신경이 집중되는 기분이었다. 좋은 느낌이었다. 단유는 영화에 집중했다. 영화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서사와 그 서사가 함축하는 의미들에 집중했다. 애니메이션이라는 특성상 표정과 행동에 과장은 있지만, 그 과장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의 의미는 보다 선명해지고 명확해졌다. 다만 진짜 사람이 연기를 통해 표현하는, 불명확하지만 호소력 짙은 감정의 전달이라는 측면은 많이 축소되는 경향이 있었다. 아무래도 애니메이션의 한계이리라. 그 덕에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순화되고, 다소 일차원적인 의미 전달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지만, 때문에 쉽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영화였다. ―는 감상평을 늘어놓는 단유의 말에 나윤은 코웃음을 쳤다. “아, 미안. 비웃는 거 아냐. 그냥, ‘너 답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그래요? 저답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나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은 기껏해야 주인공이 여주인공에게 꽃을 건네줄 때 가슴이 설레더라, 정도의 감상밖에 안 남았는데 말이다. 나윤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단유에게 넌지시 물었다. “여기 우리가 제일 어린 것 같지?” 직역하면, 여기는 분위기가 너무 딱딱하지 않냐는 물음이었는데 단유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외모만 보면, 저희도 별로 어려 보이진 않을걸요?” 잠시 생각을 하던 나윤이 와락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야? 그럼 내가 겉늙어 보인다는 이야기야?” “누나만 그런가요? 저도 그렇죠.” “넌 안 그래.” “왜요? 저도 가끔 중학생으로 안 보인다는 이야기 들어요.” “그건 네 키가 커서지. 넌 얼굴이 되게 동안이란 말이야.” “칭찬인가요? 고맙습니다.” “…아이 씨. 너 왜 말 돌려!” “커피 맛있어요. 이런 커피 처음 먹어보는데?” “야!” “사람들이 돌아보는데요?” 나윤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피하려는 듯, 몸을 안쪽으로 기울였다.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며 단유를 향해 눈을 부라리는 것을 잊지 않는 나윤을 보며 단유는 히죽 웃음을 지었다. 커피 한 잔씩을 시켜놓고 꽁냥꽁냥 거리는 두 사람의 기묘한 데이트는 영화 관람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 “니 이런 영화도 보나?” “아, 아뇨. 친구가 보자고 해서 따라온 거예요.” “친구?” 옆에 섰던 상미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오, 여자친구가?” “아, 그냥 여자 사람 친구예요.” “에이, 그런 친구랑 단둘이서 극장 데이트를 하나?” “그런 거 아닌데요.” 극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은 다름 아닌 장계 중학교의 수학 담당이신 김승민 선생님이었다. 도대체 극장에서 학교 선생님을 만나는 우연은 다 뭐람. 게다가 친하지도 않은 수학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승민은 하하 웃으며 명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명수가 축구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연애도 잘하네?” 아니라고 몇 번을 대답한 들, 들은 척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 인사해라. 얘가 우리 학교에서 제일로 축구 잘하는 애다.” “어머, 잘생겼네. 반가워요.” 선생님의 곁에 있던 여자분이 인사를 하자, 명수는 또 한 번 마주 고개 숙여 인사하다가 두 사람 사이에 조그맣게 생긴 여자애가 멀뚱멀뚱 명수를 바라보고 있음을 발견했다. “내 딸이다, 이쁘제?” 가족끼리 영화를 보러 왔다는 선생님의 설명이 이어졌지만, 명수는 달리 대꾸할 말이 없었다. “오빠한테 인사해야지?” 하지만 여자애는 그저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얘가 낯을 가리나? 원래 인사성이 밝은 앤데, 장소가 장소인지라 조금 그런갑다. 니가 이해해라.” 이해고 자시고, 명수는 볼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여자애도 명수에게 관심이 사라졌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너거 밥 묵읏나? 이제 저녁시간인데 밥 안 묵었으면 같이 할까?” “네? 아니, 저기….” 명수는 머리가 복잡해서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이걸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라고 속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상미가 나섰다. “저희는 괜찮아요. 집에 가서 먹으면 되는 걸요.” 그러자 이번에는 사모님이 선생님의 팔을 찰싹 치며 말렸다. “그러지 마요. 자기들끼리 있고 싶어하는 데 눈치 없이 끼어들고 그래요?” “아, 글나? 미안타, 내가 눈치가 쪼매 없어가지고.”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진짜 집에서 먹으려는 거예요. 저희 집이랑 명수 집이랑 가까워서요, 자주 같이 먹거든요.” “맞나? 아, 그라믄 니 단유도 알긋네?” “네. 단유한테 공부도 배우는데요?” “공부를?” 상미는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있을 때 단유의 도움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 덕에 성적도 올랐다는 이야기에 선생님이 손바닥을 힘차게 마주치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기가 막히네! 전교 1등하는 애한테 과외를 받으이 성적이 오를 수밖에 없겠네. 가가 선생들보다 실력이 더 좋다 아이가. 맞제, 명수야?” “네? 네.” “맞다고? 그럼 가가 나보다 더 실력이 좋다 이 말이가?” 명수가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근데 야는 또 와이리 쑥스럼을 타노? 학교에서는 천방지축처럼 동분서주하는 놈이 여자친구 있다고 얌전 빼는기가?” “이이도 참.” 사모님은 선생님이 너무 학생을 놀리는 것 같다는 생각에 또 한 번 선생님을 말렸다. 그때였다. “오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여자애가 불쑥 나서며 명수에게 말을 걸었다. “응?” 명수가 놀란 눈으로 여자애를 바라볼 때, 선생님과 사모님도 무슨 말인가 싶어서 여자애를 바라보았다. “오빠 어딨어?” “야, 뭐라 하노?” ‘딸내미가 갑자기 무슨 소리고’라며 사모님에게 묻지만, 사모님도 영문을 모르긴 마찬가지라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몸을 낮추며 여자 아이의 시선을 따라 ‘여기 오빠 말고 다른 오빠 찾니?’라고 물었다. 여자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시선이 계속 명수를 향하자, 명수는 쭈뼛대면서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나 혼자 왔어….” 명수의 대답에 선생님과 사모님이 ‘갑자기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고’ 라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사모님이 먼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하지만 말은 끝을 맺지 못했고, 사모님의 입술은 그저 달싹거릴 뿐이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걱정되는 판이라 그런지 말을 잇지 못하는데, 명수 역시 난처한 얼굴로 사모님과 선생님을 바라볼 뿐이었다. 명수 곁에 선 상미도 영문을 몰라 그저 상황을 지켜볼 뿐인데, 여자 아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단유 오빠 불러줘.” 여자아이의 뜬금없는 요구에 놀란 부모와, ‘단유’라는 이름에 반응한 상미의 시선이 아이에게로 향했다. “니, 니가 단유를 어째 아노?” 여자 아이가 돌아보며 선생님에게 말했다. “나, 단유 오빠랑 같이 살았어, 아빠.” 여자 아이, 지선이의 대답에 선생님과 사모님, 상미가 서로의 놀란 표정을 확인하다 명수에게로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이 닿았다. 모두의 시선을 받던 명수는 난처한 표정으로 선생님을 바라보다 대답했다. “같은, 시설에 있었거든요.” **** 극장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던 단유에게 전화가 왔다. 단유는 핸드폰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 후 전화를 받았다. “어, 왜? 응?…알았어. 어딘데? 아, 그래? 알았어, 금방 내려갈게.” “누군데?”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는 단유에게 나윤이 물었다. 단유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명수요. 밑에 와 있다네요.” “밑에?” “네. 아는 사람이랑 같이 있나 본데 얼굴 좀 보자고 해서요.” “그런데, 명수는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대?” “영화 보러 왔나봐요. 왔다가 저흴 봤나 보더라고요.” “그래? 난 못 봤는데?” 단유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나윤도 덩달아 일어났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번화한 거리가 나타났고, 주말 저녁시간 답게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저기래요.” 단유가 한 곳을 가리켜 보이며 먼저 앞장섰고, 그 뒤를 나윤이 총총 따라 걸었다. 그리고 곧 명수가, 초조한 얼굴을 하고 기다리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단유는 먼저 선생님에게 인사를 했다. 늘 유쾌한 웃음과 호탕한 성격으로 수업 시간 학생들을 쥐락펴락 하시던 선생님이 어쩐 일로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학생이 단유?” 선생님 곁에 있던 여자, 사모님이 묻자 단유는 명수를 힐끔 쳐다보았다. 명수가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이를 알아 들은 단유가 다시 사모님에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단유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 단유는 입꼬릴 올리며 인사했다. “오랜만이다, 지선아.” 그러자 아빠와 엄마 사이에 서 있던 지선이 특유의 시크한 표정으로 단유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안녕, 오빠.” 두 사람 모두, 마치 어제 만났다 헤어진 사람처럼 구니, 오히려 주위 사람들이 그 분위기가 적응이 되지 않아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 [381] 출구는 어디인가요(1) 갑자기 여러 사람이 모이니 어느새 7명의 대 인원이 되었다. 길 위에서 이러지 말고 일단 어디든 이동해서 이야기를 나누자는 사모님의 제안에 선생님은 얼떨떨한 표정은 감추고 걸음을 옮기셨다. 밥 시간도 되었으니, 라는 핑계로 향한 식당은 원래 가려고 마음먹고 있던 식당이라고 했다. 딸, 지선이가 좋아하는 메뉴라서 골라놨던 갈빗집이었다. 인원이 많았기에 가게에서는 가장 안쪽의 룸으로 안내해주었다. 어떤 이야기가 오갈지는 몰라도 여러 사람의 시선을 받지 않는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사모님은 기꺼워했다. 반면 선생님은 가슴 안쪽의 지갑을 괜히 더듬다 눈치를 보고 슬쩍 손을 내렸다. 선생님 부부와 지선이 먼저 들어가 자리를 잡고 맞은 편에 단유네가 앉기로 했다. “여기 앉으세요.” 단유가 먼저 방석을 깔며 나윤의 자리를 만들어주자, 나윤은 고맙다며 자리에 앉았다. 사실 이곳으로 오기 전, 단유는 나윤에게 먼저 돌아가도 된다고 언질을 줬다. “불편하시면 집에 먼저 가세요. 제가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하지만 나윤은 굳이 자리를 피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 단유의 제안을 사양했다. 무엇보다 무언의 직감이 자리를 쉽게 떠나선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일단 음식부터 시킬까?” 선생님의 목소리가 살짝 메인 것 같다고 느꼈지만, 단유는 아무렇지 않게 메뉴판을 집어 들어 선생님께 건넸다. “저희는 많이 먹지 않을 테니 선생님께서 골라주세요.” “그러지 말고 골라요. 이럴 땐 선생님이 사주시는 거예요. 그쵸 여보?” “그, 그럼.” 사모님은 메뉴 선정을 남편에게 일임한 이후, 먼저 단유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학생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전교 1등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다고?” “아뇨, 작년에 한 번 놓쳤어요.” “야 이 자슥아. 전교 3등 한 번 한 거 가지고 놓칫다 하면 딴 애들은 불쌍해서 우짜노? 겸손도 적당히 떨그래이.” 음식이나 골라요, 라며 말을 끊고 들어온 남편을 타박한 사모님은 다시 미소를 띠며 물었다. “그래, 우리 지선이랑 같은…시설에 있었다고요?” “네. 여기 명수도 똑같이 지냈어요. 저희가 5학년이 되기 바로 전이었으니까, 3년도 넘었네요? 그때까지 함께 지냈고요. 그때 지선이는 1학년이었죠.” 지선은 여전히 시크한 얼굴로 단유의 얼굴만 바라보다가 틈틈이 곁에 앉은 나윤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역시 지선의 얼굴을 바라보던 나윤이 슬쩍 미소를 지어보았지만, 지선은 표정 변화 없이, ‘이건 뭐’라는 눈으로 바라볼 뿐이라 머쓱할 따름이었다. “사실, 그래요. 지선이는 우리가 입양했어요.” 지선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바라보는 사모님의 눈빛은 따뜻했다. “다행이네요.” 단유의 말에 사모님이 살짝 놀란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일반적으로 ‘입양’을 이야기했을 때 돌아오는 반응은 ‘잘 됐네요’ 같은 미지근한 반응이나, ‘축하드려요’같은 형식적인 반응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같은 시설에 있었다 하더라도 신선한 반응이라 메뉴판을 들여다보는 척하던 선생님도 시선을 들어 올리니, 그 시선을 받은 단유가 ‘초등학교 입학할 정도로 큰 아이들은 입양이 잘 안 된다더라’는 이야기를 덧붙이며 명수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렇지?” “네.” 단유는 지선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렇게 보니 지선의 표정이 많이 밝아진 것 같아 단유도 기분이 좋았다. “보육원이 폐원될 때, 저희는 운이 좋아서 좋은 후원자분을 만나 이렇게 생활할 수 있게 되었는데, 다른 아이들은 모두 다른 보육원으로 흩어졌었죠.” “맞아요. 사실 저희도 걱정 많이 했거든요. 어린 애가 숫기도 별로 없고, 보육원에 친구도 많지 않아서 저희가 자주 놀아주고 그랬거든요.” “어머, 그랬어요?” 그때 지선이가 사모님의 소매를 잡아당겨 시선을 끌었다. 사모님이 ‘왜’ 하고 묻자 손가락을 들어 명수를 가리켜 보이는 지선이었다. “저 오빠, 나 죽인댔어.” “헉!” 육성으로 헛바람을 크게 들이키는 소리를 낸 명수가 급히 몸을 일으키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내가, 내가 언제 그랬어?” 지선은 태연한 얼굴로 고자질을 이어나갔다. “저 오빠가 나 잡히면 죽이겠다면서 계속 뛰어서, 나도 계속 도망갔어. 그래서 나 가슴도 아프고 다리도 아픈데 죽을까 봐 계속 도망갔어.” “야! 공지선!” 말을 내뱉자마자 실수를 깨닫고 얼른 사과부터 하는 명수였다. 과거의 성씨를 말하는 것 자체가 실례란 생각에서였다. “죄송해요, 선생님. 그…습관이 되어서요.” “뭐가? 애 잡아 죽인다는 게?” 선생님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명수를 째려보았다. “아, 아뇨! 그건 아니고요. 진짜 그건 오해예요. 그게요.” 명수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다 생각났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지선이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아, 이제 생각났다! 쟤가 있잖아요, 내 나비, 내 제비나비를 완전히 찢어가지고요, 그래서 화가 나서 쫓아가니까 도망간 거예요. 그거 단유가 잡아준 나비였는데, 진짜 귀한 나비였단 말이에요, 진짜 예쁜 거였는데.” 명수는 말하다 말고 울컥하는지 고개를 쳐들었다. 새까만 날개에 빨간 점들이 두드러진 제비 나비를 떠올리며 ‘진짜 예뻤는데’라고 중얼거리는 명수를 무심히 바라보는 지선의 표정이 재미있어 단유는 피식 웃었다. “저게 무슨 소리니?” 이해를 못 한 선생님과 사모님께 초등학교 시절 방학 숙제로 나비를 잡아주다 벌어졌던 소동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자 상미가 명수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그게 언제적 이야긴데 이러고 있냐?” “진짜 예쁜 나비였다고.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데.” ‘애들한테 자랑하려고 스크랩도 멋지게 했었는데’라며 울먹거릴 것 같은 분위기에 주위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이 선생님은 갈비를 주문했고, 사모님은 웃음기 배어든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사실 우린 지선이를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설명하자면, 지선이는 선생님 부부의 친구 딸이었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친구 부부가 명을 달리하게 되었고, 그 딸인 지선은 어린 나이에 오갈 데가 없어져 결국 보육원으로 들어가야 했다. 안타까운 사정은 알았지만, 당시 선생님 부부도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어서 도울 수가 없었고, 도울 방법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선생님도 ‘안정’을 찾았고, 사모님도 개인적으로 하는 일이 잘 풀리면서 여유가 생겼단다. 게다가 두 사람에게 아이가 없었기에 지선을 입양하기로 하는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지만은 않았다고. “보육원이 폐원됐다는 이야기를 늦게 들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지선이를 빨리 찾으러 가지 못한 게 미안할 따름이죠.” 지선이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턱을 괴고 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잘됐네요.” 라며 웃음을 지어 보이는 단유에게 지선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자친구야?” 그 물음에 모두의 시선이 나윤에게로 쏠렸다. 나윤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어른 앞에서 실례가 될 것 같아 모자를 벗고 있었더니, 얼굴을 가릴 게 없었던 나윤은 그저 고개를 푹 숙여 보일 뿐이었다. “응.” 하지만 이어지는 단유의 대답에 나윤의 고개가 번뜩 올라갔다. “뭐야? 저 표정은? 마치 자기가 여자친구인 줄 몰랐다는 표정인데? 니 혹시 니 혼자 착각하는 거 아이가?” 선생님의 짓궂은 질문에 단유가 웃으며 나윤을 바라보았다. “그래요? 착각인가?” 나윤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 단유 여자친구예요!” 그 반응에 선생님과 사모님이 웃음을 터뜨렸다. “거, 여자친구가 시원시원하네!” 선생님은 나윤의 반응에 즐거워하시며 너털웃음을 짓다가 갑자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눈을 좁혔다. “그런데 그쪽 얼굴이 꽤 낯이 익다 아이가?” “어머? 이이가 또 왜 주책이래? 남자 중학교에 있는 양반이 여학생 얼굴을 어디서 봤다고 그래요?” “아인데? 어디서 마이 봤는데?” 그때 물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던 상미가 끼어들었다. “저 언니, 연예인이에요.” “뭐?” 선생님과 사모님은 두 가지 사실에 놀라 나윤과 상미, 단유를 바라보았다. “연예인?” “언니?” 곧 선생님이 얼굴을 기억해냈다. “맞네! 내 그쪽 얼굴 봤었네. 우리 학교에 얘들 좋아하는 애들이 많아 갖고 수업 시간에도 막 영상을 찾아보고 있는 기라. 그래서 그걸 뺏느라고 내 고생 좀 했었다 아이가. 그때 봤었데이. 가디스 뭐라카는 그룹 아이가?” “예, 맞아요.” 단유가 선선히 대답했다. “그러면, 연상이가?” “네. 저보다 연상이죠.” “이야, 단유 니 능력도 좋대이. 공부만 하는 범생인 줄 알았드만.” 선생님의 너스레에 단유는 그저 웃음으로 화답했다. “진짜 여자친구야?” 이번 물음은 상미에게서 나왔다. 마치 ‘그 쪽이 오른쪽이야?’라고 묻는 평범한 질문이었다. “응.” 단유 역시 특별한 의미 없이 받아들였고, 사실관계를 인정하는 단답형 대답으로 돌려주었다. “축하해.”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짧은 대화로 인해 조금 분위기가 썰렁해졌다고 느낀 건, 명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선생님은 짧게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 마 내가 단유 니니까 넘어간다. 명수 같았으믄 지 앞가림도 몬 하는 게 무슨 연애질이냐고 한 소리 할라캤는데.” “제가 뭘 어쨌다고요….” 주눅이 든 목소리로 어렵게 항변하는 명수를 향해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명수의 머리를 한 번 쥐어박았다. “그니까, 니는 그냥 축구나 해라. 열심히 축구해갖고 나중에 프로 선수 되믄 인터뷰 때 꼭 이야기 하그래이. 중학교 때 수학 선생님이 연애를 못 하게 해서 훌륭한 선수가 되었노라고. 알앗제?”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어딨기는 여 있제. 야, 그걸로 모자라면 고기도 먹여줄게. 고기 먹자.” 마침 주문한 고기가 나온 덕에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전환되었다. 불판이 올라가고 지글지글 맛깔스럽게 구워지는 갈비를 바라보던 중에, 사모님이 단유와 명수에게 말했다. “가끔 와서 우리 지선이랑 놀아주고 그래요. 지선이도 오랜만에 좋아하는 오빠들 만나서 신이 난 거 같으니까요.” 저 얼굴이? 의아해하는 명수와 달리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니는 좀 자주 와서 놀아주고 해도 된대이. 와서 우리 지선이 공부도 좀 갈켜주고 그래라. 우리 지선이도 니 덕에 전교 1등 할지 누가 알겠노, 그자?” “그럼 더 좋죠. 지선아, 너도 좋지?” “응.” “저는요?” “니? 니는 마 공이나 차뿌리면서 뛰기 바쁠 텐데 올 시간이 어딨노? 또 괜히 왔다가 지선이 죽이겠다고 달려들믄 우짤라꼬?” 억울하다는 듯, 명수가 두 손을 포개고 사정하듯 말했다. “진짜 아니라니까요? 솔직히 예전에 지선이가 얼마나 저 괴롭혔는데요! 제가 오빠라서 그냥 참아주느라고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쟤한테 당한 거 생각하면, 어휴.” 명수가 가슴을 탕탕 치는데 주위 사람들은 그저 우스운 코미디극을 보는 기분이었다. “오빠, 먹어.” 그 와중에 지선이 명수에게 고기를 건네자, 명수가 놀란 눈으로 지선을 바라보았다. 화해의 손을 먼저 건네는 것인가? “익었는지 한 번 먹어봐봐.” 그럼 그렇지, 라는 시선을 던지면 고기를 곱씹더니, ‘덜 익었네!’라고 투덜거리는 명수였다. 덕분에 사람들이 또 한 번 웃을 수 있었다. 물론 모두가 다 편하게 웃은 것은 아니었지만, 눈치가 있는지라 차마 어른들 있는 자리에서 티나게 시무룩해 하거나, 티나게 긴장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이었다. **** “나 먼저 간다.” “같이 가.” “됐어.” “어차피 같은 방향인데, 같이 가.” 명수는 기어코 상미를 붙잡았다.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눈빛이 흔들리는 명수를 보며 상미가 코웃음을 쳤다. “왜? 내가 무슨 사고라도 칠까봐?” “아니, 난 그냥.” “너 아까 극장에서 단유 봤었지?” “…….” “봤네. 영화 보러 갔다더만, 거기서 본 거네.” 명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상미는 말없이 걸음을 옮겨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걸음을 걷는 동안 과거의 한 장면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단유가 어깨를 다쳐서 집에 혼자 있을 때였다. 병문안을 마다하길래 조금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 단유의 집을 찾았다. 마침 명수는 집에 없었고, 단유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단유를 곁에 두고 혼자 게임을 하던 상미가 단유와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이었을 것이다. “너 진짜 못 됐어.” 기말고사 공부나 하자며 병문안 온 사람 무안하게 만들 발언이나 하는 단유에게 상미가 한마디 했다. 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자기가 굳이 명수가 없는 시간을 찾아와 단유 곁을 지키려 한 이유가 뭔지 묻지 않는 단유에 대한 섭섭함이었다. “뭐가?” “너 나 싫어하지?” 지나가듯 물었다. 의미 없이. “아니.” “그럼?” 기대감 없이 되물었다. TV화면에 시선을 둔 채로. “좋아하지.” 평이한 어조의 말이었음에도 그 순간 상미의 가슴은 들뜬 강아지마냥 요동을 쳤다. “진짜?” “응.” 그 뒤로 별 의미 없는 대화가 오갔지만, 상미는 그때의 대화를 잊을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지금 그 대화를 상기하는 것만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질까? “괜찮아?”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춘 탓에 명수가 얼굴을 들이밀며 걱정스레 물었다. “뭐야, 너. 사람 민망하게. 저리 가.” 상미는 명수의 어깨를 툭 치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고, 그 뒤를 명수가 졸졸 따라갔다. ======================================= [382] 출구는 어디인가요(2) 단유가 주변 사람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여자친구가 있음을 선포한 일은, 적어도 단유를 아는 이들에겐 꽤 놀라운 사건이었다. 하지만 단유는 딱히 그 전과 달라질 게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단유 뭐해? 여자 친구랑 통화하니?” 하은이 방문을 똑똑 두드리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아니요. 공부해요.” 하은이 들어오니 역시나 단유는 노트를 펴놓고 열심히 필기하고 있었다. “더운데 방에서 뭐하니? 나와서 수박이라도 먹어.” “괜찮아요.” “하긴. 네 방은 이상하게 덥지가 않아. 에어컨을 따로 틀어놓은 것도 아닌데 말이야.” 단유의 방을 두리번거리던 하은은 여념 없이 노트에만 집중하고 있는 단유를 보고 피식 웃었다. 침대에 턱 하니 걸터앉고는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못내 견디기 어려웠던지, 단유는 펜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신데요?” “일? 없는데? 계속하던 거나 해.” “무슨 할 말이 있으시니까 이러시는 거잖아요?” 하은은 씩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여 단유를 바라보았다. “우리 단유가 이제 다 컸다 싶어서.” “설마 여자친구 이야기인가요?” “역시 우리 단유는 사람 마음도 족집게처럼 잘 맞춰.” “여자친구 있다고 갑자기 사람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걱정스럽게 바라보세요?” “아무리 잘난 너라도 연애는 또 다른 문제지. 너 연애 해 본 적 있어? 없잖아?” “선생님은요?” “그런 거 묻는 거 아니랬다. 뭐, 아무튼 말이야. 단유 너니까 솔직히 걱정이 덜 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신경이 안 쓰일 순 없네. 당장 네 공부에 영향을 줄까 걱정이 되는 면도 있고.” 그리고 사랑이라는 관계에서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여러 가지 것들. 싸우면서 정든다지만, 어린 나이의 아이들이 감당하기에는 감정의 진폭이 너무 커서 자칫 큰 상처를 받지 않을까 걱정되는 게 하은의 진심이었다. “그런데, 너 통화는 자주 하니?” “예.” “그런데 어째 맨날 책만 보고 있는 거 같니? 보통 교제 초반에는 서로 막 보고 싶고 그래서 통화도 자주 하고 만나기도 자주 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냐?” “자주 만나고 있어요.” “맨날 집에만 있는 것 같더만?” “선생님 일 나가시고 나서요.” “이것들이 대낮부터 꽁냥꽁냥 하고 있었단 말이냐!” “밤에 하면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네.” 하은은 무릎을 툭툭 치며 일어섰다. “애먼 짓은 안 하겠지만, 그래도 조심하고. 여자친구 너무 소홀하게 여기지 말고. 여자는 카드로 만든 집이야. 약간의 충격에도 쉽게 무너지는 생물이라고.” “알겠어요.” “그리고, 여기.” 웬일로 말을 길게 하지 않는다 싶더니, 본론이 따로 있었던 모양이었다. “데이트하려면 돈 많이 들 텐데 이거 써.” “괜찮아요. 용돈 모아둔 거 있어요.” “니가 돈이 어디 있다고 그래? 그리고 연애하면 돈 많이 쓰게 되어 있어. 내가 돈이 많지 않아서 많이는 못 주니까 아껴 쓰고, 여자가 나이 많다고 그쪽이 계속 돈 내게 하면 그것도 꼴불견이야. 모름지기 여자란 가녀린 화초 같아서, 하루 종일 소중하게 보살피고 조심스럽게 대해도 자칫 실수로 금방 시들 수 있는 약한 생물이라고.” “조금 과장이 심하신 것 같은데요?” “과장이라니! 여자는 그렇게 약하다고. 마음이 얼마나 여린지 남자들은 모른다고. 모르니까 쉽게 상처 주고, 그 상처에 여자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모르고. 그게 연애할 때 얼마나 힘든지 아니?” “개인적인 경험담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 건 알아서 걸러들어, 이 녀석아!” 단유는 웃으면서 하은이 건넨 돈을 받아들었다. 하은은 단유의 머리를 한 번 헝클어뜨린 뒤, 방을 나섰다. 다시 고요가 내려앉은 방에서 단유는 손에 든 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하긴, 그 날도 돈이 많이 들긴 했어.’ 처음 교제를 인정한 날, 영화 표나 카페의 커피값 등을 나윤이 나서서 계산했다. 뒤에서 지켜보기에 그 돈이 만만치 않아, 이후 두 사람이 데이트할 때면, 단유도 모아둔 용돈으로 밥값을 계산하는 등 부담을 나눴다. 하지만, 단유가 생각했던 것보다 지출이 많아져서 고민이 될 무렵이었다. “사람들이 돈, 돈 하는 이유가 있네.” 여태까지 이런 식으로 돈의 지출을 체감해본 적이 없었다. 학교와 집을 오가며 가끔 정말 보고 싶은 책이 있을 때만 지갑을 열었던 단유로서는 움직일 때마다 돈이 드는 일과가 꽤 낯설었다. “돈이라….” 단유는 노트에서 시선을 떼고 책상 위 창문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벌떡 일어난 단유는 거실로 나갔다. 게임기를 붙잡고 있던 상미와 명수가 단유를 흘깃 보고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주방 식탁에 앉아 있던 하은이 단유에게 ‘수박 먹으려고?’라고 물었지만, 단유는 간단하게 거절하고는 창가로 향했다. “뭐해?” 창가에 서서 아래를 바라보는 단유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명수가 물었지만 단유는 ‘별거 아냐’라는 말을 얼버무렸다. 잠시 후, 단유는 조심스럽게 손에 들린 잎사귀를 들여다보았다. 그 잎사귀는 조금 전까지 거리 양쪽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가로수의 잎들 중 하나였다. 마음만 먹으면 가로수의 잎뿐만이 아니라,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은행 금고 속 돈뭉치도 가볍게 빼낼 수 있는 게 단유의 능력이었다. 물론 아직 단유의 능력이 시각적으로 확인한 물건에 대해서만 ‘이동’이 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응용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결국, 세상 모든 재화가 단유의 손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조금만 마음을 나쁘게 먹는다면 돈 걱정? 나라를 사고도 남을 일이었다. 하지만, 단유는 마법사. 자신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고, 자신의 양심에 거리끼는 행동을 해서도 안 된다. 물론 제윅처럼 살인을 저지르는 마법사도 있지만, 제윅은 살인이 자신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을 테니 문제 될 게 없었다. 요는, 마법사란 자신의 마음을 배신하는 행위를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의 돈과 재물을 빼앗아 자신의 이익을 탐하려는 행위는 ‘지금의’ 단유에게 있어서 불가능한 수단이었다. 계속 마법사로 살아남으려면 말이다. 아니면 아예 ‘악(惡)의 마법사’쪽으로 마음을 돌려도 되겠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던 단유는 뒤로 돌아서며 하은을 보았다. 수박 한 조각을 입에 물고 있던 하은이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물었다. “왜?” “저 아르바이트 할게요.” 단유의 선언에 하은은 물론, 명수와 상미도 놀란 얼굴이 되어 단유를 바라보았다. **** 단유의 아르바이트 선언이 있을 무렵, 나윤은 에어컨 바람으로도 식혀지지 않는 더위와 싸우고 있었다. 하긴 1시간 이상 몸을 격렬하게 움직였으니 에어컨 바람이 다 무슨 소용일까. “아이고, 죽겠네.” 나윤은 혀를 빼물고 연습실 한쪽 벽에 위치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얘는 왜 이렇게 연락을 안 해?’ 가끔 먼저 연락할 때도 있었지만, 주로 먼저 연락하는 쪽은 나윤이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투덜거림이 쉽게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시작부터가 나윤이 굽히고 들어간 까닭, 이라고 스스로 진단을 내려보지만, 쉬이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 “이럴 때 먼저 연락 주고 그러면 얼마나 힘이 되고, 응? 기운이 나고 그러겠어? 응? 안 그래?” 마치 발성 연습을 하듯 힘주어 외치니 되려 열만 더 나는 상황이라 나윤은 입술을 삐죽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거울을 보니 한심한 표정의 얼굴이 보여, 나윤은 거울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갔다. ‘코가 조금만 더 높으면 예뻐 보일까? 이 정도면 괜찮다고 단유가 그랬지만, 예쁘다고는 안 했으니 조금 높이는 게 좋을지도…. 눈썹은 왜 이렇게 짧대? 어머, 이마에 뭐가 났나 봐? 언제 이랬지? 아침에 세수할 땐 못 본 거 같은데?’ 한참 얼굴 여기저기를 살피며 단유가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를 찾으려 애쓸 때, 연습실 문이 열리며, 실장이 들어왔다. 나윤은 실장의 얼굴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아, 그래, 됐어.” 실장은 대충 인사를 받은 뒤, 괜히 연습실을 둘러보았다. 별거 없음에도 시선을 돌리는 이유는 아마도 어색해서이리라. 그 날, 나윤을 향해 거친 발언을 했다가 박 이사에게 들켜 호되게 당한 이후, 진짜 그만둬야 하는 건 아닌지 전전긍긍하던 실장은, 그날 오후 퇴근 무렵 박 이사에게 다시 한번 강한 질책을 받은 뒤 경고를 받았다. “한 번만 우리 애들한테 그따위로 말하는 게 들키면, 그때는 그냥 안 봐준다. 알겠나?” 실장은 두 번 세 번 허리를 굽혀 사과한 뒤에야 이사실을 나올 수 있었다. 만약 실장이 일적으로도 실수가 많은 사람이거나 무능력한 사람이었다면 바로 잘렸겠지만, 현시점에서 나쁘지 않은 업무 수완을 가진 이라 박 이사라도 함부로 자르기 어려웠다. 그만한 인력을 다시 수급하는데도 어려움이 뒤따르는 형편이었고. 그렇다고 해서 실장 역시 마음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 이 바닥은 어떤 일로 갈려 나갈지 알 수 없었다. 당장에 자기 자리를 노리는 매니저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방송국 로비만 가도 알 수 있었다. 비록 중소기획사라 해도, 실장급이라면 침을 흘리며 탐내는 매니저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그중에서도 실력이 돋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 박 이사가 실장을 자르지 않은 건 진짜로 ‘봐 준’ 셈이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실장이 저도 모르게 의기소침해진 영향이 있었고, 평소 허세 끼가 다분하던 실장이 얌전하게 지내니 같이 근무하는 사원들로선 환영할만한 변화였다. 물론, 이런 상황들이 나윤에게 특별한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다만 실장의 얼굴을 계속 봐야 한다는 게 불편할 뿐이지만, 그런 일은 나윤이 감수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했다. 박 이사도 그런 식으로 나윤을 달랬고. “무슨 일이세요.” 나윤의 물음에 실장이 힐끔 나윤을 보고는 헛기침을 했다. “다른 게 아니고, 여름 행사가 하나 잡혔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나윤으로선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니 무대에 오를 수만 있다면, 그래서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자기확신을 가질 수만 있다면, 어떤 무대든 오를 수 있었다. “서해 용두 해수욕장 근처 오일장에서 하는 조그만 행산데, 괜찮지?” 괜찮고 자시고, 어차피 위에서 잡은 행사라면 무조건 해야 한다. 나윤으로서도 딱히 거절할 마음은 없었다. 5일장이라고 하니, 말로만 듣던 시장통 한가운데 간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 “괜찮아요.” “행사곡은 3곡 정도 부르면 되는데, 한 곡은 ‘리모트’고 두 곡은 트로트 커버로 해야 할 거 같다.” 오후에 있을 레슨에서 커버곡을 연습해야 한다고 말한 실장은, 3일 뒤 새벽에 출발, 이라는 말을 끝으로 연습실을 나갔다. 실장이 나간 후, 나윤은 바닥에 주저앉아 천장을 올려다보며 상념에 빠졌다. 트로트든 뭐든, 지금은 일단 무대에 오르는 것만 생각하자. 회사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만 바라보자. 하긴 회사입장에서도 데뷔까지 시킨 가수를 연습실에 박아두고 있지는 않겠지. 투자한 만큼 수익을 거둬야 할 테니까. 나윤은 얼른 일어나 핸드폰을 집었다. 그리고 단유에게 문자를 남기려다 손을 멈칫했다. 곧 수신자를 어머니로 바꾸고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사실 가디스R의 활동 중단 이후, 나윤만큼 어머니도 마음 아파하셨다. 다만 딸이 보는 앞에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무심한 표정을 짓지만, 그래서 더 가슴 아프게 느꼈던 나윤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윤과 어머니는 되도록 집 안에서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서로의 얼굴을 보면 서로의 아픔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그러니 이런 내용이라면 분명 어머니도 좋아하시리라. 문자를 보낸 뒤, ‘잘 됐다, 우리 딸’이라는 답문에 미소 짓던 나윤은 곧 단유에게 문자를 보내려고 자판을 두드리는데, 때마침 문자가 들어왔다. “어?” 그토록 투덜댔더니 그 마음을 알았던 것일까? 단유에게서 문자가 왔다. 하지만 내용을 읽자마자 나윤은 문자를 보내던 걸 취소하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무슨 소리야?” [뭐가요?] “문자 말이야.” [아, 아르바이트 한다고요.] “왜 갑자기 아르바이트를 해? 너 공부할 시간도 모자랄 텐데? 설마 나 때문이야?” [음, 전혀 상관이 없다고는 말 못 하겠네요.] 뜨끔한 표정을 짓던 나윤이 버럭 소리 질렀다. “야! 그런 게 어딨어? 하지 마. 그냥 공부해. 방해 안 할 테니까 넌 그냥 공부만 해.” [방해라뇨?] “그러니까…앞으로는 덜 만나고…뭐 그러면 너 공부하는 거 방해도 안 하고 돈 쓸 일도 없을 거 아냐.” 핸드폰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왜 웃어?” [혹시 지금까지 만나면서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나 해서요.] “아니, 아니! 그런 생각을 왜…. 아, 몰라. 아무튼 아르바이트 같은 거 할 생각하지 말고 공부나 해.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는 게 남는 거야.” [누나가 그런 말 하니까 너무 이상한데요?] “야, 내가 그래도 너보다 오래 살았어. 공부해서 출세하는 게 지금 아르바이트한다며 시간 낭비하는 것보다 낫다고. 내 말 들어.” [공부랑 담쌓은 고3 여고생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지 않아요?] “놀리니?” [아니에요. 아무튼, 아르바이트는 해 볼 거예요. 생각해보니까 그동안 제가 너무 편하게 지낸 거 같아서요. 방학인데 경험 삼아 해 볼 만한 거 같아서 말이죠.] “방학 때 만?” [일단은요. 그리고 솔직히 아르바이트 좀 한다고 떨어질 성적은 아닌 거 같고요.] “와, 너 방금 되게 재수 없는 이야기 한 거 아니?” [부러워요?] “그래, 되게 부럽다.” 나윤은 잠시 핸드폰을 붙잡고 핸드폰 너머에서 들리는 단유의 웃음소리를 감상했다. “고마워.” [뭐가요?] “이런 이야기, 해줘서.” 뭘 하는지, 무슨 생각 하는지를 이야기해줘서 고마워. 너에 대한 이야기들, 들을 수 있어서 고마워. [별 말씀을.] 단유의 덤덤한 대꾸에도 나윤의 입꼬리는 내려올 줄 몰랐다. ======================================= [383] 출구는 어디인가요(3) 단유가 주변의 만류에도 처음 도전하기로 한 것은 신문 배달이었다. “왜 하필 신문 배달이야?” 그게 얼마나 힘든데, 라고 묻는 하은에게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오피스텔 앞 전신주에 붙어 있더라고요. 구인광고.” 고작 그런 이유로? 라는 하은에게 덧붙여 설명했다. “원래 새벽에 일어나 운동하는 게 일상인데, 일어난 김에 자전거 타면서 신문 돌리면 어렵지 않을 거 같더라고요.” ‘일단은 쉬운 것부터 해보려고요’라는 단유의 말에 ‘그게 쉽냐?’고 핀잔을 주듯 되묻고 싶었던 하은이었다. “요즘 신문 보는 사람이 별로 없을 텐데.” “요즘 신문 보는 사람이 많이 줄긴 했지만, 그래도 어르신들은 아침 신문을 찾아보시거든.” 장계동의 신문보급소장은 그렇게 운을 떼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너 몇 살이니?” “15살인데요.” “어쩐지…몸은 튼실해 보이는데 얼굴이 워낙 어려 보여서 말이야. 아무튼 15살이면, 중학생?” “2학년이요.” “그럼 공부 때문에 힘들지 않겠어? 그리고 사실, 중학생은 좀 받기가 그래. 금방 포기하는 애들이 많아서 말이야.” 요즘 애들은 끈기가 없어, 라는 중얼거림을 대충 흘려들으며 단유는 보급소를 둘러보았다. “급여는 어떻게 돼요?” 단유의 물음에도 보급소장은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다. “계속 할 수 있겠어?” “일단 한 달만 해도 돼요?” “한 달이라도 제대로만 해준다면야 안 될 건 없지. 워낙에 사람이 부족해서 말이다.” 원래는 한 달도 안 돼. 한 달 하고 말 놈이면 아예 안 시키고 말지, 라며 단유를 관찰하는 보급소장이었다. 두툼한 배 위에 팔짱을 끼니, 팔이 가슴에 있는 건지, 배 위에 얹어져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200부 정도 돌린다고 하면, 60만원까지는 챙겨준다.” 하지만 찜찜한 얼굴의 보급소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안 되겠어. 낮밤이 바뀌면 애들이 많이 힘들어하더라고.” “새벽에만 잠깐 하는 거잖아요?”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하면 힘들어.” “전 익숙해요. 새벽에 일어나는 거.” 새벽 5시에 일어나 매일 운동을 한다는 단유의 증언에도 소장은 썩 내켜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말뿐이라 믿기 어려운 탓도 있었고, 어지간해서는 대부분 일주일도 못해 달아나는지라 선뜻 일을 주기가 어려운 탓도 있었다. 그래도 인상이 나쁘지 않고, 몸도 중학생이라고 보기엔 크고 단단해 보이는 것이 어느 정도 체력은 돼 보였다. “새벽 4시까지 주공아파트로 나와라. 일단 거기서 배달해야 할 집 알려 줄 테니까.” 다음 날, 반신반의했던 소장의 기대를 저버린(?) 단유는 정확히 4시에 주공아파트 단지 앞에 나타났다. 말쑥한 외모와 말똥말똥한 눈동자를 보며 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가면서 알려줄게.” 소장은 끌고 온 오토바이에서 신문 더미를 꺼내 일부는 단유에게 주고 일부는 자신이 짊어졌다. “원래는 다른 사람이 알려줘야 하는데, 배달 일정이 꼬이는 바람에 내가 이 고생을 한다. 그러니까 한 번에 잘 기억해 둬.” 보급소장은 메모지에 적힌 암호 같은 숫자들을 보며 배달을 시작했다. 어떤 집은 우유 주머니에 넣어주고, 어떤 집은 창틀에 꽂아주고, 어떤 집은 현관에 부딪히지 않게 문 옆에 가지런히 놔주어야 했다. “이런 게 다 주문 사항이라 꼭 지켜야 해.” 단유는 보는 즉시 머리에 저장하며 소장을 도왔다. 두 시간이 지날 즈음, 150부 정도의 배달이 완료되었다. 소장은 메모지에 적힌 암호(?)를 해독하는 방법을 알려주며 말했다. “아직 어리니까, 150부 정도로 하고. 오토바이는 면허증이 없으면 타질 못하니까, 일단 자전거로 해라. 만약 너무 무거워서 어렵다 싶으면 부수를 줄이고.” 부수를 줄이면 임금도 준다는 얘기를 덧붙이는 소장에게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다. “혹시 실수하거나 잘못된 게 있으면 곧바로 나한테 전화해라.” 다음 날부터 단유 홀로 배달을 시작했다. 우선 보급소로 가서 신문을 받기 전, 신문 사이에 삽지를 넣는 일부터 했다. 이후 자전거에 150부를 싣고 떠나는 단유를 불안한 눈동자로 배웅하는 소장이었다. 1시간 후, 단유가 돌아왔다. “벌써? 너 뭐 어디 버리고 온 거 아니지?” 소장이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 너무 편안한 얼굴로 소장을 마주하는 단유를 보고 미심쩍다는 시선을 보냈다. “아뇨. 어제 본대로 다 넣고 왔는데요?” 첫날인 데다 무려 150부인데, 그걸 한 시간 만에 다 처리했다는 단유의 말을 소장은 믿을 수가 없었다. “내일은 200부 해도 될 거 같던데요.” 실은 시간이 남아서, 천천히 돌다 왔다는 단유의 말은 더더욱 믿을 수 없었다. 어린아이의 치기? 혹은 허세? 그러나 확인 결과, 소장은 단유의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 다음 날, 단유는 200부로 올렸고, 역시 1시간 만에 왔다. “너 정말 다 돌린 거 맞아?” 자전거를 보급소 안쪽 창고에 세워두며 단유가 대답했다. “네.” 기어에 기름칠 좀 해야겠던데요, 라고 말하던 단유가 슬쩍 소장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300부 하면 돈 더 주나요?” 당연한 소리. 하지만 소장은 고개를 저었다. “300부는 자전거로 배달하기 힘들어. 무게도 보통이 아니어서 실으면 금방 쓰러질걸?” 그다음 날, 단유는 한 번 더 소장에게 부탁했고, 소장은 역시 반신반의하며 300부를 억지로 자전거 뒤에 쌓는 걸 도와주었다. 저 정도 무게면 페달을 밟고 10m를 전진하는 것도 무서워질 것이다, 라는 기대감으로 바라보는데 전혀 무게감을 느끼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자전거를 몰고 가는 단유의 뒷모습에 턱을 떨어뜨렸다. 물론 자연스럽게 보였을 뿐, 단유가 전혀 힘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운동 되겠네.’ 단유는 호흡을 고르며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중심을 잡는 일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렇게 자전거를 몰고 배달장소로 향한 단유는 우선 150부가 배정된 아파트 앞에 섰다. ‘오늘은 얼마나 걸리려나?’ 단유는 주변을 살핀 뒤, 아파트로 들어갔다. 제일 위층에서부터 아래층까지 내려오는 데 2분도 걸리지 않는 시간 동안 12부를 돌렸다. 사실 단유가 신문을 돌리는 방법은 간단했다. ‘능력’을 이용하면 되니까. 눈으로 신문을 거치할 장소를 고른 후, 능력을 사용하고 곧바로 아래층으로 내려오면 되니까. 몸을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그런 식으로 아파트를 모두 돌면 150부를 돌리는데 30분이 채 걸릴까 말까였다. 갖가지 주문사항이 적힌 암호 같은 메모들은 정말 암호를 외우듯, 숫자로 기억하니 외우기 어렵지도 않았다. 게다가 이틀 동안 반복하기도 했고, 능력을 사용하는데도 숙달이 되면서 오늘은 150부를 26분 안에 끝내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다음은 더 쉬웠다. 상가와 주택가를 도는 일인데, 그냥 자전거를 몰고 가면서 눈으로 ‘확인’하고 ‘이동’시키면 그만인 일이었다. 그러면 신문은 어디 구겨지는 곳 하나 없이 얌전하게 집 앞에 대령이 된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하다 보니 시간이 더 단축되는 기분이었다. 비록 배달해야 할 거리가 조금 있었지만, 그 정도를 감안해도 남은 150부는 30분이 조금 넘는 시간에 모두 돌릴 수 있었다. 만약 지나가던 누군가가 단유를 보더라도, 조금 빠른 속도로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지나는 정도로만 인식할 정도였다. 계속 지켜보았다면, 자전거 앞 바구니에 꽂아두었던 신문이 줄어드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스름한 새벽에 신문 배달하는 소년을 구경하는 취미를 가진 이는 없었다. ‘너무 일찍 가면 또 이상하게 생각하시겠지?’ 단유는 빈 자전거로 동네를 두어 바퀴 돌다가 보급소로 향했다. 더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건, 단유 본인의 개인 스케줄도 있었던 탓이었다. 그럼에도 소장의 놀란 눈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니가 정말 배달의 역군이구나.”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단유는 그냥 아재 개그라 치부하며 보급소를 나왔다. 오늘은 좀 할 일이 많았기에 함부로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 “피곤하지?” “괜찮아요.” 로드매니저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선지 먼저 말을 걸었다. “사실 나 너희 팀 로드 하고 싶었던 거 알아?” “우리 팀이요?” “작년에 가디스R 할 때 말이야. 그때 현철이가 로드였잖아? 되게 부러웠는데.” 나윤은 어색한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가디스R 때 난 개인적으로 수련이보다 니가 더 노래에 잘 어울렸다고 생각했어.” “…고맙습니다.” 굳이 회사를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것도 좋지 않게 떠난 사람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나윤의 마음도 모르고 로드매니저는 신이 나서 자신이 생각하는 지난 활동 최고의 무대에 대해서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마치 자신이 로드 딱지만 떼 내면 훌륭한 매니저가 될 수 있다는 걸 어필하듯이. 행사장을 찾아가는 것은 로드매니저와 함께 하기로 했다. 따로 매니저를 붙이지 않은 까닭은 로드가 전부 일임하기로 한 탓이었다. “이제 나도 로드 졸업해야지 않겠어?” 그렇게 자기를 소개한 로드매니저가 나윤을 데리고 처음 향한 곳은 강남의 샵이었다. 가디스R 활동할 때는 자주 왔었지만, 이후로 거의 오지 않았던 곳이었다. 사장님이 반갑게 맞아주며 나윤을 안내했고, 곧 행사용 메이크업으로 ‘변신’을 시도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련은 어디서든 인사를 잘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사람한테 깊은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 연예인으로서의 덕목이라며. 의상 코디도 없이 단둘이서 승용차를 타고 충남 보령으로 향했다. “피곤하면 잠이라도 자.” “괜찮아요.” 밴이면 모를까, 승용차에서는 자칫 잘못 누우면 기껏 공들인 헤어스타일을 망칠 수 있었다. 노래라도 들을까 싶어 라디오를 만지작거렸더니 소음만 나왔다. “이 차가 라디오 안테나가 고장이 났거든.” 멋쩍은 웃음과 함께 로드는 버튼을 눌러 내장된 시디를 틀었다. 어딘가 고장 난 게 분명한 고르지 못한 사운드의 베이스 음과 함께 최근 핫하다는 여자 아이돌 그룹의 노래가 나왔다. “요즘 어떤 음악이 대세인지 궁금해서 말이야.” 묻지도 않은 변명은 궁금하지도 않아요. 나윤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고속도로의 풍경이야, 거기서 거기다. 다만 나윤이 생각하는 것은 그런 지루한 풍경이 아니라, 어제 저녁 단유와 나누었던 대화였다. **** “일이 힘들진 않았어?” [별로 힘들진 않았어요. 오히려 운동도 되고 좋던데요?] “넌 참 신기하다. 그 새벽에 일어나는 게 쉬워? 난 힘들어 죽을 것 같던데.” [습관이 돼서 그런가 봐요. 그건 그렇고, 내일이죠?] “응. 그런데 조금 떨려. 무섭기도 하고.” [무서워요?] “응…. 솔직히 말하면 그래. 무대에 오를 수 있다는 게 좋기도 하지만, 사실 시장이면 젊은 사람들보다 아줌마, 아저씨들이 많을 거 아냐. 그런 분들은 내 노래 잘 모를 거고.” 그리고 실장에게 제의를 받을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점이지만, 향후에 다시 아이돌 그룹으로 컴백 했을 때 혹시나 좋지 않은 이미지를 만드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우스갯소리로 아이돌의 ‘흑역사’를 거론하곤 하지만, 이건 그냥 흑역사가 아니라 정체성에 관한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사실 그 점에 대해서는 제가 모르는 분야라 뭐라고 이야기하기가 어렵네요. 그런데요.] 잠시 단유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가끔 단유는 이렇게 대화 중간에 생각을 가다듬는 경우가 있었다. 신중한 성격이라 그렇겠지만, 그런 대화 간의 정적이 상대로 하여금 기대감을 돋게 했다. [결국 어떤 무대든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게 가수잖아요. 특정 타겟층을 지정해서 그들을 상대로만 노래를 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아요? 상대가 누구든, 목소리와 감정으로 설득하는 일이 바로 가수가 할 일 아닐까요?] 주제넘게 나선 거 같아 부끄럽네요, 라는 단유의 말은 그저 겸양의 표현만은 아닌지 목소리에 홍조가 묻어나는 느낌이라 듣는 나윤도 기분이 좋았다. 아니, 그 전에 단유의 응원이 기분을 좋게 해준 것이리라. [맞아. 그게 가수고 내가 꿈꾸는 길이야. 단순히 아이돌로서 잠깐 반짝하는 가수가 아니라 전 세대에 아울러 사랑받는 가수!] “그럼 트로트 가수로 전향하는 건 어떨까요? 나중에 디너쇼도 하고 그러면 되겠는데요?” [또 놀리지? 너 요즘 나 놀리는 데 취미 붙인 거 같아?] 단유는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맑은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나윤과 대화를 하면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윤에게 뒤가 없기 때문이리라. 속없이 밝고, 어두울 때도 마치 너무 맑은 달빛이라 어두운 구름마저 선명하게 보이는 밤하늘 같았다. 만약 그녀를 주변의 사람들과 굳이 비교하자면, 명수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두 사람 모두 너무 맑아서 투명하게 비치는 심장을 가진 이들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단유도 명수에게 하듯, 자연스럽게 농담을 주고받아도 어색하지 않았고, 오히려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릴 수 있었다. [보고 싶을 거야.] 다른 점이라면, 나윤은 자신의 마음을 숨기는데 어설픈 점이 있었다. 제 딴에는 숨기려고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툭툭 튀어나오는 본심도 그렇고, 얼굴과 몸짓에서 드러나는 감정이 너무 적나라해서 단유는 그저 웃으며 받아줘도 부담을 느끼지 못했다. “보러 갈까요?” [거기가 어딘데 보러와. 넌 공부나 해.] “요즘 계속 공부나 하라네요? 그러지 말고 같이 공부하는 게 어때요?” [같이?] “제가 가르쳐드릴게요.” [야!] 단유는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 [384] 출구는 어디인가요(4) 나윤은 이제껏 오일장이라는 곳을 가본 적이 없어 막연히 동네 주변의 재래시장 정도를 상상했다. 하지만 실제로 본 느낌은 마치 축제가 벌어진 것 같아 살짝 들뜨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다양한 색의 천막들이 길 양편으로 줄지어 서 있고, 때문에 좁아진 길 위를 많은 사람들이 부대끼며 지나다니고 있었다. “저기 구경해도 되요?” “별로 볼 거 없을 거 같은데?” 로드 매니저, 광석은 이왕 시간도 남는 김에 조금 쉬고 쉬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보는’ 즐거움에 눈을 뜬 나윤은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을 눈에 담고 싶어 안달이 났다. 결국 투덜대면서 나윤을 끌고 거리로 나선 광석은 혹시 모를 사고가 벌어지지 않을지 걱정을 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반면 나윤은 천막 점포에서 파는 다양한 물건들과 먹을거리들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오빠, 저기 봐요. 저거 하나 사서 갈까요?” “우와, 나 저거 좋아하는 건데.” “저거 먹고 싶지 않아요?” 치킨 두 마리에 6천 원, 모듬 과자 한 봉지에 5천 원, 한입에 먹기 좋을 풀빵과 아기자기한 화분, 싸구려지만 편할 것 같은 츄리닝. 과연 탐이 나지 않는 게 없다 할 정도였다. “넌 저런 게 먹고 싶니? 사람이 이렇게 돌아다니는 곳에서 위생도 제대로 안 지켜질 것 같은데?” “에이, 그런다고 안 죽어요. 그렇게 따지면 명동 길거리 음식들도 다 못 먹게요?” 광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니가 잘 몰라서 그러나 본데, 여기 있는 것들이 토산품일 거 같지? 아마 다 중국산일걸? 저기 고춧가루도 그렇고, 니가 먹고 싶다던 젓갈도 다 중국산일 거야. 저게 자연적으로 나올 색깔이 아니거든. 그리고 저 옷도 다 중국산일 게 분명해.” “잘 아시나 봐요?” 광석의 부모님이 그런 물건들로 오일장을 돌면서 장사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속으로 삼키며 대충 얼버무린 광석은 끝내 나윤에게 군것질거리로 들깨강정을 한 봉지 사주고 출연자 대기실로 돌아왔다. 무대가 끝난 뒤, 만약 시간이 남는다면 다시 돌아가서 점심이라도 가볍게 해결하자고 달랬더니, 나윤도 그에 동의한 참이었다. “오빠 거울 있어요?” 방송용 카메라는 없더라도 무대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나윤은 광석이 건넨 거울을 보고 헤어 스타일과 화장을 고쳤다. “다음 무대니까 준비하세요.” 연출팀의 누군가가 와서 공연이 임박했음을 알리자, 나윤은 갑자기 하지 않던 걱정들이 들기 시작했다. “오빠, MR은 다 준비됐어요? 의상 괜찮아요? 화장 너무 뜨지 않았어요? 사람 많이 와 있어요? 리스트가 이거 맞아요? 혹시 바뀐 거 아니죠?” “괜찮아. 바뀐 거 없고, 리스트대로 하면 돼. 올라가자, 시간 됐다.” 나윤은 쿵쾅거리는 가슴께에 마이크를 부여잡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 곧 마주칠 관객들에게 어떤 표정을 지어야 예뻐 보일지를 고민하며. **** “어머, 오랜만이다! 너, 나 기억나니?” “예.” “어쩜, 이렇게 예쁘게 컸대? 진짜 애들은 하루만 지나도 몰라보게 큰다더니.” “고맙습니다.” “어쩜, 이렇게 인사도 잘해? 부모님이 뿌듯하시겠어. 엄마, 아빠가 많이 예뻐해 주시나 보다.” 지선은 하은의 칭찬에도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예전 하은이 단유의 과외를 위해 보육원을 들락거릴 무렵, 단유를 졸졸 쫓아다니던 여자아이를 기억했기에 이 기막힌 만남이 하은은 신기하고 흥분됐다. “몇 학년이니?” “5학년이요.” “벌써? 와, 시간 진짜 빠르다.” 함께 지내던 단유와 명수가 어느새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는 사실보다, 오랜만에 만난 지선에게서 시간의 흐름을 실감한 하은은 지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먹고 싶은 건 없는지 물었다. 지선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단유를 바라보았다. “오빠, 뭐 먹고 싶어?” 하은은 지선의 반응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 보게? 전혀 변하질 않았네? 야, 김단유. 너 조심해야겠다?” “뭘요?” “몰라서 물어? 이거 큰일 날 놈이네. 주변 여자들한테 그렇게 쉽게 마음을 줘서 어떡하니? 니 여자친구가 불쌍하다야.” 단유는 ‘그만 놀려요’라고 간단하게 대꾸하고는 지선을 향해 몸을 숙였다. “먹고 싶은 거 없어? 어차피 우리도 점심을 시켜 먹을 거라서 말이야. 보시다시피 저분이 요리는 전혀 못 해서 말이야.” “야, 김단유! 누가 요릴 못해? 할 시간이 없어서 안 할 뿐이지, 못 하는 건 아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뭐 드실래요?” “정말 날이 갈수록 능청스러워지는 것 같아. 안 그러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한 명수의 반응에 하은은 콧방귀를 뀌며 두 사람을 째려보았다. “친구라고 감싸는 거 봐? 그래, 니들이 날 따돌리겠다 이거지?” “에이, 선생님, 따돌리긴 누굴 따돌려요?” 명수가 어울리지 않게 애교를 부리며 삐친 척하는 하은을 달랬다. 지선이 그 모습을 보다 단유에게 말했다. “저 오빠는 아직도 덩칫값을 못해.” “야! 공지선!” 명수가 버럭 소릴 지르자, 지선이 단유 뒤로 돌아가며 고개만 내밀었다. “우리 엄마한테 이를 거다?” “아우, 저걸 그냥? 너 왜 왔어? 나 놀리러 왔어? 내 속 터지게 만들려고 왔지? 내가 처음 널 봤을 때부터 알아봤어? 저건 진짜 원수다, 원수.” “명수야! 동생한테 그게 무슨 소리야! 사과해, 얼른.” “아우, 선생님! 진짜, 저게….” 단유는 웃음을 터뜨리며 명수를 달랬다. 이후 중국집에 간단한 요리를 시켜서 먹은 이후, 지선을 명수에게 맡겼다. “오빠는 약속이 있어서 말이야. 나가봐야 할 거 같거든?” “여자친구랑?” 단유는 웃음으로 때우며 몸을 일으켰다. “너 보겠다고 온 건데, 같이 놀지?” 명수가 대놓고 싫다는 말은 못하고,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너희 둘 사이 좋잖아? 지선이한테 게임도 가르쳐주고 하면 되겠네. 상미도 불러서 같이 놀던지.” 명수는 머리를 긁적이며 지선을 바라보자, 지선도 명수를 바라보았다. 곧 동시에 시선을 돌리는 두 사람을 보며 단유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 나윤은 침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나윤이 행사를 다녔던 곳은 그래도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거리 행사나, 혹은 작은 클럽에서 진행되는 소규모 행사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적어도 ‘가디스R’이라는 이름 정도는 아는 이들이 많았고, 가끔은 자신의 이름을 연호해주는 이들도 있어, 떨리지만 신나게 무대를 꾸밀 수 있었다. 물론 오일장이라는 특성상, 연령대가 높을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이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좁은 무대 위에 올라 바라보니, 무대 앞에 가지런했을 게 분명한 플라스틱 의자들은 줄을 이탈해서 뒤죽박죽인 채로 비어있는 모습들이었다. 아주 텅 빈 것은 아니었다. 무대에 가까운 줄은 그래도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무대를 ‘구경’하고 있었다. 해를 가리기 위해 넓은 챙의 모자를 쓰고들 있어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대부분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었다. 50대? 60대? 그보다 더 많아 보이시는 분들도 있었고 개중에는 지팡이를 앞에 쥐고 앉아 계신 분들도 있었다. 그것도 앞의 3줄이나, 4줄 쯤이었고, 그 뒤로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텅 비어있었다. 빈 의자들 바깥으로 지나다니는 행인들이 잠시 시선을 주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가 자기 길을 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더러 몇 사람은 뒷짐을 지고 무대를 ‘구경’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구경’을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관람’을 하는 이들은 없었다. 마치 재롱 한번 부려 보라며, 동물원 철장 너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랄까? “안녕하세요.” 얼른 정신을 수습하고 자연스럽게 인사를 했지만, 목소리가 떨려 나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먼저 저희 노래…들려드릴게요.” MR버전 CD가 돌아가며 싸구려 스피커에서 조악한 음질의 반주가 흘러나왔다. 나윤은 차라리 눈을 감고 부르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눈을 감고 노래가 들어갈 타이밍에 맞춰 입을 벌리고 노래를 했다. 하지만 노래의 흐름 상 눈을 감고 부를 부분도 아니었고, 몇 안 되는 이들이라도 반응이 궁금해서 눈을 떴다. 그리고 하마터면 노래를 멈출 뻔했다. 미동도 하지 않고, 목석처럼, 표정 없이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렇게 당황스러울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탓이었다. 어떤 사람은 시끄럽다고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무슨 노래냐며 옆 사람에게 묻는 이도 있었다. 경력이 많은 가수였다면, 오히려 이럴 때 호응을 이끌어내기도 하련만, 나윤은 더욱 어깨를 움츠리고 마이크만 두 손으로 꼭 붙들 뿐이었다. 어떻게 노래를 끝냈는지도 모르게 노래가 끝이 났다. “다음 노래는, 장윤정 선배님의 노래입니다.…아시는 분은 따라…불러 주세요.” 다른 애드립은 생각도 못 하고, 그저 무대에 오르기 전 보았던 행사 진행 멘트를 그대로 읊었다. 그마저도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서 ‘불러 주세요’라는 말은 관객들이 제대로 들었는지도 의문이었다. 어떻게 마음을 수습할 새도 주지 않고, 반주 음악이 나왔다. 나윤은 울고 싶었다. **** 주말이지만 개인적인 약속이 있어 외출을 갔다 돌아온 승민은 문 앞에 마중 나온 아내에게 지선에 대한 일부터 물었다. 오전에 외출을 나갈 때 지선도 함께 데리고 나갔던 승민은, 직접 단유네 집에 지선을 데려다준 후 약속장소로 갔었다. 돌아올 때 지선을 데리고 돌아가려 했지만, 지선이 이미 집에 도착했다는 아내의 전화에 바로 집으로 돌아온 승민이었다. “명수가 직접 데려다주고 갔어요.” “그래? 그놈아가 속정이 깊은 놈인 거 같더라고. 투덜투덜하면서도 친구들 제일 잘 챙기는 놈이거든?” 승민은 욕실에 들어가 손을 먼저 씻은 뒤, 거실로 향했다. TV를 보던 지선이 벌떡 일어나 쪼르르 다가와 인사했다. “어이구, 우리 딸내미? 잘 놀았나?” “네.” “그래, 오랜만에 오빠들이랑 노니까 좋드나?” “네. 좋았어요.” “너무 놀지만 말고 공부도 좀 배우고 그래라. 단유 그놈이 공부머리는 기가 막히게 좋으니까, 그놈한테 공부하는 법도 좀 배우고 그래라, 응?” “아이구, 누가 선생님 아니랄까 봐. 여보, 우리 애, 이제 초등학생이에요.” 애초 두 사람이 지선을 입양할 때, 서로 다짐한 것은 아이가 밝게 크기만을 바라자는 것, 그리고 무리하게 공부를 시키지 말자는 것이었다. 공부보다 더 중요한 인성 교육, 이라는 개념보다는 그간 고생했을 지선이 좀 밝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래서 지선의 성적보다 교우 관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어머니였다. “알았다, 1절만 해라. 그래도 지선아, 아빠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제? 그래, 단유네 집에 자주 놀러 가서 놀기도 많이 놀고 공부도 하고 그러면 얼마나 좋노? 맞제?” 지선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구, 우리 딸내미가 아빠 말은 기똥차게 알아듣는다.” 승민과 그의 아내는 지선에게 애정을 표현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일부러 더 ‘가족’을 강조하고, 지선이 자신들의 ‘딸’이라는 사실을 계속 주지시켜서 혹시라도 지선이 입양된 자신의 처지를 고민하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승민의 경우, 처음에는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경상도 남자였던 승민에게 애정 표현이란,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에 밥을 말아서 먹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 버릇하면 된다는 아내의 요구에 절치부심하여 노력한 끝에 지금은 지켜보는 아내가 닭살이 돋을 정도로 ‘딸바보’가 된 승민이었다. 외출을 하고 돌아오면 손부터 씻는 버릇도 그렇게 생겼다. 손을 씻기 전에는 결코 지선을 안거나 만지지 않았다. 그만큼 지선을 소중히 생각하는 승민이었다. “식사해요.” “아이구, 우리 딸? 아빠 때문에 저녁도 못 먹고 기다린 거 아니제?” “아빠랑 같이 먹으려고 일찍 온 건데?” “진짜? 아이고, 우리 딸. 이리 착해서 우야노? 응?” “두 사람 다 그만하고 빨리 앉아요. 괜히 섭섭해지게 하지 말고.” 아내의 너스레에 승민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식탁으로 향했다. “우리 딸, 많이 먹자, 알긋제?” 아내는 지선이 다 못 먹을 줄 알면서도 밥그릇에 가득 밥을 채워 주었다. 지선은 또래 아이들보다 몸이 작고 약했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초등학교 저학년생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 점이 가슴 아프던 두 사람은 지선을 먹이는 일에 꽤 열을 쏟았다. 하지만 입이 짧은지 지선은 음식을 많이 먹지 못했다. “묵자.” 승민은 눈웃음을 지으며 식탁에 앉은 두 사람을 바라본 뒤, 숟가락을 들었다. ======================================= [385] 출구는 어디인가요(5) “김단유?” “네.” “중학생이라고?” “네.” “중학생이 하기에는 조금 어려운데.” “그런가요?” 단유는 남자의 물음에 그저 웃음으로 때웠다. “중학생치고 키가 크네? 키가 몇이야?” “175㎝ 정도 되던 것 같던데, 최근에 재어보질 않아서 모르겠네요.” “이야, 내 키…보다 조금 더 크네.” 평소 남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키가 175㎝라고 주장하고 다녔다. 물론 키높이 깔창의 도움을 받으며 지내던 터였으니, 당연히 본래 키는 아니었다. 때문에 175㎝라고 주장하는 단유가 자신보다 5㎝ 이상 눈높이가 올라가 있으니 부러울 따름이었다. 헛기침을 뱉은 남자는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예상 문제집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이거라도 좀 볼래? 난 다 봤거든?” “괜찮아요.” “자신이 많나 보네. 혹시 외국에서 살다 왔어?” “아니요. 그냥,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학교 공부만으로 칠 수 있는 시험이 아닌데. 남자는 반은 안타깝고 반은 못마땅한, 복잡한 시선으로 단유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단유가 이 시험, 번역능력인정시험(TCT)을 치기로 한 것은 방학 전의 일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영어 시간만 되면 아예 기척을 숨기고 몸을 숙이는 단유에게 도하가 물었다. “너 왜 영어 시간에만 유독 그런다?” “응?” “마치 선생님께 걸릴까 봐 무서워하는 사람처럼 말이야.” 역시 경험이 많은 친구여서 금방 단유의 몸짓이 가지는 의미를 눈치챈 도하였다. “그냥.” “너 그거 아냐?” “뭐?” “넌 숨으려고 해도 숨기 힘들어. 전교 1등인 애가 그런다고 선생님이 못 보겠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거지, 설마 수업시간에 너 안 보인다고 지적을 안 하고 그럴 거 같냐? 순진하네.” 굳이 마지막 말은 붙이지 않아도 될 거 같은데. 단유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영어 선생님은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유학파 출신의 젊은 선생님이셨다. 나이가 30대 초반이라서 그런지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의 영어 발음이 섹시하게 들린다고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너 영어 잘하잖아?” “그다지….” 영어 문장을 읽거나 듣고 이해하는 것에는 어려움을 덜 느끼지만, 문법적인 부분으로 들어가면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많이 느끼는 단유였다. 물론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수준의 문법이라 교내 시험에서 점수는 잘 나왔다. “너 영화 볼 때 자막 안 보지?” 뜬금없는 도하의 질문. 영화관에 안 가더라도, TV 채널에서 영화를 볼 때가 가끔 있었으니, 그에 대한 대답은 가능했다. “보는데?” “자막 없으면 영화 이해 못 해?” 딱히. 없어도 상관은 없지만, 혹시나 해서 자막을 보며 자신이 이해하는 바와 같은지를 비교하는 편이었다. 이를 이야기하니, “어쩐지, 넌 그럴 거 같더라.” 고 말하던 도하는 관심이 없는 척 자리에 엎드렸다. “야.” “왜?” “너 번역가 하면 잘하겠다.” “도하야.” “응?” “내 미래 걱정하기 전에 니 미래를 걱정해야겠다.” “걱정할 미래 따위가 없네요, 난.” “What are you doing, now?” 도하가 고개를 들었더니, 여 선생님이 허리에 손을 얹고 도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후에는 언제나 그렇듯, 벌점을 부여받고 교실 뒤로 나가 서 있어야 했던 도하와, 그를 말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함께 뒤에 서 있는 벌을 받아야 했던 단유였다. “내 미래나 니 미래나 똑같네.” 도하의 말에 단유는 피식 웃었다. 도하가 말하려 한 의미와 무관하게 그 말 자체는 단유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 일을 통해 단유는 ‘번역가’란 직업에 대해 관심이 가지게 되었다. 단유는 번역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한,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번역’이란 작업은 단유에게 ‘일’이라는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 업으로 삼으면서 일을 한다는 게 흥미로웠고, 그 업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게 호기심을 자극했다. 알아보던 도중 그 업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의 협회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 업을 위한 자격증 시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러 사람들이 지원하는 시험이라는 것과, 특별히 언론에 나올 일도 아니란 생각에 단유는 망설이지 않고 지원을 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능력을 평가해보고픈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처럼 주말을 맞아 지선이 놀러 왔음에도 단유는 시험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서야 했다.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은 이유는 그저 이 일로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었고. ‘그나저나, 누나는 잘하고 있을까?’ 문득 행사 때문에 지방에 내려간 그녀가 생각났다. 아마도 이 시험이 없었다면, 단유는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내려갔을까? 피식, 단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듣기로는 주관식 시험이라고 들었는데, 옆자리에 앉은 사람도 그렇고 주위에 앉은 사람들도 뭘 그렇게 열심히 들여다보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넉살 좋게 다가가서 뭘 보는 거냐고 물을 성격도 아닌지라, 그냥 관심을 끊고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리는 단유였다. 과연 옆자리의 남자가 관심을 가질 만큼, 주변에 단유 또래의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이 2, 30대 이상으로 보였고 더러 50대 이상의 분들도 보였다. 그러나 그건 극히 소수였고, 단유 또래 학생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혹시 모르지.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고등학생이 있을지도.’ 어떤 이유든, 옆자리 남자가 만만하게 보고 말을 걸 상대는 단유가 유일해 보이긴 했다. 곧 시험장에 감독관이 시험지를 들고 입장했다. 이제 시작이었다. **** “먹어.” 로드 매니저는 젓가락을 챙겨 나윤의 앞에 놓아주었다. “물 줄까? 물 마실래?” 나윤의 대답은 없었으나, 광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물컵에 차가운 물을 한가득 받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는 나윤이었다. 아마도, 꽤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 정도로 충격받을 일이었을까?’ 솔직히 광석의 입장에서는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비록 데뷔는 했어도 경력이 짧기도 하고, 나이도 어린 친구라 처음에는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무대에 오르기 전 긴장한 얼굴로 하나하나 챙길 때는 도리어 본인이 더 마음의 각오를 해야 할 정도였고. 그러나 의외로 나윤이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를 때는 딱히 실수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무대를 이어나가기에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그러나 2번째 노래를 부를 때부터 자신감이 떨어진 모습을 보여 의아하게 여기다, 3번째 노래를 부를 때 심하게 손을 떠는 것 같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내적 갈등에 시달렸다. 다행히도, 나윤은 무대를 끝까지 마치고 내려왔다. 다만 정신이 없어 보이는 것이, 노래가 끝난 뒤 무대 진행자가 올라가 다시 한번 가수를 소개할 때, 관객들을 향해 인사를 해야 함에도 나윤은 마치 못 들었다는 듯 정신없이 무대를 내려올 뿐이었다. 어찌나 마음이 급했던지 무대를 내려오는 계단에서 한번 휘청거릴 정도였다. “괜찮아?” 광석의 물음도 들리지 않는지, 눈을 꼭 감고 대기실 의자에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나윤이었다. 왜 저럴까, 싶은데 같이 있던 다른 가수의 매니저가 혀를 찼다. “무대 공포증 같은데?” 공포증? 갑자기? 회사에서도 그런 병이 있다고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었는데?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나윤의 곁에 서 있을 뿐인 광석은 회사에 전화해서 상황을 보고해야 할지도 고민하고 있는데, 나윤이 나직하게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오빠.” “어? 어. 왜? 괜찮아? 이제 괜찮아졌어?” “네. 괜찮아요.” “그래, 그래. 다행이다. 어, 저기. 일단 밥부터 먹을래?” 나윤이 물끄러미 광석을 바라보았다. 광석은 얼굴을 붉히며 얼른 다음 말을 찾았다. “그래, 너 배고프지? 아까 거기 가서 밥 먹을래? 거기 맛있는 거 있을 거야. 찾아보면 그런 음식들이 있을걸?” 경력이 짧은 것은 나윤 뿐만이 아니었다. 매니저도 경험이 적은 이라서, 이런 상황에서 침착함을 잃고 같이 당황하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모습이 나윤에게 침착함을 가져다주었다. 나윤의 눈에 ‘나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와 ‘어떻게 해야 하지, 뭘 해야 하지’를 고민하는 광석의 모습이 잘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요.” 나윤이 일어서는데 광석이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나윤은 손을 뻗어 부축을 거절했다. “괜찮아요.” 나윤은 접혀서 주름 잡힌 치마를 툭툭 쳐낸 뒤, 천막 대기실 밖으로 나섰다. 여전히 주위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여전히 그 사람들은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다. 아니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연예인’이라서 호기심에 보는 것이지, 그 외의 감정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 눈치였다. 식당을 찾아가는 것은 의외로 쉽지 않았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식당마다 사람이 가득 차 있었다. 무대는 그렇게 텅 비어있더니, 다들 밥 먹으러 왔던 걸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여기서 먹자.” 결국 정한 곳은 시장 중국집이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은 침착하게 버텼지만, 식욕이 없음은 물론이고 젓가락을 들 힘도 없었다. 광석이 애써 짜장을 비벼주면서도 연신 나윤의 눈치를 보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일단 먹자. 먹어야 힘이 나지.” 빨리 먹고 바로 올라가자, 는 광석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인 나윤은 억지로 몇 젓가락 정도를 들었지만 곧 티슈로 입을 닦았다. “일어나자.” 결국 광석도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처음으로 로드 외의 업무까지 맡았는데 이런 결과를 맞이하니 스스로도 싱숭생숭했다. 게다가 아직도 회사에는 보고하지 못했다.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과연 이 이야기를 전화로 해야 하는 건지도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서울로 올라오는 길은, 조용하고 어둑했고 무거웠다. 광석은 눈치를 보는 대신, 오로지 전방만 보며 운전에 집중했고,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윤은 내려갈 때와 마찬가지로 바깥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문득 나윤은 단유의 위로를 듣고 싶었다. 그래서 단유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행사 끝났어.」 답장은 오지 않았다. 바쁜 일이 있는 걸까? 토요일인데? 단유의 답장은 2시간 뒤에 왔다. 「일이 좀 있어서 늦었네요. 지금 올라오는 길이에요?」 이번에는 나윤이 답장을 하지 않았다. 단시간에 피로가 누적된 탓인지, 나윤은 잠이 들었고 급기야 핸드폰의 알림을 모를 정도로 정신을 잃은 채 서울로 ‘실려 갔다’. 정신을 차린 것은 휴게소에 도착해서였다. 잠깐 쉬었다 가자는 광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핸드폰을 확인하니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광석이 화장실을 간 김에 차에 홀로 남았던 나윤은 핸드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단유의 목소리를 들으니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오늘, 바빴어?” [아, 조금요. 누나는 어땠어요?] 어땠냐는 단유의 물음에 답을 쉽게 하지 못하자, 곧 단유의 물음이 뒤따랐다. [무슨 일 있어요?] “…너 때문이야.” 목소리가 많이 젖어 있었던 탓일까? 단유는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위로를 받을 생각이었는데, 괜히 단유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는 나윤이었다. “너 때문에, 니가 가르쳐 준 것만 아니었으면, 그럴 일 없었을 텐데.” 단유는 달리 대꾸하지 않고 나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니가 가르쳐 준 보는 법, 그거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거야. 그럼 그 사람들이 날 동물원 원숭이 보듯, 길가에서 파는 흔한 장난감 보듯 하는 시선의 의미를 몰랐을 텐데. 아무런 관심도 없이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른다는 게 얼마나 힘들었다고….” 투정이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왜 내가 여기 무대에 서 있는 걸까? 내 노래를 전혀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이고, 내가 노래를 불러도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 앞에서 왜 노래를 불러야 하는 걸까? 내가 거기 서 있어야 하는 이유가 뭘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눈물이 섞인 불평과 투정을 단유는 말없이 들어주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아무런 느낌도 전달하지 못하는 내 노래가 쓸모없다고 여겨지고, 계속 이 일을 해야 하나 고민도 되고 그래.” 흐느끼는 소리를 듣던 단유가 말했다. [많이 힘들죠?] 나윤은 입을 막고 고개를 끄덕였다. [본다는 게 마냥 즐거운 일은 아니죠. 때로는 알고 싶지 않은 일들,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봐야 한다는 것이니까요.] 그런 거라면 차라리 보고 싶지 않다. [거울을 봐요.] 거울? [거울 속의 자신을 봐요.] 차 유리창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는 나윤은 얼룩덜룩한 얼굴을 한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주변을 보는 것만큼이나 자신을 보는 것도 중요하거든요. 자신을 보고 자신이 어디로 바라보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보세요. 그리고 물어봐요. 과연 자신이 잘못하고 있는지, 아니면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것인지.] 나윤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게 아니라고 바보야!” [네?] ======================================= [386] 출구는 어디인가요(6) 단유의 당황한 기색이 핸드폰을 통해서 느껴져서 순간 나윤은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하지만 이내 정색을 한 나윤은 좀 더 단유를 곤란하게 만들기로 했다. 딱히 악의가 있어 그런 거라기보다는, 평소의 단유와 다른 모습을 보고 싶다는 장난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쩌면 나윤은 단유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우울했던 기분이 풀렸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넌 여자친구가 힘들다는데 그런 이야기밖에 못 하니?” 과연 단유는 정답을 찾을 수 있을까? [어, 저기 그럼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요?] 땡. “꼭 말을 해야만 하니? 그렇게 내 마음을 몰라?” 두 번째 문제. 내 마음, 알겠어? [어,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니까 잘 모르겠어요.] 땡땡땡. 너무 안 좋은 대답인데? “나한테 듣는 게 중요하다고 이야기한 게 너잖아? 그런데도 몰라? 나한테 너무 관심이 없는 거 아니니?” 세 번째 문제. 관심 있어? [관심은 있죠.] 정말? “얼마나? 매일 내 생각하니?” 이건 보너스 문제. 잘만 대답하면 앞에 거 다 용서해준다. […그럼요.] 뭐냐? “뭐야? 그 뜸 들임은? 왜 바로 대답 못 해?” 용서해주고 싶어도 용서해줄 수 없는 ‘타이밍’이다. [정말 솔직하게 말해서, 매일 통화를 하는데 생각을 하냐고 물으니까 혹시 달리 대답해야 할 말이 있는 걸까 궁리하느라 그랬어요.] “그럼 통화 안 할 때는 내 생각 안 해?” 또 잠깐의 뜸 들임. 이 남자 뭐지? 라고 나윤이 미간을 찌푸릴 때, 단유의 대답이 나왔다. [누난 내 생각 많이 해요?] 어라? 날 뭘로 보고? “그럼 당연하지! 네 생각 매일 하고, 한순간도 네 생각 안 한 적이 없다고!” 말하고 나서야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부끄럽네요.] “왜 네가 부끄러운데?” [매번 고백을 받기만 하는 거 같아서요.] 내 마음도 똑같아, 이 녀석아! [누나.] “응?” [저도 누나 좋아해요. 많이.] “…….” [그러니까, 아프지 말고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단유는 평소에도 대화를 나눌 때면 화려한 수식어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조금 밋밋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단유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말 한마디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고, 하더라도 꼭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니, 가슴에 쿡 박힌다. 이번에도 단유는 나윤의 심장을 정조준하여 피할 수 없는 치명타를 날렸다. [보고 싶어요.] “…나도 보고 싶어.” [올라오면 연락해요. 바로 보러 갈 테니까.] “알았어.” 몇 마디 사소한 이야기가 오간 뒤 통화를 마쳤다. 끝난 뒤에야 나윤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보고 싶다’는 단유의 달콤한 한 마디에 머릿속이 텅 비어버려서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오늘 뭐 했는지, 어떤 일을 보고 들었는지를 묻지 못했다. 결국 자신의 잘못이었다. 괜히 투정부리고 억지 부리고 싶어 했던 욕심 때문이니까 누굴 탓하지도 못하고, 바보같이 굴었던 자신의 머리를 쿵쿵 쥐어박을 뿐이었다. “괜찮아?” 커피 두 잔을 들고 온 광석이 자해 중인 나윤을 보며 걱정스런 기색을 비쳤다. “괜찮아요.” “자, 이거라도 마셔.” “고맙습니다.” 시원한 커피를 손에 쥐니 열이 식는 기분이 들었다. “커피 괜찮지? 뭐 좋아하는지 물어보고 샀어야 하는데.” “괜찮아요. 커피 좋아해요.” 나윤은 커피를 입에 머금고 맛을 음미했다. 그리고 광석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에 광석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까지 풀 죽어 있던 나윤이 어떤 계기로 기운을 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결 나아진 모습을 보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 보고하기도 좋아졌고. “뭐 먹을래? 아니면 그냥 갈까?” “그냥 가요. 빨리 가서 쉬었으면 좋겠어요.” 빨리 서울로 가고 싶었다. **** 단유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내렸다. 통화로는 상대와의 완벽한 커뮤니케이션이 잘되지 않는다.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는 단순한 언어 전달뿐만 아니라, 비언어적 몸짓과 표정 역시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단유였다. 갑자기 전화를 하는 통에 텅 빈 시험장에 홀로 남았던 단유는 주위에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곧 ‘이동’을 사용했다. 집에 돌아오니, 아무도 없었다. 오후 수업이 있던 하은은 학원에 있을 것이고, 지선이와 명수도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외출을 한 모양이었다. 거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뜨거운 햇볕을 피해 그늘에 누워있던 호빵만 달려와 단유를 반겼다. 마실 물을 챙겨주고 거실에 떨어진 털들을 치운 뒤, 단유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신문배달을 하고는 있지만, 별로 시간도 걸리지 않고 특별히 ‘경험’이라고 생각될 만한 일도 아닌지라, 단유는 남는 시간에 또 할 만한 일들이 있는지를 검색해 보았다. 모처럼 마음먹은 김에 이번 방학 동안 이것저것 해보며 ‘경험’을 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계산에서였다. 게다가 기대하지 않았지만, 일을 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적당히 사용하는 재미도 있었고, 숙달되면서 능력이 점점 발전한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색을 해봐도 적당한 일은 찾기가 어려웠다. 대부분 성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고, 청소년, 특히 중학생이 할 만한 일은 별로 없었다. 비록 단유가 특별한 능력을 사용하면 성인 이상의 성과를 거둘 가능성도 있지만, 그 능력을 드러낼 처지도 아닌 데다가 고용주 측에서는 ‘중학생’이라는 간판만 보고 채용을 거부했다. 심지어 건설현장 막일을 하기 위해 간 인력시장에서도 거절당했다! 이력서를 쓴다 해도 이력서에 쓸 간단한 이력 따위가 전무한 단유였기에, 공란이 넘쳐나는 이력서를 보고 면접을 결정할 업체는 없다고 봐야 했다. “일 구하기 어렵다고 하더니.” 몇몇 이력서 양식을 받아 살핀 단유는 그 어마어마한 칸에 혀를 내둘러야 했다. 이 많은 빈칸을 모두 채워야 업체가 관심을 가질 거라는 사람들의 조언이 있었다. 관심을 가질 뿐, 그게 또 면접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고 하니, 과연 어떤 이력을 채워 넣어야 채용할 수 있다는 이야길까? 사실 단유가 예전 약초점에서 한 일도 ‘아르바이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그때를 떠올려보면 특별히 많은 능력을 요구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그저 숫자 계산만 잘해도 일을 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고, 가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흐름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지능만 있으면 일을 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아르바이트를 구하는데도 영어 공인 능력 시험의 점수를 채워야 하고, 고용주에 눈에 들기 위한 특별한 이력이 공란을 채워야 했다. 결론은, 단유가 할 만한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단유는 모니터에 열려 있던 창을 닫던 중, 한 광고에 눈이 들어왔다. 『발리 3박 4일, 파격특가!』 여름 성수기를 맞아 여행사에서 게시한 광고였다. 하지만 광고의 문구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광고 사진의 한 장면에 저절로 눈이 간 단유는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가능할까?’ 가능한지 아닌지는 실행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 여태 해보지 않아서 그렇지,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이야기였으니까.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한 단유는 더 시간이 늦기 전에,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유는 컴퓨터를 끄고 창가에 섰다. 그의 시선이 하늘에 닿았다. 단유가 본 광고 사진은 바다에 몸을 반쯤 잠근 한 여자가 수경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 크기만 한 진주를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물론 진주는 컴퓨터 그래픽이었고, 진주 안에는 발리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엉뚱하게도 단유가 그 사진에서 생각해 낸 것은 ‘채집’이었다. 능력을 이용해 남의 것을 뺏는 것은 안 되더라도, 자연의 것을 ‘채집’하는 용도라면 문제가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술도 없고, 지능도 떨어지던 과거의 인류가 먹고살기 위해 취한 행동이 채집이었듯, 내세울 기술도 없고 공란을 채울 이력도 없는 단유가 돈을 벌기 위해 생각해낸 방법은 ‘채집’이었다. 그 전에 우선 자신의 활동 반경을 넓힐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단유는, 최대한 먼 거리를 이동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것도 숙달된 능력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인데, 예전에는 이동을 곧바로 쓰지 못했다. 한 번의 이동 후 다음 이동을 하기 위해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좌표 연산의 계산이 빨라지고 숙달된 탓인지, 그 간격이 점점 짧아졌다. 그래서 이번에 단유가 선택한 방법은 초장거리 이동. 특히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면서 동시에 시야에서 다음 좌표를 확인하기 좋은 곳은 역시 하늘이었다. 마치 어느 게임의 마법사처럼, 하늘 위를 ‘블링크’처럼 이동한다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다행히 단유가 이동을 할 때는 게임 속 캐릭터처럼 ‘마나’나 또는 특별한 ‘에너지’를 요구하지 않았다. 단지 머리로 계산만 할 수 있다면, 무한정 이동도 가능한 것이 단유의 마법이었다. 다만, 고정 좌표가 아닌 순간적으로 변하는 좌표였기에 끊임없이 계산해야만 하고, 그 계산이 쉬운 일은 아닌지라 집중력이 흩어지면 능력을 쓸 수 없다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아직 그런 일이 크게 문제가 된 경우는 없었다. ‘가 보자.’ 숨을 크게 들이쉬고 이동을 시작한 단유는 지상의 건물이 점으로 보일 정도의 하늘로 이동했다. 방향만 잘 설정해서 이동하면 될 일이다. 가로막는 벽도 없으니, 최대한 먼 지점까지 좌표를 순간 연산하여 이동한다. 수십 번의 이동이 이루어졌을 때, 단유의 발밑으로 푸른 바다가 보였다. 아슬아슬한 느낌이랄까, 만약 자칫 실수하거나 계산을 잘못한다면 그대로 바닷속에 빠져 해조류와 해양 어류들의 생태계를 감상하다 생을 마감해야 할지도 몰랐다. 단유를 방해하는 요소는 기온과 기압과 날씨였다. 너무 높은 곳에서 이동하는 탓인지, 마치 고산병을 앓는 사람처럼 머리가 살짝 어지럽기도 하고 숨쉬기가 불편한 느낌도 있었다. 7월임에도 서늘한 까닭은 아마 그런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단유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동을 감행했다. 그리하여 또 수십 번의 이동 끝에 육지를 발견했다. 단유는 일단 쉬어야겠다는 생각에 지상으로 내려왔다. 주변을 살피며 내려온 단유는 인적이 드문 숲 속에 발을 디뎠다. 숨을 고르고 컨디션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리던 단유는 가까운 인가를 찾아 이동했다. 그리고 곧 농사를 짓는 이로 추정되는 한 노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진흙이 묻은 장화를 신고 수레에 이것저것 잡다한 집기들을 담아 이동하고 있는 노인에게 다가간 단유가 물었다. “저기요?” “…誰ですか(누구시죠)?” 잘못들은 게 아니라면, 일본어였다. 단유가 이곳이 일본이라는 것을 확인할 때, 노인은 갑자기 나타난 인기척에 놀라기도 했고, 낯선 언어에 당황하기도 했다. “아, 다름이 아니고 여기가 어디쯤인지 여쭤보려고요. 여행 중이거든요.” 곧 단유는 ‘능숙한’ 일본어로 물었다. “여행? 여기가 여행할 만한 곳은 아닌데. 이런 시골에 볼 것이 없어요. 여긴 ‘가와라자와(川原沢)’라고 하는데.” 야마가타 현 나가이 시에 위치한 ‘가와라자와’라는 조그만 마을이었다. 관광객이 올 만한 곳도 아니었고, 딱히 마을에서 내세울 만한 볼거리가 있는 곳도 아니었다. 전형적인 시골 마을로서의 풍취를 즐기기 위해 왔다면 모를까, 그 외에는 좀처럼 외부인이 찾을 이유가 없는 마을이었기에 노인은 소년을 향해 경계심을 품었다. 가끔 뉴스를 보면 10대 청소년들이 힘없는 노인들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다는 기사를 보곤 했었다. 그런 일은 대도시에나 있을 법한 일이라 생각하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여겼던 노인이었기에 비록 얼굴은 어려 보이지만 덩치가 좋은, 낯선 소년의 접근을 꺼렸다.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수레에 든 뭐라도 집어야 하나를 고민하던 찰나였다. “아, 그럼 여기서 가장 가까운 도시는 어디인가요?” 멍청한 소리. 당장 동쪽으로 가면 나가이(長井)시가 있다. 거기서 온 게 아니라면 이 마을로 어찌 왔을까? 노인이 의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길을 알려주었다. “저기가 나가이신데, 어디서 오는 길인가?” 단유가 노인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넓은 평야와 하늘이 가득한 게 마치 ‘이세계’의 그곳을 떠올리게 하였다.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곤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피했다. 어차피 노인도 자신을 꺼린다는 기색이 역력하니 빨리 자리를 피해 주는 게 노인에게도 좋을 것이다. 반면 노인은, 단유가 자신의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공손하게 예의를 갖추는 모습이나 자신을 배려하여 자리를 피해주려는 모습에서 경계심이 조금 풀렸다. 아니, 그보다는 주변에서 보기 힘든 훤칠한 외모와 신중함이 깃든 목소리에 소년에 대한 인상이 처음보다 풀렸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나가이역으로 가려면, 저쪽으로 가야 해.” “아,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단유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얼른 노인이 가리킨 방향으로 떠났다. 노인은 단유의 뒷모습을 보다가 주변을 살펴보았다. ‘카메라도 없는데.’ 여행 중이라는 사람이 가방도 없고, 복장도 딱히 관광객답지가 않다고 여겨져서 혹시 ‘몰래카메라’처럼 예능 촬영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 탓이었다. 물론, 주변에는 그저 따뜻한 바람이 푸른 논 위를 달리다 노인의 옷깃을 한 번 흔들고 지나갈 뿐이었다. ======================================= [387] 지금, 우리(1) 단유는 조급한 마음을 누르고 한국의 풍경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분위기를 즐겼다. 한국처럼 높지 않은 산과 푸른 하늘, 청량한 시골의 한적함이 느껴지는 가운데, 군데군데 금이 가고 깨진 부분은 있지만 대체로 깔끔하게 그린 듯이 정리된 포장도로와 푸른 햇볕 일렁이는 논두렁을 따라 걷는 즐거움이 남달랐다. 가옥 구조도 한국과 달라 이질적인 이국의 환경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사람들이 여행을 하면 이런 재미가 있구나.’ 라는 걸, 단유도 느꼈다. 그동안 너무 좁은 곳에서만 생활했던 것은 아닌지 후회가 될 정도였다. 마치 이곳만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정적인 공간 위로 유난히 넓은 하늘의 광활함이 모처럼 단유의 눈을 탁 트이게 하니 그동안 쫓기듯 살았던 시간 동안 알게 모르게 쌓였던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누나랑 이곳에 오면 좋겠다.’ 피식, 미소를 머금은 단유는 자기 속에 나윤이 이렇게 빨리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이유라니. ‘좋아하니까 그런 거겠지.’ 솔직하게 다가오는 이에게 호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더군다나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는 게 뭐가 이상할까? 단유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감상을 정리했다. ‘또 다음에 오지 뭐.’ 나중에 책을 들고 여기에 와서 공부하면 왠지 잘 될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괜찮은 아이디어 같았다. 남들이 독서실 갈 때, 자신은 공기 좋고 조용한 이곳에서, 남들 방해받지 않고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굳이 여기까지 와서 책을 읽어야 할까, 라는 물음은 단유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단유가 시간을 확인해보니 이곳까지 오는 데 5분도 걸리지 않은 듯했다. 정확하게 시간을 재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체감상 그 정도 걸린 것 같으니, 어쩌면 좀 더 무리해서 더 멀리 가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다만, 여기에서 동쪽으로 가는 건 무리이리라. 태평양을 건넌다는 건 아직 무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단유는 적당히 타이밍을 봐서 노인이 가르쳐 준 ‘나가이 시’로 ‘이동’했다. **** 나윤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6시가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여름이라 해가 긴 탓에 주변은 여전히 밝았지만, 피곤함은 어느 때보다 심했다. 아마도 마음고생을 한 탓이라 생각하며, 나윤은 차에서 내렸다. “수고했고, 월요일에 보자.” “네.” 광석은 다시 차를 타고 회사로 향했다. 지친 얼굴의 나윤은 얼른 집에 들어가서 씻고 드러눕고 싶다는 생각에 가득 차 있었다. “누나?” “어?”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놀라 돌아본 나윤은 맑게 웃고 있는 단유를 발견했다. “단유야? 나 기다린 거야?” “아니면 뭐 때문에 여기 있었겠어요? 당연히 누나 기다린 거죠.”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나윤의 다리를 재촉했고, 이성보다 감성이 먼저 단유를 껴안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성의 힘은 생각보다 강해서 껴안기 직전, ‘집 앞이야, 이 년아!’라는 경고를 듣고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때문에 기껏 달려간 나윤은 단유 앞에서 쭈뼛대며 주위의 시선을 살폈다. “전화라도 하고 오지 그랬어? 나 지금 막 차에서 내려서 엉망인데.” “별로. 오히려 무대 행사용이라 그런지 화사한데요?” “화장 뜨지 않았어? 너무 오래 차에 있었단 말이야.” “괜찮아요. 정 마음에 걸리면 씻고 나올래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나윤은 잠시 갈등했다. 아무래도 지금의 상태가 무대 행사를 위해 꾸며진 모습이라 씻고 나온다면 이보다 예쁘게 보이진 않을 것 같았으니까. 또 한편으로는 새벽부터 지금까지, 거의 차 안에만 있었고 행사 이후 씻지도 못했으니 아무래도 땀 냄새도 좀 나고 그럴 것 같았다. 피곤하고 냄새나는 꼴로 남자친구 앞에 있고 싶지 않았으니, 고민을 끝낸 나윤은 결국 씻고 나오는 것을 선택했다. “그럼 조금만 기다릴래? 금방 씻고 나올게.” “그래요.” 나윤은 돌아섰다가 우뚝 멈췄다. 생각해보니 비록 6시라 해도 날이 덥긴 마찬가지인데, 밖에 세워두는 것도 나쁜 짓이란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그렇다고 남자를 집 안에 끌어들이는 것도 별로 좋지 않은 생각인 것 같고. 또 한 번의 갈등과 솔로몬의 지혜를 필요로 하던 나윤은 단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집에…들어가서 기다릴래?” “그럴까요?” 이 남자, 전혀 거부감이 없다! 오히려 너무 자연스러워서 다른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진 나윤은 어색한 얼굴로 단유를 초대했다. “잠깐만.” 집에 들어가 혹시나 집 안이 어질러져 있지는 않은지 살폈으나, 다행히도 집안은 깨끗했다. 어머니는 아직 오직 않은 듯했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오시려면 조금 더 걸릴 테니, 빨리 씻고 나오면 어머니에게 들키지 않고 외출을 감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서 기다려.” “누나 방에서요?” “…그래.” “음, 깨끗하네요. 누구에 비하면.” “누구?”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앙칼지게 변했다. “선생님이요. 저희 선생님 아침에 출근하고 나면 방이 꽤 어지럽혀져 있더라고요. 치워주려고 했더니 자기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해서, 손 안 대고 있는 형편이거든요.” 단유의 말에 나윤은 얼굴을 붉혔다가 얼른 옷가지 몇 개를 챙겼다. “내 것도 손대지 말고, 그냥 여기 앉아 있어.” “책은 읽어봐도 되죠?” “읽을 만한 책이 없을 거 같은데?” “왜요? 여기 이렇게 책이 많은데.” 단유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에는 책장이 있었고, 그곳에는 몇 권의 책이 꽂혀 있었다. 평소 책을 잘 읽지 않는, 아니 읽을 시간이 없어 내버려 둔 지라 잊고 있었던 책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저 책들이 저곳을 벗어난 게 언제였더라. “그래, 그럼 읽고 있어. 대신 다른 건 보면 안 돼.” “네.” 단유는 옅은 미소를 베어 물고 고개를 돌려 이내 자신이 읽을 만한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자니, 묘한 감정이 속에서 올라왔다. ‘남자 친구를 방안에 끌어들이다니.’ 게다가 그 남자가 자신이 늘 자는 침대 옆에 서서 책장의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너무 은밀한 곳까지 들킨 것 같은 부끄러움이 밀려와, 나윤은 얼른 욕실로 들어갔다. 나윤이 욕실로 들어간 뒤에도 단유는 책을 고르기에 여념이 없었고, 곧 적당한 책을 한 권 발견했다. 책들은 주로 자기계발 서적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사실 그런 책들은 단유의 관심사항이 아니었다. 좋은 내용인 건 맞지만, 너무 상식적인 수준에서 계도하려는 목적이 강한 성향을 드러내거나, 혹은 너무 작가 개인의 경험에 기준한 편향성이 강한 면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밖에 오래된 소설책도 있었고, 시집도 있었지만, 단유가 고른 책은 고등학교 교과서였다. 물리, 수학, 사회 기타 여러 가지 교과서들을 하나씩 꺼내보며 요즘 고등학생들이 어느 정도 수준의 공부를 하는지를 살폈다. 5년 전, 기웅의 교과서를 빌려 읽은 적은 있었지만, 그때는 솔직히 지식도 짧았고 학교 교육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도 떨어지던 때여서 눈으로 봐도 이해를 하지 못했다면,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 가능한 수준에 오르기도 한데다 상위 교육 과정에 대한 호기심이 있어 책을 집어 든 단유였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욕실을 나온 나윤은 들고 갔던 옷으로 갈아입고 방으로 들어왔다. “뭐해?” “책 보죠.” “왜 그걸 봐.” 나윤은 조금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라도 ‘이 누나는 공부를 전혀 하지 않나 봐’라는 생각을 할까 걱정이 된 탓이었다. “책, 깨끗하지?” “그렇네요. 조심해서 봤나 봐요.” 단유의 말에 놀리는 듯한 기색은 없었지만, 더 보게 하고 싶진 않았다. “됐어. 그만 봐. 창피해.” 창피하다는데 고집해서 볼 이유는 없었다. 단유가 책을 덮고 나윤을 바라보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머리 말려야 하죠?” “응?” “제가 말려 드릴까요?” “니가?” 나윤의 얼굴에 토마토 터져 물든 것 같은 홍조가 떠올랐다. “드라이기 어디 있어요?” “진짜 하게?” “싫어요?” 싫긴. 로망인데. 단유에게 드라이기를 들려주고 화장대 앞에 앉은 나윤은 거울을 통해 뒤에 선 단유를 훔쳐보았다. 키가 큰 단유여서 얼굴이 다 보이진 않았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입술과 ‘남자다움’이 느껴지는 턱의 보일 듯 말 듯 한 움직임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떨려오는 것 같았다. “너무 뜨거우면 말씀하세요.” “으응.” 곧 자신의 심장 두근대는 소리를 감쳐줄 정도의 소음이 울리며 머리카락 끝에 바람이 와 닿았다. 나윤의 긴 머리 아래를 한 손으로 받치고 그 위로 거리를 두어 드라이기를 가볍게 흔들며 바람을 보내는 단유를 훔쳐보며 즐거움을 느낄 때였다. ‘어쩐지 바람이 시원한 거 같은데?’ 분명 드라이기의 뜨거운 바람이 느껴지지만, 그 가운데 시원함이 드문드문 느껴지는 기현상은 본인의 착각인가 싶었다. 어쩌면 남자 친구가 머리를 말려주는, 마치 드라마 같은 상황 때문에 자신이 잘못 느낀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단유는 집중해서 자신의 머리를 말려주는 데 신경을 쏟고 있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 머리 말려준 적 있어?” “아니요. 왜요?” “너무 잘하는 것 같아서.” “칭찬이죠? 고마워요. 그래도 실수하면 말해요. 뜨거운 바람이 머리카락에 좋지 않다는데, 실수해서 머릿결 상하면 안 되잖아요.” 글쎄다. 지금이 좋아서 감히 방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윤은 속내를 감추고 이 로맨틱한 상황을 즐겼다. 한편 단유는 꽤 즐겁게 머리를 말려주었다. ‘바람’을 드라이기의 바람 사이에 불게 해서 드라이기의 열기를 중화시킬 뿐만 아니라, 적당한 세기의 바람을 조종해서 젖은 머리가 말라가는 느낌을 손으로 느끼는 재미가 있었다. 또, 간간이 거울을 통해 살피니 기분 좋아서 웃고 있는 나윤을 보면, 또 즐거웠다. “다 됐어요. 한 번 봐요.” “너무 좋은데? 이렇게 편하게 머리를 말리니까, 마치 샵에 온 거 같아.” “그래요?” “고마워.” “별말씀을.” “다음에 또 부탁하면 해 줄 거야?” “그럼요. 뭐 별거라고요.” 나윤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선물로 뭐 줄까?” “선물이요?” “이렇게 좋은 서비스도 받았는데, 뭐 받고 싶은 거 없어?” “글쎄요?” 아무거나 말해봐. 아무거나. 콩닥거리는 가슴을 들키지 않으려 나윤은 다시 고개를 돌린 후, 로션을 바르는 척하며 단유를 훔쳐보았다. 잠시 궁리하던 단유가 입을 열려는 찰나, 현관문의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헛바람을 들이킨 나윤이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을 때, 지친 얼굴의 어머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벌써 와 있었네? 행사는 잘….” “왔어? 엄마?” 어머니가 딸의 심상치 않은 반응에 이상을 못 느낄 거라고 생각했다면 나윤의 오산이었다. 그리고 나윤이 뭔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그리고 어머니가 현관에 놓인 신발 들 중 낯선 남성의 신발을 찾기도 전에, 단유가 방에서 나오면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얼음이 된 모녀가 단유를 돌아보았다. **** “남자 친구?” 어머니의 목소리에 생소한 감정이 실려 있음을 느낀 나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 그게… 사실은 빨리 말하려고 했는데….” 나윤은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잘못한 것도 없고, 잘못한 일도 아닌데, 괜히 어머니에게 일찍 말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죄를 지은 것만 같고, 또 연하의 남자 친구라는 사실이 어머니에게 어떤 감상을 불러일으킬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아 좌불안석이었다. “어려 보이는데, 몇 살이에요? 동갑?” 과연 어머니가 보기에도 단유의 얼굴은 어려 보였나 보다. 단유는 앞에 놓인 주스를 한 모금 마시며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했다. “15살입니다.” 어머니는 앞에 놓인 잔을 만지작거리다 나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가수가 되겠다고 공부도 내팽개치고 연습에 매진한다더니, 고작 나가서 하는 짓이 연애냐?’라고 따지는 눈빛이었다. “엄마, 얘 기억 안 나? 우리, 가디스R 뮤직비디오에 나왔던 앤데.” 기껏 생각해낸 게 단유의 출연 경력이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다시 단유를 돌아보더니 놀란 눈으로 가볍게 탁자를 내리쳤다. “아, 맞네. 어쩐지 눈에 익더라니. 그때 뮤직비디오에 나오던 잘생긴 친구가 이 친구였구나. 그래서…그때부터 사귄 거야?” “응? 아니, 그건 아니고. 사귄 건 얼마 안 됐어.” 어머니라고 이 상황이 편할 리 없다. 딸의 얼굴이 당황에 물들어 있음은 이해를 하겠는데, 정작 남자 친구라는 저 아이는 너무 편안한 얼굴이지 않은가? 너무 어려서 철이 없는 걸까? “15살이면 중학생이지?” “네. 장계중학교 다니고 있고, 이제 중학교 2학년입니다.” 그때 또 하나 자랑할 만한 게 생각난 나윤이었다. “엄마, 얘 공부 되게 잘해. 전교 1등이다?” 어머니는 한심한 눈으로 나윤을 바라보았다. 기가 죽은 나윤이 입술을 삐죽이며 시선을 피할 때, 어머니는 단유를 바라보았다. “공부하느라 바쁠 텐데, 연애하면 방해가 안 되겠어…요?” “방해는 안 됩니다. 남는 시간에 공부해도 충분히 시간이 남거든요.” 어쩐지 재수 없는 이야기를 들은 기분이었다. 누구 딸내미는 남는 시간이 없어서 공부를 아예 접은 마당이니까. ‘하긴 중학교랑 고등학교는 다르니까, 중학교에서 전교 1등 쯤이야.’ 정작 자기 딸이 중학교 때 성적이 좋지 않았다는 사실은 기억 속에 없었다. “그리고 편하게 말씀하세요.” “네? 응? 아, 그, 그래요. 천천히 말 놓지, 뭐.” 하긴 15살이면 자기 딸보다 4살이나 어린데 말을 높이는 것도 우습다. ‘4살’이라는 나이 차를 떠올리는 절로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서로 나이 차가 너무 나는 거 아닐까?” ‘하필 연애를 해도 어떻게 이렇게 어린 애랑 연애한다고…’라는 질타의 시선이 나윤에게 꽂혔다. 나윤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이 남자가 비록 어리지만, 훌륭한 남자 친구란 사실을 어필해야 돼.’ 나윤은 필사적으로 단유를 변호하기 위해 머리를 굴릴 때, 단유는 오랜만에 마시는 오렌지 주스의 맛을 음미하며 편안한 미소를 베어 물고 있었다. ======================================= [388] 지금, 우리(2) 할 말을 찾고 있던 것은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저녁 먹었…니?” 아직도 관계가 서먹해서인지 말을 맺을 때가 어색한 어머니였다. “아뇨, 아직 안 먹었어요.” “그럼, 저녁 먹을래?” “제가 같이 해도 괜찮은가요?” “그럼. 괜찮지.” 단유의 되물음에 대답한 것은 어머니가 아닌 나윤이었다. 당연한 걸 왜 묻냐는 식의 뻔뻔함에 돌아온 것은 어머니의 날 선 질타였다. “넌 좀!” 비 맞은 강아지 꼴로 눈꼬리를 내리고 입을 다무는 나윤의 모습에 단유는 실소를 머금으며 나윤의 어머니에게 감사를 표했다. 어머니는 저녁 준비를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사이 식탁에 마주 앉은 나윤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괜찮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걸요?” 나윤은 만약 자신이 저 자리에 있었다면, 저렇게 태평할 수 있었을까 의심스러웠다. 물론 단유에게 부모님이 안 계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직 단유의 보호자라 할 수 있는 하은을 만나지 않은 상태. 비록 하은이 단유의 어머니는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그래서 어려움이 느껴질 상대라는 막연한 느낌이 있었다. 하은을 직접 만나게 되면 또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될지 아직은 가늠할 수 없었고. “기집애가 저녁 준비하는 것도 안 돕고….” 라는 중얼거림이 들린 듯해서 나윤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기다려. 맛있는 거 해줄게.” “네.” 나윤이―이미 편해 보이는 상태였지만―더 편하게 기다리라는 의미로 눈웃음을 지어 보였고, 그 모습을 훔쳐본 어머니가 혀를 찼다. “지가 하지도 않으면서, 말은….” “엄마!” 나윤은 괜한 부끄러움에 벌컥 소리를 지르며 어머니 곁으로 다가갔다. “뭐 도와주면 돼?” 어머니가 칼을 세게 움켜쥐셨다. “…그냥 식탁에 수저나 올려놔.” “다른 건 할 거 없어?” “그냥 가서 기다려, 이것아.” ‘진짜 내 딸이지만 창피하다’고 속으로 되뇌며 어머니는 채소를 채를 썰고 볶음 요리를 준비하셨다. 잠시 후, 다시 식탁에 둘러앉은 세 사람은 또다시 찾아온 어색함을 애써 누르며 식사를 시작했다. “잘 먹겠습니다.” “그래, 잘 먹어.” ‘잘 먹을 나이니까’라며 바라보는데, 단유는 어머니가 정성 들여 요리한 채소볶음을 입에 오물거리며 웃음을 지었다. “맛있네요. 채소가 신선해요.” “그래? 입에 맞아?” “네. 간이 적당해서 먹기가 좋은 데요?” 예전, 보육원 시절부터 단유의 먹방은 유명했다. 천천히 음식을 곱씹으며 먹는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답답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또 단유가 맛을 음미하는 모습을 보면 도대체 어떤 음식이길래 저렇게 맛있게 먹을까 궁금하게 만들기도 했다. 당연히 만든 사람으로서 그 맛을 제대로 느끼고 먹어주는 모습에 고마움을 느끼기까지 했을 정도. “우리 엄마, 요리 잘하지? 내가 말했었나? 우리 엄마가 조리사 자격증이 있거든? 그래서 요리 되게 잘해.” “쓸데없는 소리! 밥이나 먹어.” 나윤도 단유와 밥을 자주 먹었기에 이제는 익숙한 모습이다 여겼지만, 새삼 단유의 먹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어머니가 해준 음식을 저렇게 정성 들여 먹으니 고맙지 않을 리 없었다. “밥 더 줄까?” “아니요, 괜찮아요. 제가 사실 입이 길지 않아서 많이 먹진 않거든요.” “덩치만 보면 두 그릇도 먹겠구만.” “엄마, 얘가 매일 새벽마다 운동하거든? 그래서 이렇게 몸이 좋아.” 엄마 앞에서 남자 친구 몸 좋다고 자랑하는 딸의 꼴이 어찌나 꼴불견인지. 어머니는 다시 한번 눈으로 딸을 질책했다. ‘적당히 해라, 이것아!’ ‘뭐, 어때서?’ 이제는 막가자는 건지, 아니면 단유가 실수 한 번 안 하고 의젓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 덩달아 용기가 난 건지, 나윤도 어머니의 눈짓에 쉽게 기가 죽지 않았다. 식사가 끝난 후, 다시 티타임을 가지게 된 세 사람. 어머니가 진중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니, 또 할 말을 찾아 머리를 굴리는 나윤과 평소처럼 편한 얼굴로 차를 마시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어머니의 시선을 마주하는 단유였다. ‘어린 애가 기가 세네’라고 생각하며 어머니는 단유에게 물었다. “부모님은 아시니?” 나윤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첫 질문부터 이렇게 세게 나올 줄은. “저기, 있잖아? 엄마?” “부모님이 안 계세요.” 나윤의 말이 나오기도 전에 단유의 대답이 먼저 튀어나왔다. “안 계셔?” 집에 안 계시다는 건지, 아예 없다는 뜻인지 분간이 되질 않는데, 단유가 ‘고아예요’라는 말에 어머니는 살짝 어지럼증이 날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고아’는 좀 아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 때였다. “제가 고아라는 게 마음에 많이 걸리시나 봐요?” 단유의 돌직구에 어머니는 당황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니고….” 혹시라도 자신이 부지불식간에 지어낸 표정이 어린 소년에게 상처를 준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제가 최근에 아르바이트를 해보겠다고 마음을 먹고 이력서를 몇 장 쓸 기회가 있었는데요, 그 이력서마다 가족관계를 쓰는 칸이 있더라고요. 그때마다 궁금했죠. 왜 가족 구성 여부가 일을 함에 있어 영향을 주는 것인지 말이죠.” 당장 어머니가 생각나는 핑계는 ‘부모가 없는 아이는 삐뚤어지기 쉽다’는 편견과 ‘아무래도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으니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지 않겠냐’는 동어반복적인 선입견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라고 변명하고 싶지만, 당장 먼저 생각나는 이유가 그랬다. “하지만 부모님이 없다는 사실이 저에게 어떤 약점 같은 걸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더 강하게 만들었죠.” “우리 나윤이도 아빠가 없지만, 잘 컸잖니?” ‘부모님이 안 계신다고 해서 널 이상하게 보는 건 아니란다’라는 뜻을 이해해주길 바라며 한다는 말이 고작 이렇다. 어머니는 자신이 많이 당황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단유는 어머니의 이야기에 맑은 웃음을 보이며 대답했다. “그럼요. 누나, 착하고 밝잖아요?” “그렇니?” “네.” 어머니는 이때 단유의 표정과 말을 들으며 딸이 이 어린 소년에게 반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되짚어봐도 그랬지만, 이 소년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꾸며진, 혹은 만들어진 표정을 짓는 일이 없었던 것 같았다. 비록 여자친구의 어머니를 처음 만나는 상황에서 저런 태도와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의아심을 품을망정, 저 미소가 만들어진 미소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라는 것을 어머니는 확신할 수 있었다. 몇 마디 말 역시도 억지로 꾸며진 칭찬이 아니라, 진심을 담아 하는 말이니 귀에만 이로운 말이 아니라 가슴을 잔잔하게 울리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사실 아줌마가 마음에 걸리는 건, 넌 아직 중학생이고 학업에 정진해야 할 시기 아니니? 엄마 같은 마음으로 보자면, 아직 연애는 이르다고 보는데.” “엄마!” 나윤은 끝내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어머니의 말을 막으려 했다. “정히 두 사람이 좋다면,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만나는 게 어떻겠니? 솔직히 나윤이 너도 지금 연애하면서 다른 곳에 시간을 쓸 때는 아니잖아? 안 그래? 불과 며칠 전에 너 엄마한테 뭐라고 그랬어? 컴백 때까지 연습실에서 나오지 않을 각오로 살겠다고, 그랬지? 그런데 지금 연애한다고 정신이 나뉘면 어떻게 집중을 하고 연습을 해?” 어머니의 마음은 그렇다. 자식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 험한 시간도 버티며 뒷바라지했고, 잠깐 방황의 시간을 거치기도 했지만 다시 정(正) 궤도에 올라 길을 가겠다 했는데, 당연히 이런 일탈(?)은 어머니의 입장에서 막고 보는 것이었다. 단유에게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에야 어린 남자아이가 연상에다가 연예인이기도 한 여자에게 욕정(!) 혹은 동경을 품고 접근한 것을 순진한 딸 아이가 거절하지 못해 이 사단(?)이 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용납할 생각은 없었고, 만약 자신이 이 소년의 어머니라면 당연히 공부 잘하고 모범생 같은 소년이 연애라는 일탈을 하게 놔두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어머니의 걱정은 잘 알겠습니다.” 단유는 얼굴을 붉힌 나윤을 대신해 대답했다. 잠시 뜸을 들여 생각을 정리하는 모습이, 차라리 내 아들이었으면 좋았을 모습, 이라고 어머니가 생각할 때 단유의 입이 열렸다. “저도 사실 연애라는 일이 제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하기 전에는 사실 예상하지 못했거든요.” 나윤이 눈을 부라리며 돌아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단유는 그 시선을 무시하고 호기심을 드러내고 있는 어머니만을 바라보았다. “별로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심각하게 걱정해야 할 만큼의 문제가 발생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제게는 큰 도움이 되었네요.” “어떤 도움이 있었다는 건데?” “일단 제가 너무 좁은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는 걸 실감하게 해주었어요. 학교와 집만을 오가며 공부만 하던 제게 더 많은 욕심과 상상을 펼치게 해주었죠. 그래서 아르바이트도 찾아보게 해주었고….” 뒷말을 생략한 것은 단유 개인의 능력에 관한 문제였기 때문이었으니, 말 줄임의 여운이 듣는 어머니와 나윤에게 어떻게 다가갔을지 의문이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딱히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는 여겨지지 않아요. 오히려 누나의 기운과 응원이 제 일상에 활기를 불어 넣어줬고, 그래서 더 공부에 도움이 되었다고 봐야겠지요. 그리고, 저 역시도 누나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누나의 지친 일상에 활기를 불어 넣어줄 수 있는 사람. 힘들고 지칠 때 옆에서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가 생각하는 연애는, 그러니까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줘야 한다면, 그런 일을 해주는 게 아닐까 싶어요.” 어머니는 반쯤 얼이 나간 표정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 아이를 누가 중학생이라고 볼까? 아니 요즘 학생들이 워낙 조숙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저런 이야기를 마치 대본을 준비한 사람 마냥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읊을 수 있는 걸까? 하마터면 나윤에게 ‘연기자 지망생’이냐고 물을 뻔했다. 그때 나윤을 살피니, 나윤의 눈에 하트가 수만 개는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머니가 바라보는 자리라 차마 움직이지 못할 뿐, 당장에라도 단유를 껴안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 모습을 보니 곧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어머니였다. “에구, 이것아.” 어머니는 나윤의 이마를 향해 검지 손가락을 날렸다. “아야! 왜!” “니가 얘만큼 철이 들었으면 내가 이런 걱정도 안 했을 거다.” “엄마!” “왜, 남자 친구 앞에서 흉보니까 부끄럽냐?” “아이, 참.” 투덜거리려던 나윤이 입을 다물었다. 눈치를 슥 보더니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확인을 요구했다. “그럼 우리, 이래도 사귀어도 돼? 찬성? 콜?” “찬성 같은 소리하네. 진짜 걱정이다. 니가 얘를 망쳐 놓을까 봐 걱정이야.” 나윤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어머니는 단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사실 찬성은 아니야. 더 솔직히 말하면, 그래, 연애는 나중에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하지만 또 요즘 시대가 시대니만큼, 이런 연애도 유행이겠거니 생각하니까, 일단 지켜볼게.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지킬 건 지켜가면서 만나. 괜히 어른 흉내 낸답시고 허튼짓하면 안 된다.” “아, 정말! 엄마!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하고 그래!” “니가 걱정이라고, 니가!” 두 모녀의 정겨운 모습에 단유는 또 한 번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어머니는 인사를 하는 단유의 눈이 참 맑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는 그냥 편하게 단유라고 부를 테니까, 자주 놀러 오고 그래.” “네.” “그리고, 음, 앞으로는 어머니라고 부르고.” “어머니, 요?” 여자 친구 어머니도 어머니잖아, 라는 나윤의 지원 사격에 단유는 조금 낯선 단어를 입에 올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망설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 나윤의 어머니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나윤은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터뜨리며 단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가, 어머니의 눈총에 얼른 손을 떼야 했다. ======================================= [389] 지금, 우리(3) “엄마, 나 단유 배웅하고 올게.” 말릴 새도 없이 현관을 빠져나가는 나윤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찬 어머니는 식탁 위에 올려진 잔들을 치우며 생각에 잠겼다. 끝까지 반대하지 않은 이유는 그저 어린 애들의 소꿉장난 같은 사랑이라는 생각이 컸다. 출신을 떠나 반듯한 인상과 예의 바른 언동에 살짝 마음을 놓은 이유도 있고.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이들의 만남을 반길 수만은 없는 건, 역시 딸의 미래가 걸린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남자와 여자의 연애에서 손해를 보는 건 주로 여자 쪽, 이라는 어머니의 생각이 걱정을 멈추지 못하게 했다. 딸의 직장 문제로 한동안 힘들었는데, 이제는 딸의 연애 문제로 또 오랫동안 마음을 졸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저 부모인 게 죄,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그동안 딸의 얼굴에 드리웠던 그늘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을 뿐이었다. “철딱서니 없는 것.” 만약 단유가 나윤과 나이가 같거나 많았다면? ‘차라리 그랬으면 듬직한 마음에 더 예뻐했을 거야.’ 어머니는 고개를 흔들며 고무장갑을 끼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 어땠어?” 집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윤은 단유에게 붙어서 궁금하다는 얼굴로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 “좋으신 분 같았어요.” “그래? 무섭진 않았고?” “무서워요? 왜요?” ‘그러게? 우리 엄마가 무서울 리 없잖아?’라고 생각하면서도 나윤은 변명처럼 대꾸했다. “여자친구 어머니 보면 무섭, 다고들 하니까 너도 그런가 해서.” “아뇨.” 밥도 챙겨주시고, ‘어머니’라고 부르도록 배려도 해주신 분이 왜 무섭겠냐는 단유의 말에 나윤은 히죽 웃으며 단유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 앞뒤로 크게 흔들며 버스정류장을 향해 발을 통통 튕기듯 걸어갔다.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은 어느새 해가 저물어 어둑해져 있었다. 다만 근처의 재래시장의 환한 불빛들 때문에 오히려 활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퇴근길에 시장에 들러 장을 보는 사람들로 거리를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도 그렇고. 비록 모자를 쓰진 않았지만, 사람들이 알아볼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알아보더라도 상관은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만큼 지금 나윤은 마음이 들떠있었다. “들어가세요.” “너 가는 거 보고 갈게.” 발걸음만큼이나 통통 튀는 나윤의 목소리에 흥겨움이 묻어있었다. “집에 어머니 기다리시잖아요.” 나윤은 걸음을 멈추고 단유를 흘겨보았다. 왜 좋은 기분 망치려 드냐고 핀잔 주려는 듯. “나랑 같이 있기 싫어? 나 몰래 딴 데라도 가려고?” 피식, 단유는 웃으며 나윤의 손을 세게 붙잡았다. 가끔 나윤이 이런 투정을 부리는 게 웃기기도 하고 귀엽게 여겨질 때도 있었다. “알았어요. 같이 있어요.” 비록 날이 덥지만, 단유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더 세게 쥐여주니 그만큼 자신을 ‘놓치고 싶지 않다’고 표현하는 것 같아 기분도 좋았다. “아, 오늘 뭐 했어? 문자도 늦게 보내고, 전화도 안 받고.” 단유는 오후에 있었던 ‘번역능력인정시험’에 대해 말했다. “그런 시험도 있어?” “네. 그냥 호기심에 지원해 봤어요.” 자기 또래 사람들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지원하더란 이야기. 시험 시작 전까지 요약집과 노트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던 사람들의 열정에 대한 이야기. 시험이 끝나고 아쉬워하던 사람의 표정과 후련해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나윤은 별세계 이야기를 듣는 사람마냥 즐거워하며 단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너 영어도 되게 잘하는구나? 못 하는 게 없네?” “못 하는 게 왜 없겠어요? 못 하는 것도 많아요.” “뭘 못하는데?” “…아, 저 요리 못 해요.” 단유가 끓였던 맛 없는 라면을 먹고 인상을 찌푸리던 하은과 명수의 반응을 설명하자 나윤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요리는 못 하지만, 라면은 잘 끓여. 아, 아쉽다. 오늘 엄마가 늦게 왔으면 내가 라면 끓여 주려고 했었는데.” 손가락을 튕기며 많이 아쉽다, 고 눈치 보는 나윤의 모습에 단유가 미소를 머금고 제안했다. “아쉽네요. 다음에 끓여주세요.” “그럴래?” 순간 나윤의 머릿속에 ‘라면 먹고 갈래’라는 명문장이 스치고 지나갔다.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아 얼른 다른 화제로 돌렸다. “내일 뭐 해?” “내일요? 뭐, 평소랑 비슷하지 않을까요? 신문 배달하고, 운동하고, 공부하고.” “신문 배달 힘들지 않아?” “아뇨, 별로요. 오히려 운동도 되고 돈도 벌고 좋던데요.” “너무 시간 뺏기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엄마 말대로 공부하기 바쁜데 엉뚱한데 시간 뺏기지 않았으면 좋겠어.” 솔직히 나윤의 입장에서 단유의 성적이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물론 자신이 좋아해서 고백도 했고, 사귀고는 있지만, 자기 때문에 단유의 성적이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결코 마음이 편하지는 못하리라. “아까 누나 교과서 보니까 깨끗하던데요?” “야!” 단유의 장난스런 농담에 짐짓 삐진 척하며 단유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던 나윤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번역도 할 정도면 영어 듣기나 말하기도 잘해?” “음, 뭐 어렵진 않게 하는 것 같아요.” 원어민 수준, 이라는 비교 개념을 떠나 그냥 원어민이나 마찬가지인 언어니까. “그럼 나 영어 회화 가르쳐 줄래?” “회화요?” “솔직히 수학 같은 것까지 너한테 배우면 너무 자존심 상할 것 같고, 영어는 어차피 회사에서 가르치는 과목이기도 한데, 너한테 배우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음, 그게 쉬울지 모르겠네요. 누굴 가르쳐 본 적이 없어서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지만, 단유의 언어 구사 능력은 기본적으로 상대에 맞춰 변환되는 능력이어서 본인이 자의적으로 제어하며 구사하는 게 쉽지 않았었다. 그나마 영어는 오랜 학습에 의해 자의적으로 영어를 구사하는 게 가능했지만, 오늘 일본에서 노인과 나누었던 대화와 같이 상대가 일본어를 사용해야 단유도 일본어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 같은, 게임으로 치면 패시브 능력과도 같았다. 그래서 만약 상대가 한국어를 사용하는데, 단유가 능숙하게 영어로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영어로만 대화를 한다면 맞춰줄 수는 있는데, 대신 뭘 가르치거나 하는 건 쉽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좋다면, 한번 해보죠.” “그래. 만약 하다가 힘들면 관두지 뭐.” 영어로 하든, 한국어로 하든, 단유와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진다는 게 중요하지. 나윤의 속셈을 알 리 없는 단유는 그저 나윤이 공부에 대한 욕심이 없진 않구나, 라고만 생각했다. 아직까진 여자의 속마음을 쉽게 파악할 정도로 능통하지 못한 단유였다. 버스정류장에 있는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차들을 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곧 단유의 집으로 가는 버스가 오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착하면 전화해.” “그럴게요.” “오늘, 와줘서 고마웠어. 우리 엄마 앞에서 멋있는 모습 보여줘서 고맙고.” “멋있었어요?” 나윤은 두 손의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며 대답을 대신했다. “고마워요. 그렇게 봐줘서.” “그렇게 봐준 게 아니고 넌 원래 멋져. 내가 괜히 반했겠니?” “오늘따라 많이 업이 되신 것 같은데요?” “그래? 나도 모르겠어. 오늘 되게 기분이 안 좋았었는데, 너 때문에 꿀꿀했던 기분이 싹 다 날아갔어.”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버스가 앞에 서고, 단유는 마지막 인사를 했다. “손 놓기 싫다.” 나윤이 끝까지 단유의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손을 놓았다. 단유의 미소를 보며 배웅한 나윤은 차가 출발하고 사라질 때까지도 버스 정류장에 서서 그 모습을 보았다. 차가 사라진 뒤, 곧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바라보기를 한참, 나윤은 입술을 삐죽였다. “확실히 연애가 서툴러.” 이럴 때, 단유가 먼저 ‘심쿵’할 만한 메시지를 보내주길 바라는 마음은 아마도 이기적인 거겠지. 그때, 기적적으로 핸드폰에 메시지가 들어왔다. 「책상 위에 선물 두고 왔어요.」 ‘선물?’ 나윤은 얼른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문이 부서져라, 열고 들어오는 나윤을 향해 어머니가 좀 조용히 다니라고 소리쳤지만, 들리지 않았다. 책상을 보는 순간, 나윤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오늘이 생일이나, ‘만난 지 100일’ 같은 특별한 기념일인 것도 아닌데 이렇게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해줬다는 사실이 나윤을 기쁘게 했다. 나윤의 책상에 놓인 것은 들꽃이었다. 다양한 색깔의 들꽃들이 신문지에 돌돌 말린 채 놓여 있었는데, 들꽃의 끝이 말끔하게 정리되지 못한 걸 보면 아마도 직접 꺾어 모은 꽃 같았다. ‘예쁘다!’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 아니란 점에서 신기하고 예뻤다. 꽃의 출처가 궁금하기도 하지만, 사실 더 궁금한 점은 따로 있었다. ‘이걸 어디다 숨겨두고 있었던 거지?’ 줄곧 같이 있었는데, 이런 선물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곧 나윤은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 「고마워, 그런데 이거 어디서 난 거야? 직접 만든 거야? 아까 안 들고 있었잖아? 어디에 숨겨뒀던 거야?」 문득 꽃을 보던 나윤은 꽃을 싸고 있던 신문지가 우리나라 신문지가 아닌 것 같다는 것을 눈치챘다. “일본어?” 그때 문자가 들어왔다. 「비밀이에요.」 그리고 끝이었다. 갑자기 호기심 수치가 상승하면서 이것저것 캐묻고 싶은 마음이 오븐 속 밀가루 반죽처럼 부풀어 올랐다. 「뭐야? 뭐야? 말해줘~」 한껏 애교 섞인 문자를 보내놓고 부끄러워하는 타이밍에 답장이 왔다. 「비밀은 비밀로 둬야 신비로운 법이죠.」 역시, 이 남자. 신비로움이 가득한 남자다. 나윤은 단유답다, 고 생각하며 문자를 보냈다. 두 사람의 문자 대화는 끝이 날 줄 몰랐다. **** 단유의 방학은 그의 말처럼 평상시와 같이 흘러갔다. 아침에 하던 신문 배달은 결국 한 달을 넘어 방학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고, 크게 만족한 보급소장이 가능하면 방학 끝나고도 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의할 정도였다. “내가 몇만 원 더 붙여주마.” 신중하게 고려하겠다며 보급소를 나선 단유는 집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공원에 들러 운동을 했다. “왔어? 오늘도 일찍 끝났나 보네?” 명수랑 상미가 등을 맞대고 스트레칭을 하던 중이었다. 두 사람 모두 단유가 신문 배달을 한다는 사실만 알지, 몇 부나 돌리는지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했다. 다만 신문 배달을 일찍 끝내고도 힘이 남아돌아서 공원에 온다는 사실에 기가 막혀 했을 뿐이었다. “진짜 니가 운동선수를 했으면, 다른 애들은 운동 접어야 했을 거야.” 라는 명수의 말에 상미가 격하게 공감했다. “내가 공부를 접은 이유가 그거랑 비슷해. 저런 애들이 공부하는데 내가 어떻게 의욕을 가지겠어.” “그거랑은 다른 문제 아니냐? 게다가 넌 여중이고, 우린 남중인데?” “시비거냐?” 상미가 이를 갈며 노려보자 명수는 딴청을 피우며 스트레칭하는 척을 했다. “연애 사업은 잘 돼 가고?” “그게 무슨 사업이야?” 단유의 고지식한 답변에 상미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저런 애랑 사귀는 언니가 불쌍하지.” “넌 또 왜 시비냐?” 명수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 상미를 몰아붙이자 역시 매서운 눈으로 명수를 째려보았다. “잘 사귀고 있어.” “그래, 그래. 보기 좋네.” 명수는 입술을 삐죽이며 상미와 단유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늘도 갈 거지?” “응.” 단유는 매일 나윤의 회사로 갔다. 핑계는 나윤의 영어 회화를 돕기 위함이었지만, 사실은 오후의 시간을 빼서 ‘장거리 외출’을 시도하는 단유의 알리바이였다. 그동안 여러 나라를 가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주변의 나라들을 모두 가보고 싶었지만, 몇몇 제약이 걸려 가지 못하는 곳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러시아. 한국은 여름이라서 단유의 복장도 반소매에 가벼운 면바지가 기본 복장이었는데, 이 복장으로 러시아를 돌아다닌다면, 추위는 고사하고 누군들 이상하게 보지 않을 리 없었다. 미국의 경우는 날씨와 상관없이 너무 멀어서 아직 가지 못했다. 지금까지 몇 차례 시도해본 바에 의하면 대략 10분 정도면 단유의 집중력이 거의 바닥을 내보였다. 보통의 공부라면, 책을 읽고 학습하는 수준에서는 한 시간 넘게 집중할 수 있지만, 정밀한 연산을 거쳐 자신이 이동해야 하는 곳의 ‘공간적 위상’을 계산해는 일은 일반적인 집중력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였다. 그래도 가까운(?) 중국이나 멀리 인도와 터키까지는 갈 수 있었다. 터키에서 잠시 쉬었다가 좀 무리해서 유럽을 가볼 수도 있었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가지는 않았다. 어차피 남은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시도해봐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어디까지 가볼까?’ 운동을 하면서 하루의 스케줄을 구상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단유였다. ======================================= [390] 금광을 찾아서(1) 첫 월급을 받았을 때, 단유는 손에 쥐어진 65만 원이란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했다. 돈을 벌기 전에는, 그리고 용돈을 받을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돈의 ‘사용’에 대해 고민이 든 것이다. 애초에 생각했던 것은 데이트 비용으로 얼마 정도를 쓰고, 명수와 하은을 위한 선물 구입비,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한턱 쏠 정도면 충분히 잘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러고 남은 돈은 저축을 하겠다고 마음먹었고. 단유가 아르바이트를 결정했을 때, 하은이 ‘돈 벌면 뭐할 건데’라고 물었을 때도 그렇게 대답했었다. 그리고 하은이 의미심장한 미소로 ‘할 수 있으면 해 봐라’고 대답할 때도 그 의미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정작 돈을 받고 나니, 돈을 쓰는 게 쉽지 않았다. 돈이 아깝다는 의미가 아니라, 돈을 쓰기에 애매한 액수라는 점이 문제였다. 돈을 쓸 일이 없을 때는 몰랐던 문제지만, 생각보다 나가는 금액이 컸다. 하다못해 자신이 한 달 동안 쓰는 핸드폰 요금만 해도 스스로 쓰는 양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돈이 지출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최근 나윤이 단유가 준 소박한(!) 선물들에 즐거워 해줘서 딱히 다른 비싼 선물을 사줘야 할 필요성까지는 못 느끼고 있었는데, 상미가 태클을 걸었다. “여자친구한테는 이거보다 더 좋은 거 선물해야지.” 단유가 선물한 텀블러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텀블러는 아침에 운동을 나갈 때, 상미가 하나쯤 있으면 운동하기 편하겠다고 이야기해서 생각하고 있다가 사준 것이었다. 명수는 고맙다며 텀블러를 받아들었지만, 상미는 여자친구한테는 뭘 사줄 거냐고, 명수에게 ‘오지랖’이라고 핀잔받으면서도 꿋꿋이 단유에게 물었다. 그에 단유가 특별히 생각한 게 없다고 대답하자 말한 것이었다. “나중에 언니가 알면 섭섭해할걸?” 그럴 사람은 아니라고 단유는 생각하면서도, 같은 여자인 상미가 저렇게 말한다면 나윤도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유는 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 생각하여 정공법을 선택했다. “뭐 받고 싶은 거 있어요?” “뭘 계속 주고 싶어 해? 부담스럽게? 안 줘도 돼.” 나윤은 안 줘도 된다며 손사래를 쳤고, 단유는 안심했다. “멍청한 놈아.” “그래. 내가 생각해도 그건 멍청한 짓이다.” 상미와 명수가 합심해서 단유를 공격했다. 단유가 얼떨떨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자, 두 사람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얘가 공부만 해서 그래.” “그러게. 저렇게 여자 마음을 모르면서 어떻게 연애를 한 대?” 단유는 두 사람에게 바보 취급을 받는 신기한 경험과 그 감정을 가슴 속에 묻어 두고 말했다. “나 평소에도 꽃 같은 거 선물하는데?” “그런 거랑 다르지. 니가 받은 첫 월급이잖아? 그런 의미 있는 돈을 받았는데 당연히 의미 있는 선물을 줘야 여자친구도 기쁠 거 아냐?” “나도 그 정도는 안다.” 상미와 단유의 쿵짝이 잘 맞는다고 느끼며 단유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사람마다 다른 게 아닐까?” “여자는 다 똑같애.” 언젠가 한 번 들어본 적이 있는 대답으로 상미는 말을 맺었다. 결국 이번에도 단유는 ‘도대체 여자란 남자랑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가’라는 의문을 머릿속에 남긴 채,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고맙다, 단유야.” “좋은 걸 사드리고 싶었는데, 어떤 게 좋은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이걸로 했어요.” 하은에게는 핸드크림을 사줬다. 평소 학원에서 분필을 자주 사용하기 때문에 손을 씻는 일이 많은데, 그때 손 거칠어지지 말라고 사준 것이었다. “단유에게 이런 선물을 받으니까 기분이 좋네.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 단유는 하은의 미소에 괜히 뿌듯함을 느꼈다. 그간 하은에게 받기만 하고 준 게 없었다. 솔직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사실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나 선물을 고르고, 그 선물을 하은에게 주면서, 하은이 미소를 보이자 뿌듯한 마음이 들면서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더 좋은 걸 사야 했는데, 란 생각이 드네요.” “이것도 충분해. 다른 어떤 선물보다 더 고맙고 감사한걸? 평소에 나를 이만큼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 아냐? 안 그래도 나이가 들면서 손이 점점 거칠어진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하은의 너스레에 웃음으로 화답한 단유는 최근 고민하는 문제에 대해 털어놓았다. “60여만 원이라는 돈이 큰돈이 아닌 것 같아요.” 사실 명수에게는 텀블러 외에 새 축구화를 하나 사줬다. 이전에 사줬던 축구화는 고작 6개월 만에 걸레짝처럼 망가져서 새 신발이 필요하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나윤을 만나 선물 대신 하루 치의 데이트 비용을 단유가 부담하는 것으로 돈을 썼다. 몸이 커진 탓에 입을 옷이 없던 차여서 조금 욕심을 내, 자신의 옷을 사는 데도 돈을 썼다. “처음에는 저축할 돈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3분의 1도 안 남았어요.” “드디어 단유 니가 경제에 눈을 뜨는구나.” 하은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단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솔직히 60만 원이면 적은 돈은 아니지. 니 나이대 애들이 쓰기에 큰돈이기도 하고. 하지만, 요즘 물가가 워낙 높아서 쓰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일주일은 고사하고 3일 만에 탕진하기도 쉬워. 그래서 돈을 계획적으로 써야 한다고 말을 하는 거야. 돈 벌기는 어려워도 쓰는 건 쉬운 법이니까.”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선생님이 지금 너무 부담을 많이 지시는 거 아니에요?” “아냐. 솔직히 예전보다 많이 쓰는 건 있지만, 적어도 집값은 안 들잖니? 그리고 더 솔직히 말해서, 이 집에서 제일 부자인 사람은 너잖아.” “저요?” “이 집이 네 거잖아?” 재훈이 명의를 변경해준 사실을 언급한 하은에게 단유는 머쓱한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건 쓸 수도 없는 거잖아요?” “요즘 시대에 집 하나 있는 게 얼마나 큰 건지 아니? 어떤 사람은 한 달 월세로 5, 60만 원을 쓰는 사람도 있다고.” 하은은 짐짓 엄한 얼굴을 하고 단유의 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 너무 많이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돈을 버는 건 나중에, 네가 어른이 돼서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해. 지금은 그저 공부하는 것만 생각하라고. 어른 흉내 내는 건, 3년은 이르니까 말이야.” 요즘 주위 사람들이 모두 ‘공부’에만 신경 쓰라고 한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단유가 예전과 달리 공부 외의 것에도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걱정하는 바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말하는 바의 의미, 지금 차근차근 준비해서 좋은 대학가고 좋은 직장에 취업해서 돈을 벌면 된다는 의미를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그 길이 자신의 ‘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직은 어떤 길들이 있는지, 그 길들이 어디로 향하는 길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자신이 가야 할 길이 따로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넌 다른 아이들과 달리 선행학습이란 점에서 이미 중학교 수준을 넘었으니까, 지금 학교에서 시행하는 교육 수준이 기대에 못 미칠 수도 있어.” 그런 점도 어느 정도 있었음을 단유는 인정해야 했다. “중학교 입학 전에 영재 학교를 추천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던 거야. 비록 경쟁이 너무 심해서 과도하게 스트레스를 받고 학구열? 의욕이 떨어지는 경우는 있어도, 기대에 못 미칠 정도의 낮은 수준의 학습이란 없으니까.” 하은도 경험이 있기에 단유에게 솔직하게 충고를 해줄 수 있었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단유를 보아도, 단유만큼 학습 의욕과 재능을 가진 이는 영재 학교에서도 보기 힘들었다. 물론 지금은 시대가 달라진 만큼, 또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존재하니만큼 단유 정도의 아이들이 없으리란 법은 없지만, 적어도 영재학교는 단유에게 하나의 돌파구가 되리란 생각이 들었다. 단유의 미래를 위해서도.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일단 더 생각해보고 결정해봐도 될까요?” “만약 영재학교를 가려면, 중3이 되기 전에 선택하는 게 맞아. 그리고 중3 때부터 열심히 준비해서 영재학교 입시를 치러야 하니까, 빨리 결정해야 돼.” 고작 고등학교를 결정하는 문제지만, 이것이 단유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선택임을 하은은 누차 강조했다. “선택은 신중하게 해야 돼. 이런 선택은 뒤로 물릴 수가 없으니까.” **** 이야기의 흐름이 어떻게 그런 식으로 흘러가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이란 것에 대한 문제 인식이 흐려진 것은 아니었다. 한때 재훈과 이야기를 나눌 때, 재훈이 농담처럼 ‘돈은 많을수록 좋아’라고 하던 것도 생각났다. 물론 하은의 말처럼 정규 과정을 다 거친 뒤, 본격적으로 독립하고 사회에 진출할 때가 되었을 때 고민해도 될 문제, 라고 치부해버려도 그만이다. 그렇지만 당장의 문제를 그저 시간에 맡긴 채 무시하기엔 단유가 느끼는 감정을 무시할 수 없었다. 단유는 이것이 자신의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란 사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어딘가에서 들었는지, 보았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학교를 때려치우고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성공한 사람의 케이스가 있음을 안다. 하지만 단유가 그런 선택을 할 필요도 없고, 할 생각도 없었다. 무엇보다 단유의 가장 큰 목표는 단순히 공부를 잘하는 게 아니라, 현대의 수준 높은 지식을 이용해 자신의 ‘마법’을 성장시키는 게 목표다. 그런 목표를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이지, 단순히 좋은 대학 가자고 하는 일이 아니니 당연히 공부를 포기하는 선택은 있을 수 없었다. 또 단유가 이 생활을 크게 바꾸고 싶지 않은 것은 자기 주위의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 크기 때문이다. 명수든 하은이든 이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이들을 자신의 능력이 닿는 한에서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 단유의 ‘생존’과제에 부가된 미션이라 하겠다. 이런저런 생각 중에 끼어든 ‘돈’이란 문제는 또 다른 미션이라 하겠다. 현실적으로 이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생존’ 수단이니 당연히 누군가에게는 최우선 고려 대상이겠으나, 단유에게는 최우선은 아니더라도 중요도 3위권에는 들, 그런 문제였다. ‘돈은 벌면 좋지만, 돈을 벌긴 위해서는 시간을 소요해야 한다.’ 시간은 돈보다 더 중요한 자원. 당연히 그 자원을 소모해서 돈을 버는 것은 별로 반갑지 않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이렇게 느슨하게 살아선 안 될 것 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지금이 어쩌면 가장 자유롭게 시간을 낼 수 있는 때일 수도 있었다. 단유의 고민은 꽤 심각했지만, 과연 이 고민을 해결할 정답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돈? 솔직히 많이 벌면 좋겠지. 그런데 난 아직 잘 모르겠어. 성공만 하면 저절로 따라오는 게 돈이라고 생각하니까, 지금은 돈을 번다는 생각보다 성공하겠다는 생각으로 연습할 뿐이야.” 나윤에게 고민을 살짝 비추자, 나윤은 성공하기 전엔 전부 빚이야, 라며 대답했다. “성공한 가수들이 부모님 명의로 건물도 사드리고 노후 명목으로 땅도 사고하는 거, 많이 보니까 나도 그러고 싶지. 하지만 그게 목표는 아니야. 일단은 모두가 인정하는 가수가 되는 거야. 그렇게 된 뒤에야 생각해 볼 문제라고 생각해. 너도 지금은 일단 학생으로서 충실하게 사는 것만 생각하는 게 옳지 않을까?” 나윤이라고 정답을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남들이 다 그렇게 살라고 하는 건, 그만큼 그 방법이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이고 경험으로 증명된 방법이기 때문이 아닐까? 노래를 부를 때도 다양한 창법이 존재하지만, 그중에서 몇 가지 창법들만 연습하는 건 기존에 검증된 창법이고 자신에게 맞는 창법이기 때문이잖아? 그것처럼 사람들이 마냥 하는 말은 아닐 거라고 봐.” 오래 살아보지 못했던 사람은 오래 살아온 사람들의 경험을 존중하고 그 경험을 빌려와 지혜를 얻는다. 검증된 것이니만큼 신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과연 그것이 내게 맞는 옷인지는 입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지 않을까? 아르바이트, 연애 등으로 시작된 가벼운 여름방학이 결국 여러 가지 문제를 단유에게 남기고 끝나가고 있었다. ======================================= [391] 금광을 찾아서(2) “오랜만이다.” 도하가 예의 무기력한 반응을 보이며 인사를 보낸 뒤, 책상에 턱을 괴고 엎드렸다. 개학 첫날부터 변함없는 모습을 보이는 도하를 보니, 단유도 새삼 학교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겨울보다 여름이 아이들의 변화를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계절임은 분명했다. 여름이라서 더 자라는 건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1학기 때와 또 다르게 변한 모습으로 나타난 아이들이 많았다. 키가 쑥쑥 자라서 나타난 아이가 있는가 하면, 얼굴이 새까맣게 탄 채로 등장한 친구들도 있었다. 턱밑이 거뭇한 소년과 곱슬곱슬한 구레나룻을 기르고 등장한 친구도 있었다. 물론 모든 소년들이 성장기를 똑같이 거치는 것은 아닌지라, 변함없는 얼굴을 하고 나타난 이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병호가 그랬다. “밥 먹었냐? 안 먹었으면 매점 가서 라면이나 먹자.” 도하는 왜 또 친한 척이냐며 귀찮은 척했지만, ‘라면’은 끌리는지 단유의 눈치를 봤다. “난 괜찮으니까 니들 끼리 가서 먹어.” “야, 니가 안 가면 얘가 날 사주겠냐?” “사주려고?” “그래, 내가 살게.” 병호는 뒷주머니에서 장지갑을 꺼내 자랑하듯 손바닥에 올려두고 툭툭 쳤다. “됐어. 난 아침 먹고 와서 괜찮아. 그리고 니가 왜 사?” “오랜만에 만난 ‘친구’한테 한턱내고 싶어서 그래.” 병호의 표정에서 단유는 방학 전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병호는 여전히 자신을 보호해줄, 혹은 소속을 확실히 할 수 있는 무리가 필요한 것처럼 굴었다. “필요 없단다.” 도하는 단유를 흘깃 본 뒤, 병호에게 매정하게 대답했다. 자기도 꼭 먹고 싶었던 것은 아니라는 듯. “너 아침 먹었어?” 단유의 물음에 도하는 대답을 피했다. “먹고 싶으면 가.” “그럼 너도 같이 가.” “왜 날 끌고 가는데?” “그래야 편하게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병호와는 다른 의미로 도하는 단유를 곁에 두려고 했다. 도하의 이해하기 힘든 저 성향을 어찌 이해해야 할까? “가서 물이나 마시고 있던지.” 단유는 아닌 척하지만 갔으면 좋겠다고 눈빛을 보내는 도하가 마치 어린 지선이를 보는 것 같아 피식 웃음이 났다. ‘지선이도 요즘은 안 저러더라.’ 단유가 엉덩이를 들자,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냉큼 일어난 도하가 먼저 교실을 나섰다. 그러면서도 단유가 잘 따라오는지를 확인하는 도하의 모습에 단유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아침 조례가 시작되기도 전에 매점에 올 일이 별로 없었던 단유는 매점의 진풍경에 혀를 내둘렀다. “원래 이렇게 사람이 많아?” “아침 안 먹고 오는 애들이 많으니까.” 매점 앞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고, 테이블에서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컵라면을 후후 불며 먹고 있거나, 간단하게 빵과 우유로 끼니를 때우는 아이들이 보였다. “넌 저기 자리 잡고 있어, 나랑 병호가 사 가지고 갈게.” 도하가 마침 테이블을 비우는 이들을 확인하고 손으로 가리켰다. 단유는 순순히 그 지시에 따라 테이블에 앉아 두 사람을 기다렸고, 이내 두 사람은 컵라면과 빵, 음료수를 사 들고 왔다. “이거라도 먹어.” 라며 도하가 건넨 것은 카페인이 듬뿍 들어갔다는 음료였다. “공부하는 애들이 좋아한다더라.” 자신은 질색이라며 미간을 찌푸리는 도하에게 웃음을 보이며 음료수를 받아들었다. 단유도 딱히 좋아하는 음료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못 먹는다고 가릴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단유가 가리는 음식이 없기도 했고. “단유 넌 몸이 더 커진 것 같다?” 병호가 단유를 요리조리 보더니 한 마디를 건넸다. 어쩌면 필사적으로 할 말을 찾던 중에 꺼낸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병호의 감상은 도하도 동의하는 바였다. “키 컸냐?” “아니.” 키는 크게 변화가 없었다. 조금 자랐을지도 모르겠지만, 눈에 띄게 컸다는 느낌은 없었다. 다만 몸이 커졌다고 느낄 정도로 좋아지긴 했다. 그간 단유가 규칙적인 운동으로 몸을 단련하기는 했으나, 대체로 한 자리에 앉아 책을 보는 일상이 대부분인지라 몸이 눈에 띄게 좋은 편은 아니었고, 그보다는 조금 말랐다는 인상이 컸다. 그러나 이번 방학 때는 아르바이트는 물론이고 데이트를 핑계로 여기저기 나가서 몸을 움직이는 일이 많았던 데다, 나윤과 맛있는 것들을 자주 챙겨 먹다 보니 절로 살이 붙었다. 그래서 몸이 크게 불지는 않았지만, 마른 인상은 사라졌다. “단유 넌 진짜 연예인 해도 되겠다. 너 음원도 냈었잖아? 거기 계약 안 했어?” 병호의 질문에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연예인은 별로 관심 없어.” “쓸데없는 이야기 하지 말고, 라면이나 먹어.” 도하가 병호의 말을 잘랐다. 확실히 도하는 병호가 다가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알았어.” 병호는 살짝 기가 죽은 채로 컵라면을 휘휘 젓더니, 단유와 도하의 눈치를 보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난 이번 방학 때 진로를 결정했어.” 안물안궁, 이라고 도하가 나직하니 말하고는 라면 국물을 들이켰다. 뜨겁지 않을까? 하지만 병호는 이번에도 단유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실 내가 게임을 많이 좋아하잖아? 그런데 지난번…학교에서 큰일이 있었을 때, 내가 좀 그랬잖아?” 모호한 단어로 자신의 과거를 설명하며 이해를 부탁하는 건 친한 사이라고 해도 힘든 일인데, 하물며 단유라고 병호의 말을 알아들을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너한테는 이야기했었잖아? 그, USB 해킹 프로그램 말이야.” “아.” 단유는 그제야 방학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때문에 게임에 흥미를 잃었었거든.” “개가 똥을 끊지.” 도하는 어느새 라면의 밑바닥을 젓가락으로 훑어내는 중이었다. 병호는 도하를 흘낏 본 뒤, 다시 단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단유는 누구에게든 좋은 리스너였으니까. “그런데 방학 되니까 시간이 많이 남아도니까, 할 게 없잖아? 그래서 시간 때울 만한 게 있을까, 하고 검색을 해봤는데 ‘프로겜블러’란 직업이 있대.” “프로겜블러?” 단유에게는 생소한 단어였지만, 도하에게는 익숙했는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니가?” 병호는 시치미를 떼고 계속 말을 이었다. “포커 게임 같은 거로 돈을 버는 직업인데, 그걸로 억만장자가 된 사람도 있다더라? 그래서 게임을 찾아보고 배웠거든. 우선 온라인 게임으로 포커를 해 보고 내가 과연 적성이 맞는지, 잘할 수 있는지 알아보자는 의미에서 말이야.” 도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눈을 게슴츠레 뜬 채로 병호를 바라보았다. “그냥 게임 하고 싶어서 핑계 찾은 거네.” ‘너 같은 애들이 하는 생각 따위는 내가 잘 알지’라는 표정으로 병호를 압박했다. 병호는 오로지 단유만 보면서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나한테 재능이 있는 거야. 그게 다른 사람이 가진 패가 뭔지도 예측해야 하고, 내가 가지게 될 패도 예상해서 배팅을 해야 하거든? 상대의 심리를 잘 읽고, 예측해서 게임을 해야 승리할 수 있는 고난도의 게임인데, 내 게임머니가 벌써 55억이란 말이지.” 뭔가 단유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뿌듯함을 드러내는 병호였다. “결론이 뭔데?” “그 게임머니를 환전해서 돈을 좀 벌었단 말이지.” 병호가 아까 손에 들었던 장지갑을 펼쳐 보였다. 그 지갑 안에 든 노랗고 파란 지폐들이 시선을 끌었다. 도하는 이죽거리며 말했다. “너 그러다 한순간에 훅 간다. 그거 불법인 거 알고 하냐?” “불법 아냐. 그거 다 정부에 허가받아서 하는 거야.” 홈페이지에 정식 등록 업체임을 증명하는 글이 올라와 있다며 항변하는 병호에게 도하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아무리 공부 머리가 바보래도, 그런 쪽으로는 너보다 빠삭하다. 인터넷 환전은 전부 불법이다, 이 멍청아.” “안 걸리면 그만이지.” 병호는 기죽은 얼굴로 투덜대듯 변명하더니 곧 목소리를 가다듬고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아무튼, 지금은 내가 학생이라서 이렇게 하지만, 일단 이건 연습이야. 앞으로는 진짜 포커 게임 대회 나가는 프로겜블러가 될 거라고.” 눈을 반짝이는 병호는 뭐라도 리액션을 보여달라는 눈치였다. “수고해라.” 도하가 머리를 흔들며 일어섰다. “가자.” 단유는 빈 캔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도하의 뒤를 따랐고, 그 뒤를 병호가 따라붙었다. “그런데 부탁이 있어.” “부탁?” 도하가 걸음을 멈추고 병호를 노려봤다. “사이트에 가입해서 추천인 아이디로 내 아이디 써주면 안 될까?” “왜?” “추천인 써주면 게임머니가 들어오거든? 가입한 사람도 받을 수 있고.” “이 병신 새끼가….” 한순간 도하의 얼굴이 변하며 과거의 도하를 떠올리게 만드는 표정이 만들어졌다. “이 겁대가리 없는 새끼가 누구한테….” “도하야.” 단유가 나직이 부르자 도하의 성난 눈길이 단유에게로 향했다. “넌 성격 죽은 줄 알았더니, 여전하네.” 덤덤한 단유의 말이 도하의 정신을 깨운 모양이었다. 도하의 눈에 힘이 조금씩 빠지는가 싶더니 곧 아침에 보았던 나른한 눈이 되었다. “아, 몰라. 다 귀찮네. 야, 너 저리 가. 오지 마.” 툴툴대던 도하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본 뒤 단유가 병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난 사정을 몰라서 모르겠지만, 적어도 도하가 저렇게 화를 내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아니, 그게 그렇게 화낼 문제는 아….” “들어봐.” 단유는 손을 들어 병호의 말을 끊었다. “니가 우리에게 한 부탁의 경중을 사정을 모르는 내가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적어도 도하가 저렇게 화를 낼 정도라면 아마도 무리한 내용이지 않을까 싶어. 더군다나 불법이라는 이야기까지 오고 간 마당이니까. 아니, 잠깐 내 말부터 들어. 만약 내가 알아보고 그게 별 위험성이 없는 단순한 부탁이라면 들어줄 수도 있어.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넌 대단히 실수한 거란 걸 ‘경고’해주고 싶다.” 병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금 전의 대화로 보건대, 너 역시도 니가 하는 일의 경중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않거나, 혹은 알면서도 우리에게 부탁한 것일 수도 있겠지. 전자라면 내가 확실히 알아보고 충고든 조언이든, 혹은 너의 부탁을 들어주는 일이든 다 해줄게. 만약 후자라면,…그건 그때 생각해보자.” 단유는 확실하게 태도를 정리한 뒤 돌아섰다. 조금 날 선 태도로 병호를 대했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병호가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았다. 설령 병호의 부탁이 전혀 무리한 게 아니고,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병호가 자신과 도하에게 ‘부탁’이라는 걸 할 수 있는 관계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카페인이 든 음료를 마셔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일지도.’ 교실로 향하는 사이, 종이 울렸고 교실로 복귀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아이들로 인해 복도가 잠시 소란스러워지는 사태가 있었지만, 단유는 서두르지 않고 교실로 들어갔다.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명수에게 가서 물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명수도 그런 내용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아무리 명수가 단유와 달리 공부 외적인 부분, 특히 게임 같은 유흥 분야에 관심이 많고 아는 것이 많다 하더라도 이런 문제는 집에서든 바깥에서든 접하기 어려웠던 부분이었기에 알지 못했다. 반면 지태와 채윤은 그 부분에 대해 조언이 가능한 정도의 배경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거 사기 아냐?” 라는 지태의 반응과 “그거 불법인데.” 라는 채윤의 대답 정도로도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니가 인터넷을 잘 안 해서 모르겠지만, 인터넷 하면 그런 인터넷 카지노 사이트 광고가 되게 많거든? 그런데 들어가면, 처음에는 돈을 벌 수 있는 것처럼 환전 잘 해주다가 나중에는 자기 돈을 계속 입금해야 하는 거라고 알고 있어. 게임머니 충당은 현금으로 해야 하니까.” 실제 카지노에서 현금을 칩으로 바꾸듯, 온라인에서는 게임머니로 바꾼다는 이야기였다. “너 잘 안다?” 지태가 채윤을 보며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냈고, 채윤은 손사래를 치며 ‘뉴스에서 봤어’라는 말로 항변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사이가 좋아 보였다. “그런 곳에 가입하면 맨날 핸드폰에 광고 문자 오고 그렇대. 수신 차단해도 계속 오고 그래서 짜증 난다고, 우리 삼촌이 그랬어.” 삼촌을 팔아 광명을 찾은 채윤에게 ‘넌 그런 거 하면 안 돼’라며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대는 지태를 말린 뒤, 단유는 교실로 돌아왔다. 병호를 찾으니 병호가 주위 친구들에게 ‘노다지’를 광고하는 중이었다. “신경 쓰지 마라.” “왜?” “저러다 제대로 걸려봐야 정신 차리지, 안 그러면 정신 못 차려.” 도하는 점심을 먹은 후라 졸린다는 듯, 책상 위에 늘어진 자세로 웅얼웅얼거렸다. “인생은 실전이거든.” ======================================= [392] 금광을 찾아서(3) “말세다, 말세야.” 하은이 혀를 찼다. “왜요?” “무슨 중학생이 벌써 돈맛을 들여서 도박이나 한다는 거니? 우리 때랑 비교하면 진짜 우리 때 애들이 참 순진했던 거 같아. 학교에서 공부하라고 하면 공부만 해야 하는 줄 알았거든.” “에이, 그럴 리가요?” 명수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하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왜 못 믿냐며 되물었다. “이야기 들어보니까, 예전에는 막 본드도 불고 그랬다면서요?” “허, 참. 나. 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들어 가지고? 그건 진짜 막 나가는 ‘소수’의 애들이나 하던 짓이고. 그리고 솔직히 그 일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자면, 청소년기의 반항심을 풀어낼 곳이 없어 자신을 자해하는 형식으로 풀어낸 거야. 그 때문에 청소년들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위락시설을 사회적 차원에서 건설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였고, 그래서 지금 니들이 피시방이고 노래방이고 다 가서 놀 수 있는 거 아냐.” 물론 지금은 그게 너무 심해져서 이런 부작용이 벌어졌네, 라며 말이 이어졌지만, 단유가 듣고 싶은 주제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쨌든 그 도박 사이트를 이용하는 건 분명히 불법인 거죠?” “현금을 환전해주는 방식 자체가 모두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다고 알고 있거든. 만약 신고하면, 당장 경찰 외사과에서 건수 올리겠다고 달려 들만한 일이란 거지. 아이디랑 접속기록만 확인하면 바로 건수 올리는 거니까 말이야. 그러고 보면 요즘 경찰들이 너무 약아빠졌어. 얼마 전에는 안 보이는 곳에 숨어있다가 신호 위반하는 차들이 있으면 불쑥 나타나서는 손을 막 이렇게 흔들면서 잡더라니까. 물론 난 안 잡혔지만, 그래도 그런 식으로 해서 실적이나 쌓으려는 건 아니라고. 교통 법규를 지키게 하려면 나와서 감독하는 모습을 보여야지, 숨어서 그게 뭐야?” 또 엉뚱한 화제로 이야기가 옮겨져서 괜히 혼자 열을 내고 성을 내는 하은에게 단유는 젓가락 부딪치는 소리로 주의를 돌렸다. “그런데요, 그 포커라는 게임은 어떤 게임이에요?” “왜? 혹시 너도 해보려고? 하지 마. 도박은 애초에 손을 안 대는 게 최고야. 도박하다 손모가지 날아간단 얘기도 못 들었니? 행여라도 할 생각 마라.” 하은은 어느 때보다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엄포를 놓았다. “엄밀히 말해서 포커가 도박은 아니지 않아요?” 그냥 카드 게임이지, 라는 명수에게 하은의 매서운 눈빛이 날아들었다. “명수 너! 혹시 너도 몰래 해 본 거야?” “…단유 이야기처럼 한 건 아니지만, 하는 방법은 알죠. 그건 그냥 게임인데요, 뭐.” 초등학교 때 이미 포커를 배웠다는 명수의 말에 하은이 이를 갈며 경고했다. “그냥 카드 게임으로 즐기면 몰라도, 절대 도박은 안 된다!” “그럼요. 그리고 전 판돈도 없는데요.” “판돈이라니! 그런 부정한 단어를 쓰다니!” 하은이 벌떡 일어나자 명수 역시 놀랍도록 빠른 반사신경으로 식탁에서 물러나더니 방으로 도망갔다. “명수, 이 문 안 열어!” “아, 선생님! 잘못했어요!” “잘못 했으면 문 열어! 문 안 열면 계속 잘못한 거야!” “아, 선생님!” 단유는 젓가락을 입에 물고 ‘포커’라는 게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룰은 모르지만, 포커라는 게임이 있다는 것은 단유도 알고 있었다. 알게 된 계기는 사실 수학 공부를 하던 중에 있었다. 정확히 어느 책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포커라는 게임에 수학, 특히 ‘확률’을 이용한다는 내용이었다. 52장의 카드를 조합하여 특정 카드가 나올 확률과 기댓값을 구하는 예시를 보이며, 미국의 어느 학교 학생들이 이를 취미활동으로 즐긴다고 했었다. 이 내용을 기억하고 있던 단유였기에 병호가 처음 ‘포커’라는 단어를 언급하고 ‘심리’, ‘예측’이란 표현으로 게임을 이야기하기에 그렇게 심각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도하가 심각한 얼굴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면 아마 단유는 병호가 방학 동안 수학에 눈을 떠서 새로운 취미활동을 즐기는구나,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명수의 멱살을 붙잡고, ‘정신교육이 단단히 해야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하은이 명수를 데리고 다시 식탁으로 돌아왔을 때, 단유는 구겨진 명수의 옷을 펴주며 물었다. “선생님은 포커 하실 줄 모르세요?” 멈칫, 하던 하은은 곧 자연스럽게 숟가락으로 밥을 뜨며 말했다. “밥 먹자.” “에이, 선생님도 할 줄 아시네.” 찌릿, 한 시선이 명수에게로 향했다. 명수는 아차, 하며 얼른 남은 밥을 떠먹기 시작했다. “다른 게 아니고, 제가 책에서 그런 내용을 읽었거든요.” 단유의 이야기를 들은 하은은 한숨을 내쉬었다. “밥 먹고 이야기하자. 이러다가는 제대로 먹지도 못하겠어.” 잠시 후, 거실 소파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하은이 입을 열었다. “만약 니가 그 친구의 일을 서두에 꺼내지 않았다면, 좀 더 편하게 이야기를 했을 테지만, 아무래도 조금 불편한 이야기가 되었어. 하지만 수학을 전공한 선생님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자면, 확실히 포커라는 게임은 수학적으로 접근했을 때 즐기기 좋은 게임이긴 해.” ‘수학’이란 단어에 진저리를 치며 명수는 호빵을 품에 안은 채, 게임 패드를 손에 쥐었다. “52장이라는 카드 속에서 몇 가지 족보를 만들어 서로의 패를 비교하고 승리를 점치는, 어쩌면 단순한 게임이지. 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패를 모르는 상태에서 상대의 패를 예측하고 자신의 패와 비교하여 승리를 점치는 방식은 단순히 확률의 문제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면도 들어가기 때문에 유희적인 면에서도 우수한 게임이라고, 말들을 하지. 실제로 몇몇 나라들에서는 ‘포커 게임’을, 비록 도박이지만 공인해서 즐길 수 있게 하기도 하고.” 의외로(?) 하은은 포커 게임에 대해 꽤나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뒤늦은 고백으로 알게 된 사실은, 하은이 처음 포커를 접한 게 영재 학교에서였다는 것이었다. “걔네들은 솔직히 좀 재미없게 하는 편이긴 했지. 서로의 패가 주어졌을 때, 자신의 확률이 떨어진다 싶으면 뒤도 없이 포기했으니까. 계산이 워낙 빠른 대신 상대의 심리를 읽어서 승리하겠다는 마음은 덜하니까. 카드를 돌리고 패를 확인한 뒤, 계속할 것이냐 포기할 것이냐의 선택지에서 대부분 포기를 하고 말거든. 자신이 확실히 승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면 계속 진행하지도 않아. 오히려 그들은 게임이 끝나고 상대의 패를 물어봐서 자신의 예측과 맞는지 틀리는지를 맞추는 걸 더 좋아했지.” 돈을 안 걸어서인지, 아니면 그냥 순수해서인지 모르겠다만, 이라고 말을 줄이던 하은은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이런 경우라면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겠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도박에 중독되는 건 그런 확률을 떠나 상당히 운에 기반한 요소도 많기 때문이야. 어떤 카드가 자신의 손에 들어올지는 정해져 있지 않으니까, 반드시 머리 좋은 사람이 승리하는 건 아니란 말이지. 그리고 10분 남짓한 게임에서 몇백 달러, 몇천 달러가 오가다 보니 사람들이 중독되는 거야. 쉽게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해서 말이야. 니 친구도 그런 거지 싶네.” 하은의 경고는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그런 경고가 끝난 뒤에야 하은은 카드를 가지고 와서 포커의 룰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우리 집에 카드가 왜 있어요?” “어느 집에나 카드랑 화투는 구비하고 있어야 하는 법이거든.” 그런가? 명수랑 단유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에 하은은 카드의 종류와 룰을 가르쳐 주었다. 하면서 배우는 게 빠르다, 며 게임을 시작했다. 두 세 게임이 지난 후, 단유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재밌네요. 기본적으로는 4.83%의 패지만,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여러 가지 변수에 의해 퍼센티지가 변한다는 게요.” 단유는 흥미롭다는 듯 카드를 펼쳐 보이며 내려놓았다. 그리고 명수는 의기양양하게 카드를 긁어모았다. 계산은 빠르지만, 그렇다고 게임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었다. 첫 게임은 단유가 투 페어로 이겼지만, 다음 두 게임은 모두 명수가 이겼다. “사실 난 그런 거 다 필요 없다고 봐요. 봐요, 두 번 다 제가 이겼잖아요?” 하은은 피식 웃었다. “우리가 칩이나 돈을 걸지 않아서 그렇지, 만약 건다면 또 다를걸?” 한 판만 해볼까? 라고 떠보는 하은에게 명수가 콜을 외쳤다. 그리하여 다음 판은 각자의 돈을 걸고 하는 경기. 단유에게 주어진 카드는 모두 모양이 다른 3, 9, J 카드였다. 단유는 그 중 J카드를 내밀고 다음 카드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2개의 카드를 받아드는 동안, 단유는 이렇다 할 족보를 완성할 수 없었고, 남은 두 장의 카드를 받더라도 다른 두 사람에게 이길 확률이 낮다고 봐서 일찌감치 포기를 선언했다. “이것 봐. 머리 좋은 애들은 금방 포기한다니까.” 하은은 히죽 웃으면서 베팅을 올렸다. “5천 원.” “콜.” 명수는 나름 포커페이스라고 인상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를 쓰고는 있는데, 그 모습이 단유에게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다음 카드를 받고 또다시 공격적인 베팅을 하는 하은은 만원을 불렀다. 이번에 명수가 또 콜을 하게 되면, 누적된 금액만 총 3만 9천 원이 된다. 명수나 단유에게는 결코 적지 않은 금액. 명수의 공개된 카드가 같은 스페이드 모양이 3개인 것 외에는 특별한 연계성을 찾지 못하는 사이, 선생님의 공개된 카드에는 이미 Q 원페어가 만들어져 있고, A카드도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어쩌면 투 페어일 가능성도 있고, Q트리플일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3.03%의 확률로 명수가 플러시를 할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었으니,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고 단유는 생각했다. 명수는 콜을 외쳤고, 이제 히든카드만 남은 상태였다. 명수의 손끝이 살짝 흔들린다고 생각했을 때, 명수는 눈을 들어 하은을 바라보았다. “어이, 꼬맹아. 그렇게 사람 눈치 보면서 달달 떨면 모르는 사람도 니 패가 뭔지 알겠다.” 하은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자, 명수는 시치미를 뚝 떼며 큰 소리를 냈다. “아무리 선생님이라도 그건 무리일 걸요? 선생님은 각오하시는 게 좋을 건데요?” “각오? 어쩌면 좋니? 난 각오 같은 게 필요 없을 거 같은데?” 하은은 입꼬리를 잔뜩 올리더니, 옆에 두었던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5만 원, 따라올래?” “우와, 너무 하시네. 그런 게 어딨어요!” “뭐가 너무해? 이게 다 선생님이 아끼는 우리 명수한테 용돈 보태주려고 그러는 건데?” “용돈이요? 그런 건 이런 데서 말고 그냥 주세요. 그럼 잘 받아 쓸게요.” “에이, 그러면 재미가 없잖니?” 하은의 너스레에 명수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미치겠네.” 바라보는 단유야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만약 명수가 플러시라면, 명수가 당장 견제해야 할 족보는 풀하우스 밖에 없었다. 같은 플러시가 나올 확률은 현재 공개된 카드의 정보로 보자면, 2%도 되지 않을 것이니까. 하지만 만약 2.6%의 풀하우스가 하은의 손에 들려 있다면, 명수는 손을 털어야만 할 것이다. “좋은 거예요?” 슬그머니 떠보는 명수에게 하은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몰라.” 명수는 머리를 싸맸다. “아, 진짜 미치겠네.” “궁금하면 5만 원 내고 봐.” “제가 그럴 돈이 어딨어요!” “왜 없어? 있잖아?” “그럼 제 한 달 용돈이 다 사라지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말했잖아? 도박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라고. 넌 지금 그 지름길로 가는 중인 거야.” 결국 명수는 더 큰 돈을 잃을 수 없다는 생각에 카드를 던졌다. “뭔데요, 선생님?” “안 가르쳐주지.” 선생님은 혀를 삐죽 내밀었다. “아악! 정말!” 단유가 이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단유는 사실 정답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선생님이 풀하우스를 만드는 데 필요한 카드를 자신이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카드는 지금 자기 자리 앞에 엎어져 있는 상태. 그러니 선생님이 풀하우스를 만들 가능성은 0%였다. 반면 명수는 확실히 플러시였으니 분명 끝까지 갔다면 명수가 이겼을 것이다. 명수는 확률이 아니라 얼굴에서 이미 플러시라고 광고를 하고 있었으니까. “좋은 패를 가지고 있어도 심리전에서 밀리면 안 되는군요.” “그것도 있지만, 더 큰 건 바로.” 하은은 앞에 놓인 돈을 가리켰다. “욕심이지.” 돈이 많으면, 그래서 테이블에 올리고도 여유가 있다면 욕심이 줄어든다. 욕심이 줄어들면 냉정하게 게임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여유가 없다면 반대로 욕심은 커진다. 그리고 욕심이 눈을 가리고 머리를 뒤흔든다. 하은은 돈을 끌어모은 뒤, 지갑 속에 넣었다. “어, 진짜 안 돌려주시는 거예요?” 명수가 정말 예상 못했다는 듯이 하은을 바라보았다. “수업료. 니들이 절대 도박을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알려준 의미로다가.” 하은은 카드를 정리하고 아이들을 각자의 방으로 돌려보냈다. 단유는 방으로 돌아와 노트를 펼치기 전, 조금 전의 게임을 복기해보았다. 어떤 면에서 보면 친구들과 보드 게임방에서 했던 게임과 비슷한 면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다르게 확실히 포커는 도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돈이 걸리면 다 도박이지만, 특히 포커라는 게임은, 적어도 단유가 아는 선에서는 가장 위험한 도박이었다. 왜냐하면, ‘확률은 정답이 아니니까.’ 1%의 가능성이 현실이 되기도 하고, 99%의 가능성이 실패로 끝나기도 하는 게 확률이니까. 즉, 확률이란 것 자체가 도박이었다. 단유는 확률에 의지해 선택을 내리는 심리 자체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자칫하면 확률만 믿고 옳지 못한 선택을 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잠시 노느라고 시간을 소모하긴 했으나, 정해진 일과를 마치기 위해 단유는 노트를 펼치고 지식을 정리해나갔다. 이 작업으로 얻게 될 이익은 마법사로서의 역량 강화. 이것은 결코 확률에 의한 선택이 아니다. 이것은 오로지 누적된 경험치 만큼 돌아오는, 확실한 보상이 기다리는 과제이니까. ======================================= [393] 룸(1) 2학기가 시작됐지만, ‘이상기온’이라는 단어가 매일 뉴스를 장식할 만큼 에어컨을 빵빵하게 돌려도 더위가 쉬 가시지 않을 정도여서, 몇몇 학생들은 다시 방학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실없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날씨가 학생들에게만 더운 건 아닐 테니 선생님들이라고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정규 수업을 날림으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 자. 다들 힘들겠지만, 정신 단디 챙기고, 거기 뒤에 누고? 눈깔 뒤집어지는 거 봐라. 눈에 힘 팍 안 주나?” 승민도 나름 고군분투 중이었지만, 방학이 끝나고 난 뒤의 어수선함과 더위가 겹치면서 수업을 수월하게 진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의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는 집에 있는 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또래에 비해 왜소한 편이라 걱정이 많은데, 방학이 끝나기 며칠 전에 끙끙 앓더니, 개학을 하고도 열이 떨어지지 않아 등교를 하지 못하고 집에서 아내의 간호를 받는 중이었다. “자, 여기서 숫자는 숫자끼리, 미지수는 미지수끼리 묶으라고 했었제? 기억나나? 동류항을 묶으라고 했제? 그라믄 어찌 돼노? 3x 마이너스 2x가 이쪽보다 크다, 작다? 작다, 맞나?” 아이들을 둘러보며 집중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지만, 사실 집중을 못 하고 있는 게 자신이어서 아이들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승민이 집중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바로 교무실의 분위기였다. 사실 지금 교무실은 바깥의 더위 따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냉랭한 분위기였다. 이사장이 살해당한 이후, 약간의 번잡함은 있었지만 순조롭게 재단 내 권력이 교체되는 것처럼 보였다. 가장 큰 이유는 이사장 다음으로 가장 지분이 많은 이사장의 아내, 전혜숙 이사의 양보 때문이었다. 남편의 죽음과 그 죽음에 아들의 추문이 관련되어 있기에 이사장직을 받기를 거부한 까닭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사장이 죽기 바로 전에 열렸던 정기 이사회에서 결정된 연임으로 인해 이사회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비극적인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전 이사는 재단에서 물러나고 싶어 했다. 또한, 지한영 이사 역시 자신의 추문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했으니, 결국 이사진의 물갈이가 불가피해졌다. 여기서 재단 내 권력 구조가 개편되니, 이전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세력들이 등장하여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학교 재단 이사회의 변경은 선생님들에게도 민감한 사항이었다. 당장 학교 내부 정책의 변화가 있으리란 건 분명한 사실이니, 어느 계열의 이사가 들어와야 학교에, 혹은 자신에게 유리한가를 따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더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사립학교의 교사는 학교 법인의 ‘직원’ 신분이니 이사회에서 결정하면 군말 없이 옷을 벗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결국, 밥그릇 걱정이다. 더러 ‘교사는 학생들 수업만 신경 쓰면 된다’며 신경 쓰지 않는 이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은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그래서 아예 진급을 고려하지 않는 축이라 무시당할 수밖에 없었고, 많은 선생님들은 새로운 이사회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형편이었다. 전임 이사장, 지강목 전 이사장의 경우, 전혀 비리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학교 정책에 있어서는 다른 사립학교들에 비해 꽤 여유롭게 자유를 보장하는 측면이 있었다. 보통 다른 사립학교들은 외부평가에 민감해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이상한 규칙들을 만들어 자유를 구속하는 면이 많은 편이었으나, 장계중학교는 다른 국공립과 비슷한 수준의 가이드라인만 설정해서 따르도록 하고 있었다. ‘자유’는 학생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교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었고, 따라서 이런 분위기에 만족하여 들어온 교사도 적지 않은 편이었다. 그런데 이제 변화가 생길 조짐이 보이니, 뒤숭숭해지는 것은 필연이라 하겠다. ‘믄 생각하노. 수업 시간이다, 자슥아.’ 잠시 분필을 쥐고 칠판을 노려보던 승민은 다시 판서(板書)를 계속했다. 본래 능변(能辯)이라 칠판 가득 글을 채우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지금은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승민 나름대로,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끔, 교사의 본분을 지키려 애쓴다 하더라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었으니 바로 학생들의 시각에서 보는 학교였다. 아무리 어린 나이의, 통찰력이 부족한 중학생들이라 해도 대부분 선생님들이 보이는 어수선함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비록 그 상황이 재단 이사회에서 비롯된 것까지는 몰라도, 모종의 이유로 선생님들이 수업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요즘 학교 분위기가 영 수상하지 않냐?” “다들 더위를 먹어서 그런가?” “교무실은 우리보다 에어컨 더 빵빵하게 틀 텐데?” “그건 아닌 거 같더라. 내가 교무실 잠깐 가봤는데, 선생님들이 더워 죽으려 하던데?” 현행 학교 전기요금 부과 체계에 따라 학교의 최고 전력량이 경신되면, 향후 1년 동안 적용되는 기본요금이 덩달아 오르는 문제가 발생하기에 학교에서는 에어컨을 오랜 시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위가 최고조에 이를 점심시간 이후가 아니라면, 켜지 못 하게 하고 있었고, 때문에 더욱 힘든 시간을 보내는 학생들이었다. 결국, 어수선한 학교 분위기란 그런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벌어진 현상이었다. 마침 선생님과 학생들을 구원한 것은, 에어컨이 아니라 시보기(時報機)의 벨소리였다. “더운 데 수고 많았데이. 그리고 단유야.” 승민은 나가기 전에 단유를 복도로 불러냈다. “혹시 나중에 시간 되면 우리 지선이한테 전화 좀 해줘라. 우리 지선이가 조금 아프다.” 단유는 놀란 눈으로 승민을 바라보며 물었다. “얼마나 아픈데요?” “그리 심각한 건 아이고, 그냥 감기 비슷한 건데 열이 좀 많이 나가지고 학교도 못 가고 있다 아이가. 일부러 찾아갈 필요는 없고, 그냥 전화 한 통 해서 힘 좀 내라고 해도. 그래도 걔가 니를 많이 좋아하니까 니 전화 받으면 힘 좀 날 것 같은기라.” “예. 나중에 전화해 볼게요.” 고맙다며 단유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준 승민이 복도를 가로질러 교무실로 향한 사이, 단유는 교실로 돌아왔다. 교실이 텅 빈 것처럼 보이는 것은 최근에 벌어진 더위와 무관하지 않았다. 대부분 아이들이 쉬는 시간만 되면, 화장실에 가서 물을 끼얹거나 매점에 가서 음료수나 빙과류를 사 먹으려고 달려가는 탓이었다. 물론 그 짓도 귀찮다고 책상에 드러누워서 땀과 침을 동시에 배출하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도하도 그중 한 명이었다. “너 땀 많이 흘리는데?” 단유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도하를 바라보자, 오히려 도하는 신기하다는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넌 안 덥냐? 어떻게 땀도 안 흘려?”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땀을 잘 안 흘리는 체질인가 보지.” “부럽다.” 허리에 힘을 주고 상체를 들어 올린 도하는 마치 책상 위에 녹은 촛농처럼 끈적거리는 땀을 털어내며 몸을 바로 세웠다. 그마저도 힘든 듯 열기가 묻어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딱한지 저절로 동정심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자. 일어나.” “나가면 더 덥지 않을까?” “여기보단 나을 거다.” 단유가 창을 바라보며 말했다. 창을 열어도 바람이 불지 않으니 오히려 답답한 교실 공기가 사람을 더 지치게 만든다. 밖으로 나오니 텅 빈 운동장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보기만 해도 덥네.” 단유는 고개를 돌려 학교 본관 주변을 살폈다. 몇몇 학생들이 매점을 향해 걸어가거나 매점에서 나오는 중인 것을 빼면, 주변에 사람의 인기척이 없었다. “뒤에 그늘 있는 쪽으로 가보자. 거기가 좀 시원할 거 같다.”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단유를 따라가던 도하는 본관 옆으로 짙게 드리워진 그늘에 들어서고서야 숨을 편하게 내쉴 수 있었다. “와, 시원하다.” 그늘이라 직사광선을 피할 수 있다는 점도 있지만, 이곳에서만 바람이 부는지 도하의 앞머리를 흔들 만큼 시원한 바람이 더위를 잊게 해주었다. “사람이 없어서 시원한가?” 도하가 나름 합리적인 추론으로 지금의 상황을 이해했다. 도하처럼 건물 벽에 등을 기대고 선 단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면도 있겠지.” 인간의 몸은 36.5℃를 항상 유지하려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리고 그 온도를 맞추기 위해 사람은 끊임없이 열을 내뿜는다. 그 열의 양이 200W 정도라고 하니, 비유를 들자면 교실 안에 200W 백열전구 30개를 켜두는 꼴이다. 그런데 찜통더위가 한창인 지금, 그 열이 순환되지 않으니 결국 과열이 되고 고장이 나는 것은 당연지사라 할 수 있다. 더위를 식히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종이 울린 뒤에야 두 사람은 교실로 돌아갔다. 짧은 휴식이 도하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아까보다는 얼굴색이 좋아 보였다. “역시 내 선택이 맞았어.” 도하의 혼잣말에 단유가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니 옆에 있으면 편하다니까.” 뭐가 편하냐고 묻지 않기로 했다. 한편, 백열전구 30개 정도로는 성에 안 찬다 싶을 만큼 뜨거워진 곳이 있었다. 에어컨을 틀었지만, 모인 이들의 상기된 얼굴은 식을 줄 몰랐다. “강 전 이사장은 너무 방만했어요.” “어허, 돌아가신 분을 모욕하시는 건 삼가세요.” “모욕이라뇨? 이건 그분을 모욕하려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는 겁니다. 지난해 인터넷에 우리 학교 이름이 떠들썩했던 거, 잊으셨습니까?” “잘 마무리된 사건을 왜 또 끄집어내십니까?” 파란색 줄무늬 넥타이를 맨, 숱이 적은 중년 남자가 미간을 좁히며 성을 냈다. “잘 마무리돼요? 그게 어찌 잘 마무리된 겁니까? 어쩌다 운 좋게 흐지부지되면서 묻힌 거죠. 그때 제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전화가 왔는지 아십니까? 학교에서 그런 폭력 사건이 벌어졌는데 문제없겠냐고 걱정하는 전화가 쉬지 않고 왔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 교장직을 맡은 이가 이 사건을 제대로 수습도 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고 어찌나 기가 막히던지.” 넥타이를 매지 않은, 아니 맬 수 없을 만큼 목에 살이 많아서 숨 쉬는 게 어렵진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의 외모를 가진 중년인이 흥분하며 대꾸했다. “제대로 수습을 하지 않았다니요? 제대로 보고서는 읽어 보신 겁니까? 비록 학교폭력자치위원회는 열지 않았지만, 충분히 교장 직권으로 사건을 잘 마무리했고, 학생들도 반성의 의미로 봉사활동도 이수했고요. 또한, 담당 선생님에 대한 징계도 합리적인 수준에서 공정하게 진행했어요. 도대체 뭘 보고 제대로 수습을 하니 마니 하시는 겁니까?” “학교 안에서 수습만 하면 답니까? 지금 대외적으로 우리 학교의 위상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몰라서 그런 말을 해요? 폭력, 살인이란 키워드가 우리 학교의 대표 키워드랍니다!” “누가 그런 말을 합니까? 누가! 어디서 유언비어를 퍼뜨려요?” “유언비어요? 이봐요, 장 이사님? 말 가려 하세요! 여기가 어디라고!” “말을 가려? 허, 참. 박 이사님이야말로 말 가려 하세요!” 파란 넥타이와 목살이 서로 삿대질하기 직전까지 가서 얼굴을 붉힌 가운데, 다른 사람들이라고 편히 감상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편이 갈라진 것이 분명해 보였는데, 한쪽은 전임 이사장에게 우호적인 쪽이었고, 다른 쪽은 그 반대였다. 우호적인 쪽은 전임 이사장이 살아있을 때도 ‘콩고물’을 얻어먹던 쪽이었고, 반대쪽은 좀 더 ‘원칙’을 지키자는 목소리로 압박하는 중이었다. “자자, 다들 침착하시고. 지금 지나간 허물을 다시 꺼내서 이야기하자는 자리가 아니니까….” “지나간 허물이 아닙니다! 우리 학교의 명예와 위신이 걸린 현재진행형의 문제입니다! 비단 지난해뿐만이 아니라 매년 폭력 사건과 입에 담기 힘든 문제들이 발생해서 주변 지역 사회에 눈총을 받는 중임을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으니 이러는 거 아닙니까?” 지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드높이는 이들은 어떻게든 자리의 주도권을 가지기 위해 반대편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었고, 그 명분을 인정할 수 없는 이들은 그저 반대의 몸짓과 목소리로 받아칠 뿐이었다. 이러니 좁지 않은 회의실의 열기가 쉽게 사그라들 리가 있나. ======================================= [394] 룸(2) 쉽게 진정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체력이 넘쳐나는 중학생도 아닌바, 결국 제풀에 지쳐 사그라들 즈음에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바깥이 더운 탓에 나가기는 싫고, 그렇다고 마주 앉아 불편한 얼굴들과 기 싸움을 하려니 결국 못 이기는 쪽이 회의실 밖으로 거드름을 피우며 나갔다. 어쩌면 그저 흡연을 위해 나간 것일지도.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모였을 때, 목살이 귀 옆으로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헛기침을 했다. 또 저 양반이 무슨 흰소리나 하려고 저러나 싶어 파란 넥타이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바라보았다. “다들 진정이 좀 된 거 같으니, 이제 발전적인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합시다.” “발전이요? 그럼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다 헛소리랍니까? 정당한 문제 제기를 받아들이지도 못하면서 무슨 발전입니까?” 역시 전투적인 파란 넥타이라 생각하며, 목살은 애써 침착하려 노력했다. “박 이사님. 계속 이러시면 기껏 마련한 긴급 이사회 현안은 다 챙기지 못하고 맙니다. 지난여름 내내, 구멍 난 이사회 조직 하나 챙기지 못했으면서 무슨 재단을 챙기고 학교를 챙기냐는 말이 안 나오겠습니까? 조금만 침착하게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이야깁니다.” 파란 넥타이는 장 이사의 말에 콧방귀를 꼈다. 그 속을 누가 모를까 봐 번드레한 말로 얼렁뚱땅 넘기려 할까? 하지만 이번에는 목살이 나름 준비를 했는지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여러분이 줄곧 내세웠던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학교의 실추된 명예입니다. 그렇죠? 그렇다면 그 점을 먼저 해결하고 나머지를 이야기하면 되겠죠?” 파란 넥타이를 비롯한 개혁파는 목살, 장 이사의 느긋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당장은 다음 말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다들 자유학기제에 대해선 들어보았을 겁니다. 전면시행이 된 지 꽤 됐지만 이를 채택한 학교가 많지 않은 까닭에 교육부에서 자유학기제 홍보하기 위한 홍보대사를 위촉할 예정이랍니다.” 목살은 영문을 모르는 이들을 둘러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리고는 여유를 부렸다. “뭐, 사실 자유학기제 찬반논란이나 연예인 누가 홍보대사에 위촉된다더라 하는 이야기는 우리랑 상관이 없고, 중요한 건 이겁니다. 향후 1년간 자유학기제 홈페이지와 SNS 등에 얼굴을 알릴 홍보모델을 각 중학교에서 공모전을 통해 선발한다는 이야기죠.” 파란 넥타이, 박 이사는 장 이사의 속셈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쉬는 시간에 잠시 나갔다 들어오더니 웬 서류 한 장을 손에 들고 나타나길래 뭔가 했었더니 이런 꼼수를 준비해 온 것이다. “이 정도라면 지역 사회 한정으로 학교의 위신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전국구급으로 학교의 이름을 알릴 기회도 되겠죠? 또 하나는 조금 이르지만, 학교 자체 광고 이야기입니다. 본래는 10월 정기 이사회 때 나눌 이야기지만, 이왕에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자면 내년 새 학기 신입생 모집 때 쓸 학교 홍보 자료와 관련된 것인데, 우수한 학생을 내세워 학교를 홍보한다면 박 이사님이 걱정하시는 부분은 거의 해소가 될 것 같지 않습니까?” 박 이사는 코웃음을 치며 장 이사의 말을 받았다. “고작 홍보 모델 정도로 학교의 위신이 서겠습니까?” 하지만 장 이사는 박 이사의 반박을 자르고 대답했다. “그럼요. 고작 홍보모델이지만, 무려 전국구급입니다. 당연히 박 이사님이 말씀하신 SNS상에서 활발하게 활동도 할 테고요.” “하지만 그것도 우리 학교 학생이 꼭 홍보모델이 될 거란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장 이사는 서류를 들이밀었다. “이 학생 아십니까?” 박 이사는 그제야 장 이사가 들고 있던 서류가 사실 어떤 학생의 이력이 학생 기록부 사본임을 알았다. “누굽니까?” 박 이사는 주위 사람들에게도 기록부를 보여주며 물었다. 자신이 교원도 아니고, 이 학생이 자신의 친척쯤 되는 것도 아니라면 일개 중학생을 자신이 알 턱이 없었다. 하지만, 일개 중학생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박 이사의 옆줄에 앉았던 사람 중 한 명이 아는 척을 했다. “이 학생이요?” “아세요?” “네. 이 학생이 작년 그 폭력 사건 당시 인터넷에 동영상이 올랐던 아이 아닙니까?” 박 이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장 이사를 바라보았다. “이봐요, 장 이사님! 폭력이나 휘두르는 아이를 홍보모델로 내보내잔 말입니까?” 하지만 장 이사는 미소를 지은 채로 여유를 부렸다. 대답 역시 장 이사가 아닌 박 이사 옆의 사람이 알려주었다. “그런 게 아니고, 당시 싸움을 적극적으로 말리던 학생이라도 소개된 학생입니다.” 물론 처음에야 ‘폭력설’이 먼저 퍼지긴 했지만, 이후 정확한 내용이 정정되면서 한때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학생이었다. 하지만 그 화제가 박 이사의 관심 사항은 아니었던지 얼굴을 봐도 알지 못했다. “흠, 어쨌든, 박 이사님? 좀 더 자세히 기록부를 살펴보시지요.” 박 이사는 조그만 사진 밑에 기록된 학생의 성적 등을 보다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전교 1등?” “그렇죠. 단 한 번 전교 3등을 한 적이 있긴 하지만, 입학부터 지금까지 줄곧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모범생’이란 겁니다. 게다가 실제 외모도 괜찮아서 모델 활동을 하기도 했다더군요.” 어릴 때 이야기지만 기록부에는 ‘도서관 홍보모델’ 이력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유명 연예인과 같이 음반 활동도 했다더군요.” 정확히는 뮤직비디오에 ‘참여’를 했을 뿐이고, 음원을 내기는 했지만 ‘공식 활동’은 없는 이벤트성의 활동이었을 뿐이다. “그럼 연예인이란 말이잖아요?” 학교에 연예인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만약 연예인과 같은 화제성 인물이 학교에 있다면 벌써 보고가 올라왔었을 테니 말이다. 학교 홍보가 아니라 재단 홍보에도 이용했을 것이고. “연예인은 아니랍니다. 뭐, 아무튼 이런 이력을 가진 친구이니 꽤 경쟁력이 있지요? 또 설령 떨어지더라도, 학교에서 적극적으로 SNS를 이용하여 학교 자체 홍보모델로 이용할 가치가 있지요. 내년이면 3학년이니, 신입생들의 롤모델로 홍보해도 좋고요.” 흐뭇한 미소를 짓는 장 이사는 ‘승기를 잡았다!’는 듯 기세등등한 눈빛을 보냈다. 바로 그 이야기를 하려고 10월 정기 이사회 안건인 내년 신입생 홍보 자료 건까지 꺼낸 것이리라. “좋은 생각이십니다만, 겨우 그 정도로 학교의 위신이 채워지리라고는….” 박 이사의 반발은 힘을 잃었다. “아직 한 학기 남았지만, 무려 2년 내내 전교 1등입니다. 홍보 자료상에 기술할 내용으로 압도적이죠. 게다가 교사들에게 물어보니 이 아이가 여간 똑똑한 게 아니라더군요. 특히 수학 선생님의 칭찬이 인상적이었는데, 아마 수학경시대회 같은 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우승도 노려볼 수 있을 정도라고 하던데요? 마침 올 가을에 있을 수학경시대회에 맞춰 교내 경시대회를 열 거라죠? 만약 이 학생이 좋은 성적을 거두기만 한다면, 꽤 기대해 볼만 결과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결국 학교의 위신이란 뭐니 뭐니 해도 우수한 학생을 배출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난봄 중등부 축구대회 우승으로 예체능계의 우수함을 드러냈다면, 이번 가을은 수학경시대회 우승자 배출로 주목을 받고, 이어서 교육부 산하 자유학기제 홍보대사로 위촉되어 활동한다면, 학교의 위상?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박 이사는 장 이사의 제안에 두 가지를 잃었다. 한 가지는 자신을 위시한 개혁파가 내세운 명분 싸움에서 지고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장 이사 개인의 발언력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했다는 점이었다. 아마도 개혁파 내부에서 박 이사의 위치가 소폭 하락하는 결과도 있을 것 같았다. 회의실에서 나름 격렬했던 논쟁은 장 이사의 ‘제안’과 보수파의 안정적 지원 덕에 일단은 보수파의 승리로 끝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온건적 개혁을 약속하며 장 이사가 차기 이사장직에 오르게 되었다. 두꺼운 목살이 더 두꺼워지겠지, 라고 박 이사는 생각하며 등을 돌렸다. 며칠 후, “단유야, 종례 마치고 교무실로 따라올래?” 담임 선생님은 단유를 따로 불러서 이야기를 꺼냈다. “홍보모델이요?” 단유는 이상하게도 홍보모델과 같은 이런 활동 쪽으로 연계되는 게 신기했다. 특히나 자신을 크게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해지는 요즘인데, 나윤네 회사나 학교에서나 이런 식으로 제안이 들어오니 난감할 따름이었다. “싫은데요.” 단유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왜?” “얼굴이 드러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요.” 담임은 단유가 뮤직비디오에 나왔던 일을 언급했다. “그때는 그냥 돕고 싶었던 마음에서 했던 거였어요.” “그럼 이번엔 우리 학교를 돕는 게 어떻겠니? 나중에 이 학교를 졸업한 뒤, 그러니까 니가 사회에 진출한 뒤에도 니 뒤에는 늘 ‘장계 중학교’ 출신이란 꼬리표가 붙을 거다. 이왕이면 장계 중학교란 이름이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는 학교라면 너에게도 좋지 않겠니? 그런 차원에서 니가 이 학교의 이름을 떨칠 수 있게 해준다면 윈윈(win-win)이라고 생각되는데. 어떠니?” 딱히 선생님의 이야기에 동의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선생님의 간절함은 단유의 예상 범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선생님은 교육부에서 내려온 공문을 보여주며 설득을 계속했다. “여기 보면 홍보모델 공모전이라고 되어 있지? 그 말은 니가 안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니까, 일단 여긴 경험 삼아 나가보는 게 어떻겠냐?” “경험 삼아서요?” “그래. 진짜는 내년 신입생들을 위해 제작될 학교 홍보 자료 모델이야. 사실 니가 우리 학교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잖니? 담임으로서 그 점이 매우 뿌듯하다만. 아무튼, 니가 학교 홍보모델이 되어 우리 학교를 널리 알리는 데 힘을 써줬으면 싶구나.” 본래라면 이렇게 간절하게 매달릴 이유가 없는 담임이었고, 예상도 못 했었다. “정 선생. 꼭 설득하세요.” 라고, 교감 선생님이 따로 불러서 담임에게 지시했고, “정 선생, 부탁해요.” 라고, 장 이사가 학교 밖에서 따로 부탁할 정도였다. 위기감이 들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나온 단유의 단호한 거절에 정신이 번쩍 들면서 내심 곤란해 하면서도 단유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다만, 미처 단유가 이렇게 싫어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담임선생님이었기에, 단유를 설득할 말을 찾지 못해 어영부영했고,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을 못했다. 딱히 단유를 유인할 만한 이야기가 없었으니까. “학교 홍보 팸플릿이랑 SNS에 모델로 나서는 거야. 그 외는 딱히 활동이 없으니까 너 공부하는 데도 방해가 되지 않을걸?” 어쩌면 단유가 홍보모델로 나서기를 꺼리는 것은 지난해 겪었다던 SNS 소동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진이야 그런 쪽으로 관심이 없어 몰랐는지 몰라도, 학생과 학교에서는 꽤 큰 사건이었고, 대부분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그 일이 전개된 과정과 마무리를 잘 알고 있었다. ‘아마 그때 일로 SNS 등에 자신의 얼굴이 팔리는 걸 꺼리는지도 몰라.’ 만약 그런 이유라면, 담임은 어떤 유인책을 써야 할까? “생각해보고 결정할게요.” 단유는, 그저 곤란해 하는 선생님의 표정을 본 후, 그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대답을 미뤘다. 그게 차라리 선생님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방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이런 문제에 있어서 자신에게 조언해 줄 조언자들이 단유에겐 많았다. 「해 봐. 괜찮을 거 같은데?」 라고 나윤이 통화로 이야기해 주었고, “그걸 왜 하니? 다 쓸모없는 짓이야. 그리고 자유학기제? 웃기고 있네. 자유학기제를 하기 전에 우선 교육 시스템 전체를 바꿔야지. 오히려 자유학기제를 선택한 학교의 학생들에게 불리한 점이 얼마나 많은데 말이야.” 라며 시사상식을 뽐내던 하은의 반대가 있었다. “돈 준대?” “소정의 지원금, 이라는데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게 다 이력 아냐? 너 이력서 걱정했었잖아? 이런 활동 있으면 이력서에 쓰기 좋은 거 아냐?” 만약 연예 활동이나 그런 계열 방향으로 나가는 경우라면 모를까, 일반 회사에 취직하는 경우라면 홍보 모델의 이력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지? “수학 경시 대회 있는 거 알제?” “네.” “…잘 해라이, 응?.” 수학 선생님은 경시대회 출전을 권했다. 단유는 어차피 전교생을 대상으로 하는 거라 크게 의미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괜히 수학 선생님이 자신을 응원하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해야 했다. 지나가던 교감 선생님의 눈초리도 특별해 보였고, 아침저녁으로 단유를 부르는 선생님도 특별해 보였다. 일련의 흐름이 단유에게 계속 어느 쪽으로 몰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단유는 창밖을 보며 언제 더위가 한풀 꺾일 것인지, 그저 지켜보고만 싶은데 말이다. ======================================= [395] 룸(3) 새 이사장이 된 장성웅 이사장은 교장을 찾아갔다. “덕분에 일이 잘 해결됐습니다. 교장 선생님.” “별말씀을요.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년까지 무리 없이 이 자리를 지키게 해주어서 고맙다는 말이었으니 장 이사장은 기분 좋게 웃으며 교장과 악수를 나누었다. 새로 마련된 교장실은 깨끗하지만, 마치 새 건물에서 나는 접착제 냄새가 옅게 맡아졌다. 교장실을 둘러보는 장 이사장의 눈치를 알아챈 교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도배풀이 마르지도 않았나 봅니다.” “뭘요, 깨끗하게 기품이 느껴지는데요. 교장실이란 거 아무래도 이 정도의 기품와 위엄은 있어야지요.” 어떤 기품과 위엄이란 말인지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치레였으니까. 곧 교장은 이사장과 마주 앉아 차를 나누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전임 이사장께서 운동장 환경 개선을 약속하셨다지요?” “네. 그래서 적당한 업체를 알아보는 중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돼버렸습니다.” “그 문제는 곧 처리될 테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사장님만 믿겠습니다.” “그리고 자유학기제 말인데요.” “…예.” 교장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자유학기제는 꽤 민감한 문제였다. 교육부에서 진행하는 사안이라지만, 그 제도를 선택하는 것은 학교의 자율에 맡긴 바였고, 학생들의 성적이 우선이 돼야 할 사립학교의 특성상 자유학기제를 채택하기는 쉽지 않았다. “내년부터 바로 시행이 되도록 부탁드리겠습니다.” ‘부탁’이라고 표현하지만, 실상 상급자의 ‘명령’이나 다름없으니 싫어도 해야 한다. 하지만 학생들의 성적이 떨어지고, 고등학교 진학 후의 학생들의 적응도에 문제가 생길 경우 책임은 교장이 져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장 이사장이 선출되게 하려고 수를 먼저 쓴 것은 교장이니 울며 겨자 먹기로 채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홍보 모델 건은 문제없겠지요?” “네. 학생 3명을 뽑는다고 하는데, 아마 그 3명 중에 무난히 뽑힐 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됩니다.” “다행이군요.” 장 이사는 교장의 장담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야 그 학생에 대해 아는 바가 없고, 전국의 학생들 중 3명을 뽑는다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싶지만, 교장이 ‘뽑힌다’고 이야기하니까 걱정할 바가 없다. 이사장의 입장에서야 그 아이가 뽑히든 말든, 이제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그리고 만약 홍보 모델이 되지 못한다 하면, 그냥 교장을 바꾸면 되는 일이다. 비록 온건파의 라인을 붙잡고 자신이 선출되도록 돕긴 했지만, 전임 이사장의 라인이었던 사람이니 여차하면 바꿔도 마음에 걸릴 일은 없을 것이다. 교장도 장담을 할 만한 근거는 있었다. 당장에 그 아이가 보여준 성적이 그랬고, 여러 선생님에게서 들은 증언들이 근거가 되었다. 연예계 활동을 한 이력도 판단의 근거가 되었지만, 가장 큰 근거는 역시 그 아이의 뒤에 있는 ‘연성’이란 그림자였다. 교장은 작년 폭력 사건 당시, ‘연성 재단’의 부장 직함을 맡고 있던 여자에게 연락을 받았었던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아이가 홍보 모델이 되겠다고 하면, 연성 측에서도 도움을 주리라.’ 그래서 교장은 담임을 비롯한 몇몇 선생님들에게 ‘설득’을 지시해 놓은 상태였다. 한편, 교장의 ‘착각’을 모르는 담임 선생님은 지시를 따르기 위해 필사적으로 단유를 설득했다. 틈이 나는 대로 단유를 불러 ‘자발적’으로 홍보 모델이 되고 싶게끔 설득을 하는 담임의 노력은, 결국 성공했다. “할게요.” “그래, 잘 생각했다. 잘 생각했어!” 담임은 무척 기뻐했다. “니가 이 학교를 살리는 거야!” 기쁜 나머지 너무 나갔다. “살리다뇨?” “아니, 그러니까 니가 이 학교의 체면을 세워줬다 이 이야기지. 아무튼, 잘 생각했어.” 단유가 승낙한 이유 중 하나는 담임 때문이었다.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저자세로 단유를 설득하려는 담임의 태도가 보기 안쓰러울 지경이라, 굳이 ‘군사부일체’를 지키려는 마음이 아니더라도 미안해서 더는 거절을 할 수 없었다. “나중에 니가 자라서 돌아보면 다 추억이고 경험이 될 거다.” 단유는 그런 추억 따위 가지고 싶지 않았다. 일부러 드러나지 않으려 하는데도 이런 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일들이 생기니, 그게 의아할 따름이었다. 단유의 ‘자유학기제 홍보대사 위촉’ 프로젝트는 학교 차원에서 진행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자유학기제 채택과 시행에 관련된 서류가 작성되어 교육부에 올려짐과 동시에 홍보 모델 지원까지 착착 진행되니, 당장에 단유가 할 것은 별로 없었다. 있다면, ‘수학 경시대회’ 준비 정도나 될까? “홍보대사 후보 지원서에 쓸 이력 정도는 만들어야지.” 라는 이유였지만, 승민은 교장의 말을 단유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오빠, 이거 더 먹어.” “아이고, 우리 지선이가 단유 보더만 살아나네, 살아나.” 지선의 병문안을 이유로 승민의 집을 찾은 단유와 명수였다. 병원에서는 감기라고 하지만, 열이 너무 높아서 이틀 정도 응급실에서 지내기도 했었다. 지선이 퇴원한 이후에야 승민의 집을 찾게 된 두 사람은 혈색이 좋지 않은 지선을 보며 가슴 아파했다. 하지만, 두 사람을 보고 반기는 지선의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지선아, 단유 얘 임자 있어.” 명수가 초 치는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자 지선이 명수를 째려보며 입을 열었다. “무식한 오빠는 왜 왔어? 그냥 떡이나 먹어.” 명수는 얼굴을 붉히며 씩씩거렸다. “그러니까 나 오기 싫었다니까? 얘가 날 끌고 와서 온 거지, 내가 너 같은 애 보고 싶을 거 같아?” “그럼 오지 말든지. 줏대 없이 끌려다니냐?” “와, 이게 오빠를 무시하네? 야, 나도 오빠야?” “흥.” 실은 명수가 지선의 소식을 듣고 가장 안타깝게 여겼다. 지선을 보기 전까지 ‘지선이 많이 아프면 어떡하지’를 연발하며 발을 동동 구르더니, 막상 지선을 보더니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는다. 지선 역시도 단유와 명수가 오기 전까지, ‘단유 오빠, 명수 오빠 언제 와’라고 아빠, 엄마를 닦달해 놓고선, 지금은 명수에게 먼저 시비를 걸며 아닌 척 시치미를 떼고 있다. 그러니 지켜보는 사람들의 입에 미소가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이 승민이 단유에게 물었다. “준비는 잘하고 있나?” 승민이 말하는 공부란 경시대회를 말함이었다. “네. 집에서 선생님이랑 기출문제 풀어보면서 하고 있어요.” “그래, 서울대 수학과 나온 선생님이라고 했제? 그라믄 내보다 더 잘 가르키겠네.” “요즘 선생님이 되게 피곤해하세요. 보통은 학원 마치고 돌아오면 피곤해서 바로 주무시는데, 요즘은 얘랑 거실에서 늦게까지 공부하느라고요.” 명수의 증언에 승민이 미소를 지었고, 곁에 있던 승민의 아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 선생님이란 분이 참 수고가 많네요. 전에 보니까 그 선생님 예쁘기도 하시던데, 마음도 참 착하시고.” “우리 선생님이 정말 착하고 예쁘시죠. 누구랑 다르게.” 명수가 시선을 흘깃 던지자, 냉큼 받아먹는 지선이었다. “누구랑 달라? 누구?” “누구가 누구든, 무슨 상관이냐?” “그럼 왜 날 쳐다봐? 기분 나쁘게?” “왜? 찔리냐?” “찔리긴 누가 찔린다고 그래?” “흥, 찔리니까 그러는 거 다 안다?” “웃기지 마라, 시커먼 오빠야. 얼굴만 시커먼 게 아니라 속도 시커먼 오빠네.” “내 속이 시커먼지 하얀지 어떻게 아냐? 아무것도 모르면서.” “안 봐도 안다. 옛날에 나 죽이겠다고 쫓아올 때부터 알았다.” “아놔. 내가 죽이긴 또 뭘 죽인다고 그래! 다른 사람 오해한다고!” “흥, 오해 아니다, 뭐.” 두 사람의 만담에 또 한 번 웃음꽃이 피었다. **** 홍보대사 후보 등록 마감일은 9월 25일이었지만, 교내 경시대회는 9월 22일이었다. 본래는 더 늦게 치러질 예정이었지만, 홍보대사 이력서에 ‘교내 경시대회 1등’이라는 한 줄이라도 첨가하기 위해서 부랴부랴 시행한 일이었다. 학교의 입장에서는 다행히,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단유가 1등을 했다. “이제 시(市)대회에 나가서 좋은 성적만 거두고 오면 되겠네.” 비록 시대회 성적은 올리지 못하겠지만, 향후 면접을 볼 때라도 언급할 기회가 온다면 분명 좋은 점수를 받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교장은 결과지를 받아들고 웃음을 지었다. “만약 전국 대회까지 나가서 성적을 거둔다면 더 좋은 일이겠지만 말이죠.” “하지만 낙관할 수만은 없습니다. 경시대회 문제라는 게, 일반 학교에서 배우는 수준에서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까요.” 전교 1등이라 한들, 중학교 교과 과정에서 배우는 수준에서 노력만 한다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성적이라고 한다면, 경시대회는 수학적 재능이 매우 뛰어나야만 가능한 수준이다. 그래서 학교에서 전교 석차에 들어가는 아이들이라도 경시대회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는 경우는 허다했다. “뭐, 그건 그 아이에게 달린 일이니 우리가 뭐라고 할 건 아니지요.” 교장은 여전히 입술을 말아 올린 채로 결재 서류에 결재를 했다. 그리고 앞에 선 교감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학교 홍보 모델 건 말인데요.” 이왕지사, 이렇게 된 김에 내년 신입생 요강 홍보 자료에 쓸 모델로도 쓰자는 이야기는 일찌감치 나온 바 있었다. “며칠 뒤 정기 이사회 때 나올 안건이긴 합니다만, 교감 선생님도 알아두시면 좋을 거 같아 말씀드릴게요.” 교장은 흐뭇한 미소로 말을 이었다. “아마, 새 교복을 지정할 거 같아요.” 역시나. 교감은 속내를 감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돈 나올 구멍은 일부러 찾아 만드는 승냥이 같은 일족들이니, 교복 따위야 예상 가능한 부분이기도 했다. “그래서 새 교복 업체를 알아보는데, 교감 선생님이 좀 알아봐 주시겠어요?” “제가요?” 말인즉슨, 떨어지는 콩고물 나눠주겠다는 소리? “빨리 지정해야 내년 홍보자료에도 쓰고, 학부모들에게도 전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교감은 흔쾌히 대답했다. 비록 학기가 시작된 지 겨우 한 달인 데다 이사회 교체 등의 문제로 어수선했던 탓에 업무가 밀려있는 형편이지만 마다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아, 나가실 때 이거 가지고 가세요. 이번에 이사장님이 수고했다는 의미로 주고 가신 선물입니다.” 책상 위에 올려둔 고급 차 한 세트를 가리킨 교장은, 마치 자신이 선물을 주는 것인 양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교내 경시대회를 마친 직후, 이제 2주 뒤 있을 시(市)대회 경시대회를 준비하며 천천히 시간을 보내려던 단유는 또 어디론 가로 불려갔다. “이번 주 토요일 시간 되지?” 명수와 나란히 걷던 중, 명수가 물었다. “시간은 되지.” “잘됐네.” 명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단유의 어깨를 툭툭 쳤다. 명수와 함께 간 자리에는 축구부 감독이 언제나와 같이 굳은 인상을 지은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주 토요일 시간 된대요.” “잘됐네.”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토요일에 추계대회 예선전이 있다.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자리만 지켜다오.” “경기는 안 나가는 거죠?” “…원칙적으로는.” 뭔가 여운이 느껴지는 대답에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감독을 바라보았다. 감독 역시 무안했던지 슬쩍 고개를 비틀어 시선을 피했다. “불상사만 없다면, 나갈 필요가 없지. 후보일 뿐인데.” 단유는 명수를 바라보았다. 명수는 그저 단유와 같이 시합에 나간다는 이유만으로 싱글벙글이니, 그 기대감을 짓밟기도 미안했다. “알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감독은 돌아서서 몸을 풀고 있는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다행이다.” “그래, 다행이네. 더위가 많이 풀려서 말이야.” “뭐 그것도 다행이고, 니가 도와준다는 것도 다행이고.” 명수는 손뼉을 치더니 좋은 아이디어가 났다는 듯 말했다. “누나도 오라 그래라. 여자 친구 응원을 받으면 더 기운 나지 않을까?” “나 시합 안 나가는데?” “혹시 모르잖아? 그리고 시합 끝나고 데이트하면 좋잖아? 얼마나 좋아? 축구장에서 경기를 보며 데이트라니!” 아마도 명수는 그런 로망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너도 상미 불러.” “어? 상미를 왜?” “요새 둘이 잘 붙어 다니더구먼?” “뭘 붙어 다녔다고 그래? 늘 똑같이 집에서 게임만 하는데.”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손을 젓는 명수를 보다 단유는 그만 놀리기로 했다. “알았다. 그리고 누난 안돼.” “왜?” “바쁘니까.” 아마 지금 이 시간에도 연습실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중일 테다. 생각난 김에 잠깐 들러볼까? 단유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명수도 생각에 잠겼다. ‘부르면 오려나?’ 예전에는 그냥 생각 없이 초대했었는데, 괜히 단유의 말 때문에 심란해진 명수였다. ======================================= [396] 레밍(1) 책상 위에 올려진 조그만 미니 선풍기의 날개가 돌돌돌 돌아가면서 내는 바람이, 들이댄 얼굴에서 나오는 콧바람에 밀리는 기분이었다. 나윤은 좁은 보컬 연습실 책상에 엎드려 있다가 신음을 내며 힘겹게 몸을 세웠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미칠 듯이 더워서 연습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더위도 없건만 어쩐지 의욕이 나지 않았다. ‘체력이 떨어졌나?’ 몸이 지치면 마음도 지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이유일 거라 생각하며 나윤은 구석에 놓인 텀블러를 집었다. 단유가 선물한 아이스 텀블러를 보며 기운을 얻을까 했지만 도리어 마음만 싱숭생숭해졌다. 물도 없었고. 연습실을 나와 복도로 향하니 마침 외출을 했다가 돌아오는 연습생들과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연습생들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안녕? 밥 먹고 오는 길이야?” “네. 아까 연습 때문에 밥때를 놓쳤거든요.” “열심이네. 수고해.” “선배님도 수고하세요.” 기운찬 얼굴로 인사하는 이들을 위해 나윤이 좁은 복도의 벽으로 물러서며 먼저 자리를 양보했다. 아이들이 고맙습니다, 를 외치며 얼른 나윤의 곁을 지나갔다. 그 뒷모습을 잠시 보다 다시 정수기를 향해 가던 나윤은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친구의 존재와 무관하게, 홀로 연습을 하는 이 순간이 외로웠다. 박 이사는 금방이라도 매치할 연습생을 데려올 것처럼 하더니, 일이 잘 풀리지 않는지 어떤지 아직 감감무소식이었다. 나윤은 솔로 가수가 아니고, 솔로로 데뷔할 자신도 없었다. 그녀 자신의 역량을 키운다 한들, 지금 당장은 해결할 수 없는 능력의 문제였다. 물론 회사에서도 솔로로 데뷔시킬 생각이 없음은 박 이사를 통해서도 들었고. 하지만 그런 현실적인 문제들을 거론하기에 앞서 고군분투해야 한다는 지금의 상황이 나윤은 외롭게 느껴졌다. 방금 지나간 아이들처럼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등을 두드려주는 이가 있으면 좋을 텐데,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당연하게도 ‘수련’이 떠올랐다. ‘뭐 하고 있을까, 언니.’ 솔직히 말해서 수련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유를 막론하고, 결과만 놓고 보자면 수련은 나윤을 ‘배신’한 셈이었다. 적어도 나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가끔 이러저러한 이유로 수련을 떠올리면, 함께 연습할 때 그녀의 배려와 도움이 컸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지 연습생에 불과했을 때와 비교를 해도, 수련과 함께할 때 나윤은 ‘성장’을 했었으니까. 정수기의 파란 스티커가 붙은 냉수 출수구에 텀블러를 대고 물을 받으며 나윤은 생각에 잠겼다가 물이 넘치자 아차, 하며 얼른 물러섰다. 바닥에 흥건하게 쏟은 물을 보며 한숨을 내쉰 나윤에게 말을 거는 이가 있었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나윤이 고개를 돌리니, 남자 연습생 한 명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바닥과 나윤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아, 아니요. 제가 할게요.” 나윤이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종철이란 이름을 가진 그 남자 연습생은 나윤보다 한 살이 많았는데, 나윤보다 일찍 회사에 들어왔다. 이전에 다른 기획사에 위탁 연습생으로 나가 있다가 데뷔가 되지 않아 다시 돌아온 이였다. 나윤이 서둘러 대걸레를 가지러 가려 했는데, 그 전에 종철이 먼저 움직여 걸레를 가지고 왔다. “볼일 보세요. 제가 이거 치우고 갈게요.” “죄송해요.” “아니요. 저도 정수기 쓰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그렇게 말해도 미안한 마음에 쉽게 발을 떼지 못하고 바닥을 다 닦을 때까지 기다렸다. 얼추 다 닦은 듯 보였을 때, 나윤이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제가 갖다 놓을게요.” “괜찮은데.” “주세요. 제가 할게요.” 종철이 무안하다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짓더니 나윤에게 건넸다. “고맙습니다.” “아뇨, 제가 더 고마워요.” 나윤은 얼른 걸레를 들고 제자리에 가져다 놓으려고 했다. “저기요.” “네?” “선배님 이름이 정나윤 맞죠?” 선배님이란 호칭에 당황한 나윤은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선배님 무대 잘 봤어요.” “아, 감사합니다.” “앞으로 기대 많이 할게요.” “네? 네.” 종철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종이컵을 들고 연습실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던 나윤은 고개를 털어낸 뒤, 걸레를 제자리로 갖다 놓았다. **** “심심하지?” “네?” 갑자기 물어오는 통에 단유는 무슨 말인가 싶어 감독을 바라보았다. “잠깐 서 볼래?” 연습하는 거 좀 보다 가라는 명수의 말에 그러겠노라, 하고는 그늘이 드리워진 운동장 벤치에 앉아 있던 단유를 유심히 바라보던 감독이었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기면 또 모르잖아?” 단유는 감독을 빤히 바라보았지만, 이번에는 또 무슨 생각이신지 시선을 피하지 않으셨다. 속으로 한숨을 쉰 단유는 운동장을 한 번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독이 침을 한 번 꿀꺽 삼킬 때 단유가 대답했다. “제발 그럴 일이 없길 바라지만, 잠깐 정도는 괜찮겠죠?” “10분 동안 명수만 막아봐라.” 물이 오른 건지, 명수는 연습시합 20분 동안 벌써 두 골을 넣었다. “골키퍼요?” “수비수. …장훈아! 잠깐 와봐.” 중앙 수비를 맡고 있던 소년을 불러들인 감독은 그 자리를 단유에게 맡겼다. “장훈이 넌 단유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면서 배울 건 배우고, 잘못된 점은 눈에 담았다가 그런 실수를 똑같이 하지 않도록 해라.” 보는 것도 교육이고 연습이다, 라는 감독의 말에 장훈은 순순히 따랐다. 그리고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단유가 운동장으로 천천히 뛰어갔다. “몸 좀 풀어야 하지 않을까?” 날 막으려면 힘들 텐데, 라고 웃는 명수에게 단유가 피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널 막는데 몸을 풀어야 할까? 내가?” 다른 이들은 결코 볼 수 없는, 오직 명수에게만 격의 없이 보이는 단유의 능청이었다. “너의 오만함을 오늘 부셔주마. 각오해라.” “너야말로 반칙하면 지선이에게 이를 거다.” “야, 그걸 왜 지선이한테 말해!” “그럼 반칙하지 마.” 웃기는 놈이네, 라며 투덜대면서도 눈으로는 즐거워 미치겠다는 듯한 빛을 보이는 명수였다. 곧 명수가 중앙 지점에서 공을 잡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단유는 곁눈질로 주변 아이들의 위치를 확인한 뒤, 명수의 공격을 눈에 담았다. 명수도 긴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주변 아이들에 비해 머리 하나는 더 큰 단유였기에 높이도 무시할 수 없고, 덩치나 힘으로도 감히 맞상대하기 힘들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었다. 다만 순간 속도에서 있어서만큼은 자신이 조금 더 빠르다는 점을 염두에 두며 접근했다. “수비가 몸을 너무 세우고 있는 거 아냐?” 말로 단유를 흔들어보려는지 명수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하지만 단유는 대답 대신 명수를 지켜보며 방향을 가늠할 뿐이었다. 명수가 몸을 살짝 흔들며 보일 듯 말 듯 페인팅을 구사했으나, 단유는 우직하게 진로를 막아나가며 명수의 스피드를 줄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 명수 역시 당장은 단유를 뚫기가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보지도 않고 옆으로 패스했다. 그리고 그 공을 사이드에서 따라오던 같은 편 동료가 받아서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저건 아마도 약속된 플레이 중 하나이리라. 그보다도 명수와 팀 동료 간의 호흡이 꽤 좋았다. 단유는 흘러가는 공에는 시선을 두지 않았다. 어차피 감독도 명수를 막으라고 했지, 공격을 막으라고는 하지 않았다. 수비수라면 공격도 막아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적어도 명수를 막는 일만 하면 공격의 반 이상은 막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단유는 옆 선을 따라 올라가는 공격수를 막기 위해 지원을 나가는 대신, 명수를 따라 움직였다. “나 따라오면 빈틈이 생길 텐데?” 명수의 말마따나, 명수의 움직임은 중앙에 빈 공간을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공간으로 중앙 미드필더가 올라오면서 수비의 허점을 찔러 들어오는 중이었다. “그건 그쪽 사정이지.” 단유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다른 학교의 팀이었다면 곤란했으리라. 공간을 비게 만들어 상대 공격수가 올라오게 하는 것과 명수를 프리로 놔두게 하는 것 사이에서 선택하게 만들 테니까. 명수는 오프사이드를 피해가며 전진했고, 곧 사이드에서 올라오는 공을 향해 몸을 던졌다. 하지만 그에 앞서 단유가 높은 키로 공중을 선점했다. 단유의 머리에 맞은 공은 앞으로 튀어나갔다. 만약 단유가 좀 더 축구 스킬에 재능이 있었다면 원하는 방향으로 공을 뺐을 테지만, 그런 기술까지는 습득하지 않았기에 그저 공에 머리를 갖다 대고 명수에게로 가지 않게 하는 데까지가 단유의 최선이었다. “잘해요.” 코치의 감탄에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체격도 재능이야.” 만약 학교에 농구부라도 있었다면, 농구부에서도 탐낼 만한 인재였다. 저 덩치에 불구하고 느리지 않고, 운동신경도 좋은 편이니 기술만 있으면 어느 운동 분야에서든 두각을 드러낼 만하다고 감독은 생각했다. “수비까지 검증을 했으니, 전천후인가?” “그런 셈이네요.” 후보가 꼭 골키퍼만 하란 법은 없잖은가? 치밀한 전략과 세밀한 기술을 배우는 고교축구가 아닌 이상, 저 정도면 충분히 중학교 레벨에서 먹힐 만하다. 어느 포지션에 넣든 말이다. “이번 추계대회가 기대되네요.” 감독 역시 모종의 루트로 이사회에서 나온 발언을 들었다. 이번 이사회는 학교의 위상을 올리는 일에 크게 관심을 두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지난 춘계대회 우승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는 건, 역시 예체능 계열에 대한 무시이거나 무관심일 것이다. ‘한 번이 모자라? 그럼 두 번 하면 되지.’ 춘추대회 우승이라는 타이틀은 쉽게 따기 힘들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이 팀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타이틀을 얻으면 감독 본인 역시도 새롭게 주목받게 될 것이다. “감독님, 10분 지났는데요.” 장훈이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배웠어?” 뭐라고 해야 할까? “명수만 쫓아다니는 거요?” “상대 에이스 선수를 붙잡아 두는 것도 좋은 전략이지.” 감독은 팔짱을 풀고 손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단유가 천천히 운동장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 모습을 보던 감독이 장훈에게 한 마디 더했다. “하지만, 저렇게 무식하게 뛰어다니면 금방 지치고 말 테니까 따라 하진 말아라.” 중앙 센터 라인 부근까지 따라 나와서 명수를 졸졸 쫓아다니던 단유의 수비는 좀 과했다고 감독은 지적했다. **** 저녁 시간이 되기도 전에 나윤은 허기를 느꼈다. 점심때, 집에서 싸서 온 도시락의 양이 적기도 했고, 식욕이 없어 남기기까지 했던 탓이었다. 다른 연습생들이 있는 안무 연습실을 지켜보던 나윤은 갈등하다 이내 포기했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가깝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연습생들이 먼저 자신과 거리를 두니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들부터가 ‘쟤는 우리랑 달라’라는 시선을 보내는 마당인데, 먼저 다가가려 한들 ‘왜 저러지’라는 시선만 받을 거라 여겼다. 소심한 자신을 탓하며 연습실을 나오던 중에 나윤은 또 한 번 종철과 마주쳤다. “연습 끝나셨나 봐요?” 나윤은 종철이 나오던 방향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옆방에 계셨어요?” 비록 방음시설이 된 보컬 연습실이라고 해도 옆방에서 소리를 지르면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아, 그냥 노래 듣고 있었어요.” 나윤은 듣는 것도 중요하지, 라고 생각하려다 순간 다른 의미를 깨달았다. “제 노래요?” “네. 죄송해요, 훔쳐 들어서.” 훔쳐 듣는 게 무슨 죄가 되겠느냐마는. “별로 들을 것도 없는데.” “아뇨. 공부 많이 됐어요. 사실, 제가 나윤씨 팬이거든요.” “팬이요?” 종철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위탁 연습생으로 비스(B.I.S Ent)에 있을 때요, 되게 힘들었어요. 데뷔조에 들었다가 무산되고 그래서. 아무튼, 내가 계속 이 길을 갈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마침 나윤씨와 수련 선배가 한 팀이 돼서 나오는 걸 보게 됐어요. 수련 선배야 워낙 잘하시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윤씨 목소리는 정말 충격이었어요. 노래도 잘하시고.” 부끄러워서 몸을 돌리고만 싶은데 종철의 얼굴이 너무 진지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 손가락만 비틀 뿐이었다. “뭐, 아무튼 그때 나윤 씨 목소리 듣고 위로가 많이 됐어요. 나윤 씨 팬으로서 응원도 하고. 음원 차트 오를 때는 마치 제 노래가 올라가는 것처럼 기분 좋더라고요.” “그렇게 생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고개를 살짝 숙여 종철의 이야기에 답례한 나윤은 잠시 망설이다 곧 말을 이었다. “종철…씨도 금방 데뷔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제 이름 아시네요?” “네?” 나윤은 얼굴이 불타오르는 것처럼 화끈거렸다. 얼른 변명해야 한다는 생각에 말이 빨라졌다. “제가 이 회사 들어올 때, 선배님이 먼저 계셨었어요. 그래서, 그때 인사도 하고….” 후배는 선배들의 이름을 외워야 한다. 그래서 외웠다, 는 내용인데 이 말을 하는 동안이 어찌나 부끄러운지 나윤은 눈 둘 데를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시선을 돌렸다. 종철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나윤 씨한테 선배라고 들으니까 이상한데요? 먼저 데뷔하셨으니까, 나윤 씨가 선배죠.” 종철의 웃음소리에 귀까지 빨개진 나윤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 [397] 레밍(2) “연습은 다 끝나신 건가요?” “아, …아니요. 잠깐 밖에, 편의점에 가려고요.” “아, 그러시구나.” 종철을 고개를 주억거리며 귓불을 만지작거리더니 씩, 웃음을 지었다. “그럼 같이 갈까요?” “네?” “아니, 별 뜻이 있는 게 아니고요, 저도 마침 편의점에 가서 살 게 있어서요.” 나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종철이 뭘 살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은 지금 식사를 대신하려고 편의점에 가는 것이니 괜히 궁상맞은 모습을 들킬까 봐 염려된 탓이었다. 당당하게 ‘편의점에서 저녁 때우려고요’라고 말을 하지 못하는 건, 그저 부끄럽기 때문일 뿐이고. “같이 가죠.” 마치 종철이 끌고 가는 양, 먼저 몸을 돌려 지하 연습실을 빠져나간다. 나윤은 주춤거리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 뒤를 따라나섰다. **** “더 안 해도 되겠냐?” 같이 뛰니까 재미있지 않았냐는 감독의 질문에 단유는 정중히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가볼 데도 있어요.” “그러냐. 알았다.” 지금 단유를 붙잡아 부담감을 줄 필요는 없으리라. 어차피 토요일에 보면 되니까. “수고했다.” 단유는 감독과 코치는 물론, 다른 축구부원들에게까지 정중하게 인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대답은 벤치를 지키고 있던 축구부 1학년 아이들에게서 나왔다. 더러 2, 3학년 선수들도 ‘수고했다’며 손을 들어주는 이들이 있었다. 착한 아이들이었다. 질투와 시기가 있을지언정, 어린아이들의 순수한 질투와 시기는 뒤끝을 남기지 않았으니까. “단유야.” 명수가 뛰어와 단유를 불러세웠다. “왜?” “집에 갈 거야? 나 오늘 좀 늦을지도 몰라.” 단유는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감독과 코치에게 시선을 던졌다. “연습 때문은 아니고, 애들이 같이 밥 먹고 가자고 해서.” “아, 그래? 알았어. 그럼 오늘은 나 혼자 먹어야겠네.” 며칠 전부터 하은의 수업 시간표가 변동돼서, 아침에 늦게 출근하는 대신 퇴근을 늦게 하게 되었다. “아니면 너도 같이 있을래?” “아냐. 내가 끼면 이상하지.” “뭐 어때? 너도 축구부인데.” “이름만 올라간 거지, 축구부 아니다.” 명수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단유는 명수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돌아섰다. 생각해보면 잘된 일이라고 봐도 되겠다. 어차피 오늘은 나윤을 잠시 보려고 했던 참이었으니, 이참에 나윤이랑 저녁이라도 같이 먹으면 될 거 같았다. 단유는 생각난 김에 물어보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려 나윤은 걸음을 멈췄다. 앞서 걷던 종철이 뒤를 돌아보기에 나윤이 핸드폰을 가리켜 보였다. “아, 통화하세요.” 종철은 신경 쓰지 말고 통화하라며 거리를 띄었다. 그 사이 핸드폰 액정의 발신자를 확인한 나윤은 가슴이 철렁거리는 기분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 나야. 응? 아니 별일 없어. …저녁?” 절로 나윤의 시선이 앞서있던 종철에게로 향하자, 종철은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응, 그래. 응. …10분? 근처야? 알았어. 기다릴게.” 나윤은 핸드폰을 끊으면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역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기대하지 않았던 남자친구를 볼 수 있게 된다는 점에 기뻤고, 그다음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죄책감이었다. 적어도 나윤은 자신이 결코 딴마음을 품지 않았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 상관없이, 남자친구 몰래 다른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편의점을 가려 했다는 사실 자체가 어쩐지 잘못된 행동을 한 것만 같이 느껴졌다. 우선 이 상황을 먼저 정리해서 ‘오해’를 살 만한 일을 안 만드는 게 중요할 거 같았다. “저기요.” “네?” 종철이 나윤의 수줍은 부름에 성큼 다가왔다. 나윤은 한 발을 뒤로 빼면서 거리를 떨어뜨렸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경계였지만, 종철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제가 갑자기 약속이 생겨서요. 혼자 가셔야 할 거 같아요.” “방금 전화?” “네.” 종철은 머리를 긁적였다. “…혹시 남자친구예요?” 나윤은 대답을 망설였다. 아직 회사의 누구도 나윤이 남자친구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딱히 나윤에게 연애 금지라는 조항이 만들어지진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데뷔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연예인에게 연애는 금지라는 분위기가 있어 차마 밝히기 어려웠다. 다만 이 조건이 연습생이라고 다르지는 않지만, 데뷔 조에 비하면 다소 약하게 통용되는 면이 있었고, 데뷔하기 전이라면 연애를 한다더라도 연습이나 레슨에 지장을 주지 않는 이상 회사에서도 크게 터치를 하지 않았다. 나윤이 연습생으로 있을 때도, 내부에서 몰래 연애하는 커플을 본 적이 있었다. 종철은 나윤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모양인지, 이맛살을 찌푸렸다. “…별로 안 좋은데.” 뭐가 안 좋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윤은 회사에서 알면 좋지 않은 결과가 있을 거라는 말로 들렸다. 하지만 남자친구가 없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도 싫었다. 무엇보다 자기가 좋아서 사귀게 되었는데, 이를 부정한다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알았어요. 그럼 뭐, 나중에 또 보도록 해요, 우리.” “네. 조심히 가세요.” 고작 편의점 가는 길이 험하면 얼마나 험할까. 나윤은 머리를 거치지 않고 그냥 입에서 나오는대로 주워 삼긴 뒤에야 자신이 이상한 소리를 했음을 깨달았다. 종철은 별로 개의치 않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던 나윤은 핸드폰을 가슴에 꼭 쥐고 다시 돌아섰다. 나윤이 회사 지하 계단으로 내려갈 때, 종철이 뒤를 돌아서서 그 모습을 보았다. 편의점에 들렸던 종철은 담배 한 갑을 샀다. 노래와 춤을 연습하는 연습생에게 담배는 극독이나 마찬가지지만, 이미 입에 붙어버린 흡연 습관이 절로 담배에 손을 가게 만들었다. 처음 입사를 할 때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던 종철이었지만, 다른 기획사에 위탁 연습생으로 가 있었을 시기에 담배를 배우게 되었다. 데뷔 조에 끼었다가 무산이 되는 등의 일을 겪으며 힘들어할 때, 같이 연습하던 동갑내기 친구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 따라 피우다가 결국 흡연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후―. 깊게 들이마셨다가 하늘로 길게 뿜어낸 담배 연기가 편의점 간판 너머까지 올라가며 흩어졌다. ‘인생무상이라더니.’ 이제 겨우 20살이 된 종철이 인생무상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일지도 모르겠지만, 현재의 심정은 딱 그랬다. 데뷔를 위해 달려온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자신감에 가득 찼던, 그래서 더 오만했던 날들이었다. 연습생으로 발탁이 될 때만 해도,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기쁨과 언제라도 데뷔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다른 연습생들이 그러하듯. 하지만 자신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오기, 집념, 열정이 남들보다 더 크다고 생각했다. 실력과 열정, 노력이 뒷받침해주니 곧 무대에 서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3년, 4년이 지나고 지금 이런 모습으로 담배를 꼬나물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시절이었다. 그렇기에 종철은 나윤을 처음 보았을 때,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녀를 좋아했다. 연습생으로서 부럽고, 데뷔하지 못한 선배로서 질투도 나지만,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도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기에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포기하지 말자, 고 생각하면서 위탁을 끝내고 본래 회사로 돌아온 이유였다. 그녀와 가까운 곳에서 그녀를 롤 모델로 삼아, 다시 데뷔의 꿈을 꾸고 싶어진 것이다. 하지만, 방금 그녀가 ‘남자친구’에 대해 묵시적으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자 가슴 속에서 저도 모르는 어둠이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어둠을 하얀 담배 연기에 섞어 하늘로 실어 보내려 했지만, 더 시커멓게 커져만 가는 감정에 종철은 담배를 바닥에 짓이겼다. ‘연애 따위.’ 지금 이런 유치한 감정에 놀아날 틈이 없다고, 다시 시작하려고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라고 자신을 설득하며 종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나윤은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뭐 하세요?” 단유가 맑은 웃음을 띠며 나윤을 보고 있었다. “왔어? 너 씻고 왔니?” “네. 축구부 연습 좀 하느라고요.” “축구부? 축구부였어?” “아뇨. 사정을 말하면 좀 긴데….”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밥 먹으면서 이야기해드릴게요.” “그래.” 나윤은 해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유가 돌아서서 보컬 연습실을 나가려는데, 나윤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단유가 어리둥절해서 바라보니, 나윤이 볼을 빨갛게 물들이며 그를 연습실 안으로 끌어들였다. 연습실 문까지 닫고 섰더니, 좁은 연습실이 금방 더워지는 기분이었다. “왜 그러세요?”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남자친구를 탓할 마음은 없었다. 나윤 역시도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었으니까. 정확히는 자신도 뭘 어쩌고 싶은 계획 따위는 없었다. 다만. “잠시만.” 나윤은 단유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손을 둘러 그의 등을 감쌀 뿐이었다. 정말 방금 씻은 것처럼, 그의 몸에서 향긋한 바디워시 향이 났다. 뜨거운 햇살 아래 마른 듯한, 뽀송뽀송한 티셔츠의 질감마저 산뜻해서 마치 단유만 다른 계절에 있다 온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단유가 손을 들어 올려 나윤을 가볍게 안아주자, 포근함과 안락함이 느껴졌다. 다른 이야기가 필요 없을 정도로, 그의 배려는 따뜻했고 위로가 되었다. 잠시 후, 나윤이 단유에게서 떨어지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는 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나윤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이럴 땐 마치 단유가 큰 오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단유 많이 좋아졌네.” 나윤이 히죽 웃으며 말하자 단유가 무슨 뜻이냐며 되물었다. “예전 같으면 이것저것 막 물어보고 그랬을 텐데, 이제는 말없이 가만히 있어 줄 줄도 알고.” 아하, 단유는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여자 친구분께서 계속 가르쳐 주신 덕택이죠. 이럴 때는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걸. 어때요? 가르친 보람이 있어요?” “너무 보람차서 벅찰 정도인데?” “다행이네요.” 단유는 나윤의 손을 잡았다. “가죠. 배 많이 고프다면서요?” 하지만 나윤은 움직이지 않았다. 또 단유가 의아하게 바라보며, ‘이번엔 뭔가요?’라고 묻자, 나윤이 싱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단유를 본 순간부터 마치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그냥 가슴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픈 나윤이었다. 단유의 목을 두 팔로 두르고, 까치발을 들더니 쪽, 단유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하얀 얼굴의 단유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고 나윤은 웃음을 터뜨렸다. 가끔 당황하는 모습을 보긴 했어도 얼굴이 붉어진 단유는 본 적이 없었으니까. “상이야. 말 잘 들어서 주는 상.” 첫 입맞춤이라는 건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되리라. “나가자.” 나윤이 먼저 연습실 문을 열고 나왔다. 단유의 손을 붙잡고 끄는 손에 기백이 느껴졌다. 담배를 피운 뒤, 몸에 밴 담배 냄새가 옅어질 때까지 주변을 방황하던 종철이 회사로 돌아올 때, 걸음을 멈추고 회사 입구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회사 입구에서 나오는 두 사람, 나윤과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를 보니, 눈에 익은 얼굴이라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곧 가디스R의 뮤직비디오에서 봤던 소년임을 떠올렸다. 뮤직비디오에서는 키가 큰 줄 몰랐는데, 실제로는 나윤보다 10㎝는 더 커 보였다. 자신보다도 더 키가 클 것 같고, 덩치도 작지 않아 ‘듬직’한 인상의 소년이었다. 하얀 티셔츠와 청바지는 흔해 빠진 스타일이었지만, 소년의 몸이 워낙 좋은 탓인지 시쳇말로 ‘핏이 산다’는 느낌이었다. 남자가 보기에도 멋진 이의 옆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나윤을 보니 괜히 가슴이 울렁거렸다. ‘종철아, 정신 차리자.’ 눈을 감고 속으로 되뇌었지만, 망막 속에 새겨진 두 사람의 실루엣이 그의 결심을 뒤흔들고 있었다. ======================================= [398] 레밍(3) 단유가 홍보대사를 ‘자발적’으로 지원한 직후, 담임교사는 그를 더이상 호출하지 않았다. 그 부분만으로도 자신의 선택에 흡족해하던 단유는 금요일 오전 조례가 끝난 직후, 다시 선생님의 호출을 받았다. “너 내일 축구부 시합에 나간다며?” 단유는 감독에게 들었던 약속에 대해 이야기했다. 선생님은 거뭇거뭇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다음 주에는 시(市)대회 수학경시대회 있는 거 알지? 그거 준비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겠니? 만약 니가 시합 나가는 게 불편하다면 선생님이 가서 감독님께 이야기를 해주마.” 아직 조례가 끝나지 않은 교실이 많은지 복도는 한산했고, 조례가 끝난 단유네 반 아이들만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교실을 조용히 빠져나가 화장실 등으로 향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선생님.” “…사실 수학경시대회도 경시대회지만, 더 문제는 다음 달에 있을 홍보대사 면접이잖냐? 만약 경기에 나갔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조심하는 게 좋지 않겠어?”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네요. 그리고 축구부 감독님과의 약속은 되도록 지키고 싶네요.” “…알겠다. 하지만 되도록 다치지 않게 조심해라.” “알겠습니다.” 물론 약속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는 선생님에 의해 통제받게 될 향후의 일상이 걱정돼서 조금 고집을 부리기로 마음을 먹었던 단유였다. 교무실로 향하는 선생님을 일별하고 자리로 돌아오니, 눈을 게슴츠레 뜨고 늘어져 있던 도하가 눈에 들어왔다. “넌 더위도 다 지나갔는데 아직 그 모양이야?” “관성이야.” 단유는 놀란 눈으로 도하를 바라보았다. “관성이 무슨 뜻인지 알고 말하는 거야?” “그 정도는 알아.” 도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을 하지만 못내 뿌듯함이 얼굴에 묻어나고 있었다. “요새 공부하니?” “그건 아니고, 요즘 TV 보면 계속 그런 이야기가 나오더라고.” “뉴스?” “예전에 돈 받은 사람이 또 돈 받는 게 관성이라고 하더라고.” ‘나 뉴스 보는 사람이야’라는 얼굴로 입꼬리를 씰룩이는 도하였다. “아.” ‘관행’을 ‘관성’으로 잘못 말한 도하였지만, 우연인지 상황에 적합한 표현이 되고 말아서 단유가 착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단유는 굳이 그 사실을 정정해주지 않았다. 모처럼 뿌듯해하는 도하의 얼굴이 보기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고, ‘관성’이란 단어를 곱씹으며 떠오른 단상에 몰두하느라 정정할 타이밍을 놓쳤다. ‘관성 모멘트.’ 물체가 회전운동하는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는 성질을 의미한다. 단유가 가끔 바람을 이용한 능력을 사용할 때, 특히 회오리 같은 형태의 바람을 일으킬 때 반드시 연산해야 하는 요소이기도 했다. 단일 질량의 물체면, 단순히 회전축에서 각 질점(質點)까지의 수직거리의 제곱에 질량을 곱하면 되지만, 이산적 질량인 경우, 즉 물체의 질량이 크기를 가지고 연속적으로 분포된 경우에는 적분을 해야 한다. 그런데 바람을 일으킬 때는 공기의 질량을 계산하여 이에 응용한다. 공간의 좌표를 계산함과 동시에 해당 공간의 공기들을 역산하여 질량을 구하고 다시 이를 지정한 회전축에 맞춰 계산해야 회오리가 생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태까지는 바람에 대해서만 이 연산을 이용했는데, 만약 이를 응용하여 다른 곳에 쓰면 어떻게 될까? 도하는 실수로 ‘관행’을 ‘관성’으로 표현했지만, 우연히도 적절하게 들어맞았기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것처럼 까지는 아니더라도,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곳에 ‘바람’의 능력을 이용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응용해본다면 혹시나 되지 않을까? 예를 들면, 물속에서 회오리를 만들 수도 있을 테고, 더 나아가 아예 돌아가지 않을 것 같은 물체도 회전시키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즉, 요지는 ‘회전 운동’에 관한 것이었다. 단유는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에 몸이 달아올랐다. 그 즉시 노트를 펴고 당장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들을 쏟아내며 정리를 시작했다. 연구과제가 정해졌으니, 남은 것은 파고들어서 답을 만들어내는 일만 남았다. 할 일은 많았다. 당장 관성 모멘트에 대해 새롭게 정리할 일도 있었고, 물체의 저항값을 구하기 위한 연산도 필요했다. 그리고 물체의 질량이라는 본질에 대해 다시 한번 정의를 내리고 개념을 재정립할 필요도 있었다. 단유는 다급함을 느끼며 빨리 이 아이디어를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노트에 뭔가 이해할 수 없는 글자들과 숫자들을 써 갈기는 단유를 보며 도하가 어리둥절해 하다가 이내 관심을 끊었다. 방학 전에도 자주 보던 모습이니 새삼 놀랄 것도 없었다. 아마 앞으로 있을 수업 시간에도 단유는 오직 저 노트만을 보고 있겠지. 도하는 사각거리는 노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마치 ASMR을 듣는 것처럼 편안했다. 단유는 학교에 있는 내내, 심지어는 점심시간마저도 교실에서 노트를 붙잡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다른 곳으로 새지 않고 곧바로 집으로 향한 뒤에도 단유는 노트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적어나갔다. 그렇지만 그 연구 때문에 본래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거나 넘기지는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여전히 단유는 신문을 돌렸고, 조금은 짧아진 운동 시간이나마 운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명수와 함께 경기장으로 향했다. 지난번, 춘계대회와 같은 경기장에서 펼쳐지는 예선 경기는 비록 오후 2시부터지만 아침부터 나와서 가볍게 몸도 풀어야 하고, 전략을 듣고 익히는 시간 역시 필요한 관계로 아침을 먹자마자 나와야 했다. 경기장에는 검은 선글라스로 다크 서클을 가린 감독이 나와서 아이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다들 잘 잤나?” “네!” 감독은 비장했고, 아이들은 용기로 가득 차 있었다. 춘추 대회를 휩쓸겠다는 야심은 비단 감독만의 것은 아니었다. 오늘은 총 2경기가 오전 오후로 펼쳐지는데, 첫 경기는 오전 10시부터였다. 그래서 경기장 관람석에 올라갔을 때, 몇몇 사람은 바람막이를 입고 있었고, 더러 반 팔 티셔츠만 입은 사람들은 쌀쌀한 기온에 팔을 비비며 열을 내고 있었다. 더위가 가시자마자 갑자기 서늘해진 아침 기온에 적응이 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우선 첫 경기 보면서 상대를 분석한다. 전반만 볼 거니까 자세히 보고 특히 자기 포지션에서 상대해야 할 선수들의 움직임을 모두 체크해라. 나중에 어느 팀이 상대가 될지 모르니까.” 강팀으로서의 여유랄까, 아니면 긴 안목에서 내린 결정이었을까.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지만, 향후의 경기를 잘 풀어나가려면 상대를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단유는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곧 시작될 경기를 기다렸다. “누나 오냐?” 명수가 옆에 앉더니 대뜸 그렇게 물었다. “아니. 넌? 상미 와?” ‘상미가 왜 오냐’고 받아칠 거라 생각했는데, 명수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단유가 돌아보자 명수가 잠깐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시간 맞춰 올 거야.” “진짜?” 명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겠네?” “좋긴. 부담되지.” 명수는 한쪽 다리를 달달 떨면서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곧 시합이 시작되었다. 경기 초반 두 팀의 선수들은 몸이 덜 풀렸는지 움직임이 생각보다 빠르지 않았다.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팀의 선수들은 전체적으로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너희들은 저렇게 긴장하지 마라.” 감독이 진지하게 말할 정도로 선수들의 긴장도가 두드러졌다. 그 결과 위태위태하던 수비진이 결국 무너지면서 전반 5분 만에 골이 나왔다. “에이 볼 거도 없네. 저 팀이 너무 못하는데요?” “경기 결과가 중요한 게 아냐. 두 팀 중 한 팀과 우리가 붙을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야. 다들 집중해서 보도록. 나중에 확인할 거야.” 너무 이른 시간에 실점한 게 오히려 충격요법으로 작용한 것인지, 파란 유니폼의 움직임이 점점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아 만회 골이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때문에 다소 지루한 공방전이 전반 대부분을 차지했다. 아무리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들이고, 선수라 해도 아직은 나이가 어린 이들이기에 집중력이 오래가지 못했다. 더군다나 오후의 시합이 준비되어 있는 이들인데 남의 경기에 온 정신을 쏟을 수 있을까. 몇몇 아이들은 옆 사람과 잡담을 하면서 시합에서 눈을 떼기 시작했고, 감독 역시 무리하게 아이들을 다그치기 미안할 만큼 경기력이 떨어지는 시합이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보는 이들과 달리, 경기장 위의 아이들은 어찌나 필사적인지 실력과 기술의 부족을 오기와 끈기로 버텨내고 있었다. 거기에 운까지 더해진다면 감탄할 만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와아. 저걸 넣네.” 명수가 손뼉을 치며 파란 팀의 득점에 대해 감탄을 터뜨렸다. 솔직히 골이 나올 거라 예상을 못 한 부분이었는데, 여태 공 배달에만 집중하던 파란 팀 미드필더가 조금 먼 거리에서 슛을 쐈고, 마침 앞으로 나와 있던 골키퍼는 그 슛에 손도 대지 못했다. 펄쩍 뛰어오른 골키퍼의 장갑 위로 지나간 공은 아슬아슬하게 골포스트의 아래쪽을 맞고 굴절되면서 골망을 뒤흔들었다. 전반 종료 3분 전이었다. 그리고 1:1로 전반이 마무리된 상황에서 감독이 일어났다. “더 보고 가면 안 돼요?” 아무리 지루했던 경기라도 전반이 이렇게 마무리되면, 후반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별거 아닌 경기력을 보일 거란 게 예상되지만, 또 방금의 슛처럼 예상 못 한 경기장면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가 되기도 하니까. “우리 시합도 준비해야지. 다들 일어나.” 코치만 남아서 경기를 마저 보고 상대팀 분석을 하기로 한 뒤, 감독과 아이들은 관람석을 떠나 경기장 내부의 소강당으로 향했다. 선수대기실은 사용 못 하지만, 여기서 간단하게 오늘의 작전을 브리핑하고 몇 가지 점검을 하면 금방 시간이 흐를 것이다. 무엇보다 감독은 아이들의 멘탈을 점검하고 건강상태를 최종 확인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코치가 돌아왔다. 아이들은 가장 먼저 시합결과를 물었다. “다니엘중이 이겼다.” 파란팀의 역전승이란 말에 아이들이 아쉬움의 탄식을 했다. ‘끝까지 봤어야 했는데’라는 말이 나오는 분위기에서 코치의 말이 이어졌다. “4:1로 이겼어.” 감독이 더 놀란 얼굴로 코치를 바라보았다. “전략이 대단했어요. 전반에 뛰던 선수 중 3명을 과감히 교체하길래, 문제가 있구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후반에 나온 3명이 괴물 같은 애들이었어요. 마치 걔들이 진짜 스타팅 멤버였단 듯이요.” 몸을 제대로 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했는데, 후반 3분 만에 1골을 얻으며 역전에 성공, 그리고 다시 8분경에 쐐기를 박나 싶었는데 이후에도 한 골을 더 넣으면서 결국 4:1 완승이라는 코치의 이야기였다. “일단 그건 다음 경기니까, 나중에 비디오로 확인해보고 우린 오늘의 시합에 집중하자.” 감독은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너희들도 보고 들어서 알겠지만, 상대의 골이 나온 시간이 언제냐?” 감독의 의중을 파악한 아이들이 외쳤다. “전후반 시작할 때요.”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잘 알겠지만, 경기 시작할 때와 끝날 때, 그리고 전반 끝나기 5분 전과 후반 시작 후 5분이 가장 골이 나기 쉬운 시간이다. 뭐 때문이라고?” “집중력이요.” “너희들은 그런 실수, 절대 해선 안 될 거야. 단순히 골을 먹는 것으로 끝이 아냐. 한 골 먹을 때마다 충격이 얼마나 심한지, 겪어서 잘 알잖아. 그렇지?” “네!” 그래서 경험이 중요한 것이다. 경험했기에 이 아이들은 중요성을 누구보다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감독은 팔짱을 끼며 말을 이어나갔다. “같은 말로 너희들이 노려야 할 시간도 그 시간이다. 상대의 집중력이 떨어진 시간. 그 시간에 골을 넣어야 상대는 충격으로 비틀댈 것이니까. 알겠지?” 감독은 손뼉을 치고 둘러보았다. “가자.” 마치 당장에라도 함성을 지르며 경기장으로 뛰어나가야 할 것 같은 감독의 멘트였지만 실상은 앞 팀이 비우고 간 대기실로 가서 짐을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고 몸을 풀어야 했다. 장계중학교 축구부의 시합이 시작될 무렵, 벤치에 앉은 단유는 옆 사람이 건넨 수건을 받아 무릎 위에 걸쳐 놓고는 편한 자세로 경기 시작을 기다렸다. “긴장 안 되냐?” 옆에 앉은 2학년 동기가 물었다. “긴장은 무슨. 내가 시합 뛸 것도 아닌데.” 동기는 사이드라인 근처까지 나가 있는 감독의 뒷모습을 보다가 말했다. “니가 나가면 좋을 텐데.” “나보다 니가 나가서 뛰는 게 더 좋을걸?” 그거야 당연한 이야기고. 아무래도 직접 뛰는 게 더 좋으니까, 축구부에 들어와서 축구화를 신고 경기장에까지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단유가 경기에 나서면, 그래서 만약 골키퍼라도 한다면, 절대 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소년은 판단했다. 그간 자신이 봐왔던 단유의 실력이라면 말이다. 곧 경기가 시작되었고, 아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오후에 시작한 탓에 기온도 조금 올라서인지 아이들의 몸은 크게 굳어있지 않았다. 게다가 봄 대회의 경험치가 쌓여서인지 상대 팀보다 덜 긴장한 모습이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집중력이라는 부분은 그런 것과 별개로 쳐야 하나 보다. “위험해! 수비! 수비 나와야지!” 전반 4분이 지났을 즈음에 벌써 감독은 큰 소리로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상대 공격수 두 명이 수비진을 헤집고 들어오는데, 이를 효율적으로 막지 못해 뚫리고 말았다. 최종 수비수에게까지 도달한 시점에서 골키퍼가 각을 줄이기 위해 앞으로 나왔다. “나오지 마! 들어가! 들어가!” 감독이 애타게 불렀다. 골키퍼의 정면으로 들어온 공격수 말고, 오른편에서 가운데로 달려드는 다른 공격수가 있었는데 골키퍼가 미처 보지 못했는지, 아니면 가운데 녀석이 확실히 공을 찰 거라고 예상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골키퍼의 시야가 좁아진 것은 분명했다. 상대 공격수는 최종 수비수와 골키퍼를 뚫을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공을 옆으로 보냈다. 그제야 골키퍼가 다른 선수를 인식했고,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오른쪽 윙을 맡았던 선수의 왼발에 공이 걸렸다. 그리고 골키퍼도 힘껏 몸을 던졌다. 동시에 벤치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안 돼!” ======================================= [399] 레밍(4) 만약 상대 공격수가 조금 더 침착했다면 안정적으로 슛을 쐈겠지만, 그 역시 긴장을 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공을 제대로 차지 못하는 실수를 했고, 다급했던 골키퍼의 손에 걸리고 말았다. 손에 맞고 튀어나온 공은 중앙으로 쇄도하던 공격수에게 걸렸고, 이를 막기 위한 선수들의 적극적인 수비 속에서 혼전이 벌어졌다. 끝내 중앙 수비를 맡았던 3학년 선배에 의해 공은 멀리 옆줄을 벗어나며 드로우 인이 선언되었다.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리는 장계중학교 벤치 선수들이었다. “위험했다.” 그러나 안심하기는 일렀다. 심판이 휘슬을 불며 골키퍼에게로 향했고, 그제야 골키퍼가 골문 앞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한 선수와 감독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상황을 주시했다. “김단유.” 당연히 감독은 단유를 불렀다. “준비해야겠다.” 단유는 골키퍼가 있는 쪽을 바라보며 일단 대답했다. “네.” 필드의 선수들과 의료진에 둘러싸여 정확한 사항은 알 수 없지만, 일단은 걸치고 있던 조끼를 벗어 던지고 다리를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골키퍼가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벤치의 선수들이 환호와 박수를 보내는 사이, 필드에 있던 선수 한 명이 감독에게 다가왔다. “넘어지면서 어깨를 바닥에 세게 부딪혔던 모양입니다.” “어깨?” 어깨라면 심각하게 걱정해야 할 부위였다. 팔을 들어 올리지 못하는 골키퍼가 무슨 공을 막을까. 감독은 이렇게 이른 시간에 골키퍼를 교체할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단유라는 든든한 후보를 둔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역시 게임보다 골키퍼를 맡은 선수의 건강이 더 염려되었다. 비록 게임에서 이겨야만 하는 상황이라도 중등부 감독으로서의 책임은 각 선수들의 안전이 우선되어야 함을 잊지 않은 감독이었다. 그러나 곧 의료진들 사이에서 인상을 구기며 일어나는 골키퍼를 볼 수 있었기에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큰 사고가 아님을 다행스럽게 여기며 감독은 곧 교체를 지시하기 위해 본부석으로 이동하려 했다. 그때 골키퍼를 살피러 갔던 코치가 달려왔다. “계속하겠다는데요?” “뭐?” “계속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리네요.” 감독은 인상을 쓰며 골키퍼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걱정해준 선수들에게 괜찮다고 어필하는 중인지,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선수들은 그런 골키퍼의 등과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격려를 하고 있었다. “의료진은?” “외견상으로는 타박상 정도지만, 좀 더 정확히 알려면 병원에 가보는 게 좋을 거 같답니다.” 경기 중에는 심각한 부상을 입어도 본인이 자각하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을 감독은 과거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골키퍼의 마음, 책임을 지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기에 머뭇거리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감독과 단유의 눈이 마주쳤다. “감독님.” 감독은 말해보란 듯 턱을 살짝 끄덕여 보였다. “일단 지켜봐 주시죠.” 방학 때마다 학원에 가야 한다며 연습에 빠지곤 하던 아이였다. 하지만 방학만 끝나면 다시 축구부로 돌아와 열심히 활동하는 아이기도 했다. 정황만 보면 축구부에 별로 열정이 없는 선수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부모님의 반대 때문에 방학 때는 학교에 나오지 못하지만, 축구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강한 친구이기 때문에 더 열심히 골키퍼 연습을 받던 소년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골키퍼를 하고 싶어 했던 소년도 아니었다. 하지만 축구를 좋아하고 친구들과 어울려서 경기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컸기에 자진해서 골키퍼 포지션을 선택했고, 그에 어울리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던 소년임을 감독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많이 챙겨주었고 개인 연습 때도 신경을 많이 썼었다. 다만 열정과 달리 평범한 재능과, 애정에 비해 부족한 연습 시간이 그를 우수한 골키퍼로 만들어주진 못했기에 골문이 부실하다는 생각을 가졌을 뿐이었다. 단유 역시 명수를 통해 이야기를 들었고, 그래서 저 소년이 지금 얼마나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어지간해선 그의 자리를 계속 지켜주고 싶었다. “적어도 전반까지는 지켜봐 주세요. 정 안되면, 그때 들어가도 되잖아요, 저희.” 과연 단유의 말대로였다. 장계중학교는, 비록 조금 전의 위기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여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챔피언이니까. “알았다.” 감독은 교체 지시를 보류했다. 단유는 다시 벤치로 돌아갔고, 단유 옆에 앉았던 소년, 동기가 그에게 조끼를 건넸다. “고맙다.” “뭐가?” “저 선배 말이야.” 동기는 골키퍼를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아마 고등학교 올라가면 축구 못 할 거야. 집에서는 공부에 전념하길 바라니까.” 착한 아들 노릇도 해야 하고, 모범생 역할도 해야 하니, 결국 축구는 취미 생활 정도로 남겨야 할 모양이었다. “이번이 마지막 대회겠지.” 단유는 골키퍼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저 선배도 필드를 종횡무진 뛰어다니며, 멋진 슛을 넣는 모습을 그리며 축구장에 발을 디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변 사정에 맞춰 골키퍼를 선택했고, 3년 동안 그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다. 그리고 지금, 어느 정도의 부상일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통증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끝까지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싶다는 의지와 각오가 벤치에까지 느껴졌다. 돕지는 못해도 응원은 해 주고 싶다, 는 게 단유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후, 장계중학교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명수가 대활약을 했다. 상대의 수비진을 가볍게 뚫고 지나가더니 골키퍼마저 제치고 가볍게 한 골을 집어넣었다. 필드 위의 선수들이 모두 두 손을 들고 명수에게 다가가 골을 축하해주었다. 골키퍼 역시도 멀리서 손뼉을 치며 명수의 골을 축하했다. 그 뒤로도 명수의 어시스트로 한 골을 추가하면서 전반을 2:0으로 앞선 채 마무리했다. “도윤아, 어깨 괜찮아?” “괜찮습니다.” 감독은 도윤을 지긋이 바라보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후반도 뛸 수 있겠어?” “네.” 도윤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외쳤다. “도윤아. 무리할 필요는 없다. 축구 만화에나 나올 영웅 심리로 무리하다가 자칫 심각한 손상을 받으면 평생을 고생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특히 어깨 관절은 쉽게 다치는 부위라서 무리하면 안 돼.” “괜찮습니다. 크게 안 다쳤어요. 정말이에요.” 도윤이 눈에 힘을 주고 감독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자 다른 선수들이 일어나며 도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저희가 더 열심히 뛰어서 도윤이에게까지 공이 안 가도록 잘 막을게요.” “선배랑 같이 뛰겠습니다.” ‘좋을 때다’ 라며 피식 웃어버리는 코치를 일별한 감독은 열혈 소년들의 열기를 인정해야 했다. “그래, 알았다. 대신 시합 끝나고 도윤이 넌 이 코치랑 같이 병원 가서 진단서 끊어와야 한다. 그리고 만약 심각하다고 판단되면 다음 시합부터 출전 못 한다. 알았지?” “네!” 일단 지금 이 시합을 뛰는 게 중요하지, 그다음은 나중에 생각해도 될 문제라 생각한 도윤의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넌 오늘 푹 쉬어도 되겠다.” 명수가 웃으면서 단유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러려고.” 단유도 덩달아 웃으면서 도윤을 바라보았다. 마침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을 응원하던 이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던 도윤과 시선이 마주쳤다. 단유는 말없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때로는 말없이 응원해주는 게 더 좋을 때도 있다고, 나윤이 말했었다. 후반에는 상대 팀도 각오를 다졌는지 꽤 공격적으로 나왔다. 그래서 철저하게 막겠다던 수비진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힘들어했다. 하지만 미드필더 진까지 내려와 수비를 도우니 상대는 쉽게 골문을 두드리지 못했다. 더군다나 명수가 호시탐탐 역습을 노리며 센터 라인 부근을 얼쩡거리니 무조건 공격으로 나서지도 못했다. 후반 24분경, 공격이 실패하면서 역습 상황이 펼쳐졌고, 명수는 센터라인에서부터 공을 잡아 홀로 드리블을 하며 텅 빈 적진을 내달렸다. 상대 수비수들이 힘껏 달려가 명수를 막으려 했지만, 마치 메시에 빙의된 듯 현란한 드리블로 선수들을 제쳐 나가던 명수는 마침내 슛을 쏘았고, 골키퍼는 무기력하게 골을 허용했다. 명수가 양손을 치켜들고 벤치 쪽으로 세레머니를 위해 달려들 때였다. 명수가 갑자기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손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 방향이 묘해서 단유가 고갤 돌렸더니 관중석 위에 상미가 펄쩍 뛰면서 명수의 골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희극처럼 느껴져 단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후 감독은 명수의 체력 보호를 위해 교체카드를 사용했다. “좋냐?” “좋지!” 키득거리는 명수에게 단유는 수건과 물을 건넸다. 후반 종료 5분 전쯤, 감독이 단유를 불렀다. “교체카드가 한 장 남았다.” 그래서? “나가서 몸 좀 풀어봐라.” “다른 애들도 있잖아요.” “그냥 임팩트 있게 시합을 끝내고 싶다. 이래 봬도 춘계대회 우승팀 감독인데 욕심이 안 나가겠니?” 그냥 이렇게 시합이 끝나도 이기는 것은 매한가지이지만, 감독은 확실한 챔피언 이미지를 상대팀은 물론 관중석에서 관람하고 있는 다른 팀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어 했다. “딱 한 골만 넣고 끝내봐라.” “제가 넣고 싶다고 넣을 수 있나요?” “할 거 같으니까, 주문하는 거지.” 감독의 기분이 꽤 업이 된 것 같았다. 단순히 시합을 이겨서만이 아니라 선수들의 파이팅에 고무된 탓일 테다. 남은 시간은 추가 시간을 합쳐도 5분이 되지 않을 시간. 공격 한 번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운 시간에 장계중학교는 교체카드를 사용했다. 스트라이커 포지션의 선수를 빼고 등장한 단유는 다른 팀들에게 낯선 얼굴이어서 호기심을 자아냈다. “단유야.” 필드 중앙으로 뛰어가던 중에 윙을 맡고 있던 3학년 선배가 말을 걸었다. “네.” “패스해 줄게.” “고맙습니다.” 단유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중앙 센터 써클 부근에 섰다. 골키퍼에서 시작된 장계 축구부의 공격은 곧 윙어에게 공이 갔고, 앞을 막는 수비수를 무리하게 뚫는 대신 패스를 선택한 윙어의 공은 곧 단유에게로 향했다. 준다고 하기에 받겠다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황할 이유는 없었다. 오른발로 공을 받고 몸을 돌려 상대의 골문을 흘깃 바라본 단유는 곧 달리기 시작했다. “막아!” 덩치가 큰 선수에 대한 선입견인지 드리블을 잘 못 하거나, 혹은 느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단유가 빨랐다. 하지만 단유는 그렇게 오래 뛰지 않았다. 센터 서클로부터 20m 정도를 더 뛰다 멈춘 단유는 다른 수비수들이 뭔가를 하기도 전에 공을 찼다. 페널티 에어리어로부터 10m는 더 떨어져 있던 지점, 골대로부터도 대략 30m에 조금 못 미치는 먼 거리에서 찬 공이었다. 뻥―, 워낙에 큰 소리가 나서 달려들던 수비가 놀라서 몸을 움츠릴 정도였고, 멀리 떨어져 있던 벤치의 선수들까지 몸을 들썩거릴 정도의 소리가 나왔다. 단유의 발에서 시작된 하얀 선이 골대를 향해, 마치 직선을 그리듯 그어지더니 곧 골망을 뒤흔들었다. 장계 축구부 선수들은 연습 도중 한 번 본 적이 있어 충격이 덜하다지만, 그래도 같은 나이 또래의 시합 중에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파괴력의 캐논슛이었고, 정식 시합 중에 구사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지 놀란 눈을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상대 팀의 충격보다야 덜하겠지만. “뭐야?” “저 선수 뭐야? 중학생 맞아?” “저걸 어떻게 막아?” 관람석에서 지켜보던 다른 팀 선수들까지 놀란 얼굴을 하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단유는 덤덤한 얼굴로 돌아섰고, 달려오는 같은 팀 선수들의 환대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 힘을 줘야 했다. 머리와 어깨, 등을 맞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던 단유는 고개를 돌려 관중석을 보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를 치켜세우고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뭐야?’ 벤치 근처에서 뛰쳐나와 수건을 휘돌리며 기뻐하고 있던 명수가 고개를 돌렸다. 관중석 안쪽 깊숙한 곳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던 한 여자가 수줍게 손뼉을 치고 있었다. “뭐야, 누나 안 온다면서?” 명수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뚜막 고양이가 저놈이었어.” 단유는 관중석을 향해 박수를 몇 번 쳐 보이고는 고개를 돌려, 같은 팀의 환대에 답례했다. 경기는 그대로 마무리되었고, 단유의 캐논슛은 각 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데 성공했다. “수고했다.” “고맙습니다.” “정말 넣을 줄 몰랐다.” 단유는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정말요?” “그래. 아무튼, 잘했다.” 감독은 단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아, 그리고 장래 희망, 진지하게 고려해 봐라. 축구 선수도 꽤 괜찮은 직업이다. 멋있는 직업이기도 하고.” “안돼요, 감독님.” 명수가 불퉁한 얼굴로 말을 가로챘다. “단유가 진짜 축구 선수가 되면 저의 축구 인생에 큰 걸림돌이 될 거란 말이에요.” “단유가 없으면 걸림돌도 없다는 이야기냐?” “그렇지 않을까요?” 히죽 웃는 명수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감독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오만한 녀석.” 그래도 잘하니까 봐준다. 감독은 땀에 젖은 명수의 머리를 웃음이 그칠 때까지, 격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 [400] 코스모스의 순정(1) “재미있었어요?” “응, 재미있었어. 특히 마지막이 제일 재미나더라.” 너 골 넣었을 때, 라며 나윤이 수줍은 웃음을 지어 보이니, 단유는 머쓱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냄새 많이 나죠?” “넌 냄새에 되게 민감한 거 같아. 조금만 땀 흘려도 냄새나냐고 그러고. 혹시 내가 연습실에서 안무 연습하면서 땀 흘렸을 땐, 가까이 오기도 싫었던 거 아냐?” “조금?” “야!” “농담이에요. 아무튼, 오늘 와주셔서 고마워요.” “잠깐 시간 내서 온 건데 뭘. 어차피 회사에 있어 봐야 골방에 틀어박혀서 노래나 듣고 있었을 텐데. 바람도 쐬고 남자친구도 보니까 기분전환이 된 거 같아 더 좋네.” “그럼 다시 회사로 돌아갈 거예요?” “응, 그래야지.” 기약 없는 컴백을 기다리며 다시 골방으로 들어가야겠지.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넌?” “저요? 전 집에 가서 씻어야죠.” “바로 집에 가는 거야?” “가서 씻고, 공부도 해야죠.” “아, 다음 주에 시험이라고 했지?” “뭐, 그렇긴 하지만, 딱히 그런 이유라기보다는 최근에 관심이 가는 주제가 있어서 그걸 공부하고 있어요.” “뭔데?” “관성 모멘트라고 회전 운동을 할 때 물체의 질량이….” “오케이, 거기까지.” 나윤이 손을 뻗어 단호하게 외쳤다. “니가 그런 이야기할 때마다 다른 세상 사람같이 느껴져.” “다른 세상이요?”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왜 미안해요?” “공부하기 바쁜 애를 꼬셔서 시간만 뺏는 건 아닌가 싶어서 말이야.” “또 그 소리.” 단유는 맑은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으로 나윤의 볼을 쓰다듬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또 얼굴이 붉어진 나윤은 그래도 그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최근 들어 점점 단유의 스킨십이 자연스러워지고 있는데, 그 손길을 받을 때마다 나윤은 자신이 이 남자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확인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공부하다가 지치면 전화해.” “누나도 연습에 지치면 전화해요.” “난 전화하기가 미안해.” “왜요?” “괜히 집중해서 공부하는데 방해하는 것 같아서.” 단유는 괜히 한숨을 쉬는 척하자, 나윤이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알았어, 알았어. 그런 생각 안 할게.” “생각날 때마다 전화해요. 누나 전화는 괜찮으니까요.” “고마워.” “그런 거로 고맙다니요. 그런 말 말아요.” 대화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이유는 역시 아쉬움이 남아서이리라. 감독님에게도 먼저 돌아가겠노라 인사한 후, 단유는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깨끗하게 몸을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상쾌한 기분에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노트를 펼치고 펜을 잡자, 조금 전까지의 일들은 모두 잊고 오직 노트에만 집중하는 단유였다. 하지만 한 시간 후, 단유는 펜을 내려놓았다. 지금까지는 그저 자신이 여태 배우고 익힌 지식들을 정리하는 수준이었다면, 이 연구과제는 자신이 모르는 부분, 혹은 막히는 부분을 뚫어나가야만 하는데 노트와 펜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던 탓이었다. 책장에 구비 된 책은 이미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지라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도서관에 가볼까?’ 아니면 서점에 가서 책을 사도 될 일이다. 예전처럼 돈이 없어 책을 사지 못할 것도 아니니까. 단유는 생각난 김에 서둘러 서점을 가보기 위해 준비를 하고 현관을 나섰다. “어? 너 어디가?” 마침 명수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고 있었다. “서점에 책 사러.” “설마 서점 데이트?” “응?” “누나랑 서점에서 데이트하려는 거 아냐?” “그런 거 아냐.” 단유의 단호한 대답에 흥미를 잃은 명수는 다녀오라며 간단하게 손짓으로 배웅한 뒤 집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 탄 단유는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잠시 ‘서점 데이트’라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안 좋아할 거 같은데?’ 손때를 덜 탔던 책들을 보면, 책을 별로 안 좋아하던 거처럼 보였기에. ‘모르지. 내가 착각한 것일 수도 있고.’ 1층에서 내린 단유는 오피스텔 정문 대신 비상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단유를 만나고 회사로 돌아온 나윤은 복도에 비치된 정수기 앞에서 물을 마시던 종철과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나윤이 먼저 고개 숙여 인사하자, 정신이 딴 데 팔려있던 종철이 뒤늦게 나윤의 존재를 알아보았다. “어, 안녕하세요. …어디 갔다 오나 봐요?” “아, 네.” 손에 쥔 선글라스와 모자를 쓴 행색을 살피던 종철이 나직하게 물었다. “남자친구?” 짓궂다 여기면서도 종철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나윤은 대답을 피했다. “여유롭게 보여서 좋네요.” 비꼬는 걸까? 시선을 돌렸던 나윤이 종철을 바라보니, 이번엔 종철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태 안무 연습을 하다 나온 것인지 턱 끝에 맺힌 땀방울들이 바닥을 물들이고 있었다. ‘여유일까?’ 문득 나윤은 자신이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단유에게 ‘방해’가 될 것 같다며 미안해했지만, 정작 자신은 ‘방해’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물론 단유를 좋아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시간을 내는 게 뭐가 문제냐, 라고 생각하는 면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연습에 임하는 자신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라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말없이 생각에 잠긴 나윤을 흘깃 바라본 종철은 괜한 말로 나윤에게 상처를 준 것 같다 여겨 사과했다. 아니 사과하려 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생각해보면 딱히 잘못된 말도 아니지 않은가? 누구는 데뷔도 못하고 언제 데뷔할지도 모르게 미래를 회사에 저당 잡힌 채로 땀을 흘려야 하는데, 나윤은 데뷔도 했고 노래도 성공을 거뒀고 그래서 저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지 않은가. “저 먼저 가 볼게요. 수고하세요.” 종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몸을 돌렸다. 어차피 남자친구가 있으니 자기 같은 팬 따위야 눈에 차지도 않을 것이고, ‘그러니 내가 무슨 말을 한들, 그게 뭐 귀에나 들리겠어?’ 라는 마음에 종철은 가슴 한편에서 생긴 후회의 감정마저 짓눌러버렸다. 잠시 후, 골방이라고 불렀던 보컬 연습실에 들어온 나윤은 의자에 앉아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고민을 털어냈다가도 다시 고민이 생기고, 의욕이 생겼다가도 다시 꺾이기를 반복하는 이 생활이 지겹다고 느껴졌다. ‘차라리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았다면.’ 학교에 있는 친구들은 이런 걱정 하지 않고 살 텐데. 그저 시킨 대로 공부만 하면서, 자기에게 맞는 대학에 가고, 적당한 회사에 취직해서 독립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 차라리 부럽다. 혹자는 지금 나윤이 걷는 이 길을 성공의 길이라고 불렀고, 다른 이들의 삶을 평범하고 지루한 삶의 길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맞고 틀린 길은 없으니, 꿋꿋하게 자기의 길을 가라고 하지만, 어느 길이 자신의 길인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자신의 길은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는데, 반짝이는 스타에 대한 ‘동경’과 취미로 삼으면 그만일 노래를 업으로 삼은 괜한 ‘오기’ 때문에 이런 스트레스를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제자리로 돌아간다면, 편해질까?’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귀에 이어폰을 꽂고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깨닫지 못한 나윤은 배터리 다 된 MP3기기를 손에 쥔 채로 가만히 시간을 보냈다. 안무연습실로 돌아온 종철에게 2살 어린 석원이 물었다. “형?” “응?” “…아, 아니에요.” 밝은 핑크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연습생이 머리 색만큼 볼을 붉히며 물러서는 모습을 보고 종철이 아차했다. “아, 맞다. 미안. 깜박했어.” 굳이 자신이 바람도 쐴 겸 나가서 물을 떠 오겠다고 나가놓고선, 빈손으로 돌아와 어린 동생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괜찮아요. 저도 땀 좀 식힐 겸 나갔다 오죠. 물통은요?” “아, 그거. 아마 정수기 근처에 있을 거야.” 물통도 밖에 두고 나왔다. 정신머리하곤. 자책하는 종철에게 석원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저도 가끔 연습 오래하면 깜빡깜빡하는데요. 형도 좀 더 쉬세요. 벌써 3시간 동안 쉬지 않고 했잖아요.” 종철은 석원의 배려에 고맙다고 말하며 연습실 벽에 기댄 채 주저앉았다. 맞은편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보니 석원의 말처럼 지쳐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러다 슬쩍 눈을 돌리니 주변의 아이들도 많이 지쳐 보였다. ‘쉬었다 하자’고 권하니 못 이긴 척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이들이었다. 헤헤거리며 웃음을 짓는 여자아이들도, 웃을 기운조차 없어 고개를 떨구는 이들도 오랜 연습에 지치긴 마찬가지이리라. 쉬라는 말에도 설렁설렁 움직이긴 하지만 스텝을 밟으면서 안무 동선과 동작을 숙지하려 하는 연습생도 있었다. 다양한 모습이지만 하나같이, 지금의 연습이 데뷔를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자신이 그랬듯이.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저렇게 연습한들 데뷔를 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이 바닥에 있다 보니 이러저러한 모습도 다 보며 지냈다. 어떤 이는 미련하게 연습만 했지만, 어떤 이는 부모님과 함께 대표를 자주 찾아뵙는 정성을 보이기도 했고, 어떤 이는 방송국에 찾아가 로비를 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다고 다 성공을 거두지도 못하더라만. 그래도 그런 로비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게 더 좋았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자신이 여자였으면’ 하는 생각도 들고, ‘여자 연습생’들은 다 저러겠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설령 한 번도 로비를 해보지 않았던 연습생이라도, 내심으로는 그런 기회를 노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한 적이 있었다. 문득 ‘나윤’도 그런 연습생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TV로 보이는 이미지와 실제의 이미지가 다른 경우는 허다했고, 그 경우에 비쳐 보자면 나윤도 보이는 모습만 보고 판단할 순 없는 법이다. ‘게다가 남자친구도 있지 않은가?’ 뮤직비디오에 같이 출연했던 남자와 사귀고 있는 나윤이니, 일적으로 관련되면 쉽게 마음을 허락하는 스타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회사의 대표 이사 중 한 명인 박 이사에게도 마음을 허락했을지도. 마음속의 어둠이 점점 크기를 더해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는 종철이었다. “똑똑.” 나윤은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깜짝 놀라 퍼뜩 고개를 돌렸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아무리 노크를 해도 돌아보질 않아요?” 단유가 긴 팔 티셔츠 한 장을 가볍게 입은 채로 문 옆에 서 있었다. “언제 왔어?” “방금이요.” 단유는 나윤이 앉은 의자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나윤을 올려보았다. 키가 큰 단유가 그러고 있으니, 어쩐지 귀엽다고 느껴져서 나윤은 웃음을 픽 하고 터뜨렸다. “무슨 일로 온 거야?” 단유는 사실대로 서점에 가려 했음을 이야기했고, 문득 생각나 같이 가지 않을 건지 물어보려고 왔다고 대답했다. “뭐야, 그게. 데이트 신청을 그렇게 멋없이 하니?” “멋은 잘 모르겠고요. 누나 보니까 아무래도 그냥 혼자 가야 할 거 같아요.” 단유는 자세가 불편했는지,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나윤이 단유의 어깨를 누르며 다시 주저앉혔다. 왜, 라는 단유의 눈빛에 나윤이 말했다. “맨날 올려만 보다가 이렇게 보니까 너무 좋은데?” “그럼 계속 이러고 있을까요? 누나랑 있을 때마다?” “오늘이면 충분해. 그리고 왜 혼자 가겠다는 거야?” “누가 문을 두드리는 것도 모를 정도로 집중하고 있는 사람한테 시간 내달라고 말하기가 미안해지더라고요. 누나가 평소에 왜 미안하다는 말을 습관처럼 하는지 알겠더라고요.” “아냐, 나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어.” 다급하게 변명하는 나윤에게 손을 뻗은 단유는 나윤의 손을 잡고 말했다. “고민이 많아요?”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윤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처럼 눈시울이 붉어졌다. “왜요?” “아니, 그냥 그러네. 아이참. 부끄럽게.” “무슨 고민인지 모르겠지만, 만약 하고 싶으면 이야기해요. 잘 들어드릴게요.” “…고마워.” 나윤은 찔끔 새어 나온 눈물을 손가락으로 찍어내고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계속 골방에 있었더니 괜히 우울해진 거 같아. 나가자. 서점이든 어디든 나가서 바람이라도 쐐야겠어.” “이러다 나가버릇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나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모르겠다. 이러다 진짜 나가게 될지도. 하지만 일단은 그런 생각도 다 뒤로 미뤄야겠다. 단유에게까지 자신의 걱정과 우울함을 전염시키고 싶지 않았다. ======================================= [401] 코스모스의 순정(2) 단유는 처음의 걱정과 달리 서점에 가서도 딱히 불편하거나 지루해하지 않는 나윤을 보고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관심 있는 책이 있어요?” “관심이야 있지.” 나윤이 향한 곳은 역시나 음악, 악기와 관련된 코너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리번거리다 책 한 권을 뽑더니 씩 웃었다. “이런 책?” <알기 쉬운 작곡법>이라는, 직관적인 제목의 책을 집어 든 나윤은 꿈이 ‘싱어송라이터’라고. “아이돌과 거리가 멀지 않나요?” “아이돌 중에서도 직접 자작곡을 만들어서 발표하는 경우도 있어.” 그쪽 세계에 무지한 단유는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혹시 사고 싶은 책이 있으면 사요. 제가 사드릴게요.” “진짜?” “오늘은 제가 오자고 했으니까요.” 연인에게 책을 선물하는 것마저도 단유답다고 생각하며 나윤은 단유의 손을 잡았다. “같이 골라줘.” “잘 모르는데.” “괜찮아.” 그냥 옆에 있어 주기만 해도 되니까. 한참 책을 고르던 와중에 나유은 옆에서 슬쩍슬쩍 책을 집어 들어 내용을 살피는 단유에게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혹시 너도 작곡 한 번 배워보지 않을래?”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 안 되겠던데요.” 나윤은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해 봤어?” 조금 부끄러운 과거였지만, 예전에 지난 음악 차트의 노래 순위를 맞추기 위해 곡의 ‘규칙성’을 찾아서 분석하는 작업을 벌인 적이 있었다. 나름의 규칙을 찾고 통계적 분석을 통해 순위를 맞추는 일까지는 어느 정도 가능했었지만, 곡 자체를 만드는 일은 전혀 다른 일임을 확인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의 개념이었고, 음악적 재능이 곁들여져야 했다. 단유는 그런 창조의 문제에 있어 어려움을 느꼈다. “음의 높낮이, 곡의 리듬, 이런 걸 조합해서 완전히 새로운 음악을 만든다는 게 저한테는 너무 어렵더라고요. 애초에 아무 생각도 안 들던데요?” 나윤이 파,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가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 얼른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지만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웃음기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니가 정말 못 하는 것도 있구나.” “저 못하는 거 많다니까요.” 나윤은 팔짱을 끼고 한 손으로 턱을 붙잡은 자세로 끙, 궁리하더니 손뼉을 쳤다. “같이 하자.” “네?” “우리 같이 작곡 배워서 곡 한 번 만들어보지 않을래?” “네?” “요즘 작곡가들도 팀을 이뤄서 하잖아? 물론 그 사람들은 잘하는 사람들끼리 뭉쳐서 하는 거지만, 우린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뭉쳐서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거지. 괜찮은 아이디어 아냐?” “네?” “넌 머리가 좋으니까 금방 배울 수 있을 거고, 창의적인 부분은 내가 좀 괜찮으니까 내가 도우면 쉽게 해낼 수 있을 거야.” 눈에서 ‘광기’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열기를 내비치는 나윤의 선언에 단유는 볼을 긁적였다. **** 수요일에 예선 2차전이 있었지만, 단유는 나가지 않았다. 교감 선생님이 직접 감독에게 단유의 불참을 지시한 까닭이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있을 경시대회에 집중해야 할 시기에 불미스러운 사고라도 있으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학교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단유는 일요일에 있을 수학 경시 대회 준비에 전념할 수 있을, 거 같았지만, 실상은 최근의 개인연구과제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었다. 우연히 단유의 노트를 본 담임이 물었을 때, 물체의 모양에 따른 ‘관성 모멘트’의 적분 값을 구분한 목록을 정리하고, 이를 통계적으로 활용하여 특정 물체의 ‘관성 모멘트’를 쉽게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공식이라는 단유의 설명에 머리를 저었다. “수고해라.” 반면 승민은 직접 문제집을 구해와서 단유에게 건넸다. “이 문제집은 작년까지의 수학 경시 대회 기출 문제들을 정리한 거다. 함 봐봐라.” “고맙습니다.” 문제집이라면 풀어보는 재미라도 있으니, 잠시 연구에서 손을 떼고 머리도 식힐 겸 풀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한 단유였다. “쉽진 않을기다. 모르는 문제 있으면 뒤에 답지 보고 풀어봐라. 내한테 갖고 오진 말고.” 내도 설명하기 어렵다, 라며 돌아서는 승민에게 감사를 표한 뒤 문제집을 펼친 단유는, 곧 문제에 빠져들었다. 하은의 학원 퇴근 시간이 변경되기 전에는 하은과 함께 공부했었지만, 이런 기출 문제로 공부를 해보진 않았었다. ‘어렵네.’ 확실히 단순히 계산하는 것과 다르게, 문제를 읽고 해석하는 것부터가 ‘문제’가 되었다. <이등변 삼각형이 아닌 예각 삼각형 ABC의 외심을 O, 변 AC의 중점을 M이라 하고, 점 A에서 변 BC에 내린 수선의 발을 D라 하자, 삼각형 OAM의 외접원과 직선 DM의 교점을 P(≠M)라 하자. 세 점 B, O, P는 한 직선 위에 있음을 보여라.> 기하학은 사실 단유가 취약한 부분 중의 하나였기에 단유도 쉽게 문제에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우선 B, O, P가 공선점임을 밝히기 위해서는 교점 P의 위치가 어느 쪽에 있느냐에 따라 구분해서 증명해야겠네.’ 단유가 다른 노트를 꺼내 삼각형과 원을 그리고 그 위에 갖가지 기호들을 써넣는 모습을 흘깃 바라본 도하는 턱을 괴고 칠판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이 목에 핏줄을 세우며 설명을 하고 있었다. “물병에 1.5L의 물이 들어 있다고 하면 이게 참값이가 근삿값이가?” “근삿값이요.” “그제? 그라믄 문어의 다리가 8개 있다, 이거는?” “참값이요.” “그제? 그라믄 참값이랑 근삿값이 구분이 가나?” “네.” “그라믄 이거 함 보자, 2/3를 반올림해서 0.7로 나타낼 때, 오차를 구하라고 되어 있제? 오차가 뭐랬노?” “근삿값에서 참값을 뺀 값이요.” 도하의 눈꺼풀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단유가 없다고 축구부에 어려움이 있을 리 없었다. 골키퍼를 맡았던 선배는 다행히도 큰 부상이 아니었기에 계속 골키퍼를 볼 수 있게 되었고, 약간의 통증은 있을지언정 날아오는 공을 펀칭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몸이 최상의 컨디션이 아니라는 점에 경각심을 가졌던지 더 많은 슈퍼세이브를 기록했고, 선수들은 그런 선배를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움직이고 공격적으로 경기에 임했다. “그래도 5:0은 너무 했네.” 지태가 아이스크림을 쭉쭉 빨면서 대답했다. “내가 뛰는 데 그 정도는 해야지.” 명수의 자화자찬에 채윤이 마치 마이크를 건네듯 아이스크림을 내밀며 물었다. “이번 대회 첫 해트트릭을 기록하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얌, 입 앞에 놓인 아이스크림을 그냥 넘겨줄 생각은 없었는지 명수가 입을 크게 벌리고 한가득 베어 물었다. 다 먹으라며 아예 명수 입에 물려준 채윤은 운동장 스탠드 계단참에 등을 기대고 하늘을 보고 있는 단유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응? 아, 저 구름의 질량 값을 구할 방법을 찾고 있었어.” “야, 냅둬. 쟤는 아예 우리랑 다른 종족이라니까? 작년까지는 그래도 참아줄 만했는데, 점점 넘사벽이 돼가는 거 같아.” ‘아이어’로 돌아가 버려, 라는 지태의 농담을 들은 척 만 척하며 단유는 하늘 위의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번 주 일요일에 경시대회 나가지?” “응.” “그다음은 전국 경시대회인가? 언제야?” “몰라. 이번에 통과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데.” “야, 니가 안 하면 누가 하냐?” 지태가 막대에 붙은 아이스크림의 잔여물까지 쪽쪽 빨아먹을 기세로 붙들고 있다가 핀잔을 던졌다. “나라고 다 잘하는 건 아니라고.” “아칸 10마리로 저글링 한 부대를 못 막겠다고 하는 거랑 같은 소리야, 그거.” 무슨 소리냐고 채윤에게 물으니, 게임 이야기라며 신경 쓰지 말라고 눈을 찡긋한다. “생각난 김에 오늘 피시방이나 갈까?” “난 안 돼. 오늘 오후에도 연습 있어.” 모레가 3차전이라서 가볍게 전술 연습을 한다는 명수였다. “오늘은 좀 건너뛰자. 너 때문에 호주머니가 말라간다고. 그리고 오늘 집에 가서 인강도 봐야 돼.” 채윤의 투정에 지태가 김빠졌다는 얼굴로 단유를 보더니 고개를 젓는다. “말아라. 나 혼자 갈란다.” 하면 얼마나 한다고, 중얼대는 지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 일어난 단유에게 명수가 물었다. “집에 가?” “응.” “그럼 내 가방 좀 갖다 놔줘라.” “그래.” “오오, 가방 셔틀!” “이 자식이!” 명수가 지태의 머리에 헤드락을 걸고 장난치는 사이, 단유는 세 친구에게 인사를 건네고 먼저 자리를 떴다. 토요일이었지만 단유네 집은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장계중의 예선 3차전이 오전에 있었고, 오후에 단유는 서울 소재의 대학교에서 수학경시대회에 참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경시대회는 2시부터 6시까지 4시간 동안 치러지기 때문에 컨디션 조절 차원에서 단유는 경기장에 가지 않기로 했다. “명수야, 유니폼 다 챙겼지?” “네.” 이미 가방을 둘러맨 명수가 하은이 건네준 건강 음료를 벌컥벌컥 마셔댔다. 그 모습을 보던 하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혹시 키 컸니?” “키야 계속 크고 있겠죠?” 하은이 단유를 바라보자, 단유도 새삼스럽다는 듯 명수를 보았다. “매일 보는 처지라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그렇게 말하면 난 매일 안 보는 사람 같잖아?” “선생님이 워낙 ‘섬세’하셔서 알아보신 거겠죠?” “오오, 김단유? 요즘 여자친구 사귀면서 말발이 되게 좋아졌는데? 그런 립서비스도 할 줄 알고?” 하은이 자못 감탄한 척을 하며 단유의 머리를 매만졌다. 단유는 그 손길을 애써 피하지 않고 대신 미소를 지었다. “괄목상대(刮目相對)라잖아요?” 단유의 대답에 하은 역시 미소를 지었다. “괄구마광(刮垢磨光)하는 거야?” “입이저심(入耳著心)하는 거죠.” “호학불권(好學不倦)하더니 곧 청출어람(靑出於藍) 하겠어?” “학여역수(學如逆水)라잖아요. 더 노력해야죠.” 가방을 둘러맨 명수가 두 사람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기요. 아침부터 그러고 싶어요? 나 현관문 나서기도 전에 현기증 나서 쓰러지는 꼴 보고 싶어요?” 이번엔 명수의 머리를 매만지며 웃음을 터뜨리는 하은이었다. “우리 명수, 머리 아팠져여? 호, 해줄까여?” “하지 마요. 닭살 돋게.” 후다닥 물러선 명수가 먼저 간다며 서둘러 집을 나섰다. 명수를 배웅한 하은은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 여유롭게 샌드위치를 베어 물고 있는 단유에게 물었다. “준비는?” “대충이요. 수학선생님이 준 기출 문제집도 다 풀어봤고요.” “어렵진 않고?” “어렵던데요?” “그래? 그래도 잘할 거야.” 하은의 확신에 찬 응원에 단유는 손바닥을 들어 하이파이브를 했다. “데려다줄까?” “괜찮아요. 선생님도 출근하셔야 하잖아요. 별로 멀지도 않은 곳이라 혼자 가도 충분해요.” “그래, 이제 혼자서 연애도 하는데, 그치?”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다 컸다는 소리다, 이 녀석아.” 하은은 입꼬리를 주욱 늘린 채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수학경시대회가 열리는 곳은 서울에 소재한 한 대학이었다. 캠퍼스의 입구는 수학경시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찾아오는 또래 아이들이 많이 보였는데, 대체로 채윤이 정도로 키가 작거나, 몸이 왜소해서 이들만 보면 절로 선입견이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도리어 다른 아이들의 시선을 받고 있던 단유였다. “아니겠지?” “설마. 고등학생 같은데?” 학부모들마저 큰 키와 덩치에 비해 어려 보이는 외모와 수수한 옷차림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등학생 중에도 단유 정도의 덩치를 가진 이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기도 했다. “단유야.” 단유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더니 핸드폰을 손에 든 수학 선생님, 승민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른 손에는 지선이가 손을 붙잡고 있었다. “어쩐 일이세요? 지선이까지?” “오빠 응원하러 왔어.” 굳이 응원까지 할 정도인가, 싶어서 머쓱해 하는 단유에게 승민이 말했다. “응원도 하고, 지선이랑 모처럼 나들이도 할 겸해서 나왔다.” “지선이 너 이제 나와도 괜찮아?” “괜찮아. 이제 몸 튼튼해졌어.” “다행이네.” 단유는 지선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승민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보니까 긴장은 안 한 거 같네.” “긴장이랄 거까지야 있나요.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되죠.” “그래, 편하게 해라. 그리고 혹시라도 안 풀리는 문제가 있으면 너무 붙들고 있지 말고.” 그 외에도 선생님은 몇 가지 충고를 하면서 단유를 붙들었다. 사실 단유의 의도와 상관없이 진행된 면도 없잖아 있어, 처음엔 그게 불만이기도 했던 승민이었다.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하면 단유라는 아이가 자신의 재능을 계발하고 이를 경시대회라는 명목으로 드러내는 것, 그리고 인정받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오빠 이거.” 지선이가 단유에게 조그만 종이가방을 건넸다. 엿과 초콜릿, 음료수가 든 가방을 받아든 단유는 웃음으로 답례했다. “고마워.” “드가봐라. 우리도 이제 갈란다.” “네, 선생님. 끝나고 연락 드릴게요.” “그래라. 수고하고.” 서로 먼저 들어가라며 아웅다웅하다, 결국 단유가 먼저 허리를 숙여 보인 뒤, 대학교 안의 고사장을 찾아 들어갔다. ======================================= [402] 코스모스의 순정(3) 응시자가 많은 탓에 여러 강의실을 고사장으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친절하게 붙여놓은 지시문 덕에 헷갈릴 염려는 없었다. 돌아보면 대부분 부모님과 함께 온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교실 문을 열고 단유가 들어갈 즈음에 학생들과 학부모의 시선이 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는 학교 정문에서보다 더욱 노골적인 시선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중학생 맞아?” “요즘 아이들이 확실히 잘 먹고 잘 커.” “그럼 우리 아이는?” 단유는 칠판에 붙은 번호를 보고 자기 응시번호에 맞게 책상을 찾아가 앉았다. 주변에서 힐끔거리는 시선을 무시하며 단유는 메고 있던 가방에서 노트와 펜을 꺼냈다. 더러 몇몇 아이들이 책을 보고는 있었지만, 대부분은 부모님이나 같이 응원 온 친구들과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 문제집을 꺼내 문제를 푸는 아이들은 많지 않았다. 머리를 식힐 요량으로라도 문제집을 풀기보다는 음악을 듣는다거나 가만히 눈을 감고 명상을 하는 아이들 속에서 노트를 빼곡히 채워나가는 단유의 행동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가까이 앉은 이들은 단유가 문제를 푸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그 작업의 정체를 정확히 알아차린 이는 없었다. 슬쩍 지나가던 부모님 한 분이 노트를 봤다가 어질어질한 글들과 수식들에 눈이 핑핑 돌아가는 느낌을 받으며 돌아섰다. “너도 이러지 말고 문제라도 풀래?” “아, 엄마. 됐어. 정신 사나워.” “그래? 알았어, 알았어. 방해 안 할게. 정신 집중해.” “엄마, 그냥 가.” “너 시작하는 거 보고 갈게. …목마르지 않아? 물 줄까?” “됐어.” 주변의 소음도 단유의 작업을 느리게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단유는 묘한 감정을 느끼며 노트 정리에 집중할 수 있어 신기했다. 딱히 반 아이들을 무시하거나 차별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여기 모인 아이들은 적어도 서울 시내에서 내로라하는 두뇌를 가진 아이들임이 틀림없었고, 그런 아이들과 한 공간에서 있다는 사실이 묘한 경쟁심을 부추겼다. 어제저녁 늦게까지 읽었던 책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단유는 감독관이 들어옴과 동시에 작업을 멈췄다. 어느새 교실에는 학생들만 남아 있었고, 교실에 따라왔던 학부모들은 소위 ‘학부모 대기실’이란 곳으로 이동하고 없었다. “책상 위에 있는 거 다 집어넣으세요.” 책상 정리마저 끝낸 뒤, 절차에 따라 시험 준비가 이뤄졌고, 곧 감독관의 시험지 배부와 함께 시험이 시작되었다. 단유는 자신이 가장 어려워하는 기하학은 뒤에 풀기로 전략을 짰는데, 첫 문제가 바로 기하학이었다. 첫 문제부터 패스하려고 하니 여간 찜찜한 게 아니어서 그냥 풀기로 했다. 원과 삼각형이라는 소재로 방접원의 넓이를 구하는 문제였는데, 피타고라스의 정리만 잘 이용하면 쉽게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은 실수해(解)를 구하는 문제였는데, 중등과정상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때 사용하는 방법, 집합과 소거법으로 답을 확정하는 방법이 아닌, 주어진 식을 함수화시켜 교차 검증하는 방식으로 풀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함수화시키는 게 어려울 뿐이지, 계산은 좀 더 정확하고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단유의 수학 실력이야 애초에 선행학습을 통해 단련된 부분도 있지만, 최근 ‘관성 모멘트’와 회전 역학에 관련된 공부를 하면서 응용 부분에서 진보한 측면이 있었다. 이를테면 밀도함수를 통해 질량 중심을 구하거나 특정 영역의 부피를 구하기 위해 벡터미적분을 이용하는 식으로 말이다. 적합한 공식을 찾고 이를 문제에 맞게 적용하는 게 어려운 일이지, 공식을 풀이하는 일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중등부 수준의 문제 정도는, ‘껌’까지는 아니어도, 펜 몇 번 손 위에서 돌리다 보면 대략적인 풀이 과정이 머릿속에 선명히 떠오를 정도는 되었다. 단유가 문제를 다 풀고, 검산까지 마친 직후, 고개를 들었을 때 감독관과 눈이 마주쳤다. 곁눈으로 살피니 다른 아이들은 여전히 문제를 풀고 있었고, 시선을 들어 강의실 중간에 위치한 시계를 보니 시험이 시작된 지 40여 분이 지나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때, 감독관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 “무슨 문제 있나요? 학생?” “아니요, 없습니다.” “…그럼 계속 문제 푸세요.” “다 푼 사람은 나가도 되나요?” “다 풀었다고요?” “네.” 수학경시대회에 참가한 아이들의 특성을 잠시 떠올려보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문제가 풀릴 때까지 자리에 앉아서 펜을 놓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포기하기보다는 되는 데까지 풀어보려는 끈기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험을 포기하는 학생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가끔은 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두통이나 이상 증상을 호소하며 고사장을 나가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감독관은 단유 역시 그러하리라 생각했다. “어디 아픈 곳 있나요?” 만약 아프다면 대학교 의무실에 데려다줄 생각이었다. “아니요.” 보기에도 단유는 튼튼해 보였다. 얼굴색도 좋아 보였고. 그러고 보니, 꽤 잘생겼다, 는 생각을 하며 감독관이 단유의 시험지와 답안지를 슬쩍 보았다. 시험지에 빼곡한 수학식과 답안지에 빈틈없이 체크 된 답안지는 단유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했다. ‘이렇게나 빨리 문제를 다 풀었다고?’ 라는 의문은 뒤로하고, 감독관은 절차대로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다 풀었어도 시험시간이 끝나기 전엔 퇴실이 안 돼요.” 감독관의 말에 주변 아이들이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이제 5지 선다형 문제 중 14문제 정도를 풀었는데, 벌써 주관식까지 다 풀었다고?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곧 합리적으로 상황을 이해했다. ‘문제가 어려우니까 다 찍었구나. 하긴 이번에 문제가 쉽진 않네. …다항식과 미지수가 일치하지 않는데, 이건 어디서 식을 만들어내지?’ 단유는 감독관의 지시에 수긍하며 다른 사항을 물어보았다. “문제지는 제출해야 하죠? 여기 낙서, 같은 거 해도 상관없나요?” “상관은 없지만, 되도록 풀이 과정은 남겨두도록 하세요.” “네.” 감독관은 다시 강의실 앞으로 향했고, 단유는 시험지를 뒤적거리다, 적당한 공백을 찾아내서 거기에 조그맣게 낙서(?)를 시작했다. 경시대회 문제를 풀다 얻은 아이디어를 풀어내 보고 싶었던 까닭이었다. 머릿속이 간질간질하고 뭔가 떠오를 듯, 하는 게 마치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 “네, 고맙습니다. 덕분에 시험 잘 본 거 같아요. 네. 지선이한테도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시험을 마치자마자 명수와 하은, 수학 선생님에게 각각 전화나 문자메시지를 통해 무사히 시험을 마쳤음을 이야기한 직후, 단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록 남들만큼(?) 대학 진학의 필요성―대학 진학을 의무처럼 여기지 않는다는 이야기―을 느끼고 있지는 않은 단유였지만, 교육 시스템상 고등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장소라는 점에서 호기심을 느끼고는 있었다. 하지만 토요일이라 사람도 없고, 그저 보이는 거라곤 위용이 느껴지는 커다란 동상과 커다란 건물, 넓은 잔디밭과 잘 가꿔진 조경수(造景樹)들이 눈에 띌 뿐이었다. 이래서야 대학교라는 곳이 그저 넓기만 한 곳이라는 인상만 받을 뿐이었다. ‘별거 없네.’ 결국, 대학이란 공간도 그 공간 자체의 의미는 일반 학교와 다를 바 없었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 예를 들어 실제 이루어지는 수업이라든가 구성원들 간의 관계 같은 것이 중요한 거지, 겉으로 보이는 면만으로는 대학이란 곳을 알기 어려웠다. 다만 화창한 토요일 오후, 시험을 치기 위해 왔던 아이들도 빠지고 난 뒤라 ‘대학’이라는 이름만 뺀다면 돌아다니면서 한적하고 넓은 공간 덕에 산책하기에 나쁘지 않은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기요.” 단유는 누군가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2명의 여자가 서서 단유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전에 뮤직비디오 나오지 않았어요? 가디스R 꺼?” 여기서 들을 거라고 생각도 못 한 터라 단유는 아주 조금 당황하기도 했다. “네, 맞는데요.” “와아.” 조금 떨어져 있던 두 여자는 한 걸음 내로 다가와 호들갑을 떨었다. “저 그 뮤직비디오 엄청 많이 봤었거든요?” “뒤에 노래도 냈었죠?” “그런데 왜 음악방송에는 안 나와요?” “솔로로 활동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팀으로 나와요?” “노래 또 안 내요?”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단유는 조금이 아니라 많이 당황했다. “아뇨, 저기 전 활동 안 하고요, 전 연예인도 아닌데요.” 연예인이 아니란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두 사람에게 단유는 그저 친분 때문에 도움을 준 것뿐이라고 대답했다. “아, 그래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사인 좀 해주실래요?” “사인이요?” 단유는 난감해하며 사인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럼 사진이라도.” 이미 손에 핸드폰을 치켜들고 카메라 어플을 실행시킨 상태였다. “저기 좀 웃어주면 안 돼요?” “네?” “너무 표정이 딱딱해서요.” 단유는 볼을 긁적였다. “죄송한데, 제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이번엔 두 여자의 얼굴에 당황이 서렸다. “그냥 좀 웃어주면 안 돼요?”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막무가내식으로 말씀해주신들 제가 그 부탁을 들어드릴 이유도 없고 그럴 마음도 생기지 않죠.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그냥 일반인이거든요. 그리고 만약 연예인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찾아와서 핸드폰을 들이밀면 실례라고 생각되네요.” 두 여자의 얼굴이 붉어진 가운데 혀를 차는 소리도 들렸지만, 단유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반가워하는 마음도 알겠고, 사인을 받거나 함께 사진을 찍어서 기록을 남기고 소중히 하고 싶어 한다는 마음은 이해하겠어요. 하지만 그런 마음이라도 상대에게 존중받지 않은 상태라면 그저 무례하게만 느껴질 따름이라고 여겨지네요.” 어머머, 하는 소리로 여자들이 심정을 대변했다. “그냥 사진 한 번 찍어달라는 거 가지고 너무 유세 떠는 거 아니니?” “예를 들어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펜을 빌린다고 해도, 먼저 사정을 이야기하고 공손하게 예를 갖추는 게 상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짜고짜 찾아가서 펜 좀 주세요, 라고 말하는 법은 없죠. 그리고 상대가 꼭 펜을 빌려줘야 하는 법은 없습니다. 상대는 펜을 빌려줄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어요. 모욕적인 발언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 이상, 그걸 가지고 상대를 모욕할 수는 없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네요. 유세 떠는 행동이 아니라, 상식적인 수준에서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을 따름입니다.” 여자들은 더이상 말을 섞기 싫다는 투로 투덜대면서 자리를 떠났다. 떠나는 동안에도 흘깃 바라보는 그 시선에는 세상에 있는 욕, 없는 욕 다 먹고 돌아간다는 듯한 ‘분노’와 ‘경시’가 담겨 있었다. ‘연예인도 쉬운 직업은 아니겠구나.’ 특히나 인간관계가 그렇게 원만하지 않은, 원만해지고 싶지도 않은 단유로선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느긋한 오후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단유는 걸음을 빨리했다. **** “그런 일이 있었어?” “네.” “그래서 기분이 별로야?” “별로 좋지는 않네요. 그런데 누나는 이런 일들, 많이 겪어봤죠?” “많이는 아니고, 조금.” 나윤은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하기야 나윤의 활동 기간은 너무 짧았었다. “그래도 돌아다니다 보면 알아보는 사람 많지 않아요?” “예전에는 많았어. 그래서 모자를 계속 쓰고 다녔고. 요즘 미세먼지 때문에 마스크 하는 사람이 많아서 마스크를 써도 이상하게 보지 않으니까 얼굴 가리기 좋더라고.” 요즘은 마스크를 하지 않아도 알아보는 사람이 적어졌지만. “아무튼 전 연예인 체질은 아닌 거 같아요.” “글쎄다.” 나윤은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단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왜요?” “네 얼굴은 어떻게 봐도 연예인 얼굴이라고 생각했거든. 점점 잘생겨지는 것 같기도 하고.” “쑥스럽게 왜 그래요?” “오구구, 우리 남친 부끄러워하는 거 봐?” 나윤은 키득거리면서 붙잡은 단유의 손을 흔들었다. “유명한 남친 때문에 나가서 밥 먹기도 힘들겠어?” “됐어요. 얼른 일어나요. 이러다 저녁 시간도 놓치겠네요.” “그럴까?” “빨리 갔다 와야 레슨 시간 안 놓칠 거 아니에요?” “이젠 매니저 역할도 하는 거야?” 단유는 더 이상의 대화로 시간을 끌기 싫다는 듯, 나윤의 손을 잡고 끌었다. 늘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식사를 하지만, 그래도 나윤은 좋기만 했다. ======================================= [403] 코스모스의 순정(4) 저녁을 먹던 중에 단유가 물었다. “누나 그거 알아요?” 파채가 곁들여진 콩나물무침을 오물거리며 먹던 나윤이 대답 대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응했다. “우주의 중심이 어디일까요?” “…지구?” 단유는 마치 2 곱하기 2를 구하기 위해 자를 들이대는 공학자를 바라본 것 마냥 웃음을 지었다. “보통은 태양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천동설을 주장하던 시기의 사람도 아니고.” 나윤은 볼을 불룩하게 만들며 대꾸했다.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던져서 맛있게 밥 먹는 사람 무안 주고 그래?” “아, 그냥 오늘 시험시간에 할 일이 없어서 낙서를 끄적거리다가 생각나서요.” “그래서 답이 뭔데?” “모르죠.” “뭐?” “우주가 얼마나 큰지도 아직 가늠이 안 되는데 우주의 중심을 어떻게 찾을 수 있겠어요.” “그게 뭐야.” 별 의미도 없는 이야기로 놀림 받았다는 생각에선지 짐짓 화난 척 단유를 흘겨보는 나윤이었다. “그런데 수학이 참 재미있는 게요, 일부분의 표본을 통해 전체를 파악할 수 있기도 하거든요? 정확하지는 않아도 근삿값은 구할 수 있다는 거죠. 가장 쉬운 예를 들면, 1, 3, 5, 7, 9 라는 수열을 보면 그다음 수가 11이라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그다음은 13, 15 이렇게 나가는 거죠. 즉, 수열의 가장 앞 5개의 숫자를 통해 무한히 확장하는 수열의 규칙을 짐작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그런데 그 수열을 표현하기 위해 그 숫자들을 일일이 표기하는 방식으로 했다가는 전 세계의 모든 종이들을 사용해도 끝이 없을 거예요. 그래서 이를 간단하게 표현하기 위해 만든 게 수식이라는 거죠. 앞선 수열의 경우는 n+(n-1), n은 1보다 크다는 조건을 달아서 표현하는 거죠. n은 순서에요. 그래서 5번째 숫자는 10-1이니까 9라는 숫자가 나오죠.” “그래서?” 나윤은 습관적으로 대답하면서 입은 열심히 우물거리는 중이었다. 이미 수열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흥미가 떨고 있던 차였다. “우주도 마찬가지라는 거죠. 갑자기 스케일이 커지긴 했지만, 적합한 공식만 찾아낸다면 우주의 크기를 알 수도 있고, 우주의 중심도 알 수 있죠.” “우주의 중심을 찾는 게 중요해?” 우주의 중심이 밥 먹여줘? 라는 눈빛으로 진지하게 물어보는 나윤에게 단유가 웃음을 지었다. “저한테는 중요해요.” “너한테?” 단유는 대답 대신 싱긋 웃음을 지었다. “왜?” “조금 설명하기 어려운데, 나름 쉽게 설명을 해 볼게요. 만약 누나가 전쟁 중에 적진에 떨어졌어요. 적진에는 당연히 적이 많겠죠? 그래서 누나는 살아남기 위해 적진에서 벗어나야 해요. 그런데 그곳은 누나가 처음 가보는 곳이에요.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나윤은 생각보다 입이 더 빨랐다. “몰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일단 생각하는 척이라도 해보시지.” “몰라. 그냥 말해. 머리 아퍼.” 단유는 식탁 위에 물을 조금 부었다. 평평한 식탁 위에 물이 퍼지면서 번져가더니 어느 정도 선에서 멈추었다. 마치 식탁이라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섬처럼. “이렇게 외형이 보인다면, 그리고 방위를 안다면, 적진의 중심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걷던지, 뛰던지 아무튼 멀어지면 그만이에요.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면?” 식탁의 휴지로 물을 닦아내니 다시 말끔해졌다. “적진의 중심을 알 수 없지만, 적진의 중심에서 멀어져야 한다는 것만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죠. 그러니 최대한 빨리 적진의 중심을 알아내는 방법이 중요하죠.” “우주가 적이야?” “네?” 나윤은 곰곰이 생각하는 척을 하더니 젓가락을 입에 물었다. “주변 사람들이 널 공격하는 것 같다는 환상을 가지니?” “아니요.” “혹시 누가 널 스토킹하는 것 같아?” “아니요?” 뜬금없는 취조에 단유가 어리둥절했다. “잘 때 막 불안하고,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니?” “아니요.” 나윤은 입에 문 젓가락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됐다, 그럼.” “무슨 말이에요?” “정신병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다행이네.” 이번엔 단유가 삐진 척을 해야 했으나, 그런 시늉은 영 어색하다. “그럼 왜 우주의 중심을 구하는 게 너에게 중요하다는 거야?” “놀렸으니까 말 안 할래요.” 시늉만 안 했지, 삐졌다. “하지 마.” 나윤도 굳이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 행동했다. 들어봐야 단유의 학문적 세계와 마주하기엔 나윤의 지식이 너무 보잘것없었다. 비록 나윤이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기 위해 설명을 했다지만, 실제로 단유에게 필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만약 우주의 중심을 안다면, 단유의 공간 이동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단유가 지금껏 ‘이동’을 함에 있어, 시각적인 제약을 받은 것은 이유가 있었다. 친구들이 하는 게임에서처럼, 혹은 고전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이동’하려는 곳의 ‘좌표’를 알 수 있다면 시각적인 제약을 받을 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단유는 좌표를 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단유가 개념화시킨 공간의 본질(Ratio)이 상대적 공간 개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만약 단유의 공간에 대한 본질이 지구 한정의 공간 개념으로 인식(αναγνώριση, 아나그노리시) 되었다면, 지구 안에서는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구글을 이용해 좌표를 보고, 그 좌표대로 이동하는 것도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유의 공간은 ‘절대적’이었다. 그 어마무시한 크기와 압도적인 공간은 감히 인간으로서 담아내기 힘들 정도의 개념이나 마찬가지인데, 단유 역시 그 공간에 대해, 마치 선이 그어진 경기장을 보는 것처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저 끝도 없이 이어지는 하늘의 어디쯤을 보는 것처럼 불투명할 뿐. 애초에 단유의 공간 능력은 다른 능력과 달리 본인의 자각으로 얻어낸 능력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깨달음(διαφώτιση, 디아포)에 의해 얻었다고 착각하기도 했지만, 사용할수록 이 능력이 자신이 얻은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공간 이동 능력을 이용해 이동할 수 있는 ‘좌표’가 오직 단 하나 존재하니, 그곳이 바로 ‘이세계’, 단유의 원래 고향이었던 마을의 어디쯤이었다. 이동에 필요한 연산이 숙달되면서도 그 한계만 분명해지는 상황에서 단유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무한히 확장하는, 그래서 끝이 없는 공간에 대한 개념을 고민하다 결국 우주에까지 생각이 닿게 되었다. ‘만약 우주의 중심을 알게 된다면.’ 어쩐지 그때가 되어야만 자신에게 이 능력을 부여한, 혹은 깨달음을 준 미지의 존재와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단유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갑자기 왜 그래? 알았어, 알았어. 말해. 들어줄게.” 말없이 생각에 잠긴 단유를 보고 착각한 나윤이 다 들어주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 자세를 잡았다. 어디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로 ‘수포자’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 것인가 시험해보자는 듯이. 단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누나, 그거 알아요?” “뭐, 말해 봐. 끝까지 들어줄 테니까.” “누나 입에 밥풀 묻었어요.” 나윤은 다급히 입술 근처를 더듬어 가출한 밥풀 한 알을 떼어냈다. 욕심 같아서는 회전 역학에 관한 연구와 우주의 중심에 관한 연구를 다 함께하고 싶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욕심이었고 무리수였다. 한 개의 연구 과제만으로도 벅찬 까닭이었고, 여러 가지 참고 서적들을 보는 데 필요한 시간적 제약도 만만치 않은 까닭이었다. ‘일단 하던 연구를 빨리 끝내는 수밖에 없어.’ 하지만 회전 역할이라는 과제는 계속 머리를 간지럽히기만 할 뿐 쉽게 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래도 답답해하지 않고 꾸준히, 끈기를 가지고 걸어가는 것이 단유의 장점이기도 했다. “김단유, 위 학생은 서울시 주최 수학경시대회에서….” 모처럼 전체 조회가 시행되었다. 예전과 달리 이번에는 방송실에서 하는 조회여서 대부분 학생들은 각 교실에서 모니터를 보며 편안하게 조회에 임했다. 오직 단유만이 방송실로 불려가 교장 선생님 앞에 어색한 표정으로 서서 상장을 수여 받는 이벤트에 동참해야 했다. 교실로 돌아온 단유는 학급 학생들의 환호 속에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 선생님도 손뼉을 치며 단유의 수상을 축하해주었다. “금상이라니, 정말 대단하지 않니? 다들 박수!” 또 한 번의 박수갈채에 단유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다음 달에는 전국 수학경시대회가 있지? 그것도 잘해낼 수 있을 거다.” 전국 다음은 국제인가?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는 내년에 7월에 있다.” 아, 그렇군요. 단유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할 건 많은데 이리저리 바빠지는 일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자, 그리고 오늘 전달 사항은 …내년부터 교복 바뀌는 거 알지?” 웅성대는 아이들을 향해 교탁을 두어 번 내리쳐 주목을 끈 선생님은 다시 말을 이었다. “자, 자. 조용히 하고. 이번에 학교에서 현대적 감성에 맞게 새롭게 디자인한 교복으로 변경하기로 했다고 하니까, 앞으로는 교복 촌스럽다고 하지 말고 알았지?” 공동구입이나 판매처 등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에도 아이들의 수군거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저희들도 바꿔야 하나요?” “바꾸고 싶은 사람은 바꿔도 되지만, 안 바꿔도 된다. 내년 신입생은 무조건 입어야 하지만 말이야.” 그 이야기를 끝으로 조회가 끝이 났다. 선생님이 나가신 후, 떠들썩해진 교실에서는 바뀌는 교복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반면, 도하는 단유가 들고 온 상장을 펼쳐보며 감탄을 하는 중이었다. “이야, 이런 상을 받는 애가 짝이라니. 나중에 내가 애를 낳으면 할 이야기 되게 많겠다.” “무슨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그리고 그때 돼서 기억이나 하겠어?” “아무리 내가 머리가 나쁘다 해도 이런 건 기억 못 할 리가 없어.” 정말 머릿속에 단단히 기억해두겠다는 듯, 도하의 눈은 상장에서 떠나질 않고 있었다. 어찌 보면 도하가 상을 받은 줄 착각할 정도였다. “어이, 단유야!” 뒷문에서 단유를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지태와 채윤, 명수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명수는 냉큼 교실에 들어와서 단유의 머리를 붙잡고 흔들었다. “아이고, 내 친구 단유야, 이게 내 친구라니!” “아, 그만해. 어지러워.” 단유보다 더 기뻐하는 명수 곁으로 지태와 채윤도 달려와서 단유를 잡고 흔들었다. 덕분에 멀미가 날 정도였지만, 그래도 친구들이 와서 축하해주니 기분은 좋았다. “무슨 축하를 이렇게 격하게 하냐?” 단유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묻자, 명수가 이 정도로는 약과라고 소리쳤다. “오늘 수업 끝나고 축하 파티 겸해서…콜?” 마이크를 붙잡는 시늉을 하는 지태의 말에 채윤과 명수가 콜을 외쳤다. “명수 너는 연습 있지 않아?” “오늘은 쉬는 날이다. 내일 간단하게 모여서 몸 좀 풀고, 그다음 날이 결승! 아, 그때 단유 너도 올 거지?” 감독님이 꼭 너 오라더라, 는 명수의 덧붙임에 지태와 채윤이 다시 단유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어댔다. “오, 축구부까지! 이런 엄친아 같으니라고!” “우리 엄마가 너 때문에 잔소리가 늘었는데, 또 얼마나 많은 잔소리를 듣게 만들려고 그러냐!” 겨우 그들을 진정시킨 단유가 채윤을 바라보았다. “너 점점 지태한테 물드는 거 같다? 예전에는 안 이랬잖아?” 채윤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친구잖아?” 단유가 혀를 내둘렀다. “나도 너희한테 물들까 봐 겁난다.” “이 자식이!” “물들어 버려라!” 좀처럼 옷을 정리할 틈을 주지 않는 친구들이었다. “나도 같이 가도 되냐?” 도하가 대화에 끼어들며 물었다. 명수가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콜?” 도하는 그 손에 마주 하이파이브를 하며 대답했다. “콜.” 단유나 도하나, 혹은 명수나 그의 친구들, 또 많은 아이들이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렸지만, ‘교복 변경’이란 주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반발을 불러 일으키며 다시 학교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도대체 선정위원회가 어디의 누굽니까? 누가 교복 변경을 찬성했다는 말이에요?” “저기 말이죠,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위원회를 선정, 소집 했고요. 협의 끝에 민주적으로 채택한 결과입니다.” 교감의 손에 쥐어진 손수건에 땀이 촉촉이 배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교감의 변명 따위에 납득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교복 변경에 관해서 찬반을 묻지도 않고 이렇게 막 변경하는 경우가 어디 있어요? 네? 아무리 사립학교라도 그렇지, 이렇게 막 나가는 경우가 어디 있냐고요?” 드센 어머니들의 항의에 교감은 좌우로 눈을 굴리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 상황에서 누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저기, 학부모위원회에서도 통과가 된 상황이고 말입니다….” 교감이 공정성을 강조하려 했지만, 학부모들은 기도 안 찬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눈을 부라렸다. “학부모위원회요? 제가 학부모위원회 위원인데 저 없이 무슨 결정을 했다는 거예요? 네?” “준영이 어머님, 좀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교감은 드센 어머니의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낯색이 환해졌다. ‘학부모위원회’에서 위원장을 맡은 어머니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를 내며 교무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 [404] 꽃보다 아름다워(1) 위원장의 등장과 함께 어머니들의 항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교감을 향한 거센 비판과 항의가 같은 학부모에게로 옮겨졌고, 위원장을 맡은 어머니와 그녀를 뒤따른, 소위 교복선정위원회 소속 어머니들이 맞붙어 설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누구 마음대로 교복을 바꾸고 그래요?” “절차에 맞춰서 진행했다니까, 왜 뒤늦게 오셔서 그러세요.” “절차라니요? 이렇게 졸속으로 진행해 놓고 절차라니요?” 준영 어머니는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목이 시뻘겋게 변할 정도로 항의했다. 둘째 아들이 내년에 이 학교로 올 가능성이 크다 보니, 자연스럽게 교복 변경에 대한 학교의 공지에 신경이 쓰였다. 더군다나 자신이 학부모위원회에 속한 위원임에도 불구하고 교복 변경을 위한 심사 위원회 소집에 관한 건에 관해 들은 바가 전혀 없었다. “원칙을 위반한 거잖아요, 이건!” 준영 어머니가 분을 참지 못하고 책상을 내리치자, 주변 사람들의 안색이 급격히 변했다. 특히 마주 앉았던 교감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위원장은 붉게 변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교양 머리 없게.” “뭐요? 교양이요?” “책상을 그렇게 부술 듯이 두드리는 게 교양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여기 어머니만 있어요? 다른 분 안 보여요?” “보자 보자 하니까…. 이봐요, 위원장님. 도대체 뭘 얼마나 드셨길래 이러시는지 모르겠지만.” “뭐요?” 위원장의 눈이 뒤집혔다. “말이면 단 줄 아나, 어디서 막말이에요, 막말이! 누군 할 줄 몰라서 안 하는 줄 알아요?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로 그래? 응? 내가 당신보다 나이가 많아도 한참이 많아! 여기 교감 선생님도 당신보다 어른이야, 어른! 어디 어른 앞에서 소리 꽥꽥 질러대면서 말이야.” “허, 참.” 기도 안 찬다는 듯 헛바람을 내뱉던 준영 어머니가 위원장을 노려보자, 또 그 눈이 또 시빗거리가 되어 위원장의 목에 핏대를 세우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엄마들끼리 붙어 가지고 난리가 난 거지.” 지태는 발을 까닥거리며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교복 바뀌는 거 때문에 엄마들이 싸우는 게 이해가 안 가네.” 채윤이 옆에서 캔음료를 마시며 중얼거리자, 지태가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혀를 찼다. “교복이 어디 한 두 푼으로 살 수 있는 거냐? 고작 3년 입을 교복인데 비싼 돈 들여서 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게다가 새로 바뀌는 거니까 물려받을 수도 없잖아? 돈 많은 집이야 상관은 없겠다만.” “결국, 돈 때문이네?” “내 생각은 그래.” 단유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시선은 운동장에서 달리는 명수네 축구부를 향했다. 단유 본인은 교복이 변경된다는 사실을 어제 조회 때 처음 알았기에, 이 사태가 벌어진 상황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리고 그게 크게 문제가 된다고 여기지도 않았고. “그런데 넌 어떻게 알았어?” 채윤의 물음에 지태가 ‘단톡’이라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너랑 나랑 다른 단톡이야?” “아, 학생자치위원회 소속끼리 쓰는 단톡이 있어.” 채윤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물었다. “학생자치위원회, 거기는 다 찬성인 거야?” 지태가 물끄러미 운동장의 명수를 바라보다가 툭 내뱉었다. “아니.” “반대하는 사람도 있어?” 사람이 여럿이고 생각이 다 똑같을 수는 없으니까, 반대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특히 어머니와 같은 의견을 내놓는 준영이 그랬다. 준영은 3학년인데 나름 전교 석차 10위권에 들 정도의 모범생이기도 했다. 그가 내세우는 주장은 합리적이기도 했다. “교육청에서 학생 교복선정에 관한 지침이 마땅히 있는 상황에서 이를 지키지 않은 점과 독단적으로 디자인을 선정하고 교복 제작 업체를 선정한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바의 가장 큰 포인트는 ‘원칙’이었다. 원칙을 지키지 않았기에 잘못이라고 외치는 준영의 주장에 동조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문제가 학생들이 나서서 소리를 높일 문제가 아니라고 외치는 이도 있었다. 「기존 교복이 선정된 것도 벌써 10년이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니 바꿀 때도 되지 않았는가. 특히 현대적 디자인으로 변경되어 보기도 좋으니 향후에 이 교복을 이용할 학생들에게도 좋은 일이다. 더군다나 학교 측에서는 조준영 위원의 말과 달리, 지침에 따라 교복 선정 위원회를 소집하여 의견을 물었으며 교복업체 선정 역시 공정한 방법으로 입찰하여 선정하였다. 이에 대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혹은 자신이 선정 과정에서 배제되었다는 이유로 반대한다는 것은 반대를 위한 반대 외의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그러니 이제 학생의 본분을 망각하고 반대만을 외칠 것이 아니라, 공정한 결과에 수긍하는 자세를 보여줄 것을 부탁한다. 또한 반대 여론을 일으켜 학생 사회의 분열을 조장하는 일체의 언동을 삼갈 것을 당부하는 바이다.」 채윤은 지태가 보여준 장문의 메시지를 읽다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네.” “나도 그래. 과연 이게 이렇게 시끄러워질 이유가 있는가 싶기도 하고. 뭣보다 나는 이게 다 돈 때문인 거 같아서 괜히 끼어들기도 싫고.” “돈?” “위원회니 뭐니 하면서 공정한 절차를 지키려 하는 이유가 다 돈 때문이거든. 누군가가 부정한 방법으로 이득을 취하려는 것을 막기 위한 거지.” “어떤 부정한 방법이 있는데?” 지태는 입술을 삐죽이며 달싹이는가 싶더니 대답했다. “그것까진 모르지.” “그런데 어떻게 확신할 수 있어?” “확신은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거지. 너희 엄마 아빠한테 가서 물어봐.” 복잡한 건 나도 몰라, 라고 대답한 지태는 벌떡 일어나며 기지개를 켰다. 더 이상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제스처였다. “넌 어떻게 생각해?” “뭘?” “방금 한 이야기.” “교복?” 단유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을 고르기 시작했다. “쉽게 찬반을 이야기하기는 어렵겠지만, 두 가지 정도는 고민해 볼 문제가 있다고 봐.” 채윤은 기대에 찬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고, 몸을 일으켰던 지태도 슬그머니 앉아서 단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첫 번째는 역시 ‘원칙’이라고 말했지만, 그게 과연 원칙인지 아니면 편의적으로 상정한 규칙인지를 구분해야 할 거 같아.” 원숭이 엉덩이가 붉은 것인지 빨간 것인지 구분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아 채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를 들어, 건널목에서 신호등이 빨간 불이면 길을 건너지 말라는 뜻이잖아? 그건 지금의 이야기에 적용될 ‘원칙’이라고 할 수 있어. 사고를 예방하고 원활한 교통을 위해 만들어진 법이니까,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이지. 반면에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이라면, 보행자의 재량에 따라 건너야 해. 좌우를 살펴야 한다든가, 손을 들어서 사람이 지나가고 있음을 알려야 한다는 등의 룰이 있지만, 그게 법적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 “그러니까, 교복 변경에 관한 문제도 그 절차가 법으로 정해진 것인지, 아니면 편의상 정해진 룰이기 때문에 학교 재량에 따라 변동될 수 있는 것인지 알아봐야 한다는 말?”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현재 상황에 대해 잘 모르니까 하는 이야기야. 단지 누군가의 말만 듣고 이게 원칙이다, 저게 원칙이다,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그게 중요한 문제일까? “중요한 문제라고 봐. 양쪽이 주장하는 바가 갈리는 지점이 절차의 공정성에 관한 문제이니까. 양쪽 모두 ‘원칙’의 준수에 대해서는 동의를 하고 있으니, 그 점을 집어서 사실을 확인한다면 적어도 어느 쪽이 옳은 주장을 하는 것인가에 대해 판단은 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두 번째는?” 대충 이해했다는 눈치를 보이는 채윤의 뒤에서 지태가 채근했다. “나나 대부분의 아이들이 교복 변경에 대해 무심한 이유지. 나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당장 교복을 사야 할 일도 없고, 우리는 졸업할 때까지 이 교복을 입고 다니면 되니까 부담도 없잖아. 당장 다음에 입학할 아이들에게나 문제가 되니까. 이를테면 자연보호 캠페인 같지.” “응?” “자연을 보호해야 할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 하나,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할 인간으로서 주위 환경을 지켜야 한다는 당위론. 둘, 한 번 파괴되면 복구하기 힘든 게 자연이기에 지켜야 한다는 주장. 셋, 후대의 인간들에게 살기 행복한 환경을 물려줘야 한다는 의무론.” 단유는 운동장에서 날아오는 먼지구름을 향해 바람을 일으켰다. 먼지구름은 세지 않은 바람에 흩어지는가 싶더니 바닥에 나풀거리며 내려앉았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으면 그저 자연히 발생한 바람처럼 여겨질 법해서 누구도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이유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환경 보호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드물지. 법과 제도로 정비되지 않는 한은 말이야. 왜냐하면, 환경 오염에 의해 자신이 피해를 받는다고 생각하기가 어려워서 그렇다고 봐.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자연보호보다 자연 ‘개발’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잖아? 교복 문제도 마찬가지라고 봐. 우리에게 당장 어떤 문제나 영향을 미치지 않으니 관심이 덜 한 거지. 그렇다면 과연 교복 변경에 관해서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의견을 나눌 이유가 있는지를 먼저 알아봐야 한다고 생각해.” 단유가 말을 마치고 지태를 바라보았다. 마치 ‘넌 교복 변경 문제를 우리가 토론해야 할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라고 묻는 시선이었다. 지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운동장을 바라보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바람 때문에 먼지가 많네. 일어나야겠다.” 기름칠이 덜 된 로봇이 일어나는 마냥 부자연스럽게 일어난 지태는 채윤에게 말했다. “가자, 너 인강 들어야 한다며?” “어? 응. 그래. 일어나자.” 단유도 피식 웃으며 일어났다. “난 감독님한테 가봐야 하니까, 너희들은 먼저 집에 가든지 그래.” “알았어. 아, 그리고 내일 관중석에서 열심히 응원할게.” “날 응원하지 말고, 명수랑 축구부를 응원해. 내가 나갈 일은 없을 거 같으니까.” “오케이.” 화제가 바뀐 게 기뻤는지, 지태의 목소리에 힘이 돌아왔다. 봄 대회 때와 마찬가지로 전교생이 경기 관람을 위해, 혹은 응원을 위해 경기장을 찾았고, 이번에는 새 이사장도 자리했다. 괜히 학교에 남아 봉변당할 이유야 없겠지만, 찜찜한 마음도 있고 새로 선임된 이후 가장 큰 행사를 맞이한 마당에 얼굴을 안 보일 수 없었던 탓도 있었다. “여기 앉으십시오, 이사장님.” “고맙습니다.” 교감 선생님의 안내에 감사를 표하며 이사장은 자리에 앉았다. “오늘날이 좋은데요?” “그렇죠? 저도 아침에 나오는데 어찌나 하늘이 맑은지 운전하기가 힘들 정도더군요.” 교장이 너털웃음을 터뜨리자 이사장도 마주 웃었다.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 아이들이 우승할 거 같습니까?” 이사장의 물음에 교장이 그렇지 않을까요? 라고 대답하며 교감을 바라보았다. 교감도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교장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뜻을 비쳤다. “봄에 우승한 전력이 있는 데다가 이번 대회 예선 때 다른 학교를 압도적인 실력으로 누르고 올라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학교에서 모두 저희 학교를 우승팀으로 예상하더군요.” 딱히 축구에 관심이 없었고, 예체능 계열에 대한 특별한 지원도 없었지만, 그래도 전국대회 우승이란 타이틀은 싫지 않았는지 이사장은 무릎을 탁, 치며 웃음을 지었다. “잘 됐습니다. 이런 대회에서 우승해서 그 트로피와 우승기 등을 학교 현관에 전시하는 것도 아주 보람 있겠어요.” 이참에 진열대를 좀 멋있게 꾸미는 것도 좋겠지요, 라는 덧붙임에 교감이 맞장구를 쳤다. 곧 시합이 시작되었고, 아이들의 응원 소리가 경기장을 크게 뒤흔들기 시작했다. ======================================= [405] 꽃보다 아름다워(2) 고작 전반전이었지만, 아이들은 뒤가 없다는 듯 격렬하게 달리고 부딪치고 넘어졌다. 특히 이번 대회 결승은 작년 추계대회 우승팀과 지난 춘계대회 우승팀의 맞대결이 되었다. 춘추 대회를 모두 석권하려는 팀과 지난 대회 디펜딩 챔피언 팀의 대결이니 불꽃이 튀었다. 명수는 공이 오지 않는 순간에도 좌우로 움직이며 수비수를 교란하였고, 미드필더 진도 그에 호응하여 중앙을 장악하기 위한 좋은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아 패스가 쉽게 이어지질 않고 있었다. “오늘 병수가 몸이 무거워 보이는데요?” 코치가 말하지 않아도 감독 역시 느끼고 있던 바였다. 비록 명수를 주 공격수로 하여 중앙 공격에 치중하는 스타일이긴 하지만, 병수와 같은 윙어의 중요성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병수가 못 하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조금 스피드가 떨어지긴 했지만,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공간을 만들어내면서 공격의 맥을 끊어먹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칭찬할 만했다. 상대도 쉽게 공격을 풀어나가지 못하고 있는 점은 똑같았다. 미드필더가 활발하게 움직이고는 있었지만, 위험한 부근에까지 공격수가 진출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팀 모두 공통점이 있다면, 역시 강력한 한 방을 지닌 공격수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명수야 지난 대회와 지난 시합을 통틀어 가장 공격력이 좋은 선수로 인정받은 사실이 있고, 상대팀의 공격수 역시 명수 다음으로 많은 골을 넣으면서 골잡이로서의 자질이 있음을 증명한 바 있었다. 그래서 두 팀 다 쉽게 미드필더 진을 위로 끌어올리지 못하는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전반 시작과 함께 피 튀기는 승부를 벌일 것처럼 보이던 경기가 시간이 갈수록 전장이 축소되면서 센터라인 부근에서만 공이 오가는 지루한 경기가 되고 있었다. 본래 축구에 관심이 없었지만, 아이들 경기라 더 유치하다 생각하며 지루함을 참던 이사장이 교장에게 말을 건넸다. “학부모위원회 건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아직까지는 별 진척이 없습니다. 회의록 공개가 문제가 되고 있는데, 사실 회의록이야 문제 될 내용은 없습니다만, 또 꼬투리를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힐 수 있으니까요.” “박영선 씨라고 했던가요? 위원장이?” “네.”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해달라고 하세요. 이사회에서도 도와드리겠다고.” “…네.” 교복선정 위원회는 9월 초 벼락치기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에 교복 디자인 선정 및 교복 제작 업체 선정, 그리고 교복 변경 시기까지 일사천리로 결정을 내렸다. 만약 다른 공립학교였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는 사립중학교였고, 학교와 자문단, 이사회의 지원뿐만 학부모위원회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학부모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박영선의 영향력이 컸다. 학부모위원회 소속 중 자신과 성향이 비슷한 이들을 모아 교복선정위원회에 참가시키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하여 이사회에 도움을 주었다. 물론 이사장은 그녀를 직접 만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교장을 통해서 그녀에게 물적 지원과 약속을 해 주었다. “상담실에서 한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무슨 이야기입니까?” 교장이 교감에게 눈짓을 보내자, 교감이 너무 비굴하지 않게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듣고 본 이야기를 전했다. “허허, 그분이 정치에 소질이 있으신가 봅니다?” “그러니까요. 적당한 타이밍에 딱 상대의 성격을 문제 삼으니까 상대도 정신을 놓고 덤비더라고요. 덕분에 이야기가 물 흐르듯 넘어가 버렸었죠.” “요즘은 여자분들이 어지간한 남자보다 더 드센 성정을 가지고 있는 거 같아요. 국회를 봐도 그렇고.” 교감이 손만 비비지 않았다뿐이지, 광택제를 바른 듯 번들거리는 입술로 이사장의 의견에 격한 공감을 표시했다. “이게 다 시대의 변화 아니겠습니까?” 교장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렇죠. 예전 같으면 이런 일은 상상도 못 했겠죠. 세상이 좋아진 탓입니다.” “먹고살 만하니까, 이렇게 좋은 경기장도 짓고 애들 공놀이도 보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사장의 ‘공놀이’ 발언에 교장과 교감의 얼굴이 굳었다. 아무리 그래도 ‘교육자’라는 체면을 가진 마당에 방금의 발언은 조금 지나친 면이 있다고 여긴 탓이었다. 교감이 헛기침을 하며 이사장의 눈치를 보았다. “네, 뭐. 아무튼, 위원장님의 도움으로 일이 잘 마무리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이사장은 교장과 교감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너무 안심하지 마시고, 그분께 도움이 되는 쪽으로 도울 수 있도록 알아봐 주세요.” “그럼요. 학부모위원회는 학교를 지탱하는 한 축 아닙니까? 저희도 그냥 두 손 놓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 두 분의 협조에 이사회를 대표해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아이고, 별말씀을요, 이사장님.” 아이들의 요란한 응원 소리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던 이사장은 그사이 뭔가 변화가 있었나 싶어 운동장을 바라보았지만, 딱히 알아볼 만한 건 없었다. 그저 ‘공놀이’에 불과한 것이니 말이다. 비록 이사장은 알아보지 못할지라도 경기장은 조금 전과 전혀 다른 양상의 경기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드디어 공이 중앙을 넘어 페널티 에어리어에 다다른 탓이었다. 비록 그 에어리어가 장계중학교의 에어리어라는 점에서 불행이었지만. 감독과 코치도 더는 편히 이야기를 나눌 형편이 아니었다. 쉴 새 없이 소리치면서 아이들의 포지션을 잡아주고, 멘탈을 잡아나갔다. 벤치에서도 1학년 후배들이 목이 터져라 ‘수비’를 외쳤다. 한순간 미드필더 진영의 집중력이 흩어진 순간이었다. 패스한 공의 궤도가 미묘하게 꺾여 받지 못한 사이 상대팀이 가로채기를 했다. 그리고 곧장 공격을 가하는 차에 수비수도 잠깐 방심을 했었던 건지 막는 것이 늦었다. 그래서 옆선을 따라 올라가는 선수의 앞을 막지 못했고, 그저 옆을 따라가며 센터링을 올리지 못하게 패스 코스를 막는데 전력을 다했다. 상대의 윙어는 뒤에서 따라온 윙백에게 공을 넘긴 뒤, 중앙으로 달려나갔다. 순간적으로 공을 쫓던 수비수의 시선에, 윙어의 움직임이 사라졌고 그 틈을 노리고 이어진 패스에 수비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벌써 공은 페널티 에어리어를 넘어섰고, 골키퍼도 허리를 숙이고 남은 수비수들에게 마크를 명령했다. 뒤에서 쫓아온 미드필더에게 ‘태클하지 마, 태클하지 마’를 소리쳐야 했고, 반대편 사이드에서 중앙으로 오는 상대 공격수를 손가락질하며 ‘마크!’를 외쳤다. 그 사이 몇 번의 방향전환으로 수비수를 뚫어낸 상대의 윙어가 공을 살짝 띄어 올렸다. 공중전! 위치를 가늠하고 골키퍼가 뛰어올랐지만, 그 앞으로 먼저 쇄도한 상대 공격수의 머리에 공이 걸렸다. 빗맞았는지 공은 곧바로 골문을 향하지 못했고, 지켜보던 응원단에서 탄식과 함성이 섞여 나왔다. 허겁지겁 공을 향해 발길질을 한 수비수의 도움으로 공이 페널티 에어리어를 벗어나자, 그제야 한숨을 쉰 감독과 코치는 다시 아이들에게 소리치며 긴장을 풀지 말라고 강조했다. 공은 여전히 살아있었고, 저 공을 장계중학교가 잡는다면 역습이었다. 떨어지는 공을 향해 명수가 달려갔다. 옆에서 들려오는 안도의 한숨에도 단유는 경기장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특히 명수의 움직임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전반 내내 공을 잡지 못하고 있었던 탓인지 체력이 많이 떨어지진 않은 것처럼 보였다. 반면 상대 수비수는 명수를 신경 쓰느라 그랬는지는 몰라도 명수보다 체력이 많이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낙하지점에 먼저 도달한 것은 명수였고, 그 명수를 밀어내고 위치를 잡으려 애를 썼지만, 명수는 쉽게 밀려나지 않았다. 가슴을 이용해 공을 트래핑한 후, 놀랍도록 빠르게 몸을 돌려 수비수를 제치는 명수였다. 이미 공은 명수의 발끝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상대가 당황할 차례였다. 안도의 한숨을 쉬던 동기도 벌떡 일어나 명수의 드리블을 향해 환호를 보냈다. 주먹을 꽉 쥐고 명수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이들은 비단 동기뿐이 아니었다. 명수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마음이었던지, 아니면 전반 내내 공을 제대로 잡지 못했던 답답함을 풀어내려는 것인지 신나게 달렸다. 신나게 달리는데, 아무도 막지를 못했다. 그래서 비교적 쉽게 페널티 에어리어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막지 않은 이유는 먼저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존을 형성하여 명수를 막기 위함이었다는 듯, 그 이상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고, 곧 2명의 수비수가 명수를 에워쌌다. 애초에 상대 공격 때에도 방심하지 않고 수비를 보고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명수는 2명을 제쳐보려 했지만, 철저하게 몸을 돌리는 것을 막는 수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원하러 온 동료에게 공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맥없이 뺏기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것이었지만, 동료 옆에는 상대팀의 선수들도 같이 달리고 있었다. 결국 공은 다시 뒤로, 뒤로 밀려 역습은 실패했고 지공(遲攻)으로 전환하여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스피드가 좋은 선수가 받쳐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감독과 코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동시에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그 시선을 단유는 무덤덤하게 받았다. 감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단유는 감독을 개인적으로 찾아왔다. “오늘 되도록 경기에 안 나가게 해주세요.” 감독은 미간을 찌푸리며 단유의 말을 들었다. 며칠 전에도 단유의 담임 선생님이 찾아와서 단유가 경기에 되도록 나가지 않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이제 곧 전국수학경시대회에 나가야 할 아인데, 자칫 부상이라도 입으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누가 보면 아버지가 와서 청탁이라도 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보다, 담임의 말을 조금 꼬아서 듣는다면 ‘축구’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수학경시대회’는 중요하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도 나름 프로축구계에서도 뛰었고, 학교 감독 생활도 몇 년 지내면서 인내심을 많이 기른 탓인지 쉽게 흥분하지 않았다. 그런데 경기를 앞둔 지금 단유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직접 들으니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다칠까 봐 겁이 나냐?”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비웃는 듯 얼굴을 구기지도 않았고, 여전히 덤덤한 얼굴이었다. “제가 다칠 일이 뭐 있겠어요? 그보다는 오늘이 이번 대회 마지막 경기잖아요.” “그래서?” “처음의 이야기랑 같아요. 저 말고 진짜 축구부 선후배, 친구들에게 기회가 더 많이 가길 바라는 거요.” 감독은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이번에는 단유를 향한 것이 아니라, 잠시라도 못된 생각을 가졌던,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설령 누가 부상을 당하더라도 다른 선수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갔으면 해요. 그리고 만약 게임을 지는 상황이 오더라도 제가 아닌 다른 선수들이 필드 위에서 진심을 다해 뛰는 모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감독은 묵묵히 단유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이 나고, 단유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뒤, 조끼를 입은 채로 벤치로 향했다. 마침 경기장에서 뛰던 한 선수가 다른 선수의 발에 걸리면서 넘어졌고, 심판의 휘슬이 불었다. 오른쪽 미드필더를 보던 선수였다. 명수를 비롯한 동료들이 달려가 상황을 확인했다. 의료진이 경기장으로 뛰어들었고, 명수는 감독을 향해 팔을 교차해 보였다. 발목 부상이었다. 턱을 쓰다듬으며 상황을 지켜보던 감독은 벤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동기.” 단유 옆에 있던 동기가 벌떡 일어나 조끼를 벗었다. “잘해.” 단유가 동기의 엉덩이를 툭툭 쳐주자, 동기가 씩 웃음을 지었다. 조금 긴장한 듯 어색한 웃음이었지만, 단유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응원을 보냈다. ======================================= [406] 꽃보다 아름다워(3) 동기는 포지션을 찾아가며 주위 동료들에게 손뼉을 쳐주고 집중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의 교체는 단지 부상당한 선수를 대신해 들어간 것일 뿐이었다는 듯, 특별히 경기에 영향을 주지 못한 채 여전히 지루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그리고 곧 전반전이 끝이 났다. 대기실에 모여서 땀을 닦는 선수들 틈에서 감독이 팔짱을 낀 채 말했다. “힘들지?” “아닙니다!” 선수들의 목소리에는 잔뜩 독이 올라와 있었다. “힘들 거야. 뜻대로 되지 않으면 몸보다 정신이 먼저 힘들게 마련이거든.” 머리를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설명하는 감독은 딱히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고, 선수들을 추궁하는 모양새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시합들을 너무 쉽게 풀어왔던 탓에 이런 고비를 맞이한 것일 수도 있다.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이겠지. 나 역시 그랬고.” 감독의 자기반성은 이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다. 선수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라면 오히려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아이들을 독려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코치가 감독의 뒤에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감독의 말이 이어졌다. “너희들도 솔직히 명수가 잘하는 거 인정하지?” “네!” “그럼요! 명수가 중학교에서는 원탑이죠.” “제가 짱이죠.” 명수의 너스레에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니가 짱이라는 건 나도 인정하는 바다. 그런데 저쪽 팀에도 명수 정도의 실력을 갖춘 선수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곧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사실 지금까지 상대의 시합도 봤었지만, 10번 선수가 저렇게 움직임이 좋은 선수라고는 생각을 못 했어. 아마 상대 팀 감독도 우리 명수를 보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뭐 피장파장이다. 덕분에 우리가 지금껏 상대했던 팀들의 감독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느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피식 웃음 짓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감독이 목소리를 바꿨다. “자, 이제 전반전 동안 실컷 구경했잖아? 이제 그만 구경해도 쟤들이 어느 정도 실력인지 그만 가늠해도 되잖아? 그렇지?” 그렇다, 선수들은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다. 상대의 실력을 판단하고, 그 허점을 공략하기 위해 준비를 한 것이다! 라는 감독의 말에 아이들이 배시시 웃었다. “네! 맞습니다!” “명수 너도 이제 뛰어야지. 너무 쉬면 몸이 굳는다. 알지?” “넵!” “이제 너희들이 할 일은 별거 없어. 그냥 내가 지정해준 전략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어렵지 않잖아? 방학 동안 계속 연습했잖아? 그렇지?” “넵!” “만약에 이 시합에서 이기지 못한다 해도, 그건 내 전략의 잘못이지 너희들이 못해서는 아니다.” 그 말에 아이들은 곧잘 하던 대답을 하지 못했다. “너희들의 실력은, 지난 시합 동안 실컷 보여줬어. 너희는 적어도 중학교 팀들 중에서는 최고다. 만약 이 시합에서 진다면, 그건 너희 실력 때문에 지는 게 아니야. 내 전략이 상대 감독의 전략에 밀려서 진 거야.” 코치는 물론, 아이들도 감독이 하는 말의 진의를 깨달았다. 감독은 아이들이 경기에서 졌을 때의 부담감을 줄여주기 위해 저렇게 말하는 것이다. 물론 전반전의 움직임이 나쁘진 않았지만 결승이라는 점, 그리고 춘추 대회 우승 독식이라는 타이틀에 대한 부담감에 몸이, 혹은 마인드가 굳어 있었음을 부인할 순 없었다. 바로 그 점을 감독은 이야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최고다, 라고. “내가 보기에 저 경기장 위에서 너희보다 잘하는 선수는 없다. 적어도 비등한 수준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몰라도, 너희보다 잘한다고는 할 수 없어. 그러니까 물러서지 마라. 피하지 말고 부딪쳐. 너희는 이길 수 있다.” “예!” 코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프로 선수 시절의 선배는 저렇게 팀을 아우르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진 않았었다. 후배들에게 자상한 선배로 기억되긴 했어도, 카리스마와는 거리가 먼 선배였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학교 감독으로 몇 년을 있었더니 어느새 저런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발휘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아니면 애초에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있었거나. 어쨌든, 자신 역시 지도자의 길에 한 걸음 내디딘 마당에 선배의 저런 카리스마는 본받아야 할 점이 분명했다. “나가자. 시간 됐다.” 아이들은 환호와 함성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경기장으로 뛰어갔다. 0:0으로 끝난 전반전은 응원하던 아이들을 살짝 지치게 만들었다. 만약 슛을 쏘고 선방하는 장면이 계속 나오고, 더욱 격렬하고 치열하게 공방이 오갔다면 지켜보는 맛이라도 있었을 텐데, 중앙 싸움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지루함이 앞서고 말았다. 열심히 뛴 선수들의 입장에서야 억울하다 하겠지만, 경기를 지켜보는 입장에선 어쩔 수 없었다. “저 실력으로 어떻게 여기까지 왔대?” “난 괜찮은 거 같은데? 뻥축구가 아니라서 훨씬 보기 좋다.” “차라리 뻥축구가 낫겠다. 뭐냐? 저게. 가운데서 깨작깨작.” 어떤 이는 유럽의 12세 미만 유소년 축구도 이거보단 낫겠다며 깎아내리는 이도 있었고, 어떤 이는 너무 전술 위주의 축구가 아닌가 하는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아이들이 운동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그런 우려도 싹 잊어버리고 다시 열렬히 응원전을 벌였다. 경기 자체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결국 상대 팀을 꺾고 우리 팀이 이겨야 하는 경기니까. “장계중 파이팅!” “파이팅!” 비록 친한 친구가 아니고서는 선수들의 이름도 제대로 모르지만, 적어도 장계중학교를 대표하는 이들이 아닌가. 기든 구르든 어떻게든 이기기만 해달라, 는 게 응원단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후반전의 시작은 명수의 원맨쇼로 시작되었다. 감독은 경기 시작 전에 명수에게 주문을 했다. “전반에도 잘했다. 분명히 상대 팀은 너를 많이 경계하고 있어. 하지만 전반 동안 묶여 있었던 탓에 너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상쇄된 거 같다. 그러니까, 후반 시작하자마자 공을 잡고 뛰어라. 헤집어 놔. 골을 넣으면 좋지만 못 넣어도 좋다. 그다음부터는 너 때문에라도 공간이 날 테니까.” 더 솔직히 말하자면 공간이 나지 않더라도 괜찮다. 상대의 공세가 적극적이지 못하게만 만들면 된다. 그래야 장계중의 기세가 살아 오를 것이다, 라는 게 감독의 형세 판단이었다. 기세를 이기고 난 다음에야 전술도 살아날 것이다. “옙.” 맡겨만 달라는 듯, 명수가 입을 야무지게 다물고 가슴을 쿵 한 번 쳐 보였다. 어린 명수지만 믿음직스러운 축구 선수이기도 했다. 감독은 명수의 등을 툭 쳐서 경기장으로 내보냈다. 장계중의 공격으로 시작된 후반전은 명수가 공을 툭 밀어 차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명수의 발끝을 떠난 공이 동료에게 갔고, 그 동료가 제2선에 배치된 미드필더에게 줄 때쯤, 명수는 적진 가운데로 가는 중이었다. 상대 미드필더들이 밀고 지나갈 때쯤, 그리하여 약간의 틈이 생겼을 때, 명수가 손을 들어 보였고 그 신호를 기다렸다는 듯 공이 위로 떠올랐다. 곧 주변의 수비수들이 명수와 공을 마크하기 위해 달라붙었다. 명수는 머리 가슴 무릎으로 이어지는 트래핑으로 공을 지켜낸 후, 개인기로 수비수를 제쳤다. 다음 수비수가 바로 옆에서 진로를 막으려 했지만, 현란한 발재간으로 또 한 번 수비수를 제치고 지나가자 확 트인 공간이 명수 앞에 펼쳐졌다. “와아!” 후반 시작과 함께 시작된 명수의 화려한 퍼포먼스가 장계중 응원단을 들썩이게 하였다. 그 함성에 아랑곳하지 않고, 명수는 오로지 혼자 공을 치고 달렸다. “뭐야? 메시야? 호나우도야?” 몇몇의 환호, 몇몇의 경악 속에서 명수의 드리블은 곧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더 깊은 곳까지 가기에는 이미 최후방으로 물러난 상대의 수비수들 때문에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감독님은 말씀하셨지.’ 골을 넣든 넣지 않든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지만 난 중요하다고!’ 명수의 시선이 살짝 홉뜬 사이, 그 시야에 잠깐의 틈이 보였다. 그 틈이 사라지기 전에 명수의 발끝에 힘이 실렸고, 명수는 이 시합 처음으로 슈팅을 날렸다. 호쾌한 슈팅은 아쉽게도 골포스트를 맞고 튕겨 나갔지만, 상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명수의 이름값을 톡톡히 보인 퍼포먼스와 슈팅에 상대의 수비수는 페널티 에어리어 위로 올라가기가 두려웠다. 특히 오프사이드 전략을 구사하는 중인 수비수들이라 함부로 라인을 끌어올릴 수 없었던 탓도 있었다. “아쉽네요.” 코치는 손뼉을 맞부딪치며 아쉬움을 몸으로 표현했다. “기회는 또 올 거다.” 명수는 감독의 지시를 99% 수행해 냈다. 다른 선수들도 전술 수행도가 대략 90%는 넘는다고 판단한 감독은, 빈말이 아니라 진짜 이 경기를 지게 되면 그것은 순전히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자신은 이 경기를 질 수 없었고 지고 싶지도 않았다. 아이들에게만 영광이 아니라, 본인에게도 영광이고 기록이니까. 다만 그런 욕심 때문인지 계속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해서, 감독은 지금이라도 고개를 돌려 벤치에 앉아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을 녀석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니가 우리 학교 학생이라면, 당연히 학교의 이름이 걸린 이 시합에서 이기고 싶지 않겠냐?’ 고 애교심(愛校心)을 자극해볼까도 생각해봤고, ‘너의 친구들과 선배들이 흘린 땀방울의 가치를 생각하면, 당연히 그 가치가 퇴색되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고 우정과 동기애(同期愛)를 건드려볼까도 생각해봤다. 그렇지만 애초에 저 소년이 내세운 ‘마지막 시합’이라는 핑계가 너무 그럴듯하고, 본인도 그 핑계가 단순히 핑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못내 아쉬움을 참는 중이 아니던가. 저도 모르게 들썩이던 어깨를 심호흡으로 가라앉힌 감독은 다시 시합에 집중했다. 전반전이 중앙을 선점하기 위한 지루한 공방전이었다면, 후반전은 명수의 도발로 시작된 맞불과 혼전이었다. 두 팀 다 뒤가 없다는 식으로 뛰어다니며 슈팅을 남발하기 시작했다. ‘남발’이라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턱없이 모자란 유효슈팅 수와 비교해 두 팀이 후반 20여 분까지 슛을 한 횟수는 18회에 달했다. 골키퍼를 당황하게 할 만큼 먼 거리에서의 위력적인 중거리 슈팅부터 시작해, 저게 슛인가 싶을 정도로 어이없는 XXX대폭발 슛이 여러 차례 나왔다. “저 팀도 적극적으로 공격할 것을 주문한 것 같군요.” “음.” 보는 사람이야 답답하겠지만, 중학생이라는 선수들의 한계를 고려해본다면, 기술과 힘에서 성인에 못 미치는 학생들이라 저런 어이없는 슛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슛의 성공률을 떠나 시도 자체에 의미를 두자면 두 팀이 내건 전략은 비슷했다. “감독님.” “응?” “저기, 아직 교체 카드가 남았는데 말입니다.” 감독은 코치의 말을 이해했다. 말없이 경기장을 바라보던 감독은 곧 코치에게 지시했다. “재훈이 들어오라고 하고, 경주 내보내.” “네? 아니, 저기.” “재훈이 체력 많이 떨어졌다. 빨리해. 안 그러면 수비에서 일 나겠다.” “…네.” 코치의 마음이야, 자기랑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그나마 자신은 체면도 있고 해서 돌아보지 않았지만, 연신 뒤를 돌아보며 단유를 흘깃거리는 모습을 지켜본 마당인데. 문득 감독은 웃음이 나왔다 “고작 후보 놈한테 끌려다니는 꼴이라니.” 워낙에 후보 같지 않은 후보라 이런 민망한 꼴을 연출하고 말았다. 다른 사람이야 민망한 줄 모르겠지만, 감독의 속내는 첫 시집살이에 속내를 들킨 며느리 꼴이다. 감독의 표정에 급격한 변화가 생긴 것은 후반 종료 10분 전의 일이었다. ======================================= [407] 꽃보다 아름다워(4) 동기가 공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자신의 것인지, 옆에서 같이 뛰는 상대 미드필더의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솔직히 후반 시작 후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살짝 고개만 들어 올리면 전광판 시계를 볼 수 있는데도, 시선을 떼기가 두려웠던 탓이었다. 그만큼 경기에 집중하고 있던 동기였기에 길게 이어진 롱패스를 놓치지 않고 받을 수 있었고, 또 옆에 있던 상대 선수 외에 달리 자신을 막을 만한 선수가 없다는 점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패스해, 패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동기는 패스를 할 수가 없었다. 달리기 시작한 뒤로 옆에서 같이 달리는 상대를 가볍게 제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도 자신만큼 지친 거 같은데, 몸의 움직임은 자기보다 훨씬 좋았다. 자신이 어디로 공을 차든, 금방 코스를 읽어낸 후 뺏을 것만 같았다. 또 공을 지켜내느라 아래로 떨어진 시선 탓에 주변에 있을 동료의 위치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동기야!” 하지만 이번의 목소리는 달랐다. 친한 친구의 목소리였고, 가까운 곳에서 들린 목소리였다. 시선을 들어 올리자마자 보인 명수의 얼굴에, 머리보다 발이 먼저 움직였다. 반 박자 빠른 패스에 상대 수비수가 뻗은 발에 걸리지 않고 패스는 성공했다. 명수는 공을 받자마자 몸을 한 번 흔들었다. 페인트 동작이었다. 그리고 곧 오른쪽으로 몸을 낮추며 몸을 돌려 공을 빼는 동작에 명수 뒤에 붙어 있던 수비수가 발을 뻗다 넘어졌다. 후반전에는 계속된 슈팅 속에 응원단의 함성도 커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느 때보다 더 큰 함성과 비명과 고함이 터져 나왔다. 상대 골키퍼가 지르는 비명 같은 외침에 수비수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명수를 막아나갔다. 하지만 명수의 선택은 그들의 예상과 달랐다. 명수는 금방이라도 치고 달릴 것처럼 굴더니, 시선과 다른 방향으로 공을 툭 밀어 넣었다.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공은 사선으로 굴러가더니 명수의 반대편에서 쇄도하던 3학년 선수의 발에 걸렸다. 감독은 그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기분이었다. 후반 시작부터 바로 저 패스를 기다렸다. 상대의 시선이 모두 명수에게로 쏠리는 그 순간, 마지막까지 시선으로 페인팅한 탓에 상대는 반대편에서 쇄도하던 3학년 선수를 보지 못했다. 오직 명수만이 그 선수를 봤고, 그 선수에게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영환아.” 누구 표현대로 마지막 시합이다. 물론 축구 인생의 마지막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장계중학교라는 이름으로 뛰는 마지막 경기일 것이다. 그러니 누군들 그 마지막 경기를 멋있게 장식하고 싶지 않을까? 영환이라는 3학년 선수도 그랬다. 앙다문 턱에 근육이 불룩 나올 정도로 힘을 준 영환은 거침없이 발을 휘둘렀고, 그 어느 때보다 정확하게 발등으로 공의 중앙을 때렸다. 그리고 후반 37분, 전광판의 숫자가 바뀌었다. 장계중학교 학생들은 너나 할 거 없이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오래 기다린 만큼 그 기쁨도 더했다. 벤치의 선수들이라고 다를까. 경기장을 가로질러 벤치에까지 달려든 선수들과 함께 껴안고 환호를 지르며 골을 축하했다. 감독 역시 있는 힘껏 공중을 향해 팔을 휘저으며 첫 골의 기쁨을 같이했다. 단유도 일어나서 손뼉을 쳐 축하해주었다. 비록 다른 아이들처럼 펄쩍펄쩍 뛰면서 온몸으로 표현하진 않았어도 기쁜 마음은 다를 바가 없었다. 얼마나 기뻤냐면, 수학경시대회에서 금상을 받았을 때보다 더 기뻤다. 자신이 골을 넣은 것이 아님에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 동료들과 함께 느끼는 희열과 환희의 순간이 개인의 그것보다 더 크다는 것을 단유는 느꼈다. 솔직히 이들과 그렇게 친하냐고 묻는다면, 단유는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 같은 얼굴을 하고 같은 감정을 나누며 함께 껴안고 좋아하는 이 경험이 단유에겐 신비롭고 흥분되게 느껴졌다. 마치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였던 것처럼, 마치 언제나 늘 함께일 것처럼, 그렇게 느껴졌다. 시합의 진행을 위해 다시 선수들은 경기장으로 향했고, 여전히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아이들이 벤치로 돌아왔다. 옆 사람과 방금 전의 ‘환상적인’ 슛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순간의 감정을 공유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제 잘 막기만 하면 우리가 우승하는 거네?” 승리에 한 발짝 다가간 여유가 벤치에 흘렀다. “방심하면 안 되는데.” “우리가 방심을 왜 해?” 이제껏 얼마나 잘 막았는데. 응원단에서도 승리를 코앞에 두었다는 생각에 힘찬 함성과 응원이 터져 나왔다. 장계중을 연호하는 소리가 경기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리고 상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한 골을 넣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기 시작한 그들은, 수비 라인까지 끌어올리며 공격을 향한 의지를 보였다. 그러다 격한 어깨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쉽게 슈팅 기회를 얻지는 못했다. 시간이 점점 흘러 후반도 거의 끝나갈 즈음이었다. “단유야.” 단유는 옆에서 툭툭 건드리는 선배의 얼굴을 봤다가, 선배가 눈으로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코치가 손짓하고 있었다. 시합에 집중하느라 감독의 부름을 듣지 못했던 단유였다. “네.” 팔짱을 끼고 경기장을 지켜보던 감독이 말했다. “어쩌다 보니 또 카드 한 장이 남았네.” 오늘은 정말 카드 한 장을 필사적으로 쓰지 않으려 애를 썼다. 확실한 승리를 위해. 그리고 부디 이 한 장의 카드가 쓰이질 않길 바란 감독이었다. 하지만. “이제 곧 경기가 끝나는데, 어때 생각 있어?” “….” 단유는 없다고 말하려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 전 그 순간의 희열을 떠올리니, ‘없다’고 대답하면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부정하는 것처럼 여긴 탓이었다. “전반 끝나고 대기실에 있을 때, 너가 빠졌을 때 애들한테 물어봤다.” 무슨? “만약 한 장의 카드가 남았을 때, 단유 너에게 카드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만약 진짜로 그렇게 물어봤다면, 아이들 입장에서는 싫다고 말하기 어렵지 않을까? 감독이 교체 의사를 밝혔는데 이에 정면으로 반대 의견을 제시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아, 물론 단유는 제외하고. “아이들은 당연하다고 하더구나.” “당연하다고요?” “경기장에 뛰고 싶지 않은 선수가 어디 있겠어. 시합에서 골을 넣고 싶지 않아 하는 선수가 어디 있겠어. 하지만 축구는 말이다. 그런 욕심만 갖고 하는 경기가 아니야. 어떤 선수는 골을 넣고 싶은 욕심도 누르고 오로지 자신의 골대를 지키겠다는 의무감에 경기 내내 저 자리에 서서 경기를 지켜보며 긴장을 한다.” 감독이 손가락만 들어 가리킨 방향에는 골키퍼가 허리를 조금 숙이고 좌우로 조금씩 움직이면서 상대의 방향에 맞춰, 언제라도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떤 선수는 상대 수비진을 헤집으며 공을 드리블하고 싶은 욕심을 누르고 더욱 견고하게 수비를 하기 위해 옆의 동료들과 대화를 하고 시선을 맞추며 움직여야 한다.” 다시 손가락이 움직이며 여기저기를 가리킨다. “어떤 선수는 우리 팀이 위험한 상황에도 역습이란 전술을 수행하기 위해, 또 상대 수비진이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 공격 라인에 서서 팀의 위기를 가슴 졸이며 지켜봐야 한다.” 언제라도 뛸 준비를 하는 명수. “그 선수들이 원하는 건 단 한 가지. 팀의 승리다. 팀이 승리가 곧 자신의 승리라는 생각에서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말했다. 너도 우리 팀이라고.” 팀. 이 한 마디가 단유의 가슴에 묵직한 울림을 던졌다. “단순히 니가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야. 니가 우리 팀을 생각해주는 마음을 저 아이들도 알기 때문이야. 단순히 명수 친구라서가 아니라, 바쁜 때에도 시간을 내서 연습을 지켜봐 주고, 같이 흙먼지 마시며 달려 본 친구라서 그런 것이야.”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전 연습도 잘 참여하지 않았는걸요.” 감독이 싱긋 웃었다. “그렇지. 만약 진짜 축구부였다면 선배들에게 농땡이 깐다고 한 소리 들었을 게다. 하지만 축구부가 아님에도 와서 도와줬고, 운동장에서도 적극적으로 달리지 않았더냐? 저 아이들이 순진한 건지 몰라도, 같이 뛰고 땀 흘리면 다 친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만큼 축구를 순수하게 즐기고 좋아하기 때문일 테다. “어차피 지금 들어가도 니가 뛸 수 있는 시간은 2분 정도겠지. 그런데 말이야. 아마 이 시합이 너에게도 마지막 시합 아닐까?” 마지막. 그럴 것이다. 3학년이 되면, 더더욱 시합에 나올 일이 없다. 단순히 3학년이라 학업에 바빠서란 이유가 아니다. 1학년, 2학년 후배들이 누려야 할 기회를 정규 축구부도 아닌 주제에 뺏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다녀와. 마지막 시합.” 말인즉슨, 감독도 내년에는 단유를 부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단유의 의지를, 그 속내를 알기 때문이다. “…네.” 단유는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조끼를 벗었다. 벤치에서 아이들이 달려와 단유의 등과 머리를 때렸다. 격한 격려와 응원에 단유는 미소를 지었다. 후반 43분, 단유가 운동장에 들어설 준비를 하는 걸 보고, 센터 라인 부근에 서 있던 명수가 씩 웃음을 짓고는 엄지를 척 보였다. “인마, 웃지만 말고 나와 인마!” 코치가 손을 모아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교체 번호가 자신의 것임을 깨달은 명수가 히죽 웃으며 뛰어나왔다. “수고했다.” “수고해라.” 명수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들어간 단유는 지친 얼굴의 선수들과 눈을 마주쳤다. 다들 눈에서 빛을 보이며 단유를 환영했다. ‘잘 부탁한다.’ ‘잘 부탁드립니다.’ 말없이 눈으로 인사를 나눈 단유가 센터 라인 부근에 섰다. 곧 온몸이 땀으로 젖은 상대 수비수가 슬금슬금 다가와 마크했다. 상대는 단유의 등장에 조금 긴장한 눈치였다. 갑자기 잘 뛰던 명수를 넣고 나온 선수였기에 경계하는 면도 있었고, 단유의 큰 키와 다부진 체격에 기가 눌린 면도 있었다. 공격은 상대로부터 시작되었다. 드로우 인으로 시작된 상대의 공격은 여전히 파상 공세를 이어나가는 중이었다. 지금은 역습보다 수비가 중요한 순간이니, 굳이 자신이 센터라인에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체력도 좋으니 더 많이, 더 빨리 뛰어다닐 필요가 있었다. 단유는 뛰어난 눈썰미로 진영의 전개를 파악해냈다. 그리고 공의 위치를 가늠한 뒤, 빠르게 달렸다. 다른 시합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축구에서의 체력은 여러 가지가 포함된 스탯이었다. 단순히 지구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집중력에도 영향을 주는 스탯이 체력이었다. 갓 들어온 단유의 체력이 좋다는 건, 반대로 이전 시간까지 줄곧 명수를 마크해온 수비수의 체력이 많이 소모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수비수는 단유를 쫓지 못했다. 포지션을 지켜야 하기에 달리지 않은 것도 있지만, 지쳐서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그래서 윙백에서 중앙으로 향하던 자기 팀의 공격이 단유에 의해 차단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단유는 공을 잡아 세운 뒤, 발바닥으로 공을 뒤로 밀면서 동시에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방향 그대로 공을 쭉 밀어 찬 뒤, 뛰었다. 또래에 비해 큰 체격을 가진 단유가 경기장을 달리기 시작하니, 선수는 물론 관중들의 시선까지 몰리기 시작했다. 단유는 자기 앞에 있는 선수들의 수를 세었다. 총 5명. 그중 골키퍼와 수비수 3명을 제외하면 수비형 미드필더로 센터라인 부근에 있던 선수가 가장 가까웠다. 하지만 그 선수는 포함 시키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미 공은 그 선수를 지나갔고, 그 선수 역시 공을 뺏기 위해 달리고 있지만, 단유가 더 빠르다. 단유는 공을 잡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빨리 앞으로 밀어 찼다. 중앙 수비를 서던 선수가 단유와 공을 향해 달렸고, 양쪽 사이드에 있던 수비수 중 한 명은 단유에게로, 한 명은 중앙을 보강하기 위해 골키퍼 쪽으로 향했다. 단유는 차고 달리는 것임에도 중앙수비수보다 먼저 공에 도달했다. 경이적인 스피드에 놀란 것은 관중들의 몫이었다. 함성이 터져나왔고, 수비수는 당황한 얼굴을 들이밀며 단유를 손으로 붙잡으려 했다. 단유는 무릎을 살짝 굽힌 채로 어깨를 틀어 상대를 방어했고, 상대는 단유의 힘에 밀렸다. 비틀거리는 사이에 단유는 공을 밀고 나갔다. 수비수 두 명, 그리고 골키퍼 한 명. 빈공간도 보이고, 막을 사람도 적고, 시간도 별로 없으니 그냥 또 한 번 시원하게 냅다 갈겨보기로 했다. 어차피 단유가 가진 기술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쾅―. ======================================= [408] 꽃보다 아름다워(5) 벼락같이 터진 슛과 함께 난 엄청난 소리가 관중들을 벌떡 일어서게 만들었고, 골키퍼가 속수무책으로 서 있는 사이 골대의 깊숙한 곳을 찔러 들어가며 골망을 흔들어대는 공에 관중들은 열광했다. 친구들과, 선생님들과, 응원을 온 부모님들이 모두 손을 맞잡고 펄쩍펄쩍 뛰었고, 기쁨에 찬 환호성으로 쐐기 골을 환영했다. 하지만 축구를 좀 안다는 사람들, 특히 중등부 레벨의 축구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턱이 빠질 정도로 놀란 얼굴을 지어 보였다. 그중에는 고등학교 축구부에서 나온 이들도 있었다. “저게 뭐야?” “쟤 중학생 맞아?” “방금 무회전이었나? 공이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 같던데?” “그것보다 힘이 엄청난 거 같은데, 저 선수 뭐야? 후반에 나온 거 보면 주전은 아닌 거 같은데?” 상대 팀 감독이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얼이 빠진 얼굴로 경기장을 보다 몸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침울한 표정의 벤치가 보였다. 뭔가 한마디를 하려다 말았다. 지금은 그들을 위로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고, 할 타이밍도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경기가 끝이 났다. 2:0. 스코어만 보면 한쪽이 일방적으로 유리한 경기였던 거 같지만, 실상은 꽤 비등한 경기였다 할 수 있겠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 많았소, 이 감독. 결국 올해는 자네가 휩쓸었어.” “별말씀을요. 제가 뭘 한 게 있습니까. 저 아이들이 잘해 준 덕분이죠.” “내 앞에서 겸양 떨 필요 없네. 충분히 기뻐해도 돼. 최근 몇 년간 춘추 대회를 독식한 감독이 없었잖은가.” “아직 경험이 일천한 풋내기 아닙니까.” 상대감독은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흔들었다. “그나저나, 마지막 그 아이는 누군가?” 저 정도 스탯을 가진 선수를 주전으로 기용하지 않은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 궁금했다. 아주 단편적인 부분만 봤지만, 충분히 명수라는 에이스와 맞설만한 실력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저 정도면 체력도 좋은 거 같은데, 왜 전반부터 넣질 않고?” 감독은 볼을 긁적이며 마주 잡은 손을 놓았다. “특별 선수라서요.” “특별?” “올 한해만 뛰는 선수입니다.” 상대 감독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난 대회의 회식 때는 본인이 낄 자리가 아니었기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누구랄 거 없이 단유의 팔을 붙잡고 끌어당기는 통에 자리를 뺄 수 없었다. 애초에 빠질 생각도 없었지만, 아이들은 또 슬그머니 빠질까 우려했던 모양이었다. 여러 사람의 박수와 환호 속에서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아이들 틈에 끼어 두 손을 올리고 소리를 같이 질렀다. 같은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리고, 같은 목소리로 ‘장계중 축구부 파이팅’을 외치고,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축하하고 축하받는 자리였다. “많이 먹어.” “알아서 먹을게. 그런데 너 너무 많이 먹는 거 아냐?” 단유의 걱정에 명수가 불룩한 볼을 자랑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정도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가지.” 이미 먹어치운 양만 보면 간에 기별이 가는 문제가 아니라, 건강과 이별(離別)을 할 것만 같다. “야, 오늘 골도 못 넣었으면서 고기가 입에 들어가냐?” 명수 옆에 앉아 있던 3학년 선배가 장난스럽게 명수를 타박하자, 명수가 단유를 가리켰다. “얘가 넣었잖아요, 저 대신. 그래서 제가 얘 대신 먹어주는 중이죠.” “와, 얘 뻔뻔한 거 봐?” 아이들은 명수의 너스레에 웃음을 터뜨렸다. 단유도 피식 웃으며 잘 구워진 고기를 명수의 밥그릇에 올려주었다. “많이 먹어라.” “그래, 많이 먹어줄게. 니 몫까지.” 명수가 눈웃음을 지으며 고기를 입안에 집어넣고 우물거렸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벌써 시간이 7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시상식까지 마쳤을 때가 5시쯤이었으니, 무려 2시간을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할애한 것이다. 보통 때였다면 그 시간을 무척 아까워했을 단유였지만, 오늘만큼은 아깝지 않았다. “명수 니가 축구를 하는 좋아하는 이유를 알 거 같다.” “음, 그래.” 명수는 달리 대꾸를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꽤 피곤해하던 명수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꾸벅꾸벅 졸았다. “씻고 자.” “나중에.” 명수의 방문이 달칵 닫힌 후, 단유는 발밑에서 혀를 빼물고 있는 호빵을 바라보았다. “아, 너도 배고프지?” 단유를 바라보는 작고 검은 눈동자를 보며 웃음을 지어 보인 뒤, 호빵의 밥그릇에 사료를 채워주고 물도 새로 갈아 넣어 주었다. 개도 주인을 닮았는지, 허겁지겁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단유는 그 옆에서 무릎을 끌어당겨 두 팔로 안은 채 호빵의 식사를 지켜보았다. “너도 친구가 있으면 좋겠구나. 혼자라서 심심하지?” 호빵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넉넉히 부어주었건만 벌써 반이 사라졌다. “혼자 있을 때는 구속되는 게 없어서 자유로운데, 함께 하면 즐거움이 배가 되는 거 같아.” 혼자 무언가를 해냈을 때의 성취감보다 함께 움직여서 성과를 만들어냈을 때의 성취감과 기쁨이 더 크다는 사실을 단유는 깨달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지칭했다고 배운 바가 있었다. 곧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고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이루어진다는 말이라고 교과서에 기술되어 있었다. 교과서의 활자는 솔직히 와 닿지 않았다. 단유는 애초에 사회적 동일체로부터 벗어난 존재였고, 지금은 단지 그 사실을 숨긴 채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기에. 그래서 늘 경계하고 선을 그으며 자연스러움을 연기해야 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순수하게 기뻤고, 들떴으며, 흥분했었다. 늘 경계의 대상이던 주변 사람들이 오늘만큼은 ‘함께여서 다행인’ 존재들이었다. 어느새 물까지 다 마시고 식사를 마친 호빵이 ‘이제 나랑 놀아줄 차례’라는 듯 단유를 바라보며 킁킁거렸다. “씻고 놀아줄게.” 오늘은 잠깐 놀아줘도 될 거 같았다. 아니 오늘만큼은 호빵의 ‘친구’ 역할을 해볼까 생각했다. 오늘이래 봐야, 이제 몇 시간 남지도 않았으니까. **** “내가 갔어야 했어. 가서 봤어야 했어.” 나윤은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축구 잘 모르잖아요?” “축구 보러 가니? 너 보러 가는 거지?” 단유는 매운맛이 강한 돼지고기 볶음 한 점을 집어 나윤의 밥그릇에 올려주었다. “이렇게 보면 되지, 뭘 그래요.” 나윤은 입안 가득 우물거리면서도 할 말이 많다는 듯 말했다. “그냥 보는 거랑 같니? 골도 넣었다면서?” “그건 어쩌다 넣은 거죠. 그런데 바쁜 일 있어요? 왜 그렇게 급하게 밥을 먹어요?” “아, 오늘 연습할 게 많아서. 사실 행사가 잡혔거든?” 컵에 물을 담아 나윤에게 건네며 물었다. “어떤 행사요?” “지방대학교 행사래.” 어쩐지 나윤의 얼굴이 밝아 보인다 했다. 지방의 어떤 대학이라도, 지난번처럼 시골 장터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보다는 분위기가 좋을 것이다. “저도 따라갈까요?” “됐어. 와 주면 좋긴 하겠지만, 거긴 너무 멀어. 그리고 너 공부할 시간도 없잖아? 너 ‘연구’한다던 그건 어떻게 됐어? 끝났어?” “아뇨, 금방 끝나지 않네요.” “그러니까.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데 그런 곳까지 따라오지 않아도 돼. 회사 사람들한테 눈치도 보이고.” 아직 나윤의 연애에 대해 회사 측에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점을 보면 회사가 나윤에게 꽤 소홀한 것 같은데, 그래도 이렇게 행사를 잡아 오는 것을 보면 마냥 손 놓고 있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아 한편으로는 안심이 된다. 단유는 물로 입을 개운하게 씻어낸 뒤, 휴지로 입가를 정리했다. “혹시 모르니까, 무대 할 때 주위를 잘 보세요. 제가 있을지도 몰라요.” “야아, 그런 말 하지 마. 괜히 기대하게 되잖아?” 나윤이 투정부리듯 어리광을 부리니, 그 모습이 또 ‘귀엽다’고 느끼는 단유였다. “알았어요. 언제인데요?” “목요일.” “주중이네요.” “그러니까. 네가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거지.” “알았어요. 아무튼, 그럼 바쁠 테니까 그만 일어나죠? 식사 다 하셨으면.” “그래.” 나윤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던 단유는 나윤의 짧은 바지에 눈이 갔다. “왜? 너무 야하게 입은 것 같아?” 나윤이 장난스럽게 묻자,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 옷 너무 낡은 거 같아서요.” “그렇지? 하긴 벌써 4년이 넘었어.” 그냥 입는 옷도 4년이면 긴 시간인데, 격한 안무를 연습할 때 막 입기 좋다는 이유로 계속 착용하다 보니 많이 낡은 티가 났다. “아, 그럼 나중에 같이 옷이나 사러 갈까? 간 김에 니 옷도 사고.” “제 거요? 전 괜찮은데?” “아니야. 보니까 너도 옷이 아주 작은 거 같애. 일부러 몸 좋은 거 과시하려는 거 아니면, 새 옷 하나 사야 될 거 같은데?” 단유의 팔뚝을 찰싹 때리며 미간을 좁히는 나윤의 행동에 단유는 웃음을 터뜨렸다. “과시하려는 의도는 없는 걸요?” “아니야. 아무튼 나중에 행사 갔다 와서 같이 나가자.” “그래요.” 단유는 웃음을 지으며 나윤과 함께 식당을 나섰다. 회사 근처에까지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온 단유와 나윤은 입구 부근에서 걸음을 멈췄다. “들어갈게.” “네. 집에 가서 연락할게요.” “그래.” 나윤이 손을 흔들고 먼저 회사로 들어가려는 때였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사람 때문에 멈칫한 나윤에게 남자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밥 먹고 오는 거예요?” “아, 네.” 종철이었다. 종철은 나윤의 뒤에 서 있던 단유를 발견했다. “자주 보네.” 어쩐지 말에 뼈가 있다고 여겼지만 나윤은 대꾸하지 않았다. 어서 종철이 계단을 빠져나오기만 기다렸다. 하지만 종철은 계단을 내려가는 입구에 서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행사 잡혔다면서요?” 종철은 나윤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물었지만, 단유를 향해 힐끔거리는 모습이었다. 나윤도 고개를 돌려 단유를 바라보니, 어쩐 일인지 단유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자신과 종철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괜한 오해를 할까 걱정되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네. 저 먼저 내려갈게요.” 나윤이 종철의 옆을 비집고 내려가려는 시늉을 했지만 종철은 비키지 않았다. “나랑 이야기하기도 싫은 거예요?” “네? 아뇨, 아뇨. 그런 거 아닌데요?” “그런데 왜 그렇게 벌레 쳐다보는 것처럼 떨떠름하게 봐요?” 당황한 나윤에게 종철이 눈을 번들거렸다. “사람 기분 나쁘게.” 그때, 단유가 한 발 내디뎠다. 단유가 자리를 떠나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나윤이 연습실로 내려가는 모습을 끝까지 배웅하려는 게 아니었다. 모습을 드러낸 종철이 짧은 순간이나마 발산했던 불쾌한 ‘악의’에 반응한 탓이었다. 그 악의의 방향이 자신인지, 아니면 나윤인지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악의가 보이지 않았다. 악의를 감추고 있던지, 아니면 자신이 착각한 것이리라. 그래서 주의를 주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나윤과 종철이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점점 불편함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시죠?” 단유가 종철에게 직접적으로 물었다. 종철도 키가 큰 편이라 단유와 눈높이가 비슷했고, 오랜 안무 연습과 체력단련으로 몸이 좋은 편이라 단유의 덩치에 꿀림이 없었다. “나윤씨 남자 친구죠?” 종철이 먼저 직구를 날렸다. “네.” 단유 역시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놀란 것은 오히려 종철이었다. 나윤의 당황한 얼굴을 슬쩍 바라본 뒤, 단유에게 물었다. “그렇게 당당하게 말해도 되는 거예요? 회사에서 알면 어쩌려고?” “회사에 이야기하실 거예요?” 단유가 덤덤한 어투로 되물었다. 종철이 피식 실소를 지으며, 마른 뺨을 쓰윽 문질렀다. “안 하죠. 그런 짓.” “그럼 상관없겠네요. 저 남자 친구 맞아요.” “멋있는 남자 친구네? 좋겠어요, 나윤씨?” 나윤은 짐짓 화가 난 투로 대답했다. “그만 하세요. 할 말 있으면 저한테 하시고요. 단유야, 너 먼저 가.” 가란다고 갈 수 있는 상황일까. 단유는 대답 대신 종철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길을 막고 계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길? 아, 길.” 종철은 천연덕스럽게 옆으로 한 걸음 옮기고는 나윤에게 손짓했다. “지나가세요, 나윤씨.” 그런다고 지나갈 수 있는 상황이겠냐. 나윤은 기분 나쁘다는 얼굴로 종철을 노려보았지만, 종철은 아무렇지 않은 듯 뻔뻔한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됐죠?” “장난 그만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하세요. 저 그렇게 어수룩한 사람 아니니까요.” 단유가 덤덤한 표정으로, 하지만 단호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니 속내를 까보라고. 종철의 눈이 또 한 번 번들거렸다. “그렇게 말하니까 마치 내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 사람처럼 보이잖아요. 그냥 행사 잡힌 거 축하해주려고 말 건 것뿐인데 말이에요.” 종철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두 사람 다 사람 기분 나쁘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요.” 종철의 비웃음에 나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409] 거울 속 아이(1) “존칭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쪽 분께서 먼저 실례하신 거 같은데요?” 단유가 담담하게 종철의 말을 받았다. “네?” “방금 하신 말씀은 누가 들어도 비꼬는 거란 걸 알 수 있는 말이었잖아요?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한다고요? 정작 아무 말 없이 지나가려는 사람을 붙잡아서 말을 걸고,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면서도 사과 한마디 없으셨던 분이 자기 기분 나쁘다고 불쾌해하시는 건 적반하장이겠죠.” 종철은 혀를 찼다. “말씀 잘하시네요.…난 뭐 그렇게 말을 잘 못 하니까 같이 대화는 못 하겠고. 뭐, 어떻게 네네 지나가십쇼, 이러면 되나?” 허리를 굽혀 굽신거리는 시늉을 하는 종철의 비틀린 미소에도 단유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렇게 하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하세요. 강요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본인의 의사에 달렸으니까요.” “뭐?” 눈썹을 치켜세우는 종철에게서 고개를 돌린 단유가 나윤에게 말했다. “먼저 내려가세요.” “단유야.” “괜찮아요. 먼저 내려가요. 여기 정리하고 내려갈게요.” “뭐, 정리?” 어이없다는 표정의 종철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어린 새끼가 입을 너무 가볍게 놀리네?” 단유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런 일이 너무 익숙해진(?) 탓에 이렇게 어설픈 시비 따위로는 단유를 겁먹게 할 수 없었다. “안 싸울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내려가세요. 괜히 누나까지 여기 있다가 다른 사람들 눈에 띄면 좋지 않잖아요?” “단유야.” 나윤은 내려가고 싶지 않았지만, 단유의 눈에 서린 굳은 의지를 읽었다. 만약 여기서 내려가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한다면 그것 또한 단유를 곤란하게 만드는 일일 테다. “알았어. 그럼 나중에 그냥 가지 말고, 꼭 얼굴 보고 가.” “알았어요. 내려가서 연습하고 있어요. 괜히 심란하다고 놀고 있지 말고.”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보며 종철이 중얼거렸다. “웃기고들 있네.” 이것들이 사람을 앞에 세워놓고 무슨 허수아비 대하듯 있으니, 무시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윤이 내려가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던 단유가 고개를 돌렸다. 사뭇 진지해진 단유의 눈빛에 종철은 살짝 긴장됐다. 사실 종철은 싸움을 잘하진 않았다. 아니, 싸움을 못 하는 편이었다. 몸이야 워낙에 평소 안무 연습과 헬스 등으로 만든 몸이라 다부져 보였지만, 이때까지 누구와 주먹질 한 번 해본 적 없는 몸이었다. 그래서 단유가 눈을 빛냈을 때, 종철은 갑자기 주먹을 날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한 것이다. 하지만 단유 역시 싸움을 좋아하지 않았고, 할 생각도 없었다.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으시면 자리를 옮길까요? 여기 있으면 저보다 더 안 좋으실 거 같은데?” 단유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켜 보였다. 확실히 회사 내부 사람들이 이 소란을 알게 되면 아무래도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은 고작해야 ‘연습생’의 신분이니 더 많은 제약을 받는다. “너랑 할 이야기 없으니까, 그냥 꺼져.” 하지만 단유에게 끌려가는 인상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고, 단유와 할 이야기도 없었다. 종철은 콧방귀를 끼고 몸을 돌려 다시 지하로 돌아가려 자세를 취했다. 단유는 종철의 어깨를 잡았다. 종철이 고개를 홱 돌리며 날 선 눈으로 바라보는데, 단유가 그의 어깨를 꾸욱 눌렀다. “이야기, 하자고요. 들어가지 마시고요.” 이렇게 종철을 아래로 내려보냈을 때, 나윤에게 어떤 위험이 가해질지 모른다. 그런 가능성을 두고만 볼 수 없던 단유는 종철에게 위력(威力)을 가했다. 단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종철이다보니 단유가 힘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놔라.” “못 놓습니다.” 종철이 팔을 휘둘러 어깨에 놓인 손을 떨치려 했다. 단유는 어깨에서 손을 떼고, 허공을 휘젓는 종철의 팔을 붙잡았다. 빠르게 휘두르는 팔을 붙잡아버리는 단유의 기술에 놀라고, 팔목이 하얘지도록 가해지는 힘에 또 가슴이 철렁했다. “깡패 같은 새끼가!” 이를 악문 채로 단유를 노려보지만 단유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종철의 눈을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종철은 붙잡힌 손을 흔들어보았지만 단유를 떨쳐낼 수 없었다. 나름 힘에 자신이 있다고는 하지만, 저런 전문(?) 싸움꾼과는 붙어서 이길 재간은 없었다. 그렇다고 소리를 지를 수도 없는 답답함에 분노와 억울함이 가슴을 가득 채울 때였다. 단유가 손을 놓았다. 갑작스러운 단유의 태세전환에 종철이 얼른 뒤로 몸을 빼고는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단유는 머리를 긁으며 난감해하다 말했다. “죄송해요.” 뜬금없는 사과는 갑자기 날라온 주먹보다 더 강했다. “뭐?” 한숨을 쉬던 단유가 다시 종철과 시선을 마주했고, 종철은 그 맑은 시선을 피하려 눈동자를 굴렸다. “저 깡패 아니고요, 마구잡이로 힘을 쓰는 사람도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오해라니? 이미 충분히 당했다. 오해가 아니라 사실 아닌가? “1층에 커피숍 있죠? 거기서 차라도 마시면서 이야기 좀 하죠.” “할 이야기 없다고….” “정중하게 부탁드리죠.” 단유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뭐야 이게? 종철은 홀린 듯이 단유를 뒤따라 1층의 커피숍으로 향했다. “뭐라도 마실래요? 제가 살게요. 사과의 의미로.” 종철은 단유를 더욱 경계했다. 아까는 금방이라도 주먹질을 할 것처럼 하더니 왜 또 온순한 양처럼 구는지 묻고 싶었다. 그래서 물었다. “너 뭐야? 무슨 속셈이야?” 자리에 앉자마자 소리를 치며 따지고 싶었지만, 장소가 장소인지라 소리는 지르지 못하고 낮은 소리로 윽박지르듯 따졌다. 단유는 차가운 홍차로 입을 살짝 축이더니 입을 열었다. **** “그래서? 잘 마무리했어?” 좁은 연습실 안에 팬이 약하게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네.” “정말? 싸운 거 아니지?” 하얀 티셔츠 위에 파란색 체크무늬 셔츠를 걸친 나윤은 단유의 손을 꼭 붙잡았다. “제가 싸울 사람처럼 보여요?” “아니니까 걱정이 돼서 그러지.” 단유는 손을 빼서 자신의 턱과 볼을 쓰다듬었다. “그건 그것대로 이상하네요. 주변 사람들은 다들 제가 힘 좀 쓸 줄 아는 것처럼 보이던데.” “너처럼 순둥순둥한 애들이 싸움을 언제 해 봤겠어?” “칭찬인 거죠?” “칭찬으로 들리니?” 나윤은 피식 웃으며 단유를 안아주었다. “그래도 안 다쳐서 다행이야. 얼마나 조마조마했는 줄 알아?” 단유도 나윤을 마주 안으며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렇게 반겨주니까 너무 고마운데요?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은 이래도 괜찮겠어요.” “바보야, 멍청한 소리 하지 마. 이런 일 없어도 자주 안아줄게.” 단유는 말없이 나윤에게 온기를 나눠주었다. 농담으로 마음을 달랜 나윤은 그 이후에야 사정을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별말 안 했어요.” “어? 너 수상해? 왜 갑자기 시선을 피해?” “제가요? 제가 언제요?” “뭐야, 뭐야? 도대체 뭔데? 내가 알면 안 되는 거야?” “아뇨, 안 될 건 없지만, 알아서 좋을 것도 없을 것 같네요. 앞으로도 자주 볼 거 같은데.” “자주 봐?” “연습실 오가다 보면 자주 볼 거 아니에요? 그런 뜻이에요.” 과연 단유의 말대로였다. 자신이 연습실에 틀어박혀 화장실도 가지 않고 있겠다 하면 몰라도, 결국 이 지하 안에서 얼굴을 마주하게 될 일이다. “불편할 거 같은데.” “그런 생각 안 가지셔도 돼요. 어느 정도는 해결됐으니까.” “해결이 돼?” 문득 나윤은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를 떠올려 보았다. 분명 종철은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자신과 단유에게 시비를 걸었다. 자신이 종철에게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고, 단유도 딱히 종철을 모욕하거나 화나게 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니 아까의 상황에서 잘못은 무조건 종철이 한 거였다. 그리고 종철이 잘못했으니까, 벌을 받아도 종철이 벌을 받아야 하고, 자신과 단유는 사과를 받아야 한다. 여기에까지 생각이 닿은 나윤이 물었다. “사과받았어?” “사과요? 음, 비슷하게 한 거 같아요.” 모호하게 답변하는 단유의 말에 나윤은 토라진 척 시늉했다. “뭐야, 그게. 확실하게 말을 해봐. 사과를 받았다는 거야, 안 받았다는 거야?” 단유는 종철의 눈에서 분노와 함께 두려움을 읽었다. 내가 두렵다고? 단유는 자신의 어떤 행동과 어떤 말이 종철에게 두려움을 줬던가 되짚어보았다. 지금의 위력 과시는 그저 억제용으로, 종철의 돌발적인 행동을 막기 위해 사용했을 뿐이었다. 그게 두려웠을까? 아니다. 종철은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두려운 것이었다. 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두려운 것이고, 단유가 어떤 행동을 할지 두려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석되자 종철의 분노도 일견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었다. 정신분석학자, 카렌 호나이는 분노가 세 가지 방향으로 드러난다고 말했다. 첫째는 몸의 이상으로 나타나는데, 심한 두통이나 소화 불량 등이 그렇다. 둘째는 폭력적 성향이다. 가슴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분노라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셋째는 불행을 과시하는 형태다. ‘나 괴로워’, 혹은 ‘나 힘들어’ 라고 울부짖는 것이었다. 고통은 분노의 또 다른 표현이며, 피해의식은 분노의 밑바닥에서 올라온다. 종철은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단유가 느꼈던 순간의 악의는 방향성을 상실한 분노였다. 그리고 그 분노가 상대를 만나 터져 나온 것이다. 다만 상대를 잘못 만난 탓에 억제되고 말았지만. 그러자 분노는 다른 가면을 쓰고 표출되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단유에 대한 두려움, 주위에 대한 두려움, 불확실함에 대한 두려움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었지만, 결국 분노라는 감정이 위장하여 드러난 감정이었다. 그렇다면 종철은 왜 분노를 느꼈는가? 그 점이 단유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적어도 두려움을 드러내는 이라면 ‘대화’를 시도해 볼만 하다고 여겼다. 단유의 경험에도 비추어도 그렇지만, ‘대화’가 되지 않는 사람은 보통 두려움이란 감정을 모르거나 억누르는 사람들이다. 그 반대라면 충분히 대화를 통해 서로의 이견(異見)을 조율할 수 있을 것이다. “고민, 많으세요?” “…응?” 종철에게 다행이라면, 단유는 종철이 걱정하는 것처럼 싸움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과, 어떤 문제를 대화를 풀어나가는 것을 즐긴다는 점, 또 매우 합리적이기 때문에 상대의 이야기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대로 불행이라면 단유는 생각의 속도가 일반에 비해 지나치게 빠르다 보니, 가끔 정상적인 대화의 흐름을 종종 건너뛸 때가 있다는 점이었다. 본래라면, ‘조금 전의 일에서 이러저러한 오해가 있었다’ 혹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렇게 행동을 했고, 그렇지만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그렇게 행동을 했다’고 상황을 이해시키거나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는 말이 먼저 앞서야 했다. 하지만 이미 그와 관련된 내용들이 단유 머릿속에서 단계를 지나가 버려 그다음 단계, 요컨대 종철의 행동에 대한 단유의 가정을 검증하는 단계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 물론 단유는 멍청하지 않았고, 상대의 반응과 리액션에 따라 상황을 이해하는 능력이 좋은 대화 상대였기에 곧바로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아, 죄송해요. 제가 그… 아, 그런데 실례지만 이름이…?” 이제야 상대의 이름도 묻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단유였다. “내 이름 알아서 뭐하게?” 상대의 경계에 단유는 적당히 건조하게 반응했다. 상대가 지키려는 거리감을 지금 당장 깰 필요는 없었으니까. “저희는 대화를 하려고 하는 거니까요. 상대의 이름도 모르는 채로 대화를 할 순 없잖아요? 제가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함부로 야야 거릴 수도 없고요. 그렇다고 계속 ‘그 쪽분’이라고 지칭하는 것도 우습잖아요? 그리고 전 김단유라고 합니다.” “…신종철.” 내키지 않았지만, 어린놈에게 ‘그쪽’이라고 불리는 것도 기분은 나빴다. “네. 음, 뭐 일단은 종철 형이라고 부를게요. ‘종철 씨’보단 낫죠?” 단유 나름의 농담이었는데, 썩 효과가 좋지는 않았다. “아까 물었던 말, 다시 물어볼게요. 요즘 고민 많으세요?” 단유는 찻잔으로 입을 가리고 말했다. 곧 차가운 홍차가 입술을 적시며 혀끝에 살짝 떫은맛을 남겼다. ======================================= [410] 거울 속 아이(2)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종철을 향해 손을 뻗어 제지한 단유가 끝까지 들어보란 식으로 종철을 앉혔다. “고민이 많은 사람은 비판적인 사람이래요. 주변 사람들의 잘못을 평가하고 비판하기 일쑤라고 하네요. 형은 어때요? 주변 사람들에게 비판적인가요?” 안 그런 사람이 어딨냐고 되묻고 싶었던 종철은, 하지만 대답 대신 단유를 노려볼 뿐이었다. “힘들다, 괴롭다고 외치는 사람은 자신의 변화가 힘들고 괴롭다고 외치는 거래요. 환경에 자연스럽게 맞춰가지 못하고 타인의 시선과 기준에 따라 자신을 맞춰가다 보니 힘들고 괴로운 거죠. 고통스럽고요, 두려운 거죠.” 단유를 노려보는 눈에 조금씩 힘이 빠졌다. 대신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반면 단유는 홍차 잔 위의 잔물결을 바라볼 뿐이었다. “형이 지금 나윤 누나에게 혹은 저에게 느끼는 분노가 저는 그런 비판과 고민에서 나온 감정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형이 고민하는 그 무언가에 대한 고통이라고요.” 단유가 고개를 들었다. “힘든가요?”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을 쏟아낼 뻔했다. 솔직히 눈앞의 소년을 곁눈질로 몇 번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자리해서 이야기한 것은 처음이 아니던가. 낯선 이와 마주하여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건 생소한 경험이지만, 전혀 낯선 느낌만은 아니다. 이를테면 처음 접한 노래를 듣고, 마치 그 노래 속 가사 말이 내 이야기인 것만 같아서, 그래서 울컥하던 느낌처럼. 비록 단유가 음률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것도 아니지만, 카페 안의 여러 가지 소음들, 잔과 찻잔이 부딪치며 달그락거리는 소리, 커피 머신이 돌아가는 소리, 마주 앉은 사람과 속삭이는 사람들의 소리, 실내에 들릴 듯 말 듯 흐르는 클래식 음악들이 섞여 마치 전혀 다른 세상, 전혀 다른 공간에 앉아 노래를 듣는 기분이었다. 종철을 위로하기 위한 자리도 아니었고, 그의 마음을 달래려는 의도에서 나온 말도 아니었지만, 어쩐지 종철은 단유의 그 한마디에 오랜 시간 앓고 있었던 병의 정체를 알아낸 것만 같은 시원함이 느껴졌다. “…힘들어.” 힘들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투성인 세상에서 홀로 맹목적으로 달리기만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내 뜻과 무관하게 움직이는 세상 속에 섞이기 위해 그토록 분전했건만, 여전히 제자리인 것만 같아 힘들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세상의 시선에 홀로 위축되어 발악도 못 하고 그저 질질 끌려가고만 있었던 게 아닐까.’ 연습실의 거울을 보면 훌쩍 자란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져서 힘들었다. 그래서였을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 마치 나에게만 가혹한 것 같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행운의 여신이라도 강림한 것인지 다들 잘만 살아간다. 행복한 미소를 짓고, 여유로운 걸음으로 세상을 활보한다. 자신은 지하실 연습실에 틀어박혀 햇빛을 보기가 두려운데. “분노, 증오, 공포심은 단순히 억압된 세상에 대한 표출이 아니라고 해요. 자신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수록, 그리고 그 고민이 해결되지 못할 종류의 것이라고 믿을수록 감정이 거세진다고 해요.” 단유도 이미 경험한 바 있었다. 홀로 남은 세상에 분노했었고, 악의를 드러내며 자신을 위협하는 이들을 증오했으며, 언제 또 자신에게 해를 가할지 모르는 세상에 공포를 느꼈었다. “자존감이 약해질수록 고민은 끝이 없고, 감정은 그 세를 불려가죠. 그래서 그 정신분석학자가 말하길, 자신을 알고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해요. 타인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믿어야 한다고 말하죠.” 단유는 시선을 옆으로 미끄러뜨렸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종철의 떨리는 손가락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 학자의 말처럼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찾고 그 모습을 자신의 의지대로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것도 정답일 순 있겠죠. 혹은 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에게 물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때로 친구는 나보다 더 나를 정확하게 바라봐주는 존재이니까요.” 단유는 일어나서 카페 한쪽에 비치된 티슈를 집어 왔다. 그리고 종철의 손에 쥐여 주었다. 종철이 영문을 몰라 바라보자, 단유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가를 가리켰다. 그제야 종철은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인가. 몇 마디 말에 진짜 눈물을 흘렸다고? “자신을 의심하는 고민은 하지 마세요. 그 시간에 자신을 더욱 믿으려고 노력하세요. 그럼 조금은 덜 힘들지도 몰라요.” 제가 그랬어요, 라며 살짝 웃음기를 더한 단유의 목소리에 종철은 눈을 닦다 말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이런 이야기를 왜 해주는 거냐?” “글쎄요.” 단유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민망한 듯 볼을 긁적이다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누나 때문이죠.” “나윤씨?” “누나랑 같은 회사의 같은 공간에서 연습하시는 분이신데, 누나와 자주 마주칠 거 아닌가요? 그런 분이 평소에 껄끄럽게 대한다면 누나도 불편할 테니까, 애초에 껄끄러운 점이 없도록 만들면 좋지 않을까 판단했어요.” 만약 단유가 같이 있을 수 있다면, 그때는 또 다른 방법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단유네 반의 우성이처럼. 단유는 지금처럼 인도적인 방법 대신 다소 강한 힘을 써서 우성을 눌렀다. 확실히 강한 힘은 효과가 즉각적이고 효율적이다. 때문에 우성은 단유와 떨어져 있을 때도 교실 안에서만큼은 쥐죽은 듯 지내고 있었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시쳇말로 ‘동공지진’도 일으킬 정도다. 반면 종철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첫째는 그가 느끼는 분노와 두려움의 감정에 호기심을 느낀 탓이지만, 둘째는 단유가 늘 나윤과 함께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 좀 덜 위압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지금 당장은 종철이 단유의 말에 동조, 혹은 감화를 받은 것처럼 굴지만, 그 지속성에 대해서는 장담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했을 때의 위험성에 비하면 낫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떤 ‘복수’를 꿈꿀지 모른다. 복수의 방향이 단유라면 다행이지만, 나윤에게로 향한다면 낭패다. “나윤씨에게 악감정 없다.” 종철의 말에 단유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잘 지냈으면 좋겠네요. 두 사람, 아니 회사에 있는 모든 연습생이 다 같은 ‘동료’들이잖아요.” 에이바운스라는 회사 안에서 하나의 목표, ‘성공’이라는 깃발을 잡기 위해 달려가는 그들은 때로는 경쟁자가 되기도 하겠지만, 크게 보면 그들은 동료였다. 때로는 서로를 위로해주고, 때로는 서로를 격려해주고, 때로는 상대의 성공을 축하해줄 수 있는 동료. 종철은 고개를 내저었다. “니가 이곳에 있어 보질 않아서 그래. 얼마나 시기, 질투가 많은 곳인지.” “모르죠. 하지만 시기, 질투와 같은 것이 모두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는 증거예요. 말씀드렸잖아요. 자신을 믿으라고. 자신이 바로 서면 타인의 모습에 시기나 질투를 하지 않게 돼요. 할 필요가 없죠.” 단유가 잠시 말을 끊고 가만 생각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맥락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맹자는 서로 상생하는 공동체의 구성이 중요하다고 했어요.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선(善)’이라고 했죠. ‘선’은 ‘인(仁)’이라고 했으니 정직하고 바른 마음이 선을 이끈다고 할 수 있어요.” 종철이 조금 전과 다르게 눈을 동글게 뜨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너…되게 똑똑하구나? 그런 건 외우고 다니냐?” “아뇨, 그냥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럴 거예요. 제가 책 읽는 걸 좋아하거든요. 형이 노래를 많이 외우듯이, 저도 책을 많이 읽다 보니 그런 거라고 생각하세요.” “혹시 대순진리교, 뭐 그런 건 아니지? 도를 아십니까, 이러는 거.” “그게 뭐예요?” 정말 모른다는 눈치의 단유를 보며 종철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소리를 냈다. “아, 정말. 울다 웃으면 안 좋은데.” 종철은 눈꼬리를 티슈로 꾹꾹 눌러 마저 물기를 지워낸 뒤, 단유에게 툴툴대듯 말했다. “너 참 별난 놈이구나.” “…그런 말, 종종 들었네요.” 웃음을 지었을 때, 아니 그 전부터 종철의 경계심은 꺾인 상태였다. 종철은 그제야 앞에 놓인 냉커피에 손을 가져갔다. “난 좀 단 게 좋던데.” 시럽을 넣어야겠다며 일어나던 종철을 바라보며 단유는 다시 홍차를 입에 머금었다. 여전히 떫은맛이지만, 개운한 맛이었다. 이후, 종철은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이 눈물을 보인 것에 대한 변명이라며 꺼낸 이야기였지만, 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란 하소연 같은 것이었다. 나윤보다 더 어린 나이에 회사에 들어와 데뷔의 꿈을 키워갔던 이야기는 사실 다른 이들과 비교해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다르지 않다고 해서 본인이 느끼는 심적 괴로움과 외로움을 폄하할 순 없었다. 누구나 자신의 고통이 가장 아픈 법이니까. “…아마 그래서 나윤씨에게 질투가 났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도 난 나윤씨 팬이기도 하니까, 니가 걱정할 일은 없을 거다.” 종철은 들어올 때와 다른 얼굴로 카페를 나왔다. “난 담배 한 대 피우고 갈게.” 이것도 빨리 끊어야 하는데, 라고 중얼거리며 돌아서는 종철을 바라보다 단유도 돌아섰다. 그리고 걱정하고 있을 게 분명한 나윤에게로 향했다. **** “단유야, 너 편지 왔는데?” “네?” 하은이 퇴근 후 집에 들어서며 우편물 여러 개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중 하나를 흔들어 보였다. “한국번역가협회, 라고 되어 있는데? 너 시험 쳤던 거 결과 나온 거 아니니?” 그러고 보니 이미 결과가 나왔을 시점인데, 컴퓨터로 확인하지 않고 있었기에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편지를 열어보는 단유의 어깨너머로 내용을 훔쳐보던 하은이 밝게 웃으며 소리쳤다. “우와, 김단유! 너 대박이다!” “고맙습니다.” “그럼 이제 번역일도 하겠네?” 번역능력인정시험(TCT)에 합격했다고 해서 취업알선이나 번역 일거리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다만 취업 시에나 번역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을 때, 이력서에 넣을 한 줄 정도는 될 것이다. “그건 뭐 천천히 생각해봐야죠.” 번역아르바이트라는 일거리가 있다는 것을 이전에 알아본 바가 있었으니, 아마 단순히 중학생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재택근무가 가능하니 시간을 뺏길 일도 적고. 하지만 지금도 꽤 빡빡하게 하루를 사용하는 단유였기에 그럴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다. 단유는 다시 편지지를 접어 봉투에 넣고는 하은을 바라보며 웃었다. “번역 알바하면 돈 좀 되겠죠?” “글쎄다. 내가 그쪽으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어서. 진짜 해 보려고?” “여유가 되면요.” 단유는 방으로 돌아가 책상 서랍에 봉투를 넣고 다시 펼쳐놓았던 노트로 시선을 돌렸다. “하아.” 절로 한숨이 나온다. 쉽게 생각했던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으니, 조금 답답한 마음이었다. 가을도 이제 다 지나가고, 어느새 겨울의 초입을 눈앞에 둔 시점인데도 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역학이란 게 꽤 어렵구나.” 단순히 회전에 관한 문제에 천착해서 공부를 시작한 단유는 곧 물체의 운동과 관련된 ‘동역학(動力學)’에까지 손을 뻗게 되었다. 하지만 공부를 할수록 더 많은 분야에 손을 대지 않을 수 없었고, 역학 일반에까지 범위가 넓어진 상황이었다. 역학이란 학문의 범용성과 다양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혼자서 해결하려다 보니 부딪히는 한계이기도 했다. 하긴 대학에서 4년을 공부하고도 모자란다는 이야기를 듣는 학문이기도 하니, 어찌 단유 혼자 할 수 있을까. “이래서 대학을 가는 거구나.” 고등학문을 배우려면 대학을 가야 한다. 그곳에서 우수한 지도자의 가르침 아래 체계적으로 학문을 공부해야 이 연구가 끝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단유의 머리를 지배했다. ‘어떻게 하면 대학에 빨리 들어갈 수 있을까?’ 대학 조기 입학. 단유는 다시 책상을 벗어나 하은에게로 향했다. 대학 조기 입학자가 집에 있는데, 혼자 궁리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 [411] 거울 속 아이(3) “흐음. 결국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됐군.” 올 게 왔군, 이란 표정의 하은은 팔짱을 끼고 미간에 골을 만들어 보였다. “우리 때도 그런 고민을 심각하게 하던 친구가 있었지.” 고1 때 이미 대학 조기 입학을 고려하던 친구가 있었다는 하은은 그 친구가 결국 학교를 자퇴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검정고시를 쳐서 17살에 대학을 들어갔다.” “가능한 거였네요.” “가능은 하지. 다만 좋은 점만 있지는 않았어.” 그 친구는 친하다고 부를 만한 사람이 없었던 탓에, 대학에 가고 나서 꽤 힘들어했다고 한다. “본인의 성격도 조금 문제가 있었지만, 대학에 가서도 주변의 교우관계가 그렇게 원활하진 않았었나 봐.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그것 때문에 오히려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우울증도 겪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요?” “음, 그 뒤로는 소식을 들은 바가 없어 모르겠네. 나 같은 경우야, 뭐 고2를 마치고 입학을 했으니 조기 입학이라면 조기 입학이지만, 내가 다니던 학교에선 조기 입학한 친구가 여럿 있었거든.” 그중 한 명이 연성 재단의 주영이었다. “솔직히 니 나잇대의 아이들이 감수성이 좀 특별하잖니? 그래서 남들보다 쉽게 스트레스를 받고 하다 보니 그런 것일 수도 있고 그래.” 하은은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어쨌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문제는 니가 조기 입학을 하겠다는 문제인데, 난 솔직히 말하면 찬성. 너 정도면 조기 입학해도 문제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친구야, 뭐 지금도 잘만 만들고 있잖아? 여자 친구도 알아서 잘 만드는데.” 그것도 연상의 여자를, 이라며 킬킬거리는 하은을 보며 단유는 왜 또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냐며 툴툴댔다. 하여튼 하은에게 틈만 주면 저렇게 의식의 흐름을 따라 브레이크 없이 내달린다. 그러나 알고 보면 단유 주위의 사람들이 단유를 보기에도 브레이크 없이 내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학교에서 바라보는 단유가 그랬다. “자, 전국수학경시대회 역시 금상!” 담임은 단유가 들고 온 상장을 다시 단유에게 건네는 퍼포먼스로 단유를 축하해주었고, 반 아이들은 감탄의 눈으로 박수를 보냈다. “너란 인간, 정말 대단한 놈이구나.” 이런 애가 나중에 서울대 가겠지, 라고 중얼거리며 도하가 눈을 빛내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 낯뜨거운 시선이 민망해서 단유는 도하를 툭 밀었다. “그냥 엎드려 자라. 이상하게 쳐다보지 말고.” “왜 이래? 축하해주는 거잖아?” “누가 축하를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식으로 해?” “너 말고 나.” “응?” “이 평범한 인간 세계에 너 같은 놈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나를 축하하는 거야.” 최근 도하가 지태 네랑 어울리면서 좀 평범해졌다 싶었는데, 역시나 도하는 도하다. 그 사이 선생님은 몇 가지 전달사항을 알린 후, 조례를 마치려 했다. 출석부를 교탁 위에 세워 탁탁 소리를 내서 주의를 환기한 담임 선생님은 학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리고 최근에 단톡방에서 교복에 대한 문제로 말들이 많던데, 그 문제는 학교와 학부모회가 잘 조율해서 마무리할 것이니까, 너희들은 괜한 논란에 휩쓸리지 말고 시험준비나 잘해라. 2학년 마지막 기말고사가 이제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거 알지? 수업시간에 졸지 말고, 학교 끝나고 피시방 가는 것도 좀 줄이고, 집에 가서 인강 듣는 사람은 열심히 인강 듣고, 학원 가는 사람은 열심히 학원 다녀. 알겠지?” 선생님은 그 말을 끝으로 반장의 인사를 받은 뒤 교실을 나갔다. 아이들은 1교시가 시작되기 전의 짧은 휴식시간도 알차게 보내려는 마음인지, 서둘러 교실을 뛰쳐나가 일부는 화장실로 일부는 매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교실에 남은 아이들은 선생님이 던진 화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거 말 되게 많던데?” “다른 반 단톡방에서는 싸움이 날 정도라더라.” “그냥 교복 바뀌는 건데 그게 무슨 싸움 거리나 되나?” “그냥 바뀌는 게 아니잖아. 엄연히 원칙과 절차라는 게 있는데, 그런 걸 무시하고 바꾸는 건 말이 안 되지.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어떤 세상인데?”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인실좆 당하는 세상?” “그래도 교복 문제는 좀 그렇지 않나? 학교에서 정한 걸 뭐라고 그래?” “그런 사고방식이 위험한 거다, 짜식아. 너 만약에 국회에서 이상한 법 만들어서 통과시키는데도 우리 일 아니라고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그거 다 우리한테 돌아오는 거야. 법과 질서가 지켜지지 않은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어?” “아 몰라, 임마. 왜 나한테 화내고 지랄이야?” “너한테 화를 낸 게 아니고, 현 시국이 지랄 맞아서 지랄한 거다.” “시국 걱정할 시간에 니 성적이나 걱정해, 새끼야.” “대신 걱정해줘서 고맙다, 새끼야. 이번 기말에 너는 얼마나 잘 나오는지 보자.” “너보단 나을 거다, 새끼야.” “안 나오면 뭐 걸래?” “걸긴 뭘 걸어?” “니 플스 걸어라. 새끼야.” “그럼 너는 니 자전거 걸어라. 새끼야.” “씨발 그 자전거 존나 비싼 거야, 임마.” “내 플스도 비싸다, 새끼야.” 사이좋은 친구들이 오붓하게 정담을 나눌 때, 도하가 우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단유야.” 단유는 노트를 보던 시선을 돌려 도하를 보았다. 턱을 괴고 교실을 보던 도하는 턱을 괸 탓에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다. “왜들 저럴까?” 단유가 흘깃 아이들을 보고, 그 아이들이 나누는 대화를 조금 듣다가 대답해주었다. “공정성에 대한 의심 때문이겠지.” “공정성? 그게 뭔데?” “누구나 올바르다고 판단하는 거?” “그럼 교복이 올바르지 않다는 말이냐?” “교복이 올바르지 않다는 게 아니고, 교복을 변경하는 문제가 올바르지 않다는 말이지.” 이제 알겠냐는 듯 도하를 쳐다보자, 도하는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멱살잡이를 할 것처럼 장난치는 아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솔직히 난 저런 데 관심이 없지만 말이야. 그래도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라 그런데, 교복 바뀌면 우리도 옷 새로 사야 하나?” 불의가 아니라 ‘불이익’ 아닐까? 도하 본인에게 불이익이 있을까 걱정하는 것 같아 단유는 그럴 일 없다고 말해줬다. “3년간은 현재 교복과 바뀌는 교복을 혼용해도 된다고 하니까.” “혼용?” “같이 입어도 된다고. 이걸 입든 저걸 입든 상관없다는 뜻이야.” “그래? 그런데 왜 다들 저렇게 열을 내나?” 도하는 아이들이 저러는 이유가 도저히 이해 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단유는 별다른 대꾸 없이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저 아이들은 적어도 도하처럼 불이익이 없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들이 저렇게 열을 내는 것은 순수하게 ‘불의’에 직면한 때문일까? “아직도 말이 많이 나온다고요?” 이사장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로 식탁에 놓인 회 한 점을 집어 들었다. “곧 가라앉을 겁니다. 학부모회 내부에서도 이제 거의 진정되어간다고 하니 말입니다.” 교장은 차분한 표정으로 짐짓 여유를 부리며 오초코(おちょこ, 사케 전용 잔)를 입술에 대고 맛을 음미했다. “나 참. 이게 이렇게 말이 나올 일인가, 이 말이에요.” “요즘은 사소한 것도 문제가 됩니다. 애초에 말씀드렸잖습니까.” 교장의 여유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사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교장은 살짝 입가를 늘리며 이사장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걱정 마세요, 이사장님. 만약 누군가가 정식으로 문제제기를 해서 교육청에 고발이 들어간다고 해도 문제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게 더 좋겠군요.” “…학교가 시끄러워지는 일은 피해야지, 그게 어떻게 더 좋다는 이야깁니까?” 비록 자신이 이사장으로 선출이 되었지만, 여전히 다른 이사 라인의 힘은 살아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계속 끌려다니는 수밖에 없으니 얼른 가시적인 성과를 끌어내야 했다. 물론 자유학기제 홍보대사와 같은 이벤트와 수학경시대회, 추계축구대회의 우승 등으로 학교의 이름을 알린다는 계획은 꽤 성공적으로 진행 중에 있다. 하지만 교복 변경은 학교의 이미지를 세탁하는 데도 의미가 있지만, 새로운 재단 이사회의 출범을 공식화하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었다. 물론 실속을 챙기려는 마음도 있지만 말이다. “교육청에서 나와서 감사를 하면, 뭐 조금 고달플 수는 있지만 이를 통해 공식적으로 문제가 없음을 증명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졸속으로 진행했지만, 절차상의 문제는 전혀 없다. 아니 경고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교복 변경이 취소될 정도는 아닐 것이다. “이미 준비도 끝났으니, 만약 누군가가 교육청에 감사를 요청하게만 한다면 깔끔하게 마무릴 될 겁니다.” 요청하게 한다? 교장은 자신의 잔에 또 사케를 조르르 따른 뒤 잔을 들었다. “학부모회는 모릅니다. 위원장도요.” 천천히 음미하듯 사케를 마신 교장인 입술을 달싹거리며 남은 술의 여운을 즐기더니 말을 이었다. “교복 선정 위원회 때 학부모회 위원장에게 졌던 빚, 이번에 갚을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요?” 교장은 젓가락을 집어 식탁을 톡톡 두드린 뒤, 살이 도톰한 회를 한 점 집었다. 입에 넣고 씹는 모습을 보니 이사장은 우득우득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위원장은 자신이 학부모회 내부를 정리할 수 있다고 했지만, 결국 교육청 감사에까지 이르게 되죠. 그렇다면 위원장 역시 감사 대상이 됩니다. 그걸 저희가 적당히 막아주는 거죠. 교육청 감사를 막지도 못했고, 감사 대상에서 빠지게 도와주기까지 했으니, 어떨까요?” 역시 교장이다, 라는 생각에 이사장이 허벅지를 탁, 치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오랜 시간, 단순히 의자에만 앉아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과 동시에 이전 이사장이 교장을 끼고돌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이렇게 정치적 계산이 빠른 인물이 가려운 곳을 기가 막히게 긁어주니 어찌 고맙지 않았을까? “허허, 교장 선생님이 여유를 부리는 이유가 있었군요.” 교장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온화한 교장의 얼굴이 마치 보살처럼 보인다고 이사장이 생각하고 있을 때, 교장의 미소는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이사장은 자신을 여유롭다고 평하지만, 속내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사장은 그저 교복 변경에 관한 건을 제의했을 뿐이니, 이 건이 자연스럽게,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려고 모든 절차를 감독하고 빈틈이 생기지 않게 서류 등을 신경 쓰느라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노년에, 무사히 정년을 마치기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도 이사장에게 자신이 이만큼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 여유 있는 척을 했던 것이니, 속이 그렇게 편하지는 않았다. 이사장은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교장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르며 말을 꺼냈다. “요즘 학교에서 아이들이 교복가지고 말이 많다고 들어서, 괜히 신경이 쓰이더란 말입니다. 도대체 애들이 알면 얼마나 안다고 떠든단 말입니까. 이제 겨우 중학생인데 말이죠.” “요즘 아이들이 어른인 척을 많이 합니다.” “그러니까요. 그게 다 어른인 척 흉내를 내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런 아이들의 헛소리에 어른들이 휩쓸린다는 게 문제죠. 뭐 SNS니 인터넷이니 하는 곳에서 이말 저말 꺼내서 분란을 일으키는 게 그 아이들의 주 종목이라죠? 그래서 학교에서 핸드폰 같은 걸 못하게 해야 하는 겁니다. 아, 생각난 김에 말이죠. 우리 학교도 수업 중 핸드폰 소지 금지를 하는 게 어떻습니까?” 단순한 이사장이니 핸드폰이 없으면 말도 안 나올 거라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교장은 또 이사장의 의견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십니다. 학부모들에게 학생들의 학습 의욕 저하를 이유로 핸드폰 사용을 금지하게 한다고 설득하는 것도 방법이겠고, 수업 중 핸드폰 사용이 수업 방해가 되어서 자녀들의 성적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경고를 하는 것도 방법이겠죠.” “그렇습니다! 역시 우리 교장 선생님은 올바른 교육자의 모범이세요. 바로바로 이렇게 정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하하, 앞으로도 교장 선생님만 믿고 가야겠습니다.” “별말씀을요.” 교장 선생님과 이사장은 잔을 들어 부딪쳤다. 작은 사기잔의 울림이 조용한 별실을 채웠다. ======================================= [412] 거울 속 아이(4) [김 단유 학생은 교무실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점심시간이 반쯤 지나, 급식을 먹고 교실로 돌아오던 중에 들린 교내 방송에 도하가 단유를 돌아보았다. “사고 쳤어?” “아니.” 단유는 느긋한 걸음으로 교무실로 찾아갔다. 담임 선생님도 막 식사를 끝내고 양치질을 했는지 자리에서 양치도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교감 선생님께 가자.” 담임과 함께 교감 선생님께로 향하니, 서류 더미를 한가득 책상에 쌓아놓고 뭔가를 작성하고 있던 교감 선생님이 고개를 들어 단유를 확인했다. “오전에 연락이 왔는데, 자유학기제 홍보대사 서류전형을 통과했다는 소식이다. 일주일 뒤에 면접이 있을 예정이니까, 준비 잘해서 꼭 좋은 결과 있길 바란다.” 단유는 ‘부디 자랑스러운 장계중학교 학생임을 잊지 말아달라’는 교감의 주문에 대충 대답을 하고 물러났다. “우선 면접 때 자유학기제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네 나름대로 자유학기제를 찬성하는 논조의 1분짜리 글을 써 봐라. 국어 선생님이 첨삭지도를 해 주실 거다.” 담임은 자유학기제와 관련된 설명이 담긴 몇 장의 서류뭉치를 단유의 손에 쥐여주었다. 교실로 돌아와 서류를 보기 시작하자 도하가 호기심을 나타냈다. “뭐냐?” “자유학기제란 무엇인가, 에 대한 홍보 글이네.” “그거 좋은 거야?” “쉽게 설명하면, 대학처럼 학생들이 자신이 듣고 싶은 수업을 골라 듣는 거야.” “그럼 체육만 듣고 싶은 사람은 그 과목만 골라 들을 수 있는 거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수 과목이 정해져 있어서 필수로 들어야 하는 과목도 있어.” 중학교 교육과정 중 한 학기 동안만 적용되어 학생들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등 시험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는 취지가 가장 첫머리에 소개되는 홍보문을 보여주며 단유가 말했다. “시험 안 쳐도 된대.” “좋은 거네?” “뭐, 그럴지도.” 토론과 실습과 같은 학생 참여형 수업으로 능동적인 학생들에게는 환영받을 시스템이었다. 또한 진로 탐색과 같은 여러 체험형 활동을 통해 자신의 진로를 스스로 고민할 수 있게끔 시스템적으로 보장한다는 내용을 들여다보며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좋은 내용은 다 들어가 있네.” 2학년이 되면서 학과 수업에 흥미를 잃고 있던 차였기에 단유는 자유학기제라는 시스템이 이야기하는 바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유도 이제는 마냥 받아들이기만 하는 학생이 아니었고, 어쩌면 누구보다 비판적으로 시스템을 바라볼 수 있는 식견을 지닌 학생이었다. “문제는 이 제도가 그만큼의 실효성이 있는가를 직접 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는 문제가 있겠지. 자유와 방종은 한 끗 차이라고 하니까.” “방종이 뭔데?” “제멋대로 하는 걸 말해.” 도하는 차이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그것과 상관없이 또 하나의 문제라면 자유 학기제 역시 자유를 강제한다는 점이지. 강제된 자유가 과연 정말 자유일까?” “됐다. 들어도 모르겠고, 괜히 머리만 아프네.” 단유도 더는 이야기하지 않고 펜만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당장은 자유학기제를 찬성하는 논조의 글을 써야 한다고 하니, 그 점에 치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뭐야, 저게?” 명수와 함께 등교하던 길에 학교 교문 앞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있는 장면을 목격한 단유는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에서는 한 학생이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소위 1인 시위라는 것이었는데, 피켓에는 ‘졸속 행정 반대, 교복변경 반대’라고 적혀 있었다. “우와, 저런 거 TV에서만 봤는데.” 명수가 호기심을 드러내며 피켓을 든 아이를 지켜보았다. 3학년으로 짐작되는 학생은 등교하던 아이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못 진지한 얼굴을 하고 피켓을 든 채 묵언 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서는 사명감이라고 느껴질 만한 힘이 느껴졌다. 그때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뛰어오는 선생님‘들’이 있었다. “우병석! 당장 그만두지 못해!” 투지를 불태우는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조례 전까지는 있을 겁니다. 불법도 아니잖아요.” “이 자식이! 선생님 말 안 들을래?” “부당한 일에 목소리를 내는 것이 나쁜 행동입니까?” “뭐가 부당한 일이야! 지금 네 행동이 더 잘못된 거란 걸 몰라?” 병석은 야무지게 피켓 손잡이를 고쳐잡고 힘껏 위로 뻗어, 더 많은 사람들이 피켓을 보게끔 했다. “저희가 비록 학생이지만, 옳고 그름은 구분할 줄 압니다. 그리고 그른 일에 대해서는 바른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헤치고 지나가 병석이 든 피켓을 뺏으려 했다. 그 광경에 구경하던 아이들이 우우, 야유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다른 선생님은 주변의 아이들에게 호통을 치며 교실로 내몰았다. “얼른 교실로 가지 못해! 너희들 모두 징계받고 싶어?” 그래도 이 재미난 구경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듯,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물론 몇몇은 관심도 없다는 듯 교문을 지나쳐가고는 있었지만, 대부분은 병석과 선생님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와중에 선생님은 병석의 손에서 피켓을 빼앗았다. “너 허위 사실 유포가 얼마나 큰 죄인지 몰라!” “허위 사실이라뇨? 저희도 다 알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느 학교에서 교복을 변경하는 내용을 2달 만에 해치운답니까? 이건 졸속 행정이고 학교의 비리입니다. 학생들에게 바른길을 알려주셔야 할 선생님께서 이러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 병석은 꿇리지 않는다는 듯 바르게 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다수의 학생들이 그에 찬동하며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혹은 그저 선생님 앞에서 강한 모습을 보이는 그 광경 자체에 놀라움과 흥미를 보이며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도 있었다. 선생님도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디 선생님 앞에서 큰 소리야? 위아래 없이 굴라고 누가 가르쳤다고 이러는 거야! 얼른 사과하지 못해!” “제가 사과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이 자식이!” 그 소란 중에 교무실에서 달려온 또 다른 선생님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두 세 명의 선생님으로는 교문 앞의 학생들을 모두 통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던 모양이었다. 몇몇 선생님은 눈에 익은 아이들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호명하며 교문 앞에 모인 학생들을 해산시키는 일을 우선했고, 또 몇몇 선생님은 병석과 선생님 사이에 고성이 오가는 걸 말리는 것과 동시에 병석을 데리고 교정 안으로 가기 위해 병석의 팔과 어깨를 붙잡았다. 다소 작은 몸집의 병석은 어른 두 사람의 힘을 감당하기 어려워 끌려갔고, 남은 선생님들이 모인 학생들을 교실로 보냈다. 교실로 들어오니, 교문 앞에서 벌어졌던 시위와 이를 막아서던 선생님들의 대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뭐냐, 무슨 일 있었어?” 일찍 학교에 왔던 탓에 교문 앞에서 벌어진 사태에 대해 알지 못하던 도하가 볼에 흐르는 침 자국을 닦아내며 게슴츠레 단유를 보았다. “3학년 선배가 교복 문제로 시위를 하고 있었거든.” “시위? 데모 같은 거?” 도하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니가 생각하는 게 도대체 어떤 광경인지는 모르겠다만, 평화적인 묵언 시위였어. 말없이 피켓만 들고 있는 거.” 도하에게 대충 알려주자, 도하는 재밌는 광경을 놓쳐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교복 바뀌는 게 그렇게 시위를 할 정돈가?” 단유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누군가에게는 참을 수 없는 문제일 수도 있어.” “누군가?” “정의롭지 못한 일, 불의를 보고 참을 수 없는 거지.” “그 말은, 교복 문제가 정의롭지 않다는 말이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인다는 거지.” “니가 보기엔 어떤데?” 단유는 책을 정리하던 걸 멈추고 도하를 바라보았다. “내가 보는 문제가 중요해?” “그럼. 넌 우리 반에서, 아니 우리 학교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이잖아.” “정의를 판단하는 건, 똑똑하고 똑똑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냐. 개인의 양심에 관한 문제지.” “그럼 지금 시위를 한 사람은 양심적인 사람이란 뜻이야?” “양심과 양심적이란 용어의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할 것 같은데? 개인의 양심에 관한 문제라는 표현에서 양심은 가치를 변별하고 정의를 판단하며 선악을 구분하는 기준을 의미한다고 정의한다면, 양심이 있다는 건 기준이 명확히 있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기준은 누구나 다를 수 있잖아? 누군가에게 정의지만, 누군가에게는 불의가 될 수 있지. 반면에 네가 말하는 양심적인 사람에서 ‘양심적’이라는 표현은 사회 전반에 통용되는 바르고 선한, 이란 의미가 있으니 내가 말한 것과는 다른 이야기야.” “어렵다, 어려워. 원래 머리 좋은 사람은 다 이러나?” “정의(定義)가 다른 단어를 구별 없이 쓰면, 본래의 뜻과 달라지니까 오해가 생기잖아? 그러니 그걸 확실히 해야 하는 거지.” “미안하다, 아침부터 내가 몹쓸 말을 했다.” 도하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엎드렸다. “선생님 오면 깨워줘.” “오셨어.” “아이 씨.” 도하는 얼굴을 잔뜩 구기며 허리를 세웠다. 담임 선생님이 출석부로 교탁을 탁탁 두드리며 엎드려 있던 몇몇 아이들을 깨웠다. “반장, 인사.” “차렷, 경례.” 조회 시간에는 다른 공지 사항에 앞서 선생님의 ‘당부’를 빙자한 ‘경고’가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기말고사를 준비하기도 바쁜 시기에 쓸데없이 학교 일에 신경 쓰지 말라는 ‘당부’였다. “그리고 학교에서 바르게 처리한 일인데도 유언비어에 휘둘려서 오해하는 이들이 있는데, 너희들은 절대 거기에 휘둘리면 안 된다. 알았지? 대답 안 해?” 학생들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단유네 반뿐만 아니라 학내 모든 교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병석은 그다음 날도 새롭게 피켓을 준비했고, 병석과 뜻을 같이하는 몇몇 학생들이 생겨났다. 동조자가 늘어나면서 목소리에 힘이 실렸고, 몇몇은 수업거부와 피케팅으로 항의를 계속했다. SNS와 단톡방에 그 일과 사진이 퍼져나갔고, 곧 학교에서는 긴급대책회의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리고 곧 ‘학생회 공개 토론’이라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학생 쪽에서 찬성과 반대 입장에 선 두 진영이 나와서 토론을 한다는 것인데, 이를 교내 방송을 통해 모든 학생들이 지켜볼 수 있게 만들었다. “저는 찬성합니다. 저희 교복은 주변 학교의 교복들에 비해 오래전에 만들어진 디자인이어서 평소에도 시쳇말로 ‘구리다’는 말을 듣는 교복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이번에 새롭게 디자인된 교복은 학교의 상징에 맞는 색깔과 현대적 디자인으로 세련되게 만들어졌으니, 향후 우리 학교의 이미지를 고양하는데 일조할 것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반대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반대 측의 대표로 나선 병석은 절차의 문제를 거론했고, 다른 공립 중학교의 사례와 사립 중학교의 사례 등을 들어 바르지 못한 절차와 행정을 지적했다. “저는 이 사례를 반드시 교내에서 고칠 것을 주장하며, 만일 이것이 제대로 시정되지 않으면 교육청에라도 이야기해서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청이 거론되자 방송을 보던 학생들이 웅성댔다. “진짜 교육청에 꼰지르는거야?” “여태 안 꼰지른게 이상하지 않냐?” “그런가? 그래도 교육청까지 가는 건 너무 오버 아닌가?” “잘못된 건 고쳐야지.” “그래도 학교가 또 시끄러워지는 거 아냐?” “그걸 왜 우리가 걱정을 해? 위에서 걱정할 문제지.” “야, 다른 학교에서 우리 학교 욕할 수도 있잖아?” “웃기시네. 평소에 그렇게 애교심을 발휘했으면, 교가라도 제대로 외우고 다니던가.” 단유는 팔짱을 낀 채 방송을 보았다. 모니터 너머에서 열을 내며 토론을 나누는 두 사람 다 진심을 다해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와, 되게 말 잘한다.” 중학생 같지가 않아, 라는 도하의 말대로 그들은 자신의 논리를 군더더기 없이 잘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의 시선은 결국 병석의 ‘반대’ 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병석은 ‘정의’를 위해 싸우는 투사의 이미지였고, 불의에 맞서는 ‘영웅’의 이미지였다. 그리고 마침내 교육청에서 감사를 보내기에 이르렀다. ======================================= [413] 거울 속 아이(5) 감사가 오면 잘못한 것이 없어도 움츠러들기 마련인지라, 교무실은 평소보다 더 조용하고 분주했다. 어지럽게 널려 있던 교과서들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고, 선생님들은 혹시라도 말실수가 나올까, 혹은 예민해진 다른 선생님들의 심기를 건드릴까 우려한 탓에 최대한 말을 아꼈다. 상담실에서는 교육청에서 파견된 감사위원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교육청에 보고된 서류와 교내에 비치된 서류 사이에 오차는 없는지, 그리고 몇몇 회의록들을 살피며 절차상의 문제는 없었는지를 살폈다. 그 탓에 홍보대사 면접 시에 발표할 내용을 점검받기 위해 교무실을 찾았던 단유는 상담실이 아닌 음악실에서 국어 선생님과 마주했다. “잘 썼네.” 국어 선생님은 딱히 손 볼 곳이 없다는 듯 가볍게 칭찬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단유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선생님은 그런 단유의 얼굴을 흘깃 본 뒤, 다시 처음부터 다시 문장을 훑으며 혹시라도 놓친 부분이 있는지, 사소한 단어 하나도 살피며 읽어나갔다. “그런데, 여기 이 부분은 네 생각이니?” 선생님이 가리켜 보인 부분은 ‘학생들의 자율적인 협조가 충분히 이루어진다면’ 이란 부분이었다. “네.” 선생님은 펜을 잡은 손으로 코를 문지르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닌데, 이 제도의 장점을 설명하면서 조건을 단다는 게 심사위원들에게 좋은 심상을 심어줄 수 있을지 의문이구나.” 단유는 다른 반론을 제기하지 않은 채 선생님의 말씀을 끝까지 들었다. “‘자유학기제가 교육 전반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가진 모두에게 설득력 있는 개선방안이 될 것이다’라는 건 조금 어른스러운 표현 같긴 하다만, 썩 나쁘지는 않으니까 그대로 가도 될 것 같다.” 단유를 바라보니, 단유의 표정에는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아 선생님은 호기심이 생겼다. 하지만 일단은 끝까지 검사를 마친 뒤에 풀 일이다. “‘숙제와 시험에 지친’이란 표현은 너무 식상한 거 같은데 좀 더 신선한 표현이 필요하지 않을까? 면접관들은 반복되는 이야기에 지루함을 느낄 수밖에 없으니까, 너를 어필하고 싶다면 다른 지원자와 다른 표현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게 중요해.” 요즘은 개성시대라고 하잖니, 라는 말을 덧붙이며 검사를 마친 국어 선생님이 용지를 탁탁 정리하여 단유에게 넘겼다. 단유는 두 손으로 공손히 용지를 받아 들었다. “어때, 도움이 될 거 같니?” 내가 말한 거 다 고칠 거지, 라는 말을 둘러 표현했다. “고치고 다시 검사받을까요?” 단유의 말에 선생님은 즉각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종이를 곱게 접어 품에 집어넣었다. 뭐 고친다고 했으니 말은 따르겠다고 하는 것이겠지만, 느낌상 단유가 뭔가 불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단유야, 혹시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라도 있니?” 라고 대놓고 물어볼 수 없는 건 자존심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음악실을 나가는 단유를 지켜볼 뿐이었다. “무슨 일 있냐?” 하교하는 동안, 명수가 물었다. 지태, 채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단유의 안색을 살폈던 모양이었다. “응?” “썩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지태와 채윤이 명수의 말을 듣고 단유를 살펴보았지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이라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음, 사실 아까 학교에서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눈 게 생각나서 그래.” “선생님이? 왜 뭐 안 좋은 이야기라도 들었어?” “아니. 안 좋은 이야기는 아니고, 조금 그래.” “뭐가.” 단유는 한숨을 내쉬고 말을 고르더니 신중하게 생각을 밝혔다. “자유학기제 홍보대사 건으로 면접을 봐야 하는데, 그때 면접관에게 이야기할 1분짜리 스피치를 짜라고 하셨어. 그래서 나름 취지에 맞게 글을 썼지. 그런데 난 단순히 홍보대사라는 이유로 장점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 물론 자리가 자리니만큼 그쪽 입맛에 맞게 써야 하겠지만, 그걸 이야기하는 당사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잖아? 난 결코 없는 말을 지어내고 싶지도 않았고, 한쪽에 편중된 시선으로 사안을 바라보고 싶지도 않았어. 그래서 나름 균형에 맞춘다고 생각하고 글을 썼지.” “그런데?”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했어. 이런 점도 있고, 저런 점도 있다. 하지만 이런 점에서 장점이 있고, 그 두드러지는 장점 때문에 자유학기제를 선택해야 한다, 는 식으로 말이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게 들리는데?” “선생님도 나쁘지 않다고 하셨어.” “그러면 뭐가 문제인데?” “만약 자유학기제란 것도 지금처럼, 자유롭게 쓰기를 ‘강요’하고 선생님의 기준에서 ‘검증’한다면 어떻게 자유로운 선택과 창조를 이루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강요라고?” “예를 들어서 직업 탐색이라는 활동 시간이 있어서, 각자 원하는 다양한 분야의 직업 활동을 체험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이를 통해 진로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되어 있어. 그런데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직업과 관심 분야가 존재하니? 그런데 그걸 학교에서 몇 가지로 분류하고 정리해서 이 길을 알아봐라, 저 길을 알아보라고 결정을 짓잖아. 결국 다 아는 직업들, 예를 들어 판사, 변호사, 의사나 소방관, 경찰, 같은 특수 전문직이나 알아볼 뿐이겠지. 무역회사의 경리나 공항 환경미화원 등을 알아보진 않을 거 아냐.” “그런 건 원하는 애들도 없을 거 같은데?” “그러니 직업이 제한적인 거지. 학교에서 제시한 직업과 미래가 마치 좋은 직업이고 선택해야만 하는 것처럼 강요받을 수도 있고.” “그래서 강요받는 기분 때문에 기분이 안 좋다는 거야?” 단유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런 내용 때문에 자유학기제를 마냥 찬성해야 한다는 게 불편하다는 거고, 선생님과의 상담은 또 다른 의미로 조금 불편했지.” “뭔데?” “과거에 언론 검열이란 게 있었대. 언론사들이 자기 입맛에 맞게 글을 쓰도록 정부가 나서서 기사를 검열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뉴스에서는 온통 정부를 찬양하는 글만 쓰게 하고, 비판적인 내용은 쓰지 못하게 했다고.” 검열받는다는 행위 자체가 불편하다는 단유의 말이었다. 실제로 선생님이 그런 의도로 하지는 않았겠지만, 말 한마디도 심사위원에게 좋게 보이기 위해서 바꿔야 한다는 게 썩 좋진 않았다. 특히나 단유에게 ‘말’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무거운 의미를 가지고 있는 터였다. “듣기 좋은 말만 늘어놓고, 비판적이거나 잘못을 언급하는 내용은 모두 도려내야 한다는 건 ‘아부’잖아. 홍보대사가 ‘아부’를 떨어야 하는 것이라면 별로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명수가 단유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하지 마. 안 하면 되겠네.” 단유는 명수의 대답에 피식 웃었다. “그러게. 안 하면 될 일인데.” 다만 안 한다고 했을 때, 담임 선생님은 물론이고 교감, 교장 선생님까지 나서서 뭐라고 닦달할지가 걱정되고, 그로 인해 피곤(?)한 일이 생길 것 같아서 걱정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 토요일, 날씨가 무척이나 맑지만, 늦가을의 쌀쌀함에 몸이 절로 움츠러드는 아침이었다. 단유는 명수의 배웅을 받으며 교복을 입고 학교로 향했다. 학교에서는 담임 선생님 뿐만 아니라 많은 선생님들이 교무실을 지키고 계셨는데, 감사가 아직 끝나지 않은 탓이었다. “왔니?” “네.” “교장 선생님께 인사 먼저 드리고 출발하자.” “네.” 결국 단유는 그만둔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고민은 했지만, 여러 가지를 고려한 끝에 면접관을 만나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서 떨지 말고, 평소처럼 하면 돼요.” 평소의 단유를 잘 알지도 못하지만, 교장 선생님은 넉넉한 미소로 단유를 격려했다. “떨어져도 괜찮으니까 긴장하지 말고, 준비한 만큼만 하면 됩니다. 아시겠죠?” “네.” “똑똑하고 영민한 친구니 어련히 잘하겠죠. 그렇죠, 선생님?” “그럼요. 잘할 겁니다.” 곁에 선 담임 선생님이 맞장구를 쳤다. 면접은 교육부 청사가 있는 세종특별시가 아니라, 서울의 모 사립대 강당을 빌려서 진행하였다. 10시부터 면접이 시작될 예정인데, 서울과 경기 일대에서 온 학생들을 우선 면접을 보고, 점심을 먹고 난 후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을 면접할 예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미 많은 학생과 관계자들이 강당을 채우고 있어 단유가 들어갔을 때는 꽤 시끌벅적한 상태였다. 단유의 외모도 남다른 외모라 생각했던 담임 선생님은 강당에 모인 ‘꽃미남’, ‘꽃미녀’들의 외모에 혀를 내둘렀다. “요즘 아이들이 잘 먹어서 그런가, 우리 때보다 평균 외모도 많이 오른 거 같네.”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하기 어려워, 단유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부분은 선생님은 물론이고 부모님과 함께 참석했다. 그래서 강당에는 학생들보다 어른들이 더 많았고, 그네들끼리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는 장면도 보였다. “저기 빈자리 가서 앉아 계세요.” 정장을 차려입은 여자 안내원이 가르쳐 준 곳으로 간 단유는 옆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선생님을 슬쩍 본 뒤 고개를 돌려 강당을 여유롭게 구경했다. ‘평소라면 저 앞 교탁에 교수님이 나와서 저 넓은 칠판을 채워가며 강의를 하겠지.’ 조용히 수업을 듣다가 궁금한 점이 있으면 자유롭게 질문을 던지는 학생들을 그리며 강당을 볼 때, 선생님이 물었다. “긴장되냐?” “아니요.” 단유의 대답은 여유로웠다. 선생님은 별난 녀석 다 보겠다는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내가 긴장되냐?” “글쎄요.” 그때 앞줄 부근에서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한 여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여학생도 주위에 어떤 학생, 아니 어떤 ‘경쟁자’들이 왔는지 궁금해서 주위를 둘러보던 중이었다. 그러다 마침 부산스럽게 떠들어대는 아이들 틈에서 어린 티가 나는 외모의 단유를 발견한 것인데, 여학생은 살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엄마, 엄마. 저기.” “응?” 여학생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어머니는 곧 말끔한 외모의 한 학생을 발견했다. 사실 여러 아이들과 사람들이 섞인 틈이라 잘 찾을 수 없어야 정상인데, 신기하게도 그 아이는 눈에 바로 띄었다. 이유라면 그 아이 주변만 한산한 탓이었다. “나 쟤 알아.” “니가 어떻게 알아?” “우리 기획사 사람들이 쟤 누군지 궁금해했었어.” “쟤를? 연예인이야?” “아니라고 들었는데.” 이미 기획사에 들어가서 배우를 준비 중인 그 여학생은 작년 겨울, 핫했던 한 뮤직비디오에서 저 소년을 봤었던 걸 기억해냈다. “엄마가 가서 물어볼까?” “응.” 어머니는 딸의 경쟁자가 될 소년에게 호기심을 품고 걸음을 옮겼다. 단유는 자신에게로 향하는 어머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아, 예 안녕하세요.” 어머니는 먼저 옆에 있는 보호자에게 인사를 했다. 청모중학교에서 온 누구누구 엄마라는 소개에 담임 선생님도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제야 단유에게로 시선을 옮긴 어머니는 호기심을 드러냈다. “듣자 하니, 예전에 어떤 가수 뮤직비디오에도 나왔다고 하던데, 정말이니?” “네.” “정말이구나. 몇 학년이니?” “2학년입니다.” “어머, 그런데 키가 꽤 커 보이는구나. 키가 몇이니?” “최근에 재었을 때는 179였어요.”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손뼉을 쳤다. “세상에, 요즘 아이들은 정말 이렇게 잘 자란다니까요. 나중에 고등학교 가면 190도 넘는 거 아니니? 몸이 좋아서 모델해도 되겠다, 너.” 모델이 꿈이냐고 에둘러 물어보는 어머니였다. 단유는 그저 공손히 감사를 전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랑 두 분만 오셨어요?” 단유의 대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대화의 상대를 선생님에게로 옮겼다. 선생님은 약간 낯을 가린다는 듯 얼굴을 붉히면서도 어머니의 대답에 곧잘 대답했다. 혼자 단유 옆에 멀뚱히 있는 것보다는 누구라도 대화의 상대가 있는 게 더 편했던 탓이었다. 그 사이에 단유가 고개를 돌리니, 자기를 빤히 쳐다보는 여학생의 시선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눈을 마주하고도 시선을 피하지 않으니, 여간내기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더한 건, 그 여학생이 일어나 단유에게로 향했다는 점이었다. 어머니를 보내놓고도 궁금함을 참지 못해 책상을 두드리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옆 사람과 하하호호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며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 더는 앉아있을 수 없었던 여학생이었다. “안녕.” 여학생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단유도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응, 안녕.” 어깨를 살짝 넘는 길이의 머리를 찰랑이며 고개를 살짝 기울인 여학생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정유진이라고 해. 넌?” “김단유.” ======================================= [414] 배신의 계절(1) “넌 얌전히 앉아 있지 왜 왔어?” 어머니의 타박에도 유진은 그저 샐쭉 웃으면서 능청스레 선생님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그래, 반갑구나.” 유진은 다시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려 호기심을 드러냈다. “나 너 뮤직비디오에서 봤는데.” 단유는 달리 대꾸할 말이 없어 볼을 긁적였다. “너 소속사가 에이바운스야?” “아니. 난 소속사 없는데.” “어? 그럼 소속사 옮기는 거야?” “아니. 애초에 소속사가 없었어.” 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어떻게 출연했던 것이냐고 물었고, 단유는 친분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난 너 연습생이나 데뷔조일 줄 알았는데. 그럼 지망이 어디야?” “지망?” “연기나 노래, 둘 중 하나일 거 아냐? 아니면 그냥 모델?” 대충 봐도 ‘모델삘’이 나는 아이라고 생각하며 위아래를 훑는 유진이었다. “아니. 아직 연예인 생각은 없어.” “아직? 그럼 나중에는 연예인 할 수도 있다는 소리네?” “모르지. 미래에 또 어떤 선택을 하게 될는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단유에게 관심을 보이는 유진의 모습이 어머니는 부끄러웠던지, 괜히 유진을 타박하며 선생님에게 한 마디를 건넸다. “우리 애가 너무 잔망스럽게 굴었네요. 죄송합니다, 선생님.” “아닙니다. 저 나잇대 애들이 다 그렇죠.” 선생님은 별거 아니라는 듯 허허 웃음을 지으며 어머니의 너스레를 받아주었다. 어머니는 눈치로 유진에게 주의를 준 뒤, 유진의 팔을 잡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럼 면접 잘 보세요. 면접 잘 봐라.” “네.” 단유는 살짝 엉덩이를 들고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어머니와 유진이 자리로 돌아간 뒤, 선생님이 단유를 새삼스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널 알아보는 사람이 있구나.” “그렇네요.” 쑥스럽다는 듯 단유가 대답할 때, 선생님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과연 단유에게로 향한 몇몇 시선들이 있었는데, 단유를 알아보고 호기심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었고, 경계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정말 연예인 생각은 없고?” “네.” “하긴, 그 머리로 연예인만 하기는 아깝지.”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지만 굳이 애써 변명하긴 싫었다. “그런데 연예인 지망하는 애들이 오는 경우가 많은가 보구나.” 과연 잘생기고 예쁜 아이들은 모두 모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더러 몇몇은 ‘머리가 엄청나게 좋을 것만 같은’ 외모의 아이들도 있었지만, 다수는 아역배우 뺨치는 외모를 드러내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옅게 화장이라도 한 듯 화사한 얼굴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서류전형 시에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우수학생 인증 따위가 다 무소용이었던 건만 같아 씁쓸했다. 결국 홍보대사라는 거창한 이름도 사실은 ‘모델’을 달리 부르는 말일 뿐이니, 모델이라 하면 잘 생기고 사람들의 호감을 잘 이끌어내는 얼굴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리라. “단유야, 너 1분 스피치는 다 외웠니?” 단유는 선생님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예.” 하긴 머리 좋은 아이니까 그 정도는 문제도 아니리라. 그렇다면 정말 할 것도 없고, 준비시킬 것도 없고, 달리 긴장하고 있는 기색도 아닌 애에게 뭔가 말을 건넬 화젯거리도 없으니, 선생님은 몸을 뒤로 살짝 젖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핸드폰을 꺼내 들 뿐이었다. 딱히 핸드폰으로 할 것도 없지만, 괜히 지난 문자들을 확인하면서 뭔가를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정시에 시작된 면접은 3명의 학생들이 한꺼번에 들어가서 보는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중계되니까 그 점 참고해주세요.” 사전에 들은 바가 있어, 딱히 당황할 문제는 아니었지만 모두가 단유같지는 않았다. “엄마, 나 괜찮아?” “보자, 눈 밑에 살짝 덧칠만 하면 괜찮겠다.” “얘, 너 립밤 좀 바르자. 너무 입술이 건조해 보여.” “머리 괜찮아?” “괜찮아. 거울 줄까?” 아이와 부모들이 모두 부산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비교적 일찍 번호를 배당받은 단유가 대기 줄에 섰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작은 목소리로 격려하는 선생님이 더 긴장돼 보였다. 하긴 말 붙일 상대가 없어 쩔쩔매는 모습을 계속 봤더니 되레 안쓰러운 마음이 들 정도였으니, 단유는 선생님께 잘 보고 오겠노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단유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등을 두어 번 토닥거려준 뒤, 대기실로 돌아갔다. “너랑 나랑 같은 조야?” 유진이 다가와서 물었다. 번호를 확인하니 유진이 단유의 바로 앞번호였다. “준비 많이 했어?” 유진의 물음에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너 원래 말수가 없는 편이야?” “그러는 너는 원래 말이 많은 편이야?” “응. 나 원래 말 많아. 말하는 거 좋아하기도 하고. 인간관계에 있어 의사소통이란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니?”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눈앞에 보이는 아무나 붙잡고 수다를 떨 수는 없는 거 아닌가? “난 너랑 친해지고 싶은데?” “왜?” “어쩐지 너랑 친해지면 좋은 일이 많을 것 같다는 예감?” 내가 원래 예감이 좋거든, 이라고 덧붙이며 살짝 이를 드러내는 유진이었다. 과연 배우 지망생이라 그런지 웃는 모습이 작위적이라는 느낌이었다. “너 여자친구 있어?” “너무 사생활을 캐묻는 거 아냐?” “이런 이야기라도 하면서 긴장을 풀자는 의도지.” “긴장돼?” “당연히 긴장되지. 비록 인터넷이라도 전국의 중학생들이나 관계자들이 모두 지켜볼 수 있다는 거잖아? 아까 엄마 핸드폰으로 확인해봤는데, 2천 명 정도가 실시간으로 영상을 보고 있다고.” 고작 2천 명, 이라는 생각이 드는 단유였지만 유진은 그 2천 명이 꽤 큰 숫자라고 강조했다. “그중 일부는 움짤이나 캡쳐 사진을 만들어서 SNS에 올리기도 할 거란 말이야. 그러면 2천 명이 아니라 2만 명이 내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소리야. 2만 명이 2십만, 2백만이 되는 건 순식간이고.” 수백만 페이지뷰를 달성하며 한때 전국적 안티 집결지 역할도 했었던 단유였기에 별로 달가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여기 있는 애들 대부분이 그걸 노리고 있을걸? 솔직히 시간이 남아돌아서 홍보대사를 지원하겠니?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많이 알리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러지.” 유진은 단유에게 한발 다가서며 귓속말을 했다. “저기 저 애 보이지?” 금테 안경을 쓰고 나름 멋을 내기 위해 헤어스타일링도 했지만,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한 그 소년은 손바닥만 한 메모지에 적힌 내용을 암기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저런 애들은 그냥 순진하게 ‘자유학기제’라는 걸 홍보한다는 취지에 왔을 거야. 하지만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걸? 중요한 건, 교육부라는 정부부서에서 집행하는 행사라는 게 중요하지. 교육부 주관 홍보대사, 라는 한 줄이 이력에 한 줄 포함되는 게 얼마나 큰데.” “어떤 이력?” 유진은 눈을 크게 뜨며 대답했다. “당연히 배우 이력이지.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외모와 단정한 몸가짐으로 정부 홍보모델도 맡은 바 있었다, 는 이력이면 충분히 수고할 가치가 있는 셈이야.” 아마 어떤 어른들은 이런 아이들을 보고 영악하다고 표현할지도 모르겠다. 혹은 영민하다고 칭찬을 하거나. 하지만 어느 쪽이든 ‘아이답지 않다’는 말이 될 테다. 아무리 조숙함이 요즘 세태의 풍속이라 해도 이런 계산은 어울리지 않는다. 단유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여자친구’라는 질문에서 화제를 잘 돌려냈다는 것에 만족했다. “다음 들어오세요.” 어느새 단유의 차례가 되었다. 단유를 포함한 세 명이 면접장으로 입장했고, 그중 가장 앞선 번호였던 유진이 당당한 걸음으로 등을 꼿꼿이 세우고 들어갔다. 어디 교육장에나 가면 볼 수 있을 법한 작은 책상 3개를 이어붙인 긴 책상 너머에 3명의 면접관이 다소 지루한 얼굴을 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면접관들의 뒤편에는 삼발이 지지대 위에 카메라가 설치돼서 면접자들을 정면에서 촬영하는 중이었다. 면접관들의 앞에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3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아마도 그곳에 앉으면 되리라. 흘깃 옆을 보니 오른편에 커다란 화면이 있고, 빈 의자 3개와 그곳으로 향하는 면접자들을 보여주는 중이었다. 아마 카메라로 중계되는 영상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화면인 것 같았다. “여기 앉으세요.” 학생들을 인도하던 스태프는 세 명의 학생들이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뒤, 면접장을 홀로 나섰다. 잠시간의 침묵 속에 서류를 넘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가장 오른쪽에 앉은 근엄한 얼굴의 남자가 굵은 목소리로 면접자들을 환영했다. “반갑습니다. 자유학기제 홍보대사 면접을 맡은 홍보담당관실 담당관 이제윤이라고 합니다.” 소개를 한 사람은 오직 그 한 명뿐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서류와 화면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여러분들의 면접 화면은 인터넷 방송을 통해 전국으로 송출되고 있습니다. 각 학교의 명예를 대신하여 나온 자리이니만큼 최선을 다해주시고, 부디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럼 첫 번째 학생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홍빈 학생?” 대기실은 조금 전과 다르게 조용했는데 아무래도 면접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긴장감이 높아진 탓인 거 같았다. 거기다 인터넷 방송으로 중계중이어서 실시간으로 학생들을 살필 수 있는 까닭에 몇몇 사람들은 핸드폰으로 그 영상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다만 여전히 대기실에 남아있던 몇몇 학생들은 영상을 보지 않고, 부모님이나 선생님과 낮은 목소리로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는데 아마도 그 영상을 보고 더 긴장할까 봐 보여주지 않는 듯했다. 담임 선생님도 어차피 할 것도 없는 마당에 단유가 과연 면접을 잘 볼 수 있을지 기대도 되는 상황이라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단유의 차례가 오려면 적어도 20분은 더 있어야 하는 상황이라 화면에서는 단유의 앞번호 학생들의 면접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화면을 보고 있는 가운데 옆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요즘은 죄다 인터넷이야.” “그러게요. 확실히 IT 강국답네요.” “그런데 도대체 면접하는 모습을 왜 인터넷 중계를 하는 거지?” “아무래도 요즘 오디션이 워낙 유행이잖아요? 그런 오디션 형식으로 홍보대사를 선출한다고 하면, 아무래도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끌지 않겠어요?” “하여튼 이쪽 사람들은 뭐만 유행하면, 그걸 따라 하려고 한다니까.” “정부에 있는 사람들이 다 그런 식인걸요. 새로운 걸 만들어낼 자신도 없고, 의지도 없으니까요. 그냥 요즘 유행하는 형식을 차용해서 이 정도라도 하는 게 어디에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애들 긴장해서 얼굴 굳어있는 이런 모습을 보는 게 무슨 재미가 있다는 거야?” “아까 6번이었던가, 그 남자애는 재미있지 않았어요?” “재미있기는. 면접장에서 장난스럽게 구는 모습이 전혀 진중해 보이지 않더구먼. 난 별로였어. 그보다는 9번의 여학생이 화면발이 좋던데, 그 애도 연예인 지망생이겠지?” “보니까 여기 온 애들 대부분이 그런 거 같던데요?” “세상 참. 이제는 애들한테 판검사 되란 소리도 못할 시대야.” 부와 명예를 다 가진 연예인들이 선망의 직업으로 우뚝 선 시대, 라는 말을 흘려들으며 선생님은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 사람의 말대로 화면 속 내용은 별로 재미있지 않았고, 만약 단유의 출연이 없었다면 굳이 이 지루한 영상을 보고 있어야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도대체 이런 게 사람들의 관심을 끌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새롭게 아이들이 등장했고, 그 끝에 단유가 특유의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등장했다. 앞서 등장한 아이들보다 월등히 큰 키를 가진 단유였지만, 화면 속에서는 별로 티가 나질 않아 보였다. 앞번호 학생에게 식상하고 형식적이며 지루한 질문들이 몇 가지 건네지 1분 스피치 발언 시간이 주어졌다. “…자유학기제를 통해 꿈을 찾고 목표를 세울 기회가 생겨서 좋았습니다. 이상입니다.” 실수는 하지 않았지만, 앞서의 학생들이 말한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내용이라 흥이 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답답함만 가득했다. ‘단유 차례만 지나면 바로 꺼야겠다.’ 보고 있는 게 시간 낭비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어떻게 이렇게 개성이 없을까? 현장에서 그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고 있을 면접관들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아마도 자신과 비슷한 표정이지 아닐까 싶었다. ======================================= [415] 배신의 계절(2) 유진은 당당한 걸음만큼이나 다부지게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청모중학교 2학년 정유진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자유학기제 홍보대사 공모제에 참가할 수 있게 되어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의 꿈과 끼를 찾는 행복한 학교 만들기에 한 손 거들 수 있게 되길 바라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살짝 미소마저 베어 물며 여유를 보이는 유진은 화면에서도 그 당당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기운찬 학생이네. 보기 좋아요. 그럼 몇 가지 물어보죠. 학생은 취미가 뭔가요?” “네. 제 취미는 연극 감상입니다. 저희 부모님은 예전부터 연극에 관심이 많으셔서 저를 데리고 연극이나 뮤지컬 공연 등에 많이 데리고 다니셨는데, 배우들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무대에서 펼쳐지는 연극배우들의 연기에 전율을 느끼곤 했습니다. 배우들의 땀과 열정이 오롯이 느껴지는 연극에 관심이 생기면서 공부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설명하실 때 눈에서 빛이 나는 걸 보니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네, 아주 좋아합니다.” 어물거리는 말 없이 똑 떨어지는 발음은 듣기에도 좋았고, 내용도 명확해서 심사위원들은 유진에게 호감을 느꼈다. “자, 그렇다면 자유학기제에 관해서 1분 스피치, 해볼까요?” “네.” 자신 있게 대답한 유진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시작했다. “저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취미가 연극 감상이고 꿈도 연극인일 만큼 연극이라는 것에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도 연극배우를 직업으로 삼겠다고 생각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연극배우라는 것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고, 깊게 생각해볼 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희 학교가 지난해부터 시행한 자유학기제 때 저는 제가 관심을 가졌던 연극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연극을 직접 체험하는 활동을 하게 되면서 제 꿈을 구체화 시킬 수 있었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 역시 자유학기제 기간 동안 자신의 진로를 탐색해 볼 기회를 얻게 되었음을 좋아했습니다. 사실 그동안 진학과 시험이라는 것에 갇혀 스스로의 꿈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얼마나 부족했는지는 말로 하지 않아도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전 제 꿈을 찾아 행복합니다. 이 행복을 다른 친구들도 다 같이 느낄 수 있도록, 자유학기제를 통해 자신의 적성을 빨리 찾을 수 있길 바랍니다.” 특별한 내용은 없었지만, 깔끔한 유진의 설명은 귀에 잘 들어왔다. 일부 학생들이 하듯이 괜히 어려운 단어를 써서 멋있는 척도 하지 않았고, 앞서의 취미와 관련된 질문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한 스피치 전략도 꽤 좋았다. 면접관들도 화면을 통해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며 차분하게 설명하는 유진의 스피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들었습니다. 정유진 학생, 부디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무릎 위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고개를 살짝 숙여 마무리 인사를 하는 것까지 깔끔했다. 스스로도 무사히 잘 마쳤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드는 유진의 얼굴에 더욱 여유로운 미소가 배어 있었다. “자, 다음은…. 김단유 학생?” “네.” 단유의 차례가 되었다. “엄마, 얘가 아까 걔야.” 담임 선생님은 이어폰을 고쳐 끼는 척하면서 주변에서 나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괜찮아. 지금 화면으로 보니까 키는 별로 안 중요한 것 같아.” “정말?” “그래, 보니까 얼굴도 많이 굳었네.” 실제로는 그저 평소처럼 담담한 표정이라 긴장했다고 보기 어려웠지만, 애써 어머니는 아들의 기를 살려주려는 의도로 말했다. “진짜? 나도 봐봐.” 어머니는 혼자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중계를 해주고 있었다. “아냐, 넌 보지 마. 괜히 긴장할라.” 아들을 다독이며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린 어머니를 훔쳐보다 선생님도 얼른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김단유 학생의 이력서를 보니 꽤나 화려한데요, 일단 중학 2년 동안 줄곧 전교 1등을 했다고요?” 면접관의 말에 단유 옆에 앉았던 두 소년 소녀가 고개를 돌려 단유를 쳐다보았다. “아뇨. 줄곧은 아니고 한 번 3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튼 그 한 번을 제외하고는 계속 1등이네요?” “네.” 선생님은 어쩐지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른 학부모와 선생님들에게 ‘어때, 우리 애가 이 정도야!’라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얼굴, 외모도 꿀리지 않지만 말이야.’ 입꼬리가 씰룩씰룩 올라간다. ‘어서, 그다음도 말해줘요, 면접관님.’ “그리고…여기 보니까, 서울교육청주관 수학경시대회에서도 금상을 받았고요?” “네.” “혹시 얼마 전 있었던 전국 수학경시대회에도 나갔었나요?” “네.” 단유의 단답형 대답이 조금 답답하게도 느껴졌지만, 면접관은 그저 쑥스러워 그러는 거겠거니 생각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때도 상을 받았나요? 무슨 상을 받았죠?” “금상을 받았습니다.” 세 면접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얼굴만 잘생긴 모델을 뽑는 것보다는 타의 모범이 될만한, 우수한 모범학생을 뽑는 게 아무래도 좋지 않겠냐는 이유에서였다. “매우 우수한 학생이었군요. 평소 수학에 관심이 많았나요?” “네.” “그렇군요.” 면접관은 서류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혹시 미래 진로도 정했나요?” “아뇨,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면접관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왜요? 이 정도면 어느 정도 갈 길을 정했을 거 같은데?” 이를테면 수학자나 물리학자, 혹은 의사나 법관과 같은 엘리트 코스를 이야기하지 않을까 했는데 말이다. “구체적으로 진로를 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시간의 여유가 있어 천천히 생각해보겠다는 이유도 있고, 현재의 공부에 좀 더 집중하고 싶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화면에는 면접관의 모습이 비치지 않아 모르겠지만, 실제 단유 앞에 앉은 면접관들은 좀 더 흥미로운 얼굴을 하고 고개를 앞으로 빼서 단유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1등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공부에 집중하느라 진로를 탐색할 여유가 없었나 보군요.” 면접관 나름의 설명은 중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한 메시지이기도 했다. 전교 1등 하는 학생이라도 시험과 공부에 치여서 제대로 진로를 탐색할 여유가 없다지 않은가? 그러니 한 학기만이라도 시험에서 자유로운 ‘자유학기제’를 시행한다면, 이런 학생이 차분하게 자신의 진로를 찾을 수 있게 돕는 것이다, 라는 메시지를 말이다. 옆에서 지켜보는 면접관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정유진이란 학생도 좋지만, 이 학생도 나름 전략을 잘 짰어.’ 특히 전교 1등이라는 배경이 좋으니, 더욱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공부에 집중한다는 것은 맞지만, 전교 1등이란 순위에는 별로 연연하고 있지 않습니다.” 모순된 발언이지만, 겸양의 표현이라 생각하며 면접관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래, 혹시 학생은 평소 취미 생활이 어떻게 되나요?”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말을 골랐다. 당당한 모습을 보이던 유진도 무릎 위에 올려났던 손을 감히(?) 움직여 제스처를 취하는 데 소극적이었는데 단유는 평소랑 전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물론 평소의 모습을 잘 아는 담임 선생님이기에 느낄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독서입니다.” “어떤 책을 읽죠? 최근에 읽은 책은?” “최근에는 Stephen T. Thornton 의 <일반역학>이란 책을 읽고 있습니다.” “역학이요?” 추가 설명을 요구하는 면접관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제목 그대로의 내용입니다. 역학에 관한 기초적인 학문으로 행렬과 벡터, 벡터 계산, 뉴턴 역학, 해밀턴 원리, 중심력에 의한 운동 등을 쉽게 풀이해서 이해를 돕는 책입니다.” 면접관은 입을 살짝 벌린 채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어, 그러니까 물리학에도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군요.” “네. 특히 역학에 관심이 많아서 최근 열심히 공부 중입니다.” 면접관은 머리를 긁으며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까 전의 이야기와 연결시켜 보자면, 학과 공부가 아닌 개인적인 취미(?)에 몰두하느라 전교 1등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기도 했고. 자칫 다른 학생들에게 위화감을 느끼게 하거나 자격지심을 느끼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걱정이 들었다. ‘겸손한 줄 알았더니, 어쩌면 거만한 것일지도.’ 엘리트 특유의 오만함인 걸까? 게슴츠레 뜬 눈으로 단유를 살피는 면접관들이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럼 1분 스피치 들어볼까요? 무척 기대되네요.” 단유는 짧은 숨을 뱉어낸 뒤, 입을 열었다. “얘, 뭐야?” “물리 역학? 얘 혹시 영재학교 다니는 애 아냐?” “다 가졌네, 다 가졌어. 머리 좋고, 얼굴 좋고.” “이런 애들 모아놓으니까 저런 애도 나오는구나.” “1%의 학생들 중의 1%? 뭐 그런 의미인가?” “그런데 굳이 그런 이야기를 여기서 해야 돼?” “면접관이 먼저 물었잖아?” “그래도 저렇게 대답하면 괜히 거리감이 느껴지잖아? 만약 진짜 취미가 저런 책을 읽는 거라고 해도 적당히 평범한 취미로 바꿔서 말하면 안 되나? 내가 보기엔 일부러 지 자랑하려고 말한 거 같은데?” 선생님은 듣다가 화가 나서 대신 항변할 뻔했다. ‘자랑은 무슨 자랑! 그럼 거짓말이라도 해야 했다는 거야, 뭐야! 승마가 취미라고 말이라도 했어야 속이 시원할까? 어떻게 사람들이 다 저렇게 속이 꼬였대?’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면서도 단유의 인터뷰를 계속 지켜보았다. 조금 거슬리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며 귀를 기울였다. 곧 1분 스피치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자유학기제는 분명 학생들의 진로 탐색과 학업 부담을 덜어주는 좋은 제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어?’ 선생님은 이곳에 오기 전에도 단유가 쓴 1분 스피치 내용을 몇 번이고 살펴본 바가 있었다. 국어 선생님이 첨삭지도를 도와준 덕분인지, 자신이 보기에도 꽤 좋다고 생각했고 더욱이 이 정도라면 분명 면접관들에게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할 정도였다. 하지만 담임 선생님이 기억하는 스피치의 첫 문장은 저런 문장이 아니었고, 더구나 저런 뉘앙스도 아니었다. 저건 마치. “하지만 자유학기제가 성공적으로 시행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선행 조건들이 달성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지금까지의 지원자들과 다른 내용이긴 했다. 다만 면접관들이 저 내용을 좋게 봐줄지 의문이다. “우선은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입니다. 학생들 스스로가 자유학기제라는 제도를 선용(善用)하여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용해야 할 텐데, 그저 학교에서 자유학기제를 실시하자고 해서 따라가는 정도에 그친다면 자유학기제의 본의(本意)는 곡해될 것입니다.” 과연 지금 면접관들은 어떤 표정으로 단유를 바라보고 있을까? 그것이 선생님은 가장 궁금했다. “그런 점에서 이런 홍보대사를 이용한 교육부의 홍보 방책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이 스스로 자유학기제의 장점과 활용법을 찾아보게 하고, 이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게끔 선택의 여지를 부과한다는 것이 말이죠.” 저건 좋은 점수를 딸 수 있는 멘트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래도 불안한 것은 지금까지 단유가 뱉은 내용이 모두 원래의 원고에는 없는 내용이라는 점이었다. 너무 긴장해서 까먹은 걸까,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표정만 보면 너무 침착해 보여서 그런 것 같지 않았다. “두 번째는 교육 시스템입니다.” “응?” “현재 대한민국의 교육 시스템은 대학 진학에 초점을 맞춘 진학 위주의 교육입니다. 고작 단 한 학기의 자유학기제가 학생들의 부담을 줄여 줄 거라고 믿기보다는 오히려 학습의 연속성을 해치는 결과를 부르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지경입니다. 말하자면 현재의 중학교 교육 과정에서 자유학기제가 제대로 그 가치를 발휘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유학기제를 도입하기에 앞서 교육 시스템의 교정(矯正)이 우선 되어야 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면접관들은 아까와 다른 표정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대기실의 사람들 또한 비슷한 표정으로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는데,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며 소릴 질렀다. “이게 무슨 소리야!” 얼굴이 붉어진 담임 선생님이었다. ======================================= [416] 배신의 계절(3) 면접관들도 담임 선생님과 다른 표정은 아니었다. 누구랄 거 없이 당황한 얼굴로 서로의 표정을 확인하는 세 사람과 어색한 표정으로 이 사태를 바라보는 두 학생들 사이에서 단유 홀로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과거의 사례들을 살펴보아도 이는 알 수 있습니다.” 아직 안 끝났어? 사람들의 경악 속에서 단유는 느긋하게 말을 꺼냈다. “가령 조선 후기 붕당 간의 대립을 보자면,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이 붕당의 폐해로 인해 결국 세도정치로 흐르며 나라의 힘을 잃게 하였습니다만, 사실 붕당이라는 것은 현재의 정당 정치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선용의 유용함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 시스템과 그 제도를 활용하는 이들의 미성숙함과 욕심이 그르치게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전교 1등, 이라고 감탄한 남학생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유진은 연신 면접관들의 안색을 살피며 이 사태가 어찌 흘러갈 것인지 조마조마해서 다리가 절로 모이고, 발끝이 톡톡 바닥을 두드렸다. “단순히 좋은 제도를 마련하고 이를 적용하는 것만으로 좋아질 거라고 판단하기 전에 그 제도가 적용될 베이스, 즉 학교와 학생의 현실을 먼저 파악해서 고쳐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얼굴이 붉어진 면접관 중 가운데 앉은 이가 헛기침을 하며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김단유 학생? 학생의 말대로라면 현재의 교육 시스템에 상당히 불만이 많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학생은 먼저 뭘 고쳐야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나요?” 홍보담당관이라고 소개했던 면접관이 단유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답에 앞서 한 가지를 부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의 교육 시스템에 상당히 불만이 많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렇게 불만이 많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먼저 확인하고 대답 드려야겠네요.” “불만이 없다고요?” 왼쪽에 앉았던, 풍채가 좋은 면접관이 다소 큰 목소리로 따지듯이 물었다. 여태 말을 하지 않았던 이유가 저 목소리 때문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늘고 높은 목소리였다. “전혀 없지는 않지만, ‘상당히’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할 만큼의 불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질문에 대답을 하면, 바로 상술(上述)한 문장을 인정해야 하는 모양이 나오기 때문에 먼저 그 부분을 짚은 것이니 이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단유는 틈 없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주신 질문에 답을 드리자면, 뭘 고쳐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저는 불만이 별로 없기도 하거니와, 무엇을 고쳐야 하냐고 물으신다면 앞서 말한 내용을 반복하거나 혹은 전혀 다른 내용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 반복을 원하시지는 않으실 테니 그 부분을 뺀다면 달리 말씀드릴 내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막힘이 없는 단유의 대답에 풍채 좋은 면접관은 할 말을 잃었다는 표정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가운데 앉은 면접관이 말을 꺼냈다. “학생은 현재의 교육 시스템이 대학 진학에 초점을 맞춘 교육이라고 했습니다. 맞죠?” “네, 그렇습니다.” “흔히 하는 표현으로 입시 경쟁 위주 교육이라고 하겠죠?” “네.” “바로 그 점을 수정한다는 의미에서 자유학기제가 도입되는 것이라고 보지 않나요?” “그렇게 보는 게 맞습니다. 다만 그에 앞서 교육의 현실을 먼저 고려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유학기제가 되어도 학생들은 비싼 사교육비를 들여 학원에 다녀야만 할 것이고, 특정 직업에 제한된 진로 탐색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또한, 학교라는 공간은 자유학기제의 자유로움이 들어올 수 없을 만큼 구속적인 공간이기에 학교의 변화가 있지 않다면, 자유학기제는 그저 겉만 번지르르하게 포장된 제도로 남을 공산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남학생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자유학기제와 상관없이 2개의 단과 학원과 인강을 매일같이 듣고 있는 실정이니까. 홍보담당관은 거칠게 숨을 뱉으며 마른세수하듯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김단유 학생. 학생이 자유학기제에 대해 깊은 고민을 했다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교육에 대해서도 꽤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도요. 앞서 학생이 이야기한 취미 생활을 고려한다면, 아마 학생은 현재 학교 교육 과정을 이미 넘어선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 선행학습이 가져온 편견이 아닐까요? 대부분 학생은 현재의 교육 과정에 맞춰 차근차근 자신의 지식을 쌓아갑니다만, 학생은 그것이 부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비판적인 입장에 선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두 면접관과 달리 끝까지 차분함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홍보담당관이었다. 아니, 사실은 뒤늦게 이 장면이 방송을 통해 중계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머릿속에는 당장 이 중계를 끊도록 지시를 내려야 하나를 열심히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런 면도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현재의 교육 시스템에 크게 불만이 없다고 말씀드린 바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리자면, 현재의 ‘교육 과정’에 만족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비록 몇몇 과목에 있어 선행학습이 되었을지언정 대부분 과목은 다른 학생들과 비슷한 수준에서 교육을 받고, 성취를 얻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점에 있어 충분히 만족스럽기도 하고요. 그리고 교육 시스템에 대한 ‘비판’은 단지 저만의 의견도 아닐뿐더러, 이제껏 여러 번 언론이나 다양한 채널을 통해 제기되었던 문제라고 알고 있습니다.” 처음 듣는 소리 아니지 않냐, 라는 말임을 홍보담당관도 알아들었다. 그렇기에 얼굴이 또 한 번 붉어졌다. 이 무슨 낭패란 말인가. 마침 사태가 이상하게 불거지고 있음을 깨달은 교육부 직원 한 명이 면접장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즉시, 홍보담당관은 카메라를 가리켜 보인 뒤, 두 팔을 엇갈리게 겹쳐 방송을 중단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다행히 알아들었는지, 직원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면접장을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직원이 다시 들어올 때까지 면접장은 침묵 속에서 묘한 대치 상태를 벌였다. “방송 중지되었습니다.” 직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가운데 앉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던 면접관이 벌떡 일어나며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야!” “강 과장님, 진정하십쇼.” 홍보담당관이 같이 일어나 강 과장이란 사람의 팔을 붙잡아 내리며 진정시켰지만, 강 과장은 열이 올라 푸들거리는 볼살을 감추지 못했다. “아, 혈압 올라.” 뒷목을 잡고 고개를 쳐든 채로도 단유를 노려보는 기세는 죽지 않았다. 홍보담당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면접장 입구에서 대기 중인 직원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직원이 서둘러 달려와 강 과장을 붙잡고 면접장 밖으로 향했고, 뒤이어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달려온 몇몇 직원들에게 담당관이 지시했다. “이후 번호는…지금 몇 시지?” “11시 조금 넘었습니다.” “그럼 점심 이후에 재개한다고 전해.” 마음 같아서는 취소를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개인 행사도 아닌 정부의 행사였다. 그리고 감히 정부의 행사를 망쳐버린 단유의 행태가 몹시 못마땅했다. “두 사람은 나가고, 넌 잠깐 따라와라.” 조금 전과 달리, 담당관의 말이 거칠어졌다. 카메라 앞에서 얌전 떨 이유가 없어진 때문일까? 복도로 나서니 행사 진행을 위해 왔던 교육부 직원들과 학부모 학생들이 얽혀 어수선한 가운데 수군거리는 소리가 뚝 멈췄다. 그리고 단유를 향한 묘한 시선들이 모여들었다. 그중에 담임 선생님이 있었다. 붉어진 얼굴을 한 선생님은, 담당관의 뒤를 따라 나오는 단유를 향해 뭐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는지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잠깐의 시선 교환 뒤 단유가 담당관 뒤를 따라가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멀찍이 서서 바라볼 뿐이었다. “혼자 왔나?” 담당관과 단유는 같은 건물 내의 빈 강의실로 향했다. 대학교 강의실은 어딜 가나 비슷비슷한 거 같다고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는 단유의 태연함에 담당관은 혀를 내두르며 물었다. 이곳까지 걸어오는 동안 많이 진정되었는지 안색을 되찾고 있었다. “아니요, 담임 선생님이랑 같이 왔습니다.” “담임 선생님? 부모님은?” “부모님은 안 계십니다.” “안 계셔?” “초등학교 때부터 보육원에서 자랐습니다.” 설명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담당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릿속에 사회 부적응자, 소시오패스와 같은 단어들이 떠다니다 사그라들었다. “선생님은 어디 계시니?” “아까 복도에서 봤습니다만, 담당관님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다가오시진 않으셨던 것 같네요.” 담당관은 또 한 번 마른세수하며 달아오르는 열기를 식혀보려 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문가에 서 있던 직원에게 선생님을 모시고 오게 시켰다. 이윽고 선생님이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 강의실로 들어오셨다. “이리 앉으세요.” “네.” 목소리가 잠겼는지, 이상한 목소리로 대답한 선생님은 애써 침착하게 보이려 성큼성큼 걸어 단유 옆에 앉는데, 그 모습이 마치 로봇을 보는 것 같았다. “방송, 보셨습니까?” “네, 죄송합니다.” 대뜸 사과부터 하는 선생님이었다. 힘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꽉 쥔 주먹이 허벅지에 올려져 있음을 단유는 확인했다. “죄송할 일이라. 솔직히 대형사고이긴 하죠.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있겠습니까?” 선생님은 대답은 못 하고 그저 고개를 숙여 보였다. 담당관은 혀를 차며 다시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태연한 단유의 표정을 보니 지금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아니, 모르진 않으리라. 이렇게 똑똑한 녀석이 모른다면, 진짜 소시오패스일지도. “넌 어떻게 생각하니?” “어떤 부분을 이야기하고자 하시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는데요?” “…니가 조금 전 면접장에서 친 사고 말이다.” “면접관님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한 거요?” ‘솔직’이라고 하니 할 말이 없다. “그래. 말이 나온 김에 이야기를 좀 해보자. 그 이야기를 하려고 준비를 해왔었니?” “아닙니다. 저희는 그런 준비를 시킨 적이 없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선생님이 단유를 대신해 대답했다. 교감 선생님의 지시로 국어 선생님의 감수까지 받아 행사의 취지에 맞게 스피치를 준비했었다고 열변했다. 그런 선생님을 비난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담당관이었다. “선생님들 몰래 준비했던 거니?” “아니요. 그냥 그 자리에 앉았을 때 생각나서 이야기한 겁니다.” “…말이란 한 번 뱉으면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다. 충분히 숙고하지 않은 채, 그저 카메라 앞이라고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에 그랬던 것 같은데, 경솔한 행동이었다.” 소영웅주의적 심리, 라고 지적하는 담당관에게 단유가 반박했다. “한번 뱉으면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니, 자신의 말은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전 제 말에 어떠한 거짓이나 가식이 섞이길 원치 않습니다.” 입이 살짝 벌어지는 담당관이었다. “제가 학교에서 배운 바대로라면, 과거 독재정권 시절 언론 탄압이 있었다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학교의 선생님은 물론, 교과서에서는 그 시절의 언론이 비판과 견제의 역할을 하지 못해 독재정권이 계속 커가도록 방치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미국도 언론의 자유를 굉장히 중시하고 있다고 하고요.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원칙과 기본을 강조하고 가르치면서, 현실에서는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려는 건가요?” “니가 오해를 했나 본데, 원칙과 기본을 지키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례하게 느끼실 수 있겠지만 감히 여쭤봅니다. 담당관님은 현재의 교육 제도에 문제가 없다고 느끼시는 겁니까?” 담당관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 [417] 배신의 계절(4) “그렇진 않다. 당연히 문제가 있겠지. 어느 시대, 어느 사회건 100% 완벽한 제도는 없다. 그러니 조금씩 수정하고 보완하여 완벽에 가깝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저 역시 그와 같은 의도로 발언한 것입니다. 다만 절차에 있어, 현 교육 시스템의 고질적인 문제를 먼저 개선한 뒤, 자유학기제가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만약 자유학기제가 그렇게 좋은 제도라면 한 학기만 적용할 것이 아니라 전 학기에 걸쳐 적용해야 하는 문제 아닌가요?” “너 스스로도 그게 답이 안 된다는 건 알 텐데?” “알기 때문에 적용에 앞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결국 단유는 줄곧 같은 이야기를 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이 아이가 다른 속셈이 있으리라 의심을 하다 보니, 단유의 이야기를 오롯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을 뿐. 담당관도 이제는 단유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아니 현실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고,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네 생각은 알겠다. 하지만 아까 그곳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정 네 생각이 그랬다면 자유학기제 홍보대사는 지원하지 말았어야 해.” “그만두려고 했습니다만 두 가지 이유로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는 자유학기제를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학교와 학생의 근본적인 변화만 있다면 충분히 선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 싶었고, 두 번째는 지금과 같은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과 같은 자리?” “일개 학생에 불과한 제가 교육부라는 관청의 높으신 분들을 어떻게 뵐 수 있겠습니까. 이런 자리를 통해서 만나야죠.” “…왜 보려고 했지?” 단유는 숨을 골랐다. 지금부터가 진짜 본론이었다. **** 인터넷으로 중계되던 ‘자유학기제 홍보대사 오디션 제1부’는 갑작스럽게 방송이 종료되었다. 물론 실시간으로 시청하던 사람의 숫자가 워낙에 적었기에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방송이 종료되기 직전, 해당 방송을 보던 사람은 무려 4천여 명에 달했다. 그리고 그중 몇몇은 유진의 말처럼 해당 영상의 내용을 SNS와 커뮤니티 등에 실시간으로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처음에는 참가자들의 뛰어난 외모가 주 내용이었고, 두 번째는 긴장한 듯 버벅거리는 지원자들의 어설픈 모습들이 대화의 소재가 되었다. 세 번째는 유진과 같이 당당하고 말 잘하는 데다가 외모까지 받쳐주는 지원자들에게 호감을 드러내는 내용이었고, 단유가 나오면서 그 파격적인 내용이 화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방송 종료 직전에 무려 천여 명이 더 몰리는 효과가 발생했으니, 화제성만큼은 애초의 기획 의도를 넘어선 셈이었다. 특히 교육 제도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선 단유의 발언은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방송이 종료되기에 이르자 뜨거운 불판이 마련되었다는 듯, 중고등학생들 위주의 커뮤니티에서 난리가 났다. 「나 방송 못 봤는데 구할 수 없음?」 「인코딩 중.」 「능력자님, 미리 감사.」 조악한 화질이나마 단유의 1분 스피치와 면접관들과의 대화를 빙자한 토론이 영상에 고스란히 담겨,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주 내용은 현 교육에 대한 비판이었지만, 내용을 떠나 면접관이라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고 소신 있게 자기 발언을 하는 단유의 모습이 화제가 되었다. 「쟤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쟤 모름? 가디스R 뮤직비디오에도 나왔는데.」 「그전에 일진을 무릎 꿇리다, 에 나오지 않았음?」 「그때는 얼굴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걔 맞음. 그때 그 동네 일진이라고 소문났다가 소문낸 사람 인실좆 당함.」 단유에 관한 온갖 이야기와 증언들이 겹치면서 인터넷 불판은 점점 불씨를 키워갔다. 당연히 교육부 자유학기제 홍보페이지의 게시판 역시 뜨거워졌다. 다양한 게시글들이 밀려들며 한때는 게시판 서버가 잠시 멈출 정도였다. 그리고 이런 사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비단 중학생이나 네티즌 뿐이 아니었다. ‘오케이, 오늘도 한 건 올리겠는데.’ 자판을 두드리는 신나는 손가락의 주인공은 인터넷 신문사의 기자였다. 『자유학기제? 현 교육부터 고쳐라! - 교육부와 정면으로 맞선 중학생, 담당자들에게 일갈.』 늘 그렇듯이 인터넷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기사로 쓸만한 소재를 찾아 나서던 기자는 우연히 이 불판을 발견했고, 정부와 소년의 대립이라는 구도가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마침 어떤 할 일 없는 사람이 해당 영상을 실시간으로 녹화해 놨다가 단유 부분만을 편집해서 업로딩한 덕분에 기자도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야, 아주 제대로 질렀네, 질렀어.” 특히 ‘붕당’을 비교 소재로 삼음으로써 비판의 강도를 높인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붕당보다는 중국 전국시대의 법가사상을 예로 들어서 법치주의가 통치보다 압제에 더 유용하게 사용되었음을 예로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법치주의보다 붕당이 더 임팩트가 있다. 붕당이란 단어에 ‘비리’, ‘부패’의 이미지가 내재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똑똑한데?” 뭔가 이 소년을 주제로 이야기를 써봐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1보로 기사를 작성해서 올린 후, 이 소년을 인터뷰하러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와 이름까지 알고 있으니까 찾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다만 문제는 그런 생각을 하는 이가 한 명이 아니라는 점이었으나, 기자는 아직 거기까진 생각을 못 하고 그저 신나게 자판을 두드릴 뿐이었다. **** “현재 저희 학교에 교육부 감사가 와 있습니다.” 선생님이 헉, 소리를 내며 단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다급한 모습에 담당관이 눈을 빛냈다. “아니, 저기 담당관님, 잠시만요. 아니 단유야, 잠깐만 저기 이야기 좀.” 선생님은 단유가 무슨 말을 꺼낼지 몰라 불안함에 우선 이야기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담당관은 이미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온 마당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을까, 라는 호기심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불안감을 보이는 선생님의 반응에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계속 이야기해봐라. 무슨 감사지?” 단유는 학교에서 벌어진 교복 변경에 관한 일을 이야기했다. “아직 감사 결과가 나오지 않은 터라, 해당 일의 시비를 나눌 순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말입니다. 학교의 구성원인 학생들에게 어떤 설문조사 한 번 하지 않고, 교복 변경 및 선정 위원회가 구성되고 디자인이 결정되는 과정이 이해가 가시나요?” “그런 점도 감사에서 다 드러날 일이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마치 교육부의 감사를 의심하거나 믿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사실 교복이 변경되는 일은 저희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저희는 졸업할 때까지 현재의 교복을 착용하면 되니까, 경제적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새로 들어오는 신입생들도 현 교복을 물려받거나 혹은 새 교복을 구입할 수 있도록 선택지가 주어지기 때문에 부담이 없지는 않지만, 충분히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단유는 차분하게, 하지만 정확하게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말이죠, 설령 이 교복 변경이 절차에 어긋남이 없다고 하더라도 제가 문제라고 생각한 것은, 단지 학교가 학생들의 의사에 상관없이 추진하는 정책이라는 것입니다. 학생은 그저 학교가 추진하는 바에 따라 따라만 가야 하는 것이냐는 생각이 들더군요. 학교는 그러겠죠. 너희를 생각해서 바꿨다. 너희에게 좋은 것이니 바꿨다. 학생들은 생각할 필요도 없고, 판단할 필요도 없이 그저 위에서 시킨 대로 따라만 가야 하는 건가요? 지금의 자유학기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육부에서 좋다고 하니까, 그저 비판 없이 따라만 가야 합니까? 무조건 좋다고 자신을 세뇌하며 따라가야 옳은 것입니까? 비판 없이 따르도록 하는 이 시스템이 제겐 가장 큰 문제라고 보였습니다.” 담당관은 할 말을 잃었다. 선생님은 살짝 넋을 놓은 듯 단유를 바라볼 뿐이었고. 문득 담당관은 자신의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공무원이란 관료제의 전형이다. 위에서 시킨 대로 해야 하고, 특별한 제안을 해도 위에서 거부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더욱 솔직히 이야기해서, ‘자유학기제’란 제도에 대해 특별히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 단순히 홍보담당관이란 직책을 가졌기 때문이고, 그 직책에 맞게 업무를 수행코자 열심히 수단을 강구했을 뿐이니 정책 자체에 대한 비판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비판적 사고와 창의성은 대한민국 교육에 있어 늘 나오는 문제이지 않나요? 그 부분을 함양할 준비는 하지 않고, 무작정 좋은 제도라고 들이 밀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당장 저희 학교를 봐도 내년부터 자유학기제를 시행하겠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 준비가 되었는지 의문입니다.” 담당관이나 자리에 동석한 몇몇 직원들이 단유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나 처음과 같은 못마땅한 표정만은 아니었다. 단유의 비판에는 이유가 있었고, 그 이유는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이해 가능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조금의 시간이 지나면, 그런 생각도 금방 잊혀질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공무원이고, 행사를 주관하는 입장에서 윗분들에게 문책을 받아야 하는 위치였으니까. 그렇더라도 단유를 그저 기분 나쁘다고 비난할 순 없었다. 저런 이야기를 듣고도 단유를 비난한다면, 그건 성숙한 어른의 자세가 아니다, 라고 다들 생각했다. ‘그래도….’ 왜 하필 그 자리에서 꼭 그래야만 했었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아 결국 다들 침묵을 지키는 선에서 시간을 보냈다. “담당관님!” 한 직원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인터넷에 기사가 떴습니다!” 담당관은 순간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 교장 선생님은 교장실 소파에 앉은 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교감은 어쩔 줄 몰라서 주저하는 중이었고, 이사장은 얼굴이 붉어진 채로 교장을 노려보았다.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그럼 화를 내야 한단 말입니까?” “지금 이게 화가 나지 않는다면, 교장 선생님의 속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겨우 중학생 아이입니다. 세상을 잘 모르는 아이기도 하고, 그저 책으로 세상을 안다고 착각하는 어린애의 일입니다. 그런 일에 화만 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이 일이 가볍게 넘어갈 문제는 아니지요.” 이를 가는 이사장의 표정에도 교장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비록 예측 불가의 일이지만, 현명하게 넘길 방도를 찾는 게 어른입니다.” 애들처럼 씩씩대며 고자질하러 온 것 마냥 안절부절못하는 교감과 이사장을 꾸중하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저희보다 교육부가 더 문제겠지요. 아주 전국적 망신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게요.” 이사장은 교장의 여유로운 표정을 지켜보다 물었다. “계산이 있으신가 보군요.” “계산이라. 글쎄요.” 능청을 떠는 교장에게 이사장은 되물었다. 교장은 일단 차부터 마시면서 진정하자는 듯 시간을 끌었다. 소파에서 일어나 차를 준비하러 돌아서는 교장의 얼굴은 조금 전과 달리 심각하게 굳은 채였다. 하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는 얼굴이기도 했다. “자, 마시면서 들으세요.” 다시 미소를 띠며 차를 건네던 교장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묻은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교육부는 사실 굉장히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관료들입니다. 수차례의 개정과 개혁 속에서도 변함없이 일관된 기조로 일하는 이들이지요. 장관이 바뀔 때마다 교육 정책이 바뀌죠? 그건 변화무쌍하다는 말보다는 기준이 없다는 뜻입니다. 기준이 없음에도 존속 가능한 이유가 뭘까요? 그들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 노력할 뿐인 기관인 겁니다.” 통렬한 비판? 아니 그냥 교육부라는 제도권에 대한 모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교장은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이라 이사장은 살짝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번 사건은 그들로서도 꽤 충격이 있을 것입니다만, 언제나 그렇듯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어떻게 할지는 모르지만요. 하지만 추측 가능한 부분은 있습니다.” 교장은 따뜻한 차로 입술을 적셨다. “마치 전혀 큰 문제가 아닌 것처럼 꾸미려 한다는 것이지요.”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교장은 머리를 가리켰다. “구체적인 방법이야 그네들이 생각할 문제 아니겠습니까? 전 그저 그런 방향으로 움직일 거로 예측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저희 학교에도 영향이 없을 거라는 것입니다.” “영향이 없다고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어야 하니까요.” ======================================= [418] 배신의 계절(5) 담당관은 목을 조여오던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숨을 크게 쉬었다. 뒤늦게 자신을 지켜보던 눈들이 있음을 알았지만 당장은 숨부터 쉬고 볼 일이었다. “어떤 기사가 났죠?” 직원은 핸드폰으로 기사를 찾아 보여주었다.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마치 베틀의 씨줄 꿰듯 좌우로 왔다 갔다 움직였다. “하아.” 단순히 시말서 정도로 끝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정부의 행사 중 참가자의 돌발 발언에 면접관이 당황해서 급히 방송을 멈췄다는 이야기가 나온 마당이니 차라리 깔끔하게 자리를 정리했어야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생각이 짧았어.’ 하지만 이대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최대한 빨리 움직여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혀 동요가 없었던 것처럼 해야 한다. 담당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직원에게 몇 가지를 주문했다. 직원이 서둘러 강의실을 나간 뒤, 담당관은 단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단유의 태연한 표정을 보며 첫인상이 떠올랐다. 처음 단유에게 질문을 던질 때, 단유는 바로 지금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는 긴장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표정을 연기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도 했었지만 줄곧 같은 표정인 걸 보니 여간내기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김단유 학생?” 담당관의 낮은 목소리에 단유가 대답했다. “네?” 잠시 단유를 바라보며 조금 전까지 이루어졌던 대화를 복기해보던 담당관은 눈을 빛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만 가보세요.” 단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만히 담당관을 지켜보았다. “차후 연락드리겠습니다. …선생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선생님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담당관의 인사를 받기 위해 엉거주춤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담당관은 조금 빠른 걸음으로 강의실을 먼저 나가려다 돌아섰다. “그리고 김단유 학생. 아까 말한 내용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제 권한은 아니지만 ‘꼭’ 알아보도록 하지요.” 그제야 단유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허리를 폈을 때, 담당관은 이미 강의실을 나가고 없었다. “선생님, 저희도 이만 가죠.” 고개를 들어 올린 선생님은 빈 강의실에 둘만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도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던 선생님이 급히 일어나 핸드폰을 붙들고 전화를 했다. 그러나 상대가 전화를 안 받는지 연락이 되지 않자, 이를 갈더니 단유에게로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김단유!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단유는 조금 씁쓸한 시선으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뭐! 왜! 아직도 할 말이 남았어!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응? 뭐가 그렇게 불만이어서 이 지경을 낸 거냐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던지 선생님은 떨리는 몸을 주체를 못 해, 책상을 붙든 채로 단유를 노려보았다. “불만, 없습니다.” “없다고? 없는데 그런 소리를 해? 니가 뭘 안다고 교육 정책이니 뭐니 떠드는 거야!” “선생님. 선생님께 학교는 어떤 곳인가요?” “뭐?” “교사란 직업은 어떤 일을 하는 건가요?” 선생님은 단유가 자신을 비꼬고 있다고 생각했다. 감히 하늘 같은 스승에게! “김단유!” “만약, 교사로서 돈을 벌지 못했다면, 교사라는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을 건가요?” “뭐야!” 단유는 선생님의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선생님이 왜 제게 화를 내시는 거죠?” “그걸 몰라서 물어!” “네.” 선생님은 손이 치켜 올라가는 걸 억지로 참았다. 부들대는 선생님의 눈에 선 핏줄을 보던 단유가 침착하게 되물었다. “만약, 제가 교사가 되고자 한다면요?” “뭐? 니가 교사가 된다고?” 기도 안 찬다는 듯 반문한 선생님이 단유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 같은 놈이 교사가 되었다가는 이 나라 교육이 망하고 말 거다!” “왜요?” “왜라니! 왜….” 왜지? 단유의 계속된 물음에 선생님의 머릿속에도 순간 물음표가 생겼다. 처음에는 화가 치밀어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할 생각도 없었건만, 계속된 물음에 저절로 반응한 것인지 선생님은 저도 모르게 궁리를 하고 말았다. ‘왜 단유는 교사가 되면 교육이 망할까?’ 멋들어진 대답으로 단유를 엉망으로 만들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며 답을 찾던 선생님은, 그러나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자신은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잘해도 단유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단유처럼 성적이 우수한 애들은 고등학교에서도 두각을 드러냈고, 그런 애들이 결국 서울대를 들어갔었다. 하물며 교사가 되겠다고 하면 못할 것도 없으리라. 그렇다면 단유가 교사가 되었을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 분명히 문제가 발생하니까 ‘이 나라 교육이 망하는’ 결과를 예측한 것일 텐데. ‘사람을 열 받게 만드는 화법을 가지고 있으니까?’ 왜 화를 내느냐고 되묻던 단유의 태연함에 화가 났었다. 머리도 좋은 놈이 상황 판단도 못 하고,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알고 지껄이던 놈이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단지 머리만 좋으면 다인가? 기본적인 인성이 안 된 놈이 아닌가? 인성이 덜된 놈이 아이들을 가르치면 그 아이들의 인성은 어떻게 되겠는가? 이 나라 교육의 기본은 바로 ‘인성 교육’ 아닌가? ‘교사란 직업은 어떤 일을 하냐고?’ 바로 아이들의 인성을 바로 세우고, 이 세상을 잘 살아가게끔 만드는 일이다. 아이들이 세상 속에서 잘 화합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지식과 상식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인간관계와 넓은 교양을 갖도록 만드는, 이른바 ‘전인 교육’의 실천이다. ‘나에게 학교가 어떤 공간이냐고?’ 바로 전인 교육과 인성 교육을 실천하는 장(場)이다. 그런데. ‘난 뭘 하고 있는 거지?’ 단유의 질문을 되짚으며 대답을 궁리하던 선생님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의자에 주저앉고 만 선생님의 눈은 초점을 잃었다. ‘개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존중하며 동시에 다양하고 균형적인 교육을 실천하는 것이 교사.’ 인격을 존중하는 교사, 정신적 육체적 성장을 돕는 교사. 방학 때마다 참여해야 했던 지루한 세미나와 커리큘럼에서 다루던 말들이 귓가를 맴돌았다. ‘직업으로서의 교사가 아니라, 사명감을 가진 교사로서 자부심을 가지길 바랍니다.’ 라고 강사가 떠들 때마다 뻔한 소리 한다며 혀를 찼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학교 밖에서는 친척들이며 주변 사람들이 ‘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그를 높이 세워 주었고, 사회적으로도 좋은 인식을 가진 직업을 가진 스스로가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반면 학교 안에서는 일반 회사와 같은, 아니 때로는 일반 회사보다 못한 질서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저 굽신대고만 있었다. 학기마다 쌓이는 ‘페이퍼워크(paperwork)’에 짜증을 부렸고, 교감과 주임 선생님, 선배 교사 등 윗사람의 눈치를 보며 살았다. 특히 학생들에게 자신은 그저 습관적으로 대하고 있지 않았나. 기계적으로 종이 치면 교실로 들어가 교과서대로 수업하고, 종이 치면 교무실로 향한다. 아이들을 성적으로 평가하고, 수업시간에 자는 아이들이 있어도 넘어가기 일쑤였다. 그의 삶의 방침이랄까, 세월이 흐르며 그가 가진 생각은 단 하나. 좋은 선생님,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이었다. 최선을 다하는 선생님보다 터치를 덜 하는 선생님. 관대한 선생님으로 남게 되었다. 학교 일에 최선을 다하기보다 선배와 상사의 눈에 벗어나는 일이 없게 적당히 처세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래서 선생님은 단유에게 화를 냈다. 좋은 선생님이 아니라, 좋은 동료가 아니라 무능한 선생님, 무능한 동료로 낙인 찍힐까 봐. 선생님은 고개를 숙였다.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어쩐지 단유는 자신의 속내를 모두 읽고 있을 것 같았다. 노린 것처럼 질문했던 내용을 상기해보면, 단유는 자신을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음이리라. 이런 아이 앞에서 유치하게 화를 내고, 어리석게 ‘망할 거’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듯, 자신이 해충이 된 것만 같았다. **** 담당관은 면접관들을 구슬려서 곧 면접을 재개했다. 동시에 방송도 다시 송출을 시작했고, 금방 인터넷 실시간 시청자 수가 5천 명을 넘어섰다. 사건이 터진 지 불과 한 시간도 안 됐는데, 이런 반응이 나온다는 건, 그만큼 이 사건이 세인의 관심을 모았다는 뜻이고 또한 뭐든 빠르게 전파되는 인터넷 시대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담당관은 입맛이 썼다. 다시 뒷번호 지원자들이 들어와 제 자리에 앉았다. 이번이 조금 전의 면접과 다른 점은 사전에 지원자들로부터 1분 스피치 대본을 받았다는 점이었다. 다들 1분 스피치를 위해 대본을 준비해둔 덕분에 이를 요구했을 때, 대부분은 쉽게 대본을 제공했다. 다들 조금 전의 사건을 감상(?)한 덕분이기도 해서, ‘원활한 진행을 위해 협조’ 바란다는 교육부의 안내에 잘 따라주었다. 대본을 제출한 이에게는 1분 스피치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대신, 대본을 제출하지 않은 이에게는 1분 스피치 대신 간단한 질문으로 대체해서 스피치를 하지 않도록 했다. 형평성의 문제가 거론될 수 있기에 질문은 ‘자유학기제’ 경험담이나 혹은 개인에 국한된―문제의 소지가 없을법한―대답이 나올 것들로 준비를 했고, 면접장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공지해서 원활한 진행이 되도록 했다. 이를 위해 파견 나온 직원들이 고생―사전 질문 제작, 전체 공지, 대본 미제출자에게 질문 전달과 협조 요청 등―을 조금 하긴 했지만, 짧은 시간에 졸속으로 준비한 것에 비하면 꽤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오디션’은 원활하게 진행되었고, ‘방송’은 약한 수준의 악성 댓글을 제외하곤 문제없이 시청자들을 끌어모았다. 담당관은 조금 더 조심스럽게 면접을 진행했으며, 다른 두 면접관에게는 질문 없이 점수를 매기는 것에만 집중하도록 일렀기에 걱정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해야 했어.’ 괜히 방송에서 작가들을 기용하겠는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대본을 만들고 시뮬레이션을 해야 했는데, 처음 하는 일이라 그런지 실수가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 그것은 단순한 시행착오였을 뿐이다. 단지 그 시행착오가 낳은 결과를 어떻게 봉합해야 하느냐를 두고 골머리를 썩여야 하겠지만 말이다. 학교는 관료제이다. 철저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상명하복을 원칙으로 하여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갈리고, ‘교육’이란 서비스를 제외하면 행정적인 부분에서 다른 일반 관청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랜 세월을 관료적 행정 질서와 함께하다 마침내 교장이란 직위에 오르게 되면, 행정 감독과 하급자 통제라는 전문 행정직으로 변모를 꾀하게 된다. 오래도록 고수되었던 규칙과 방식이 지켜지길 바라며 늘 ‘질서 정연’하기를 요구한다. 원활한 ‘통제’를 위해서는 하급자의 자율권을 적당히 속박해야 했다. 하급자가 자신의 의지대로 의사결정을 하게 되면, 이는 곧 상급자의 통제력 위축으로 이어지게 마련,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돌아오셨다는 겁니까?” 평소의 교장과 다른 분위기에 담임 선생님, 강구는 얼른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교장 선생님.” 교장 선생님이 소파의 팔걸이에 붙은 원목 받침대를 손톱으로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였다. “그 학생, 김단유는요?”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학교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을 못 했다. 아니, 설령 기다렸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와 나란히 있을 기분이 아니어서 그냥 대학교에서 헤어졌다. 학교에 연락을 취했다가 교장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리에 아뿔싸,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다시 불러들이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 생각하며 홀로 학교로 왔건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눈 딱 감고 부를걸.’ 매도 나눠 맞으면 덜 아프지 않을까. 비록 나눠 맞을 상대로 학생을 생각했다는 것 자체에 또 한 번 죄책감을 느꼈지만. “정 선생님.” “네, 교장 선생님.” “참으로…가슴이 아픕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 “선생님을 믿고 맡긴 거였는데 일 처리를 ‘이따위’로 하시다니요.” 특정 단어를 강조하는 교장 선생님이 상체를 살짝 기울여 오른쪽에 앉은 담임 선생님에게로 몸을 향했다. “학생이 자기 멋대로 실언을 하게 두는 건 감독하는 선생님의 직무유기입니다. 게다가 교육감들이 지켜보는 자리였어요. 그렇다면 당장 그곳에서 뭔가 손을 쓸 생각을 했어야죠. 그냥 이렇게 돌아오면 선생님을 믿고 보낸 저는 뭐가 됩니까?” “…그게 말입니다.” “변명, 하실 겁니까?” 선생님은 입을 꾹 다물었다. “선생님도 아시죠? 제가 선생님을 얼마나 믿는지? 그래서 굳이 주임 선생님이 아니라, 선생님 반에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는 녀석을 넣어줬던 거예요. 선생님이라면 충분히, 잘 가르칠 거라고 믿었으니까요.” 믿음. “정 선생님. 정말 실망입니다.” 실망. “선생님에 대한 처분은 차후에 따로 고지해 드리겠습니다. 나가보세요.” “교장 선생님.” “나가세요.” 강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장실을 나올 때, 교장 선생님에게 고개를 숙여 보일 때, 인사를 받지 않는 교장을 보며 강구는 마치 자신이 배신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 [419] 주홍글씨(1) 강의실을 나와 대학교를 빠져나오던 중, 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마치 공원처럼 조성된 대학 입구 근처에서 단유는 유진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유진은 근처 벤치에 앉아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먼저 단유를 발견하고는 뛰어왔다. “단유야!” 오늘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랜 시간 함께 보낸 친구인 양 구는 유진의 태도가 조금 꺼림칙하게 느낄 법도 한데, 워낙에 표정이 밝고 주저함이 없어서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너 오늘 대단하더라!” 진심으로 감탄하는 유진의 시선에 단유가 머쓱해 할 때, 옆에서 말없이 걷던 선생님이 단유에게 물었다. “너 혼자 집에 갈 수 있지?” “네. 선생님 먼저 가시겠어요?” “그래. 너무 오래 밖에서…아니다, 알아서 잘 들어가도록 해라.” 단유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단유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선생님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유진도 선생님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곧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거기서 그런 말을 할 생각을 다 했어? 설마 준비 없이 그냥 말한 건 아니지? 평소에도 그런 생각 많이 해? 뉴스나 신문 같은 거 자주 보는 편이야?” 단유는 어쩐지 익숙한 대화 진행에 서둘러 손을 들었다. “거기까지.” “응?” “만약 묻고 싶은 게 있으면 하나씩 물어봐. 그렇게 물으면 대답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잖아?” “그럼 전화번호 뭐야?” “응?” “핸드폰 번호 알려줘.”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번호를 알려주었다. 핸드폰에 단유가 불러준 번호를 입력한 유진이 단유의 이름을 저장하다가 물었다. “이렇게 쉽게 알려줘도 돼?” “…그럼 애초에 물어보질 말았어야지.” “혹시나 했지.” 키득거리며 저장을 끝낸 유진이 다시 물었다. “아까는 왜 그랬어?” “뭘 알고 싶은 건데?” “솔직히 대단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말이야, 어른들 앞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다는 거. 그래도 그런 이야기를 하면 홍보대사 못 할걸? 원래 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일부러 난장판 만들려고 그런 거야?” “마치 내가 고약한 심보를 가지고 일부러 그런 말을 한 것처럼 보였어?” “아니, 그렇진 않았지만 솔직히 잘 이해는 안 돼. 교육제도니 뭐니, 하는 거. 게다가 넌 전교 1등이라며? 그런 애가 왜 교육제도를 비판하고 나서? 그리고 교육부의 높은 자리에 계신 분들 앞에서?” “그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있건 낮은 자리에 있건 나랑은 상관없지. 딱히 그분들을 모욕하려던 의도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단지 현재의 교육제도에 대한 내 생각을 솔직하게 밝혔을 뿐이야.” “원래 하고 싶은 말은 못 참고 다 뱉는 성격이야?” “표현이 거슬리긴 하지만, 그렇진 않아. 보통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는 편이고.” “그런데 왜 그랬어?” “할 말은 해야 하니까. 그리고 내가 한 말에는 책임을 져야 하니까. 속에 없는 말을 하더라도 거짓이 섞이면 안 되니까.” “그러니까 한치의 사심도 없이 정면으로 부딪친 거네? 멋지다, 너!” 뭐가 멋지게 보였는지는 모르겠다. 단유는 유진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이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기 부모님들한테 가봐야 하지 않니?” 날씨도 쌀쌀한데 벤치에 멀뚱히 앉아 딸을 기다리는 유진의 부모님이 보여 물었다. 유진은 뒤로 돌아보더니 손을 흔들어 보였다. “괜찮아. 친구랑 이야기하는 건데.” “그런 뜻이 아니고, 부모님이 기다리시니까 가보란 뜻이야. 나도 이만 집에 갈 거니까.” “아, 그래? 많이 피곤해?” “그래. 어쩐지 지금 많이 피곤하네.” “그럼 나중에 연락할게.” “연락?” “전화번호 알려줬잖아? 연락해도 된다는 뜻 아냐?” “굳이 연락할 이유가 있을까?” “친하게 지내자고. 너 같은 친구 있으면 어쩐지 나중에라도 도움이 많이 될 거 같으니까. 아, 너 여자친구 있어?” 아까도 물었던 내용이었는데, 이번에는 대답을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 있어.” “아, 진짜? 아쉽네.” 단유는 얕은 한숨을 내쉬고는 작별을 고했다. “갈게.” “응. 오늘 수고 많았어.” “너도.” 유진이 먼저 손을 들어 보인 뒤, 곧 부모님께로 뛰어갔다. 단유는 가볍게 유진의 부모님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정문을 빠져나갔다. 부모님은 다가오는 유진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다가 자랑스레 ‘번호 받았다’며 이야기하는 딸의 등을 찰지게 때렸다. “넌 어떻게 된 애가 그렇게 가볍게 굴어? 엄마가 밖에서 조신하게 굴라고 했지? 아까 교실에서도 엄마가 너 그럴까 봐 얌전히 있으라고 했는데도 쪼르르 달려와서 말이야, 어른들 보는 앞에서 교양 없이 굴고 말이야.” “내가 뭘 어쨌다고….” “그리고 엄마가 뭐라고 그랬어? 친구는 가려 사귀랬지?” “뭐 어때서? 전교 1등이나 할 정도면 머리도 좋고…괜찮은 거 아냐?”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겼고, 말도 잘하는’ 이란 속내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딱하다는 듯 혀를 차며 딸을 나무랐다. “니가 그러니까 사람 보는 눈이 없다는 거야. 아까 그 자리가 어떤 자린데 그런 소리나 하고 앉았어? 솔직히 엄마는 아까 핸드폰으로 보다가 식겁했어. 그런 애는 나중에라도 사고 칠 애니까 행여라도 가까이 지낼 생각 마.” “그런 애 아냐.” “아니긴? 니가 뭘 안다고 아네 마네 하니?” 오늘 처음 본 주제에, 라며 딸을 타박한 어머니는 날씨가 차갑다며 유진의 손목을 붙잡고 정문을 빠져나갔다. 정문 근처에서 기다리던 아버지의 코끝이 붉어진 것 같았다. 집에 돌아간 단유는 명수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역시 단유 넌 기대를 버리지 않아!” 도대체 무슨 기대를 했길래? “또 발칵 뒤집었다며?” “또, 라니?” “됐어, 그런 사소한 문제는 접어두고. 아무튼 듣는데 통쾌한 기분이 들더라.” “진짜?” 단유가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명수를 바라보자, 명수가 헤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니. 사실은 댓글에 그런 내용이 많더라. 솔직히 네가 하는 말은 어려워서 잘 모르겠어.” “댓글?” 문득 지난 일들이 생각나 단유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 네 신상 다 떴어.” 각오했던 바였다. 작년에 이미 겪은 바 있지 않던가. 인터넷을 ‘정보의 바다’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각종 데이터가 퇴적층(堆積層)을 이룬 채 그 위를 활보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겹겹이 쌓이기만 할 뿐 사라지지 않으니, 언제라도 드러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러니 이번 사건으로 단유의 신상명세가 다시 떠오를 것이란 것은 예상 가능한 부분이었다. “혹시라도 용돈 벌이가 될까 살펴봤는데, 별로 악성 댓글은 없더라.” “용돈 벌이?” “악성 댓글 다는 사람 고소해서 합의금 받는 거.” 단유는 그런 일에 시간 낭비하지 말라며 명수를 다독이곤 방으로 들어갔다. 명수는 그런 단유의 뒤를 졸졸 쫓아와 물었다. “그런데 너, 뒤탈은 없는 거지?” 단유는 교복을 벗으며 물었다. “뒤탈?” “댓글 보니까 마티즈 올지도 모른다고 하더라.” “그게 무슨 뜻이야?” 인터넷과 친하지 않은 단유는 ‘용돈 벌이’니 ‘마티즈’니 하는, 명수의 비유를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명수의 설명을 들은 뒤,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나한테는 안 오겠지.” “그럼?” 단유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태연한 표정으로 ‘학교에는 올지도’라고 대답했다. **** 월요일이 되어 단유가 학교에 갔을 때, 단유는 예상치 못한 환대에 어리둥절했다. 같은 반이 아닌 애들도 단유를 보며 아는 체를 했고, 어떤 선배는 속이 시원했다며 단유의 등을 툭툭 치기도 했다. 교실에 들어갔을 때는 더 했다. 아이들은 단유의 얼굴을 보자 환호를 보내고 손뼉을 쳤다. 3반의 소란에 옆 반 아이들이 창가로 얼굴을 들이밀기도 했다. 단유보다 늦게 온 아이들도 가방을 자리에 던져놓고 단유에게 와서 무용담을 청했다. 하지만 무용담이랄 것도 없는 것이, 이미 영상으로 모두 공개된 데다가 단유네 반의 3분의 1은 실시간으로 영상을 시청했었기 때문이다. “그때 면접관들 표정이 정말 궁금하다.” “옆에 앉은 애 얼굴 봤냐? 완전 당황해서 입을 헤 벌리고 있는 거?” “얘는 못 봤겠지. 계속 정면만 보더만.” “근데 옆에 앉은 애는 되게 예쁘던데.” “연예인 같더라.” “혹시 인사했냐? 손 한 번 잡아봤어?” “손만 잡았겠냐? 으흐흐.” “으흐흐.” 단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기들끼리 신이 나서는 이러쿵저러쿵 떠드니 정신이 사나웠다. “할 말 없으니까, 다들 자리로 가지, 응?” “야, 그것만 얘기해줘. 옆에 애랑 인사했어? 이야기해 봤어?” “인사했지? 했네, 했어.” “했구나. 했어.” 어쩐 일인지 평소라면 인상을 쓰며 아이들을 째려봤을 도하도 얌전히 책상에 앉아 아이들의 수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슬쩍 보니 즐기는 얼굴 같기도 했다. 하지만 단유 본인이 이 소란을 견디기 힘들었다. “제발, 그냥 좀 가라. 니들이 본 거 이상도 이하도 없으니까. 응?” “어제 댓글 봤냐? 완전 단유 찬양 글!” “혁명가라던데?” 혁명은 무슨. 만약 선생님이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교실로 들어오지 않았으면, 진심으로 단유가 화내는 모습을 구경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아이들은 단유 대신 선생님이 화내시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지만. “다들 자리로 돌아가! 아침부터 왜 이렇게 시끄러워!” 누가 봐도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상태여서 아이들은 얼른 입을 다물고 신속히 자리로 복귀했다. 선생님의 좁혀진 미간이 펴질 줄 모르는 가운데, 선생님과 단유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선생님은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선생님은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는 상태였다. 단유를 비롯해 아이들 보기가 부끄럽다는 마음도 있지만, 토요일에 교장에게 힐난을 받고, 월요일 아침 회의 때 교감으로부터 온갖 눈치는 다 받은 상태라 짜증이 잔뜩 올랐다. 그뿐인가. 출근하는 순간부터 교무실을 빠져나오기 전까지 동료들과 말 한마디 속 시원히 하지 못했다. 혼자 죄인이 된 것마냥, 그렇게 자리를 지키며 교무 수첩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그 때문에 선생님은 미처 보고하지 못한 내용이 있다는 사실도 망각하고 있었다. 어쨌든 선생님은 단유의 변함없는 표정과 그 표정으로 물었던 질문들이 다시 상기되자, 짜증 대신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누군가 말했다. 요즘 교사는 편하지 않냐고. ‘편하긴 개뿔.’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에라도 때려치우고 싶었다. 교사로서의 자격이 있나 하는 회의감과 동료로부터 질책에 가까운 시선을 받으며 직장 생활을 해나가야 한다는 괴로움 때문이었다. “이제 진짜 기말고사까지 한 달 남았다. 그러니까.” 기말고사 따위가 문제일까. “수업시간에 다들 집중하고 별말 나오지 않게 행동 조심하고 공부에 집중해라.” 아침 전달 사항에는 ‘기말고사 기간 고지, 바른 수업 태도 견지토록’ 이라고 적혀 있었다. 도대체 학교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경고하고, 무엇을 요구하는 것일까. 이제는 이런 글을 봐도 무슨 의미인지, 어떤 의도인지를 확신할 수가 없다. “그리고 학교에 교육청 감사 나온 거 알지? 복도에서 떠들지 말고, 사고 치지 말고.” 거기까지 말한 담임은 한숨을 짧게 뱉으며 수첩을 덮었다. 마지막 전달 사항은 말하기 거북했다. “그리고…지난 토요일의 일은, 되도록 언급하지 않으마. 하지만 너희들도 잘 알아둬.” 담임은 수첩을 세게 쥐며 말했다. “단유는 너희들을 위해 이야기를 한 거다. 너희도 조금은 진지하게 단유가 했던 말을 숙고할 수 있도록 해라.”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선생님과 단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잠시 단유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인사도 받지 않고 교실을 빠져나갔다. 아직 조회가 끝나지 않은 다른 반에서는 ‘토요일에 있었던 인터넷 사고를 주제로 소란스럽게 굴지 말고,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다시 한 번 주지시켜라’는 전달 사항을 전하는 중이었다. ======================================= [420] 주홍글씨(2) 비록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자중하길 권했지만, 순순히 따를 아이들이 아니었다. 설령 교실 분위기를 잡기 위해 다소 강압적으로 험악하게 인상을 쓴다 해도 아이들은 입만 열지 않을 뿐 손가락을 분주히 놀려 단톡방에서 수다를 떨었다. 다수의 아이들이 단유의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단유의 주장, 교육 개혁이라는 것에는 무관심했다. 몸으로 와 닿지도 않고 그저 말뿐인 주장이라 더욱 그랬다. 다만 단유가 어른들, 특히 교육부의 높은 직급을 가진 이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들이밀던 그 모습에는 모두 환호를 보냈다. 물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단유를 보는 이들도 없진 않았다. 잘난 척한다거나 버릇이 없다는 식으로 매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단유를 옹호하는 말들이 대부분이었고, 단유를 전교 회장 시켜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기까지 했다. 사실 선생님들 사이에도 단유에 대한 시선은 갈렸다. 평화로운 직장 생활을 꿈꾸는 선생님들 입장에서 물의를 일으킨 단유가 곱게 보이지 않기도 했지만, 단유가 주장한 내용에 대해, 그 취지마저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선생님 식사하셨어요?” 강구가 돌아보니 박헌영 선생님이 커피를 든 채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 박 선생님. 예, 방금 먹었습니다.” “커피?” “아뇨, 괜찮습니다.” 헌영은 싱긋 웃으면서 다가왔다. “잠깐 이야기 좀 나눌까요?” 강구는 선배 교사인 헌영이 어떤 말을 할지 걱정되었다. “날이 선선하니 좋네요.” 선선하다기보다는 쌀쌀하다. 이제 겨울이 진짜 다가왔다는 느낌이었다. 헌영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교정을 걸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다. “정 선생님, 힘드신가 봐요?” “네?” “어깨 펴세요. 선생님이 잘못한 건 없잖아요.”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빈말 아닙니다.” 헌영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힘드실 거예요. 보통 애가 아니라서요.” 그제야 강구는 단유가 1학년 때 헌영의 반이었음을 떠올렸다. “아, 예.” “아시죠? 작년에 단유가 사고 쳐서 교장 선생님 면담까지 갔던 거.”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는 주변인의 입장에서 안타까운 시선으로 헌영을 바라봤었다. 고작 1년 만에, 입장이 이렇게 바뀌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때도 단유가 사고 친 건 아니었죠. 사고를 수습했던 거지.” “그렇죠.” “이번에도 같아요.” 강구는 걸음을 멈추고 헌영을 바라보았다. 앞서 걷던 헌영도 걸음을 멈추고 강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단유가 딱히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럼 선생님은, 단유의 말에 동의하시는 겁니까?” 헌영은 고개를 들어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취지에는 동의해요. 장소가 적당하지 않았다뿐이지.” 헌영은 다시 시선을 내려 어지러운 시선의 강구를 보았다. “작년에 그 일이 있고 나서 생각이 많아졌어요. 제일 처음, 그러니까 폭력 사건이 있고 난 후,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해결을 했다고 보고를 했을 때요. 그때는 굉장히 화가 많이 났었죠.” 선생님의 통제에서 벗어난 아이들의 행동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화를 낼 일만은 아니더라 이겁니다.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해결하는 게 뭐가 문제일까요? 자율과 선행(善行)을 강조하는 학교에서 말입니다. ‘학생자치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이 스스로 질서를 만들고 지켜나가도록 지도하는 마당에 말이죠.” “하지만, 학교에는 학교의 규칙이 있지 않습니까?” 헌영은 강구의 반문이 진짜 그렇게 생각해서 묻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부드럽게 대꾸했다. “어느 집단에나 지켜야 할 법과 규칙은 존재합니다. 이를 따르는 이유는 질서와 화합 때문이죠. 하지만 무조건 법과 규칙을 지켜야 하냐고 묻는다면, 글쎄라는 말이 나오겠죠. 과연 법으로 강제하고 구속하는 것이 정답일까요? 그건 고대 중국의 법가에서나 할 법한 이야기죠.” 강구는 왠지 익숙한 대화 방식과 마주한 느낌을 받았다. “법에 의한 수직적 지배는 사람들의 창의성을 말살하고 자유를 억압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이는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죠. 게다가 우리 교육에서는 더더욱이나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입니다. 아이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창의성보다 통제에 의한 획일성을 강조하다니요?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거기까지 말한 헌영은 벌써 식기 시작해서 김도 나지 않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말이죠, 우리가 그러고 있더라고요.” 우리. “두 사람이 싸웠어요. 그리고 한 사람이 잘못을 인정하고 싸운 사람에게 가서 화해를 요청했어요. 두 당사자가 모두 서로의 잘못을 인정했고, 다시는 그러지 말자며 손을 잡았어요.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장면입니까? 마치 소년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 아닌가요? 아니 요즘은 만화에서도 나오지 않습디다. 그런데 이 애들이 그걸 했어요. 잘못을 먼저 시인하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상대도 그 화해를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이를 두고 서로 법을 지키지 않았으니 처벌하겠다? 오히려 상을 줘야 할 일이죠. 이 아이들은 조화롭게 사는 법을 터득한 아이들이니까요. 교육자로서 이보다 뿌듯해할 장면이 있을까요?” 하지만 헌영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전 그러지 못했어요. 아직도 그 아이들에게 가서, 잘했다, 칭찬 한마디 안 건넸어요. 왜냐하면, 자존심 때문에요. 선생이라는 자존심이, 학생들에게 칭찬 한마디를 못 하게 막더라고요.” 강구는 차가운 날씨에도 땀나게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헌영도 강구의 시선을 따라 운동장을 보며 말을 이었다. “단유는, 어쩌면 우리가 교과서대로 가르친 대로만 움직이는 건지도 몰라요. 그 아이의 말과 행동은 문자 그대로 ‘교과서’ 적이니까요. 만약 그 아이가 잘못한 게 있다면, 우리가 잘못 가르친 거예요. 그렇다면 우린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현실? 세상은 교과서처럼 이상적이지 않다? 적당히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현실과 타협하며 이상을 좇지 마라?” 헌영도 강구와 같은 고민을 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점에서도 헌영은 선배였다. 강구보다 1년 먼저 경험을 했고, 치열한 고민을 했었기에. “결국 단유의 말이 맞는 셈이죠. 우리가 제대로 가르치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자유 학기제 같은 제도가 다 무슨 소용입니까? 우선은 학교가 바르게 서고 나서 볼 일이죠.” 사실 일선에 선 교사로서는 할 말이 많은 게 제도권 교육이다. “비록 저희가 월급을 받고 사는 월급쟁이지만, 한편으로는 ‘교사’입니다. 사명감으로 자존감을 높이기 전에 의무적으로 학생들을 선도해야 하는 직업이죠. 타의 적으로 지시를 받아 아이들을 세뇌하는 직업이 아닙니다.” 사실 남 말할 처지는 아닌데, 라며 너스레로 말을 마무리한 헌영이 종이컵을 꾸깃꾸깃 쥐었다. 헌영은 강구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고 말하지 않았다. 단지 난 이랬었고, 이런 생각을 한다, 고 전했을 뿐이었다. 선배라고 젠체하지 않고, 행동을 강요하지도 않으니, 강구는 헌영의 배려가 고마워서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선배님.” 단순한 호칭에도 의미가 부여된다. 학교에서는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교사라는 동류적 시선에 따라 선후배 할 것 없이 성에 ‘선생님’이란 호칭을 붙여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렇게 ‘선배’라고 부르니, 그 호칭에 존경과 감사의 뜻이 묻어났다. “별말씀을요.” 헌영은 싱긋 웃음을 지었다. 종일 아이들에게 시달리며 진저리를 쳤던 단유는 수업이 끝난 후, 담임 선생님과 함께 교장실로 향했다. “너무…걱정하지 마라.” 단유는 딱히 걱정하는 바가 없었지만, 어쩐지 굳은 각오를 다지고 전장에 나서는 병사의 그것처럼 비장함을 드러내는 담임 선생님에게 다른 대답을 하기가 석연치 않아 고개를 끄덕여만 보였다. 곧 교장실에 들어선 담임은 단유를 먼저 앉히고 그 옆에 앉아 자리를 잡으려 했다. “정 선생님은 나가서 일 보세요.” “네?”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로 엉거주춤 교장을 바라보며 되묻는 담임 선생님에게 교장이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쁘실 텐데 나가 보세요.” 단유와 독대를 하겠다는 교장 선생님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담임으로서 자기 반 학생을 변호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각오를 다진 게 무색해질 상황이었다. 교장은 보고 있던 서류들을 정리한 뒤, 책상에서 일어났다. 시선이 마주치자 담임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나가보겠습니다.” “그래요. 수고하세요.” 교장은 후후 웃음을 지으며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 오른편에 놓인 소파의 끝쪽에 앉은 단유를 가까이 앉도록 시킨 교장은 따뜻한 차를 단유 앞에 놓아주었다. “따뜻한 차가 마음을 녹이는 데 도움이 되겠지요?” 그러나 아직 차 맛에 익숙하지 않은 단유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교장실의 침묵을 채워나갔다. 곧 교장 선생님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묻으며 입을 열었다. “1년 만이죠?” “네.” “그때도 범상치 않은 학생이라 생각했지만,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요.” 어떤 의미인지 명확하지 않아 단유는 교장 선생님의 눈을 통해 의도를 파악하려 했다. 하지만 오랜 연륜과 두꺼운 지방에 싸인 눈빛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교장도 그 시선과 교차하여 단유의 맑고 투명한 눈을 들여다보았다. 눈빛만 보면 중학생이라 보기 힘들 정도로 깊이가 느껴졌다. 요즘 아이 같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봐야 아직은 어린애지.’ 그리고 어린애는 어린애답게 굴어야 제맛이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면 무섭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하는 게 어른의 의무이고 교사의 역할이리라. “학생의 본분이 뭐라고 생각하지요?” 단유는 잠시 말을 고른 뒤 대답했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 아닐까요?” “맞아요. 학생의 본분은 공부지요. 학생은 아직 자신의 지식이 부족함을 자각하고 이를 채우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요. 지식이란 단순히 국·영·수의 지식만을 말하는 게 아니란 것쯤은 알 거로 생각합니다.” 팔걸이 위에 올려진 교장의 손이 톡톡 나무틀을 쳤다. “만약 사람들이 당연히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과연 이 사회가 평화롭게 유지될 수 있을까요? 사회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개개인의 노력과 사회적 약속이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학생들이 배워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약속과 노력에 관한 것이에요.” 몸을 기울여 찻잔을 집어 들던 교장이 그 자세로 단유를 보았다. “학생은 바로 그 약속에 대한 주의가 부족했어요. 그리고 경솔하게 행동했고요. 학생의 짧은 식견을 자랑해서 스스로는 뿌듯했을지 모르겠지만, 그로 인해 여러 사람이 곤란한 처지에 처하게 됐어요. 특히 우리 학교의 이름이 좋지 않은 의미로 거론되었죠. 마치 우리 학교는 개혁이 시급한, 문제 있는 학교인 것처럼 보이게 되었어요.” 자신이 다니는 학교가 그런 오해를 사게 되는 것은 원치 않았을 것 아니냐는 교장의 물음에 단유는 얕은 한숨을 지었다. “단순히 단유 군만의 문제가 아니란 게 더 큰 문제입니다. 당시의 방송을 본 학생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요? …학생의 경솔함을 따라 하지 않을까 걱정될 수밖에 없기에 학교에서는 어쩔 수 없이 조치를 취할 겁니다.” 본보기를 세워야 한다. 경솔한 행동에 대해 이런 처벌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학생들에 알려 경각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 “학생들은 단유군을 반면교사로 삼아 바른길로 나아갈 겁니다.” 아직 처벌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곧 학교운영위원회에서 처벌을 결정할 것이다. “전 개인적으로 단유군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어요. 얼마든지 바르게 성장할 잠재력을 가진 학생이니까요. 남들보다 뛰어난 머리도 아직은 덜 여물었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지식과 세상을 담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으니까요. 학생이 이번 일로 반성하고 바른 마음을 먹는다면, 우리 나라를 위해 헌신할 최고의 엘리트가 되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학교의 처벌을 순순히 받으라는 뜻일까?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앞에 놓인, 딱 한 번 입을 댄 차를 들여다보았다. 개나리처럼 샛노란 색의 차는 비록 색깔은 선명하게 알아볼 수 있었지만, 맛은 모르겠다. “몇 가지 여쭤도 될까요?” “…그러세요.” 교장은 입꼬리를 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421] 주홍글씨(3) 단유가 입을 열려고 할 때, 교장 선생님이 먼저 말을 꺼냈다. “묻기 전에 말이죠.” “네.” “생각을 충분히 하고 말을 하도록 하세요.” 인자한 미소를 그린 교장 선생님은 이것도 훌륭한 가르침이니 잊지 말게나, 라고 말하는 표정이었다. 단유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입을 열었다. “만약 제가 전교 1등이 아니었다면 절 이 자리에 부르지 않으셨겠죠?” 교장 선생님의 눈두덩이를 덮던 두꺼운 지방질이 밀려 올라갔다. 단유가 질문을 하겠다고 했을 때 상정했던 여러 가지 물음 중에 없던 내용이라 조금 당황했다. “어떤 의도로 묻는 거죠? 혹시 내가 학생들을 차별하고 있다고 여기는 건가요?” 단유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차별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나누는 선생님의 의견을 묻는 것입니다.” “뭐라고요?” 단유는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조금 전 선생님께서는 ‘엘리트’라는 단어를 언급하셨어요. 정확한 정의를 몰라서 교장 선생님과 제가 같은 의미로 해석하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다수에 비해 특별히 많은 권력을 가진 소수 지도층이나 지배층을 엘리트라고 호칭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전 엘리트가 되려고 노력한 적도 없었고, 엘리트가 되고 싶지도 않아요.” 이제는 당황을 넘어 기분이 나빠졌다. 소파의 팔걸이를 두드리는 대신 소가죽을 두터운 손가락이 하얘지도록 짓눌렀다. “대한민국은, 적어도 제가 아는 한 엘리트 교육을 지양하는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단유 군.” 목에 진 주름이 울렁대며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네.” “생각! …을 하고 이야기하라고 했을 텐데요.” “충분히 생각했습니다.” 단유는 담담하게 발언했고, 교장은 또 한 번 소파의 가죽을 짓누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의도적인 발언이군요. 어른의 심기를 일부러 거슬려서 얻고자 하는 바가 있나요?” 교장의 매서운 눈초리에도 단유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단유는 얕게 숨을 토해낸 뒤 입을 열었다. “어른들은 이해하기 힘든 대화 방식을 선호하네요. 대화는 서로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명확하게 뜻을 전달해야 하는 것으로 아는데, 굳이 중의적인 표현으로 질문을 하시네요.” 교육부에 계시던 어느 분도 저렇게 말씀하시던데. 대답 대신 소가죽이 짓눌리며 내는 소음이 났다. “심기를 일부러 거슬리게 하려는 생각도 없었고 얻고자 하는 바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잠시 말을 끊은 교장 선생님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천천히 뱉으며 진정하려 애를 썼다. 어지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교장이지만, 자기가 살아온 인생의 반도 살지 못한 꼬마가 자신과 눈을 마주하는 꼴을 보니 비위에 거슬려 더 화가 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말꼬리나 붙잡고 트집 잡으려는 생각은 말고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세요.” 단유는 교장의 안색을 살피다 입을 열었다. “국어 시간에 자주 듣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교과서에 나온 글을 읽으면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글의 행간을 읽어라. 글자만 보지 말고 그 속에 숨은 작가의 의도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이죠. 그래야 그 글을 제대로 읽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교장의 눈빛은 여전히 서늘하게 단유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교육의 영향인지 사람들은 대화의 겉이 아닌 속을 보려고 하네요. 저 사람은 왜 저런 말을 했을까? 저 사람은 어떤 의도로 말을 꺼냈을까? 숨겨진 의도가 무엇일까?” 단유는 차를 바라보며 물었다. “교장 선생님께서 주신 이 차는 찻잎을 달인 물이겠죠. 차를 우려내서 이렇게 노랗게 보이는 것이겠죠. 그런데 이 차를 보고 이 차에 숨겨진 비밀이 무엇일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도대체 왜 노란색 차를 줬을까? 왜 이런 맛이 나는 차를 줬을까? 왜 이 차는 투명한 거지? 바닥이 보일 만큼 투명한 차를 준 이유가 있을까?” 단유는 차를 건네준 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시라고 준 차(茶)를 의심하는 행동은 불필요한 것이겠죠. 마찬가지로 대화의 핵심은 바로 말입니다. 말 뒤에 의도를 숨겨놓기보다는 말 그 자체로 상대에게 자신의 뜻을, 의도를 전달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해요.” “…맞는 말이다.” “하지만 교장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저도 그렇게 생각해야만 할 것 같네요. 교장 선생님은 과연 어떤 의도로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일까요.” 교장 선생님은 점점 건방지게 구는 이 조그만 아이를 어떻게 혼을 내야 할까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학교운영위원회를 통해 처벌이 나오겠죠. 그 사실을 통보하기 위한 이유라면 그냥 담임 선생님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했어도 될 문제일 텐데 굳이 선생님이 절 불러서 이야기하시려는 의도가 뭘까요?” 단유를 부른 이유? 그야…. “얼마 전 사회 시간에 국제 사회와 국제 정치라는 단원을 공부했거든요? 그때 사회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요즘은 잘 쓰이지 않는 단어이지만 ‘헤게모니’란 단어가 있다고요.” 헤게모니는 본래 뜻은 주도권을 의미하고 주도하는 권력 혹은 권한을 의미하지만, 국제 정세에서 헤게모니는 보통 미국에 의한 세계 질서 체제에서 미국을 비판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는 면이 많다. “기본적으로 모든 나라는 각자의 권력을 용인받길 바라고 한 나라에 의해 끌려가는, ‘헤게모니’적 질서를 반대한다고요.” 도대체 어떤 선생이 이제 중학생이 된 애들한테 ‘헤게모니’ 따위를 이야기한단 말인가. ‘이 작자를!’ 그저 학생들에게 국제 정세가 복잡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했을 뿐인 사회 선생님은 엉뚱한 이유로 교장 선생님의 저주를 받아야만 했다. “나라와 나라의 관계에서만 권력 다툼이 있는 것은 아니라죠? 저도 가끔 뉴스를 보면, 뉴스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갈등과 대립은 ‘권력’에 관한 내용으로 이해되기도 해요.” 국회 정당 간의 대립. 회사 내에서의 대립, 더 작게는 가족 내에서의 대립까지도, 결국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다. “이제부터는 순전히 저의 개인적인 상상으로 추정하는 것일 뿐이니 틀릴 수도 있어요. 그리고 틀린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주세요.” 단유는 잠시 숨을 돌린 뒤, 말을 이었다. “전 교장 선생님이 의도를 가지고 절 불렀다고 생각해요. 그 의도가 처음에는 불분명했지만, 앞서의 대화들을 통해 몇 가지를 추정해 볼 수 있었어요. 첫째는 교장 선생님의 권위에 관한 문제입니다.” 권위? 뜬금없는 단어의 등장에 교장은 단유의 의도를 제대로 캐낼 시간을 갖지 못했다. “교장 선생님은 저를 자유학기제 홍보대사에 들도록 선생님들께 지시하셨을 겁니다. 적어도 그런 문제를 선생님들이 임의로 정하지는 않았을 것 같으니까요. 그렇다면 거기서 왜 제가 그 대상이 되느냐는 문제가 나오더군요. 하지만 앞서와 같이 ‘엘리트’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면 이런 저라도 교장 선생님이 보시기에는 적당해 보였을 거란 추측이 드네요.” 교장의 내면에 있던 계획의 일부를 집어내는 단유였다. “하지만 면접장에서의 일로 교장 선생님은 곤란해지셨나 봅니다. 그것이 학교의 일이든, 뭐든 말이죠. 그러니 제게 ‘처벌’을 지시하시는 것도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절 이렇게 부르실 이유는 없죠.”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그래서 두 번째 추측은 저와 사적 관계를 유지하시고자 하는 겁니다.” “니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느냐?” “그러니까 말이죠. 겨우 15살인 중학생에 불과한데요. 그런데 선생님.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권력’의 문제입니다.” 단유는 찻잔을 들었다. “저는 권력이 뭔지 모르겠어요. 권력이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하는지도요. 권력의 속성이니 하는 이야기는 당연히 이해할 수도 없죠.” 식어서 미지근하게 변한 차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권력을 하나의 힘으로 가정하면, 몇 가지 도식을 그려볼 수 있겠죠. 예를 들면, 교장 선생님의 위치에서 권력이라 하면 교사와 학생들의 위에서 발휘될 것입니다. 당연히 아래에 놓인 이들에게 힘을 투사하거나 혹은 아래의 질서를 통제하는 것이 가능해지겠죠.” 교장 선생님은 천천히 등받이에서 등을 떼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교장 선생님의 권력은 완전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학교란 공간은 독립적으로 분리된 공간이 아니니까요. 바로 상위에 교육부와 교육청이라는 기관이 존재하잖아요? 당장 저희 학교를 봐도 교육청에서 내려온 감사에 의해 통제받고 있으니까요. 즉 교장 선생님의 권력―통제는 공고하지 않거나 혹은 생각보다 약하다는 뜻이겠죠.” 교장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또 저희 학교는 사립학교이니까 당연히 재단이 있을 테고, 재단의 이사회가 있겠죠. 사립학교 재단 이사회라는 곳이 어느 정도의 권력을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사립학교의 존립에 관계된 영역이니 아마도 교장 선생님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위치에 둘 수 있을 거라고 추측이 되네요. 그렇다면 당연히 권력이란 힘 역시 분산되거나 혹은 약화 되겠죠.” 뭐지, 이 녀석? “교장 선생님의 권력이 약하다는 말은 반대로 하위에 있는 교사와 학생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영향도 있겠죠? 사실 선생님들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학생들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가네요. 옛날에는 선생님들이 말 듣지 않는 아이들이 있으면 마음대로 때릴 수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잖아요? 통제권이 약화되었다는 점이겠죠. 또 학교 교복 문제는 적당한 예가 되겠네요. 교복 변경을 교장 선생님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은 통제권이 약하다는 이야기고 반대로 학생들의 자율권이 높다는 이야기니까요.” 복잡한 이야기 같지만 몇 가지 변수들만 조합하면 얼마든지 비교 가능한, 단순한 관계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단순한 관계도가 교장에게는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권위를, 권력을 다시 높이고 싶으셨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저를 이용하기로 생각하신 거겠지요. 마치 과거의 권력자들이 스포츠나, 언론, 모델, 광고 등을 이용한 것처럼요.” 틀린 부분이 있으시면 지적해주시란 단유의 덧붙임에도 교장 선생님은 할 말이 없었다. 뭔가 아주 건방지고 대단히 불편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그런 기분이었다. 단지 기분만이냐고 묻는다면, 역시 할 말이 없다. “저는 선생님의 광고판 노릇을 위해 불려온 셈이겠죠. 처음에는 홍보대사로 학교의 이름을 드높이는 역할로, 이번에는 학생들을 징계하여 통제하려는 의도로서 말이죠.” 아니다, 틀렸다, 뭐라고 지적해야 하는데 어느 지점을 지적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저는 선생님의 광고판이 아닙니다.” 단유가 마무리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아냐, 그럴 수 있지, 뭐. 경위서는 다 썼고?” “네.” “그래. 알았어. 일 봐.” 홍보담당관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상사를 지켜보았다. “왜 할 말 남았어?” “아니, 그게 아니라….” 김 과장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냥 이렇게 끝내니까 아쉬워?” “…아쉬운 게 아니라 뭔가 후속대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후속대책?” “당장 언론에 반박자료나 해명자료를 만들어 배포하고….” “이봐, 진 담당. 뭐가 그렇게 걱정이 많아?” “네?” “사람이 왜 이렇게 꽉 막혔대?” 김 과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돌아 나왔다. “잠깐 따라와.” 홍보담당관은 김 과장의 뒤를 따라갔다. 흡연실이라고 마련된 곳은 청사 바깥에 있었기 때문에 가는 동안 김 과장은 홍보담당관이 착각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 가르쳐 줄 시간이 충분했다. “자네는 사건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축소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당연히 줄일 수 있으면 줄여야죠.” 키우는 건 말이 안 되니까. “그래, 줄일 수 있으면 줄여야지. 그런데 자네가 말한 것처럼 반박자료, 혹은 해명자료를 낸다고 생각해봐. 사건이 커질까 작아질까? 손뼉도 맞부딪쳐야 소리가 난다고 하는데, 우리가 반박자료를 내면 소리를 키우는 꼴 아니겠어?” “그럼 이대로 가만히 계실 겁니까?” 가만히 있기에는 몇몇 언론에서 재생산되는 뉴스가 눈에 걸린다. 아직 여론이 어느 정도로 형성되었는지는 가늠이 되지 않지만, 이 상태로 언론에서 재생산되는 뉴스는 막아서 더 커지지 않게 하는 것이 상책이다. 사그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하책이고. “누가 가만히 있는데?” 어느새 흡연실에까지 온 김과장은 품에서 담배를 하나 빼어 물었다. 덩달아 입에 담배를 문 홍보담당관은 연신 눈치를 보며 불을 붙였다. “우선 표현부터 바꾸자.” “무슨…?” “사건이 아니라 ‘해프닝’.” 같은 의미인데 뭔가 작아진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어차피 날 소리, 크게 키우자.” “네?” “그 친구를 교육부 홍보대사 시켜.” “네?” “교육 개혁을 위해 일하는 교육부의 이미지. 좋잖아?” 홍보담당관은 순간 놀라서 담배를 떨어뜨릴 뻔했다. “자유학기제가 아니라, 교육부요?” ======================================= [422] 주홍글씨(4) 과장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대답했다. “그래, 교육부. 마침 잘 됐잖아? 교육부 폐지론도 오가는 판국인데 말이야.” 어느 나라인들 안 그러겠느냐마는, 특히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교육은 가장 중요한 국가 정책 중의 하나이다. 한데 그간 교육부의 존재는 여러 단체에 의해 위협을 받았다. 가장 중요한 점은 국가 행정 기관의 하나로 교육부가 존재하기에 행정 수반의 영향력을 많이 받는다는 점과 이 때문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정책이 바뀌는 등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점이 지적을 많이 받았다. 물론 교육정책의 추진과 중앙 콘트롤타워의 기능을 담당해야 할 교육부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곳도 있지만 말이다. “교육부도 개방적인 이미지를 가져가야 돼. 비판을 수용할 줄 알고, 개혁에 앞장선다는 인상을 심어줘야 하거든. 마침 잘 됐잖아. 이 정도 해프닝으로는 크게 타격받을 일도 없고, 적당히 이미지 쇄신이란 이름으로 이용할 가치가 있는 일이니까.” 담뱃재를 톡톡 털어낸 김 과장이 홍보담당관의 멍한 표정을 바라보았다. “성실하게 일하는 건 좋아. 하지만 너무 공무원 티는 내지 말라고. 요즘 같은 시대에 공무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뭐인 것 같나?” 김 과장은 별로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듯, 곧 답을 이야기했다. “바로 유연성이야.” 담배를 입에 문 뒤, 빈손으로 머리를 톡톡 두드리는 제스처를 취한다. “여기가 꽉 막혀서는 살아남을 수 없거든? 공무원 집단도 이제 유연하게 사고할 줄 알아야 하는 거야. 사고 터졌네, 어쩌지? 막아야지. 여기 뛰고, 저기 뛰고. 그거 다 옛날 방식이야. 요즘은 뭐야? 솔직함이 대세라잖아? 인정해버리는 거지. 우리가 중학생의 의견도 소중히 생각한다. 우리는 이 나라의 교육을 위해 어떤 비판도 겸허히 받아들인다. 이런 메시지를 던져주는 거야. 효과? 장담은 못 하지만 억지로 막는 것보단 좋을걸?” “위에서 허락하실까요?” “결과만 놓고 보는 거야. 결과만. 그 중학생을 홍보 모델로 쓰면, 그 소년의 이야기를 우리가 가져올 수 있어. 포장지 새로 씌어서 시장에 내놓으면 그게 우리나라 건지, 외국 건지 알 길이 없잖아? 팔아먹는 사람이 돈 버는 거지.” 김 과장의 이야기는 홍보담당관에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평소 김 과장을 보면서 ‘공무원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특히 행정고시를 거쳐 올라온 이였기에 7급 시험 치고 이 자리까지 온 홍보담당관으로서는 그의 ‘똘끼’가 오만함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 ‘똘끼’가 이제는 시대의 변화처럼 보였다. 이 시대에는 저런 사고와 추진력이 살아남는 법이라고 알려주는 것처럼. “그런데 그 소년이 만약 홍보대사를 고사한다면요?” “그건 그쪽 소관 문제고.” “네?” 김 과장은 담배를 비벼끈 뒤, 홍보담당관을 쳐다보았다. “일이잖아?” 아, 그렇구나. 홍보대사를 시키라고 지시가 떨어졌으니, 자신들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 아이를 발탁하면 될 일이다. “임기응변을 발휘하는 것도 기본은 지킨 뒤의 일이지.” 홍보담당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꽁초만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던져넣었다. “아, 그리고 장계중학교에 지금 교육청 감사가 들어가 있다고?” “네.” 홍보담당관은 교복 변경과 관련한 감사에 관한 내용과 이를 단유가 언급한 일까지 모두 보고를 한 상황이었다. “내가 전화 좀 넣어둘게. 생색은 진 담당이 내라고.” “감사합니다.” “뭐, 이 정도로 그래.”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젓던 김 과장은 옷깃을 여미며 다시 본관으로 향했다. 몇 해 동안 유난히 추운 겨울을 보냈던 기억이 있던지라, 이번 겨울 역시 그 맹추위를 어찌 견뎌야 할지 걱정이다. **** 교장 선생님은 단유의 이야기에 말을 잇지 못했다. 적막한 교장실에 교장의 거친 숨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단유 군.” “네.” “제가 단유 군을…‘간판’으로 쓸려고 했다는 건, 추측이죠?” 교장은 짧은 시간에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적어도 ‘존칭어’를 쓸 수 있을 정도의 이성은 회복했다. “네, 추측입니다. 만약 그런 의도가 없으셨다면 사과드리죠.” 교장은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과…안 하셔도 돼요. 사실이니까요.” 교장은 일단 그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앞서의 권력관계에 관한 이야기는 둘째로 두더라도 단유를 가까이 두려 했던 자신의 행동은 다른 말로 포장하기가 어려웠다. 어리니까 괜찮겠지, 라고 가볍게 생각했던 자신의 판단을 탓할 뿐이었다. “하지만, 단유 군을 제 개인의, 사적인 욕심으로 간판처럼 다루려 했던 것은 아니에요. 자랑스러운 장계 중학교의 간판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지. 학생은 충분한 자격이 있으니까요.” 단유는 말없이 교장의 말을 기다렸다. “이미 말한 대로 학생은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죠. 지금의 모습만 봐도 앞으로 이 사회에서 두각을 드러내리라 판단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현재 이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활약을 하는 이들을 보세요. 그들의 프로필에는 꼭 출신학교가 나옵니다. 이런 사람을 배출한 명문 학교, 라는 자부심. 누군들 가지고 싶지 않겠습니까? 저만 그럴 것 같나요? 저에게만 좋을 것 같나요? 아니에요. 학생의 말처럼 이 학교는 학생의 것입니다. 학교의 이름이 높아질수록 학교를 나온 학생들의 자부심도 올라가는 것입니다.” 말을 꺼내는 동안 교장은 침착함을 되찾았다. “단유 군이 학교의 이름을 드높이면, 그로 인해 단유 군의 친구들, 선배들, 후배들에게 그 영향이 갈 겁니다. ‘훌륭한’ 명문 학교를 나왔다는 자부심을요. 아직 어려서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이 사회에는 그런 가치를 소중히 여깁니다. 경기고등학교, 경복고등학교 등 이름만 대도 사람들이 그 역사와 전통을 추억하고 존중하는 분위기죠.” 교장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단유의 곧은 눈을 마주했다. “명문, 이란 이름은 단순히 허명만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세운 전통이 학생들에게 바른 가치관과 존경받을 습관을 마련해줍니다. 그런 학생들이 사회에서 큰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고요. 우리는, 그러니까 이 학교의 교사들과 학생들은 그런 전통을, 규율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러한 점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단유 군이라면 충분히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해가 있는 것 같으니 이렇게 설명해 드리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선생님.” 교장의 눈이 짧은 순간 번들거렸지만, 그 순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뭔가요?” “선생님의 말씀은 이해하겠습니다만, 그렇다면 더 많은 오해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보네요.” “오해?” “학교의 전통, 그러니까 선생님이 말씀하신 취지대로 바른 가치관과 존경받을 수 있을 만한 전통을 세우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학생들의 자발적인 협력과 노력이 뒤따라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렇죠.” “학생들을 배제하고 세우는 전통은 전통이나 아니라 그저 강제하기 위한 규칙에 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학생들을 배제한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요, 학생.” “지금 교복 문제 말입니다. 학생들의 의견을 묻지 않은 채 강행하고 있지 않나요? 학교의 일이라는 이유로 학생들의 의견을 묻지 않는다면, 이 학교의 전통이란 것은 그저 강제적인 복종만을 당연시 여기는 문화를 학생들에게 주입시키려는 것 같다는 오해가 생길 것 같네요.” 교장의 홉뜬 눈이 단유를 노려보았다. “점점 도를 넘는 것 같군요. 학생. 다른 무엇보다 먼저 학생은 어른에 대한 예의를 먼저 배워야겠습니다.”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나, 교장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강제적인 복종이라느니, 주입이라느니 하는 자극적인 단어만 일부러 사용해서 심기를 어지럽히려는 학생의 의도가 매우 불쾌합니다.” 단유는 그 순간 교장의 상태를 정확히 읽어낼 수 있었다. 교장은 자신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아니 들을 생각이 없었다. 처음에는 듣는 척이라도 하는 것 같더니, ‘간판으로 쓰지 말아달라’는 단유의 선언 이후부터는 그저 단유가 하는 말의 특정 단어와 문장만을 문제 삼는 교장의 태도였다. 아마도 오랜 세월에 굳혀 형성된 그의 가치관 안에서 15살 소년의 이야기는 들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명을 내렸던 것인지도 몰랐다. 단유도 딱히 교장을 힐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자기변명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무엇을 고치라고 지적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저 솔직하게 보이는 대로 생각한 대로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그 솔직함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결국 대화가 아닌 싸움이 될 뿐이었다. 그리고 단유는 그런 싸움을 즐기지 않았다. 단유는 침묵을 지키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 학교가 비록 오랜 역사를 가진 학교는 아니지만, 적어도 학생들이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지도하는 교풍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바른 사람이 무엇이냐? 어려운 사람을 돕고, 어른을 공경하며, 타인에게 예의를 지키는 사람이 올바른 사람입니다. 즉 조화롭게 사는 법을 아는 사람이 올바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학생은 그 조화를 아직 배우지 못한 것 같네요.”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송글 맺힌 땀을 닦아내는 교장이었다. “학생에 대한 문제는 이번 주 금요일, 학교운영위원회에서 다시 한번 이야기를 나눠야 하겠습니다. 그리고…생각보다 좀 더 엄한 교육이 필요할 것 같네요. …이만 돌아가세요.” 단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보이고 곧장 교장실을 나왔다. 그 뒷모습을 노려보던 교장인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부모 없는 애들은 저래서 안 돼. 예의가 없어, 예의가….” 괜한 심력 낭비 때문에 저녁에 있을 골프 약속도 못 지킬 것 같았다. 교장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핸드폰을 들었다. “이사장님, 네. 접니다. 내일 시간 되십니까?” **** 그날 저녁, 늦게 돌아와 피곤한 얼굴의 하은이 단유를 불렀다. “너 지난 토요일에 또 일냈더라?” “에이, 선생님. 그게 언제 적 일인데 그래요.” 명수가 혀를 내밀며 핀잔을 주자 하은이 바빠서 그래, 라며 변명했다. “오늘 학원 갔더니 니 이름을 언급하는 아이들이 있더라. 설마 하면서 찾아보니까, 세상에 또 인터넷에 니 영상이 떠 있는 거 있지?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어떻게 얌전히 지나가는 법이 없니 그래? 그리고 영상 보면서 내가 얼마나 죄책감을 느꼈는지 알아?” 명수는 냉장고에서 300g 파인트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날도 추운데 그런 게 먹고 싶냐는 하은의 핀잔에 괜찮아요, 라고 짧게 대답했다. “선생님이 왜 죄책감을 느껴요?” 단유의 물음에 하은은 단유를 돌아보았다. “너 거기 면접 가기 전에 나랑 이야기하면서 했던 이야기들이었잖아?” “어, 그랬어?” 명수가 아이스크림을 숟가락으로 퍼다가 물었다. “응.” “그럼 선생님이 단유한테 가르쳐준 거네요? 교육 개혁이니 뭐니 하는 거?” 하은은 턱을 괴고 명수를 바라보았다. “그런 건 아냐. 그때도 단유는 그 점에서는 나랑 같은 의견이었으니까. 그나마 인권 이야기가 안 나와서 다행이랄까?” “그게 뭔데요?” 하은은 잠시 말을 끊고 물끄러미 명수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단유랑 학교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인권 이야기가 나왔거든. 학생들의 인권이 과연 학교에서 보장을 받고 있는가에 대해서 말이야. 요즘 학교는 내가 다니질 않아서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학교에서 학생들의 인권을 무시하는 경우가 워낙 많아서 말이야. 기본적으로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한 사람의 인격체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어. 자신이 가르친다는 행위 그 자체에 강한 의미를 두어서 학생들을 뭔가 모자란 사람, 혹은 부족한 사람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어. 그래서 학생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경우가 적었지. 학생들의 이유 있는 불만도 그저 철부지 아이들의 투정쯤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도 했고.” 하은은 명수 근처에 있던 수저통을 가리켜 보였다. 명수가 그 뜻을 알아채고 숟가락 하나를 꺼내 하은에게 건넸다. “아무튼 말이야. 그런 이야기까지 나오면 정말 큰일 나겠다 싶었지.” “왜요? 오히려 속 시원하게 그런 이야기도 질러버리는 게 좋은 거 아닌가요?” 먹고 있던 아이스크림이 더 시원할 것 같다만.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인권을 이야기하면 너는 감탄을 하겠니, 아니면 귀엽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겠니?” 글쎄요, 그런 상상은 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짓는 명수에게 하은이 혀를 찼다. 그리고 명수의 품에 있던 아이스크림을 뺐었다. “어른들이 보기에 너희들이 딱 그런 꼴이야. 주제에 뭘 아냐고 무시당하거나 혹은 어디서 주워들은 걸 떠드는 주제에 잘난 척이라고 비난을 받겠지. 만약 단유가 그랬다면 온갖 욕이란 욕으로 인터넷이 도배되지 않았을까?” 아이스크림에 숟가락을 꽂고 한가득 퍼낸 하은은 그 아이스크림을 할짝거리며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맛있네.” ======================================= [423] 주홍글씨(5) “선생님, 저 상의할 게 있는데요.” 단유가 화제를 돌려 묻자, 아이스크림을 오물거리던 하은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단유는 학교에서 있었던 교장과의 대화를 짧게 요약해서 이야기했다.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처벌을 한다는 거지?” “처벌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그럼?” “선생님은 제가 교장 선생님께 그런 이야기를 한 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세요?” “할 말은 하고 살아야지.” 말하기를 좋아하는 하은다운 시원한 대답이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요즘은 학생들도 자기 할 말은 하고 사는 시대야. 하다못해 인터넷에 올라오는 수많은 댓글들이 다 뭐겠니? 자기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살겠다는 의지인 거잖아? 게다가 내가 너를 모르는 것도 아닌데, 설마 교장 선생님께 예의 없이 굴었겠니?” “교장 선생님은 절 버릇없는 아이라고 생각하셨을 거예요.” “그건 교장 선생님이, 꼰대라서 그래.” 하은은 이런 표현 밖에서 쓰지 말라며 주의를 줬다. 좋게 말하면 기성세대요, 나쁘게 말하면 고리타분하고 편협한 이를 일컫는다. “그들은 그들이 지낸 세월에 대한 신뢰로 가득 차 있지. 모름지기 사람이 얻는 지식 중 가장 신뢰할 만한 지식이라면 역시 ‘경험’에 의한 지식 아니겠어? 경험치가 많을수록 그 경험에 의해 얻은 지식에 대한 믿음 또한 크고 공고할 수밖에. 그들이 살아온 세상, 그들이 거쳐온 질서에 대한 믿음 또한 크지. 때문에 그들은 변화에 익숙하지 않아. 전통과 도덕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구(舊)질서를 따르고 동시에 강요하거든.” 단유는 어느 정도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당장 오늘의 대화를 복기해봐도, 교장은 끊임없이 ‘전통’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강요했었으니까.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하였지만, 그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반응이 남다르지. 새로운 가치관, 젊은 사람들의 가치관을 가볍다고 여기거든. 전통이 짧으니까. 그리고 그 가벼움이 기존의 질서로 정돈된 세계를 어지럽힌다고 보지. 그래서 그들은 새 가치관을 부정하거나 멀리하게 돼. 자신의 가치관이 부정당하면 자신의 인생이 부정당한다고 생각하거든.” 인생이 부정당한다는 말은 단유에게 와 닿지 않았다. 그게 어떤 느낌일지도 감히 추측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이건 한국에 한정해서 추측 가능한 부분인데,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부터 우리나라는 예(禮)를 숭상했어. 유학의 잔재라고 비난하는 목소리도 없진 않지만, 나쁘게 볼 문제만은 아닐 거야. 기본적으로 예는 대인관계에 있어 상대를 존중하고 자신을 보호하는 방식이니까.” 그 점은 단유도 인정하는 부분이 있다. 아니 오히려 예를 높게 생각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예’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의 야만성을 절실하게 겪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단지 어리다는 이유로 약자로 여겨 업신여기거나 경시하던 이들의 시선을 떠올려 보면 말이다. “하지만 꼰대들에게 예는 단지 자기보호의 수단이기도 하고, 전통의 고수라는 사고방식의 원천이기도 해. 오랜 세월 이 나라를 지켜온 가치관이기에, 그 유구한 역사에 따라 옳은 것, 바른 것이라 생각하고 동시에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전통’이라고 분류를 하는 것 같아.” “단지 그런 이유로 옳다고 생각하는 건 좀 비약이 심한데요?” “적자생존의 사고방식인 거지. 그 가치관이 오랜 세월에 걸쳐 지켜진 이유는 그것이 옳기 때문이다, 라는 거? 거기에 자신의 경험이 겹쳐져 일종의 신화(神話)를 만들어내는 거야. 아무튼 꼰대라고 지칭할 만한 이들이 젊었을 적에, 당시의 사회와 교육이 그런 가치관을 옹호하고 지키기를 원했고, 이를 체화(體化)한 꼰대들은 지금의 아이들이 보기에는 너무 편집(偏執)적으로 보일 수 있는 거지.” 명수는 거실 러그 위에 자는 호빵 옆에 누워 지켜보다가 잠이 들었다. 하은의 이야기가 마치 자장가처럼 들렸던 모양이었다. “전통과 도덕을 강조하는 건, 그것이 옳은 것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변치 않는 것이 옳은 것이라는 보수적 가치관도 한몫한다고 봐.”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는 하은은, 그 리듬에 맞춰 생각을 다듬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 그 틈에 단유가 물었다. “교장 선생님이 전통적 가치관의 옹호자란 사실은 이해하겠어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제가 말을 아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왜?” “불편해지니까요.” “교장 선생님과의 관계가?” “교장 선생님을 포함한 학교와의 관계가 전부 불편해지지 않을까요?” 교장 선생님의 권력 관계도에 대해서는 단유 본인이 직접 거론했다. 비록 그의 권력이 약화되고 있음을 언급하긴 했지만, 여전히 학교와 교사, 학생에게 투사하는 권력이 존재한다. 그리고 교장의 힘이라면 자신의 학교생활이 불편해질 가능성은 있었다. 하은은 싱긋 웃었다. “설마 이제야 그 생각을 했다는 거니?” “음,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네요. 낮에 교장 선생님과 이야기를 할 때 그러지 않을까, 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요. 지금은 좀 더 분명하게 느끼고 있달까?” “아마 그렇게 되겠지. 그래서 높은 분들과 맞서는 게 어려운 거야.” 너 블랙리스트에 오를지도, 라고 우스갯소리를 덧붙이던 하은은 실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맞서 싸울 때도 필요한 거야. 그게 너의 양심과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말이야. 아니, 너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맞서 싸워야지.” 하은도 사실 불의를 보고 못 견디는 축이었다. 싸움은 못 해도 말싸움은 언제든 할 준비가 되어 있던 그녀였다. “대신 그만큼 너도 희생을 각오해야겠지. 만약 지금 그런 희생이 걱정된다면, 내일 아침에 교장실에 찾아가서 공손하게 사과를 하던가. 그런데 안 그럴 거잖아?” “네.” 전혀 없다. 늘 그렇지만, 단유는 자신의 말에 진실을 담으려고 노력한다. 때문에 더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려고 한다. 단지 불편 때문에 사과를 한다? 그럴 거라면 애초에 말을 꺼내지도 않았어야지. 교장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반성할 부분이 있다면 과연 그 상황에서 말을 꺼냈던 것이 옳으냐는 선택의 문제지, 그 내용에 관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서 어쩔 거야?” 하은은 단유가 처음 이야기를 꺼낼 때 ‘상의’를 할 게 있다고 말했음을 기억했다. 무언가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바가 있을 것이고, 이를 위해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했으리라. “솔직히 말씀드리면요….” 하은은 단유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제까지보다 더욱 진지한 얼굴을 했다. 하은은 성심성의껏 단유의 고민을 듣고 함께 논의해 주었다. 하은은 결코 자신이 이 아이들의 ‘선생님’이란 사실을 잊지 않았다. **** 다음날 학교에 나간 단유는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그리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장면과 마주했다. 교문 앞에서 마스크를 끼고 자체 제작한 플랜카드를 든 일군의 학생들을 보게 된 것이었다. 「장계 중학교는 각성하라.」 「논의 없는 교복 변경 철회하라.」 「교육 개혁, 우리가 먼저다.」 언제 이런 모의를 했었는지 모르겠지만, 다수의 학생들이 시위판을 들고 학교 정문에 이르는 길에 늘어서서 사람들이 볼 수 있게끔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학교가 주택가 근처에 있어 근방의 사람들이 출근하던 중에 그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운동장은 더 심했다. 운동장에는 더 많은 학생들이 모여서 교무실을 향해 소리를 치고 있었다. “학생들도 학교의 주인이다!” “주인을 무시하는 졸속 행정 철회하라!” “교육 개혁 우리가 시작한다!” “비리 재단 물러가라!” 물론 그 목소리도 교문 밖에까지 들렸다. 안과 밖에서 호응하여 구호를 외치니 그들의 모습이 사뭇 비장하게 보이는 건 단순히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개인은 약하지만 군중은 강하다던가? 다소 지나치게 비장한 얼굴을 하고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그들은 용감했다. 비록 머리에 머리띠를 두르지도 않았고, 깃발을 흔들지도 않았지만, 조악하게 쓴 스케치북을 들고 목소리를 높이는 그들의 모습에서 단유는 교장의 한 마디가 떠올랐다. “친구들, 선배들, 후배들에게 영향이 갈 겁니다.” 이런 것일까? 정말 자신의 말이, 행동이 이런 결과를 낳게 한 것일까? 그리고 교장 선생님은 이런 모습을 예상했던 것일까? 단유는 중앙현관을 통해 달려오는 선생님들을 보며 발걸음을 돌렸다. “왜?” 곁에 있던 명수가 단유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조금 불편해서.” 명수는 다른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일로 고민이 많다는 것을 엊저녁의 이야기를 통해 들은 명수였기에 섣부른 위로는 하지 않았다. “김 단유!” 누군가가 단유의 얼굴을 알아봤는지, 단유의 이름을 불렀다. 돌아보니 최초 시위를 벌였던 우병석이란 선배였다. “너도 이리 와라! 같이 하자!” 단유를 보고 밝은 표정을 짓던 그는 당연히 단유가 와서 같이 목소리를 함께 할 거로 생각했다. 그리고 단유가 함께 한다면 더욱 큰 힘이 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단유는 씁쓸함을 삼키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몸을 돌려 교실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고 주변의 아이들이 수군거렸지만, 단유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본관 안으로 들어갔다. “얼른 학생들을 교실로 돌려보내세요.” 교감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엿보였다. 지난번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일단 수가 많아졌다는 점도 있었지만, 감사가 나와 있는 상황에서 아이들의 돌발행동은 결코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감의 다급함과 달리, 아이들도 평소의 모습과 달랐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에 자신감이 있었고, 자신들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다는 견고한 믿음이 있었다. 단지 단유의 말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유의 일에 대한 네티즌들의 지지와 언론의 기사들이 그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 탓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단순히 교복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다. 학생의 의견을 무시하고 강행하는 학교라는 제도권에 대한 저항이었다. 단유의 ‘교육 개혁’과 그가 교육부의 높은 분들 앞에서 당당하게 소리치던 모습이 저항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의 저항에 공감하며 뜻을 세웠다. 단톡방과 학교 커뮤니티 안에서 철저히 토론을 거쳐 방법을 강구하였기에 이들의 행동은 돌발적이지 않았고, 그래서 더욱 사명감에 넘쳤다. 그들의 주장은 순수하게 정의를 향한 소리였고, 숨겨진 의도가 없었기에 당당했다. “빨리 교실로 돌아가지 않을래!” “너! 지금 안 들어가면 부모님 부를 거다!” ‘부모님’을 언급하면 다수의 아이들이 움츠러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오히려 아이들은 더 당당하게 소리쳤다. “부모님이 저희 학교에 다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더 좋은 교육 환경에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옛날 같았으면 선생님들이 강제력을 행사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한 상황이고 게다가 조금 있으면 교육청 사람들이 올 것이다. 아무리 사전에 이야기를 맞춘 이들이라 해도 이런 광경을 보고 눈감아줄 이들은 아니었다. 교장은 교장실 창 너머로 운동장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망할 놈들.’ 그리고 9시가 다 되어가지만 아이들을 강제 해산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그리고 학교 정문을 통해 차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교무실로 들어온 이들은 교육청에서 온 감사관들이었다. “운동장의 학생들은 무슨 일입니까?” “네? 아, 저기….”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 하지만 교감은 그보다 먼저 물어볼 게 있었다. “그런데, 어제까지 오셨던 분들은….” 감사관이 바뀌었다. “왜요? 무슨 문제 있나요?” 감사관의 날카로운 눈빛이 교감을 훑자, 교감을 찔끔 놀라며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저 궁금해서….” “…그럼 대답 드리지 않아도 되겠군요.” 아마 지금쯤 어디 사무실에서 상위 감사기관 사람들과 마주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일이 이렇게 복잡하게 꼬일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기존의 감사관들도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고 소정의 대가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교육부에서 누군가의 연락이 오고, 얼마후 기존에 파견된 감사위원에게 의혹이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교육위원회에서 사람이 파견되면서 현재 감사담당관실이 혼란에 빠졌다. 비록 지금 감사관들은 그 일에 관여한 바가 없지만, 동료를 곤란에 빠뜨리게 한 이 재단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저희는 처음부터 새로 감사를 할 예정입니다. 그러니 기존에 검수 되었던 서류들도 다시 제출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감사관 책상 위에 불필요한 자료는 모두 치워주시고요. 여기 이런 책상보 따위가 필요합니까?” 교감은 아찔함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넌 왜 저기 안 나가냐?” 도하가 물었다. “내가 왜?” 단유가 되묻자 도하가 눈동자를 굴리다가 대답했다. “너도 교육개혁인가 하는 거 하자고 했던 거 아냐?” 도하가 시비를 거는 게 아니란 것은 단유도 알고 있었다. 순수하게 호기심에 물어보는 것임을 안다. 알지만 불편했다. 게다가 도하가 이런 생각을 할 정도라면, 당연히 저 밖에 있는 이들, 학교에 있는 학생들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나가면 마치 내가 저 일을 주도한 것처럼 보이잖아.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한 게 아니야. 저런 방식도 아니고.” “그럼 어떤 방식인데?” ======================================= [424] 주홍글씨(6) “당연히 대화지.” “대화?” “저렇게 나가서 시위하는 게 나쁘다는 건 아냐. 저런 방식도 필요하겠지.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대화가 가능한 상황을 마련해서 대화를 요청하는 게 우선이라고 보거든.” 물론 학교가 학생들과의 대화를 받아들일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리고 대화를 거절할 가능성도 농후했다. 하지만 그럴 거라 미리 짐작하고 하지 않는 것은 편의적인 발상이었다. “대화를 위해 먼저 학생들의 의견을 모아야겠지. 이런 문제에 대해 학생들의 의견이나 생각을 먼저 듣고, 다수의 학생들에게서 같은 의견이 모인다면, 그때 그 의견을 학교 측에 전달하는 거야. 이런 문제로 학생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서로의 의견이 대립하는 상황이니 대화로 해결하자.” 도하는 머리를 긁적이며 단유의 대답을 생각해보았다. 언뜻 들어도 어디선가 많이 보던 장면 같았다. ‘아.’ 가끔 길을 지나다 종이를 내밀며 서명을 부탁하던 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면 너무 일이 복잡해지는 거 아냐? 언제 학생들한테 일일이 묻고 그래? 그 사이에 교복을 두 번은 더 바꾸겠네.” “복잡하지만, 그게 옳은 방식이고 정당한 절차야. 학교가 문제인 이유는 그 정당한 절차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고.” 학교도 당연히 그런 의견 수렴 절차를 모두 지켰어야 했다. 어떤 정책의 수립과정에서 구성원들의 의견 수렴 없이 진행하는 경우가 어디 있던가. 구성원들에게 반발을 불러일으킬 뿐인데. 그런데 단유네 학교는 그 구성원들에게 의견 수렴을 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구성원을 무시하고 얕봤다. “상대가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같이 편법을 저지른다면 결국 같은 꼴이잖아?” 상대가 죽창을 들었다고 같이 무기를 맞드는 것은 전쟁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서로 죽고 죽이는 전장이 아니고서야 그것은 용납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면 당하는 사람은 억울하잖아? 상대는 편법으로 이익을 얻을 때, 우리는 편법을 쓰지 않으면 손해 아냐?” 도하의 생각도 이해 가능한 부분이다. 이해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단유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한 때는. “상대와 같은 방식으로 대하면, 상대의 잘못을 지적할 수 없지. 나 역시 잘못이니까. 그건 또 다른 누군가에게 나의 잘못을 지적받을 수 있다는 뜻이야.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너를 때렸어. 그래서 너도 그 상대를 때린다면 그건 정당한 것일까?” “정당방위지.” “상대가 한 대를 때렸어. 그러면 너도 한 대를 때리면 정당방위일까?” “당연하지.” 도하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도 그것은 옳은 말이다. “니가 두 대를 때리면?” “어, 그래도 상대가 먼저 선빵을 날린 거니까 그 정도는 정당한 거 아닐까?” 애초에 맞기 싫으면 때리질 말았어야지, 라며 한때의 과거를 떠올려 보는 도하였다. “초등학교 1학년 생이 널 때렸어. 그럼 너도 그 초등학생을 때려야겠네?” “응? 그건 다른 이야기잖아?” “할아버지가 널 한 대 때렸어. 그럼 너도 그 할아버지를 때려야 정당할까?” 도하는 조금 어이없다는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상대가 다르잖아?” “경찰이 널 한 대 때렸어. 그럼 너도 그 경찰을 때릴 수 있어?” “무슨 예가 그런 식이냐?”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잖아, 라고 항변하고 싶은 도하였다. “그럼 니가 말하는 정당방위란 것은 상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거네?” 단유의 물음에 도하는 고개를 좌우로 휘휘 저었다. “아, 몰라.” “법적으로 들어가면 복잡하게 이야기되겠지만, 이건 법적인 이야기가 아니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정당성은 내가 바르게 행동했을 때만 성립하는 거야. 같은 폭력을 휘두르면 정당성은 성립하지 않는 거야.” “그럼 맞고만 있어?” “만약 우리가 나누는 대화가 폭력에 대한 방위에 관한 문제라면, 맞든지 혹은 방어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옳겠지. 법적으로도 같은 폭력은 정당방위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으니까.” “뭐가 그렇게 어려워?” “그 어려운 걸 해내야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거야. 정당성이란 나 혼자 옳다고 주장해서는 옳은 게 아니니까.” 괜히 복잡한 절차를 수행하도록 법이 정해진 게 아니었다. 그런 절차를 거쳐야 모두의 인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은 그래서 현대의 제도에 맞지 않는다. 상대의 잘못을 크게 키워서 자신의 행위를 옳다고 여기게 하는 게 동태복수법이다. 게다가 동태복수법은 상대의 행위를 평가하는 잣대를 자신에게 둔다. 즉, 자신이 옳으면 상대가 그른 것이고, 상대가 옳지 못하기 때문에 나의 행위가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류를 저지르게 한다. 단유는 창밖으로 들려오는 구호 소리를 들으며 시선을 던졌다. “세상이 모두 자기 편한 대로만 움직인다면, 그건 이 사회의 법을 지키지 않겠다는 선언과 다를 바 없어.” 혼자 살 게 아니라면, 법과 원칙은 지켜야 한다. 다만 단유를 진정으로 씁쓸하게 만드는 점은 그 법과 원칙을 만든 이가 교장과 같은 기성세대라는 점이었다. 그러니 이것은 지독한 오류의 순환이었다. 만약 젊은 사람들이 기성 세대에게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면, 기성세대는 기존에 세운 법과 원칙으로 정당성을 강조할 것이다. 만약 세월이 영구히 지나도 인정받을 수 있는 절대적인 법과 원칙이 있다면 이런 문제를 고민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절대’라는 게 과연 가능할까? 그 순간이었다. 단유는 머릿속에서 쾅, 터지는 폭음을 들은 기분이 들었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은?’ 순간적으로 떠올린 그 물음에 단유는 즉각적으로 하나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모든 것이 존재하는 공간, 동시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 그 속에서 오롯이 빛나는 단 하나의 점. 그것은 빛이었고, 어둠이었으며, 숫자였고, 그림이었으며, 모든 것이었으며, 아무것도 아니었다. 혼란과 질서과 함께 공존하는 ‘그것’은 일찍이 단유가 훔쳐보았던 진리의 한 단편이었다. 단유는 입을 벌렸다. 그 모습을 보던 도하가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 “왜 그래?” 하지만 단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점차 단유의 동공이 풀리더니 급기야 단유는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야! 김단유!” 도하의 외침에 반 아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호기심을 느낀 아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곧 웅성거리는 소리가 교실을 채워나갈 때, 담임이 교실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시끄러워!” 한 아이가 외쳤다. “선생님! 단유 쓰러졌어요.” 담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단유가 쓰러졌다는 소식은 빠르게 전파되었다. 가장 먼저 명수가 조회 중에 선생님의 제지도 뿌리치고 양호실로 달려왔다. “단유야! 단유야!” 불러도 단유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동안 이런 일이 없어서 잊고 있었지만, 어린 시절에 단유가 이렇게 쓰러지곤 했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얘 혹시 지병이 있어?” 양호 선생님의 물음에 명수는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도 몇 번 쓰러졌었는데요, 병원에서 병은 없다고 그랬어요.” 땀으로 엉망이 된 양호 선생님은 심각한 얼굴로 창백해진 단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심장이 너무 느리게 뛰는데?” 말로 뱉지는 않았지만, 마치 가사 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심폐 소생술을 시행해도 돌아오지 않는 맥과 심박동 때문에 119에 전화를 해 놓은 상태였다. “예전에도 이랬어요. 병원에서도 의식불명 상태라고.” “그런 일을 여러 번 겪었다고?” “여러 번까지는 아니고 두세 번 정도.” 호흡이 느리게 이어지고는 있지만, 저 정도의 심박동이라면 뇌에 충분한 양의 피와 산소가 공급될지 의문이다. 그렇다면 뇌에 상당한 충격이 가해질 텐데, 명수의 말대로라면 과거에도 저랬다고 하니 이상하기 짝이 없다. 뇌에 수차례 충격을 받은 아이가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다? 양호 선생님의 짧은 식견으로도 이는 의학계의 미스터리였다. 그 사이 명수는 하은에게 연락을 했다. 오후에 학원을 가기 때문에 지금쯤이면 집에서 집안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역시나 곧 하은이 전화를 받았다. 명수가 짧게 단유의 상태를 알리자, 급히 전화를 끊어버린 하은이었다. 전화를 끊었을 즈음에 구급대가 학교에 도착했다. 수업 거부를 하며 운동장에 섰던 아이들이 영문을 몰라 구호를 멈췄을 때, 몇몇 아이들이 핸드폰으로 단유의 일을 알게 되었다. 웅성대는 아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단유는 구급차에 실렸고, 명수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단유는!” 제대로 치장도 못 한 상태로 허겁지겁 나타난 하은이 붉어진 눈으로 명수를 채근했다. 곧 명수와 하은은 단유가 누워있던 침상으로 향했다. 마침 응급실 담당의가 단유를 검진하고 있었다. “선생님, 저희 단유, 단유 어떤가요? 괜찮나요?” 하은이 허둥지둥하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려운 모습이지만, 그런 일이 익숙하다는 듯 여상(如常)히 대하는 의사는 미간에 깊은 골을 새기며 말했다. “괜찮지 않습니다. 솔직히 원인을 알 수 없어 뭐라고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이 상태가 오래 지속 되면 문제가 생길 여지가 많습니다.” 둘러 말했지만, 생명이 위독하다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에 저 학생이 이야기하기로는 예전에 이런 일이 몇 번 있었다죠?” 하은은 금시초문이라는 얼굴로 명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하은은 단유가 마지막으로 쓰러졌던 이후에 만난 사람이었다. 명수는 과거 단유가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찾아보니, 저 학생 말대로 병원에 입원했었던 기록들이 있더군요.” 단유의 과거 의료 기록을 확인한 의사가 명수의 말이 사실임을 인정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 미스터리지요. 과거에도 이런 코마(coma) 상태를 겪었다는 뜻인데, 이 정도 수준이라면 몸이 정상일 리가 없거든요?” 의사는 인공호흡기를 달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할 정도였다. 만약 자발적인 호흡이 없다면 당장에라도 인공호흡기를 연결해야 할 테지만, 기이하게도 단유는 비록 미약하나마 자발 호흡을 하고 있었다. 그 호흡이 지나치게 길고 가늘어서 과연 저런 호흡이 가능할까 의심스러울 정도였지만. “그런데도 지금까지 정상생활을 했다면…, 아무튼 일단은 지켜볼 문제이긴 합니다만 우선 입원 수속을 밟으시길 권해드립니다.” 하은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인 후, 명수를 바라보았다. “제가 옆에 있을게요.” 하은은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인 뒤, 입술을 깨문 채로 응급실 바로 옆에 위치한 원무 접수처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다, 다시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린 명수는, 마치 자는 듯 얌전하게 눈을 감고 있는 단유를 지켜보았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명수는 간절히 기도했다. **** 모두의 걱정을 사고 있던 단유는, 그런 상황은 전혀 모른 채 매우 느긋하게 주변을 파악 중에 있었다. 지금 단유가 있는 곳은 처음 보는 곳이었다. 처음 보는 곳인데 익숙했다.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곳이 땅인지 물인지, 그도 아니면 허공인지도 분간을 할 수 없었고 자신이 바라보는 곳에 있는 것이 나무인지, 바위인지, 혹은 동물인지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움직이고 있는지, 아니면 멈춰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단유의 상식으로 이런 건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니, 현실이 아니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단유는 느긋했다. ‘꿈이겠지.’ 그렇지만 단유의 본성이 호기심이니 이 상황을 이성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가장 먼저 단유를 둘러싼 공간에 대해 파악을 해 보자면, 거대한 우주 공간인 것도 같고 아주 좁은 밀실에 갇혀 있는 것도 같았다. 정형적(定型的)인 것 같다가도 마치 생물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변형과 왜곡이 쉴새 없이 벌어지는 공간이었다. ‘어떤 의미일까?’ 꿈속의 일이니 곧 자신의 의식에 관련된 문제이리라. 단유는 자신이 현재 ‘감각적으로’ 느끼는 이 주변의 현상에 대해 해석을 시도했다. 모든 것이 정물화처럼 멈춰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니 마치 꿈을 꾸기 전의 자신이 느꼈던 혼란의 이미지를 그려낸 것 같다. ‘아.’ 단유는 그제야 자신이 고민했던 화두를 떠올렸다. 절대적인 것,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궁리를 하던 중이었음을 깨달은 단유는 자신이 보는 만변(萬變)의 현상에 대해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러고 나서야 단유는 만날 수 있었다. “오랜만이네?” 쾌활한 목소리가 단유에게 인사를 건넸다. ======================================= [425] 바스크(1) “오랜만?” 단유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목소리를 가진 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 넌 날 기억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괜찮아. 난 널 기억하니까.” “언제 만났다는 거죠?” “음…처음 만났던 건 아마 니가 ‘리아빈’을 건너고 있을 때였을 거야.” 리아빈? 단유는 뒤늦게 리아빈이란 지명이 가리키는 곳을 떠올릴 수 있었다. 너무나 넓고 광대한 늪지대. 그곳을 빠져나가는 길이 마치 미궁과도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리아빈’이었다. 그리고 단유가 그 리아빈을 지나갔던 경험은 오직 한 번이었다. “라보네와 함께 있을 때 말인가요?” “그렇지.” 단유는 기억을 되짚어봐도 이런 목소리를 만난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리고 그다음은 니가 살았던 집에서였지.” “네?” 목소리는 흥미롭다는 듯 콧소리를 내더니 이죽거리는 듯 물었다. “생각 안 나? 난 엄마를 버리지 않았어요! 난 동생을 버리지 않았어요! 전 원하지 않았어요! …너의 의지로 이 길을 걷더니 너의 의지로 권능을 부정했었지.…그때 넌 완전자로 향하는 길을 부정했었다.”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점차 굵어지는가 싶더니 마침내는 엄숙함으로 가득 찬 재판관의 그것처럼 묵직한 울림을 단유에게 던졌다. “넌 너의 길을 가겠노라고 선언했었다.” 기억나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단유가 기억을 떠올려 보려고 노력하는 사이, 목소리의 울림이 와 닿았다. “그랬던 니가, 다시 완전자의 길을 엿보고자 하니 결국 운명인가 싶다.” “완전자(完全者)?” 목소리는 화제를 돌렸다. “너는 뭘 찾는 중이지?” 다시 익살맞은 목소리로 돌아온 그의 질문에 단유는 가만히 대답을 궁리하다 대꾸했다. “변하지 않는 절대적 진리.” 영원토록 변하지 않을 진리, 혹은 진실. 모든 의심에서 벗어나 오롯이 정당할 법칙. “과연 그런 게 있을까?” 단유는 곰곰이 생각했다.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우주의 기원을 찾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이지만,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만큼이나 명확한 논리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진리’는 존재한다. “나는 또다시 너의 길을 엿보며 즐거움을 얻을 거야.” 목소리는 쾌활하게 단유의 길을 환영했다. “무슨 뜻이죠?” “아이들이 바른 길을 찾아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건, 부모의 즐거움이지.” “부모?” 단유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물었다. “아버지이신가요?” “나는 너의 아버지이고, 너의 친구의 아버지이며, 너의 아버지의 아버지. 모든 이의 부모이며 모든 이의 기원(起源).” 절대자. 단유는 그의 정체를 깨달았다. “당신은 신이군요?” “신? 그렇게 불러도 무방하겠지. 하지만 신은 인간의 초월에 기댄 관념일 뿐이지 않아?” “그렇다면 당신은 실체를 가지고 있나요?” “그 반대야. 나는 그저 존재할 뿐.” 목소리의 울림이 단유를 스치고 지나가자, 단유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당신이, 제게 좌표를 남겼군요?” “아닌데?” “아니라고요?” “그것은 애초부터 니가 알던 것. 단지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리게 해 주었을 뿐.” “그렇다면 다른 좌표는, 그러니까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나요?” “그건 니가 구할 답이지, 내가 건넬 답은 아니야.” 목소리의 잔향이 단유의 방향 감각을 어지럽혔다. “그렇다면 왜 다시 제 앞에 나타나신 거죠?” “내가 나타난 게 아냐. 니가 나에게 온 것이지.” “제가 뭘 했길래요?” “너는 뭘 하고 있었는데?” 모든 물음에 물음으로 답하니 단유로서는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냥 대답해주시면 안 돼요?” 대답이 없었다. 거대한 진공관에 들어간 듯 이명이 귀를 울렸다. 잠시 후 작아진 목소리가 단유의 귀에 마지막 말을 남겼다. “…기억하거라.” 기억하라고? 뭘?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지다가 단유는 정신을 잃었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것이 바람인지, 풀인지, 아니면 작은 개미 떼인 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간지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단유는 손을 들어 코를 문질렀다. 하지만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이었던 것 같다. 정신이 돌아오자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시야로 빛이 들어오면서 온몸에 감각이 돌아왔다. 마치 어렸을 적 아이들이 하던 얼음 땡 놀이처럼, 지금까지 꽁꽁 얼어붙어 있어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다가 갑자기 술래가 땡, 하고 녹여준 것 같았다. 입에서 뜨거운 신음을 뱉으며 몸을 일으킨 단유는 자신을 덮고 있던 두꺼운 이불을 벗겨냈다.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는지 주위가 흐릿해 보였다. 하지만 일단 어둡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내 방은 아닌데.’ 일단 누워있던 자리의 느낌이 단유 방의 포근한 침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딱딱한 나무 침대와 거칠한 질감의 이불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점차 눈에 초점이 맞으면서 주위의 것들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낯설지만 한편으론 익숙한 분위기의 실내였다. 톱밥 냄새가 가득한 나무 벽과 곧지 않은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얼기설기 풀을 엮어 조악하게 지붕을 덮고 있는 천장. 흙과 돌이 뒤섞인 바닥과 아귀가 맞지 않는 나무를 맞대어 만든 외벽에서 새어 나오는 바람. 이 모든 것이 단유에게 ‘고향’을 떠올리게 하였다. ‘어떻게 된 일이지?’ 좌표가 생긴 이후, 강제로 이곳에 끌려온 적이 없었기에 지금의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문득 머리가 지끈거려 단유는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뭔가 복잡한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인데.’ 항상 꿈에서 뭔가를 보고 들은 것 같지만, 막상 꿈에서 깨어나면 기억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뭐, 원래 꿈이 그런 식이니까. 가끔 단편적인 기억이 남을 때도 있지만 그건 운이 좋은 경우지, 라며 단유는 머리를 저었다. 지금은 팔자 좋게 꿈이나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닫힌 문밖에서 흘러들어오는 구수한 냄새를 맡다 보니 더는 자리에 누워있을 수 없었다. 단유는 침대에서 벗어나려다 몸이 꽤 많이 굳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 몸 관리를 철저히 하는 편인지라, 아무리 깊은 잠이 들었다 해도 몸이 이렇게까지 굳는 경우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자신의 몸인데도 낯선 느낌이었다. 아무튼 단유는 억지로 바닥에 발을 딛고 서서는 천천히 몸을 풀었다. 호흡으로 몸의 긴장을 풀고, 몸의 구석구석에 에너지를 보냈다. 가볍게 몸을 떨어 근육을 이완시키고, 사지에 힘이 제대로 전달되는지를 가늠했다. 몸의 상태가 적당히 돌아오는 것을 확인한 후, 단유는 경계태세로 조심스럽게 닫힌 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려다 단유는 습관적으로 문고리를 찾고 있었단 사실에 피식, 실소를 지어 보였다. 슬쩍 문을 열고 바깥의 동태를 살펴보려 고개를 내미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어, 깼네? 아빠! 깼어요!” 쾌활한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단유는 여전히 의심을 풀지 않은 채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눈에 담았다. 이제 10살이나 됐을까? 몸은 왜소했지만 커다란 눈에서는 밝은 빛이 날 만큼 깨끗하고 선명했다. “이리 와요.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데 없어요? 걱정 많이 했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보니까 얼굴이 되게 어려 보이네요? 몸은 우리 아빠만큼 큰데?” 활달한 성격이란 것은 금방 눈치를 챌 수 있었다. 단유는 화로 위에 올려둔 냄비에서 흘러나오는 냄새가 자신이 맡았던 구수한 냄새의 정체임을 깨달았다. 단유의 시선이 냄비에 가 있음을 눈치챈 아이가 손에 든 국자로 냄비를 휘저으며 물었다. “배고파요? 조금만 기다려요. 우리 아빠가 오면….”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들어왔다. 아이는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아빠! 이 형 깨어났어요!” “나도 봤다.” 무뚝뚝한 사내는 등에 짊어진 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가죽이 벗겨진 고깃덩어리였다. 겉에 묻은 물기로 보아 방금 씻어서 온 모양이었다. 아래가 갈라져 있으니 내장을 모두 들어낸 것 같다. “우선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아이는 그거 넣어야죠, 라고 대꾸하면서도 국자로 휘휘 젓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는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던 칼로 고깃덩어리 일부를 조금 잘라내 냄비 안에 퐁당 집어넣었다. 여러 조각을 넣으니 곧 구수한 향이 진해졌다. 어딘가 향수를 자극하는 냄새에 단유는 처지도 망각하고 식욕이 동했다. “이리 와서 앉아라.” 사내는 왼쪽 발을 뻗어 옆에 있던, 작은 나무 둥치를 베어 만든 것 같은 의자를 단유 쪽으로 보냈다. 단유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경계하고 있으면 우리가 나쁜 사람인 거 같군.” 사내는 여전히 호기심 많은 얼굴을 하고 단유를 훔쳐보는 아들을 턱으로 가리켰다. “설마 우리 아들이 저 국자로 네 머리를 깨부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단유보다 아이가 먼저 반응했다. “이게 무기가 돼요?” 고작 수프를 젓는 일에나 쓰던 국자로 사람 머리를 부술 수 있나, 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아들에게 사내가 말했다. “내 머리는 안 돼도 니 머리는 깨질 거다.” “으휴, 아빠는 꼭 나한테 이런 무서운 걸 시키더라.” 아이는 무섭다는 듯 국자를 엄지와 검지로 들어 올리는 시늉을 했다. “장난 그만하고, 계속 저어. 눌어붙으면 맛없다.” 단유는 부자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왜 여기 있는 거죠?” “생각 안 나요?” 단유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들이 아버지의 눈치를 한 번 보고는 설명했다. “세리(txerri) 산 입구에 형이 쓰러져 있었어요.” “세리 산?”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었다. “거기 멧돼지들이 꽤 많이 살 거든요? 아빠랑 자주 사냥하러 가요. 물론 나는 덫에 잡힌 것들만 잡을 뿐이지만요. 하지만 1년만 지나면 아빠가 활을 가르쳐 준다고 했으니까 내년부터는 나도 본격적인 사냥꾼이 되는 거예요. 그렇죠?” 사내는 묵묵히 남은 고기를 베어서 정리하고 있었다. 벽에 걸려있던 꼬챙이에 큼지막하게 잘라낸 고기를 꽂아서 옆에 놓아두는 모습을 보는 단유에게 아이가 설명했다. “아, 저거요? 저건 훈제를 할 거라서 지금은 못 먹어요. 이제 곧 겨울이라 비상식량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그러고 보니 사내의 오른편에 벽난로처럼 보이는 화덕이 보였다. 작은 돌과 진흙으로 조잡하게 만든 그 화덕을 관찰하니, 그 위에 꼬챙이들을 걸 수 있는 막대가 가로 지르고 있었다. 화덕에서 위로 향하는 굵은 기둥은 연기가 빠져나갈 길을 만들어 놓은 것이리라. “그런데 형은 어디서 왔어요?” “나?” 그때 사내가 단유를 힐끔 보더니 아들에게 물었다. “제토. 넌 왜 계속 ‘형’이라고 부르는 거냐?” “예?” 아들, 제토가 단유를 위아래로 훑더니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며 아버지에게 속삭이듯 대꾸했다. 하지만 셋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상황에서 들리지 않을 리가 없다. “덩치가 아빠만 한 걸요?” “얼굴은 어려 보이는데?” 제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단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른이 보는 눈은 다른가? 제토가 우물거리다 물었다. “몇 살이에요?” 단유는 나이를 말하기에 앞서, 과연 이곳에서도 같은 셈법을 쓰는지 혹은 어떤 역법(曆法)으로 날짜를 세는지 궁금해졌다. “15살인데요.” “네?” 제토가 놀라서 국자를 놓쳤고, 하마터면 냄비 속으로 기어들어갈 뻔한 국자를 아버지가 빠른 손놀림으로 잡아챘다. 아버지는 그럼 그렇지, 라는 얼굴을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도 15살인데?” 같은 나이라서 억울하다는 듯 단유를 바라보는 제토였다. 정확히는 단단한 근육이 자리 잡은 단유의 팔과 다리를 훑는 제토의 얼굴이 화로의 불빛 때문에 노란색으로 울렁거렸다. 이미 방 안에서 해가 저물었다는 것은 알았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지구식으로 계산하면 대략 6시에서 7시 정도일 거로 추측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식사를 하면서 이를 물어본 단유는,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까와는 달리 시무룩한 얼굴을 한 제토로부터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내려올 때였으니까 얼마 안 됐어….” 어색한 맺음말이었다. 여전히 제토는 단유를 ‘형’과 ‘동갑’의 경계선에 두고 있었다. “해가 지기 전이었으니까.” 예전에도 느꼈지만, 이곳 사람들은 시간을 지구 식으로 구별하지 않았다. 해뜨기 전, 해 뜬 후, 해가 높이 떴을 때, 해가 지기 전, 해가 진 후, 정도가 그들이 시간을 감지하는 기본적인 방법이었다. 다만 녹스에서는 특별히 종탑의 종을 쳐서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었다. 처음 한 번의 종소리가 나면 하루의 시작이었고, 10번째 종소리가 나면 하루의 끝이었다. 밤에는 종을 치지 않았다. 여기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이란 개념을 이용하는 무리가 있다는 점이었다. 대부분 사람이 그저 해가 뜨고 지는 것으로 일과를 정한다면, 특정 세력은 시간의 흐름을 분명하게 구분하여 이용한다. 그리고 그 세력은 아마도 귀족들이나 관청에서 일하는 이들과 같은 상위 계층일 것이다. 단유는 불필요한 잡생각들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흔들고는 위치를 물었다. “여기가 어디쯤이죠?” 제토가 눈을 좁히며 되물었다. “세리산이라니까? 그럼 넌 어떻게 여길 온 건데?” 단유는 할 말이 없었다. 모르겠다는 말 밖에는. 제토는 도리어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단유를 보며 아버지에게 속삭였다. 아까도 그렇지만 제토의 속삭임은 너무나 잘 들렸다. “아빠, 얘 뭔가 위험한 사람 같은데?” 사내는 아무 표정 없이 손에 든 고기 수프를 후루룩 마시기만 했다. 그러다 단유를 무미건조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물었다. “맛이 없나?” 단유는 손에 든 고기 수프를 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구경하라고 준 거 아니다.” 단유는 서둘러 수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 [426] 바스크(2) 식사를 모두 마친 후에야 단유는 다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식사 전에는 쾌활하기만 하던 제토가 단유의 나이를 알고 난 뒤부터는 괜히 서먹해 하는 것 같았지만 따뜻한 화로 곁에서 맛있는 수프로 배를 채우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는지, 다시 명랑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름이 뭐야?” 단유는 모처럼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루치드.” “루치드? 여기 사는 것 같진 않고, 어디서 왔어?” 단유는 고민하다 말했다. “녹스.” “녹스?” 제토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제토의 아버지는 시큰둥한 얼굴로 고기를 다듬던 도구를 정리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빠가 모르는 곳이면 되게 먼 곳인가 봐?” 그 반응에 오히려 단유가 당황했다. 녹스를 모른다? 그럼 정말 여긴 어디지? 단유는 기억을 더듬어 또 다른 지명을 떠올렸다. “아크리스토스 아세요?” 이번에는 제토의 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아크리스토스, 쓸모없는 땅이란 의미로 드뷔시의 최남단, 녹스가 있던 곳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핀체노가 가르쳐줬던 그 이름을 떠올린 단유가 기대를 품고 물었다. “아크리스토스?” 제토의 아버지가 살짝 놀라는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 틈에 단유는 제토의 아버지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눈꼬리가 약간 아래로 쳐진 그의 눈은 검고 깊었다. 눈꼬리 근처의 깊은 주름은 그의 고된 세월을 드러내는 것 같고, 왼쪽 눈 아래의 희미한 흉터는 거친 젊은 시절을 보낸 훈장처럼 보였다. 희끗해진 귀밑머리 아래에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긴 흉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흘러내린 앞머리가 짙은 눈썹 위에서 흔들렸고, 껌뻑이는 눈꺼풀을 지나 불거진 광대뼈는 사내의 성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듯 다부지게 보였다. 레고 조각처럼 각진 턱은 굳건한 심지를 보는 것 같았고, 다듬지 않은 턱수염이 야성적인 남성성을 드러냈다. “들어본 적 있다.” “정말요?” 제토가 더 호기심을 가지며 되물었다. 아버지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뒤 단유를 바라보았다. “제토, 니가 태어나기 전일 거다. 마을에서 가끔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제르아 오마(zerua horma)에서 넘어오던 사람들이 그곳에서 왔다고.” 제르아 오마? 하늘의 벽(sky wall)? 단유는 낯선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뜻은 이해되지만 지칭하는 바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제토는 엄청나게 놀란 얼굴을 하고 단유와 아버지를 번갈아 보았다. “제르아 오마를 넘는 사람들이 있다고요?” 아버지는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아주 가끔 거기에서 넘어오는 이가 있다더구나. 나도 본 적은 없고 이야기만 들어서 믿을 수 없었지만 말이다.” 단유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제르아 오마가 뭐죠?” 껍질이 일어날 정도로 거친 입술을 가진 제토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제르아 오마는 하늘을 가릴 만큼 높은 산맥이다. 사람은 누구도 넘어설 수 없다고 알려졌지. 그래서 그 산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단유는 매우 익숙한 설명을 들으며 입이 벌어졌다. “그러나 가끔 그곳을 넘어왔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많지는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 산을 넘는데 체력을 다 쏟은 것인지, 마을에 다다르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그래서 그들이 남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길이 없지.” 단유는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제르아 오마’라는 곳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곳이 자신이 생각하는 그 산이 맞는다면, 그래서 이곳으로 온 사람이 있다는 말도 사실이라면, 어쩌면 단유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자신이 염원했던 일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제르아 오마라는 산맥은 혹시 동쪽에 있나요?” “제르아 오마는 태양을 낳는 산이다.” 단유는 제르아 오마가 ‘대산맥’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자신의 마을에서 늘 대산맥의 산줄기로 해가 떨어지는 모습을 구경했었으니까. 핀체노도 대산맥을 일컬어 ‘인간이 넘어갈 수 없는 자연의 험지’라고 표현했다. 그 스스로도 생의 마지막을 그곳에서 보내겠다며 대산맥으로 향했었다. “그 산을 넘어오는 이가 많나요?” 제토의 아버지는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얼굴로 단유를 보다가 말했다. “다른 곳에서 넘어오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니 잘은 모르겠다만, 내가 살았던 마을에서는 넘어오는 이를 만났다는 이야기가 조금 남아있긴 해도 많지는 않은 편이었다. 말했듯, 대부분 마을에 도착할 때 즈음 다들 죽거나 혹은 죽어가는 중이었으니까.” 제토의 아버지는 완전히 몸을 돌려 단유에게로 향했다. 이미 모든 도구는 가죽 띠 안에 가지런히 정렬된 뒤, 곱게 접혀서 아버지의 옆에 놓여 있었다. “나야말로 묻지 않을 수 없군. 네 입으로 ‘아크리스토스’라는 곳에서 왔다고 했으니 분명 제르아 오마를 넘었음이 분명한데 어떻게 그 산을 넘을 수가 있었냐고 말이다.” 단유는 말문이 막혔다. 단유의 침묵에도 제토와 제토의 아버지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침묵의 추궁에서 단유는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모르겠어요.” “모른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사실이지만, 이것을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제 기억은 이 집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거든요. 그리고….” 단유는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들여다보았다. 지구에서 입고 있던 옷도 아니고, 자신의 고향, 빈촌에서 입던 옷도 아닌 처음 보는 복식이었다. “이 옷도 제 옷은 아닌 것 같은데….” “아, 그 옷은 우리 아빠 옷이야.” 제토의 말은 단유를 황당하게 만들었다. “처음 봤을 때, 벌거벗겨진 채여서 처음에는 강도를 만난 건가 싶었는데, 이곳에는 강도가 없거든? 그래서 미친 사람인 줄 알았어. 옷 벗고 다니다가 다쳐서 쓰러진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고.” 미친 사람이면 깨어났을 때 큰일일 수 있지 않을까? 단유가 몰래 그 생각을 하다가 아, 하고 깨달았다. 제토의 아버지가 저 도구를 멀리 떼어놓지 않은 이유. 굳이 저녁 식사 시간에 고기를 베어서 정리하던 이유가 실은 단유가 미친 사람인지 혹은 경계해야 할 사람인지를 몰라 주의하던 중이었음을, 저 날카로운 칼과 꼬챙이가 단순히 고기를 걸기 위한 도구만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단유는 제토의 아버지에 관한 판단에 한 가지를 덧붙였다. 조심성이 많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정도로 슬기로운 지혜를 가졌다는 사실을. 아무튼, 단유가 벌거벗은 채였다는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지금까지 단유가 이곳으로 건너올 때는 복식에 대해 걱정을 한 적이 별로 없었는데, 늘 빈촌의 마을 사람들이 입고 있던 복식과 유사한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교복을 입고 있던, 사복을 입고 있던 이곳에 오면 한결같이 같은 복식으로 변해 있었다. 벌거벗은 채로 오는 경우는 그가 누군가를 강제로 이곳에 데려올 때만 그랬다. 그것도 끌려오는 이들이 벌거벗은 채였지, 단유는 늘 같은 복식이었다. 의문을 품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의아한 일이었다. 왜 저들은 벗고 있을까. 하지만 매번 이곳으로 데려오는 경우가 늘 감정적으로 격해져 있던 상태여서 그 점을 의아하게 생각해 고민에 빠질 틈이 없었다. 나름대로 생각한 것은 자신이 원래 이곳의 주민이기 때문이고, 그가 데려온 이들은 이곳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추정했지만, 어설픈 논리임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단유로서는 명쾌하게 그 현상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단유가 벌거벗은 채로 오게 되었다. 그것도 대산맥 너머로. 단유의 혼란스러움을 눈치챘는지, 제토의 아버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밤이 늦었으니까, 우선은 자자. 그리고 내일 아침에는 오늘 못한 사냥 거리를 구해야 하니까 좀 부지런히 움직여야겠구나.” 처음의 말은 모두에게 한 말이었고, 뒤의 말은 제토에게 한 말이었다. 제토는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지만, 아버지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제토를 먼저 방에 들여보낸 뒤, 제토의 아버지는 단유를 데리고 다른 방으로 향했다. 그곳은 방이라기보다는 창고 같은 곳이었다. “잠자리가 충분치 않지만, 대충 이곳에서 저 가죽을 깔고 누우면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역시 아직은 경계를 풀 수 없다는 제토의 아버지였다. 하긴 단유가 두루뭉술 설명을 한 탓에 정체가 모호해진 탓도 있었다. “고맙습니다.” “혹시 볼일을 보고 싶으면 저 문을 써라. 나가면 밖에 덤불이 많으니까, 적당히 일을 보면 될 거다.” 거기까지 설명하고 제토의 아버지는 제토가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단유는 적당히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뒤, 어둠이 자리 잡은 방구석 대신 문을 열었다. 시원한 밤공기가 덮치며, 도시에서는 맛볼 수 없는 대자연의 청량함이 느껴졌다. 작은 집 마당에는 잡초가 듬성듬성 나 있고, 울타리 하나 없이 그대로 숲과 이어졌다. 모래가 바삭거리는 마당 가운데로 향하니 주변이 훤히 보였다. 아마도 세리산이라는 곳 언저리라 추정되는데 산장이라 불러야 할지, 별장이라 불러야 할지 모를 모옥(茅屋)의 뒤로 높은 벼랑과 산이 서 있었다. 벼랑 때문에 혹시 모를 산짐승들의 습격은, 적어도 집 뒤에서는 이루어지기 힘들 것 같았다. 마당 앞에 뻗은 산길은 숲속을 가로지르는데, 아마도 이 산의 아래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단유는 고개를 들었다. 산자락에 가렸는지 달은 보이지 않았지만, 하얀 별빛들이 마치 고향에서 보는 것과 비슷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단유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구의 기준에서 보면 이 세계는 자신이 살던 세계고 그러니 이곳의 하늘은 모두 자신의 고향에서 보는 하늘과 같은 하늘일 것이다. 하지만 제토의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 때문인지 낯설게 느껴졌고, 고향의 하늘과 ‘다른’ 하늘인 것처럼 느껴졌다. 고개를 내려 모옥을 바라보니 벌써 잠이 들었을 리 없건만, 쥐죽은 듯 조용했다. 아마 이것도 아버지의 배려이리라. 만약 이곳을 떠나고 싶다면 조용히 떠나라는. ‘그래도 가죽을 쌓아놓은 곳에 눕히는 건 아니지.’ 만약 자신이 그 가죽들을 들고 가면 어쩌려고? 한때나마 녹스 최고의 사냥꾼과 함께 생활해 봤던지라 가죽의 중요성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 가죽들을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자리에 깔고 누울 수 있게, 아니 의심스러운 사람이 들고 갈지도 모르는데 저렇게 놓아둘까? 아마 제토의 아버지는 잠이 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단유가 이 집을 떠날 때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단유가 가죽을 들고 간다면, 도둑이라고 생각해서 붙잡으려나? 다행히도 단유가 그런 물욕(?)이 없으니 그런 일은 생기지 않겠지만, 설령 있다 해도 제토의 아버지는 단유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단유는 공간을 넘나드는 마법사니까. 우선 단유는 집으로 가기로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몰라도 자신이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면, 걱정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집으로 돌아가는 게 우선이었다. ‘어?’ 단유는 좌표 생성에 실패했다. 다시 한번, 머릿속에 저장된 좌표를 불러오려 했지만 좌표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단유는 당황한 채로 머리를 붙잡고 쪼그려 앉았다. 세게 머리를 붙잡고 어떻게든 좌표를 만들어내려 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돌아가기 위한 좌표를 떠올릴 수 없었다. 마치 ‘벽’에 부딪친 것처럼 어느 순간 계산이 멈춰버렸다. ‘돌아갈 수 없어?’ 단유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피다가 커다란 나무 하나를 눈에 담았다. 곧 그 나무 옆으로 ‘이동’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단유는, 마치 소원을 들어달라고 부탁하듯 강하게 그 나무줄기를 붙잡고 좌표를 떠올리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그 나무가 벼락 맞은 대추나무도 아니고, 신령이 깃든 신목(神木)도 아닌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산자락에 가려져 있던 달이 하늘 중앙에 다다를 때쯤에야 단유는 계산을 포기하고 말았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그대로 풀밭에 드러누운 단유는 우거진 나뭇잎 사이에서 하얀 달을 바라볼 수 있었다. 잠시 후 숲을 뒤흔든다 싶을 정도로 커다란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이 비명을 지르고 풀들이 바닥에 드러눕다시피 했지만 단유는 그저 멍한 눈으로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괜한 심술에 바람을 일으켜 보았지만, 안 되는 이유를 몰라 답답함만 쌓일 뿐이었다. 대신 얼굴을 뒤덮었던 땀은 거센 바람에 모두 말라버리고 버석한 소금기만 남아 찝찝함을 더했다. ======================================= [427] 바스크(3) “잘 잤어?”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부산스러운 움직임에 단유는 감았던 눈을 떴다. 눈을 감은 지 2시간도 되지 않은 것 같았지만, 낯선 환경 탓에 깊이 잠들 수가 없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니, 까치집을 한 제토가 눈을 비비다 단유를 보고 물었다. “응.” 단유는 대충 대답하고 고개를 돌렸다. 벌써 허리에는 각종 도구를 끼워 넣은 가죽띠를 메고, 고리에 짧은 단검을 채우고 있던 제토의 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 아버지도 단유를 향해 눈길을 돌린 참이라 시선이 마주쳤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여상하게 대답하는 단유를 보던 제토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 옆으로 미세하게 붉은 핏줄이 보이는 것을 보니, 그도 편히 잠을 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줄곧 신경을 곤두세웠으리라. 하지만 누구보다 심란한 건 역시 단유였다. 갑자기 ‘봉인’이라도 된 건지, 좌표를 구해내는 계산이 되지 않아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단유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안겨주었다. 돌아갈 수 있을지,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떤 방법을 써야 하는지, 그리고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그 무엇하나 지금으로써는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제토의 아버지는 커다란 활을 들고 마당에 나타났다. 단검의 반대쪽에 활통이 달랑거리며 매달려 있었는데, 가슴 쪽의 줄을 잡아당기자 활통이 죽 끌려 올라가더니 등에 비스듬히 매어졌다. 만약 활을 계속 쏴야 할 때는 가슴에 매어져 있는 장치를 풀기만 하면 활통이 다시 옆구리로 떨어져 내리니 단순한 장치지만 유용해 보였다. 제토의 아버지가 단유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할 거냐?” 단유 본인이 상대의 입장이라도 난감하리라. 집에 두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초면에 같이 가자고 말하기도 쉽진 않은 일. 차라리 지난 밤 어딘가로 떠났다면 편했을 것인데 말이다. “같이 갈래?” 제토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단유는 제토의 눈빛이 어린 시절의 명수를 보는 것 같았다. 아마 제토는 또래(?) 친구의 등장이 반가운 것일 테다. “그래도 되나요?” 단유는 제토의 눈빛을 무시하고 떠나기가 어려웠다. 물론 이성적으로는 제토의 아버지란 이에게서 더 많은 정보를 얻고자 하는 점도 있었다. “…그래라.” 단유는 부자의 사냥에 따라나섰다. 알고 보니 세리산이라고 부른 산은 제토의 집이 있던 산의 맞은편이었다. 숲속으로 난 길을 30여 분 정도 걸어 내려가니 푸서릿길이 나왔는데, 그곳에서 산굽을 따라 양쪽으로 길이 나 있었다. “저쪽으로 가면 우리 마을이 있어.” 제토가 오른손을 들어 가리킨 방향에는 잡초가 우거져 있긴 하지만 그 사이로 쭉 뻗은 길이 산과 산 사이로 지나가 넓은 들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마을이 보이지는 않았다. 반대편을 돌아보니 산에 가려 보이지 않던 웅장한 산맥이 보였다. 높이 솟아오른 봉우리들에 비하면 지금 눈앞에 있는 산은 그저 언덕 정도에 불과할 정도였다. 골안개가 피어 신비스러움을 더하는 그 산은 과연 대산맥을 볼 때와 비슷한 장엄함이 엿보였다. 빈촌 마을에서 대산맥을 볼 때는 그저 높다는 생각만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높은 벼랑과 무시무시한 바위들로 뒤덮여 과연 사람이 오를 수 없을 것처럼 보이긴 했다. 그 봉우리들 사이로 희끄무레하게 꿈틀거리는 빛덩어리가 보였다. “서두르자.” 제토의 아버지가 걸음을 재촉했다. 이 시간이 산돼지들이 막 잠에서 깨어 먹이를 찾느라 느릿느릿 움직일 때라 사냥하기가 편하다는 제토의 설명이 이어졌다. 과거에 단유 역시 무슬라를 따라 여러 번 산행을 하며 그와 같은 지식을 얻은 바가 있었으나, 이제까지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을 따름이라 단유는 금방 제토의 설명을 이해했다. 세리산은 곧은 나무들이 별로 없었다. 마치 소나무를 보는 것 같기도 한데, 소나무와 달리 잎이 넓은 나무들이라 단유는 신기했다. 단유가 두리번거리며 주변 환경을 살필 때, 제토의 아버지는 단유의 허리께까지 오는 야생 회양목들이 수북이 자란 가운데로 들어가 허리를 굽히고 바닥을 살폈다. “아직 지나가지 않았나 보군.” 산돼지들이 주로 지나가는 길목이 회양목 자생지 사이였는데, 그곳에 덫을 미리 놓아두었던 모양이었다. “향이 좋아서 벌레들이 많이 모이거든.” 제토가 덧붙여서 설명했다. 향을 찾아 몰려드는 벌레들을 기다리는 동물을 사냥하는 산돼지. 그리고 그 산돼지를 사냥하기 위해 덫을 놓은 사냥꾼. 단유는 제토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뒤를 따라갔다. 단유의 덩치도 큰 편이라지만, 제토의 아버지는 우람하다는 말로 다 설명이 힘들 정도여서 그의 옷을 빌려 입은 단유는 소매가 너무 덜렁거려 팔을 움직일 때마다 움직임에 방해가 될 정도였다. 몇 단을 접어 올려붙이니 좀 낫다. “조심해라. 팔에 독 옮는다.” 제토의 아버지가 그 모습을 봤는지 한 마디를 했다. 역시나 제토가 재잘재잘 설명을 덧붙였다. “여기 나무들 중에 잎에 독이 있는 나무가 있어. 피부에 닿으면 빨갛게 부어오른다고. 나도 예전에 멋모르고 지나가다가 닿아서 한참 고생한 적 있거든.” 단유는 옻나무 정도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움직임에 방해가 될 정도인 소매를 내릴 생각은 없었다. 한참을 더 올라가다 사냥꾼이 걸음을 멈췄다. 덩달아 제토와 단유도 걸음을 멈추고 제 자리에서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걸음 소리가 죽으니 희미한 콧소리가 들렸다. 킁킁거리는 소리는 누가 들어도 돼지의 그것이었다. 사냥꾼이 활을 빼 들고 비스듬히,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겨눴다. 활시위가 팽팽해질 때까지 당긴 채로 기다리던 사냥꾼의 움직임에 제토와 단유는 침을 삼키는 것도 참으며 지켜보았다. 사냥꾼이 바라보는 방향은 새벽 안개 때문에 시야가 그렇게 선명하진 않았다. 점점 옅어지고 있던 참이라 아예 보이지 않는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명확히 사물이 구별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 사이를 노려보는 사냥꾼의 팔은, 지금 활시위를 힘껏 당기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할 만큼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단유의 시계(視界)에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안개를 흩지 못할 정도로 미약한 움직임이었지만, 정물화처럼 고정된 풍경에 이질감을 만들었다. 제토 역시 그 모습을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냥꾼은 보았던 모양이다. 핑,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떨친 시위에서 날아간 화살이 눈 깜짝할 사이에 움직임을 보였던 물체에 꽂혔다. 그리고 귓가를 울리는 비명소리가 꽤액 하고 터져 나왔다. 사냥꾼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다시 활을 하나 더 시위에 매겨 다시 그곳을 향해 쏘았다. 여전히 비명을 지르던 돼지가 다시 찾아온 충격에 비명 대신 도망을 선택했다. 안개를 헤치며 달리기 시작한 돼지의 덩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 스크로파의 돌진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릴 만큼 커다란 덩치의 산돼지는, 짧은 다리로 땅을 박차며 산 위쪽을 비스듬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냥꾼의 손에서 벌써 세 번째 화살이 떠난 중이었고, 네 번째 화살을 메기는 와중이었다. 멀리 달아나기도 전에 뒷다리 위쪽을 맞은 돼지는 근육을 다친 것인지 달려나가는 속도가 반으로 뚝 떨어졌다. 그리고 네 번째가 날아가 돼지의 목 언저리에 꽂히면서 돼지는 걸음을 멈추고 주저앉았다. 어지간한 덩치가 아니어서 그런지 네 대의 화살을 맞고서야 움직임이 멎은 돼지에게 사냥꾼이 단검을 빼 들고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가자!” 제토가 신이 난 얼굴로 일어나 아버지의 뒤를 따라갔다. 단유 역시 몸을 일으켜 뛰어가는 제토의 뒤를 빠른 걸음으로 쫓았다. 다가갈수록 돼지의 커다란 덩치가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크고 흉악한 덩치를 가진 스크로파의 돌진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던가 신기할 정도다. “제토, 뛰지 마라.”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의를 줬다. 아직 완전히 숨이 멎지 않은 돼지기에 자극을 주지 않기 위함이고, 또 다른 짐승이 있을지 모른다는 경계 때문이었다. 하지만 단유가 주위를 돌아보니, 달리 위험해 보이는 짐승은 없는 것 같았다. 숨을 헐떡이는 짐승은 검은 눈으로 사냥꾼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사냥꾼은 단검을 들고도 섣불리 다가가지 않고 그 눈을 주시했다. 다리를 버둥거리는 돼지지만 땅을 박차고 나갈 힘을 얻지 못해 검은 흙만 긁어낼 뿐이었다. “지금 저렇게 보여도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치고 나갈 수가 있거든? 그래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돼.” 제토가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단유에게 알려주었다. 물론 단유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심지어는 온몸에 불이 붙은 채로 쓰러지다가도 갑자기 일어나 달려들던 몬스터와 마주하기까지 했으니 경계하는 것은 당연했다. 끼익. 흠칫 놀란 제토가 고개를 돌렸다. 돼지가 뛰쳐나온 방향에서 들려온 소리에 단유도 뭔가 싶어서 고개를 돌렸다. 자세를 낮추고 단검을 뽑아 든 제토의 모습을 곁눈질로 보며 소리가 난 방향을 지켜볼 때였다. “새끼다.” 여전히 돼지의 죽음을 지켜보던 사냥꾼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아, 어미구나.” 제토가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뽑아 든 칼로 경계하며 대답했다. 그 말처럼 곧 안개를 헤치며 다가온 것은 무릎에도 닿지 않을 만큼 작은 갈색 돼지였다. 털이 어미에 비해 억세지 않은지 보기에도 부드러워 보이는 돼지가 바닥에 닿을 듯이 코를 아래로 내리고 총총 달려왔다. 마치 명수가 거실 바닥에 흘린 과자를 주워 먹기 위해 바닥을 훑으며 달려오던 호빵을 보는 것 같았다. 아기 돼지는 어미의 꼬리께에 닿아서 코를 킁킁거리더니 삐익, 하고 울음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어미가 킁킁거리며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커다란 머리가 바닥을 훑으며 작게 먼지를 일으켰지만, 몸을 일으켜 세우지 않는 이상 자신의 아이를 볼 수 없었다. 아기 돼지는 킁킁거리며 어미의 등을 따라가더니 마침내 어미의 머리 쪽에 닿았다. 시선이 맞닿자 아기 돼지가 끙끙거리며 코로 어미의 머리를 밀어냈다. 그런다고 밀려날 어미가 아니었지만, 아기 돼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먹이를 찾으러 나선 어미가 돌아오지 않아 찾으러 온 것일까? 아니면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을 주지 않아 뿔이 난 아이의 투정일까? 그때 사냥꾼이 움직였다. 빠르게 몸을 아래로 숙이며 들고 있던 칼로 어미의 목을 찔렀다. 어미의 시선이 아기 돼지에게로 간 틈이었다. 칼이 찌르고 들어간 틈으로 붉은 피가 솟구쳤다. 하지만 어미 돼지의 심장이 많이 느려졌던 탓인지 피는 금방 솟구침을 멈추고 목 주위를 붉게 물들일 뿐이었다. 빼액, 다시 아기 돼지가 비명을 지르더니 몸을 돌려 달아났다. 그러나 완전히 달아나진 않고 적당한 거리에서 다시 고개를 돌려 어미를 지켜보는 아기돼지였다. “여기, 잡고 있어라.” 사냥꾼은 아들에게 목을 누르고 있던 칼을 계속 붙잡고 있도록 주문했다. 아들은 대답 대신 재빨리 아버지의 곁으로 다가가 아버지의 단검을 힘껏 붙잡고 눌렀다. “여기 돼지는 좋은 걸 많이 먹어서 그런지 피가 신선하거든? 그래서 피가 많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해야 돼.” 불필요한 설명이었지만, 제토는 계속 단유에게 이것저것을 설명하는 데 공을 들였다. 자신이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음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 사이 사냥꾼은 활을 빼 들더니 아기 돼지를 향해 시위를 당겼다. 당연히 아기 돼지는 사냥꾼이 보이는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곧 화살은 정확히 아기 돼지의 미간을 뚫었다. 단말마의 비명도 없는 죽음이었다. “와! 비싼 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토가 기쁨에 찬 소리를 질렀다. 말인즉슨, 아기 돼지가 꽤 비싼 요리 재료로 이용되기 때문에 비싸게 팔린다는 이야기였다. 사냥꾼은 새벽이슬로 젖은 흙을 저벅저벅 밟아 나가 화살을 집었다. 화살을 집어 들었을 뿐인데도 아기 돼지가 박힌 채로 공중에 들렸다. 얼마나 절묘하게 박혔는지 아기 돼지는 피도 흘리지 않았다. 새까만 눈동자에 지금 막 떠오른 동녘의 햇살이 반사되어 단유의 시야에 점을 찍었다. ======================================= [428] 바스크(4) 돼지 모자를 잡은 것으로 사냥이 끝나지는 않았다. 그 뒤로도 사냥꾼은 눈먼 족제비와 나무둥치를 긁던 오소리 등을 잡았다. 풍족한 사냥감에 제토가 기뻐하는 사이 짐이 많아져서 손이 모자랄 지경에 처했다. “제가 들게요.” 단유가 자청해서 손을 내밀었다. 구해준 보답, 이라기보다는 저녁 한 끼에 대한 감사 인사 정도라고 덧붙였다. 제토의 아버지는 단유의 위아래를 다시 한번 훑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단유는 당연히 어미 돼지를 어깨에 짊어졌다. 제토에게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사냥꾼은 되도록 움직임에 제한이 없는 편이 좋기 때문에 이렇게 무거운 사냥감은 짐꾼이 짊어지는 게 옳다. 제토의 아버지도 그것을 이해한 탓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해가 뜬 지 3시간여가 지났을 즈음에 사냥을 마무리했다. 보통 이 시간이면 학교에서 1교시를 시작할 시간인데 산길을 걷고 있자니 어쩐지 리듬이 흐트러진 느낌이었다. 게다가 평소라면 꼬박꼬박했을 운동도 하지 않았다. 대신 산을 타고 올랐으니 운동 대신이랄까? “이건 오늘 바로 가서 팔아야겠다.” 사냥꾼이 들고 있던 가죽 주머니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기 돼지까지 잡은 뒤, 사냥꾼은 등짐에 지고 있던 가죽 주머니를 열고 그 안에 돼지의 피를 받았다. 그리고 호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내더니 그 가죽 주머니에 뿌리자 하얀 가루들이 피 속에 섞였다. 피가 빨리 굳는 것을 막기 위함이란다. “그럼 마을에 가서 아침 먹는 건가요?” 제토가 눈을 반짝이며 묻자, 사냥꾼이 고개를 끄덕여 제토를 기쁘게 해주었다. 그전에 사냥꾼은 마을에 가져다 팔 가죽을 가지러 별장에 들렀다 가기로 했다. 마을은 세리 산에서 대략 한 시간 이상을 걸어야 나오는 거리에 있었다. 평소 운동을 많이 하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지만 어딘가로 가기 위해 한 시간을 걸어본 적이 없던 단유는 이 행위가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확실히 현대 지구의 문명 속에 많이 젖어 든 단유였다. 반면 제토는―비록 단유와 동갑이라고는 해도―단유보다 훨씬 왜소하고 힘이 약해 보였지만 걷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는 것처럼 보였다. 원체 익숙한 일이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동갑내기가 있다는 사실에 들뜬 영향도 없진 않았다. 가는 동안 줄곧 이런저런 수다거리로 떠들어대던 제토가 지루해할 틈은 없었으리라. 커다란 가죽주머니와 소소한 사냥감 몇 개를 짊어지고 활과 활통, 그 외 몇 가지 도구들을 착용한 사냥꾼은 그저 묵묵히 앞만 보며 걸을 뿐이었다. 저런 아버지지만 제토가 이렇게 수다스러운 걸 보면 평소에는 말을 잘 받아주는 걸지도 모르겠다. 지금이야 단유가 대신 말을 받아주기에 저렇게 묵언 수행자처럼 걷고 있을 뿐이겠지만. “레이도르! 오늘은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아잘, 여기 이거나 좀 봐줘.” 사냥꾼, 레이도르는 아잘이라는 가죽 공장(工匠)에게 가죽 더미를 내밀었다. “레이도르. 자네의 무두질 솜씨는 훌륭하다니까? 그냥 우리 가게에 와서 일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사냥꾼에게 사냥 그만두란 소리는 욕이나 다름없어.” “욕이라니! 우리 가게에서 밥만 축내는 저놈들보다 낫다는 건데 욕이라니? 그럼 난 저놈들에게 무슨 소리를 해야 욕을 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단 말인가?” 아잘의 힐난에 뒤에서 얼쩡대며 가죽을 훔쳐보던 도제들이 움찔거리더니 가게 뒷문으로 우르르 빠져나갔다. 아잘은 혀를 차면서도 레이도르가 들고 온 가죽들을 살피고 값을 치렀다. “그건 뭔가?” “돼지 피.” “호오, 설마 저 돼지가 자네 거였나?” 아잘은 단유가 등에 짊어지고 있던 돼지를 가리켜 보였다. 레이도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잘은 감탄의 눈으로 돼지를 바라보았다. “요즘 저만한 덩치 잡기 쉽지 않을 텐데, 역시 레이도르야.” “운이 좋았어.” “암만 운이 좋기로서니 저렇게 가죽이 크게 상하지 않게 잡는 건 기술인 거지.” 역시 일류 사냥꾼은 뭐가 달라도 달라, 라며 레이도르를 칭찬한 아잘이 돼지를 팔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고깃값은 적당히 쳐줌세.” 아잘은 40디루(dirua)를 제안했고, 레이도르는 잠시 궁리하더니 43디루를 제시했다. “못 말리겠네.” 아잘은 웃으며 호주머니에서 3디루를 더 꺼내 레이도르에게 건넸다. 아무리 힘 좋은 단유라도 대략 100㎏이 넘을 돼지를 어깨에 메고 한 시간 이상을 걷는 것은 무리라 해도 좋을 일이었다. 신음소리나 엄살 한 번 피우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은 괜한 자존심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런 말을 할 시간에 좀 더 호흡에 신경을 써서 힘을 아끼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지켜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달랐던 모양이다. “수고했다.” 짤막하지만 감탄과 고마움이 담긴 레이도르의 치하에 단유는 그저 머쓱하게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제토 너도 사냥꾼이 되고 싶으면 저 정도는 해야 할 거다.” “나도 매일 운동한다고요.” “힘만 키운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럼요?” 레이도르는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민망했던 단유는 괜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냥꾼의 제 일 미덕은 인내다.” 주위의 풍경은 얼핏 보면 빈촌 마을을 보는 것처럼 아주 낡은 가옥들이 곳곳에 있었고, 더러 새로 지은 티를 내는 건물들이라도 구조는 예전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이렇게 보면 녹스가 엄청나게 발전한 도시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아, 발전한 도시구나.’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의 수만 따져도 이곳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곳은 ‘성’이지 않은가. 안전과 치안이 확립된 ‘성’은 일반 마을과 비교가 불가하다. 가죽 공방을 떠난 레이도르는 제토와 단유를 데리고 식당을 찾아갔다. 식당이라고 해서 외식을 전문적으로 하는 곳은 아니었고, 가끔 외지에서 오는 이들에게 가정식을 파는 정도였다. 본래 주업은 주점이었다. 알싸한 술지게미의 향이 깊게 베인 듯한 실내에 들어서자 탁자를 닦고 있던 사내가 북슬북슬한 수염을 자랑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레이도르! 너무 오랜만인데?” “에드, 인사치레는 됐고, 밥이나 줘.” 제토를 돌아보며 주문을 하자 주점 주인은 제토에게도 인사를 했다. 제토는 이를 드러내며 손을 흔들며 인사에 답했다. “옆에는 누구야?” 에드는 낯선 얼굴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나 모르게 아들을 주워왔을 리는 없고.” “…아들 친구야.” “친구?” 레이도르는 에드의 안내 없이 자리를 잡고 앉아 제토와 단유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에드가 호기심을 누르고 주방에 들어갈 때, 레이도르가 ‘맥주’를 한 잔 주문했다. “얼마나 머무를 건가?” “밥만 먹고 바로 돌아갈 거야.” “이런. 자네랑 술잔을 기울이고 싶어하는 친구들이 많이 아쉬워 하겠는데?” 레이도르는 제토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들 밥 먹이려면 열심히 일해야지.” “저녁에 술 한잔 마신다고 뭐가 문제려나?” “그래서 자네 아이들이 계속 밖으로 나도는 게지.” 에드의 북슬북슬한 털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웃음소리를 냈다. “먹고 살길 찾으려고 나가는 애들이야 당연히 장려해야 할 것 아닌가? 제토도 이제 다 컸는데, 말 나온 김에 술 한잔해 볼래?” 제토가 솔깃한 제안을 눈을 빛냈지만, 새까만 아버지의 눈빛에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우리 애는 내가 알아서 키울 테니까 자네는 신경 끄고 밥이나 가져와.” “이런 재미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혀를 차며 에드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혀를 다시던 제토가 아버지의 눈치를 보다 얼른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빠, 빨리 돌아가야 돼요?” “왜?” “이왕 온 김에 루치드한테 마을 구경도 시켜주고 그러면 좋잖아요? 루치드도 여기는 처음이니까 궁금하기도 할 테고.” 제토의 속셈이야 아버지뿐만 아니라 단유도 쉽게 눈치를 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 사냥꾼으로서의 기술을 배우고 싶어 하는 것도 있겠지만, 역시 사람 없는 산속에서 오랜 기다림을 익히는 것은 젊은 나이의 아이에게 쉽지 않은 일이니까. 레이도르가 단유를 바라보았다. 사실 레이도르 입장에서 단유를 어리다고만 볼 수는 없었다. 제르아 오마를 넘어왔다는 그의 주장도 믿을 수 없지만, 자신도 가볍게 들기 힘든 어미 돼지를 어깨에 지고 마을까지 한 번을 쉬자는 말 없이 묵묵히 따라왔다. 아들인 제토와 같은 나이라는데 힘은 이미 자신과 비등한 수준으로 보이니 경계를 풀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철없는 아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저 수상한 아이에게 친근감을 보인다. 물론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은 아니다. 그만큼 외롭게 자란 탓이리라. “루치드의 의견도 들어보지 않고 네 마음대로 결정할 셈이냐?” 결국 선택은 단유에게로 넘겨졌다. 어젯밤과 똑같은 선택지를 넘겨받은 셈이었다. 마을까지 확인했고 언어의 문제가 없으니 단유 혼자서라도 주변을 탐문해서 정보를 얻고자 하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단유는 그게 쉽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제르아 오마, 대산맥을 넘어온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함에 있어 레이도르가 단서를 걸었던 말이 있었다. ‘제토가 태어나기 전’, 그리고 ‘어릴 때’라는 조건은 지금 사람들이 잘 모를 수도 있다는 뜻이니 단유가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예상을 하는 데 무리가 없다. 그렇다면 일부러 먼 길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잠깐 구경하는 정도는 괜찮지만, 아저씨한테 방해가 되는 건 아닐까요?” 레이도르는 눈을 빛냈다. 어젯밤과 같은 선택을 내렸음을 간접적으로 알린 것이다. 아직까지는 단유가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조금 더 심력을 낭비해야 할 필요성이 있겠다. 하지만 눈을 보건대 자신의 아들에게 해를 끼칠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오늘은 모처럼이지만 집에 가서 청소나 해야겠다, 제토. 집 청소를 마치면 외출을 허락하마.” “진짜요?” 제토는 신이 난 얼굴로 이를 잔뜩 늘어 보였다. 아들의 활짝 핀 웃음꽃에도 레이도르는 웃지 않았다. 그 사이 에드가 가져다 놓은 맥주잔을 들어 입을 축일 뿐이었다. 레이도르의 집은 마을 변두리에 있었는데, 주점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집을 비울 때가 많아 무기나 비싼 것들은 없지만, 살림살이는 더 많이 갖춰져 있었다. “여기 동네 사람들은 다들 얼굴을 알기 때문에 도둑은 없어.” 단지 얼굴을 알기 때문에 도둑이 없다는 것보다는 이곳의 경제 자체가 남의 것을 탐낼 정도로 궁핍하지 않다는 데 있을 것이다. 도둑은 경제적 빈곤 때문에 발생하기도 하지만, 경제적 격차 때문에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거의 비슷한 수준의 경제 생활을 영위하는 소규모 공동체였다. 굳이 비교하자면 빈촌에서의 생활과 비슷하달까? “도와줄게.” “정말?” 레이도르는 도구들을 점검하기 위해 대장간으로 향했고 제토와 단유만 집으로 돌아왔다. “그냥 쌓인 먼지만 닦아 내면 되니까, 여기 쓸고 있을래? 내가 물을 길어 올게.” 제토가 물통 하나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단유는 볼을 긁적이다가 말했다. “아냐, 내가 물을 길어 올게. 힘이 더 좋으니까.” “아, 그렇지.” 제토는 단유의 팔뚝을 툭툭 두드린 뒤 씨익 웃으며 물통을 건넸다. “마을 우물은 나가서 오른쪽으로 가면 핀 아저씨네, 아, 그러니까 여기서….” “아까 오면서 봤어. 우물이 어디 있는지.” “아, 그래? 그럼 부탁해.” 단유는 물통을 들고 집 밖으로 나섰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마른 바닥에서 먼지가 일었다. 곧 겨울이 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 딱히 춥다는 느낌은 없었다. 지나는 사람들도 딱히 두꺼운 로브를 걸친 이가 없으니 이곳이 원래 따뜻한 지방이거나 아니면 오늘따라 유난히 더운 것일 수도 있겠다. 주변을 살필수록 단유는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존의 지구에서 지낼 때 배운 것들이 영향을 미친 것인지, 주변 사람들이 먹고사는 생활과 환경, 기후, 사회 규칙과 경제, 법 등이 모두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며 지내는 걸까? 어떤 규칙과 통제 속에서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는 걸까? 외부에서도 사람이 온다는데 그들은 어떤 목적으로 이 작은 마을을 방문하는 걸까? 우물가에 도착하니, 몇몇 아주머니들이 외줄에 바구니를 매달아 물을 뜨고 있었다. 뜻밖에 원시적인(?) 형태의 수원(水原)을 보니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하다못해 펌프 같은 것이라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한 가지가 더 궁금해졌다. 이 세계의 기술력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 [429] 바스크(5) 우물가에는 남자가 별로 없었다. 대부분 아주머니들이었고, 더러 나이 어린 여자아이들이 단유가 들고 온 것과 비슷한 크기의 통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단유는 적당히 눈치를 봐서 줄의 뒤에 서서 기다렸다. 갑자기 나타난 낯선 이에게 경계를 품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들이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나서서 자신을 소개할 단유도 아닌지라 어색함이 있었지만 단유는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이봐요.” 머리에 천을 두른 아주머니 한 분이 단유를 불렀다. “네.” “이것 좀 도와주지 않을래요?”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오르는 일이 여자들의 힘으로 쉽지 않다는 제스처로 어깨를 두드리며 부탁을 하는 아주머니였다. 단유는 흔쾌히 우물가로 다가갔다. 이왕이면 빨리 일을 처리하고 돌아가는 게 시선을 덜 받는 길이다. “아이고, 이 청년이 힘이 좋네.” 두레박이라고 불러야 할까, 우물에서 물을 긷는 바가지는 그렇게 크지 않아 물을 가득 채워도 들어 올리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단유의 기준에서였다. 단유는 부지런히 물을 가득 채운 두레박을 끌어올리기를 반복하여 기다리는 사람들의 물동이를 채워주었다. 쉴 틈 없이 반복되는 움직임에 사람들이 감탄하면서 물을 채운 뒤 줄을 비워 나갔다. 덕분에 긴 줄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여기요.” 붉은 색 머리를 한 젊은 여인이 볼을 붉히며 단유에게 물통을 건넸다. 그것은 단유가 들고 온 것이었다. “저보다 먼저 오셨던 것 같은데, 먼저 채우세요.” “고맙습니다.” 단유는 거절하지 않았다. 우선 자신의 것을 채우고, 그다음 젊은 여인의 물통을 채워주었다. “아, 됐어요. 더 채우면 무거워서 들기가 힘들어요.” 여인은 두 개의 물통을 모두 채운 뒤, 두 개의 물통을 이은 줄을 어깨에 걸고 양쪽으로 물통을 들어 올렸다. 단유가 보기에 어깨에 메인 줄이 여간 아파 보이는 게 아니었다. 녹스에서 오물 처리 아르바이트(?)를 할 때 썼던 지게 같은 것이라도 있다면 덜 하지 않을까 싶은데, 이곳에는 그런 도구가 없는 모양이었다. 여인은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단유의 시선이 부끄러웠던지 또 얼굴을 붉히며 슬쩍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수줍게 인사를 건넨 뒤, 눈치를 보다가 몸을 돌려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 아가씨가 우물에서 물을 긷기 위해 기다리던 마지막 사람이어서 단유도 두레박을 우물에 걸쳐 두고 나왔다. 그냥 줄을 뒤에서 기다렸다면 지금보다 더 늦게 물을 길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빨리 물을 가지고 돌아올 수 있었다. 엉성하게 만든 빗자루로 바닥을 쓸던 제토가 단유를 보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이 계속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어 단유의 가슴 한구석이 찌릿했다. “빨리 왔네? 사람들이 별로 없었나 봐?” “조금 있었는데, 금방 줄이 줄어들었어.” “그래?” 제토는 별다른 생각 없이 단유의 말을 받았다. 고개를 돌려 물질을 할 솔을 찾더니 단유에게 말했다. “이제 내가 할게, 넌 저기 가서 쉬고 있어.” 나름 배려를 해주려는 제토의 마음이 고맙지만, 어찌 그럴 수 있을까? “나도 도울게.” 괜찮다는 제토의 만류에도 단유는 또 하나의 솔을 집었다. 아주 어릴 때 자신의 집을 청소할 때 이런 식으로 했었던 기억이 났다. 어머니가 바깥에서 텃밭을 돌볼 때, 자신과 동생이 솔을 하나씩 붙잡고 바닥을 문지르며 청소했었다. 하지만 그 기억도 너무 오래된 것인지 가물가물하고 흐릿해서 했다는 정도의 기억 외에는 남는 게 없었다. 심지어는 동생의 얼굴도 생각이 잘 나질 않을 정도. 얇은 나무판을 덧댄 마룻바닥이 반질반질해질 정도로 문질러댔더니 물이 마르며 나무판 특유의 적갈색 윤기가 보이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아버지도 와서 놀라겠는걸?”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제토가 히죽 웃어 보였다. 단유에게서 솔을 받아 정리한 뒤,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럼 이제 나가서 놀아볼까?” 단유는 간단하게 그러자고 대답했다. 이윽고 두 사람이 집을 나와, 가장 먼저 간 곳은 동네의 광장이었다. 본래 고향 마을이었던 빈촌에서도 마을 중앙의 공터를 ‘광장’이라 부르며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특히 그곳은 마을의 중앙 우물이 있는 곳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 마을의 중앙 광장은 공터 주변으로 상점들이 모여 있었다. 상점가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아 그냥 소규모 가게들이 모인 거리 정도라 부르는 게 적당하겠지만, 아무튼 주변에 비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 가장 번화한 곳이기도 했다. 그렇게 보면 마치 녹스의 상점가를 연상케 하기도 만든다. 하지만 녹스의 중앙 대로를 기준으로 양쪽으로 온갖 길드의 상점들이 늘어선 것에 비하면 이곳은 아파트 상가 정도 수준이었다. 그것도 소규모 아파트 단지 수준이랄까? 그래도 이 근방에서 가장 활발한 움직임이 보이는 곳이기는 했다. 무엇보다 집에서 쉽게 보기 힘든 것들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게 흥미를 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잡화점으로 보이는 가게는 인기가 좋아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지나가며 슬쩍슬쩍 눈길을 주곤 했다. “와, 이것 봐.” 제토가 상점 가판대 근처에 다가가 손을 가리켰다. 단유가 바라보니, 구슬처럼 반짝이는 사탕이었다. “예전에 한 번 먹어본 적이 있는데 되게 맛있었어.” 지금도 침을 꿀꺽 삼키는 모양이 여간 탐이 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제토, 먹고 싶으면 먹어. 3딜루아(dilrua) 밖에 안 하는데.” 상점 주인이 제토의 얼굴을 알아보곤 투실투실한 턱살을 흔들며 웃음을 지었다. 제토가 금세 시무룩한 얼굴로 주인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아저씨, 일부러 그러시는 거죠? 아빠가 알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어쩌겠니? 그래도 그 양반이 아들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건 우리 마을 사람들이 다 아는 건데.” “그렇게 이용하려는 놈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더라? 피만?” 제토의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상점 주인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모두들 자네 술값을 대느라 허덕댔었지.” 레이도르가 팔짱을 끼고 상점 주인을 무심히 바라보자, 상점 주인은 여전히 웃는 모습으로 손짓했다. “그러지 말고 오랜만에 왔는데 술이나 한잔하자고. 자네 오늘 돈 좀 벌었다며?” 작은 동네라 소문이 빠르다. 누가 얼마를 벌었는지도 알려질 정도면 거의 비밀이 없는 동네라 해도 무방하리라. “내가 이래서 이 동네가 오기 싫은 거야. 보는 사람마다 술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라도 있는지.” “허허, 참. 그러니 친구 아닌가.” 친구라고 하기엔 나이 차가 있어 보인다만, 어른들의 세계는 아이들과 다른 법이니까. 레이도르가 단유와 제토를 돌아보며 물었다. “뭐 사고 싶은 거라도?” 제토가 우물쭈물 거리며 가판대 위의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과연 사줄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탐나는 것들은 많았다. 사탕뿐만 아니라, 허리에 매다는 고리라든가 특이한 자수가 놓인 수건이라든가, 겨울을 대비해 팔에 씌울 수 있는 토시 같은 건 꼭 필요할 것만 같았다. 제토가 망설이는 사이 레이도르가 단유를 향해 시선을 던지자, 단유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신세를 더 지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필요한 것도 없었다. “괜찮다. 오늘 어미돼지 값에는 네 몫도 있으니까.” 이를테면 짐삯이랄까? “아뇨, 그건 아까 밥값으로 퉁쳐도 되겠는데요.” “퉁쳐? 크크.” 상점 주인이 옆에서 듣다가 웃음을 흘렸다. “어린놈이 표현이 기가 막히구먼. 계산이 정확한 친구 같은데, 누구지?” 레이도르는 주점에서 그랬듯, ‘아들 친구’라고 설명했다. “이런 친구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그 물음에는 믿어도 되는 사람인가, 라는 물음이 같이 섞여 있었다. 레이도르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아직까지는 어떤 대답도 섣불리 하기 어렵다는 뜻. 그 사이 제토가 가판대 위의 것들 중 하나를 조심스럽게 집어 보였다. “아저씨. 이건 얼마예요?” 제토가 집어 든 것은 팔꿈치에 끼는 보호대 같은 것이었다. “그런 건 여기보다 아잘에게 가서 사는 게 더 낫다.” “무슨 소리야? 이건 아잘 그 친구도 탐내는 물건이라고.” 피만은 역정을 내며 제토의 손에서 보호대를 뺏어 레이도르의 눈앞에 들이댔다. “이게 밖에서 얼마나 귀한 줄 알아? 나도 겨우 구한 거라고. 다 우리 동네 사람들을 생각해서 어렵게 구한 건데 말이야. 여기 이거 보여? 이게 완충 작용을 해서 갑자기 바닥에 넘어져도 팔꿈치를 완벽하게 보호해준단 말이야. 그리고 바깥에 이거 보이지? 이게 평소에는 이렇게 물렁물렁한 가죽처럼 보여도 쉽게 찢어지지 않고 단단하기 때문에 공격용으로 사용해도 제품에 무리가 안 가게 해준다 이 말이야. 아잘의 가죽이라면 금방 찢어지고 말걸? 게다가 여기 이 끝을 조이면 보호대가 쉽게 벗겨지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해주는 역할도 한다고.” “고작 팔꿈치 보호대에 그런 불필요한 기능들이 필요한가?” “허, 이것 참. 이 봐. 자네야 워낙 몸을 돌보지 않고 막 굴리는 인간이니 그렇다 쳐도, 보통 사람들은 조심해야 하는 곳이 바로 관절이라고. 특히 산에서 잘못 굴렀다가 쉽게 다치는 곳이 어딘가? 바로 여기, 팔꿈치 아닌가?” 단유는 주인의 어설픈 논리와 쉽게 흔들리지 않는 레이도르의 뚝심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제토를 구경하다, 혹시나 해 자신도 가판대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무엇하나 조악하기 이를 데 없고, 딱히 필요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특히 현대에서 살던 단유에게 이런 조악한 품질의 물건들은 그 사용처를 떠나 욕심이 나질 않았다. “얼만데?” “1디루, 아니 특별히 자네니까 80딜루아에 쳐줌세.” 그렇게 들으니 꽤 비싸다. 아까 주점에서 한 끼 식사가 12딜루아였는데, 무려 6끼분의 가격이다. “갖고 싶냐?” 제토는 아빠의 물음에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상점 주인이 혀를 차며 팔짱을 꼈다. 눈 아래의 희미한 흉터가 꿈틀거리는가 싶을 때, 레이도르가 입을 열었다. “오늘 술값은 이걸로 내게.” 언제 들고 있었는지, 1디루의 동전을 주인에게 던진 레이도르였다. 주인이 반색하며 공중에 뜬 동전을 낚아채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지. 오늘은 내가 술 한잔 사는 날이네.” 그러면서 제토에게 팔꿈치 보호대를 건넸다. “자, 받아라. 너희 아버지가 오늘 기분이 좋으신가 보다.” 제토는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제토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것을 본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오늘 너도 네 몫을 잘 하지 않았느냐. 그건 오늘 네가 번 돈으로 산 거다.” “고맙습니다! 아빠!” 제토는, 그제야 방긋 웃으면서 주인의 손에서 보호대를 뺏어 들었다. “너희들끼리 놀다 들어가거라. 아빤 친구들이랑 이야기 좀 나누다 들어가마.” “너무 많이 마시지 마세요.” “걱정하지 마라.” 그 자리에서 바로 발길을 돌리는 레이도르를 지켜보던 제토가 뒤돌아서며 물었다. “우리도 가자.” “어디로?” “저기로 가면 애들이 많이 모여 있을 거야.” “애들?”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마을의 규모로 보면 못해도 몇백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을 마을인데 아이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게 이상하다 싶었다. “대부분은 놀이터에서 지내니까.” ‘놀이터’라고 말한 제토의 단어 선택이 올바르게 이해된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단유의 기준에서 놀이터란 미취학 아동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을 의미하고 미끄럼틀이나 시소, 그네 등의 소소한 놀이기구들로 채워진 곳을 말하는데, 그런 곳이 이곳에 있을 턱이 없으니까. 하다못해 녹스에서도 아이들은 그저 거리를 뛰어다니거나 혹은 성벽 근처에서 술래잡기하는 정도의 놀이 문화만이 존재했었다. 제토를 따라간 단유는 금방 놀이터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을 바깥의 작은 둔덕에 풀도 자라지 않는 공터가 있었는데, 그 공터에서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척 보기에 예닐곱 살 정도로 보이는 애들부터 제토 또래의 아이들까지 두루 섞여 모인 형국이었다. 조악한 나무 막대기를 들고 편을 갈라 칼싸움을 하는 아이들은 주로 남자아이들이었고, 두세 명 정도의 여자아이들은 공터의 변두리에서 주저앉아 바닥에 뭔가를 끄적이며 자기들끼리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제토!” 아이들 중 한 명이 손을 번쩍 들며 제토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야울!” 야울이란 불린 이들뿐만 아니라 곁에 모인 아이들도 제토를 보며 환영했다. “제토! 완전히 돌아온 거야?” “아냐. 잠깐 일이 있어서 온 거야. 아마 내일 다시 돌아가야 할 거야.” 아이들은 오랜만에 만난 기쁨을 나누며 회포를 풀다, 제토의 뒤에 선 덩치 큰 단유에게 시선을 주었다. “누구…?” “아, 인사해. 내 친구, 루치드야.” 친구? 그 단어에 의아함을 느끼던 아이들에게 제토가 히죽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랑 동갑이야. 15살.” 아이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져갔다. ======================================= [430] 기하학개론(1) 간단한 소개를 나눈 뒤, 아이들은 제토에게 같이 놀 것을 제안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대장 시켜 줄게.” “정말?” 제토가 반색을 하며 좋아하다 옆에 선 단유의 눈치를 보았다. 척 봐도 두 편으로 나눠서 노는 중인데, 무리의 대장을 시켜주겠다고 하니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단유가 끼기에는 뭔가 어울리지 않았다. 당장 모인 이들 중에 단유보다 키가 큰 아이가 없다는 것도 그렇고, 마치 초등학생 노는 곳에 어른이 끼어드는 형국 같아 단유는 정중히 거절했다. “난 저기서 구경하고 있을게.” ‘놀이터’에 들어올 때부터 눈에 들어오던 아이들을 가리켰다. 대략 20명 정도의 아이들이 공터의 가운데에 몰려 있는 반면, 저 네 명의 여자아이들은 공터의 끝에 모여서 방해하지 않으려는 모양새였다. 즉, 단유도 아이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저쯤에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심심할 텐데….” 제토가 미안한 듯 물었다. 애초 핑계가 단유에게 마을 구경을 시켜 주겠다는 것이었지만, 결국 핑계였을 뿐 오랜만에 찾아온 마을에서 놀고 싶어 한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괜찮아.” 어차피 마을도 볼 만큼 봤으니, 제토에게 시간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구경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을 것 같았고. 곧 아이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서 나무 막대를 들고 마주 섰다. 흡사 패싸움이라도 벌일 것처럼 진지한 얼굴로 대면했지만, ‘너희들을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겠다’ 같은 발연기를 펼치며 칼싸움을 하는 시늉만 할 뿐이었다. 이미 약속된 시나리오에 따라 한쪽 편이 밀리는 형세를 취하고 곧 패퇴하는 적들을 쫓아 승리를 거두는 모양새로 놀이가 일단락되었다. 그러고 나면 다시 상대에게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져주는 역할을 맡아 받아주는, 일종의 역할극이 그들의 놀이의 정체였다. 단유는 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는 이들에게 다가갔다. 둘은 지선이보다 더 어려 보였고, 한 명은 지선이 정도, 한 명은 지선보다 두 어살 많아 보였다. 하지만 제토의 경우(?)에서 봤듯이 외모와 나이가 지구와는 다른 면이 있어 확신할 순 없었다. 단유의 접근에 아이들은 호기심과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단유는 그들의 놀이에도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멀찍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공터 바깥은 얕은 둔덕이 있고, 마른 풀들이 듬성듬성 나 있었는데 앉아서 구경하기 좋은 관람석 역할을 했다. “누구야?” 어린 꼬마 여자 아이 하나가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물음을 던졌다. 색 바랜 슈미즈에 헐렁한 튜닉을 걸치고 짧은 망토를 입은 아이였다. 솔직히 말해서 공터에 모인 이들 중 이것과 다르게 입은 이가 별로 없었다. 사이즈와 색의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이 튜닉과 망토를 걸치고 있었는데, 다른 점이라면 여자아이들은 치마를 입었고, 남자아이들은 바지를 입었다는 점이었다. 또 몇몇 아이들은 두꺼운 망토로 추위를 견디지만, 몇몇은 바람에 흩날리는 얇은 망토를 어깨에 걸치고만 있을 뿐이어서 방한(防寒)성에 의심이 갔다. “루치드. 제토 친구.” “산에서 살아?” 제토가 늘 산에 있다 보니 그런 추측을 할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른 곳에서 사는데 우연히 오게 됐어.” “다른 곳, 어디?” 또 다른 아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멀리 있는 곳이라서 잘 모를 거야.” “혼자 다니는…거예요?” 이번에는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자아이가 수줍게 볼을 붉히며 물었다. 아니 어쩌면 수줍어서가 아니라 단지 차가운 바람에 볼이 홍조 현상을 보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네.” “혼자 다니면 무섭지 않아요? 바깥에는 도둑도 많고 살인자도 많다던데.” 단유는 어색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물론 무서워할 리 없지만, 이곳의 바깥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쉽게 대답하긴 어려웠다. 단유의 대답이 없자 여자아이들도 더는 물어볼 말이 없는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눈치를 봤다. “뭐해요?” 단유는 반쯤은 호기심으로, 반쯤은 화제를 돌릴 요량으로 물음을 던졌고 얼굴에 홍조가 띈 여자아이가 수줍게 대답했다. “먹고 싶은 음식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한창 클 나이라 식욕이 남다르겠지만, 주변 여건상 넉넉히 먹을 수 있는 형편은 아닌지라 이렇게 자기들끼리 모여 먹고 싶은 음식들을 이야기하며 수다를 떠는 게 낙(樂)인 모양이었다. “저는 딸기 파이가 먹고 싶어요.” “저도요, 예전에 밭에 딸기가 많이 났을 때 먹은 적이 있었는데 정말 맛있었어요.” “저는 달걀이 많이 들어간 오믈렛이요.” 다시 자기들끼리의 이야기에 빠진 여자아이들을 보다 단유는 고개를 들어 남자아이들을 보았다. 번갈아가며 이겨주고 져주는 놀이에 흠뻑 빠진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이 막대기를 휘두르면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는 가운데 하늘에 붉은 비단이 깔리기 시작했다. **** “자네 오늘 큰 건수 올렸다면서?” 레이도르의 어미 돼지 사냥은 사실 말처럼 쉽게 얻기 어려운 성과였다. 레이도르는 겸양을 표하는 대신 잔을 들어 올려 사람들의 환호성을 끌어냈다. “역시 레이도르는 천성이 사냥꾼이었어.” 한 친구의 주장에 다른 친구들이 동조했다. “그럼, 그럼. 레이도르가 활은 기가 막히게 쏘잖아.” “처음부터 사냥꾼으로 갔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레이도르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어디 레이도르만 그런가? 우리도 젊었을 때는 다들 헛바람이 들어 방황했었지 않은가? 당장 저기 아잘만 해도 그렇지.” “갑자기 내 이야기는 왜 꺼내고 그래? 부끄럽게.” “아잘 저 친구가 학자가 되겠다며 마을을 나갔을 때 동네 어른들이 혀를 차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네.” 친구들이 탁자를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카운터에서 맥주를 따르던 에드도 키득대느라 맥주잔에 거품이 넘칠 정도였다. “평생 책 한 번 본 적이 없는 놈이 왜 갑자기 학자가 되겠다고 했는지 아직도 의문이야. 아잘?” “묻지 마. 그런 건 조용히 묻어두라고.” “이제 이야기해 주면 안 되겠나? 레이도르야 워낙에 몸이 날래고 힘이 좋으니까 기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는 그나마 이해라도 했지만 말이야, 자네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고.” 오래도록 무두질을 하느라 손에서 가죽 냄새가 떠나질 않는 아잘이 붉어진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렸잖아? 어려서 꿈도 못 꾸나?” “터무니없으니까 하는 소리지.” 친구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아잘이 잔을 기울였다. 입가를 닦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들 기억하려나 모르겠는데, 그때 우리 마을에 왔던 이야기꾼이 있었잖아?” “아, 있었지. 근데 그건 한참 전이잖아?” “어쨌든. 그 양반이 놀이터에서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흔들리지 않은 사람 있었나?” 이야기꾼은 바깥으로 나갈 기회가 없던 동네 꼬마들에게 바람을 집어넣었다. 전장을 누비던 전설적인 용병의 이야기와 도시의 온갖 고충들을 해결해주던 현자의 이야기, 한 나라의 젊은이들을 상사병에 빠뜨린 무희의 이야기와 나라를 망하게 한 늙은 왕의 이야기 등 다양한 소재와 주제로 이야기를 전했다. 당시 어렸던 이들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다양한 세계와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품었었다. “내가 들은 것 중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어떤 귀족의 이야기였지. 병사들에게 줘야 할 군량을 빼돌려서 착복하던 귀족이 비밀이 밝혀져서 처형당했다는 이야기 말이야.”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왜?” 아잘은 여전히 쑥스럽다는 듯 탁자를 손톱으로 긁으며 말했다. 그의 손톱 아래에는 가죽 때가 끼어 시꺼멓게 변해 있었는데, 때를 지우려고 아무것에나 손톱을 긁어대는 습관이 있었다. “그때 그 귀족의 착복을 밝힌 게 어떤 현명한 학자의 힘이었다지 않던가?” “그랬나?” 오래된 이야기여서 기억하는 이가 드물었다. 하긴 짧은 시간에 워낙 많은 이야기를 남겼던 이야기꾼이었고, 인상적인 이야기들이 다들 달라서 기억을 못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다른 사람이 숨기려던 비밀도 쉽게 밝혀내는 학자라는 게 대단해 보였지. 그래서 학자가 되고 싶었고.” “뭔가 밝히고 싶은 비밀이 있었나 보군.” 한 친구가 말하자 아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사 하는 말이지만, 르네의 남자친구가 누군지 궁금했거든.” 그러자 다들 시선이 레이도르에게로 쏠렸다. 레이도르는 무심히 잔을 들이킬 뿐이었다. “하긴 당시에 르네를 좋아하지 않는 남자가 없었지.” “그런데 그런 르네의 마음도 모르고 누구는 마을을 나가서 기사가 되겠다고 했으니….” 레이도르는 탁 소리 나게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지나간 얘기는 그쯤 하지?” “제토가 르네를 많이 닮았어.” 아잘이 한마디 하자, 숨죽여 웃는 소리가 났다. “제토가 르네를 닮은 게 다행이지. 저 친구를 닮았으면 지금쯤 제토는 생을 비관했을 거야.” 또 피식하며 실소를 터뜨리는 소리가 났다. 레이도르는 무뚝뚝한 얼굴로 맥주잔을 바라보다가 대꾸했다. “내 아들이 아잘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게 된 것이 다행이지.” 사람들이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레이도르에게 잔을 내밀며 건배를 제의하고 아잘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등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잠시 후, 에드가 새로운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런데 레이도르. 아까 그 젊은 아이는 어떻게 된 건가?” 제토가 단유를 데리고 다니며 마을을 구경시켜줄 때 그 아이를 본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다들 호기심을 갖고 있던 차에 에드가 가려운 곳을 긁어준 셈이라 눈을 빛내며 레이도르의 대답을 기다렸다. 레이도르는 심란하다는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우연히 만났어.” “우연히?” 레이도르는 어차피 친구들도 알고 있는 게 좋을 거로 생각해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세리산 입구에서 쓰러진 이를 구했다는 이야기와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까지. 하지만 ‘아스크리토스’라는 지명, 제르아 오마를 넘어왔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믿기 힘든 이야기였으니까. “그래서 계속 경계를 하고 있었던 것이군.” 레이도르가 신중한 친구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지나치게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덩치는 커도 어리지 않나? 그렇게 경계할 필요가 있을까?” 레이도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 애가 힘이 좋거나 한 건 문제가 아니야.” “그럼?” 레이도르는 맥주잔을 들고 마실 듯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무 침착해.” 아이답지 않은 침착함과 어른들만이 가지는 특유의 통찰력이 엿보이는 아이였다. 그의 말대로 혼자 이곳에 왔다면, 어른이라도 불안한 마음이 겉으로 드러날 텐데 전혀 그런 불안함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사냥을 할 때도 따로 지시를 내리지 않았건만 말없이 보조를 맞추던 모습을 보면 사냥을 배웠거나 혹은 눈치가 남다른 아이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럼 제토랑 둘만 놔두면 위험한 건 아냐?” 레이도르는 고개를 저었다. “위험하진 않은 것 같다.” ‘위험’이 보이지 않더라도, ‘수상’하다는 것만으로도 경계하는 마음을 갖기에 충분했다. **** 집으로 돌아오던 제토는 기분이 좋은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보랏빛 하늘을 등에 지고 돌아온 제토는 물청소를 할 때 물을 다 써서 물을 새로 길어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는 네가 갔다 왔으니까, 이번엔 내가 갔다 올게. 넌 쉬고 있어.” 단유는 대답 대신 물통을 들었다. “내가 갔다 올게. 하는 일 없이 계속 신세만 지는 건 너무 미안한 일이야.” “신세는 무슨 신세라고. 됐어. 그냥 쉬고 있어.” 하지만 단유도 고집을 꺾지 않았고, 결국 두 사람은 같이 우물가로 가기로 했다. 사람이 늘었으니 물도 많이 필요할 거란 생각에 제토도 물통을 하나 들고 나섰다. 사실 힘으로만 따지면 단유가 물통 두 개를 들어도 상관은 없겠지만, 제토는 단유에게만 일을 맡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물가에 다다르니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 줄을 서 있었다. 오후와 달리 이번에는 남자들도 몇몇 서 있었다. 제토를 보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유를 보고 경계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친구예요.” 단유를 소개하는 제토의 얼굴이 밝았다. “아, 아까 봤던 그 청년이구만? 그런데 친구라고?” 말을 꺼낸 이는 낮에 단유가 우물물을 대신 길어줄 때 물을 받아갔던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저 청년 힘이 좋던데?” 물통을 바닥에 내려놓고 순서를 기다리던 남자들의 시선이 단유에게로 향했다. ======================================= [431] 기하학개론(2) 궁금해하는 제토에게 단유가 간단히 오후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제토는 과연, 이란 눈치로 단유의 가슴을 주먹으로 툭툭 치며 입꼬리를 늘렸다. “친구가 힘이 좋아요. 어미 돼지도 혼자 업고 왔는걸요?” 사람들이 놀라는 모습을 보며 제토가 좋아하고 있을 때, 단유는 긴 줄을 보며 물었다. “혹시 마을에 우물이 하나야?” “응. 좀 많이 붐비지?” 빈촌 정도의 규모라면 우물 하나로도 충분하겠지만, 이 마을은 빈촌의 몇 배는 더 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우물 하나로 모든 사람들이 식수와 허드렛물을 해결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매번 이렇게 긴 줄을 서서 물을 받는다는 것도 현대인으로서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다못해 물이라도 빨리 뜰 수 있다면 좋겠지만, 팔심이 약한 여자들이 들고 온 물통을 채우려면 시간이 꽤 걸릴 일이었다. 지금은 그나마 남자들이라도 있어서 먼저 온 이가 팔을 걷고 물을 길어주고 있는 형편이니 좀 나은 편이겠지만, 그마저도 사람이 많으면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문득 단유는 우물 위에 어떤 이미지가 겹쳐지는 그림이 그려졌다. 아마 교과서에서 봤을 것 같은 그림인데 이 우물에도 그 ‘장치’가 있다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장치를 만들 도구도, 기술도 없고, 딱히 부탁할 사람도, 명분도 없다. 그저 편리함을 추구하고 이용하던 습관이 만들어낸 상상에 불과했다. 물통을 들고 집에 도착할 때 즈음, 단유는 제토에게 제안했다. “재밌는 거 하나 만들어보지 않을래?” “재밌는 거?” 레이도르가 없었지만, 그가 친구들과 함께 주점으로 가기 전에 저녁으로 먹을 빵과 치즈를 사 놓고 나간 터라 제토는 따뜻한 수프만 만들어서 저녁을 해결할 수 있었다. 저녁을 먹는 사이 제토는 물었다. “어떤 건데?” 단유는 지금까지도 머릿속에서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는 아이디어들을 살짝 알려주었다. “물을 쉽게 뜰 수 있게 돕는 기구, 랄까?” “그런 게 있어?” 단유는 빵 일부를 뜯어내 수프에 찍었다. 빵이 수프를 빨아들이며 촉촉해지면 입으로 가져가 오물거렸다. “원래는 좀 복잡한데, 간단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어떻게 하는 건데?” 자급자족이 기본인 생활이다. 물론 잡화점이나 공방에서 물품을 살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직접 만든다. 의자, 식탁은 물론이고 문이나 그 외 가구들도 직접 만들어 쓴다. 뚝딱거리며 무언가를 만드는 건 아이들의 시선에서 신기하고 재밌는 일과 중 하나였지만, 아직은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나이였기에 그 재미를 온전히 느낄 수 없었다. “우선 나무가 필요해. 나무를 벨 도구가 필요하고, 고정할 못도 필요하고, 그러면 망치도 있어야겠고….” 제토는 단유의 설명을 듣다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못?” 아이들이 직접 ‘제작’에 손을 대지 못하는 이유는 열거한 도구들을 만질 권한이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제토 정도의 나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아직 제토도 뭔가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어서 직접 해본 적이 없었던 때였다. 제토는 마침 아버지도 없는 틈에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나이인데도 단유는 제작 경험이 많은 것 같은데 자신이 한 번도 없다는 걸 알면 비웃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이게 자신의 첫 제작 도전기라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괜히 들뜬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아버지가 쓰던 도구들을 들고 왔을 때, 단유는 그 도구들을 보면 살짝 미간을 좁혔다. 척 봐도 쓸만한 게 없었다. 무엇보다 톱이 없었다. 도끼, 칼, 망치가 다인데 전부 제작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사냥용이었다. 단유는 일단 도구보다 자재가 우선이라고 생각해 제토에게 물었다. “보니까 곧은 나무가 별로 없던데, 곧은 나무는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제토는 냉큼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로 가면 곧은 나무들이 많아.” “그럼 저녁 먹고 가보자. 우선은 가서 봐야 알 거 같아.” “알았어.” 식사 시간이 짧아졌지만, 제토는 기분이 좋았다. 제토가 알려준 곳에는 꽤 곧은 나무들이 많았다. 처음 세리 산 근처에서 나무를 봤을 때, 곧은 나무가 별로 보이지 않아서 걱정했던 것과 달리 이곳은 평소 알던 것들과 유사한 모양의 나무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중에서 단유는 적당한 굵기의 나무를 찾을 수 있었다. 시간이 더 많다면 천천히 돌아다니며 더 좋은 나무를 고르겠지만, 이미 해가 거의 저물어 컴컴해진 마당에 더 돌아다니기가 어려웠다. 단유는 다른 한편에서 단유가 알려준 굵기의 나무를 찾고 있는 제토를 슬쩍 본 뒤, 다시 눈앞의 나무를 바라보았다. 원래는 톱이든 도끼든 이용해서 나무를 베어낼 생각이었지만, 제토가 보여준 것들을 보고는 마음을 바꿨다. 뭉툭한 날의 도끼를 쓰는 것도 곤란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도구를 사용하는 것도 안전하지 않다고 여긴 단유는 이곳으로 오는 동안에 머리를 굴려 방법을 찾고 있었다. 확실히 사람은 필요성을 느껴야 생각을 하는 법인가보다. 평소에도 나름 생각을 많이 하는 단유였지만,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그래서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방법을 떠올렸다. ‘압력과 힘은 정비례하지. 압력이 높을수록 힘도 커지겠지.’ 평소에는 바람이 적용되는 공간의 단위 면적을 넓게 잡는다. 하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공간을 최소한으로 줄여도 가능하리라. 공간을 줄이고 줄이되, 풍력을 유지하면 단위 면적에 작용하는 힘이 세지지 않을까? ‘즉, 공기를 압축해서 한 방향으로 분사시켰을 때 그때의 힘은 과연 어느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 것인가?’ 정육면체로 그려지는 공간을 위에서 누르면 그 안의 공기는 압축이 될 것이다. 이론적으로 공간의 압축은 이차원적인 ‘선’에 수렴할 수 있으니, 이때의 압력은 어마어마하리라. 그렇다면 그 힘으로 나무를 베어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차원적 벡터의 작용을 계산하여 바람을 ‘쏘아낸다’는 식으로 계산했더니 결괏값이 너무 터무니없는 숫자에 다다른다. 만약 이대로 마법을 구현했다가는 감당 못 할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히려 위력을 줄여야 했다. 압축은 그대로 하되, 면적을 줄여 힘을 약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마법을 구현하는 계산을 한 뒤에야 단유는 안심하고 마법을 구사할 수 있었다. 나무가 쿵 하고 쓰러지는 소리를 낸 뒤에야 제토는 단유 앞에 있던 나무가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 그 전에는 나무를 꺾거나 흔들거나 쪼개는 소리가 전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단유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시치미를 떼자, 제토는 나무에게로 시선이 옮겨졌다. “세상에.” 나무는 지름이 대략 10㎝ 정도였는데, 그렇게 얇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무식하게 굵은 나무도 아니었다. 다만 나무가 꽤 길어서 앞뒤로 한 사람씩 들어야 들고 가는 게 가능해 보였다. “이거면 돼?” “응. 가자.” 손쉽게(?) 재료를 구해서 집으로 향하는 두 사람이었다. “내가 할게.” “조심해.” 제토는 손을 비비며 도끼를 잡은 뒤, 자세를 잡고 신중하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힘껏 아래로 내려쳤더니, 도끼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옆으로 튕겼다. “아야!” 나무를 잘못 겨냥해서 손에 반동이 심하게 왔는지 제토는 도끼를 던지듯 떨쳐내고는 손바닥을 오므렸다 폈다 반복했다. “괜찮아?” 단유가 걱정스레 다가오자 잠시 입을 다물고 고통을 참아내던 제토가 손바닥을 뻗어 단유의 접근을 막았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제토는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다는 얼굴로, 바닥에 널브러진 도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비장한 눈빛으로 호흡을 가다듬은 뒤, 다시 한번 도끼질을 했다. 결국 서너 번을 더 반복한 뒤에야 나무에 제대로 홈을 남길 수 있었고, 그 뒤로 열 번을 넘게 휘두른 뒤에야 나무를 둘로 나눌 수 있었다. “어때? 괜찮지?” “응.” 단유는 적당한 길이로 잘렸다는데 만족했다. 그 작업을 한 번 더 해서 전체적으로 나무를 셋으로 나눴다. “넌 이 나무의 가지를 다듬어. 난 이쪽을 맡을게.” “응.” “칼 조심하고.” “내가 칼은 잘 쓰거든? 걱정하지 마.” 제토는 조금 전과 다르게 자신감이 넘친다는 듯 가슴을 툭툭 치고는 칼을 고쳐잡았다. 제토가 나무를 조심스럽게 다듬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단유는 자신이 맡기로 한 나무를 다듬기 시작했다. 비록 칼을 들긴 했지만, 칼을 쓸 생각은 없었다. 적당히 눈치를 보면서 마법으로 다듬었더니, 다듬는 건 금방이었다. 게다가 이 나무를 기둥으로 삼을 생각이어서 땅에 박기 편하게 한쪽을 뾰족하게 다듬기까지 했다. 남은 또 한 나무에도 똑같은 작업을 했음은 물론이다. 제토가 땀을 뻘뻘 흘리며 나무를 다 다듬고 난 뒤, 뒤를 돌아보았을 때 단유는 이미 자신의 할당량을 소리 없이(?) 마친 후 바닥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 “뭐야?” 단유는 제토가 작업을 마친 것을 확인하고 그를 불렀다. “이렇게 만들 거야.” 제토는 단유가 보여주는 그림과 설명을 듣고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원래는 이렇게 생긴 게 달려야 더 좋은데 지금은 없으니까 임시변통으로 이렇게 쓰려는 거야.” “그래서 저걸 만든 거야?” “응.” “너 정말 못 만드는 게 없구나?” 제토는 놀랍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걸 저 칼로 만들었다고?” 단유는 또 한 번 어깨를 으쓱거려 보인 뒤, 직접 칼을 들어 제토에게 보여준 것을 또 하나 만들어냈다. 칼이 부드럽게 움직이는데 마치 저절로 나무가 깎여 나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제토의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단유와 제토는 그것들을 들고 우물가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우물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제토는 단유의 지시에 따라 작업을 도왔다. 달빛에 의지해 작업을 이어나가는 제토는 힘들지만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다는 듯 입꼬리가 내려올 줄 몰랐다. 다음 날, 새벽에 우물가로 온 한 아주머니는 우물가에 세워진 낯선 기구에 의아함을 느꼈다. “저게 뭐래?” 우물 양쪽에 단단히 세워진 기둥이 있고, 그 기둥에 수직으로 연결된 또 하나의 기둥이 우물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가로로 연결된 기둥에는 무언가가 달려 있었는데, 하나는 단순히 밧줄이 묶여 있을 뿐이었고, 기둥의 정 가운데쯤에는 동그란 장치가 밧줄에 묶여 달려 있었다. 그 동그란 장치에 밧줄이 감겨 한쪽은 우물 안으로 들어가 있었고, 다른 한쪽은 우물 바깥의 한 기둥에 묶여 있었다. 그냥 묶인 게 아니고 또 이상한 장치에 감겨 있었다. “뭐야? 누가 우물에다 장난을 쳐 놓은 거야!” 아주머니는 화를 냈다. 그녀가 보기에는 마치 물을 뜨지 못하게 하려고 줄을 묶어놓은 것처럼 보인 탓이었다. “아, 안 늦었네.” 그때 아주머니 뒤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나타난 것은 제토였다. “뭐야? 제토 아냐? 니가 이렇게 해 놓은 거야?” “네.” “나 참. 오랜만에 집에 왔다더니 왜 이런 짓을 한 거니! 너희 아버지는 대체 뭐하시고!” 제토는 아주머니의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서둘러 움직였다. “이브 아줌마. 이건요, 물 뜨기 편하게 하려고 만든 거예요.” “이게?” 믿을 수 없다는 아주머니에게 제토가 직접 시범을 보였다. “여기 이게 손잡이거든요? 이걸 잡고 이렇게 돌리면요.” 제토가 나무 기둥에 달려 있던 장치를 조작하자, 밧줄이 돌돌 말리면서 우물 속의 물통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소리만 나서 무언가 싶었는데 우물 속에서 커다란 두레박이 손쉽게 끌려 올라오는 것을 보고 아주머니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된 거니, 이게?” 마치 무슨 기적을 보는 것 같았다. 한 손으로 손잡이를 돌릴 뿐이었는데 저 무거운 바구니가 손쉽게 끌려온다는 게 아주머니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쓰는 거예요.” 손잡이를 또 교묘하게 조작한 뒤 제토가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두레박은 여전히 물을 담은 채 공중에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제토가 그 두레박을 붙잡아 끌어내자 줄이 풀리면서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그 두레박 속의 물을 아주머니가 가져왔던 물통에 붓자, 물통이 금방 차올랐다. “해보세요.” 제토는 손잡이를 돌리는 것과 다 잡아 들어 올린 뒤, 손잡이에 걸쇠를 걸어 고정하는 걸 가르쳐주었다. 그 두 가지만 알면 전혀 어려운 게 없다는 설명이었다. 반신반의하며 손잡이를 돌리자 두레박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두레박에 물이 담긴 것을 확인하신 다음에 다시 끌어올려 보세요.” 다시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하자 두레박이 올라오기 시작하는데, 평소라면 힘껏 밧줄을 잡고 끌어올려야 할 것이 너무도 가볍게 느껴져서 마치 물이 담기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힘이 많이 안 들죠?” 제토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대단해!” 아주머니의 감탄에 제토가 뿌듯한 웃음을 지었다. 저 웃음을 얻기 위해 지난 밤 단유를 도왔고, 아침 새벽부터 나와서 이 수고를 자청한 것이다. 도르래를 이용한 간단한 장치가 첫선을 보였고, 첫 고객에게 호평을 받았다. ======================================= [432] 기하학개론(3) 새벽이 지나면서 우물로 물을 뜨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는데, 물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도 사람들이 자리를 쉽게 뜨지 않아 우물 주위에 사람들이 몰리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심지어는 물을 집에 가져다 놓고 다시 돌아와서 우물에 설치된 도르래 기구를 구경하는 이들도 있었다. 제토는 새벽에 온 몇 사람들에게 방법을 가르쳐준 뒤 집으로 돌아갔고―밤늦게까지 단유를 돕느라 피곤했다―그 뒤로는 먼저 와서 방법을 배운 이들이 뒷사람들에게 알려주어서 장치를 사용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사실 손잡이만 돌리면 그만일 뿐이니 기계 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닌 이상 어려움을 겪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제토나 기구를 만든 단유나 이런 인기를 얻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도대체 이게 어떤 원리래?” “몰라. 근데 확실히 힘이 덜 들어.” “신기하네.” 물이 필요도 없는데 괜히 손잡이 한 번 돌려보는 이들이 줄을 섰다. 사람들은 두레박이 오르내리는 광경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근데 이걸 누가 만든 거야?” “그러게? 어제는 없었잖아?” “그럼 어젯밤에 만들었다는 거네?” “이게 하룻밤 만에 만들 수 있는 거야?” “복잡해 보이는데?”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대는 소란이 일자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오는 이들이 합류하며 우물 주위에 남녀노소 할 거 없이 온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일이 벌어졌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지내던 마을에 구경거리가 생긴 셈이었기에 더 많은 관심을 받은 것이기도 했다. 거기에 밤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였던 레이도르와 그의 친구들도 있었다. “저게 뭐지?” 숙취에 힘들어하던 아잘이 눈을 크게 뜨고 우물 위에 설치된 기구를 바라보았다. 에드나 다른 친구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 사람들이 한 손으로 손잡이를 돌려 두레박을 끌어올리는 광경을 목격하고 입을 다물 줄 몰라 했다. 사람들의 호기심이 폭발할 때 즈음, 제토를 만났던 아주머니가 다시 나타나 그들의 호기심을 풀어주었다. “레이도르! 자네 아들이 만들었다던데?” 뒤에서 구경하던 레이도르가 어울리지 않게 휘둥그레 눈을 뜨고 아주머니를 쳐다보았다. “밸 아줌마! 그게 사실이요?” 레이도르를 대신해 아잘이 묻자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물 뜨러 왔을 때 제토가 가르쳐 줬어.” “제토도 누군가에게 배운 게 아닐까요?” 군중 속에 있던 사람이 의문을 제기하자 아주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제일 처음 우물에 왔었는데, 저게 떡하니 있더라고. 어떻게 쓰는 건지도 모르겠고 구경만 하고 있는데 제토가 와서 가르쳐 주더라니까. 자기 입으로 그랬어. 물 뜨기 편하게 하려고 만들었다고.” 아주머니의 체험기에 사람들은 자리에 없는 제토 대신 그의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자네 아들이 이렇게 손재주가 좋았나?” “천재였어? 몰래 산에 데려가서 뭐라도 가르쳤던 거야?” “에끼, 이 사람아. 레이도르가 가르치긴 뭘 가르쳐?” 사람들의 입방아 속에서도 레이도르는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의심이 가는 부분이 없진 않았다. “레이도르.” 아잘이 레이도르를 부르자, 레이도르 역시 아잘을 바라보았다. “이거 보통 솜씨가 아닐세.” 레이도르는 고개를 끄덕인 후 몸을 돌렸다. 레이도르가 걸음을 옮길 때 아잘 역시 그의 뒤를 따랐고, 몇몇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도 혹시나 해서 그의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우물 주위에서 자기도 한 번 손잡이를 돌려보겠다고 줄을 서서는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우물의 장치를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집에 도착한 레이도르는 늦은 아침을 준비하던 제토와 단유를 볼 수 있었다. 단유는 어제와 비슷한 모습으로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지만, 제토는 어쩐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빠, 어디 갔었어요? 아침 드셨어요? …어?” 제토는 말을 걸다 현관 바깥으로 사람들이 몰려 있는 광경을 발견했다. “뭐예요?” 레이도르는 제토와 단유를 번갈아 바라보다 물었다. “우물에 있는 거, 네가 만들었냐?” 제토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치드랑 같이 만들었어요.” 뒤에서 듣고 있던 아잘이 레이도르의 어깨를 밀며 집안으로 들어왔다. “너희 둘이서 만들었다고? 저걸?” “네. 괜찮지 않았어요?” 난 신기하던데, 한 손으로 돌려도 두레박이 이렇게 올라오고, 라며 시늉을 하는 제토에게서 눈을 돌려 단유를 바라보던 아잘이었다. “네가 만든 거구나!” “…같이 만들었어요.” 단유의 대답에 아잘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소싯적에 헛꿈을 꾸느라 밖에서 돌아다닌 일이 있었지만, 마냥 놀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저 장치가 예삿것이 아니란 건 잘 안다. 특히 기둥에 매달려 있던 동그란 장치가 핵심이지 않으냐?” 학자를 꿈꿨지만, 분수에 맞지 않다 여겨 다시 마을로 돌아온 아잘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가죽 공방에서 무두질을 하며 평생을 살았다. 하지만 나름은 도시에 가서 책이란 것도 보고, 학자의 제자가 되어 이것저것 잡학을 공부하기도 했었다. 기둥에 매달린 도르래가 움직이며 걸려 있는 밧줄의 움직임을 용이하게 하여 힘의 손실을 줄인다는 것을 역학적으로 설명할 자신은 없지만, 그것이 저 장치의 핵심 부품이란 것은 알 수 있었다. 더구나 그 도르래를 만들어낸 기술이 놀랍다. 단유는 쑥스러워하며 볼을 긁적였다. 사실 단유의 눈으로 보면 조잡하기 이를 데가 없는 장치였다. 이왕이면 쇠로 된 베어링을 이용해서 마감도 잘하고, 고정장치도 튼튼하게 만든다면 훨씬 보기도 좋고 역학적으로 계산에 가깝게 만들 수 있을 텐데, 수작업으로 하다 보니 제대로 된 도르래의 모양이 나오지 않았다. 도르래를 기둥에 매단 고정장치도 부실하고 두레박을 매단 움직도르래도 모양이 완벽한 원을 그리지 않기에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게 보였다. 그런 것들이 계산 상으로는 힘의 손실을 대략 20% 정도 깎았다. 다시 말해서 제대로만 만든다면 지금보다 20% 더 힘을 덜 들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어떻게 저걸 만든 것이냐? 아니 저 장치의 구동 원리가 어떻게 되는 것이냐?”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원리 정도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동그란 장치의 명칭은 도르래라고 하는데요.” 단유는 허공에 손을 저어가며 나름 이해하기 쉽도록 움직도르래와 고정도르래를 이용한 힘의 절약을 설명했다. “…이만큼이 움직이면 그 길이의 절반만큼만 올라와요. 하지만 길이가 짧은 대신 힘도 반으로 줄어들거든요.” 단유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뒤에 선 사람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해갔다. 여러 개의 도르래가 있다면 더 힘을 줄일 수도 있는데, 그 값이 움직도르래의 개수에 비례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즈음에는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사용하면 그만 아닌가?” “그렇지.” 원리를 안다고 자신이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싶었다. 만든 사람도 알았고, 만들어진 원리도 ‘대충’ 들었으니까 이제는 다시 돌아가 그 장치를 한 번 더 만져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런 이유로 레이도르를 따라왔던 이들 중 다수가 발길을 돌렸다. 몇몇은 빨리 돌아가서 제작자의 정체를 알려주고자 하는 마음에 걸음을 서두르기도 했다. 반면 모두가 이해를 하지 못한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겉핥기로라도 학문을 공부했다는 아잘은 손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감탄했다. “놀랍구나. 그럼 도르래의 크기는 상관이 없느냐?” “별로 상관은 없어요.” 그저 힘의 방향을 바꿀 뿐이 도르래이기에 크기가 크든 작든 힘에 영향을 주진 않는다. “다만 움직도르래가 크면 그 무게가 더해지니 별로 이득은 아니겠죠.” “그렇구나.” 아잘과 단유의 대화를 묵묵히 듣던 레이도르가 아잘의 어깨를 잡았다. 아잘이 왜 그러냐는 듯 돌아보자, 레이도르가 턱으로 밖을 가리켰다. “잠시 나가 있게. 이야기할 시간은 나중에 충분히 있을 테니까.” 친구의 눈빛을 읽은 아잘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도르는 제토에게도 잠시 나가 있도록 권했다. 제토도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나간 후, 무거운 침묵이 집에 내려앉았다. “앉아라.” 집안 가운데 위치한 식탁에 앉은 레이도르가 단유에게 마주 앉을 것을 권했다. 단유가 마주 앉아 덤덤히 레이도르를 바라보자, 레이도르는 심란한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다 물었다. “정체가 뭐냐?” “네?” “…정말 15살이 맞긴 하느냐?” 의외의 질문에 단유는 잠시 당황했지만, 맞는 걸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레이도르는 의심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단유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침착함과 담대함도 수상하지만, 도대체 저걸 만든 저의가 무엇이냐?” 단유는 괜히 또 볼에 열이 올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냥 편할 것 같아서요?” “그냥?” 단유는 괜히 집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제가 살던 곳은 보다 편하게 살기 위해 여러 가지 것들을 만들어내던 곳이었어요. 사실 우물에 만든 도르래는 가장 기초적인 것들 중 하나예요.” ‘기초적인 것’이란 말에 레이도르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레이도르의 지식수준에서 도르래만 해도 ‘최첨단’ 기술이었다. 그런데 그게 고작 ‘기초’라는 표현으로 급을 낮추니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들이 많다는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아크리스토스라는 지역은 도망자들이 살던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번엔 단유가 놀랄 차례였다. 레이도르는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도망자들이 살던 곳임에도 그렇게 놀라운 것들이 많이 있다면, 아마 제르아 오마 너머는 엄청나게 발전한 곳이겠구나.” 착각을 바로 잡아줄 의무는 없으니 단유는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혹시 아크리스토스에서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아나요?” “말했듯, 대부분은 죽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도 있을 거 아니에요?” 레이도르는 단유를 지켜보다 물었다. “찾는 사람이라도 있는 것이냐?” “…네.” 레이도르는 단유가 그 사람을 찾기 위해 제르아 오마를 넘어왔으리라 생각하게 되었다. ‘저런 놀라운 기술들을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낼 정도이니 제르아 오마도 넘을 수 있었던 것일까?’ 단순히 생각하면 그렇지만, 사실 이 사실은 그렇게 간단히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만약 제르아 오마 건너편에 욕심이 많은 나라가 있다면, 그리고 그들의 군대가 제르아 오마를 건넌다면 이곳에서는 그들을 막을 방도가 없다. 예전에는 넘기만 해도 기력이 다해 죽던 사람들이 이제는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넘을 수 있을 만큼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으니까. 힘을 온전히 보전한 채로 저 산을 넘어 올 군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도저히 안심되지 않았다. 당장 이 마을에, 평화로운 이곳에 전화(戰火)가 일어날 것이라 생각하니 끔찍함이 앞선다. ‘어쩌면 이 녀석은 척후병(斥候兵)일지도?’ 그렇게 생각했다가도 금방 머리를 저어서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는 레이도르였다. 만약 척후병이었다면 저런 장치를 만들거나 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너무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 “누굴 찾는 것이냐?” 단유는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솔직히 가족을 찾고 싶다고 말하고 싶지만, ‘시간’을 생각하면 그리 쉽게 말하기가 곤란한 문제가 있었다. 적어도 십 년, 혹은 수십 년이 될지도 모른다. 동생이라면 눈앞에 있는 레이도르보다 더 나이가 많이 들었을지도 모르고, 어머니라면…. “예전에 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싶다면서 대산맥, 아니 제르아 오마를 넘은 사람이 있었어요. 혹시 그 사람의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레이도르는 팔짱을 끼고 단유의 눈빛을 계속 지켜보았다. 확실히 아이의 눈빛은 맑고 선했다. 하지만 사람이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것을 오랜 세월의 경험으로 익힌 바 있던 레이도르는 자신의 감으로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도 지켜보고자 한 것이었는데, 어쩐지 불안했다. 단지 자신뿐이라면 모르겠는데, 하나뿐인 아들이 저 수상한 녀석과 함께 있으려 하는 게 보이니 불안했다. “제르아 오마를 넘은 사람을 직접 본 적이 있다.” ‘역시!’ 단유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 [433] 기하학개론(4) “내가 아주 어렸을 적의 일이었다. 제토보다도 더 어렸을 때의 일이었지. 그 사람은 우리 마을 사람들을 보고 굉장히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 마치 제르아 오마 너머에 사람이 사는 줄 몰랐다는 듯이 말이다.” “그 사람이 자기 입으로 넘어왔다고 말했나요?” 레이도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나의 아버지가 그 사람을 마을 입구에서 처음 발견했고, 그 사람을 집으로 데려왔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보였거든.” 레이도르는 과거의 그 순간을 회상하는 듯 천장을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에게 물과 먹을 것을 줬더니 고맙다고 인사를 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 사람은 제르아 오마를 가리키며 산을 넘어왔노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그 사람의 얼굴이 무서워서 아버지 뒤에 숨어 있었지. 그 사람의 눈빛은 꽤 날카로웠거든.”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눈빛만큼은 날 선 칼날보다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사람도 물었다. 자기 말고 저 산을 넘은 사람을 본 적이 있냐고.” 응? “아버지가 있다고 대답했더니, 그 사람이 미소를 짓더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었느냐고 물었고, 아버지는 꽤 많은 사람이 넘어온 적이 있었다고 대답했다.” “많은 사람이요?” 레이도르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을 어떻게 했냐고 묻자, 아버지가 답했다. 모두 죽었다고.” 단유의 안색이 검게 변했다. “어떻게 죽었냐고 묻길래, 아버지가 되물었다.” 레이도르는 단유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죽길 바라냐고.” **** 제토는 밖으로 나선 김에 우물가로 달려갔다. 사람들의 반응이 여간 궁금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토는 대환영을 받았다. “제토! 정말 네가 만든 거니?” “제토, 대단하다! 전혀 힘들지가 않아!” “어릴 때는 그저 말 안 듣는 개구쟁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멋지게 자랄 줄 알았다면 그때 덜 혼낼 걸 그랬구나.” “이거 말고 또 다른 것도 있니?” 사람들의 환호와 추켜세움에 제토는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특히 지켜보던 아이들의 눈에 깃든 선망과 존경의 눈빛에 흥분을 감추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그럼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요.” 지난 밤, 처음 손잡이를 돌리면서 놀란 것은 제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단유에게 이것저것 물어봤었고, 그중 하나가 방금의 질문과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신기한 물건을 또 만들 수 있냐고. 단유는 잠시 궁리하는가 싶더니, 간단한 건 만들 수도 있지 않겠냐며 덤덤히 대답했다. ‘이게 간단하다니!’ 물론 만드는 작업은 간단했다. 제토 본인이 간단한 제작을 맡아서이기도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기에도 동그랗게 생긴 ‘도르래’라는 걸 달기만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단유가 ‘역학’이니 ‘힘의 균형’이라느니 하면서 이해하기 힘든 설명을 이어나가니, 절대 간단하지 않은 작업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상관인가? 만들 수 있다고 했으니, 만들면 되는 것이다. 제토는 사냥보다 제작이 더 재미있었고, 자신에게도 소질이 있다고 여겼다. 복잡한 기구 제작은 단유가 맡았지만, 자신도 한몫했으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의 축하를 받을 자격도 있었다. ‘루치드에게 하나 더 만들어보자고 해야겠어.’ 우물이 하나인 게 아쉬웠다. 하지만 도르래 말고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 발명품이 분명 있을 것이다. 제토가 상기된 얼굴로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며 우쭐해 하는 시간을 가질 무렵, 정반대 의미로 얼굴을 붉히고 있던 단유는 레이도르의 무심한 시선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러다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 “그래서요? 뭐라고 대답하던가요?” 레이도르는 끼고 있던 팔짱을 천천히 풀며 대답했다. “웃더군. 너처럼.” “아무렴 저 험한 산을 넘는다는 것 자체가 죽음을 각오한 일이었을 텐데, 어떻게 죽고 싶냐고 묻는들 무슨 대답이 필요할까요.” “…그래. 그도 그렇게 이야기했었다. 자신은 이미 저 산 위에서 한 번 죽었다고. 그래서 달리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이야기하더군.” 레이도르는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보이는 산을 바라보았다.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보아도 높이가 남다른 제르아 오마. 저 산을 넘어온 이에게 죽음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평생을 사냥꾼으로 지내며 죽음의 순간을 겪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런 자신도 어릴 때 보았던 그의 웃음은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런데 자신의 아들과 같은 나이라는 소년은 마치 그 시절의 그 노인처럼 미소를 짓는다. 그 사람을 이해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도 그 의미를 공감하기 때문일까?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그 사람을 여태까지 기억하는 이유는 그 웃음이 인상에 남아서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으로부터 초월한 듯한 웃음과 표정이었거든.” 단유는 과연 그 사람이 자신이 알던 그 사람일지 궁금했다. 정확하진 않지만, 자신이 경험한 바에 따르면 지구와 이곳의 시간은 대략 5배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요컨대 지구에서의 하루가 이곳에서는 5일 정도였던 것이다. 그런 계산에 기대어 추정해보면 마법을 가르쳐줬던 핀체노 할아버지와 헤어진 게 대략 40년 전후가 될 것이다. 그 정도라면 레이도르의 어린 시절과 적당히 맞아 떨어진다. “그 사람의 이름은 기억하시나요?” 레이도르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와의 문답이 끝나고 그는 바로 마을을 떠났다. 그는 이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끝을 보겠다며 떠나려 했지. 아버지는 그에게 얼마간 도움이 될 식량을 주머니에 담아주었고.” 그 외에는 별로 기억하는 바가 없다는 레이도르에게 단유는 아쉬움을 감추고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아저씨의 아버지는 저 산을 넘은 사람들을 봤다고 했잖아요?” “그래.” “그 사람들은 모두 그냥 죽은 건가요?” 레이도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컵을 집어 구석에 놓인 물통으로 향했다. 물통을 덮고 있던 뚜껑을 열고 컵에 물을 담은 뒤, 단유에게 보였다. 단유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고, 레이도르는 그 자리에서 물 한 컵을 마셨다. 그렇게 입을 축인 뒤에야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한참 후에, 내가 좀 더 큰 뒤에야 들을 수 있었다. 그 사람들이 온 건 내가 기억을 하지 못하는 갓난아이 때였다. 당시 아버지는 이 마을의 촌장 역할을 하고 있었지. 갑자기 추레한 몰골의 사람들이 마을로 나타났고, 사람들은 각자 집에서 도끼와 삽, 쟁기 등을 들고 그들을 포위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는 모두 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경계하던 태도에서 구조의 손길로 전환한 마을 사람들이 다급하게 다가갔지만, 마른 얼굴을 한 그들은 대부분 물 한 모금 못 삼키고 죽어갔다고 레이도르는 설명했다. “사실 그 당시에 기이하게도 제르아 오마를 넘어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 중의 일부가 목숨을 연명하며 아버지의 신세를 졌고, 그러면서 아버지는 제르아 오마 너머의 일들, 네가 말한 아크리스토스의 일들도 들을 수 있었다.” “왜 넘어왔는지도 이야기를 하던가요?” “전쟁이 났다고 하더군.” “전쟁이요?” 단유는 처음 듣는다는 얼굴로 레이도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게 벌써 수십 년 전의 이야기니까, 당연히 넌 모를 수도 있겠지.” 아니, 그런 의미로 놀란 표정을 지은 게 아니었다. 단유의 기억에 이곳에서, 정확히 녹스 주변에서 전쟁이 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신이 어렸을 때는 그저 산에서 나무나 캐던 아이였던데다 워낙 빈촌이 대륙의 구석에 위치한 탓에 전쟁의 참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 “대륙에서 도망쳐 아크리스토스로 왔더니, 다시 도망을 쳐야 할 위기에 놓여 어쩔 수 없이 저 산맥을 넘어왔노라고,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아버지는 내게 알려주셨지.” 결과적으로 그 말이 사실이라면, 결국 그들은 단유의 가족, 빈촌의 주민들과는 상관없는 이들이란 이야기가 된다. 겨우 실종된 이들에 대한 실마리를 구하나 싶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기회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실망한 단유의 기색을 읽었는지 레이도르는 잠시 말을 멈추고 기다려주었다. “그 사람들이 쓰러진 건 병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버지와 젊은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마을에서 멀리 벗어난 언덕에 매장했다. 병이 옮을 것을 염려한 탓이었지. 다행히 병은 전염되지 않아, 마을에 별일은 없었지만, 한동안 마을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특히 겨우 목숨을 부지한 이들을 간병하다 죽음을 목도한 마을 사람들이 꽤 힘들어했었나 보더군. 그래서 그 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사람이 마을에 왔을 때, 아버지는 일부러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집으로 데려왔다가 아무도 모르게 마을 밖으로 나가게끔 도와준 모양이다.” 그 사람 중 이름을 말한 사람이 있는지 묻자, 레이도르는 고개를 저었다. “들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이름을 남기지 않고 죽었다.” 매장된 묘지에도 그들의 묘비는 없다는 설명이었다. 단유는 고개를 털어냈다. 계속 찝찝한 기분에 매달려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는, 니가 처음이지. 그리고 너처럼 건강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도 처음이고.”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매일 운동을 해서 그런가 봐요.” “운동?” 딱히 운동이라고 명명할 활동을 하지 않아도 매일매일이 몸을 움직이지 않고서는 뭔가를 할 수 없는 환경인지라, 단유의 ‘운동’이란 표현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때, 집의 문이 열리며 제토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직 이야기 안 끝났어요?” 레이도르가 단유의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끝났다. 나는.” 이제는 할 말이 없다는 표시에 단유도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충분히 다 들었다는 표시였다. “무슨 일이냐?” “아, 밥 먹자고요. 생각해보니까, 우리 아직 밥 안 먹었잖아요?” 제토는 수프를 끓이기 위해 장작을 모으다 밖으로 내쫓겼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는 기분이 좋아서 배가 고프단 사실도 잊었지만, 신체가 간절하게 원하는 탓에 제토는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래. 먹자.” 레이도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유의 궁금증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고, 레이도르의 의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대화의 내용과 과정 중에 두 사람은 당분간 함께해도 무방할 거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일단 ‘전쟁’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단유였지만, 완전히 의심을 풀기에는 그가 보여주는 능력이 너무 남달라 보였다. 하지만 단유의 성정이나 태도, 자세가 레이도르에게 나쁘게만 다가오지 않아 당분간은 지켜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였다. 마찬가지로 레이도르가 자신이 아는 바를 모두 털어놓긴 했지만, 그래도 단유는 레이도르 뿐만 아니라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서도 들을 만한 정보가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게 되었다. “루치드.” “응?” 조금 간이 짠 수프에 빵을 찍어 먹으며 배를 채우던 단유가 제토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혹시 저거 말고 또 만들 거 없어?” 레이도르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제토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글쎄….” “어제 이야기 한 거 있잖아? 물이 저절로 나오게 하는 것도 있다고.” “뭐?” 레이도르가 놀란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물이 저절로 나오다니? 단유는 머리를 긁적였다. “뭐 그것도 원리는 간단하긴 하지만, 그걸 설치하는 일은 쉽지 않은 거라.” “그래?” 단유가 어렵다고 하니, 정말 어려운가보다 싶어서 제토는 풀이 죽었다. 하지만 레이도르는 그 말을 쉽게 넘기기가 어려웠다. 마을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물이었다. 그런데 이 마을에 고작 우물이 하나뿐인지라 사람들이 여간 불편을 여기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더더욱 단유와 제토가 만든 ‘도르래장치’라는 것에 열광하는 것이다. 그런데 물이 저절로 나오게 한다? 어디서 물이 나오는지, 어떻게 물이 나오게 하는지는 몰라도, ‘물이 나온다’는 그 명제 자체만으로도 귀가 솔깃했다. “자세히 설명해봐라.” 레이도르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단유를 추궁했다. 식사가 끝나고, 레이도르는 단유와 제토를 데리고 마을의 대장간으로 이동했다. 숙취를 대장간의 열기로 날리려는지 벌건 민낯의 대장장이는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망치를 내려치고 있었다. “어이, 가론.” “어이, 레이도르. 왜 또 온 거야? 칼은 아직 덜 갈았어. 오후에 오라니깐.” “그것 때문에 온 거 아냐.” “그럼 뭐? 오늘 저녁에 한 잔 더 하자고? 안 돼, 오늘도 마시면 일이 너무 많이 밀린다고.” “그것도 아냐.” 그제야 가론은 망치를 내려놓으며 레이도르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럼?” “우물에 있는 ‘도르래 장치’ 봤나?” “아, 그게 ‘도르래 장치’라는 건가? 이름은 처음 듣는데?” “이 아이들이 만들었다고 하더군.” 가론은 슬쩍 고개를 갸웃거리다 피식 웃었다. “자네 아들 자랑이라도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건가?” 레이도르는 그 말을 무시하고 단유를 가리켰다. “이 아이가 그 장치를 고안했다네.” “호오, 그래?” “그리고 한 가지 더 만들고 싶은 게 있다는군.” “뭐?” “물이 저절로 나오게 하는 장치, 라고 하던데.” “뭐?” 가론이 휘둥그레 눈을 뜨고 레이도르와 단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 [434] 기하학개론(5) 단유는 과학 시간에 대수층에 관해 배운 바를 떠올렸다. 사실 우물이라는 것이 지반 깊숙이 흐르는 대수층의 물을 뽑아 쓰는 것이니 새로울 것은 없었다. 다만 단유는 좀 더 기술적인 방식으로 물을 뽑아 쓰는 방식을 떠올렸다. 이를테면 빨 펌프와 같은 방식이었다. 물론 ‘아르키메데스의 나사’라고 불리는 양수기 방식도 고려했지만, 펌프처럼 간단하고 효율적인 방식을 두고 다른 방식을 취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처음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펌프 제작은 곧 벽에 부딪혔다. “그게 뭐냐?” 대장장이 가론은 단유의 설명을 듣고 인상을 잔뜩 찌푸리더니 대답했다. “어떻게 그런 걸 만든다는 거지?” 흙바닥에 그림을 그려 가론에게 보여줬지만, 가론은 물론 그의 뒤에서 일을 돕던 다른 야장들도 고개를 저었다. “복잡한 구조도 구조지만, 그 정도 철 덩어리를 만들기 위한 재료가 없다.” 만약 이 펌프를 만들기 위해 철을 쓴다면 당장 필요한 생활 도구들을 만들 재료가 부족해진다. “우물이 있는데 뭐하러 그런 복잡한 걸 또 만들어? 지금으로도 충분해.” 가론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주문한 칼, 삽, 쟁기 등을 만들기에도 일손이 부족한데 굳이 그런 걸 만들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있으면 편하겠지만, 없어도 큰 불편이 없다는 게 가론의 주장이었다. 단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간 야장들을 보다가 대장간을 둘러보았다. 가론의 옆에서 한 야장이 빨갛게 부어오른 쇳덩어리를 투박한 모양의 집게로 붙잡고 있었고, 그 위를 가론이 망치로 때려서 모양을 내는 중이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두 사람이 커다란 풀무를 눌러서 고로에 불을 키우는 중이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대장간 한편에 쌓여있던 목탄을 삽으로 퍼서 가마 속에 집어넣고 있었다. 대장간 입구 근처에는 가판처럼 넓은 나무판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만들어 진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여러 가지 도구들이 대기 중이었다. 칼도 있고, 망치도 있고, 냄비도 있었다. 하지만 마치 박물관에나 전시되어야 할 것들처럼 투박하고 엉성했다. 그 외에 만들어진 것들을 살펴봐도 이 정도 기술력으로는 실린더와 피스톤 역할을 할 부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어려워 보였다. “왜 해보지도 않고 그러나? 한번 해 보지그래?” 레이도르가 가론을 채근하자 가론은 다시 들었던 망치를 내려놓으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내가 비록 쇠만 만지는 놈이라 머리가 썩 좋진 않지만, 지금 이 친구가 말한 것은 여기서 만들 수 없는 물건이란 것쯤은 알 수 있어.” 단유가 제시한 조건, 원기둥 모양의 펌프 실린더와 그 안에 들어갈 몇 가지 부품―밸브, 마개, 수관(水管) 등―의 제작은 단유가 그린 그림대로 어떻게 뚝딱거려서 얼추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만든다고 끝날 일이 아니다. “이 정도 물건을 만들려면 저기 있는 목탄 정도로는 턱도 없을 거야. 아마 저 산의 나무를 모두 베어서 목탄으로 만들고 그걸로 온종일 쇠를 녹여야 겨우 부품 하나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밀한 부품을 제작하려면 쇠가 잘 녹아야 한다. 그런데 고로에서 쇠를 녹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현대 지구에서야 거대한 제철소를 운영할 정도의 기술력이 있으니 쇠를 녹이는 일에 대해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쇠를 녹이기 위해서는 목탄을 가열해 온도를 높이는데, 정밀 작업을 위해서는 더 많은 열이 필요하다. 당연히 많은 목탄이 필요하게 되고, 목탄을 위해 산의 나무를 베어다 써야 하니 더 많은 노동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방식의 특성상 한계가 존재하니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 사정이니 아마 부품을 만들더라도 그 내구성이 의심될 것은 물론이요, 정밀하게 규격을 맞추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게다가 좀 더 생각해보면 펌프에 필요한 몇 가지 필수 재료가 없었다. 단유가 떠올린 재료 중 하나는 바로 고무였다. 오링(O-ring)을 만들어 내부에서 오르내릴 실린더의 주위를 감싸야 진공상태가 만들어질 텐데, 그런 고무를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또 지금 대장간에서 이뤄지는 작업 현장을 보니 ‘치수’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만약 고무가 없다면 그나마 펌프 원통 내부 실린더의 치수와 피스톤의 치수가 같거나 거의 맞물릴 정도로 비슷해야 진공 비슷한 상태를 만들어낼 것인데, 이런 작업환경에서 그게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특히 대장간 외벽에 걸린 물건들을 보며 놓치고 있던 사실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부식’이었다. 단유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금속의 부식은 금속 이온의 용출에 의해 결정된다. 부식되면 녹이 슬고, 그 녹이 물을 오염시킬 것이다. 철이 부식되지 않게 하려면 간단하게는 방수 페인트 같은 것으로 외부를 코팅하거나, 혹은 산화마그네슘을 이용하는 방식인데 어느 것 하나 불가능에 가까웠다. 혹시나 해서 녹이 슬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아냐고 물었더니, 가론이 눈짓으로 가리켰다. “알면 내가 저걸 저렇게 두겠냐?” 벽에 걸린 걸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되물으니 단유는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쇠파이프를 이용해 물을 끌어올리는 펌프 방식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지 말고 나무로 만들면 안 돼? 도르래도 나무로 만들었잖아?” 옆에서 지켜보던 제토의 제안에도 단유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나무로 한들 가능할까. 나무도 습기에 노출되면 썩기 마련이고, 그 내구성이 쇠에 한참 못 미치니 만들어봐야 일회용이나 다름없다. 고작 일회용이나 만들자고 그런 수고를 해야 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단유가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짓자, 제토가 단유를 위로했다. “괜찮아. 못 만들면 어때? 우물이 있으니까 괜찮아. 가론 아저씨 말대로 우물 하나로 여태껏 불편 없이 살았는걸.” 제토는 단유가 자신의 발명품을 만들지 못해 실망했다고 생각했다. 실망한 것은 맞지만, 대상이 틀렸다. 단유는 자기 자신에게 실망했다. ‘아무리 많이 알면 뭐해? 현실에 적용도 못 시킬 지식 따위.’ 그동안 끼니를 채우는 것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던 지식들이 모두 쓸모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 지식들이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들을 쓸모없게 만든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위대한 과학자, 현인들은 자기가 가진 것보다 못한 지식으로도 충분히 위대한 발명품을 만들어냈었다. 그들이 아는 것 이상의 지식을 습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고작 이런 펌프 하나 만드는 게 힘들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물론 그들이 만들었던 방식대로 만드는 게 불가능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현대 과학의 정수를 공부한 입장에서 고무링을 대체할 만한 무언가를 떠올리지 못한다는 것, 낮은 기술력의 야금술을 대체할만한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게 부끄럽고 한심했다. ‘도대체 지금껏 무엇을 위해서 공부한 것이냐.’ 어쩌면 단유의 기댓값이 너무 높아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오는 시대에 살았던 단유가 굳이 타협해서 ‘시대에 맞게’ 나선형 양수기를 만든다거나 하는 것은 배운 지식을 헛되이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증기기관의 원리를 안들, 유체의 흐름을 역학적으로 계산할 줄 안다고 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생각해보니, 이곳이 아니라 지구에 간다고 해도 단유가 직접 무언가를 만들거나 실생활에 적용할 만한 것들을 구상해내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았다. 단유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대장간에서 물러났다. 제토의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느릿느릿 걸어가는 단유의 뒷모습을 레이도르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원래는 이날 다시 산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레이도르는 며칠을 더 머무르기로 했다. 겨울을 지내기 위한 준비라는 핑계가 있었지만, 실상은 주변에서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보다 정확하게는 단유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가장 적극적인 사람은 처음부터 호기심을 드러냈던 아잘이었다. “나무는 안 되나?” 대장간에 갔다가 실망해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아잘이 물었다. “나무는 물에 닿으면 썩잖아요. 두레박 같은 경우라면 교체할 수 있지만, 지반 깊숙이 박을 관은 교체하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위생도 문제고요.” “위생?” 이 마을 사람들은 우물에 뚜껑도 덮지 않고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 물을 단순히 생활용수로만 쓰는 게 아니라 식수로도 사용하고 있으니, ‘위생’이란 개념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썩은 나무가 물을 오염시키면, 그 물을 먹고 탈이 날 수 있어요.” 단유는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했다. “아, 그럼 배탈이 나는 경우도 오염된 물을 먹어서 그런 것이냐?” 아잘이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의 호기심은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할 정도여서 지켜보던 레이도르는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배탈이 나는 경우야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죠. 하지만 물도 원인일 수 있다는 거예요.” “다른 이유는?” “뭐, 오래된 음식이나 썩은 음식을 먹어서 그럴 수도 있죠.” “아, 그렇지.” 아는 사실인데도 이야기를 하다 보니 깜빡했다. 아잘은 자신의 머리를 쿵 치며 실수를 자책한 뒤, 다시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들을 물었다. “쇠도 녹이 스니까 안 되는 것 아니냐?” “그렇죠.” “그런데 넌 처음에 쇠를 쓰려고 했다며?” 단유는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때는 그 생각을 못 했었죠.” “그럼 니가 살던 곳에서는 뭐로 관을 만들었던 거니?” 쇠나 나무 이외에 재료라면 혹시 돌일까? 아잘의 질문에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쇠를 쓰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그 쇠에 녹이 슬지 않게 하는 거죠.” “쇠가 녹이 안 슬어?” 그것은 마치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빵이 있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였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칼에 기름칠을 할 필요도 없고, 쟁기도 부러지지 않는 이상 평생 쓸 수 있을 것이다. “쇠에 녹이 스는 것은….” 단유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부식에 대한 설명은 여러 가지 기초 과학 상식을 요구한다. 분자는 물론 전자와 이온에 대한 개념을 알아야 하고, 금속의 전위와 전위차에 의한 흐름, 반응성도 알아야 한다. 그 이후에나 ‘부식은 양극(Anode), 음극(Cathode), 전해질(Electrolyte), 전기적 회로(Return Circuit)등 4가지 요소를 갖춰야 발생한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왜?” 단유가 말을 잇지 못하자 답답함을 참지 못한 아잘이 되물었다. “아니, 그게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워서요.” 이해는 하는데, 그 이해를 상대에게 전달시키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특히 지식수준이 현격히 차이가 나는 상황이니 이를 쉽게 전달하기가 어려웠다. “쇠에 녹이 스는 이유는 조금 복잡해서 설명하기가 어렵네요. 하지만 이유를 알기 때문에 문제를 고치는 방법도 알 수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쇠에 녹이 슬지 않게 하는 방법을 찾아내서 적용했어요.” “그 방법을 여기서는 쓸 수 없는 것이냐?” 문제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방법을 알고 있지만, 그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 문제였다. 마치 지금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훌륭한 선생님은 어려운 문제도 쉽게 설명하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단유는 훌륭한 선생님은 아니었다. 훌륭한 제자도 아닌 것 같지만. 제토가 끼어들었다. “루치드는 지금 많이 실망한 것 같아요.” “실망?” “그런 거 있잖아요. 어른들이 쉽게 하는 걸 아이들이 못할 때, 어른들이 그 아이들에게 실망하는 거요.” 그렇게 비유하면 마치 단유가 어른이고, 앞에 앉은 아잘이나 레이도르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아이인 것처럼 돼버리니 자리에 앉은 이들이 듣기에 민망하다. 하지만 그 비유가 지시하는 바는 정확하게 와 닿았다. 아잘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우리가 그렇게 많이 부족한가?” 단유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단지 기술의 한 면만 가지고 그 사람들이 부족하다거나 열등하다거나 비판할 순 없는 걸요. 게다가 제가 실망한 건 이곳의 기술이 아니라 저예요.” “너?” 단유는 자신이 고민하는 바를 털어놓았다. 마치 자신이 아는 게 굉장히 많은 사람인 것처럼 자랑하는 것 같아 쑥스럽지만, 거꾸로 자신의 지식이 너무 얕아서 그런 것이라고 피력했다. 자신이 배운 지식들 자체는 전혀 문제가 없으니까. “전 여태 헛공부를 한 셈이에요.” 아잘은 혀를 찼다. “그건 아닐 거다.” ======================================= [435] 친구야 놀자(1) “네?” “내가 젊은 시절에 학자를 꿈꿨다는 이야기를 했던가?” 제토를 돌아보며 아잘이 묻자, 제토가 처음 듣는다는 얼굴을 했다. “아저씨가요?” “그것 때문에 마을을 나가서 3년간 돌아오지 않았었지.” 한쪽에서 팔짱을 끼고 이야기를 듣던 레이도르가 첨언하자, 아잘이 눈을 치켜떴다. 레이도르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 는 시늉을 했다. “내 비록 그때 많은 것을 배우진 못했지만, 그리고 그 당시 배운 것들도 다 기억나진 않지만, 그래도 기억나는 게 하나 있다.” 아잘은 마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단유에게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새로운 길을 가고 싶으면 새로운 생각을 해라.” 단유는 놀란 눈으로 아잘을 쳐다보았다. “당시 나를 가르쳐 주던 스승님이 해주신 말씀이었지. 어느 한 방향에 익숙해지면 다른 길을 찾지 못하는 법이라 했다. 너도 어쩌면 너무 한 쪽으로 익숙해져 있어서 다른 길을 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어. 그러니 만약 새로운 방법을 찾고 싶다면 새로운 생각을 해보는 게 어떻겠니?” 단유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레이도르가 툴툴거리는 어조로 침묵을 깨고 나섰다. “아잘, 자네가 이렇게 말을 잘하는 줄 몰랐군.” 아잘은 턱을 치켜들며 뽐내듯 말했다. “3년이라도 배운 내가 자네보다 말을 잘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나?” “그래서, 자네는 새로운 길을 가기라도 하는가?” “왜 이래? 내가 만든 가죽 허리띠를 보라고? 다른 곳에서 그런 걸 만들 수 있을 거 같아? 나니까 그런 기능을 가진 허리띠도 만들어내고 그러는 거야.” 그러고 보니 활통과 연결된 줄을 잡아당기거나 늘리는 것만으로 위치를 변환시켜 사용자의 편의를 돕게 하던 레이도르의 허리띠를 보고 내심 감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이 아잘의 솜씨라고 하니, 비록 단순한 장치라 해도 그 발상과 편의성을 고려한 디자인은 무시할 수 없었다. “역시 배운 사람은 다르군요!” 제토가 제 손바닥을 내리치며 감탄하자 아잘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 제토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당연히 레이도르는 뭔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용불용(用不用)이라는 말이 있다.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한다는 생물학자 라마르크의 이론은 다윈의 진화론 만큼이나 많이 차용되어 쓰 이는 이론이었다. 단유 본인도 가끔 그 이론의 적합성에 고개를 끄덕일 때가 많았다. 불과 얼마 전에도 ‘바람’을 이용하는 마법의 응용판을 고안할 때 그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지금까지 단유는 그저 머릿속에 지식을 쌓기만 했을 뿐, 제대로 풀어낼 기회가 없었다. 고작해야 시험지의 답을 고를 때 지식을 풀어낼 뿐이었다. 그러니 단유가 지금 현재 곤란해 하는 상황은, ‘용불용’의 이론을 적용해서 풀이해보자면, 결국 평소에 그 지식을 현실에 적용하려 하는 버릇이 들지 않아 그런 것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맹자>에도 그런 말이 있다. 산속의 사람들이 지나는 작은 길은 사람들이 다니면 큰 길이 되나, 다니지 않으면 풀이 자라 길을 막는다.(孟子謂高子曰 : “山徑之蹊間, 介然用之而成路. 爲間不用, 則茅塞之矣.”) 그리고 끝에 한 마디가 붙는다. “지금 그 풀이 자네의 마음을 가로막았다(今茅塞子之心矣).” 단유는 풀이 자라서 막혀버린 길을 앞에 두고, ‘길이 막힌 게 자기 탓’이라고 한탄하는 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의미에서 아잘의 한 마디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새로운 길을 찾으려면 새로운 생각을 하라.” 말 한마디에 깃든 현기(玄機)가 보통이 아니라고 여긴 단유는 아잘의 스승이란 분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따지고 보면 단유가 무리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고무링을 이용한 빨 펌프는 지구 기준으로 19세기 후반에나 나온 것이다. 원시적인 구조의 펌프가 나온 것도 13세기이니 무려 600년의 격차를 뛰어넘으려 했다. 그런데 이곳의 야금술은 못해도 10세기 이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즉, 단유는 무려 1000년의 세월을 한순간에 뛰어넘으려고 시도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곳에 대한 배경지식도 부족한 상황인데 말이다. 단유는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깊이 반성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실망을 했든, 형편없는 기술력을 가진 이곳에 실망을 했든 결국 자신의 마음공부가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임을 인정하고 반성했다. “고맙습니다.” 단유의 정중한 인사에 아잘이 손을 저었다. “이런, 그런 인사치레나 받자고 한 말은 아닌데.” 아잘은 어른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고마워한다면 오히려 내가, 아니 우리가 고마워해야지. ‘도르래장치’ 같은 좋은 물건을 만들어줘서 말이야.” 도르래장치를 생각하자 단유는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났다. 단유는 레이도르를 보며 말했다. “저기, 생각난 김에 드리는 말씀인데요.” 두 사람 사이의 대화에서 한발 벗어나 지켜만 보려던 레이도르가 의아해하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이걸 만들어달라고?” 대장장이 가론은 또 왔냐는 표정으로 레이도르 일행을 바라보다 단유의 설명을 듣고는 난감하다는 듯, 단유와 레이도르를 돌아보았다. “이건 그냥 길게 만들어낸 뒤에 두드려서 죄기만 하면 돼요.” 단유가 부탁한 건, 도르래 장치를 보다 견고하게 만들기 위한 일종의 죔쇠였다. 지금은 밧줄로 엉성하게 묶어 놓았을 뿐이라 아무래도 불 안했던 단유는 쇠로 만든 죔쇠를 생각해냈다. 물론 재료가 많이 들어가지 않고 단순한 모양이니 만드는 것에 어려움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이거면 충분하겠나?” 레이도르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자 가론이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저었다. “돈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니니 집어넣게. 게다가 마을을 위해 쓴다는 데 자네에게 돈을 받을 수야 있나?” “그렇다고 자네가 부담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받게.” 가론은 혀를 차다 못 이기는 척 레이도르가 내민 동전의 반을 챙겼다. “반값에 해주지.” “고맙네.” 레이도르가 피식 웃었다. 고로에 녹인 쇠를 두들겨 직사각형의 긴 띠 모양을 만들어낸 가론은, 같은 모양의 죔쇠를 여러 개 만든 뒤 단유에게 건넸다. 이를 이용해 단유는 우물 위에 장치된 도르래 장치를 다시 조립했다. 하는 김에 어른들의 손을 빌려 더 튼튼하게 땅에 박았더니 안정성이 보다 커졌다. 이제는 손잡이를 돌려도 기구가 흔들리거나 하는 일이 없어 단유는 만족스러웠다. 단유는 자신이 이곳, 대산맥 너머에 오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만약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그중 하나는 자신의 지식이 머릿속에만 잠든 지식으로 남지 않길 바라며 ‘새로운 생각’을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현실화시키는 일이 바로 이 마을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단유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 보기로 했다. 무언가를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이 마을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식을 풀어내는 것도 생각을 전환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며. 하지만 단유가 먼저 지식을 풀어 도움을 준 대상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 “제토! 뭐야, 이제는 우리랑 같이 안 놀 거야?” 제토보다 서너 살은 어려 보이는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제토를 불렀다. “나 바쁘다.” 제토는 짐짓 어른스러운 체하며 아이들을 쫓으려 했지만, 아이들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같이 놀자, 응?” 그들의 놀이 문화는 기본적으로 여러 사람이 편을 갈라서 역할을 수행하는 역할 놀이였다. 사람이 많을수록 재미가 더 많아지는 것은 기본이고, 그중에 특히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있다면 재미가 배가된다. 그리고 제토는 연기를 잘했다. 상대의 연기를 잘 받아주는 이에 속했기에 제토는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안 돼. ‘발명가’는 계속 고민해야 하는데, 너희들이랑 놀고 있을 시간이 없어.” 단유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런 기구를 만들어내는 사람을 일컬어 ‘발명가’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들은 후, 제토는 스스로를 ‘발명가’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에서 필요한 게 뭘까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사실 그동안 살면서 불편하다는 생각을 별로 해 본 적이 없었기에 갑자기 생각을 바꾼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영 재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무문 대신 철문으로 만들면 좋지 않을까?” 그러면 밤에 잘 때 덜 춥지 않을까, 라는 이유였다. 철문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와 철문을 여닫을 때 들어갈 힘이 많이 필요할 거란 지적에는 쉽게 수긍했지만 말이다. 사실 보안의 문제와 견고함의 문제가 지적된다면 철문도 고려해 볼 수 있겠지만, 이곳은 그런 상황이 아니니 굳이 철문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철이 쓰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제토는 이후 집 안에 필요한 것이 있나 없나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식탁을 보고, 의자를 보고, 침대를 보아도 당장 필요한 게 보이지 않았다. “루치드, 바닥에 있는 이 나무들을 바꾸는 게 좋지 않을까?” “왜?” “나무도 썩는다며? 썩으면 벌레나 쥐들이 많이 모이잖아?” 그것은 제토 나름의 예리한 관찰에서 비롯된 추론이었다. 썩은 음식에 꼬이는 벌레와 쥐를 봤던 기억을 참조해서 ‘썩은 것에 불결한 것들이 꼬인다’는 결론을 만들어낸 것이다. 역시 적당한 이유는 아니지만, 확실히 위생을 생각한다면 집안 환경을 바꾸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었다. 물론 제토가 위생을 염려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제토는 그저 자고 있을 때 잠을 깨우는 벌레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을 뿐이었다. “돌을 깔아서 바닥을 만들 수도 있지만, 그러면 너무 일이 커지지 않을까?” “돌로도 바닥을 만들 수 있어?” 그보다는 ‘시멘트’와 같은 방식이 더 좋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건 좀 더 깊이 생각해볼 문제다. 아무튼, 제토의 때아닌 호기심에 곤란을 겪는 사람은 같이 놀아주지 않아 삐친 친구들만이 아니었다. 레이도르 역시 시도 때도 없이 어디 불편한 곳이 없냐고 물어보는 제토 때문에 지금이라도 산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민이 됐다. 어미 돼지를 잡으면서 꽤 큰돈을 벌지 않았다면 고민의 여지도 없었을 일이다. “가자, 응?” 칭얼거리며 제토를 부르는 아이들이 쉽게 자리를 떠나지 않자 제토도 난감해했다. 아이들과 노는 것도 좋지만, 뭔가 멋진 발명품을 만들어서 또 한 번 마을 사람들의 환호와 축하를 받고 싶은 마음이 컸던 제토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어떡하지?” 제토가 단유를 돌아보며 묻자, 식탁에 앉아 턱을 괴고 있던 단유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 마음 가는 대로 해.” 제토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결국 아이들의 끈질긴 청원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너도 가자.” 제토는 혼자 끌려갈 수 없다는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는 문밖으로 보이는 상쾌한 햇볕을 보며 흔쾌히 제토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오랜만에 향한 놀이터에는 예전에 봤던 그 멤버들이 그대로 모여 있었다. “같이 하자!” 단유는 같이 오긴 했으나 같이 역할극을 하자는 제안은 거절했다. 그들이 즐기는 역할 놀이-아마도 어떤 전투를 재현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거기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으니 같이 어울리기 어렵기도 하거니와, 어쩐지 그런 놀이는 너무 유치한 것 같다고 여겨졌다. “혼자 구경만 하면 심심하지 않아?” 문득 단유는 초등학교 때 자신이 뭘 하며 놀았던가 떠올려 보았다. 생각해보니 명수 때문에 끌려가서 놀았던 게 몇 번 있긴 했어도 적극적으로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던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았다. ‘난 정말 비사교적인 인간이었구나.’ 이런 식으로 또 한 번 자신에 대한 성찰을 하는 단유였다. 하지만 그런 성찰을 알 리 없는 아이들은 단유에게도 같이 놀자고 졸랐다. 비록 또래보다 덩치가 커서 마치 어른 같다는 느낌이었지만, 제토와 말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게 여겨졌다. 장군 역할을 맡겨도 어울릴 것 같다는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역할극과 자신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단유는 머리를 굴려 제안을 피할 방법을 모색했다. “저기 있잖아.” 단유가 아이들의 재촉에도 꿈쩍하지 않기에 다들 포기할까 말까를 고민하던 중이었다. 단유가 입을 열자 아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내가 그거 말고 다른 놀이 하나 알려줄까?” “다른 놀이?” 아이들이 눈을 반짝였다. 사실 매일같이 반복하는 놀이가 그렇게 좋아서 하는 것만은 아니었으니, 달리 즐길 거리가 없는 아이들에게 역할극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뿐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새로운 놀이가 있다는 말은 그 어떤 말보다 달콤한 유혹이었다. “뭔데, 뭔데?” 단유는 그저 역할극을 면피하기 위해 즉석에서 게임을 만들었을 뿐이라 과연 이 아이들이 좋아할지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즐겼던 놀이가 별로 없던 터라 지구에서 초등학생들이 즐기는 놀이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기란 어려웠고, 그래서 임기응변으로 머리를 굴렸을 뿐이었다. “이건, 너희들이 하는 것과 비슷한 전쟁놀이야.” “전쟁놀이?” 아이들의 얼굴에 기대감이 무럭무럭 자랐다. ======================================= [436] 친구야 놀자(2) “우선 세 개의 팀으로 나눠야 돼.” “세 팀?” “이 전쟁놀이는 세 개의 진영이 서로를 견제하면서 싸우는 놀이야.” 단유는 공터의 중간에 가서 동그라미를 하나 크게 그렸다. “한 팀은 여기가 진영이고.” 몇 발을 더 들어가 세모를 그렸다. “여기가 또 다른 한 팀.” 다시 방향을 바꿔 같은 거리에 네모를 그렸다. “여기가 마지막 팀의 진영.” 단유의 걸음에 방해가 되지 않게 물러나 있던 아이들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세 도형의 진영은 크게 보면 삼각 구도가 이루어지도록 그렸다. 단유는 세 도형을 선으로 연결해서 그린 뒤 물러났다. 게임은 각 진영에서 시작한다. 각 진영에서 나와 공터에 나오면 외발로 뛰어다녀야 하고 적을 두 손으로 잡으면, 잡힌 사람은 공터 바깥으로 물러나서 구경만 해야 한다. “동그라미의 적은 세모팀, 세모의 적은 네모 팀, 네모의 적은 동그라미야. 다시 말해서 동그라미 진영의 사람은 세모 팀을 잡아야 하지만 네모 팀으로 부터는 도망 다녀야 돼. 세모나 네모도 그런 식으로 잡거나 도망 다녀야겠지.” 진영 안에 있을 때는 두 발로 서 있을 수 있지만, 진영 밖으로 나오면 무조건 외발이다. “상대 진영의 바깥을 한 바퀴 돌면, 그러니까 이 공터를 잡히지 않고 한 바퀴 죽 돌아서 다시 자기 진영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때는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어.” 상대 진영을 먼저 다 잡는 팀이 승리. 자기 진영 사람들이 모두 잡히거나 혹은 다른 진영의 사람이 승리 조건을 획득하면 패배. 그리고 한 진영의 아이들이 모두 두 발로 걷게 되면 역시 승리한 것으로 간주한다. “외발로 뛰던 아이의 다른 발이 땅에 닿아도 잡힌 것과 마찬가지로 공터 밖으로 나가야 돼.” 단유가 생각한 것은 초등학교 때 구경했던 놀이에서 힌트를 얻었다. 하나는 ‘오징어’란 놀이였고, 또 하나는 4학년 때 학교 수련회 때 했던 놀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외발이라는 핸디캡은 자신을 잡으려는 사람과 자신이 잡아야 하는 사람들 사이를 무사히 빠져나왔을 때 극복할 수 있도록 했고(승급), 잡히지 않기 위해 자기 진영에만 있다가는 승리를 뺏길 수 있도록 설정해(패배조건) 게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복잡한 룰을 많이 만들기보다는 단순하되 많이 뛸 수 있도록 게임을 고안했다. 거기다 눈치 싸움도 필수다. 복잡한 룰이 아니어서 아이들은 일단 단유의 놀이를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세 편으로 나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금방 진영이 정해졌다. 좁게 그려진 진영 안에 6~7명의 아이들이 서 있다 보니, 가만히 기다리고 있기도 쉽지 않았지만, 잡힐까 봐 진영 밖으로 나가는 것도 두려워 처음에는 누구도 진영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아이가 외발로 콩콩 뛰면서 밖으로 나오자 상황이 급변했다. 세모 진영에 있는 아이가 네모 진영을 향해 다가오자 네모 진영에 있는 아이들은 더욱 나가기 힘들었다. 금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고 서로 몸을 뭉치느라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사이 세모 진영의 소년이 콩콩 뛰다 동그라미 진영을 봤을 때, 동그라미 진영의 아이들도 눈치를 보며 나갈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세모 진영의 아이는 동그라미 진영의 아이들을 잡을 수 없으니 용기 있게 다가가기는 어렵다. 하지만 저 진영만 주위만 무사히 빠져나와 다시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면 두 발로 뛸 수 있게 되니, 그 유혹이 꽤 크다. 그렇다고 동그라미 진영 아이들이 당장 튀어나올 이유는 없다. 네모 진영 근처는 자신들에게 불리한 입장이니 섣불리 외발로 뛰고 있는 소년을 잡기 위해 가기 어려웠고, 그 소년이 자기 쪽으로 온다면 그때 나서도 문제는 없다. 그런 상황을 알아챈 네모 진영의 한 소년이 용감하게 진영 밖으로 뛰쳐나왔다. 나오자마자 동그라미 진영으로 달려갔고, 겉에서 맴돌던 세모 진영의 아이는 생각을 못 했는지 급히 잡으려 하다가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했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긴 했지만, 이미 네모 진영의 아이는 동그라미 진영 근처로 간 상황. 이렇게 되니 묘한 대치 형국이 되었다. 문제는 먼저 뛰어나갔던 세모 진영 소년의 체력이 점점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외발로 중심을 잡는 게 생각처럼 쉬운 일만은 아니었던 것. 다시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동그라미 진영을 돌아야 하는데,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는 것도 아쉽다. 이때 세모 진영에서 두 사람이 한 번에 튀어나왔다. 그리고 금방 네모 진영 근처로 다가와, 먼저 나온 소년 근처로 갔다. 한 소년이 속삭였다. “같이 한 번에 뛰는 거야.” 한꺼번에 뛰면 적도 자기들을 쉽게 잡지 못할 거란 것. 게다가 동그라미 진영에는 네모 진영 아이 한 명이 나가 있는 상황이니 쉽게 진영 밖으로 나서지 못할 거라고 추측했다. 셋을 세고 뛰어가기로 한 소년들이 동그라미 진영을 보며 눈치를 보다가 셋을 외치고 뛰기 시작했다. 동그라미 진영의 아이들은 조심성이 너무 많았던 게 탈이었다. 동그라미 진영을 향해 달려오는 아이들을 보면서도 잡을 생각을 미처 못하다 자기 진영을 돌아갈 때쯤에야 진영 밖으로 나왔다. 사실은 그때쯤에 자기 진영 앞에 있던 네모 진영의 소년이 자길 잡으러 오는 줄 알고 도망가느라 앞이 비면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공터를 크게 빙 돌아 나가는 아이들을 잡으러 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동그라미 진영에서 네 사람이 한꺼번에 나와 달아나는 세 사람을 잡으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놓치고 말았다. 한 사람은 잡으러 달려오는 아이를 피하려고 격하게 몸을 움직이다 그만 중심을 잃고 두 발이 땅에 닿고 말았다. “와! 넘어졌다, 넘어졌어!” 그런데 상황은 더 복잡하게 변했다. 네 사람이 나온 순간, 네모 진영에서도 아이들이 뛰쳐나온 것이었다. 쉽게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건지 아이들이 뛰쳐나왔고, 동그라미 진영 바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잡으려는 자와 잡히지 않으려는 자들의 술래잡기가 시작되고 그 틈에 세모 진영에는 두 발로 걸을 수 있게 된 아이가 둘이나 만들어진 것이다. 두 발로 뛰어다닐 수 있다는 조건은 너무나 유리한 조건이었다. 더 이상 진영 안에 있을 필요가 없었고, 동그라미 진영의 아이들을 무서워할 필요도 없었다. 아수라장 속에 끼어들어 서로 잡겠다고 뛰어다니는 통에 난리가 났고, 그 와중에 팀의 지원을 받으며 세모 진영에는 두 발로 걸을 수 있게 된 아이들이 늘어났다. 결국 게임은 적극적으로 게임을 풀어나갔던 세모 진영의 아이들이 네모 진영의 아이들을 모두 잡아내면서 게임이 끝이 났다. 아이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재미있다며 계속 게임을 했다. 소극적이면 다른 팀에게 승리를 헌납할 뿐인지라 적극적으로 게임에 임했고, 점점 아이들끼리 협동을 해서 플레이하는 전략도 생겨났다. 제토도 그 속에서 신나게 게임을 했고, 모처럼 ‘발명’을 잊을 수 있었다. 덕분에 단유는 한가롭게 오후 햇살을 맞으며 공터 밖 둔덕에 앉아 여유를 즐겼다. 급조한 것 치고는 아이들이 재밌게 즐겨줘서 다행이라 생각하던 단유였다. 사실 급조했다지만, 그 게임에는 최근 단유가 고민하고 있던 문제가 반영되기도 했다. 하나는 기하학적 문제였고, 또 하나는 균형에 관한 문제였다. ‘원’은 가장 완벽한 도형, 이란 말이 있다. 수학적으로 원의 조화로움과 신비로움을 풀어 설명한 이도 있지만, 건축학적으로나 기술학적으로 원이란 도형은 여러 곳에 응용이 된다. 가장 단순하게는 바퀴의 활용일 테고, 다리나 집의 건축 시에도 아치형으로 짓는 등의 다양한 활용이 보인다. 단유가 만든 도르래도 역시 원을 활용한 것이나 마찬가지니 원이란 기하학적 도형은 연구가치가 무궁무진하다고 볼 수 있겠다. ‘삼각형’은 가장 안정적인 도형, 이라고 부른다. 세 변의 길이가 바뀌지 않는 한, 외부 힘에 의한 모양 변형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안정적인 구조라는 것이다. 다리, 지붕, 그 외 여러 가지 구조물에 활용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사각형’은 직관적인 도형이다. 사람의 시각에서 가장 정갈하게 다듬어진 모양이라 어디에서든 사각형을 찾을 수 있다. 단유가 이런 도형을 떠올리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시계 때문이었다. 시계는 굉장히 복잡한 구조라는 인식이 있지만, 스위스에서 만들어진다는 고가의 초정밀 시계를 만들 게 아닌 이상, 만드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단유는 생각했다. 수학적 계산을 통해 정밀하게 기어(gear)비를 맞추기만 한다면 나름 정확한 시계를 만들기도 어렵지는 않으리라. 시계를 만들려는 생각을 가진 것은 녹스 때의 경험도 있지만, 사람들의 기술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도 있었다. 여기 사람들도 시간의 흐름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시계에 의해 분할된 시간의 인식은 일과의 효율성을 높여줄 것이다. 또한 그런 시계를 제작함에 있어 여러 가지 기술의 활용은 이 마을 사람들에게도 기술의 중요성과 개발의 필요성을 자각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향후에도 단유가 무엇인가를 할 때, 마을 사람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을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 단유는 먼저 아잘을 찾아갔다. 마을에서 단유의 이야기에 가장 관심을 많이 가져주는 이가 아잘이었기 때문이었다. “시계?” 아잘은 단유의 설명을 듣고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잘은 시계가 왜 필요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반대를 하진 않았다. 단유가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 자체에 호기심을 느꼈고, 그것이 어딘가에는 분명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잘이 단유를 데리고 간 곳은 목재 공방이었다. “이게 뭐라고?” “시계라고, 시간을 파악하는 장치에요.” “시간? 그걸 왜?” 아잘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론,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만들어나 보라고.” “아니 필요도 없는 걸 왜 만들겠다고 이 난리를 피운대? 차라리 우물에 있는 도르래처럼 필요한 걸 만들라고.” “이봐, 론. 자네는 도르래를 만들 수 있겠어?” “못 만들 게 뭐 있어?” 이미 실물이 있으니, 그걸 보고 따라 만드는 것쯤이야 어렵진 않다. “그래, 그거야. 따라 보고 만들 수 있는 게 있으니까 자네도 만들 수 있는 거지. 시계라는 것도 당장은 어디에 쓰일지 모르지만, 일단 만들어보면 나중에 비슷한 장치를 만들 때 도움이 되지 않겠나?” 단유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식으로라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기술은 단순히 사용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기술의 필요성을 느끼고, 활용해야만 앞으로의 행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식사를 언제 하세요?” “식사? 그야 배고플 때 하지.” “혹시 식사 때를 놓친 적도 있지 않나요?” “그야, 일을 하다 보면 놓칠 때도 있지.” “잠은 언제 자세요?” “피곤하면 자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론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잠을 잡니다. 만약 잠을 제때 못 자면 그다음 날 피곤하죠?” “잠을 못 잤으니까 그렇겠지.” “밥을 제때 못 먹으면 배가 고프고, 몸에 힘이 떨어지니까 제대로 일을 하기 힘들죠.” “그렇지.” “만약 잘 시간, 밥 먹을 시간을 꼬박꼬박 알려주는 기계가 있다면 어떨까요?” 론은 물론이고 아잘도 단유의 물음에 대답을 궁리해 보았다. “…편하기는 하겠네.” 론이 그래도 뭔가 미심쩍다는 듯 툴툴대는 말투로 대답했다.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까지 정확히 알려주는 시계가 있어요. 그 시계에 맞춰서 아침에 일어나 시계가 알려주는 시간에 밥을 먹고 시간에 맞춰서 일터로 나가요. 하루 일하는 시간도 시계가 알려주는 거예요.” “시계가?” “특히 해가 뜨지 않는 날, 흐린 날에도 시계는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죠. 언제 밥을 먹고 언제 잠을 자야 하는지도 알려주죠. 그 시간을 따르기만 해도 몸이 피곤하다거나 힘든 일이 줄어들겠죠.” 흐린 날, 어두울 때 시간을 알 수 있다는 건 꽤나 매력적으로 들렸다. “게다가 또 다른 활용법이 있죠.” “뭔데?” 아잘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예를 들어, 아저씨가 친구분과 저녁을 같이 먹자고 약속을 한다고 가정해봐요. 시계가 없을 때는 각자의 저녁 시간이 다르니 정확한 시간을 맞추기가 힘들겠죠. 하지만 시계라는 기준이 있다면 정확한 시간에 만나는 일도 가능해지는 거죠.” “호오.” “두 분은 공방에 있으니까, 이런 경우도 가능하겠네요. 손님들이 맡긴 물건을 찾으러 올 때요, 언제까지 오라고 하는 경우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때, 정확히 몇 시에 오라고 시간을 정해놓으면 찾으러 오는 사람도 헷갈리지 않을 것이고, 아저씨들도 그 시간까지 물건을 만들어 놓으면 되니까 편하겠죠?” 아잘과 론이 서로 마주 보고 놀란 표정을 드러냈다. 다른 부분은 그냥 대충 좋겠다는 정도였지만, 마지막의 이야기는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점이 있었다. ======================================= [437] 친구야 놀자(3) 처음 시계가 만들어진 이유는 천문을 관측하기 위함이라고 단유는 학교에서 배웠다. 별의 운행과 변화를 알기 위해 만들어진 게 처음의 시계였다면, 이후에는 이슬람교에서 매일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기도를 해야 하는 의례 때문에, 그런 종교적 이유로 시계의 필요성이 대두하였다. 그리하여 기계적인 진자시계는 13세기 말에 등장했다. 하지만 이 마을에는 그런 종교도 없었고, 별을 관측하려는 호기심을 가진 이도 없었다. 기본적으로 대부분 사람들은 농경을 주업으로 한 이들었고, 그들에게 하루의 일과는 해가 뜨고 지는 일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시계가 생김으로서 기대할 수 있는 결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사람의 일과에 ‘계획’이란 게 생길 테고, ‘효율성’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단유는 일에 착수하기도 전에 또다시 벽에 봉착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로 해야 한다는 말이냐?” 단유가 만들려는 시계는 기어가 정교하게 맞물리며 돌아가는 진자시계였다. 진자의 규칙적인 왕복 운동으로 일정하게 회전하는 기어에 의해 시간을 측정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원리인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밀하게 만들어진 기어가 중요하다. 그런데 지난 펌프 때도 알던 문제였지만, 이곳에서는 정밀한 무언가를 만들기 위한 도량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부분은 눈짐작으로만 할 뿐이고, 그마저도 공방마다 다르게 측정되니 문제가 많았다. 단유는 임시로나마 도량법을 만들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단유는 얼추 눈대중으로 익숙한 ‘㎝’ 단위를 나무에 새겨 자를 만들었다. “이걸 기준으로 하면 언제라도 똑같은 길이의 제품을 만들어내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론은 조금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눈대중으로 같은 길이의 목재를 만들어내는 데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뭘 잘라내거나 할 때마다 ‘자’ 따위를 대고 길이를 잰다는 행위가 일을 더 어렵고 복잡하게 만들 거 같았다. 그러나 시계의 외형을 이룰 판을 짤 때, 자를 이용했더니 생각보다 덜 불편할 뿐만 아니라 정확하게 판자를 만들어낼 수 있어서 론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만일 시계를 만들지 못한다고 해도, 그리고 시계가 쓸모가 없는 것이라 해도 ‘자’ 하나면 충분히 보답을 받은 셈 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시계의 제작은 일단 철의 사용을 최대한 피했다. 아직까지는 쇠를 다루는 기술에 대해 단유가 알고 있는 바가 너무 적다는 게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나무로만 하다 보니 일단 단유가 필요로 하는 부품을 만드는 것의 난이도는 낮았다. 하지만 나무는 그 내구성과 정밀도가 많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보니 시제품 제작용으로만 만족해야 했다. 단유가 매일같이 톱밥 냄새 날리며 집에 돌아오고, 제토가 매일같이 땀에 전 흙냄새를 날리며 집에 돌아오니, 레이도르의 고민은 날로 깊어만 갔다. 본업이 사냥꾼이고, 애초에 이곳에 온 것도 사냥감을 처리하기 위해 잠시 들렀을 뿐인데 이대로라면 마을을 떠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잠시 이야기 좀 하자.”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레이도르가 단유를 불렀다. “진작에 할 이야기였는데 미루다 보니 늦었구나.” 평소 약간 쳐진 듯이 내려가 있던 레이도르의 눈꼬리에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우선 솔직히 말하자면, 난 아직도 너의 정체를 의심한다.” 달리 몰랐던 사실도 아닌지라 단유는 덤덤하게 레이도르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다. 너를 이 마을에 두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일지 말이다. 아니라면 너를 데리고 산으로 가거나, 아니면 아예 이 마을 밖으로 내보는 게 좋으리라 생각했다.” 레이도르는 소매 밖으로 나온 팔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동안 네가 보여준 모습을 본다면 마냥 의심하며 경계할 일만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어쩌면 너를 이 마을에 둠으로써 이 마을이 전보다 훨씬 살기 편하게 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이 마을에는 레이도르의 친구는 물론,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촌장 역할을 했던 아버지와 달리 자신은 어떤 직위도 맡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을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은 누구 못지않다고 자부하는 레이도르였다. “물론 네가 가져올 변화가 모두 좋은 결과만 낳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때로는 어떤 변화가 사람들 사이에 분열을 낳기도 한다. 단유 역시 그 점을 모르진 않는다. 가령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나뉘는 결과가 벌어질 수도 있다. “그래도 도르래장치는 대단했다.” 레이도르의 칭찬에 단유는 살짝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그래서 일단 물어봐야겠다. 넌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이냐?” 너무 진지한 분위기인지라 여태 말없이 지켜만 보던 제토도 그 대답이 궁금해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는 신중하게 말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일단은 이곳에 머무르고 싶어요.” “정말?” 제토가 반기는 가운데, 레이도르는 표정 변화 없이 물었다. “왜?” 레이도르는 단유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되물었다. “넌 찾는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차마 시간이 너무 흘러서 쉽지 않을 거란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이 마을에 아저씨 말고도 아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레이도르가 단유에게 제공한 정보는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다 죽어서 마을 뒷산 부근에 묻혔다는 이야기가 레이도르가 건넨 이야기의 결말이었다. 그러니 단유는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마을에서 머무를 필요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피력한 셈이었다. 레이도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유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제스처였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반대였다. “그런 이유라면 설명이 부족하다.” “그리고…이 마을에서 뭔가 이루고 싶은 것도 있고요.” “여기에서?” 단유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오해 없이,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애를 썼다. “제가 살던 곳은 기술적으로 굉장히 발달한 곳이에요. 지금 만드는 시계 같은 것은 우스울 정도고요. 지난번에 만들려다 못했던 펌프같은 것은 아주 과거에나 쓰던 물건일 정도죠.” 레이도르는 감히 상상도 가지 않는 세계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 기술을 여기에 적용 시켜 보겠다?” “아니요.”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감히 그런 생각을 했다가 실패한 게 바로 지난번의 일이었잖아요?” 단유는 그때 자신의 행동과 생각이 경솔했었다는 사실을 반성했다. “그 기술을 그대로 옮겨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요. 저도 거기선 일개 학생에 불과해서 그 많은 장치와 기술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다 알진 못하거든요.” 도르래도 만들어내는 단유가 고작 학생이라 다 모른다고 하니, 그럼 그런 것도 못하는 자기들은 뭔가 싶어 레이도르는 괜한 자괴심이 들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제가 누렸던 기술과 과학은 그저 편해지려고만 만든 기술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편하려고 한 게 아니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살던 곳의 기술과 과학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었어요.” ‘인간답게 산다’는 말이 와 닿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간다운 게 과연 무엇인가? “설명하자면, 과학이란 자연을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기 위한 논리를 가리켜요. 왜 비가 올까, 왜 지진이 벌어질까, 왜 구름이 움직일까, 왜 해가 뜨고 질까.” 레이도르는 지금까지 들은 것 중 가장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땅에 심은 싹은 어떻게 자라는지, 나무가 모래처럼 삭아서 쓰러지는 이유는 무엇인지, 강물이 흐르는 이유는 무엇이며 바람이 부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연구하는 학문이 바로 과학이에요.” “그걸 알 수 있다고?”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완전히 알 수 있는 건 아니고 추정만 하는 경우도 있죠. 아무튼 과학은 그런 자연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연구하는 내용이에요. 그리고 기술은.” 단유는 얕은 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 “기술은 자연을 인간이 실생활에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한 방법이에요. 예를 들어 논에서 쓰는 쟁기는 땅을 훨씬 쉽게 갈기 위한 기술이고, 아저씨가 쓰는 활은 짧은 팔을 가진 인간이 사냥을 유용하게 하려고 공격 범위를 넓힌 기술이라고 할 수 있겠죠.” 현재 사용하는 것들을 예로 들어준 덕에 레이도르는 단유의 이야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 식탁이나 의자도 기술이죠. 만약 식탁과 의자가 없다면, 사람들은 바닥에 주저앉아서 스푼을 들어야 했을 거예요.” “그렇겠지.” “그런데 이 식탁과 의자가 과연 편하기만 하려고 만들었을까요?” 레이도르는 단유의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웠다. 워낙에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사용했던 물건이라 달리 다른 존재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다. 방금 예로 든 것처럼 바닥에 주저앉아서 먹는 것보다 편해서 이용한다는 이유 외에 다른 이유가 있을까? “바닥에 앉는 좌식 생활이 더 편한 사람도 있겠지만, 이 자세는 이 골반에 많은 무리를 줘요. 잠깐잠깐 앉는 것은 문제가 없겠지만 오래 지나면 허리나 골반에 문제가 생겨서 병이 될 수 있죠.” “고작 바닥에 주저앉는 게 말이냐?” “잠깐은 괜찮지만, 그게 몇십 년에 걸친 생활이 되면 그럴 수 있다는 이야기예요. 그 밖에도 목의 뼈나 척추에도 좋지 않다고 하죠. 거기다 위생의 문제도 있을 수 있어요. 바닥에 음식을 두는 게 위생상 좋지 않다는 거죠.” ‘위생’에 관한 부분은 지난번 펌프 제작의 필요성을 이야기할 때 언급한 바가 있어서 레이도르는 달리 설명을 요구하진 않았다. 어쨌든 그저 사용에 익숙하기에, 관습적으로 사용할 뿐인 식탁과 의자에 그런 의미가 있다고 들으니 뭔가 새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바로 그런 점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아니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단유가 이야기하는 인간다움이란 바로 ‘생각’을 하는 인간이었다. 필요한 것을 만들고, 개선 시키고, 발전시키는 것은 단지 몇 사람의 노력만으로도 가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회의 발전, 공동체의 성장은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토론하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한다. “제토처럼 주변을 관찰하고, 필요한 것이 없는지 찾아보는 노력들이 있어야만 그 사회가 발전을 한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단유가 기술을 전달한다고 해서 사회가 발전할 수 있을까?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는 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바로 시계였다. 시계라는 기술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단유가 보건대, 시간은 ‘불’의 발견 이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그게 너한테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단유가 말한 것은 듣기에는 좋았다. 하지만 그 사정을 그대로 믿기란 어른의 경험이 녹록지 않다. 비록 단유 만큼 똑똑하지 않지만, 어른으로서 살아온 세월이 있는 만큼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만큼은 단유 못지않게 잘 안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이득도 없이 돕는다? 마을에서 함께 자란 죽마고우가 아니고서야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 마을을 돕는 일은 곧 저를 위한 길이기도 해요. 여태껏 배운 바를 풀어 그것이 실제로 도움이 되는 길인지를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요.” “도움?”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과연 자립할 수 있는가를 알아보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역설적이지만,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는 것만이 삶의 유일한 방식은 아니다. 모두가 욕심 없이 서로를 돕고 도우며 살아간다는 것은 이상적인 망상일지도 모른다. 도움을 줄 때도 있겠지만, 도움을 주지 못할 때도 있을 것이고, 도움을 받을 때도 있겠지만, 도움을 받지 못할 때도 있을 것이다. 공동체라는 묶음으로 인식되는 사회라 해도, 한 사람 한 사람은 각자의 역할을 부여받고 자기 몫을 해야 한다. ‘자립’이란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홀로 살아간다는 의미이니, 결국 ‘혼자 살 수 있는가’를 검증해야 한다. 지구에서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그 검증이 보류되는 형편이니 생각을 덜 하게 되었지만, 이곳에서는 지금 이 순간도 검증받고 있으니 단유에게는 소중한 시간이자 기회였다. ======================================= [438] 친구야 놀자(4) 시계를 만드는 일은 생각처럼 순조롭진 않았다. 처음 문제가 발생한 것은 나무를 깎아서 단유가 필요로 하는 부품들을 일일이 만들어내야 할 론이었다. 그의 손재주는 나쁘지 않았지만, 실물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오로지 단유의 설명과 그림에만 의존해서 복잡한 부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단유는 좀 더 정밀한 그림을 그려서 보여줄 필요성을 느꼈고, 결국 ‘제도(製圖)’를 연구하게 되었다. 제도를 위해 단유가 필요로 한 것은 종이와 연필, 그리고 정밀 측정 도구였다. “이걸 써라.” 론은 단유에게 거친 질감의 종이를 건넸다. 식물을 가공하여 만들었다는 종이는 색과 질감 면에서 지구의 것과 많은 차이를 보였지만, 못 쓰겠다는 정도는 아니었다. 종이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니 단유는 고맙게 받아들였다. “귀한 것이니 낭비하면 안 돼. 나도 몇 장 없으니까.” 작은 사이즈로 잘라 나눠 쓰면 효율이 높아지겠지만, 단유가 그리는 제도의 치수와 모양을 보고 확인해야 할 론에게 정확한 그림을 전달하고자 단유는 최대한 원본 사이즈에 맞게 그림을 그렸고, 그래서 꽤 많은 종이가 사용되었다. 연필 역시 목탄을 가늘게 잘라서 최대한 얇은 선이 그려지도록 했다. 이 때문에 목탄의 소요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이 소모되었다. 컴퍼스는 이미 예전부터 원을 그릴 때 쓰는 게 있었다. 다리 두 개와 그 두 개를 핀으로 연결하여 쓰게끔 만들어져 있는데, 단유가 만든 자를 이용하면 원하는 사이즈의 원을 그리는 데 문제가 없었다. 다만 문제는 각도기였다. “그건 중요한 거냐?” 단유는 진지한 얼굴로 론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부품은 정확한 타이밍에 서로 맞물리면서 돌아가야 하는데, 그 비율대로 정확히 묘사하려면 아무래도 각도기가 필요해요.” 단유는 컴퍼스로 종이에 원을 그려 넣으며 대답했다. 원은 하나로 그치지 않고, 여러 개의 원이 겹쳐지게 여기저기 그려졌다. 때로는 자를 이용해서 사이에 선을 긋기도 하니, 지켜보는 론은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단유는 중앙의 원을 중심으로 사분원을 한 뒤, 사분원점을 중심으로 같은 반지름의 원을 4개 더 그려 넣음으로써 간단하게 원을 12등분 시켰다. “오호?” 단유가 만들어낸 원의 등분은 그 과정의 미스테리함을 떠나 결과는 신비로웠다. 론은 신기한 얼굴로 지켜보다 그 원인을 물었고, 단유는 때아닌 기학학 교실을 열었다. “그런데 왜 360이란 숫자가 나오냐?”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며 변명했다. “사실 제가 살던 곳에서 그렇게 나눠 쓰다 보니 익숙해서 사용하는 면도 있고요. 360이란 숫자가 어중간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꽤 유용한 숫자기도 하거든요.” 360은 꽤 많은 약수를 보유한다. 1, 2, 3, 4, 5, 6, 8, 9, 10, 12, 15, 18, 20, 24, 30, 36, 40, 45, 60, 72, 90, 120, 180, 360 과 같은 약수를 보유하는데, 특히 1부터 10까지의 수 중에서 7을 제외한 모든 수를 약수로 가지기에 10진법에 익숙한 사람들이 사용하기에도 유용한 숫자다. 단유는 간추린 설명으로 론의 이해를 도우며, 내친김에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인 이유, 그리고 이를 응용하여 원을 12등분한 과정에 대한 설명까지 해주었다. “어렵긴 한데 꽤 흥미롭기도 하구나.” 목재를 가공하여 여러 가지 물품을 만들어내는 장인의 눈에 기하학 이야기는 꽤 재밌을 뿐만 아니라, 이를 응용한 제품을 만들어보겠다는 충동까지 느끼게 하였다. 이런 와중에도 단유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은 바로 시간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사실 12등분이 가장 편하기 사용하기 좋은 숫자임에는 분명하다. 그저 단유에게 익숙한 방식이라는 이유 외에도, 12는 각도기 360과 같이 많은 약수를 보유한 숫자기에 활용도가 높다는 점이 첫 번째 이유라면, 두 번째는 기하학적으로 보기 좋은 모양이라는 점이었다. 시계는 네모난 형태로 안정감을 주지만, 시간을 알리는 밑판은 시침, 분침의 운동에 맞춰 원형을 띄게 된다. 즉 숫자가 기재 되는 판은 원형으로 제작하는데, 이때 시계를 알리는 숫자의 간격이 보기 좋게 만들어지려면 7등분, 9등분 같은 어중간한 숫자보다 4등분, 8등분, 12등분이 보기 좋다. 특히 12등분은 정삼각형의 원리가 포함되어서 균형감도 있어 보이니 단유 개인에게는 무엇보다 안정적인(?) 숫자 배열이었다. 그런데도 10등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건, 10이란 숫자의 편의성이 다른 숫자에 비해 월등히 높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손가락이 10개니까, 같은 유치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10은 ‘완전수’의 법칙에 따라 가장 안정감을 주는 숫자였다. 지구라면 어렵겠지만, 아직 시간의 개념도 제대로 서지 않은 이곳에서 시간을 10단위로 설정한다 한들 누가 뭐라 할까? 론에게 이야기했더니, 론은 뭐 별거냐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네 마음대로 해라. 네가 만드는 거 아니냐.” 레이도르와 아잘에게 물어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모두가 시간을 나누는 게 뭐 그리 대수일까, 라는 생각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단유가 만들기로 한 것이니 그에 대한 책임도 단유가 져야 한다고 생각한 탓도 있었다. 단유는 편의성과 효율성의 양 갈래에서 효율성을 선택했다. **** “이게 그 시계라는 것이냐?” 무려 1달 이상이 걸려 만들어진, 순수 나무로만 만들어진 시계가 첫선을 보였다. 거창하게 표현했지만, 실상은―단유의 시선에서―허름하기 짝이 없는 목조시계에 불과했다. 하지만 론은 매우 감격한 눈으로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건 내 인생 최대의 역작일 거야.” 단유의 도움이 많았지만, 나무를 깎고 사소한 부품들을 만들어내는 일은 대부분 론이 도맡았다. 특히 시계의 안쪽에 위치해서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기어들을 만들어내는 일은 론의 최대 시련이자, 최고의 성과였다. 론은 얼른 이라도 자랑하고 싶어 시계 바깥의 틀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시계 안쪽에서 틱탁거리며 작은 소음을 내는 톱니바퀴 여럿이 서로 맞물리며 돌아가는 모습이 공개됐다. “우와! 이게 다 뭐야?” 제토는 물론, 아잘과 그 밖의 사람들이 휘둥그레 놀란 눈으로 쉴 틈 없이 돌아가는 톱니들을 지켜보았다. 각기 다른 속도로 돌아가는 톱니들의 움직임이 현란하게 느껴져 머리를 짚는 이도 있었지만, 아잘처럼 톱니 하나하나를 뜯어 먹을 듯이 쳐다보는 이도 있었다. 가론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단유가 와서 펌프를 같이 만들자고 했을 때는 그 황당한 설명에 한 번 머리를 저었고, 거기에 들어갈 수많은 재룟값과 수고비, 하지만 그런 비용에 훨씬 미치지 못한 필요성에 의구심을 가져 단유를 돕지 않았었다. 하지만 가론 역시 한 사람의 장인으로서 이런 복잡한 ‘기계장치’를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없지는 않았다. 평소, 비록 장난스럽게 내뱉는 말이긴 해도, 나무 부스러기나 만든다고 낮춰 불렀던 론이 이토록 정교하고 복잡한 기계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에 여간 샘이 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걸 쇠로 만들 수 있냐고 묻는다면 결국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뜨거운 쇳물을 저렇게 만들어 낼 자신도 없었고, 만들어봐야 팔리지도 않을 모형이라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그 사이 단유는 시계가 움직이는 방식과 시계를 읽는 방법 등을 설명했다. “몇몇 분께는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눠서 계산하는 거예요. 그리고 해가 낮의 가장 높이 떴을 때를 시곗바늘의 출발점으로 지정했어요.” 처음에는 해가 뜰 때의 시간을 0시로 정해서 해가 질 때를 12시로 맞추는 방식을 고려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낮의 시작을 정하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산자락에 걸리는 태양의 빛이 마을에 스며들 때를 시작으로 해야 할지, 아니면 하늘에 동살이 비칠 때를 시작으로 정해야 할지 결정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낮에 이 시곗바늘이 한 바퀴 돌고요, 다시 밤에 한 바퀴 돌아서 다시 12시에 이르면 다음 날 해가 하늘 정상에 걸리는 거죠.” 이 비율을 맞추기 위해 시간이 꽤 걸렸다. 진자의 왕복 운동과 하루 해의 길이를 맞추는 작업은 가장 지루하고 어려운 작업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게 사실 정확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계절이 바뀌거나 할 때마다 낮의 길이가 달라지거든요.” 단유는 이를 위해 사정 청취를 했다. 몇몇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몇몇 사람들은 낮의 길이가 달라지는 것 같더라는 증언을 해 주었다. 하지만 나이가 든 대부분 이들이 낮의 길이가 길어지거나 짧아지는 일이 있음을 인정했다. “그래서 만약 해가 정상에 뜰 때와 이 시계가 많이 차이가 난다면 둘을 일치시키는 작업이 필요해요.” 이 작업을 위해서도 정오(正午)를 12시로 정하는 것이 좋았다. 해의 그림자를 관찰해서 정오를 알아내는 것은 손쉬운 방법이니까. “그런데, 이 시계는 하나뿐이야?” 제토가 톱니에 홀린 듯 바라보다 단유에게 물었다. 역시 중요한 질문이었는데, 단유는 론을 쳐다보며 말했다. “사실은 이 시계는 일종의 시험이었어요. 과연 이 시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그리고 시간은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죠. 그래서 이제 진짜 마을 분들에게 도움이 될 시계를 만들까 생각해요.” “어떻게? 나도 도울까?” 제토가 눈을 반짝이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시계탑을 만들까 해요.” 단유는 모여든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 시계를 만드는 동안 본격적인 겨울이 찾아왔고, 레이도르는 산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제토는 레이도르를 따라가지 않았다. “루치드랑 같이 있어도 돼요?” 제토는 마치 어려운 결정이었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레이도르에게 물었다. 레이도르는 제토와 단유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민했다. 만약 단유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제토는 레이도르를 따라 산에서 겨울을 났을 테고, 그러면 레이도르의 사냥기술을 배울 시간이 늘었을 것이다. 겨울의 사냥은 다른 계절보다 쉽지 않기 때문에 특히 많은 주의가 필요하다. 혼자서는 알기 힘든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스승의 역할을 할 때 많이 배워두는 것이 좋다. 하지만 레이도르는 그런 점을 제토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본인이 어렸을 적에 기사가 되겠다며 마을을 뛰쳐나갔던 사실을 잊지 않았듯, 자신의 아들 역시 잠깐의 ‘방황’은 있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물론 ‘방황’이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에 도움이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나쁠 것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나쁜 사례에서 더 좋은 경험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것이든, 결국은 아들의 선택이고, 아들의 미래이다. 그 모든 것을 자신이 책임질 순 없는 법이다. “그래라.” 레이도르는 떠나기 전, 단유에게 말했다. “제토를 부탁한다.” “반대 아닌가요?” 얹혀사는 건 단유였으니까. “제토, 는 내 아들이긴 하지만 아직 어려.” 단순히 나이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싶어 단유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도르는 어깨에 한 짐을 지고 집을 떠났다. **** 시계탑 건설을 이야기한 이후 어느 날, 제토와 저녁을 먹으며 그날 놀이터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던 단유는 가론과 아잘의 방문을 받았다. “이번에도 나무로만 만들 것이냐?” 가론의 질문은 시계탑 건설에 자신도 참여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셈이었다. “쇠가 많이 들지 않는다면, 나도 참여할 수 있다면 참여하겠다.” 아잘 역시 일손을 거들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나선 이유는 며칠간 시계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였다. 정확히는 시계를 가게에 걸어둔 론의 변화 때문이었다. 론은 마을 사람들이 쉽게 볼 만한 위치에 시계를 걸어두었다. 작은 추가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모양을 보려고 사람들은 종종 론의 가게에 와서 5분간 시계를 보다가 갔다. ‘5분’이라는 정확한 시간이 측정 가능한 것도 시계 덕분이었다. “아줌마, 5분 지났어요. 이제 자리 좀 비켜줘요.” “아이, 조금만 더 보자고?” “에이, 아줌마 뒤에 줄 선 거 안 보여요?” “아, 거 되게 쩨쩨하게 구네. 론, 자네 그렇게 안 봤는데 말이야.” “아줌마. 지금 가게 앞이 엉망이 된 걸 보면서 그래요? 나도 장사는 해야죠. 아니면 아예 시계 못 보게 치워버릴까요?” “알았다, 알았어. 비켜 주면 될 거 아냐.” 그리고 시곗바늘이 12시를 가리키면, 론은 사람들을 내쫓았다. “밥 먹을 시간이니까, 다들 나가요.” “저 시간이 밥 먹을 시간이란 건가?” “네. 지금이 해가 머리 꼭대기에 있을 때라고 하네요.” 사람들은 해가 내리쬐는 거리에 가서 직접 그림자를 확인하고 신기해했다. 론이 식사를 하는 시간이라고 정하자, 사람들도 각자 점심을 먹겠다고 흩어졌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시계를 구경하다 보면 론이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 다가왔다. 론은 6시가 되면 가게 문을 닫았는데, 얼추 해가 서산 너머로 지기 시작해 어둑해질 무렵이었다. “신통하네그려.” 론이 가게 문을 닫으면 그 시간이 저녁을 준비해서 먹을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론의 움직임에 맞춰 생활하기 시작했다. 론이 점심을 먹고 가게 문을 여는 시간은 오후 일과의 시작 시간처럼 여겨졌고, 그 시간에 아이들은 놀이터로 모이기 시작했다. 아이들마저도 노는 시간이 정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 [439] 친구야 놀자(5) 처음에는 솔직히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론이 ‘시간’에 맞춰 가게 문을 열고 식사를 하고, 외출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그것이 꽤 유용하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게다가 그의 시계에 맞춰 변해가는 사람들의 모습 역시 그들에게는 남달리 느껴졌다. ‘시계가 중요하다.’ 아잘과 가론은 그 의견에 동의했다. “도와주신다면 고맙죠.” 단유는 아잘과 가론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마을의 전문 기술자들이 도와준다면 아무래도 시계탑 건설에 도움이 많이 될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가론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달싹거리기만 하니, 단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내가 대신 말하지.” 아잘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가론이 말하려고 하는 건 말이다. 사실 우리 마을이 그렇게 넉넉한 편이 아니거든?” 그래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솔직히 도르래를 만들 때나, 시계를 만들 때 어떤 대가를 요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계탑이라고 하니 꽤 재료도 많이 들 거고, 그러면 돈이 많이 들지 않겠니?” “아.” 단유는 너무 사소한 문제를 놓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사실 시계만 해도 들인 재료와 노동비를 고려하면 꽤 많은 돈이 들어야 했지만, 재료를 구하는 일에도 단유가 도움을 많이 줬거니와 론이 돈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계탑은 엄연히 다르다. 건축물이기에 들어갈 재료도 만만치 않을 것이고, 단유 혼자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노동력도 꽤 많이 들여야만 할 것이다. “시계탑도 도르래라는 것 못지않게 마을에 중요한 의미가 되리라 판단은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가론의 말에 아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도 가론, 아잘과 그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단유는 밤늦게 자리에 들고서도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비록 기술력이 떨어지는 사회라 해도 다들 경제 행위는 하고 살아간다. 즉, 어떤 일에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것인데 단유는 그 점을 잠시 놓치고 있었다. 단순히 시계탑 건설을 위한 건설비 마련만이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마을의 경제 활동에 대한 고찰이 필요했다. 농경을 위주로 하되, 공방을 중심으로 한 상업 행위도 활발히 이루어지는 마을이었다. 하지만, 그 규모가 워낙 영세해서 마을 전체의 경제 규모는 자급자족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이라 봐도 틀린 말은 아니리라. 게다가 필수 자재라고 불러야 할 쇠를 외부에서 사와야 한다는 것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었다. 아마 이번에 시계탑을 만든다고 해도 주요 부품은 목재이겠지만, 커다란 부품들이 많아질 예정이니 견고함을 고려한다면 아무래도 철이 많이 필요하다. ‘돈을 벌어야 하겠구나.’ 문득 지구에서의 아르바이트가 생각났다. 2학기가 개학을 하고서도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의도치 않게 며칠 빠지게 되었으니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지금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남들보다 많은 양을 돌려서 지점장에게 기대도 많이 받았는데 이렇게 며칠을 무단으로 빠지게 되었으니, 어쩌면 다시 돌아가더라도 안 받아줄지 모르겠다. ‘꽤 괜찮은 일이었는데.’ 단유는 씁쓸한 맛을 느끼며 누워 있던 자세를 바꿨다.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돈을 벌려면 일단 어떤 상품이 오가는지를 먼저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뭐, 이렇게 무두질만 된 가죽 같은 것이나, 소소하게 이렇게 만든 것도 팔고 그렇지.” 아잘이 가판대와 가게 안에 널린 물품들을 보여주며 말했다. 레이도르 외에도 사냥 일을 주로 하는 사람이 몇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사냥해 오면 그 가죽을 아잘이 무두질로 1차 가공을 한 뒤, 그대로 외부의 마을에 가서 파는 게 대부분이었다. 외부 마을까지 꽤 거리가 먼데, 무두질을 해 놓지 않으면 가는 동안 원피(原皮)가 상할 우려가 있었다. 무두질은 꽤 많은 손이 가는 일이지만, 아잘의 밑에서 일하는 도제들도 있기 때문에 남는 시간이 생기면 아잘은 간단한 수공예품을 만들었다. 보통은 칼집이나 가죽조끼 정도지만, 그 정도라도 팔게 되면 1차 가공품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난 남는 게 없어. 그냥 먹고 사는 일이 다지.” 단유가 어떻게 돈을 버냐는 물음에 장비들을 수리하거나 또는 주문받을 물품을 제작해주는 게 전부라는 가론의 대답이었다. 남는 돈으로 철광석을 사 오더라도 대부분은 다시 주문받은 물건을 제작하는데 들기 때문에 달리 잉여가 발생하지 않았다. 단유의 상식에서 쇠는 다루기는 힘들지만, 그 견고함이 다른 재료들에 비해 차원이 달라서 활용 가능성만 따지자면 무궁무진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나 기술의 문제가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이것은 좀 더 고민해 볼 문제다. 론의 공방은 다른 공방에 조금 여유로운 편이었다. 일단 자재 수급에서 자유로웠다. 뒷산에서 나무만 베어오면 될 일이었으니까. 다만 다른 공방에 비해 재료 가공에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야만 했다. 론 외에도 여러 사람이 일을 하지만 그 사람들이 모두 함께 손을 거들어도 1차 가공에만 며칠씩 걸릴 정도로 낭비가 심했다. 목재라는 재료 자체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도구의 문제도 있었다. 하다못해 ‘선반(旋盤)’이라도 있다면 좋겠지만, 이 나간 톱과 몇 번만 쓰면 날이 상하는 대패와 칼 따위로는 빠른 가공이 불가능했다. 잡화상이나 포목점, 미곡점, 그 외 여러 가지 상점들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외부와 거래가 활발한 곳은 별로 없었다. 충분한 거래 물량이 나올 만큼의 생산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광산을 개발해 볼 생각은 없었나요?”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산인데도, 마을의 주력이 농사라는 게 의아하게 여겨졌다. 점심을 제공해주겠다며 친절을 베풀던 에드가 제토와 단유 앞에 그릇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예전에 광산으로 쓸만한 곳을 찾다가 포기했다고 들었다.” 에드는 자신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광산을 개발하려는 노력들이 있다가 어느 순간 멈췄다고 설명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단유는 이들이 찾으려 한 광산이 ‘노천채굴(露天採掘)’방식 임을 깨달았다. 저렴하고 안전한 채굴방식이긴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부분이 없다면 채굴 자체가 어렵고, 채굴할 부분을 찾더라도 때로는 대량의 표토제거작업이 필요할 수 있는데 이를 진행할 손이 이 마을에는 모자랄 것으로 보인다. 단유는 비록 벽에 가려 다 보이진 않지만, 마을 뒷산 혹은 더 나아가 제르아 오마 근처의 산들에서 의미 있는 채굴광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궁리했다. 하지만 아무런 기술도 없이 그저 눈으로 채굴광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단유 이전의 마을 사람들이 그런 이유로 포기했을 것이다. “여기서는 ‘금’이 어때요?” “금?” 에드의 되물음에 단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빵에 수프를 찍어 먹던 제토가 눈을 껌뻑이며 에드를 쳐다보았다. “금광만 찾는다면, 내가 이 장사 당장에라도 때려치우지. 그리고 곡괭이 하나만 들고 들어가야지. 금 한 덩이만 캐서 아내랑 오순도순 지내야지.”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는 표정을 짓던 에드가 주방으로 들어가고, 단유는 턱을 괸 채로 고민에 빠졌다. 여기서도 ‘금’은 높은 가치를 지니는 광물이라는 것을 확인했지만, 과연 금을 찾기가 쉬울까? “금 찾아보게?” 단유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찾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찾는다고 찾아질까, 라는 고민이 드네.” 제토가 눈을 반짝였다. “그거 찾기 쉬워?” 이번에는 단유가 눈을 끔뻑이며 제토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얘들아!” 놀이터에 등장한 제토가 소리쳤다. “왜 이렇게 늦었어? 시간을 지켜야 할 거 아냐? 다들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한 아이가 제토에게 툴툴거리듯 말했다. 시계가 생긴 후, 얼마 되지도 않아 마치 새로운 패션이 유행되듯 온 마을의 점심시간이 정오로 통일이 되었다. 그래서 거의 같은 시간에 각 집의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식사를 한 뒤, 식사가 마치면 오후 일과가 시작되고, 그 시간에 맞춰 아이들은 놀이터로 집합을 했다. “야, 오늘은 ‘투루루(karratu-zirkulu-triangelu)’ 말고 다른 거 하자. 투루루도 매일 하면 재미없잖아?” “매일 해도 재밌는데?” 아이들의 반응은 제토의 예상과 달랐다. 사실 제토도 단유가 가르쳐 준 ‘투루루’가 재미있었다. 눈치를 보며 기회를 엿보다가 적들의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서 달아나는 쾌감이 꽤 좋았던 탓이다. “그래도 오늘은 다른 거 좀 해보자.” 제토가 히죽 웃으며 단유를 가리켰다. “루치드가 이야기해준 건데.” ‘투루루’ 게임의 창시자, 단유의 이야기란 말에 다들 귀가 솔깃했다. 하지만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난 반대.” “뭐야?” 무슨 이야기인지 듣기도 전에 단유가 반대를 외치니, 제토의 당황스러움은 둘째치고 다들 호기심이 일었다. 아이들이 추궁하니 제토가 ‘금’이라고 대답했다.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아이가 단유에게 물었다. “금 찾을 수 있어?”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단유의 단호한 대답에 이번에는 제토를 쳐다보았다. 제토는 항변하듯 말했다. “찾아보면 있을 수도 있다며?” “있을 수 있다는 거지, 꼭 있다는 말은 아니야.” 제토는 그 말이 그 말이지 뭐, 라며 아이들을 둘러 보았지만 이미 아이들은 단유의 대답을 듣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제토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술래잡기 같은 거야. 숨겨진 금을 찾는 거지.” “그거랑 그거랑 어떻게 같냐?” “같은 거야! 그리고 생각해봐. 금만 찾으면 부자 되는 거야!” “부자?” 제토는 얼굴이 벌게지도록 열과 성을 다해 아이들을 구슬렸다. “부자만 되면 잡화점에 있는 물건들 다 살 수 있고, 먹고 싶은 거 매일 먹을 수 있잖아?” 제토가 평소 가지고 있던 부자의 개념은 그런 것이었다. 뭐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소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이들 중에는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 아이도 있었고,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해하는 아이도 있었다. “부자가 되면 일 많이 안 해도 되니까, 놀 시간이 더 많아질 거야!” 그 말에는 대부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게 진짜냐고 되물었다. 당연하지만 오후 시간에 여기 나와서 노는 아이들이 이 마을 아이들의 전부는 아니었다. 여기 나오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도 많았는데, 그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거나 집에 일손이 모자라는 경우였다. 예를 들어 아잘의 아이들 경우에는 큰 아이부터 작은 아들까지 모두 공방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마 지금 이 시각이면 점심을 먹고 나른한 기분을 쫓기 위해 가죽에 기름칠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 있는 아이들이라고 달리 놀기만 하는 것은 아니어서, 이들은 주로 오전에만 일손을 돕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직 나이가 어리고 힘이 약한 이들은 일손을 거들기는커녕 불편만 더할 뿐인지라 간단한 일과에만 동원되었다. 드물게 제토와 같이 15살이나 먹고도 노는 아이들이 있지만, 그것도 제토처럼 매우 특수한 일을 하는 아버지를 둔 경우였다. 그 경우에도 오전에는 집안일을 돕기 위해 오전에는 일을 해야 했다. 부자가 되면 일을 적게 하고, 놀 시간이 늘어난다는 제토의 허무맹랑한 말이 그들에게 솔깃한 제안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금을 찾으면 되는데?” 한 아이의 제안에 제토가 히죽 웃었다. “산에 올라가서 찾아야 한대.” “그냥?” 제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 고개를 돌려 둔덕 너머의 산들을 지켜보았다. 산허리에 구름이 걸린 넓고 높은 산이 묵묵히 아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440] 개천에서 용났네(1) 처음에는 제토의 말에 시큰둥했던 아이들도 하나둘씩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면서 묘한 열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무리 내에서 나름 신망받는 제토였기에 아이들이 쉽게 무시하지 않는 것도 있었고, 제토가 내세운 핑계가 그럴듯하게 들린 까닭도 있었다. “여기서 뛰나, 산에서 뛰나 똑같아. 게다가 만약 우리가 금을 발견한다면, 어른들도 우리한테 함부로 말 못할걸?” 부모들이 달려들어서 손찌검하는 대신, 무등을 태우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자랑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아이들의 얼굴은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했다. “잠깐.” 단유는 제토를 가로막았다. 처음에는 그냥 호기심으로 바라보려 했지만, 이대로 정말 산에라도 갔다가는 감당하지 못할 일이 벌어질 수 있었다. 산은 위험한 곳이다. 하지만 겨울 산은 그냥 위험한 게 아니라 죽음과 맞닿는 곳이었다. 겨울의 초입부터 굶주린 짐승들이 결코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 “너희들 겨울 산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는 있어?” “눈도 안 내렸잖아?” 겨울이라 춥기는 해도, 눈이 내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온도가 많이 내려간 탓에 햇빛이 들지 않는 산비탈에 잘못 발을 디디면 그대로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산이 위험하다는 이유에서도 그렇지만, 금을 찾기 쉽지 않다는 것도 같은 이유야. 이 근처에서 금이 나오는 걸 본 적 한 번도 없지?” 당연히 아이들은 단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금을 찾는 건, 이 저 언덕 풀밭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똑같아.” 겨울이라 풀이 마르긴 했어도 잡초로 우거진 둔덕이었다. 그곳에 떨어진 바늘을 찾는다? 쉽진 않겠다. “그 정도로 어려워?” “어려운 게 아니라 불가능한 거야.” “그럼 아까는 왜 금을 찾아보겠다고 한 거야?” 제토가 되묻자, 그걸 이제야 묻는 것이냐는 얼굴로 단유가 눈꼬리를 내렸다. “산에 오르지 않아도 금을 찾아보는 방법이 있으니까.” “정말? 그럼 그 방법을 말해주지 그랬어?” 제토가 발을 구르며 단유를 채근했다. “어떻게 하는 건데?” 물론 단유가 생각한 이 방법도 무모하긴 마찬가지였다. 바로 사금(砂金)이었다. 과학 시간에 들은 바에 의하면, 금은 특성상 무겁기 때문에 풍화, 침식 등에 의해 붕괴, 모래처럼 파쇄(破碎)되어도 강바닥의 점토층에 모이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접시 같은 것을 이용해 그곳의 모래를 퍼서 물과 담아 돌리면, 가벼운 모래와 흙은 물에 섞여 흘러나가고 무거운 금 알갱이만 남게 된다. 사실 단유는 제토가 기대하는 것만큼 금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금은 그냥 순간적인 호기심에, 그러니까 이곳에서도 지구와 같이 금을 희소광물, 귀금속으로 인정하는지를 궁금해했던 것일 뿐, 실제로 금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제토의 추궁에 대답하다 보니, 지구에서 배웠던 여러 가지 지식―이라기 보다는 잡학(雜學)이라 해야 옳을 것―들이 떠올라 이런저런 방법을 궁리하게 된 것에 불과했다. “물에도 금이 있어?” 그냥 물이 아니라 오랜 세월 퇴적된 강바닥에 쌓인 모래에 금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해 보자!” 제토는 다시 흥미를 느꼈다. 산에서 뭘 찾는 것보다는 훨씬 안전하고 재미있을 것 같았다. 아이들도 호기심을 느끼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강에 얼마나 많은 금이 숨어있다는 것인지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것이다. ‘투루루’게임을 하기 위해 벗어두었던 망토를 다시 입고 아이들은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나무 접시를 하나씩 들고 나타났다. 강은 마을에서 대략 20분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강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개천 정도의 수심이 낮은 물줄기였다. 여기서 좀 더 가면 다른 지류와 합쳐지면서 강이 깊어지는 모양이지만 거기까지 갈 필요는 없어 보였다. 단유는 어설프게나마 사금을 채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단유도 처음 하는 것이지만, TV에서 스치듯 봤던 장면을 떠올려 어설프게나마 방법을 알려주었다. 천이 흐르다 굽어지는 곳의 안쪽, 모래가 쌓이는 곳에 다가가 바닥 깊은 곳의 모래를 훑어 접시에 올린 뒤, 물을 약간 넣어 살살 돌렸다. 그러자 모래와 흙이 살짝 떠오르기도 하고 물의 흐름에 따라 빙빙 돌기도 했다. 그렇게 돌리면서 접시의 중심에서 바깥으로 빠져나오는 것들은 대충 물과 함께 흘려보내고 가운데 남은 것들만 남겼다. 그리고 거기에 다시 새 물을 받아 앞선 작업을 반복했다. 접시에 담은 모래가 점점 줄어들었고 마침내 남은 것들은 반짝이는 것도 섞인 알갱이들이었다. “이렇게 남은 것들 중에 금이 있는지 살펴보는 거야.” “금 있어?” 제토는 그게 가장 중요했다. “아니, 없어.” 단유는 접시에 남은 알갱이들을 손가락으로 뒤적거리다 물에 흘려보냈다. “그럼 여기 없는 거야?” 지켜보던 어린 꼬마의 물음에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모르지. 이건 한 번으로 금방 알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저 쌓인 모래흙 사이에 섞여 있을지도 모를 작은 알갱이를 찾는 거거든.” 제토는 대충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팔을 걷어붙였다. “알았어, 해 볼게.” 제토의 뒤를 이어 다른 아이들도 너도나도 해보겠다며 달려들었다. 처음에는 원리를 정확히 몰라 모래를 펐다가도 금방 다 흘려보내기 일쑤였다. 하지만 접시를 돌리다 보면 물과 상관없이 접시 가운데 남는 알갱이들이 있음을 알게 되면서 점점 요령이 붙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뭔가 묘한 경쟁이 붙어서 누구보다 먼저 금을 찾고 말겠다는 듯 열심히 접시를 돌렸다. 멀찍이서 보면 개천의 굽이에 조그만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접시를 돌리고 있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단유는 괜한 걸 알려준 것 같았다. 이왕에 왔으니 단유도 해볼까 싶었지만, 처음에 하는 방법을 알려줄 때 외에는 할 시간이 없었다. 아이들이 너도나도 다가와서 접시를 내민 까닭이었다. “이거 금이야?” “아니야.” 시무룩한 아이의 뒤로 또 한 아이가 접시를 내밀었고,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단유는 사금 채취를 포기했고, 개천 위로 흐르는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단유는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차라리 아이들이 애먼 짓 못 하게 감시하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했다. 이러고 있으니 예전 보육원에서 어린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지켜볼 때가 생각났다. ‘다들 잘 지내겠지?’ 솔직히 말해서, 명수 외에는 특별히 정을 준 이들이 없었다. 그나마 지선이는 괜히 동생을 떠올리게 하던 기억에 가까이 지내긴 했어도, 그 외에는 특별히 정을 나누진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있다 보니 괜스레 그때의 기억이 나면서, 그 아이들의 얼굴들이 한 명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과거의 단유와 지금의 단유는 달라진 면이 있었다. 여유가 생겼달까? 과거에는 그저 모든 것을 경계하고 관찰하고 거리를 두려고만 했었다. 표현되지 않는 두려움을 늘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았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마저도 불안해서 더욱 얼굴을 굳혔던 단유였다. 하지만 지금은 여유가 생겼다. 지구에서도 그렇고, 낯선 이곳에서도 단유의 표정이 예전보다 많아졌다. 이제는 불안감을 덜 느끼게 되었고, 어디에서라도 여유 있게 대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마법이란 힘에 의존하는 바도 있었지만, 머릿속에 든 지식이 많아지면서 세상을 덜 두려워하게 된 것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여유가 생기니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되었고, 사람과의 관계도 예전보다 너그러워진 면이 많았다. 그렇다고 곰살궂게 행동하는 것은 또 아니지만 말이다. “형, 이거 금이에요?” 단유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냥 모래야, 라는 대답에 붉어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아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겨울의 개천이 얼마나 시릴까. 단유는 아이의 손에 온기를 전해주며 말했다. “돌아가자.” 그날 아무런 소득도 건지지 못한 채 붉어진 손을 비비며 집으로 돌아간 아이들은 다음날 아무도 다시 가자고 하지 못할 것, 이라고 단유는 생각했다. 성과없는 일에 흥미를 진득하게 가지기란 쉽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당장 같이 살고 있던 제토는, “여기서 멈출 수 없어!” 라고 쉽게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부진 선언을 해서 단유의 한숨을 자아내게 했다. “그러다 감기 걸려.” “오늘은 준비가 덜 됐던 거야. 내일은 확실히 준비해서 나가겠어.” 지구에서처럼 두꺼운 파카를 입고 다닐 것도 아니고, 애초에 그런 옷도 없으니 낡은 옷가지를 겹쳐 입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제토는 망토의 끈을 조이며 다시 한번 도전할 뜻을 비쳤다. 그리고 뜻밖에도 다음날 놀이터에는 제토와 뜻을 같이하는 아이들이 몇몇 더 나타났다. 새로운 놀이에 굶주렸던 아이들에게 일상의 변화는 도전할 가치가 있었던 모양이다. 한편, 이마가 붉어진 채로 등장한 아이가 있었다. “엄마한테 혼났어.” 집안의 가재도구를 마음대로 가지고 갔다가 저녁을 준비하는데 접시가 모자라 어머니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아이들은 각자 집안 방식대로 혼이 났다. 반대로 접시를 한 뭉텅이 껴안고 나타난 아이도 있었다. “간 김에 접시 다 씻고 오래.” 갑자기 반질반질해진 접시에 이유를 물었던 어머니가 다른 접시도 씻어오라며 넘겼단다. 대신 저녁 식사 준비 전에 돌아오지 않으면 혼날 거라는 경고도 받았다고 덧붙였다. 어떤 이유든,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아이들이 접시를 들고 다시 강으로 향했다. 그에 앞서 단유는 가죽 공방에 들러 아잘에게 물었다. “불 피워도 돼요?” “피울 줄은 알고?” 아잘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단유라면 알아서 잘하겠거니 생각하며 부싯돌을 빌려주었다. 돌아올 때 반납하기로 하고 단유는 정중히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 저런다고 금이 나오긴 하냐?” 아잘도 호기심이 일었지만, 어른 체면에 아이들과 섞여 뭘 한다는 게 어려웠던 탓에 슬쩍 물어보기만 했다.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금이 나올 수도 있지만, 나와도 모래보다 작은 알갱이 정도일걸요?” “그래?” 혀를 차던 아잘이 무사히 다녀오라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만약 사금이 나온다면, 그 양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주변에 금맥이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기에 천을 거슬러 올라가 산금(山金)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 가능성은 현저히 낮기에 입에 올리진 않았다. 강가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은 적당히 자리를 잡고는 사금 채취를 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단유는 마른 풀과 장작을 마련해 불을 붙였다. 지구에서야 해볼 일이 별로 없어 하지 않았지만, 아주 오래전에 이곳에 있을 때는 가끔 부싯돌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불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을 때도 몇 번인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돼 부싯돌을 써서 불을 지피곤 했었다. 처음 시도에는 실패했지만 몇 번의 시도 끝에 불똥을 만들어냈고, 그 후 또 몇 번의 시도로 불을 지피는 데 성공했다. 단유는 불을 키워 모닥불을 만든 후 아이들에게 일렀다. “추운 사람은 여기 와서 몸 좀 녹여.”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접시를 들고 단유에게 검사를 받으러 왔다가 몸을 녹인 뒤 다시 작업에 들어갔다. 때아닌 작업장(?) 열기에 강가의 차가운 바람도 비켜 갈 정도였다. “형, 이건 뭐야?” 엄마에게 혼났다는 아이가 접시를 들고 단유에게 왔다. 혼이 나서 접시를 들고 올 수 없었지만, 접시를 가득 들고 온 아이들이 몇몇 있어서 접시를 빌리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단유는 도대체 어떻게 혼이 났길래 이마에 붉은 손자국이 여태 남았을까 생각하며 아이의 이마를 문질렀다. “안 아파?” 아이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더벅머리를 한 아이의 웃음에서 순박함을 느낀 단유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이가 건넨 접시를 보았다. 섬세하지 못한 탓에 모래 알갱이가 가득한 접시였다. 몇 번 더 물을 풀어 모래를 걸러내야 했어야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단유의 눈에 모래가 아닌 알갱이가 보였다. ======================================= [441] 개천에서 용났네(2) 원자번호 79번의 금(金)은 녹는점이 1064.18℃, 끓는점이 2980℃이며 11족 6주기 원소로 분류된다. 외형적으로 노란색을 띠며 연성과 가단성이 있는 전이 금속으로서 길게 늘이거나 얇게 펴는 게 가능하다. 지구에서는 금본위제도의 기반으로서 화폐로 활용되기도 했으며 사치재로서의 가치뿐 아니라 공학이나 기타 다양한 부분에 실용적으로 사용되기도 하는 금속이다. 단유가 금에 대해 아는 지식은 이보다 더 많다. 그런데 그런 지식과 별개로 직접 금을 본 사례가 없어 단유는 눈앞에 있는 알갱이가 금인지 혹은 금처럼 보이는 다른 무엇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만약 순수한 금덩어리, 아니 금 조각이었다면 또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가 가져온 알갱이는 모래에 금이 살짝 묻어있는 것처럼 보여서 그 정체가 헷갈렸다. 금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모래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대답을 기다리는 아이의 반짝이는 눈을 보며 머리를 긁적인 단유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잘 모르겠네. 하지만 모래는 아니니까, 이거 들고 가서 어른들한테 물어보자.” 희망(?)을 잃지 말라는 단유의 이야기에 아이는 늘어뜨렸던 어깨를 추켜 올리며 돌아갔다. 단유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일단 흔적이라도 발견했으니 최대한 많이 건져 올려서 마을에 가져가야 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단유가 멀찍이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차가운 물에 손을 집어넣기 싫어서는 아니었다. 아이들이 들고 오는 알갱이들을 감별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대략 15명 정도의 아이들이 물가에 조르르 앉아 있으니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고자 그들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위치에서 경계태세를 취할 따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금 알갱이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나왔다고 해서 같이 욕심을 낼 수는 없는 일이니, 단유는 금이 나왔던 쪽으로 아이들을 재배치하는 선에서 작업의 효율을 높여보기로 했다. 만약 저 아이가 있던 자리 근처의 퇴적층에서 꾸준히 금이 발견된다면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 금맥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날 처음의 아이를 제외하고도 두세 명에게서 금 알갱이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발견되었다. 추위에 몸을 떠는 아이들을 위해 장작불을 더 키워서 다 같이 몸을 녹일 수 있게 해주었다. 모인 이들 중 몇몇은 망토 끝으로 사용했던 접시를 바득바득 닦아내고 있었다. 하루 종일 물에 담갔다가 망토로 닦아내니 과연 새것처럼 반질반질한 접시가 되었다. 아마 저들은 설령 금을 못 캐내 가더라도 부모님께 칭찬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단유는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돌아가기로 했다. 그 전에 알갱이를 캐낸 아이들에게서 아직 정체를 확신할 수 없는 그것들을 받아냈다. “어른들께 물어본 뒤, 각자에게 그대로 돌려줄게.” “진짜?” “진짜야.” 단유의 말에 한 명은 반신반의하며 주저했지만, 다른 아이들이 서슴지 않고 자신의 획득물을 건네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자신의 것도 단유에게 건넸다. 그렇게 건넨 알갱이가 6개였다. 다 모아도 손톱 부스러기 정도밖에 되지 않을 양이었지만, 발견이 됐다는 것에 의미를 둔다면 기대 이상의 만족을 주는 양이었다. 단유는 아잘에게로 먼저 돌아갔다. 부싯돌을 빌린 참이라 돌려주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단유가 알기로 마을에서 가장 식견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에게 향한 이유도 있었다. 아잘은 단유가 건넨 알갱이를 보고 침음(沈吟)을 내뱉었다. “이건, 금이 맞구나.” 손바닥을 눈앞에 두고 눈을 좁힌 채로 그 위의 조그만 알갱이를 관찰하던 아잘이 미간을 풀지 않은 채로 단유에게 말했다. “설마 했는데, 물에서 금이 나오다니.” 단유는 아잘에게 자신이 아는 상식선에서 그 이유를 설명했다. 어떤 금속이나 광석이든 침식과 풍화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금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깎여나간다. 하지만 깎여나갈 뿐이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물에 흘러 떠내려가다가 모래가 쌓이는 지점에 같이 묻히게 된다. 그렇게 묻힌 금 알갱이를 발견한 것이 바로 지금 아잘이 보는 것의 정체다. 아잘은 당연히 이어질 질문을 하였다. “그렇다면 이런 작은 금 말고 진짜 금도 찾을 수 있는 것이냐?”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가능성일 뿐, 100% 찾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우선 개천의 지류를 거슬러 올라가야겠지만, 만약 많은 지류가 섞이게 되면 조사 범위는 생각보다 넓어지게 될 것이다. 또한, 지류가 없다 해도, 그 길을 죽 따라 올라가며 금을 찾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혹은 이미 금이 지난 세월 동안 모두 깎여 떠내려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문득 아잘을 보니, 그의 입술이 씰룩이는 것이 여간 마음이 동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만약 계절이 겨울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사람들의 일감이 많이 줄어든 상태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단유와 아이들이 물가에 가서 뭘 하는지는 몰라도 마을 소란할 일이 줄어서 좋다고만 여기던 어른들은, 그 아이들이 들고 온 금 소식에 놀란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진짜 금이 있다고?” “아잘 아저씨가 확인했다던데?” “그럼 물에서 금이 나오는 거야?” “정확히 그건 아니고, 뭐라더라? 금이 쪼개져서 물에 흘러 내려온 거래.” “…그럼 쪼개지지 않은 금도 있다는 이야기 아냐?” “그건 모르지.” 찾아봐야 알 수 있는 일. 마침 겨울이라 산에서 땔감이나 구하는 일 외에는 특별히 소득을 올릴 일이 없던 차였으니 마을 사람들의 발길이 자연스럽게 산으로 향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리라. 그리고 그 무리의 앞에 가론이 있었다. 사실 마을 유일의 대장간이기에 쉴 틈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쇠를 다루는 일에 특화된 그는, 당연하게도 산에서 광맥을 찾는 일에 능숙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알겠어?” 대장간은 일을 배우고 있는 아들에게 맡기고 가론은 산을 올랐다. 그 외에 아잘과 에드 역시 산에 올랐고, 소식을 들은 몇몇 사냥꾼들도 산을 옮겨와 금맥도 찾고 사냥도 하는 욕심을 부렸다. 하지만 모두가 이 금맥 찾기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일부 마을 사람들은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이들을 어리석다 여겼고, 또 일부는 대놓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에저’였다. 사실 에저는 레이도르의 아버지 다음으로 촌장을 맡은 이로써, 지금까지 30여 년간 이 마을의 대소사를 책임지고 있었다. 겨울이 되기 전, 마을 전체에서 생산한 것들을 외부의 도시에 가져다 팔기 위해 몇몇 사람들과 함께 마을을 떠나 있었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마을은 떠나기 전과 사뭇 달라져 있어서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이게 뭐지?” 그의 아내가 자신을 데리고 가서 보여준 것은 바로 우물에 설치된 도르래였다. 아내가 간단하게, 한 손으로 손잡이를 돌렸을 뿐인데 우물에서 끼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두레박이 올라오는 바람에 에저는 뒤로 넘어갈 정도로 놀랐었다. 그리하여 단유라는 외부인이 마을에 나타나 마을에 변화가 생겼음을 알게 되었다. 단유가 한참 시계를 만들기 위해 목재 공방에서 톱밥을 뒤집어쓰고 있을 때, 에저는 직접 단유를 만나러 갔다. “네가 우물의, 저 기계를 만든 아이냐?” 론의 소개로 그가 마을의 촌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 단유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에저는 단유와 대화를 나눠 그가 시계를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물건을 자신의 반도 살지 못한 아이가 어떻게 알고 만들까 놀랐고, 만드는 이유를 듣고 또 한 번 놀랐다. “시간을 알기 위해서?” “시간을 알면 좀 더 효율적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거예요.” 단유의 대답은 에저에게 뭐라 표현하기 힘든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의 말대로 ‘효율적’인 것은 긍정적인 기대를 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점에 걱정도 들었다. 오랜 삶의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삶의 변화가 늘 좋은 결과만 낳지는 않았다. 물론 우물의 두레박처럼 편하게 물을 뜰 수 있게 만드는 정도라면 감당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사람이 마냥 편하게만 지내게 되면 일을 하지 않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에저는 그런 걱정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는 좀 더 숙고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길 바랐고, 그동안 단유가 가져올 변화를 지켜보고 고민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만약 그 변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마을의 질서를 해친다면 그때라도 멈출 수 있기를 바랐다. 그의 신중함이 이 마을을 여태까지 안전하고 편안하게 이끌어 온 비결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신중함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 마을 사람들이 보이는 행태는 자신이 걱정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을 팽개치고 산으로 향하는 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그저 혀만 차고 있을 수는 없으니 뭐라도 해야 했다. “어리석은 이들 같으니라고.” 에저의 한숨을 듣고 그의 아내가 왜 그러냐고 물었다. “이 마을 주변의 산을 타보지 않은 이가 얼마나 될까? 응? 만약 그곳에 금이 있다면 진작에 찾았을 것이다. 어떻게 물에서 금조각이 나왔는지는 몰라도 금맥이라니. 지금 젊은 놈들이 산으로 올라가는 건 자신들의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아버지들을 모두 욕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거라고.” 점점 목소리가 높아지는 남편의 등을 토닥이며 아내가 대꾸했다. “혹시 모르지 않아요? 그동안은 금을 찾기 위해 산을 올랐던 게 아니니 옆에 있더라도 무심코 지나갔을 수 있는 거죠.” “그게 멍청한 소리라는 거야. 사람들이 모두 장님도 아닌데 금이 있는 것도 모르고 지나갔으려고?” “여보, 흥분하지 말아요.” 촌장의 현명한 아내는 늙은 남편의 건강이 염려되어 다시 한번 등을 쓰다듬었다. 아내의 주름진 손길은 세월에 상관없이 남편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난 이 마을의 촌장이야. 이 마을을 지켜야 돼.” “그럼요. 당신은 지금까지도 잘 해왔는걸요.” 고집스러운 에저의 입술이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나왔다. “꼬마 녀석의 말 한마디에 이랬다저랬다 하는 꼴이라니.” “오래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흔들리지 않는 뿌리를 가지겠지만, 아직은 덜 여물어서 그런 거겠죠.” 아내는 적당히 남편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에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고민이라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면 돌이킬 수 없을 거 같아.” “겨울이 끝나면, 다시 싹을 뿌려야 하니 다들 돌아올 거예요.” “만약 돌아오지 않는다면?” 에저의 물음에 아내는 대답하기 어렵다는 듯, 난감한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일이라도 사람들을 모아서 회의를 해야겠어.” 오랜 세월 이 마을을 지켜온 ‘원로’들을 모아서 의견을 나누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에저는 아들을 불러 이를 지시했다. “내일 아침 먹은 뒤, 우리 집으로 와서 차 한잔 하자더라고 알려라.” “내일 몇 시까지요?” “뭐?” “그러니까, 그…요즘엔 시계라는 것 때문에 시간을 맞추는 게 유행이잖아요.” “그놈의 유행은….” 못마땅한 눈을 한 에저가 아들을 쳐다보자, 아들은 얼른 집을 나섰다. 어른들이 금맥을 찾아 산으로 뛰어갔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강가로 향했다. 다른 점은 아이들이 들고 오는 접시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과 접시 외에 컵이나 각종 그릇들이 추가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간 김에 설거지나 해 오라, 고 맡기는 것이다. 더러 어떤 이들은 아예 광주리에 살림살이를 끼고 나타나기도 했고,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여자아이들까지 끼어서 물가에 나타났다. 물가 주변의 수초를 따서 손으로 돌돌 뭉쳐서 수세미처럼 사용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모닥불을 피우고 그 모습을 보던 단유는, 세제가 없기 때문에 환경오염은 없겠다며 미소를 지었다. ‘비누가 필요할까?’ 비누 이전에 잿물이라도 있으면, 접시의 기름때를 벗겨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거기다 몇 가지가 더 첨부되면 비누도 만들 수 있을 테고. 머릿속으로 비누에 대한 지식들을 짚어보던 단유는 곧 아이들이 들고 온 접시들을 감별해주느라 생각을 멈춰야만 했다. 처음과 달리, 이제는 아이들도 모래와 모래가 아닌 것을 구별하는 눈이 생겨서인지 단유에게 감별을 부탁하는 이들이 줄고 있었다. 하지만 몇몇은 일부러 몸을 녹이려고 다가오는 이들도 있어서 그 아이들과 어울려주느라 단유는 깊게 생각을 진행 시킬 틈이 없었다. “형은 금 캐러 안 가?” 한 아이가 동그란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며 물었다. “안 가.” “왜?” 처음부터 금에 대한 아이디어가 단유의 것이었음을 기억하는 아이들은, 단유가 마을 어른들에게 금을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물었던 것이지만 단유는 피식 웃으며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금은 내 게 아냐.” “그럼 누구 건데?” “먼저 찾은 사람 거 아냐?”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금은 이 마을 사람들 거야.” 그리고 단유는 이 마을에 머무르고 있지만, 이 마을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 욕심을 낼 필요가 없었다. ======================================= [442] 개천에서 용났네(3) “오랜만에 뵙는구려. 한마을에 있으면서도 이렇게 보기 힘들어서야.” “내가 요새 무릎이 좋질 않아서 바깥나들이를 잘 못 해 그래요. 나중에 날이 풀리고도 나가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이오.” “허허. 언제 날 한 번 잡아서 문진이라도 가야겠구려.” “이 사람아, 가려면 진작 가볼 일이지 여태 꾸물거렸어?” “내가 어디 시간이 없어서 못 갔겠나? 겨울이라 쟁여둔 약초가 다 떨어져서 다른 환자도 못 받는구먼.” “겨울 산에는 약초가 안 난다든가?” “허, 이 사람. 약초 캐러 갈 시간에 다들 금 캔다고 나갔으니 하는 말일세.” “아, 거기도 그런가? 자네 아들들도?” “내 아들이 제일 극성이구만. 금 쪼가리 가져온 게 우리 손자 아닌가.” “아, 그래? 그럼 그거 진짜 금 맞아?” “그래. 맞더라고. 작기는 개미 똥만큼 작은데도 금이라 그런지 빛깔이 영롱하더라고.” “영롱 좋아하시네. 고작 금 쪼가리 때문에 마을이 아주 풍비박산이 나게 생겼는데 무슨 금이란 말인가.” “풍비박산까지는 아니지 않나? 솔직히 겨울에 일도 없는데 잠깐 짬 내서 보고 오는 게 뭐 어때 그런가. 뒷산보다야 멀지만, 내 아들은 거기서도 땔감을 여럿 주워 오더만. 일거양득 아닌가?” “이보게, 지금 저 아이들이 겨울이란 핑계로 저렇게 나도는 게 안 보이는가? 만약에 봄이 와서도 금 찾겠다고 나가면 어찌할 셈인가?” “아, 그거야 그때 돼 봐야 알 일이고. 그리고 만약에 금 찾는답시고 나간다 그러면 그때는 다리를 분질… 아니지. 그럼 일을 못 하겠구만. 아무튼 봄이 와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일을 미룬다 싶으면 그때 혼구녕을 내도 될 일이지.” “쯧쯧, 자네는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는 거야. 내 소싯적에 바깥의 큰 도시에 들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일은 안 하고 길에서 구걸하던 거지를 봤더란 말이지. 이 큰 도시에 일거리 하나 못 구하나 의아해하던 중에도 가여워서 동전 몇 개 던져줬더니 냉큼 받아서는 어디로 향하더라고. 그래서 따라가 봤더니….” “따라갔더니?” “아, 그 무슨 도박장 같은 델 들어가더라고. 도박으로 살림 밑천 거덜 내고도 정신을 못 차려서 틈만 나면 달려가는 놈들이 바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도박꾼들일세. 우리 아들들이 그런 도박꾼마냥 눈이 돌아가면 자네는 잡을 수 있을 것 같나?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잡아야 할 일이야.” “형님들, 너무 과하신 거 같소.” “과하다니?” 다른 모인 이들보다 주름이 한 개 정도 적은 노인이 콧잔등을 매만지며 말했다. “도박 따위가 위험하단 거 잘 알지만, 이건 경우가 다르지 않소?” 그러자 처음 도박장 이야기를 꺼낸 노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다를 게 뭐냐? 오늘 아침에도 나갔더니 다들 눈을 땡그르르 굴리면서 금 캐겠다고 허겁지겁 달려가는 꼴을 봤는데, 그 눈이 바로 도박에 미친 놈들이랑 같더란 말이야.” “난 생각이 다르오. 지금 저 아이들이 하는 건 예전에 우리가 산에 귀한 약초가 난다는 말 듣고 허겁지겁 산에 올랐던 일이랑 다를 게 뭐요? 그렇다고 우리가 몇 날 며칠을 산에서 지내기를 했소, 아니면 일을 내팽개치길 했소? 어느 순간 시들해지면 다시 돌아오게 마련이오.” “그거야말로 경우가 다르지. 그때는 저 집 어르신이 그 약초를 캐오지를 않았더냐? 그 약초가 산등성에 무리 지어 자란다고 하지를 않았더냐? 확실한 근거가 있었으니 잠시 일을 미루고 갈 수 있었던 게다. 그리고 우리 때랑 지금 아들 때랑은 또 다르다. 우리는 그래도 마을의 규칙과 질서를 따르려고 노력했지만, 요즘 아이들이 어디 그러더냐? 우리 아들만 해도 말없이 마을을 나가서 2년을 방황하다 오질 않았더냐? 저 집 아들도 그랬었고.” “그때는 뭐, 마치 무슨 유행이라도 된 듯 다들 나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하는 말이다. 유행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쫓아다니는 꼴이라니. 사람이 지켜야 할 법도가 있는데, 요즘 아이들은 그걸 너무 쉽게 보는 경향이 있어.” “형님, 그런 소리 마시오. 우리 애들도 이제는 나이들이 차서 그리 경솔히 행동하진 않을 거요.” “자, 그쯤하고 다들 주목하세요.” 손뼉을 두어 번 쳐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에저는 다른 이들이 수다를 떠는 사이 목이 잠겼던지 얕은 헛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대체로 두고 보자는 쪽과 당장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나뉘는 것 같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저 개인으로도 조치를 취하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만, 이 자리는 모두의 의견을 듣고 결정을 내리는 자리니 일단 전 중립을 지키겠습니다.” 몇몇 사람은 콧잔등을 찡그리기도 하고, 턱을 쓰다듬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이 결코 마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란 건 다들 동의하실 겁니다. 그렇지요?” “뭐, 좋을 건 없지.” “당연하지. 어디 다른 때보다야 할 일이 적다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시간을 허비할 정도는 아니지.” 겨울에도 할 일은 많다. 삭풍에 덜컹거리는 지붕과 문틀을 보수해야 하고, 마을 전체적으로도 손 봐야 할 곳이 많다. 농사 때문에 미뤘던 마을 내의 잡일들을 해야 할 시간이 바로 겨울이다. 만약 이번 겨울에 할 일을 못 하면 봄이 힘들어진다. 농사일로도 바쁜 와중에 마을 일까지 겸하려면 몸이 남아나지 않으리라. “우리가 어디 우리 좋자고 이러는가? 다 자기들 편하게 지내도록 지혜를 나눠주는 것 아닌가.” “그럼, 그럼.” “지금 당장 급한 곳이 어디요?” “원래는 이번 겨울에 다른 우물을 하나 더 찾기로 하지 않았소?” “동생 말이 맞네. 에저, 가장 급한 것은 우물이네.” “그건 도르랜가 뭔가 하는 것 때문에 해결된 거 아닌가? 요즘은 물 떠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반으로 뚝 줄어든 탓에 그리 오래 줄을 서지 않아도 되더만?” “그거 참 신통하더구먼. 자네, 그거 한 번 돌려봤나?” “집 안 여자들이 신통하다고 떠드는 통에 궁금해서 가 봤지. 내가 요즘 팔심이 많이 떨어져서 힘들지 않을까 했는데 웬걸? 별 힘을 들이지도 않고 두레박이 쑥쑥 올라오던걸?” 다시 화제가 엉뚱한 쪽으로 튀려고 하자 에저가 손을 저으며 말렸다. “조용, 조용. 별 상관없는 얘기는 나중에 돌아가시면서 하시고. 아무튼 말입니다. 마을이 점점 커지고 사람들이 예전보다 늘어나는 추세인데 아무래도 우물 하나로 버틴다는 건 무리입니다.” “그건 촌장 말이 맞아. 당장 우물을 하나 더 찾아야 하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우리끼리 해서 뭣 하는가? 젊은 애들이 와서 해야 할 일을.” “그런 걸 깨우쳐 주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이리 동분서주하는 거 아니요?”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여태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모인 이들 중에서는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이가 입을 열었다. “뭔가?” “시계탑입니다.” “시계탑?”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짓는 이도 있었고, 그게 왜 급하다는 이야기인가 싶어, 어리둥절 해하는 얼굴도 있었고, “에이, 그 놈의 시계는.” 혀를 차며 못 마땅해하는 이도 있었다. “론과 루치드란 아이가 시계탑을 만들기로 했는데, 그걸 마을의 한가운데 세워서 모든 사람이 시계를 볼 수 있도록 할 거랍니다.” 중년 사내의 소개에 혀를 찼던 이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난 그게 마음에 안 들어.” “뭣이 말인가?” “시계라는 거 말이야.” “시계가 왜요?” 혀를 찬 노인이 탁자를 탕탕 두드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생각해보니 그 시계란 것이 고약한 물건이란 말이다. 다들 생각해보게. 옆집 사람이 와서 자네 일 안 나가고 뭐 하는가, 라고 물으면 처음에야 웃으며 대답하겠지만, 매일 매시간 찾아와서 자네 일 안 나가는가? 밥 안 먹는가? 잠 안 자는가? 라고 물으면 어떨 것 같나?” “뭐, 귀찮긴 하겠네요.” “귀찮다 뿐인가? 쯧쯧. 자네가 자네의 하루를 자네 뜻대로 지내지 못한다는 말일세.” “네?” “시시콜콜한 것까지 시계라는 놈이 시간을 알려주면서 이거 할 시간, 저거 할 시간 정해주는 게 가당키나 한가?” “그거야 자기 나름으로 할 일 아닌가요?” “그게 애들이 게을러지는 요령일세. 모름지기 아이들에게 일할 시간을 정해주는 건 어른들의 몫인 거야. 우리가 시계가 없다고 해서 어디 일을 못 했던가? 잠을 못 잤던가? 해가 뜨지 않았다고 해서 일 할 때를 놓치기를 했나, 해가 졌다고 해서 잘 시간을 몰라 헤매기를 했나? 그 오랜 세월 동안 우리가 부지런할 수 있었던 건 다 오랜 세월을 살았던 어른들의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네. 그런데 지금 꼴을 보시게. 시계니 뭐니 이상한 걸 만들어서 어른들의 지혜를 무시하려는 작태가 아닌가? 그리고 자기들이 시간을 정한다고? 내 듣기로 그 시계란 놈은 매일 같은 때를 알려주는 게 아니라 하더만.” “아니라고요?” “그래. 자네들도 알겠지만, 겨울에는 밤이 길고 여름에는 밤이 짧지 않던가? 그런데 시계란 놈은 그걸 구별하지 못한다 하더라고. 그래서 해가 뜨는 시간도 오락가락한다고 하더란 말이야. 그럼 생각해보게. 해가 떴는데도 시계가 아직 일어날 시간이 아니라고 알려주면 어떻게 되겠나? 계속 잠만 자고 있을 거 아닌가? 사람이 그런 식으로 게을러진다는 말이야.” “아아, 역시 어르신의 혜안은 놀랍습니다!” 에저는 다시 수다에 빠진 어른들을 본 주제로 돌리기 위해 여러 번 탁자를 두드려야만 했다. **** 아이들의 사금 채취는 계속되었지만, 참여하는 이는 줄어들었다. 날이 점점 추워질수록 물속에 손을 담갔다 빼는 작업이 힘들어진 탓도 있었고, 금 쪼가리 하나 나오지 않는 일에 계속 매달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더 열성적으로 접시를 돌리는 이들도 생겼는데, 이들은 남들이 다 지루해하는 접시 돌리기(패닝)에 재미를 붙인 이들이었다. 그들은 나무 접시를 살살 돌려서 물을 회전시키고, 그 물에 모래 따위가 쓸려가도록 만드는 기술에서 손맛을 느꼈다. 금이 나오고 나오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단유는 모닥불 근처에 주르르 앉아 접시를 닦는 아이들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놀이터에서 잘들 놀던 아이들이 어쩌다 ‘6시 내 고향’에나 나올 장면을 연출하게 되었을까. 단유는 이들을 간단하게 이들을 도울 방법이 없을까를 궁리하다 곧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손이 많이 가겠지만, 마법을 이용하면 간단하게 해결 가능하리라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날 밤, 몰래 집을 나온 단유는 새벽까지 작업을 했고, 새삼 자신의 마법이 ‘건축’에 특화된 부분이 많다며 자축하며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홀린 듯이 접시와 그릇들이 담긴 광주리를 품에 안고 나타난 아이들은 어제와 달라진 물가의 풍경에 어리둥절했다. 모닥불을 피우던 자리 주변으로 네 개의 기둥이 서 있었었는데, 기둥 안쪽으로는 대략 3평 남짓한 범위에 석판들이 오밀조밀 틀을 맞추어 자리 잡고 있었다. “다들 이거 깔고 앉아. 그냥 앉으면 뜨거우니까.” 단유의 말처럼 석판에서 열이 오르고 있어, 그 위에 서 있으면 차가운 겨울 바람도 둘러가는 것 같았다. 그냥 앉더라도 그렇게 뜨거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혹시나 해서 단유는 나무 원목을 적당히 잘라 앉은뱅이 의자처럼 만들어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모닥불을 피우던 위치는 다른 쪽으로 옮겼는데, 그곳에는 화덕 같은 구조물을 만들어 열기가 다른 곳으로 새지 않게 만들었다. 그곳에 불을 지피면 석판 아래로 열기가 지나가게끔 만들었는데, 당연히 이것은 온돌 방식을 응용한 것이었다. “저기는 불 때문에 굉장히 뜨거우니까, 웬만하면 저기로 가지 마. 위험해.” 마음 같아서는 아예 집처럼 벽과 지붕까지 만들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적당히 타협을 보았다. “여기 기둥에다가는 돌을 쌓아서 벽을 만들까 하는데, 어떠니?” “그럼 여기가 집이야?” “지붕이 없어서 집이라고 부르긴 그렇고, 그냥 겨울 동안만 쓸 놀이터라고 하자.” “와, 신난다!” 사금 채취를 하려던 아이들도 따뜻한 석판이 신기한지 물가에서 벗어나 온기를 즐겼다. 아이들이 벽을 만들겠다며 물가의 돌들을 주워와 쌓기 시작했다. 단유는 진흙을 물에 개어서 돌과 같이 쌓을 수 있게 해주었다. 추위에 떨며 가사 노동에 매진하는 아이들을 돕고자 만든 온돌인데, 도리어 아이들을 건축 현장 막일을 시키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전혀 힘들지 않다는 듯,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 [443] 개천에서 용났네(4) 사람이 많다 보니 비록 작은 손이더라도 벽이 높아지는 속도가 빨랐다. 제토와 어린아이 몇몇은 단유와 함께 진흙을 만들어 현장(?)에 투입하는 일을 도왔다. 진흙을 조물거리는 촉감이 좋아서 단유 옆에 쪼그리고 앉아 엉덩이를 뗄 줄 모르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얼굴이 사뭇 진지하기도 하고, 흥겨워하는 것 같기도 해서 단유가 물었다. “재밌니?” 아이는 입을 옆으로 크게 벌리며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응! 재밌어.” “나도, 나도!” 가만히 살피니 벽을 쌓는 아이들도 힘겨워하기보단 재밌는 놀이를 한다는 듯 즐거워했다. 진흙과 돌을 같이 쌓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고, 힘이 약한 아이들에게는 버거운 작업이기도 했다. 힘이 부치기 시작한 아이들은 진흙을 쌓는 대신 진흙에 쓸 돌들을 나르는 일을 했다. 그릇들을 담았던 광주리에 돌을 집어넣은 뒤 서로 맞들고 나르는 이도 생겼다. 하지만 하루 만에 끝날 일은 아니어서 적당한 시점에 단유는 작업 중단을 시켰다. “씻자.” 아궁이 근처에 만들어놓은 돌 가마솥에 물을 길어다 놓았더니 뜨겁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온기가 느껴질 정도로 데워져 아이들의 환영을 받았다. 물이 많지 않아 아이들이 충분히 씻기에는 부족했지만, 조금씩 나눠 쓰니 대충 더러워진 손과 얼굴을 씻어낼 수 있었다. “우리 집에도 이런 거 있으면 좋겠어. 그럼 밤에도 안 추울 거 아냐?” 석판 위를 쓰다듬으며 열기를 느끼던 아이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이 걸려 벽이 모두 완성되었다. 키가 되지 않는 아이들을 대신해 단유가 새벽에 나와 벽을 높이 쌓아 올렸다. 비록 지붕은 만들지 못했지만 바람을 막기에는 충분했다. 단유와 제토는 아침을 먹고 다른 이들보다 먼저 ‘놀이방’으로 향했다. ‘놀이방’이라는 명칭은 벽이 만들어진 이후, 누군가의 입에서 나왔는데 ‘놀이터’라는 이름 대신 불리기 시작했다. 제토가 산에서 땔감으로 쓸 나무들을 구해오는 동안, 단유는 간밤에 죽어가던 불을 살렸다. 아궁이 근처에 쌓아놓은 장작들을 집어넣고 불을 크게 지피면 두세 시간이 지난 후 석판이 데워졌다. 현대식으로, 보일러 관을 매설해 바닥을 데우는 방식을 택한다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전통적인 방식을 차용했다. 교과서에 나와 있던 구조를 떠올리며 단유 나름의 방식으로 만든 이 온돌방은 처음엔 구조적으로 너무 단순해서인지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열전도율이 좋지 않았다. 아궁이 근처는 너무 뜨겁지만, 연기가 나가는 빠져나가는 방향의 석판은 열이 미치지를 못했던 것이다. 시험에도 나왔던 문제라 ‘아궁이-부넘기-바람막이-개자리-굴뚝개자리-굴뚝’과 같은 순서를 외우고는 있었지만 실물로 보지 못하고 그저 이론으로만 아는 정도였던 단유는, 새벽에 홀로 나와서 석판을 들어내고 불길이 지나는 고래를 여러 번 수정해야 했다. 그런 노력 덕택인지, 벽이 완성될 때 즈음에는 처음보다 훨씬 나아진 난방 효과를 볼 수 있어서 단유는 기분이 좋았다. “그냥 여기서 살았으면 좋겠다.” 나중에 쓸 장작을 아궁이에 근처에 쌓아둔 제토가 바닥에 드러누우며 기분 좋은 소리를 입술 사이로 흘렸다. “마을이랑 멀어서 불편할걸?” “밤에 잘 때가 되면 이 집 생각이 난다니까.” 제토가 팔다리를 움직이며 파닥거리는 모습을 보니, 석판에 삼겹살이 구워지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먼지 많으니까 일어나.” “따뜻해서 좋은데? 조금만 더 이렇게 있으면 안 될까?” 단유는 어깨를 으쓱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나갔다 올게.” “어디 가게?” “금방 돌아올게.” 단유는 놀이방을 나섰다. 문도 없이, 마치 고대 움막처럼 뻥 뚫린 입구로 나선 단유는 산으로 시선을 던졌다. 겨울이라 살아 움직이는 것들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경험 많은 사냥꾼도 사냥감을 쉬이 잡지 못하는데, 아무리 마법의 힘을 빌린다 해도 어설픈 단유로서는 사냥이 쉽지 않을 터였다.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좋지 않지.’ 단유는 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제토가 깜빡 잠이 들었다 깨었을 즈음에 다시 놀이방에 나타났다. “그거 뭐야?” “물고기.” 결국 산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단유는 기왕에 물가에 있으니 낚시라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물가를 거닐었다. 눈에 띄기만 하면, 건져 올리는 건 일도 아니니까. “너무 작은 거 아냐?” “그래도 맛은 볼 수 있을 거야.” 민물 생선이라 기생충이 염려되지만, 구워 먹을 예정이니 큰 문제는 없으리라. 그렇게 간단히 배를 채우고 석판 위를 정리하고 나면 적당히 석판이 데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때 아이들이 광주리를 들고 나타났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만든 집이라는 생각에 애착이 강해서인지, 벽이나 석판에 흠집을 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방 한가운데 몰리게 되었고, 단유가 뜨겁다며 건넸던 나무 의자도 마다한 채 석판 위에 앉아 수다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이제 정말 소수의 아이들만이 사금 채취라는 이름의 놀이에 심취할 뿐, 대부분은 놀이방에서 그릇을 닦으며 추위를 피해 몸을 녹이는, 마치 찜질방에 온 아줌마들처럼 시간을 보냈다. 당연하지만, 단유와 아이들이 만든 ‘놀이방’은 또 어른들에게 화제가 되었다. 단유가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호기심을 드러낸 아잘과 가론 같은 장인들은 물론이고, 부모들 역시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놀이방을 보러 왔다. “세상에.” 마을 사람들에게 그곳은 가히 신세계라 할 만했다. 바닥이 따뜻하니 지붕이 없는데도 추위를 느끼기 힘들었다. 아이들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궁둥이를 붙이고 있노라면 드러눕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였다. 하지만 차마 애들처럼 바닥에 눕지는 못하고 손바닥으로 석판을 쓸며 온기를 체감할 뿐이었다. “도대체 이건 어떤 원리로 만든 거냐?” 단유는 아잘과 가론, 그리고 몇몇 호기심을 드러내는 어른들에게 원리를 알려주었다. “이것도 니가 살던 곳에서 쓰는 방식인 거냐?” 단유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잘은 고개를 흔들었다. “알 수 없구나. 도저히 같은 세상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아.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것 같지 않으냐.” 단유는 씁쓸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잘은 아궁이 옆에 쌓아둔 장작들을 보며 말했다. “대신 땔감으로 쓸 나무가 많이 필요하겠구나.” 확실히 그런 점은 있었다. 과거 조선에서도 온돌 난방 방식 때문에 산림의 황폐화가 걱정될 정도였다지 않던가. 놀이방 하나라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마을의 집을 모두 온돌식으로 바꾼다면 이 마을 주변의 산들이 모두 벌거숭이가 되고 말 것이다. “요즘 어르신들이 마을의 변화에 관심이 많던데, 아마 이 집을 보면 또 무슨 말씀들을 하실지.” 기대보다 걱정이 앞서는 아잘은 말을 아꼈다. 하지만 옆에서 듣던 가론이나 다른 이들도 아잘의 걱정을 이해했다. 그분들에 비하면 어린 나이지만, 솔직히 이들도 아들이 장성해서 일손을 돕고 있는 처지였다. 말하자면, 살 만큼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마을 어르신들의 걱정과 우려를 모를 리 없다. 게다가 무슨 철 지난 반항기라고 어르신들과 반목하려 들겠는가. 다만 시계탑이든, 금을 찾는 일이든 전부 개인의 욕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을의 발전을 위해서 하는 것일 뿐인데, 그걸 몰라주니 조금 섭섭하다는 감정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이런 집은 어르신들을 위해서라도 하나 만들어두면 좋지 않을까요?” 단유의 제안에 어른들이 아이의 얼굴을 돌아보며 물었다. “또 하나를 짓자고? 마을에?” 단유는 기왕에 ‘놀이방’도 만들었는데, ‘노인정’도 있으면 어떨까 싶어서 제안한 것이다. 이 마을의 건축술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적어도 현재 이런 온돌 방식을 각 집에 적용 시키려면 집을 아예 부수고 새로 지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건 아무래도 무리일 테니, 최소한 이런 난방 방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 정도만 만드는 게 좋지 않겠냐는 의견이었다. “저도 전문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사실 많이 미흡하거든요. 그러니 다 같이 만들면서 모두의 지혜를 빌려야 할 거예요.” 직접 만들어 보는 것이 지식을 전수하기에도 좋고, 또 직접 해 봐야 깨달음도 있다. 그리고 단유가 미처 몰랐던 지혜를 얻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는가? “제가 살았던 곳에서는 나이가 드신 분들을 위한 공간이 따로 만들어져 있었어요. 그분들끼리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요.” 단유의 말에 아잘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공간이 있다면 나쁘지는 않겠다. 마을을 위해 헌신해온 그분들의 공덕을 기리는 차원에서라도 이런 집 한 채 마련해 드리는 것이 나쁘진 않으리라. “그런데 이 집은 원래 지붕을 안 만드는 것이냐?” 뻥 뚫린 지붕으로 내리쬐는 햇살에 눈을 살짝 찌푸리며 손우산을 만들어 보이던 가론의 물음에 단유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지붕은, 사실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잘 몰라서요.” “난 또. 너희 동네에선 전부 지붕 없이 사는 줄 알았다. 지붕이 없으면 비나 눈이 올 때 어떡할라구.” 그러나 마을에 온돌식 집, 노인정을 짓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놈들아! 정신들 못 차리느냐!” “아이고, 어르신! 왜 그러십니까, 대체!” “네놈들이야말로 왜 그러는 것이냐! 지금 이 마을에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인 게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걱정하지 마십쇼, 어르신. 그것들도 다 할 겁니다. 다.” “이게 다 하는 것이냐! 이런 쓸데없는 짓거리나 벌여대는데 어느 세월에 마을 뒷산에 축대 세우고, 우물을 파겠느냐! 길 한복판에 파인 저 웅덩이는 보이지도 않고!” “아버지! 언성 좀 낮추세요. 저희가 다 알아서 할게요.” “어허, 이놈이! 아비가 말씀하시면 곱게 들을 일이지, 이제는 아비 말을 막어? 이제 좀 컸다고 아비를 무시하는 게야?” “그런 거 아니래두요, 아버지. 제발 좀.” 터를 닦는 현장에 들이닥친 마을 원로들이 지팡이를 들고 팔을 부르르 떨며 고성을 질러대는 현장에서 젊은이들은 구슬땀 대신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어르신들, 이건 다른 일들보다 중요한 겁니다.” 한 중년 사내가 어르신들을 향해 사안의 중요성을 강조하니, 어르신들은 콧방귀를 꼈다. “이따위 쓸모도 없는 집을 짓는 일이 무에 중요하단 말이냐!” “지금 당장 집 없어서 노숙하는 이가 있더냐, 세간살이가 불타서 내쫓긴 이가 있더냐?” “어르신들을 위한 거라니까요?” 옆에서 끼어든 젊은 사내의 말에 또 한 번 어르신들이 역정을 냈다. “필요 없대도! 니들이 감히 우릴 핑계로 이런 헛짓거리를 하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구나!” “그런 게 아닙니다, 어르신.” 처음 말을 꺼냈던 중년 사내가 다시 이유를 고했다. “이 집은 단순히 우리가 지금껏 만들었던 집을 짓는다는 게 아닙니다. 좀 더 튼튼하고 안전하며 따뜻한 집을 만들어 보려는 겁니다. 겨울에 떨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집, 여름에 덥지 않게 지낼 수 있는 집, 깨끗하게 지낼 수 있는 집을 만들어 보고자, 그 기술을 시험해보는 집이란 말입니다. 이런 집을 만들어서 우리 마을의 기술로 삼아야 앞으로 더 좋은 집, 튼튼한 집을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능변은 아니지만, 진심을 담아 건설 취지를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어르신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집이 어때서 그러냐? 지금 집이 불만이더냐? 하기야 너희들은 전부 불만이었지.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다 하여 밖으로 나돌지 않았느냐? 그래서 어떻게 했었느냐? 결국 돌아오지 않았더냐? 이것도 똑같다. 그래 다 좋다. 너희들이 우리들을 위해서 만든다고 한 말이 진심이라고 믿어 주겠다. 그렇다 한들, 그게 과연 옳은 길이라고 생각하느냐? 지금 니가 사는 그 집들이 그냥 뚝딱거려서 만든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오랜 세월 동안 윗분들이 검증한 집들이었다. 비바람이 불어도 쓸려가지 않고, 따뜻한 일상을 지켜준 집이 바로 너희들이 지금 살고 있는 집이다. 그런데 그 집 어디가 부족해서 불만을 갖느냔 말이다!” 노인의 일갈에 젊은이들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자신들이 틀려서도 아니고, 노인의 말이 전적으로 옳기 때문도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이 상황이 답답해서, 대화를 계속할 이유를 찾지 못해 입을 다물 뿐이었다. “정신들 차리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 그리고 내일부터라도 뒷산 축대부터 다시 세워. 헛꿈 꾸지 말고!” 혀를 차며 뒤돌아서는 어르신들의 하얀 머리를 하염없이 바라볼 뿐인 젊은이들이었다. ======================================= [444] 개천에서 용났네(5) “…그런 이유로 넌 당분간 여기서 지내는 게 좋겠다.” 아잘은 바닥에 퍼질러 앉은 채로 진지한 이야기를 건넸다. 평소에 의자가 없으면 앉지를 않던 사람들도 이 집에만 오면 바닥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서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열기를 즐겼다. 때문에 기껏 준비해뒀던 앉은뱅이 의자는 언제부턴가 구석에 처박혀서 쓸 일이 없어졌다. 단유 본인도 이제는 그냥 바닥에 주저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데 익숙해져 버렸다. “할아버지들의 반대가 그렇게 심하신가요?” 오죽 심하면 단유를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까? 아잘의 말에 따르면, 단유가 할아버지들에게는 귀신보다 더한 존재처럼 여겨지고 있다고 했다.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북적북적한 사람들 때문에 꽤 넓게 지었던 집이 지금은 너무 좁게만 느껴졌다. 소문이 나면서 아이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어머니들도 이 집으로 ‘놀러’ 왔다. 워낙에 아이들이 집에서 자랑을 많이 하니 궁금하기도 했고, 혹시나 아이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위험이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 마음에서 집을 방문했던 어머니들은 온돌방의 온기에 반해버렸다. 그래서 점심을 먹고 난 뒤, 아이들과 함께 광주리를 들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들고 온 광주리에 그릇들이 있다면, 어머니들이 들고 온 광주리에는 옷가지들이 있었다. 낡은 옷을 수선하거나 빨래할 옷들을 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겨울의 추위가 더해질수록 집 안의 온도도 점점 내려 가는 데다 벽난로에 불을 지펴도 난방 효과가 별로 좋지 않던 집에 살던 중이었다. 비록 지붕은 없지만, 바닥에서 올라오는 온기 때문에 망토를 벗어도 춥지 않다는 장점이 어머니들의 발길을 끈 이유였다. “만약 그분들이 이 집에 오시면 생각들이 바뀌실까요?” “그렇지 않겠느냐? 당장 저 사람들만 해도 매일 오는 것 같은데 말이다. 직접 보고 경험하면 생각도 바뀌실 것이다.” 단유의 시선을 따라 아잘도 주위를 둘러보며 아쉬움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어르신들도 이 모습을 본다면, 아니 이 집의 유용함을 깨닫는다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 하지만 워낙에 고집이 강하신 분들이라 쉽게 마을을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몇 번 모셔오려고 했지만, 오히려 지팡이를 휘두르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물러서야 했었다. 게다가 마을 안은 분주히 움직이시는 분들이 마을 밖으로 나가려 하면 삭신이 쑤시고 무릎이 안 좋아서 오래 걸을 수 없는 연약한 노인으로 변하시니 방법이 없었다. 그런 완고한 고집불통은 이 세계나 저 세계나 똑같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시계탑을 반대하시는 것은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단유는 그분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뭔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에 단유네 반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있었다. 평소에도 성서 말씀을 자주 인용할 정도로 성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친구였는데, 한 번은 단유에게 전도를 시도하면서 대화가 깊어진 적이 있었다. “요한 복음 20장 29절에 보면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했어. 모든 사람이 이성과 논리로 하느님을 재단하려 하지만, 사실 하느님의 존재는 인간의 이성과 합리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인간의 이성과 논리는 인간을 발전시켜온 도구야. 물론 아직도 과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한 것들이 많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믿음을 강요할 순 없는 법이 아닐까?” “신의 존재는 합리와 비합리로 구분할 수 없어. 오로지 절대적인 믿음과 진실한 기도로서 이루어지는 거라고.” 믿어라, 믿으면 복이 오나니. 하지만 철저한 과학 신봉자이자, 라티오(Ratio)의 신자(信者)로서 단유는 비합리적인 존재의 증명 하나 이루지 못할 이론에 마음이 흔들릴 까닭이 없었다. 그 친구도 딱히 단유를 반드시 기독교 신자로 만들어야겠다는 것은 아니었던지, ‘다음에 기회 되면 같이 교회 가서 목사님 말씀 들어봐’라는 정도로 대화를 마무리했었다. 지금 그 친구와의 대화가 문득 떠오른 것은 마을 어르신들에게 이 집의 장점을 알리는 일이 마치 그 친구가 했던 ‘전도’와 다를 바 없다고 여겨진 탓이었다.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 인간은 오감으로 경험하지 못하면 믿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거꾸로 말하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느꼈을 때 믿음이 강해지기도 한다. 특히 완고한 어르신들이라면 그냥 말로 설득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리라. “혹시 말인데요.”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이 있던 단유가 입을 열자, 아잘이 눈을 빛냈다. “마을에 탈 것이 있나요?” “탈 것?” 레이도르야 사냥꾼이고 아잘이나 가론 등은 공방의 기술자들이니 그랬지만, 농사를 짓는 다른 사람들은 가축을 기르기도 했다. 닭이나 돼지는 물론이고, 염소나 소도 있었다. 대부분은 집 안에서 키우거나 혹은 집 밖에 간이 축사를 지어 목줄을 매어두고 길렀다. “말은 없나요?” “말은 귀한 동물이야.” 큰 도시에서도 높은 분들이나 타는 귀한 동물이라 이런 마을에서 말을 기르거나 소유한 이는 없었다. 말은 오로지 달리는데 특화가 된 동물이라 이런 작은 마을에 쓰일 일도 별로 없었다. “소를 타지는 않고요?” 아잘이 고개를 저었다. 소는 사람을 태우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말로 단유를 이해시켰다. 가끔 국어 교과서에서 보면 소 등에 올라타 피리를 부는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그런 모습을 연출하지 않나 보다. ‘뭔가 탈 것 같은 게 있다면 좋겠는데.’ 아잘은 단유가 궁리하는 모습을 보며 이번엔 또 어떤 새롭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나올지 기대가 돼서 저도 모르게 입술을 혀로 훔치며 기다렸다. **** 해가 지고 난 뒤, 뻥 뚫린 지붕으로 별빛이 겨울의 찬 공기와 함께 내려와 앉을 때 뚜벅거리는 걸음으로 레이도르가 나타났다. “오랜만이네요.” 방 한가운데에 조그만 화로를 두고 거기에 불을 지펴 어둠을 밀어내고 있던 단유가 일어나서 레이도르를 반겼다. 레이도르 뒤에는 제토가 손을 흔들며 단유에게 인사했다. 레이도르는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석판 위로 올라섰다. “아빠, 여기서는 신을 벗는 게 편해요.” “신을 벗으라고?” 침대에 오를 때나 벗던 신을 여기서 벗으라고 하니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레이도르는 아들의 말에 따라 가죽신을 벗었고, 제토가 냉큼 신발을 받아 입구 근처에 가지런히 놓았다. 이렇게 해놓으면 나갈 때 다시 신어도 따뜻한 신발의 온기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냄새가 조금 나긴 하지만, 그 정도를 불편해하는 건 여기서는 단유밖에 없었다. 신을 벗고 맨발로 석판에 발을 디디다가 놀란 레이도르가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단유나 제토가 편안하게 석판 위에 앉는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발을 바닥에 대니 그렇게 뜨겁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온기가 발을 감싸자, 한겨울 내내 산에서 추위와 싸우며 쌓였던 피로가 사라지는 기분이 느껴졌다. “…신기하구나.” 마을에 식량을 구하러 들렀다가 가죽 공방의 아잘과 대장간의 가론, 잡화점의 체돌이 하도 떠들길래 궁금하던 참이었다. 그리고 직접 이렇게 체험하니, 그 신기한 체험은 둘째치고 다시 한번 단유라는 아이에 대해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여기 앉으세요. 뭐라도 드실래요?” “먹을 것도 있느냐?”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심심할 때 입을 달래는 정도예요.” 단유가 신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바깥에는 돌로 만든 항아리가 있었는데, 그곳에 내장을 빼고 손질을 해놓은 물고기 몇 마리가 있었다. 긴 꼬챙이에 꽂아서 화로에 올리니 금방 생선구이가 만들어졌다. “낮에 잡은 건데, 사람들이 좋아해서 몇 마리 안 남았네요.” 양념으로 쓸 게 없어 그냥 생선을 구워 먹는 정도였지만, 단유 말대로 입을 달래는 정도로는 충분했다. 그 밖에도 단유는 몇 가지 과일도 내놓았다. “제법 세간살이도 갖췄구나.” 레이도르의 말에 단유가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주머니들이 조금씩 챙겨 주셨거든요.” 엄밀히 말하면 단유 개인이 쓰라고 둔 것이라기보다는 아주머니들이 놀러 왔을 때 쓰려고 놔둔 것이라 해야 옳겠다. 접시에 생선과 과일을 담아 주니 제법 모양이 잡혔다. 생선 살을 조금 떼어 입에 넣으며 오물거리던 레이도르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바닥은 따뜻한데 위는 차가워서 자기 불편하지 않으냐?” “괜찮아요. 오히려 더 좋아요.” “더 좋아?” “몸은 따뜻하게 하고, 머리는 차가운 게 건강에 좋다고 하더라고요.” 지구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사실 한의학적 상식이 풍부한 편은 아니라서 그 말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머리가 시원한 편이 생각을 깊게 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아 단유는 그 방식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아무렴 어떻겠느냐마는. 어쨌든 마을에서의 일 때문에 니가 마음고생을 많이 하는 게 아닌지, 제토가 걱정이 많더구나.” 오는 길에 계속 제토가 단유에 대한 일을 늘어놓으며 걱정을 했던 모양이었다. 단유랑 같이 있을 때는 별로 그런 기색을 내비치지 않아 몰랐다. “괜찮아요. 보시다시피 넓고 깨끗하고, 따뜻하잖아요.” 하긴 이 겨울에 이렇게 따뜻한 곳에 잘 수 있다면 걱정은 없겠다. 제토가 이 집에서 자는 게 좋다고 자랑을 하길래 어느 정도일까 했는데, 이 정도라면 제토가 부러워할 만했다. 어색하게나마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앉아 있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냥 드러눕고 싶다는 충동이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이게 네가 하고 싶다던 그것이냐?” 레이도르가 산에 들어가기 전, 단유는 자신의 지식을 실험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었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반쯤은요.” 실상 이 집을 만든 건 만들겠다고 미리 계획을 세워뒀다기보다는 조금 충동적으로 시작한 일이라서 자신의 ‘실험’과는 조금 거리가 먼 것이었다. “중요한 건 시계탑이죠.” 시계탑은 시간이 지나도록 건설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리어 잘 됐다. 시계탑 건축에 대해 고민하고 정리할 시간이 마련되었으니까.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시뮬레이션을 해보면서 더 나은 방법, 더 좋은 시도를 고민해 볼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말인데요.” 단유는 레이도르에게 시계탑 건설에 앞서 어른들에게 이 집과 유사한 집을 마을에 만들기로 한 계획을 알려주었다. 일종의 회유책이자 동시에 건축에 대한 기술을 마을 사람들에게 공유해줄 기회가 될 것이라는 단유의 이야기는 이미 아잘에게서도 들었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어르신들을 설득하지 못하면 막무가내로 진행할 수 없다.” 어른에 대한 존경과 공경은 어른들이 걱정하는 것 이상으로 품고 지내는 이들이 바로 마을의 젊은이들이었다. “알아요. 그래서 그 어르신 분들을 이곳으로 한번 초대하고 싶어요.” 단유의 뜻은 이해했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르신들이 이곳에 오는 것을 싫어하신다던데?” “아마 거리도 멀고 움직이기 불편해서일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어르신들이 쉽게 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면 어떨까 생각해봤어요.” “쉽게? 어떻게 말이냐?” “만약 말 같은 동물이 있다면 마차 같은 걸 만들어서 모실 수 있겠는데, 말이 귀한 동물이라면서요?” “이 근처에서는 보기 어려운 동물이지.” 단유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인 뒤,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뭔가를 하나 더 만들어볼까 해요.” “또?” 이렇게 많이 만들고도 또 만들 수 있는 게 있다고? 이제는 레이도르도 제르아 오마 너머의 세상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뭔데?” “그게 사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거긴 한데, 도르래처럼 힘을 적게 들이고도 많은 거리를 갈 수 있게 해주는 탈 것이에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레이도르 대신 제토가 호기심에 가득 찬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게 뭔데?” “그게, 자전거라고 부르는 건데.” 단유는 두 사람에게 간단하게 자전거의 모양과 원리를 설명해주었다. 생선을 굽던 화로의 불빛이 세 사람의 얼굴 위를 일렁거리는 동안 밤이 깊어갔다. 초기의 자전거와 같이 단유가 만들려는 자전거도 일단은 나무로 만들어보기로 했다. 기어와 벨트로 힘을 전달하는 구동 방식에 대해서는 조금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일단은 아잘의 가죽으로 체인을 대신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시계를 만들며 기어에 대한 이해를 높인 론의 도움이 있다면 자전거의 기어도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볍게 만들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하면 사람이 타다가 부서질 수도 있을 것 같아 무게를 절감하는 것은 일단 포기해야 했다. 그래서 바퀴가 마치 수레에나 쓰일 바퀴처럼 크고 묵직했다. ‘산악용도 이보다는 얇겠지.’ 나무로 된 바퀴라서 내구성은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능을 한다는 데 의의를 두고 향후에 다른 소재로 개선이 가능하다면 그때 생각해도 될 문제라 생각해 진행했다. 물론 자전거만 만들어서 어르신들을 태울 생각은 아니었다. 단유가 떠올린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자전거 인력거’였다. ======================================= [445] 개천에서 용났네(6) 자전거 제작에는 론 뿐만이 아니라 아잘, 가론 등이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무엇보다 탈 것, 이라는 이야기에 관심을 많이 가진 이들이었다. 시계 제작 때는 부품을 고정할 때 나무못이나 나무 핀을 만들어 사용했었지만, 이번에는 쇠도 적극적으로 사용해 보기로 했다. 역시나 복잡한 구조물은 만들기 어렵지만, 가론이 나름 적극적으로 나서서 단유가 지시하는 부품들을 만들기 위해 애를 썼더니 만족할 만한 것들이 나왔다. 덕분에 자전거의 내구성이 눈에 띄게 올라갔다. 가죽 안장을 만들 때도 아잘의 도움이 있었지만, 역시 그의 공이 가장 크게 들어간 곳은 바로 체인이었다. 초창기의 자전거는 체인은 물론이고 페달도 없었다. 수레바퀴를 줄인 것에 사람이 탈 수 있는 지지대를 올려 만든 자전거는 사람이 직접 바닥을 박차서 바퀴에 힘을 전달하는 방식이었기에 효율성 면에서 걷는 것보다 크게 나을 바 없는 수준이었다. 물론 바퀴의 구동력은 체력이라는 약점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이 달리는 것보다는 빨랐지만, 현대식 자전거에 원리에 익숙한 단유가 굳이 그런 방식을 채택할 이유는 없었다. 크랭크-체인 방식을 선택한 것도 사실은 욕심일 수 있었다. 단순하게 만들자고 했다면, 그냥 크랭크-페달 방식으로 페달을 밟는 힘을 그대로 뒷바퀴에 전달하는 정도로 했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효율’을 무시할 수 없었던 단유는 ‘적은 힘으로 많은 거리를 갈 수 있는’ 효율이 없다면 자전거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조금 무리하더라도 크랭크-체인 방식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자전거 자체의 무게가 무겁다는 것도 힘을 줄이기 위한 선택의 이유가 되었다. 물론 쇠로 된 체인도 아니고 가죽으로 체인 역할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설명을 듣던 아잘이 욕심을 부려보자며 오히려 단유를 채근했다. 기어의 비율과 거기에 맞게 체인이 맞물려 돌아가도록 길이나 간격을 계산하는 것은 단유의 몫이었고, 단유의 지시에 따라 만드는 것은 론과 아잘의 몫이었다. “이건 어떠냐?” 아잘이 가져온 체인의 모양을 보며 단유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두 개의 가죽 벨트를 독특한 방식으로 꼬아 만든 체인은 언뜻 봐도 쉽게 끊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사이마다 일정하게 홈이 만들어져서 기어의 톱니를 조금만 높인다면 충분히 체인과 맞물려 돌아갈 수 있게 만들어 줄 수 있을 듯했다. 활용성이 보이는 벨트라 차라리 거기에 맞게 부품을 제작하는 게 좋을 듯해서 단유는 다시 처음부터 계산을 하고 부품의 비율을 맞췄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했다면 며칠이 아니라 몇 달이 걸려도 만들지 못했을 자전거지만, 단유가 제시한 명확한 디자인과 정확한 계산, 그리고 여러 장인들의 손기술들이 어울려서 일주일 후 자전거가 만들어졌다. 물론 장인들이 밤을 새우며 만든 공로도 있었지만, 아무튼 놀랍도록 빠르게 만들어진 자전거였다. “한 번 타보세요.” 하지만 장인들은 섣불리 시도하기를 꺼렸다. 타는 방식 자체가 익숙하지도 않거니와, 자전거의 첫 시승의 영광을 단유에게 돌려주려는 마음씨 때문이었다. “그럼 제가 먼저 타도 돼요?” “그러거라.” 단유는 어차피 테스트를 해봐야 한다면 자신이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자전거에 올랐다. 지구에 있을 때 자전거를 몇 번 타보긴 했어도, 이렇게 무거운 자전거는 처음이라 과연 잘 굴러갈지가 의심스러웠다. 페달을 조심스럽게 밟으며 균형을 잡았다. 나무 기어가 마찰을 일으키며 끼득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 “오오, 움직인다!” “앞으로 간다!” 다 큰 어른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신기해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동네 꼬마들 같다. 하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신기한 모양의 ‘탈 것’이 몇 번의 발 구름과 함께 죽죽 나아가 멀리 달아나는 모습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작은 공터 앞에서 단유가 보이는 시연에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저게 뭐야?” “저런 게 저절로 움직이는 거야?” 새로운 ‘장난감’이 출현했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몰려들 때쯤, 단유가 첫 시승을 마치고 아잘 앞에 섰다. “어떠냐?” “안장은 그런대로 괜찮긴 한데, 길이 좀 험해서 엉덩이가 조금 아프긴 하네요.” “잘 굴러가든?” “네.” 단유가 생각한 정도로 잘 나가는 건 아니었고, 나무 바퀴라 그런지 바닥에 부딪힐 때마다 손잡이를 잡은 손과 엉덩이에 가해지는 충격이 작지 않았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 이 정도 기술 문화를 가진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본다면 꽤 놀라운 수준이라 자평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아잘이 시승을 하기로 했는데, 그는 중심을 잡는 것이 꽤 어려웠다. 그래서 단유가 진땀을 흘리며 자전거 뒤를 잡아줘야 했다. “넌 쉽게 타는 것 같더니, 난 계속 넘어질 것 같더구나.” “익숙해지시면 편할 거고요, 뒤에 마차를 달면 뒤에 중심이 잡히니 괜찮을 거예요.” 이미 자전거 제작과 함께 마차도 제작 중에 있었다. 마차는 무게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 처음의 생각대로 2인승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자전거를 우선 만들어야 하다 보니 마차 제작이 늦어졌지만, 단순한 구조라서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가론과 론도 중심 잡기가 쉽지 않다고 여기며 자전거에서 내렸다. “자네가 타보는 건 어떤가?” 아잘은 마침 구경나온 레이도르에게 권해보았다. 레이도르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 없네.” “자신 없긴. 이 중에서 가장 날쌘 사람이 자네 아닌가?” 다른 친구들과 단유가 레이도르에게 시승을 권하자, 마지못해 자전거에 오른 레이도르였다. 단유가 간단하게 타는 법을 알려주고 뒤를 잡아주었다. 처음 얼마간은 익숙하지 않아 휘청거리기도 했지만, 워낙에 몸 쓰는 일에 특화된 직업을 가진 이다 보니, 금방 자전거를 홀로 몰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조심스러웠던 페달 밟기도 익숙해지자 힘을 온전히 실어서 바퀴에 속도를 더했다. 놀라운 속도로 길을 따라 운전하던 레이도르가 방향을 바꿔서 돌다가 다시 가게 앞으로 돌아왔다. 천천히 속도를 줄이다 두 발로 바닥을 짚으며 자전거를 세운 레이도르는 꽤 흥분한 모습이었지만 애써 침착해지려고 노력하는 티가 역력했다. “빠르군.” 만약 잽싼 동물을 쫓아야 할 때, 이런 자전거가 있다면 전혀 꿀릴 게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당연히 산에서 탈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 그저 공상에 불과했지만 레이도르는 산에서도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물건’이 있으면 좋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아, 그렇구나.’ 레이도르는 그제야 예전 단유가 말했던 이야기의 진의를 깨달았다. 단순히 편리한 물건을 만들어 쓴다는 게 끝이 아니었다. 이런 물건들의 사용으로 인해 사람들의 생각이 바뀐다는 게 바로 지금 자신이 느꼈던 ‘필요성’에 대한 부분이었다. 너무나 오랜 세월을 변화 없이 지내다 보니 뭔가를 꿈꾼다거나 변화를 꾀할 일이 없었다. 그런 의지도 없었고. 그런데 짧은 순간이지만, 단유로 인해서 여러 가지 변화를 꿈꾸게 되었다. 단유가 만든 ‘온돌 방식’의 집이 지금의 집보다 훨씬 겨울을 지내기 편하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더 편한 방식의 주택 구조를 궁리하게 되었고, ‘자전거’의 놀라운 속도를 경험하면서 탈 것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더 편리한 생활 도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자신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설령 그런 필요성을 느끼더라도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해결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살았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이 신비로운 탈 것이 그 생각을 거듭 궁리하여 만들어진, ‘인간을 위한 도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안일하게 살았구나.’ 더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그 방법을 찾으려 하지 않고 살았던 과거를 반성하게 된 레이도르였다. 그렇게 반성한 사람이 레이도르 뿐만은 아니었다. 아잘, 론, 가론과 같은 기술자들은 물론이고 곁에서 지켜보던 많은 젊은이들에게도 영감을 준 순간이었다. **** “이게 뭐냐?” 노인이 인상을 쓰며 눈앞의 기물(奇物)을 바라보았다. “일단 여기 타시면 됩니다. 어르신.” 젊은 청년이 노인 앞에 공손히 서서 마차 안에 탈 것을 권했다. 마찬 안은 앉아서 가기 편하도록 털갈이한 가축들의 털을 잔뜩 집어넣어 푹신하게 만든 소파가 만들어져 있었다. 겉은 마을 최고의 장인 아잘이 손수 한땀 한땀 들여 세공한 가죽 시트로 편안하고 안락함을 동시에 전달해줄 수 있게 했기에 어른들이 보기에 낯설긴 해도 꺼려지는 바는 없었다. “으흠.” 일단 겉으로 봐도 앉을 수 있게 된 모양이라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 앉았다. 푹신한 소파의 탄성에 편안함이 느껴졌다. 입술 사이로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잠시 어르신을 모시고 갈 곳이 있으니 잠시만 앉아 주십시오.” “어딜 간다고?” 어딜 간다면서 앉으라니. 앉아서 갈 수 있다는 뜻인가? 젊은이는 노인이 ‘기물’이라 여겼던 마차 앞의 탈 것에 탑승했다. 들고 있던 뭔가를 뒤집어쓰길래 뭔가 했더니 모자였나보다. 다만 평소 보던 모자와 달리 얼굴 전체를 덮는 기괴한 모자였다. 눈구멍만 나와서 노인을 쳐다보는데 섬찟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눈웃음을 지으며 ‘편히 계십시오’라고 한마디 한 청년은 페달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 페달을 밟기 시작하자 노인의 입에서 기함(氣陷)이 터져 나왔다. “뭐, 뭐냐 이게?” 젊은이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혼자 탈 때보다 훨씬 힘이 많이 드는 게 사실이어서 다리에 힘이 많이 들었지만, 대화를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자전거라는 겁니다. 사람이 걷거나 뛸 때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발명품’입니다.” 길이 고르지 않아 덜컹거림이 조금 있지만 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너무 빨라서 멀미가 날 것 같았다. “머, 멈춰라! 위험하지 않으냐!” “위험하지 않습니다, 어르신. 천천히 달리고 있어요.” 젊은이의 말은 사실이었다. 시운전을 하기 위해 달릴 때는 이보다 훨씬 빠르게 달렸다. 힘도 덜 들었고. 겨울 바람에 볼살이 갈라지는 느낌이 있었지만 손재주 좋은 아주머니가 만든 ‘안면 모자’ 덕분에 추위를 막을 수 있었다. 괘씸한 청년이 자신의 말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자전거를 몰아가자 노인은 어쩔 줄 몰라했다. 너무 빠른 탓에 감히 내릴 생각도 못 하고 마차의 벽을 손으로 단단히 짚어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했다. 하지만 마차의 구조상 상체가 살짝 뒤로 젖혀지게 만들어진 터라 떨어질 리도 없고 만약 사고가 나더라도 뒤를 조심해야 할 판이었는데, 노인은 그저 뻥 뚫린 전면에서 쏟아지듯 지나쳐가는 풍경의 속도에 다리를 덜덜 떨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냥 차가운 겨울바람 때문에 추워서 떤 것일 수도 있겠다. 마을 밖을 빠져나온 자전거가 덜컹거리는 길을 지나 도착한 곳은 바로 단유가 만든 온돌 집이었다. “다 왔습니다, 어르신. 내리시지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망토를 여미고 있던 노인이 젊은이의 부축을 받으며 바닥에 발을 딛자, 그제야 살 것 같았는지 깊은숨을 토해낸다. “이, 이놈을….” “어서 오세요. 어르신.” 노인이 고개를 돌리자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아잘이 눈에 들어왔다. 노인의 수염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본 아잘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부득이하나마 어르신을 불편하게 만든 것 같아 죄송합니다. 일단 날이 추우니 안으로 드시지요.” “네놈이, 결국 이런 짓을 벌인단 말이더냐!” “고정하시고, 일단 안으로 드세요.” “시끄럽다! 네놈을 내가 가만히 두면….” 아잘이 곤란해할 때, 아잘의 옆으로 지어진 집에서 솔솔 풍기는 따뜻한 수프 향이 노인의 코를 간지럽혔다. “화를 내시더라도 일단 안에서 몸을 녹이신 후 내시지요.” 병 주고 약 준다는 표현은 없지만, 그 고약한 심사가 절절하게 다가오는 노인은 젊은이의 부축도 마다하고 일단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고집을 부리려 해도 차가운 바람을 오래 맞고 있기에는 노구(老軀)가 견디기 어려웠다. “여기서 신을 벗으시면 됩니다.” “신을 벗으라고?” 갈수록 가관이다. 이쯤 되니 어디까지 가나 두고 보자는 마음이 커졌다. 노인은 신발을 집어 던지듯 벗어젖힌 후 실내로 들어섰다. 이제까지의 놀람은 우스갯소리 정도로 치부할 수 있을 정도로 노인은 놀라고 말았다. 바깥에서 보았을 때 어설프게 나뭇가지를 엮어 덮어놓은 지붕 꼬락서니를 비웃으려 했던 마음도 사라졌다. 발바닥을 통해 올라오는 은은한 열기와 차가운 겨울을 잊게 할 만큼 후덥한 공기에 순간 다른 세계로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벽마다 초를 여러 개 꽂아 마치 잔칫집에 온 것 같은 분위기였다. “어서 오세요. 어르신.” 안에는 마을 젊은이들 몇몇과 아낙들, 동네 꼬마들 몇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가 노인이 입장함과 동시에 일어서서 반겼다. 그리고 그 가운데 낯선 얼굴의 청년이 노인을 반겼다. “루치드, 라고 합니다.” 단유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 [446] Holy Night(1) 노인이 바라보니, 말로만 듣던 그 ‘외부인’의 정체가 눈앞의 청년, 아니 소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얼핏 보면 덩치가 커서, 자신의 막내 아들뻘이라 생각할 수 있었는데 레이도르의 아들과 같은 나이라 했다. 실내에 있어도 어둡지 않아 그의 얼굴을 살피니 과연 동안(童顔)인데 눈에서 형형한 기운이 쏟아지는 것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하지만 눈빛의 기운과 달리 얼굴은 전체적으로 순한 인상이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봤다면 어디서 뒤통수 맞고도 웃으면서 넘겨버릴 아이,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 아이가 마을을 떠들썩하게 만든 주범이라 생각하니 그저 순박하게만 보이진 않는다. 옅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바라보나 저 속을 누가 알까? “니가 말로만 듣던, 그놈이로구나.” “그렇습니다, 어르신.” 다시 한번 머릴 숙여 보이는 아이는 결코 비굴해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오만해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노인은 쉽게 경계를 풀지 않았다. “우선 앉으시겠습니까?” 자리를 권하는 소년이었지만 주위 어디에도 의자가 보이지 않는다. “할아버지, 여기서는 그냥 바닥에 앉는 거예요.” 뒤편에 서 있던 꼬마애 하나가 통통 튀는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 내용이 기가 찬다. 바닥에 그냥 앉는다고? 그러고 보니 바닥이 여간 따뜻한 게 아니란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어찌 바닥에서 열이 날까? 그 원리가 자못 궁금해진다. 노인이 주춤거리다 허리를 숙이니, 다른 이들도 모두 그에 맞춰 바닥에 앉았다. 그 모습을 흘깃 본 노인이 뒤늦게 엉덩이를 바닥에 붙였다. 바닥에 주저앉는 모양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길 즈음, 바닥에서 올라온 열기가 엉덩이를 덥히더니 금세 온몸으로 전달된다. 겨울바람을 맞으며 식었던 몸이 금방 노곤해지는 게, “으으.” 절로 기분 좋은 신음소리가 난다. 추태를 부렸다 생각한 노인이 얼굴을 붉힐 때, 꼬마 애들은 바닥에 드러눕기까지 하는 게 보였다. 그러나 주위의 사람들은 그런 아이들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 인 것처럼 보인다. “어르신, 날이 추운데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죠? 저기 데루카 아주머니가 수프를 끓여 놓으셨는데 먼저 한 입 드시죠. 언 몸을 녹이는 데 도움이 되실 겁니다.” 노인의 뒤에서 아잘이 손짓으로 지시하자, 얼른 아주머니 한 분이 나서서 그릇에 수프를 담아 노인에게 건넸다. 식탁도 없이 또 이렇게 받아드는 꼴이 영 아니다. 머뭇거리는 모양새를 본 단유가 옆에서 작은 나무 둥치를 가져왔다. “본래는 의자로 쓰려고 만들었던 것인데, 다들 바닥에 앉는 걸 즐기셔서 요즘은 간이 식탁으로 쓰고 있어요. 여기에 받치고 드세요.” 거지꼴은 면하게 해주겠다는 건가 싶어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일단은 앞에 놓인 나무둥치 모양의 토막 위에 그릇을 올려놓았다. 하지만 영 숟가락을 떠서 먹기가 곤란했다. “크흠.” 실내에 있던 이들이 전부 자신만 바라보고 있으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노인의 헛기침에 아잘이 눈치 빠르게 손을 저어서 사람들의 시선을 물렸다. “다들 한 그릇씩 드세요. 여태 기다리시느라 드시지 못했잖아요?” 단유가 시원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네자 분주하게 그릇들이 오가기 시작했고, 그러는 사이에 분위기가 한결 나아졌다. 어렵게 한 입 떠서 마신 수프는 나쁘지 않았다. 마주 앉은 소년은 여전히 껄끄러웠지만, 따뜻한 바닥에 앉아 온기를 느끼며 마시는 따뜻한 수프는 지금이 겨울이란 사실을 잊게 하기 충분했다. 단유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달리 할 말도 없었고,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했다. 그저 공손한 태도로 손님을 맞는 주인의 모습만 보여도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식사를 마칠 즈음에는 노인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따뜻한 곳에 앉아 수프는 물론이고 따뜻한 물 한잔으로 입가심까지 하고 나니 주위의 아이들처럼 드러눕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아잘은 연신 눈치를 보면서도 처음에 단유가 일러준 것처럼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노인이 뭔가를 물어보면 그때야 적절히 대답하되, 일부러 설득한다거나 항변을 하는 태도는 최대한 피해달라는 단유의 요구를 충실히 이행하는 중이었다. 혹시 불편하진 않을까 살폈지만, 노인도 식사를 마칠 즈음에는, 조금 곤란한 기색은 보여도, 불평을 늘어놓지는 않아서 아잘은 조마조마한 가운데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색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푸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아이들이었다. “할아버지, 저기 저거 제가 한 거예요.” “저거?” “저기 저 벽에 흙도 바르고 돌도 나르고 해서 만들었어요. 제가 애들이랑 같이 만든 거예요.” “그러냐? 잘했구나.” “잘 만들었죠? 바람도 안 불죠?” “그, 그래. 따뜻하구나.” 지켜보던 어른들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는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끼며 단유의 배웅을 받은 노인이 자전거 뒤의 마차에 올랐다. “추우실 텐데 이거 덮으시죠.” 단유는 잘 때 이용하던 담요를 곱게 접어 노인의 무릎에 올려놓았다. 노인은 한 번 단유를 보았다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노인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보이니, 곧 자전거가 출발했다. 그 노인 이후에도 한 명씩 모시고 와서 수프와 따뜻한 물을 대접했다. 처음의 대접 때는 조금 부실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었는지, 아주머니들은 쿠키 같은 간식거리들도 직접 만들어와서 찾아온 어르신들에게 드리기도 하고 모인 이들과 다 같이 나눠 먹기도 했다. 그리고 마을 촌장인 에저가 방문했다. “뭐냐? 이런 집을 짓겠다고?” 실내에 들어서기 전, 허름하기 짝이 없는 토벽과 겨울나무로 엉성하게 엮어 올린 지붕을 보고 혀를 차던 에저는 실내에 들어오면서, 다른 이들이 그랬듯, 깜짝 놀란 눈으로 바닥을 바라보았다. 여름철 뜨거운 태양열에 달궈진 바위가 이럴까 싶은데, 여기는 해가 내리쬐는 곳도 아니고, 여름도 아닌 마당에 어찌 바닥이 뜨거울까 싶었다. 혹시나 다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스칠 때 실내에서 뒹굴거리던 아이들을 보며 안심했다. “와, 촌장님이다!” 아이들은 ‘촌장 할아버지’를 반기며 뛰어왔다. 마을에서 자주 보던 아이들의 밝은 얼굴을 보니 불안한 마음이 조금 사라지긴 했다. “할아버지! 여기 앉아요, 여기. 수프 갖다 줄까요?” “할아버지! 저기, 저거 우리가 만들었어요. 튼튼하죠?” 다른 노인들이 그랬듯, 어수선한 분주함 가운데 단유와 마주 앉은 에저는 애초 단단히 혼을 내리라 생각했던 것을 실행할 겨를이 없었다. 밖에서 집을 봤을 때의 그 어설픔을 조롱하려던 마음도 바닥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온기에 허둥대고 있었다. “촌장님.” 단유가 입을 열자, 그제야 단유를 바로 의식하게 된 에저였다. 지금까지와 달리 단유는 에저에게만큼은 대화를 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는 당분간 이곳에서 지낼 예정입니다.” 당분간? 그럼 나중에는 다시 마을에 돌아오겠다는 뜻? “향후 이 마을을 완전히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갈 예정입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에저가 콧잔등을 씰룩일 때, 곁에서 듣던 다른 이들이 놀란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아니, 왜? 어딜 간단 말이냐?” 아잘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직 단유에게서 보고 들을 것들이 많다고 여긴 아잘이었다. “저도 제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죠.” 그러고 보니 단유가 어디서 온 것인지 들어보지 못했고, 묻지도 않았다. “그곳이 어딘데? 여기서 먼 곳이냐?” 가까운 곳이라면 자전거를 이용해서 자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멀어요.” 단유는 아잘의 속내를 안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에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라도 저 때문에 불편하셨던 게 있다면 사과드릴게요.” 선수를 치고 나서는 모습이 보통이 아니다. 하지만 에저가 뭔가 반응을 하기 전에 단유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촌장님. 시계가 계속 움직이는 것은 시간도 흐르고 있다는 뜻이에요. 계절이 바뀌고, 낮과 밤이 바뀌듯, 그리고 저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듯 시간은 계속 흐릅니다. 사시사철 변함없을 것 같은 자연도 매분 매초 변하고, 몇천 년이 흘러도 변함없을 것 같은 저 산도 점점 변하죠. 변화는 당연한 겁니다. 그것이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요. 생각이 변하고 기술이 변하고 생활이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이라고 배워왔어요. 촌장님보다 짧은 시간을 살았지만 그런 변화를 보면서 자랐고요.” “나빠질 게 뻔한데 그걸 두고 보고만 있으란 말이냐?” “무엇이 나빠질까요?” 에저의 고집스럽게 다물어진 입술이 씰룩거렸다. “제가 살던 곳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하면 성장이 없다고요. 아이들의 순수함이 귀엽다고 해서 성장을 멈추게 하는 것이 그릇된 방법이듯, 사람이 더 나은 방향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할 뿐만 아니라 응원해야 할 일이라고 봐요.” 단유는 잠시 숨을 고르고 아잘과 에저, 그 밖에 모인 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물론 촌장님의 걱정이 잘못된 것은 아니에요. 제가 살던 곳에서는 온갖 범죄들이 매일같이 벌어져요. 소소하게는 남의 것을 훔치거나 기만하여 사기를 치거나, 또는 사소한 시비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죠. 심지어는 살인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역시, 라는 표정을 짓는 에저와 두려움을 눈에 담은 아이들과 아주머니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남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모두 내놓는 이가 있고, 더욱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자고 부르짖는 이도 있어요. 어린 아이들에게 행복한 삶을 물려주고자 노력하는 부모들이 있고, 이웃의 행복을 지켜주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는 이들이 있어요.” 에저는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냐고 반문하고 싶었다. “아이들은 꿈을 꾸죠. 미래의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꿈꾸고 배우며 노력하고, 어른들은 더 나은 삶을 살려는 방법을 모색하고 연구하며 제가 만들었던 것 이상의 것들을 만들어내죠.” 꿈을 꾼다는 이야기에 에저와 아주머니는 아이들을 흘깃 쳐다보았다. 여기 모인 아이들 중에는 단유의 이야기가 와 닿지 않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또 어떤 아이들은 눈을 빛내며 단유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촌장님이 타고 오신 자전거 같은 것도 만들었고, 더 나아가 자동차라고, 사람이 한 시간을 걸어갈 길을 불과 몇 분 만에 가는 탈 것도 만들어냈죠.” 아잘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하늘을 나는 기구도 만들어냈어요. 수백 명의 사람이 한꺼번 비행기에 올라타 대륙을 건너기도 하지요.” “거짓말!” 사람들이 감탄사와 믿을 수 없다는 반응 사이를 오갈 때, 에저가 외쳤다. 사람이 하늘을 난다고? 그 반응을 살피며 단유는 차마 ‘우주’를 건넌 이야기까지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이야기까지 하면 아마 자신을 미친 사람 보듯 할 것 같았다. 이미 충분히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 중이긴 하지만. “그런 기구가 있다면 왜 제르아 오마를 건너오지 않는 것이냐? 만약 그런 기구가 있다면 우리가 그 오랜 세월을 사는 동안 한 번은 봤어야하지 않느냐?” “제가 살던 곳만큼은 아니어도, 하늘 위로 떠오를 수 있게 하는 기구쯤은 저도 만들 수 있어요. 아니, 여기 기술자 분들의 도움을 받아야겠지만, 가능하죠.” 원리만 알면 기구쯤이야. “하늘을 날 수 있다고? 정말?” “만들자, 응? 나 하늘 구경하고 싶어!” 아이들이 가장 먼저 반응했고, 그다음 아잘이 단유를 채근했다. “그것이 사실이냐? 사람이 하늘을 날 수 있다고?” “사람이 하늘을 나는 게 아니고, 하늘을 날 수 있는 기구를 만들어서 탑승하는 거예요.” “그게 그거 아니냐? 어떻게 만들면 되느냐? 자전거보다 어려운 것이냐? 당연히 어렵겠지. 그래도 시간만 들이면 만들 수 있는 것이지?” 단유는 대답 대신 심하게 동요하고 있는 에저를 바라보았다. “제가 그 방법을 알려드리지 않아도 언젠가는, 이 마을에서도 그런 기구를 만들 수 있게 될 거예요. 수많은 시간이 흐르고 수많은 공부가 뒤따르겠지만, 그건 역사의 흐름이에요.” “역사, 라고?”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 [447] Holy Night(2) “인간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실수를 저지르고 잘못을 범하지만, 그런 실수와 잘못들을 반성하고 고치며 더 나은 삶,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역사, 라고 배웠어요.” 단유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제가 살던 사회에서는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이 사회를 발전시켜나가는 것은 바로 아이들, 후손들이니까요. 그 아이들에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들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올바른 가치관과 서로를 이해하고 더불어 사는 방법을 고민하게 하는 일들을 가르치는 거죠.” 이제 에저 뿐만 아니라 모인 어른들 모두가 입을 굳게 다물고 단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엄숙해진 분위기 탓에 아이들도 쉽게 떠들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그냥 하자고 해서 되는 건 아닐 거예요. 다시 어른들의 역할을 거론해야겠죠. 특히 촌장님과 같이 마을에서 사람들의 이견을 조율하고 지침을 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분들의 역할이 중요한 거고요.” 에저는, 물론 마을에서 자신의 위치가 높은 만큼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거창한 이야기의 끝에 자신의 역할론이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단유는 촌장의 역할에 대해 달리 부연하지는 않았다. 거기까지 가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라 생각했다. “비록 제가 이 마을에 사는 사람도 아니고, 단지 외부자일 뿐인데다 식견이 부족한 아이에 불과하니 제 말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닐 겁니다. 이 마을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말이죠. 하지만 촌장님. 부디 제 뜻을 곡해하지 마시고 마을의 발전을 위해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그리고 어떤 선택이 마을에 도움이 될 것인지를 신중하게 생각해주셨으면 해요. 제가 볼 때, 이 마을 누구도 마을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에저는 눈을 감았다. 온몸이 노곤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 며칠 후, 단유는 아잘의 공방을 방문했다. 달리 살 것이 간 것은 아니었고, 아잘이 방문을 요청한 탓이었다. 공방 앞에는 자전거 한 대가 서 있었는데, 자전거를 바라보는 아잘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진 상태였다. “안녕하세요.” “왔구나. 다름 아니라 이 자전거를 타다가 다친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아잘의 말에 따르면, 자전거를 타고 길을 지나다가 미끄러운 길을 지나면서 중심을 잃었다는 것이다. “가죽끈이 풀리면서 벗겨졌다는구나.” “많이 다치지는 않았고요?” “그 전부터 길이 미끄러워서 넘어지는 일들이 있었거든. 그래서 조심해서 타도록 주의를 준 상황이라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다. 그나마 큰 부상이 아니라니 다행이긴 했다. 단유가 살펴보니 단순히 가죽 체인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나무바퀴에 노면의 충격이 고스란히 실리는 구조이다 보니 바퀴도 많이 망가졌고, 바퀴의 중심을 잡아주는 고정핀도 많이 찌그러진 상태였다. 차라리 바퀴가 빠지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가죽 체인, 이라고 단유가 부르긴 했지만, 엄밀히 말해서 체인이라고 부르기보다는 벨트라고 불러야 옳겠다. 아잘의 특별한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홈이 생긴 가죽 벨트에 기어의 톱니를 끼워 맞추는 방식이니 안정성에도 문제가 있다. 게다가 자전거에 가해지는 자잘한 충격이 가죽에도 전해지니 홈이 조금씩 늘어난 면도 보였다. 헐거워진 홈 때문에 기어가 제대로 힘을 전달하지 못하고, 그러다 보니 페달이 헛도는 현상도 있었으리라. 부품의 내구성이 단유의 예상보다 훨씬 짧은 것이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힘들겠네요.” 단유의 설명을 들은 아잘은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방법이 없는 거니?” 굳이 방법을 찾자면, 소재의 변화를 꾀하거나 혹은 완전히 다른 기술을 접목해 보는 것이리라. “다른 기술이라니?” 아잘은 끊임없이 쏟아져나오는 신기술의 세례(洗禮)에 환호성을 지르고픈 마음을 꾹 참으며 물었다. “기본적으로 자전거의 원리는 페달을 돌리는 힘을 바퀴에 전달시켜 구동시키는 거예요. 힘의 전달에 관한 여러 가지 기술들을 이용할 수 있다면 어떤 방법이든 고려해 볼 수 있는 거죠.” 단유는 작은 돌을 하나 주어서 바닥에 그림을 그려 보였다. “원래는 이런 모양의 체인으로 톱니에 걸어서 힘을 전달시키는 게 제가 생각했던 방식이에요. 하지만 이런 체인은 소재의 문제도 있고 제작의 문제도 있죠. 이렇게 세밀하게 공정(工程)할 능력이 아직은 안되니까요.” 아잘도 단유 옆에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서 그림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이번 기회에 그 기술도 전수해주는 게 어떠냐?”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이건 저로서도 가능성을 점치기 힘들어요. 이건 단순히 모양만 따다 만든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 정확한 치수에 맞춰서 정밀하게 똑같은 부품들이 수십여 개가 만들어져야 하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가죽 체인처럼 톱니바퀴에서 벗겨지거나 혹은 톱니를 상하게 할 수 있어요.” 그런 일이 벌어지면 곧장 사고가 날 것이니 지금의 가죽 체인과 다를 바가 없다. “다른 방법은, 이것도 사실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하긴 한데 잘하면 가능할 수도 있어요.” 단유는 ‘힘의 전달’을 언급하다 떠올린 아이디어를 털어놓았다. “이런 식으로 기어를 연결하는 방법이 있거든요? 힘의 방향을 바꾸면서 전달하기 때문에 이렇게 긴 축을 연결해서 돌리면, 여기가 맞물리면서 돌아가는 거예요.” “이런 모양이 돌아간다고?” “시계 기어의 응용판이죠.” 단유가 그린 것은 ‘베벨 기어’였다. 삿갓 모양의 기어 두 개를 맞물려 회전시켜 힘의 방향을 바꿔주는 기어였다. 페달과 뒷바퀴 사이에 체인 대신 긴 축을 놓고 축의 양 끝에는 베벨 기어 방식으로 기어가 맞물리게 한다. 페달의 회전운동을 축으로 전달시키고, 다시 축의 회전운동을 뒷바퀴의 중심축에 전달시켜 뒷바퀴가 돌아가게 만드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바지 끝단이 체인에 방해가 되는 일도 줄어드니까 좋죠.” “이렇게 좋은 방식이 있다면 진작에 쓸 것이 아니더냐?” 물론 그렇다. 하지만 현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이건 난이도로 따지면 체인 제작 이상일 수 있어요.” “이게?” 솔직히 체인은 정밀 사이즈의 주물과 일정 강도 이상이라는 조건만 맞는다면 제작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런데 베벨 기어와 같은 경우는 체인 이상의 정밀 가공이 요구된다. 기어비를 고려한 디자인 설계라면 단유가 어떻게든 수학적으로 계산해서 치수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치수대로 만들어낼 기술이 없는 것이다. 역시 기술은 정직하다. 절대 새치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럼 이대로 해야 한단 말이냐?” 아잘에게 지금으로써는 어렵다, 고 말하려 했던 단유는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아잘이라는 사람은, 지구에서라면 19세기,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의 지식과 기술을 지닌 시대의 인물로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호기심과 집념, 그리고 기술에 대한 선망은 현대인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교육을 받지 않은 현대인이라면 아잘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선진 기술의 도움도 있겠지만, 교육을 통해 사람은 발전한다. 자신의 입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단유는 고민을 하다가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어요.” 단유는 개인적으로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여러 공방을 오가며 현저히 낮은 기술력과 질이 떨어지는 제품들을 보며 선입견을 가졌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만들기 어려우리라는 것을 예상했고, 그래서 시도도 하지 않았음을 인정했다.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만드는 방법과 거기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단유는 아잘의 도움을 받아 론과 가론 등 공방 기술자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그리고 도량형에 대한 교육을 다시 했다. “이거 아주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예요. 그리고 가장 기본이죠.” 단유는 나무판자를 칠판처럼 세워놓고 목탄으로 단위와 숫자를 써내려가며 설명했다. “앞으로는 시계보다 더 복잡한 것들도 만드셔야 할지 몰라요. 아니 지금도 마찬가지죠. 의자 하나를 만들 때도 여러 가지 부품을 나눠서 조립하는 형태잖아요? 그런데 단위가 다르다면 각각의 부품들은 알맞게 조립될 수 없어요.” 언어가 서로 다르면 말이 통하지 않듯이, 치수가 다르면 부품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쇠를 다루는 일도 마찬가지죠. 지금이야 단순히 거푸집 하나를 만들고 주물을 부어 만들면 모두 똑같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서는 정교한 물건을 만들기 어려워요. 가론 아저씨한테는 일전에도 설명해 드렸지만 제가 사는 곳에서는 시계를 쇠로만 만들기도 한다고요. 즉 거기에 들어가는 복잡한 부품들을 모두 쇠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론이나 가론은 이미 그 필요성을 절감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몇 번을 강조해도 좋을 말이라 단유는 불필요할지 모르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이후에 론에게는 정밀한 디자인의 설계도를 건넸다. “이게 그 체인이라는 것이냐?” “네.” 외부판과 내부판, 롤러와 체인 핀까지 모두 나무로 만들도록 했다. “만약 잘 만들어진다면 자전거에 쓰인 가죽 대신 이게 쓰일 수 있어요. 그럼 보다 더 튼튼하고 효율적인 자전거를 만들 수 있게 될지도 몰라요.” 하지만 내구성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외부 날씨에 의해 나무의 변형이 일어나는 것도 고려하면 주기적으로 교체해야만 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효율성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이 체인을 만드는 목적은 단순히 쓰겠다는 게 아니에요. 이런 제품도 목재로 만들어낼 수 있다면 목재 가공술에도 한 단계 발전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예요.” 그리고 생각의 발전도 있을 것이다. 이런 복잡한 구조를 한 번 보고 만들어두면 어디엔들 응용할 곳이 생기지 않겠는가? 특히 원형 핀의 효율성은 다른 가구에 응용해도 좋으리라. “그리고 가론 아저씨는 저랑 좀 더 이야기를 나누도록 해요.” 단유는 기회가 난 참에 가론과 금속에 대해 연구를 해 보기로 했다. 사실 금속 분야는 단유가 잘 모르는 분야였다. 굉장히 얕은 수준의 지식만 있어서 어쩌면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제가 알기로 쇠에다가 어떤 첨가물을 넣으면 쇠가 단단해진다고 알고 있거든요?” “쇠가 단단해져?” “저도 정확히는 모르니까 실험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 얕은 지식이라도 가론에게는 도움이 된다. 지금보다 얼마나 더 단단해진다는 것인지 감은 잡히지 않지만, 더 단단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가론이 지금까지 해온 방식은, 굳이 말하면 단조(鍛造)였다. 철을 반 용융 상태로 달군 뒤에 망치로 두드리는 것이다. 거푸집에 부어 모양을 잡은 뒤, 철을 두드려 단단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완전한 형태를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철은 굉장히 연하고 무른 금속이라고 알고 있어요.” “맞다. 그래서 제대로 두드려주지 않으면 쉽게 구부러지고 끊어지기 일쑤지.” “온도에 따라서도 금속의 성질이 변하기도 하고요.” 가론은 놀란 듯이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런 것도 배우는 것이냐?” 물론 가론도 선대로부터 배운 바가 있으나, 그런 걸 대장장이도 아닌 단유가 알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저게 교육이란 것인가?’ 단유가 말한 교육이 단순히 선대에게서 기술을 물려받는 걸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가론과의 대화로 단유는 단조의 절차와 담금질(quenching) 등의 열처리 방식을 대략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쇠에 어떤 첨가물을 넣어서 물성(物性)의 변화를 꾀하는 방식에 대해선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니다. 망간이니 크롬이니 하는 것을 듣기는 했으니까. 문제는 망간과 크롬을 자연 상태에서 구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래서 단유는 일단 단순하게 가기로 했다. “일단 불의 온도가 더 높은 게 좋을 것 같아요.” 듣기로는 제철소에서 쇠를 녹일 때의 온도가 1,000℃ 이상이라고 들은 것 같았다. 그런 온도에 비하면 목탄을 이용한 지금의 방식은 꽤 낮은 온도다. 철의 불순물을 날려버리기 위해서라도(제선製銑) 더 높은 화력이 요구된다. “석탄이 필요해요.” “석탄?” 아무래도 금 대신 석탄을 찾으러 산엘 올라가 봐야 할 것 같았다. ======================================= [448] Holy Night(3) 석탄은 오래된 습지 식물이 지압과 지열로 수분을 뺏기고 압력을 받아 만들어지는 퇴적암으로 오래된 퇴적층에서 발견되는 게 일반적이다. 지구의 경우, 딱히 지형이나 날씨의 영향을 덜 받기 때문에 거의 모든 나라에서 고르게 발견이 될 정도다. ‘그러니 이곳에서도 주의 깊게 살피면 찾을 수 있는 확률이 커.’ 금을 찾는 것보다는 석탄을 찾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는 굳이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를 금을 찾기 위해 겨울 산으로 오르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어 움직이지 않았지만, 석탄은 찾아볼 이유가 충분했다. 특히 해가 잘 들지 않고 습한 지형이라면 산의 북면 비탈을 특정해 볼 여지가 있으니, 금보다 발견 확률이 높다. 게다가 이 마을에는 산을 자주 타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훨씬 수고로움이 덜하리라. “여긴 어쩐 일이냐?”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레이도르는 산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단유를 보고 깜짝 놀랐다. “혼자 온 거냐?” “네. 아저씨께 여쭤볼 게 있어서요.” “뭘 말이냐?” “아, 그전에 이거….” 단유는 들고 온 먹거리와 옷가지들을 건넸다. “아저씨 뵈러 간다고 했더니 아잘 아저씨랑 가론 아저씨가 주셨어요.” 친구들의 호의를 대수롭지 않게 받으면서 되물었다. “그래서 뭘 물어보고 싶은 건데?” “혹시 산에서 검은 흙 같은 거 못 보셨어요?” “흙?” “아니면 검은 돌멩이나.” 과거에 석탄을 ‘불붙는 돌멩이’ 혹은 ‘검은 흙’이라고 표현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단유는 물었다. “검은 돌멩이는 잘 모르겠고, 흙이야 거의 검지 않느냐?” “그냥 물에 젖어 검게 보이는 흙이랑 다르고요. 정말 새까만 흙이에요.” ‘검은 흙’이란 두루뭉술한 표현만으로는 단유가 찾고자 하는 것을 찾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단유가 먼저 말한 것처럼 물에 젖은 흙도 검게 보이고, 죽은 동물이나 식물이 썩으면 그곳의 땅이 검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단유는 사냥꾼이란 직업을 가진 이들의 속성을 잘 아는 편이다. 그들은 늘 짐승들이 다니는 길을 살피며 산을 타기 때문에 지형의 변화와 특성에 대해 거의 외다시피 하는 이들이다. 그러니 이질적인 무언가를 본 기억이 있다면, 분명 사냥꾼은 기억할 것이다. 과연 그랬던지, 곰곰이 생각하던 레이도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기억을 떠올렸다. “그렇게 직접적으로 물으니 본 것 같기도 하다.” “그곳이 어딘데요?” “이조츠(Izotz) 산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레이도르가 가리킨 곳은 제르아 오마에 가까운 산이었다. 레이도르의 산장에서 두 개의 고개를 넘으면 만날 수 있는 산이었는데 옆에 있는 높은 산의 그늘에 가려 여름에도 서늘할 정도인 곳이라는 레이도르의 설명이었다. “괜찮으시면 안내 부탁드려도 될까요?” 두 개의 고개라는 말에 가볍게 생각했던 단유는 꽤 험한 지형과 깊은 골짜기 탓에 그곳에 가는 데만 무려 2시간이 걸렸다. “이곳은 맹수들이 많이 사는 산이다.” 맹수들의 가죽은 꽤 인기가 좋아서 마을 사냥꾼은 물론, 더러 외부에서 온 사냥꾼들이 이곳까지 찾아올 정도였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겨울이기도 했고, 과거에 많은 맹수를 잡은 탓인지 지금은 보기 어렵다는 레이도르의 설명이었다. 이조츠산은 미리 경고한 바와 같이 꽤 추웠다. 겨울임을 감안하더라도 골짜기 하나를 넘기 전보다 체감상 5도 이상 온도가 낮은 것처럼 느껴졌다. 단유는 입고 있던 망토를 새로 여미며 앞서가는 레이도르의 뒤를 따랐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넌 산을 자주 타본 것 같구나.” 단유는 어색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굳이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진 않았다. 그때의 기억은 행복보다 슬픈 마무리로 더 기억되는 아픔이었다. 그 표정을 읽은 것인지, 레이도르는 더 묻지 않았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인 데다 짐승들도 잘 다니지 않는 길인지 여간 험한 게 아니었다. “여기다.” 마치 바닥에서 자라난 것 같은 크고 뾰족한 바위를 지나 미끄러지지 않게 힘주어 바닥을 디디며 도착한 그곳에는 정말 검은 흙이 있었다. “일단 기억나는 곳 중의 하나가 여긴데, 이게 네가 찾는 거냐?” 단유는 흙을 한 줌 쥐어 비벼보았다. 석탄이란 것도 글로만 배운 터라 이렇게 만져본들 알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석탄이란 게 흙이랑은 다른 광석이니 촉감이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으며 쥐어보는 시늉을 했을 뿐이다. 조금 퍼석한 느낌이 느껴진다. “불을 붙여봐야 알 것 같은데요.” 레이도르가 그 말을 듣고 배낭에서 부싯돌을 꺼냈다. 단유는 황급히 레이도르를 말렸다. “여기서 바로 불을 붙이면 안 돼요.” 만약 여기가 대규모 석탄이 매장된 노천광산이라면 자칫 이 산을 홀라당 태울 염려도 있었다. 흙 한 줌을 쥔 채로 자리를 이동한 단유는 커다란 바위 근처로 이동했다. 적당히 넓은 바위를 찾은 뒤, 그 위에 흙을 올리고 부싯깃에 불을 붙여 흙 위에 불을 옮겨 보았다. 별 반응이 없어 보이는가 싶더니 곧 타닥거리며 흙에 불이 붙었다. 레이도르는 또다시 단유가 이룬 ‘기적’같은 현상을 눈으로 목격하게 되며 혀를 내둘렀다. **** 단유는 좀 더 본격적으로 매장된 석탄을 확인하기 위해 도구를 준비하러 마을로 돌아갔다. 처음에 올 때야 위치를 몰라 걸어왔지만, 다시 올 때는 ‘이동’ 마법으로 손쉽게 올 수 있었다. 가론에게 빌린 삽으로 위의 덮인 흙, 아니 석탄 가루들을 퍼냈다. 한참을 퍼내다 단유는 삽을 손에 놓았다. 파도 파도 계속 흙만 나오니 혼자서 무식하게 삽질을 하다가는 어느 세월에 광맥을 찾을 수 있을지 가늠할 수가 없다. 게다가 단유는 마법사지 않은가? 최소 범위의 공간을 설정하되 조금씩 깊이 파 내려가게끔 바람을 쏘아냈다. 압력에 비례해 쏘아져 나가는 공기의 힘이 커지니 마치 공기총의 원리와 비슷했다. 바닥을 뚫고 들어가던 구멍에서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더 깊이 뚫고 들어가려면 아마도 더 강한 압력과 힘이 작용해야 할 듯하지만, 단유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찾았다!’ 대략 지면에서 2미터 즈음 파고 들어간 지점에 광맥이 있었다. 그 윗부분을 모두 덜어내니 시커먼 광맥 덩어리가 눈에 보였다. 단유가 건넨 석탄 덩어리를 신비롭게 쳐다보던 가론은 고로에 넣고 화력을 파악했다. 현대인에 비해 기초 과학 지식이 부족하고 상식이 없다 해서 멍청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철과 불을 다루는 면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혜를 간직한 이가 가론이었다. 목탄보다 더 강한 화력을 뿜어내는 석탄의 가치를 몰라볼 수 없었다. 단유는 가론에게 석탄에 관한 몇 가지 지식을 전달했다. 특히 석탄을 태울 때 나는 연기가 매우 유독하므로 주의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더워도 마스크를 꼭 하시길 바랍니다.” 당연히 연기가 잘 배출될 수 있도록 환기시설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그 외에 연기가 안 나는 ‘무연탄’과 ‘유연탄’의 구분이 있음과 쇠를 가열할 때 유연탄으로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정보를 전해주었다. 유연탄을 아탄, 갈탄, 역청탄 등으로 구분하지만, 그 구분법에 대해서는 정확히 아는 바가 없어 대략 냄새가 너무 독하거나 하면 쓰지 말라는 정도의 경고만 해줄 뿐이었다. 이후에 가론은 공방의 몇 사람을 석탄 매장지로 보내 석탄을 캐 오도록 했다. 일단은 공방에서만 쓸 일이라 많이 필요하지는 않다고 여긴 탓이었다. 하지만 얼마 후에는 마을에서 몇몇 사람들이 석탄을 캐와서 팔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석탄은 목탄보다 훨씬 효율이 좋은 연료였다. 사람들이 석탄을 사용했을 때가 훨씬 따뜻하고 열이 오래 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때문에 단유는 마을 사람들에게 석탄의 위험성을 여러 번 강조해야 했다. 단유는 가론의 공방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며 작업을 지켜보았다. 철을 녹여 거푸집에 넣고 주물로 만들어내는 작업과 담금질을 하며 쇠의 강도를 시험하는 일까지 일일이 참여했다. “일단 쇠를 녹이는 일이 꽤 쉬워졌다. 확실히 열이 강하니 쇠가 빨리 녹는구나.” 이마를 벌겋게 달군 가론이 차가운 바람을 쐬기 위해 공방 밖으로 나온 틈에 입을 열었다. “쇠의 강도는 어떤 것 같나요?” “아직 네가 말한 온도의 변화를 정확히 찾아내진 못했지만, 가끔 예전의 것과 비교해서 단단해진 물건이 만들어지곤 있어.” 온도 변화를 주기 위해 석탄의 양을 조절하여 쇠를 가공해보니 가끔 의도치 않은 강철이 나올 때가 있었다. 아직은 몇 번의 실험 과정 중에 나온 것이라 정확히 어떤 조건에서 나오는지는 파악하지 못했으나, 거듭 실험하다 보면 정확한 조건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고맙다.” 뜬금없는 가론의 인사에 단유가 가론을 쳐다보자, 가론은 괜한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얼마 전 첫눈이 온 뒤로 자주 눈이 내려서 거리에는 눈과 진흙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 위를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아주머니들과 조심성 없는 젊은이들의 뜀박질 모습이 보였다. 곧 점심시간이라 다들 식사를 위해 바삐 움직이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너를 못 믿은 것도 사실이다만, 지금 생각하니 부끄럽구나.” 만약 처음부터 단유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고, 마음가짐을 달리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어쩌면 자기도 마을 어르신들처럼 그렇게 고리타분하게 변하는 중이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어르신들을 존경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런 어르신들처럼 완고한 고집과 아집으로 세상을 살고 싶진 않았다. 특히 가론은 ‘공인(工人)’이다. 공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창의성은 비록 다른 사람들이 몰라주더라도 언제나 가슴 속에 품고 사는 가론이었다. 그래서 론이 나무로 시계를 만들어내는 것을 봤을 때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던가.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세요. 앞으로 아저씨가 만들어낼 물건들은 이 마을을 더 좋게 만들뿐만 아니라 세계를 놀라게 할지도 몰라요.” “세계를?” “제가 살던 곳에서는 말이죠. 쇠의 발달이 곧 기술의 발달이나 다름 없었어요. 쇠를 쓰지 않는 곳이 없을 지경이었죠. 심지어는 집도 쇠로 지었거든요.” “집을 쇠로 지어?” 세상에. 그럼 얼마나 많은 쇠가 필요하단 말인가? 게다가 관리를 잘못하면 금방 녹이 슬어서 부서지는 쇠인데? “물론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어야 했죠. 하지만 인간은 그런 시행착오를 통해서 발전을 해요. 한 번의 실수에서 잘못을 깨달으면, 그 다음번에는 잘못을 수정해서 실수하지 않으려 하잖아요. 그게 누적이 되면 결국 성공에 다다르는 거죠. 빠르거나 느리거나 결국 성공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반성이 중요하다. 반성이 없으면, 성공도 없다. “그렇군.” 가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자신은 운이 좋은 편일 것이다. 아이가 살던 곳에서는 시행착오를 겪었다지만, 자신은 그런 시행착오를 겪기 전에 미리 길을 제시해 준 이가 있지 않은가. 나갈 방향을 알려주니 그 방향으로 가면 된다. 성공에 다다를 시간은 훨씬 빠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선 밥부터 먹자고.” 이 정도 여유는 부려도 되리라. 쇠꼬챙이 같은 턱수염이 옆으로 벌어지며 하얀 이를 드러내는 가론이었다. 대장간에서의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단유도 그저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직접 망치를 들진 않아도―망치를 드는 일은 꽤 숙련된 스킬이 필요했다―집게로 주물을 집어 고정해주는 등으로 일손을 도왔다. 그리하여 대장간의 작업 프로세스를 익힌 단유는 그 과정에서 몇 가지 개선점이 보일 때마다 가론에게 일러 주었다. 대장간에 도르래도 설치했다. 이동식 도르래를 설치해 주물을 옮길 때도 도르래를 이용했더니 사람의 힘이 덜 들게 되면서 작업의 효율이 올라갔다. 그리고 환기시설을 갖춘 고로도 새로 만들 필요가 있었는데,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결국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게 되었다. “마을 바깥에 대장간을 새로 짓는 게 어떨까요?” 소규모로 대장간을 운영할 때와는 달라졌다. 지금이야 간단한 물품을 만들면서 쇠의 질을 높이는 실험 정도만 할 뿐이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다양하고 복잡한 제품을 생산해낼지 모르는 상황이니 이전은 불가피했다. 특히나 석탄을 이용한 고로의 화력은 인근 가게와 민가에도 위협이 될 수 있다. “그렇구나.” 건물을 하나 짓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도 마을 중앙에 온돌 난방식 집을 짓는다고 마을 젊은이들이 매달려 있는 입장인데, 대장간까지 옮긴다면 일이 너무 많아지는 게 아닐까 걱정이었다. “대장간은 튼튼하고 안전해야 하니까, 조금 체계적으로 모델링을 해서 지어보면 어떨까요?” 가론의 머릿속에 스파크가 튀었다. ======================================= [449] Holy Night(4)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했던가? 도르래, 시계, 온돌, 자전거 등등을 만들어내다 보니 점점 더 많은 걸 시험해보고픈 생각이 들었다. 이미 마을 외곽에 놀이방, 이라는 이름으로 된 건물을 지어보긴 했지만, 이번에는 소규모 공장에 준하는 건축물을 짓고자 했다. 가론도 공방의 이전에 동의함과 동시에 기왕에 짓는 거 조금 획기적으로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 는 말은 어느 순간 마을의 유행이 되어가고 있었다. 종이를 구해와서 단유가 나름의 구조를 생각하며 평면도를 그렸다. 각종 치수 등을 기재하며 평면도를 구성하자, 가론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에 가마를 만들 거고요, 여기에 담금질 통을 만들어놓으면 여기서 도르래로 끌어서 이쪽으로 옮기고 바로 물에 집어넣을 수 있게 되는 거죠.” “괜찮구나. 그럼 풀무를 이쪽에 배치해야 하는 거냐?” “풀무를 여기 배치하면 이동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까, 이쪽에 공기구멍을 내서 길을 내고, 이쪽으로 풀무를 놓으면….” 두 사람은 석판과 몇 장의 종이를 이용해서 의견을 교환하여 작업 공간의 효율을 올릴 수 있는 공방을 모델링 했다. “물을 많이 써야 하니까, 이쪽에 짓고 여기서 물길을 끌어오는 방식도 좋을 것 같은데요.” “물길을 끌어온다고?” 단유는 모델링을 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샘솟는 걸 느꼈다. 아이디어라고 해야 할까, 욕심이라고 해야 할까? 가론은 끝이 없이 나오는 여러 가지 아이디어에 숨이 막힐 정도로 벅찬 동시에 흥분되었다. 단유의 설명을 들으며, 과연 인간이 꿈을 꾸면 어디까지가 한계인가를 궁금하게 여길 정도였다. 눈앞의 소년만 보면 마치 한계 따위란 말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되도록이면 겨울이 가기 전에, 그러니까 마을의 노동력에 여유가 있을 때 하고 싶지만, 어쩌면 더 길어질지도 모르겠네요.” “그 정도는 참아야지. 만약 이 공방만 만들어지면, 바깥에 우리 물건을 만들어 팔 때, 나도 한몫을 하겠다.” 그동안은 마을 내의 수요만 충당할 정도로 물건을 만들어낼 뿐이었지만, 만약 다른 어디보다 튼튼하고 강한 물건을 만들어낼 수만 있다면 팔아서 수익을 거두는 건 문제도 아니리라 생각됐다. “니가 바로 금덩이로구나.” 가론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단유의 어깨를 퍽퍽 두드렸다. 눈이 오는 와중에도 마을 내의 변화는 계속되었다. 석탄의 발견만으로도 난방의 효율이 올라갔을 뿐 아니라, 나무를 자르고 가공하는 작업이 줄어 시간적인 이득이 생겼다. 이제는 마을의 몇 사람은 석탄이 충분히 가치를 한다는 것을 알고 그쪽으로 진로를 잡아 광부업으로 업종을 전환하기까지 했고, 덕분에 석탄 공급에는 문제가 없었다. 단유는 이번 일을 위해 몇 가지를 더 만들기로 했다. 무거운 자재를 높은 곳까지 쌓기 위해서는 기중기가 필수였다. 공방의 높이를 높이려는 것은 열의 순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인데 지붕을 높여 간단히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또 하나 만든 것은 벽돌이었다. 만약 석회암을 찾았다면 시멘트도 고려했을 테지만, 아쉽게도 석회암은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벽돌로 벽의 견고함을 더해보기로 했다. 마침 석탄으로 화력의 도움도 받을 수 있으니 벽돌 생산도 이참에 시도해볼 만하다 여겼다. 벽돌을 본 아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돌을 만들어내다니!” 벽돌을 만들고 보니 단유는 꽤 많은 곳에 벽돌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당장은 건물을 짓는 곳에 쓰고 있지만, 길에 벽돌을 까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길에다 돌을 깐다?” 그렇지 않아도 길에 생긴 웅덩이나 얼어붙는 땅 때문에 보수가 급한 상황이었다. 벽돌로 바닥을 깔면 그런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계절이 지나 비가 많이 오는 계절이 와도 길에 물이 고이는 일은 없을 터이니 확실히 유용할 테다. 겨울 한가운데 시작된 건설 붐은 금광의 유행을 사그라뜨리게 하였다. 마을 어르신들은 온돌 난방식 집을 건설하는 것도 좋았지만, 우려하던 금 찾기 유행이 사라진 일이 더 좋았다. 게다가 마을 한가운데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길에 벽돌로 만들어진 길이 생기는 것을 보고는 흡족함을 감출 수 없었다. “호오, 이런 길이 있다면 통행에 불편이 없겠구먼.” “마을 전체에 이렇게 포장(鋪裝)을 할 예정입니다.” “그래? 보기도 좋구나.” 바닥에 놓인 벽돌을 한 발로 통통 발을 굴러 밟으며 그 견고함에 웃음 짓는 어르신들 모습에 젊은이들도 흐뭇해했다. 온돌 난방식 집, ‘노인회관’은 비록 벽돌을 생산하기 전에 짓기 시작한 터라 벽돌을 이용할 순 없었지만, 대신 빠르게 공사가 완료되었다. 석탄으로 난방을 하다 보니 열효율도 좋아져서 단유의 집처럼 그냥 맨바닥에 앉을 수는 없었고, 그 위에 다시 진흙을 바르고 짚을 깔아야 했다. 허리가 불편한 이들을 위해 마차의 의자를 만들었던 방식으로 소파도 만들어 넣고, 의자도 구비해 뒀지만 대부분 어르신들은 앉아 있기가 불편하면 그냥 드러누워서 온돌을 즐겼다. “여긴 우리가 관리하마.” “어르신, 어르신들이 하기에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불편할 게 뭐 있나. 여기 ‘아궁이’에 흑석만 집어넣으면 될 일 아닌가?” “너무 뜨거우면 다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때는 덜어내면 될 것 아닌가?” 노인들은 구태여 마을 젊은이들의 도움을 사양했다. 이 정도는 자기들끼리 해도 될 거라며 사양했는데, 사실 이전에 괜한 고집으로 반목했던 일이 부끄러웠던 탓도 있었다. “자네들은 지금도 마을에 ‘포장 공사’ 때문에 일손이 부족하지 않은가? 거기 일도 바쁜데 괜히 우리한테 시간 쓰는 게 미안해서 그러니, 가서 일보게.” 노인들은 아궁이 옆에 마련된 삽으로 창고에 재워두었던 석탄을 한 삽 떠서 아궁이에 집어넣었다. “거 참. 봐도 봐도 신기하네. 불이 저절로 알아서 붙으니 용하다 용해.” “동생, 거기 추운데 서 있지 말고 불 넣었으면 어서 들어와.” “네, 형님. 들어갑니다.” 삽을 석탄 더미 옆에 세워두고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노인회관 안으로 들어가는 노인이었다. **** 점점 심해지던 추위가 한풀 꺾이고 길가에 포장된 도로가 점점 늘어나던 무렵, 공방의 건설이 마무리되기 시작했다. 공방은 마을 변두리에 크게 지어 올렸는데 그곳에서 개천까지의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았다. 단유는 직접 물길을 내는 작업에 동참했다. 그냥 땅을 파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치형의 벽돌을 구워 땅에 심는 공사까지 진행했다. 이를테면 복개천이다. 물론 서울의 개천들처럼 크게 짓는 것이 아니라 관개수로 정도였다. 공방 사람들의 참여로 작업은 3일에 걸쳐 완성되었고, 졸졸 흐르던 물이 공방에 이르러 미리 만들어둔 구덩이에 담겼다. 그곳에서 물을 퍼서 사용만 하면 되니 이보다 편할 수가 없었다. “이거 이런 식으로 해서 논에다가도 만들어두면 좋겠는데?” 아잘이 턱을 쓰다듬으며 묻자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땅이 얼어 있으니 하기가 쉽지는 않더라고요. 날이 풀리고 나서 하는 거라면 몇 사람 정도만 투입되어도 손쉽게 만들 수 있을 거예요.” 마을 외곽의 논밭에도 수로는 있었지만, 종종 수로 옆벽이 침식되어 흙이 무너지면 물길이 막히곤 했었다. 벽돌로 된 수관을 만든다면 적어도 그 점에서는 안전하겠다. “이거 목마를 때 그냥 마셔도 되겠는걸?” 별로. 그것까진 권하고 싶지 않았다. 마을 바깥의 공방은 여전히 건설 중이었고, 가론은 그 건설현장에 직접 가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여전히 바빴다. 단유도 물길을 내는 공사를 도울 때와 공사 진행을 감독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가론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기존의 공방에서 가론은 단유와 함께 쇠와 석탄을 실험하는 일에 열중했다. 단유는 곁에서 가론에게 조언을 하며 실험을 도왔고, 가론의 큰아들이자 공방의 책임 기술자 중 한 명인 에렘(Errem)은 종이에 실험 내용을 기록하며 관찰했다. 단유는 특히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금은 우리가 온도를 정확히 측정할 도구도 없고, 결과를 측정할 장치도 없어요. 오로지 가론 아저씨의 감에 의존할 뿐이죠. 그래도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해내려면 에렘 형의 관찰과 기록이 중요해요. 그래야 이후에 똑같은 품질의 제품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석탄의 종류도 냄새와 연기 등으로 분류해보고, 어떤 석탄을 넣었을 때 화력이 센가, 그리고 어떤 석탄과 철이 반응했을 때 강철이 나오는가를 일일이 기록해야 했기에 에렘은 한 시도 눈 돌릴 틈이 없었다. 「코끝이 매워지며 눈이 따가울 정도의 연기가 나는 돌은 겉이 약간 투명하여 햇볕에 비추면 눈동자가 어렴풋이 보일 정도이다. 이 돌을 바닥에 문지르면 다른 돌에 비해 쉽게 부서지고 가루가 되는 경향이 있다. 가마에 넣으면 다른 돌과 비슷하게 불이 붙긴 하지만 불빛이 새빨갛고 다섯 걸음 정도까지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다. 40분 정도가 지나면 열기는 세 걸음 정도로 줄어들고, 불빛도 약해진다. 1시간이 지나면 한 걸음 이내에서 작업해도 열이 나지 않을 정도지만 여전히 붉은 빛을 낸다. 그리고 이때쯤에 가장 새까만 연기가 많이 나고 냄새가 지독해지는데 몸에 굉장히 해롭다는 루치드의 조언이 있어서 실험을 종료한다.」 처음에는 그저 비슷하게만 보였던 석탄도 그 품질이 제각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채굴장에서도 각각의 석탄들이 서로 다른 곳에서 채굴되는 것임을 확인했다. 그런 실험을 통해 가론은 어떤 석탄이 사용하기에 적합한 것인지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10걸음 정도의 화력을 낼 수 있게 되었을 때, 가마에서 빼낸 쇳물을 부어 주물을 만들면, 망치로 내리쳐도 쉽게 찌그러지지 않는 쇠가 만들어진다.」 「8걸음의 화력을 내는 쇳물로 주물을 만든 뒤, 10분 이내에 세 번의 담금질을 하면 10걸음의 화력을 낼 때의 쇳덩이보다 더 단단해졌다. 담금질의 횟수도 영향을 준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다음에는 여러 걸음의 쇳물마다 담금질의 횟수를 다르게 실험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좋아요. 이런 의견이 필요했어요.” 에렘의 관찰 기록을 살피던 단유가 에렘을 칭찬하자, 에렘이 히죽 웃었다. 솔직히 에렘의 나이가 벌써 22살이었다. 턱에 난 수염이 아버지보단 못해도 꽤 풍성히 자랐건만 어린 단유의 칭찬에 붉게 볼을 물들이는 순수함이 있었다. 가론 역시 관찰 기록의 내용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렘. 잘 했다.” 모처럼 아버지의 칭찬을 들은 에렘이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단유는 나무상자를 들춰 석탄의 상태를 확인했다. 석탄은 관리가 매우 중요한데 물과 접촉하면 물속의 산소를 흡수하여 서서히 열을 발생시키고 급기야 자연발화가 되기도 한다. 혹은 공기의 유동이 많은 곳에서 풍화 현상에 의한 자연발화가 벌어지기도 하기에 보관에 특별히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탄소와 산소의 접촉으로 산화작용이 발생할 때의 에너지가 문제란 말이지.’ 단유는 석탄을 살피던 중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탄소의 결합식이 이미지로 떠올랐다. 탄소는 산소와 함께 생명에 없어서는 안 되는 가장 기본적인 원소, 원소 중 녹는 점과 승화점이 가장 높은 원소, 최대 4개까지 안정한 형태로 결합 가능한 원자, 탄소 형상에 따라 무한한 종류의 화합물이 생성 가능하다는 지식들이 떠올랐다. ‘Fe3O4 + 4 C(s) → 3 Fe(s) + 4 CO(g), C(s) + H2O(g) → CO(g) + H2(g).’ 탄소에 관한 여러 가지 지식들과 탄소 동소체들의 구조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울 때쯤이었다. “아.” 단유의 입술 사이로 바람이 새어 나오며 탄식과 같은 소리가 나오니, 바깥에 나와 시원한 공기를 쐬며 얼굴을 식히던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려 단유를 보았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냐?” 가론의 물음에도 단유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가론이 석탄에 뭔가 문제라도 생긴 것이 아닌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단유를 재차 불러도 단유에게서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단유는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마치 거대한 회오리가, 아니 토네이도가 대륙을 쓸어담을 듯 휘젓는 모양새로 거대한 지식의 소용돌이에 단유의 머릿속이 뒤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간 단유가 보고 배우고 익혔던 온갖 지식들이 그 회오리 안에 모두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회오리에서 특정한 정보들만이 뽑혀 나와 뇌세포 하나하나에 새겨지고 있었다. 아니, 그런 기분이었다. 과거에 헤아릴 수 없이 거대한 숫자를 계산해낼 때의 통증, 그 이상의 아픔에 단유는 머리를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루치드! 루치드! 무슨 일이냐?” 놀라 뛰어들어온 가론과 에렘이 아무리 살펴도 단유의 찡그린 얼굴은 쉽게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 [450] Holy Night(5) 일산화탄소 중독 증상으로 착각한 가론과 에렘이 단유를 들쳐메고 밖으로 나왔다. 이전에 단유가 일산화탄소 흡입으로 인한 어지럼증이나 두통, 구역 등의 증상이 발현되면 그 즉시 환기를 시키고 환자는 공기가 깨끗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맑은 공기를 쐬도록 해야 한다고 일렀던 것을 기억해낸 두 사람이었다. “이제 어떡해야 하지?” “루치드? 괜찮아?” 가론의 등에 업혀 있던 단유가 가론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괜찮아요.” 여전히 통증을 느끼는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였지만, 손을 내저으며 뜻을 전달했다. “괜찮아? 정말?” “네, 괜찮아요.” 땅에 내려준 후에도 단유는 무릎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지만, 에렘이 곁에서 부축해 준 덕에 꼴사나운 모습은 피할 수 있었다. “난 또 네가 전에 말한 흑연(黑煙)에 쓰러진 건 줄 알았다.” 이래서야 무서워서 어디 석탄을 다루겠는가? 가론이 공방 안의 석탄 더미를 돌아보며 걱정을 표시했다. “다행이네요.” “뭐가 다행이야?” “제가 전에 주의해준 사항을 잘 기억하고 계시니까요.” “설마 시험해보려고 연기한 건 아니지?” “그런 건 아니에요.” 단유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자, 그제야 마음을 놓으며 가론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왜 그랬던 거야?” “…그냥 머리가 좀 아팠을 뿐이에요.” 좀 아픈 게 아니라, 머리가 터져나갈 것처럼 아팠던 것이지만 굳이 걱정을 끼칠 필요는 없으리라. 소동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가론은 몸이 불편하면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며 단유를 돌려보냈다. 단유도 기력이 다한 것 같아 그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집으로 돌아온 단유는 아궁이에 불을 지핀 후, 바람을 약하게 불어넣어 불길을 빨리 일으켰다. 풀무질하듯 바람을 몇 번 집어넣으니 금세 방이 따뜻해졌다. 실내로 들어와 방 한가운데 드러누우니 절로 눈이 감기고 의식이 점점 멀어진다. 생각은 나중에 하고 일단 잠부터 자야겠다. 단유가 눈을 떴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아까는 쏟아지는 잠을 참지 못해 눈을 감았었는데, 이번에는 미칠 듯이 허기가 졌다. ‘먹을 게 있을까?’ 아주머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방’을 자주 찾게 되면서 소일거리만 들고 올 뿐 아니라 간단하게 먹을 간식거리들을 싸 가지고 오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그날 가져와 그날 다 먹는 식이지만, 더러 남는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남는 것들을 바구니에 담아 벽 한쪽에 걸어놓곤 했다. 그 바구니를 뒤졌더니 먹다 남은 파이 반쪽이 남아 있었다. 이거라도 감지덕지다. 단유는 파이를 입에 집어넣고 우물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곧 겨울바람이 단유의 외출을 반겼다. 개천 위를 훑다가 들이닥친 바람이라 그런지 더 차갑게 느껴졌다. 단유는 몸 주위로 바람의 벽을 둘러 차가운 기운이 닿지 않게 했다. 단유 주위에 회오리처럼 바람이 움직이니 바닥의 모래가 슬쩍 말려 올라간다. 단유는 그대로 개천으로 향했다. 개천의 물을 두 손으로 떠서 입을 축인 뒤, 밤하늘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검은 개천을 들여다보다가 적당한 지점에 회오리를 일으켰다. 고깔 모양의 회오리는 강력한 흡입력으로 물을 빨아들여 위쪽으로 올라가게끔 하였다. 물론 물만 빨려 올라가지 않고 그 안의 여러 가지 것들, 예를 들면 떠내려오던 나뭇잎이나 바닥에 얕게 박혀있던 수초나 작은 돌멩이, 그리고 더러 물고기들이 말려 올라왔다. 사람이 있을 때는 못하지만 보는 사람이 없을 때는 이렇게 마법으로 물고기를 사냥했다. 개천을 몇 번 휘젓다 보면 송사리는 물론 손바닥만 한 민물고기도 몇 마리씩 낚아 올릴 수 있었다. 이번에도 개천을 휘저으니 공중에서 파닥거리며 정신없는 물고기 몇 마리가 보였다. 발치에 뒀던 바구니로 ‘이동’된 물고기가 3마리 정도 되었을 때, 단유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화로에 불을 붙이고 물고기를 구워 먹었다. 3마리를 모두 먹고 나니 그제야 허기가 가셨다. 두 손을 뒤로 짚고 상체를 젖히니 낮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부랴부랴 만든 지붕이라 허접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굵은 겨울나무 가지를 엮어 만든 지붕이라 쉽게 바람에 날아가진 않을 것 같았다. 지붕 사이로 스며드는 겨울의 찬 공기도 실내의 공기 순환에 도움이 되니 나쁘지 않았다. 허기도 해결하고 정신도 맑으니 이제 자신에게 벌어졌던 일을 확인해 볼 차례다. ‘탄소’를 떠올리자 머릿속에 명확하게 ‘이미지’가 떠오른다. ‘포르마(forma).’ 핀체노의 설명을 되새겨보면, ‘라티오’에 존재하는 ‘원형’이다. 그 자체로 완벽한 의미를 내포한 원형의 이미지는 ‘샤락티라스’-고유성질을 모두 파악해야만 ‘아나그노리시’-인식이 된다. 즉, 단유는 탄소의 원형을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간 수없이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물질의 원형을 파악한 사례는 이번이 최초였다. 단유의 머릿속에 떠오른 탄소의 이미지는, 예를 들면 빛과 같았다. 흰색에 가깝지만 달빛처럼 은은하고 별빛처럼 눈 부시지 않은 빛이었다. 하지만 광원(光源) 속에서도 뚜렷이 그 모양이 구분되며, 그 속에 탄소에 관한 무한한 정보들이 함축되어 있었다. 단유가 지금껏 공부한 내용들을 정리하기 위해 써내려갔던 지식이 담긴 노트가 그 빛 원자에 함축된 것 같은 모양새라, 단지 그 이미지만 떠올렸음에도 탄소에 관한 정보들이 한순간에 파악된다. “으음.” 하지만 단유는 이내 눈을 감고 고통에 이맛살을 찡그렸다. 한꺼번에 수많은 정보가 출력되는 상황에서 뇌가 감당하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오랫동안 떠올리고 있기가 힘드네.’ 그래도 이왕에 떠올린 김에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을까? 최초의 구현(具現)마법인데. 핀체노가 제일 처음 설명한 마법도 구현마법이었지만, 단유가 이제껏 사용한 마법은 재현(再現)마법이었다. 물질의 고유성질을 모두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 어렵기도 하거니와, 이미지를 떠올리는 일이 쉽지 않은 탓이었다. 다시 포르마를 떠올린 단유는 해당 이미지를 연속으로 떠올리며 각각을 결합시켜 나갔다. ‘사면체 구조였던가?’ 눈을 감고 집중하는 단유의 이맛살이 재차 찌푸려졌지만, 이번에는 꾹 참고 계속 작업을 이어나갔다. 수십 개에서 수백 개로, 수천 개로 확장해나가며 이미지를 결합시켜 나가니 점차 거대한 구조물이 만들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머릿속을 꽉꽉 채우고 있던 정보들인데 결합이 이어질수록 수많은 정보가 갱신되고 새롭게 만들어지면서, 뇌가 마치 고압에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터질 것만 같았다. 「sp3 오비탈 구조, 12.01 g/mol, 굴절률 2.418」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질 때쯤, 단유는 ‘챕터’―성질 추가를 중단했다. 그리고 머릿속에 그려진 ‘피구라’―특정 성질에 의해 정의된 이미지―를 ‘컨슈메’―재현해냈다. 머리를 압박하던 그 통증이 무색하게, 소리 없이 나타난 하얀 결정이 공중에 아래로 떨어지며 바닥을 굴렀다. 그 결정을 집어 올리니 손가락 한 마디보다 조그맣다. 피식, 웃음 지은 단유는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최초이지 않은가. 언젠가는 핀체노가 컵을 마법으로 만들어냈던 것처럼 특정한 형상의 물체도 구현해낼 수 있을 것이다. 턱 끝으로 떨어질 듯 매달린 땀방울을 소매로 훔쳐낸 뒤, 단유는 보석‘들’을 지붕을 엮고 있는 나무 기둥에 박아 넣었다. 화로의 불빛이 흔들릴 때에 맞춰 영롱한 빛깔을 반사 시켜 보인다. 처음의 결정을 만든 이후, 총 7개의 결정을 더 만들어낸 단유는 달리 둘 곳을 찾다가 나무에 박아넣기로 했다. 천장에 박힌 일곱 개의 결정이 마치 별빛처럼 반짝였다. **** 겨울이 지날 무렵, 변두리에 짓던 공방이 완성되었다. 내부의 작업장도 미리 계획한 모양에 맞게 새로 지어서 작업의 효율을 최대한 높일 수 있게 꾸몄다. “이건, 꿈의 대장간이야.” 가론이 몽롱해진 눈으로 실내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게 대장간이라고?” 우중충한 대장간의 이미지와 달리 새로 지은 공방은 천장이 높기도 하거니와, 벽돌을 야무지게 쌓아 올려서 언뜻 봐도 견고함이 보통이 아니라 아잘과 론은 그저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구경할 뿐이었다. 게다가 벽에는 도구 걸이용 타공판을 설치하여 다양한 공구들을 매달아 둘 수 있게 했는데, 론이 가장 탐내는 물건이었다. “도구들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굴러다니지 않도록 정리해두면 보기도 깔끔하지만, 작업 할 때도 도움이 많이 될 거예요.” 간단하게 철판에 구멍을 뚫고 그사이에 고정용 핀만 꽂으면 쉽게 도구들을 걸 수 있도록 한 그 제품을 본 아잘과 론이 선주문을 넣었다. “이런 곳에서 그저 농기구들만 만들기엔 너무 아까운데?” 아잘의 물음에 가론이 피식 웃었다. “이제는 모양만 같다고 똑같은 삽이 아니야.” “무슨 말인가?” 가론은 씩 웃더니 진열대에 올려놨던 낫 두 개를 들고 오게 시켰다. 에렘이 한 개의 낫을 붙잡고 작업대 위에 올렸다. 가로로 눕힌 낫 위로 가론이 망치를 들고 내리치니 낫이 쨍,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깨져 버렸다. 멀쩡한 낫을 왜 부수나, 싶어 아잘과 론이 어리둥절해, 할 때, 가론은 다른 낫을 다시 작업대 위에 올려두고 망치로 똑같이 내리쳤다. 망치를 자랑할 모양인가, 라고 생각할 때 앞서와 같은 금속 마찰음이 들렸다. 하지만 이번의 낫은 깨지지 않았다. “응?” 가론이 입꼬리를 늘리며 다시 한번 망치를 내리쳤으나 낫은 깨지지 않고 대신 약간 휘어졌다. “이런, 여기를 받치고 있어서 휘었나 보다.” 쯧, 혀를 차던 가론이 낫을 들어 이리저리 쳐다보는데 아잘과 론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가론과 낫을 지켜보았다.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어 아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찌 된 건가? 어떻게 부서지지 않은 거야?” 아잘의 상식으로 철은 세게 두드리면 깨지는 게 옳다. 웬만큼 두껍게 만들지 않는 이상, 낫이나 칼과 같은 얇은 제품은 사용 중에 부러지는 게 다반사였다. 그런데 방금은 망치로 두어 번을 내리쳤는데도 깨지기는커녕 겨우 휘기만 할 뿐이지 않았는가? 가론이 너털웃음을 짓더니 에렘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는 아잘의 물음에 답을 했다. “지난 겨울 내내 루치드랑 아들 녀석이랑 다 같이 쇠를 시험하지 않았나?” “그럼 진짜 그 실험으로 이런 쇠를 만들어냈다고? 다른 금속으로 만든 게 아니고?” 이 정도면 철이 아니라 다른 금속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루치드 말로는 이게 ‘강철(鋼鐵)’이라더군.” “정말 대단하군.” 쇠가 다 좋은데 종종 너무 쉽게 깨져나간다는 게 문제였다. 밭을 매다가 돌에 치이면 쟁기날이 날아가고, 도축을 위해 칼질을 하다가도 간혹 단단한 뼈에 날이 걸리면 날이 부러지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이런 강철로 만든다면? “외부의 어떤 마을에서도 이보다 단단한 쇠는 다룬 적이 없을걸?” “그 말은 장사를 본격적으로 해보겠단 소린가?” “아무렴. 이런 칼은 값을 높여 불러도 살 사람이 있을 거야.” 아잘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론의 생각에 동의했다. 아잘과 론처럼 도구를 자주 사용하는 이들은 더더욱 그랬다. “나라도 지금 당장 주문해야겠는걸. 이거 참. 친구의 새로운 작업장을 축하해주러 왔다가 주문만 잔뜩 하고 돌아가게 생겼어.” 론도 마찬가지라 모인 세 사람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단유가 공방에 들어오면 무슨 웃음소린가 궁금해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웃음을 지으며 타박하는 가론에게 단유가 미소 지으며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는 며칠 전 얻어간 종이가 들려 있었다. “뭐지 그건?” 아잘은 궁금해했고, 가론은 조심스럽게 종이를 받아들었다. “설계도에요.” “설계도?” 단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절삭용 기계랄까요?” ======================================= [451] 스스로 긋는 한계(1) 절삭용 선반은 정밀가공의 시작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가론이 이 도구를 어떻게 사용해낼지는 알 수 없으나, 에렘이라면 다양한 실험과 상상력을 통해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건 시계탑 부품이요.” 다시 건넨 종이에는 복잡한 모양의 부품들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고, 각각의 치수가 그려져 있어 가론은 보자마자 눈을 찌푸렸다. 다만 론은 이러한 방식의 설계도에 익숙해선지 보면서 호기심을 드러냈다. “이건 우리 시계에 들어가지 않던 모양 같은데?” “이건 태엽이라고 얇은 철판을 둥글게 말아놓은 모양인데, 이 태엽이 돌아가는 힘을 동력으로 삼기에 적당하거든요.” 물론 이렇게 일정하게 얇은 철판을 만들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지금의 공방에서는 조금만 신경을 쓰면 만들어내는 게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단유는 시계의 설계도를 보며 설명했다. “이론적으로는 이렇게 돌아가도록 했는데, 사실 직접 만들어보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저도 모르겠어요. 직접 만들어 본 적은 없거든요.” “뭐, 어쨌든 해보면 알겠지.” 가론이 뭐 대수냐는 듯, 에렘에게 설계도를 건넸다. 겨울 동안 아들과 함께 이것저것 실험하면서, 가론은 아들의 가능성을 알게 되었다. 아들은 자신보다 훨씬 더 쉽게 단유의 설명을 알아들을 뿐 아니라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상상해내는 창의력도 보였다. “우선은 남은 철들로 강철 제품을 만들고요, 그것을 팔아서 더 많은 철광석들을 사와야 합니다.” 에렘이 설계도를 수습하며 말하자, 가론과 친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루치드, 나는 어디 팔 만한 게 없을까?” 론은 벌써 도르래 장치를 만들어 팔 계획을 세웠다. 마을의 도르래 뿐만 아니라 기중기에 들어가는 도르래도 목재로 만들었던 탓에 목제 도르래의 활용성은 입증이 된 상태였다. 이를 가지고 가서 장사해도 꽤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텐데, 문제는 아잘이었다. 아잘은 여태 가죽 체인과 소파 정도밖에는 자신의 기술을 활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의 가죽 기술이 앞으로 전혀 쓸모없게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친구들이 여러 가지 것들을 만들며 기술력을 쌓아나가고 있을 때, 자신은 그저 예전처럼 가죽을 대패로 문지르며 무두질만 하고 있을 뿐이니까. 단유는 아잘의 질문에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가죽은 다른 것 못지않게 꽤 고급스러운 소재, 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현대에서도 천연 가죽 제품은 비싸게 거래되지 않던가. 물론 디자인이나 마감 등의 요소가 중요하긴 하지만 ‘가죽 제품’이란 건 ‘비싼 제품’이란 인식이 단유에게 있었다. 그리고 예전 녹스에 있을 때도 가죽조끼나 망토 등이 비싸게 거래되었던 것을 떠올려보면 굳이 가죽 공방에서 특별한 기술을 이용한 제품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 이야기를 줄여 이야기했더니 아잘이 조금 낙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지금 하는 거랑 별 차이가 없는 거구나.” 도구의 손잡이에 미끄러지지 말라고 가죽을 감거나, 늘 만들던 조끼나 장갑, 신발을 만드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일이 없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제가 가죽 만드는 걸 잘 몰라서 그런 거니까, 한번 견학해봐도 될까요?” 혹시 보다 보면 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지도. 단유의 말에 아잘이 흔쾌히 허락했다. 가죽의 무두질은 그냥 대패로 털을 미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가죽을 벗기면 때로 불필요한 부분들―이를테면 지방질이나 단백질―이 붙어서 나올 때가 있었다. 그런 부분을 일일이 칼로 떼어나고 불로 지져서 없애야 한다. 그리고 나서 털을 제거해야 하는데, 이때는 나무뿌리에서 채취한 용액으로 털을 제거한다. 오랜 시간 가죽을 절여 놓으면 털이 녹아 빠진다. 털까지 빠지고 나면 가죽의 흠결이 선명히 드러난다. 물론 제모 이전에 가죽의 상태를 보고 급을 정하기도 하지만, 제모 후에 드러나는 것들, 이를테면 똥 부스러기에 변색이나 변질이 된 부분, 진드기 자국, 쇠파리 종기 구멍 등이 선명히 드러난다. 더러 사냥 시에 긁힌 자국과 억지로 털이 뜯기며 생긴 구멍이 선명하다. “이렇게 흠이 많은 가죽으로는 옷을 만들기 어려워. 그래서 보통은 신발을 만들거나, 일부분을 잘라내서 조각으로 사용하지.” 표피층과 조직층을 칼과 대패로 분리한 뒤, 뜨거운 물에 끓인다. 가죽의 비릿한 냄새를 없애는 작업이었다. 이후 망치로 두드려서 가죽을 연하게 만든다. “그냥 가죽을 오래 두면 쉽게 썩기도 하지만, 물이 닿으면 가죽이 늘어나고 마르면 딱딱해져서 굳기 때문에 사용하기가 쉽지 않아. 그래서 이렇게 두드리는 작업이 필수지.” 이를테면 가죽 안의 수분을 짜내는 작업이었다. 끓이고 짜고 펴고 말리는 작업을 수차례 반복하면 가죽은 연하되 냄새는 나지 않고, 수분이 없어 변질이 쉽게 일어나지 않게 된다. 마지막으로 가죽 위에 또 다른 나무 기름을 바른다. “이 기름을 바르면 처음의 가죽에서 보였던 자국들의 상당수가 가려지거든. 없어지진 않지만 덜 눈에 띄게 하는 거야.” 이후에 사용이 가능하고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가죽이 완성되면 장인의 손에서 제품으로 디자인되어 만들어진다.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릴 뿐만 아니라 손도 많이 가네요.” “그럼. 사실 가죽은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지.” 아잘은 진열대 위에 놓인 가죽 장갑을 들어 올리며 뿌듯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단유는 그 웃음을 보다가 공방 안을 다시 돌아보았다. “여기는 아예 지붕을 없앴군요.” “대장간 못지않게 냄새가 지독하니까.” 가죽 원피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도 냄새지만, 무두질 과정에서 수분을 짜내기 위해 두드릴 때 가죽에서 온갖 냄새가 다 풍겨 올라온다. 그래서 환기는 필수였다. 단유는 턱밑을 긁적이다가 아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사실 가죽 제품에 대해서는 제가 별로 아는 바가 없어서 기껏해야 장갑이나 소파 정도밖에는 생각나는 게 없네요.” 대장간에서 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에 아잘이 별수 없나, 라는 듯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작업들이 있는데, 이걸 기계의 힘을 빌려서 줄이면 좋지 않을까요?” “기계의 힘? 어떻게 말이냐?” 단유는 당장에 생각나는 것만 몇 가지 언급했다. “예를 들면, 가마솥에 가죽들을 집어넣을 때요, 저렇게 많이 넣고 뺄 거면 기중기 같은 장치로 옮기는 게 좋지 않을까요? 밑에 이런 넓적한 판을 만들고 그 판을 기중기에 연결하면요…판 위에 가죽들을 적재해서 한꺼번에 용액에 넣고 빼는 게 가능해지겠죠.” “오호라. 그렇구나. 이런 식으로 응용하는 법이 있어!” 아잘이 손뼉을 칠 때, 단유가 덧붙였다. “대장간에도 소형 도르래 장치 만들어 둔 거 보셨죠? 그것도 무거운 주물을 옮길 때 쓰려고 만든 거니까, 그거랑 비슷하게 만들어서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요. 그리고 가죽의 수분을 뺏기 위해 망치를 두드리잖아요? 이걸 기계로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단유는 당장 몇 개의 톱니바퀴와 체인으로 연결된 기계를 구상해냈다. “옆의 손잡이를 돌리면 여기서 힘을 전달하고, 이 힘이 여기까지 오면 여기 달린 망치를 아래로 내려찍는 거예요. 밑판이 돌아가도록 설계만 해놓으면 한 손으론 손잡이를 돌리고, 한 손으로는 밑판을 돌리는 거죠.” “그냥 손잡이를 돌리기만 해도 망치가 알아서 가죽을 찧어줄 테니까 무거운 망치를 들 필요가 없겠구나!” 그림을 그려놓고 보니 그것이 마치 구형 재봉틀 같은 모양새라 여겨졌다. 옛날 재봉틀도 손잡이를 돌리면 바늘이 위아래로 왔다 갔다 하며 실을 꿰던 방식 아니던가? 단유는 일단 상념을 지우고 마저 설명했다. “마지막에 가죽을 펼 때는 이런 거대한 ‘롤러’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한쪽에 가죽을 넣고 돌리면 거대한 롤러가 가죽을 압착해서 가죽을 연하게 하는 작업을 돕는 거죠.” “어서 만들자! 어서!” 아잘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금방이라도 달려갈 듯한 모양새를 취했다. 예전이라면 이런 기계를 만드는 일이 쉽지 않을 터였지만, 지금과 같은 공방이라면 만드는 게 어렵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이참에 재봉틀도 만들어?’ 산업 혁명 당시 획기적인 아이템이었던 재봉틀은 대한민국에서는 60년대와 70년대, 가혹한 노동 현실을 상징하는 물건처럼 변했다고 배웠다. 만약 만든다면 과연 이 시대에도 재봉틀은 사람들을 가혹한 노동 현장으로 몰아넣는 기구가 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시대로 발돋움하는 아이템으로 기억될 것인가? 철제 톱니바퀴를 만들기 위해 여러 사람의 협조가 필요했다. 론은 나무로 목각 틀을 만들었고, 아잘은 가죽 장갑과 가죽 작업복을 만들어 가론에게 주었다. 가론은 목각 틀을 이용해 주형(鑄型)을 만들고, 주형에 쇳물을 부어 톱니바퀴 주물(鑄物)을 만들어냈다. 세밀하게 다듬는 작업을 끝내고 보니 괜찮은 기어(gear)가 만들어졌다. “이런 바퀴라면 정말 부서질 염려가 없겠구나!” 론이 감탄하며 만들어진 기어를 만져보고 두드렸다. 가론 역시 뿌듯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드디어 자신도 이런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만들어진 기어는 절삭용 기계에 들어갈 부품이었다. 이런 기어를 몇 개 더 만들어 수동식 절삭용 기구를 만들면 단순히 절삭뿐만 아니라 다듬는 작업에도 응용이 가능할 것이다. “여기에 맷돌을 달고 돌리면 원형 제품의 겉면을 깔끔하게 다듬을 수 있겠네요.” 에렘이 바로 기구의 응용법을 캐치해냈다. 에렘은 보기 드문 인재였다. 어떤 물건을 보면 그 작동원리를 논리적으로 파악한 뒤, 그 원리를 응용해서 다른 기계 장치를 상상할 수 있으니 타고난 장인이자 발명가라 하겠다. 최근 에렘은 저녁을 먹은 뒤 목재 공방으로 가서 론에게 목재를 다루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앞으로 더 많은 제품들을 제작할 때 목각틀이 필요할 텐데, 그때마다 론에게 부탁하기가 어려우니 자신이 직접 목재를 다루는 법을 익혀보려는 것이었다. 론도 에렘의 그런 열정을 높이 사서 저녁 늦게까지라도 에렘을 가르치는 일에 성의를 보였다. 겨울의 막바지에 마을의 공사들이 대부분 끝이 났다. 공사 기간 중에 만들어진 기중기와 벽돌 등이 공기(工期)를 단축하는 데 도움을 줬다. 어른신들과의 마찰로 갈등을 빚었던 젊은이들이 대부분 마을로 돌아온 것도 큰 역할을 했다. 한 달이 넘게 산을 누볐음에도 금이 나오지 않자 시들해진 것도 원인 중의 하나겠다. 어르신들은 겨울이 다 가고 추위가 거의 가셨음에도 아침마다 노인 회관으로 출근해서 뜨거운 온돌에 몸을 데웠다. 마을의 길들은 몇몇 작은 골목길은 제외하고 큰길을 모두 벽돌로 포장했더니 거리가 깨끗해지기도 했고 통행이 한결 편해졌다. 또 이전의 대장간을 벽돌 제조 공방으로 바꿔서 계속 벽돌이 공급되도록 했다. 자기 집 앞 골목길을 벽돌로 포장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개별적으로 벽돌을 구매해 바꿔나갔다. 금을 찾으러 갔던 사람은 대부분 마을로 돌아왔지만, 일부는 금광 대신 석탄으로 자리를 옮겨서 일했다. 석탄이 돈벌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겨울이 거의 다 지났지만, 불은 계절을 가려 사용하는 것이 아니니 나무보다 더 화력이 좋은 석탄의 수요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론은 도르래와 노끈을 이용한 장치를 여러 벌 만들었다. 노끈의 길이만 조절하면 어디에라도 달아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에 활용도가 높았다. 당장 마을에서는 이를 개별적으로 사용할 이가 없었지만, 애초 외부 마을에 가져다 팔 생각이었기 때문에 론은 봄맞이 상행에 직접 참여해서 기회만 닿는다면 기중기 제작도 역시 팔아볼 생각을 했다. “수익이 나면 너에게도 나눠주마.” 론의 이야기에 단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온전히 이 마을의 것이에요. 저한테 주실 필요 없어요.” “그럴 수야 있나? 너한테 얻은 것이 이렇게 많은데 모른 척한다면 천벌을 받을지도 몰라.” “그렇지 않아요. 저도 많이 얻었는걸요.” “혹시 ‘놀이방’을 말하는 것이냐?” “그것도 있고요.” 단유는 호주머니에 넣어둔 하얀 결정을 떠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아!” 단유가 갑자기 탄성을 지르더니 히죽 웃음을 지었다. “왜 그러느냐,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나서요.” 단유는 나중에 보자며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단유가 론에게 무언가를 선물했다. “뭐냐, 이게?” “줄 톱이요.” “톱?” 론이 바라보니 다소 가볍기도 하거니와 톱니 끝부분이 하얗다. “꽤 쓸만할 거예요.” 어쩐지 창백해 보이는 단유였지만,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워낙 환해서 론은 고맙다는 말로 선물을 건네받았다. ======================================= [452] 스스로 긋는 한계(2) 새싹이 파릇하니 돋아나고 겨우내 보이지 않던 종류의 새들이 아침마다 울어댔다. 살얼음이 끼던 개천도 다시 흐르기 시작하고 개천 주위의 바위틈에서 하얗게 얼어있던 눈들도 녹아서 사라졌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개천 주위의 작은 모래 알갱이들 사이로 이슬 맺힌 푸른 풀잎들 위로 단유가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아직은 서늘한 아침 바람이 남아있던 잠기운을 말끔히 씻어내 주었다. 개천의 차가운 물로 세수한 단유는 가볍게 몸을 푼 뒤, 마을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동’ 단유가 있던 자리에 얕은 발자국만 남았다. 마을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공방에 먼저 들른 단유는 이른 아침부터 공방에 출근한 에렘을 볼 수 있었다. “어? 벌써 왔어?” “네. 잘 주무셨어요?” “나야 잘 잤지.” 에렘은 새벽부터 공방으로 나와서 석탄 더미를 체크하고 있었다. 굳이 그렇게 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해도, 만일을 모른다며 매일같이 아침에 나와서 석탄 보관 상태를 확인하는 에렘이었다. 사실 단유도 주의를 주긴 했지만, 광물 상태의 석탄을 보관하는 방법이나 보관 시의 유의사항을 잘 알진 못했다. 그저 이론으로만 석탄의 산화를 예측해서 말했을 뿐이니까. 그러니 에렘처럼 경각심을 갖는 자세가 나쁘진 않으리라. “아, 이왕 온 김에 확인해봐.” 에렘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어제까지 만들었던 부품들이었다. 조립도까지 만들어주긴 했지만, 우선은 정밀 부품 제작이 우선이라 생각해서 부품만 만들어두고 단유에게 확인을 받는 상황이다. “연마석을 더 구해야겠어.” “다 썼어요?” “질이 더 좋은 연마석을 구해야지, 안 그러면 부품 하나 만들 때마다 연마석 하나가 통째로 사라져.” 정밀한 가공을 위해 연마석은 필수였다. 아직까지는 순철을 생산할 기술도 없고, 강철(鋼鐵)이라고 해도 현대의 기준에 들어맞는 수준엔 이르지 못해서 불순물이 많다 보니 주형(鑄型)에서 뽑아낸 주물도 정밀함에 많이 못 미친다. 이를 가공으로 해결하기 위해 가론 공방의 사람들은 연마석을 이용해 철을 다듬었다. 특히 에렘은 이런 부분에서 꽤 철저해서 단유가 제시한 규격을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하려고 신경을 기울였다. 그러다 보니 연마석이 남아나질 않는다. “연구할 게 너무 많아. 석탄도 공부해야 하고, 연마석 제작 방법도 공부해야 하고, 철도 그렇고. 도대체 네가 살던 곳은 어떻게 이런 걸 모두 알고 만든다니?” 단유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려 보일 뿐이었다. “시간이 답이죠.” “시간?” “시간을 들인 만큼 결과가 나오니까요. 실패든 성공이든 그런 경험들이 누적되고 후대 사람들에게 그 지식을 고스란히 전달하면 자연스럽게 기술도 발전하죠.” “시간이라.” 단유는 공방의 창으로 마을을 바라보았다. 마을 중앙에 짓기 시작한 높은 탑 모양의 건축물. 향후에 시계탑으로 불릴 건물의 기초작업이 진행 중에 있었다. 마침 석탄을 보관하던 상자의 뚜껑을 덮고 단유 옆으로 다가온 에렘이 같은 방향을 보며 물었다. “시계탑, 아니 시계가 있으면 생활이 편리해질까?” 단유가 이제껏 만들었던 모든 기술들이 삶의 편리를 위한 제품들이었다. 그래서 에렘도 기술의 발전이 가져다주는 의미를 그렇게 이해했고 기술 발전에 천착(穿鑿)했다. “시계가 있으면, 삶이 바뀔 거예요. 불이 삶을 바꿨듯.” 단유는 그렇게만 이야기하고 에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잘 만들어졌어요, 이것들.” “그래? 다행이구나.” 단유는 에렘의 얼굴이 매번 볼 때마다 야위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 만도 하겠지. 매일 저녁 목공까지 배우고 집에 가서 다시 일지를 정리한다고 들었다. 아침이면 누구보다 먼저 공방으로 출근해서 일을 시작하니 피곤할 것이다. “재미있으세요?” “재밌냐고? 당연하지. 내 평생에 이토록 즐거운 날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예전처럼 아무 생각 없이 철이나 두드리고 숫돌로 칼날이나 갈고 있었다면 전혀 느끼지 못할 일들 아니냐. 지금도 머릿속에는 지금 이 부품들을 어떻게 응용할 수 있을까로 가득 차 있지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마치 단유가 처음 학문을 접하고 수학의 묘미에 빠져 밤낮없이 숫자만 생각하던 그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생각은 생각이고 우선 밥이라도 먹어야겠어. 밥 안 먹었지? 같이 가서 밥이나 먹자.” “네.” 에렘은 단유를 데리고 마을로 향했다. 가기 전, 마을 사람들에게 주문받아 만든 몇 가지 물품들을 수레에 담아서 끌었다. 단유는 수레의 뒤를 밀어주며 마을로 향했다. 공방에서 마을 중심부까지 벽돌로 길을 만들어 둔 터라 수레를 끄는 일도 전혀 어렵지 않았다. “먼저 에드 아저씨네에 가 있을래? 난 아잘 아저씨네에 가서 이거 전해주고 올게. 아, 그리고 혹시 거기 우리 아버지 계시면 아침부터 술은 마시지 말라고 전해줘. 날이 풀린 김에 광산에 가자고 했었는데, 술 드시면 먼 길 가기 힘드니까.” “알겠어요.” 비록 공방을 키우고 시계탑에 들어갈 부품들을 제작하는 데 힘을 쏟는다 해도 대장간 본래의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마을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제품의 제작도 겸하고 있었다. 원래의 대장간은 벽돌 공방으로 바뀌어서 사용되고 있었기에, 만들어진 제품은 아잘이 위탁 판매 형식으로 물건을 받아 팔고 있었다. 에드의 가게로 향한 단유는 가론 외에도 몇몇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가론의 손에는 맥주가 들려 있었다. “아저씨.” “오, 루치드 왔구나. 뭐? 맥주? 괜찮아. 한 잔 정도는.” “오늘 광산 가보신다면서요?” “에렘에게 들었나 보구나. 날이 풀린 김에 한 번 가볼까 생각하기도 했고, 또 거기서 일하는 친구에게서 솔깃한 이야기를 듣기도 해서 말이야.” “솔깃한 이야기라니요?” “석탄도 아니고 돌도 아닌 광석이 나왔다는데 한 번 봐달라고 하더라고.” “석탄 나오던 탄광에서요?” “아니, 거긴 아니고 그 옆인데, 우연히 돌아다니다 발견했나 봐. 혹시 아냐? 거기서 철광석이라도 나올지?” “그랬으면 좋겠네요.” 단유는 웃으며 가론의 말을 받아주었다. 그때 앞치마를 걸친 에드가 단유 앞에 갓 구운 빵 하나와 감자 수프 한 접시를 내려놓았다. “고맙습니다.” 에드가 북슬북슬한 턱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있다가 갈 때 빵 한 바구니 줄 테니 그걸 노인 회관에 좀 가져다주겠느냐?” “그럴게요.” “고맙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아침은 공짜다.” 에드의 눈이 호선을 그리더니 금방 몸을 돌려 주방으로 사라졌다. “이봐, 에드! 나도 심부름 하나 해 줄 테니 점심 공짜로 한 끼 안 되나?” “자네가 우리 집 주방 화덕을 만들어주길 했나, 가게 의자를 고쳐주길 했나? 안 했으면 말을 마.” “에이, 저 사람. 농담도 못 해?” 단유는 주고받는 훈훈한 대화를 흘려들으며 수프를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다. 걸쭉하면서 고소한 감자 수프의 따뜻함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안녕하세요, 에드 아저씨 심부름 왔어요.” “아, 너로구나.” 어르신 한 분이 고개만 들어 단유를 확인하고는 다시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감는다. 방 한쪽에 놓여있던 소파에 앉아 종이철을 들추며 뭔가를 확인하던 촌장 에저가 단유를 보고 손짓을 했다. 단유는 신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 벽 한쪽의 선반 위에 가져온 바구니를 올려두고 에저에게로 향했다. 지난겨울 동안 워낙에 많은 일이 벌어지면서 고심한 탓인지, 그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이 한결 깊어진 것 같았다. “이틀 뒤, 마을을 나갈 때 따라가고 싶다고 했다면서?” 마을 바깥에도 눈이 많이 녹은 터라 다른 마을로 가는 길이 열렸을 것이다. 그때에 맞춰 큰 마을로 나가서 물건을 사고팔 계획이라는 아잘의 이야기를 듣고 단유가 부탁을 했었다. “네.” 에저는 한동안 서류를 들여다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종이들을 정리해서 소파 옆에 내려둔 에저가 단유를 돌아보았다. “떠날 생각인 것이냐?” 단유는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다. “지난 밤에 가론과 잠시 시계탑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 들었다. 가론은 니가 곧 떠날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구나.” “가론 아저씨가요?” 어쩌면 최근 가장 오래 붙어 지냈던 이가 가론이기에 단유의 속내를 바로 읽어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애초부터 단유가 이 마을에서 오래 머무르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렇기에 놀이방도 자신의 것이라 여기지 않았고, 누군가가 고마움의 사례로 무언갈 주겠다고 해도 받지 않았다. 당장에 허기를 채울 먹거리 정도라면 받았지만, 그 외에는 옷이나 신발, 혹은 기타 가재도구들은 일절 받질 않았다. 물론 그렇게 받지 않아도 놀이방에 쌓이고는 있었다. 하지만 다 남겨두고 갈 것들뿐이었다. “도무지 모르겠구나. 이만큼 살다 보니 어지간한 사람 속은 눈만 봐도 알겠다 여기며 살았건만, 너란 아이는 도저히 모르겠어.” 얕은 숨을 뱉으며 에저가 고개를 젓는다. 단유는 단지 지식이 없을 뿐, 연륜으로 쌓인 지혜를 한가득 담은 깊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에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모름지기 사람이란, 비록 이런 작은 마을에 있어도 조그만 욕심 때문에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대부분은 이타적이다. 이웃 사람들이 모두 친구이고 삼촌이고 이모니까. 옆 사람이 굶으면 빵조각이라도 떼어낼 줄 사람들이다. 앞집의 사람이 아프면 밤새 간호해줄 정도로 정이 깊다. 그럼에도 사람은 이기적이지. 자신에게 아무런 이유가 없다면 절대 자신에게 유리한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에저는 방바닥에 드러누워 얕게 코를 고는 노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마을의 질서란 그런 것이다. 서로의 이기심을 이해하며 적당히 배려해주는 것. 그러면서도 이웃을 위해, 마을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이 마을 사람들이다.” 에저는 자신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단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넌 오롯이 이타적이기만 하구나.” “그렇지 않아요.” “내가 비록 니가 만들려 했던 것들에 대해, 니가 가져오려 했던 변화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긴 했지만, 자전거나 벽돌이나 하는 것들이 얼마나 상품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모르지 않아. 아마 이번에 두 수레에 벽돌을 가득 담아내놓으면 두 수레 가득히 곡식과 옷감을 채우고도 주머니를 두둑이 채울 돈을 벌어올 게 분명하다. 니가 만든 자전거나 마차라는 것도 아마도 높으신 분들이 서로 가지고 싶어 할 게 분명하다. 그런 걸 만들고도 아무런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마을 공방 사람들에게 전한 지식의 가치는 더 크겠지. 그런데도 넌 아무것도 바라지도 않고 떠난다고 하지 않느냐. 그런 건 마을 사람, 아니 내 손자라고 해도 하지 않을 짓이야.” 그럴지도. 그런데 그게 그렇게 이상한가?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는 것이? “그래서 너에 대해서 내가 보지 못한 다른 무엇인가가 있는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에저가 옆에 뒀던 서류들을 집어 흔들어 보였다. “가만 보니 네게 도움을 받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야. 네게 받은 호의에 감사하는 이들의 이야기로 가득해.” 마을을 오가다가 틈틈이 보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도움을 준 바가 있었다. “넌 이 마을에서 뭘 하려고 했던 것이며, 뭘 했던 것이냐?” 과학 실험? 마을 발전? 새마을 운동? 어떤 대답도 단유의 속내와는 거리가 멀다.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았어요.” “아이들?” 그 아이들을 위해 ‘놀이방’까지 만들었다는 것은 익히 아는 바가 있었다. “그 아이들은 편을 갈라서 전쟁놀이를 하고 있었죠.” 요즘은 그 아이들이 전쟁놀이 대신 단유가 가르쳐 준 놀이를 하느라고 바쁘다는 것을 에저도 알고 있다. “그 아이들에게 미래를 주고 싶었어요.” “미래?” ======================================= [453] 스스로 긋는 한계(3) 무슨 이런 뚱딴지같은 소리가 다 있나? 에저가 어리둥절하다는 듯 눈동자를 굴리며 단유의 얼굴을 살폈지만, 덤덤하기만 한 표정이었다. “미래는 상상이에요. 앞으로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궁금하고 기대하는 것. 그리고 그 꿈같은 미래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 뜻을 펼쳐 보려 하는 게 아이들, 이라고 생각했어요.” 갑자기 이세계로 오면서 경황이 없었다고 해도 줄곧 생각하던 문제가 갑자기 뇌리에서 잊힐 리 없다. 기성세대와 신세대 간의 갈등은 단유가 줄곧 고민하던 문제였고, 그 와중에 각 세대의 역할과 사회의 의미에 대해 교장과 치열하게 토론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 이 마을의 부모세대는 그 뜻이 한 번 꺾였었다죠? 각자의 이유가 다르겠지만, 아마도 세상의 변화, 미래를 꿈꾸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돼요. 그래서 다시 돌아와 과거를 답습하고, 과거의 질서를 비판 없이 받아들일 뿐이겠죠.” 에저가 눈썹을 찡그리며 단유의 말을 받았다. “너의 말을 들으면 마치 이 마을의 질서, 규칙들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지는구나?” 단유의 말이 도전적으로 느껴졌던지 에저가 언성을 키웠다. 누워있던 어르신들 중 일부가 귀를 쫑긋하며 대화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런 뜻은 아니에요, 촌장님. 질서의 우열을 가리고자 드린 말씀도 아니고, 선악을 가르려는 이야기도 아니에요. 전쟁놀이하듯 우리 편 나쁜 편을 가르는 게 아니라 동그라미, 세모, 네모가 서로 돌아가듯, 여러 개의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듯 그렇게 어우러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드리는 겁니다.” “어우러져?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우리 마을 사람들은 이미 서로에게 충분히 이타적이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들이라고.” 단유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본인 입으로 사람들과의 갈등은 대화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했지만, 종종 이렇게 대화로 해결하기 어려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할 따름이다. 그리고 그런 난감함 때문에 단유는 말 대신 행동으로 보였다. 기술을 전달하고, 변화를 보여주었으며, 미래를 꿈꾸게 했다. “촌장님.” 나직하니 촌장을 부른 단유는 촌장의 시선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이곳으로 오기 전, 이와 비슷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요. 그때도 저에게 촌장님처럼 말씀하시던 분이 계셨어요.” 문득 촌장은 눈앞의 아이가 분쟁을 일으키는 데 일가견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누구였든 그 사람도 자신이 느끼는 것처럼 어린아이의 좁은 식견을 지적하고 있었을까? “저는 그분과의 대화에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그리고 정답을 드리지도 못한 채로 대화를 마쳐야만 했었어요. 그 기억이 제 행동의 기원(起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마을에 기술을 전달한 것, 그리고 그 기술에 의해 변화되는 마을을 지켜보는 것이 제가 구하는 답이었던 것이죠.” 단유는 촌장의 입이 열리기 전에 계속 말을 이었다. “이전에 놀이방에서 촌장님께 드렸던 말씀 기억하시죠? ‘아이들은 꿈을 꾼다’고요. 하지만 제가 본 이 마을의 아이들은 꿈을 꾸지 않았어요. 어제와 같은 오늘을 보내며, 오늘과 같은 내일을 기다리지 않아요. 이게 굉장히 슬프다는 것을 어른들이 알아주면 좋겠지만, 어른들은 그런 현실에 익숙하죠.” 익숙한 현실. 오늘과 같은 내일. 변화가 없는 세상. 단유가 정말 슬프다는 얼굴로 그 말을 뱉을 때, 에저는 물론 주위의 어른들도 모두 얼굴을 굳혔다. 단유의 말이 갖는 의미를 가장 뼈저리게 느낄 사람이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래서 시계탑을 만들려고 했어요.” 시계. “시계는 사람이 시간을 다룰 수 있게 해주니까요.” 사람이 시간을 다룬다? “한 사람이 독점하는 시간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 모두가 공유하고 이용할 수 있게 끔요.” 언뜻 들으면 무슨 말인가 의미를 헤아리게 한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단유의 말은 너무나 혁명적이다. 시간은 인간이 조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늙어버린 노인들에게 시간이란 초월적인 그 무언가였다. 그런데 그 시간을 사람들이 이용한다? “아이들이 그 시간을 이용할 때, 변화는 더 크게 일어날 겁니다.” 기계로 인한 삶의 편리함은 그저 편리함에 그치지만, 시간을 소유함으로 인해 삶에 ‘효율’이 생긴다. ‘효율’은 비교적인 수치이며, 상대적이다. 비교와 상대로 인해 ‘개선’이 생기고, ‘변형’이 생기며, ‘변화’와 ‘개혁’, 그리고 ‘혁명’이 나타난다. 산업 혁명이 그러했듯. 프랑스 혁명이 그러했듯. 역사에 있었던 ‘혁명’이 그러했듯. “그렇다면 너는 왜 이 시점에 떠나는 것이냐? 충분히 변화가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냐?” 에저가 물었다. 단유의 말대로라면, 적어도 시계탑이 건설되고 시계가 활용되는 것을 지켜본 뒤에 떠나야 하지 않은가? 마치 도둑이 현장을 들키기 전에 떠나려는 모양새로, 서둘러 떠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단유는 씁쓸한 표정으로 입술을 말았다가 떼었다. “두려움이 생겨서요.” “두렵다?” “욕심도 생기고요.” 촌장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으로 단유를 바라보지만, 대답이 이어지질 않았다. 마을의 변화가 계속되고, 자신의 생각대로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픈 마음이야 굴뚝같았다. 마을에서 생기는 변화에 아이들이 호기심을 드러내고, 그 호기심이 아이들을 변화시킬 것이다. 때로는 그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신이 메워줄 수도 있을 것이다. 지식으로, 사상으로, 혹은 행동으로. 그리하여 아이들이 미래를 꿈꾸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자라며 변화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욕심이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그 변화를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머무른다는 것이 욕심이다. 한순간에 변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 시곗바늘이 돌아가야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두려움. 이곳에 영원히 머무르게 될 것만 같은 두려움. 시곗바늘이 돌아갈수록 두려움이 커질 것이다. 시간은 때로는 축복이지만, 때로는 저주이기도 하다. “돌아가야죠. 제가…있던 곳으로.” 고개를 숙인 채로 나직하게 자기 고백을 읊조리는 단유에게 물음이 던져졌다. “돌아가기로 한 것이냐?” “네.”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로?” “아무것도 얻지 않은 건 아니에요.” 새로운 마법을 얻기도 했고, 책으로만 보던 것을 직접 만져보기도 하고 만들어보기도 했다. 경험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라고 했던가? 이런 경험은 결코 손쉽게 얻을 수 없다. 특히 미래를 꿈꾼다는 것의 의미를 깨달았다. 비록 꿈 없이 살아온 단유였지만, 그래서 마치 놀이터의 아이들처럼 그저 반복된 일상 속에서 치열한 전쟁을 벌이듯 ‘생존 게임’을 하고 있었지만, 아이들에게 투영한 모습에서 단유는 자신의 꿈을 엿보았다. “너무 귀한 것을 얻었는걸요.” “그래도 시계탑이 완성되는 것은 보고 가지 그러냐?” 시계탑이 완성되는 순간, 그리고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순간 단유는 떠날 수 있을까?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이 마을에서 시계탑이 변화의 상징, 역사의 시작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는 것도 어쩌면 저의 욕심이겠죠. 욕심은 채워지는 순간, 또 다른 욕심으로 변해서 절 유혹할 거예요. 그러면, 전 영원히 떠날 수 없을 거예요.” “그래서 떠나겠다고?” “네.” 바닥을 내려다보던 단유의 위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었더니 망토를 뒤집어쓴 사람이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누구?” “맞네. 널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거라더니, 정말 재밌었어.” “무슨 말이죠? 아니, 그보다 누구시죠? 촌장님은요?” 단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 훈훈한 기운이 올라오던 노인 회관에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어떤 집 안에 서 있다. “여긴 어디죠?” “흠. 별로 좋은 질문은 아니군.” “여긴 어떻게 오게 된 거죠?” 후드를 뒤집어써서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끊임없이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는 기분 나쁜 사내였다. “넌 알고 싶은 게 많구나?” “무슨 말이에요?” “이것 봐봐. 넌 모든 게 질문이야. 사실 좋은 습관이지. 모르는 것을 물어보는 건 말이야. 하지만 질문도 쓸모있는 질문이 있고, 쓸모없는 질문이 있어.” “어떤 게 쓸모있는 질문이란 거지요?” “늘 그렇게 분석하려고만 드는군. 시계를 만들려 했던 것도 그런 이유겠지.” “네?” “네가 말한 모든 것에 답이 있잖아?” 단유는 동문서답에 질릴 것 같았다. “당신이 하는 말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도대체 여긴 어디죠? 난 어떻게 여기 온 거죠?” “넌 두려움이 많은 친구야. 모든 걸 두려워하지. 그중 하나가 바로 시간이지.” “제가 시간을 두려워한다고요?” “말은 잘하더구나. ‘시간을 이용하면 변화가 생길 것’이다!” 망토 사내의 거친 웃음소리가 듣기 불편하다. “하지만 정작 너 스스로는 시간을 통제하지 못해 불편하고 어려워하지 않았더냐.” “통제?” 단유는 자신이 시간을 통제하려 했던가 떠올려보았지만, 딱히 그런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졌지. 마치 그냥 흐르는 시간을 참기 힘들어하는 것처럼. 뜻대로 흘러가지 않으니 미친 듯이 시간을 사용해. 한 시간? 일 분? 일 초?” 그게 바로 효율이 아닌가? 누구에게나 공평히 흐르는 시간이라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르다. “누가 뭐래? 다만 너의 강박적인 사고에 미소를 짓게 될 뿐.” 사내가 팔을 활짝 펼치자 망토가 펼쳐지며 거대한 암막이 드리워진다. “두려움 많은 아이야. 그래서 넌 너의 주위를 벽으로 두르고 마음에도 벽을 둘렀느냐?” 벽이라니? “그러니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냐? 너의 과거도, 너의 미래도.” “…무슨 뜻이죠?” “모든 건 명명백백 드러나 있다. 다만 니가 보지 못할 뿐.” 사내에게서 공간을 울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미신(迷信)을 믿으니, 자신(自信)을 잃은 아이야.” 미신? “눈을 가리고 귀를 막으니 남은 건 꿈이라. 하지만 그 꿈(迷夢)이 헛되니 낭비한 세월을 어찌 붙잡을까?” “제가 시간을 낭비했다는 이야긴가요?” 그렇지 않다. 자랑하진 않았지만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고,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던가? 누구는 영재라고 했고, 누구는 천재라고 불렀지만, 자신이 그런 영재도, 천재도 아니란 사실은 누구보다 잘 안다. 그저 노력했기에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 어찌 자만(自慢)에 빠지지 않고 버틸까.” 자만이라니. 겸손하려고 노력하진 않았어도, 자만은 경계하며 살았다고 자부한다. “번번이 돌아갈 길 없는 곳에 이르러 헤매는 아이야. 이것들이 다 너에게 무슨 의미가 있더냐? 무수한 질문과 질문의 답을 찾다가 결국 넌 ‘두려움’이라는 이름의 상처만 새기고 돌아가길 반복하는구나.” “당신의 말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어요!” “이해하길 힘들어하는 것이냐, 이해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냐.” 망토를 천천히 내리니 그 뒤에 선 빛이 단유의 시야를 가린다. 그 빛이 너무 눈부셔 손을 들어가리니 이명(耳鳴)과도 같은 울림이 들린다. “지금 네가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내가 가장 바라는 것?’ 단유는 자신이 가장 바라는 것은 이곳을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떠나면 갈 곳이라도 있느냐?” 당연히 있다. 자신이 왔던 곳, 자신의 집.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 곁으로. “널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느냐?” 당연히 있다. 명수, 가족과도 같은, 형제보다 가까운, 세상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친구. 하은, 누나보다 살갑고, 엄마보다 다정한, 세상 누구보다 자신에게 많은 지혜를 나눠준 선생님. 그리고. “아아.” 잊고 있었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지? 왜 그 이름을 잊고 지냈던 것일까? 좋아한다고 말해놓고선, 마음으로 가장 경애한다고 되뇌어 놓고선 어떻게 그 사람을 석 달간 잊고 지냈을까? “겨우? 네가 여기 머무른 석 달간 앞서 말한 이들을 제대로 떠올린 적이나 있더냐?” 없었다고? 생각을 안 했다고? 정말? “알겠느냐? 넌 말로만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했지만, 실은 네 마음의 진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너의 진실이 진실이 아니고, 너의 자신이 자신이 아니다. 네가 말하는 감정들이 과연 너의 감정들이냐? 아니면 타인의 감정들이냐? 네가 진실로 느끼는 것들이 무엇이냐? 결국 넌 네 마음의 위선도 제대로 볼 용기가 없었던 아이였느니.” 단유는 쪼그리고 앉아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혼란스럽다. “네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사람이더라.” ======================================= [454] 스스로 긋는 한계(4) “내가 사람을 가장 두려워한다고? 그렇지 않아.” 단유는 사내의 말을 부정했다. “난 내게 악의를 드러냈던 이들에게도, 나를 해치려 했던 이들에게도 도망가지 않았어.” “그래서, 용감하다는 소리라도 듣고 싶은 건가?” 비웃는 듯한 사내의 말에 단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넌 네게 악의를 보내는 이들이 더 상대하기 편하지? 그들의 악의에 맞서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네게 호의적인 감정을 보내는 이들에게는 어떻게 대했더라?” 호의적인 감정을 보낸 이들. 명수, 하은, 지태, 채윤, 그리고 나윤. 그들에게 자신은 어떻게 대했냐고? “넌 그들의 호의를 늘 부담스러워 하지 않았어? 그래서 늘 거리를 두고 있었지. 애써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막지 않는다고 핑계를 대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도망갈 곳을 찾고 있었고.” ‘내가 도망을 가려 했다고?’ “사람은 누구나 상대에게 기대하기 마련이지. 부모에게든, 자식에게든, 친구에게든, 혹은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기대하지.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상대가 이렇게 반응해주길 바란다는 기대를 가지기 마련이지. 넌 어땠어? 넌 그 사람들에게 어떤 기대를 했었지?” “그건 억지야. 아무런 조건 없이 주는 사랑이라는 것도 있어.”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우습지. ‘사랑’이라고? ‘사랑’이 뭔데?” 단유는 이를 악물면서 주변 사람들에 관한 기억을 떠올렸다. 보육원에서 ‘같이 축구하자’며 자신을 방에서 끌어내던 명수의 웃음. 단유의 농담에 같이 어울리며 익살맞게 미소 짓던 하은. 등굣길에서도 끊임없이 수다를 떨며 별것 아닌 일에도 웃음을 터뜨리던 지태. 조용히 곁에 앉아 운동장을 바라보며 아이스크림을 먹던 채윤. 그리고, 코앞에서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좋아해’라고 고백하던 나윤. 붉게 상기된 얼굴과 그보다 더 빨간 입술. 하지만 기억을 아무리 되돌려도 그 사람들에게 단유 본인이 무엇을 했던 가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네가 말하는 사랑이 설마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것을 말하는 건 아니지? 만약 그렇다면 ‘이기적’이라는 수식어도 곁들여야겠네.” 다시금 비웃듯 놀려대는 사내의 말에 단유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아니야!” “아니면?” “…….” “넌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걸 두려워해. 그리고 그 사랑을 부담스러워해. 그래서 늘 피하려고 하지. 제토를 봐봐. 제토, 그 불쌍한 아이는 모처럼 생긴 친구가 반가워서 늘 네 결을 맴돌았지만, 이런. 넌 그 아이의 호의가 부담스러워서 대장간으로, 목공방으로 도망 다녔지. 그러다 공방 사람들이 너에게 호의를 가지고 다가서려 하니, 이런. 넌 이번엔 아예 마을에서 벗어나겠다고 하지 않느냐?” “틀렸어. 그런 마음으로, 도망가려는 게 아니었어. 난 그저…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 그래서 떠나려는 거야. 계속 머무르면 욕심이 생기니까.” “그 말이야. 욕심.” 사내의 웃음소리가 섞여 나온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왜 지금까지는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 많은 날들이 지나는 와중에도 말이야? …넌 그저 적당히 사람들에게서 벗어날 핑계만 찾아다녔던 거야. 너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많아지니 부담스러워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고, 이제 다시 기대가 높아지니 떠나겠다고 선언하며 도망치는 거야. 너에게 기대를 갖는 사람이 두렵고, 그 기대를 채워주지 못할 것 같아 두렵지. 상대가 널 사랑하는 만큼, 넌 상대를 사랑해줄 자신이 없으니 두렵지. 넌, 그래서 사람이 두려운 거야.” “틀렸어!” “넌 오히려 너에게 악의를 갖는 이가 상대하기 편해. 그들을 없애버릴 명분이 있으니까, 마음껏 손을 쓰는 거지.” “그렇지 않아!” “범죄자.” “아냐!” “기만자.” “아니라고!” “위선자.” “…….” 단유의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 주제에 감히 절대자의 자리를 넘봐? 진리를 연구하겠다고? 웃기고 있네. 자기 자신도 모르는 주제에 무슨 진리를 깨닫겠다는 거지?” “…너 누구야.” “나? 내가 과연 누구일까?” 단유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망토를 펄럭거리는 사내의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악의? 그런 것도 없다. 그는 그저 단유를 놀리며 즐길 뿐이었다. “정체가 뭐야?” “넌 정체가 뭔데?” 사내의 되물음에 단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난 정말 도망치기만 했던 걸까? 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 단유의 고민이 깊어질수록 사내의 웃음소리가 커져만 갔다. **** 단유는 꿈을 꿨다. 그 꿈에서 단유는 아주 어린 아이였다.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을 새도 없이 숲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쫓기는 걸까? 아니. 단유는 지금 돌아가고 있었다. 집으로. 어머니와 동생이 기다리는 집으로. 어머니는 돌아온 단유를 향해 미소를 지을 것이며, 동생은 혼자 내버려 두고 갔다고 칭얼거릴 것이다. 빨리 돌아가 어머니에게 칭찬을 받고 싶었고, 칭얼거리는 동생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며 달래야 할 것이다. 눈앞에 익숙한 언덕이 보인다. 숲이 끝나는 자리에서 솟아오른 언덕을 넘으면 마을이 나온다. 동네 사람들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분주한 모습이 보인다. 뛰어가는 단유를 향해 손을 흔들고, 넘어진다며 걱정해준다. 마을의 꼬불꼬불한 길을 가로질러 익숙한 낡은 집이 보이기 시작한다. 굴뚝에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고, 들창이 열린 틈으로 빵 굽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외친다. ‘엄마’. 두건을 둘러쓴 어머니가 화덕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장작을 넣다가 돌아보며 웃는다. ‘왔니?’ ‘다녀왔어요, 엄마!’ 식탁 근처에서 쪼그리고 앉아 나무 장난감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고 있던 동생이 쪼르르 다가와 묻는다. ‘왜 이제 와?’ ‘빨리 오려고 했는데, 숲 깊숙이 들어가는 바람에 그래. 많이 기다렸어?’ 어머니가 무릎을 짚고 몸을 일으키며 단유에게 다가왔다. 물에 적신 수건을 건네며 묻는다. ‘깊이 들어가지 마라니까.’ ‘그래도 거기가 쓸만한 장작들이 많이 나오는걸요. 숲 가장자리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다 가져가서 가져올 게 별로 없거든요.’ ‘고생이 많았다, 우리 아들.’ ‘물 떠올까요?’ ‘괜찮아, 쉬고 있어. 엄마가 떠 올게.’ ‘아니에요. 괜찮아요. 제가 떠 올게요.’ 단유는 메고 있던 가방을 벽 한쪽에 세워두고는 그 옆에 놓여 있던 물통을 들었다. ‘금방 갔다 올게요.’ ‘서두르지 마. 다쳐.’ ‘네!’ 단유는 웃음을 지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빛이 쏟아진다. 저녁노을이 질 무렵의 태양 빛이 이렇게 환할 리가 없는데. “너랑 계속 이야기 나누고 싶어.” 익숙한 목소리가 빛을 뚫고 들렸다. ‘예, 저도 이야기 나누고 싶어요.’ “전화도 좋지만, 자주 만나고 싶어.” ‘저도 자주 만나고 싶어요. 정말.’ 피하지 않을 거예요.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제대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귀 기울여 보고 싶어요. 그래야 할 거 같아요. “너, 나랑 사귀자.” 덜컥. 단유의 심장이 아래로 내려앉는 기분이다. ‘안 돼. 피하지 마.’ 자신에게 강하게 주문을 걸어본다. 상대의 진심으로부터 눈 돌리지 마. 할 수 있어, 넌. “떠날 거야? 이대로?” 대답이 없는 단유에게 채근하는 듯한 목소리. 단유는 주먹을 쥐고 소리를 내려 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두렵냐고? 두렵다. 떠날까 봐. 홀로 내버려 두고 먼저 떠날까 봐. 사라질까 봐 두렵다. 그러니 그들이 떠나기 전에 먼저 떠나는 것이다. 서로에게 좋은 기억만을 남기며 떠나는 것이다. 그것이 좋은 방법이다. 서로 상처 입지 않아도 된다. “거봐. 넌 욕심쟁이라니까. 상대에게 사랑받고 싶고, 기대받고 싶고. 그러면서 자기는 사랑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아. 이 무슨 불공평한 관계란 말이냐?” 단유는 망토의 사내와 마주 보았다. 후드 속에 가려진 그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다. “너였구나.” 망토의 사내가 미소를 짓는다. “루치드.” 사내, 루치드가 미소를 짓는다. “난 또. 내 이름 잊은 줄 알았어.” “잊지 않았어.” “새벽 동살이 비추면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겠지. 지난 밤의 악몽은 잊어버리고 또다시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겠지. 하지만 악몽은 언제나 너의 꿈을 지배할 거야.” “루치드(Lucid).” “두드리고 또 두드려서 쇠가 단단해지도록 만들 듯, 넌 너 자신을 매일같이 두드리고 몰아붙이겠지. 마침내 쇠가 모양을 잡듯 넌 흔들리지 않는 자신을 만나겠지. 하지만 거기에 미래는 없을 거야.” “김단유(金鍛侑).” 이름을 읊는 순간, 그리고 그 이름의 의미를 이해하는 순간 단유는 사내와 하나가 되었다. **** 병실의 문이 열리며 하은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을 비비며 들어온 하은은 곧 단유 옆에 앉은 사람을 발견했다. 쓸쓸한 표정으로 단유의 손을 쥐고 있는 소녀, 나윤이었다. “바쁘다고 하지 않았니?” “아, 언니.” 나윤이 얼른 손을 떼고 일어나 하은에게 고개를 숙였다. “단유는 어때?” “…똑같아요.” 1인실에 들어온 지 벌써 12일이 넘었다. 열흘 넘게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단유를 보며, 의사들도 고개를 저었다. 가망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들도 어떤 수를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단유가 어떠냐 묻는 건, 그냥 인사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매일매일 찾아와서 단유의 손을 붙잡아주는 나윤과 하은에게는 다른 의미다. 단유는 ‘기적’과도 같은 아이였다. 늘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고, 늘 기대를 갖게 만들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리라. 나윤은 그렇게 믿으며 잡은 손을 꼭 쥐었다. ‘이렇게 따뜻한데.’ 누가 보면, 몇십 년이라도 사귄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윤의 마음에서 단유는 평생을 지켜보며 곁에 머물고픈 사람이었다. 어쩌면 어린 치기에서 오는 어설픈 연애 감정의 발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장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오늘 회사에서 무슨 미팅 있다고 하지 않았었니?” 하은이 소독한 손으로 단유의 머리를 짚으며 다시 물었다. “오전에 빨리 끝냈어요.” “…혹시 단유 때문에 이야기 나온 건 아니고?” 나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 단유가 쓰러지고 놀란 나윤이 3일간을 단유 곁에 머무르면서 회사에서도 단유와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사실 그렇게 비밀로 하고 싶던 관계도 아니었기에 나윤은 회사에 정직하게 밝혔다. 아니, 밝힐 수밖에 없는 사정이었다. 회사만 나오지 않은 게 아니라, 학교도 3일을 빠졌으니까. 비록 나윤이 지금은 거의 준 연습생 수준으로 취급받고는 있지만, 엄연히 데뷔했었던 가수이고 대중들에게도 꽤 얼굴이 팔린 ‘연예인’이다. 그런 나윤이 회사 모르게 연애를 했었다는 사실도 펄쩍 뛸 일이지만, 상대가 혼수상태에 빠져 병실에 있다는 스토리도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게다가 아직 미성년자 아닌가. 회사의 관리 책임이 도마 위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 여겨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그나마 하은이 나윤을 말려 병원에서 밤을 새우지 못하게 한 덕분에 학교에는 등교했지만, 그 이후엔 회사 대신 병원으로 향하는 나윤이었다. 긴급히 회사 실무진들이 사태를 파악하고 대책을 마련한 뒤, 나윤을 불렀다. “가수 안 할 거야?” “…….” “가수 계속 할 뜻이 있으면, 당장 병원 가는 짓은 그만둬. 니가 의사도 아니고 거길 매일 가서 어쩌겠다는 거야? 소문이라도 나면 안 좋아.”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혼자 둘 수 없어요.” “걔가 왜 혼자야? 우리가 걔를 몰라? 너 아니라도 간호해 줄 사람 있고, 걱정해 줄 사람 있어. 네가 왜 그 난리를 쳐? 병원에서 네 얼굴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생기면 그 뒤에 생길 소문들은 걱정 안 되니?” “그런 건 걱정 안 해요. 저랑 단유가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런 걱정을 해요?” “네가 아무리 잘못을 안 했다고 해도, 사람들은 이상하게 쳐다볼 거야.” “왜요?” “그게 대중이야.” ======================================= [455] 스스로 긋는 한계(5) “개인으로서는 널 걱정해 줄 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중은 널 걱정하기보다 의심할 거야. 의심하고 비난할 거다. 너도 모르는 악의적인 소문이 떠돌 거고, 너와 우린 그것들을 해명하느라고 진을 빼야 할 거다. 너의 컴백은 한없이 미뤄질 거고, 설령 다시 무대에 오르더라도 그 시선들과 싸워야 해. 그건 너도, 우리도 원하지 않는 바야.” 파란색 정장을 갖춰 입은 여자 팀장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동의한다는 듯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나윤을 지켜본다. 나윤은 반항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진 않았다. 그게 사실일지도 모르니까. “이제 겨우 네 컴백 시기를 조율하고 있는데, 이런 일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정말이요?” 나윤이 반쯤 의심스럽다는 시선으로, 하지만 반은 사실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되물었다. “정말이야. 너랑 같이 팀을 짤 멤버도 구했거든.” 솔로 컴백은 바라지도 않았으니, 나윤에겐 불감청이나 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다. 하지만 때가 좋지 않다. 단유가 저래서야 아무리 집중을 하려 해도 집중하기 힘들뿐더러, 단유 곁에 있지 않고서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나윤아, 가수가 하고 싶어?” “…네.” “그럼, 마음 단단히 먹어. 무르게 마음을 먹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우리도 그런 사람을 믿고 지원해주긴 힘들어.” 나윤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나윤은 즉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회사에서도 정리할 시간은 주겠다며 회의를 마쳤다. 그러나 분위기를 보아, 아마 오늘내일 안으로 정리하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듯이 보였다. 나윤은 무거운 걸음으로 단유를 보러 왔다. 병실에서 단유의 얼굴을 보니 절로 눈물이 흘렀다. 자신을 바라보던 따뜻한 시선과 외롭던 자신을 위로해주던 그의 말들이 떠올라 참을 수 없었다. 만약 이대로 단유와 헤어진다면, 자신은 다시 외로움의 늪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일어나 제발.” 단유의 손을 잡고 빌었다. 눈을 떠, 단유야. 날 보며 말해줘.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줘. 곁에 있어 주겠다고 말해줘, 단유야.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하은이 들어왔다. 단유가 쓰러진 첫날, 학원에 급히 조퇴신청을 하고 나온 하은은 둘째 날부터는 다시 학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것은 굉장히 힘든 결정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실질적으로 단유, 명수네의 가정을 이끄는 것은 하은이었다. 물론 주영에게 부탁하면 연성 재단에서 돈을 내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재훈이 선을 끊은 마당에 그런 부탁은 뒤로 미루고 싶었다. 지금은 자신이 이 아이들을 돌보는 책임자이며 돈을 벌어야 할 사람도 자신이다. 명수의 말처럼 언젠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 전까지는 병원비와 생계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명수 너도 일단 학교는 나가.” “싫어요!” 눈이 퉁퉁 부은 명수를 억지로 달래서 출석을 시키는 것도 하은의 몫이었다. 나윤이 회사 대신 병원으로 와서 단유의 곁을 지켜줘 한편으로는 안심을, 다른 한편으로는 부담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나윤이 회사에서 강한 압박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하은은 나윤에게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야 했다. “너도 네 생활이 있는데, 그걸 포기하는 건 옳지 않아.” “…단유가 일어날 때까지만 곁에 있을게요.” “언제 일어날지 몰라.” “아니에요. 금방 일어날 거예요.” 순수하다고 해야 할까, 어려서 그렇다고 해야 할까. 나윤의 고집을 꺾기엔 하은에게 명분이 부족하다. ‘선생님’. 하은은 단유에게, 그리고 명수에게 그저 ‘선생님’일 뿐이니까. “명수는?” 단유의 이마에서 손을 떼며 나윤에게 물었다. 나윤은 여전히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친구들이랑 점심 먹고 온다고 해서 잠깐 나갔어요.” 토요일,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라서 명수도 이른 아침부터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 점심 시간이 지날 무렵, 나윤이 병실에 들어서니, 명수는 마침 비슷한 시간 병실을 찾은 지태와 채윤을 데리고 점심을 먹으러 병원을 나섰다. “나윤 누나만 있어도 돼?” 감자튀김을 오물거리며 지태가 묻자 명수는 입가를 휴지로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만 있게 해 준거지?” 채윤의 물음에 명수는 별다른 대꾸 없이 콜라를 집어 마셨다. “나윤 누나는 매일 오는 거야?” “응.” “와, 대단하다. 그 누나도 학교 다니잖아?” “연예인이니까 오전만 하고 오는 게 아닐까?” 연예인이라고 오전만 수업을 듣는다는 말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이야기지만, 실제로 나윤은 점심시간이 지날 즈음에 병실로 와서 단유의 곁을 지켰다. “오늘이 13일째던가?” “12일째야.” 평소의 쾌활한 명수와는 전혀 다른 묵직한 대답에 지태와 채윤은 말을 잇지 못했다. 명수도 달리 할 말이 없다는 듯, 콜라만 마시며 창밖의 사람들을 쳐다볼 뿐이었다. 딱히 어딘가에 시선을 두고 있지는 않았지만. 초겨울에 들어서서 그런지 사람들의 옷차림이 눈에 띄게 두꺼워졌다. 코트는 물론이고 붉은 목도리로 목을 감은 이도 더러 보였다. 높은 구두를 신고 길을 바삐 걸어가는 사람도 있고, 이어폰을 끼고 느릿느릿 걸어가는 이도 있었다.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면서 걷는 이도 있었고, 옆구리에 서류가방을 끼고 성큼성큼 걷는 이도 있었다. 어느 누구도 멈춰 서 있는 이가 없이, 모두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시험이 며칠이랬지?” 지태가 채윤에게 물으며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문다. “다다음 주 월요일부터.” “하아. 이럴 때는 차라리 빨리 시험 끝내고 방학이 됐으면 좋겠다.” “방학 되면 뭐하게?” 글쎄. 지태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방학을 기다렸겠지만, 지금은 방학이 되어도 딱히 즐거울 것 같지 않았다. 친구가 병실에 누워서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방학이 즐거울 리 없다. 또다시 정적이 흐르고, 어색한 침묵 속에서 지태는 햄버거를 우걱우걱 씹었다. 그마저도 눈치가 보였는지, 천천히 햄버거를 씹던 지태는 햄버거의 맛을 제대로 느끼기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푸념을 늘어놓지도 못했다. 채윤은 괜히 휴지로 식탁을 쓱쓱 닦으며 어색한 침묵에 동조했다. 그리고 지태에게 눈짓을 보냈다. ‘빨리 먹어.’ ‘목멘다고.’ 지태의 콜라는 이미 예전에 다 마셨다. 유달리 갈증이 많이 나는 상황이라 그럴까. 채윤은 지태에게 자기 몫의 콜라를 건넸다. “어, 선생님이네?” 채윤이 창밖으로 지나가는 하은을 가리켰다. 지태가 눈으로 좇아 하은을 찾은 뒤 인사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듯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냥 앉아 있어.” 명수가 나직이 말하자 지태의 엉덩이가 다시 의자에 들러붙었다. 명수의 상태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여기서 좀 더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았다. “뭐, 더 마실래?” 채윤이 묻자, 지태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명수야, 너는?” “난 됐어.” “…물이라도 가져다줄까?” “고마워.” 채윤이 일어나자, 지태가 얼른 따라 일어나려 했다. 채윤이 재차 눈을 부라리며 신호를 보내니 지태는 다시 엉덩이를 붙이며 입꼬리를 아래로 내렸다. ‘얌전히 있어.’ 채윤이 돌아서 카운터로 간 사이, 지태는 빨대만 쪽쪽 빨다가 빈 컵을 빨아들이는 요란한 소리에 깜짝 놀라며 입술을 떼었다. 하지만 여전히 바깥을 바라보는 명수였다. “무슨 생각, 하냐?” 채윤처럼 눈치가 없는 지태는 답답함을 못 이기고 물었다. 명수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무섭다는 생각.” “무섭다고?” 명수는 정말로 무서웠다. 단유 없이 홀로 이 세상에 남겨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금방 일어나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견딜 수 있었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단유는 깨지 않았고, 점점 가슴속에서 불안감이 커져만 갔다. 하은에게는 자신있게 금방 일어난다고, 지금은 마치 죽은 듯이 누워있지만 금방,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어날 거라고 이야기했지만, 가슴 속에서는 불신과 두려움이 커졌다. 자신에 대한 불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이토록 선명히 느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명수는 단유의 병실로 가기가 두려워졌다. 명수가 홀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싸우는 동안, 담당 의사가 오후 문진을 시작했다. 단유의 몸에 부착된 각종 기계들을 살피고, 단유의 안색 등을 보더니 돌아선다. 하은은 뭔가 조금이라도 희망적인 말이 건네지길 기다렸다. 하지만 담당의는 건넬 말이 없었다. 10여 일이 지나는 동안 한결같다. 어떤 징조나 변화의 조짐이라도 있다면 그걸 토대로 예측이라도 하겠지만, 환자는 의식을 차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실례하겠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우리 단유….” 하은이 병실을 나가려는 의사를 붙잡으려 했지만, 의사의 시선에 담긴 무기력함에 손을 내렸다. 어느 의사가 환자를 살리는 데 소홀할까. 환자를 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면 의사는 자신의 무능력에 답답함을 느낀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죠.” 그렇게밖에는 건넬 말이 없다. 어떤 변화라도 있어야 호흡기를 떼던지, 혹은 계속 유지할 것인지를 판단해 볼 텐데, 지금은 어느 것도 쉽지 않다. 특히 환자의 보호자들이 저렇게 끈을 놓지 않고 있다면 더더욱 쉽지 않다. 5시를 갓 넘긴 시간인데도 벌써 하늘에 어둠이 찾아들고 있어서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명수도 돌아와서 병실 한쪽의 소파에 앉아서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랫동안 국민 예능이란 타이틀을 놓지 않았던 그 예능 프로그램은 토요일마다 명수를 TV 앞에 앉혔다. 하지만 지금은 TV 안에서 명수가 좋아하던 연예인들이 뻥긋거리며 웃고 떠들고 있어도 명수는 웃지 않았다. 볼륨을 낮춰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으니 내용을 몰라서 그런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냥 습관적으로, 그리고 애써 시선을 둘 데가 마땅치 않아 TV를 바라볼 뿐인 명수였다. 나윤은 한결같이 단유의 손을 쥐고 있었다. 때로는 단유의 팔다리를 주물러주기도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도 하지만, 주로 단유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그의 온기를 느끼고 싶다는 마음과, 자신의 온기를 느껴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이 섞여 있었다. 그때, 나윤의 손에 미세한 느낌이 느껴졌다. 너무나 미약해서 혹시 착각한 것은 아닐까 싶었다. 사실 이제껏 단유의 손을 잡고 있다 보면 가끔 그런 느낌을 느낄 때가 있었다. 몇 번은 그 느낌에 놀라 의사, 간호사를 부르기도 했었다. 다시 한번 손에 느낌이 왔다. 조금 전보다 더 세게 쥐는 느낌이었다. 나윤의 눈이 커졌다. 그래도 아직은 확신을 할 수 없었다. 괜히 설레발을 치다가 의사가 들어와, 마치 선고를 내리는 판사 모양으로 ‘아닙니다’라고 선언하는 진단을 듣고 싶지 않았다. ‘눈을 떠!’ 차라리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봐주길 바랐다. 깊고 따뜻한 눈빛을 다시 봐야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발!’ 나윤은 단유의 손을 힘껏 쥐었다. 그에 맞춰 나윤의 손을 부드럽게 말아지는 손. 나윤의 눈이 커지며 입술이 벌어졌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단유의 눈꺼풀이 올라갔다. 반개한 눈 속의 검은 눈동자가 조금씩 초점을 찾더니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시선이 옆으로 움직이며 나윤을 찾는다. “다, 단유야.” 나윤의 목소리에 TV를 보던 명수의 고개가 돌려졌다. 엉거주춤 서 있는 나윤의 모습에 이상함을 느낀 명수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단유의 눈동자가 나윤의 눈을 찾았다. 그리고 잠시 멍하니 바라보더니 그의 눈동자가 호선을 그린다. 그리고 얼굴이 빨갛게 부으며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억지로 호흡기를 달아놓은 상태라 자가 호흡이 되는 순간, 거부감을 느낀 것이다. “며, 명수야! 의사, 의사 선생님!” 천천히 다가오던 명수가 머뭇거리다 얼른 병실 밖으로 뛰어갔다. 병실을 나서자마자 ‘의사 선생님! 간호사님!’을 외치는 명수의 목소리에 복도가 쩌렁쩌렁 울렸다. 단유는 기침하며 눈을 찡그리다가도 억지로 눈을 떠서 나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윤의 손을 꼭 쥐었다. ‘울지 마요.’ 마치 그렇게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나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하지만 계속 쏟아지는 걸 어떡해. ======================================= [456] 스스로 긋는 한계(6) 단유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놀란 것은 의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신이 들어요?” “네.” 의사들은 여기가 어딘지, 오늘이 며칠인지 알겠냐는 둥의 질문을 던지며 혹시 뇌에 어떤 영향이 있는지 살폈다. 호흡기를 방금 제거한 탓에 잔기침이 종종 섞였다는 것 외에는 명료한 대답이 이어졌다. “오늘이 며칠인지는 제가 알 도리가 없지만, 앞에 계신 분이 의사 선생님이란 건 알겠네요.” “이름은 기억나요?” 단유는 잠깐 목을 다듬더니 대답했다. “김단유입니다.” 잠깐 바람을 쐬러 나갔다 왔던 하은은 병실의 분주함에 혹시 어떤 일이 생긴 게 아닌지 불안해하며 병실로 뛰어들어왔다. “선생님.” 하은은 입을 틀어막고 미소 짓는 단유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왜 이렇게 우는 사람이 많은지 모르겠네요.” 능청스러운 단유의 말에 하은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입꼬리를 늘리며 말했다. “명수보다 네가 더 사고뭉치구나.” “아니,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또 그래요?” 옆에서 붉어진 눈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던 명수가 볼을 불룩하게 부풀리며 토라진 시늉을 했다. 하은은 그런 명수를 신경 쓰지 않고 단유의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이제 괜찮아?” “오래 쉬었더니, 몸이 찌뿌둥한 거 빼고는요.” “그래. 너무 오래 쉬었어.” 단유는 손을 뻗어 하은의 손을 붙잡았다.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으이구.” 하은도 단유의 손을 꼭 쥐었다. 담당의는 몇 가지 검사를 더 정밀하게 한 뒤에 퇴원 절차를 밟자고 권했다. 단유는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하은과 명수가 강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월요일까지 병실에 묶여 있어야 했다. 단유는 신문보급소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이야기했다. 이미 집으로 전화해서 하은과 통화를 했었던 소장은 단유의 일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단유의 전화를 받았을 때 마치 자기 일인 양 기뻐했다. [그래서 몸은 괜찮고?] “네. 좀 깊이 잠들었을 뿐인데요.” [능청은. 그런데 미안한 이야기지만, 얼마 전에 사람 구했다.] “아, 다행이네요.” [다행은 무슨.…알다시피 이 일이 하루도 빠지면 안 되는 일이잖아. 어쩔 수 없었던 거긴 하지만 미안하다.] “아뇨. 오히려 저 때문에 피해가 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요.” 그 뒤로도 대충 몇 마디 말을 주고받다가 통화를 끝내자 잠자코 듣고 있던 명수가 물었다. “그럼 이제 아르바이트는 끝이야?” “뭐, 새로 구해봐야지.” “계속하려고?” “이제 겨울방학이잖아? 시간도 많은데 돈 벌어야지.” “돈?” 갑자기 돈타령하니 명수가 의아하게 생각했다. 물론 종종 돈을 버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그건 학교를 모두 졸업하고 난 뒤의 사정이다. 단유나 명수나, 일단은 학교를 다니는 일에 충실하고 그동안 하은이나 여러 사람에게 진 신세는 이후에 꼭 갚자는 게 그들의 입장이었다. 단유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벗어났다. 명수가 부축이라도 해줄까 싶어 손을 내밀려다 말았다. 이미 단유는 침대에서 내려와 명수의 어깨를 두드리며 창가로 향하는 중이었다. 1인실이라는 사치는 하은의 욕심이었고, 단유에게는 빚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이렇게 넓은 채광창으로 바깥을 훤히 볼 수 있어 좋았다. 지난 3개월, 그러니까 이세계에서의 3개월간 겨울을 지내다 왔는데 다시 겨울을 맞이하게 되니 계절 감각이 비틀리는 기분이다. 마른 가지의 가로수들 아래로 사람들과 차들이 지나는 거리를 보며 단유가 입을 열었다. “지난…시간 동안 반성을 좀 했어.” “무슨 반성을 해, 네가?” 의식 없이 누워만 있던 것도 모자라, 반성이라니? 의사의 말로는 뇌 활동이 거의 멈춰진 상태라고 이야기를 했던 거 같은데, 그 말대로라면 단유의 반성은 쓰러지기 전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려나? “내가 너무, 무지했어.” “…그 말은 내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장난스럽게 받아치는 명수에게 피식 웃음을 지어 보인 뒤, 단유는 말을 이었다. “그런 이야기는 아니고…내가 너무 다른 사람의 감정을 몰라줬던 거 같애. 무시하기도 했고.” “무시했다고?” “응.” 단유는 가만히 창밖을 응시하다 얼른 명수를 보며 말했다. “넌 빼고.” “섭섭할 뻔했다?” 명수가 눈썹을 한번 위로 들썩거려 보이니 단유가 또 한 번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이내 흐려진 웃음 뒤에 단유의 말이 계속되었다. “뭐 솔직히 말하면, 너한테도 미안해. 네가 나를 생각해주는 것만큼 너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선생님한테도 미안하고, 아무튼 그냥 다 미안한 기분이야.”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미안해할 이유는 없어. 넌 누구보다 좋은 친구고, 좋은 학생이었고, 좋은 사람이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너한테 고마워해야지.” ‘네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데.’ 차마 마지막 말은 쑥스러워서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지만, 단유는 그런 명수의 마음을 안다는 듯 눈을 찡긋거렸다. “고맙네.…아무튼 날 되돌아봤어. 난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으로 지냈었던가. 어떤 마음으로 내 주위의 사람들을 대했던가. 그래서 반성도 하고, 깨닫기도 했고.” 명수는 계속 단유를 바라보고 있기도 민망해서 같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일요일 오후의 햇살이 눈을 찔러 살짝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난, 책임감이 없었어.” 단유의 나지막한 선언에 명수가 고개를 돌렸다. “네가 책임감이 없다고?”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모두의 기대를 받는 게 두려웠고, 그래서 계속 피하려고 했어. 다른 사람에게 받는 사랑도 부담스러워서 애써 모른척하기도 했었고, 노골적으로 무시하기도 했고.”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수없이 많은 사람과 만나는 와중에 단유는 그렇게 행동해왔다. “생각해보니 그게 책임감이었던 거 같아. 난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고, 책임을 지는 일을 피해왔던 거지. 그래서 이제 고치려고.” 명수가 고개를 휘저었다. “전혀 아닌데? 내가 보는 넌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야. 스스로 한 말을 지키려고 노력하잖아? 그리고 기대를 무시하지도 않았고. 모두가 네게 기대하는 걸 아니까, 그 기대에 부응하려고 더 많이 공부하고 노력해서 전교 1등도 된 거잖아?” 단유는 씁쓸하게 웃었다. 명수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지만, 선후가 바뀌었다. 스스로 한 말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니까 지키려고 했을 뿐이고, 전교 1등은 그런 기대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것이다. 오히려 2학년 들어서는 더욱 그런 마음이 커져서, 아예 학과목과 다른 공부만 하지 않았던가. ‘생각해보니 재수 없네, 나.’ 만약 지태가 단유의 생각을 알았다면, 금방이라도 손가락질을 하며 핀잔을 줬을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한테도 미안하고. 솔직히 선생님은, 우릴 책임질 필요가 없는데도 희생을 하고 계신 거잖아?” “…그렇긴 하지.” “비록 예전에 우리가 선생님께 진 빚은 나중에 갚자고 했지만, 그래선 안 될 거 같아. 내 책임을 유예시켜서 선생님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거, 잘못된 거였어.” “음, 살짝 머리에 쥐가 날 뻔했지만, 그건 봐줄게. 어쨌든 요지는 네가 돈을 벌려는 이유가 선생님께 신세를 지기 싫다는 이유라는 거잖아.” “그것도 있지만, 굳이 지금 내게 주어진 가능성을 무시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야.” “가능성?” “돈을 버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혹은 다른 무엇을 하는 것도 다 가능성이 있는데 애써 무시할 필요가 없다는 거야.” 명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약 네가 지금 당장에라도 프로 축구팀에서 널 데려가고자 한다면, 넌 어떡할래?” “그럼 당연히….” 명수는 말을 잇다 말았다. 만약 자신에게 그런 ‘가능성’이 주어진다면 굳이 지금의 위치에 머무를 이유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단유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긴, 네가 하면 뭘 못하겠어?” 명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단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만능인데.” “하하. 이러니까 내가 부담스럽다는 거야. 내가 무슨 만능이야?” “흐흐, 너만 모르지 다른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명수가 단유의 어깨에 깊이 팔을 걸치며 속삭였다. “돈 벌면, 뭐 있냐?” “뭐 필요해?” “아니 딱히, 뭐가 필요한 건 아닌데 자전거 정도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 통학용?” 능글맞은 명수의 너스레에 단유가 같이 명수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까짓거 자전거 하나 만들어주지 뭐.” “자전거를 네가 만든다고?” “왜 못 할 거 같아?” “아니, 너라면 금방 만들 거 같아서 더 걱정이다.” “그게 왜 걱정이야?” “사람들이 점점 널 사람이 아니라, 무슨 신처럼 생각할 거 같아서 말이야. 아니면 마술사?” 명수는 늘 이렇게 무심한 듯 핵심을 파고든다. 다만 자신이 핵심을 파고들었다는 사실을 모를 뿐. 두 사람이 창가에 서서 웃음꽃을 피울 때, 병실 문 근처에서 하은이 눈꼬리를 손등으로 찍으며 울음을 참고 있었다. 언제부터 단유가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자기가 너무 단유의 마음을 몰라줬던 게 아닌가 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비롯한 사람들의 기대에 단유가 힘들어한다는 것도 몰랐다. 오죽 힘들면 피하고 싶달까. 그런데도 지금은 저렇게 웃으며 자신의 책임감이 부족했다고, 이제는 책임감을 갖고 살아가겠다며 선언하는 단유가 너무 자랑스럽고, 사랑스럽고, 애틋하다. “언니, 안 들어가세요?” “어? 왔어?” 잠깐 집에 들렀다 온다며 나갔던 나윤이 병실 밖에 나와 있는 하은을 보며 물었다. 하은은 얼른 표정을 수습하며 물었다. “뭐야 그건?” 나윤이 손에 들고 있는 게 있어 물었더니 나윤이 볼을 붉혔다. “…병원식 안 먹어도 된다고 하길래, 집에 가서 좀 만들어봤어요.” “직접 만든 거니?” “…네.” 하은은 엄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단유가 좋아하겠다.” “맛없으면 어쩌죠?” “맛없어도 맛있다고 할 애인 거, 모르니?” “그러니까 더 걱정인데요?” “…들어가자.” 두 사람이 병실로 들어서니, 단유와 명수는 서로의 목에 팔을 걸친 채 힘자랑을 하고 있었다. “니가 먼저 풀어.” “참으면 아플 텐데?” “네가 더 힘들걸?” “너 열흘 동안 운동도 못 하고 누워만 있었잖아? 허리 아프지 않냐?” “열흘 만에 일어난 친구한테 힘자랑 하고 싶냐?” “그러니까 먼저 포기해.” “너야말로 포기해.” “두 사람 동작 그만!” 하은의 외침에 두 사람은 얼른 팔을 풀고 자세를 바로 했다. “애다 애야.” 하은이 혀를 차며 말하자, 나윤이 동의한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 월요일에도 병원에 있느라고 결국 학교에 가지 못한 단유는 오후 늦게 퇴원 수속을 밟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은은 학원 일 때문에라도 오지 못했지만, 단유가 혼자 할 수 있다며 극구 말린 탓에 더 올 생각을 못 했다. “오랜만에 오니까 좋지?” 대신 학교를 일찍 마치고 병원에 온 명수가 단유의 짐을 덜어주었다. 2주를 병원에 있었다지만, 그 시간 동안 침대에 누워만 있었을 뿐인데 짐은 왜 그렇게 많은지, 가방이 한 가득이었다. 대부분은 간병인의 몫이었지만, 혹시 몰라 가져왔던 단유의 옷가지와 수건, 책 등도 무게를 많이 차지했다. “오랜만이긴 하네.” 무려 3개월, 아니 정확히는 달력이 없으니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계절을 보냈으니 그만큼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흘렀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누워있었던 시간을 역산(逆算)해도 그 정도 시간이 흘렀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긴 했지만 말이다. “내일 바로 학교에 갈 거지?” “그래야지.” 명수가 학교 이야기를 꺼내면서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아, 맞다. 요즘 학교 분위기 되게 안 좋다?” “…왜?” “교육청 감사 왔던 거 있잖아? 그것 때문에 완전히 난리야.” “감사? 그거 계속하고 있던 거였잖아?”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뭐가 많이 달라졌나 봐. 아니면 어떤 비리 같은 거라도 발견했던지. 아무튼 학교 분위기가 장난 아니야.” 단유가 실습 체험(?)을 하며 변하는 동안, 학교에도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 [457] 선물(1) 새로 학교로 들이닥친 감사관들은 아주 뿌리를 뽑겠다는 듯, 식사도 거르며 서류들을 검토했고, 현 이사장 아래의 문제뿐 아니라 지난 이사장 때의 문제까지 찾아냈다. 전 이사장의 흠결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이, 결국 재단의 문제이기에 당시 이사진들은 조사를 피할 수 없었다. 당시의 이사진이라고 해봐야, 지금은 떠난 전 이사장의 부인과 아들을 제외하면 현 재단 이사진 그대로다. “고작 교복 하나로 떠들 게 아니었구만.” “아이고, 이거 적당히 드셨어야지. 각 업체들마다 로비에, 뭐야 이건? 상납금이라도 받아드신 거예요? 예?” 감사관 앞에서 누구도 거세게 항의를 하지 못했다. 더러 몇몇이 결백을 주장해도, 감사관들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렇게 결백하시면, 왜 그때는 아무 말씀 없으셨을까? 회의록을 보니 조용하시던데요?” “관례라고요? 그런 관례 찾으시다가 법전(法典) 앞에서는 아무 말 못 하는 거 봤죠?” 선생님들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물론 일개 평교사들이야 크게 문제가 될 일이 없다지만, 교장과 교감을 비롯한 몇몇 주임 선생님들까지 줄줄이 감사관에게로 끌려가니 교무실 분위기가 좋을 리 없었다. 특히 정년만 바라보던 교장이 어쩌면 불명예 퇴직을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판이다. 떠들려면 학교 밖 포장마차에서나, 아니 거기서도 입조심을 해야 할 형국이니 교사들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은 쉽게 사라지기 어려워 보인다. 그 와중에 단유가 돌아왔다. “야, 괜찮아?” 물론 괜찮다. 괜찮기만 할까, 정신을 차리고 주말에 걸친 3일 동안, 지극정성으로 돌봄을 받아 오히려 더 낯빛이 좋아진 단유였다. “살 빠진 거 같은데?” 빠지긴. 나윤이 입에다 욱여넣은 샌드위치, 김밥, 햄버거에 명수가 혼자 먹기 싫다며 사 들고 온 떡볶이, 어묵, 튀김과 하은이 사 온 치킨, 피자를 모두 합하면 거의 한 달 치를 몰아 먹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친구들의 걱정을 나 몰라라 하지 않았다. “걱정해줘서 고맙다.” 그리고 미소를 지어 보이며 친구들의 손을 한 번씩 잡아 주었다. 친구들의 환영 인사를 받으며 자리로 찾아온 단유에게 턱을 괸―처음에는 같이 반기려 했지만, 워낙 많은 아이들이 단유에게 인사를 건네는 터라 포기하고 구경만 하던―도하가 물었다. “선거 나가냐?” “응?” 도하가 악수하는 시늉을 하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누가 악수를 하면서 인사를 하냐? 늙은 아저씨도 아니고.”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런가, 하고 자문했지만 마땅히 그런 식의 인사 외에는 생각나는 게 없었다. 여태 만났던 대부분이 자신을 반길 때는 손을 내밀어 악수했던 것 같은데. “괜찮은 거야?” 도하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응.” “그렇구나.” 도하는 멀거니 단유를 보다가, 단유가 그 시선에 의아함을 느낄 때쯤 또 입을 열었다. “다음 주 시험인 거 알아?” “들었어.” “시험공부 못했겠네?” “응.” 하지만 이제 시험 따위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아니 애초에 시험과 성적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시험과 성적이 단유의 인생을 좌지우지하진 못할 테니까. 도하는 그래도 계속 단유를 바라보았다. 훔쳐보는 것도 아니고 노골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단유는 그 시선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을 떠올릴 때, 도하의 얼굴도 얼핏 지나갔지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이 소년은 정말 독특하다. “너 좀 변했다?” “응?” 도하는 물끄러미 바라보다 또 툭 하고 한 마디 뱉었다. “계속 웃네?” “내가?” 단유는 얼굴을 더듬어 보지만, 손으로 느껴지는 표정은 아니었다. “기분 좋은 일 있어? 아니면 학교에 와서 기분이 좋은 거야?” 기분이 좋다, 라. 단유는 여전히 입가를 더듬으며 자신의 표정과 기분에 대해 생각했다. 책임감을 가지겠다고, 선언하긴 했지만 당장 어떤 행동의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삶의 궤적이 갑자기 바뀐 것도 아니다. 하지만 책임감을 느끼고, 당당하겠다고 선언하며 마음을 먹는 순간 단유는 본인은 바뀌었다. 벽을 허물고 주변과 당당히 마주 보기로 했다. 그 결과에 대해서도 더는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책임을 지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더니 단유는 전에 없던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동안 내가 나를 구속하고 있었던 걸까?’ 속박, 어쩌면 집착. 자신을 좁은 틀 안에 가둬 두고 가능성도 막은 채, 그저 자기 위안과 만족에만 몰두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이.” “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직 안 괜찮은 거 아냐?” 도하가 턱에서 손을 떼며 미간을 좁혔다. 단유는 소년의 미간을 보다 피식 웃으며 미간을 검지로 꾹 눌러 주름을 폈다. 예상치 못한 단유의 행동에 도하가 당황하고 어리둥절할 때, 단유가 입을 뗐다. “너보단 건강하고, 힘도 좋아. 의심스러우면 팔씨름이라도 할까?” “…됐다. 우리 반 애들 전부를 한 팔로 이긴 너한테 어떻게 당해?” 그러면서도 단유의 팔을 주물럭거리며 ‘그동안 약해진 거 아냐’라고 의심해보는 도하였다. 단유는 팔에 힘을 주어 그의 의심을 날려버렸다. **** “단유야, 이야기 좀 할까?” 하은의 부름에 명수와 함께 TV를 보던 단유가 호빵을 거실 바닥에 내려놓은 뒤 다가왔다. 호빵은 오랜만에 만난 단유가 그리웠던지 졸졸 뒤를 쫓아왔다. “사실은 너랑 명수가 하던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이야.” “명수랑요?” 워낙에 많은 이야기를 나눈 터라, 정확히 어떤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돈 벌겠다면서?” “아, 네.” 단유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하은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나랑 한 이야기한 거 있지? 너 쓰러지기 전에 했던 거 말이야.” 그제야 단유는 하은의 어법에 단유에 대한 걱정이 많이 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하려는 말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어법. 하은은 계속 단유의 기억을 테스트했다. 병원에서 정상으로 검사 결과가 나왔음에도 단유의 기억에 문제가 없는지, 혹은 후유증이 남은 건 아닌지 걱정을 하는 하은이었다. “자퇴요?” 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단유가 정신을 잃기 전날의 일이었다. 학교에서 자신에 대한 처벌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단유가 하은에게 상의했던 내용은 바로 자신의 자퇴에 관한 문제였다. 교장 선생님과의 껄끄러운 관계, 학교와의 불편한 공존 때문에 자퇴를 언급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부수적인 문제였을 뿐, 실제로는 당시의 단유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 이상의 지식을 원했다는 점이고, 좀 더 빨리 대학에 들어가 고등 학문을 배우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혹시 빨리 돈을 벌고 싶어서, 그래서 빨리 독립하고 싶어서 그런 결정을 내렸던 건 아닌지 묻고 싶어서 그래.” “아니에요.” 단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식탁 위에 올려진 자신의 두 손끝을 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도하 말대로, 웃음이 많아진 것 같긴 하다. “당장 무슨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겠다는 건 아니고요, 독립도 아직은 멀었죠. …빨리할 수만 있으면 좋겠지만.” “빨리 독립하고 싶어?” “그럼요. 그래야 우리 선생님도 걱정 없이 결혼하시겠죠.” 하은의 얼굴이 빨갛게 변하다가 단유의 뒤에서 들려오는 키득거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단유의 머리를 쥐어박으려고 손을 휘둘렀지만, 단유가 잽싸게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피하는 통에 짓궂게 웃고 있는 명수의 얼굴만 눈에 들어왔다. “선생님, 놀리니?” “놀리는 게 아니라, 사실이잖아요. 솔직히 우리 선생님이 외모가 부족한 것도 아니고, 머리가 부족한 것도 아니잖아요. 이 시대 최고의 설리번이자, 이 시대의 신사임당 같은 분 아니세요?” “너 아직 정신 못 차렸구나? 너 아직 덜 깬 거지? 그렇지?” 명수가 배를 잡고 웃는 소리에 하은이 빽 하고 소릴 질렀지만, 명수는 웃음을 참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사이 단유가 여전히 미소를 입에 머금은 채로 말했다. “고마워요, 선생님.” “…나 참. 누가 그런 소리나 듣자고 그러니?” “아무튼요.” 단유는 하은이 더 뿔이 나기 전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때 자퇴하고 싶다고 말했던 건, 그때 이야기한 이유 그대로예요. 빨리 진급해서 더 많은 책과 더 높은 수준의 지식을 배우고 싶다는 이야기.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아니라고?” “네. 지금은, 자퇴 안 하려고요.” “…다행이긴 한데, 혹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졌다거나 뭐 그런 거니? 그래서 돈을 벌겠다고?” “에이, 아니요. 여전히 공부는 재미있어요. 계속할 거고요.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아르바이트를 하겠다는 거예요.” 하은은 단유의 진심을 파악해보려는 의도인지 단유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물론 단유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좋아, 일단 믿겠어. 그럼 자퇴는 안 하고, 계속 학교를 다니겠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겠다?” “신문 배달하듯이요.” “공부에 방해가 되는 일은 없도록?” “네.” “다시 신문 배달할 거니?” “다시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못해도 상관은 없죠. 그냥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려고요.” “하지만 중학생이 아르바이트할 만한 건 별로 없을 거야.” “알아요. 지난번에도 찾다 찾다 못 찾아서 결국 신문 배달을 했던 거니까요.” “그때도 안 됐던 게 지금 되리란 법은 없잖니?” “그건 장담할 수 없죠.” “…너 아무래도 후유증이 남아 있는 거 같아. 왜 이렇게 능글맞아졌지?” 단유는 적당한 변명거리를 찾다가 고개를 돌려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명수를 가리켰다. “쟤한테 옮았나 봐요.” “야! 왜 또 난데?” “이래서 친구는 가려 사귀어야 하는 거야.” 하은의 대꾸에 명수가 벌떡 일어섰다. “아, 정말! 둘 다 왜 또 가만있는 날 건드려…요!” “어쭈? 선생님한테 대드는 거니?” 하은이 째려보자 명수가 ‘맨날 나만 뭐라 그래’ 라며 툴툴거리다 소파에 몸을 묻었다. 단유가 대화를 마무리하려는 것 같아 어울려주었던 하은이지만, 그렇다고 단유에 대해 안심한 것은 아니었다. 지난번 대화에서 ‘조금 더 생각해보자’고 말하며 결론을 미뤘던 건, 오늘과 같은 대답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지만, 막상 단유가 생각을 고쳤음에도 하은은 편하지 않았다. 혹시 ‘책임감’이란 것 때문에, 괜히 부담을 가지는 건 아닐까? ‘괜찮을 거야. 단유는 똑똑하니까.’ 스스로에게 되뇌며 단유를 믿자고 다짐을 해보는 하은이었다. **** 모처럼 지태와 채윤, 상미가 집으로 찾아왔다. 상미는 웬 과일 바구니를 들고 찾아와서 단유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건 병원에 있을 때 가져오는 거 아니야?” “우리 엄마가 가져가랬어.” 상미는 식탁 위에 올려놓고 거기서 바나나를 하나 꺾어 단유에게 내밀었다. “먹을래?” 단유가 고개를 저으니, 상미가 껍질을 까서 입 앞에 대었다. “먹어.” 어쩔 수 없이 입에 넣으니, 그제야 상미가 다른 바나나를 집에 넣고 우물거렸다. “니들도 먹어.” 지태와 명수가 누가 먼저랄 거 없이 달려와 바나나를 하나씩 집었다. “그런데 너도 공부할 시간 없었지 않아? 설마 일주일 만에 시험공부 다 끝낸 거야?” 어느새 빈 껍질만 손에 든 지태였다. “다 끝낸 건 아니고 너희들이랑 같이 하려고 부른 거야. 하는 김에 족집게 흉내도 내 보고.” “역시 전교 1등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 상미는 바구니 안에 든 멜론을 깎아볼까 생각하며 주방을 눈으로 더듬는 중이었다. “난 이번에는 그냥 혼자 공부해야 하나 싶어서 걱정이었는데, 잘 됐다.” 채윤은 자칫 상미가 실수라도 할까 걱정이 돼서인지, 서둘러 칼을 집었다. 단유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행동하는 친구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단유가 부르기 전에는 혹시라도 피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해서 오지 않은 것일 테다. 하지만 단유가 부르니 이렇게 바로들 달려오지 않는가. 그러면서도 다른 아이들이 그랬듯 뻔한 대화를 나누지도 않는다. 일부러 과장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전혀 무신경하지도 않으니, 이들이 바로 자신의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친구들이 곁에 있다면, 종종 힘들거나 무서울 때도 위로가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 [458] 선물(2) 2학년의 마지막 기말시험이 시작되는 날,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혹자는 가을의 마지막과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비라고 했고, 혹자는 ‘지랄 맞은 비’라고 평했다. “오려면 눈이나 올 것이지.” 하은의 과격한 표현은 오후 출근할 때 입고 갈 옷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추위를 생각하면 코트를 입어야겠는데 그러면 비에 젖을 것이 걱정되고, 그렇다고 빗방울에도 크게 상하지 않을 패딩을 입자니 한겨울에나 입을 두꺼운 패딩밖에 없었던 탓에 하은의 심기가 불편했다. 끙끙거리는 호빵에게 아침을 챙겨준 뒤 창밖을 바라보는 하은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아, 오늘 시험이지?” “네.” “명수야, 문제 끝까지 읽고 풀어.” “왜 나만 갖고 그래요?” “단유는 알아서 잘하잖아?” “단유한테도 한 마디 해줘요. 괜히 섭섭해할지도 몰라요.” “…설마.” 신발을 신고 문고리를 잡던 단유가 피식 웃었다. “전 괜찮아요. 다녀오겠습니다.” 오피스텔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현관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니 차가운 빗방울이 얼굴에 튀어 오른다. “그냥 버스 타고 갈까?” 버스 정류장에서 고작 두 정거장 떨어진 학교다. “아니다. 그냥 가자.” 명수는 금방 마음을 바꿨다. “왜? 비 맞기 싫으면 그냥 버스 타지?” “비 오는 날 버스 타면 그게 더 고생이야. 젖은 우산이 몸에 닿는 건 둘째 치고, 이상한 냄새도 나고 막 그러니까.” 명수는 우산을 펼쳐 들고 거리로 나섰다. 그러고 보니 지난 3개월간 제대로 씻지도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매일 아침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하는 게 습관이던 단유에게 비누 하나 없는 곳에서 청결을 유지하는 것은 꽤나 고역이었다. ‘냄새라.’ 비록 물을 데워서 세수하긴 했지만, 샤워를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양의 물을 데워 쓰지 못한 탓에 제대로 씻는 것이 어려웠다. 그러니 어쩌면 자신에게도 꽤 심한 냄새가 났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누구도 그 냄새에 대해 지적하지 않은 건 그들 역시 다를 바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면 시계니, 자전거니 하는 기계들보다 목욕탕과 비누를 먼저 만들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제 두 번 다시 돌아갈 일 없는, 그리고 언젠가는 희미한 사진처럼 남을 기억에 불과하다. 바람이 불면서 빗방울이 얼굴 옆을 때리고 지나갔다. 명수가 칫, 소리를 내며 얼른 우산을 옆으로 끌어내렸지만 이미 젖을 대로 젖었다. 몇 걸음 걷지도 않은 잠깐 사이에 비가 내리는 기세가 세졌다. “굿모닝!” 오른쪽 골목에서 젖은 바닥을 박차며 튀어나온 지태에게 명수가 툴툴거렸다. “넌 이게 굿모닝이냐?” “그냥 인사지, 뭘 그렇게 따져? 그리고 니가 나보다 영어 잘해?” “내가 아무리 몰라도 굿모닝이 무슨 뜻인지는 알거든?” “그럼 아침부터 보자마자 배드(bad)모닝이라고 하면 기분이 좋냐?” 단유는 적당히 말리는 척을 할까 하다가 관뒀다. 이것도 나름의 인사니까. 곧 채윤도 합류했다. 채윤의 바지는 거의 무릎까지 젖어 있었다. 마치 바지 밑단을 줄여 정강이에 달라붙게 한 스키니진이라도 입은 모양새다. “여태 기다렸냐? 그냥 혼자 가지 그랬어?” “어떻게 혼자 가? 시험날인데 단유 기운이라도 듬뿍 받아야지.” “야, 얘가 무슨 ‘토템’이냐?” 명수의 대답에 지태와 채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명수의 입에서 나올 단어가 아니라 여긴 탓이다. “토템이 뭔진 알아?” “축복이나 저주를 비는 물건이잖아! 내가 그것도 모를 거 같아?” 지태가 못 말린다는 눈으로 명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얘 이거 분명히 게임에서 배운 걸 거야.” 채윤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두 친구의 모습에 명수가 씩씩거렸다. “야! 그럼 토템이 뭔데?” “단군신화는 아냐?” “단군신화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단군신화에 곰이랑 호랑이 나오지?” “응.” “그게 토템이야.” “곰이랑 호랑이가 토템이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토템은 일종의 상징이고, 부족의 상징으로 쓰던 걸 말하는 거야.” “진짜야?” 단유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명수는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지태에게 물었다. “시험에 나와?” “무슨 시험? 이번 시험? 이번 시험에는 안 나오지.” “그럼 상관없잖아? 뭘 그렇게 따지고 들어?” 애초에 명수 네가 틀린 말을 한 거잖아, 라고 설명할 지태가 아니었다. “무식한 놈.” 면박을 주면 모를까.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씩씩거리던 명수가 이죽거렸다. “겨우 토템 하나 안다고 잘난 척이냐?” “책 좀 읽어라, 책 좀. 맨날 게임만 하지 좀 말고.” “단유보다 무식한 게.” “야,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우리 학교에서 단유보다 똑똑한 애가 어딨냐?” “없으니까 너도 무식한 거지.” “와아. 미치겠네.” 보다 못한 채윤이 둘을 말렸다. “아침부터 유치하게 왜들 그래?” 하지만 둘은 학교 정문을 통과할 때까지도 옥신각신했고, 단유는 괜히 학교에서 제일 똑똑한 놈이 되어서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물론 단유는 둘의 입씨름에 끼지 않았다. 비록 친구들과 좀 더 가깝게 지내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갑자기 행동이 180도 달라지는 것도 이상할뿐더러, 이런 대화에 낄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변화였다. **** 시험을 마친 후, 단유는 명수에게 들릴 곳이 있다고 전했다. “언제 올 건데?” “아마 저녁 먹고 들어갈 거 같은데?” “아하. 누나 만나러 가는구나? 아주 깨가 쏟아진다, 쏟아져.” “깨는 무슨. 아무튼 혼자 저녁 챙겨 먹어.” “네가 그런 말 안 해도 잘 챙겨 먹거든?”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을 향해 걸어가던 중, 명수가 손바닥을 마주치며 말했다. “오늘은 상미네 집에 가서 먹어야겠다.” 아마 오늘 상미네 집엔 저녁밥 남을 일은 없겠다. 밥솥에 있는 밥을 싹싹 긁어먹을 식충이가 입맛을 다시고 있으니까. 교문을 나와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명수와 헤어진 단유는 하교한 학생들 무리들과 함께 버스를 기다렸다. 여전히 비가 내리는 가운데, 좁은 버스 정류장 지붕 아래로 마치 눈보라를 피하려 몸을 밀착한 황제펭귄들의 그것처럼 몸을 붙이고 선 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차마 그사이에 끼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에 단유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산을 들고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버스가 오자 학생들이 우르르 달려가 출입구 근처에서 한 발이라도 먼저 걸치고 올라가겠다는 듯이 서두르는 광경이 보였다. 우산을 미리 접은 아이들은 빗방울에 머리가 젖는 것을 감내해야 했고, 더러 어떤 아이들은 버스에 올라서기 전까지 우산을 접지 않겠다는 듯 팔을 높이 쳐든 채로 무리에 끼어 있었다. 당연히 우산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에 주변 사람들의 소리 없는 원성이 가득했다. 다행히 단유가 기다리는 번호는 아니어서 그 광경을 여유롭게 감상할 수 있었지만, 다음번에 자신이 기다리던 버스에서도 저런 광경이 펼쳐진다면 어찌하나 걱정도 들었다. 솔직히 ‘가능’만 하다면, ‘이동’으로 바로 갔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제는 불가능했다. 단유가 ‘루치드’와 하나가 되면서, 단유는 깨달았다. 두 번 다시 그곳, 자신의 고향이라 여겼던 그곳으로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언제라도 떠올릴 수 있었던 그곳의 좌표는 물론이고, ‘이동’을 하기 위한 이미지가 마치 깨끗이 삭제라도 된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많이 돌아다녀 볼걸.’ 일본, 중국, 베트남, 러시아, 심지어 인도와 북한―금강산이 궁금해서 잠깐 갔다 온 적이 있다―까지도 몰래 다녀온 적이 있긴 했지만, 더 멀리까지는 가보지를 못했다. 본래는 겨울 방학이 되었을 때, 시간 여유를 두고 돌아다녀 볼 계획이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이것도 예전과 비슷한 경우라, 지금은 어떤 이유로 사용하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지식을 쌓고 깨달음을 얻는다면 다시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사라지게 마련. 애초부터 ‘공간’의 능력은 단유의 지식과 재능을 넘어선 것이었다. ‘언젠가는 내 것으로 만들 날이 오겠지.’ 단유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가다, 지하철로 갈아타고 다시 얼마를 더 간 뒤에야 나윤의 연습실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하철은 그나마 나았지만, 버스는 정말 명수의 말 대로였다. 꿉꿉한 버스 실내에 젖은 학생들이 여럿 끼어 있으니 비릿한 물 냄새와 쾨쾨한 땀 냄새가 코를 막고 싶게 만들었다. 다만 너무 유난스럽게 보일까 봐 차마 손을 들어 올리진 못해서 대신 코에 잔뜩 힘이 들어가기만 했다. 그나마 한산했던 지하철을 나와보니 비가 내리던 기세가 조금 줄어든 모양이었다. 핸드폰을 들어 미리 연락할까 하다가 그냥 찾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 그냥 걸음을 떼는 단유였다. 연습실로 내려가는 계단에서부터 물 냄새와 먼지 냄새가 확연히 느껴졌다. 젖은 우산을 바깥으로 탈탈 털어낸 뒤, 야무지게 끈을 돌려 묶어 정리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연습실의 좁은 복도를 지나 안무연습실을 보니 여러 연습생들이 노래에 맞춰 연습하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연습생들의 얼굴이 다소 붉은 게 꽤 오랜 시간 연습을 했던 것 같았다. 나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자리를 떠나려다 걸음을 멈췄다. 연습생 무리의 가장 왼쪽에 서서 격한 안무를 추고 있는 종철이 보인 탓이었다. 만남의 시작은 좋지 않았지만, 대화를 통해 종철의 악의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고, 나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확인하며 헤어졌었다. 그 이후에는 따로 만난 적이 없었고, 단유 본인의 일도 겹친 탓에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기왕에 얼굴을 보니 호기심이 생겼다. 오랜 연습 기간도 그렇지만, 재능이 없는 수준은 아닌 것 같았다. 춤을 모르는 단유가 보기에도 꽤 잘 춘다. 하지만 그런 춤보다 단유의 관심을 끈 것은 그의 눈빛이었다. 저렇게 진지한 눈빛으로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니 없던 열정도 생길 것 같다. 저렇게 진지하고 열정적인 사람이 그때는 왜 그랬을까? 그가 말한 대로, 기약 없는 데뷔와 불투명한 미래가 그의 열정을 깎고 순수했던 마음을 검게 물들였던 것일까? 어쩌면 종철의 그런 모습은 단지 그에 국한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미래가 보이지 않으며, 노력의 결과가 자신의 기대와 다르다면 누구라도 ‘종철’처럼 변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기다림이 ‘희망’이지만 때로는 기다림이 ‘절망’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단유라고 다를까. 어쩌면 단유는 ‘종철’의 절차를 미리 짐작하고 두려워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종철이 단유에겐 가까운 미래의 자신처럼 보였을지도. 그런 의미에서 종철이 단유를 만난 건 다행이었고, 단유와의 대화를 통해 현재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그는 다시 ‘노력’할 마음을 갖게 되었고, ‘정열’을 되찾았다. “여기서 뭐 해?” 단유가 뒤돌아보니 나윤이 물통을 든 채로 미소 짓고 있었다. “아.” “언제 왔어?” “조금 전에요. 놀라게 해 주려고 했는데 들켜버렸네요.” 단유의 대답에 나윤이 방긋 웃었다. “어머, 그랬어요? 그럼 모른 척할 걸 그랬네?”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오늘 시험이라고 하지 않았어?” “네. 시험 마치고 바로 온 거예요.” “나 보고 싶어서?” “네.” 단유의 당당함에 나윤은 기분이 들떠 볼이 상기되었다. “물 마시려고요?” “아, 응. 노래 연습할 때는 물을 마셔야 하거든.” “줘요.” “아냐, 바로 저긴데 뭐.” “그럼 가요.” 정수기가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나윤이 물었다. “그런데 거긴 왜 보고 있었어? 나 찾고 있었던 거야?” “그것도 그렇지만, 종철 형이 춤추고 있길래 보고 있었어요.” “아, 종철 오빠. 춤 잘 추지?” “제가 춤을 잘 모르니까 섣부르게 말하긴 어렵지만, 멋있던데요?” “잘 추는 거야, 그게. 춤을 알든 모르든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단유는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459] 선물(3) 나윤과 저녁을 먹은 후 집으로 돌아오니 호빵이 달려 나와 단유를 반겨주었다. “밥 먹었어?” 호빵의 집 앞을 보니 깨끗하게 비워진 밥그릇이 보였다. 그래도 혹시 몰라 명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밥 주고 나왔어.] “넌? 밥 먹었어?” [응. 방금 먹었어. 아, 아줌마가 너 밥 먹었냐고 물어보시는데?] “나도 먹고 왔어.” [여자친구랑 밥 먹고 왔대요.] 명수가 아주머니께 대답하는 소리에 단유는 웃음을 흘렸다. “넌 안 들어와?” [조금 있다가. 아주머니가 과일도 먹고 가라고 하셔서.] 역시 위‘대’한 식충이다. “폐 끼치지 말고 얼른 돌아와서 공부해. 아직 시험 안 끝났잖아?” [알았어. 금방 돌아갈게.] 단유는 통화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섰다. 깔끔하게 정리된 방에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았다. 종일 잔 비를 맞은 동복 상의는 현관 밖에서 손으로 툭툭 턴 뒤에 옷걸이에 걸어 벽에 걸어 두었다. 저녁이라 다른 집에 소음이 될까 봐 청소기는 돌리지 못하고 대신 걸레로 바닥을 훔쳤다. 예전엔 단유가 움직이는 대로 졸졸 따라와 털들을 날리던 호빵은, 그동안 교육이 되어서인지 자기 방석 위에 눌러앉아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저 졸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거실과 방을 구석구석 닦고 나니, 등에 땀이 맺힐 정도다. 그제야 단유는 샤워를 했다. 집 청소와 샤워를 모두 끝냈더니 몸과 마음이 개운하다. 그제야 단유는 책상에 앉아 책을 펼치고 공부를 시작했다. ‘네 가지의 동위 원소. …지구 중량의 32.07%. 체심 입방정계 결정구조를 가지고 96.1 nΩ·m의 전기저항률을 보인다. 녹는 점은 1811K, 끓는 점은 3134K. 하지만 순철은 726℃, 910℃, 1400℃에서 각각 변태가 일어난다.’ 물론 시험에는 절대 나오지 않을 내용이다. 하지만 단유는 지난 경험들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면 그저 암기에 불과하겠으나, 어설프게나마 실험을 거듭하며 철의 물질 변화를 눈으로 보고 기록했던 경험에 의해 입체적인 지식으로 변화되었다. 사실 그때의 경험을 그대로 묻어버리기엔 아깝다는 것도 공부의 한 원인이다. 얼마 후, 명수가 돌아왔다. 과일만 먹고 왔다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아마도 상미와 수다를 떨다가 온 모양인데, 괜히 아주머니께 미안했다. 상미의 경우, 시험이 다음 주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유롭게 놀고 있을 처지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단유는 명수와 두 시간 정도를 같이 공부했다. 물론 시험을 대비한 공부였고, 단유가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점검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단유가 짚어준 것만 외워도 시험의 반은 거뜬히 맞출 수 있음을 알기에 명수는 암기하려고 노력했다. 명수는 축구부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면서, 다시 말해 중학교에 올라오면서부터 공부보다 운동에 더 많은 신경을 쓰긴 했다. 물론 장난이지만, 지태가 명수를 놀리듯 무식하다고 한 말이 전혀 사실과 다른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공부에 손을 뗀 건 아니었다. 적어도 단유와 함께 할 때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사실 학교 선생님들보다 더 알아듣기 쉽다고 여길 만큼 단유가 설명을 잘해준 것도 있지만, 단유가 없는 시간도 쪼개서 자신을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명수는 단유보다 훨씬 ‘책임감’이 강한 친구였다. 적어도 명수는 단유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하니까. 물론 시험 기간이라는 조건부 상황에서다. **** 겨울비는 오래 가지 않았다. 겨울비가 멈추자 거짓말처럼 날이 따뜻해졌다. 뉴스에서는 이상 기온이라고 했고, 누구는 ‘지랄 맞은 날씨’라고 평했다. “도대체 뭘 입고 다니란 소리야?” 아침을 먹던 하은이 투덜거렸다. ‘날씨’에서 시작된 투덜거림은 ‘패션의 고민’을 지나 ‘온난화 문제’를 거쳐 ‘국가의 역학 관계’에까지 이어졌다. 오랜만에 하은의 수다가 이어지던 중 명수가 물었다. “그래서 이 날씨가 미국 때문이에요?” 모처럼 하은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던 명수의 질문에 하은은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단유에게 시선을 옮겼다. “오늘이 시험 마지막 날이지?” “네.” “끝나고 집에 바로 올 거니?” “아니요!” 명수가 대뜸 외쳤다. 마치 억울한 조서에 항의하는 변호사에 빙의한 듯한 모습이었다. “당연히 시험 뒤풀이를 해야죠.” 하은은 얕은 숨을 내쉰 뒤, 마침 준비해뒀다는 듯 옆에 둔 지갑을 들어 펼쳤다. 단유에게 돈을 건네며 ‘이걸로 써’라고 말하니, 역시나 명수가 ‘왜 단유만 줘요’라고 항의했다. “괜찮아요, 선생님.” 아르바이트를 할 때 벌었던 돈이 남아 있던 단유의 사양에, “선생님이 주는 용돈은 그냥 써도 돼.” 나중에 돈 벌면 그때 써, 라며 지갑을 닫는 하은이었다. 용돈은 단순히 부모가 자녀에게, 어른이 아이에게 군것질이나 하라고 주는 의미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용돈이 자녀의 경제 개념을 키우기 위한 교육적 용도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용돈의 그 이면에는 관계를 정립하는 목적도 숨어 있다. 요컨대 용돈을 주는 이와 받는 이 사이에 상하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친구나 동등한 관계에서는 용돈이란 게 있을 수 없듯이 말이다. 하은이 ‘내가 너희들을 보호한다’, 혹은 ‘내가 너희를 돌보는 책임자’라는 의미를 용돈에 부여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런 무의식은 분명 존재했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면, 하은은 용돈을 통해 자기 존재의 의미, 이 집에서의 위치를 증명하려는 셈이다. ‘무슨 생각이람.’ 단유는 피식 웃으며 하은의 용돈을 받아 챙겼다. “고맙습니다. 아껴 쓸게요.” 망상이든 뭐든, 하은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쭉 단유와 명수에게 ‘선생님’일 테니까. **** 시험이 끝난 뒤, 떠들썩한 교실에서 도하가 가방을 챙기다 물었다. “어딜 갈 거야?” “아직 안 정했는데? 명수나 지태가 정하겠지.” 지난번에 한 번 어울린 뒤부터 도하도 종종 단유의 무리에 끼어 놀기 시작했다. 오늘도 시험 뒤풀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미리 어딜 갈 건지 물은 것이다.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 “아니.” 예전의 도하는 무리를 이끄는 대장 역할을 했었다. 물론 그 무리가 ‘불량한’ 무리였고, 도하가 ‘불량함’의 끝판왕 격이었다는 것은 모두가 안다. 하지만 지금의 도하는 ‘평범하게’ 놀고 즐기는 문화를 배우는 중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도하는 주위 사람들의 영향을 크게 받는 중이었다. 단유의 역할이 컸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 사건’ 이후의 도하는 점점 변했고, 지금은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많이 받아 예전의 모습은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개심(改心) 초기의 나른함과 어딘가 모르게 위험해 보이던 느낌도 사라져서, 이제는 흔하디 흔한, 중학생의 전형(典型)을 보는 것 같았다. 약간은 소심하고 엉뚱한 소년이랄까? “시험 잘 봤지?” “뭐, 어느 정도는?” “그럼 오늘은 네가 쏘는 거네?” 맥락 없이 이어지는 대화는 여전했지만. 그래도 그런 점을 제외하고 보면, 단유는 인간관계에도 ‘관성’이 있음을 느꼈다. 관성은 단순히 물리학에만 적용되는 힘의 성질이 아니었다. 종종 사람들이 말하듯 역사에도 관성이 있었고, 인간관계에도 관성이 있었다. 관성으로 흘러가는 인간관계는, 만약 그 방향이 옳은 방향이라면 계속 흘러가도록 두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만약 옳지 못한 방향이라고 생각된다면, 브레이크를 밟기보다는 핸들을 움직여 방향을 틀어 보는 것이 좋겠다. 갑작스러운 브레이크는 사고가 날 가능성이 있으니까. ‘오늘 아침부터 왜 이럴까?’ 단유는 머릿속을 파고드는 온갖 잡다한 생각에 관자놀이를 짚었다. “왜? 어디 아파?” 도하의 물음에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괜찮아.”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짓자, 도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진짜 변한 거 같아.” “내가?” 오히려 변한 건 너라고. “병원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됐잖아? 무리다 싶으면 집에 가서 쉬어.” “괜찮아. …만약 내가 집에 가면 넌? 너도 그냥 집에 가게?” “아니? 니가 아픈 거지, 다른 애들이 아픈 게 아니잖아? 걔들이랑 놀아야지. 걔들도 그렇게 생각할걸?” 괜히 얄밉다. “아파? 그럼 집에 먼저 들어가.” “그래. 너무 무리하지 마.” “아, 그렇네. 병원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머리를 많이 써서 아픈 거네. 그렇지?” 명수, 채윤, 지태가 한 마디씩 건넸다. 그리고 도하와 함께 어디서 무엇을 하며 놀까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도하의 예상과 한 치의 오차가 없다. “섭섭하지만, 너희들이 날 이렇게 걱정해주니 고맙네. 그럼 나 먼저 갈게.” “진짜 가게?” “삐졌어?” “저래 놓고 여자친구 만나러 가는 거 아냐?” “그저께도 만났다며?” “아주 빠졌네, 빠졌어.” “여자친구랑 뭐·하·고 놀까?” “그야 당연히, 으흐흐.” “얼레리 꼴레리?” 아주 신이 났다. 결론적으로 단유는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단순하지만, 단유에게는 하은에게 받은 용돈이 있었고, 아이들은 단유를 극진히 모셨다. **** 최근 회사에서 다시 레슨을 받도록 한 탓에 바쁘게 시간을 보내는 중인 나윤은 새롭게 배정된 팀장과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다. 새로운 팀장은 여자였는데, 목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짧은 커트머리를 해서 마치 잘 생긴 남자를 보는 기분이었다. “헤어졌니?” 성격도 남자 같은 부분이 있어, 털털함을 넘어서 꽤 직설적이고 말을 강하게 하는 스타일이었다. “…아니요.” 나윤은 여태 만났던 매니저들 중 가장 기가 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걸크러쉬? 그냥 크러쉬다. “앞으로 본격적인 연예 활동하려면 인간관계부터 정리해. 이건 그냥 소문이 나고 마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야.” 나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손톱 끝의 굳은 살을 잡아 뜯었다. “손!” 팀장의 한 마디에 바로 손을 뗐다. “만약 예능 프로에 게스트로 나갔다가 그런 짓 하는 게 카메라에 잡히면 어떤 소릴 들을 것 같아? 평소에 습관 제대로 고쳐놓지 않으면, PD들한테도 혼나. 너만 욕먹는 게 아니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고 우리도 욕먹어. 알겠니? 자세 똑바로 하고 앉아. 허리 펴고.” 혼이 나는 와중에도 자세 교정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 연애는 상대한테도 피해를 주는 거야. 앞으로 얼마나 바빠지겠니? 그런데 제대로 만날 틈도 없는데 관계가 계속 되겠어? 넌 뭐라고 할 건데? 내가 바쁘니까 기다려 달라고 말할래? 스케줄 있으니까 나중에 보자고? 그러다가 니가 한가하면 부르고? 걔는 무슨 잘못이 있어서 네 스케줄에 맞춰서 움직여야겠니? 걔도 걔 생활이 있을 텐데, 너랑 맞출 수 있겠어? 진심으로 상대를 생각한다면, 여기서 헤어지는 게 맞아. 그리고 넌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일에만 집중해야 하고.” 틀린 말은 없다. 틀린 말이 아닌 걸 아니까 더 항변하지도 못하겠다. 고개를 들었지만 차마 시선은 마주 보기 어려워 아래로 내리깔고 있는 나윤이었다. “지금 마음 아픈 거? 나중에 다 보상돼. 너, 성공해야 하잖아? 너희 어머니 고생하신다며? 이제 행복하게 해드려야지? 니 나이 또래 애들 중에서 너처럼 기회 가진 애들이 많던? 없잖아? 그럼 더 열심히 할 생각을 해야지, 생각이 한쪽으로 빠져서 무슨 일을 하겠니?” 눈물이 찔끔 나오는데, 차마 손을 들어 훔쳐내지를 못하겠다. 나윤은 눈을 깜빡깜빡, 하며 눈물을 참으려 했다. 어머니 생각, 단유 생각에 머리가 혼란스럽다. “나윤아. 우리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내가 뭐 이 세상에 반은 남자다, 그러니? 이 남자 아니라도 만날 남자 있다, 그러니? 나도 알아. 니가 얼마나 그 애를 좋아하는지, 지난번에 봐서 알잖아.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거야. 넌 이미 대중에게 인정받은 가수야. 성공 가능성이 있는 가수라고. 네 꿈, 네 재능이 모두 그걸 입증했어. 그러니 독하게 마음먹어야 돼.” 나윤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끝내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눈에서 툭 떨어진다. ======================================= [460] 선물(4) 단유는 핸드폰을 바라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최근 나윤이 컴백 때문에 바쁘다는 사실은 이미 들은 바가 있었다. 그래서 연락이 조금 뜸해지긴 했어도 이해를 했다. 그 때문에 지난 번에도 단유가 먼저 연락 없이 찾아가서 놀라게 해주려 했던 거였고. ‘무슨 의미일까?’ 한참 레슨 때문에 바쁠 시간이라, 전화는커녕 문자도 제대로 보내기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일 만나자’는 단문 메시지가 도착했다. 어차피 내일은 토요일이라 시간도 여유로워서 한 번 찾아가 볼까 생각 중이긴 했다. 핸드폰은 확실히 커뮤니케이션의 획기적인 변화를 불러온 도구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이 단지 언어의 전달과 교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표정, 눈빛, 행동들이 모두 커뮤니케이션에 포함된다. 즉 핸드폰이나 전화를 통한 의사전달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지금과 같은 경우에도, ‘내일 만나자’는 단순한 메시지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것은 단순히 ‘만남’을 약속하자는 것인지, 만남을 전제로 숨은 이야기가 있는 것인지를 확인할 수 없기 때…. ‘나 정말 왜 이러지.’ 단유는 핸드폰을 책상 위에 엎어 놓고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만약 담당의가 단유의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후유증이 남은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며 MRI 기계 속으로 집어넣으려 했을 게 분명하다. 단유는 평소와 비슷한 차림에 두꺼운 패딩 점퍼만 걸치고 거리로 나섰다. 2주 후가 크리스마스였지만, 언젠가부터 거리에는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분위기가 사라졌다. 아주 어릴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이맘때 선생님의 차를 타고 이동하다 보면 거리에서 흥겨운 캐럴(carol)과 다양한 색의 램프들이 상점들을 수놓았던 기억이 있었다. 너무 유난스러운 것도 하루 이틀이면 모를까, 몇 주간 계속되면 싫증이 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사라진 거리는 어딘지 아쉬움을 남긴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지하철에도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사라졌을지 몰라도 연말 분위기란 게 있는지 어딘지 모르게 들떠있고 분주한 느낌이다. 희로애락이 느껴지지 않는 아줌마들과 목적 없는 시선을 이리저리 던지는 넥타이들 사이에서 알콩달콩하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젊은 연인들이 보인다. 손가락이 왔다 갔다 하며 서로의 볼을 찌르고 잡은 손을 엎치락뒤치락하기도 한다. 어떤 커플은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대어 온기를 나누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은 못 본 척하기도 하고, 혹은 힐끔 훔쳐보기도 한다. 어쩌면 단유의 시선도 그런 훔쳐보는 시선들 속에 섞여 있을 것이다. 단유는 자신이 왜 그 모습들을 보며 관찰하는 것인지 물었다. 그저 눈에 들어와서? 아니면 그런 모습들을 보고 배우려고? 그래서 나중에 나윤과 함께 있을 때 저런 모습을 해 보려고? 확실히 사랑에 빠진 이의 눈은 아름답다. 그저 웃는 것일 뿐인데도 사랑이 담긴 눈은 뭔가 형언할 수 없는 에너지를 전하는 것 같다. 단유는 남자 친구를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여자를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사랑이 뭐길래.’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런 도움도 안 될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시간이 아깝다. 차라리 그 시간에 어젯밤 공부했던 ‘철의 결정구조 변화’에 대해 한 번 더 점검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본인이 생각해도 다시 돌아온 단유는 이전과 달라졌다. 이전에도 생각을 많이 하긴 했지만, 이렇게 뭔가를 끊임없이 분석하려고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니 안 했다. 비록 주위를 경계하거나 관찰하긴 했어도 시간의 대부분은 자기 공부를 위해 할애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좀처럼 집중을 못 하고, 오히려 ‘산만’하다고 느껴질 만큼 주변의 행동들을 분석하고 해석하려 한다. 왜? 마침 내려야 할 역이어서 단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릴 문 앞에 서서 열리길 기다렸다. 지하철이 역내에 들어서며 서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단유의 옆에는 분홍빛 기운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젊은 연인들이 섰다. “뭐 먹지?” “뭐 먹고 싶은데?” “난 자기가 먹고 싶은 거면 다 좋은데.” “나도.” “분식 먹을까?” “떡볶이?” “응.” “그건 나중에.” “그럼 양식?” “스테이크?” “스테이크도 좋고, 뭐 생각나는 거 없어?” “양식은 별로 안 당기는데.” 저런 면에서는 나윤이 낫다. 나윤은 적어도 먹을 거로 밀당은 하지 않더라. 단유는 고민에 빠진 남자의 얼굴을 반사되는 유리창을 통해 확인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토요일에 날씨도 좋으니 사람들이 많이 거리로 나선 듯 보였다. 한겨울이 아니라서 두꺼운 패딩은 못 입겠다던 하은의 말이 무색하게 대부분 사람들의 옷차림은 겨울의 한가운데였다. 물론 그때 이후로 점점 기온이 떨어진 탓도 있지만, 오늘은 유난히 차가운 날씨라 가만히 있어도 볼이 바람에 갈라지는 기분이었다. 이런 날씨니 연인들은 더욱 밀착해서 붙어 다녔다. 심지어는 저렇게 안고 있어서야 어디 걸을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연습실로 향하던 단유가 핸드폰을 들었다. [왔어?] 보컬 연습실 안에 있었는지 약간 울림이 느껴졌다. “네.” [금방 나갈게.] “네.” 전화는 바로 끊어졌다.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주머니에 다시 챙겨 넣고 연습실 입구로 걸어갔다. 도착할 무렵 지하에서 올라오는 나윤이 보였다. “춥지 않아요?” 무릎까지 내려오는 패딩이었지만 그 아래로는 맨다리가 훤히 드러난다. “조금 춥네.” 패딩을 여미는 나윤이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물었다. “어디 가서 이야…아니다. 밥 먹었니?” 단유는 문득 조금 전의 일이 생각났다. “먹어야죠.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나? 나야 아무거나 상관없지.” “그럼….” “저기 가자.” 한 손은 패딩 호주머니에 넣은 채 다른 한 손으로 방향을 가리켜 보이는 나윤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조급함이 엿보이는 그녀의 손가락이 향한 곳에는 자주 가던 분식집이 있었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두 사람은 볶음밥을 시켰다. 기다리는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는데, 단유는 그 침묵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건 잘도 분석하더만.’ 단유는 속으로 혀를 차며 앞에 놓인 물잔을 들어 입을 축였다. 나윤도 다를 바가 없었는데, 다만 나윤의 표정은 초조해 보이기도 했다. “오늘 춥지?” “네, 비 온 뒤로 계속 기온이 떨어지네요. 오늘 뉴스 보니까 내일은 더 추울 수도 있다고 하던데요.” “그렇구나.” “누난 감기 조심하셔야겠어요. 목 상하면 안 되잖아요?” “그래.” 형식적으로 날씨 이야기를 꺼낸 뒤로는 달리 건넬 말이 없었던 것일까. 나윤은 몇 번이고 분식집 주방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배가 너무 고파서 그런 것은 아닐 테니 의도적으로 단유의 시선을 피하는 것일 테다. 이쯤 되면 아무리 단유라도 이상함을 못 느낄 수 없다. “하아.” 단유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불현듯 단유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최근 자신이 벌인 기행의 이유였다. ‘감정을 따라가기가 힘든 거였구나.’ 누군가와 가까워진다는 것은 그저 친밀감을 표현하는 정도의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그 사람이 표현하는, 혹은 내색하지 않는 온갖 감정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 늘 한결같지는 않다. 슬픔이 가득한 장례식에 가서도 우스운 장면을 보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마는 것이 사람이고, 치열한 공방전이 오가는 야구장에서 주위 사람들과 함께 응원 도구를 흔들며 즐기다가도 모종의 이유로―부고(訃告) 연락을 받았다거나, 연인에게서 헤어지자는 소리를 들었다거나―슬퍼지기도 하는 것이 사람이다. ‘감정의 롤러코스터’란 게 단순히 조울증 환자를 수식할 때만 쓰이는 것은 아니리라. 그런 의미에서 단유는 이전에는 느끼지 못하던 감정의 격류에 혼란스러웠다. 이전에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느껴지는 감정의 깊이가 다르달까? 단유 본인의 마음가짐이 변하면서 주위 사람들을 대하는 단유의 행동에 변화가 생긴 탓이겠지만, 익숙하지 않은 감정들을 체감하면서 단유는 혼란스러웠고, 그래서 단유는 감정들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타인의 감정이 어색하고 낯선 게 아니라 단유 본인이 체감하는 감정이 낯선 이유였다. 그래서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이성적’으로 감정을 분석하고 해석한 것이다. 지난 며칠간 단유가 주위 사람들을 보며 가졌던 다양한 생각들은 바로 그 감정을 ‘이해’해 보려던 단유 만의 프로세스였던 셈이다. 그리고 지금, 그녀에게서 혼란, 슬픔, 안타까움과 같은 감정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감정과 마주한 본인에게서도 해석하기 힘든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나윤은 단유의 한숨에 깜짝 놀랐다. 줄곧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 더 가슴 아파하고 있던 찰나였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한숨과 함께 일그러지는 단유의 얼굴. “왜? 왜 그래?” 단유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다. “아파? 아프니?” 병원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단유였다. 그걸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나윤은 자신을 책망하며 단유의 안색을 살폈다. 단유는 감정과 생각을 수습한 뒤,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많이 힘들면 말해. 너, 아직 몸조심해야 하잖아?” “안 그래요. 말했잖아요? 그냥 깊이 잠들었을 뿐이라고.” “그래도….” 나윤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단유를 바라볼 때, 주문한 요리가 나왔다. “먹죠?” 단유가 싱긋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하지만 나윤은 쉽게 숟가락을 들기가 어려웠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 나윤은 단유에게 ‘이야기’를 꺼내려 했다. 솔직히 그 ‘이야기’가 단유에게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킬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좋아할 수도 있고, 슬퍼할 수도 있다. 화를 낼지도 모르고, 기다렸다는 듯 쉽게 동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단유가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든 격한 반응이 나올 만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나윤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수저를 들었다. 식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연습실로 돌아왔다. 이제는 예전처럼 밖으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처지가 아닌 나윤이었다. 좁은 보컬 연습실에서, 어색한 침묵 속에 마주 앉았다. 나윤이야 할 말이 있어도 하기가 어렵고, 단유는 나윤이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아니까 먼저 무슨 말을 꺼내기가 곤란했다. “여기 춥지?” 나윤이 어렵게 꺼낸 말에 단유가 두리번거리며 보다가 말했다. “아뇨, 괜찮은데요. 그래도 누난 여기서 연습하려면 그 패딩 입고 해야겠어요.” “응. 그렇긴 한데 또 오래 있다 보면 더워져서 벗었다 입었다 하면서 해.” 아무 의미가 없는 이야기가 오갔다. “누나.” “응?” 나윤의 눈이 불안감에 흔들리고 있었다. “할 말 있으면 해요.” “응?” “우리 그러기로 했잖아요. 고민이든 뭐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생각하자고.” 나윤은 단유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전혀 모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유가 공부는 잘할지 몰라도 이성 관계는 잘 모르는 경향이 있지 않았던가. 나윤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어떤 선택을 해야 옳은 것인지, 자신도 아직 판단을 내리지 못한 상황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모르겠다. “무슨 일 있어요?” 결국 단유가 먼저 물었다. 나윤은 눈을 꼭 감았다. ======================================= [461] 선물(5) 나윤은 선택을 했다. “우리 있잖아.” “네.” 나윤이 고개를 들어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의 눈은 한없이 고요하다. 나윤은 고요한 호수, 라는 식상한 수식어를 떠올리며 그 호수에 돌을 집어 던져야 하는 자신의 파렴치함을 욕했다. “헤어져야 할 거 같아.” “왜요?” 아, 이건 생각 못 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나, ‘그래요, 우리 헤어져요’같은 반응을 예상했는데. 단유는 마치 1 더하기 1은 2가 아니라는 말에 ‘왜’라고 묻는 것처럼 호기심을 드러낼 뿐이었다. 흔들리지 않는 눈빛, 어쩐지 섭섭하다고 해야 할까? 사실 나윤이 속으로 얼마나 많은 시나리오를 쓰고 지웠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때마다 단유의 대답을 상상하며 혼자 기뻐하고 슬퍼하고 눈물짓고 웃었다. 만약 자신이 헤어지자고 했을 때, 단유가 옳다구나 하면서 받아들이면 기쁘면서도 슬플 것이다. 단유에게 상처를 주지 않은 것 같아 기쁠 것이고, 그가 자신을 그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 슬플 것이다. 반대로 헤어지잔 말에 단유가 화를 내면 슬프면서도 기쁠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자신이 이기적인 여자라는 증명밖에 되질 않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왜’라는 물음에 어떻게 대답할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솔직하게 회사에서 헤어지라고 해서, 라고 해야 하나? 그러면 어쩐지 이별의 이유를 남한테 돌림으로서 면피를 하려는 것 같이 보일까 봐 걱정이다. 그렇다고 다른 말로 돌리기엔, 나윤의 감정이 아직 혼란스럽다. 헤어지고 싶냐고? 당연히 헤어지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제 나 컴백하면 일에 집중해야 하는데, 그럼 너한테 소홀하게 할 게 뻔해. 내 마음 같지 않게 너한테 짜증을 낼 수도 있고, 자주 만나지도 못할 거야. 그러면 너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타당성이 있네요.” ‘타당성’? 마치 논술 시험 평가를 받는 기분이라 괜히 울컥한다. “그리고 연예인의 연애가 사회적으로 어떤 평가 받는지 알잖아? 특히 난 이제 갓 데뷔한 건데, 처음부터 구설에 오르면 성공하기가 힘들어.” 괜히 욱한 마음에 이기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일단 지르고 보는 나윤이었다. 단유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렇죠. 솔직히 말해서 ‘연예인의 연애’나 ‘사생활’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악성 댓글을 당해본 경험은 있으니까 뭘 걱정하시는 건지는 알 것 같아요.” 나윤도 당해본 적 없는 악성 댓글 테러를 단유는 이미 받은 적이 있다. 그것도 두 번이나. “그래. 그래서…우리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아.” ‘헤어지는 게’라는 말에 악센트를 집어넣은 나윤의 말에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쉽게 고개를 끄덕이는 거 아냐? 상상만하던 모습을 눈으로 보고 있으려니 더 가슴이 아프다. 그런데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는다. 다만 나윤의 눈을 계속 쳐다볼 뿐이었다. 나윤은 시선을 피해 연습실의 벽을 쳐다보았다. 방음을 위해 설치한 흡음재(wedge)가 기하학무늬를 이루고 있어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괜히 어지럽다. 단유의 침묵이 계속될수록 나윤의 가슴 속에는 불안감과 동시에 기대감이 커가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누나와 저의 연애를 계속하긴 어렵다는 거죠?” 나윤이 언급했던 핑계들이 ‘현실적’이란 한 단어로 축약되었다. “…그래.” “어렵네요.” 나윤이 돌아보았다. “제가 요즘 예전에 못 느끼던 감정들이 느껴져서 조금 힘들거든요.” 단유가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고백하자면, 예전에는, 그러니까 제가 ‘깊은 잠’에 들기 전에는요, 제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몰랐어요. 그러니까 기쁘고 슬프다는 1차원적인 감정을 제외하고는 복잡한 감정을 별로 느끼질 않았던 거 같아요.” ‘무슨 뜻이지? 설마 예전부터 날 사랑하지 않았다, 뭐 이런 소릴 하려고 그러는 걸까?’ 나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채 단유의 눈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그런데 잠에서 깨어난 후로는요, 저도 설명할 수 없는 제 감정 때문에 종종 혼란스러울 때가 있어요. 내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기쁜지, 슬픈지. 화가 나는 것인지, 침착한 것인지 모를 정도로요.” 방정식이 존재하고 미지수가 있다면 다른 방정식을 대입해서 미지수를 풀 수 있다. 감정의 미지수를 해석하기 위해 ‘이성적 분석’이라는 또 다른 방정식을 대입했던 이유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생각들이 다 우스운 게, 지금 이 상황이 되고 보니까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요.” “……?” “그냥 내 감정에 솔직하게 다가가면 되는 것을, 온갖 이유들을 가져다 붙이며 꾸미니까 더 알기 어려웠던 거예요. 상대의 말에만 귀를 기울일 게 아니라 감정에도 귀를 기울이는 방법이 따로 있는데 말이죠.…내가 무엇을 느끼는지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들어야 했어요.” 자조 섞인 웃음을 짓는 단유였다. 어리둥절해 하는 나윤을 위해 비유를 들어 보였다. “어쩌면 음악, 이란 게 그런 거일지도 모르겠네요. 성부(聲部)를 따지고 선율을 분석하는 행위가 음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음악을 감상하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죠.” 음악은 듣는 것이다. 듣는 행위 가운데에도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음악은 듣고 느끼는 것이다. 단유의 이야기는 바로 그 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윤도 동의했다. 노래를 연습할 때야 이것저것 따져가면서 기술적으로 부르긴 해도, 무대 위에선 ‘감정’을 실어서 부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묻는 거지만, 누난, 어때요?” “으응?” “누나가 언급한 이유들, 모두 이해 가능한 것들이에요. 하지만 제가 느끼는 감정의 혼란스러움이 비단 저만의 것은 아닌 거 같으니까요. 누나 역시 혼란스러워 보여서요.” 불안해 보이는 눈빛. 그 불안의 원인은 오롯이 나윤 내면에서 벌어지는 갈등에서 빚어진 것일 테다. 그리고 그것을 듣지 않고서는 나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 나윤도 많이 혼란스러웠다. 감정에 솔직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단유의 말은 나윤 역시 깊이 공감하는 바였다. 특히나 ‘가수’를 꿈꾸는 나윤이라면. 그리고 솔직히 말하건대, 나윤은 스스로의 감정과 선택을 여전히 헤아릴 수 없었다. “나, 난.” 나윤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단유는 나윤이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 방학이 되었다. 이전에도 많은 방학을 보냈고, 앞으로도 수십 번의, 아니 앞으로 남은 방학은 10번도 되지 않겠다. 아무튼 여러 번의 방학을 겪었음에도 이번 방학은 단유에게 남다르게 다가왔다. 어느 때보다 길고 험난했던 1년을 보낸 기분이었다. “넌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지태가 신기하다는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지태의 손에 들린 것은 단유의 성적표였다. “평소에 열심히 한 덕이겠지.” 명수가 단유를 대신해 대답했다. 그게 정답이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병원에 그렇게 오래 있다가 나와서는 대뜸 1등을 하냐? 시험공부 할 시간도 별로 없었는데.” “단유가 너 같은 줄 알아?” “아니, 넌 왜 계속 시비야?” “니가 먼저 시비를 걸었잖아!” “내가 무슨 시비를 걸어?” “내 거 보고 피식 웃은 거 내가 못 본 줄 알아?” “봤냐?” “와, 이런 뻔뻔한 새끼!” 두 사람이 또 옥신각신하며 길을 걷는 동안 단유는 지태에게서 성적표를 챙겨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방학도 했으니 오늘은 좀 길게 달려보자.” 지태의 의견에 이번에는 명수가 쉽게 또 동조한다. “당연하지! 오늘은 저녁까지 알뜰하게 챙겨 먹고 놀자고. 다들 집에 허락은 받아 놨지?” 솔직히 중학생들이 놀 만한 곳은 PC방, 노래방, 보드 게임방을 제외하곤 별로 없었다. 쇼핑하러 백화점을 갈 수도 없고, 남자들끼리 카페에 가서 수다를 떨 것도 아니고, 비싼 음식점이나 놀이동산도 남자들끼리 가는 것은 무리다. 아니 무리라기보다는 그냥 기피 지역이다. 동물원을 가는 것도 동물을 구경하러 가는 거지, 동물처럼 구경 받으려고 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다 보니 막상 놀고 싶다고 해도 딱히 놀 만한 곳이 없으니, 결국 갔던 곳에 또 가는 수밖에 없다. “저희 4명이요.” “지금 자리 다 찼는데.” 피시방 카운터에 있던 주인아저씨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이미 인근의 피시방들이 다 비슷한 처지이리라. 거리로 나와 뚜벅뚜벅 걸으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노래방 가자.” “다 차지 않았을까?” 다 찼다. 두 군데를 더 돌아다녔지만, 들어갈 곳이 없었다. “아니 왜 다들 집에 안 가고 그래?” 지태가 투덜거렸지만,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영화 보러 갈래?” “요즘 볼 만한 영화 있나?” “가보면 있지 않을까?” 결론만 말해서 단유, 명수, 지태, 채윤, 도하까지 다섯 사람은 복잡한 도심 한가운데에서 정처 없이 떠돌며 시간만 보냈다. “이렇게 놀 데가 없나?” 계속 걷는 것도 힘들어 영화관 근처의 벤치에 사내아이 다섯이 주르르 앉아 있으니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이 머물다 떠난다.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오죽하면 채윤이 그런 이야기를 할까 싶다. “어른들은 이럴 때 어딜 갈까? 어른들은 갈 데가 많겠지?” “당연하지. 술집도 갈 수 있고, 19금 영화도 볼 수 있고.” “여자친구랑 모텔도 갈 수 있고?” “에이, 음란 마귀 같은 새끼.” “아, 전에 TV 보니까 방탈출 카페인가? 뭐 그런 거 있던데 거기 가볼까?” “이 근처에 있나?” 그 사이 핸드폰으로 검색하던 지태가 금방 가까운 곳에 만들어진 카페를 하나 찾았다. 대부분은 신촌, 홍대 쪽이었는데, 마침 이곳 근처에도 한 군데가 있었다. “예약했니?” “아니요.” “원래 예약 안 하면 하기 힘든데, 지금은 방이 남으니까 들어가게 해줄게. 대신 앞으로는 예약해야 할 수 있어.” “얼마에요?” 방마다 다르지만, 가장 싼 방은 한 시간에 18,000원이었다. “중학생이라고 했지? 중학생은 3천 원 할인해서 15,000원이야.” 명수는 표정관리가 힘들 정도로 당황한 눈치였다. 피시방에서 종일 놀면서 저녁까지 챙겨 먹어도 만 원이 될까 말까인데, 한 시간에 15,000원이라면 감당하기 힘든 금액이었다. “주세요.” 단유가 체크카드를 내밀었다. “야!” 명수와 채윤이 단유를 붙잡았다. “괜찮아. 이럴 때 쓰려고 번 건데.” 달리 돈 쓸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계산하고 들어간 방에서 아이들은 한 마디씩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지만, 단유는 괜찮다고 손을 저었다. “한번 해보자고. 이게 그렇게 유명하다며?” 잘 꾸며진 방안을 쳐다보며 단유가 물었다. “아저씨, 이거 빨리 깨면 무슨 혜택 있어요?” 명수가 문을 닫던 알바생에게 물었다. 겉보기에 대학생 정도밖에 되지 않아 보여 ‘아저씨’라고 부르기 미안했지만, 자주 듣는 이야기였는지 알바생은 아무렇지 않게 명수의 질문에 답했다. “없어요.” 그리고 문을 닫아버렸다. 불친절하다고 불평할 틈도 없었다. “여기서 방을 뒤져서 힌트 찾고, 다음 방으로 이동하면 된다는데.” 아이들은 처음 마주한 방의 분위기에 어색해하면서도 이것저것 뒤지기 시작했다. 단유는 방 가운데서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며 살폈다.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게 분명했다. 깨끗한 도배지와 사람 손이 많이 닿지 않은 티가 나는 방이었다. 명수와 지태가 지금 보는 모습처럼 방을 뒤지듯 한 시간마다 손님들이 들락거리며 방을 뒤졌다면, 아무리 관리를 잘해도 방에 사람의 흔적이 남을 테니까. 벽에 걸린 액자와 고풍스러운 느낌이 나는 서랍장, 책장, 절묘한 위치에 놓인 소파 등이 적절히 동선을 가리면서 사람들이 쉽게 주변을 훑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이것도 나름 수를 쓴 것일 테다. 문제를 어렵게 하든, 문제를 쉽게 풀지 못하게 막든 결국 방탈출을 방해하는 요소일 테니까. “안 해?” 지태가 서랍장을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뒤지면서 물었다. “해도 돼?” “무슨 말이야? 니가 돈 내놓고 무슨 허락을 받아?” “그럼 저기 저 액자 밀어봐.” “여기? 어, 번호판이네?” “920317 눌러봐.” “어? 너 여기 와봤어?” “아니.” “그런데 어떻게 알아?” “저기 저 벽에 그려진 그림은 저기 지도의 좌표랑 매치가 되잖아. 그리고 그 좌표를 저 책장의 책들 순서대로 배열해서 읽게 되어 있잖아. 그럼 간단하게 나오지.” “…그게 간단해?” “뭐, 그냥 잘 관찰만 하면 보이는걸?” 틀린 걸 찾는 건 이렇게 잘한다. 그냥 보면 보이니까. 그런데 왜 사람 마음은 그렇게 잘 보이지 않는 걸까. 단유는 지태의 환호를 흘려 들으며 다음 방으로 이어진 문을 밀고 넘어갔다. 결국 방에 들어온 지 3분 만에 다음 방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4분 후에 또 다음 방으로 이동했고, 그다음 방에서는 약간의 조작이 필요한 곳이 있어 손이 몇 번 오가다 보니 시간이 걸려 5분이 걸렸다. 결국 30분도 되지 않아, 클리어되고 말았다. “시시하네.” 명수가 혀를 차며 말하니, 사장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희가 처음이라길래, 난이도가 낮은 곳을 추천해줬던 거야.” “그럼 높은 곳은 어딘데요?” 명수가 의기양양하게 쳐다보았다. ======================================= [462] 선물(6) 단유의 도움이 있긴 했지만, 나름의 요령을 터득한 친구들은 좀 더 높은 난이도에 도전했다. “넌 지켜보고만 있어. 우리가 힌트 달라고 하면 주고.” 명수는 탁자 위의 기묘한 문양의 퍼즐을 풀고, 지태는 서랍장에서 발견된 카드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다. 채윤은 시험관에 채워진 색색의 액체들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내기 위해 주변을 뒤졌다. 물론 단유는 시험관이 특정 숫자와 짝을 이루는 색을 의미한다는 것을 벽에 붙은 가족사진의 의상과 서열에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명수가 풀고 있는 퍼즐에 의해 만들어지는 홈에 시험관을 끼우고, 맞은 편에 생뚱맞게 서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켜서 벽에 빛이 비치도록, 그래서 글자가 드러나도록 하는 것임을 눈치챘다. 동시에 그 글자가 지태가 찾은 카드를 배열하는 힌트라는 것과, 그 카드에 의해 방을 탈출하는 있는 키 카드(Key card)의 위치가 나오리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안타까운 건, 그 위치가 너무 뻔해서 굳이 저런 힌트가 필요할까 싶을 뿐이었다. 다음 장소로 건너가기 위한 입구의 자물쇠가 키 카드로 열 수 있다는 것과 그 키 카드를 숨길만 한 장소가 의외로 뻔하다는 것이 단유가 추리할 수 있었던 요소였다. 그래서 방에 들어서자마자 고개를 몇 번 돌린 후, 천장에 붙은 조명의 위치를 둘러보다 어느 한 지점에서 손을 뻗어 벽에 붙은 장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 여기를 힘줘서 누르면 돌아가면서 카드가 나오는 구조이려나?’ 거기까지만 확인한 후, 단유는 뒤돌아서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명수가 풀고 있는 퍼즐은 기하학적 무늬가 그려진 그림을 맞추는 퍼즐이라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각 면의 다양한 선들이 다른 조각과 일치하는지를 일일이 맞춰보다가 보면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해서, 퍼즐을 맞추기 전에 인내심이 바닥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단유는 벽 아래 놓인 1인용 소파에 앉아서 아이들이 문제를 푸는 모습을 구경하며 딴생각에 잠겼다. 처음의 방은 명탐정이 범인의 실마리를 찾아서 조사하는 컨셉이었다면, 이번 방은 유명 과학자의 실험실에서 그가 남긴 보물을 찾는 컨셉이었다. ‘이게 재미있나?’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는지 입술이 삐죽 나온 명수나, 카드 주변에 힌트가 없을까 살피며 눈을 빛내는 지태, 시험관 주변을 뒤지다가 포기하고 다른 힌트를 찾기 시작한 채윤을 보며 단유는 궁금해했다. 왜 굳이 어려운 퀴즈를 만들어서 방을 탈출하게 하였을까? 퀴즈를 풀이하는 재미? 아니면 어려운 문제를 풀어서 얻는 성취감? 그런 것이라면 학교 수학 시험이 더 재미있지 않을까? 단유는 수학 올림피아드 준비를 할 때 문제집들을 풀면서 재미있다고 여겼던 과거의 기억을 잠시 떠올려보았다. 탈출이라는 요소에 초점을 맞춘다면, 단유는 오히려 지긋지긋하다. 감옥에서 탈출했고, 미친 마법사의 손아귀에서 탈출했고, 근위병과의 사투에서도 탈출했었다. 최근에는 3개월간 지구로 돌아오지 못하기도 했었고. “…….” 방탈출 카페는 단순한 유희(遊戲)를 위해 돈을 지불하고 스스로 미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굳이 따져서 범인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밀실에 갇혀야 이유도 없고, 유명 과학자의 유산을 얻기 위해 그의 실험실에 잠입해야 할 이유가 없다. 대마법사의 유지를 잇기 위해 그의 던전으로 잠입한다는 컨셉도 이유가 부족하지만, 유희를 위해 ‘허용 가능한’ 개연성 정도로 이해하고 말 일이다. “방 탈출 카페는 일종의 역할극이에요. 그러니 본인들이 진짜 탐정, 혹은 탐정의 조수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역할에 충실할 때 재미가 배가됩니다.” 카페 주인의 설명을 듣고 아이들은 나름 몰입해서 첫 번째 도전에 임했었다. 역할, 시대, 상황에 대한 가정은 결국 방 탈출카페의 테마에 몰입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그러니 아이들은 비록 이질적으로 꾸며진 방에 놓여 있어도 그것이 꾸며진 가짜라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러니 ‘허구’라는 상황을 전제한 상황에서 빈약한 설정 정도는 가볍게 무시하거나 인정하는 것이다. 반면, 단유에게 ‘저 세계’는 현실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이며, 자신이 본래 속했던 공간이다. 그래서 그곳의 실재(實在)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물론 지구도 마찬가지다. 지구는 단유의 이성적 관찰과 지성에 의해 실존이 증명된 세계다. 단유와 같은 경험을 겪지 않은 이가 없으니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지구를 허구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단유는 궁금했다. 과연 두 세계를 오갈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일까? 만약 자신뿐이라면 왜 자신만 두 세계를 오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일까? 그리고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일까? “모르겠다. 도와줘.” 명수와 지태가 단유를 향해 도움을 요청했다. 단유는 생각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유가 설명을 시작하자 금방 아이들은 이해를 했고, 2분도 안 되어 키 카드를 손에 쥐었다. “다음 방 고고!” 다들 신이 난 것이 분명한데, 왜 이게 재미있는지는 계속 고찰해봐야 할 것 같다. **** 크리스마스 전날이 되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궁금해하는 것이 있었다. “내일 눈이 내릴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궁금하면 날씨 뉴스라도 찾아봐.” 날씨에 안 맞게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는 이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연습생이었다. 3년 차 연습생이라는 그녀는 나윤과 동갑이었다. 나윤보다 6개월 정도 연습 기간이 더 길었으니 거의 동기라 봐도 무방하겠다. 다만 그녀는 에이 바운스가 아니라 다른 기획사에서 연습하다가 이번에 스카우트가 된 사례였다. “왔으면 좋겠다.” 나윤의 말에 그녀, 소영이 입술을 삐죽이며 수건을 뒤로 던졌다. 날아간 수건은 연습실 벽을 맞고 아래로 떨어지며 의자의 등받이에 교묘히 걸쳐졌다. “지금 눈이 문제니? 하루라도 빨리 호흡을 맞춰야 하는데, 이게 뭐야?” 다소 신경질적인 소영의 대답에 나윤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소영을 처음 만났을 때, ‘눈이 예쁜 친구’라는 첫인상이었다. “안녕. 나 임소영이야.” “정나윤이라고 해.” “알아. 데뷔한 것도 봤고. 노래 잘하더라.” “고마워.” “같이 하게 돼서 너무 기뻐, 행복해!” “…….” 나윤은 소영 대신 소영의 곁에 있던 팀장을 쳐다보았다. 팀장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자, 일단 두 사람 인사는 거기까지 하고 앞으로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을 알려줄게. 우선 새 노래는 지금 준비 중이니까 기다려야 돼.” 이전처럼 그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뭐가 이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윤은 그저 설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연초에 행사가 하나 있어. 그때 소영이 네가 새로 합류되었다는 걸 공식적으로 발표할 거야. 그러니까 그 전에 가디스R의 노래랑 안무 따는 데 집중해야 할 거야.” “자신 있어요. 몇 번 부르기도 해봤고요.” 그 말에 나윤이 놀라서 쳐다보았다. 다른 기획사 연습생들이 따라 할 정도였던가? 나윤의 시선을 느낀 소영이 나윤을 새침하게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좋은 노래라고 생각해서 연습하는 애들이 많았어. 특히 수련 언니 파트.” 나윤도 수련 못지않게 잘하긴 했지만, 역시나 가디스R의 메인은 수련이었다. 그러니 수련이 빠지고 난 뒤 활동을 아예 잇지 못했던 것이고. “아무튼 두 사람이 합을 잘 맞춰봐.” “네.” “그리고 행사에서 한 곡만 부를 수 없으니까, 다른 것도 할 줄 알아야겠지? 그래서 준비한 리스트야.” 팀장은 미리 준비해뒀던 리스트를 두 사람에게 건넸다. A4 종이에 빼곡히 적힌 리스트를 보며 나윤과 소영이 입을 벌릴 때, 팀장이 말했다. “나름 괜찮다고 생각한 히트곡들만 골라놓은 거야. 둘이 부르기에 적당한 거로. 나중에 보컬 선생님 오시면 테스트해서 5~6곡 정도를 고르고 안무 선생님이랑 다시 상의해서 3곡 정도로 추릴 거야. 알겠지?” “…네.” 앞으로 험난한 시간이 예상된다. 그리고 실제로 험난했다. 노래야 늘상 부르던 것인 데다, 행사용으로 AR버전만 녹음해놓으면 된다. 하지만 안무를 새롭게 준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노래에 비해 안무가 취약한 나윤에게는 더 어려웠다. “다시 맞추자.” “응.” 소영은 기가 막히게 춤을 잘 추는 아이였다. 춤선이 살아있다, 는 말이 이럴 때 쓴다는 걸 나윤은 처음 알았다. 아니 실제로 그 말을 입에 올린 게 처음이었다. 연습실에서 소영이 안무를 연습하던 걸 옆에서 거울로 지켜보며 한순간 동작을 놓치기까지 했던 나윤이었다. “시간 없다니까. 언제까지 넋 놓고 있을래?” 말하는 본새가 조금 얄밉기도 하지만, 딱히 악의가 없는 친구라는 걸 알게 되어서 나윤은 되레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사과할 뿐이었다. “미안.” 어떻게 보면 소영은 종철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지스탑 엔터테인먼트에서 브룸레이디로 데뷔할 뻔했다가 좌절한 뒤, 홀로 기다림의 시간을 가지다 의지가 꺾일 뻔했다고 소영이 털어놓았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났으면 아예 접었을지도 모른다고. 같은 출발선에 있었는데, 어느 순간 친구는 저 멀리 앞서나가고, 자신만 뒤처져서 머무는 듯한 느낌. 특히 브룸레이디가 잘 나갈 때는 그런 생각이 더 심했으리라. 그래서 이곳에 온 뒤, 조바심이 난 탓일까? 그런데 웃긴 건, 연습실을 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나윤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살갑게 군다는 점이었다. “나윤아, 먼저 씻을래?” “응? 아니, 너 먼저 씻어.” “그래도 돼?” “응.” 연습실에서만 인격이 바뀌는 것 같다. 처음에는 그게 잘 적응이 되지 않아 나윤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나도 알아. 그런데 이상하게 연습할 때는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아무한테나 땍땍거리게 되더라고. …솔직히 고치려고도 해봤는데, 연습실 거울 속의 나를 보고 있으면 신경질이 나서 참을 수가 없어. 그래서 전의 회사에 있을 때도 같은 연습생들끼리 싸울 뻔한 적도 있었고.” 연습실 바깥의 의자에 앉아 속을 털어놓을 때는 그저 눈이 예쁘고 얼굴 작은 동갑내기 친구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나윤은 시선을 돌려 연습실 입구를 바라보았다. 저곳이 소영에겐 어떤 의미일까? ‘나에게 연습실은 어떤 의미일까?’ 소영이 씻으러 간 사이, 나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습실 대신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를 걸어갔다. 두꺼운 철문을 열고 나서면 그 뒤에 숨어있던 겨울이 나타나 나윤의 품으로 파고든다. 상기되었던 볼도 금방 식고, 턱을 따라 흐르던 땀방울도 자취를 감춘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텅 빈 거리와 가로등이 보인다. 지금은 새벽 1시 10분. 주변의 가게들도 이미 문을 닫은 시간이다. 저 멀리 편의점 간판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이지만, 컴백 준비를 위해 끊은 곳이기도 해서 그저 눈으로만 즐길 뿐이다. 하늘을 바라보니 그저 어둡기만 해서 구름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다. “보려고 하면 보인다더라.” 그렇게 중얼거려봐도 보이지 않는 것은 볼 수 없는 법. 하긴 지금 나윤이 보고 싶은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애초에 볼 수 없기도 하다. 하얀 입김이 위로 뭉게뭉게 올라간다. 한 번 더 후, 하고 불어보니 희미하게 흩어지며 사라지는 입김이다. “춥지 않아요?” 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추운 데 왜 나와요?” 그러게. “들어가요. 감기 걸리겠어요.” 내 걱정은 하지 마. “제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안 할 거야. 네 걱정. 네 생각도 안 할 거야. 단유는 희미하게 웃더니 그대로 돌아갔다. 희미하게 흩어지던 단유의 뒷모습이 나윤의 기억 속 마지막 모습이었다. ======================================= [463] 선물(7) 모처럼 단유와 명수, 그리고 하은까지 세 사람이 함께 외출했다. “이런 날 집안에만 있으면 섭섭하지. 안 그러니?” 붉은 털모자를 쓴 하은은 깜찍한(?) 미소를 지으며 단유와 명수를 돌아보았다. 단유가 얼른 하은의 팔을 붙잡아 당겨, 하은의 뒤를 지나가던 꼬마 아이와의 충돌을 막았다. “길을 걸을 땐 앞을 보고 걸어야 하는 거 몰라요?” 명수의 핀잔에 하은은 어색하게 웃으며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오랜만에 너희들이랑 나오니 좋아서 그러지.” “일을 안 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명수는 단유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선생님이 그동안 너무 고생하시긴 했어. 그렇지?” 단유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려는 사이 명수가 말을 이었다. “그동안 머리도 안 감고 소파에서 뒹굴뒹굴하면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던 그 시절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그치?” “명수 너!” 하은이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주먹을 들어 올리자 피하는 시늉을 하며 단유 뒤로 숨는 명수였다. “선생님, 여긴 밖이잖아요. 자중하셔야죠?” 아무래도 명수가 지태랑 다니면서 깐죽거리는 스킬을 습득한 모양이다. 웃음기 가득한 비명을 지르는 명수나 골이 난 척하며 명수를 붙잡으려 하는 하은이나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들뜬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세 사람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백화점이었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선물을 사주겠다는 하은의 의지로 오게 된 곳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은 전날에 준비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라는 명수의 물음에, “그런 고정관념을 버려. 지금 봐봐. 여기 사람이 얼마나 많니? 이 많은 사람이 왜 지금 여기에 다 몰렸겠니? 그리고 명수 너 계속 까불면 선물 안 사준다?” 라고 대답하는 하은이었다. “에이, 선생님. 장난이신 거 아시면서.” 명수의 애교에, “…두 살만 어렸어도 귀엽게 봐줬을 텐데, 다 큰 녀석이 그러니까 징그럽다.” 하은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그동안 명수도 부쩍 자라서 이제 하은의 어깨와 나란히 할 정도가 되었다. 단유야 이전부터 크긴 했지만, 명수처럼 과하게 애교를 부리는 성격이 아니라서 그런 지적을 받을 일이 없었을 뿐이다. “선생님, 너무해.” 입술을 삐죽 내민 명수에게 “하지 말라 했다.” 단호하게 선을 긋는 하은이었다. “그만 해요, 둘 다. 이러다 오늘 안에 여기서 나가지도 못하겠어요.” 두 사람의 팔을 붙잡고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는 단유의 얼굴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하은의 말대로, 백화점 안은 인산인해라는 말처럼 사람으로 가득 차 있어서 한 걸음도 편히 걷기가 힘들었고, 한 눈이라도 팔면 일행과 헤어지기 일쑤였다. 곳곳에서 우두커니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사람들이 보이는 건 그런 이유일 테다. 이런 와중에도 물건들을 살피며 살만한 게 있는지 살피는 여유를 보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여자들 뿐이라, 뒤따르는 남자들은 그저 피곤할 뿐이다. 에스컬레이터를 찾아 걷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지치는 기분은 단유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사람이 너무 많아서 공기가 희박한 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까지 하게 만든다. “빨리 와. 정신 놓지 말고.” 하은만 눈을 반짝이며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 속을 파고드는 날렵함을 보인다. 그 뒤를 따라가니 어느새 남성복 매장이 모여있는 층이었다. 그중에서도 평상복 의류들을 판매하는 매장들을 찾아가는 하은의 움직임에는 거침이 없었다. 마치 하은의 주변에만 사람들이 피해 다니는 것 같았다. 반대로 명수와 단유 주위에만 사람들이 몰려와 진로를 방해하는 것 같고. “여기서 한 번 골라봐.” “여기 너무 비싼 거 아니에요?” “괜찮아. 크리스마스잖아? 월급도 받았고.” 단유가 돌아보니 명수는 이미 바지를 뒤적거리며 고르는 중이었다. “명수한테 맞는 바지가 지금 별로 없잖니? 이참에 바지를 하나 사는 게 좋겠다 싶네. 너도 빨리 골라봐.” 아무리 이맘때 정도의 아이들이 빨리 자란다고 해도 단유와 명수는 너무 빨리 자랐다. 하은은 마침 크리스마스기도 하고 겨울에 입을 옷도 필요하니 이참에 사자는 생각으로 두 사람을 데리고 백화점으로 온 것이었다. “여긴 너무 비쌀 거 같은데?” “괜찮아. 선생님이 ‘선물’로 사주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마.”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며 매장 내부를 둘러 보았다. 여성복 매장 못지않게 많은 사람이 복작거리며 옷을 고르는 중이었다. 젊은 연인, 친구끼리 온 사람도 있었고, 아들을 데리고 온 어머니도 있었다. “이거 어떠니?” “아, 엄마! 내가 고를게.” 아들의 반대에도 머리가 희끗한 어머니는 아들의 몸 위에 옷을 맞춰 보며 어떤 옷이 잘 어울릴지 찾는 데 열중했다. 조금이라도 나은 옷을 사주려는 어머니의 마음이다. 그 모습을 보다 단유도 적당한 옷을 골라 하은에게 건넸다. “저 잠깐 화장실 갔다 올게요.” “빨리 와. 여기서 길 헷갈리면 하루종일 못 찾는 수도 생길 거 같으니까.” 정 급하면 백화점 방송실에서 아동 실종 신고(?)를 할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흘러 들으며 단유는 매장을 나왔다. 그리고 화장실로 가는 대신 아래층으로 이동했다. 사실 하은은 나름 패션에 신경 쓰는 스타일이라 옷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부족한 옷을 채운다는 목적보다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단유도 뭔가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하은의 옷을 골랐다. 아무래도 학원 선생님이니까 평범한 티셔츠보다는 블라우스 계통이 어떨까 싶었다. “누구 선물하실 거예요?” “네.” “여자 친구?” “아뇨, 선… 누나요.” “아, 착한 동생이네.” 매장 직원이 웃음을 지으며 사이즈를 물었다. 평소 집에서 빨래를 말리고 개는 역할을 단유가 했기에 눈에 익숙한 사이즈를 집어 보였다. “누나가 날씬한가 봐요? 이건 어때요? 요즘 많이들 입으시는 건데.” 그냥 가볍게 고르려 했건만, 이것저것 따지다 보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자기 옷은 눈으로 훑어서 고르는 데 1분도 안 걸렸는데 말이다. 겨우 적당한 옷을 골랐더니, 이번엔 가격이 문제다. “39만 5천 원인데, 세일해서 33만 원이네요.” 통장 잔고가 바닥이 되었지만, 그 정도 가치는 되리라 믿었다. ‘사람들이 왜 돈, 돈 하는지 알겠네.’ 어릴 때는 몰랐던 ‘돈’이 점점 단유에게 실감이 되고 있었다. 큰 거냐고 놀리던 하은은 단유가 건넨 선물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 비싼 걸 왜 사? 네가 돈이 어디 있어서?” 환불하려는 하은을 억지로 말렸다. “그동안 선생님한테 너무 받기만 했잖아요.” “그런 건 나중에 커서 갚아도 된다고 했잖아?” “기회 있을 때 조금씩 갚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하은은 눈을 찡그리고 단유를 바라보았지만, 단유는 드물게 싱글싱글 웃는 모습으로 하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하은이 꺼림칙하게 느끼는 것 같아 아무래도 특별한 수가 필요할 것 같다. “선생님, 이번 한 번만 그냥 받아요. 네?” 명수가 눈을 가리고 헛구역질을 하는 시늉을 했다. 하은은 눈이 동그래져 단유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더니 단유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어이구 우리 단유가 이런 애교도 부릴 줄 알아?” “선생님! 왜 사람 차별해요? 누구는 징그럽다고 그러고, 누구는 귀엽다고 그러고!” “거울 좀 봐라. 네가 눈을 요렇게 뜨고 ‘선생님’ 이러면 어떤가.” 과장되게 얼굴을 찡그려 보이는 하은을 보며 욱한 명수가 볼을 부풀리며 단유를 손가락질했다. “단유는요?” “단유는 귀엽잖아? 아무래도 여자 친구랑 사귀면서 애교가 늘었나 봐?” “아씨. 나도 여자 친구 사귀면 되잖아요.” “그래라, 뭐. 누가 못하게 막기라도 하든? 솔직히 네 얼굴이 귀여운 얼굴은 아니잖니? 어쩜 애가 점점 자랄수록 산적같이 변한다니? 시커멓게 변해 가지고. 예전 같으면 까마귀 고기 삶아 먹었냐고 놀림 받을 얼굴이라고.” “치, 치사하게 얼굴 갖고 그러기 있어요?” 하은의 말대로 명수의 얼굴이 검붉게 타긴 했어도, 연한 구릿빛에 얼굴이 아직 동안이라 ‘산적’이라고 비유하긴 어려웠다. 그래도 단유와 비교하면 너무 흑백이 비교되는지라 명수 나름의 콤플렉스이기도 했다. “근데, 단유 넌 여자 친구랑 잘 지내지?” 하은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지만, 기회를 엿보고 있던 질문이기도 했다. 솔직히 크리스마스인데 나가지도 않고 집에만 있길래 이상하다고 여기고는 있었다. 하지만 차마 여자 친구 만나러 나가지 않느냐고 묻기가 어려운 분위기가 있어서 입을 꾹 다물고 눈치를 보던 하은이었다. 명수야 워낙에 눈치가 없어서 잘 모르고 있었지만. 하은의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단유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질문이 언젠가는 나오지 않을까, 예상했던 바이기도 하고. “헤어졌어요.” “헤어져? 왜?” “음, 글쎄요.” 헤어진 이유를 묻는다면, 솔직히 할 말이 없다. 나윤이 거론한 이유는 너무 편파적이지 않은가. 연예인이라서? 현실적이라고는 해도 이성적으로 따지면 말이 되지 않는 이유다. 좋아하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어, 라는 옛날 영화 대사 같은 이유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우리가 만약 헤어져야 한다면, 어떤 이유로 헤어지는 게 좋을까요?” “무슨 말이니?” 나윤은 단유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헤어지기 싫다는 말인지, 헤어지고 싶다는 말인지 알아듣기가 어렵다. 얘는 이 마당에도 이러고 싶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음, 글쎄 정확히 말로는 설명을 못 하겠어요. 이런 경우가 전에 없던 일이라 저도 당황스럽긴 한데요.” 단유는 볼을 긁적이다 나윤을 바라보았다. “제가 싫어요?” “…….” “사람이 헤어지는 이유라면 보통 싫어지거나 싫증이 나거나 혹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뭐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고서는 어렵지 않나요?” 보통 이런 경우라면 ‘구질구질하게 굴지마’나 ‘우리 깔끔하게 헤어져’ 같은 대사들이 어울릴 것 같은데 단유는 늘 생각 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별하는 순간에, 이별에 대한 개념 정의를 하고 있으니. 나윤이 입을 열지 못하는 사이, 단유는 나윤의 머리 위쪽으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생각해보니,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헤어질 순 있겠네요.” 응? “그렇군요.” 혼자 말하고 혼자 납득하는 단유.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이유가 없듯이, 싫어지는데도 이유가 없네요.” 뭔가 쿵, 하고 가슴에 울림이 느껴져 나윤은 가슴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단유가 시선을 내려 바라보니,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지는 느낌이 들어 나윤은 얼른 시선을 피했다. 단유의 손이 다가와 나윤의 손을 잡았다. 나윤은 손을 피하지 않았다. “죄송해요. 제가 괜히 심술을 부린 것 같아요.” 고집?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마음이 허락을 안 해준 것 같아요. 그래서 쓸데없는 소릴 한 거 같아요.” 듣고 싶었던 말이긴 한데, 막상 들으니 참기가 힘들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또 한 번 덜컹 내려앉는다. 방금의 말이야말로 쐐기를 박는다. “나오지 말아요. 추우니까.” 단유가 나윤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선을 들어 올리지 못하는 사이 연습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조용히 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났다. 달칵, 거리는 소리에 나윤은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나섰다. 단유가 천천히 복도를 걸어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영화라면, 드라마라면, 만화라면, 소설이라면, 노래라면, 꿈이라면. 그렇다면 나윤은 긴 복도를 달려가 소년의 뒤를 안으며 걸음을 멈추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은 소녀의 발목을 붙잡고 뛰지 못하게 막았다. 단유가 지하 입구를 빠져나갈 때야 나윤은 걸음을 뗄 수 있었다. “왜 나와요?” 계단 끝에 서서 바람을 쐬고 있었던지, 단유가 발걸음 소리에 돌아보며 물었다. “춥다니까. 감기 걸려요.” 단유는 나윤이 걸치고 있던 패딩의 앞을 채워주며 말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방금 이별을 한 남자라고는 전혀 보이질 않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불과 1, 2분 전에 ‘그동안 고마웠다’고 고하던 남자의 모습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단유는 나윤을 보다 연한 미소로 마지막 인사를 고했다. “누난 제게 선물 같은 사람이었어요. 고마워요.” 갑자기 달려와 안기던 사람. 이전에 느꼈던 것과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을 느끼게 해 준 사람. 나윤의 눈이 또 발갛게 변하는 것을 본 단유는 더 시간을 끌지 못하고 돌아섰다. “갈게요.” ======================================= [464] 유연한 관계?(1) ‘다사다난’한 해가 지나고, 희망에 찬 새로운 해가 시작됩니다, 라고 외치는 아나운서의 멘트와 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는 단유에게나 명수에겐 별로 감흥을 주지 못했다. 하은도 소파 위에서 반쯤 드러누운 편한 자세로 맥주캔을 홀짝이며 TV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서 TV 속의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하며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덕담을 나누는 광경이 너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나이 먹는 게 뭐가 좋다고.” 하은은 테이블 위에 올려둔 오징어 과자를 하나 집어 먹으며 중얼거렸다. “난 모르겠어. 어제랑 오늘이랑 다른 게 있나?” 소파에서 밀려나 바닥에 주저앉은 명수는 무릎을 끌어안고 TV를 시청했다. 새해의 시작은 관심이 없지만, 잠시 중단된 가수들의 무대가 언제 재개될지는 관심이 많았다. “뭐, 사실 양력으로 1월 1일은 별로 의미가 없는 날이라는 주장이 있긴 하지.” 양력에서의 1월 1일은 단지 부활절을 춘분 다음에 오게 하려고 날짜를 역산해 정한 날짜일 뿐이다. “과학적으로, 그러니까 천문학적으로 진짜 새해를 따지는 건 어렵대.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는 타원형 궤도에 올라가 있을 뿐이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원에는 시작도 끝도 없잖아. 끝없이 돌고 도는 거지.” “우리 인생 같네.” 하은은 전인권의 ‘돌고 돌고 돌고’를 흥얼거렸다. 그렇게 돌고 도는 인생처럼, 그래서 시작도 끝도 없는 원 위에서 끝없이 돌고만 있는 지구에 들러붙어 먼지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들 중, 이제 겨우 15년을 갓 넘긴 단유와 명수는 다음 날에도 변함없이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나갔다. “오늘은 사람이 별로 없네.”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던 명수의 말에 단유가 가볍게 대꾸했다. “선생님처럼 과음한 사람도 있을 테니까.” 하은은 몇 캔만 마시다 방에 들어갈 듯하더니, 뭐에 꽂혔는지 결국 냉장고에 있던 맥주들을 모두 꺼내 마시고 새벽에야 침대에 들어간 듯 했다. 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간 단유는 테이블 위에 쌓아놓은 맥주캔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어야 했고. “아니면 해돋이 같은 거 보러 간 게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명수의 맞은편에서 무릎과 발목의 관절이 완전히 풀리도록 꼼꼼히 스트레칭하는 단유였다. 그리고 손목도 천천히 풀더니 바닥에 엎드렸다. 그리고 숨을 한껏 들이쉰 뒤, 발로 지면을 차며 튀어 오르듯 하체를 들어 올렸다. 물구나무서기를 한 상태로 팔굽혀펴기를 하는 단유를 보며 따라 해 볼까 궁리하던 명수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이런 날씨에도 해가 보일까?” 먹구름이 끼어 흐릿한 새벽 날씨였다. 시간을 따지면 대략 30분 정도 뒤에 해가 뜰 테니 그사이에 구름이 옅어지면 모를까, 지금 같아선 수평선에서 깨끗하게 떠오르는 해를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바닷가는 또 날씨가 다를 수 있으니까.” “그래?” “그런데 아마 보기 힘들 거야. 어제 뉴스에서도 해돋이 보기 힘들지도 모른다고 했으니까.” 지금 날씨라면 서울엔 오후에 눈이 내릴지도 모르겠다. 이르면 오전에라도. 무릎을 높이 세우고 제자리 뛰기를 1분 가까이하던 명수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허벅지를 주무르며 헉헉대다가 다시 물었다. “해돋이 보러 가면 새해 목표나 소망 같은 걸 빈다고 하잖아?” “응.” 물구나무를 마친 단유가 이번에는 다리를 높이 머리 높이까지 차올렸다. 유연성도 기르고 다리 스트레칭도 되니 일석이조(一石二鳥)다. “그런데 우린 어떤 목표를 세워야 하지?” 단유는 동작을 멈추고 명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명수도 등을 바로 세우며 설명을 보충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서. 내가 갑자기 공부 1등을 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비는 건 이상하잖아? 그렇다고 20등 안에 들게 해주세요, 라고 하는 것도 좀 웃기고.” “축구는?” “그것도 봄 대회만 지나면 끝이니까.” 3학년은 봄 대회까지만 출전한다. 지난번에야 워낙에 축구부원들이 많지 않았던 데다가 우승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어서 3학년들을 전략적으로 가을 대회 때 출전시키긴 했다. ‘전국대회 우승’이란 타이틀은 학생기록부에 집어넣기에 좋고, 축구를 진학 조건으로 따지는 학생들에겐 메리트가 크다. 하지만 명수는 이미 두 차례 우승을 했고, MVP도 얻은 바가 있었다. 벌써 몇몇 축구 명문 고등학교에서는 학교를 통해 관심을 보였다. “어쩐지 이번에는 꼭 우승해야겠다는 생각도 크게 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우승하기 싫은 건 아니지만, 작년처럼은 안 느껴지네.” 신발의 뒤꿈치로 바닥을 문질러 흙먼지를 일으켜보던 명수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래서 잘 모르겠어. 도대체 올해는 뭘 목표로 해야 하는지.” “넌 프로 축구 선수가 되는 게 꿈이잖아? 그 꿈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니까, 올해도 부지런히 연습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긴 한데…….” 지친 걸까? ‘소진증후군(burnout syndrome)’이라던가? ‘방전’이 돼서 열정과 성취감을 잃어버린다던 그런 증상? “계속 반복되는 운동도 별로 재미가 없고, 지금도 그냥 습관처럼 할 뿐이지 하면서 뭔가, 내가 잘한다는 느낌도 없고, 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래.” “너무 오랫동안 경기를 하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닐까?” “요즘은 게임도 재미없어서 계속 못 하겠더라고.” 그러고 보니 방학 이후로 명수가 게임을 하는 모습을 별로 보지 못했다. 게임을 하는가 싶으면 어느새 리모컨으로 케이블 TV 채널을 돌리면서 멍한 시선을 던지던 명수였다. “네가 같은 경우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읽었던 책에는 그 증상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걸 봤어.” 단유는 기억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보통 수면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하는데, 넌 요즘 잠을 잘 자는 편이야?” “음, 가끔 잠이 늦게 올 때가 있긴 한데, 그건 다 그렇지 않나?” “넌 아니지. 넌 예전부터 머리에 베게만 대면 바로 숙면을 했었잖아.” “그런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명수였다. “그리고 새로운 목표를 가져보는 건 어때?” “새로운 목표?” “그러니까, 한시적이더라도 새로운 목표를 가정해보고 그 일에 도전하는 거지. 일단 신선한 자극이 의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하니까.” “축구에서 새로운 목표라.” “아니, 축구 말고.” “축구 말고?” “가끔은 전혀 다른 분야에 도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예를 들면?” “음, 네가 처음에 말한 것처럼 20등 안에 들기나, 10등 안에 들기 같은 거?” “공부하라고?” “내가 잘 가르쳐 줄게.” “그냥 이대로 살면 안 될까?” “아, 그러면 너도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해 보던가.” “난 연습 나가야 하는데?” “내가 예전에 했던 것처럼 새벽에만 아르바이트하는 거지. 해보니까 나쁘지 않더라고? 운동도 되고 돈도 벌고.” “근데 말이야, 그건 계속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금방 하다가 시들해지면 어떡해? 그만하고 싶어도 그만할 수가 없잖아?” “왜 미리 그런 걱정을 해?” “요즘은 별로 흥미가 닿는 게 없으니까 그렇지. 금방 하다 말게 되더라고.” 단유는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고민 상담인 데다 이런 문제의 해결책을 늘 머릿속에 간직하고 사는 게 아니었기에 괜찮은 대답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조금 더 생각하고 다시 이야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 뒤에야 두 사람은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단유는 명수의 고민을 위해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 좀 더 나은 조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조언을 위한 조사는 필수였다. 컴퓨터를 열고 ‘번아웃 신드롬’에 대해 살펴보니 의외로 많은 사람이 비슷한 무기력증을 호소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번아웃 신드롬? 명수가?” 머리를 감지 않은 게 분명한 하은이 산발인 채로 단유를 돌아보았다. 단유는 대화보다 세수가 먼저라고 판단했다. “씻고 나오세요.” 하은을 힘으로 밀어 욕실 안으로 넣은 뒤, 주방으로 가서 물을 끓였다. 숙취엔 해장국이란 말을 들었지만, 해장국을 끓일 줄 모른다. 하지만 하은이 술을 마신 다음 날 커피를 마시던 모습을 종종 봤던 기억이 있기에 미리 진한 커피를 준비했다. 그리고 그보다 연하게, 물을 조금 더 타서 본인 몫의 커피를 탔다. 하얀 연기가 올라오는 커피를 보니 데이트 할 때, 나윤과 함께 커피를 마셨던 기억이 떠올랐다. “넌 아직 독하게 마시면 안 되니까, 물을 조금 더 타서 마셔봐. 그러면 음료수처럼 마시기 편할 거야.” 같이 커피를 홀짝이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커피의 맛을 알게 된 단유였다. “이야, 김단유! 고마워! 땡큐!” “별말씀을.” 하얀 수건으로 머리를 감아올린 뒤 헐렁한 티셔츠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크으’하는 감탄사를 뱉는 하은이었다. 아저씨 같았다. 마침 명수도 상미네 집에 넘어간 사이라 단유는 편하게 하은과 명수의 고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하은은 커피의 따뜻함을 즐기면서 동시에 단유와 명수의 우정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이 둘의 우정이 앞으로도 계속되길.’ 하은이 몰래 빌어보는 새해 소망이었다. “번아웃 신드롬이라는 거 난 없다고 봐.” “인터넷에 보니까, 그런 증상에 대해 이야기를 한 사람들이 많던데요?” “그냥 이름 가져다 붙이기 좋아하는 이들이 만든 현상이지. 무슨 신드롬, 무슨 신드롬 하면서 이것저것 이유와 핑계를 만드는 거야. 그런 신드롬 전에도 무기력증은 오랜 세월 인간이 싸워왔던 증상 중의 하나니까.” 하은의 이야기는 그랬다. 무기력증이란 아주 오랜 세월, 인간이 언어를 쓰기 전부터 있던 병이라고. “사냥을 하러 나갔어. 그런데 사냥감이 안 잡혀. 집에 돌아와. 아내와 자식들이 먹을 거 내놓으라고 하지. 그러니 눈치가 보여, 안 보여? 다시 사냥을 나가. 그런데 또 안 잡혀. 집에 돌아와. 눈치만 보이나? 자신은 왜 사냥을 못 할까 답답하겠지? 답답하고 짜증 나겠지? 답답하고 짜증 나는데 방법을 모르면 어때? 또 답답하지? 악순환이지? 악순환에 빠지면 사람은 방향을 잃고 무기력에 빠지는 거야.” “그럼 방법이 없나요?” “방법이 왜 없겠니? 아까 사냥에 실패했던 가장이 어떤 방법을 썼을 거 같니? 속병이 생기는데 사냥을 하기도 싫고 그렇잖아? 그러니까 그 마음을 벽에다 표현을 했어. 어떻게 돌을 잡고 벽에 그림을 그리는 거야. 빙글빙글. 내 마음이 이렇다, 는 걸 표현하려고 원을 그리는 거야.” 이야기가 산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때 깨달았어야 했는데. “원을 그리다 보니까, 다른 것도 그릴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거야. 그래서 이것도 그려보고 저것도 그려보는 거야. 소를 그리면서, 이 소를 잡았으면 좋겠다, 빌어도 보고. 말을 그리면서, 저 말을 잡아서 뒷다릴 잡아 뜯어 먹으면 배부르겠지, 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그러니까, 고대 원시인들의 벽화라는 게 무기력증 때문에 생긴 것이다, 라는 말씀이신가요?” “아니면, 벽화 그릴 시간에 사냥을 나갔겠지. 사냥을 나가기 싫으니까 벽에다 그림만 그리면서 빌고 있는 거야. 소 잡아야지, 말 잡아야지, 하면서. 상상력만 커지니까 매머드 같은 것도 잡았으면 좋겠다고 그려 넣고 있는 거야. 그거 그리는 게 쉽겠니? 연필로 그리는 것도 아니고 돌로 벽을 파고 새기는 건데 오죽 시간이 걸리겠어? 사냥 갈 시간에 벽만 파고 있는 거야. 벽만.” 어제까지는 별로 말이 많지 않던 하은이었다. 학원 일 때문에 피곤했는지도 모르겠다. 모처럼 학원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쉬다 보니 예전의 하은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던지, 아니면 어제 마신 술의 여파가 조금 남았던지 둘 중 하나이리라.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명수는요?” “명수?” “명수가 지금 느끼는 무기력증을 해결하려면 그림이라도 배워야 한다는 이야긴가요?” “그림도 좋지만, 더 좋은 방법이 있지?” “뭔데요?” 하은이 싱긋 웃었다. “그건 명수가 이미 알고 있어.” 단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465] 유연한 관계?(2) “명수 왔구나?” 현관문을 열어준 것은 상미의 어머니였다. “안녕하세요? 상미는요?” “나, 여기!” 거실 소파에서 게임 패드를 붙잡고 있던 상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가 불러놓고서는 얼굴도 안 비추네.’ “그런데 단유는?” “아, 지금 집에 있을 걸요?” “같이 오지 그랬어?” “그게, 선생님이랑 이야기할 게 있다고 해서요.” “그렇구나. 자주 오라고 해. 덕분에 상미 성적도 많이 올랐는데, 아줌마가 맛있는 것 좀 해주려고 하니까.” “정말요?” ‘맛있는 것’이라는 말에 호기심을 드러내는 명수에게 아주머니는 멋쩍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주방으로 돌아갔다. “왜 이제 와? 오라고 한 게 언젠데?” 명수는 무안한 표정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직 오전 10시도 되지 않았다. “나름 일찍 온 거다. 근데 지금 이건 뭐야?” 상미가 하고 있던 게임은 전에 보지 못한 게임이었다. “아, 이번에 새로 산 거. 등수 올랐다고 아빠가 사줬어.” “그래도 공부에 취미 붙이게 책이나 사줄 것이지, 게임이나 사주고.” 마실 것을 들고 온 어머니의 한 소리에 상미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떻게 사람이 공부만 하고 사나? 가끔 스트레스도 풀어주고 그래야지.” “이그, 넌 단유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니?” “걔는 뭐 맨날 공부만 하나? 여자친구랑 놀기도 하고 그러더만. 그치?” 명수는 우물쭈물 거리며 대답을 피했다. “뭐야?” “응?” “너 눈치가 이상해? 단유…그쪽 커플에 뭔 일 있지?” 하여튼 얘도 여자라고 그런 쪽으로는 눈치가 비상하다. 명수 본인이 티 나게 행동했다는 것은 전혀 자각하지 못한 채 투덜거렸다. “빨리 말해 봐? 뭔데? 헤어졌어?” “말 못 해.” “헤어졌구나? 왜 헤어졌는데? 언제 헤어졌어?” “말 못한다니까?” “얼마 안 됐구나? 왜? 싸웠어?” “내가 어떻게 알아? 게임이나 하자고.” “싸운 건 아닌가 보네? 그럼 왜 헤어졌지?” 명수는 아무 말도 안 하는데, 이상하게 상미 혼자 알아내고 이해하면서 스토리를 만들어나간다. “너 계속 그러면 나 그냥 간다?” “알았어, 알았어. 왜 니가 열 내고 그래? 잠깐만 기다려. 이건 혼자 하는 게임이라서 나중에 하고, 아, 이거 빌려줄게. 재밌을 거야.” 상미는 두 사람이 같이할 수 있는 게임을 실행시켰다. 곧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똑같은 자세로 TV화면을 바라보며 게임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명수가 알다뇨?” 하은은 기지개를 켜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빈 커피잔을 싱크대에 넣은 뒤 돌아서며 대답했다. “가만 보면 명수가 좀 느려. …아닌가? 네가 빨라서 그런가?” “네?” “대개 남자는 11~14세 사이에 시작하고, 여자는 10~13세 사이에 시작하는, 호르몬의 영향으로 겪는 정신적 혼란기, 라고 하면 알려나?” “…사춘기요?” “다행인지 너희들은 들은 것처럼 심하게 반항하지는 않는 것 같아 다행이긴 하다만, 그래도 사춘기란 건 분명하지 않니?” 단유는 볼을 긁적였다. ‘사춘기’를 학교에서 배우긴 했지만, 딱히 자신이 사춘기인지는 모르겠다. “남자 청소년의 2차 성징에 영향을 끼치는 ‘테스토스테론’이란 호르몬이 뇌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들었어요. 회백질(grey matter)도 늘어나면서 사고가 급격히 발달한다고요. 하지만 그게 몸으로 느껴지는 게 아니니까 딱히 사춘기가 시작되었다는 느낌은 없네요.” “그건 너니까 할 수 있는 소리지. 솔직히 넌 초등학교 때부터 회백질이 성인 이상으로 많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게 있잖니?” “뭐요?” 하은이 싱긋 웃으며 단유의 턱을 엄지손가락으로 훑었다. “이거.” 단유의 턱에 꺼뭇하게 자라나고 있는 턱수염이 하은의 엄지손가락에 까칠한 감촉을 남겼다. 몇 개의 도전과제를 넘기며 게임을 하던 명수는 상미의 눈치를 보다가 게임 패드를 내려놓았다. “쉬었다 하자.” “왜?” 상미는 돌아보자, 명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좀 지치네.” 말만 그런 게 아니라 진짜로 지친 표정인지라 상미는 게임을 중지시키고 명수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디 아파?” “아니, 아픈 건 아니고 그냥 좀….” “좀 뭐?” “좀 지쳐.” 상미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경기장에서 하루 종일 뛰어다녀도 멀쩡한 애가 가만히 앉아만 있었는데 지친다는 게 말이 돼?” 명수는 상미를 힐끗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모르겠어. 그런데 그래.” 기운 빠진 명수의 모습을 보니 상미도 흥이 사라졌다. 조금만 더 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만, 상미는 과감히 게임을 끄기로 했다. TV 화면으로 전환하니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대에는 그다지 볼 만한 게 없다. TV마저 끄니, 거실이 조용해졌다. “무슨 일 있니?” 갑자기 조용해진 거실 분위기에 이상함을 느낀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잠깐 쉬었다 하려고.” “잘 됐다. 그럼 잠깐 심부름이라도 할 겸 나갔다 와라.” “명수는 손님이잖아?” “누가 명수랑 같이 가래니? 너만 갔다 와도 되잖아?” “아뇨, 저도 같이 갔다 올게요.” “그럴래?” 어머니는 싱긋 웃으며 지갑에서 지폐를 꺼냈다. 잠시 후, 상미는 두꺼운 패딩을 걸치고 집을 나섰다가 이내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아우, 추워.” “그러게 목도리 하라니까. 아까 그랬잖아. 밖이 춥다고.” “거실에 햇빛이 많이 들어오길래 많이 안 추울 줄 알았지.” “넌 참 추위 많이 타는 거 같다.” “이 정도 추우면 누구라도 추위를 탈걸? 오히려 니가 이상한 거야.” “나도 추워. 추운 데 참는 거야.” “꼴에 남자라고 센 척이냐?” “남자는 무슨.” 명수는 말끝을 흐리며 걸음을 옮겼다. “왜 갑자기 빨리 걷고 그래? 같이 가.” “네가 너무 느린 거야.” “얘, 왜 이래, 오늘? 무슨 생리 하니?” 상미의 말에 명수가 얼굴을 붉히며 버럭 소릴 질렀다. “야! 넌 여자애가 말 좀 가려 하면 안 되냐?” “왜 이래, 진짜? 오늘 너 좀 이상해? 평소에는 화장실도 안 가고 게임하던 애가 금방 지친다고 하질 않나, 생전 안 하던 신경질을 부리질 않나. 그게 딱 여자애들이 생리할 때 하는 행동이랑 똑같은 거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여자도 아니고.” “하긴 네가 그 고통을 알겠니?” 키득거리며 명수의 어깨를 툭툭 치는 상미였다. 하지만 장난스러운 대화에도 굳어있는 명수의 얼굴을 본 상미는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아냐?” “그럼 왜 그래?” 명수는 잠시 말없이 걷다가 곧 단유에게도 했던 말을 그대로 했다. 상미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 불감증 같은 거네.” “게임 불감증?” “새로운 게임을 해도 금방 흥미를 잃어서 그만둔다거나 게임을 아예 접는 증상이지.” 눈을 동그랗게 뜬 명수가 상미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것도 병이야?” “뭐, 일종의 병이지. 너, 게임은 계속하고 싶지?” “응.” “그런데 막상 게임을 하다 보면 금방 질리는 거 아냐?” 마치 의사에 빙의된 사람 같이 진지한 얼굴로 명수를 문진하는 상미였다. “…뭐 비슷해.” “난 아직 게임 불감증에 걸려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걸린 사람들 이야기는 꽤 심각하더라. 게임을 잔뜩 사 놓고도 할 게임이 없어서 안 하거나, 하더라도 금방 질려서 손을 놓게 된다는 거야. 그런데 게임은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 혹시 이 게임을 하면 좋아질까 싶어서 또 새로운 게임을 사는 거지. 그러다 보니 게임은 쌓이고 돈은 돈대로 쓰는데 재미는 못 느낀다는 거야. 세상에! 게임을 하면서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억울한 일이 어디 있어?” “게임 불감증이라는 게 평소에도 영향을 미치는 거야?” 평소에도 종종 무기력을 느낀다는 명수의 이야기에 상미가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혀를 찼다. “뭘 모르나 본데, 이 세상은 말이야. 모든 게 게임이야. 네가 하는 축구도 게임이고, 학교생활도 게임이고, 시험도 게임이고, 지금 하는 심부름도 다 게임이야.” 언뜻 생각해보면 그럴듯하다. 아니 그 말이 멋있다. ‘인생은 게임’이라니. “지금 심부름을 클리어하면 보상으로 용돈이 나오지? 학교에서 공부로 렙업해서 등업하면 졸업하지? 학교 졸업하고 취업하면 직장 생활할 거 아냐? 그것도 어찌 보면 다 게임인 거야. 일한 만큼 월급을 받는 게임.” “그런가?” “그래서 우리가 지금 게임을 하는 건 절대 시간을 낭비하는 게 아냐. 게이머로서 인생을 충실히 살아가기 위한 예행연습 같은 거야. 충실하게 도전해서 성취해내는 그 감동을 현실에서 느낄 수 있게끔 하려는 연습 같은 거라고.” 상미의 개똥철학은 마트에 가는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게임하는 게 질린다? 이건 인생에 질린다는 소리랑 마찬가지야. 재미없다고 인생 포기할 거 아니잖아? 게임은 힘들어 봐야 게임이야. 본질적으로 즐기는 거라고. 즐기려고 노력하고 노력하면 못 이룰 리 없으리라.” 상미의 얼굴을 보니, 자기 말에 도취 되어 경황이 없어 보인다. 아마 지금 어디 가느냐고 물으면 어디였더라,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릴지도. 단유는 자신의 턱을 쓸어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명수가 알고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명수는 자신이 사춘기라는 걸 안다는 이야기예요?” 하은은 고개를 저었다. “뭐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겠지. 그런데 명수가 안다고 했던 것은 사춘기를 안다는 게 아니라, 지금의 무기력증을 해결할 방법을 안다는 이야기야.” “안다고요? 알면 고칠 수 있다는 거네요?” “글쎄.” 어깨를 으쓱거리며 머리에 감아뒀던 수건을 푼 하은은, 수건을 베란다 쪽 세탁기에 집어넣은 뒤 바깥 풍경을 보며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느끼게 되어 있어. 배고프면 밥이 먹고 싶어지고, 당이 필요하면 단 게 당기듯이. 호기심이 생기면 책을 찾아보고, 인터넷을 검색해서 지식을 보충하고, 몸이 찌뿌둥하면 스트레칭을 하거나 운동을 하지.” 어쩐지 지금의 이야기도 아까와 같이 대화가 산으로 가기 위한 준비 과정인 것만 같았다. 단유는 이쯤에서 대화를 끝내는 게 좋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데 하은의 말이 계속되었다. “명수도 지금 자신이 필요한 게 뭔지 무의식적으로는 아는 거야. 그래서 아침부터 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는 거겠지.” 하은의 시선이 무언가를 쫓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단유도 자리에서 일어나 하은의 곁에 섰다. 그리고 곧 명수와 상미가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명수는 호르몬이 필요한 거야.” “호르몬이요?” 무슨 호르몬? 단유가 알기로 호르몬 주사는 심각한 병일 때만 맞는 거로 아는데? “연애 호르몬.” 하은은 명수가 상미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상미에게 관심을 보인 건 꽤 이전이었지만, 방학 전까지만 하더라도 워낙에 명수가 학교 일로 바빴던 탓에 상미에게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었던 탓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방학이 되니 시간이 많아지고 학교나 축구와 같은 특정 관심사 외에 생각을 쏟을 여유가 생겼을 것이다. 상미처럼 예쁜 여자친구를 곁에 두고도 관심이 없을 수야 있을까? 특히나 혈기왕성한 사춘기 소년 아닌가. 하은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걸어가는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도파민 같은 건가요?” “응?” “전에 다큐멘터리 같은 데서 보니까, 연애를 하면 대뇌에서 본능을 관장하는 미상핵이 활성화 된다던데, 여기가 도파민이 작용하는 쾌감 중추의 메인 신경이라고 하더라고요. 선생님 말씀은 도파민을 이야기하시는 거 아니에요?” 하은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단유를 보다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단유는, 참 똑똑해.”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니, 그냥 똑똑하다고 칭찬하고 싶어서.” 연애하기 참 힘든 친구인데, 그동안 고생했겠다, 나윤이. 하은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단유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어 주었다. ======================================= [466] 유연한 관계?(3) “김단유 학생?” “네.” “여기 보니까, 중학생인데…맞아요?” “네.” 말을 잇지 못하던 체크 남방의 중년 사내가 다듬지 않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혹시 해외에서 유학했어요?” “아니요.” “그럼 외국에서 태어났다거나 부모님이 외교관? 아니면 부모님이 외국분?” “고아예요. 7살 때부터 보육원에서 생활했고요.” “아, 그렇군요. 너무 민감한 질문을 했었던가요?” “아뇨,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뭐…머리가 굉장히 좋은가 봐요? 외국에서 나가 살던 곳도 아니고 국내에서 공부만 해서 번역 자격증, 그것도 1급으로 따기가 쉽지 않을 텐데 말이에요.” “열심히 하긴 했습니다.” 사내는 검은 뿔테 안경을 고쳐 쓰며 맞은 편의 단유를 슬쩍 보았다. 이력서를 봐서 그런지 몰라도 묘한 분위기가 풍기는 소년, 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지금 방학이겠네요?” “네.” “그래서 아르바이트 삼아? 그러면 저희 쪽보다 덜 전문적인 쪽을 찾아가는 게 더 낫지 않겠어요? 가령 해외 전자 제품 설명서를 번역하는 일 같은 것도 있는데, 그게 학생이 하기에 편할지 몰라요.” 번역이란 게 단순히 외국어를 한국어로 바꾸는 작업이 아니다. 특히 사내가 있는 곳은 해외 전문 서적들의 판권을 사서 국내로 가져오는 출판사들이 외주를 주는 번역 회사였다. 당연히 소속 번역가들이 몇몇 있긴 하지만, 가끔 시간 싸움이 되는 경우가 있어서 아르바이트를 동원할 때가 있었는데 지금이 그런 경우였다. “제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인가요?” “아무래도 그런 부분도 있을 거예요. 지금 저희가 맡은 프로젝트는 영국의 저명한 학자분이 저술한 사회과학 분야 서적이에요. 중학생이 배우는 레벨을 넘어선 부분이 있어서 학생이 이해하긴 쉽지 않을 겁니다. 관련 지식이 없으면 번역을 해도 오류가 생기곤 하니까요.”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회과학’이라는 익숙지 않은 단어도 그렇지만 대학생 단유의 끄덕임을 본 사내는 소년이 이해했다고 생각하며 이력서를 덮으려 했다. “혹시 가능하다면 그 원본 볼 수 있을까요?” “네?” “그냥 호기심이 들어서요. 어느 정도의 전문성이 필요한지도 알고 싶고. 그래야 나중에라도 공부해서 다른 일을 맡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사내는 멀뚱히 소년을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저 나이의 아이들이 용감하긴 하다. 조금만 더 나이가 들면 어른을 무서워할 줄 알게 되고 윗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을 피하기 마련인데, 아직 어리다 보니 저렇게 자기 요구도 당당히 할 수 있는 것일 테다. ‘순수하니까.’ 사내는 소년의 요구를 ‘순수’로 받아들였고, 그 순수한 호기심에 잠깐 어울려 줄 마음을 먹었다. 책상에서 테스트를 보기 위해 가져왔던 책을 집었다. “이건데 볼래요?” 단유가 보니 여간 두꺼운 책이 아니다. 못해도 500페이지는 넘을 것 같다. 실제로도 책에 찍힌 페이지가 530여 페이지를 넘어가고 있었다. 단유는 가장 앞에 적힌 머리말을 읽어나갔다. “현대사인가 보네요.”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간단하니까 중학생이라도, 번역 1급이 아니더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머리말엔 저자가 책에 소개하려는 내용과 취지를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니 어려운 단어도 별로 없었다. 그러니 그 정도로 영어 실력을 뽐내려 한들 사내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기엔 부족하리라. 물론 단유가 그런 생각을 애초에 하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단유는 그 자리에서 페이지를 휙휙 넘기며 책을 살폈다. 아니, 정독했다. 다만 너무 빨리 읽는 터라 지켜보던 사내는 소년이 자신이 아는 단어만 찾아보는 게 아닐까 의심하는 상황이었을 뿐이었다. 소년의 얼굴이 점점 진지해지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자신이 해석하기 힘든 책이라는 걸 실감하는 중이라 그럴 것으로 추측했다. 일정한 속도로 넘어가는 페이지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으니 사내는 적당한 시점에서 말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충 한 챕터를 넘긴 것 같아 보여 입을 열었다. “그쯤 보니까, 대충 알겠지?” 본인이 번역하기엔 어렵다는 사실을. “네. 대충은요.” 대충? “그런데 재밌는데요? 왜 세계 각국의 나라들이 영토에 집착하는지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학자의 시선이 꽤 흥미롭고요.” “응?” 중학생 소년이 작가의 글을 ‘흥미롭다’고 평가해? “21세기에도 지구의 영토 분쟁이 끝나지 않는 이유,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끊임없이 탐식의 욕망을 드러내는 강대국 간의 내밀한 거래들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계속 읽고 싶게 만드는데요? 정말 이런 거래들이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다 읽었어?” 아는 단어나 문장을 찾는 게 아니라 ‘글’을 읽었다고? 그렇게 짧은 시간에? “여기 보니까 미국이 강대국이 된 사연에는 그저 강한 국방력만이 아니라 강대국들과의 은밀한 거래를 주도했던 외교력이 밑받침되었다고 나오잖아요? 흡사 음모론처럼 받아들일지도 모르지만, 최근 해금된 CIA 기밀문서들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런 것도 출판이 가능한 거예요? 전에 뉴스 보니까 국내 기밀문서는 밀반출이 금지되어 있고 출판도 할 수 없다고 들은 거 같은데? 외국은 좀 다른가 봐요.” 단유는 사내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계속 책의 내용을 뒤적거렸다. 사회과학이란 분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막상 이 책을 읽으니 없던 관심도 생길 판이었다. 글을 쓴 학자가 워낙에 첫 시작을 흥미롭게 이끌어나간 덕분이었다. 단유는 멍한 시선으로 마주 보는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이 책, 그냥 빌려 가면 안 되죠? 사야 하나요?” 사내는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정말 다 읽은 거니?” “아뇨, 다 못 읽었죠. 앞에만 읽는 거 보셨잖아요?” “아니 내 말은, 그 내용들을 다 이해한 거냐는 뜻이었어.” “아, 내 별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없던데요? 물론 뒤에는 어떻게 될지 몰라도. 그런데 확실히 재미있는데요? 이런 책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볼 거 같은데요? 이게 베스트셀러란 건가요?” 그게 정말 베스트셀러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한국에서 비소설 분야, 특히 사회과학 분야의 번역 서적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아쉽지만…아니 그게 아니지.’ 사내는 잠깐 정신을 차리고 다시 소년에게 물었다. 아니 요구했다. “그럼 뒤에도 한 번 읽어볼래? 그리고, 읽은 내용을 설명해 보겠니?” “읽어도 돼요?”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 “선생님!” 단유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하은을 찾았다가, 이마를 쳤다. “아, 학원 가셨지.” 단유가 아르바이트를 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고하려 한 이유는, 그 회사를 소개해 준 사람이 바로 하은이었기 때문이다. 명수의 일로 이야기를 나눈 뒤, ‘새해 목표’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가 단유가 아르바이트로 ‘번역 알바’를 고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문 선배가 그쪽 일 하던데 한 번 알아봐 줄까?” 단유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생각난 김에 새해 안부 인사나 해 볼까’라며 전화를 든 하은은 그 선배를 통해 어떤 번역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단유의 이력서를 밀어 넣을 수 있었다. 단유는 책을 들고 방에 들어가려다 거실 소파에 밀려드는 햇살에 눈이 닿았다. 어쩐지 오늘은 저기에서 책을 읽고 싶어졌다. 일 때문에 받아온 책이긴 해도, 흥미를 돋우던 책이니 공부하듯 읽고 싶지 않았다. 하은처럼 드러눕진 않아도 소파에 몸을 편히 기대고 햇살을 받으며 편한 마음으로 독서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이것도 사춘기라서 그런가?’ 하은은 단유와 명수의 모든 행동의 원인이 마치 사춘기에 닿아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 과하다 싶었지만, 또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하은의 이야기여서 단유도 혹하는 느낌이 있었다. ‘어쩌면 내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호르몬의 영향을 받아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보기엔 자신이 보낸 시간이 너무 길지 않았던가. 남들은 모르는 수년의 세월이 단유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었다. 시간만으로 따지면 단유는 하은과 몇 살 차이도 나지 않으리라. ‘물론 내가 반쪽일 때의 이야기니까.’ 단유가 루치드와 하나가 된 사건은 사실 의미가 크다. 그 전까지는 단유의 정신과 육체의 성장이 불균형적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몸도 빨리 자라고 전교 1등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할 만큼 똑똑하니 성장이 빠르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사실 단유 본인이 느끼기에 자신의 정신은 어느 한순간에 머물러서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의 정신은 육체가 성장하듯 자란다. 혹자는 ‘진화’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단순히 아이에서 어른으로, 단순함에서 복잡함으로 자라는 상태를 일컫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 성장과 함께 여러 경험과 지식을 습득하고 다양한 사고와 감정들을 받아들이며 그 폭을 넓혀가는 것을 정신의 성장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단유는 자신의 경험을 되짚어 정신의 성장을 나누어보았다. 그 폭이 넓어지는 과정을 따라 단계를 나누자면, 크게는 세 가지 단계로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처음은 ‘이기적’인 단계, 자신만을 생각하는 단계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보통은 어린아이들이 여기에 속하는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에 대해 많은 선현(先賢)들이 언급한 바가 있다. 인지의 범위가 좁은 탓에 ‘관계’보다 ‘자기’에 충실해지려는 동물적 본능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단유는 자신이 처음 지구로 왔을 때, 그리고 명수라는 친구가 생긴 이후에도 이 단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는, 입버릇처럼,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던 시기였기 때문이기도 했고, ‘혼자’라고 생각했던 시기이기도 했으니까. 설령 단유가 누군가를 위해 행동하더라도, 그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굳이 비유하면, 가끔 어린 영아들이 손에 쥔 먹을 것을 자기 입에 넣는 대신 타인에게 건네는 정도의 행동 양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단유는 그 시절을 생각하면 ‘부끄러움’을 느꼈다. 지식과 경험이 더해지면 인지의 범위가 넓어지며 ‘관계’를 모색하게 되는데, 이때가 ‘개인’을 자각하는 시기다. 타인과 자신을 구별하고 각각의 다름을 인지하는데, 단유의 경우는 구도자(지톤)들과의 만남에서 이 단계로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너무나 개성이 뚜렷한 세 사람을 만나 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단유의 정신도 조금 성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단유의 정신적 성장이 이어지지 않았다, 고 단유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다음 단계가 타인의 감정과 교류하며 이타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유는 자신이 루치드와 하나가 되기 전까지 ‘감정’의 교류에 대해 거의 느낀 바가 없었다. 지금에야 비로소 진짜 감정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감정에 의해 움직이는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비춰봐도 그렇다. 언뜻언뜻 소소한 일들에 마음이 움직이던 때가 있었는데, 가장 최근의 일이라면 지난 가을 체육대회 때의 일일 것이다. 경기가 끝난 직후 땀에 젖은 아이들이 부둥켜안고 환호를 지르던 순간에 움직였던 감정은 바로 다음 단계로 커가고자 하는 정신의 맥동(脈動)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니 돌연 부끄러움과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나윤과의 만남에 대한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단유는 나윤이 자신을 생각하는 만큼 그녀를 생각하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물론 싫어한다거나 내키지 않는데 억지로 교제를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보여준 따뜻한 마음을 돌려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단유에게 남아있었다. 어쩌면 그 마음 자체가 남들이 이야기하는 ‘미련’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크다. “하아.” 단유는 머리를 털고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얼른 책을 펼쳐 책 속의 내용에 빠져들고자 했다. 괜히 시간이 남으니 이런 ‘후회’와 ‘자책’을 분석하려 들지 않는가. 아르바이트를 구한 것은 잘한 일일 것이다. 단순히 돈을 번다는 목적만이 아니라, 뭔가에 열중할 수 있는, 그래서 쓸데없는 감상에 빠져드는 일을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잘한 일이다. ‘이제는 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 단유는 책 페이지를 넘기며 생각을 지워나갔다. ======================================= [467] 유연한 관계?(4) 타닥타닥. “명수야, 선생님도 물 한 잔만 줄래?” “네.” 명수는 냉장고에 도로 넣으려던 물통을 다시 꺼내어 깨끗한 잔에 담아 하은에게 건넸다. 타닥타닥. “선생님, 다른 거 돌려봐도 돼요?” “그래.” 명수는 하은이 건넨 리모컨을 받아 채널을 변경했다. 뭔가 속이 뻥 뚫릴 예능 프로그램이라도 있으면 보고 싶은데, 어딜 돌려도 딱히 시선을 끄는 프로그램이 없었다. 탁. 탁, 타닥. 하은의 미간이 좁혀지며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탁, 탁. 명수는 뒤통수를 누가 잡아당기는 기분이 들었다. 돌아보고 싶은데, 돌아보면 답답해서 미칠지도 모른다. 탁. 탁. “단유야.” 결국, 참지 못한 하은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보았다. “…예?” 소파 뒤, 거실의 한쪽 벽에 처박혀 있던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자판을 두드리던 단유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시선은 키보드에 꽂혀 있었다. “그냥 선생님이 대신 쳐주면 안 될까?” “괜찮아요, 선생님. 제가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겠지. 할 수 있는데, 어느 세월에 다할까 걱정이 돼서 말이야.” “천천히 하면 되죠. 하다 보면 익숙해지지 않을까요?” 하은은 한숨을 내쉬며 명수를 보았다. “너도 저 정도니?” “아뇨. 전 잘해요. 게임할 때 채팅하려면 빨리 쳐야 하는 걸요.” “…단유도 게임을 강제로 시켰어야 했나? 아니, 요즘 아이들은 다 컴퓨터 잘하는 거 아니니?” “단유 같은 경우가 흔하진 않겠죠.” 하은과 명수의 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단유는 키보드를 보며 독수리타법으로 글자를 입력하는 데 집중했다. “단유가 못하는 게 또 하나 있었구나.” “…저 못하는 거 많다니까요?” 사람들은 다들 단유가 뭐든지 잘할 거라고만 생각하는데, 단유 본인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뭐든지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없었고. 컴퓨터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주로 마우스로 클릭을 하거나 아이디를 쓰는 정도의 타이핑 외에는 키보드를 쓸 일이 별로 없었던 단유였다. “그런데 선생님이 요즘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들으니까, 집에서 인터넷 강의를 안 듣는 아이들이 없다며?” “맞아요! 우리 반 애들도 대부분 인터넷 강의를 듣더라고요.” “그런데 넌 왜 안 들어?” “네?” 하은의 되물음에 말문이 막힌 명수는 우물쭈물대며 시선을 TV로 돌렸다. “너도 인터넷 강의를 좀 들으면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니?” “에이. 무슨 그런 말씀을. 전혀 도움 안 돼요.” “왜?” “그것도 꾸준히 듣는 사람들이나 그렇죠.” “넌 꾸준히 들을 생각이 없어?” “전 축구 연습도 해야 하고, 바쁘죠.” “축구 연습하는 거 말고는 바쁠 일 없잖아?” “…그리고 인터넷 강의보다 단유가 더 잘 가르쳐주는데, 강의 안 들어도 돼요.” “단유가 무슨 만능 사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한다?” “시험 때는 만능 이상이죠. 솔직히 인강도 시험 잘 보려고 보는 건데, 단유 같이 족집게처럼 집어주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굳이 비싼 돈 들여서 볼 필요가 없죠.” “얼마 정도 하는데?”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한 달에 20만원 정도 한다든가? 저도 그냥 들은 이야기라서 잘 모르겠네요. 아무튼, 전 들을 필요 없어요.” “마치 공부는 아예 손을 놨어요,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아뇨, 절대. 단유랑 시험공부는 꼬박꼬박하고 있잖아요? 게다가 이번에 기말시험에서도 저 22등 했어요.” “…네가 그런 점수 얻는 거 보면, 정말 단유가 사기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왜 또 단유로 넘어가요? 저도 나름 열심히 했어요!” “퍽이나 했겠다.…단유야, 그냥 내가 해 줄게.” 탁, 타닥. “…괜찮아요, 선생님. 저도 빨리 익숙해지려면 혼자 연습해야죠.” 하은은 등이 굽은 단유를 흘깃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단유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걸 보고 있으면 답답해져서 숨을 쉬기가 어려워질 정도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저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래도 사람은 적응을 한다. 100페이지 이상을 두드렸더니 그 답답했던 타이핑도 점차 실력이 늘어서, 이제 하은은 답답증을 호소하며 물을 마시는 일이 줄었고, 힐끗힐끗 쳐다보며 눈치 주던 명수도 TV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쯤에야 단유는 아르바이트 삼아 맡았던 책의 번역을 끝냈다. 사실 초반 단유의 타자가 워낙 느렸기에 티가 나지 않았지만, 단유의 번역은 거의 실시간으로, 아니 그냥 한글로 된 글을 그대로 옮겨쓰는 것이라고 착각할 만큼 빨랐다. 하지만 번역 회사의 중년인, 한 달 정도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같은 체크 남방을 입고 있어 그 패션 센스가 의심스러운 유상곤 팀장은 단유의 방문에 놀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애초에 단유에게 맡긴 번역은 책의 앞부분, 대략 50페이지가량의 번역이었기 때문이었다. 50페이지를 번역하는데 한 달이면 ‘중학생’치곤 느리지 않은 편이었다. 게다가 일반 번역도 아닌 전문 번역 분야였기에 시간을 지켜 가져온 것만으로도 칭찬할 만했다. “이메일로 보내도 된다니까.” 상곤은 단유가 건넨 파일을 받으며 말했다. “저희 선생님이 이런 건 직접 가서 주는 게 좋다고 하셔서요.” “선생님?” “아, 같이 사는 누나예요. 저희 ‘보호자’ 되세요.” 익히 아는 단어들이 생소하게 쓰인다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고아’라고 소개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물음을 삼키는 상곤이었다. 하은은 단유에게 꼭 종이에 뽑아서 가라고 일렀다. “첫인상이 중요하거든. 번역을 잘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인상을 남겨야 다음에도 또 너한테 일을 맡길 거야.” 이게 세상 사는 법이지, 라며 으쓱대던 하은의 말을 따라 한 단유는 다행히 효과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종이를 넘기며 살피는 상곤의 얼굴에도 흥미롭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기에. “잘했네.” 대충 읽어봐도 문장과 문단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데다가 소위 ‘번역체’라고 부르는 어색함이 없어서 좋았다. 자세한 건 역시 교정을 보면서 살펴야 하겠지만, 이 정도라면 초벌로 무리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일을 대충 갈무리하여 탁자 위에 올려놓은 뒤 느긋한 표정으로 상곤이 입을 뗐다. “수고 많았어. 많이 어려웠니?” “아뇨, 책이 재미있어서 즐겁게 했어요.” 전문 서적이 재미있다니, 이 아이도 참 별종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 맞추는 건 어렵지 않았고?” “저, 그게요.” 소년이 말을 쉽게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니, 무슨 일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너무 어려워서 ‘선생님’이라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사실 번역이라는 게 무슨 시험 치르듯 혼자 해야 한다는 법도 없는지라 누군가의 도움을 받든 상관이 없다. 기간 내에 지정된 분량을 번역해 오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단유의 망설임은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그리고 나중에 기회를 봐서 이걸 내놓는 거야.” 하은이 입꼬리를 잔뜩 끌어올리며 말했다. 눈에 깃든 장난기만 보면, ‘널 위해서 이러는 거야’라는 말이 설득력을 잃는다. “그럼 깜짝 놀란 얼굴로 널 다시 보게 될걸? 그게 바로 도장 찍는 일인 거야. 이렇게 임팩트를 줘야, 널 어리다고 얕보지도 않고 앞으로도 일을 맡긴다 이거지.” 마치 명수의 어릴 때 모습처럼, 악동같이 히죽거리며 단유의 호주머니에 USB 메모리를 집어넣는 하은이었다. 그런 모습이 신뢰감을 대폭 하락시킨다는 사실을 모를까? 아마 지금쯤 소파 위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 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과연 하은의 전략은 성공할까? 아니면 그저 단유를 난처하게 만들 뿐일까? 단유는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호주머니에서 그 USB 메모리를 꺼내 들었다. “뭐니, 그게?” “이거, 저기 그 책 번역한 건데요.” 단유는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책?” 상곤은 어리둥절해 하다가, 곧 이해했다는 듯 자신의 허벅지를 가볍게 찰싹 때렸다. “아, 파일로. 그렇지. 나도 종이로 받아들곤 깜박했네. 어차피 교정보려면 파일이 필요하니까.” 그러면서 단유의 손에 든 USB를 받아들었다. “앞으로는 메일로 줘도 돼. 굳이 이렇게, 아 이거 필요하지? 복사만 하고 돌려줄게.” 상곤은 얼른 일어나서 컴퓨터에 USB에 꽂았다. 파일을 복사하기 위해 폴더를 열고 복사를 하려는데, 이상하다. ‘이게 용량이 왜 이렇지?’ 1메가 정도의 용량을 생각하다가 5메가가 넘는 용량의 파일에 의아함을 느낀 상곤이 파일을 열어보았다. 긴 스크롤, 그리고 아래쪽에 매겨진 페이지 수. “뭐지?” “저기, 그게 책 전부를 번역하긴 했는데요. 혹시 몰라서요.” 몰라서라기보다는 하은의 꾀가 담긴 책략이었다. 단유는 컴퓨터 앞에 앉아 온종일 독수리 부리처럼 손가락 끝을 세워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리고 5일이 지난 즈음에 배정받은 분량을 번역해내자, 감탄한 하은이 반쯤은 장난으로 단유에게 제안했다. “타이핑 연습도 할 겸, 뒤의 분량도 번역해 봐봐.”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했다. 다시 일주일이 지나고 단유의 타이핑이 빨라졌을 때, 책의 반이 번역되었다. “점점 빨라지네? 계속해 볼래?” 어차피 글을 번역하면서 읽는 재미도 있었고, 타이핑이 늘어나는 것이 체감되기도 해서 단유는 계속 번역을 이어나갔다. 타이핑이 리드미컬 해지다가 다시 2주가 지날 무렵, 책을 완전히 번역하기에 이르렀고, 단유의 타이핑은 평균 400타 정도에 이르렀다. “와, 이건 한 달 만에 번역하다니. 실화냐?” “…무슨 뜻이에요?” “아, 우리 반 애들이 가끔 이런 말 쓰길래 해봤어. 너희 또래 애들이 많이 쓰는 말 아니니?” “…….” 아무튼 그런 이유로 책을 완전히 번역하자 하은이 꾀를 냈다. 본래 배정받은 분량은 종이로 출력해서 제출하고, 이후에 USB를 건네서 담당자를 깜짝 놀라게 하라. 도대체 그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이냐는 단유의 물음에, 하은은 ‘잘 되면 좋은 거지’라며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일단 깜짝 놀라게 한 것은 성공한 것 같았다. 눈이 작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크고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이걸, 정말 한 달 만에 했다고?” “그런데 말씀하신 것처럼 전문적인 단어들이 많이 나오더라고요. 대충 인터넷에서 유사 단어를 찾아서 바꾸긴 했는데, 그게 학계에서 정식으로 쓰이는 용어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 건 1, 2차 교정단계에서 고치면 되니까 문제는 없다. 문제는 이 분량을 한 달 만에 해냈다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이 책은 현재, 분량을 잘게 쪼개서 여러 사람에게 맡긴 상황이었다. 그리고 단유는 그중의 한 명일 뿐이고. 그런데 그 한 명이, 아르바이트를 맡은 이들 중 가장 어린, 고작 중학생인 그 한 명이 책은 완역(完譯)했다고 말한 것이다. 그것도 한 달 만에? 어쩐지 번역 시험 1급을 너무 과소평가했던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요즘 번역 1급들은 다 이 정도인 걸까?’ 나중에 자신이 아는 번역가들에게 물어봐야겠다. 세상이 빨리 변한다더니, 이런 데서도 변화의 조짐이 느껴진다. **** “다녀왔습니다.” “왔어?” 소파에 누워 있던 하은이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어땠니? 깜짝 놀래지?” “네.” 당연하지. 솔직히 자신도 많이 놀라지 않았던가. 나름 단유를 알고 지낸 본인도 그 어마어마한 속도와 실력에 놀랐는데, 단유를 고작 ‘중학생’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을 사람이라면 놀라서 자빠지지나 않으면 다행이리라. 아니, 잠깐. “혹시 뒤로 넘어지진 않았고?” 단유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하은을 쳐다보다 대꾸도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야, 갑자기 왜 방으로 들어가니?” “옷 갈아입고 씻어야죠.” “대답해주고 씻어! 야! 단유야!” ======================================= [468] 유연한 관계?(5) 번역비는 교정이 끝난 후에 받기로 했다. 일단 완역본을 검토해 본 후 쓸만하다 싶으면 쓰되 무리가 있다면 애초 분량만 쓰겠다고 상곤이 말하자 단유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괜찮아요, 전.” 애초부터 약속된 일이 아니었으니,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처음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는 일인지라 어떻게 일이 진행되는지 알아보고자 하는 마음도 컸다. 완역은 그저 경험치로 돌려도 무방하리라. 대신, 이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단유는 팀장에게 해당 원서를 선물로 받았다. 덩달아 다른 일감도 받았고. “일을 또 받았니? 거봐. 선생님이 말했잖니? 그렇게 하면 인상을 강하게 남길 수 있다니까.” 하은이 득의양양한 웃음을 짓는데, 그게 참,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느끼게 했다. 다소 유치하게 느껴지는 웃음을 지어 보이는 하은이었지만, 그녀의 말대로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책 완역 인정되면 돈 많이 받을 텐데.” “그래요?” “그런 말 안 하든?” 하지는 않았지만, 단순 계산으로도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받는지 모르겠지만, 처음 분량 배정 시에 약속한 금액은 A4 1장당 5천 원이었다. 완역본의 페이지 수가 대략 300장을 넘어가기 때문에 그 금액만 따져도 150만 원 이상이다. “에이, 그것보단 많아야지. 원래 전문 서적 번역은 페이가 센 데.”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볼 문제다. 당장 급한 것은 새로 받은 책을 읽어보는 것이다. 이번에 받은 책도 역시 사회 과학 분야 서적이었는데, 이번에는 좀 덜 전문적인 대신 완역을 하기로 했다. “얼만데, 그건?” 아무래도 하은이 옆에 있으면 편하게 책을 읽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단유는 방으로 들어갔다. “얼마냐니깐?” **** 한 달을 꼬박 집에만 틀어박혀 책을 읽고 번역하는 일에 매달렸더니 어느새 2월이 찾아왔다. 명수에게 한 달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다면 앓는 소리를 내며 버둥거렸겠지만, 단유에겐 너무나 편하고 익숙한 일이었다. 오히려 그 시간이 휴식과도 같아 즐거웠다. 비록 숫자를 좋아하고 계산하는 게 재밌다고 해도, 늘 같은 것만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무리가 없다 해도, 다른 분야의 지식을 경험하는 것은 휴가나 다름없어 머리를 식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단유가 외출준비를 하자 호빵이 그걸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는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나 좀 나갔다 올게.” 단유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낮은 콧소리로 킁 하고 대답하는 호빵이었다. 명수는 축구부 선배 졸업식 때문에 학교엘 갔고, 하은은 언제나와 같이 학원으로 출근한 상황이라 집에는 단유와 호빵뿐이었다. “너도 혼자 있는 게 힘들 거야. 그렇지?” “킁.” “내가 돈 벌면, 네 친구부터 구해야겠어. 외롭지 않게.” 호빵은 단유의 발밑에 다가와 짧은 다리를 들어 툭툭 건드렸다. 호빵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뒤, 단유는 집을 나섰다. 번역 회사에 다녀온 후, 일주일 만에 외출하는 단유였다. 번역을 모두 마친 것은 아니지만, 오늘은 그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처음 가보는 곳이지만 이미 인터넷으로 가는 길을 파악해뒀기에 헤매지 않고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집에서 거리가 좀 떨어진 곳이라 가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2월이라도 겨울인 것은 마찬가지니 여간 추운 게 아니었지만, 1월의 맹추위를 떠올리면 확실히 날이 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러다가도 갑자기 폭설이 내리기도 하기에 날씨의 변덕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고도 했었다. 그나마 컴퓨터와 최첨단 기술의 영향으로 점점 예보의 정확도가 올라간다고 하니 언젠가는 날씨의 변덕도 사람이 극복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 긴 시간이 걸려 도착한 곳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사람들이 붐비더니, 골목을 따라 올라갈수록 통행이 쉽지 않을 정도였다. 인파로 가득 찬 골목의 한가운데서도 굳이 자동차를 끌고 가겠다며 들어가는 몰상식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 골목을 따라 올라가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들고 있는 게 있었으니, 바로 꽃이었다. 사실 단유가 향하는 곳은 한 고등학교의 졸업식이었다. 그리고 그 졸업식에서 단유가 만나려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윤이었다. **** “아이고, 너 찾느라 혼이 났어.” “왜 왔어, 엄마. 그냥 졸업장만 받고 그냥 갈 거라니까.” “네 졸업식이 이게 마지막일 텐데 이거라도 안 오면 섭섭해서 어쩌니?” 어머니의 뼈있는 말에 나윤은 어머니를 흘겨보며 대꾸했다. “은근히 디스한다, 엄마?” “그럼 대학 갈 거니?” “왜 또 그래? 그 이야기 끝났잖아?” “그러니까 하는 말이지.” “엄마 일부러 나 흉보려고 온 거야? 그럴 거면 그냥 돌아가.” 딸의 매몰찬 반응에 어머니는 딸의 엉덩이를 때리며 말했다. “넌 엄마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그러는 엄마는?” 그러다 문득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져 나윤은 급히 목소릴 낮추고 속삭였다. “됐어, 그만해. 딴 사람들 쳐다보잖아.” “큰 소리는 네가 쳤어.”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라는 어머니의 능청에 나윤은 화도 내지 못하고 입술만 삐죽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 참!” 그때 마침 지나가던 나윤의 친구가 다가왔다. “나윤아?” “어, 혜정아. 엄마, 여긴 내 친구 혜정이.” “안녕하세요?” “어, 그래 반갑다.” “혜정이도 나랑 같은 지망생.” ‘연습생’이란 표현 대신 ‘지망생’이라고 했지만, 결국은 기약 없는 데뷔를 꿈꾸는 처지다. 다만 나윤과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냥 데면데면한 정도? 오히려 먼저 데뷔를 한 나윤을 조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혜정이었고, 숫기 없는 나윤보다는 조금 더 활발한 성격이어서 먼저 다가와 말을 거는 건 대부분 혜정이었다. “반은 다른데 같은 쪽 일을 하고 있어서 친해졌어.” “그러니? 너도 고생이 많겠구나.” 주로 두 사람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항상 연습과 데뷔에 관한 이야기뿐이지만, 그조차도 오래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는다. 서로 다른 회사에 소속된 마당에, 각자의 회사 험담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결국 ‘넌 레슨 얼마나 받니?’나 ‘요즘 무슨 노래로 연습하니?’ 정도의 대화만 오갈 뿐이었다. 그런 대화가 나윤은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혜정은 나윤과 그런 대화를 하면서 ‘너도 아직은 연습생이잖아’라고 확인하려 드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최근 ‘컴백’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불필요한 말로 서로의 차이를 느끼게 만들 이유가 없다. 그래도 어머니 앞에서 싫다는 표정은 짓지 않았다. 혜정이라도 말을 붙여주지 않는다면 반 친구들 중 누가 나윤에게 살갑게 다가와 말을 걸어줄까 염려도 되었다. 그래서 일부러 교실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에서 얼쩡대고 있었던 것이고. 교실에는 나중에 담임 선생님이 졸업장을 나눠줄 때나 들어갈 생각이었다. “졸업 축하해.” “너도.” “나중에 무대에서 만나자.” “그래.” 혜정은 어머니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인 뒤, 예쁜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착한 애구나.” “착하긴.” 나윤의 대꾸에 이번엔 어머니가 딸을 흘겨보았다. “넌 친구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그런 게 있어.” 나윤은 괜히 머쓱해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는 사람을 찾기 위함이 아니라, 아는 사람이 있을까 봐 경계하는 눈이었다. 어머니만 아니었으면 계속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적은 곳으로 옮길 텐데, 그 사정을 또 어머니에게 구구절절 이야기하기가 귀찮아서 그저 주위만 살피는 나윤이었다. 그런 딸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어머니는 나윤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요즘 나윤이 많이 신경질적이어서 대화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 컴백을 하게 되었다고 좋아하던 나윤은 곧 회사에서 마련한 예전의 숙소로 짐을 옮기면서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에는 회사에서도 기존의 정책을 바꿔 휴대폰을 가지지 못하게 만들어서 통화도 힘들었다. 그래서 딸을 보려면 직접 숙소로 찾아가야 하는데, 어머니도 평소에 일을 해야 하는 처지라 주말에나 반찬 몇 가지를 싸서 가야 잠깐 만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요즘 딸이 심상치 않았다. 유난히 신경질이 심해서 살짝 미운 마음도 들 정도였다. 그런데 계속 신경질만 부리고 있는 거라면 한소리라도 할 텐데, 어떨 때는 안타까울 정도로 우울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어 어머니의 마음은 타들어 가기만 했다. “그런데 넌 왜 강당에 안 있고 여기 있어?” “됐어. 조금 있다가 교실 가서 졸업장만 받고 돌아갈 거야. 오늘도 연습해야 한단 말이야.” 어머니의 시선을 피한 채로 말을 잇던 딸은 곧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끝났나 봐.” 강당에서 몰려나오는 학생들을 보며 어머니는 또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나윤의 걱정과 달리, 교실에 들어서니 많은 친구가 아는 척을 하며 말을 건넸다. 평소 함께 하는 시간이 적은 데다, 3학년이 될 무렵부터 ‘연예인’이라는 거리감이 들었는지 아이들이 잘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졸업식이라 그런지 같이 사진 찍자며 넉살 좋게 다가오는 친구들이 있어 나윤은 한결 편하게 교실에서 있을 수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선생님이 들어오셨고, 졸업장을 나눠준 후 학생들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나누다 졸업식이 완전히 끝이 났다. 운동장에는 일찍 끝내고 나온 학생들이 친구, 가족들과 함께 모여서 사진을 찍느라 분주했다. “나윤아, 우리도 사진 찍어야지?” 나윤은 싫은 눈치를 보이려다 참았다. 본인도 사진 정도는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때문이었다. “이거 누구한테 찍어 달라고 하지?” “그냥 우리끼리 찍어.” “에이 그러면 자세가 안 나오잖니?” “그냥 찍어.” 하지만 어머니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부탁할 사람을 계속 찾았다. 하지만 다들 바쁜 와중이라 마땅히 부탁할 사람이 보일 리 없었다. 나윤은 이마를 찌푸리며 어머니의 손에서 핸드폰을 뺏으려 했다. “아, 저기 있네.” 나윤이 뻗던 손을 멈추고 어머니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윤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 “네. 오랜만에 뵙네요.” 어머니가 단유와 인사를 하는데, 나윤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는 주변의 학생들이 단유의 얼굴을 힐끗거리며 ‘누구지?’ ‘남자 친구야?’라고 숙덕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는 데 힘들지 않았니?” “워낙 여기 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길 잃을 염려는 없겠던데요?” “어머, 그랬어?” 어머니의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와의 대화가 대충 마무리되자 그제야 나윤에게로 시선을 옮긴 단유가 예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죠?” “…….”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흐르자, 어머니가 대뜸 단유의 손에 핸드폰을 쥐여줬다. “우리 사진 찍으려고 했는데, 손이 모자라서.” “아, 제가 찍어 드릴게요. 두 사람 서보세요.” 단유가 사람들을 피해 두어 걸음 물러섰다. “두 분 서보세요.” 어머니가 나윤의 팔짱을 끼고는 단유를 바라보았다. “웃으시고요.” 단유는 핸드폰의 액정을 바라보며 찍을 타이밍을 기다리다 다시 말했다. “누나, 웃어요.” 하지만 나윤의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화가 난 것인지, 당황한 것인지, 슬픈 것인지, 기쁜 것인지 구분하기 힘든 묘한 표정이었다. “나윤아.” 어머니가 나윤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쳐도 표정이 쉽사리 변하지 않았다. 괜한 짓을 했나, 싶은데 나윤이 물었다. “엄마가 불렀어?” “응.” 나윤은 입술을 꼭 다물고 단유를 응시했다. 단유는 그 시선을 마주하다 씨익 미소를 지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꾸밈이 느껴지지 않는 웃음이었다. “웃어요. 예쁘게 찍어야죠.” 날씨의 변덕만큼이나 사람의 마음도 변덕이 심하다. 지금 나윤의 마음속에서 오갔던 그 수많은 감정의 변화들을 짚어보자면, ‘변덕’이라는 표현이 모자랄 정도다. 웃으라고? “자, 찍어요. 하나, 둘, 셋!” 눈물 한줄기가 볼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 [469] 유연한 관계?(6) “왜 온 거니?” 나윤은 조심스럽게 묻고 싶었지만, 정작 입에서 나온 말에는 어쩐지 가시가 잔뜩 박힌 것 같았다. 그래서 스스로도 놀라는 와중인데 단유는 아무렇지 않은지 또 슬쩍 웃는 모습을 보였다. “졸업 축하해드리려고요?” 얘는 왜 계속 웃는 거니?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더니 정말 단유의 미소를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거린다. “…우리 헤어졌잖아.” “연애를 그만두자는 거지 만나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게다가 싸운 것도 아니잖아요.” “…말장난하지 마.” 그렇지만 단유의 말에 혹한 것도 사실이었다. 나윤은 잠깐 사이에 ‘회사에서도 연애하지 말라고만 했잖아? 그럼 연애는 안 하고 만나면 상관없을까?’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버렸다. “말장난 아니에요. 사실 오늘 어머니께서 먼저 연락을 주시기도 했지만, 저도 오려고 했었어요.” “헤어졌는데도?”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헤어졌다’는 것의 의미가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헤어지면 연락도 하면 안 되는 건가요?” “……” 나윤은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정작 그 말이 입술을 비집고 나오진 못했다. 정말 그렇게 말하면 단유에게서 아예 연락이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절망감에 무릎이 꺾일 것만 같아서였다. ‘핸드폰도 없으면서.’ 어차피 연락할 수단이 없는 건 마찬가진데 말이다. 나윤은 얼른 화제를 바꿨다. “엄마랑 연락하고 지냈어?” “그렇게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연락을 먼저 주시긴 했어요.” 그것도 아주 예전의 일이지만 그것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나윤은 만약 어머니가 자리에 계셨다면 왜 전화했냐고 다시 따지고 싶었지만 나윤의 그런 반응을 예상했던지 어머니는 먼저 자리를 피하셨다. 사진도 찍을 만큼 찍었고, 나윤도 곧 회사로 들어가야 하는 마당이니 먼저 돌아가겠다는 핑계였지만, 누가 봐도 단유와 시간을 주려는 의도임이 분명했다. ‘혹시….’ 문득 나윤은 단유와 헤어진 뒤, 방에서 한참을 울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거실에 어머니가 계셨던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아마 계셨다면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것도 알고 계셨으리라. “우리 엄마, 우리 헤어진 거 알고 있어?” 단유는 그걸 왜 나한테 묻냐는 눈으로 나윤을 빤히 바라보다, 어깨를 한번 으쓱거려 보였다. 대답하지 않아도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안녕하세요?” [그래요, 오랜만이네요.] 단유의 기억으로도 한참 전 이긴 했다. 나윤의 어머니로서는 알 수 없는 3개월 이상의 시간이 끼어있기 때문이지만, 그 기간을 제외하더라도 마지막으로 통화한 날이 여름의 끝 무렵이었으니 벌써 6개월 전이다. “네. 잘 지내셨어요?” [나야 잘 지내죠. 학생은, 잘 지내요?] “네.” [공부하느라 많이 힘들죠?] “아뇨. 괜찮아요.” 이야기가 겉돈다는 느낌이 드는 건, 수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머뭇거림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단유로서는 딱히 드릴 말도 없거니와 헤어진 여자친구의 어머니와의 대화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직하게 물어보기로 했다. “무슨 일이세요?” [아, 다름이 아니고….] 어머니의 전화는 단유가 나윤의 졸업식에 와줬으면 한다는 이야기였다. “괜찮을까요? 누나가 절 보지 않길 원할 텐데요?” 잠시 수화기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건 아닐 거에요.] 어머니는 딸의 변화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최근 딸이 심리적으로 불안하다고 느낀 어머니는 그 이유가 단유와 헤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컴백을 앞두고 신경이 곤두선 탓도 없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헤어지고 돌아와 펑펑 울던 모습이나, 그 이후에도 가끔 숙소로 찾아갔을 때 우울한 얼굴로 있던 모습을 떠올리면 단유와의 일이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고 여겼다. 어머니라는 입장에서 볼 때, 두 사람의 교제가 그렇게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반듯해 보이는 단유가 나쁘지 않아 보여 그동안은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고, 딸의 얼굴이 과거 어느 때보다 밝아 보이니 두고 볼 뿐이었던 것도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단유에게 전화를 했고, 나윤과의 만남을 직접 주선하게 되었다. [두 사람 헤어진 건 알아요. 회사에서 그래야 한다고 그러더라고요. 하지만 사람 사이가 그렇게 무 자르듯 끊어지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사실 말인데, 나윤이 어미로서 조금 이기적일 수 있지만, 학생이 우리 나윤이 좀 위로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요즘 나윤이가 많이 힘들어하는 것도 같은데 다른 사람 말을 잘 안 들으려 하는 것 같아서 말이에요. 그래도 학생 말이라면 좀 듣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싫어져서 헤어졌다면 저렇게 우울해하지 않았으리라, 는 판단에 어머니는 단유에게 부탁을 했고, 단유는 흔쾌히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 “회사 가야 하죠?” “으응.” 단유의 물음에 우물거리듯 대답하던 나윤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아, 그런데 빨리 안 가도 돼.” 말을 꺼내고서야 아차, 하는 심정으로 ‘졸업식 끝나고 친구들이랑 이야기도 나누고 하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라고 뒤늦은 핑계를 대는 나윤. 그녀에게 단유가 식사 같이하겠냐고 물었다. “점심 드셔야죠.” “아, 그런데 나 요즘 다이어트해서….” “아, 그래요?” “그, 저기 그냥 간단하게 뭐 먹자. 아니 넌 밥 먹어야 할 거 아냐? 난 조금만 먹으면 되니까, 가서 먹자. 저기, 이 근처에 분식집 맛있는 데 있거든? 거기 갈래?” “네.” 두서없는 나윤의 모습을 보며 마치 헤어지기 전의 나윤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사실 헤어졌다고 해야 이제 고작 한 달을 겨우 넘겼을 뿐이니,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다. 반면 나윤은 너무 오랜만에 단유를 보는 기분이었다. 불과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마치 반년을 못 보고 살다가 만난 것 같았다. 그래서 반갑기도 하거니와,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이 이후에는 정말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여기예요?” “으응.” 분식집은 문을 닫은 상태였다. 하긴 방학 때인 데다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사하는 집이니 이맘때 문을 열지 않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윤은 괜히 투덜거리며 닫혀 있는 셔터를 발끝으로 툭툭 찼다. “여기 자주 왔어요?” “응? 어, 가끔.” 사실은 자주 오지 못했다. 1, 2학년 때나 가끔 와서 먹긴 했어도, 연습 때문에 조퇴하고 회사로 향했던 나윤이 학교 앞 분식집에 자주 갈 리 만무했다. 그나마 학교 앞에서 나윤이 아는 집이 이곳뿐이라 온 것일 따름이었다. “다른 곳 찾아보죠.” “그래.” 이미 졸업생들도 많이 빠진 틈이라 올 때와 달리 한산해진 학교 앞 거리였다.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이었지만, 그사이에는 애매한 간격이 존재했다. 그 공간의 애매모호함이 나윤의 입을 틀어막았다. “예전 일이 생각나네요.” “응?” “예전에, 누나랑 사귀기 전에요. 누나가 워낙에 말이 없어서, 제가 말을 많이 하게 된다고 했었잖아요? 지금 또 그런 것 같아서요.” “…….” “이런 누나가 그렇게 말이 많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내가 말이 많다고?” “누나가 워낙 말이 많아서 제가 입을 열 틈이 없었던 거 몰라요?” “내가, 그랬어?” 그랬을까? 그랬던 것 같기도 한데, 딱히 그랬나 싶다. 지금 생각나는 건 단유와 만나는 동안 단유의 얼굴을 보며 웃느라 정신없던 기억밖에 없는데. “그렇게 말하니까, 우리 헤어진 지 되게 오래된 사람들처럼 느껴지네요.” “…….” 거리를 한참을 걸어도 들어갈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문을 닫았거나 혹은 들어가기가 꺼려지는 식당들뿐이었다. “아무래도 누나는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 운명인가 봐요.” 단유 나름의 우스갯소리였지만, 나윤은 마음이 급해졌다. 어디라도 들어가지 않으면 단유가 그냥 가겠다고 할 것만 같았다. “저기….” “누나.” “…응?” “아무래도 오늘은 같이 식사하기가 힘들겠네요. 이래서야 나중에 회사에 늦게 들어왔다고 혼나겠어요.” 나윤은 손을 내저으면 아니라고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또 입이 틀어 막힌다. 손이 올라가지도 않는다. 나윤은 가만히 단유의 말을 기다렸다. “여기서는 버스 타고 가나요? 아니면 지하철?” “…지하철.” “아, 그러면 지하철역까지 같이 가요. 거기까지 배웅해드릴게요.” 이 쿨한 남자는 끝까지 쿨하게 보내주려는 모양이다. 아주 잠깐, 졸업식에 얼굴을 드러냈을 때만 해도 자신에게 ‘미련’이 남아서 온 걸까, 라는 희망을 가졌는데, 끝까지 쿨하다. 시크하다? 도도하다? 아주 그냥 얄미워 죽겠다. 그런 마음이 또 나윤의 입을 쉽게 열지 못하게 막는다. “같이 연습하는 멤버는 어때요? 좋아요?” 관심이나 있니? 괜히 신경질이 난다. 관심 있으면 소개해 줘? 말없이 앞만 보고 걷는 나윤의 눈치를 흘깃 본 단유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많이 힘든가보다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눈치 없이 괜한 걸 묻는다고 트집잡힐 것 같아서였다. 또 그렇게 말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지하철역이었다. 나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또 이렇게 헤어지고 마는 건가 싶어 답답하고 억울했다. “누나.” 정신 차리고 보니, 단유가 한 걸음 뒤에 서 있었다. 돌아보는 나윤에게 단유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진짜 마지막, 일지도 모르겠네요.” “…마지막이니?” 진짜 마지막이야? 다시는 얼굴 안 보일 거야? 라고 묻는 것처럼도 들리고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 라고 애원하는 것처럼도 들린다. 단유는 옅게 웃으며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생각해보니까 누나한테 선물 하나 해준 게 없더라고요. 기껏해야 들에서 꺾은 꽃이나 줬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조금 창피하기도 하고 그러네요.” 아직도 그 꽃이 방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이 아이는 알까? “그래도 마지막인데, 지난번에는 경황이 없어서 그랬다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선물을 주고 싶어요.” “헤어지는데 선물 주는 건 무슨 심보니?” 아까부터 마음과 반대로 말이 나온다. 나윤은 자신이 미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도 좋은지 단유는 히죽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사실 이것도 제대로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정성이라고 생각하고 받아줘요.” 나윤이 머뭇거리다 손을 내밀어 단유의 선물을 받았다. “목걸이?” 은색 줄에 아주 작은, 새끼손톱만 한 펜던트가 걸려 있는데, 펜던트의 가운데 하얀 보석이 박혀 있었다. “다이아몬드?” …일리는 없지만, 마치 그런 보석처럼 보인다. “은목걸이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도 있다던데, 혹시 안 맞으면 다른 거로 바꿔서 쓰세요. 금목걸이는 좀 비싸서 제 능력으로는 어렵더라고요.” “니가 무슨 돈이 있어서 그래?” “그래도 이 정도는 살 수 있더라고요. 별로 안 비싸서.” 물론 ‘목걸이’만의 이야기였다. 보석이 박힌 펜던트는 제외한. 나윤은 영롱한 빛깔의 보석을 들여다보았다. 투명하리만치 맑은 보석 안에 다양한 빛깔들이 면을 따라 빛을 내고 있었다. 정말 말로만 듣던 다이아몬드를 실제로 보면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다이아몬드는 아니겠지. 비싸지 않다고 말하는 걸 보면. 아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순간 보석에 눈이 돌아간 자신을 탓하며 나윤이 다시 목걸이를 내밀었다. “받을 수 없어. 우리 헤어졌잖아? 다시 시작하자는 것도 아니고, 이런 선물 부담스러워서 못 받아.” 다시 시작하자고 하면 모를까. “그냥 받아요. 그동안 누나한테 해준 것도 없이 받기만 했는데 이 정도는 해야 저도 미련 없이 누나를 보낼 수 있을 거 같으니까.” “미련?” 그렇다면 더더욱…. “갈게요.” 단유는 손을 흔들더니 ‘미련 없이’ 돌아섰다. “야, 단유야!” 단유는 곧 지하철 계단을 걸어 올라갔고 금세 모습이 사라졌다. 눈물이 핑 돌았다. 목걸이를 손에 쥔 채로 나윤은 그곳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쁜 놈.” 목에 걸어나 주고 가지. ======================================= [470] 포착(1)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게 참 묘해.” 하은과 단유는 모처럼 주말을 맞아 밖으로 나섰다. 학원이 쉬는 날이기도 했고, 날이 좋아서 나가고 싶다는 하은의 뜬금없는 충동 때문이기도 했다. 명수는 약속이 있다는 이유로 나가고 없어서 둘만의 외출이었다. “어떻게 묘해요?” 학원가는 날도 아닌데 단유가 사준 블라우스를 입은 하은은 입고 나온 가죽 재킷을 옆 의자 위에 걸쳐 놓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축였다. “고무줄 같다고나 할까?” “고무줄이요?” 단유는 따뜻한 커피잔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두 손에 품으며 물었다. “연애라는 게 마치 양 끝에서 고무줄을 잡고 당기는 것 같거든.” “…그러면 끊어지지 않나요?” “생각 없이 당기기만 하면 그렇지. 그러니까 적당히 힘 조절을 해서 당기기도 하고 놓기도 하는 거지. 끊어지지 않게.” “둘 다 놓으면요?” “그럼 고무줄이 축 늘어져서 바닥에 나뒹굴겠지? 원래 사람 사이에는 팽팽한 고무줄 같은 긴장감이 있어야 하는 법이야. 그래서 상대를 의식하고 상대의 행동, 말, 표정 등을 관심 있게 보는 법이거든. 바닥에 떨어진 고무줄처럼 서로에게 관심이 떨어지면 언젠가는 잡고 있던 줄도 놓고 말게 되는 거지.” “둘 다 잡아당기면요?” “고무줄이라니까? 고무줄을 서로가 양보 없이 잡아당기면 과도하게 긴장감이 커지다가 결국 끊어지고 마는 거지. 적당히 양보할 줄 아는 미덕이 없는 연인 관계가 금방 파국을 맞이하는 건 그 때문인 거야. 그래서 사람들과 만날 땐 배려하고 양보하는 마음도 필요한 거고.” “그렇다면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로 잡아당기거나 힘을 풀어주는 요령이 필요하겠네요?” “그렇지. 그게 처세술이고, 연애의 기술인 셈이지.” 뭔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하은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렇게 잘 알면 선생님은 연애 잘하시겠네요?” 순간 하은은 마치 메두사를 본 양 얼굴을 굳히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흐르는 거지?” “선생님이 시작하신 말이잖아요?” “이론과 실전은 다른 법이야.” “전 선생님이 빨리 실전으로 넘어갔으면 좋겠어요.” 하은의 입술이 꿈틀거리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다, 고 단유는 느꼈다. “이제 내가 싫증 나니?” “그런 위험한 발언은 삼가시는 게 어떨까요?” “모처럼 선생님이 제자에게 금과옥조와 같은 가르침을 내리는데, 배은망덕하게도 제자는 선생님을 놀려먹을 궁리나 하고 있으니 가슴이 아프다.” “감히 제자 된 입장에서 선생님을 놀리려고 하겠습니까? 아직 창창하신 선생님께서 다가오는 봄날에는 부디 외롭지 않으시길 바라는 마음이지요.” “…넌 선생님이 외로워하는 것처럼 보여?” 하은의 진지한 물음에 단유도 표정을 고쳤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외로워할 틈도 없이 바쁘시죠. 그래서 미안하고요.” 시선을 떨어뜨린 단유는 손안에서 커피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저희 때문에 선생님이 너무 희생하시는 게 아닌가 싶어요. 사실 선생님도 아직 젊으시잖아요. 비록 제가, 저희가 선생님이라고 호칭을 하긴 하지만, ‘누나’잖아요.” 하은은 어린 두 제자들이 평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전혀 몰랐다. 그래서 단유의 진지한 이야기에 웃을 수가 없었다. “희생이라.” 단유는 나지막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재훈이 형…이 여전히 저희 보호자로 지정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법이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선생님이 그 역할을 대신할 이유가 없는데도 저희를 위해서 함께하시는 거잖아요.” 하은은 말없이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늘 고맙고 또 미안해요. 만약 누나가 안 계신다면 저도, 명수도 이렇게 걱정 없이 학교생활을 할 수가 없었겠죠. 저희가 삐뚤어지지 않게 잘 잡아준 것도 선생님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일 테고요. 그래서 선생님이 안 계실 때를 상상하기가 쉽지 않아요. 하지만 선생님도 언제까지나 저희랑 함께하실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그래서도 안 될 테고요.” “왜? 가족처럼 오래 함께할 수도 있지.” “선생님도 선생님만의 삶이 있으시잖아요.” 하은은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 얼른 고개를 돌렸다. 눈에 힘을 주고 창밖을 바라보니, 더러 가벼운 옷을 입은 채로 거리를 거니는 여자들도 보이고, 눈에 띄게 예쁜 가방을 팔에 끼고 다른 팔에는 말쑥한 외모의 남자 친구를 끼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사이 좋은 부부로 보이는 중년인들도 보이고, 아이들과 함께 거리로 나온 가족도 보였다. 언제였던가, 한번은 현모양처를 꿈꿨고, 한번은 커리어우먼을 꿈꿨다. 귀여운 자식들을 사이에 두고 남편과 놀이공원을 가는 모습을 상상한 적도 있었고, 노처녀로 늙어가도 절대 꿀리지(?) 않으리라 다짐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인테리어에 관심을 두기도 하고, 패션 잡지를 구독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느 순간에도 두 남자 아이를 데리고 살아가는 모습을 꿈꾸진 않았었다. “단유야, 선생님은 한 번도 너희들과 함께 하는 이 생활을 후회한 적이 없어. 외롭다고 느낀 적도 없고.” 단유는 하은의 눈빛이 약간 젖어있었다고 느꼈다. “그래, 네 말대로 언젠가는 선생님도 선생님만의 삶을 살겠지. 하지만 지금은 지금의 삶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어. 오히려 너희들과 함께하면서 행복하고. 너희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며 즐겁고 좋아.” 차마 단유에게 말은 못 꺼내겠지만, 예전 두 아이를 제대로 보살필 능력이 없다는 사실에 절감하며 떠났던 일이 지금은 가장 부끄러운 선택 중의 하나였다. 비록 학교로 돌아가 이론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겠다는 결정 때문이긴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계속 함께했던 것이 좋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서로 부족한 걸 채워주고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니까 선생님 연애 걱정은 접어두고, 네 연애나 걱정해, 이 녀석아.” “저 헤어졌다니까요?” “그래서 위로해주려고 데리고 나왔잖니?” “위로받을 일은 아닌데요.” “원래 헤어지면 위로해주고 그러는 거야.” “그럼, 앞으로 저도 선생님 위로해주고 그래야 해요?” “…하나를 알려주면 하나만 알도록 해. 굳이 둘 이상을 알려고 하지 말고.” “언제는 열을 안다고 칭찬해주시더니?” “거기까지 하자. 커피도 다 마셨다.” 일어서는 하은에게 단유가 물었다. “어디 가요?” “놀러.” “놀러요?” “오늘은 내 남자 친구 역할 좀 해라.” “나이 차이가….” “뭐?” 이제까지와 비교할 수 없는 찌릿한 시선이 ‘비수처럼’ 날아든다. “아니에요. 이거 갖다 놓고 올게요.” 단유는 쟁반을 들고 카운터 옆 반납대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예전엔 그저 똑똑한 아이였다면, 이젠 따뜻한 친구, 라고도 느껴질 때도 있었다. ‘아이들은 참 빨리도 자라는구나.’ 하은은 재킷을 걸치고 안에 입은 블라우스 매무새를 보기 좋게 고쳐 입었다. 처음에는 그냥 집 주변 커피숍에 나와서 수다나 떨다가 들어갈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그냥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았다. “놀이공원에나 갈래?” “놀이공원이요?” 단유가 큰 눈을 끔뻑거리며 묻자, 하은은 웃으며 단유의 목을 잡아끌었다. 오늘은 날이 좋아서 나가 놀기 딱 좋은 날이다. **** 개학이 며칠 남지 않았을 때, 단유는 다시 출판사를 찾았다. “며칠 전에 보낸 완역본은 잘 봤다. 수고했어.” 상곤은 단유를 회의실로 안내했다. 넓은 회의실에 오직 두 사람뿐이었지만, 조용해서 이야기를 나누기 좋았다. “고맙습니다.” “교정부에서 보더니 고칠 데가 거의 없다는구나.” “그런가요?” “물론 약간의 오타는 있다지만, 그건 고작 오타일 뿐이고 번역 자체는 깔끔하게 잘했다는 평가더구나.” “감사합니다.” 상곤은 준비해온 서류를 내밀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괜찮으면 계약을 하는 게 어떻겠니?” “계약이요?” 단유는 상곤이 건넨 서류를 살폈다. “지난번에 냈던 번역본 있지? 『욕망의 영토』 말이야.” “아, 네.” “원래는 너한테 줬던 것처럼 여러 사람한테 분량을 나눠서 아르바이트를 맡겼는데, 워낙에 네가 잘해 준 덕에 그 완역본을 그대로 쓰기로 했어.” “그런가요? 잘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몇 가지 전문 단어들의 경우에는 기존에 학계에서 쓰는 단어나 표현이 있어서 고쳐야 했지만, 그 외에는 문제가 없었다. 이번의 번역본도 그렇고. 그래서 회사에서 결정한 것이 너랑 계약하자는 것이었어.” 상곤은 집에 가서 ‘보호자’랑 상의해서 결정하라고 말했다. 어차피 미성년자라 보호자의 허락이 있어야 하니까, 집에 가서 신중히 결정하되 되도록 긍정적으로 검토해보라며 말을 맺었다. “아, 그리고 번역비는 말이야, 금액이 커서 통장으로 보내기로 했다. 들었지?” “아, 네.” “가져오란 서류는 챙겨왔니?” 단유는 가져온 주민등록등본과 통장 사본 한 통을 건넸다. “지금 처리하면 오늘내일 안으로 두 번역본의 번역비가 입금될 거야. 계약 이전이라서 다른 소속 번역가들의 번역비만큼은 안 되지만 그래도 중학생이 만지기 힘든 큰 금액이야.” 하지만 당장은 별 감흥이 없는 단유였다. 그래서 상곤의 말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번역가도 괜찮은 직업이야. 물론 지금은 번역가로 일하는 사람도, 지망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일종의 레드 오션이기도 하지. 하지만 지금까지의 두 작업물에서 보여준 퀄리티만큼 계속 보여줄 수 있다면 너도 번역가로서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 전문서적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번역도 가능하다면 수입도 나쁘지 않으니까.” “네, 참고하도록 할게요.” 덤덤한 단유의 대답에 상곤은 아직 어리니까 별생각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상곤은 단유의 등을 토닥거려주다가 물었다. “그런데 곧 개학이지?” “네.” “그럼 지금처럼 일하기도 쉽지 않은 거 아니니?” “글쎄요. 점점 익숙해져서 괜찮을 것 같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계속 번역 일만 하는 건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원래 책 한 권을 완역하는데 페이지에 따라 다르긴 해도 보통 2~3개월이 걸리니까, 너에게도 그 기준을 적용한다면 조금 여유롭게 할 수도 있겠지?” 상곤의 말에 단유에 대한 배려가 담겨 있음을 깨닫고 단유는 고마움을 표했다. “와우.” 하은이 단유가 가져온 계약서를 보고 제일 처음 보인 반응이었다. “무슨 뜻이에요?” “놀랐다는 뜻이지. 무슨 뜻인 거 같았는데?” “뭐, 아직 중학생이라 학교도 다녀야 하는데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냐는 걱정? 혹은 아르바이트도 아닌 정식 직업이라는 것에 대한 놀람?” “정식 직업, 이라고 표현하긴 힘들지. 번역가는 기본적으로 프리랜서니까.” 일이 있으면 번역가. 없으면 백수. 그게 현실이다. “그래서 놀라신 건가요?” “아니, 그냥 순수하게 놀란 거야. 네 실력이 인정받았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과 뿌듯함이 섞인 감탄사야. 이런 것도 설명해야 하는 거니? 우리 사이에?” 단유가 어깨를 으쓱거려 보이자, 하은은 턱을 괴고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우리 단유, 이제 진짜 가장(家長)이 돼가는구나.” “그 정도까진 아녜요.” “그래도 아직은 학생이란 거 잊지 않았지?” “그럼요.” “자퇴도 안 하기로 했고, 대학교 갈 때까지 꾸준히 학교에 가겠다고 했으니 돈 번다고 공부 안 하면 안 된다?” “알았어요. 아시잖아요? 저 공부 좋아해요.” “그래. 단유니까.” 이틀 뒤, 단유가 통장을 들고 와 하은에게 보여줬을 때, “와우!” 하은이 보인 반응이었다. “공부 계속할 필요 있니?” 우스갯소리라 생각하며 머쓱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 [471] 포착(2) 돈을 아껴 쓰라는 하은의 충고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수전노까지 돈을 모으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쓰려고 버는 돈, 이라는 게 단유의 생각이었다. “이게 뭐야?” “선물. 돈 벌면 사주겠다고 했잖아?” “진짜?” “응. 너 갖고 싶다고 했었잖아?” 단유가 명수에게 준 선물은 자전거였다. 지난번에 명수가 자전거를 갖고 싶다고 했던 말을 기억해 뒀던 단유는 번역으로 번 돈으로 가장 먼저 명수의 자전거를 산 것이다. “내 것만 샀어?” “뭐, 일단은. 선생님 선물은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서 사려고.” “아니, 그게 아니라 네 건?” “나?” “아침에 학교 갈 때 같이 타고 다니면 좋잖아?” “아.” 단유는 그 생각까진 못했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이것도 받아.” 단유는 자전거 뒤 안장에 박스를 하나 올렸다. “뭐야, 또 이건?” “축구화. 전에 쓰던 거 다 떨어졌잖아.” “와, 정말 대박이다, 너.” “고마우면, 열심히 연습이나 해.” 하지만 명수는 박스를 손에 쥐기만 할 뿐 쉽게 열지 못했다. “…매번 받기만 하니까 미안하다.” 명수의 반응에 단유는 정색을 한 채로 말했다. “인명수. 그런 말 하지 않기로 했잖아.” 뒤늦게 명수가 단유의 표정을 보고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멋쩍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 그래. 그렇지.” “우린 가족이야.” “맞아.” 명수가 웃으며 주먹으로 단유의 가슴을 툭 하고 밀었다. “구경만 하지 말고 한 번 타봐.” “그럴까?” “뒤의 상자는 내가 들고 있을게.” 명수는 히죽 웃으며 단유에게 박스를 넘기고 자전거 위에 올라탔다. 제자리에서 한쪽 발로 페달을 돌려보며 바퀴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좋아하던 명수가 단유에게 눈짓을 보냈다. 단유가 고개를 끄덕이자 땅을 박차고 앞으로 튀어나가는 명수였다. 골목을 따라 앞으로 씩씩하게 나아가던 자전거는 두 블록을 지나 다시 돌아왔다. “탈만 해?” “괜찮은데?” “높이는? 조절 안 해도 되겠어?” “응. 괜찮은 거 같아. 근데 자전거 되게 가볍다?” “자전거 파는 데서 좋은 거랬어.” 명수는 신이 난 얼굴로 오피스텔 뒷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그 모습을 보니 단유도 흐뭇했다. 단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자신의 자전거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것이니까 조금 ‘실험’을 해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다음날, 명수의 자전거를 샀던 곳에 가서 가장 싼 자전거를 하나 구매했다. 실험용이니 비싼 자전거를 살 필요는 없다고 여겼지만, 그래도 10만원이나 들었다. 명수의 것에 비하면 10분의 1이니 싸다면 싼 편이지만. “조심해서 타라.” 자전거를 끌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려는 단유에게 경비 아저씨가 한 마디 던졌다. “네.” 명수에게 사줬던 자전거는 접는 게 가능해서 엘리베이터에 가지고 올라가는 게 편했는데, 단유의 것은 접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다행히 오피스텔의 엘리베이터가 나름 큰 편이라 자전거를 대각선으로 세워 올리면 가지고 오르내리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불편한 것도 사실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자전거를 끌고 가니 페달에서 나는 체인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명수는 이미 오전 중에 자전거를 타고 나간 상황이라 집 앞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다른 집들도 이미 직장이든 뭐든 나갔을 시간이라 이 시간에 뭘 해도 크게 눈에 띄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조심하는 편이 좋다고 여겨, 단유는 집 앞을 지나 비상계단 쪽으로 자전거를 끌고 갔다. ‘한번 해 볼까?’ 자전거의 프레임은 알루미늄이었다. 하지만 단유는 자신이 가진 마법으로 물성(物性)변화를 유도할 수도 있었으니, 그 마법으로 자전거의 프레임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의문과 호기심을 풀어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구현’만 가능했던 마법이지만, ‘탄소’와 ‘철’이라는 물질에 관한 공부를 이어가다 보니 특정 대상에 한해 물체의 성질을 바꾸는 ‘재현’ 마법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초의 ‘물성변화’ 마법은 제르아 오마 근처의 마을에서 목공방의 장인(匠人) 론에게 선물을 전할 때였다. 론에게 줄톱을 선물하면서 톱니의 끝부분을 녹슨 철이 아닌 ‘탄소 구조체’로 바꿔준 일이 있었다. 사실 그때는 우연히 발견한 마법이기도 했고, 아직 구조체에 대한 공부가 깊지 않은 때여서 고작 톱니의 끝부분만 살짝 바꾸는 데 그쳤다. 그러나 다시 지구로 돌아온 뒤, 여러 가지 일로 바쁜 와중에도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던 단유는 결국, 각고의 노력을 다한 끝에 변화마법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그 노력의 산물이 나윤에게 줬던 선물이었다. 나윤의 어머니에게 졸업식 초청 연락을 받은 뒤, 괜히 들뜨고 두렵던 마음에 갈피를 못 잡고 있던 단유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남겼던 ‘선물’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리고 말로만 그럴 것이 아니라, 정말 자신의 마음을 담은 선물을 줌으로서 깨끗이 자신의 마음속 ‘미련’을 떨쳐내고자 했다. 미안한 채로 헤어지는 것은 편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액세서리점에 들르기도 하고 금은방에 가기도 했지만, 마음에 드는 선물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윤이 뭘 좋아할지도 모르고, 자신이 가진 돈의 한계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가능한 한도 내에서 적당한 선물―목걸이를 산 단유는 집으로 돌아와 목걸이를 바라보다, 그 목걸이 가운데 박힌 보라색 모조석이 눈에 걸렸다. ‘하얀색이 더 좋을까?’ 어쩐지 보라색은 우울한 색감이라 밝은 분위기의 나윤에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톱으로 모조석을 빼려다 보니 모조석을 감싸고 있던 조그만 다리가 부러질 것 같았다. 그 순간 충동적으로 단유는 마법을 떠올렸다. ‘변화마법’을 쓰긴 했어도 이렇게 ‘큰’ 모조석을 바꾸는 작업은 처음이었다. 물론 단유가 보석에 관련하여 지식이 많은 편이 아닌지라, 인터넷 등을 살펴 적당한 ‘구조체’의 탄소 구조와 외형, 성질 등을 이론적으로 숙지한 뒤에 마법을 실행했다. 그리하여 ‘마법 생산제 보석’ 펜던트가 완성된 것이다. 어쩌면 ‘다이아몬드’와 비슷할 수도 있겠지만, 이론상 유사할 뿐 다이아몬드는 아니다.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고.’ 아무튼 그저 이론적으로 알고만 있던 것을 구조적으로 이미지―완성 시켜 만들어냈을 뿐이니 천연 다이아몬드는 아니고, 그렇다고 인위적 조작을 가한 것도 아니니 공업용 다이아몬드도 아니다. 하지만 맞든 안 맞든 그게 뭐 중요할까? 나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이 담긴 보석을 건넸으니 미련은 없다. 단유는 느긋하게 잡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님을 떠올리며 곧 작업에 들어갔다. **** “단유 네 거 맞지? 언제 샀어?”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명수는 집 앞에 낯선 자전거가 눈에 띄었다. “오늘 오후에.” “그럼 이제 같이 자전거 타고 다닐 수 있겠다!” “응.” 명수는 신이 난 얼굴로 단유의 자전거를 살폈다. “그런데 이 자전거는 왜 이렇게 무거워?” “그게, 좀 싼 거라서 그럴 거야.” “메이커도 안 나와 있던데?” “내가 지웠어.” “그래? 그런데 너무, 시커멓다.” “보기 이상해?” “아니. 나쁘지는 않은데…마치 검은색 스프레이를 뿌린 것 같이 그렇네?” 명수가 말하는 건 다름이 아니라, 괜히 자기 것만 좋은 거로 사고 단유 자신이 쓸 자전거는 싸구려 제품을 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단유는 명수의 그런 마음을 미리 눈치채고 선수를 쳤다. “안 바꿔 줄 거야. 너무 부러워하지 마.” “에이. 진짜? 네게 나한테 더 잘 어울릴 거 같은데? 봐봐 내 얼굴색이랑 자전거랑 잘 어울리잖아.” “됐어.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네 거나 아껴 써. 그거 고장 나면 수리비도 보통이 아니래.” “정말? 비싸?” “근데 어지간한 건 내가 고칠 수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아이, 참. 미안하게 시리.” 명수는 단유의 자전거를 살피다 또 눈에 띄는 게 보였다. “그런데 이건 여기가 새하얗네?” 명수가 가리킨 것은 자전거 뒷바퀴에 달린 기어의 색깔이었다. 기어 톱니의 끝부분이 하얀 것이 마치 유리같이 보인 것이다. “하여튼 눈도 좋아. 별거 아냐. 그만 구경 끝내고 들어가자.” “야광, 같은 거 아냐? 밤에 타면 여기서 빛이 나서 막 돌아가는 그런 거.” “애들 킥보드에 들어가는 LED 등처럼?” “LED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뭐 그런 비슷한?”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꺼.” 명수는 단유의 떠밀림에 밀려 집으로 들어갔다. 미안한 마음은 나중에 갚기로 하고, 우선은 모레 개학 때부터 같이 학교에 타고 다닐 생각에 기분이 즐거워졌다. “나는?” “선생님은 자동차 있으시잖아요? 자전거 탈 일도 별로 없으시면서.” “나도 자전거 사줘.” “에이, 선생님. 무슨 애처럼 그래요.” “너 돈 많잖아? 나보다 많잖아? 나보다 많으면 선생님한테 선물 하나 사줄 수 있지 않니? 어떻게 너희 둘만 그렇게 알콩달콩 그러니? 언제는 선생님뿐이라더니 그때 그 말은 모두 거짓이었어? 그런 거야?” “…진짜 사드릴까요?” 어색한 침묵이 지난 뒤, “…에이, 또 농담을 진담처럼 받는다. 단유 너 그러면 못 써.” “선생님이 과하셨어요.” “과했어?” “네.” “그래도 적당히 받아주지 그랬니?” 단유는 히죽 웃고 하은의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말했다. “선생님한테는 나중에 더 좋은 거로 선물해 드릴게요. 이런 블라우스보다 더 좋은 거로.” “…됐어. 내가 진짜 선물이 받고 싶은 그런 줄 아니?” “아니라도 줄 거예요. 진짜.” 하은은 시원한 안마를 받으며 미소를 머금었다. 최근 그녀에게 생긴 꿈이 있다. 단유와 명수가 결혼하는 모습을 가장 가까운 데서 지켜보는 것. 두 사람이 결혼해서 각자의 가정을 만들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자신의 역할도 비로소 끝이 날 것 같았다. ‘그때까지는 내가 너희들의 엄마고, 누나고, 선생님이야.’ 하은은 그녀의 꿈을 고이 접어 가슴 속 깊이 묻었다. 그리고 그 날이 올 때까지 최선을 다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 “부럽지?” “응.” “너무 솔직하네?” “치사하게. 야! 그럼 우린 그냥 걸어가고?” “부러우면 너희도 자전거 사던가?” 지태는 이를 갈며 천천히 페달을 밟으며 속도를 맞추는 명수를 노려보는 시늉을 했다. “근데 단유 네 것도 파는 거 맞아?” “응.” “마치 누가 만든 거 같은데?” 만들었다기보다는 개조가 옳은 표현이리라. “광택 죽인다야.” 어두운 복도에서 볼 때는 몰랐지만, 아침 햇살을 받은 단유의 자전거 프레임이 묘한 광택을 내며 그 색을 뽐냈다. 사실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조금 튼튼한 구조체를 구상하다 보니 다면체 형상을 떠올리게 되었는데,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구조물이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물론 단유의 지식이 아직 한계가 있다 보니 다른 어딘가에서는 단유가 만든 구조물에 관한 연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순수하게 단유의 상상과 창의력으로 물질이 탄생하였고, 나름 탄성과 강도를 갖춘 물질로서 기능했다. 다만 순수 탄소 구조체가 아니라 기존 알루미늄 프레임에 물성을 변화시키며 생긴 물질이다 보니 의도치 않은 색이 만들어진 것이다. 철의 경우에는 공부가 많이 되어서 ‘물성변화’를 유도하면 순수 탄소 구조체의 ‘어떤 것’이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다른 물질의 경우에는 탄소 구조체가 가미된 ‘어떤 것’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이 부분은 향후 연구를 더 해봐야 할 것이다. “안 되겠다. 먼저 가라.” 지태가 마치 파리 쫓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삐졌어?” 명수가 혀를 낼름 빼물며 물었다. “삐지긴? 이 정도로 삐지냐? 나도 자전거 사달라고 해야겠다.” “너 성적 오르면 사준다고 하지 않을까? 너희 어머니?” “…그렇겠지? 에휴. 내가 내 무덤을 파고 말겠네.” 지태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학교로 향했다. 개학 첫날, 기분 좋은 아침의 시작, 평범한 일상의 시작이었다. ======================================= [472] 포착(3) “너랑 같은 반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다행이다, 지긋지긋한 네놈 안 봐서.” “와! 지랄, 또 같은 반이냐!” “지랄하네.” 언제나와 같이 매년 첫 학기의 시작은 교실, 복도 가리지 않고 떠들썩했다. 3학년이 되었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오히려 더 시끄러우면 시끄러웠지 덜하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직은 중학생. 이제 겨우 16살이 된, 혈기왕성한 남자아이들이었다. “대박이다. 그치?” 명수는 헤벌쭉 웃으며 단유를 안았다. “우리 처음으로 같은 반 된 거잖아?” 단유도 기분 좋은 미소를 입에 머금은 채 명수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래도 숙제는 네가 혼자 해야 한다?” “당연…응? 그래도 조금은 도와줄 거지?” 그때, 교실 앞문이 벌컥 열리며 뚜벅뚜벅 들어오는 이들이 있었다. 몇몇 아이들이 그들의 등장에 잠시 긴장하는 기색을 보이기도 했지만, 옆 친구들과 수다를 떠느라 전혀 모르는 아이들도 있었다. “비켜, 새끼야.” 그냥 지나가도 될 것 같은데 일부러 시비를 걸며 발로 책상을 차는 아이들의 건들거림은 멀리서 봐도 그 의도가 느껴졌다. “에휴. 또, 야?” 명수가 나지막이 혀를 차며 팔짱을 꼈다. 명수의 말에 단유도 동의했다. 어떻게 매년 이런 일이 반복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데다가, 도대체 왜 저렇게 과장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등장하는지 모르겠다. ‘나 불만 많아요’를 얼굴로, 몸으로 표현하며 등장하는 이들의 전형적인 연출에 진저리가 쳐질 정도다. “너 쟤 알아?” 단유가 묻자, 명수가 적잖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에 5반인가에 전학 온 앤데, 소문이 별로 좋지도 않고 그래.” “소문?” “그 전 학교에서 사고치고 전학 왔다던가, 뭐 그렇데?” 교실 뒤로 오던 아이의 발걸음은 단유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쟤들은 꼭 이 자리를 좋아하더라.” 창가 쪽 제일 끝자리는 교실의 가장 구석진 곳이라 선생님의 시선에서 멀기도 하고, 점심시간 이후에는 햇볕이 잘 들어와서 잠자기 딱 좋은 곳이기도 하다. 아마 대부분 아이들이 탐내는 자리가 아닐까? “인마, 일어나라.”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단유에게로 와서 시비를 거는 소년이었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유난히 턱 아래가 거뭇해서 다른 또래에 비해 성숙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는 나름 불량스러운 표정을 지어도 어린 외모 탓인지 무섭다는 느낌이 덜 했다. 그런데 지금 찾아온 녀석은 명수의 말이 없었더라도 실제로 눈에서 드러내는 불량함이 남달라 사고 좀 치는 녀석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래 봐야 중3, 16세, 동갑내기 소년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단유가 나설 이유도 없었다. 가장 든든한 친구이자, 얼굴로만 따지면 절대 뒤지지 않을―최근 선생님으로부터 ‘산적 얼굴’이라고 놀림 받기 시작한―명수가 있으니까. “우리 귀여운 명수 돌려내!” 라고 명수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던 하은의 모습이 생각나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 웃어?” 소년은 한쪽에 걸치고 있던 가방을 책상 위에 툭 던졌다. 한 걸음 다가설 때, 명수가 입을 열었다. “거기까지 해라.” “뭐?” 단유가 보기엔 여전히 귀여운 얼굴이다. 얼굴이 조금 검게 탔을 뿐, 여전히 장난기 많은 동그란 눈매에 둥근 턱과 두툼한 입술은 어릴 때의 명수와 다를 바가 없었다. 짐짓 진지한 척을 해도 단유의 눈엔 ‘나 잘했어?’라고 금방이라도 애교를 부릴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상대의 눈엔 그렇지 않았나 보다. 소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우리가 먼저 앉았잖아? 늦게 왔으면 그냥 빈 자리 찾아서 않던가, 아니면 선생님 오셨을 때 말해. 괜히 애들 앞에서 어깨 각 잡고 뭐 있는 척하지 말고. 응?” 소년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명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뻗은 발길질에 명수의 책상이 거친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갔고, 명수는 빠른 운동 신경으로 물러섰지만, 책상 모서리에 허벅지가 찍혔다. “아우, 아파라.” 허벅지를 문지르며 엄살을 부리는 명수의 모습이 희극적으로 보였던지, 뒤에 서서 구경하던 몇몇 아이들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새끼야, 다시 말해봐라? 뭐라고?” “아, 나, 참. 어린 새끼가 벌써 귓구멍이 막혔나?” 명수가 허벅지에 손을 떼며 혀를 차다 단유의 눈치를 살폈다. 바로 옆자리에서 난 소란에도 담담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는, 정확히는 명수의 반응을 보며 즐기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너 왜 보고만 있냐?” “네가 어련히 잘할까 봐.” “와, 같은 반 됐다고 바로 부려먹네?” “자전거.” “잘 모시겠습니다. 형님.” “이 새끼들이, 쌍으로 쳐 돌았나?” 소년은 명수와 단유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욕지거리를 뱉었다. 짧은 문장 속에 수많은 욕이 컬래버레이션을 이루며 튀어나오는데, 단유는 욕으로만 한 문단을 만들 수 있다는 경이로운 체험에 놀라워했다. 신선하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소년도 섣불리 주먹을 쓰진 않았다. 일단 눈앞에 선 명수의 넓은 어깨와 날카로운 턱, 다부진 눈매가 심상치 않게 느껴졌고, 앉은 채로 상황을 지켜보는 녀석이 그의 친구이기에 숫자로 밀릴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자칫 협공이라도 당하면 못난 꼴을 보일 수도 있으니까. 그나마 앉은 애는 이 상황에도 멍청하게 앉아만 있는 것이 자신에게 쫄아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 여차하면 무시하고 1:1로 싸울 수도 있을 것 같긴 했다. “새끼가, 눈깔을 코에다 달았나, 누구한테 개기고 지랄이야, 씨발놈아. 뒤질래? 응?” 그 말에 단유와 명수 대신 뒤에서 반응이 나왔다. “쟤 모르나 봐.” “어떻게 모르지?” “우리 학교에서 쟤들 모르는 애도 있구나.” “전학 와서도 계속 결석했다던데?” “그래도 너무 심한 거 아냐? 작년에 축구대회도 안 왔었나?” ‘축구대회?’ 웅성대는 아이들의 반응 속에 ‘축구대회’란 말이 소년의 귀에 꽂혔다. “축구부냐?” 얼굴 면상이 검은 게 딱 축구부긴 했다. “새끼, 운동부면 운동부답게 얌전히 짜져 있어 새끼야. 까불다가 뒤지지 말고.” 운동부는 애들이랑 싸우면 처벌이 더 커지지 않던가? 폭력문제가 걸리면 미래에도 영향을 주니까 더 몸을 사릴 게 뻔했다. 소년이 이죽거리며 명수에게 다가가자, 명수도 질 수 없다는 듯 눈을 매섭게 치켜뜨고는 한 걸음 다가갔다. “명수야.” “응?” 단유가 불렀고, 명수가 대답할 때, 소년이 주먹을 날렸다. 빈틈이라 생각한 소년이 한 방 먹이고 시작하자는 듯 주먹을 뻗었고, 대답을 하던 와중에도 시선을 떼지 않았던 명수는 턱을 뒤로 빼며 주먹을 피하려 했지만, 애초에 주먹은 단유의 손에 붙잡혀 뻗질 못했다. “이 새끼가….” 소년은 오른손이 부지불식간에 붙잡히자, 반사적으로 왼손을 뻗으려 했다. 아무래도 싸움 경험이 조금 있긴 했나 보다. 보통은 잡힌 손을 빼려는 게 보통인 것 같은데. 하지만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 전에도 그랬듯이 단유의 놀라운 운동 신경과 또래를 압도하는 힘은 소년을 손쉽게 제압했다. 그저 잡은 소년의 팔을 세게 쥐기만 할 뿐임에도 소년은 참을 수 없는 통증에 절로 무릎이 꺾였다. “아아!” 소리를 낸 뒤에야 창피함을 깨달을 정도로 비명은 통제를 잃고 터져 나왔다.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단유는 명수에게 말했다. “넌 안 되겠다.” “뭐가?” “내 보디가드.” “흥, 웃기시네. 니가 무슨 보디가드가 필요하다고.” “그러니까.” 나설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오히려 단유가 나서서 명수를 보호해줘야 할 판이다. 그때였다. 소년의 다른 한 손이 단유의 손을 덮더니, 통증을 이겨내고 팔을 교묘하게 돌렸다. 그러자 잡고 있던 단유의 손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휙 돌아갔고, 힘이 풀리면서 저절로 손을 놓게 되었다. “어?” 소년은 단유의 손을 덮고 있던 손을 끌어올려 단유의 교복 소매를 강하게 붙잡았다. 다른 손으로 교복의 팔꿈치 부분을 움켜쥐었다. 웅크린 자세에 몸을 돌려 등을 단유에게 대더니 잡고 있던 소매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단유도 대처할 틈이 없었다. 무슨 일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단유의 몸이 기우뚱하며 기울어졌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몸이 뒤집히며 시멘트 바닥에 부딪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등이 욱신거릴 정도로 강한 통증에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윽!” “단유야!” 놀란 명수가 달려와 공을 차듯 발을 차올렸다. 거의 습관적인 행동이었는데, 수년에 달해 단련된 명수의 발차기마저도 소년은 얼굴을 틀며 들어 올린 팔꿈치로 막아냈다. 그래도 명수의 힘이 보통은 아니어서, 뒤로 걷어차이며 날아간 소년은 우르르 몰린 아이들의 다리에 부딪히며 넘어졌다. “어어.” 아이들은 서로 끼지 않으려고 원을 그리며 물러섰다. 그 사이 명수가 단유에게 다가가 부축했다. “괜찮아?” “…응.” “진짜?” “응. 괜찮아, 이 정도는.” 예상도 못 한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단유도 당하고 말았지만, 설마 그런 기술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속수무책이었던 것도 있었다. “새끼가….” 명수가 이를 꽉 깨물며 일어나려는 걸, 단유가 붙잡았다. 명수가 내려다보자 단유가 말했다. “싸우지 마라.” “저 새끼가 먼저 시비 걸었어.” 정당방위라도 될 거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학교에서는 정당방위란 게 없다. 학교 밖 사회에서도 정당방위가 인정되기 어렵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지만, 학교 내에서는 정당방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웬만해서는 말이다. “가만있어.” 단유는 경계 어린 시선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며 일어나는 소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소년의 움직임을 눈에 담으며 일어났다. 슬쩍 눈동자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조례까지는 15분 정도 남았다. 3학년이라 교무실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어 선생님들이 소란을 듣고 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테니, “수습은 내가 할게.” 단유가 소년에게 한 걸음 내디뎠다. 단유의 흔들리지 않는 눈빛에 소년은 그가 전혀 쫄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 지난 겨울 방학 동안, 학교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정확히는 가을께부터 시작되었던 보복성 감사―라고 선생님들은 판단했다―에 교무실은 난리가 났다. 아주 오래된 채용 비리가 문제가 되는가 싶더니, 어떤 때는 학교 외부 업체의 로비가 문제가 되기도 했다. 전부 실질적인 증거는 모자라지만, 회의록과 기타 서류들에서 발견되는 여러 정황 증거들이 의심을 불렀고, 교육청에서는 수사 기관에 의뢰하겠다고 소란이 일었다. 실제로 의뢰가 들어갔고, 수사가 진행되기도 했다. 그리고 몇몇 이사는 책임을 물어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교장과 교감은 불명예 퇴직을 받아들여야 했다. 다행이라면 두 사람 모두 형사 입건은 피했다는 점인데, 지난 일들에서 욕심을 내지 못했던 것이 그 두 사람에게는 행운으로 작용했다. 돈 욕심보다 자리보전에 더 큰 욕심을 드러냈던 것이 일말의 도움이 된 셈이었다. 그리하여 겨울 동안 재단은 긴급히 이사진을 새로 꾸리고 학교 정상화를 위한 조치를 취해야 했다. 단유의 의식 불명 사태로 인해 교육부는 처음에 기획했던 단유의 모델로서의 기용을 보류해야 했고, 교육청은 기존 두 감사관이 형사 입건 당하는 치욕을 겪어야 했으며, 학교는 교복은 물론 여러 개혁 조치들이 흐지부지되는 상황에 부닥쳤다. 그리고 교감을 새로 정하지 못한 채로 새 학기를 시작해야 하는 사태도 감내해야 했다. 그나마 교장을 맡을 사람은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어렵게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반갑습니다. 장계 중학교 교장으로 취임하게 된 허창완이라고 합니다.” 점잖은 목소리로 선생님들을 향해 자신을 소개하는 교장, 허창완에게 선생님들이 다 같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교장 선생님.” 허창완의 부드러운 시선이 선생님들을 훑었다. ======================================= [473] 포착(4) “내가 수습할게.” 단유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경계를 하는 소년을 바라보며 다가갔다. 소년의 교복에 붙은 명찰을 보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윤병억.” “…왜 부르고 지랄이야.” 소년, 병억은 이죽거리면서도 시선은 단유에게서 떼지 않았다. 단유는 병억이 이제까지의 애들처럼 막싸움이나 하는 녀석이 아님을 깨달았다. 약간 엉거주춤한 자세처럼 보이지만, 무릎을 살짝 굽히고 어깨를 낮춰서 타점을 피하려는 행동처럼 보였다. 이전에 상대했던 아이들이 정글의 원숭이들처럼 일부러 몸을 부풀려 위세를 보이려 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물론 단유는 주먹질을 할 생각이 없었다. 불리한 싸움을 일부러 할 필요도 없고, 안 한다고 해서 자존심이 상할 이유도 없다. “우리가 먼저 앉아 있었고, 넌 나중에 왔어. 만약에 네가 저 자리를 정 앉고 싶었다면, 일어나란 말 대신 부탁을 했었어야지. 무턱대고 일어나라는 둥 시비를 거는 건 싸우자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아.” “새끼가 어디서 이빨을 털어?” 저속한 놀림에도 단유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첫날부터 싸움 일으켜서 좋을 거 없잖아. 여기까지 하자.” “지랄하네, 개새끼. 어디서 씹선비질이야?” 병억은 단유가 훈계질을 한다고 여겼고, 그래서 속이 뒤틀렸다. “네가 뭔데 싸우네 마네야, 새끼야. 개병신 새끼야. 눈깔을 확 뽑아버릴까.”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병억은 단유와 단유 뒤에 있는 명수를 주의 깊게 살폈다. 사실 속으로 많이 놀란 것이 사실이었다. 축구부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해도 교복이 작게 느껴질 정도로 튼튼한 명수의 허벅지를 보면 그의 킥을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단유는 의외였다. 제대로 붙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긴 해도 짧은 순간에 자신의 팔을 잡아채던 반사신경과 한순간 통증에 신음을 흘릴 정도로 강했던 손아귀의 힘은 이제껏 겪어보지 못했던 종류의 것이었다. 굳이 비교하면 예전에 합기도를 배울 때 봤던 사범님이 저랬을까? 그 당시 합기도 3단의 사범님은 나이가 20대 중반이었다. 그런 사범님과 비견될 정도라니. 그래도 자신의 소맷대 빗당겨치기에 넋 놓고 당한 것을 보면, 기술적으로는 자신이 한 수 위라는 판단이 들었다. “어느 곳에나 생각의 차이, 의견의 충돌은 있을 수 있어. 그런데 그 차이를 조율하는 방식의 하나가 힘이야.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굴복시키고, 힘으로 상대와 나의 위치를 정하려는 건 오랜 옛날부터 내려온 전통이지.” 뜬금없이 시작된 단유의 이야기에 병억은 물론이고, 주위 아이들까지 멍한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에 대해 조금 아는 이들이야, ‘역시’라고 중얼거리는 정도였지만, 단유를 잘 모르는 이들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냐는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는 위에 걸치고 있던 교복 재킷을 천천히 벗으며 말을 이었다. “힘으로 서열을 정하면,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이 구별돼. 그리고 강한 사람을 위, 약한 사람을 아래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보다 강한 사람은 위, 나보다 약한 사람은 아래.” “이 새끼 뭐라고 하는 거야?” 병억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이죽거리며 주변의 아이들을 빠르게 훑고 반응을 살폈다. 싸움판에서 ‘이빨 터는’ 애들 치고 제대로 된 애들이 없다. 자기만 몰랐던 꼴통인가 싶어 살피니, 아이들의 반응이 여간 심상치 않다. 눈에 기대감이 깃들어 있는데, 단순히 여흥(餘興)으로서의 싸움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유’라는 아이의 언행에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 이제야 단유의 이름표를 확인한 병억은 ‘김단유’라는 이름의 익숙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들은 이름인데? 병억은 2학년 2학기 중간에 전학을 왔다. 전학을 온 뒤에도 한동안 친구가 없었다. ‘얌전히 지내라’는 생활지도부 선생님의 경고가 없었더라도, 본인이 딱히 친구를 만들 생각이 없던 까닭이었다. 그러다 보니 주변 아이들과 교류가 없었고, 전학 온 일주일 뒤, 반에서 까불대던 한 녀석을 ‘조용히’ 처리한 뒤로는 아예 다가오는 이들이 없어 학교 내의 일에 별로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들리는 귀가 달려 있다 보니 자연히 알게 된 이름이 있었는데, 그게 ‘김단유’였다.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느니, 선생님과 싸워도 이길 거라느니, 하는 말도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학교에서 제일 똑똑한 애’라는 수식어였다. 줄여서 전교 1등. 원래 1등은 잘 기억되는 법이다. **** “지금 학교가 많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저 의례적인 수사가 아니라 실제로 어렵기 때문에 교사들은 긴장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 교장 선생님께서 무리하신 면도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전 그분이 개인적 욕심 때문에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전(前) 교장은 오로지 자리보전과 명예로운 은퇴만을 꿈꿨을 뿐이다. 실질적인 수익(?)은 모두 재단에 양보하는 미덕을 발휘하기도 했다. “은퇴를 바라볼 나이인 제가 굳이 이 학교로 와서 교장직을 맡겠다고 한 이유는, 지난 30여 년간 교육 현장의 일선에서 보고 지켜온 신념이 이 학교에서도 꽃피우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늙은 교육자가 말하는 신념은 무엇일까? “학교는 오로지 학생들을 위함이다? 아닙니다. 학교는 학생들을 키우는 동시에 선생님들도 함께 크는 곳입니다.” 교장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처음부터 훌륭한 교육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흔하게 인용하는 앤 맨스필드 설리번은 처음부터 훌륭한 교육자였을까요? 23세의 나이로 헬렌을 가르치기 시작한 설리번은 좋은 교육자는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헬렌과 함께 커갔기에 지금에 이르러 설리번은 훌륭한 교육자의 표상처럼 여겨지는 거겠죠. 그 기간이 무려 40여 년입니다. 지금 제 앞에 있는 여러분들은 짧게는 3년, 길게는 20년을 교육 현장에 몸 바쳐 일하고 계시죠. 설리번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짧은 근속 기간이군요.” 나름의 농담이었을까?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교사들은 슬쩍 눈치를 보았다. “학생들의 성장만큼이나 교사도 성장해야 합니다. 교사가 성장해야 학생도 바르게 성장할 수 있고, 더 나은 학교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머무르기만 하면 결코 발전은 있을 수 없겠지요.” 몇몇 교사는 고개를 끄덕이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지만, 몇몇은 자연스럽게 근무평정과 교원평가(교원 능력 개별평가)를 떠올렸다. “여러분들이 입버릇처럼 학생들에게 자기계발을 강조하듯, 저 역시 여러분에게 자기계발을 부탁하고자 합니다. 외부에 의한 강제력으로 성장하는 것은 한계도 있을뿐더러 의지도 사라지게 하는 것이니까요.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억지로 하라고 말한들, 반발심만 커질 뿐이지요?” 몇몇 교사는 ‘자기계발? 좋지!’ 라며 고개를 끄덕였고, 몇몇은 지긋지긋한 일을 덤터기 쓸 것 같다는 불안감에 눈동자를 굴렸다. “해서 올해부터 여러분들에게 자기 성장을 위한 몇 가지를 주문하고자 합니다.” 올 게 왔다는 느낌으로 교사들은 다음을 기다렸다. “앞으로 여러분들은 향후에 있을 수업들에 대해 자기 평가를 실시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 스스로를 평가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학교에 신고하시면 됩니다.” “네?” 한 평교사가 잠시 넋을 놓고 있었던지 멍청하게 되묻는 짓을 했다. 곧 자신이 무슨 짓을 했던가, 깨달은 교사가 입을 가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지만, 교장은 친절하게 보충 설명을 했다. “매시간 매 수업을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한 학기 수업들에 대해 스스로를 평가하고 그 내용을 학교에 알려주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내용을 토대로 교원평가에 포함을 시킬 것입니다.” 현재의 교원평가는 동료 교사와 학부모, 학생들의 평가를 토대로 점수를 매기는 방식이었다. 외부의 평가가 독립적이며 객관적인가 하는 신뢰도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능력 좋은 교사를 발굴하기 위한 평가 지표 중 가장 객관적인 지표여서 외국에서도 시행하는 있는 제도였다. 그런데 그 평가에 ‘자기가 매긴 점수’를 포함 시킨다? “교장 선생님, 저기 그게 평가 신뢰도에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본인의 변화는 본인이 가장 잘 알지 않겠습니까? 수업 참관 한 두 번으로 선생님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고, 미성숙한 학생들의 평가를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지요. 게다가 여러분들은 교육자 아닙니까? 교육자로서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할 분들이 자신을 속이는 짓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양심과 교육자로서의 자부심, 사명감을 보여주세요.” 교장은 교사들의 굳은 낯빛을 보며 말을 마무리했다. “지금 이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따지고 보면 학교의 본질을 놓침으로써 발생한 일들입니다. 본질이 무엇입니까? 교육입니다. 더러 누군가는 교육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건 교사의 권위를 낮추는 표현이라 여겨집니다. 교사는 서비스 제공자가 아닙니다.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 스승이어야 합니다. 스승으로서 모범이 되도록 노력하고 발전하는 것, 그리고 그런 스승으로부터 학습 받고 성장하는 학생들로 학교를 채워가는 것이 바로 학교의 본질인 것입니다.” **** “네가 전교 1등이냐?” 병억의 말에 단유는 눈을 껌뻑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개×같은 놈이 ×같이 혀를 놀릴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이구, 전교 1등님께 실례를 범했네? 응? 이럴까? 남들이 다 1등 님, 1등 님 해주니까 니가 뭐라도 된 거 같지? 그러니까 니가 무슨 선생이라도 된 것처럼 굴지? 응? 씨발 놈아?” 애들이 기대하는 이유는 저놈이 전교 1등이기 때문이리라. 선생님들의 비호를 받는 아이. 저 얼굴에 흠집이라도 나면 담임은 물론이고 생지부 선생, 더 나가서 교장까지 득달같이 달려와서 자신을 곤죽으로 만들겠지. 그 위세를 등에 업고 저리도 당당한 것일까? 심술이 난다. 병억은 허리를 살짝 세우며 단유에게 다가갔다. “머리에 뭐가 든 놈들은 전부 이빨만 털 줄 알지? 니가 인생을 다 아는 거 같지? 너 말고는 다들 무식해 보이고, 그러니까 뭐든지 가르치고 싶지? 너만 사람이고, 너만 머리 있냐? 응? 씨발 새끼야?” 단유와 한 걸음 간격으로 좁혀졌을 때, 병억은 뒤틀린 심보를 주먹에 실었다. 욕을 하며 시선을 맞추고, 그 시선이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을 때, 자신은 눈으로 간격을 맞추고 오른쪽 아래 사선에서 주먹을 그어 올리면 상대는 시야의 사각(死角)에서 올라오는 주먹을 피하지 못한다. 설령 본다 해도 그것은 반사 신경이 작용하기 힘든 시점에서 발견될 것이다. 하지만 단유는 그 주먹을 피할 것이다. 아까 본 반사신경이 거짓이 아니라면. 퍽. ‘어?’ 단유가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하지 못한 걸까? 단유는 병억의 오른쪽 주먹에 광대를 비스듬하게 맞았다. 맞은 충격에 얼굴이 살짝 오른쪽으로 흔들렸다. 하지만 시선은 병억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세게 때릴걸?’ 단유가 피하면, 피하는 동작에서 흐트러진 균형을 이용해 팔꿈치로 상대의 목을 밀고 동시에 발을 걸어 넘어뜨리려는 게 병억의 시나리오였다. ‘왜 못 피했지?’ 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후속 동작을 이어나갔다. 쥔 주먹을 펼쳐 단유의 턱을 잡고 다른 손으로 앞섶을 움켜쥔 뒤, 한 걸음 나아가 다리를 안쪽으로 밀어 넣어 넘어지게 하는 동작. 순식간에 이어지지만 숙련된 그 동작에 단유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당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 멍청한 소리가 입에서 날 때쯤, 병억의 두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 [474] 포착(5) 처음 단유가 생각한 수습은 당연히 ‘대화’였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먼저 대화가 가능한 상대인가를 가늠해보는 것.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와 대화를 하겠다고 꾸역꾸역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것보다 피곤한 일은 없다. 욕을 입에 담으며, ‘생각’의 문을 잠근 채로 침입자를 향해 짖는 도사견처럼 으르렁거리는 병억과는 대화가 어렵겠다는 걸 판단한 단유는, 그다음 방법을 생각했다. 힘에는 힘. 본인이 말한 대로 힘은 전통적인 방식의 조율법이다. 마냥 무식하다느니 하면서 피할 이유가 이제는 없다. 그 정도는 지난 경험들을 통해 인정할 수 있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조율이란 측면에서 힘이 투사되어야 한다. 감정적인 통제를 벗어난 힘은 결국 개싸움이고 지성적이지 못하다. ‘싸워도 지성적으로 싸워야지.’ 단유는 병억의 갑작스러운 주먹질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했다. 예측했다기보다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정도였지만. 그래서 병억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순간 ‘피해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몸을 기울이려 했다. 하지만 동시에 단유는 피하지 말아야 한다고 자신을 설득했다. 정당방위는 없지만, 정당방위처럼 보이기는 해야 설득력이 있지 않겠는가? 그래도 그냥 맞았다가는 턱이 나갈지도 모른다고 여겨 살짝 고개를 뒤로 물렸다. 덕분에 광대를 맞았다. 병억의 손이 펼쳐지며 단유의 턱이 붙잡혔다. 동시에 교복 앞섶이 거칠게 잡혔다. 그 와중에도 단유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노려보는 병억의 눈빛. 그 순간이었다. ‘지금!’ 단유는 병억의 눈이 자신의 눈을 뚫어져라 보는 그 짧은 순간에 손을 올렸다. 오른손으로 턱을 잡은 병억의 소매를 붙잡고, 왼손으로는 병억의 겨드랑이 부근 옷깃을 강하게 쥐어틀었다. 병억도 단유의 눈빛이 변함과 동시에 자신의 옷깃과 소매를 틀어잡는 손을 느꼈다. 하지만 자신은 이미 기술이 들어가는 중이었다. 단유가 막지 못하리란 생각에 더 빨리, 더 강하게 밀고 들어갔다. 단유의 가랑이 사이로 들어간 자신의 다리가 단유의 행동에 제약을 주리란 판단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단유에게 도움이 되었다. 단유는 다리 한쪽만 살짝 뒤로 빼는 선에서 제약을 풀었다. 그리고 허리를 틀며 잡은 손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병억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등을 찧은 병억. 아찔한 통증과 함께 든 생각은 ‘무식한(?) 새끼’라는 평가였다. 업어치기나 빗당겨치기나, 시전자의 몸은 상대의 몸에 밀착해서 상대의 중심을 흩어놓는 동시에 지렛대 역할을 해야 한다. 힘의 효율이 중요한 기술이다. 그런데 단유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힘으로 끌어당기는 통에 막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흔들리지 않는 하체와 비틀어 넘기는 허리의 힘은 보통이 아니었다. 마치 팔씨름 세계챔피언과 시합하는 유치원생이 된 기분이었다. “우워!” 주변에서 이해하기 힘든 감탄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사이 단유는 여전히 붙잡고 있던 병억의 팔을 모로 꺾으며 병억을 바닥에 엎드리게 만든 뒤, 그 위를 무릎으로 눌렀다. “아악!” “강한 사람은 위, 약한 사람은 아래. 넌 어떡할래?” **** 교장의 첫인사를 겸한 교무회의가 끝이 나고, 각 반의 담임들은 교실로 갈 준비를 했다. “특히 3학년 학생들은 질서 잘 잡으셔야 합니다. 특히 작년의 데모 주동했던 애들 있죠? 언제라도 반에서 튈 수 있는 아이들이니까 잘 잡으셔야 돼요.” 주임 선생님의 경고에 선생님들은 교무 수첩을 덮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5반 선생님.” “네.” “잠시 저 좀.” “네.” 5반의 담임을 맡은 임희선 선생님이 주임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반에 김단유, 들어간 거 아시죠?” “아, 네.” 김단유. 계륵이라고 말하면 너무 미안한 이야기지만, 솔직히 그런 면도 없잖아 있었다. 반 평균을 끌어 올려주는 소년이기도 하고, 유독 단유네 반은 다른 반에 비해 사고가 적어 담임이 속 끓을 걱정을 덜 하게 만든다는 평가가 있긴 하다. 그러나 사고가 아예 없지는 않아, 한 번 사고가 나면 학교를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의 ‘큰 손’이란 점에서 경계의 대상인 데다, 지난해의 데모를 유발한 장본인 격으로 주목받는 소년이다. 중학생답지 않게 똑똑하지만, 중학생답지 않게 정치적인 아이로서 경계대상이 되었다. “올해는 제발 조용히 넘어가게 해주세요.” “그게, 어디 제 뜻대로 되나요.” “선생님!” “…네, 알겠습니다.” 그냥 얌전한 아이보다 더 다루기 어려운 면이 있다. 버릇없이 굴지는 않는다지만, 2학년 담임이었던 선배 교사가 학을 떼며 고개를 저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 선배는 올해 초심을 찾기 위해 1학년 담임을 자청했다. 어쩌면 자신도 내년에 초심 운운하며 3학년을 멀리하게 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암울하다. “임희선 선생님?” “…네, 네? 교장 선생님.” 교장이 온화한 얼굴로 다가왔다. “선생님 반에 김단유, 라는 학생이 있다죠?”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름이다. 나쁜 의미에서 인터넷 스타. 그리고 좋은 의미에서 천재 소년. 새로 온 교장 선생님도 이 학교에 대해 알아보면서 자연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 “조례 끝나고 잠시 교장실로 안내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단유를요?”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는 교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희선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쉬었다. 아마 자신은 폭탄을 껴안은 건지도 모르겠다. ‘이래서 중간만 가라는 건데.’ 너무 뛰어난 것도 너무 모자란 것 만큼이나 좋지 않다. 옛날 사람들도 아는 것을 요즘 아이들은 모른다. 아, 모르니까 가르쳐야 하는구나. 희선은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교무실을 나섰다. **** “놔, 씨발 새끼야!” 단유는 순순히 놓아주었다. 그리고 오른발을 슬쩍 들어 누운 채로 휘두르던 병억의 주먹질을 피했다. “일어나.” 병억이 서둘러 일어났다. 옷에 먼지가 잔뜩 묻었다. “개새끼가 어설프게 배워서 써먹으니까 아주 신이 나지? 응?” 당해보니 알았다. 단유는 기술적으로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 놈이었다. 이번의 망신은 자신이 방심해서 당한 것이다. 방심하지 않으면, 아무리 힘이 세다 해도 자신이 질 수 없었다. 당하고는 못 산다. 그런데 단유가 담담히 말했다. “아니.” “…뭐래, 씨발 놈이.” “배운 거 아냐. 네가 한 거 따라 한 거야.” 병억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는 침을 뱉었다. 능청스러운 새끼. “씨발, ×같은 소리하고 있네. 어디서 약을 쳐?” 병억은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마치 정신을 잃은 사람마냥. 그러나 공격은 그렇게 두서없지 않았다. 마치 권투를 하는 사람처럼 오른팔을 굽힌 채로 한 걸음 내딛더니 잽을 날리듯 쭉 뻗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눈가리개용. 단유가 잽을 피하려고 몸을 뒤로 빼는 순간, 내밀었던 팔을 잡아당기며 동시에 왼발을 휘두르는 돌려차기가 단유의 옆구리를 향했다. 병억은 사각(死角)과 스피드로 단유의 힘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단유의 눈은 짧은 순간에 날아오는 다리를 인지했고, 복잡한 연산을 순식간에 거쳐 선택지를 결정했다. ‘될까?’ 의문은 잠시, 단유는 병억의 왼 다리를 오른팔로 껴안듯 잡았다. 오른팔을 접어 발이 빠지지 못하게 한 뒤, 오른쪽 무릎을 살짝 굽히며 몸을 비틀었다. 병억은 발을 빼지 못해 후속 공격은커녕 오히려 단유의 움직임에 따라 바닥으로 나뒹굴 뿐이었다. 게다가 다리가 꺾이는 반대방향으로 붙잡힌 상황. 힘을 주고 빼기도 힘들었다. 병억이 손을 뻗고 거두는 힘에 비례해 다리를 휘둘렀는데 단유는 막고 비틀어 다시 눕힌 결과다. 아이들에게서 또 한 번 기괴한 탄성이 쏟아진다. “아악! 놔, 이 새끼야!” “또 넌 아래. 난 위. 어쩔래? 이제 굴복할래?” “야 이 개새끼야!” 워낙에 큰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옆 반의 아이들까지 무슨 소란이냐며 구경하러 들어왔다. “뭔데?” “청소부가 청소하는 중이야.” “청소부?” “일진 청소.” “아, 김단유.” 예전 몇 번의 일들이 단유에게 이상한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상대한 애들이 모두 일진이었던 건 아니지만, 싸움 좀 한다는 애들이 단유만 만나면 힘도 못 쓰고 나자빠지기 일쑤였다. 그리고 나면 교실에는 힘자랑하는 애들이 기를 쓰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반과 달리 조용한 편이었던 단유네 반이었다. 그 때문에 일부 아이들은 단유가 일부러 일진들에게 싸움을 거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물론 단유네 반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사정을 잘 모른 채 결과만 전해 듣던 다른 반 아이들은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병억과 단유, 명수가 대립할 때도, 호기심을 드러낸 것이다. 과연 이번에도 ‘청소부’는 미리 청소를 해서 싹을 자를 것인가? 그리고 과연 청소부는 청소를 잘했다. 단유가 시계를 살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조율하려면 얼마 남지 않았다. 단유는 병억의 다리를 붙잡아 누른 상태로 말했다. “힘은 언제나 더 큰 힘에 눌릴 뿐이야. 힘의 논리는 그런 거야. 누르고 누름을 당하는 건, 동물들에게나 통용될 이야기지. 인간이라면 이런 무식한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건 어울리지 않아. 지금 니가 주먹질하는 거? 몇 년이나 갈 거 같은데? 평생 주먹질만 하고 살 거야? 아니면 너보다 약해 보이는 애들한테만 주먹질하며 살래?” “놓으라고! 새끼야!” 병억은 질 수 없다는 듯 버럭버럭 소릴 질렀다. “네가 뭔데 지랄이야, 개새끼야! 네가 뭔데? 평생 주먹질을 하든 노가다를 하든 네가 뭔 상관이냐고!” 이제는 진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부지런한 선생님이라면 종이 치기 전에 교실에 들어올 수도 있으니 상황을 마무리해야겠다. “난 상관하기 싫어. 그럼 너도 상관하지 않게 해야지.” “…뭐?” 단유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지막이 속삭이듯 말했다. “신경 끄고 살게 해달라고. 얌전히.” 단유는 병억을 누르고 있던 무릎에 힘을 가했다. “윽!”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상관 안 하고 지낼 테니까, 너도 나 신경 쓰이게 하지 마. 애들 앞에서 힘자랑하거나, 욕하고 싶으면 나 안 보는 데서 해. 안 보이면 신경도 안 써.” 병억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 단유의 검은 눈을 보니 이전처럼 악을 쓰기가 꺼림칙했다. “뭣들 하는 거니?” 교실의 앞문을 쾅쾅 두드리며 등장한 담임의 목소리에 빙 둘러있던 아이들이 허겁지겁 자릴 찾아갔다. 뿐만 아니라 다른 반 아이들까지 뒷문을 통해 빠져나가느라고 소란이 일었다. 희선은 인상을 찌푸리며, 교탁 앞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단유는 병억의 다리를 풀어주고 일어났다. 그제야 칫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난 병억이 반대쪽 구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침 자리가 비어 있던 터라 병억은 그곳으로 자리를 찾아갔다. “거기, 너.” 하지만 교복에 잔뜩 먼지가 묻은 병억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었다. “뭐야, 너희 거기.” 움직이다 걸린 병억과 자리에 멈춰 서 있던 단유가 희선에 눈에 걸렸다. 단유의 얼굴은 보자마자 알았다. 다른 또래에 비해 몸이 좋다더니, 과연 중학생 반에 고등학생이 교복만 입고 앉아 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너희 둘 나와.” 단유가 먼저 성큼 걸어 교실 앞으로 나서고, 뒤이어 병억이 입술을 달싹거리며 뒤따랐다. 가까이서 보니 가관이다. 단유의 얼굴은 붉게 부어 있고, 병억은 바닥에서 뒹군 사람 모양으로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싸웠니?” “네.” 단유가 솔직하게 대답하자, 희선은 어이가 없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선생님 앞에서 싸웠다고 말할까? 학폭위가 열리면 전교 1등도 얄짤없는 세상이다. “너 싸웠어?” “맞았는데요?” 병억은 자기 옷을 들어 보이며 보란 듯이 말했다. 단유의 얼굴을 흘깃 보고는 그의 볼에 그어진 흔적을 가리켰다. “이건 뭔데?” “…….” “네가 때린 거 아냐?” 병억은 대답하지 않았다. 희선은 침묵의 의미를 읽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불과 몇 분 전에 ‘애들 잘 잡으라’는 주의를 들었는데 첫날부터 학폭위를 열면, 과연 주임은 자신을 뭐라고 하겠으며, 새로 온 교장은…. “아.” 맞다. 교장 선생님이 단유를 불렀다. 큰일이다. 저 얼굴을 보면 물어볼 텐데? 희선의 얼굴이 변검 배우의 그것처럼 휙휙 바뀌는 이유를 학생들은 알 턱이 없었다. ======================================= [475] 의심스러울 때는(1) 사람들은 교사가 편할 거로 생각한다. 일반 직장인이 6시 퇴근 시간을 넘겨 야근을 해도 선생님들은 칼같이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와 맨발에 편안한 차림으로 TV나 보다가 잠들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실제로는 서류철 한 뭉텅이를 들고 와 작성하느라고 눈이 돌아가는 데 말이다. 방학철에는 선생님도 같이 방학해서 해외여행이나 다니다가 돌아와 느긋하게 개학을 맞이하는 게 일상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당직, 이라고 하면 방학 중간에 한두 번 나와서 커피나 마시면서 쉬다가 퇴근하는 일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 “월급 따박따박 나오지. 연금도 잘 나오지. 야근 안 하고 출근 시간 넉넉하고 1시간마다 쉬는 시간 정해져 있는데, 이만큼 좋은 직업이 어디 있냐?”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 중의 한 명이 바로 어머니였다. 희선이 보기에도 그런 생활이었다. 그래서 교직을 선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사실 희선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런 점에서 교사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장에서 그 기대감이 무참히 짓밟히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을 것이다. 보기에 좋은 떡이라고 했던가? 알고 보면 선생님이란 직업은 생각처럼 쉬운 직업도 아니었고, 해마다, 달마다, 매일 고뇌와 고통을 옆에 달고 살아야 하는 직업이었다. 교장 선생님 말씀처럼 교사는 서비스제공자가 아니다, 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자부심 정도는 있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은 학생들을 대할 때마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나?’ 혹은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매번 해야 하나?’ 라는 고민을 한다. 했던 이야기를 또 해야 하는 경우가 숱하게 발생하고, 했음에도 모른 척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태평양 어느 섬의 활화산처럼 울화가 치민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희선이 ‘교사’라는 직업에 진절머리를 내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직업적 회의(懷疑)란 어느 직업에나 있을 수 있다. 특히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고통받을 때면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지금 스트레스를 받느냐고 묻는다면, 희선은 눈을 부릅뜨고 말할 것이다. “네! 무척! 많이요!” 개학 첫날, 교실에 들어서니 난장판인 데다가 마침 주의를 들었던 학생이 ‘폭력 사건’을 일으켰음을 알게 된 상황이다. 담임으로서 첫 시작이 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장 선생님의 부름은 둘째치고 우선 사건의 정황부터 완전히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가서도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왜 싸웠어?” 희선의 시선은 단유에게 머물러 있었다. 단유는 담담하게 사정을 전했다.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있는데, 이 친구가 와서 막무가내로 비켜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비켜주지 않았고, 그로 인한 의견 충돌로 부딪힌 겁니다.” 간결한 상황 설명에 더 물을 말이 없다. “맞아?” 병억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럼 말로 할 것이지, 왜 주먹질을 한 거야? 학교에서 싸우면 안 된다는 사실 모르니? 그것도 학기 첫날부터? 넌 머리도 똑똑하다는 애가 그걸 몰랐어?” “싸움을 피하란 말씀이신가요?” “당연하지.” “피할 수 없는 싸움도 있습니다.” “뭐?” 희선은 기가 찬다는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너 어디서 말대답이니?” 단유는 희선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금방 사과하는 단유의 모습에도 희선은 순간적으로 울컥했던 감정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넌 내 말이 우습니? 학교에서 싸우지 말란 소리가 네 귀엔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어? 그래서 지금까지 그렇게 몇 번이고 사고를 쳤었던 거야? 응? 그런 거야?” 반 아이들의 침묵 속에서 희선의 날카로운 목소리만이 단유를 집어삼킬 듯이 쏟아졌다. “뭐?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있어? 너 혼자 무슨 청춘 드라마라도 찍니? 물불 안 가리고 주먹질하는 게 멋있어 보여? 응? 그래?” “선생님!” 그때 교실 뒤편에서 선생님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희선이 시선을 돌리자 얼굴이 그을린 덩치가 손을 번쩍 들고 바라보고 있었다. 명수였다. “저도 싸웠는데요?” “뭐?” 희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 뭐야!” “저요? 인명수인데요.” 몇몇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누가 이름 물어봤어! 야! 너 나와!” 명수가 벌떡 일어나 교탁 앞으로 나오자, 선생님은 허리에 손을 얹고 명수 앞에 섰다. 얼굴과 덩치, 이름을 보니 누군지 금방 떠올렸다. “너도 싸웠어? 근데 왜 가만히 있었어? 응?”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고 나가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계속 말씀을 하셔서요, 그래서 손만 들고 있었는데요, 선생님이 안 보시는 거 같아서요, 그래서 선생님 부른 건데요.” 사실 명수는 처음부터 손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희선이 당황한 틈이라 명수가 손을 들고 있던 것을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싸운 게 무슨 자랑이라고 이렇게 당당하단 말인가. 희선이 쌍심지를 켜고 앞에 선 세 아이들을 노려보았다. “중학교에 갓 올라온 1학년 애들도 첫날부터 싸우진 않을 거다. 응? 너희들은 정신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중 3이면 철이 들어도 될 나이 아니니?” 단유는 뒷짐을 지고 고개를 숙인 자세로 머리를 굴렸다. 처음의 시나리오와는 조금 다른 길로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 애초에 단유가 상정한 상황은 시비가 붙은 정황을 솔직히 이야기하고 선생님께 처벌을 받는 길이었다. 폭력 사건이라고 해도 직접 타격을 받은 것은 명수의 발길질에 당한 병억과, 병억의 주먹질에 당한 단유 뿐이었다. 그 외에는 신체 접촉이 있긴 했어도 충분히 무마할 변명거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처벌을 피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단유가 처벌을 두려워해서 몸을 사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인상을 병억에게 남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담임 선생님은 그런 사정을 봐줄 사람이 아닌 듯하다. 봐주긴커녕 변명 한마디도 듣기 싫다는 완고한 모습이다. 예전 초등학교 5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과 비슷한 유형이었다. 이런 선생님은 학생들이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언제나 정해진 답을 요구하고 학생이 그 답을 말하지 않으면 대화를 하지 않으려 한다. 게다가 명수까지 나선 마당이다. 비록 명수가 정의롭게 나서긴 했지만 선생님의 화를 돋우며 상황을 불리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자신이 이렇게 한 것도 명수가 나설 틈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는데 명수의 의리를 너무 얕본 모양이었다. “폭력 사건은 이유 불문하고 학폭위 열어야 하는 거 알아, 몰라?”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 화를 낼 수는 있다. 하지만 지금 선생님처럼 얼굴을 붉혀가며 화를 낼 정도의 일이었던가를 떠올리면 뭔가 이상하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선생님은 사건이 벌어진 이유보다 벌어진 그 자체에 주목하고 있다. 왜 그 사건이 벌어졌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그러니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는 표현에도 호기심 대신 역정을 낸 것이리라. 물론 폭력은 나쁘다. 특히 학교 폭력에 관한 문제는 뉴스의 단골 소재일 만큼 사회적 관심을 받는 부분이고, 그러니 학생들을 통제해야 하는 선생님으로서는 조금은 과하게 반응을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싸움이 벌어진 사정을 전해 듣고도 거기에 대한 반응, 이를테면 왜 ‘양보’를 하지 않았냐, 혹은 말 대신 주먹을 써야 했던 이유라도 있었냐고 묻는 것이 정상 아닐까? 단유의 생각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선생님의 호통 소리는 쉽게 그치지 않았다. “자, 여기 차 한 잔 드세요.” “고맙습니다.” 행정실장은 교장의 권유에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뒤 맞은편 소파에 앉아 차를 손에 쥐었다. 차를 입에 가져다 대며 앞에 앉은 교장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미소를 살짝 입에 머금은 것처럼 온화한 표정이었다. 보통 저 나이의 사람들에게 보이는 의젓함과 여유였다. 전(前) 교장도 표정은 온화했다. 하지만 교육자로서의 모습보다는 노련한 행정가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반면 새로 온 교장은, 적어도 표정만큼은 근엄과 온화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동시에 품은, 속 깊은 어른이라는 인상이었다. 물론 인상일 뿐이다.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지 않던가. “학교 행정이란 게요.” 차를 음미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던져진 말에 행정실장은 얼른 시선을 내렸다. “아, 네.” “학교의 행정이란 부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어요. 행정실의 지원이 없이는 좋은 교육도, 좋은 학교도 있을 수 없다고 여길 만큼이요.” “아, 예….” 의례적인 말일까. “특히 이런 사립이라면 행정 실장님의 노력이 이만저만 들어가는 게 아니겠지요.” 사실 작년 전임 행정실장이 불의의 사고로 해임이 된 뒤에 들어온 터라 아직 학교에 대해 그렇게 파워를 발휘할 일이 없었던 행정실장이지만, 법인 재단 소속 사립학교이니 행정실장의 권한이 적다고 할 수 없다. 무엇보다 ‘인사권’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이지 않은가. 그리고 지출과 예산을 관리하는 행정실이니, 실질적인 파워는 강력한 편이다. “별말씀을요. 저희야 어디까지나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지내기 좋은 학교가 되게끔 뒤에서 지원해주는 정도인데요.” “특히 이번에 인사이동이 많아서 꽤 바빴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렇죠. 그런데 그것도 이제는 대충 마무리가 되어서…한두 주 후면 마무리가 될 겁니다.” “그렇군요.” 교장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내렸다. 보면 볼수록 묘한 인상이다. 주름진 눈꼬리의 인상과 달리 늙은 사람답지 않게 맑고 검은 눈동자의 깊은 속은 알아보기 어렵다. 반대로 자신의 속을 낱낱이 파헤쳐 보는 기분이 들어서 불쾌하진 않지만, 불편하다. “그런데 말입니다.” “네.” “지난 감사 때 회계 문제로 고발당한 게 있다죠?” “…네. 하지만 그 문제는 재단 이사회 쪽과 연관된 터라….” “제가 이곳으로 오기 전에 어디 있었는지는 아시죠?” 알다마다. 교육지원청장으로 근속하다 퇴직하고 온 것이 아닌가? 즉, 장학관이었다는 이야기. “이번에는 제가 힘써서 무마합니다만, 다시는 회계 문제로 시비가 생기지 않도록 철저히 해주시길 바랍니다.” “네. 고맙….” “실장님께 인사들을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 예.” “적어도 제가 여기 있는 동안은 불미스러운 일이 없길 바랍니다.” 지금의 말은 단순히 행정실장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들은 바를 그대로 재단 이사회에 전하라, 그런 이야기였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마저 드세요. 실장님.” 실장은 빨리 마시고 나가란 뜻으로 이해했다. 행정실장이란 직급이 교감급에 준한다지만, 그래도 교장보다는 아래다. 아랫사람은 눈치가 빨라야 한다. 그게 사회생활이다. 소파에 몸을 묻고 따뜻한 차로 입술을 적시는 교장의 위로 시곗바늘의 움직임이 보였다. 8시 50분을 겨우 넘긴 시간. 한참 아침 조회 중일 학교는 교장실만큼이나 조용하다. “…알아들었어!” “네.” 단유는 담담하게 대답하고, 병억은 입을 다물었고, 명수는 당당하게 외쳤다. “네!” 희선은 뭐가 그리 당당하냐고 꼬집어 물으려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아차 했다. 시계를 보자 갑자기 머리가 확 식어버린다. 왜 그렇게 화를 냈냐고? 실은 화가 났다기보다는 당황해버렸다는 게 옳은 표현이겠다. 당황했지만, 당황한 티를 보이지 않으려 했더니 오히려 더 화를 내버렸다. 지금까지 애들을 세워놓고 했던 이야기들을 줄여 말하면 ‘왜 그랬어? 나보고 어떡하라고!’ 였다. 조회를 끝내고 단유를 데리고 가야 하는데, 왼쪽 뺨이 부어오른 단유를 데리고 가면 무슨 소릴 들을까? 뭐라고 변명해야 할까? 그런 생각으로도 정신이 없는데, 한 놈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대답도 안 하면서 ‘불성실’한 모습을 보이고, 또 한 놈은 말대답이나 하면서 속을 긁는다. 그런데 또 한 놈이 지도 싸웠다고 자랑하듯 하니 머릿속 퓨즈가 끊어져 버렸다. 그런데 이 퓨즈라는 게 자연 회복 능력이 있어서, 시간이 좀 지나니 모르는 사이 연결이 된 모양이다. 어차피 이제 곧 1교시가 시작될 시간인데, 1교시는 학급회의 시간으로 정해져 있다. “김단유, 넌 나 따라오고 나머지는 얌전히들 있어!” 갑자기? 뭔가 두서없는 담임의 이야기들을 조립하다 말고 담임을 따라나서야 했다. “왜 단유만 가요? 저도 싸웠는데요?” 눈치 없는 명수가 단유만 벌 받는 건 줄 알고 따라가겠다고 성화니, 희선은 성남 암사자마냥 짧은 숏컷트의 머리를 휘날리며 명수를 압박했다. “얌전히! 있으라고 했지? 자리에 가 있어!” “그런데 저도….” “인명수! 꼭 선생님이 소리쳐야 말 들을래!” 선생님의 뒤에 선 단유의 눈짓에 명수는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자리로 돌아갔다.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던 병억이 그 뒤를 따라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반 아이들에게도 조용히 교실에서 대기하란 엄포를 놓은 뒤 교실을 나섰다. “따라와.” “네.” 단유는 얼굴색이 몇 번이고 바뀌는 담임의 뒤를 따랐다. ======================================= [476] 의심스러울 때는(2) 교무실이나 생활지도부로 가리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담임은 단유를 데리고 1층으로 내려왔다. ‘교장실?’ 담임은 교장실 앞에서 간단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뒤에서 지켜보는 단유에게로 고갤 돌렸다. 그제야 단유는 담임의 얼굴이 유난히 굳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바로 이곳을 향해 온 것을 보면 교실로 들어오기 전에 자신을 데리고 오란 이야기를 들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데려가야 할 아이가 싸움을 일으켰다면, 선생님으로서는 황당하고 화가 날 상황이긴 했다. ‘그래도 조금 침착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뭐가 문제일까? 왜 사람들은 문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침착하지 못한 걸까? 아니면 오히려 매번 냉정을 유지하는 자신이 이상한 걸까? “김단유.” “조심하겠습니다.” 단유는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할지 미리 알고 선수를 쳤다. 선생님은 반쯤 열린 입술을 달싹이다 다물었다. 그리고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여선생과 소년이 들어오자, 창완은 들고 있던 차를 내려놓고 일어났다. “교장 선생님.” 고개 숙여 인사하는 여선생에게 가벼운 목례로 답하는 창완의 모습은 거만하지 않았다. 가볍게 다문 입술은 편안해 보였고, 일부러 젊게 보이려 염색을 하는 요즘 트렌드와 달리 하얗게 센 머리 그대로인데 숱이 많고 정갈하게 빗겨져 단정하고 연륜있는 노신사라는 느낌이 있었다. “어서 와요. 거기 학생도 들어와요.” “네. 김단유라고 합니다.” “아, 그래요. 김단유 학생. 여기 앉아요.” 단유는 자연히 지난 교장과의 만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교장의 경우도 점잖은 학자의 느낌이 없진 않았지만, 완고하고 고루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새 교장의 경우는, 일단 첫인상부터가 남달랐다. 엄밀히 말하면 담임 선생님은 평교사이기에 직급상 교장 선생님의 아래다. 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도 문이 열렸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는 자세는 상대를 직급이나 나이에 따라 낮춰보는 면이 적다는 것이 아닐까? 아니라면 상대가 누구든 그저 오랜 세월 몸에 밴 습성처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상대에게 좋은 이미지를 준다. “선생님,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앞서 앉아 있던 행정실장이 허리를 숙이자, 또 마주 목례를 하며 인사를 받아준다. “나중에 또 이야기하죠.” “네, 교장 선생님.” 행정실장은 몸을 돌려 나가다 단유와 눈이 마주쳤다. ‘저 아인가?’ 행정실장은 곧 시선을 돌려 여선생과 눈인사를 나누고는 교장실을 빠져나갔다. “선생님, 저도 물러….” “아뇨, 선생님. 선생님도 잠시 앉아 계시다 가시죠. 선생님 반 아이 아닙니까?” “아, 네.” 희선은 손을 공손히 모으고 허리를 숙여 교장 선생님께 예를 보이고는 다소곳이 맞은 편 소파에 앉았다. 최대한 단정한 모습을 보이려 했지만, 귀밑으로 땀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세상 천지에 상관과 자리하면서 편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 게다가 아직 그 성향이 파악되지 않은 갓 부임한 상관이라면 더더욱 불편할 수밖에 없다. 비록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은 하지만, 보는 사람은 누구나 알아볼 만큼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단유도 담임의 그 모습에 마음이 불편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교장은 아무렇지 않게 희선을 상대했다. “차라도 드릴게요. 괜찮나요?” “아, 예. 저, 괜찮, 습니다.” 담임의 괜찮다는 말은 ‘괜찮으니 마시지 않겠다’는 걸까, ‘차도 좋습니다’라는 걸까. 변화무쌍한 표정을 보여주는 담임에게서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바라보는 교장과 마주 바라보게 되었다. “학생, 단유군은?” “차 좋아합니다.” “다행이군요. 보이차, 마셔봤어요?” “예, 예전에 몇 번 마셔봤어요.” “그렇군요.” 희선은 오히려 단유의 침착함과 담담한 태도가 어색하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곧 교장실에 보이차의 그윽한 향기가 가득 차올랐다. 붉은 듯 맑은 보이차를 한 모금 마시니 따뜻한 기운에 몸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차를 즐길 줄 아는군요?” “잘은 모르고요, 그냥 따뜻해서 편하다는 정도인데요.” “그게 차를 즐기는 거죠. 허허.” 중후한 목소리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니 교장실의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담임은 긴장하고 있는 듯 하지만. “그런데, 단유군 얼굴은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나요?” 담임의 긴장도가 갑자기 확 올라가더니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희선의 머릿속에 난리가 났다. 평소라면 가로세로 줄 맞춰 정리된 단어장이 폭탄 맞은 것처럼 이리저리 흩어진 가운데 자신이 원하는 단어들을 주워다 이어붙여 말을 해보려 했지만, 손에 쥐어지는 단어들이 없어서 입술만 달싹거리다 힘겹게 문장을 만들어냈다. “사고가 조금 있었습니다.” 희선은 ‘사고’라고 표현했다. “싸움이 있었어요.” 뒤이어 단유의 진짜 ‘폭탄’이 터져버렸다. “싸움이요?” 찰나의 순간 교장의 눈에 빛이 서렸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의 눈빛에도 희선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조심하겠다며? “그게….” “제가 말씀드려도 될까요? 선생님?” 교실에서였다면 ‘버릇없는’이나 ‘감히’ 같은 수사가 붙을만한 행동이었지만, 단유는 제대로 항변하고 싶었기에 담임의 말을 잘랐다. “선생님께서 들어오시기 전의 일이어서 제대로 말씀드릴 시간이 없었어요. 저희 때문에 선생님께 곤란을 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선생님.” 단유는 먼저 희선에게 사과를 했다. 그것은 앞서의 일들에 대한 사과이며, 동시에 교장에게 ‘선생님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저를 데리고 교장실로 가셔야 하는 일 때문에 여유가 없으셨거든요.” 혹시 몰라서 단유는 교장 선생님을 향해서도 한 마디를 보탰다. “무슨 뜻인지 이해했어요, 단유군.” 교장은 달리 의심할 만한 이유가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도대체 어떤 싸움이 있었던 거죠?” “사소한 시비였습니다. 학기 초에 자리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었죠. 학생들 간에 일어나는 사소한 의견 충돌이었지만, 뜻이 맞지 않다 보니 주먹이 오갈 뻔했던 일이었어요.” “오갈 뻔했다는 말은 그렇지 않았다는 이야기, 인가요?” 단유는 부어오른 볼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제가 실수로 맞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특별히 상해를 입힐 만한 상황은 없었습니다. 힘으로 눕히긴 했지만 상대를 진정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교장은 흥미롭다는 듯 단유를 바라보며 손깍지를 끼었다. 무릎 위에 손을 올리고는 담담한 표정의 단유와 그 옆에 긴장된 표정을 지은 채로 처분을 기다리는 사람마냥 고개를 떨군 희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학생의 말은 변명입니다. 그렇죠?” “네. 하지만 당시에는 힘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저 나름대로는 그 힘으로 상대를 무력하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왜죠?” “가끔 대화가 안 되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희선이 날 선 눈으로 단유를 훔쳐보았다. 누구 앞이라고 말장난이냐고 혼을 내고 싶었다. 대화가 안 되는 사람? 대화가 안 되면 힘을 사용한다? 그거야말로 후안무치한 논리 아닌가? 힘을 쓰는 상황을 정당화시키고 합리화시키려는 핑계일 뿐 아닌가? “대화가 안 되는 경우라.” 교장은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몸을 기울였다. 교장의 검은 눈동자가 단유의 눈을 겨눴다. “왜 대화가 안 된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 경우 있지 않나요? 상대가 대화할 의지가 없다거나, 혹은 대화를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경우요.” “그런 상황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런 상황이 대화 대신 힘을 선택하게 만드는 핑계는 되지 않아요.” 단유는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감정이라고 해야 할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데, 그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괜히 등 뒤가 서늘해지는 기분인데. “네, 그 점은 저도 인정해요. 하지만 오로지 대화만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숱하게 겪었던 경험들, 대화가 안 된다고 여겼던 일들이야 제가 어리고 미숙하기 때문에 그랬다고 한정 짓더라도, 현실에서 대화 대신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해요.” “어떤 경우가 그렇죠?” “정확하게 어떤 상황이라고 특정 짓긴 어렵지만, 예를 들면 국가와 국가 간의 문제를 대화가 아닌 전쟁으로 해결하는 경우도 힘을 이용하는 것 아닌가요?” “2차 대전은 반세기도 지난 이야기군요. 세계는 힘 대신 대화로 문제를 풀려는 의지를 UN 창립을 통해서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전쟁은 계속 있지 않았나요? 아프간 전쟁도 그렇고, 쿠웨이트 전쟁도 말이에요.” “중학생 두 사람의 문제가 세계적인 규모로 비화될 정도인지 궁금하군요. 하지만 거론한 두 문제도 결국 세계의 비판을 받고 있는 전쟁이죠? 힘보다 대화가 필요하지 않았냐는 논란이 있죠.” “정당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런 경우가 있더라는 얘기를 드리는 건데요.” “그런 경우마다 비판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교훈을 얻었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싶군요.” 교장은 결코 화를 내지 않았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조목조목 단유의 말에 답을 해주었다. 어른이라고, 교장이라고 윽박지르려는 태도는 전혀 없었다. 단유는 생각을 정리한 뒤 말을 이었다.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분명 폭력보다 대화가 유용할 뿐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에서 필수적인 해결 방식인데 좀 더 편한 방식이라 여겨 눈을 가렸습니다.” 몸을 앞으로 기울였던 교장은 고쳐 앉으면서 앞에 놓인 차를 집었다. 입술을 축이는 동시에 끌어 올라가는 입꼬리를 잔으로 가렸다. 다시 잔을 내렸을 땐, 이전과 다름없는 표정이었다. “단유군은 듣던 것 이상으로 똑똑하고 영민한 학생이군요.” 단유는 교장의 말이 그저 놀리기 위함은 아니라고 느꼈다. “과찬이십니다.” “사실 여러분 나이대의 학생들은 혈기 왕성하죠.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나이기도 하고요. 천천히 생각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도 흥분해서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쉽게 힘을 쓰기도 하죠.” 교장은 두 사람의 대화를 훔쳐 들으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희선에게 시선을 돌렸다. “학생 말대로 가끔은 대화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을 거예요. 그건 우리 선생님이 더 잘 느끼시겠죠.” 희선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가 교장과 시선을 마주하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시선을 피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초조함을 느낀 건지, 무릎 사이에 놓인 손가락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분주하게 꼼지락거리는 중이었는데 본인만 느끼지 못하는 중이었다. “가끔 학생들이 선생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여겨질 때 있죠?” 없다면 거짓말이다. 굳이 학생과 선생의 문제일까? 부모와 자식 간의 문제기도 하다. “하지만 그럴 때 대화가 되지 않으니 힘을 써야겠다, 고 생각하는 선생님이 있던가요?” 단유는 기억을 더듬은 뒤, 고개를 저었다. 과거에 한 번, 초등학교 때 한 선생님의 팔이 올라가긴 했어도, 교장이 말한 경우와는 다른 문제였으니, 적어도 대화 대신 ‘힘’이라고 했던 선생님은 없었다. “옛날에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계도’하기 위해 ‘사랑의 매’를 들었다지만, 체벌이 교육적 효과가 없다는 사실은 물론, 때리는 선생님을 가해자로 만드는 심리적인 문제가 지적되어서 이제는 체벌이 금지되었어요. 아시죠?” “네.” “지금의 선생님들은 어떤 경우에도 ‘힘’으로 학생을 억누르려 하지 않아요. 그런 선생님의 행동에서 학생들은 배워야 합니다. 대화와 인내가 인간 관계에 있어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네.” 단유의 생각도 그와 다르진 않았다. 이전까지는. “하지만 대화를 원치 않는 상대와는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까요?” 희선은 놀란 나머지 팔꿈치로 단유의 팔을 툭 쳐서 낮은 목소리로 을렀다. “단유야!” 희선은 제발 단유가 얌전히 ‘네, 네’만 하다 끝냈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빌었다. 정말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고작 중학생인 녀석이 한참 어른이신 교장 선생님과 저런 ‘무례한’ 대화를 나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걸 받아주는 교장 선생님의 속도 모르겠고, 이 대화의 끝이 어디로 흐를지도 따라갈 수 없었다. “흠. 대화를 원치 않는 상대라.” 교장은 다시 찻잔으로 입을 가리며 목을 축였다. 코끝에 와 닿는 향기가 점점 진해지는 기분이었다. “지금의 대화는 어떤가요?” 다시 되돌려진 질문. 무슨 의도지, 라고 희선이 생각할 때 단유가 답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탐색을 받는 기분인데요.” 교장은 진심으로 참을 수 없었다는 듯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하, 죄송합니다. 재미있네요. 탐색을 받는다라. 그래서 학생은 일부러 수긍하는 척을 한 건가요?” “일부러는 아니고요. 교장 선생님의 생각과 뜻이 같기 때문에 제 잘못을 시인한 거예요.” “좀 더 재미있는 대화가 되리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희선은 어지러웠다. 두 노소(老小)가 벌어는 대화가 자신의 상식을 깨는 기분이었다. ======================================= [477] 의심스러울 때는(3) 교장 선생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책상 쪽으로 몸을 돌렸다. 책상 위에 얹어져 있던 서류들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이 학교에 오기 전부터 학생에 관해 들은 바가 있어요.” 희선은 단유의 과거 행적을 떠올렸다. 같은 반도 아니었고, 학년도 달랐지만, 단유를 모르는 아이들이나 선생님들이 없을 정도였다. 1학년 때부터 사고를 쳤던 데다가, 2학년 때는 무려 전국으로 송출되는 인터넷 방송에서 교육부를 물 먹인 장본인 아니던가? 혹자는 대한민국의 교육에 대해 일침을 놓았다고들 하지만, 희선이 보기엔 그저 소영웅주의에 빠진 중학생의 허세였다고 생각했다. “경력이 화려하더군요.” 찾던 서류를 찾았는지 교장은 손에 프린트된 종이 한 장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학생 기록부에 적힌 것 말고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더군요.” 교장은 품에서 안경을 꺼내 코에 걸쳤다. “6년 전에도 SNS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군요? 그 일로 도서관 홍보용 광고를 찍었다고. 맞나요?” “네.” 6년 전이면 초등학교 3학년?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무슨 뮤직비디오에 나왔다고 하던데, 예전부터 연예계 쪽에 관심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쪽과 연계된 줄이 있는 것일까? 희선은 호기심이 동하는 걸 느꼈다. “TV에도 출연했었고요. 그런데 그때는 별로 좋은 평을 듣지 못했나 보군요. …궁금하군요. 그때의 단유군은 어땠는지 말이에요.” “지금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안경 위로 눈동자를 올려 단유를 바라보는 교장 선생님이었다. “변한 게 없나요?” “솔직히 키가 자란 거 외에는 별로 변한 게 없는 것 같아요.” “그런 것도 재미있네요. 보통 단유군 또래의 아이들은 시간의 흐름을 느리게 느끼던데 말이에요.” “느리게요?” “한 학년이 지나는 기간이 너무 길게 느껴지고, 방학은 기다리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던가요? 그래서 한 해가 지나면 참 긴 시간이 지났다는 생각을 가지죠. 한 학년만 지나도 작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무척 많이 다르다고 느끼기도 하고요. 실제로도 다르죠. 학교라는 공간에서 배우는 양과 질이 매해 달라지니까요.” 교장의 말에 희선은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에게 시간은 어떤가? 시쳇말로 ‘화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이었다. 어제와 오늘을 비교할 필요도 없다. 어제나 오늘이나 같으니까. 눈 깜짝할 사이에 한 학기가 지나고 1년이 지난다. 엊그제 학교에 들어와서 선배, 동료 교사들에게 인사를 한 것 같은데 벌써 7년 차가 되었다. 지금도 이런데 나이가 더 들면 어떨까? “제가 알기론 도파민에 의해 선조체 돌기신경세포가 활성화되면 선조체의 회로가 빠르게 진동해서 그렇다고 들었는데요.” 뭐? 희선의 감상을 깨뜨리는 단유의 대답에 희선의 고개가 돌아갔다. “뭐, 그런 연구가 있긴 하죠.” 교장의 대꾸에 희선은 다시 교장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도파민이 분비되면 생체 시계가 빨리 돌아가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외부의 시계가 느리게 느껴진다고 하더군요. 나이 든 사람은 도파민을 적게 생산하기 때문에 생체 시계가 느리고, 그래서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것처럼 느낀다죠? 하긴 나이가 들면 젊었을 때처럼 감정에 휘둘리는 일이 적어지죠.” 희선은 어쩐지 소외감이 느껴졌다. 원래 이런 내용은 모두 다 아는 내용인 걸까? 아니면 본인만 일에 치중하느라고 일반 상식이 부족해진 것일까? “그런 이유 때문인지 젊은 사람들은 너무 감정에 휘둘리는 경향이 있다고 보일 때도 있어요. 흥분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생각해보면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도 조급하게 선택을 하지요. 조급한 선택은 대부분 좋지 않은 결과를 낳거든요.” “야구 선수는 공을 보고 결정하고 치는 데 0.4초가 걸린다고 하던데요? 때로는 빠르게 선택해야 할 때도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야구 선수는 3할만 되도 훌륭한 타자라고 하지요? 7할은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만약 충분한 사고와 결정을 내릴 시간이 주어진다면 누구라도 천천히 생각하지 않을까요? 만약 조급한 선택을 내렸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걸 ‘상황 논리’라고 하지요. 객관적 사실이나 원칙보다 현실적 제약과 한계를 거론하고 이로 인한 불가피성을 역설하는 경우죠. 하지만 그런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집에 도둑이 들어왔을 때도 천천히 생각할 여유가 있을까요?” “도둑이 들어오거나 강도를 만나거나 다리가 무너지거나 건물이 무너지는 상황을 얼마나 많이 마주치게 될지 궁금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굉장히 제한적이겠죠?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는 그 상황의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즉, 제한적인 선택지를 적절히 고르는 융통성과 응용력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해야겠군요.” 희선은 이런 대화가 이루어진다는 게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겁도 없이 입을 여는 단유도 이제는 대단하게 느껴지고, 한참 어린아이의 질문이나 대꾸에도 화내지 않고 차분하게 받아주는 교장 선생님은 존경을 넘어, 옛이야기에서나 나올 법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말을 주고받는 모습에만 집중하다 보니 이야기의 흐름을 잘 따라가지 못하겠다. 도대체 두 사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허허, 모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바쁜 선생님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나 봅니다.” “아, 아닙니다. 교장 선생님.” “앞으로 1년간 가르쳐야 할 학생이 어떤 학생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에서 선생님을 붙잡고 있었는데, 제가 너무 생각이 짧았던 건지도 모르겠네요.” “아닙니다. 덕분에 단유를 좀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그런가요?” 웃음을 흘리는 교장 선생님의 검은 눈동자가 안경 위로 드러났다. 살짝 치켜든 그 눈을 마주 보던 희선은 아차, 하는 마음으로 일어섰다. “아, 그러고보니 학급회의 중일 텐데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던 것 같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이만 가봐도 될까요?” “아, 그래요? 그럼 먼저 일어나세요. 단유군은 좀 더 이야기를 나눈 뒤에 보내도 되겠죠?” “아, 예. 알겠습니다, 선생님.” 희선을 허둥지둥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단유도 덩달아 일어나 희선에게 고개를 숙였다. “천천히, 올라와.” “네, 선생님.” 인사를 마친 희선이 교장실을 나선 뒤, 단유가 교장 선생님을 돌아보았다. “차, 더 마시겠어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럼, 다시 자리 앉아요.” “괜찮으시면 말 편하게 놓으시죠, 선생님.” “허허, 이런 모습을 보면 중학생 같지가 않아요, 단유군은.” 여태 나눈 대화들만 놓고 봐도 일반적인 중학생 중에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싶지만 말이다. 희선이 교실로 다가가니 떠들썩한 소리가 복도를 울리고 있었다. 문을 열고 교실을 들어가자 황급히 자리를 찾아가는 아이들 때문에 소란이 일었지만, 금세 조용해졌다. 희선은 교탁 앞에 서서, 그 앞에 놓인 출석부를 붙잡았다. 조회 후에 그대로 두고 갔던 모양이었다. 시계를 보니 불과 20여 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체감상으로는 1시간이 넘게 흐른 것 같았는데 말이다. ‘도파민 때문인가?’ 희선은 고개를 젓고는 자신의 눈치를 보느라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학생들을 쳐다보았다. 저 아이들도 단유와 비슷할까? 혹시 자신만 저 아이들을 그저 어리고 미숙한 아이들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사실은 생각 이상으로 똑똑하고 많은 것을 생각하고 고민하는 아이들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교장 선생님은 그런 아이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화를 받아줬던 것일지도 모른다. “선생님!” 교실 뒤편에서 손을 번쩍 들고 자신을 부르는 이는 명수였다. “단유는요? 혹시 혼자 벌 받는 건가요? 저랑 얘도 같이 싸웠는데 같이 벌 받아야 하는데요?” 마치 맛있는 간식을 뺏기고 자신도 달라고 조르는 아이처럼 구는 명수 때문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왜 자신을 끌고 들어가냐며 눈을 부라리는 병억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벌 받는 거 아니고 교장 선생님이랑 이야기 나누는 중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리고 너희들 문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거니까 그때까지 제발 얌전히 좀 있어라. 알겠니?” 아까 전의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모습 대신 차분하게 대꾸하는 선생님의 반응에 반 아이들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떤 모습이 진짜 모습이지? “반장? 아, 반장 뽑아야 하지? 반장 하고 싶은 사람?” 갑자기 이런 분위기에서 반장 선거를 하겠다고?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살피며 과연 누가 손을 들지 궁금해했다. “저요!” 명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선생님도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명수를 바라보았다. “반장이 하고 싶어?” “아뇨, 저 말고 단유요. 김단유를 반장 후보로 추천합니다!” 이유야 말할 필요도 없다. 2년 내내 전교 1등이었고, 남은 1년도 전교 1등이 확실한 데다가 아이들 사이에서는 평판도 좋은 편이라 반장을 시켜도 무방하리라. 다만 지금은 아니다. “단유는 안 돼.” “왜요?” “왜라니? 몰라서 묻니? 첫날부터 반 친구랑 싸움을 일으킨 사람을 어떻게 반장으로 뽑아?” “싸운 거 아닌데요.” 병억이 눈을 흘겨보지만 명수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쟤가 먼저 시비 걸어서 그런 건데요.” 이미 교장실에서 들은 내용이라 모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지금으로써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기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안 돼. 그리고 너희 둘도 오늘 방과 후에 남아서 선생님이랑 면담해야 할 거야.” 명수는 시무룩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그때였다. “선생님!” 앞자리에 앉아 있던 학생 한 명이 손을 들었다. 명찰을 보고 이름을 불렀다. “그래, 관영이.” 관영이 일어나더니 말했다. “저도 김단유를 반장 후보로 추천합니다.” 희선은 이게 또 무슨 상황이냐는 듯 인상을 썼다. “방금 선생님 말 못 들었니?” “단유가 싸우지 않았다는 건 제 눈으로도 봤고, 저희 반 아이들도 봤습니다. 싸웠다기보다는 싸움이 일어나지 않게 방어하는 수준이었어요. 그러니 폭력 사건의 주범이나 공범 정도로 볼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단유 정도라면 저희 반 반장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단유를 추천합니다. 그리고 만약 제 생각이 틀린 것이라면 단유가 후보가 되더라도 반 아이들이 단유를 뽑지 않으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단유가 반장이 된다면 반 아이들이 단유에게 죄가 없음은 물론이고 반장으로서의 직무를 충실히 이행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하기에 뽑은 것 아닐까요?” 아이들이 ‘오오’, 감탄사를 뱉으며 손뼉을 치고 책상을 치며 호응을 보냈다. 희선은 정말 자신이 이 아이들을, 아니 요즘 아이들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교육의 최전선에서, 매일 아이들과 함께 있었음에도 이런 모습은 상상하지 못했던 희선이었다. “단유군, 자네의 생각은 알겠어요. 그래도 물어보죠. 그렇게 불가피한 상황이었나요?” “아뇨.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래도 전 그게 최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죠?” “예전에도 몇 번 이런 일들이 있었고, 그때는 대화로 해결을 하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불씨가 남아 이후에 더 큰 일로 번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처음부터 강하게 나가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방식을 바꿔본 거예요.” “그렇군요. 효율성을 강조하고자 한다면, 학생의 말대로 할 수도 있을 거예요. 제가 학생의 나이쯤이었을 때는 그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어요. 그러니 학생이 하는 말은 이해해요. 하지만, 그럼에도 동의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원칙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원칙이라 부르는 것은 그것이 옳은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지켜야 하는 방향이기 때문이기도 해요. 때로는 그게 상황에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지키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는 법이거든요.” 교장은 다시 채운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안경을 빼지 않았던 탓에 차에서 올라온 뜨거운 김이 안경에 서려 교장의 검은 눈동자를 가렸다. ======================================= [478] 의심스러울 때는(4) “일단 그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죠. 학생의 시간을 계속 뺏을 순 없으니까요.” 보통은 반대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교장은 설핏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안경을 벗었다. “학생을 불렀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교육부에서 요청이 있어섭니다.” 요청? “혹시 자유학기제 홍보모델 말인가요?”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물론…단유군이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자칫 그 인상이 너무 강해서 자유학기제라는 메인이 흐려질 우려가 있지요.” 좋게 말해서 ‘인상이 강했다’는 거지, 사실 고춧가루를 뿌린 셈이었다. 거기에서 단유가 홍보용 광고를 찍어봐야 좋지 않은 말들만 덕지덕지 붙을 것이다. “학생의 이야기는 별로 틀린 말이 없었지요. 우리 사회는 능력 중심 사회로 가자고 이야기하면서도 여전히 학벌과 스펙 위주의 채용 관행들이 판을 치는 사회니까요. 해가 지날수록 많은 젊은이들이 선택의 기회도 받지 못한 채로 시간을 보내고 있고, 그들이 무엇을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마치 낙오자인 것처럼 취급하는 시선들 때문에 힘들어하죠.” 등급으로 구분하고 학교로 계급을 나누는 차별적 시선들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인간은 누구나 동등하다’고 교과서에서 떠든 들, 사회가 그 가르침을 부정하는 마당이다. 어떤 교육 정책을 내놓는다 해도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결국 겉도는 정책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교육을 이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죠. 모든 것을 한 번에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천천히 한 걸음씩, 할 수 있는 만큼 바꿔나가는 것이 이 나라 교육 정책의 바른길일 겁니다.” 단유는 그 내용만큼이나 교장의 태도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원칙이 중요하다고 말했었죠?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의 교육은 바로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교육이라는 욕을 먹더라도, 학생들에게 꿈을 이야기해야만 하는 것이 교육입니다.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변화되어야 하지만, 그래도 학생들에게 바르게 사는 법, 함께 사는 법, 옛것을 존중하는 법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 교육입니다. 미래 핵심 역량이라고 일컫는 창의력, 융합적 사고력을 길러 능력 있는 인재가 되도록 돕지만, 동시에 화합과 평화에 대한 바른 세계관을 갖도록 돕는 것이 교육입니다.” 얼핏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 싶지만, 꼼꼼히 짚어보면 중요한 이야기다. 개인의 역량 강화에만 초점을 맞추는 사회다 보니, 학교보다 학원 등의 사교육이 발달했다. 치열한 경쟁만을 부추기는 사회다 보니 이기는 것만 중요하고, 이기는 이유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만들었다. 비리 판사, 돈만 밝히는 의사, 탐심에 눈을 가린 정치인들이 심심치 않게 뉴스에 나오는 것은 그런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올해부터 교육부에서 미래를 대비한 적극적 교육 정책을 펼치려 하는데, 거기에 학생이 학생 모델로 나와주었으면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다양한 수업 제공’, ‘모든 학생의 학습권 보장’, ‘차별 해소 정책’, ‘건강하고 안전한 학교 환경’ 등의 모토로 캠페인을 벌일 예정이라는데, 거기에 학생 모델로 참여해 달라는 교육부의 공문을 보여주었다. “학생의 이미지가 교육부의 정책 캠페인에 어울린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저 역시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고요.” “제가 굳이 그걸 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없지요. 당연히. 저는 그저 학생에게 이런 요청이 들어왔음을 알려주고 학생의 의견은 어떤지 물어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강요는 없어요.” 단유는 교장이 내민 공문을 받았다. 적힌 내용은 별것 없었다. 올해부터 시작될 캠페인에 ‘장계중학교 김단유 학생’을 모델로 기용하고 싶으니 의견을 물어봐달라는 정도의 내용이었다. “몸은 괜찮나요?” “네?” “몇 달 전에 혼수상태에 빠졌었다고 들었는데.” “아, 네. 지금은 괜찮아요.” “몸을 보니 운동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혹시 알리지 않은 병이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네. 병원에서도 병은 없다고 했어요.” 교장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다행이군요. 사실 아까 이야기의 연장선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호기심이 줄어요. 새로운 기술과 도구들이 등장해도 신기하다는 생각만 들지, 그게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게 어떤 원리를 적용한 것인지 궁금해하는 호기심은 생기지 않아요. 그저 그러려니 하는 거죠. 세상은 계속 변하니까, 언젠가는 진짜 달 여행을 떠날 수도 있겠지, 라고 생각하고 넘어가 버리는 거죠.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호기심이 전혀 없지는 않아서 가끔 학생 같은 친구들을 보면 호기심이 생깁니다.” 가만 보면 교장의 얼굴에도 주름이 많았다. 하지만 교장의 이미지가 워낙 단정하고 바른 모습이라 그런 주름을 느낄 새가 없었다. 그렇게 보이는 기운 같은 게 있었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그런 거겠지만. 과연 이 학생은 10년 후에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이 학생은 미래의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삶을 살아갈까. 또 이 아이는 5년 뒤에 어떤 생각을 품고 살아가고 있을까. 이런 것들이 궁금해져요. 그래서 그 친구들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어요.” ‘스토커처럼 따라다니지는 않아요’라는 농담이 뒤따라 붙었는데, 웃음을 흘릴 만큼 웃기지는 않았다. “학생도 궁금해요. 과연 학생은 어떤 모습으로 자랄지 말이에요. 그래서 부디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건강하게 자라서 어떤 모습으로 이 늙은 선생의 호기심을 자극할지 기대가 됩니다.” “작년의 전 교장 선생님은 절 보고 사회지도층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던데요.” 단유의 말은 웃겼던 모양이다. 교장은 눈이 동그래지더니, 허헛, 하고 큰 웃음을 터뜨렸다. “죄송해요. 체통 없이. 아무튼, 재밌는 이야기네요. 사회지도층이라. 학생도 그렇게 되고 싶나요?” “아니요. 전 되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왜요?” “당시에 교장 선생님은 사회지도층을 엘리트라고 표현하셨어요. 그런데 전 그런 특권계층이 되고 싶지도 않았거든요.” “특권계층이 되고 싶지 않다?” “일종의 귀족이잖아요? 특권이 주어진 만큼 의무도 다해야 할 텐데, 전 그 의무를 이행할 능력이 안 되니까요.” 교장은 다시 눈을 빛냈다. 흥미로운 대화의 주제로 돌아온 탓일까? “조금 전에 전 학생에게 ‘동등한 인간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학생은 마치 이 사회에 귀족이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군요?” “네.” “왜 그렇게 생각하죠?” 단유는 잠시 입술을 다물고 길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최근에 읽은 책에서 보면, 과거의 귀족은 왕과 가문으로부터 인정된 권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권력으로 아랫사람들을 부리고 착취했죠. 그 권력은 어떤 실체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실제로 그 권력이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귀족에게 대들지 못했고 저항하지 않았어요.” “권력의 존재론적 의미라.” “현대에는 과거와 같은 방식의 계급은 사라졌다고 해도, 여전히 귀족, 혹은 그에 준하는 계층은 있어요. 특히 현대 귀족은 특별한 권력을 소유합니다.” “그게 뭐죠?” “실체화된 권력, 돈이죠. 돈은 보이지 않던 권력과 달리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실감할 수 있는 실체에요. 그러면서도 과거 어느 때보다 강한 권력성을 보여주죠. 하지만 믿음이 아닌 실체에 의존한 권력이기에 변동성도 강해서 누구나 돈만 있으면 귀족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었어요. 하지만 사실 현대 사회는 이미 돈에 의한 계층 구조가 과거 귀족의 때보다 더 공고하게 확립된 상황이죠. 소수의 귀족이 공고하게 자리를 잡은 가운데, 일부 부유한 중산층들이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고…하네요.” “재밌는데 왜 말을 흐리죠?” “실은 거기까지 밖에 읽지 못했거든요.” 교장은 무릎을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책을 좋아하는 친구로군요. 그런데 무슨 책인데 그런 내용이 나오죠?” “외국의 사회학자 분께서 쓰신 책인데, 그 책의 일부에 그런 내용이 나왔어요.” “그럼 그 내용에 동의하나요?” “어느 정도는요. 물론 제 식견이 짧아서 내용의 진위 여부를 확인할 능력도 되지 않고, 제대로 비판할 지식도 없지만 대체로 그 내용이 제가 느끼는 사회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하긴. 교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요즘의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진다. 워낙에 많은 미디어에 노출된 세대다. 넘치도록 흘러나오는 정보들은 주워 담기가 버거울 정도인데, 그런 정보들의 세례를 받으며 자란 아이들의 지식과 식견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을까? 게다가 가끔씩 눈앞의 아이처럼 튀어나오는 아이들을 보면 놀랍다 못해 무시무시할 정도다. “그런데 귀족이 되기 싫다는 설명으로는 부족한 것 같은데요.” “현대의 귀족도 단순히 돈만 많아서 귀족의 칭호를 얻는 게 아니잖아요? ‘사회지도층’이란 별칭을 얻었다는 건, 그만큼 특별한 사회적 의무를 지고 있다는 뜻일 텐데, 전 그런 의무를 이행할 능력도 의지도 없으니까요.” “사회를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는 게 싫다는 뜻인가요?” “의무로 해야 하는 게 부담스럽다는 뜻이죠. 몰래 불우이웃돕기를 하는 건 좋지만, 매년 뉴스에 나와서 불우이웃돕기 합니다, 광고하는 건 부담스러운 거죠.” 교장은 웃으며 찻잔을 집어 들다 놓았다. 이미 다 식은 차라서 맛을 볼 이유가 없다. “시간만 있다면 학생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는 게 아쉽네요. 게다가 교장으로서 한 학생을 편애한다는 이야기를 들을까 봐 자주 부르지도 못할 것 같고요.” 면담을 마치자는 이야기로 들렸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1교시가 마치기 직전이었다. “교육부 건은 언제까지 답을 드리면 될까요?” “이달 내로 생각하고 결정하세요. 그리고…원래는 담임 선생님께 결정한 내용을 알리도록 할 생각이었는데, 이왕이면 직접 와서 이야기해 줄래요? 온 김에 늙은 선생의 대화 상대나 해주면 더 좋고요.” “알겠습니다, 교장 선생님.” 마침 1교시 마침을 알리는 종소리가 학교에 울려 퍼졌다. 먼 곳에서 아이들이 복도를 뛰쳐나오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이만 가보세요.” “네, 선생님.” 단유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뒤, 교장실을 벗어났다. 나가기 전 교장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는데, 교장 선생님의 눈이 웃고 있었다. 단유도 모처럼 ‘대화’를 나눈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뭐야?” “뭐긴 뭐야? 니가 반장이라고.” “내가 왜?” 단유는 얼떨떨한 얼굴로 명수의 이야기를 들었다. 잠깐, 아니 잠깐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이 빠진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반장이 되어 있다니? “내가 추천했어.” 명수가 자랑스럽게 엄지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쿡쿡 찌르며 입꼬리를 늘렸다. 이 친구야. 단유는 명수의 어깨를 짚었다. “…그냥 반장 안 하고 조용히 살면 안 될까?” “반장 하면서 조용히 지내면 되지, 뭐가 문젠데?” 에휴. “아, 그리고 쟤도 너 추천했어.” 누구, 하면서 고개를 돌리니 명수의 손가락이 가리킨 아이가 마침 고개를 돌려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1, 2학년 때 모두 같은 반이 아니었던 아이였다. 혹시나 명수는 알까 싶었는데, 명수도 처음 보는 아이라고 했다. 전혀 모르는 데 왜? 그 아이가 일어나 다가왔다. 일단은 그 태도와 당당한 표정에서 성격이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적극적이다. “반갑다. 나, 김관영이라고 해.” “응. 반가워.” 의례적인 인사였지만, 관영은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난 네가 우리 반 반장이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왜?” “민주주의를 실천한 셈이거든.” “뭐?” 옆에서 듣던 명수가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 [479] 의심스러울 때는(5) “우리는 선거를 통해서 네가 죄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어. 직접민주주의를 실천한 셈이지.” “단유야, 무슨 말이야 저게?” 그저 반장 투표를 했을 뿐인데, 민주주의를 실천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오니 명수는 자기가 모르는 뭔가를 했었나 하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약 아이들이 너에게 죄가 있다고 여겼다면, 너를 뽑지 않았겠지만, 다들 너에게 죄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너를 반장으로 뽑은 거야. 우린 민주적인 방식으로 선생님에게 우리의 의사와 진실을 알린 셈이지.” 관영의 얼굴에는 뿌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관영과 단유는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관영은 뭔가 뒤이어 나올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인데, 단유는 그저 아무 말 없이 관영을 바라볼 뿐이었다. 참지 못한 관영이 먼저 말을 걸었다. “어떻게 생각해?” ‘선거라는 방식을 그렇게 활용할 줄 몰랐어. 정말 대단한걸’ 이나 ‘반장으로 뽑아줘서 고마워’ 같은 반응을 기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유는 그런 고마움은 별로 느끼지 못했다. 단유의 시선이 껄끄러운 느낌이었는지 관영이 얼굴을 굳혔다. “왜 그렇게 보냐?” “…일단 고마워.” “그래.” “‘죄’가 없다고 생각해줘서.” “응?” “그래도 선거가 그런 식으로 이해되는 건 별로 달갑지 않아.” “왜?” “선거에 당선되었다고 해서 당선된 사람이 무죄라는 건 오류가 있거든.” “…아이들이 모두 상황을 지켜봤고, 그래서 너에게 죄가 없다고 판단한 거야.”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죄는 우리가 가늠할 문제가 아니야. 선생님께서 판단할 문제야.” “선생님은 보지 못했어.”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충분히 상황을 전해 듣고 판단하실 수 있어. 이 세상 모든 범죄의 순간에 경찰과 검찰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죄를 판별하는 것 같아? 유죄냐 무죄냐를 판단하는 것은 그것을 식별할 능력과 권한이 있는 사람의 몫이야.” 관영은 단유의 대답에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까지 상기되었던 얼굴은 빠르게 식어갔다. “그리고 선거를 통해 증명한다? 선거는 죄의 유무를 판가름하는 제도가 아니야. 만약 배심원석에 앉은 이들의 투표 같은 경우였다면 모를까, 반장을 뽑기 위한 선거는 말 그대로 선출을 위한 행위에 불과해. 그 행위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면 의미는 곡해될 수 있어.” “아이들이 설마 그런 걸 몰랐을까? 적어도 아이들은 너에게 죄가 없고, 반장으로서도 잘할 거라는 생각에서 투표했던 거야.” “정말 그럴까? 예전에 어떤 대통령 후보도 범죄 혐의가 있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선거에 당선되었다고 들었어.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니 범죄 혐의를 조사할 여건이 만들어질 리도 만무하지. 결국 혐의 사실은 흐지부지되고 말았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선거는 혐의 면피용 제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야.” “아, 됐어. 둘 다 그만해. 머리 아프게 무슨 이상한 소릴 하고 있어.” 명수가 끼어들어 둘 사이의 대화를 막았다. “너, 단유 말 알아들었어?” “…대충은.” “그럼 됐어. 너 되게 똑똑하구나.” 명수가 입꼬리를 올리며 관영의 어깨를 툭 하고 밀 듯이 쳤다. 그리고 단유를 향해서도 물었다. “너, 반장 안 할 거야?” “…….” “뽑혔으면 해야 하는 거 알지?” “그래.” “그럼 열심히 할 거지?” “해야지.” “그럼 됐어. 열심히 반장 해. 그럼 된 거잖아?” “하긴 하지만, 그래도 잘못은 잘못이야.” “뭐가? 니가 병억이 눕힌 거? 그건 네 말대로 담임 선생님께 처벌받으면 되는 문제야. 네 말대로 문제가 있다면 말이야. 지금 얘랑 이러쿵저러쿵한다고 해서 반장 투표한 거 없었던 일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선생님도 그냥 넘어가신 일이야.” 단유는 명수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 눈길에 명수가 뻘쭘한 모양새로 시선을 피했다. “가끔은 명수 네가 부럽다.” “뭐가?” 단순한 게 진리, 라는 말은 이럴 때 사용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하긴 관영이란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를 해 봤자 무슨 소용일까? 그리고 굳이 관영의 생각을 고쳐줘야 할 의무도 없고 말이다. **** 예전에도 한 번 고민했었지만, 이상하게 단유는 카메라 앞에 설 일들이 자주 생기는 것 같았다. 원하든 원치 않든 말이다. “돈 벌고 좋지 뭐.” “이번에는 장학금이라는데요.” “장학금?” “아, 그렇구나.” 김 샌 얼굴로 고개를 돌려 TV를 보던 하은은 채널을 돌리다 홈 쇼핑 채널에 시선을 고정했다. 날씬한 모델들이 나오는 속옷 광고였다. “저거 하나 살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갈등하는 하은을 보며 물었다. “혼자 있을 때 하시는 게 어때요?” “왜? 부끄러워? 민망해?” 하은의 눈에 깃든 장난기를 읽지 못했다면, 정말 민망했을지도 모르겠다. “제가 있을 때 살까 말까 고민하는 건, 사달라는 이야기처럼 들리잖아요.” “사 주게?” “사드릴까요?” 빤히 쳐다보는 두 사람.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유, 이 능청아. 얘가 왜 이렇게 점점 뻔뻔스러워지니?” “선생님이야말로 점점 심해지시는 것 같은데요.” 단유는 TV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별로 비싸진 않네요.” “네가 속옷 가격을 알아? 비싸니, 마니. …혹시 여자친구한테 속옷 선물도 했던 거 아냐?” 어머, 얘 좀 봐, 라며 호들갑을 떠는 하은을 무시하고 단유는 핸드폰을 들었다. 진짜 사려는 건 줄 알고 하은이 서둘러 단유의 손에 든 핸드폰을 뺐었다. “뭐하니, 너! 장난이야, 장난.” “사드릴게요.” “사긴 뭘 사. 됐어. 아유, 이젠 장난도 못 치겠네.” “저 돈 있어요.” “그래요? 아이구, 좋겠어요. 김단유씨. 그래도 돈 좀 번다고 그렇게 막 쓰면 안 되는 거야.” “막 쓰긴요. 선생님한테 쓰는 건데 뭐 어때요.” “얘는. 나도 돈 벌 거든?” “선생님이 사는 거랑은 다르죠.” “야! …너 내 사이즈도 모르잖아!” “…….” 단유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뭔데요, 사이즈?” “이 녀석이!” 하은이 달려들어 단유의 머리를 팔에 끼고는 꿀밤을 먹였다. ‘감히 선생님을 놀려!’라며 머리를 콩콩 찧는 하은에게 엄살을 부리며 ‘죄송해요, 잘못했어요’라고 비는 단유였다. “아, 좀 조용해요. 남들 다 자는 시간에 뭐예요?” 명수가 부스스한 머리로 방에서 나와 소리쳤지만, 하은은 쉽게 단유를 놓아주지 않았다. 명수가 머릴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방문을 닫고 들어갔다. 카메라가 모델들의 전신을 훑는 가운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라는 쇼호스트의 멘트가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그래, 하기로 했군요.” “네.” 이런저런 이유를 떠나, 단유가 결심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장학금 때문이었다. 중학교야 의무교육이라 ‘학교운영지원비’, 소위 ‘육성회비’라 불리는 비용만 내면 되지만 그마저도 1학년 때만 냈고 금액도 10만 원이 채 되지 않는 금액이라 부담이 적었다. 게다가 남들 다니는 학원도 안 다니고, 인터넷 강의도 듣지 않으니 고정 수업료 항목으로 지출되는 돈이 없었다. 가끔 단유가 필요로 사는 책이나 문제집들을 사는 비용 정도만이 있을 뿐이었다. “고등학교에서는 수업료가 많이 드는 것 같더라고요.” “아직은 의무교육이 아니니 말이에요. 내 기억에는 한 분기에만 30만 원 넘게 내야 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알아보니까 한 해에 거의 2백만 원이 넘는 것 같더라고요.” 거듭된 단유의 요청에도 교장은 쉽게 말을 놓지 않았다. 단유에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건네며 교장은 미소를 지었다. “단유군 정도라면 과학고 같은 특목고를 목표로 하지 않나요?” “고민 중이긴 한데, 아직은 결정을 못 했어요.” “왜죠? 수학, 과학을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좋아하긴 하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흠. 아무래도 진학에 관해서는 좀 더 진지하게 상담해 줄 선생님이 필요하겠군요.” 교장은 단유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를 나름대로 이해했다. 보통 일반 가정의 경우, 학부모가 학생의 결정을 대신하거나 혹은 결정을 돕는 조언을 해 준다. 하지만 그런 부모가 없는 단유이니 정보도 없고, 선택의 조언도 듣기 어려운 환경이라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나중에 진학 상담 선생님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눠봐요. 학생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네, 그럴게요.” “그런데, 단유군.” “네?” “혹시 바둑 둘 줄 아나요?” “아니요.” “장기는요?” “못 두는데요?” “그렇군요. 아쉽네요. 지금은 어쩔 수 없지만, 나중에라도 하나 배워두면 좋을 거예요. 예전에 어떤 실학자는 자식들에게 가르치지 못하게 할 것 4가지 중 하나가 바둑이라고도 했지만, 두뇌 계발과 학습력 신장에 도움이 되기도 하거니와…사실 어른들과 대화를 하며 즐길만한 주제가 되기도 하니까요.” “참고할게요.” 교장은 웃으면서 단유를 보냈다. 단유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나선 뒤, 교장은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완연한 봄이 되어 곳곳에 봄꽃들이 피어오른 가운데 집에 가는 아이들과 남아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뒤섞인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품에서 핸드폰을 꺼낸 교장은 어디론 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 접니다. 네. 김단유군이 승낙을 했습니다. 날짜 정해주시면 맞춰서 가도록 하죠. 네. …네. 그럼요. 그럼 이제 됐나요? 고맙긴요. 처음부터 약속드렸던 거 아닙니까.” 교장은 상대의 인사를 대충 흘려 받으며 통화를 마쳤다. 이로써 벌였던 일들이 일단락되었다. 장학관을 그만두고 장계중학교로 오면서 재단에게서 부탁받았던 학교 정상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교육청 감사 해결 건과 교육부의 홍보모델 청탁은 마침표를 찍었다. 사실 단유의 홍보모델 청탁은 교육지원청에 있던 창완이 들어줄 이유가 없는 부탁이긴 했다. 하지만 같은 직급의 사무관이 찾아와서 사정을 비는 모양새에 동정이 가기도 했고, 단유라는 학생에게도 나쁘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게다가 단유와 대화를 하면서 그 학생의 자질과 품성이 성적표에 나오는 순위 이상으로 좋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라이브 방송으로는 보지 못했지만, 단유라는 아이가 실시간으로 송출되는 인터넷 방송에서 교육부의 높은 분들 심기를 어지럽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창완은 단유를 버릇없다 여기지 않았다. 버릇없다는 식으로 폄하하기 전에 그 아이가 이야기한 내용에 대해 고민을 하는 게 자신들, 어른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유는 기본적으로 약자였다. 어른에게도 약자인 중학생이고, 교육부라는 정부 기관에 비교해도 가장 힘이 없는 약자의 위치에 놓인 학생이다. 그런 학생의 외침을 단순히 버릇없네, 라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 형법에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in dubio proreo)’ 라는 말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의심스러울 때는 약자의 이익으로’ 생각하라는 말이다. 어떤 토론과 논란이 있을 때 그 사안을 약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게 중요하다. 약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진정한 시민 사회의 완성, 이라는 게 창완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뜻을 시스템화시키려고 노력한 지난 세월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사회는 강자의 목소리에 귀를 더 많이 기울이고, 단유 같은 아이들도 이 사회의 ‘계급’과 돈의 권력성을 논하는 상황이다. 세상은 점점 더 피폐해지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렇지만 창완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저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에게 그 희망을 걸어보고 싶었다. 그 희망을 전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몫이고 선생님들의 몫이며 학교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바른 학교에서 바른 교육으로 학생들이 자라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 실험을 시작해 볼 생각이며, 그래서 교장직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래도 장학관이 사립학교의 교장이 되는 것을 곱지 않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자칫 그 시선이 엉뚱한 오해를 낳고 좋지 않은 여론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런 경우를 숱하게 보았다. 그래서 창완은 당사자들, 교육부와 재단의 부탁을 하나씩 들어주었다. 그로 인해 자신의 이직이 깔끔하게 정리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지금, 그 첫 단추는 잘 꿰어진 듯했다. ======================================= [480] 커넥션(1) 단유는 명수와 함께 학교 뒤편 주차장으로 향했다. 선생님들이나 외부인들이 오면 주차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주차장인데, 한쪽에 자전거를 보관할 수 있는 보관소가 따로 만들어져 있었다. “오늘 좀 덥네.” “그러네. 불과 한 달 전이 겨울이었는데.” “봄은 어디로 갔을까?” 명수가 자전거 체인을 풀어 가방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단유는 명수의 감성에 감탄했다. “그러다 너 조만간 시 쓰겠다.” “시? 한 번 써볼까?” 명수는 히죽 웃으면서 자전거 위에 올라탔다. 한발로 땅을 디딘 채 손을 펼쳐 보이는 명수. “사라진 봄이여, 어디에 숨었느냐? 팥빙수 밑에 숨었느냐?” 과장된 연극 톤으로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명수 때문에 단유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배를 잡았다. “뭐야, 그게.” “이런 게 시 아냐? 봄이 사라져서 어디에 있을까 찾아보는 화자의 심정을 잘 나타낸 시. 맞지?” “그런데 왜 팥빙수야?” “봄이 사라지면 뭐가 오겠어? 여름이잖아? 여름 하면 팥빙수지. 그래서 팥빙수 밑에 숨었는지 보자는 거지.” “그냥 팥빙수 먹고 싶다는 이야기로 들리는데?” “먹고 갈까?” 단유는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리며 역시 자전거에 올랐다. “가자. 내가 살게.” “콜!” 명수와 단유가 동시에 땅을 박차고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자전거를 끌고 가면 지나가는 이들이 한 번씩 쳐다본다. 특히 단유의 자전거는 체인, 바퀴가 돌 때마다 마치 LED 등을 단 것처럼 하얀빛이 원을 그리는데, 밤이 아닌 낮에도 그 현란함이 눈에 띄기 때문에 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주차된 자전거 옆에 멈춰 서서 그 부분을 쳐다보다 가곤 했다. 단유와 명수가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자전거를 두고 팥빙수를 주문했을 때도 그런 일이 있었다. 단유와 명수가 가게 안에서 팥빙수를 시켜 먹고 있을 때, 어디서부터 따라왔는지 모르겠지만, 한 20대 남자가 자연스럽게 걸어와서는 단유의 자전거 앞에 섰다. 단유와 명수가 사용한 자물쇠는 U자형 자물쇠였다. 이런 일에 익숙한지 피식 웃고는 슬쩍 주변의 눈치를 본 뒤, 등에 멘 슬링백에서 절단기를 꺼냈다. “어?” 보통 이 부분을 자르면 쉽게 잘린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절단기 날이 파고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야, 이거? 새로 나온 건가?’ 혹시 모양만 비슷하고 재질이 전혀 다른 종류의 자물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주변을 빠르게 살핀 뒤, 힘을 다해 절단기를 눌렀다. 그러자 절단기가 자물쇠의 U자형 몸통을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너무 힘을 썼는지 얼굴에 피가 몰려 붓는 느낌이 들 정도였지만, 조금만 더 하면 작업을 무사히 마치고 목표물을 획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이두근이 불타오를 정도로 힘을 줘서 절단기를 눌렀는데, 절단기 날이 서로 가까워질수록 남자는 이상함을 느꼈다. 계속 파고드는데도 불구하고 잘린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다. 뭔가 싶어 힘을 풀고 절단기를 벌렸더니, ‘세상에!’ 절단기 날이 움푹 패어 있었다. ‘이게 가능해?’ 무슨 금강석을 자르는 것도 아니고, 설령 금강석이라도 그렇지 특수강으로 만들어진 절단기 날이 이렇게 상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설마 하며 자물쇠를 살피니, 약간의 흠집이 있을 뿐 전혀 손상이 없었다. “뭐 하세요?” 번뜩 놀란 얼굴로 몸을 일으킨 사내는 두 아이가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모습에 쳇, 소리를 내며 연장을 챙겨 들고 달아났다. 달아나려 했다. 단유가 두 사람 사이를 몸으로 밀치고 달려가려는 사내의 손목을 오른손으로 붙잡고, 남은 왼손으로 그의 어깻죽지를 붙잡은 뒤, 달려나가던 힘을 이용하여 당기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사내는 헛발을 짚으며 허둥대다 단유의 힘에 이끌려 비스듬하게 고꾸라졌다. 바닥에 절단기와 가방이 나뒹굴었고, 가방 속에서 자물쇠며 열쇠뭉치 따위가 쏟아져 나왔다. “단유, 너 되게 잘 써먹는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신고나 해. 현행범이니까.” “아, 그래.” 명수는 별로 놀란 기색도 없이 태연히 핸드폰으로 112를 눌렀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장계중학교 3학년 5반 인명수라고 하고요, 제 친구는 같은 반 김단유라고 하는데요. 네? 아, 저희가 자전거 도둑을 잡아서 신고하려고요.” “이거 못 놔! 놔!” 팔을 꺾어 등에 붙이고 무릎으로 그의 허리께를 눌렀더니 사내는 버둥거리기만 할 뿐 빠져나오질 못했다. 남은 팔을 휘두르려 해도 다른 쪽 팔이 워낙 심하게 꺾여 있는 상태라 휘두를 수가 없었다. “그러게 왜 남의 걸 탐내요.” “내가 뭘 했다고 그래! 안 놔, 이거?” 단유는 힐끗 시선을 돌려 자전거를 살폈다. 자전거를 대 놓을 때와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자전거였다. ‘바꿔야 하나?’ 욕심을 부린 게 너무 과했던지도 모르겠다. 그냥 평범하게 만들걸. 그나마 자전거 자물쇠를 ‘조금’ 튼튼한 재질로 바꾼 탓에 쉽게 도난당할 우려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다시 바꾸면 명수나 하은이 이상하게 쳐다보거나 혹은 엉뚱한 걸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의혹보다는 도난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괜히 ‘저런 결정체’로 한들 성능이 특별히 좋아지는 것도 아니니, 평범하게 바꾸는 게 좋겠다. 뭐든 튀는 건 좋지 않은 것 같다. **** 단유는 담임 선생님, 희선과 함께 종로구의 교육부 건물로 향했다. “반갑습니다. 홍보담당관 이제윤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장계중학교 교사 임희선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눈 뒤, 담당관의 시선이 단유에게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구나.” “네.” “네 덕분에 꽤 고생했었는데, 인사가 건조하구나? 그래도 우리, 나름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어?” 담당관이 웃음을 흘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희선이야 방송 정도로만 봤으니 모르겠지만, 단유는 담당관과 따로 자리를 가져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옆에는 2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한 상태였었고. “그때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진심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뭐 어쨌든 이렇게 함께하게 되었으니 잘해보자고.” “네.” “그럼 선생님, 같이 가실까요?” 담당관은 두 사람을 데리고 회의실로 향했다. “일단 저희가 이번에 찍을 내용은 올해부터 반영될 새 교육 정책에 대한 것입니다. 홍보 동영상과 광고용 시안 몇 개를 찍을 거고요. 동영상은 드라마 타이즈 형식으로도 찍을 예정입니다.” 과거와 같은 딱딱한 정책 홍보 문구만 잔뜩 들어간 것이 아니라, 보는 이들이 재미있게 볼 수 있도록 스토리가 있는 광고 영상을 찍겠다는 이야기였다. “작년에 기획되었고 올해 2월부터 준비되어서 이제 바로 찍기만 하면 되는데, 김단유 학생 혼자만 나오는 것은 아니고 유명 연예인도 함께 참여할 예정이에요. 그분이 주인공이고 단유 학생은 주인공 친구, 이렇게 나올 거예요. ‘똑똑하지만 엉뚱한 면이 있는’ 친구니까 학생과도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요.” 희선은 정확히 어울리는 배역이라고 생각했고, 단유는 ‘왜 잘 어울릴까’라고 고민했다. “몇 편의 동영상은 각각의 주제에 맞게 스토리가 짜여 있고요, 각각의 주제들은 학교 내의 공간에서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창의적 인재상 발굴’이란 주제에서는 ‘교실’이란 공간에서 두 친구가 상상하면서 펼치는 대전 형식의 씬이 구성되고요, ‘더 나은 미래’라는 주제는 강당에서 학교로 공간을 옮기면서 대화를 나누는 씬이 구성됩니다.” 희선은 그게 뭐, 라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새로울 것도 없는 평범한 장면처럼 보였다. 그런 희선의 표정에서 심드렁함을 느낀 담당관은 자신 넘치는 눈빛을 빛내며 웃음을 지었다. “별거 없는 것 같죠? 그런데 저도 대본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말씀드렸다시피 드라마타이즈라서 스토리가 중요하거든요. 평범한 공간에서 기발한 상상과 대화를 통해 주제를 전달한다, 는 게 작가의 설명이었어요.” 그렇게 설명해도 특별할 건 없었다. 사실 그런 형식의 광고들은 워낙 많았고, 과거에도 넘쳐나듯 했으니까. 당장 떠올릴 수 있었던 건 일본의 음료수 광고뿐이었지만. “상대는 누군가요? 유명한 사람인가요?” 희선은 오히려 그게 더 궁금했다. 담당관은 대답을 하려다 역시 아무런 감흥이 없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단유에게 시선을 돌렸다. “넌 안 궁금해?” 단유는 볼을 긁적였다. “별로요.” “왜? 혹시 같이하고 싶다거나 만나보고 싶다거나 그런 사람 없어?” “네.” 단호한 단유의 대답에 담당관은 할 말을 잃었다. “여전히 재미없구나, 너.” 개그맨도 아니고 개그 지망생도 아닌데, 굳이 재미를 찾을 이유가 있나? 단유는 그저 얌전하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유명 아이돌이라고 그러던데요.” 희선에게 대답해준 담당관의 말이었다. **** “바른 인성교육이 대한민국을 이끈다. 좋은 말이네.” 좋은 말이긴 한데, 그걸 대사로 하려면 낯간지럽기 이를 데가 없다. 듣기로는 재미있는 드라마 형식의 광고를 찍는다고 들었는데, 이런 대사가 들어가는데 재미있을까? “자, 우리 같이 달릴까? 와, 이런 대사도 있어. 소름.” 매니저의 유난스러운 호들갑에 닭살이 돋았다. “그만 해요.” “대본 봤니?” “봤으니까 그만 해요.” “첫 연기인데 열심히 해야지? 혹시 아니? 이 기회로 드라마 쪽으로 진출하게 될지?” “저 놀리는 거죠?” “놀리긴 누굴 놀려? 우리 귀염둥이를 누가 놀려? 니가 놀렸어?” 스타일리스트가 화들짝 놀라, 는 시늉을 하며 매니저와 호흡을 맞춘다. “아니요? 제가 귀염둥이를 왜 놀려요? 이렇게 귀여운 애를?” “아, 진짜!” “야, 그럼 니가 놀렸어?” 이번엔 운전대를 잡은 로드매니저에게로 방향이 돌아갔다. 운전석 룸미러를 통해 눈웃음을 짓고 있는 로드 매니저의 모습이 보인다. “아니요. 제가 감히 어떻게 놀려요.” “그럼 누가 놀렸다는 거니? 감히 말이야. 응? 걱정하지 마. 만약에 누가 너 놀리면 나한테 말해. 내가 혼쭐을 내줄 테니까.” “아이 씨.” “어이구, 우리 귀염둥이, 삐졌어요? 우쭈쭈.” 차 안에서 웃음 폭탄이 터지면서 웃음소리가 차를 들썩거리게 하였다. 오직 한 사람만이 삐진 척, 볼을 부풀리며 스태프들을 돌아보았다. “나빴어.” “알았어, 알았어. 이제 안 할게. 네가 너무 굳어 있으니까 풀어주려고 그런 거지.” “그래도 그러지 마요. 나 진짜 삐질 거예요.” 스키니 청바지에 노란색 밴딩 형 오프숄더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 아이, 도연이 팔짱을 끼고 매니저를 흘겨보았다. 3인조 걸그룹 리본소녀의 막내인 도연은 이제 17살이 된 소녀였다. 작년 가을께에 데뷔한 리본소녀는 중형 기획사 소속의 걸그룹이지만 대형 기획사 못지않게 인기몰이를 하는 중이었다. 첫 발표곡이 워낙 좋게 ‘빠진’ 탓에 대박을 터뜨리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대형 신인으로 주목받고 있었다. 게다가 멤버들이 모두 개성이 넘치고 에너지가 밝아서 다양한 세대, 다양한 취향의 사람들이 리본소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아직은 비공식이지만 팬클럽의 숫자도 날이 갈수록 빠르게 늘어나는 중이었다. 하지만 신인은 신인이다. 개별적으로, 혹은 팀으로 이름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방송과 예능 활동, 행사 등을 소화하느라 바쁜 일정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도연에게 ‘교육부 정책 홍보모델’ 일이 들어온 것이다. 정확히는 ‘리본 소녀’에게 들어온 것이지만, 일정상 동영상 촬영은 도연만 찍게 되었다. 홍보 사진용 촬영 때는 다른 멤버들도 오겠지만 말이다. “혼자라서 조금 떨리긴 해도, 굳어 있진 않았어요.” 도연의 대답에 매니저는 코웃음을 쳤다. “그게 굳은 거야. 정 못 믿겠으면 거울을 봐. 네 표정이 어떤가.” 손에 들고 있던 거울로 보니, 굳은 표정을 살피기 전에 오른쪽 눈 아래로 화장이 뭉쳐 있는 게 보였다. 콧등에도 땀이 났었던 건지 번질번질한 것 같고. “언니, 나 눈 새로 해야 할 거 같지 않아요?” “도착하면 새로 해줄게.” 스타일리스트의 웃음소리를 흘려 들으며 도연은 거울 속의 자신에게로 빠져들었다. ======================================= [481] 커넥션(2) 주차장에서 화장을 고치고 올라온 도연은 매니저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너무 긴장하지 마.” 말이 없는 도연을 향해 매니저가 다시 충고했다. “데뷔하고 처음이지? 혼자 스케줄 뛰는 거.” “그렇긴 한데요. 별로 긴장은 안 했어요.” 약한 소리는 하고 싶지 않았다. 비록 언니들과 함께 있을 때는 어리광도 부리고 애교도 피우는 포지션이지만, 혼자 있을 때는 의젓하게 보이려 노력했다. 자신의 사소한 행동과 말이 그룹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기 때문이고, 부모님께도 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연은 다른 친구들과 달리 부모님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데뷔를 했다. 부모님은 도연이 연예인 같은 것보다는 공부를 계속하길 바랐다. “머리도 좋은 애가 왜 그런 걸 하려고 그래? 연예인이 보기에나 좋지, 실상은 얼마나 힘든지 아니?” 도연이 연예인을 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어머니는 그렇게 반대하셨고, 아버지는 문을 닫고 안방에 들어가 한참을 나오지 않으셨다. 시쳇말로 ‘딸바보’라고 불러도 허허, 웃고 넘길 아버지였지만 연예인이 되고 싶다는 딸의 선언에는 쉽게 허락을 하시지 않았다. “이 아빠는 네가 연예인이 되는 게 달갑지 않구나.” “꼭 성공할게요.” “설령 성공한다 해도 아버지는 반대다.” “제 꿈이에요.” “딸이 힘든 길을 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근거도 없이 반대만 하시는 거예요.” “아빠도 나름 알 만큼 알아봤다. 반짝 성공에 취해서 인생 망치는 경우도 있었고, 그마저도 못해 젊음을 낭비하는 이들도 있었다. 게다가 오래도록 나이가 들어서도 승승장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짧은 시간에 불타올랐다가 식어버리는 삶을 딸에게 추천할 수 없다.” 딸은 울었고, 아버지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학교 성적이 떨어지면 그대로 끝이다.” 아버지는 조건부 승낙을 했다. ‘리본소녀’가 나름 인지도를 올리고 바쁜 활동을 벌이는 와중에도 도연이 개인 활동을 하지 못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작년 연말에 많은 행사가 들어오는 와중에도 도연은 기말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고민은 쌓인다. 중학교야 어떻게 성적을 거둘 수 있었지만, 고등학교는 다르지 않겠는가. 이런 상황은 사실 팬들에게도 알려진 사실이었다. 「도연이는 오늘도 안 나옴?」 「방송 무대만 하고 다른 행사는 같이 안 하나?」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냐?」 「도연이 기말시험 준비 중-오피셜」 「기말시험? 중학교 기말시험?」 「오피셜은 뭔데? 관계자임?」 「나 도연이랑 같은 반.」 「오오!」 「도연님이랑 같은 급식? 부럽!!」 「도연이 공부 잘함?」 「도연이 부모님이 공부 못하면 연예인 못하게 했다고 하던데 트루임?」 「나도 들었다. 성적 떨어지면 머리 삭발시키고 연예인 못하게 했다고 들었다.」 「에이, 설마. 지금 리본소녀 정도면 돈 많이 벌지 않나?」 「이제 겨우 데뷔 1년 차라 정산도 못 받는데 무슨 돈이냐?」 「정산받으면 많이 벌지 않을까?」 「분기마다 히트곡을 만들어내도 정산받는데 3년 넘게 걸린다. 어떤 그룹은 5년이 지나도 정산 못 받았다더라.」 「그런 비교가 뭐 필요하냐? 도연아, 무럭무럭 자라만 다오.」 「내꺼티브 반대.」 어쨌든 도연에게는 공부와 연예계 활동을 병행하는 모범생 이미지가 생겼고, 귀여운 외모와 방송 노출도가 적은 희귀성이 팬들의 집중도를 높였다. 그런 이미지가 이번 교육부 홍보모델 선정에 도움이 된 면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여기 리본소녀 도연이고요.” “안녕하세요! 리본소녀 막내 도연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저는 매니저 윤제순입니다.” 매니저의 명함을 받으며 담당관도 마주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여기로 오시죠.” 담당관의 안내에 매니저와 도연이 뒤를 따라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단유를 만나게 되었다. **** “오늘은 일정 끝났어요?” “그래, 일단은 끝났어.” “다행이다.” 4월 말에 있을 첫 중간고사를 대비하여 공부할 시간이 필요한 도연이었다. 비록 활동 때문에 수업을 다 듣지는 못하지만, 교과서와 문제집을 들고 다니면서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차에서도 틈틈이 책을 붙들고 있지만, 피곤하기도 할뿐더러 차에서 책을 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같이 출연하기로 한 애 어땠어?” 차에서 기다리던 스타일리스트가 궁금해했다. “남학생이라고 들었는데, 잘 생겼어?” 스타일리스트의 물음에 수첩을 뒤적이며 일정을 확인하던 매니저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게 뭐가 중요해?” “중요하죠. 같이 광고 찍는다면서요? 이왕이면 잘 생긴 사람이랑 같이 해야 기분도 살죠.” “기분으로 일하니? 프로답지 못하게.” “에이, 도연이가 그런 거 하나 구분 못 할까 봐 그래요? 지금도 봐요. 책부터 붙잡고 있잖아요. 그리고 이왕에 하는 거 기분 좋게 촬영하는 게 좋죠. 도연아, 어때? 성격은 좋아 보이디?” “얘보다 어리다.” 매 질문마다 끼어드는 매니저에게 눈을 흘기던 스타일리스트가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왜 그렇게 까칠해요? 무슨 일 있었어요?” “무슨 일은. 일정이 빡빡해서 그래. 도연이는 회사에 내려주고 우리는 양평 가야 돼. 시간 맞춰서 갈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양평이요?” “넌 안 가도 돼. 나랑 희준이만 가면 돼.” 양평에서 펼쳐지는 행사의 주최 측과 협의를 하기 위해 가야 하는 매니저였다. “매니저 오빠, 바쁘면 저 여기서 언니랑 따로 들어갈게요.” “응? 아냐, 그 정도까지는. 너 데려다주고 가도 돼.” “왜요? 여기서 양평까지면 꽤 멀잖아요? 그냥 가세요. 언니랑 택시 타고 가도 돼요. 회사까지 별로 멀지도 않은데.” “그럴까?” “야, 너네 짐은 어쩌고? 옷이랑 신발도 다 회사에 가져가야 돼.” “그건 내일 가져와도 돼요. 협찬받은 것도 없어서 당장 급할 것도 없어요.” 스타일리스트는 벌써 모자를 꺼내서 도연이 머리 위에서 푹 눌러 씌었다. “형님, 괜찮을까요?” 로드매니저 희준이 옆에 탄 매니저를 보며 물었다. 아직 주차장을 나서기 전이다. 만약 양평으로 바로 간다면 방향이 반대쪽이니 지금 결정을 해야 했다. “야, 그냥 회사 가. 아무리 그래도 얘한테 애를 맡길 수가 있어?” “아니, 제가 뭐 어때서요? 제가 얘를 잡아먹는데요?” 스타일리스트가 앞 좌석 쪽으로 머리를 들이밀며 물었다. “잡아먹을 것 같으니까 그래.” 그때 도연이 가방에 책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저 내릴게요.” “도연아!” “진짜 괜찮아요. 모자 쓰면 못 알아봐요.” 스타일리스트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도연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쩜, 우리 도연이는 이렇게 마음씨도 예쁠까?” “언니, 우리 빨리 내려요. 매니저 오빠 결정 장애 일으키기 전에.” “그럴까?” 가방을 둘러맨 도연은 다시 한번 모자를 고쳐 쓰고 밴의 문을 열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희준이 작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매니저는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스타일리스트에게 당부했다. “도경아, 애 데리고 엉뚱한 데 들르지 말고 바로 회사로 가야 한다?” “알았어요. 걱정 붙들어 매세요. 아, 안전벨트도 꼭 매시고.” 차가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하고, 그 뒤를 도연과 스타일리스트가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룸미러로 그 모습을 보던 희준이 매니저에게 물었다. “형님, 진짜 괜찮아요?” 창틀에 팔을 걸치고 턱을 괴고 있던 매니저는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을 리가 있나.” “예?” “가끔은 저렇게 풀어주기도 해야지.” 희준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회전 깜빡이가 꺼질 때쯤, 매니저가 말을 이었다. “난 도연이 쟤가 참 걱정이야.” “왜요?” “일이랑 공부를 같이 하는 게 어디 쉽겠냐? 지금 받는 보컬이랑 안무 레슨만 해도 하루의 반이 다 지나갈 판인데, 그 와중에 또 공부하겠다고 저러고 있잖아? 내가 여러 애들 만나봤지만, 저렇게 사서 고생하는 애들은 처음 봤어.” 그럼 걱정을 할 게 아니라 칭찬을 해야 할 게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체력과 정신력이 받쳐주겠냐 이거야. 몸이 힘들고 마음이 지치면 쓰러지기 마련이잖냐? 그래서 도연이 보면 아슬아슬해 죽겠어.” 포텐은 참 많은 아인데. 매니저는 씁쓸한 맛에 혀를 찼다. “그건 그래요. 그냥 하나만 해도 충분할 거 같은데.” 희준의 ‘하나’는 당연히 연예 활동이다. 누구는 기회를 잡지 못해 몇 년씩 연습생으로 시간을 보내는 마당인데 누구는 저렇게 이른 나이에 연예계 데뷔를 했고 가시적인 성과도 거뒀다. 앞으로 조금만 더 이 기세를 이어나가면 돈 버는 건 일도 아니다. 아마 20대 초반에 건물 하나 사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일반인이 평생 돈을 모아도 자기 집이나 겨우 살 정도면 다행이란 소리를 듣는 세상인데, 매달 월세 받으며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애가 마음이 여려. 싫은 소리 잘 못 하기도 하지만, 부모님을 어찌나 생각하는지…. 그때 도연이 아버님이 회사에 왔을 때 너 있었어?” “아뇨, 그냥 이야기만 전해 들었죠.” “단호하게 ‘우리 딸 성적 떨어지면 활동 접기로 약속했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옆에서 도연이가 그러겠노라고 순순히 대답하더라. 다른 아이들 같았으면 기회를 달라거나, 시간이 필요하다거나 하면서 저항이라도 할 법한데 말이야. 결국 대표님도 손을 들 수밖에.” “…그런데 그게 지금 상황이랑 무슨 상관이 있어요?” 매니저는 운전 중인 희준을 힐끗 바라보며 ‘눈치 없는 놈’이라고 한 소리를 했다. “쟤들이 지금 바로 회사를 가겠니?” “네? 그럼요?” “도연이가 말려도 도경이 저 녀석이 도연이 꼬셔서 놀러 갈 거다.” “예? 그럼 말려야지 왜 그냥 두셨어요?” “말했잖아. 도연이도 좀 쉴 필요가 있다고. 그리고 도경이도 그렇게 생각 없이 노는 애는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디 자신의 예상보다 좀 더 생각이 깊은 도경이길 바랐다. “어디 갈래?” “…회사 가야죠?” “어머, 얘? 능청스럽긴? 지도 생각이 있으니까 내린 거면서.” 그 말에 도연은 얼굴을 붉히더니 수줍게 입을 열었다. “그럼요, 우리 햄버거 먹으러 갈까요?” “햄버거?” 걸그룹 아이들에게 식욕은 영원한 숙제다. 특히나 한참 자라날 아이인 그들에게 다이어트라는 숙명은 만악의 근원쯤으로 치부될 정도다. “햄버거 못 먹은 지 진짜 오래됐거든요.” 생각해보면 데뷔 후에는 한 번도 먹은 적이 없던 음식이기도 했다. “그래, 소원이라는데 먹으러 가자.” “소원까지는 아닌데.” “일단 먹고 또 생각하자. 아이고, 오늘 보니까 차가 많이 막히겠네. 회사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어.” 원래 광화문 광장 앞 도로는 번잡하다. 하지만 차가 막혀서 기어 다닐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뻔뻔하게 걱정을 늘어놓는 도경에게 풋, 웃음을 터뜨리며 팔짱을 끼는 도연이었다. “가요, 언니.” 도경은 도연이 쓴 모자의 챙을 꾹 누르며 대답했다. “그래.” 두 사람은 햄버거를 먹고, 광화문 지하통로를 거쳐 청계천 쪽으로 향했다. “사람이 많은데, 괜찮아?” “괜찮아요. 아까 가게 안에서도 못 알아봤잖아요?” “너 더 열심히 해야겠다?” “그래야 할 거 같네요.” 도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청계천에는 여러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가벼운 운동복 차림의 커플도 있었고, 지방에서 왔는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걷는 중년 부부도 있었다. 등산복 차림을 한 노부부도 있었고, 친구끼리 왔는지 수다를 떨며 웃음을 터뜨리는 젊은 사람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리본소녀 도연이가 얘예요, 라고 하면 과연 몇 사람이나 아는 척을 할까?” “아이, 참. 그러지 마요.” 모처럼 책과 일에서 벗어나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 지금이 너무 좋았다. 편안한 표정의 도연을 보며 도경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많이 힘들지?” “다들 저만 보면 그러네요. 힘드냐고. 뭐, 안 힘들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좋아서 하는 건데요. 힘들어도 참을 수 있어요.” “널 보면 괜히 내가 마음이 찔려. 난 공부가 그렇게 하기 싫었는데 말이야. 너처럼 그때 열심히 했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드네.” 도연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 후회를 하지 않으려는 생각도 있다. 하지만 굳이 공부를 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다. 하기 싫은 순간은 있어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보다 해야 할 이유가 더 크기 때문에 손을 놓을 수 없었다. “내가 나름 이 바닥에 오래 있었거든? 그래서 대충 보면 안다고. 누가 뜰지, 말지 말이야.” “저도요?” “응. 넌 분명 성공할 거야.” 독한 사람이 성공한다. 도연이는 독한 사람이다. 그러니 성공할 거다. ======================================= [482] 커넥션(3) “저희는 다음 일정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아, 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네, 다음에 뵐게요.” 여자 아이돌의 매니저와 희선이 로비에서 서로 마주 보고 허리를 숙였다. 따라왔던 아이돌 역시 희선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시간 단유는 희선이 아닌 홍보담당관과 함께 있었다. 담당관은 단유를 따로 불러서 다음 일정 때는 촬영을 담당할 감독이 함께 나올 예정인데, 라고 말을 꺼냈다. “전문 배우가 아니다 보니 그 전에 미리 카메라 테스트를 하고 싶다고 하시거든?” 담당관은 일부러 상대가 없을 때 이야기를 꺼내 단유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해주려는 배려를 보여주었다. 단유는 그 배려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이틀 뒤 토요일 오후에 여기로 갈 수 있겠니?” 담당관이 건넨 명함은 어떤 스튜디오의 명함이었다. “가서 테스트만 받으면 되나요?” “별다른 건 없고, 미리 어떤 부분이 필요하고 연습해야 하는지를 알려줄 거야.” 단유는 고개를 돌려 주위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자리를 떠나는 아이돌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함께 따라간 담당관이 말을 이었다. “저 아이는 자기 회사에서 따로 연습을 시킬 모양이다만, 넌 그런 게 없잖니?” “네, 그럼 토요일에 가볼게요.” “그래. 그럼 다음 주 수요일에 다시 보자꾸나.” “수고 많으셨습니다.” “너도.” 담당관은 단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단유가 다시 희선에게로 향할 때, 아이돌과 매니저는 로비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매니저가 앞장설 때, 아이돌이 슬쩍 주위를 둘러보다 단유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돌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형식으로 인사를 보냈고, 단유도 그에 맞춰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우리도 가자.” “네.” 핸드백을 고쳐 잡으며 먼저 앞장서 걸어가던 희선이 물었다. “뭐라고 하시든?” “아, 카메라 테스트 때문에 토요일에 와달라고요.” “너만?” “네.” “하긴.” 어떤 이유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희선은 나름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건물을 빠져나갔다. “너 혼자 오라든?” “딱히 그런 이야기는 없었지만, 저 혼자 가도 될 것 같은데요?” 단유의 덤덤한 대답을 들으며 희선은 단유가 ‘고아’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교육부 홍보모델이 된다는 것이 물론 별거 아니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남자 중학생이 예쁜 여자 아이돌과 광고를 찍는다는 게 아무런 감흥이 없을 일일까? 물론 선생님이 있으니까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저렇게 시종일관 태연한 자세로 있다는 게 희선의 기준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카메라 테스트까지 받으러 오라는 주문을 받았다. 만약 보통의 아이들이라면 초조하거나 불안해하거나 혹은 긴장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선입견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선입견이다. 그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래도 ‘혼자’ 무엇을 한다는 것에 익숙해 보이는 단유를 보니 소년의 출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념에 빠져 걸음이 느려진 탓에 단유가 길을 걷다 돌아보았다. 뒤늦게 단유의 시선을 알아채고 희선은 걸음을 서둘렀다. “가자.” “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세종로 사거리로 향하던 희선은 길 건너편의 패스트푸드점이 보였다. “단유야.” “네?” “뭐 좀 먹을래?” 희선이 손가락을 가리켜 보였다. “선생님이 사줄게.” 단유는 희선의 손가락과 눈을 번갈아 보다가 흐린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희선은 마치 자신의 속이 너무 훤하게 드러났던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괜히 얼굴에 피가 쏠리는 기분이 드는 와중에 단유가 말을 이었다. “저기, 괜찮으시면 저 여기 서점에 잠시 들렀다 가도 될까요?” “서점에?” “이왕에 온 김에 책 좀 보다가 가고 싶어서요.” “그, 그럴래?” 어쩐지 단유답다고 생각하면서, 기왕이면 햄버거 따위를 사주는 것보다 책 한 권을 사주는 게 선생님으로서 더 위신이 서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단유가 말하기 전에 미리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예. 집에는 제가 알아서 갈게요.” “…….” 아마 먼저 가라는 뜻인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순간적으로 갈등 했다. ‘희선아. 너 담임이야. 학생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선생님이라고.’ 그렇다. 그런 의무가 있다. ‘단유가 어린애니? 여기서 길 못 찾고 미아라도 될까 봐?’ 길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갈 아이지. ‘학생이 집에 들어가는 것까지는 봐줘야 나중에라도 문제가 없지 않겠어?’ 만약, 혹시 만약에 단유에게 문제가 생기면 교장 선생님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눈치 없이 굴래? 너 먼저 가란 소리잖아? 감시하는 것처럼 느끼면 어쩔래?’ 논리는 빈약한데 감정적으로는 많이 흔들린다. 단유니까 그러지는 않겠지만, 혹시라도 단유가 반 아이들에게 이야기한다거나 하면 여간 곤란한 게 아니다. 요즘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인데, 단톡방이고 SNS고 소문이 나면 이상한 선생님으로 낙인찍힐지도 모르겠다. ‘단유가 불량한 성격도 아니고, 설마 일탈을 하겠어?’ “그럼, 서점에서 책만 보고 집에 갈 거니?” “네.” 언질은 받아놔야 마음이 편하리라. “알았어. 그럼 보고 조심해서 들어가도록 해.” “네, 선생님.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일 보자. 늦지 말고.” “네.” 단유는 지하철 입구에서 희선과 헤어졌다. 단유가 먼저 서점으로 들어가는 걸 보며 약간 착잡한 기분을 느끼던 희선도 돌아섰다. 이왕에 나온 김에 이 근처에서 일하는 친구나 만나고 들어가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여보세요? 어, 나 희선이. 너 퇴근했니? 아, 나 지금 광화문 근처에 왔다가 시간 되면 너 보고 가려고. 응? 야, 한가하긴 뭐가 한가해? 나도 일 때문에 나온 거거든? 됐어, 나 그냥 갈래.…10분 뒤? 그럼 너네 회사 앞에 가서 기다릴까? 로비에? 알았어. 그럼 거기서 봐.” 진흙탕 거리를 지나듯 걷던 걸음이 징검다리 건너는 걸음으로 바뀌며 희선의 얼굴도 한결 가벼워졌다. 서점에 들어간 단유는 평일임에도 사람으로 가득 찬 서점을 보며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사람 이상으로 가득한 책을 보니 마치 보물찾기를 하기 위해 시작 선에 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맞다.’ 단유는 혹시나 해서 전문서적 코너로 향했다. 며칠 전에 자신이 제일 처음 번역했던 책이 발간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단유는 자신의 이름이 ‘역자’로 박힌 책을 찾게 되었다. [옮긴이 김단유는 최연소 번역 1급 자격증을 취득한 번역 전문가로서 <지리의 발견>을 번역했으며, 현재 <디 옵티컬> 외 2종의 서적들을 번역 중이다.] ‘뭐야, 이게?’ 단유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이 짧은 문장을 만들기 위해 고심했을 편집부를 마음으로 위로했다. 솔직히 ‘이제 중학교 3학년이 된 학생이며, 이 책이 첫 작품이에요’ 라고 쓸 수는 없지 않겠는가. 책의 가장 앞머리에 저자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편집부의 기획 의도 등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어서, 가장 페이지 한끝에 조그맣게 실린 역자에 관한 내용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어렵게 배치를 해 놓았다. 차라리 역자에 대한 소개가 없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부분은 출판사 나름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것까지 가늠해 볼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단유는 책을 집어 든 뒤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집에도 같은 책이 한 부 있지만, 그래도 서점에서 사는 것과는 또 다르지 않겠는가. ‘선물로 줘도 되겠지.’ 단유는 흐뭇한 마음으로 서점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 청계천 길을 따라 소소한 잡담을 나누며 걸었던 도연과 도경 두 사람은 종로 5가쯤에서 큰길로 나왔다. “택시!” 도경이 나름 택시를 잡아보려 했지만, 퇴근 시간이 맞물리고 있던 틈이라 쉽게 택시가 잡히지를 않았다. 특히 동대문 쪽에서 나오는 택시들은 이미 손님들을 태우고 바쁘게 달리는 중이라 잡히질 않았고, 대학로 부근에서도 손님들을 태운 채로 오는 택시들뿐이라 도경의 부름에 반응하는 택시 따위는 없었다. “콜택시 불러야겠네.” 차라리 진작 불렀으면 이렇게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을 건데. ―10분에서 15분 정도 기다리셔야 합니다, 손님. “그렇게 오래 기다려요?” ―네, 지금 주변에 빈 택시가 없어서요. 그래도 근처에 빈 택시가 생기면 바로 가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손님. “알았어요.”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도경이 혀를 찼다. “그 많은 택시들이 다 어디 갔단 말인지 모르겠네.”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면서요. 그냥 기다려요.” 모자 아래로 미소 짓는 도연을 보며 도경은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저기 빵집 있다. 빵 먹을래?” “아뇨. 괜찮아요. 빵까지 먹으면 진짜 큰일 날 거 같아요.” 먹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지금 회사로 가서 레슨을 준비해야 하는데 배가 가득하면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다. 햄버거를 먹고 나서 긴 청계천 거리를 걸은 이유도 바로 그런 까닭이었고. 도경이 미안해한다는 걸 느꼈는지, 도연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요, 언니. 언니 덕분에 정말 모처럼 스트레스도 풀었는걸요.” “오늘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지.” “그러니까요.” 길에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경은 도연을 데리고 길 안쪽의 상점 옆 벽에 붙었다. 마침 도연이 수수하게 옷을 입었기에 망정이지, 행사용 복장을 입었다면 정말 큰일 났을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새벽까지 레슨 하니?” “네. 아마 2시까지는 할 거 같은데요.” “어휴. 그렇게 레슨하고 내일 또 학교 가고?” “그래도 전 오전 수업만 하잖아요. 차에서도 자면 되니까 괜찮아요.” 말은 저렇게 해도, 차에서 잠을 청하긴커녕 단어장을 꺼내 드는 도연이었다. “만약에 말이야. 너 이대로 대박 나서 완전히 성공하잖아? 소녀시대처럼? 그러면 너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다니요?” “계속 공부할 거냐고?” “계속해야죠.” “아빠랑 한 약속이라서?” “그것도 있고요. 고등학교까지는 계속 공부하고 싶긴 해요.” “왜?” “최소한 그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해서요.” “최소한?” “상식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아서요.” 자신이 모자란 것은 괜찮지만, 그런 이유로 부모님까지 들먹이게 될까 봐 두려운 도연이었다. “그럼 연예인 말고 다른 직업은 생각 안 하고?” 조금 민감한 질문이긴 했지만, 도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금은 그래요. 가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어릴 때부터 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당장 다른 직업은 생각나지 않기도 하고요.” 도경은 도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빠르게 달릴 뿐인 자동차들이었다. 가끔 빨간 불에 걸려 멈춰 설 때 외에는 속도를 줄일 생각이 없는 자동차들. 거친 엔진음에 섞인 매연 때문에 코가 매워진다. “그래도 넌 조금 낫다. 내가 아는 어떤 아이돌 멤버는 오로지 가수만 보고 달렸거든? 학교생활도 거의 포기하고 연습에만 매달리다가 데뷔를 했어. 그런데 계속 성공을 거두지 못하니까 회사에서도 결국 포기를 한 거야. 끝내 방출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이 아이는 노래 부르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는 거야. 새로 시작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도 몰라. 그래서 방황을 거듭하면서 망가지기 시작한 거지.” “그래서요?” “뭐, 다행히 지인의 도움을 받아서 플로리스트를 하게 되었다고는 하는데, 뭐 젊은 호시절 다 보내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직업이라 행복할 수야 있겠니? 알코올 중독…아이고, 내가 무슨 소리람. 미안하다, 몹쓸 소릴 했어.” “아녜요. 그 정도 경각심은 가지고 살아야죠. 우리 아빠 말대로 상위 1%만 성공하는 세계잖아요.” “그래서 하다가 안 되면 일찍 포기하게?” 그것도 답이다, 라는 도경의 말에 도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때 가봐야 알 일이죠. 아직은 저도 어리니까요. 도전할 시간은 있다고 봐요. 그리고 언니가 말한 그 사람처럼 뒤늦게 다른 직업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 와도 후회는 안 하려고요. 조금 뒤늦게 가면 어때요. 제가 즐거워서 하는 일인데.” 좋게 보면 긍정적인 사고이고 나쁘게 보면 그저 철없는 아이의 짧은 판단이겠다. 아직 겪질 못해서 모르는 것일 수도 있고. “그래도요, 전 저를 망가뜨리는 일은 없도록 할 거예요.” 부모님이 절 얼마나 귀하게 키워주셨는데요, 라고 덧붙이며 혀를 빼무는, 아직은 귀엽기만 한 도연이었다. ======================================= [483] 커넥션(4) “너 요즘 너무 바쁜 거 아냐?” 명수는 신발을 신으며 외출준비를 하는 단유를 보며 물었다. “바쁘긴.” “학교에서도 보니까 쉬는 시간에도 책만 읽고, 집에서는 키보드나 두드리고, 잠깐 쉬나 싶으면 이렇게 또 나가고. 도대체 언제 쉬는데?” “알아서 잘 쉬고 있어.” “작년에도 이랬냐? 같은 반이 아니라서 몰랐던 건가?” 하긴 번역 일을 하면서 바빠진 건 사실이었다. 책을 읽고 공부하는 거야 머리로만 하는 일이고 쉬었다 하든 몰아서 하든 상관이 없다. 하지만 번역 일은 마감 기한이 있고 키보드를 두드려서 완성 시켜야 하는 물리적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쉴 틈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타이핑 속도가 빨라지면 더 여유가 생기겠지만, 아직까지는 부지런히 키보드를 두드려야 한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야 편하지.’ 원서를 읽는데 어려움이 덜하고, 하면 할수록 숙달이 되면서 번역이 어려운 단어들, 전문 용어들도 눈에 익기 시작해서 시간이 단축되는 마당이다. 용돈 벌이 이상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고. “갔다 올게.” “나도 좀 있다 나갈 거야.” 명수는 축구부 때문에 학교에 갈 예정이라고 했다. 봄 대회가 며칠 뒤인데, 그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몸조심하고.” “당연하지. 이제는 잘 안 다쳐.” “그렇게 방심하다 한순간에 훅 간다.” “걱정 그만하고 너나 차 조심해.” “그래.” 단유는 손을 가볍게 젓고 집을 나섰다. 스튜디오는 홍대 근처에 있었다. 처음 이곳에 온 단유는 복잡한 골목과 많은 사람 때문에 길을 찾는 게 여간 쉽지 않다고 느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살피는 와중이었다. “어이, 학생?” “네?” “학생 맞죠?” “네.” “혹시 연예인 해 볼 생각 없어요?” “없는데요.” “몸이 좋은데, 모델 같은 것도 생각 없어요?” 지금 그 모델 일 때문에 스튜디오를 가는 중이지만 그걸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네. 괜찮아요.” “나 이상한 사람 아니고, 여기서 나왔는데, 혹시 생각나면 전화 줘요. 우리 회사는 항상 열려있거든?” 요즘도 이런 길거리 캐스팅을 하나 싶었다. 듣기로는 인터넷에서 회사 오디션을 공지하고 매주 오디션을 보기 때문에 이런 캐스팅 방식은 하지 않는다고 나윤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소형 기획사나 신생 기획사의 경우에는 아직도 이런 길거리 캐스팅을 시도했다. 요즘 연예인 지망생들도 눈이 높아서 아무 회사에서나 오디션을 보지 않고, 대형 기획사 위주로 혹은 중형 기획사지만 네임밸류가 있는 회사 위주로 오디션을 신청한다. 그러니 소형 또는 신생 기획사는 발로 뛰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잘 안 하는 게, 워낙에 실용음악학원이나 댄스학원 등이 많아진 상황이다. 학원에서 기획사로, 혹은 기획사에서 학원 측에 오디션 제의를 넣거나 문의하는 터라 A&R(Artist and Repertoire) 직원들이 밖으로 돌아다닐 이유가 적어진 요즘이었다. 그러나 단유와는 상관없는 이야기. 면전에서 매몰차게 구는 법은 배우지 못한지라 단유는 남자가 건넨 명함을 받아들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 단유의 뒷모습을 보던 남자는 다시 고개를 돌려 괜찮은 마스크의 인물이 있는지 살폈다. 마침내 찾은 스튜디오는 하얀 벽돌 외장에 2층으로 된 건물이었다. 건물 앞의 간판을 통해 본인이 찾던 장소임을 확인한 단유가 입구를 바라볼 즈음에 건물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자 한 명이 멀뚱한 표정으로 단유를 바라보다 물었다. “무슨 일이니?” 단유는 교육부 홍보담당관이 가보라고 해서 왔다고 용건을 말했다. “아, 너구나.” 담배를 바닥에 떨구고 발을 비벼 끈 남자는 단유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감독님. 배우 왔는데요.” “배우?” 남자는 단유를 힐끗 돌아보며 물었다. “배우 맞지?” “아닌데요.” “아냐?” “그냥 출연만 할 뿐이지, 학생이에요.” “뭐야, 그게. 그럼 배우지. 배우 맞대요.” 사무실 안쪽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모양인지, 자리에서 일어선 감독의 맞은편엔 누군가의 등이 보였다. 감독은 문을 열고 단유를 보며 물었다. “니가 그…김단유, 맞아?” “네.” 감독은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단유를 살피더니 말했다. “얼굴은 괜찮은데? 카메라도 잘 받겠어.” 그러더니 담배 냄새를 풍기던 사내를 향해 말했다. “스튜디오는 정리 끝났어?” “네. 방금 끝냈어요.” “카메라 세팅은?” “금방 끝나요.” “그럼 세팅 끝내고 와. 그동안 이야기 좀 하고 있을 테니까.” 감독은 다시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감독은 사무실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켜서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사무실은 모노륨 바닥에 푸른색 벽지를 발라서 차분한 인상을 줬다. 새까만 책상 위는 모니터와 전화 외에는 제자리에 놓여 있는 게 없는 것처럼 여러 가지 것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책상 뒤 창문을 넘어온 오후 햇살에 책상 위의 먼지들이 유유히 떠다니는 광경이 보였다. “여기 앉아. 아, 인사하지?” 등을 돌리고 있던 이가 일어나 단유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둘은 인사했었다면서?”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선 도연을 바라보았다. **** “카메라 테스트요?” 도연의 물음에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3분짜리 영상 3개를 찍는다는데, 굳이 연기 레슨까지 받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미리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해보면 자연스럽게 촬영할 수 있을 테니까.” “저만요?” 매니저는 생수를 따서 도연에게 건넸다. 도연은 생수를 받아 마시며 오랜 연습으로 마른 성대를 적셨다. “그 애는 영상 감독에게 따로 받는다고 하더라만, 네가 걔랑 같이 받을 필요는 없잖아. 시간도 안 맞고. 우리는 따로 하겠노라고 했지.” “시간이 왜 안 맞아요? 저 이번 달에 스케줄 다 뺐던 거 아니예요?” “너 공부해야지.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면 시간 낭비지 않니?” 매니저의 말에 도연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어쩐지 이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 감독님한테 밉보이는 거 아니에요?” “그건 걱정하지 마. 우리도 우리 사정이 있고, 바쁜 스케줄 쪼개가면서 촬영하는 거니까, 이 정도는 이해해 줄 거야.” “스케줄 없잖아요?” “그쪽은 모르니까. 너야말로 왜 그래? 회사에서는 네 시험 때문에 일부러 한 달 스케줄을 빼줬는데?” “촬영을 담당할 감독님한테 좋게 보여야 하지 않아요? 저 혼자 스케줄 핑계로 빠지면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을 거 같아서요. 게다가 카메라 테스트 정도면 시간도 많이 뺏기지 않을 거고요.” “…진짜 그 이유야?” 매니저가 게슴츠레 눈을 뜨고 도연을 살폈다. “아무리 TV 방송에 안 나오는 영상이라도 사람들이 찾아볼 거 아니에요? 그러면 어떻게든 말이 나올 건데, 이왕이면 잘 나오는 게 좋죠. 발연기니 뭐니 그런 이야기 들으면 나중에 흑역사일 텐데.” “솔직히 말해서 누가 찾아보겠니? 교육부 홍보모델이란 타이틀 때문에 일을 맡은 거지, 실제로는 찾아보는 사람도 없을 거야.” “그래도 저희 팬들은 보지 않을까요? 일부만 본다고 해도, 그게 괜히 나중에 흉이 되면 어떡해요? 조금만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야죠.” “누가 널 말리겠니.” 매니저는 핸드폰으로 통화를 몇 번 하더니 도연을 돌아보았다. “원래는 오늘 저녁이랑 내일 저녁에 카메라 테스트랑 간단한 대본 리딩을 하려고 했는데.” 원래는 대본 리딩 같은 걸 할 필요가 없다. 3분짜리 홍보영상 정도는 미리 받은 대본을 현장에서 맞춰보며 그때그때 조정하는 게 다였다. 어차피 컷 수도 많지 않은 홍보영상이기 때문인데, 그래도 연기라면 연기고, 도연에게는 첫 도전이기 때문에 실수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회사에서 배려해 준 것이었다. 하지만 도연은 그런 호의도 반려하며 감독의 카메라 테스트에 나서겠다고 한다. 매니저는 도연의 생각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이번 촬영의 중요성이 다른 것들에 비해 높지 않다는 게 회사나 매니저의 생각이었고, 그래서 조금은 가볍게 본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촬영 감독이란 사람도 이쪽 업계에서 널리 알려진 사람도 아니고, 가끔 정부 기관이나 기업의 수주를 받아 홍보영상만 전문으로 제작하는 곳의 감독이다보니 무시한 면도 있었다. “전화했어. 내일 오후 1시야. 홍대에 있는 스튜디오라는데, 내일 너 데려다주고 나서 난 같이 못 있을 거야.” “언니들 때문에요?” “그래. 애들 다른 행사가 있어서 데리고 가봐야 하거든. 넌 도경이랑 같이 움직여.” “그럴게요.” “대신 내일은 끝나고 바로 회사로 와야 한다.” 도연은 배시시 웃으며 매니저를 바라보았다. “네.” “꼭이다. 내일은 레슨 시간 늦으면 안 돼.” “네.” 도연은 매니저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계속 연습해.” 매니저는 보컬 연습실을 나와 문을 꼭 닫아 주었다. 문에 달린 조그만 창으로 헤드폰을 쓰고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도연을 보며 눈웃음을 지어보던 매니저는 다시 바쁜 걸음을 옮겼다. **** “원래는 바빠서 올 시간이 없었는데, 기어코 오겠다고 고집을 부렸다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말이야.” 감독이 웃으면서 도연을 보았다. 도연은 쑥스럽다는 듯 귀 뒤로 머리를 넘기며 수줍게 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두 주인공이 모두 왔으니까, 한 번 카메라 테스트하고 얼굴 한번 보자. 대본은 가져왔지?” “네.” 단유는 담당관으로부터 받은 대본을 꺼내 들었다. 대본이랄 거까지도 없고 겨우 몇 장의 A4용지 묶음이었다. “현장은 이미 섭외가 끝났거든? 그래서 다음 주 주말에 찍기 시작할 거고, 빨리 끝나면 다다음 주에 끝이 날 거야.” 기간은 길지만 실제로 촬영하는 날짜는 단 이틀. 이틀 동안에 촬영해서 3회분을 찍는다. 그마저도 이번 영상이 드라마타이즈 형식이라 그렇지, 보통은 1회 3~4시간 촬영으로 마무리되는 게 보통인 홍보영상이다. “감독님, 다 됐는데요.” 마침 세팅을 마친 남자가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알렸다. “가자.” 감독이 앞장서고 그 뒤를 서먹한 분위기의 소년 소녀가 따랐다. 스튜디오는 지하와 1층을 함께 쓰는데, 카메라 테스트는 지하 스튜디오에서 촬영하기로 했다. 하얀 페인트로 꾸며진 황량한 지하 스튜디오의 가운데에 조명과 카메라가 불을 밝히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도연아.” 지하 스튜디오 구석에서 기다리던 스타일리스트 도경이 도연을 불렀다. “아, 언니. 여기 계셨어요?” “너 촬영하기 전에 얼굴 좀 봐야지. 옷은…감독님 옷은 이대로 가도 돼요?” “스타일리스트예요?” “네.” “뭐, 상관없어요. 어차피 바스트샷 위주로 볼 건데요.” “그래도 아이돌인데, 기왕이면 잘 나와야죠.” “…영상을 어디 유출이라도 시킬까 봐 그래요?” “네? 아뇨, 그런 뜻은 아니고요. 나중에 실제 촬영할 때도 이런 이미지면 좋겠다, 하는 뭐 그런 거 있으실 거 아녜요? 그런 거 미리 맞춰보시란 뜻이죠.” “그렇게 하세요.” 스튜디오에도 카메라 앞에 서기 전에 메이크업을 해줄 사람이 있긴 하지만, 스타일리스트가 직접 하겠다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다. “넌, 우리 메이크업 좀 받고 서자. 강자야!” 단유는 그런 메이크업을 해줄 이가 없으니 스튜디오 소속 직원을 불렀다. “어?” 그때 스타일리스트가 단유를 보고 아는 척을 했다. “너 맞지? 나 알지?” 단유가 도경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맞네. 그때 걔 맞네.” “언니, …알아요?” “아, 응. 알지. 예전에 같이 일했었거든.” “예전에요?” “나 말했었잖아? 가디스R 노래 신곡 뮤직비디오 촬영할 때 일했었다고. 안 했었나?” “가디스R?” 도연이 단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단유는 담담하게 그 시선을 받으며 잠시 마주 보다 도경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잘 지내셨어요? 회사 옮기셨나 봐요?” “옮긴 게 아니라, 그때도 잠깐 일 도와준 거야.” “아, 미래 누나 대신해준 거라고 하셨죠?” “그래, 미래. 미래 이름도 정말 오랜만에 듣네?” 도연이 뭔지 모를 소외감을 느끼는 사이, 감독이 두 사람의 대화를 잘랐다. “잘 됐네. 그럼 그쪽 분이 얘도 봐주실래요?” “그럴게요.” “저기서 하면 돼요.” 감독은 손가락으로 대기실을 알려준 후 고개를 돌렸다. “한준아, 모니터도 다 됐어?” “네, 감독님.” “화이트도 맞췄어?” 감독이 걸음을 옮기는 사이, 단유와 도경, 도연은 대기실로 향했다. ======================================= [484] 커넥션(5) “너 키 많이 컸지? 그때도 중학생치고 키가 크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더 큰 거 같아. 너 이제 고등학생이니? 아직 중학생이야? 3학년? 그럼 도연이보다 한 살 어리구나. 그때도 너 피부 좋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어쩌면 이렇게 좋아? 피부 관리하니?” 도연은 평소보다 하이 텐션인 도경을 보며 의아한 생각을 가졌다. “아, 기억난다. 그때 내가 너 피부 좋다고 하니까, 수련이가 너보고 해를 안 봐서 그렇다고 했었지?” “기억력 좋으시네요?” “그래, 기억나네. 너 전교 1등이라고, 공부 잘하고 책 보는 거 좋아한다고 그랬잖아. 노래도 잘하고 공부 잘하고 피부 좋고.” “그래서 사기 캐릭터라고 놀리셨죠.” “놀리긴? 사실이잖아? 너 정도면 사기야, 사기. 어떻게 남자애가 여드름 하나 안 나? 이것 봐, 완전 애기 피부야. 건드리기가 두려울 정도야.” 그러면서 단유 얼굴에 연신 크림을 찍어 바르는 도경이었다. “전교 1등이요?” 옆에서 이미 메이크업을 끝낸 도연이 물었다. “아, 그때 수련이 그랬어. 전교 1등이라고. 그 이후엔 모르겠지만, 뭐 달라졌겠어? 계속 1등이지?” 단유는 미소만 짓자, ‘대답 안 하네. 지 자랑 같아서 부끄럼 타는 거니’라며 도경이 단유의 어깨를 툭툭 때렸다. “아, 그런데 너 연예인 하는 거 아니었어?” “아닌데요.” “그래? 그런데 어떻게 이거 촬영하는 거야?” “뭐, 어쩌다 보니….” “아, 정말? 그럼 소속사 없어?” “없어요.” “이야, 난 솔직히 너 계속 이쪽 활동할 줄 알았는데. 네 얼굴이랑 몸 정도면…. 도연아, 그렇지 않니?” 곤란해 하는 얼굴로 시선을 피하는 도연이었다. “그럼 그때 수련이랑 나윤이, 맞지? 걔네들이랑 연락은 하고 지내니? 그때 보니까 수련이랑 되게 친해 보이던데.” 단유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마침 쿠션으로 턱부위를 두드리고 있던 탓이기도 했지만, 딱히 들려줄 만한 대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듣기로는 수련이가 태호 오빠 회사로 갔다던데, 알고 있니? 난 처음에 되게 놀랬잖아. 태호 오빠가 갑자기 회사 차린다고 해서.” 말을 잇던 도경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손을 마주쳤다. “맞다, 그때 에이바운스의 갤럭시즈 애들 전부 태호 오빠네로 넘어갔다던데.” 도연은 갤럭시즈란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갤럭시즈가 누구예요? 퍼포먼스 팀?” 같은 업계에 있는데도 잘 모를 정도로 인지도가 낮은 걸그룹, 갤럭시즈였다. “걸그룹이야. 몇 번 노래도 냈는데, 별로 인기가 끌지 못했지. 그래도 애들이 실력은 좋다고 그랬어. 그중에 메인보컬이 수련이라고 나중에 가디스R로 나왔잖아.” “수련 선배는 들어봤어요. 수련 선배가 갤럭시즈라는 그룹 멤버예요?” 데뷔 1년 전에 나온 가디스R은 당시 꽤 많은 화제를 부르기도 했고, 노래도 좋아서 지금도 가끔 거론되곤 하는 걸그룹이었다. 다만 컴백을 하지 않은 채로 1년이 지나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 있지만, 도연은 가디스R을 기억하는 이들 중의 한 명이었다. “그때 노래 ‘리모트’ 알지? 그 노래 뮤직비디오에 단유, 얘가 출연했었는데.” “아.” 도연은 도대체 어디서 봤던 얼굴인가 궁금했던 이유를 알아냈다. 바로 그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남자 ‘모델’이 바로 눈앞의 남자아이였던 것이다. 그렇다는 말은, “그럼 중1 때 그걸 찍었다고요? 난 전문 모델인 줄 알았는데?” 동안의 소년이긴 했어도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치? 너도 몰랐지? 대부분 사람들이 잘 모르더라고.” 도경은 단유의 머리를 손으로 빗기며 말을 이었다. “그때 ‘리모트’ 남자 버전도 있었던 거 알아? 들어봤니? 그게 얘가 부른 거래잖아? 몰랐지? 얘가 이렇다니까. 노래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겼는데, 머리도 좋아. 이러니 사기라고 말할 수밖에.” 단유는 피식 웃었다. “누나, 그때 저 보고 고민 많이 하라면서요?” “내가 그랬어?” “네. 한 연습생의 자살 이야기를 해주시면서요.” “아.” 도경의 들뜬 얼굴이 찬물을 끼얹은 주물(鑄物)처럼 순식간에 굳었다. “내가 참, 별 이야기를 다 했었네.” “아니에요. 덕분에 저도 생각 많이 했었는걸요.” “설마 그 이야기 때문에 연예인 할 생각이 없어졌다거나 한 건 아니지?” “뭣들 하세요? 빨리 준비하고 나와요.”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조감독, 이라는 직급을 가진 ‘담배 냄새’ 나던 남자였다. “네, 나갈게요.” 도연이 벌떡 일어났다. 단유도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나 때문은 아니고, 그냥 공부를 좋아해서 그래요. 연예인에 뜻이 없었기도 하고요.” “그러니.” 조심스러운 도경의 대답. 단유는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대기실을 나섰다. 나서기 전 뒤에서 도경이 다시 물음을 던졌다. “수련이랑은 연락하니?” 단유는 멈칫 섰다가 돌아섰다. “아니요.” **** “자, 여기 보시고요.” 카메라 감독의 지시에 따라 이쪽저쪽을 보기도 하고, 조감독의 지시에 따라 앉았다 섰다 입을 크게 벌리기도 하고 얼굴을 찡그려보기도 한다. 총 감독이자 스튜디오의 대표인 정일중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이것저것 체크를 했다. “강준아, 시선 카메라 쫓지 말라고 해.” “네. 도연씨, 카메라 보지 마시고요. 카메라 아래쪽이나 옆을 보세요. 동공 흔들리면 불안해 보이니까, 주의하시고요.” “강준아, 조명.” 모니터를 슬쩍 본 강준이 조명 감독에게 지시를 내렸다. “형님! 빛을 살짝 뒤로 넘겨 주셔야겠어요. 얼굴이 너무 하얗게 나와요.” “반사판 떼라.” 반사판을 들고 있던 스태프가 조금씩 각도를 조정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됐어요’, ‘아니, 조금만 뒤로’, ‘됐어요’, ‘조금 오른쪽으로’, ‘됐어요’, ‘됐어’. 단유는 감독의 옆자리에서 우두커니 서서 조명 가운데 선 도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촬영장은 어디나 비슷한 모습이었다. 비록 가수도, 배우도 아닌 단유지만 몇 번 이런 현장을 경험했더니 다 비슷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욱 긴장을 덜 하는 것 같았다. 사실 부담이 없기도 했다. 자신이야 어차피 이번 한 번이면 끝이고, 굳이 뭘 잘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꿔말하면, 카메라 테스트를 받는 도연은 그런 강박관념이 있는지 표정이 쉽게 풀리지를 않았다. 특별한 주문을 받아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한 표정 몇 가지를 지어보면서 카메라 테스트를 받을 뿐인데도 저렇게 어려워하는 것을 보면, 이 테스트가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다. 현장에서 저랬다면, 꽤나 시간을 잡아먹었을 일이다. 모니터를 보던 일중은 사무실에서 호탕하게 웃던 모습과 달리,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머리를 긁었다. “강준아.” “네.” “좀 쉬었다 가자.” “그럴까요?” 강준이 고개를 들고 ‘10분만 쉬었다 가겠습니다!’라고 크게 소리치자, 현장에 흐르던 묘한 침묵과 긴장감이 일시에 끊어지며 소란스러워 졌다. 도연을 부른 감독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잘하는데 카메라를 너무 의식하시네요. 가수라서 그런가 봐요.” 도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일중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일중은 말을 잇지 않고, ‘좀 쉬다 오세요’라는 말로 이야기를 맺었다. 도연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물러선 뒤, 일중은 혀를 찼다. “어렵네.” 그러다 바로 옆에 단유가 대기하고 있는 걸 깨닫고는 표정을 고쳤다. “어? 너 왜 여기 있어?” 단유는 강준을 쳐다보았다. 조감독이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해서 기다릴 뿐이었다는 대답을 대신한 것이었다. “야, 너도 저기 가서 기다리고 있어. 나중에 부를게.” 테스트일 뿐이라 금방 끝날 줄 알고 옆에서 대기하라고 했던 건데 본의 아니게 감독의 심기를 거스르게 된 것 같아서 강준은 시치미를 뗐다. “어서.” “…네.” 단유는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일중의 시선을 모른척했다. 딱히 자기에게 말을 거는 것도 아니고, 당장에 할 말도 없고 말이다. 걱정한다손 쳐도 테스트를 한 뒤에나 할 일이다. 지금은 그저 구경꾼일 뿐인 단유였다. “괜찮아?” 금방 끝날 줄 알고 가볍게 시작했던 테스트가 의외로 마음의 부담이 되어, 도연은 무척 지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스튜디오 뒤에서 구경하던 도경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도연은 애써 괜찮다고 대답하며 말했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그럴래?” “저 혼자 갈게요.” 도경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가운데 도연이 느릿느릿 문을 열고 스튜디오를 빠져나갔다. 지켜보던 도경이 안타까움에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다 단유를 보았다. “단유야.” “괜찮아요?” 단유의 물음이 도연에 대한 것이라 생각한 도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쟤가 조금 ‘완벽주의자’적인 기질이 있는데, 아마 상처가 많이 됐을 거야.” ‘완벽주의’? “애가 마음이 많이 여려서 주위 사람들 고생하는 걸 못 보거든. 그래서 한 번 실수하니까 계속 실수를 하는 모양인가 봐. 어떡하지?” “쉬고 나면 괜찮아지겠죠.” “그렇겠지?” 도경은 불안한 얼굴로 스튜디오의 출입구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가서 위로해주는 게 좋을까?” 단유는 나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위로는 쓸모없을 거예요. 진짜 완벽주의자라면.” “응?” “완벽주의자들은 타인의 시선에 크게 구애를 받지 않아요.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 기준이 자기 안에 있어요. 그래서 자신만의 기준에서 합격선을 넘지 못하면 감당하지 못하는 거죠. 설령 타인이 괜찮다고 해도 자신의 기준에 못 미치기 때문에 위로가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도경은 단유를 멍하니 바라보다 말했다. “그, 그렇게까진 아닌 거 같은데.” “네. 제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지는 않네요.” “응?” “완벽주의자는 아닌 것 같다고요.” 단유의 말에 도경이 되레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만약 완벽주의자라면, 애초에 저 앞에 설 생각을 안 했을 테니까요.” 도경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는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도연, 씨는 자신이 연기를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감정을 제대로 감추지를 못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얼굴에 계속 자신감이 부족해서 불안해하는 모습이 나오는 거죠.” 감독은 카메라를 계속 본다고 투덜거렸지만, 사실은 계속 확인받으려는 시선이었다. 자신이 잘하고 있는지, 못하는지를. “포기하지 않고 노력은 하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서 답답한 모양이에요.” “그걸 어떻게 아니? 그냥 보면 알아?” 눈을 보면, 그 사람의 표정을 보면, 그 정도는 다 알 수 있지 않나? 하지만 어쩌면 관찰이 일상이었던 단유였기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카메라 앞에서 주문받은 대로 연기를 하려고 노력하다가도 문득문득 나오는 불안감이 모니터에서 불량 화소가 낀 것처럼 느껴지니 위화감이 들 수밖에 없고, 그래서 감독이 신경질을 낸 것이리라.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것만도 아니다. 애써 노력하려는 낌새가 보인다. 단유가 그렇게 느끼는데, 설마 베테랑 감독이 모를까? 그나마도 아이돌인 도연을 배려하기 위해 시선을 계속 꼬집어 이야기했을 뿐이리라. 시선만 고치면 된다고. 말인즉슨, 자신에게 확인받을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돌려 말한 게 아닐까?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면 알아듣기 힘들지 않을까?’ 어느 정도 나이도 먹고 사회생활도 많이 한, 노련한 배우라면 감독의 배려를 눈치챌 수 있을지 몰라도 이제 고1, 어린 소녀가 그 배려를 이해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그럼 차라리 내 눈치 보지 마, 라고 이야기를 하던지.” 도경은 감독이 앉은 자리를 보며 툴툴거렸다. “그럼 나가서 위로 좀 해줘야겠다.” “그러세요.” 도경이 나가려다 멈칫하며 돌아섰다. “너도 바람 좀 쐬지? 공기, 탁하지 않니?” 지하 스튜디오는 보통 그렇다. 환기시설이 있긴 해도 탁한 건 어쩔 수 없다. “괜찮아요.” 하지만 단유는 괜히 나서서 얼굴 부딪히는 일은 없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거절했다. 자신이야 아무런 감정이 없다 해도, 상대는 불편해할 수도 있다. 마치 자신이 현장을 멈추게 한 것 같아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지금은 말이다. “도연아, 괜찮아?” 혹시나 울고 있으면 어쩌나 걱정하는 마음으로 나선 도경은, 말 그대로 바람을 쐬며 쉬고 있는 도연을 발견했다. 스튜디오 옆의 좁은 골목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도연은 설핏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도연의 눈은 맑게 빛나고 있었다. ======================================= [485] 코미디(1) “왜 그랬어.” “…….” 어깨를 밀치는 여린 손에도 상체가 크게 휘청거렸다. “왜 그랬냐고!” “…….” 저항할 의지가 없는 몸이 밀면 밀리는 대로, 당기면 당기는 대로 흔들렸다. 마지막 한 잎이 바람에 흔들리듯 하얀 손에 붙들려 흔들렸다. “대답해 봐! 왜 말을 못 해!” “…….” 뺨이라도 올려붙일까 싶었는데, 차마 때리지는 못하는지 그저 옷깃을 아슬아슬하게 붙잡고만 있는 손이었다. “나쁜 새끼.” 단유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그저 하얀 손을 쳐다볼 뿐이었다. **** 드디어 첫 촬영이 시작되었다. 첫 로케이션 장소는 학교였다. 오늘 찍을 내용은 간단했다. 교실에 앉아 몇 줄 안 되는 대사를 주고받으면 끝이었다. 활달하고 호기심 많은 여학생과 무뚝뚝한 남학생. 두 사람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밝은 미래를 꿈꾸는 여학생과 사사건건 부정적인 말로 여학생을 상심케 하는 남학생의 대화. 그리고 CG로 메시지를 전한다. 「커리어넷에서 당신의 미래를 응원합니다.」 교육부 내 진로상담서비스의 홍보 메시지가 나오는 것으로 끝. “간단하지?” 콘티를 들추며 설명하던 일중의 말에 단유와 도연은 가볍게 대답했다. “네.” 하지만 내용이 가볍다고 촬영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단유의 이미지는 평소의 단유와 보기 좋게 맞아 떨어진 터라, 카메라 테스트 때도 일중은 오케이를 외쳤었다. 오늘도 단유의 단독 컷씬에서는 오케이가 쉽게 나왔다. “연기가 좋네!”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무심하게 있을 뿐인 연기라 칭찬인지 흉인지 알 수 없었지만, 촬영 콘티 상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지니 다른 스태프들도 고개를 끄덕였던 단유의 연기였다. 반면, 활달한 이미지에 맞게 다양한 표정을 구사해야 하는 도연은, 표현해야 하는 성격과 무관하게 카메라 연기가 어색했다. 너무 과장되거나 혹은 너무 소심하게 보이는 표정 연기에 촬영감독이 먼저 카메라에서 눈을 떼는 경우가 생길 정도였다. “정 PD. 괜찮아?” 촬영감독이 혀를 차며 말할 정도니, 일중이라고 다를까? 일중이 고민하던 걸 보더니 넌지시 말하는 촬영감독. “그냥 넘어가자. 오늘 이거만 찍을 거 아니잖아?” 적당히, 라는 촬영감독의 말에 일중의 귀가 솔깃했다. 진짜 드라마를 찍는 것도 아니고 고작 3분짜리 홍보영상인데 무슨 퀄리티를 따질까. 그래서 솔직히 그냥 넘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자기도 못한다는 걸 아는 도연은, 그래서 안타까움을 담아 눈빛으로 일중에게 부탁한다. 자기 때문에 같은 컷을 몇 번을 찍고 있으니 미안하긴 한데, 어물쩍 넘어가고 싶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냥 눈 딱 감고 ‘오케이’를 외치지 못하는 일중과 ‘컷’ 소리에 일중을 향해 젖은 눈빛을 보내는 도연. 대충하고 가자는 말이 막상 나오지 않는 이유였다. “한 번만 더.” “…그래.” 촬영감독이 다시 앵글을 조정하는 동안, 일중은 주변 분위기를 보다 강준이를 불렀다. “10분만 쉬자.” “10분만 쉴게요!” 강준의 목소리가 교실이 떠나가도록 울린 뒤, 일중은 도연을 불렀다. 조금 전의 촬영 화면을 모니터로 확인하면서 몇 가지를 알려줄 생각이었다. 연기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선생님은 아니라도 몇 가지 디렉션은 해줘야 방향을 잡고 가지 않겠는가. 어쨌든 이 영상의 메인은 도연이었고, 도연의 연기가 영상의 퀄리티를 좌우한다. 이제 첫 촬영인데, 처음부터 쉽게 넘어가 버리면 이후의 촬영이 고단해질 것이다. “도연씨, 여긴 말이죠.” 일중은 콘티를 모니터 옆에 펼쳐두고 설명을 시작했다. “단유야, 이거 마셔.” “고마워.” “근데 원래 이렇게 오래 걸려?” 명수가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통은. 촬영 준비하는 시간이 제일 길고, 본 촬영은 하기에 따라서는 길어질 때도 있고 짧을 때도 있고 그래.” 뮤직비디오 촬영 때도 그랬지만, 컷이 바뀔 때마다 카메라 위치를 재조정하게 되면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카메라만 바뀌는 게 아니라 조명도 옮겨야 하는데, 보통 적게는 3~4개에서 많게는 6~7개의 크고 작은 조명 기기들이 움직이며 적절한 위치를 잡느라고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만약 카메라에 트랙이라도 깔아야 하는 경우면, 동선에 맞춰 트랙을 까느라고 또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니 촬영이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다. 그나마 변수가 통제되는 스튜디오 촬영의 경우에는 낫다. 지금처럼 교실에서 찍는다든지, 야외에서 촬영하는 경우라면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햇빛의 변화, 섭외된 장소의 렌탈 시간 등에 쫓기며 제한된 시간 내에 촬영하기 위해 다들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그런 와중에 배우가 NG라도 내면 감독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스태프가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다. 시간에 맞춰 촬영을 끝내기 위해 욕먹고 진땀 흘려 가며 바쁘게 서둘렀는데 기껏 고생했던 게 무색하게 배우의 NG로 시간을 낭비하니 말이다. 단유는 명수가 건넨 생수를 마시며 촬영장을 둘러보는 명수 뒤를 바라보았다. “상미야, 안 심심해?” “음, 조금?” 처음에야 들뜬 마음이었지만, 시간도 지체되고 현장 분위기도 점점 싸늘해지는 것 같아 상미는 구경하고 있기가 힘들었다. 명수야 분위기도 모르고 그저 바쁘게 눈동자를 굴리며 구경하느라 바쁘지만, 상미는 스태프들의 굳어지는 얼굴과 같이 대기하는 스태프들의 투덜거림을 흘려 넘길 수 없었다. ‘괜히 따라왔나?’ 그런 후회가 들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명수 붙잡고 돌아갈까, 진지하게 고민도 했다. **** 6시간 전, 새벽 운동을 하러 공원엘 나온 단유와 명수는 모처럼 새벽에 나온 상미와 함께 가벼운 달리기를 했다. “너도 운동 좀 해야 돼. 맨날 게임만 하니까 그렇게 체력이 떨어지잖아?” “운동하면 종아리 굵어진댔어.” “웃기고 있네. 며칠 운동했다고 종아리 굵어지면 남자들이 땀 흘려서 헬스장 갈 이유가 없네요.” 자신에게 핀잔을 던지는 명수의 등을 퍽, 소리 나게 때린 상미는 단유에게 물었다. “너 촬영 간다는 게 오늘이지?” “응.” “그럼 나도 따라가서 구경해도 돼?” “구경? 왜?” “왜는. 그냥 궁금하니까 그러지.” 상미의 말에 등을 문지르던 명수도 단유에게로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나도 갈까?” “너까지?” “왜? 가지마? 가면 안 되나? 혹시 방해되나?”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니, 방해가 아니라, 허락받지 않은 외부인이 가면 출입을 못 하게 할지도 몰라.” “허락 필요하구나.”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상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손바닥을 주먹으로 치며 물었다. “거기 매니저 같은 사람들은 옆에서 기다리고 그러지 않아?” 단유는 잠깐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오늘 일일 매니저 할게.” “응?” “너 매니저 없잖아? 그러니까 내가 오늘 매니저로 너 따라갈게.” 상미는 어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명수를 향해 손가락을 들었다. “넌, 로드 매니저 해라.” “나 운전 못 하는데?” “누가 운전하래? 그냥 직급이 로드라는 거지. 싫으면 스타일리스트 하던가.” “야, 하려면 네가 스타일리스트 해. 내가 매니저 할게.” “너 남녀 차별하니?” 명수가 발끈했다. “야! 이게 무슨 차별이야?” “그게 차별이야.” 의미도 없는 싸움을 계속 듣고 있기가 힘들어 단유는 손뼉을 쳐서 두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그만해, 둘 다. 그리고 상미야. 미리 허락받지 않으면 어려울 거야.” “그건 가서 보자고. 만약에 거기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 그때 그냥 돌아오면 되지. 나간 김에 명수랑 놀다 들어가도 되고. 그렇지?” “그럴까?” 히죽 웃는 명수를 보며 단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여우를 닮아가는 친구와 속도 없이 헤벌쭉 웃는 친구를 번갈아 바라보니 그저 웃음만 나온다. 결국 세 사람이 함께 촬영현장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응? 아, 왔구나. 도연 씨는 아직 안 왔는데.” 오늘도 진한 담배 냄새를 풍기는 강준이 단유를 보고 아는 척을 했다. 촬영준비를 하느라 바쁜 모양인지, 한 손에는 콘티북과 슬레이터, 다른 손에는 두꺼운 전선을 돌돌 말아 들고 있었다. “저기 가 있을래?” 턱으로 옆 교실을 가리킨 강준에게 단유가 물었다. “그런데요.” “응? 뭐?” 돌아서던 강준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단유는 친구의 ‘견학’이 가능한지 물었다. “친구?” 그제야 단유 뒤, 멀찍이서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는 소년과 소녀를 보았다. “야, 여기가 함부….” 말을 잇다 만 강준이 가만히 두 사람을 보더니 미간을 좁히고 뭔가를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일단 같이 대기하고 있어 볼래? 좀 있다가 다시 이야기하자.” “그럼 옆 교실에서 같이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래.” 결과적으로 명수와 상미는 촬영장에서 견학이 허용되었다. 허용만 된 것이 아니라 함께 촬영하기로 했다. 배역은 엑스트라. 카메라 앵글 끝에 살짝 걸릴 정도겠지만, 교실에 앉아만 있는 정도니 무리가 없겠다는 촬영감독과 총감독의 허락도 받아냈다. 어차피 교실 학생들을 연출하기 위해 섭외한 엑스트라들이 있었기에 두 사람 정도가 추가된들 문제는 없었다. 잠시 후, 도연이 현장에 나타났다. 주변 사람들에게 애교 있는 표정으로 싹싹하게 인사하는 도연과 매니저. 곧 두 사람도 단유가 대기하고 있던 교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도연과 단유는 고개를 숙이는 정도로 예의를 보이며 인사말을 나눴다. “쟤들은?” 매니저의 시선이 단유 옆 친구들에게 옮겨지자, 단유가 사정을 이야기했다. 연출부 스태프가 가져다 준 교복을 입어보며 함박웃음을 터뜨리는 두 사람을 보던 매니저가 말했다. “넌 친구들도 다 멋있고 예쁘네. 특히 넌 연예인 해도 되겠다.” “고맙습니다.” 상미가 배 앞에 손을 모으고 허리를 푹 숙이며 인사했다. 하지만 딱히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은 아니었다. 듣기 좋은 말 해줘서 고맙다는 정도? 그래도 외모와 키를 보니 잘만 가꾸면 꽤 괜찮은 ‘상품’이 만들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매니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럼 다들 중학교 3학년?” “네.” 명수의 씩씩한 대답에 매니저가 또 한 마디 건넸다. “학생은 되게 남자답게 생겼네. 아, 혹시 두 사람…?” “아뇨, 그냥 친구예요. 이렇게 세 사람.” “아, 그래.” 얼굴을 붉히는 명수를 보며 매니저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대충 인사가 마무리되었다 싶은 매니저는 도연에게로 돌아섰다. “도경이는?” “화장실 갔어요.” “얘는 시간 없는데.” 마침 도경이 급한 걸음으로 뛰어 들어왔다. “시간 없는 거 알고 뛰어왔으니까 거기까지 해요. 단유도 벌써 와 있었네?”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도연아, 메이크업부터 하자.” “네, 언니.” 도경은 책상 위에 메이크업 박스를 내려놓고 의자 하나를 따로 빼서 도연을 앉혔다. 상미가 호기심을 드러내며 슬슬 다가가니 도경이 ‘누구?’라고 물었다. ‘제 친구예요’라는 단유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도경은 다시 도연에게로 집중했다. “쟤도 여자라고 저런 게 궁금하긴 한가 봐.” 명수의 속삭임에 단유는 피식, 실소를 흘리며 돌아섰다. “너도 궁금하면 가봐.” “내가? 내가 왜? 나 안 궁금해.” “너 눈 돌아가는 소리가 아주 시끄러워 죽겠어.” 명수는 어울리지 않게 몸을 꼬면서 부끄러운 척을 했다. “그래도…. 솔직히 넌 자주 봤겠지만, 난 아이돌 처음 본단 말이야.” “엄밀히 말하면 나윤 누나도 아이돌이다?” “그 누나는, 조금 다르지.” “어떻게 다른데?” “그냥, 데뷔하기 전부터 알던 사이라서 그런지 아이돌이라는 느낌이 덜했지만… 쟤는 진짜 아이돌이잖아? TV에서만 보던.” “리본소녀 좋아해?” “솔직히 너 빼고 우리 또래에서 리본소녀 안 좋아하는 애 없을걸?” 리본소녀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명수의 ‘아이돌 구분법’이 단유에겐 조금 안타깝게 느껴졌다. ‘부디 나윤 누나도 빨리 진짜 아이돌이 되길.’ 그렇게 속으로 빌어보는 단유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화장을 고치는 도연을 바라보았다. 지난 주, 카메라 테스트 때의 도연이 생각났다. ======================================= [486] 코미디(2) 일주일 전. “컷! 오케이. 괜찮은데? 어때요?” “정PD가 괜찮으면 괜찮은 거지. 그런데 긴장 많이 안 한 거 같애? 많이 찍어 본 모양이야?” 촬영감독의 말에 단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많이는 안 해봤고요, 뮤직비디오 같은 거 찍은 게 다인데요.” “그래? 근데 이미지가 잘 맞아. 카메라에 정말 자연스럽게 나오거든?” 일중은 스튜디오 옆에 놓인 TV를 가리키며 말했다. 카메라 테스트를 받는 동안 실시간으로 TV형 모니터에 송출해서 지켜볼 수 있었다. “야, 넌 모델 해도 되겠어. 요즘 시크한 이미지 모델이 유행이잖아? 넌 딱이다.” “내 생각에도 그래. 야, 내가 아는 PD 있는데 소개 시켜 줄까?” 촬영감독과 일중의 칭찬이 이어지면서 스튜디오의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근데 연기 연습은 조금 해야겠더라. 목소리는 좋은데 발음이 살짝 뭉개지는 느낌이 있어.” 솔직히 지금도 나쁘진 않지만, 너무 칭찬만 하는 것도 좋지 않을 거 같아 애써 단점을 찾아 지적한 정일중 PD였다. “몇 가지만 더 테스트해 보자.” 대본을 살피며 점검해볼 씬을 찾는 정PD의 뒤로 잠시 밖에 나갔던 도연이 도경과 함께 스튜디오에 돌아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침 그 순간에 단유와 시선이 마주친 도연. 입술을 꽉 깨무는 도연이 단유의 눈에 들어왔다. 카메라 테스트를 받은 날로부터 7일이 지나 다시 만난 도연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컷!” 10분만 쉬자는 이야기에 단유는 몸을 돌려 교실 한편에서 기다리던 친구들에게로 걸어갔고, 도연은 정 PD에게로 걸어갔다. “너무 부담가질 필요 없어요. 도연씨.” 도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연 씨 나이에 그 정도면 잘하는 거야. 이거 봐봐, 도연 씨 얼굴 괜찮지? 그런데 여길 봐봐. 잔뜩 긴장한 게 너무 눈에 띄니까 문제인 거예요. 여기 설명 뭐라고 되어 있어요? 활달한 소녀, 친구의 어깨를 치며 눈웃음을 짓는다, 고 되어 있죠? 그런데 도연 씨 눈이 웃지를 않잖아? 그럼 보는 사람도 이상하단 말이야. 마치 도연 씨가 이 친구랑 무슨 다른 관계라도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러면 이 내용이 살지를 않아. 허심탄회하게 속을 털어놓는 두 친구, 가 아니라 속을 감춘 두 남녀의 이야기가 되어버린다고. 응?” “…네.” “긴장해서 그러는 거 아니까, 긴장 좀 풀고 해요. 카메라 울렁증, 그런 거 아니죠? 무대 자주 서니까 카메라 익숙하잖아? 편하게 해요, 편하게.” “네.” “조금 쉬다가 다시 할게요.” 도연은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돌아섰다. “괜찮니?” 도경이 도연의 곁에 서서 위로했으나, 도연은 대꾸도 없이 시무룩한 얼굴로 주먹만 쥘 뿐이었다. 평소처럼 하라, 는 주문이 있었지만 이상하게 카메라 앞에서는 평소 같은 모습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심박수가 올라가고 머리가 하얗게 변하면서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 되고 마는 것이다. 심지어는 옆에 누가 앉아있는지도 모를 정도니, 주위 사람들이 보는 것 이상으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도연은 그런 모습을 토로하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도 두려운 게, 마치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겨질 것만 같아서였다. 자신의 약점을 고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도경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시선을 돌린 틈에 단유가 명수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명수의 시선이 간간이 자신에게로 오는 것을 느끼며 두 사람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혹시 자기 때문에 촬영이 지연되는 것에 대해 불만을 늘어놓고 있을까? 아니면 얼굴 반반한 아이돌이라고 좋게 봤더니 연기를 개떡같이 못한다고 흉을 보고 있을까? “단유야. 쟤가 너 쳐다보는데?” “응?” 단유는 고개를 돌려 도연을 바라보았다.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시치미를 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너한테 관심 있는 거 아냐?” 은근한 명수의 속삭임이 괜히 떠보는 듯한 목소리라 단유는 코웃음을 쳤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왜? 혹시 알아? 예쁜 여자친….” “거기까지.” 단유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명수의 말을 잘랐다. “장난이야.” “알아.” 명수는 목을 긁으며 머쓱해 하는 얼굴로 둘러보다가 말했다. “사인해달라고 하면 사인해줄까?” “지금 말고 나중에 해. 지금은 별로 기분 안 좋아 보이니까.”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거든?” 그때였다. 도연이 일어나 단유에게로 다가왔다. “저기,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명수가 입을 헤 벌리고 있다가 단유가 팔꿈치로 치자, 그제야 아, 하며 정신을 차렸다. “나 상미랑 잠깐 이야기할 게 있는데.” 고작 생각해낸 핑계란 게 참으로 조악하다만,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 명수가 도경의 옆에서 메이크업 도구들을 구경하는 상미에게로 향한 뒤, 도연이 말했다. “여기 말고 밖에서 이야기할래요?” “네.” 도연이 먼저 앞장서고 그 뒤를 단유가 뒤따랐다. “죄송해요.” 도연이 가장 처음 꺼낸 말이었다. “뭐가요?” “저 때문에 촬영이 계속 길어지고….” “괜찮아요. 제가 뭐라고요. 저도…별로 다를 바 없는데요.” 단유의 말은 본인 역시 출연자이니 같은 처지라 이해한다는 취지였지만, 도연은 실수 없이 컷을 받는 단유가 겸양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전에 들어보니까, 카메라 연기 몇 번 해보셨다고 하던데.” “저요? 아뇨. 뮤직비디오만 출연했을 뿐인데요. 그건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런데 되게 익숙해 보이시더라고요.” “아뇨. 솔직히 별로 안 익숙해요.” “긴장 별로 안 하시는 것 같아 보이는데.” “보이는 것보다 더 긴장하고 있어요. 그나마 전 억지로 표정을 꾸밀 필요가 없는 역할이라 ‘그쪽’보다 좀 편할 뿐이죠.” 그리고는 단유가 볼을 긁적였다. “그런데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네요. 도연 씨, 라고 불러야 하나요?” 도연은 얼굴을 붉혔다.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촬영장에서 다들 자신에게 ‘도연 씨’라고 부르는 이유 때문이었다. 자신에게는 ‘도연 씨’라고 부르는 스태프들이 단유에게는 ‘단유야’라고 부른다. 단유를 부르는 호칭에 비하나 경시의 의미는 없을지라도 상대적으로 뭐라도 되는 것처럼 ‘무슨무슨 씨’라고 불리는 게 영 어색하고 불편했다. 고작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말이다. 원래 과장된 존대는 불편한 법이다. ‘그렇다고 말을 놓으라고 할 수도 없으니 참.’ 어쨌든 한 살이 많으니까. 단유는 도연의 표정을 살피다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촬영하는 교실의 아래층으로 내려왔더니 엑스트라들과 지원 스태프 몇몇이 대기하고 있어 이야기를 나누기가 곤란했다. 그래서 결국 두 사람은 건물 밖까지 나와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공립고등학교 한 곳을 빌려 촬영하는 중인 이곳은 단유가 다니는 중학교보다 훨씬 크고 넓은 운동장을 가지고 있었다. 명수도 처음 운동장을 보고 소리를 지를 정도였으니. 몇몇 사람들이 공을 차며 운동을 하는 중인데 미리 스태프들에게 이야기를 들었는지 소리를 크게 내는 사람들은 없었다. 촬영에 지장만 가지 않는다면 운동을 하는 것을 막을 이유가 없었으니 그대로 둔 것이다. 그렇다고 전혀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니 간간이 공을 뻥뻥 차는 소리가 기분 좋은 울림과 함께 들렸다. “저기, 그런데요.” 단유는 다시 도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 노하우, 같은 거 있나요?” “노하우요?” “카메라 앞에서 떨지 않는 법, 같은 거요.”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요.” 아마 도연은 답답한 마음에 물어본 것일 테지만, 경험으로만 따지면 도연에게 한참 못 미칠 단유가 그런 노하우를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제가 사실은요, 조금 많이 긴장해요. 처음 가수 데뷔했을 때도 긴장을 많이 해서 실수를 몇 번 했었거든요.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까 조금씩 나아지긴 했는데, 이번에는 쉽게 나아질 것 같지가 않아서요.” 단유는 도연을 가만히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저기요.” “네.” “아마 의지할 사람이 없어서 그럴 거예요.” “네?” 뜬금없는 단유의 말에 도연이 눈을 껌뻑거리며 바라보았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같이 할 때는 옆에서 의지가 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별로 긴장을 안 하다가 ‘혼자’라고 느끼면서 심하게 긴장하고 몸이 굳어버리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아마 ‘도연 씨’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네요.” “…….” “그룹이라면서요? 혹시 지금도 같은 숙소를 쓰시나요?” “네.” “평소에는 같은 멤버들과 함께 있다 보니 그분들에게 의지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그분들과 함께 촬영할 때는 긴장이 덜했던 것인지도 몰라요. 그러다가 혼자 하는 촬영, 특히 처음으로 연기하려고 하니 긴장이 배가 된 것이겠죠.”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잘하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실수에 대한 두려움도 있겠죠. 실수했을 때 이를 커버해줄 수 있는 멤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 두렵고, 그래서 실수하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감이 몸을 옥죄는 거, 아닐까요?” 공부를 잘한다더니, 아닌 게 아니라 말하는 본새가 보통이 아니다. 전혀 중학생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오히려 무슨 상담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쪽 계통 아니라더니 너무 잘 아는 것 같은데요.” “들으셨잖아요? 갤럭시즈. 그 누나들이랑 친했었거든요.” “아, 그렇구나.” 단유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점점 기울어가는 해의 위치를 가늠했다. “혼자라서 힘들겠지만, 그래도 힘내세요.” 단유는 그렇게 말을 맺었다. “들어가죠. 쉬는 시간 끝났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먼저 돌아섰다. 그러자 황급히 단유에게 말을 꺼내는 도연. “저기 그러면요.” “네?” “…아, 아니에요. 고마워요.” 단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하지만 더 입을 열지 않았다. 괜히 이유를 물어보면 말이 길어지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먼저 건물로 들어갔다. “자, 슛 들어갑니다!” 스탠바이, 그리고 정 PD의 슛 소리와 함께 다시 촬영이 재개되었다. “넌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어?”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단유를 바라보는 도연. 한껏 기대감이 녹아들어 ‘들뜬’ 목소리. “뭐라도 되겠지.” 턱을 괴고 심드렁하게 창밖을 바라보는 단유. “에이, 꿈 같은 거 없어?” “꿈? 그런 거 없어.” “왜?” 단유를 향해 ‘반짝’이는 눈빛을 보내는 도연. “꿈이 현실이 되지는 않잖아.” “그렇다고 꿈도 안 꿔?” “꿈꿀 시간에 교과서나 봐.” 애교 섞인 콧소리로 칫, 토라진 흉내를 내는 도연. 그런 도연을 흘깃 바라본 단유가 물어봐 준다. 마치 예의상 물어봐 준다는 태도. “그러는 넌 꿈이 있어?” “난 웹툰 작가가 될 거야.” “웹툰? 그거 돈도 안 되잖아.” “돈이 문제니? 내가 꿈꾸는 일을 하고 산다는 게 중요하지.” 단유는 고개를 틀어 도연과 시선을 마주했다. 도연의 눈에 일렁이는 감정들이 단유에게 다가왔다. 단유는 그 눈빛을 가만히 받아주었다. “돈 안 되는 일에 힘쓰지 마. 그렇게 살다가 굶어 죽어.” 화난 척 단유를 째려보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는 도연. “그렇게 말 안 해도 알거든. 그리고 자신도 없고.” “왜?” “내가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잘할 자신도 없고.” 휴, 하고 눈에 보일 것 같은 한숨을 내쉬며 눈썹을 아래로 내리는 도연. 단유는 덤덤히 말했다. “그럼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봐.” “어떻게?” “글쎄?” 그리고 컷. 이후 ‘커리어넷에 물어보세요.’라는 CG가 나올 때를 대비해 카메라를 2초간 응시. 이후 고개를 들어 위로 시선을 들어 올린다. 그리고 컷. “오케이!” 결국 해가 지기 전까지 촬영을 마치는 데 성공했다. 본래 5개의 컷으로 나눠 가야 할 촬영이었지만, 너무 많은 NG가 속출한 탓에 정 PD는 컷을 더 쪼개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거의 대사 한 줄에 한 컷을 배분하는 형식으로 촬영을 이어갔는데, 이렇게 되면 후반 작업의 어려움뿐만 아니라 영상의 리듬이 너무 정신없게 진행될 우려가 있지만, 불가피했던 작업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촬영장의 스태프들이 진땀을 흘리며 서로에게 인사를 나눴다. 그 와중에 도연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를 가장한 사과로 마무리를 지었다. “수고하셨어요.” 단유에게도 허릴 숙여 인사하는 도연에게 단유 역시 정중히 답례했다. “네.” 고개를 들어 올린 도연의 눈에 일이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그 결과가 못내 아쉽다는 안타까움,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폐를 끼쳤다는 미안함이 뒤섞여 울렁거리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단유는 인사를 마치자마자 돌아서서 친구들에게로 향했다. ======================================= [487] 코미디(3)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에서 울음을 참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글쎄? 딱히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기가 곤란하다. “어떻게 하면 돼? 뭘 하면 되는 거야?”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한 큰 눈동자가 단유를 바라보았다. “…….” “왜 아무 말도 안 해? 무슨 말이라도 해봐, 해보라고!” 부탁과 협박의 중간 쯤을 줄타기하는 말투에도 단유는 입을 열지 않았다. **** “여기 사인 좀 해주세요.” “사인이요?” 도연은 의외의 부탁에 펜을 드는 대신 단유의 눈을 바라보았다. 진심일까? “네.” 도연은 머뭇거리다가 항상 챙기고 다니던 펜을 집어 단유가 건넨 ‘리본소녀’ 싱글 앨범의 재킷에 ‘To’라고 썼다. “거기 명수에게 라고 써주세요.” “네?” “명수, 요. 밝을 명, 빼어날 수.” 그렇게 말한들 한자를 잘 모르는 도연으로서는 그게 무슨 글자인지 모른다. 하지만 한자를 모르는 거지, ‘명수’라는 한글을 모르는 건 아니다. “부탁받으신 거예요?” “네. 지난번에 같이 왔었던 친구요.” “아.” 지난번에는 촬영이 끝난 후에 워낙 분위기가 좋지 않아서 사인을 받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명수는 단유에게 따로 부탁했다. 그 부탁을 하려고 일부러 리본소녀의 싱글 앨범을 사기까지 했다. 도연은 멋들어진 사인을 한 뒤, ‘만나서 반가웠어요’라고 시작해서 ‘많이 응원해주세요’라는 말로 싸인 멘트를 마무리했다. “여기요.” “고맙습니다. 괜찮으시면 한 장 더 해주실 수 있나요?” “네.” 도연은 다시 건넨 앨범을 받아서 ‘To’라고 썼다. ‘김단유? 단유? 단유씨?’ 어떻게 써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상미에게, 라고 써주세요.” “…상미요? …그때 왔었던 여자 친구?” “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도연은 잠깐의 머뭇거림 뒤에 다시 멋들어진 사인을 써내려갔다. ‘저보다 예쁘신 거 같아요’라는 말이 들어간 싸인 멘트를 쓴 뒤, 하트를 그리며 마무리를 짓고 단유에게 건넸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서는 단유. 도연은 단유의 등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일중은 금일 촬영할 콘티북을 살피면서 관자놀이 부근을 엄지로 꾹꾹 눌렀다. “여기 커피요.” “어, 고마워.” 강준이 건넨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일중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 뒤 강준을 돌아보았다. “애들은?” “대기 중입니다.” “…도연 씨는 어때?” “계속 콘티만 보고 있어요.” 일중은 절로 나오는 한숨을 참지 못하며 콘티를 내려놓았다. 강준이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오늘은 2회분을 모두 끝내야 하는데, 가볍게 가시죠?” “배우가 연기를 못해도, 책임은 감독이 져야 하는 거야. 이번 일 제대로 마감 안 하면 앞으로 이 일 따내기 어렵다는 거 알잖아?” “그래도…감독님이 너무 신경을 쓰시니까 그러죠.” 일중은 그래도 오래 봤다고 나름 신경 써주는 강준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씀씀이에 고마워할 여유가 없었다. 까놓고 말해서 관공서 홍보영상이란 건 별로 돈도 안 되는데 괜스레 까다롭기만 한 것이었다. 굳이 비유하면 가시 많은 꽁치를 정성스레 구워서 가시를 하나하나 발라낸 뒤에 손님에게 내줘야 하는데, 수고비라도 두둑이 받으면 모를까, 엄한 트집이나 잡지 않을까 걱정만 하고 마는 일이었다. ‘그래도 손님 떨어질까 두려워서 감히 손을 놓지도 못하지.’ “됐고, 30분 뒤에 슛 들어가도록 하자.” “네.” 강준이 물러난 후, 일중은 마른세수를 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촬영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며 콘티를 조정해 볼 생각이었다. 매니저는 수첩을 뒤적거리며 일정을 살피다가 고개를 들었다. 중얼중얼대며 콘티 속 대사를 암기하는 도연은 집중하느라 주위의 시선 따위는 의식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사실 저런 모습을 자주 본 매니저는, 그래서 도연이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었다. 가수 데뷔 조에 들 때도 그랬고 그 이후에도 그랬지만 도연은 언제나 최선을 다해 집중을 했다. 가사를 빨리 외우기도 하고 안무를 빠르게 습득하는 능력도 다른 멤버보다 빨랐다. 독하게 공부하는 모습도 그렇고, 회사에서 일부러 스케줄을 빼지 않는 한 군소리 없이 착실하게 스케줄을 소화해내는 모습도 그랬다. 다만 그런 태도와 무관하게 카메라 앞에서 작아지는 도연이었다. 음악프로 무대에 서기 위해 회사 내에서 수십 번의 카메라 리허설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카메라 앞에서 어색함을 드러내는 도연이었다. ‘오프 행사나 사인회에선 끼가 넘쳐나는 아인데….’ 하물며 지금껏 해본 적 없는 연기라면 더더욱 힘들 터. 도경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들은 매니저는 회사의 허락 하에 초단기 연기 레슨을 준비했다. 카메라도 문제지만 우선은 연기에 자신감을 붙여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사전에 취소하지 못한 행사도 다른 멤버들과 소화해야 했던 도연은 누구보다 바쁘고 힘들게 일주일을 보냈다. 그런데도 역시나 군소리 없이 묵묵히 따라온 도연이 매니저는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저런 모습을 다른 사람들도 다 알아야 하는데.’ 알기만 하면 저 매력에 흠뻑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다. 앨범을 한 장이라도 더 사고 싶고, 응모권을 더 많이 확보해서 사인회에 참석하고 싶어질 것이다. 매니저가 상념에 빠져있던 사이 도경이 슬쩍 다가와 매니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으응?” “앉아서 꿈꿨어요?” “무슨…. 왜?” “30분 뒤에 촬영이라고 하던데, 이제 메이크업 좀 손봐야 하지 않을까 해서요.” “아, 그래.” 매니저는 다시 도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콘티만 들여다보는 도연이었다. 이미 저 콘티 속 대사들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외우고 있을 도연이었지만, 여전히 자신감이 부족해서 거듭 콘티를 들여다보며 대사를 입으로 익히고 있었다. 도연이 도경의 부름에 고개를 들어 올리는 것은 본 뒤에야 매니저는 생각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오늘의 촬영장소는 학교 운동장 근처였다. 지난주 촬영한 곳과 다른 장소였지만 운동장만 나오는 장면이라 문제는 없었다. 오전 10시지만 따뜻한 봄날의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중이라, 일만 아니라면 아무 풀밭에나 드러누워서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고픈 마음이 드는 날씨였다. 물론 그냥 누우면 안 된다. 자리라도 깔아서 옷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해야 했다. 비싼 옷이니까. “오늘 화장 잘 먹었다.” 도경이 브러쉬를 든 채로 미소 가득한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도연은 거울로 이리저리 살피더니 도경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힘내. 잘할 거야.” “네, 언니.” 도연은 콘티북을 들고 카메라가 세팅된 곳으로 이동했다. 화창한 봄 햇살에 운동장이 살짝 데워질 정도였지만, 촬영할 벤치는 푸른 나무가 우거진 그늘진 곳이라 시원했다. 그래서 연기를 하기에는 좋아 보일 것 같지만, 촬영하기에는 그늘이 짙어서 불가피하게 조명 2개를 따로 설치해야 했다. 가끔은 이렇게 대낮에도 조명을 써야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반사판도 카메라 앵글에 걸리지 않는 선에서 촬영팀 스태프 한 명이 이리저리 각도를 조정해서 들고 있어야 했고. 벤치에는 이미 단유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잘 부탁드려요.” 도연이 먼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아, 네.” 단유도 일어나 인사를 받았다. “너희는 나이도 비슷한데, 왜 그렇게 서먹해?” 촬영감독이 앵글을 맞추다가 장난투로 물었다. “단유가 말을 놓긴 어렵죠. 1살이라도 많으면 어른인 데다가 대스타인데.” 촬영팀 스태프 한 명이 웃으면서 감독의 말을 받았다. 그냥 하하 웃으면 그만일 테지만, 어쩐지 ‘대스타’라는 단어가 가슴에 와 닿는다. 그렇다고 정색을 할 수만은 없는지라 도연은 설핏 미소를 지어본다. 힐끗 바라보니, 아무렇지도 않게 일중을 바라보며 슛 사인을 기다리는 단유의 모습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참 특이한 소년이었다. ‘소년’이라고 표현하긴 해도 어쩐지 ‘오빠’ 같은 느낌이 물씬 드는, 그래서 ‘청년’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드는 소년이었다. 게다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민망한 일이지만 자신에게 사인을 요청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정 PD도 자신에게 사인을 부탁했는데―아마 회사 홍보용으로 쓸 모양이지만 그런 것은 흔한 일이었다―단유는 친구의 사인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것을 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싸인 필요하지 않으세요’라고 대놓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냉정하게 돌아서는 이에게 묻기는 구차한 질문이었다. ‘잘 생겼지?’라고 도경이 운을 뗀 적이 있는데, 못생기진 않았다. 워낙에 잘 생긴 사람들이 많은 바닥에서 지내고 있다 보니 원빈 같은 탑 급 연예인 정도가 아니고서야 잘 생겼다는 감흥도 없다. 그래도 ‘일반인’들 중에서는 괜찮은 외모이니 아마도 자신이 잘생겼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자 친구도 많겠지.’ 그러니 어쩌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계산에 의한 것인지도 모른다. 일부러 차갑게, 사무적으로 대하는 것인지도. ‘나쁜 남자 컨셉?’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그의 시선이 자신을 벗어나 있다. 자신이 그를 훔쳐보는 정도로도 자신을 보지 않는 단유였다. 그렇다고 도연이 단유에게 이성적인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같이 연기할 상대역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호기심 때문이야.’ 도연은 자신의 관심과 생각을 그렇게 정리했다. “컷!” 일중은 모니터 옆에 놓인 전자담배를 집어 입에 물었다. 버튼을 누르자 코일이 열을 뿜어내며 액상이 기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숨을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내뱉자 연막탄 같은 하얀 연기가 허공으로 뿜어져 올라간다. 강준이 한 걸음 뒤에서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강준아.” “네, 감독님.” “쉬었다 가자.” “네. 10분 쉬었다 갑니다!” 여기저기서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린다. “정 PD도 딱하네. 웬만하면 그냥 가지, 왜 저런대? 예술 영화 찍을 것도 아니고 말이야.”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고정해놓은 나사를 풀고 위치를 옮길 준비를 했다. 옆에서 돕던 스태프가 감독의 말을 받았다. “워낙 심하니까 그렇겠죠. 대충 찍었다가 퇴짜 맞으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요.” “아니면 그냥 CG로 떡칠을 하든가. 요새 CG가 워낙 좋잖아? 들어보니까 윗사람들은 그런 거 좋아한다던데.” “이번에 오더 내릴 때요, 되게 깐깐하게 주문하더란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발주를 한 교육부에서 이번 작품에 기대가 크다는 이야기였는데, 촬영감독은 그게 이렇게 깐깐하게 촬영해야 할 정도인가 싶었다. 고개를 슬쩍 들어보니 도연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자리를 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벤치에 앉아서 묵묵히 콘티북을 살피는 단유. “쟤는 카메라로 찍을 때나 안 찍을 때나 똑같네. 그냥 원래 성격인가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연기가 자연스럽겠죠.” “그건 성격이 비슷한 거랑 연기랑은 다른 문제야. 특히 카메라 앞에서 정해진 대사를 하는 건 다른 거라고.” 입에 쉽게 붙지 않는 대사를 적당한 어감으로 뱉어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단유도 그런 점에서 보면 다소 발음이 어눌해지거나 버벅거리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이채로운 점은 몇 번 연습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변한다는 것. 말은 일종의 습관과도 같아서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일류 배우들 중에서도 현장에서 지적받은 내용을 한두 번 만에 고치는 경우가 많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단유는 연기가 처음이라면서도 고쳐낸다. “배우의 끼가 있거나, 아니면 아나운서 쪽으로 준비를 하거나.” “왠지 아나운서는 억지 같은데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실없는 농담으로 낄낄거리며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촬영팀이었다. “단유 씨.” 자리에서 벗어났던 도연이 다시 단유에게로 향했다. 콘티를 들고 있던 단유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도연이 말했다.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어요?” 또?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할 말은 없지만 들어주기만 하는 건 문제가 아니니까. ======================================= [488] 코미디(4) 단유가 따라오는 것을 확인한 도연은 멀지 않은 나무 그늘 아래에서 돌아섰다. 녹음이 푸르러 그늘마저 푸르게 느껴지는 시원한 곳이었다. “저 좀 도와주세요.” 도와달라고 해도 단유로서는 막막하기만 하다.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데, 도연은 어떤 부탁을 하려는 것인지 머뭇거림이 길었다. “사실은 최근에 연기 연습을 받았는데요.” 도연은 그저께 연기 레슨을 받던 중의 일을 떠올렸다. “가수라서 그런지 발성은 좋네.” “고맙습니다.” “대사도 잘 외우고. 그런데 연기란 건 그냥 목소리만 내는 게 아냐. 사실 가수도 무대 위에서 연기를 펼치는 건 마찬가지라지만, 카메라 앞에서 대본에 따라 연기하는 건 또 다른 거거든.” “네.” “지금 당장 메소드 연기법 같은 걸 배운다고 실천할 수도 없는 문제니까, 간단하게 이야기할게. 일단 액팅(Acting)을 한다는 건, 지금의 너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는 뜻이야. 대본이나 혹은 기타 디렉션에 따라 꾸며진 모습을 과장해서 보여주는 행위지. 그런데 이 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뭘까? 아까 말했던 발성도 중요하고, 감정도 중요하고, 동작도 중요하고 그렇겠지? 하지만 난 ‘자연스러움’이 가장 중요하다고 봐. 자연스럽게, 보는 이로 하여금 위화감이 들지 않게 하는 것. 이게 가장 중요해. 감정, 행동, 발성 같은 건 그런 ‘자연스러움’을 위한 부수적인 것들이야.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서 감정을 다스려야 하고, 행동이 과하지 말아야 하며, 꾸민 듯한 발성이 나오면 안 되는 거지.” 선생님은 연습에 지친 도연에게 땀을 닦으라며 수건을 건넸다. 그리고 말을 계속 이었다. “네가 카메라 앞에서 어색한 건 마음의 문제야. 그건 당장 어떻게 해줄 수 없어. 하지만 조언을 하자면, 혼자 연기하는 것이 아닌 상대 배역의 도움을 받길 바랄게. 물론 상대도 초보라면 문제가 있겠지만, 그래도 네 연기가 개선될 여지는 있어.” “어떻게요?” “감정을 주고받아.” “감정을요?” “우리 몸은 정직해. 자신이 품은 감정에 따라 좌우되지.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눈빛이 변하고, 목소리의 톤이 변하고, 움직임이 변해. 그러니까 먼저 감정을 가져.”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해요?” “그건 대본에 따라 다르겠지. 만약 상대가 연인이라면,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겠다는 마음을 품는 거야. 그 마음을 계속 되뇌면서 상대의 이름을 부르고, 상대의 눈을 바라보고, 상대의 연기를 받는 거야. 만약 상대가 부모님의 원수다, 그러면 원수를 향한 마음을 가지는 거야. 무슨 뜻인지 알겠니?” “몰입이 어려울 거 같아요.” “그래, 당연히 어렵겠지. 그런데 적어도 네 가슴 속에서 그 마음을 계속 되뇌는 게 중요해. 계속 되뇌면서 카메라를 잊는 거야. 널 바라보고 있는 카메라와 시선들을 잊고 오로지 상대에게 초점을 맞추는 거지. 그리고 대사를 떠올려. 암기한 대사들이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게 하는 거야.” 말은 굉장히 쉽게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울 리가 없었다. “만약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도움을 받는 것도 좋아.” “어떻게요?” “상대 배우에게 부탁해. 감정을 잡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물론 이런 어설픈 방식은 전문 배우를 꿈꾸는 이들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초단기로 연기 레슨을 받겠다는 도연에게는 극약 처방이 될 수 있다고 선생님은 판단했다. “친구처럼요?” “네. 친구처럼 이야기를 좀 나누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해서요.” 단유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그 효용성에 대해선 의심이 들었다. 가수나 배우라고 해도 모두가 감성적인 것만은 아니고, 때로는 감정이 아닌 기술이 필요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기술이나 감정이나 연습이 부족한 단유가 그나마 연기를 할 수 있는 것도 평상시 단련된(?) 무표정과 무감정이 도움이 된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단유가 본 도연은 그런 감성적 접근이 유용하지 않을 것 같았다. 굳이 비교하자면 도연은 자신과 비슷한 유형이었다. 감성보다 이성으로 접근하는 케이스. 카메라가 두렵다지만, 그것도 다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서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하는 단유였다. 그러나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깃든 도연을 보니 굳이 그렇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지 싶었다. 게다가 만약 단유가 잘못 판단한 것이라면, 도연의 선생님이 말한 방법이 도연을 도울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돼요?” “일단 설정상 동급생이니까 말을 놓을…까요?” “그래요.” “그럼 먼저 놓으세요.” “도연 씨가 먼저 놓아요.” “아, 그, ‘도연 씨’라는 호칭도 바꾸죠. 친구끼리 무슨 씨 하는 건 이상하잖아요.” “그럼….” “…그냥 도연이라고 불러요.” 단유는 도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알았어. 도연아.” 망설임 없이 나오는 단유의 대답은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어, 단…유야.” “응.” “너, 넌 저기 말이야.” 비록 자신이 먼저 말을 놓자고 했지만, 영 어색했다. 반면에 단유는 뭘 해도 자연스럽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꺼내지? 친구 사이에 할 말이 뭐가 있지?“ “너, 저기, 여자 친구 있어?” 본인이 말을 꺼내고 놀란 도연. 그리고 그런 도연을 덤덤히 바라보는 단유. 도연은 자신을 바라보는 단유의 눈빛이 마치 ‘왜 이렇게 한심하니’라고 타박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없어.” “아, 그렇구나.” 서둘러 대답한 도연은 빨리 화제를 바꿨다. “공부 잘하니?” “응.” “응?” “잘한다고.” 워낙에 많이 들은 말이고, 스스로도 남들과 비교해서 모자람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냥 잘한다고 대답했을 뿐인데 도연은 미처 생각지 못한 대답을 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아, 그렇지. 전교 1등이라고 했지. 지금 중간고사 기간 아냐?” “이번 주에 시험이 끝났어.” “아, 진짜? 좋겠다. 난 다음 주가 시험인데.” “시험공부 해?” “응. 해야지. 난 공부 많이 해야 하거든.” “왜?” “시험 성적 안 좋으면 가수 그만두기로 했거든.” “재미있네.” “뭐가?” “내가 아는 누나는 가수 하느라고 학교 성적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었거든.” “아, 그래.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학업과 동시에 병행하려면 많이 힘들겠다.” 이런 질문을 많이 들은 도연은 거의 공식화된 답변을 내놓았다. “가수가 꿈이었기 때문에 몸은 조금 힘들지만 괜찮아.” 단유는 도연의 대답에서 익숙한 데자뷔를 느꼈다. “슛 들어갑니다, 스탠바이 하세요!” 강준의 소리가 들리고 여기저기 쉬고 있던 스태프들이 다시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날이 좋아서 그런지 금방 긴장이 풀리네요.” 스크립터와 함께 기록을 확인하던 일중은 강준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배우들도 긴장을 풀면 좋겠는데.” 강준은 슬쩍 배우, 라고 지칭된 도연과 단유를 바라보았다. 10분 동안 저쪽 그늘에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던 강준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결국 애구만.’ 일에 집중을 못 하는 이유가 혹시 단유라는 남자애한테 흑심을 품어서 들떴기 때문일까? 괜히 어색한 모습을 보이던 지난주엔 그저 처음 만난 터라 서먹해서 그런 걸까 싶었는데 오늘 도연을 보니 어쩐지 다른 마음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어쩐지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어쨌든 ‘연예인’이니까. 다시 슛이 들어가고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연기가 시작되었다. “아, 날 좋다.” 양발을 쭉 뻗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리는 도연. “나 들어가서 공부해야 돼.” 단어장을 넘기며 투덜거리는 단유. “야, 이렇게 날이 좋은데 교실에만 처박혀 있을래?” 그런 단유에게 애교스럽게 핀잔을 던지는 도연. “날이 좋든 안 좋든 학생은 공부를 해야 돼.” 심드렁한 단유. “맨날 공부, 공부. 공부 말고는 할 게 없어?” 어깨로 단유를 밀치는 도연. 하지만 단유는 여전히 단어장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학생이 공부를 안 하면 뭘 하냐?” “학생도 사람이야. 사람은 가끔 쉬어주기도 하고, 취미생활도 해야 한다고.” 학생도 사람, 이란 말에 도연을 바라보는 단유,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젓는다. “그런 건 사치야. 학생은 원래 죽어라 공부만 해야 한다고.” 말을 조금 버벅거렸지만, 무사히 넘어갔다. “치, 맨날 똑같은 공부. 솔직히 지겹지 않니?” 본래는 단유에게 동의를 구하는 듯, 은근히 묻는 어조여야 했지만, 어쩐지 콧소리가 많이 들어간 애교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지겨워도 해야지.” 단유는 어쩔 수 있나, 하는 표정으로 다소 허탈한 느낌을 주는 대사를 읊어야 했다. 하지만 감정이 들어가 있지 않은 기계적인 반응. 하지만 본래 정해진 이미지와 어색함이 덜해서 일단 또 무사통과. “지루해.” 동의를 얻지 못해 삐친 척을 하며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는 도연. 그리고 곧 두 사람이 고개를 들고 위를 쳐다보면 CG로 글자가 나온다. 「즐겁고 신나는 공부, 꿈과 끼를 찾는 수업, 행복한 교육을 꿈꿉니다.」 “컷.” 일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연의 긴장이 옆자리에 앉은 단유에게 느껴졌다. “아까보다 많이 좋았어. 그냥 이대로 써도 될 거 같은데?” 일중이 미소를 지었다. 억지 미소 같지는 않아 도연도 한시름 놓았다. “그럼 이제 각자 개인 바스트 컷 몇 개 찍고 넘어가자. 강준아.” “예.” 뒤에서 대기 중이던 강준이 발 빠르게 다가와 촬영 감독에게 위치 세팅을 이야기해주고 순서를 정했다. “누구 먼저 할래요? 도연 씨? 아니면 단유?” “니가 먼저 할래?” “난 상관없어.” “그럼 먼저 해. 난 좀 있다가 찍을래.” 도연은 단유에게 우선권을 주고 물러났다. “너희 언제부터 말 놓았냐?” “아, 조금 전 쉬는 시간 때요.” “이야, 빠른데? …소문 안 낼게.” 무슨 소문을 내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감독에게로 돌아가는 강준의 뒷모습을 보다가 촬영감독의 부름에 단유는 다시 벤치에 앉아 지시에 따라 자세를 고쳐가며 촬영 준비를 했다. “수고했다. 도연아.” “저 잘했어요?” “그래. 잘했어.” 도연은 자신의 연기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하는 동안 내내 머릿속으로 ‘내 친구야, 내 친구야’를 백 번은 더 되뇌었던 것 같았다. 계속 단유를 훔쳐보며 단유의 모습을 가슴에 담으려고 애를 썼다. 다행히 감독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걸 보면 무사히 넘어간 듯하니 선생님의 조언이 무쓸모는 아니었다. “이렇게 잘하는데 말이야. 괜히 사람들이 걱정했어. 그렇지?” “잘하긴요. 지금도 가슴 떨리는데.” “아냐, 잘했어. 처음 하는 연기치고는 잘한 거야. 이거 나중에 드라마 캐스팅도 한 번 알아봐야겠는데? 우리 막내 연기자로 성공할 수 있게?” “아이참. 놀리지 말아요, 오빠.” 매니저는 시답지 않은 농담으로 조금이나마 마음을 풀어주려 애를 쓴 뒤, 감독에게로 향했다. “감독님.” “아, 네. 매니저님.” “저희 도연이, 괜찮았나요?” 그 전에 5번의 테이크가 있었고, 그 테이크의 대부분이 도연 때문이었음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물어서 영상이 잘 나올지 확인하는 것도 매니저의 역할이었다. “네. 괜찮았어요.” 턱을 괴고 모니터를 바라보는 일중은 매니저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고 대화를 마치려 했다. “잘 봐주세요, 감독님. 저희 도연이, 처음이잖아요.” “그러고 있어요.” “…그리고.” 감독은 미간을 좁히며 매니저를 바라보았다. 개인 바스트 샷은 찍기에 따라서 인물의 이미지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 부디 잘 찍어달라고 부탁을 할 참이었던 매니저는, 하지만 눈살을 찌푸리는 감독의 표정에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감독님. 더우신데 수고하시라고요.” “수고하고 있어요.” “아, 네.” 현장에서는 어떤 감독도 신경이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촬영시간이 지체되는 와중이라면 말이다. 그 와중에 매니저란 작자가 와서 속을 살살 건드리려 하니 좋은 소리가 나올 턱이 없다. 물론 촬영이 끝난 후에는 적당히 관계 개선을 위해 좋은 말로 무마할 생각이 있다. 하지만 아직은 촬영 중이니 약간 신경질을 부려도 된다. 물러난 매니저는 ‘자식 가진 부모가 약자’라는 심정으로 돌아섰다. 도연이 도경과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다가 방향을 바꿔 학교 밖으로 향했다. 어쩐지 속이 타는데 밖에 나가서 음료수라도 사와야 할 것 같았다. 사는 김에 스태프들 것까지 사서 돌리기도 해야겠고. 시멘트로 포장된 갓길을 뚜벅뚜벅 걸어 교문으로 향했다. ======================================= [489] 코미디(5) 명수 때문에 축구에 관심이 생겨서 이것저것 찾아보던 때가 있었다. 방과 후 보육원으로 돌아가기 전, 학교 도서관에 들러 책을 빌려 보던 시절의 이야기다.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는데, 2천여 명의 사망자, 만 이천여 명의 부상자, 5만여 명의 피난민이 발생한 전쟁이었다. 2차 대전도 아닌 1969년, 대한민국에서는 한참 제 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시행되던 때였다. 엘살바도르가 온두라스를 먼저 침공한 이 전쟁은 약 100시간 동안 벌어졌으며, 짧은 시간에 많은 희생자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전쟁의 이유가 재미있다. 물론 당사자인 두 나라에겐 중대한 이유였겠지만 외부에서 보기엔 너무 ‘사소한’ 문제라 여길 만한 이유였다. 전쟁의 원인은 1970년 월드컵 예선에서 맞붙은 두 나라의 축구 시합 때문이었다.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다. 물론 이전부터 두 나라 간에 월경(越境)이나 토지문제 등으로 다툼이 있었으나, 축구가 기폭제가 되어 전쟁이 발발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사소한 이유’가 큰 싸움의 원인이 되는 경우는 종종 볼 수 있다. 별거 아닌 사소한 말 한마디에 형제끼리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주먹질을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쩌다 나온 말 한마디에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는 부부도 있다. 형제나 부부가 그럴진대, 생판 남이면 어떨까? 타인이기에 더 조심스러울 수도 있지만, 서로를 모르기에 ‘어떤 말’은 상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실수’라고 넘기거나 용서를 구하고, 사과를 받으며 끝나는 상황이라면 점잖은 편이다. “당신 뭐랬어!” “뭐? 당신? 당신?” “어린 놈의 자식이 어디 눈을 시퍼렇게 뜨고 쳐다 봐?” “봐? 봐? 와, 그냥 말 까네? 댁이 날 언제 봤다고 말을 까? 응?” 시작은 뭐였을까? 하지만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면서, 모두가 그 싸움을 인지했을 때쯤에는 싸움의 원인 따위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던 모양이다. 상대가 자신의 자존심을 건들였고, 본인은 잠깐 이성을 잃었을 뿐이고, 이성을 잃은 순간 입에서 통제를 벗어난 말과 단어가 튀어나와 상대를 자극했으며, 흥분한 상대가 거품을 물고 주먹을 치켜 올리며 칠 듯한 자세를 취하면, 상대에게 얕보일 수 없다는 본능이 울컥 치밀어 올라 함께 멱살잡이를 시작한다. 대부분 그렇게 시작한다. 그나마 이성이 있다면, 그리고 이성을 가진 주변인들이 옆에 있다면 싸움은 거기서 대치 형국으로 이어지거나, 혹은 타의에 의해 서로 떼어지면서 눈을 부라리는 정도로 마무리될 것이다. 하지만 주변인의 이성이 함께 안드로메다로 갔던지, 아니면 싸움을 말려야 한다는 이성의 목소리를 들을 귀가 없다면 싸움은 본격적이 될 것이다. 단유가 본 싸움은 바로 그 본격으로 넘어가기 바로 전 단계였다. “새끼가 어디라고 행패야?” “새끼? 말 다했어? 오냐 오냐 해주니까 아주 막 나가자 이거네? 응?” “오냐오냐? 이게 미쳤나? 당신이 뭔데 오냐 오냐를 해? 당신이 뭔데?” 단어의 취사선택이 가히 상스러운 경지에 오르기 전, 억센 억양과 거친 파열음이 터지는 순간이다. “아, 왜들 그래요? 애들도 보는데.” “뭐해요? 말려요, 얼른.” 말리는 이들이 붙잡은 건 조명 스태프 중 한 명이었다. 나이가 많지 않은 이였는데, 보통 드센 성격이 아닌지 선배들이 잡고 있는데도 ‘놔요, 이거 놔 봐요!’라며 저항하며 눈을 뒤집고 있었다. 한편 상대는 고작 한 사람만 그의 팔을 붙잡고 있는데, 다름아닌 도경이었다. “매니저님 참아요. 왜 그래요?” “놔 봐! 저 어린 놈의 자식이 싸가지 없게….” 듣던 어린 놈이 눈을 뒤집었다. “뭐? 어린 놈? 싸가지? 이게!” 어린 놈이 잡고 있던 팔을 뿌리치며 달려들었다. 장정 세 사람이 안고 있는데도 힘을 막을 수 없다. 그냥 시늉만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칠 기세인지라 다른 이들이 얼른 달려와 둘 사이를 막는다. “야, 오광철! 뭐하는 짓이야!” 굵은 팔뚝을 드러내며 등장한 조명 감독이 귀청이 나갈 정도로 큰 소리를 질렀다. 단유의 바스트 샷을 찍다가 교문 근처가 소란스러워지면서 사람들이 몰리는 분위기라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사람들. “강준아.” 책망하는 기색이 역력한 부름에 강준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 진짜.” 도대체 밑의 애들은 뭐하길래 촬영장 통제도 못 하고 있는가 답답한 마음에 강준은 구시렁거리며 교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강준이 가고도 소란이 쉬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카메라를 잡고 있던 감독도 집중을 못 하고 교문 쪽을 향해 힐끗거렸다. 일중의 신경이 날카롭다 못해 이마에 핏줄이 곤두설 때쯤 강준이 아닌 다른 스태프 한 명이 달려왔다. “싸움이 났는데요?” “싸움? 누가?” “조명 팀 막내랑 도연 씨 매니저요.” “뭐? 막내랑 매니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조합이었다. 온갖 궂은일은 다하면서도 찍소리 하나 못 내야 정상일 막내가 감히 싸움판을 벌였다는 것도 기가 막힐 노릇인데, 연예인의 매니저가 자기 연예인의 일터에서 싸움을 벌인다? 상식적이지 않다. 상식적이지 않으니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 없었다. 일중은 스크립터에게 모니터와 장비를 지키도록 지시한 후 교문으로 향했다. 그 뒤를 촬영감독과 촬영팀 스태프들이 우르르 따라갔다. 싸움이 났다고 해도 어른들의 일이었고, 그들만의 사정이 있을 테니 단유가 끼어들 이유는 없었다. 끼어들 틈도 없을 테고. 그래서 단유는 제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리며 쉬려고 했다. 도연과 도경이 황급히 교문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 짧은 순간이지만 갈등했다. 솔직히 말해서 도연과 단유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비록 몇 시간 전에 도와달라고 해서 친구인 양 말도 놓고 사적인, 하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대화 몇 마디를 나눈 게 전부다. 그리고 오늘의 촬영이 끝나면, 소소한 지면 광고 촬영 외에는 만날 일도 없을 관계다. 남인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과 달리 가슴에서는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왜냐하면 도연은 이 현장에서 소수이자 약자이기 때문이었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제외하면, 나이 어린 여자에 불과한 데다가 자기편이라곤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 뿐인데, 그 매니저가 싸움의 당사자이니 도연을 지켜줄 이는 스타일리스트 뿐이다. 그런데 상대는 조명팀. 그 사람이 이 현장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는지는 몰라도 굳이 세력을 구분하면 몇 사람을 제외한 현장의 모든 사람이 그의 편이다. 그러니 도연은 그 싸움의 현장에서 소수고 약자다. ‘참나.’ 단유는 자신이 내린 결론의 억지를 비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유가 바라본 싸움은 그랬다. 이성을 상실한 감정의 대립. 주먹질 일보 전까지 갔지만, 두 사람 다 싸움을 해결하려는 이성적 움직임은 없다. 감정적인 말과 행동, 조금이라도 상대를 깎아내리려는 저열한 말들만 오갈 뿐이었다. 감정이 앞서니 더더욱 화를 부추기고 대립은 첨예하게 부딪힌다. “오빠, 그만 해요.” 매니저를 붙잡은 도경과 그 옆에서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 도연. 그리고 조명팀 막내의 팔과 허리 등을 감아서 잡고 말리는 중인 사람들. 역시나 단유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애들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짓거리야! 여기 촬영장인거 몰라?” 아무리 자기가 박찬욱 같은 유명한 영화감독도 아니고 국내 굴지의 광고기업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촬영장에서, 자신의 눈이 닿는 곳에서 싸움이 벌어질 정도로 권위가 무시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왜 싸운 거야!” 싸움의 두 당사자가 서로 노려보는 가운데,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던 조명팀의 한 사람이 겨우 입을 열었다. “막내가 조금 불평을 했어요. …촬영이 지연되는 것 때문에요. 그랬더니 저 매니저가 달려들어서는 막내를 몰아붙였고, 막내도 이성을 잃었는지 같이 말을 주고받다 보니…이렇게 됐습니다.” 다른 거 다 떠나서, 막내가 촬영 지연을 불평할 정도로 촬영장의 군기(?)가 빠졌다는 사실에 열이 받은 일중이었다. 막내를 노려보는 일중의 고리눈에 막내가 매니저를 삿대질하며 변명했다. “저 새끼가 먼저 달려들었다니까요?” “새끼라니! 저게 진짜….” 매니저가 욱하는 표정으로 달려드는데, 도경의 손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너 말조심해, 내부인도 아니고 외부인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막내는 답답하다는 듯 허리에 손을 얹고 탄식을 쏟아냈다. “존나 열 받네.” “네가 먼저 뭐라고 했으니까 이런 일이 벌어졌을 거 아냐!” 같은 편끼리 보호해주진 못할망정, 자기만 잘못한 사람인 양 몰아세우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막내였다. “별말 안 했어요!” 그 말에 매니저가 침을 튀기며 소릴 질렀다. “안 해? 안 했다고? 이 씨발 놈이 사람을 완전히 갖고 노네?” “오빠!” “뭐? 씨발?” 세 사람을 달고도 한 걸음 내딛으며 달려들려는 막내. 다시 사람들이 달라붙어서 ‘왜 이래’ ‘야, 그만해’ ‘진정해’ 같은 말들이 요란스럽게 오갔다. 단유는 그 형편없는 행태들을 눈에 담았다. 매니저는 학교 근처에 있던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서 스태프들에게 나눠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교문을 향해 걸어가던 중이었고. 그런데 교문 밖에서 담배를 피우던 스태프들의 이야기가 담을 넘어 들렸다. “연기 ×도 못하지 않아요? 그러면서 왜 연기를 하겠대?” “요즘은 개나 소나 연기한다고 나서잖아?” “가수만 해서는 돈을 못 버니까 그래. 이제는 연예인도 멀티 뛰는 시대라고.” 매니저는 순간적으로 혈압이 올라 현기증이 나는 느낌이었다. 누구는 제 놈들 수고한다고 음료수라도 사줘야지, 생각하는 판인데 정작 그들은 흉이나 보면서 깔보고 있다. “그쪽 회사는 애들 연기도 안 가르치고 보낸 거야, 뭐야.” “민폐지. 그게 민폐야.” “얼굴만 반반하면 다들 연기 한 번씩 해보겠다고 깝죽대는 꼴이라니.” “우리가 영세하다고 깔보는 거 아냐?” “에이, 그럼 지들은요? 지들이 무슨 JYP야, SM이야?” 빡(?) 돈 매니저가 불같이 화를 내며 교문을 벗어났고, 당연히 그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 없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욕을 들으면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기분이 나쁘다. 특히 혈기 왕성한 20대 막내는 분기를 참지 못해 앞에 섰다. “갑자기 뭐야! 당신이 뭔데 지랄인데?” “뭐, 지랄? 이 새끼가….” “뭐? 새끼?” 말꼬리를 주욱 늘리며 기분 나쁘다는 티를 한껏 낸 막내가 눈썹을 추켜 올리며 이죽거렸다. “씨발, 매니저가 이 모양인데….” 뒷말은 듣지 않아도 도연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주먹질 일보 직전까지 갔다. “당신도 여기가 어디라고 소란을 피워! 내가 우스워?” 감독이 매니저에게 소리쳤다. 그래도 차마 감독에게만큼은 큰 소리를 낼 자신이 없었던지, 아니면 사람이 몰리면서 이성을 찾은 것인지 매니저는 입술을 꾹 다물고 감독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아니, 여전히 막내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리고, 강준이.” “네.” “애들을 어떻게 관리하길래, 막내가 이런 소란을 피우도록 내버려두는 거야? 응?” 일중이 강준의 가슴을 주먹으로 말뚝 박듯 찍어 쳤다. 맞은 통증과 부끄러운 마음이 섞여 강준은 맞은 자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얼굴을 가득 찌푸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야? 응? 개판으로 만들래? 만들고 싶어? 날 잡아서 복날 개 잡듯이 해야 되겠어?” “아닙니다.” “아니면 잘해야 할 거 아냐! 말로만 떠들지 말고 잘하라고 새끼야!” 일중은 강준을 혼냈다. 모든 스태프와 외부인들이 보는 앞에서 욕먹는 강준의 심정이야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이렇게 해야 했다. 그래야 질서가 선다고 생각했으니. “다들 안 돌아가고 뭐 해? 촬영 안 할래? 다 접을까?” 일중의 호통에 다들 학교로 뛰어들어갔다. 그 와중에도 도경과 도연, 그리고 단유는 자리에 남았다. 도경과 도연이야 매니저를 말리느라고 있는다지만 단유는 왜? “너도 들어가 있어.” 차마 단유에게까지 큰 소리를 낼 순 없었지만, 여전히 분히 풀리지 않은 감독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단유는 일중의 호통에 매니저와 막내를 돌아보았다. “왜 안 들어보세요?” “뭐?” “왜 이분께는 여쭙지 않느냐고요.” 일중은 이제 이 어린 꼬마까지 자신을 우습게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게 한숨을 내쉰 뒤 귀찮다는 표정으로 턱짓을 했다. “그냥 들어가서 대기하고 있어라.” 조용히 얘기할 때 들어라. 뭐 이런 뜻이리라. “들어갈게요. 그래도 대답은 해 주세요.” “뭘?” “이 분께도 사태에 대해 청취하시겠다고요. 한쪽의 말만 듣고 상황을 이해하시는 건 올바른 처사가 아니라고 봅니다.” 적어도 지금 이 자리에서 상황을 마무리 지을 사람은 감독밖에 없었고, 그 감독이 한쪽의 말만 듣고 상황을 넘기려 하면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겠는가? 적어도 억울하지는 않게 해줘야 한다. ======================================= [490] 코미디(6) 어릴 때야 뭣도 모르고 그랬다 하더라도, 점점 나이가 들면서, 그리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게 되면서 드는 생각은 어린아이가 어른과 동등한 시선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단유의 지난 시절, 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다른 어른들에게 좀처럼 좋게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러는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로 화가 나게 했을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저쪽 세계에 비하면 양반이긴 했다. 적어도 어린이날이라도 만들어주니까. 하지만 이곳도 저쪽 세계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점도 있다. 무엇보다 ‘대화’가 안 된다. ‘대화’를 할 준비가 안 된 어른들이 많았다. “나 참. 기가 막혀서.” 일중은 이런 꼬마에게까지 우습게 보이는 현실이 개탄스러웠다. “네가 그런 말 안 해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그만 가보지?” 단유는 고개를 돌려 도연을 바라보았다. 도연도 단유를 보고 있던 참이라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수차례 경험한 사실이지만, 대화의 준비가 안 된 사람과 대화한다는 것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4박 5일 동안 사막을 건너는 일 만큼이나 고된 일이었다. 이성과 합리로 설득하려 해도 상대는 감성과 억지로 방어벽을 단단히 두르고 모욕과 멸시의 창으로 찔러댈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없다. 나이가 어리다는 것은 약점이지만 동시에 그들의 선입견에 기대어 무자비한 독설을 날릴 수도 있는 강점이다. 기껏해야 철이 없다느니, 혹은 싸가지가 없니 하는 소리만 들을 뿐이니 그 정도만 감내한다면 속 답답할 일은 없다. “물론 감독님은 현명한 어른이시니 잘 처리할 겁니다.” 상대가 자신을 깎아내리려 해도 같이 어울려서는 안 된다. 적당히 상대의 위신을 세워주는 것은 싼값에 물통을 마련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비굴하다고 여길 일도 아니다. “지금 감독님은 갑작스러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나선 것이잖아요? 그런데 한 사람은 감독님의 스태프 중 한 명이죠. 방금도 그분의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고요. 제가 ‘학교’에서 배운 바로는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최대한 객관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러니 이해관계가 얽힌 지금은 그런 객관성이 과연 유지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지 않나요?” 또 하나의 요령이랄까? 어떤 토론에서든 ‘원칙’과 ‘기본’은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그것은 훌륭한 명분이 되며, 상대의 논리를 밑바닥에서 흔들 수 있는 유용한 무기이다. 비유하자면, 목을 축일 수 있게 해주고, 물통을 시원하게 만들며, 흥분한 머리를 식혀주는 얼음과도 같다. 단유는 상대의 반응을 적당히 살피면서도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굳이 따지면 매니저님은 감독님에 비해 을이잖아요. 최소한의 변호도 정황상 못할 가능성이 높죠. 그냥 미안하다고 할 가능성이 커 보이는데요? 그러면 당장은 문제가 덮어질 순 있겠지만, 매니저님이나 혹은 저기 저분 같은 경우에는 억울할 수 있다고 봐요. 저분도 단지 ‘막내’라는 이유로 ‘소란’을 피웠다는 외형에만 초점을 맞춰 비난하실 게 아니라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어떤 부분이 감정을 상하게 했는지를 소상히 듣고 판단하셔야 억울한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주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상대가 반박할 틈을 주지 않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특히 상대가 자신보다 어른이고 자신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을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웃기는 녀석이네. 너 지금 누구 앞에서 잘난 척이야?” 물론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 “잘난 척이 아니라, 그저 걱정이 들어서 드린 말이에요.” “허, 나 원 참. 살다 살다 중학생한테 훈계를 다 듣네. 야, 오지랖 떨지 말고 들어가라. 응? 좋게 이야기할 때 들어.” “실례했습니다.” 단유는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를 한 후 교문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을 바라보는 도연의 시선이 느껴지지만 단유는 모른 척했다. 괜히 더 시간을 끌면서 미적대는 건 감독의 심기를 어지럽혀 좋지 않다. 단유의 말이 당장 감독을 설득시킨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감독이 ‘아, 그렇구나. 내가 생각이 짧았네’라고 반성할 거란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단유도 거기까지 바라지는 않았다. 다만 매니저나 도경과 같은 이들이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이야기를 했으니, 단유가 이야기한 ‘원칙’은 모두의 의식에 깊이 새겨졌을 것이다. 단지 ‘원칙’을 상기시켜 놓음으로써 그들은 원칙을 벗어나기 힘들다. “빨간 불에는 건너지 마세요.” 라는 이야기를 들은 직후에 ‘난 빨간 불일 때 건너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더구나 건널목 앞에 선 이들이 모두 ‘빨간 불일 때는 건너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경우라면, 그 원칙을 어기고 일탈을 범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다. 단유가 교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감독이 시선을 돌려 매니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짧은 헛기침을 뱉은 후,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었습니까.” 도연은 이 모든 일이 다 자기 탓이라는 생각에 오들오들 떨었다. 자신이 연기만 잘했어도, 욕심만 덜 부렸어도 오늘의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괜찮니?” 도경이 도연의 어깨를 짚으며 물었다. 측은한 표정. 아마 도경도 사실은 자신을 책망하고 있을 것 같았다. “괜찮아요. 저기 혼자 좀 있고 싶어요.” 도경은 얼른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적당한 자리를 찾다가 물었다. “차에 가 있을래?” “키가 없잖아요.” “아, 참.” 자동차를 키를 든 매니저는 지금 감독과 함께 따로 면담 중이었다. “그럼…뭐 마실래? 아까 보니까 학교 밖에 편의점 있던데 뭐라도 마실 거 사다 줄게.” “아뇨, 괜찮아요.” “그러니? 그럼, 나라도 마실 거 좀 사와야겠다. 그래도 되겠니?” “그러세요.” 도경은 도연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 준 뒤 뒤돌아섰다. 멀지 않은 곳에 단유가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단유가 고개를 들어 도경임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좀 걸을래?” 손가락이 향하는 교문을 한 번 바라본 단유는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일어섰다. 뒤를 슬쩍 보며 도연이 혼자 있는 것을 확인한 단유는 별다른 말 없이 도경과 나란히 서서 걸어갔다.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뭐가요?” “너 아니었으면 아무 말 못 하고 그냥 혼만 났을 거 아니니.” “설마요. 제가 별말 안 했더라도 매니저님이나 누나가 한마디 했겠죠.” “야, 그 상황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니? 나 그렇게 억센 여자 아니다? 네가 보기엔 내가 무슨 여장부 스타일로 보이든?”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할 말은 꼭 하실 것 같은데요.” “아냐 아냐. 나 의외로 소심해서 그런 말 잘 못 해.” 그런 분이 단유를 처음 만났을 때, 인생에 대한 조언을 해줬었다. “아무튼, 고마워.” “네.” “그런데 너 정말 되게 똑똑해 보이더라. 너 공부 잘한댔지? 만약에 나중에 판검사 같은 거 하면 정말 잘하겠더라.” “고맙습니다.” 괜히 판검사는 생각이 없어요, 같은 말을 꺼내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단유는 감사 인사로 대체했다. “그런데 진짜 넌 연예인 생각 없어?” “네.” “왜? 넌 하면 되게 잘할 거 같은데? 솔직히 지금까지 촬영하면서 별로 혼난 적도 없었잖아? 뮤직비디오 촬영 때도 그렇고. 너 정도면 먹고 살 정도가 아니라 빌딩 2~3개는 살 수 있을 정도로 벌 수 있을 거 같은데.” 단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가만 보면 사람들의 직업을 고르는 기준이 참 단순하다. 공부를 잘하면 의사, 변호사, 검사. 얼굴이 잘생기고 끼가 많으면 연예인. 얼굴이 잘생겼으면 모델. 운동을 잘하면 운동선수, 운동을 못 하면 공부. 수학을 잘하면 수학자. 옷을 좋아하면 디자이너. 공부를 잘하더라도 뜻이 없으면 의사, 변호사, 검사 대신 디자이너가 될 수도 있고, 얼굴이 잘생긴들 꿈이 있으면 승무원이나 선생님이 될 수도 있다. 운동을 잘해도 군인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수학을 잘해도 경찰이 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마치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만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 애를 쓴다는 냥 의식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아니, 요즘은 공무원이라던가? 게다가 직업 선택의 기준은 돈이다. 돈을 잘 버는 직업.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사람의 재능과 꿈이 제각기 다르고, 돈보다 얻는 성취감과 행복이 모두가 다르게 마련인데 세상은 점점 하나의 기준, 하나의 생각으로 통일되는 듯하다. “스타일리스트는 꿈이 아니었어요?” “꿈, 까지는 아니고 그냥, 어쩌다 보니 된 거지.” 막상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려니 어색했던 모양이다. 도경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도연이랑 친구 먹었다며?” “촬영하는 동안만요.” “촬영하는 동안?” 단유는 간단하게 사정을 밝혔다. “너 예전에 수련이나 나윤이랑 친하게 지냈잖아? 그것처럼 친하게 지내면 되지.” 단유는 얼굴을 굳혔다. 사실 수련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대부분 사람들이 모르는 일이고, 스스로도 밝힐 생각은 없었다. 변명할 일도 없고. 이렇게 두 사람이 친했던 과거를 아는 사람을 만날 기회가 얼마나 된다고 변명 따위를 준비하고 지낼까. “요즘도 연락하고 지내니?” “수련 누나요?” “응.” “아뇨.” “왜? 아, 요즘 수련이가 바쁜가?” 도경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단유를 보니 단유의 표정이 밝지가 않았다. 눈치가 전혀 없지는 않아 도경은 입을 다물었다. 태호, 수련, 그리고 그 외 갤럭시즈 멤버들. 특히 태호가 단유와의 관계를 빌미로 재훈에게 돈을 받아간 순간부터 그들과의 관계는 끊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 때문에 재훈이 단유와 명수의 보호자 역할을 포기했다, 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었다. 마치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의 축구 전쟁과 같다. 단유에겐 아무런 언질도 없이 벌어진, 두 사람 간의 사소한 돈거래였지만, 결과적으로 단유는 재훈은 물론 수련과 갤럭시즈 멤버들 전부와 연락을 끊게 만든 일이었다. 그들을 미워하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과 연락할 마음이 있냐고 묻는다면, 역시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용 당했다? 그런 건 아니다. 단지 그들의 이기적인 행동 하나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상황들이 단유로 하여금 그들과 만나기를 꺼리게 만들었다. 특히 나윤이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던 모습을 기억하는 한은 그들과 편하게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상념에 빠진 단유의 어깨를 친 도경. 단유가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니 도경이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그제야 소란스러운 움직임과 고함 소리가 단유에게 다가왔다. “놔, 씨발. 내가 진짜…참는 데도 한계가 있어, 씨발!” “야, 놔 봐라. 내가 오늘 저 새끼 멱따고 내 발로 경찰서 갈라니까, 놓으라고.” “아, 형님 왜 그러세요? 참으세요.” “놓으라니까!” “놔!” “이 새끼가. 정신 안 차려?” 뒤죽박죽으로 들려오는 고함 소리들은 또 다른 난장판을 예고하는 것일까? 도경은 저도 모르게 단유의 팔을 붙잡았다. 교문 밖에서 싸움을 벌인 건, 비록 막내가 드러나긴 했지만 같이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공범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막내가 유난스럽게 화를 내며 매니저와 맞짱(?)을 뜰려고 했고 이를 말리다 보니 다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을 뿐이다. 하지만 정 PD가 교문 밖에서 소란을 진정시킨 후, 막내를 데리고 교내로 들어온 조명 감독은 그 사실을 몰랐기에 막내를 쥐잡듯이 잡았다. 막내는 억울하다며 분해하다가 분을 참지 못하고 또 상스런 욕을 입에 담았고, 어이가 없는 상황에 조명 감독이 불같이 화를 냈다. “씨발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래요, 정말! 아, 진짜 열 받아서 못 해 먹겠네.” “이 새끼가. 누구 앞이라고 욕이야? 응?” “야, 경덕아. 왜 그러냐, 참아.” “아, 진짜. 형님도 그러시는 거 아니죠. 형님도 같이 있었잖아요? 우리가 무슨 틀린 말 했어요? 우리가 무슨, 씨발, 패드립치고 섹드립 날렸어요? 뭘 했다고 이런 대접을 받냐고요.” “새끼야. 그래도 형님 앞에서 그러는 건 아니지.” “아놔. 진짜.” 침을 뱉는 막내의 불손한 태도에 조명 감독은 꼭지가 돌았고, 손바닥이 날아가 막내의 머리를 쳤으며, 막내가 눈을 꼴아 보며 ‘쳤어요? 지금 나 쳤어요? 응?’이라고 대드는 일이 벌어졌다. 조명 감독이 동생들을 뿌리치고 한 대 더 때리는 순간, 받아치는 막내 때문에 싸움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진짜 주먹질이었다. ‘우습다.’ 단유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 [491] 상투(1) 결국 마지막 촬영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일중은 내부에서 조용히 수습되길 원했지만, 사건은 교육부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 애들끼리 의견 충돌이 생겨서 조금 목소리가 커졌을 뿐입니다. 절대 큰일은 아니었어요.” 뉴스에도 나오지 않을 만큼 사소한 문제고, 촬영을 못 한 부분은 차후에 다시 스케줄을 잡아서 촬영하면 될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비록 주말이라 하더라도 연예인이 나와서 촬영을 한다는 게 인근에 알려지면서 구경하러 나온 이들이 많았다. 이들의 눈을 모두 가릴 수도 없었고, 입을 막을 수도 없었다. ‘누구 촬영하는 촬영장에서 싸움이 있었더라’ 하는 말이 SNS를 타고 흘러간 것은 순식간이었다. “위약금 배상하시고, 기존 촬영분은 전량 폐기하세요.” “이 담당관님! 이 담당관님! 그러지 마시고, 일단 설명을….” 담당관은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리본소녀 도연, 촬영장에서 싸움에 휘말리다] 일중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런 경우를 스노우볼(snow ball)이라고 하던가? 조그만 눈 뭉치가 구르고 굴러서 몸집을 키워가다 마침내 손으로 막지 못할 정도의 큰 덩치가 되는 것. ‘작은 구멍이 댐을 무너뜨린다’는 격언도 이런 경우에 쓰일 것이다. “요즘 길에 조경이 잘 되어 있잖아? 약을 안 치면 나무에 온갖 벌레들이 생기기도 하지. 그런데 벌레가 꼬이는 곳에 보통 거미도 생기거든? 마침 새벽에 거미가 나무에서 거미줄을 쳐.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가며 거미줄을 치지. 그런데 마침 지나가던 사람이 그 거미줄 사이를 지나간 거야. 보이지 않는 끈끈한 거미줄이 얼굴에 붙으니까 얼마나 불쾌하겠어? 얼굴에 붙은 걸 떼어내려고 손을 휘젓지.” 거미줄이 얼굴에 붙는 상상만으로도 찝찝한 기분이다. “그런데 또 마침 그 사람의 뒤에서 길을 걸어가던 이가 있었어. 앞사람이 갑자기 크게 손을 휘저으니까 놀라서 멈칫한 거지. 그랬더니 또 출근 중이던 한 여자가 핸드폰을 보느라고 그걸 못 본 거야. 부딪쳤어. 핸드폰을 떨어뜨렸지. 여자랑 앞에 멈춰 선 이가 동시에 핸드폰을 주우려고 허리를 숙이다가 여자가 풀썩 쓰러져. 저혈압이었거든. 남자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당황하다가 119를 불렀어. 구급차가 일찍 도착하려고 속도를 내 보지만 아침 출근 시간이라 차가 좀 막히네? 그래서 차선을 넘나드는 위험한 곡예 운전을 했지. 그러다가 사거리에서 사고가 나고 만 거야. 노란 불에 빨리 지나가려고 악셀을 밟은 자동차와 크게 부딪친 거지.” 사고 현장으로 긴급출동하는 구급차의 추돌사고는 뉴스에 종종 나오는 레퍼토리였다. 그럴 때면 ‘시민의식’이라는 단어가 댓글에 등장하곤 했다. “자동차와 구급차가 크게 부딪치면서 서로 옆으로 튕겼고, 승용차는 빙빙 돌다가 인도를 덮쳤어. 출근 시간대라 인도에는 사람이 많았으니 당연히 부상자가 있었겠지. 그 부상자 중 한 명이 재정부 장관의 손자였어. 아침에 출근한 장관이 손자의 변고를 듣고 놀라서 나왔는데, 마침 그때 결제해야 했던 예산안이 결국 결제를 받지 못하고 만 거야. 그 예산안은 복지부에 배당될 예산이었는데, 예산 편성이 불발되었어. 복지부는 당장에 쓸 돈이 필요했는데 예산을 편성 받지 못해 오래 준비했던 기획을 포기해야 했어. 그 기획이 바로 전국 초중고 무료급식이었어. 결국 무료급식은 다음 추경안이 편성될 때까지 연기되었고, 전국의 학생들은 그동안 무료급식을 먹지 못했어. 결국 급식비를 내지 못해 굶는 아이도 생겼지.” “말도 안 돼.” 말이 될 리가 있나. 그냥 생각나는 대로 지어낸 말인데. “학생들이 급식을 먹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1번, 장관 때문에. 2번 노란불에 과속한 차량 때문에. 3번 거미 때문에. 4번 거리 조경수에 약을 치지 않고 내버려 둔 시청 때문에. 정답은?” “거기에 정답이 어디 있어?” “내가 지금 그 상황이다. 정답이 없는 상황.” 일중은 소주를 입안에 털어놓고는 안주 대신 고추를 된장에 찍어 씹었다. 아삭하고 매콤한 고추가 얼얼한 입안을 자극했다. 누구를 탓할까. 개념 없는 조명팀 막내라는 놈을 조진다고 상황이 해결될까? ‘고작’ 말 몇 마디 들었다고 미친놈처럼 달려들었다는 매니저를 욕할까? 연기를 존나게 못해서 촬영을 지연시킨 아이돌을 탓할까? 아니면 별거 아닌 홍보 동영상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깐깐하게 컷을 불렀던 자신을 탓해야 할까? 일중과 같이 술잔을 기울이던 친구는 같은 업계에서 종사하는 감독이었다. 일중과 달리 화보 사진을 전문으로 하는데,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그런 잡지 화보가 아니라 조그만 광고 전단에 들어갈 사진이나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가는 화보들을 찍는 감독이었다. 사실 일중의 동영상 작업이 끝나면 지면 광고용 사진을 찍을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물 건너간 일. “꼴에 감독이라고 스토리는 뚝딱 만들어내네. 그걸로 영화 찍어라, 영화. 아주 대박 나겠어.” “헛소리 그만하고 술이나 마셔라.” 허탈한 일중의 목소리에 친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일중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차가운 소주가 목을 타고 넘어가니 절로 크, 하는 탄식이 나온다. “어차피 그쪽 매니저랑 문제가 생겼으니 더 촬영도 힘들었어. 촬영 스케줄 잡으려면 또 얼마나 시간을 보내야 하겠어? 그쪽은 요즘 잘나가는 걸그룹인데, 시간을 내기가 쉽겠어?” “…야. 그걸 위로라고 하는 거냐?” “그러니까 그만 털어내라고. 이런 위기를 극복해야 사람이 단단해지는 거야. 알잖아?” “위기가 곧 기회다? 웃기시네. 기회가 곧 위기다, 이 자식아.” 부득이한(?) 사정으로 제작사를 긴급히 교체해야 했던 교육부였지만, 프로젝트 자체를 없었던 일로 돌리지는 않았다. 어쨌든 무조건 해내야 하는 프로젝트였고 제작사만 바꾸면 다소 시일이 걸릴지언정 문제는 없다, 고 판단했다. 당연히 도연의 소속사 측에서는 불편한 마음이 컸다. 새로 스케줄을 조정해야 하는 어려움도 어려움이지만, 다시 촬영한들 도연의 문제가 또다시 반복될 염려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매니저가 의견을 냈다. “같이 출연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와 함께 레슨을 받도록 하는 게 어떨까요?” “레슨을? 우리가 왜?” “사실은 그 친구가 호흡을 맞췄을 때, 도움이 됐었습니다.” 매니저는 레슨 선생님의 조언을 따른 도연이 단유와 ‘일시적’이나마 친구가 되어서 연기를 했을 때 도움이 되었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비싼 돈을 내고 레슨을 시켜줄 이유가 있어? 아니 그보다 지금 도연이한테 연기 레슨이 필요해?” 솔직히 말해서 도연이는 그냥 이대로, 가수로서 활동에 전념해도 문제가 없다. 아니, 가수로서 활동에 전념해야 할 때이다. 연기를 전혀 배울 필요가 없다는 건 아니지만, 지금 그렇게 문제로 삼을 일인가 싶은 게 대표의 생각이었다. “애초에 도연이를 거기에 출연시키려 했던 것도 내 욕심이었던 건지도 몰라. 그 때문에 괜히 애 자존감만 낮춘 게 아닌가 싶어.”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처럼 지금은 보컬이나 안무 레슨받는 것만도 벅찬 스케줄이죠. 하지만 전 이 기회가 오히려 도연이한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시잖습니까? 도연이 카메라 울렁증. 이 기회에 완전히 고칠 수 있다면 좋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자주 카메라에 노출될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시련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고 하지 않습니까? 도연이 성격 아시잖아요? 이번 일만 넘기면 분명히 성장할 겁니다.” 소속 연예인의 성장은 소속사의 기쁨이고 수익이다. “게다가 말입니다. 같이 출연했던 그 친구, 꽤 탐나는 친구입니다.” “이야기는 들었어. 그런데 그렇게 괜찮아?” “제 마음 같아서는 A&R에서 한 명 데리고 가서 보여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확실히 재능이 있는 친구입니다.” “그래? 듣기로는 에이바운스 쪽이랑 선이 닿았다고 들었는데? 유니 엔터랑도 관계있다고 하는 것 같고.” “유니 엔터의 장 대표가 에이바운스 매니저 시절에 알게 되었다고는 하는데,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거기까진…. 그런데 그런 것보다 중요한 건 그 친구가 아직 무소속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탐이 날 정도의 인재라면 왜 에이바운스에서 가만히 있냐는 말이지. 에이 바운스의 박 이사가 회사는 못 키워도 애들 보는 건 좋다는 거 다 아는데 말이야.” “그게 실은…연예인 쪽으로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관심이 없어? 그러면 우리도 못 먹는다는 소리잖아?” “대표님, 그런 친구가 어디 한 둘입니까? 그런 친구들 설득해서 성공할 수 있게 돕는 게 우리 일 아닙니까?” 그 뒤로도 매니저는 끈질기게 대표를 설득했고, 결국 대표는 한번 만나는 보자고 이야기했다. 물론 단유와 도연의 합동 레슨도 통과되었다. “네….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죠? 아, 예. …예. 그럼 거기서 뵙고 이야기 나누죠. 오신다고요? 아뇨, 그러실 것까진 없고요.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아뇨, 괜찮아요.” “뭔데?” 명수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있다가 물었다. “도연 씨 회사 매니저 형인데 좀 보자고 해서.” “또?” “응.” 명수는 아이스크림을 아득 씹으면서 멍하니 운동장을 보다가 말했다. “뭐, 시험도 끝났으니까 바쁜 일은 없잖아?” “그렇기도 하고, 마침 그쪽으로 갈 일도 있으니까.” “뭐?” “번역회사에서 보자고 해서.” “…이럴 때 보면 넌 학생이 아닌 거 같아.” “학생이 아니면?” “영업사원? 부르면 달려가는 슈퍼맨?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달려가는 로봇?” 명수가 읊은 세 가지의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 한 호흡에 쏟아져 나오니 더욱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아침에는 교장 선생님이 부르고, 점심때는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전화 오고, 정말 바쁘다 바뻐, 김단유.” “그러게.” “그런데 왜 보자는 거야?” “이유는 모르겠어. 그냥 일 때문이라고 만나서 이야기 하자던데.” “설마 또 앨범 내자고 하는 거 아니겠지? 그럼 너 완전히 가수 되는 거 아냐?” “그럴 일도 없고, 그러지도 않을 거야.” “뭐 어때? 솔직히 차트 1위 하면 지금 버는 것보다 더 많이 벌 수 있다잖아?” 단유는 명수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다 먹은 아이스크림의 빈 막대만 쪽쪽 빨던 명수가 단유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말했지? 돈은 문제가 아니라고.” “야, 솔직히 돈이 문제가 안 될 수는 없지. 내가 비록 프로축구선수가 되려는 이유가 축구를 좋아해서라지만, 그렇다고 돈을 포기할 순 없잖아? 돈도 중요한 고려 조건이야.”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어쩐지 설득력이 상당히 떨어진 기분이지만, 맞아. 네 말이. 그래도…돈 걱정은 하지 마.” “왜? 너야 지금 돈을 잘 벌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돈은 많이 벌 수 있어.” “어떻게?” 미성년자는 귀금속 제품을 사들일 능력이 없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귀금속을 판매할 때도 장물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 더군다나 감정서가 없는 귀금속이라면 특히나 판매 절차가 복잡하고 어렵다. 그러니 만 20세가 지나면, 그래서 귀금속 판매에 제약이 사라지면, 단유는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를 명수에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나 똑똑하잖아.” “와, 재수 없어!” 단유는 피식 웃었다. **** 연기 레슨을 받지 않겠냐는 매니저의 말에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게다가 레슨을 받게 되면 제가 공부할 시간도 줄어들어서 힘들 거 같아요.” 매니저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레슨은 우리 회사가 있는 곳이 아니고, 여기 근처에서 할 거야.” “여기 근처요?” 되묻는 단유의 앞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아주는 매니저였다. ‘고맙습니다’라고 짤막하게 대답하는 단유에게 미소를 보인 후 대답을 이어나갔다. “연기 학원에서 수업을 받거든. 도연이도 이쪽으로 와서 수업을 받아야 하고. 이왕에 너희 둘 같이 연기를 해야 하는데 미리 호흡을 맞춰놓으면 좋지 않겠니? 물론 우리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도연이 때문이야. 도연이가 지난번처럼 불편한 시선을 받으며 촬영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야. 그리고 네가 도와준다면 한결 좋아지지 않겠어?” 매니저의 단유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고 느끼는 건,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매니저는 단유가 그저 어린, 다른 또래들과 다르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았고 인지했다. 그래서 정직하게, 그리고 나이와 상관없이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단유는 사소하지만 매니저의 어투와 행동에서 그런 마음을 느꼈고, 그래서 고마움도 느꼈다. 적어도 이 매니저는 함부로 사람을 무시할 사람은 아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492] 상투(2) 매니저와의 이야기가 끝나고 단유는 번역회사로 이동했다. 3월에 받았던 번역의 완역은 이미 이메일로 보낸 터라 무언가를 준비해서 갈 필요는 없었다. 빈손으로 들어간 단유는 두 권의 책을 들고 나왔다. 한 권은 새로 번역을 맡은 책의 원서였고, 또 다른 책은 자신이 번역한 책의 출판본이었다. 원래 번역할 때는 책이 아니라, 편집이 가능한 워드 파일로 받기도 하는데, 단유가 원서를 보며 번역하고 싶다는 희망을 드러냈더니 회사에서 매번 원서를 구해다 주었다. 지하철에 앉아서 원서를 펼쳐 들었다. 이번의 책은 경영에 관한 서적이었는데, 내용은 경영보다 사회과학적인 시선이 많이 담긴 책이었다. 주제는 희귀 자원(rare resource)의 효율적 관리를 통해 성공한 글로벌 기업 모델의 연구였다. 현대 사회는 만성적인 자원 결핍을 겪고 있으며, 체감하진 못해도 수많은 자원들이 점점 바닥을 향하고 있다, 고 얼마 전에 배우기도 했다. 3학년 사회 교과서에 <에너지 자원과 지역 갈등>이 나오는데, 당시 선생님은 자원을 둘러싼 지역 갈등의 발생 과정과 전개 양상에 대해 핏대를 세우며 설명했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여러 분쟁이 벌어지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잘 아는 중동은 물론이고 아프리카의 수단이나 콩고 같은 나라에서도 연일 싸움이 벌어지고 수많은 사상자와 피난민들이 생기죠. 그 싸움이 대부분 한정된 자원을 소유하기 위한 갈등에서 생긴답니다.” 자원의 편재성, 매장량 감소, 채굴 조건 악화, 가격 상승으로 불안해지는 공급 때문에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졌다. “자원의 수출을 중단하거나 가격을 인상하는 등으로 자원을 무기화하는 경우도 생겼죠. 오일 쇼크라는 말을 들어본 사람?” 에너지 자원의 확보와 이로 인한 갈등으로 국가 간에 첨예한 대립이 이어지자 ‘자원 민족주의’라는 말이 나오기까지 했다. 단유가 이번에 번역할 책은 그와 관련된 기업에 관한 이야기였다. 거시적으로 보면 국가 간의 대립이지만, 직접적으로 자원을 개발하고 채굴하여 판매하고 유통하는 일은 기업이 맡는다. 그래서 몇몇 기업은 독점적인 위치에 오르기도 하면서 세계의 지탄을 받기도 한다. 심지어는 씨앗과 같은 종자를 개발, 생산하여 재배 농가에 보급하는 종자 산업마저도 기업에 의해 움직인다. 글로벌 10대 종자 기업이 세계 시장의 75%를 점유하는 과점 현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불과 며칠 전 시험을 치기까지 했었던 내용을 우연히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단유는 흥미를 느끼며 원서를 읽어나갔다. 단유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단유가 정신없이 빠져 읽는 책을 흘깃 보며 남몰래 감탄하기도 했다. ‘요즘은 어릴 때부터 영어 공부를 한다더니, 이런 책도 읽는구나.’ ‘나도 영어 공부 좀 해야겠는데.’ ‘누구는 토익 800점을 못 넘어서 허덕이는데. 하아, 어릴 때 공부 좀 할걸.’ ‘외국인인가?’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책을 읽던 단유였지만 내릴 역을 지나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 며칠 뒤, 단유는 다시 매니저를 만났던 장소로 향했다. 정확히는 그 장소 근처에 있는 연기 학원을 찾아갔다. 뭐든 경험해보는 게 나쁘지는 않을 거라는 하은의 조언도 있었지만, 최근 단유가 ‘감정’이라는 것에 대해 관심을 둔 영향도 있었다. “연기는 단순히 어떤 사람을 흉내 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아요. 배역 속 인물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승화시켜야만 자연스럽고 보기 좋은 연기가 나올 수 있어요.” 연기 학원의 원장이 단유를 맞이하며 꺼낸 이야기였다. “학생은 소속사가 없다고요?” “네.” “그런데도 거기서 돈을 대신 내주겠다고 했다면서요?” “네.” “그쪽에서 학생을 잘 봤나 보다.” 원장은 단유가 곧 기획사 연습생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혜택이 주어질 리 없으니까. “우리 학원이 이 바닥에선 꽤 유명해요. 강사님들도 유명하시고, 현직 배우들도 가끔 와서 레슨을 받거든요.” 원장의 팔불출 같은 자기 자랑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이랑 목요일이고요, 시간은 6시부터 7시 반까지예요. 괜찮죠?” “네.” 사실 여기에는 단유의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학교를 마친 이후의 시간이라 상관은 없지만, 전적으로 도연의 스케줄에 맞춘 시간이라 단유가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오늘은 학원 구경만 하시고요, 다음 주 월요일부터 수업할게요.” “알겠습니다.” “학생 보니까, 되게 침착해 보이네요.”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끼가 많은 사람이 연기를 잘할 거로 생각하지만, 연기는 굉장히 이성적인 창조행위에요. 침착하고 차분한 사람이 연기를 더 잘할 확률이 높아요.” 단유는 저 멘트가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활달한 성향의 사람이 오면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 연기에 더 몰입을 잘할 거라고 이야기할지도. **** 월요일에 단유가 학원에 갔을 때, 도연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었다. 먼저 연습실에 들어간 단유는 나윤이 연습하던 안무 연습실과 비슷한 구조와 인테리어의 실내를 구경하다 한쪽 벽에 있는 접이식 의자에 앉아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전과 달리 원서를 번역할 때는 최소한 두 번을 정독하고 번역을 했다. 첫 번째는 내용을 알기 위함이고, 두 번째는 한국어로 번역할 때 더 자연스럽게 표현 가능한 단어들을 떠올리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원서를 읽고 있을 때, 도연이 매니저와 함께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단유가 먼저 일어나 인사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뒤이어 도연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매니저에게 미리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얼굴을 보니 반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단유는 마치 처음 만난 사람마냥 딱딱하게 인사를 했다. “우리 친구 하기로 하지 않았어요?” 라는 말이 입속에서 맴돌기만 했다. 야구모자에 하얀 마스크를 끼도 있던 도연은 혹시 모자 자국이 남지 않았을까 조심스러워하며 모자를 벗고는 벽면에 붙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아직 레슨이 시작되기 전이기에 잠깐이라면 상관이 없을 것이다. 단유는 매니저의 부름에 연습실을 나갔다. 그 뒤를 거울을 통해 훔쳐보는 시선이 따라갔다. 원장실 옆 상담실을 양해를 구해 들어간 매니저와 단유는 책상에 마주 앉았다.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학원에서 일하는 직원이 먼저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아, 고맙습니다.” “커피로 드릴까요?” “아, 네. 커피 부탁드릴게요.” “그쪽은?” “전 그냥 물이면 돼요.” 잠시 후, 따뜻한 커피를 손에 든 매니저가 잔을 들어 올려 향을 맡은 뒤 입을 축였다. 그래 봐야 일회용 믹스커피일 뿐인데. “다름이 아니라, 부탁할 게 있어서 그러는데.” 단유는 물을 마시는 대신 매니저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사실, 도연이한테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에서 너랑 같이 레슨을 받게끔 하긴 했지만, 알지? 이게 전부 일 때문이란 거. 네가 아직 학생이고 연예계 활동을 전문으로 하는 게 아니란 건 알지만, 그래도 경험이 전혀 없는 건 아니잖아? 무슨 말인지 알지?” 단유는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매니저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럼요. 매니저님 말씀 이해했어요.” “역시. 똑똑한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 아무튼, 일이니까 말이야, 사적인 감정이 안 생기도록 주의해 줬으면 좋겠어. 이런 걱정 하는 게 너무 앞서나가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거든. 내 새끼 자랑 같지만, 도연이는 잘나가는 아이돌 가수잖아. 아무래도 구설수 걱정도 안 할 수가 없어.” “걱정 마세요. 매니저님. 매니저님이 걱정하시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매니저는 씩 웃었다. 단유는 상담실 유리창 너머로 레슨실로 들어가는 선생님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레슨 시작하는 거 같으니 먼저 일어날게요.” “그래, 그래. 아, 그리고 혹시 뭐 물어보고 싶은 게 있거나, 부탁할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해줄게.” “네.” 단유는 목례를 하고 상담실을 나갔다. “절대, 라고?” 매니저는 단유가 단호하게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했던 말을 떠올리며 조금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본인이 원했던 일이니 좋아야 했지만, 또 막상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하니 도연이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 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모름지기 아이돌이란, 어느 누구에게나 ‘우상’과도 같은, 선망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도연 씨는 지난번에 잠깐 인사를 했었고, 여기 잘 생긴 친구는?” “김 단유라고 합니다.” “연습생?” “아뇨. 그냥 일반 학생인데요.” “그래요? 혹시 연극 같은 거 해요?” “아뇨. 그런 것도 안 해요.” “아, 그래요.”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 이상 깊게 파고들진 않았다. 호기심은 수업 외 시간에 만나서 풀어도 될 일이다. 처음 온 단유를 배려하는 의미에서, 그리고 도연에게 연기에 대해 다시금 숙지시킨다는 의미에서 간단한 연기론을 설파한 선생님은 두 사람이 함께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연기를 시도하도록 지시했다. “두 사람은 연인이에요. 나이에 맞게 학생 간의 연애로 해볼게요. 혹시나 하는 말이지만, 연애도 나이에 따라 대사와 행동이 달라져요. 엉큼한 생각은 하지 말고?” 웃기지도 않는 농담에 웃음이 나올 리가 없어, 단유는 덤덤한 눈으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다소 머쓱한 표정이 찰나 간에 지나간 뒤 선생님은 상황을 연출해 주었다. “두 사람은 만난 지 세 달 된 학생 커플이야. 그런데 여학생이 주말에 시내로 나갔다가 어떤 여자랑 걷는 남자 친구를 보게 된 거야. 자, 이때 여학생은 어떻게 행동할까? 도연이는 여자 친구, 단유는 남자 친구. 오케이? 자, 스탠바이. 컷!” 도연은 쭈뼛대며 단유와 선생님을 번갈아 보았다. “연애해 본 적 없어?” “…네.” “한 번도? 입 꾹 다물고 있을 테니까, 한 번도 없어?” “없어요.” “그래도 몰래 좋아한 적은 있지?” “…네.” 선생님은 접이식 의자를 끌어다 앞에 놓고 그 위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가끔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상황을 연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요. 이를테면 내가 너희들에게 40대 중년 부부가 주방에서 같이 요리하는 장면을 연기해 봐, 라고 하면 어떻게 할래요? 경험해 본 적도 없는데 할 수 없나요?” 도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사람의 경험은 몸으로 직접 한 것만이 경험이 아니에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간접 경험들도 모두 경험인 거야. 그러니 그 모습을 상상하고, 거기에 자신을 오롯이 대입해보는 거지. 그런데 그저 본 대로 들은 대로 하면 그게 연기가 될까?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이런 행동을 했는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했는지를 연기해야 한다고 했죠? 그래서 연기는 상대를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상대를 이해하고 상대와 공감해야 연기가 가능해지는 거죠. 아시겠죠?” 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 숙련도가 낮기 때문에 일부러 학생 커플로 설정한 거예요. 생각해봐요. 친구들이나 주위 사람들이 연애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나요?” “아니요.” 본 적이야 있다. “그럼 그 기억들을 떠올려봐요.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생각하고, 자신이라면 어떤 감정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를 궁리해요. 그리고 그것을 몸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아시겠죠?” 도연은 단유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저라면…그 자리에서는 모른 척했다가 나중에 따로 만날 거 같아요.” “좋아요. 그럼 나중에 다시 만난 남자 친구에게 걸어가는 순간부터 연기해보도록 하죠.” 도연은 몇 걸음 떨어진 뒤, 조금 과장되게 발을 굴리며 다가왔다. 화가 났다는 뜻이리라. “왜 그랬어?” 수줍은 목소리. “목소리가 작아요. 연기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목소리와 발음이 또렷해야 한다고 했었죠?” “왜 그랬어!” “감정이 너무 1차원적이야. 나 지금 화났어, 라는 감정을 그저 목소리를 키우는 것만으로 표현하려 하면 보는 사람은 식상해. 적당한 크기로, 하지만 발음은 정확히? 오케이? 다시.” “왜 그랬어.” 이번에는 그냥 넘어갔다. 단유는 대사를 뱉은 후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도연을 지켜만 보았다. 지금 자신의 역할은 상대의 연기를 받아주기만 하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스톱. 갑자기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분위기가 되는데, 말했듯이 10대 학생 커플이에요. 방금 건 10대 여학생이 보일 수 있는 감정이라기보다는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20, 30대 여주인공 같은 느낌이에요. 나이에 맞지 않는 연출은 관객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하거든요? 조금 전의 이미지와 맞지 않고.” 도연은 다시 숨을 가다듬고, 대사를 뱉었다. “왜 그랬어.” “감정을 다스리려고 하지 말고, 토해내요. 발산해. 너무 눌린 느낌이야.” “왜 그랬냐고!” 도연이 단유의 어깨를 밀었다. “좋아! 그 정도는 괜찮아요.” 도연은 단유의 어깨 부근을 붙잡더니 흔들며 소리쳤다. “왜 그랬어!” “……” “대답해!” “……” “나쁜 새끼.” 도연은 말로 뱉고는 얼른 입을 가렸다. 말이 너무 과하게 나왔다. “컷! 마지막이 제일 좋았네. 거봐요. 몰입하면 된다니까?” 선생님은 손뼉을 마주치며 웃었다. ======================================= [493] 상투(3) 첫날의 연습은 서로 자유롭게 연기를 하는 식으로 마무리를 했다. 연기를 마쳤을 때는 등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심하게 운동을 하거나 계속 뛰어다닌 것도 아닌데 머리와 몸을 함께 쓰는 일이어서 그런지 꽤 많이 지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쉬운 일이 아니구나.’ 배우는 사람은 물론이고 가르치는 사람도 땀에 젖을 정도로 열정적인 수업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이번 주 목요일에 봅시다.” “네, 선생님.” 단유와 도연이 선생님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저기 탈의실 먼저 사용하실래요?” “아뇨. 전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요. 그냥 가볼게요.” “아….” “먼저 갈게요. 수고하셨습니다.” “아, 네. 수고…하셨어요.” 뒤돌아서서 가는 단유. ‘끝내 묻지 못했네.’ 왜 말을 다시 높이기 시작했는지, 왜 그렇게 데면데면 대하는지를. 괜히 섭섭한 마음이 드는 도연이었다. **** 6회에 걸친 레슨을 받은 후, 그러니까 3주가 지난 뒤 두 사람은 다시 촬영에 들어가게 되었다. “오케이.” 도연의 울렁증은 여전했지만, 이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특히 단유와 투샷(two-shot)으로 잡힐 때면, 도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안정감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그래도 레슨을 받아서인지 연기가 훨씬 좋아진 거는 사실인가 보네요.” 도경의 말에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 암기야 기본이고 발음, 발성도 나쁘지 않다. 가끔 표정이 어색하거나 대본에 주어진 지문을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겪긴 해도, 경험만 쌓이면 충분히 대성할 가능성이 보인다. 매니저는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맛있다, 이거.” 도경은 도연이 건넨 간식거리를 먹으며 감탄을 했다. 도연의 팬이 준 마카롱이었는데 입에서 살살 녹는 달달한 느낌에 도경은 곱씹으며 맛을 음미했다. 지난 촬영장 사건으로 도연이 원치 않게 주목받은 후, 리본소녀의 팬카페에서는 도연을 위로하는 글들이 많이 올라왔다. 데뷔 1년 차인 리본소녀에서 가장 막내인 도연의 첫 연기가 당연히 어설플 수 있다는 옹호의 글과 그런 사정도 이해 못 하고 막말을 쏟아냈다는 업체 사람들에 대한 비난의 글이 쏟아졌다. 그런 사연이 도연 개인에 대한 응원으로 이어졌고 리본 소녀의 전체 스케줄이 있을 때나 도연의 스케줄이 있을 때 따라다니는 팬들의 수가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도연아! 파이팅!” 흔히 말하는 ‘출근길’에도 팬들이 따라와 도연을 응원하는 구호를 외치기도 하고, 더러 도연에게 선물이 든 가방을 건네기도 했다. “고맙습니다.” 도연은 미소를 지으며 팬들의 성원에 감사해 했고, 그런 미소에 또 팬들은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오늘의 촬영장에도 미리 알고 찾아온 팬들이 도연의 ‘출근길’에 카메라와 선물 가방을 들고 기다렸었고, 도연이 오자 큰 함성과 응원으로 반겨주었다. 도경이 먹은 마카롱은 그 팬들이 건넨 선물 중 하나였다. 도경이 맛을 음미하다 대기실로 사용하는 교실 한쪽에 얌전히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단유를 발견했다. “쟤도 하나 주지?” 도연이 힐끗 본 뒤, 도경에게 말했다. “언니가 가져다 줘요.” “왜? 네 거잖아?” 도연이 머뭇대자 도경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바라보았다. “너 혹시….” “네? 아,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 뭐라고 했는데 아니래? 내가 뭐라고 할 줄 알고?” 도연이 발끈하며 말했다. “언니가 이상하게 쳐다봤잖아요?” “뭘 이상하게 쳐다봐? 너야말로 이상하다? 괜히 열 내고?” “아이참.” 도연은 입술을 삐죽이다가 변명했다. “별로 안 친한 데 가서 주기가 뭣해서 그러죠.” “야, 누나가 동생한테 먹을 거 챙겨주는데 친하고 말고가 어딨니? 게다가 지난번에는 서로 말놓고 친구처럼 지내기로 했다며?” “그런데, 이번에는 다시 존대를 하더라고요.” “아, 그래서 서먹했던 거구나.” 도연은 대답 대신 마카롱이 들어간 상자만 들었다 놨다 했다. 도경에게 준 마카롱 외에는 아직 입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친해지려면 네가 먼저 나서야지.” “제가요?” “누나잖아?” 도경의 익살맞은 웃음이 조금은 불편한 도연이었다. 촬영 중간 잠시 정비 시간을 가질 때, 단유는 대기실에서 틈이 날 때마다 책을 읽었다. 솔직히 최근처럼 바쁘게 지냈던 날이 있었던가 되짚어 볼 정도로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던 단유였다. 당장 학교에서도 반장이라는 직함을 받아 생각지 못한 수업 외 활동과 직무를 수행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고, 학교 밖에서는 번역 일과 교육부 홍보 건으로 시작된 연기 레슨 등을 받느라고 바빴다. 그러다 보니 방과 후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책상에 앉아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마음껏 책에 집중할 수 있었던 그 시간이 그리웠다. 더군다나 한 달 전에는 중간고사도 있어서 시험공부를 하느라고 시간을 많이 뺏기기도 해서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시간이 부족했다. 그런 이유로 단유는 최근 대중 교통을 이용해 움직일 때나, 짜투리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했다. “무슨 책 읽어요?” 단유가 고개를 들었을 때 볼을 빨갛게 물들인 도연이 상자를 든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교양 물리학이라는 책이에요.” “물리학?” “물리학 일반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쓴 책이에요.” 물리학계의 유명한 학자들, 케플러에서 아인슈타인에 이르는 학자들에 관한 이야기와 그들의 이론이 소개되었음은 물론, ‘전하’, ‘엔트로피’, ‘불확정성 원리’, ‘슈뢰딩거 방정식’, ‘핵에너지’, ‘쿼크와 하드론’ 같은 이론들까지 가볍게(?) 이해할 수 있게 쓴 책이었다. 복잡한 이론과 증명은 없지만, 말 그대로 ‘교양’을 위해 쓰인 책이라 머리를 가볍게(?) 하기에 충분했다. 요즘처럼 바쁠 때 여유를 갖고자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아, 그렇구나.” 뭔가 물어보려 해도 아는 게 없어 물어보지도 못하겠다 싶어 도연은 화제를 돌렸다. “이거 먹을래요?” “뭔데요?” “마카롱인데 제 팬이 선물해 주신 거예요. 하나 드세요.” 단유는 상자의 든 것들 중 하나를 집었다. “잘 먹을게요.” “더 드세요.” ‘하나’ 드세요, 라고 권해놓고선 더 먹으란 건 무슨 뜻일까?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이거면 충분해요.” 하지만 도연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앞에 계속 서 있었다. 단유는 또 무슨 일인가 싶어 보다가, 손에 든 마카롱을 보는 앞에서 먹어보란 뜻인가 싶어 한 입 깨물었다. 우물우물 씹어 맛을 음미한 단유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맛있네요.” 도연이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란 표정이었다. 단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곧 고개를 들어야 했다. 단유 앞에 선 발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 할 말이 남았나 싶어 바라보니, 도연이 붕어처럼 벙긋거리다 소리를 냈다. “그런데 왜 다시 말을 높이는 거예요?” 단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그때, 촬영할 때만 그러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감정 잡는 데 도움이 될 거 같다고 하셔서.” 그렇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말을 또 그렇게 곧이곧대로 듣는 법은 또 뭔가. “그리고 이제는 그렇게 안 하셔도 잘하시잖아요? 아니면 아직 힘든 부분이 있으세요? 만약 필요하다면 도와드리고요.” 말을 놓는 게 ‘도와주는’ 행위로 인식된다니 참 어이가 없기도 하지만, 어쩐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도연은 상자를 든 채로 우물쭈물 거리다 다시 질문을 던졌다. “혹시 제가 뭐 잘못한 게 있나요?” “네?” “혹시 제가 저도 모르게 불편하게 했다거나.” “아뇨, 그런 거 없어요.” “그런데 너무 매정하게 구는 거 아니에요?” ‘매정하다’라. 어떤 의도인지 몰라도 도연이 선택한 단어가 단유에겐 불안한 감정으로 다가왔다. 단유는 한숨을 내쉬며 도연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제가 지금은 여유가 없어서 그럴 거예요.” “여유요?” 도연의 눈썹이 위로 살짝 올라갔다. “요즘 좀 바쁘다 보니 주위에 신경을 잘 못 쓰고 지내요. 아마 저보다 더 바쁘실 테니 아실 거 같은데요.” ‘아, 그 여유.’ 도연은 그럼 그렇지, 라는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하긴 단유가 아무리 바빠 봐야 도연만 하겠는가. 그렇지만 그게 ‘매정’의 이유는 되지는 않잖아? “뭐하니?” 도연이 뒤를 돌아보니 매니저가 교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 오빠.” 매니저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도연은 뭔가 들키면 안 될 것을 들킨 사람처럼 마음이 시끄러웠다. “이거, 마카롱이요. 이거 하나 드시라고…. 오빠도 하나 드세요.” 빠른 걸음으로 매니저에게 다가간 도연이 상자를 내밀었다. 핑크색 마카롱을 하나 집어든 매니저가 짧게 ‘고마워’라고 인사를 했다. 도연은 곧바로 도경에게로 향했고, 도경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걸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촬영은 잘하고 있어?” 매니저는 받은 마카롱을 다 먹은 뒤에 단유에게 다가와 물었다. “네. 덕분에요.” “덕분에?”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는 매니저에게 단유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매니저님이 연기 레슨받도록 해주셨잖아요. 덕분에 도움이 많이 됐어요.” “그랬다니 다행이군.” 그리고 잠시 끊어지는 이야기.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하실 말씀이라도?” “아, 다름이 아니고,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이 되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오늘 저녁에요?” 매니저는 호주머니에 찔러 뒀던 오른손으로 귀 뒤를 긁으며 말했다. “우리 회사 대표님이 좀 보자고 하시네.” “저를요?” “그래. …사실을 말하면, 내가 너를 추천했어.” “추천, 이라뇨?” “내가 보기에 넌 딱 연예인 관상이거든. 몸도 균형이 잘 잡히기도 했고. 연기도 옆에서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네 연기가 나쁘지 않다고 하니까. 그런 이야기를 대표님께 했더니 한번 보자고 하시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대표를 만날 필요는 없었다. “전 연예인 할 생각 없는데요.” “그래, 알아. 지난번에 그렇게 이야기했었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말이야. 사람 인생이라는 거 어찌 될 줄 모르는 거잖아? 지금은 싫어해도 나중엔 좋아할 수 있는 일이고.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겠지만. 아무튼 그래서 내가 대표님께 네 이야기를 많이 했어. 그래서 너한테 관심이 가셨나 봐. 아, 물론 오늘 대표님과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서 널 꼭 연예인 시키겠다는 건 아냐. 스토커처럼 쫓아다니면서 회사 들어오라고 꼬실 일은 없으니까 걱정 놓고.” “그냥 밥만 먹는 자리인가요?” “그래, 밥만. 뭐 밥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는 있겠지만 절대 연예인을 하라거나, 우리 회사로 들어오라거나 강요하는 자리는 아닐 거야. 그러니 너무 부담 갖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도 싫다면 어쩔 수 없고.” “알겠어요. 저녁에 뵙도록 하죠. 아, 그럼 집에 연락을 먼저 해야겠네요.” “아, 그럼. 그래야지.” 매니저는 그렇게 이야기를 전하고 돌아섰다. 자신을 훔쳐보다 얼른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피우는 도연과 도경이 눈에 들어왔다. 미간을 좁히며 바라보니 도경이 헤헤, 하고 웃음을 지었다. “오빠, 맛있죠?” “그래, 맛있다.” 눈짓으로 도연을 가리키니 도경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시치미를 뗐다. 마치 ‘난 아무것도 몰라요’ 라고 말하는 것처럼. 일전에 단유에게 부탁했던 일을 떠올리며 매니저는 도경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자, 이번에는 단유 바스트샷부터 찍자.” “네.” “저기 앉아봐. 응, 거기. 서린아 준비 다 됐어? 다 됐냐고. 그래? 화이트밸런스는? 단유는 카메라 앵글이 잡힐 위치에 서서 숨을 가다듬었다. 매니저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했던 말은 그냥 한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 레슨이 많은 도움이 되었고, 특히 사람의 감정에 관한 분석과 이해라는 측면에서 단유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 [494] 상투(4) 과거에는 사람의 생김새와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수명이나 운명 등을 점치곤 했다. 관리를 선발할 때도 관상을 보고 ‘길상(吉相)’의 인재를 뽑기도 했고, 얼굴에 나타난 ‘흉(凶)’을 파악하여 위험을 피하고자 하기도 했다. 신라시대 때 들어와 조선 시대에 유행한 관상은 지금까지도 ‘관상학’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이 신뢰하고 의지하는 부분이 있다. 서양에도 관상은 있었다. 중세에는 관상학을 학문의 한 분야로 여겼으며 동양이 전체적 조화를 중시한 반면, 서양은 개별적인 부분의 해석을 더 중시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에는 과학이 급격히 발달하면서 비과학적 분석학인 관상은 발붙일 데가 없어졌다. 비록 예언적, 분석적 관상학은 사라졌지만, 심리학적 페이스 리딩(face-reading)은 다른 의미로 발달했다. 눈동자나 입술의 움직임, 눈썹이나 코의 씰룩임, 얼굴색의 변화 등이 그 사람의 심리를 파악하는 요소로 발전했다. 얼굴에 존재하는 두 개의 근육만으로 300가지 표정을, 세 개의 근육으로는 4,000가지, 5개의 근육으로 1만 가지의 표정을 조합해서 만들 수 있다는 연구도 나왔다. 이를 통해 얼굴 표정만으로 상대의 심리와 생각을 읽는 방법이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그동안 단유는 많은 사람들을 관찰했다. 교실 안의 사람들은 물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표정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관찰했다. 처음의 의도야 ‘경계’였지만, 이후 ‘심리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의도로 말을 하는 것인지를 파악하기 위한 실험적 관찰이 주가 되었다. 그 경험들이 고스란히 단유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었다. “자, 이번에는 친구가 고민거리를 너에게 털어놓으며 상담을 할 때로 가정해보자. 성적 고민일 수도 있고, 이성 친구에 대한 고민일 수도 있겠지. 넌 그 친구들의 고민에 공감하며 조언을 하는 역할이다. 알겠지?” 연기 레슨을 할 때 선생님은 임의의 상황을 설정하고 그에 맞는 역할을 지시했다. 단순히 대본을 읽고 그 대본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모호한 상황을 설정한 뒤, 그 상황 속에서 자유롭게 연기하는 것이다. 하나의 연기를 보이면, 그다음에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또 다른 연기를 보여주는 것. 그렇게 다양한 연기를 연습하는 것이 연기의 즉흥성과 유연성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설명이었다. 지금까지의 단유가 보여줬던, 즉 평소의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은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혀 다른 모습이라면? 단유는 기억 속에서 어떤 인물을 소환했다. “뭐, 그런 걸 가지고 고민해? 그거 나중에 시간 지나면 아무것도 아닐걸? 우리 할아버지가 그러는데 인생무상이랬어. 원효대사 님도 그랬잖아?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원효대사 님이 한 말은 그런 말이 아닌 거 같은데?” “아니면 말고. 그게 뭐가 중요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볍게 넘어가자는 모습. 단유는 지태를 떠올리며 지태의 말투와 표정을 ‘연기’했다. 선생님은 단유의 연기에 몇 가지를 지적했다. “말투에 비해 목소리는 여전히 단유 평소의 너와 크게 다르지 않아. 만약 가벼운 느낌의 사람을 표현하고 싶었다면, 말을 조금 더 빠르게 한다거나, 목소리 톤을 조금 더 올리는 방법도 좋을 거야. 그리고 가벼움을 좀 더 연기적으로 표현하려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몸이 움직여야지. 팔을 막 휘젓는 연기를 하란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가볍게 다리를 떨거나, 고개를 이렇게 까닥까닥 움직이는 게 좋지.” 단유는 지태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돌이켜보면 지태도 자주 다리를 떠는 모습을 보이곤 했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지태는 가볍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저 가볍기만 했다면 상대의 고민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지만 지태는 가벼울지언정 유쾌함이 있었다. 그 순간에 ‘유쾌하다’라는 기분을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지태는 자기 나름대로 친구를 돕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감정을 표정으로, 비언어적인 몸짓으로 드러내 보였던 것이리라. 그 감정이, 진실한 속내가 ‘유쾌함’과 어우러져 친구의 기분을 풀어주었던 것이 아닐까? “헤이, 브라더! 우리 스트레스나 풀러 가지 않을래?” 단유의 너스레 ‘연기’에 선생님이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그 후에도 단유는 표정, 움직임, 말에 기억 속 대상들을 이식시켜 연기를 해 보였다. 때로는 공부에 지친 급우들의 모습을, 때로는 지하철에서 지친 얼굴로 창밖을 보던 아저씨의 모습을 연기했다. 그리고 그런 연기를 하면서 동시에 그 사람들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어떤 감정으로 그런 말과 표정을 지었던 것인지를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연기는 상대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순히 상대가 이렇게, 혹은 저렇게 행동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순간 그 행동에 어떤 감정과 생각이 깃들어있는지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연기인 것이다. ‘연기’는 단유에게 표층적인 관찰 너머의 세계를 보게 해주었다. **** “컷! 이야, 점점 표정이 좋아지는데?” “고맙습니다.” “빈말이 아냐. 안 그러냐, 길중아?” 카메라 감독도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척 내밀었다. “너 와봐라. 같이 모니터 해 보자.” 감독은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단유를 불러 옆에 세워놓고 모니터를 보여주었다. 조금 전 촬영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보는 게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곧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니, 어설프긴 하지만 자신이 표현하려 했던 모습이 드문드문 보이는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다. 좀 더 숙달되면, 드문드문 보이던 저 연기가 좀 더 자연스럽게, 자신이 표현하려 했던 인물인 양 보일 것이다. “너 배우 해라. 배우 좋다, 좋아. 응?” 감독이 턱을 엄지손톱으로 긁으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케이 컷으로 갈까요?” 스크립터의 물음에 감독이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자. 오케이로 해.” “그럼 단유 바스트는 끝났고, 도연이 차롄가? 도연이 좀 불러와.” “제가 부를게요.” “아, 그래. 넌 그럼 가서 좀 쉬고 있어.” “네.” “잘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자?” “네.” 단유는 고개를 숙여 보이고 돌아섰다. 그 뒤를 감독이 힐끗 바라보다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쟤는 연기할 때랑 카메라 앞에서랑 똑같네요.” 조감독이 감상을 털어놓자, 감독이 눈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옹이구멍 같은 눈이 바로 네놈 눈이구나. 네 눈엔 저게 같은 거로 보이냐?” “비슷하지 않나요? 그래서 자연스러운 거 같은데?” 감독은 쯧, 혀를 차고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여 조감독을 바라보았다. “저놈 표정이 달라.” “표정이요?” “평소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이야. 아이답지 않게 깊은 눈빛도 그렇고. 그런데 카메라 앞에서는 아니야. 그냥 흔한 남자아이, 라는 느낌이라고. 왜 그런 줄 알아? 눈빛이 달라서 그래. 눈빛이.” 조감독은 오히려 더 모르겠다는 듯,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미세하게 변하는 표정과 눈빛이 사람을 전혀 다르게 보도록 한다고. 이그, 네가 그러니까 아직까지 내 밑에서 조연출이나 하는 거야. 너 언제 독립할래? 응?” “아, 왜 갑자기 이렇게 저격하십니까? 계속 그러시면 저 서러워서 일 못 합니다.” “허 참. 누가 말리니? 가고 싶으면 가? 아니 제발 좀 독립해라, 너도. 내 밑에서 일했던 놈들 중에 네 출석부가 제일 두꺼워, 아냐?” “에이, 그래도 저 없으면 힘드실 겁니다. 솔직히 제가 일은 제일 잘하지 않습니까?” “잡일 잘해서 뭣하게? 뭐에 써먹어? 빨리 독립해서 스튜디오 하나 차리라고 몇 번을 말해? 응?” “때가 되면 어련히 하지 않겠습니까?” “진짜 못난 자식 둔 애비 마음이 꼭 이러지 싶다.” “아드님이 지금 속을 많이 괴롭히나 봅니다.” “내 아들놈이 너처럼 굴었으면 가만 안 뒀어. 능글맞기나 하고 말이야.” 조감독은 헤헤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다음에 이어질 도연의 촬영을 위해 챙길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 찍었어요?” “네. 이번에는 도연 씨 차례라고, 나와서 준비하시래요.” “…아, 그래요.” 또 ‘도연 씨’라고 부른다, 이 아이. 이제는 은근히 불쾌하다. 왜 계속 거리를 두려고 하지? 무시당하는 느낌까지는 아닌데, 무시하려고 간을 보는 것 같아 살짝 기분이 좋지 않다. 도연은 그에게 건넨 마카롱이 아까워지려 했다. 도연이 나간 뒤, 도경이 단유에게로 다가왔다. “너 일부러 그러지?” “뭐가요?” “쟤랑 일부러 거리 두는 거 맞지? 그치?” 은근한 도경의 물음에 단유는 볼을 긁적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솔직히 그렇잖아. 요즘 대세 아이돌. 예쁘고 어리고 애교 많은 여자아이를 싫어하는 남자가 어딨어? 왜 네 취향이 아니야?” “거기에 ‘취향’이 왜 들어가요?” “그래서 싫어?” “싫긴요.” “그럼 좋아하는 거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럼 왜 그러는데? 내가 진짜 이해가 안 가서 그래.” “꼭 친해지려 하고 그래야 하나요? 누나가 일하면서 만나는 사람들한테 모두 다가가서 친해지려고 하지는 않잖아요?” “난 하는데?” “여기 촬영장에서 일하는 스태프들이랑 다 친해요?” “에이, 그건 비유가 이상하지. 적어도 이 대기실에서 같이 지내는 사람들끼리는 친해져야 정상이잖아?” “글쎄요.” “그럼 일부러가 아니란 소리야? 진짜 관심 없어?” “포기를 모르시는군요.” “궁금해서 그러지. 너 같은 남자애도 있구나 싶어서.” “누나가 아는 남자는 어떤데요?” “예를 들면, 저기 ‘출근길’에 나와서 얼굴이라도 한번 보려고 하는 애들?” “편견이네요.” “에이, 그렇게 빼지 말고. 솔직히 말해 봐. …일부러 관심 없는 척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관심이 없는 거야.” “존중하는 겁니다.” “존중?” “존칭, 존대법은 상대를 존중하는 표현이에요. 아시잖아요.” “그냥 존중만 한다? 이성적 관심은 전혀 없다?” “네.” “정말?” 단유는 한숨을 툭 내쉬었다. 아마 지금의 대화는 도연에게 흘러 들어갈 공산이 크다. “일로 만난 거예요. 친해지면 좋겠죠. 하지만 굳이 친해지자고 오버할 필요는 없잖아요? 자연스럽게 친해지는 게 좋으니까요. 하지만 이번 일이 끝나면 저랑 도연 씨가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요? 게다가 도연 씨는 연예인인데 괜히 저랑 친한 척하는 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 좋지 않잖아요.” “그걸 네가 왜 걱정해? 걱정해도 본인이 걱정해야지?” 도경은 손뼉을 치며 놀란 눈으로 단유를 보았다. “알았다! 너! 일부러 그러는 게 맞구나. 도연이랑 친해지면 도연이가 곤란해질 거 같으니까, 도연이가 걱정돼서 일부러 선을 긋는 거구나. 마음을 숨기고 말이야.” 단유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마 매니저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테지. 그래서 가끔 대기실에 들어와 슬쩍 경계심을 드러내 보이는 것일 테고 말이다. 마치 인터넷 연예기사에 올라오는 댓글을 보는 기분이었다. 단편적인 조각만 맞춰서 틀을 짜고, 그 틀에 자신만의 양념을 추가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남녀 연예인이 나란히 찍은 사진 아래에 ‘했네, 했어’ 같은 댓글을 다는 것이나, 남자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한 이가 ‘남자 연예인’의 기사 아래에 음험한 스토리를 조작해서 댓글을 다는 게 다 이런 식이 아닐까? 하지만 얼마나 많은 조각이 나뉘어있는지 모르고 몇 개의 조각만으로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건 ‘망상’이고 ‘편견’이다. 단유와 도연, 두 사람 관계 아래에는 보이지 않는 조각들이 숨어 있었다. ‘매니저’라는 조각도 있고, ‘나윤’이라는 흐릿하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조각도 남아 있었다. ‘도연’에 대한 단유의 개인적 ‘부담감’도 분명히 존재했고, 적당히 선을 지키는 관계에서 오는 심적 여유도 보이지 않는 조각 중의 하나였다. 과거에 ‘구설수’와 ‘댓글’의 피곤함을 겪었던 일도 있었고. 도연과 친해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야 지금과 같은 답답한 문답도 나눌 일이 없을 것이고. 지금은 그냥 책이나 읽으며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아! “전 혼자가 편하네요.” “혼자?” “네. 지금은 그냥 혼자인 게 편해요.” “아웃사이더니?” 단유는 고개를 갸웃하다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그리고 옆에 놓인 책을 집으며 대화의 마침표를 찍었다. ======================================= [495] 상투(5) “반장!”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단유를 부르는 소리에 단유가 시선을 돌렸다. “응?” 하얀색 커버가 인상적인 헤드폰을 목에 걸친 소년이 책상에 걸터앉아 있다가 단유와 시선이 마주치자 폴짝 뛰어내렸다. “너 도연이랑 촬영한다던데 사실이야?” “응.” “와, 그걸 여태 말 안 했어?” 뭐 무슨 중요한 비밀이라고 감출까. 외계인을 만나고 온 것도 아니고 일개(?) 연예인과 일(!)을 하고 왔을 뿐이다. 자랑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저 떠벌리지 않았던 것인데, 소년은 마치 큰 배신이라도 당한 양 볼을 부풀렸다. “내가 리본 소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당연히 모른다. 가끔 생각하는 것인데, 반 아이들이 자신을 무슨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시험공부 기간에는 쉬는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힘들 정도로 찾아와서 문제집을 들이밀었는데,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우리 학교 뒤에 있는 산 이름이 뭐지?” 이 정도는 가끔 생각이 안 나서 물어볼 수도 있다. “전화를 최초로 만든 사람이 누구야?” “안토니오 무치.” “아, 그렇구나.” 그래, 여기까지는. 상식 정도니까. “이번 챔피언스 결승에서 누가 이길 거 같냐?” 그건 너무 객관적이지 않은 답을 요구하는 것이지만, 친구 사이에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단유는 도박사가 아니니, 대답은 ‘모른다’였다. “조선 시대에 머머리는 상투를 어떻게 틀었어?” “머머리?” “대머리 말이야.” 왜 그걸 모르냐는 소년을 바라보며 단유는 미간을 좁혔다. 은어는 둘째치고 질문 내용 자체를 단유가 어떻게 알 거라고 생각한 걸까? “상투는 머리를 위로 올려 동곳을 꼽고 망건을 두르는 방식이잖아. 대머리, 라고 통칭해서 부르지만, 보통은 윗머리가 벗겨지지 밑머리는 남아 있을 테니까 그 밑머리를 길러서 위로 추켜 올려 동곳을 꼽는다면 상투를 트는 일이 어렵지 않을걸? 주변머리도 없이 완전히 탈모가 진행된다면 상투 없이 망건만 두르고 그 위에 탕건이나 갓을 썼겠지.” “와, 역시.” 질문을 던진 소년은 감탄했지만, 단유로서는 웃을 수 없었다. “내 추측일 뿐이니까, 다를 수도 있어.” “반장이 말한 건데 맞겠지.” 그 대답을 들으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반장, 내일 비 오냐?” 그런 질문은 그냥 들고 있는 핸드폰을 이용하라고 단유는 ‘충고’했다. 물론 ‘비 온다는 뉴스는 들어보지 못했어’라는 답도 덧붙여주긴 했다. “반장, 이빨도 뼈야?” “반장, 컴퓨터가 느린데 어떻게 해야 돼?” “반장, 이거 칼로리가 얼마야?” “반장, 여기서 대학로까지 얼마나 걸려?” 단유는 한숨을 쉬었다. “우리나라에는 인터넷이라는 훌륭한 통신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고, 너희들은 모두 인터넷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핸드폰을 들고 있잖아. 그리고 너희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포털에는 그런 질문을 하라고 섹션이 만들어져 있고, 굳이 그 섹션을 이용하지 않더라도 간단한 주제어 검색만으로 너희들이 궁금해하는 것들은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거야.” 아이들은 피식 웃었다. “인터넷은 돈 들잖아.” 지금 단유가 촬영하는 홍보 내용 중에도 있지만, 교육부는 조만간 초중고등학교에 와이파이 인프라를 설치할 예정이었다. 디지털 학습자료를 활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정보화진흥원(NIA)과 교육부가 업무 협약을 체결했는데, 과거에 시행하려다가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서 잠정 중단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산 확충과 장비 호환성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기에 곧 시행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각자의 핸드폰 통신을 이용하여 인터넷을 해야만 했고, 무시무시한 통신 요금 폭탄을 부모님께 안겨드리고 등짝이 부서지는 안타까운 상황은 피하고자 아이들은 무료 사용량 이상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 주의해야 했다. “인터넷으로 찾는 것보다 네가 더 빠르잖아?” 그렇다. 아이들은 단유를 값싼 성능 좋은 검색기로 활용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가 리본소녀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단유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러다간 ‘우리 집 식탁에 숟가락이 몇 개게?’라는 물을 것만 같아 걱정스럽다. “나도 사인 좀 받아주면 안 되냐?” ‘나도?’ 단유는 고개를 돌려 뒤에서 따라오던 명수를 쳐다보았다. 명수는 단유의 시선을 피해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찾아갔다. 리본소녀의 팬이라면 촬영장이 어디인지 알고 찾아올 정도니, 상대가 단유라는 것도 어쩌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도’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은 이전에 사인을 받은 이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니, 당연히 범인은 사인을 받아주었던 명수이리라. “내가 자랑하지 말랬지.” “아니, 그게. …미안해.” “으휴.” 유명인의 사인을 받는 것은 자기만족을 위한 수집행위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라 해도 ‘수집’은 ‘자랑’이나 ‘과시’를 위한 행위이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면 수집의 의미가 없다. 그러니 명수를 이해한다. “이해는 하지만, 벌은 받아야겠지?” “단유야.” “일주일 동안 설거지 담당.” “야, 너무 심하잖아!” 지켜보던 자칭 ‘도연빠’가 단유와 명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런 건 너희 집에서 이야기하고. 반장, 싸인 받아줄 수 있지?” 단유는 머리를 긁적였다. “조금 힘든데?” “왜? 같이 오래 촬영했다며? 자주 만났으면 친할 거 아냐?” 단유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명수를 째려본 뒤, ‘도연빠’에게 대답했다. “별로 안 친해.” “그런데 명수건 어떻게 싸인 받았는데?” “처음 만났을 때 부탁한 거니까 예의상 받아줄 수 있는 거지. 친하지도 않은데 계속 뭐 해달라고 요구하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이해하지?” “그럼 명수랑 반장 거만 받았어?” “단유는 안 받았어, 사인.” 명수가 끼어들었다. “응? 왜?” “말했잖아. 안 친하다고.” “아무리 안 친하다고 해도 그렇지, 리본 소녀의 도연인데 사인을 안 받아?” 마치 태양계의 중심이 태양이 아니라 달이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쩌면 저런 반응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도경도 자신에게 은근히 물어봤던 거겠지. “미안하지만 그 부탁은 들어주길 힘들 거 같다. 이해해 줘.” 도연빠는 아쉽다는 듯 단유를 보다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긴 몇 번 만났다고 친해지겠어.” 모태 솔로에게 여자는 두어 번의 만남으로 친해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게다가 천상천하 유일 여신 도연‘님’ 아닌가. 묘한 이유로 단유의 설명을 납득한 ‘모태 솔로’, ‘도연빠’는 손을 저었다. “어쩔 수 없지. 아, 맞다.” 본인의 자리로 갔다가 돌아온 도연빠의 손에는 작은 가방이 하나 들려 있었다. “이거 좀 전해줄래?” “뭔데?” “도연님한테 주는 선물이랑 편지.” “네가 직접 전해줘. 거기 너처럼 선물 들고 오는 사람 많던데.” “주말에만 촬영한다며? 난 주말에 가족 행사가 있어서 가기 어려워.” 단유의 손에 억지로 가방을 쥐여주고 헤벌쭉 웃음을 지었다. “반장, 꼭 전해줘야 한다. 알았지? 믿는다, 반장?” 단유는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그제야 ‘광팬’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자리로 갔더니, 앉아서 구경하던 명수가 히죽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니 떨려고 했다. “무조건 일주일.” “아… 단유야. 응? 미안.” 단유는 시치미를 떼고 가방을 정리했다. “반장, 굿모닝?” 마침 교실에 들어오던 급우 한 명이 단유를 보고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마주 손을 들어 인사하면서 생각해보니, 요즘처럼 자신이 많이 불린 적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틈만 나면 ‘반장’, ‘반장’ 외치는 것도 그렇지만, 약속이라도 한 듯 다들 ‘단유’라는 이름을 부르는 대신 ‘반장’이라고 호명하기를 즐기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때도 한 학기지만 반장을 했던 경험을 떠올리면, 그때는 지금처럼 많이 불리지 않았었다. 워낙에 반장이 할 일이 없기도 했지만, 반 아이들도 ‘단유’나 ‘석고’라고 불렀지―90% 이상은 석고라고 불렸다―‘반장’이라고는 부르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들 ‘반장’이라고 불렀고, 단유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선생님마저도 ‘반장, 이리와 봐’, ‘반장 자율학습 시켜’라고 명령하니 명수 외에는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반장’이라고 불리는 것이 어색했다. 하지만 몇 번 반복되니 이것도 적응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복도에서 다른 반 아이들이 ‘반장’하고 불러도 저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가며 부른 이를 찾곤 했다. 어릴 때는 반장을 ‘반장’이라고 부르기보다 누구누구야, 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만약 상대가 직급이나 특별한 호칭을 지닌 이라면 그 호칭을 부르는 게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이것도 교육의 영향일까?’ 딱히 반장을 ‘반장’이라고 부르도록 명령받은 적도 없고, 교육받은 바도 없지만 그렇게 부르는 관습을 교육받았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호칭에 대한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떠올린 것은 바로 ‘선생님’, 하은이었다. 어릴 때부터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그녀는 늘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혹시 그녀는 이름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학원에서도 하은은 ‘선생님’이라고 불릴 테고, 집에서도 ‘선생님’이다. 고작 몇 개월에 불과하지만 이름 대신 ‘반장’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 때문에 생각이 많아진 단유다. 하물며 몇 년 동안이나 이름 대신 ‘선생님’으로 불리는 하은은 어떤 마음일까? **** 하은은 단유의 질문에 손등으로 턱을 괴고는 흥, 콧소리를 냈다. “별로. 아무 생각 없는데.”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말 그대로. 어떻게 부르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네가 뭐라고 부르든, 아, 쟤가 날 부르는구나, 하고 뜻만 통하면 그만이지.” “너무 단순한 거 아니에요?” 마치 단유가 고민했던 것들이 다 부질없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 네 생각은 뭔데?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거야? 뭐, 그냥 이름이라도 부르게? 집에서 단유야, 하은아, 하고 부르자고? 맞먹자는 거니? 너 요새 번역한다고 영어 원서 붙잡고 있더니 생각도 서구식으로 바뀐 거야? 말 트고 지내고 싶어? 그래? 그게 네 생각인 거야? 한 번 그래 볼까? 응? 그러면 편할 거 같니?” 어디쯤에서 하은의 폭주를 멈춰야 하는 걸까 간을 보다가 그만 타이밍을 놓쳤다. “요즘 단유 네가 바빠서 힘든 거 같아 잠시 모른 척했더니 이렇게 건방져졌구나. 선생님은 참으로 가슴이 아퍼. 이래서 중2병 사춘기 아이들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고 하는 거구나. 어릴 때는 선생님, 선생님 부르면서 콧물 질질 흘리며 졸졸 따라오던 애가 이제는 머리 좀 컸다고 선생님이랑 맞먹으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사람이 변하니? 아, 알겠다. 너 요즘 돈 번다고 유세 떠는 거구나. 그치? 지갑에 돈이 쌓이니까 선생님이 이제 우습게 보이는 거지? 만만해 보이지? 그래, 알았어. 네가 정 원한다면 허락해줄게. 그냥 이름 불러. 불러봐. 선생님보다 돈도 잘 버는 단유가 이름을 부르고 싶다는데 부르게 해줘야지. 그치? 이제 편하게 불러. 그게 네 마음이 편해지는 길이라면 불러.” “알았어.” “…알았어?” “알았어, 하은아.” “…….” 어리벙벙한 눈으로 단유를 보던 하은이 별안간 손을 뻗었다. 이미 달아날 준비 중이던 단유가 늦지 않게 몸을 뒤로 쑥 빼더니 거실 바닥에서 몸을 한 번 굴러 거리를 뒀다. 그리고 엎드린 채로 하은을 보며 씨익, 짓궂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야!” “I’m sorry.” “너 잡히면 가만 안 둬!” 단유를 잡으려고 소파에서 일어난 하은의 손을 피해 단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김단유! 문 안 열래?” “선생님, 층간소음이요! 조용히 하셔야죠. 민폐예요.” “김단유!” 볼을 부풀리던 하은은 닫힌 방문을 보다 피식 웃었다. “너 안 나오면 설거지 당번 시킬 거다.” “괜찮아요. 일주일 동안 명수가 설거지 당번 하기로 했어요.” “명수가? 왜?” “약속을 어겼어요.” “뭐,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럼 거실 청소!” “그건 제가 늘 하는 거잖아요.” “그럼 아침 식사 당번!” “제가 만들어도 돼요?” 안 되지. 안 되고 말고. 다 떠나서 단유에게는 요리를 시키지 않겠다 마음먹은 하은이었다. 그건 그냥 재료를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아이, 정말! 너 왜 그렇게 못 됐어!” “선생님이 먼저 장난치셨잖아요!” “그렇다고 진짜 맞먹니? 응?” “I’m sorry!” “야!” 오늘도 단유네 집은 평화롭고 화목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 [496] 상투(6) “드디어 오늘 마지막 수업이네요?” 선생님은 도연과 단유 두 학생을 바닥에 앉혀 놓고 마주 앉았다. “두 사람 다 수고 많았어요.” “선생님도 수고 많으셨어요.” 도연이 나서서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제가 보기에 두 사람 모두 연기에 재능이 있어요. 비록 속성 초단기 수업이었지만, 두 사람이 보여준 발전 가능성만큼은 제가 이제껏 만났던 학생들 중에서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예요.” “고맙습니다.” 선생님은 고개를 슬며시 끄덕이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호흡이 참 잘 맞는 거 같아요.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예요.” 배려? 단유와 도연이 서로를 바라보았다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연기는 호흡이에요. 상대와의 호흡, 관객과의 호흡, 감독과의 호흡. 그 모든 호흡이 일치해야 비로소 연기가 완성된다고 할 수 있어요. 어려울 것 같죠? 어려워요. 하지만 그 어려운 걸 해내는 이들이 바로 연기자들이고 배우들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요. 제가 보증하죠.” “고맙습니다, 선생님.” 예의상 건네는 덕담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를 판단하긴 어려웠지만, 그래도 예전보다 나아졌다는 그 말이 도연은 너무 듣기 좋았다. 연습실을 나오며, 도연이 말을 건넸다. “내일이 마지막이네요.” “네.”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도연 씨도 수고 많으셨어요. 아, 제 친구가 사인 고맙다고 인사 전해달라더군요.” “인사는요. 그게 저희가 팬들에게 해드릴 수 있는 일인데요.”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내일 뵐게요.” “아, 네.” 단유가 먼저 작별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 “아, 저기요.” “네?” “저기 괜찮으시면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어요?” “네?” “지금 저희 매니저님이 아직 안 오신 거 같아서요. 오실 때까지만 같이 있어 주시면 안 될까요?” 도연은 붉어진 볼을 감싸며 수줍게 부탁했다. 단유는 도연을 보다가 학원의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매니저님 오셨네요.” “네?” 때마침 매니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 끝났구나?” “네.” “가려고?” “네, 먼저 가볼게요.” “그래. 도연아, 너도 빨리 준비해. 다음 스케줄 가야 돼.” “네.” 도연은 학원을 벗어나는 단유를 보다 옷가지를 챙겨 들고 탈의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뒷모습을 매니저가 지켜보았다. “에휴.” 저 나잇대 애들의 연애 감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본인도 그 시절을 거쳐왔고, 어린 애들이 어른들의 눈을 피해 연애하는 장면을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이 연애를 해도, 자신의 아이들은 안 된다. 이제 겨우 뜨기 시작한, 1년 차 아이돌이다. 회사 대표 입장에서야 엄청난 금액의 투자와, 그 투자에 기대어 성공을 거둔 ‘아이돌’로 인식되겠지만, 매니저에게 리본 소녀와 도연이는 동고동락한 자식들이나 마찬가지다.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건 부모의 공통된 마음이다. 지금은 샴페인을 터뜨릴 때가 아니다. 잠깐의 성공에 취해 무리하거나 안주하면 더 높은 곳으로 오르지 못한다. 더 조심하고 주의해야 할 시기다. 다행이라면 단유가 잘 ‘협조’해 줘서 불편한 상황은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매니저는 며칠 전의 상황을 잠시 떠올렸다. **** 단유는 매니저의 뒤를 따라 번화가에 있는 어떤 식당에 들어갔다. “예약하셨나요?” 머리를 곱게 빗겨 넘긴, 하얀색 유니폼의 단정한 여직원이 미소를 지으며 반겼다. “예. 심태성이란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있을 겁니다.” “잠시만요.” 곧 직원은 두 사람을 데리고 안내를 시작했다. 홀을 지나니 어슴푸레한 조명의 좁은 복도가 나타났고, 직원은 가장 안쪽 방을 향해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두 사람을 모셨다. “더 오실 일행 계신가요?” “예. 조금 있다 한 분 더 오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벨을 누르시고요, 직원이 인사하고 나간 뒤, 단유와 매니저는 검은 원목 식탁의 한 편에 나란히 앉았다. 아마 맞은편은 회사 대표님이 앉으실 자리라서 미리 비워둔 것이겠지. “이런 곳은 처음이지?” “아니요.” 으레 처음일 거라고 생각했던 매니저가 살짝 놀랐다는 듯 단유를 돌아보며 물었다. “언제?” 그러고 보니 그때도 엔터 기획사의 대표랑 가졌던 식사자리였는데, 또 이렇게 되었다. 잘 얻어먹는 복이라도 타고난 모양이다. “작년에요.” “아, 그래. 나름 잘 나가는걸?”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다른 직원이 물과 컵을 건네주고 떠났다. “어, 저기 물어볼 게 있는데.” 매니저는 목이 탄다는 듯 물을 한 번에 벌컥 마신 후, 단유를 돌아보았다. “도연이 말이야. 혹시 두 사람 별일 없지?” 단유는 빤히 매니저를 바라보다 대답했다. “없어요.” “의심해서 물어본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사실 도연이는 어렸을 때부터 회사에서 키웠어. 그래서 남자도 잘 모르고….” 단유는 매니저에게서 나오는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돌의 매니저란 사람들은 저 멘트를 똑같이 외우도록 교육을 받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 걸 생각하면, 나윤이 꽤 과감했던 셈이다. “매니저님. 저 정말 관심 없어요. 연애 별로 하고 싶지도 않고요.” “아, 뭐, 그렇다면 다행인데.…그런데 요즘 도연이가 부쩍 널 의식하는 것처럼 보여서 말이야. 아무래도 남자에 대한 환상도 많이 가질 나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널 좋게 봤던 거겠지. 이해하지?” 전혀 이해가 안 된다. 남자에 대한 환상과 본인이 어떻게 결부될 수 있는가?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사람처럼 멋있는 척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늘 같은 교복에 짧은 머리로 나타나는 단유였으니,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연애 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는 되도록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왜요?” “뭐, 그게,…자칫 다른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말이기도 하고….” 16살의 새파란 남자아이가 연애에 관심이 없어요, 여자에 관심이 없어요, 라는 말을 하면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만약 생각이 모자라거나 배려가 없는 인간이었다면 ‘너 남자 좋아하니’ 같은 질문을 던졌을 테지만, 자신은 사려 깊은 어른이고 이 자리는 대표님이 나오실 자리였다. 혀끝에 맴돌던 질문은 꿀꺽 삼키고 점잖게 충고하는 선에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잠시 후 말끔한 인상의 40대 젊은 대표가 나타났다. “심태성이라고 한다.” “반갑습니다. 김단유라고 해요.” 이후 식사자리에서 대표는 단유를 떠보며 연예계 쪽으로 들어올 생각이 없냐고 물었고, 단유는 그럴 의사가 없음을 재확인 시켜줌으로써 싱거운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아쉽네. 말로 듣는 것보다 훨씬 재능이 넘쳐 보이는데.” “고맙습니다만, 정말 생각이 없어요. 아직은요.” “그래, 혹시 나중에라도 생각이 생긴다면 우리 회사에 연락을 한 번 해주겠니? 우리 이 매니저한테 연락해도 좋고.” “알겠습니다.” “에이바운스에 연이 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는데, 우리 회사가 에이보다 훨씬 큰 회사인 거 알지? 만약 성공하고 싶다면 우리 회사를 선택하는 게 좋을 거야. 아, 이번에 그 회사에서 가디스R이 컴백한다고 하던데 들었나?” “예전에 듣긴 했는데, 언제 컴백하는지 까지는 들어보지 못했어요.” “이번 주에 컴백한다고 하더군.” 나윤 누나가 드디어 컴백을 하는구나. 뭔가 미묘하고 복잡한 심경이 들끓었다. **** 드디어 마지막 영상 촬영이 끝났다. 그리고 단유는 홍보용 사진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로 갔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리본 소녀 전부를 만나게 되었다. “반갑습니다. 리본 소녀입니다.” 시끌벅적한 스튜디오 안에서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그녀들을 보며 단유는 예전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곧 지워버리고 도경에게로 갔다. “오늘이 진짜 마지막이네?” “그러네요.” 도경은 서비스라며 단유의 얼굴에 분을 찍어 발랐다. 마치 재작년의 그 날처럼. 단유는 눈을 감고 도경의 손에 얼굴을 맡겼다. 도경은 익숙한 솜씨로 도구를 바꿔가며 촬영용 메이크업을 완성 시켰다. “어떠니?” “좋네요. 고맙습니다.” “언제 우리 따로 만나서 밥이라도 같이 해야 하는데 말이야. 늘 스케줄이 있어서 같이 식사를 못 했어.” “다음에 기회가 있겠죠.” 도경은 슬쩍 주변을 살핀 뒤,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 같이’ 식사 한번 하자고.” ‘다 같이’에 포함되는 이가 단유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다면 별로 내키지 않을뿐더러, 왜 이렇게 끈질기게 선을 닿게 해주려는 건지 궁금해진다. “애가 너무 섭섭해하더라고. 보기 안타깝잖니? 사귀라고는 말 못해도 그냥 식사 정도는 괜찮지 않겠어?” “그건 매니저님이 허락하셔야 할 문제 같네요. 도연 씨 스케줄은 매니저님이 관리하시는 거잖아요.” “그렇지. 그렇긴 한데, 일단 네가 허락을 해야 매니저에게도 물어볼 수 있지.” 단유는 이차 관문, 매니저는 최종관문 같은 거다. “불편해요.” “불편해?” “싫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부담스럽죠. 마주 보고 있는 것도 점점 부담스러워져요. 제가 그 마음을 받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뭔가 느끼한 걸 한 병 마신 기분이야. 속이….” 도경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화제를 돌렸다. 싫다는데 어쩔까. 오히려 같이 있게 되면 단유 뿐만 아니라 도연도 불편해질 것이다. 후회할 수도 있고. ‘그래, 어차피 연예인인데 차라리 시작을 안 하는 게 맞는 거겠지.’ 드디어 도경의 오지랖도 끝이 났다. 모든 촬영이 끝나고 ‘다정하게’ 사진도 찍었다. 단유가 찍고 싶어서 찍은 게 아니라, 연예 신문 기자가 와서 찍자고 부탁을 하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 “두 사람이 영상 주인공이죠? 두 사람은 앞에 나란히 앉고, 뒤에는 언니분들이 서주실래요?” 도연은 다리를 가지런히 접어 단유의 옆자리에 앉았다. 볼이 살짝 붉어지는 기분이 들었는데, 그게 나름 애교스러운 외모와 맞물려 사진 기자의 흥분을 끌어냈다. “한 장만 더 찍어요! 표정 좋아요!” 그 사진은 곧 인터넷 연예면에 올랐고, ‘교육부 홍보모델 리본 소녀’라는 해쉬태그와 함께 SNS 상에서 복제되어갔다. 단유네 반에서 ‘도연빠’라고 했던 소년은 핸드폰 속의 사진과 벽에 걸린 사인을 번갈아 보며 어쩔 줄 몰라했고, 리본 소녀의 팬이 아닌 이들도 SNS에서 떠도는 사진을 보며 ‘입덕’을 했다. “어쩌면 표정이 이렇게 예뻐?” “그런데 얘네 둘 너무 잘 어울리는데?” “남자애도 잘생겼어. 둘이 잘 어울려.” “혹시 이미 사귀는 거 아냐?” “그럴 수도 있겠다. 한 달 넘게 같이 촬영했으니까 그 사이에 같이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하다 보면서 친해졌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 사진을 우연히 보게 된 이가 또 있었다. 핸드폰을 뺏겨서 이제는 이메일이나 유선 전화로 주변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나윤은 이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다 우연히 포탈 메인에 걸린 연예기사를 보게 되었다. ‘단유야.’ 마우스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한동안 잘 잊고 지냈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뜻하지 않게 얼굴을 보니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뭐하니?” “아, 실장님.” “아, 그거.” 실장은 매시간 새로 나온 연예 뉴스를 살피는 게 일인지라, 나윤이 보던 그 뉴스도 몇 시간 전에 봤었다. “쟤는 말만 연예인 안 한다고 하면서 하는 건 연예인보다 더 많이 나오는 거 같애.” “…….” 나윤의 소리 없는 대답을 곁눈질로 확인 후, 실장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나윤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려가자. 연습해야지. 다 쉬었지?” “실장님.” “응?” “저 한 번만 보러 가면 안 돼요?” “안 돼.” “실장님.” “너네 끝났잖아? 나윤아. 컴백 얼마 안 남았어. 지금 스트레스받고 힘든 거 아는데, 걔 만난다고 스트레스가 풀릴 거 같니? 다시 만난다고 너희가 잘될 거 같아? 안 그래. 전에도 말했잖아? 이제 현실을 보라니깐? 그리고 같은 여자로서 해주는 충곤데, 여자가 그러는 거 남자들 싫어한다? 질척거린다고 되게 짜증 내고 그래. 헤어졌으면 쿨하게 헤어져야지, 다시 보고 싶다면서 찾아가고 전화하고 그러는 거 꼴불견이야.” 나윤이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을 옮길 생각을 못하고 있자, 실장이 다시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좋은 기억만 남았다며? 그럼 너도 그 사람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지 않니?” 이윽고 나윤은 천천히 걸음을 떼어 지하 연습실로 향했다. ======================================= [497] 권투(1) “단유야. 나 아파.” 새벽 운동을 위해 일어난 단유가 명수를 깨워주기 위해 그의 방에 들어갔을 때, 명수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단유를 불렀다. 보기에도 얼굴이 하얗게 질린 데다 식은땀을 흘려 옷이 젖어 있었다. “선생님!” 명수를 부축한 채로 소리를 질러 하은을 깨웠다. 곧 하은이 졸린 눈을 하고 나타났다. “무슨 일인데 새벽부터 부르니?” “명수가 아파요!” 비몽사몽 잠이 덜 깼던 하은은 신음을 흘리는 명수의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차 갖고 나올게, 먼저 명수 데리고 나가!” 그렇게 지시를 내린 하은은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간단히 옷을 챙겨 입고 자동차 키를 챙겨서 나왔다. 그 사이 단유는 명수를 둘러업고 집을 나가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도착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집 문이 벌컥 열리며 하은이 뛰쳐나왔다. 셋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어떡해? 많이 아파?” “선생님, 아파요.” “어디가? 어디가 아픈데?” “배가, 배가 너무 아파요.” 비록 명수를 둘러업고 나오긴 했지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외출 나갔던 이성이 돌아온 단유는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구급차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요?” “여기서 병원이 멀지 않아. 이 새벽이면 5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하은의 말처럼 병원까지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물론 하은이 제 속도를 지키며 달리지는 않았다. 아직 6시도 되지 않은 새벽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맹장이나 복막염 같은 거면 빨리 가야 돼.” 단유는 뒷자리에서 명수를 부축한 채로 다른 손으로는 명수의 손을 꼭 붙잡았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그렇게 되뇌었다. “식중독입니다.” “식중독이요?” “네.” 집에 상한 음식 같은 게 있나를 고민할 때, 의사 선생님은 친절하게 식중독 예방법을 알려주는 대신 병원 원무과에 가서 약 받으라고 일러주고는 다른 환자에게로 향했다. 하은은 명수 곁에 앉아서 잠이 든 명수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 나는 줄 알았잖아.” 촉촉한 하은의 눈을 피해 단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는 가운데 묘하게 가라앉은 공기가 밝은 형광등 불빛 아래 멈춰 있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새벽임에도 응급실에는 사람이 많았다. 모든 침상이 꽉 들어찬 건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응급실을 찾는 모양이었다. 신음을 흘리며 죽는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었지만, 낮게 코를 골며 잠을 자는 이도 있었고, 도란도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있었다. 드르륵 바퀴 끌리는 소리가 나며 응급실 자동문이 열리더니 주황색 유니폼을 입은 119 구급대원들이 이동침상을 끌며 나타났다. 다른 환자를 보던 의사가 곧 그쪽으로 향했다. 단유가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잘 들리진 않지만, 구급대원들이 의사에게 뭔가를 설명하고 의사는 간호사와 함께 빈 침대로 환자를 인도했다. 다시 명수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링거를 꼽고 잠이 든 명수가 눈에 들어왔다. 응급실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통증에 이를 악물고 신음을 흘리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다행히 진통제를 맞고 잠이 든 명수는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집에 상한 음식 같은 게 있었어?” 하은의 물음에 단유는 고개를 내저었다. 곰팡이가 필 정도라면 모를까, 음식이 상했는지 안 상했는지는 눈으로 봐선 알 수 없었다. 눈으로 알 수 있는 정도라면 명수도 먹지 않았을 테고 말이다. “모르겠어요.” 하은은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단유를 돌아보았다. “우리 냉장고 청소 언제 했었지?” “냉장고 청소를 한 적이 있나요?” 학교는 가야 하지 않겠냐는 하은의 주문에 단유는 어쩔 수 없이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들어온 단유는 먼저 냉장고부터 살폈다. 명수나 하은이 가끔 야식으로 먹기 위해 주전부리를 사놓은 것들도 있었고, 반찬 가게에서 사다 놓은 반찬들도 적지 않게 있었지만 그중 어떤 것이 상한 것인지는 쉽게 파악하기 힘들었다. 후각이 예민한 편이라 냄새가 이상한 것이 있다면 진작에 찾았을 테지만, 그런 냄새도 맡기 어려울 뿐 아니라 냉장고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냉기에 섞인 냄새 덩어리는 이것저것 섞인 냄새라 구분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청소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냉장고 안쪽 깊숙이에 생긴 성에라든가, 냄새 덩어리 속에 묘하게 섞인 쿰쿰한 냄새도 어쩌면 청소를 안 해서 생긴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여태 냉장고를 청소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한 적이 없었다. 청소해야 한다고 알려준 이도 없었고, 청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한 적도 없었다. 그저 정리만 잘하면 되겠거니 하며 내버려 뒀던 것이다. 자전거를 끌고 홀로 등교를 하던 중에도 단유는 명수에 대한 걱정과 냉장고 청소에 대한 고민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병원에 갔다 오느라고 등교가 늦은 단유가 교실에 도착했을 땐, 이미 1교시가 진행 중이었다. 국어 과목을 수업 중인 선생님께 간단히 사정을 설명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교무실로 향했다. “명수는 괜찮니?” “네. 제가 나올 때는 자고 있었는데요,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밤새 통증으로 잠을 못 자고 있다가 진통제 때문에 아픈 게 사라지니까 피로가 몰려 잠이 든 거라고 하더라고요. 자고 나면 괜찮을 거라네요.” “그럼 다행이구나. 너는? 너는 괜찮고?” “네.” “그래, 알았어. 들어가 봐.” “네, 선생님.” 단유는 담임 선생님께 고개를 숙여 보인 뒤,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교실에 들어서자 아이들이 몰려와 물었다. “반장, 명수는?” “명수 아파서 병원에 있어.” “아파? 왜? 다쳤냐?” “식중독.” “그럼 오늘 결석이네? 오진다!” 아이들은 식중독이란 말에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넘겼다. “요새 점점 더워져서 교실에 앉아 있기도 힘든데. 나도 어디서 뭐 좀 주워 먹어볼까?” “혼자 먹고 째게? 하려면 다 같이 해야지.” “그거 웃기겠다. 우리 반 애들 다 같이 식중독 걸리면 뉴스에 날 거잖아? 그러면 급식 막 조사하러 오고 그러는 거 아냐?” “애들이 수업 째려고 일부러 상한 음식 주워 먹었다고 하면 인터넷에 기사 뜨면 지린다고 댓글 달리는 거 인정?” “그 밑에 이거 실화냐, 이러면서 댓글 달릴 각 인정?” “인정!” “역대급 주작이라고 난리 날걸?” 농담처럼 주고받는 이야기들의 가벼움은 ‘식중독’이란 질병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일까? 아니면 자기 일이 아닌 것에게는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구멍 난 백지, 혹은 고장 난 저울. 하지만 비웃지도,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마치 단유가 냉장고 청소를 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과 비슷할 것이다. 배우지 못하거나, 가르치는 이가 없으면 모르고 사는 것이다. 언젠가는 배울 수도 있고, 혹은 평생 배우지 못한 채 살아갈 가능성도 있다. 시쳇말로 ‘실전’을 거쳐야만 알 수 있는 이도 있을 것이다. “식중독 그거 심각한 병이다.” 단유의 말에 ‘아무 말 대잔치’를 이어나가던 아이들이 돌아보았다. “식중독 방치하면 사람 죽을 수도 있어.” “에이, 오버 쩐다, 반장. 나도 예전에 식중독 걸려봤거든? 그거 처음에만 조금 아프고 마는 거거든.” “대부분의 식중독은 구토나 설사로 부족해진 수분을 보충만 하면 나을 수 있긴 해. 하지만 때로는 장기가 손상되거나 열이 심하게 나서 항생제 치료를 병행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 약한 식중독이라면 네 말대로 약간의 통증과 설사 증상만 있을 수도 있겠지만, 심한 경우라면 앞서 말한 증상에 구역질과 심한 복통은 물론이고, 사망에 이른 사례도 있어. 독일에서 장출혈성 대장균 식중독 감염으로 14명이 사망한 사례도 있거든? 미국도 연 5천 명 정도가 식중독으로 사망한다는 보고가 있고.” 아이들은 단유의 말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런 것도 알아?” “와, 역시 반장은 모르는 게 없네. 쩐다!” “반장 이야기 듣고 나니까 갑자기 식욕 돋네. 매점 갈 사람?” “야, 지금 5분도 안 남았어.” “졸라 뛰면 되지, 새꺄.” “그거 말할 시간에 가겠다.” “나도!” 몇몇 아이들이 우르르 뛰어 교실 밖으로 향했다. 단유의 지식 대방출에서 ‘반장은 백과사전’이란 결과만 도출해 머리에 심은 아이들은 뇌의 나머지에 ‘쉬는 시간은 매점이 진리’라는 생각을 채워 넣으며 복도를 뛰어갔다. “오늘 명수 아파서 결석한 거 알지? 점점 여름이 다가오는데, 날이 더울수록 음식이 잘 상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건 알 거야. 하지만 식중독은 여름에만 잘 나는 게 아니고 봄 가을에도 많이 발생하는 질병이야. 그러니까 항상 음식을 먹을 때 유통기한 같은 거 잘 확인하고 상한 음식 먹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알겠니?” “네!” 대답은 큰 목소리로 열심히 외치는 아이들. “너희 이제 기말시험 얼마 안 남은 거 알지?” 갑작스런 화제 전환에 아이들은 ‘에이’ 나 ‘우우’ 같은 야유의 목소리가 합창처럼 터져 나왔다. “조용! …학교 끝나고 딴 데로 새지 말고 제발 집으로 들어가자, 응? 괜히 쓸데없는 곳 돌아다니다가 몸 상하고 시간 낭비하는 일 없게 해라. 그래야 기말시험도 잘 칠 수 있는 거야.” 선생님은 종례를 마치기 전, ‘명수에게 안부 문자라도 하나씩 보내줘’라는 말을 덧붙인 후 교실을 나섰다. 우르르 빠져나가는 학생들 사이로 지태와 채윤이 들어왔다. “가자.” 두 사람은 점심시간에 명수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래서 학교 마치고 같이 병원을 가자고 먼저 제안을 해왔다. “너 학원 안 가?” “친구가 아파서 병원에 있는데, 어떻게 학원을 가냐?” 지태의 말에 단유가 피식 웃었다. “말은 고마운데, 어째 핑계처럼 들린다?” “네 착각이다.” “채윤이 넌?” “병원 들렀다가 가도 돼. 어차피 병원에서 학원까지 별로 멀지도 않은데.” “그래.” 세 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참고로 지태와 채윤도 자전거를 마련했다. 채윤은 잘 모르겠고, 지태는 ‘단유’의 이름을 팔아서 샀다, 고 전해 들었다. 그리고 그 대가, 라고 표현하긴 그렇지만 자전거 가격과 동일한 가치의 성적 상승을 위해 학원에 다녀야 하는 지태였다. 솔직히 여느 스타 강사보다 더 족집게 같은 단유와 시험공부를 하는 게 성적을 올리기엔 더 좋다. 하지만 학원도 같이 다니면 ‘시너지’ 효과가 날 거라고 굳게 믿는 지태의 부모님이셨다. “선생님, 저희 왔어요.” “왔어? 지태랑 채윤이도 왔네?” “네, 안녕하세요, 선생님.” “지태 넌 학원 다닌다면서?” 지태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친구가 아픈데 어떻게 병문안을 안 올 수 있어요? 그치, 명수야?” 단유가 떠날 때와 달리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던 명수가 피식 웃었다. “개구라 떨지마. 너 학원 땡땡이치려고 온 거잖아?” “와, 친구의 진심을 이렇게 곡해하다니! 섭섭하다, 진짜.” “내가 채윤이의 진심은 믿겠는데, 너의 진심은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내가 채윤이보다 못 믿을 놈이란 말이야?” “당연하지. 너라면 채윤이를 믿을래, 너를 믿을래?” “나라면 당연히, 채윤이를 믿지.” 명수와 지태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명수가 곧 미간을 좁히자 지태가 얼른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많이 아파?” “아냐. 많이 나았는데, 웃으니까 배가 조금 당기는 거 같아서 그래. 아프진 않아.” 단유가 가방을 침대 옆에 벗어두며 끼어들었다. “지금은 진통제 때문에 아픔을 덜 느끼는 거지, 완전히 나은 건 아니라서 그럴 거야. 게다가 새벽까지 아픈 걸 무식하게 참느라고 배에 얼마나 힘이 많이 들어갔겠어? 아마 근육이 조금만 당겨도 아플 거야.” 하은이 듣다가 풋, 하고 웃음을 지었다. “왜요?”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마치 의사 선생님 같아서 그래.” 명수가 손가락을 퉁겼다. “야, 네가 의사하면 좋겠다. 내가 축구 하다 다치면 너한테 찾아가서 고쳐달라고 하면 병원비 안 내도 되는 거 아냐?” “병원비 생각하기 전에 다칠 생각을 하지 마.” “축구 하면서 어떻게 안 다쳐? 축구 선수랑 부상은 부부 같은 거랬어.” …별 이상한 걸 다 가르치네, 축구부 감독은. ======================================= [498] 권투(2) 단유는 명수의 말을 무시하고 하은에게 시선을 던졌다. “선생님. 이만 가보세요. 여긴 제가 지킬게요.” “가긴 어딜 가, 내가?” “학원이요.” “괜찮아. 명수가 아픈데 어떻게 그래?” “선생님, 저 괜찮아요. 약 먹었더니 좋아졌어요. 의사 선생님도 포도당 주사만 맞으면 금방 나을 거라고 그랬잖아요? 이참에 푹 쉬는 건데요, 뭐.” 하은이 과장되게 눈썹을 추켜세우며 놀란 척을 했다. “뭐니, 너? 기껏 선생님이 너 걱정돼서 옆에 있겠다는데, 내가 옆에 있으면 귀찮니? 옆에 있으면 쉬는 게 아냐?” “솔직히 뭐….” 시치미 뚝 떼고 당연한 걸 묻는다는 명수의 표정. “왜 말을 하다 말아? 진짜 선생님이 갔으면 좋겠니?” 단유는 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려는 만담을 조기에 붙잡았다. “그만 해요. 다른 사람도 보고 있는데 부끄럽게 그래요. 명수 말대로 병간호가 크게 필요하지도 않은 상황 같으니 선생님은 이만 가서 일 보세요.” “오오, 말인즉슨 가서 돈 벌어와라?” “왜 또 그래요.” 명수가 또 손가락을 퉁겼다. “맞네, 그 말이네. 선생님, 단유가 돈 벌어오라잖아요. 단유가 시키면 해야죠.” 이번엔 단유가 발끈했다. “야, 내가 언제 그런 말 했어?” “아니야? 내 귀엔 그렇게 들리는데?” “그치? 네 귀에도 그렇게 들리지? 저게 요새 돈 번다고 위아래 구분을 못 하는 거 같애. 명수야, 네 친구 점점 건방져지는 것 같지 않아?” “저도 요즘 조금 그런 걸 느끼고 있어요. 며칠 전에는 저보고 돈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기가 막혀서. 단유가 입을 벌리고 바라보자, 하은이 옳다구나 명수의 말을 받았다. “어머, 그게 정말이야? 단유가 너보고 그랬어? 지가 벌면 얼마나 번다고 그래? 돈 번다고 유세 떠는 거네?” “맞아요, 유세. 단유가 요새 유세 떨어요. 되게 많이.”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아주 죽이 척척 맞네요, 두 사람.” “그럼 선생님이랑.” “제잔데.” 두 사람이 서로 바라보며 키득거리는 모습이 참 가관이라 헛바람을 뱉는데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지태가 양 볼에 익살을 한 주머니 가득 채우고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지태, 너 아무 말 하지 마라. 너까지 끼어들면 진짜 정신없다.” “…아, 알았어.” 지태는 단유의 서늘한 눈초리에 찔끔 놀라며 입을 닫았다. 그 모습을 본 후 다시 명수를 보자, 명수는 슬금슬금 누우며 담요를 턱밑까지 끌어올렸다. 하은을 바라보니, 하은이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쟤는 왜 저렇게 농담을 못 받아줘? 괜히 무섭게.” 그러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너한테 쫓겨나는 게 아니라, 내가 갈 때가 돼서 가는 거야. 원래 가려고 했어.” “다녀오세요. 아, 그리고 끝나고 집으로 오세요.” “집으로?” “네. 말 나온 김에 냉장고 청소나 하죠.” “여기는 어쩌고?” 단유가 명수를 바라보았다. 명수는 코 밑까지 담요를 끌어올렸다. “지 말대로 아픈 거 하나 없다니까, 굳이 자리 지킬 필요 있나요? 저도 집에 갈 거예요.” “단유야!” 명수의 놀람은 한 손을 내저음으로써 물리쳤다. “말 나온 김에 묻자. 너 도대체 뭘 먹었던 건데? 대충 살피긴 했어도, 냉장고에서 상한 음식 같은 건 없던데?” “아, 어제저녁에 책 읽다가 조금 출출하기도 하고 목도 마르고 그래서 우유를 마셨는데, 그게 좀 탈이 났었나?” 책이라면 ‘만화책’이겠지. 그런데 우유라면 냉장고에 있었을 텐데, 냉장고에 있는 우유를 먹고도 식중독이 걸리나? **** “그럼 이것으로 조회를 마치도록 하죠. 아, 그 전에 임 선생님.” 주임의 부름에 일어서려던 희선이 주춤거리며 대답했다. “네?” “윤 선생님 반에 학생 한 명이 식중독이라고요?” “네, 선생님.” 희선은 여전히 앉지도 서지도 못한 어정쩡한 자세였다. “다른 반 선생님들도 애들 건강 관리 차원에서 공지 한 번 하세요. 음식 섭취 시 주의하도록 이르고요. 실제로 식중독은 여름철보다 봄 가을에 더 많이 발생한다고 하니까요.” 봄과 가을에 식중독이 많이 발생하는 이유는 음식이 잘 변질되어서라기 보다는 여름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람의 주의가 덜한 계절이기 때문이다. 여름은 음식이 잘 상한다는 것을 알기에 음식 보관이나 섭취에 주의를 많이 기울이지만, 봄과 가을에는 음식이 변질될 수 있음에도 잘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한다. “학생도 이와 같습니다. 너무 특정 학생에게만 신경이 편중되면 다른 학생들에게 소홀할 수 있으니 그 점 유의해서 학급 관리 부탁드립니다.” 공평한 시선, 공평한 처우. 형평성은 교사의 책임감과 직결된다. “그리고….” 교장, 교감, 주임. 이분들은 말이 끝날 듯 끝날 듯하면서 끝나지 않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덕분에 희선은 아침부터 강제로 스쿼트를 해야 했다. 강제로 하는 운동은 효과가 제로다. “…그러니까 목마르다고 식수대 물 함부로 마시지 말고, 매점에서 빵 같은 거 사 먹을 때도 꼭 유통기간 확인하고. 알겠지?” “네!” “하여튼 대답들은 잘해요. 아무튼, 만약에 교실에서 갑자기 아프면 선생님한테 바로 알리고, 선생님이 없으면 반장에게라도 알려야 한다. 알겠니? 반장은 지체없이 선생님께 보고할 수 있도록 하고. 그럼 여기까지. 수업 때 졸지 말고.” 희선은 출석부를 챙겨 들고 교무실로 향하다, 2반 담임 선생님과 만났다. “조례 끝났어?” “네.” 2반 담임 선생님은 희선보다 5년 빠른 선배 여교사였다. “선생님은 좋겠다.” “뭐가요?” “반에 사고가 없잖아?” “없긴 왜 없어요. 당장 식중독 환자도 나온 판국인데.” “그 정도는 사고 축에도 못 들어. 식중독이야 병원에서 며칠 쉬면 금방 낫는 병인데. 3일 정도면 바로 퇴원일걸? 그리고 5반에는 단유가 있잖아.” “그게 무슨 말이에요?” “왜 시치미를 떼? 애들끼리 하는 말 모르니? 단유가 학기 초에 싸움을 벌이는 건 1년 동안 사고가 안 나도록 ‘액땜 굿’하는 거라고.” “그건 애들 말이죠.” “단유네 반이 다른 반에 비해 유독 조용한 건 사실이지.” “대신 단유가 제일 큰 걸 터뜨리곤 했었죠.” 굳이 상관관계를 따지면 작년 초겨울 즈음 벌어졌던 교복 반대 집회의 시작은 단유의 생방송 발언 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학급 담임 입장에서는 반 조용하고, 반 평균 올라가는 일만 있으니 얼마나 좋아. 단유도 처벌을 받진 않았고. 결국, 업무평가에는 결과만 올라가는 거야.” “아, 그러고 보니 곧 ‘자평’해야 하네요.” 새 교장 선생님 취임식 때 교장이 직접 제안한 ‘자기 평가 제도’에 따라 자신에게 ‘성적’을 매겨야 했다. “전 이거 좀 불편해요. 마치 북한에서 ‘자아비판’하는 거랑 똑같은 거 아니에요?” “임 선생, 그렇게 생각하면 밑도 끝도 없는 일이야. 일본에서 먼저 도입한 제도라잖아? 공정한 평가를 위해서라는 취지에는 공감을 해줘야지.” “뉘앙스만 들으면 선생님도 별로이신 거 같은데….” “그럼 누군 좋겠니? 그런데 어쩌겠어? 교장 선생님인데. 군대에 그런 용어 있다잖아? 까라면 까라고.” “여기가 무슨 군대도 아니고.” 어느새 교무실에 다다른 두 선생님은 교무실에 들어서면서 각자의 자리로 가기 위해 갈라졌다. 본인 자리에 와 털썩 앉은 희선은 첫 수업 일정을 살핀 뒤 잠깐 시간이 남는 것을 확인하고는 의자에 계속 앉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학년 주임 선생님의 말씀처럼, 편중된 시선이 소외학생을 만든다는 이야기는 일견 이해가 가는 부분이긴 했다. 하지만 시선이 절로 가게 하는 아이가 있다면? 김단유, 그 아이는 블랙홀 같다. 자신의 신경만 끌어당기는 게 아니라, 온갖 소음과 소란을 모두 흡수해버리는 것 같았다. 2반 담임의 말처럼 첫날 이후, 단유네 반은 시끄럽게 떠드는 일은 물론이고 수업 태도도 좋다고 소문이 났다. 몇몇 아이들의 성적 하락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치트키 같은 단유의 성적이 반 평균을 쭉쭉 끌어 올려주니 다른 담임들이 부러워할 만도 하다. 실제 담임을 맡은 바로서 솔직히 평가하자면, 5반은 ‘무난한’ 반이었다. 자신이 보지 못한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의 귀에까지 들어오는 일들은 전혀 없다. 다른 반의 경우에는 온갖 일탈, 사고, 심지어는 가벼운 시비에서 이어진 몸싸움 등이 연이어 터지면서 건너 책상, 옆 책상 할 것 없이 소란스러운데, 자신의 책상만 고요하다. 그러니 남들은 부러워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희선은 그게 마치 태풍 속 눈처럼 느껴졌다. 거대한 태풍의 한가운데에서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착각을 느끼게끔 하는 현상. 그 고요가 길고 깊을수록 그 뒤에 따라올 일들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 생각을 2반 담임에게 들려줬다면 ‘오버하지 마’라고 한 소리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학교 전체에 울렸다. 희선은 상념을 갈무리하고 일어나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 “야, 김단유.” 점심을 먹고 나오는 길에 들려오는 소리에 돌아보니 도하가 단유를 부르고 있었다. 지가 무슨 선비라도 되는지 팔자걸음으로 느긋하게 걸어오는 모습에 단유는 고개를 갸웃했다. 단유와 같이 있던 아이들이 슬금슬금 걸음을 빨리하여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뭐야?” “뭐긴. 같이 매점이라도 가자고.” “너희 반 애들이랑 같이 가.” “이제 같은 반 아니니까 모른 척하자 이거야?” “너희 반에는 친구 없어?” “내가 친구 같은 걸 만들겠냐?” 비록 도하가 예전의 삶을 버렸다 해도 다른 아이들에게는 여전히 무서울 수 있는 도하였다. 2학년 때 얌전해졌다지만 단유네 무리 외에는 도하에게 다가가는 아이들이 없기도 했었고, 도하도 별로 다가가려는 노력이 없었다. “뭐 사줄 건데?” “네가 사줘라.” “내가 왜? 설마 삥 뜯는 거야?” “그래, 오늘은 오랜만에 삥 한 번 뜯자. 라면 사줘.” 이미 단유와 같이 있던 아이들은 먼저 교실로 돌아가고 없었다. “가자.” 단유는 도하를 데리고 매점으로 향했다. “너 밥 안 먹었어?” “먹었어.” “그런데 그게 들어가?” “네가 음료수 마시는 거랑 똑같아.” “내가 마시는 건 그냥 물이고, 네가 먹는 건 탄수화물이 다량 포함된 음식이잖아. 같을 수 없지.” “아 몰라. 그냥 먹고 싶어서 그래.” 후루룩 먹어치우던 도하는 금세 컵라면 한 그릇을 비웠다. “아, 잘 먹었다.” 배를 툭툭 두드리며 만족스런 표정을 짓던 도하는 단유를 바라보며 물었다. “단유 너, 조심해야겠더라.” “응?” “너희 반에 병억이가 널 저격할 거란 소문이 있어.” “저격은 무슨. 그리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 꼬봉이 말해주더라.” “꼬봉? 너 다시 그쪽 길로 발 들인 거야?” “아니. 그냥 가만히 있는데 와서 꼬봉 시켜 달라는 애들이 있어서 그래.” “가만히 있는데 와?” “그런 애들 많아. 작년에도 병호가 나한테 와서 꼬봉하겠다는 걸, 네가 막았었잖아.” “그런 적이 있었나?” 힘이 약하고 보호가 필요하다고 스스로 판단한 아이들은 자신을 지켜줄 적당한 우산을 든 이에게 먼저 다가간다. 우산을 든 이는 그런 이들을 ‘꼬봉’이라고 부르며 우산 아래로 불러들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아무튼 몰래 밑 작업을 한다는데, 우성이도 판에 끼었나 보더라.” 유우성. 2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도하와 친구였다가 도하가 개심한 이후, 홀로 단유와 대적했던 아이. 하지만 단유에게 혼쭐이 난 뒤로 쥐죽은 듯 얌전히 지내던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은 단유가 또 한 명의 일진을 물리쳤다, 고 소문을 냈지만, 우성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축구대회 때 응원하러 온 상미를 불쾌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 아니라 음흉한 생각까지 품었었고, 이를 알게 된 단유가 분노로 가득 차 우성을 힘으로 제압하고 협박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다시 복수를 꿈꿨고, 여전히 그 복수는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도하는 단유가 마시던 물을 빼앗아 마시며 입을 헹궜다. “너도 참. 인생 참 힘들게 산다.” 도하가 혀를 차며 말했다. “뭐가?” “적을 만드는 스타일인가 봐.” 적을 만든다, 라. “그거 말해주려고 라면 사달란 거였어?” “정보료라 생각해.” “걱정해줘서 고맙다.” “걱정은 무슨.” 비록 표현은 안 했지만, 도하는 단유가 고마웠다. 단유 덕분에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기도 했거니와 오랜 시간 그를 괴롭혔던 트라우마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명수 나으면 다 같이 노래방이나 가자.” “그래.” “먼저 간다.” 도하는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고 뒤돌아섰다. 단유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하여튼 저 뜬금없는 인간은 끝까지 컨셉으로 밀고 갈 모양인가보다. “적이라니.” 무슨 전쟁이라도 난 줄 알겠네. ======================================= [499] 권투(3) 명수는 정확히 4일을 입원했다가 퇴원했다. “아, 정말 푹 쉬었네.” 집에 돌아온 명수의 첫 마디였다. “좋아?” “좋지. 모처럼 푹 쉰 건데.” “그렇게 말하면 평소에 전혀 못 쉰 것 같잖아?” “야, 솔직히 말해서 못 쉬었지. 그동안 학교에서 네가 얼마나 눈치 줬어? 수업시간에 잠도 못 자게 하지, 숙제는 꼬박꼬박해야 했지, 집에 돌아와도 복습하고 예습해야 하지…. 어휴, 완전히 감옥이 따로 없어.” 듣고 있던 하은이 명수를 쥐어박으며 타박했다. “듣자 듣자 하니까 말이야. 명수 너, 그 당연한 걸 하면서 피곤하다고 말하는 그 뻔뻔함에 내가 또 놀란다. 그럼 여태까지는 한 번도 그걸 안 지켰다는 말이잖아? 도대체 너 여태 학교는 어떻게 다녔던 거니?” “그야, 축구부 연습 때문에 바빴잖아요?” “학교에 공부하러 가지, 공 차러 가니?” “전 공 차러 갔어요.” “퍽이나 자랑이다!” 단유가 두 사람을 말리며 말했다. “그만들 하세요. 그리고 명수 너도 이제 중3이고 내년에 고등학교 들어가려면 최소한은 해야 하잖아. 그리고 이제 시합도 다 끝나서 나갈 시합도 없고.” 단유가 교육부 홍보 영상 촬영 등으로 바빴던 4, 5월에 명수는 중등부 춘계 대회에 나갔다 왔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지만, 대회 MVP는 명수가 받았다. “나 고등학교도 축구부 있는 데로 가고 싶은데?” 사실 벌써 하은과 축구부로 컨택이 들어오고 있었다. 명수가 2년간 보여준 실력만 두고 보면 어느 학교든 명수를 탐내지 않을 수 없었다. 특이한 건 명수만이 아니라 단유에게도 영입 제의가 들어온다는 점이었다. 그 학교는 아마도 지난해 가을 대회에서 단유가 보여줬던 활약을 직접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명수의 문제는 직접 상의하고 연락드리겠노라 대답을 보류하던 하은이 단유의 건에 있어서만큼은 단호하게 반대 의사를 보였다. “우리 단유는 축구 안 해요.” ―실력을, 재능을 낭비하는 일입니다. 그 선수는 꼭 축구를 해야 돼요. “우리 단유는 다른 재능이 더 뛰어나요.” ―공부 잘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공부 잘하는 건 그저 학창시절의 일일 뿐입니다. 아시잖아요? 만약 전국에서 10% 안에 드는 똑똑한 학생이라 해도 그뿐입니다. 하지만 그 재능은 전국 1%입니다. “우리 단유는 공부도 전국 1%에요.” ―학생의 미래를 위해 좀 더 심사숙고해주세요, 어머니. “…‘어머니’ 아니거든요?” ―네? 여보세…. 뚝, 끊어버리는 전화를 소파 위에 내던지는 하은의 모습이 종종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튼, 자랄수록 두각을 나타내는 단유와 명수였다. **** 허름한 골목에 누가 찾아오기나 할까 싶은 당구장이 하나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좁고 긴 계단을 걸어가 삐걱거리는 철문을 열면 담배 연기가 먼저 훅 다가오는 당구장이었다. 당구공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딱딱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가운데, 카운터에선 왠지 모르게 지친 얼굴의 중년인이 조그만 TV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중년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경우는 화장실을 갈 때 외에는 거의 없었다. 계산도 앉아서 하거나 혹은 아르바이트생에게 맡겼다. 이런 허름한 당구장에도 아르바이트하는 아이가 있을까 싶지만, 어린 얼굴의 소년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재떨이 갈아주고, 심부름도 해주었다. 손님이 떠난 자리를 청소하는 것도 아르바이트 소년의 몫이었고, 공을 수거해서 당구공 세척기에 넣고 돌리는 것도 소년의 일이었다. “우성아, 여기 콜라 좀.” “네, 선배님.” 씻었는지 말았는지 모를 스테인리스 컵에 콜라를 담아 게임판 아래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당구대를 들고 순서를 기다리던 선배 한 명이 검은색 세손 장갑을 낀 채로 컵을 집었다. 한참을 공을 보며 큐를 앞뒤로 재보던 다른 선배가 딱, 소리를 내며 힘차게 공을 굴린 뒤 우성을 향해 말했다. “내거는?”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야, 넌 한 번에 해도 될 일을 왜 나눠서 하냐? 미련스럽게.” “죄송합니다, 선배님.” “몸이 안 되면 머리라도 써, 새끼야.” “알겠습니다, 선배님.” “야, 야. 그만해라. 불쌍한 애잖아.” 키득거리는 소리가 우성의 등을 떠밀었다. 우성은 도망치듯 카운터 쪽으로 향했다. “쟤 완전히 갔다며?” 다음 공을 노려보며 계산을 하던 소년의 말에 큐를 어깨에 걸치고 있던 다른 소년이 비웃음을 날렸다. “같은 반 애한테 처 발리고 나서 맛탱이가 갔다더라.” “같은 반 애가 누군데? 우리가 아는 앤가?” 콜라를 홀짝대며 마시는 소년의 물음에 딱, 하고 빨간 공을 맞힌 소년이 허리를 펴며 대답했다. “우리가 아는 애란다.” “아는 애? 다른 라인이야?” “아니. 그냥 공부 좀 하는 애.” “공부?” “거 있잖아? 우리 3학년 때, 신입생들 중에서 사고 대판 쳤던 새끼.” “신입생 중에 사고 친 새끼가 한둘이어야 말이지.” “아, 이런 무식한 새끼들. 1학년 전교 1등 하던 새끼 말이야.” “주먹 말고 진짜 공부로 전교 1등? 아, 누군지 알겠다.” “알겠지? 이름은 생각 안 나도 얼굴은 알잖아? 뉴스에도 나왔던 애.” “아, 그럼 그 새끼한테 당한 거야?” “완전히 발렸단다.” “그런 애한테 처 발리고 바닥에 드러누웠으면 쫑난 거지.” “근데 왜 여기서 저러고 있냐?” 다음 공격을 아쉽게 날리며 혀를 차던 소년은 카운터에서 컵 하나를 들고 돌아오는 우성을 보며 대답했다. “재기의 희망을 놓지 못했달까?” “븅신이, 한 번 발렸으면 끝난 거지. 뭐, 설마 우리가 지 대신 뭐라도 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뭐야?” “해줄 수도 있지, 새꺄.” “왜? 왜 우리가 해줘?” “요것만 있으면 말이야.”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말아 보이는 동작에 다들 키득거렸다. 그들은 고등학생인데, 이렇게 뭉쳐서 돌아다니며 후배님들의 주머니를 가볍게 하거나, 혹은 정당한(?) 대가를 받고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는 일을 소일거리로 하고 있었다. “여기요. 콜라.” “거기 놔.” “네, 선배님.” 우성은 공손하게 잔을 내려놓고 꾸벅 허리를 숙여 보인 뒤, 돌아섰다. 돌아선 그의 표정은 야차의 그것처럼 잔뜩 찡그린 얼굴이었다. 사실 여기서 일하는 이유는 그저 유흥비 마련을 위한 아르바이트이자, 마음 놓고 당구를 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른 곳보다 아르바이트비가 무척 낮았지만, 우성은 별 고민 없이 아르바이트를 선택했다. 들어오고 나서야, 볼 때보다 더 힘들고 짜증 나는 일이란 것을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자신의 처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일이 많은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뒷담화도 아닌 빤히 보는 앞에서 듣는 비웃음 섞인 힐난은 정말 참기가 힘들었다. 이 바닥은 그랬다. 한 번 드러누우면 평가가 바닥으로 치닫는다. ‘씨발.’ 하지만 고등학교 선배들이 보는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릴 순 없는 일이라 그저 속으로 삭힐 뿐이었다. 싸움에서 지는 것은 그저 힘이 약하다는 뜻이 아니다. 자존심이 바닥에 떨어졌다는 뜻이고, 명성이 추락했다는 뜻이며, 존재가 무의미해진다는 뜻이다. 제대로 살고 싶다면 반드시 ‘복수’를 해야 한다. ‘개새끼. 두고 봐라.’ 우성은 이를 갈았다. **** 단유가 찍은 영상이 소개되었지만, 예상했던 대로 반향은 크지 않았다. 교육부의 정책이 백년대계라는 국가 교육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잘 알지만, 형식적이며 식상한 교육부의 홍보 영상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는 이는 많지 않았다. 학생은 물론이고 선생님들도 굳이 찾아서 보는 이가 없었으며, 학부모나 일반인들도 굳이 찾는 이가 없는 그런 영상이었다. 그나마 ‘리본소녀’라는 이름에 기대어 골수팬들 몇몇이 찾아보았지만, 교육부가 기대했던 만큼의 조회 수는 나오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의 영상들이 인터넷에 등장하는데 그 와중에 개인적 취향에 맞는 것들만 찾아보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린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혹은 별 관심도 없는 내용의 영상을 보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는 이들은 드물었던 것이다. 아예 보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대박. 반장 진짜 도연이랑 이렇게 가까이 있었어?” “도연이 어때? 예뻐?” “커?” 단유는 손을 내저어 그들의 호기심을 물리쳤다. “난 관심 없고, 할 말도 없으니까 그런 거 묻지 마. 굳이 내게 물을 게 있으면 공부나 시험 관련해서만 물어. 나머지는 대답 안 해.” “야, 반장. 너무하네. 그냥 예쁜지만 대답해줘. 실물이랑 화면이랑 달라? 실물존예, 라던데 진짜냐?” 포기하지 않고 달려드는 도연빠를 비롯하여 많은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단유의 대답을 기다렸다. “별로.” “별로라고? 진짜?” “나한테 별로라고.” 단유는 급히 말을 바꿨다. 비록 자신이 마음이 없다고 해도, 도연에 대해 나쁘게 말할 이유까지는 없으니까. “왜? 어떤데?” 단유 옆에 앉아있던 명수가 끼어들었다. “얘한테 묻지 마. 얘 되게 눈 높아.” “야, 도연이 정도 얼굴이 안 예뻐 보인다고 하면 도대체 얼마나 눈이 높은 거냐?” “엄청나지.” 명수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단유를 힐끗거렸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갤럭시즈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의 경악을 불렀던 단유의 심미안이었다. 사실 외모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단유가 아니기에 망정이지, 만약 외모를 우선으로 생각한다면 단유의 눈에 들 이는 단 한 명도 없을지도 모른다. “너 예전에 뮤직비디오도 나오고 그랬다면서? 나중에 배우 쪽으로 가는 거 아냐?” 어른들에게나 아이들에게나 연예인이란 직업은 선망의 대상이자 전도유망한 직업 중 하나로 인식되는 모양이다. 비싼 외제 차 수 대를 끌고 다니고, 틈틈이 일하고 대부분 시간을 외국으로 놀러 다니며 인생의 황금기를 여유롭게 보낼 수 있는 직업, 이 연예인이라는 인식이었다. 그때였다. “아주 지랄들 나셨네.”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아이들의 대화가 잠시 멈춘 틈에 들린 목소리라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돌아가니, 병억이 입술을 삐죽이며 이죽거리고 있었다. “뭐냐, 너?” 명수가 코웃음 치며 병억을 쳐다보았다. 병억이 고리눈을 뜨고 명수를 쳐다보았다. “씨발, 졸라 잘난 척 오지다고.” “뭐야!” 명수가 일어서려는 걸, 단유가 붙잡았다. “놔 봐!” 단유는 대답 없이 세게 끌어당겨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왜! 저 새끼가 먼저 시비를 걸잖아?” “시비를 건다고 다 받아주지 마.” “왜?” “잊었어? 학기 초에 있었던 일?” “그럼 저 새끼 지랄하는 거 그냥 눈감아?” “응. 눈 감아.” 병억이 두 줄 떨어진 자리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바라보다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븅신들.” “누가 병신인데? 맞고 쫄아서 얌전히 있더니 무슨 간댕이로 시비냐?” “쫄긴 누가 쫄았다고 그래, 븅신아.” 아마도 일부러 ‘븅’이라는 발음을 내는 것이겠지. 아니면 ‘병’자를 발음하지 못하는 구강구조를 가졌나? “병신은 지가 병신이면서.” “뭐 이 새끼야? 뒤질래?” “왜? 또 한 번 붙을까?” 명수가 벌떡 일어나더니 턱을 삐죽삐죽 내밀며 병억과 붙을 기세를 보이자, 병억도 껄렁대며 손가락을 까닥까닥거렸다. “네가 와 이 새끼야.” “와, 나. 미치겠네. 단유야. 이래도 참아야 하나?” 이미 주변 아이들은 입을 다물고 흥미로운 상황으로 전개되는 두 사람 사이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중이었다. “참아야 돼.” “이걸 왜 참는데?” “참지 마, 새끼야! 덤벼, 덤비라고.” 단유는 명수의 소매를 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은 채 병억을 쳐다보았다. 저건 진짜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라기보다는 일부러 시비를 걸어서 싸워보자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당장 싸우자는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건, 악기로 가득 찬 눈처럼 보여도 간간이 보이는 떨림과 입꼬리의 어색한 움직임 때문이었다. 문득 며칠 전, 도하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라 단유는 병억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 [500] 권투(4) 단유가 일어서자 모여있던 아이들이 한걸음 물러섰다. “윤병억.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몰라도 자중하자. 사고 치지 말고.”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병억에게로 향했다. “사고는 니미. 니들이 먼저 조용히 하든가! 꼴에 TV 나왔다고 깝치지나 말든가.” 다시 단유에게로 향하는 시선. 그때 분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는 명수에 의해 시선이 가려졌다. “아, 저 새끼 오늘 왜 저래? 야, 너 진짜 죽고 싶어?” “와, 저 눈깔 봐라? 왜? 죽이게? 죽여. 죽여봐, 이 새끼야.” 한쪽 다리를 떨면서 느긋한 표정으로 도발하는 병억의 태도에 명수가 움찔하는데 뒤에서 단유가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 병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뭘 꼬나봐, 새끼야.” “…….” 단유가 말없이 지켜보자, 점점 교실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주위 아이들도 단유가 말이 없으니 화가 난 게 아닐까 추측하며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병억도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을 직시하는 단유의 태도에 무작정 욕만 내뱉진 못하고 같이 노려봤다. 그렇게 단유의 검은 눈동자가 병억에게 고정된 동안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러자 아이들이 슬금슬금 자리로 돌아가며 경직됐던 분위기가 풀리기 시작했다. “고아 새끼들 주제에.” 그 말만 없었다면 말이다. 운동장에서 공을 쫓아갈 때처럼 허벅지에 모인 힘을 터뜨리며 자리를 박찬 명수가 병억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병억을 향해 주먹을 던졌다. 앉아있던 병억이 명수가 달려오는 걸 인지하고 일어서려던 찰나에 명수는 이미 지척에 다다랐다. 몸을 날리듯 기울이며 주먹을 던지는 명수의 공격이 병억에게 닿기 직전, 가까스로 단유가 뛰어들어 명수를 덮쳤다. 의자와 책상들이 무너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고, 명수와 단유가 바닥을 굴렀다. “인명수! 참으라고 했잖아!” 단유가 명수를 위에서 누르며 소리쳤다. 보기 드물게 화를 내는 단유의 모습에 아이들은 얼떨떨한 느낌이었다. “저 말을 듣고 어떻게 참아!” 바닥에 엎드려 있던 명수는 어깨를 들썩이며 벗어나려 했지만 단유의 힘을 쉽게 이겨내긴 힘들었다. “생활기록부에 줄 긋고 싶어! 고등학교 가서도 축구하고 싶다며! 그럼 참아!” “어떻게 참냐고! 저 새끼가….” 명수가 눈을 돌려 이 사태를 만든 원흉을 바라보는데 눈동자가 커졌다. ‘이때다!’ 애초에 병욱은 싸움을 벌일 생각까지는 아니었다. 아니, 싸움이 벌어진다 해도 자신이 먼저 선제공격을 할 생각은 없었다. 적당히 시비만 걸 생각이었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은 기회였다.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두 놈이 서로 얽혀서 바닥에 엎어진 상황. 방어를 위해 일어섰던 틈에 병욱은 자신의 의자를 집었다. “야!” 누군가가 말리려는 것인지, 경고하려는 것인지 소리를 쳤다. 하지만 이미 병욱의 머리 위로 의자가 들어 올려졌다. 단유는 병욱이 의자를 들었다는 것을 인식했다. 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피하면 명수가 맞게 된다. 단유는 이를 악물고 등에 힘을 주었다. 퍽, 하고 등에 강력한 충격이 가해졌다. 집어던진 게 아니라 강하게 내려친 것이라 더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읍!”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뒤이어 달려온 병욱이 발로 단유의 옆구리를 찼다. 하지만 단유는 버티면서 충격을 감당했다. 맞고 굴렀다면 충격이 덜어졌을지도 모르지만, 명수가 싸움판에 끼는 것은 막아야 했다. “단유야!” 명수가 계속 일어서려는 것을 단유는 굳이 손으로 어깨를 눌러 막았다. 그 사이 단유의 옆구리에 병욱의 신발코가 틀어박혔다. 이번의 공격은 전신에 전기가 흐르는 느낌까지 줬다. ‘이대로는 안 돼.’ 명수를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도 더 피해를 누적시켜서는 안 될 것 같다. 1분만, 아니 2분만 참으면 선생님이 오시겠지만 그 사이에 몸이 상할 것 같다. 통증이 두려운 게 아니라, 몸이 상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힘들어질까 두려웠다. 병억은 다시 의자를 집어 들었다. 의자가 내려오는 순간은 1초도 걸리지 않는다. 몸에 닿기까지 길어야 0.5초 안팎. 그 사이 단유는 몸을 돌려 의자의 다리를 붙잡았다. 병억의 눈에 놀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게 보였다. 힘으로는 또래의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단유였다. 게다가 매일 철봉을 붙잡고 풀업(pull up)을 해온 단유는 악력이 좋아서 잡은 의자의 다리를 붙잡고 끌어당기니 절로 병억이 딸려왔다. 병억은 얼른 손을 놓고 물러섰지만, 몸의 중심이 흐트러진 상태. 여기서 단유가 의자를 휘두르거나 발로 밀어도 병억은 꼼짝없이 당할 테지만, 단유는 그러지 않았다. 의자를 옆으로 던져놓고 즉각 몸을 돌려 명수를 붙잡았다. 단유가 어깨를 놓는 순간을 포착해 일어선 명수가 달려들려던 참이었다. “놔! 저 새끼 죽일 거야! 죽일 거라고!” “인명수.” 단유가 나직하게 불렀다. 명수의 눈은 이미 반쯤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고아’라는 모욕도 모욕이지만, 감히 단유를 때린 놈이었다. 단유가 무방비로 있던 틈을 노려 비겁하게 의자로 때리고 발로 찬 놈이었다. 가만둘 수 없었다. 하지만 단유는 다른 무엇보다 명수를 지키는 게 우선이었다. “놔!” “인명수.” 그때 드르륵 교실 앞문이 열리며 사회 선생님이 들어왔다. “뭣들 하는 거야!” 아이들이 급히 제자리로 돌아가며 의자와 책상들을 밀치는 소란에 교실이 난장판같이 되자, 선생님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동작 그만!” 몇몇 아이들은 급히 자리에 앉았지만, 몇몇은 자리에 서서 선생님의 눈치를 살폈다. 그 사이, 단유는 여전히 명수와 눈을 맞추고 나직하게 말했다. “쟤, 내가 처리할 거다. 넌 손대지 마.” “…….” 명수는 이를 악물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청소, 내가 잘하는 거다. 넌 그냥 구경해라.” “거기, 반장! 뭐하는 거야! 나와!” 단유는 명수의 어깨를 슬며시 놓았다. 그리고 돌아섰다. 병억이 숨을 헐떡이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저 눈동자에 공포를 새겨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 “야.” “…….” “야.” “…….” “쌩까냐?” “아니요.” “그럼 고개 들어 새끼야.” 병억이 고개를 들었다. 하얀 담배 연기가 얼굴에 뿜어졌다. 살짝 눈을 찌푸리긴 했어도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하지만 곧 뺨을 향해 날아오는 손바닥에 고개가 휘청거릴 정도로 돌아갔다.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죄송합니다.” 병억은 볼을 감싸 쥘 생각도 하지 못하고 허리를 숙였다. 숙인 머리 위로 손바닥이 날아와 뒤통수를 치고 지나간다. 설마 머리에 꼬인 파리를 쫓느라 그러는 것은 아닐 테고, 있어도 그렇게 많은 파리가 머리에 있을 턱이 없다. “내가 뭐랬냐? “…그냥 시비만 걸라고….” “그게 어렵냐? 그게 그렇게 어려워?” 물음표 하나에 손바닥 하나. 얼얼한 뒤통수에 혹이 생길 것 같다. “죄송합니다.” 뒤로 물러서는 발의 움직임이 보였지만, 병억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담배 연기가 얼굴을 감싸고 내려오다 흩어진다. “말 좀 잘 듣자? 응? 좋은 말 할 때 들으면 서로 좋잖아. 응?” “예.” 시야에서 사라진 신발은 멀어져가는 소리만 남겼다. “윤병억.” 한참 옆에 서 있기만 하던 이의 목소리가 들릴 때쯤에야 병억은 접었던 허리를 펴며 고개를 들었다. “단유, 불러내.” “어디로?” “일단, 영운 슈퍼 앞으로. 거기서 뒤로 가면 공터 나오잖아. 그쪽으로 데리고 나와.” “언제?” “내일. 시간 끌면 안 좋아.” “알았어.” 병억에게 담배를 물려주고 볼을 톡톡 두드려준 뒤, 뒤돌아서서 옆에 잠시 놔뒀던 수건을 챙긴 우성은 앞에 놓인 당구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 다음날, 희선은 조례를 위해 교실로 올라가는 걸음이 무척 무겁다고 느꼈다. 전날 벌어졌던 사건은 명백한 폭력 사건임과 동시에 의자 등을 투척하는 싸움이었다. 아니 일방적 폭행이었다. 시비의 발단은 병억이었고, 명수가 달려들려는 걸 단유가 막았다. 그리고 단유가 바닥에 엎드려 있을 때 병억이 의자 등을 수차례 내리치고 발로 차는 등의 폭행이 가해졌다는 진술은 보는 내내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특히, 단유가 절대 반항하지 않고 맞기만 했다는 여러 아이의 진술서는 희선의 양심을 건드렸다. “말로 하지 왜 주먹질을 해! 학교에서 싸우면 안 된다는 거 모르니?” 학기 초 단유에게 했던 말이었다. “피할 수 없는 싸움도 있습니다.” 라던 단유의 말은 이런 상황을 예견한 것일까? 시비를 거는 상대에게 어떤 식으로 ‘대화’를 해야 상황을 정리할 수 있을까? 폭력의 피해자가 된 단유에게 잘했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말을 잘 들었다고 칭찬해야 하는 걸까? 도망가지 않고 미련하게 맞고만 있었냐고 질책해야 하나?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병억이는 도대체 왜 싸움을 걸었단 말인가? 사건 직후 받아든 진술서들인지라 서로 입을 맞출 겨를이 없었을 테니, 공통적으로 나오는 내용은 진실이라 봐도 무방할 테다. 그렇다면 그 원인이란 게 너무나 하찮고 어이가 없어서 이게 무슨 싸움이 날 일인가 싶을 정도였다. 아이들이니까 이런 ‘사소한’ 이유로도 싸울 수 있는 건가, 납득을 해보려 해도 쉽지가 않다. ‘모르겠어.’ 어차피 병억이는 학폭위에 소환될 터이니 거기서 처벌을 받든, 소명기회를 얻든 할 것이지만, 폭력의 피해자인 단유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 희선은 교실 앞에서 쉽게 문을 열지 못했다. 그때 그녀의 정신을 깨우는 소리가 교실 안에서 들렸다. “개새끼가!” 우당탕탕 집기들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희선은 급히 문을 열었다. 의자가 날아오고 있었다. “꺄아악!” 비명을 지르며 희선이 주저앉은 틈에 날아든 의자가 교실 앞문에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내고 바닥을 굴렀다. 30분 전, 병억이 불퉁한 얼굴을 하고 교실에 들어왔을 때, 아이들이 그의 얼굴을 힐긋힐긋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뭘 봐, 새끼들아!” 아이들은 얼른 시선을 돌려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퉤.” 바닥에 침을 뱉으며 자리로 향한 병억은 둘러맸던 가방을 화투장 집어 던지듯 책상 위에 던져두고 그 위에 두 발을 올렸다. “뭘 보냐고, 새끼들아? 뒤질래?” 손에 집히는 거 아무거나 들고 던질 시늉을 하니 또 아이들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피하는 게 아니라 단유에게로 시선을 돌려 그의 반응을 살피는 모습이었다. 병억도 단유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 는 식으로 초연한 태도 덤덤히 책을 읽는 단유의 모습은 한 학기 동안 줄곧 보아온 모습이었다. ‘오늘 방과 후, 학교 뒤 영운 슈퍼로 데리고 와.’ 병억이 오늘 해야 할 일이었다. 솔직히 병억이 그 일을 하려 했던 것은 단유를 물 먹일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단순히 물만 먹이는 게 아니라, 성질머리를 고쳐놓을 수만 있다면 나락으로 떨어졌던 자신의 권위도 세울 수 있고, 자존심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게 당시에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만약 어제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굳이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성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학기 초엔 잘 몰랐지만, 이번에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단유에게도 약점이 있다는 점이고, 그 점만 잘 공략한다면 저 두 놈을 때려눕히고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오늘은 얌전히 가자.’ 다시 시킨 걸 제대로 하지 않으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닐 것이다. 병억은 생각을 정리한 뒤, 일어섰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에 아이들의 시선이 모일 때도 단유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다만 명수가 그 소리에 반응했다. 날 선 시선이 병억에게로 향할 때였다. “명수야.” 나직한 단유의 목소리가 명수의 이성을 붙잡았다. 책을 탁 덮더니 몸을 45도쯤 돌리고 다리 하나를 책상 바깥으로 내놓은 단유는 일어선 병억과 눈을 마주했다. “얌전히 있어라, 윤병억.” 일정한 톤의 목소리가 어쩐지 병억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였다. ======================================= [501] 권투(5) 머릿속으로는 자제해야 한다고, 되뇌고 되뇌면서도 막상 상황을 만들면 머릿속이 검게 물들어서 통제가 되지 않는 병억이었다. 분명 학교에 갈 때까지만 해도―사전에 정한대로―두 사람을 불러 데리고 나오는 것까지만 하려 했다. 그러나 두 놈을 마주하자 괜히 울컥하는 마음에 머릿속이 깨끗이 비워졌다. 한 발을 밖으로 빼고 앉은 채로 자신을 쳐다보는 단유의 자세에서 어제처럼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단지 그것뿐일까? 병억의 뇌 속을 뚫고 들어오는 듯한 강렬한 눈빛과 침묵을 강요하는 듯한 굳게 다문 입술이 병억의 입을 쉽게 열지 못하게 만들었다. “얌전히 있어라, 윤병억.”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단유의 목소리에 병억이 반응했다. “얌전히 있지 않으면 어쩔건데?” “이 새끼가!” 명수가 발끈하는 걸, 한 손으로 말린 단유가 병억의 물음에 답했다. “어차피 넌 학폭위 소환 대상이야. 그런데 여기서 더 사고 치면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래?” “그걸 네가 왜 걱정해?” “걱정하는 거로 보여? 경고하는 거다. 행동 조심하라고.” “이런 미친….” “여기 있지 말고 얼른 생지부로 가. 등교하면 생지부로 오란 이야기 들었잖아.” “새끼야, 내가 어딜 가든 네가 왜 신경을 써!” 단유가 일어서자 갑자기 교실에 찬 바람이라도 분 것처럼 온도가 뚝 떨어졌다. 어떤 아이는 진짜 소름이 돋는다는 듯 팔을 쓰다듬었다. 비록 아침이지만 한참 더워지기 시작하는 6월에 이런 소름이 돋다니.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긴 하나 물러서지 않는 병억에게 한 걸음 다가간 단유가 그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다른 사람 피해 주지 말고 그냥 가.” “이 새끼가….” 비록 단유에게 ‘제압’당하긴 했어도, 결코 싸움에서 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힘에서 밀린 것도 사실이라 그간 저도 모르게 기죽어 지낸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무시’당할 순 없었다. ‘운빨로 이긴 주제에, 날 무시해?’ 아슬아슬 이어지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 “근데 병억이가 잘할 수 있을까요?” “뭘?” 우성이가 재떨이를 갈며 물었다. “단유한테 쫄아서 말도 못 거는 거 아닐까 해서요.” “그 반대겠지.” “네?”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깊게 빨아들이니 담배 끝이 빨갛게 타들어 간다. “워낙 멍청하고 단순한 녀석이라야 말이지. 흥분해서 싸움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일 거다.” “걔가 싸워요?” “그래도 나름 기술을 배운 녀석이야. 자기 싸움 기술에 자신감이 넘치는 게 문제지, 싸우는 걸 피하진 않는 녀석이야.” “만약에 진짜 싸우면요?” “지 할 일만 잊지 않는다면 뭐 싸우든 맞든 상관없지.” 병억의 쓸모는 오직 단유를 데리고 나오는 것, 까지라는 말이었다. ‘내 쓸모는 어디까지일까?’ 이미 도하에게도 배신을 당했던 경험이 있는 우성이었다. 입술을 살짝 깨문 우성은 담배 연기를 뿜으며 당구대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다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이곳, 지하 당구장에서 자신은 더 내려갈 데가 없는, 바닥에 기어다니는 지렁이 같은 존재다. 자칫 실수라도 했다간 선배들의 장난에 짓밟혀 꿈틀대다 죽을 수도 있다. 만사에 조심스러워야만 했다. **** 병억은 벼락같이 발을 내질렀다. 하얀 운동화의 발등이 단유의 허벅지를 강타하기 직전, 단유는 무릎을 들어 올리며 로우킥을 방어했다. ‘가볍다.’ 병억의 공격이 가볍다고 느끼기가 무섭게, 병억은 뻗었던 무릎을 빠르게 접으며 거둬들인 뒤, 허리를 더 틀면서 다시 발을 내뻗었다. 이번에는 아래가 아닌 위였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공격은 병억이 이 기술에 얼마나 숙달되어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발등이 아닌, 신발의 딱딱한 코 부분이 단유의 얼굴을 향했다. 조금 전 공격이 진짜가 아니었던 게, 이번에는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단유는 위험을 느끼고 고개를 뒤로 뺐다. 그리고 깨달았다. ‘실수다.’ 단유가 싸움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그런 동작이 나오고 말았지만, 병억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비록 단유가 몸을 빼는 동작으로 공격을 회피하긴 했지만 대신 중심을 뒤로 놓는 우를 범했고, 간격이 좁혀진 상황에서 중심을 잃은 단유는 병억에게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병억은 돌려차던 그 회전을 그대로 이어, 뻗었던 발을 접고 땅을 강하게 딛은 후, 몸을 돌리며 뒷발을 단유를 향해 스트레이트로 밀었다. 단유는 병억의 다리를 붙잡을 요량으로 손을 뻗었으나 뒤차기는 속도도 빠르고 공격의 궤도도 직선이라 붙잡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회전력을 더한 뒤차기의 힘은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단유의 손을 스치며 내질러진 발에 배를 걷어차인 단유는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지만, 뒷걸음질해야 했다. 뒤에서 명수가 잡아주기도 했고. “단유야!” 단유는 한 손으로 배를 감쌌다. 병억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짧게 말했다. “내가 한다고 했다.” 그마저도 채 말을 끝내지 못했다. 뒤차기의 성공으로 자신감이 붙은 병억이 두 걸음 정도 달려와 정권을 내지른 탓이었다. 단유는 날아오는 주먹을 보며 이번엔 허리를 숙여 주먹을 피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병억의 정권은 다음 공격을 위한 페인트였다. 가볍지만 빠르게 내지른 정권을 거둠과 동시에 레프트 훅의 궤도를 따라 휘둘러진 주먹에 단유는 급히 숨을 들이켜며 다시 한번 피하려 했지만, 허리를 숙인 상태에서는 달리 피할 곳이 없었다. 이번에는 관자놀이 부근을 맞았다. 다행히 정확하게 들어맞지를 않아 충격이 크진 않았지만, 스친 공격도 만만하게 볼 것은 아니었다. 구경하던 아이들에게서 소란이 일었다. “지는 거 아냐?” “설마….” “존나 세게 맞았는데?” 단유가 한 걸음 물러설 때마다 구경하던 아이들이 두세 걸음씩 물러나야 했다. “저 새끼 미친 거 아냐?” 용감한 누군가의 지적질도 병억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사실 이미 병억은 흥분 상태였다. 자신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단유는 확실히 힘만 센 바보였다. 초보적인 기술만 섞어도 이렇게 당하지 않는가? “죽고 싶지?” 놀리듯 한 마디를 뱉고는 다시 정권 찌르기를 시도했다. 다른 아이들이 정직하게 주먹을 던지는 것과 달리, 병억은 주먹과 발을 내지르거나 거두는 요령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단유는 이전의 다툼처럼 그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기껏해야 천부적인 반사신경으로 겨우 급소만 피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 새끼!” 명수가 주먹을 쥐기만 할 뿐 달려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챈 병억은 좀 더 마음 편하게 단유를 요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병억이 좀 더 잔인한 눈빛으로 단유를 바라볼 때, 단유는 남몰래 심각한 고민에 처했다. 혼자만이라면 어떻게든 묵묵히 버텨내며 시간을 끌어볼 수도 있을 것이고, 싸울만한 공간을 만들어내서 움직임을 크게 가져가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뒤에는 명수가 서 있었다. 비록 전날부터 몇 번이고 강조해서 자신이 맡겠다 했지만, 자신이 이렇게 당하고 있는 걸 두고 보기만 할 명수가 아니었다. 자칫 위험하다고 ‘착각’이라도 한다면 싸움에 끼어들 우려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싸움을 빨리 끝내든지, 아니면 완벽하게 ‘제압’을 하는 방식을 택해야 할 테다. 하지만 단유의 생각 이상으로 병억은 노련하고, 단유의 힘은 병억의 기술을 완벽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짜 마음 같아서는 그냥 마법으로 눕혀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보는 눈이 많은 상황. 어떻게든 버텨내야 한다. 그런데. 병억이 한 걸음 옆으로 움직였다. 단지 한 걸음인데 단유의 뒤에 선 명수와 아이들, 좌우로 움직임을 제한하는 의자와 책상과 같은 집기들이 단유를 둘러싸게 하였다. 비열한 병억의 웃음이 입꼬리를 스치고 지난 뒤, 기습적으로 뛰어들었다. 단유는 얼른 손을 올려 손바닥으로 무릎을 막았지만 밀고 들어오는 힘을 쉽게 막기 힘들었다. 직접적인 충격은 받지 않았지만 몸을 실은 플라잉 킥에 떠밀려야 했고, 명수가 단유의 등을 받치다 함께 넘어졌다. 두 발이 땅에 닿자마자 달려들어 샤커킥을 날리려는 병억을 보며 단유는 이를 악물었다. “아악!” 발을 뻗던 병억이 갑자기 주저앉아 발목을 부여잡더니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구경하던 아이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걷어차인 것은 단유였다. 맞기 직전 단유가 머리를 틀어 타격점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긴 했지만, 걷어차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비명은 병억이 질렀다. ‘잘못 차서 다쳤나?’ 그러나 병억이 발목을 잡고 있던 손을 떼어 보였을 때, 아이들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어? 피?” 맨살이 드러난 발목에 붉은 혈선이 그어져 있고, 그 선에서 피가 송글 솟고 있었다. 하지만 병억이나 아이들은 왜 갑자기 병억이 다친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물론 단유가 한 짓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단유는 이마가 빨갛게 부어오른 채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에도 무기로 쓸만한 뭔가를 들고 있지 않기도 했고. “이 새끼, 뭐야!” 하지만 병억은 분명 단유가 뭔가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상처를 입을 이유가 없으니까. 단유를 차고 난 다음 순간에 통증이 왔다는 것도 단유를 의심하는 이유였다. 방법은 알 수 없었지만. 병억은 꼭지가 돌 정도로 화가 났다. 얕지 않게 베인 상처지만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리고 병억은 범인이 단유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다만 이 짜증나는 상황의 화풀이 대상이 눈앞에 쓰러진 단유라는 점이 중요했다. “개새끼야!” 단유가 쓰러지며 동시에 도미노처럼 넘어진 의자들이 널려 있었고, 병억은 손에 닿는대로 아무거나 집어 던졌다. 힘이 과하게 들어갔는지 단유를 정확히 맞추지 못하고 단유 앞의 바닥을 친 의자는 바닥에 퉁겨진 뒤,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 오르며 구경하던 아이들을 공격했다. “워어.” 물러난 아이들과 맞아서 상처를 본 아이들이 병억을 힐난했다. “저 미친 새끼가 또 체어샷이야!” “잘못해서 죽으면 어쩌려고!”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까지 다치게 만들잖아, 저 새끼?” “야, 저 새끼 잡자!” 병억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 잡아? 누구야! 어떤 새끼야!” “야, 저 새끼 말려야 하는 거 아냐? 눈깔이 완전히 돌았는데?” “누구야! 어떤 새끼야!” 병억은 수군대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열을 내더니 아무거나 집어서 던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놀람과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물러섰다. “야, 이 새끼야. 왜 의자를 집어 던지고 지랄이야?” “…이 새끼들이 사람을 가마니로 보나….” 의자, 책상 잡히는 대로 여기저기 던져대니 아이들이 물러서다 못해 맞는 아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씹새가….” 설마 이 반에 성격 더러운 이가 오직 병억뿐일까. 누군가가 자기 책상의 의자를 집어 병억에게 던졌다. 병억은 던지려던 의자를 반사적으로 들어 올려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의자를 막았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어떤 아이는 들고 있던 책이나 도구들을 집어 던졌고, ‘눈에는 눈’이라고 자기 주변의 의자를 병억에게 던지는 애들도 있었다. 곧 병억에게로 의자와 잡동사니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씨발 니미….” 병억은 의자를 내려놓지 못하고 의자가 날아올 때마다 의자를 들어 막았다. 혼자보다 함께일 때 우린 강했다, 는 어느 영화의 선전 포스터 멘트처럼 아이들은 합심해서 병억에게 의자를 던져댔다. 하지만 모두가 의자를 던질 수 없었고, 던질 수 있는 의자 수도 많지 않았다. 즉, 언젠가는 끝이 나고 말 일. 곧 날아오는 의자가 뜸해지고 대신 병억의 옆으로 날아들었다가 바닥에 나뒹구는 의자, 책상, 필기구 등이 눈에 띄었다. “야, 이 개새끼들아!” 반격의 시간. 병억은 손에 잡히는 대로 의자를 교실 여기저기에, 아이들이 보이는 곳마다 던지기 시작했다. “그만해! 다들! 너도! 그만해!” 단유가 일어나서 말려보려 했지만 애초에 단유의 말을 들을 병억이가 아니었다. “닥쳐! 이 새끼들아!” 아이들은 날아드는 의자를 피하거나 맞불을 놓는 식으로 대응했다. 처음 자신에게로 날아드는 물건들을 막다가 어떻게 잘못 막았던지 검지가 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픈 티는 내지 않는 병억이었다. 오히려 더 열을 내며 반 전체와 싸우기 시작했다. 의자가 날아다니고 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칼만 가지고 싸움을 벌이는 보스몹 레이드 같아 병억은 기분이 더러웠다. “죽어, 이 새끼들아! 다 같이 죽으라고!” 완전히 이성을 상실한 병억은 의자며 책상이며 할 것 없이 던져댔고 그야말로 전쟁의 한복판이 된 교실의 소란은 선생님이 들어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너희들 뭐, 아악!” 희선은 날아오는 의자를 피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 [502] 권투(6) 비명이 들리자 아이들은 동작을 멈추고 선생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날아오는 의자들을 막느라 헐떡이던 병억의 숨소리만 교실에 크게 울렸다. “맞았나?” “설마.” “좆됐네.” 이제야 상황을 깨달은 아이들이 주춤거릴 때, 단유는 선생님께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선생님?” 희선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단유가 자신을 걱정스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단유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너, 또 싸운 거니?” 단유는 대답을 피했다. 희선도 단유의 침묵이 무슨 뜻인지 금방 이해했다. 교실에 들어오기 전까지 비폭력 비저항이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를 고민하며 들어오던 참이었으니까. 시선을 돌려 바라보니 역시 씩씩거리며 자신을, 그리고 단유를 노려보는 병억의 모습이 보였다. 생활지도부실로 가지 않고 교실로 와서 또 사고를 친 모양이다. 그런데 병억의 모습도 정상은 아니었다. 의자 한두 개가 날아오는 것이었으면 어떻게 막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여러 아이들이 한꺼번에 던져댄 의자나 물건들을 모두 쳐낼 수는 없었다.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것도 있고, 어깨나 다리에 맞기도 해서 지금 병억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교실의 소란에 다른 반 선생님들이 찾아오셨다. 남자 선생님은 엉망이 된 교실과 여전히 쪼그리고 앉아 있는 희선을 보고 화를 냈다. 남 선생님은 또 다른 의미로 아이들을 움츠러들게 하였다. “여기가 교실이야, 싸움터야!” 누구도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 새끼들이….” 그때 희선이 무릎을 짚고 일어서려 하길래 단유가 부축했다. 희선의 무릎이 떨리는 게 아직 완전히 진정된 건 아닌 모양이었다. 희선도 단유의 어깨에 손을 짚고 의지하며 서서는 교실을 둘러보았다. 싸움터, 아니 전쟁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대체 이 혼란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가. 희선은 아찔한 생각에 무릎이 꺾일 뻔했다. 단유는 희선을 부축한 채로 교실을 둘러보았다. 자신이 명수를 보호하기 위해 물러선 동안, 반 아이들이 집어던진 의자들로 인해 교실 뒤의 사물함에는 온통 찍힌 자국투성이였고, 게시판에 붙은 종이들도 찢어져 흩날리는 중이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 “다들 교실로 안 들어가!” 복도에서는 몰려든 다른 반 아이들을 내쫓는 선생님들의 목소리로 요란한 가운데, 그 틈에 섞여 있던 우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복도 창문 너머로 보이는 교실 안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병신 새끼.’ 학교에서 사단 일으키지 말라고 그렇게 경고했건만, 무식한 새끼는 손톱만큼의 주의사항도 지킬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저 녀석은 곱게 학교 다니긴 힘들 것이다. 단순히 학폭위 소환되어 처벌받는 정도가 끝이 아니다. 병억이도 결국 심부름꾼이다. 심부름꾼이 심부름을 제대로 못 하면 심부름을 시킨 사람이 가만히 있을까? 병억이는 학교 밖에서 제대로 운신하기도 힘들 것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강전(강제전학)이다. 우성은 교실 앞쪽에 담임 선생님과 함께 있는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의 꼴도 말이 아니다. 이마 부근이 붉게 물든 것은 물론이고 교복도 바닥을 굴러 흉하게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그때 단유가 우연인지 우성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런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단유. 그 침착한 눈동자가 우성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새끼, 알고 있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단유는 병억의 뒤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되도록 어떻게 손 한 번 쓰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없었던 일로 돌릴 수 없다. 시작은 우성이 했지만, 이미 일은 손을 떠났다. ‘그래, 갈 데까지 가보자.’ 우성은 피식 웃어 보인 뒤, 몸을 돌렸다.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비릿하게’ 느껴지길 바라며. 하지만 아쉽게도 단유는 우성의 미소에서 비린 맛을 느끼진 못했다. 그저 음흉한 속내를 감추고 어설픈 어른 흉내나 내고 싶어 하는 ‘철부지’로 보일 뿐이었다. ‘도대체 이렇게 일을 벌이는 이유가 뭐지?’ 무턱대고 시비 걸고 싸움을 하자는 거? 그런 이유라면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일이 커질 이유도 없고. 선생님들이 복도에서 구경하던 아이들을 내쫓고 있을 때, 생지부 선생님이 도착했다. “모두 강당으로 집합해!” 아이들이 우르르 교실 밖을 빠져나가 강당으로 뛰어갔다. 단유는 머뭇거리는 명수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고, 명수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이들과 함께 강당으로 향했다. “넌 왜 안 가!” 교실 뒤편에서 의자 다리 하나를 붙잡고 씩씩대던 병억은 선생님의 지시에 불응하며 서 있었다. “너도 가, 임마!” 교실 문을 빠져나가던 아이들이 멈춰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안 가?” 생지부 선생님이 팔을 걷어붙이며 소릴 질러도 병억은 요지부동이었다. 아이들과 선생님들은 그 묘한 대치 상황을 주시했다. “씨발….” “뭐?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씨발 놈들….” 병억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빠져나가는 아이들을 노려보았다. “저 새끼들이 나한테 던졌단 말이야! 내가 뭘 잘못했는데!” “아니, 이놈이….” “…개새끼들, 내가 죽여버린다.” 교실 문에 멈춰선 아이들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병억의 저주가 아이들을 어이없게 만들었다. “저 새끼, 뭐래.” “병신, 니가 먼저 반장한테 체어샷 날렸잖아!” “병신 새끼가 존나 골 때리네.” 생지부 선생님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이게 뭐하는 짓거리들이야! 선생님 말 안 들어! 강당으로 가지 못 해! 그리고 너, 어제 사고 친 놈이 또 사고를 쳐! …그거 당장 놓지 못해?” 병억은 자신이 의자를 붙잡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지 아래로 내려보며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내려놔! 얼른!” 뎅그렁, 바닥을 구르는 의자는 다리가 휘어져 있었다. “단유야.” 단유는 자신의 어깨를 짚고 있는 희선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대답했다. “네.” “너도 일단 강당으로 가 있어.” “…네.” 천천히 몸을 빼니 희선은 부들거리면서도 자력으로 버티고 서려는 모습을 보였다. “임 선생님, 괜찮아요?” 옆 반 선생님이 희선을 부축하려 하자, 희선은 손을 저었다. “괜찮아요.” 단유는 교실을 나가려다 다시 고개를 틀어 교실 뒤편에서 여전히 대치 중인 병억을 보았다. 지금 선생님들은 모르지만, 병억의 발목에는 단유의 충동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압축된 바람의 칼날이 병억의 발목을 스치면서 낸 상처가 그를 광분케 만들었다. 그러니 이 사태에는 단유의 책임도 있다. 그래서 미안하냐고 묻는다면, ‘천만에.’ 단유와 병억의 눈이 마주쳤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단유의 눈빛에 병억은 또 울컥했다. 저 혼자 잘났다는 듯, 자신을 무시하는 저 표정. ‘내가 딴 놈은 몰라도 너는 절대 안 봐준다.’ 자신이 이 지경에까지 몰렸는데, 저놈은 뭐가 잘나서 저렇게 뻔뻔스럽게 멀쩡히 바라보고 있는가? 이를 악문 병억이 교실 앞으로 달려들었다. “어? 야!” 생지부 선생님은 말릴 틈이 없었다. 이미 의자며 책상이며 전부 던져지고 나뒹구는 판이라 병억의 돌진을 막는 것도 없었다. 거침없이 내달리는 병억. “이야아!” 단유는 가만히 기다리지 않았다. 바로 옆에 선 선생님 때문에라도 단유는 한 걸음 나와야 했다. 오른발을 한 보(步) 내디디고 왼발에 무게 중심을 둔 단유는 호흡을 정리했다. “윤병억!” 희선이 비명처럼 병억의 이름을 불렀고, 희선을 부축하던 선생님은 희선을 감싼 채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질끈 눈을 감았다. 이를 악문 병억의 오른발이 바닥을 세차게 딛고 왼발이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서며, 동시에 오른 주먹이 단유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살벌한 공세에 모두가 움찔하는 순간, ‘두 번 실수는 안 해.’ 단유는 무릎을 살짝 굽히고 앞으로 파고들었다. 두 손을 비스듬히 올려 병억의 오른팔을 감쌌다. 손에 잡히는 소맷귀를 강하게 잡아당기고 몸을 비틀었다. “흡!” 기술은 잘 모른다. 그래도 한 번 해본 거라고 흉내는 낼 줄 안다. 단유는 호흡을 끌어모아 팔을 잡아당겼고, 병억은 공중을 휘돌아 바닥에 메쳐졌다. “으억!” 등을 세게 부딪쳐 고통이 심했던지 병억의 몸이 뒤집힌 활처럼 휘며 바닥을 굴렀다. 단유는 다시 팔을 붙잡은 채로 병억을 제압한 뒤, 고개를 들었다. “괜찮으세요?” 병억의 타겟이 단유라는 것을 느꼈지만, 달려오는 기세가 워낙 흉흉해 움츠러들었던 희선은 단유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사실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대답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물음이 마치, ‘이런 상황에서도 대화해야 하나요?’라고 묻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 학교 전담 경찰관(SPO)이 출동하여 병억을 데려갔다. 생지부 선생님은 아이들을 데리고 강당으로 향했으며, 다른 선생님들은 각자의 교실로 돌아갔다. 단유는 담임 선생님과 함께 양호실로 향했는데, 관자놀이뿐만 아니라 온몸에 새로 멍든 부위와 이마 근처에 부풀어 오른 상처를 돌보기 위해서였다. 희선도 잠시 안정을 취하라는 양호 선생님의 충고가 있었지만, 그 말을 그대로 따를 수 없는 처지였다. “괜찮니, 단유야?” “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단유는 솔직하게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명수가 싸움에 끼어들까 봐 넌 막기만 했고?” 굳이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병억을 단유 본인의 손으로 처리하려 했다는 등의 이야기는 불필요한 오해만 낳을 뿐이니까. 선생님은 단유의 상처를 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싸움은 안 된다? 만약 아까처럼 병억이 무턱대고 달려든다면, 그리고 그 방향이 단유가 아닌 자신을 향했다면, 그 상황에서 희선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희선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선생님.” “으응?” 희선은 단유의 시선을 알아채고 두 손을 맞잡았다. 하지만 손의 떨림이 쉬 가시지는 않았다. 파르르 떨리는 눈썹과 입매를 보며 단유는 희선의 감정을 추측할 수 있었다. 강렬한 악의에 노출된 사람이 보이는 전형적인 증상. 비록 자신을 향하지 않더라도 그 악의는 사람을 두렵게 만든다. 경험이었다. “도대체 왜 이런 싸움이 벌어진 거지? 병억이는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거지?” 희선의 물음은 딱히 대답을 원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단유는 대답을 주었다. “가끔 뉴스를 보면 학교폭력의 이유로 가정을 많이 이야기하죠. 편부 편모 가정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둥, 학대받는 가정에서 자라 삐뚤어진 사고관을 가졌다는 둥 말이죠. 또 폭력 만화나 폭력 게임을 즐기면서 폭력적 성향이 커졌다고도 하죠.” 학교 폭력 뉴스의 단골 메뉴다. “하지만 전 그런 뉴스와 진단들이 어쩐지 과장되게 포장되어서 우리를 설득하려는 것 같아요. 가령 가정 문제는 현대 가족 사회가 파편화되는 문제를 꼬집죠. 또 젊은 부모들의 무책임과 방기(放棄)를 지적하고요. 하지만 그런 문제 지적의 이면에는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는 미화적 해석이 섞여 있어요. 흔히들 말씀하시는 것처럼, 우리 때는 그러지 않았다, 같은 말이요.” 만화, 게임도 같은 해석이다. 과거의 만화가 꿈과 순수를 이야기했다면, 요즘 만화는 폭력과 외설적인 부분이 청소년들을 자극하여 문제를 일으킨다고 한다. 물론 그런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청소년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가 보는 만화, 그가 즐기는 게임 등을 근거로 청소년의 정신 건강을 이야기하는 이면에는 현대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지적과 옛것을 지켜야 한다는 보수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 “보수적 가치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현대 사회의 문제점들을 과하게 지적하는 행위, 그리고 이를 위해 청소년들의 문제를 과장하는 행위.” 희선이 단유를 돌아보았다. 단유는 얌전히 앉아서 양호선생님의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어른들이 우리 나이일 때는 이런 폭력 사건이 없었을까요? 당시의 청소년들은, 그 나잇대를 지나온 어른들은 아무런 걱정도, 갈등도 없이 그 시기를 보냈다는 말인가요? 그럴 리 없잖아요.” “이쪽으로 고개 돌려볼래?” 단유는 양호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양호선생님은 단유의 어깨와 목에 입혀진 상처에 연고를 발랐다. “현대 사회의 비정함, 가정 폭력, 규제받지 않는 대중 매체를 학교폭력의 근거로 삼음으로써 가정, 사회, 언론을 보수적 가치로 얽어매려는 것처럼 보이는 건 저만의 착각일까요?” “하지만 전혀 근거 없다고 단정할 순 없진 않니?”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저는 폭력의 이유를 그 틀 안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어른들의 시선을 말하고 싶은 거예요. 제가 보기에 그건 어른들이 직면한 문제로부터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처럼 보이거든요.” 희선은 의식적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오직 양호선생님만 아무렇지 않게 단유의 몸을 돌려 다른 부상이 없는지를 살폈다. “수호해야 할 것은 옛것이 아니라 바른 것이어야 하는데 말이죠.” 희선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말을 이은 건 양호 선생님이었다. “난 놈은 난 놈이네.” ======================================= [503] 미상(1) “참 나, 일 더럽게 어렵게 만드네.” 눈썹의 가운데가 긁힌 것처럼 잘려나간 모습이 인상적인 그는 방금 물었던 담배의 필터를 씹으며 큐를 잡았다. 앞에 선 우성은 열중쉬어 자세로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우성을 흘깃 본 그가 큐로 우성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네가 왜 죄송해? 네가 했어?” “아닙니다.” “아니잖아? 아닌데 왜 죄송해?” “…….” “대답 안 해? 왜 죄송하냐고?” “선배님 명령을 어겨서 죄송합니다.” “네가 어겼어?” “아닙니다.” “그런데?” “…친구가 잘못한 일은 저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지? 친구가 잘못하면 바로 잡을 책임이 있어. 그렇지?” “네, 그렇습니다.” “내가 어려운 걸 시켰어?” “아닙니다.” “그런데 그걸 왜 못해?” “…다른 아이를 이용하겠습니다.” “다른 애 누구?” “…친구입니다.” “친구라….” 단유는 주변 사람들에게 별로 관심도 없고, 친하다고 여길 만한 친구도 몇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를 지정한 장소로 끌고 가기 위해서는 특별한 접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처음에 생각했던 것은 병억이었다. 병억은 단유와 앙금이 있다는 명분이 있었고, 그 명분을 이용해 단유를 부른다면 나와줄 거라고 생각했다. 모범생인 단유가 학교에서 사고를 치려고는 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진짜 모범생들처럼 약해 빠진 것도 아니니까. 우성이 직접 겪지 않았던가. 우성은 지금도 기억한다. 축구 경기장에서 자신의 목을 조르며 협박하던 단유의 모습을. 웬만하면 그 기억을 떠올리려 하지 않겠으나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그때를 되짚어야 했다. 그리고 그 덕에 우성은 단서를 얻었다. “친구가 다치는 걸 끔찍하게 생각합니다.” “친구 누구?” “…상미라는 여자아이입니다.” ‘여자’라는 말에 그의 흐릿했던 눈빛이 순간 반짝였다. 입맛을 다시는 그 모습에 묻지 않아도 무슨 상상을 하는지 짐작이 갔다.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어렵게 만들었다. 속으로 병억을 저주하는 우성이었다. **** 교장실에 교장 선생님과 교감, 그리고 생활지도부 선생님과 재단 법무팀장이 모였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뭐가 죄송합니까.” “좀 더 엄하게 아이들을 단속해야 했는데, 제 불찰입니다.” “선생님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어요.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도…죄송합니다, 선생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요.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3학년 5반 전체를 대상으로 또 한 번 학폭위 제출용 진술서를 받아냈고, 사건의 개요는 대충이나마 파악했다. 이번에도 병억의 일방적인 폭력으로 시작된 문제지만, 다른 선생님들이 함께 고민하는 문제는 사고가 벌어지던 과정에서 발생한 ‘집단 린치’였다. 물론 병억이 잘못하긴 했어도, 그렇다고 반 아이들이 의자 등의 집기류를 던져 해를 끼친 것을 좋게 볼 수는 없었다. “다 같이 미친 것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것인지….” 학폭위 위원장을 맡은 교감은 학생폭력대책 위원회가 소집되었을 때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 곤란함을 미리 느끼는 중이었다. “군중의 광기, 라는 것이겠지요.” 교장이 혼잣말하듯 대답했다. 혼자서는 절대 하지 않을 일, 이성적으로 절대 할 수 없는 일도, 군중은 할 수 있다. 혼자라면 마녀의 집 앞을 지나는 것도 무서워 빙 둘러 갈지라도, 군중이 되면 마녀를 끌고 나와 화형식을 벌일 수 있다. 그 여자가 진짜 마녀든, 가짜 마녀든 간에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합니다. 쇠로 된 의자를 사람에게 던지다니요. 만약 문제 삼으면 일파만파로 커질 수 있는 문제입니다.” 법무팀장의 말에 모인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병억은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다. 병억의 부모가 문제 삼는다면 5반의 아이들 다수에게 특수 폭행에 가담한 죄를 물어야만 한다. 단순히 특수 폭행일 뿐일까? 어쩌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미수’ 혐의를 주장하는 상황도 상정해야 했다. 교장 선생님은 이마를 꾹꾹 누르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단 학폭위는 제대로 열어야 합니다. 비록 교육청 감사가 끝났다 해도 아직 완전히 일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학폭위를 열기 전, 충분히 관계자들과 만나 합의를 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학폭위에 반영되도록 해야겠지요.” 학폭위의 회의 결과에 따라 처벌이 결정되면, 무조건 이행해야 한다. 때문에 그 전에 적당한 합의가 나와야 학폭위에서도 합리적인 처벌 수준이 결정될 것이다. “학폭위가 열리는 기간은 보통 1주에서 길게는 2주가 걸립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인데, 이 사이에 관계된 학생들의 학부모들과 모두 만나서 합의를 볼 수 있습니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보도록 해야죠. 무조건.” 교장이 선언하듯 말을 던지자, 교감은 푸르죽죽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교장 선생님.” 법무팀장이 교감 선생님과 생지부 선생님에게 다시 조언했다. “혹시 합의를 거절하는 학부모가 나온다면 꼭 이야기하세요. 이 문제가 커지면 소년 법정도 고려해야 한다고.” “협박이라도 하란 말씀이신가요?” “협박이 아니라, 현실을 말씀드리란 이야깁니다.” 이해 좀 하라고 머리를 두들기는 대신 탁자를 툭툭 두드린 법무팀장이 짧게 숨을 들이쉬고 말을 이어나갔다. “병억이라는 학생의 부모님께도 잘 설명하셔야 할 겁니다.” 병억은 거의 강제전학이 확정되다시피 했다. 교감과 학교가 학교폭력대책위원회 회의에서 할 일은 적어도 병억이 퇴학 조치는 받지 않게끔 조절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경찰은….” “그래서 합의가 중요하단 이야깁니다. 일단 발단은 병억이란 학생이었으나 경찰 수사는 전방위로 이뤄질 가능성이 큽니다. 합의되어 원만히 해결되길 원한다는 학부모 측의 의사가 전달되면 아무래도 수사 진행에 다소 편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김단유 학생 말입니다. 그쪽이 가장 문젠데….” 교감이 말끝을 흐리자, 교장이 나섰다. “그 학생은 제가 이야기를 해 보죠.” “교장 선생님께서요?” “일전에도 이야기를 나눠보니 저랑 잘 통하는 점이 있더군요. 제가 잘 이야기하죠.” “교장 선생님께 짐을 드리는 것 같아 죄송해서 이거 원….” “그런 생각 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무튼 이 일이 너무 확대 재생산되어 소란스러운 일이 벌어지지 않게 각별히 유념해주시고, 아, 특히 SNS에 일이 거론되지 않게 해주세요.” “네, 선생님.” 물론 SNS를 완전히 막을 순 없을 것이다. 그 사태를 직접 목격한 사람만 몇인데 막을 수 있겠는가. 그래도 주의는 주는 게 좋을 것이다. “다른 반은 몰라도, 우리 반에서는 이 일이 크게 소문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으면 좋겠어.” 희선은 교탁 위에 서서 반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소문나봐야 서로에게 좋지 않을뿐더러, 본인에게도 좋은 일은 없으니까. 알겠니?” “네.” 희선은 얌전히 대답하는 아이들의 면면을 살피며 슬쩍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저렇게 단정히 교복을 입고 있지만, 언제 또 돌변해서 미친 광기로 무장하고 집단 린치를 가하는 무자비한 폭도로 변할지 모른다. 새삼 아이들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는 희선이었다. 그러나 사실 학생들 입장에선, 희선의 트라우마는 물론이고 SNS도 흥미를 끌지 못했다. 가장 큰 관심은 역시 학폭위의 결과였다. 바보도 아니고, 경찰까지 나선 상황에 자신들이 어떤 처벌을 받게 될 거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사회봉사 정도라면 다행이지만, 혹시라도 생활기록부에 붉은 줄이라도 그어진다면 가깝게는 고등학교 입학 때, 멀게는 대학교 입학 시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 분명하니까. “이게 다 병억이 그 미친 새끼 때문이야.” “솔직히 그 새끼가 우리한테 의자 집어 던지고 그러지 않았으면 우리가 그랬겠냐고.” “그래도 의자 집어 던진 건 너무 심했어.” 날아오는 의자를 막겠다고 손을 휘두르던 병억의 모습이 떠오른 한 아이가 툭 한 마디를 꺼내자, 주위의 아이들이 들고 일어섰다. “심하긴 뭐가 심해? 와, 너는 안 던졌다 이거지? 야. 솔직히 우리가 걔를 괴롭히고 싶어서 던졌냐? 다 너희들 같은 애들 보호하려고 나섰던 거잖아? 그럼 너희는 당연히 우리 편을 들어야 하는 거 아냐?” “보호는 무슨….” “와, 미치겠네? 그래서? 그래서 넌 맞기도 싫고 도와주기도 싫어서 도망갔냐?” “야, 내가 무슨 도망을 가?” “뒤로 내뺐잖아? 그게 도망이지, 아니면 뭔데? 응? 뭔데?” “말 그따위로 하래?” “그따위? 너 방금 그따위라고 했냐?” “야 야, 왜들 그래? 왜 우리끼리 싸워? 그만해.” “씨발, 말본새 그따위로 해 봐, 어디. 가만 안 둔다.” “가만 안 두면, 나한테도 의자 집어 던지게?” “이 새끼가!” 드르륵 의자가 끌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단유가 일어서자, 소란스러웠던 교실이 조용해졌다. 그날, 단유가 병억을 메침으로서 단순히 당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음이 증명되었고, 아이들은 단유가 힘에서도 톱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다들 조용히 해. 자습시간이잖아.” 단유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이전보다 훨씬 무게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순간 교실이 조용해졌고, 단유는 교실을 둘러보다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잠깐은 쥐죽은 듯 조용했던 교실이었지만, 금방 속닥거리는 소리로 채워져 갔다. “반장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이 사태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아이들은 모두 ‘반장’, ‘김단유’를 지목했다. 처음부터 맞기만 했고, 친구를 감싸려다 부상을 입기까지 했다. 물론 상처만 보면 단유보다 병억이 더 많았다.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자잘한 상처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셀 수 없이 많았던 병억이었으니까. 하지만 끝까지 명수를 지키려던 모습, 그리고 마지막에 선생님보다 앞에 나서서 ‘선생님을 보호하려’던 모습들이 단유에 대한 인상을 좋게 만들었고, 피해자지만 용감했다는 이미지를 남겼다. 물론 단유는 그런 인상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게 아니라도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들은 많았다. 예를 들어 마법을 좀 더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가, 하는 점과 마법을 쓸 수 없을 때 몸을 보호하는 기술로 무술, 혹은 격투기를 배울까 생각하는 것들이 그랬다. 하지만 가장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싸움이 벌어진 원인이었다. 단순히 병억을 ‘분노조절장애자’ 정도로 볼 수만은 없는 것이, 둘째 날 병억이 단유에게로 다가올 때는 분명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생지부실로 가지 않고 교실로 왔던 게 단순히 반항심 때문일까? 만약 그 순간에 명수가 반응해서 일어서지 않았다면, 그래도 병억은 자신에게 주먹을 휘둘렀을까? 그리고 우성이 일부러 지어 보이던 그 미소와 표정은 어떤 의미였을까? ‘어쩌면 도하가 건넨 정보 때문에 괜히 두 사람을 연결짓는 것인지도 몰라.’ 하지만 뭔가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끝나지 않은 무엇인가가 남은 느낌은 꽤 불쾌하고 불편했다. 딱 맞아 떨어져야 정상인 수식에 불필요한 소수점 이하 숫자들이 늘어서서 단유를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정확한 답이 나올 때까지 계산하고 검산하고 증명하는 일을 반복해도 답이 틀리게 나오면, 그때만큼 심란한 경우가 또 없다. ‘왜 그랬을까?’ 단유는 생각을 거듭했고 답을 찾으려 했다. **** “잘 가!” “안녕! 내일 봐!” 까르르 웃음 짓는 여학생들의 모습이 싱그럽다. 팔짱을 끼고 재잘대는 여학생들이나 버스 정류장에서 단어장을 손에 들고 공부를 하는 여학생들이나 하나같이 에너지가 넘친다. 조금 귀가 혹사당하는 기분도 있지만,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보노라면 그런 혹사 대신 눈과 마음이 즐거워지는 기분이다. 물론 아무런 사심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사람에 한해서다. “쟤 맞지?” “응.” “얼굴 죽이네? 쟤가 진짜 걔 이거야?” 새끼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묻자, 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얼굴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일전에 보기도 했지만, 워낙에 뛰어난 외모를 가진 여학생이라 스쳐 지나가도 알아볼 수 있다고 우성은 생각했다. 우성과 함께 온 아이들이 숙덕대며 히죽거렸다. “아까운데?” “그럼 끝나고…콜?” “우리한테까지 오겠냐?” “그건 가봐야 알지.” “난 먹다 남은 건 싫다.” “배부른 소리 하네.” 우성은 그 대화에 끼는 대신 손짓으로 팀을 인도했다. “얼굴 익히셨으면 작업 들어가죠.” 소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 [504] 미상(2) ‘작업을 하자’고 했지만, 말을 꺼낸 후에도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들이 납치를 밥 먹듯 하는 전문 납치범도 아니었고, 놀이동산 롤러코스터 타본 경험 자랑하듯 말할 경험도 전무한 상황이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납치’는 고작해야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게 전부였으니 말이다. 모방하려 해도 힘든 게, 납치를 하려면 ‘차’가 있어야 하는데, 차가 없는 건 물론이고 운전을 할 줄 아는 아이도 없었다. “술 먹자고 꼬셔볼까?” 여태 놀았던 아이들은 그렇게 꼬셨을지 몰라도, 눈앞에 보이는 여자애는 그런 쪽과 거리가 먼 아이였다. ‘미친놈’ 소리 듣고 뺨이나 맞지 않을까? “잘됐네. 뺨 맞으면 그걸로 시비 걸어서 끌고 와.” 우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도 머리 쓰는 걸 싫어하지만, 이 형들은 정말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다. “말로만 떠들지 말고, 일단 해 봐. 우리가 언제부터 이빨만 털었어?” 머리를 짧게 깎은 소년이 건들거리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교문을 빠져나오던 상미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며 다들 심장이 쿵쾅거리는 긴장감을 느꼈다. “야, 너 시간 있냐?” 상미와 상미 주변의 아이들이 멀뚱히 소년을 바라보았다. “아뇨.” 상미는 무시하고 지나가려 하는데, 소년이 상미의 팔을 붙잡았다. “이야기 좀 하자고.” 그때, 학교 주변에서 서성거리던 남자애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소년이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는데, 남자애들 중 한 명이 소년에게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 손 놔라.” “뭐? 너 뭐야?” “놓으라면 놔, 새끼야!” 목소리를 깔고 짐짓 히어로라도 되는 양 구는 그 남자애 혼자면 코웃음 치며 무시하겠는데, 여러 남자애들이 눈에 칼을 품고 바라보고 있으니 그럴 수 없었다. 슬그머니 상미의 팔을 놓은 짧은 머리는 무시하고 남자애가 상미에게 물었다. “괜찮아?” 상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팔을 툭툭 털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오빠들도 좀 그냥 가요.” 이들은 상미의 외모에 반해서 방과 후 찾아오는 주변 학교의 남학생들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상미의 외모에 반해서 고등학교 진학 후에도 찾아와 사랑을 구걸하는 자칭 ‘남친 후보’들이자 타칭 ‘껄떡이’들이었다. 그런 이들 앞에서 상미의 팔을 거칠게 붙잡는 모습을 보였으니, 그들의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곱게 말할 때 꺼져라. 상미한테 함부로 하는 놈들은 우리가 절대 용서 못 하니까.” 상미가 듣는 자리라서 최대한 허세 끼를 듬뿍 담아 말을 건네는 남자애는 최대한 상미의 눈치를 보지 않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상미의 반응이 궁금해 눈이 계속 돌아간다. 다 알지만, 모른 척하는 상미와 그녀의 친구들은 씰룩이는 입꼬리를 감추려 애썼다. 짧은 머리는 기도 안 차지만, 자신을 둘러싼 남자애들의 험악한 분위기에 쫄아서 뒷걸음질 쳤다. 우성은 멀찍이서 보다가 혀를 찼다. **** “매년 연례행사구나, 연례행사.” “죄송해요, 선생님.” 단유가 고개를 숙였다. “네가 왜 죄송하니? 넌 맞기만 했다며?” “저 때문이에요.” 명수가 눈꼬리를 내리고 말하자, 하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맞고만 있니? 너도 좀 때리지 그랬어.” 풀 죽어 있는 명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하은이 우스갯소리를 꺼내니 단유도 어울려주었다. “그랬으면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 못했겠죠?” “하긴, 그렇지.” “그런데 이제 시험 며칠 남지 않았잖아?” 교장 선생님이 따뜻한 찻잔을 들고 웃으며 ‘시간이 빨리 간다’고 푸념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너희 반 선생님도 답답하겠다. 기말시험도 준비시켜야 하는데, 이런 일이 벌어져서.” “그런데 선생님도 내일 오시나요?” “가야지. 다 오라는데 안 갈 수 있니?” 좀처럼 없던 일이라 학교 측에서도 꽤 골머리를 앓은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유야무야 넘길 순 없는 일이라 절차에 맞춰 일을 진행하기 위해 애를 썼다. 진술서 상에 진술된 증언과 목격 증언을 토대로 당시 사태가 벌어졌을 때 끼어들었던 아이들의 부모들을 모두 불러 상황을 논의하기로 한 것인데, 그게 무려 20명에 이르렀다. 즉, 반의 3분의 2가 폭력 사건에 가담한 셈이다. 억울함을 토로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발뺌하는 아이도 있었다. 병억에게 책임을 돌리는 아이도 있었고, ‘반장’을 지키기 위한 일이었다고 변명하는 아이도 있었다. “그런 부분은 모두 학폭위에서 결정할 문제야. 일단 학부모들 모시고 와.” 그렇게 해서 내일 오전, 강당에서 긴급히 학부모 회의가 열리게 된 것이다. 단유는 마지막에 병억을 제압하기 위해 메치기까지 했지만, 그리고 그 메치기가 실질적으로 병억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지만, 선생님들은 그것을 자기 방어로 보았고, 그 전까지는 주먹 한 번 내뻗지 않았다는 학생들의 진술을 토대로 ‘일방적 폭행의 피해자’로 단유를 지정했다. 물론 논란―학교 폭력에서 일방적 폭행은 거의 성립하지 않는다―이 있을 수 있지만, 해당 사건을 구별해야 학부모들 간의 협의―라고 쓰고 합의라고 읽는다―가 쉬워지기에, 학교는 그렇게 입장을 정리했다. “너희 담임 선생님이 이야기하기로는 나는 별로 할 게 없다더라만, 그래도 영 마음이 편하진 않네.” 하은의 역할은 크다. 다른 부모들과 병억의 부모 간의 문제는 병억 측과 단유 측의 문제가 어떻게 결론 나는가에 영향을 받는다. “진짜 마음 같아서는 그 자식을 가만두고 싶지 않아요.” 시간이 조금 흘렀고 약도 발랐지만, 여전히 부어 있는 단유의 이마를 보며 명수가 이를 갈았다. “그럼 못 써.” “걔가 먼저 우리한테 시비도 걸었고, 싸움도 먼저 시작했는데, 맨날 참으란 말이에요?” “참은 덕분에 학교의 처벌은 피할 수 있게 되었잖니?” “그 때문에 단유는 다쳤는데요?” 이번엔 단유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하은이었다. “에휴. 나도 솔직히 마음 같아선 너랑 다르지 않아. 솔직히 내일 그 아이를 보게 되면 내가 참을 수 있을지도 걱정이야.” 단유는 하은의 손을 끌어내리며 부탁했다. “선생님, 제발 내일은 성격대로 하지 말아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설마 내가 진짜로 걔를 때리기라도 할 것 같니?” “네.” “…그래, 나도 정말 그럴 거 같아. …어디 때릴 데가 있다고 이 연약한 애를 때려!” “연약하진 않죠.” 단유의 팔뚝을 가리켜 보이는 명수의 말에 하은은 눈을 좁혔다. “맨날 공부만 해서 싸울 줄도 모르는 애를.” “얘가 마지막에 걔를 바닥에 메쳤을 때, 걔 거의 죽으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진짜 그건 언제 배웠대?” “학기 초에 걔가 썼던 거잖아.” “와, 그때 한 번 보고 따라 한 거야? 넌 그냥 한 번 보면 다 외우고, 다 따라 하는구나? 역시 단유다!” 제대로 배운 게 아니고 힘으로만 메치다 보니 어설프기 그지없었지만, 효과는 좋았다. “아무튼 이제 방학 때까지 부디 아무 일도 없길 간절히 바란다.” 단유나 명수도 하은과 똑같은 마음이었다. **** 우성과 그의 선배들은 쪼그리고 앉아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계획을 세우자’고 했지만 역시나 생각나는 게 없다. 하지만 두 번째도 실패하면 그들도 온전히 살아남긴 힘들 것이기에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학교 근처 말고 다른 데서 하는 게 어때?” 학교 근처에는 소위 ‘친위대’라고 불리는 정신 빠진 놈들이 죽치고 있어서 일을 치르기가 어려웠다. “아까 보니까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가던데요? 일부는 같이 버스를 타기도 하고요.” “미친놈들이야. 그 새끼들.” “여자 꽁무니나 쫓는 놈치고 제정신인 놈이 있냐?” 우성은 대화를 자르고 들어가 화제를 돌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요, 그럼 걔가 사는 동네에서 해야 한다는 이야긴데, 그건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거기나 여기나 위험하긴 마찬가지지. 걔가 버스에서 내려 집에 갈 때는 혼자일 거 아냐? 그때 하는 게 어때?” 하지만 그에 대한 정보가 전무해서 혼자일지 아닐지, 그 아이의 집이 버스 정류장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아는 바가 없었다. “일단 내일은 그냥 따라가 보죠.” “버스에서 얼굴 보면 바로 알아차릴 텐데?” “넌 내가 따로 연락할 테니까 뒤에 따라와.” “나만?” “그래. 너만 얼굴 팔렸잖아?” “아이 씨.” 한심한 작태를 보이는 선배들을 보니 우성은 처음의 호기가 점점 꺾이는 기분이 들었다. “잘 가!” “내일 보자!” 환하게 웃으며 친구들에게 손을 저은 뒤 버스에 올라타는 상미의 뒤로 시치미를 뚝 떼고 올라타는 우성과 그 패거리였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서 힐끔 바라보니, 상미의 주변에는 멀건 얼굴의 남자애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 새끼들은 어디까지 따라가는 거야?” “할 일 없으면 집에 가서 공부나 할 것이지.” 소곤거리며 떠드는 선배들을 조용히 시키며 우성은 생각했다. 만약 저들이 상미가 집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따라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도 어제보다는 사람 수가 적으니, 어제처럼 무력하게 밀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길에서 싸움이 나면 누가 신고를 할지도 모른다. ‘빠르게 치고 빠질 필요가 있어.’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차가 멈췄다. 그리고 새로 타는 사람들로 인해 버스 앞이 부산스러웠다. 우성은 옆에서 비집고 들어오는 아주머니에게로 시선을 빼앗겼다. 등이 굽은 중년의 아주머니는 허름한 옷차림으로 한 손에 무거운 짐이 든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학생, 조금만 옆으로 가지?” 같은 말도 없이 엉덩이로 밀고 들어오는 아주머니에게 인상을 쓰며 쳐다봐야 좋은 소리 듣기 힘들뿐더러 소란만 날 뿐이리라. 그 아주머니가 아니더라도 새로 탄 사람들이 워낙 많아 우성과 그 패거리는 불가피하게 버스의 뒤쪽으로 게걸음을 걸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상미와 가까워진 패거리였다. 얼굴이 팔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버티려 해도 밀고 들어오는 이들이 워낙 많았다. 다시 차가 출발하자 몸이 앞뒤로 심하게 흔들렸다. 겨우 몸을 고정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이 여간 많은 게 아니었다. 여름에 가까워지는 계절답게 날도 더웠다. 원치 않게 등과 등이 맞닿으면서 짜증 섞인 시선을 교환하는 경우도 있었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저편에서 상미를 보호하겠다고 몸으로 벽을 만든 남자아이들의 꼴에 코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성인군자 나셨군.’ 고개를 돌려 선배들을 보니, 한 선배는 고개를 빼꼼히 빼고는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는 모습이었다. 그의 앞에는 창밖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젊은 여성이 있었는데, 선배는 그 여성의 가슴골을 보려고 용을 쓰고 있다. 갑자기 회의감이 밀려 들어왔다. 이 모든 게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누구는 죽지 않으려고, 명을 수행하기 위해 머리를 쓰는 데, 누구는 여자 가슴 한 번 보겠다고 저리도 어수선하다. 자기를 쫓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넋 나간 놈들의 호위를 받으며 여유를 부리는 여자애의 처지도 우습다. 살짝 몸만 닿아도 짜증이 나는 만원 버스 안에서 자기만 편하자고 엉덩이를 밀고 들어오는 아주머니도 짜증스럽다. ‘왜 나만 이 고생을 하는 거지?’ 득이 되는 것도 없고, 기껏해야 선배들의 주먹세례를 피할 수 있다는 것뿐인 일이다. 복수? 하면 좋겠지만, 선배들은 자신의 복수를 돕기 위해 하는 게 아니다. 특히 자신에게 직접적인 명을 내린 선배의 목적은 단유가 아니라, 단유가 가진 자전거였다. 어디서 단유와 명수가 타고 다니는 자전거가 비싸다는 이야기를 듣고 탐을 내더니, 그 두 사람이 부모가 없는 고아라는 사실을 우성에게 듣고는 우성을 부추긴 것이다. “복수? 그거 도와줄게.” 그 속을 왜 모를까. 하지만 알면서도 ‘고맙습니다, 선배님’이라고 허릴 숙여야 한다. 그리고 곤란한 일은 모두 자신이나 같이 있는 선배들 같은 무리가 맡고, 그 선배는 가만히 앉아서 떡이나 먹고 굿이나 본다. 치사한 세상이다. 부질없는 짓거리라도 해야만 하는, 그래야 살 수 있는 세상이다. 역시 세상은 힘이 세고 봐야 한다. ======================================= [505] 미상(3) 상미가 내리는 정류장에서 우성과 패거리는 가장 마지막에 내렸다. “존나 덥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바닥으로 훔치며 신경질을 부리든 말든, 우성은 상미가 걸어가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미는 핸드폰을 보며 걸어가는 중이었다. “다행히 혼자네요.” “그럼 가자.” “잠시만요. 여기는 보는 사람이 많아서 힘들 거 같은데.” “그럼 어쩌자고? 계속 뒤에서 구경이나 해? 엉덩이 구경이 취미냐?” 질 낮은 개그는 무시하고 우성은 걸음을 옮겼다. 주변을 살피며 적당히 일을 벌일 만한 장소를 물색했지만, 그런 장소가 쉽게 눈에 띌 리가 없었다. “언제까지 가는데?” “여기선 일을 벌이기 힘들잖아요. 만약 쟤가 소리라도 지르면 사람들이 돌아볼 테고 그러다 누가 신고라도 하면 어쩌게요.” “그럼 신고 못 하게 핸드폰이라도 뺐을까?” 그 순간에 우성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걸음을 멈췄다. “왜?” “좋은 생각이 났어요.” **** “안녕하세요. 단유 담임인 임희선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두 아이의 보호자 역할을 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시겠어요.” “수고는요. 두 아이 모두 자기 일을 알아서 잘하는 스타일이라 별로 신경 쓸 일이 없답니다.” “두 아이 모두요?” “뭐, 한 명은 손이 많이 가는 편이지만, 특별히 사고를 치는 스타일은 아니거든요.” “하긴 사고는 다른 쪽이 많이 냈었죠.” 하은은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하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본인 입으로 흉보는 건 괜찮아도, 남의 입으로 흉을 듣는 건 별로 원치 않는다. “그래도 워낙에 바르고 똑똑한 아이잖아요? 모범생의 표본 같달까?” “그럼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만장일치로 반장으로 뽑은 거겠죠.” 희선은 적당히 맞장구쳐주며 하은을 강당으로 안내했다. 이미 도착한 학부모들이 얼굴을 구긴 채 기다리고 있었는데, 희선은 그들에게 하은을 소개했다. “아, 김 단유 학생 보호자요?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듣자니 학원 선생님 일을 하고 있다던데, 혹시 어떤 학원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무려 3년간 전교 1등을 하고 있는 단유의 보호자이며 ‘선생님’이다. 분명 자신들이 잘 알지 못하는 특별한 교수법이 있을 것이라 여긴 학부모들은 그녀가 다니는 학원을 궁금해했다. “저는 고등학교 수학반을 가르치고 있는데요?” “잘됐네요! 마침 저희 큰아들이 이번에 고 2가 되는데, 수학을 워낙 어려워하거든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전 문과반 수학을 맡고 있어서.” “저희 아들도 문과예요.” 생각지도 못한 학원 홍보를 하게 된 하은이었다. 시간이 지난 후, 특별한 사정이 있어 참가하지 못한 두 학생의 학부모를 제외한 대부분의 관련 학생 학부모가 참석했다. “조금 전에 에어컨 틀었으니까 잠시만 참아주시면 곧 시원해질 거예요.” 희선이 그렇게 양해를 구한 뒤, 생활지도부 선생님이 강당 앞으로 나와 소개를 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번 일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때 한 학생의 부모가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의 말을 잘랐다. “제 아이에게 듣기로는 반장이 폭행을 당하는 걸 막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했다는데, 정당방위로 봐야 하지 않나요?” “그게….” “저희 아이도 마찬가지예요. 솔직히 반 아이들이 나서지 않았다면 반장인 김단유 군이 곤란한 상황에 놓일 수 있었을 거라고 하던데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은 사람은 하은과 담임 선생님뿐이었다. 하은이야 단유가 그리 쉽게 곤란해지지 않을 거라는 걸 믿기 때문이었고, 희선은 눈앞에서 맹수처럼 사납게 달려드는 병억을 손쉽게(?) 메치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생지부 선생님은 헛기침을 한 뒤, 소란스러운 학부모들을 진정시켰다. “예, 그런 의도였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다수의 학생이 한 학생에게 린치를….” “보세요, 선생님! 린치라뇨! 말씀 조심하세요!” “우리 애가 무슨 조폭이에요? 선생님이란 분이 그렇게 쉽게 말하면 안 되지 않아요?” 생지부 선생님이 땀을 닦아내며 희선을 돌아보았다. “에어컨 틀었어요?” “네, 선생님.” “그런데 왜 이렇게 더워.” 라고 중얼거리며 선생님은 다시 마이크에 입을 댔다. “저기, 잠시, 잠시만 제 말 좀 들어주세요. 네, 네, 어머님.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는데요, 일단 말씀 좀 들어주시겠어요? 제 표현이 잘못되었습니다. 예, 죄송합니다. 아무튼, 다수의 학생이 한 학생을 상대로…한 일은 그냥 넘어가긴 어렵습니다. 비록 그 학생이 최초의 폭력 사건의 가해자였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하얗고 파란 투 톤 스카프를 목에 두른 중년 여성이 손을 들어 보인 뒤, 누가 뭐라 하기 전에 스스로 일어나 입을 열었다. “우리 아이가 잘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폭력이라는 극단적 행위가 눈앞에서 벌어지는데 구경만 할 수는 없지 않나요? 듣기로는 병억이라는 아이가 싸움을 잘하는 아이라면서요? 다른 아이들도 그렇겠지만, 저희 아이는 싸움이라고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아이예요. 그래도 그 아이가 그 싸움판에 끼어든 건, 바로 정의감 때문이에요. 불의를 참지 못한 거라고요.” 중년 여성의 이야기에 동조하는 어머니들의 외침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어요? 힘도 약하고 싸울 줄도 모르니 가만히 있을까요? 차라리 가만히 있었다면, 어미로서 마음은 편했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 아이는 정의감 때문에, 양심 때문에 움직였던 겁니다.” 정의감과 양심. 비판하기 힘든 명분을 내세운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가 먼저 의자를 집어 던졌다면서요?” “맞아요! 우리 아이가 맞았다고 했어요!” 스카프를 두른 학부모는 맞장구를 쳐준 어머니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가 돌아왔다. “피해자가 늘어날 게 보이는 상황에서 단지 몸을 움츠리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요? 아니면 몸을 사려서 도망이라도 쳤어야 한단 말인가요? 다 도망치고 나면 교실에는 반장만 남을 텐데요? 곤경에 처한 사람을 두고 떠나라고 가르칠 생각은 아니시죠?” 하은이 남몰래 혀를 내두르며 그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말본새를 보아하니 어디서 한자리라도 하는 어머니가 아닐까 싶었다. “게다가 지금 다들 놓치고 계신데요.” 고개를 돌려 여기저기에 시선을 던지던 어머니는 여유롭게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학교 아닌가요? 학기 초부터 말썽이었던 아이를 그대로 방치한 것은 물론이고, 학급의 반장이 폭력의 피해자가 되고 관계없는 아이들이 피해자가 되기 직전의 상황에 놓이도록 학교는 도대체 무엇을 한 건가요?” ‘맞아요, 맞아!’ 동조의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지금 이 순간까지 학교로부터 사과의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 계세요? 아무도 안 계시죠? 학교가 이렇습니다. 이 사태를 오로지 학생의 책임으로만 떠넘기려는 학교 측의 부당한 태도에 대해 저는 심히 개탄스러울 따름입니다.” 하은이 바라보니, 강당 앞 단상 위에 올라선 생활지도부 선생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학교는 학생들의 진학에 큰 영향을 미칠 생활기록부를 주무를 수 있다. 그런 점만 보면 당연히 학부모들은 학교의 눈치를 봐야 할 거 같지만, 현실은 반대다. 오히려 학교가 학부모들의 눈치를 보며 바짝 엎드려야 하는 현실. 힘의 역학 관계란 그래서 오묘하고 재미있다. 과연 학부모들과 그들의 자녀는 어떤 역학 관계를 구성하고 있을까? **** “거기 앉아요.” “네.” 단유는 교장실에 오면 늘 앉던 그 자리에 앉았다.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 번씩 방문하다 보니 이제는 익숙해진 교장실이었다. 그 사이에 여러 가구와 집기들이 바뀌면서 이전 교장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몸은 어때요?” “괜찮습니다.” “다행이에요.” 교장은 마주 앉아서 양복 앞 단추를 풀고 편한 자세를 취했다. 여유로움은 교장의 미소에서 잘 드러났다. 단유는 교장이 교실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자신을 불렀다고 생각했다. 과연 교장이 입을 떼고 뱉은 첫 마디는 그 일이었다. “학교에서도 참 난감해요.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는지 말이죠.” “벌어질 일이었어요.” “벌어질 일?” “제가 매 학년마다 겪은 일이었어요. 제가 직접 겪을 때도 있고, 간접적으로 보거나 들은 일이었죠. 하지만 학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요. 그때마다 학폭위만 열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학교 폭력이란 건 습관 같은 거예요.” “습관이라. 학생들이 어릴 때부터 그런 습관을 고치지 못해서 그렇다는 말인가요?” “아뇨. 이 사회가 가진 습관이요. 힘으로 해결하려는 습관, 폭력으로 힘을 과시하는 습관. 힘으로 위계질서를 세우고 정렬시키려는 습관 같은 거요.” 교장은 계속해 보란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폭력은 대물림 되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가정 폭력, 학대가 아이들을 폭력에 익숙하게 만들고, 그 아이가 자라 또 다른 가정 폭력과 학대를 낳는다고요. 그래서 학교에서도 그런 대물림을 막기 위해 교사의 체벌을 막은 것이라고 알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학생들이 보는 것은 단지 교사와 학부모만이 아니거든요. 이 사회가 학생들에게 보여주는 민낯이 어떤가요? 대물림된다면 바로 이 사회로부터 직접 대물림받는 것이고, 계승한다면 바로 이 사회의 관습으로부터 계승된 폭력일 거라고 생각해요. 점점 잔인해진다느니 하는 말은 결국 이 사회가 점점 더 잔인해지고 있는 탓이 아닐까요?” “꽤 열심히 궁리한 모양이구나.” “아무래도 반복된 현상의 관찰은 그 원인을 탐구하게 만드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한쪽 다리를 절면서 걷는 것을 보게 되면, 왜 저렇게 절면서 걸을까 궁금해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그래서 학교의 역할이 중요한 거고 교사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지. 무엇이 옳다, 라고 가르치는 게 아니라 무엇이 옳은지 생각하게끔 돕는 게 이 나라의 교육이어야 한다.” 또 한 번 교장 선생님의 교육관을 엿볼 수 있었다. “폭력을 행사하면 안 된다, 는 게 아니라 폭력을 행사하면 왜 안 되는가를 궁리해야지. 하지만 그 선택까지 학교가 좌우할 순 없다. 선택은 순전히 자유의지니까. 다만 학교는 최대한 사회에 유리한, 공리적 선택을 하게끔 유도할 뿐이다.” 교장 선생님은 스스로의 말을 되뇌며 고개를 끄덕인 뒤, 단유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부른 건 아닌데 이렇게 됐구나.” 그리고 짧게 웃음소리를 낸 뒤, 몸을 돌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서류 하나를 집어 단유에게 건넸다.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IMO) 초청장이다.” 단유가 받아들고 바라볼 때, 교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웬만하면 이런 시기에 발표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쉽게도 이렇게 되었구나.” 단유는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 우성의 계획은 상미가 들고 있는 핸드폰을 뺏는 것이었다. 뺏어서 달아나면 상미가 쫓아올 테고 적당한 곳까지 유인한 뒤, 그곳에서 상미를 어떤 방법으로든 납치해서 선배들에게 데려가는 것이었다. “오오, 괜찮은데?” “대신 그 아이가 쫓아올 수 있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 돼요. 너무 멀리 떨어지면 아예 쫓는 걸 포기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네가 해야겠다. 네가 우리 중에서 달리기 제일 잘하잖아?” “내가?” “그럼 선배가 해 주세요.” “난 여기 지리 잘 몰라.” “이쪽 길로 가면 공원 하나 나오는데, 거기에 사람들 잘 안 오는 곳이 있어. 길 따라 그냥 죽 가면 돼. 우린 미리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붙잡으면 돼요. 오케이?” “너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예전에 저 동네에서 산 적이 있었어.” 우성은 손바닥을 짧게 마주쳐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럼 형 말대로 하죠. 형들은 먼저 가서 기다리고, 형은 뺏어서 오세요.” “넌?” “저는 형 뒤에서 쫓아가면서 상황이 어떻게 변하는지 봐야죠.” “너만 꿀 빠는 거 아냐?” 이 상황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올까. 우성은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시작하죠.” ======================================= [506] 미상(4) 상미는 여름이란 계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땀이 나기 때문이었다. 친구 중에도 땀 흘리는 걸 싫어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피부가 민감해서 땀이 흐르면 피부염이 자극을 받아 난리가 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미의 경우는 그것과 달랐는데, 그냥 땀이 흘러내리는 느낌이 불쾌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여름에는 되도록 집 안에만 있으려 했고, 그런 ‘어쩔 수 없는’ 이유로 게임을 즐기는 시간이 늘었다. 물론 겨울도 싫긴 마찬가지였다. 이유야 뭐, 대충 추워서, 라고 해두자. 아무튼, 그래서 날이 더워지면 상미는 당연하다는 듯 고민에 빠진다. ‘이번 여름에는 어떤 게임을 하지?’ 새로 나온 게임 타이틀이 있는지 검색도 해보고, 온라인 게임 유통 시스템 ‘스팀’에서 여름 세일을 할 때 살만한 게임도 찾아서 ‘찜’을 해 놓는다. 오늘도 상미는 한 달도 남지 않은 기말고사를 걱정하는 대신, 핸드폰으로 게임 커뮤니티에 들어가 할 만한 게임을 물색했다. “이건 평가가 좋네. 체크.” 게임 평가 댓글에 빠져 정신없던 와중이었다. 뒤에서 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려는 찰나, 휙 하고 지나가나 싶던 키 작은 남자아이가 상미의 손에 들렸던 핸드폰을 낚아챘다. 그리고 달리던 방향으로 내뺐다. “어?” 상미가 잠시 얼이 빠진 틈에 남자아이는 빠르게 달려나가기 시작했고, 뒤늦게 상미가 정신을 차리고 뒤쫓았을 때는 저 멀리 앞서나가고 있었다. 관자놀이 옆으로 스크래치를 새긴 남자아이가 뒤를 돌아보니, 과연 상미가 붉어진 얼굴로 쫓아오고 있었다. 울면서 주저앉으면 어쩌나 싶었지만, 다행히 상미는 잘 쫓아왔다. 그냥 잘 쫓아 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야, 이 개새끼야! 거기 안 서!” 피식, 웃음을 지으며 스크래치는 적당한 속도로 간격을 유지했다. “야, 이 씨발 놈아! 거기 서라고, 새끼야!” 생긴 것과 다르게 입이 꽤 걸었다. 그래도 그 정도는 같이 노는 아이들과 비슷한 수준이다. “난쟁이 똥자루 새끼야! 안 서면 죽인다!” …조금 듣기 거슬리긴 하지만, 그런다고 멈추면 바보다. “야 이 대가리 새끼야!” …자신의 머리가 조금 크긴 하다. 귀가 괜히 간지럽고 뒷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이었지만, 참았다. 그나저나 달리면서도 숨이 차지 않는지 잘도 떠든다. “개시부랄호로잡놈의 새끼야!” 저도 모르게 달리기를 멈출 뻔했다. 생긴 건 예쁘장하고 여리여리하게 생겼던데 반전이다. 보통 반전이 아니라, 욕 나올 것 같은 반전이다. “똥통에 밥 같은 새끼야! 대낮에 할 일이 없어서 핸드폰이나 뽀리고 다니냐, 병신 존만아!” …아, 뭐 저런 여자애가 다 있어? 슬슬 머리에 열이 난다. 뜀박질을 멈추고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욕이 입 끝에서 살살 맴돈다. “돼지 오줌물에 밥 말아 먹을 병신 새끼야! 난쟁이 존만한 새끼야!” “아, 놔!” 결국 스크래치는 달리다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씨발, 듣자 듣자 하니까 존나 싸가지 없네? 야 이 년아! 내가 키가 얼마든 니가 무슨 상관인데, ×년아!” 땀이 가득한 얼굴을 잔뜩 구기며 돌아선 스크래치에게 겁 없이 달려드는 상미. “내 핸드폰 내놔, 병신 쪼다 새끼야!” “아, 씨발, 엿 같아서 못 해 먹겠네. 야, 야! 너 내가 몇 살인 줄 아냐? 몇 살인데 반말지거리야!” 핸드폰을 집어 던질 듯한 자세를 취하는 스크래치의 험상궂은 얼굴과 마주한 상미는, 그제야 더 가까이 가지 않고 멀찍이서 소리만 빽 질렀다. “내가 니 나이를 어떻게 알아! 내 핸드폰이나 내놔, 개새야!” “와, 저게 계속 사람 빡치게 만드네. 야, 내가 니 새끼야? 응? 내가 니 새끼냐고?” “닥치고 내 핸드폰이나 내놔, 도둑놈 새끼야!” 한참 뒤에서 쫓던 우성은 이마를 감쌌다. 도대체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 고작 욕 몇 마디 먹었다고 이 시점에서 깽판을 치나. “아니, 이 년이 미쳤나? 씨발, 입에 걸레를 쳐 물었어? 응?” “걸레를 쳐 물든 말든, 니 아가리 찢어버리기 전에 내 핸드폰이나 내놔!” “진짜 이 년이!” 스크래치는 눈을 뒤집고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높이 쳐들었다. 상미도 지지 않겠다는 듯 눈에 힘을 주고 끝까지 스크래치를 노려 보았다. 그때 골목 끝에서 쌩하고 달려온 자전거가 스크래치를 향해 돌진했다. 자전거가 미칠 듯한 속도로 달려오는 것을 본 스크래치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릴 즈음, 자전거를 타고 있던 덩치가 풀쩍 뛰어서 스크래치를 덮쳤다. 갑자기 그렇게 덮쳐 올 줄은 몰랐던 스크래치는 덩치와 함께 바닥을 구르며 넘어졌고, 그 틈에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졌다. “명수야!” 상미는 달려든 덩치가 명수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갑자기 나타난 것도 놀랍지만, 심하게 바닥을 구르며 신음도 냈기에―정확히는 명수인지, 스크래치인지 모르겠지만, 소리가 났던 것은 사실이었다―혹시 크게 다친 게 아닐까 싶어 명수에게로 뛰었다. 그때 명수가 벌떡 일어나 함께 구른 스크래치를 위에서 눌렀다. 멱살을 잡고 조르며 소리 지르는 명수. “이 개….” 명수의 욕설은 한참을 이어졌고, 그동안 스크래치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갔다. “명수야, 그만해. 이러다 진짜 죽겠어!” 너무 심하게 멱살을 조른 터라 숨을 쉬지 못할 정도였던 스크래치는 상미가 명수를 말린 탓에 가까스로 풀려났다. 상미가 명수를 붙잡고 일으켜 세운 뒤, 스크래치는 몸을 모로 눕히며 거칠게 기침을 토해냈다. 필사적이다 싶을 정도로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미는 명수를 살폈다. “괜찮아? 어? 너 머리에 피난다.” “어? 피?” 명수가 이마를 짚은 손을 내려 보니 손가락 끝에 피가 묻어 있었다. “어, 피다.” “어떻게 해?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냐?” 상미가 발을 동동 굴렀다. “많이 피나?” “응. 많이 나.” “안 아픈데?” “그래도 병원 가자.” 상미는 명수의 팔을 잡아당겼다. 명수는 끌려가는 대신 널브러진 자전거를 보며 말했다. “내 자전거 챙겨야 하는데.” “내가 끌고 갈게.” 상미가 명수와 명수의 자전거를 챙겨 급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뒤에서 쳐다보던 우성은 발을 세게 구르며 방법을 모색해 봤지만, 지금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아, 씨발. 이거 어떡하지.” 약속된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을 선배들을 다시 부른다고 해도, 그 선배들이 여기 도착할 즈음에는 이미 명수와 상미는 자리를 떠나고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혼자 얼굴을 드러내고 명수를 막는 것도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만약 자신이 명수와 상대할 때 상미가 핸드폰으로 신고라도 한다면 큰일이 나겠다 싶어서 섣불리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아, 진짜 왜 갑자기 저 새끼가 튀어나온 거야.” 우성의 투덜거림에 대답이 이어졌다. “우리 동네니까.” 우성은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천천히 돌아보니 단유가 자전거를 벽 옆에 세우고 있었다. “여긴 왜 온 거냐, 유우성.” “…….” “설마 상미 때문에 온 거야?” “…….” 우성은 대답 대신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것만으로도 단유에겐 충분했다. “내가 그때 말했을 텐데. 내 친구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그, 그래서 어쩔 건데!” 저도 모르게 물러서고 있는 우성이었지만,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했다. “내가 최근에 느낀 게 있는데 말이야, 모든 일에는 발아라는 과정이 있더라고.” 무슨 뜻이지? “착한 씨앗은 꾸준히 물을 주고 애정을 가져주지 않으면 싹을 틔우지 못하고 말라 죽거나 자라더라도 금방 시들어 버려. 그런데 못된 씨앗은 물도 안 주고 될 대로 되라고 방치해도 혼자서 싹을 틔우고 자라서는 주변으로 못 된 씨앗을 퍼뜨리더라.” 단유가 한 걸음 다가왔다. “내가 최근에 그 못된 씨앗을 그대로 뒀을 때, 어떤 결과가 만들어지는지 몸소 체험했거든? 그래서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씨앗을 거둬볼까 해.”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네. 꺼져 새끼야. 난 그냥 갈 테니까!” 우성은 모른 척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단유는 멈추지 않았다. “오지 말라고, 새끼야!” “조용히 해. 여기서 소리 지르면 사람들한테 민폐니까.” 아까 니 친구는 이보다 더 크게 소리 지르고 욕했다고, 새끼야! “오지 마, 오면 가만 안 둔다.” “가만두지 마. 나도 너 가만 안 둘 거니까.” 뭔가 심하게 꼬였다. 우성은 급히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여기로 좀 와주세요, 얼른요!” ―왜? 무슨 일인데? “여기, …앗!” 갑자기 뭔가가 쓱 지나갔다는 느낌이 듦과 동시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바닥에서 두 번 튀어 오른 핸드폰은 액정이 거미줄처럼 금이 가며 전원이 꺼졌다. “어? 뭐야?” 줄곧 단유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우성이었다. 뭔가를 던진 것도 아니고 손을 뻗은 것도 아닌데 갑자기 핸드폰을 치고 지나간 뭔가가 있었다. 그런데 그 ‘뭔가’에 대한 정체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우성은 오싹한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너…무슨 짓 한 거야?” “무슨 짓? 뭘 말하는 거지?” 시치미를 떼는 단유의 모습이었지만, 우성은 아무것도 지적할 수 없었다. “나 그냥 갈 거니까, 따라오지 마.” “그냥 가게 내버려 둔대? 그런 말 있더라? 올 때는 네 맘대로 왔지만, 갈 때는 네 맘대로 갈 수 없다고.” “무슨 개소리야!” “병억이 건도 네가 한 짓이지?” 불시에 급습한 질문에 우성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었던 거야?” “그, 그런 거 없어, 새끼야!” “네가 꾸민 거야?” “아냐!” “음, 아니구나. 그럼 다른 사람이 또 있다는 소리네.” “모, 모른다고 했잖아!” “아니라고는 말 안 하네.” “아, 아니야.” “늦었어.” “…씨, 씨발.” 이미 굴욕스러웠지만, 더 이상은 안 된다, 고 생각한 우성이 태도를 바꿨다. “난 모르겠고, 너랑 할 말도 없어, 새끼야. 그러니까 넌 그냥 네 갈 길이나 가.” “내가 가는 길에 네가 서 있는데?” “비켜 가면 될 거 아냐!” “다른 사람에게도 방해가 될 거 같으니까, 그냥 내 손으로 치우는 게 좋을 거 같아.” “뭔 개소리야!” 부리부리한 눈으로 단유를 노려보려 하지만, 저도 모르게 눈에 힘이 빠지고 시선을 피하고픈 충동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우성이었다. 그때 좁은 골목으로 경광등을 빛내며 들어오는 순찰차가 우성을 살렸다. 단유가 시선을 돌린 틈에 우성은 빠르게 몸을 돌려 내뺐다. 단유가 우성의 뒷모습을 보고 있을 때, 순찰차가 멈추며 경찰이 내렸다. “네가 여기서 소란 피운 거야?” 아마도 이 근처에 사는 사람이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경찰이 도착했음을 알았는지 빼꼼, 고개를 내밀고 구경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그 전에도 몰래 구경하고 있었겠지만 괜히 눈에 띌까 두려웠던지 모습을 가리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걔는 방금 온 애고, 방금 도망간 애가 한 패거리예요.” 누군가가 전화기를 흔들며 말했다. 아마 저 핸드폰으로 상황을 찍고 있었던 모양이다. 단유는 다시 우성이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같은 ‘패거리’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어 텅 빈 골목이었다. 명수에게 전화해서 어디인지 물어봐야 할 거 같다. ‘아, 그러고 보니….’ 자신이 수습해야 할 것들이 몇 개 있었다. 본인 자전거와 상미의 핸드폰, 그리고 우성이 떨구고 간 핸드폰. 단유는 허릴 숙여 발밑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웠다. **** “괜찮아?” “지금 나한테 묻는 거야? 다친 사람은 너거든?” “네가 오버해서 병원에 온 거지, 사실 여기 올 정도도 아니었거든?” 명수의 이마에는 작은 밴드 하나만 붙어 있었다. “그래도 병원에 왔으니까 약이라도 바르는 거지. 나 아니었으면 너 머리에 흉 졌어.” “이 정도는 흉 질 것도 없거든?” 상미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명수의 이마를 흘끔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명수가 괜히 헛기침하며 말했다. “금방 단유 올 거야. 걔가 네 핸드폰도 챙겼대.” “아, 그래? 다행이다. 아무튼 이상한 놈이야. 백주 대낮에 핸드폰 소매치기나 하고.” “네가 약해 보여서 그랬겠지. 하여튼 요즘 세상이 너무 험해.”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 입에 담아보는 명수의 태도에 상미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고, 고맙긴 뭘. 친구끼리.” “그래도 고마워.” “고, 고마우면…보답해.” “보답? 원하는 거 있어?” “아니, 뭐 딱히 원하는 건 없는데, 그래도 준다면 거절은 안 할게.” “그럼 말이야. 내가 아까 봐둔 게 있는데 그거 줄까?” “그게 뭔데?” “이번 여름에 세일하면 사려고 찜해뒀던 게임. 나중에 세일하면 너한테도 하나 선물할게.” 명수는 물끄러미 상미를 보다 히죽 웃었다. “그래.” 그다지 개운해 보이는 웃음은 아니었다. ======================================= [507] 미상(5) “아이구, 병신 새끼들아. 그거 하나를 제대로 못 해서 이 지랄이냐?” 슬리퍼로 머리를 내리치는 운종의 손이 꽤 매서웠다. 찰진 소리가 울릴 때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뒤를 이었다. 어둠이 찾아든 시간, 어지간하면 가로등이나 멀지 않은 곳의 불빛들 때문에 어두운 곳을 찾기 힘들다. 그런 불빛의 사각도 분명히 존재해서, 지금 운종과 아이들이 있는 곳은 하얀 눈동자만 간신히 보일 정도로 어두운 폐가의 담벼락이었다. 폐가라고 해서 다 낡아 쓰러지기 직전의 폐가가 아니다. 그냥 빈집이 된 지 오래되어서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을 뿐, 고쳐 쓴다면 앞으로도 수십 년을 더 살 수 있는 집이었다. 최근 도시의 빈집 현상은 점점 심해져서, 특히 장계동과 같은 서울 변두리 지역은 열 집 중 2집 이상이 빈집이라 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런 집은 보통 갈 곳 없는 아이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갑자기 튀어나와서 막는데 어쩔 수가….” “뭐?” 운종이 눈을 부라리자, 얼른 입을 막고 고개를 숙이는 스크래치. “죄송, 합니다.” “죄송하지? 죄송하지? 죄송한 줄 알면 그런 일을 안 만들던가, 잘하지 그랬어? 응?” “죄송합니다.” “씨발, 너는 죄송합니다 밖에 할 줄 아는 말이 없어?” 퍽, 소리가 나며 스크래치는 배를 감싸고 무릎을 굽혔다. 운종은 손을 거두고 고개를 돌렸다. 가장 마지막에 서서 떨고 있는 우성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야.” “…….” “야.” “예.” “잘하겠다며?” “…….” “두 번 다시 실수 안 하겠다며?” “…죄송합니다.” “나한테 구라친 거네?” “아닙니다.” “아냐? 아닌데 왜 이렇게 됐을까? 응?” “…….” “와, 나 이거 참. 개새끼가 또 쌩까네?” “아닙니다.” “야.” “예.” “야.” “예.” “야!” “…예.” “죽을래?” “…….” 윽, 신음을 내며 쓰러지는 우성의 위로 운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씨발, 대답 하란 소리를 몇 번을 해야 들을래? 내가 우습냐? 그래서 내 말 다 쌩까고 무시하고 구라친 거냐? 응? 개새끼야?” “죄송합니다.” “이 새끼들이 다 짰나? 야, 이 엿같은 새끼야. 할 말이 그것밖에 없냐고, 새끼야. 내가 그런 개소리나 듣고 싶어서 니들이랑 이 지랄 하고 있냐고!” 그 뒤로 손과 발이 무작위로 튀어나오며 우성의 몸 구석구석을 두들겼다. 우성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겨우 얼굴만 감싼 채 운종의 샌드백이 되었다. 밟히고, 차이고, 또 밟히며 머리가 공처럼 바닥에 부딪히고 튀어 오르는 상황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누구 하나 운종을 말리는 이가 없었다. 그저 자신이 우성과 같은 대상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 “여기.” “고마워.” 상미가 핸드폰을 받아들고 살폈다. 액정이 깨지긴 했지만, 작동은 제대로 되고 있었다. “이거 어떡해. 힝.” 울상이 된 상미가 단유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본들 단유라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깨를 으쓱거려 보이는 단유에게 상미가 부탁했다. “뭘?” “우리 집에 가서 이야기 좀 해줘. 내가 깬 거 아니라고.” “신용이 없구나, 집에.” “이거 핸드폰 바꾼 지 얼마 안 됐단 말이야.” “그럼 수리 센터 가서 바꿔 달라고 해.” 이왕이면 최신 핸드폰으로 바꾸고 싶었던 상미였지만, 단유는 단호하게 협조를 거절했다. “명수야, 넌 괜찮아?” “응. 이 정도쯤이야 뭐. 운동장에서 태클로 단련된 몸이잖아.” “잔디밭에서 하는 거랑, 시멘트 맨바닥에서 하는 게 같을 리 없잖아.” “내 몸 튼튼해.” “알았어. 그럼 상미야. 명수 좀 부탁할게.” “왜? 넌 집에 안 가?” “난 잠깐 들렀다 갈 곳이 있어.” “어디?” “금방 갔다 올 거야. 넌 집에 가서 좀 쉬어.” “알았어.” 단유는 두 사람을 먼저 보낸 뒤, 우성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상미의 그것처럼 액정에 금이 가긴 했지만, 고장이 나진 않았다. 10분 전, 우성의 핸드폰으로 연락이 왔었다. “여보세요?” ―…누구야? 우성이 아냐? “핸드폰 주운 사람인데요?” ―아 놔, 이 멍청한 새끼는 지 핸드폰을 질질 흘리고 다녀? “…이거 돌려드리려고 하는데 어디로 가져다 드리면 되나요?” ―(…야, 이 새끼 존나 착한 새끼다. 안 팔아먹고 돌려준다네?)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는 소리도 너무 잘 들린다. 고장이 안 난건 확실했다. ―그거 갖고 여기로 와라.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대뜸 반말로 나오는 대범함은 둘째치고, 이 핸드폰을 돌려주었을 때 과연 온전히 주인에게 돌려주기나 할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물론 돌려주지 않는다고 한들 단유가 마음 쓸 이유는 없지만 말이다. 단유는 주소를 기억하고 곧 가겠다는 말을 남긴 뒤, 전화를 끊었다. ‘발본색원(拔本塞源)이라 했었지.’ 이제 못된 씨앗들을 수거하러 가야겠다. **** 단유가 통화로 들은 주소로 갔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처음부터 만날 생각이 없긴 했지만, 이래서는 그들이 근처에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었다. 자전거를 적당히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세워두고 주변을 살폈다. 드문드문 가로등이 있긴 했지만, 대체로 어둡고 복잡한 골목이었다. 예전의 ‘공간이동’ 능력이 있다면 좀 더 쉽게 돌아다니며 찾아볼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없으니 발품을 팔아야 했다. 뚜벅뚜벅 걸으며 주변 골목을 살피다 보니 곧 유난히 소란스러운 한 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변 집들이 모두 조용한 데, 이 집에서만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기도 하거니와 거친 욕설이 섞인 고함과 신음이 간간이 들리니 단유는 그 집을 특정해서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꿈틀대는 우성과 무릎을 꿇은 고등학생 3명을 앞에 두고 쪼그려 앉은 운종은 담배를 입에 꼬나물었다. 워낙에 발을 많이 써서 그런지 발목이 시큰거리는 느낌도 들었다. “야, 마실 거 없냐?” 운종의 뒤에 있던 아이가 얼른 냉장고로 향했다. 비록 전기가 끊어져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냉장고였지만 음료수나 물을 잠시 놔두기엔 적당한 상자였다. “여기요.” 미지근하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닌 음료수였다. 벌컥벌컥 마신 운종이 빈 캔을 아무렇게나 던지니 벽에 맞고 튕기면서 요란한 소리가 어두운 집 안을 울렸다. “야, 더운데 창문 좀 열자.” 몇몇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덜컹거리는 창문이 억지로 버티려는지 쇠 긁는 소리가 났다. 운종은 불쾌함에 얼굴을 찌푸렸다. “야!” 운종이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니 얼른 사과가 뒤따른다. “죄송합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하여튼 마음에 드는 놈이 없어.” 운종이 일어나 발목을 몇 번 돌리더니 창가로 향했다. 창틀에 팔을 기대고 연기를 뿜어내니 하얀 연기가 검은 하늘 사이로 흩어졌다. 운종이 뒤를 돌아보니 눈치를 보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야, 무슨 눈치를 보고 그래? 그냥 펴.” “감사합니다.” “감사는 개뿔.” 그마저도 명령이라 생각했는지 아이들은 다들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없는 아이는 옆 사람에게 빌려서 입에 물었다. 라이터 몇 개가 오고 가며 불빛이 전염병처럼 옮겨 갔다. 곧 연기가 실내를 채우기 시작했다. “진짜 말 잘 듣고 일 잘하는 놈들 구하기가 이렇게 어렵다.” 창밖을 보며 하소연하듯 중얼거리던 운종은 발끝으로 바닥을 톡톡 두들겼다. 아무래도 아까 발을 사용할 때 잘못 찼던 모양이다. 지금은 그저 시큰거리는 정도지만, 내일이 되면 절뚝거릴지도 모르겠다. “에이 씨. 모양 안 나게….” 짜증이 나서 담배를 또 하나 더 꺼내 들었다. 목이 점점 따가워진다는 느낌마저도 짜증이 났고, 뜻대로 되지 않는 모든 상황이 짜증이 났다. 뒷탈 안 생기게 조용히 데려오라는 간단한 일을 하지 못해 쩔쩔매는 애들이 답답하고 짜증 났다. 문득 운종은 뒤가 괜히 조용하단 느낌이 들었다. “뭐야?” 뒤로 돌아보았을 때, 실내는 자욱한 담배 연기로 시야가 많이 가려져 있었다. “야!” 아이들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다. 운종은 싸늘한 느낌을 받으며 들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내던졌다. “이 새끼들이 단체로 돌았나…. 야!” 마치 연기가 소리를 잡아먹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조금 전까지 들리던 신음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수상함을 넘어 정체 모를 두려움까지 느끼게 했다. 운종이 걸음을 쉽게 떼지 못할 때, 연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어.” 운종은 무슨 개소린가, 생각하다 지금 들린 목소리가 처음 듣는 목소리란 것을 깨달았다. “누구야!” 목소리가 들리는 데 정확히 어디인지를 알 수 없었다.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살피는 운종의 귀에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실수, 라는 이유로 모든 걸 용서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어디야! 어디 있어!” “게다가 그 실수가 계속 반복될 거라면, 그리고 그 실수 때문에 피해를 받는 사람이 계속 늘어날 거라면, 그건 더 이상 ‘실수’가 아니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이 되겠지.” “이 새끼야! 어디 있어! 나와!” 운종이 좌우로 팔을 휘저었다. 그러나 걸리는 것 없이 자욱했던 연기만 흩어질 뿐이었다. “나와! 나오라고, 새끼야!” 곧 연기가 희미해졌지만 워낙에 어두웠던 실내라 보이는 게 없었다. 그때 뭔가가 휙 하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와 동시에 오른쪽 팔뚝에 화끈한 느낌이 들어 살피니 피부가 칼에 베인 것처럼 갈라져 붉은 피가 솟고 있었다. ‘이 새끼가 연장을 써?“ 마침 들고 다니던 주머니칼이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 우성을 비롯한 아이들에게 ‘참교육’을 집행할 때 잠시 빼놨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운종은 자신의 팔을 가르고 지나간 게 그 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문제는, 만약 그게 진짜 칼이었다면, 떨어질 때 소리가 났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점이었고, 운종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단지 자신의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사람을 때리고, 자신보다 어리다는 이유로 인격을 무시했으며, 타인의 물건을 탐내고 비열한 방법으로 뺏으려 했다. 특히 자신의 기분과 이익을 위해 타인을 상처입히는 것에 아무런 죄책감도 못 느낀다는 것은 ‘실수’로 포장할 수 없는 ‘죄’임이 틀림없어.” “너 누구야? 나와, 당장! 너 걸리면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알겠…악!” 이번에는 왼쪽 팔에 뭔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좀 더 깊게 들어온 상처였다. 피가 더 많이 나기 시작했는데, 아까처럼 단순히 손으로 감싼다고 해서 멈출 상처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계속 경계를 하고 있었던 터라 확실히 칼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뭔가 날아온다는 느낌도 없이 팔에 상처만 남았다. “무엇보다.” “악!” 이번에는 오른쪽 허벅지 바깥쪽이 갈라지며 피가 튀었다. 꽤 깊은 상처였다. “건드려선 안 될 사람을 건드렸어.” 마지막 말은 들릴 듯 말 듯 했다. 소리가 작지 않았더라도 운종이 비명을 지르느라 듣지 못했을 말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건 네가 자초한 결과야.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걸 넌 알았어야 했어.” 왼쪽 허벅지에 작은 구멍이 뚫렸다. 운종은 눈물과 비명을 쏟아냈다. 저벅저벅 단유가 다가왔다. 운종은 누군가 다가온다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사, 살려줘!”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단유가 말했다. “넌 살려달라던 아이들에게 어떻게 했었어?” “살려줘, 살려달라고, 새끼야!” “사람이라면 대화가 가능해야 하지만, 넌 대화가 안 되잖아. 대화가 안 되니까, 네 잘못을 설명해줘도 알아듣질 못하고, 개심할 생각도 없겠지. 설령 나중에 마음을 고쳐먹는다고 한들, 네가 한 나쁜 짓들이 모두 없었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야.” “무슨 개소리야, 새끼야!” 바닥에서 꿈틀대면서도 악을 지르는 운종. “네가 만들어낼 수많은 피해자, 그 피해자 중의 한 명이 나이거나 혹은 내 친구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확실한 예방이 필요해.” 단유는 공기를 압축시켰다. 2㎟의 좁은 공간에 극도로 압축시킨 공기가 단유의 의지에 의해 발사되자, 900㎧의 속도로 쏘아지며 운종의 이마를 뚫고 지나갔다. 화끈한 통증이 이어지고, 이내 모든 것이 암흑으로 바뀌었다. “총이야?” “아닙니다. 그런 의심은 들지만. 화약 반응도 없었고요. 사입구의 크기를 봐도 이런 구경의 총은 없다는 분석입니다. 주택가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은 경찰을 혼돈 속으로 몰고 들어갔다. 평소 불량 서클 아이들이 빈집에 들어와 고성방가를 일삼았다는 주변의 증언이 있었지만, 시끄럽다는 이유로 저 아이들을 죽인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일단 주변 사람들을 탐문하고, 혹시 총기류를 보관하고 있는지 알아봐.” 요즘은 워낙 인터넷이 발달한 터라, 외국의 사이트를 보고 수제 총을 만들어 사용하는 사례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소문 안 나게 주의해.” “네.” “왜 하필 우리 구역에서 일이 터진 거야? 젠장.” 책상 위로 던져진 사건 파일에서 튀어나온 피해자의 사진들이 책상 위로 흩어졌다. 운종을 비롯한 아이들의 얼굴 속에 우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 [508] 요령(1) 집으로 돌아오니 소파에 드러누워 TV를 보던 명수가 반겼다. “왔어?” “응.” “왜 이렇게 늦었어?” “아, 뭐 좀 하느라고.” “밥은?” “생각 없어.” 그렇게 대답하며 방으로 들어가는 단유. 명수는 단유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되게 피곤해 보인다?” 잠시 대답이 없다 싶더니, 겨우 들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나 씻을게.” 그 뒤로는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네?” 뭘 하다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렇게 기력이 빠진 모습은 보기 드문지라 명수는 조금 걱정이 됐다. 하지만 세상에서 연예인 걱정이 제일 쓸데없다고 하듯이, 이 집에서 단유를 걱정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었다. “알아서 잘하겠지, 뭐. 그렇지 호빵아?” 단유의 방문 앞에서 킁킁거리던 호빵이 명수의 부름에 짧은 다리를 놀리며 뛰어왔다. 헥헥거리며 혀를 빼물고 명수를 올려다보는 호빵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어준 명수는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TV는 별로 재미가 없었다. 단유는 갈아입을 옷을 들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옷 바구니에 새 옷을 올려둔 뒤, 입었던 옷을 천천히 벗었다. 그리고 샤워기를 틀고 그 아래에 섰다. 차가운 물이 몸에 닿자, 즉각적으로 몸이 반응했다. 팔과 등에 소름이 돋으면서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것은 의지와 상관없는 자연스러운 신체 반응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몸은 그 차가움에 적응했고, 차가움은 시원함으로, 그리고 개운함으로 다가왔다. 별로 긴 시간도 아니었고 물줄기 아래 선지 몇십 초 만에 이루어지는 적응력이었다. 단유는 몸이 아닌, 정신도 그런 적응력을 보일 수 있을까 궁금했다. 누구나 말한다. 머리는 차갑게. 단유도 공감하는 말이다.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라. 그것은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유일한 특성이며,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감을 갖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종종 사람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무너뜨리고자 하는 본능이 있는지, 전혀 이성적이지 않게 행동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그런 사례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이 보아왔다. 이쪽 세계에서든, 저쪽 세계에서든. 아이든, 어른이든 특정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비이성적 행동을 보이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좁은 식견과 무리한 추측으로 상대를 무시하거나 흠잡던 초등학교 도서관의 사서 선생님, 겨우 분풀이나 하려고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소녀의 비밀을 폭로하던 동인,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하고 말을 듣지 않으려던 순찰대장, 그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죽이려고 들었던 감옥에서의 죄수들. 복수의 감정에 치우쳐 결국 마법을 잃어버렸던 마법사. 그런 면에서 단유는 이제껏 감정에 치우친 행동을 행한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바꿔 말하면, 늘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해왔다. 사실 예전의 단유는 감정에 치우칠 일이 별로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감정에 대해 돌아본 적도 없고, 느낀 적도 없었으니까. 늘 이성적으로 옳은 선택―물론 옳고 그름의 기준은 사회적 통념과 다른 경우가 많았다―을 했으니까. 그래서 과거 저쪽 세계에서 첫 ‘살인’을 했을 때도, 이곳에서 ‘정환’과 ‘숙희’를 죽였을 때도 단유는 후회를 하진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단유는 후회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성적으로 따졌고, 옳은 선택이라고 결정했기에, 그 결정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하지?’ 상대가 이제껏 상대했던 어른이 아닌 또래의 아이라서? 대화를 하지 않아서? 법을 어겨서? 생각이 이어지다 보니, 과거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가해자일까, 피해자일까.’ 가해자의 가학적 욕망이었을까, 피해자의 정당방위였을까? 마법을 쓸 수 있으니까, 힘이 있으니까 그 힘을 쉽게 사용했던 것일 뿐일까? 아니면 피해자로서, 아니 잠재적 피해자로서 자신과 친구에게 가해질 위해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정당방위라고 변명하는 게 옳은 것일까? “단유야? 뭐해?”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명수의 목소리에 단유는 정신이 들었다. 해석되지 않는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나름대로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며 분석을 하던 단유는 즉시 대답했다. “씻고 있어.” “괜찮아?” “응.” “혹시, 어디 불편하거나 아픈 데 있으면 말해. 혼자 앓고 있지 말고.” “…알았어.” 지금 느껴지는 여러 복잡한 감정 중, 단 하나의 감정만은 선명하게 이해되었다. ‘미안하다.’ 명수를 걱정시켜서 미안했다. 다친 명수를 볼 때, 명수가 버릇처럼 ‘미안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감정이리라.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나오는 단유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명수에게 단유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 “응. 조금 피곤해서 그래. 생각도 많고.” “…그래, 너 좀 쉬어. 넌 너무 안 쉬는 게 탈이야.” “알았어. 그런데 뭐 하고 있어?” “나? 나야, 그냥 TV 보고 있지.” “넌 너무 공부를 안 하는 게 탈이야. 기말시험 한 달도 안 남았어.” “에이, 새삼스럽게 무슨 공부 타령이야.” “그렇네. 그래도 너무 늦게까지 보고 있지 마.” “걱정 마. 선생님 오시기 전에 끌 거야. 그런데 걱정이다. 선생님이 이거 보면 걱정하실 텐데.” 명수가 이마에 붙은 밴드를 가리켰다. “상미를 구하려다 다친 거니까, 괜찮을 거야.” “아, 그 새끼. 갑자기 생각하니까 열 받네. 할 짓이 없어서 핸드폰이나 훔치고 다니는 놈이 상미를 때리려고까지 하다니 말이다. 진짜 그런 새끼들은 모조리 잡아서 감옥에 처넣어야 하는데. 소년원 같은 데 말고 진짜 감옥 같은 데.” 단유는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느새 호빵이 다가와 단유의 발밑에서 고개를 쳐들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흑색의 맑고 촉촉한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나 먼저 들어갈게.” “그래. 들어가서 쉬어.” 단유가 방에 들어간 후, 명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단유가 다시 기운을 차리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장계 중학교 교무실은 또 한 번 발칵 뒤집혔다. “교장 선생님, 어떻게 하죠?” 교감은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교장에게 의견을 구했다. 지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습도가 오른 탓인지 비가 오지 않을 때보다 더 더웠다. 비록 교장실에는 에어컨 때문에 시원하긴 했지만, 교감의 땀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지 않잖아요? 일단 학교 전체에 소문이 크게 나지 않도록 선생님들께 각별한 주의를 당부해주세요.” 호기롭게 교장직을 맡았으나 연이어 터지는 이런 사건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학교 밖에서 나는 사고까지 감당하기엔 교장의 권한과 권위에 한계가 있다. “경찰에서는 뭐라던가요? 혹시 범인이 누군지는….” “그것까지는 말해주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만, 눈치로는 경찰도 아직 범인이 누군지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학교 학생도 학생이지만, 그 고등학교는 아주 난리가 났겠군요.” 피해 학생 총 6명. 그중 한 명이 사망한 사건이었다. “아무래도, 살인 사건이니까요.” “그런데 그 학생 소문이 좋지 않다고요?” “예. 학교의 일진으로 소문난 학생인데, 학교 안은 물론 밖에서도 소문이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사법적 제재가 필요했던 아이라는 소문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학교 내의 일이라 정확히 어떤 일을 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들려온 소문은 그랬다. 폭력, 절도, 강도, 강간 등 생각할 수 있는 소년 범죄의 모든 것을 실행에 옮긴 학생이라는 소문. 그래서 어떤 이는 당해도 싸다거나, 언젠가 이런 일이 날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워낙에 그 학생에게 당한 피해자가 많았기에 범행동기만으로 범인을 특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우리 학생은요?” “3학년 유우성이란 학생인데, 후두부에 강한 충격을 받고 쓰러져 현재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설마…죽는 건 아니죠?” “병원에서는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고….” “이런.” 주먹을 쥔 손으로 가볍게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는 교장의 시선이 천장을 향했다. 교감이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요, 교장 선생님.” “말씀하세요.” “5반의 일 말입니다.” 교장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왔다. 시선 끝에 무거운 추라도 달린 듯 정수리를 짓누르는 무게감에 교감은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대로 말을 이었다. “처벌 수위를 조절하는 게 좋겠습니다.” “…….” “불량 청소년 살인 사건은 곧 뉴스에도 날 테고, 그러다 보면 그 사건에 우리 학교 학생도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 소문날 겁니다. 다시 말해 우리 학교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다는 이야긴데, 작년의 일에 이어 올해까지, 결코 학교에 좋을 일이 없는 이야깁니다.” “…….” 교감은 슬쩍 눈동자를 들어 대답 없는 교장의 눈치를 보았다. “계속하세요.” “아, 예. 저기, 그래서, 그런 와중에 5반의 일까지 거론되면 보통 시끄러운 일이 아닐 겁니다. 학교 폭력과 일진의 문제가 언론의 손을 타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테고 말이죠. 사실 학교의 명예만이 아니라 학생들의 내신과 미래가 걸린 일 아니겠습니까?” “학교폭력대책 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주시는 말씀인가요?” 교감은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일단, 학폭위 위원분들과도 이야기를 어느 정도 나누긴 했습니다.” 당연하다. 사실 교감의 생각이 아니라, 학부모들의 거센 압력과 전방위적인 로비(?)에 의해 학폭위 위원들이 먼저 교감에게 꺼낸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처벌하면, 피해 학생은 어떻게 합니까?” “아, 그 부분은 학부모님들 사이에 적당한 합의가 이루어질 거라고 합니다.” 교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감이 저도 모르게 반응해 움찔하는 것도 무시하고, 교장은 창가로 향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유리창에 부딪혀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금은 머리 위로 두 손을 올리고 달리면 비를 많이 맞지 않고도 운동장을 지나갈 수 있는 정도다. 하지만 폭우가 되면 두 손을 올리든 올리지 않든 몸이 젖는 것은 물론이고, 운동장의 흙탕물이 바지를 온통 적실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학교를 나설 때 학생들은 고민할 것이다. 지금 이 비가 보슬비인지 소나기인지, 아니면 태풍이 몰고 온 폭우인지. 어떤 비가 내리느냐에 따라 학생들의 대처도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학교도 그런 학생들을 위해 방법을 내어놓아야 한다. 보슬비라면 집에 빨리 가라고 지시하는 정도로 끝나겠지만, 폭우가 내린다면 학교는, 학생들이 비를 맞으며 뛰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나서서 말리고 보호해야 한다. “난 내가 우산이 되어주리라 생각했어요.” “교장 선생님께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은 학생들과 교직원 모두 아는 사실입니다.” 교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산이 아닌 우산 장수가 되었어요.” “네?” 우산 장수는 우산을 파는 사람이다. 비 오는 날 우산을 파는 이만큼 고마운 이가 어디 있는가? “장사꾼이 되었다는 이야깁니다.” 교장을 맡은 지 이제 겨우 6개월밖에 되지 않았건만, 남모를 스트레스에 아침마다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니, 나이 든 아내가 매일 한숨으로 배웅하고 있다. “매 순간의 선택이 장사꾼 이윤 계산하는 모양이니 말입니다.” 어쩔 수 없다. 같은 교육계에 있더라도 교장은 지금껏 상위 기관에서 편하게 지냈다. 반면 거친(?) 현장에서 20년 이상을 보낸 교감은 교장의 고민이 부질없다 여겼다. 아마 교장도 1, 2년 더 있다 보면 자신이 느끼는 것과 똑같이 느낄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니까. “그렇게 하세요.” “네?” “5반 문제, 말씀하신 대로 하시라고요.” 어차피 교장이 반대한들, 학부모와 학폭위에서 더한 압력을 넣을 뿐이지 다른 결과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원칙? 현실에서는 그저 바지를 더럽히는 흙탕물 같은 것이다. 융통성을 발휘해서 바지를 더럽히지 않는 길을 찾아 돌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 [509] 요령(2) 두 번, 정중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허락에 이어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단유였다. “아, 단유군. 들어와요.” “바쁘신데 방해가 아닐까요?” “아뇨, 괜찮아요. 우리 학생들이 찾아오는데 바쁘다고 내쫓을 순 없지요.” 따지고 보면, 교장실에 찾아오는 학생 자체를 찾기가 어렵다. 그러니 내쫓을 학생도 없었을 터. “한창 바쁠 때 아닌가요?” 기말고사를 2주 뒤에 치르고, 4일 뒤, 국제수학올림피아드(IMO)에 참석해야 하는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 사실 내신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반면에 투자해야 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올림피아드 출전을 꺼리는 중학생이 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학교의 입장에서 국제수학올림피아드 참가 학생이라는 홍보는 다른 어떤 홍보 못지않게 큰 효과를 보인다. 그러니 참여 의사를 보이는 학생을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괜찮습니다.” “역시, 김단유 학생은 여유가 넘치는군요. 그래 무슨 일이죠?” “국제수학 올림피아드 참가를 고사할까 생각해서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나요?” “최근에 심란한 일이 있어서요.” “심란한 일이요? 혹시 반에서 벌어졌던 일 때문인가요?” “관련이 없지는 않네요.” 교장은 굳어진 얼굴로 단유의 눈을 바라보았다. “학교의 책임자로서, 학교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해 깊이 통감해요. 그리고 단유군이 그런 일을 겪은 것에 대해서도 굉장히 미안하고요.” 교장 선생님이 사주한 것도 아닌데, 미안해할 거까지야. “괜찮습니다.” 안타까움보다 미안함을 담은 표정은 교장 선생님이 어떤 부류의 인간인가를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단유군이 어떤 마음의 상처를 받았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유군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포기할 이유는 못 돼요.” “기회요?” 국제수학 올림피아드 대회가 단유에게 기회였을까? “나가고 싶어 하지 않았나요?” “하긴 했지만, 꼭 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랬나요? 지난번에 단유군이 보여준 표정을 봤을 때는 상당히 기대하고 있던 것처럼 보였는데 말이죠.” 기대? 교장은 몸을 소파에 깊숙이 묻으며 단유 너머, 벽 너머의 어딘가를 바라보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어릴 적에 시골에서 자랐어요. 아이들이 많지 않은 동네라 학년 구분 없이 뛰어놀곤 했어요. 특히 이맘때면 학교 뒤의 동산에 올라 뛰어놀곤 했었죠.” 그때는 지금처럼 놀 거리가 많지 않았거든요, 라는 말을 이으며 눈을 감은 교장은 잠시 후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당시 또래 아이들이 가장 많이 즐겨 하던 놀이는 술래잡기나 숨바꼭질이었지만, 알고 보면 그냥 산에서 뛰어놀던 이야기죠. 봄에는 아버지가 지서장 하시던 친구와 산길에 난 진달래 따다 먹고, 여름에는 이장 아들 친구와 붉은 뱀딸기 여러 개를 한 손에 이렇게 모아다가 입 안에 털어 넣곤 했어요.” 말을 하다 보니 그때의 얼굴이 떠오른다. 얼굴에 검댕이 묻은 줄도 모르고 웃으면서 옥수수 구워 먹던 친구와 꽁꽁 언 땅을 뾰족한 돌로 파서 칡을 캐내던 친구. 지금 그 친구들은 수십 번을 기워입던 낡고 헐렁한 옷을 벗어 던지고, 자신처럼 목을 조르는 넥타이에 하얀 셔츠 차림으로 살아가고 있다. 잠시 말을 멈췄던 교장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늙으면 주책이라더니. 아무튼, 과거를 떠올려보면 그 시절이 참 아름다웠노라 이야기하게 돼요. 그때의 나는 지금에 비해 꽤 순수했기 때문일까요?” 딱히 대답을 바란 질문은 아니리라. 단유는 조용히 교장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런데 그 시절이라고 마냥 아름답고 순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우리 역시 사소한 문제로 다투고 주먹질도 하고 했으니까요. 꽤 짓궂은 장난을 치기도 했고요.” 그 정도는 어디나 다 마찬가지 아닐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이지만, 당시의 저는 아름답다고 느끼지도 않았고, 그저 하루를 살아가는 데 의의가 있는, 그런 삶을 살았던 것 같아요. 저뿐만 아니라, 제 또래가 꿈꿀 수 있는 미래란 그저 아버지, 어머니, 동네 삼촌들과 이모들이 보여주는 삶이 전부였거든요. 그래서 생각해보니 그 당시의 우리들에겐 교육이 ‘기회’가 될 거란 믿음이 없었어요. 그저 어른들이 배워야 한다고 하니, 우격다짐으로 배움을 이어나갔던, 그런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죠.” 교장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전 운이 좋은 편이었어요. 중학교에 가기 위해 읍내로 나갔어야 했는데, 마침 제 짝이 군수의 아들이었거든요. 그 친구 덕에 전 시골에서 보기 힘든 것들, 문명의 이기들과 구하기 어려운 책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당시의 전, 커서 ‘군수’가 되겠다는 희망을 품었었죠.” 나이 든 이가 추억을 되짚으며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결국 저 ‘희망’이란 이야기일까? 너도 열심히 공부해서 희망을 가져라? 경험에서 우러나온 충고? “어렸을 때는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노력하죠, 하지만 나이가 들면 언제나 차악의 선택을 하려고 합니다.” “왜 그렇죠?” “어렸을 땐 구체적인 상상력이 빈약하거든요. 어떤 미래를 상상하더라도 채워지지 않는 공백의 틈이 커요. 그 공백은 판도라의 상자와 같아요. 그래서 희망을 품게 되고, 밝은 미래를 꿈꾸죠. 하지만 어른이 되면 상상이 구체화됩니다. 어렸을 때는 겪지 못했던 경험을 쌓으며 공백을 메워나가게 되거든요. 그래서 어른은 아이들이 꿈꾸는 밝은 미래 대신 실패와 두려움으로 점철된 현실을 걱정합니다. 그리고 최악보다 차악을 선택하기 위해 신중해지죠.” 일반적으로 아이들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어른은 그 반대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교장은 정반대란다. 하지만 그 말의 의미를 곱씹으니 과연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교장은 입꼬리를 올렸다. 웃음이 나서 짓는 표정이라기보단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들어보고자 하는 노련함이 깃든 표정이었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단유군은 아이답지 않게 선택에 신중해요. 선택의 무거움을 알기 때문이고, 선택의 결과를 두려워할 줄 알기 때문이겠죠. 그런 단유군이 수학올림피아드 초청장을 받아들었을 때는 또래의 아이들과 비슷한 표정을 짓더군요.” 단유도 기억했다. 처음 교장에게서 그 초청장을 받았을 때 느꼈던 가슴의 두근거림. “그런데 지금은 다시 어른의 선택으로 돌아온 거 같군요. 현실의 두려움을 담은 표정으로 말이에요.” 단유는 대꾸하지 못했다. **** 경찰은 탐문 수사를 해봐도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었다. 주변의 집들도 시끄럽던 아이들이 조용해지기에 그저 아이들이 자리를 피했다고만 생각했지, 어떤 다툼이나 문제가 생겼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단다. “혹시 다른 소리 들으신 건 없으시고요? 기억에 남는?” “그런 건 별로 없었어요. 걔들이 하루 이틀 그러는 것도 아니고 매일 와서 떠들다 가곤 했으니 그날도 으레 그러려니 했죠.” “저기….” 형사는 뭔가를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곧 들고 있던 수첩을 덮더니 짧게 감사를 전했다. 사실 ‘총소리’를 듣지 못했냐고 직접적으로 묻고 싶었지만, 그것은 언론에도 공표되지 않은 문제인데다, 만약 ‘총기’로 의심되는 도구에 의한 살인이란 이야기가 흘러나오면 치안이 극도로 불안해질 뿐이다. “총도 아니라면서요?” 파트너의 이야기에 형사는 입술을 삐죽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검시관의 말로는 총기라기보다 드릴 같은 것에 의해 관통된 상처라고 이야기했다. “총기라면 사입구 부근이나 사창관에 뚜렷한 흔적이 남아요. 예를 들어 사입구에는 탄두가 피부를 뚫으면서 생기는 표피박탈륜(abrasion ring)이 보여야 해요. 피부가 밀리면서 안쪽으로 함몰되는 흔적이죠. 사창관에도 탄환의 속도와 진동에 의해 사창관이 심하게 훼손되고 화상을 입은 것 마냥 조직이 변질되는 경우가 보이죠. 그런데 이 학생의 경우에는 그런 상처가 보이지 않아요. 사입구, 사출구, 사창관이 모두 깨끗해요. 아니 아주 깨끗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총상이라고 보긴 어려워요.” 물론 자세한 건 부검의에게 물어봐요, 라며 떠나는 검시관은 마치 이제부터는 네 일이지 내 일 아니다, 고 말하는 것 같아 형사는 찝찝함을 느꼈다. 쉽게 끝날 일로 보이지 않으니 이번에는 또 얼마나 오랫동안 위장약을 먹으며 지내야 할까. 언론의 포화와 윗분들의 답답한 지시사항을 버텨내며 수사를 이어가야 할 자신의 운명이 벌써부터 그려졌다. 형사는 한숨을 내쉬며 좁은 골목을 걸었다. 전혀 정비되지 않아 마치 미로같은 좁은 골목을 누비길 며칠 째. 단서는 눈꼽만큼도 나오지 않았고, 그 흔한 CCTV가 왜 이런 곳에는 설치되지 않았는지 답답할 따름이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아파트며 부촌에서 살려고 하나 봐요.” 이런 동네에서는 사고를 당해도 보호해 줄 이가 없다. 억울하게 죽는다고 한들, 누구 하나 눈 깜짝하지 않을 것만 같다. 기껏해야, 치안을 불안케 했다고 항의하는 정도겠지. “요즘 세상이 어느 땐데 말이야. CCTV 하나 없어? 이거 구청에 신고하면 달아주려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죠.” “소를 잃었으면 찾으려고 노력해야지.” “소 주인 생각하니까 확 열이 오르네.” “말조심 해라.” “에이, 여기는 듣는 사람도 없는데요.” “말도 계속하면 버릇 돼. 나중에 피해자 부모님이 경찰서에 오셨는데, ‘소주인’ 운운하는 게 들키면 어떡하려고 그래?” “에이, 제가 무슨 욕을 한 것도 아니고.” “됐으니까 조심해.” “예.” 파트너는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놓고 형사의 뒤를 쫓았다. 범행 방법이나 증거에서 찾지 못한다면, 범행 동기를 되짚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죽은 운종의 학교에서부터 그가 만났던 사람, 그를 잘 안다고 소문난 사람들을 모아 조사를 벌였다. “그 새끼, 그렇게 될 줄 알았어요.” “그 새끼, 완전 미친 또라이에요.” “솔직히 걔가 죽어서 잘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걸요?” “잘 됐다고?” 죄질이 아주 심한 사람이거나 하지 않으면 죽은 사람을 두고 ‘잘 됐다’고 표현하기가 어렵다. “걔 죽이고 싶어할 사람이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전교생 전부가 아닐까요?” “전부?” “네.” 평판은 무척이나 나빴다. 게다가 운종에게 노골적으로 복수심을 드러낸 이도 있었다. “운종일 죽인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사람이 죽었는데 행복하다고?” “걔가 학교에서 벌인 짓을 형사님이 몰라서 그래요.” 전교생들은 마치 짠 듯이, 운종을 욕했다. “범행동기는 넘치네요.” 파트너의 말대로 넘쳐나는 범행동기 때문에, 형사는 범인에 대해서 1도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 중학생 있잖아?” “장계 중학교 학생이요?” “그래. 거기도 한 번 가보자.” “거긴 너무 아닌 것 같은데요.” “일단 가보자.” 형사는 곧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거친 배기관 울음소리가 이제는 익숙하다. **** “단유군이 가졌던 기대, 그것은 학생과 비슷한 수준의 학생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 아니었나요?” 단유는 계속 입을 다물었다. “대화가 통하는 또래 친구를 만나고 싶어서 기대했던 거 아닌가요?” 그렇다. 단유는 자신과 비슷한 사고를 가진 이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수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었다. “물론 단유군에게 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잘 알아요. 하지만 진짜 대화가 통하는 친구가 많나요?” 훅 치고 들어온 교장의 추측이 단유의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아마 단유군이 생각하는 그런 친구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겁니다. 그런 기회를 포기하지 마세요. 그것은 매우 소중한 기회이고 단유군에게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단유는 교장이 단순히 학교의 입장에서 서서 설득하기보다, 단유 본인을 잘 배려하며 말을 고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고맙기도 하지만, 아쉽기도 했다. 아쉬운 건, 단유 본인이 처한 상황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다는 사실에 관한 아쉬움이었다. 어른은 차악의 선택을 한다고 했던가? 단유는 자신이 그런 차악을 선택했던 건 아닌지 반성했다. ======================================= [510] 요령(3) ‘난 왜 살인이라는 선택지를 골랐을까?’ 살인. 그것은 매우 극단적인 문제 해결 방식이며, 일반적으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범죄 중 가장 최악인 범죄이다. 사람이 같은 생물학적 존재를 죽인다는 건, 여름밤 팔에 붙은 모기를 때려죽이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행위, 라고 인식된다. 살인에 관한 도덕적, 윤리적 고찰을 하자면 끝도 없다. 살인을 해야 할 이유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더 많다. 무엇보다 현대 사회에서 살인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성을 얻기가 힘들다. 단유도 그 사실을 잘 안다. 하지만 단유는 고민했고, 선택했다. 그것은 사소한 이유로 다툼이 벌어져 충동적으로 칼을 들어 올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행위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다. 사람이 모기와 다르다지만, 그 사람으로 인해 자신의 생명과 삶이 위협받는다면, ‘살인’이라는 방법은 유효한 선택지다. 다만 단유가 느끼는 불안감은 다른 방향에서 접근한다. 상상력의 문제라는 교장 선생님의 말을 빌자면, 단유는 그의 존재가 자신에게, 또는 자신의 주변인에게 위해를 가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100%는 아니더라도, 거의 그 정도에 준하는 위험성이 있기에 자신의 조치는 정당했다고 믿었다. 믿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상상의 문제였다면, 그래서 자신의 판단 준거가 불확실하다면 자신의 선택 역시 불확실한 가정 속에 성급히 답안지를 작성한 셈이다. 답이 틀릴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불안감의 원인이다. “저는 제 능력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단유의 한 마디에 교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단유군, 자네는 정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요. 더 많은 교육과 더 많은 경험을 쌓게 된다면, 더 많이 발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요. 하지만 그 재능이 모든 일을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 라는 말 들었죠? 아무리 뛰어난 머리가 있다고 해도, 렘브란트, 피카소 같은 화가나 베토벤, 모차르트 같은 음악가가 될 순 없는 법이거든. 모든 재능은 자기만의 영역이 있고 그 영역 내에서만 발휘되는 거예요. 영역 외에서 자신의 재능이 쓸모없다고 여길 순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과소평가할 이유는 없는 것이죠.” 교장은 어리지만 어리지 않은 단유를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심각한 폭력의 피해자로서 마음의 상처를 입은 단유를 보며 이런 표정을 지으면 안 될 것 같지만, 이번 일을 극복했을 때 단유가 어떻게 성장해나갈지 그 미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교장은 기분이 좋았다. 교장의 역할은 바로 단유를 비롯한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런 일에도 흔들림 없이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학교의 시스템을 구축하고 유지해나가는 일이 교장의 임무이며, 의무였다. “학교에서 다양한 과목을 가르치는 것은, 그 모든 과목을 모두 잘하라는 의미가 아니에요. 사람마다 가진 특성과 재능이 다르기 때문에 그중에서 자신에게 맞는 재능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알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많은 학문을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음악, 체육, 미술은 물론이고, 사회, 역사, 국어, 수학, 영어 등 이 많은 학문 들이 우리 삶에 모두 필요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재능과 관심이 어느 방향으로 뻗어갈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죠.” “하지만, 학교는 늘 시험을 치고 정답을 요구하지 않나요?” 이런 순간에도 단유답다, 고나 할까?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부터 교장은 이런 단유를 봐 왔기에, 오히려 주눅 들지 않고 할 말은 하겠다는 단유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걸 고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 비록 지금 당장은 고쳐지지 않고 있다 해도, 언젠가는 고쳐질 거예요. 그리고 단유군과 같은 생각을 가진 친구들이 나중에 커서 교사가 된다면, 그리고 그 교사들이 다시 학생들을 가르칠 즈음에는 단순히 정답만을 강요하는 선생님과 학교는 없지 않겠어요? 그렇게 미래는 여러분들이 바꿔 가는 거죠. 좋은 방향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말이지요.” 책임을 여러분들에게 떠넘기는 것 같아 미안해지는군요, 라며 낮은 웃음을 흘리는 교장이었다. **** 거친 머플러 소음과 함께 학교 정문에서 오래된 구형 차 한 대가 나타났다. 털털거리며 학교 운동장 주변의 길을 따라가던 차는 이내 주차장에 도착해서 멈췄다. 머플러 소음이 멎자, 주변이 일시에 조용해진 착각이 들 정도다. “이 차 언제 퍼질지 겁납니다, 선배.” “야, 내 차 사는데 돈이라도 보탠 거 아니면 조용히 해.” “차 안 바꾸세요?” “내 차 바꾸길 기다리기 전에 니가 차를 사는 게 어때?” “에이, 제가 돈이 어딨다고요.” “그럼 나는? 너나 나나 다 거기서 거기다.” “형수님이 돈 잘 벌지 않으세요?” “그 형수가 요새 장사가 안된다고 밤마다 우는소리를 해서 미칠 지경이다.” “하긴 요즘 꽃 장사 같은 게 잘 될 리가 없죠.” “아주 악담을 해라?” “아이고, 애들이 아직 많네요.” 지나가며 수군거리는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을 돌리는 후배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두드린 장 형사는 교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실례합니다.” “아, 예. 어쩐 일로?” “경찰입니다.” 장 형사는 경찰증을 보인 뒤, 용건을 말했다. “교감 선생님 좀 뵐 수 있을까요?” “저기 저쪽에….” “감사합니다.” 장 형사는 경찰증을 품에 집어넣고 후배와 함께 교감에게로 향했다. 이미 낯선 외부인이 등장할 때부터 모두의 시선이 몰린 틈이었다. 교감 역시 자신에게 다가오는 장 형사를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든 표정으로 ‘어떻게….’라고 물어보는 교감에게 장 형사는 ‘유우성 학생 문제로 왔습니다’라고 이야기를 꺼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런데, 교감 선생님이 바뀌었나요?” “네? 네. 연초에 교장 선생님과 함께 바뀌었죠. 그런데 어떻게?” “아, 다름이 아니고 작년 초에 여기 사건이 있을 때, 제가 조사를 담당했었거든요.” “작년에요?” “이사장 살인….” “아, 맞아요. 기억나요. 어쩐지 얼굴이 익다 했어요.” 작년에는 학생 주임이었다며, 묻지도 않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교감의 말을 자르며 장 형사가 물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유우성 군에 대한 생활기록부나 학교 내에서의 문제 등을 듣고 싶은데요.” “아, 예.” 아침에도 교장 선생님과 그 문제로 이야기를 나눈 상황이라 교감은 난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일이야 어쨌든 다른 선생님도 있는 이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눌 순 없는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장 선생님께 보고를 해야 할 문제였고. “일단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를 나누시겠습니까?” “그러죠.” 그리고 뒤에 선 후배를 돌아보았다. “넌 유우성 담임 선생님 만나봐.” 교감은 살짝 당황한 얼굴로 장 형사를 바라보았다. “아, 저기. 저희가 담임 선생님을 불러드릴 테니 일단 함께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장 형사가 바라보자, 교감이 속을 털어놓았다. “최근에 학교에 불미스러운 일들이 조금 있는 와중이라 학교가 괜히 소란스러워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학기 기말고사가 2주도 남지 않은 상황인데 괜한 일로 학교가 들썩거리면 학생들이 집중을 하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학생들을 위한 조치이니 협조해달라, 는 교감의 말에 장 형사는 동의했다. “그러죠. 따라와.” 후배는 그러려니 하며 장 형사와 교감의 뒤를 따랐다. 교감은 생활지도부실이 비어있음을 확인한 후, 우성의 담임 선생님과 생활지도부 선생님을 불렀다. **** “아까의 질문에 답하자면, 단유군 스스로의 재능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할지는 천천히 알아가도 됩니다. 단유군은 아직 어려요. 벌써부터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고 조급해할 나이가 아니란 말이죠. 단유군이 무언가를 이뤄야 할 나이가 될 때까지는 학교와 사회가 학생을 보호해 줄 겁니다. 가진 재능이 무사히 개화될 수 있도록 돕는 게 학교와 저의 역할이니까요. 그러니 학교를 믿으세요.” 단유는 교장을 바라보았다. 교장의 표정에서 거짓의 틈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다시 말해, 교장은 진심으로 자신을, 학교를 믿으라고 말하는 셈이다. 학교를 믿는다? 아니 그 전에, 믿으라는 말을 꺼내는 자신감에 단유는 살짝 놀랐다. 교장은 자신이 이 학교를, 학생들이 믿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드러낸 셈이었다. 돌아보면 학교란 공간은 단유에게 믿음의 대상은 아니었다. 단유 뿐 아니라 거의 모든 학생에게 그렇다. 학교가 학생을 보호한다? 만약 진실로 보호하려 했다면, 작년 말 그런 학생 시위가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학생 개개인의 사고와 가치관을 획일화시키는데 주력했던 학교의 강압은 결코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학교를 믿어라? 이제 갓 부임한 교장의 포부는 기대하고 싶지만, 선뜻 신뢰하기엔 이제까지의 경험이 벽이 되었다. 그리고 애당초, 학교를 못 믿어서 자신의 재능을 못 키웠던 게 아니다. 단유 본인의 재능은, 단유가 말하는 능력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재능이고 학교가 보호할 수 없는 범위의 것이었다. “단유군은 무엇이 되고 싶다, 라는 꿈이 있나요?” 오랜만에 듣는 질문이다. 예전 같으면 모르겠다, 라고 대답하겠으나 지금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 할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는 정했어요.” 교장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요?” “진실한 사람이요.” “진실한 사람?” “네.”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 사람. 위선이나 위악마저도 철저히 배격하고, 오로지 자신의 이성과 양심에 따르는 사람. 철저히 진실을 따르는 사람.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사람이요.” “…기대하지 못했던 대답이군요. 그렇지만…아마 그 길은 굉장히 험난할 것 같군요.” “네. 그래도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가야 한다? 가고 싶다가 아니고요?” “네.” 그것이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보존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방법이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자신의 선택에 대해 고민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려 노력한다. “가끔 단유군과 대화를 나누며 스스로를 돌아보게 돼요. 어쩌면 이리 어린 나이에도 그런 바른 생각을 가졌는지 말이죠. 학생 스스로의 자질도 자질이지만, 집에서 함께 생활하시는 분들이 모두 바른 생각을 가졌기에 그런 영향도 있겠죠?” “그럴 겁니다.” 영향이 없진 않다. 하은과 명수, 두 사람 모두 솔직하기로는 세상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때론 너무 솔직해서 탈이라고 느껴질 정도니. “알겠습니다. 단유군의 의견을 존중해서, 일단 이번 IMO 출전은 거절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내년, 고등학교 진학 후에도 출전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는 꼭 나가보길 권할게요. 세계 대회에 나가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단유 군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굳이 성적을 내지 않더라도 그런 대회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며 식견을 넓히는 것이 단유 군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믿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교장 선생님.” 대화를 마무리하고 단유는 일어설 때, 교장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교장 선생님.” 교감이 들어오다 단유와 눈이 마주쳤다. 단유는 정중히 인사를 올린 뒤 돌아섰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요, 수고하세요.” 교장이 온화한 미소로 배웅해준 뒤, 교감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교감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형사가 왔습니다.” 교장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졌다. 단유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이 마치 동화를 읽는 기분이었다면, 이제 다시 어른의 세계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어쩌면, 이런 기분 때문에 더 단유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 [511] 요령(4) 교장실을 나와 학교 본관을 나오니 명수가 그늘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운동장을 보고 있었다. 단유의 인기척을 느낀 명수가 돌아보며 물었다. “다 끝났어?” “응.” “안 가기로 했어?” “응.” “아쉽지 않아?” “별로.” “그럼 다행이고.” 명수는 단유에게 음료수를 던졌다. “가자.” 단유는 음료수를 한 손으로 가볍게 잡아챈 후, 학교를 바라보았다. 붉은 벽돌이 외벽을 꾸민 4층짜리 건물이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보였다. **** 교장은 형사들을 만나기 위해 생활지도부실로 이동했다. “장계중학교 교장 허창완이라고 합니다.” “아, 예. 반갑습니다.” 떨떠름한 표정의 장 형사는 교장과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을 꺼냈다. “유우성군의 학교생활과 주변 교유 관계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교장이 눈길을 돌리자 생활지도부 선생님이 바로 입을 열었다. “유우성 학생은 성적이나 품행 면에서 문제가 있는 학생이긴 했지만, 최근에는 특별히 언급할만한 사건은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일을 듣고 저희도 꽤 놀랐습니다.” “혹시 이 학교의 일진이었다거나….” “일진이라고 표현하기는 좀 그렇군요. 주위 학생들과의 사소한 마찰이 빈번히 일어나는 정도라고만 언급할 수 있겠네요.” ‘빈번’하다는 표현이 쓰일 정도라면 문제가 많다는 것을 학교 측에서도 인지하고 있다는 말일 테다. “그렇다면 어떻게 관리하고 있었나요?” 그 말에 교장이 헛기침을 한 후 답변을 대신했다. “학교는 군대가 아닙니다. 군대에서처럼 관심 병사로 지정해서 관찰 및 관리를 하는 식이 아니라는 이야깁니다. 비록 학생이 문제를 일으킨다 하더라도, 학교는 최대한 학생의 자율권을 우선시 생각하여 학생을 통제하려는 행위를 최소로 합니다. 그 때문에 늦장 조치라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 학생들을 모아 놓거나 ‘관리’하는 것은 반인권적인 처사지요.” “그럼 유우성 군에 대해서도 학교에서는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말인가요?” “우리는 그 학생이 문제를 일으킬 것이 분명하기에 미리 관리해야 한다는 예방적 조치를 하지 않습니다. 특정 학생을 관찰, 통제하는 행위는 반민주적 행위이니까요.” 장 형사는 갑자기 ‘반민주적’이란 용어가 나오니 자신이 뭔가 잘못 말했나 싶은 생각에 겸연쩍어했다. “하지만 그 학생으로 인해 다른 학생이 피해를 보아서도 안 되겠지요. 그래서 저흰 학교에서 지켜야 할 규율을 지키도록 교육하는 동시에, 여기 계신 선생님들이 매일 수고하시는 겁니다.” 생활지도부 선생님은 괜히 머리를 숙였다. 틀린 말은 없지만, 자신이 그렇게 열심히 했던가를 반성하는 마음이었다. 한편으로는 교장 선생님이 ‘수고’를 천명한 만큼 자신이 이제껏 해온 것들이 인정받는다는 기분도 들었다. “네, 일단 알겠습니다. 아무튼… 저기, 선생님.” 머쓱한 기분에 뺨을 한 번 쓸어본 장 형사는 담임 선생님을 향해 물었다. “유우성 학생의 교우관계는 어떤가요? 특별히 친한 친구나 혹은…사이가 좋지 않은 관계에 있는 학생이 있나요?” 최대한 표현을 순화해서 묻는 장 형사의 물음에 담임 선생님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3학년에 오른 뒤로는 특별한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어서요.”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다고요?” “그게….”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의 눈치를 살피던 담임 선생님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반 학생들과 충돌이 난 적이, 제가 아는 한에서는 없어요.” 단순히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일까, 객관적인 사실을 언급하기 위한 노력일까. “그 말씀은 선생님이 보지 않았을 때는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인가요?” “학교에서는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만약 학교에서 문제가 났다면, 담임인 제가 모를 수 없으니까요.” “아이들이 모두 쉬쉬할 수 있지 않나요?” 왕따 문제나 괴롭힘과 같은 학교 폭력이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일어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한 학생이 힘으로 누르면, 다른 학생들은 기가 죽어서 말을 못할 수도.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옛날과 달라요. 한 아이가 힘으로 반을 장악하고 공포로 아이들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없어요. SNS나 단톡방 등으로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아이들이에요. 만약 그 반에 문제가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표출이 되지요.” “요컨대, 이제는 교실에 엄석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교감 선생님이 끼어들었다. ‘이 사람들, 미리 준비라도 했나? 왜 이렇게 호흡이 좋아?’ 장 형사는 일단 고개를 끄덕인 후, 질문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유우성 학생은 고등학교 일진 아이들과 같이 있다가 피해를 받았습니다. 말하자면, 노는 아이들 축에 끼었던 셈이죠. 선생님은 유우성이란 학생이 그런 ‘일탈’을 하고 있었음을 몰랐나요?” 담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생활 지도부 선생님이 대신 변명을 했다. “교감 선생님이 말한 것처럼, 요즘 학교는 옛날 우리나 형사님 세대의 학교와 달라요. 담임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란 말이지요. 학교 밖에서의 일탈까지 담임이 일일이 캐치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자리가 담임의 관리 책임을 성토하는 자리도 아닌 바, 더 이상의 질문은 무의미했다. “반에서 친한 친구는요?”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이번에도 생활지도부 선생님이 나섰다. “예전에는 같이 다니던 아이들이 있었는데, 2학년 때 갈라선 것으로 보입니다.” “갈라서요?” “2학년 초까지는 세 명이 몰려다니면서 힘자랑을 했었어요. 하지만 그 무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한 학생이 마음을 고쳐먹으면서 그 무리에서 나온 뒤로는 흐지부지됐어요.” “그 학생이 누군가요?” “진도하라고, 지금은 착실…까지는 아니지만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학교 생활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학생입니다.” “진도하, 그 학생 좀 볼 수 있을까요?” “저기, 이미 하교 시간이라 모두 집에 돌아갔을 텐데요.” “아, 그런가요? 그럼 내일 다시 오도록 하죠.” “그런데 말입니다.” 교감 선생님이 또 끼어들었다. 장 형사는 뒷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보았다. “말씀하세요.” “저기, 듣기로는 고등학생 일진이 죽은 사건이라고 들었는데, 왜 저희 우성군의 주변 인물을 묻는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제 생각에는 그 살해된 학생의 주변을 살펴야 하지 않나 해서요. 너무 주제넘은 참견인지 모르겠지만, 조금 의아하네요.” “학교의 교육이 선생님들 몫이듯, 수사는 저희 몫입니다. 교감 선생님의 참견은 주제넘은 게 맞는 것 같군요.” 장 형사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자신을 곤란케 했던 선생님들을 향해 독설을 남기고 일어섰다. “아, 그리고 내일은 이렇게 단체로 마중 나와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교감 선생님과 생활지도부 선생님이 헛기침하는 소리를 들으며 장 형사와 후배는 생활지도부실을 빠져나왔다. **** 다음날, 장 형사는 다시 학교로 찾아와 도하를 만났다. “네가 진도하냐?” “네.” 경계하는 도하에게 장 형사는 수첩을 펼치며 물었다. “유우성 알지?” “네.” “친하니?” “별로요.” “선생님 말씀으로는 꽤 친했다던데?” “작년 초까지는 그랬는데, 이제는 별로 안 친해요. 말도 잘 안 나누고요.” “그래? 그럼 혹시 우성이랑 친한 애나 혹은 우성이한테 안 좋은 감정을 가진 친구가 있는지 아니?” “우성이랑 친한 애는, 진태라고 있었는데 걔도 작년부터 우성이랑은 별로 말 안 하고 지냈을걸요?” “그럼 친한 애는 없어?” “제가 알기론, 별로 없을 거예요. 겨울방학 때부터 고등학교 선배들이랑 지내느라고 바빴을 테니까요.” “넌 걔가 방학 때 아르바이트 한 것도 알아?” “당구장이요? 듣긴 했어요.” “넌 별로 안 친하다면서 그건 어떻게 알아?” “친하지는 않아도 그런 이야기는 다 알아요. 원래 그런 이야기는 다 돌고 도니까요.” “그럼 들은 이야기 중에 혹시 우성이나 그 선배들에게 앙심을 품은 아이는 있어?” “한둘이어야 말이죠.” “한둘이 아니다?” 도하는 답답하다는 눈치로 장 형사를 바라보았다. “생각해보세요. 온갖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 하고 다닌 애들인데 좋아할 애들이 있을 거 같아요?” “그래도 개중에 특별히 싫어할 사람이 있지 않을까?” 도하는 피식 웃었다. “형사님.” “왜?” “형사님 지금까지 범인들 많이 잡으셨을 거 아네요? 그 사람들 중에 형사님한테 앙심 품은 사람이 하나도 없을까요?” “…….” “어린 놈이 말버릇하곤!” 후배가 나서려는 걸 한 손을 들어 말린 장 형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럼 다시 질문할게. 네가 아는 한에서, 그 애들을 죽이고 싶어할 사람, 그리고 진짜로 행동에 옮길 사람은 몇이나 되냐?” “음, 글쎄요.” 도하는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놓고 뜸을 들였다. 한동안의 정적 후 도하가 말했다. “너무 많네요.” “많아?” “부모님께 받은 용돈을 상납한 아이들, 강간당한 딸의 부모님, 수백만원 어치의 물건을 도둑맞은 가게 사장님, 맞아서 고막이 나간 동생의 형. 따지면 너무 많지 않나요?” 장 형사는 입을 다물었다. “살인이 별건가요? 요즘 뉴스 보니까, 말다툼하다가도 죽이고, 자기 무시했다고도 죽이고, 시끄럽다고 죽이고, 째려본다고 죽이고, 그냥 이유 없이도 죽이던데요. 작정하면 뭔들 못하겠어요.” 장 형사와 후배 형사는 도하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도하를 돌려보낸 장 형사는 담배를 물려다가 교내임을 자각하고 다시 담배갑에 담배를 집어넣었다. “요즘 아이들은 왜 이렇게 싸가지가 없대요?” 후배의 한 마디에 장 형사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너희 때도 똑같았어, 임마. 저 나잇대 애들은 다 저래.” “그래도 말이에요. 애들이 어른 무서운 줄 모른다니깐요.” “살인이 별거냐고 말하는 아이인데 어른이 무섭겠냐?” “…그렇네요.” “하아. 정말 애들이 무서워지는 건지, 세상이 무서워지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게요.” “이래서야 어디 경찰 짓도 해먹을 수 있겠냐? 밤길에 칼 맞는 건 둘째치고 대낮에도 해코지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해야 할 세상이다.” 치안을 책임져야 할 경찰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로 어울리진 않지만, 진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어떡하실 생각이시죠?” “현장에서는 다른 증거 나온 거 없다지?” “네.” “나 참.” 장 형사는 한숨을 내쉬다 문득, 작년의 일이 떠올랐다. “그 애도 이 학교 학생이었지?” “누구요?” 미스디렉션을 가르쳐 준 아이. 보고 싶은 것만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도 보라고 가르쳐 줬던 아이. 사실 장 형사가 이 학교에 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살해당한 아이는 고등학교 일진 학생이지만, 다른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에 당시 현장에 있었던 아이들의 조사는 물론 그 주변 인물까지 샅샅이 알아보는 중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범인의 실체였다. **** “야, 뚝배기 깠다.” “개피, 개피!” “오른쪽으로 가서 양각 잡자!” “오케이!” 피시방에서 나란히 앉아 현란한 마우스 콘트롤로 에임을 잡고 총을 쏘는 소년 소녀의 뒤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지만 게임에 집중한 두 사람은 그 사실을 몰랐다. “인명수.” “응?” 명수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오늘 시험 공부한다고 했었지?” 단유가 짐짓 화난 표정으로 명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그, 그랬지. 금방 끝내고 가려고 했어, 정말이야!” 그때,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상미가 소리쳤다. “야, 나 기절이야, 살려줘!” 단유는 상미의 헤드폰을 벗겼다. “뭐, 뭐야? 응? 아, 단유네?” “너 오늘 우리집에 공부하러 가겠다고 했다며?” “응? 아, 그랬지.” “여기가 우리집이니?” “…엄마가 전화했어?” “응.” “…엄마한테 이야기 안 할거지?” “지금 바로 일어나면.” 아쉬운 듯 모니터로 고개 돌린 상미는 죽어버린 자신의 캐릭터를 발견했다. “죽었네.” 명수의 캐릭터도 이미 죽어서 회색빛으로 물든 화면이었다. “끝났네, 가자.”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힘없이 일어나는 소년 소녀를 보며 웃음을 참는 단유였다. 부쩍 가까워진 두 사람을 보니, 괜히 마음이 즐겁다. 하지만 공부는 그와 별개다. “오늘은 문제집 다 풀기 전까지는 집에 못 갈 거야.” 상미는 울상을 지었고, 명수는 눈꼬리가 휘어졌다. ======================================= [512] 요령(5)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등줄기로 땀이 흘러내리는 날씨지만 학생들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편하게 앉아 있었다. 물론 자세가 편하다고 마음도 편한 건 아니다. 불편한 마음을 한가득 안고 펜을 움직이던 학생들을 멈추게 한 것은 종소리였다. “그만. 다들 펜 놓고 머리 위로 손 올려. 거기, 너 빨리 손 떼.” 끝났다고 기뻐하는 학생과, 마킹을 끝까지 하지 못해 울상인 학생들이 뒤섞인 가운데 제일 뒷자리에 앉은 학생들이 답안지가 마킹된 OMR 카드를 앞으로 넘겼다. 제일 앞자리까지 다다른 카드는 다시 선생님 손에 거둬졌고, 선생님은 카드 매수를 헤아린 뒤 시험이 끝났음을 선포했다. 아이들은 와, 하고 소리 지르며 자리를 벗어났다. 서로의 답안지를 확인하며 탄식과 환호가 터져 나오는 교실에서 명수는 단유에게 넌지시 물었다. “오늘 PC방 어때?” “나 회사 가보려고 했는데.” “회사는 나중에 가도 되잖아? 메일 보냈을 거 아냐?” “메일이야 보내긴 했지. 그래도 회사에 가서 새로 책도 받아와야 하고.” “내일 가면 안 돼? 오늘 시험 끝났는데 뭉쳐야지.” “너랑 상미만 뭉치면 되는 거 아냐?” “야, 말 섭섭하게 하지 마라.” “그 입이나 제대로 수습해. 아주 귀에 걸려서 내려올 줄 모르네.” 제 속도 제대로 감추지 못하는 명수를 보며 단유가 피식 웃었다. “티 나냐? 아, 됐고. 아무튼, 같이 가. 이 게임이 원래 한 스쿼드로 해야 재밌단 말이야.” 원래 뭔가 바쁠 때 하는 일탈이 더 짜릿하고 재밌는 법이라, 시험공부 기간에 하게 된 게임에 푹 빠진 명수였다. 상미랑 같이해서 더 재미를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태랑 채윤이랑 같이 해.” “하려면 다 같이 해야지! 그리고 네가 와야 맛있는 것도 많이 먹지.” “내가 물주냐?” “응.” 으이구. “그래, 가자. 내가 널 먹여 살려야지.” “오케이! 그리고 지금까지 네가 나 시험공부 도와줬으니까, 오늘은 내가 널 가르쳐줄게. 나만 믿고 따라와.” “굳이 배워야 할 필요가 있을까?” “어허. 이 게임은 상당한 전략 이해와 순발력이 필요한 게임이야. 네가 아무리 공부를 잘한다고 해도, 이 게임에선 풋내기라고.” “내 말은, 굳이 내가 같이 게임을 해야 하냐는 이야기였어.” “한 번 해보고 그런 말을 해. 아마 너도 푹 빠질걸?” “이제껏 내가 네 말대로 푹 빠졌던 게임이 있었나?” “이번엔 다를 거야. 꼭 그렇게 되고 말걸?” 명수가 자신 있게 외쳤다. 시험이 끝났다고 모두가 홀가분한 기분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5반에서 십여 명 정도의 학생들은 학내 봉사 활동을 위해 움직여야 했다. 이례적으로 빠르게 진행된 학폭위는 학부모 간 합의가 있었음을 전제로 학생들에 대한 제재 수위를 정했는데, 결국 병억에게나 다른 아이들에게나 모두 학내 봉사 활동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병억에게는 40시간의 봉사 활동을, 다른 아이들에게는 10시간에서 15시간의 봉사 활동을 하도록 정해졌다. 다만 기말시험이 끝날 때까지는 유보되었다가 이제 각자 받은 시간대로 봉사 활동을 해야 했다. “다행인 줄 알아, 이것아.” 아이의 등짝을 세게 내려치는 어머니와, “쓸데없이 끼어들어서 이 고생을 하니, 글쎄.” 라며 아이의 쓸모없고 융통성 부족한 정의심을 비판하는 어머니들 속에서 아이들은 오늘도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야, 가자.” 아이들이 우르르 교실을 빠져나가는 와중에 병억만 축 처진 어깨로 가방을 싸고는 어깨에 둘러멨다. 그 날 이후, 병억은 말수가 급격히 줄었다. 누구도 말을 걸지 않았고, 병억도 등교 이후부터 하교할 때까지 누가 말을 걸지 않는 이상 입을 여는 일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사소한 이유로 시비를 거는 일도 없었다. “역시 자기도 당해봐야, 아! 내가 함부로 하면 안 되는구나, 느낀다니깐.” “참교육각이었다. 인정?” “인정!” 하지만 병억이 기가 죽은 듯 보이는 이유는 단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당한 기억 때문만은 아니었다. “윤병억 학생 맞지?” “네.” “우리가 왜 왔는지 알아?” “…….” “듣기로는 너도 그 당구장에 자주 왔었다고 들었다. 맞지?” “…….” “혹시 그…아는 게 있니?” “없어요.” “아무것도?” “네.” 장 형사는 수첩을 펼쳤다. “깨어난 학생들 말로는 운종이라는 녀석이 너희들한테 시킨 게 있다고 하던데?” 병욱은 다른 이야기보다, ‘깨어난 학생’이라는 단어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시킨 게 뭐지?” “…….” 병욱과 장 형사의 대치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너무 우스운 거 아닙니까?” “뭐가?” “애들 말입니다. 그걸 변명이라고 하고 있으니.” 병억은 시킨 대로 하지 않으면 운종이 자신을 때려죽였을 거라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했노라고 말했다.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이다. “말 같지도 않은데, 그걸 믿는다니까, 애들은.” “도대체 왜 그걸 믿는 거죠?” 장 형사는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진짜니까.” “네?” “도하인가 하는 녀석이 했던 말 기억 안 나? 살인이 별거냐고. 그 아이들은 진짜로 죽일 수도 있었던 거겠지.” “에이, 설마요.” “그러니 이런 사건도 벌어진 거 아니겠어?” 후배가 바라보더니 물었다. “그럼 범인이 또래 아이들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봐야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범행 도구가….” 확실히 현재 이 사건의 가장 큰 방해물은 증거물의 행방이었다. 운종을 죽인 범행 도구는 물론이고, 다른 아이들을 한순간에 기절시킨 방법 혹은 도구가 무엇인지 전혀 감이 잡히질 않는 것이다. 증거가 나오지 않다 보니 수사 방향 자체가 마구잡이식으로 뻗어 나가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 장 형사가 살해된 일진 학생의 모임에 참석한 학생들의 주변 관계를 살피고 있는 동안, 다른 팀은 운종의 가족 관계와 부모님의 주변 인물을 탐색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솔직히 그쪽도 의심스럽긴 하던데.” 운종의 가족은 잘사는 편이었다. 그냥 잘 사는 게 아니라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정도였다. 그런데도 운종은 아이들에게서 삥을 뜯거나 비싼 물건을 갈취하는 범죄행위를 지속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런 운종네 집의 부는 아버지가 사업으로 큰돈을 벌어들인 까닭인데, 그 사업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많은 적이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들을 건드리기야 하겠습니까?” “요즘 세상이 얼마나 험하고, 수상한데. 별의별 인간이 다 나오는 판국이잖아? 우리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수사하는 수밖에.” 하지만 장 형사는 느낌상, 이 사건은 미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졌다. **** 반 아이들이 학교에 남아 봉사 활동이라는 명목의 대청소를 하고 있을 때, 단유네는 피시방으로 향했다. 네 명이 자리를 잡고 앉아 게임을 켰고, 명수는 단유에게 게임을 가르쳐주었다. “너 왜 이렇게 답답하냐?” 명수가 가슴을 치며 단유를 타박했다. “미안.” 단유는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을 가리켜 보였다. “이게 마음대로 안 되네?” “조금만 움직여야지. 적이 여기서 여기로 이동하면, 너도 마우스로 이만큼만 움직여야 하잖아? 그치?” “응.” “그런데 여기서 여기까지 거리가 있으니까, 네가 먼저 쏴야 상대에게도 맞을 거 아냐? 그렇지?” “그런데 아무리 거리가 있다고 해도, 이 총의 표제 속도대로라면 초속 10㎧라는 건데, 그러면 이 정도 거리는 쏘자마자 맞아야 하는 거리야. 내가 먼저 쏘면 탄환이 먼저 지나가고 말걸?” “아, 몰라. 그런 건 현실에서나 그런거고, 여기는 봐봐. 총알 날아가는 거 보이지? 이 총알이 여기에 박히려면 네가 대략 0.2초에서 0.5초 정도 빠르게 마우스를 눌러야 한다고.” “0.2초와 0.5초를 구분한다고?” “아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명수가 가슴을 치며, 지태를 돌아보았다. “야, 나 답답해서 못 하겠다. 네가 해라.” “난 편하게 게임 하련다. 말 걸지 마라.” “그럼 단유는?” “깍두기. 어차피 상미 오면 바꿀 건데.” 마침 상미가 나타나 네 아이 뒤로 모습을 드러냈다. “벌써 시작했어?” “야, 너 단유랑 자리 바꿔라.” “왜?” “단유 너무 못해.” “야, 못 한다고 그러면 안 되지. 될 때까지 하자, 우리가 한 달 동안 계속 들은 이야기 아니니?” 시험공부 기간에 아이들이 지쳐 쓰러지고 무너질 때마다 단유가 ‘조금만 더 하자’, ‘될 때까지 해야 후회하지 않는다’, 고 응원(?)과 격려(?)를 쏟아붓던 사실을 상기시킨 상미의 말에 지태가 인상을 찌푸렸다. “야, 내가 그 이야기 들을 때마다 스팀에 연기 날 뻔했어.” “스팀이 연기라는 뜻이야.” 지태는 ‘아몰랑’ 하며 팔을 내저었다. “야, 대충 좀 들어. 아무튼, 단유 쟤는 진짜 공부 빼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니까. 아, 운동도 좀 하나? 아무튼, 보고 있으면 답답해서 미쳐.” 상미는 단유의 뒤에 서서 바라보았다. 단유가 방향키를 조정하여 총구의 방향을 적에게 놓는데, 절대 함부로 쏘지 않았다. 화면에 나타난 십자가가 적의 몸에 정확히 맞을 때까지 누르지 않는다. 그러나 끊임없이 움직이는 적의 움직임 때문에 단유는 사격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있다 보면 단유 자신이 맞추기 좋은 표적용 마네킹이 된다. 어느새 탄환이 날아와 ‘헤드샷’이라는 문구를 남기며 단유의 화면을 잿빛으로 물들였다. “단유야, 화살표가 적당히 맞다 싶으면 바로 눌러야지.” “정확히 몸에 맞아야 쏘지.” “쏘다 보면 맞아.” “그럼 탄환 낭비야.” “…나 참. 뭐 캐시로 총알 사서 쓰니? 어차피 게임하면서 나오는 총알 먹으면 되잖아?” “그런 게 아니라 무의미하게 빗나가는 총알이 없어야 한다는 소리야.” “그게 뭐가 중요해?” “게임이라 해도, 사람은 효율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어. 낭비는 결코 효율적인 행위가 아니야.” 상미는 각자의 모니터에 빠져 있는 아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얘 왜 이래?” “아까부터 그랬어.” “얘 누가 데려왔어? 너 집에 가서 책 읽어.” “안 돼.” 명수가 반대했다. “왜?” 상미의 물음에 명수가 단유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물주야.” 상미가 얼른 두 손을 앞으로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 물주님. 죄송합니다. 원하시는 대로 하시지요.” 단유가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빙글 돌렸다. 다리도 꼬았다. “뭐가 필요해?” “라면 한 사발이면 감지덕지하옵니다.” “먹어.” “저도 먹어도 됩니까?” 눈치 보던 지태가 고개를 쭉 뻗으며 물었다. “먹어. 채윤이 너도.” “감사합니다. 물주님.” 신나게 라면을 주문하는 친구들이었다. 게임보다, 이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기쁘고 재밌다. ‘그런데 게임은 영 내 체질이 아니야.’ 마우스를 움직이고 키보드를 눌러서 모션과 제스처를 제어하는 방식이 단유에겐 익숙하지 않았다. “상미도 왔으니까, 너희끼리 해.” “넌?” “난 이만 갈게.” “혼자?” “나 일 있다니까.” 명수가 그 말뜻을 알아채고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알았어.” 아직 다른 아이들은 단유가 번역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다만 자기들이 모르는 아르바이트를 비정기적으로 하는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을 뿐이지만, 단유나 명수는 굳이 그들의 호기심을 채워줄 생각이 없었다. “계산하고 갈게.” “땡큐!” “고마워 단유야!” 아이들의 인사를 받으며 피시방을 나선 단유는 집으로 향했다. 어차피 번역일은 며칠 전에 끝내서 메일로 보낸 상황이라 손댈 게 없었다. 다만 내일 회사로 찾아가기 전에 자신의 스케줄을 한 번 조정해서 일을 줄일 생각이었다. 6개월간 3권의 책을 완역했는데, 이는 번역 회사에서도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라고 했다. 첫 번째 책은 가게에 나왔으나 두 번째 책은 아직 감수도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세 번째 책까지 완역이 되어서 제출된 상황.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일이라면 계속 이 정도 페이스로 작업했을 때, 대기업 초임 연봉 이상도 벌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목적도 아닐뿐더러, 단유 스스로 자신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3학년 한 학기가 단유 본인에게는 이제껏 없던 혼란의 시간이었고 그 정점이 며칠 전의 사건. 남들 보기에 편안할지 몰라도, 드러나지 않는 단유의 속은 진도 9.0의 지진에 무너진 도시 같은 혼돈 그 자체였다. 그러나 상황은 단유가 생각한 것처럼 평탄하게 흐르지 않았다. “김단유군?” 집 앞에서 단유는 두 남자와 마주쳤다. ======================================= [513] 요령(6) 저녁이 가까워져 오는 시간이지만 여전히 날은 더웠다. 다만 자전거를 탄 데다 틈틈이 바람을 불러와 땀을 식힌 탓에 땀이 흐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단유를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은 이마가 번질번질 한 것이 여간 더운 게 아닌 모양이었다. “김 단유군?” “네. 누구시죠?” “아, 난 이런 사람인데….” 라며 건넨 명함에는 무슨 프로덕션의 연출부라는 직함이 찍혀 있었다. “어떻게 알고 오셨죠?” “그보다, 어디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까?” 오피스텔 로비 내의 그늘도 더위를 식혀주진 못했던 모양이었다. “근처에 커피숍 있나?” 단유는 오피스텔 맞은편 거리에 있는 커피숍을 안내해 주었다. 일부러 칠하지 않은 듯, 시멘트의 거칠한 면이 두드러진 천장과 은빛 호일로 감은 것 같은 알루미늄 환기 덕트관 아래로 검은색 LED 핀 조명에서 비춰진 주광색 빛이 가게 전체를 은은하게 감싸는 가게였다. “가게 분위기가 좋네.” “이런 인테리어 하는데 돈 좀 들었겠네요.” “저 조명은 색온도가 5400이 안 나오겠는데?” “일부러 조절한 건가? 색온도 저렇게 다운시키려면 커스텀이겠죠?” 전문가 포스를 풀풀 내면서 카페에 들어서는 두 사람은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 뒤를 따라온 단유가 맞은 편에 앉으니 ‘뭐 마실래’라고 묻는다. “용건부터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시간도 많이 늦었는데요.” 피시방에서 시간을 보내다 온 단유는 살짝 배도 고팠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눈빛으로 의견을 나눈 뒤, 말을 꺼냈다. “소개부터 다시 하자면, 난 실프 프로덕션의 연출부에서 일하는 강영식이고, 여기는 같은 연출부의 막내 조태영.” “네,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고, 실은 우리 스튜디오에서 웹드라마를 맡게 되었는데, 원래 배역을 맡은 배우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그만두게 되어서 대체할 사람이 시급한 상황이거든. 그런데 우리 대표님이 어디서 너에 대해서 들었나 봐. 우리 감독님한테 널 추천했다네? 또 지금 출연하는 배우 중에서도 한 명이 널 추천하니까 감독님이 궁금해하시더라고. 과연 어떤지 보고 싶다고 하셔서 말이야.” 단유로서는 전혀 감이 오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대답은 일찌감치 정해진 문제였다. “캐스팅 때문에 오셨다는 말씀이시네요.” “그렇지.” “그렇다면, 잘못 찾아오셨네요.” “왜?” “전 연예인도 아니고, 연기 뭐 이런 건 별로 하고 싶지 않아서요.” “연기에 관심이 없으면, 가수 지망생이나 전문 모델 쪽 그런 거야?” “아뇨, 아예 관심이 없어요.” “아예 없다고?”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두 사람에게 오히려 단유는 반대로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것인지를 물어야 했다. 사실 사건의 발단은 단유가 홍보 영상을 찍을 당시, 영상을 촬영했던 촬영감독의 칭찬이 건너건너 전해진 결과였다. 신선한 마스크에 연기도 곧잘 하는 원석이 있더라는 이야기가 마침 대표의 귀에 들어갔고, 배우 한 명이 그만두면서 새 배우를 찾아야 할 처지에 있던 대표가 혹시 하는 마음으로 연출부에 단유를 찾아가 보라고 이야기를 꺼낸 것이지만, 그런 사정을 대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았으니 그들은 그저 추천하더라, 는 것까지만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럼 우리 대표님은 왜 널…. 아니 그보다 걔는 얘가 잘할 거라고 입에 거품 물고 추천하지 않았나?” “그랬었지.” 두 사람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진데, 제작사 대표가 추천하고 배우 한 명이 덩달아 이름을 올린 이가 연예인도 아니고, 연습생도 아니며, 이쪽 계통으로는 꿈도 꾸지 않는 일반인이란 사실 때문이었다. 왜 그들은 일반인을 추천했을까? “너 혹시 정유진이라고 알아?” “누구요?” “정유진.” 단유는 고개를 갸웃했다. “걔는 널 잘 아는 것 같던데.” “그래요?” “뭐야? 전혀 몰라? 그럼 걔는 왜 얘를 추천한 거야?” “문자 넣어 볼까요?” 지금 그게 중요한가, 중요한 건 현재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냐는 문제였다. 촬영은 며칠 남지 않았다. 방학 기간 학생들을 타겟으로 하는 웹드라마였기에 최대한 빨리 촬영에 들어가야 한다. 본래라면 이미 들어가고도 남았을 일이지만, 조연급 배우의 공석 때문에 촬영이 지연된 참이었다. 주연도 아니고, 조연이라니. 감독은 지금도 나머지 연출팀과 제작팀을 모아놓고 촬영 스케줄 조정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을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캐스팅을 끝내지 않으면 안 된다. 제대로 빗지 않아 헝클어진 곱슬머리 혹은 일부러 저런 스타일의 펌을 한 것인지도 모를 막내가 핸드폰을 붙잡고 있을 때, 조연출이라는 짧은 체크 남방을 걸친 사내가 단유에게 물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미안한 이야기다만, 아예 생각이 없다는 거니?” “네.” “혹시 이전에 어디 출연한 적 있었어?” 단유는 체크 남방을 입고 얼굴에 곤란하다는 표정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는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예 경험이 없다면 모를까, 몇 번 저쪽 업계의 사람들과 일을 해보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을 전혀 이해 못 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추측건대, 대표는 감독에게, 그리고 감독은 다시 조연출에게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이런 애 있단다. 가서 만나보고 캐스팅해 봐.” “누군데요?” “나도 몰라. 대표님이 알아본 모양이니까, 가서 만나보고 이야기해봐. 결과 나오면 바로 연락하고.” 철저한 상명하복의 업계 질서는 군대를 방불케 한다. 예민한 예술가의 길을 걷는 감독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조연출은 ‘눈치껏’ 행동하고 ‘빠릿빠릿하게’ 명령을 수행한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일 처리를 하려는 모양새는 아마도 단유가 유명 소속사의 배우가 아니기 때문이리라. “뮤직비디오랑 광고 조금이요.” “그래? 그때도 개인으로 움직였어?” “소속사가 있었냐는 물음이시라면, 네. 없었어요.” 단유는 그저 돕기 위해 잠깐 카메오 형식으로 참여했을 뿐이라고 덧붙였지만, 조연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출연작이 적지 않은데, 연예인은 하기 싫다? 요즘 애들은 다들 연예인하고 싶어 하지 않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막내를 돌아보며 묻자, 막내도 동의한다는 고갯짓을 했다. “옛날에야 딴따라였지, 요즘은 못해서 안달인 직업 아닌가요? 솔직히….” 그쯤에서 단유의 얼굴을 흘깃 쳐다본 막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 정도 마스크면 연예인 하겠다고 해도 말릴 사람은 없겠죠.” 그간의 경험으로 보건대, 연예인, 그러니까 가수든 배우든 단지 마스크 하나만 믿고 나서기엔 너무 어려운 직업이라는 것을 단유는 배웠다. 얼굴만으로 배우가 된다 한들, 혹독한 작업 환경과 제작 현장에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되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이 일을 계속 하기 힘들 테다. 가수라고 다를까? 무대 위에서 조그만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로 거울을 보며 몇시간이고 연습을 하는 이들이 가수들이고 가수 지망 연습생들이었다. “편견 아닌가요?” 단유의 물음에 조연출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말해서 얼굴도 재능이야. 사람이 백 명이 있다고 하면 백 명의 취향이 모두 제각각이라고 하지? 천 명, 만 명 숫자가 늘어갈수록 그 취향은 더욱 갈라질 테고 말이야. 그 사람들의 취향을 모두 충족시킨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야. 하지만 개중 어떤 사람은 그 많은 사람들의 취향을 충족시키고 만족감을 선사한단 말이지. 연기로든, 노래로든. 그런 사람들이 바로 연예인이잖아?” 만약 대한민국 7천만 인구의 다수가 좋아하는 배우라면 국민배우가 되는 거고, 가수라면 국민가수가 되는 거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취향의 얼굴을 가졌다면, 그것 또한 노래나 연기 못지않은 재능인 거지. 재능을 넘어서 신의 선물, 정도? 물론 네가 그렇다는 건 아냐.” 마지막 말은 조연출 나름의 유머였을 것이다. 어쩌면 조연출이라는 저 남자는 가학적 유머를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 문자 왔네요.” 막내가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액정 속의 문자를 읽던 조연출이 단유를 바라보며 물었다. “리본 소녀의 도연이랑 같이 촬영했다는데? 정말이야?” 단유의 가장 최근 필모그래피였는데, 생각해보니 우습다. 연예인 활동은 하지 않겠다면서 필모그래피는 점점 늘어만 간다. 이러다 진짜 연예인 하는 건 아닐까 모르겠다. “그게 아까 말씀드렸던 광고영상이네요.” 단유는 간단하게 교육부 홍보물로 찍었던 사실을 알렸다. “그거만 보고 추천을 했다는 거야?” 조연출의 물음에 막내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연출부 막내가 무의식적으로 들고 있던 핸드폰을 들여다 보았지만, 그의 핸드폰이 아니었다. “제 거네요.” 단유가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낯선 번호와 낯선 이름. 그런데 아주 낯선 이름은 아니었다. 액정에는 방금 전에 들었던 ‘정유진’이란 이름이 찍혀 있었다. ‘뭐지?’ 단유는 양해를 구하고 통화를 시작했다. “여보세요?” ―야! 너 어떻게 나를 몰라? “네?” ―네는 무슨 네, 야? 정말 나 기억 안나? “예. 기억이 안 나네요.” ―나랑 같이 교육부 홍보대사 선출 인터뷰도 했었잖아? 그때 넌 폭탄 터뜨려서 면접장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기억 안 나? 안 날 리가. 그제야 ‘정유진’이란 이름을 가진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샐쭉하니 웃던 소녀. 그때 대학교를 나오기 직전, 대학교 입구에서 그 아이와 만나 연락처를 주고받았던 기억이 스파크처럼 번쩍, 하고 떠올랐다. “기억 나.” ―진짜? “응. 청모 중학교 2학년 정유진. 학생들의 꿈과 끼를 찾는 행복한 학교 만들기에 참여하게 되어 기쁘다고 했었지.” ―우와, 그런 말 두 번 다시 하지 마. 나 방금 등에 소름 돋았어. 내가 그런 말을 했었다고? “응.” ―너, 나한테 관심 많았나 보네? 내가 했던 말도 다 기억하고? 그러면서 왜 모른 척해? 나랑 밀당하는 거야? 그럼 진작에 연락을 하지 그랬어? 설마 내 연락처 지웠던 거야? “거기까지. 지금 다른 분들이랑 같이 있으니까 나중에 통화해.” ―야, 그 오빠들 진짜 너한테 간 거야? 우와, 신기하다. 솔직히 내가 말하긴 했어도 진짜로 너한테 갈 줄은 몰랐는데. 잘 됐다. 너도 해. 같이 하면 재밌을 거야. 나, 너 얼마전에 도연이랑 찍은 거 봤었거든? 너도 연기 꽤 하는 거 같더라? 아마 그 정도면 최소한 감독님들한테 욕은 안 먹겠더라. 같이 하자? 응? 생각해보니, 그때도 마이웨이 스타일로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죽죽 늘어놓던 스타일이었던 기억이 난다. 핸드폰 번호를 주고받을 때도 저돌적으로 나서던 모습이었다. “알았어. 나중에 통화하자. 끊어.” ―할 거지? 같이 하자, 응? 단유는 대답하지 않고 통화를 종료시켰다. 그리고 조연출을 바라보니, 조연출과 막내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희 둘 혹시 사귀니?” 어떻게 들으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아뇨. 예전에 한 번 만난 게 다입니다.” “그런거 치곤 되게 친해 보였던 것 같은데?” 어디가? 왠지 지금 이렇게 헤어지고 나면 이 두 사람, 다른 곳에 가서 전혀 근거 없는 가쉽을 만들어내서 퍼뜨리고 다닐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 알 바는 아니지.’ 아니 땐 굴뚝에 연기도 나고, 발 없는 말이 천 리, 만 리 달리기도 하더라.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아무튼, 이제 처음의 궁금했던 점들은 모두 해결됐다. 왜 왔는지, 어떻게 온 것인지 다 알게 되었으니, 향후에 걱정할 문제도 없겠다. 깔끔한 마무리만 필요한 상황. “결론만 말씀드리면 처음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전 전혀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죄송하지만 이만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잠시만. 우리 이야기도 조금 들어 보지 그래?”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조급해진 조연출이 다급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주인공인 남자 고등학생이 여자로 변하면서 겪는 에피소드를 웹드라마로 엮을 예정이라는데, 주인공의 친구 역을 맡을 남자 고등학생이 갑자기 소속사 사정으로 그만두게 되었다고 한다. “약간 아웃 사이더 같은 친군데, 독특한 세계관을 가진 친구라는 설정이야. 주변 일에 무관심하고 우주와 통신을 해서 외계인을 만나고 싶다는 등의 4차원 아이거든? 반 아이들이 모두 무시하는 가운데 주인공만 이해해주고 같이 어울려주기 때문에 주인공과 절친이라는 설정이야. 재밌을 거 같지 않아?” 재미를 떠나, 올림피아드도 거절한 마당인데, 지금 무엇이 내키겠는가. “죄송합니다.” 단유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좋은 대답 들려드리지 못해 안타깝네요.” “아니, 잠깐만. 거, 너무 하네.” 막내의 까칠한 반응이 단유를 붙잡았다. ======================================= [514] 나무치(1) “야, 그만해.” “뭘 그만합니까. 보자 보자 하니까 너무하잖아요? 아무리 요즘 애들이 싸가지가 없다고 해도 그렇지.” 단유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바라보는데, 연출부 막내의 불만스러운 표정은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엄연히 우리가 어른인데 말이야, 어른이 이야기를 하면 고분고분 듣는 척이라도 해야지. 안 그래요? 우리가 쟤를 어리다고 무시하길 했어요, 뭘 했어요? 나름 일 때문에 왔으니까, 그래서 같이 일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존중해줬잖아요. 그럼 자기도 존중을 해줘야지, 이건 뭐 지가 진짜 뭐 무슨 대스타라도 된 것처럼 말이야. 지 할 말 끝났다고 그냥 일어서는 건 뭐야? 안 그래요?” 단유는 자신이 정말 자기가 모르는 실수라도 했나 싶어 대화를 되짚어 보았다. 캐스팅 때문에 왔다길래 관심이 없다고 했더니, 예전에 어디 나온 적 있냐고 묻고, 재능 어쩌고 저쩌고 하다가 재차 단유가 하지 않겠다고 선을 긋고 일어나려 했더니 그제야 허겁지겁 배역 설명이며 급하게 캐스팅 오게 된 이유를 설명하다가 돌연 태도가 바뀌었다. 물론 단유 개인의 입장에서 본 상황이었고, 상대의 입장에서는 다르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유는 상대가 왜 불쾌감을 느끼는지 이유를 알기 어려웠다. “됐어, 야, 그만해. 아직 애잖아. 위아래 구분 못 할 때야.” 웃음을 흘리며 막내를 나무라는 조연출의 가학적인 유머 감각은 정도가 지나치다. 다만 ‘위아래’라는 조연출의 한 마디와 ‘어른’을 언급하던 막내의 이야기에서 ‘위계질서’를 침범당해 자존심 상한 모습이라는 걸 추측할 수 있었다. 단유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으니, 막내는 그 모습에 또 어떤 착각을 했는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 애들은 도대체 자기가 잘못을 하고도 반성을 못 해요. 사과 한 마디 하면 될 것을 말이죠.” “그만해라, 너도. 듣는 사람 민망하겠다. 말로 한다고 될 일이었으면, 요즘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겠냐?” “그렇잖아요.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말 한마디면 또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잖아요. 그러면 우리도 가서 뭐 좋게 이야기라도 할 수 있지, 이건 뭐.” 다른 건 몰라도, 저 두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단유가 깊이 고개 숙여 사과하는 모습을 보며 통쾌해하고 싶어 한다. 자신들을 어른으로서 존중하고, 단유 본인은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에 위치한 계층으로서 당연히 보여야 할 굽신거림을 눈앞에서 재현하길 원한다. 사람은 누구나 사회가 공정하길 바란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나이가 많든 적든, 돈이 많든 적든, 남자건 여자건 할 거 없이 모두가 원하는 바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타인과의 불평등한 차이가 발생하지 않길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 공정한 사회를 원한다. 그리고 자신의 입장에서 불공정한 사회와 현실은 불편하다. 지금 단유의 눈 앞에 있는 두 사람은 ‘자신의 입장에서’ 불공정한 현실과 맞닥뜨렸다. 감히(!) 어른을 존중할 줄 모르고 자기 혼자 잘난 줄 알고 멋대로 행동하는 아이는 그들의 기준과 사회에서 용납되기 어려운 사례였고, 그래서 ‘불편’함을 느낀다. 물론 ‘자신의 입장’이란 것이 무조건 이기주의적인 것만은 아닐 테다. 때로는 공리주의적인 시각으로 세상의 질서를 판단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그런 이들이라면 이타주의적인 기준으로 세상을 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앞에 있는 두 사람은 그런 기준은 아닌 듯하다. ‘이 놈의 사회가 어찌 되려고’, ‘요즘 애들은 너무 편하게 살아’, ‘오냐 오냐 해주니까 기가 살았어’ 같은 말들로 불공정함을 지적하는 그들은, 그들의 삶에서 공정하다고 교육받아왔던 가치관이 흔들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조금 무리하게 생각을 이어가자면, 어쩌면 이 두 사람, 나이가 들면 단유에게 보수적 가치를 부르짖던 전 교장 선생님처럼 될지도 모르겠다. 단유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두 사람이 무슨 짓을 하려고 저러나 보는 사이, 핸드폰의 녹음 기능을 켜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뭐 하는 짓이냐?” 조연출의 물음에 단유는 녹음 버튼을 누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지금부터 여기서 있을 대화 내용을 녹취하기 위함이에요. 혹시나 서로의 입장이 갈려 분쟁이 벌어지더라도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에 다른 곡해가 들어가지 않기를 바라거든요.” 단유는 액정 속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확인 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은 물론 두 분께서 하시는 말씀도 모두 녹취가 될 겁니다. 만약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꺼 드릴게요.” “하, 나 참, 어이가 없네.” 단유는 두 사람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두 분과 저 사이에는 불필요한 갈등 관계가 형성되었어요. 그리고 앞으로 있을 대화에서도 서로의 입장이 좁혀지기 힘들 가능성도 있어 보이기에, 전 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녹취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만약 제게 문제가 있는데 제가 모를 뿐이라면, 이 녹취는 두 분의 의견을 정당하게 입증하는 자료로 사용될 수 있어요. 동의하시나요?” “누가 이 따위에 동의를 한단 말이야!” 막내가 탁자 위에 올려둔 핸드폰을 집어 들어 던질 듯한 자세를 취할 때, 단유가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비록 녹음은 안 돼도, 녹화는 되고 있을 겁니다.” 검은 반구형 CCTV가 단유의 손가락 끝에서 묵묵히 지켜보는 것을 확인한 막내가 멈칫거렸다. “타인의 재물을 손괴하시려는 행위 역시도 문제 삼으려고 하면 얼마든지 문제 삼을 수 있어요.” 조연출이 팔꿈치로 막내를 툭툭 치자, 막내는 못마땅한 얼굴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여전히 녹음이 되고 있음을 확인한 단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상황을 정리해보죠. 두 분께서는 두 분이 일하시는 프로덕션의 일 때문에 절 찾아오셨고, 저에게 캐스팅을 제의하셨어요. 그런데 전 그쪽으로 관심도 없을뿐더러, 두 분에게는 말씀드리기 어려운 사정이 있는 관계로 고사했습니다. 하지만 두 분께서는 저에게 ‘싸가지가 없다’느니 ‘사과를 하지 않느니’하면서 몰아 세우셨어요.” “몰아 세우긴 누가 몰아 세웠다고 그래?” 막내가 눈을 치켜 뜨자, 단유가 핸드폰을 가리켰다. “차분하게 말씀하시는 게 차후에 도움이 될 겁니다. 진정하세요.” “이익!” 이를 가는 소리까지 녹음이 되면 어쩌려고. 조연출은 번들거리는 이마를 한번 짚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자 보자 하니까….” 단유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듣고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만,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이 얼마나 상대를 불쾌하게 만드는 것인지 아냐?” “불쾌하시다고요?” “속 다르고 겉 다른 사람의 이중성이 얼마나 사람을 열 받게 하는지 알아?” “제가 이중적이었던가요?” “지금 너의 말본새도 그래. 정중한 척 가식이나 떨면서 말이야.” “제가 지금 가식을 떨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래! 녹음하기 전까지만 해도, ‘됐어요’ ‘관심 없어요’ 이렇게 싸가지없게 말을 해놓고선, 갑자기 녹음기를 켜놓고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어요, 라고 연기하는 모습이 참으로 역겹다.”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억울하네요. 다만 앞서의 대화는 녹음이 되지 않았으니 다시 돌려볼 수도 없고, 제 억울함을 토로해봐야 무의미하네요. 다행히 지금은 녹음을 하고 있으니 지금부터라도 서로의 의견을 제대로 나눠보도록 하죠.” “너랑 무슨 말을 하자는 거냐!” “처음에 그러셨잖아요?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고 결정하라고. 사실 전 마음이 바뀔 리가 없으니 하지 않겠노라고 먼저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저에게도 그렇지만 두 분께도 시간은 소중한 것이잖아요?” 기도 안 찬다는 표정으로 실소를 터뜨린 막내의 눈초리가 부리부리했다. 조연출도 등을 등받이에 기대고 팔짱을 낀 채 단유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시간 낭비를 하지 않으려고 이야기도 듣지 않았다는 거냐?” “이야기를 듣지 않겠다는 태도 이전에요, 제가 연예인이나 배우 지망생 같은 게 아니란 건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보시다시피 전 학생이고 일반인이에요. 그냥 지나가는 학생을 붙잡고 대뜸 너 왜 내 말 안 듣고 그냥 가? 내 말 들어, 라고 우격다짐으로 붙잡는 것과 마찬가지란 생각 안 드시나요?” “와, 이 새…. 와, 나.” 말을 잇지 못하고 어이없다는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는 막내 곁에서 조연출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단유를 보고 있었다. 단단하게 엮은 팔짱에서 강한 의지가 보인다. 네 말 따위 절대 나한테 통하지 않아.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 지켜야 할 예의란 게 있어. 넌 그 예의를 지키지 않고 있잖아? 지금도 말이야. 너, 우리가 너보다 얼마나 더 나이를 먹었는지 알아? 너랑 우리가 몇 살 차인데 말이야….” 단유는 말을 자르는 대신 조용히 상대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조연출의 씹는 듯한 말투 때문에 중간중간 알아듣지 못할 내용도 있었지만, 요는 ‘넌 예의를 지키지 않았고, 싸가지가 없어’ 라는 내용의 반복이었다. ‘나이’와 ‘예의’를 엮으면 유교적 관습에 근거한 ‘질서’가 튀어나온다. 옛 것이니, 고리타분하니, 조선을 망하게 한 사고니 하면서도 그 뿌리가 너무도 깊숙이 내려서 누구도 유교적 사고방식, 메커니즘을 버리지 못한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나누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 이유는 ‘윗사람’이기 때문이고, 그가 위인 이유는 나이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이 질서 하에서 결코 용납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는데, ‘대화’였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지시’나 ‘명령’을 내리고, 아랫사람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 ‘대화’란 있을 수 없었다. 단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사랑’과 ‘호의’에 대한 감정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 했던 지난날의 그것과는 다르게, 지금 단유는, 계속해서 치밀어오르는 ‘손쉬운’ 문제 해결책을 선택하지 않으려고 머리를 혹사시키는 중이었다. 하지만 가슴속 충동은 쉽게 이겨내기 어려웠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충동과 마법의 힘은 아마도 지난번, 그 충동에 따라 움직였던 ‘사건’의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단유의 손 끝에서 펼쳐지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사그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지금도 단유는 자신의 충동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논리적 정당성을 머릿속에서 꾸며내는 중이다. 만약 이성적으로 정당성을 입증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단유의 마법은 그 형태를 온전히 갖추고 구현될 것이다. 하지만, “후우.” 호흡으로 미쳐 날뛰는 충동을 잠재우며 단유는 머리를 비우려 애썼다. 이들은, 만약 이대로 헤어지더라도 자신이나 자신의 주변 사람에게 해를 끼칠 인물은 아니다. 사소한 문제로 감정적 다툼이 있을지언정, 그게 크게 확대될 일도 아니었고, 따라서 자신이 쉽게 힘을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충동을 느끼는 건, 그저 손쉬운 결과만을 바라는 자신의 이기심 때문이다. ‘그러면 안 돼.’ 점점 쉬운 방법만을 찾으며 힘을 쓰다간, 그 끝이 파멸에 이를 수 있음을 가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쨌든 하나는 인정하고 가야 한다. 이 자리에서 약자는 단유다. 앞의 두 사람은, 적어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강자이며, 자신은 보호받아야 할 약자인 동시에, 그냥 ‘약자’다. 보호고 뭐고 그냥 고개 숙여야 하는 약자. 물론 그들의 사회적 선입견에 기대어 보호받을 생각도 없고, 고개 숙일 생각도 없다. 대화? 가슴 답답해지는 대화는 계속해봐야 무슨 소용일까. 힘? 자신을 파괴할 생각이 아니라면 적어도 자신의 비밀스런 무기는 되도록 ‘비밀’에 묻혀있게 하자. ‘그래. 생각해보면 별거 아닌 일이야. 내 감정의 문제만 아니라면, 이렇게 앉아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감정 싸움을 벌일 일이 아니었어.’ 불쾌하다고? 싸가지가 없다고? 그게 뭐? 호흡을 가다듬으니 가슴이 진정되고 머리가 맑아진다. 저들이 그렇게 애써 지키려고 하는 자존심? 다 부질없다. 생각해보면 저들은 굳이 16살의 어린 중학생 앞에서 잘난 척을 하고 싶어 하는 게 다인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과 어울려 감정 싸움을 벌이는 것은, 스스로를 그 수준에 매이게 하는 것일 뿐, 아무런 득도 없는 일이다. ‘유치하게.’ 단유는 핸드폰의 녹음 버튼을 껐다. 그리고 바라보니 두 사람의 얼빠진 표정에 실소가 나올 뻔 했다. ======================================= [515] 나무치(2) 단유는 핸드폰을 들어 번호를 누르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거기가 실프 프로덕션인가요?” 단유의 목소리에 앞에 앉은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단유가 얌전히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웹드라마를 찍는 곳 맞죠? 아, 다름이 아니고 전 장계중학교에 다니는 김단유라고 하는데요, 여기 그쪽에서 오신 두 분이 절 캐스팅하겠다고 오셨는데, 답변은 직접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야, 전화 안 꺼!” 막내가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소리가 컸던지 통화하고 있던 상대도 그 목소리를 들은 모양이라 누구냐고 물었고, 단유는 침착하게 일러주었다. “네? 이 분 성함이 조태영, 이었던가요? 조금 흥분하신 모양이네요. 네, 별일 없습니다.” 조연출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고는 있으나 그 시선이 향한 대상은 단유가 아니라 핸드폰 너머의 누군가인 듯했다. “아무튼, 저에게 주신 관심은 감사드립니다만, 전 연예인도 아니고 연기에도 관심이 없기 때문에 주신 제안은 ‘정중히’ 거절하고자 합니다. 부디 좋은 배우 섭외하셔서 좋은 드라마 만드시길 응원하겠습니다.” 조연출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말하는 것만 보면, 어딜 보고 중학생이라고 할까? 아니, 그보다도 이런 짓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절대, 앞에 계신 두 분 때문에 거절하는 게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로 거절하는 것이니 오해 없으시길 바랄게요.” 단유는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앞에 앉은 두 사람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눈앞에 있는 저 사람들은 강자다. 하지만 지금, 이 테이블에 한정된 강자일 뿐. 그러니 저들은 또 다른 강자에게 넘기기로 한다. 모든 것을 다 제 손으로 처리하겠다는 것만큼 또 어리석은 생각이 있을까? 집에 돌아와 호빵의 그릇에 간식을 채워주고, 싱크대에 담겨 있는 오전에 두고 갔던 컵과 식기를 씻기 시작했다. 베란다에 걸린 빨래들을 걷어 곱게 개어 각자의 방에 옮겨 놓고, 거실에 흩어져 있는 호빵의 흔적들을 청소기로 깨끗이 치워버렸다. 커피숍에서 시간을 조금 보내긴 했어도, 명수가 집으로 돌아오기에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다. 하은도 학원에 가고 없는 마당이니 한동안은 집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단유였다. 그래서 다행이다. 차분하게 자신의 안으로 들어가 볼 시간을 벌었다. **** “다음에 또 보자!” “잘 가!” 지태와 채윤이 횡단보도에서 크게 손을 흔들며 뛰어가는 것을 배웅한 뒤, 상미와 명수는 다시 집으로 걷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넷이서 왁자지껄 떠들다가 두 사람만 남으니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말없이 걷고 있자니, 어색한 느낌이 들어 명수는 참을 수 없었다. 분위기라도 바꿔볼 겸, 명수는 아무 말이나 꺼냈다. “아까, 마지막 게임 아쉬웠다. 그치?” “뭐, 조금 아쉽긴 했지.” “집에서 쓰는 마우스였으면 금방 잡았을 건데.” “장비 탓하는 거 아니랬다.” “장비 탓이 아니라 진짜로 감도가 안 맞았어. DPI도 안 맞았고.” 그러자 상미가 목소리를 변조하여, 명수를 타박하는 흉내를 냈다. “언제까지 장비 탓만 할 셈인가. 프로는 지고 나서 군말을 하지 않는 법이야.” 명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다. “아쉬워서 잠도 못 잘 거 같애.” 상미도 아쉽긴 마찬가지였다. 랭킹을 올리려고 하는 게임은 아니지만, 이왕이면 방학 동안 높은 순위를 차지해보고픈 생각을 가진 상미였다. “그럼 한 게임 더 할래?” “그럴까?” “집에 가서 접속해.” ‘집’에 가서 ‘각자’ 접속해서 게임을 하자는 이야기에 명수가 살짝 실망했다. 스치고 지나갈 감정이라도 들킬까봐 얼른 고개를 돌리는 명수였다. “아, 응.” “대답이 시원찮다?” “응? 아, 아니. 지금 집에 가면, 아, 그… 단유가 컴퓨터 쓰고 있지 않을까 해서.” “단유도 게임해?” 상미가 ‘설마?’ 라고 묻자, 명수는 ‘그럴 리가’ 라고 대답했다. “게임은 안 하지. 그냥 가끔…컴퓨터로 작업할 게 있나 봐.” “그렇구나.” “…….” “…….” 그리고 다시 말이 끊어졌다. 낮 동안 달궈진 도로 위를 달리는 따뜻한 바람이 두 사람을 쓸고 지나갔다. 명수는 머리를 쓸어넘기며―물론 넘길 머리 따위 없는 짧은 스포츠 스타일이었지만―하소연하듯 혼잣말을 했다. “아, 배고프다.” “아까 라면 먹었잖아?” ‘돼지니’라고 묻는 눈동자에 명수가 발끈했다. “난 운동선수야. 먹고 먹어도 계속 배고픈 축구 선수라고.” “누가 들으면 되게 열심히 하는 줄 알겠다?” “나 열심히 하거든?” “열심히는 무슨. 너 요즘은 방과 후에 축구 연습 안 하잖아?” “시험기간이라서 그렇지.” “아냐, 작년에는 축구 연습을 더 많이, 더 오래 했었거든? 너 초심을 잃었어.” ‘초심’을 잃다니? ‘초심’하면 명수, 명수하면 ‘초심’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 선수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잊지 않고 지금까지 달려온 명수는 오로지 그 꿈을 위해 아직까지도 공부를 가까이하지 않고 있다. “만약에 내가 초심을 잃었다면,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라도 공부를 했겠지만, 난 내가 축구선수가 되고 말 거란 확실한 자신감과 신념이 있기 때문에 공부를 하지 않아.” “넌 꼭 이럴 때만 말을 잘하더라?” “이럴 때가 언젠데?” “뻔뻔하게 변명할 때.” “아니거든? 나 원래 말 잘하거든?” “맞거든요?” 운율을 붙여 놀리듯 명수를 향해 혀를 쭉 내밀던 상미는 코웃음을 치며 웃다가 고개를 돌렸다. “상미야!” “어? 아빠!” 상미가 조르르 달려가 아버지의 팔짱을 끼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너 왜 이제 와?” 그렇게 물으며 고개를 들었더니 명수와 시선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어, 명수구나.” “아빠, 오늘 우리 시험 다 끝난 기념으로 친구들이랑 놀다가 오는 길이에요.” “도대체 그 놈의 기념은 1년에 몇 번을 하는 거야? 1년 365일이 매일 기념일인건 아니지?” “그럼 더 좋지? 매일 매일이 신나는 하루가 되는 거잖아? 매일이 의미 있고 기분 좋은 하루가 된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기분 좋은걸? 아빠는 안 그래?” “듣고 보니 그러네?” 아버지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상미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다시 명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희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네!” 상미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매달렸다. “맛있는 거 사줄 거예요?” “마음이야 얼마든지 맛있는 걸 사주고 싶지. 그런데 그러면 아빠 집에 못 들어가. 알잖아? 엄마가 밖에서 사 먹는 걸 싫어하시는 거.” “그래도 오늘은 아빠가 힘 좀 써라, 응?” “다음에. 대신 고기나 사 가지고 갈까?” “응! 좋아요!” “명수야, 너도 같이 가서 먹자.” “아, 네. 고맙습니다.” “역시 명수는 빼질 않는구나.” 아버지의 우스갯소리에 명수가 히죽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이번엔 명수에게로 조르르 달려간 상미가 명수의 목 뒤로 팔을 걸더니 아버지를 쳐다보며 당당하게(?) 외쳤다. “아빠, 명수 놀리지 마!” “어쭈? 뭐냐? 너?” 아버지가 헛바람을 내뱉으며 바라보자 상미가 힘줘서 명수를 끌어당겼다. “내 친구 놀리는 건 못 참거든?” “너희 둘 사귀니?” “아빠는! 그런 거 아냐!” 빽 소리 지르며 명수를 끌고 마트를 향해 걷던 상미가 걸음을 멈췄다. 그 옆에 어깨를 움츠리고 상미와 상미 아버지의 눈치를 번갈아 보던 명수도 덩달아 멈추고 눈동자를 굴렸다. “단유도 부르면 고기 많이 사야 되는데 괜찮아?” “괜찮다. 우리 딸 공부도 시켜주는 착한 친군데 고기 많이 먹여줘야지.” “알았어.” 상미가 힘차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명수에게 속삭였다. “고기 많이 살 거니까, 오늘 많이 먹어. 알았지?” “응.” 대답하는 명수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지만, 스스로는 느끼지 못했다. **** 우주의 신비, 과학의 원리, 인간의 시원(始原). 열거된 그 무엇과도 비교하기 힘든 미스터리이자 실존이 증명된 ‘마법’은 단유의 가장 큰 무기이며, 동시에 지식의 결정체였다. 사실 지난 날들의 대부분은 바로 이 마법을 습득하기 위한 고군분투의 시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 단유는 마법을 어떤 ‘파괴력을 지닌’ 혹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통제 수단으로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보통은 그저 자신이 아는 지식이 옳은지 그른지, 옳다면 그 작동하는 기제, 메커니즘은 어떠한지를 알아볼 수 있는 도구로서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법을 ‘살인’의 도구로서 사용한 단유는 자신의 마법이 가진 힘을 보았다. ‘살인’에 대한 윤리적 찬반도 중요한 문제이겠으나, 그보다 먼저 단유가 문제 삼은 것은 마법의 실질적인 효용성에 관한 부분이었다. 너무나 손쉽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은 손을 들어 컵을 집어 물을 따라 마시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물이 있다면’ 말이다. 마법도 마찬가지다. 단지 의지를 가지기만 하면 얼마든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다만 그 전제가 조금 복잡하긴 해도, 구현 가능한 마법을 구현함에 있어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다. 그렇다 보니 단유는 마법이 마치 어울리지 않는 두 손에 쥐어진 대도(大刀)처럼 느껴졌다. 아니, 손쉬움이란 기준에서 보면 ‘대도’라기보단 ‘피스톨 권총’이다. 검지를 까딱거리는 것만으로 상대를 무력화시킬 수도 있고, 아예 죽일 수도 있다. 조그만 더 과장하면, 권총이 아니라, ‘핵무기’다. 핵분열과 핵융합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연구하는 학문에서, 천문학적 재산 가치와 윤리학적 생명 가치를 한순간에 앗아가는 무기가 만들어진 것처럼, 그저 살아남겠다는 소박한 희망과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여 알아가는 희열 속에서 시작된 마법이 이제 너무나 쉽게 사람을 죽이고, 괴롭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핵을 단지 핵무기로만 사용했다면, 인류의 발전은 아직도 5, 60년 전에 머물렀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더 후퇴했을지도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마법 역시 그 가치를 새로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명수에게서 걸려온 핸드폰은 기말 시험이 끝난 기념으로 상미네 아버지께서 고기를 사주겠다고 하셨다는 이야기였다. “너희끼리 먹지 그래?” ―우리끼리 먹으면 체하든지, 아프든지 둘 중 하나야. 빨리 건너와. “알았어.” 들어올 때와 같이, 거실을 한 번 둘러보고, 호빵의 그릇과 물병 상태를 점검하고, 싱크대와 탁자 주변을 깨끗한 행주로 말끔히 청소한 후 단유는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끊어졌던 생각을 이어붙여 보았다. 마법이란 힘을 쉽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곧 단유 본인이 어지간한 일은 모두 혼자 처리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단유가 워낙 책임감이 강한 아이라 뭐든지 혼자서 잘할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만약 단유에게 청바지를 만들어 입으라고 한들, 단유가 혼자 만들기나 하겠으며 만들 시도라고 할까? 이 사회는―교과서에 배운 대로 말하자면―분업화되고 세분화된 세상이다. 혼자서 모든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비효율적인 것이다. 비효율은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이다. 잠깐의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는 단유에게 ‘비효율’이란 본래 의미 이상의, 끔찍한 자기파괴행위였다. 그러니 비효율을 경계해야 한다. 일단 지금 당장은 그렇다. 하지만 또 어떤 생각과 기준에 흔들려 지금의 방침이 바뀔지는 알 수 없다. ‘어쩔 수 없지.’ 일전에도 그랬지만, 이 세상, 이 현실에 ‘100% 절대’란 없다. 기준은 늘 변하기 마련이다. 그때였다. 엘리베이터 도착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리고, “김단유군?” 상상하지도 못했던 인물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타났다. ======================================= [516] 나무치(3) “오랜만이네?” 장 형사는 아는 얼굴이라고 친한 척 손을 들어 단유에게 인사를 했다. 단유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어디 가는 길이니?” “친구 집에요.” “친구 집?” “저녁 먹으려고요.” “아, 그렇구나.” 장 형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옆에 선 후배를 돌아보았다. 돌아본들, 후배라고 무슨 생각이 있을까? 장 형사는 다시 단유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혹시 잠깐 시간 좀 낼 수 없을까? 잠깐이면 되는데?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이다.” 단유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대답했다. “시간은 많이 안 걸리나요?” 장 형사와 후배는 얼른 단유의 뒤를 따라 탔다. “어, 그래.” 1층 버튼을 누른 단유가 장형사를 돌아보았다. “그럼 로비에서 이야기하시죠.” 딱히 앉을 데도 없는 로비였지만, 바깥보단 시원하다. 로비에서 ‘잠깐이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불편하신가요?” “응? 아, 아니. 괜찮아. ‘잠깐만’ 이야기할 건데.” 후배는 장 형사가 왜 이렇게 좋은 사람 시늉을 하며 너그럽게 허허 웃기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작년에 네가 가르쳐 준 거 말이야. 미스디렉션. 그거 꽤 재미있었는데.” “아.” 단유도 곧 장 형사가 말하는 것을 떠올렸다. 사실 그때는 마법으로 장 형사를 속인 것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 역시 일종의 미스디렉션이이었다. “그때 어떻게 했던 건지, 이제 좀 가르쳐주면 안 될까?” “죄송하지만 좀 곤란하네요.” “난 솔직히 TV 보면서 마술사들이 전부 게스트랑 짜고 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얘한테 한 번 당해보니까, 이야! 마술 그거 제대로 하면 일반 사람들은 절대 눈치 못 채겠더라.” ‘내가 지금 미친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너도 당해보면 내 심정을 이해할 거야’라는 장 형사의 넉살에 후배는 건성으로 반응하며 단유를 보았다. 다른 애들은 물론이고, 좀 논다고 하던 애들도 형사를 만나면 긴장을 하기 마련인데, 눈앞의 아이는 너무 태연하게 행동한다. 오기 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저 모범생인 아이라고만 했었는데. 의심스럽다. 단유는 핸드폰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제 친구가 기다려서요.” 그러니까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라는 말임을 왜 모를까. “하하, 그래. 그러고 보니 우리도 저녁을 안 먹어서 그런지 배고프네. 우리도 후딱 끝내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네, 선배.” 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장 형사가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입꼬리를 끌어올린 장 형사가 물었다. “유우성 알지?” “네.” “어떻게 알지?” “작년 같은 반이었어요.” “올해는?” “다른 반인데요.” “만난 적 없어?” “같은 학교에요. 당연히 오며 가며 만나지 않았을까요?” “학교 밖에서 말이야.” “얼마 전에 만났어요.” 장 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여태 들고만 있던 수첩을 펼쳐 보였다. “지난 6일 이 동네 근처에서 인근 파출소로 신고가 들어간 정황이 있더라. 학생들이 소란을 피운다고 했었는데, 정작 경찰이 나왔을 때 알아보니 고등학생 한 명이 여중학생의 핸드폰을 뺏어서 달아나더라, 는 거였어.” “제 친구였어요.” “그래. 시원여중 3학년 유상미. 그리고 당시 그 아이를 도와준 게 네 친구인 인명수라는 학생이고.” “네.” “이후 응급실로 이송되어 간단한 치료를 받았고.” “네.” “그런데 말이야. 그때 넌 어디 있었지?” 단유는 장 형사의 눈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옆에 있었어요.” “현장에?” “네.”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줄래?” “저랑 명수가 학교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골목에서 누군가가 쫓고 쫓기는 장면이 목격됐어요. 명수가 말릴 새도 없이 자전거를 끌고 가서 달아나던 고등학생 형과 부딪혔고요. 전 그 뒤를 따라가려다 근처에서 그 장면을 구경하고 있던 우성이랑 만났죠.” “구경을 하고 있었다고?” “네. 그래서 왜 여기 있느냐, 뭐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도망을 가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했니? 쫓아갔니?” “아뇨. 제 친구가 쓰러져 있는데, 그게 더 걱정이 되더라고요.” 장 형사는 머리를 긁적였다. 후배가 슬쩍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사실일까요?” 사실 장 형사는 우성에게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전해 듣지 못했다. 우성이 아직도 혼수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주변 인물들을 탐색하던 도중 ‘김단유’란 이름이 나왔고, 마침 그날 운종의 패거리 애들이 낮에 사고를 쳐서 파출소에 신고가 들어갔었다는 내용까지 알게 된 탓에 단유를 찾아온 것이다. 뜻밖의 인물이 이 사건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오늘 하루 종일 바쁘게 뛰어다니면서 증거를 수집했다. 그러나 노력이 무색하게 단유와 그의 친구들에게서 결정적인 한 가지를 찾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바로 범행 동기였다. “걔들이 의도적으로 단유 너와 네 친구들을 노렸다는 걸 알고 있었니?” 단유는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장 형사과 후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미스디렉션은 사람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한곳으로 쏠리게 해서 중요한 부분, 마술사가 트릭을 섞거나 구사하는 부분에 시선이 가지 않도록 하는 기술이에요. 그런데 조금 다른 의미로 부주의맹(Inattentional blindness)이란 게 있어요.” “부주의맹?” “어떤 주제에 몰입한 나머지, 너무나 잘 보이는 물체도 보이지 않는 현상을 말해요. 예를 들면 전경(前景)에 집중하면 배경이 보이지 않고, 배경에 집중하면 전경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거죠.” “미스디렉션과 비슷한 거네?” “비슷하지만 달라요. 미스디렉션이 마술사의 의도적인 조작에 의한 현상이라면, 부주의맹은 그런 마술과 달리 심리학적으로 어떤 외부의 요인 없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이거든요.” “그래서, 그 말을 하는 건 또 내게 가르쳐 줄 게 있다는 거냐?” “부주의맹말고 한 가지 더. 변화맹(Change Blindness)이란 게 있어요.” 변화맹은 주변을 보는 방식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인데, 눈앞에서 어떤 시각적인 장면 변화가 일어나도 의식적으로 알아채지 못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는 선택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뇌 때문이에요.” “그걸 왜 지금 이야기하는 거지?” 후배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단유를 쏘아보았다. “형사님들의 수고는 알겠지만, 계속 주변만 살피시는 게 아닌가 해서요.” “그게 무슨….” 후배의 말을 장 형사가 손을 들어 막았다. “똑똑하다고 하더니, 정말 눈치가 보통이 아니네.” “똑똑한 것과 눈치는 다른 포인트지만, 칭찬으로 받아들일게요.” “혹시 더 해줄 말 있냐?” 단유는 장 형사를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 단유가 자리를 뜨자, 그 뒤를 지켜보던 후배가 선배에게 푸념을 했다. “아니 선배, 왜 그렇게 오냐오냐 해주십니까?” “오냐오냐는 무슨.” 장 형사는 수첩을 덮고는 그 수첩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가려움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 “쟤 눈치 깠어.” “뭘요?” “우리가 건성으로 조사하는 흉내 내고 있다는 거 말이야.” 장 형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건 수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증거 수집이다. 증거 없이 사건을 검찰에 송치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살인사건에서 증거도 용의자도 없이 송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따라서 경찰은 애초에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장 감식에서부터 명확한 물증 혹은 의심의 여지가 있는 증거를 수집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살인사건 혹은 다수의 학생들이 의식을 잃고 쓰러진 현장을 증빙할 증거품은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은 미스터리한 상황이다. 게다가 더욱 미스터리는 운종의 부모였다. “죽을 놈이 죽은 것을.” 여태 얼마나 많은 사고를 치며 살았는지 경찰이라 모르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식이 살해당했는데 부모가 잘 죽었다는 태도를 보이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때는 부모를 의심할 정도였고, 실제로 알리바이를 조사했다. 하지만 부모는 알리바이가 확실해서 혐의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니 경찰 측은 난감하고 답답한 마음이었다. “부모가 저러니 애가 비뚤어질 수밖에 없지.” “하여튼 요즘은 부모가 문제에요, 문제.” “죽은 애만 불쌍하지.” 운종의 부모가 매달리든 매달리지 않든 사건의 조사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사건 수사에 비협조적인 것은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학교는 그저 자교 학생의 죽음을 쉬쉬하려고만 들었고, 죽은 운종의 평소 행실은 그의 죽음이 당연한 결과였다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학생들, 학교, 그리고 부모가 모두 그의 죽음을 거의 방관하듯 하니, 수사는 더욱 난항에 빠졌다. “덮지 못해 가는 거지.” 그나마 장 형사는 제대로 보고 제대로 수사를 하고 싶었다. 모두가 그를 외면할 때, 자신만이라도 그의 억울…할지도 모를 죽음에 대해 안타까워 해주고 죽인 범인을 찾고 싶어 했다.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요.” “네?” “어떤 도구가 쓰였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무슨 원한을 가진 귀신이 와서 죽이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그 집에 귀신 붙었다고 소문났던데요?” 검시관의 우스갯소리는 장 형사의 의욕을 꺾을 뿐 아니라, 경찰의 수사 의지도 꺾었다. “대충 서류 작성해서 송치시켜.” 서두에 말한 바와 같이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증거 없이 검찰에 송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 만약 아무런 증거 없이 검찰에 송치하는 경우가 있다면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이었다. 수사권을 가진 경찰이 수사권을 포기하는 상황. 범인을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경우다. 만약 드라마나 영화였다면, 이런 상황에서 열혈 검사가 나타나 판을 뒤집어 엎거나 누구도 찾지 못한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겠지만, 현실은 서류에 붉은 사인펜 몇 줄 들어가고 담당 검사의 사인과 함께 서류보관함 속에 오래오래 묵고 썩어갈 것이다. 동시에 운종의 억울…할 사연도 함께 묻히게 될 테고. 사실 한 해 동안 얼마나 많은 살인사건이 일어나는지, 일반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대부분은 범인이 잡힌다. 하지만 범인을 잡지 못하거나 증거가 없어 미제로 끝나는 사건도 상당수 존재하는 현실이다. 게다가 불량학생의 죽음은 국민들의 관심과 동정을 받기 힘든 사건이다. “죽은 놈만 불쌍하지.” 장 형사는 쯧, 혀를 차며 말했다. “가자.” 약 한 달이 채 못 되는 시간 동안 매달렸던 이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끝난 겁니까?” “…모르지. 검찰에서 다시 조사할 수도 있고.” 물론 장 형사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이런 사건은 그냥 이대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장 형사 본인도 계속 매달릴 순 없다. 그가 수사해야 할 사건은 이것 말고도 많으니까. **** “왜 이렇게 늦었어?” “아, 일이 좀 있었어.” “무슨 일?” “그런 게 있어.” 주방에는 고기 굽는 냄새로 가득했다. 명수가 입맛을 다시며 젓가락을 흔들었다. “아줌마는 정말 고기를 잘 굽는 것 같아요.” “내 생각도 그래.” 옷을 갈아입고 나온 상미 아버지도 명수의 말에 동의했다. “만약 식당이었으면 대박이었을 거예요.” 고기의 맛은 단순히 고기 자체의 질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고기를 어떻게 굽느냐에 따라서도 맛은 크게 변한다. “이렇게 맛있는 돼지고기는 식당에서도 먹기 힘들다고요.” 상미의 어머니는 접시에 구운 고기를 담아 식탁에 올려놓았다. “먹기도 전부터 그렇게 부담을 주고 그러니?” “냄새만 맡아도 배가 부른 거 같아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먹기는 제일 많이 먹을 녀석이.” “엄마! 명수 많이 먹는다고 구박하는 거야?” “이 녀석이? 구박은 무슨 구박이야!” “명수야, 많이 먹어.” “응.” 이미 볼이 불룩하게 솟아오른 명수였다. “단유야, 너도 많이 먹어. 사실 수고는 우리 단유가 제일 많이 했는데.” “제가 뭘요.” “그럼. 쟤가 뭘 했어? 공부는 내가 했는데?” “아이구, 이 녀석아. 정말 네가 내 딸이라는게 이럴 때 부끄러워!”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수가 있어?” “됐고. 그냥 고기나 먹어. 꼭꼭 씹어 먹고.” 떠들썩한 식탁 위에서 단유는 조용히 젓가락으로 고기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부들부들한 육질의 잘 익은 돼지고기 맛이 고소하게 입 안을 채워야 할 테지만, 어쩐지 아무런 맛도 느끼지 못하겠다. “크, 맛있다.” 상미의 아버지가 소주를 입에 털어 넣으며 감탄을 하는 모습과 “명수야, 이것도 먹어.” 라며 답지 않게 친절을 베푸는 상미. “너도 많이 먹어.” 고기를 먹는 순간에는 쉽게 눈 돌리지 않는 명수가 상미를 챙겨주는 보기 힘든 장면도 단유의 눈엔 흐뭇함으로 다가왔다. “왜 그러니? 맛없어?” 상미의 어머니가 단유에게 물었다. “아뇨, 그냥…입맛이 없어서요.” 단유는 쓴웃음을 지으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뇨. 아무 일 없어요. 정말요.” 정말이다. 아무 일도…없다. ======================================= [517] 나무치(4) 며칠 후, 단유의 핸드폰으로 문자가 하나 왔다. 단유는 문자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래?” 옆자리에서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던 명수가 낌새가 이상했던지 물어왔다. “별거 아냐.” “그런데 왜 그렇게 인상을 써?” “누가 좀 이상한 걸 물어서.” “누구? 여자야?” “응.” “도대체 넌 어디서 여자를 만나고 다니길래, 그렇게 끊임없이 연락이 오냐? 나랑 매일 같이 지내는 것 같은데 몰래 바람 피냐?” 단유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명수를 바라보다 한 마디 던졌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이상한 거 아니고 진짜! 완전 신기해! 작년에 그, 일 있고 나서 만나는 사람 없잖아?” “작년에 자유학기제 홍보대사 공모제 때 만났던 애야.” “우와, 작년에 봤던 애랑 계속 연락하고 지냈어?” “그런 거 아니고. 며칠 전에 우연히 연락이 닿아서 그래.” “그래서? 만날 거야?” “모르겠어.” “왜? 만나면 만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굳이 만나서 할 이야기는 아닌 거 같은데, 그렇다고 그냥 무시할 이야기도 아니고.” 그 말에 단유가 받았다는 문자의 내용에 호기심이 생긴 명수는 그 내용을 물었다. “무슨 문자였는데?”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며 보여주었다. 차마 본인 입으로 읽기 곤란한 문자였다. ―너 리본 소녀 도연이랑 사귀니? 명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가 왜 쳐다보냐는 눈으로 명수를 바라보니, 명수가 혀를 찼다. “도대체 세상을 몇 번 구했길래….” “무슨 소리야?” “혹시 연예인만 좋아하는, 뭐 그런 거 아니지?” 단유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명수를 바라보다 손을 들어 올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더니 허겁지겁 몸을 빼는 명수. “그런 거 아니다.” “아닌데, 그런 문자가 왜 와? 진짜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냐?” “없어.” “만약에 진짜면, 우리 반 애들은 물론이고, 전국의 열혈 팬들이 널 가만두지 않을걸?” “그럴 일 없어.” “장담하지 마. 만약에 인터넷에 그거 비슷한 소문이라도 나면 넌 그냥 매장이야. 솔직히 예전의 댓글들? 그건 장난일 걸?” 현재 아이돌 가요 시장의 메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대세 그룹 리본소녀. 그 중에서도 희귀성을 담보로 인기몰이를 하는 그룹의 막내 도연과의 열애설은 도연 뿐만 아니라 단유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적지 않다 뿐일까? “그런데 진짜 아무것도 아닌 거 맞아?” “아냐. 네가 내 옆에 계속 있었으니까 알 거 아냐?” “노노. 그건 모르는 일이지. 난 여전히 네가 그런 여자들과 연락하고 지낸다는 게 너무 미스테리거든.” “연락하고 안 지냈거든?” “모르지. 나한테 말 안 하고 몰래 연락하고 다닐지.” 단유가 벌떡 일어서자, 명수는 빠르게 발을 놀려 교실 뒷문으로 달아났다. “이리 와. 애들 들어오는 거 방해하지 말고.” 마침 점심을 먹고 난 후 교실로 돌아오던 아이들은 갑자기 길을 막는 명수 때문에 걸음을 멈춘 상황이었다. “아, 미안.” 명수는 얼른 길을 비켜주고는 단유를 향해 한소리 했다. “너 요즘 너무 과격해진 거 같아. 무슨 말만 하면 손을 들어 올리고 말이야. 왜 그래?” “오버하지 말고, 얌전히 좀 있어. 목소리도 좀 낮추고.”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며 깐죽거리는 명수는 분명 심심해서 저러는 것일 테다. “그렇게 분위기 파악을 못 하니까, 상미가 너한테 말을 안 하는 거야.” “응? 무슨 말이야, 그게?” 단유는 마치 아무 말도 안 했다는 듯, 입술을 꾹 다물고 책상에 앉아 책을 펼쳤다. “야, 그게 무슨 말이야고? 왜 말을 하다 말어? 야, 김단유!” 단유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으니, 명수는 궁금해서 미치겠다는 얼굴이 되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 친구의 연애는 그 둘에게로 맡기기로 하고 단유는 문자에 대해 다시 고민했다. 문자의 내용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할 거리가 없다. 사실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그 내용이 사람들의 입을 타고 흘러가는 것은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도 어떻게 참아보자고 가정하자. 단유는 연예인도 아니고 도연 측에서야 회사 차원에서 적절한 대응을 할 테니 단유가 나설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마음이 불편한 것은 아무런 조짐 없이 그런 소문이 났다는 것과, 그 소문을 자신에게 전달한 사람이 정유진이라는 것이었다. 작년의 공모제 때 본 이후로 연락이 쭉 없다가 며칠 전 우연히 연락을 한 번 했을 따름이었다. 즉, 전혀 ‘친밀한 관계’가 아닌 이에게서 가쉽에 가까운 소문을 확인받는 문자를 받는다는 게 여간 이상한 게 아니었다. ‘가정하면, 진짜 소문이 났고 그 소문을 확인하려 했을 가능성이 하나. 다르게는 그런 소문이 난 적도 없지만, 일부러 소문이 있다고 거짓말로 연락했을 가능성이 하나.’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냐고 물으면, 당연히 없다고 해야 하지만 워낙에 이상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 세상이고 보니 그런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다. 학교를 마친 후, 단유는 먼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오랜만이다?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귀를 쨍쨍하게 울리니 살짝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야 했다. “물어볼 게 있어서.” ―이야, 오랜만에 전화해서는 안부도 안 묻고 바로 본론이니? “너도 아까 문자 보낼 때 그런 안부 없었잖아?” ―그건 문자니까 그런 거지. 말 나온 김에 내가 먼저 묻자. 너 진짜 도연이랑 사귀니? “그보다, 왜 그 누나한테 ‘도연이’라고 불러? 혹시 두 사람 친구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다들 그렇게 부르잖아. 너야말로 ‘누나’라고 부르는 게 되게 친해 보인다? “촬영하면서 그렇게 부르는 게 입에 붙어서 그래.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그런 소문은 도대체 어디서 난 거야?” ―너 되게 수상하다? 왜 대답은 안 하고 말을 돌려? 단유는 엄지로 이마 옆 관자놀이 부근을 꾹꾹 눌렀다. “말 돌리는 거 아니고, 안 사귄다. 그런 관계 전혀 아니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넌 그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던 거야?” ―그냥 며칠 전에 스튜디오에서 녹화 준비하는데 촬영 스태프들이 그러더라. “너희 촬영 스태프?” ―응. 지금 유진이 촬영하는 장소는 얼마 전 단유에게도 찾아왔었던 실프 프로덕션의 웹드라마 촬영현장이리라. ―아, 맞다. 그때 너한테 우리 조연출 갔었다면서? “응.” ―그 조연출이 나한테 와서 되게 뭐라고 하더라. “뭐라고?” ―너 되게 싸가지 없대. 인성도 문제가 있는 거 같더라고 하더라. 뒤에서 입방아 찧을 것은 예상한 바였다. 뒷담화를 통해 한 사람의 약점을 캐거나, 그 사람의 사소한 비밀이나 문제를 드러내어 공격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뒷담화에 참석한 이들과 공통된 주제로 대화를 나누면서 긴밀한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에 뒷담화를 즐긴다. 또한, 타인의 약점을 지적하며 자신들은 그렇지 않다는 심리적 자위를 즐기기도 한다. 집단주의에 매몰된 이들은 끊임없이 집단을 만들거나, 자신을 집단에 속하게 만들려는 시도를 한다. ―도대체 두 사람, 뭐 했길래 그 조연출 오빠가 와서 눈을 부리부리 뜨고 널 욕하니? “정신승리라도 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지.” ―뭐? “그런 게 있어.” 단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 부분은 넘기며 물었다. “아무튼 진짜 넌 그냥 듣기만 했다 이거지?” ―그럼 듣자마자 사실인지 궁금해서 너한테 문자 넣은 거야. “그럼 다른 누구한테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거지?” ―당연하지. 그런데…다른 사람한테 왜 말하지 말래? 수상한데? “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경우에 허위 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할 수 있어.” ―너 나 협박하는 거니? “내가 아니라, 도연 누나네 회사에서 말이야. 나야 그런 소문이 나든 말든 상관없지 않아?” ―왜 상관이 없어? 넌 도연이가, 아니 도연 언니가 헛소문에 시달려도 상관없다는 말이야? 가끔 이상한 논리로 이야기를 전개 시켜 나가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해줘야 할지 난감할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였다. “지금 내가 너에게 말한 건 근거 없는 이야기를 조심성 없이 퍼뜨리는 행위를 삼가라고 충고를 해준거야. 그런데 거기서 협박은 왜 나오고, 도연누나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왜 나와? 엉뚱한 이야기로 계속 말을 끌지 말고 할 말만 해.” ―어쩜, 전에도 느꼈지만 너 진짜 말빨 하나는 끝내준다야. “됐어, 그게 궁금해서 전화했던 거니까, 그만 끊어.” ―아, 잠깐만. “왜?” ―혹시 시간 되면, 한 번 만나지 않을래? “왜?” ―그냥 친구끼리 얼굴 한번 보자고. “친구?” ―우리 친구잖아? “아닌데.” ―…너 되게 냉정하다? “정확한 사실관계만 놓고 보면, 난 너랑 한 번, 우연히 만났을 뿐이야. 어떤 이야기도 제대로 나눈 적 없이 이런 식의 대화를 한다는 것도 사실 신기하긴 하지만, 아무튼 우리가 ‘친구’라고 하기는 어렵지 않아?” ―…확실히 도연, 언니랑 안 사귀는 게 맞구나. 너같이 여자 마음도 모르는 남자랑 사귈 여자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을 거야. 단유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끊을게.” 단유는 그렇게 해프닝이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유진에게서도 문자나 전화는 오지 않았고, 아예 그쪽으로 귀를 닫고 살았으니 단유는 방학이 될 때까지 편안한 마음으로 공부에 집중했다. 그러나 방학식 전날, 핸드폰으로 뜬금없는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린 여자 아이의 목소리에 단유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밤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누구세요?” ―아, 내 목소리 못 알아듣네. 자조 섞인 느릿느릿한 목소리가 단유의 기억을 자극했다. 하지만 선뜻 이름을 말할 수 없었다. ―잘 지내니? “네.” 단답형 대답에 한동안 핸드폰 너머에서는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궁금한 거 없어? “네.” ―나한테 할 말 없어? 왜 전화했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네.” 물어볼 말도 없고, 물어서도 안 될 거 같았다. 괜히 통화가 길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저기, 나 말이야, 좀 도와줄 수 있을까? 단유는 핸드폰 너머에서 수화기를 붙들고 있을 사람의 표정을 생각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몇 번 만나지는 않은 사이라도, 함께 연기 수업을 하면서 표정을 자주 마주쳤더니 저절로 그녀의 표정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과 부탁은 별개다. “뭘 도와드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누나네 회사에서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공중전화로 전화하는 거요.” ―……. “전화번호는…도경이 누나가 알려줬나 봐요.” 예전에도 도연은 핸드폰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래서 단유와 핸드폰 번호를 교환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연락할 수 있었던 이유라면 역시 도경이 도와준 덕분일 테다. ―많이 불편하니? 불편하다. 그쪽과는 아예 담을 쌓고 살고 싶은 심정이다. 가장 큰 이유는 단유의 생활리듬을 파괴하는 일정 때문이다. 새벽에는 운동을 하고 저녁 식사 후에는 자기만의 공부에 전념하는 게 단유만의 생활리듬이었는데, 그쪽은 밤낮 가리지 않고, 시간 되는 대로 촬영 스케줄을 진행했다. 그러니 단유의 생활 패턴이 완전히 꼬일 수밖에 없었고, 운동이든 공부든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두 번째는 감정적 소모가 심한 직업이란 점이었다. 애초에 감정을 크게 사용하지 않는, 무덤덤한 생활을 지속해온 단유에게 수많은 사람들과 엮이며 작업을 해야 하는 환경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간 겪었던 여러 갈등들도 결국, 감정적 소모가 심한 환경이란 사실 때문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누가 먼저 인내의 바닥을 보이는가’를 눈치게임 하듯 살피게 되는 현장이었다. ―미안해. 그런데, 나도 어쩔 수가 없어서 그래. 단유는 깊고 뜨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신데요.” ======================================= [518] 나무치(5) 도연이 단유에게 전활 하겠다고 마음을 먹기까지 꽤 오랜 시간 동안 고민을 해야 했다. 지난 교육부 홍보 영상 이후, 도연은 다시 본업인 아이돌 ‘리본 소녀’로 돌아갔다. 학교의 중간고사도 끝났으니 다시 기말 고사가 있기까지는 시간의 여유가 있었고, 5월과 6월은 대학교 행사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어, 리본 소녀의 스케줄은 바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도연도 한동안 연기 때문에 힘들어했었던 기억도 잊고 열심히 무대 활동을 이어나가야 했다. 그런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공중파 방송의 야외 공연 프로그램 때문에 지방에 온 리본소녀가 방송 전 카메라 리허설을 마친 후였다. “도연아, 너 요즘 무슨 문제 있니?” 모니터링을 하던 리본 소녀의 리더가 도연에게 물었다. 대기실 소파에 반쯤 엎드린 채로 쉬고 있던 도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요? 아무 문제 없어요.” “그런데 너 표정이 너무 굳었어. 아픈 사람처럼.” 리더가 보고 있던 핸드폰을 도연에게 넘기며 말했다. 영상을 다시 재생시키며 자신들의 리허설 장면을 함께 보다가 도연의 얼굴이 나오는 장면에서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이것 봐. 너 전혀 웃지를 않잖아.” 말 그대로 웃지 않는 도연이었다. “혹시 어디 아프면 지금 말해. 무대에서 쓰러지면 방송사고야.” 마침 밖에서 방송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들어온 매니저도 리더의 이야기를 듣고 동의를 표했다. “너 요즘 확실히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나오고 있어.” “제가요?” 팬사이트 등에서 도연의 건강 이상설이 간간이 나오는 와중이었다. “식사도 잘하고 평소에는 괜찮으니까 문제가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무대 위에서만 그러니까 걱정이 되지.” “저 아무 문제 없는데요.” 매니저도 그렇게 생각을 했었다, 지금까지는. 하지만 오늘 리더가 모니터링을 하면서 지적할 정도로 도연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점에서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춤도 열심히 추고, 자기 파트에서는 노래도 곧잘 부르지만, 굳어버린 표정 때문에 웃어도 억지로 웃는 것 같이 느껴진다. “일반 행사라면 모를까, 오늘은 카메라를 받아야 하는데 표정이 그렇게 굳어 있으면 분명 사람들이 의심하던지 염려를 할 꺼야.” 비록 대세라 해도 1년 차라 더 자주 얼굴을 알리기 위해 많은 활동을 하는 중인 리본 소녀다. 때문에 팬 사이트에서는 아이들을 쉼없이 굴린다고 소속사를 향해 비판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도연이 전국으로 방송되는 행사에서 저런 표정을 짓는다면? 후폭풍이 여간 심하지 않으리라. “혹시 그날이니?” “아닌 거 아시잖아요.” 아이돌의 건강 관리는 소속사의 가장 큰 의무 중 하나였다. 당연히 아이들의 생리 주기도 매니저가 챙겨야 했다. 그러니 아닌 줄 알면서도 묻게 되는 일이다. “그럼 혹시 뭐 잘못 먹어서 체했거나, 그런 거 아니지?” “아픈 데 없어요. 정말이에요.” “그럼 왜 그랬는데?” “저도 몰라요. 제가 저런 표정이었는지도 몰랐는걸요.” “정말이야?”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는다는 건 좀 더 심각하게 여겨야 할 문제였다. 왜냐하면, 스스로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무대 위, 카메라 앞에서 통제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건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안고 방송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걱정하지 마세요. 본 무대 때는 웃으면서 잘할게요.” “잘할 수 있겠니?” “그럼요.” 도연은 미소를 지어 매니저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날 저녁, 팬 사이트에서는 ‘도연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가?’, ‘리본 소녀 불화설’, ‘매니저에게 꾸중 듣는 도연’ 등의 글들이 올라왔고, 소속사 홈페이지의 게시판과 SNS의 댓글은 수많은 팬들의 글들로 도배가 되었다. **** “전혀 몰랐어?” ―몰랐는데요. 도연은 단유가 자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에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이미 단유가 TV를 잘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연예인에게도 관심이 별로 없다는 것을 지난 촬영 기간에 들은 바가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함께 고생하며 촬영을 했는데 조금도 궁금하지 않을까?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게 아니란 건 말투에서 이미 잘 느껴진다. “그래서 얼마 전에 건강 검진도 새로 받기도 했거든. …요점만 말하면, 나한테 심리적인 문제가 있대.” ―……. 반응이 영 심심하다. 하지만 급해서 전화를 건 쪽은 자신이었으니, 도연은 계속 말을 이었다. “대인 의존증이요?” 매니저가 되묻자, 하얀 가운을 입은 여의사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대인 의존증이 그저 혼자서 어떤 결정도 주체적으로 내리지 못하고 타인에게 의지하려고만 하는 사람을 가리켰어요. 하지만 이 부분은 의존성 인격 장애(Dependent Personality Disorder)와 엄격히 구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의존성 인격 장애는 병입니다. 남에게 의존하려는 욕구가 아주 강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것을 병적으로 꺼립니다. 자신감이 없고, 혼자 있을 때 불안과 초조를 강하게 느껴서 스트레스를 유발합니다. 의존적 관계를 맺고 지내면서도 언제 이 관계가 깨어질지 몰라 두려워하죠. 그래서 종종 불안 증세와 신경질적인 어투가 나옵니다.” “저희 도연이는 그렇진 않은데요. 그렇지…않은 거 맞죠?” “네. 도연 씨는 그 정도까지 심각하진 않죠. 하지만, 대인 의존증이라 볼 만큼 불안감을 많이 드러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매니저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혹시 저희가 이것저것 챙겨주는 것 때문에 그런 건가요? 그러니까, 직업 때문에 그런 증세가 생긴 건가요?” 여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영향이 전혀 없다고는 못하겠네요. 아직 가치관이 정립되지 못한 어린 시기의 아이들이 연예계에 발을 들이면서, 그런 의존증을 보이는 경우가 다수 있거든요. 예전에 어떤 사람은 혼자 은행에도 못 갔다잖아요. 창구에 앉은 은행원이 물어보는 게 두려워서 못 갔다던가?” 그런 건 매니저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 왜…아니 그럼 고칠 순 있는 건가요?” 여의사는 들고 있던 펜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신중히 말을 고르는 모습을 보였다. “도연 씨? 처음 데뷔했을 때는 어땠는지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도연은 의사의 질문에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사실 처음에는 별로 감흥이 없었던 것 같아요. 데뷔무대요. 오랫동안 꿈꾸던 데뷔여서, 연습을 많이 했어요. 밤새도록 연습하고 하루에 두 시간도 못 자는 날들이 무려 한 달이 넘었죠. 그래도 힘들다는 생각보다 무섭다는 생각이 많았어요. 데뷔무대에서 실수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 그리고 만약 사람들에게 외면받는다면, 그래서 만약 가수를 계속할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거든요.” 도연은 손가락을 꼬면서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다 문득 공들여 받았던 네일 아트가 많이 망가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큐티클도 지저분한 게 조금 정리가 필요해 보였다. “그런 생각과 고민이 많았던 데뷔무대였어요. 그런데 막상 데뷔무대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상한 무대였어요. 실수도 없었고, 연습한 대로 다 잘 됐던 무대였거든요. 리더 언니는 물론이고 매니저 오빠도 끝나고 나서 칭찬을 해줬어요. 잘했다고. 하지만 혼자서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잘했나? 한 달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군살 생길까 봐 먹는 것도 조심하며 지냈던 게 바로 이 무대를 위해서였는데, 그런 노력에 비례한 결과였을까? 솔직히 조금 의심도 들었어요.” 여의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도연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다는 자세를 보였다. “그런데, 아세요? 저희 첫 노래가 나오고 3주 뒤에 음악 프로에서 1위를 했어요. 그제야 마음이 놓였죠. 우리가 잘했구나. 사람들이 우리를 좋아하는구나, 라고요.” “그렇군요. 그럼 지금은 어떤가요?” “지금은, 솔직히 말씀드리면, 좋아요. 무대에 오를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응원해주는 함성을 들으면 힘이 나죠. 기분도 좋고요.” “기쁜가요?” “그럼요.” “그럼 다른 걸 물어보죠. 요즘 힘든 점은 없나요?” 도연은 너무 당연한 걸 물어본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사실 저희가 활동을 많이 하고 있다 보니, 잘 시간도 모자라고 먹는 것도 계속 관리해야 하는 데다, 음원 차트에서 우리 노래의 순위가 계속 변동되다 보니 그런 걸 신경 쓰는 게 전부 힘들죠. 하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의사는 작성하던 서류에 뭔가를 적어넣은 뒤 도연과 시선을 마주하며 물었다. “하지만 도연씨는 최근 무대에서 웃질 못하고 있다고 하죠.” “네. 그게 이상해요. 사실 아픈 것도 아니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도 않았는데 왜 그런 걸까요?” “제가 보기에는 지금 도연씨가 자기도 모르게 받고 있는 스트레스를 표출한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스트레스요?” “먼저 지금 그 증상이 언제부터 나왔는지를 알아봐야겠죠? 매니저분의 이야기로는 한 달 전에는 그런 모습이 없었다고 하던데요.” “한 달 전에는 제가 촬영을 하는 게 있어서 무대에 오를 일이 없었어요. 중간고사도 있었고요.” “학교 생활이랑 연예계 활동을 병행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럴 지도요.” “또 들어 보니 한 달 전, 영상 촬영 당시에 많이 힘들었다고 하던데요?” “그때는, 네. 그랬어요. 하지만 금방 좋아졌어요.” “그때 이야기를 해보실래요?” 도연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처음 하는 연기에 대한 부담감과 부족한 실력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에 힘들어했던 기억. 하지만 연기 수업을 받으며 자신감을 얻고 이후에는 별 탈 없이 촬영을 마쳤다는 이야기에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같이 촬영했던 아이가 있었는데, 그 친구 덕에 연기를 잘할 수 있었어요. 상대의 감정을 잘 받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연기가 자연스러워진다고 연기를 가르쳐주시던 선생님이 말씀해 주셨거든요.” “저도 봤어요. 연기가 나쁘진 않던데요?” 도연은 쑥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솔직히 말해서, 그건 편집의 힘이에요. 자신감을 얻긴 했지만, 제가 봐도 제 연기는 아주 어설펐어요.” “자신에 대한 평가가 너무 박하네요.” “사실인데요, 뭘.” “도연씨의 대인 의존증은 사실 연예계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던 거로 보여요.” 의사의 말에 매니저가 의아해했다. “들어오기 전이요?” “자기 결정권이 부족한 증상을 보이는 장애(Disorder)라기보다는 대인 의존증이라고 결론을 내린 이유에요. 도연 씨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많이 부족해요. 그래서 더 자신을 몰아세우는 경향이 있어요. 학교와 연예계 활동을 동시에 하는 것도 실은 스스로가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보다 실패에 대한 불안과 자신에 대한 불신을 가리기 위한 결정이었죠. 그리고 그 결정도 스스로 내리기보다는 부모님의 권유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이뤄졌고요. 활동 이후에도 회사에서 정한 스케줄에 군말 없이 따랐다고 하죠?” 매니저는 도연의 그런 자세가 다른 연예인들이 모범으로 삼아 마땅할 성실함의 표본이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지난 연기 연습 때, 카메라 공포증이라고 했나요? 회사에서는 그렇게 생각했었다고 하셨죠? 물론 카메라 공포증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본질은 대인 의존증에 의한 불안감이 표출된 것으로 봐야 할 것 같아요. 데뷔 초기에는 멤버들에 대한 신뢰와 본인에 대한 신뢰가 낮은 상태여서 당시 무대에서는 만족감이 낮은 점수를 기록하고 있어요. 반면, 점점 무대를 하면서 멤버들에 대한 신뢰가 올라가고 팬들의 함성과 같은 평가지수에 신뢰를 부여하면서 만족감이 상승하네요.” 여의사는 서류를 뒤적이며 말을 이었다. “첫 연기를 시작했을 때, 그녀의 신뢰 수치는 다시 낮은 점수로 내려와요. 첫 연기라는 불안감도 있겠지만, 그 현장에서 자신이 신뢰할 만한 주변인이 없었던 모양이에요. 그러니 스스로가 ‘엉망이었다’고 평가할 만큼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겠죠.” 매니저는 당시, 촬영을 마치고 낯빛이 어두워진 채로 차에 올라 교과서를 꺼내 들던 도연을 떠올렸다. “그런데, 그때 그녀에게 도움을 준 친구가 있었네요.” 매니저도 금방 이해했다. “남자 친구 역을 했었던 아이 말이군요.” “네. 영상을 보니, 바로 이해가 되던데요? 사실 매니저님이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셨다면, 저라도 오해했을 거예요. 두 사람, 사귀는 거 아니냐고. 처음 촬영본에서 보여주던 얼굴이랑 마지막 촬영에서의 도연씨의 얼굴은 확연히 다르니까요.” ======================================= [519] 나무치(6) “이유는 대충 알겠습니다. 그래서, 고칠 수 있는 건가요?” 사실 이유야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것은 그래서 상황이 나아질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이 순간에도 매니저의 머릿속에는 여러 상황에 맞춘 보도자료 머리말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의사는 책상 위에 펜머리를 콕, 찍으며 말을 이었다. “도연씨에게 지금 필요한 건, 적응입니다.” “네?” 무슨 약이라든가, 아니면 심리 상담이라든가 그런 게 필요한 건 아니고 그냥 적응? 매니저의 머릿속에 ‘시간이 약이다’라는 문구가 고속도로 표지판처럼 홱 스치고 지나갔다. “쉽게 이야기를 드리자면, 대인 의존증은 결국 적응의 문제입니다. 도연씨는 이제 겨우 17살이에요. 데뷔했을 때는 16살. 데뷔 당시에는 부모님의 반대도 심했다지요? 이런 상황에서 가치관이 채 정립되지 않은, 말 그대로 ‘미성숙’한 자아를 가진 도연 씨는 정체성의 성장에 방해를 받았을 거라고 봐요.” “잘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한 사람의 정체성은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성장을 합니다. 다양한 갈등 상황을 겪고, 거기에서 자신만의 가치관을 정립해 나가며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는 거죠. 때로는 사랑하고, 때로는 다투고, 뭐 그런 감정과 경험들이 인간의 정체성에 영향을 준다는 건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아시겠죠? 그런데 그런 관계 맺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어떻게 될까요?” 의사는 쓰고 있던 종이를 뒤집어 하얀 여백에 그림을 그렸다. “자라면서 맺는 가장 최초의 인간관계는 바로 가족이에요. 이 가족이란 연결고리는 사실 거의 인생의 끝까지 이어지죠. 그런데 이 가족 안에서만 사람이 살 수 있나요? 언젠가는 이렇게 고리 밖으로 나가야 하죠. 그리고 이 고리 밖의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겪으면서 사람은 비로소 ‘사회성’이라는 것을 가지게 됩니다. ‘사회성’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요소지요.” 종이 위에 동그라미를 여러 번 겹쳐 그리며 ‘아시죠?’ 라고 묻는 여의사의 말에 매니저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사람이 다 그렇듯이, 때가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새로운 인간 관계를 형성하고, 새로운 가족을 만든다. 산속에 움막 짓고 평생을 살지 않는 한, 사람은 끊임없이 관계 맺기를 해야 하고 거기에 ‘적응’을 해야 한다. “한 사람에게, 혹은 특정인에게 의존하는 형태는 미숙한 자아의 문제라는 거죠. 자아정체성은 청소년기 동안에 획득해야 하는 일종의 포괄적인 성취로, 성인기가 되기 전의 경험으로부터 유래하며 성인기의 과제를 해낼 수 있다, 고 <에릭슨>이라는 심리학자가 말한 것처럼, 보통 이런 정체성은 사춘기 시절에 정립되기 마련이거든요.” “잠시만요, 갑자기 무슨 심리학 강의를 듣는 기분이라 좀 그렇네요. 그래서 말씀하시는 건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이건가요? 어떤 조치도 무소용이라는 건가요?” 여의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실 제일 좋은 방법은 적당한 휴식을 두고 주변의 스트레스로부터 떨어지는 일이죠. 그리고 그동안 편안한 상태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과 상황에 적응을 하는 거죠. 혼자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상황에 말이죠.” “제일 좋은 방법, 이라는 말은 다른 방법도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여의사는 또 한 번 펜머리로 책상을 콕, 하고 찍었다. **** 단유는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틈에 거실에서 명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른쪽, 옥상에 한 명, 아니 두 명!” 그리고 잠시 후, “담벼락으로 돌아간다, 체크!” 거실로 나가보니, 명수가 컴퓨터 앞에 앉아 헤드셋을 끼고 열심히 마우스와 키보드를 조종해서 캐릭터를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얼마 전부터 상미와 함께 하던 그 게임이었다. “안 자?” 하지만 명수는 단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계속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일 방학을 하고 나면 매일 저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뒤에서 쳐다보니, 명수가 조종하는 캐릭터가 허리를 숙이고 달려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곧 자리를 잡더니 수류탄을 꺼내 들었다. 수류탄의 지연시간을 기다려 쥐고 있다가 목표로 한 곳을 향해 ‘힘껏’ 던졌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 중앙에 메시지가 뜬다. “잡았어!” 명수가 신이 난 듯 격앙된 목소리로 리포팅을 하고 다시 돌격한다. 손가락의 경쾌한 움직임에 캐릭터가 전장을 활보하고, 거침없이 총을 쏘고, 적들이 바닥에 드러눕는다. 경쾌하고, 가볍고, 쾌활하다. ‘게임이니까.’ 어떤 사람들은 저렇게 게임에 몰입한 아이들을 보며 혀를 찰 것이다. 시간 낭비라고, 학생이 공부는 하지 않고 놀기만 한다고 비난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명수는 건강하다. 건강한 모습과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건전하게 ‘게임’을 즐기는 것이지,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사실 단유처럼 살아가는 것, 겉보기엔 모범생과도 같은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좋을지 몰라도, 단유가 겪었던 일들을 겪는다면 그렇게 쉽게 이야기하진 못할 것이다. 단유는, 차라리 보통의 아이들처럼 사는 모습이 부러웠다. 부모가 있고, 부모가 잔소리하고, 그 잔소리에 짜증도 내면서 사소한 갈등에 혼자 고민하고 고뇌하고 그러면서 성장하는 삶이 건강한 삶, 바른 삶인 것만 같았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단유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내일 만나죠.] 문자를 전송하고 핸드폰을 내려놓은 뒤, 단유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삶은 다른 이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만약 자신의 비밀과 자신의 경험을 모두 본 이들이라면,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까? **** 방학식은 별다른(?) 일 없이, 무난하게 끝이 났다. 비록 반 아이들 중 다수는 방학 중에도 학교에 나와서 봉사활동을 해야 하는 과제가 남았지만, 일단은 방학이니까, 그래서 아이들의 얼굴은 밝았다. “방학 때는 제발 사고 좀 치지 마라. 알겠니?” “네!” 선생님의 당부는 도서 머리말에 적힌 작가의 감사 인사 같았다. 선생님의 진심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의 귀에는 소귀에 경 읽기나 마찬가지였다. “명수야, 오늘 같이 한 판 할래?” 반 아이들 중 몇몇이 몰려와 명수에게 말했다. “콜!” 명수는 단유에게도 물었다. “너는?” “나는 약속 있어.” “약속?” 명수가 게슴츠레 눈을 뜨고 단유를 흘겨보았다. “이것 봐, 이거. 나 몰래 또 여자 만나는 거지?” “여자? 반장 여자 있어?” “얘, 아주 카사노바라니까?” “진짜? 와, 반장 능력 좋네?” “누군데? 어디 학굔데?” 단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가방을 둘러맸다. “그런 거 아니야.” “진짜 미스테리야. 어제도 계속 집에만 있었잖아? 나 몰래 밤에 나가서 누구 만나고 다니는 거 아냐?” “밤에?” “밤일이야?” “좋겠다, 반장!” 키득거리는 아이들의 눈에 장난기가 서려 있다. 적당히 어울려줄까, 생각하다 관뒀다. “됐어. 나 먼저 간다.” 명수도 장난기를 거두고 물었다. “몇 시에 올 건데? 저녁은?” “모르겠어. 그런데 저녁 먹기 전에 들어올 거야.” “아, 그래? 난 저녁 먹고 올지도 몰라.” 당연히 그러겠지. 단유는 피식, 손을 저으며 먼저 교실을 빠져나갔다. **** “그런데 중요한 게 한 가지 있어요.” “뭡니까?” “매니저님을 비롯해서 도연 씨의 주변 사람들이 뭘 해주려고 나서지 않아야 돼요.” 그 부분은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요?” “도연이가 스스로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을 찾게끔 질문을 던져줘야죠.” “질문이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게 중요해요.” **** 단유가 미리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도연 대신 다른 사람이 나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야.” 매니저는 단유의 인사를 가볍게 받아주었다. “전화, 미리 줘서 고맙다.” “뒤탈이 없으려면 그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뜻밖이네요.” 생각이 깊은 아이, 라는 생각을 하며 되물었다. “뭐가?” “만나지 말라고 할 줄 알았거든요.” “뭐,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렇게 했겠지. 그런데 지금은 조금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연이한테 어디까지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도연이한테 조금 문제가 있어.” “듣기로는 심리 치료를 받고 있다던데요?” “그것도 이야기를 한 거야? …뭐, 다행히 지금 공식 활동도 끝났고, 컴백도 아직 정해지지 않은 시간이라 여유가 있으니까.” 그즈음에 두 사람이 있던 상담실의 문이 열리며, 여직원 한 명이 들어왔다. “커피, 드릴까요?” “뭐 마실래?” “아니요.” “저도 됐어요.” “네.” “아, 그리고 도연이 오면 여기로 안내해 주실래요?” “그럴게요.” 여직원이 나간 후, 매니저가 다시 단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 회사에 온 손님인데, 회사 구경도 못 시켜 줬네.” “괜찮아요.” “그래, 뭐 급한 건 아니니까 천천히 하고.” 매니저는 허벅지를 손으로 쓸며 잠시 말을 골랐다. “날이 좀 덥지?” 단유는 매니저가 쉽게 말을 떼지 못하는 심정을 헤아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담당하는 연예인의 치부를 타인에게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을 테다. “그, 음, 저기 도연이는 뭐라고 이야기했어?” 단유는 어젯밤의 통화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요. 그냥 통화로는 이야기하기 어렵다고만 하더라고요. **** “대화요?” -응. 부탁이란 게 고작 대화라니. 그런데 막상 ‘대화’를 부탁하니, 뭔가 부담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밤 11시에 공중전화로―물론 핸드폰이 없어서 그럴 테지만―대화를 요청하는 또래 여자아이의 마음이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밖에 오래 있을 수 없어서 그런데,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지금 만나자는 이야기는 아니죠?” -아니, 아니. 지금 말고, 그러니까…약속을 정해서 만나서 이야기를 했으면 해서. “어떤 대화를 원하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러니까, 그냥 잡담이나 하자고 말하는 건 아닐 거잖아요? 혹시 말동무가 필요한 거라면, 저 아니더라도 많잖아요.” -없어. “뭐가요?” -친구. 그 순간, 단유는 거실에 있는 명수를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멤버들, 있잖아요.” -사실은 말이야. 도연은 어렵게 자신이 심리 치료를 받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심리 치료 과정에서 자신이 필요한 게 감정을 공유할 친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친구란 게, 그런 거래. 서로의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고. 친구, 교우 관계는 인간의 성장에 있어 꼭 필요한 과정 중 하나였다. 교우 관계를 통해 가족의 결속에서 벗어나 관계를 확장하고 사회성을 발달시키고, 자아를 성장시킨다. “그런데 왜 저예요?” -그게, 나도 모르게, 그냥 네 생각이 나서. 언뜻 들으면 마치 사랑 고백을 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도연이 단유를 떠올린 것은 ‘연기 연습’ 과정에서 겪은 교감의 영향 때문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오롯이 받아주고, 거기에 맞춰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 보여주던 단유에게 정서적인 면에서 영향을 깊이 받은 까닭이었다. -너랑 연기 연습을 하면서 마음이 즐거웠던 기억이 있어. 그런데 이후에는 그런 기분을 느끼지 못하니까, 그래서 조금 기분이 뭐랄까, 우울한 것 까지는 아닌데, 나도 모르는 뭔가가 있나 봐.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그냥 그런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라고 토로했다. -의사 선생님이 그랬어. 이 문제는 나 혼자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 뭐든지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해보라고. 그래서 전화를 했어, 너한테. 어쩐지 너랑 이야기를 하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만약 단유가 누군가에게 ‘너 혼자 해봐’라고 말을 듣는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는 하지 않을 거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 속에 담긴 어떤 절실함이 단유가 쉽게 통화를 끊지 못하게 막았다. 매니저는 단유의 이야기를 들으며 살짝 걱정도 들었다. 철저히 자신의 기준에서 생각하는 것이지만, 어쩐지 도연은 친구와 연인의 중간 쯤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친구로서, 도연이 단유와 만나 그녀의 의존증이 나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결과겠지만, 친구가 아닌 연인으로서 단유에게 의존하게 된다면 더 문제가 되지 않을까? ======================================= [520] 나무치(7) “들어보니 넌 도연이가 완벽주의자는 아닌 것 같다고 얘기했었다며?” 스타일리스트 도경에게만 했던 이야기였다. “네.” “혹시, 그때 뭐 이상한 점을 느꼈던 거야?”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말 그대로였어요. ‘완벽주의자’라면 애초에 자신감 떨어진 모습은 보이지 않았을 거란 이야기였으니까요.” 매니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도리어 전 그게 더 궁금하네요. 왜 다들 도연 누나를 ‘완벽주의자’라고 생각했었는지 말이에요.” “그건, 네가 평소의 도연이를 많이 못 봐서 그래. 도연이가 얼마나 악바리처럼….” 매니저는 평소의 도연이 얼마나 열심히 생활하는지를 설명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면, 그녀의 노력이 실은 인정받기 위한 발버둥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었다. “…열심히 했었어. 노래든, 공부든.” 말을 줄이며 단유를 바라보니, 그 침착한 모습이 너무 낯설게 보였다. 예전에도 그랬다. 대표와 함께 만났던 자리에서나, 촬영장 대기실에서나 단유는 저런 모습이었다. 어른스럽기도 하고, 듬직하다고 여길 만도 했던 그런 모습 때문에 매니저는 종종 단유의 나이를 잊곤 했었다. 그래서 도연과의 관계에 대해 부탁을 하기도 했었고. “아, 그리고 늦었지만 고마웠어.” “뭐가요?” “그, 내가 부탁했던 거 있잖아. 도연이랑….” “아…! 네.” 단유는 매니저의 감사 인사가 그냥 지난날 있었던 일에 대한 감사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알았다. 아마 이번에도 ‘부디’ 도연이와 불필요한 연애 감정은 갖지 말아 달라는 부탁일 테다. “걱정 마세요. 전혀, 그런 생각은 없으니까요.” 단유의 단호한 대답에 매니저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데, 진짜, 호기심 때문이고 다른 생각 전혀 없는데, 도연이가 정말 여자로서 매력이 없니? 그렇게 단호하게 이야기할 만큼?” “매니저님은 도연 누나를 보면 연애 감정을 느껴요?” 단유의 되물음에 매니저는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나랑 비교하면 안 되지.” “왜요?” “나는 나이 차도 있고….” “나이 차이가 없으면 연애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인가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일 적인 관계로 있으니까, 나 참, 이런 말 하려는 게 아닌데, 아무튼 나한테 도연이는 딸과 같은 거야.” “매니저님의 말대로면, 모든 남자가 도연 누나한테 연애 감정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죠? 다수의 사람들이 좋아할 순 있어도 소수의 사람들은 어떤 사정으로든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죠. 매니저님이 그렇듯, 저도 그런 소수의 부류, 라고 생각해 두세요.” 뭔가 말로서는 도저히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느끼면서, 동시에 도연이는 이런 아이와 도대체 어떤 대화를 나누고 싶어했던 것인지 궁금했다. “이제 제가 여쭤볼게요.” “응?” “제가 도연 누나를 만나는 것을 왜 허락하신 거죠?” 단유는 도연과의 통화에서 만나자는 도연의 요청에 즉답을 피했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이야기한 후, 통화를 마친 단유는 도연의 매니저에게 전화를 했다. 도연의 일은 그쪽 회사 사람들이 알아서 해결하라는 뜻이었다. 모든 걸 자신이 맡을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데 뜻밖에 매니저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도연의 요청을 들어주라는 부탁을 다시 해왔다. 단유는 조금 당황했었고, 매니저는 사정이 있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그리고 오늘, 도연과의 약속보다 일찍 회사로 나와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자는 약속을 한 것이었다. “두 가지 관점에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데, 한 가지는 도연이 계속 연예계 활동을 유지하기 위해 치료가 필요하고, 그런 목적에서 너의 개입이 도움된다면 허락할 만하다는 판단 때문이었어. 다른 ‘남자아이’였다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넌, 믿을 수 있다는 개인적 판단도 있었고.” ‘믿는다’는 말로 포장을 했지만, 사실 단유 정도라면 매니저나 회사에서 통제할 수도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예전부터 그랬고 지금도 회사 연습실에는 단유 나이대의 아이들이 회사에 소속되어 연습을 하고 있다. 그 나이대 아이들을 다루는 노하우는 다년간에 걸쳐 축적된 마당이다. 비록 소속된 아이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통제 가능하다고 여겼다. “또 한 가지는 설령 도연이가 연예 활동을 더 이상 하기 힘든 상황에 놓이더라도, 지금까지 그녀가 우리 회사를 위해 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회사도 도연이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도움에는 한계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 대표님의 의견이었어.” 앞서의 이야기와 비슷한데, 다르다. 데뷔한 ‘아이돌’로서, 즉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단유’를 이용해 보자는 의견이 첫 번째. ‘도연’이라는 아이의 미래를 위해 ‘어떤 수단’이라도 허락하자는 도의적인 차원에서의 결정이 두 번째였다. 두 번째 의견은 도연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그만큼 도연의 현 상태가 ‘상품’으로서 문제가 있다고 회사가 판단한다는 방증이었다. 웃지 않는 아이돌은 ‘상품적 가치’가 제로라는 뜻. 도연이 상담실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매니저가 나가고 단유 혼자 있을 때였다. “일찍 왔네.” “네.” “미안해, 이런 부탁 해서.” “네.” ‘괜찮아요’같은 겸양의 표현은 없었다. 살짝 머쓱해하는 도연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여기는 처음이지?” “아니요, 지난 번에 한 번 왔었어요.” “진짜? 언제?” “누나랑 촬영하던 기간에 한 번 초대받아서 온 적이 있어요.” “아, 그래?” 첫 인사로 가볍게 말을 건넸지만, 그 이후에는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도연이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니, 확실히 예전의 도연과 조금 달라졌다는 느낌도 들긴 했다. “생각해보니까 어제는 내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한 게 아닌가 싶어. 사실 우리, 아무런 관계도 아닌데 말이야.” 어제 밤 통화를 마친 후, 나름 생각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조금 후회도 되고.” 단유는 대답 없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기, 그러니까 뭐 물어볼 말은 없어?” 말없이 바라만 보는 단유의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웠던 모양인지 얼굴이 살짝 상기되는 도연이었다. 이대로 두면 더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할까 봐 적당히 받아주었다. “사실 전 그런 경우가 없었지만, 길을 가다가 갑자기 누가 붙들고 ‘도를 아십니까’ 라고 물으면 이런 느낌일 거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도연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면박을 주려는 건 아니에요. 100% 이해는 못 해도 어느 정도는 느껴요. 누나도 나름 절실하니까 저에게까지 전화를 한 거라고…. 다만 제가 누나한테 어떤 존재였기에 그런 부탁을 할 정도였을까 되짚어봐도, 잘 모르겠네요. 그래서 지금 이 자리가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고요.” “솔직하네.” “지금 이 자리가 소개팅 자리는 아니잖아요?” 굳이 말을 가리면서 좋은 모습만 보이려 노력할 필요가 있냐는 단유 식의 비유였지만, 도연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해봤어? 소개팅?” “아니요.” 어색한 침묵이 다시 찾아왔다. 도연은 뭐라도 말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아무 말이나 시작했다. “오전에 병원엘 다녀왔어.” “네.”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면 남들이 날 미쳤다고 생각할까봐 조금 겁이 나기도 하는데, 너한테는 해도 괜찮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넌 나 이상하게 보지 않을 거 같거든.” “요즘 정신과 치료 받는 연예인들이 많다잖아요? 공황장애 뭐 그런거로.”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한다는 건 어려워. 특히 난 여자잖아.” “여자, 라는 건 별로 논리적인 근거가 되지 못하는데요.” 뻘쭘해진 도연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지금도 나한테 어떤 문제가 있는 건지 자각하지 못해.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대에 서면 전혀 웃질 않아. 웃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데도 되질 않고.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심리적인 문제래.” “그렇군요.” “의사 선생님이 그러시더라. 내가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고. 그게 내가 자신감이 부족해서래. 난 내가 자신감이 그렇게 부족하다는 생각은 많이 해보질 않았거든. 사실 자신감이 늘 넘치는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야. …아무리 연습을 많이 해도 불안하기는 했지만, 그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어.” “그렇죠.” 단유가 몇 마디 덧붙였다. “시험공부를 아무리 많이 해도, 시험 성적이 잘 나올지 자신할 수 없는, 뭐 그런 거겠죠.” “맞아. 그런 거. 너도 그런 경험 있지?” 맞장구쳐준 단유의 대답에 손뼉을 마주치며 되물었다. “아뇨.” “응?” “전 별로 그런 경험이 없고요, 대신 그런 불안을 느끼는 친구들을 많이 봤었죠.” “넌 불안한 적이 없어?’ “네.” “…아, 넌 전교 1등이라고 했지.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머리가 좋으면, 그런 경험이 없구나.” “아뇨, 그런 의미는 아니고요. 별로 시험 성적에 연연하지 않아서 그래요.” “왜?” “뭐가요?” “아니, 시험 성적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게 이해가 안 돼서. 너 전교 1등 하는 건 맞아?” “물론 성적은 그렇게 나오긴 하지만, 반드시 시험을 잘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공부하는 건 아니란 뜻이에요.” “그럼 어떤 생각으로 공부하는데?” “전, 그냥 책을 보고 공부를 하는 게 재밌을 뿐이에요. 누나는 가수가 꿈이었다고 했었죠? 그럼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런 거예요. 그냥 책 읽고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 게 재미있었던 거예요. 시험 성적은 덤 같은 거죠.” “와, 너 같은 애가 진짜 있구나. 말하자면 공부가 천성이라는 거네?” “글쎄요. 그런데 어딜 가나 자신이 좋아하는 거에 몰두하면 다 그렇지 않나요?” 성공한 사람들은 다 그렇다더라, 하는 이야기로 들렸다. 도연은 단유의 이야기를 곱씹다 씁쓸한 어조로 대답했다. “어쩐지 내가 초심을 잃었다는 이야기처럼 들리네.” “초심이 뭐였는데요?” 단유의 물음에 도연은 시선을 들어 허공의 어느 즈음을 응시하며 읊조리듯 말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나.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본 TV 화면에서 클로즈업 된 가수의 당당한 표정이 나를 붙잡았어. 무대 위에서 빛나던 그 모습이 되게 인상적이었던 것 같아.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는데,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던 것 같아.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 흔해 빠진 이야기. 하지만 도연에게는 특별한 기억이었다. 그녀의 미래를 결정할 만큼 특별했던 기억이지만, 입 밖으로 나온 이야기는 그저 그런 정도의 추억. “그때부터 가요프로도 계속 찾아보고, 노래도 자주 찾아 듣게 되면서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던 거 같아. 내 노래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겠다, 는 거창한 생각은 하지 못했어.” 갑자기 도연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말하고 보니까 나, 되게 이기적인 인간이었네. 내 욕심만 밝히는 사람 같아. 아! 그러고 보니 지금도 달라진 건 없구나. 너한테 전화를 걸어서 부탁한 것도 결국 내 생각만 한 거니까. 난, 결국 그 정도의 인간이었던 거네.” 자조적인 미소가 도연의 입에 걸렸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에요.” “넌 아니잖아? 고작 몇 번 만난 것밖에 없는 나 때문에 여기까지 와줬잖아?” “아니요. 저도 다르진 않아요.” 한숨을 고른 단유. “초심 이야기가 나오니까 생각이 나는데, 저도 그래요. 처음의 제가 가졌던 생각과 지금은 많이 달라졌거든요.” 과거의 기억들이 조용한 상담실을 부유하며 맴돌다 흩어졌다. “초심이란 거, 그런 거 같아요. 늘 같을 수는 없죠. 상황이 변하니까요. 제가 지키고 싶다고 지킬 수 있는 게 아니죠. 사람이란 계속 변하는 거잖아요? 처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니까요.” 그간 겪었던 수많은 일들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단유의 생각과 태도도 많이 바뀌었다. “한때는, 가족을 위해서였고, 또 한때는 친구를 위해서였죠.” 마법으로 잃어버린 가족을 찾으려 했다. 마법으로 친구를 돕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자기만족이에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살인도 불사한 단유. 어떤 변명으로도, 어떤 논리적 정당성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사실들. 후회와 다른 감정,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 [521] 보리수 그늘 아래(1)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데스크에 앉아 일을 보던 여직원이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날이 덥네요.” 가벼운 인사말로 답례한 유한성 대표는 건물 안으로 들어오다 데스크 근처에서 어물쩍대다가 같이 인사를 올리는 매니저를 발견했다. “윤 팀장?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아, 저기…지금 도연이가 저기 상담실에 와 있습니다.” “도연이가? 아, 그럼 그 친구도 와 있는 건가?” “네.” 유 대표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 꼴이 마치 외동딸을 둔 아빠 같구만.” “네?” “딸이 남자친구랑 방에 들어가 있으니 안절부절 못 해하는 모양새 아닌가?” “아, 네.” 매니저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거긴 그만 놔두고,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하지.” “아, 저기 인사라도 받으셔야….” “됐어. 끝나고 잠깐 들리라고 말만 전해줘요.” “네, 대표님.” 여직원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대답했다. 살짝 미소를 지은 유 대표는 복도를 지나려다 반투명 유리로 가로막힌 상담실로 슬쩍 시선을 던졌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상상력을 자극하는 법이지.” “네?” 그러나 유 대표의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다시 앞서가는 대표 이사의 뒤를 매니저가 종종걸음으로 따라 갔다. “확실히 이번 여름은 너무 더운 것 같아. 작년에도 이렇게 더웠나 싶다니까.” 대표이사실에 들어서자마자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거는 유 대표가 꺼낸 이야기에 매니저가 얼른 반응했다. “예, 문자로도 계속 폭염 특보가 울리더라고요.” “애들은 어때? 더운데 쓰러지거나 하면 큰일인데 말이야.” “특별히 관리에 신경 쓰고 있습니다.” “그래.” 책상 위에 놓인 결제 서류들을 대충 훑던 유 대표는, 여전히 문가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매니저에게 소파에 앉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 자신도 몇 가지 서류들을 챙겨든 뒤 소파 상석에 앉았다. “요즘 애들 스케줄은 어때?” “대학 행사도 이제 끝물이라 더 잡히는 건 없습니다만, 지방 행사나 한류 콘서트 이벤트 등 몇 개가 예정되어 있어서 8월 말까지는 계속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힘들어하진 않고?” “4월에 컴백한 후 지금까지 쉴 틈이 없었으니, 솔직히 체력이 많이 딸리긴 하겠지만 아직까지는 기운이 넘칩니다.” “이제 시작한 아이들이야. 너무 방전되지 않게 적당히 관리하라고.” 말로는 ‘적당히’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스케줄을 느슨하게 잡을 순 없었다. 아직 갈 길이 먼 신인 그룹이었다. **** 단유는 상담실 너머의 인기척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도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처음에는 무대에 오르는 게 설레기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그냥 그래. 관성처럼. 차를 타고 행사장에 도착하면 차에서 내리고, 메이크업을 받고 옷을 갈아입고, 마이크를 채우고, 무대에 올라서 MR이 나오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 노래가 끝나면 인사를 하고 무대에서 내려와 차에 타고 다음 행사장으로 이동해. 그러다 하루가 끝나. 집에 돌아와 씻고 잠들었다가 눈을 뜨면 다시 차를 타고 이동하고.” 손가락 끝에 시선을 둔 도연의 이야기는 나지막이 계속되었다. “무대에 서면 생기가 넘쳐 흐르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난 내 속에 있는 무언가가 점점 줄어드는 느낌이야. 이러다가 점점 쪼글쪼글 말라붙을 것만 같다는 생각도 들고.” 고개를 든 도연의 촉촉한 눈망울이 단유를 담았다. “이런데도 사람들은, 팬들은 내가 무대 위에 오르면 환호해주고, 내 이름을 외쳐.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내 모습을 찍어서 핸드폰에 저장해주는데, 난 잘 모르겠어. 내가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지, 내가 그 사람들의 ‘아이돌’이 될 자질이 있는지.” 길게 숨을 토해내는 도연에게 단유는 위로 대신 자신의 이야기로 화답했다. “저도 처음 학교에 갔을 때가 생각나요. 학교에서 교과서를 받아들고, 그 교과서로 공부를 할 때, 전 사실 굉장히 흥분했어요. 그 놀라운 지식과 정보들. 여태 몰랐던 이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이 절 들뜨게 만들었죠. 한 글자 한 글자가 소중했고, 선생님의 가르침 한 마디도 놓칠 게 없었어요. 교과서에 나온 이야기와 지식들을 모두 배우면, 난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초등학교 때?” “네.” “초등학생이 그런 생각을 하다니…. 난 어렸을 때, 가수를 꿈꾸기 전의 난 그저 친구들과 노는 것만 생각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처음의 열정이 식는 걸 느꼈어요.” 학교 교육에 대한 회의감은 언제부터였을까? “어느 날, 누군가 제게 물었어요. 넌 꿈이 뭐냐고.” 보육원 원장? 학교 선생님? 보육원에 봉사활동을 나왔던 봉사자? 독지가? “전 대답할 수 없었어요. 전, 누나처럼 명확하게 그리던 미래가 없었거든요.” “나도 그렇게 명확했던 건 아냐. 그냥 되고 싶다는 바람만 있었던 거지.” “전 그런 바람도 없었어요. 그 당시의 전 그날 배운 지식을 머리에 담고, 내일 배울 지식을 기대하는 정도가 전부였거든요.” 도연은 단유의 이야기에 가만히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꿈이 뭐냐는 질문을 받고서야 전 제 미래를 생각해보게 되었죠. 난 무엇이 되고 싶을까, 무엇을 하고 싶을까.” 어린 단유는 무엇이 되고 싶을까? 그러고 보니 지금 이야기를 나누는 단유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도 모른다. 공부를 잘한다니까 으레 판검사나 변호사, 의사 같은 소위 ‘상위 직업’을 선택하지 않을까 생각할 따름이었다. “누나는 연예계 활동을 하면서도 공부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죠?” 갑작스럽게 들어온 질문에 도연이 언뜻 놀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으응. 공부…계속하기로 했거든.” 부모님과의 약속, 이란 말에 단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공부가 누나의 직업에 어떤 영향을 줄까요?” “그, 글쎄?” 다음에 나온 시를 읽고 시적 화자가 말하고 싶은 바를 찾으시오, 라는 질문과 리미트 함수의 해를 구하는 요령이 가수가 되는데 필요하지는 않다. “이 사회는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을 ‘상식’ 정도로 치부해요. 그 정도는 당연히 알아야 한다, 고요. 하지만 과연 그 상식이 정말 ‘상식’일까요?” 언뜻 생각나는 건, 그래도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같은 사칙연산은 상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것도 못하면 은행에서 일을 보지도 못할 것이고 쇼핑도 제대로 못 할 것이다.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것들은, 과연 우리가 긴 시간에 걸쳐 배워야만 하는 내용일까요? 그 내용들을 배우지 않으면, 우리의 삶에, 우리의 미래에 커다란 지장이 생길까요?”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솔직히 쓸모없다고 여기는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최소한 이거는 알아야 한다고 여기는 것들을 모아놓은 게 아닐까? 예를 들면, 한국사 같은 건 당연히 알아야 하는 거잖아.” 한국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어떤 연예인이 방송에 나와 문제를 일으켰던 사례를 떠올린 도연이었다. “저도 그 점에서는 동의해요. 하지만 절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건, 그게 내 미래, 내 꿈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하는 점이에요. 단적으로 말해서 학교에서 배우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 정도 지식을 얼마든지 배울 수 있어요. 자신의 의지만 있다면요. 학교 밖에서 더 많은 지식과 상식을 배울 기회가 널린 세상이잖아요? 굳이 학교라는 시스템에서 긴 시간에 걸쳐 배워야 할 내용일까 하는 점이었어요.” 학원, 인터넷 강의, 학습지, 그 외 존재하는 여러 교양 강의와 서적들. 단유는 더 많은 책을 읽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 이상의 것들을 찾아 공부했다. “그리고,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들,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도덕, 체육…세분된 지식의 홍수 속에서 전 오히려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였어요. 이 많은 것들을 배운 뒤에 선택해야 할 꿈이 무엇일까. 이것들을 필수적으로 익혀야만 할 직업이란 무엇일까.” 결국, 단유는 어느 순간, 학교 공부에 흥미를 잃었고 대신 자신이 관심을 가진 것에만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단유는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를 찾았고, 자신의 미래를 흐릿하게나마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저도 꽤 방황을 했었더랬죠. 지금도 그 방황이 끝난 건 아니지만요.” 갑자기, 단유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닌데, 저도 모르게 말이 길어졌네요.” 단유는 도연에게 사과를 했다. “아냐, 괜찮아. 들으니까 나도 조금 생각을 하게 되네.” “아까 이야기로 돌아가서, ‘관성’이라고 하셨죠? 관성적으로 생활하는 루틴에 빠져서 매너리즘을 느낀다고.”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는 도연을 보며 단유는 말을 이었다. “저 같은 경우는 현재의 관성적인 교육 시스템에서 그런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말을 하려 했던 거였어요. 뭔가를 새로 배우고 알아간다는 희열은 사라지고, 정답 맞추기와 성적순으로 줄 세우기에만 몰두하는 교육에 회의를 느낀다고요.” 알 듯 말 듯한 결론이다. **** “피터 드러커라는 양반이 그러더라고. 기업은 오로지 두 가지 기능, 마케팅과 혁신만 있으면 된다고. 그런데 지금 이 회사는 그 두 가지 모두가 부족해.” 다리를 꼬고 앉은 유 대표의 말에 매니저는 경청하고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쳤다. “그 때문에 대표님께서 저희보다 더 바쁘게 움직이고 계신 거 아니십니까?” 적당한 아부는 회사 생활을 기름지게 만든다. “엔터 산업이란 게 완전히 외줄 타기야. 발 한 번 삐끗하면 외줄 아래로 떨어져서 올라오기가 힘들지. 힘내서 올라오려 해도 외줄에 올라탄 이들이 한둘이어야 말이지. 그 사이를 뚫고 올라오기가 어디 쉬운가.” 대한민국의 엔터 산업은 레드 오션이다. 아니, 대한민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엔터 산업이 레드 오션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 시점에서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가장 폭발력이 강한 산업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은 미국이다. 그리고 그 미국에서도 항공우주 산업을 제치고 최대 수출산업으로 부상한 산업이 엔터 산업이다. 그토록 강력한 산업 성장력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으니, 비록 다른 큰 나라에 비할 바는 못되더라도 한국 내에서의 산업 비중도에서 수위를 차지하는 동시에 해외 진출이라는 부문에서 경쟁력을 가진 산업으로 손꼽힌다. 레드오션이라 리스크는 크지만, 그만큼 과실은 달콤하다. “그런데 마케팅과 기획력이 떨어지는 회사들이 어디 성공할 수 있을까? 눈이 시뻘개지도록 돌아다니며 재능이 넘치는 상품을 찾아서 데뷔를 시킨들,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하면 길바닥에 깔리는 3류 찌라시만도 못한 신세가 되고 마는걸.” “그렇죠. 대중의 관심과 호응을 얻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결국 이 바닥도 반쯤은 도박판이란 말이야.” 성공과 실패는 도박 패에 달렸다. 한 끗 차이로 모든 것을 얻거나, 혹은 손모가지 잘리고 병신처럼 뒤로 끌려가거나. “하지만 사업은 도박이 아니지.” 운이 좋은 도박꾼은, 한 번은 판을 쓸어담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도박꾼의 말로는 늘 정해져 있다. “우리는 사업을 해야 돼.” 매니저는 유 대표의 이야기가 뜻하는 바를 읽어냈다. “그럼 혹시…?” 유 대표는 입꼬리를 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드립니다!” 엔터 산업도 산업이다. 경제학의 논리를 따른다. 규모의 경제학은 엔터 산업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어, 작은 과도를 든 회사는 큰 자본의 칼을 휘두르는 회사를 이기지 못한다. 해외 증권사인 크레디요네증권(CLSA)에서 투자적격을 내며 주목한 홍콩의 게임업체가 있다. 게임과 미디어 기업을 적극적으로 인수하며 콘텐츠 기업으로 발돋움한 유명 게임 업체에 유 대표가 찾아간 것은 무려 5달 전, 리본 소녀가 데뷔와 동시에 1위를 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그 타이밍에 홍콩으로 출장 간 유 대표를 보며 관련업계 사람들은 설레발을 치는 것이라 흉을 봤지만, 결국 유 대표는 그 업체에게서 거액의 투자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제 남은 건 거침없이 나가는 길 뿐이야.” 유 대표는 진한 미소를 그리며 손에 든 서류를 챙겼다. ======================================= [522] 보리수 그늘 아래(2) 생각해보니, 단유는 이제 겨우 중학교 3학년이다. 그런데 벌써 ‘교육’이라는 시스템에 대해 고민하고 비판한다. 도연은 어쩐지 자신의 고민이 하찮게 여겨졌다. 자신은 고작해야 무대에서 웃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괴로워할 뿐이지 않은가? “어쩌면 나 되게 사소한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던 걸까?” “어떤 사람은 식사 메뉴를 고르는 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했어요. 어떤 사안이든, 중요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결국 자신일 거예요.” 그 말에 도연은 픽, 하고 코웃음소리를 냈다. “그래도 뭐 먹을지 고르는 정도라면 너무 과장된 거 아니니?” 단유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사형수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먹을 음식을 고르는 일이 가벼운 건 아니죠.” “아!” 도연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미안해.” “저한테 사과하실 일은 아니에요.” “아냐, 다 미안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한 것도 미안하고, …사실 아무 상관도 없는 널 여기까지 오게 한 것도 미안해.” 잠시 숨을 고른 도연은, 더욱 처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미안해. 기대에 못 미치는 행동으로 실망하셨을 부모님한테도 미안하고, 회사에도, 멤버들에게도 미안해. 응원해주는 사람들에게도 미안하고.” 만약 콘서트나 행사장에서 이런 멘트를 하면 사람들은 겸양의 표현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도연은 진심으로 미안해했고, 죄책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단유는 그녀의 감정을 헤아리며 말했다. “파스칼이라는 수학자는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표현했어요. 갈대는 힘이 없어서 쉽게 꺾이기도 하고 약한 바람에도 금방 드러눕는 연약한 식물이잖아요? 그처럼 인간은 연약하고 고민이 많다는 이야기래요. 하지만 인간은 ‘생각’을 하니까 생각을 하지 못하는 식물보다 위대하다는 뜻이기도 하죠. 누나의 고민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봐요.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반성하고 후회하고, 그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나도 고칠 수 있을까?” “고친다는 표현은 적당하지 않은 것 같아요. 인간은 기계가 아니잖아요?” “그럼?” “고장난 것도, 아픈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전.” 문득 단유는 지난 날의 자신을 떠올렸다. 한때는 본의 아니게 ‘마약’ 때문에 정신이 나간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때, 단유는 명수의 도움으로―물론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겠지만―그 시기를 이겨낼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쩌면 도연도 그런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라 생각되었다. 비록, 그녀가 도움을 요청한 상대가 왜 자신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지금 누나는 시련을 겪는 거라고 생각해요.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 때문에 힘들고 괴로워하는 거라고. 하지만 절망과 시련을 극복한 인간이 강하다잖아요? 지금 이 순간을 견디고 이겨내면, 그러면 누난 더 강해져 있을 거라고 믿어요.” 단유의 따뜻한(?) 격려에도 도연은 가능할 것이라고 자신할 수 없었다. 이 상황을 이겨낼 자신감도, 극복할 의지도 부족했다. “만약에 말이야, 네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있다면, 넌 어떻게 할 거야?” “만약, 이란 단서를 달지 않아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은 많아요. 오히려 내 뜻대로,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는지를 고르는 게 더 쉬울걸요?” “…그렇지.”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데뷔하자마자 1등을 하면서 승승장구하는 아이돌 그룹이라 해도, 아직 정산도 받지 않았고, 그래서 여전히 부모님의 용돈에 기대어 살아야 한다. 회사에서는 신인 그룹이라 더 조심해야 한다며 먹는 거, 입는 거 모두 통제하고 있다. 마음대로 밖을 돌아다닐 수도 없고, 돌아다닐 시간도 없다. 일거수 일투족이 통제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의지’라는 건, 생각보다 강해요.” 단유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도연을 응시했다. “명확한 이미지를 떠올리고, 그 이미지에 자신의 소망을 담아요. 그리고 강한 의지를 발현시켜요. 그 심상이 곧 자신이라고. 그러면 ‘마법처럼’ 심상은 현실이 될 거예요.” 방금전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얘기했던 사람이 돌연 다 할 수 있어요, 라고 자신 있게 말하니 도연은 웃음이 났다. 어디서 저런 자신감이 나올까? “전교 1등도 너의 강한 의지가 만들어낸 결과야?” “왜 계속 전교 1등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전교 1등,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건 그저 사람들이 줄세우기를 해서 이름 붙인 결과에 지나지 않아요. 차트 1위한 곡이 차트 100위한 곡보다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잖아요? 차트에서 몇 등을 하든, 그 곡이 가치는 의미와 본질은 서로 다를 뿐이지, 우열을 나타내는 게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전교 1등이라는 타이틀은 저를 온전히 수식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니라고 봐요.”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 결과라면 높이 평가해야 하는 거 아냐?” “대중의 기호에 맞춘 결과겠죠. 다수의 선호가 그 본질의 우수성을 보증하진 않아요.” “그렇게 말하니까, 무슨 철학자 같애.” 도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보풀같이 튀어나온 웃음이 슬쩍 나타났다 사라진다. “잘 웃으시네요.” “무대에서 웃질 못한다는 거지, 늘 웃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어.” “무대와 이 자리의 차이는 뭔가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거 같네. 결국,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이야길 하려는 거겠지?”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 라는 장소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려보세요. 그리고 거기에서 자신을 웃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하나씩 빼봐요. 그리고 다른 요소를 집어넣어서 무대를 상상해봐요.”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제가 가수는 아니니까, 정확히 설명이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해볼게요. 이를테면, 무대라는 장소는 지면보다 높게 만들어진 단이죠. 수많은 조명들이 위에서 비춰지고요. 때로는 뒤에 LED 전광판도 있겠죠? 앞에는 수많은 관객들이 앉아 있거나 혹은 서서 무대를 바라보고 있을 거예요. 어떤 이는 응원도구를 들고 있기도 할 테고, 어떤 이는 핸드폰으로 무대를 촬영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무대 위에서 가수는 마이크를 들고 있거나 혹은 그, 뭐죠? 볼에 붙이는 마이크? 뭐 그런 장치를 달고 있겠죠. 귀에는 모니터링 이어폰이 꽂혀 있고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가끔은 밴드가 뒤에서 연주를 하기도 할 거고요. 또 무대 전면에는 스피커와 프롬프터가 있어요.” “너 되게 자세히 안다?” “아무튼요. 그런 무대를 상상해보세요. 혹시 제가 말한 것 말고 또 떠오르는 누나만의 무대 이미지가 있나요?” 도연은 잠시 생각해보다 대답했다. “사람들의 눈빛. 조명이 비춰지지 않아도 어둠 속에서 나를 보는 눈빛들.” “그리고요?” “땀. 언제나 무대에 오르면 목을 타고 흘러내린 땀 때문에 답답해.” “또 있나요?” “함성 소리. 때로는 야유 같기도 하고. 모니터링 이어폰을 뚫고 들어오는 응원 소리도 있어. 가끔은 힘이 되지만 또 가끔은 질책 같기도 해. 왜 그렇게 노래를 못 부르냐, 왜 그렇게 춤을 흐느적 거리며 추냐, 그런 말들 같이.” 진짜 들은 목소리였는지, 아니면 어디선가 읽은 댓글의 내용인지는 구분되지 않았다. 흐린 감정이 배인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올 때마다 도연의 얼굴이 굳었다. “그럼 이제 이런저런 것들을 하나씩 빼봐요.” “어떻게?” “우선 목소리부터 빼 보죠. 무대 위로 아무런 소리도 올라오지 않아요.” “사람들이 있는데 목소리는 없어? 어쩐지 그게 더 섬뜩한데?” “눈빛도 빼 보죠. 아예 보는 관객들이 없다고 생각해봐요.” “그럼, 너무 쓸쓸할 거 같은데.” 빈 공연장에서 열창하는 가수에게 ‘가수’의 의미가 있을까? “무대 위의 마이크도 치워볼까요? 전광판도 없애고, 조명도 없애요.” 그렇게 하나하나 없애니 남는 건, 말 그대로 ‘무대’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리고 동시에 도연은 단유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언젠가 한 번 겪었던 것임을 떠올렸다. 이전에 단유와 연기 연습을 할 때 선생님이 상황 연출을 하며 했었던 것이었다. ‘텅빈 연습실에서 어떤 특정한 장소를 상상하게 하고, 그 안에서 연기를 하도록 시켰었지.’ 그때는 연기 선생님이 지시했던 것을, 지금은 단유가 하고 있었다. “이제 무대 위에 누나가 원하는 것을 하나씩 채워봐요. 뭐가 필요하죠?” **** 배우 매니지먼트에 비해 가수 매니지먼트라는 영역은 특히나 돈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배우의 경우, 초기 투자비용도 가수에 비하면 적게 들어가고, 배우의 연기력에 있어서도 매니지먼트사가 관여할 부분이 적다. 반면 가수의 매니지먼트는 초기 투자비용도 그렇고, 작사, 작곡, 안무를 매니지먼트사가 모두 담당, 제작하여 가수에게 넘긴다. 게다가 앨범의 제작 역시 거액의 제작비가 들어가기에 가수를 매니지먼트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돌’은 ‘가수’와 또 다르다. 아이돌도 가수냐, 아니냐는 물음이 아니라, 산업적으로 ‘아이돌’의 육성, 관리는 다른 분야의 연예인과 차별되기 때문이다. 가장 큰 차이점은, 매니지먼트 그 자체다. 아이돌은 팀워크가 중요하다. 특히 한국의 아이돌은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성장하는’ 아이돌이 아니라 ‘완성된’ 아이돌이다. 때문에 ‘완벽’을 요구하는 팀워크를 위해 회사는 여타 직종에 비해 가장 적극적으로 아이돌을 ‘통제’한다. 때문에 숱하게 벌어지는 소속사와 연예인 간의 충돌도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비용과 시간, 그리고 리스크를 감당하고서라도 우후죽순으로 기획사들이 생겨나는 이유는 간단하다. 돈이 되니까. 1년에 세 작품 출연하기도 힘든 배우와 달리, 가수는 여러 행사 무대를 가질 수 있고, 그때마다 수입이 들어온다. 회사 입장에서는 자금 회전을 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더군다나 유명 가수가 되면, 몇 곡의 노래를 부르고도 수천만원을 챙길 수 있고, 당연히 기획사도 그 과실을 보상받는다. “아이돌의 수명은 길지 않아. 한 아이돌을 출범시키고 그 아이돌의 흥망성쇠를 소속사가 같이해야 할 이유는 없지. 그러니 새 아이돌 그룹을 끊임없이 만들어야 하고.” 아파트를 하나 짓는데 엄청난 자본과 인력이 소요된다. 그 자본과 인력이 결집된 곳이 바로 건설회사다. 건설회사는 아파트 하나 짓고 사라지지 않는다. 아파트를 지어야 이윤이 생기고, 그 이윤으로 건설회사가 돌아간다. 그래서 좁은 땅덩어리에, 미분양 아파트 사태로 건설 위기를 부르짖어도, 건설회사는 끊임없이 아파트를 짓는다. “어쩌면 악순환이 될 수도 있겠지. 팔리지 않는 상품은 창고에 쌓이지만 수익을 내기 위해 끊임없이 상품을 만들어야 하는 기업처럼. 그래서 확장이 필요한 거야.” 단일 사업에만 집중하는 건 외줄 타기다. 범위를 넓혀 안전성을 도모해야만 한다. 그것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방향. “마침 투자도 받았으니, 이제 우리도 시장을 넓게 바라볼 때야.” 유 대표의 자신감은 끝없이 뻗어나가는 중이었다. 그 앞에서 매니저는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동시에 기대했다. 회사의 발전과 성장이 자신과 무관한 일만은 아닐 테니까. 자신도 나름 이 회사의 성장에 큰 기여를 하지 않았던가. “일단 회사를 더 키워야 돼.” “어떤 생각이신지?” 유 대표는 들고 있던 서류를 슬쩍 흔들어 보였다. 자세한 내용은 보이지 않았지만, 앞장에 크게 적힌 문구는 매니저도 볼 수 있었다. “M&A Project? 기업합병 말인가요?” “일단 예비인수제안서를 만들어서 던진 상태야. 만약 일이 잘 돼서 회사가 커지면, 자네도 할 일이 많아질 거라고.” 매니저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끼다, 순간 유 대표의 시선을 느끼고 표정을 수습했다. “윤 팀장한테 이런 이야기 하는 이유 알겠나? 지금이 중요해. 비록 투자를 결정받았지만, 모든 게 이제 시작인 단계야.” 매니저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문제 생기면 안 된다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무슨 문제를 말하는지 몰라도 일단은 씩씩하게 대답하는 매니저였다. ======================================= [523] 보리수 그늘 아래(3) 유 대표는 싱긋 웃으며 충고했다. “애들만 문제가 아니라 자네도 조심해야 돼. 지난번 일, 자네도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하긴 힘들잖아?” 매니저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푹 숙였다. “도연이 생각해서 나선 건 좋지만, 그래도 ‘적당히’ 선은 지켜야지. 알겠지?” “네, 대표님.” 유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향했다. “그 문제는 심 대표가 충분히 이야기 했을 테니 여기까지 하지. 아무튼, 주의하라고. 안팎으로 주의해야 할 때니까.” “알겠습니다.” 어느새 해는 서쪽으로 기울어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워낙에 더웠던 한낮이라 해가 지고도 쉬이 더위가 가시진 않을 것 같다. “아 참, 심 대표는? 오늘 나왔나?” “지방 출장 가신 거로 아는데요.” “아, 그런가?” 유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 대표가 주로 회사 외부의 확장에 주력한다면, 심태성 대표는 회사 내부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본래 캐스팅 쪽에 특출한 안목을 지녔던 심 대표는 일주일에 한 번은 직접 지방을 돌며 인재를 찾는 일을 했다. “이제는 아랫사람들을 시켜도 될 텐데 말이야.” “의욕이 넘치시는 분 아니십니까?” “그래도 대표쯤 되면 묵직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유 대표의 말에 악의는 없었다. 비록 경력은 유 대표가 더 길긴 해도 두 사람은 젊은 시절부터 함께 일을 하면서 호흡을 맞춰온 사이였다. 공동 대표로 함께 있으면서도 각자의 영역을 확실히 구분하여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고 동시에 회사를 견실하게 이끌어가는 중인데, 덕분에 만들어진 지 몇 년 되지 않은 이 회사가 ‘중형’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애들은 아직도 이야기 중인 건가?” “그렇지 않아도 저녁 스케줄이 하나 있는데, …제가 한 번 가보겠습니다.” 매니저는 얼른 일어나 목례를 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창밖으로 보며 생각에 잠긴 유 대표의 얼굴에 블라인드의 그늘이 겹쳐졌다. 매니저가 문에 노크를 하고 상담실에 들어갔을 때, 단유와 도연의 이야기도 거의 마무리가 되는 중이었다. “방해했냐?” “아뇨. 괜찮아요, 저희.” ‘저희’가 아니라 ‘너’가 괜찮아야 하는데. 매니저는 단유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그래. 사실 저녁 스케줄 때문에 이제 슬슬 갈 채비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도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고마워. 덕분에 도움이 많이 됐어.” “아뇨, 오히려 제가 더 도움됐어요.” 간간이 자신의 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어서 단유도 썩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어쩌면 이런 시간이 단유에게도 필요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조금 전에 알려준 거, 아직 자신은 못 하겠지만, 그래도 노력은 해볼게.” “한 번 해봤던 거니까, 잘 하실 거예요.” “정말 고마워.”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을 데리고 매니저는 대표실로 이동했다. 유 대표가 웃으며 두 사람을 반겼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는 도연에게 간단한 안부를 물은 뒤,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듣던 대로 잘 생긴 친구네. 심 대표가 탐낼만하겠어.” “감사합니다.” “허허, 부정은 안 하는구먼.” 단유는 가타부타 말없이 서서 유 대표와의 짧은 인사가 끝나길 기다렸다. “우리 도연이 때문에 먼 길 왔는데, 뭔가 맛있는 거라도 먹여서 보내야겠는데.” “괜찮습니다.” “작은 인연이라도 소중히 생각해주는 그 마음이 기특해서 그래.” 확실히 연륜이 있는 분의 이야기라 그런지, 워딩에 신경을 쓰는 모습이 단유에게 보였다. 굳이 ‘작은 인연’이란 표현을 쓰는 것도 혹시 모를 일을 미연에 방지코자 하는 것 같았다. “오늘은 갑작스럽게 잡힌 일정이니 더 오래 이야기하긴 어렵고, 다음에 또 기회가 된다면 그땐 제대로 대접하지.” ‘다음’이 있을까? “그리고 도연인 스케줄 잘하고.” “네.” “리본 소녀가 너무 열심히 해줘서 내가 많이 고마워하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저희가 더 고마워요.”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윤 팀장은 끝까지 수고해줘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렇게 짧은 대면을 마치고 나온 단유에게 매니저가 물었다. “나가는 데까지 태워줄까?” “아뇨, 괜찮아요. 여기서 지하철까지 별로 멀지도 않던걸요.” “아, 그래? 오늘, 고마웠다.” 고맙다는 인사를 종일 받을 기세다. “이만 가볼게요.” “어, 그래.” “누나도 수고하세요.” “그래. 고마워. 아, 가끔 연락해도 되지?” 단유는 매니저를 쳐다보았다. “매니저 오빠 핸드폰으로 연락할 거야.” “아, 그럼 그럼. 우리가 아주 남도 아닌데, 두 사람 친하게 지내는 게 뭐 어때?” 매니저가 안심하고 대답했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 동안, 단유는 도연과 있었던 대화를 떠올려보았다. 도연을 돕기 위해 왔었지만, 어쩐지 자신도 꽤나 후련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나, 수다쟁이였을까?’ 피식, 짧은 코웃음으로 자신의 생각을 비웃은 단유는, 마침 생각난 김에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했다. [가디스R, 출근길에 함박웃음] [가디스R, ‘두근두근’으로 인기몰이 이어간다] 기사의 날짜는 거의 4월 중순에 몰려 있었다. 그 이후로는 특별한 기사 없이 포토 기사라는 이름으로 사진 몇 장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5월 말에 ‘활동 마무리’라는 짧은 기사로 끝이 났다. 차트도 찾아볼까 싶었지만 관뒀다. 순위가 좋다 한들, 축하한다고 문자를 보낼 수도 없고 날짜도 한참이 지났다. 만약 이번 활동의 성과가 좋지 않았다면 그건 그거대로 슬픈 일이다. 위로 해줄 수도 없고, 그저 단유 본인만 안타까울 뿐일 테니까. ‘잘하고 있겠죠?’ 그냥 잘하고 있으리라고, 좌절하지 않고 계속 꿈을 향해 달리고 있을 거라고 믿는 게 편하다. 그리고 나윤은 충분히 이겨낼 사람이다. 그녀는, 적어도, 자신의 일에 있어서는 확고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니까. **** 중학교의 마지막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마지막이라지만, 앞으로 남은 방학들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의미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때로는 특별한 기념일을 부여하고 그 날을 의미 있게 보내려 하는 연인들의 그것처럼, 단유의 친구들은 방학을 보다 알차게 보낼 방법을 궁리했다. “국토 횡단?”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할지 안 할지도 모르고, 고등학교에 올라가도 그때는 공부를 해야 하니까, 지금처럼 시간 여유가 없을지도 모르잖아?” 지태는 마치 오랫동안 기획해왔던 것처럼 술술 계획을 꺼내놓았다. “재밌겠다!” 명수가 손뼉을 치며 지태의 의견에 동의했다. 하긴 명수도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축구를 해야 하니까, 그렇게 되면 방학 때 친구들과 어울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닐 수도 있고. “난 힘들 거 같은데.” 채윤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왜?” “우리 엄마가 이번 방학부터 준비해야 한다면서 여름 기숙학원에 가기로 했거든.” “언제부턴데?” “다음 주 월요일부터 8월 15일까지.” 채윤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이틀, 오늘과 내일 뿐이다. “와, 너무 심하다.” “내 말이. 네가 와서 우리 엄마한테 말 좀 해줘라. 심하다고.” “…뭐, 안 되면 채윤이 빼고 우리끼리 가지 뭐.” “야!” “명수야, 넌?” “나야 좋지!” “단유 넌?” 모두의 시선이, 심지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채윤도 단유의 대답이 궁금한 눈치를 보이며, 단유에게 쏠리니 여태 조용히 콜라를 마시던 단유는 볼을 긁적였다. “글쎄, 뭐 상관은 없을 것 같긴 해.” 새로 맡은 번역 일이야 일정만 조금 조정하면 여유롭게 방학 끝나기 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여유롭게 학과 외 공부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유혹도 있지만, 친구들과의 시간을 외면하기도 어려웠다. 누구처럼, ‘친구’가 없어서 외롭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하기 싫었으니까. “그런데 채윤이 빼고 우리끼리 가는 건 좀 그런데.” 채윤은 단유가 자신의 편을 들어줘서 고맙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너희 부모님은 네가 국토 횡단 같은 걸 한다고 하면 보내줄 거 같아?” 채윤이 자신감을 얻고 지태에게 되묻자, 지태는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마지막 방학’이니까 상관없지 않겠어? 게다가 친구들이랑 같이 가는 건데 문제 있겠어?” “문제 많아 보이는데? 어느 부모님이 중학생들끼리 며칠이 걸릴지 모를 여행을 간다는 데 허락을 해 주겠어?” “잘 설득하면 되지!” “퍽이나.” 지태에게 면박을 준 채윤은 앞에 놓인 감자튀김 하나를 집어 먹으며 넌지시 말했다. “그런데 정말 같은 고등학교에 못 갈 수도 있나?” “못 가겠지. 명수는 축구 쪽으로 가야 하니까, 부평고등학교나 언남고등학교 같은 데로 가겠지.” 소위 축구 명문이라고 이름난 고등학교고, 이미 명수에게 스카웃 제안이 오기도 했다. 지태는 빨대를 물고, 까닥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단유는, 뭐 과학고나 그런데 갈 생각이지 않아?” “나?” “야, 솔직히 네가 일반 고등학교 가는 건 반칙이야. 양민학살이라고.” 공정한 경쟁 사회를 위해, 단유 넌 빠져, 라며 우스갯소리를 뱉던 지태는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제일 막막하다.” 채윤을 바라보며 꺼낸 이야기였기에 채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 “그래, 인마. 쟤들은 이미 미래가 탄탄하잖아? 명수는 축구 선수라는 목표가 있고, 이미 명문들이 기웃거릴 만큼 실력을 보였어. 단유는, 뭐 넘사벽이니까 패스. 그런데 우린 뭐냐. 이도 저도 아니고.” 지태의 말에 명수가 쑥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우리야? 난 괜찮아.” 채윤의 대꾸에 지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뭐가 괜찮은데?” “성적도 그리 나쁘지 않고, 고등학교 가서도 이대로만 지내면 뭐 문제 있겠어? 그런 말 있잖아? 중간만 가면 된다고. 사실 나도 단유처럼 공부도 잘하고 전교 1등 하고 그러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 그건 그냥 욕심인거고.” “그럼 넌 뭘 하고 싶은데?” “뭘 하고 싶다기보다는, 그냥 적당히 사는 거지.” “야! 젊은 놈이 벌써 그렇게 생각하면 되냐?” “지는 뭐 젊은 놈 아닌 것처럼 말한다? 그럼 넌 뭐가 되고 싶은데?”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술을 꾹 다물고 콜라 빨대만 물고 있는 지태였다. “난 나한테 재능이 없다는 걸 잘 알거든. 난 뭐든 어중간하잖아. 얼굴도 잘생기지 못했고, 공부도 썩 잘하는 편은 아니고. 지태, 너처럼 활달한 성격도 아니고, 명수처럼 운동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노래나 미술 같은 예체능에도 재능이 없어. 이런 내가 어떻게 살겠어. 그냥 적당히 남들 하는 만큼만 하고 살려고 노력하는 것밖에 더 있겠어?” 시끌벅적한 패스트푸드점에 단유네 테이블만 조용해졌다. 채윤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감자튀김을 입에 넣으며 자신이 뱉은 말의 여운을 즐겼다. “나도 똑같애.” 지태가 슬쩍 숟가락을 얹었다. “똑같긴. 넌 그래도 집 잘 살잖아? 우리 집은 솔직히 그렇게 부자도 아니고, 물론 가난한 것도 아니지만, 그냥 그래.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어? 그냥 고등학교 가고, 운이 좋으면 좋은 대학도 갈 수도 있겠지만, 요즘 등록금 비싸다고 하는데 사립 대학교는 가기 힘들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서울 대학교를 들어갈 수 있을 리도 없고.” “왜 못 한다고 단정해? 지금부터 뭐 빠지게 공부하면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우리 엄마도 너처럼 그렇게 생각하니까, 방학인데도 무슨 기숙학원엘 보낸다고 하시는 거지.” 지태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단유는 앞에 앉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뭔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이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거라곤 짐작도 못 했던 탓이었다. 생각 없이 노는 것만 좋아하는 친구들, 이라는 생각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 정도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살짝 놀라기도 했다. “그럼 국토 횡단은 포기하는 거?” 명수가 물었다. ======================================= [524] 보리수 그늘 아래(4) “어렵지 않을까?” “그럼,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당일치기로 가자.” “당일치기?” 명수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단유를 돌아보았다. “내일 선생님 쉬시는 날이잖아? 선생님이랑 다 같이 가면, 부모님들도 허락해 주시지 않을까?”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도 쉬어야지.” “아냐, 지난번에 그랬어. 여행 가고 싶다고.” “그 여행이 당일치기로, 게다가 밑에 애들을 달고 가는 여행을 말하는 건 아닐 것 같은데.” 채윤이 끼어들었고, 그 말에 단유가 동의했다. 그리고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굳이 다 같이 하는 걸 원한다면, 여행은 포기하고 그냥 기억에 남는 일을 하는 게 어때?” “어떤 거?” **** 전날 모처럼 학원 동료 선생님들과 새벽까지 달린 하은은 깊은 잠에 빠져 일어날 줄 모르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목마르지?” 혀를 쭉 빼물고 단유를 향해 눈동자를 반짝이는 호빵에게 물을 챙겨주고 개밥그릇에는 적당량의 사료를 채워 넣었다. “준비 다 했어?” “응. 대충.” “그럼, 가자.” 평일이라면 학교에 갈 시간이니 이상할 것도 없겠지만, 일요일 아침, 그것도 방학 기간의 일요일 아침이다. 되도록 편한 복장을 갖춰 입은 두 사람이 조용히 오피스텔을 빠져나오려 하니 호빵도 의아하게 여긴 모양인지 사료 그릇에서 고개를 빼 들고 물끄러미 두 사람을 바라본다. “선생님 잘 지키고 있어. 알았지?” 대상이 뒤바뀐 것 같지만, 딱히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은 없어 단유는 먼저 나가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명수는 말없이 층을 알려주는 액정 화면만 바라보았다. 오피스텔을 나오니 더운 공기가 확 밀려들어 코와 입을 막는 기분이었다. “오늘 엄청 덥겠네.” 단유의 한 마디에도 명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단유는 명수의 마음을 헤아려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잠시 후, 건널목에 도착했을 때 채윤이 손을 들어 두 사람을 반겼다. “일찍 나왔네? 오래 기다렸어?” “아니. 나도 금방 나왔어.” “지태는?” “조금 있다 오겠지.” 아침 햇살을 피하려 세 사람은 근처 상가의 벽에 달라붙었다. 담벼락 아래 서서 햇살 비치는 아침 거리를 바라보는 기분은 묘했다. 특히 일요일 아침이라 돌아다니는 사람도 적은 마당이었다. 한산한 거리에 푸른 가로수의 울창한 잎들이 들리지 않는 바람 소리를 허밍처럼 들려주었다. 비록 좌우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차량들로 인해 소음이 있긴 했지만, 그 소음마저 현실과 별개인 느낌이었다. 세 사람이 말없이 그 거리를 한창 바라보고 있을 때, 지태가 헐레벌떡 나타났다. “미안, 오래 기다렸어?”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솔직히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정말 아무 일도 없이, 그냥 해를 피해 그늘에 서서 거리를 바라볼 뿐이었는데, 그 시간이 마치 현실에서 뚝 떼어놓은 느낌이었다. 단유와 명수는 물론이고, 채윤까지 그런 기분을 느낀 모양이었다. “별로. 몇 시지?” 지태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좀 늦긴 했네.” “가자.” 단유가 먼저 나서서 길을 청했다. 곧 네 아이들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봉사활동 간다고 하니까, 엄마가 네가 웬일이냐면서, 그러는 거 있지? 그러면서 네 칭찬을 하더라.” 역시 친구는 잘 사귀고 봐야 한다더라, 면서 어머니의 말을 전하는 지태에게 단유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오늘도 폭염이라더라.” 아침에 나오며 뉴스에서 봤다는 지태는 지금 가기로 한 보육원에도 에어컨이 있는지, 없으면 더워서 쓰러지는 건 아닐지 걱정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지태의 말에 크게 반응이 없자, 지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니들, 나 없을 때 싸웠냐?” “아니.” 채윤이 대표로 말했다. “그럼 분위기가 왜 이래?” 채윤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명수를 바라보았다. 사실 이 중에서 가장 분위기가 이상한 사람은 다름 아닌 명수였으니까. 명수가 비록 ‘수다쟁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농담도 지태 못지않게 많이 하는 데다 이런 처진 분위기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명수가, 이렇게 화창한 일요일 아침에, 그러니까 전혀 처질 분위기가 아닌 상황에서 말이 없다는 것은 이상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명수야, 너 어디 아파?” “아니.” “그럼 왜 그러는데?” “글쎄.” 명수는 자신의 짧은 머리를 한 번 크게 쓸어올렸다. 덥긴 했던지 작은 땀방울이 튀어 오르며 흩어졌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단유는 더운 숨을 후 뱉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 일 아니야.” “넌 뭐 알아?” “아니, 뭘 안다기보다는 나도 명수랑 비슷한 느낌이라서.” 명수가 단유에게 시선을 슬쩍 던졌다가 다시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도로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느낌인데?” “우리 보육원에서 살다가 나왔잖아. 다시 그 보육원으로 간다니까 기분이 좀 그래.” “아.”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지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100% 이해는 못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말인지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싱숭생숭하고 그래?” “조금.”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분?” “그거랑은 조금 달라. 보육원을 고향이라고 생각하진 않으니까.”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10년 전 일기장을 다시 들추는 기분?” **** 전날 국토 대횡단이라는 거대한 이벤트가 현실의 벽에 가로막힌 후, 단유는 자원봉사를 건의했다. 여태 자원봉사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주민센터나 도서관 등에서 6시간 내지 8시간 짜리 간단한(?) 일들만 했었다. 그러나 멀리 보육원을 찾아가 자원봉사를 하는 일은 일부러 피했다. 사실 일부러 피하지 않더라도 중학생들은 보육원에 봉사활동을 가기가 쉽지 않다. 보육원 자체에서 봉사활동 신청을 받아주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단유가 보육원에 있을 당시에도 봉사자들 중 가장 어린 축에 속했던 사람도 고등학생이었고 그마저도 봉사 단체에 속한 이였기에 받아주었지, 학생들끼리 봉사활동 신청을 하면 잘 받아주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 네 사람이 가기로 한 곳도 영유아들이 대부분인 보육원이었다. 단유네가 살고 있는 장계동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여를 가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20 여분을 더 가야 나오는 곳이었다. 버스에 올라타니 에어컨을 세게 틀어놓았던지, 그제야 숨이 편하게 쉬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 여기서 내리기 싫어질 것 같다.” 지태가 손부채질을 하며 벌써 벌겋게 달아오른 볼을 식혔다. 채윤이 가방을 주섬주섬 뒤지더니 선크림이었다. “나 이거 바르면 얼굴이 너무 하얗게 변해서 이상하던데. 목소리를 얇게 내야 할 거 같은 느낌적인 느낌?” “얼굴이 익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채윤이 단유를 돌아보며 ‘너도 바를래’라고 물었고, 단유는 고개를 젓고 대신 명수를 가리켰다. “괜찮아. 이미 이번 생은 글렀어.” 명수가 농담을 하니, 그제야 분위기가 조금 풀린다. 지태가 히죽 웃으면서 명수의 얼굴을 인디언에 비교했고, 아프리카 원주민에 비교하지 않아 줘서 고맙다는 명수의 대답이 이어지면서 곧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들 명수가 많이 심란해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채윤은 물론이고, 비슷한 마음인 단유까지 대화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다행히 버스에 탄 승객이 많지 않아 다행이지, 만약 사람이 많았다면 진작 한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 그 시간, 단유네와 달리 분주한 곳이 있었으니 바로 도연이 속한 리본 소녀의 숙소였다. 일요일이지만 음악방송이 잡힌 것도 아니어서 다행히 늦잠을 잘 수 있었던 리본 소녀는 꿀맛 같은 잠을 자다가, 매니저의 등장에 침대에서 일어나야 했다. “오늘 저녁 행사 있으니까, 지금 준비해야 돼. 자자, 다들 일어나.” 윤 팀장과 함께 온 부매니저 희숙이 손뼉을 치며 이불을 끌어내렸다. “언니, 조금만.” “야, 지금 8시야. 충분히 잤잖아? 얼른 일어나. 그래야 밥이라도 챙겨 먹을 거 아냐?” “아앙, 언니.” 팬들에게는 우레같은 환호성을 이끌어 낼 애교도 희숙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빨리 일어나! 언니 화낸다!” “알았어요.” 반쯤 달아난 잠을 찬물로 완전히 깨운 뒤, 리본 소녀 세 사람은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향했다. “다들 잘 잤어.” “네.” 수첩을 보며 스케줄을 확인하던 윤 매니저는 수첩을 덮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지역 민방 행사니까, 카메라도 잡을 거야. 리허설도 하고 하려면 서둘러야 돼. 그리고 듣기로는 300석짜리 무대인데, 서서 보는 사람까지 합하면 아마 천 명은 훌쩍 넘을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공카(공개카페)에서도 행사 보러 오겠다는 팬들이 많은 것으로 확인됐으니까, 불미스러운 일 없도록 주의해야 돼. 알겠지?” “네.” “그리고 오늘 낮에 최고 온도가 38도라지만 우리 행사는 저녁에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하지만 거기 보러 오는 사람들은 더위에 지친 사람들도 많을 거라고. 그러니 너희들이 그 사람들의 더위를 확 날려버릴 정도로 시원한 무대 보여줘야 돼.” “그럴게요.” “그럼 나가자.” 그나마 오늘은 시간 여유가 있으니, 이렇게 집에서 짤막하게 브리핑 할 수 있었다. 브리핑을 듣고, 안 듣고는 차이가 크다. 어차피 데뷔 연차가 짧은 걸그룹이라 무대에서 부르는 노래는 정해져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무대를 똑같이 해선 안 된다. 하다못해 무대 위에서 짧은 인사말 멘트를 할 때도 각 무대마다 다르게 해야 한다. 멘트 하나가 ‘차이’를 만들고, 다른 가수와 ‘차별’이 된다. “언니, 배 안 고파요?” 리더의 물음에 운전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던 희숙이 룸미러를 보며 대답했다. “샵에 가면 줄게.” “그럼 김밥이에요?” “그럼 김밥 말고 뭐 먹게?” “오늘은 햄버거 안돼요?” “이그, 그러니까 너희들이 맨날 욕먹지. 오늘 행사 있는 거 뻔히 아는 애가 아침부터 햄버거를 찾니?” “반씩만 먹으면 되잖아요. 안 그래?” 리더의 물음에 다른 두 사람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오빠한테 물어봐.” “우리가 부탁하면 혼나잖아요. 언니가 대신 말해 주면 안 돼요? 언니가 애들 햄버거 좀 먹이자고 하면, 팀장님도 화 많이 안 내실 거잖아요.” “혼날 거 뻔히 아는 애가 그래? 그냥 참아. 내일은 스케줄 없으니까, 내일 먹으면 되겠네.” 그때 매니저가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갑자기 조용해진 차 안의 분위기를 감지한 매니저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뭐야, 니들? 내 흉봤니?” “아니요?” “그런데 분위기가 왜 이래? 무슨 작당 모의한 사람처럼.” “아니요, 그런 거 없었어요.” “숙아, 얘들 왜 이래?” “아침밥 때문에요.” “언니!” “왜? 뭐? 말해달라며?” “뭔데 또?” “햄버거가 먹고 싶다네요?” “얘들은 무슨 햄버거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라도 있나, 왜 그래? 맛도 없고, 영양 부실한 패스트푸드 따위에 맛 들이면 니들 성공 못 해.” “그건 너무 억지네요.” “숙이 너도 편들지 말고.” “네.” “가자.” 희숙이 에어컨을 틀고 차를 출발시켰다. 큰 도로에 올라 달리고 있을 때, 매니저가 물었다. “도경이는?” “샵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거기로 바로 온다고?” “그 근처에서 편집매장이 있는데, 거기서 액세서리 구해서 온다네요.” 고개를 끄덕인 매니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올 때, 햄버거 몇 개 사오라고 그래.” “오예!” 뒷자리에서 함성이 터졌다. ======================================= [525] 보리수 그늘 아래(5) “왜 햄버거 허락하신 거예요?” 헤어샵의 한구석에서 제순은 희숙의 물음에 별거 아니라는 듯 햄버거를 베어 물고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애들이 먹고 싶어 하잖아.” “애들 먹고 싶다고 다 허락하면, 몸 망가지잖아요.” “햄버거 하나 갖고 망가질 몸이면 이미 진작에 망가졌어.” “그래도요.” 평소 같지 않다는 의심으로 바라보는 희숙에게 제순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도연이 있잖아.” “그렇죠? 역시 도연이 때문일 줄 알았어.” 짐작했다는 듯,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희숙이었다. “당분간은 도연이 때문에라도 분위기를 조금 유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싶어서.” “이해는 해요. 그런데 다른 애들이 알면 섭섭해하지 않을까요?” “뭐가 섭섭해?” “차별한다고요.” “이게 무슨 차별이라고. 다 지들 잘 되자고 하는 짓인데.” “아직 어린 애들이잖아요. 이런 거에도 민감하게 영향을 받을 거예요.” 이번엔 제순이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희숙을 바라보았다. “혹시, 애들 사이에 무슨 문제 있어?” 희숙이 화들짝 놀라며 먹던 햄버거도 내려놓고 두 손을 흔들었다. “아니요.”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는 표정을 지어? 더 의심스럽게?”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워낙 민감한 나잇대 애들이니까 조심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죠. 애들은 문제없어요. 서로들 얼마나 아끼는데요.” 도연이가 최근 상담을 받는 것을 아는 아이들은 병원에 다녀온 도연이를 다독여주기까지 한다, 는 희숙의 이야기를 들으며 제순은 햄버거를 한입에 넣고 손을 털었다. 목이 멜까 봐, 콜라를 집어 주는 희숙의 친절을 받아든 제순은 빨대를 쪽쪽 빨고는 만족한 듯 콜라를 내려놓았다. “지금이 중요한 시기야. 도연에게도, 리본 소녀에게도. 그리고 우리 회사에도.” “회사요?” “뭐,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해줄게. 아무튼, 지금은 애들 활동에만 집중하고 문제 안 생기게 주의하자고. 일부러라도 좋은 분위기 만들어서 애들이 활동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고. 비활동 시즌인데 너무 애들 잡는 것도 안 좋잖아? 잡는 건, 컴백 때 해도 되니까.” “네, 뭐.” “그리고 가서 애들 햄버거 몇 개 먹었는지 확인해봐.” “네?” 방금 애들 좀 풀어주자더니? “그래도 많이 먹는 건 안 되지. 적당히 잡아줄 줄도 알아야지. 안 그럼 네가 왜 여기 있냐? 뭐 하냐? 안 가고?” “아, 네.” 희숙이 얼른 일어나 아이들에게로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런 줄도 모르고 웃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 “야, 오늘 정말 날 잘못 잡은 거 아냐?” 지태의 투덜거림에 채윤이 핀잔을 줬다. “봉사활동을 하는데 날이 어딨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야, 이것 봐라. 오늘 야외 활동을 금하란다.” 핸드폰에 뜬 경고 메시지를 보이며 항변하는 지태를 무시하고 세 사람은 부지런히 걸었다. “저긴가?” 2층짜리 다세대 주택처럼 보이는 건물은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었다. 많이 떨어져 있진 않았지만, 다른 집들과 거리가 있긴 했다. 다만 혐오시설이나 그 외 불편한 이유로 떨어져 있지는 않아 보이는데, 일단 건물이 새 건물처럼 보였고, 외벽에 칠해진 페인트는 밝은 아이보리 색감에 방금 칠한 것 마냥 깨끗했다. 주변으로는 큰 사각형을 그리며 담장이 서 있고, 건물의 앞에는 넓은 마당이 펼쳐져 있는데 과거 단유가 살았던 보육원에 있던 운동장만 하지는 않아도 어린아이들이 소꿉장난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어 보이는 마당이었다. “저기 맞네.” 채윤이 가리킨 손가락 끝에는 멀리 ‘진연 보육원’이란 명판이 입구 옆에 걸려 있었다. “되게 좋은 곳 같다?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보다 더 좋은데?” 지태는 연신 더위에 허덕대면서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 지치지 않는 체력은 명수 부럽지 않았다. “힘 있으면 이거라도 들어.” 채윤이 두 손에 든 봉지를 들어 보이며 힘든 표정을 지었다. 오기 전, 단유의 아이디어로 마트에 들린 이들은 먹을 것들을 한가득 샀다. 그냥 한 가득도 아니고, 각자 양손에 한 봉씩 들었다. “없어서 못 먹지, 있으면 금방 먹어.” 명수의 강력한 주장에 단유가 동의해주면서 마트를 쓸다시피 한 네 사람이었다. 물론 부피와 질량이 비례하지 않으니, 그렇게 무겁지만은 않았지만 더운 날씨에 뭔가를 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다 왔는데 뭘 그러냐? 그냥 들고 가.” 지태가 더운 공기를 후 뱉으며 보육원 입구로 힘차게 걸어갔다. “바람도 더워.” 더위를 많이 타는지 채윤이 한마디 했다. 사실 버스에서 내린 후부터 단유가 간간이 능력을 썼다. 하지만 공기마저 뜨겁게 데워진 터라 마치 온풍기에서 나오는 것 같은 바람에 더위가 쉽게 가시진 않았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낫겠지, 란 생각에 계속 능력을 사용하긴 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머리에 쓴 밀짚모자였다. “안녕하세요.” “어서들 와요. 어제 전화한 학생들 맞아요? 아이고, 어린 학생들이 무슨 돈이 있다고 이렇게 많이 사 들고 왔어요?” 지태가 입꼬리를 늘리며 자랑하듯 말했다. “혹시 몰라서 아무거나 다 사 왔어요.” “아이들이 좋아할 거예요. 이러지 말고 더운데 얼른 들어들 와요.” 네 학생을 맞이한 사람은 보육원의 부원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했고, 단유를 비롯한 아이들도 짧게 자기 이름을 소개했다. 흐뭇해하는 표정을 짓는 부원장은 재차 반갑다는 인사를 하며 상담실로 이들을 안내한 뒤, 말을 이었다. “원래 우리 보육원엔 방학 때마다 정기적으로 봉사 오시는 학생들이 있어요. 그래서 으레 그 학생들이겠거니 했는데 처음 오는 학생들이라고 해서 조금 놀랐어요.” 아이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다 단유에게로 시선이 몰렸다. 그래서 단유가 대표로 대답했다. “저희도 보육원 봉사활동은 처음이라서 잘 모르는 게 많아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와 준 것만으로도 아이들한테 도움이 많이 될 거예요.” 네 아이를 바라보는 부원장의 눈빛이 부드럽다. “저희가 뭘 도와드리면 되나요?” 결국, 지태가 먼저 나서서 물었다. “뭐 고칠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얘가 못질 같은 거 잘할 거예요. 힘이 좋거든요.” 지태가 명수를 가리키자, 명수가 왜 뜬금없이 자신을 가리키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얘는 꼼꼼해서 빨래 같은 거 시키면 잘할 거고요.” 이번엔 채윤이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얘는, 뭘 시켜도 다 잘할 거예요. 우리 학교에서 제일 똑똑한 애거든요.” “학교에서?” “전교 1등이에요. 3년 동안.” “어머, 얼굴만 잘생긴 줄 알았더니 머리도 좋은 친구였네요?” “잘 생겼죠?” “다른 학생들도 다 잘 생겼어요. 학생도 보니까 여자들이 많이 좋아할 얼굴인걸요?” “정말요? 흐흐, 그런데 제가 아직 여자친구가 없어서.” “봉사활동 다니다가 정이 들어서 사귀는 커플도 많아요.” “그 말씀은 계속 봉사활동을 하라는 말씀?” “학생도 머리가 좋네요.” “제가 잔머리는 좀 좋아요.” 바보스러운 웃음을 흘리는 지태의 넉살에 부원장이 소리 내어 웃었다. “재밌는 친구네. 그런데 처음 봉사 활동하는 학생들이 보육원에 오면 아이들부터 먼저 보려고 하던데, 학생들은 안 그러네요?” “아, 그게요.” 지태가 눈치를 보다가 대답을 단유에게로 넘겼다. 지태의 눈빛을 읽고 단유는 살짝 난감해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예전에 보육원에서 지냈거든요.” “예전에? 아, 부모님이 멀리 계셨었나 봐요?” “아뇨. 부모님은 안 계시고요. 초등학교 때까지 보육원에 있었는데, 중학교 올라올 즈음에 독지가분의 도움으로 따로 나와 살게 됐어요.” “어머, 정말요?” 부원장은 진심으로 놀란 표정이 되어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가 슬쩍 명수의 눈치를 살핀 뒤, ‘저 친구도 같이 지내다가 같이 나왔어요’라고 소개하자, 부원장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놀란 감정을 숨길 수 없다는 듯 손뼉을 쳤다. “전혀 몰랐어요. 아니, 그보다 미안하네요. 보육원에 있다 나왔다길래 지레 부모님이 계신 거라고 생각해서…. 혹시라도 마음에 걸린다면, 죄송하네요.” “아뇨, 사실 별로 감출 생각도 없었는걸요. 저 입 싼 친구가 방정을 떨지 않았다면 좀 더 자연스럽게 밝힐 생각이었어요.” “그렇군요.” 부원장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단유와 명수를 보았다. “어려운 점은 없고요? 하긴 두 사람 표정을 보니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제가 더 기쁘네요. …우리 아이들도 학생처럼 행복한 가정에 들어갔으면 좋겠네요.” “네.” 거기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해도 무의미하고. 부원장도 더 깊이는 묻지 않았다. “아, 그럼 보육원에 있는 동안 봉사활동 나오는 사람들을 많이 봤겠군요.” “네. 그때도 많은 분들이 보육원 내부의 잡일들을 도맡아 해주신 덕분에 꽤 편했던 기억이 있어서요. 아이들 보는 건 선생님들이 더 잘하시잖아요. 저희가 아이들을 만나봐야 서로 낯설어서 불편할 뿐이죠.” 순화시키긴 했지만, 단유나 명수의 경험에 비춰도 그런 식으로 대면하는 건 좋지 않았다. 아이들이 먼저 다가오면 모를까,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전시된 상품 고르듯 마주하는 건 받아들이는 아이들 입장에서도 껄끄럽다. “역시 속이 깊어요.” 부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오늘, 날이 너무 더워서 괜찮을까 모르겠어요. 오늘은 우리 아이들도 실외 활동을 못 하게 막아 놓은 상태라.” “괜찮아요. 물만 자주 마시면 별문제 없을 거예요. 오는 길에 이렇게 밀짚모자도 하나씩 샀는걸요.” 지태가 손에 쥐고 있던 밀짚모자를 흔들어 보였다. 과자를 사고 나오는 길에 시장 골목에서 팔고 있던 밀짚모자를 보고 지태가 충동구매를 해버렸는데 단유도 그게 나름 도움이 될 거로 생각해서 다른 아이들 것까지 사버렸다. 참고로 선물이나 모자를 사는 데 단유가 가장 많은 몫을 담당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돈이 가장 많으니까. 친구들은 모르지만 단유 통장에는 이미 본인 나잇대에 벌기 힘든 목돈이 저금 되어 있었다. 다른 애들은 그저 아르바이트한 거라고 알고 있지만, 단유의 통장은 정기적으로 불어나는 중인데다, 평소에도 써봐야 애들 용돈 수준이고 남들 다 가는 피시방도 잘 가지 않는 단유였기에 한 번씩 큰돈을 써도 몰아 쓴다 생각해서인지 이상하게 여기질 않았다. “사실 날만 덥지 않으면, 마당 주변에 난 잡초를 뽑아달라고 했을 텐데, 그건 좀 무리인 것 같아서 고민을 했는데….” 부원장인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학생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명수가 입을 열었다. “창문 닦을까요?” “창문을?” “아…예전에…누나랑 형들이 방의 창문들을 막 닦던 게 생각나서….” 명수가 수줍게 말을 잇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부원장은 그 모습을 보다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것도 괜찮겠네요. 보시다시피 우리 보육원 주변 길이 비포장도로다 보니 먼지가 좀 많이 쌓이거든요.” 영유아 보육원이기에 시설 관리를 할 직원이 모자란 편이기도 해서 창문 닦기나 이런 부분은 보통 자원봉사자들에게 맡기긴 한다. 어쩌면 갓 칠한 듯한 페인트도 주기적으로 봉사활동 나온 이들이 도움을 준 탓일지도 모르겠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네?” 곧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보육 교사로 추정되는 젊은 여성 한 명이 고개를 내밀었다. “다른 봉사자분들 오셨는데요.” “아, 그래요.” 부원장은 고개를 돌렸다. “사실 오늘 오기로 한 분들이 더 있거든요. 그 분들이랑 같이 하면 되겠네요. 같이 인사 나누실래요?” “그럴게요.” “그래요. 아, 이 선생님. 여기 이거 애들 간식인데 일단 주방에 놓아두죠?” “네, 선생님.” 이 선생님이란 분이 들어와 여러 꾸러미들을 보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채윤이 얼른 봉지들을 들며 말했다. “저희가 들고 갈게요.” “네, 고마워요.” 네 아이들은 다시 두 손에 가득 봉지를 들고 상담실을 나왔다. 복도를 뛰어다니는 아이들 몇몇과 눈이 마주쳤고, 아이들은 얼른 뒤돌아서 도망을 갔다. “부끄러워서 그래요.” “네.” 그 모습을 보니 옛 생각이 났다. 그리고 예전 보육원에서 함께 지냈던 아이들의 얼굴도 함께 떠올랐다. 슬쩍 명수를 보니, 명수도 비슷했던지 마침 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명수의 얼굴에 살짝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난 괜찮아, 라고 말하는 표정 같았다. ======================================= [526] 보리수 그늘 아래(6) “오늘 행사 끝나고 바로 올라오는 거예요?” 리더, 주현이 물었다. “그건 왜 물어?” “모처럼 부산에 가는 건데 바다도 좀 보면 좋지 않아요?” “무대가 바다 앞이니까, 그때 구경해.” “회 같은 것도 먹으면 좋은데.” “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희들 그렇게 먹는 것만 밝혀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 1년만 활동하고 그만두려고?” “겨우 회 한 접신데.” “겨우는 무슨. 그리고 니들 이제 겨우 1년 차야. 아직 성공한 거 아니라고. 원 히트 원더 몰라? 반짝 하고 사라지고 싶어? 응?” 매섭게 다그치는 매니저의 말에 리더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여튼 한 번 풀어주면 계속 풀어지려 한다니깐. 물론 아직 어린 아이들이고 한참 먹을 때, 라는 걸 모르진 않지만 이들은 보통의 여자 아이들과 다른 길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말이 나온 김에 매니저의 폭풍 설교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너희들에게 원하는 게 뭐라고 생각해? 너희 노래? 춤? 그것만 잘하면 될 거라고 생각해? 아냐. 너희 팬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건 너희의 모든 것이야. 패션, 헤어스타일 뿐만 아니라 말, 행동, 몸짓, 표정, 사소한 것 하나하나를 모두 지켜보길 원한다고. 그 모든 걸 사람들에게 모두 보여줘야 하는 게 아이돌이고.” 일요일이라 그런지 차가 조금 막히는 듯, 차량의 속도가 슬쩍 느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게 바로 이미지야. 그리고 너희들은 사람들에게 가장 완벽하고 이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서 보여줄 의무가 있는 아이들이고. 사소한 이미지의 흠결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실망을 안겨주는지 몰라? 몸매 관리가 되지 않아 배가 나오면 어떨 거 같아? 그때부터 너희들은 아이돌이 아니라 그냥 놀림감이 되는 거야. 사람들이 선망해야 할 대상이 될 수 없게 된다고. 그럼 끝이야. 말 한마디 잘못해서 공분을 사면 어떻게 될 거 같아? 그럼 끝이야. 거기서 다시 원래 이미지를 회복할 수 있을까? 어림도 없어. 가능하다 해도 수없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그걸 너희가 견딜 수 있을 거 같애? 유지하는 것도 힘들어하는 애들이? 그러니까 애초에 그런 일이 없도록 철저히 관리해야 하는 거야.” 시계를 슬쩍 보니 그렇게 촉박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여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양 차선에 차가 밀리니까 속도를 내고 싶어도 낼 수가 없다. 조수석에서 주변을 훑는 매니저의 시선을 느꼈는지, 희숙이 ‘다음 IC까지 가면 좀 풀릴 거예요’라고 조용히 말했다. “지금 톱클래스라고 불리는 애들이 잘하는 게 뭔지 알아? 자기 관리야, 자기 관리. 노래, 춤? 그건 기본이고 평소의 이미지를 잘 구축하고 유지하는 일을 잘한다고. 니들 눈에는 그 아이들이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것 같지? 벌어놓은 돈이 많으니까 펑펑 쓰면서 여유롭게 지내는 것 같지? 그 아이들은 말이야, 지금도 먹는 거, 입는 거 전부 신경 쓰면서 살아. 카메라가 없을 때도, 사람들이 많지 않은 곳에 있어도, 행동, 표정, 말 전부 조심하면서 산다고. 왜? 그런 사소한 것 하나가 꼬투리가 돼서 돌아온다는 걸 아니까.” 뒷자리에 앉은 아이들이 모두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룸미러로 슬쩍 본 희숙이 피식 웃었다가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요즘 리얼이 대세라지만, 진짜 리얼은 없어. 너흰 리얼처럼 보이는 리얼을 만들어내야 하는 거야. 알겠어?” 이 바닥에서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처절한 리얼’. 그것은 현실의 가혹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리얼이 대세가 되는 요즘, 더욱 리얼리티 있게 만들어야 하는 이미지 전쟁을 일컫는 단어다. 감정마저 ‘리얼’하게 꾸며야 하는 시대다. “괜찮겠지?” 매니저가 희숙에게 물었고, 희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강 휴게소만 지나면 풀릴 거예요. 그런데 잠깐 들려야 하지 않을까요?” “거긴 사람들 너무 많아서 안 돼. 그다음은 어디야?” “옥천 휴게소요.” “그럼 거기 가자.” “네.” 매니저가 다시 고개를 뒤로 슬쩍 기울이며 말했다. “휴게소에서 화장실만 잠깐 들렀다가 간다. 알았지?” “네.” 30분은 더 가야 할 거리다. “그리고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눈이라도 붙여. 시간 날 때 자는 것도 자기 관리야.” 쪽잠은 연예인의 필수 스킬이다. **** “안녕하세요.” “아이고, 어린 학생이라고 들었는데 다들 덩치가 어마어마하네.” 상대적으로 체격이 작은 편인 채윤만 수줍은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어디 학교에요?” “장계 중학교요.” “장계 중학교?” “장계동이요.” “아, 그래요?” 잘 모르는 눈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청호 봉사단이라고 해요. 인터넷 카페에서 활동하는 봉사모임이고요, 일주일에 한 번씩 이렇게 봉사활동을 다니죠.” 소개를 하고 있는 이는 청호 봉사단의 단장으로서 나이를 말하진 않았지만 겉보기에 50줄에 다다른 이로 보였다. 선입견인지 몰라도 환한 얼굴과 미소는 ‘착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학생들은 이번에만 봉사활동 온 건가요?” “네, 저희는 조금 즉흥적으로 결정한 면이 있어서요.” 단유는 친구들끼리 기억에 남을 일을 함께 경험하기 위해 선택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어린 학생들이 대견한 생각을 했어요. 제가 학생 나이 때는 방학 때 어떻게 놀까만 궁리했던 것 같은데.” “아저씨는 옛날부터 봉사 활동 많이 하셨을 거 같은데요?” 지태가 넉살 좋게 다가서니 단장이 크게 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요. 저도 봉사 활동을 하기로 마음 먹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아요.” 회사 생활을 하다 보니 너무 삶이 척박하다는 느낌이 들어 고민을 했고, 문득 대학 때 농활 갔었던 기억을 떠올려 봉사 활동을 해 볼까 생각했었다고 단장은 옛일을 털어놓았다. “지금도 가끔 저희 봉사단에 들어오게 된 계기를 말씀하시는 분들 중에 저랑 비슷한 사람이 많아요. 봉사 활동을 하면, 몸은 조금 힘들어도 마음이 편안해져서 일주일 기분 좋게 지낼 수 있다고도 말씀들 하시죠.” “그럼 단장님도 회사 생활하시면서 일주일에 한 번 활동하시는 건가요?” “사실 회사를 그만뒀어요, 저는. 회사 생활을 계속 하다보니 돈을 버는 건 둘째치고 몸이 너무 안 좋아져서요.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니까 도저히 계속 하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럼 봉사 활동만 하시는 거예요?” “아니요. 예전보다 봉사 활동을 많이 하긴 하지만, 개인적인 생활도 있으니까, 조그만 자영업도 하고 있죠.” 부원장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자, 다들 여기서 인사만 계속 하실 거예요?” “죄송합니다, 부원장님. 오랜만에 이런 어린 친구들을 만나니 어쩐지 흐뭇한 마음이 들어서요.” “단장님, 그럼 저흰 뭐가 되요?” “너희는 먹을 만큼 먹었잖아?” “저희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 안 했거든요?” 단장의 옆에서 재잘거리는 여고생 두 명의 말에 봉사단 사람들이 귀엽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튼, 만나서 반갑고, 그럼 오늘 우리랑 같이 할래요?” “네, 저희가 방해만 안 된다면요.” “봉사하는데 방해가 어딨어요? 다 조금씩 도우면서 작은 힘을 보태는 거죠.” 부원장이 웃으며 단장의 말을 거들었다. 청호 봉사단은 총 8명이었다. 가입된 이는 훨씬 많지만, 개인의 생활이 있는 이들이다 보니 다 같이 모여서 봉사활동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했다. “너희가 얘들이랑 나이 차이가 적으니까, 너희들이 옆에서 좀 도와주고 그래. 선배니까. 아, 얘들은 아까 들었다시피 고등학생들이고 3학년? 맞나?” “저희가 몇 살인지도 몰라요?” “3학년 맞을 거야. 둘 다 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지망한다고 하는데, 어지간하면 당분간 봉사는 쉬고 수능 준비하라고 해도 그렇게 말을 안 듣네. 요즘 사회복지학과도 꽤 점수가 높아서 쉽게 들어가기 어려울 텐데 말이다.” 말은 그렇게 해도 단장의 얼굴에는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 보였다. 새침한 표정으로 단장과 농담을 주고 받던 두 여고생은 단유네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박선하. 얘는 구지연. 효인여고 3학년이야.” 단유네도 짤막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일단 일부터 하자.” “뭐부터 하면 되나요?” “아까 들어보니까, 애들 옷이랑 기저귀 같은 거 빨래를 해야 한다는데, 옷은 세탁기가 해주니까 나중에 끝나고 말릴 때만 하면 돼. 그런데 기저귀는 손빨래를 해야 하거든. 그거 좀 도와줘.” “네.” 그때 단장과 이야기를 나누던 한 청년이 다가왔다. “너희 둘은 우리랑 같이 가자.” 단유와 명수를 가리킨 청년은 ‘힘 좀 쓰게 생겼네’라고 덧붙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보니 다들 웃음이 많은 것 같다. 그리하여 지태와 채윤은 두 여고생과 함께 빨래를 하러 가고, 단유와 명수는 청년을 따라 건물의 뒤로 향했다. “여기 철망을 수리해야 되거든?” 보육원 건물에 뒤에는 낮은 산이 하나 있는데, 가끔 너구리나 살쾡이 같은 야생동물들이 넘어온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얼마 전에 펜스를 만들어 막았는데, 이 펜스가 부실해서 새로 설치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땅을 파고 여기에 기둥을 박은 다음에 철망을 여기서 여기까지 설치하는 일이야. 쉽지?” 청년은 웃으면서 두 사람에게 장갑을 건넸다. “미리 이런 일 할 줄 알고 준비한 거 같은데?” 두 사람의 머리에 씌어진 밀짚모자를 가리키며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다. 여러 사람이 붙어서 하는 작업이라 일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단유와 명수는 별로 한 것도 없이 힘 좋다고 칭찬을 듣기 일쑤였고, 그런 칭찬에 명수도 흥이 났는지 얼굴이 벌개지도록 땀을 흘리며 땅을 파고 기둥을 박았다. 단유도 명수의 곁에서 그 못지않게 열심히 삽을 움직여 작업을 도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단유는 마법이라는 힘이 있고, 그 힘을 이용하면 지금 이런 불볕더위에 고생할 이유가 없다. 땅을 파는 것 정도야 손짓 한 번이면 끝날 일이고 기둥을 박고 흙을 덮는 것도 금방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그런 힘을 사용하지 못하고 이렇게 땀을 흘리고 있으니, 힘이 있어도 무소용이다. 하지만 힘을 사용했다면, 지금 명수가 흘리는 땀도 보기 힘들 것이고, 지금 느끼는 이 충만한 감정도 쉽게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덥지?” 단유의 물음에 명수는 삽질을 멈추고 허리를 피며 말했다. “응. 조금. 그런데 바람이 부니까 괜찮네.” 손을 슬쩍 들어올려 불어오는 바람을 손바닥으로 느껴보는 명수였다. 단유가 고개를 돌려 바람이 불어오는 산을 보았다. 푸른 나무를 거쳐 불어오는 바람이라 그런지 싱그럽고 시원했다. “오길 잘한 거 같다.” 다시 단유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명수가 히죽 웃으며 턱 끝에 맺힌 땀을 닦았다.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했다?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우리만 이렇게 편하게 지내도 되는 걸까?” 역시. 단유와 비슷한 생각을 먼저 떠올린 모양이었다. “보육원이란 곳에 다시 간다는 거 자체가 마음에 걸렸어. 그냥, 겁이 난다거나 그런 건 아닌데, 뭐랄까. 그런 거 있잖아? 난 니가 얼마나 힘든지 안다, 면서 잘난 척하는 기분. 그런 기분이 들까봐 무섭기도 하고 그랬어.” 정리되지 않은 명수의 말이었지만 단유는 조금 이해가 갔다. 명수는 그런 아이였다. 늘 자기 기분 좋은 일만 하는 것처럼 보여도 남한테 피해를 끼치는 일은 극히 피하는 성격. 알게 모르게 주위 사람들을 신경 쓰면서 그 사람들이 불편해하지 않을까, 눈치 보는 아이였다. 보육원 생활, 이라고 단순히 넘길 수만은 없는 게, 그것은 일종의 트라우마였다. 부모의 애정과 보살핌이 많이 필요한 나이에 그것으로부터 강제로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것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상처다. 그 상처를 가진 이들은 티가 나든 나지 않든 주위 사람들의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단유와 명수는 분명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과거를 잊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가슴 속 깊이 그 상처와 트라우마를 품고 살아야 한다. 어떤 이는 스트레스가 많은 환경에서 그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해 자신감을 잃고 웃음까지 잃었다. 또 어떤 사람은 두려움과 트라우마를 간직한 채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 시작인데 너무 감상이 빠른 거 아냐?" "그런가?"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이를 드러내는 명수였다. “뭣들 해? 점심 시간 전까지 끝내야 돼!” 건너편에서 삽질을 하던 청년이 웃으며 말했다. “네, 하고 있어요.” “후딱 끝내고 쉬자. 덥잖아.” “네!” 명수도 덩달아 웃으며 삽을 들었다. 단유도 일단 생각을 뒤로 하고 삽을 들었다. ======================================= [527] 보리수 그늘 아래(7) 다행히 점심식사를 하기 전, 작업을 모두 마칠 수 있었던 단유네는 욕실로 가서 등목을 했다. “일한 후에 등목은 필수야.” 청년은 웃음을 터뜨리며 단유의 등을 소리 나게 때렸다. “이야, 너 운동 좀 했나 보다? 몸 좋은데? 오, 명수 너도 보통이 아니구나? 요즘 중학생들은 다 이러냐? 너희 뭐 학교에서 맞고 살진 않겠다?” 열심히 맞은 덕에 징계를 피할 수 있었던 단유는 쓴웃음을 지었다. 차가운 물로 등목을 했더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어푸, 어흐, 어흑.” 명수의 엄살 섞인 신음에 청년은 물론이고 단유도 웃음을 터뜨렸다. 점심은 보육원에서 미리 준비해주었다 “입에 맞을지 몰라도 한 번 먹어봐요.” “이렇게 준비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반찬도 김치만 있으면 되는걸요.” 단유네와 같이 일했던 청년들 중 한 명이 너스레를 떨었고,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즐거운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참 웃는 걸 즐기는 사람들이라는 생각과 함께, 타인을 돕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기에 마음의 여유가 있어 저렇게 기분 좋게 웃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추측도 해보았다. “밖에 많이 덥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지태의 물음에 명수의 핀잔이 이어졌다. 명수도 땀 흘리며 정신없이 힘을 썼더니 도리어 기운을 차린 모양이었다. “우리도 고생했다고.” 빨랫감이 얼마나 많았는지, 기저귀를 깨끗하게 씻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를 장황하게 털어놓는 지태에게 조용히 있던 채윤이 한마디 했다. “밥 먹는데 그만하지?” 그냥 빨래도 아니고 기저귀였다. 작은 거, 큰 거 고루 섞인 기저귀들을 빨았던 기억에 비위가 상했던 모양인지 채윤이 미간을 찌푸리며 지태를 타박했다. 타박과 핀잔 속에서도 꿋꿋이 식사를 마친 지태는 디저트로 주어진 요구르트를 핥아 먹으며 다리를 쭉 뻗었다. “아, 좋다!” 지태의 얼굴에 가득 떠오른 미소를 보니 절로 행복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단유만의 느낌은 아닌지, 채윤과 명수도 흡족한 표정으로 지태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그늘을 지나는 바람을 맞으며 여유를 만끽했다. **** “지금까지 리본 소녀였습니다!” 리더의 선창에 이어, 다른 두 멤버도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두 손을 흔들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무대를 마친 리본 소녀 멤버들이 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다시 대기실로 돌아왔을 때, 희숙은 그녀들에게 수건을 한 장씩 건넸다. 부산이고 무대가 바닷가 옆이라도 덥긴 매한가지여서 고작 2곡을 불렀을 뿐인데 땀이 흥건했다. 옷의 재질이 바람이 잘 통하는 것도 아닌 데다, 머리카락이 모두 등을 덮을 정도로 길어서 더 더웠던 소녀들이었다. 세 사람 모두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늘어진 머리를 감아올리고 한 손으로 고정한 채, 다른 손으로 수건을 받아 목 뒤를 두드렸다. “수고했어.” “고맙습니다.” “얼른 정리하고 차에 타.” 야외무대라 천막을 치고 임시 대기실로 사용했는데, 선풍기가 돌아가긴 해도 덥긴 매한가지라 다들 빨리 밴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리더는 멤버들에게 ‘이어 마이크’를 받아 능숙하게 돌돌 감은 뒤 케이스에 집어넣었다. 그 사이 멤버들은 얼른 구두를 벗고 편한 신발로 갈아 신었다. 옷도 갈아입고 싶지만, 열악한 천막 대기실에서 옷을 갈아입기엔 어려운 점이 많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뒷무대를 준비하는 다른 가수 선배들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그 밖에 다른 스태프, 매니저들에게도 일일이 인사를 했다. 천막 앞 무대 스피커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악 소리 때문에 적당히 인사해서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리본 소녀는 큰 목소리로 ‘수고하셨습니다’를 외치며 인사해야 했다. 인사야말로 연예계 활동의 핵심, 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열심히 허리를 숙였다 폈다. 밴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뒷무대를 포기하고 리본 소녀를 보기 위해, 혹은 사진을 찍기 위해 달려든 팬들이 무리 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리본 소녀 멤버들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한 번만 쳐다봐 달라고 손을 흔들어댔다. 매니저와 희숙이 앞뒤로 서서 길을 트고 팬들이 들러붙는 것을 막으며 리본 소녀를 안내했고, 그 사이에 멤버들은 밝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거나 손 인사를 보내며 아는 체를 했다. 실제로 모인 사람 중에는 팬 사인회 등에서 자주 보는 얼굴도 있었기 때문이다. “비켜요, 붙지 마요!” “여기요! 여기 한 번 봐줘요!” 소란과 혼란 속에서 밴에 도착한 멤버들이 차에 오를 때, 뒤쪽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도연아! 아프지 마!” 도연은 돌아보며 ‘아프지 않아요’라고 변명했다. 그 대답을 끝으로 밴의 문이 닫혔다. **** “원래 오후에는 짬을 내서 보육원 아이들도 보고 같이 놀아주는 시간도 있는데, 오늘은 야외가 너무 더우니까 방에서 간단히 인사만 하는 정도로 하자.” 강당 같은 게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런 시설은 가지지 못한 영유아 보육원이었다. 결국 다 같이 모일 자리가 없으니, 봉사자들이 따로 가서 얼굴을 보고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결정했다. “저희는 그냥 일할게요.” 단유와 명수만 빼고. 지태나 채윤이는 그래도 보육원에서 애들이랑 놀아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란 생각에서 단장의 의견에 쉽게 수긍했지만, 단유와 명수는 그러지 못했다. “왜? 혹시 아이를 싫어하니?”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굳이 강요할 문제는 아니다만,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도 봉사야. 그리고 대부분 여기 오는 사람들은 그런 도움을 생각하고 오는데, 너희는 아예 작정하고 일만 하러 온 사람 같구나?” 단유는 명수를 바라보았고, 명수도 단유를 바라보다 머리를 긁적였다. 돕는다는 행위에 대해서는 모두가 같은 생각일 테다. 하지만 명수와 단유는 아이들을 만나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놀아줄게’라고 얘기하는 게 어색했다. 그건 마치 자기 자신에게 놀아줄게,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 단장님. 그 아이들은 제가 따로 부탁할 게 있어요.” 마침 부원장님이 원장실에서 나와 그 모습을 보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아, 그래요? 미리 이야기가 된 거였구나. 뭐, 알겠다. 그래도 봉사 활동 마치기 전에 잠깐 아이들을 만나서 인사라도 하렴. 정이 많이 고픈 아이들이니까, 잠깐이라도 만나서 자신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들이고 그들을 걱정하고 아껴주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려주는 게 중요해.” “네, 단장님.” 딱히 지적할 부분은 없는 말이었다. 좋게 생각하면, 너희가 받은 행복을 아이들에게도 나눠줘, 라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아이들과 자신을 비교하게 될 수밖에 없는 단유와 명수였고, 그때 느낄 감정과 생각들이 차마 마주하기 힘들었다. “괜찮니?” 부원장이 눈썹을 내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별일 아니에요.” 부원장의 물음과 단유의 대답 사이에는 묘한 간극이 있었다. 어쩌면, 부원장도 당사자가 아니기에 느끼지 못하는 감정이라, 단유와 명수의 태도를 오해한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답한 것처럼 ‘별일’까지는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래서 단유와 명수가 적당히 미화된 과거를 기억할 나이에 무덤덤해질 수 있는 노련함을 얻게 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될 일이었다. **** -도연이 오늘도 이상함? -뭔가 어색한 표정인 데다가 얼굴빛도 안 좋은 거 같음.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닌가? 아까 퇴근길에 괜찮냐고 물으니까 억지로 대답하는 것 같던데? -뒤에서 여자 매니저가 손으로 밀치는 거 본 사람? 막 구겨 넣는 것 같더라. -윤 팀장인가? 그 사람도 계속 인상 쓰고 있지 않았나요? -나도 봤음. -도연만 이상한 게 아니고 요즘 전부 이상한 거 같음. 오늘도 무대 끝나자마자 도망가듯이 가는 게 수상함. -원래 무대 끝나면 빨리 집에 가야 하는 거다. -아닌데? 원래 무대 끝나고 미니 팬미팅 같은 거 하고 그러던데? -솔직히 부산까지 왔는데 그 정도 팬서비스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이기적인 새끼를 봤나. 애들이 서울에서 여기까지 왔다가 다시 서울 가야 하는데, 안 피곤하겠냐? 걔들도 사람이다. -말 막 하네. 누가 이기적인데? 너 알바냐? -하여튼 이런 놈들 있어요. 남들이 애들을 아이돌이라고 상품 취급해도 팬이라면 상품이 아니라 사람으로 봐줘야 하는 거 아닌가? -씹선비 등장. -알바 2. -상품이고 인간이고 떠나서 팬들이 응원해주고 찾아와주면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는 게 예의 아니냐? 솔직히 팬 없으면 걔들이 어떻게 1등 먹고 그러냐? -분탕 치지 마라. 너 타 팬이지? -지랄하네. 미친 것들. 애들이 인사하고 안 하고가 뭐가 중요하다고. 지금 지랄하는 것들 반은 타 팬이거나 붙덕이다. 난 무대 봐서 좋았다. 팬 사이트에서 난리가 난 동안, 서울로 가는 밴 안은 더위에 지쳐 쓰러진 리본 소녀 멤버들이 쥐 죽은 잠에 빠져들었고, 매니저는 어두운 고속도로의 붉은 후미등을 눈으로 좇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저께 도연의 부탁 때문에 단유가 회사에 오는 것을 허락했다. 솔직히 지금도 그게 도연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싶은 의구심은 있었다. 하지만 의사에게 물었을 때, “일단 도연 씨가 원하는 방향으로 들어주세요. 지금 도연 씨에겐 심리적 안정이 제일 중요해요.” 라는 대답을 들은 뒤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금은 나아지겠지, 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역시 극적 반전은 없었다. 도연은 무대에서 계속 굳은 표정이었고, 무대 인사를 하는 데도 힘이 없는 모습이었다. “되도록 도연이는 안 잡는 방향으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부탁도 PD에게 해야 했다. “방송 화면상 안 잡힐 수가 없는데.” “그래도 부탁드립니다.”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에요?” “아뇨, 별일은 없고요. 조금 피곤해서 그래요. 도연이가 피곤하면 얼굴에 금방 드러나는 스타일이라서.” 피디가 혀를 차며, 애들 너무 막 굴리는 거 아냐, 라고 혼잣말 같은 비난을 할 때도 그저 웃음으로 때워야 했다. “아주 안 잡을 순 없지만, 되도록 카메라에 원샷이 안 잡히게 해 줄게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그게 더 오해를 살 수 있지 않을까?” “그건 저희가 감당해야죠. 우선은…팀이 살아야죠.” “…윤 팀장, 이기적이네.” 그래도 피디는 매니저의 말을 지켜주려 했고, 일단은 녹화방송이었기에 시간은 벌었다. 하지만 논란을 불식시키려면 빠른 조치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매니저는 수첩을 뒤적거리다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대훈씨? 나 윤 팀장인데. 부탁할 게 있어서. 거기 라디오 방송 혹시 게스트 필요하지 않아?” 얼굴이 보이지 않고, 무대도 아니니까 도연의 웃음소리를 들려주기엔 적당하리라. 설마 라디오에서마저 문제가 생길까. **** 돌아가는 버스에 올라탈 때 즈음, 다들 조금은 지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다고 시무룩하거나 우울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뿌듯한 그런 기분. 그래서 서로를 보며 유쾌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정도였다. 가장 뒷자리에 주르르 앉아서 저물어가는 노을을 얼굴에 담는 네 사람이었다. “오늘 여기 오길 잘했다.” “나도.” 지태와 채윤이 옆에 앉은 단유 등을 보며 말했다. “역시 믿고 맡기는 단유야.” “내가 뭐?” “네가 여기 오자고 해서 오늘 같은 경험을 한 거잖아. 사람을 돕는다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인 거 같아. 아까 만난 고등학생 누나들처럼 나도 사회복지학과나 가 볼까?” “네가 기분 좋은 게 봉사 활동을 해서인지, 아니면 누나들 전번을 따서인지 모르겠다.” “전번 땄어? 재주도 좋아?” “야, 내가 단유보다는 못해도 얼굴이 못생긴 편은 아니잖아? 나름 매력적인 얼굴이라고.” 자신의 외모가 여자들에게, 연상의 여자들에게도 먹힌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우리한테 매력 어필을 해서 뭐하게?” “…그냥 그렇다고.” 생각난 김에 문자나 보내볼까, 라며 핸드폰을 꺼내 드는 지태였다. “단유야.” 명수가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응?” “다음에 또 올까?” “…그래.” “오려면 다 같이 와야지? 이런 거면 집에서도 별로 반대 안 하겠는걸? 어차피 내신 때문에라도 봉사 활동 해야 하는데, 핑계도 대고 기분도 좋고, 일석삼조네.” “두 개는 알겠는데, 한 개는 또 뭐야?” “니들이랑 다 같이 할 수 있는 거잖아.” 아마 오늘 지태가 한 말 중에 유일하게 흘려듣지 않았던 말일 테다. ======================================= [528] 보리수 그늘 아래(8) “금방 나을 수 있었다면 애초에 저한테 오시지도 않았겠죠?” 말도 안 되는 컴플레인을 거는 매니저에게도 친절히 응대하는 여의사였다. “다른 방법 없습니까?”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제일 좋은 방법은 당분간의 휴식입니다. 전과 같은 방식으로 지내면서 좋아지길 바란다는 건 무리죠. 사람은 기계가 아니잖아요?” 그래도 매니저는 다른 선택권이 없는 상황이었다. 아직 많은 행사 무대가 남았고, 더군다나 리본 소녀는 이제 시작한 아이돌 그룹이다. 더 열심히 해도 모자랄 판인데, 도연만 빠진다면 무대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물론이고, 유 대표가 말했던 ‘문제 상황’에 직면하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생긴 것일까? “그리고 그 도연씨의 친구인가 했던 방법 말이죠.” “아, 네. 혹시 그게 좋지 않은 방법이었던 걸까요?” “아니요. 좋은 방법이에요. 그것도 일종의 이미지 심리 치료 방법이에요. 하나의 이미지를 자신이 생각하는 긍정적 이미지로 바꾸는 작업은 그 대상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자신의 긍정적인 내면을 드러내 보이는 효과도 있거든요.” “그런가요?” “도연씨에게 듣기로는 연기 연습 때도 사용했었던 방법이라고 들었는데, 실제로 역할 연기 치료를 할 때도 그런 방법을 차용합니다. 도연씨의 친구라는 아이가 알고 그랬는지는 몰라도 나쁜 방법은 아니에요.” 그렇다면 왜 도연이는 여전히 웃질 못하는 건가?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꾸준히 상담 치료를 하다보면 좋아질 거예요.” 그걸 기다릴 시간이 없다, 라고 말할 순 없어 그저 속만 태우는 매니저였다. **** 아침 운동을 나선 단유와 명수는 공원에서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땀을 식혔다. 새벽이라 시원하기도 했지만, 오늘 하늘에 낀 구름을 보니 요 며칠 동안 이어진 폭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에어컨 없으면 잠도 못 잘 거 같네.” 열대야가 심해서 잠들기가 쉽지 않아, 라는 핑계로 밤늦게까지 컴퓨터를 붙들고 있던 명수의 말이라 믿음은 가지 않았지만, 더운 건 사실이었다. 단유는 푸른 나무의 잎사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감상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제는 능숙해져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디아트리의 호흡을 구사하게 되었다. 머리가 맑아지고 몸 구석구석까지 힘이 전달되는 게 느껴질 정도다. 무엇보다 이 호흡을 하는 동안은 시야의 한계가 흐려지는 기분이었다. 단지 앞만 보는 게 아니라 옆과 뒤의 움직임과 변화가 보지 않아도 느껴지고, 마주한 사람의 미세한 변화도 눈으로 인지하는 것 이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명수가 뱉은 거친 호흡 속에서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고민하는 게 있어?” 단유의 물음에 명수가 곁눈으로 단유를 본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냥, 요즘 옛날 생각이 나서.” “옛날 생각?” “예전에 같이 지냈던 아이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 형근이 형, 철용이 형, 다영이 누나, 소미 누나, 윤정이 누나, 기웅이 형, 유철이, 재민이, 지선이 다들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 명수의 입에서 막힘없이 나오는 이름들을 보니 명수가 실제로 그들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유는 잠시 그 이름들과 얼굴들을 떠올리다 대꾸했다. “지선이는 보러 갈 수 있잖아.” “아프다며?” 어릴 때는 몰랐는데, 지선이가 보기보다 몸이 약했다. 작년에도 감기 때문에 학교도 빠질 정도라 해서 병문안을 가기도 했는데, 그 이후로 지선이는 계속 아팠다 나았다를 반복했다. “한 번 보러 가자.” 이런저런 이유로 지선이를 자주 보러 가질 못했던 두 사람은 생각난 김에 지선에게도 병문안을 가기로 결정했다. “오랜만이구나?” 지선의 아버지이자, 학교의 수학 선생님이신 승민이 두 사람을 반겼다. 사모님도 나와서 두 사람을 두 팔로 안아주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어쩜 이렇게 컸어? 이러다 두 사람 다 농구 선수 하는 거 아냐?” “얘는 몰라도 전 아니에요. 전 무조건 축구 선수 할 건데요.” “알지, 우리 명수가 축구 잘 하는 건 내가 왜 모르겠어? 그만큼 키가 컸다는 소리지.” 반달 눈으로 명수의 등을 톡톡 두드려주는 사모님에게 명수는 히죽 웃음을 지어보였다. “지선이는요?” “아, 지금 방에 있어.” “자나요?” “응. 사실 조금 전에 잠들었어.” 승민이 끼어들었다. “이러지 말고, 일단 거실로 가자.” 승민은 두 아이를 거실로 안내했다. 세 사람이 자리를 잡는 사이, 사모님은 주방에 들어가 음료수를 준비했다. “어떻게, 방학은 잘 지내고 있냐?” “저희 지난주에 봉사활동 하고 왔어요.” “나름 내신 걱정은 하나 보구나?” 승민은 명수를 보며 기특하다는 듯 물었다. “내신 때문이 아니라요, 그냥 친구들이랑 기억에 남을 일을 남기고 싶어서요. 보육원으로 봉사 활동을 갔었어요.” “보육원?” 승민이 살짝 놀란 눈으로 두 아이를 쳐다보았다. 물론 못 갈 곳은 아니지만, 두 아이가 어떤 생각으로 보육원을 갔을까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단유가 명수 대신 설명을 보충했다. 간간이 명수가 봉사 활동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했고, 어떤 감정을 느꼈었는지를 곁들이니 승민은 대견하다는 얼굴로 두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 사이 사모님도 자리에 함께 해서 두 아이를 칭찬하며 한동안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엄마.” 방문이 열리고 눈을 비비며 나타난 지선의 등장으로 대화가 끊어졌다. “깼니, 지선아?” “…안녕?” 멀뚱히 거실을 보던 지선이 시크하게 인사를 하자, 단유는 그만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우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깬 거 아니지?” 명수가 히죽 웃으며 물었다. “오빠 목소리가 제일 크더라.” “넌 꼭 말을 해도 그렇게 하더라.” “뭐 사 왔어?” “뭐?” “병문안 온 거잖아? 그럼 뭐라도 사 들고 왔어야지, 빈손으로 왔어?” “야! 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지!” “엄마, 저 오빠 돌려 보내.” 거실에 웃음꽃이 피었다. **** 팬카페에서 시작된 논란은 곧 몇몇 커뮤니티로 옮겨갔다. 그리고 커뮤니티와 팬카페를 들락거리며 기사거리를 찾던 기자의 눈에 띄었다. 「리본 소녀 불화설, 그 정체는?」 「리본 소녀, 무대 불성실 논란」 언론은 제목 짓기에 열중했고, 곧 세인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자극하여 페이지뷰 수를 늘렸다. 그리고 기사는 카페 내에서 논란 중인 내용을 마치 사실인 양 써놓고 소속사의 대응을 기다린다는 식으로 마무리했다. 그러자 열성팬들이 그 기사에 몰려들어 리본 소녀를 옹호하기 시작했다. -개념 없는 기자 새끼, 취재도 안 하고 뇌피셜이네. -없는 소리 지어내는 기레기가 또. 열성 팬덤은 언론의 기사를 부정하고, 기자를 모욕했다. 기자는 다시 그런 팬덤의 경향성과 가수에 대해 부정적인 기사를 토해내고, 다시 팬덤은 방어와 공격으로 자기 가수를 지키고 사방에서 몰려드는 창날같은 독설에 맞대응했다. 논란은 또 다른 논란을 낳고, 충돌은 더 큰 충돌을 야기했다. “왔는가.” 유 대표는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으며 룸으로 들어오는 심 대표를 맞이했다. “언제 왔어? 오래 기다렸나?” “아냐, 나도 방금 왔어.” 심 대표도 식탁 앞에 자리하고 앉자, 유 대표는 자연스럽게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요즘 너무 돌아다니는 거 아냐? 좀 쉬엄쉬엄해. 그러다 자네 먼저 지치겠어.” “자네야말로 보신 좀 하고 살아. 제수씨가 자넬 못 알아보겠어.” “살이 좀 많이 빠지긴 했지? 굳이 다이어트 할 생각은 없었는데, 얼굴이 이러네.” 자신의 얼굴을 문지르며 머쓱하다는 시늉을 해 보이는 유 대표였다. 소리없는 웃음과 함께 잔을 들어 보이자, 심 대표도 잔을 들었다. 특별한 건배사 없이 유리잔의 작은 울림으로 건배를 대신했다. “그런데 말이야.” “음.” “리본 애들은 어떻게 하지?” 심 대표는 유 대표의 걱정에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하긴 뭘 어떡해 해? 그냥 둬.” “자네는 요즘 기사 안 보나? 좀 시끄러워야 말이지.” “원래 언론이란 게 그래. 사소한 거로 떠들어대고. 그런 걸 일일이 대응하려 하면 피곤하기만 하고, 또 괜한 오해를 낳을 뿐이야. 지금은 그냥 가만히 두는 게 상책이라고.” 심대표는 별로 걱정 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유 대표는 느긋해 보이기까지 하는 심 대표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 대표는 그런 유 대표의 표정을 일견하고 말을 이었다. “자네가 지금 외부 일로 정신없는 건 알겠지만, 안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은가? 일단은 나한테 맡겨.” “그럴 수 없으니 하는 말이지. 벌써 홍콩 쪽에서 전화가 왔어. 문제없는 거냐고.” “걱정 말라고 전해. 어차피 리본 소녀도 상반기 활동 마무리하고 나면 휴식이고, 그 휴식기간 동안 재정비하면 돼. 들어보니 도연이도 당분간 휴식만 취하면 좋아질 거라고 했다니까 일단 그렇게 믿고 가면 돼.” 심 대표는 자신이 직접 캐스팅한 도연에게 신뢰가 있었다. 아직 어린 아이고 연예계란 곳에 적응한 지 이제 1년도 채 안 된 아이였다. 경험과 경력이 쌓이면 충분히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이 많은 아이였다. “포기할 생각은 없나 보군.” “포기라고? 누굴? 도연이?” 유 대표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심 대표는 고개를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절대. 그 아이, 충분히 이 바닥에서 뜨고도 남을 아이야. 내 눈 알잖아? 만약 지금 그 아이 놓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거야.” “그 아이가 언제 뜰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란 생각이 들어. 특히 지금 이 시기에 그 아이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보라고. 어쩌면 리본 소녀가 완전히 묻히는 수가 있다고. 이 봐. 연예인은 이미지야. 이미지로 먹고 사는 애들이라고. 그런데 그 이미지에 심각한 금이 갔어. 고장난 상품은 수리를 하든, 교환을 하든 해야지.” “자네 말대로야. 고장 났다면 수리를 하면 되지, 고장 났으니까 버리는 건 낭비야.” “자네가 계산이 빠른 건 알지만, 이번 일은 일단 나한테 맡겨. 언론도 내가 알아서 만져볼 테니까.” “가능하겠어?” “윤 팀장도 자신 있다고 하니까.” “윤 팀장이?” 재능있고 욕심도 많은 매니저 출신 팀장. 밑바닥에서 오래 구른 탓에 이 바닥 생리를 잘 꿰고 있기도 하거니와, 성실함과 재치를 두루 갖춘 인물이라 인정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윤 팀장은 정이 많다. 때로는 정이 사업적 판단을 내리는 데 걸림돌이 된다, 고 유 대표는 생각했다. “요즘 대세가 리얼이잖아? 솔직한 거.” “뭐, 그래서 솔직하게 이야기하자고? 뭘? 아이돌 1년 차가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고? 그게 회사 이미지에 더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거참, 성격도. 혼자 시나리오 쓰지 말고. 일단 이런 식으로 갈 생각이야.” 심 대표는 며칠 전 윤 팀장과 이야기를 나눴던 내용을 유 대표에게 들려주었다. “그게 될까?” “잘 되길 바라야지. 잘 될 거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자네 말대로, 아이돌은 이미지잖아? 이참에 이미지 하나 만들어보는 거지.” 심 대표는 이야기는 여기까지라는 듯, 술잔을 들어보였다. 유 대표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술잔을 마주쳤다. “그나저나, 자네 이야기나 해봐. 홍콩은 완전히 픽스가 된 거야?” “이 상황에서 픽스는 무슨.” “이럴 때일수록 더 여유를 보여야, 투자자도 자넬 믿을 거 아닌가.” “나를 믿으면 뭘 하나? 회사를 믿어야지.” “회사가 곧 자네고, 자네가 곧 회사야. 대중들에게 아이돌이 하나의 표상이듯, 투자자들에겐 자네가 표상이야.” “하아. 이럴 때는 차라리 자네 단독으로 대표 이사를 맡는 게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아까도 말했지? 난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그 눈이 자네를 공동 대표로 뽑은 거야. 날 믿어.” 사람 구슬리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다, 심 대표는. ======================================= [529] 보리수 그늘 아래(9) “엄마 나 씻을래.” “그럴래?” 사모님이 일어나 지선이를 데리고 욕실로 데려갔다. 그 뒷모습을 의아하게 쳐다보는 명수에게 승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선이가 힘이 많이 없어. 그래서 욕실에서 혼자 씻다가 자주 넘어졌거든.” 자신의 두 발로 오래 서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몸이 약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명수의 눈이 금방 그렁그렁해졌다. “운동을 좀 하면 괜찮을 거야. 병원에서도 운동을 하라고 권하기도 했고.” 요즘은 밖이 더워서 산책을 하기가 어렵고, 그래서 집 안에서 걷거나 어머니나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계단을 오르내리는 운동을 하는 중이란다. “심각한 병이 있는 건 아니죠?” “그런 건 아니라더라. 그냥…몸이 좀 약하대.” 겨울이면 감기를 달고 사는데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여름에는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걱정될 정도고. “아 참. 지선이 방 좀 볼래?” “지선이 방을요?” 승민이 먼저 일어나 두 사람을 데리고 지선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벽을 가득 메운 브로마이드였다. “집에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음악도 자주 듣게 되고 그러면서 저런 애들이 좋다고 앨범을 사달라거나 브로마이드 좀 구해달라거나 하는 부탁을 하더구나.” “우와.” 명수가 입을 쩍 벌리고 벽에 도배된 브로마이드를 바라보았다. 브로마이드 뿐만 아니라,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사진을 확대해서 붙여놓기도 했다. “리본 소녀가 대세는 대세인가 봐요.” 명수의 말에 승민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음반매장에 가서 애들 줄 선 틈에 같이 껴서 있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냐?” “선생님이 직접 가서 줄을 서셨다고요?” “우리 학교 애들이 없어서 다행이었지, 있었으면 얼굴도 못 들 뻔했다.” “선생님이 거기서 수줍은 표정으로 줄 서 있는 모습이 상상이 안 돼요.” 명수의 말에 선생님은 정색을 하며, ‘수줍은 표정이라니!’라고 항변했다. “딸을 위해서라면 뭔들 못 할까. 니들도 나중에 결혼해봐라. 그럼 안다.” “전 결혼해도 그렇게는 안 할 거 같아요. 그리고….” 명수는 단유를 가리켰다. “얘가 있는데 굳이 줄을 설 필요가 있을까요?” “나?” “왠지 너라면 가수한테 직접 싸인 시디를 받아올 거 같단 말이지.” “내가 무슨 능력으로?” “싸인 티셔츠도 받아왔잖아?” “사인은 니가 받았잖아?” “따지면 다 네 덕분이지.” 무슨 이야기냐고 묻는 승민에게 명수는 도연과 함께 촬영했었던 이야기를 신나게 털어놓았다. “그럼 도연 언니 사인 티셔츠가 있다는 소리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야무지게 감아 얹은 지선이 동그란 눈으로 명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명수는 히죽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부럽지, 라는 표정의 명수에게 지선이 말했다. “내놔.” “뭐?” “티셔츠.” “맡겨 놨냐?” “선물 사 왔어?” “무슨 선물?” “병문안 선물.” “얘 진짜 왜 이러냐?” “안 사 왔으니까 티셔츠 줘.” “맡겨 놨냐? 그리고 그 티셔츠에는 내 이름 적혀 있거든?” “귀여운 동생한테 그러면 못 써.” “자기 입으로 귀엽다느니 하는 건 안 부끄럽냐?” “전혀. 그러니까 내놔.” “못 줘.” 이대로 유치한 말장난 같은 대화를 듣고 있기가 힘들었던 단유가 나섰다. “내가 받아다 줄게.” “정말요?” 기다렸다는 듯 활짝 핀 얼굴로 되묻는 지선에게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었다. 아파서 바깥출입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불쌍한 팬을 위해 사인 티셔츠 정도는 해주겠지라는 기대도 있었다. “단유 넌, 진짜 연예인 쪽으로 갈 생각이 없는 거지?” 승민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네.” “다재다능한 것도 고민이겠구나.” “별로요.” “다재다능하다는 말은 인정하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없는 이야기는 아니죠.” “보셨죠? 단유 뻔뻔한 거? 얘가 이렇다니까요? 사람들은 단유가 착하기만 한 줄 안다니까.” “뻔뻔한 거랑 착한 거랑 무슨 상관이라고.” “아니 얘는 왜 계속 내 말에 태클을 걸지?” “모자란 오빠 가르쳐주는 거야.” “모자라?” 욕실을 정리하고 나온 사모님이 웃으며 대화를 강제 종결시켰기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점심시간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 도연은 병원을 나와 차에 올랐다. 미리 차에 탔던 매니저가 뒤를 흘깃 쳐다보며 물었다. “갈까?” “네.” 운전은 윤 매니저가 맡았다. 희숙은 다른 멤버들 일정 때문에 그쪽으로 붙은 상황이었다. 밴도 희숙에게 맡겨서, 매니저의 자가용으로 이동 중이었다. “음악 틀어줄까?” “아니요.” 도연의 기운 빠진 모습에 매니저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가 곧 목소리를 바꿔서 되물었다. “상담은 어땠어?” “괜찮았어요.” “금방 좋아질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네.” 브레이크를 꾹 밟고 신호를 기다리는 와중에 룸미러로 도연을 바라보니, 도연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는데 그 모습이 사뭇 처연해 보였다. 며칠 전, 심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결론은 도연을 보호해주자는 것이었다. 아티스트를 보호하는 것은 회사의 의무이고 정체성이었다. 이 사태를 잘 마무리해야 다음에 들어올 아티스트들, 아이돌이든 다른 영역의 연기자들이든 회사를 믿고 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단기적으로 보면 안 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뜻을 맞췄고, 그래서 도연을 지키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을 강구했다.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본인도 자신의 문제점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고 개선하려는 의지가 있기 때문에 꾸준한 상담 치료와 적당한 휴식만 있다면 좋아질 거라고 했다. “조금 힘들겠지만 조금만 힘내자. 곧 활동 마무리할 거니까 그때까지만 조금 더 버티자. 알겠지?” “네.” 도연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지금 이 시각, 도연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TV 예능에 출연해서 녹화 중일 것이다. 지금 가장 힘든 사람은 어쩌면 자신보다 멤버 언니들, 이라고 도연은 생각했다. 연예인은 감정 노동자이다. 끊임없이 웃고 웃어야 한다. 카메라 앞에서의 문법은 일상의 문법과 달라, 끊임없이 머리로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뱉어야 한다. 조심스럽다고 해서 말을 하지 않으면 또 안 된다. 쉴 틈 없이 사이를 끼어들며 말하고 웃어야 한다. 섹시 컨셉이 아니더라도 아이돌은 날씬한 몸매와 짧은 치마, 혹은 쇼트 팬츠에 어울리는 몸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먹을 것도 못 먹고, 카메라 앞에서는 몸에 힘을 주고 있어야 한다. 끊임없이 말하고 웃으면서 예쁜 자세가 나오도록 신경 써야 한다. 그것만도 힘든데, 멤버들은 도연까지 신경 써야 했다. 기자들의 짓궂은 질문에도 나긋나긋하게 웃으면서 ‘우리 도연이 괜찮아요. 원래 몸이 약한 친구라서 그래요’ 라고 대신 변명해주면서 불화설을 일축한다. 그 때문에 매니저도 도연에게 붙었다. 아마 지금 계속 말을 붙이며 기분을 좋게 해주려 애쓰는 매니저는 다른 한쪽으로는 멤버들이 잘하고 있을지 걱정하는 마음으로 혼란스러울 것이다. “미안해요.” “뭐가?” “전부 다요.” “그런 생각하지 마라. 니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니가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 “제가 잘못한 거예요. 제가 언니들한테도 폐를 끼치고, 회사에도 폐를 끼치고….” 말을 하던 도중에도 울먹이더니 결국 눈물을 떨어뜨리는 도연이었다. 조용히 운전대를 잡고 있던 매니저는 묵묵히 운전을 해 나가다가 적당한 곳에서 차를 세웠다. “도연아.” “…네?” “실은 이 문제 때문에 심 대표님이랑 이야기를 나눴는데 말이야.” “…….” “너만 괜찮다면, 언론과 단독 인터뷰를 잡는 게 어떨까 하는데 말이야.” “단독 인터뷰요?” “연 데일리의 박 기자 알지? 내 친구.” “네.” “그 친구랑 인터뷰를 하는 게 어떨까 해.” 도연은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거기서 네 병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거야.” “네?” 울먹임도 멈추고 매니저를 바라보는 도연이었다. 심 대표와 대화로 나눈 전략은 이랬다. “먼저, 도연이가 밝히는 거야. 자신이 지금 자신의 표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병이 있다고 말이야.” “병이요?” “일단은 그렇게 이야기를 해. 그리고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얼마나 힘든지도 고백하는 거지.” “그건….” 연예인이 스스로 힘들다고 고백하는 건 긍정적인 효과보다 부정적인 효과가 더 크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싸구려 급식보다 못한 부실한 식사로 몸매를 유지한다는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런 수고로움에도 연예인들은 일반인들이 거두기 어려운 수익을 거둔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행복한 고민’을 하는 사람 정도로 연예인을 생각한다. 더구나 아이돌이라면, 게다가 데뷔하자마자 음악 프로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인 대세 아이돌이라면, 그녀의 고민은 그저 사치에 겨운 불평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서 너의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거야.” ‘솔직한’이라는 워딩에 의아함을 품는 도연.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연예인이지만, 연예인 역시 사람이다. 비록 연예인이 우대받으며 특별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삶은 한순간도 카메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이다. 팬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 때문에 행복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한쪽에서만 보는 시각이다. 실제로 연예인은 관심과 무관심의 경계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앞선다.” 도연은 입을 다물고 매니저의 이야기를 들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그렇게 느끼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 이야기를 대중에게 꺼낸다는 건 또 다르다. 진실하되 솔직하지 마라. 연예계의 격언(格言)이다. “그래서 병원에 다니며 심리 상담을 받는 중이다.” “그렇게 이야기하라고요?” “이런 취지가 담기도록 이야기하란 거지.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너에게 동정심을 가질 수 있도록. 그리고 사람들이 너에게 ‘똑똑하다’는 이미지를 갖도록.” “언플 아닌가요?” “맞아, 언론 플레이. 하지만, 없는 이야기는 아니잖아. 너 똑똑하고 열심히 하는 이미지잖아. 아직은 팬들에게만 각인된 그 이미지를 널리 알리자고.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너를, 그리고 리본 소녀를 머리에 새길 수 있게 하자고.” 매니저가 몸을 돌려 뒷좌석에 앉은 도연을 바라보았다. “이런 것까지 이야깃거리로 만들어서 장터에 내놓아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몰라.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위기를 기회로.” 심 대표가 강조했던 이야기였다. ‘이건 기회야’.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지는 네가 생각해야 돼. 네 생각을 말하는 거니까.” “간단히 이야기하면 저를 포장하라는 거네요.” “맞아. 포장. 저질스럽고 작위적인 느낌이 들겠지만, 결국 포장이야. 하지만 부정적으로 볼 문제는 아니라고 봐. 비단 연예인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포장해. 취업준비생이 자기소개서를 쓰는 것도 포장이야. 그리고 자신을 상품화시켜서 기업에 내놓지. 자신이란 상품을 사달라고. 그거랑 똑같은 거야.” 도연은 고개를 숙였다. 이성과 감정이 혼란스럽긴 하지만, 이해 못 할 내용은 아니었다. 좋게 생각하면, 지금 멤버들이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만약 매니저의 말대로 된다면, 리본 소녀를 홍보하는 효과도 있을 테니 기꺼이 할 수 있다. “할게요.” 자신은 ‘리본 소녀’의 도연이니까. “그래.” 매니저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 “오빠, 도연 언니랑 친해?” “음, 아니.” “안 친해?” “친하다기보다는 그냥 아는 사이?” 지선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물었다. “나보다는 덜 친하다는 소리야?” “그렇게 이해해도 되고. 그런데 왜?” “아, 요즘 그 언니 많이 아프다고 하잖아.” “아, 응.” “병문안 안 가나 해서.” 단유는 대답 대신 머리를 긁적였다. 명수가 끼어들어 지선의 궁금증을 해결해주었다. “그냥 같이 일만 한 번 했을 뿐인데 뭐가 친하겠어. 친할 틈도 없었지.” 명수는 단유가 방학식 날 도연에게 갔었던 일을 모른다. 그래서 지난 몇 달 전 촬영 이후, 도연과 연락이 끊어졌다고 알고 있었다. 때문에 아까 지선에게 사인 티셔츠를 받아준다고 했을 때도 눈빛으로 ‘가능하냐고’ 묻기까지 했었다. “도연 언니랑 친하면 좋을 텐데.” “왜?” “그럼 나도 오빠랑 같이 가서 도연 언니 볼 수 있잖아?” “지금도 같이 가면 되지.” “안 친하다며? 안 친한데 가면 민폐야.” “이야, 네가 민폐란 말도 다 알아?” “그 정도는 상식이거든?” “이건 맨날 나한테만 그래?” “오빠가 먼저 멍청한 소리 했거든?” “이게 정말!” 단유는 명수를 막은 뒤, 지선에게 물었다. “넌 도연 누나가 좋아?” “응.” “왜?”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그리고 예쁘고 똑똑하잖아.” “그건 다른 사람도 다 그런데?” “아냐, 난 도연 언니가 제일 좋아.” “악개네, 악개.” 명수가 입술을 삐죽이며 끼어드는 걸 다시 말렸다. 그 틈에 지선이 말을 이었다. “나도, 그 언니처럼 춤출 수 있었으면 좋겠어.” 연예인이 되고 싶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활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으로 들렸다. 단유는 지선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 [530] 보리수 그늘 아래(10)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단유인데요. “어, 그래. 웬일이냐? 네가 전화를 다 주고?” ―실은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단유는 매니저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아픈 동생이 있는데, 그 동생이 리본 소녀를 좋아하더라, 그래서 리본 소녀의 사인 시디를 얻어서 주면 그 동생에게 힘이 될 거 같더라. ―어려운 부탁이겠지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단유는 이런 부탁을 처음 하는 것이지만, 매니저는 수도 없이 들었던 부탁이었다. 그래서 그냥 적당히 핑계를 대서 거절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단유는, 비록 큰 도움은 안 됐지만―매니저는 그렇게 생각했다―도연을 도와주러 와주기도 했었던 이였기에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적어도 기브 앤 테이크는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매니저였다. “알았다.” ―그런데 도연 누나는 좀 괜찮나요? “그래,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중이야.” 실제로는 큰 변화를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낫고 있으리라 매니저는 믿었다. 그리고 비록 도연의 실제 심리 상태는 그대로라 하더라도, 여론은 변했다. 이틀 전, 도연은 매니저와 동행하여 연예 전문 매체의 기자를 만났다. 그리고 매니저가 이야기해준 것과 같은 방향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럼 지금 병원에 다니고 계신단 말이군요.” “네.” “얼마나 되셨죠?” “2주 정도 되었어요.” “물론 본인이 제일 힘드시리라 생각해요. 하지만 그 사실을 이렇게 알리는 이유는 뭔가요? 사람들이 알면 본인의 이미지에 많은 타격이 있을 것 같은데요.” 도연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그 순간을 포착한 사진 기자의 카메라가 후레쉬를 터뜨리며 그 장면을 담았다. “그렇죠. 전 아이돌이에요. 아이돌이라면 개인의 이미지 뿐만 아니라 팀의 이미지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래서 이런 고백이 저희 그룹, 저희 멤버 언니들에게 좋지 않게 작용할 수도 있다고 봐요.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제 상황을 팬들에게 알려서 팬들의 오해를 풀어주는 것도 제 몫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말은 현재 항간에 떠돌고 있는 리본 소녀 불화설은 사실이 아니란 말인가요?” “네. 저희 멤버들은 여전히 끈끈한 우정을 보여주고 있고요. 그뿐 아니라 저로 인해서 저희 그룹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들이 나오는 와중에도 제가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해서 매일 다독여주고 기운을 북돋아 주려고 노력하고 있거든요.” “그렇군요. 그럼 다시 도연 씨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조금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심리적인 문제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것이라면, 혹시 공황 장애 같은 건가요?” “아니요. 선생님 말씀으로는 그런 경향도 있긴 하지만, 주로 저의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때문이라더군요.” “자신감이요? 그건 솔직히 이해가 잘 가지 않는군요. 리본 소녀는 현재 아이돌 시장에서 가장 잘 나가는 그룹이고 데뷔와 후속곡이 모두 차트 상위권에 오른 팀입니다. 자신감이 넘쳐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건 주위에서 봐주시는 모습이죠. 사실 저도 연예인이 되기 전까지, 톱스타에 오른 이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보며 연예인을 꿈꿨으니까요. 하지만 이 자리에 있고 보니, 전 하루하루를 매일 공포와 불안에 떨어야 했어요.” “공포요?” “만약 차근차근 올랐다면, 그래서 제 노력이 빛을 받아 대중의 인정을 받았다는 생각에 자신감이 생겼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흰, 아니 저는 갑자기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제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빠른 시간에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죠. 그래서 불안했어요. 언제 이 사랑으로부터 외면받게 될지, 갑자기 어느 날 사람들이 절 무관심하게 쳐다보게 되면 어떡하나 두려워하기 시작했어요.” “이해가 갈 듯 하네요.” “사랑이 그렇잖아요? 갑자기 그 사람이 좋아졌다가도 갑자기 그 사람이 싫어지듯이요.” “사랑, 해 보셨나요?” “다른 사람이 하는 그런 정도예요. 짝사랑. 고백도 못하고 멀리서 바라만 보는, 그런 거요.”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건가요?” “그럼요. 하지만 제 나이 대의 사랑이 그렇잖아요.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풋사랑. 저도 그랬어요. 그냥 멀리서 보고, 저 사람 멋지다, 라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가슴을 태우다, 갑자기 식어버리죠. 그리고 생각해요. 내가 왜 저 사람을 좋아했을까?”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그럼 지금 팬들이 도연씨에게 보내는 감정이 그런 감정 같다는 이야긴가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뜨겁게 타오르는만큼 금방 식을 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저를 불안하게 했죠. 무엇보다 제 노력 이상의 결과로 인해 얻은 영광이잖아요. 그래서 저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했고, 그런 불안과 공포가 무대에서 절 얼어붙게 만들었다, 고 의사 선생님이 진단해주셨죠.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들어보니, 어쩌면 다른 정상에 오른 아이돌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럴 거라고 봐요. 하지만 그 분들은 소위 멘탈이라는 게 강한 분들이라 매일매일 자신을 다잡고 끊임없이 노력하시는 분들이겠지만, 전 제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약했던 거죠.”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으로 중요한 질문은 아마도 계속 활동을 할 수 있겠냐는 질문이겠는데요.” “네. 사실은 속으로 많이 생각했어요. 저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저희 멤버들에게도, 회사에게도, 그리고 저희 그룹을 사랑해주시는 팬들에게도요. 그분들을 위해서라도 제가 빠지는 게 옳지 않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멤버들과 회사에서는 그런 절 꾸짖어 주었죠. 그렇게 나약한 생각 하는 게 아니라고.” 도연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빠지는 건 도망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요. 사실 도망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 방법이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큰 실망을 안겨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누구요?” “팬들이요. 만약 지금까지의 제 모습이 부족했는데도 좋아해주셨다면 전 더 나은 모습으로 팬들에게 보답을 해야 옳은 거죠. 아까 짝사랑 이야기를 한 것처럼, 혼자 한 사랑이라도 그 사랑이 끝난 뒤 그 시간을 되돌아보잖아요? 그때, 그 사랑이 어땠던가, 하고요. 전 그 시간이 후회로 남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왜 그 시간에 그 사람을 좋아했던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해요.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며 품었던 마음과 행복, 그 아름다움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지금의 팬들도 그런 마음이 아닐까요? 나중에 한참의 시간이 지나면, 저에게 어떤 마음을 품었더라도 그 마음이 따뜻했던 한 때의 추억처럼 간직될 수 있기를. 그러려면 제가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냥 도망가기만 할 게 아니라, 지금껏 받은 사랑 때문에라도 남은 시간, 제가 리본 소녀로 있는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서 팬들의 사랑에 보답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해요.” “팬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굉장히 행복해 하겠네요.” “팬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기도 하고, 제 마음의 다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도연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역시 곁에 있던 사진 기자는 그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더 하고 싶은 이야기 있나요?” “사실 아직 어떤 게 정답인지는 모르겠어요. 과연 팀에 남는 게 옳을지, 아니면 떠나는 게 옳을지. 그래서 방금 한 이야기도 어쩌면 저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변명일지도 모르겠고, 어떤 분들은 핑계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전 저희 팬과, 멤버들을 믿고 싶어요. 그리고 그 믿음에 최대한 부응하려고 최선을 다할 거고요. 병원 치료도 꾸준히 받으면서 빨리 나을 수 있도록 할 거예요. 그때까지 응원 부탁드리겠습니다.” 도연의 인터뷰는 다음 날 포탈 사이트에 공개 되었고, 여론은 양분되었다. 도연에게 동정심을 품는 이가 있는가 하면, 이기적이라고 욕하는 이도 생겼다. -결국 연예인 계속 해먹겠다는 소리? -아프면 집에 가서 쉬어야지, 계속 뽑아먹겠단 말을 돌려 말한 거 아님? 험담과 비난은 있을지언정, 유언비어는 없었다. 그리고 이 인터뷰로 인해 팬덤은 더욱 강해지는 효과를 나았다. 리본 소녀의 팬덤은 도연을 지키자는 의견으로 몰렸고, 특히 도연이 팬들을 위해 애쓰는 마음이 애달프다며 힘내라는 응원이 편지와 선물 등으로 회사에 보내졌다. “팬덤을 지켰다는 게 중요한 거지.” 심 대표는 보고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함께 동석한 매니저에게 고개를 돌렸다. “도연이는?” “반응이 썩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럼, 그럼.” “그런데, 도연이가 인터뷰 중에 예로 들었던 ‘짝사랑’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는지, 도연이의 과거를 캐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팬 카페에서?” “네.” “하여튼, 쓰잘데기 없는 일에 힘 쏟는 일은 제일 잘해.” 심 대표는 혀를 찼다. “문제 없잖아?” “네. 사실, 모태 솔로인데요, 뭐.” 쌓인 결제 서류 철들을 소리나게 덮은 심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옷걸이에 걸린 재킷을 걸치며 말했다. “그럼 난, 대전엘 다녀오지.” “대전이요?” “그쪽 아카데미에서 괜찮은 애가 있다고 하니까, 가서 좀 봐야겠어.” 심 대표는 벌써 다음 아이돌 그룹을 구상 중이었다. 심정적으로야 리본 소녀를 믿고 계속 지원해주겠지만, 이런 일도 벌어진 다음에야 언제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회사의 입장에서는 얼른 후속 그룹을 준비해 놓는 게 좋다. “그리고 이번 월말 평가 때는 나도 들어가서 봐야겠어.” “대표님이 오시면 애들이 많이 긴장하겠는데요?” “나 하나도 못 감당하는 애들이 몇 백, 몇 천 명 앞에서 긴장 안 할까?” 심 대표가 대표실을 나가고, 그 뒤를 매니저가 뒤따랐다. “아, 대표님. 그리고 오늘 그, 단유라는 친구가 올 겁니다.” “누구?” “예전에 도연이랑 같이 교육부 홍보 영상 찍었던 아이 말입니다.” “아, 그.” 심 대표가 자리에 멈춰 섰다. “몇 시?” “아마, 1시간 쯤 있다가 올 겁니다.” 심 대표는 손목 시계로 시간을 확인 후, 잠시 궁리하다 말했다. “잠깐 보고 갈까?” 단유는 약속 시간보다 일찍 회사에 도착했다. “저기, 윤제순 매니저님이랑 약속을 잡았는데요.” 로비에 있던 여 직원이 내선 전화를 들어 확인했다. “3층 상담실로 가면 되요.” “고맙습니다.” 단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향했다. 이전에 들러 도연과 이야기를 나눴던 장소였기에 헷갈릴 이유는 없었다. 문을 열자, 한참 수첩을 정리하고 있던 매니저가 단유를 보며 아는 척을 했다. “왔어.” “네, 안녕하세요.” “밖이 덥지?” “여름이니까요.” “그런 것 치고는 땀을 많이 안 흘렸는데?” “바람이 많이 불더라고요.” “그래? 아까 내가 나갔을 때는 바람이 전혀 불지 않던데. 바람도 사람 차별하나?” 말도 안 되는 농담으로 대화를 잇던 매니저는 그 사이 수첩을 정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말이야. 우리 대표 이사님이 잠깐 보자고 하는데.” “절요?” “그래. 지난 번에 같이 식사했었던 대표님 있지?” “네. 기억나요.” “그래. 잠깐 시간 되겠냐?” 단유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왕에 부탁하러 온 입장이니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었다. 대표이사실에 들렀더니 한참 전화 통화중인 심 대표를 볼 수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 경우가 없구나, 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거기 잠깐 앉아 있어.” 핸드폰을 잠시 떼고 언질을 준 후, 다시 통화를 잇는 심 대표의 말대로 매니저와 단유는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매니저는 미리 챙겨둔 작은 쇼핑백을 단유에게 건넸다. “여기.” “고맙습니다.” 잠깐 열어 확인해보니, 멤버 세 명의 사인이 모두 담긴 시디와 브로마이드 몇 장, 그리고 모자가 하나 있었다. “이야기를 했더니 도연이가 자기가 쓰는 물건을 하나 주는 게 더 의미있을지도 모르겠다며 넣어줬어. 착한 애야, 그치?” 마음 씀씀이가 고맙다. 단유는 고맙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매니저에게 말했다. 그때, 통화를 마친 심 대표가 단유 맞은 편에 앉았다. “갑자기 보자고 해서 당황했지?” “아니요. 별로.” “그래?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자네는 참 대담한 성격인 것 같아. 보통 나랑 이야기하면 대부분 자네처럼 침착한 모습을 잘 못 보이거든. 이번 월평 때 이 친구같은 대담한 성격의 연습생이 나왔으면 좋겠어.” 마지막 말은 매니저를 향한 발언이었다. 매니저는 의례적인 웃음을 지으며 대표의 말에 동의했다. “다름이 아니라, 자네랑 잠깐 이야기를 했으면 해서.” “어떤 이야기를요?” “그냥 요즘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나 궁금해서 말이야.” 단유 나이 또래 아이들이 이 회사에도 많이 있을 텐데 굳이 자신과 이야기를 나눌 이유가 있을까? “자넨 꿈이 뭐지?” ======================================= [531] We are the Future(1) “도대체 넌 뭐가 되려고 그러니?” “왜 또 그래?” “왜는 무슨 왜야? 너 지금 방학한 지 얼마나 지났는데 여태 책 한 번을 안 펼쳐? 너 그래 가지고 고등학교는 어떻게 가려고 그래?” “수능 보고 고등학교 가는 거 아니거든?” “이년아, 정신 좀 차려. 너 고등학교 올라가서도 단유한테 시험공부 해달라고 할 거야?” “왜 안 돼?” “아이고, 머리야.” 어머니는 머리를 감싸 쥐었고, 상미도 머리를 쥐며 외쳤다. “악! 죽었어!” “너 때문에 내가 죽겠다. 너 정말 뭐가 되려고 그래? 너도 꿈이라는게 있니?” “꿈이 없는 사람이 어딨어?” “도대체 그 꿈이 뭐니?” “스트리머.” “뭐?” 어머니는 자신이 뭘 들었는지 헷갈려했다. “너 미쳤니?” “왜?” “어디 기집애가 할 게 없어서….” “그게 뭐 어때서? 요즘 많이들 해.” “뭐?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니? 세상에…. 너 지금 그게 엄마 앞에서 할 소리니?” “뭐가 어때서?” “야!” 어머니의 고함 소리에 상미는 움찔하며 모니터에서 눈을 뗐다. “엄마가 너 옷 벗고 다니라고 비싼 돈 주고 학교 보내니? 응?” “옷을 왜 벗어?” “많고 많은 일 중에 스트리퍼가 뭐야!” “스트리퍼라니?” 눈이 동그래진 상미, 그리고 딸의 반응에 이상함을 느낀 어머니. **** “연예인은 아니네요.” 단유의 대답에 심 대표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건 지난번에도 들었는데…. 그렇게 연예인을 하기 싫은 이유가 있나?” “남들 앞에 나서는 게 그렇게 편하진 않아서요.” “지금까지는 잘 했잖아?” “지금까지는 그럴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하기도 했었고, …또 그냥 돕기 위해서였어요.” 처음 초등학교 시절 도서관 모델을 했었던 것은 책을 살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고, 그 다음은 갤럭시즈를 돕기 위해서였다. 그 다음엔 돈이 필요해서였거나 혹은 또 다른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몇 번의 경험으로 단유가 느낀 것은 평생 직업으로 삼기에는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확신이었다. “그렇다치고. 그럼 지금 다른 꿈은 없나?”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지금은 어느 정도 방향을 잡았어요.” “그래?” “네.” “궁금한데? 자네같이 뛰어난 친구는 과연 어떤 꿈을 꾸는지?” “저는 다른 사람을 돕고 싶어요.” 단유의 대답에 심 대표는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그건 너무 모호하지 않은가? 법조계에 들어가서 법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돕는다거나, 의사가 되어서 아픈 사람을 돕는다는 등의 이야기라거나 그런 구체적인 꿈은 아직인 건가?”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 그런 직업을 가지기 어려워요.”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심 대표. “어렵다고? 듣기로는 공부도 잘한다고 했는데?” 옆에 앉은 매니저에게 동의를 구하니, 매니저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 시험 성적의 문제가 아니라, 저 개인의 문제에요.” “혹시…고아라는 점이 그런 직업을 고르는 데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요. 하지만 비슷합니다.” 단유는 자신의 출신이 직업 선택에 어려움이 있음을 인정했다. 심 대표는 물론이고 다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지만, ‘고아’라는 출신이 아니라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출신 때문이었다. 비록 현재는 감추고 있지만, 자신은 ‘이세계’ 사람이다. 단유는 늘 무언가를 감춰야 하고, 속여야만 한다. 악의가 없을지라도 그것은 타인과 함께 하는 조직적인 생활을 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낳을 것이라 보았다. 학교에서도 그렇듯이, 사회에 나가서도 그것은 마찬가지. 그래서 단유는 생각했다. “조직 생활이 저한테 맞지 않아요.” 심 대표는 단유의 생각을 어린 애들이 흔히 하는 이기적인 생각이라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지. 자유롭고 싶고, 어딘가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거. 남한테 허리 숙이기 싫고, 딱딱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는 게 마치 감옥 같다고 생각하는 거.” **** 뙤약볕 아래에서 명수는 오랜만에 운동장을 뛰었다. “더 빨리!” “으아악!”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명수와 함께 달리는 중학교 축구부 아이들은 전부 붉은 얼굴로 비 오듯 땀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녀석들아! 고작 이런 거로 벌써 헉헉대? 그래 가지고 90분 잘도 뛰겠다!” 코치의 일갈에 몇몇 아이들은 이를 악물고 신음을 냈다. 또 몇몇 아이들은 악을 쓰며 꿈틀거리는 허벅지를 억지로 움직여 앞으로 걷듯이 뛰었다. 하지만 명수는 비록 지치긴 했어도 호흡이 크게 흐트러지지 않은 채, 가장 선두에서 달렸다. “하여튼 난 놈이야.” 감독의 시선이 무리의 선두를 훑고 있음을 확인한 코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놈이 한 명만 더 있었으면, 우승기를 지키는 것도 무리는 아닐겁니다.” “그렇겠지.” “…프로 가겠죠?” “쟤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아니면 부상을 당하거나 하지 않는다면.” “체격도 꾸준히 자라고 있으니, 이대로면 분명 국대 스트라이커도….” “너무 앞서가지 마. 아직 중 3이야.”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감독도 명수의 미래를 무척이나 기대했다. 자신의 축구경력과 이제껏 지도해온 아이들 중에서도 명수는 발군이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딴 애들은 너무 떨어지는데요.” “눈높이가 달라서 그럴지도.” 명수랑 다른 아이들을 비교하면 저도 모르게 시선이 올라간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2바퀴만 더 돌리고 다음으로 넘어가지.” “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인지도 모르고, 명수는 그저 호흡만 신경 쓰며 달렸다.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나중에는 몸을 쓰면서도 이 호흡을 계속해야 돼. 그럼 힘의 낭비도 줄고, 몸의 움직임도 네가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있을 거야.” 단유에게 배운 호흡법은 익히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몇 년간 꾸준히 했더니 이제는 나름 몸에 익어서 이렇게 달리면서도 호흡이 절로 되었다. 그뿐 아니라 이렇게 오래 달리면서도 숨이 달리지 않고, 다리에서 사용되는 힘의 정도도 자기 의지로 조정할 수 있는 느낌이었다. “계속 익히다 보면, 90분 내내 전력 질주를 해도 힘이 남을 정도가 될 거야.” “그건 너무 오버 아니야?” “조금 과장이긴 해도, 네 체력을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될 건 확실해.” 하지만 지금 이렇게 달리고 있다 보니 과연 단유의 말처럼 될 것 같은 기분이다. ‘고맙다, 단유야.’ 그간 단유에게 얼마나 도움을 받았던가. 단유는 그 고마움의 대가를 미래로 유예시켜 주었지만, 명수는 그걸 어떻게 다 갚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죽을 때까지 그걸 다 갚을 수 있을지도 자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당장 단유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있었다. 그건 바로 이렇게 달리는 것. ‘그리고 반드시 축구 선수로 성공하는 것.’ 단유는 자신의 친구이자, 가족이다. 형이며, 아버지이다. 친혈육 이상이며, 이 세상 유일한 자신의 편이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것이 자신의 성공임을 알기에, 자신은 결코 한 눈 팔 수 없었다. 물론 게임 때문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긴 해도, 운동을 소홀히 한 적은 없었다. ‘공부를 소홀히 하긴 했지만.’ 순간 명수는 피식 웃음이 났다. 남들은 힘들어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와중인데 자신은 여유롭게 딴생각이나 하면서도 뜀박질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서였다. “쟤, 웃는데요?” “…축구 선수가 아니라 장거리 달리기 선수를 시켜야 하나?” 감독은 까칠한 턱을 긁으며 명수를 보다 뒤의 선수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중학교 축구부의 감독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 **** 무대로 내리쬐는 보랏빛 조명 아래에 선 도연은 스탠드 마이크를 붙잡았다. “난 자유롭죠, 그날 이후로. 다만 그냥 당신이 궁금할 뿐이죠.” 마이크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음 세상에서라도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마요.” 연주가 멎고 관중들의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고개를 숙인 채 감정을 수습하던 도연이 고개를 들었다. 옆을 돌아보니 이마에 땀이 송글 맺힌 멤버들이 미소를 지으며 도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 마무리했어.’ 라고 응원해주는 눈빛이 한순간 교차한 뒤, 세 멤버는 관객들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무대를 내려오는 멤버들을 향해 매니저는 엄지를 들었다. 전략은 나름 통했다. “웃을 수 없다면, 차라리 웃지 않는 노래를 부르라고 그래.” 심 대표는 그렇게 지시했다. “이번 기회에 우리 애들이 라이브도 잘하는 가수라는 걸 알리면 되지.” 활동 마무리가 되는 시기에 갑자기 새 노래를 뽑아낼 순 없으니, 기존의 히트곡을 편곡해서 무대에 선보였다. 워낙 유명한 노래인데다 멤버들이 잘 소화해낼 수 있을지 의심은 갔지만, 그래도 도전해볼 가치는 있다 여겼다. 그리고 반응은 썩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축제 행사에서 부르는 무대라 방송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래서 더 부담 없이 시도해볼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무대에서 부를 노래가 부족했는데 레퍼토리에 하나 추가하는 꼴이라 주최측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수고했다.” “이제 진짜 끝이네요.” “그래. 이제 당분간 스케줄 없다.” “와!” 멤버들은 서로 손바닥을 마주치며 좋아했다. 그러다 리더가 매니저의 눈치를 보더니 한 마디 더했다. “어쩐지 시원섭섭하네요.” “방금 제일 기뻐하더라?” “에이, 그건 그냥 쉰다고 하니까 좋아서 그랬던 거고요.” “그래? 그럼 앞으로 쭉 쉴래?” “그건 싫은데요?” “그래. 당분간 쉬면서 에너지 좀 보충하고 하반기에 다시 열심히 뛰자.” “예!” 차에 오른 뒤, 둘째가 매니저를 불렀다. “그런데 나중에도 이 노래 또 부르나요?” 매니저는 도연을 곁눈질로 살피며 말했다. “글쎄다. 반응이 나쁘지 않아서 또 할 수도 있지만, 그때는 네들 노래로 무대를 채우는 게 더 좋지 않겠어?” 정규 1집 앨범을 준비 중인 리본 소녀라서 하반기에는 무대 위에서 부를 노래가 부족하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반응에 따라서는 레퍼토리에 끼워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미리 판단하는 건 섣부르다. “고마워요.” 뒷자리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던 도연의 한 마디에 차 안이 조용해졌다. “언니들, 매니저 오빠 다들 너무 고마워요.” 울먹거리는 목소리에 둘째가 얼른 도연의 어깨를 감싸 안아주었다. “왜 그래? 사람 민망하게. 우리 팀이잖아.” “그래. 우린 팀이야. 그리고 이게 그저 너 좋으라고 한 거니? 우리 모두에게 좋은 거니까 한 거잖아.” “맞아.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매니저가 코웃음쳤다. “야, 니들 그러는 게 더 이상해. 차라리 서로에게 고맙다고 하지 그래?” “네? 어우, 닭살!” 터져 나온 웃음소리와 야유가 차 안을 가득 메울 때, 차는 도로 위를 힘차게 내달렸다. **** 심대표는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단유의 눈을 보다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말을 하려고 부른 건 아닌데, 어쩌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됐는지.”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주제넘은 말을 했구나.” “조언으로 받아들일게요.” 어른을 대하는 태도가 건방지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눈앞에서 보는 단유는 건방지다기보다는 일찍 철이 든 녀석, 정도로 여겨졌다. “어쩌면 연예인이란 직업도 네가 생각하는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것 같은데, 연예인은 싫다고 하니….” 심 대표는 다리를 꼬고 깍지낀 손을 허벅지 위에 올렸다. “지난번에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눴던 이야기는 아직 유효한 거지?” 만약 연예계 쪽으로 진출할 의향이 있다면 연락을 달라며 명함을 건넸던 심 대표.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더 기다려야 하는 모양이군. 사실 이번에 우리가 남자 아이돌 그룹을 준비하는데 관심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거든.” “괜찮습니다. 전 당분간 계속 공부를 할 생각이에요.” “도연이처럼 학업과 연예계 생활을 같이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하지만 그런 생활이 도연에게 스트레스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단유는 대답을 피했다. “말이 나온 김에, 도연이랑 정서적 교감을 나눠준 것에 대해서는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 “저도 도움이 많이 되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아, 그리고 소소하게 부탁을 하나 하자면 도연과의 일, 혹은 대화 내용에 대해 다른 곳에서는 말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물론이다. 아니, 애초에 그걸 다른 곳에 전할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게 본론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유는 슬쩍 매니저를 쳐다보았다. 매니저는 방금의 대화에 대해 별로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단유가 보기에, 심 대표란 사람은 뭐든 자기 손으로 직접 해야 성이 풀리는 스타일인 것만 같았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고 직접 자신을 따로 만나 저런 이야기를 전하는 것일 테다. 티 나지 않게. “그럴게요.” 단유는 심 대표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 [532] We are the Future(2) 단유에게 사소한(?) 당부를 마친 후, 심 대표는 소소한 이야기로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는 거지만, 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쨌든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지금이야 조직 생활이 불편해 보이고 프리랜서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이들이 부럽게 보일 수 있겠지만, 살다 보면 또 생각이 바뀔 수 있지 않겠니?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거라.” “네.” “사실 난 다른 사람들에게 조언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상대의 처지도 고려하지 않고 젠체하는 인간들을 싫어하는 편이거든. 시쳇말로 ‘꼰대’라고 하는 짓, 나도 싫어해. 그런데 넌 아주 남 같지도 않고 영특하기 이를 데 없는 아이다 보니 걱정이 앞서 주제넘게 충고를 한 거다. 이 점 이해해주길 바란다.” “알겠습니다.” 불필요한 말을 집어넣어 대화가 길어지는 것을 막는 건, 단순히 상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Yes’만 이야기하면 된다. 간혹 흥이 나서 말을 끊을 줄 모르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의 이야기에 혹시라도 흥분해서 반박을 하거나 한 마디라도 보태면 정말 대화만으로 하루를 다 보낼 기세로 쏘아붙일 수 있다. 그러니 최대한 뒷말이 나오지 않게, 단답형으로 대답하여 상대의 말을 줄인다. “인생,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쉽지 않을 거다. 하지만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 있지? 노력하면 그만큼 정당한 보상이 있을 거다. 인생을 먼저 살아본 사람으로서 경험해 본 일이니 믿어도 될 거다.” 물론 단유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노력에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말은 듣기엔 좋다. 하지만 모든 노력에 보상이 ‘반드시’ 뒤따르는 것은 아니고 그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판단은 또 다른 문제다. 만약 보상이 반드시 있었다면, 단유는 이미 ‘대마법사’가 돼야 했고, 모든 과학자는 자신의 연구 과제를 이미 수십 번은 넘게 해결했을 것이며, 이 세상에 불공평한 것들은 사라졌어야 옳다. 죽을 때까지 풀지 못한 난제는 수없이 많으며, 코피를 쏟으며 공부를 했음에도 취업을 하지 못한 이들이 나날이 늘어나는 세상이다. 수십 년을 회사를 위해 온몸을 바쳤다가도 ‘회사의 사정’으로 쫓겨나는 사람이 있고, 쪽잠을 자는 수고를 감내하며 노력했음에도 뜨지 못해 쓸쓸히 단칸방으로 돌아가야 하는 연예인들이 있다. 또 설령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았더라도 그 보상이 정당한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누가 정할까. 최선을 다했음에도 최저시급을 받는 것에 만족하라며 월급을 쥐여 주는 사장님이 정하는 것일까? 성적이 초라하다고 하소연하는 학생에게 노력이 부족했다고 꾸짖는 부모가 정하는 것일까? 성과가 부족하다면 노력이 부족했다고 비난하고, 소박한 보상에는 ‘미래의 보상’으로 유예 시키려는 사회적 분위기가 잘못일까? “네.” 당연히 심 대표와 이런 주제로 토론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단유는 짤막한 대답과 과하지 않은 끄덕임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의 생각과 자기 생각의 차이를 좁혀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관계였으니까. **** “여보세요?” ―운동 중이야? “응.” ―몇 시에 끝나? “아마…5시쯤 끝날 거 같은데?” ―끝나고 바로 집에 가? “응. 그럴걸? 왜?” ―한 게임 하자고. 명수는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넘어갔는지 ‘왜 웃어’라고 묻는 상미의 뾰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계속 게임만 한다고 집에서 혼났다며?” ―한 번 혼났다고 그만두면 진정한 게이머가 아니지. 그리고 나도 마냥 노는 게 아니라고. 이런저런 게임을 하면서 나도 꿈을 키우는 중이야. “스트리머?” ―응. “근데 지난번에 네가 스트리머가 된다고 해서, 나도 여자 스트리머 방송들을 찾아봤었거든?”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괜히 듣기 싫어지는데? “나쁜 소리 아냐. 너라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치? 네가 생각해도 나 정도면 잘할 거 같지? “응. 넌 게임도 잘하고, 말도 잘하니까 단순히 게임 리뷰 방송만 해도 사람들이 많이 볼 거 같은데? 게다가 얼굴이 되잖아?” ―너 진짜 갑자기 왜 그래? 대놓고 칭찬하니까 괜히 무섭잖아? “무섭긴. 그냥 내가 느낀 대로 이야기한 거야.” ―그래서 이번 방학 때 짧게나마 해 볼까 생각 중이야. 명수는 상미의 도전에 의문을 품었다. “중학생이 해도 돼?” ―시험 방송인데 뭐 어때? “…너희 어머니가 강종(강제종료)하시는 거 아냐?” ―잠깐만 하는 거라고 하면 돼. “나 못 도와준다.” ―도와달라고도 안 했다. “안 도와줘도 돼?” ―당연히 도와줘야지! 의리 없게 너 혼자 빼기냐? “거기서 의리가 왜 나와?” ―아무튼! 그때 멀리 운동장 가운데 선 코치가 외쳤다. “인명수! 언제까지 쉴 거야!” “나, 가봐야겠다.” ―끝나고 우리 집 와. 밥 줄게. “니가 주냐? 너희 어머니가 주시는 거지.” “인명수!” 다시 한번 코치의 외침에 ‘갈게요!’라고 외치는 명수. “야, 나 진짜 간다?” 그런 뒤 통화를 마쳤다. **** 심 대표와 대화를 마친 후, 단유는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뒤를 매니저가 뒤따랐다. “도연이가 그러던데, 넌 여태 도연이한테 개인적으로 사인 부탁한 적이 없다며?” “네.” “다른 멤버들 꺼도 필요 없고?” “그게 왜 필요하죠?” “…하여튼 넌 정말 이상한 애다. 요즘 애들 같지가 않아.” 단유는 다른 대답 대신 손에 든 쇼핑백을 들어 보이며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동생에게 잘 전달할게요.” “그래. 알았다.” 회사를 나온 단유는 곧바로 지선의 집으로 향했다. 승민은 바깥 일이 있어 나가고 사모님이 단유를 반겼다. “지선아, 여기.” “뭐야?” 쇼핑백을 받아든 지선은 내용물을 확인하고 무척 기뻐했다. “고마워, 오빠.” “우리 지선이 좋겠네?” 곁에 선 사모님도 지선의 함박웃음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단유도 기분이 좋아졌다. 남을 돕겠다고 했지만, 사실 아무나 도울 뜻은 없었다. 누구라도 도울 순 있지만, 오지랖 넓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성격상 맞지 않은 단유였다. 그리고 돕더라도 최우선은 바로 단유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 될 터였다. 바로 지금처럼. 지선은 사모님의 도움을 받아 본래 붙어있던 브로마이드 옆에 새 브로마이드를 붙였다. 세 멤버의 사인이 붙어있는 그 브로마이드를 보며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는 지선은 가녀린 손끝으로 도연이 준 모자를 쓰다듬었다. “한 번 써보지그래?” “못 써.” “왜?” “도연 언니가 쓰던 거잖아.” “그게 뭐?” “그냥 이대로 간직할 거야.” “모자는 쓰라고 있는 거야.” 지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자신의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고 또 히죽 웃었다. “도연 언니가 여기 같이 있는 거 같아.” 모자에 어떤 이미지를 덧씌우고 있는 것인지 대충은 알 거 같다. 어쩌면 사인이 된 브로마이드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그건 리본 소녀 세 사람의 사진이 인화된 종이에 불과하지만, 그리고 수천, 수 만장 이상이 인쇄되어 배포되었을 브로마이드였지만, 지선에게는 그 종이 이상의 의미가 부여된 ‘보물’일 것이다. 그 순간, 단유의 머릿속에 번쩍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원본을 복제한 사진, 수많은 복제품 중의 하나.’ 원복과 복제의 관계, 그리고 복제된 것의 기능적 의미 이상의 의미가 가치 있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가능성. **** 집에 돌아갈 때쯤, 전화가 왔다. “상미네 집에서 밥 먹어.” 단유도 상미네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단유는 방학 때도 바쁘구나.” 딱히 그런 것도 아닌데, 어머니의 말씀이 딸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치껏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잘 먹겠습니다.” “그래, 많이 먹어.” 이미 숟가락을 놀리고 있던 명수가 단유에게 물었다. “지선이 집에 갔다 왔어?” “응.” “지선이 엄청 좋아했겠다.” “그렇더라.” 둘의 대화를 듣던 상미가 물었다. “왜?” 명수가 지선의 사연을 이야기해주고 단유가 리본 소녀의 사인을 받으러 갔다 왔음을 알렸다. “야! 그럼 내 것도 받아주지.” “네가 아프냐?” “꼭 아픈 사람만 사인받니?” “아픈 사람을 대신해서 가준 거니까.” “난?” “네가 직접 가서 받으면 되지.” “내가 어떻게 가?” “그럼 못 받는 거고.” “명수 너, 나한테 왜 그래?” “뭘 왜 그래? 있는 사실을 말한 건데?” 상미는 단유를 쳐다보며 물었다. “얘, 사춘기야?” “으이구, 이 철없는 딸아. 듣는 내가 다 부끄럽다.” “엄마가 왜?” “얘는 진짜 언제 크려고 그러나?” 단유는 우물거리던 것을 마저 삼키고 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고구마줄기 이거 맛있는데요?” “그러니? 나중에 집에 갈 때, 싸줄게.” “선생님이 좋아하실 거예요.” “어쩜, 이렇게 마음 씀씀이가 다를까?” “우리 엄마는 단유만 좋아해.” “에휴.” 어머니의 한숨 소리를 뒤로하고, 상미는 단유에게 명수와 나눴던 이야기를 꺼냈다. “방송?” “그냥 방송 아니고 인터넷 방송. 방학 때 잠깐 해 볼까 하는데 네 생각은 어때?” “그거 이상한 거 아니지?” “아이참! 엄마! 그런 거 아니라니까?” 단유는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명수가 몇 번 보여줘서 어떤 건지는 알겠는데, 그걸 네가 진짜 하겠다고?” 상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난 나중에도 스트리머가 될 거거든.” “왜 그걸 하고 싶은 건데?” “난 게임을 좋아하잖아? 어차피 할 게임인데 이왕이면 돈도 벌면서 하면 좋잖아?” “그걸로 돈을 벌어?” 어머니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상미에게 물었다. “잘 버는 사람은 한 달에 몇억도 번대.” “억?” 그 말에 명수가 태클을 걸었다. “그렇게 버는 사람은 외국의 유명한 스트리머들이나 그렇지, 다 그렇게 버는 건 아니에요.” 한 달 내내 매일 방송해도 한 달 수입이 몇만 원은 물론이고, 아예 수입이 없는 경우도 있다. 명수의 설명을 들으며 어머니가 그럼 그렇지, 라며 고개를 주억거릴 때 상미가 날 선 목소리로 명수를 타박했다. “친구가 하면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왜 계속 걸고넘어져?” “도와주려고 왔잖아?” “와서는 계속 안 되는 이야기만 하고 있잖아!” 똑똑, 단유는 식탁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그 소리에 상미와 명수가 돌아보았다. “식탁에서 싸우지 마. 그리고 그 문제는 내가 잘 모르니까, 하라 마라 할 수 없을 것 같다.” “할 거야. 그냥 테스트 삼아. 본격적으로 하는 건 나중에 고등학교 때 하면 되지.” “공부는 언제 하려고?” “틈틈이?” 어머니의 한숨 소리만 깊어졌다. 상미는 친구들이 집에 있음을 감사해야 했지만,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못했다. 그녀의 신경이 온통 인터넷 방송에 몰린 까닭이었다.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단유는 상미나 명수나 참 대단하다고 여겨졌다. 비록 현시점에서 그 직업을 완전히 가진 건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그것을 자신의 직업으로 삼으려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주변의 학생들을 보면, 상미나 명수 같은 경우를 찾는 게 어렵지 않았다. 어떤 아이는 만화를 좋아해서 웹툰 작가를 꿈꾸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별을 좋아해서 천문학을 전공해 천문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와 정반대로, 아무런 꿈도 꾸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비단 단유만의 일이 아니라, 대학만을 향해 일로 정진하도록 채찍질하는 학교에서 자신의 재능과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아볼 기회가 많지 않았다. 아직 고등학교를 들어가진 않았지만, 고등학교에 가면 지금보다 더 많은 학과목을 감당해야 할 게 분명하다. 그리고 목전에 닥친 입시가 고등학생을 목조를 텐데 그 상황에서 자신의 미래와 꿈을 헤아릴 여유가 올까? ‘아니야. 미리 예단하지 마.’ 지금이 이렇다고 해서, 나중에도 그럴 거라고 미리 속단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이미 그 과정을 거쳐 사회로 나간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다. 다들 자신의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했기에 지금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지금은 그런 미래에 대한 추측보다, 현재 머릿속을 간지럽히는 이미지, ‘포르마’를 확인해야 했다. ======================================= [533] We are the Future(3) 단유가 마법을 배울 때 핀체노가 분명히 그랬다. 마법은 ‘라티오’에서 ‘가져오는’ 것이라고. 가져온다 하여 그 대상을 온전히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복제’하여 가져오는 것. 즉, 복제품이다. 다만 가져오기 위해서는 ‘무엇을’ 가져와야 하는지를 정확히 해야 한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고 집히는 대로 가져오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는 뜻이다.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와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그대로 상상하여 그 물건을 ‘소환’ 해내는 것이 바로 마법이다. 때문에 대상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명확한 정보, 그리고 선명한 상상력이 중요하다. 방에 들어간 단유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흐릿하게 떠오르는 포르마에 집중했다. 그리고 마법 구현의 순서에 따라 눈앞에 그 포르마를 생성시켰다. 그러자 책상 위에 대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모자였다. 익숙한 그 모자는 바로 도연이 지선에게 주려 했던 그 모자였다. 단유는 그 모자를 집어 들어 앞뒤로 뒤집어 보았다. 안과 겉이 원래의 모자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모자였다. 물끄러미 모자를 관찰하던 단유는 손을 한 번 툭 털었다. 그러자 모자가 사라졌다. 단유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리고 다시 마법을 사용했다. 이번에는 책상의 빈 공간에 시계가 만들어졌다. 그 시계는 론이 나무로만 만들었던 바로 그 시계였다. 만들기 시작한 순간부터 완성이 될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고 도왔기에 그 구조와 외형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던 단유였다. 그래서 눈앞의 시계와 그 시계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단유는 천천히 손을 가져가 그 시계의 겉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러다 손을 떼자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시계였다. 사실 단유가 사용한 마법은 대상의 실체를 구현하는 마법이 아니었다. 단유가 재현한 것은, 정확히 표현하자면, ‘허상’이었다. 허상이란 실제로는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나타나 보이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마법이란 힘을 이용해 단유는 상상을 현실화, 아니 가시화시켰다. 다만 그냥 보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유의 의지 내에서 실제로 ‘작동’을 하는 ‘허상’이란 게 특이한 점이랄까? 원리는 간단하다. 라티오가 아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도, 마법의 구현 원리에 따라 ‘복제’를 한다. 다만 복제되는 원형의 성질상 실체를 지니지 못하는 ‘허상’이 만들어질 뿐이었다. 비유를 들자면 거울과도 같다. 거울 바깥에는 실체를 지녀도 거울 안쪽, 대상을 비추는 면은 그저 대상을 똑같이 ‘반사’해내는 것일 따름인 것처럼 말이다. 비록 단유의 의지 내에서 잡을 수 있고, 움직일 수도 있지만, 결국 ‘허상’인 마법이었다. “단유야.” “응?” 단유가 고개를 돌리자,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명수가 보였다. 방금 샤워를 했는지 머리가 살짝 젖어 있었다. “상미, 어떻게 도와줄 거야?” “내가 도울 방법이 없을 거 같은데? 알다시피 컴퓨터는 내 종목이 아니니까.” “그래도 우리 중에서 네가 제일 똑똑하니까, 네가 도와주면 잘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상미 앞에서야 투덜대며 불친절하게 굴었지만, 속내는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 안달이 난 명수였다. 그리고 명수가 도움을 부탁할 사람은 단유 밖에 없었으니, 저렇게 적극적으로 달려와 의논을 청하는 것일 테다. “이번 기회에 컴퓨터 좀 공부해라. 요즘 컴퓨터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안 그래?” “너한테서 공부하란 소리 들으니 신선하다.”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지? 그러니 평소에 열심히 좀 하지 그랬어?” “그럴 걸 그랬다.” 명수와 단유는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방금 네 책상에 뭐가 있었던 거 같은데?” “뭐?” “그게…에이, 몰라. 착각했나보다.” “뭐냐, 그게.” “졸린가? 아닌데.” 머리를 긁적이던 명수는 몸을 돌렸다. “선생님 올 때까지 게임이나 할란다.” “오늘 충분히 하지 않았어?” “나도 상미 도와주려면 좀 알아야지.” “핑계 좋다?” “그냥 넘어가자. 넌?” “책 좀 보다 자야지.” “그래. 잘 자.” “너무 오래 하지 마?” “오래 안 해. 내일도 훈련 있어서 좀만 하다가 잘 거야.” 명수는 손을 한 번 흔들고 방문을 닫았다. 불볕더위가 이어지다가 날이 축축해지더니, 태풍이란 놈이 가까이 와서 물 폭탄을 전국에 던져 놓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더위가 시작되나 싶었는데, ‘입추’라며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운동장을 계속 뛰어야 했던 명수네 축구부는 더위가 가신 대신 많아진 운동량에 더 지친 얼굴을 드러냈다. 방학이 끝날 무렵 돌아온 채윤은 기숙학원에서 많이 시달렸는지 눈이 퀭한 느낌이었고, 할아버지를 따라 절에 들어갔던 지태는 마른 뺨을 드러낸 채 나타나 채윤과 서로 자기가 제일 힘들었노라 배틀이 붙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씻자마자 공부하는데 죽는 줄 알았다.” “난 4시 반에 일어났거든? 일어나자마자 법당 가서 불공드리는데 끝날 때까지 적응이 안 되더라.” “하루 종일 스파르타식으로 공부하는 게 더 힘들어.” “절에 할아버지랑 스님밖에 없었거든? 말 한마디 안 하고 하루를 지내는 게 쉬운 줄 알아?” 지태의 수다 본능을 잠재울 수 있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넌 뭐했냐?” “얼굴 보면 몰라?” “아! 얼굴이 더 새까맣게 변했네? 밤에 보면 이 밖에 안 보이겠다.” 키득대던 채윤이 단유에게 물었다. “넌?” “얘 도와주느라고 공부 좀 했다.” 열심히 콜라를 마시는 상미를 가리켜 보였더니 지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공부? 과외라도 했어?” “방송.” “방송?” “인터넷 방송.” 상미는 짧게 트림을 하고―명수가 살짝 눈을 찌푸렸다―대답했다. “나 이제 스트리머야.” 명수가 픽, 하고 비웃었다. “고작 한 번 하고 스트리머냐?” 상미는 발끈하며 말했다. “앞으로 계속 영상 올릴 거야!” “조회수가 100도 안 나오더만.” “원래 처음에는 그래. 꾸준히 하다 보면 천천히 오를 거야.” 지태는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갔다. “단유 넌 뭘 도와줬단 건데?” “프로그램 설치하고, 설정 잡아주고, 편집 프로그램으로 편집하는 거랑…뭐 잡다한 거.” “뭐야, 그게.” 상미가 히죽 웃으며 단유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우리 방송국 프로듀서.” “프로듀서?” “야! 나는?” “너? 넌…내 조수나 해라.” 상미와 명수가 투닥거리는 사이, 단유는 채윤과 지태에게 지난 방학동안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진짜 방송을 했어?” “응.” “대박. 그래서? 어땠는데?” “들었잖아? 조회수 100도 안 나오는 영상 만든 게 다야.” “실시간으로는 안 하고?” “실시간으로도 하긴 했는데, 컴퓨터 사양 때문인지 렉도 심하고, 얘가 생각보다 버벅거려서 10분 만에 껐어. 프레임도 잘 안 나오고, 그러니까 사람들도 보기 힘들다며 금방 방에서 나가더라고. 그래서 녹화분은 폐기하고, 새로 게임 리뷰 방송 몇 개만 시험적으로 만들어서 유튜브에 올렸지.” 지태와 채윤이 입을 쩍 벌렸다. “단유 네가 그런 말 하니까 신기하다.” “왜?” “몰라, 그냥…너랑 안 어울리는 거 같아.” “맞아. 어쩐지 넌 수학이나 과학 같은 거 설명하는 게 잘 어울려.” “뭐래.” 단유는 햄버거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렇게 중학교에서의 마지막 여름 방학이 지나가나 싶었다. “여행 가자.” “여행이요?” “이대로 여름을 보내기엔 내 젊음이 너무 아까워.” 하은이 주먹을 쥐고 허공을 휘저었다. “바쁘시잖아요?” “휴가받았어.” 남들은 다 월초에 휴가를 받는데, 하은은 다른 사람의 휴가에 밀려 중순도 다 지난 시기에 휴가를 가게 되었다. “너희도 보니까 다들 바쁜 것 같고, 특히 명수 넌 방학 훈련 때문에 어디 가기가 힘들었잖아? 이제 훈련도 끝났으니까 같이 갈 수 있지?” 당연히 명수는 두 손을 높이 들어 올리며 하은의 제안에 환영의 뜻을 보였다. “어디로 가시고 싶으신데요?” “솔직히 시간이 많으면 해외로 나가고 싶은데, 그럴 시간은 별로 없으니까 가까운 데로 잠깐 갔다 오자.” “가까운데 어디요?” “음…부산이나 제주도?”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고 싶다는 뜻이리라. 단유는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꺼내 컵에 따랐다. 그리고 하은과 명수 앞에 각자의 컵을 건넨 후 말했다. “선생님 가시고 싶은 데로 가요.” “나보다… 너희들이 원하는 곳 없니?” “저는 딱히?” 단유의 대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 명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는 어디든 좋은데요?” “그럼 제주도 갈까?” 명수가 끼어들었다. “비행기 타고 가요?” “당연하지.” “안 비싸요?”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어.” 그리고 저렴한 항공사를 이용할 수도 있다. 명수는 비행기를 타고 간다는 말에 혹했다. “그럼 제주도요!” “오케이! 가자, 제주도.” 단유는 정확한 계획을 물었다. “그런데 언제요?” “이번 주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어때?” “2박 3일이요?” “응. 그리고 갔다 와서 일요일 쉬고 월요일 출근하면 되니까. 너희도 일정에 문제없지?” “여행사 통해서 가는 건가요? 아니면 자유 여행인가요?” “여행사는 무슨. 그냥 숙소 하나 잡아 놓고 돌아다니면 돼. 다니면서 맛집도 찾아보고, 관광지도 보고 그러는 거지.” “저도 돈 보탤게요.” “네가 무슨 돈을 보태? 됐어. 넌 그 돈으로 고등학교 학비에나 써.” “전 장학금 받잖아요.” 교육부 홍보 영상 덕에 장학금을 받기로 되어 있던 단유였다. “아, 그러네? 그래도 그건 나중을 위해서 모아 둬. 그리고 제발 내 돈 걱정은 하지 말아줄래? 나도 쓸 만큼 벌고 있거든? 왠지 네가 그런 걱정 하면 내가 정말 못 사는 사람처럼 느껴지거든?” “알았어요. 그럼 목요일 가는 거로 하고, 뭐 특별히 준비할 게 있나요?” “준비는 무슨. 외국 가는 것도 아닌데. 그냥 갈아입을 옷만 대충 몇 벌 싸서 가면 돼.” 모처럼 세 사람이 함께 여행한다고 생각하니 들뜨는 기분인지 하은은 기분 좋게 가위 바위 보를 외쳤다. 그리고 더 기분 좋게 명수의 등을 두드리며 식탁에서 벗어났다. “수고해라!” 명수는 한숨을 내쉬며 싱크대 앞에서 고무장갑을 손에 끼었다. “수고.” 단유도 명수의 등을 툭툭 두드린 후, 방으로 돌아갔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물이 쏟아지는 소리를 들으며 단유는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단유가 눈을 떴을 때, 책상 위에는 새까만 돌하르방 하나가 손을 앞으로 모으고 서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뭉실한 느낌을 주는 조각상이었다. ‘실제로도 비슷하겠지?’ 아무래도 영상과 책으로만 접한 터라 실제와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직접 보는 것과는 아무래도 다를 수 있으니, 가서 보면 이 ‘환상’도 더 리얼해질 것이다. 지식이란 그런 것이다. 책으로, 영상으로 간접적으로 얻는 지식도 지식이지만, 직접 보고 겪는 것만큼 확실한 지식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지식도 완전하고 100% 옳은 것은 아니라는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어야만 할 것이다. 흐릿한 환상을 구체화 시키듯, 단유의 꿈도 그렇게 구체적으로 현실화되고 있었다. **** “방학 잘들 보냈니!” “네!” “다들 기운이 넘…치는 건 아니구나. 왜 이렇게 처져 있어?” “방학 끝났잖아요!” “그래. 방학 끝났어. 그러니까 이제 다시 마음 잡고 공부해야지?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공부해야 고등학교 올라가서 후회 안 한다. 알지?” 담임 선생님의 대답에 다들 야유를 보냈다. “하여튼 이렇게 공부 싫어하는 애들은 두 번 다시 보기 힘들 거다.” 피식 웃으며 출석부를 손에 든 선생님은 교탁을 탁탁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방학 동안 늦잠들 많이 잤지? 수업 시간에는 졸지 말고 빨리 적응하도록 해.” 시커멓게 탄 얼굴들을 뒤로 하고 선생님은 교실을 나갔다. 아이들은 못다 한 경험담들을 꺼내고 수다를 떠느라 교실이 벅적거렸다. “단유야.” “응?” 단유는 읽던 책에서 눈을 뗐다. 눈만 하얀 명수가 눈짓을 하니 마치 자동차 방향지시등이 켜진 것 같았다. 명수의 신호를 따라 시선을 돌리니 교실 뒷문 쪽에 서 있던 도하가 빙긋 웃고 있었다. ======================================= [534] We are the Future(4) “쟤는 왜 안 들어오고 저기 서 있대?” 명수의 혼잣말에 단유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의 도하라면 거침없이 들어와서 말을 걸든지 했을 테니 말이다. 아무래도 들어올 생각이 없어 보이는 도하라 단유가 일어나 다가갔다. “너답지 않게 왜 여기 서서 불러?” 빙긋 웃는 도하. “너 그렇게 웃고 있으니까, 징그럽고 무서운 거 알아?” 단유 곁에 따라온 명수가 몸을 떠는 시늉을 하며 말하니까 도하가 피식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며?” “침 맞을 짓이라도 했냐?” “아니라곤 못 하겠다.” “뭐?” 도하는 단유와 눈을 맞췄다. “이런 거 부탁할 사람이 너밖에 없다.” 단유와 명수는 서로 마주 보았다. 그리고 다시 도하에게로 고개를 돌리니, 꽤 머쓱해 하는 도하였다. 확실히 가을이 되니 선선해진 바람에 “금연?” 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왜?” 명수의 물음에 도하가 되물었다. “그럼 계속 피워?” “그런 말은 아니고. 그러니까 내 말은….” 단유가 명수 대신 말을 이어나갔다. “네가 갑자기 금연을 하겠다고 결심한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될까?” 도하는 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여자친구가 담배피지 마래.” “뭐?” 이건 금연보다 더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여자친구 생겼어?” “응.” “언제?” “방학 때.” 명수는 이마를 짚으며 한탄했다. “난 방학 때 뭘하고 지냈던걸까?” 단유는 명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뒤 도하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도와주면 돼?” “특별히 도와줄 건 없는데, 친구들한테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해서 하는 거야.” 방학 때, 금연을 위해서 ‘5일 금연학교’를 찾아간 도하는 그곳에서 지키라고 내려준 수칙에 따라 행동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5일간 이어진 금연 교육을 받고, 일주일에 1회 방문하여 니코틴 수치를 측정하며, 한 달에 한 번 금연을 선언한 학생들끼리 모여 집단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했다. “언제부터 금연을 했는데?” “지난 주?” “뭐야, 고작 1주일 밖에 안 지난 거야?” 명수의 불퉁한 반응에 도하가 발끈했다. “1주일 참는 게 쉬운 줄 알아?” “나야 모르지.” 이번엔 도하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단유였다. “다른 거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운 거니까 신경 쓰지 마.” “다른 거? 아하.” 피식 웃는 도하의 모습에 명수가 눈썹을 세웠다. “너 웃는 거 안 어울려.” 고작 1주일, 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도하에게서 늘 풍기던 역한 냄새가 옅어졌음은 분명했다. “아직 완전히 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꼭 금연할거다.” “응원할게.” “네 코가 개코란 거 아니까 부탁하는 거야. 만약에 내가 다시 담배를 핀다 싶으면 확실히 말려줘.” “네가 내 말을 들을까?” “내가 네 말은 잘 듣지 않았나?” “글쎄? 잘 모르겠는데.” “모르면 됐고. 아무튼 도와줘.” “알았어. 우선 가방에 있는 담배부터 버리지?” “내 가방에 담배가 있는 건 어떻게 알아?” “어쩐지 너라면 아직 들고 있을 거 같아서.” “…넌 나를 너무 잘 아는 거 같애.” 담배를 끊는 게 어렵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 금단증상도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하지만 일단 지금의 도하는 확실히 금연에 대한 의지가 있어 보였다. “여자 친구랑 헤어지면 다시 필걸?” 명수는 그 말을 끝으로 도하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너도 여자 친구 사귀면 되잖아?” “내가?” 단유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여자가 있어야 사귀지.” “사귀고는 싶고?” “당연하지! 나도 남자야!” “그럼 고백해.” “누구한테 고백을 해?” “그걸 모르면 영원히 이대로 지내는 거고.” 명수는 대꾸를 하지 못했다.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리고 5교시가 시작되었기에 단유도 그 문제를 더는 거론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교시간이 될 때까지 명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표정이었다. 그 이상 단유가 개입하는 건 오버라는 생각에 단유는 공부에 집중했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시작된 2학기의 교실 풍경은 1학기와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인문계-일반계와 실업계-특성화고로 진학 고교가 벌써 나눠진 것처럼 학생들의 태도에도 변화가 보였다. “넌 어디 갈 건데?” “집에서는 일반고로 가라는데, 솔직히 난 공고를 가도 상관없을 거 같애.” “취업 때문에?” “어차피 내 머리로 대학가는 건 무리고.” “우리 집은 가난해서 대학가기 어려울지도 몰라.” “장학금 받으면 되잖아?” “장학금은 아무나 주나? 그리고 요즘은 대학교 가도 취업하기 힘들다잖아? 그냥 기술 배워서 취직하는 게 더 좋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들어.” “벌써 그런 생각하냐? 대단하다.” “대단하긴.” “그런데 요즘은 대학 안 가면 취업하기 힘들다잖아? 그래도 대학가는 게 낫지 않나?” “우리 동네 형이 그러는데 대학 가서 돈 낭비하고 몇 년 동안 백수로 지내느니 차라리 공고나 상고 가서 취업하는 게 좋을 거래.” “난 그냥 일반고 갈 건데. 그래도 대학은 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 “네가 대학이나 갈 수 있겠냐?” “고등학교 올라가면 마음 잡고 공부해야지.” “네가? 퍽이나.” 고등학교 진학이라는 문제는 고등학생들이 대학교를 고르는 것만큼이나 당사자들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과 여유는 별로 주어지지 않았다. 대부분 학생들은, 자의든 타의든, 당연히 일반고로 진학하는 것을 기정사실화했으며 소수의 몇몇 아이들은 특성화고, 공고나 상고, 혹은 특수 목적고의 진학을 고려했다. 개인의 적성과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하여 고등학교를 고르는 경우는 보기 드물었다. 굳이 기준을 따지자면 ‘대학’을 갈 사람은 일반고, 가지 않을 사람은 특성화고로 진학을 고려하는 수준이었다. 더러 대학 진학을 위해 특성화고를 전략적으로 선택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학생의 선택이 아닌 부모의 선택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니, 그 모든 선택들이 대부분 부모의 선택이었다. “반장, 넌 어디 갈거야?” 단유는 대답에 앞서 질문한 친구의 말을 정정했다. “나 이제 반장 아니야.” “그냥 반장 해. 너 말고 할 사람도 없는데.” “장담하지 마. 반장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거야.” “우리 반에서?” 친구는 그럴 리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넌 어디 갈 거야? 과학고? 사립고?” “반장 정도면 과학고 가는 거 아냐?” “요즘은 사립고가 더 좋다던데?” “반장은 수학 잘하니까 과학고 가겠지.” 그 말에 단유는 대답 대신 물음을 던졌다. 자신이 ‘수학’을 잘한다는 이유로 과학고를 가는 게 당연시된다면, 너희들은 어떤 이유로 고등학교를 선택하는 것이냐고. 예상했던 대로 신통치 않은 대답들이 이어졌다. 줄곧 들어왔던 이유들. 엄마가, 집에서, 대학은 가야 하니까, 고등학교는 가야 하니까. 설익은 꿈과 여물지 못한 희망은 시스템의 흐름에 묻혀 흘러갔다. “다음 주부터 진학 상담을 할 테니까, 미리 집에서 부모님과 상의들 하고 와라. 알겠니?” 담임의 말씀을 끝으로 하루 수업이 모두 끝이 났다. 왁자지껄 떠들며 가방을 챙겨 교실 밖으로 뛰쳐나가는 학생들 틈에서 단유는 명수와 함께 담임 선생님의 호출을 받았다. “너희 보호자 분은 학교에 오실 수 있겠니?” “저희 선생님이요?” “그래.” 처음에는 어색하게만 들렸던 ‘선생님’이란 호칭이 한 학기를 지나고 나니 익숙해진 담임이었다. “오전이라면 괜찮겠지만, 오후에는 어려울 텐데요.” “그럼 오전으로 시간 약속을 잡아야 겠구나.” “네.” “그런데, 혹시 넌 어디로 가겠다고 정한 게 있니?” “전 그냥 일반고로 가려고요.” “과학고로 가도 괜찮지 않겠어?” 사립고의 경우는 비용이 커서, 고아인 단유네가 감당하기 쉽지 않으리라 생각해 아예 배제한 담임의 물음에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확신할 순 없지만, 굳이 과학고를 가야 할까 싶어요.” 선생님은 ‘굳이’란 단어에서 단유의 생각을 읽었다. “물론 네가 평소에 혼자서 곧잘 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체계적인 수업을 들으면 더 좋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이미 방학 동안에 알아볼 만큼 알아본 단유였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서 통학하기도 불편하고, 기숙사에 들어가기는 싫더라고요.” 단유는 가족과 떨어져 지내기가 싫었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혼자 자유롭게 공부하는 게 더 좋을 거 같아요.” 수없이 많은 과제에 치어 살게 되면 자기 공부를 할 틈이 없을 것 같다. 정해진 커리큘럼에 따르는 것보다, 개인적으로 찾아 공부하는 게 더 나을 수 있다고 단유는 판단했다. 자신의 최종적인 목표는 역시 ‘마법사’였으니까. “일단 그 문제는 너희 선생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겠구나.” “네.” 만약 단유가 과학고에 들어간다면, 학교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다. 플랜카드를 걸어 학교를 홍보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본인이 싫다는데 담임이 무슨 자격으로 강요할 수 있겠는가. **** “생각이 바뀌진 않았고?” “네.” 하은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미 이 문제로 틈틈이 이야기해왔던 터라, 단유나 명수의 결정에 딱히 놀랄 일은 없었다. “그런데 명수는 스카우트를 받은 그 학교로 갈 거니?” “네.” “너무 멀지 않니?” 단유가 손을 들었다. “그 문제 때문에 말인데요.” “응.” “저희 이사 가죠.” “이사?” 갑작스런 단유의 발언에 하은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실 명수랑은 몇 번 이야기했는데, 제 생각에는 명수네 학교가 있는 쪽으로 이사를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네 생각, 이란 말은 명수의 생각도 있다는 말인데?” 명수는 쭈뼛대다 대답했다. “전 반대요.” “왜?” “여기서 별로 먼 것도 아니라서 굳이 그쪽으로 이사 갈 필요가 없기도 하고요, 단유나 선생님이 저 때문에 사는 곳을 옮겨야 한다는 게 별로 내키지 않아요.” “흐음.” 하은은 턱을 받치고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단유가 명수의 뒤를 이어 말했다. “저야말로 어차피 어느 고등학교를 가든 상관이 없지만, 명수는 그 학교를 가야만 하잖아요. 문제는 선생님이신데, 선생님 학원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질 지가 문제일 거 같아요.” “만약 그 동네로 옮긴다 하더라도 난 상관없어. 어차피 차로 이동하는 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뿐이지 별 차이는 없을 거야.” 명수는 좀 더 망설이는 얼굴이 되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여기서 3년을 살았잖아요? 굳이 옮길 필요가 있을까요?” “3년을 살았다 해도, 편의에 따라서는 옮기는 게 나을 수 있지. 그리고 우리가 전세를 사는 것도 아니고 엄연히 이 집은 단유 명의로 된 집이니까 옮기는 건 문제가 아니지. 문제는 어느 집을 구할 수 있느냐가 문제겠지.” “여기 아는 사람도 많고….” 명수의 말끝이 흐려졌지만, 단유는 명수가 무엇을 망설이는지 알 수 있었다. 사실 단유도 조금 걸리는 문제긴 했다. 바로 친구들. 이사를 가게 되면 아무래도 친구들과 떨어져야 했다. 명수는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하은은 손끝으로 탁자를 두드리다 팔짱을 끼고 명수를 바라보았다. “나도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닌데.” 그리고 단유를 보며 말을 이었다. “네 문제도 솔직히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 아무 학교나 고를 수 없는 게 당연하잖니? 보나 마나 뺑뺑이를 돌릴 텐데, 만약 집에서 멀게 잡히면 어떡하니?” “그건 여기서도 마찬가지잖아요. 서울의 끝에서 끝까지 움직여야 하는 것만 아니라면 옮겨도 상관없어요.” 각자 생각하는 것은 비슷했다. 어쨌든 서로에게 유리한 쪽으로 선택하려는 것. 단유나 하은은 명수에게 유리한 쪽으로 옮기는 게 맞다는 입장이었고, 명수는 굳이 자신의 학교 때문에 친구들과 헤어지는 게 탐착치 않은 것은 물론 가족의 ‘희생’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이사를 반대했다. 그러나 결국 명수의 반대에도 두 사람은 이사를 가는 게 좋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만약 옮긴다고 하면, 빨리 결정을 해야 돼. 나도 직업상 대출을 받기가 힘드니까, 이 집을 내놓고 다른 집을 사야 하거든?” 집이 빨리 팔려야 돈을 마련할 수가 있다, 는 하은의 설명이었다. “돈은 저도 보탤게요.” “너 요즘 돈 자랑 너무 하는 거 아니니? 돈 번다고 유세 떠는 것 같다?” 웃음이 섞인 하은의 말에 단유는 열이 오른 볼을 긁적였다. ======================================= [535] We are the Future(5) “너무 아까운데?” “네?” “거기 오피스텔 위치가 좀 아까워요? 놔두고 월세로 받아도 좋을 텐데.” “저희가 이사를 가야 하는데 돈이 없거든요.” “어디로 가는데요?” “아직 정해진 건 아닌데….” 하은이 동네를 이야기하자, 숏 커트의 아주머니는 혀를 차며 컴퓨터 앞에 앉아 뭔가를 검색했다. “오피스텔 월세 주면 그게 또 쏠쏠하니 좋은데. 사실 예전에는 오피스텔에 부가세를 매겼어요. 그런데 요즘은 사무실로 쓰든, 주택으로 쓰든 부가세를 안 매겨도 되게 되어서 얼마나 좋은데.” 아주머니는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지만, 들으라고 하는 말임을 모를 수 없었다. “어디, 아파트로?” “네, 일단은 아파트로 알아보려고 하는데.” “여기는 그 돈으로 사긴 힘든데.” 반말과 존대가 뒤섞인 중개사는 모니터에 떠오른 차트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하지만 하은은 중개사의 설명에도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숫자와 그래프에 익숙한 하은이지만, 지금 모니터에 뜬 그래프를 보고서 앞으로의 전망을 예측하긴 어려웠다. “요즘 이 동네가 전세가율이 높아서 정부가 규제를 강화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거든. 그럼 당장은 가격 상승세가 꺾여서 매매는 좋을 수 있을지 몰라. 그런데 그래도 한동안 많이 올랐던 터라 그 가격으로 매매할 만한 물건이 있을지 알 수 없다고요.” “저기, 저희는 거기 들어가서 살 집을 구하려는 거지, 딱히 수익을 거둘 생각은 없는데요.” “지금 당장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나중에 집값 떨어져 봐요. 그때는 아깝다는 생각에 땅을 칠걸?” 아주머니는 안타깝다는 얼굴을 하고 매물을 찾아봐 주었다. “그래도 동네가 동네다 보니 다 비싸네. 여기 보이죠?” 섬네일과 매물 가격이 주르르 매겨진 모니터 화면을 보며 하은은 옆머리를 긁었다. “뭐, 여기 정도면 대출 좀 보태면 살 수 있겠네. 여긴 어때요?” “저기 그런데 이 오피스텔은 지금 얼마 정도에 팔리는데요?” 그런 것도 미리 알아보지 않고 왔냐는 표정이 드러났다. 젊은 사람이라고 무시하는 거예요, 라고 따질 법도 한데 워낙에 이쪽 방면으로는 아는 바가 없던 하은인지라 일단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다. “솔직히 지금 오피스텔이 금값이라 내놓으면 금방 팔리긴 할 거예요.” 한 이 정도, 라며 중개사가 제시한 금액에 하은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단유를 쳐다보았다. 단유는 들어도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하은의 난감한 얼굴을 보면 돕고 싶기도 하지만, 자신이라고 아는 바가 있겠는가. 사실 단유는 별로 오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전혀 모르는 분야이기도 하거니와, 하은이 어련히 알아서 할까 싶은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은은 엄연히 단유가 명의자이고, 자신의 재산이니 어떻게 거래가 되는지를 알아야 하지 않겠냐며 단유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하은이나 단유나 비슷한 얼굴을 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하은은 주워들은 거라도 있겠지, 라고 생각했는데…결과는 도긴개긴이었다. 복잡한 법을 강의하는 것도 아니니 내용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전세가율’이니 ‘규제 강화’니, ‘취득세’, ‘양도세’, ‘부가세’ 등의 숫자들이 붙는 말들은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와중이었다. 하은이 부동산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걸 알게 된 아주머니가 친절하게 이것저것을 설명하다, 양도소득세 문제가 나오면서 명의자가 이 집을 몇 년간 소유하고 있었던지를 묻게 되었다. “아, 저기 그런데 이 집의 명의가 이 아이로 되어 있거든요.” “응?” 중개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아이 이름으로 되어 있어?” “그건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요.” “아들처럼 보이진 않는데.” “아무튼, 그럼 어떻게 매매할 수 있죠?” “부모는?” 하은이 단유를 흘깃 본 후,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미성년자지? 그럼 법정대리인이 하면 돼.” 이 시점에서 중개사의 눈빛이 살짝 바뀌어 있었다. 의심이 가득한 눈빛. 하은은 괜히 이상한 오해를 받는 기분이었지만, 굳이 설명하려 들진 않았다. “법정대리인, 은 아니지만 제가 보호자인데 대리로 할 순 없나요?” 무슨 소리냐고 되묻는 중개사의 시선에 하은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상담 아닌 상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단유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던 하은에게 말을 건넸다. “다른 방법이 있겠죠.” “…미안하다. 이렇게 기초적인 것도 몰랐다니.” 여전히 법정대리인은 재훈으로 되어 있었고, 하은은 법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다. “아니에요. 우리가 그런 걸 신경 쓸 틈이 없었잖아요.” “어른이 돼서 이런 것도 몰랐다는 게 창피하다.” “모를 수도 있죠.” “못 봤니? 아까 그 중개사가 날 한심하게 쳐다보던 거?” “선생님이 우릴 위해서 얼마나 헌신했는지 몰라서 그렇죠. 그나저나 저도 이제부터는 뉴스 좀 봐야겠어요. 아까 그 아줌마가 하는 이야기 10%도 못 알아듣겠던데.” 단유는 일부러 말을 돌렸다. 하은은 씁쓸한 미소를 입에 띄며 단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일 전화해볼게. 부탁하면 들어줄 거야.” 누구에게 전화한다고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단유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지금 한국에 없어서 만나기 어려울 거 같은데.” “뭐?” 친구이자 연성 재단 내에서 팀장 직급으로 근무 중인 주영에게 전화를 건 하은은 재훈이 국내에 없다는 이야기에 당황하고 말았다. “집 옮긴다고?” 결국 주영에게 사정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응.” “벌써 애들이 고등학교 갈 나이가 됐구나.” “그렇지.” “…잘 크고 있지?” “너무 잘 커서 걱정할 일이 없다.” “너 방금 무슨 학부모 같았어.” “그랬나? 하긴 반쯤은 그런 생각으로 살아.” “…많이 변했구나? 너.” “내가 뭘?” “네 과거를 생각해봐라.” 한군데 오래 있지 못하고, 잠깐잠깐 일하다 지치면 그만두고 지칠 때까지 놀다가 돈이 떨어지면 또 적당한 일자리를 찾아 떠돌았던 하은이었다. 적당히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할 때까지는 남부럽지 않게, 놀 거 다 놀아보자는 마인드였다. “내가 그렇게 심했나?” “오죽하면 내가 너 때문에 다크서클이 생겼겠어?” “지도 같이 놀았으면서.” “너랑 같이 놀아주느라 다크서클이 생겼다고!” “몰라. 지나간 일은 왜 또 꺼내고 그래. 아무튼, 그래서 어떡하지?” “사내변호사님 보낼게.” “변호사?” “재훈 오빠의 법률대리.” 말하자면 복대리였다. 민법 제123조에 의거, 복대리인으로서 지정된 변호사는 재훈의 법정대리권을 대리할 수 있었다. “아주 단단히 준비하고 나간 거구나.” “오빠가 챙겼겠니? 회사에서 법률적 문제가 나올 걸 미리 다 체크해 뒀으니 그런 거지. 그럼 그 집은 팔고 나갈 거야?” “그래야 하지 않을까? 옮기려고 하는 동네가 워낙에 비싸서 대출받아서 사야 할지도 모른다는데.” “그래? 음…그 문제도 우리 변호사랑 상의해보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그 집 팔기는 좀 아까울 거 같은데.” “왜?” “왜긴? 요즘 오피스텔이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 가지고 있으면 그게 다 돈이야.” “나만 몰랐구나.” 그 뒤로 사소한 이야기가 오간 뒤, 변호사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을 정해 만나기로 약속하고 통화를 마쳤다. **** “이사 간다고? 전학?” “아니. 일단 졸업은 여기서 하고 겨울에 이사갈 거 같아.” 명수는 시무룩한 얼굴로 상미에게 말했다. 상미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럼 방송은?” “무슨…네 방송?” “그럼 내 방송이지, 누구 방송이겠어? 도와주기로 했잖아?” “그건 뭐.” 상미는 명수 곁에 앉은 단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도와주기로 했잖아?” 도와달라고 생떼를 쓰는 모양새지만 그 속내는 안타까움과 아쉬움, 미련이 가득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에 단유는 말을 아꼈다. “학교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그렇지. 명수는 축구 선수가 돼야 하니까.” 상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신이 꿈을 가지고 준비하듯, 명수도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었으니, 그걸 이해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게다가 자기보다 더 오래되고 확고한 꿈이었다. 자신은 그것을 응원해야 했다. “어쩔 수 없지, 뭐. 그리고 굳이 얼굴 안 봐도, 게임에서 만나서 어울리면 되니까. 그렇지?” “그래. 그렇지.” 명수도 히죽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단유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 화장실?” “아니. 오늘 볼 일이 있어서 나 먼저 가야겠어.” “어디?” 명수가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어딜 가! 나 혼자 두지 마.’ 단유는 두 사람에게 시간을 주고 싶었다. 명수도 앞으로 더 나아가고 싶다면, 굳게 마음을 먹어야 했다. “강남에.” 실제로도 번역 회사에 들러 일을 봐야 했다. 지난 여름쯤에 맡았던 번역도 끝이 나서 엊그제 메일을 보낸 상태였다. 그랬더니 회사에서 한 번 찾아오라고 연락이 왔었다. 마침 상황이 이렇게 된 마당에 약속한 날짜는 아니지만, 전화로 양해를 구하고 찾아가 볼 마음을 품었다. “굳이 오늘 가야 돼?” “응. 상미야, 나중에 다시 보자.” “진짜?” “그래도 중학교 마지막 기말고사까지는 내가 도와줘야지. 안 그럼 너 본격적으로 방송하기도 전에 너희 어머니 반대에 아무것도 못 할걸.” “역시 김단유! 내 친구!” “그래, 나도 네 친구고 명수도 네 친구니까, 친구끼리 재밌게 놀고 있어.” 단유는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인 뒤 등을 돌렸다. **** “괜찮을까요?” ―그럼? 괜찮지. 김 프로는 언제 와도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오도록 해. 아니면 온 김에 같이 저녁이나 할까?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괜찮아요.” ―자세한 건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뚝 끊어진 핸드폰을 보며 단유는 피식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번역 회사에 가서 새 일감을 받으러 가던 단유는 주변을 둘러 보았다. 며칠 전의 일 때문인지, 새삼 이 동네가 다르게 보였다. ‘여기가 서울에서 제일 땅값이 비싼 동네 중 하나란 말이지?’ 그저 높은 건물과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 번잡하기까지 한 거리, 라고만 생각해왔던 곳이 문득 다르게 보였다. 마치 금을 바닥에 묻어두고 사는 동네랄까?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리는 것일까? “학생?” 단유는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학생한테 좋은 이야기 전하고 싶은데, 잠깐 시간 있어요?” 푸근한 인상을 가진 아주머니가 검은색 백을 들고 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신데요?” 아주머니는 곁에 선 마르고 하얀 얼굴의 여성과 마주 보며 미소를 지은 뒤,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우린 위험한 사람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려는 거야. 이사야 서에 보면….”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기 이러지 마시고 저기로 옮기시죠. 거리 한복판에서 이러시면 통행에 방해가 되니까.” “학생이 마음도 곱네. 몇 살이에요?” “중학생이에요.” “…네?” “중 3인데요.” “진짜?” “네.” “어쩜, 요즘 중학생들은….” 똑같은 레퍼토리. 낯선 얼굴이 호선을 그린 붉은 입술을 손으로 가리고 웃음소리를 냈다. “잠깐 시간 되죠?” “아니요.” 옆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했을 때만 해도, 단유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순순히 들어줄 거라고 여겼던 두 아주머니는 당황한 표정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제가 약속이 있어서 그러니, 지금은 두 분과 이야기를 나누기 어렵네요.” “잠깐이면 되는데.” “죄송해요.” “아니, 그럼 연락처라도 주겠니? 우리가 연락을 할게.” “그러실 필요가 있나요?” “이게 다 학생을 위해서에요. 요즘 사회가 워낙 흉흉하죠? 그 이유가 뭐 때문일 거 같아요? 그게 모두 사람들이 좋은 말씀들을 듣지 못하고, 그릇된 사고와 우상을 섬겨 그런 거예요.” 단유는 양해를 구하고 떠나려는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단유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어?” 단유의 시선을 따라간 아주머니는 저도 모르게 바보같은 목소리를 냈다. “어라?” 곁에 선 다른 아주머니도 이상함을 느껴 고개를 돌렸다가 그만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늘에 환하게 빛나는 빛. 태양과 다르게 빛나는 발광체는, 너무 환하고 밝아서 차마 눈을 크게 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거기서 쏘아낸 빛은 두 아주머니의 눈을 가렵게 만들었다. 실눈을 뜨고 바라보던 한 아주머니가 탄성을 내뱉었다. “설마!” 어렴풋한 실루엣과 오라 같은 빛은 두 아주머니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을 정도로 익숙한 형체의 그것이었다. “오! 주여!” 두 손을 맞잡고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리고 손을 비는 두 아주머니의 머리에 이미 단유는 없었다. 이를 지켜보다 단유는 몸을 돌렸다. “저 아줌마들 뭐야?” “몰라. 왜 길 가운데에서 울고불고 그러지?” “신흥종교인가?” 단유가 임시변통으로 만든 환상에 홀린 두 아주머니로 인해 길 위에는 잠시 소란이 있었고, 그 사이 단유는 유유히 거리를 빠져나갔다. ======================================= [536] Eyes on me(1) 태양의 고도가 낮아지며 날이 선선해지다 못해 서늘하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쌀쌀해진 탓에 사람들은 긴 팔, 두꺼운 스웨터를 꺼내 입기 시작했다. 평균기온은 봄보다 높은 편이지만, 겨울이 다가올수록 추워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을을 봄보다 더 춥다고 여긴다. 바람이 불면 떨어진 낙엽이 길 위에 쌓이고, 도심 속의 낮은 동산에도 붉은색으로 뒤덮여, 감수성이 풍부한 이들은 옷깃을 세우고 산책로를 걸으며 가을의 정취를 느꼈다. “에취!” “감기야?” “아니. 비염. 환절기만 되면 비염 때문에 미치겠어. 에취!” 상미는 붉어진 코를 비볐다. “언제부터 그랬어?” 명수의 전혀 몰랐다는 반응에 상미가 흘겨봤다. “옛날부터 그랬거든? 봄에도 비염 때문에 계속 재채기했었거든?” “몰랐어.” “이거 봐. 나한테 관심이 전혀 없었던 거야.” “아, 아냐.” “아니긴.” 명수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상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이런 애를….” 말끝을 흐리며 미안해하는 명수를 노려보던 상미는 명수의 손을 낚아채듯 잡았다. 명수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이래서 내가 나오기 싫었던 거라고. 가자.” “으응.” 명수는 붉어진 얼굴로 상미의 뒤를 따라갔다. 마치 목줄에 매인 강아지처럼. “오늘 딱 5번만 이겨보자.” “응?” “랭킹 올려야 돼.” “알았어. 최선을 다할게.” “최선을 다하는 거론 안 돼. 오늘 5승을 거두지 못하면 잠을 안 자겠다는 각오로 해야 돼.” “으응.” 질릴 정도로 사육당하는 강아지의 심정으로 명수는 상미를 쫓았다. “여자 친구는 어떻게 사귄 거야?” “어쩌다 보니.” “그러니까 그 어쩌다, 가 뭐냐고?” 앞장서 묻는 지태만큼이나 채윤도 궁금하다는 얼굴을 했다. 도하는 뚱한 표정으로 두 사람과 그 뒤에서 관심 없다는 듯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단유를 보다 말했다. “우리 동네에 살던 앤데, 걔가 사귀자고 했어.” “여자애가 먼저?” “응.” “왜?” “뭐?” “이상하잖아. 도대체 너한테 먼저 고백할 이유가 뭐가 있어? 사진 보니까 얼굴도 예쁜 애더만.” “난 먼저 고백받으면 안 되냐?” “응.” “왜?” “야, 너도 양심이 있으면 그런 말이 나오냐? 천하의 진도하가 여자한테 먼저 고백을 받아? 차라리 니가 협박을 했다고 하면 믿겠다.” 지태의 말대로 ‘천하의 진도하’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천하의 진도하’가 이미 오랜 옛날이야기라는 건, 지태가 이렇게 대놓고 디스를 할 정도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옛날의 도하였으면 지태는 이미 쌍코피를 흘리고 있었겠지.’ 채윤이 키득대는 이유였다. 지금의 도하는 이런 친구들의 반응에 그저 눈썹을 한 번 꿈틀댈 뿐이었다. “가끔씩 자기가 키우는 개를 데리고 동네 산책을 할 때가 있는데, 그때 몇 번 마주쳤었어. 그런데 한 번은 그 개가 미친 새끼처럼 뛰어다니다가 차도로 뛰어나가는데 내가 막은 적이 있었거든. 그때 고맙다고 하더라.” “겨우 그걸로?” “그리고 한번은 길을 가다가 지갑을 흘렸는데, 마침 내가 뒤에 있다가 그걸 주워서 준 적도 있고.” “응?” 지태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또 한 번은, 그게 이번 여름이었는데, 되게 더운 날이었거든? 잠깐 편의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벽에 기대고 있길래, 얼굴도 몇 번 마주치기도 했어서 그냥 지나가기도 뭣했는데 눈이 마주쳤어. 그래서 괜찮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괜찮다네? 그리고 집에 들어왔는데, 며칠 뒤에 다시 우연히 만났는데 사귀자고 하더라고.” 지태는 채윤을 돌아보고, 다시 뒤에 앉은 단유를 바라보았다가, 여전히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단유를 확인하고 다시 채윤에게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이해돼?” “아니.” “이상하지?” “응.” 지태는 고개를 끄덕이고 도하를 바라보았다. “완전 이상하잖아!” “뭐가?” “겨우, 고작 그걸로 좋아한다고?” 도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 참. 그래, 그건 그렇다 쳐. 그럼 넌 왜 고백 받아들였는데?” 도하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그냥, 그게…내가 이제까지 알던 애들이랑 다른 느낌이라서 신선하달까?” “응?” 도하는 단유를 흘깃 본 뒤, 말을 이었다. “예전에 알던 애들은, 솔직히 같이 노는 애들이었거든. 발랑 까진 애들. 그냥…나 같은 애들이었는데, 걔는 조금 다르더라고. 그래서 호기심도 생기고, 뭐…그랬어.” “호기심 때문에 오케이를 했다고?” “그런 마음도 있었고…솔직히 얼굴도 예쁘잖아, 그 정도면.” “와, 나.” 지태는 이마를 짚었다. “여름도 아닌데 열나는 거 같아. 도대체 이 세상은 얼마나 요지경인 거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여자 친구를 만들다니.” 때마침 명수가 양팔에 음료수를 싸 들고 나타났다. “내가 이런 셔틀을 하다니.” 명수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채윤이 얼른 음료수를 받아주었다. “네가 가위바위보 져서 그런 거잖아.” “근데 얘는 왜 이래?” 채윤은 피식 웃으며 사정을 이야기했다. “도하한테 여자 친구가 생긴 게 충격이래.”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지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자 친구가 생긴 이유도 납득하기 힘들다고!” “무슨 이윤데?” 채윤이 간략하게 알려주자, 명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지태가 도끼눈을 뜨고 명수를 응시했다. 그 시선에 명수가 물었다. “왜?” “이 이야기를 듣고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든다고?” “그렇게 연애할 수도 있는 거지, 그게 뭐가 이상해?” 지태는 명수의 표정을 살폈다. 명수는 볼을 붉히며 들고 있던 음료수 중의 하나를 단유에게 넘겼다. 단유가 짧게 ‘고마워’라고 답한 후,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실 때, 지태가 물었다. “너, 수상해.” “뭐, 뭐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말이야, 얼굴에 다 드러난다고.” “내 얼굴이, 뭐?” 지태는 단유에게 물었다. “얘, 연애하냐?” “응.” “…뭐? 진짜? 진짜로 연애한다고?” “응.” “너, 너, 여자 친구 있어?” 명수는 시계를 보는 척하며 허둥댔다. “야, 단유야. 점심시간 다 끝난다. 들어가자.” “그래.” “야, 인명수! 딱 거기 서!” 지태의 외침에도 명수는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에 피식 코웃음을 치며 도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들어갈게. 아, 이거 잘 마실게.” “어, 어. 잘 마셔. 나중에 보자.” “야! 인명수!” 도하는 명수의 등을 보며 부르짖는 지태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너도 여자 친구 사귀면 되잖아.” “야! 그게 말처럼 쉽냐?” “쉽던데?” “이익!” 채윤이 지태의 등을 두드리며 달랬다. “괜찮아. 나중에라도 생길 거야. 울지마.” “안 울어!” 지태는 채윤의 위로를 뿌리치고 씩씩거리며 학교 본관으로 들어갔다. 그 뒤에서 채윤이 살랑거리는 가을바람을 맞으며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채윤의 웃음을 실은 바람이 교정 화단에 심겨 있던 나무를 스치고 지나가자, 힘없이 매달려 있던 낙엽들이 아이들이 떠들던 그 자리로 떨어져 내렸다. **** “이번에도 고마웠어. 편집장님이 대단히 놀라워하더라고.” “감사합니다.” “우리가 더 감사하지. 이렇게 마감을 지켜주니까.” 계속된 칭찬에 단유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저 웃음만 지었다. “솔직히 말이야.” 유 팀장은 안경을 한번 고쳐 쓰며 말했다. “입이 근질근질해. 천재 소년이 있다! 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거든.” “천재는 아니죠.” 고작 번역 좀 한다고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을까? “아냐, 너 정도면 천재지, 천재. 전문 번역가들도 이만한 서적을 이렇게 빨리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고. 가끔 동종업계에 있는 사람들이나 다른 번역가들한테 너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데, 진짜 목에 여기까지 네 이름이 올라왔다가 겨우겨우 참는 형편이란 말이다.” ‘김단유’라는 번역가의 이름은 조금씩 업계에 알려지는 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 사람이 이렇게 빨리 번역본을 출판하는 경우가 흔치 않기 때문이었다. 1년 동안 벌써 3권의 책이 출판된 상황이었다. 물론 그중 한 권은 작년 말에 번역했던 것이 올해 나온 것이었고, 올해 번역한 서적 중 한 권은 아직 출판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경이로운 속도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아 외쳤다. 그 때문에 ‘김단유’에 대해 물어보는 이들이 조금씩 늘고 있는 형편이었지만, 회사에서는 그에 대해 함구했다. 솔직히 유 팀장은 이미 3권의 번역서로 실력이 입증되었으니 괜찮은 거 아니냐는 입장이기도 했지만, ‘중학생’이라는 타이틀은 번역에 대한 신뢰를 해칠 수 있다는 사장의 의견도 일리가 있었기에 여전히 입에 걸린 자물쇠를 쉽게 풀지 못하고 있었다. “전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괜히 제 이름이 거론돼서 지금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걱정되거든요.” “오히려 유명해지는 게 더 좋지 않겠니?” “아뇨. 그냥 조용히, 다른 사람들처럼 조용히 지내고 싶어요.” 은둔자 스타일이구나, 라고 대답한 유 팀장은, 그래도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너 같은 인재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야 돼.” “모르는 게 좋습니다.” 단호한 말투로 단유는 선을 그었다. 앞으로도 이 일을 계속하는 건 단유도 원하는 일이었고, 회사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언젠가는 알려질 수 있겠지만, 굳이 나서서 알리고 싶지는 않다는 단유의 뜻을 유 팀장은 이해해 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이 없는 건가요?” “그래. 네가 너무 빠르게 일을 진행해 준 덕분에 말이야. 사실 해외 출판사나 작가랑 상의해서 일을 따는 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 미리 많이 딸 수도 없는 것이, 미리 계약을 해 놓았다가 제때 출판을 못 하면 회사로서도 손해기 때문에 양을 어느 정도 조정하는 부분이 있어. 그런데 네 덕분에 올해는 초과 달성한 셈이지. 아, 물론 지금도 계약을 진행 중인 책들이 몇 되긴 해. 내가 그쪽 일을 맡질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 올겨울부터 다시 일을 맡기게 될 거야.” 회사에 소속된 번역가가 단유 혼자만이 아닌 터라 그 작가들에게도 맡긴 책이 있었다. 계약이 된 만큼, 그들에게 가야 할 책도 있기에 단유에게 그 책들을 모두 몰아줄 수만은 없는, 그런 입장도 있었다. “그럼 겨울까지는 쉬는 거네요.” “왜? 계속하고 싶어?” “이왕이면요. 사실 그 책들을 읽는 게 재미있었거든요.” “너처럼 책도 좋아하고, 번역도 잘하는 사람이라면 ‘번역가’가 천직이다, 천직.”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번역가로 계속 활동하는 게 나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직업이니, 그 정도 직업을 유지한 채 본업인 ‘마법사’로서의 역량을 키우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돈도 많이 벌었잖니?” 돈독이 올랐구나, 라고 농담을 하려다 상대가 아직 어린 중학생이란 사실에 유 팀장은 말을 바꿨다. “그럼 겨울까지는 휴가받은 셈 치죠.” “그래. 그동안 수고했으니, 잠시 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아, 맞다.” 유 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책 두 권을 가지고 돌아왔다. “자, 선물.” 다른 번역가가 맡은 책이라 단유가 번역할 필요는 없지만, 단유가 책을 좋아하기에 번역과 상관없이 선물 겸해서 단유에게 건넸다. 이런 식으로 지금까지 받은 해외 원서들이 단유의 책장에 하나둘 늘어나는 중이었다. “고맙습니다.” “나중에 맡길 일 있으면 먼저 연락줄게.” “기다릴게요.” “그래, 수고했다.” 단유는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천재야, 천재.” 유 팀장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단유가 들고 간 책 때문이었다. 대학생 이상의 고학력자들이나 겨우 이해할 법한 전문 서적들을 술술 읽고 이해하는 16살의 아이를 천재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 [537] Eyes on me(2) 1학년 때나 2학년 때나 3학년 때나, 전체 조회가 있는 날의 교실은 언제나 어수선했다. 추측하기에 그건 고등학교에 올라가도 마찬가지일 것만 같았다. “으흠.” 교장 선생님을 비추는 카메라에는, 마이크를 피해 기침을 하는 교장의 모습이 잡혔다. “목이 많이 아프신 것 같은데, 그냥 조회 넘어가면 안 되나?” 잔기침과 가래 끓는 소리를 내는 교장 선생님의 모습이 안쓰럽다기보다는 그저 형식적인 조회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리라. 교장 선생님은 가을 감기에 걸리셨는지 마른 목을 축이려 연신 물을 마셨지만, 그런다고 목이 금방 낫지는 않았다. 마른 논이 갈라지듯 목소리가 갈라져 듣고 있는 학생들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일부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중 한 명이 명수였다. “좋아?” 단유가 물었다. “좋지, 그럼.” 명수는 히죽 웃으며 교실 앞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교장 선생님의 앞에는 2학년 학생 한 명이 서 있었는데, 바로 명수의 후배이자 현 축구부 주장을 맡은 아이였다. 장계 중학교 축구부는 올해 가을에도 우승을 거뒀다. 지난봄 대회에서는 아쉽게 준우승을 차지해서 연승을 잇지 못했지만, 잃었던 왕좌를 이번 가을에 되찾았다. 여름방학 동안 고생했던 2학년들의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교감 선생님이 읽고 교장 선생님이 건넨 상장을 받으며 2학년 후배는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쟤 너무 긴장한 거 아냐?” “어디 저런 자리에 서 봤어야 말이지. 애가 낯을 많이 가려서, 처음에는 주장도 안 하려고 하더라고. 그런데 내가 말했지.” “뭐라고?” “네가 주장을 해야 내가 안심을 한다고. 쟤가 날 되게 존경하거든.” “존경?” 단유의 되물음에 명수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익살 궂게 웃었다. “왜 이래? 후배들 중에 나 존경하는 애들 많다?” “걔들이 그래? 너 존경한다고?” “그럼.” 세상에, 아무리 친한 명수지만, 명수를 존경하는 후배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놀랍다. 물론 축구 실력만 보면, 그러니까 경기장 위에서 날뛰는 명수를 본다면, 명수를 존경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경기장 밖에서의 명수를 보고 과연 존경한다고 할 수 있을까? 단유는 고개를 모로 젓다가 물었다. “그런데 넌 저런데 서고 싶지 않아?” “뭐?” “상 받는 장면이 카메라로 나오는 거.” “에이. 난 싫어.” 하긴 단유 본인도 저런 자리에 나가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일은 싫으니까. “쪽팔리게 고작 중학교에서? 난 싫어. 하려면 공중파 TV 정도는 돼야지.” “…아, 그런 뜻이야?” “나중에 프로선수 돼서 방송국 카메라 많은 데서 박수갈채 받으면서 받아야 폼이 나지. 이런 데서? 에이, 싫어.” 명수는 스케일이 크구나. **** 늦은 시간, 일을 마치고 돌아온 하은이 단유를 불렀다. “우리 집 말이야.” 지난번에 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들렀다가 흐지부지되고 말았었다. 하은이 알아서 해결하겠노라고 말해서 이후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구하셨어요?” “그게 말이야.” 하은은 머리를 긁적였다. 본래 이 집의 매매에 대한 결정권은 법정 대리인인 재훈에게 있었다. 그러나 본인이 해외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재훈의 복대리인인 재훈네 집안 변호사가 하은을 만나게 되었다. “재훈씨는 이 집의 매매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가요?” “네. 그래서 만약 매각을 원하신다면 알아서 하시라고 합니다. 거래시 제가 도움을 드릴 수도 있을 거고요.” “잘됐네요.” 어차피 법무사에게 등기 대리를 맡겨야 하는데, 변호사가 해준다면야 하은이 신경 쓸게 줄어서 좋다. “그런데….” “네?” “만약 다른 집이 필요하신 거면 굳이 팔지 말고 하나 더 사주시겠다고.” “네?” 변호사는 핸드폰을 꺼내 몇 번 누르다가 곧 액정에 뜬 것을 눈으로 훑으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 집의 명의가…김단유 군의 것으로 되어 있다지요? 그리고…같이 동거하는 아이 중에 인명수란 아이도 있다면서요?” 하은의 눈가가 살짝 굳기 시작했다. “재훈 씨의 말을 전하자면, 인명수란 아이의 명의로 집 하나를 더 사도 된다고, 그러시더군요.” 하은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버렸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하은의 표정을 마주하면서도 변호사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핸드폰을 끄고 다시 안주머니로 집어넣을 때, 하은의 냉랭한 목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이게 뭐하자는 거죠?” “네?” “우리가, 아니 애들이 무슨 거지인가요? 무슨 적선하듯이….” “적선이라뇨? 아시겠지만, 서울의 집값, 결코 거지에게 적선할 푼돈 정도로 여기기 어려울 텐데요.” “그러니까요! 집이 무슨 애들 장난감도 아니고…이렇게 쉽게 건넬 물건이냔 말이에요!” 변호사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재훈 오빠, 아니 연재훈 씨가 집을 준다고 하면 우리는 ‘아이고 고맙습니다’ 하고 넙죽 받으면 되는 건가요?” “그런 의미로 드리는 선물은 아닙니다.” “선물, 이요?” “…죄송합니다. 말이 헛나왔군요. 아무튼, 재훈 씨의 의사는 그렇습니다.” 도대체 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렇다고 변호사에게 화를 낼 성질의 것은 아니란 생각에 하은은 심호흡을 했다. “이건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 같네요.” 준다고 넙죽 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1만원 짜리 문제집이라면, 그래 성의를 생각해서 받아준다 할 수 있다. 하지만, 1억, 아니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를 금액의 ‘집’을 무상으로 준다는 걸 받아들이긴 어렵다. 하지만 생각에 잠겨 잠시 입을 닫은 틈에 변호사가 꺼낸 말에서 하은은 눈썹을 추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 그 아이들의 법적 권리에 관한 내용으로 의논이 필요한 경우, 저에게 연락 주시면 됩니다.” “…무슨 뜻이죠?” 사실 이번 기회로 ‘복대리’라는 개념을 처음 알게 된 하은이었다. 대리인의 대리인이라니. 마치 난 너희들 보기 싫다, 라는 말을 간접적으로 외치는 것 같지 않은가. 해외에 있어서 이야기 나누기 힘들다는 말도 핑계로만 들렸고. 사실 국내에 있다 하더라도 그를 보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긴 했지만, 그것과 이건 다르다. ‘차는 것과 차이는 건 다르잖아.’ 그런데 변호사의 말은 재훈이 대놓고 ‘난 빠질래’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책임한….’ 이를 꽉 깨무는 하은에게 변호사는 명함을 건넸다. “이 전화로 전화 주시면….” 하은은 먹이를 낚아채는 독수리의 그것처럼 사납게 명함을 채갔다.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 “의논하고 연락드리죠.” “그러십시오.” 변호사는 일어서며 양복 앞 단추를 여몄다. 하은은 변호사를, 그 뒤에 선 그림자를 노려보듯 도끼눈을 뜨고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집을 새로 사준다고요?” “응.” 단유와 명수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두 사람 다 쉽게 입을 열진 않았다. “일단…그 사람 말로는 단유는 이 집이 있으니까, 명수에게도 집을 주겠다는 건데….”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명수가 말을 잘랐다. 단유와 하은이 명수를 바라보니, 평소의 명수와 다른 모습이었다. “말하자면, 저한테 이거 먹고 떨어지라는 거네요.” 그 말에 하은이 당황했다. “아냐, 그런…뜻은 아닐 거야.” “어차피 전, 단유 옆에 꼽사리로 들어온 거잖아요. 재훈이 형, 저한테 별로 관심 없었는걸요. 그런데 그런 저한테 집을 사주겠다는 건….” 명수는 단유를 바라보았다. “저희랑 아주 연을 끊겠다는 거 아닌가요?” 하은이 손을 저었다. “그런 건 아닐 거야. 그러니까, 그 사람 돈이 많잖아? 돈이 많으니까, 그래서일 거야. 그 사람한테는 집 한 채 사는 건 별로 무리가 아니란 거겠지. 그런 걸 거야.” 단유는 짧은 한숨을 토해냈다. 결국 두 사람 다, 재훈이 ‘선의’로 집을 사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셈이었다. 모두가 말은 안 했지만, 그때 그 일로 가슴에 알게 모르게 상처를 입은 것이리라. “그리고 저 그거 안 받을래요. 재훈 형과 계속 보고 싶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받는 건 아닌 거 같아요. 그 형한테 계속 대가 없이 받는 것도 싫고요.” 명수의 대답과 단유의 무언의 동의를 확인한 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 제안은 받지 않는 거로 하자.” 하은은 빙긋 웃었다. 억지로라도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게 중요했다. 우린 잘 지내고 있다고, 당신이 그런 싸구려 동정심을 보이지 않아도 잘 사노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싸구려치고는 터무니없이 비싼 값이지만.’ 분위기도 바꿀 겸, 하은이 자신의 허벅지를 찰싹 때리며, 한 톤 높은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 이번 주말에 새로 옮길 집이나 보러 갈까?” “다 같이요?” “그래! 우리가 다 같이 살 집이니까, 당연히 같이 봐야겠지?” “좋아요!” 명수가 입을 길게 찢으며 좋아했다. **** “이 집입니다.” 하얀 카라티에 감색 정장 재킷을 걸친 수더분한 인상의 중개사가 문을 열어 주었다. 25층 아파트 중 21층인 이 집은 비워진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고 했는데도 입구부터 자욱하게 쌓인 먼지가 세 사람을 반겼다. “원래 사람이 관리하지 않는 집은 금방 더러워지는 법이죠.” 일부 중개사들은 집을 보러오는 손님의 구매의욕을 높이기 위해 집을 청소해놓기도 하지만, 지금 이 중개사는 그런 수고를 할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워낙에 수요가 많은 동네라서 살 사람은 뭘 해도 살 거라고 생각하는 중개사였다. 집 안으로 발을 들인 하은과 두 아이는 먼저 거실로 향했다. “좀 작네?” 이전의 오피스텔에 비해 거실이 조금 작았다. 하지만 그건 이 아파트의 평수가 오피스텔보다 작기 때문이기도 했고, 아파트 자체가 방의 크기를 키운 구조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거실이 좁아진 탓도 있었다. “전에 살던 신혼부부는 그냥 이대로 썼는데, 여기 베란다를 확장해서 쓰면 넓게 쓸 수 있어요. 요즘 다 확장해서 쓰잖아요?” 말이 나온 김에 베란다 쪽으로 나간 명수는 높은 고층의 아파트에서 오는 아찔함에 한 발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우와. 여기 되게 높구나.” 이전의 오피스텔도 높은 층수이긴 했지만, 여긴 거의 두 배 이상 높은 곳이었다. “요즘은 낮은 곳보다 높은 곳을 더 선호하는 거 아시죠?” 모르겠다. 하은을 쳐다보니, 하은도 잘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하지만 딱히 싫다는 것도 아니어서, 하은은 베란다에서 물러나 방 안을 구경하러 갔다. 그 사이 단유와 명수는 베란다에서 바깥을 내려다봤다. “남산 타워에서 내려다보면 이런 모습이겠지?” “남산 타워가 더 높겠지만, 비슷할지도.” 명수는 처음에 물러섰던 것과는 달리, 창에 붙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멋지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광경이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그때 바람 부는 소리가 크게 들리며 바깥 들창이 들썩거렸다. 창에 손을 짚고 있던 명수는 그 떨림이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얼른 손을 떼며 허공을 내다보다가 단유에게 물었다. “이거 안 깨지겠지?” “응. 아마도.” 그렇게 허술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이렇게 높은 아파트를 짓는데 나라에서 허투루 승인을 내리진 않았을 것이니까. 그리고 만약 사고가 났다면 벌써 예전에 뉴스에 났을 것이다. 하지만 여태까지 고층 아파트에서 안전 문제로 뉴스에 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너희들도 방 좀 구경해.” 방을 둘러보던 하은의 말에 단유와 명수는 베란다에서 등을 돌렸다. “막상 본다 해도 잘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없는 방인데.” “그 방에다가 자기 책상이며 침대며 이런 걸 배치한다고 상상하면서 보면 돼. 어디에 어떻게 가구들을 놓을지 상상하는 거, 재미있을 거야.” 머리를 긁적이며 방 안을 힐끔 쳐다보는 명수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려 보일 뿐이었다. 이후 몇 집을 더 돌아본 뒤, 하은과 두 아이는 맘에 드는 집을 고르지 못한 채 다시 원래의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우리 집이 제일 좋은 거 같아요.” “여기가 적응돼서 그래. 나중에 이사 가서 적응하면, 그때는 거기가 더 좋을걸?” “그럴까요?” “그럼. 사람은 적응하기 나름이거든. 사소한 결점은 조금씩 고쳐나가면 되고.” 명수는 괜히 집을 둘러보며 아쉬운 듯 말했다. “차라리 여기서 통학할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여기서 거리가 얼만데.” 명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단유는 그런 명수의 머리를 한번 휘저으며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라고 말했고, 명수는 그런 단유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었다. ======================================= [538] Eyes on me(3) 거실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던 명수가 단유를 불렀다. “왜?” 단유가 명수 곁에 섰다. 명수는 턱짓으로 바깥을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낮이 짧아진 탓에 하늘은 어둑해져 있었지만, 하늘의 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밝은 조명 때문에 아래는 환했다. “처음에는 여기도 꽤 높다고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어제 그 아파트 보니까 여기가 별로 높게 안 보여.” “상대적인 거겠지.” 단유가 평이하게 대꾸하자, 명수는 작게 한숨을 뱉었다. “옛날에 보육원에 있을 때는 낮은 층수에 있고 싶었어. 그래야 빨리 운동장에 나가서 공을 찰 수 있으니까. 처음 학교에 갔을 때는 그래서 좋았어. 1학년 때는 1층을 썼잖아.” “그랬지.” “그런데 점점 학년이 올라갈수록 층수가 높아지더니 6학년 때는 4층을 썼잖아? 빨리 내려가려고 계단을 두세 개씩 건너뛰다 보면 위험할 때도 있었어.” “내가 너한테 뛰지 말라고 자주 뭐라고 했었지.” “맞아. …그리고 여기 이사 왔을 때는 왜 이렇게 높은 곳에서 살아야 하나 했었거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높은 곳에서 살게 되는 거 같애.” 거실 유리창에 손을 짚은 명수는 바싹 붙어서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자동차의 붉은 램프가 줄을 잇고 있었다. “나중에 우리가 다 크면, 그때는 산 정상 높이의 아파트에서 살게 될지도 모르겠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높은 곳이 싫다는 거야?” 명수는 바로 대꾸하는 대신 콧김이 서린 유리창을 손가락으로 비볐다. 뿌옇게 김이 서렸던 그 부분이 말끔하게 닦여나갔다. “그냥…높은 곳은 별로야.” 단유는 바깥을 바라보는 명수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바깥으로 시선을 주었다. 길 위에 붙어 있는 사람들과 차들을 내려다보며 단유는 대답했다. “나도 그래.” **** “자, 이번에도 단유가 전교 1등을 했다. 박수!” 어떤 아이는 입술을 모으고 호루라기 부는 소리를 냈고, 어떤 아이는 손을 번쩍 들어 손뼉을 쳐 보였다. 어떤 아이는 쉽게 보기 힘든 기록일 거라고 환호를 보냈고, 어떤 아이는 앞사람의 등 뒤에 숨어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런 가운데 단유는 짤막하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뒤, 자리에 앉았다. “단유 말고도 성적이 오른 친구들이 많더구나. 모두들 수고 많았다. 하지만 풀어지면 안 되는 거 알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알겠니?” 담임은 3학년 중에 가장 성적이 좋은 반을 맡았다는 기쁨에 얼굴이 활짝 피어있었다. 담임이 나간 뒤, 아이들의 축하 메시지가 줄을 이었다. “대박 아냐? 어떻게 3년 내내 그래?” “어쩌면 단유는 사람이 아닌지도 몰라. 야, 너 머릿속에 컴퓨터라도 심어 놓은 거 아냐?” “나중에 진짜 아이언맨이 될지도 몰라.” “그럼 미리 잘 보여야 하나?” 단유는 그런 아이들의 축하를 적당히 받아주었다. “단유야.” “넌, 거기까지.” 단유는 명수의 말을 잘랐다. “너까지 그러면 민망하니까.” “그게 아니고.” “…그럼?” “오늘 상미랑 100일인데 같이 놀자고.” “야, 너네가 100일인데 내가 왜 끼어?” “야, 니가 남이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두 사람 데이트하는데 끼기 싫다.” “지태랑 채윤이도 올 건데?” “뭐? 걔들이 왜?” “내가 오랬거든.” “네가 오란다고 가?” “지태는 좋다던데?” 단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태야, 넌 왜 왔냐?” “100일이라잖아? 축하해주려고 왔지.” 맑은 눈동자의 지태에게 다른 마음은 없는 듯했다. 그래서 더 불쌍하다. “채윤이 넌?” 채윤이는 얕은 숨을 뱉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 지태를 향해 눈짓했다. 끌려왔다는 뜻이리라. 단유는 채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정신없이 들떠서 수다를 떠는 명수와 지태를 바라보았다. “21층이면 얼마나 높은 거야?” “지금 니가 사는 곳의 높이보다 두 배 높지.” “대박. 거기서 보면 진짜 아찔하겠다?” “바람 때문에 베란다 유리가 덜컹거리는데, 난 유리 깨지는 줄 알았다.” “야, 그럼 위험하잖아? 그럼 평소에 문도 못 여는 거 아냐?”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아무튼 무섭더라.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까, 진짜, 진짜 사람이 작게 보이는 거 있지?” 검지를 구부려 보이는 명수는 무서웠단 소감과 달리 신명 나게 떠들었다. 채윤도 지태 뒤에서 그 이야기를 듣다가 단유에게 고개를 돌렸다. “정말 이사 가는구나.” “응.” “그럼 방학 때 했던 말이 진짜가 되는 거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자주 보지 못할 거란 말, 그 말이 현실로 다가왔다. 채윤은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명수와 지태를 보다 말했다. “그때는 그저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공부 때문에 보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지, 이렇게 멀리 떨어질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데.” 때마침 채윤이 들고 있던 진동벨이 울렸다. “내가 가지고 올게.” 채윤 혼자 네 사람 분량을 모두 가지고 오긴 힘들 거라고 생각해서 단유도 같이 일어섰다. 그때 패스트푸드점의 문을 열고 상미가 들어왔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네가 늦게 온 거야.” 상미는 눈을 한번 찡긋거리고는 명수에게로 갔다. “옷 갈아입고 올 줄 알았는데.” “옷 갈아입고 오라고?” “아니, 하도 늦길래 그런 줄 알았다고.” “며칠 뒤에 우리 학교 축제하잖아? 그거 준비하느라고 그랬어. 아, 너도 올 거지?” “시간 되면 갈게.” “시간 되면?” “아! 아니, 무조건 가야지. 무조건!” 주먹을 쥐어 보이는 상미에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명수였다. 상미는 명수 옆자리에 털썩 앉으며 가방을 옆에 내려놓았다. 유난히 묵직해 보이는 가방이었다. “공부도 안 하는 애가 가방엔 뭘 그렇게 넣고 다녀?” 지태가 물으니 상미가 혀를 찼다. “왜 보자마자 시비야? 너 소개받기 싫어?” 지태가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아니, 어쩌면 시늉이 아닐지도. “시비는 무슨! 너 어깨 피곤할까 봐 걱정한 거지.” “걱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걱정을 해도 얘가 해야지, 왜 니가 하냐?” “친구로서 걱정할 수 있지.” “너, 조심해. 내가 요즘 너 계속 지켜보는 거 알지? 내 친구를 아무한테나 소개해 줄 순 없는 거잖아?” “내가 아무나야?” “아무나가 되기 싫으면, 행동 똑바로 해.” 여기서는 상미가 갑이었다. “알았다, 알았어. 아, 햄버거 왔다. 아, 너 이거 먹을래?” 지태의 넉살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명수를 바라보았다. “내 건 안 시켰어?” “너 오면 시키려고 했지. 내 거 먹어.” “됐어. 난 다른 거 시킬 거야.” 상미가 명수를 빤히 바라보자, 명수는 얼른 일어나서 카운터로 향했다. 굳이 상미가 말하지 않아도 상미의 기호에 맞는 햄버거를 주문하는 일은 그동안 단련된 터였다. “단유야, 다음 주말에 우리 학교 축제 있는데 올 거지?” “내 대답과 상관없이 확정된 것처럼 말하네?” “명수가 너 데리고 오기로 했거든.” “그럼 왜 물어?” “그래도 개인의 의사가 중요하잖아?” 단유는 피식 웃으며 카운터로 간 명수를 바라보았다. 메뉴를 주문하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명수를 본 뒤, 상미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오늘 이렇게 보자고 한 거야?” “무슨 말이야?” “100일이라며? 그럼 너희 둘이서 데이트라도 하지, 왜 이렇게 다 모이게 했냐고.” “친구잖아.” 단유는 채윤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100일 기념일에 두 사람이 따로 만나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단유와 채윤이 이상한 건지도 모르겠다. 명수와 지태, 상미는 이렇게 모이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니까. 아니면 다수결의 맹점일지도. 햄버거를 먹어치운 다섯 사람은 감자튀김을 하나씩 집어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상미네 학교 축제에 대한 기대감이 서린 지태의 호기심과 상미의 자랑, 명수의 과한 리액션이 얽혀 이야기는 즐겁게 이어졌다. “그런데 우리 어디 갈까?” “피시방 가서 한 게임 할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상미가 그렇게 말하니 단유와 채윤은 동시에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왜? 뭐?” “너네 100일이라며? 그래서 이렇게 우리까지 불러놓고선 고작 간다는 데가 피시방?” “뭐 어때서? 그리고 솔직히 100일이 뭐 별거야? 안 그래?” “응? 그럼, 그럼. 별거 없지.” 명수의 맞장구에 상미가 명수의 머리를 토닥거려 주었다. 그리고 명수는 그게 좋다고 또 히죽 웃었다. 저러니까 바보 소리 듣는 거다. 연애 바보. “아무리 그래도 피시방은 좀 심했고…. 여기서 계속 이야기하기도 그러니까, 일단 자리 옮기자.” “어디로?” 중학생 5명이 함께 갈 만한 곳이 어디 있을까? “뭐야? 고작 집이야?” 오피스텔 앞에서 투덜거리는 지태를 채윤이 다독였다. “단유네 집에 지금 아무도 없다잖아? 우리끼리 놀기 좋지 뭐.” “난 별로야. 어쩐지 공부방 같은 느낌이란 말이야.” “그건 나도 그래.” 불과 몇일 전까지 중간고사를 대비해 단유네 집에서 스터디를 했던 아이들이었기에, 그런 감상도 과장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렇게 케이크에 불붙이고 축하해주는 자린 있어야지.” 채윤이 손에 쥐고 있던 케이크 박스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게 왜 공부방이냐고!” “야! 우리 집 공부방 아니거든?” 명수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상미는 명수의 팔짱을 끼고 있었는데 상미도 썩 즐거워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아무리 둔한 명수라도 그런 눈치를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어서, 더 이상 입을 열진 않았다. 그리고 먼저 집으로 가자고 제안한 단유는 오피스텔 앞에서 아이들을 세웠다. “3분 있다가 들어와.” “3분?” “갑자기 그렇게 말하니까 뭔가 기대하게 되잖아?” 상미가 명수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마치 미리 준비했던 거야, 라고 묻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명수는 전혀 알지 못하기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솔직히 단유가 뭔가를 준비할 시간은 없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줄곧 함께 있었는데 집에 뭔가를 준비해 놨다면 모를 리가 없으니까. 단유가 들어가고 난 뒤, 네 사람은 가을 저녁의 노을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오늘 유난히 노을이 붉은 것 같네.” “오, 상미 너 유난히 감상적인데?” “내가 아까 시비 걸지 말라고 했지?” “이게 무슨 시비야? 칭찬이지.” “니가 하는 말은 칭찬으로 안 들리거든?” 뭔가 길게 입씨름을 할 것 같은 분위기를 채윤이 나서서 말리며 명수에게 물었다. “진짜 뭔데? 넌 알 거 아냐?” “몰라, 진짜.” 마침 명수의 핸드폰으로 올라오라는 메시지가 전송됐다. 명수는 그 메시지를 보인 후 안으로 들어섰다. 두근거리는 마음 반, 의심 반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명수는 물론, 다른 세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 뭐야?” 천장에 가득한 색색깔의 풍선과 크리스마스 트리에서나 볼 것 같은 발광체가 벽에 붙어서 반짝이고 있었다. 종이 꼬리가 달린 풍선도 빛을 반사 시키는지 그 자체로 조명 역할을 했다. 거실의 한쪽 벽에는 우스꽝스러운 모양의 해골 인형이 달려 있었는데, 머리가 커서 오히려 귀여운 느낌이었다. 특이한 점은 팔다리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는데 노란색과 붉은색이 번갈아 나와서 파티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이, 이걸 언제 준비한 거야?” “서프라이즈.” “진짜 놀랬다.” 명수가 어버버 거리다 겨우 물었다. “이걸 진짜 네가 준비했어? 언제? 어떻게?” “비밀.” 단유는 씩 웃으며 손을 들어 거실을 가리켰다. “들어와.” 이럴 때 쓰려고 배운 건 아니지만, 환상 마법은 꽤나 효과적이었다. 아이들은 그것이 환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거짓이라고 의심하지 못하면, 그것은 진짜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환상이고, 마법이었다. ======================================= [539] Eyes on me(4) 주위를 둘러보며 구경에 여념이 없던 아이들의 정신을 돌려놓은 것은 상미의 물음이었다. “야, 너희는 뭐 없어?” “뭐?” “단유는 우릴 위해서 이렇게 해줬는데, 너희는 뭐 없냐고?” 지태가 케이크를 들어 보였다. 상미가 코웃음을 쳤다. “그걸로 퉁 치려고?” 지태는 채윤의 다른 손에 들려 있던 봉지를 들어 보였다. 과자와 음료수 등이 가득 담긴 봉지였다. “니들한테 뭘 바라냐.” 상미가 손을 좌우로 흔들어 보이며 혀를 찼다. “넌 왜 우리한테 상의도 안 하고 이런 걸 준비해서 사람을 당황시켜?” “이게 뭐 별거라고.” 단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며 아이들을 거실로 데려왔다. 아이들은 먹을 걸 깔아놓고 수다를 떨거나 게임을 하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비록 명수와 상미의 100일이라는 핑계는 있었지만, 중간고사를 무사히 끝낸 아이들의 뒤풀이 같은 것이었다. 단유도 그 사이에서 밝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다 같이 모여 노는 것도 앞으로는 힘들 테니까. 우습게도 아이들은 그 뒤풀이를 끝으로 다시 기말고사 준비에 들어갔다. 1, 2학년은 12월에 기말고사가 있지만, 3학년은 11월에 기말고사를 본다. 때문에 시험 범위가 작아 공부하는 게 크게 부담스럽진 않다. 하지만 시험이라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인지라 아이들은 결코 그 사실이 반갑지 않았다. 게다가 일부 학생들은 아예 기말고사를 신경 쓰지 않았다. 과학고나 외고, 국제고나 자사고 같은 학교에 지원하려는 학생들에게는 2학기 기말고사가 고입 전형 성적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또한 특목고가 아닌 공업, 상업 계열 특성화고에 진학을 결심한 아이들도 기말고사에 별로 관심이 없는 모습이라, 결국 기말고사는 상당히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지게 되었다. “우리 학원 원장이 그러는데, 기말고사 잘 쳐야 한대.” “왜?” “고등학교 입학하면 바로 전국연합학력평가를 치는데, 범위가 중학교 과목 전 범위래. 그래서 그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려면, 기말고사 범위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나?” “그거 그냥 상술 아냐? 학원 빠지지 말고 계속 비싼 학원비 내면서 공부하라는?” “그럴 수도 있지. 그렇다고 없는 말은 아니잖아?” “우리 학원은 벌써 고등학교 과목 가르치는데.” “기말고사는?” “몇 주 전에 끝냈지. 기말고사는 범위가 넓지 않아서 시험 1주일 전에만 바싹 하고 그다음에는 다시 고등학교 진도로 넘어간다네.” “피곤하다, 피곤해. 난 공부가 체질이 아닌가 봐.” “누군 체질이라서 하냐? 다 그냥 하라니까 하는 거지. 우리 반에서 공부가 체질인 사람은 단유 밖에 없을걸?” 그 말에 모여서 수다를 떨던 아이들이 교실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언제나와 같이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단유였다. “왜 과학고 안 간대?” “나라면 과학고 대신 사립고 갈 건데.” “사립고든 과학고든 단유 정도 성적이면 장학금 받으면서 다닐 수 있지 않을까?” “그건 모르지.” “왜?” “그런 데 가는 애들이 보통 애들이겠냐? 다 자기 학교에서 단유처럼 전교 1등만 하는 애들일 텐데. 그런 애들이 모여서 순위를 정하면, 그때도 단유가 1등을 할 수 있을까? 솔직히 난 못할 수도 있다고 봐.” “3년 내내 전교 1등 했잖아? 학원도 안 다니고 전교 1등 할 정도면 대단한 거 아닐까?” “그래서 더 어렵다는 거지. 아무리 단유가 똑똑해도, 다른 애들 역시 똑똑해. 똑같이 똑똑한 아이들이 있으면 누가 더 유리할까? 아무래도 학원 다니면서 선행학습을 한 애들이 더 똑똑하지 않겠냐?” “그럴 수도 있겠네.” “게다가 강남에는 몇백, 몇천만 원짜리 과외를 받는 애들도 있다며? 그런 애들이랑 비교를 해봐. 혼자 하는 애랑, 과외받는 애들 중에 누가 더 성적이 잘 나오겠어?” 모인 아이들은 그의 생각이 옳을 수도 있겠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는 아이도 없진 않았다. “난 단유가 그 아이들 사이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우리 학교에 단유 말고도 지금 과학고 가겠다고 원서 쓰는 애가 한 둘이 아니라며? 그 애들이 단유보다 성적이 잘 나온 적 있어? 아니면 단유보다 똑똑하다고 평가받은 애가 있어? 없잖아? 다시 말해서, 과학고에 가더라도 단유보다 똑똑한 애는 의외로 많지 않을 수 있다는 거지. 그런 아이들까지 다 과학고에 몰려 있다고 가정한다면 말이야.” “그건 아니지. 걔들이 과학고 지원한다고 과학고에서 걔들을 받아준대? 걔들 중에 반 이상은 못 간다에 내 손목을 건다.” “이 새끼, 혓바닥 놀리는 거 봐라? 너 그러다 한순간에 훅 간다?” “크큭, 그만큼 확신한다고.” “그런데 우리가 단유 때문에 너무 눈이 올라간 거 아냐? 어쩌면 걔들도 다른 학교였으면 전교 1등 할 수 있는 애들인데, 단유 때문에 가려진 거 아닐까?” “하긴 걔들도 죽어라, 공부하긴 했을 거 아냐?” “나라면 그렇게 못 했을 거야. 존나 공부해도 맨날 1등은 단유가 하니까 의욕이 날 리가 없잖아.” “어차피 1등은 단유, 인정?” “어, 인정.” 키득대는 아이들의 수다는 그저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의 뒷담화에 불과했지만, 기말고사를 준비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잠시 벗어보려는 것이기도 했다. 일반고에 가든, 안 가든 어쨌든 성적을 감독하는 이는 부모님이었고, 부모님은 어떤 핑계로든 성적이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단유가 시험공부를 하고 있을 거라고 아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단유는 교과서를 보지 않았다. 모처럼 일이 없던 차였기도 해서 개인적인 공부에 매달리는 중이었다. 그동안 바쁜 중에도 간간이 공부를 하긴 했지만, 이렇게 집중해서 공부할 시간이 없던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그간 단유가 줄곧 정규 교육 과정과 별개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분야는 수학, 화학, 물리 등의 이과 계통이었다. 그러다 번역 일을 하면서 사회과학 분야에도 관심을 가졌고, 이계에서 돌아온 뒤에는 심리학, 금속학, 건축 구조학 쪽으로도 잠시 공부를 했었다. 그러나 이 분야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으면 쉽게 파악하기 힘든 분야였던지라 잠시 보류했다. 아무리 학교 정규 과목이 쉽다고 해도 아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던 데다, 번역과 촬영 등의 일들이 있어서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던 탓이었다. 하지만 겉핡기라도 조금씩 공부한 보람은 있었던지, 단유의 마법에도 진전이 있어서 환상―혹은 환시(幻視) 마법도 가능하게 되었다. 탄소라는 원소를 이용해 물건을 ‘소환’하는 마법도, 원소에 대한 이해와 구조에 대한 여러 실험을 통해 다양한 성질의 물건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는데, 지금은 탄소 외의 다른 원소를 활용하여 유사 ‘소환’ 마법을 준비하는 중이다. 이 정도만 해도 사실 이 세상에서는 반칙이나 다름없었다. 국가 단위의 억제력이 아닌 이상 단유를 통제하거나 억압할 수단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유사 ‘다이아몬드’를 만들어 유통시키게 된다면―지금은 어렵지만 향후에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드비어스(DE Beers Conslidated mines)의 감시가 무색하게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유가 원하는 것은 남을 억압할 무기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경제력도 아니었다. 처음의 목적이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었다면, 지금의 목적은 마법 그 자체였다. 마법은 현대 물리학과 철학의 개념을 뛰어넘는, 말 그대로 초현실이었다. 초현실의 존재는 곧 세계의 확장이었고, 사고의 지평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과연 이 세계의 진실은 무엇인가?’ 지구라는 행성과 현대 과학에 묶여 있는 세계의 진실이 아니라, 온 우주, 공간과 시간을 넘어 의미로 존재하는 세계의 진실을 단유는 알고 싶었다. 그런 단유에게 ‘기말고사’는 물론, 진학은 1푼의 가치도 없었다. 아니, 전혀 없지는 않았다. 여전히 단유는 지식이 고프고, 고등 학문은 단유의 지식수준을 조금이라도 넓혀줄 뿐 아니라 영감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정규 교육 과정이 단유에게 줄 수 있는 한계는 분명 존재했다. 그렇기에 단유는 일반고로 진학을 결정했다. 그것은 단유를 철저하게 ‘평범한’ 이들 속에 숨겨줄 것이기에. **** 한 달 뒤의 기말고사도 끝이 나니, 정말 교실은 반쯤 놀이터가 되었다. 방학까지 한 달도 더 남았지만, 수업이 제대로 진행될 리 없었고, ‘일부’ 학생들은 출결이 위험 범위를 넘지 않는 선에서 결석과 조퇴를 자의적으로 이용했다. 각 반의 담임들은, 그렇지 않아도 학기 말이라 산적한 서류 더미에 치이는 데다가 학생들이 ‘일탈’하지 않도록 감시·감독 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했다. 몸은 하난 데 지켜야 할 학생들은 30명이니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학생들을 강압적으로 붙들 수는 없었다. 학교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야 했고, 그저 그들이 도를 넘지 않기를 기도하는 수준에서 통제할 뿐이었다. “야, 학교에서 담배 피지 말랬잖아? 냄새 나.” “냄새 많이 나냐?” “전담 피운다고 안 했냐?” “전담이 몸에 안 받는 거 같더라고. 피우는 맛도 안 나고.” “골초 새끼.” 학교 뒤 폐지 수집터에서 하얀 연기가 뭉글뭉글 솟아나는 일도 빈번히 벌어졌지만, 선생님들은 그 현장을 제대로 잡아내기 어려웠다. “일부러 안 잡는 거 아냐?” “야, 일부러 안 잡는 게 말이 되냐?” “어차피 한 달만 있으면 다 학교에서 떠나고 없을 텐데, 굳이 지금 잡아서 뭐하게? 주임 선생님도 피곤할 거야.” “그건 그렇다. 크큭.” 시간이 남는 아이들은 후배들 교실을 어슬렁거리며 괜히 선배 부심을 부리며 시비를 걸기도 했지만, 그건 극히 일부의 학생들이었다. 대부분 학생들은 교실에서 게임을 하거나, 잠을 자거나, 매점을 가거나, 운동장을 뛰었다.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아이들 중에는 명수가 대표적이었다. “야, 패스!” 명수는 쌓인 스트레스를 공으로 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쟤가 무슨 스트레스?” 지태가 운동장 옆 스탠드에 앉아서 물었다. 곁에서 같이 구경하던 채윤이 설명했다. “중간고사 기간부터 기말고사 끝날 때까지 공을 한 번도 차지를 못했대잖아.” “그게 그렇게 스트레스인가?” “쟤는 그게 스트레스였겠지.” “여자 친구도 있는 놈이 별 게 다 스트레스네.” 하지만 그보다 더 스트레스가 쌓이는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상미의 문제였다. 어쨌든 나중에 이사를 가면, 지금처럼 상미를 만나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 비록 온라인상에서 만나 같이 게임을 하면 된다지만, 고등학교 축구부에 들어가고 나면 컴퓨터를 할 시간이 지금처럼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 부분은 명수도 이미 각오한 바였다. 그건 어떻게 감내할 수 있다 쳐도, ‘사랑’하는 상미를 보기 힘들다는 건 명수에게 꽤나 스트레스였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다른 이들에게 할 수는 없었다. 상미에게 이야기하기도 어렵고,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그러니 저렇게 웃지도 않고 이를 악물고 공을 차는 것이리라. “아무리 그래도 애들끼리 하는데 너무 진지 빠는 거 아냐?” “그러게. 명수가 축구 할 때 저렇게 진지하게 한 적이 있었나?” 시합 외에서 공을 찰 때는 늘 즐겁게 공을 차며 웃음을 터뜨렸던 명수였으니 이상하게 보일만도 했다. 운동장에 있는 애들이 명수를 집중 마크하니까 패스가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패스가 막혀 이어지지 않다 보니 공을 잡을 기회가 적어진 명수의 얼굴이 점점 더 굳었다. 입술을 굳게 닫고 눈썹을 추어올리며 달리는 명수의 얼굴이 무서웠는지 몇몇 아이들은 일부러 어깨 싸움을 피했고, 그렇게 공을 되찾은 명수는 공을 몰아 상대 진영으로 달려갔다. “불도저네, 불도저. 저거 봐라. 완전히 홍해 바다 갈라지는 거 같다.” “홍해 바다 보기는 했냐?” “비유가 그렇다는 거지.” 채윤의 대답에 지태는 칫, 하고 심통 난 표정을 지었다. “넌 왜 그러는데? 아까부터 뭔가 불만이 있는 거 같다?” “불만 없겠냐? 담배도 없다.” “되도 않는 농담은 관두고. 왜 그러는데?” “…나 떠난다.” “떠나? 어디?” “캐나다.” “…뭐?” “유학 간다.” 채윤은 아무 말도 잇지 못한 채, 지태를 바라보았다. 지태는 볼을 불룩하게 부풀린 채, 화난 듯 달리는 명수를 바라보았다. ======================================= [540] Eyes on me(5) 아침 운동을 위해 나선 단유와 명수는 평소와 달리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다른 친구들과 함께, 멀리 자전거 하이킹을 하기로 했다. 평소라면 늦잠을 자고 있을 지태나 채윤도 모처럼 일찍 일어나 가벼운 가방을 등에 매고 단유네 오피스텔 앞으로 왔다. “으, 춥다.” 지태는 두 팔로 자신을 감싸고는 하얀 입김을 후후 불어냈다. “달리면 금방 몸에 열이 오를 거니까 참아.” 채윤이 지태를 다독일 때, 오피스텔의 문이 열렸다. “일찍 왔네?” “우리도 지금 왔어.” “지태를 이 시간에 보다니,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명수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내가 뭐? 난 이 시간에 일어나면 안 되냐?” “됐고. 아침은?” “난 아침 잘 안 먹어. 채윤이 넌 먹고 왔냐?” “간단하게 과일 몇 개 집어 먹었지.” 명수는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단유를 돌아보며 물었다. “여기서 한강까지 가려면 꽤 오래 가야 할 텐데, 배 좀 든든하게 채워놔야 하지 않나?” “가다가 분식집이라도 있으면 잠깐 들리던가, 아니면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먹자.” “그럴까?” 명수는 자전거에 발을 올렸다. “그럼 고!” 난지 공원에서 시작해서 광나루 한강 공원에 이르는 코스를 모두 돌아보자는 무모한 도전은 불과 이틀 전에 결정되었다. “추억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래, 그래. 추억이 되겠지. 그런데 왜 매번 이렇게 여유없이 결정을 하는 거야?” “즉흥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건 젊음의 특권이라고!” 명수가 단유를 돌아보며 물었다. “쟤 뭐라는 거야?” “그냥 놀고 싶다는 핑계.” “단유 너까지 왜 그러냐? 너라면 날 이해해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해해.” 이해하니까 지태의 즉흥적인 제안이 ‘핑계’라고 짚어낸 것이다. 지태는 심각하고 진지하게 분위기를 만들고 싶지 않았고, 그것은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즐겁게, 흥겨운 기억만으로 가득한 친구들이었다. 그 기억을 계속 간직하고 싶다는 바람을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고, 또 원하고 있었다. “그럼 도시락이라도 싸야 하나?” “에이, 무슨 초등학생 소풍가는 것도 아니고 도시락은 무슨. 그냥 편의점에서 간단히 때우고 그 날은 계속 자전거만 타는 거야. 이름하야 폭주 자전거 데이!” “그게 네 개그의 한계구나.” 명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혀를 차자 지태가 발끈했다. “뭐, 어때서?” “둘 다 그만둬. 만약 그 코스로 돌려면 꽤 일찍부터 움직여야 할 거야. 채윤이는 그래도 믿을 수 있겠지만, 넌 조금 불안한데?” “내가 그렇게 신뢰가 없어? 두고 봐라. 내가 제일 먼저 나올 걸?” 지태는 자신의 말을 지켰고, 그래서 가장 먼저 단유네 오피스텔 앞에 와서 기다렸고, 그래서 네 사람은 제시간에 출발할 수 있었다. “아이고, 힘들다.” 아직 한강에 도착하기도 전이지만 지태는 물론이고 채윤까지 체력의 부족을 느끼며 페달을 느리게 밟았다. “아침을 제대로 안 먹고 와서 그럴 거야. 그래서 사람은 밥심이라고 하는 거잖아?” 결국 한강에 도착하기도 전에 네 사람은 식당을 찾았다. 편의점도 괜찮다는 아이들의 말에 단유가 거부권을 행사했다. “먹는 건 제대로 먹자. 편의점 김밥 질린다.” “오오, 역시 알부자.” “이래서 사람은 돈을 벌어야 하는거야.” “나도 고등학교 올라가면 방학 때마다 아르바이트 해야겠다. 엄마한테 손 안 벌리고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니가 퍽이나 하겠다. 그리고 캐나다에서 말도 안 통할 텐데 무슨 아르바이트를 해?” “캐나다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라. 지금 랭귀지 스쿨 들어가야 한다고 요란 법석이다.” 지태가 골이 아프다는 투로 투덜대니 명수가 키득거리며 지태의 어깨를 두드렸다. 식당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 문을 연 식당을 보기가 힘든 탓이었는데, 식당을 찾으러 돌아다니는 게 귀찮았던 지태와 명수는 물론 채윤까지 지친 표정으로 걸음을 멈췄다. “그냥 저기 가자.” 이번에는 단유도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네 사람은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서 모닝 메뉴를 시켜서 간단히 배를 채우는 선에서 만족해야 했다. **** 단유와 명수가 아침 일찍부터 ‘소풍’―자전거 하이킹, 이라고 정확히 설명했지만, 듣기에는 그냥 소풍이나 다름없었다―을 간다고 요란을 떨 때도 방 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던 하은은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겨우 잠에서 깨어 거실로 나왔다. 일주일의 단 하루는 이렇게 게으름을 피우는 게 보장되어야 다시 일주일을 열심히 보낼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다고, 하은은 믿었기 때문이다. 거실로 나섰을 때, 그녀를 반긴 것은 혀를 내밀고 촐싹맞게 꼬리를 흔드는 호빵이었다. “밥은 먹었니?” 호빵은 말똥말똥한 눈으로 하은을 바라보며 헥헥거릴 뿐이었다. 목이 마른 걸까 싶어 바라보니, 이미 부지런한 단유가 물을 가득 채워놓고 나간 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보니까 아침도 먹은 거 같은데, 더 못 줘. 단유한테 혼난다.” 호빵은 킁킁거리더니 고개를 돌려 자기 방석이 있는 곳으로 총총 걸어갔다. 푹신한 방석 위에 자세를 잡고는 고개를 푹 숙여 하은을 졸린 눈으로 바라보는데, 이럴 때 보면 정말 저 개가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주인을 닮아서 똑똑한가?” 이 집 주인들은 단 한 명을 제외하면 ‘똑똑한’ 편이니까. 말도 안 되는 논리로 호빵의 행동 양태를 분석한 하은은 머리를 긁으며 주방으로 갔다. 시원한 물 한 컵으로 남아있던 잠기운을 깨끗이 씻어 보낸 그녀의 다음 일은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것이었다. 리모컨을 찾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았다. 누가 보든 안 보든, 거실을 정리해놓는 단유 덕택이었다. 가끔은 단유가 결벽증이 아닐까 싶을 정도여서 물어보기도 했었지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사실 단유 덕분에 늘 깨끗하게 정리된 거실에서 안락함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 늘 행복한 하은이었다. 소파 앞 거실 탁자에 가지런히 올려져 있는 리모컨을 들어 TV를 켠 뒤, 하은은 소파에 앉는 대신, 베란다로 향했다. 케이블 뉴스 채널이 켜지면서 어제 저녁에 들었던 뉴스의 재탕 같은 몇몇 뉴스와 ‘한 낮의 온도가 예년보다 많이 떨어져 야외 활동을 하실 때 두꺼운 옷을 입으시길’ 바란다는 기상 캐스터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유리에 가로막혀 정말 그만큼 추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몇 주 전과 다르게 삭막한 분위기를 주는 거리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구름이 많이 끼지 않은 밝은 아침이라 밖에서 자전거 타고 놀기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소파로 돌아온 하은은 오늘이나 어제나 별 다를 게 없어 재미없는 뉴스 대신 잠시라도 엔돌핀이 솟구치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줄 프로그램을 찾아 채널을 돌렸다. 홈쇼핑 채널에서 구이용 대하를 쩝쩝 소리내며 먹는 모델들의 모습을 20여 초간 보며 입맛을 다시다가, 리얼 다큐멘터리라는 이름의 막장 스토리를 보며 자신이 놓친 앞 부분을 유추해보고, 해외에서 유행하는 브랜드의 스타일리쉬한 트래킹화를 보며 자신의 뱃살을 살짝 움켜 잡았다가 놓기도 했다. 해외 야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리모컨을 놓고 빠져들 채널도 단 1초의 고민 없이 넘기고, 해외여행 패키지 광고 채널은 고민하지 않기 위해 넘기고, 드라마 연속 방영을 하고 있던 채널은 자신이 잘 모르는 배우들이 나와 어색한 말투로 이해 못할 대사를 늘어놓기에 관심을 끊었다. “심심하네.” 리모컨 채널을 누르는 손가락은 쉴 새 없이 버튼을 누르고, 눈은 잠깐잠깐 머무르는 순간의 장면을 보고 해석하며 시간을 보냈다. 호빵이 하품을 하며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는 모습이 살짝 보였지만, 저 아이에게도 휴식이 필요할 거라 생각해 건들지 않기로 했다. 음악 채널이 나왔지만, 한동안 대중 가요에 관심이 없었던 터라 요즘 어떤 노래가 유행하는지, 어떤 가수들이 무대를 꾸미는지 알지 못했다. 잠깐의 호기심에 리모컨 버튼 누르기를 쉬고 바라보니, 기본적으로 가수들 대부분이 그룹이었다. 남자들이 우르르 나와서 대형을 갖추고는, 격렬한 댄스와 화사한 미소, 격정적인 감정을 흉내 내고는 인사를 하고 들어갔다. 그 뒤에는 다시 여자애들이 우르르 나와서 대형을 갖추고는, 깜찍한 댄스와 애교 섞인 몸짓, 지금 당장 나를 보지 않으면 안 될 걸, 하는 표정을 짓다가 인사를 하면 화면이 바뀌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그들의 모양새가 마치 평일 아침 지하철의 개찰구에서 줄을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그것만 같다. 개찰구에 카드를 찍는 그 순간을 제외하면 모두가 바쁘게 발을 놀려 어디론가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그들도 잠시 무대에 섰다가 사라졌다. 대부분 빠른 비트에다가 귀를 타박하듯 쏟아지는 가사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늙은 거겠지.’ 문득 옛날의 노래들은 가사도 쉽게 외우고 따라부르기도 쉬웠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금의 노래가 예전의 그것보다 음악적으로 세련되고 발전되었겠지만, 자신의 감수성은 예전의 그것에 머물러 있는 모양이었다. 어르신들 말처럼 ‘정신 사나운’ 노래를 더 듣고 있기가 힘들어, 채널을 돌리려던 하은은 그냥 전원 버튼을 눌렀다. 아무래도 지금의 자신은 TV를 보며 엔돌핀을 느끼기가 어려운 상태인 것 같았다. TV를 끄고 대신 핸드폰으로 노래를 찾았다. 그리고 스피커에 연결하여 음악을 틀었다.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의 ‘Träume’(from Wesendonk-Lieder)가 흘러나오며 소프라노의 고고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엔돌핀을 포기하고, 휴식과 안정을 택했다. **** 한강에 도착하니 벌써 11시가 다 되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쓴 탓도 있지만, 지구력이 부족한 두 친구와 호흡을 맞추다보니 도착하는데 만도 시간이 이렇게 걸린 것이다. “나 벌써 배고프다.” “배가 고픈 거야, 지친 거야?” “솔직히 말하면 둘 다인 거 같다.” 지태는 자전거를 옆에 세워두고 벤치에 앉았다.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된 친구는 말도 길게 잇기가 어려웠는지 상체를 숙이고 숨을 헐떡였다. 땀을 식혀주기 위해 따로 바람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차가운 강바람이 꽤 세게 불어오고 있던 탓이었다. “너무 오래 쉬면 땀이 식어서 감기 걸리니까, 조금 쉬었다가 다시 가자.” 단유의 말에 채윤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서 쉬고 있어. 내가 가서 물 좀 사올게.” 지태가 손만 들어서 흔들었다. “같이 갈까?” 단유는 명수에게 고개를 저었다. “나 혼자 갈게. 넌 애들이랑 여기 있어.” 그리고 단유는 다시 페달을 밟아서 죽죽 나가기 시작했다. “단유 쟤는 진짜 철인 아냐? 어떻게 저렇게 힘이 넘쳐?” 지태가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단유의 뒷모습을 힐끗 바라보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일 아침마다 운동을 했어. 왠만한 운동부 애들보다 체력은 더 좋을걸?” “저건 왠만한 수준이 아니야. …너도 그렇고. 너희 둘은 진짜 괴물 같애.” “친구한테 괴물이 뭐냐?” “나한테 너희들이 그렇게 보여. 넌 안 그래?” 채윤이 피식 웃으며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명수는 넌 분명히 축구 선수로 대박 날 거야. 심장이 두 개가 아니라 세 개인 사람이라고 부를지도 몰라.” “오버하지 마. 다른 애들도 이 정도는 해. 너희들이 너무 약한 거야.” 지태는 절대 아니라고 부정했다. “우리가 평균이야. 대부분 애들은 다 우리 정도라고. 아니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혓바닥 함부로 놀리는 거 아니다?”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주먹으로 툭 미는 명수의 손짓에 지태는 반항할 의지가 없는지 힘없이 밀려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그래도 바람이 불어서 다행이야. 만약에 여름에 이 짓을 했으면 여기까지 절대 오지 못했을 거야.” 채윤의 말에 지태가 맞장구쳤다. “그니까 말이야.” 그리고 대화가 끊어졌다. 명수도 지치긴 마찬가지였기에 지태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렇게 나란히 앉은 세 사람은 다리를 쭉 펴고서는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런데 사람 많다.” 한강 공원에는 공을 차는 사람과 나들이 나온 사람들, 조깅 하는 사람들과 단유네처럼 줄지어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 [541] Eyes on me(6) “그러고보면 말이야. 우리 왜 진작 이런 걸 안 했나 몰라.” “이런 거라니?” “뭔가 기억에 남을 만한 것들.” 아쉬움이 가득 담긴 지태의 넋두리는 계속 되었다. “그동안 우리, 같이 있었던 시간도 많은데, 왜 이런 걸 안 했나 싶어. 기껏 해봐야 피시방에 가거나 햄버거나 먹으러 돌아다니는 일밖에 없었잖아.” “그게 뭐 어때서? 그런 것도 다 기억에 남는 일이고, 추억이야.” “그럴 수도…있겠지.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 여름방학 때 했던 자원봉사나 이런 자전거 하이킹 같은 건 나중에 오래 기억에 남을 거 같은데.” 명수는 지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지태의 머리카락 끝에 달려 있던 땀방울들이 아래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난 말이야, 세월이 얼마나 지나더라도 다 기억할 수 있을 거 같아. 같이 피시방 가서 라면 먹었던 거, 보드 게임방 가서 소리 지르면서 놀았던 거, 우리 집에 다 같이 모여서 문제집 풀던 거. 아침마다 함께 등교했던 일들 전부 말이야. 왜냐하면 그게 다 너희들과 함께 했던 일이니까.” 지태가 고개를 들어 명수를 바라보았다. 명수는 햇살에 반짝이는 한강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뭘 했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중요한 거라고, 난 생각해. 너희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즐거웠고, 그래서 오래오래 기억할 거야.” 지태와 채윤은 잠시 명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지태가 어깨를 털며 명수의 팔을 뿌리쳤다. “이 새끼는 더워 죽겠는데, 팔을 올리고 있어?” “응?” 채윤도 한마디 보탰다. “단유랑 같이 지내다 보면 명수도 저런 말을 할 줄 알게 되는구나. 역시 친구는 가려서 사귀어야 하는 거야.” “너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 이렇게 멋진 친구들 만나기 쉽지 않을거 거든. 게다가 예쁜 여자친구까지. …말하고 나니까 열 받네. 난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나?” 명수는 지태와 채윤의 농담에 발끈하며 손을 내저었다. “이 새끼들이, 좋은 말을 해줘도 그래?” “니가 좋은 말을 하니까 이상해서 그러잖아. 네 캐릭터대로 가자.” “내 캐릭터가 뭔데?” “단순 무식?” “이 자식이!” 채윤을 가운데 두고 빙글빙글 도는 두 아이를 보며 멀리서 단유가 혀를 찼다. “기운도 좋네.” 단유는 음료수와 간단히 당을 보충할 간식거리를 담은 비닐 봉지를 들고 그들에게로 걸어갔다. **** 비록 집에 있는 스피커는 조악한 품질의 것이었지만, 일요일 아침 여유를 부리며 클래식 감상을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조금 쌀쌀한 거실 온도 때문에 방에서 담요를 하나 가져와 배를 덮은 뒤 소파에 반쯤 드러누운 자세로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하은이었다. 아직 시간 여유가 있다는 핑계로 게으름을 피울 순 없었던 하은은 핸드폰으로 이사 갈 집을 찾아 검색했다. 지역과 가격대에 맞는 방들은 많았지만, 선뜻 마음에 드는 집을 고르기는 쉽지 않았다. 사이트에 올라온 사진들을 보면 대충 어떤 구조인지는 알 수 있지만, 구매의욕을 돋우기 위해 정성 들여 찍었을 게 뻔한 사진들을 보며 판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적당한 위치의 집을 몇 개 물색해 놓아야 발품 파는 수고를 덜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세상 편한 자세로 여유롭게 핸드폰을 보던 하은은 문득 배가 고파졌다. ‘뭘 먹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고민은 메뉴를 고르는 것, 이라는 말을 친구가 한 적이 있었다. 그 친구를 따라다니며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을 섭렵했었지만, 최근에는 그런 호사를 부릴 기회가 별로 없었다. 최근, 이라고 표현하기보단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난 뒤, 라고 해야 옳겠다. 물론 배달 음식도 종종 시켜먹기도 하고, 밥 대신 치킨이나 피자로 대신한 적도 있지만, 그래도 하은은 아이들을 두고 따로 나가서 식사를 한 적이 거의 드물었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철칙도 없건만 괜히 식사는 아이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늦은 저녁을 먹을 일이 있어도 집에 돌아와서 먹곤 했다. 그러다보니 지금처럼 혼자 집에 있는 경우에도 하은은 나가서 먹기보단 안에서 간단하게라도 먹는 걸 선호하게 되었다. 가끔 이런 생활을 알고 있는 친구와 이야기를 주고 받다보면 ‘집순이’라고 놀리는데, 집순이면 어떤가? 돈도 아끼고, 집도 지킬 수 있으니 일석 이조다. 밥이야, 그저 배고픔만 잊을 수 있을 정도로 먹기만 하면 된다. “너 아줌마 다 됐구나?” 친구의 놀림을 칭찬으로 들으며 웃었던 하은은, 괜히 오늘따라 기분을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넓은 거실에, 홀로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편한 자세로 드러누워, 클래식을 들으며 여유를 부리는 이 시간의 안락함을 이어가고 싶었다. 나가서 먹으면 좋은 점이 여러 가지다. 일단 집에서 설거지를 안 해도 되고, 혼자 청승을 떨지 않아도 되며, 그동안 잊고 있었던 미각을 자극할 수 있다. ‘그래, 어차피 나가서 방도 봐야 하는데 나가서 먹자.’ 하은은 자신의 욕구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여러 핑계로 자신을 설득했다. 귀찮지만 예쁜 옷도 입고, 일요일이지만 화장도 좀 하고, 차를 타고 이동할 테지만 그래도 보기 좋은 구두도 신어본다. “남자만 있으면 딱인데.” 이런 모습을 보면 친구들이 분명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것이다. 그럼 자신은 이렇게 대꾸할 테고. “남자는 무슨.” “너 연애 안한 지 얼마나 됐어?” “알면서 묻는 거지?” “너도 이제 연애 좀 하고 그래. 언제까지 처녀 아줌마로 늙을래? 그러다가 진짜 시집 못 간다?” “때가 되고 운이 맞으면 가겠지.” “속 편한 소리 하고 있네. 강제 독신주의자가 되고 싶지 않으면 제발 좀 집에서 나와서 돌아다녀. 니 얼굴에, 니 몸매에 뭐가 부족해서 남자를 안 만나니?” “머리도 좋지.” “남자들은 머리 좋은 여자 안 좋아한다던데?” “그건 사람마다 다르지.” “머리가 좋든 말든, 그런 건 하나도 안 중요해.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알아?” “뭔데?” 친구는 자신의 턱 아래로 브이자를 만들어 보였다. “예쁜가, 안 예쁜가.” 하은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친구는 역정을 냈다. “뭐니 그 반응은? 내가 못생겼다, 이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 …남자들이 꼭 외모로만 판단하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해서 말이야. 사람이 여러 부류가 있듯이, 외모만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외모를 보지 않고 마음을 보는 사람도 있을 거야.” “그건 니가 남자를 몰라서 그래. 그런 이야기 안 들어왔어? 남자는 10살 때도 예쁜 여자를 좋아하고 80살에도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고. 남자는 단순한 동물이라 얼굴만 예쁘면 만사 오케이라고.” 예전에는 하은도 남자에게 관심이 있었던 때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공부와 성적에 집중하느라 몰랐지만,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남자 동기와 선배들로 둘러싸여 여왕 대접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 때는 좀 더 잘보이고 싶고, 좀 더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신경을 썼었다. 화장도 배우고, 얼마 안 되는 용돈을 모아 비싼 브랜드의 옷도 사서 입었다. 그리고 그때 자신의 외모가 다른 친구들에게 결코 꿇리지 않는, 조금 과장해서 꽤 뛰어난 편 임을 자각했었다. 그래서 더 치장하고 말과 행동을 의식적으로 주의하며 다녔다. 그때는 어딜 가든 주목받는 하은이었고, 그런 주목이 자연스러웠고 즐거웠던 적도 있었다. 하은은 고개를 저었다. 모처럼 제대로 꾸민 모습으로 거울을 보고 있다 보니 괜한 잡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되는 게 어딨어. 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될 거야.’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결혼, 연애는 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하은은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었다. 뒤에서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던 호빵이 어슬렁거리며 현관 앞까지 와서 꼬리를 흔들다가 하은의 인사를 받은 뒤 문이 제대로 닫히는 것까지 확인 후,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소리까지 들은 후 다시 자신의 방석으로 돌아왔다. 이제 눈치 보지 않고 계속 잠을 잘 수 있겠다. **** “일단 점심 먹고 가자.” “이걸로?” “아니, 이건 나중에 달리다가 배고프면 먹으려고 미리 사놓은 거고, 밥은 제대로 먹자.” 음료수로 갈증을 해결한 뒤에도 벤치에서 일어날 줄 모르는 친구들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우와, 바지에 땀 찬 거 봐.” “난 여기 멍든 거 같은데?” “난 발목도 아퍼.” 명수가 혀를 찼다. “너희 둘 다 평소에 얼마나 운동을 안 했으면 그러냐? 얼른 일어나.” 끝내 두 사람을 억지로 일어서게 만든 뒤, 넷은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일단 저기로 나가서 올라가면 식당가가 있다니까, 가 보자.” “오케이!” 명수가 일부러 기운찬 목소리로 흥을 돋우며 앞장섰다. 그 뒤를 힘없이 페달을 굴리는 지태와 채윤이 따라가고, 단유는 가장 마지막에 섰다. 시원한 강바람이 등을 밀어주니 등줄기에 흘렀던 땀이 식으며 기운이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넷의 자전거가 한강 자전거 도로 위를 달렸다. 자전거 도로는 그리 넓진 않았지만, 무리만 하지 않는다면 사고 위험 없이 안전하게 달릴 수 있게 꾸며져 있었다. 강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건 썩 나쁘지 않다, 고 아이들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단유의 옆을 씽, 하고 지나가는 검은 물체가 있었다. 뒤에서부터 다가오는 소리를 느끼고 있었던 단유는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당황하지 않았지만, 지태나 채윤이는 옆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사람의 자전거에 놀라서 비틀거렸다. “뭐야, 저거!” 경주용 자전거인지 얇은 프레임의 검은 자전거를 힘껏 밟으며 지나가던 그 사람은 단유네 뿐만 아니라 앞서 길을 가던 다른 사람도 위험할 정도로 가깝게 붙어서 지나갔다. 위아래 운동복과 안전 헬멧까지 검은색으로 통일을 해서 오히려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관종이야?” 지태가 넘어질 뻔한 것을 앞서 가던 명수가 재빨리 자전거를 멈추고 내려서서 잡아주었고, 채윤이는 자전거 도로 옆 인도의 울타리를 박을 듯이 비틀댄 뒤에야 멈춰 섰다. “괜찮아?” “응.” 그러면서도 화가 난 눈으로 검은 자전거를 바라보았다. “저 사람 뭐야? 진짜. 다칠 뻔했잖아?” “저거 신고해야 하는 거 아냐?” 옆에서 산책하던 사람들도 그 광경을 봤는지 수군거렸다. 단유는 채윤의 위아래를 살피며 진짜 괜찮은지를 확인한 뒤에야 멀리 시선을 던졌다. 얼마나 빨랐던지 벌써 작은 점이 되어 버린 로드파이터(Road fighter)였다. “저런 놈들이 있으니까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욕을 먹는 거야.” 천천히 자전거를 끌고 가다 보니 앞서가던 사람들이 자전거를 세우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사람은 자전거를 눕혀 놓고 인도 부근에 앉아 있었는데 무릎에 먼지가 묻은 것이, 아무래도 넘어졌던 모양이었다. “너희들은 괜찮니?”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아저씨 한 분이 넷을 둘러보며 물었다. “예. 다행히 큰일은 없었네요.” “쯧쯧. 하여튼 세상이 어찌 되려고 저러는지, 별 미친놈들이 다 있다니까.” “자기 생각만 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많아요.” “ISS 같은 놈들이네.” “북한 빨갱이 같은 놈들이죠.” “하여튼 저런 놈들을 모조리 체포를 하던지, 구속을 시켜야 돼. 저것도 범죄야, 범죄.” “그럼요. 자기는 부딪치지 않았다고 변명을 하겠지만, 위협 운전도 범죄라고요.” 단유와 아이들은 자전거를 붙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 단유가 용기 내서 말했다. “저희 좀 지나갈게요.” “어, 그래. 지나가.” “네.” 단유는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내가 앞장설게.” 어차피 단유가 길을 아니까 단유가 앞장서는 게 맞다. 단유는 조금 더 길을 따라 가다가 공원 위로 건너갈 수 있는 건널목에 이르렀다. 그때 저 멀리서 세차게 달리는 검은 자전거가 눈에 들어온 것은 우연이었다. 아니, 우연이라고 치부하기도 뭣한 게, 저 사람은 저렇게 달리는 게 재미있는지 웃으면서 반대편의 사람들, 그러니까 자기가 뒤에서 위협하고 지나갔던 사람들을 흘겨보며 페달을 밟는 중이었다. 자전거를 타던 사람들 중 어떤 이는 고개를 돌려 검은 자전거를 향해 욕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 사람 또 오네?” “미친 거 아냐?” “동영상 보니까 자전거 던져서 잡는 것도 있던데, 한 번 잡아볼까?” 단유가 지태를 말렸다. “그러면 특수폭행으로 너 잡힐 거야.” “칫.” 단유는 다가오는 남자를 보다가, 마주치기 전에 자리를 피하는 쪽을 선택했다. “빨리 가자.” “그래.” 단유와 아이들은 방향을 꺾어 안쪽 샛길로 들어갔고, 그 후에 검은 자전거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그 자리를 지나갔다. 단유가 잠시 속도를 늦추고 뒤를 흘깃 보았다. 물론 무슨 사정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가난한 경륜 선수라서 누구나 다 이용하는 한강 공원을 이용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자전거 브레이크가 고장 나서 자기 뜻대로 자전거가 움직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진짜 누구 말처럼 미쳤거나. 어쨌든 저대로 두면, 누구에게든 또 피해를 입힐 것 같았고, 자신을 비롯, 친구들을 위협했던 그가 즐거워하는 모습은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으아악!”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지태나 채윤도 자전거를 세우고 고개를 돌렸다. 검은 자전거 사내가 머리를 감싸 쥔 채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살려 줘! 살려 줘!” 지태가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왜 저래? 진짜 미쳤나?” 단유는 다시 자전거 핸들을 잡으며 말했다. “헛것이 보이는지도 모르지. 가자, 얘들아.” 제자리를 맴돌며 기고 있는 꼴에 그 근처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원했던 것이 만약 시선 집중이었다면 성공했다. ======================================= [542] 안녕, 친구야(1) “으, 춥다. 자전거 못 탈 거 같아.” “오늘은 타지 말자. 혹시라도 빙판길에 미끄러지면 큰일이니까.” 명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갑을 고쳐 끼고 오피스텔을 나섰다. “와, 바람 봐. 자전거 타면 얼굴이 완전히 얼었을 거야.” 단유는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해 보기가 어렵겠네.” “아까 뉴스에서 눈 내린다고 하지 않았나?” “강설 확률이 60%라고 했었어.” 60%, 참 애매한 숫자지만 눈으로 본 아침 하늘은 90%라고 해도 믿을 수 있었다. 목도리로 완전 무장하고 학교를 향하는 두 사람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걸었다. 잠시 후 저 멀리서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놓고 발을 동동 구르는 지태와 채윤을 만났다. “빨리 좀 와.” “급할 게 뭐 있다고 빨리 오냐?” 기말고사가 끝난 뒤, 등교 시간이 9시가 된 터라 여유로운 걸음이었다. “작년에는 선배들 보면서 되게 흉봤는데, 막상 이렇게 되니까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지태가 익살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학교 늦게 가는 거?” “학교 늦게 가는 것도 그렇고, 수업 시간에도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 안 받잖아?” “수업을 안 받으니까 그렇지.” 명수도 지태의 말에 한마디 보탰다. “난 어제 2시간 정도 내리 누워서 잠만 잤거든? 완전 꿀잠.” “단유 너는 뭐 했는데?” 그러자 명수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얘가 뭘 했겠냐? 나 자는 동안 계속 책 읽고 있었지.” “역시 단유다.” “요즘은 무슨 공부 하는데?” 단유가 평범하게 고등학교 선행 학습을 하진 않으리란 생각에 채윤이 물었다. “공부까지는 아니고, 이것저것 미뤄뒀던 책 읽는 거야.” “무슨 책?” “지금은 지구의 역사라는 책을 읽고 있어.” “그게 뭐야?” “지구라는 행성이 만들어진 후부터 최초의 인류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과학적 추론을 담은 책.” 지태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혀를 찼다. “얘는 왜 이렇게 인생을 어렵게 사냐? 그냥 남들 다 보는 책 보면서 좀 즐겨.” “무슨 책?” 지태는 명수에게 물었다. “너희 반에는 판타지 소설 같은 거 보는 사람 없어?” “있지.” “그래, 그런 거 재밌잖아?” “너도 많이 보냐?” 명수의 물음에 채윤이 대신 대답했다. “얘 매일 핸드폰으로 결제해서 본다. 지금 가방에도 무협지가 잔뜩 있을걸?” “얼마나 멋있는지 알아? 등평도수, 초상비, 답설무흔 응? 이렇게 팍팍 걸어가서 응? 이화접목으로 이렇게 푹! 공격하고 철판교로 피하고.” 비틀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팔자걸음으로 쑥쑥 나가더니 허공을 향해 팔을 휘젓는 꼴이 영락없이 취객이다. 허리를 숙였다 폈다, 허리 위로 올라가지 않는 발길질에 몸이 기우뚱거린다. “넌 책보다 먼저 운동을 해야겠다. 완전 저주받은 몸이네.” “그래서 무술 가르쳐 주는 체육관에라도 갈까 싶어.” “무술? 그냥 MMA를 배우는 게 어때?” “그건 싫어.” “왜?” “좀 무섭잖아? 배우다 보면 막 대련도 해야 할 건데, 대련하다 보면 맞기도 할 거고.” “무술 학원에서는 안 맞냐?” “야. 네가 잘 모르나 본데, 무술 학원에서는 그냥 형(形)만 가르쳐 줄 뿐이거든? 원래 무술이란 게 보여주기 식이지, 진짜 싸움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대련 같은 걸 안 해.” 명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채윤을 바라보았다. 채윤도 모른다는 눈치로 고개를 저은 뒤 물었다. “그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나? 유도를 배우든, 태권도를 배우든 다 대련하고 그러는데, 무술만 그런 걸 안 한다는 게?” 지태가 코웃음을 쳤다. “진짜 무술이 대련 위주로 연습하는 종목이었다면, 벌써 MMA나 어디서든 써먹지 않았겠냐? 유도, 태권도, 주짓수, 레슬링 같은 건 다 MMA에서 써먹지만, 무술은 안 써먹잖아? 영화를 봐라. 그런 무술이 실제로 가능하겠냐?” “그럼 실제로 써먹지도 못할 무술을 왜 배우려고 하는데?” “멋있잖아? 그냥 보기에 멋있는 거니까 배우려는 거지. 운동 좀 했다고 싸움을 할 것도 아닌데, 그냥 보기에 멋진 걸 배우려는 거지.” 지태의 대답에 다들 코웃음을 쳤다. “야! 솔직히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다 그런 거 아냐? 어디 써먹으려고 배우냐? 그냥 가르쳐 주니까 배우는 거잖아? 흥선대원군이 호포제를 실시한 걸 내가 알아서 어디 써먹어? 남들한테 자랑하려고? 나 이 만큼 안다고 자랑하려고 배우는 거잖아? 똑같은 거야.” 명수가 소처럼 눈을 끔뻑거리며 물었다. “호포제가 뭔데?” “바보야, 지난번 시험에 나왔던 거잖아?” “아. 그랬나?” “몇 달이나 지났다고 그걸 까먹냐? 아무튼 내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 단유가 물었다. “캐나다에 무술 학원이 있어?” 지태는 입을 다물었다. 빵 터진 명수를 째려본 뒤 입술을 삐죽이며 ‘꼭 배울 거야’라고 다짐하는 지태를 다독여주는 채윤이었다. 3학년 교실이 늘어선 복도에서 넷은 인사를 하며 헤어졌다. 교실로 들어가니 몇몇이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건넸다. “밖에 졸라 춥지?” “완전. 이러다가 방학 때 어디 나가지도 못하겠어.” “강제 방구석 폐인 각 나오지?” “인정.” 여유롭게 걸어왔건만 교실에는 학생들이 반도 오지 않았다. 아직 9시까지 20여 분 정도가 남긴 했지만, 과하게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9시가 지나고 수업 시간이 되더라도 이런 분위기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선생님들도 딱히 수업을 진행하지 않을 테고, 대부분은 자율 학습이라고 선언한 뒤 교실을 나갈 테니까. “시끄럽게 떠들지는 마라. 아래층에서 공부하는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말이야.” 라는 충고는 소귀에 경 읽기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단유는 이런 분위기도 썩 나쁘진 않았다. 누군가는 중학교 3학년의 수업 파행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겠지만, 학제 시스템이 이런 것을 어찌하겠는가. 분명한 목적의식이 상실된 교실에는 나태와 방만이 전염병처럼 퍼질 뿐이었다. 다만 단유는 그런 혼란 속에서도 통제받지 않는 조용한 시간을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할 따름이었다. 물론 모든 선생님이 학생들을 풀어주진 않았다. “자! 다들 조용. 교과서 펴라.” “아, 선생님!” “진도는 나가야지! 진도 얼른 나가고 쉬자. 알겠어?” 교과서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진도를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선생님들은 수업을 꿋꿋이 진행했고, 그렇게 주장하는 선생님은 대체로 무서운 선생님들이어서 아이들은 조용히 수업을 받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제대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많지 않았다. 앞 학생의 등 뒤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학생과 엎드려서 잠을 자는 학생, 만화책을 읽는 학생과 소설책을 읽는 학생들이 뒤섞인 교실 풍경이었다. “통일이 되면 어디에 가서 뭘 할건지 서로 이야기를 하고, 발표하도록 하자.” 사회 선생님처럼 발표 수업을 맡기면, 선생님이 무섭든 무섭지 않든, 일단 야유를 보내며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그러나 졸업을 할 때까지, 아니 졸업을 하고서라도 절대 이기지 못할 사람이 바로 선생님이다. “125페이지를 보면 북한의 지도가 나와 있지? 그 지도를 보면서 각자가 여행하고 싶은 코스를 한 번 짜보고, 그렇게 짠 이유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도록 한다. 알겠어?” 좋든 싫든 시킨 과제는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기에 아이들은 앉은 자리에서 조를 짠 뒤, 둘러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거 너무 말이 안 되지 않냐?” “뭐가?” “북한에 여행을 왜 가? 위험하고 볼 것도 없잖아.” “외국 사람들도 북한에 여행을 가는데 왜 볼 게 없어?” 인터넷에는 종종 북한으로 여행을 간 외국인들이 촬영한 영상들이 업로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북한에서 허락된 곳만 갈 수 있는 거잖아? 다 꾸며진 곳. 영화 세트장같이.” “맞아, 보면 대부분 평양이더라.” “뉴스 보니까 평양 바깥으로는 먹을 게 없어서 나무만 캐고 먹는다더라. 그래서 산들이 대부분 민둥산이래. 그런데 뭐 볼 게 있겠어?” “사막 보러 중동도 가는데, 그게 뭐 어때? 그리고 벌거벗은 나무를 보면서 배울 것도 있을걸?” “자연 보호하자고?” 대답이 뻔한 이야기였다. “아무튼 각자 제일 가고 싶은 곳이 있어?” 단유가 이야기가 엇나가는 것을 막고 주제를 잡았다. “내래 아오지 탄광에 가고 싶어요.” 한 아이가 어색한 북한 사투리로 물꼬를 트자, 다른 아이들도 이야기를 쏟아냈다. “나는 청진 수용소 가고 싶어. 거기가 현대판 아우슈비츠라던데.” “미친 새끼. 너 거기 가면 바로 잡혀가 죽을걸?” “아오지 탄광은 안 잡히냐?” “거기는 산이니까 숨어서 보면 안 잡힐 수도 있지.” “무슨 스파이냐? 숨어서 다니게?” “나는 풍계리 맞나? 거기 가서 핵실험 하는 거 구경하고 싶다.” “야 이 똘아이 새끼야. 그거 구경하다 너 골로 가.” “죽을 때 죽더라도 핵은 한 번 보고 죽어야지.” “지랄하네. 방사능에 오염돼서 피부에 진물이 철철 넘쳐봐야 아,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 후회할 녀석이네.” “그럼 너는 어디 가고 싶은데?” “난 그냥 평양 가서 얌전히 구경하고 올란다.” “얌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평양광장에서 ‘김일성 개새끼야’하고 할 놈이다.” 명수는 배를 잡고 웃다가 문득 단유가 뭔가를 계속 쓰고 있다는 것을 본 후 물었다. “넌 뭘 계속 쓰고 있는 거야?” 단유가 펜을 멈추고 말했다. “니들이 말하는 걸 다 적고 있었지.” “그걸 왜 적어?” “발표할 거잖아?” “다 농담으로 말한 건데 뭘 그렇게 진지하게 그래?” 단유도 진지하게 답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중에 선생님이 발표시켰을 때 말할 게 없을 거야.” 토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도 아이들이 진지하게 선생님이 내준 과제를 이행할 것이라는 확신이 없으니 이런 거라도 적어야 한다는 단유의 말에 아이들이 맞장구를 쳤다. “괜찮잖아? 어차피 점수 매기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북한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데 어딜 가고 싶다고 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안 그래?” 그 말에 다른 한 학생이 동의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북한이랑 통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어차피 알지도 못하고 갈 수도 없는 곳인데, 마치 버킷리스트 작성하듯 진지하게 할 필요가 있냐는 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풍계리는 아니다. 어쩌면 북한에서 제일 감시가 심한 곳이 그쪽일 텐데, 거기 가면 너 바로 총살당할걸?” 그때 한 아이가 교과서의 지도를 짚으며 말했다. “백두산은 가보고 싶지 않냐?” “그건 지금도 갈 수 있잖아?” “어쨌든 북한 지역 중에 갈 수 있는 곳을 고르라고 했으니까, 거기 가고 싶다고.” “백두산 중국 거 아냐?” “백두산이 왜 중국 거야?” “북한이 군사비 마련하려고 백두산 팔았다던데?” “나도 들었어.” “반만 중국 거고 반은 북한 거라던데.” 정확한 사실을 모른 채 이러지 않을까, 저러지 않을까 하던 아이들은 단유를 바라보았다. “6.25 전쟁 이후에 조중변계조약을 맺었는데, 그게 북한과 중국의 국경을 정하는 조약이었어. 그 조약에 따라 국경선이 천지의 가운데를 지나게 되면서 중국이 백두산의 반을 자신의 지역이라고 선포하게 되었고, 지금은 중국이 관광사업을 유치하면서 백두산에 올라갈 수 있게 해서 그런 유언비어가 퍼진 거야.” 아이들은 궁금증을 해소해서 시원해진 얼굴로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난 백두산 가면 천지 괴물이 있는지 보고 싶어.” “무슨 괴물?” “모르냐? 천지가 엄청 깊잖아? 그래서 거기 어떤 생물이 사는지 아직 아무도 모른대. 그런데 거기 관광을 갔던 사람들이 네스 호의 괴물처럼 황소 머리를 가진 괴생물체를 봤다잖아.” “진짜?” “일종의 미스터리지만 사실일 수도 있지. 아무튼, 확인된 바가 없으니까 가서 직접 보고 싶다는 말이지.” 아이들은 다시 단유를 돌아보았다. “나라고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냐.” “단유가 모르는 것도 있구나.” “애초에 내가 다 알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야.” 아이들은 고개를 주억거리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수업이라는 생각에 질색하던 아이들도 어느새 몰입해서 대화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며 단유는 이런 수업 방식이 확실히 재밌구나,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리고 시키지도 않은 서기 노릇을 하며 계속 아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 [543] 안녕, 친구야(2) 눈이 올 듯 올 듯하면서 오지 않는 날이 계속되었다. 일기예보에서는 눈이 내릴 확률이 60%, 혹은 70%라고 말을 하지만 무슨 연유인지 눈은 내리지 않았다. 흐린 하늘을 보며 하얀 김을 뿌려보던 명수가 ‘이럴 거면 차라리 눈이나 내리지’라고 말했다. 그리고 손을 호호 불더니 철봉을 붙잡았다. “하나, 둘, 셋….” 옆에 선 단유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횟수를 세었다. 어느 날부터 명수도 턱걸이에 욕심을 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어깨나 팔 힘이 부쩍 늘어나 단유의 평소 운동 패턴을 잘 따라오는 편이었다. “열넷, 열…다섯.”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명수는 팔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열아홉, 스물.…한 개만 더.” 그러나 명수는 끝내 손을 놓고 바닥에 내려섰다. “아우, 손바닥.” “그러니까 장갑을 끼지 그랬어. 장갑 끼면 5개는 더했을 거야.” “장갑 꼈다가 벗었다 하기 귀찮아서 그랬지.” 이번에는 단유가 명수가 섰던 자리에 섰다. 장갑 낀 손을 한 번 쥐었다 편 뒤 뛰어올랐다. 가뿐하게 스무 개를 넘어선 단유는 30개 즈음에서 내려왔다. “장갑 끼고 해.” “알았어.” 명수는 단유가 건넨 장갑을 끼고 심호흡을 한 뒤, 철봉에 올랐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명수의 몸도 이제는 또래 중에서 꽤 큰 편이라 할 만큼 커져 있었다. 본래 힘이 좋은 편이기도 했지만, 근육도 살뜰하게 들어차서 단유가 예상컨대, 고등학교에 올라간 뒤 시합을 뛰더라도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선배들과의 몸싸움에서도 쉽게 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감독님이 상체 운동도 열심히 하라고 하셨거든. 몸의 균형이 중요하다고. 그래야 나중에 해외 선수들이랑 붙어도 밀리지 않을 거래.” 명수의 꿈은 점점 더 커지고 발전해나갔다. 그저 축구 선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축구 선수가 될 것인지, 그리고 그런 축구 선수가 되기 위해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고민하고 추구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넌 분명히 해외에서도 성공할 수 있을 거야.” “몸만 갖고 되냐? 기술도 있어야 성공할 수 있어.” “기술은 앞으로 배우면 되지.” 명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웃었다. “그래.” 물론 단유도 명수가 생각하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누구는 축구 유학을 간다고 하고, 누구는 유명 유소년 클럽에 들어가 훈련을 받으면서 기량을 쌓지만, 명수는 그렇게 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기회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을 주워들은 명수는 오직 그 믿음 하나로 계속 자신을 단련해 나갔다. ‘넌 분명히 성공할 수 있을 거야.’ 단유는 명수가 반드시 그의 꿈을 성취하길 바랐다. “이제 들어가자. 학교 갈 시간이야.” “그래.” 명수는 헉헉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력 질주?” “응.” 겨울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두 소년이 거리를 질주했다. **** 매일 오전 수업만 끝나면 하교 시간인지라 급식을 먹을 일이 없어진 3학년 학생들은, 매점을 사용하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배가 고파서라기보다는 달리 쉬는 시간을 메울 일이 별로 없었던 탓이다. 단유 역시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매점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우연히 학교 주위를 돌던 교장 선생님과 마주친 아이들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교장 선생님은 푸근한 미소를 고개를 끄덕이다 그사이에 단유가 있음을 확인하고 그를 불렀다. “단유 군, 오늘 수업 끝나고 잠시 교장실에 들리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그래요. 다들 조심해서 걸어요. 매점 근처에 보니까 빙판길이 있던데.” “네.” 교장 선생님은 아이들의 대답을 듣고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야, 교장 선생님이 널 왜 불러?” 단유는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교장 선생님과 친하다니. 역시 전교 1등 클라스!” 지태가 단유를 보며 입을 둥글게 모으고 소리를 냈다. “그런 거 아니다.” “아니긴? 아닌 게 아닌데?” 하지만 정말 이유를 모르기도 하거니와, 교장 선생님과 ‘친하다’고 불릴만한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단유였다. 그래서 궁금했다. ‘왜 보자고 하신 걸까?’ 수업을 마치고 단유는 명수에게 먼저 가라고 일렀다. “안 기다려줘도 돼?” “상미가 기다릴 텐데?” “아, 그러네? 그럼 나 먼저 갈게.” 명수는 순순히 단유의 말을 들었다. 그 뒤 단유는 교장실로 향했다. “왔어요?” 책상에서 일을 보던 중이었는지, 서류를 보던 교장 선생님은 보던 것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는 안 고픈가요?” “괜찮습니다. 집에 가서 먹으면 되거든요.” “단유 군 덩치만 보면 어디 운동부 소속이라 해도 믿겠어요. 그 몸을 유지하려면 먹기도 많이 먹어야 할 거 같은데.” “먹는 걸 싫어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많이 먹는 편도 아니에요.” “그래요?” 짧은 웃음과 함께 교장은 단유의 맞은 편에 앉았다. “길게 이야기할 건 아니고요, 사실 이제 방학하고 나면 졸업인데, 그러면 볼 일도 없을 것 같아서 잠시 시간 좀 내달라고 했어요.” 교장은 미소를 지으며 단유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말을 이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동안 단유 군을 지켜보면서 꽤 즐겁기도 했고, 제가 앞으로 어떤 교장이 되어야 할지, 그리고 우리 학생들이 어떤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지를 생각할 수 있었어요.” “저를요?” 교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 모든 학생들이 단유 군처럼 전교 1등하고 공부만 하기를 바란다는 건 아니에요. 단유 군도 그랬잖아요? 전교 1등을 위해서 공부하는 건 아니라고.” “네.” “교장으로 오기 전, 단유 군이 인터넷에 나와서 했던 말을 봤다고 했었죠? 그리고 이후에도 간간이 단유 군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낀 바를 말하는 거예요.” “네.” “학교도 작은 사회고,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시스템 속에서 살아야 한다면, 시스템이 바르게 작동하길 바란다는 단유 군의 말은 꽤 오랫동안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였어요.” 단유는 지난번에 교장 선생님과 나눴던 대화 중에 잠깐 나왔던 이야기를 기억해주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보다, 그 이야기를 중요하게 판단하고 생각했다는 사실에 조금 더 놀랐다. “현재 한국 교육 시스템을 제가 마음대로 바꿀 순 없으니, 그건 어쩔 수 없겠지만, 적어도 이 학교 내에서만큼은 학생들이 자유롭게, 그리고 차별받지 않고 꿈을 키울 수 있게 해보고 싶어요.” 교장 선생님의 말씀은 듣기엔 좋았지만, 그걸 왜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는 단유였다. 그러나 입 밖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그러나 나이 든 교장 선생님은 단유의 무표정 속에서 그런 의문을 읽어낸 모양이었다. “저는 단유 군을 보면서 교육의 중요성도 느꼈지만, 학교라는 제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 학교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학교를 ‘정상화’ 시키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교육부에 있을 때, 학교가 얼마나 잘못되어 가고 있는지, 학교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 사고들을 보고서로 읽었거든요. 그래서 잘못된 길로 가는 학교를 바로 잡겠다고,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교사가 학생을 체벌하고, 체벌 받은 학생은 뇌사로 숨을 거뒀다. 또 야구방망이가 부러질 때까지 학생을 때리는 행위로 인해 뉴스를 타고, 교사는 검찰 조사를 받던 중 자택에서 자살을 시도했다. 또 학생과 교사가 교실에서 서로 주먹질을 하는 참상이 벌어지기도 했고, 초등학생에게 과한 체벌을 가한 탓에 뇌진탕에 걸려 식물인간이 되기도 했다. 학생끼리 서로 때리게 한 교사가 있는가 하면, 따돌림으로 자살한 학생이 줄을 잇기도 했고, 복수를 위해 가해 학생을 무참히 살해한 사건도 있었다. 교사가 여학생을 성추행하거나 선배 학생들이 후배 여학생을 집단 강간하는 사례도 있었다. 학생인권센터에는 하루에도 수십 건의 피해 상담과 고발이 이어졌다. 교육부에는 교사의 피해 사례가 쏟아졌고, 뉴스에는 공교육 붕괴가 뉴스로 보도되었다. “학교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는 생각은 학생들 뿐 아니라 어른들도 똑같이 하고 있어요. 특히 교사들은 더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죠. 하지만 모두 어떻게 학교를 바꿔야 할지 그 방향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저도 똑같아요. 이 학교를 어떻게 이끌고 나가야 할까, 하는 점에서요.” 교장의 자조적인 서술에 단유도 잠시 자신이 바라본 학교가 어떠한가를 떠올려보았다. “사람은 그래요. 상대방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사건을 이해하거나 풀이하는 방식은 본인 위주로 돌아가기 마련이거든요? 저도 말로는 학생들을 위해서, 라고 하지만 어쩌면 제가 쌓은 경험과 기억에 의존해서 학교를 바라봤던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가장 익숙한 방식과 경험을 올바른 것으로 생각했던지도 모르겠고요.” 이를테면, ‘아침 조회’와 같은 것이다. 전교생에게 교장 선생님이 훈화를 건네는 아침 조회는 일제강점기 시절의 잔재지만, 구성원의 화합을 위한다는 명목과 경륜이 많은 교장 선생님의 말씀으로 ‘교화’를 한다는 핑계가 여지껏 조회를 계속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것이 무조건 나쁘다는 말은 아니고, 긍정적인 효과도 있을 테다. 하지만 조회라는 예식을 통해 교사와 학생들을 통제하는 방식이 교장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목적이며, ‘수직적 관계’와 ‘복종’을 체화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분명 지적되어야 할 악습이다. 교장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동안, 아이들은 떠들면 안 되고, 자리에서 벗어나서도 안 되고, 딴짓해서도 안 된다. ‘복종’해야 하고 ‘순종’해야 한다. “그런데 단유 군이 그랬죠? 꿈을 꿀 시간이 없다고. 전교 1등, 모든 학부모들이 바라마지 않는 성적을 유지하고 모든 선생님이 칭찬해 마지않는 모범생이면서도 정작 본인은 ‘꿈’이 뭔지 모르겠다고 했었죠.” 단유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지금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찾았으니까. 하지만, 교장 선생님과 대화를 나눴을 때 했던 그 대화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학교는 여전히 학생들에게 꿈을 꿀 시간을 주지 않았다. “하물며 다른 학생들은 어떨까요. 학교는 학생들에게 단유 군과 같은 자세로 학교생활을 하길 바라면서 그것이 학생들의 미래에 도움이 될 거라는 추상적인 희망만 제시해 줄 뿐인데 말이죠. 꿈꿀 시간을 주지 않으면서 꿈을 꾸라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었던 셈이죠.” 그렇게 말을 이어가던 교장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도 습관인가 봅니다. 지루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버릇이요.” “아뇨, 지루하지 않았어요.” “단유 군은 제게 그걸 생각하게 해주었어요. 그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단유 군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고맙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나중에 우연히 보게 된다면 어렸던 단유 군에게 감화되었던 한 늙은이가 이런 학교를 만들었노라 자랑하고 싶다는 치기(稚氣)입니다.” 교장의 눈은 잠시나마 현재가 아닌 미래의 어느 날을 그려보고 있었다. 다시 만난 단유에게 떳떳한 교육자로서 서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때는 오늘보다 더 나은, 더 훌륭한 어른으로서 성장해 있을 단유 군을 볼 수 있겠지요. 그렇죠?” “…자신이 없는데요?” “허허, 꼭 그렇게 될 거예요.” 교장은 웃음을 터뜨린 후 품에서 펜을 하나 꺼냈다. “어린 학생들이 이런 펜을 쓸지 모르겠지만.” 펜보다 펜을 건네는 교장의 굵고 주름진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선물이에요. 미리 주는 졸업 선물이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이런 선물을 받아도 되나요?” “됩니다. 이 선물은, 일종의 증표라고 생각하세요.” “증표요?” “제가 지금보다 더 훌륭한 교장으로서, 더 좋은 학교를 만들어 보이겠다는 다짐을 상징하는 증표이고, 단유 군이 멋있는 어른이 되어서 자신의 꿈을 이루겠다는 약속을 하는 증표지요.” “그런 것이라면 서로 주고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선물은 말이죠, 기억하는 것이에요. 선물을 받은 사람은 그 선물을 볼 때마다 준 사람을 기억하고, 선물을 준 사람은 그 선물을 떠올리며 받은 사람을 기억하는 거죠.” 펜은 특별히 고급스럽지 않았고, 오히려 투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제가 20년간 사용했던 거라 조금 낡긴 했지만, 쓰는 데는 문제가 없을 거예요.” “소중히 간직할게요.” “그래 주면 고맙죠.” 교장은 그동안 대화 상대가 되어 주어서 고맙다며 악수를 청했다. 단유는 교장의 손을 붙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흘렀다. 손이 차가우면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던가요, 라는 농담을 건네며 교장 선생님은 단유를 보냈다. ======================================= [544] 안녕, 친구야(3) 교장과 대화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단유는 책상에 앉아 펜을 꺼내 보았다. 낡았지만 관리를 잘한 것인지 펜의 겉면으로 검은 광택이 흘렀다. 앞머리를 돌려 펜촉이 나오게 한 뒤, 공책에 선을 그어보니 부드럽게 자국을 남긴다. ‘기억하기 위해 선물을 한다.’ 교장 선생님이 펜을 건네며 했던 이야기가 떠오르자 문득, 단유는 자신이 줬던 선물을 받고 눈물을 보였던 그녀를 떠올렸다. ‘잘 지내고 있을까?’ 도연과 촬영을 할 때, 그쪽 기획사의 대표님 덕분에 잠시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고작해야 곧 컴백한다는 짤막한 소식에 불과했지만. 그리고 이후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아 컴백 이후의 영향과 성과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미련 없이 보내기 위해’ 그녀에게 목걸이를 선물했다. 하지만 그 선물이 만약 ‘기억’이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면, 과연 그녀는 자신에 대한 기억을 품은 채 지내고 싶을까. 단유 본인이야 그녀에 대한 기억을 오래 간직한다 한들 나쁜 것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에 대한 좋은 감정들과 좋은 기억들로 가득하니 잊고 싶지 않은 단유였다. ‘아, 어쩌면 그래서 선물을 줬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난, 당신을 기억하겠다’라는 무의식적인 의미가 그 선물에 담겨 있었는지도. 반면 그녀는, 단유라는 소년을 어떻게 기억하고 싶을까? 아니 기억 자체를 하고 싶어 할까? 그녀는 소년을 어떻게 생각할까? 밀려드는 궁금증에 단유는 저절로 핸드폰으로 시선이 움직였다. **** “체인 박스 빼버릴까?” “그걸 왜 빼요? 위험하게? 그 위에 올려요, 그냥.” “짐이 너무 많아서 그러지. 체인 박스만 빼도 상자 하나는 더 넣을 수 있겠는데.” “그랬다가 만약에 눈이라도 내리면요? 길 위에서 사고라도 내고 싶어요? 난 그런 차 못 타요.” 까칠한 스타일리스트의 지적에 매니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공간을 만들기 위해 짐들을 이리저리 쌓았다. 겨우 짐을 정리했을 무렵, 헤어샵에서 스타일을 손보고 나오는 아이들과 마주쳤다. 발목까지 닿을 정도로 긴 패딩을 걸친 아이들이 매니저를 보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다 끝났어?” “네.” “얼른 타라. 춥다.” “네.” 무대 의상까지 맞춰 입은 두 아이가 차에 오르고 난 뒤, 차는 천천히 출발했다. “나윤아, 너 좀 피곤해 보인다?” “저만 그런가요? 소영이 너도 졸리지?” “아주 죽을 맛이다.” 공들인 머리가 헝클어지지 않도록 뒤에 편히 기대지도 못하고 있는 소영이었다. 스타일리스트가 그런 소영에게 둥근 공 모양의 쿠션을 건넸다. 소영은 ‘고마워요, 언니’라고 대답하고는 그것을 받아 앞으로 껴안았다. 뒤로는 기대지 못하니까 앞으로라도 숙여서 몸을 편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자, 너도.” “고맙습니다.” 나윤도 그것을 받아 두 팔로 안았다. 안전벨트를 맨 탓에 자세가 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머리를 뉠 수 있는 쿠션이 있어 다행이었다. “대전 행사는 별로 멀지 않으니까, 빨리 끝내면 오늘은 푹 쉴 수 있을 거다.” “내일은요?” “내일이 문제지. 지방 두 곳을 돌아야 하니까. 그러니까 쉴 수 있을 때 쉬어.” “당연하죠.” 단유는 모르지만, 가디스R의 인기는 조금씩 입소문을 타고 오르는 중이었다. 사실 입소문이랄 것도 없는 것이 처음 데뷔할 때부터 실력파 가수라는 수련의 인기에 힘입어 등장한 탓도 있었고 의도치 않았던 바이럴 마케팅의 효과로 가디스R은 어느 정도 인지도를 타고 있는 편이었다. 수련의 탈퇴와 소영의 영입으로 잠깐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이후 컴백했을 때는 그런 초기 활동의 영향으로 시선이 모이기도 했다. 다행히 후속곡도 썩 나쁜 반응은 아니었다. 비록 가요 프로그램에서 1등은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팬카페에 가입하는 숫자가 조금씩 늘었고, 음원 순위도 썩 나쁘지 않은 수준으로 나왔다. 데뷔곡보다는 못했지만, 자체적으로 ‘선방’했다고 평가할 만한 수준이었다. 지방행사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부를 만한 인지도의 가수들이어서 지방행사도 많이 잡혔고, 그래서 공식 활동이 끝난 지금도 지방을 돌면서 작은 대학교나 축제 행사에서 모습을 보이곤 했다. 검게 선팅한 탓에 바깥 날씨가 온전히 보이진 않았지만, 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구름 낀 흐릿한 날씨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오늘 눈 온다고 했나요?” “늘 눈이 온다고 말들은 하지.” 매니저는 룸미러로 흘깃 본 뒤 물었다. “왜? 눈이 왔으면 좋겠어?” 나윤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눈 내리면 보기야 좋지만 힘들잖아요.” “그치? 나도 눈은 정말 싫어.” “눈 싫어하는 사람이 많은 거 같아요.” “이 바닥에서 눈 좋아하는 사람 별로 없을걸?” 스타일리스트도 대화에 끼었다. “나도 싫어. 협찬받은 옷들 젖을까 봐 아주 신경이 곤두선다니깐.” 소영은 말없이 눈을 감고 쿠션에 고개를 기댄 채로 있었다. 잠이 벌써 들 리는 없겠지만, 마치 동면한 곰처럼 생체 에너지를 비축하는 모양새였다. “갑자기 눈이 내리는 일만 없다면 좋겠어요.” “왜? 사고 날까 봐?” 나윤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없잖아요.” “마음의 준비?” 눈이 내리면, 그 사람이 생각나니까.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그에게 일방적으로 헤어지자고 했던 그 날이 떠오르니까. 그랬는데도 그 사람은 자신에게 고맙다며, ‘선물 같은 사람’이었다고 말하며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졸업식 날 찾아와 목걸이를 건넸었다. 나윤은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잠시 만지작거렸다. 무대에 오를 때는 또 풀어야 하겠지만, 그 외에는 늘 착용하고 다니는 목걸이였다. **** “예전에 어떤 책에서 보니까, 지구가 갑자기 빙하기로 접어들 수 있대.” 뜬금없는 지태의 발언에 명수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빙하기가 뭔데?” “…야, 넌 책 좀 읽어라. 어떻게 빙하기도 모르냐?” “그래서 그게 뭔데?” “그러니까…갑자기 추워져서 전부 다 얼어버리는 거야.” “겨울 되면 갑자기 추워지기도 하고 그렇잖아.” “아니, 그런 추위 말고! 야, 니가 설명 좀 해줘.” 지태는 단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지구 전체 기온이 비정상적으로 떨어져서 전 지구가 빙하로 뒤덮이는 걸 말해.” “전 지구라면, 지구 전체?” “야, 그게 그 말이지! 아, 정말 이해력 완전 떨어지네.” ‘바보’란 단어가 섞인 핀잔이 이어지는 가운데, 단유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예전에 공룡이 멸종한 것도 이런 빙하기가 갑자기 찾아와서 적응을 하지 못한 공룡이 죽은 거라는 설이 있어.” 명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지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 빙하기가 어쨌다는 건데?” “빙하기라는 게 예고하고 천천히 오는 게 아니라, 갑자기 찾아와서 온 세상을 얼려버릴 수 있다는 거야.” “갑자기?” “그래. 그래서 이렇게 걷다가 갑자기 빙하기가 찾아오잖아? 그럼 우리는 이렇게 걷던 자세 그대로 얼어서 얼음이 되는 거야.” 명수가 소리쳤다. “대박!” “대박은 무슨. 존나 무서운 거지.” 명수는 게임에서나 보던 이펙트를 현실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잠시 품었다. 그 사이, 채윤이 지태에게 물었다.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지태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며칠째 태양도 안 보일 정도로 흐리잖아. 눈도 안 내리고 춥기만 춥고. 이러다가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면서 세상을 얼려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거지.” “그런 거라면 과학자들이 먼저 알지 않을까?” “과학자들도 모를 수 있지.” “어떻게 과학자들이 모를 수 있어?” “과학자들이라고 다 아는 건 아니잖아?” “다 아는 건 아니라도 빙하기가 온다는 건 알 수 있잖아?” “모를 수 있다니까?” “누가 그래?” 지태는 입을 열지 못했다. 지태가 그런 생각을 할 만큼 기이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뉴스 말미에 기상 캐스터가 일기예보를 전할 때 지구 환경 어쩌고저쩌고하면서 기이한 현상을 언급했지만, 여전히 매일 눈이 내릴 확률만 이야기하면서 ‘안전사고에 유의하셔야겠습니다’라는 멘트만 반복했다. “날도 추운데 매운 떡볶이나 먹으러 갈까?” “어제는 날이 추워서 우동을 먹고, 오늘은 떡볶이야? 내일은 뭔데?” “내일은…돈까스?” “그게 뭐야? 그냥 네가 먹고 싶은 메뉴만 고르는 거잖아?” “그래서 싫어?” “아니, 좋아.” “그럼 가자.” “응.” 지태와 명수가 룰루랄라 하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단유야.” 그 뒤를 걷던 중 채윤이 물었다. “너희는 언제 이사 가?” “아마 방학 시작하고 바로 갈 거 같아.” “졸업식은?” “그때는 선생님이 차를 태워주시겠지?” “그럼 방학 때는 보기 힘들겠구나.” 가끔 놀러 올게, 라고 말했으면 좋겠지만, 단유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평소에도 어울려 놀기보다 집에서 공부하는 시간이 많은 단유인데 여기까지 올 일이 별로 없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내가 너희들한테 나쁜 친구인 거 같다.” “나쁘긴. 그게 당연한 거지. 그리고 네가 와도 보기 힘들걸.” “지태는 캐나다에 가야 한다고 치고, 넌 왜?” 채윤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혹시 지난번처럼 합숙하는 학원, 뭐 그런 거야?” 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집에서는 그게 좋았었나 봐.” 스파르타식 학원에 맡겨 놓으면 학습 효율이 오를 거라고 생각했을까? 라며 조심스럽게 투정을 늘어놓는 채윤이었다. 차마 부모님께는 못하고 단유에게만 늘어놓는 채윤이의 소심함에 단유는 웃음을 지었다. “학교에 보내고, 독서실에 보내고, 학원을 보내고, 인강 끊어놓고, 학습지 구독하고. 부모님들은 그렇게 하면 아이들이 다들 공부를 잘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잘 할 거라고 생각하신다기보다는 그렇게 믿고 싶으신 거겠지. 피시방에 간 아들이 공부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을 거 아냐?” “그런데 실제로는 공부 안 하는 애들이 더 많은데, 부모님들은 그걸 모르나 봐.” 단유는 볼을 긁적이다 말했다. “사실 난 그런 부모님이 안 계셔서 모르겠지만, 우리 선생님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 일종의 믿음이 있는 게 아닐까, 라는 거. 저기, 명수가 평소에 공부를 잘 안 하고, 게임도 많이 하지만, 선생님은 그런 명수에게 공부하라거나 게임 좀 적게 하라거나 하는 말을 하지 않아. 우리 선생님이 친부모가 아니라서?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 선생님은 나나 명수를 믿는 거라고 봐. 알아서 잘할 거라고.” “너희들은 잘하잖아. 너도 그렇고, 명수도… 솔직히 명수는 잘 모르겠네?” 단유는 촐랑대며 앞서가는 명수의 뒷모습을 보며 대답했다. “명수는 정말 열심이야. 축구 선수라는 자신의 꿈을 위해서 정말 많은 노력을 하지. 매일 새벽 운동하는 걸 거르지도 않았고, 연습 시간에는 게으름도 피우지 않아. 누가 시켜서, 혹은 누가 감시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걸 원하니까 열심히 하는 거야. 하지만 사람의 몸이다 보니 무리한 운동은 오히려 몸에 해를 끼칠 때가 많으니까 그걸 자기 나름대로 조절하는 거야. 너무 무리해서 다음 날 운동에 영향을 주면 안 되거든.” 명수가 다리를 다쳐서 운동을 강제로 쉬어야 했을 때, 남들에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가 얼마나 우울해했었는지는 단유가 똑똑히 지켜본 바였다. “물론 공부도 잘하면 좋겠지만, 자기한테 맞지 않는 걸 어떡해. 그나마 최소한 필요로 하는 정도의 공부는 하고 있으니까.” “넌 다 잘하잖아?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너까지 왜 그래? 나 못하는 거 많아.” “네가 뭘 못하는데?” “요리도 못 하고, 그림도 잘 못 그리고, 창의력도 부족하고, 축구 빼고는 해 본 운동 종목이 별로 없어서 잘 못 하지.” “하면 잘 하지 않을까?” “…연애도 못 하고.” “아.” 두 솔로는 한동안 말없이 앞서가는 친구들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 [545] 안녕, 친구야(4) 축구랑 게임 빼고는 잘하는 게 없는 명수와, 집에서는 얌전하나 밖에만 나오면 촐랑대는 지태가 앞서고 친구들에 비해 자신감이 부족한 채윤과 연애 못 하는 단유가 뒤에 서서 향한 곳은 단유네가 새로 이사 갈 집이었다. 그동안 하은은 틈틈이 시간을 내서 집을 돌아보러 다녔고, 겨우 마음에 드는 집을 하나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모두가 모여 이사 가기 전 그 집을 미리 청소하러 가는 것이었다. “우리 엄마가 새집 청소하러 갈 때가 제일 기분이 좋대.” 가기 전 분식집에 들른 네 아이는 지태가 원하던 떡볶이를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채윤이 빈 컵에 물을 따르며 말하자, 명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노라고 대답했다. “아직 집에 가기 전인데도 이상하게 들뜨는 기분이야.” 이전에 오피스텔로 이사 올 때는 단유나 명수가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집이 구비 되어 있었고, 그 안에 가재도구까지 모두 갖춰져 있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집은 커?” “비슷해.” “지금 사는 집이랑?” “응.” 단유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얼마 전 계약하러 가는 날 하은과 함께 가서 집을 둘러보았을 때 단유는 그렇게 느꼈다. “대신 거실이 지금보다 좀 더 넓더라. 그치?” “응.” “그럼 더 비싼 집인가?” “집값도 비슷해.”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오피스텔이 아깝대. 그게 더 돈이 된다고 그러더라.” 채윤이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물이 조금 차가웠던지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돈은 나중에 벌어도 되지만, 일단 지금 사는 집이 중요하니까 살기 좋은 집으로 골랐대.” “선생님이?”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고. 어차피 명수 얘가 나중에 돈 엄청 많이 벌어올 텐데 뭐.” 마침 갓 나온 떡볶이를 포크로 집어 우물거리던 명수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눈을 크게 떴다. “너 돈 많이 벌 거잖아?” “응. 많이 벌 거야.” 지태가 명수를 음흉스럽게 실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얘, 나중에 돈 벌고 입 싹 닦는 거 아냐?” 명수가 코웃음을 치며 내가 그럴 애로 보이냐, 고 되물었고 지태가 응, 이라고 대답하면서 또 툭탁거리기 시작했다. 늘 보던 장면이라 별 흥미 없이 눈을 돌려 떡볶이를 집어 먹던 채윤은 다시 단유에게 물었다. “학교는?” “명수야 체육중점학급이 운영되는 학교라서 지원하면 붙을 테니까 문제가 없고, 나는 마침 가까운데 과학중점학급이 운영되는 학교가 있어서 거기 지원할 생각이야.” “그렇구나. 다행이네.” 단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과학고나 특목고는 가지 않지만, 그 정도라면 충분히 단유도 만족할만한 수업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해당 학교에 문의했을 때, 학교 측에서도 단유의 성적을 확인하고는 기꺼운 마음으로 입학을 종용했을 정도였으니까. 학교 측에서 보내준 팸플릿을 보고 하은도 괜찮다고 판단했다. “경쟁과 과제에 치여 사는 삶보다는 낫겠지?” 굳이 그런 이유는 아니었지만 단유는 괜찮다고 판단했다. 비록 실질적으로 어떻게 수업이 진행되는지는 겪어보지 않아서 호불호를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팸플릿에 기재된 내용만으로 판단하기에는 적당히 관심 과목에 대한 호기심도 채우고 자신만의 시간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난 아마 인주고등학교로 갈 거 같아.” 인주고등학교는 장계중학교 근처에 있는 고등학교로 장계고등학교와 함께 근처에서 가장 많이 가는 고등학교였다. “가까워서 좋겠네.” 채윤의 집에서 가까운 편이라 아마 지금 타고 다니는 자전거도 필요 없을 정도이리라. “혼자잖아.” 채윤의 대답에 순간 침묵이 흘렀다. “야, 그렇게 말하면 다 혼자지. 나도 혼자 캐나다 가고, 명수나 단유도 다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하잖아?” “…그렇긴 하지.” “원래 인생 혼자 사는 거라고 했어. 이제 우리가 코찔찔이 어린 애도 아닌데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해?” “맞어. 그리고 가서 또 새로운 친구 사귀면 되지.” “난 말이야. 성격이 소심하고 낯도 많이 가린단 말이야. 혹시…왕따 같은 거라도 당하면 어떡하나 걱정도 되고 그래.” 명수가 포크로 테이블을 찍을 듯이 하다가 단유의 눈짓에 멈칫거렸다. 하지만 입을 다물진 않았다. “야! 너! 만약에 누가 너 괴롭히면 당장 말해. 내가 달려가서 다 때려눕혀 줄 테니까.” “웃기네. 니가 무슨 슈퍼맨이야?” “나만 있냐? 단유도 있어. 솔직히 지태는 도움도 안 되니까 신경 안 써도 되고.” “내가 왜 도움이 안 돼?” “너 싸움 잘해?” “모든 일을 힘으로 해결하려는 그 무식한 생각부터 버려.” “힘이 필요하면 내가 나서고, 머리가 필요하면 단유가 나서는 거지. 안 그래?” “둘 다 내가 해도 될 것 같은데?” “음, 그건 그래.” 명수의 빠른 인정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튼, 채윤이 너 그런 걱정은 하지 마라. 그리고 넌 성격이 좋고 눈치가 빨라서 금방 좋은 친구 사귈 거야.” “눈치가 빠르다는 건 별로 상관없는 거 같은데?” “상대의 마음을 잘 헤아린다는 뜻이니까, 좋게 받아들여.” 단유의 대답에 채윤이 싱긋 웃었다. 그 모습에 지태가 초를 쳤다. “좋댄다. 눈치만 빠르고 머리는 나빠서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고.” “그건 니 이야기고.” “웃기시네. 네 이야기거든?” “네, 다음 환자.” “야!” **** 30여 분간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10분을 더 걸어간 뒤에야 단유와 명수가 내년부터 살게 될 집이 나왔다. “5층이면 엘리베이터 안 타도 되겠다.” “그런데 왜 넌 엘리베이터 기다리냐?” “난 손님이니까.” 명수는 그게 무슨 논리냐며 지태를 타박했다. 명수 입에서 ‘논리’가 나온다며 지태가 놀란 척 놀렸고 두 사람이 입씨름을 벌이는 가운데 넷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렸다. “왔어?” 미리 와 있던 하은이 앞치마와 마스크를 끼고 거실 가운데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이들이 인사할 때, 단유가 물었다. “왜 혼자 하세요? 같이 하자니깐요.” “먼저 온 김에 슬슬 하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너희들, 도와주러 와서 고맙다?” “고맙긴요. 그동안 단유가 우리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요?” 명수가 ‘나는? 나는?’이라고 캐물으며 지태를 압박하는 동안 채윤과 단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이 훨씬 큰 거 같은데요?” 채윤의 감탄에 하은이 웃었다. “아직 가구가 안 들어와서 그래. 들어오면 많이 좁을지도 몰라.” “와, 먼지 많다.” 지태도 들어와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단유도 주위를 둘러보니 벽지는 나름 깨끗한 편이긴 해도 창틀이나 바닥에는 먼지가 많이 쌓여 있었다. “원래 사람이 며칠만 집을 비워도 먼지가 쌓이는 법이야. 이렇게 안 되도록 너희 어머니들이 얼마나 고생하시는지, 너희도 알아야 돼.” 하은이 웃으며 지태의 말을 받아주었다. 사실 단유가 조금만 ‘힘’을 쓰면 금방 깨끗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하은이 ‘청소를 해야 한다’고 했을 때, 혼자 하겠노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너 혼자 못해’라며 하은이 말렸고, ‘우리 집인데 우리같이 하자’고 명수가 끼어들어서 결국 그러겠노라 했다. 그 후, 명수가 친구들에게 ‘새집 청소하러 간다’고 알렸고, 친구들이 오지랖 넓게 ‘도와줄게’라고 나서는 바람에 이렇게 다 같이 오게 된 것이다. “뭐부터 하면 돼요?” “일단은…뭘 할까?” 하은이 귀밑을 긁으며 되물었다. 하긴 손 볼 부분이 많아 보이긴 했다. “일단 먼지부터 다 쓸고 나서 걸레로 닦아야겠지?” “제가 저 방을 쓸게요.” 단유가 먼저 가장 큰 방을 가리켰다. “그럼 난 저쪽 방.” 명수가 벽에 기대져 있던 빗자루 하나를 집으며 말했다. “우린 거실을 맡을까요?” “빗자루가 두 개밖에 없으니까, 너희는 대신 장갑 끼고 창틀 좀 닦아 줄래?” “예!” “그럼 쓰는 건 저희 둘이 다 할게요.” 그렇게 각자의 청소 영역이 지정되었다. 새집을 청소한다고 해서 이사 갈 준비가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사전문업체에서 이삿짐을 옮겨 줄 것이기에 일일이 물건을 쌀 필요는 없지만, 가기 전에 자기에게 필요한 것과 필요 없는 것들을 구분해서 버릴 물건들은 미리 버리는 것도 일종의 청소였다. 중학교로 올 때야 워낙에 가진 짐이 없었기에 거의 맨몸으로 오다시피 했지만, 이제는 책이며 옷이며 가진 것들이 많아 골라내는 것도 간단하지 않았다. 특히 3년간 부쩍 몸이 자라며 옷장에 입지 않는 옷들도 많았다. “깨끗한 옷들은 세탁해서 기부할까?” “그러자.” 명수의 동의하에 자신들의 옷들을 모두 꺼내놓았더니 제법 많은 옷들이 나왔다. “그동안 우리 이렇게 옷 많았구나.” “대부분은 못 입는 거지.”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크면 못 입는 옷들 많겠다. 1년만 입고 버리는 옷들도 있겠는데?” 어느새 단유의 키는 180을 넘어섰고, 명수도 단유에 버금가게 키가 커서 180 언저리에 닿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사실 지금 입고 있는 옷들도 처음에 살 때는 꽤 큰 사이즈로 샀었는데 지금은 마치 몸에 맞춘 듯 딱 들어맞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명수는 작년에 산 패딩이 작아서 입기 불편해 보일 정도였다. “명수 네가 키가 많이 컸어.” 하은이 명수의 옷들을 하나하나 들어 올려 보며 감상에 젖은 듯 말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 옷들은 모두 하은이 사 준 것들이었다. 두 사람 다 워낙 옷에 관심이 없어서, 아니 옷을 사는 일에 관심이 적어서 하은이 나서서 사 주기 전에는 불편해도 불편하단 소리를 내지 않았던 탓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일일이 옷을 맞춰 봐 주며 어떤 옷이 잘 어울릴지 고심하고 구매를 결정했던 옷들이었다. 그런 정성이 들었기에 기억하기도 하거니와, 같이 지내는 동안 아이들이 이렇게 잘 자라주었다는 생각이 들어 괜히 감상적으로 변한 하은이었다. “나도 내 옷 중에서 안 입는 건 좀 골라놔야겠어.” 하은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명수가 자신의 옷을 하나하나 고르는 모습을 보며 단유가 말했다. “고등학교 올라간 김에 옷 좀 새로 살까?” “돈이 어딨어.” “살 돈은 있어.” “그런데 돈 쓰지 마.” 명수는 무심하게 말했다. “니 돈은 아껴서 나중에 필요한 데 써.” “이럴 때가 필요한 거 아냐?” “어차피 학교 가면 교복 입고 다니는 일이 많잖아? 그리고 나도 고등학교 올라가면 교복 아니면 체육복이나 입지, 사복 입을 일은 별로 없을 거야. 사복은 지금 옷으로도 충분하고.” “그렇게 말하면서 먹을 걸 살 때는 안 말리더라?” 명수가 볼을 붉히더니 배시시 웃었다. “먹는 건 입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잖아.” “그건 그래.” 단유도 마주 보며 웃었다. 옷 말고도 정리할 것들이 있나 확인하기 위해 방을 둘러보던 단유는 생각보다 짐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책만 해도 벌써 과일 상자에 담으면 두 박스 이상은 나오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물론 다른 집, 다른 친구들의 짐에 비하면 없는 편이긴 하겠지만, 단유에게는 그것도 많아 보였다. 애초에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던 몸이었으니까. 책들을 살피다 이번엔 책상을 바라보았다. 넓지 않지만 고급스러운 재질의 책상 위에는 LED 스탠드 조명, 그리고 자주 보는 몇 권의 책과 필기를 위해 준비해뒀던 노트, 펜 한 자루가 책상 위에 올려진 전부였다. ‘충분하잖아.’ 바라보고 있자니 그동안 부족함 없이 살아왔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저 책상 앞에서는 부족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저 앞에 앉아 있을 때, 단유는 모든 걸 잊고 지식을 쌓는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책상 밖을 벗어나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지만, 저 앞에서는 오직 책만 보며 집중할 수 있었다. 앞으로는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어쩌면 지금껏 겪었던 일은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많은 일들이 자신에게 닥칠지도 모른다. 때로는, 자기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들 때문에 어려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책상에 앉아 조용히 숨을 고르고 생각을 집중하면 어떤 일이라도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도 생긴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확신 같은 것이 생긴다. 단유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에는 잡동사니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서랍을 끝까지 열고, 그 안에서 조그만 상자를 하나 집어 들었다. 손바닥만 한 상자는 종이로 만들어 투박하지만 단유는 소중하게 다루었다. 조심스럽게 상자의 윗부분을 들어 열었다. 그 안에는 낡은 나무로 조각된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가 담겨 있었다. “…….” 이 세계로 건너올 때, 오로지 자신의 것이었던 유일한 물건이었다. 단유 본인도 정확히 언제 받았던 건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늘 목에 걸고 다녔던, 아버지의 ‘유품’. 한때는 그 목걸이가 자신을 지켜준다고 생각하기도 했었고, 품고 다니면 괜히 아버지가 같이한다는 기분도 가끔 느낄 때가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힘을 가지게 되고, 낡은 목걸이라 분실의 위험이 있어서 더 이상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대신 서랍 깊숙이 넣어두고 가끔 생각날 때마다 목걸이를 보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지켜보고 계시죠?’ 단유는 목걸이를 한참 바라보았다.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리지만, 아버진 자신에게 말했었다. 기억하라고. ‘기억할게요.’ 단유는 진심으로 그 의미를 되새기며 대답했다. ======================================= [546] 안녕, 친구야(5) - 1부 완(完) 노는 것도 지친다는 말을 3학년 학생들이 공감할 무렵, 방학식 날이 되었다. “이게 왜 피곤하냐면, 차라리 집에서 늦잠을 자면 괜찮은데, 학교까지 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피곤한 거야.” “왔다 갔다 움직이는 게 싫다고?” “솔직히 방학 때 약속 없으면 피시방도 가기 귀찮잖아.” “완전 게을러빠진 새끼네.” “그건 시험날 니 머리 이야기고.” “개새끼.” “그건 니 별명.” 지난 한 달간 그렇게 열심히 떠들어댔건만, 여전히 할 말들이 많은 것인지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편한 자세로 수다를 떠는 아이들 때문에 교실은 여간 시끌벅적한 게 아니었다. 그곳에서 단유는 혼자 책상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명수는 축구부 감독님 만나고 온다고 잠시 교실을 나간 상황이었다. 같이 갈 테냐고 물어왔지만, 단유는 거절했다. 비록 한때 명의만 올라가 있던 상황이어서 단유도 공식적으로는 축구부였기도 했지만, 그렇게 열심히 활동했던 상황도 아니기도 해서 보고 이야기를 나눌만한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이렇게 시끄러운 교실에 있고 보니 그냥 따라갈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뿌연 창을 보니 그동안 청소도 제대로 하지 않았던가 싶었다. 먼지만 닦아내도 깨끗해질까 싶어 슬쩍 바람을 일으켰다. 창문의 바깥면에다 바람을 일으켰기에 아이들은 알 수 없겠지만, 만약 누군가가 그 장면을 봤다면 그 부분의 먼지만 사라지면서 창이 투명해지는 장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람으로 먼지를 닦아내는 것도 한계는 있어서 주변에 비해 깨끗하다뿐이지 단유의 마음에 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바깥을 보는 데 문제는 없었다. 오늘도 흐린 하늘과 짙은 구름이 동요 없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나마 오늘은 눈이 내릴 확률이 높다고 하니 어쩌면 오후에 눈이 내리는 장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단유야.” 단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너 이사 간다며?” 단유의 앞자리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들 중 한 명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단유와 시선이 마주치자 고등학교 가도 보기 힘들겠네, 라고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단유가 이사 안 가면 이 동네 아이들은 전교 1등은 절대 못 했을 거야.” “전교 1등만 문제겠어? 부모님들이 애를 얼마나 들들 볶을지 상상이나 되냐?” “학원 선생님들도 이제 어깨 좀 펴겠다.”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바라보니, “너 때문에 이 동네 학원 원장들이 아주 말라 죽을 지경이었다고 하더라. 어떻게 된 게 학원을 보내도 단유를 이기지 못하냐며 엄마들이 가서 그렇게 난리를 쳤대.” “내가 듣기로는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도 단유를 이기지 못하면 학원 문 닫아야 한다고 하더라.” “그건 좀 에반데?” “진짜로 그랬대. 어떤 엄마는 단유가 학원도 안 다니고 집에서 인강만 듣는다고 들었다면서 자기 애한테 사이트별로 다 등록시켜서 새벽까지 인강만 듣게 했다더라.” “에이, 뻥 치지 마라. 그리고 만약 진짜로 그렇게 했다고 해도 어떻게 하루 종일 인강만 듣고 살아? 그것도 다 같은 내용일 거 아냐?” “진짜라니까?” “우리 학교 애야?” “우리 학교 애는 아니고 주연중학교 이야기야. 우리 학원에 다니는 애한테 들었어.” “방에서 인강 듣는 척하고 야동 보고 있었던 거 아냐?” “존나 보다가 엄마 들어오는 거 같으면 바로 알트 탭 누르고?” “그러다가 걸리면?” “걸리면 그냥 뭐 되는 거지.”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들의 이야기에 단유는 별 표정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단유가 그러는 모습은 여러 번 봤던 아이들이라 별로 개의치 않았다. “단유 너 이사 가면 그쪽도 난리 나겠다.” “단유를 이겨라 시즌 2가 시작되는 거지.” “어차피 일등은 김단유.” 그저 단유를 소재로 좀 더 잡담을 끌어보자는 수작이리라. 그냥 친구들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친목을 돈독히 하려는 모습인지라 단유도 달리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단유 넌 나중에 서울대 가겠지?” 이번에는 진짜 대답을 원하는 질문이었던지 빤히 바라보는 모습이었다. “모르지.” 알 수 없다. 서울대가 목표는 아니지만, 하다 보면 갈 수도 있고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선택의 기준이 다를 수 있으니까. “어디 갈 거야? 법대? 의대?” 그렇지만 아이들은 단유가 서울대를 간다고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글쎄?” “하아. 난 어디로 갈까?” “가고 싶다고 한들 갈 수나 있겠냐? 네 머리에?” “누가 모르냐? 그래도 꿈은 꿀 수 있잖아. 내 자윤데.” “꿈꾸는 건 자유지만, 성적은 현실이지.” 한 아이가 툴툴대며 말했다. “야, 골 아프게 왜 그러냐. 어차피 고등학교가서 생각할 문젠데.” “그래도 걱정되잖아. 대학 못 가면 사람 취급도 못 받는 세상인데.” “웃기네. 야, 니가 세상을 아냐? 그런 취급을 받는지 안 받는지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사람들이 다 그렇게 이야기하잖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게 다 진실이냐?”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진 않았을 거 아냐?” “대학 안 나온 연예인들도 떼돈 벌면서 건물주 되는 세상이야. 대학은 무슨.” “나도 동감. 솔직히 대학이니 학벌이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돈만 잘 벌면 되지. 사실 난 대학 안 가고 바로 취업하는 게 더 좋을 거 같애. 남들 대학 가고 군대 가면서 시간 낭비할 때 미리 취업해서 돈 벌어두면, 그 돈 불려서 목돈 만들고 또 굴려서 더 크게 만드는 게 유리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새끼네. 야, 돈을 모으는 게 쉽냐? 한 달 벌어서 그 돈 안 쓰고 모으는 게 가능하겠냐? 그리고 그 돈을 어찌 모았다 치자. 그러면 그 돈은 어찌 굴리게? 주식으로? 주식 하다 한강 간다는 말도 모르냐?” “그거야 욕심부려서 그런 거고. 욕심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하면 돈 벌 수도 있을 거야.” “주식 자체가 도박이야. 도박에 욕심을 내지 않는 게 말이 되냐?” 하지만 주식으로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종종 해주시는 아버지를 둔 아이는 친구의 말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주식 보면 한 방만 노리는 식으로 몰빵하는 사람들이 망한대. 그렇게 안 하고 조심스럽게 나눠서 하면 투자야. 그리고 그렇게 투자하는 사람이 돈 번대.” “씨발, 무슨 판타지 소설이냐? 어떤 게 오를지 미리 알고 찍지 않는 이상 어떤 게 오르고 내릴지 어떻게 아냐? 그리고 한강 가는 사람들 중에는 그, 뭐지, 기관인가, 아무튼 유명한 펀드 매니저 같은 사람들도 있잖아? 대학물 먹고 평생 그 짓만 하던 사람들도 한강을 가는데, 푼돈이나 굴리는 사람들이 주식을 하면 성공을 하겠냐? 그거 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차라리 은행에다가 돈 넣어두고 이자 먹는 게 백배 천배 낫지.” 그 아이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월급날마다 주식으로 쫄딱 망했다는 외삼촌의 이야기를 들먹이며 아버지의 돈줄을 막았다. “야, 대학 안 가고 취업하려면 공고나 상고를 가지 왜?” “집에서 대학 가야 한다고 하니까 가는 거지.” “취업한다고 말해.” “그걸 어떻게 말하냐? 사실 우리 집에서부터 대학 안 가면 사람 취급 안 하는 분위긴데.” 현재 고2인 형과 어머니는 저녁 식사 때마다 언쟁을 벌이곤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기는 건 어머니셨다. 대학도 못 가면 사람도 아니라고, 협박 조로 아들을 핍박하는 어머니 때문에 늘 형은 방으로 쫓겨난다. “남자가 곤조가 있어야지.” “그래서 넌 공고 가냐?” “뭐 그런 것도 있지.” “지랄하네. 야, 네 성적이면 인문계에서도 밑바닥이니까 공고 가는 거잖아?” “아 이 새끼 솔직한 거 보소? 존나 대놓고 그렇게 말하면 사람 안 민망하겠냐?” “미안하다, 새끼야!” 그렇게 웃음과 농담으로 서로를 위로하는 친구들이었다. 중학생. 비록 어른들의 시선에는 어리기만 하고, 또 실제로도 어린아이들이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놀기만 좋아하는 ‘어린’ 애들은 아니었다. 나름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기도 하고, 미래에 대해 고민도 하는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이 중학생들에게 미래는 그저 철로를 따라 달리는 열차와 같은 것이었다. 단 하나의 철로 위를 달리는 열차 위에 늦지 않게 올라타는 것. 그리고 다음 정거장까지 무사히 가는 것. 혹시라도 자신이 열차보다 빨리 달릴 수 있다고 착각하고 열차 문을 억지로 여는 일이 없도록 확실하게 잠금장치를 마련된 열차를 타야 했다. 그리고 다음 정류장까지 얌전히 앉아서 안내방송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이들의 과제였다. 과도한 경쟁 체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 열차는 똑같은 조건의 객차를 연결해서 누구나 같은 자세로, 같은 속도로 열차를 타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뛰어다니지 말 것, 창문을 열지 말 것, 열차 안에서 싸우지 말 것 등의 룰을 만들어놓고 이를 지키도록 했다. 동등한 조건과 동등한 환경에서 열차의 승무원들은 말한다. “개성을 키우세요.” **** 마지막 학년, 마지막 방학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방학식이 될 것 같았지만, 특별한 점은 별로 없었다. 겉으로는 그랬다. “모두들 방학 잘 보내고, 특히 이번 방학이 중요한 거 알지? 이제 너희들은 더 이상 중학생이 아냐. 졸업식이 남았지만, 이제는 중학생이라고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거야. 이 시기에 누가, 얼마나 더 열심히 노력했느냐에 따라서 너희들의 미래가 바뀐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돼. 정신 못 차리고 어영부영 시간을 보냈다가는 고등학교 가서 크게 후회할 거니까, 준비들 잘해야 된다. 알겠니?” “네!” “나는 너희들이 모두 훌륭한 어른으로 자라서 나중에 몇 년 지나서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선생님, 저 왔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 물론 그렇다고 꼭 선생님 보러 오라는 얘기는 아니다. 알지?” “네!” “지금 대답한 사람 얼굴 기억한다?” 교실에 웃음소리가 파도처럼 출렁이고 지나갔다. “스승의 날이니 하는 날에만 와서 얼굴 비추고 가는, 그런 건 안 해도 돼. 가끔 생각날 때 와도 되고, 힘들거나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필요할 때 와도 돼. 너희들은 졸업해도 내 제자들이고 난 너희들을 언제나 아낄 테니까.” “우우~” 야유와 웃음을 흘러가고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그럼 모두들! 방학, 잘들 보내라.” 아이들은 교실에 폭탄이라도 설치되었다는 듯 다급하게 보일 정도로 교실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가자, 단유야.” “응.” 이런 날에도 책 한 권 가방에 담아 온 단유는, 여느 날보다 가벼운 가방을 둘러메고 명수와 함께 교실을 빠져나왔다. 마침 복도에서 달려나가는 아이들을 거슬러 오는 지태와 채윤을 만났다. “오늘 어디 갈까? 피시방?” “도하는?” “그 새끼, 여자 친구 보러 간단다.” 지태가 투덜대다 명수를 향해 날 선 시선을 보냈다. 명수는 이유 없이 찔끔하며 왜, 라고 물었다. “너 오늘 ‘여자 친구’ 만나러 가냐?” “…….” “아, 진짜. 이 새끼. 이런 날도 꼭 그러고 싶냐?” “이런 날이니까 더 그런 거 아냐?” “야, 우리가 며칠을 더 본다고 그러냐? 앞으로 이렇게 만날 시간도 별로 없어.” 당장 일주일 뒤, 단유와 명수도 이사를 가면 더욱 보기 힘들 것이다. “상미도 같이 놀면 되지.” 채윤이 명수에게 시선을 던지며 말하자, 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야, 우리끼리 놀 때는 그냥 우리끼리 좀 놀자.” 지태의 말에 채윤이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신경 쓰지 마. 이 새끼, 갑자기 외로워서 시샘하는 거니까.” “외롭긴 누가 외로워?” “넌 캐나다 가서 금발 미녀 사귈 거잖아.” 지태가 두 눈에 힘을 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반드시 사귀고 나서 니들한테 톡 보낸다. 진심이다.” “유학 간다는 놈이 공부 생각은 안 하고 여자 사귈 생각만 하고 있으니 안 봐도 뻔하다.” 명수가 한마디 보태니, 또 지태와 명수가 툭탁거렸다. 두 사람, 정말 서로 헤어지기 싫은가보다. 단유는 웃으면서 두 사람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일단 밥이나 먹으러 가자.” “뭐 먹지?” 태세 전환이 빠른 지태의 질문에, “떡볶이, 돈까스, 라면, 짬뽕 빼고.” 라고 명수가 즉각 대답했다. 최근 이 네 메뉴만 돌아가면서 먹은 탓에 질린다는 표정이었다. “스테이크 어때?” “스테이크?” 지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예전 명수랑 함께 스테이크를 먹으러 갔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단유가 미소를 지었다. 교실 밖을 나와 운동장을 가로지를 때, 하늘에서 하얀 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눈이다!” 오랫동안 전전긍긍하던 하늘이 마침내 눈을 뿌리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네 사람은 운동장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실려 내려오는 눈은 금방 함박눈이 되어 시야를 가득 메울 정도로 떨어져 내렸다.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을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1부 완(完)> ======================================= [547] 새벽이 밝으면(1) “아윽.” “…뭐냐, 그 이상한 소리는?” “안 피곤하냐?” “피곤하지. 10시간을 계속 앉아 있었는데 안 피곤하면 그게 사람이냐?” “난 눈이 침침하다. 뭐 좀 먹고 들어갈까?” “앞뒤가 안 맞잖아? 눈이 침침한 거야, 배가 고픈 거야?” “둘 다지.” “으휴. 이 시간에 문 연 데가 있을까?” “편의점에서 대충 때우고 들어가자.” “그래.” 어슴푸레했던 아침 햇살이 빠르게 선명해지며 눈꺼풀을 제대로 뜨고 있기 힘들게 만든다. 눅진했던 새벽 공기가 시험 전날 벼락 공부했던 거 마냥 사라지고, 대신 부지런한 청소차의 굉음이 지나가며 기름진 머리를 뽐내는 베짱이 두 마리를 욕하고 지나갔다. 푸르스름한 턱을 가진 남자는 연신 목을 돌리며 피곤하다는 티를 냈고, 검은색 뿔테 안경을 낀 남자는 새벽 일찍 길을 나선 어르신들의 흘깃거리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걸음을 빨리했다. “조금만 더 했으면 다이아 찍었을 텐데.” 기름진 뺨을 긁던 푸른 턱의 한 마디에 뿔테 안경이 키득거리며 받아쳤다. “다이아 찍기 전에 키보드에 머리 박고 다이했을 거다.” 푸른 턱은 안경을 쳐다보며 눈을 찡그렸다. “너의 어설픈 유머 감각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대중성이 결여된 유머감 만큼이나 순발력이 떨어지는 뿔테 안경의 친구는 그 말을 받아치지 못했고, 대신 100여 미터 앞에 문을 연 편의점을 발견한 뒤 말을 돌렸다. “저기 있네, 편의점.” “아, 진짜 배고파.” 편의점 문을 열었더니, 시원한 공기가 훅, 하고 밀려 들어왔다. 창고를 정리하고 있었던지, 아르바이트생의 목소리가 음료수 칸 너머에서 들려왔다. “어서 오세요.” 두 사람은 라면과 김밥, 햄버거와 도시락, 소시지와 샌드위치 사이를 오가며 치열하게 고민했고, 마침내 메뉴를 골라 계산을 끝낸 뒤 눈보다 빠르게 손을 움직여 조리를 끝내고 입안으로 허겁지겁 음식들을 밀어 넣었다. “이 짓도 더는 못해 먹겠다.” 전자레인지에 데운 햄버거를 검지와 엄지로 조심스럽게 집어 드는 뿔테 안경이었다. 그 말에 이미 먹을 것들을 앞에 펼쳐 놓고 먹을 준비를 하던 푸른 턱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가을부터는 하고 싶어도 못해. 공부해야지.” “공부, 할 거냐?” “뭐냐? 그 이상한 질문은? 취업하려면 공부해야지. 이제 곧 졸업인데.” 입속을 가득 채운 조미료 덩어리의 음식들을 우물거리던 푸른 턱의 남자는 탄산 부글거리는 검은 음료를 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노량진 들어갈 거다.” “노량진? 공무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뿔테 안경을 고쳐 쓴 친구는 남자의 옆모습―자세히 보니 뺨도 푸르스름하게 변한 친구였다―을 흘깃 본 뒤 햄버거를 베어 물었다. “공무원이 대세는 대세구나.” “집에서 성화라서.” “그래도 니 인생이다, 인마. 집에서 가란다고 가냐?” “집에서 뭐라고 하지 않더라도 갈 생각이었어.” “너무 늦지 않았어?”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빠르다고 하지 않나?” “늦었을 때는 늦은 거지, 무슨….” 남자는 탄산음료 때문인지 속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숨을 길게 토해냈다. “1학년 때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애들 보면서 그렇게 흉을 봤는데.” “공무원시험 준비하는 애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인 뒤, 샌드위치를 베어 물고 입가에 묻은 소스를 휴지로 닦아냈다. “학문의 전당이라는 대학에 들어왔으면, 적어도 자기 전공에 관한 공부를 해야 할 거 아냐? 전공 공부는 저 멀리 내버려 두고 공무원시험에나 몰두하는 사람들 보면서, 돈 아깝다는 생각 되게 많이 했거든.” “내 욕 많이 했겠다?” “넌 1달, 아니 보름도 안 했잖아?” “여간 지겨운 게 아니라서 말이지.” 친구는 키득거리며 소시지를 입에 채워 넣었다. 불룩해진 볼이 열심히 씰룩이는 것을 보며 남자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 같아. 차라리 그때부터 공부해서 공무원이나 붙었으면 이런 고민도 안 했을 거고 스트레스도 안 받았을 건데.” “그냥 계속 취업 도전하지그래?” 남자는 또 한 번 길게 숨을 토해냈다. “붙을 거였으면 예전에 붙었겠지. 어지간하면 졸업하기 전에 취업하고 싶어서 졸업을 끌었는데, 이제 더는 안 되겠더라. 스펙도 안 되고, 점수도 안 되고. 진짜 대학 와서 헛돈만 쓴 거 같아서 집에도 미안하고. 그런데 집에서는 공무원시험이나 해보라고 하니, 거절할 명분도 없다.” 딸랑, 거리며 편의점 문이 열리고 검은 모자를 눌러쓴 여자 한 명이 들어왔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 서로 눈이 마주쳤지만, 관심 없어 보이는 핑크색 츄리닝의 그 여자는 이내 계산대에 선 알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목소리는 안 들렸지만, 알바는 뒤 진열장에서 담배 하나를 집어 건넸고, 여자는 미리 준비했던지 바로 지폐를 내밀어 계산을 끝내고 편의점을 나갔다. 그 모습을 흘깃 본 뿔테 안경이 물었다. “야, 담배 남았냐?” “아까 피시방에서 다 피웠잖아.” “하나 사야겠네. 나가면서 내가 하나 살게.” 까끌까끌한 턱을 손끝으로 긁던 남자는 편의점 밖으로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는 사람이야?” 친구의 물음에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반했냐?” “미쳤냐?” 친구는 키득거리더니 시야 바깥으로 사라지는 여자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 시간에 저런 츄리닝 차림으로 편의점 와서 담배를 사 가는 여자는 뭐하는 여잘까?” “…관심 없어.” “관심 없는 놈이 그렇게 지켜봤냐? 에이, 보니까 반했구만.” “그런 거 아냐. 그냥 눈앞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이라 눈으로 좇았던 거뿐이야.” 그 말대로 그들이 앉아 있는 편의점에서 바라보는 바깥은 마치 정물화처럼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색바랜 담장 너머의 붉은 건물들은 물론이고 흔들림 없이 서 있는 가로등과 그 아래 누군가 던져 놓은 종량제 봉투의 쓰레기도 정물화 속 사과처럼 가만히 멈춰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된 흰색 중형차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기는 했지만, 그 빛마저 정지된 것처럼 보였다. “남친이 사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뭘?” “담배. 그래서 심부름 나온 게 아닐까?” 친구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 ‘토요일 저녁 신나게 한잔 빨고 남친이랑 집으로 들어와서 새벽까지 쿵덕쿵덕하다가 숙취에 해롱해롱하며 일어났더니, 남친이 담배 심부름을 시키니까 짜증은 나지만 착한 여친이고픈 여자가 간단하게 츄리닝만 걸치고 편의점에 와서 담배를 사 간 게 아닐까?’라고 소설을 썼다. “자기가 피우고 싶어서 산 것일지도 모르잖아?” “에이. 그러면 재미가 없잖아?” “무슨 재미?” 남자의 질문에 친구는 안경을 밀어 올리며 대답했다. “본래 이야기란 게 기승전결도 중요하고 개연성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캐릭터가 살아야 한다고. 남자의 무리한 부탁에도 싫은 내색 못 하는 여자. 그 자체로 뭔가 사연이 담겨 있잖아? 안 그래? 남자친구의 담배 냄새가 좋을 리 없지만, 그의 사랑을 갈구하는 여자는 담배 심부름도 마다치 않고. 그런데 어느 날 여자는 자신의 남자에게서 낯선 여인의 향기를 맡았고, 머리가 홱 돌아간 여자는 복수를 꿈꾸며….” “됐다. 그만해라. 누가 3류 아니랄까 봐…. 니가 그러니까 여태껏 제자리라는 거야.” “더 들어봐, 그러니까 그 여자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는 남자의 뒤를 조용히 밟는데, 남자의 집 앞에서 그 남자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장면을 목격하는 거야. 눈이 돌아간 여자가….” “어설픈 유머 감각도 모자라서 3류 막장 스토리냐? 그거 어따 써먹겠다고 그래? 내가 진지하게 충고하는데, 그냥 나랑 같이 노량진 들어가자.” “두고 봐라. 조만간 충무로에서 내 이름 걸린 시나리오로 영화 한 편 나온다.” “퍽이나.” “그때 돼서 나한테 사정해도 난 모른다.” “그 자신감으로 부디 성공하길 빈다.” “고맙다, 친구야.” 넉살 좋게 웃는 친구의 말에 남자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남은 소시지를 친구의 입에 집어넣었다. 안경은 소시지를 우물거리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말했다. “쟤들은 어떤 사연으로 이 시간에 저러고 있을까?” 남자가 시선을 돌리니 마침 눈앞으로 하얀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조깅하는 두 남자가 보였다. 짧은 머리, 땀에 젖은 흰 티셔츠 너머로 드러난 가슴 근육, 규칙적으로 엇갈리는 두 팔을 보아하니, “운동선수?” “어려 보이던데?” 얼굴을 다시 보기에는 이미 그 뒷모습만 눈에 들어오는지라 확인이 어렵다. “그게 중요해?” “캐릭터가 중요하다고 했잖아? 아무리 여름이라도 이제 겨우…6시를 넘긴 이 시간에 저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하는 이라면 뭔가 사연이 있지 않겠어?” “사연은 개뿔. 솔직히 이 시간까지 밤새며 게임하고 편의점에서 아침을 때우는 우리가 이상한 거야.” “누가 이상하댔냐? 그냥 사연이 있을 거란 이야기지. 상상해 보자고. 전혀 닮지 않았으니 형제일 리는 없고, 젊고 건강한 두 남자가 새벽부터 땀을 흘리며 길을 뛰어가는 모습을 보면 뭔가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아?” “그 사이에 얼굴을 다 봤냐?” “작가는 관찰력이 좋아야 하거든?” “작가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개똥 같은 소리 말고 나랑 같이 노량진 들어갈 준비나 해. 너도 그동안 까먹은 시간 때우려면 어지간히 노력 안 하면 안 될 거야.” “와, 진짜 우리 엄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우리 엄마가 나한테 하는 소리다.” 두 남자는 앞에 널브러진 껍데기들을 모아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편의점을 나왔다. “들어가서 바로 자야겠다.” “지금 자면 일요일은 끝이네.” “눈뜨면 저녁이겠지.” “저녁이면 배고프겠지. 뭐 사갈까?” “나중에 사자. 아, 잠깐만. 담배 사 올게.” 안경은 다시 편의점으로 뒤돌아 뛰어갔다. 먹을 건 안 사도 담배는 사야겠다는 친구의 집념에 푸른 턱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정물화 같은 새벽 거리에 햇살이 점점 차오르며 늦여름의 열기가 슬슬 올라오는 것 같았다. 물론 기분만 그렇다. “자, 니 꺼.” “땡큐.” 각자 담배 한 개비씩을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어떤 사람은 새벽 운동을 하면서 건강해지는데, 어떤 사람은 담배에 쩔어서 건강을 낭비하네.” “그런 소리 할 거면 담배를 사질 말던가.” “없으면 머리가 안 굴러가.” 24시간 국밥집 굴뚝처럼 담배 연기를 뿜어내던 두 남자는 걸음을 옮겼다. “우리도 운동할까?” “하면 좋지.” “말로만?” “우리가 그렇지 뭐.” 두 남자는 재밌는 농담이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 걔들은 운동선수였을 거야.” “그렇겠지. 아니면 누가 이 시간에 이런 데서 달리기를 하겠어? 헬스장을 가면 모를까.” “아니면 돈을 아끼려고 헬스장을 안 가는 것일 수도 있지.” 그들의 예상은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한 사람은 분명 운동선수였으니까. 비록 아직 프로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단유야.” “응?” “우리도, 나중에, 편의점, 들러서, 뭐 좀, 먹을래?” 명수는 헐떡이는 와중에도 말을 이었다. 단유는 명수의 말이 아까 편의점을 지나갈 때 봤던 장면 때문임을 눈치챘다. “지갑 안 들고 나왔잖아.” “아, 그렇구나.” 명수는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그런 거 먹으면 너 몸 버려.” “그렇긴 하지.” 다시 두 사람 사이에 규칙적인 호흡 소리만 들렸다. “단유야.” “응?” “아까 그 사람들, 되게 맛있게 먹는 거 같던데.” 편의점 앞을 지나가던 그 짧은 순간에 명수는 빠르게 그들이 먹던 음식 메뉴들을 훑어 내렸다. 한동안 몸을 만드느라고 못 먹던 음식들도 있었다. 가령, 햄버거라든가 콜라라든가. “먹고 싶으면 먹어.” 단유는 절대 명수를 말리지 않았다. 애초에 누구도 명수에게 먹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명수 스스로가 ‘몸에 안 좋다더라’며 금식을 선언했던 메뉴들이었을 뿐이다. “그치? 먹고 싶으면 먹어도 되는 거지?” “응.” “그래.” 명수는 입매를 다부지게 만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슬쩍 쳐다본 단유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마 명수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먹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 음식들이 자신의 몸에, 운동에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동안에는 말이다. 반드시 최고의 선수가 되겠어, 라는 각오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명수였다. 1시간 이상을 달린 두 사람이 잠시 쉬기 위해 속도를 줄이며 걷기 시작했다. “여름도 끝이구나, 드디어.” 명수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단유는 환하게 밝아진 하늘을 보며 대답했다. “응.” “내일부터 개학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마지막이잖아. 힘내.” “하아. 이제 진짜 마지막이지.” 명수는 길게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마지막. 대학교에 들어간다면 또 계속 이어지겠지만, 어쨌든 고교 졸업 후 바로 프로 입단을 꿈꾸는 명수에게는 학창 생활의 마지막 여름이었다. “할 수 있겠지?” “그럼.”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넌 할 수 있을 거야.” 단유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명수를 응원했다. 그에 명수도 히죽 웃으며 초롱초롱한 눈을 빛냈다. “아! 따가워!” 눈에 땀이 들어가는 바람에 명수는 손등으로 눈을 거칠게 문질러야 했지만. ======================================= [548] 새벽이 밝으면(2)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단유와 명수는 그 전과 사뭇 다른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일단 명수는 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학교의 운동장과 부설 체육관에서 보냈다. 학교 수업보다 운동에 더 매진할 수 있게 되었고, 중학교 때보다 훨씬 체계적인 훈련 속에서 전보다 훨씬 치열한 경쟁을 거치며 주전에 올랐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이 실감 나더라.” 초등학교 때는 감히 말하건대, 그 누구도 명수를 축구에서 실력으로 능가하는 이가 없었다. 단연 독보적인 실력과 체력을 보유하였고, 그런 배경이 명수가 축구 선수를 꿈꾸는 데 도움을 줬다. 중학교에서도 그것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록 선배들 중에서 명수보다 피지컬적으로 뒤처지지 않는 이들도 있었고, 실력 면에서도 명수와 엇비슷한 이들이 있었지만 그건 명수가 아직 어렸으니까 그럴 거라 생각했다. 명수는 계속 자라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고등학교, 그것도 각종 대회에 단골로 입상하는 명문 축구팀을 보유한 고등학교에서는 명수의 실력이 독보적, 이라고 표현하기 힘들었다. 명수보다 피지컬에서 훨씬 앞서는 무서운(?)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다년간 유소년 클럽에서 기술을 익힌 친구들도 있었다. 게다가. “축구는 개인의 기량만으로 성공할 수 없다.” 팀의 전술과 전략을 완벽히 이해하고 수행하기를 바라는 감독의 지침 아래에서는 단지 잘 뛰고 힘 좋은 선수들은 설 자리가 없었다. “명수 넌 다 좋은데, 전술 이해도가 부족해.” 축구로 성공하고픈 아이들이 모인 가운데서 주전으로 발탁되는 것은 명수로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축구에 관련해서는 머리 쓰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명수였기에, 그의 단점으로 지적된 부분은 시간이 갈수록 빠르게 흐릿해져 갔다. 대신 장점으로 부각된 피지컬은 점점 더 선명해져 감독의 기대와 동료의 신뢰를 쌓기에 충분했다. 비록 1학년 때는 쟁쟁한 선배들 때문에 경기에 많이 뛰지 못했지만, 2학년이 되면서 명수는 주전이 되었고, 큰 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3학년이 되고 맞은 춘계 대회에서 명수는 주장으로 뛰면서 인상적인 활약을 보였고, 타 학교는 물론 프로팀들의 스카우트들에게 눈도장을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몇몇 대학에서도 명수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예체능 특기 전형으로 들어오면 4년 장학금을 주겠다.” 때문에 명수는 꽤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하지만 4년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 타이틀을 목에 거는 것보다 프로로 입단해 빨리 커리어를 쌓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머리로 대학 가서 뭐해? 어차피 졸업장 이상의 것은 얻지도 못할 테고. 축구 하는 데 대학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머리 핑계를 댔지만, 사실 빨리 자리를 잡고 싶은 마음이 있음을 단유에게 고백한 명수였다. 물론 단유는 명수에게 별다른 조언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조언이 필요 없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네가 무엇을 선택하든 난 널 응원할 테니까.” 명수는 자신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 단유는 과학 중점 학급에 운 좋게(?) 합격했다. 비록 지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중점 학급 학생의 선정은 추첨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고나 영재학교를 지원했다가 떨어진 아이들, 중학교 내내 단유에 버금가는 훌륭한 성적을 보인 아이들이라고 중점 학급에 반드시 들어갈 순 없었다. 단유는 최초 지원 시 고민을 했었다. 과학과 수학 중점 학급 중 어디를 지원해야 할까? 수학은 재미있었고, 과학은 자신의 성장을 도울 수 있는 학문이었다. 고민 끝에 단유는 과학 중점 학급을 골랐고, 운 좋게 합격을 했다. “김단유입니다.” 첫날 각자 자기소개를 할 때, 아이들은 단유를 보며 특이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같은 교실에 모인 이들과 ‘종’이 다른 생명체를 보는 듯한 눈길들이었다.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운동을 좋아하니?” 30명 남짓한 아이들 중 단유보다 키가 큰 애들은 2명밖에 없었고, 그 두 명도 ‘우람하다’고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단유와 비교하면 젓가락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몸을 쓰기보다 머리를 쓰기 좋아하는 아이들에 대한 선입견일 수 있겠지만, 교실에서 단유 같은 덩치를 가진 아이는 별로 없었다. 떡 벌어진 어깨를 보며 선생님이 자신의 편견을 수정하기 위한 질문을 던졌고, 단유는 간단하게 ‘예’라고 대답했다. 아이들은 그런 단유가 ‘운 좋게’ 과학 중점 학급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런 아이들이 전혀 없는 건 아니어서. 대학 입시에 가산점을 받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지원하는 추세였으니까. 물론 그런 아이들은 한 학기, 혹은 2학년으로 올라가기 전에 일반 학급으로 이동하는 편이긴 했다. 그들의 생각은 중간고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운동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단유는 교실에서 조용한 편이었고, 수업시간에도 별로 튀는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단체 활동 중에도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피력하기보단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묻혀 있는 아이였으니까. 단유의 중학교 성적을 파악하고 있던 담임 선생님을 단유의 침묵을 의미심장하게 읽어나갔다. “공부, 어렵니?” 단유의 성적은 눈에 띄었지만, 교실에 있는 아이들도 그에 못지않게 화려한 편이었고, 학교별 수준차를 고려하면 단유 만큼의 성적을 과시할 수 있을법한 아이들도 여럿 있었다. 그래서 단유는 특별하되 특별하지 않은 아이였다. “아니요. 괜찮아요.” 담담하게 대답하는 단유는 교육부로부터 장학금을 지원받은 학생. 그의 활동 내역을 살펴보면 공부보다 오히려 예체능 계열에 더 관심이 많은 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만약 공부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간혹 자존심 때문에 자리를 지키려는 학생들도 있지만, 알아듣기 힘든 수업과 경쟁에서 도태된다는 스트레스로 인해 학급 변경을 신청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중간고사 이후, 상황은 반전되었다. 단유를 바라보는 시선도 180도 달라졌다. 호기심을 느낀 교과 선생님들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는 단유를 보며 몇몇 학생들은 위기를 느꼈고, 몇몇 학생들은 좌절을 느꼈다. “쟤는 왜 여기로 왔대? 저 정도면 과학고를 갔어야 하는 거 아냐?” “여기로 오고 싶어서 왔겠냐? 과학고 지원했다가 떨어졌겠지.” 자기가 그랬듯이. “그럼 도대체 과학고에 붙은 애들은 얼마나 똑똑하단 소리야?” “괴물들이겠지.” “그런 줄도 모르고 과학고를 지원했던 내가 바보 같아.” “인정.” 과학고 아이들은 상상 속 괴물이 되어버렸다. 한편 그 계기를 만들어 준 단유는 중점 학급에 들어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가졌다. 다른 무엇보다 조용한 교실이 마음에 들었다. 독서실에 틀어박힌 듯 30명 모두가 공부만 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다른 평범한 교실과 마찬가지로 수다를 떠는 친구들도 있고,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하며 분위기를 주도하는 친구도 있었다. 가끔은 짓궂은 장난을 치다가 멱살을 잡는 흉흉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전과 달리 힘을 과시하며 교실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이들은 없었다. 멱살 잡고 10분간 입술이 뜨거워질 정도로 침 튀기며 말싸움을 할지언정 주먹질을 하는 아이들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단유는 지난 어느 때보다 편하게 자기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과제에 허덕이는 친구들과 달리 자기 페이스를 지켜가며 과제와 개인 공부는 물론, 언젠가는 튼튼한 버팀목이 되어줄 통장을 채우는 일까지. 아, ‘언젠가는’이 아니라 ‘현재에도’ 통장은 그 쓰임새가 충분했다. “단유야, 왜 이렇게 많이 사 왔어?” “냉장고가 비웠길래요.” “또 네 돈으로 산 거야? 그러지 마라니까. 나한테 말해.” “별로 안 비싸요. 오는 길에 저기 삼거리에 새로 개업한 가게에서 할인 행사하길래 사 놓은 거예요.” “할인행사?” “개업이라고 30% 할인행사를 하더라고요.” “그래? …그럼 좀 더 사 놓을까?” “그 이상 사면 넣을 데가 없어요.” “그렇겠지? 그럼 오늘은 이걸로 저녁 해 먹자.” 하은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단유가 사 놓은 스테이크용 고기를 꺼내서 조리를 시작했다. **** 두 아이와 마찬가지로 하은 역시 생활이 바뀔 수밖에 없었지만, 어떤 의미로 보면 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도 볼 수 있었다. “사회인이라는 게 다 그렇지 뭐. 출근해서 일당 채우고 퇴근해서 집에 기어들어가고, 엿가락처럼 늘어지도록 자다가 다음 날 일어나서 다시 출근하는 거. 다들 그렇잖아?” “누가 들으면 되게 빠듯하게 사는 사람처럼 보인다? 니가 야근을 아니? 퇴근 시간에 맞춰서 공장에서 문제 있다고 클레임 걸려오면 퇴근도 못 하고 달려가서 고쳐질 때까지 옆에서 눈 부릅뜨고 있어야 하는 고충을 니가 알아?” “넌 야근 하면 야근 수당이라도 받지. 나 같은 자영업자는 그런 것도 없다.” “넌 니가 일한 만큼 벌잖아? 난 한 달 내내 몸 불살라가며 일해도 쥐꼬리만 한 박봉에 허덕여야 한다고.” “배부른 소리 하고 앉아있네. 요즘 경기가 안 좋아서 하루 종일 자리 지키고 앉아있어도 손님이 없어서 굶는 처지다, 이것아.” 말을 시작한 건 하은이었는데 불이 붙은 것은 중형급 연구소에 취직한 친구와 얼마 전 퇴사하고 남편과 작은 가게를 연 친구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계속 회사나 다니는 건데, 건영씨가 괜히 바람을 넣는 바람에.” “그 바람 아니어도 너 그만뒀을걸? 너 계속 그랬잖아? 결혼만 하면 때려치운다고.” “말로는 뭔들 못하겠어? 그냥 해본 말이었지.” 한발 물러서는 자영업자 친구는 앞에 놓인 감자탕에 수저를 가져가며 시선을 피했다. “퇴근 시간만 되면 괜히 와서 끈적하게 달라붙는 과장 때문에 돌아버리겠다며?” 연일 이어진 야근에 눈 밑이 검어진 연구소 친구가 몰아붙이니 얼굴이 붉어진 자영업자 친구는 입에 물었던 수저를 빼내며 흔들었다. “말도 하지 마. 그 대머리 새끼, 상상만 해도…어우.” “잘 그만뒀으면 됐지 뭐.” 하은이 그쯤 하라는 뜻에서 한 마디 꺼냈다. 그러나 새삼 생각났다는 듯 이를 가는 친구였다. “그 대머리가 사장 라인만 아니었으면 확 찔러서 어디 처넣기라도 했을 건데.” 사장 라인이란 건 핑계일 뿐, 실제로 회사에서 벌어지는 성희롱과 성추행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방법이 찾지 못하던 친구는 결혼 후 깔끔하게 사표를 내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깔끔’한 방식이란 건, 친구만의 생각이었고, 하은과 다른 친구들의 입장에서는 답답하고 속 터지는 대응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술자리에서는 대범해질지라도 현실에서는 소심하기 그지없는 친구였다. 그나마 좋은 남자와 결혼한 덕에 친구들의 걱정은 덜었다. 대머리 과장의 흉측한 눈매와 어깨를 짚던 두껍고 짧은 손가락을 언급하며 몸을 한 차례 떠는 시늉을 보인 친구는 하은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넌 어쩔 거야?” “어쩔 거라니?” 새로 옮긴 학원에서도 큰 갈등 없이 일을 맡을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학생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지난 학원보다 더 많은 수입을 얻고 있는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런 하은의 말에 핀잔을 던지는 친구였다. “누가 그런 거 따지니? 언제까지 그 집에 있을 거냐고.” “집? 우리 집?” “우리 집이랜다. 거기가 어떻게 니 집이야? 거기 애들 집이라며?” “같이 사니까 우리 집이지.” 그 말에 연구소에 다니는 친구가 답답하다는 듯 자기 가슴을 툭툭 치며 말했다. “그러니까 내 말이. 언제까지 같이 살 거냐고?” 비록 술을 마셨고, 주변 사물에 잔상이 살짝 어릴 만큼 취기를 느끼고는 있지만, 하은은 멍청이가 아니었다. 친구가 묻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토스트기에서 튀어나오는 빵처럼 곧바로 대답이 나오진 않았다. 그런 하은의 침묵을 읽은 자영업자 친구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도 이제 니 인생 챙겨라. 언제까지 애들 뒷바라지만 하면서 살 거야? 돈도 안 나온다며? 그런데 기껏 돈 벌어서 애들한테 바치는 건 좀 그렇지 않니? 니가 무슨 자선 사업가도 아니고. 자선 사업가도 너처럼 무식하게 다 퍼주진 않을 거다. 막말로 니가 걔들 엄마라도 되니? 걔들이 크면, 너한테 무슨 용돈이라도 줄 거 같애? 가족도 아닌데?” 가족, 이란 단어에 하은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친구는 그런 하은의 눈빛을 읽지 못했다. “너 걔네들이랑 평생 살 거야? 아니잖아? 나중에 걔들이 커서 집 나가면, 그제서야 정신 차릴래? 그때 니 나이가 몇이나 되겠니? 그리고 결혼도 안 한 여자가 다 큰 남자애 둘이랑 같이 살면, 어느 남자가 너 좋다고 붙겠어?” “미진이 너 말 잘했다. 하은아? 결혼 안 할 거야? 설령 결혼 안 한다고 해도 돈은 모아놔야 할 거 아냐?” 하은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친구들의 오지랖을 하은은 반길 수 없었다. ‘가족’을 들먹였을 때는 순간적으로 욱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진지하게 자신의 미래를 고려하면, 그 미래의 어느 날에 하은은 두 사람과 같이 있는 모습을 그릴 수 없었다. 당연했다. 하은은 두 아이가 다른 사람 부럽지 않은 번듯한 가정을 꾸려 독립한 모습을 보고 싶으니까. 그리고 본인은, 그런 두 아이들에게 의지하여 노년을 보내고픈 마음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뒤의 자신은? ‘…….’ 잠깐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친구들은 어느새 결혼과 독신의 장단점을 비교하며 진취적이고 보람찬 여성의 삶에 대한 진지하고 쓸데없는 토론 배틀을 벌이는 중이었다. 하은은 앞에 놓인 잔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단유한테 애교 좀 부리면, 눈썹을 좁히며 꿀물을 타 주겠지?’ 명수는 코를 막은 채 놀리면서도 의지할 수 있게 어깨를 빌려줄 테고. 하은은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들을 그리며 잔을 들었다. “막잔 하자.” ======================================= [549] 새벽이 밝으면(3) “캄캄한 영원, 그 오랜 기다림 속으로 햇살처럼 니가 내렸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걸어가는 하은은 어두운 골목을 비틀대며 걸어갔다. 물론 본인은 비틀대고 있다는 자각이 없었지만. 흥이 돋아서 어깨를 들썩거렸더니 비틀거림이 좀 더 커졌다. 아차, 하는 사이에 넘어질 뻔했지만, 벽을 짚으면서 큰일은 피했다. “으휴.” 뜨거운 숨을 길게 토해내며 고개를 살짝 젓고는 다시 곧바로 걷기 위해 몸을 곧추 세웠다. 그러나 아슬아슬한 걸음은 계속 이어졌다. 그때, 그녀의 뒤를 따라오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처음에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던 걸음이었으나 비틀대며 걷는 여자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는 듯하니 점점 걸음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주변을 살피니 인적도 드물고, 저만치에 가로등의 사각지대에 웅크린 어둠을 확인한 그림자는 좀 더 과감하게 여자에게 다가갔다. 손만 뻗으면 닿을만한 거리에 이르렀을 때, 그림자는 뜨거운 입김을 뱉은 후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 했다. “선생님!” 너무 여자에게 집중했던 탓일까, 골목 끝에서 사람이 다가오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림자는 짧게 혀를 찼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여자를 빠르게 지나갔다. “왜 이렇게 늦어요?” 덩치가 큰 사내가 여자에게 다가가니 여자가 방긋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거기까지 확인 후, 남자는 다음을 기약하며 두 사람을 지나갔다. 덩치가 뒤를 돌아보는 듯한 느낌에 사내는 얼른 오른쪽 골목으로 몸을 돌려 시선을 피했다.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걸음을 걷던 사내는 골목 가운데에 어슴푸레한 인영을 발견했다. 짧은 치마를 입고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풀어헤치고 있는 모양새에 남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요즘 여자들은 저렇게 경계심이 없단 말이지.” 남자는 주변을 확실히 살핀 후,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여자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뒤에서 슬쩍 불러봤지만, 여자는 인사불성인지 대답이 없었다. 남자는 입술을 혀로 훔친 뒤, 여자의 어깨를 붙잡았다. “저기요.” 그러자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눈을 부릅떴다. “흐악!” 여자는 눈, 코가 없었다. 둥근 얼굴에 입만 덩그러니 있었는데 입을 쩍 벌리자 송곳처럼 날카로운 이가 드러났다. 남자는 기함을 토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여자는 손을 휘저으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남자에게 다가왔다. “으어어!” 신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흘리며 남자는 벌떡 일어나 달아났다. 귓가를 쨍, 하고 울리는 기성(奇聲)이 등 뒤에서 울렸다. 무서워서 돌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있는 힘껏 다리를 놀려 달아나는 수밖에. 소름 돋게 만드는 목소리가 멀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아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살려줘! 살려줘요! 도와줘요!” 침을 튀기며 악을 써도 주변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인적이 드물다는 사실에 반가워했는데, 이제는 정 반대가 되었다. 누구라도 자신의 비명을 듣고 모습을 드러내길 바라며 끊임없이 소리를 질렀다. 소리를 지르며 전력으로 내달렸다. 땀으로 범벅이 된 채 큰 길가를 향해 달리는 남자의 뒤를 조용히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지만, 남자는 알지 못했다. “뭐 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그 시선은 고개를 돌렸다. “좀 도와줘.” 이맛살을 찌푸린 명수는 히죽 웃으며 매달리는 하은을 부축하며 단유를 불렀다. 야밤에 소리를 지르며 뛰어가는 남자 따위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투였다. 단유는 사라진 남자의 뒤를 슬쩍 봤다가 명수를 돕기 위해 다가갔다. 아마 저 남자는 두 번 다시 이곳에서 음흉한 짓은 못 하리라. 만약에라도 다시 눈에 띄게 된다면 그때는 이 정도로 끝내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단유는 하은의 다른 한쪽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었다. “단유야! 명수야!” “아악! 선생님! 이제 그만 해요! 나 힘들다구요.” “우리 명수! 지금 나 피하는 거?” “으윽,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예요! 안 돼! 도와줘! 단유야!” 단유는 얕은 한숨을 내쉬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달그락거리는 소리, 커피포트에서 물이 끓는 소리, 달콤한 향기가 거실을 맴돌고 그 속에서 하은과 술래잡기를 하던 명수의 코끝을 간지럽힐 무렵 단유가 다시 나타났다. “선생님, 여기요.” “오! 우리 단유! 역시! 고맙다 고마워. 잘 마실게!” 흥이 돋은 하이톤의 목소리에 호빵이 못 말리겠다는 듯 하은을 바라보다가 등을 돌리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방석 위에 올라가 꼬리를 말고 앉아 하은을 바라보는 모양새가 마치 ‘어디까지 가나 보자’는 시어머니 눈빛이었다. 하은은 그런 눈빛을 외면하고 단유가 건넨 꿀물을 후후 불며 마셨다. 명수는 말로는 싫다면서도 방으로 피하는 대신 하은의 옆에 앉아 팔걸이 대용으로 어깨를 쓸 수 있게 해주었다.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 거실에 술 냄새 다 배겠네. 선생님 친구들은 전부 술고래예요? 그리고 밤에 술 취한 여자가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는 거예요?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요?” “잔소리 그만! 어떻게 넌 점점 잔소리가 그렇게 늘어? 단유 봐라. 얼마나 조용하니?” “한마디 할까요?” “됐어. 너까지 한마디 하면 나 완전히 벌서는 기분일 거야. 한참 기분 좋게 술 마셨는데 집에 와서 벌 받는 기분 들면 그간 마신 술이 아깝지 않겠니?” 하은은 히죽 웃으며 명수의 어깨에 걸친 팔을 흔들었다. 꼬마아이가 흔드는 장바구니마냥 앞뒤로 그네를 타던 명수가 인상을 쓰며 ‘흔들지 마요’라고 저항했다. 눈을 가늘게 뜨며 ‘앙탈 부리니?’ 라고 한 마디 내뱉고는, 그 말이 우스웠던지 혼자 웃음을 터뜨리는 하은을 단유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기분 좋게’ 마셨다는 선생님의 말씀과 달리, 어쩐지 울적해 보이는 선생님이었다. 그러나 곧 기분 탓이라 여기며 단유는 선생님을 부축했다. “들어가서 주무세요, 선생님.” “그래, 그래. 그래야지.” 헤픈 웃음을 지으며 명수와 단유의 머리를 쓰다듬는 하은은 아마 침대에 눕히자마자 잠들 것이다. 부디 좋은 꿈 꾸시길. **** “수능이 이제 며칠 남았다고?” “아! 선생님!” 아이들이 하나같이 우는 표정이 되어 선생님을 향해 한탄과 야유 섞인 목소리를 질러대는데, 그게 오히려 기분을 좋게 만들었는지 걸쭉한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들을 둘러보는 담임 선생님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진짜 며칠 남지 않았으니까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공부하자. 설마 우리 반에서 여름을 날로 보낸 친구는 없을 거라고 믿지만, 그래도 혹시나 자신이 게을렀다고 생각하면 남은 시간만이라도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 알겠지?” 시한부 환자들처럼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아이들에게 기운을 내라는 말은 건네지 않았다. “오늘 야자하는 사람?” 몇몇이 손을 들었고, 선생님은 해당 학생들을 기록한 뒤 출석부를 덮었다. “자, 다들 수고하고 내일 보자. 이상. 반장?” “차렷! 경례!”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은 고개를 까닥이며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교실을 채우고 있던 긴장이 확 허물어지며 왁자지껄한 가운데 아이들은 가방을 둘러매고 교실을 뛰쳐나갔다. 서둘러 학원에 가서 자리를 잡아야 하는 아이들은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과 달리 여유롭게 가방을 챙기며 교실을 나설 준비를 하는 아이가 있었다. “단유야. 오늘 야자 안 해?” 야자를 하겠다고 손을 들었던 한 친구가 물었다. 과중 1반의 아이들은 대부분 학원을 다녔지만 다니지 않는 아이가 없지는 않았다. 단유를 부른 소년도 그중 하나였다. “볼 일이 있어서.” “무슨 일?” 단유는 자신이 그 친구에게 모든 사정을 털어놓아야 할 이유가 없었기에 대답 대신 멀뚱히 바라보며 침묵으로 의도를 물었다. 그 시선에 소년은 괜히 뜨끔한 기분을 느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난, 그게…모르는 문제가 있어서 물어보려고….” 말끝을 흐리는 소년의 말에도 단유는 소년을 바라보다가 소년이 눈을 깔며 시선을 피하자 얕은 한숨과 함께 가방을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뭔데 물어봐. 대답해주고 갈게.” “으응? 어, 그게…잠시만.” 애초에 그런 게 있지도 않았다. 그저 변명을 위해 내세운 핑계였으니까. 그렇다고 이제 와서 ‘거짓말이야’라고 고백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소년은 책상 서랍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아무거나 집히는 대로 꺼냈다. 다행히 ‘과학 II’ 문제집이었다. 대충 펼쳐서 눈으로 훑다가 자신이 풀지 않은 문제를 짚었다. “이거. 잘 모르겠어서.” 단유는 눈으로 확인 후에 소년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펜을 집어서 문제 밑에다 풀이를 적으며 설명했다. “1학년 때 배운 건데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나나 보다. 복습을 제대로 해야 잊지 않을 거야.” “으응. 알았어.” 단유는 간단한 물리 문제를 풀이해주고는 다시 가방을 집었다. “단유야.” “응?” “어…저기… 내일 보자고.” “그래.”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그리고 교실에 몇 남지 않은 아이들의 소리 없는 배웅을 받으며 교실을 나섰다. 단유가 나간 뒤, 가까운 곳에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던, 여드름 가득한 소년이 다가왔다. “짬뽕. 쟤 어디 가는 데?” “몰라.” “그럼 너 진짜 문제 물어보려고 불렀던 거야?” 그럴 리가. 정원은 화장실에나 가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중반은 애초에 2학급뿐이어서 3년간 지내다 보면 서로서로 모를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서먹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정원과 단유는 그런 서먹한 관계가 아니었다. 서먹할 것도 없었다. 단지 정원이 단유를 어려워할 뿐이었으니까. 많은 아이들이 단유를 어려워했다. 1학년 때는 교실 안의 어느 누구보다 큰 덩치와 과묵함 때문에 단유에게 섣불리 말을 붙이는 아이들이 없었다. 성격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만으로 쉽게 사람을 판단하는 단세포들은 과중반에 없었다. 순진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도 피가 마를 정도로 괴롭히며 즐거움을 느끼는 또래 아이를 지난 3년간 겪어본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갖고 경계했던 아이들은 중간고사 이후, 보이는 것(?)과 달리 엄청난 수재란 사실에 경악했다. 그 이후에 몇몇 아이들이 단유에게 말을 붙여볼까 궁리하긴 했다. 하지만 쉬는 시간이든 수업시간이든 언제나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인 단유에게 말을 붙이기란 쉽지 않았다. 거기다 이런저런 사정 따지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말을 붙일 넉살을 가진 아이들이 과중 반에는 없었다. 딱히 단유가 아이들과 대화를 하기 싫어한 것은 아니었지만, 알게 모르게 생긴 거리감과 경계심은 단유를 은근히 따돌리는 분위기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1학년 내내 최상위 성적을 거두는 아이, 놀리거나 시비를 걸기 힘든 외형의 소년은 시간이 갈수록 도리어 경외심을 갖게 만들었다. 게다가 3년 내내 야자를 신청한 몇 안 되는 소년이었다. 모두가 조금이라도 성적을 끌어올리기 위해 학원을 수강하고 과외를 받을 때, 오직 단유만 학교에서 교과서와 남들 다 보는 문제집을 붙잡고 있었다. 심지어는 인강도 보지 않는 듯하니 아이들의 놀라움은 더 커졌다. 비록 30명, 2반 모두를 합치면 60여 명의 아이 모두가 단유에게 경외심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더러는 시기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투쟁심(?) 비슷한 감정으로 나란히 서 보려 하는 아이들도, 당연히 있었다. 2학년 때 같은 반이 된 정원은 단유에게 관심을 가진 소년들 중 가장 먼저 단유에게 다가가 말을 건 소년이며, 단유에게 투쟁심을 가졌던 소년 중의 하나였다. “반갑다. 나, 최정원이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단유에게 다가가 손을 내민 정원. 단유는 정원을 바라보고는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그래, 반가워.” 정원은 득의양양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겨우 단유의 손을 잡은 게 뭐라고 정원은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단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늘 고개 숙인 모습만 보다 이렇게 눈을 마주치니, 꽤 잘생긴 편이다, 라는 생각이 언뜻 스치고 지나갔다. ‘마냥 무뚝뚝할 줄만 알았는데.’ 잠시 말없이 손잡고 있는 시간이 길었던 탓에 단유의 눈빛에 의아함이 깃들 무렵, 정원이 정신을 차리고 손을 놓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정원이 입을 열었다. “짬뽕 좋아해?” 말을 꺼낸 순간 교실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자신들이 들은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워하는 아이들. 그리고 잠시 후, 동시다발적으로 픽, 하고 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오그라드는 선전포고라도 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던 아이들의 기대를 저버린 결과다. 그리고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는 순간, 정원은 발끝부터 올라온 부끄러움이 온몸을 휘감으며 눈을 하얗게 물들이는 기분이었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단유는 아무 말 없이 정원을 바라보았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정원은 소리높여 외치고 싶었다. 짬뽕이란 별명을 얻게 된 계기였다. ======================================= [550] 새벽이 밝으면(4) “좋아하는데.” 단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 그렇구나.” 이미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정원은 뒷말을 잇는 게 쉽지 않았다. “나도.” 할 말은 그뿐이었다. 어지러운 머릿속에서 수많은 단어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지만, 정원은 더 큰 실수를 저지르면 안 된다는 경각심을 갖고 입속으로 꾹꾹 쑤셔 넣었다. 등 뒤에서 터져 나오는 비웃음을 들으며 고개를 푹 숙인 채 자리로 돌아갔다. ‘순진한 아이네.’ 고등학교 2학년이면 어느 정도 물이 들기 마련인데, 정원이란 아이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순진한 녀석, 이란 판단이 들었다. 단유는 정원과 자신을 번갈아 바라보며 후속편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기대 어린 시선을 무시하고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후, 단유는 정원을 ‘짬뽕’이라 부르는 아이들의 유치한 유희에 참여하는 대신 언제나처럼 독서와 수업에 몰두했다. 그리고 정원은 그런 단유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처음의 자신감은 문밖에 내놓은 배달 그릇 수거해가듯 사라진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무시하려 했다. 지난 1년간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신경 안 쓰고 자기 일에만 몰두했더니 적잖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어울리지 않게 아련한 눈으로 흘끔흘끔 쳐다보는 모양새나, ‘짬뽕’이라는 유쾌하지 않은 별명을 감수하며 귓불을 붉게 물들이는 아이를 보니 괜히 마음이 쓰였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고등학생씩이나 돼서, 게다가 똑똑하다는 아이들이 모인 틈에서 ‘지니어스’, ‘안경’, ‘모범생’, ‘책벌레’ 같은 별명 놔두고 ‘짬뽕’이라는 별명을 들어야 하는 정원의 마음이 어찌 편할까. 점심시간이 되어 급식을 먹으러 가기 위해 분주해진 사이, 정원은 ‘같이 갈까’라는 단유의 제안을 받았고, 개구리 왕눈이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눈이 커졌던 정원은 모처럼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은 엉망이었으나 그 일을 계기로 단유에게 말을 거는 아이들이 늘었다. 그중에서도 정원은 가장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아이였고, 어느새 ‘짬뽕’은 단유라는 중국집의 첫 번째 메뉴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럼 나는?” “너는 그냥 간판해라.” 맥락상 틀린 말은 아니다. 한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친구를 보면 된다고 하던데, 그런 의미에서 명수는 단유가 애지중지하는 간판이다. 녹슬지 않게, 언제나 빛이 나게끔 아침 저녁으로 관리하는 간판. 물론 단유 본인도 명수에게 그런 간판이 되려고 노력했다. “…좋은 뜻이야?” “나쁜 뜻은 아냐.” 명수는 히죽 웃으며 정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다.” “나도.” 이사 후 1년이 넘게 지난 뒤에야 사귄 첫 친구였다. **** 야자도 빠지면서 단유가 간 곳은 강남에 위치한 번역회사였다. “안녕하세요.” “단유 왔어? 일찍 왔네? 밥은?” “끝나고 먹으려고요.” “잘됐네. 나도 아직 저녁 안 먹었는데. 같이 먹을까?” 상곤은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소파를 가리켰다. 단유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소파에 앉았다. “고3 생활은 어떠냐?” “평소랑 똑같죠.” 거만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그간 단유와 얼굴을 맞대고 지내온 시간들이 있어 크게 오해할 일은 없었다. “역시 여유가 넘치는구나.” 고개를 주억거리며 책상에 올려져 있던 책 두 권을 집었다. 한 권은 새로 맡길 원서였고, 다른 한 권은 이번에 출판된 단유의 번역본이었다. “오랜만에 사무실에서 보니까 반갑네. 여기.” 고등학교에 올라간 뒤에는 사무실에 직접 찾아오는 빈도가 줄었다. 회사 측에서도 그런 단유의 사정을 이해해주었고, 굳이 단유가 오지 않더라도 마감 시간에 맞춰 메일로 번역본을 건네주기 때문에 달리 문제 삼지 않았다. 사실 문제 삼을 이유가 전혀 없다. 단유의 번역 속도는 다른 번역가와 비교가 어려울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번역의 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니 회사는 그런 단유를 더욱 귀하게 대접할 수밖에 없었고. “고맙습니다.” 단유는 상곤에게서 책을 건네받은 뒤, 우선 새로 번역해야 할 원서가 어떤 책인지를 살폈다. “이번에도 자연과학계열인데, 사실 난 문과라서 봐도 모르겠더라.” 단유는 주로 비문학계열 서적들을 번역했는데, 주로 인문과학계열 서적들이 많았다. 그러나 1년 전, 단유가 자연과학계열 서적도 번역해보고 싶다는 요청을 직접 해왔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꾸준히 성과를 거둔 단유의 실력을 회사도 인정했기에 그 요청은 쉽게 수락되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3차례 정도 자연과학서적을 번역했고, 그 결과물들은 모두 회사가 만족할만한 수준의 것이었다. “최근의 입자물리학을 정리한 책이네요. 얼마 전에 ‘벨’ 실험팀에서 쿼크 입자 2개와 반쿼크 2개로 이루어진 새로운 입자를 발견했다잖아요? 그에 대한 이론을 겔만의 쿼크 모형에서부터 되짚어서 설명하는 내용인가 봐요.” 머리말과 목차를 보며 내용을 유추하는 단유의 설명에 상곤은 손을 저었다. “그렇게 말해도 난 모른다. 내가 고등학교 때 수포자였어. 과학이랑 수학은 전혀 친해지질 않더라고. 몸이 받아들이질 않아.” “어려운 용어를 써서 그렇지, 실제로는 별로 어렵지 않아요.” 단유가 좀 더 쉽게 설명하려는 모양새를 보이자 상곤이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런 거 설명해도 난 모른다니까. 들으면 멀미만 놔. 그냥 잘 번역해주면 그만인걸. 나중에 감수팀에서 말 안 나오면 그만이지 뭐.” 단유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볼을 긁적이자 상곤은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이번 거도 기본적으로는 6개월 안에 해주면 된다. …근데 또 석 달이면 나오겠지?” “네.” “하하. 너의 그 자신만만함에 내가 두손 두발 들었다. 아, 그리고 내가 또 빼놓은 게 있었는데….” 상곤은 자리에 일어나 책상 뒤편의 책장으로 다가가 뭔가를 찾는 시늉을 했다. “입시 준비 때문에 바쁜 애한테 이런 일 맡기는 게 옳은 건가 싶기는 한데, 또 이제까지 네가 해준 걸 생각하면 1년은 쉬라고 해야 맞는 건데….” “괜찮아요.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요. 해도 무리가 없으니까 하는 거고요.” 실제로 그랬다. 처음에는 컴퓨터로 타이핑하는 것도 쉽지 않아서 느리기만 했던 것이, 이제는 속도가 점점 붙어서 작업 시간이 대폭 줄어든 탓이다. 종종 이해하기 힘든 전문 용어가 나올 때 그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과 참고서적을 찾는 시간이나, 읽기 편하게 문장을 고쳐 쓰는 일로 지체되는 시간을 제한다면 작업 시간은 처음에 비해 거의 두 배로 줄어든 상황이었다. 다만 고등학생이기에 주어진 자유 시간이 중학생 때보다 줄었기 때문에 작업을 띄엄띄엄하다 보니 최종 결과물은 예전처럼 석 달 전후가 걸렸다. 어쨌든 여유가 있다는 단유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래. 그런 줄 아니까 나도, 회사도 염치없이 너한테 계속 일을 맡기는 거지. 워낙 잘 해주니까. 아, 여기 있네.” 상곤은 책 한 권을 집어서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다른 책들 위에 올려졌다. 바라보니 이전까지 받았던 책과 다른 종류의 책이었다. 일단 책 표지가 화려했다. 은은한 파스텔톤의 추상화 같은 삽화가 표지에 그려져 있고, 금빛 활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호기심을 드러낸 단유의 표정을 살핀 상곤이 짧은 헛기침 후에 말을 꺼냈다. “사실 우리 회사에서 다루는 책은 아니고, 다른 회사에 들어온 책인데 내가 일이 있어서 잠시 들렀다가 네가 생각나서 가져온 책이야.” “소설 같은데요?” 대충 페이지를 훑으며 살피는 단유의 말에 상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단유가 ‘이걸 왜?’라는 의문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니, 상곤은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해 볼래?” 문학 서적의 번역은 비문학 서적의 번역보다 어렵다. 감성과 이성의 차이, 라고 단순하게 구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문학의 경우,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가 농축된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야만 해석이 가능한 경우가 많다. 또 문학적인 의미에서의 축어(逐語)를 사용하는 경우도 적확한 단어를 매치시키는 일이 쉽지 않다. ‘서로 다른 두 언어를 일대일 대응시키는 기계적 번역으로는 문학 작품의 향취와 결을 제대로 살릴 수 없다’고 주장한 문학평론가의 말마따나 문학 서적의 번역은 어렵다. 때문에 문학작품 번역가의 문턱은 높다.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도 많고, 번역일에 매달리는 사람도 많지만, 문학 작품을 전문적으로 번역하는 사람은 적은 이유다. “문학적 소양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번역이 거의 불가능하다고들 하지.” 단유는 상곤의 설명을 들으며 과연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껏 단유가 비문학 서적들을 번역해오고는 있었지만, 그 안에서도 단유가 쉽게 다른 언어로 치환하기 힘든 문장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화석의 지질학적 가치를 논하는 글이라도 모든 문장이 과학적 용어로 점철된 딱딱한 문장은 아니었다. 때로는 글쓴이의 위트가 담긴 문장이 삽입되어 있을 때도 있었고, 문학적인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문장을 번역할 때마다 단유는 약간의 곤란함을 겪었었다. 물론 회사의 감수팀에서 적절하게 수정해주기도 했기에 번역물 자체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너라면 문학 작품의 번역도 잘할 수 있을 거 같더란 말이지.” “제가요?” “감수팀의 이 팀장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는데, 니가 맡은 번역물은 모르고 보면 번역서인지도 모를 정도라고 하더라. 마치 애초부터 우리 말로 쓴 책을 타이핑한 것 같다고 말이야.” “과찬이시네요.” “그만큼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게 번역한다는 이야기지. 번역물은 태생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이질감이 느껴지는데, 네 건 그렇지 않다고 하니까.” “그게 제가 문학 작품을 잘할 수 있다는 근거는 안 되지 않나요?” “물론 검증은 해봐야겠지. 그리고 그 검층의 차원에서 이 책을 가져온 거고. 만약 네가 이 책을 잘만 번역해준다면, 우리 회사도 문학 작품 쪽에 한 발 담글 수 있게 될 테고 말이야.” “못 하면요?” “못 하면 어쩔 수 없지만…못 할 거 같애?” 단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책의 중간쯤을 펼쳐 한 단락을 읽었다. 「시큼한 냄새를 풍기던 그 방에 들어선 순간에 나는, 인생의 마지막은 반드시 포근한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고 조용히 마감하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다. …곰팡이가 피어오른 눅진한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썩어가는 얼굴을 보며 기도했다. 신이시여! 아침에 먹었던 스콘이 부디 상하지 않았기를.」 미간을 좁힌 채로 책을 훑던 단유는 조용히 책을 덮고 볼을 긁적였다. 난감하다는 단유를 보며 상곤은 피식 웃었다. “이런 모습은 처음 보네.” “어렵네요.” “쉽지는 않지. 그런데 처음 너를 만났을 때, 고작 중학생이었던 니가 자신만만하게 ‘할 수 있다’며 원서를 들춰 읽던 모습을 생각하면 이런 니 모습이 조금 생경하게 느껴지고 그러네?” “저라고 다 잘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건 자주 듣던 이야기네.” 웃음을 흘리며 상곤은 까칠까칠한 턱을 엄지로 쓰다듬었다. “아, 그리고 문학 작품은 비문학작품보다 번역비가 비싸. 회사마다 다르고 번역가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비문학보다 70% 이상 더 받을 수 있지.” 물론 넌 돈이 크게 중요하지 않겠지만, 이라고 운을 떼는 상곤에게 단유는 저 돈 좋아해요, 라고 대답해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일단 이건 그냥 가져가서 읽어봐. 해외 문학 원서는 읽어본 적 없지? 읽어보고 어떤 느낌인지, 그리고 이런 책을 번역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를 한 번 검토해봐.” 이건 번역해도 돈 안 나오니까 그냥 읽기만 해, 라며 책을 들어 흔들어 보이는 상곤이었다. “그건 그렇고, 일단 일어나자. 계속 떠들었더니 더 배고픈 거 같네. 뭐 먹고 싶어?” 재킷을 걸치는 상곤에게 단유는 아무거나요, 라고 대답했다.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 단유였다. **** 하은은 단유가 가져온 책을 펼치고 두세 페이지 정도를 대충 넘기다 덮었다. “아이고 머리야. 도대체 이런 걸 읽으라고 주는 건 무슨 의도래?” “결정권을 제게 넘긴 거죠. 본격적으로 할지 말지를.” “하고 싶어?” “아직은 모르죠. 제대로 읽어보고 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생각해보려고요.” “뭐,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느냐마는 굳이 이 시기에 결정할 필요가 있나?” 역시 고3이라는 게 문제라는 하은의 판단에 단유는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미소를 보며 하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단유니까.” 하은은 그 말만 하고 입을 닫았다. 뭔가 많은 문장들이 생략된 느낌이다. ‘만약 지금 이 말을 다른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면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이내 단유는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리며 방으로 돌아갔다. 만약 하은이 소설가이고 그녀의 소설을 번역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단유는 절대 그 일을 맡지 않을 것이다. 말꼬리를 잡고 끝없이 이어지는 수다와 혼자 납득하고 마는 혼잣말들을 무슨 수로 번역할 수 있을까. ======================================= [551] 새벽이 밝으면(5) 교실에 들어가니 몇몇 아이들이 인사를 건넸다. 1학기 때도 그랬지만, 2학기 들어서 더욱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지 아침부터 책상에 코를 박고 엎드린 아이들이 많아졌다. 몇몇 아이들만 악의 없는 욕설이 섞인 잡담을 주고받으며 친목을 나누다가 교실로 들어오는 학생과 눈이 맞으면 가벼운 인사를 건넨다. 단유는 가볍게 손을 젓고 자리로 향했다. 가방을 내려놓고 책상을 정리하는 틈에 정원이 다가왔다. 빈 옆자리 의자를 끌어와 풀썩 앉으며 한껏 지친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정원의 표정을 보니, 조식을 기다리는 호빵의 얼굴을 떠오르게 한다. 사료를 꺼내 그릇에 담을 때까지 끈덕지게 쫓아오는 그 시선처럼, 정원의 시선이 단유의 움직임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다행히(?) 호빵과 달리 정원은 소통이 가능했다. “왜?” “그냥, 웬일로 저녁 야자도 건너뛰었나 싶어서.” “어제?” “응.” “그냥 볼 일이 있었거든.” “오늘은?” “오늘은 야자 할 거야.” “그렇구나. 난 또 니가 학원에 다니기로 마음을 먹었던 게 아닐까 궁금해서 말이야.” “교과서만 봐도 충분한데 뭐.” “교과서만 보진 않잖아, 너. 어? 그건 또 무슨 책이야?” “소설책.” “원서네? 이야, 역시 넌 뭔가 다르다. 무슨 내용이야? 재미있는 거야?” “아직 안 읽었어. 어제 받은 거라.” “그럼 어제 이것 때문에 야자 빠졌던 거?” “겸사겸사?” 정원은 책을 가리키며 봐도 돼? 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여주고 마저 책상을 정리했다. 서랍 속에 오늘 공부할 과목들의 교과서와 문제집들을 채워 넣고, 책상 위를 물티슈로 닦았다. 그 후 마른 휴지로 물기를 훔쳐낸 뒤 노트 한 권과 펜을 책상 위에 반듯하게 올려놓았다. 처음에는 단유의 그런 책상 정리를 보며 호들갑을 떨던 정원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며 단유가 꺼내놓았던 책을 훑었다. 색바랜 재생지에 적힌 활자는 모두 영어였고 삽화 하나 없이 빽빽하게 글자만 들여 차 있다는 사실만 확인한 뒤 책을 덮고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런 거 좋아해?”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니고.” 번역 일 때문, 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던 단유는 책을 집어 왼편에 올려놓고 그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정원은 더 이상의 질문은 받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에 ‘그렇구나’라고 말끝을 흐리며 대꾸했다. 단유는 주저주저하는 정원의 입꼬리를 살피고 물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인데?” 정원과 1년 이상을 같은 교실에서 보냈다. 그동안 봐왔던 정원은 별 의미 없이도 다가와서 말을 건네는 그런 친구이긴 했다. 지금도 따지고 보면 별 알맹이 없는 대화가 오고 갔고. 하지만 친구의 얼굴에 묻어있는 표정을 짚어보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너 소원 아파트 3단지에 살지?” “응.” “혹시 말이야, 거기 귀신 나온다는 이야기 들었어?” “귀신?” 정원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저께 어떤 남자가 소원 아파트 뒷길에서 귀신을 봤다면서 파출소에 신고를 했대. 귀신이 계속 소리를 지르면서 따라오더라면서 살려달라고 그랬대.” 단유는 흥미를 잃었다. “잘못 봤겠지.” “아냐, 그 남자 말고도 다른 사람도 거기서 귀신을 봤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래서, 나도 그 근처에 사니까 귀신을 본 적 있냐고 묻고 싶은 거야?” “응? 뭐, 그렇지.” “본 적 없어.” “…그, 그렇지? 본 적 없지? 본 적 없구나. 하긴 귀, 귀신이 세상에 어딨어? 그치?” 정원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돌렸다. 사실 이 귀신 이야기는 어젯밤부터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군 이야기였다. 땀을 뻘뻘 흘리며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파출소에 뛰어들어온 남자가 귀신을 봤다며 소동을 피운 이야기가 인터넷에 올라왔는데, 워낙에 남자의 모습이 절절해서 감히 거짓말이라고 치부하기 어려웠던 목격자가 나름 살을 붙여서 글을 올렸고, 그 글에 또 다른 목격자를 자칭하는 댓글이 붙으며 화력이 들끓게 되었다. 정확한 지명까지 나오니 당연히 근방에 사는 사람들의 관심이 높았고, 이른 아침 부족한 잠을 미루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어야 하는 이유가 되어 주었다. 다른 아이들이 심각한 척, 얼굴에 진지함을 담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정원 역시 단유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근방에서 벌어진 중차대한 사안에 대해 토의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역시 단유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는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비록 정원을 우습게 보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해당 주제로 이야기를 길게 이어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아, 맞다. 오늘 명수 시합 아냐?” 명수의 이야기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단유였다. “준비 잘했대?”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나야 잘 모르지. 일단 아픈 곳 없고 아침에 보니까 컨디션도 좋아 보였으니까 아마 잘할 거야.” “이번 경기에서 잘 하면 프로팀 가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지.” 애매한 답으로 대꾸했지만 내심으로는 이미 결과를 예측하고 있었다. 4강 이상만 올라간다면, 그래서 팀이 주목을 받기만 한다면 명수 정도의 실력을 갖춘 선수는 분명 프로팀에서 먼저 스카우트 제의를 해올 것이다. 그 시간, 명수는 교실이 아닌 체육관에서 다른 축구부원들과 함께 모여 몸을 풀고 있었다. 아직 감독님이나 코치님이 오지 않아서 각자 편하게 자기 방식대로 몸을 풀고 있었다. 어차피 코치님이 오시면 다시 한 시간 정도를 스트레칭과 준비 운동으로 보내야 하지만, 가을 대회 첫 시합을 앞둔 흥분과 긴장이 아이들을 가만히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름 대범한 편이라고 자부하는 명수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평소처럼 쾌활하게 농담을 주고받기보다는 말없이 스트레칭을 하며 머릿속을 비우려 노력했다. 고등학교에 올라온 이후, 명수네 축구부의 성적은 썩 나쁜 편은 아니었다. 명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늘 4강에 진입했고, 명수가 1학년이었을 때는 가을 대회에서 우승도 했었다. 그러나 명수가 2학년에 오른 뒤에는 생각처럼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없었다. 처음에는 준우승, 그 다음 대회에서는 준결승까지는 갔으나 결승 문턱을 밟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명수의 실력은 놀랍도록 발전하였고, 감독과 코치는 물론 타 학교의 견제 1순위가 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게 발목을 잡았다. 2학년 추계대회에서 결승을 가지 못했던 것이 명수가 상대의 작전에 막혀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3학년이 된 이후, 명수는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특유의 유쾌한 성격으로 동료와 후배들을 아우르는 품성을 인정받아 주장 완장을 차게 되었다. 그리고 주장이 된 이후의 첫 춘계 대회에서 명수는 전에 없던 책임감을 느끼며 누구보다 열심히 경기에 임했다. 그리고 팀을 위한 축구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운동장을 누볐다. 욕심을 조금 내려놓고 패스와 경기 운영에 신경을 쏟은 덕일까, 명수네 축구부는 춘계 대회에서 결승에 올랐었다. 그리고 결승전에서 모두의 도움을 받아 마지막 힘을 쏟아냈고, 결승전에서만 두 골을 넣으며 대회 MVP가 되었다. 그 시점에서 대학팀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기 시작했고, 몇몇 프로팀에서는 가을 축구를 기대한다는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네 실력은 인정해. 하지만 곧바로 프로에 진출했을 때, 네가 과연 팀에 어울릴 수 있는지, 그리고 프로에서도 네 실력을 100% 발휘할 수 있는지는 단 몇 경기의 시합만으로는 확언할 수 없다. 그러니 이번 추계대회는 그것을 확인하고 검증하는 시합들이 될 거야. 매 시합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될 거야.” 고등학생 수준, 이라고 폄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프로에 준하는 실력이라고 인정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평가에 명수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다행히 이런 고민에 대해 명확하게 답을 줄 수 있는 조언자가 명수 곁에 있었다. “이전과 달리 네가 팀 축구를 했다는 점에서 프로팀에서는 이미 너한테 합격점을 줬을지도 몰라. 하지만 축구가 아무리 팀을 중심으로 한다 해도 개인의 역량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잖아? 어느 팀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해당 포지션에서 최고의 역량을 발휘하는 선수를 데려오고 싶은 건 마찬가지고. 가을 경기에서는 네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기량을 발휘해보라는 의미 아니었을까?” 명수는 누구보다 골을 많이 넣고 싶어 하는 선수였다. 힘껏 공을 차 골키퍼를 제치고 골망을 뒤흔들고 싶어 하는 선수. 하지만 고등학교에 올라왔을 때 이미 해당 포지션에 능력 있는 선배들이 자리 잡고 있어서 명수가 본인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3학년에 오른 뒤에야 겨우 그 기회가 생겼는데, 춘계 대회는 지난 대회까지 우승을 하지 못했던 축구부의 사정상 전략을 넘어선 개인의 욕심을 부리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도 명수가 활약을 했으니 프로와 대학팀 스타우트들의 눈에 띈 것이긴 했지만. 아무튼 이번 가을 대회에서 명수에게 주어진 과제는 그랬다. 팀을 우승까지 이끌되, 그 안에서 자신의 기량을 최대한 보일 것. 명수는 팀 포지션 상 스트라이커였고, 그의 기량을 보이기 위함이란 결국 골을 많이 넣는 것이다. “쉬운 일이잖아? 기회가 닿는 대로 골을 넣어. 골을 많이 넣으면 시합에서 이기는 거고, 시합에서 이기다 보면 대회도 우승할 수 있어.” 명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들었다. 체육관의 창으로 밝은 아침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오늘은 날씨도 좋아 보인다. 선선한 바람과 따뜻한 햇볕. 미친 듯이 뛰어도 지치기 힘들 것 같다. **** 4교시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단유는 교과서와 노트를 덮어 책상 서랍에 밀어 넣었다. 책상 위를 말끔히 치운 뒤,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정원이 나타나서 히죽 웃고 있었다. “밥 먹으러 가자.” “그래.” 급식실로 가는 동안에도 정원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단유는 적당히 맞장구도 쳐주고 대꾸도 해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단유는 서두르는 일이 없었다. 모두가 미친 듯이 급식실로 뛰어갈 때, 단유는 평소의 걸음 이상의 속도를 내는 법이 없었다. “어차피 빨리 가나 천천히 가나 똑같애. 1층이랑 2층에 있는 애들이 급식실 앞에 먼저 도착할 테고, 급식을 받는 인원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나머지 애들은 줄을 서야 하거든. 그 줄에서 10분을 기다리나 15분을 기다리나 거기서 거기지.” 정원도 그런 단유의 페이스에 익숙해졌다. 오히려 그렇게 걸어가는 동안 단유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아하기도 했다. 역시나 급식실 앞에는 사람들이 웅성대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질서정연하게 이어진 줄이 아니었다. “뭐지?” 정원이 먼저 호기심을 드러내며 뒤꿈치를 들고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그런다고 보일까마는. 키가 큰 단유도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는 그 너머는 잘 보이지 않았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웅성대는 소란 너머의 거친 고함은 잘 들렸다. “니가 선생이면 다야!” “뭐, 이 사람이! 말 다했어!” “어디서 함부로 반말 찍찍대? 내가 당신 학생이야?” 시비가 붙은 모양인데, 대상자들이 어른들인 모양이었다. 정확히 한 사람은 선생님인 모양이었고. “무슨 일이지?” 걱정 대신 호기심을, 두려움 대신 흥미로움을 두 눈에 가득 채운 채로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있었다. ======================================= [552] 충동, 관심(1) 반에서 키가 중간 정도인 정원은 쪼르르 달려가 까치발로 고개를 쭉 내밀고 스크럼 안쪽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살폈다.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두 사람은 모두 눈에 익은 사람이었는데, 한 사람은 국어 과목을 담당하는 지영호 선생님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급식실에서 근무하는 남자였다. 이름은 모르지만, 급식실에 올 때마다 보던 얼굴이었다. 두 사람 다 얼굴을 붉힌 채로 상소리만 안 한다뿐이지, 거친 언사를 내뱉으며 언제 멱살을 잡아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야기만 들어서는 왜 싸움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당신이 뭘 안다고 큰 소리야!” “뭐? 당신? 언제 봤다고 당신이야!” “소리 지르지 마! 애들 보기 부끄럽지 않아!” “너나 소리 지르지 마!” “너? 너? 당신 지금 말 다했어?” 뒤늦게 급식실로 온 학생들 역시 사정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며 상황을 살피다가 주위 사람들에게 무슨 일 때문에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 그래서 정원과 단유는 굳이 묻지 않고도 사정을 엿들을 수 있었다. 평소와 같이 지 선생님은 점심을 먹기 위해 동료 교사들과 함께 급식실로 향했다. 4교시 수업이 없었기 때문에 모처럼 일찍 급식실에 올 수 있었지만, 앞에는 발 빠르게 내달려 미리 줄을 서고 있던 학생들이 있었다. 지 선생님과 동료 교사는 ‘수업 종이 치기도 전에 미리 나왔던 거냐’며 가벼운 농담조로 학생들에게 말을 건넸다. 사실 그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떤 선생님들은 4교시가 마칠 무렵이 되면 산만해지는 교실 분위기를 파악하고 평소보다 3분 내지 5분 일찍 수업을 마쳐주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점을 알았기에 교사들도 딱히 진지하게 지적할 마음은 없었고, 그저 나란히 선 김에 교사로서 농담을 건넸을 뿐이었다. 학생들 역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며 머쓱해 하는 표정으로 교사의 농담을 받아주었다. 급식실은 시간이 되기 전에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급식실 내에서 배식 준비가 완료되었을 때 문을 열고 학생들을 받아주어야 질서가 지켜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보통은 점심시간 종이 울리기 10분 전에 배식 준비가 되기 마련이고, 종이 울리면 실장이 문을 열고 학생들을 받았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 달리 종이 울렸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급식실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궁금해진 지 선생님은 유리문 너머 실내를 살폈다. 40대 중반의 급식실 실장이 누군가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뭐랬어요! 세척실에 들어갈 때 빨간 앞치마라고 했어요, 안 했어요?” “죄송합니다.” 허리를 숙이며 사과를 하는 사람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여성이었다. 중년이라고 표현하기도 어색한 것이, 외관상 50대는 넘는 것으로 보였다. “똑바로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그만두라고 했잖아요? 이게 몇 번쨉니까!” 나이든 여성이 그보다 어린 실장에게 허리를 숙여 사과하는 모습은 과히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어린 학생들이 빤히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면 어떤 사정이 있더라도 저런 행동은 지양해야 옳을 것이다. 지 선생님은 유리문을 두드렸다. “이봐요.” 흥분한 탓인지 목둘레가 붉게 물들었던 실장이 그 소리를 듣고 얼른 다가왔다. 문을 열고는 바로 사과의 말을 전한다. “늦게 열어서 죄송합니다.” “아니, 그건 괜찮은데요, 애들 보는 앞인데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아 예, 죄송합니다. 저…사람이 실수를 해서 말입니다.” 지 선생님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저 사람’이라는 표현도 듣기 불편한데, 핑계라고 대는 말이 면피성 발언이라 불쾌했다. “무슨 사정인지 몰라도, 나이도 많으신 분인데 좀 그렇습니다. 어쩌다 실수를 했다 쳐도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아직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았던 실장도 지 선생님의 지적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문을 늦게 연 건 죄송한데, 사정도 모르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네?” 지 선생님이 반문하자, 실장은 짧게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저희도 저희 사정이란 게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시면서 그렇게 가르쳐 들려고 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이때 이미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문이 열리면서 눈치 없이 뛰어들어갔던 몇몇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선생님과 실장의 말다툼이 벌어지는 현장을 넘어가지 못한 채로 멀뚱히 서서 상황을 지켜봐야만 했다. 급식실 안에서 배식을 준비하던 조리보조들 몇이 뛰어나와 실장을 말리는 시늉을 했다. “실장님, 일단 나중에 얘기하시죠.” “아, 이거 놔봐요. 이 선생님이 뭣도 모르면서 말을 막 하잖아요.” 지 선생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리고 실장을 바라보았다. 젊은 지 선생님의 눈에 열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저 아저씨가 잘못한 거네.” “뭐야, 저 사람.” 사정을 들은 뒤 실장을 욕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 갔다. 정작 실장은 선생님과 말다툼으로 주변의 목소리를 들을 겨를이 없었기에 그런 분위기를 알지 못했고, 다만 실장 뒤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며 중간에 끼어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급식실 인원들만이 학생들의 목소리를 듣고 시온 잉크처럼 낯빛이 변했다. “저 아저씨가 갑질 같은 거 한 거 아냐?” “같은 게 아니라 갑질을 한 거지. 꼴에 실장이라고 어깨에 힘주고 다니더니만.” “급식실 실장이 무슨 벼슬이라고?” “너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커서 저런 사람 된다?” “지랄하지 마, 새끼야.” 키득거리는 웃음소리, 굳이 목소리를 낮출 생각을 하지 않는 아이들의 말들을 단유와 정원도 주워들었다. “미친 거 아냐? 그래도 여기가 학굔데, 학교 안에서 선생님이랑 저렇게 하는 건 이게 좀 모자란 거 아냐?” 정원이 자신의 머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라고 동의를 구하는 눈빛에 단유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딱히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지만, 뭔가 불만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건 정원의 착각일까? 비록 1년여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나름 친구라고 단유의 얼굴을 자주 관찰해왔던 정원은 평소의 담담한 얼굴이 아닌 표정에 의아함을 느끼며 물었다. “왜 그래? 열 받은 거야?” “아니.” “그럼?” “식사 시간이 늦어지니까.” 단유는 일찍 식사를 마무리하고 교실로 돌아가서 책을 읽고 싶었다. 평소에 꾸준히 지켜오던 그 페이스를 방해받았다는 점에서 조금 불만이 있었던 것일 뿐. 정원은 입구를 막고 싸우는 두 사람, 지 선생님과 실장을 돌아보았다. 지 선생님과 함께 왔던 교사들이 ‘왜 그래요, 선생님’ ‘참으세요’라고 말리는 시늉을 하지만 지 선생님은 완강한 태도로 그 손길을 거절하는 중이었다. 실장 역시도 뒤에 선 급식실 직원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더욱 드세게 나오는 중이었고. 그러다 보니 길이 쉽게 열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저 실장이라는 사람이 그냥 사과하면 끝날 일인데, 왜 저러지?” 정원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왜?” “응?” “실장님이 왜 사과를 하는데?” “그야 실장이 잘못했으니까.” “실장님이 잘못했다고 확신해?” 정원은 또 자기가 무슨 잘못 말한 건가 싶어 입을 다물고 자신의 발언을 되짚어보았다. 단유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돌아섰다. “어디가?” “매점에라도 들러서 라면으로 때워야겠어. 너도 먹을래?” “어? 그래.” 정원은 단유의 뒤를 따라갔다. **** 급식을 먹지 않고 매점에 와서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는 학생들은 이전에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급식실 앞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더 많은 듯했다. “모르지, 애초에 이 시간에 라면 먹으러 매점에 와 보질 않았으니까.” “앉을 자리가 안 보이는데.” 정원은 손에 든 컵라면을 들고 미어캣처럼 고개를 좌우로 돌려가며 빈자리를 살폈다. “아, 선배님. 여기 앉으세요.” 마침 근처에 있던 아이 둘이 두 사람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확히는 단유를 보고 일어섰다. 넉넉하지 않아도 조금씩 양보하면 모두가 앉을 수 있을 자리가 만들어졌다. “과중반?” “네. 2반 장대준입니다.” 정원은 입꼬리를 주욱 늘리며 컵라면을 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후배의 따뜻한 마음씨에 감격했다는 듯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고마워.” “저기, 선배님. 선배님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단유가 눈을 껌뻑거리며 물었다. “나?” “네! 저희 학교 이래 최고의 성적을 거두셨다고.” “최고는 무슨.” “아냐, 최고지. 완전.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만점 1등이잖아. 오죽하면 선생님이 너 문제 틀리는 거 보고 싶어서 난이도를 올릴까 고민이라고 말하겠냐?” 정원의 추임새는 못 들은 척하고 단유는 볼을 긁적였다. “내가 후배를 잘 챙기고 그런 편이 아니라서.” 뭔가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려 한다는 눈치에 후배가 재빨리 말을 던졌다. “아닙니다. 선배님 덕분에 저희도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갔습니다. 작년에 국제과학기술경진대회(ISEF)에서 수상하셨다고 들었을 때, 무척 기뻤습니다.” 뭔가 아부를 받는 기분이 들어 단유는 느낌이 묘했다. 고작 라면 먹으려고 매점에 들어왔을 뿐인데 후배로부터 이런 과한 칭찬을 받는다는 게 어색했다. “특히 선배님은 오로지 독학만 한다고 들었는데, 공부 비결이 듣고 싶습니다.” “공부 비결?” “네!” 그런 거 없다, 고 솔직히 말을 하면 괜히 미안해지는 분위기가 되었다. 크리스마스트리에 달린 꼬마전구처럼 눈을 빛내는 후배를 향해 무슨 말을 할까 잠시 고민하던 단유는 결국 언제나와 같은 대답을 꺼내는 수밖에 없었다. “책을 많이 읽는 거?” “어떤 책이요?” 그러자 정원이 끼어들었다. “너희들은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얘가 책을 엄청나게 많이 읽거든? 쉬는 시간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책도 꼭 교과서랑 문제집만 보는 게 아니라, 교양서적들 있잖아? 이론서, 전문서 안 가리고 다 읽어. 옆에서 자주 봐서 아는데, 얘 만큼 책 많이 읽는 애가 없어. 그리고 책도 봤던 거 또 보고 또 보고 그래.” “특정 학문에 구애받지 않고 여러 과목의 지식을 통합적으로, 또 반복적으로 부지런히 쌓는다는 말씀이시죠?” “야, 너 정리 되게 잘한다? 척하면 척이네? 아주 똘똘해, 후배?” “감사합니다.” 정원의 말에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후배 대준이었다. “너도 꽤 공부 잘하겠는데?” “나쁘진 않습니다.” “오오, 자신감?” 대준의 옆에 있던 친구가 ‘전교 5등 안에 들어요’라고 이르는 말에 정원이 놀라움을 표시하려 할 때, 단유가 팔꿈치로 정원을 툭툭 건드렸다. “라면 불어.” “아, 어. 그래.” 이미 라면을 한 번 휘젓고는 먹기 시작하는 단유를 따라 정원도 젓가락을 들었다. 후배들은 눈치를 보면서 각자 먹던 샌드위치와 김밥을 슬며시 가운데로 밀며 ‘이것도 좀 드시죠’라고 말을 붙였다. ‘역시 단유네.’ 후배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단지 선배라서가 아니라, 단유이기 때문임을 정원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친구니까, 친구가 후배로부터 저런 존경(?)을 받는다는 사실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아, 그런데 단유야. 아까 그거 무슨 말이야?” “무슨 말?” “급식실 앞에서. 실장이 잘못한 게 아니라고 했잖아?” 단유는 오물거리며 먹던 것을 완전히 삼킨 뒤에야 입을 열었다. “실장‘님’.” “그래, 뭐 아무튼.” 단유는 잠시 젓가락질을 멈추었다. “실장님이 잘못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실장님이 잘못했다고 확신할 수 없다는 거지.” “그게 그 말이지.” 대준이 눈치를 보다 물었다. “혹시 필요 충분 조건의 성립 요건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단유는 힐끔 대준을 본 뒤,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 마저 말을 이었다. “실장님도 나름의 사정이 있지 않을까, 하는 거지. 우리가 들은 거라곤 편향적인 이야기였을 뿐이니까.” 정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단유의 말을 되새김질해 보았다. ======================================= [553] 충동, 관심(2) 생각에 잠긴 정원을 더 보채지 않고, 단유는 앞에 놓인 라면이 더 불기 전에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바쁘게 젓가락을 놀렸다. 하지만 단유에게 말을 걸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정원뿐만이 아니었다. “선배님, 그럼 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단유는 대답 대신 국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따뜻하고 자극적이며 매운 라면 국물이 입안을 채웠다가 사라졌다. “말했듯이, 나는 처음부터 본 게 아니라 두 분이 싸우는 모습만 봤고, 주변 사람들이 떠드는 사정을 주워들었을 뿐이라서 왜 그 싸움이 일어났는지 몰라. 시시비비를 가릴 준거가 부족하다는 거지. 물론 내가 그걸 판단할 입장도 아니지만 말이야. 그러니 섣부르게 누가 잘했다, 못했다를 따지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야.” “하지만 지영호 선생님은 공정하신 편 아닌가요? 전 선생님이 애들한테 욕먹는 경우도 별로 보지 못했는데요.” 대준의 말은, 설마 선생님이 애꿎은 사람에게 함부로 했겠느냐는 뜻. “그 사람의 평소 평판에 근거하여 추리할 순 있겠지만, 그것이 100% 확실하냐고 묻는다면, 난 아니라고 대답할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제삼자들끼리 추측을 하며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서로 소설 쓰는 것밖에 안 되지.” 단유는 대준에게도 확실하게 선을 긋고, 젓가락을 움직였다. “역시 선배님은 생각도 깊으시네요. 알겠습니다.” 입발림 소리라고 치부해도 무방할 대준의 이야기는 못 들은 척하고 단유는 점심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정원과 함께 교실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급식실로 시선을 던졌더니 상황이 마무리되었던지, 급식실 입구는 정리되어 있었다. 뒤늦게 점심을 먹고 돌아온 아이들이나 단유처럼 매점에서 점심을 때웠던 아이들이 교실로 돌아오며 교실 안은 시끌벅적해졌다. 선생님과 급식실 직원이 싸웠다는 이야기는 뒷담화를 나누기 좋은 소재였으니, 평소라면 책상에 엎드려 부족한 잠을 채웠을 아이들이 모두 말똥말똥한 눈을 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이 낯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익숙한 광경이기도 했다. 가끔 어떤 연예인이 마약을 했다거나 하면서 뉴스에 대서특필이 되면, 또 인터넷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구는 어떤 영상이 올라오면 그다음 날 점심 디저트 삼아 아이들은 열심히 씹어대곤 했다. 사실 매일 같은 반찬만 먹으면 질리듯이, 아침 7시 교실로 향한 뒤 저녁 6시가 될 때까지 교실에 처박혀서 공부 이야기만 하는 게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아이들은 색다른 반찬을 원했고, 이왕이면 좀 더 자극적이고 목구멍이 따가워질 정도로 침을 튀겨 나눌 소재가 필요했다. 과중반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다른 다수의 아이들에 비해 좀 더 공부를 많이 하고, 남들보다 더 오래 의자에 앉아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18살 여느 남자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아이들이었다. 혈기왕성하고, 날마다 같은 반찬에 질리기도 하면서, 반년도 채 남지 않은 시험을 앞두고 스트레스에 원형 탈모가 걸리기도 하는, 평범한 아이들이었다. “야, 아까 그 실장이라는 사람 너무 심하지 않냐? 학교에서 감히 선생님한테 야, 너 하면서 반말 찍찍하는 거 보니까 괜히 내가 열 받더라.” “나라면 벌써 주먹 나갔을 텐데.” 말을 꺼낸 아이의 하얗고 마른 주먹이 엉성하게 뻗어졌다가 들어갔다. “싸울 줄도 모르면서 주먹은 무슨. 괜히 선빵 날리겠다고 주먹질했다가 맞고 울지나 마라.” “아니거든?” “됐고, 아무튼 그 실장 아마 잘리겠지?” “당근이지. 학교에서 갑질하다 선생님한테 걸린 거잖아?” “그러고 보면 지영호 선생님도 많이 참은 거다? 그치?” “솔직히 뒤에서 다른 선생님들이 안 말렸으면 싸우지 않았을까?” “선생님이 한 인상 하시잖아? 그래서 그 실장이 쫄았던 거 아닐까?” “그거 웃긴다. 속으로는 졸라 쫄았는데 애들이 막 쳐다보고 있으니까 허세 부린 거잖아? 만약에 보는 사람 없었으면 무릎 꿇고 살려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에바다, 새꺄’ 라며 말을 꺼낸 친구를 구박하는 아이들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려 있었다. 개중에 사정을 잘 모르는 아이들은 싸움의 원인을 궁금해하기도 했다. “근데 처음부터 본 사람 있냐?” “우리 반에는 없을걸? 4교시 늦게 끝나서 우리 다 늦게 나갔잖아?” “처음부터 본 애들 말로는 종이 쳤는데도 문을 안 열길래 가서 보니까 안에서 지랄 떠느라고 문을 안 열었다는 거야.” “무슨 지랄을 떨었는데?” “거기 일하는 아줌마한테 뭐라고 지랄하더래. 근데 아줌마가 눈물을 흘리면서 미안하다고 막 봐달라고 사정하는데도 욕하면서 지랄했다더라.” “그 실장이라는 사람 젊은 사람 아냐?” “니보다 많다, 새꺄.” “야, 잡소리 넣지 말고. 아무튼, 실장이라는 사람이 아줌마보다는 어리지. 그거 아줌마들 다 나이 많잖아?” “아무튼 대한민국은 좆같은 게 실장이 뭐 대단한 벼슬이라고 좆갑질이냐?” “그걸 목격한 선생님이 참교육 시전한 거잖냐?” “참교육 인정.” “이제 그 실장 좆 된거지. 근데 그 아줌마는 그거 고소 못 하나?” “무슨 고소?” “명예 훼손 같은 거?” “그게 되나?” “애들 다 보는 앞에서 그랬으니까, 명예 훼손 같은 거 안 되나?” “뇌피셜 오지구요. 그거 명예 훼손 안 되거든? 만약에 아줌마가 부당하게 해고당하면 고소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걸로는 고소 안 돼.” “학교에서 그 업체에 항의하면 그 실장은 잘리겠지?” “당연하지. 학교에서 그 지랄 해놓고 계속 일하면 되냐? 만약에 그 사람 안 잘리면 우리가 나서야지.” “우리가 어떻게?” “부당한 처사에 항의한다고 대자보 붙이고 그 뭐지? 청원 운동 같은 거도 하고 그래야지. 학교에 정의가 살아있다는 걸 보여줘야지.” “학생회에서 하지 않을까?” “지금 학생회장 하는 애가 약간 똘끼가 있으니까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하겠지.” “걔 1학기 때도 무슨 청원 운동한다고 서명받고 그랬잖아?” “학생 복지 개선한다고 뭐 그랬던 거 같은데?” “그니까 걔가 똘끼가 있다는 거야. 자기 공약으로 내세웠던 거라고 해서 한다는데, 솔직히 무슨 복지를 말하는지 모르겠더라.” “그게 바로 포퓰리즘이라는 거지.” “근데 그때 서명했던 거, 그거 해서 뭐 된 거 있나?” “서명한 사람이 있긴 있나?” “난 했는데?” “야, 넌 나중에 커서 분명 보증 서 주고 망할 거다.” “개새끼.” “응, 네 얼굴.” 여름날 소나기처럼 급변하는 화제는 아이들의 수다 본능을 자극했고, 그들의 수다는 점심시간이 마쳤음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까지 이어졌다. **** 시합 전 가볍게 몸을 풀었던 아이들이 약간의 흥분과 긴장을 담아 뜨거운 숨을 내쉴 때, 감독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감독은 주위를 둘러본 뒤 짧게 격려했다. “첫 시합이다. 그리고 상대는 이전까지 별다른 전적을 올린 적이 없는 학교다. 하지만 결코 얕보지 마라. 필드 위에서는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너희는 오로지 최선을 다해 뛰고 전술에 맞춰 움직이면 된다.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계속 움직이는 것, 그래서 상대에게 틈을 주지 않는 것이 우리 축구다. 맞나?” “예!” 감독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아픈 사람 있나? 컨디션 안 좋은 사람?” “없습니다.” 그때 명수가 손을 들었다. “뭐야?” “컨디션이 너무 좋으면 어떡합니까?” 아이들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긴장이 다소 가시는 대기실 분위기에 감독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명수야, 우리 주장아. 우리 주장이 이렇게 무게감이 없으니 상대가 우리를 얕보면 어쩔꼬?” “에이, 얕보면 안 되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 좀 미친 척하고 뛰어도 되겠습니까?” “양코치, 쟤 이상하다. 뺄까?” “잠깐 빼고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어? 감독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명수가 세상 다 잃은 표정을 만들어내며 바닥에 엎드리는 시늉을 하자, 아까보다 더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됐다, 명수야. 그만하고. 다들 긴장도 풀린 거 같으니 실수만 안 하면 오늘 결과는 잘 나오겠다.” 명수는 머리를 긁적이며 입꼬리를 늘렸다. “그런데, 감독님. 저 오늘 진짜 컨디션이 너무 좋아서 계속 뛰어도 안 지칠 거 같은데, 좀 지랄해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코치가 미간을 좁히며 명수를 나무랐다. “야, 아무리 그래도 감독님 앞에서 지랄이 뭐냐, 지랄이.” “됐다. 명수가 저러는 거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닌데. 너, 어떻게 하려고?” “그냥 가뿐하게 해트트릭하면 어떨까요?” “네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는 있냐?” “뭐, 오늘은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근거가 뭔데? 그냥 네 컨디션이 좋아서?” “뭐, 그것도 있고요. 날씨도 좋고요, 운동장도 딱 뛰기 좋을 정도로 말라 있기도 하고요. 애들이 좀만 도와주면 해트 트릭 좀 하겠는데요? 첫 경기부터 해트 트릭 좀 하면 다른 학교 애들도 겁 좀 먹지 않을까요?” “거 참.” 감독은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니들은 어떻게 생각해?” 명수는 팔꿈치로 옆에 앉은 친구를 툭툭 건드렸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감독에게 이야기하는 친구. “경기장에 미친개 한 마리 풀어놨다 생각하죠?” “그럴까?” “야, 미친개가 뭐냐?” “지랄견보다 낫지 않냐?” “야, 이….” 명수는 뒷말을 잇지 못하는 척하며, 친구의 머리를 붙잡고 헤드록을 걸었다. 감독님은 손뼉을 두어 번 치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좋다. 사실 얕보지 말라고 했지만, 조금 수준 차이가 나는 것도 사실이고 하니까, 일단 전반전은 미친개 한 마리 풀어보자. 개 한 마리가 휘젓고 다니는데 상대가 정신 못 차리면 잘된 일이고, 개몽둥이로 죽어라 패는 정도가 되면 후반전에 개는 빼고 사람으로 상대하자.” “아, 감독님! 뭔가요? 비유가 좀 그런데요?” 명수의 항의는 가볍게 씹으며 감독님은 뒤에 놓인 칠판을 두드렸다. “경진이랑 지호는 옆에서 잘 움직이고. 아무리 미친개가 지 마음대로 움직이려고 해도 옆에서 목줄만 잘 잡고 있으면 통제가 되니까, 전반전은 너희들이 잘 끌어야 한다. 알겠지?” 3학년인 경진과 지호는 피식 튀어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힘차게 대답했다. “농담은 여기까지다. 경기장 위에서는 농담도, 방심도 용납 안 해. 확실히 자기 몫을 하자. 알겠지?” “네!” “가자.” 아이들은 마지막으로 손을 겹치고 파이팅을 외친 뒤,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명수야.” “네.” 마지막에 나가는 명수를 불러 세운 감독은 명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주장이다. 알지?” “넵!” “그래. 그것만 잊지 않으면 된다. 그럼 가서 열심히 짖고 와라.” “넵!…네?” 감독은 말 대신 명수의 등을 툭툭 두드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약간 긴장한 듯한 표정의 상대와 마주한 명수는 뒤를 돌아보았다. 상대를 과소평가하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긴장해서 얼어 있을 필요도 없다. 어릴 때부터 늘 그랬지만, 축구는 열심히 하되 즐겨야 하는 것이다. 즐기지 못할 축구라면, 재미도 없고, 열심히 뛰어야 할 이유도 없다. 물론 이기면 좋겠지만, 지더라도 즐기는 축구를 하고 싶다, 는 게 명수의 속내였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난 결코, 지지 않을 거야.’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한 번 보고, 옆에 선 친구와 후배들을 둘러본 뒤, 경기장 바깥에 선 감독을 쳐다보았다. 감독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명수는 윙크를 했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감독을 보며 씩 웃음을 지을 때, 심판의 휘슬이 울렸다. “미친개 나가신다!” 명수는 소리치며 달려나갔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그러다 경고받는다.” 오른쪽에서 지호가 외쳤다. 저 친구는 어쩐지 목줄을 쉽게 놔주질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뭐 어떠랴. 오늘 명수는 너무 기분이 좋고, 다리가 너무 가볍다. 25분 후, 명수는 상대의 페널티 박스를 넘어섰다. 옆에서 상대 수비수의 외침이 고장 난 확성기처럼 뭉개져서 들렸다.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명수의 관심은 오직 오른발 안쪽에서 흘러나가는 공에 있었으니까. 명수는 야무지게 입술을 다물고 힘껏 공을 찼다. ‘어? 실수.’ 너무 힘을 준 탓에 공을 제대로 차지 못했다. 공은 비실거리며 원래 차려고 했던 궤도를 벗어났다. 골키퍼의 양다리 사이를 노리고 찼던 공은 왼쪽으로 흘러갔고, 골키퍼는 다급히 몸을 왼쪽으로 던졌다.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손을 빗겨난 공은 아슬아슬하게 골대 왼쪽 포스트를 맞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우와!” 뒤에서 달려오던 아이들이 명수를 향해 덮칠 듯이 뛰어왔다. “오지 마! 다쳐!” 명수는 얼른 자리를 벗어나 경기장 가장자리로 달아났고, 그 뒤를 동료들이 쫓았다. 스코어 3:0. 전반이 끝나기도 전에 명수는 자기가 뱉은 말대로 미친개처럼 뛰어서 목표를 이루었다. ======================================= [554] 충동, 관심(3) 명수는 해트 트릭을 기록한 이후에도 쉬지 않았다. 공격진은 신이 난 것처럼 상대를 압박하며 명수를 지원했고, 수비진도 물샐 틈 없는 전략으로 상대의 역습을 철저하게 막아냈다. 그리하여 전반 끝나기 전, 명수가 어시스트한 공을 골로 연결시킴으로서 4:0이라는 엄청난 스코어를 기록했다. “후반에는 좀 쉬어라.” “더 뛸 수 있을 거 같은데요?” “그 정도면 충분히 눈도장 찍은 것 같으니까 거기까지 해. 오늘만 뛰고 말 거냐?” 딱히 상대를 위해서 명수를 빼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명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명수를 후반에서 빼는 것이 좋겠다는 게 감독의 생각이었다. 명수는 아쉬움을 삼키며 교체되었다. 명수가 빠졌어도 팀은 여전히 강했다. 오히려 전반에 명수가 날뛰어준 덕분에 상대적으로 체력을 많이 보전한 팀이었기에 후반전에도 상대가 매섭게 날아오르지 못하게 막아낼 수 있었다. 최종 스코어 6:0. 가끔 최약팀과 최강팀이 상대하면 이런 스코어가 나긴 했다. 말하자면 상대는 대회 참가팀 중 최약팀으로 인증을 받은 셈이었다. “벌써 씻었냐?” 세면도구를 들고 샤워실로 들어가려던 선수들은 말끔한 얼굴로 대기실에 앉아 핸드폰을 두드리는 명수를 보며 물었다. 명수는 손 끝으로 볼을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선크림도 발랐어.” “야, 그런다고 피부가 하얘지기라도 하냐?” “더 타면 안 돼.” “새끼.” 낄낄대며 샤워실로 들어가는 선수들을 등지고 명수는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냈다. ―1승. 해트트릭. 곧 답문이 도착했다. ―축하한다. 뭐 먹고 싶냐? “역시 오늘 같은 날은 피자 한 판 땡겨야지.” 명수는 키득거리며 핸드폰 자판을 두들겼다. 전송 버튼을 누른 뒤 곧바로 문자가 도착했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에게서 온 것이었다. ―잘했어. 칭찬해. 그리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깜찍한 동물 이모티콘이 뒤에 붙었다. 이를 보는 명수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선배님, 뭐 좋은 거 보십니까?” 샤워실에 들어갈 준비를 하던 후배 한 명이 명수의 웃음을 보며 물었다. 명수는 핸드폰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여자친구.” “아, 예. 부럽습니다, 선배님.” “마음껏 부러워해.” “예.” “너도 나만큼 축구 잘하면, 예쁜 여자친구 생길 거 같지? 안 생겨요.” “…예.” “흰소리하지 말고, 빨리 들어가 씻어들.” 코치가 들어와 아이들을 정리시키고 난 뒤, 명수를 돌아보며 물었다. “힘이 남아도나 봐?” “반만 뛰었잖아요? 정말 힘이 남아돈다니까요?” “그래 보인다. 그러니까 나와.” “지금요?” 경기도 끝난 마당에 다시 뛸 일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에너지 소비 차원에서 빈 운동장을 혼자 달리기라도 하란 걸까? “저 아까 씻었는데요? 로션도 발랐어요.” “무슨 헛소리야? 프레스 인터뷰다.” “인터뷰요? 저요?” 코치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 하도 인상적인 활약을 해서 그런지 스포츠지 기자들이 너랑 인터뷰하고 싶단다.” “정말요? 저 처음이에요!” 명수는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녀석.” 코치는 피식 웃은 뒤 샤워실을 향해 소리쳤다. “빨리 씻고 나와라. 밥 먹으러 가야지.” 샤워실 안에 대답과 환호가 섞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다음 시간이 국어잖아? 혹시 자율학습 시키시는 거 아닐까?” “에이 설마.” 아이들의 기대와 달리 국어 선생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수업을 진행했다. 아이들은 뭔가 묻고 싶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따뜻한 가을 햇살을 맞으며 꾸벅꾸벅 고개를 떨궜을 아이들이 말똥말똥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으니, 선생님은 마냥 수업을 이어갈 수만은 없었다. “자식들아. 다들 머릿속에 딴생각으로 가득하다는 게 눈에 보인다. 집중 안 할래?” 결국 선생님이 한마디를 던졌고, 이에 한 아이가 용기 내서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급식실 실장…님 고소하실 건가요?” “고소는 무슨. 그리고 지금 니들이 그런 거 신경 쓸 때야? 수능이 100일도 안 남았어.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마.” “그래도, 선생님! 그 사람이 잘못한 거잖아요? 그럼 조치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학교에서 알아서 할 테니까, 너희들은 공부나 해라. 조금 있다가 모의평가에서 몇 점 받을지를 걱정해야지.” 선생님은 아이들이 다른 곳으로 신경을 쓰지 말라고 당부했다. “선생님!” 한 아이가 또 손을 번쩍 들었다. “또 뭐?” 뭔가 크게 각오한 듯, 비장한 얼굴로 일어선 아이가 입을 열었다. “학교에서 부당한 일이 벌어졌는데, 학생들이 자기 일 아니라고 나 몰라라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맞아요!” 몇몇 아이들이 호응해주자, 말을 꺼냈던 소년은 더욱 비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희가 관심을 갖는 건 이타적 양심에 의거해서 올바른 사회 문화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오!” 국어 선생님은 그 학생을 바라보다 피식 웃으며 들고 있던 분필을 뒤에 내려놓고 손을 툭툭 털었다. “순간 여기가 문과인 줄 알았다. 문자 좀 쓰는 걸 보니 언어영역 공부 좀 하나보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뻔뻔한 대답에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국어 선생님도 상황을 심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지,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사실은 공부 대신 이런 신변잡기 같은 이야기로 시간을 때우고 싶어서 뭔가 멋지게 보이도록 포장했다는 걸 잘 알지만, 그래도 그냥 웃고 넘어가면 선생님으로서 도의가 아닌 거 같아서 말해주마.” 교탁 위에 팔을 포개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 편한 자세를 만든 선생님은 잠시 말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먼저 이 이야기부터 하마. 아까 점심 시간에 있었던 일은 나도 잘못이 있다.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교사란 사람이 처신을 잘못한 거야. 그렇게 목소리를 높여서는 안 됐는데 말이지. 그게 너무 부끄러워서 사실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단 말이다.” “아닌데요! 선생님 멋있었어요!” “선생님 잘못하신 거 없는데요?” “그래, 고맙다. 너희들이 그렇게 말해주니까. 그래도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지. 그리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아까 네가 말한 ‘부당한 일’에 나 몰라라 하면 안 된다는 말. 그래, 나도 그 점에 있어서는 동의한다. 뉴스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면 알겠지만, 이 사회에는 부당한 일들이 많다. 그리고 뉴스에 나오지 않는 일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계속 벌어지는데도 고쳐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나를 포함한 어른들이 그런 부당함에 대해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의 관심은 급식실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한 것이었지,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누구도 선생님의 말씀에 불만을 터뜨리진 않았다. 유행처럼 번져가는 ‘헬조선’이란 단어처럼, 이 사회에 수많은 부당과 적폐들이 판을 치고 있음을 모르진 않았으니까. “변명하자면, 사는 게 바빠서, 혹은 자기 일을 신경 쓰기에도 벅차서 먼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는 관심을 쏟을 겨를이 없었던 거겠지. 당장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니라면 사회운동가가 아닌 이상은 나서서 고치려고 들지 않았던 거야.” 교탁 위에 반쯤 기대고 있던 선생님은 몸을 바로 세우며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 미소 짓던 얼굴은 어느새 진지함으로 가득했다. “부당함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부당하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이 사회의 바른 규칙과 온당한 원칙들에 대한 위협이고, 그 위협은 불신과 불안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비록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더라도, 나중에는 자신이 혹은 자신과 가까운 가족이 그 부당함으로 인한 피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니까. 평화와 공존, 공생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위협하는 일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바른 시민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라는 생각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말이야. 여기에는 좀 더 이성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너희들, 마녀사냥이란 말 많이 들어봤으니까 알지?” 이때 앞자리에 앉아 있던 정원이 슬쩍 고개를 돌려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단유가 정원과 눈을 마주쳐 주었다. “객관적으로 완벽하게 부당함을 단정 지을 수 있는 일은 과연 얼마나 될까? 때로 사람은 군중심리에 휘말려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이전에 움직이기도 한다는 것을 너희들은 알아야 한다. 몇 사람의, 혹은 다수의 사람들이 잘못이라고, 그릇된 일이라고 손가락질하면 그것이 진실처럼 오판할 수 있다는 것이지.” 선생님은 ‘밴드왜건 효과(band wagon effect)’와 ‘다수결의 오류’를 언급하며 말씀을 이어나갔다. 처음에는 급식실에서 벌어졌던 사건에 대한 뒷이야기를 당사자에게 들을 수 있을 기회라 여긴 아이들이 흥미진진하게 듣다가 어느새 ‘언어영역’ 수업으로 바뀌면서 몇몇은 힘겹게 버티고 있던 눈꺼풀에 힘을 풀었고, 몇몇은 교과서로 입을 가리고 하품했다. ‘역시 국어 선생님이다.’ 라는 생각을 가질 무렵, 수업시간은 끝이 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지문이 나오면 너희들이 읽어야 할 점은 단순히 단어만 찾아서 정답을 찾을 게 아니라, 그 내용 전반에 걸쳐 이어지는 맥락을 이해하고 보기에서 가장 적합한 예문을 이어서 연결할 줄 알아야 한다.” “예.” 힘없는 대답들에 선생님은 진지한 표정을 풀었다. “니들 덕분에 진도를 많이 나갔네. 사실관계를 해석하는 일은 지문 해석에서 가장 중요하다. 알겠지?” “네.” 선생님은 수업을 마무리하려는 듯 교탁에 펼쳐뒀던 책을 덮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일은 아까도 말했듯이 선생님이 잘못한 부분도 있다. 그분도 옳다는 건 아니지만, 그분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고, 그걸 선생님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일이 커진 것이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함부로 누가 잘했네, 못했네, 나눠서 편 가르려 들지 말고 싸우지 마라. 알겠지?” 가장 중요한, 그리고 궁금한 부분이 선생님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종이 울렸다. “선생님! 그게 뭔데요?” “수업 끝!” “아! 선생님!” 선생님은 입술에 손가락을 붙이는 시늉을 한 뒤, 교실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아니,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를 말해줘야지, 왜 그걸 말씀을 안 해주시는 거야?” “와, 나 오늘 궁금해서 잠 못 잘 듯.” “웃기시네, 누우면 바로 코 골고 잘 거면서.” “응, 아니야.” 단유가 교과서를 챙겨 서랍에 넣고 다음 수업을 준비하는 동안, 정원이 다가왔다. 정원은 옆에 쭈그리고 앉아 책상에 팔을 걸치고 그 위에 머리를 올렸다. “지폐라도 있으면 니 입에다 물려주었을 텐데 아쉽다.” “…뭔 소린지 모르겠고, 단유 너 말야. 혹시 뭐 아는 거 있어?” “알긴 뭘 알아?” “그럼 정말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거야?” 단유는 정원을 바라보았다. “아니, 뭐…솔직히 그래. 사정을 모르니까 누구 편도 들 수 없겠다고 말할 순 있겠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말이야. 그 상황에서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실장에게도 사정이 있을 거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 뭔가를 아는 게 아니라면 그렇게 말하기 어렵지 않나?” 정원이라는 친구는 어수룩한 면이 많은 친구다. 사교적인 면도 많이 부족해서 ‘친구’임에도 편하게 말을 붙이지 못하고, 속내를 드러내는 것에도 익숙하지 않아 가끔 엉뚱한 말로 사람을 당황시킬 때도 있었다. 그러나 과중반에 들어온 친구답게 뭔가 하나에 꽂히면 집중력을 발휘해서 답을 알 때까지 파고드는 면도 있었다. 지금 정원이 호기심을 가진 부분 역시 평범한 사람들에겐 그게 왜 궁금하냐고 되물어볼 법한 일이지만, 정원은 물리학의 난제를 대하는 태도로 단유에게 해답을 구하고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주변 사람들의 모습에서 알 수 있었지.” “주변 사람들?” “실장님을 말리던 사람들의 표정에는 실장님을 원망한다거나 억지로 울분을 참는 표정이 없었어. 만약 그 실장님이 잘못을 했던 것이라면, 그 사람들의 표정에는 아까 이야기 나온 것처럼 ‘부당함’에 대한 분노와 그것을 마음껏 표현하지 못해 쌓인 울분 같은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을까?” “어?” “어쩌면 그 사람들이 실장과 한편이니까 그런 감정을 안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그것 역시도 달리 고려해야 할 사정이 있다고 생각할 근거가 되는 거지.” 정원이 살짝 입을 벌리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는 정원의 턱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렸다. “그리고 내가 원래 이기적이잖아. 그래서 그런 일을 보고도 모른 척하는 나쁜 심성을 가진 거지. 그렇게 편하게 생각해.” 단유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정원의 시선이 따라오며 물었다. “어디 가?” “화장실.” “같이 가.” 단유가 걸음을 멈추고 정원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정원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는 도망치듯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 [555] 충동, 관심(4) “인명수 선수, 반갑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오늘 표정이 무척 밝네요. 역시 해트트릭을 했기 때문인가요?” “아, 뭐, 그런 것도 있고요. 그냥 오늘 컨디션이 좋습니다.” “재작년에 U-17에 합류했을 때가 생각나네요. 이미 중학교 때부터 두각을 드러냈던 선수로 관계자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는데, 그땐 그렇게 빛을 보지 못했어요.” “그때는 제가 너무 긴장을 많이 해서요.” “큰 대회에서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인가요?”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닌데요. 고등학교에 갓 올라온 상태인 데다 경험도 다른 클럽 선수들에 비해 적었거든요.” “아, 경험 부족이라는 사실이 본인을 위축되게 만들었다?” “네. 조금 그런 면이 있었죠. 그리고 그때 팀에 저보다 잘하는 선수도 많았고요.” 명수는 중학교 때의 경력으로 U-17에 올랐으나 당시 해외 유소년 클럽에서 활약하던 선수와 포지션이 겹치면서 제대로 활약할 기회를 얻지 못했었다. 그러나 명수는 그 점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았다. 본인이 평소 실력을 내지 못했던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제가 알기로는 U-20 대표로 인명수 선수가 물망에 올랐다고 들었는데요, 오늘 경기에서 보여준 활약은 그런 본인을 어필하기 위함인가요?” “아뇨. 그런 생각은 없었고요. 그냥 즐기자는 생각만 있었어요.” “이기려고 하기보다는 즐기려고 했다는 말인가요?” “네, 뭐 그런 거죠.” “그럼 오늘 경기 이야기로 넘어가서, 전반 4분에 첫 득점을 했어요. 미리 약속된 플레이였나요?” “그건 아니고요. 그냥 운이 좋았어요.” “순전히 운이었나요?” “보통 전후반 시작과 끝에 집중력이 약해진다고들 하잖아요? 마침 타이밍이 맞았던 거라고 생각해요.” 이후의 득점 상황에 대해서도 짤막한 브리핑과 호응이 이어졌다. 기자는 미리 준비해뒀던 질문지의 질문들을 모두 쏟아낸 뒤, 녹음기를 껐다. “오늘 경기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기대할게요?”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명수는 허리 숙여 인사했다. 더벅머리의 기자는 미소 지으며 명수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었다. **** 수학에는 귀류법이라는 게 있다. 명제의 반대를 가정하고, 이를 논리적으로 풀어 모순을 끌어낸다. 그러한 모순들로부터 가정이 거짓이기에 본 명제가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수학 논리 중 하나인 ‘대우’를 활용한 것이다. 급식실 실장이 정말 잘못을 했고, 그것이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면 과연 그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그 문제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언뜻 생각하면 그렇구나, 하고 넘길 이야기지만 좀 더 고찰해보면 빈틈이 많다. 우선 실장이 잘못했더라도, 불만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 이것은 수직화된 직장 내 서열관계에서 있을 수 있는 가정이다. 윗사람이 부당한 지시나 명령을 내리더라도 아랫사람이 이 지시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있는 경우가 있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학교 내에서 선생님의 지시에 대해 아이들은 대체로 순순히 따르는 편이다. ‘선생님’이라는 직급에 대해 가지는 선입견도 영향을 미칠 테고, 오랜 관습을 통해 윗사람의 지시를 온당히 여겨야 한다는 것을 교육받은 학생들의 태도 역시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 “내일까지 숙제해 와.” 라는 말과, “내일까지 보고서 작성해.” 라는 말이 다르게 들릴 수 있을까? “저 오늘 다른 과목 선생님들도 숙제를 많이 내주셔서 내일까지는 힘들겠는데요.” “지금 밀린 업무가 많아서 내일까지는 힘들 거 같습니다.” 라고 변명할 수 있을까? “선생님 너무 한 거 아냐? 내일까지 이걸 어떻게 다 해?” “이 부장 너무 한 거 아냐?” 하지만, 과연 이런 상황에서 전혀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주어진 과제를 수행해낼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더라도 ‘궁시렁’거리면서 어설프게나마 불만을 표하지 않을까? 당사자 앞에서야 순응하는 태도를 보인다 하더라도, 불만은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조선 시대 노비들이라도 못된 주인에게는 불만을 품었을 것 같다. 두 번째는 과연 단유는 그가 말한 것처럼 급식실 사람들이 불만을 품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단유의 말을 믿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가 안 된다. 비록 정원이 그의 죽마고우라도 되어서 오랜 시간 함께한 것은 아니라 해도, 단유가 결코 허언이나 실언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확신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유의 말은 믿는다. 단유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단유는 분명히 그 사람들에게서 그가 확신하는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확신의 문제다. 분명 그 상황은 싸움을 말리기 위해 뛰어들어야만 했고, 거기에서 그 사람들은 어떤 다급함, 혹은 주저함을 보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불만을 드러낼까? 그리고 만약 드러나지 않았다면, 단유는 어떻게 그들이 불만이 없었음을 확신할 수 있을까? “단유야.” “응?” 야자를 준비하던 단유에게 정원이 다가갔다. 눈을 껌뻑거리며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는 단유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한참을 기다렸다가 물었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단유는 정원을 보며 이게 또 왜 이러나, 하는 눈빛을 보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니가 그랬잖아. 급식실에서 모여있던 사람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하자면 넌 그 사람들의 표정을 읽었다는 뜻이잖아? 그래서 내가 하루 종일 애들 얼굴을 살펴봤는데, 솔직히 애들이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잘 모르겠더라고. 넌 어떻게 본 거야?” 단유는 얕은 한숨을 쉬며, 정원의 어깨를 짚었다. “정원아.” “응.” “어쩐지 오늘 온종일 얌전히 있는다 싶었더니, 계속 그 생각을 했던 거야?”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이야.” “어제 내가 너한테 그 말을 한 이후로 지금까지, 거의 하루 이상을 그 생각만 했다고?” “응.” 단유는 정원을 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해보면 예전에 자신도 그런 때가 있었다. 안 풀리는 문제가 있으면, 풀릴 때까지 밥 먹는 것도 잊고 문제에 몰두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당장 공부해야 할 것도 여러 가지였으니까. 학과 공부는 물론이고 모의고사 준비에, 개별 과제와 조별 과제, 번역일도 해야 하고 마법을 위해 몰두했던 개인 학습도 해야 했다. 거기에 최근에는 소설책을 번역하는 일까지 맡았다. 그래서 만약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거나, 쉽게 이해하기 힘든 책을 읽게 되면 거기에 몰두하기보다는 다른 곳으로 신경을 돌렸다. 다른 책을 읽거나, 다른 문제를 풀거나, 아니면 집안일을 했다. 집중력의 문제라기보다는 효율의 문제다. “다다음 주면 모의고사야.” “알아. 알아도 이건 꼭 해결해야 속이 편해질 거 같아.” 문득 일요일에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 하던 명수가 ‘불편!’을 외치던 모습이 떠올랐다. “사람을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해. 말로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들 하지. 하지만 사람이 단지 언어로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낼까? 갓 태어난 아이들, 말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어떻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지 떠올려봐. 단순히 울고 웃는 표정으로 모든 의사를 전달하는 거 같지만, 사실은 그 표정 안에 다양한 의미가 숨어있다고 해. 제삼자는 모르는 것을 어머니들은 안다고들 하잖아. 배가 고픈 건지, 답답한지, 짜증이 났는지, 아니면 졸려서 그러는지 얼굴을 보면 안다고.” 정원이 눈을 깜빡이며 단유의 말에 집중했다. “성인도 마찬가지야. 70여 가지의 근육들이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표정을 보면 그 사람의 감정이나 속내를 짐작할 수 있지. 물론 100%는 아니야. 하지만 어느 정도는 유추가 가능해. 특정 조건 하에서는 말이야.” “특정 조건?” “포커페이스란 말 알지? 도박사들이 자신의 패를 상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짓는 무표정. 그런데 뛰어난 도박사들은 그런 무표정 속에서도 상대의 패를 읽는다고들 해. 좋은 패를 받았는지, 아닌지를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 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표정의 변화에서 읽어낸다고들 하지. 그게 가능한 이유는 도박판이라는 특정한 상황에서 유추해낼 의미가 특정되어 있기 때문이야. 말도 안 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의 표정을 읽으라고 하면, 사람의 표정을 읽는데 선수인 도박사들이라도 제대로 해내기 어려울 거야.” “말하자면, 넌 어제 그 상황에서 불필요한 조건들을 제하고 특정한 의미만 골라 읽어냈다는 거네?” “골라 읽어냈다기보다는 보여야 할 감정들이 보이지 않았다는 정도가 되겠지.” 싸움이 벌어졌고, 싸움을 말리는 상황에서 웃음을 터뜨릴 사람은 없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라며 웃음을 지으며 상황을 무마시켜 보려는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 웃음이 즐거워서 웃는 웃음은 아닐 테다. “넌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어릴 때 사람을 많이 관찰했었어.” “왜?” “…성격이 배배꼬여서.” 자신의 생존을 위협할 상대가 주위에 널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늘 위기의식을 느끼며 주위를 경계했다. “에이. 말도 안 돼.” “뭐가?” “넌 내가 본 중에 제일 착한 사람이야.” “내가?” “아무리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해도 대답을 해주려고 하잖아. 그게 착하다는 증거야.” 어설프다. 단유는 또 한 번 피식 웃었다. “겨우 그런 거로 착하다고 말하면 안 되지. 그리고 오히려 난 나쁜 사람에 속해.” “니가? 왜?” 대답하지 않았다. 지난 과거에서 단유는 결코 착한 사람이라면 하지 않았을 일들을 했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어설프기 짝이 없는 지식을 내세우며 마치 지혜로운 척을 했고, 성급했던 결정으로 손에 피를 묻히기도 했다. 과거를 생각하니 괜히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배우고 익혀도, 여전히 모자란다는 생각을 갖는 건 바로 과거의 자신이 행했던 일들이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치열하게 자신의 빈속을 메꾸듯 지식을 습득하는 중이다. 하지만 언제쯤에나, 어디까지 익혀야 만족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왜 말을 하다 말아?” 정원은 교실을 나서는 단유의 옆에 붙었다. “있잖아.” 입술을 달싹거리던 정원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거, 나도 가르쳐줄 수 있어?” “뭐?” “사람 표정 보고 읽는 거. 배울 수 있는 거지?” “왜 배우고 싶은데?” “그냥…배워두면 좋지 않을까 해서.” 소심해진 표정으로 말을 건넨 정원은, 그 스킬이 있으면 앞으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을 꺼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고백했다. 어렸을 때, 종종 말실수로 친구들에게 핀잔을 듣거나 심한 경우 맞기도 했었다. 농담이라고 꺼냈는데, 친구는 기분이 나쁘다며 등을 돌리기도 했고, 반갑다고 인사를 했는데 분위기 파악 못 한다고 욕을 먹었다. 정원은 그 친구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쁜 건 그 친구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나였어.” 친하게 지내고 싶지만, 실수할까 봐 가깝게 다가가지 못하는 정원이었다. 키도 작고 왜소했던 정원이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얼마나 용기를 냈던 걸까? 속으로는 많이 떨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떨림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나름 열심히 얼굴을 꾸몄을 것이다. 그런 것들에 신경을 쓰다 보니 정작 입에서 나온 말은 엉뚱하기 그지없었고, 그래서 단유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슬쩍 옆을 보니 눈치를 보던 정원이 눈을 아래로 내리까는 모습이 보였다. “가르쳐줄게.” “정말?” “사실 가르쳐줄 것도 없어. 요령은 간단하거든.” “뭔데?” “바르게 보는 거야.” 정원은 단유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보며 저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 [556] 충동, 관심(5) “단유야!” 명수의 다급한 부름에 방에서 책을 보던 단유가 거실로 나왔다. “뭔데?” “이거 봐봐.” 호들갑을 떠는 명수의 모습에 호기심을 느꼈는지 자기 자리에서 배를 깔고 누워 있던 호빵도 일어나 어슬렁거리며 다가갔다. 그러고보니 호빵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다. 포메라니안 종이 보통 12년에서 15년 정도를 산다고 하는데, 호빵은 벌써 6년이 지났다. 그래서일까, 예전처럼 혈기왕성하게 뛰기보다는 느긋하게 걷는 걸 즐기는 것 같았다. 원숙해진 걸까? 명수에게 다가가니, 명수는 보고 있던 모니터를 가리켰다. “내 인터뷰 실렸어!” 아, 그것 때문에 그렇게 다급히 불렀던거야? 라는 말이 혀끝에서 아슬아슬하게 맴돌다 사라졌다. 대신 명수를 가볍게 흘겨봐주고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한편, 경순고등학교 축구부의 주장 인명수는 재작년 U-17에서의 부진을 극복한 모습을 보이며 전반에만 세 골을 넣어, 해트트릭을 달성하였다. 운이 좋았다며 겸손을 보인 인명수는 다음 경기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이겠다고 다짐했으며, 또한 앞으로 있을 U-20 월드컵에 참여하게 된다면 제 기량을 120% 보이겠노라고 자신했다.…」 “자신한다고?” “아니, 그런 말은 안 했는데, 아마 기자님이 좋게 봐 주셨나봐.” “그래?” 나쁘진 않지만, 아직 국가대표 선발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발언은 자칫 오해를 부를 수 있다. 이를테면 기사의 첫 댓글처럼. 「김칫국 마시는 거 아님?」 하지만 겨우 2~3줄의 인터뷰에 딴지를 걸기엔 명수의 인지도가 부족했다. 「얘 누구?」 그리고 고등부 대회 예선전 경기에 관심을 둔 사람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의 댓글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얼굴을 감춘 익명의 워리어들에 의한 테러를 당해 본 경험자로서 판단한다면, 이 정도는 양호한 편이다. “인터뷰 길게 했었다며?” “그건 좀 아쉽다. 나름 멋있게 인터뷰 했었는데. 그래도 괜찮아. 내 첫 인터뷰였으니까.” “그래. 다음에는 단독으로 인터뷰 실릴 날을 기대할게.” “이번 대회 우승하면 실릴 수 있지 않을까? 전 경기 해트트릭이라는 대기록을 쌓으면서.” 물론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했다. 아무리 명수가 축구를 잘 한다고 해도, 축구는 혼자 잘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팀과의 호흡이 중요한 경기니까. 명수도 그 사실을 재작년의 U-17 월드컵에서 뼈저리게 느꼈고. 단유는 댓글은 신경 쓰지 마, 라고 충고를 남기고 돌아섰다. “내가 설마 모르겠어? 예전에 너한테 있었던 거 나 다 기억해.” 당시 단유보다 더 분개하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던 명수의 모습을 떠올리며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명수가 자신을 위로해주었듯, 명수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때는 자신이 명수를 도울 것이다. **** 수능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치러진 모의고사는 별 탈 없이 끝이 났다. 아직 성적이 공개되기 전이지만, 그때까지는 모두가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에 더해 2학년들에게는 수학여행이라는 선물이 주어졌다. 덕분에 학교는 평소보다 조용했다. “2학년이 빠졌을 뿐인데, 이렇게 세상 조용해질 수 있나?” “200여 명의 입이 사라졌으니까 조용할 수밖에.” “에구, 좋을 때다.” 물론 2학년과 달리 3학년은 그런 조용한 분위기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 수능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는 선생님들 덕이었다. “분위기 휩쓸리지 말고 공부나 해!” “조용해서 공부하기 더 좋기만 하네. 그렇지? 자, 수업하자.” 어쨌든 이 학교를 다니는 대다수의 학생들의 당면 과제는 대입이었고, 수능을 포기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선생님들의 말씀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리고 늘 그렇지만, 문제는 언제나 사소한 하나의 계기에서 시작된다. 가끔 교실을 둘러보면 공동묘지가 따로 없다 싶을 정도였다. 책상 위에 책을 쌓아두고 그 위에 엎드린 아이들의 굽은 등은 우울한 봉분이었다. 10분의 짧은 휴식 뒤에는 다시 좀비처럼 고개를 들고 멍한 눈으로 칠판을 향하는 아이들. 하지만 세상사가 모두 천태만상이듯, 쉬는 시간이 되어서야 눈을 말똥말똥 뜨고 분주한 이들도 있었다. 살펴보면 그들도 꽤나 바쁜 삶을 보내고 있었다. 고작 10분 밖에 주어지지 않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매점에 가서 컵라면도 먹어야 하고, 아니면 주전부리 삼아 빵과 음료수를 섭취해야 했다. 만약 배가 부르다면 매점에 가는 대신,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인간을 찾아 주로 입에 비축되어 있던 에너지를 소비하며 시간을 보낸다. 물론 소비된 에너지는 다시 이어지는 50분간의 수업시간에 보충한다. 어떤 아이는 문제집을 풀거나 지난 시간에 배운 내용들을 다시 노트에 정리하는데 쉬는 시간 10분을 모두 쓴다. 가끔은 옆 친구에게 묻는다. “노트 좀 빌려줘라.” 수업시간에 조느라고 빈 여백에 알 수 없는 줄이 그어진 페이지를 찢어 버리고, 친구에게 빌린 노트를 보며 여백을 채운다. 단유는 쉬는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물론 부족한 수면을 보충하려는 시도도 없었다. 가끔 그런 단유를 보고 ‘사람도 아니다’며 눈살을 찌푸리는 아이도 있었지만, 단유가 3년간 이룬 업적이 그런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쉽게 말하자면, “저렇게 안 하면 어떻게 1등 하냐?” 였다. 그래서 단유는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자기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사실 시비를 거는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다들 자기 시간을 보내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그런 단유도 쉬는 시간에 바쁘게 움직여야 할 때가 있었다. 2주에 한번 꼴로 돌아오는 주번 활동 때였다. 주번은 학급비품 정리 정돈, 실내 청소, 학급 분위기 조성에 노력 봉사해야 한다. 전교 1등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학급 번호순으로 돌아오는 차례에 최선을 다해 학급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양보해야 했다. 단유가 학급 주번을 맡을 때는 다른 어느 때보다 깔끔한 교실이 된다. 사실 주번 활동이 뭐 별거 있냐고 말을 할 수도 있지만, 정작 단유가 주번일 때와 아닐 때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명확해서 다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가장 차이를 많이 느끼는 사람은 선생님이었다. “오늘 주번 단유니?” 라고 물으면, 대답은 다른 아이들에게서 나온다. “네!” “역시 단유가 주번이면 칠판이 깨끗해. 먼지 하나 없다니까?” 단유네 학교는 여전히 분필을 사용했다. 그래서 칠판이나 그 주변이 분필 가루로 쉽게 더러워지곤 했다. 그래서 더욱 주번의 역할이 중요했는데, 사실 10분의 휴식시간마다 쓸고 닦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단유가 주번일 때는 마치 칠판이 새것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깨끗한 데다 한쪽에 가지런히 정리된 분필과 분필지우개들을 보면 감히 손대서 흩트려 놓기가 꺼려질 정도였다. 평소에는 아무렇게나 묶여 있는 창가의 커튼들도 각을 맞춘 것처럼 보기 좋게 묶여 있고, 교실 뒤 사물함 위에는 번잡한 물건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래서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단유가 ‘결벽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벽증이라면 평소에도 어지럽혀져 있는 교실 주변을 보고 참을 리 없다는 반론이 나왔고, 결국 단유가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깔끔하고 청소를 잘한다는 정도로 정리되었다. “공부도 잘하고, 청소도 잘하니 도대체 못 하는 게 뭐야?” 선생님은 분필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는 웃으며 모범생 단유를 칭찬했다. 그리고 그런 칭찬을 들으면, 단유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들의 편집적인 호의가 달갑지 않은 까닭이었다. 모든 수업이 끝난 후 ‘너희들이 수학여행 간 거 아니니까, 정신 놓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자’는 선생님의 종례 말씀이 있고, 그 후 청소 시간이 되었다. 아이들은 각자 맡은 부분을 청소했고, 가득 담긴 쓰레기통을 비우기 위해 단유는 분리수거가 된 쓰레기 봉투를 들고 교사(校舍) 뒤편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전 학년의 아이들이 청소하느라 시끌벅적했을 시간인데, 2학년은 수학여행을 가고 1학년도 일찍 수업을 마치고 돌아간 시간이어서 유난히 조용했다. 때문에 드물게 여유로움 마저 느껴지는 오후였다. 조용한 복도를 지나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가는데, 3층의 2학년 교실이 몰린 복도 쪽에서 소음이 들렸다. 정확히는 복도의 끝에 있는 화장실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뭘까, 잠깐의 호기심에 단유는 시선을 흘깃 던졌다. 매우 짧은 순간이었지만, 화장실 앞에 누군가가 서성거리고 있었고 화장실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수명의 아이들이 있을 거라고 판단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은 불필요한 관심이라 생각해서 단유는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상대는 아니었던 모양. “야.”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도 단유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대로 계단을 내려가 건물을 빠져나갔다. 교사 뒤편에 분리수거장까지 걸어간 단유는 구분된 종류에 따라 쓰레기를 버리고 다시 교실로 돌아가려 했다. “야, 안 들려?” 뒤따라 온다는 것은 알았지만, 굳이 자신에게 시비를 걸기 위해 오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남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망을 보고 있었던 것이라면, 오히려 숨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따라온 아이는 낯선 얼굴이었다. 하지만 교복에 붙은 명찰을 보니 동급생이었다. 그 아이도 단유의 얼굴이 낯설었는지 가슴에 붙은 명찰을 확인하는 시선이었다. “너 3학년이야? 몇 반이야?” 단유에게 질문을 던지는 아이의 얼굴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애써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한껏 불량스러움을 표현하는 아이는 송곳니를 드러냈다.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 입술을 뒤집고 송곳니가 드러나게 인상을 쓰고 있었다.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다. “9반.” “9반? 아, 과중반.” 그제야 왜 동급생임에도 얼굴이 낯설었는지를 이해하는 표정이다. 과중반은 3년 동안 자기들끼리 반을 섞어가며 지내기 때문에 일반반과 대면할 일이 급식실 외에는 거의 없었다. 더구나 쉬는 시간에도 밖엘 잘 나가지 않는 단유였으니, 더욱 그랬다. “야, 뭔데?” 송곳니의 뒤에서 또 다른 아이가 등장했다. 송곳니보다 머리가 하나 더 큰 아이는 단유보다 키가 컸다. 운동으로 다져진 단유도 몸이 큰 편이긴 했지만, 새로 나타난 아이는 비만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지만 단유보다 좀 더 커 보였다. “아까 걔.” “니가 불렀다는 애?” “새끼가 째려보고 가잖아. 그래서 불렀는데 그냥 째고 가더라.” 속이 시커먼 새끼, 라고 뒤를 붙이는 송곳니를 지나 덩치가 다가왔다. “너 뭐냐? 우리 학교 맞아?”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데 그런 질문이 나오나 싶었다. “9반이란다.” “…아, 과중반?” 단유가 과중반이라는 사실이 덩치를 불쾌하게 만들었나보다. 눈썹을 꿈틀거리며 다가오는 모양새가 영 불안하다. 조용하고 평화로웠던 일상에 금이 가는 느낌이었다. “김단유? 이름은 많이 들어봤는데?” “아, 걔네.” “뭐?” “선생들이 말하던 애 있잖아. 전교 1등.” “아, 존나 재수 없는 새끼가 얘야?” “상판도 존나 재수 없게 생겼네.” 당사자를 앞에 두고 만담이나 나누자고 분위기를 만드는 건 아닐 것이다. 틀에 박힌 이 패턴에 진절머리가 났지만, 단유는 되도록 조용히 상황을 무마시키고 싶었다. “너희들한테 관심 없다.” “관심? 난 관심이 있는데?” 이죽거리는 웃음을 짓는 덩치의 누런 이에서 구린 담배 냄새가 느껴졌다. 아마도 조금 전까지 흡연에 열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과중반에 존나 재수 없는 새끼가 있다고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렇게 만나서 반갑다.” 손을 내미는 덩치. 단유는 잠시 그 손을 보다가 마주 잡았다. “그래, 반갑다.” 그렇게 맞잡은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곧 덩치가 팽개치듯 손을 놓으며 말했다. “새끼, 좆같은 대가리만 굴리는 줄 알았는데 힘 좀 쓴다 이거지?” 왜 이런 애들은 시비를 걸고 싶어서 안달일까? “아까 어디까지 봤냐?” 애초에 근처도 가지 않았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상대의 멍청함과 무대포 같은 시비에 진절머리가 난다. “아무것도.” “좆같은 소리 하네.” 한발 다가서며 단유의 턱을 붙잡는 덩치. 물론 그런 도발에 당황할 단유가 아니었다. 손을 쳐냈더니 예상했던 말이 뒤따른다. “쳤냐?” 이제는 그냥 우습다. 뒤에서 눈을 빛내며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는 송곳니를 위해서라도 그들을 재미있게 해주어야겠다. ======================================= [557] 신속, 정확(1) 송곳니, 해찬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이어질 상황을 기다렸다. 성격이 꽤나 폭급한 동영이는 거의 매일 주먹질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친구였기 때문이다. 조금 전까지도 2학년 교실이 있는 복도 화장실에서 주먹질을 하다 나왔다. 뜨거워진 피가 아직 식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며 해찬은 입술을 혀로 핥았다. 처음 ‘범생이’를 봤을 때는 키도 크고 어깨도―자기만큼은 아니지만―벌어진 모습에 전교 1등을 독식한다던 소문 속의 그 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전교 1등을 한다는 놈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책상에 앉아 펜만 굴리느라 등은 굽고, 엉덩이는 퍼진 키 작은 땅딸보 안경쟁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지와 다르다고 해서 기죽을 동영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교과서를 펼치고 지식 대결을 할 것도 아닌 바에야, 힘으로 하는 싸움에서 지는 일은 별로 없었으니까. 손을 내밀었을 때, 그리고 그 손을 ‘겁도 없이’ 잡을 때는 살짝 놀라는 감도 있었고, 힘주어 잡았음에도 표정 변화 없이 밀리지 않던 모습에는 속으로 많이 놀랐지만 드러내진 않았다. 싸움에서 질 것 같진 않았으니까. “눈깔아, 새끼야.” 동영은 단유의 머리를 향해 손바닥을 휘둘렀다. **** 단유는 반걸음 물러서며 손바닥을 피했다. ‘어쭈?’라는 감탄사가 동영에게서 나올 때, 단유는 손을 등 뒤로 가져갔다. 다시 손을 앞으로 뻗었을 때, 그의 손에는 긴 칼이 들려 있었다. ‘칼?’ 뜬금없이 등장한 칼에 해찬은 잠깐 사고가 정지되는 기분을 맛봤다. 단유의 들린 긴 장검은 마치 애니메이션에서 일본 사무라이들이 들고 다니며 휘두르던 장검과 비슷하게 보였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번뜩이는 것을 보며 해찬은 생각했다. ‘저 긴 칼을 어떻게 숨기고 있었지? 저거 휘두르면 진짜 다칠 수 있겠는데? 영화 같은 데서는 저 칼에 맞아서 팔도 베이던데? 쟤는 검도도 배운 건가? 검도를 배웠다면 위험할 수도 있겠는데?’ 그러다 깨달았다. “씨발, 뭐야!” 칼이다. 위험한 살상 도구. 어떻게 휘둘러도 맞으면 큰 상처가 날 수 있는 도구다. 학교에서 저런 위험한(?) 도구를 어떻게 들고 왔고, 어떻게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지? 단유가 칼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고 머리 위로 들었을 때, 단유의 흔들림 없는 눈빛과 햇살에 번득이는 칼날을 보자, 그제야 위험을 자각했다. ‘피해야 돼!’ 어떻게 저 칼이 나타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 걸 고민하고 있을 여력도 없다. 지금은 당장 저 칼을 피해 달아나야 한다는 점만 깨달았다. “동영아, 피해!” 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해찬이 말을 뱉기 전에 칼날이 아래로 그어졌다. 무방비였던 동영은 칼을 막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칼날이 지나간 자리로 피가 뿌려졌다. 붉은 피가 안개처럼 뿜어지고 큰 덩치의 동영이 짚단 베어지듯 허물어졌다. “어….” 입을 벌리고 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살인. 지금껏 수많은 아이들을 친구들과 괴롭혀왔던 해찬이었지만, 고작해야 주먹으로 치거나 발로 차는 정도였지, 저런 도구를 쓴 적은 없었다. 친구 중에 괜히 커터칼의 레버를 밀었다 당기며 드르륵거리는 소리를 즐기는 녀석이 있긴 했지만, 걔가 진짜로 커터칼을 사람에게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감히 진검을 들어 사람을 베어버린 녀석이 있다. 전교 1등이라고 들었는데, 알고 보니 미친놈이다. 그리고 그 미친놈이 자신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피가 흘러내리는 검을 든 채로. “으아악!” 해찬은 의도하지 않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전속력으로, 있는 힘껏 발을 놀리며. 해찬은 우선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피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달아났지만, 일단 뒤를 쫓아오는 기색이 보이지 않자 다소의 안정감과 함께 다른 생각이 이어졌다. 누구에게든 달려가서 알려야 했다. 신성한 학교에서 살인이 났다고. 친한 친구가 웬 미친놈이 휘두른 칼에 죽었다고. 이 시점에서 똑똑한 아이라면, 당연히 교무실로 향해야 했다. 살인 사건은 고작 학생이 아이들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니까, 당연히 어른들에게 맡겨야 했다. 그리고 이 학교에서 어른은 선생님들이다. 선생님께 사실을 밝히고 사건이 커지지 않도록 해야 옳다. 해찬의 말대로 그 아이가 ‘미친놈’이라면 가끔 해외 토픽 기사에 나오듯 고등학교 내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해찬은 그렇게 똑똑한 아이가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이 시점에서 똑똑하고 안 하고는 문제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이성적이었다면 선생님께 가서 고해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눈앞에서 살인을 목격한 충격 때문에 이성적인 판단을 할 겨를이 없었던 해찬은 교무실 대신 2학년 화장실로 향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던 탓인지 화장실에는 해찬과 어울리던 학생들 무리가 여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큰일(?)을 치르고 난 뒤라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여운을 즐기고 있던 친구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나타난 해찬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동영이가 죽었어!” 해찬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에는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태연하게 담배를 흡입하는 아이도 있었다. “뭔 소린데.” 가운데 선 아이가 느린 어조로 물었다. “동영이가 죽었다니까!” “나 참. 언 놈이 째려보고 갔다면서 뒤쫓아가더니 갑자기 동영이가 죽어? 자살했냐?” “그게 아니라, 그 새끼가 칼로….” “칼?” “무슨 칼?” 태연하게 되묻는 아이들의 태도에 해찬은 답답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어 발을 동동 굴렀다. “씨발, 존나 긴 칼 있잖아? 사무라이들 쓰는 칼!” 해찬의 말에 무리의 뒤에서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놓고 담배를 물고 있던 아이 한 명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키득거렸다. 해찬은 왜 사람을 못 믿냐며 소리쳤고, 그 소리에 앞에서 이야기를 들어주던 친구는 해찬의 뺨을 때렸다. 화장실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에 웃음소리는 그쳤다. 멍한 얼굴로 뺨을 감싸 쥔 해찬에게 친구가 말했다. “씹새끼야. 왜 소릴 지르고 지랄이야.” 화장실은 교무실에서 먼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더구나 오늘은 2학년 아이들이 없기 때문에 이 층으로 선생님들이 오지도 않는다. 그래서 일을 치르기 좋은 곳이다. 하지만 해찬이처럼 소리를 질러대면, 지나가던 선생님이나 아니면 정신 빠진 학생들이 기웃거릴 수도 있다. “목소리 낮추고 천천히 말해봐라. 뭔데?” 핏기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묻는 친구의 말에 해찬은 떨리는 가슴을 꾹 참고 말했다. 자신들을 쳐다보던 놈을 쫓아갔더니 전교 1등 한다던 놈이었고, 동영이가 가볍게 교육을 시키려 하는데 갑자기 칼을 빼 들더니 동영을 베었다. 그리고 동영이 죽고 나서 자신은 달아났다, 는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무슨 칼?” “그, 있잖아. 사무라이들 쓰는 긴 칼.” “긴 칼?” “…응.” 친구가 피식 웃었다. “약 먹었냐?” “…….” “아니면 동영이랑 짰냐? 그렇게 말하면 재밌을 거라고 하든?” “…….” “머리 쓰는 꼬라지 하고는.” 해찬은 입술을 깨물고 뒤를 슬쩍 바라보았다. 복도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는 없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고 이번에는 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아이를 보았다. 모처럼 호구 정신 교육을 시킬 겸 화장실에 끌고 와서 주먹을 휘두르고 삥을 뜯던 중이었다. 평소와 달리, 오늘은 학교가 워낙 한산하고 여유로운 탓에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말하자면, 아이들 모두가 긴장하지 않던 중이다. 그런데 갑자기 동영이 ‘사무라이 칼’에 맞았다는 이야기를 믿을 수 있을까? 입장이 바뀐다면, 자신도 친구들처럼 웃고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자신은 두 눈으로 똑바로 봤고,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게다가 그 녀석은 살인의 현장에서 자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 자신의 얼굴도 기억할 것이다. 이대로는 자신이 위험하다. “씨발, 믿기 싫으면 믿지 마. 난 선생님들한테라도 알릴 거다.” 그 말에 아이들의 표정이 변했다. “…뭐냐, 얘.” “진짜일 리 없는데 진짜 같네?” 거짓말이라고 치부하기엔 절박해 보이는 해찬의 표정에 아이들은 ‘의심’을 갖게 되었다. 혹시, 라는 생각에 아이들이 머뭇거릴 때, 친구가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내던졌다. 느릿하게 앞꿈치로 꽁초를 비벼 끈 친구가 말했다. “가 보자.” “응.” 해찬이 돌아서서 안내하려 했다. “만약에 장난이면, 너 죽는다?” 친구의 음산한 협박에 해찬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졌다. “장난이면 내가 죽어줄게.” 라고 호기롭게 외치진 못하고, 침만 꿀꺽 삼키는 해찬이었다. “너희 둘은 여기 정리하고 있어.” 친구는 그렇게 지시를 내린 후 남은 3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해찬의 뒤를 따라갔다. 급한 마음과 달리 뒤에서 느긋하게 따라오는 아이들 때문에 해찬은 걸음을 빨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건물을 빠져나온 뒤에는 저도 모르게 느려지는 걸음에 친구가 해찬의 등을 밀치는 상황이 벌어졌다. “빨리 가, 새끼야.” “으응.” 엉뚱하지만, 괜히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친구인데, 말을 저렇게 하나 싶은 것이다. 하지만 티를 낼 순 없었다. 결국 쓰레기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해찬은 당황했다. 당황해서 말도 못하는 와중에 친구가 이를 꽉 깨물고 물었다. “동영이는?” “그, 그게….” 분명 이 자리였는데, 동영이 보이지 않았다. 친구는 조용한 쓰레기장을 둘러보다 해찬의 목덜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목덜미를 짓누르는 손에 담긴 흉포함에 해찬의 당황스러움은 배가 되었다. “자, 잠깐만.” “뭐냐, 너?” 그때 해찬을 구해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야, 이 개새끼야!”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더니, 죽은 줄 알았던 동영이 씩씩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어?” “이 새끼가 혼자 튀고 지랄이네?” “어?” “승현아, 꼭 잡고 있어라. 그 새끼.” 다가오는 동영을 본 승현은 해찬을 붙잡고 있는 대신, 힘을 줘 앞으로 밀었다. 해찬은 갑자기 밀리면서 바닥에 고꾸라졌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영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승현은 눈을 살짝 찌푸리며 동영에게 물었다. “뭐냐, 니들?” 승현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여긴 동영이 속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 단유가 자신의 손을 뿌리친 뒤에도 도망가기는커녕 눈을 맞대고 있자, 동영은 단유가 겁도 없이 까분다고 여겼다. “쳤냐?” 밀쳐진 손을 그대로 공중에 든 채로 동영은 단유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때, 동영의 등 뒤로 다급히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렸는데, 마침 건물을 돌아 등장하는 선생님이 보였다. 국어를 담당하는 지영호 선생님이었다. 그 전까지는 그저 사람 좋은 선생으로만 생각했었는데, 급식실 앞에서 보여준 모습을 보고 ‘꽤 성격이 있는’ 사람으로 인식이 변한 선생님이었다. 그걸 떠나서라도 선생님에게 들켜서 좋을 게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함께 있던 해찬이 허겁지겁 달아나는 모습을 보니, 자기도 달아나야겠다는 순간적으로 들었다. 해찬은 어찌나 빠른지, 동영이 겨우 몸을 돌려 달아나려는 순간인데, 그는 이미 저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그 뒤를 쫓아가려는데 선생님이 ‘야, 거기서!’라며 뛰어왔다. “아, 씨발.” 욕지거리를 입에서 굴리며 동영은 무거운 몸을 움직였다. 건물 모서리를 끼고 돌았더니 이미 해찬은 보이지 않았고, 지영호 선생님은 기이할 정도로 빨라 거의 뒤에 붙은 모양이었다. 놀란 동영은 혀를 깨물 뻔했다. 두꺼운 허벅지를 탓할 시간도 부족해 열심히 다리를 놀려 달아났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저 쫓아오는 선생님과 거리를 넓혀야 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뛰었다. 시원한 가을 날씨에도 금세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될 정도였다. 정신없이 뛰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니 쫓아오는 선생님이 감쪽같이 사라진 상태였다. ‘뭐야?’ 그제야 뜀박질을 멈추고 숨을 고른 동영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건물로 들어갔다. 그리고 화장실로 갔더니, 친구 둘만 남아서 호구 새끼를 씻기고 있었다. 정확히는 씻도록 명령하고 뒤에서 감시하는 쪽이었지만. “야, 다른 애들은?” 친구들에게서 어이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동영은 기가 찬다는 듯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린 뒤, 말도 안 되는 말로 친구들을 기만하고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일을 합리화시킨 해찬을 손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혼자 도망간 새끼는 친구도 아냐.’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동영이었다. 동영의 이야기를 들은 승현은 잠시 말없이 동영과 바닥에 쓰러진 해찬을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그 새끼는?” “누구?” 동영의 물음에 승현은 혀를 찼다. “전교 1등이라는 애.” “아, 걔.…어?” 동영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을 보며 승현이 재차 물었다. “몇 반인지 알아?” “어? 아까 말했는데?” 해찬이 끼어들었다. “9반, 9반이라고 그랬어.” 승현은 해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쓰러진 해찬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해찬의 눈에 떠오른 두려움을 보며 승현은 입꼬리를 올렸다. “병신 새끼야. 어쨌든 넌 도망친 거잖아. 친구 두고.” “그게 아니라….” 승현의 손바닥이 다시 해찬의 뺨을 때렸다. “그냥 닥치고 있어, 새끼야.” 별로 큰 힘을 들여 때리지는 않았지만, 이어지는 따귀 세례에 해찬의 뺨은 붉어졌다. 그리고 해찬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잠시 후, 승현이 일어섰다. “가자.” 한편, 4층 복도 창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단유는 고개를 돌리고 교실로 들어갔다. 선물을 받기 위해 몰려올 아이들에게 어떤 선물을 줘야 할지 곰곰이 생각하며. ======================================= [558] 신속, 정확(2) 자리로 돌아간 단유는 그들을 잊고, 잠시나마 책에 집중하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단유라도 그게 쉽게 될 리 없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무리지만, 지난 세월 동안 겪었던 여러 일들을 토대로 추리하면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며 쾌감을 얻는 이들이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들에게 어떤 선물을 주면 좋을까? 한편으로는 그런 이들에게 신경을 쏟아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고, 자신의 시간을 빼앗겨야 한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그런 생각이 이어지니 괜히 독한 선물을 주어서 괴롭히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뒷문이 열렸다. 3년간 함께 학교를 다녔지만, 이런 식으로 과중반을 찾아온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문을 열었을 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는 괜히 허탈함도 느끼는 승현이었다. ‘똑같네.’ 다른 일반반 교실과 다를 바 없었다. 대단히 특수한 아이들만 모아놓은 교실이라 뭔가 다를 거라고 예상했지만, 편견이었을 뿐이다. 감상은 거기까지. 승현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누구?” 앞뒤 다 자른 말이었지만, 동영은 찰떡같이 알아듣고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 끝에 시선을 마주한 아이가 보였다. 전교 1등처럼 보이지 않더라는 동영의 말처럼, 꽤 몸이 좋아 보이는 아이가 자신들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승현은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가슴에 붙은 명찰을 본 후 물었다. “네가 김단유?” 단유 역시 승현의 명찰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그래.” 대담한 녀석, 이라는 게 승현이 단유를 본 첫인상이었다. 뭐, 대담하든 쫄아있든 상관은 없다. 어차피 올라온 목적은 하나였으니까. “미안하다.” 승현의 말에 당황한 건 뒤에 선 아이들이었다. 특히 동영은 한껏 어깨에 힘을 주고 있었다. 만약에 엉뚱한 말로 심기를 건드린다 싶으면 승현이 말리기도 전에 뛰쳐나가서 아구창을 날려버리겠노라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승현은 그 녀석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동영은 순간 자신이 들은 게 뭐였나 싶은 생각에 혼란스러웠다. 동영뿐만 아니라 뒤따라온 패거리들 역시 혼란스러운 눈으로 승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단유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과 다르게 단유의 혼란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내 친구들이 너한테 괜히 시비를 걸었다고 하더라. 아직 철이 덜 든 녀석들이라 그렇다. 이해해라.” 승현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야.” “응?” “너도 사과해.” “…….” 씨발, 내가 왜 사과를 해야 하는데, 라는 말이 목구멍을 뚫고 나올 것 같았지만 차마 승현에게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불만이 없지는 않아 얼굴을 붉히는데, 승현이 눈을 부라렸다. 검은 동공 사이로 핏빛이 일렁이는 기분에 동영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미안하다.” “공손하게 해.” “씨…”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은데, 그래도 승현에게 대들 순 없었다. “미, 안하다. 시비 걸어서.” 지금 이 교실이 가득 차지 않았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늦은 시간 야자를 하기 위해 교실에 남은 아이들이 더러 있었고, 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는 동영은 쪽팔려 죽을 거 같았다. 그러나 그런 동영을 배려할 마음이 없는 승현은 다시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공부하는데 방해한 거 같아서 미안하다.” 대답을 기다리는 모양새라 단유도 입을 열었다. “괜찮아.” “사과 받아주냐?” “그래.” “알겠다. 열심히 해라.” 뭘 열심히 하란 건지 목적어는 빠졌지만, 승현은 할 말이 끝났다는 듯 돌아섰다. 그리고 동영의 어깨를 툭 치며 교실을 나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등장만큼이나 시크하게 퇴장하는 무리들을 보며 교실에 남아 있던 아이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패거리가 교실에서 멀어지는 소리를 확인한 후, 정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단유에게로 달려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단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원은 그런 단유를 잠시 바라보다가, 아무래도 지금은 이야기를 나눌 타이밍이 아니라는 판단에 슬그머니 몸을 돌렸다. 책에 시선을 두고 있지만, 아까보다 더 혼란스러운 느낌이었다. ‘이게 뭐지?’ 처음 승현이라는 아이가 나타났을 때, 얼굴과 눈빛에서 드러나는 잔인함을 읽었다. 주위를 공포로 억누르며 힘으로 약한 자들을 괴롭히는 악당의 전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악당이 다가와 건넨 첫 마디가 사과라니. 당연히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말 단유를 혼란스럽게 만든 점은 그 말을 던지는 순간에 보인 승현의 진심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사과의 말을 건넸고, 그 말 속에 다른 흑심은 보이지 않았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단유의 판단으로는 그랬다. 이제껏 만났던, 타인을 죄책감 없이 괴롭히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여 인정받으려 하는 아이들 중에 승현과 같은 부류는 없었으니까. 비록 그의 사과가 반쯤은 강요하는 어투이긴 했으나, 사과를 받아주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는 속내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사과를 안 받아주면 어쩔 수 없지, 라는 생각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승현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책에 시선을 두고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글이 머릿속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단유가 고개를 들었더니 슬쩍슬쩍 훔쳐보는 시선들이 화들짝 놀라며 안 본 척,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아이들이 보였다. 의자를 뒤로 빼며 일어서자 들려온 소음에 고개를 돌려 호기심을 보이는 아이들도 단유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거란 걸 알 수 있었다. 사정은 잘 모르지만, 조금 전과 같은 상황에서, 패거리를 데리고 온 아이가 순순히 사과를 하고 사라진다? 마치 양자(proton) 충돌 실험에서 양자가 서로 부딪혔음에도 아무런 에너지의 폭발도 없는 현상을 발견한 것과 같지 않을까? 단유가 교실을 나간 뒤, 아이들은 수군대다가 정원에게로 향했다. 정원은 단유와 자유롭게 소통하는 몇 안 되는, 아니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야, 무슨 일인데?” “나도 몰라.” “단유, 쟤들이랑 싸운 거 아냐?” “말이 되냐? 단유가 싸우게?” “그럼 무슨 일인데?” 정원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한 가지는 알겠어.” “뭔데?” “단유가 사과받을 일을 쟤네들이 했고, 쟤들은 사과한 거지.” “…바보냐?”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시나리오를 추리하기 시작했다. 물리학, 화학, 생명과학, 지구과학 등의 과목에서 뛰어난 사고력을 뽐내는 아이들이지만, 방금전 관찰한 상황에 대한 합리적인 추측은 쉽지 않았다. 충분한 조건들이 주어진 상황에서 결과를 예측하는 건 전혀 과학적이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늘 같은 문제집을 반복해 풀면서 식상함에 질려있던 아이들에게는 흥미롭기 그지없어, 마치 세기의 난제를 풀 듯 집단지성을 발휘해서 추리를 이어나갔다. **** 다른 친구들에게 가방을 갖고 나오라고 문자를 보낸 후, 아이들은 곧장 학교를 빠져나갔다. 나가는 동안에도 아이들은 별다른 말을 붙이지 않았다. 하교 시간이 지난 터라 학교 앞은 한산했다. 승현은 터벅터벅 걸어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그래서 자주 애용하는 옹벽 옆 골목으로 향했다. “야, 김승현.” 한참을 따라가던 동영이 승현을 불렀다. 승현은 슬쩍 고개를 기울여 동영을 쳐다보니, 동영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아까 뭐야?” 승현은 무심한 눈으로 동영을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그러나 더 걸어가진 않고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길게 빨아들인 뒤, 고개를 들고 하늘을 향해 소리 없이 연기를 뿜어냈다. 마치 그게 자신의 대답이란 듯이. “야, 김승현. 솔직히 말해서 아까는 너무 심했던 거 아냐? 씨발, 내일부터 애들이 졸라게 씹어댈 거 아냐? 내 자존심도 생각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승현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래서 뭐?” 턱을 치켜들고 동영을 바라보는 승현의 눈빛은 여전히 무심했고, 그래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좀 그렇잖아. 일단은…그래도 친구니까, 그래서 하란 대로 했지만 그래도 설명은 좀 해줘야 하지 않냐?” “설명하면, 이해할 순 있겠냐?” “뭐?” 동영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뒤에 서서 관망하던 친구들 중의 한 명이 얼른 다가와 동영의 어깨를 짚으며 달랬다. “야, 야. 왜 소리를 높이고 그래. 진정하고 들어보자.” “놔봐, 새끼야.” 거칠게 친구의 손을 뿌리친 동영은 승현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방금 뭐냐, 그 말은?” 승현은 침을 뱉은 뒤, 동영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뭐?” “…….” “이제 내가 만만해 보이냐?” “…….” 굳은 얼굴의 동영을 노려보던 승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니가 그래서 안 되는 거야.” “뭐?” 동영의 뺨을 툭툭 두드리며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 승현이었다. “이렇게 덤빌 사람 구분 못 하고 나대니까 좆밥인거야, 새끼야.” 부들부들 떠는 동영을 보면서도 입가에 지어진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동영아. 우리 친구잖냐. 그치?” “…….” “친구 말 잘 들어. 이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충고야.” 아이들은 승현이 동영을 놀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영은 이성을 잃고 금방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승현을 눈앞에서 바라보는 동영은 그럴 수 없었다. 질끈 눈을 감는 동영을 보며 승현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 단유는 수도꼭지 아래 쏟아지는 물줄기에 손을 집어넣고, 손가락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씻었다. 이후 페이퍼타올로 물기 하나 남아 있지 않도록 깨끗이 닦아냈다. 휴지를 한 손으로 꾸깃 구겨 쓰레기통에 집어넣은 뒤, 손을 바라보았다. 유난히 창백해 보이는 손가락과 손바닥을 들여다보던 단유는 고개를 들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서 담담한 얼굴을 드러낸 그 사람은 타인에 대한 신뢰가 극히 낮다. 그가 남몰래 가진 비밀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나, 본질적으로 그의 그런 생각은 지난 세월 동안 겪은 일들이 바탕이 되고 있다. 그가 만났던 많은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악의를 가지고 단유를 대하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그런 경계심을 만들었다. 한때는 타인을 믿고 함께 협동하여 결과를 만들어내는 일에 가슴 뭉클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살면서 느낀 건, 그런 경우가 매우 특수한 상황에서나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축구장이라는 특정 공간에서는 그 공간에서만 허용되는 특수한 규칙과 시스템으로 인해 타인―동료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가능하다. 하지만 일반적인 공간에서 그런 신뢰가 가능한지 따져보면 단유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과중반은, 그런 점에서 단유에게 안락함을 주었다. 학교의 규칙을 일부러 위반하려 드는 아이들은 드물고, 주변 아이들에게 악의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비교적 경계심이 옅어졌던 3년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단유는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 신뢰하지 않았고, 거리를 두었다. 사교성이 부족한, 이라는 정원에 대한 평가는 사실 단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겠다. 그런 모습에 단유가 정원을 받아들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오늘의 일은 단유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사람을 신뢰하냐, 안 하냐의 문제가 아니다. 승현이 나쁜 아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껏 단유가 가졌던, 사람에 대한 자신의 판단에 혼란이 온 것이다. 선입견 없이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단유의 장점이고 특기다. 사물뿐만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오늘 승현을 통해 단유는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게 되었다. 단유에게 말을 걸던 승현은 분명 약자를 괴롭히면서도 그 약자에게 어떤 죄책감도 가지지 않는, 폭력 서클의 일원이었다. 그런 승현이 단유에게 ‘사과’를 했다. 엄밀히 말하면 친구의 잘못을 사과시키기 위해 온 것이지만, 어쨌든 이해하기 힘든 일임에는 분명했다. 미안해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저 친구의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으며, 자신이 대표로 상황을 종결시키겠다는 의지 정도가 그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던 감정이었다. “왜?” 왜 그는 단유에게 와서 그런 말을 한 걸까? 강자에게 약하고 강자에게 강한 타입이라고 해석하기도 어렵다. 단유는, 적어도 승현의 기준에서는 강자가 아니었으니까. 가정해보면, 굳이 와서 사과를 할 필요도 없다. 그저 모른 척하고 지나가도 상관없는 일이다. 자신에게 오는 대신 자기들 갈 길 가면 되니까. 이제껏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그들과 단유가 다시 얼굴을 맞댈 일은 별로 없으니까. 그럼에도 그는 단유에게 와서 ‘미안하다’라는 말을 던졌다. 왜? ======================================= [559] 신속, 정확(3) 동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준 승현은 뒤에 선 아이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야, 술이나 한잔하러 갈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승현의 태도에 아이들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등 돌리고 서 있는 동영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지 못한 상황에서 대뜸 승현의 제안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탓이었다. “응? 왜 대답이 없어?” 하지만 당장 눈을 맞대고 선 승현의 얼굴을 보며 버티는 건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 돈도 생겼으니까 가자.” 한 친구가 동조하자, 누구랄 거 없이 다들 가자는 분위기가 되었다. 승현은 코웃음을 짓고는 동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질끈 눈을 감고 있는 녀석이 귀엽다. “가자.” 승현은 동영에게서 떨어졌다. 동영을 지나 친구들 무리에 섞였다. 그제야 동영이 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의 승현을 보며 동영은 이를 꽉 깨물었다. 만약 이게 교훈이라면 제대로 알겠다. 이 세상에는 힘만으로는 안 되는 것도 있다는 걸. 타고난 힘과 체력이 좋고, 빈번한 싸움 속에서 남에게 쉽게 지지 않을 정도의 기술도 체득했지만, 승현과는 그런 힘 싸움이 의미 없다. “야, 동영아. 빨리 와.” 친구 중 한 명이 동명을 챙겼다. “됐어, 새끼야.” 동영은 친구의 호의를 거절했다. 호의가 진짜 호의로 느껴지지 않은 까닭이다. 친구의 얼굴에 설핏 당황스러워하는 감정이 떠오르지만 동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걔나 자신이나 비슷한 처진데 서로 동정해준다고 좋아질 건 없다. ****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온 단유는 가방을 던져두고 빈 거실로 나왔다. 호빵이 킁킁대며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알았어.” 싱크대 아래에 넣어두었던 사료를 꺼내 그릇에 소복이 담아 내주고 조금밖에 남지 않은 물통에도 물을 가득 채웠다. 수고했다는 한마디 말도 없이 사료에 코를 박은 호빵을 보다가 편하게 식사할 수 있게끔 자리를 피해주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꺼진 TV 화면을 보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피스텔에서 살 때보다 조금 더 넓어진 거실이고, 인테리어도 조금씩 바뀌었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그래도 3년을 살았더니 이제는 오피스텔에서 살 때보다 더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깥이 훤히 보이는 전면 창에는 하은이 이사 오던 날 공들여 준비했다던 하얀 커튼이 창 양쪽에 얌전히 늘어져 있었고, 그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에 TV 위에 걸어둔 액자가 눈부시게 빛이 났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하은과 명수 그리고 단유가 함께 찍은 ‘가족 사진’이었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분명 많은 게 달라졌다. 하지만 동시에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었다. 위치가 바뀌거나 할지언정 TV나 소파, 대형 가구들은 예전에 쓰던 것들을 계속 쓰고 있었다. 익숙한 것들이다. 하지만 이 익숙함 속에서 단유는 한 사람의 그림자를 느낀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신뢰를 근본적으로 고민하게 만든 사람의 그림자다. 그는 결코 나쁜 사람도 아니었고,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사람이다. 명수와 헤어질 뻔했던 것을 막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함께 살 수 있도록 금전적 지원까지 해주었다. 그뿐인가? 그는 하은을 두 아이 곁에 머물 수 있게 해주었다. 그에게도 사정은 있었을 것이다. 단유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두 사람을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방적이었다. 일방적이었기 때문에 두 아이는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 내심 힘든 시간을 겪어야 했다. 명수도 그랬고, 단유도 그랬다. 쾌활했던 명수는 한동안 더 웃으려고 노력했고, 단유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똑같은 일상을 살려고 했다. 평소처럼 공부하고,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고, 명수와 목소리를 낮추어 서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다. 당시 느꼈던 감정은 무뎌졌고, 우울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의 흔적과 그림자는 이 집 곳곳에 배어있다. 이사를 왔어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이런 집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단유는 독립을 하게 된다면, 그림자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렇게 된다면, 사람을 신뢰할 수 있게 될까? ‘비약이 심하잖아.’ 단유는 스스로의 마음을 꾸짖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늘의 일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냥 넘길 순 없다.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한 계기가 되었다. 판단 착오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여전히 공부가 부족한 것이리라. **** “다녀왔습니다.” 저녁 늦게 승현은 집으로 들어갔다. 하얀 앞치마를 두른 아주머니가 고개를 내밀고 승현에게 인사를 건넸다. “왔어요?” “네.” 승현은 고개를 돌려 닫힌 방문을 바라보았다. 아주머니가 낮은 목소리로 일렀다. “안에 계실 거예요.” 승현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금고처럼 닫힌 방 앞으로 다가갔다. 짧게 숨을 토해내고, 천천히 문을 두드렸다. 안에선 대답 대신 인기척으로 회답했다. 승현은 조심스럽게 얼굴이 온전히 보일 정도까지만 문을 열었다. “저 왔습니다.” 방 가운데 커다란 책상을 두고 그 뒤에 앉아 책을 보던 중년인이 안경 위로 시선을 들어 승현을 보았다. “늦었다.” “죄송합니다.” “밥은?” “대충 먹었어요.” 중년인은 승현을 가만히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밥 먹고 자라. 빈속에 자면 아침에 힘들 거다.” “네, 그럴게요.” 승현은 할 말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 중년인에게 고개를 숙이고 문을 닫으려 했다. “적당히 해라.” 승현은 멈칫했다. “네.” 승현의 대답을 들은 중년인은 다시 시선을 책에 두었다.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문을 닫고 나오는 승현에게 주방에 있던 아주머니가 손짓을 했다. “금방 차려줄게요.” 먹지 않겠다고 할 수 없었다. 승현이 식탁으로 향하자, 아주머니는 미리 준비했던지 차가운 물부터 주었다. 잔을 받아 한 번에 다 들이켰다. 시원한 냉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던 술기운을 조금 잠재워주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는 정갈하게 담은 반찬과 밥을 내어주고 버섯들깨탕을 국그릇에 담아 내려놓았다. “아버지께서 저녁에 들깨탕을 드시고 싶다 하셨거든.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승현은 숟가락을 들어 탕을 한 입 먹었다. 그리고 이어 밥을 한술 뜨며 식사를 시작했다. 승현의 식사는 조용했다. 아주머니도 승현에게 말을 거는 대신, 퇴근 준비를 위해 다용도실로 들어가는 모양새였다. 식탁에 홀로 앉아 식사하는 승현은 집안에 내려앉은 침묵을 깨뜨리면 안 된다는 암묵적인 룰을 지키기 위해서 더욱 조용히 식사를 이어나갔다. 학교 급식실에서 밥을 먹을 때는 그래도 친구들의 재롱을 보며 즐겁게 식사를 하지만, 집에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했다가는 아버지의 묵직한 시선 아래 무언의 추궁을 받게 될 것이다. 식사를 끝내니 자연스럽게 아주머니가 주방으로 들어왔다. 역시 그냥 자리를 피해주려 했던 것 같았다. “그냥 둬요.” “네.” 이 집에서 승현은 절대 학교에서처럼 행동할 수 없었다. 일하는 아주머니에게도 깍듯이, 예의를 다해야 한다. “옷은 밖에 내놔요. 내가 세탁해 놓을게요.” “네.” 술 냄새 풀풀 풍기는 옷이니 씻지 않을 수 없다. 술자리에서 기분이 격해진 덕분에 좀 활달하게 마셨더니 술이나 안주 따위가 옷에 좀 묻기도 했다. 방에 들어가 샤워를 한 후, 침대에 몸을 던졌다. 푹신한 침대 스프링이 승현의 몸을 받아주었다. 실크로 된 겹이불이 몸에 감기며, 그제야 안락함을 느낀 승현은 여전히 뜨거움 입김을 길게 뿜어냈다. 밥을 먹었다고 해서 술이 금방 깰 리도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취한 모습을 집에서 그대로 드러낼 수 없으니, 눈에 힘을 가득 주고 정신력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이러니 술을 마셔도 즐겁지 않다. 몸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니 눈이 부시다. 불을 끄러 가야 하는데 귀찮다. 팔을 들어 올려 눈 위에 얹었더니 조금 낫다. 이대로 잠들고 싶었다. 승현은 꿈을 꾸었다. 아주 오래전, 자신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의 모습이었다. 당시에도 이 집에 살고 있었다. 당시에도 이렇게 조용히 지냈었다. 거실을 오갈 때, 방문을 열 때도 조심스러웠던 시기여서 승현은 되도록 집에서는 방 밖으로 나가질 않았다. 초등학생이 방 안에서 할 게 뭐 있겠는가. 책 읽는 취미라도 있으면 지금 이러고 있진 않았겠지. 승현은 대신 컴퓨터를 했다. 인터넷을 하면서 만화도 보고, 게임도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어떤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요즘 핫하다면서 링크된 영상을 눌렀더니, 그 영상에 자기 또래의 한 아이가 등장했다. 잘 생긴 아이였다. 이름도 잘 모르는 걸그룹과 함께 인터넷 방송을 했는데, 걸그룹보다 아이가 더 주목을 받는다며 소개글이 달려있었다. 영상을 본 후, 아래 댓글을 훑다 보니 아이의 신상이 소개된 댓글이 있었다. ‘고아.’ 잘 생긴 아이는 고아였다. 그리고 한때 SNS에 스타처럼 인식되기도 했었다고 했다. 몇 년 전 사진이라며 링크된 글을 찾아가 보기도 했다. 신기했다. 같은 고아인데, 누구는 저렇게 인터넷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누구는 집에서 옴짝달싹도 못 하는 신세다. 누구는 입양되어서 남부럽지 않은 집에서 살게 되었지만, 누구는 저 나이가 되도록 입양도 못 하고 보육원에서 살고 있단다. 그런데 저 아이는 유명―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데뷔를 한―걸그룹과 촬영을 하며 행복해 보이는데, 자신은 반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지도 못하고 외로움을 느낀다. 부러웠다. ‘김단유’란 아이가. 몇 년 뒤, 중학교에 올라올 무렵 승현은 다시 ‘김단유’란 아이의 이름을 듣게 되었다. 이제는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해서 연기한다. 방 안에서 그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 봤는지 모른다. ‘만약 저렇게 살 수 있는 것이라면, 입양되지 않는 게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감 가득해 보이는 눈빛이 부럽고 가지고 싶었다. 중학교 1학년 생활을 하던 중에 또다시 김단유란 이름을 들었다. 인터넷상에서 떠도는 영상을 본 이들 중에서 김단유가 예전에 유명했던 김단유 임을 모르는 이도 있었지만, 승현은 그의 과거를 모두 기억했다. 어떤 보육원에서 자랐고, 어떤 도서관에서 모델도 했으며, 어떤 걸그룹과 뮤직비디오도 함께 찍으며 친분이 있다고 소문이 났었다는 것까지 모두 기억하는 승현은, 단유의 새로운 영상에 눈을 빛냈다. 그는 승현이 알고 있는 이들 중 가장 따라 하고 싶은 이였다. 특히 같은 고아 출신이라는 점에서 더 마음이 끌렸다. 그 후, 승현은 변하기 시작했다. **** 승현과 단유는 이후로 볼 일이 없었다. 승현도 딱히 단유를 다시 보려고 하지 않았고, 단유도 교실 밖으로 나서지 않으니 두 사람이 다시 대면할 일은 별로 없었다. 급식실에서 우연히 시선이 맞을 때도 있었지만, 결코 시선이 오래 머무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동영은 달랐다. 과중반에서의 일은 넘고 넘어 일반 반에게까지 알려졌다. 누가 소문을 퍼뜨렸냐고 따질 수도 없었다. 의심 가는 이는 과중반에 남아 있던, 하지만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이들 몇몇일 텐데, 그들을 찾아내기 위해 다시 과중반에 갈 순 없는 일이었다. 간다고 하더라도 찾을 수 있을지는 둘째치고, 승현이 곁에 있는 상황에서는 독자적으로 행동하기가 어려웠다. ‘어쩌면….’ 범인이 그들이 아닌 자신의 친구 중에 있을 수도 있다. 동영이 전교 1등한테 시비 털다 좆됐다, 는 식으로 포장해서 안주 삼아 떠들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고도 남을 일이었다. 진심으로 사과한 일도 아닌데, 깜도 안 되는 애한테 ‘좆됐다’는 식으로 시선을 받는 건 불쾌했다. 그러다 보니, 급식실이나 복도에서 우연히 단유의 얼굴을 보게 되면 얼굴을 구기며 노려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단유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그게 자신을 우습게 보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전교 1등이란 놈에게 어떤 배경이 있어서 자신이 함부로 덤벼들면 안 되는지는 모르겠다. 승현의 배경 정도라면 자신이 함부로 대들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그런 승현이 대신 사과를 할 정도라면 전교 1등에게도 무시 못 할 배경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승현의 배경은 자신의 집안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배경이기 때문에 극한의 인내심으로 참을 뿐이다. 그러나 전교 1등은? 그녀석에게도 그런 배경이 있을까? 정말? 동영은 식판을 들고 지나가는 단유를 노려보았다. 아이들의 수군거림이 마치 자신을 두고 하는 이야기같다. 저기서 웃고 있는 녀석들은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고 비웃는 것 같다. 동영은 이를 악물었다. ======================================= [560] 신속, 정확(4) 억울한 점도 있다. 막말로 동영은 단유를 때린 적이 없다. 시비가 붙은 건 사실이지만, 곧 선생님이 나타나면서 자기만 죽어라 달아났을 뿐이다. 그런데, 자신은 승현에게 개처럼 끌려가 짖으란다고 짖은 꼴이다. 개 같은 기분이다. 단유는 자신을 향한 악의의 당사자를 확인 후 시선을 피했다. 미친개 같지만 무서워할 필요가 없는 사냥개였다. 저 덩치는, 적어도, 눈앞에서 맞주먹을 교환할 녀석이긴 해도 뒤에서 음흉하게 칼을 빼 들고 다가올 녀석은 아니었으니까. ‘아닐 수도 있지.’ 지금은 자신의 눈을 믿기 힘들었다. 확신을 갖지 못하는 건, 역시 그 옆에서 승현 때문이다. 아는 척하지 않는 건 고맙지만, 그 저의를 파악하기 힘들다. 그냥 이대로 졸업 때까지 모른 척해준다면야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단유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단유가 남들이 알지 못하는 능력이 있다고 한들, 숨죽이고 다가서는 강도의 칼을 피할 능력까진 없으니까. **** 2학기 들어 벌써 세 번째 모의고사다. 시험 하나 끝내고 숨돌릴 틈도 없이 시작되는 모의고사에 아이들은 모두 진이 빠진 얼굴이다. 하지만 쓰러지기엔 이르다. 한 달 뒤, 대망의 그 날이 오기 때문이다. 마치 제3차 대전이 시작될 날을 기다리는 기분이다. 사실 두려움은 더 크다. 단 하루, 단 몇 시간이 전체 인생을 좌우하게 된다고 생각하면 결코 웃을 수 없다. 만반의 준비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모든 것이 짜증 나는 상황만 이어질 뿐이었다. 그 와중에 모의고사는 테스트라기보다는 ‘네 미래가 이렇게 암울할 거야’라고 미리 알려주기 위한 것으로만 느껴진다. 수능을 포기한 이들이라고 마음 편한 것은 아니었다. OMR 카드를 받자마자 1분 컷으로 마킹을 끝내고 자리에 누우면, 편하게 잠들 것 같지만 사실 그 아이들이야말로 인생의 회의를 절실하게 느끼는 중이었다. 누군들 자신의 인생을 똥통에 집어넣고 편하게 웃을 수 있겠는가. 조금만 더 머리가 좋았다면, 조금만 더 열심히 했다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후회로 가득할지도 모를 얼굴을 감추기 위해 책상 위에 얼굴을 파묻고 시험이 끝날 때까지 눈을 감는다. 종이 울리고 ‘손 머리 위로’라는 선생님의 지시에 엉기적거리며 따르는 척, 선생님이 나가면 시끌해진 교실을 조용히 빠져나가 화장실에서 한숨을 돌리고,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돌아와 자리에 비스듬히 앉아서 교실 속 아이들을 관망하듯 바라보다가 종이 치면 또다시 엎드릴 준비를 한다. 과중반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다. 물론 일반계에 비하면 더 확실한 비전과 목표를 가진 이들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수능을 포기한 이가 없진 않았다. 처음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는 자신도 있었고, 부모님과 학원에서 과중반 진학이 대학 진학에 도움이 될 거라고, ‘넌 잘할 수 있을 거야’라고 자신감을 부추겼다. 하지만 상대평가에 따라 순위가 나뉘면서 자신감은 떨어진다. 멘탈은 조금씩 금이 가고, 일반계에 비해 ‘똑똑한’ 이라는 수식어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잠깐 정신을 놓으면 진도를 따라가기 힘들고, 자신은 아무리 계산하고 이해해보려 해도 되지 않는 걸, 옆자리 아이들은 금방금방 이해하고 문제를 풀이해낸다. 중학교 때 잘했다는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2학년 때 일반반으로 반이동을 신청해서 떠난 친구가 없진 않았다. 그러나 원한다고 다 이동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안 돼! 넌 할 수 있어!” 고민 끝에 털어놓는 자녀의 요청을 부모님은 거절했고, 대신 더 많은 학원과 인강과 과외를 물색하여 자녀의 성적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부모님들이라고 답답하지 않은 건 아니다. 어릴 때 똘똘하고 영특하다고 칭찬받던 자녀가, 성적표만 받아오면 자신감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런 아이들에게 단유는 특별하다. 학원도 다니지 않고, 과외를 받는 것 같지도 않다. 솔직히 과외를 받을 필요가 없어 보이는 학생이다. 애초에 모르는 게 없는 아이 같은데. “단유야, 이거 한 번 풀어봐 줘.” “이건, 이쪽 방정식에 0에 수렴한다는 것만 알면 되네. 0분의 0이 되니까 이 식을 미분하면 간단하게 답이 나오겠지?” “단유야 이건?” “거울상 이성질체잖아? 네 개의 서로 다른 치환기와 결합 되는 거.” 머뭇거림도 없이, 마치 자판기처럼 버튼을 누르면 답이 툭 하고 나온다. 그런 단유였기에 이제껏 전교 1등이라는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처음에 그를 잘 모를 때야 한 번 이겨보겠노라고 밤을 새웠지만, 지금은 그를 이기겠다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신계에 있을 애가 인간계에서 같이 어울리고 있는 거잖아.” “불쌍한 중생들을 굽어살피소서.” 그러나 지금 단유는 그런 모의고사가 별로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솔직히 모의고사가 그의 인생에 중요한 의미를 차지한다고 생각하지 않은 까닭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수능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점이다. 어찌 보면 배부른 소리다. 또래 아이들이 수능에서 1점이라도 더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을 보면, 감히 그 앞에서 ‘수능 따위’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수능이라는 게 이제까지 배운 걸 점검하고 상위의 학문을 배울 능력이 되는지를 검증한다는 차원의 시험이 아닌, 그저 대학 진학을 위한 선발자료로서의 가치만을 지니며 이를 위한 갖가지 꼼수를 학교와 학원에서 배우는 현실에서 단유의 지향점은 다른 이들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 생각은 대학 진학 계획에도 영향을 미쳤다. 모의고사가 끝난 후, 남은 시험은 오직 수능뿐인 시점에서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멘탈 관리를 위해 가끔 상담하는 것 외에는 아이들을 특별히 통제하지 않았다. 민감한 시기에 아이들을 잘못 건드려 분란을 만들기 싫은 까닭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면담도 그런 면에서 선생님들에게는 나름 스트레스였다. 9반 담임은 더욱 특별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남들은 ‘반에 전교 1등이 있으니 좋겠어요’라거나 ‘수능 결과 나오고 인터뷰하는 거 아냐’라는 속 편한 소리나 하고 있다. 하지만 9반 담임은 바로 그 1등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중이었다. “정말 대학 안 가려고?” 도대체 모의고사에서 만점씩이나 받는 인간이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말하면 어떤 충고나 상담을 해줘야 하는가? 물론 본 시험에서 그 점수가 그대로 나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남들은 설레발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3학년에 올라온 이후의 모든 모의고사에서 상위 0.01%의 성적을 거둔 이의 수능 성적이 좋으리란 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왜 대학을 가지 않겠다는 거니?” 이제 수능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인데, 돌연 대학 진학에 뜻이 없다고 말하는 건 그냥 넘길 수 없는 문제였다. 담임의 문제가 아니라 학교의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조금 과장하면, 학생에 대한 지도에 문제가 있었다고 문책을 받을 수도 있다. “대학에서 제가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서요.” “어떤 공부를 하고 싶은데? 사실 대학에 가면 비록 전공을 정하긴 하지만, 타 전공의 수업도 원한다면 들을 수 있단다. 시간의 문제일 뿐이지 원하는 전공을 수강해서 듣는 게 가능해. 그뿐 아니라, 복수전공이나 부전공 같은 시스템이 지원되면 다양한 전공들을 배우는 것도 가능하고.” 담임은 책상에 펼쳐둔 교무 수첩에 슬쩍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단유에 대한 기록이 간단하게 적혀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빼고 대략적인 것만. 그 내용만으로 단유라는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과목에 강점을 보이고 어떤 과목에 약점을 보이는지가 적혀 있다. 강점은 역시 이과계열 과목이고 특히 수학과 물리, 화학에 특히 강하다고 적혀 있다. 사실 큰 의미는 없다. 약한 과목이라고 해도, 그것은 해당 과목 선생님들의 첨언에 의한 것일 뿐, 성적만 보자면 언제나 만점인 단유였으니까. 따지고 보면 그것이 바로 성적이라는 수치의 맹점이다. 음악을 잘 못 하고, 미술을 잘 모르지만, 시험이라는 정형화된 테스트를 통해 점수를 내면 마치 다재다능한 인간인 것 마냥 묘사되는 상황이니까. “솔직히 이 점수면, 서울대 의대도 문제는 아닐 것 같은데.” “선생님.” “응?” “고등학교 내내 의학과 관련해서 제대로 배운 게 없는데, 대학교에 가서 의학을 배워야 하나요?” “뭐?” 단유의 엉뚱한 질문에 선생님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리고 똑똑한 애가 이런 것도 모르냐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고등학교 때까지는 대학교에서 배울 고등 학문들을 배울 준비를 하는 거야. 법대도, 의대도 마찬가지 아니니? 법학, 의학, 경제학 이런 전공들이 모두 그래.” 잠시 단유를 보다 선생님은 말을 이었다. “사실 너라면, 그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겠다. 고등학교 과정의 수업들이 너무 쉬웠겠지, 너한테는.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에게는 그것이 대학에서 배울 어려운 전공과목들을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이 되냐, 안 되냐를 판가름하는 것이거든. 수능은 그걸 판별하기 위한 시험이고. 이를 통해서 대학은 이 학생이 대학에 들어와서 수업을 들을 준비가 되었는지를 분별하는 거야.” 단유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여 선생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있음을 보였다. “너 물리학 좋아하잖니? 물리학 선생님이 칭찬을 많이 하더라. 호기심도 많고 결과를 추정하고 실험을 진행하는 실력이 남다르다고. 그렇다면 물리학과에 가서 깊이 있는 공부를 하는 것도 좋지 않겠니? 양자역학이니, 전자기학이니 하는 거. 선생님은 잘 모르지만, 이런 분야도 굉장히 고도의 학문이고 연구의 필요성도 많은 분야라 너처럼 진취적인 학생이라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본인이 진취적이라는 사실을 처음 깨달은 단유였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그리고 요즘은 이공계 쪽으로 가야 취업이 잘 된다고 하잖니? 국내에도 여러 연구소가 있지만, 재능만 있다면 해외의 유명 연구소나 기업으로도 취업할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연구를 할 수도 있다고 하더라.” 어느 대학의 팜플렛에 나오는 홍보 문구 같은 선생님의 조언에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열심히 설득한 것 같은데 단유에게서 나온 답변은 심심하다. 선생님은 조금만 더 설득해볼까 하다가 일단은 시간을 두고 하기로 했다. “일단 수능은 볼 거지?” “네.” 그렇다면 다행이다. “그래, 일단 수능을 보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자. 서둘러서 결정할 일은 아니니까. 수능 끝나고 다시 선생님이랑 이야기를 나눠보자.” “네, 선생님.” 단유가 일어나 고개를 숙여 보이곤 돌아섰다. 교무실을 나가는 단유를 보며 선생님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서린 한숨이었다. “왜 그래요? 선생님.” 멀찍이서 보던 동료 선생님이 다가와 물었다. 담임 선생님이 사정을 설명하자 선생님은 혀를 찼다. “천재들은 괴짜라더니만, 쟤도 그 과네요.” 천재, 라면 천재일지도. “그렇네요.” “선생님이 고생이 많겠어요.” 저 아이가 만약 진짜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학교 입장에서는 재앙이다.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 선생님은 문득 생각난 사람을 떠올리고 교무 수첩을 뒤졌다. 그리고 핸드폰을 들어 문자를 보냈다. 문자를 본 하은은 올 게 왔구나 하는 심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며칠 전에 단유와 이야기를 나눈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오늘 단유와 담임이 그 이야기를 나눴음이리라. 솔직히 하은은 단유의 대학 진학에 대해 정확한 답을 제시해 줄 수 없었다. 그 자신이 대학이라는 곳에 배운 바를 이렇게 써먹고는 있다지만, 대학이라는 공간이 과연 단유에게 필요한 공간인가를 고려하면 반드시 가야만 하는 곳, 이라고 조언할 수 없었던 탓이다. 취업, 이라는 점에 있어서도 이미 단유는 자기 앞가림을 하고 있다. 처음에야 아르바이트 삼아 한다고 여겼지만, 정식으로 계약을 하고 번역일을 통해 수입을 거두면서 단유는 이미 일반 직장인들과 비슷한, 혹은 보다 많은 수준의 수입을 거두고 있었다. 솔직히 세금도 하은과 비슷하게 내고 있다. 학교 수업 때문에 일거리를 줄였는데도 그렇다. 그래서 알아보았다. 번역가라는 직업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점도 있었기에 직접 단유가 계약한 출판사에 찾아가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번역가란 직업이 결코 만만한 직업이 아니며, 단유 정도의 실력이라면 평생 직업으로 삼아도 넉넉한 수입을 얻으며 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말하자면, 단유는 이미 취업을 위해 대학을 가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대학이란 곳은 그 본래의 의미로서 접근해야 한다. 과연 대학은 학문의 상아탑으로서, 단유가 충분히 만족할 만한 수업과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인가, 하는 물음을 던져야만 한다. ======================================= [561] 신속, 정확(5) 흔한 비유지만, 이것은 일종의 전쟁 수행과도 같다. 직접 총 들고 전장에 뛰어들어 총탄을 피하며 진격하는 병사들도 고충이 있지만, 병사들이 나갈 길을 제시하고 다른 위험은 없는지를 전략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작전병과의 장교도 고충은 있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고지를 향해 발을 내딛을수록 신경은 날카로워지고 조그만 숨소리에도 날선 반응이 앞선다. ‘고지 점령 이후, 전쟁은 끝이 날까?’ 병사들은 고민하지만, 그 고민을 해결해 줄 사람은 없다. 주변의 병사들은 모두 고지만을 바라보고 한 걸음 내디딜 뿐이다. 무전을 통해 작전을 지시하는 본부에 대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하소연할 여유도 없다.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를 피탄에 쓰러질까 걱정하는 부모님의 사진을 전투모 사이에 끼우고 전진 포복하는 병사의 심정으로 아이들은 하루하루를 견뎠다. “대학만 가면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그때까지는 참고 공부해.” 라는 말은 많이 듣지만, 그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란 걸 모르지 않는다. 그래도 마음 한편으로는 믿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 “지금까지 수고했다.” 수고를 치하하기 위한 빈말은 아니었다. “오늘은 되도록 일찍 자고 컨디션 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마지막 고지까지 단 한 걸음을 남겨둔 상황. “마지막으로 할 말은 후회를 남기지 말자는 거다.” 단 한 걸음이지만, 그 한걸음에 담긴 의미는 크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공부한 것들, 그리고 모의고사를 통해 준비해왔던 것들은 바로 내일 모두 풀어야 한다.” 점심시간 전에 종례를 한다. 만약 방학식을 맞아 하는 종례라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지만, 오늘의 종례는 그저 무거울 뿐이다. “실수하지 말자. 이제까지 수없이 많이 연습했잖아. 그렇지?” “네.” 다소 힘없는 대답. 하지만 선생님은 개의치 않았다. “학생들이 시험에서 제일 많이 실수하는 게 뭔지 알아? 문제를 잘 못 이해하는 거? 보기를 헷갈리는 거? 제일 많이 실수하는 게 사실은 OMR 마킹하는 거야. 학교에서 시험 칠 때도 보면 꼭 번호 밀려서 마킹하는 애들이 나오는데, 그게 제일 억울하지 않니? 다 아는 문제인데, 맞게 답도 골랐는데, 마킹을 잘못해서 틀리면 너무 억울하잖아. 그렇지? 시간 부족하다고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마킹하다 실수하지 말고, 꼭 번호 확인하고 마킹 실수 안 하게 조심하자. 알겠지?” “네.” “긴장해서 시험을 치르다 보면 시간이 모자랄 수도 있으니까, 시간 관리 잘하고.” “네.” 결국 시험이란 빠르고 정확하게 답을 골라내서 표기하는 거다. 빠르게 풀고, 정확하게 답을 기입하자. 담임 선생님의 말씀은 이제까지 줄곧 들어왔던 이야기의 반복이었지만, 아이들은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자, 그럼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다들 파이팅하자. 알겠지?” “네.” “일찍 끝났다고 피시방 가는 놈들은 없길 바란다.” “…….” “이것들 봐라?” 그렇게 종례가 끝나고 아이들은 가방을 챙겨 교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단유야.” 그 와중에 정원이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다가왔다. “시험 잘 봐라.” “그래. 너도.” 정원은 뿌듯한 얼굴을 하고 돌아섰다. 단유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은 뒤, 본인도 교실을 나왔다. 이미 운동장 갓길에는 집으로 가는 고3들로 가득 했고, 운동장에서 그 모습을 부러운 듯 쳐다보던 후배들은 체육 선생님의 일갈에 고개를 돌리지만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인파 속에 섞여 학교를 빠져나온 단유는 집으로 갈까 생각하다 이왕 일찍 나온 김에 명수랑 점심을 먹고 들어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명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희 끝났어? “응.” ―우리도 방금 끝났어. “그럼 밖에서 점심 먹고 들어갈까?” ―오케이! 가까운 번화가에 나왔더니, 교복을 입고 나온 무리가 적지 않게 보였다. 아무리 내일이 수능이라지만 당장 독서실이나 집으로 들어가 책 한 권 더 보겠다는 아이들보다는, 잠깐이라도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 피안(彼岸)을 하려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남자아이들 뿐만 아니라 여자아이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표정으로 여자들은 서로 팔짱을 끼고, 남자들은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가게의 진열장들을 슬쩍 보면서 지나간다. 옷이든, 액세서리든 지금 당장 눈에 들어오는 게 있을 턱이 있나. 그냥 눈에 담아보는 것이리라. “쟤들은 뭔데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거야?” “내일 수능이잖아?” “아, 그렇구나. 요즘 사는 게 바빠서 수능이 내일이란 것도 몰랐네. 뉴스를 볼 틈이 있어야지. 그런데 내일 수능이면 여기서 놀고 있을 게 아니라 집에서 책 하나라도 더 봐야 하는 거 아냐?” “지들이 알아서 하겠지.” “우리 때는 수능이 엄청 어려웠잖아. 저러고 있을 시간이 어딨었어? 안 그래?” 지나가던 연인들이 나누던 대화가 흘러들어 왔다. 전쟁 같은 시간을 겪었던 경험자들에게 전쟁 같은 시간을 맞이한 아이들은 동정의 대상도, 공감의 대상도 아니었다. 남들 다 겪는 일인데 새삼스럽긴, 이란 반응이 대다수다. 이미 전쟁을 겪은 이들의 여유로움일 수도 있겠다. 하긴 당사자들에게나 전쟁 같은 고통이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매년 반복되는 일상이기도 하다. 늘 수능 전날이면 이곳으로 와서 최후의 만찬과도 같은 휴식을 취하고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러 떠나니까. 동시에 전투가 끝난 뒤, 다시 돌아와 매상을 올려줄 최고의 고객들이다. 길가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짚어보던 단유의 등을 누군가가 툭 쳤다. 돌아보니 명수였다. “오래 기다렸어?” “아냐, 나도 금방 왔어.” “뭐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있어?” “오늘 같은 날은 뭘 먹어도 소화가 잘 안 될 거 같은데.” “엄살은.” “야, 아무리 나라도 긴장이 되거든?” 명수는 수능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대학을 가지 않기로 했으니까. 아니 대학을 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가을 대회에서 명수는 문자 그대로 화려한 활약을 펼쳤고, 학교에 우승컵을 안겨준 일등 공신이 됨과 동시에 프로 구단의 적극적인 러브콜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는 몇몇 에이전트 회사에서 접근을 하기도 했다. 확실히 에이전트의 도움을 받으면 향후 활동에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아직 시간이 많으니까, 좀 더 시간을 두고 선택하겠다고 미뤄둔 상태이긴 하지만 마땅히 이에 대해 조언을 구할 만한 곳이 없어 난감한 상황이다. 하지만 다소의 곤란함을 제외하면, 명수는 그야말로 해피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이다. “나만 잘하면 되는 거 아냐?” 본질은 그렇다. 축구선수가 축구만 잘하면 되지 않겠는가? 명수의 단순하지만 명쾌한 기준은 그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머지 문제는, 솔직히 단유나 하은이 조금만 도와주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명수의 행복이 곧 가족의 행복이니까. “시험을 치는 건 난데, 왜 니가 긴장을 해. 내가 실수할까 봐?” “아무리 네가 단유지만, 사람이란 게 실수를 할 때도 있잖아.” “어감이 이상한데?” “기분 탓이야.” “아무튼 네가 결승전에서 헛발질해서 사람들을 웃기게 만들었던 것 같은 실수를 내가 할 수도 있다는 거지?” “…뭐지? 엄청 구체적인 말로 날 깐 것 같은데?” “기분 탓이야.” 간단하게 먹자는 명수의 제안에 따라 먹을만한 음식점을 둘러보다 가까운 쌀국수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식사가 나올 때까지 두 사람은 가벼운 사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내일 너 어디 갈 거야?” “그야…너 응원하러 가야지?” “잠시 머뭇거린 걸 보니 역시 걸리는 게 있지?” “…야,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건 어느 축구팀을 갈 거냐를 고르는 거보다 더 어려운 문제라고.” 한 사람은 자신의 가족이며, 평생의 친구이다. 또 한 사람은 자신이 평생에 걸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정과 사랑을 놓고 고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삼각관계인 줄 알겠어.” “삼각관계라면 삼각관계지. 둘 다 나를 엄청나게 좋아하잖아?” 단유가 미간을 좁히자, 명수가 헤픈 웃음을 터뜨린다. “됐고, 내일 상미한테 가서 응원 좀 해 줘. 내 몫까지.” “넌?” “내가 걱정이나 되냐?” “아니. 단유를 걱정하느니, 세계 평화를 걱정하지.” “계속 내 이름을 묘한 어감으로 부르는데, 조금 거슬린다?” “이미 네 이름은 그런 거야.” 명수가 핸드폰을 들어 흔들었다. 여태까지도 중학교 때 친구들과 단톡방에서 대화를 나누며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 대화 중에 단유의 이름은 특정 상황에서 특정한 의미를 지니는 보통 명사처럼 활용되기도 한다. “아, 생각난 김에 메시지나 보내야겠다.” 명수가 핸드폰을 두드려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걸 보며 단유는 가게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간이 좀 지난 탓인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의 모습도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거리를 방황하는 아이들도 눈에 띄었다. 그러다 낯이 익은 한 사람을 발견했다. “지금 가면 당구장 되게 썰렁하겠다.” “문이나 열었으려나?” 재잘대면서 걷는 아이들 무리의 뒤에서 승현은 느긋하게 걸음을 걸었다. 종례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을 모아 옹벽으로 가 여유롭게 담배 타임을 가질 때, 당구장에 가서 짜장면이나 시켜먹자고 제안하니 아이들은 모두 찬성했다. 하긴 누구의 제안인데 거절할까? 마지막까지 알뜰하게 삥을 뜯어낸 친구의 노고를 치하한 뒤, 당구장으로 향하는 아이들은 내일이 수능이든 말든 상관이 없는 처지였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그 말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는 아이들이었다. 번화가로 나가니 몇몇 아이들이 아는 척을 하기도 했다. 다른 학교 아이들이지만, 평소 어두운 골목에서 종종 교류를 갖기도 했다. “당구 한판?” “콜?” 수학은 못 해도 당구는 기가 막히게 잘하는 아이들이었다. “3-5?” 3쿠션 1개 3천 원, 빈 쿠션 1개 5천 원으로 하자는 내기에 아이들은 동의했다. 처음에야 3-5지만, 나중에는 ‘5-7’ 혹은 ‘1만 빵’이 될 수도 있다. 돈이야 어차피 있다가도 없는 거고, 없다가도 있는 거다. 재밌자고 하는 거다. 재밌자고. 문득 승현이 고개를 돌려 동영을 바라보았다. 입술을 비틀고 있는 동영을 보니 웃음이 났다. 그 날 이후로, 꽤 시간이 지났지만 동영은 승현에게 말을 거는 일이 부쩍 줄었다. 물론 대놓고 반항한다거나 거부 의사를 밝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따라준다는 느낌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태도를 일일이 지적할 마음은 없었다. 그게 동영의 한계니까. 승현은 동영을 보면서 생각한다. 역시 사람은 힘만 갖고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제 딴에야 주먹 좀 쓴다고 목에 힘주고 다녔겠지만, 사람이라는 건 ‘사회적 동물’ 아닌가? 사회적 관계를 무시하고 독불장군처럼 지낼 순 없는 법이다. 만약 그러고 싶다면 돈이라도 많던가. 그런 점에서 동영은 승현보다 돈이 없다. 가진 돈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집에 돈이 없다. 애들 코 묻은 돈을 삥쳐서 담배나 겨우 사 피우는 주제다. 술집에서 승현이 카드를 긁으면 거절 못 하고 마셔야만 하는 녀석이다. 무엇보다 동영의 아버지는 승현의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여야만 한다. 그래도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가끔 눈에 힘을 주고 승현을 바라볼 때도 있지만 승현의 눈에는 그저 귀여운 하룻강아지의 앙탈로 보일 뿐이다. 하룻강아지는 강아지다. 귀여워 해주면 그만이다. “가자, 동영아.” 그래서다. 일부러 동영의 등을 툭툭 쳐주며 말을 거는 것은. 다른 아이들이 보기에는 동영을 챙겨주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동영은 입술을 씹으며 참아내야 했다. 그도 승현의 제스쳐가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넌 내 아래야.’ 생각날 때마다 자신의 위치를 각인시키는 승현의 행동에도 동영은 아무런 반항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위치를 모르지 않으니까. 승현은 동영의 꿈틀대는 표정을 보며 웃음을 지어 보인 후,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바로 근처에 있는 가게의 창가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단유와 시선을 마주쳤다. ‘김단유.’ 재미있다. 승현의 한쪽 입꼬리가 깊이 파이며 짙은 웃음을 자아냈다. ======================================= [562] 콤플렉스(1) 멀었지만 승현의 얼굴에 슬쩍 떠오른 미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단유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리고 승현이 동영의 어깨를 두드리며 자신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게끔 했을 때, 그리고 동영의 눈에 피어오른 불꽃을 보았을 때 불안감은 더 커졌다. “닭고기 쌀국수는 어느 분이신가요?”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단유는 고개를 돌렸다. “이건 저쪽이고요, 이건 제 거요.” 명수의 주문에 맞춰 점원이 그릇을 내려놓고는 물러갔다. “숙주 넣을래?” “됐어. 난 괜찮아.” 명수는 콧노래를 부르며 따로 나온 숙주를 젓가락으로 한 움큼 집었다. 서브로 나온 양파절임과 고추도 가득 집어넣고 젓가락으로 쓱쓱 휘저은 뒤, 탱글탱글한 면을 집어 올린다. 입김을 후, 불고는 입에 가득 채워 넣던 명수는 도로 면을 뱉었다. “앗 뜨거!”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냥 봐도 뜨겁겠는데.” “그럼 말을 해 주지.” “설마 했지.” 찬물로 입안을 식힌 후, 이번에는 조금만 집어서 조심스럽게 입에 가져갔다. 요란스럽게 입을 움직이며 먹은 뒤, 다시 찬물을 마셨다. “아직도 뜨거워.” “천천히 먹자.” “그래도 맛있어.” “맛이 느껴져?” “뜨거운 맛도 맛이잖아.” “명수답다.” “내가 나다워야지. 안 그래?” 히죽 웃으며 ‘너도 먹어’라고 권하는 명수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인 후 젓가락으로 맑은 국물을 휘저었다. 얇은 쌀국수 면이 젓가락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인다. “이야, 이런 데서 다 보네?” 단유는 고개를 들기 전에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 승현은 단유와 눈이 마주친 후, 재미있는 생각을 떠올렸다. “동영아.” 승현도 동영이 자신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안다. 하지만 그래서 어쩔 건가? 동영은 자신에게 아무 짓도 못 할 건데. 하지만 승현은 그런 동영도 ‘친구’니까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내치지 않았다. ‘친구’는 언제나 쓸모가 있는 존재니까. 승현의 부름에 동영이 고개를 돌렸다. 콧구멍이 씰룩거리는 게 보였지만 모른 척해주었다. “저기 봐.” 승현이 턱을 들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동영은 거센 콧바람을 내뿜었다. 울컥하는 기분에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가서 인사 좀 하고 올까?”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승현을 바라보니, 승현은 예의 진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야, 너희들 먼저 가 있어.” “응? 왜?” “아, 여기 아는 사람을 만나서. 인사하고 갈 테니까 가서 놀고 있어.” “어, 그래.” 친구들은 의심하지 않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승현은 소리 없는 웃음을 지으며 쌀국수집으로 향했다. “뭐해? 따라와?” 동영은 돌아보는 승현을 보며 도대체 무슨 의도인지를 짐작해보려 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따라오라니까?” 일단은 따라간다. 하지만 또 저 자리에서 이상한 짓을 요구하면 그때는 아버지고 나발이고 그냥 다 때려치우겠다, 고 다짐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침 서빙을 하던 점원이 둘을 돌아보며 ‘어서오세요’라고 인사를 한다. 승현은 단유가 앉아 있던 자리로 걸어가 인사를 건넸다. “이야, 이런 데서 다 보네?” 그러자 단유 대신 단유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아이가 고개를 돌려 반응했다. “누구?” “아, 나 얘랑 같은 학교 친구.” “친구?” 승현은 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넌?” “나도.” “교복을 보니까 우리 학교는 아닌 거 같은데? 알아?” 동영에게 물으니, 동영이 힐끗 보고는 명수의 학교를 맞췄다. “아, 거기구나. 그럼 두 사람은 어떻게 아는 사인데?” “어릴 때부터 친구였어.” “어릴 때부터?” 승현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오랜 기억 속에 묻혀 있던 한 사람을 떠올렸다. “아아. 걔구나.” 단유를 처음 알게 된 영상 속에서 단유와 함께 나왔던 아이. 익살 궂은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이 살짝 보였지만, 승현의 시선은 단유에게 집중되어 있어 흐릿한 잔상으로만 남았던 아이. 게다가 그때와 지금의 모습은 사뭇 달라서 당시의 얼굴을 온전히 기억했다고 하더라도 알아보기 힘들었을 모습이다. “응?” 명수가 되물었지만, 승현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 아냐. 아무것도.” 그리고 승현은 얼른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우연히 만난 것도 신기한데, 같이 밥이나 먹을까? 내가 쏠게.” 단유가 고개를 들고 승현을 바라보았다. 적의는 없다. 하지만 호의도 없다. 꿍꿍이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 행동의 목적과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승현 같은 사람을 만나 본 기억이 적어도 단유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이런 표본에 대한 관찰이 부족했고, 따라서 정확한 추리가 어려운 것이다, 고 단유는 판단을 내렸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관찰. 실증적인 실험과 면밀한 관찰만이 정확한 답을 도출해낼 수 있다. 제일 좋은 건 피실험자이며 관찰자인 자신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좋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가정한다면 가장 가까이에서 미시적인 변화마저 관찰하고 기록하는 게 결과를 예측하고 검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 오늘은 명수와 편하게 어울린 뒤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고, 그 일정에 방해를 받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왕 아는 척을 해 왔으니, 자신도 그에 어울려주며 승현이란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 살펴보겠지만, 내일부터다. 아, 내일은 수능이던가? “내일 시험인데 이러고 있어도 돼?” 단유의 말에 승현이 웃음을 지었다. “내일 시험인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아, 넌 내일 시험이 별로 부담스럽지 않은가 보네? 하긴, 너 정도면 걱정 안 하겠다.” 국수 그릇에 젓가락을 찔러넣은 채로 명수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날 선 말들이 오가는 건 아니지만, 친구라고 보기엔 두 사람 사이가 꽤 멀어 보인다. 학교가 다르고, 최근 자신의 주변 일들로 바빠서 단유와 오래 이야기를 나눈 일이 없지만 저런 친구가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을뿐더러, 명수가 아는 단유는 아무나 친구로 인정하지 않는다. 번드레하게 생긴 모양새지만 어딘가 냄새나는 구석이 있는 아이처럼 보였다. 이럴 때는 직접 물어보면 된다. “야. 친구 맞아?” 단유는 순간 고민했다. 보아하니 명수는 조금이라도 심기가 틀리면 일어설 모양새였다.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명수에겐 치명타로 작용할 수 있다. 자신이야 사실 대학을 가든 말든 상관이 없다지만, 명수는 아니다. 명수는 무사히 졸업하고 프로에 입단을 해야 하는 몸인데 이 시점에서 불명예스러운 일에 휘말리는 것은 말려야 한다. “명수야.” “응?”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니, 일단은 개인적으로 상황을 마무리해야 옳다. “나 잠깐 얘랑 나갔다 올게.” 명수의 눈에 불안이 스치고 지나갔다. “별일 아냐. 잠깐 이야기만 하고 올게.” 그때 옆에서 코웃음소리가 들렸다. “왜 이래? 왜 나가서 이야기를 해? 그냥 여기서 해.” 단유가 몸을 천천히 틀며 승현을 보자, 승현은 여우같이 얄미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한 가지는 알겠다. 승현은 머리가 나쁘지 않다. 그는 분명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만들 줄 안다. 지금이 주도권을 가지고 유리하게 끌고 나갈 수 있는 상황임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단유가 뭔가를 더 말하기 전에 승현은 단유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멀뚱히 서 있는 동영을 보며 말했다. “너도 저기 앉아.” 명수의 옆자리를 가리키는 승현에게 명수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앉으라고 안 했다?” 명수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누구의 동의도 없이 멋대로 와서 ‘친구’를 자칭하고, 멋대로 합석하는 이가 단유의 친구일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수야.” 단유는 즉시 명수를 말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명수에게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왜?” “넌 그냥 가만히 있어.” 명수가 발끈하려는데, 승현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왜들 그래? 친구들끼리 밥 먹자는 건데.” “왜 그러는데?” “뭐가?” “왜 친한 척을 하는 건데?” “척이라니? 난 정말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 그러니까 저번에도 먼저 가서 사과를 한 거잖아. 사과가 부족했어? 진짜, 진짜 진심으로 미안하다니까. 혹시 그 날 이후로 쟤가 시비 건 적 있어? 없었겠지만, 만약 있었다고 해도 내가 대신 사과할게.” “왜 네가 사과하는데?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원래 친구가 잘못하면, 친구가 대신 사과해주기도 하는 거야. 알잖아? 너희들도 그런 친구 아냐? 친구가 잘못하면 대신 사과하고 용서를 빌고, 그런 친구 맞잖아?” 명수는 여전히 테이블 옆에 서서 콧바람만 씩씩 내뿜고 있는 동영과 승현을 번갈아 보다가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뭐야, 얘들?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한 거야?” “아냐,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여기요!” 승현이 손을 번쩍 들었다. “여기…이거 2개 주세요.” 멀리서 보고 있던 점원이 빠르게 다가와 물었다. “닭고기 쌀국수요?” “아무거나요. 그냥 2개 빨리 주세요. 배고프니까.” 승현은 아무렇지 않게 주문을 마친 후,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뿌듯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 빨리 앉아. 계속 그러고 있으면 나만 뻘쭘하잖아?” 동영이 명수의 옆자리에 앉기 위해서는 명수가 자리를 당겨 앉아서 들어갈 틈을 주던가 해야 했지만, 명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야, 서 있는 김에 물이나 좀 떠다 줘라.” 동영의 눈에 시퍼런 빛이 서리는 듯했다. “아, 네 것도 같이 가지고 떠와.” 승현을 잠시 바라보던 동영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정수기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것을 확인한 후, 승현은 명수에게로 손을 뻗었다. “인사가 늦었네. 반갑다. 김승현이라고 한다.” 명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팔짱을 끼었다. “뭐하는 거냐, 지금. 왜 시비 걸고 지랄이냐?” “시비라니? 교우 관계를 다지자는 거잖아?” 능글맞은 승현의 태도에 명수도 참을 수 없었다. “꺼져, 새끼야.” 명수의 거센 발언에도 승현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왜 이래? 그냥 같이 밥 먹고 이야기나 하자는 건데. 혹시 아냐? 이야기하다 보면 잘 맞아서 죽마고우가 될지?” “죽마고우는 무슨 얼어 죽을. 야, 김단유. 일어나자.” 지들이 일어나기 싫다면 우리가 일어나면 그만 아닌가? 하지만 승현은 그런 명수의 태도에도 유유자적이었다. 오히려 단유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말했다. “왜 흥분하고 그래? 그냥 앉아서 밥만 먹자고. 내가 쏜다니까?” “너랑 같이 먹기 싫다고. 그리고 그 팔 내려라.” “응?” 승현은 단유의 어깨에 걸친 팔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묻는 시늉을 했다. “혹시 내가 불쾌하게 했어? 불편했어? 아, 내가 잘못했네. 난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는데, 불편했다면 내가 사과해야지. 응, 그럼.” 과장되게 팔을 번쩍 들고 놀란 척을 하다 다시 단유의 어깨에 팔을 올리는 승현. “난 말이야, 사람을 참 좋아하거든? 특히 공부도 잘하고 인기 많은, 응? 우리 단유 같은 친구가 참 좋단 말이야. 아마 난 공부도 못하고 못생겨서 그런 가봐. 원래 나한테 없는 걸 가진 사람이 부러운 법이잖아? 그래서 너랑 참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내가 말을 잘못해. 이게 부족해서.” 승현은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려 보였다. “이게 안 되니까, 내가 나도 모르게 실례를 하기도 하지만, 결코 의도한 바는 아니란 거지. 그런 건 이해해 줬으면 좋겠네? 왔냐? 앉아, 거기. 야, 좀 비켜줘라. 친구가 앉을 자리가 없어서 서 있는 게 보기 좋니? 옆에 사람들도 보고 있잖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우리가 무슨 사고라도 치는 줄 알겠다. 얌전히 밥만 먹고 간다니까?” 동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게 보인다. 명수는 복잡한 심경으로 동영을 보다가 한발 물러섰다. 동영이 멈칫하다 재차 자리를 권하는 승현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승현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깊어지는 보조개를 보며 명수가 인상을 쓸 때였다. “후우.” 단유는 길게 숨을 뱉었다. ======================================= [563] 콤플렉스(2) 짧은 순간이었지만, 단유는 승현에 대해 몇 가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첫째는 승현이 결코 단순 무식하게 시비를 거는 타입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세히 표현하자면,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만들 줄 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명제인데, 단유가 보기에는 자신이 주도적으로 콘트롤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동시에 자신에게 해를 가할 수 없는 상황이 되도록 연출한다는 점이었다. ‘손님’처럼 등장해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는 연출, 그리고 등장부터 지금까지 절대 흠 잡힐 만한 표현은 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가게 안이라 지켜보는 눈들도 많은 상황이니 그의 이런 연출은 혹시 어떤 문제―가령 사소한 시비나 하다못해 거친 언사가 오가는 싸움과 같은 요소―가 생기더라도 자신을 변호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지난번 교실에서 있었던 일도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승현이 단유를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전의 만남에서 승현이 보인 묘한 눈빛에서 가능성을 점쳐보긴 했었던 일이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던 일인데, 조금 전 승현이 명수를 보고 마치 예전 일을 떠올린 것처럼 반응한 것을 보면, 명수나 자신이 어렸을 때의 모습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떤 방식으로 알게 되었는지는 사실 추리하기 힘들지만, 이제껏 본인이 해왔던 행적들을 되짚어보면 불특정인들이 예전의 단유를 알아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굳이 찾아보려 하진 않았지만, 인터넷에는 단유에 대한 영상이나 잡다한 사진들이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세 번째는 승현의 단유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었다. 선의에 바탕한 호의도 없으며, 악의적인 적대감도 느껴지지 않는 승현이 왜 단유에게 관심을 가지는가? 그런데 지금 신나게 웃으며 즐기는 모습을 보니 어렴풋이나마 승현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장난감.’ 마치 진열장 속 꿈에 그리던 장난감을 바라만 보다가 우연한 기회로 그 장난감을 얻었을 때 보일법한 들뜬 표정이 지금 승현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리라. 여기까지 생각이 정리되니 몇 가지가 더 요구된다. 왜 그는 자신을 장난감처럼 여기는지. 지금까지는 왜 아는 척을 하지 않았던 건지. 그리고 왜 지금 이 시점에서 이런 식으로 접근한 것인지. 툭 까놓고 이야기하고 호기심을 풀어보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특히 명수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승현을 바라보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말이다. 지금은 일단 조용히 이 사태를 넘기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다행히 단유는 이 순간 승현에게 줄 선물을 떠올렸다. 장난감을 갖고 놀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는 장난감을 주는 게 도리다. 그의 취향에 맞을진 모르겠지만. **** 어쩌면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승현은 기분이 좋았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꼼짝도 못 하고 있는 단유를 보고 있으니 역시 머리 좋은 녀석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동영이 같이 물불 안 가리는 녀석이었다면, 무슨 사고를 쳤을지 모르지만, 똑똑하고 사리판단 잘하는 녀석이니까 함부로 날뛰지 않는 것이다. ‘내 손바닥 안이야.’ 일부러 협박할 필요도 없고, 은밀히 위협적인 언어를 입에 담을 필요도 없다. 공부 잘하는 거? 다 필요 없다. ‘모두 내 장기말들이니까.’ 승현은 뜻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들떠서 조금 흥분할 정도였다. 명수가 자리를 비켜주고 동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게걸음으로 좁은 통로를 지나 자리에 앉는 모습을 보며 더욱 기분 좋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시스템을 로딩합니다. ‘응?’ 갑자기 들려온 기계 음성에 놀라 승현이 눈을 크게 떴다. ―로딩까지 10초 남았습니다. “뭐야?”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왔다. ―5초 남았습니다. “…….” 입을 반쯤 벌린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바로 옆자리에 앉은 단유는 여전히 고개를 반쯤 숙인 채였고, 앞에 마주 앉은 명수는 불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동영이는 자기가 들고 온 물을 마시고 있는데, 모두 뭔가 이상한 걸 들었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실상 이상한 건 그들을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자신이란 걸 본인만 모르고 있다. 그리고 갑자기 눈앞에 섬광탄이라도 터진 듯이 환해졌다가 원래의 시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상한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뭐, 뭐야?’ 눈동자를 굴려보아도 시야의 가운데에 뜬 글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곧 글자는 사라지고 이상한 그래프와 문자들이 시야 곳곳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분명 낯선 현상이지만, 묘하게 익숙한 이유는 그래프와 글자들이 이전에 본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HP, MP, Stat?’ 야자 시간에 학교 대신 피시방에 가서 즐겼던 게임 속에서 보던 ‘상태창’과 유사한 모양의 디자인이었다. 더군다나 몇몇 단어는 영어지만, 대부분은 한글로 알아보기 쉽게 주석이 달려 있었다. ―공격력 10 ―방어력 8 ―민첩 11 ―지능 6 때문에 직관적으로 이런 디자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다만 왜 갑자기 이런 디자인이 보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 다시 들려온 기계 음성에 화들짝 놀란 승현이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돌리며 살펴보지만, 누구에게서도 이 음성을 들었다는 표시가 나지 않았다. ―사용자는 미션을 통해 수치를 강화하여 살아남으십시오. “김승현. 왜 그래?” 오랫동안 초점 잃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승현을 보고 의아한 마음에 동영이 그를 불렀다. 그제야 놀란 눈으로 동영에게로 고개 돌린 승현이 어버버 거리다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하긴 갑자기 눈앞에 상태창이 나타났다느니, 미션을 하라는 소리가 들린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다. 꺼내봐야 미쳤다는 소리밖에 더 들을까? ―사용자의 지능이 낮으므로 우선 지능을 높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미션 : 조건에 맞는 책 3권을 정독하여 지능 수치를 올리십시오. 보상 : 지능 +1(권당), 보너스 스탯 +1 실패시 : 지능 -0.5(권당), 연계 미션 불가. 내용을 이해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나마 밖으로 나가서 토끼 10마리를 잡으십시오 같은 미션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도대체 왜 책을 읽어야 한다는 건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자신의 지능이 ‘6’이라는 애매한 수치라는 게 불쾌했다. 어쩌면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고 추측은 해 보지만, 그런 이유로 지능이 저런 수치라면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니다. 공격력이 10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도 솔직히 애매한 수치긴 마찬가지다. 비교 대상이 없으니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도 없고. 문득 맞은편의 동영을 보니 그의 힘은 과연 수치로 얼마나 될지 궁금했다. 그러나 상대를 바라본들 수치가 보이지는 않았다. 한 가지 더 이 미션을 받고 이해한 것은 스탯을 올리는 게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고작 책 3권을 읽기만 해도 지능이 1씩 오른다는 건, 향후에도 지능을 계속 끌어올릴 방법이 있다는 소리였다. 마찬가지로 힘이라든가, 민첩이라든가 하는, 계량화시키기 힘든 수치들도 게임처럼 올릴 수 있다는 말이다. ‘게임처럼!’ 승현도 온라인 게임을 적지 않게 플레이해 보았다. 그리고 게임의 미션을 통해 얻는 보상에 대해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쩌면. ‘어쩌면 초인(超人)이 되는 것도 가능할지!’ 하지만 마냥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왜 나한테 이런 게 보이기 시작한 거지?’ 아무런 전조도 없이 시작된 이 현상을, 더군다나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모양인데, 자신에게만 보이는 이유가 뭘까? ‘선택받은 사람?’ 그것은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문제다. 자신은 선택받기보단, 선택에서 제외된 쪽이었기 때문이다. ―시간 내 달성하지 못할 경우, 실패로 돌아가며 ‘지능’ 스탯에 페널티를 받게 됩니다. 승현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만약 눈앞에 보이는 이게 말 그대로 게임 시스템을 차용한 것이라면, 보상만큼이나 페널티도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주어진 페널티는 승현을 뜨끔하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애매한 6이라는 수치에 불안감을 느끼는 와중인데, 페널티까지 있다니? 솔직히 말해서, 승현이 평소에 ‘친구’라고 부르는 이들의 지능 수준으로 떨어진다면 살아야 할 가치가 없다고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냥 저능아 수준이니까. 단유를 흘깃 보았다. 전교 1등을 밥 먹듯이 하는 단유는 과연 지능이 어느 정도 수준일까? 만약 자신이 지능 수치를 올려서 단유 수준이 된다면? 사용자 위주의 시스템은 아닌지 설명도 불친절하지만, 지난 경험을 통해 추측해 본바, 어쨌든 이 시스템에 따라 움직였을 때 얻을 보상이 결코 가볍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번에는 지능 수치를 올리지만, 다음 ‘연계 미션’에서 체력 혹은 힘 수치를 올릴 수 있다면? 승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하다. 급한 일이 있었는데, 깜빡했네. 잘들 놀고. 아, 계산은 내가 하고 갈게. 오케이?” 그리고는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우선 당장 가까운 서점에 가서 책을 골라야 했다. “뭐야? 저거?” 명수가 고개를 돌리고 사라진 승현의 뒤를 보다가 단유에게로 몸을 돌려 물었다. 단유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려 보일 뿐이었다. 명수는 마침 옆에 앉은 동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동영은 아주 난감하고 머쓱한 상황에 직면했다. 솔직히 오기 싫었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얼굴과 마주한 상태인데, 정작 자길 끌고 온 녀석은 한동안 바보 같은 표정만 지으면서 원맨쇼를 하다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자리를 떠났다. 때문에 홀로 남겨진 동영은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게다가 명수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데, 여기서 무슨 말을 꺼낼까? 속이 탄다. 물잔을 들었더니 이미 비었다. 아까 자리에 앉자마자 물을 한 번에 다 마신 탓이었다. ‘조금 남겨둘걸.’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 난국을 타개해야 하는가 고민하던 찰나에 점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음식 나왔는데, 어느 분…?” 동영이 고개를 들었더니 점원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명수도 자신을 쳐다보고 있고, 단유도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털고 일어날까?’ 씩씩하고 용감하고 당당하게 벌떡 일어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가게를 빠져나가면 모양 빠져 보이진 않겠지?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나가면 뒤에서 비웃음을 던지지 않을까?’ 입을 막고 자신을 쳐다볼 사람들의 표정이 그려지기도 했다. 아무 말 없이 일어서는 것도 바보같이 보일 것 같다. 아니, 이미 자신의 표정이 바보처럼 보일 것 같다. “저기 놔 주세요.” 단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점원이 그 말에 따라 동영의 앞에 그릇을 놓아주었다. “그건 그냥 가운데 놔주세요.” 그렇게 그릇을 놓고 점원이 돌아섰다. “먹고 부족하면 덜어 먹자. 이왕 사주고 갔는데 남기면 아깝잖아?” 단유의 말에 명수가 불만스럽다는 듯 툴툴댔다. “꼭 이렇게 같이 먹어야 하냐?” 그게 자기를 두고 하는 말 같아 동영도 뿔난 목소리로 대답하려는데, 단유가 먼저 선수를 쳤다. “밥 아직 안 먹었지?” 동영을 바라보며 묻는 단유의 말이 신호라도 된 듯,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가게 안의 사람들이 모두 들었을 것만 같았다. 얼굴이 시뻘게진 동영이 아무 말 못 하고 있을 때, 단유가 젓가락을 집었다. “먹자.” 명수는 말없이 젓가락을 저어 국수를 먹는 동영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 전 상황을 복기해보면, 승현이 한참 단유와 친한 척을 하다가 갑자기 입을 반쯤 벌리고 허공을 멍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어딘가에 홀린 듯 다급하게 가게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동영이 혼자 얼굴이 심각해졌다가 시뻘개졌다가 하더니 단유가 ‘먹자’라는 말에 젓가락을 들고 국수를 먹기 시작하는 것이다. 뭔가 자기만 모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도무지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들마냥 움직이는 두 사람과 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연스럽게 식사를 재개한 단유를 보며 명수는 머리를 긁적였다. 단유가 잔을 집어 물을 마시려다 그 모습을 보았다. “왜?” “응? 아, 저기 조금 이상해서.” “원래 그래.” “응?” 단유는 빙긋 웃고 계속 먹으라는 시늉을 보였다. 서로 만족할 만한 선물을 건네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 [564] 콤플렉스(3) 억지로 끌려온 데다 분위기가 급변하면서 떠나지도 못하고 자리에 눌러앉은 마당이다. 게다가 맞은 편에는 자신에게 수치감을 느끼게 했던 단유가 앉아 있고, 옆에는 불편한 시선을 계속 건네는 명수가 있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고개를 처박고 묵묵히 국수를 흡입할 뿐이다. 아쉬운 점은 동영이 기억하기로 이 집의 쌀국수가 맛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 맛을 전혀 느낄 새가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빨리 먹고 빨리 자리를 떠나는 것만을 생각하며 젓가락을 놀렸다. 명수와 단유도 다르진 않았다. 걱정했던 큰 사고는 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북하다는 티를 팍팍 내며 식사를 하는 동영을 곁에 두고 하하호호 할 수만은 없었다. “쌀국수 좋아하는데.” 명수가 작은 목소리로 투덜대며 자기 몫을 마저 끝낼 따름이다. 문자 그대로 ‘조용히’ 식사를 마무리한 후, 동영은 인사도 없이 자리를 떠났다. “쟤도 대단하다. 나 같으면 그냥 나갔을 거 같은데.” 단유는 잠시 동영이 사라진 쪽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나가기 위해서는 너한테 다시 길을 비켜 달라고 말을 해야 했는데, 그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을 거야.” “비켜 달라고 하면 되지.” “얌전하게 말하는 성격은 아닌 거 같으니까.” 하지만 준프로선수에 비견되는 명수의 덩치와 얼굴(?)을 보고 동영도 함부로 말을 꺼내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아예 입을 닫고 단유가 권한 대로 식사를 했겠지. “아무튼 고맙다.” 단유의 뜬금없는 인사에 명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니가 보라고 했던 책에서 도움을 받았거든.” 단유가 문학책 번역에 도움을 받기 위해 일반 서적이 아닌 문학 서적들을 찾아 탐독할 때, 명수가 지나가며 툭 건넨 책이 있었다. “이 책 한 번 봐봐.” 명수가 가을 대회 이후 남는 시간 동안 찾아 읽던 판타지 책이었다. 중학생일 때도 명수가 보라고 권유해서 봤던 무협지가 있었는데, 솔직히 단유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어서 보다 말았던 기억이 있었다. “내가 요즘 읽고 감동받은 책이야.” 읽는 척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명수의 성의를 받아들였고, 이후 그 책을 읽었다. 수권의 시리즈로 엮인 책이었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설정에 단유는 책을 내려놓고 말았다. “이게 왜 생기는 거야?” “뭐가?” “이런 현상이 주인공에게만 생기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읽다 보면 이유가 나오나?” 명수가 턱을 긁다가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몰라.” “모르는데 궁금하지 않아?” “아니, 별로.” “왜?” “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거 같은데, 이건 그냥 재미있자고 읽는 책이잖아. 너무 심각하게 따져가면서 읽지 마. 골 아파.” “감동 받았다며?” “감동이지? 기연을 얻긴 했지만, 성공하기 위해서 주인공도 나름 노력하잖아?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는 복이 없나니.” “뭐래.” 독서 취향의 차이라 생각하며 단유는 남은 책을 명수에게 돌려주었다. 물론 단유 나름대로는 그런 설정이 만들어진 것에 대한 심리를 추정해보긴 했다. 이를테면, 어렸을 적에 부모가 자녀에게 장난감을 사주었을 때의 그것과 비슷할 것이란 생각. 어린 여자아이에게 바비 인형을 사주면서 패션센스와 여자의 외모를 가꾸는 방법을 연구하라고 이야기하는 부모는 없다. 마찬가지로 남자아이에게 로봇 인형을 사주면서 로봇의 원리를 파악해서 후에 과학자가 될 수 있도록 해라, 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부모도 없다. 그건 그저 아이들에게 그 인형을 가지고 즐길 수 있도록, 그래서 덜 투정부리고 부모가 덜 간섭해도 되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보는 게 맞다. 이유 없이 등장한 ‘초능력’과 ‘상태창’ 같은 설정은 주인공과,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한 독자에게 쥐여주는 장난감일 뿐이다. 그리고 이를 응용해서 단유는 승현에게 장난감을 쥐여주었다. 한시적이고, 실제 아무런 효과도 없는 착각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당분간은 그 장난감을 가지고 노느라 단유에게 신경을 덜 쓰지 않겠는가? **** 식당을 나간 승현이 향한 곳은 당장 책을 볼 수 있는 곳, 서점으로 갔다. 소규모 서점들은 자리를 잃어가는 추세라지만 이곳 서점은 나름 큰 편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이었다.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통로에 우두커니 서서 책 한 권을 정독해서 볼 수는 없는 일이었고, 혹시라도 상태창에 변화가 생길 때 그 변화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승현은 책을 샀다. 평소 직접 책을 사본 일이 거의 없었고, 문제집도 ‘친구’들이 사다 준 걸 썼기 때문에 서점에서 책을 산다는 게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베스트셀러라고 적힌 책 3권을 아무렇게나 집었다. “4만 2천원입니다.” 승현은 책 한 권만 사기로 했다. 서점을 나오면서 생각한 것은 집에 책이 많다는 것이었고, 그렇게 생각하니 방금 산 책 한 권도 돈이 아까웠다. 그렇다고 다시 들어가서 환불하기도 어색해서 그냥 책을 든 채로 집으로 향했다. 주방 아주머니만 집을 지키고 계셨는데,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곧장 자기 방으로 들어간 승현은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했다. 중간에 문자가 와서 확인하니 친구들이 당구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이 있어서 못 간다고, 가방은 나중에 챙겨 달라고 문자를 보내놓고 독서를 재개했다.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일단 책 한 권을 끝까지 읽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계속 책을 들여다봤다. 중간에 잠이 오는 걸 억지로 참으며 읽었다. 생각이 딴 곳에 있어서 그런지, 갑자기 주인공이 밤에 빈 공터에 나가서 눈물을 흘리며 독백을 할 때는 무슨 내용인가 싶었다. 처음에 읽을 때는 어느 자동차 수리공장에서 일하는 수리공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순간 주인공은 여자를 만나고 배신당하고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이런 걸 사람들이 많이 읽는다고?’ 꾸역꾸역 읽어나갔고 마침내 책을 완전히 읽었다. 승현은 뿌듯한 마음과 기대감을 품고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창밖은 해가 져서 어둑했다. 나름 책을 읽느라 집중했던 모양인지, 그제야 바깥의 생활 소음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뭔가를 이루었다는 알림 소리도 없었고, 미션 진행이 몇 퍼센트가 진행되었다는 확인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상태창도 보이지 않았다. 책을 읽을 때는 독서에 집중하라는 뜻에서 상태창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인가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책 한 권을 다 읽었음에도 상태창이 보이지 않으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세 권을 마저 읽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 아니면 저렴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지능 수치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방금 읽은 책이 잘 이해되지 않는 것도 그런 지능 때문인가 싶은 의심마저 들었지만 애써 지웠다. 승현은 두리번거리며 읽을 책이 있는지를 보았지만 아쉽게도 자신의 방에는 책이 없었다. 아버지의 방이나 형의 방에 들어가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허락 없이 방에 들어가는 것은 안 된다. 일단 거실에 나가서 혹시라도 책이 없는지 봐야겠다. 그렇게 수능 전날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 수능 날이 밝았다. “오늘도 운동 가게?” 명수가 눈을 끔뻑거리며 물었다. “왜?” “아니, 그래도 오늘은 좀 긴장하지그래?” “왜 그래? 새삼스럽게.” 하긴 천하의 단유가 수능이라고 긴장을 할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긴 팔에 두꺼운 트레이닝복을 입고 집을 나서니 유난히 차가운 새벽 공기에 명수는 코가 간지러웠다. “에취!” 코를 문지르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야 괜히 오늘 무리하다가 감기 걸리는 거 아냐?” 단유는 걱정말라는 뜻으로 명수의 어깨를 두드려준 뒤,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오늘 진짜 안 가도 되지?” 명수의 말에 단유는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상미 보면 대신 인사나 전해줘. 시험 잘 보라고.” 평소보다 기온이 내려간 날씨라 두 사람은 좀 더 빠르고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마치 겨울처럼 하얀 입김이 입 밖으로 삐져나오고, 이마에 송글 땀이 맺혔다. 대화를 멈추고 30여 분 정도를 열심히 뛰었더니 등이 흠뻑 젖을 정도가 되었다. 그 후에야 다시 집으로 돌아오던 두 사람은 동네 근처에서 분홍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여자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편의점에 들렀던지 하얀 봉투를 손에 들고 마주 오던 여자는 두 아이를 아무 감정 없이 흘깃 본 후 시선을 돌렸다. “야.” “왜?” “저 여자는 뭐하는 여잘까?” “뭐?” “아니…이 시간에 여길 지날 때마다 보니까 궁금하잖아?” “그게 왜 궁금한데?” “그냥 자주 보니까.” 단유는 풉, 하고 터지는 웃음을 억지로 참는 시늉을 하자 명수가 의아해했다. “왜?” “너 이러는 모습을 상미가 알면 뭐라고 할지 궁금해서.” “야! 그냥 해 본 말이지. 내가 진짜 관심 있어서 그런 거 아니잖아?” “예전에는 상미 말고 다른 여자한텐 눈 한번 깜짝 안 하더니 이제 다른 여자에게 눈 돌리는 거잖아? 설마….” “설마 뭐? 뭐?” 단유는 대답 대신 뜀박질에 속도를 더 붙였다. “야! 왜 대답 안 해? 내가 뭐했다고! 야! 야!” 얼굴이 붉어진 명수가 쫓아왔다. 단유는 붙잡히지 않기 위해 더 빨리 뛰었고, 덕분에 두 사람은 일찍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단유는 기분 좋게 명수를 상미에게 보낼 수 있었다. 하은이 졸린 눈을 참고 일어나 배웅하겠다며 거실로 나왔다. 단유는 자신을 안아주며 등을 두드려 응원해주는 하은에게 열심히 하고 오겠다고 대답한 뒤 집을 나섰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시험장을 가는 동안 버스 안은 비교적 한산했다. 척 봐도 시험을 보러 가는 학생이라는 게 티가 나는 아이들이 고개를 꾸벅거리기도 하고 창에 머리를 기대고 바깥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기도 했다. 적막감과 긴장감이 묘하게 감도는 버스를 타고 시험장에 도착하니 교문 앞엔 수많은 학생들이 열을 지어 길가에 서 있었다. 소리 지르고 작은 북을 치며 마치 축구 경기 응원하듯 흥을 돋우는 이들도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종이컵을 학생들에게 건네주는 이들 사이를 걸어가니 어떤 무리가 파이팅을 외치며 박수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선배님!” 옆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처음 보는 얼굴의 학생이 종이컵을 건넸다. 처음 보지만, 교복을 입고 있으니 같은 학교 학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힘내세요.”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네는 후배에게 단유는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후배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보인 뒤, 다시 다른 종이컵을 들고 뒤따라오는 학생들에게 똑같은 미소와 똑같은 인사말을 건넨다. “단유야.” 이번엔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익숙한 목소리라 돌아보기도 전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선생님.” “오늘 긴장하지 말고 잘해.” “네.” 담담하게 대답하는 단유를 보며 담임 선생님이 피식 웃었다. “하긴 네가 긴장이라는 걸 할까 싶다마는 직접 보니 역시 단유구나 싶다.” 어떤 의미로 ‘단유’라는 단어를 이해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듣고 싶은 대답은 아닐 것 같았다. “잘 봐라.” “네.” 단유는 인사를 하고 다시 교문을 향해 걸었다. 단유네 학교 학생 말고도 다른 학교 학생들도 어우러진 터라 시험이 열릴 학교의 교문 앞은 꽤나 번잡했고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 교문을 지나 시험장에 들어갔더니 교문 밖의 소란과는 완전히 격리된 침묵과 긴장이 맴돌았다. 몇몇은 책상에 엎드려 눈을 붙이고 있지만, 몇몇은 노트나 문제집을 보고 있었다. 무려 고등학교 전 학년에 걸쳐 배운 교과목을 시험 치는 마당에 그런 공부가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마는, 그래도 안 보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할 것이다. 자기 위로 차원에서 노트를 보며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도 전략이라면 전략이다. 단유는 가방을 옆에 걸어두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시험장에 오는 동안 문자가 연이어 들어왔는데, 정신없던 주변 때문에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시험 잘 봐. 사랑하는 우리 단유♡ 라고 간지러운 문자를 보낸 것은 상미였다. ―명수는? ―지금 같이 있지. 역시 우정보다 사랑이야. 그치?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시험 잘 쳐라. ―너도 잘 봐. 끝나고 뭉치자. 콜? 상미는 여전하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단유는 미소를 지었다. 그 외에도 채윤에게서 온 문자도 있었고, 심지어는 멀리 지태에게서 온 문자도 있었다. ―만점 받아라. 이렇게 시간 맞춰서 문자를 보내주는 정성을 생각하면 역시 친구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 [565] 콤플렉스(4) 평소라면 12시 즈음까지 자다가 일어났을 하은이지만, 오늘은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오후에 일을 하려면 그래도 수면은 충분히 취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억지로 침대에 누운 채로 뒤척거렸지만, 결국 오지 않는 잠을 어찌할 수 없어 하은은 침대에서 일어나야 했다. 암막커튼을 걷으니 늦가을의 청명한 햇살이 하은을 감쌌다. 눈꺼풀을 억지로 뜨며 창밖을 내려다보다 어두컴컴한 실내로 고개를 돌렸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잘하고 있겠지?’ 수능 당일임에도 평소처럼 아침 운동을 나갔다 오는 단유를 보며, 하은은 차마 호들갑을 떨기가 어려웠다. 그 속을 완전히 읽은 건 아니지만, 평소와 같은 분위기로 교복을 입고 집을 나서려는 단유를 보며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는 게 어쩐지 실례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하은도 평소와 같이, ‘잘 다녀와’라는 짧은 말로 단유를 배웅했었다. 그러나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하은의 마음도 그렇게 평온할 순 없었다. 그래서 이 시간에도 눈을 껌뻑이며 거실로 나와 시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킁.” 시선을 내리니,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호빵이 보였다. 하은은 점잖아진 호빵을 품에 안고 손끝으로 머리를 가만히 쓸어주었다. 호빵은 눈을 게슴츠레 뜬 채로 그 손길을 얌전히 받아들였다. 처음 호빵을 키울 때는 손이 많이 갔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거실 바닥 곳곳에 지뢰를 설치하기 일쑤였고, 집안 곳곳에 흘리고 다니는 하얀 털들이 눈에 밟혔다. 그도 모자라 새벽에도 킁킁거리며 거실을 뛰어다니는가 하면, 밥투정이 심해서 사료를 먹이는 게 힘들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손이 덜 가기 시작했다. 물론 아이들의 도움이 있었다. 단유가 틈틈이 청소를 하니 집 안은 다시 깨끗해졌고, 명수가 훈련을 시키니 대소변을 가릴 줄 알게 되었다. 더구나 나이가 들면서 점잖아진 탓인지 괜히 뛰어다니면서 사람 정신을 빼놓는 일은 크게 줄었다. 예전에는 그저 귀엽기만 했던 호빵이었지만, 이제는 귀여운 외모를 떠나 그냥 가족으로서 함께 하지 않으면 허전한 호빵이다. 단유와 명수도 그렇다. 예전에는 그저 정성으로 보살펴주고 응원해줘야 할 대상이었던 두 아이는 이제 한 가족임은 물론이고, 가끔은 하은이 의지해도 괜찮을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나름 인생에서 가장 큰 고비일 수도 있을 시험을 맞이하면서도 하은이 단유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그만큼 단유에 대한 믿음이 크다는 뜻임과 동시에 단유가 하은의 품을 떠나 자신의 길을 걷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암시처럼 느껴졌다. 비록 명수는 시험을 치지 않지만, 명수 역시도 조만간 프로팀과 계약을 맺고 나면 프로팀의 연고지가 있는 곳으로 떠나게 될 것이다. 서울이나 수원, 인천과 같은 곳이라면 멀지 않은 곳이라 자주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합숙과 훈련, 그리고 경기를 밥 먹듯 치러야 할 프로선수가 된다면 그마저도 쉽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두 사람이 이 집을 떠날 날도 머지 않았다는 뜻이다. 문득 친구들이 자신에게 해준 말이 떠올랐다. ‘걔네들이 너한테 진짜 가족이라도 돼? 언제나 함께 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그 당시에는 보류했던 그 대답을, 이제는 슬슬 준비해야 할 시기가 오고 있다. 얌전한 호빵의 반응에 아래를 바라보니, 어느새 눈을 감고 오수(午睡)를 즐기고 있었다. “개팔자가 상팔자라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하은은 좀 더 호빵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 오전 시험을 모두 마친 후, 점심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식사 대신 흡연을 위해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학교를 다닐 때도 담배를 피는 학생들이 없진 않았지만,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숨 쉴 틈 없이 빼곡하게 화장실을 채운 모습으로 연기를 뿜어내는 장관(壯觀)은 본 적이 없었다. 개중에는 재수생도 있을 테지만, 현역 고등학생이 더 많은 것처럼 보였다. 단유는 교무실이 있는 층의 화장실을 이용했다. 이 곳은 감독관 선생님들이 자주 지나다니기 때문에 그런 연기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런 이유로 이 화장실을 찾는 사람은 비단 단유 만은 아니었다.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손을 씻으며 거울을 바라보고 복장을 점검하는 단유의 뒤로 다소 왜소한 몸에 날카로운 눈매를 드러낸 남자가 지나갔다. 교복을 입고 있지 않았지만, 젊은 외모를 보면 재수생인 듯했다. 남자는 단유에게 특별히 시선을 두지 않고 화장실을 빠져나갔고 그 뒤를 단유가 잠시 쫓아 보다가 손을 털었다. 화장실을 나온 단유는 잠시 주춤했지만, 이왕에 본 것을 모른 척하기 어려워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검은색 점퍼에 낡은 청바지 차림의 남자는 상의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가끔 오른손으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는 모습이 보였다. 교실로 들어가나 싶었지만 남자는 중앙계단에서 아래로 내려갔고, 곧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학교 본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어가는 남자의 뒤를 쫓던 단유는 멀리 운동장 너머에 닫아놓은 학교 출입문 건너편에서 학교를 향해 애타는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추측해보면 여기서 시험을 치는 학생들의 부모일 것이다. 눈으로 보이지 않아도 간절하게 기도하며 자녀가 시험을 끝내고 나올 때까지 저기서 기다릴 모양이다. 점심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어디 가질 않고 저 자리에 서서 두 손을 꼭 모은 채로 자녀와 함께 고통을 분담하고픈 마음일까? 그러나 사람이 모두 제각각이듯, 그들이 애타게 기도하는 자녀들 중 일부는 자리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노트를 보며 점심을 먹는가 하면, 어떤 자녀들은 가방을 싸 들고 운동장을 빠져나가는 중이다. 어떤 자녀는 밥보다 구름과자가 급했던 모양이고, 어떤 자녀는 점심도 거른 채 어디론가로 향한다. 머리를 손질한 지 꽤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남자는 주변을 살피며 변관 옆으로 향했다. 그 남자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쫓던 단유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한 기색이었다. 본관에는 교무실이 있어서 선생님들과 감독관들의 눈에 띌 수도 있지만, 별관에는 점심시간이라 감독관이 올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뭔가를 저지르기에는 딱이다. 남자는 별관 측면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2층, 3층을 지나 4층까지 죽 올라가는 남자를 단유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빌어먹을.” 남자는 불만을 곧잘 터뜨리는 성격은 아니다. 오히려 속에 묻어두고 꾹꾹 참고 견디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자에게 성격이 좋다고 칭찬을 했다. 어떤 일을 시켜도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고 묵묵히 자기 맡은 일을 해내니 좋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치뤘던 첫 수능은 너무 점수가 좋지 않았다. 그래도 그때는 재수해서 좋은 대학 가자고 생각하며 아쉬움을 삼켰다. 그런데 재수 1년 만에 상황이 급변했다. 아버지의 회사가 휘청거리더니 끝내 무너졌다. 집 안에 압류 딱지가 붙는 광경을 드라마가 아닌 실제 자신의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어머니는 별 이유 아닌 사고로 넘어졌는데, 그만 허리를 크게 다치게 되었다. 추간판 탈출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는데, 다행히 보험이 있어 수술은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수술 이후의 치료과정에서 들어가는 비용과 시간은 보험으로 보상받기 힘든 것이었다. 그 때문, 이라고 말하긴 뭣하지만 어쨌든 재수도 망했다. 집안도 어려워진 마당에 대학은 무리라고 생각했는데, 어머니가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대학을 가지 않으면 사람 구실 못한다.” 대입을 포기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 때문에 남자는 다시 삼수를 준비했다. 그러나 마냥 삼수만 준비할 순 없는 것이, 등록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남자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비록 첫 수능에서 물 먹긴 했지만 자신의 성적이 나쁜 편도 아니었기에 조금만 노력하면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 또 아르바이트로 자신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버는 것은 가계에 도움이 되고, 차후 혹시라도 합격수기 같은 걸 쓰게 된다면 자랑스럽게 기록으로 남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만큼 아르바이트는 쉽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찾아온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아침부터 불콰해진 얼굴로 들이닥쳐서 주정을 부리는 인간도 있었고, 매장 안을 계속 빙글빙글 돌아다니며 수상한 몸짓으로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손님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최악은 사장이었다. 시간이 금이라는데, 제 시간에 교대 업무를 한 적이 드물었다. 자신이 손해 본 만큼의 시간을 보상해줄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 사장과 차마 옥신각신 다툴 성격이 되지 못해 조용히 입 다물어야 하는 자신이 밉고 한심했다. “학생이 공부하는 건 좋은데, 손님 있는데서까지 책을 보고 있는 건 문제가 있지 않나 싶네?” 손님 응대가 엉망이잖아, 라고 소리라도 치면 모를까 저렇게 은근한 어투로 사람 속을 긁으니 더 열이 받는 것 같았다. “벌써 수능인가?” “네. 그래서 그만두려고요.” “그럼 한 달 전에 이야기 해줬어야지, 갑자기 이렇게 말하면 어떡하지?” “말씀을 드린 것 같은데요.” “사람이 구한다고 바로 구해지는 것도 아니잖아? 안 그럼 내일부터 당장 문을 닫아야 할 판인데? 내가 빨리 다른 아르바이트생을 구할 테니까, 그때까지만 수고해줘. 대신 시급 조금 더 쳐 줄게.” 얼마냐고 묻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당 100원 더 오른 시급을 받고 편의점을 그만둘 수 있었다. 안일하게 생각했고, 낙관적으로 기대했던 수능은 역시나 남자에게 큰 벽이었다. 첫 시간, 언어영역 시험지를 잡는 순간 남자는 울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도록 채워지지 않는 OMR 카드를 보면 속이 휑한 느낌이 들었다. ‘누구를 욕하겠어.’ 미련한 자신을 욕할 수밖에. 모질게 행동하지 못한 자신을 흉볼 수밖에.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렇게 생활했던 걸까? 돈은 모았지만, 돈이 있어도 시험을 못 치면 대학을 갈 수가 없는데. 삼수도 실패하고 나면, 부모님은 자신을 어떻게 쳐다볼까? 자리에 누워서 잘 움직이지도 못하시는 어머니는 어떤 말을 하실까? 대학 진학에 실패한 자신이 편의점을 지나다 사장과 마주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저런 사람은 얼굴에 표가 확연히 드러난다. 무언가 극단적인 결정을 하기 직전의 사람은 눈에서 이미 다른 사람과 다른 빛을 발한다. 그것은 일종의 신호다. “지금부터 내가 미친 짓을 할 테니까 잘 봐둬.” 라고 외치는 눈빛이다. 굳이 단유가 그 남자를 따라온 이유는 과연 그 남자가 어떤 미친 짓을 하려고 그러는지 호기심이 생겨서이기도 했고, 더 나아가 오늘 이 고사장에서는 부디 큰 사고가 일어나질 않기를 바라기도 해서였다. 어떤 불의의 사고로 고사장의 시험이 방해를 받으면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가장 높은 층에 오른 남자가 조심스럽게 난간 위로 오르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기껏해야 4층이다. 저기서 바닥을 향해 힘껏 뛰어내린들 죽을 수나 있을까 싶은 높이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난간 위에 선 남자가 심호흡을 하고 있다. 보아하니 쉽게 뛰어내리진 못할 것 같다. 남자가 뒤를 힐끗 돌아보는 모습이 보이고, 뭐라고 소리치는 모습도 보였다. 아마 4층에 머물러 있던 학생들이 그 남자의 모습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식사를 빠르게 마치고 산책을 하던 학생들 몇몇도 단유 근처에 서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뭐지?” “저기서 뛰어내리려고?” “미친 거 아냐?” “관종인가?” “시험 망쳐서 그런가?” “고작 시험 망쳤다고 저래? 아까 우리 반에서 시험보던 어떤 애는 시험지 받자마자 OMR 카드 내고 교실 나가더라. 완전 쿨하던데.” 지금쯤이면 어디 공원에서 소주로 병나발을 불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저렇게 소동을 벌이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저 남자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였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하찮은 이유가 누군가에겐 감당하기 버거운 이유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물론 그걸 하나하나 헤아려 이해해줄 여유는, 적어도 이 시험장에는 없었다. 단유는 상황이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마무리 짓고 교실로 들어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감독관 몇몇이 뛰어서 별관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남자는 생각했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자신의 억울함이 조금이나마 해소될 것이라고. 자신이 왜 뛰어내려야 했는지를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자신을 이해하는 시선을 보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조금은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리 가! 가까이 오면 뛰어 내릴거다!” 눈물을 가득 담은 눈으로 소리를 지른 남자는 벽을 짚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도와줄까? 뒤에서 굵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흠칫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 얼굴에 볼록한 배를 내민 아기가 자신을 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남자는 누구냐고 물을 수 없었다. 아기 같은 외모와 목소리는 성인 남성 못지않게 굵고, 온몸이 붉은색에 흑갈색 트렁크만 입은 사람을 보고 평범하다고 생각하지 못한다는 게 아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공중에 둥실 떠 있는 존재를 보고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지금 뛰어내리면 내가 바로 널 데리고 지옥으로 데려가 줄게. 어서 와. 지옥은 처음이지? 아기가 입을 죽 벌리며 웃었다. 그리고 조막만한 손을 내밀어 남자에게 다가갔다. “으아악!” 남자는 놀라서 난간 아래로 떨어졌다. 남자가 뭐에 놀란 듯 내려오자 4층에서 남자와 대치 중이던 사람들이 얼른 부축하려고 가는데, 남자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엉덩이로 땅을 밀며 물러서기만 했다. “저리 가! 저리 가!” 무엇을 보고 저러는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미쳤다.’ 가끔 심한 스트레스에 정신이 나간 사람도 있다고 했으니, 아마 그런 케이스가 아닐까 짐작했다. ======================================= [566] 콤플렉스(5) 다행히 시험 중간에 벌어진 일은 아니어서 상황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종결되었다. 사이렌을 울리지 않은 순찰차가 교내에 들어왔고, 그때까지 ‘악마를 보았다’며 횡설수설하던 남자는 경찰과 함께 교내를 나가게 되었다. 점심시간 종료까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배를 가볍게라도 채우기 위해 단유는 미리 준비했던 샌드위치를 들고 나왔다. 교정의 벤치에 앉아 운동장을 빠져나가는 순찰차를 바라보며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그리고 자신의 힘이 그 남자에게 어떤 의미였을까를 되짚어보았다. 분명 처음의 의도는 그 남자가 어떤 사고를 칠지 몰라 막아보겠다는 것이었고, 실제로 자살을 하려 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못하게 막아냈다. 그런데 만약 그 남자가 진심으로 자살을 원했다면, 과연 자신은 그 남자의 자살을 막을 명분이 있었을까? 단유는 그 점에 대해 명확하게 확답을 내릴 수 없었다. 도덕적인 명분은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개인의 자유 의지이며 선택인데 타인이 그것을 막아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든 것이다. 사회적으로 자살은 분명 ‘죄’라고 인식된다. 어떤 나라에서는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하면 사형을 시키기도 한다는데,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사회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자체를 죄악시하는 것은 비슷하다. 비록 범죄라고 명시되지는 않지만, 병원이 아닌 경찰이 출동한 까닭이기도 할 테다. 샌드위치에 들어간 양상추의 아삭한 식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단유는 꼭꼭 씹으며 혀끝에서 터지는 단맛과 새콤한 맛을 즐겼다. 샌드위치를 마저 먹은 뒤, 입가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어차피 병원에 갔어야 할 사람이긴 하지만.’ 어쩌면 그 남자는 정신 상담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왜 자살을 하려 했는지에 대한 상담과 더불어 환각 상태가 아닌지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다. 특히 그가 보았다고 주장할 환시(幻視) 증상은 그를 조현병은 아닌지 의심하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극단적인 행동을 결심할 정도였으니, 애꿎은 사람을 정신병자로 만든 건 아니다. 어쩌면 귀신을 목격한 사람처럼 행동할 수도 있다. 지금으로써는 그저 마음을 다잡고 다시 자신의 인생을 충실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것 외에는 단유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 기회를 준 것뿐이다. 이후로는 별 탈 없이 시험이 진행됐다. 빈 OMR 카드를 내고 시험을 포기하는 학생이 아예 없지는 않았고, 듣기 평가를 할 때는 몇몇 반에서 소란이 있었다고도 하지만, 어쨌든 무사히 시험을 마칠 수 있었다. 고사장을 나와 학교 앞으로 향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학교 입구에 몰려들어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 인파 속을 뚫고 어떻게 나가나 살짝 고민하던 찰나였다. 마침 전화벨이 울리기에 전화를 받았다. “응.” ―끝났지? “응.” ―잘 봤냐? “응.” ―역시 너답다. “그래서, 어디로 가면 돼?” 보나 마나 명수는 상미랑 같이 있지 않을까 싶었고, 아마도 자신을 부르기 위해 전화를 했을 것이다. 명수는 웃으며 장소를 말한 뒤, 채윤이도 올 것이라고 전했다. 단유는 서둘러 그들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진짜 친구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요 며칠 느꼈던 복잡했던 심경이 확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 수능이 끝나면 폭주하리라 생각했던 아이들은 잠깐의 자유를 만끽하기도 전에 다시 책상 앞에 앉아야 했다. 어떤 이들은 수험생 할인 혜택을 써가며 놀기 바쁜데, 단유네 학교는 정상 수업을 진행한다며 아이들을 학교에 가둬 놓았다. 물론 학교 안에서 정상적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님은 드물었다. 이미 모든 교과 과정을 끝낸 마당에 어떤 수업을 진행할 수 있을까? 아이들은 집에서 들고 온 노트북과 핸드폰, 혹은 게임기를 활용하여 시간을 보냈고, 체육 시간에는 농구나 축구 같은 종목으로 에너지를 소비했다. 하지만 어떤 아이들은 그런 자유로운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게임기 대신 문제집을 붙잡고 다시 열공모드에 들어가기도 했다. “뭐하냐?” “보면 모르냐.” “공무원 시험 치게?” “집에서 보라고 난리다.” 마치 하소연하는 어투지만, 본인도 생각이 없으면 전혀 하지 않을 공부다. “그냥 한 번 경험 삼아 해 보는 거야.” 당장 시험을 치고 합격을 한다고 해도 대학 때문에 공무원 임용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대학생들도 일반 회사 취직보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열을 올릴 정도라고 하는데, 미리 시험을 쳐 보고 만약 합격한다면 진지하게 미래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단유가 있는 과중반도 그런 일반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6년 이상 반강제적으로 대입을 위한 공부에 몰두해야 했던 것은 과중반도 마찬가지다. 나중에 대학에 들어가면 또 지금과 다른 생활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때까지는 주위의 강제 없이 자유롭게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래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컴퓨터 게임에 빠지는 아이들도 있었고, 드라마나 영화를 잔뜩 다운 받아서 하루 종일 감상하는 이들도 있었다. 사실 수능이 끝났다고 완전히 마음 놓고 편하게 놀 수 있는 형편들은 아니었다. 가끔 논술을 준비해야 하는 학생도 있었지만, 과학 서술형 문제를 풀어야 하는 시험을 요구하는 대학에 지원할 학생들은 이를 준비해야 했다. 계속해오던 게 그런 문제를 푸는 일이었던 과중반 아이들이라고 해도 방심은 할 수 없었다. 한순간의 실수가 탈락이라는 결과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교실은 혼란스러운 난장판이었다. 자유를 만끽하며 노는 아이들이 반, 놀지 못하고 책과 씨름하는 아이들이 반이었다. 그런 와중에 단유는 교실이 아닌 교무실 옆 상담실에서 진학 상담을 하고 있었다. 마주 앉은 선생님은, 왼손으로는 머리를 감싸고 오른손으로는 펜을 돌리며 앞에 놓인 브로셔를 쳐다보았다. 가끔 눈만 들어 앞에서 평화로운 모습으로 앉은 단유를 훔쳐보았지만, 답이 안 나온다는 얼굴로 브로셔를 보며 한숨을 쉬기 바빴다. 더 솔직히 말하면, 브로셔를 볼 필요도 없었다. 가채점이긴 해도, 단유의 점수와 성적이면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대학은 가고 싶은 데로 갈 수가 있다. 굳이 안내서에 기록된 번지르르한 소개말을 언급하며 이런 대학, 저런 대학을 권할 필요가 없다. 서울대. 그 외에는 어떤 대학도 권할 이유가 없는 선생님이다. 다만 이제 그 대학 내에서 어떤 과를 지정해 갈 것이냐를 두고 조언을 해주기만 하면 된다. 학생들의 성향과 잠재력, 그리고 발전 가능성을 고려하여 최대한 적합한 전공과목을 선택할 수 있도록 조언하는 것이 선생님의 역할이라지만, 실상은 수능 점수와 내신 점수를 반영하여 합격 가능한 전공을 선택할 수 있게 알선하는 정도다. 그러니 단유에게 무슨 말이 필요할까? 고르면 합격이 보장된 상황인데. 어떻게 보면 선생님으로서는 가장 편한 상황이다. 그러나 지금 단유와 마주한 선생님은 머리를 감싸 쥐고 싶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지금 꼭 대학 가야 하나요?” “뭐?” 선생님은 단유의 폭탄 발언에 얼이 빠졌다. “지금은 그냥 쉬고, 나중에 대학 가면 안 될까요?” “왜 그러니, 단유야.” 선생님은 혹시 단유가 아픈 건 아닌지 걱정했다. “몸이 안 좋니? 오래 쉬어야 할 만큼?” “아뇨, 그런 건 아닌데요.” “그런데 왜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그러니?” “대학을, 가긴 갈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아닌 거 같아서요.” “왜? 나중에 가면 얼마….” 재수로 대학을 들어갔었던 선생님은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충고를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지금 대학을 가지 않으면 뭘 하고 싶은데?” 일단 단유의 의향을 정확히 알아야 충고를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계 여행이요.” “여행?”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너무 모범적인 대답이라 선생님은 쉽게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래, 선생님도 그건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해. 시야도 넓히고 다양한 풍광들을 즐기고 싶어하는 네 마음은 알겠어. 하지만 굳이 대학 진학을 포기할 정도인지는 모르겠구나. 일단 대학을 들어간 뒤에 방학 때 여행을 다녀도 될 것 같은데 말이지.” “그냥 잠깐 구경하는 여행 말고요, 시간을 두고 머물면서 사람들의 삶을 지켜보고 싶어요.” 뭔가 단단히 결심한 듯한 단유의 태도에 선생님은 머리를 감쌀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막말로 지금 단유의 성적이면 서울대든 카이스트든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게 어렵지 않다. 정확히 정보가 나오지 않아서 단언할 순 없지만, 단유의 성적은 전국 석차 3위 안에는 들 수 있을 점수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성적을 가지고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말할 아이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잠시 후, 선생님이 물었다. “여행 갈 경비는 있니?” 현실적으로 접근해보자. 단유는 고아다. 비록 지금 보호자와 함께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은 아닐 것이다. 대학을 가는 것은, 단유의 성적이라면 장학금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고, 서울대라면 다른 사립대보다 저렴하니 경제적 제약을 덜 받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을 포기하고 갈 정도의 여행이라면 기간도 기간이지만 경비도 엄청나게 들 게 뻔하다. 그런 경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을까? “네.” “있어?” “네. 그동안 조금씩 모은 돈이 있어요.” 조금씩 모았다고 해서 해결될 돈일까? 만약 재벌가의 자녀가 매달 받은 용돈을 모아서 여행을 간다고 한다면, 얼추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단유는 그런 게 아니지 않은가. “혹시 무전여행 같은 걸 생각하니?” 무전여행이라는 낭만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완전히 무일푼으로 여행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선생님은 단유에게 현실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려 했다. 그러나 마주 앉은 사람은 단유다. 전국 석차 3위 안에 들리라 생각했던 아이가 아무 생각도 없이 여행을 계획했을까? 결국 선생님은 상담 중지를 결정했다. “같이 사시는 보호자 분이랑 이야기를 나눠야겠구나.” 오후에 일을 나가시니, 오전 중에 오시라고 말을 전했다. “너희 선생님은 니 생각을 아시니?”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 단유가 여행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하은은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기가 막히네.” “뭐가요?” “너 설마, 나 때문에 그런 결정한 건 아니지?” 하은은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결정한 뒤, 세계 여행을 떠났다. “아니면, 재훈 오빠 때문이라거나?” 재훈도 대학 입학 후 곧바로 휴학하고 세계 여행을 떠났고, 2년 동안 돌아다니다 다시 돌아와 학교를 다녔었다. “주위에 그런 사람들을 보다 보니 너도 거기에 영향을 받은 거 아냐?” 단유는 볼을 긁적이다 멋쩍게 웃었다.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건 순전히 제가 필요하다고 느껴서예요.” “왜?” “이번에도 느꼈지만, 대학을 가는 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거 같아요. 딱히 시험이 어렵지도 않고요.” “와, 오만한 녀석!” “사실이니까요. 아무튼, 그리고 만약 진짜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면 제가 정말 원하는 공부를 선택해서 하고 싶어요. 그런데 지금은 정확히 고를 수가 없어요.” “일단 들어가고 난 뒤에도 전공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편입학하는 방법도 있으니까. 단유는 고개를 들고 천장을 잠시 응시했다. 이윽고 다시 시선을 하은에게 맞추며 말했다. “귀찮네요.” 하은은 피식 웃었다. 단유의 생각은 알겠다. 가고 싶을 때, 가고 싶은 과를 골라서 가겠다, 는 것. 대학이라는 곳이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이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 하겠지만, 어쩐지 단유는 그런 게 의미가 없을 듯했다. 그리고 대학의 이름도 단유에게는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못할 듯했고. 이미 지난 시간 동안 단유를 곁에서 보아온 하은은 단유의 특별함을 잘 안다. 그리고 그런 특별함을 고려하면, 남들이 선택하는 평범한 루트는 굳이 따를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 단유의 선택을 존중해주는 건 어렵지 않다. 다만. “나도 귀찮겠는데?” 보나 마나 학교에서 자신을 부를 테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단유는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 [567] 3년 후(1) ―삐익 휘슬이 울리고 관중석에서 함성과 탄식이 터져 나왔다. 운동장에 선 선수들 중 어떤 이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가슴 속에서 터져 나오는 울분을 참아내고 어떤 이는 주먹을 불끈 쥐고 환희에 가득 찬 함성을 질렀다. 어떤 이들은 서포터즈가 앉은 관중석을 향해 달려가 팬들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나누고, 어떤 이들은 지친 발걸음으로 선수대기실을 향해 걸어갔다. 90분간 선수들이 흘린 땀과 열기가 서린 운동장 한편에서는 경기 결과에 희비를 표하는 사람들과 다르게 분주한 움직임이 일었다. “이쪽에서 대기해 주세요. 슛 들어갑니다.” 대답 대신 짧은 고갯짓으로 의사를 표현한 선수는, 거친 호흡을 정리하기 바쁘다는 듯 콧바람을 연신 내뿜고 있었다. ‘경기 내내 슛했는데, 또 슛이야?’ 제 딴에는 재밌는 언어유희였는지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카메라 앞에 선 미모의 리포터로 향했다. 경기 결과를 짧게 브리핑하던 리포터는 피디의 손짓에 맞춰 멘트를 전했다. “그럼 이쯤에서 오늘의 수훈 선수인 인명수 선수를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인명수 선수?” 리포터가 명수가 선 곳으로 한 걸음 다가오는 동시에 카메라 감독은 줌아웃을 하여 두 사람을 한 화면에 담았다. “오늘 경기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여서 오늘의 선수로 뽑히셨는데요, 소감이 어떠신가요?” “아무래도 오늘 경기가 이번 시즌 1위로 올라가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경기였기 때문에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요, 그래서 조금 부담은 있었는데 그래도 이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요. 개인적인 기록은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네, 그 이야기도 하려고 했는데, 마침내 서울 유나이티드가 1위에 올랐어요. 서울 FC의 독주를 막아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요, 여기서 인명수의 선수의 활약이 돋보였다는 평가도 있어요.” “어, 그런 평가는 조금 부담스럽고요, 제가 잘했다기보다는 저희 팀 동료들이 열심히 뛰어주고 밀어준 덕분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축구는 팀 게임이고 저 혼자 잘한다고 해서 잘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겸손하신 말씀 같은데요, 지금 25라운드까지 인명수 선수가 득점 1위를 하고 계시거든요? 2위와도 5골의 격차가 있을 정도니까요. 그 비결이 뭔가요?” “어, 사실 골은 역시 동료들의 패스가 주요한 거 같은데요, 특히 저희 팀 주장이신 이찬성 선수의 어시스트가 득점 비결인 것 같습니다.” “동료들을 돌려서 뛰어주시는 말씀 같아요. 그리고 한편에서는 말이죠, 인명수 선수의 기본기와 체력이 다른 선수들에 비해 뛰어나다는 말도 있어요. 풀타임 출장도 팀 내에서 가장 많을 뿐만 아니라 한 경기 최고 이동 거리가 많은 선수로 뽑히기도 하더란 말이죠? 그런 체력도 역시 골의 비결이 아닐까 하는데, 어떤가요?” “어, 그것도 맞는 거 같습니다.” 거듭된 칭찬에 얼굴을 붉히는 명수를 향해 마이크를 들이밀었던 리포터는 피디의 손짓에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제 남은 라운드 어떻게 임하실 건지 각오 한 말씀 부탁드릴게요.” “어, 일단 1위에 올라온 이상 이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더 열심히 뛰겠고요, 저희 팀을 위해 항상 경기장에 찾아주시는 서포터즈 분들을 위해서라도 멋진 경기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오늘의 선수로 뽑히신 인명수 선수와 함께했습니다. 다음으로 서울 유나이티드의 감독님과 인터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피디의 손짓에 따라 옆에 서 있던 감독님과 자리를 바꾼 명수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토해냈다. 그리고 선수 대기실로 향해 걸어가자 코치 한 명이 다가와 등을 두들겨 주었다. “수고했다.” “고맙습니다.” “숨 쉬어.” “네.” 명수는 히죽 웃으며 심호흡을 몇 번 했다. 처음 인터뷰를 할 때는 너무 거친 숨소리 때문에 엉망이 되기도 했었다. 앞으로 인터뷰할 일이 많아질지도 모른다며, 인터뷰할 때는 최대한 짧게 숨을 고르면서 말을 하는 습관을 기르라는 코치의 조언에 따랐더니, 그나마 듣기 좋은 인터뷰가 되긴 했지만 반대로 평소의 긴 호흡을 이어나가질 못하니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인터뷰를 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곤 했다. “들어가서 씻고 나와.” “네, 코치님.” 명수가 대기실로 들어서니 선수들이 명수에게 하이파이브를 건넸다. “수고했어, 새끼야.” “오늘 너 미친 줄 알았다.” 다들 나잇살 꽤 먹은 이들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냥 동네 개구쟁이들처럼 순박하게 웃으며 익살스럽게 명수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거나 가슴을 툭툭 치며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 “고맙습니다.” 팀에 들어온 지는 3년이 넘었지만, 나이로는 거의 막내급인지라 명수는 고개를 꾸벅 숙여 가며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잘했다, 명수야.” 팀의 고참이자, 주장인 찬성이 명수에게 다가오더니 볼을 꼬집었다. 명수와 나이 차가 무려 10살이다 보니 명수를 마냥 어리게만 보는 찬성이었다. “주장 덕분이죠.” 명수는 오늘 3골을 넣었고, 그중 찬성의 어시스트가 2개였다. “짜식.” 찬성은 명수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려준 뒤 샤워실로 들어갔다. 명수도 샤워하기 위해 로커에서 샤워 도구를 꺼내 들었다. 그러다 핸드폰이 눈에 들어와 무심코 집었다. 화면을 들여다보니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오늘 수고했다. 명수는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여보세요?” 수화기 건너편에서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라커룸 안이 너무 시끄러워서 대화가 되질 않았다. 명수는 얼른 복도로 나왔다. “여보세요?” 다시 물으니, 그제야 목소리가 들린다. ―수고했다고. “야, 이…. 들어왔으면 들어왔다고 말을 할 것이지, 이게 뭐냐?” ―뭐긴 뭐야? 그냥 들어왔다고 생존 신고한 거지. “2년 동안 연락 한 번 안 하다가 이제 와서 생존 신고?”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아. “선생님한테 그 말 한번 해봐라.”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에 선생님한테 한 소리 들었어. “벌써 했어?” ―솔직히 연락을 드리면 너보다 선생님한테 먼저 했을 거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아? “하긴…. 아, 그런데 오늘 내 경기는 본 거야?” ―봤으니까 수고했다고 말했지. 명수 너, 안 본 사이에 다시 멍청해진 거 아니지? “말도 안…. 잠깐 무슨 소리야? 다시 멍청해지다니?” ―웃자고 한 소리야. 심각하게 듣지 마. “넌 웃겨도 난 안 웃겨.” ―MVP씨, 기분 좋은 날인데 그냥 웃어. “…안 본 사이에 너 성격 이상해진 거 같다?” ―내 성격이 왜? “이렇게 농담을 하는 애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내가 농담을 했다고? 무슨 농담? “방금 나보고 멍청…. 아 놔!”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한껏 과장되게 목소리를 높이던 명수도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어딘데?” ―아, 나? 여기 경기장. “뭐? 여기 있다고?” ―너 경기 끝나고 바로 숙소로 가야 하지? 가면 보기 힘들 거 같아서 여기로 왔어. 씻고 나오면 잠깐 얼굴 보자. “야!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얼른 씻고 나와. 여기까지 땀 냄새 나는 거 같아. “어딘데?” ―주차장. 기다리고 있을게. “너 딱 기다려!” 명수는 얼른 전화를 끊고 샤워실로 뛰어들어갔다. **** 텀블러에 꽂아 넣은 빨대를 물고 음료수를 마신 후, 다시 마우스를 잡은 ‘군필 여고생’이 모니터에 시선을 둔 채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전략적으로 진행해볼게요. A팀과 B팀으로 나눠서 플레이하고요, 브리핑 확실하게 하세요. 각자 수급한 무기들이 뭔지 이야기해주시고 적을 발견하면,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교전은 피해 주세요. 최대한 전투를 피하고 지형을 먼저 선점하는 쪽으로 가서 방어선을 펼치도록 하죠.” ‘군필 여고생’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흘러 들어갔다. 곧이어 쓰고 있던 헤드폰에서 화답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알겠습니다. ―먼저 에코 지역 가실 건가요? “예. A팀 B팀 모두 에코로 가서 A는 오른쪽, B는 왼쪽으로 돌아갈게요.” ‘군필 여고생’의 오더에 따라 멤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여고생이 보고 있는 모니터의 오른쪽에 놓여있던 또 다른 모니터에 띄워 놓은 창에서 채팅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군필 여고생님, 진짜 군필이심? ―혹시 여장교 출신? ―현역 아님? ―군필 여고생님은 여고생이십니다. ―또 한 번의 승리를 기원하며 후원합니다. 후원금이 들어왔다는 효과음에 ‘군필 여고생’이 슬쩍 창을 확인한 후, 감사 인사를 전했다. “코코콩님, 1억 후원 감사합니다!” 보통 게임이 끝나고 결과에 후원이 나오는데, 게임 시작 전에, 그것도 만 원씩이나 후원을 준다는 건, 게임 결과에 따라 더 큰 후원이 뒤따를 수도 있다는 의미라 생각할 수 있다. “빡겜 한 번 해볼게요.” ‘군필 여고생’이 필승을 다짐하며 키보드와 마우스를 조작했다. “브라보 방향 300m 적 발견.” 처음의 오더대로 교전을 피하기 위해 팀은 엄폐 후 기다리기도 했고, 때로는 교전도 벌였다. 위험도 있었지만, 적절한 오더가 작은 승리를 맛볼 수 있게 해줬다. ―MP40에 탄약 110발 찾았어요. ‘군필 여고생’은 전략 무기 습득 보고를 받은 즉시, B팀에 무기 배치를 지시했다. “이제 알파로 갑니다. 알파 영역 진입 후에는 A팀은 즉시 교전, B팀은 배후를 맡습니다.” ―콜. 몇 가지 위기 상황을 큰 어려움 없이 넘기고 차분히 앞으로 나아가는 ‘군필 여고생’을 향한 찬사가 채팅창을 도배했다. ‘이런 분위기라면 가볍게 1등 하겠는걸?’ ‘군필 여고생’은 기분이 좋아지면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긴장이 너무 풀리면 망칠 수도 있으니까, 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고 다시 눈에 힘을 줬다. 얼마 후, 적들을 해치우며 킬로그(Kill log)를 쌓던 ‘군필 여고생’ 팀은 1위를 목전에 두게 되었다. 그때 핸드폰에 불빛이 들어왔다. 무음으로 해놓아서 방송 마이크를 통해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혹시 중요한 연락이 올지도 몰라 모니터 아래쪽에 놔두었던 핸드폰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핸드폰 액정에는 문자가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신경 쓰이네.’ 하지만 일단은 게임을 마무리하는 게 중요하다고 여겨 잠시 틈이 생겼을 때 손을 뻗어 핸드폰을 엎어놓았다. “북동쪽, 덤불 이어진 쪽에 적 있어요.” ―확인. “혹시 모르니까 B팀은 동쪽 봐주시고, 야호님은 견제해주세요. 제가 도랑 타고 올라가서 양각 잡을게요.” ―둘이 올라가는 게 좋지 않아요? “저쪽에서도 저희랑 비슷한 생각으로 언덕을 크게 돌아서 올 수 있어요. 저쪽에서 돌면 동쪽으로 완전히 빠져서 올 수 있으니까, 나올 때까지 확인할 수 없고 나오면 우리는 완전히 드러나는 지형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미리 위로 가서 한쪽을 자르고 난 뒤에 포위하는 게 좋아요.” ―오케이. 일단 그렇게 할게요. “둠둠님, 혹시 저격 각 나오나요?” ―나오면 쏠게요. “일단 그렇게 해주세요. 그럼 제가 올라가서 확인하고 신호 보낼게요.” ‘군필 여고생’이 조종하는 캐릭터가 웅크리기 자세로 슬금슬금 기어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틈틈이 방향을 전환하여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는 적은 없는지 확인하면서 나아가던 ‘군필 여고생’은 총소리와 동시에 피가 튀며 캐릭터 체력의 3분의 2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과 동시에 엎드리기로 자세를 전환했다. 살짝 머리가 드러났을 때 리드 샷을 맞은 모양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위치 확인. 브리핑과 동시에 아군 지역에서 총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저격 담당인 ‘둠둠’의 킬로그가 모니터 한쪽에 떠올랐다. “나이스 샷.” ―나이스. 팀원들이 화답하고 동시에 ‘군필 여고생’은 상황을 파악했다. “왼쪽 없고요, 오른쪽 언덕으로 돌아가는 거 같아요. 동쪽 바위 부근 째주시고요, 둠둠님도 그쪽으로 가주세요. 야호님은 저랑 같이 올라가도 되겠어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팀원들에 의해 곧 적들이 소탕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화면에 승리를 나타내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동시에 채팅창도 승리를 축하하는 메시지가 줄을 이었다. 그제야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팀원들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남기던 ‘군필 여고생’은 엎어두었던 전화 메시지를 확인해보았다. ―오랜만에 인사한다. “이 새끼….” 순간적으로 거친 말을 쏟을 뻔했던 ‘군필 여고생’은 방송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수습했다. “죄송한데요, 저 이만 방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채팅창에서는 갑작스러운 방종에 무슨 일 있냐고 걱정하는 메시지와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방종이냐며 항의하는 메시지들이 뒤섞여 올라왔다. 그리고 가지 말라는 메시지와 함께 후원금이 들어오거나, 수고했다며 응원하는 메시지와 함께 후원금이 들어왔다. “후원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방종하게 돼서 죄송하고요, 나중에 오늘 못한 만큼 방송하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해요.” ‘군필 여고생’은 미안하다는 마음을 담아 사과를 한 뒤, 방송을 끝냈다. 그 후, ‘군필 여고생’은 핸드폰을 들고 통화를 시도했다. ―어. “어? 어? 2년? 3년 만에 전화해서 한다는 소리가 어?” ―문자 보냈잖아. “문자도 성의 없이 이따위로 보내놓고 나한테 좋은 소리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미안. “…어딘데?” ―방금 명수 만나고 나서 집으로 가는 길. “집이면, 선생님 계신 곳?” ―그 집 말고 다른 집 있어? 아, 너 명수랑 헤어졌다며? “그 이야기는 또 어디서 들었는데? 명수가 그래?” ―어. 조금 전에 네 안부 물었더니 명수가 그러더라. 헤어졌다고. “내가 찼어.” ―좀 봐주지 그랬어. “봐주긴 뭘 봐줘. 됐고, 너 이리로 와라. 아니면 내가 갈까?” ―잠깐 시간 있으니까 보고 가지 뭐. 어디로 가면 돼? 예전 그 집 그대로야? “아냐. 나 독립했어. 주소 찍어줄게.” ―알았어. 가서 다시 연락할게. 그렇게 통화를 마무리했다. ‘군필 여고생’, 아니 상미는 3년 만에 얼굴을 보게 된 친구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욕실로 들어갔다. 방송하는 동안에는 얼굴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어서 씻지도 않고 있던 참이었기에, 이렇게 만날 수는 없었다. ======================================= [568] 3년 후(2) “너 얼굴이 왜 그래?” “얼굴?” 얼굴을 더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상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이런 훈남이 또 어디 있을까 싶었는데, 지금은 뭐야? 비쩍 골아가지고. 제대로 먹고 다니긴 했니?” “명수도 그런 이야기를 하긴 하더라만. 내가 그렇게 많이 살이 빠졌나?” 나는 모르겠던데, 라고 중얼거리니 상미는 친구의 손목을 붙잡고 가까운 식당에 가서 뭐라도 먹여야겠다며 데려갔다. 가정식 식단을 파는 조그만 식당에 들어와 ‘이모’를 외치는 상미의 모습은 매우 익숙해 보였다. “집에서는 밥을 잘 안 해 먹어서 나와서 먹는데, 집밥 생각 날 때마다 여기 와서 먹어.” “너 예전에는 라면 잘 끓였던 거로 기억하는데, 요리 잘 하지 않았나?” 상미는 혀를 찼다. “우선 이 세상에서 너보다 라면을 못 끓이는 사람은 없을 거란 이야기를 먼저 할게. 두 번째는 라면 끓이기가 요리 실력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거야.” “라면 물 맞추는 것도 요리잖아.”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밖에 없을 거야.” 곧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두 사람은 식사를 시작했다. 상미가 빠른 속도로 그릇을 비워내는 것을 보고 물었다. “어쩐지 나 사준다는 건 핑계고, 니가 배고파서 먹는 거 같다?” “이리 메치나 저리 메치나 똑같잖아? 따지지 말고 먹어.” 식사하며 그간의 이야기를 물었더니, 상미는 부지런히 숟가락을 놀리는 와중에 자신에 관해 짧게 털어놓았다. 대학을 들어갔지만, 본격적으로 인터넷 방송을 시작하면서 휴학을 한 이야기. 1년 정도를 고생하며 방송을 하다가 겨우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방송을 위해 따로 독립해서 살면서도 방값 낼 정도의 수입을 얻으며 살고 있다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명수는?” 상미는 먹는 걸 멈추지 않았다. “서로 바쁘니까, 자주 보기 힘들고, 조금 오해도 생기는데 그거 가지고 다투는 일이 잦다 보니 그냥 헤어지게 된 거지.” “완전히?” 되물으니 상미는 입을 다물었다. 시선을 피하는 모습을 보니 역시나다. “고등학생일 때도 그러더니 니들은 정말 변하질 않는구나.” 그 말에 상미가 버럭했다. “야! 솔직히 말해서 내가 지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고작 그걸 이해 못 해줘?” “주말 데이트 약속 깬 거?” “그것도 이야기하든? 아무튼, 남자애가 입이 가벼워. 그리고 솔직한 말로, 내가 밤낮 구분하기 힘든 직업이라는 걸 걔가 이해해줘야 하는 거 아냐? 모르는 것도 아니고, 뻔히 알면서 말이야. 조금 늦었다고 그렇게 사람을 면박을 주나?” 이에 대해 명수는 ‘자기가 주말에 시간 빼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3년 만에 만난 친구를 앞에 두고 성토했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이러는 모습을 보니, 괜히 변함없는(?) 모습을 보게 된 것 같아 실실 웃음이 났다. “너 돈 있어?” 식사를 끝내고 집에 돌아가려 하니, 상미가 붙잡았다. “갑자기 돈은 왜? 빌려달라고?” 상미가 인상을 구기며 손가락질을 했다. “너 거울도 안 보니? 솔직히 아까는 너무 배도 고프고, 너도 바쁘다고 해서 일단 식당에 들어가긴 했지만, 지금 너랑 같이 다니는 게 되게 부끄러운 거 알아? 머리 자를 돈이 없었어? 어디 초원의 인디언들이랑 친구 하다 왔어? 웬만하면 머리 좀 자르고, 그 옷도 새로 갈아입어.” “꾸질꾸질해?” “아주 정확한 표현이네.” 옷을 들쳐 보이며 말했다. “오래 입고 다닌 옷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알면 고쳐. …혹시 제대로 씻지도 않고 다닌 건 아니지?” “냄새나?” “아니. 냄새는 안 나는데, 괜히 냄새나는 기분이야.” “그렇겠지.” “뭐?” “아냐. 알았어. 아무튼 난 이만 가볼게. 너도 들어가.” 상미가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완전히 돌아온 거야?” “응.” “어디 안 가고?” “응.” “…다시 봐서 정말 반갑다.” “나도 반가워.” 입꼬리를 늘이며 웃었더니 상미가 말했다. “자주 연락하고 지내자고.” “나중에 명수랑 다 같이 보자.” “그 자식이랑 헤어졌다니까?” “그래, 알았어.” “진짜야.” “응, 그래.” “진짜라니까?” 손을 흔들어 보인 뒤 돌아섰다. **** 원래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하은이 자신이 일하는 곳으로 당장 달려오라는 이야기에 발걸음을 돌렸다. 하은은 얼굴을 보자마자 달려와 잔소리부터 늘어놓았다. “도대체 뭘 하고 지냈길래 얼굴이 이래? 응?” 씁쓸한 웃음과 함께 잘 먹고 지냈다는 변명을 늘어놓아도 하은은 들리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어디 아팠어? 혹시 위험한 곳에라도 갔던 거야?”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잘 지냈어요.” “잘 지냈다는 애가 몰골이 왜 이래?” “그렇지 않아도 명수랑 상미한테서 똑같은 이야기 듣고 오는 중이에요.” “밥은?” “상미가 사줬어요.” 단유는 하은의 손을 붙잡고 걱정 그만하셔도 된다고, 거꾸로 그녀를 위로해야 했다. “여행은 다 한 거야?” “네. 충분히 할 만큼 한 거 같아요, 일단은.” “일단?” “지금은 그래요. 나중에 다시 나가게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그래요.” 하은은 돌아온 탕아를 보듬는 엄마의 심정으로 단유의 머리와 어깨를 연신 쓸어내렸다. 얼굴을 보니 안심이 된다는 하은에게 단유는 웃음과 함께 집에서 기다리겠노라고 말했다. “얼굴 보니 안심이다.” 명수도 일 년에 몇 번 겨우 얼굴을 마주할 정도인 상황이다. 두 아이가 별 탈 없이 잘 자라줘서 고맙기도 하지만, 그래도 늘 한편으로는 마음이 쓰이고, 자신이 늘 같은 자리에서 돌아올 그들을 기다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던 하은이었다. 비록 자신도 허락하고 보낸 단유가 이렇게 무사히 돌아와서 얼굴을 비추니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 그리고 그간 보이지 않는 쇳덩이가 가슴 속에 깊이 박혀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집에 가 있을 거지?” “가서 좀 씻고 쉬고 있을게요.” “그래. 그렇게 해. 나도 끝나고 바로 갈게.” “네.” 단유는 다시 한번 하은과 포옹을 하고는 돌아섰다. “정 선생님, 누구예요?” “가족이에요.” “가족? 동생이에요?” 하은은 학원 문을 열고 나서는 단유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들이기도 하고 동생이기도 하고 그래요.” 동료 교사는 고개를 갸웃하다 말했다. “뭐하는데요?” 길게 자라 치렁거리는 머리와 오래된 재킷, 낡은 청바지의 언밸런스는 둘째치고, 스쳐 가며 보았던 깊고 진한 눈빛이 기억에 남는다. “지금은…백수네요.” “네?” **** 집에 돌아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자신을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단유는 고개를 돌려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해 이곳에 오기까지, 자신의 외모에 대해 딱히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지인들의 걱정과 우려를 사는 외관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정돈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콧김을 길게 뿜어낸 단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미용실이 있었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머리 좀 다듬은 뒤, 돌아가서 씻으면 될 것 같았다. “어서 오세요.” 올림머리를 한 20대 여성이 단유를 맞이했다. 저녁 시간을 조금 넘은 시간이 미용실 안은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머리 자르실 건가요?” “네.” “여기서 잠시 기다리실래요?” “오래 기다려야 하나요?” 여성은 가게 안을 둘러본 뒤 대답했다. “10분 정도만 기다리시면 될 거예요.” 단유는 여성이 안내한 자리로 갔다. 그곳에는 이미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 몇이 앉아 있었다. 짧은 눈 맞춤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이내 들고 있던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잡지책을 들추며 단유에 대한 신경을 끊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젊은 남자애가 정리되지 않은 긴 머리를 출렁이며 등장하니 호기심에 바라보았다가 후줄근한 옷차림에 괴이한 헤어스타일을 가진 남자가 정상적이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에 일부러 시선을 피한 것이리라. 단유는 오랜만에 찾은 미용실의 분주한 분위기가 조금 어색하기도 했는데, 여성이 안내해 준 자리에 앉으니 옆에 있던 사람이 슬쩍 거리를 벌리는 모습이라 더 눈치가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니 괜히 신경 쓰이네.’ 여행하는 동안 다른 사람의 시선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살았더니, 더 신경이 쓰이는 기분이다. 6년 전에 샀던 핸드폰이라 꽤 구형이었던 데다 핸드폰으로 인터넷 서핑만 간간이 할 정도일 뿐이어서, 옆 사람이 하는 현란한 그래픽의 모바일 게임 같은 건 깔려 있지도 않았고, 애초에 핸드폰을 주물럭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취미도 없었다. 단유는 품에서 작은 포켓북을 꺼내 펼쳤다. 여행하는 동안 떠오르는 것들을 마구잡이로 적은 책인데, 이제는 이것들을 구체화시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다양한 주제와 단상(斷想)들이 기입되어 있었는데, 그중에서 어떤 것을 먼저 정리할지를 골라볼 요량으로 페이지를 들췄다.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처음 여성이 말한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단유가 포켓북을 재킷 안쪽에 집어넣고 일어서자, ‘옷은 이쪽에 맡겨주시겠어요’라고 물어왔다. 옷을 벗어 건넸더니 굉장히 조심스럽게 옷을 집는데, 손님의 옷이라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인지 아니면 더러운 것을 억지로 참으며 잡는 모습인지 헷갈렸지만 내버려 뒀다. 딱히 문제가 될 일은 없었으니까. 안내받은 자리로 가서 앉으니 깔끔한 유니폼을 갖춰 입은 여성이 다가와 거울을 통해 시선을 맞추며 인사를 건넸다. “커트하실 건가요? 어떻게 잘라드릴까요?” “깔끔하게 잘라주세요.” “원하시는 스타일은 없으시고요?” “네.” “그럼 지금 스타일은 그대로 하시고요?” “아뇨, 그냥 깔끔하게….” 마침 앉은 자리 왼편에 모니터가 있었는데, 거기에 제목을 모르는 예능 프로가 나오고 있었다. 과장된 몸짓과 리액션으로 주변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출연자들 중 한 명이 눈에 들어왔고, 단유는 손으로 그것을 가리켰다. “저렇게 잘라주세요.” 딱히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 말하기보다 직관적으로 표현하기 편해서 가리켰는데, 미용사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능숙하게 커트보를 둘러씌운 그녀는 옆에 세워둔 이동식 수납장에서 가위를 집었다. 단유는 적당히 알아서 해주겠거니 생각하며, 마침 시선이 간 김에 TV를 보기로 했다. 머리를 커트하는 동안 멍청하게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보단 어딘가에 시선을 둘 곳이 필요했던 고객들의 니즈를 충족시키기 위해 설치한 TV였던 모양이다. 스튜디오에서 진행되는 예능프로였는데 미용실 내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 때문에 뭐라고 말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물론 상관은 없었다. 그저 시선 둘 곳이 필요해 설치해둔 모니터에 불과했으니. 아까 봤었던 남자 외에도 여러 출연자들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입을 벌려 말하면 과장된 행동과 표정으로 리액션을 해주며 뭔가를 진행 중이었다. ‘음?’ 한참을 보던 중에 게스트인지, 아니면 원래 있었는데 카메라에 안 잡혔던 모양인지 모르겠지만, 여성 출연자가 화면에 잡혔다. 그런데 그 여성 출연자가 눈에 익었다. 발랄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 옆에 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손뼉도 치고, 춤도 추고, 입을 가리고 웃는 등 아주 바쁜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 괜히 단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모습을 미용사가 봤던 모양이다. “저 연예인 좋아하세요?” 처음에는 자신에게 묻는 건지 몰라 단유의 대답이 조금 늦었다. “네?” “저기, 저 여자. 이름이 뭐더라?” “나윤이요.” “아, 어, 맞나?” 미용사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와중에도 손은 쉬지 않는 게, 역시 프로였다. “본명인가 보죠?” 본명을 알 정도면, 정말 팬인가 보다, 라고 말을 건네는 미용사에게 단유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무튼 요즘 저분 좋아하시는 남성 팬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노래도 좋다고 하더라고요.” “그런가요?” 몰랐다는 듯한 단유의 대답에 미용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제가 아는 남자들도 저기 저분, 나오면 눈을 못 떼더라고요.” 단유가 아는 나윤은 저렇게 짙은 방송용 화장을 하지 않았을 때의 모습이라 조금 낯설게 보이기도 하지만, 확실히 예쁘다, 는 칭찬이 나올만한 외모였다. 원래 말하기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고객 접대 차원에서 말을 건네는 건지, 미용사는 계속 이야기를 건넸고 단유는 적당히 맞장구도 쳐주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나윤―아마 방송용 예명이 따로 있는 모양이지만 미용사는 쉽게 기억해내지 못했다―이 속한 가디스R이 낸 싱글들이 성공을 거두면서 인지도를 올리고 있다는 이야기와 목소리가 예뻐서 여자들 중에서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는 둥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다른 건 다 떠나서, 나윤이 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 같아서 단유는 기분이 좋았다. ======================================= [569] 3년 후(3) 길었던 뒷머리가 싹뚝 잘려나가며 앉은 자리 아래가 긴 머리카락으로 쌓이고 있을 때, 단유는 나윤이 나온 프로가 대충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출연자들에게 어느 지역의 대표 음식을 먹게 하고, 그 음식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는, 소위 먹방이라고 표현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생각해보니 나윤을 만날 때는 늘 식당을 갔었는데, 연습하며 소비하는 에너지에 비해 먹는 양이 늘 적었다. “평소에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 그렇다고 아예 안 먹을 수는 없고, 먹어도 적게 먹어야 하니 나윤은 대신 맛있는 걸 먹고 싶어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용인되지 않았다. 대부분 기획사 근처의 허름한 식당에서 빠르게 식사를 끝내야 했었기에 먹는 메뉴라곤 김치찌개, 혹은 된장찌개가 다였고, 가끔 연습을 쉬고 단유와 데이트를 한다는 명목으로 시내를 나가도 둘 다 돈이 없던 때라 먹는 데 많은 돈을 쓸 수가 없어 소박한 분식 메뉴 정도가 다였다. “저건 먹기 힘들 텐데.” 미용사가 한마디 했다. 머리를 다듬는 손이 멈추지 않는 가운데, 언제 또 TV를 봤나 싶지만, 그렇다고 딱히 문제가 생기는 것 같지는 않아 단유는 입을 다물었다. 나윤이 먹을 음식은 홍어였다. 사실 단유도 먹어본 적은 없는 음식이라 그 맛을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발효 음식이고 자극적인 암모니아 냄새 때문에 쉽게 먹기 힘들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난 먹는 걸 구경만 해도 속이 울렁거려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미용사는 단유의 옆머리 커트를 마무리했다. 반대쪽은 아직 손대지 않아 비대칭인 단유의 헤어스타일을 거울을 통해 확인하더니 물었다. “길이는 이 정도면 괜찮나요?” “네.” 미용사는 귀 옆을 세심하게 정리한 후 반대편에 섰다. “솔직히 저런 건 너무 심한 거 같아요. 홍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텐데, 방송이라고 억지로 먹이고. 너무 가학적인 거 같아요.” 진심이 담긴 말이라 단유는 그녀를 흘깃 본 후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아 영상 속 인물들의 표정만 살필 뿐이었지만, 미용사의 말대로 나윤은 짐짓 먹기를 꺼리는 표정이 슬쩍 드러났다. 하지만 나타나기 무섭게 사라지며 남은 것은 아이돌스러운 표정이었다. 금방이라도 꿀이 쏟아질 것 같은 큰 눈, 이라는 자막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나윤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끝내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곧 미간을 좁히며 찡그리는 표정을 짓는데, 그 표정이 웃기다고 다른 출연자들이 폭소하는 장면이 몇 컷에 걸쳐 교차로 연출되었다. 화면을 보느라 자기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갔던 모양인지, 미용사가 단유의 머리를 살짝 잡아주었다. 좌우의 균형을 확인하는지 거울을 보던 미용사가 다시 빗으로 머리를 넘긴 후 가위질을 시작했다.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네, 뭐.” 단유의 시원찮은 대답에 미용사가 넘겨짚었다.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요즘 아이돌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다고 그래요? 사실 저도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이 있거든요. 원래는 별로 관심이 없다가 친구가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저한테 영업을 한 거거든요? 일 끝나고 집에 갈 때 심심해서 유튜브로 영상을 찾아봤는데, 한 번 보니까 계속 보게 되더라고요.” 어쩌면 모니터의 음향을 줄인 게 실내 음악을 조용히 감상할 수 있도록 한 게 아니라, 미용사가 손님들에게 건네는 수다를 잘 들어주라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아는 얼굴이기에 본 것이지, 딱히 감정이 있어서 본 것은 아니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 보듯 감정이 식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제는 정리된 관계이기에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을 뿐이다. 더군다나 앞으로도 볼 일이 없을 것인데, 스토리도 모르는 예능 프로를 계속 보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미용사가 가위를 수납장에 놓으니, 옆에서 대기하던 보조 미용사가 다가와 단유를 세면대로 안내했다.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대고 누우니 능숙한 손길로 단유의 머리를 감겨주기 시작했다. 이런 서비스를 받아본 적이 없던 단유는 생소한 느낌을 받음과 동시에 편하고 기분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하지 않게 두피 마사지라며 머리를 꾹꾹 눌러줄 때는 시원하다는 표현이 절로 입에 오를 정도였다. ‘다음에 명수랑 같이 와봐야겠어.’ 자신이 그렇듯, 명수도 이런 미용실에는 온 적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단유는 머리까지 말려주는 친절함에 반쯤 감동했다. 다만 커트 비용이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일 때는 ‘역시’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1년에 두어 번(?) 커트를 한다고 가정하면 이 정도 비용으로 이런 서비스를 받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 단유가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가을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여행을 선택했을 때, 하은에게 약속했던 것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여행이 끝나면 대학, 꼭 갈게요.” 처음에는 굳이 대학을 갈 필요가 있냐는 생각이었고, 하은도 굳이 단유에게 대학을 가야 한다고 종용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는 중에 하은이 은근히 비친 생각은, 적어도 이 사회에서는 ‘대학’이라는 타이틀이 있는 게 좋다는 것이었고, 사소한 문제로 어려움을 겪질 않길 바라는 하은의 마음을 읽은 단유가 결정을 내렸다. 정말 ‘대학’이라는 타이틀이 자신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오랜 시간 자신과 명수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헌신한 하은을 위해서라도 그 정도 ‘수고’는 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었고, 어쩌면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자신이 정말 궁금해하는 배움도 얻을 가능성을 고려했다. 이왕에 갈 거라면 굳이 시간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 오랜만에 학교에 갔더니, 몇몇 선생님들을 빼곤 단유를 알아봤다. 3년 전, 무려 전국 1등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던 졸업생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 기행을 저지른 괴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널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구나.” 3학년 때 담임이었던 선생님은 단유의 손을 꽉 붙잡고 흔들었다. 머쓱한 웃음으로 대답을 미룬 단유를 데리고 자리로 향한 선생님은 단유가 준비한 서류를 받아 챙기고 응시 원서를 작성케 하였다. 단유가 꼼꼼히 서류를 채워 넣는 동안 선생님이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물었다. “여행을 했어요.” “여행? 어디?” “여기저기요.” “세계 여행을 했다는 거니?” “네.” 혹시 대학을 가지 않은 걸 후회하지 않냐, 고 묻고 싶었지만 선생님은 그 질문을 속으로 삭였다. 후회한들 이미 지난 마당에 무슨 소용일까. 그저 선생님 본인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물음에 지나지 않는 것을. 제자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참는 게 도리, 라고 생각했다. 그 사이 단유가 서류 작성을 마쳤다. 선생님은 오랜만에 만난 기념으로 밥이라도 같이 하고 싶었지만, 원서 접수 기간이라 졸업생들이 계속 찾아오기도 했고, 단유도 약속이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바람에 인사를 나눠야 했다. “나중에 다시 한번 찾아와. 그때는 선생님이 밥 한 끼 쏠게.” “시험 끝나고 찾아뵐게요.” 단유가 나간 뒤, 지켜보던 선생님 한 분이 다가왔다. “이번에 시험 친대요?” “그런가 보네요.” “천재들은 괴짜가 많다더니, 딱 그 짝이네요. 공부는 많이 했대요?” “세계 여행을 하다가 며칠 전에 들어왔다네요.” “그래요? 그럼 제대로 공부를 안 했다는 말이잖아요? 그럼 지난번보다 더 점수가 낮을 수 있겠네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단유’이기에 혹시 모를 일이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지난번과 같은 결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아마 서울대는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무슨 과를 지원한대요?” “거기까지는 이야기를 못 했네요.” 묻고 싶은 게 많았고, 그래서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지만 다음으로 미룬 상태다. 지금은 그저 천재성을 보였던 제자가 부디 그대로이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 오랜만에 돌아오니 할 게 많았다. 군대 간 채윤이를 보러 가고도 싶었는데 그러질 못하는 건 생각보다 할 일이 많은 탓이었다. 오전 중에 수능 원서 접수를 한 것도 그 중 한 가지였고, 이후 강남에 위치한 번역 회사를 찾아간 것도 한 가지였다. “살이 빠졌나 보네?” 단유가 여행 간 것을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인 상곤은 단유와 악수를 나눈 뒤 마주 앉았다. “다시 한국에서 지내는 거냐?” “네.” “견문은 많이 쌓았고?” 만족할 정도는 아니지만, 일단 지금은 충분하다고 여긴다는 단유의 말에 상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단유는 계속 번역일을 했다. 메일을 통해 일감을 받고, 다시 메일을 통해 번역본을 전달하였기에 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여행을 가기 전처럼 빡빡한 일정으로, 일 년에 3~4개씩 번역하던 작업을 1~2개 정도로 줄였다. 딱히 힘들어서라기보다는 여행이라는 목적에 좀 더 충실하기 위해 일하는 시간을 줄인 것이지만, 덕분에 쌓아뒀던 통장 잔고가 조금씩 줄어가고 있던 차였다. 상곤은 단유 앞에 책을 무더기로 내어놓았다. “그동안 번역한 책들. 그리고 이건 이번에 진행할 거.” ‘번역-김단유’라고 적힌 책들을 한 권씩 살핀 단유는 상곤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챙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당연한 건데 뭘. 그럼 이제 다시 예전처럼 일하는 거냐? 우리 대표님이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저를요?” “니가 4개씩, 일을 맡아서 해줄 때 회사 입장에서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감수팀에서도 니가 맡은 작업물은 달리 손 볼 곳이 없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거든. 회사 입장에서는 짧은 시간에 많은 책을 번역할 수 있었으니 비용적인 측면에서도 확실히 이득이었고. 의뢰받은 출판사에게서도 신뢰가 높았단 말이지.” “예전처럼 일해 보려고요. 돈도 필요하고요.” “모아놓은 걸 다 쓴 거야? 여행하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이제 대학에 갈 거거든요. 대학 등록금도 필요하고 하니까 돈 벌어야죠.” “정말 열심히구나.” 딱히 열심히, 라고 할 것도 없었다. 상곤이야 단유의 작업 속도에 매번 놀라움을 표했지만, 이제는 단유도 번역이란 일에 익숙해져서 예전보다 더 빨리 일을 처리할 자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일감을 많이 받지 않는 건, 역시 자신만의 시간을 여유롭게 사용하고 싶다는 이유가 컸다. 상곤은 조그만 가방에 책을 담아주었다. 그리고 같이 식사라도 하겠냐고 제의했지만, 단유는 다음으로 미뤘다. “아쉽네.” “책은 빨리 번역해서 드릴게요.” 단유는 인사를 하고 회사를 나왔다. 어느새 해가 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며칠간 만나야 할 사람들, 처리해야 할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시간을 많이 쏟았는데, 이제 겨우 정리가 끝이 났다. 주말에 강원도로 가서 군복무 중일 채윤을 만나러 가긴 하겠지만, 일단은 그때까지 집에서 편하게 책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수능이야 기억을 점검할 겸, 예상 문제집 몇 권 정도를 풀어보면 될 일이고, 이제부터는 오롯이 자신만을 위해, 속에 품고 다니던 포켓북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연구해볼 일만 남았다. 그리고 기대하건데, 그 정리가 끝나면 아마 단유는 새로운 마법을 손에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 김단유 아냐?” 지하철을 타러 가던 도중, 누군가가 단유를 불렀다. 사람 많은 강남의 거리에서 단유를 알아보고 불러세울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사람을 만날 확률은 또 얼마나 될까? 단유가 고개를 돌리니 하얀 셔츠를 멋들어지게 입고 있는 또래 사내가 히죽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야, 살이 너무 빠져서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눈빛은 여전하구나.” 우습게도 이 사람 많은 곳에서, 하필 만난 사람이 승현이었다. ======================================= [570] 3년 후(4) 붉은빛이 도는 세련된 헤어스타일을 한 승현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반갑다.” 마치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불알친구를 만난다는 듯 승현은 반가움을 가득 담은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아무렇게나 걷어 올린 것 같은 소매 아래로 멋들어진 팔찌들이 길고 하얀 손목을 감싸고 있었다. 단유는 승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반갑다.” 건넨 손을 붙잡지는 않았다. 악수를 거절한 단유의 행동에 살짝 머쓱한 표정을 짓던 승현은 이내 표정을 고치고 그의 왼쪽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여성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 여긴 고등학교 동창. 3년 만에 처음 만나는 건데, 이런 데서 다 보네.” 단유를 소개하는 승현의 말에 여성은 건성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그 와중에 단유의 위아래를 훑던 여성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승현에게 물었다. “엄청 친한 친구였나 봐?” 비꼬는 듯한 그녀의 말투는 단유의 행색이 초라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승현의 악수를 거절한 태도 때문에 불쾌했기 때문일까. 물론 단유는 별로 상관없었다. 남이니까. “아, 뭐.” 친하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다. 승현이야 단유를 오랫동안 봐왔다지만, 정식으로 대면한 것은 고작 두어 번이었으니까. 그 사실을 깨달으니 단유가 자신의 악수를 거절한 이유도 그런 친밀감의 온도 차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승현은 다시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리고는 물었다. “잘 지내냐?” 참 실속 없는 질문이다. 악수하고 반가운 척을 할 사이도 아닐뿐더러, 서로의 안부를 묻고 대화를 나눌 사이도 아니다. 단유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승현은 아닌가 보다. “애들이 너 되게 궁금해하더라. 아, 맞다. 얘가 있잖아, 우리 수능 쳤을 때, 전국 1등이었거든.” “전국 1등?” 여자가 놀란 듯 단유를 바라보았다. ‘전교 1등’만 해도 탄성이 나올 수식어건만, 수십만의 아이들 중 한 명만이 들을 수 있는 ‘전국 1등’은 결코 쉽게 듣기 힘든 수식어였다.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다시 단유를 바라보았다. 머리는 최근에 다듬었는지 깔끔한 편이지만 딱히 멋을 낸 스타일은 아니었다. 얼굴은 마른 편이었는데, 가만 보니 뭔가 색다르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특히 렌즈를 낀 것처럼 새까만 눈동자는 어딘지 이질감을 느끼게 하였다. 하지만 단유의 인상이 별로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은 그가 입고 있는 옷 때문이었다. 비록 시기상 여름이 다 지났다고 해도 아직까지는 더운 편인데, 눈앞의 남자는 언제 씻었는지도 모를 허름한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안에 받쳐 입은 하얀 티셔츠도 어쩐지 오래도록 세탁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낡은 티가 팍팍 나는 바지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전교, 아니 전국 1등이라고 하니 갑자기 사람이 달라 보인다. “그럼 서울 대학교 다니세요?” 여자가 단유에게 처음으로 건넨 말이었다. 하지만 대답은 승현이 대신했다. “아니. 얘 대학 안 갔어.” “응?” “그 일로 우리 학교 완전히 발칵 뒤집혔잖아. 학교 정문에 ‘전국 1등’ 이렇게 써서 플래카드를 걸려고 했었는데, 얘가 대학 안 간다고 해서는 난리가 났었지.” 그때 생각이 난다는 듯, 키득거리는 승현의 말에 여자는 혼란스럽다는 눈으로 단유와 승현을 번갈아 보았다. 그런 여자의 모습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승현이 물었다. “그때 너 교장실에도 불려가고 그러지 않았냐?” “잘 아네.” 단유의 무덤덤한 대답에 승현은 신이 나서 계속 이야기했다. “우리 학년에서 되게 유명한 이야기였어. 기자들이 우리 학교에 찾아오기도 했다더라고. 우리가 졸업하고 나서도 학교에 찾아와서 왜 그 학생은 대학에 가질 않았습니까, 라고 묻기도 하고, 심지어는 학교에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 때문에 조사가 들어오기도 했다더라고.” 마치 자신이 단유를 얼마나 잘 아는지 말하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승현은 떠들었다. 단유는 잠시 눈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길 가던 사람들이 길 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자기들을 힐끔 살피며 지나가는 모습들이 보였다. 심하게 반가워하는 승현과 대조적으로 침착해 보이는 단유의 대비가 아무래도 눈에 띄는 모양이다. 하지만 승현은 그런 눈치를 못 챘는지 여전히 자기 이야기에 신이 나서 떠들었다. “아무튼 그 뒤로 연락이 전혀 없어서 애들도 너 되게 궁금해하더라고. 그런데 이런 데서 이렇게 보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그치?” 왜 저렇게 신이 난 걸까? “아무튼,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 말이 길어질 분위기를 느꼈는지 여자가 승현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응? 왜?” 여자는 핸드폰을 들어 시계를 보여주었다. “아, 그래. 알았어. 단유야, 전화번호 좀 가르쳐줘라. 우리가 지금은 약속이 있어서 그렇고,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밥 한번 먹자.” 승현은 웃는 얼굴로 단유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번에도 단유가 멀뚱히 서 있자, 승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러나 역시 이번에도 금세 표정 관리를 하며 핸드폰을 집어넣고는 지갑을 꺼내더니 명함을 한 장 꺼냈다. “혹시 그러면 이거 받고, 나중에 연락 한번 해. 내가 밥 사줄게.” 승현은 단유의 손에 억지로 명함을 쥐여준 뒤, 윙크를 했다. “꼭 연락해라.” 손을 흔들어 보인 뒤, 여자의 어깨를 감싸 안고는 인파 속으로 사라져갔다. “오빠, 저 사람 진짜 전국 1등이야? 수능 점수로?” “그렇다니까.” “그런데….” 승현은 여자의 뒷말을 짐작한다는 듯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고아야.” “고아?” “응. 그 때문인지 사교성도 좀 부족하고 그래. 그래서 고등학교 때도 친구가 없었거든. 한번은 친구들이랑 시비가 붙었는데, 어쩔 줄 몰라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중재해서 싸움이 일어날 뻔한 걸 막아주기도 했지.” “키는 큰데 힘은 없나 봐?” “그게, 고등학교 때는 그래도 덩치도 좀 있는 편이었는데 지금 보니까 좀 불쌍하게 변했나 보다. 먹을 것도 못 챙겨 먹는 눈치 같고.” “얼굴이 좀, 그렇더라. 비쩍 마른 얼굴에다 눈은 좀….” “눈빛이 그렇지?” “응. 되게 어두운 사람 같아.” “없이 살아서 그럴 거야. 솔직히 아까 내가 핸드폰 번호 물어봤을 때, 걔가 가만히 있었잖아? 그때 내가 실수를 한 거지.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르는데 번호를 물으니까, 자존심 상할 수도 있겠다 싶었거든.” “핸드폰 없는 사람이 있겠어?” “있을 수도 있지. 너무 가난해서 한 달 요금도 버거워서 핸드폰 마련 못 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어?” “불쌍한 사람이네?” “불쌍하지. 같이 놀아줄 친구도 없으니까 맨날 책만 보는 거지. 그런데 또 저런 애들이 악바리 근성, 뭐 그런 거 있잖아? 그래서 전국 1등까지 한 게 아닐까 싶어.” “그런데 대학은 왜 안 갔대? 돈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생각해봐. 전국 1등 정도면 대학에 장학금 받고 들어갈 수도 있지 않았겠어? 그런데도 왜 대학을 가지 않았을까? 돈 때문만은 아닌 거지.” “그럼?” “나도 모르지. 갑자기 대학 안 가겠다고 배짱부리면서 원서도 안 넣었다고 하니까. 성격 문제일 수도 있고, 돈 문제일 수도 있고.” “오빠는 학교 다닐 때 쟤랑 친했어?” “야, 쟤가 뭐냐, 쟤가. 그래도 나랑 친군데.” “어쨌든.” “그래, 뭐. 별로 친한 건 아니고, 내가 좀…뒤에서 봐주는 편이랄까?” “오빤 그때도 되게 착했구나? 불쌍한 사람 보면 막 보살펴주고 싶고 그랬어?” “조금 그런 게 있는데, 내가 무슨 성인군자도 아니고 다 도와주겠냐? 그냥 눈에 밟히길래, 조금 도와준 거지.” “오빠, 난 오빠가 착한 사람이라서 좋긴 한데, 그렇게 살면 언젠가는 뒤통수 맞을지도 몰라. 세상에 나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아까 그 사람도 오빠 배경보고 한 번 비벼보려고 전화할지도 모르잖아? 속이 시꺼먼 사람일지도 모르는데, 동창이라고 다 받아주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에이, 그래도 내가 지를 얼마나 도와줬는데 뒤통수를 치겠어?” “어머, 이 오빠 진짜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 하네? 그러다 큰일 당한다고. 오빤 적당히 사람들을 경계할 줄도 알고 그래야 돼. 에휴, 이러니까 내가 오빠 옆에서 오빨 지켜줘야 하는 거야.” “그래, 알아. 나도 그래서 니가 고마워.” “고마우면, 고맙다고 티 좀 팍팍 내줘. 섭섭하지 않게.” “알았어. 뭐 필요한데? 갖고 싶은 거 이야기해. 내가 다 사줄게.” “정말?” 알콩달콩 커플은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단유는 마침 정류장에 도착한 버스에 올라탔다. 올라타는 사람들 때문에 밀리고 밀려 뒷자리까지 간 단유는 긴 팔을 뻗어 손잡이를 붙잡았다. 차가 출발하며 잠시 덜컹거렸지만, 단유는 흔들림 없이 서서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마침 코너를 지나 어느 가게로 들어가는 승현 커플이 보였다. 단유는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명함을 꺼내보았다. 무슨 국회의원 공보담당 인턴 김승현이라고 적힌 명함이었다. 주변에 쓰레기통이 있었다면 버릴 텐데 정류장 근처에 쓰레기통이 없었다. 쓰레기를 길에 함부로 버리면 안 된다. 만약 시내 환경 미화를 위해서라면 더 많은 쓰레기통을 설치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보는 단유였다. 물론 쓰레기통이 많으면, 그것을 관리 유지하는 비용과 인력이 많이 소요될 테니 무작정 늘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길에 쓰레기가 버려짐으로서 생기는 처리 비용을 고려하면 쓰레기통이 있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특히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곳이라면 비용보다 미화를 좀 더 신경 쓰는 게 옳지 않을까? 생각을 좀 더 확장해보면,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쓰레기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사람을 줄일 수는 없으니, 사람들의 의식을 개선할 교육이 더 많이 필요하겠다. 쓰레기와 사회 환경 미화의 관계를 고심하다 보니 어느새 내릴 때가 되었다. 다음에 또 이에 대해 생각할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자칫 지루할 뻔했던 시간을 알차게 사용한 것 같아 썩 나쁘지는 않았다. **** 주말에 하은과 함께 시내로 나왔다. 단유는 그럴 필요 없다고 항변했지만, 하은은 꼭 사야겠다며 그를 데리고 백화점으로 갔다. “그동안 이런 일이 있을까 봐 내가 부지런히 저축했었나 보다.” 단유의 예전 옷들은, 애초에 많지도 않았지만, 단유에게 맞지도 않아서 새 옷들을 살 필요가 있었다. 지금 단유가 입고 있는 옷도 여행 중에 산 옷이었는데, 허구한 날 같은 옷만 입고 다닌다는 걸 깨달은 하은이 억지로 단유의 손목을 잡고 끌었다. “저도 돈 있어요.” “네 돈으로 옷을 사 입을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이렇게 억지로라도 데리고 나온 거야.” “갖춰 입고 나갈 일도 별로 없는걸요.” “그래도 옷은 있어야지.” 매장에 데리고 가서 이것저것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하은은 예전에 애들을 데리고 와서 옷을 사주던 기억이 떠올라 괜히 기분이 들떴다. “이건 어떠니?” “저만 사주면, 명수는요?” “걔는 여자친구 있잖아.” 둘 다 단유에게 헤어졌다며 씩씩대며 성질을 내더니, 지금은 또 매일 통화를 하며 죽고 못 산다고 한다. 하은은 징글징글한 녀석들, 이라고 짧게 평했다. “너 없는 동안에도 몇 번을 싸우고 헤어지고 만났는지 몰라. 그러고선 나한테 전화해서 어찌나 하소연을 해대는지.” 투덜대면서도 하은의 손은 병아리 감별사의 그것처럼 쉴새 없이 옷들을 들었다 놨다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상미가 이런 데는 관심이 있는지 명수 옷은 잘 챙겨 주더라.” 단유는 멀찍이서 그저 하은을 바라만 보다가 하은이 손을 뻗으면 그녀의 손에 든 옷을 집어다 탈의실로 갔다가 나와서 품평을 듣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그것은 꽤 피곤한 일이었지만, 동시에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 몸은 힘들지만 하은이 신나 하는 모습을 보는 건 좋았다. “너 혹시 키가 더 커진 거니?” “음, 아마도요?” “농구 선수 될 거 아니면 그만 커도 되겠다. 그리고 밥도 좀 팍팍 먹고. 도대체 무슨 여행을 했길래 얼굴에 살이 안 오른다니? 계속 굶고 다녔니?” 단유는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몇 시간의 쇼핑 끝에 두 손 가득히, 까지는 아니지만, 가을 내내 입고도 남을 옷들이 담긴 쇼핑백을 들고 백화점을 나올 수 있었다. “겨울 오기 전에 한 번 더 오자.” 하은은 다음을 기약하며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고, 단유는 즐겁지만 고된 일을 마무리했다는 뿌듯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밥 먹고 들어갈까?” “네.” “뭐 먹고 싶은데?” “선생님은요?” “니가 먹고 싶은 거로 먹어.” “음, 볶음밥 어때요?” “…그냥 따라와라.” 하은은 단유를 데리고 고깃집을 데려갔다. 돼지 갈비를 푸짐히 시킨 뒤, 불판에 적당히 구워놓고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 사진을 명수에게 보냈다. 곧 명수에게서 ‘어떻게 자기만 빼고 그럴 수 있냐’며 징징대는 문자가 도착했고, 하은은 단유와 나란히 앉아 혀를 빼물고 놀리는 듯한 표정의 셀카를 찍어서 보냈다. 하지만 둘 다 명수가 그 사진을 보며 기분 좋게 미소 지으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 [571] 진실의 거울(1) 단유의 일상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하는 것도 똑같았고, 방에 틀어박혀 책을 파고드는 것도 똑같았다. 학교나 직장을 나가지 않으니 거의 집 안에서만 지냈고, 이제는 늙어서 기운도 없는 호빵을 옆에 끼고 소파에 앉아 책을 읽으며 유유자적하는 단유였다. “부럽다. 내가 바랬던 삶이 바로 이 모습이었는데.” 점심을 함께 먹은 뒤, 집을 나서던 하은이 말했다. 단유는 스웨터에 붙은 보풀을 떼어내며 인사했다. “잘 다녀오세요.” “그래.” 단유가 돌아온 뒤 보였던 하은의 발랄함은 여름밤 하늘의 폭죽처럼 사그라들었다. 일상의 권태로움은 그 무엇으로도 이길 수 없는 강적과도 같았다. 하은이 나가고 나면, 단유는 호빵을 소파 위에 올려두고 청소를 시작했다. 단유가 온 뒤 가장 큰 변화는 사실 이 점이다. 하은이 게으른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혼자서 넓은 집을 청소하기에는 벅찬 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단유는 먼지 하나 용서치 않겠다는 결벽증 같은 청결도를 보였고, 늘 정돈된 집안은 마치 모델하우스를 보는 기분이었다. 청소가 끝나면 다시 호빵을 끼고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책상에 앉아 공부하기보다는 소파에서 반쯤 누운 상태로 책을 펼쳐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호빵은 단유의 배 위에 올라타 몸을 웅크리고 거실 창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햇볕을 쬐며 낮잠을 자고, 단유는 모아뒀던 책들을 옆에 쌓아두고 마치 만화책을 보듯 읽어나갔다. 지금 단유가 읽고 있는 책은 ‘중력파’에 관련된 서적으로 ‘신카이 히사아키’라는 일본 오사카 공대의 교수가 썼는데, 얼마 전 회사로부터 받은 책이었다. 비록 단유가 의뢰를 받은 책은 아니지만, 단유가 이쪽 분야의 서적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던 상곤이 챙겨준 책이었다.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은 사실 오래전부터 있었다. 정확히는 단유가 ‘공간 이동’을 재현하기 위해 공부를 하면서부터였다. 단유는 어느 날 갑자기 공간을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었고, 어느 날 갑자기 그 능력을 잃었다.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가능하다는 것을 체험한 단유로선 그 능력을 재현할 방법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마법이란 초현실적 능력이 아무리 초과학적인 영역이라해도 그 바탕은 철저하게 세계와 사물에 대한 본질의 탐구와 숙려(熟慮)에 기반하기에 지식의 습득과 연구는 필수다. 확장하면, 공간 이동이라는 이능(異能) 역시 충분한 지식과 연구만 있다면 얼마든지 구현 가능한 마법계 능력이라는 것을 단유는 믿었다. 그러나 ‘공간 이동’은 쉽게 이루기 힘든 마법이었다. 그에 관련된 지식을 얻으려 해도 당시 단유가 접근할 수 있는 정보가 한정되어 있었고, 현실적으로도 그 연구에만 매달릴 수 없었던 일들―학업이라든가―이 있었다. 특히나 ‘공간’이라는 주제에 한정해서도 단유가 얻어야만 하는 지식의 양이나 깊이가 가볍지 않아서 단시간에 이루기 힘들다는 것을 파악한 단유는 눈을 돌리기로 결정했다. 그가 배우고 익혀야 할 지식들이 많은데 한 가지에만 몰두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몇 년 후 단유는 ‘환상 마법’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한 발 디딜 수 있었다. 환상 마법은 지금까지 단유가 사용했던 마법 중 가장 유용하게 써먹은 마법 중 하나였고 여러 사람들이 그 혜택(?)을 누렸다. 하지만 환상 마법의 최대 수혜자라고 하면, 단유는 호빵이 아닐까 생각했다. “킁.” 마치 단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콧방귀를 뀌며 눈을 뜬 호빵이 단유의 배에서 내려왔다. 느릿한 걸음으로 급수기를 향해 가더니 꼭지 아래를 혀로 할짝댔다. 충분히 물을 보충했는지 호빵이 다시 단유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소파에 앉은 단유를 바라보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심심하다는 뜻이리라. 단유는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앞뒤로 까닥였다. 곧 거실에 노랗고 빨간 공들이 통통 튀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호빵은 익숙하게 공들을 향해 쫓아갔다. 지금까지 느리게 걸었던 이유가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체력을 보전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듯 달리고 뛰고 굴렀다. 공을 물거나 발로 잡으면 꽃잎이 날리듯 흩어져 사라졌다. 그리고 다른 곳에 또 다른 공이 생겼다. 그러면 호빵은 다시 공을 향해 달려갔다. 좁은 거실 안에서 뽈뽈거리며 뛰어다니는 호빵은 너무 신이 나서 어쩔 줄 모르겠다고 꼬리를 힘차게 흔들었다. 어느새 거실에는 여러 개의 공들이 바닥과 벽을 오가며 돌아다녔고, 그 사이 각양각색의 나비들이 폴폴 거리며 날아다녔다. 단유는 그 와중에도 편안한 자세로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여유로운 오후였다. ****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고 느껴질 무렵, 모든 고3들이 두려워하며 기다리던 그 날이 왔다. 단유는 두 번째로 맞이하는 날이었지만, 역시나 두려움은 없었다. 학교 다닐 때보다 여유로운 나날들을 보내면서도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었던 탓인지, 시험 준비는 어렵지 않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몫이었다. “같이 가야 하지 않겠어?” 하은은 충혈된 눈동자를 하고 단유에게 물었다. “저보다 선생님이 더 걱정이네요. 잠 못 주무셨어요?” “어떻게 편히 잠을 자겠어?” “저 못 믿어요?” “세상에. 내가 너를 못 믿는다고 하면 도대체 누굴 믿을 수 있겠어? 당연히 널 믿지. 믿는 건 믿는 건데, 그렇다고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잖아. 물론 니가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란 건 알지만, 그래도 학원 같은 거 안 다니고 독학만으로 준비하는 건 좀 어렵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안 할 수 없는 거지. 게다가 그날 하루의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아무리 똑똑해도 망칠 수 있는 게 시험이잖니.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저 조금 전에도 운동하고 온 걸요.” “그래, 확실히 몇 달 전보다 훨씬 보기 좋아진 얼굴이라서 안심은 된다만. 그래도 요 며칠, 날도 춥던데, 혹시라도 감기 같은 거 걸린 건 아니지? 감기약 같은 비상약이 집에 있던가?” “저 감기 안 걸렸어요.” “아, 그래? 아, 내가 감긴가 보다. 괜히 몸이 으슬으슬하네.” “코도 빨개요.” “아, 그렇구나. 야, 그럼 너 좀 떨어져라. 혹시 감기 옮으면 큰일 나. 지금은 아무렇지 않을지 몰라도 갑자기 시험 중에 열나고 머리 아프고 그러면 큰일이잖아. 목도리랑 마스크는 꼭 하고 가고. 목도리는 있지? 없나? 내 거 줄까?” “방에 있을 거예요. 챙겨 갈게요.” “또 뭐 챙길 거 없어? 책이랑 노트, 뭐 이런 건 필요 없나? 펜은? 연필이랑 지우개 같은 것도 챙겼어? 아, 점심은? 사 먹을 거니? 돈 있어? 잠깐, 내 지갑이 어딨더라?” 허둥대는 하은을 붙잡았다. “괜찮아요. 다 준비했어요. 그리고 열이 좀 있는 것 같은데, 주무세요.” “아냐, 아냐. 괜찮아. 그럼, 진짜 나 안 따라가도 되겠어?” “저 잘 치고 올게요. 그리고 저녁때 학원으로 갈게요.” 단유는 오랜만에 정신없이 쏟아내는 하은을 안심시킨 후 집을 나섰다. 3년이나 지났지만, 고사장의 분위기는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날은 추웠고, 고사장 정문 주위에는 수험생들을 응원하러 온 후배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다가 학교 선배들이 나타나면 큰 목소리로 응원의 목소리를 보내고 따뜻한 차를 건넸다. 가끔 사복을 입고 나타난 학생들도 선생님들이 알아보고 손짓을 하면, 후배들이 달려가 선배들의 손에 준비한 티슈와 간식을 쥐여주었다. 교실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학교 아이들끼리 모여서 수군대거나 혹은 몸을 웅크리고 책상에 엎드려 있거나, 또는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노트를 암기하는 아이들의 풍경은 그대로였다. 엄숙함과 긴장감이 뒤섞인 공기가 수험생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와중에, 중간자리인 단유는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자세로 칠판 위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고등학생일 때보다 머리가 길어서 재수생이라는 게 티가 나는지, 아니면 가방도 없이 나타나 책상 위에 펜 두 자루만 올려놓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어선지 주변 아이들의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단유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계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 때문에 어떤 아이들은 ‘저 시계에 뭐라도 있나’ 싶어서 눈을 살짝 좁히며 시계를 바라보기도 했다. 물론 그 시계는 평범한 시계일 뿐이어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시험 포기한 사람인가?’ 무려 수능인데 저렇게 여유로운 자세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째깍거리며 지나가는 시계를 보니 무수한 단상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처음 만들어보았던 목제 시계의 시제품도 떠오르고, 시계탑의 분침이 덜컥거리며 움직이던 광경을 바라보던 기억도 떠올랐다. ‘공간’의 영역이 ‘시간’의 영역과 분리될 수 없는 ‘차원’계임을 인지했던 순간의 기억도 떠오르고, 이곳과 ‘저곳’의 시간 왜곡을 처음 깨달았을 때의 충격도 떠올랐다. 다른 장소지만 같은 장소인 ‘교실’에서, 3년이 흘렀지만, 그때와 똑같은 시각에, ‘수능’이라는 시험을 반복하는 행위에 대해 잠시 고찰하기도 했다. 사실 일상에서도 이와 같은 일은 반복되고 있다. 매일 매일 다른 하루지만, 같은 시간에 일어나 출근하고, 어제와 같은 공간에서 어제와 같은 일을 하며, 하루를 반복한다. 그리고 어제와 분명히 다른 내용의 TV를 오늘도 똑같이 바라보다 잠이 드는 하루를 사람들은 반복한다. 하은이 가끔 토로하는 권태는 이런 반복에서 오는 것일 테다. 물론 매일 수능을 보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은 일생에 단 한 번만 경험하는 이벤트일 테니, 일상과 비교하는 것은 억지스럽긴 하다. ‘상상은 자유지.’ 딱히 수능에 목을 매는 것도 아니고, 필요성을 전혀 못 느낀다, 까지는 아니지만 인생의 전환점, 정도로 중요성을 느끼지도 않으니 긴장도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몇몇 사람들처럼 엎드려 잠을 자는 척을 하고 싶지도 않아, 그냥 시계를 바라보며 시간을 때울 단상(斷想)들을 조각(彫刻)하거나 조합(調合)해 볼 뿐이다. 그리고 이런 단상에서 혹시라도 좋은 아이디어를 얻는다면, 그것 또한 이득이다. 여행하는 동안 얻은 노하우라고도 할 수 있다. 시험이 시작된 뒤에는 생각을 잠시 묻어두고 시험에 집중했다. 3년이 지났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그동안 교육 개혁이라도 일어나서 갑자기 수학 시험에서 전단사함수가 튀어나온다거나, 과학에서 열 물리(Thermal Physics) 문제가 나오는 게 아닌 이상은 말이다. 그리고 그런 난이도라면 단유가 어려워할 게 전혀 없었다. 그해 수능에서 단유는 또다시 최상위 점수를 얻었다. “아깝다. 혹시나 이번에도 만점 받나 했는데.” 명수의 말에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만점 받아 뭣하게.” “너 혹시 일부러 틀린 거야?” “그건 더 어이없는 소리지. 뭐하러 일부러 틀려.” “그럼 진짜 못 풀었다는 소리야?” 굳이 따지면, 못 푼 게 맞았다. 지문과 문제가 서로 다른 답을 묻는 외국어 영역 문제나, 문제 자체에 오류가 있어서 어떤 답을 써도 틀리게 되는 문제 같은 건 무슨 용을 써도 맞출 수 없었으니까. “그런 면에서 보면, 오히려 3년 전의 내가 미숙했던 거야.” 그 당시에도 그런 문제가 있었는데, 그때는 그런 문제를 푸는 게 익숙해져 버렸던 단유였고, 그래서 맞출 수 있었다. “그럼 그거 뭐야, 그 뭐 신고하는 거 있잖아?” 명수는 단어가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다는 듯 더듬거리며 말했지만 단유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이의신청?” “그래, 그거. 그거 해야 하는 거 아냐?” 아직 신청 기간이 아니라서 하진 않았지만, 단유는 아직 이의신청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했다. 틀린 건 틀렸다고 말해야 하지만, 굳이 자신이 나서서 가르치듯 떠벌릴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 외에도 이의신청을 할 사람은 수백, 수천 명일 테니 단유가 한들 티도 나지 않겠지만 말이다. “근데 너 이러고 있어도 돼?” “가야지.” 명수는 무릎을 짚으며 일어섰다. 이제 K리그 클래식 마지막 라운드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명수네 팀인 서울 유나이티드는 작년 챌린지에서 승급하여 올해 클래식 라운드에서 놀라운 성과를 이룬 팀이었다. 명수의 덕, 이라고 표현하면 조금 과장이지만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정도여서 많은 사람에게서 기대를 받는 중이었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오늘 경기 잘해라.” “당연하지. 오늘 너를 위해서 해트 트릭 한다.” “야, 그걸 왜 나를 위해서 하냐? 네 여자친구를 위해서 한다고 해야지.” “그야, 상미한테는 당연히 그렇게 말해놨지.” “박쥐 같은 놈.” 단유는 명수의 등을 찰싹 때려주었다. 명수는 히죽 웃으며 손을 흔들고 대기실로 뛰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단유도 돌아섰다. 이제 관중석에 가서 친구의 활약을 지켜볼 시간이다. ======================================= [572] 진실의 거울(2) 교정에 심어진 벚나무에 하나, 둘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하늘하늘 거리는 하얀 꽃잎을 보고 있으면 감성이 메마른 사람이라도 나무 아래에 서서 시를 읊고 싶은 광경이다. 그러나 그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시를 읊기보단 핸드폰을 들어 셀카를 찍고, 해시태그를 붙여 SNS에 올리기 바쁘다. ‘감성 폭발’하는 문장을 적어 놓고 뿌듯해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이곳은 바로 한국 제일의 대학교, 서울대학교다. 워낙 넓어서 셔틀버스를 타고 다니는 이들이 많다고 알려졌지만, 공강 시간에는 이렇게 유유자적하게 교정을 돌아다니며 산책을 즐기는 사람도 없진 않았다. 도서관에 가서 과제를 하는 것도 좋은 시간 때우기지만, 이렇게 날이 좋으면 도서관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게 스스로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다. “내가 들었던 서울대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한때는―아마도 호랑이가 곰방대 물던 시절일 거로 추정한다―대학만 나와도 취업이 되던 시절이 있다고 하지만, 지금은 대학 졸업증과 한식 요리사 자격증 정도가 비슷하게 취급되는 시기다. 그래서 많은 대학생들이 입학하자마자 도서관으로 입주 경쟁이라도 벌이듯 틀어박혀 밤낮으로 책을 끼고 사는 게 대학의 현실이다. 고학점은 당연하고, 토익과 각종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부에 전념하는 학생들로 도서관의 불은 꺼질 줄 모른다. 최고 명문대라고 손꼽히는 서울대 역시 다르지 않았다. 사정을 잘 모르는 이들은 ‘그래도 서울대니까 다른 데보다 낫지 않냐?’고 하는데, 듣는 서울대생은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간다. 서울대생은 남들보다 훨씬 높은 기준점을 통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서울대 나왔다면서 이것밖에 안 돼?’라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그건 개인의 자존심만 굽히면 어느 정도 용인될 수 있는 수준이다. 근본적으로 이 나라의 취업문이 좁아진 마당인데, 서울대라는 타이틀이 성골(聖骨) 취급을 받는 것도 아닌 이상 치열한 경쟁은 필수였다. ‘서울대 백수’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1학년 때부터 최선을 다해야 한다. “고3만 끝나면 내 세상일 줄 알았는데, 여긴 새로운 지옥도로구나.” “미친놈.” 두 남학생은 한숨을 내쉬며 파란 하늘을 바라보다 중도로 향했다. 가끔 커플인지 팔짱을 끼고 걷는 이들을 보면, 왜 자신의 두 팔에 안겨 있는 것이 귀여운 여자 친구가 아니라 무거운 전공 서적이어야 하는지 답답할 지경이다. 그들은 학기 초부터 각종 과제를 안겨준 교수님에 대한 뒷담화로 청춘을 소모하던 중이었다. “어? 쟤, 걔 아냐?” “응?” 친구가 턱짓으로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커다란 키의 훈남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고 느릿한 걸음으로 마주 오고 있었다. “뭔데?” “왜, 얼마 전에 대나무숲에 올라온 글 못 봤어?” “잘 모르겠는데?” 그때 마주 오던 사내가 옆을 지나갔다. 둘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지났다. 지나간 뒤 친구는 슬쩍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3년 전에 전국 1등이 대학 진학 포기했다고 해서 난리가 났었잖아?” ‘난리’라는 표현을 썼지만, 실제로 난리가 난 건 아니다. 고작해야 ‘수능’이라는 이벤트에 목매달던 고등학생들에게나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뿐이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그 사건은 의문과 호기심을 자아내게 했을 뿐이지만, 당시 고등학생들에게는 마치 무림 고수가 무림 제일 악당을 물리친 뒤 아무 일 없다는 듯 쿨하게 무림을 떠나는 모습처럼 보였다. 수능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좌신합일(座身合一)의 자세로 책상에 들러붙어 있던 사춘기 소년들에게 이보다 멋있는 장면은 상상할 수 없었다. 3년 전 고 2였던 이 두 사람 역시 그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게 쟤, 아니 저 선배라고?” “선배 아니고.” “그럼?” “그때 대학을 안 갔는데, 이번에 다시 수능치고 들어왔대.” “대박.” 새삼스러운 눈으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친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진짜야?” 단유는 전공을 고르는 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 대학을 가냐 마냐를 결정할 때는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이라는 생각이었지만, 이왕에 대학에 들어가게 되니 무엇을 배워야 할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이 되는 한에서, 지정된 전공과목 외에 다른 전공과목도 수강해서 배울 수 있다는 것은 들어 알았지만, 그래도 주전공이라는 이름으로 집중해서 배울 과목이니 절로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 배워야 하는 학문 분야를 지정한다면, 역시 물리와 화학이다. 그러나 개인적 취향을 고려한다면 수학과나 컴퓨터학과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마법으로 극복할 수 없는 분야이기에 관심이 쏠리는 의학 쪽도 선택지에 두고 고민했었다. 점수가 좋으니 아무거나 골라도 되는구나, 라며 부러워하는 친구들―군대 간 채윤과 휴학 후에 인터넷 방송에 집중하고 있는 상미―에게서 대학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다가 결국 물리천문학부의 물리학 전공을 선택하게 되었다. 처음에 단유는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다. 외모의 문제가 아니라, 특별히 주목받을만한 사건이 없는 학생이란 이야기였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도 참여하고 선후배간의 만남이라는 자리에 나가서 인사도 했지만, 몇몇 사람들에게서 ‘잘생겼네’라는 덕담을 듣는 정도 외에는 별일이 없었다. 조금 과묵하다는 정도와 나이를 따지니 사수생 정도라고 알려졌을 뿐이다. 그런데 서울대학교 대나무숲, 이라는 SNS 페이지에 글이 올라왔다. ―물리천문학부 신입생 김단유, 혹시 3년 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주인공 아닌가요? 우연히 단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던 한 학생이 익명으로 글을 올린 것이다. 의혹의 제기에 댓글이 붙기 시작했고, 곧 단유의 나이와 출신학교가 공개되면서, 긴가민가하는 반응이 이어졌다. ―같은 고등학교 출신인데, 저분은 저희 선배님이 맞습니다. 당시 우리 학교가 발칵 뒤집혔었죠. 단유는 모르지만, 단유를 기억하는 동문 후배의 증언이 이어지면서 사람들은 단유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여기서 뜻밖의 일들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김단유’라는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했다. 혹시 그의 개인 SNS 계정이라도 찾으면, 그가 당시 사건의 주인공인지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인터넷 검색창에 단유의 이름을 집어넣으니 단유의 개인 페이지는 찾을 수 없고, 대신 원치 않았던 기사들과 커뮤니티 글들이 검색되었다. “가디스R 뮤직비디오에 나왔었다고?” “갤럭시즈는 또 누구야?” “노래도 불렀었네?” “와, 대박! 힘이 장난 아닌가 봐? 아니면 격투기 같은 거 배운 건가?” 단유가 지난 세월 남긴 흔적들이 고스란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너무 예전이라 지금과 비교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뮤직비디오에 여러 컷으로 출연하기도 했고, 『초전박살! 길거리 싸움 고수』라는 민망한 제목으로 단유가 광종을 제압하는 영상이 나오기도 했다. “김단유.” “네.” 강의실에서 출석을 부르면 다른 사람을 부를 때는 관심 없던 사람들이 단유의 이름이 나오면 모두 단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문 속의 인물이 어떤 사람인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픈 마음에서일 것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강사님이지만, 일순간에 바뀌는 강의실 분위기를 감지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물었다. “무슨 일이죠?” 물론 누구도 대답할 수 없었다. 흘깃대는 시선과 소곤대는 목소리가 신경 쓰였지만, 다들 강사님과 눈이 마주치면 ‘무슨 일이시죠’라고 딴청을 피우는 눈치였다. “강의 진행하겠습니다.” 1학년들이 필수로 들어야 하는 교양강의를 맡은 강사는 굳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단유 역시, 딱히 수업을 듣는 데 방해하려는 게 아니라면 그 정도 시선쯤은 무시할 수 있었다. 바로 옆자리에서 수업 시간 내내 힐끔거리며 자신의 얼굴을 마치 멸종동물을 발견한 것 마냥 들여다보는 동기의 시선은 솔직히 조금 거슬렸지만 참을 수 있었다. 강의가 끝난 뒤에 붙잡고 물어보면 되니까. “혹시 이 사람이 맞으세요?” 동기도 참을성을 발휘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단유에게 붙더니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단유는 동기의 얼굴을 한 번 보고 그가 내민 핸드폰으로 시선을 던졌다. 거기에는 인터넷 기사 페이지가 로딩되어 있었는데, 3년 전 단유가 대학 진학을 포기한 일을 보도한 기사였다. “네.” 부정할 이유가 없는 물음이었다. “그럼 이것도요?” 구형 핸드폰으로 찍은 조악한 화질의 영상 속에 어린 시절의 단유가 담겨 있었다. 이런 쓸모없는 데이터를 여전히 품고 있는 인터넷이라니. “맞아요.” “그럼 이것도 맞으시죠?” 세 번째 들이밀 때부터 예상은 했는데, 역시나 가디스R의 뮤직비디오였다. “네.” “사인해주세요.” 지체없이 노트를 들이밀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동기에게 단유가 물었다. “왜요?” “어, 유명인이시잖아요? 저 유명한 사람 처음 보거든요. 사실 제가 지방에 있다가 와서요, 서울에서는 연예인도 많이 만난다고 하던데, 형처럼 유명한 사람은 처음 보거든요. 아, 혹시 예의에 어긋나는 일인가요?” 악의 없는 동기의 대답에 단유는 물끄러미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다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다음은 내 차례, 라고 노트를 들고 있는 모습에 단유는 이마를 짚었다. “저 유명한 사람 아니에요.” “왜요? 뮤직비디오에도 나오고 노래도 내셨잖아요? 리모트요. 저 그 노래 되게 좋아했어요. 중학교 때요. 핸드폰에 집어넣고 계속 들었거든요. 원곡보다 더 많이 들었어요.” 처음 받아보는 리액션에 단유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팬이에요!” 반짝이는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 사인이 없다는 말로 자리를 피했는데, 다음 강의도 동기와 함께였다. “이름이 뭐예요?” “강새벽이에요, 형.” 경북 김천에서 올라왔다는 새벽은 자기 살았던 곳은 서울에 비하면 촌이나 다름없다며, 자신의 고향을 디스했다. “디스가 아니라 진짜 별거 없다니까요.” 서울에 올라온 지 이제 겨우 2달밖에 되지 않았다며, 기숙사에 들어가진 못하고 낙성대역 근처에서 자취방을 얻었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털어놓았다. 단유로서는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새벽은 뭔가 모르게 들뜬 얼굴로 단유 옆에서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단유가 한마디 하면 맞장구를 치며 열 마디로 대답하는, 소년 같은 청년이었다. ‘청년, 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어린 티가 많이 나긴 하지만.’ 새벽은 서울에 올라오면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영화관을 가고, 한 달에 한 번은 뮤지컬이나 연극을 관람하고, 콘서트장 같은 곳도 가보려고 했다고 말했다. “김천에 극장이 없어?” “에이, 그럴 리가요. 극장은 있는데요. 고등학교 다닐 때는 공부하느라고 보고 싶은 영화도 제대로 못 보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이제 마음껏 보러 다니려고요.” 그래서 지난 두 달간 무슨 영화를 봤었냐고 물었더니, 아직 본 영화가 없다고 대답하는 새벽이었다. “왜 못 봤는데?” “돈이 없어서요.” 용돈을 받긴 하는데 그 용돈으로 영화를 보려니 충분치가 않더라는 이야기와 함께, 과외나 아르바이트를 해 볼까 생각 중이라면서, ‘명색이 서울대생’인데 아르바이트는 어떻게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주말에는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며 아르바이트를 찾는 중이라는 대답이 이어졌다. 어쩐지 하은 선생님에게 소개해 주면, 종일 떠들어도 끝이 나지 않을 호적수가 되리라 생각하며 단유는 고개를 돌렸다. 다행인 점은 교수님이 들어오면 수다 모드가 꺼지고 열공 모드가 켜진다는 점이었다. 만약 수업 중에도 수다 본능을 이겨내지 못하는 학생이었다면, 얼굴을 굳히고 접근 금지를 요구했을지도 모르겠다. “형! 같이 점심 먹어요.” 어쨌든 이 일로 단유에게 밥친구가 생겼다. ======================================= [573] 진실의 거울(3) 대학에 온 뒤 가장 마음에 든 점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수많은 장서가 보관된 도서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중에서 보기 힘든 전문서적과 각종 논문들, 고서와 외국 서적들이 보관된 중앙도서관은 그야말로 보물창고였다. 사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에도 좋은 곳이라 반쯤은 피신의 목적으로 도서관을 찾은 이유도 없잖아 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도서관에 가야 할 이유는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했다. “형도 시험 준비하시는 거예요?” “무슨 시험?” “뭐, 공무원 시험이라든가, 행정고시라든가, 외무고시라든가, 국회 공채 시험이라든가.” “무슨 시험이 그렇게 많아?” “형은 그런 시험 준비하는 거 아니에요?” 단유는 열람실 안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기 있는 사람들은 다 그런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라고?” “다는 아니겠지만, 꽤 될 걸요?” 자신도 저런 분위기에 동참해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민 중이라던 새벽은 ‘그래도 당분간은 프리하게 지내다 하려고요’라고 말을 맺었다. 도서관에 들어간 단유는 컴퓨터를 이용해 능숙하게 도서를 검색한 뒤, 논문을 모아놓은 장서관으로 이동하여 찾으려 했던 책을 서재에서 뽑아 들었다. “이런 것도 봐요? 과제 때문에 보시는 거예요? 이런 과제 없었던 거 같은데?” “그냥 보고 싶어서.” 단유가 뽑아 든 37페이지짜리 논문은 2000년에 발표된 중력파 관련 논문 중 하나였다. 중력파가 발견되기 전부터 중력파에 관한 실재적 고찰과 함께 이를 발견하기 위한 다양한 이론적 시도들이 있었고, 이 논문도 그중 하나였다. 해외의 명망 높은 교수들이 쓴 논문들이 더 가치 있다고 볼 법도 하지만, 때로는 비주류라고 불러도 무방할 이곳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주류에선 볼 수 없는 신선한 아이디어를 얻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도 한 나라에서 최고 수재라는 사람들이 모인 학교 아닌가? 그 사람들의 연구와 생각을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와, 전부 다 영어네.” 단유가 훑어보던 논문을 어깨너머로 보던 새벽이 약하게 탄성을 질렀다. 그마저도 시끄러울까 봐 단유는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며 주의를 줬다. “영어가 문제가 아니구나.” 페이지의 반 이상은―새벽의 능력으로는 전혀 알아볼 수 없는―방정식들로 메워져 있었다. “이거 다 알아보실 수 있어요?” “설명되어 있잖아. 이건 입자 운동 방정식을 풀이해 놓은 거고, 이에 근거하여 뉴턴 퍼텐셜(Newtonian potential)이 민코프스키 텐서(Minkowski tensor)에서 어떤 수치로 상정될….” 단유의 이어지는 설명은 반도 알아듣기 힘들었던 새벽은 두 손을 비비며 용서를 구했다. “죄송해요, 형. 제가 잘못했어요. 그냥 조용히 할게요.”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너도 가서 보고 싶은 책 봐.” “그런 책 없어요. 말했잖아요? 프리하게 지내고 싶다고. 1학기는 저한테 자유를 주고 싶어요.” “그래, 그럼.” 자신이 새벽의 부모도 아닌데 이래라저래라 할 순 없는 일이었다. 단유도 이유는 다르지만,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여행을 떠나지 않았던가. 새벽은 잠시 둘러보고 오겠다며 단유의 곁을 떠났다. 논문만 모아놓은 이곳은 처음 들리는지 이것저것 호기심에 들춰 보는가 싶었는데, 금방 질린 얼굴을 하고 단유에게로 돌아왔다. “배 안 고프세요?” **** 단유를 알아보고 사인을 요청했던 그 날 이후부터, 새벽은 단유를 졸졸 쫓아다녔다. 1학년 1학기라서 의무적으로 들어야 하는 교양 강의도 겹치는 게 많아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항상 단유와 함께 지내는 새벽이었다. “저희 학교에서 서울대 온 사람이 몇 안 돼요. 그리고 다른 반이었어서 얼굴도 잘 모르고, 선배도 잘 모르고요. 그래서 3월달에는 거의 강제로 아싸(Outsider)로 지냈는데, 형 덕분에 혼밥은 면했네요. 사실 딱히 혼밥을 싫어하진 않고요, 고등학교 때도 혼밥 먹을 때가 많았는데, 이왕이면 형처럼 유명한 사람이랑 같이 식사하면 좋잖아요. 게다가 형은 아는 것도 많고, 모르는 거 있으면 바로바로 대답도 해주고, 재미있으니까요.” 수다스러움은 하은을 통해 어느 정도 면역이 생겨서 참을 만했다. 그렇지만 몇몇 부분은 조금 이해하기 힘들었다. “첫째, 난 유명한 사람이 아냐. 예전에 잠깐 뮤직비디오에 나온 적이 있었다지만, 내가 주인공은 아니었잖아. 그리고 두 번….” “형, 되게 유명해요. 지금도 봐봐요. 다들 형 쳐다보는데?” 단유는 주변을 살피고 볼을 긁적이며, ‘내일부턴 모자라도 쓰고 다녀야 하나’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아무튼, 난 연예인도 뭣도 아니야. 그리고 두 번째. 내가 재미있다고?” “형 되게 재밌어요!” 이보다 황당한 말은 근 10여 년간 들어본 적이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어디가?” “아, 이게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데요. 형이 막 웃긴 사람이라는 얘기는 아니고요, 그러니까, 형이랑 같이 있으면 즐겁다는 뜻이에요.” “즐거워?” “네!” 새벽은 진심이라는 듯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이유를 물을까 고민하다 말았다. 물어봐야 이야기만 길어질 뿐이고, 이유를 듣는다고 한들 단유가 거기에 대해 반론을 펼치거나 변명을 할 게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본인이 즐겁다는데 뭐라 하겠는가. 하지만 수다쟁이 본능은 상대의 요구 없이도 발휘된다. 새벽이 단유와 함께했을 때 즐거운 이유. 1. 드물게 신입생들이 찾아와 같이 밥 먹자고 조르는 경우가 있었다. 이는 새벽 때문에 생긴 일인데, 새벽이 늘 형, 형 하니까 ‘선배’인 줄 알고 접근하는 경우였다. 이런 일이 생기면, 새벽이 나서서 교통정리를 해야 했다. “동기야. 같은 학번이라고.” “근데 왜 형이라 그래? 동기면 말을 놔야지.”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 어떻게 말을 놓냐?” “동기끼리 위아래가 어딨냐?” 그러면 단유가 나섰다. “가요, 밥 사줄게요.” “정말?” 신입생 둘은 신이 나서 단유를 쫓아가고, 그 뒤를 새벽이 뒤따랐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잠시 후 식당의 테이블에 마주 앉아 식사를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신입생들은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게 된다. 단유는 서글서글한 성격도 아니고, 귀여운 후배들을 아끼는 선배 노릇을 할 이유가 없는 동급생이다. 그런 마당에 둘을 앞에 앉혀 놓고 무슨 이야기를 하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식사 때는 천천히 밥을 먹는 단유였다. 느릿하게 오물거리며 과묵하게 식사를 하는 단유를 앞에 두고 신입생 둘은 어색하게 숟가락을 놀릴 따름이다. 가끔 화가 났나 싶어 쳐다보면 단유는 평온한 표정으로, 식사 시작부터 마칠 때까지 한결같기만 하다. 그리고 이때는 새벽도 딱히 입을 열지 않고 단유의 식사 속도에 맞춰 조용히 밥을 먹었다. 다른 테이블의 요란함은 딴 세상 이야기라, 신입생 두 사람은 밥을 먹어도 먹는 기분이 나지 않았다. 체하지나 않으면 좋으련만. 그 후, 두 사람은 단유와 새벽 근처에 다가오는 일이 없다. “가끔 걔들이랑 복도에서 마주치면 괜히 눈 돌리고 형을 못 본 척하면서 지나가는 거 알아요? 그런 것만 봐도 얼마나 재밌는데요?” 도대체 어디가 재밌냐고 묻지 않았다. 2. 교양 강의들의 경우, 수강생이 많기 때문에 강사의 입장에서는 개별적으로 리포트를 받기 곤란한 경우가 있어, 어쩔 수 없이(!), 학생들이 싫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별 과제를 냈다. 그러면 가끔 눈썹을 가지런히 다듬고, 컬러렌즈를 착용한 여학생이 짝을 지어 찾아와서는 함께 조를 짜서 발표수업을 하지 않겠냐고 제안을 건넸다. 새벽은 늘 단유와 함께 있으니 같은 조로 엮일 수밖에 없었고, 새벽 스스로도 원하던 일이니 거기까지는 별문제가 없다. “오빠, 연예인이에요?” “연예인 많이 알아요?” “삼수했다면서요? 왜 삼수했어요? 재수했을 때는 어땠는데요?” “싸움도 잘해요?” 조별 과제를 하기 위해 온 건지, 단유의 사생활을 캐묻기 위해 온 건지 분간이 안 될 때가 많았다. 당연하게도 단유는 충실하게 답변했다. “아니요.” 모든 질문의 대답은 그 한마디로 정리되었다. 후속 질문이 이어졌지만 단유는 최대한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연예인은 아니지만, 연예인보다 더 까다로운 사람, 이라는 인상을 받을 무렵, 조장을 뽑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오빠가 조장해요.” 라고 하면, 이번에도 단유는 고개를 흔든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들어봐야죠.” “오빠가 나이가 많으니까 오빠가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해요?” 새벽은 침묵을 지키고, 다른 조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2학년도 있었지만 단유보다는 나이가 한 살 어리다. “그럼 오빠 하는 거죠?” “아뇨.” 이번에도 단유는 고개를 흔든다. “왜요?” “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간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단유는 사람들의 시선에 띄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단유의 성향을 모르는 사람들은 단유의 단호한 대답에 입을 벌리고 바라볼 뿐이었다. 새벽이 ‘하기 싫다는 사람 억지로 권하지 말자’고 거들었지만, 여학생들의 눈에 서늘한 빛이 서린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처음 단유에게 함께 조를 편성하자고 제안했던 아이가 나섰다. “무슨 이유에서 하고 싶지 않다는 건지는 몰라도, 무작정 하기 싫다고 나서시면 너무 책임감이 없는 거 아닌가요? 그럼 저희가 어떻게 오빠를 믿고 역할을 분담할 수 있겠어요?” 논리적 비약이 심하다고 지적하는 대신, 단유는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제가 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조장을 하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학우분의 말씀처럼 이 조별 과제는 각자 자신이 맡은 부분을 책임감 있게 해내고 그걸 통합해야 완성될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각 부분을 조율하고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조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여러분은 그런 능력의 유무를 따지지 않고, 그저 제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조장을 맡기려 하셨잖아요. 그래서 조장 직을 반려한 겁니다.” 여학생은 입을 다물었다. 괜히 나섰다가 돌멩이로 뒤통수를 맞은 얼굴이 돼서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기 바빠졌다. 그 여학생을 구해준 것은 같이 단유에게 찾아왔던, 갈색 머리의 여학생이었다. “제가 듣기로는 오빠가 전국 1등도 했었다던데요? 솔직히 그 정도면 저희 중에 제일 똑똑하신 분 같으니까, 지영이가 그렇게 권한 거예요.” “여러분도 수능을 쳐 봐서 아시겠지만, 수능은 그저 고등학교 때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했나, 교과서를 얼마나 충실히 이해했나를 테스트할 뿐이에요. 수능 잘 쳤다고 좋은 조장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무리라고 보는데요. 만약 그 가정이 옳다면, 여러분도 충분히 좋은 조장이 될 자격이 있는 거고요.” 갈색 머리도 입을 다물었다. 남은 사람은 2학년 선배와 두꺼운 안경을 끼고 눈치만 살피는 1학년 남학생 한 명뿐이었지만, 두 사람 다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어쨌든 다들 수능 고득점자고, 머리 좋기로 유명했던 이들이다. 여기서 단유와 말로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 조장은 누구로 하죠?” 갈색 머리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단유를 노려보며 물었다. 이때 새벽은 나중에 SNS에 익명의 악성루머가 올라올 거라고 짐작했다. “그걸 왜 제게 묻죠?” 갈색 머리 혼자 고군분투하는 게 안타까웠는지, 지영이라는 이름의 여학생이 참전했다. “그럼 여기서 무슨 이야기를 하죠? 그냥 이렇게 서로 멀뚱멀뚱 지켜만 보다가 헤어지나요? 과제는 어떻게 나누고, 각자 무엇을 맡을지 의논하려고 모인 거 아니었나요?”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아까 두 분이 계속 저에 대한 이야기만 물으시길래, 그렇게 사담(私談)이나 나누려고 모인 건 줄 알았네요.” 모인 사람들은 물론, 나름 단유와 붙어 지내며 단유를 어느 정도 알았다고 생각했던 새벽까지도 놀란 얼굴로 단유를 쳐다보았다. ‘뒷끝 장난 아니네!’ ======================================= [574] 진실의 거울(4) 파멜라 메이어라는 작가는 ‘인간은 하루에 10~200회 정도의 거짓말을 한다’고 했으며, 누군가와 첫 대면을 하는 최초의 10분 동안 평균적으로 3회 정도 거짓말을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 말도 그 진실성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지만, 아무튼 거짓말을 연구한 여러 학자들의 말에 근거해서 보자면,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라는 뜻이 된다. 이런 학자들의 연구가 아니래도, 대부분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타인에 대한 신뢰가 어렵다. 특히 낯선 사람이라면. 물론 오래 함께 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100% 신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하니까.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이라고 한들, 쉽게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넌 너무 못생겼어.” 라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의 경우, 신뢰의 문제가 아니라 인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보이니까. 그래서 인간관계가 어렵다. 물론 이것이 좁은 관계망을 보유한 아싸들의 상황을 완벽하게 설명하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이유에서, 새벽은 단유라는 사람과 친밀함을 유지하며 지내게 되었다는 것에 기뻤다. 단유는 자신을 속이려 들지 않았고, 필요한 말은 반드시 하지만 그 외에는 말을 아끼는 신중함과 배려가 몸에 밴 남자였다. 게다가 키도 크고, 잘 생기고, 똑똑하다. 성적으로 남자를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단유는 평생을 두고 따르고 싶은 마음이 드는 훌륭한 형이었다. 그래서였다. 교정에 핀 벚꽃들이 모두 지고, 푸릇푸릇한 초록 잎들이 우거지기 시작할 무렵, 첫 중간고사가 끝났다. 그리고, “영화 보러 가실래요?” 이제는 혼밥을 즐기지 않게 된 새벽이 단유에게 물었다. 만약 단유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그것도 남자에게 ‘영화 보러 가지 않을래’라고 묻는다면 조금은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을까? 하지만―이미 일부 학생들에게―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힌 단유는 그 말을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슨 영화?” “최근에 개봉한 영화들이 많은데, 가서 보고 고르려고요.” 단유는 새벽이 일주일에 한 번씩 영화를 보러 가고 싶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점도 있겠지만, 고등학교 시절 문화생활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것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용한 탓이리라. 강남으로 가자는 새벽의 말에 따라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왜 굳이 가까운 곳을 놔두고 강남을 가냐는 말에, “강남에 한번 가보고 싶어서요.” 라는 시답잖은 이유를 대는 새벽이었다. 서울에 올라온 지 몇 달 되었지만, 여전히 관악산 주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새벽은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가령, 부자의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라는 강남과 문화와 연극의 중심지라는 대학로, 젊은 예술인들의 성지라는 홍대 거리를 꽤 가고 싶어 했다. “여의도도 가보고 싶고, 신촌도 가보고 싶고, 월드컵 경기장도 가보고 싶어요. 아, 압구정도 가보고 싶고, 남산도 가보고 싶고, 명동도….” 단유는 손을 들어 새벽의 말을 잘랐다. 그냥 두면 서울 전 지역의 명칭이 다 나올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수다쟁이의 본능은 쉽게 잠재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어릴 때 가요프로 보면서 되게 가보고 싶었어요. 공개 방송 같은 데 가서 좋아하는 가수도 보고 응원도 하고 그러잖아요? 그런 거 직접 보면 되게 좋을 거 같은데. 아, 같이 가달라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런데 제가 고등학교 때 좋아하던 걸그룹이 리본 소녀였거든요? 요즘은 휴식기라서 방송에 안 나온다고 하니까 아쉽지만, 나중에 컴백한다고 하면 꼭 방송국 가서 보고 싶어요. 혹시 우리 학교 축제 같은 거 하면 연예인들도 오겠죠? 그때 리본 소녀 오면 대박일 텐데.” 한 달 뒤에 서울대학교 봄 축제가 열리긴 한다. 하지만 누가 올지는 모르고, 애초에 관심도 없었다. 그 시간에 책이나 보는 게 더 유용하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람마다 생각은 다를 수 있다. “남산 타워는 가고 싶긴 한데 정말 혼자서는 가기 힘들 거 같아요. 어쩐지 거기는 관광지란 느낌이 강하잖아요? 서울 사람들은 잘 가지 않을 거 같고,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나 외국 사람들이 들리는 곳 같은 느낌. 그래서 혼자 가면 되게 촌스러울 것 같고 그래서요 혼자 가긴 그래요. 하지만 이왕 서울에 왔는데 남산 타워랑 63빌딩은 가봐야 하지 않겠어요? 아, 롯데 타워도 가봐야 하는구나. 그런데 거기가 데이트 장소로 좋은 곳인가요?” “글쎄?” “아, 안 가보셨어요?” “응.” “나중에 시간 되면 같이 가보실래요? 형도 혼자 가긴 그렇잖아요? 그쵸? 아, 남자 둘이서 가긴 좀 그런가? 뭐, 63빌딩은 밥 먹으러 가기도 한다던데. 거기 식당 음식이 좋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거기 가면 좀 비싸려나? 비싸겠죠?” 지하철을 타고 강남을 향해 가는 동안, 새벽은 자신이 꿈꿨던 서울 판타지를 두서없이 털어놓았고, 덕분에 가는 길이 심심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심심한 편이 더 좋았으려나? 강남에 도착하여 역을 빠져나왔을 때, 새벽은 이렇게 감상평을 털어놓았다. “사람 진짜 많네요.” 역을 빠져나오는 동안에도 강남역 아래 지하상가를 가득 메운 인파를 보며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새벽은 들뜬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반면 일 때문에 자주 이곳을 다녔던 단유는 여상한 얼굴로 새벽을 이끌었다. “여기 자주 오셨어요?” “자주는 아니고 가끔.” “역시 강남은 사람이 많네요.” “서울 최고의 번화가 중 한 곳이니까.” 역을 나와 5분쯤 걸으니 극장이 나왔다. 매표소에 서서 개봉작들을 살피는 새벽의 표정은 이름난 평론가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미리 예약할 걸 그랬네요. 이렇게 사람이 많이 올 줄 몰랐어요. 평일인데.” 가장 빨리 볼 수 있는 영화도 2시간은 기다려야 했다. 결국 새벽은 단유의 동의 아래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를 하나 골라 표를 샀다. 사실 가장 인기 많은 영화는 감성 멜로 영화였는데, 남자 둘이서 보기엔 좀 그렇지 않냐, 는 새벽의 주장이었다. 그 후 커피숍에 가서 시간이나 때울까 하다가, 강남을 구경하고 싶다는 새벽의 말에 두 사람은 강남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단유도 강남을 돌아다닌 적은 없었고, 늘 같은 길로만 걸었던지라 주변 지역의 지리 같은 건 알지 못했다. 극장이 있는 거리에서 중앙대로를 건너 반대편 거리로 가면, 유흥가 거리가 나오는데 술집들은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곳이 많았지만, 점심시간 영업부터 하는 음식점들이 많아서 그곳도 사람들이 꽤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다른 번화가 거리와의 차별성을 느끼기 힘들었는지 새벽은 풀이 죽은 반응을 보였다. “아, 저기가 그 유명한 클럽이네요.” 눈에 확 띄는 커다란 간판 주변은 조용하기만 했다. “역시 해가 지고 왔어야 하는 거네요.” “그렇겠지.” 교보생명 건물까지 걸어간 두 사람은 지하층의 서점에도 들렀다. 역시 번화가의 중심에 있는 서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무척 많았고, 제대로 책을 살펴보기도 힘들어 보였다. 대충 둘러보고 빠져나가려는데 뒤에서 단유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단유야.” 단유가 뒤를 돌아보니 상곤이 눈을 번쩍 뜨고 다가오고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맞구나!” “안녕하세요.” “그래, 어쩐 일이야? 여긴?” “얘랑 영화 보려고 강남에 왔다가 시간이 남아서 잠시 돌아다니던 중이에요.” 단유의 손짓에 새벽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저, 강새벽이라고 합니다.” “반갑네요. 그럼 그쪽도 서울대생?” “네.” “두 사람 친한가 보네. 둘이서 영화 보러 올 정도면.” “아, 예. 그런데 오해하지 마세요. 저 혼자 영화 보러 가기가 심심해서 억지로 형을 데리고 온 거거든요. 강남도 처음이고. 제가 시골에서 올라와서, 서울이 아직 낯설거든요. 그런데 역시 강남이 사람이 많긴 많아요. 혼자 왔었으면 길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에 상곤이 살짝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새벽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괜찮아요. 오해 안 해요.” 단유는 두 사람이 언급하고 있는 ‘오해’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괜히 누군가의 수다 본능을 자극할까 봐 호기심을 억눌렀다. 대신 상곤에게 어떻게 이 시간에 여길 왔는지 물었다. “당연히 출판된 책 때문에 왔지. 이번에 인문학 서적 베스트 20에 들었다고 해서 말이야.” 고작 베스트 20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매 분기, 매달마다 쏟아지는 엄청난 서적들 속에서 베스트 20을 차지한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잘됐네요.” “잘 됐지. 너한테도 잘 됐고.” “저요?” “네가 번역한 책이거든.” 그 말에 새벽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하지만 상곤과 단유의 대화에 섣불리 끼어들진 않았다. 묻고 싶은 말이 많을 테니 입이 간지러운 모양이지만, 당장은 해결할 방법이 없다. “작년 말에 인세 계약을 했던 책 있지?” “예. 중국 공산당의 비밀(Secret of China’s Communist)이란 책이었죠.” “마침 한중 문제가 얽히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졌던 게 요인인지 책이 많이 팔렸어.” “그런가요?” “너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알지?” 지금까지 단유는 번역물을 맡을 때 매절 계약을 했었다. 사실 이건 회사 측에서 단유에게 특혜를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회사 입장에서는 책이 많이 팔릴 것 같다는 예상이 될 때 매절 계약을 하고, 책이 많이 팔리지 않을 것 같으면 번역가와 인세 계약을 맺는 게 유리했다. 그런데 단유의 경우에는 거의 매절 계약을 했다. 단유가 남들과 다른 속도로 번역을 완료하기도 했고, 그 결과물도 꽤 깔끔하기에 회사가 단유에게 성의를 보인 측면이 있다. 비록 단유가 어리기도 하고, 겉으로 드러내기 힘든 경력을 가졌기 때문에 단가가 높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린 단유가 벌어들이기 힘든 금액이 책정되었었다. 그러다 단유가 서울대 입학이 결정된 뒤, 상곤과 미팅을 할 때 상곤이 직접 인세 계약을 추진했다. “내가 선견지명이 있었던 거지.” 회사 입장에서는 비용을 아낄 수 기회를 날려 아쉽겠지만, 단유를 아끼는 상곤은 뿌듯한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그렇네요. 감사드립니다.” “쯧쯧, 그러면 안 돼. 무턱대고 감사라니. 네가 정확히 얼마를 벌게 될지 알고 난 뒤에 감사해야지.” “베스트 20이면 많이 팔렸을 테고, 그러면 수익도 많이 나겠죠.” “정산을 해봐야 하겠지만, 다음 달 통장 한 번 봐라. 그리고 나 큰 거 안 바란다?” “네. 꼭 좋은 거로 보답할게요.” 상곤은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리며 단유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다른 일정이 있어서 바쁘다는 말로 인사를 건넨 후, 상곤이 떠나자 곁에서 눈치만 보던 새벽이 입을 열었다. “형, 번역도 해요?” “응.” “무슨 번역이요?” 말이 나온 김에 보자며 인문 서적 코너로 향했다. “우와. 대박.” 새벽은 극장 근처 커피숍에서 책을 살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서점에서 책을 보자마자 번역가에 ‘김단유’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놀라더니, 곧 지갑을 열었다. 영화 시간이 아직 조금 남았지만, 번화가에 대한 호기심보다 책에 대한 호기심이 더 강했던 새벽은 극장 근처로 자리를 옮겼고, 커피숍에서 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번역가 김단유의 이력이 적힌 면을 보며 감탄했다. “형 되게 많이 하셨네요? 언제부터 하신 거예요?” “예전부터 했어.” “우와. 그런데 왜 물리학과를 지원하신 거예요? 이 정도면 어문학부로 가셔도 될 거 같은데?” “니가 리본 소녀를 좋아한다고 해서 방송연예과를 지원하진 않은 거랑 비슷한 이유 아닐까?” “그래도 이 정도면…번역가로서 자리매김한 거나 마찬가지 아니에요?” “그 정도는 아냐.” “그리고 아까 들어보니까, 베스트 20이라면서요? 이 책? 그러면 돈 많이 버는 거 아니에요?” “들었으니 알겠지만, 정산 나올 때까지는 나도 모르는 일이지.” “인세 계약이라고 했죠? 인세 얼마나 받는데요? 아, 이런 건 물어보면 안 되나? 보통 계약은 업계 비밀일 테니까. 그래도 형 대박이에요. 형은 못 하시는 게 없는 사람 같아요. 아, 그런데요. 혹시 거기 아르바이트 같은 건 안 구해요? 저도 영어는 조금 하는데. 번역 아르바이트 같은 거 하면 돈 좀 벌 수 있나요? 형처럼 책 한 권을 번역할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조금씩 아르바이트로 하는 건 괜찮지 않을까요?” “한 번 물어봐 줄게.” 고등학교 때부터 번역을 했느냐, 번역할 때 어려운 점은 없느냐, 대학 생활하면서 번역하기에 시간은 모자라지 않느냐, 같은 질문들이 쏟아질 때 단유는 대답 대신 핸드폰의 시간을 보여주었다. “영화 시간 다 됐어.” 모든 질문에 일일이 대답할 필요는 없다. 대답하기 곤란한 것들이 있으면 화제를 돌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혹은 진실의 반만 보여주거나. ======================================= [575] 진실의 거울(5) 단유가 돈을 잘 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새벽의 태도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존경의 시선을 보낼 때가 있다는 정도였다. 그리고 바쁜 와중에도 그때 샀던 책을 다 읽었던 모양인지, 단유에게 와서 ‘책 정말 재밌던데요?’라고 한마디 하는 선에서 그쳤다. 물론 말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말이 있다는 것을 단유는 알 수 있었다. “아직 아르바이트 못 구했어?” “…네.” 커피숍에서 번역 아르바이트 자리를 물어봤었던 새벽은 괜히 조르는 모양새가 될까 봐 말을 아꼈다. 속으로야 전전긍긍하며 혹시나 좋은 자리를 알선해주지 않을까 기다렸을 테지만 말이다. “주소 알려줄 테니까, 한 번 찾아가 봐.” “혼자요?” “같이 가줄까?” “아, 아니요. 혼자 갈게요. 자리 주선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형 시간 뺏을 순 없잖아요.” 역시나 속마음과 다른 말이 새벽의 입에서 나왔지만,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을 보면 모를 수 없다. 단유가 피식 웃으며 ‘같이 가줄게’라고 말하니, 두 손을 격하게 흔들며 괜찮다고 말한다. “어차피 한 번 들려야 할 일도 있으니까, 시간 맞춰서 같이 가자.” “고마워요, 형.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인사가 너무 빠른 거 같은데? 아직 아르바이트하기로 결정된 것도 아니잖아.” “이렇게 마음 써주신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이야기죠.” 새벽은 홀로 상경하여 의지할 데 없어 외로울 뻔했던 자신의 삶에 대한 넋두리와 그런 자신을 구원(?)해 준 단유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으려 했지만, 단유는 사전에 눈치를 채고 입을 막았다. “나 강의 들어간다.” 단유가 먼저 발걸음을 돌리니, 서둘러 옆에 붙으며 헤헤 웃는 새벽이었다. 교양 필수 과목들은 다 같이 듣는 편이긴 해도, 이 수업만큼은 두 사람이 각기 다른 클래스에 속했다. “그런데 형은 이 수업 되게 쉽겠어요. A+는 맡아놓은 거 아닌가요?” 단유가 지금 들으러 가는 강의는 <고급영어>였다. 교양 필수인 대학 영어는 모두 4 클래스였는데, <기초영어>, <대학 영어 1>, <대학 영어 2>, <고급영어>로 나뉘었다. 입학 시 기록한 TEPS 성적에 따라 반이 나뉘는데, 단유는 처음으로 치는 TEPS에서 900점 이상의 고득점을 받아 <고급영어> 반으로 배정되었고, 새벽은 <대학 영어 1>로 배정되었다. 사실 이공계 학생들에게는 꽤 힘든 수업이었다. 서울대에 들어올 정도의 실력이니만큼 영어는 어느 정도 한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문과가 아닌 이과에서, 이과 과목을 공부하기에도 버겁던 아이들에게 영어는 그리 친숙한 과목은 아니었다. 더구나 <대학 영어1>을 들으며 말하기 교실 수업까지 들어야 했던 새벽은, 그보다 더욱 심화한 수업인 <고급영어> 클래스에 대해서는 몸을 떨 정도였다. “나도 쉽지는 않아.” “그렇겠죠. 영어를 모국어처럼 쓰는 사람이라도 쉽진 않을 거라던데.” “그 정도는 아니고.” 다양한 텍스트를 분석하고 토론하고 발표하는 수업, 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텍스트의 깊이나 분석 작업, 그리고 쏟아지는 과제물들은 영어 논문 초록을 수십 편 쓰는 것과 마찬가지일 정도였다. “영어를 잘해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좋은 점수를 받기는 어려울 거야.” 하지만 단유의 말은 겸손에 지나지 않았다. 그간 번역한 서적들이 주로 인문학, 사회학 관련 서적들이었던 것도 해당 수업을 듣는 데 도움이 많이 될뿐더러, 언어의 장벽이 없는 단유였기에 수업을 듣는 데는 사실 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수업 중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조용하게 지내는 편이긴 해도, 이미 몇 차례의 발표 수업이 지나면서 해당 클래스의 사람들은 단유의 실력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중간고사 결과가 나오진 않았지만, 강사가 단유의 이름을 꼬집어 말하며 최우수였노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단유는 <고급영어> 강의가 필수니까 듣는 거지, 사실 별 재미는 느끼지 못했다. 어렵고 지루하단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대학에 와서 배우고 싶었던 학문과 거리가 멀다는 의미였다. 이런 과목은 그냥 아침에 눈 뜨고 일어나 TV를 켜고 듣는 아침 뉴스와 다를 바 없었다. 그냥 귀에 들어오니까 듣는 거다. 따지고 들면 교양 강의라는 게 다 비슷하지만, 그래도 고급수학이나 고급 물리학은 고등학교 때 배우지 못했던, 흥미로운 주제로 공부할 수 있어서 좋았다. “조화진동자(harmonic oscillator)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알아봤는데요, 조화진동자의 에너지 준위는 E=(n+1/2) \hbar \omega로 표시하고….” 임의의 시스템 온도 상에서 평균 에너지를 구하는 문제를 두고 강사의 열띤 설명이 이어질 때, 단유는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이건 겨우 교양이지 않은가? 앞으로 이보다 더 심화한 문제와 맞닥뜨리며 배우게 될 것들을 생각하니 즐겁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에 오길 잘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 세 가지 다른 엔트로피 Clausius, Boltzmann, Shannon이 서로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지를 생각하며 교정을 걷던 무렵, 누군가가 단유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물광 이랬던가? 번들거리는 이마와 광대 부근에 시선이 절로 가도록 하는 화장을 한 여성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 옆에는 무지 티셔츠에 물 빠진 스키니 청바지를 입은 여성이 다소곳이 서 있었다. “저희가 설문 조사를 하고 있는데요, 시간 괜찮으시면 잠시 설문지 작성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단유는 고개를 끄덕여 그들의 부탁을 받아들이니, 고맙다며 자리를 잠시 옮기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근처에 벤치가 있어 그쪽이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여자들은 괜찮다고 말했다. 벤치에는 단유와 물광 여인만 앉고 스키니 청바지는 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앉으시라 권했더니, 괜찮다며, 자신은 서서 기다리겠노라 대답했다. 편한 대로 하시라는 의미에서 단유도 더는 권하지 않고, 물광 여인이 건넨 설문지를 받아 읽기 시작했다. 「엘로X 아카데미에서 실시하는 기독교 인지도에 대한 설문입니다」 첫 번째,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신앙생활을 하신 경험이 있습니까? 이 질문을 보며 단유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희미한 광륜(光圇) 속 존재였다. ‘빛’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그게 빛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하얀 배경이었던지 정확하진 않았다. ‘존재’가 있었던 것 같지만, 꿈에서 본 걸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떤 책에서 읽었던 것을 공상으로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런 이미지가 무의식중에 순간적으로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아래에 보기가 있는데 기독교 계통의 종교가 있는지, 아니면 다른 종교 계통인지, 무신론자인지를 세세히 묻고 있었다. 첫 질문에서 체크를 하지 않고 오래 설문지를 들여다보는 것 같으니, 옆에서 보충 설명이 들어왔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그냥 생각나시는 대로, 대신 솔직하게만 작성해주시면 고맙겠어요.” “네.” “지금 혹시 믿으시는 종교 있으세요?” “아니요.” “그럼 어릴 때 혹시 믿으시던 종교가 있으셨나요? 어릴 때는 부모님 따라서 가기도 하잖아요?” “없어요.” “아, 그러시면 네 번째에 체크하시면 돼요.” 길고 하얀 손가락 끝이 가리키고 있는 부분에 단유는 브이(V)자로 체크를 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존재하냐, 안 하냐. 증거가 있으면 믿겠다, 존재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 네 가지 보기 중에 고르면 되는데 이건 쉽게 골랐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아보고 싶으신 거네요?” “네.” 비단 하나님 뿐일까? 부처님도 알고 싶고, 알라도 알고 싶고, 브라흐마, 비슈누도 알고 싶다. 아마테라스 오오카미, 일광보살, 제우스 등등 알고 싶은 신화적 존재들은 널리고 널렸다. 어릴 적에 멋모르고 교회를 따라간 적도 있었지만, 그래서 정확히 알지 못해 쉽게 흥미를 잃었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종교도 자신이 배워서 머리에 새길 지식의 한 페이지다. 단유가 생각하기에 종교는 인류의 창의성이 극단적으로 발휘된 영역의 하나였다. 초월적 존재를 상정하고, 그 존재에 대해 신화적 스토리를 만들어낸 뒤, 그 스토리에 스스로 빠져들어 ‘믿음’이란 형태로 개인, 사회, 국가를 함몰시키기까지 했다. 종교의 탄생과 발전에서 쇠락해가는 과정에 이르는 이야기는 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며, 인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길잡이였다. “잘됐네요. 저희도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 공부하고 있거든요. 특히 그분의 가르침은 워낙에 방대하고 깊어서 혼자서는 하기 힘들어요. 그래서 다 같이 함께 공부하면 더 잘 알 수 있죠.” 세 번째, 성경은 어떤 책으로 알고 있나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기록된 예언서, 라는 1번 보기는 웃음을 짓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그 가르침을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보는 앞인데 경솔하게 행동할 순 없는 법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서, 라는 2번 보기도 재미있다. 구전으로 내려오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며, 기록자도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전문 역사가들도 아닌 이들이 기록한 책이다. 역사적 증명의 가치를 지닌 책도 아닌 마당에, 역사서 운운하는 것은 조금 이상하다. 마치 환단고기가 역사책이냐 아니냐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신중하시네요.” 물광 여인은 은근하게 말을 건넸다. 지금까지 설문 조사를 핑계로 만난 사람들 중, 이보다 꼼꼼하게 설문지를 읽고 체크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앞에 선 스키니 청바지 여인도 앞에서 기다리기보다는 벤치에 앉도록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처럼 마주 앉은 청년에게 빨리하라고 재촉할 순 없는 일이다. 요즘 시대에 이렇게 길거리 전도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갈수록 야박해지고 심지어는 면전에서 모진 소리도 거침없이 내뱉는다. 물론 고작 그런 이유로 전도를 포기할 정도의 가벼운 신앙심은 아니었기에, 꿋꿋하게 웃으면서 전도에 전념했다. 가끔은 이렇게 자신들을 거부하지 않고, 마주 앉아서 귀를 기울여주는 착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힘이 난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교회에 들어와 준다면 더더욱 고맙고, 뿌듯하다. 또 한 명의 병든 이들을 회개시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끔 했다는 보람이 있다. 여인은 자신의 이타적인 면이 손해를 많이 보는 성격임을 알지만, 남들을 도울 수 있다면 행복했고,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하는 이유가 된다고 생각했다. 여인의 말에도 단유는 천천히, 꼼꼼하게 설문을 읽고 문항을 체크했다. 성경에서 어머니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본 적이 있냐는 질문은 의아하기 그지없었지만, 마침 없다라는 문항이 있어 체크를 했다. “어머니 하나님에 대한 말씀은 성경에도 나오는데, 다른 종교의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부분이죠.” “왜요?” “함께 공부하면 아시겠지만,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자면….” 물광 여인이 눈을 빛내며 설명을 하는 동안, 단유는 그녀의 눈에 서린 광기를 읽었다. 독실한 신자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때론 광기로 해석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광기, 그것은 이성의 독(毒)이다. 마지막까지 체크를 하고 건네니, 밑에 연락처를 적어달라고 했다. “적지 않으면 안 되나요?” “적어 주시면 고맙죠.” “왜요?” “이 설문지가 저희가 연구하고 있는 부분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니, 그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서라도 연락처를 알면 좋겠고요, 또 여기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저희가 그에 대한 공부 자리가 있거나 알려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을 때, 간단하게 연락드릴 수 있으니 그쪽 분도 편하지 않겠어요?” “죄송하지만, 제가 평소에 혼자서 집중해야 할 일이 많은데, 아무 때나 연락이 온다면 꽤 신경이 쓰일 것 같네요.” “연락 아무 때나 하진 않을게요.” “그럼 그쪽 분 연락처를 주시겠어요?” “네?” “이 설문지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이유로 감사 인사를 받기는 제가 부담스러우니 받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제가 필요할 때, 그러니까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이란 분의 존재에 대해 알고 싶거나 공부하고 싶을 때는 제가 먼저 연락을 드리도록 하죠.” “그러지 말고, 서로 알려주는 건 어떨까요?” “앞서도 말씀드렸듯, 제 연락처로 아무 때나 연락 오는 것은 불편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설령, 그 빈도가 제가 지금 예상하는 경우보다 낮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그렇지만 만약 필요하다면 제가 먼저 연락드릴 의향은 있으니까 그쪽 분의 연락처를 주십사 부탁드리는 겁니다.” “저기…저도 좀 그런 게, 그래도 전 여자잖아요? 그쪽 분이 정중하고 예의 바르신 분이란 건 알지만, 그래도 남자시니까 아무 때나 전화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저만 알려드리긴 그렇고, 서로 알려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럼 서로 알려주지 말죠.” 단유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일어섰다. “저기, 잠시만요. 그러지 마시고 시간 되시면 저희랑 함께 공부방이라도 한 번 가보지 않으실래요? 여기 후문 쪽에 저희 공부방이 있는데요, 거기서 분위기도 좀 보시고, 못다 한 이야기도 좀 더 하시죠?” 물광 여인이 단유의 소매를 붙잡았고, 스키니 청바지의 여인이 한 걸음 다가서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 [576] 진실의 거울(6) “단유 형.” 단유는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뭐해요?” 백팩을 매고 설렁설렁 걸어오던 새벽이었다. “수업 마쳤어?” “네.” 19동 건물에서 수업을 마치고 나오던 중이었던 새벽은 단유의 옆에 선 낯선 두 여인을 보며 누구냐고 눈짓으로 물었다. “안녕하세요.” 물광 여인의 눈이 반짝였다. 새 물고기가 걸렸구나, 기뻐하는 조사(釣士)의 모습이다. “저희는 수상한 사람 아니고요,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말하면 관심을 가지고 미끼를 물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허술한 낚시질에 걸려들 만큼 어리숙한 사람은 이곳에서 보기 힘들다. “아! 그….” 말로만 듣던 ‘길거리 전도’의 실체와 맞닥뜨린 새벽은 신기하단 듯이 두 여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형이 왜 여기에?’라는 눈빛을 보냈다. 자신이 아는 한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 단유였으니까. 단유는 여태 들고 있던 설문지를 들어 보였다. “설문하는 거 도와 달래서.” 아니, 그럼 난생 처음 보는 걸인이 찾아와 보증을 서달라고 하면 서줄 겁니까, 라는 말이 목구멍을 튀어나오기 직전까지 갔다가 들어갔다. 물광 여인은 수만 가지 질문을 눈빛에 담아 보내는 새벽의 정신을 흩트려 놓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쪽 학생분은 신입생인가요?” “네? 네.” 옳거니, 미소를 짓는 여인의 광대 위로 햇살이 반짝였다. “잘됐네요. 시간 괜찮으시면 저희랑 잠시 이야기 나누실래요?” “아뇨, 전 괜찮아요.” “시간 많이 뺏진 않을 거예요. 보니까 두 분은 절친한 사이신 거 같은데, 같이 잠시 이야기 좀 나누지 않으실래요? 아, 점심시간인데 혹시 식사는 하셨어요?” “아뇨, 저희 이제 밥 먹으러 갈 건데요.” 단유에게 밥 먹자고 말하려던 건 맞지만, 아직 의사를 물어보진 않은 상태다. 그래도 새벽은 두 사람이 이미 사범대 옆 식당으로 가서 식사를 할 것을 전제했다. 물광 여인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단유의 덤덤한 얼굴을 일별하고, 꺼림칙하게 여기는 게 분명한 새벽을 완전히 포섭하기 위해서는 베팅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럼 저희랑 같이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시는 건 어떠세요? 저기 후문 쪽에 가면 맛있기로 소문난 식당이 있거든요. 물론 이곳 학생들이시니 잘 아시겠지만. 저희가 식사 대접해드리고 싶네요.” 접대비를 조금 쓰는 한이 있더라도 두 사람을 앉혀야 이야기가 된다. “아니, 그건 좀.” 불편한 표정의 새벽은 이런 대화를 딱 잘라 거절할 심성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새벽의 모습을 보며 물광 여인은 좀 더 진한 미소를 지으며 경계심을 깨려 노력했다. “어려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저희가 억지로 뭘 하려는 건 아니에요. 여기 이쪽 분도 저희랑 아직 이야기가 완전히 끝난 건 아니잖아요? 그쵸? 가서 식사하시면서 마저 이야기를 나누시는 건 어떠세요?” 이쪽도 놓치기 싫고 저쪽도 놓치기 싫다, 는 낚시꾼의 욕심이 말에 묻어났다. 그리고 낚시꾼을 돕던, 스키니 청바지가 입꼬리를 살짝 내리며 두 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겼다. 퇴로를 막고 압박하는 모양새다. 그들은 이런 경험이 많은 것처럼 보였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쳐다보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확실하게 걸려든 두 물고기를 완전히 손에 넣기 전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쯧.” 그때까지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단유가 혀를 찼다. 그 반응에 물광 여인과 스키니 청바지가 단유를 쳐다보았다. 단유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당신의 믿음에 대해서는 존중을 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믿음을 실천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방해하고 싶진 않습니다. 앞으로도 이곳에서 계속 설문이든, 전도든 하고 싶은 대로 하셔도 방해는 안 할 겁니다.” “네?” “하지만, 분명 거부 의사를 밝힌 상대의 의지도 존중해주지 못하는 방식이라면, 저 역시 여러분의 방식을 계속 존중해주긴 어렵죠.” 단유의 말에 물광 여인은 손을 내저었다. “무슨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 저희는 좋은 의도로 여러분께 말씀을 전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좋아요.”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도 여러분들에게 좋은 의도로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무슨?” 단유는 머리 위로 손을 뻗고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두 여인이 단유의 뜻 모를 제스처에 의문을 품을 때, 단유가 입을 열었다. “당신의 믿음과 진실에 대해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여인은 당황하지 않았다. 길거리 전도를 하면서 별의별 인간들을 다 만나본 경험이 있다. 때로는 역으로 자신들에게 종교를 전도하던 이도 있었다. 앞에 선 사내는, 비록 설문지에서 종교가 없다고 했지만, 완전히 믿을 순 없다. 애초에 크론바하((Cronbach) 알파값―설문의 신뢰도를 평가하기 위한 평가값―을 적용할 설문지도 아니었으니까. “어떤 말씀을 하시려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자리를 옮겨서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떨까요? 그렇지 않아도 저희, 서로 오해가 조금 있잖아요? 후배분이랑 같이 자리를 옮겨서….” “당신은 신의 존재를 믿나요?” “…당연하죠. 저희는 저희 하나님을 믿으며, 위대하신 선지자 엘리야의 말씀처럼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수없이 되뇌고 머리에 새겼던 교리 내용이 필터링 없이 입 밖으로 나왔다. “그쪽 분도 그런가요?” 지목당한 스키니 청바지도 입을 열었다. “네. 저도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외모에서 떠올리기 힘든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목을 다쳐서 목소리를 내기 힘든가, 라는 생각이 들 만큼 쇳소리가 심했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여태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일까? 그러나 단유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은 왜 종교를 믿습니까?” 물광 여인은 물론이고, 스키니 청바지 여인도 단유의 질문에 계속 답을 해야 하는가를 잠시 고민했지만, 자신들의 공고한 믿음을 보여줌으로써 자신들의 믿음에 교화되기를 바라며 대답했다. “이 세상은 곧 멸망해요. 종말의 날이 다가와요. 그것은 위대한 선지자의 예언서에 기록된 사실이에요. 멸망의 날이 다가올 때까지도 믿음을 갖지 못한 이들, 거짓 믿음을 가진 이들은 모두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한 고통의 지옥 속에서 하루하루를 후회하며 살게 될 거예요. 저희는 그런 미래를 모르고 방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은 겁니다. 믿음으로 무장한 이들만이 종말의 날 구원받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예비해두신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될 겁니다.” 스키니 청바지가 그 말을 받아 내용을 덧붙였다. “지금도 이 세상에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지, 아시나요? 그게 다 종말의 날이 다가오는 증거입니다. 아비가 딸을 강간하고, 어미가 아들을 목 졸라 죽이며, 자식들은 부모를 배신하고 등에 칼을 꽂아요. 친구는 호시탐탐 사기를 칠 기회만을 엿보며,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다가와 폭력을 행사하는 게 이 세상입니다. 도덕과 정의가 사라지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게 다 믿음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다시 물광 여인이 믿음으로 충만한 목소리를 뽑아냈다. “이 땅에는 사탄과 마귀들이 인간의 탈을 뒤집어쓰고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지 못하게끔, 서로를 저주하고 원망하게끔 술수를 쓰고 있어요. 일반 사람들은 그런 사탄과 마귀를 제대로 구분할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저희만이 그런 마귀들을 구분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저희는 침례를 받았거든요. 형제님도 침례를 받게 되면 진실을 알게 되실 거예요.” 은근히 ‘형제’라는 표현으로 단유를 아우르는 물광 여인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형제님께서는 혹시 12월 25일이 예수의 탄생일이라고 알고 계시나요? 하지만 12월 25일은 거짓 신의 기념일이랍니다. 태양신의 기념일에 불과한데, 거짓 신을 믿는 이들이 교묘하게 사람들을 세뇌하여 만든 거예요. 거짓 선지자를 만들고, 거짓 예언을 따르게 함으로써 구원의 길을 막은 거죠. 바로 악마들의 계략입니다.” 단유는 진지한 얼굴로 되물었다. “당신들은 착한 사람들입니까?” “네?” 대놓고 착하냐고 물으면 아무리 뻔뻔한 사람이라고 해도 쉽게 대답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착한 사람들이냐고 물었습니다.” “저희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착한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네, 착해요. 그러니까 형제님과 같이 순수하신 분들이 악마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거죠.” 그들이 길거리 전도를 하는 이유, 뭇 사람들의 멸시와 야유와 조롱 속에서도 꿋꿋이 이어나가는 이유는 세상이 곧 멸망할 거라는 ‘진실’을 알기 때문이고,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이타심’을 지녔기 때문이다, 라는 말을 쏟아냈다. “악마의 유혹이란 건 무엇인가요?” “세속적 욕심을 부추겨 눈 앞을 가리는 것을 말하죠. 돈, 권력, 명예, 이런 것들은 모두 부질없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로 인해, 사람은 영적인 성장을 하지 못하고 이 땅에 붙들려 있는 거예요. 저속한 물욕의 유혹에 무릎을 꿇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나요?” “형제님은 이 나라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이들만 들어간다는 서울대학교 학생이시잖아요?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영적인 성장은 쉽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기도하고 정진하여야만 가능한 것이죠.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이를 모른 채 살아갑니다. 똑똑한 머리를 가지고도 돈 몇 푼 더 벌기 위해 이 지옥 같은 현세에서 아등바등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형제님도 고민 많이 하시죠? 공부 때문에, 직장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으시죠? 혹시 가족 때문에, 친구 때문에 고민하시지 않으세요? 그런 고민들이 모두 영적 성장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저희는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답니다. 저희의 고민은 오로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품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것뿐이랍니다.” 확실히 교리를 충실히 교육받은 이들이라 그런지 끊김 없이 서로의 말을 받아주며 좋은 호흡을 보여준다. “정리하자면 당신 두 분은 마귀와 사탄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영적으로 성장한 신자들이며,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전도를 나선 착한 사람들이며, 세속적 욕망과 물욕에 관심이 없다는 거네요.” 죽 이어서 말하니 뭔가 장황한 느낌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럼요.” “저흰 다른 사이비 종교처럼 재산을 바치라거나 하지도 않아요.” “순수하게 영적인 도움을 주고자 할 뿐이죠.” 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이의 표정을 모방하여 짓는 두 여인에게 단유가 말했다. “어떠한 물욕도 없다?” “네.” “만약 두 분에게 누군가가 돈을 준다면, 그 돈을 어떻게 하실 건가요?” “돈을요?” “네.” 뭐지? 헌금 같은 걸 말하나? “저희는 돈을 받지도, 요구하지도 않고요. 만약 돈이 생겨도 저희 교단에 바쳐서 교단의 이름으로 어려운 이들을 돕도록 할 것입니다.” 사실 개인 개인은 돈이 필요하지 않지만, 교단은 돈이 필요하다. 교단 운영비와 신자를 교육하는 교육비 등, 이 땅에서 교단을 계속 지키기 위한 최소한 비용은 드는 법이니까. 그건 다 이 땅의 법이 잘못된 탓이다. 악마들이 판치는 세상이다.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자신들의 거룩한 사명도 악마들의 탄압 아래서 그 생명줄을 이어나가려면 최소한 그들의 논리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물론 그들은 종말의 날, 모두 심판받을 것이다. 돈? 그들이 그 돈을 위해 희생했던 것은 모두 ‘그날’ 돌려받을 것이다. 그러니. “저희는 돈에 대한 욕심이 없답니다.” 봐라, 너희들을 옥죄는 물질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평화로운 모습을. 물광 여인과 청바지 여인이 웃음을 지었다. 단유는 품에서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주머니 입구를 죄고 있던 줄을 풀고 그 안의 내용물을 손바닥 위에 부었다. 하얗고 반짝거리는 결정들. 여인들의 눈이 커진다. 쏟아지는 양이 많아질수록, 그래서 손바닥 위에 모두 담기 힘들 정도가 되어 바닥에 떨어지는 걸 보면서 그녀들의 눈은 점점 더 커진다. 단유는 손바닥을 뒤집었다. 바닥에 나뒹구는 반짝이는 그것들을 보며, 여인들은 ‘설마’라는 생각을 가졌다. 진짜라면 저렇게 다룰 리가 없다. 단유는 이어서 또 다른 주머니를 꺼냈다. 품속에 저런 걸 왜 품고 다니나, 하는 생각은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을 보며 이어지질 못했다. 처음의 것보다 훨씬 크고 맑으며 영롱하고 아름답다. 차마 가짜라고 보기 힘들 정도의 것이다. 아니 진짜라고 믿기가 힘든데, 힘들어도 믿고 싶어질 정도의 아름다움이다. 단유는 개중 가장 큰 덩이를 손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무려 검지 손가락 크기나 된다. “진짜일까요, 가짜일까요?” 여인들은 침을 꿀꺽 삼킨다. 단유는 등에 메고 있던 가방마저 풀어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천천히. 그리고 여유롭게. 가방을 열고, 손을 집어넣고 다시 빼낼 때 그의 손에는 햇빛에 반짝이는 금괴가 들려있다. 금괴를 바닥에 내려놓고, 다시 가방에서 금괴를 꺼내 내려놓기를 반복한다. 학생이라 무거운 책이 들어 있을 줄 알았더니, 금이 들어 있다? 금을 모두 꺼내 바닥에 늘어놓은 뒤,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단유가 고개를 들었다. “원하신다면 모두 드리겠습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이 상황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그런데도 여인들은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현실이 아닌 거 같은데, 현실이다. 꿈이 아니다. 말없이 서 있는 여인들에게 단유가 다시 물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단유가 무릎을 펴며 일어섰다. “전, 악마일까요, 아닐까요?” ======================================= [577] 진실의 거울(7) 심각하게 굳어진 두 여인을 보며 단유가 피식 웃었다. “재미있는 가정이죠? 만약 제가 당신들을 유혹하는 악마라면, 이 보석과 금괴들은 가짜겠죠? 그리고 만약 제가 악마가 아니라면, 이 보석과 금괴들은 진짜겠죠?” 두 여인은 입술이 바싹 마르는 기분으로 단유를 바라보고 단유의 발밑에 흩어진 반짝이는 보석과 가지런히 놓인 금괴들을 바라보았다. “저는 악마인가요?” 그가 악마라면, 그래서 지금 보고 있는 이 모든 게 환상이라면 육두문자를 섞어 썩 꺼지라고 소리쳐야 한다. 조금 전까지 신실(信實)함에 대한 간증을 열심히 했었던 본인들 아닌가? 하지만 그가 진짜 악마라면, 자신들은 악마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채로 전도를 한 멍청이들이 된다. “아니면 넘치는 재물들을 주체 못 해 바닥에 흘리고 다녀도 아깝지 않다고 여기는 정신병자일까요?” 마음으로는 외치고 싶다. ‘당신은 정신병자야!’ 사탄, 마귀, 악마 같은 초현실적 존재가 아니라, 그냥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인간이라고. 그런 인간이 어떻게 저런 재화들을 품고 다니는지는 알고 싶지 않다. 그저 그 재화들이 모두 손으로 만질 수 있고, 팔아서 돈이 되고, 그 돈으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면, 당신이 미친놈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일까. “내가 악마가 아니라면, 당신들에게 이것들을 드리죠.” 뭐? “조건 없이.” 싱긋 웃으며 빈 가방을 금괴 옆에 내려놓는 단유를 보며 외치고 싶다. 악마! 그리고 바란다. 부디 악마가 아니기를. “…….” 간단하게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다. 그냥 당신은 악마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한 뒤 그가 던져 놓은 가방 속에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들을 주워 담아 이 자리를 빠르게 빠져나가면 그만이다. 마침 주위에 사람도 없으니까, 그가 허락할 때 빨리 수습하고 떠나면 된다. 보석이나 금괴의 시세도 모르지만, 저 정도라면 적지 않은 돈이 될 것이다. 그것들을 싸 들고 해외의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으로 가서 평생을 여유롭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 ‘그래도 되잖아?’ 어린 날, 돈이 없어서 고생했던 날들에 대한 트라우마와 못된 사람들 때문에 고생했던 자신의 불쌍한 삶에 대한 신의 보상이 아닐까? 악마가 아니라, 신의 대리자, 천사가 아닐까? ‘당신은 천사였던 거야! 그렇지?’ 울컥하고 솟아오르는 단어가 목구멍에 콱, 하고 막히는 이유는 바로 옆에 선 동료 때문이다. ‘자매님’이라고 부르며 서로를 존중하던 사이지만, 지금은 누가 먼저 변절할 것인지를 두고 겨룬다. 그런 눈치 때문에 둘 다 쉽게 입을 떼지 않는다. ‘신이라고? 천국이라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막말로 앞에 놓인 것들은 둘이서 나눠 써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둘 다 쉽게 나눠 쓰자고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지금껏 주장한 믿음에 대한 간증 때문이다. ‘저 년, 설마 지가 먼저 배신 때리는 건 아니겠지?’ ‘고생은 내가 다했잖아? 그러니까 이번엔 니가 먼저 해. 먼저!’ **** “뭐죠?” “뭐가?” “저 사람들이요.” 새벽은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길 위에 우두커니 서서, 입을 꾹 다물고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을 흘깃 보며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밥 사준다니 어쩐다니 하더니 갑자기 플러그 뽑힌 인형처럼 멍해져서는….” “이유가 있겠지.” 덤덤한 단유의 말에도 새벽은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119에 신고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럼 하든지.” 단유는 신경 쓰지 않는 듯 앞만 보며 걸었다. “형은 아무렇지 않아요?” “응.” 조금의 틈도 없이 나오는 대답에 새벽이 새삼 놀랍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쩐지 형이 무서워지려 그래.” 새벽이 어설픈 3류 코미디언의 그것처럼 과장되게 놀라는 표정을 짓자, 단유가 화제를 돌렸다. “방언 기도라고 알아?” “네? 그게 뭔데요?” “말로서 기도하는 건 육(肉)의 기도기 때문에 사탄의 방해를 받을 수 있지만, 방언 기도는 영(靈)의 기도라서 무슨 소리인지 몰라 방해할 수 없다고 해.” “그게 말이 돼요?” “사탄은 끊임없이 자신들을 공격하려 하기 때문에, 그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이며 동시에 신에게 자신의 믿음을 간증하는 유효한 방법이란 거지.” “형, 신자였어요?” “아니.” “아닌데 어떻게 알아요?” “그냥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알게 된 거야.” 이 형은 정말 별걸 다 아네, 라는 눈으로 보다 물었다. “그런데, 그게 지금 저분들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 거예요?” “방언 기도가 논리적으로 이해가 돼?” “솔직히, 아니요.” “그런거야.” “네?” “저들의 신앙과 양식을 이해하려 하지 말라는 뜻이야. 네가 보기엔 이해할 수 없는 저 행동도 어쩌면 저들에게 중요한 의식인지도 모르잖아?” 보이는 것 이상으로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으니, 중요한 의식이긴 했다. “뭔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요.” “물론 내 말이 무조건 맞다는 건 아냐. 너도 어쨌든 물리학도잖아? 끊임없이 의심하고 의심해.” “아, 몰라. 머리가 갑자기 굳어버리는 느낌이에요.” “배고파서 그래. 밥이나 먹으러 가자.” “아까 전까지만 해도 오늘 학식 메뉴 때문에 기분이 좋았었는데.” “뭐였는데?” “왕돈까스에 매운 삼겹이요.” “좋네. 가자.”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지 뒤를 돌아보는 새벽에게, 저들이 진심으로 마음속 미혹을 극복하게 되면, 알아서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은 알려주지 않았다. 저들이 저들 마음속 진실을 제대로 바라볼 용기가 있다면, 그리하여 그 진실과 맞닥뜨려 한 점 부끄럼이 없다면, 그들의 흔들림 없는 신앙은 존경해 마지않아야 하리란 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대신 다른 걸 제안했다. “축구 보러 갈래?” “축구요?” “상암 월드컵 경기장 보고 싶다며?” 새벽은 흔쾌히 콜을 외쳤다. **** 새벽은 축구를 잘 모른다고 했다. 고작해야 국가대표 경기만 TV로 몇 번 보는 정도였다고 했다. “우와! 엄청 넓은데요?” 지하철역을 나와 경기장을 향해 가는 동안, 경기장 주변에 조성된 넓은 공원을 보며 새벽이 뱉은 감탄이었다. “경기가 없을 때도 여기 와서 산책하거나 놀러 오는 사람들이 많대.” “그럴 만도 하겠는데요?” 석양이 지며 붉은 주단을 드리운 공원을 정답게 걷는 커플들과 유모차를 끄는 젊은 부부의 모습을 부러운 듯 바라보는 새벽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갑자기 공허해지네요.” “공허?” “왜 이곳을 형과 와야 했던 걸까요?” 그런 생각할 줄 아는 녀석이 극장엘 가자고 했단 말인가? 경기장 안에 발을 들이니, 새벽의 공허함은 함성에 묻혀 사라진 듯 보였다. 연신 탄성을 질러대며 주변을 둘러보던 새벽이 말했다. “와, 축구 보러 오는 사람 되게 많네요? 우리나라 축구 되게 인기 없다고 들었는데.” 6만 6천여 석의 경기장에 반도 차지 않았지만, 서포터즈 석에 앉은 팬들의 우렁찬 응원 소리는 경기장을 꽉 채우고도 남았고, 새벽은 그 함성에 압도된 듯 놀란 눈을 했다. “뭐 먹을래?” “뭐 있는데요? 아니, 계세요. 표도 사주셨는데, 먹는 건 제가 살게요.” “괜찮아. 그 정도는.” “아뇨, 제가 살게요.” “됐어. 정 그러면 내일 점심 사면 돼. 치킨 괜찮아?” “뭐든 잘 먹어요.” “맥주는?” “땡큐죠.” 단유는 매점으로 향했고, 자리에 남은 새벽은 골대 뒤편 구역에 자리한 붉은 서포터즈들의 북소리와 응원 구호를 들으며 경기장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자리를 찾아 이동하는 관중들로 인해 주변이 어수선했지만, 그런 분위기마저도 왠지 새벽을 들뜨게 만들었다. “저기요.” 갓 상경한 시골 총각처럼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던 와중에 누군가가 새벽을 불렀다. “예?” 설마 나를 부른 건가, 싶은 마음에 고개를 돌렸던 새벽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와, 연예인을 보면 이런 기분이 들까?’ 라는 생각이 절로 날만큼 눈부신 외모의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벽은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아서 그녀를 올려다보는 것이 마치 큰 실례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진 탓이다. “혼자, 오신 건가요?” 응? 설마 이게 말로만 듣던 헌팅? 길거리에서 갑자기 누군가 다가와 ‘도를 아십니까’라고 물으면 경계를 하게 되겠지만, 이렇게 예쁜 외모의 여인이 다가와 묻는다면, ‘알고 싶어 죽을 지경이에요!’라고 외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게 아니지.’ 어쩌면 여기가 축구 경기장이기 때문에 이런 게 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길거리에서 갑자기 그러면 경계심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이곳에서는 축구를 보면서 응원도 하는 장소 아닌가? 혼자 온 거 같은데, 혼자서 응원하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이 함께 응원하며 소리도 지르고 해야 신도 나고 그럴 것이다. 그런 이유일 게다. 아무것도 아닌 자신에게 다가와 ‘혼자 왔어요?’라고 묻는 여인의 행동에 스스럼없는 이유는. ‘축구장 만세!’ 그리고 자신을 데리고 와준 단유에게도. ‘형님, 사랑합니다!’ 머릿속에 수많은 상념과 질문과 해답들이 태풍처럼 몰아치느라 잠시 대답의 타이밍을 놓쳤다. 다행히 여인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는 이가 나타났다. “나랑 왔어.” 익숙한 목소리에 새벽이 눈을 돌리니, 단유가 치킨이 담긴 박스와 종이컵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단유의 대답이 언뜻 기묘하게 들렸다. 그 이유는 금방 밝혀졌다. “난 또. 니가 다른 사람한테 표 주고 안 온 줄.” “말했잖아. 중간고사 끝나서 한가하다고.” 오늘은 방송 안 하냐, 경기 보고 나서 하면 돼, 오랜만에 외출하는 건데 더 놀다 들어가지, 내 걱정해주는 거냐, 며 깔깔대는 여인의 모습에서 새벽은 말을 잃었다. 그 모습을 본 단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쪽은 나랑 같은 학교 동급생.” “와, 그럼 서울대생이네?” 손뼉을 마주치며 환하게 웃는 여인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새벽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강새벽이라고 합니다.” “이름 멋지네요?” “고, 고맙습니다.” 치킨을 내려놓은 단유가 피식 웃으며 새벽의 어깨를 두드렸다. “왜 이렇게 얼어있어? 쟤가 좀 어렵게 생긴 얼굴이긴 하지만.” “야, 내가 뭐가 어렵게 생겨?” “너 처음 보면 조금 사납게 보여.” “말이면 단 줄 알아?” “또, 성격 나온다.” “아우. 오랜만에 본다고 좋아했더니, 이게 또 사람 속을 긁네?” 단유는 마저 소개를 했다. “이쪽은 내 친구.” “안녕하세요. 유상미라고 해요. 저 사나운 성격 아니거든요? 오해하지 마세요.” “아, 네. 반갑습니다.” 도리어 얼굴을 붉히는 새벽의 모습에 상미가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상미는 단유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단유가 가져온 맥주로 손을 뻗었다. 칙, 하고 탄산이 빠지는 소리가 들리고 종이컵에 콸콸 부어 꿀꺽 마시는 동작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이어졌다. “시원하다!” 콧잔등을 살짝 찌푸린 상미가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혼자 마시냐?” “너 안 마시잖아?” “얘도 있잖아.” “아, 그렇네. 죄송해요. 제가 성격이 급해서. 얘가 속만 긁지 않았어도 그러질 않았을 건데. 짠 해요.” “아, 네.” 새벽이 서둘러 캔을 따고 손에 들었다. “…형은요? 따드릴까요?” “얘는 술 안 마셔요. 그치?” “응. 난 이거.” 단유는 주머니에 넣어뒀던 오렌지 맛 음료를 꺼내 들었다. “얘는 애도 아니고 맨날 이런 거만 마셔.” “축구 볼 때는 이게 좋아.” 상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종이컵을 들었다. “자, 만나서 반갑습니다. 건배!” “건, 건배.” 단유도 병을 들어 어울려 주었다. 단유는 왼쪽에 앉은 상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유난히 조용한 새벽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참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힐끔 쳐다보다 시선이 마주치자 새벽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새삼 새벽이 본인보다 어리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왜 아무 말도 없어?” 수다쟁이 본능만 따지면 하은을 능가할 정도인 새벽인데 말이다. “아, 그게 아니고요.” 새벽은 단유의 어깨너머로 자신을 흥미롭게 쳐다보는 상미를 보고는 또 한 번 얼굴을 붉혔다. “형 여자친구 분이요, 연예인이세요?” “연예인?” 단유가 상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 시선에 상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냐? 왜 그렇게 이상하게 봐?” “이 얼굴이 연예인 할 얼굴이야?” “야!” ======================================= [578] 수리 수리 마수리(1) 새벽이 오해를 하는 듯해서 단유는 그의 오해를 풀어 주었다. “얘 연예인 아니야.” “아까 방송 어쩌고 하신다고.” 그 말에 상미가 유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인터넷 방송이요. 저 스트리머거든요.” 스트리퍼 아니고요, 라고 덧붙이며 재밌다는 듯 깔깔 웃음 짓는 상미를 여전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새벽이었다. “두 분 언제부터 사귀신 거예요?” “사겨?” “누가?” “…….” 단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단유의 고갯짓에 상미가 또 뿔이 난 듯 화를 내려는 찰나에 단유가 설명을 했다. “얘는 그냥 친구. 그리고 얘 남자 친구 따로 있어.” “두 분, 사귀시는 거 아니에요?” “얘는 그냥 남자 사람 친구.” “아.” “잠깐, 그러면 너 아직도 여자친구 없어?” “응.” “서울대에는 여자가 없어?” “왜 없어.” “그런데 왜 연애를 안 해?” “연애 같은 거 할 마음이 없어. 공부하느라 바쁘기도 하고.” “와, 난 네가 이렇게 친구, 아니 동생도 데리고 오고 하니까 나름 사교성도 좋아졌구나 싶었는데, 아직 연애는 무리였던 거야? 이야, 우리 단유 다 죽었네. 한창때는 막 여자들이 들러붙고 그랬는데.” “기억 조작하지 마. 나한테 무슨 여자가 들러붙어?” “어라? 너 왜 딴청이야? 기억 되살려줘?” “됐어.” “아, 그러고 보니 우리 김단유씨는 눈이 높지? 일반인은 눈에 차지도 않지?” “뭔 소리야?” “그러니까 잘 나가는 여자 연예인들만….” “거기까지 해라.” “흐미, 무서워라.”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표정으로 깐죽대는 상미를 보며 한숨을 쉰 단유는 운동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니 남친 나왔다.” 그 말에 상미와 새벽의 시선이 모두 운동장으로 향했다. 예전에 새벽이 단유에게 서울에 올라와서 보고 싶은 것들을 나열한 적이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월드컵 경기장이었고, 오늘 그 소원을 들어준 단유였기에, 연예인도 소개시켜 주려고 불렀나 싶었다. 그러나 다정한 두 사람을 보니 연인 사이가 아닌가 싶었고, 그래서 처음에 가졌던 자신의 망상이 남부끄러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얼굴을 붉히고 있던 새벽은 단유의 설명에도 괜히 얼굴을 들기 어려웠는데, 연예인인 줄 알았던 그녀의 진짜 남자 친구가 있단다. 그리고 그 남자 친구가 운동장에 나왔다고 하니, 호기심이 생겼다. 과연 이렇게 예쁜 여자를 여자친구로 둔 남자는 어떤 사람일까? “누군데요?” 단유가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등 번호 23번의….” ―와! 그때 마침 응원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와 단유의 목소리가 묻혔다. 응원석에서는 힘차게 선수들의 이름을 연호했다. 반대편 응원석에서도 원정 선수들의 이름을 응원하느라 소리를 치는데 그 고성(高聲)들이 어울려 소음이 되었다. 새벽은 운동장 위에 나오는 선수들을 빠르게 훑으며 23번을 찾았고, 이내 운동장 가운데서 공을 차올리며 몸을 푸는 선수를 발견했다. 동시에 전광판에 선수들을 소개하는 영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음악 소리 같은 것도 나오는 것 같은데, 응원단의 함성에 묻혀 제대로 들리진 않았다. “저 선순가요?” “응.” 멀어서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덩치가 꽤 있어 보이는 듯했다. “잘하는 선수죠?” 새벽은 주변 소음 때문에 목소리를 높여 물었는데, 상미에게도 들린 모양이었다. 상미가 몸을 살짝 기울여 새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잘해요. 첫해 때 신인상도 받았었고요, 지난 시즌에는 득점왕도 노려볼 만했는데, 아쉽게 두 골 차이로 받지 못했어요. 그래도 데뷔 3년 차에 그 정도 성적을 보인 선수가 드물다 할 정도죠. 국대의 차세대 스트라이커예요.” 자랑스러워하는 눈치가 빤히 드러난다. “그리고 얘랑 둘도 없는 친구고.” “네?” 축구 선수랑도 친해요? 라고 물을 뻔했는데 단유가 미리 설명해주었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죽마고우야.” “우와.” 설명하는 동안에도 단유는 그 친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처음의 낯설었던, 그래서 서먹했던 분위기는 경기가 시작된 뒤 조금씩 옅어졌다. 경기를 응원하는 동안, 새벽도 단유네와 함께 FC 유나이티드를 응원하며 그들이 공격을 주도할 때마다 ‘골, 골’을 외쳤고, 위기에 처하면 탄식을 하며, 위기를 벗어나면 안도의 한숨과 함께 상미와 건배를 했다. 전반이 끝난 뒤, 남은 맥주를 털어 넣으며 새벽이 말했다. “어쩐지 허전하네요.” “뭐가?” “해설이 없어서요.” 상미가 맑은 웃음을 터뜨리며 새벽의 말에 공감했다. “나도 처음에 그랬는데, 이제는 익숙해. 오히려 쓸데없는 말이 끼어들어서 감상을 방해하는 것 같고 그래서 방송 중계 보다 보면 귀에 거슬리기까지 하는걸.” “우와, 축구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단유가 한마디 거들었다. “축구가 아니라, 지 남친을 좋아하는 거지.” 상미가 단유를 쏘아보며 말했다. “내가 내 남친 좋아하는 데 뭐가 불만이야?” “그럼 싸우지를 말든가.” 음료수를 홀짝이는 단유가 얄밉다는 듯 상미가 콧방귀를 꼈다. “야! 사람이 사귀다 보면 싸우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그런 것도 이해 못 해?” “이해 못 했으면 너랑 지금 여기 이러고 있겠어?” “얼래? 그럼, 너 만약에 명수랑 나랑 헤어지면 나 다시는 안 보겠다?” “그건 비약이야.” “비약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됐고, 가서 맥주나 더 사와.” “알았어.” 단유는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제가 사올게요.” “아냐, 괜찮아.” “아뇨. 제가 갈게요. 화장실도 갈 겸.” “그래.” 새벽의 단호한 의지를 읽은 단유가 순순히 양보했다. 새벽이 상미에게 얼마나 사와야 하냐고 물었고, 상미는 ‘적당히’라고 대답했다. 아마 새벽은 그 ‘적당히’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수량의 한계선을 두고 심각하게 고민할 것이지만, 단유는 그대로 놔뒀다. 새벽이 자리를 비운 뒤, 단유가 물었다. “요즘 뭐 안 풀리는 일 있어?” “뭐? 왜? 내가 신경질 부려서 그래?” 날카로운 상미의 반응에 단유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널 모르겠어?” 그 말에 상미가 단유를 쏘아보다 이내 눈동자에 힘을 풀고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역시 우리 단유는 변하질 않는구나.” 단유는 말없이 상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으면 부끄러워서 무슨 말을 해?” “부끄럽긴. 너랑 나 사이에 그런 게 어딨어.” “그것도 그렇네.” 상미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허탈한 듯 경기장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이는 복도를 어렵게 뚫고 나가 긴 줄 끝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기다려 산 맥주 4캔을 들고 다시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더니, 어느새 등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단유가 새벽에게서 캔이 담긴 봉지를 받아들며 ‘수고했다’고 한 마디 건네니 새벽이 씩 웃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어요.” “그래서 내가 간다고 했잖아.” “에이, 그건 아니죠. 고생을 해도 제가 하는 게 맞아요.” “어머, 말 예쁘게 하는 거 봐. 단유 니가 인복은 있나 보다. 저런 착한 동생도 얻고?” 상미의 말에 새벽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헤헤, 웃음을 흘렸다. 그때 다시 각 팀의 응원단이 내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운동장으로 선수들이 나오고 있었다. 전반전 스코어는 1:1. 스코어도 스코어지만, 전반전에 두 팀은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며 경기장을 누볐고, 때문에 직관 온 관중들의 응원 열기도 드높아진 상황이었다. 당연히 처음으로 경기장을 찾은 새벽도 경기에 꽤 몰입했다. “시작하나 봐요.” 상미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후반엔 꼭 좀 골을 넣었으면 좋겠는데.” 전반에 얻은 한 골도 명수의 도움이 있었기에 얻을 수 있었지만, 상미는 명수의 발로 넣은 골을 보고 싶었다. 후반 10분여가 지났고, 선수들은 여전히 활발하게 뛰어다녔다. 두 팀 다 교체 선수가 없었고, 선발의 체력들을 감안하면 이제 점점 지치는 선수가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그래도 아직까지는 걸어 다니는 선수가 보이지 않았다. 두 팀의 서포터즈 석 역시 아직 지치지 않았다는 듯,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응원가를 불렀고, 그 열기가 옆으로 전염되어 동쪽과 서쪽의 관중석에 앉은 이들도 눈을 반짝이며 경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FC유나이티드의 골키퍼의 선방으로 위기를 한 차례를 넘긴 후였다. 골키퍼는 품에 안은 공을 힘껏 던졌고,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공은 센터 라인 근처에 있던 미드필더의 가슴에 맞고 떨어졌다. 그 즉시, 주변에 있던 상대 팀 선수가 압박하기 위해 달려왔는데, 미드필더의 볼 처리가 먼저였다. “막아!” 상대 팀 감독인지 코치인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보다 앞서 중앙 미드필더가 찬 공은 바닥의 잔디를 스치며 나아가 왼쪽으로 굴렀다. 가장 먼저 그 공을 잡은 선수는 FC 유나이티드의 레프트 윙어였다. 한 번의 터치로 공의 속도를 줄이는 대신 진행방향을 전면으로 바꾼 뒤, 공을 쫓아가는 윙어의 옆을 상대 팀 수비수가 쫓아 막았다. 사이드라인을 따라 나란히 달리던 두 선수가 공을 차지하기 위해 어깨 싸움을 벌였고, ‘반칙, 반칙’을 외치는 응원단의 소리가 경기장을 덮었다. “저거 반칙이에요?” “아냐. 저 정도 몸싸움은 봐주는 편이야.” 갑작스럽게 드리블을 멈춘 FC유나이티드의 윙어. 그러나 수비수도 빠른 반사 신경으로 진로를 막고 나아가지 못하게 앞에 섰다. 결국 윙어는 뒤로 공을 돌려야 했는데, 뒤에서 쫓아오던 미드필더가 원터치로 공을 중앙, 페널티 에어리어로 보냈다. 그 절묘한 패스가 마침 가운데로 침투하던 명수의 발에 걸렸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상대 수비수가 3명이나 서 있던 상황. 여기서 명수 타임이 시작됐다. 가장 가까이 있던 수비수가 명수에게 어깨를 들이밀었다. 피하더라도 앞뒤로 자신을 도와줄 수비수들이 붙어 있기 때문에, 공을 조금이라도 빼는 순간 뺏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나보다. 그러나 공을 향해 고개를 떨구고 있던 명수도 주변의 상황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던지, 공을 빼지 않았다. 대신 수비수와의 몸싸움에 밀리지 않기 위해 힘을 줬고, 상대 수비수는 오히려 균형을 잃지 않는 명수의 힘에 놀란 눈치였다. 그게 틈이었다. 명수는 오른발을 교묘하게 흔들어 공을 굴렸고 앞에 선 수비수 사이를 뚫었다. 그리고 두세 걸음 앞까지 나와 각도를 좁힌 골키퍼마저도 한 호흡에 뚫었다. 그런 명수의 무브는 놀라웠으나, 덕분에 골대로 공을 찰 만한 각도가 나오질 않게 되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때, 명수가 몸을 비틀며 공을 찼다.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는 명수를 바라보는 시선은 없었다. 대신 모두의 시선이 그의 발을 떠난 공의 궤적을 쫓았고, 모두의 주목을 받은 공은 회전 없이 날아가 반대편 포스트를 맞고 튕기면서 골망을 흔들었다. ―와아! 경기장을 뒤흔드는 함성 속에 FC유나이티드 선수들이 명수에게로 뛰어갔다. 명수는 잔디와 흙이 잔뜩 묻은 유니폼을 털 생각도 않고 벌떡 일어나 경기장 사이드로 뛰었다. FC유나이티드의 서포터즈들과 마주한 명수가 두 주먹을 흔들며 세리머니를 펼치자 더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 대박!” 새벽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왁왁 소리 지르는 상미를 따라 함께 소리를 질렀다. 흐뭇한 표정으로 박수를 보내는 단유를 붙잡고 ‘대박 아니에요, 형?’이라고 외치는 새벽의 모습에 단유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하하하!” 결국 2:1로 승리한 FC 유나이티드 선수들은 경기장 위에서 찾아온 서포터즈와 관중들을 향해 박수를 보내며 선수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들이 모두 운동장 위를 떠날 때까지 관중들은 박수를 보내주었다. 그때, 명수가 W석 쪽으로 달려오더니 손을 흔들었다. 새벽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상미를 바라보니, 역시 상미가 두 손을 크게 흔들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명수가 양손의 검지로 단유네 쪽을 가리키고 엄지를 들어 보인 뒤, 대기실로 들어갔다. “형, 오늘 완전 대박이에요. 축구가 이렇게 재미있는 경기인 줄 몰랐어요. 앞으로도 자주 보러 와야 할 거 같애요. 제가 서울 사람은 아니지만, 앞으로는 FC유나이티드 팬이라도 할까 봐요. 특히 형 친구분이요, 인명수 선수분 팬 해야겠어요. 어떻게 그렇게 공을 잘 차요? 나 완전 메시 보는 줄.” 쉴새 없이 떠는 새벽의 수다 본능이 드디어 터졌다. 그래도 오늘은 그냥 두기로 마음먹었다. 명수를 칭찬하는 이야기는 아무리 많이 들어도 질리지 않으니까. “형은 되게 자랑스럽겠어요.” 그 말에 상미가 의아하다는 눈으로 물었다. “왜?” “저렇게 멋있는 축구 선수를 친구로 두고 있잖아요? 부러워요.” 상미가 풋, 하고 실소를 지었다. “너 웃긴다.” “왜요?” “명수 쟤는 오히려 전국 1등까지 하고 서울대에 들어간 단유를 자랑스러워할걸?” “서울대에 들어간 거로요?” 고작 그런 이유로? 라는 얼굴을 보며 상미는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서울대에 들어간 게 안 자랑스러워?” “자랑스럽긴 하지만, 저분은 스타시잖아요.” “와, 명수가 스타 소리도 다 듣네. 이상하다, 그치?” “뭐, 이제 스타 소리 들을 때도 됐지.” 단유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 [579] 수리 수리 마수리(2) “솔직히 걱정이 많았거든. 단유가 대학에 가서도 혼자 지내는 건 아닐까.” 이제 겨우 두 잔째인데 상미는 이미 만취한 사람마냥 흥을 주체하지 못해 깔깔대며 높은 데시벨의 목소리로 수다를 늘어놓았다. 사실 지금 있는 이 호프집이 워낙 시끄러워서 어지간한 목소리로는 들리지도 않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중학교 때도 친구가 없었거든. 고작해야 나랑 다른 두 친구가 있었는데, 걔들 아니면 단유 얘는 완전히 혼자였을 거야.” 과장에 과장을 보태 하는 말이지만, 단유는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혼자였어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단유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미나 지태, 채윤과 같은 친구들의 존재를 거북하게 느끼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있었기에 좀 더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니까. “아까는 여자 친구도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 시끄러운 곳에서 들었던 걸 용케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새벽의 물음에 상미가 깜빡했다는 듯, 손뼉을 쳤다. “그치. 정말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어. 이런 애를 좋아하는 애도 특이 취향의 사람도 있단 말이야.” 그중의 한 사람이 자신이었단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과거는 과거일 뿐. “아무튼, 네가 단유 곁에서 많이 좀 도와줘.” “오히려 제가 도움을 받아야 할 거 같은데.” “그래, 그래. 도움도 받고, 도움도 주고. 그게 동기잖아?” “아, 네.” 상미가 건네는 술을 넙죽넙죽 받아 마시기 바쁜 새벽이다. 단유는 곁에서 사이다나 시켜놓고 조금씩 홀짝댈 뿐이기에 상미의 술을 받아줄 사람은 결국 새벽뿐이다. “너도 전교 1등하고 그랬어?” “네? 뭐, 한 번 했었죠.” “한 번? 그런데 서울대 들어간 거야?” 사실 서울대에 입학한 아이들 중 전교 1등을 한 번도 못해본 사람도 없진 않다. 서울대 입학 정원은 전국 고등학교 숫자보다 많으니까. 그런 면에서 보자면 새벽처럼 전교 1등을 한 번 경험해봤다는 경우는 그리 드문 케이스는 아니다. 오히려 흔한 편이라고 봐야 한다. “단유 형처럼 ‘전국 1등’이 희귀한 경우죠.” “그거야, 뭐….” “그리고 저는 사실 운이 좋았어요. 모의고사에서도 받지 못했던 점수를 수능에서 받았으니까요.” “오오. 찍었던 게 다 맞고 그런 거야?” “그런 점도 있었죠?” “실전형이네. 멋있다!” 그러면서 다시 잔을 높이 드는 상미다. 조금만 마시고 간다던 상미와 새벽은 엉덩이를 뗄 줄 몰랐다. 수다 본능이 되살아난 새벽과 흥에 취한 상미가 죽이 맞아서는 대화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대화의 소재는 주로 단유에 대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둘 사이의 교차점이 단유다보니 어쩔 수 없긴 했지만, 그것을 듣는 단유로서는 조금 불편한 느낌도 없잖아 있었다. “내 얘기 말고는 할 얘기가 없어?” 단유의 소소한 항의는 일말의 합의도 없이 묵살 당했다. “누나는 단유 형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요.” “도대체 내가 지금까지 어떤 이야기를 했었지? 기억이 안 나네. 내가 한 이야기 중에 어떤 이야기가 그런 생각을 갖게 했는지 설명해줄래?” “푸하하. 누나 너무 재밌어요.” “인터넷 방송을 하다 보니 이런 쓰잘데기 없는 스킬만 늘었나 봐.” 단유는 사이다를 한 병 더 시켰다. “되게 외로웠겠구나.” “솔직히 처음 한 달 동안은 많이 어려웠죠. 그나마 단유 형을 만나면서 겨우 서울생활이 재밌어진 거 같아요. 이렇게 누나를 보게 된 것도 단유 형 덕분이잖아요. 제가 누구한테 쉽게 말을 붙이는 성격도 아니거든요. 제가 보기보다 낯을 많이 가려요.” 응? 단유는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새벽을 바라보았다. “그런 거 같아 보여. 그래서 아까 처음 만났을 때 과묵했던 거지?” 응?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궁금하다는 얼굴로 상미를 바라보았다. “그런 면도 있었죠. 헤헤.” “그럼 짠.” 단유는 손을 들고 점원을 불러 안주를 더 시킨 뒤, 남은 사이다를 털어 넣었다. 밍밍한 맛이 나는 이유는 뭘까. 새벽 1시가 되어서야 겨우 술자리를 파하게 되었다. 호프집을 나와 걷던 중에 명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상미가 MVP 축하한다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걸 억지로 막은 뒤, 전화기를 뺐었다. “월요일에 온다고?” ―응. 그날 병원도 좀 가야 하고, 간 김에 집에 잠시 들리려고. “병원은 왜? 아까 보니까 크게 다친 데는 없어 보이던데?” ―그냥 정기 검진이야. 아무튼, 너 월요일에 바빠? “3시면 수업은 다 끝나.” ―됐네. 그럼 내가 오전에 병원 갔다 와서 너한테로 갈게. “그래. 그럼 와서 전화해.” ―오케이. 아, 상미 걔는 네가 잘 좀 데려다줘.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도 남았는지, 새벽과 키득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상미를 바라보며 물었다. “얘 원래 이렇게 술 마시냐?” ―네가 같이 있으니까 편해서 그런 걸 거야. 원래 술 잘 안 마셔. “그래도 정말,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봐라.” ―크하하. 단유 너 되게 고생했나 보구나? “됐다. 역시 상미는 나랑 잘 안 맞아.” ―나랑 잘 맞으니까 문제없어. “알았다. 늦었는데 얼른 자라. 내일 경기도 나가야지.” ―오케이. 그럼 월요일에 보자.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리니, 상미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단유를 노려보고 있었다.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봐? 나랑 잘 안 맞아?” “…농담이지.” 상미가 와락 달려드는 순간, 오른손을 뻗어 전진해오는 그녀의 이마를 막았다. “아야!” “미안.” 주저앉은 상미를 일으켜 세운 후, 조금 떨어진 곳에서 키득거리는 새벽에게 물었다. “혼자 갈 수 있지?” “아, 네. 물론이죠.” “자.” “아뇨, 괜찮아요. 저 돈 있어요.” “아냐. 나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받아. 택시 타고 가.” “정말 괜찮아요.” “내 마음 편하자고 주는 거니까, 그냥 받아라.” 단호한 단유의 말에 새벽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정말 받으면 안 되는데, 이상하게 형 말은 거부할 수가 없네.” 새벽의 손에 지폐를 쥐여주고 나서 단유는 상미의 팔을 어깨에 걸었다. “난 이거 좀 치우고 올게.” “뭐?” 날카로운 상미의 목소리는 가볍게 씹었다. **** 상미네 집 근처 편의점에서 숙취 음료를 사서 건넸다. “나 많이 안 마셨어.” “알아. 그래도 마셔.” “고마워.” 마시기 편하게 뚜껑까지 따 놓은 터였다. 상미는 한 번에 드링크를 비운 후, 다시 단유에게 건넸다. 단유는 빈 병을 받아 편의점 안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왔다. “아, 좋다.”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다리를 쭉 뻗고 고개를 든 상미의 시선이 밤하늘을 향했다. 컴컴한 밤하늘에는 조그만 별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서울의 밤이란. “들어가자. 감기 걸리겠어.” 5월의 밤은 적당히 서늘하다. 하지만 찬바람을 계속 쐬면 좋지 않으니까. “그래.” 새벽과 있을 때는 그래도 제대로 걷는 듯싶었는데, 뒤늦게 술이 올라오는 모양인지 혼자 일어서는데도 비틀거린다. 단유는 상미의 팔을 다시 어깨에 걸고 걸었다. 작은 원룸의 문을 열고 들어선 뒤, 불을 켰다. 난장판이 된 집안을 보며 단유는 한숨을 쉬었다. 상미는 단유에게서 벗어나 비틀대며 걷다가 침대 위에 풀썩 엎어졌다. 거친 숨소리가 이불 위로 쏟아진다. “치우고 좀 살아.” “응.” “갈게.” “…단유야.” 문고리를 잡았던 단유는 고개를 돌렸다. 단유를 불렀던 상미가 한참 뜸을 들이다 말했다. “나…계속할 수 있을까?” 단유는 상미의 말이 경기장에서 자신에게 털어놓았던 고민의 연장임을 알아차렸다. **** “나, 요즘 방송하기가 조금 겁나.” 솔직히 말해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누구보다 게임을 좋아하고, 또 방송을 하면서 자신과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이들과 대화하며 소통하던 것을 좋아하던 상미였기 때문이다. “왜?” 상미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입술을 달싹거리다 겨우 꺼낸 말은 ‘스토커’였다. “방송 초기에는 채팅창에 되게 안 좋은 말들이 많았어. 인신공격성 발언도 많았고, 입에 올리기도 더러운 말들도 계속 올라오고.” 채팅창 분위기가 방송 전반을 지배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가차 없이 밴(ban)을 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얼마나 이상한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이 많던가. “알다시피 내가 멘탈은 좋은 편이잖아? 그래서 꾹 참기도 했어. 참을 만하기도 했고.” 때로는 밴 하기도 애매하게 자신의 실력을 꼬집어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불편하지만, 그저 인내하고 자신을 채찍질하여 그런 비판이 나오지 않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악의적인 채팅이 있는가 하면 응원의 목소리를 해주는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늘어갈수록 자신감도 얻었다. “그중에 한 사람이었어.”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아이디만큼은 기억한다. 방송 초기부터 자신을 응원해 주었고, 때로는 후원도 해주었다. 그래서 고마워했고, 채팅창에 나타나면 먼저 아이디를 읽어주고 반겨주었다. “그런데 개인 쪽지로 연락이 오기 시작했어.” 처음엔 별다른 말이 없었다. 방송 잘 보고 있다, 열심히 해 달라, 웃는 모습이 보기 좋다, 뭐 이런 말들이었고 그 정도야 자신의 방송을 보던 시청자들이 종종 하는 말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신경 쓰지 않았다. 감사의 뜻으로 답장을 보내는 정도에서 끝날 거라 생각했고. 그런데 어느 날 만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죄송한데, 아직 정모 계획은 없어요. 라고 답장을 보냈는데, 방송 중에 30만 원의 후원금이 터졌다. 동시에 쪽지로 메시지가 들어왔다. ―한 번 만나 주시죠? 만약 채팅창에 그런 글이 올라왔다면 적당히 제재를 가하고 말 텐데, 개인 쪽지로 연락이 오니 딱히 제재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일반 채팅창에서 그 사람을 밴(ban) 하려니, 사람들은 30만 원씩이나 후원해 준 사람을 왜 제재하냐고 물어볼 것 같았다. 후원과 쪽지가 며칠에 걸쳐 이어졌다. 후원금은 부담스럽게 만들었고, 쪽지의 내용은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제가 거기로 갈게요. ―쪽지 대답해줘요. ―남자친구 있어요? ―만족해요? ―저 잘하는데. 결국 그의 아이디를 차단했다. 그러나 그는 멈출 줄 몰랐다. 어느 날, 또다시 쪽지가 왔다. 이를 악물고 쪽지를 확인하는데, ―너희 집 앞이야. 너무 놀란 상미가 벌떡 일어나 창문으로 가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 후, 혹시 몰라 커튼까지 쳤다. 저도 모르게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고 컴퓨터 앞에 앉았을 때, 다시 쪽지가 왔다. ―놀랐어? 농담이야. 그러니까 그냥 얼굴 한번 보자고. 섬뜩한 느낌에 상미는 계속 방송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 뒤로 계속 그러는데, 너무 힘들고 무서운데, 경찰에서는 특별히 위해를 가한 것도 아니고 쪽지의 내용도 신변의 위협을 가하려는 협박성 문자가 아니라서 어쩔 수 없다네.” 상미의 고민 상담은 맥주를 사 들고 온 새벽이 등장하면서 멈췄다. 그리고 지금, 상미는 눈에 고인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 한 채 단유를 바라보았다. “나 어떻게 해?” 누군가에게는 그게 뭐, 라는 반응이 나올 수도 있겠다. 심정적으로는 별로 공감이 되지 않는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단유는 상미를 알고 지낸 지 오래됐다. 상미가 단유가 어떤 성격이고, 성향이 어떠한가를 잘 알듯이, 단유도 상미를 잘 안다. 그래서 상미가 이런 문제로 고통받을 수 있음을 머리로는 이해했다. 단유 본인이 똑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자신은 별로 개의치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사람이 모두 똑같을 수는 없으니까, 상미에게는 꽤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바쁜 남자친구에게는 차마 걱정할까 봐 말을 못했다. 단유에게도 사실 하기 힘든 말이었지만, 단유가 먼저 자신의 기색을 읽고 먼저 물어봐 줬기에 털어놓을 수 있었다. 어쩌면, 단유는 언제나 그랬듯이, 답을 찾아줄지도 모른다는 조그만 기대를 살짝 품으며. ======================================= [580] 수리 수리 마수리(3) 일단 상미를 재우기로 했다. “내일 다시 올게.” “응.” 힘 빠진 목소리로 단유를 배웅하는 상미를 뒤로하고 단유는 집을 나왔다. 건물 입구를 나와 집으로 향하는 대신, 주위를 한 번 둘러보기로 했다. 5층짜리 신축 빌라 3동이 붙어 있었는데, 입구에는 카메라도 달려 있어 건물에 누가 들락날락하는지 알 수 있었다. 문도 자동문으로 되어 있어 방문자는 입주자들이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열리지 않았다. 비싼 방범 장치가 설치된, 나름 좋은 빌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집 밖을 아예 나서지 않는다면 모를까, 집 밖으로 나오게 되면 위험해질 수밖에 없다. 1층의 주차장에도 카메라는 달려 있지만, 주차장 옆 담벼락에 몸을 숨기면 카메라에 걸리지 않는다. 건물과 건물 사이는 좁지만, 아예 틈이 없는 건 아니어서 성인 한 명이 몸을 굽히고 숨으면 신경 쓰지 않는 한 알 수가 없는 구조였다. 좀 더 멀리 걸어서 주변을 탐색한 후에야 단유는 집으로 돌아왔다. **** 새벽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단유는 샤워를 한 뒤, 간단하게 토스트로 속을 채우고 집을 나섰다. “집 잘 지켜.” “킁.” 현관에서 호빵의 배웅을 받으며 나온 단유는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집에 잘 도착했다는 새벽의 메시지가 마지막 수신 문자였다. 단유는 주소록을 검색한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잘 들어갔어? “응. 넌 푹 쉬었고?” ―그럼. 기분 좋게 푹 잤다. 상미는? “집에 잘 데려다줬어.” ―고생 많았어. “고생은.” 이어 단유는 상미가 하고 있는 고민에 대해 전했다. 상미는 한참 시즌 중이라 정신없을 남자 친구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말을 하지 않았지만, 단유는 명수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새끼야? 그 새끼?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불같이 화를 내는 명수였다. “아직 몰라.” ―상미는 어떤데? 많이 힘들어 하지? “응.” ―보기보다 마음이 여린 애라서 혼자 속앓이 많을 했을 건데. 난 그것도 모르고 나 혼자 기분 좋다고 꿀잠이나 처자고 있었네. “자책하지 마. 너 그러지 말라고 상미가 말을 안 했던 거니까.” 잠시 말이 끊어지고 씩씩거리는 콧소리만 들렸다. “그렇게 싸우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면서도 너희 둘, 서로를 끔찍이도 아끼는구나.” ―내가 내 여자 아끼는 게 뭐가 이상해? “보기 좋다는 말이었어.” ―아무튼.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일단 내가 조금 알아보고 난 뒤에 내 선에서 처리할 수 있으면 처리하려고. 그리고 너한테도 그 정도는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너밖에 없다. “고마우면, 계속 열심히 해. 네가 잘 돼야 나도 잘 되는 거야. ―오케이, 그럼 다음에 골 넣으면 네 이름 불러줄게. “그런 짓은 하지 말고.” ―김단유, 사랑한다! 고 외쳐줄까? “닥쳐.” ―내 진심을 왜 몰라주는 거야? “닥치라고.” 전화를 끊은 후 단유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솔직히 명수에게 알려주기 전까지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어떤 가정 속에서도 단유는 명수에게 알려야 한다는 결론만 도출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 친구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느 남자가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분노가 치밀어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더욱이 시즌 중인 선수의 멘탈 관리 차원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신중해야 했다. 그러나 멘탈이라는 측면에서 명수는 강하다. 보통 강한 게 아니다. 그렇게 강하지 않으면 오늘날 이렇게 축구선수가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힘써주겠다고 했으니, 명수도 안심할 테고 말이다. 일요일,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빌라 주변은 한적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주행음이 흐릿하게 들려올 뿐 인적 드문 거리는 시간마저 정지된 것처럼 고요했다. 그 정적을 깨고 나타난 단유는 자박거리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빌라 주위를 살폈다. 어두운 밤에 볼 때랑 또 다른 느낌이었다. 회색빛의 드라이비트 외장재는 화재에 취약하다고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저 외장재가 쓰인 이유는 역시 값싼 비용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겠지만, 만약 어떤 사람이 악의를 품고 불을 지른다면, 저 외장재는 불쏘시개 역할을 하며 금방 건물을 불덩이로 만들 것이다. 또 상미가 머무르고 있는 4층은 반대편 건물 옥상에서 쉽게 노출되는 문제가 있었다. 길 하나를 두고 반대편에는 일반 상가가 서 있는데, 그 상가에서는 옥상 문을 단속하고 있지 않아서, 누구나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 조금 더 떨어진 곳에는 6층짜리 건물이 있었는데, 거리는 멀지만 그곳 비상계단 통로에서 빌라를 바라보면, 웬만한 시력이면 그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다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였다. 원룸의 유일한 창문이 사생활을 보호하기 힘들다는 점은 조금 곤란하지 않나 싶었다. 환기를 위해서라도 가끔은 창문을 열어야 할 경우가 있을 테니 말이다. 주위를 적당히 살핀 후에야 단유는 상미의 집으로 향했다. 벨을 누르고 기다리니 안에서 누구냐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나야.” “나가 누군데.” “단유.”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일단 들어가자.” 전자식 도어락이 풀리는 소리가 난 후, 문이 천천히 열렸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상미를 보며 단유는 혀를 찼다. “너 너무 한 거 아냐? 일요일이잖아? 어제 술도 마셨잖아? 그럼 좀 쉴 시간을 줘야 하는 거 아냐?” “10시 넘었어.” “야! 난 12시에 일어난다고!” “너 어제 잠든 시간이 2시야. 8시간 이상 잤다고.” “술 마셨다고, 술! 피곤하다고!” “그런 애교는 명수한테나 보여줘.” “…이게 애교로 보이냐?” 싸늘한 목소리. 하지만 단유에겐 통하지 않았다. “보니까 집에서는 밥을 안 해 먹는 거 같은데, 나가자. 해장은 시켜줄게.” “아이 씨! 기다려봐. 씻고 나올게.” “그럼 나 컴퓨터 좀 보고 있을게.” “아, 그럼 내가 켜 줄게.” “나도 컴퓨터 쓸 줄 알아.” “아.” 상미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욕실로 들어갔다. 단유는 컴퓨터를 켠 뒤, 설치된 프로그램들을 살폈다. 백신 프로그램 하나 깔려있지 않은 깨끗한(?) 컴퓨터였다. 오로지 게임과 방송이라는 목적에 충실한 컴퓨터. 우선 백신 프로그램을 1년 결제하여 설치한 뒤, 컴퓨터를 스캐닝했다. 스캐닝하는 동안, 단유는 주변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간단하게 세안을 하고 머리를 감은 상미가 수건을 머리에 둘둘 마르고 나와 말했다. “대박.” 씻느라 욕실에 들어가 있던 고작 20여 분 만에 집 안이 깨끗해졌다. “빨래는 저기 바구니에 뒀고, 소소한 것들은 저기 화장대랑 서랍에 적당히 넣어놨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것들을 정리한 것도 정리한 것이지만, 바닥도 쓸고 닦았는지 광이 나는 듯 보였다. 침대보는 마치 호텔의 그것처럼 정리되어 있고, 화장대와 수납장 위의 물건들은 열과 오를 맞춰 도열한 상태. 행거에 걸려 있던 옷들도 가지런하게 줄을 맞춰 마치 백화점 진열…. “오버하지 마.” 단유의 말에 상미가 여기저기 둘러보며 감탄하던 것을 멈췄다. “단유야.” “…왜?” “너 같이 살자.” “미쳤어?” “아니면 청소 알바라도 할래?” “…진짜 너랑 명수는 천생연분이다.” “왜?” “헛소리 레벨이 똑같애. 됐고, 여기 와서 네가 받았다던 쪽지 좀 보여줘.” “나중에 하자.” 단유가 돌아보니, 상미가 배를 슬슬 만지며 히죽 웃고 있었다. “배고파.” 중국집에 시켜먹자는 상미를 억지로 끌고 나온 단유는 가까운 식당을 향해 가던 중 전화를 받았다. “일어났어?” ―네, 형. 목소리 들으니까 밖이신 거 같은데요? “응. 상미랑 같이 밥 먹으려고.” ―누나랑요? 설마…. 말끝을 흐리는 새벽에게 물었다. “너는 밥 먹었어?” ―네? 아뇨. 저도 지금 일어났어요. 어제는 너무 피곤해서 잘 들어갔다는 연락도 못 드려서, 그래서 별일 없이 잘 들어왔다고 알려드리려고 전화 드린 거였어요. “그래, 알았어.” ―근데, 형 혹시 어제 그 누나랑 같이…. “이상한 쪽으로 생각하지 마. 얘 해장시켜 주려고 온 참이니까.” ―아, 네. 저기, 그럼 저도 가도 돼요? “여기? 밥 먹으러?” ―서두르면 금방 나갈 수 있어요. 낙성대에서 여기까지 2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그래, 오고 싶으면 와. 정확한 주소는 문자로 보내줄게.” ―네. 전화를 끊으니 상미가 어제 그 친구냐고 물었다. 그렇다 하니, “걔가 너 엄청 따르는구나?” 라고 말한다. “나를 보고 싶은 건지, 너를 보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고 말하려다, 괜히 상미 어깨에 힘만 잔뜩 들어가게 만들까 봐 말을 말았다. “안녕하세요.” “오? 되게 빨리 왔네?” “네. 차가 안 막히더라고요.” 두 사람이 서로 한 마디씩 나누는 걸 지켜보다 단유는 착석을 권했다. 새벽이 도착한 시간에 맞춰 육개장 그릇이 나왔다. “네 거 먼저 시켜놨어.” “고맙습니다.” “타이밍이 절묘했어? “그렇네요.” “먹자.” 상미가 화사하게 웃으며 권하니, 새벽이 싱긋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먹는 두 사람과 달리 느긋하게 식사를 마친 단유는 티슈로 입 주위를 닦고, 물을 마시며 고개를 돌렸다. 맛은 괜찮은 편이긴 한데, 또다시 와서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가게는 아니었다. 그냥 주위에 있으니까, 가끔 생각나면, 혹은 지나가다가 충동적으로 한 번 들릴 정도의, 평범한 가게였다. 그리고 그런 가게에 들어와 있는 손님은 단유네와 또 다른 한 사람. 점심을 먹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니, 가게에 손님이 많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건너 테이블에 홀로 앉은 손님은 상미처럼 전날 기분 좋게 한잔하고 난 뒤, 숙취 해소를 이해 일찍 찾아온 것일 수도 있다. 나이도 대략 30대에서 40대 사이로 추정되는데, 입은 옷이나 외형은 단정한 편이었다. 솔직히 지나가다 만나도 너무 흔해서 눈길조차 주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니, 식사 중에 단유네가 있는 테이블을 한 번씩 훔쳐본 것은, 그저 젊은 애들 셋이서 이른 아침부터 해장국을 마시는 모양새가 특이해서일지도 모르고, 상미와 새벽의 만담 같은 대화 소리가 자신의 식사 시간을 방해해서 눈치를 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 먹었어?” 두 사람이 포만감을 느끼며 배를 두드리는 모습을 보고 물었다. “일어나자.” 단유는 두 사람이 일어서기 전에 얼른 계산을 마쳤고, 두 사람이 이런저런 미안함을 드러내기 전에 가게 밖으로 내몰았다. 가게를 나오기 전, 살짝 눈이 마주쳤는데 단유는 ‘시끄러워서 죄송합니다’라고 짧게 말을 건넸다. 사내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뭔데?” “아냐, 아무것도.” 상미가 가게 안을 쳐다보려 하자, 단유가 막았다. “왜?” “괜히 찾아가 쳐다보면 시비 거는 모양새가 되잖아. 진짜 별거 아니었어.” 상미는 고개를 갸웃하며 걸음을 옮겼다. “새벽이 넌 어떡할래?” “저도 가도 돼요?” “비록 금남의 집, 이런 건 아니지만. 처녀 혼자 사는 집에 시커먼 남정네 둘을 들이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거 알지?” “불편하면 전 그냥 가볼게요. 괜히 와서 밥도 얻어먹었는데, 불편 끼치면 제가 죄송해요.” “아냐, 괜찮아.” 상미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을 저었다.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커피 한 잔 마시고 가. 괜찮아.” “괜찮나요?” 새벽은 단유의 눈치를 살폈고,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집주인이 괜찮다는데 뭐 어때.” 집에 돌아와, 작지만 넓은―새벽의 자취방과 비교하면 넓었다―원룸과 마이크가 설치된 컴퓨터를 보며 새벽은 감탄했다. “엄청 깨끗하시네요! 역시 여자 방이란 이런 거군요.” 상미가 쓴웃음을 지으며 찬장에서 커피 믹스를 꺼냈다. “믹스 괜찮지?” “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방송하시는 거네요. 몇 시간이나 하세요?” “대중없어. 10시간을 할 때도 있고, 20시간을 할 때도 있고.” “그렇게 오래요?”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기다리는 동안, 상미는 인터넷 방송에 큰 관심을 보이는 예비 애청자 새벽과 문답을 나눴고, 단유는 컴퓨터를 열고 스캔 된 기록들을 살폈다. 다행히 별문제는 없어 보였다. “상미야, 내가 여기 백신 프로그램 설치해 놨거든. 자동으로 바이러스나 악성 프로그램을 잡아주니까, 절대 지우지 마.” “그거 설치하면 컴퓨터 느려지는 거 아냐?” 컴퓨터 성능에 저하가 오면 방송 송출 퀄리티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상미의 말이었다. “그래도 보안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으니까. 자칫해서 진짜 악성 프로그램에 걸려서 네 컴퓨터 전부 날려버리면 뭐로 보상받을래?” “알았어.” 수긍하는 상미에게 단유가 물었다. “네가 받았다는 쪽지 보여줘." ======================================= [581] 수리 수리 마수리(4) “지금?” 난감해하는 상미의 모습에 새벽이 물었다. “뭔데요?” 상미가 간단하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야기했다. “아니, 그런 놈이 다 있어요?” 말로만 듣던 스토킹, 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말에 새벽이 깜짝 놀랐다. 단유가 말했다. “딱히 네 신상에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면, 같이 봐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 얘도 일단은 서울대에 들어올 만큼 똑똑한 친구니까.” “일단은, 이란 수식어가 붙는군요, 저는.” 뭔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는 듯 가슴을 부여잡는 액션에 단유가 피식 웃었다. 이런 녀석이 ‘아웃사이더’라는 게 이해가 잘 안 될 정도다. 저렇게 넉살도 잘 떠는 녀석이. 그래놓고 자기 입으로 ‘낯을 많이 가리거든요’라고 뻔뻔하게 말한다. 덕분에 상미도 새벽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잠시만.” 상미는 인터넷 방송 사이트를 열고 로그인을 한 후, 자신의 쪽지함을 보여주었다. “생각보다 많네?” “그 사람 말고 다른 사람한테서도 가끔 쪽지가 오니까.” 그 스토커에게서 온 쪽지는 지우고 싶었지만, 그래도 나중에 혹시 필요한 증거가 될지도 몰라서 지우지 않았다고 했다. 새벽이 이를 갈았다. “이런 새끼는 신고해서 콩밥 먹여야 하는 거 아니에요?” “소용없댄다.” 경찰서에 가서 상담했던 이야기를 듣고 새벽은 분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씩씩거렸다. “꼭 일이 터지고 나야 움직일 모양인가 봐요? 무슨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도 아니고.” “스토킹이라는 행위에 대해 경찰들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야.” 단유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네?” “예전이라면 모를까, 요즘은 스토킹이라는 행위가 치명적인 폭력적 수단을 동반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경각심은 높아진 상태야. 경찰들이 다른 나라, 다른 세상에 사는 것도 아니고, 똑같이 이 시대를 살고 있으니 모르지 않는다는 말이야.” “그런데 왜 그래요? 형 말대로면 무슨 조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문제는 우리나라의 법이 그걸 제대로 따르지 못한다는 거지. 경찰은 치안, 안전을 유지하기 위한 국가 시스템이고, 국가의 법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어.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활동할 수 있고, 그 권력을 사용할 수 있지. 말인즉슨, 법이 허용하지 않으면 경찰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뜻이야. 스토킹이 범죄라는 인식에는 동의하지만, 지금 상미가 당한 상황을 스토킹으로 정의하고 피해자로서 상미를 특정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은 경찰이 자의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제지.” 단유는 쪽지를 하나하나 넘기면서 말을 이었다. “해외 유명 연예인의 스토킹으로 인한 피해 사례가 널리 알려지기도 했고, 국내에서도 연예인들 중 스토킹으로 심각한 피해를 본 이들이 나오고 있어서 스토킹이라는 범죄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기는 해. 하지만 여전히 논의 중이라는 문제가 있어.” “그럼, 그냥 손 놓고 있어야 한다는 뜻인가요?” 새벽의 물음에 단유는 짧게 대답했다. “그럴 리가.” “그럼 무슨 방법이 있나요?” 지금 그 방법을 강구하는 중이지.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그런데 형은 이런 걸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그 말에 상미가 새벽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단유는 말이야. 모르는 게 없어.” ‘훗, 애송이’하고 코웃음을 짓는 상미가 어이없어 단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상미한테 이야기 듣고 나서 조금 찾아본 거야.” 하지만 새벽의 말도 크게 틀린 건 아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으로, 일이 터지기 전까지는 공권력의 개입이 있기 어렵다. 법에 명시된 것처럼, ‘공포심이나 불안감을 유발하는’ 메시지를 지속해서 보내는 경우라면 정보통신망 보호법에 의거해서 경찰이 수사에 착수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부분이 너무 광의적으로 해석될 우려가 있어 도리어 경찰들이 수사를 적극적으로 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따지고 보면 문제다. 공포심과 불안감을 유발하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받게 되는 순간, 피해자가 받을 심리적 고통과 충격은 어떻게 보상받을 것인가? 때문에 어제 새벽부터 지금까지, 다소 편집증적으로 보일 만큼 주변을 샅샅이 살피고 경계했던 참이다. 상미에게 그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길 바라니까. 솔직히 말해서 상미가 쪽지와 캡쳐해 둔 대화들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스토킹이라고 100% 확신하지 않은 상태였다. 상미가 예민하게 반응한 것일 수도 있고, 도가 지나친 장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모든 가능성은 염두에 두어야 하니까. 그러나 제시된 증거들을 종합하여 추론하면, 상대는 분명 상미에게 비정상적 집착을 보였다. “방송 때마다 나타나?” “응. 그리고 자기가 보고 있다는 걸 티 내려고 후원금을 보내는데, 시스템상 후원금을 환불 할 수도 없어.” 마음 같아서는 지금까지 받은 후원금을 모두 돌려주고 싶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관심을 끊어달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려면 그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서, 개인 거래를 해야 한다. “그런데 계속 직접 만나자고만 하니까, 미치겠어.” 어떨 때는 방송을 방해할 정도로 후원금을 보내는데, 인사를 하지 않으면, 사정을 모르는 다른 시청자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서 더 곤란하다는 것이다. “일단은 평상시처럼 방송하도록 해.” “응?”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장은 방법이 없으니까. 그 사람이 너의 얼굴도, 주소도 모르듯이, 나도 그 사람을 알지 못하잖아.” “방송 키면 그 사람이 또 올 텐데?” “그때는 내가 나설게.” “어떻게?” “그건 신경 쓰지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단유의 말이니 일단은 믿겠노라 대답한 상미는 ‘그래도 지금 말고, 나중에 할게’라고 말을 이었다. “숙취 때문에 컨디션이 안 오르네.” 그새 커피를 모두 비운 새벽이 호기심에 물었다. “근데 누나는 주로 어떤 게임 하세요?” 어제 이야기할 때는 게임을 주제로 한 인터넷 방송을 한다는 이야기만 했었지, 정확히 어떤 게임을 하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배틀 로얄 시스템 게임인데, 요즘 많이 하잖아?” “아, 그거요. 저도 한 번 해봤어요.”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한 번 어울리면서 해 봤다는 새벽은 상미의 랭킹을 물었고, 상미는 직접 랭킹 페이지를 열람해서 보여주었다. “이 정도면 잘하시는 거죠?”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못하진 않지.” “게임 잘하는 특별한 방법 같은 게 있어요?” “솔직히 나는 노력파라서 그냥 많이 하다 보니까 실력이 는 거 같애. 오히려 저쪽이 재능 낭비류지.” 상미의 눈 흘김에 새벽의 시선이 단유에게로 향했다. “처음에는 마우스로 에임 잡는 것도 어설프게 하더니만, 어느 순간부터 곧잘 하기 시작하더니 장거리 저격전에서는 아주 이거야.” 눈에 힘을 주고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며 입꼬리를 올리는 상미의 모습에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게임 이야기만 나오면 그저 홀랑 정신이 나가지.” “아, 그럴 게 아니라 말 나온 김에 같이 할까?” “컴퓨터 하나뿐이잖아요.” “요 앞에 피시방 있어. 시설이 좋아서 가끔 가는 곳이야.” “너 컨디션 안 좋다며?” “그러니까, 거기서 손 풀면서 컨디션 좀 올리려고. 컨디션 올라오면 그때 방송해서 샤샤 삭 하면 시청자들이 우와와 하는 거지.” 상미의 좋은 점은 나쁜 일에 매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분 나쁘게 하는 말, 상황들이 있어도 훌훌 털어버리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그런 의지가 좋은 멘탈을 만들고 상미의 표정을 밝게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명수의 여자 친구답다. ****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은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들고 있던 술잔을 보다, 꿀꺽 들이켰다. “크. …많이 힘들었겠다. 상미.” “네. 원래 그런 거 잘 내색하는 편도 아니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온 터라 쉽게 말하기 힘들었던 모양이에요.” “그렇겠지. 부모님 귀에 들어가면 당장 들어오라고 말 나올 테니까.” 세상엔 정신병자들이 너무나 많아, 라고 읊조리는 하은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하은은 단유의 손에서 병을 건네받아 단유에게도 한 잔 따랐다. “경찰은?” “낮에 가서 문의를 해 봤는데요, 직접적인 해를 가한 정황도 없고, 스토킹이라고 부를만한 조건인지도 불확실하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류의 민원이 하루에도 몇 건씩 계속 나온대요. 그런데 대부분 스토킹이라기보다는 장난이 지나친 경우로 해석되고 실제로 해당 가해자를 붙잡아도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는 식으로 나와서 어지간하면 합의를 보는 수준에서 그친다고 하더라고요.” “그것도 그렇겠네.” “경찰의 출동, 수사도 비용이니까요.” 현대 사회에서 어느 기관, 어느 소속을 막론하고 비용 절감은 필수다. 국민의 안전을 보장해야 하는 경찰마저 비용을 계산하고 움직여야 하는 단체가 되어버렸고, 위급 상황 시 출동해야 하는 소방서마저 비용의 문제로 늘 골머리를 앓는다고 한다. “현실의 문제를 그들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죠.” “넌 너무 이성적인 거 같애. 이럴 때는 상미 편도 들어주고, 경찰 욕도 하고, 응? 그래 줘야 하는 거 아냐?”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상미랑 있을 때는 그렇게 해줬겠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 “넌 정말 변하질 않는구나.” “아무튼요. 그래서 생각한 건데요.” “음.” “우리도 이사하는 게 어떨까요?” 뜻밖의 말에 하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사?” “상미네 집을 둘러보다가 생각했던 건데요. 여자 혼자 사는 집인데, 주위 환경이 썩 좋은 편은 아닌 거 같더라고요. 그럴 일은 거의 없겠지만, 혹시나 변태 같은 사람들이 흑심을 품으면 위험할 수도 있을 거 같고요.” “잘 이해가 안 가는 게, 상미가 사는 집이 안 좋은 거랑 우리가 이사 가는 거랑 무슨 관계가 있어?” “평소에는 잘 생각하지 않던 거였는데, 오늘 상미 집을 보고 나니까 지금 우리 집도 썩 치안에 좋은 집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파트도 오래되었고, 생활 안전이란 측면에서 조금 취약한 점이 보인달까? 게다가 선생님 혼자 이 집에 머무르는 시간도 많은데, 안심이 잘 안 되고요.” “에이, 난 괜찮아.” “제가 안 괜찮아요. 선생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저도 그렇고 명수도 참기 힘들 거예요.” “이제 완전히 자리 잡았는데, 다시 또 이사를 가자고? 됐어. 우린 이 정도로 만족해도 돼. 그리고 요즘 집값이 얼마나 올랐는데? 이사 힘들어.” “저 돈 많아요.” “됐네요. 네 돈으로 이사 가면 누가 좋아라 할 것 같아?” 단유가 번역해서 버는 돈을 대충 아는데, 지금까지 한 푼도 안 쓰고 모았다고 해도 넉넉하진 않을 것이다. 설령 돈이 된다고 해도, 그 돈은 향후에 단유 본인이 필요할 때 쓰는 게 좋다. “돈 있다고 막 쓰는 거 안 좋아. 아껴.” “선생님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정도로 많아요.” “너 얼마 전에 인세 받았다더니, 꽤 되나 보네? 그래도 함부로 쓰지 마. 나중에 너 장가가고 나서 독립할 때나 써. …아, 그러고 보니 이 집이 네 거였지? 내가 돈을 아껴 써야겠네. 에이, 참. 돈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야, 너 돈 많이 벌었으니까 오늘 술값은 네가 내라.” “네, 제가 낼게요. 내는데 이사도 가요. 그리고 가는 김에 상미도 같이 살고.” “상미도?” “네.” “그건 너무 오지랖 아니니? 만약에, 진짜로 명수랑 상미랑 헤어지면 어쩌려고? 에이, 그건 아니다. 남녀 사이 모르는 거라고, 헤어진 뒤에 상미가 같이 지내고 싶겠니?” “물론 그런 일은 없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상미도 같이 지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선생님이랑 상미랑 같이 지내면 조금 안심이 될 거 같기도 하고. 그리고 상미가 돈을 많이 벌어서 독립을 하겠다고 하면, 그때 나갈 수 있게 해줘도 되고요.” “뭐야, 그럼 집에 세를 놓겠다고? 자취방처럼? 상미를 자취생으로 들이겠다고?” “자취는 아니지만, 나가고 싶을 때 나갈 수 있게 해준다는 거죠. 들어올 땐 마음대로. 나갈 때도 마음대로.” “자원봉사자도 아니고…. 그래, 뭐 다 좋다 쳐. 그런데 상미가 들어온 대니? 상미한테 물어봤어?” “좋은 핑계가 생겼으니까요.” **** “너 방송 계속한다고 했지?” “응.” “그럼 내가 투자 좀 해도 될까?” “투자?” 상미가 놀란 눈으로 단유를 돌아보았다. ======================================= [582] 수리 수리 마수리(5) 화요일 오후, 느지막이 일어난 상미는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창가로 향했다. 무심코 커튼을 걷으려다 단유가 당부한 내용이 생각나 멈칫했다. 암막 커튼은 그대로 두고, 창문만 살짝 열었더니 커튼이 바람에 살짝 나풀거렸다. 하지만 무거운 커튼을 젖힐 정도는 되지 못했다. 정신을 차릴 겸 욕실로 가서 세수를 하고 나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고등학교 때 잠시 캠을 켜고 한 적이 있었는데, 외모에 대한 이야기들이 너무 많이 나와서 게임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칭찬하는 글들이라 듣기 좋을지는 몰라도, 그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의 게임에 집중을 잘 하지 않는 것 같아 일부러 캠을 치웠다. 가끔 인터넷에서 당시의 방송 영상을 캡쳐한 이미지가 보이긴 했는데, 지금과 비교하면 조악한 화질의 영상이라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무시했다. 그러나 이제는 나름 게임 실력도 인정받는 분위기고, 새로이 자신의 방송을 구독하는 시청자들의 요구도 꾸준히 늘고 있어 캠을 다시 설치할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스토커의 등장으로 그 결정은 무기한 보류되었고, 상미는 그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는 그냥 지금까지처럼 게임 방송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솔직히 캠을 켜고 방송하는 게 수익 면에서 도움이 되기는 한데, 그렇다고 위험을 노출한 채로 방송하고 싶진 않았다. 방송을 시작하기 전, 인터넷으로 새로운 방송 장비나 다른 생필품들을 알아보던 중이었는데, 인터폰이 울렸다. “누구세요.” “나.” “아이 씨. 깜짝 놀랐잖아. 비밀번호도 알면서 왜 그래?” “집주인 허락 없이 마음대로 들어가면 안 되지.” “괜찮아. 그냥 내 집이다 생각하고 들어와.” “됐고, 그냥 문이나 열어줘.” 잠시 후, 단유가 들어오더니 바로 창문을 닫았다. 나풀거리던 커튼이 생명을 잃고 축 처졌다. “답답한데.” “당분간은 창문 열지 마라니까.” “정말 그놈의 스토커 때문에 제대로 살 수가 없네.” 구시렁대던 상미가 슬쩍 시선을 돌려 물었다. “그냥 확 만나서 단도리 칠까?” “만만한 사람이 아닐 거야.” 애초에 스토킹이라는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 자체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뜻이지만, 고액의 후원금을 꾸준히 보낸다는 점에서 두 가지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 첫째, 정말로 돈이 많거나, 둘째.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돈을 마련해서 너에게 쓰고 있거나.” “범죄?” “그렇지.” 어떤 식으로든 얽히지 않는 게 좋다. 그래서 후원금을 정산해도 쓰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 그 돈으로 피해를 봤다면 바로 돌려줄 수 있도록 하려고 말이다. “너 방송 계속한다고 했지?” 스토커, 라는 놈이 저질렀을지도 모를 범죄의 목록을 머릿속에 떠올려보던 상미는 단유의 물음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응.” “그럼 내가 투자 좀 해도 될까?” “투자?” 상미가 놀라서 단유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무슨 투자?” “알아보니까, 요즘 인터넷 방송하는 사람들도 무슨 매니지먼트사에 들어가서 관리를 받는다며?” 상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유명 매니지먼트로부터 이야기가 들어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쪽과 관련하여 정보도 부족했거니와 무슨 매니지먼트의 관리를 받으며 방송을 할 정도는 아니라는 소심함 때문에 계약을 맺지 않은 상황이었다. “매니지먼트와 관리를 하더라도 일정이나 혹은 유튜브 영상 관리 정도에서 도움을 받을 뿐, 특별히 시설 지원을 받거나 하는 건 아니랬어.” 더구나 지금과 같은 상황처럼, 법적인 지원을 받을 문제가 생겼을 때 매니지먼트에서 법무팀을 동원한다거나 하는 점은 없다. 채팅창에 악의적인 글이 올라온다 하더라도 대응의 책임을 지는 것은 방송인에게 있는 것이다. 대신 아는 변호사가 없다면, 소개는 해주겠단다. “나도 대충은 알아봤어. 그런데 내가 하려는 건, 어쩌면 니가 방송에서 후원을 받는 거랑 비슷할 거야.” “무슨?” “방송을 하기에 충분한 환경을 조성하는데도 비용이 들 거 아냐? 그 비용을 내가 부담해주겠다는 거지.” “왜?” “친구니까.” “그건 말이 안 돼. 비록 내가 너랑 명수를 나의 가장 친구로 생각하고 있고, 너희 역시 날 그렇게 생각해 주는 건 알지만 말이야. 그래도 단지 친구란 이유로 그런 돈을 아무런 대가 없이 받는 건 아니라고 봐.” “너 방송할 때 후원받잖아?” “그거랑은 다르지. 그 사람들은 내가 만든 콘텐츠를 보고 즐겨주는걸.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달라는 의미에서 주는 것이니까, 고맙게 받을 수 있어. 하지만 넌 내 방송을 보는 것도 아니고, 그냥, 동정심에 주겠다는 거잖아?” “동정심?” “아냐? 여기, 이렇게 좁은 원룸에서, 커튼도 마음대로 걷질 못하는 환경에서, 여자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까, 불쌍해서 그러는 거잖아. 너 돈 잘 버는 거 나도 명수한테 대충 들었어. 그렇다고 해서 너한테서 아무런 이유 없이, 아니 친구라는 같잖은 핑계로 돈 받는 거? 나 싫어.” “부담스러워?” “당연하지! 반대로 생각해봐. 네가 돈을 안 벌고 있다는 가정에서, 네가 서울대를 다니고 있다지만, 그래도 대학 생활하는데 돈이 들 거 아냐? 그런데, 내가 그래도 방송 좀 하고, 그 방송으로 수익을 조금 거두는 형편이니까, 너한테 ‘친구니까’ 대학 생활하는데 보탬이 되라며 돈을 주면, 넌 넙죽 받을 수 있겠어?” “못 받지.” “그래! 그거야.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너한테 그런 이유 없는 돈을 받을 수 있어?” “일단 오해는 풀고 보자.” “무슨 오해?” “첫째, 내가 동정 때문에 너한테 투자를 하겠다는 거 아냐. ‘후원’에 빗대긴 했지만, 그래도 ‘투자’야. 말인즉슨, 이 투자로 인해서 너에게 원하는 게 있다는 뜻이지.” “그게 뭔데?” “니가 행복하게 지내는 거.” “…….” “니가 말한 대로 넌 내 친구야. 알다시피 난 굉장히 교우 관계가 좁은 편이고, 그 이유는 내가 사교성이 별로 없는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내가 속을 털어 넣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탓이야. 바꿔 말하면, 너랑 지태, 채윤이 같은 친구들은 내가 평생을 믿을 수 있는 친구란 말이기도 해. 그런 친구를 위해서 내가, 너희의 행복을 위해 몇 푼 안 되는 돈을 쓸 수 있다면, 충분히 할 만한 투자 아닌가? 너희가 행복해서, 그래서 늘 웃을 수 있다면, 그런 친구를 둔 나도 기분이 좋으니까.” “…….” “그 점은 이해했으리라 보고, 두 번째 이유를 설명할게. 두 번째는 너에게 없는 돈을 털어서 투자하려는 것처럼 보일는지 모르겠는데, 나 니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돈 많아.” “방금 대사는 무슨 졸부가 하는 말 같다?” “졸부 맞아.” “로또라도 맞았어?” “아니, 그런데 그 정도로 돈이 많긴 해.” “어떻게?” “그건 비밀. 아직 명수도 모르고, 선생님도 잘 모르는 일이니까.” “뭐야?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하잖아?” “친구라고 해도 말할 수 없는 비밀 정도는 있잖아? 그렇게 알아 둬. 아무튼, 그래서 너한테 투자하려는 건 나한테 아무런 부담이 되지 않으니까, 너도 그냥 가볍게 받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뭔데?” “이사 가자.” 단유는 하은에게 말했던 내용을 상미에게도 설명했다. “우리나라 치안이 다른 나라에 비해 좋다지만, 그래도 완전히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게다가 너한테 벌어진 문제를 생각하면, 이런 곳에서 널 혼자 두는 건 아닌 거 같다. 그리고 우리 집도 마찬가지고. 명수나 나나 밖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선생님이 혼자 집에 있을 때가 많은데, 지금 생각해보니 좀 불안한 게 사실이야. 그래서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조금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고 싶어. 가는 김에 너도 같이 들어와서 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 거야.” 하은의 말 상대도 되어주면 좋고, 휴식일에 집으로 찾아오는 명수가 있으니 만나기 쉽고, 특히 서로의 고민을 나누기 편한 친구들이 한집에 사는 건. “명수의 로망이기도 했고.” “뭐야, 그게. 유치하게.”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렇게 나쁠 거 같진 않아. 알잖아? 나나 명수나 가족 없이 외롭게 자란 거.” “…그래.” 그렇게 상미를 설득했다. “근데 말이야, 진짜 너 돈 많아?” “응.” “얼마나?” “그냥 사는 데 무리 없을 정도?” “그건 너무 주관적이지 않아? 어떤 사람은 한 달에 100만 원으로 살면서도 무리가 없다고 여길 수 있고, 어떤 사람은 1,000만 원으로도 모자란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 “사는 데 무리가 없다는 말은, 무엇을 사려고 마음먹더라도 돈이 모자라서 못 사지 않는다는 말이었어.” “응?” “Life 아니고 Buy. OK?” “…재수 없어.” **** 마지막으로 단유는 명수에게 갔다. 명수가 시즌 중에 머무르는 숙소로 가서 불러냈다. “들었어, 상미한테.” “상미가 뭐라고 하든?” “니가 돈 지랄했다던데?” 단유는 훗, 하고 코웃음을 쳤다. “틀린 말은 아니네. 여튼, 상미나 선생님 문제도 있지만, 집은 좀 안전하고 안락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 그건 나도 동감이야.” “그래서 좀 괜찮은 집으로 이사를 가려는데, 괜찮지?” “솔직히 말해줘?” “응.” “내 꿈이야.” 모두가 다 함께 웃으며 지내는 집. 아침부터 저녁까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함께 오순도순 지내며 살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지.” “나도.” “돈 좀 보태줄까?” “그럴래?” 단유의 표정을 보니, 말과 달리 받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도대체 뭐해서 돈 번 거야?” “돈 버는 거 별로 어렵지 않더라.” “우와, 너 방금 되게 재수 없었어.” “상미도 그러더라.” “뭔데?” “돈으로 돈을 버는 거지.” “응?” “주식 좀 했어.” “헐.” 주식하면 쫄딱 망해서 한강 다리로 간다는 이야기만 들어왔던 명수는 단유의 말에 걱정이 먼저 들었다. “계속할 건 아니지?” “왜? 걱정돼서?” “당연하지! 우리 팀 선배들 중에서도 주식 하다 돈 날린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더라. 다들 나보고 주식 하지 말고 그냥 안전하게 은행에 돈 넣어두는 게 제일이래.” “틀린 말은 아니지.” “언제 했는데?” “여행 다닐 때?” “…언젠가는 내가 날 잡아서 네 여행 이야기 좀 자세히 들어야겠다.” “별거 없는데.” “시간이 별로 없어서 오래 이야기는 못 하겠다. 아무튼,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듣기로 하고. 집은 니가 알아보고 살 거지?” “그럴게.” “진짜 필요 없어?” “응. 괜찮아.” “일단 알았어. 너, 이번 시즌 끝나고 좀 진지하게 이야기 좀 하자. 그동안 우리 너무 이야기가 없었어.” “그래. 알았어. 몸조심하고. 어디 아픈 데는 없지?” “지난번에 건강 검진할 때 이상 없다고 하더라.” “혹시라도 몸이 안 좋으면 말해.” “그걸 왜 너한테 말해? 팀 닥터한테 말해야지.” “누구한테든. 넌 몸이 전부니까.” “그렇게 강조하지 않아도 돼.” 명수는 손을 흔들며 뒤돌아섰다. “후.” 일단 설명을 해야 할 사람들에게는 다 했다. 약간의 속임수도 있고, 과장도 했지만, 어쨌든 원하는 데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내 마음대로 돈 쓰는 것도 어렵네.’ 비록 가장 친한 친구이지만, 명수에게도 자신이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설명하는 것은 꽤 곤란한 문제였다. ‘주식’이라고 둘러대긴 했는데, ‘주식’만으로 돈을 번 것은 아니었다. ‘주식’을 한 것은 맞으니 거짓말도 아니었지만. 돌이켜보니 짧은 기간에 꽤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예전부터 생각해왔던 계획을 실행에 옮긴 단유는, ‘보석’을 만들어 거의 뿌리다시피 했다. 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판매할 경우, 혹시라도 시선이 집중될 우려가 있다고 여겨, 여러 곳을 돌며 보석을 판매했다. 단유가 만든 보석은 순도가 매우 높고 흠결이 없는 제품이었다. 당연히 인기가 높고 가치를 대우받았다. 보석을 팔아 돈을 번 뒤, 단유는 시험적으로 주식을 해보았다. 그리고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꽤 많이 좋았다. 덕분에 허세를 떨어도 충분할 만큼의 재산이 모였다. 그리고 이제, 싱가포르의 한 은행에 잠들어있는 그 재산을 국내로 들여올 때가 되었다. ======================================= [583] 수리 수리 마수리(6) 이것저것 할 일들이 생겼지만, 일상을 미루고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학교도 다녀야 하고, 번역일도 해야 했다. 일반인들은 결코 알 수 없는, ‘마법’이란 힘을 지녔지만, 몸을 두 개로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 효율을 위해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다. ‘우선.’ 집부터 청소하자. 이사를 갈 예정이라고 해서 집 안의 청결 상태를 무시할 순 없는 법이다. 요 며칠 바쁘다고 일주일마다 하던 대청소를 건너뛰었더니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이렇게 많이 보인다. ‘환상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마법으로 청소하는 방법이 있다면 좋으려만.’ ‘클린’이라는 단순한 시동어만 외우면 집 안이 깨끗해진다거나, 못생겼지만 일 잘하는 도깨비를 고용해서 집 안 청소를 맡겨 놓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단유의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나마 바람 마법이라도 이용할 수 있어서, 진공청소기가 닿지 않는 부분까지 먼지를 빨아들여 청소할 수 있다는 점만이 유용했다. 집 안 청소를 끝내고 나니 학교에 갈 시간이 되었다. 대학이 고등학교보다 좋은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학교 갈 시간을 자신이 정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정해진 강의 시간은 있지만, 그래도 여유롭게 통학 시간을 정해서 갈 수 있으니 좋았다. ‘여기에 차가 있다면 더 좋을지도?’ 자전거를 타기엔 학교까지 가는 길이 멀고 험했다. 그렇다고 타지도 않는 것을 집에 계속 두기도 그렇다. ‘새벽이한테 주면 괜찮으려나?’ 새벽은 학교 근처에 자취방이 있으니, 자전거가 있다면 통학하기 좋을지도 모르겠다. 역시 문제는 자전거를 건네주는 방법이다. 학교까지 끌고 가기가 힘들어 타지 않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 새벽에게 전달할까? 이럴 때, 어느 게임에서처럼 아무 곳에서나 인벤토리 같은 기능이 있다면 편리할 거 같기도 하다. 아니면 어느 소설에처럼 아공간 같은 능력이 있다면, 그래서 아무거나 막 집어넣고 다니다가 필요할 때 빼 쓸 수 있다면, 세상의 유통구조는 대격변을 치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단유의 마법은 그런 능력이 없다. 어쩌면 나중에, 단유의 마법 실력이 향상되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공간’과 ‘차원’에 대한 이론적 기반을 쌓고, 거기에 마법적 창의성만 쌓인다면 말이다. 하지만, 불가능에 가깝다. 평생을 두고 공부를 해도 ‘공간’과 ‘차원’에 대한 지식은 충분히 쌓기 힘들 것 같았다. 대학에서 공부하면 할수록, 지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한계는 선명해지고, 자신감은 떨어진다. 아인슈타인이 다시 태어난다면 가능할까? 아쉽지만, 단유는 아인슈타인이 아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자전거를 어떻게 새벽에게 줘야 하나. ―어, 형. “어디야?” ―집이죠. 형은요? “어, 혹시 너 자전거 필요하니?” ―자전거요? 어…있으면 좋죠. 왜요? “집에 남는 자전거가 있어서. 필요하면 줄까 하고.” ―정말요? “대신 네가 와서 가져가야 돼.” 자전거를 무상으로 양도하는데, 이 정도 수고는 본인이 감당해야지. 단유는 기분 좋게 통화를 마쳤다. **** 학교에서 새벽을 만나 자전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수업이 없고, 여유가 있는 날짜에 단유네 집으로 찾아와서 자전거를 가져가기로 했다. “관리는 잘했으니까, 쓸만할 거야.” “고마워요.” 오늘은 2학점짜리 강의 두 개를 듣는 날이었는데, 두 개가 연달아 있어서 무려 4시간을 이어서 수업을 들어야 했다. “배 좀 채우고 가자.” “네. 대신 오늘은 제가 살게요.” “그래.” 새벽은 단유의 소개로 번역 아르바이트를 맡게 되었다. 번역할 것은 기계 설비의 안내 책자를 번역하는 것이었는데, 양이 많지 않아 보통 번역 아르바이트들이 도맡아 하는 것들이었다. 장당 금액을 산정해서 아르바이트 비를 받는데, 양이 많지 않아 큰 금액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더욱이 번역 아르바이트가 재택 아르바이트의 성격이 강해, 하려는 사람이 많다 보니 일감이 많지 않고 수당도 많지 않았다. “형처럼 책을 번역하는 게 아니면, 큰 수익은 바라기 어렵더라고요.” “그럴 거라고 하더라. 그래서 보통은 다른 일들을 하면서 부수입으로 번역 아르바이트를 한다던데.” “네. 저도 그래야 할 거 같아요.” 과외 자리는 계속 알아보는 중인데, 쉽게 찾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서울대생이라고 해도, 낯선 사람에게 과외를 맡기는 경우가 적다는 이야기였다. “과외도 인맥이 없으면 안 되나 봐요.” 부모님한테 손 벌리는 행동을 부끄러워하는 건 아니지만, 모처럼 부모님의 그늘에서 벗어난 마당에 자기 힘으로 서울 생활을 이어나가고 싶다는 새벽의 결심은 칭찬할 만 했다. 하지만 칭찬 이상의 도움은 단유로서도 방법이 없다. “열심히 해.” 그냥 응원하는 수밖에. 5월쯤 되니, 이제 학사 내에서 눈에 익은 인물들이 많이 늘었다. 수업을 들으러 가던 중에 지나다 만나기도 하고, 오후 수업을 끝내고 식사를 하다가 또는 동기들의 손에 이끌려 술자리에 갔다가 만나기도 하게 된다. 마주 오는 마른 인상의 선배 둘도 그렇게 얼굴을 익혔다. “너희 수업 다 끝났냐?” ‘너희’라는 표현에 새벽이 얼른 대답했다. “네, 선배. 어디 가세요?” “우리 피시방 간다. 같이 갈래?” 서울대 다니는 학생들이라고 24시간 공부만 하지도 않을뿐더러, 남들 즐기는 건 똑같이 즐긴다. 게임도 좋아하고, 술도 좋아하고, 술 마시고 피시방 가서 밤새고 학교 와서 조는 일들도 종종 볼 수 있다. 마침 수업도 끝난 참이라 새벽은 마음이 동했다. 앞으로 3년, 아니 군대까지 고려하면 그 이상도 얼굴을 맞대고 지낼 선배들이다. 아, 어쩌면 졸업 후에도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본인이 아웃사이더임을 자처하더라도, 선배, 동기들이 아는 척을 하는데 무시할 순 없다. “형 같이 가실래요?” 단유에게 물었더니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난, 개인적으로 볼 일이 있어서 가봐야 돼.” “아, 그래요?” 새벽은 아쉽다는 눈으로 단유를 바라봤고, 선배―라고 하지만, 단유보다 어리거나 동갑이다―들은 어정쩡한 시선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사실 재수생이나 삼수생들이 들어오면 나이 때문에 관계가 애매해지곤 한다. 어느 유명 체육대학처럼 선후배 관계를 엄격히 지키며 군기 잡는 유형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느슨한 것만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에 같이 하죠.” 단유는 예의를 갖춰 말했고, 두 선배는 가벼운 손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단유가 떠난 뒤, 선배들과 새벽은 후문으로 향했다. “중간고사는 잘 봤어?” 선배 중 한 명이 물었다. 딱히 할 말이 없어 물어보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새벽은 성의껏 대답했다. “네.” 잘 봤으니까. 특히 단유와 함께 듣는 수업의 경우에는 단유의 족집게 강의가 도움이 많이 되었다. “고등학교 때랑 많이 다르지?” “네. 아직도 적응 중인 거 같아요.” “어려운 거 있으면 뭐든 물어봐. 후배 무시하는 선배는 없을 테니까.” “네.” “아, 너 실험1 언제 들어? 월요일?” 물리학 실험은 좋은 조원들이 도와줄수록 점수 따기 좋다. 좋은 조원들이란 일반적으로 경험이 많은 선배들을 말한다. “화요일이요.” “아, 그렇구나. 같은 수업이면 많이 도와줄 건데.” “다음 학기 때 많이 도와주세요.” “그래.” 별 의미 없는 대화가 지나고, 새벽은 괜히 따라가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단유와 함께 있을 때는 어떤 대화를 해도 배울 게 있고, 느끼는 게 있었는데 이 선배들과 함께하니 알맹이 없는 대화만 길어지는 기분이다. 선배들도 그런 생각이었는지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중이고. “아, 너 게임은 좀 하냐?” “조금요.” “우리 배틀로얄 할 건데, 할 줄 알아?” “네. 잘하지는 못하지만 조금 할 줄 압니다.” “잘됐네. 그럼 한 사람만 더 구해서 가자.” “없으면 삼쿼드?” 새벽은 단유의 부재를 아쉬워하며 선배의 뒤를 따랐다. 한편, 단유는 학교를 나와 강남으로 향했다. “여, 어서 와라.” “안녕하세요.” “볼수록 얼굴이 좋아지네. 공부 열심히 하는 거 맞아?” “공부도 하고, 먹기도 잘 먹고 그렇죠.” “역시.”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 앉도록 권유한 상곤은 준비한 책들을 단유에게 건넸다. 단유는 짧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말을 꺼냈다. “그런데 여쭤볼 게 있는데요.” “뭐?” “혹시 아시는 PB분 계신가요?” “PB? 왜? 아, 이제 너도 돈 좀 벌었으니까, 관리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야?” “그런 것도 있고요. 그냥 아무 은행에나 가서 상담해 볼까 하다가 이왕이면 잘 아는 분께 소개받는 게 더 좋을 거 같아서요.” 상곤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글쎄? 나도 무슨 PB를 만나서 자산 운용할 정도는 안 되고 해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네. 건너건너 물으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가요?” “아, 잠시만. 우리 대표님한테 물으면 아실지도 모르겠네. 한 번 물어봐 줄까?” “네, 그렇게 해주세요.” “잠시만 기다려봐.” 상곤이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상곤과 단유는 대표실로 이동했다. “오랜만에 보네?” “안녕하세요.” “늘 유 팀장이랑만 이야기하다 가니까, 얼굴 보기가 어려워?” “앞으로는 들릴 때 인사드릴게요.” “아냐, 그냥 웃자고 한 이야긴데 뭘.” 너털웃음을 짓는 듬직한 외형의 대표는 곧 단유의 이야기를 듣고 한 사람을 추천했다. “역시 똑똑한 친구라 그런지 돈 관리를 제대로 할 줄 아는구먼. 목돈 생겼다고 이것저것 과소비하는 젊은 애들에 비하면 확실히 달라.” “감사합니다.” “잠시만 기다려봐.” 대표는 전화를 건 뒤 이야기를 나누다, 단유에게 물었다. “오늘 시간 돼?” “저는 괜찮습니다.” “이 친구가 오늘 괜찮다는데? 오랜만에 저녁 같이 하는 건 어때? 시간 괜찮아? 아, 그래? 알았어. 그럼 거기서 보자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품에 집어넣은 대표가 말했다. “내 그동안 자네한테 밥 한 끼 제대로 사준 적 없어 마음에 걸렸는데, 이참에 같이 식사나 하자고. 밥 먹으면서 인사 나누면 더 좋을 거야.” “고맙습니다.” “고맙긴. 우리 회사에서 자네 역할이 얼마나 컸는데. 이번에 베스트셀러 건도 솔직히 자네가 워낙 빠르게 작업을 마쳐준 탓에 시기에 맞출 수 있었던 거라고. 자네 공이 커.” 이어지는 공치사에 아무리 단유라도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 “여기는 김단유군. 우리 회사에서 번역 일을 하지.” “반갑습니다.” “여기는 공택윤. 모르긴 몰라도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실력의 자산 운용가.” “칭찬이 과하십니다, 사장님.” “내가 아는 사람들은 다들 자네가 최고라 하니, 그런 줄 아는 거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보기 좋은 미소를 짓는 40대 초반의 사내는 짙은 청색 정장에 단정하게 빗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공택윤이라고 합니다.” “말씀 낮추시죠. 제가 한참 어립니다.” “천천히 낮추도록 하죠. 그리고 어쩌면 제 고객이 될 수도 있으니 실례는 하지 말아야죠.” “허허, 역시 매너가 몸에 밴 사람이야.” 대표의 너털웃음이 실내를 가득 메우는 중에 문이 열리며 식사가 들어왔다. “모처럼 자리를 냈으니, 마음껏 먹으라고. 일 이야기는 나중에 둘이 따로 하도록 하고.” “네.” 식사 자리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꽤 괜찮은 편이었다. 호탕함을 주무기로 삼은 대표는 단유를 편안하게 배려했고, 공택윤이라는 사람은 겸손했지만 입담이 좋았다. 그래서 낯선 자리임에도 단유는 여유롭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공택윤이라는 사람에 대해 관찰의 시선을 떼지 않았다. ======================================= [584] 수리 수리 마수리(7) “오늘 사장님 덕분에 식사 잘했습니다.” “뭐, 이 정도를 가지고. 그리고 오늘의 식사는 다 이 친구 때문이니까 내 얼굴 봐서라도 잘 대해줘.” “당연하죠. 저보다 나이 어리다고 사람 함부로 하는, 그런 사람 아닌 거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그래. 그럼 다음에 또 보자고. 단유군도 조심해서 잘 들어가고.” “오늘 고맙습니다, 대표님.” 대표는 단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뒤 자리를 먼저 떠났다. 그렇게 배웅한 뒤, 택윤이 단유를 보며 물었다. “괜찮으면, 커피라도 한잔할까요?” “네.” 커피숍에 갈 줄 알았는데, 택윤은 단유를 데리고 어느 빌딩으로 들어갔다. 바로 택윤이 운영하는 PB센터였다. 불을 켜 실내를 밝히고 창가의 블라인드를 걷었더니, 강남의 화려한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잠시 후, 택윤은 직접 커피를 내려서 단유에게 건넸다. “자, 여기요. 자랑은 아니지만, 일반 커피숍에서 마시는 것보다 나을 거예요. 좋은 원두를 쓰거든요.” “감사합니다.” 택윤은 웃으며 앉을 것을 권했다. “아까는 짧게 말했지만, 그래도 제 소개는 제대로 해야 할 거 같네요.” 어느 은행에 입사하여, 몇 년간 근무하고 PB로 일한 지는 몇 년이 되었으며, 어느 정도의 자금을 운용하고 있다는 말로 소개를 마친 택윤은 ‘신뢰와 정직’이 자신의 제 일 원칙이며, 고객이라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최선을 다하려 한다는 말로 PR을 마쳤다. “사실은 단유 군을 만나기 전에 사장님, 아, 제가 그분을 사장님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 의아해하실 수 있는데, 그분이 지금처럼 큰 회사를 만들기 전부터 알고 지냈거든요. 그때 대표님께서 자신은 ‘사장’이라는 호칭이 좋다며 개인적으로 그렇게 불러달라 하셔서 죽 그렇게 부르고 있어요. 아무튼, 그분께 넌지시 귀띔을 들었는데, 이번에 인세로 꽤 큰돈을 받으셨다고요? 그 돈의 관리를 위해 절 만나려 했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그것도 있지만, 따로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요.” 단유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택윤을 마주 보았다. 젊음과 패기는 옅어졌지만, 원숙함과 진중함이 자리 잡은 눈동자를 보며 단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베스트셀러가 된 책의 번역을 맡았다고 들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베스트셀러 순위표 끝자락에 겨우 자리 잡은 것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베스트셀러다. 그만큼 많이 팔렸고, 그래서 번역가로서 인세를 많이 받게 되었다고 들었다. ‘1억? 2억?’ 대표에게 정확히 금액을 듣진 못했지만, 나름 추정은 해볼 수 있었다. 이제 20대 초반인 눈앞의 젊은이에게는 꽤 큰돈이겠지만, 택윤이 관리하는 자금들에 비하면 푼돈이다. 그렇지만 대표가 자랑스러워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의 번역가라면, 앞으로도 꾸준히 수입이 생길 여지가 있는 실력자라면, 고객으로 모셔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 섰다. 그래서 단유가 컴퓨터로 가서 자신의 계좌를 보여주겠다고 했을 때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1분 후, 택윤은 입이 쩍 벌어졌다. “이, 이게 뭐죠?” 바보 같은 질문이었지만, 자신이 그런 질문을 했다는 자각이 들지 않았다. 해외 은행 계좌로 추정되는 그곳에는 생각지도 못한 숫자가 적혀 있었고, 택윤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 겨우 꺼낸 말이 ‘이게 뭐죠’라는 말이었다. “싱가포르 은행에 있는 돈이요.” “그, 그러니까 이게…고객님 자산이란 말씀…이시죠?” ‘단유군’이 ‘고객님’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택윤은 여전히 정신없이 화면만 바라볼 뿐이었다. ‘달러로 4,483만….’ 한화로 약 500억 정도다. 번역으로 이렇게 많이 벌 수 있을 리 없다. 부모님의 증여일까? 그때 단유가 말했다. “이 돈을 국내로 들여오고 싶은데요, 과세라든가 이런저런 문제들이 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 문제를 처리해 주실 수 있나요?” 단유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록 자신이 나름 강남에서 잘 나가는 PB라 해도 단일 자산가로서 자신에게 이 정도 금액을 맡긴 이는 없다. “어, 그게 어떤 식으로 들여오느냐에 따라 비용이 다릅니다.” 비용이란 표현에는 세금도 포함되어 있었다. 해외 자산을 국내로 들여오거나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여러 번 해 보았고, 그래서 방법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 방식이다. 금액이 많지 않다면 그냥 국세청에 신고하고 세금 낼 거 다 내고 정상적으로 반입, 반출을 하면 되지만, 금액이 커서 세금을 많이 내야 한다거나 이중과세 국가와 거래가 되어야 하는 경우에는 보통 편법을 이용한다. 편법은…. “아뇨. 그냥 정상적으로 해주세요. 뒤에 말 나오는 일이 생기면 귀찮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하시면 세금을 많이 내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세금은 조세컨설팅을 받으시는 게 좋겠지만, 간략하게 설명해 드리면 해외 재산의 경우 외국환 거래규정에 따라 국세청에 알려지게 되고, 국세청은 반입된 자금의 출처를 조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사에 따라 소득세 과세대상인 경우 종합소득세를, 증여 재산인 경우 증여세를 과세합니다.” 자산 신고를 해야 하고 동시에 반입자금에 대한 출처를 소명해야 할 의무가 생긴다. “알아요.” 복잡하고 귀찮은 서류 작업과 발품팔이가 이어져야 하는데, 단유는 그 과정에 소요되는 시간과 노력이 아까웠다. 그래서 PB를 찾은 것이고. “돈은 문제가 안 돼요.” 단유는 자신이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귀금속 판매로 인한 사업 수익과 그에 대한 증빙 서류도 이미 구비해 뒀다. 귀금속을 어떻게 취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비밀. 굳이 신고할 필요가 없는 문제다. 그리고 해외 주식 거래를 통한 수익. 택윤은 이야기를 다 들은 후, 잠시 생각을 짚어보다 입을 열었다. “역시 조세컨설팅의 도움을 받는 게 좋겠다는 게 제 개인적인 입장입니다만, 적어도…150억 정도의 세금은 예상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그런가요?” 단유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고민이 많이 되겠지. 한국보다 더 많은 과세를 물리는 나라도 없진 않지만, 한국도 꽤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 버는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100억, 200억의 세금을 내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다들 아깝다고 생각할 것이다. “한 가지만 여쭤볼게요.” “네.” “해외 주식 투자로 인한 매도 차익에 대해 양도소득세만 부과되고 금융 종합소득세는 내지 않아도 되는 거죠?” “그렇죠. 대신 22%의 세금이 부과되는 거죠.” “그렇군요. 그럼 그만큼 벌면 그만이네요.” “네?” “아니에요. 그럼 그냥 진행해 주세요. 그리고 조세컨설팅, 그거 필요하면 받고요, 컨설팅 비용은 나중에 청구해주세요. 세금이랑 그런 것도 알아서 다 처리해 주실 수 있죠?” “네? 네.” “그럼 PB님은 수수료를 얼마나 드려야 하죠?” “어, 그러니까 컨설팅 수수료와 대리업무에 대한 수수료를 각기 따로 계산해서….” 단유는 어렵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30분 전이라면 애가 뭘 잘 몰라서 그러는구나 싶었겠지만, 지금은 그냥 부자의 여유로 보인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오늘 컨설팅 비용은 나중에 일괄 정산해서 내도 되죠?” “…그럼요.” “일단은…한 일주일 정도 뒤에 다시 찾아올게요. 그때 다시 보죠.” “일주일이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일은 그때까지….” “일단 해외 자산 신고는 빨리해야 한다면서요? 그거만 처리해 주시고요, 국내로 들여오는 일은 일주일 뒤에 다시 말씀드려야 할 거 같네요.” “아, 예.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단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택윤도 벌떡 일어나 단유보다 더 깊이 허리를 굽혔다. 허리를 들었을 때는 이미 뒷모습을 보이며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단유였다. “허….”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택윤은 잠시 멍하니 사무실 입구를 바라보았다. 한 모금만 맛보았을 뿐인 커피는 차갑게 식어 있었고, 사무실 바깥으로 요란한 머플러가 뿜어내는 배기음 소리가 지나갔다. 끙, 앓는 소리를 내며 힘겹게 일어나 자신의 책상으로 향한 택윤은 서랍에서 시가와 라이터를 하나 꺼냈다. 강남에 개인 사무실을 오픈한 뒤, 대박이 터지면 하나씩 피우겠노라고 생각하며 모셔놨던 시가였다. 첫 고객을 받았을 때, 개인 통산 수익률 최고점을 찍었을 때 한 번씩 피웠다. 그리고 오늘, 자신이 맡은 고객들 중 단일 자산으로 최고인 고객을 만났다. 정확히는 고객이 되어줄 사람이지만, 아마 큰일만 없다면 자신의 고객이 되어주리라. “후.” 창을 열고 담배 연기를 뿜었다. 화려한 불빛의 강남이 짙은 연기에 가렸다. 택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그는 일주일 뒤 단유가 들고 올 폭탄을 몰랐다. **** 일주일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단유는 조금 무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일주일간 학교를 빠졌다. “역시 돈이 문제야.” 일상의 리듬이 깨진 것은 돈 때문, 이라고 단유는 생각했다. 그래도 앞으로 편하게 지내려면, 그러니까 일상을 지키려면 지금 바짝(?) 벌어놓는 게 편하지 않을까 싶었다. 컴퓨터를 켜고, 트레이딩 프로그램을 실행한 뒤, 옆에는 노트와 펜을 두고 준비했다. 기억해야 할 몇 가지를 노트에 적고, 가끔 암산으로 헷갈리는 것들도 노트에 짤막하게 기록하여 실수하지 않게 주의했다. 몇몇 기업들의 이름과, PER, PBR, PCR, EPS, BPS 등등은 물론이고 단유가 개인적으로 고민해서 만든 여러 가치 평가 기준 수치들을 계산하고 비교하고 선택했다. 주식은 수학을 잘한다고 해서 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정확한 기업분석은 기본이고, 시황에 따른 변화를 잘 캐치해야 한다. 쌀 때 매수해서 비쌀 때 매도한다. 원칙은 간단하다. 간단한 원칙임에도 어려운 것은, 주식의 가격이 언제 오르고 내릴지를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한, 이 원칙은 도박에 가깝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주식은 수학적 원리에 기반한다. 확률과 통계다. 오를 확률이 높은 주식에 투자하고 고점이라 여겨지는 부분을 통계적으로 예측하여 판매하면 된다. 물론, 이 역시 도박이다. 어렸을 적, 하은, 명수와 둘러앉아 포커를 해 본 경험이 전부인 단유였지만, 도박이 어렵진 않았다. 어쨌든 수학적으로 접근하면 된다. 오를 확률이 높은 종목을 선택하고, 수익을 볼 수 있는 구조를 계산하여 베팅, 아니 투자한다. 설령 돈을 잃는다고 해도 아쉽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또 벌면 되기도 하거니와, 결국 확률의 문제이니까 잃는 것도 가능한 경우인데 배신당했다거나 하는 감정을 느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만약 이름난 도박사가 단유의 이런 마음을 알았다면, 멘탈이 좋다고 칭찬했을지도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단유는 그런 도박사를 알지 못했고, 그래서 그런 말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 그런 칭찬을 듣는다고 좋아할 단유도 아니지만 말이다. 일주일 후, 단유는 다시 택윤을 만났고, 다시 계좌를 보여주었다. “어?” 숫자가 늘어났다. 그냥 늘어난 게 아니라 무시무시하게 늘어났다. ‘일주일 만에?’ 택윤의 눈빛에서 어떤 말을 하려는지 읽은 단유가 겸손하게 대답했다. “운이 좋았어요.” 그렇다. 결국 확률에 근거한 투자였고, 그래서 그 확률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면, 그건 단유가 운이 좋았던 때문이다. 단유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택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주식 투자로…일주일 만에 이렇게 벌었다고요?” 택윤은 무릎 꿇고 빌어서라도 그 투자 기법을 배울 수 없냐고 청하고 싶었다. 이성의 끈을 놓았다면, 당장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세금 낼 돈은 충분히 벌었죠?” 세상에. 세금 낼 돈을 벌기 위해 돈을 번다? 이런 경우가 세상 천지에 또 있을까? 택윤은 또 한 번 입을 다물지 못하고, 담담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단유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거 같네요.” 겨우 꺼낸 택윤의 말에 단유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마법은 안 썼어요.” ======================================= [585] 얼마면 돼(1) “여기야?” “응.” “…집 되게 넓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명수의 표정에는 ‘비싸 보이는데?’라는 말이 담겨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비슷했다. “청소하기 힘들겠다.” 하은도 한 마디 꺼냈다. “괜찮아요.” 어차피 청소는 단유가 도맡아 할 거니까. “자기 방 청소만 알아서 해주시면 돼요.” 단유는 특히 상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괜히 찔끔한 상미가 고개를 돌렸다. “주방도 넓어. 지금 내 방보다 넓은 거 같은데?” “집에서 요리하는 사람이 없어서 쓸 사람이 있으려나 모르겠다.” 명수도 숙소 생활을 하고 하은도 늦게 일어나 바로 학원을 나가다 보니 집에서 밥을 먹는 경우가 부쩍 줄어든 상황이었다. 그나마 집에서 시간을 자주 보내던 단유도 대학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니 주방의 가스레인지를 언제 켰는지 모를 정도다. “식탁이 넓으니까 다 같이 모여서 밥 먹으면 좋을 거예요.” 식구가 늘어난다는 것은 기꺼운 일이다. 단유는 그랬다. 하다못해 컵라면을 나눠 먹어도 다 같이 함께한다면 기분 좋은 일이다.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언덕에 지어진 이 집은 2개 층으로 나뉘어, 아래층의 침실 3개와 윗층의 침실 3개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일 넓은 방은 선생님이 쓰실래요?” “음…. 아니 난 작은 방이 좋겠는데.” “왜요?” “청소하다 지칠 거 같아서.” 명수가 나섰다. “난 제일 작은 방. 어차피 자주 오지도 못하는데 큰 방 가져봐야 소용없잖아.” “아니지, 몸 쓰는 직업인데 집에서만큼은 편히 쉬어야지. 그리고 난 이 집에 얹혀사는 몸인데 내가 제일 작은 방을 쓸게.” 세 사람은 어떤 방이 가장 작은 방인지를 가늠하기 위해 1, 2층을 빠르게 돌아다녔다. “나 여기서 길 잃어버리면 어떡해?” 명수의 실없는 소리에 피식 웃어버린 단유는 옆에선 중개사에게 물었다. “바로 들어올 수 있나요?” “그럼요. 계약 즉시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말끔한 정장 차림의 중개사는 공손한 태도로 단유의 질문에 대답했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하죠.” “야, 야! 잠시만!” 2층에 있던 명수가 후다닥 뛰어 내려왔다. 단유의 팔을 붙잡고 끌어당기더니 목소리를 죽이고 물었다. “진짜 이 집 하려고?” “그러려고 온 거잖아. 다른 사람도 마음에 들어 하는 거 같고.” “당연히 마음에야 들지! 아, 죄송해요. 잠시만 이야기 좀 하고요.” “네. 천천히 이야기들 나누세요. 신경 쓰지 마시고요.” 중개사는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저었다. 명수는 눈인사를 보낸 후 다시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 집 얼마야?” “120억.” “헉!” “눈알 튀어나오겠다.” “나 진짜 눈깔 빠질라 그랬어! 아우, 눈 아파. …야, 돈은 있냐?” “응.” “…진짜?” “응.” “…로또 맞았어?” “요즘 로또 맞아도 100억 안 되는 거 몰라?” “몰라.” “어쨌든 로또 아냐.” “그럼?” “여행 다닐 때 돈 벌었다니까.” “아니, 그러니까 무슨 수로 돈을 벌었냐고?” “물건 좀 팔고, 주식도 좀 하고.” “주식? 너 진짜였어? 지난번에 나한테 한 말, 진짜야?” “응. 내가 언제 너한테 거짓말 한 적 있어?” “없지.” “아무튼 이 집 살 돈은 충분해.” “와, 진짜 넌 못 하는 게 없구나. 하다 하다 이제 주식도 해?” “운이 좋았어.” “…잠깐 생각 좀 하자.” 명수는 턱을 붙잡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드문 광경이라 단유는 흥미롭게 ‘생각하는 명수’를 지켜보았다. 의자라도 하나 들고 와서 앉혀 놓고 사진으로 찍어 보관하고 싶은 장면이다. “내가 계약금 받아놓은 거 아직 그대로인 거 알지?” “그래.” “사실은 그걸로 좀 보태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발톱의 때만큼도 안 될 거 같다.” “괜찮아. 넌 그 돈 잘 모아서 너 나중에 장가갈 때나 써.” “넌? 넌 니 돈 이렇게 써도 되고?” “응. 난 돈 많으니까. 말했잖아, 졸부라고.” “그래도 너한테만 부담 주기 싫단 말이야.” “그럼, 여기 가구들 살 때 보태면 되지.” “하아. 그래. …그런데 말이야. 너 돈 얼마나 벌었는데? 아니 지금 얼마나 있는데?” 단유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는 경고를 한 뒤, 조용히 알려주었다. 순간 명수의 무릎이 풀썩 꺾일 뻔했다. “거짓말 같은 거짓말이네.” “뭐래.” 단유는 명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는 뒤돌아섰다. “계약하죠.” 중개사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단유는 거실의 넓은 창으로 눈길을 돌렸다. 눈부시게 빛나는 한강 물결과 저 멀리 한남대교 위를 빠르게 지나가는 차들의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기온도 따뜻하고 하늘도 청명하니, 이사하기 딱 좋은 날이다. 이런 집은 처음 본다며 신기해만 했던 하은은 진짜로 매매 계약을 한다는 이야기에 놀라며 반대를 했지만, 단유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단유의 결정을 일단 따르기로 했다. 거래는 택윤에게 위임하고 단유는 아파트로 돌아와 두 사람과 마주 앉았다. “늦게 말씀드려서 죄송해요.” “난 아직도 현실감이 없어.” 명수의 중얼거림에 하은도 동감했다. 그리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단유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도대체 그 큰돈을 어떻게 벌었는지, 들었지만 그래도 이해가 안 돼. 내가 아는 단유가 맞는지도 모르겠고. 그런데 저 얼굴을 보니 내가 아는 단유긴 한데.” 명수는 단유가 건넨 핸드폰을 보며 허탈한 표정을 짓다가, 하은에게 건네며 말했다. “왠지 상상 이상의 숫자를 보니까 뭔가 허무해져.” “…….” 단유의 침묵 뒤로 명수의 말이 이어졌다. “딱히 널 뭐라 하려는 건 아닌데, 그래도 네가 이렇게 큰돈을 벌었다고 하니까 잘 됐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럼 내가 돈 많이 벌려고 하는 이유가 없어지니까, 좀 허망하달까? 좀 그렇네.” 단유와 하은은 아무 말 없이 명수를 지켜보았다. “어릴 때, 네가 신문 아르바이트해서 나 축구화도 사주고 그랬잖아? 나 아직 그 축구화 안 버리고 있는 거 알지? 박스에 보관해두고 있는 거.” 앞코가 뜯어져 발가락이 튀어나올 정도로 신었던 축구화였다. 뭐, 이제는 발도 커져서 억지로라도 신을 수 없는 신발이지만, 명수는 그 신발을 차마 버릴 수 없었다. “고마워서도 있지만 잊지 말자고 했던 거였거든? 너한테 받은 만큼 나도 너한테 해주고 싶어서. 빨리 프로에 데뷔하고 싶었던 것도, 더 빨리, 더 많이 돈을 벌고 싶어서였는데…. 이제는 내가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계속 이렇게 받기만 하고.” “명수야.” “…응.” “우리 예전에 그랬잖아. 서로에게 빚지는 거 없다고. 그거 빚 아니야.” “…….” “만약에 내가 그런 돈이 없다면, 그리고 만약 네가 집을 사야 한다면, 그래서 네가 모은 돈을 모두 털어야 했다면 어땠을까? 넌 아깝다고 생각했겠어?” “아니지.” “만약 내가 너한테 빚졌다고 말하면, 넌 뭐라고 했을 거 같아?” “…….” “똑같은 거야. 부채의식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어. 우리는 언제나 하나잖아. 너나 나나 왜 돈을 벌려고 했어? 서로 좋은 거 먹고 좋은 거 해주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 서로가 행복하게 지낼 수만 있다면, 이깟 돈 누가 내든 무슨 상관이야? 안 그래? 그리고 지금이야 내가 많이 벌었다지만, 나중에 너 유럽에라도 진출하면, 나보다 더 많이 벌 수도 있지 않겠어? 거기는 주급으로 30만 파운드도 받고 그런다며? 그럼 내가 지금 가진 이 정도는 우스울 텐데?” 명수는 대꾸 없이 식탁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너 돈 때문에 축구하는 거 아니잖아. 축구를 누구보다 좋아하고 잘하니까 하는 거잖아? 나도 네가 축구장 위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아. 그러니까, 괜한 생각하지 말고 계속 최선을 다해. 그리고 아시아 최초로 발롱도르 트로피를 들어 올리겠다는 각오로 하라고. 그게 나와 선생님이 바라는 명수 너의 모습이니까.” 단유가 하은은 바라보자, 하은도 고개를 끄덕이며 명수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명수 넌 좋아하는 거 해. 사람이 살면서 자기 좋아하는 거만 하고 살 수 없다지만, 좋아하는 거만 하면서 살 수 있으면 얼마나 행복하겠어? 다행히 넌 좋아하는 거 하면서 살 수 있잖아? 그래서 웃을 수 있잖아? 그 웃음을 위해서 단유나 나나 노력한 거잖니? 그렇다면 넌 돈으로 갚을 생각을 할 게 아니라, 계속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 거야.” “선생님.” “응.” “그런데요.” “응?” “30만 파운드가 얼마예요?” 괜히 의기소침해진 명수를 달래느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던 하은은 한참 후에야 단유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솔직히 나도 명수랑 비슷한 생각이긴 해.” “허탈하다고요?” “비슷한 느낌? 음…허탈하다기보다는, 내가 이제 뭘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지. 이제껏 너희를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었고, 그런 생각에 차곡차곡 돈을 벌었단 말이지. 물론 워낙 ‘소박한’ 녀석들이다 보니 돈 쓸 일도 별로 없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대학 등록금이라도 내 줄까 했더니, 서울대에 장학금 받고 들어가는 통에 돈도 많이 들지 않았고, 용돈이나 줄까 했더니 둘 다 이제는 나보다 더 돈도 잘 벌고 말이야. 그래도 사람이 살면서 목돈이 필요한 순간이 올 테니까, 그때를 위해서라도 돈을 모아야지 했는데, 명수는 이미 억대 연봉을 받고 있고 단유 넌…. 이건 뭐, 내가 끼어들 틈이 없네?”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네는 하은에게도 단유는 같은 취지의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그동안 선생님이 저희 둘을 돌봐 주신 것만으로도 저흰 평생 갚을 수 없는 걸 받은 것과 같아요. 이깟 돈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몇백 억이나 되는 돈을 ‘이깟’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단유가 많이 성장했구나.” “아니, 그런 게 아니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선생님도 이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시면 좋겠어요.” “하고 싶은 거?” 단유는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선생님, 아직 젊으시잖아요. 그런데 저희 때문에….” 단유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지만, 하은은 대충 단유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뭐, 그래서 나보고 빨리 시집가라고, 그 말 하고 싶은 거니?” “…비슷해요.” “어머, 얘 좀 봐?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거거든? 너도 내가 노처녀라고 놀리는 거니? 어머나, 세상에. 그래, 이제 나이도 먹고, 돈도 많이 벌었으니까 선생님이 만만해 보이고 그러지? 같이 늙어가는 처지다, 이거지? 그래 아주 맞먹어라, 맞먹어.” “농담이 아니라, 정말 이제는 선생님도 선생님의 삶을 찾으셨으면 좋겠어요.” “이제 돈 벌었으니까, 떨어지라고?” “아이, 참. 선생님.” “에휴. 이제는 늙었다고 말도 안 받아주네. 서러워서 살겠나.” 과장된 제스처로 한숨짓는 시늉을 하던 하은이 픽, 코웃음을 쳤다. “됐어. 무슨 말 하려는지 알겠으니까 내 걱정은 그만해라. 선생님도 다 생각이 있거든? 선생님이 연애를 하든, 결혼을 하든 알아서 할 거야. 그리고 지금 다니는 학원? 억지로 하는 거 아니야. 알잖아? 나 선생님 소리 듣는 거 좋아해. 애들 가르치는 것도 좋아하고. 너만큼 똑똑한 애들은 아직 만나지 못했고, 앞으로도 만나지 못할 거 같지만, 그래도 혹시나 너 같은 아이들을 만나 가르칠 수 있다면 그것도 나름 뿌듯한 일일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계속 학원 출근할 거야. 선생님도 이제 경력 좀 쌓여서 나름 나 찾는 학원 많다? 내 실력 인정해주고, 나도 보람을 느끼는데, 내가 싫어할 이유가 어딨어?”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니가 갑자기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꿈도 못 꿀 돈을 들고 와서 명수나 나나 잠시 얼이 빠졌던 거뿐이야. 따지고 보면 말이야, 단유 너잖아? 불가능을 모르는 사나이? 뭔들 못 하겠어? 그냥 당연히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인데, 우리가 미리 준비가 안 됐던 것뿐이야. 그런 거야.” 자상한 표정으로 단유를 바라보는 하은. 그래서 고맙고 감사하다. 뭐든 이해해주려고 하고 받아주려 하니까. 세상 어떤 부모도 하은 같지는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말이야, 너 계속 번역 일은 할 거니?” “네.” “그것도 좋아서 하는 거지?” “네.” “그럼 됐어. 너도 좋아하는 일 다 하면서 살아. 아, 이제 내가 뭐라고 안 해도 되겠구나. 돈이 철철 남아도는 데. 에구, 비루한 내 삶이나 챙겨야지. 안 그래? 어린 제자들에게 걱정 안 끼치려면 내가 잘해야 하는구나. 내가 잘해야 돼.” “선생님.” “아유, 이제 내가 선생님 소리 들을 날도 얼마 안 남았네. 고작 하루 먹고 하루 사는 제가 어찌 선생님 소리나 듣겠어요?” “선생님.” “응?” “집 청소 잘하면 용돈 드릴 수 있는데.” “야!” 단유는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 방으로 숨어 들어갔다. “안 튀어나와!” 킁, 하고 호빵이 귀여운 기침을 뱉는 소리가 들렸다. 평화로운 하루가 또 지나간다. ======================================= [586] 얼마면 돼(2) 이사는 이삿짐센터에 맡기고, 그 외 가구는 명수와 상미에게 맡겼다. 둘은 신혼집 꾸미는 기분이라며 신이 나서 돌아다녔다. 하은에게도 새집에 들어가는 김에 사고 싶어 거 있으면 사라고 말씀드렸더니, 하은은 부담스럽다며, 지금도 충분하다고 제의를 거절했다. 그래서 상미에게 따로 부탁했더니, 상미가 억지로 하은을 데리고 쇼핑을 나섰다. “졸부 된 기념으로 졸부 흉내 좀 내 보세요.” 단유는 그렇게 손을 흔들어 배웅한 뒤, 학교로 향했다. “형!” 자연대 앞에서 새벽이 자전거를 끌고 나타나 단유를 불렀다. “이거 대박이에요. 완전 가벼운 거 있죠?” “그래?” “근데, 이거 너무 가벼워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날아갈 거 같은 거 있죠?” “새벽아, 바람이 어느 정도의 풍속으로 불어야 니가 날아갈 수 있는지 계산해 볼까? 너도 물리학과니까, 그 정도는 계산할 수 있지?” “말이 그렇다는 거죠. 그만큼 가볍다고요. 이런 자전거 처음 봐요.” “잘 타고 다녀.” “네. 조심해서 쓰고 돌려드릴게요.” “괜찮아. 너 가져.” “예? 이거 꽤 비싼 거 아니에요? 제가 자전거 잘 모르긴 하지만, 비싼 자전거는 천만 원대도 된다고 알고 있는데, 이것도 그렇게 좋은 거 아닌가요? 저 그런 거 못 가져요. 염치가 있지.” “괜찮아. 난 안 쓰는 거니까.” “아뇨. 제가 아무리 그래도 그냥은 못 받죠. 나중에 돈이라도 벌어서 갚으면 모를까. 일단은 그냥 빌리는 거로 할게요. 그래야 저도 마음이 편해요.” “그래. 그럼 편한 대로 해.” 그제야 씩 웃으며 목을 긁적거리는 새벽이다. “자전거를 모른다고 했으니, 차도 잘 모르겠네?” “차요? 그쵸, 뭐.” 아까보다 더 얼굴을 붉히는 새벽은 변명이라도 하듯 말을 이었다. “차 싫어하는 남자 없다는데, 전 그냥 공부만 하느라고 그런데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거든요.” 아는 거라곤, 현대, 기아, 삼성, 벤츠 등등의 브랜드뿐. “그게 뭐 어때서. 그 덕분에 서울대 들어온 거 아냐. 그리고 나도 잘 모르니까 너한테 물어본 거고.” “인터넷에 자동차 동호회 커뮤니티 같은 데 가서 물어보는 게 제일 낫지 않을까요?” 새벽이나 단유나 인맥이 워낙 없으니, 주변에 이런 주제를 물어볼 대상이 없었다. “아니면 동기들한테 물어볼까요?” 그게 쉬운 일이었으면 이미 단유가 물어봤을 테지만, 새터도 가지 않았던 단유라 친한 동기라곤 고작 새벽뿐이었고, 그 외는 모두 단유와 거리를 두고 훔쳐보기 바쁜 이들이었다. 반면, 새벽은 그래도 안면을 익히고 지내는 동기도 있고, 선배도 있었다. 그저 인사만 나누는 게 다였지만, 그래도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눌 정도는 된다. 새벽은 쇠뿔도 단김에 뽑으랬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마침 자연대에서 강의를 듣고 나오는 동기 한 명을 찾았다. “경수야.” 동기들과 함께 나오던 경수란 이가 새벽의 부름에 눈을 맞추고는 손을 들어 반가움을 표시했다. “어이.” “어디 가?” “이제 밥 먹으러 가야지. 같이 먹을래?” 새벽이 고개를 돌려 단유를 바라본 뒤, 물었다. “그럼 저 형이랑 같이 먹을래?” “어? 어, 뭐. 그래.” 단유가 어려운 거지, 싫은 건 아니었기 때문에 경수는 조금 주춤거리긴 했지만 싫다고는 하지 않았다. “차요?” 우연인지, 아니면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식사 자리에 모인 이들 중 차에 대해서 잘 안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주워들은 거로는 ‘역시 벤츠가 튼튼해’, ‘BMW도 좋지 않나’, ‘국내 브랜드가 AS는 잘 되지 않을까’, ‘현대가 수출은 제일 많이 한다던데’, 정도였다. “그런데 차는 왜요? 차 사시려고요?” ‘그렇게 안 봤는데, 차를 살 수 있는 정도의 재력이 있으신 분이셨던가요’라는 눈빛이었다. 단유가 평소 잘 차려입고 다니는 스타일은 아니어서 더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그냥 좀 알아보려고.” 두루뭉술하게 대답한 단유는 식사를 이어갔고, 새벽은 단유의 눈치를 살핀 후 다른 화제로 돌렸다. “근데 축제가 이번 주야?” “응. 요 앞 학생잔디에 무대 설치하는 거 봤지?” “말로만 듣던 대학 축제라니. 내가 살던 동네에는 가까운 곳에 대학이 없어서 가본 적이 없었거든. 넌 대학 축제 가본 적 있어?” “고1 때 친구들이랑 한 번 가본 적은 있지. 그런데 서울대 축제는 한 번도 안 가봤지만, 별로 기대하지 말라더라.” “왜?” “사람들이 그러던데? 그리고 너도 봐라. 당장 이번 주가 축제인데, 축제 분위기가 느껴지냐?” 학생들은 여전히 도서관과 강의실을 오갈 뿐이고, 대자보에 축제를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 있지만, 누구도 관심 있게 보는 이가 없다. “그래도 축제면 연예인도 와서 노래 부르고 할 거 아냐?” “저기 포스터 봐라.” 경수가 가리킨 손가락 끝에 벽면에 붙은 포스터가 있었다. 단유도 그제야 벽에 붙은 포스터를 봤다. 「세상이 바뀌니 축제가 바뀐다」 뭔가 시의성을 담은 문구인 듯한데 그다지 센스가 느껴지지 않는다. 문구 아래 축제에 참여하는 가수 다섯 팀의 얼굴이 십자가 형태로 배열되어 있었다. 그중 한 팀에서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리본 소녀가 와?” 새벽이 놀란 얼굴로 ‘진짜냐’고 되묻고, 경수나 다른 동기들이 이제 알았냐며 핀잔을 줬다. “나 리본 소녀 팬인데!” “누구는 아닐까 봐?” “리본 소녀 때문에 수능 망칠 뻔 했다이가, 나는.” “넌 리본 소녀 중에 누가 좋아?” 왁자지껄 떠드는 와중에 단유만 조용히 식사를 이어나갔는데, 새벽이 들뜬 얼굴로 단유를 향해 물었다. “형도 리본 소녀 알죠?” “야, 리본 소녀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그렇죠?” 경수도 단유의 대답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단유는 먹던 걸 삼키고는 대답했다. “알긴 알지.” “그래요? 그럼 별로 안 좋아하는?” “특별한 감정은 없어. 노래를 많이 들어보지도 않았고.” “와! 진짜요? 작년에 리본 소녀 노래가 거의 수능 금지곡 수준이었는데.” 부산에서 올라왔다는 친구 하나가 밥풀을 튀기며 자신이 그 노래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말했다. 실상은 자신이 그만큼 리본 소녀를 좋아했다는 고백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부산 친구의 말에 격하게 동의하는 걸 보면, 작년에 나왔던 노래가 꽤나 히트를 했던 모양이다. “한 번도 안 들어봤어요?” “응.” “진짜로요? 대한민국에서 ‘두락댓’ 안 들어본 사람이 있을 줄이야! 어디 외국에라도 있었어요?” “응.” “어? 진짜로요?” 부산 친구는 상대의 말을 잘 믿지 못하는 성향이라도 있나 보다. 무슨 말을 해도 ‘진짜’냐고 되묻는다. 어쨌든 거짓말을 하지 않는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네 발음 왜 그렇게 저렴하냐? 두락댓이 뭐냐?” 경수의 말에 동기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야, 내 정도면 괜찮은 편이다. 내 친구들 중에는 내보다 더 저렴한 애들이 얼매나 많은데.” “지역 특색이냐?” “마, 지역 차별 발언이다, 그거.” “우리는 ‘뚫어대’라고 불렀는데. 후렴에 그렇게 들리잖아? 뚫어대, 뚫었대.” “그렇게 부르니까 존나 야하게 들리네.” “우리는 수능 끝나고 교실에서 걔네 뮤직비디오만 계속 돌려 봤다. 장난 아니었다고. 우리 반에 꼴통이 있는데 갑자기 교탁 앞에 나가서 웨이브 추면서 뚫어대, 뚫어대 하면서 부르니까 애들 전부 넘어지고 그랬다.” ‘축제’에서 ‘리본소녀’로, ‘리본소녀’에서 ‘Do like that’의 발음으로, 그리고 ‘고3 수능 이후의 교실 풍광’에 대한 화제로 흘러가는 이야기의 흐름을 단유는 따라잡을 수가 없어, 그저 식사를 빨리 마치는 쪽으로 자신의 길을 정했다. 한편으로는 리본소녀의 ‘도연’과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눴던 그때가 떠오르기도 했다. 동기들의 이야기로 추정해보면, 아마도 작년에 크게 성공했던 모양인데, 그렇다면 ‘무대 공포’로 어려워하던 도연이 자신의 증상을 잘 극복해낸 모양이다. 잘된 일이다. 차는 택윤에게 부탁했다. 애초에 그러려고 했었는데, 마침 자전거에 관해 이야기를 하다가 말이 나온 김에 물었던 것일 뿐인지라 별로 큰 기대는 하지 않았고, 나름 돈 많은 이들과 교류가 많은 택윤이 좀 더 아는 바가 많을 거라 생각해서 부탁을 했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차량 중에 좋은 차를 사고 싶어요.” 모호한 주문에도 택윤이 소개해 준 딜러는 웃으며 카탈로그를 펼치고 차 하나를 짚었다. 이미 택윤에게 가장 좋은 차로 골라주라는 언질을 받았기에, 딜러는 스스럼없이 몇 개의 차를 선택해 단유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어떠신가요? 벤츠에서 나온 이 차는….” 설명을 듣던 중에 단유가 말을 잘랐다. “주세요.” “네?” “저 차 잘 몰라요. 차 전문가시라면서요? 전문가가 고른 차니까 좋은 차겠죠. 주세요.” “어, 저기, 그래도 고객님께서 제대로 선호하시는 디자인이나 뭐 그런 게 있지 않을까요?” 단유는 볼을 긁적였다. “디자인에 따라 선호도가 많이 다른가요?” “네, 그런 편이죠. 사실 여성 분들이 좋아하는 차, 라고 해도 워낙 종류가 많고 선호도가 달라서 딱 이 차다, 라고 고르기 어렵거든요.” 하은 몰래 선물해주고 싶었던 것인데, 명수의 축구화를 고르는 것처럼 쉽게 고를 수 있는 게 아닌 모양이다. 예전에 명수 축구화를 고를 땐 제일 잘 나가는 거 주세요, 하면 매장 직원이 망설임 없이 ‘이거요! 이게 제일 잘 나가요’라고 골라줬는데 말이다. “그럼 이 카탈로그 제가 가져가서 일단 고르도록 할게요. 가져가도 되죠?” “아, 그럼요. 가져가셔도 됩니다.” “그리고 이 중에서도 추천할 만한 차 있으면 체크 좀 해 주실래요?” “그러죠. 그럼….” 딜러는 몇 개의 차량에 체크를 해 주었고, 단유는 카탈로그를 챙겨 매장을 나왔다. “뭘 골라?” “차요. 이 중에서요. 여기 체크된 게 좋대요.” “왜 골라?” “사려고요.” “누구 차?” “선생님 차요.” “왜?” “선물이요.” “무슨 선물?” “그냥 선물이에요.” “생일도 아닌데?” “네.” “왜?” “…졸부라서요?”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하은은 카탈로그를 뒤적거리다 덮었다. “마음에 드는 게 없네.” “그럼 이것도요.” 단유는 다른 카탈로그를 꺼내 펼쳤고, 하은은 흥미롭다는 듯 카탈로그를 뒤적이다 덮었다. “여기도 없어.” “더 있어요.” 단유는 다른 카탈로그도 내밀었다. 하은은 역시 몇 번 뒤적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없어.” “자동차 전문가가 추천한 차들인데요?” “마음에 안 들어.” “그럼 마음에 드는 차는 있어요?” “봐야 알지.” “그럼 날 잡아서 보실래요?” “아니.” “왜요?” “귀찮아.” “그럼 차를 어떻게 사요?” “차 들고 오라고 그래, 여기로.” “어떻게 그래요?” “되게 해.” “뭐예요, 지금?” “졸부 흉내.” “아, 예.” 단유도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날. 단유는 집으로 한 사람을 초대했고, 출근하기 전인 하은은 편한 복장으로 있다가 갑작스럽게 손님을 맞이해야 했다. “안녕하세요, 딜러 한재현이라고 합니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하은은 겨우 미소를 지으며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현관 옆 방문을 신경질적으로 두들겼고, 가방을 챙기던 단유가 나왔다. “네?” “니가 불렀니?” “아,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하은은 잠시만 더 기다려달라고 부탁한 뒤, 단유를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닫아건 뒤, 단유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뭐니?” “부르라면서요.” “뭘?” “카탈로그만 가지고 고르기 어렵다고 하시니까, 사람을 불렀죠.” “아이고, 머리야.” 이마를 짚는 하은을 향해 진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단유. “아마 차도 끌고 왔을 걸요?” “뭐?” 놀란 눈이 되어 단유를 바라보는 하은에게 말했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으시는 게 좋겠어요. 그 옷 입고 나가시면 창피하실 테니까.” “너!” 단유는 하은의 손길을 피해 문을 열고 나갔다. “거실에 앉아 계세요. 선생님이 곧 나오실 거예요.” “아, 예. 알겠습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단유는 하은에게 차를 선물할 수 있었다. “선생님, 그동안 낡은 차 끌고 다니셨잖아요. 바꿀 때 돼서 바꾼 거니까 마음 푸세요.” “고맙네. 아주 고맙네.” “그럼 새로 차도 뽑은 김에 주말에 드라이브나 가죠.” “드라이브?” “강원도로.” “강원도? 왜?” “채윤이 면회 가려고요.” “기사 대용이냐?” “선생님도 같이 가서 보면 좋으니까요.” “이 녀석이! 야, 그러지 말고 니가 운전해서 가!” “저 운전면허 없잖아요.” “여태 면허도 안 따고 뭐 했어!” “여행 다녔죠.”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거 좀 봐? 내가 만만해?” “에이, 제가 어떻게 선생님을 만만하게 봐요? 저 선생님 되게 존경하는 거 아시면서?” “존경한다는 녀석이 매번 이렇게 사람 골탕 먹이니?” “그래서 안 가시려고요?” “…….” “채윤이도 선생님 보고 싶어 할 텐데?” 결국 주말 드라이브가 결정되었다. ======================================= [587] 얼마면 돼(3) 주중에 이사가 마무리되고 명수와 상미가 함께 고른 가구도 모두 집 안에 자리를 잡았다. ‘두 번 다시 쇼핑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아’라며 투덜대며 축구단으로 향했던 명수는 아마 다음 주에나 와서 얼굴을 비칠 모양인데, 대신 상미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명수의 것까지 정리를 해주었다. “어머 이런 것도 있었네.” 명수의 짐들 중에는 오래된 게임 시디들이 있었는데, 상미는 그런 시디를 발견할 때마다 보물을 발견한 듯 즐거워했다. “내건 집에서 모두 내다 버렸거든.” 휴학을 결정했을 때, 부모님이 모두 버렸다고 했다. 부모님의 과감한 결정이 독립을 선언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데, 축하해줘야 할지 안타까워해야 할지 몰라 단유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넓은 집으로 이사 오면서 걱정했던 것 중 하나는 호빵이 낯선 집에 적응을 못 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는데, 그 점은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과장되게 표현해서, 이전 집의 3배쯤 되는 거실 위를 쉬지 않고 내달리며 즐거워하는 호빵을 보면 말이다. “쟤 늙어서 못 움직이는 건 줄 알았는데.” “청춘이네요.” 청춘, 아니 회춘한 호빵은 대리석 거실 위를 오래도록 기다려왔던 꿈의 놀이터인 양 누비고 다녔다. 그러다 목이 마르면 급수기에 가서 할짝거린 뒤, 다시 뛰어다녔다. 단유는 늙은 개가 흘리고 다니는 개털들을 보며 살짝 미간을 좁힐 뿐이었다. “저 넓은 거실에 호빵 혼자면 심심하지 않을까?” 상미가 넌지시 새로운 동물의 입양을 추천했다. 어쩐지 조만간 새로운 동물이 이 집에 들어올 거란 예상이 됐지만, 역시 막지 않았다. “청소만 잘해 준다면 난 상관없어.” “나 청소 잘해.” 부디 자기 방 청소만이라도 잘해 주길. 하은은 새로 산 외제 차를 부담스러워하는 듯했지만, 잘만 타고 다녔다. “학원에서 말야, 선생님들이 내 차를 보고 말이야, 완전 부러워하는 거 있지? 원장 선생님보다 더 좋은 차 타고 다닌다고, 돈을 그렇게 많이 벌었냐고 묻더라고? 내가 그래서 아니라고, 선물 받은 거라고 했더니 눈을 이렇게 뜨면서 막 막 남자 생겼냐고 묻는 거야? 내가 남자가 어딨니? 맨날 학원, 집, 학원, 집만 오가면서 일만 하는데 남자 사귈 시간이 어딨냐고, 남자 사귈 시간이라도 가질 수 있게 휴가나 주면서 말하라고 했더니, 자기들도 그래서 연애할 시간 없다면서, 막 그러는 거야. 그런데 우리 선생님들 중에 연애하는 선생님도 있거든? 그 선생님한테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은 연애 어떻게 하셨어요? 이렇게 물으니까 말이야….” 단유는 진심으로 집에 상미를 데리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둘이서 저렇게 수다를 떨며 지내는 모습을 보니 한결 귀가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어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단유는 이전에 말한 바와 같이, 상미에게 ‘투자’를 했다. 최고급 방송용 마이크와 지향성 안테나, 마이크 스탠드, 인터페이스, 두 개의 최고급 모니터와 조명 장치는 물론이고 컴퓨터까지 모두 새 걸로 장만했다. 물론 사양은 잘 모른다. 이 부분은 상미에게 오롯이 맡겼는데, 나름 아는 지인 찬스를 사용하여 최고급으로 맞췄다고 했다. 일단 가격 면에서 생각 이상의 금액이 나오긴 했는데 그래 봐야 ‘졸부의 품격’에 흠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어쨌든 그런 장비들을 갖췄더니, 상미의 넓은 방도 별로 넓어 보이지 않는 단점이 있었지만, 상미는 개의치 않았다. “내 원룸보다 넓은데 뭘 더 바라?”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다시 한번 당부했다. “청소 제대로 하고, 특히 뒤의 케이블 쪽도 신경 써.” “알았어, 알았어. 내가 제대로 한다니까?” “다른 건 모르겠는데, 참 신용이 안 간다.” “야! 그때는 내가 한참 스토커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그래서 방 청소를 제대로 못 하고 있을 때 네가 찾아와서 그런 거야. 나 원래 청소 잘해.” “우리 중학생일 때부터 알고 지냈지? 내가 네 방에 한두 번 가는 거 아니었잖아?” “야! 그때는 우리 엄마가 청소를 해서 그래. 우리 엄마, 얼마나 청소 못 하는데? 난 아냐, 난 잘해.” 단유는 나직이 한숨을 쉬고, 돌아섰다. 등 뒤에서 상미의 변명은 계속 이어지지만 어쩌겠는가. 단유가 좀 더 부지런하게 움직이면 된다. 그게 편해지는 길이다. **** 재미없는 축제로 ‘서울대 축제’가 뽑히지만, 그래도 축제라고 학교 곳곳에서 축제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학생 잔디에 가설된 무대에서는 학내 동아리 모임의 소규모 공연이 이어졌고, 중도와 학생회관 사이의 아크로에서도 소소한 이벤트들이 펼쳐지며 지나가던 학생들이 참여를 하거나 구경을 하느라 떠들썩했다. 굳이 축제 분위기를 비교해보겠다며 다른 학교에 가지 않는 이상―그리고 실제로도 다른 학교에 가는 경우는 드물다―학생들은 나름의 재미를 찾으며 축제를 즐겼다. 그렇지만 축제라고 강의를 휴강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정상적인 수업이 진행됐고, 바깥의 떠들썩한 분위기와 격리시키기 위해 창문들을 모두 닫았다. 5월이지만 수십 명의 학생들이 창문을 닫은 교실에 앉아 수업을 들으니, 답답한 공기도 공기지만, 열기가 슬슬 올라와 괜히 노곤해진다. 교수님이라고 뭐 다를까. 특히 백발의 노교수님은 기력이 부족해 평소의 까랑까랑한 목소리도 오늘은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문제는 다음과 같이, n이 무한대로 갈 때, finite series가 주어져 있고, 그 series에서 n번째 턴을 n으로 표시할 수 있을 때, 이거의 n을 무한대로 보내는 극한을 취했을 때, 그 극한이 finite한 값으로 존재하면 우린 그 series는 infinite series가 converge 하다고 얘기합니다.” 느리지만 또박또박 적어 내려가는 칠판 위의 여러 공식들은 학생들의 의식을 점점 안드로메다로 보내고 있었다. 이론적으로, 교수님이 설명하시는 공식들은 실제로 안드로메다로 향하는 로켓의 궤적을 연구할 때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 수업의 난이도를 n으로 지정하고, 그 n이, 무한대까지는 아니더라도, 100에 가깝게 다가간다면 말이다. “무슨 말이에요?” 새벽이 조용히 물었다. “지금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100년이 지나도 넌 간단한 로켓 궤적 하나도 계산해내지 못할 거란 이야기지.” 모이 쪼는 새처럼 고개를 끄덕이던 새벽을 팔꿈치로 깨워서 졸지 말라고 친절을 베풀었는데, 새벽은 눈 사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이렇게 대꾸했다. “제 평생에 로켓 궤적 따위를 계산할 일이 있을까요?” 틀린 말은 아니라 단유는 홀로 수업에 집중했다. 강의를 끝내고 교수님이 강의실을 나가자, 학생들도 겨우 생기를 되찾고 강의실 뒷문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잠에 취해 비몽사몽 하는 사람들도 있어, 뒷모습이 사뭇 좀비 영화 속 엑스트라들 같다. 그중 한 사람이 새벽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 강의는 다시 듣고 싶지 않네요.” “다시 듣기 싫으면 지금 열심히 들어. 학점 안 나와서 재수강하면 너만 고생이야.” 새벽의 어깨를 툭툭 치며 지나가는 물리학과 선배의 조언이었다. 그렇게 지나가나 싶더니 우뚝 서서 돌아본다. “어? 그런데 너 1학년 아냐? 1학년이 왜 이 수업을 듣지?” “도강이요.” “와, 이 수업을 도강하는 신입생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네.” 선배는 피식 웃으면서 새벽과 단유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단유에게서 시선이 멈췄다. “너구나?” “네?” “소문 자자한 전국 1등.” “아, 예.” “야, 그냥 말 놔. 너, 나랑 같은 나이야.” “아.” “너 그거 알아? 우리 때 넌 거의 연예인급이었다는 거.” 단유는 대답 대신 머리를 긁적였다. “서울대 들어온 동기들 중에 연예인 이름은 몰라도 니 이름 모르는 애는 없었을 거다. 그런 애를 이렇게 직접 만나다니. 지금 막 사인 받고 싶어지는 거 알아?” 살짝 얼굴이 상기된 듯 한 선배는 지난 3시간의 피로가 한 번에 날아간 듯 보였다. “야, 너 다음 수업 있냐?” “아니요, 없어요.” “말 놓으라니까. 괜찮아. 아무튼, 수업 없으면 커피나 한잔하자. 괜찮지?” “응.” “그래, 그래.” 엉겁결에 선배와의 차담회(茶談會)가 이루어졌다. “너희 교양 수업 하나가 휴강이어서, 전공수업을 도강했다고? 와, 골 때리네. 하필 도강을 해도 수리물리학을 도강하냐?” 1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갔다가 이제 막 복학했다는, 서진우라는 이름의 선배가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자, 새벽은 오해 말라며 ‘전부 이 형이 시켰어요’라는 뜻으로 단유를 손짓했다. “거길 따라간 너도 대단하고.” “저도 뭐, 시간이 남아서. 그리고 이렇게 빡셀 줄은 몰랐죠.” “최 교수님이 원래 빡세게 수업하기로 유명하신 분이야.”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고 시작한 이야기는 주로 단유에 대한 감상과 질문들이었다. 서울대는 당연하고 어느 과로 지원할지 궁금했었는데, 돌연 진학 포기를 선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는 이야기와, 3년이 지나 자신과 같은 과를 다닌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는 이야기에 새벽은 새삼 신기하다는 눈으로 단유를 훔쳐봤다. “축제 재미없지?” “글쎄요? 제대로 축제를 즐겨본 적이 없어서.” 그 원흉은 역시 ‘골 때리는’ 단유 때문이었지만, 단유는 어깨를 으쓱댈 뿐이었다. “사실 1년만 다니고 바로 군대를 갔던 까닭에 축제라곤 봄 축제랑, 가을 축제 한 번씩만 경험해 봤을 뿐이지만, 지금 이 정도면 지금까지 서울대에서 열렸던 축제 중에 가장 큰 규모일 거야.” “이게요?” “아, 이럴 게 아니라 물리대 주점이나 가자. 이럴 때 다 같이 모여서 서로 인사하고 안면 트면 얼마나 좋아?” 마이 페이스 경향이 좀 있는 선배였다. 자기가 목마르니까 커피 마시자고 하고, 이제 ‘화제의 인물’인 단유를 데리고 다니면서 소개해주며 화제를 끌어모으려는 치기를 보인다. 선의로 행하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선배들이나 동기들과 ‘축제’를 핑계로 얼굴을 익히는 것도 앞으로의 생활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단유는 어울려 주기로 했다. “여기는 나랑 같은 복학생이자 동기, 박철형. 여기는 그 유명한….” “알아, 김단유.” “안녕하세요.” “야, 그냥 말 놔. 나랑 말놓기로 했거든. 너도 괜찮지?” “괜찮아. 우리가 무슨 군기 잡는 학과도 아니고. 게다가 무려 전국 1등이신데.” ‘전국 1등’ 타이틀은 쉽게 잊혀 지지 않을 모양이다. 다들 공부 하나에 자존심이 있는 분들인지라, 그들 중 최고였다는 과거의 기록이 인상적이었나보다. 선배들이 단유를 대하는 태도를 보며 새벽은 어쩐지 굉장한 사람과 함께 다녔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전에도 대단하다고 느끼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라는 느낌이랄까? 진우의 소개로 여러 사람과 통성명하며 단유는 새터 때 했어야 할 것들을 지금 하게 되었다. “술 한 잔은 받아주라.” “그래, 우리가 선배라고 젠체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술 한 잔은 괜찮잖아? 혹시 술 한 잔만 마셔도 몸에 이상 생기고 그래?” “그건 아니고.” “그럼 마셔.” 그렇게 작은 소주잔을 든 단유는 망설임 없이 입안에 털어놓았다. “오오, 잘 마시는데?” “재수할 때 술 좀 마셨던 거 아냐?” “진학 포기하고 결정을 후회하면서 혼술한 거?” “인정? 어, 인정.” 나이가 같거나, 많거나, 적은 선배들은 단유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환호했다. 정말 그들 말대로 ‘연예인’ 보듯 했다. “후배님도 한잔해.”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덩달아 새벽도 소주잔을 기울였다. 술은 참 신기하다. 술을 마시니 평소 어렵게 느끼며 멀찍이 있던 이들이 다가와 말을 걸고 술잔을 나눈다. 술을 마신다는 행위 하나로 공감대가 형성되기라도 한 걸까? 사람들은 단유에게 궁금한 게 많았고, 똑같은 걸―왜 대학을 안 갔었냐, 3년 동안 뭐 했냐, 군대는 안 가냐. 앞으로 뭐 할 거냐―몇 번이고 물었다. 단유는 똑같은 대답―그냥요, 여행이요, 안 가요. 몰라요―을 몇 번이고 반복하고, 똑같은 소주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사람들은 불콰해진 얼굴로 웃음을 터뜨리고 소리를 높이고 노래를 부르다가, 고개를 숙이거나 옆 사람과 속삭이거나 입을 틀어막고 텐트를 빠져나간다. “이게 축제야!” 라는 듯 다양한 군상의 면면을 드러낸다. 물리학과에서 설치한 텐트 안에서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 밤이 깊었다. 멀리 학생 잔디에 설치한 무대에서 들려오는 흐릿한 음악 소리를 배경으로 이어지는 술자리는 멈출 줄 몰랐다. 따뜻한 밤바람이 불어오는 5월의 대학 축제 둘째 날이 지나는 가운데 물리학과 학생들은 단유에게 새로운 별칭을 붙여주었다. “주다, 이것 좀 먹어.” ======================================= [588] 얼마면 돼(4) ‘주는 대로 다 받는다’는 의미로 ‘주다’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단유가 주는 술을 마다하지 않고 모두 받아 마신 탓이다. “적당히 마셔. 억지로 안 마셔도 돼.” 오히려 단유를 끌고 온 진우가 걱정해서 단유를 말릴 정도로. “괜찮아.” “술 잘 마셔?” “몰라.” “몰라?” “이렇게 마신 적은 처음이라서.” “큰일 나는 거 아냐?” “몰라.” “몰라?” 무표정한 얼굴로 받는 술은 다 받는다. 그리고 누가 뭘 물어보면 단답형이긴 해도 다 대답한다. “취한 거 아냐?”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애도 아니고.” 건배 제의를 마다치 않고 꼬박꼬박 다 마셔대니 속이 걱정되어 새벽이 안주를 건네 주었다. 플라스틱 접시에 놓인 파전을 잘게 찢어, 그 중 한 조각을 입에 물려주었더니 볼을 씰룩이며 맛있게 먹는다. “쟤 입만 입이고, 내 입은 입도 아니냐?” “선배님도 드리려고 했습니다.” 새벽은 싹싹한 태도로 웃으며 접시를 건넸다. 새벽이 접시를 놓으니 다른 선배들이 단유의 속을 챙겨 주었다. 여자 선배들은 볼을 불그스레 물들인 단유에게 자신들 앞에 놓인 안주를 들어주니 그것도 사양하지 않고 잘도 받아먹는 단유가 귀엽다고 난리들이다. “얘 이렇게 보니 꽤 괜찮네.” “맨날 무뚝뚝한 얼굴로 다녀서 몰랐는데.” 오히려 지금이 더 무표정이지만, 술기운에 볼을 빨갛게 물들이니 색다르게 보였나보다. 아니면 다 같이 취해서 눈에 뭐라도 씌었던가. 단유가 텐트 안을 종횡무진 돌아다녔더니, 단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함께 얼큰하게 취하고 말았다. 취한 것 같은데, 멀쩡하게 돌아다니며 술을 주고받는 단유 덕에 선배들도 오기가 생긴 탓이다. 단유가 취해서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자고 다들 한 잔씩 하다 보니 어느새 술이 부족할 지경에 이르렀다. “어, 술이 다 떨어져 졌네?” “야, 과대. 술이 없다!” 과대는 서둘러 지갑을 열었다. 근처에 있는 후배들에게 시켜 술을 사 오게 하려 했는데, 어느새 옆에 단유가 서서 과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술 사올까요?” “아뇨. 오빠는 술도 많이 드셨는데 그냥 쉬세요. 후배들 시키면 돼요.” “저도 후밴데.” “아, 그래도 오빠는 좀 쉬세요.” “돈 필요해요?” “네? 아니요. 과비 아직 많이 남았어요.” “돈 필요 없어요?” “네. 혹시 보태시려고요? 괜찮아요. 이런 건 사비로 계산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많이 마신 거 같아서요.” “선배님들이랑 나눠 드신 거니까요.” “저 돈 많아요.” “괜찮아요. 오빠.” 과대표는 대화를 빨리 마무리 지으려 노력했다. 가까이서 단유를 보니 어쩐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라, 시선을 피하며 덜 취한 후배들을 불러 함께 텐트를 빠져나갔다. “형, 괜찮아요. 여기 앉아서 좀 쉬세요.” “나 돈 많아.” “알아요. 아니까, 좀 쉬세요.” “야, 쟤 취한 거 맞지?” “그런 거 같은데요?” “술주정 참 요란하네. 돈이 얼마나 많길래 저러냐?” “술주정인데 뭘 그렇게 진지하게 들어?” 평소 단유가 허름한 옷차림에 뚜벅이 생활을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다들 단유의 말을 ‘주정’이라 치부했다. 사실을 아는―그나마도 굉장히 축소된 정도지만―새벽은 선배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단유를 데리고 텐트 밖으로 나섰다. “형, 진짜 취하신 거예요?” “…몰라.” 무표정한 표정에 초점이 살짝 풀려 있는 단유를 보며, 어쩐지 완전무결한 단유의 인간미를 본 거 같아 새벽은 조금 즐거워졌다. 자신도 텐트 안 분위기에 취해 술을 많이 마셨던 터라 잠시 쉴 겸 주위를 돌기로 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새벽은 자신의 전화인가 싶었는데 단유의 것이었다. 단유는 전화기를 꺼내 들고는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통화를 시작했다. “응.…응.…응.” 그리고는 전화를 끊었다. “누구에요?” “상미.” “…아, 명수 형 여자친구분이요?” “응.” “왜요?” “왜 늦게 들어오냐고.” “네?” 단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고, 새벽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단유를 힐끔 쳐다보며 거리를 걸었다. 오늘, 서울대의 밤은 꽤 요란스러웠다. **** 다음 날, 서울대의 풍경은 언제나와 같았지만 지난 밤, 광란의 시간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초췌해진 얼굴로 건물 복도를 돌아다니는 학생들과 ‘괜찮냐’고 물어보는 선후배들의 모습에서 끈끈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괜찮아요.” 새벽의 눈 밑에 깊게 새겨진 다크 서클과 조커의 웃음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음산한 미소는 절로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괜찮지 않아 보여.” “형이야말로 괜찮아요? 어제 많이 드셨잖아요?” “난 괜찮아.” “그렇게 보이네요. 형 어제 기억은 다 나요?” “응.” “형 어제 취한 거 맞죠?” “…몰라.” 무표정한 얼굴의 단유를 보며 새벽은 생각했다. ‘아직 덜 깬 거 같은데.’ 둘은 해장을 하러 학생 식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진우와 마주쳤다. “어이, 괜찮아?” “괜찮아.” “멀쩡해 보이네.” 새벽이 끼어들었다. “어제도 멀쩡해 보이긴 했어요.” “아, 그렇지. 어디, 식당 가나?” “해장하러요.” “같이 가자. 친구한테 밥 한 끼 못 사주겠냐?” 진우는 단유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치고는 히죽 웃어 보였다. 가는 길에 우연히(?) 마주친 물리학과 좀비들이 아는 체를 하면서 식당으로 향하는 무리가 점점 불었다. “이거 2차 가는 분위긴데?” “2차는 무슨. 2차는 오늘 저녁에나 하자.” “오늘 저녁에는 공연 보러 가야지.” “아, 맞다. 오늘 리본 소녀 나오지?” “세상에 리본 소녀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니, 꿈만 같다.” 기대감에 부푼 얼굴로 식당에 들어서는 학생들은 곧 식당 메뉴에서 해장 메뉴를 골랐다. 축제날이라서 그런지 학생 식당에서 특별히 육개장과 콩나물 해장국 등을 개시한 상황이었다. “너희들 건 내가 사줄게.” 호기롭게 외친 진우의 말에 다른 선배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덕분에 같이 따라 왔던 후배들은 선배들의 은혜로움―3천 원짜리 식권―에 깊이 감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근데, 넌 왜 물리학과를 지원한 거냐?” 육개장을 먹다 말고 진우가 물었다. 사실 어제 술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단유가 인기가 좋아서 오붓하게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꼭 술 먹고 나눌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아, 어제는 친구가 된 것으로 만족했던 진우였다. “물리학이 좋아서?” 단유의 모호한 대답에 진우는 피식 웃었다. “새터에서 그렇게 대답하는 후배가 있었으면, 당장 사발을 들이켜라고 했을 거다. 솔직히 물리학 싫어하는데 물리학과에 온 애들이 있을까?”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여 진우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나랑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서울대 물리학과라고 하면 전국 최강이라는 자부심은 있단 말이야. 그런데 현실은 암울해. 학사만 하고 졸업하면 딱히 취업할 데가 없단 말이야. 싫든 좋든 대학원을 가야 하고, 대학원에서 또 수년간 욕받이 생활하면서, 아, 이건 오프 더 레코드다. 대학원 선배들 앞에서 이런 이야기하면 좋은 인상 못 받아. 아무튼,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는 따야 표과연(표준과학연구원)이나 국과연(국방과학연구소), 혹은 괜찮은 연구소로 갈 수 있단 말이지. 아니면 아무 관련도 없는 직종으로 취직하는 수밖에 없고.” 다른 선배가 진우의 말을 받았다. “예전에는 서울대 명함으로 취업이라도 했지, 요즘은 것도 안 받아준다더라. 솔직히 3, 4학년 가면 수업이랑 실험에 치여 살게 되는데, 다른 애들처럼 여유롭게 스펙을 쌓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결국 취업하려고 나서면 다른 전공에 밀리는 일도 생기지. 암울하다 이거야.” 지난 밤, 괴성을 지르며 놀던 선배들과 동일한 존재들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침착하게 암울한 미래를 덤덤히 이야기한다. “대학원을 가도 사실 비슷해. 거기까지 가면 다른 대학에서 온 애들이랑도 경쟁해야 하고, 여기 있는 동기, 선배, 후배들이랑도 경쟁을 해야 하니까. 대학원도 나름 치열한 세계거든. 허구헌날 연구실에 박혀서 데이터랑 싸워야 하는데, 사람 만날 시간도 없고, 다른 걸 따로 준비할 시간도 없어. 석박사 못 따면 말짱 황이다, 이거야.” 숙취를 해소하기 위해 숟가락을 쉴 틈 없이 놀리던 신입생들의 움직임도 점차 느려졌다. “이런 거 다 감안하고도 물리학이 좋다! 막 이러면 그러면 진짜 물리학이 좋은 거야. 물리학 아니면 아무것도 하기 싫고,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굶어 죽어도 물리학이다! 이래야 물리학이 좋아요, 라고 할 수 있는 거야. 알겠어?”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물리학이 좋아?” 진우의 물음에 단유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뒤 대답했다. “물리학을 배워야만 해.” “왜?” “필요하니까.” “그러니까 왜?” “그래야…세상의 진리를 알 수 있으니까.” 과중반에서 반을 정할 때도 그랬고, 대학 전공을 정할 때도 수학과 물리학 둘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었다. 그것은 단유 본인의 선호도 문제도 문제이거니와 마법이라는 능력을 끌어올리는 데 유효한 학문을 배우고자 하는 의지도 고려되었다. 그리고 결국 물리학을 선택한 것은 그런 점들을 모두 고려하여 선택한 결과다. 물리학은 삼라만상의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리고 그 진리는 단유가 추구하는 마법적 지식의 근원이기도 하다. 더불어서, 비록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의지로 ‘그 세상’으로 가보고도 싶었다. 이 우주의 어딘가에 존재하는지, 아니면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인지 불명확하지만, 물리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그 길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결정을 위해 3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단유는 자신이 선택한 결정에 따라 우직하게 나아가는 것밖에 없었다. 단유의 대답에 테이블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곧, 진우가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대박!” 진우의 뒤를 이어 다른 선배들도 감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뼉을 쳤다. “너는 그냥 천상 물리학자네, 물리학자. 세상의 진리를 알기 위해 물리학을 배운다! 모르긴 몰라도 최근 10년 내에 그런 대답을 한 신입생은 니가 유일할 거다.” “존경스럽다! 다들 박수.” 단유의 동기들도 다들 수저를 놓고 단유에게 박수를 보냈다. 뜬금없는 박수 소리에 다른 테이블에서 식사하던 이들이 고개 돌려 돌아볼 정도였다. 열심히 박수를 치던 진우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멋있다, 김단유! 친구야! 멋있어. 진심을 담아 말하는데, 부디 그 마음 변치 않길 바란다. 우리 서울대 물리학과에도 이런 친구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 머쓱해진 단유가 볼을 긁적였다. “너희들도 잘 들어. 물리학, 좋아. 재밌어. 이 세상 모든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 물리학 아니냐? 그렇지? 그런데 말이야, 안타깝게도 현실은 이 중에 30%만 그 길을 걸을 수 있게 한단 말이지. 나머지는 모두 물리학과 동떨어진 길을 걷게 될 거야. 섬뜩한 일이지. 그래도 지금은 자부심을 가져. 너희는 서울대 천체물리학부의 물리학과를 지망한 학생들이야. 그렇지? 한국? 좁다 이거야. 세계로 가자 이거야. 응?” 그때 진우의 등 뒤로 누군가 나타났다. “뭐냐, 갑자기. 하도 시끄럽길래 뭔가 해서 봤더니 진우 너였구나.” “아, 선배님.” 진우는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 뒤를 다른 사람들도 앞다퉈 일어나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아무렇게나 자란 턱수염을 하고 나타난 이는 진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됐어, 밥 먹다 말고 웬 소란인가 싶어 본 거야. 여기는 신입생들?” “네, 선배님. 인사해, 여기는 하늘보다 높고 높은….” “야, 야. 오버 좀 그만해. 무슨 말만 하면 이렇게 오버야? 반갑다, 난 조대휘라고 한다. 석사 준비 중이다.” “반갑습니다, 선배님!” 신입생들이 모두 고개 숙여 인사했다. “반가워.” 대휘는 싱긋 웃는 얼굴로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았다. 신입생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잘들 먹고 가라며 인사를 건네고는 사라졌다. 단유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 [589] 얼마면 돼(5) 대휘가 신입생들을 훑으며 인사를 할 때, 단유와도 자연스럽게 시선이 맞았다. 그 순간은 매우 순간이었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다른 사람에게로 시선이 넘어갔으나 단유는 그 짧은 순간에 위화감을 느꼈다. 사람을 경계하며 살아온 지난 세월을 경험했던 단유였기에 대휘의 눈빛에 서린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는 읽어내기 어려웠다. ‘뭐지?’ 대휘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을 때 옆에서 툭툭 치는 새벽의 팔꿈치에 정신을 차렸다. “식사하세요.” “아, 응.” “왜요? 형의 미래의 모습 같아서요?” 단유는 쓴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숙취로 괴로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학생들을 데리고 수업을 진행했던 강사도 꽤 힘든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일 년에 단 두 번 있는 일탈의 기회를 탓할 수만은 없었기에 수업을 일찍 마치는 선에서 타협을 했다. 학생들은 강사에게 감사하며 강의실을 나갔다. 단유와 새벽도 금요일 마지막 수업이었던지라 가벼운 얼굴을 하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어젯밤 머물렀던 텐트 쪽으로 발길을 돌려 나가는 중이었는데 본부 앞이 시끌시끌해서 절로 시선이 갔다. “형, 저기 한 번 가보죠?” 새벽이 강하게 호기심을 드러냈다. 이번 축제로 가장 신이 난 사람은 아마도 새벽일 것 같았다. 고등학교 생활하는 내내 공부만 했다는 새벽은 신대륙을 발견한 탐험가들이 저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3일 내내 들떠있었다. 잔디 마당 구석에 설치된 펀치 기계를 때리며 즐거워하고, 막걸리 많이 마시기 대회 같은 것도 하고 싶어 했다. 교정을 거닐다 뭔가 시끌벅적하다 싶으면, 무조건 달려가서 구경하고 참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참석하려 했다. ‘음…햄스터에 가까우려나?’ 쳇바퀴 돌리는 게 뭐가 그렇게 신이 날까 싶지만, 햄스터는 지칠 줄 모르고 원통 위를 신나게 내달리지 않던가. 다가간 곳은 ‘관악 생존왕’이라는 부제가 붙은 관악 게임리그가 펼쳐지는 중이었다. 역대 축제에서 항상 빠지지 않고 실시했던 게임 대회가 이번 봄 축제에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게임은 그때 그때마다 달라지는데, 스타크래프트가 유행할 때는 스타크래프트 게임리그를 진행했고, 롤이 유행할 때는 롤 대회를 진행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배틀 로얄’ 게임이었다. 이번에는 제작사의 후원을 받아, 역대 최대 규모로 진행이 되었는데 아쉽게도 새벽은 예선전에 지원을 못했던 이유로 참여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무대 앞 잔디밭에 앉아 그냥 구경만 할 뿐이었다. “우와, 아깝다. 에임 좋았는데 뒤로 돌아서 오는 걸 못 봤나 보네.” 새벽이 아쉬운 플레이 장면에 눈을 찡긋거렸다. 고등학교 때 몇 번 해보긴 했어도 잘하지는 못했고, 공부에 전념해야 했던 시기이기도 해서 게임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새벽이었지만, 우연히(?) 배틀 로얄 전문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는 상미와 함께 플레이를 하면서 재미를 알게 되었다. 새벽 정도의 초보자에게 꿀팁이 될만한 것들을 하나하나 알려주는 상미의 도움이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 승패가 나뉘는 게임에서 승리를 이어간다면 절로 재미를 붙일 수밖에 없다. 상미야 방송에서 실력을 인정받을 정도로 잘하는 축이었고, 단유도 생각보다 플레이가 좋아서 세 사람만으로도 승리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때 이후로 새벽은 게임에 눈을 떴다(?). “형이 나갔으면 우승했을 건데.” “나 그 정도까진 아닌데.” “생각난 김에 피시방이나 갈까요?” 그냥 보고만 있으려니 몸이 근질근질했던 모양이다. “나중에 공연 시작 전까지만 오면 되니까요.” 해가 떨어질 때쯤,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연예인 축하 공연이 있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무려 ‘리본 소녀’가 등장할 예정이었기에, 이 공연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새벽 뿐만이 아니었다. 오늘 하루동안 단유가 돌아다니며 가장 많이 들은 단어가 아마도 ‘리본 소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람들의 기대심은 크게 오르는 중이었다. 반면에 그런 사람들과 기대심의 척도가 다른 단유는 아무래도 흥이 나질 않았다.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친분을 쌓는다는 목적이 없었다면, 축제 자체의 재미도 못 느꼈을지 모르겠다. 그나마 이 축제에서 재미있는 점이라면, 평소 무뚝뚝하기만 하던 사람들의 면면에 떠오르는 생경한 미소들을 구경하는 재미였다. 그런 미소를 만들기 위해 축제를 진행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런데 형.” “응?” “아까 점심 때 식당에서 한 이야기 정말이에요?” “어떤 거?” “…세상의 진리를 알기 위해 물리학과를 선택했다는 말이요.” “응.” “사실 저도 물리학을 좋아해요. 좋아는 하는데, 잘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니 원래 예전에는 잘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비록 지방에서 올라오긴 했지만, 그래도 서울대 들어와도 잘 할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 조금 꺾였거든요. 당장 형만 해도, 솔직히 형보다 잘할 자신이 없기도 하고요.” 시선을 떨군 채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새벽을 흘깃 본 단유는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낙성대로를 따라 심어진 가로수에 푸른 잎들이 눈 앞을 가득 메운다. “물리학을 전공 후에 삼성 반도체 연구소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거기 리소그라피(Lithography) 개발팀 있잖아요?” 꽤나 구체적인 진로를 잡아놓은 새벽이다. “반도체 산업은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 테고, 특히 반도체 생산의 1인자인 삼성이니까, 거기 들어갈 수 있다면 꽤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죠.” 평소 막 상경한 시골 총각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모든 것에 신기해하던 새벽이지만 확실히 자기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그 길을 정직하게 나아가는 인재였다. 역시 서울대에 들어온 사람들 중 평범한 사람은 없구나, 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그런데 솔직히 고백하면 형만큼 물리학을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속물적일 수 있지만, 물리학은 선택된 사람들만 공부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물리학 전공자들 중에서도 일부만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요.” 진우가 했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반드시 물리학으로 성공할 거다, 라는 자신감이 있었으니까 물리학과를 지원할 수 있었어요. 그러니 물리학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전 물리학과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어요. 자신감도 점점 떨어지고. 얼마 전에 도강했던 수리물리학 수업을 생각하면, 그런 걸 계속 들어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고 그걸 듣고 내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래요.” 새벽이 돌아보며 말했다.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 수는 없잖아요?” 단유가 말없이 있자, 새벽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이렇게 현실 도피를 하려고 피시방을 가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피시방을 가는 이유가 너무 거창하네.” “그런가요?” 하지만 단유는 새벽의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하기 곤란했다. 물리학은 이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의 근원을 추적한다. 분자에서 원자로, 원자에서 핵으로, 핵에서 양성자와 중성자로, 다시 쿼크(quark) 렙톤(lepton)으로. 이 최소의 물질을 완벽히 이해한다면? 지금 고작(?) 탄소라는 원자의 이해 정도로도 남들은 상상도 못 할 마법을 구사하게 되었는데, 만약 물질의 이해도가 격을 달리할 만큼 높아진다면 어찌 될까? 물론 이 이야기를 새벽에게 해 줄 수 없으니, 단유는 씁쓸한 미소로 새벽을 위로했다. “오늘은 새벽까지만 놀자.” “…지금 농담하신 거예요?” “…….” “완전 아재 느낌인데?” 하은에겐 잘 먹히던데. **** 게임에 너무 빠졌던 새벽은 자신을 자책하며 서둘러 피시방을 나왔다. “늦겠어요.” “안 늦어. 7시에 시작이라며?” “앞에서 보려면 서둘러야 하거든요.” 정류장에 갔더니 사람들이 많이 줄 서 있는데, 빈차가 와도 다 타기 힘들 것 같았다. 다른 이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걸어서 후문 쪽으로 가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자전거 있었으면, 빨리 갔을 텐데.” 아쉬워하며 새벽은 단유를 재촉했다. “형은 리본 소녀 안 보고 싶어요?” “딱히. 보더라도 굳이 앞에서 볼 필요까지는 있나 싶고.” “에이, 진짜 형이 리본 소녀를 몰라서 그래요. 리본 소녀 공연은 앞에서 봐야 한단 말이에요.” 새벽만 유난을 떠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모양이다. 주위에 걸어가는, 아니 뛰어가는 이들 중에는 교복을 입은 남, 녀 학생들도 눈에 띈다. 이윽고 학생 잔디에 도착했을 때는, 서울대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었는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행인 점은 아직 리본 소녀의 공연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점이고, 안타까운 점은 그럼에도 이미 학생 잔디 전체가 사람들로 가득해 마땅히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시 늦었네.” 새벽은 아쉬워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나마 무대에 가장 가까운 곳을 찾아 가려는 새벽과 단유는 결국 무대 왼편의 비탈길 쪽으로 향했다. 무대가 멀지는 않지만 불가피하게 측면만 구경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차라리 무대 옆에 설치된 모니터로 무대를 구경하기 위해 군중들의 뒤쪽으로 가는 게 좋지 않겠냐 했더니, 그래도 가까이서 보는 게 좋다고 새벽은 비탈길을 골랐다. “게다가 저기는 대포들 때문에 구경하기도 힘들어요.” 통칭 대포 카메라라고 부르는, 600㎜ 초망원렌즈를 붙인 카메라를 든 팬들의 무리 때문에 그 뒤는 무대를 제대로 구경하기 힘들어 보이긴 했다. “아직 안 왔나?” 마침 가까운 쪽에 설치된 대기실을 까치발로 기웃거리던 새벽의 말에 단유도 고개를 돌렸다. “음, 없나 보네.” “보여요?” “응.” “정말 제가 형만큼 키가 컸으면.” 부럽다는 눈으로 단유를 쳐다보던 새벽은 다시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무대 위에는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인디 밴드의 공연이 진행 중이었는데, 사람들이 밴드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걸로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때 뒤쪽에서 분주한 움직임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더니 커다란 밴이 천천히 길을 따라 오는 중이었다. “왔다!” 누군가의 외침에 주변 사람들의 고개가 미어캣처럼 돌아갔다. 사람들이 주변에 많아 밴은 속도를 내지 못했고, 느릿한 속도로 지나가느라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새벽은 입을 벌린 채 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대박. 처음 봐.” 단유는 아무 말 없이 밴을 쳐다보다가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 사람들의 환호성이 그 무대에까지 들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대에서 열심히 연주하는 이들에게 이 환호성은 별로 달갑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 무대의 주인공은 자신들인데 말이다. 다시 한번 커다란 함성이 터져서 고개를 돌렸더니, 대기실 근처에 선 밴에서 여리여리한 소녀들이 내리고 있었다. ‘소녀’라는 표현하니까 이상하긴 하다. 다들 단유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그때, 그 소녀들 중 한 명이 단유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연은 아니었다. 그녀는 정확히 단유를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단유도 그 소녀를 익히 잘 알고 있었고. “우와, 이 쪽 쳐다봐요!” 새벽은 격앙된 목소리로 환호를 보내며 허공에 손을 저었다. 혹시나 했다. 차가 천천히 지나가며, 길가에 선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그래서 무심코 그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중에 눈에 익은 얼굴이 하나 들어왔다. 주변 사람보다 키가 큰 그 사람은 예전보다 성숙한 이미지긴 하지만 몰라볼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을 여기서 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비슷한 사람이라도 본 걸까 싶었다. 차창에 검게 썬팅이 되어 있어 잘못 본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내려서 돌아보니, 그 사람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리가 있어도 얼굴은 알아볼 수 있었다. “뭐해?” 매니저가 어깨를 툭툭 치며 대기실 안으로 들어갈 것을 종용했다. “아, 네.” 대기실로 들어와 도연은 생각했다. ‘진짜 걘가? 여기 왜? 설마 나 보러?’ 무대에 대한 긴장이 사라지고 대신 물음표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 [590] 얼마면 돼(6) “형 봤어요? 저기, 도연이가 이쪽 보는 거 봤죠? 어, 또 본다?” 새벽이 손을 힘껏 저으며 어떻게든 자신을 어필하려 애를 썼다. 도연과 새벽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손을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의 노력은 별 의미가 없겠지만, 어쨌든 자기만족이다. 반면 단유는 그저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인디 밴드의 무대가 종료된 후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멋있는 공연을 펼쳐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함성이며, 동시에 뒤에 나올 팀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한 함성이었다. 그리고 그 기대감에 부응하기 위해, 화려한 무대용 의상을 차려입은 리본 소녀가 등장하자 함성은 더욱 커졌다. 일치단결한 사람들의 함성 때문인지, 아니면 바로 옆에서 악을 지르는 새벽 때문인지 단유의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무대에 오르자마자 진형을 갖추고 준비자세를 취하자, 곧바로 MR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미 큰 함성이라 생각했던 것 이상의 함성이 관중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그 함성에 보답하기라도 하듯 리본 소녀는 미소를 지은 채 안무와 노래를 시작했다. **** “안녕하세요, 리본 소녀입니다.” “와아!” “첫 무대는 괜찮으셨나요?” “네에!” “감사합니다. 오늘 날씨가 참 좋더라고요, 그렇죠?” “네에!” “이런 날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이라는 서울대에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하게 되어 저희도 무척 기뻐요.” “우와!” 리본소녀가 무슨 말을 해도 대답은 함성이었다. 단유는 옆에 선 새벽의 목소리가 쉬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이 분위기를 이어가기 위해 저희 다음 곡 불러드릴게요. 다음 곡은요, 작년에 여러분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우와!” “「Do like that」입니다.” 사람들은 반주부터 떼창을 하며 노래를 즐겼고, 사람들의 열띤 환호가 더 신이 나는지 리본 소녀는 좀 더 격하게 안무를 펼치며 무대를 이어나갔다. 후렴부를 따라 부르는 새벽과 달리 단유는 팔짱을 끼고 무대를 지켜보았다. 아무래도 예전 일이 있어서 그런지 주로 시선이 도연에게로 쏠렸다. 확실히 무대에서 자신감과 여유가 생긴 표정이었고, 이전에 그녀가 고백했던 두려움이나 공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듯 보였다. 시간이 흐르며, 경험을 쌓으며, 성장한 것이리라. 그때 누군가가 자신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맞구나, 단유?” 현(現) 리본 소녀의 스타일리스트이자 전(前) 갤럭시즈의 스타일리스트였던 도경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얼굴에 단유도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옆에서 벌어진 일에 무슨 일인가 싶어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새벽은 단유가 아는 사람을 만났구나 싶어 다시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리본 소녀의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의지였다. “오랜만이다, 너. 처음에 차 안에서 봤을 때는 긴가민가했는데 말이야. 신기하다, 이런 데서 널 만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여기 학생이야?” “네.” “정말? 진짜 서울대생?” “예.” “와…. 아, 그러고 보니 너 중학생 때도 공부 잘한다고 했었지? 정말 너 난 놈이었구나? 아, 표현이 좀 셌나?” “아뇨, 칭찬인데요. 고맙습니다.” “혹시나 리본 소녀 애들 보러 온 건 아닐까 했는데, 서울대라니. 도연이가 들으면 되게 놀라겠다.” “왜요?” “어? 그냥, 그럴 거 같다고.” 단유는 무대로 슬쩍 시선을 보냈다가 다시 도경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누나는 이번에 꽤 오래 일하시네요.” “그렇지? 아니, 저기 회사가 대우가 좋아. 경력도 인정해주고, 또 애들도 워낙 착해서 나도 일하기 편하고.” “잘됐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때 무대가 끝나면서 대화를 잇기 어려울 정도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무대에 머물렀다가 다시 서로에게로 향했다. “너 전화번호 바뀌었어?” “아, 예. 얼마 전에 핸드폰 새로 사면서 바꿨어요.” “아, 그렇구나. 그럼 번호 알려줘. 그래도 우리가 남도 아닌데 통화는 하고 살자고.” 단유는 순순히 번호를 알려주었다. 번호를 저장하며 도경이 피식 웃었다. “코찔찔이 때 봤던 애가 이렇게 커서 서울대에 입학하다니. 세월 참 빠르다. 그치?” “그런가요?” “아, 도연이도 너 보면 되게 반가워할 텐데.” “그럴 리가요.”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도연이 마이크를 꼭 쥐고 해맑게 웃으며 관중들의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아냐, 그때 이후로도 가끔 나한테 물어보더라고. 너 어떻게 지내는지 아냐고.” 물론 그건 잠시였고, 그 이후로는 활동이 바빠서 다른 이야기를 꺼낼 겨를이 없었다. 사실 살다 보면 이런 일은 자주 겪게 마련이다. 급속도로 가까워졌다고도 별 이유 없이 멀어지기도 하는 것. “예쁘지?” “…네.” 무대 위의 저들은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고, 예쁘게 보이기 위해 들인 시간을 고려하면, 안 예쁠 수가 없다. “자주 연락하자. 가볼게.” “예. 가세요.” “공부 열심히 하고. 혹시 아니? 나중에 서울대생 도움을 받을 일이 생길지? 아, 너 무슨 과야?” “물리학과요.” “어? 그거 되게 어려운 과 아냐?” “재미있어요.” “와, 너 그렇게 말하니까 되게… 좀 그렇다? 수능 만점 받은 애가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하는 거 같애.” 단유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도경도 자기 할 일이 있는데, 여기서 죽치고 있을 순 없었기에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대기실로 향했다. 그 뒤를 지켜보다 다시 무대로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 무대와 앵콜 공연까지 마친 후, 격한 함성으로 그들의 마지막을 아쉬워하는 대중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퇴장하는 리본 소녀들은 곧장 밴으로 향했다. 짧은 거리에서 그녀들을 향해 온갖 구애의 함성을 보내는 팬들에게 짧은 목례와 손인사를 보낸 리본 소녀들이 밴에 오르고, 천천히 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행사 진행 요원들이 길 주위의 사람들을 뒤로 물리면서 밴이 서서히 나아갔고, 천천히 왔던 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새벽과 단유가 있는 부근까지 서행하던 중, 갑자기 창문이 내려가며 도연이 얼굴을 드러냈다. “와아!” 사람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고, 도연은 손을 조그맣게 내밀고 흔들어 답례했다. 그 와중에 도연의 시선이 단유에게로 향했다. “형, 형! 이쪽 봐요, 이쪽! 진짜, 대박!” 새벽의 호들갑에도 단유는 그녀를 조용히 지켜봤다. 도연은 단유에게 시선을 고정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풀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여주는 선에서 최대한 예의를 보였다. 도연이 좀 더 진한 미소를 짓는가 싶었는데, 창이 올라가며 차는 그들을 지나쳐갔다. “와, 나 완전 가까운 데서 봤어. 봤어요?” “응.” “도연이 분명히 이쪽 본 거 맞죠.” “그럴걸.” “혹시 나 본 건가? 내가 아까 되게 크게 소리 지르고 손 막 흔들고 그래서 본 건가? 그런 걸까요?” “그럴지도?” 새벽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발을 구르다, 주위의 온도조차 떨어뜨릴 정도로 심하게 차분한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형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뭐가?” “연예인 이렇게 가까이 봤는데?” “그냥.” “…아 맞다. 형은 연예인 많이 봤었구나.” “뭘 또 많이야.” “예전에 가디스R도 직접 보고 그랬잖아요.” “옛날이야.” “옛날이라도. 와, 형 지금 모습 보니까 진짜 다른 세상 사람 같아요. 마치 ‘연예인? 그까짓 거’ 막 이런 모습이에요.” 단유는 새벽의 어깨를 두드려준 뒤 다시 무대로 고개를 돌렸다. 이미 무대에는 또 다른 공연팀이 올라와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아니요, 다 봤는데요.” “그럼, 가자.” “아, 예.” 두 사람은 곧 학생 잔디 행사장을 빠져나와 자연대 텐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축제의 마지막 밤, 마지막 일탈을 위해 그들의 남은 에너지를 끌어모아 분출하고 있었다. 단유는 도연과의 만남도 그 일탈의 연장선상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내일이 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연스럽게 잊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다시 다른 축제를 옮겨 다니며 무대를 펼치듯, 그래서 지난 무대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듯, 자신에 대한 것도 금방 잊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새로운 무대 위에서, 자신은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서로의 길을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 “진짜 걔 맞아요?” “맞더라니까. 내가 가서 이야기까지 했다고.” “누구 이야기에요?” “예전에 도연이가 교육부 주관 홍보 영상 찍은 적 있잖아? 그때 같이 찍었던 애.” “아, 그 잘생긴 애? 그때 중학생이라지 않았나?” “그때 중학생이었으니까, 지금은 대학생이지.” “와, 그런데 그냥 대학생도 아니고 서울대학교 학생?” “그렇지.” “대박. 완전 공부 잘했나 보다.” “그때도 꽤 똑똑하다고 소문났던 애야. 내가 걔를 중1 때 봤는데….” 도경의 이야기가 이어지던 와중에 도연은 잠시 스쳐 지나가며 봤던 단유의 얼굴을 떠올렸다. 차마 이름은 부르지 못하고 그저 손만 흔들었는데, 그가 알아봐 주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다. 만약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면 조금 감흥이 식었을지도 모르겠다. ‘변한 게 없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이 참 그렇다. 시간이 가면, 누구나 사람은 변한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변하지 않는 모습을 꿈꾸기도 한다. 그 모습 영원하기를. 그런데 그 소년은 남부럽지 않은 모습으로 자랐을 뿐 아니라, 그 시절의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찰나의 순간이라 정확한 판단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여자의 감’이 말한다. 그는 변하지 않았다고.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거야?” 지금 리본 소녀를 맡은 매니저는 맡은 지 이제 2년째였고, 당시의 매니저는 부장으로 진급한 뒤 자신들과 후배 걸그룹과 보이그룹 각각 1팀씩을 총괄 관리하고 있다. 그래서 현 매니저는 단유를 모른다. 도경은 친절하게 ‘김단유’란 아이의 필모그래피를, 자신이 그의 개인 매니저인 양, 줄줄 읊으며 리본 소녀와 또 어떤 관계였던지를 이야기했다. “도연이 무대 공포증을 고쳐 줬다고?” “고쳐 줬다기보다는 고치는 데 도움을 준 거죠.” “그게 그거지. 그럼 도연이가 늘 말하는 고마운 사람이 걔야?” “걔지?” 도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눈에 담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도시의 불빛들이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 지난 밤, 서울대 재학생들은 그들의 마지막 축제를 화려하게 불태웠다. 그리고 물리학과 학생들은 밑 빠진 독 채우듯 술로 위를 채워 불태웠다. 불꽃이 타고 남은 검은 재가 흩날리듯, 검은 하늘이 물러가고 어슴푸레한 새벽이 찾아온 뒤에야 귀소 본능을 발휘했다. “괜찮아?” “윽. 괜찮아요.” “데려다줄게.” “아니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비틀대며 자연대 건물 뒤편의 주차장으로 향한 새벽은 주차장 구석에 거치되어 있던 자전거를 꺼내려 했고, 단유는 서둘러 새벽을 막았다. “음주운전이야.” 결국 새벽을 부축하여 그의 자취방에 데려다준 후에야 단유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늦은 새벽, 문을 열고 들어서니 서늘하리만큼 넓은 거실이 단유를 반겼다. “킁.” “깨웠어?” “킁.” “미안하다. 들어가서 자.” 호빵은 단유의 발밑에서 꿈지럭거리다 코를 몇 번 킁킁대더니,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거실을 질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급수기를 몇 번 핥고는 이전 집에서부터 쓰던 자신의 방석 위에 올라가 자세를 잡고 엎드려 단유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술 냄새가 좀 나나?” 들어오기 전에 바람을 이용하여 몸에 밴 냄새를 조금이나마 덜고자 했으나, 향기 분자가 배인 옷이 고작 바람에 탈취가 되진 않는다. 단유는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렸다. “단유야?” “…응. 안 자고 뭐 해?” “방송 중이지.” “그럼 계속해.” “윽, 술 냄새. 취했냐?” “다 깼어.” 술도 마시면서 익숙해지나 보다. 조금 어질어질하긴 해도 그저께처럼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다. “알았어. 너무 늦게 다니지 말라고. 걱정되니깐.” “누가 할 소리.” “난 집 밖으로 나갈 일이 별로 없으니까.” “…스토커 때문에?” “응? 아, 그것도 그렇지만, 원래 잘 안 나가. 내 생활 리듬이 좀 그래. 그리고 이미 집에 먹을 거 천지고 배고프면 시키면 되니까, 굳이 나갈 일이 없잖아? 생리대도 몇 달 치 거를 한 번에 사놨고.” “야.” “알았어, 알았어. 얼른 들어가 자.” 상미는 손을 삐죽 들어 올려 보이고는 방으로 쏙 들어갔다. 단유는 잠시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위층으로 올라가려다, 계단에서 발을 떼고 상미네 방으로 다가갔다. 문을 두드리니, 안에서 ‘들어와’란 허락이 떨어졌다. 방으로 들어가는 대신, 문만 살짝 열었다. 벌써 이어폰을 끼고 마우스를 잡은 상미의 모습이 보였다. “어, 왜?” “…잠깐 이야기 괜찮아?” “어, 괜찮아. 지금 잠시 쉬는 시간이야.” 상미는 이어폰을 귀에서 빼내곤 앉은 채로 몸을 돌렸다. “거기 있지 말고 들어와.” “그냥 별 이야기 아니고 물어볼 게 있으니까.” “뭔데.” “스토커, 요즘은 안 보여?” 상미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내가 잠시 방송 안 했잖아? 이사도 하고 그러면서 며칠 쉬어서 그런가, 안 나타나네.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겁먹었던 거 같애.” “다행이네.” “응. 어쩌면 스토커 아니고 그냥 장난일 수도 있겠다 싶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다시 나타나면 꼭 연락해.” “알았어. 그러니까 걱정 그만하시고 올라가서 쉬세요. 집주인님.” “집주인은 무슨.” “아, 네. 투자자님.” 단유는 피식 웃으며 방문을 닫았다. 그러나 곧 웃음은 사라지고, 단유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팼다. 이런 식의 대응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뭔가 일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하다니. 일이 생기기 전에 무슨 조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권능’이 아무리 초월적이라 해도 이런 사소한 위협에 대응을 못 한다면 무소용이다. 어쩐지 자신의 능력이 모자라 이런 불안감을 느끼는 것도 같다. ======================================= [591] 사랑은 아무나 하나(1) “교수님, 조교가 학부생들 휘트스톤 실험 보고서 들고 왔는데요, 책상 위에 놓고 가겠습니다. 네. 전원 제출했다고 합니다. …예? 아, 예. 알겠습니다. 검토 끝내고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네? 아, 예.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예, 교수님. 들어가십시오.” 통화를 마친 대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으려 하는데, 갑자기 벨이 울렸다. 화면을 보니 교수님의 전화라 혹시 교수님께서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셨던가 싶어 지체하지 않고 곧 전화를 받았다. “예, 교수님. …아, 죄송합니다. 말씀 끝나신 줄 알고…. 아닙니다. 잘못했습니다. 네. 아닙니다. 불만은요. 제가 성격이 급해서 실례를 했습니다. 네, 교수님. 들어가십시오. 예….” 교수님이 먼저 전화를 끊으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통화가 종료되었다는 화면이 뜨는 것을 확인 후, 대휘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시다바리 짓이나 할 줄은 몰랐다. 자신은 천출도 아니고, 서울대 학부를 졸업한 라인이지 않은가? 고작 막내라는 이유로 자기 공부할 시간도 버려가며 심부름이나 하려고 이 짓을 해야 한다는 게 아주 불만스러웠다. 게다가 꼬장꼬장한 교수는 택도 없는 예를 지키라며 사사건건 시비다. ‘시비’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대휘는 핸드폰을 차마 집어 던지고픈 마음이었지만, 최신형 스마트폰의 가격이 무시무시한 관계로 그저 힘주어 쥐었다가 얌전히 호주머니에 집어넣을 따름이다. “후우.” 오늘도 새벽까지 연구실에 붙잡혀 있다 가야 할 것 같다. 학부생들 실험보고서야 소수의 얼토당토않은 것들을 제외하곤, 거의 비슷비슷한 수준이라 딱히 신경 쓸 건 없지만, 저 많은 양을 일일이 체크해야 한다는 귀찮음에 대휘는 뒷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 “주말 잘 쉬셨어요?” “친구 면회 갔다 왔어.” 하은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3시간을 달려 강원도의 한 군부대로 찾아간 단유는 오랜만에 채윤을 만나 회포를 풀었다. 병장이 된 채윤은 그 동안 면회 한 번 오지 않은 단유에게 섭섭하다는 시늉을 하며 반가움을 표시했고, 단유는 넘칠 정도의 먹을거리들을 선물하여 미안함을 드러냈다. 아무튼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면회요? 아, 군대요?” “응.” “저희 동기 중엔 군대 간 애들이 없어서 잠깐 생각했네요. 아, 형은 군대 다녀오셨어요?” “아니.” “언제 가실 건데요?” “나 안가.” “네? 정말요? 왜요?” “5급이야.” “5급…이 뭔데요?” “전시근로역. 쉽게 말하면 민방위.” “그럼 면제에요?” “면제는 아니지만, 면제랑 비슷해.” “와. 신의 아들이셨네요?” “정 반대다.” 단유는 입꼬리를 씰룩이며 걸음을 옮겼다. 새벽도 눈치가 있어서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강의를 들으러 가던 중, 자연대 실험동 근처에서 대휘를 만났다. 지난 축제 때 안면을 익힌 사이라 단유와 새벽이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어? 어, 그래. 신입생들, 맞지?” “네. 지난주에 식당에서 인사드렸습니다.” “그래, 그래. 기억난다. 강의 들어가는 거야?” “네.” “그래, 수고해라.” 딱 그 정도의 인사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후배는 선배에게 인사하고, 선배는 적당히 아는 척을 해주고. “다크 서클 장난 아닌데요? 저 선배?” “왜? 네 미래 같아?”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아직은 먼 미래. 새벽은 신의 아들이 아니라 군대도 가야 하고, 군대를 다녀오고 다시 학사 졸업을 한다 치면, 6년은 더 지나야 실감할 미래다. **** 오늘 수강해야 할 수업들을 모두 듣고 나왔을 때는 오후 4시를 겨우 넘긴 시각이었다. 볼 일이 있다며 새벽과 헤어진 단유가 향한 곳은 집 근처의 운전학원이었다. 하은과 함께 드라이브를 하던 중에 면허를 따라는 독촉이 있었고, 이를 승낙한 단유였다. “어서 오세요. 수강하러 오셨어요?”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접수 안내원이 상냥하게 물었다. 단유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접수원의 친절에 응대했다. 안내원의 도움을 받아 등록 서류를 작성하여 제출하고 기다리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바깥에서 한 아주머니와 중년 사내가 말다툼을 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가르치려면 똑바로 가르쳐요! 왜 욕을 하고 그래요?” “오죽하면 욕을 하겠냐고요! 아주머니가 이대로 차 몰고 나가면, 사고가 날 게 뻔하니까 그러지 말라고 가르쳐 준 거잖아요?” “어이가 없네? 내가 사고 내는 거 봤어요? 봤어?” “안 봐도 뻔하잖아요! 신호등 보라고 몇 번을 말해요? 빨간 불 몰라요? 빨간 불?” “처음 연습하는 거니까, 헷갈릴 수도 있잖아!” “빨간 불을 어떻게 헷갈려?” “헷갈려? 당신 지금 반말이야? 반말하는 거야, 나한테?” “당신이 먼저 했잖아! 이 사람이….” “당신? 당신? 언제 봤다고 당신이야, 당신이!” “…나 참 기가 막혀서.” “기가 막히긴 누가 기가 막혀? 내가 더 기가 막혀, 내가. 내가 내 돈 주고 배우는데, 아저씨는 내 돈 받아서 가르치는 사람 아냐? 어디서 막말이야, 막말이.” “이 아줌마가…. 아줌마, 내가 가르치는 사람인 걸 알면 말을 들어야 할 거 아냐! 신호 지키라고, 악셀 밟지 말라고 하면 그대로 하면 되잖아! 왜 하란 건 안 하고, 하지 말란 건만 계속 해!” “왜 소릴 질러, 왜! 왜! 아주 이러다 한 대 치겠다, 치겠어?” 지켜보는 몇몇 사람들과 나서서 말리는 몇몇 사람들로 인해 시끌벅적해지는 상황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니, 뒤에서 단유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안내원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등록 다 됐는데요’라고 말한다. “사실 저런 일 잘 안 일어나는데. 저희 강사님들 전부 친절하시거든요?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네.” “가끔 인터넷에 저희 강사님들 불친절하다는 글도 올라오는데, 그거 전부 오해에요. 일부 사람들이 괜히 앙심을 품어서 그래요. 사실 요즘 운전 면허 따기가 쉽지 않다고 하잖아요? 법이 엄해져서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시험 합격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강사님이 좀 더 타이트하게 가르쳐주시는 건데, 그걸 오해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단유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안내원이 건넨 접수비 내역서를 확인했다. 그 모습을 보고 안내원이 또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저희 학원 수강생들 합격률이 주변에서 제일 높은 편이에요. 그만큼 저희 강사님들 가르치시는 실력도 좋으시고요, 여기 차들도 웬만큼 관리를 해서, 사고도 잘 안 나요. 다른 안 좋은 학원들 가면, 차가 안 좋아서 연습생분들이 차 운전하기 힘들다고 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혹시라도 접수 취소를 할까 걱정했던 걸까? 단유는 내역서를 곱게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어디로 가면 되죠?” “잠시만 기다리시면, 강사님이 오실 거예요. 아, 최 선생님. 이쪽이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중년 강사가 안내원의 부름에 다가왔다. “여기는 오늘 등록하신 김단유씨고요, 여기는 최필연 강사님. 저희 학원 최고 베테랑 강사세요.” 간단히 목례와 악수로 인사를 갈음하고, 단유는 강사를 따라 사무실을 나왔다. 바깥에는 여전히 아주머니와 강사가 침을 튀기며 다투는 중인데, 말리고 중재하는 사람들이 끼면서 아까보다는 소란이 잦아든 상황이다. 특히 강사였던 중년 사내는 동료로 보이는 이들에게 두 팔이 잡혀 끌려가는 와중에, 옆에서 다독이는지 더는 입을 열지 않고 대신 얼굴만 붉힌 채였다. 단유의 시선을 눈치챈 최 강사가 변명처럼 말했다. “저 사람이 원래 다른 사람한테 막말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조금 흥분했나 보네요.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운전면허 시험 난이도가 올라가면서 자동차학원에서도 꽤 엄격하게 지도를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조금 다그쳤던 모양이에요. 그게 다 수강생 분들이 시험을 잘 통과할 수 있게 하려는 거거든요. 아시죠?” “그렇군요.” 단유의 말에 강사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시험 합격하는 거 어렵지 않아요. 강사가 말하는 것만 잘 지켜 주시면 되거든요. 대부분 그걸 잘 안 지켜서 떨어져요. 머리가 나쁜 사람들도 아닌데, 시험장에서는 금방 까먹는단 말이죠. 수강생분들은 그저 저희가 알려주는 노하우대로 따르기만 하면 운전 시험 합격하는 거, 껌도 아닐 겁니다.” 아주머니도 당사자가 물러났으니 더 화를 내지 못하고, 그저 씩씩대며 자리를 떠났다. “요즘 김여사, 김여사 하는 말 들어보셨죠? 그게 다 저런 아주머니들 때문이에요. 자기 성격대로만 하려고 하니까. 그런데 운전이라는 게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물론 운전자 본인 원칙을 지켜가며 운전해야 하는 게 맞는데, 운전이란 건 다른 자동차들도 함께 신경을 써야 하는 거란 말이죠. 그래서 전방 주시가 중요하고, 사이드 미러를 틈틈이 확인하면서 주위 상황을 계속 체크해야 하는 거예요. 신호를 지키는 건 당연한 거고, 운전 중에 핸드폰 쓰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말고, 사이드 미러나 숄더 체크 같은 건 수시로 해줘야 사고도 안 나고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저런 아주머니들은 그런 걸 잘 못 해요. 그저 자기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지, 그런데 자기가 잘하지도 못해요. 깜빡이도 안 켜고 차선 변경하거나, 급정거, 급출발 같은 거, 다 저런 분들이 하는 거죠.” 그래도 같은 강사 편이란 걸까? 강사의 편을 드는 것 같은데, 어쩐지 자기 말을 잘 들으라고 돌려 말하는 기분이다. 듣는 거야 단유가 잘하는 것이니까 별문제가 안 되는데, 문제는 다른 사람에 대한 근거 없는 험담을 들어야 한다는 게 문제다. “강사님들은 대체로 말씀을 험하게 하시는 편인가요?” “응?” “수강생들이 잘 합격할 수 있도록 엄하게 가르치고, 그 과정에서 말씀도 험하게 하시는 편이냐는 물음이었습니다.” “아니, 그렇진 않죠. 저희도 친절하게 하는데, 가끔 저런 분이 계시면 이제 조금 엄하게 한다는 거지, 말을 막 하진 않죠.” “알겠습니다.”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사실 운전이라는 게 목숨이 걸린 문제잖아요? 안 그래요? 운전 잘못해서 사고라도 나면 죽을 수도 있어요. 자신의 목숨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목숨도 위험하다고요. 그러니 운전은 늘 조심해서 해야 하는 거예요. 자신의 운전 실력을 자만하지 말고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건데, 그걸 저희들이 알려주는 거죠. 까먹지 말라고. 모르면 사고가 나요. 사고가.” 단유의 물음이 버르장머리없는 젊은 놈의 말대답처럼 느껴졌던 모양이다. 강사의 태도가 조금 까칠해졌다. 그렇지만 그 강사의 주장은 솔직히 틀리다고 지적할 부분은 없었기에, 단유도 수긍했다. 대신, “도로교통법 시행령 제71조에 따르면, 학원의 귀책사유에 해당하면 잔여 교육시간에 해당하는 수강료 전액을 반환하도록 되어 있다더군요.” “네?” “기능 강사, 학원 등의 무성의 역시 학원의 귀책사유가 될 수 있다고요.” “뭡니까?” 강사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저 아주머니도 강사님 표현처럼 ‘몰상식하게’ 보일 정도로 목소리를 높이는 것보다 깔끔하게 반환 청구하고 학원을 떠났으면 될 일이다, 이거죠. 강사님 말씀처럼 모르니까 그런 거겠죠.” 그랬으면 괜히 사람들 모인데서 목에 핏줄 세우며 자존심 대결을 할 이유도 없을 건데 말이죠, 라는 단유의 말에 강사는 헛기침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 뒤로 조용히, 학원 첫날 강의를 받을 수 있었다. ======================================= [592] 사랑은 아무나 하나(2) 축제만 끝나면, 오롯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해외 자산 이전과 이사도 마무리되었고, 축제 바로 전에 번역 작업도 끝을 냈다. 축제로 어수선했던 학교도 다시 평소의 일과로 돌아갔으니, 단유는 강의실과 도서관을 오가며 공부만 하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하은에게 준 선물이 스노우볼이 되었던지, 단유는 생각지도 않던 운전면허를 따느라 시간을 사용해야 했고, 중간고사 이후 쏟아지는 리포트들 때문에 꽤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중간고사가 있기 전의 리포트는 얼마 되지도 않았고, 있어도 그렇게 시간을 많이 요구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입생들에게 ‘대학 리포트란 이래야 한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나마 번역 작업을 하느라 타이핑에 익숙했던 단유였기에 주제만 정확히 정해지면 빠르게 리포트를 작성할 수 있었다. 인터넷에서 익히 악명 높았던 조별 과제라는 것도 꽤 신경을 많이 쏟게 만들었다. “혹시 조장 하실 분?” 한 강의실에서 3달 이상 함께 수업을 듣다 보니 이름은 정확히 모르더라도 대충 얼굴은 익힌 상황이다. 사실 얼굴을 모르더라도 모인 이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같은 조에 꽤 유명한 이가 섞여 있으니 말이다. “형이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오빠가 하세요. 이 중에 제일 연륜이 많으시니까 잘하실 거 같아요.” 이전의 조별 과제 당시와 다르게 이번의 학생들은 단유를 적극적으로 추천했고, 단유는 애써 거절할 핑계를 찾을 수 없었다. 거기다 지난번에 조별 과제를 한 번 경험했던 것이 도움되기도 했다. “그럼 제가 조장할게요.” “와아.” 조촐한 조장 취임 축하 박수가 지나가고, 단유는 빠르게 역할을 지정해주었다. “이번 조별 과제는 발제와 해답을 동시에 해야 하니까, 브레인스토밍을 적극적으로 해야 할 거 같다. 시간 정해서 다 같이 모이는 시간을 갖고, 그 외는 각자 주어진 역할 대로 과제 수행을 하는 거로.” “예.” “그전에 서로 인사나 하죠.” “안녕하세요. 저는 물리천문학부 1학년 강태준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단유를 제외한 네 사람이 서로를 소개했다. 자연대는 공대만큼이나 성비가 불균형적이기로 소문났는데, 특이하게도 단유의 조는 여자 둘에 남자 셋이라는 이상적인(?) 비율을 자랑했다. “안녕하세요. 이보영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장하나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고, 이번 조별 과제에서 꼭 좋은 성적 받을 수 있길 바랄게요.” 유독 두 여자의 소개 타임에 다른 두 남자는 입꼬리를 떨어뜨릴 줄 몰랐다. 정직한 녀석들,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네 조에 여자가 둘이라면서요? 아쉽다. 내가 형네 조에 들어갔어야 하는데.” “여자 조원이 있다고 점수를 더 받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기분이 좋잖아요. 형은 안 그래요?” 단유가 어깨를 으쓱거리자, 새벽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단유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상미 누나 같은 분을 친구로 두셨으니 눈에 찰 리가 없겠죠.” “무슨 뜻이야?” “솔직히 난 상미 누나가 무슨 연예인 줄 알았다니까요. 안 그래요?” “모르겠는데.” “자주 봐서 모르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아니면 제가 시골에서 올라와서 그런건지. 아무튼 상미 누나 정도면 거의 외모로는 탑 아닌가요? 우리 과에도 그 정도 외모 되시는 분은 없어 보이던데.” “다른 건 모르겠고, 방금 네 발언은 총여(총여학생회)에 걸리면 분명 문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새벽은 입을 막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쓸데없는 데 신경 쏟지 말고, 공부나 해.” “그래도 부러운 건 사실이네요.” “그런 게 부러우면 차라리 연애를 하던가.” “날이 좋아서 그런지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그렇네요. 그런데 형은 왜 연애 안 해요?” “공부할 시간도 없는데, 연애는 무슨.” “그래도 형은 키도 크고 얼굴도 되니까, 언제라도 연애할 수 있겠죠? 저는 키도 작고, 얼굴도 안되니까 아마 안 될 거야.”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에 단유는 도서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새벽은 ‘대학에 오면 바로 여자친구를 사귈 줄 알았는데’라는 둥, ‘대학 다니는 동안 소개팅이라도 한 번 할 수 있을까’같은 시답잖은 말을 중얼거리며 단유의 옆을 따랐다. 도서관에 다다를 때쯤 뒤에서 단유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김단유?” 단유와 새벽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단유 맞지?” 단유는 순간적으로 미간을 좁혔다가 곧 상대의 이름을 기억해내곤 얼굴을 폈다. “정유진.” 중학생 시절, 자유학기제 홍보대사 선발과정에서 만났던 그녀를 이 자리에서 이렇게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야, 너 정말 오랜만이다? 처음에 뒷모습만 보곤 너 아닌 줄 알았다?” 새벽은 동그래진 눈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시선을 돌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베이지색 블라우스와 검은 핫팬츠, 핑크색 양말에 하얀 운동화는 자연대에서는 보기 힘든 패션이었던데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조그만 얼굴이 평범해 보이지 않은 탓이다. “그래, 오랜만이다.” “거의 3년? 4년만인가?” “그럴걸.” “연락 한 번 하랬더니, 죽어도 연락을 안 해. 내가 연락을 해야 겨우 전화 받더니, 나도 모르게 전화번호 바꿨더라?” “핸드폰을 바꿨어.” “요새 누가 핸드폰 바꾸면서 전화번호를 바꾼다니? 너 일부러 전화번호 바꾼 거지? 나랑 연락하기 싫어서.” “그럴 리가.” “아무튼, 너 여기 다니는 거 맞지.” “응.” “어떻게 그동안 얼굴 한 번을 못 마주쳤지?” “이번에 입학했거든.” “이번에? 왜? 혹시 재수, 아니 삼수했어?” “고등학교 마치고 여행 갔었어.” 단유는 짧게 대학을 늦게 입학한 이유를 설명했고, 유진은 입을 동그랗게 벌리며 감탄을 했다. “대단하다, 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너도 여기 다녀?” “그래. 너 때문에 여기 다닌다.” “나?” “중학교 때 봤던 네 모습에 충격받았잖아? 그냥 외모만 가지고는 성공할 수 없겠단 생각이 들어서, 공부도 잘하고 끼도 많은 배우가 되자는 욕심에 고등학교 때 꽤 열심히 했더란 말이지. 그랬더니 이렇게 서울대에 들어오게 되었지. 사실 점수는 잘 받지 못했는데, 운이 좋았어. 우리 과에서 거의 꼴지로 들어오다시피 했거든.” 유진은 부끄러울 수도 있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이야기했다. “아, 나는 언론정보학과. 넌?” “물리천문학부. 물리학과 지망이야.” “우와, 역시 김단유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 소속사는?” “없어.” “전혀 없는 거야? 아니면 있었는데 그만둔 거야?” “계약한 적 없어.” “아깝다. 야, 혹시 생각 있으면 우리 소속사 들어올래? 내가 잘 말해줄게.” “생각 없어. 그리고 너 도서관 가는 길 아니었어?” “아니. 난 여기서 버스 타고 나갈 건데?” “나는 도서관에 가야 하니까,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 길 위에서 쓰잘데기 없는 잡담이나 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단유의 태도에 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너, 또 이렇게 도망가려고? 너 나 안 반가워? 난 되게 반가운데? 넌 모르겠지만, 넌 나의 멘토야.” “멘토?” “말했잖아? 너 때문에 서울대 오게 됐다고. 그런데 멘토가 이렇게 날 푸대접하면 되게 서럽다? 그리고 우리 친구잖아? 아냐?” 단유는 머리를 긁적이다 옆에 선 새벽을 보았다. “여기 얘랑 같이 도서관 가야 하니까, 다음에 이야기하자.” “여긴?” “아, 안녕하세요. 이 형이랑 같은 물리학과 지망인 1학년 강새벽이라고 합니다.” “말투에 살짝 사투리가 섞인 거 같은데?” “김천에서 왔거든요.” “아, 그렇구나. 현역?” “네. 고등학교 마치고 바로 왔습니다.” “그렇구나. 반가워요. 정유진이라고 해요.” “네.” 속도 없이 히죽 웃는 새벽을 보며 단유는 고개를 흔들다 유진의 시선에 움찔했다. “내놔.” “뭐.” “휴대폰.” 단유는 어기적거리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고, 낚아채다시피 핸드폰을 뺐든 유진은 곧 전화번호를 따낸 뒤에 돌려주었다. “나 되게 바쁜 사람인 거 알지? 바쁘니까 이 정도로 해 줄게. 연락하면 전화 받고, 언제 한 번 따로 만나서 이야기 좀 하자. 어떻게 지냈는지 되게 궁금하니까. 전화 피하지 말고.” “안 피해.” “그 말, 꼭 기억한다? 어느 과인지도 들었으니까, 전화 안 받으면 자연대 동으로 쳐들어간다. 오케이?” 유진은 처음처럼 쾌활하게 인사를 보낸 뒤, 먼저 몸을 돌렸다. “우와. 형.” 단유는 새벽의 풀린 눈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할지 익히 짐작한 단유는 새벽을 보채, 도서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니, 어떻게 형은 저런…누님도 알고 계시는 건가요? 혹시 형은 아는 사람들이 전부 저런 연예인급들인가요? 아니, 아까 소속사 어쩌구 하던데, 혹시 진짜 연예인? 정유진이라고 했나? 핸드폰 치면 나오려나?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중학교 때부터 알게 된 사이 맞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혼자 도서관엘 가는 거였는데. ****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어. 얼른 타.” 이마에 맺힌 땀을 대충 수건으로 찍어 닦아낸 리본 소녀는 밴에 오른 뒤에야 한숨을 돌렸다. “저희 행사 하나 더 남았죠?” 리더의 물음에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것만 하면 오늘은 끝이다.” “날이 점점 더워지는 것 같아요.” “올해는 여름이 더 빨리 찾아오는 기분이야. 다음 주까지만 대학 행사하면 일단 당분간 활동 없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컴백 준비하는 건가요?” “다음 주부터는 아마 레슨 시간이 두 배로 길어질 거야.” “시간 잡혔어요?” “보컬 레슨은 4시부터 8시까지. 댄스는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새벽 2시까지지만, 연장될 가능성이 있다?” “알면서 묻냐?” “그럼 그 전까지 저희 먹고 싶은 것 좀 먹으면 안 될까요?” “그러든지. 난 안 말린다.” “저래놓고 나중에 연습실에 저울 가져다 놓으실 거죠?” 다음 행사 일정인 대학교에 가기까지 소녀들은 각자 먹고 싶은 음식들을 하나씩 대며 허기를 참아야 했다. “다들 그냥 한숨 푹 자라. 체력 아껴야지. 카메라 없을 때 ‘비글돌’ 시늉하려 들지 말고, 카메라 켜져 있을 때나 끼들 부려 좀.” “네이, 네이.” “아, 그리고 다들 입 조심하고. 이번에 또 스포하면 너네 가만 안 둔다고 대표님이 직접 말씀하셨어.” 경고를 잊지 않고 던진 매니저는, 체력 보존을 위해 잠들 자라며 종용한 뒤 침묵을 지켰고, 갓 행사를 마친 소녀들도 피곤함에 못 이겨 하나둘 눈을 감기 시작했다. 노을이 지며 오묘한 색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던 도연은 잠이 오지 않았다.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며칠 전 우연히 봤던 그 얼굴이 떠오른 탓이다. 아무 감정이 없었다면, 그냥 잘 지내는구나 생각하고 말았을 텐데, 이렇게 계속 생각이 나는 이유는 단순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그동안 회사 몰래 다른 보이 그룹 아이돌과 연애를 했던 멤버가 없던 건 아니다. 하지만 도연은 한눈팔지(?) 않았다. 잘생기고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소년들을 보면서도, 누군가와 계속 비교하게 되었다. 그 ‘누군가’는 자기 앞에서 춤을 추지도, 노래를 부르지도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 멋있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쉽게 잊히지 않았다. 특히 그 사람이 자신에게 해줬던 말들, 충고들로 인해 크게 도움을 받았다. 나이보다 성숙하고 진지했던 언행들이 그를 존경하게 만들었고, 그를 잊지 못하게 했었다. ‘게다가 서울대생이라니.’ 뇌섹남?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섹시한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도연은 저도 모르게 볼이 붉어지는 기분이었다. ‘그 당시 목소리도 좋았던 것 같은데.’ 문득 도연은 도경이 그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음을 떠올렸고, 언니의 전화로 한 번 전화해볼까, 충동을 느꼈다. 뒤를 슬쩍 돌아보니 도경은 챙겨온 무대 의상들의 정리를 끝내고 잠이 든 상태였다. 유리창에 머리를 기대로 잠든 도경을 보며, 나중에 몰래 부탁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 “여기야.” 단유는 주위를 둘러보다 곧 손을 번쩍 들고 해맑게 웃는 유진을 보며 살짝 혀를 찼다. 곧 다시 만나서 회포를 풀자던 유진의 말에 그러마 했지만, 이렇게 빨리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던 탓이다. “야, 솔직히 가능했다면 어제 그렇게 놔주지도 않았어. 어제는 내 개인 스케줄이 정해져 있어서 시간 빼기가 어려웠으니까 그냥 얌전히 보내준 거야. 고마워해.” “고마워해야 할 상황인 건가?” “아님 말던가. 아, 여기는 와봤어?” “아니.” “여태 여기도 안 와 보고 뭐했대?” 대학 내에 있는 카페테리아였는데, 단유는 처음 들린 곳이었다. 주위에는 빈테이블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학생들이 자주 찾는 곳이라고 했다. “나 올해 입학한 신입생이거든?” “아, 그렇지? 계속 깜빡하네. 그럼 내가 선배네? 기분이다! 먹고 싶은 거, 마시고 싶은 거 다 말해. 내가 쏜다.” “나도 돈 있어.” “이럴 때는 선배가 사주는 거야. 비록 직속 선배는 아니더라도, 학번이 위면 무조건 선배인 거 알지? 그래도 오래전부터 친구여서, 차마 존댓말 쓰라고는 못 하겠다. 고맙지.” “무척.” “짜식. 변한 게 하나도 없어요. 하나도. 됐고. 너 생각보다 유명하더라? 서울대 대나무숲에도 네 이야기 많이 올라왔던데? 내 친구들도 널 알더라? 과도 다른데. 아무튼 이제껏 뭐 하고 지냈는지 소상히 밝히도록.” “왜?” “궁금하잖아?” “별로 의미 있었던 일 같은 건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 “또, 또 비싸게 군다. 입 한 번 열면 어디 덧나냐?” 단유는 옅게 한숨을 쉬었다. ======================================= [593] 사랑은 아무나 하나(3) 300년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미지의 숲속 한가운데서 발견된 보물상자를 손에 넣은 사람의 눈빛이 저렇지 않을까 싶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반짝이며 ‘말해 봐, 말해 보라고’라는 의미를 가득 담아 단유를 쳐다보는 유진이다. “별일 없었어. 고등학교 마치고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할 겸, 여행을 갔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견문을 쌓고 돌아와서 대학 입학. 끝.” 빨대를 물고 있던 유진은 앞에 놓인 아이스커피를 쪽 빨아 마시며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액정에 뜬 화면을 볼 수 있게끔 들고선 입을 열었다. “3년 전, 그 어렵다던 수능에서 유일하게 만점을 받으신, 전국 1등이 돌연 대학 진학을 포기한 이유가 고작 견문을 쌓기 위해?” 석 달 전 단유의 이름이 거론되면서 제보되었던 게시물이 액정에 떠 있었다. “그냥 변덕이었다고 생각해.” “변덕?” “그때는 아직 대학을 진학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로 고민하기도 했고, 내가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떤 미래를 꿈꿀 것인지 정해지지 않았던 참이라. 따지고 보면 남들 하는 고민을 나도 했던 거고, 대신 남들이 잘 고르지 않는 선택지를 골랐던 것뿐이야.” “흠. 그렇게 말하니까, 슬쩍 이해가 갈 듯도 하고. 좋아, 그럼 그건 그렇다 치고, 나한테는 왜 연락 안 했어? 섭섭하게?” “아까부터 계속 연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데, 내가 너한테 연락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친구잖아, 우리!”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외치는 유진에게 단유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친구라는 것에 대해 개념 정의를 하고 따질까, 아니면 그냥 네가 억지 부리는 거라는 걸 인정할래?” “…난 네가 친구라고 생각해.” “왜?” 잠시 단유를 지켜보더니, 곧 어깨에 힘을 풀고는 ‘무슨 일 있었냐’는 태도로 대답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자.” 손을 내젓던 유진은 단유를 흘겨보며 ‘깐깐한 녀석’이라고 중얼거렸고, 단유는 그 중얼거림을 무시하며 음료수를 마셨다. 단유의 무미건조한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 유진이었다. “너 참 이상하다. 솔직히 말해 봐. 나 정도면 꽤 괜찮은 얼굴 아냐?” “누가 뭐래?” “그런데 왜 나한테 아무런 관심이 없어?” “말했다시피, 난 내 공부하기도 바빠. 다른 곳에 눈 돌릴 틈이 없어.” 팔짱을 끼고 물어본다. “혹시 취향이 남다른 건 아니지?” “어떤 취향?” “성적 취향.” “그런 거라면, 남들과 똑같아.” “어떤 ‘남’들을 말하는 거야?” “말장난하지 말고.” 길게 한숨을 내쉰 유진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 너랑 정말 친하게 지내고 싶었어. 고등학교 올라간 뒤, 너랑 연락이 잘 안 될 때도 그랬고. 어제 우연히 만난 뒤에도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난 너랑 정말 친한 친구가 되고 싶어.” “왜?” “네 미래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대학에 가는 대신 여행을 선택했다고 했듯이, 나도 내 미래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었어. 특히 고등학교 올라갈 즈음에. 알다시피 그때도 난 소속사가 있었고, 늘 꿈이 배우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정말 배우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배우로서 성공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어. 걱정이란 건 늘기만 하지, 줄지는 않더라고. 그럴 때 내 걱정에 대해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했어.” “친구 없어?” 유진은 아이스커피 잔에 꽂힌 빨대를 빙빙 돌리며 대답했다. “친구야 있지. 있는데, 너처럼 말해 줄 친구는 없었던 거 같애.” “나처럼?” “기억 안 나? 할 말은 해야 한다. 그리고 본인이 한 말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 당시 방송사고를 치고 난 후, 대학교를 빠져나올 때 유진을 만나 나눴던 이야기다.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건가? “솔직한 말을 해 줄 사람이 필요한 거야?” “그것도 그렇지만, 당시 교육부에 한자리하시던 어른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힐 뿐 아니라, 교육제도에 대해 비판을 가하던 너처럼 통찰력을 가진 친구는 찾기 힘들었지.” 또다시 길게 숨을 내뱉던 유진은 자세를 바꿔 단유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똘망똘망한 눈동자에 담긴 단유의 표정이 비쳐 보일 정도로. “우리 엄마는 맨날 내가 부족하대. 뭘 해도 부족하고 못마땅해하시지. 좀 더 잘하라고 채찍질하는 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가끔은 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몰아붙이셔.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 확실하게 선을 그어서 이야기해주면 나도 이해하고 알아듣겠는데, 엄마는 그저 두루뭉술하게 지적만 하니까 괜히 반발심도 생기고 그랬었어. 반면에 친구들은……. 몰라, 그때는 친구들도 많이 어리게 느껴졌어. 그들이 사는 세상과 내가 사는 세상은 다르다고 생각했고, 내가 보고 느끼며 겪는 세상의 일을 잘 모르는 아이들은 그저 넘겨짚을 줄만 알지, 내가 뭘 힘들어하고 걱정하고 고민하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 아이들의 위로나 충고를 제대로 들을 생각을 못 했던 것 같아. 그래서 점점 더 외로워지고 힘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빨대로 커피 위에 떠 있는 얼음들을 꾹꾹 누르며 지난날을 이야기하는 유진에게 설핏 아쉬움이 보였다. 아무래도 연예계에 일찍 발을 들이면서 나름 고충을 겪은 모양이다. 그러나 단유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다 비슷해, 라는 식의 위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니까. “하아…. 아무튼 말이야, 그럴 때마다 과연 너라면 나한테 무슨 말을 해줬을까, 생각하게 되더란 말이지.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 고민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조언을 해줄 거란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자격을 갖춘 상담가도 아닌데 무슨 조언이야.” “잘할 거 같은데?” “그 당시에 네가 나한테 어떤 고민을 털어놓았더라도, 난 별로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는 못 했을 거야. 내 앞가림도 못 하는데 누구한테 충고하겠어?” “그렇게 말하는 놈이 그때 교육부 공무원들한테 그렇게 일침을 놨던 거야?” “일침까지는 아니지. 그저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이걸 먼저 해결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라고 의견을 제시했던 거야. 그분들이 그걸 너무 공격적으로 받아들이셨던 게 문제지.” 어느새 화제는 과거의 그 사건을 두고 서로의 감상을 피력하는 것으로 넘어갔고, 유진은 마치 오래된 추억을 이야기하듯 신이 난 얼굴로 대화를 주도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대기실에서 갑자기 나타나 인사를 건네던 15살의 유진을 보는 것 같았다. **** “오랜만에 옛날 이야기하니까 참 좋다. 그렇지?”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유진은 히죽 웃으며 단유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쳤다. 확실히 이런 제스처를 보면 도회적인 외모와 달리 털털한 성격이다. “자주 연락하고 지내자? 알겠지?” “그래.” 스케줄이 있어 가야 한다는 유진에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아, 맞다. 야.” “어.” “여자친구 있어?” 단유는 가만히 있다가 손가락으로 유진을 가리켰다. “나? …아니, 여자 사람 친구 말고, 사귀는 여자친구 있냐고.” “없어.” “오케이.” 유진은 손가락으로 OK 표시를 한 후 콧노래를 부르며 멀어져갔다. ‘한 걸음 더 천천히 간다 해도 그리 늦는 것은 아냐’라고 흥얼거리는 유진의 흔들리는 뒷머리를 바라보다 단유는 고갤 들어 서쪽으로 기울어져 가는 해를 바라보았다. 이야기가 생각보다 길어진 탓에 도서관에서 여유롭게 책을 보긴 힘들 것 같았다. 일단 책을 빌리고 집에 가서 조별 과제랑 오늘 받은 리포트 몇 개를 해결하리라 마음먹었다. **** 집에 갔더니, 역시나 호빵이 신나게 달려와 단유를 반겼다. 그에 대한 화답으로 거실에 떨어진 호빵의 털을 모두 수거하여 쓰레기통에 버린 후 2층의 방으로 향했다. 계단으로 올라가는 틈에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 봤더니, 닫혀있던 상미의 방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방에 가방을 두고 내려와 노크했다. “들어와.” “바빠?” “조금. 왜?” “밥 먹었냐고.” “아직.” “밥 먹을래?” “이번 판만 끝내고.” “그래.” 상미는 단유와 대화를 하기 위해 잠시 꺼놨던 마이크를 켜고, ‘이번 판 끝나면 식사하고 올게요’라고 함께 하던 플레이어들에 통보했다. 그 모습을 보며 단유는 방문을 닫고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보니 얼마 전에 사놨던 반찬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셋 다 집에서 식사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보니 반찬 줄어드는 속도가 느리다. 반찬을 꺼내 식탁에 늘어놓고, 하은이 사 놓은 2인분용 곰탕을 냄비에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식사 준비가 끝났을 무렵, 상미가 방을 나왔다. “혼자 했어? 조금만 기다리지.” “괜찮아. 먹자.” “고마워. 곰탕 한 숟가락을 떠먹고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 상미다. “맛있네. 역시 돈만 있으면 살기 편하다니까.” 상미는 정말 맛있게 식사를 했다. 보는 사람이 배부를 정도로 허겁지겁 먹는데 며칠 굶은 사람처럼 보일 정도다. 분명 아침에 함께 밥을 먹었는데 말이다. “방송은 어때?” 어지간하면 밥 먹을 때 말을 잘 걸지 않는 단유였지만, 저렇게 먹으면 어쩐지 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질문을 던졌다. “방송? 괜찮아.” “시청자는 많고?” “컴퓨터 업글을 하고 나서 송출용의 화질이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 그 덕분에 시청자도 늘었고. 그래도 내 게임 실력이 갈수록 일취월장한다는 게 크지.” “카메라는 사용해?” 잠시 멈칫하던 상미가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손캠만.” “그게 뭔데?” “손만 나오게 하는 거.” “사람들이 그런 걸 보고 싶어 해?” “아무래도 FPS장르의 게임은 컨트롤이 중요하니까, 사람들이 손의 움직임을 보고 싶어 하거든. 얼굴 보여달라는 사람도 많긴 한데, 아직은 자신이 없어서. 너한테 괜히 미안하네. 일부러 조명까지 사줬는데.” “미안할 거까지야. 어떻게 쓰든 네 마음이지.” 상미의 식사 속도가 느려진 것을 보며 단유도 식사를 이어나갔다. “아, 너도 한 게임 할래?” “공부해야지.” “야, 밥 먹고 바로 책이 봐 져? 아, 넌 되겠구나. 그래도 소화도 시킬 겸, 같이 한 게임 하자.” 괜히 말을 걸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 “중앙에서 5시 방향으로 가면 오두막이 있는데, 거기에 좀비들이 5마리 정도 있을 거야. 거기서 템 좀 맞추고, 모자라면 3시 방향으로 올라가서 늪지대 몹 좀 잡아서 템 맞추는 거로.” “알았어.” “그리고 상황에 따라 수시로 오더가 변할 수 있으니까, 잘 따라주기만 하면 돼. 사주경계 하다가 적이 나타나면 바로 알려주고. 오두막 지역이 파밍 하기 좋다고 소문이 나서 그쪽으로 오는 사냥꾼들 많거든.” 상미는 자기 방에서 방송과 동시에 게임을 하고, 단유는 본인의 방에서 게임을 했다. 가끔 명수가 집에 오면 셋이서 같이 게임을 하기도 해서 컴퓨터에는 이미 웬만한 게임이 다 깔려 있다. 이러려고 비싼 컴퓨터를 샀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언덕을 넘으니 길버트의 오두막이라는 지명이 나오며 아래 분지 가운데에 낡은 오두막 두 채가 서 있었다. 샷건과 권총을 갖춘 상미가 앞장서고, 단유는 그 뒤에서 볼트 액션식 저격총을 들고 따라갔다. 카우보이모자를 눌러쓴 상미의 캐릭터가 오두막 근처까지 뛰어가다 멈춰 서서 사주경계를 시작했다. “왼쪽 나무 아래. 저격 가능?” 단유는 대답 대신 신중하게 에임을 맞추고 사격을 실시했다. 헤드샷 알림음과 함께 좀비 하나가 쓰러졌다. ‘나이스 샷’을 외친 상미가 느린 걸음으로 오두막에 다가갔다. 입구 근처를 배회하던 좀비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권총으로 좀비의 머리를 겨눴다. 세 발의 총알을 연발로 쏴서 좀비의 머리를 터뜨린 상미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떨어진 아이템을 수거했다. “안경 나왔다. 안경 써.” 상미는 단유에게 전리품을 건네고 본격적으로 오두막을 공략했다. 작은 오두막임에도 내부는 조그만 방들이 여러 개 있어 수색에 시간이 걸렸다. 두 마리의 좀비를 더 해치우고 마지막 한 마리를 찾고 있을 때, 오두막 내부에서 바깥을 보며 경계를 하던 단유가 입을 열었다. “150m 사냥꾼 한 팀. 저격할까, 아니면 경계할까?” “100m 안쪽까지 기다렸다가 가능하면 교전. 만약에 아이템을 맞춘 것 같으면, 교전 없이 뒤로 빠지자.” 상미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남은 좀비를 찾기 위해 수색 속도를 높였고, 단유는 창 옆에 몸을 숨기고 다가오는 사냥꾼들을 지켜보았다. 100m 안쪽부터 50m 지점까지는 몸을 숨길 데가 별로 없다. 저들이 빠른 사냥을 위해 빨리 올 생각을 가졌다면 단유에게 기회가 있을 것이고, 조심성이 많아 몇 안 되는 구조물에 몸을 숨겨 가며 온다면 사냥을 빨리 마무리하고 떠날 수 있으니 그것도 나쁘진 않다. 오두막은 파밍도 잘 되고, 수비하기에도 제격이라 사람들이 많이 찾는 지역이 된 것이다. “헬프, 헬프!” 뒤쪽에서 움직이던 상미에게서 구조요청이 들어왔다. 어떤 사정인지는 몰라도 빨리 가야 하는데, 적팀도 마침 100m 구획선을 넘었다. 부디 그들이 조심성 많은 팀이길 바라며 단유는 몸을 돌렸다. “어디?” “지하방 들어와서 오른쪽! 보스몹 잡다 실수했어.” 단유는 빠르게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아 들어갔다. 저격총은 등에 걸고 권총을 꺼내 장전을 마친 뒤, 총구를 돌려 오른쪽을 보려는 찰나에 정면에서 보스몹이 달려들었다. 단유는 침착하게 두 발을 보스의 머리에 쏘고 왼쪽으로 몸을 피했다. 어두운 지하실에서 갑자기 나타난 까닭에 빠르게 반응했음에도 제대로 피하지 못해 체력의 반이 깎이는 공격을 받았다. 만약 적이 50m 안쪽으로 들어오게 되면 오두막에서 나는 총성을 듣고 포위 공격을 준비할 텐데, 라는 생각을 잠시 가지며 권총을 들었다. 그러나 쏘지 못하고 오른쪽으로 몸을 굴려 보스의 공격을 피해야 했고, 덕분에 보스의 등 뒤로 몸을 옮길 수 있었다. 상미는 기절상태로 빨리 부활시키지 않으면 죽고 말 것이기에 빠르게 권총으로 머리를 겨눴다. ―탕. 앞서 상미의 공격으로 체력을 잃었던 모양인지, 이번 공격에 보스는 괴성을 지르며 죽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반짝이는 아이템이 드랍되었다. ======================================= [594] 사랑은 아무나 하나(4) 부활을 한 상미가 체력을 회복하는 동안, 단유는 다시 창가로 가서 적들의 동태를 살폈다. 엄폐물에 몸을 숨겼는지 적팀은 보이지 않았지만, 오두막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을 거란 사실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오두막을 빠져나올 수는 없었다. “불리한데.” 상미가 지하실에서 올라와 다른 창문으로 바깥을 바라보며 말했다. 적팀은 단유네 팀이 이미 보스를 잡아 아이템 파밍을 끝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무리하게 진입작전을 펼치기보다, 밖으로 나왔을 때 기습을 해서 아이템을 뺏는 작전을 펼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둘 다 손핸데. 에바야.” 상대 팀은 파밍도 못 한 상태로 야외에서 엄폐물에 의지해 움직이지 못하고, 단유네도 비록 파밍은 했지만,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다른 파밍을 하지 못하니 손해다. 이러다가 다른 지역에서 파밍을 모두 마치고 사냥을 시작할 다른 팀들에게 손쉬운 먹잇감이 될 수 있다. 상미는 오두막의 창으로 주위를 모두 살핀 후, 동쪽과 북쪽을 맡기로 하고, 단유에겐 나머지 지역을 감시하도록 오더를 내렸다. “인내심 부족한 팀이 지는 거야. 혹시라도 저격이 가능하면 바로 머리 따.” 게임이라지만, ‘머리 따’ 같은 살벌한 표현도 서슴없이 하는 상미다. “응.” 물론 게임이니까, 단유는 별 말없이 따른다. 2분여가 지났을 때, 인내심의 바닥을 느낀 건 다행히 상대 팀이었다. 단유가 바라보는 쪽에서 왼편 바위 뒤에서 움직임이 보였다. 대략 30m 정도로 추정되는 거리라 저격이 아니라 권총으로 사격해도 충분할 것 같았다. 이 게임은 저격을 하려 해도 배율이 뛰어난 편이 아니라 중거리 교전이 더 자주 있는 편이고, 권총을 많이 사용한다. 특히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연발을 쏠 수 있는 권총이 더 효과적이다. 안경을 해제한 뒤 보스몹에게서 얻은 헬멧을 착용했다. 적이 다시 얼굴을 빼꼼 내밀 때, 단유는 빠르게 조준하고 사격을 시작했다. 초탄에 머리에서 피가 터졌지만, 적은 죽지 않았다. 이어진 공격은 아쉽게도 바위에 맞고 도탄이 되었다. 그 사이 단유가 눈치채지 못한 방향에서 공격이 들어왔다. 단유의 체력이 쑥 빠지자, 상미가 즉시 오더를 내렸다. “엄폐해.” 단유는 즉시 몸을 숙여 2차 공격을 피했고, 그 사이 상미가 교묘한 위치로 다가가 외부의 공격을 파악했다. “왼쪽 바위랑, 오른쪽 비탈 아래네. 오케이, 체력 채우고 빠지자. 무조건 싸우는 건 답이 아니니까. 내가 먼저 앞장설 테니까, 그사이에 견제해주고, 특히 바위 쪽 견제해줘. 오른쪽은 각이 안 나온다, 내가 오른쪽으로 빠져서 견제 시작하면, 그다음에 내가 왔던 길로 나오면 돼. 앞에 덤불 이용해서 이동 경로 가리고. 알았지?” 상미는 침착하게 오더를 내린 후,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 총알이 쏟아지고 상미가 잠시 몸을 피한 사이, 단유가 창문으로 견제사격을 날렸다. 한 대는 맞을 각오로 열심히 총을 쏘는 사이에 오른쪽 비탈 쪽에서도 상미와 교전이 벌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견제 와중에 상미 쪽을 보니, 놀랍게도 한 대도 맞지 않고 목표했던 지점까지 내달리는 데 성공한 상미였다. “지금이야!” 단유는 재빨리 오두막을 나와 계단을 뛰어내린 후 바닥에 엎드렸다. 다소 낮은 지형이라 상대의 시야에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엉금엉금 기어 상미가 기다리고 있을 방향으로 향할 때, 상대도 다급함을 느꼈는지 접근하는 게 보였다. 단유는 앉은 자세로 변경함과 동시에 놀라운 마우스 컨트롤로 에임을 정확히 잡고 사격을 실시했다. 연달아 상대의 머리에서 피가 터져 나오는 이펙트가 나오면서 곧 킬로그가 올라왔다. 곧이어 상미와 대치 중이던 적도 상미의 권총에 드러눕고 말았다. “나이스!” 상대의 시체에서 적당히 탄약과 회복 아이템을 보충한 뒤, 두 사람은 자리를 피했다. “오더 괜찮았지? 내 오더만 잘 들으면 질 수가 없다니깐?” 키득거리는 상미의 목소리를 헤드폰으로 들으며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상미는 그 모습을 볼 수 없겠지만. **** 자화자찬을 멈추지 않는 상미의 오더대로 움직였더니 결국 1위를 달성하고 마무리를 짓게 되었다. 상미의 시청자들이 케미가 좋다며, 계속 게임 해달라고 조른다는데, 단유는 한 게임 이상 할 여력이 없었다. 정중하게 사양한 뒤, 게임을 종료한 후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펼치고 조별 과제를 위한 자료 수집에 들어갔다. 집중해서 과제를 이어가던 중 옆에 놔두었던 핸드폰이 떨기 시작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했던 집중력이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단유는 핸드폰을 집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모양이다. 처음 보는 전화번호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단유는 잘못 건 전화일까 짐작해 보았다. “네.” ―저기, 혹시 김단유씨 핸드폰 맞나요? “네, 전데요. 누구시죠?” ―아, 나…도연인데요. “도연?” 예상도 못 한 이름이었다. ―그러니까…리본 소녀의 도연이요. “아, 예.” 평생 다시는 보지도 듣지도 못할 인연이라 생각했던 터라, 단유는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상대는 더 당황했던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죠? “네.” 단유의 단답형 대답에 상대의 말이 잠시 끊어졌다가 이어졌다. ―잘 지내셨어요? 시계를 보니 어느새 밤 열 시가 넘어선 시각이었다. “네. 그런데 무슨 일로?” ―네? 아, 저, 잘 지내시는지, 그냥 궁금해서, 아니 그러니까, 인사차 전화해 봤어요. “아, 예.” ―혹시 제가 잘못했나요? “아뇨.” ―그럼 통화하기 불편하신가요? 단유는 책상 위에 놓인 책들과 쓰다 만 워드 문서 화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뇨, 괜찮아요.” ―정말요? 그럼 다행이네요. 그냥…전화해 봤어요. 그러니까, 지난번에 서울대에서 우리 봤었잖아요? 멀리서 슬쩍 본 건데? 뭐, 보긴 했으니까.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반갑기도 하고…가서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스케줄이 있어서…우리 무대도 하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시간도 없었고요, 그래도 그냥 못 본척하기는 그렇고, 그래서 인사는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전화 했는데, 괜찮죠? 뭔가 굉장히 중구난방에 두서없는 이야기지만, 대충 이해는 했다. “만나서 반갑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는 거죠?” ―네. “저도 반가웠어요.” ―정말요? 그러시구나. 그리고 다시 말이 없어진 도연. 단유는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톡톡 두드리며 다음 말이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우리 무대 어땠어요? 고르고 고른 말이 무대에 대한 감상을 묻는 말이라. “좋았어요.” ―그래요? 어쩐지 아쉬워하는 어투라 단유는 조금 더 신경 써서 답변했다. “호흡이 잘 맞는 것 같았어요. 서로의 안무도 잘 들어맞고. 굳이 제가 이런 말을 안 해도 당시 관중들의 열렬한 환호 소리를 들으면 알 수 있지 않나요?” ―그렇긴 한데, 단유씨는 또 어떻게 느끼셨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서요. …저는 어땠어요? “좋았어요. 이제는 전혀 무대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던데요? 오히려 즐기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정말요? 다행이다. 그나저나 도연은 아까부터 존댓말을 쓰고 있다. 예전 도연과 함께 연기 레슨을 받던 중에, 서로 친해지기 위해 말을 놓겠다고 한 뒤로 계속 하대를 했었는데. 역시 오랜만의 통화라 어색해서 그런 걸까? “안 바쁘세요?” ―우리? 바쁘죠. 아직 대학 행사철이라 계속 돌아다니고 있거든요. 그래도 곧 끝나니까. 물론 끝나도 바쁘긴 할 거예요. 저희 곧 컴백이거든요. “아, 그래요?” ―아, 맞다. 근데 이거 비밀이거든요? 컴백하는 거? 그러니까 그때까지 인터넷이나 다른 사람한테 리본 소녀 컴백한다고 알려주시면 안 돼요. “네.” ―꼭이요. “네.” 그리고 또 한참 동안 말이 없다. ―그럼…저기, 다음에 또 통화해요. “네.” ―들어가세요. “네, 수고하세요.” 어쩐지 급하게 통화를 마무리하는 분위긴데, 오히려 그게 낫다. 서로 접점이 없다 보니 말을 길게 끌 화제가 없으니까. 핸드폰을 내려놓고 보니, 어느새 10분이 훌쩍 지났다. 별로 한 말도 없었는데. 단유는 잠잠해진 핸드폰을 잠시 바라보다 키보드 위로 손을 올리고 다시 타이핑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손을 떼고 길게 숨을 토해내는 단유. 바보가 아니라면, 그리고 아주 무지한 경우가 아니라면, 정상급 연예인이라고 할 도연이 자신에게 전화를 건 이유가 단순히 안부를 묻기 위해서가 아니란 건 알 수 있었다. 다만 도연이 단유 본인에게 어떤 이성적 감정을 느껴서 충동적으로 전화한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매력이란 걸 느낄 수나 있을지 모르겠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단유는 도연에게 별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탓이다. 좀 더 과장하면, 오후에 만났던 유진도 비슷하지 않을까? ‘도대체 왜 나한테?’ 무인도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때, 남자 한 명이 찾아와 평생 둘이서 함께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면, 여자는 어쩔 수 없이 그 남자를 데리고 평생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남자를 부려서 좀 더 안전하고 아늑한 생활을 영위하려 할까? 지금 단유가 보기에 도연과 유진은 딱 무인도에 떨어진 여자 같았다. 그 남자가 비록 이상형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남자이기에 어쩔 수 없이 같이 살아야 하는데, 그래도 호기심이란 게 있으니 이 남자는 어떤 남자일까, 운을 떼보는 정도랄까? 딱 그 정도로 보였다. 그렇다고 매정하게 대하기엔, 두 사람 모두 단유에게 친절하고 상냥했다. 그 성의를 무시하는 것도 예의는 아닌 듯하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단유는 잠시 고민하다, 문득 천상천하 유아독존 격으로 자찬하던 상미의 ‘오더’를 떠올렸다. 일단 과제를 마무리하고 난 뒤, 상미에게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냈다. ―방송 끝나면 연락 줘. 잠시 후, 답문이 왔다. ―전화 줄게. 그리고 30여 분 후, 상미에게서 전화가 왔고, 두 사람은 거실에서 조우했다. “무슨 일인데?” 단유는 자신의 상황을 상미에게 설명했다. 상미는, 처음에는 놀란 듯하더니 점점 입꼬리가 길게 말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단유의 현 상황에 대한 브리핑이 끝났을 즈음에는 웃음소리가 잇달았다. “그러니까, 연애복 터진 김단유를 구원해달라, 그 소리네?” “연애복은 무슨.” “야, 그 정도면 연애각이지, 뭐냐? …이거, 이제 보니까 자기 인기 많다고 자랑하러 온 거네? 그치?” 단유가 말없이 소파에서 일어서자, 그제야 말리는 시늉을 했다. “미안미안, 하도 오랜만에 네가 여자 때문에 고생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말이야.” “오랜만?” “왜, 예전에 너 첫 여자친구 사겼을 때. 그때도 너 고생 좀 했잖아?” “별로 그런 기억 없는데?” “에이, 아니긴. 그때 그 언니 보겠다고 맨날 그 회사에 조르르 달려가서 밥 사주고 선물 사주고 그랬잖아? 그것 때문에 아르바이트도 하고 그랬잖아?” “밥은 서로 번갈아가면서 샀고, 선물 산다고 돈 쓴 기억은 안 나고, 아르바이트는 그것과 전혀 별개의 문제였고.” “아무튼. 이야, 이거 당장 명수한테 전화해서 자랑해야 할 일 아닌가?” 단유가 다시 일어서자, 농담이라며 다시 말린다. 농담 한 번 더 하면 대화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놨더니 얼른 손을 저으며 미안하다고 용서를 구한다. 그 와중에도 입꼬리가 내려올 줄 모르니 후회만 늘어난다. “내 지혜를 구한다 이거잖아? 나 되게 비싼데?” “얼마면 되는데?” “에이, 내가 친구한테 돈을 받을 수야 있나?” “그럼?” “조만간 오프라인 대회가 있는데, 그때 나랑 같이 가자.” “너랑 같이하는 동료들 있잖아?” “실력이 너만 한 애들이 있었으면 벌써 했어. 아무튼, 대회 도와주기. 콜?” “그래, 콜. 이제 이야기해봐.” 만면에 미소를 띤 상미가 손가락을 하나 꺼내 들었다. “둘 중 한 사람과 진짜 사귀는 거야.” “…….” 단유는 할 말을 잃고 득의양양하게 웃는 상미를 덤덤히 지켜보았다. “이제 연애할 때도 됐잖아? 안 그래? 괜찮은 사람으로 골라봐. 연상, 동갑. 취향은 어느 쪽인데? 아 혹시 연하? 그러면 신입생들 중의 한 명 골라서 유혹해.” 아주 갈수록 가관이다. 단유의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고 상미가 전혀 그럴 의도가 아니란 사실을 항변하기라도 할 모양인지, 끝까지 들어보라며 단유를 옆에 앉혔다. “둘 다 좋은 사람이라며.” “응.” “얼굴도 예쁘고?” “응.” “한 사람과 연애를 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굳이 모진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떨어져 나갈 거잖아? 그럼 넌 오직 한 사람에게만 신경을 쓸 수 있다는 거지.” “그게 전략이야?” “전략이지. 야, 다 떠나서 말이야. 너 아직 20대 초반이야. 팔팔한 나이에 여자 친구 하나 없이 책에만 파묻혀 있다는 게 얼마나 슬픈데. 적극적으로 움직여. 넌 그래도 돼. 그리고 연애가 별거니? 솔직히 나도 명수랑 사귀고는 있지만, 이러다가 마음이 안 맞거나 멀어지면 헤어질 수도 있는 거야. 너도 마찬가지고.” 단유는 이마를 짚었다. 그러나 상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무 고지식하게 굴지마. 연애도 인간관계의 하나야.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피할 필요가 없어. 여러 사람 만나면서 살아봐야 나중에 진짜 자신과 잘 맞는 남편, 혹은 아내를 만날 수 있다고들 하잖아. 옛말 틀린 거 없다.” ======================================= [595] 사랑은 아무나 하나(5) “그럼 넌?” “나? 나 뭐?” “여러 사람 만나야 한다며? 너의 연애관이라면, 명수랑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겠다는 소리 아냐?” “에이, 난 예외.” “왜?” “가끔 이런저런 연애 할 필요 없이 자신의 짝을 찾는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말하자면 로또를 뽑은 셈이지.” “니가 그 정도로 명수를 생각하는 줄 몰랐다.” “야, 까놓고 말해서, 이 정도면 로또 아냐?” 넓은 거실을 둘러보며 말하는 상미의 말을 일단 수긍했다. “그리고…사람 일은 모르는 거지.” “응?” 상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손을 저었다. 그리고 방송이나 해야겠다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단유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말했다. “오늘 이야기는 다른 사람한테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뭐? 에이, 걱정 마. 나 입 무거워.” 상미는 눈을 찡긋거려 보인 뒤 방으로 쏙 들어갔다. 침묵이 내려앉은 거실. 어쩐지 불안한 이유는 뭘까? **** ―야! 너 연애 한다며? 시합을 준비 중일 명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상미 이 나쁜 기집애. “연애 안 해.” ―왜? 왜 안 해? 해. 하라고 좀. “내 연애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네 일이나 신경 써. ―네 연애도 내 일이야. “그게 왜 네 일이야?” ―네가 행복해지는 길을 찾도록 돕는 게 다 내 일이지. 명수의 언변이 이렇게 좋아진 줄 몰랐다. ―예쁘냐? “누구?” ―너 좋다는 너희 학교 선배. “동갑이야.” ―어쨌든. 이야, 역시 우리 단유 부럽다 부러워. 한 명은 대학 선배고, 한 명은 연예인이라며? 확실히 달라? 응? 그래서 누가 더 좋아? 누구랑 사귈 거야? 더 이야기해봐야 속만 탈 거 같아서 그냥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상미에게 따지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단유야?” 거실 소파에서 TV를 보며 사과를 깎던 하은이 불렀다. “네?” “너 요즘 인기 좋다며?” 요즘 입이 무겁다는 표현이 자신도 모르게 바뀌었나 싶었다. ‘인기쟁이네, 김단유’라며 놀리는 하은의 말을 흘려 들으며 상미의 방을 두드렸다. “아, 왜.” 자고 있었던지 졸린 눈으로 문을 연 상미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말하지 말랬지?” “뭘?” “몰라서 물어?” 상미가 단유의 어깨너머로 바라보니, 재밌다는 얼굴로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 보는 하은이 보였다. 팝콘 대신 사과를 아삭 깨물며. “비밀이라고 했잖아요, 선생님!” 단유가 그 시선을 차단했다. “니 말은 비밀이고, 내 말은 동네방네 소문낼 이야기야?” “아니, 그게 아니고…. 야, 솔직히 단유 네 일은 선생님도 알아야 하잖아?” “명수는?” “뭐? 명수도 말했어? 아우, 입 싼 새끼.” 누가 누굴 지적하나? 단유가 팔짱을 낀 채로 쏘아보자 상미는 괜히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렸다. “친, 친구잖아. 가족 같은 친구라며? 다, 다 널 걱정해서 그러는 거지.” “아무래도 내가 친구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우, 그래.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입이 싸. 내가 아주 입이 방정맞아 그래. 미안하다!” 거실을 채울 정도로 까랑까랑한 하은의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단유는 이 층으로 올라갔다. ‘그래서 누굴 선택할 건데?’라고 묻는 하은의 질문도 못 들은 척하며. 결국 오롯이 혼자 고민해야 할 문제였음을 재확인한 단유는 번잡한 기분도 떨칠 겸, 집을 나섰다. 어차피 오늘 학교에서 조별 과제를 위해 조원들과 만나기로 했었기 때문에 조금 일찍 나간다는 생각으로 서둘렀다. 세미나실에 들어가 과제물을 검토하다 보면 복잡한 마음도 정리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으며. 그러나 세미나실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그것도 1시간 뒤에 만나기로 되어 있던 조원 중 한 명이었다. “제가 할 말이네요.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같은 조에 속한 두 명의 여학생 중 한 명이었다. 단유가 세미나실에 들어오는 것을 보며 엉거주춤 일어서 인사를 하는데, 평소와 옷차림새가 사뭇 다른 느낌이다. 하늘하늘한 검은색 주름 스커트에 캘리그라피가 디자인된 푸른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진한 눈썹과 어울려 시크한 매력을 도도히 드러낸 그녀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제가 맡은 부분을 아직 다 끝내지 못해서요.” “많이 남았어요?” “아뇨, 금방 다 해가요. 여기 이 부분만 마저 하면 돼요.” “그거하고 출력도 하셔야 하죠? 그럼 조금 있다가 저랑 같이 복사실 가요. 어차피 저도 제 부분 복사해야 하니까.” “아, 네.” 여학생은 다시 자리에 앉아 앞에 놓인 노트북 위에 손을 올렸다. 단유는 여학생의 작업이 끝나길 기다리는 동안 자신도 출력해 온 부분을 읽으며 수정할 부분은 없는지 검토했다. 몇 장 되지 않아 검토는 빠르게 끝났고, 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슬쩍 여학생에게로 시선을 던졌는데, 마침 단유를 보고 있었던지 여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황급히 시선을 모니터로 돌리며 손가락을 빠르게 놀리는데, 얼굴에 긴장이 서려 있다. “저기요.” “네?” “불편하시면 제가 잠깐 나가 있을까요?” “아뇨, 괜찮아요. 그냥 계셔도 돼요.” “불편하시면 말씀하세요.” “정말 괜찮아요.” 여학생은 다급히 변명하며, 마치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과시하듯 손가락을 더 빠르게 움직였다. 단유는 용지를 내려놓고 들고 온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과제를 위해서 빌렸던 책인데, 꽤 볼 만한 내용이라서 어차피 시간도 남으니까 한 번 더 보자는 생각으로 펼쳤다. 타자를 치는 소리와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이 존재하는 세미나실의 고요한 분위기가 집중을 도왔다. 그렇게 한참 재밌게 읽던 중에 단유를 부르는 나직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저기, 오빠.” “네?” “목마르지 않으세요?” “저요? 괜찮은데요.” “아, 그래요.” 단유는 괜찮다는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다시 단유는 책에서 시선을 뗐다. “제가 목이 말라서요. 음료수 사 올까 하는데, 뭐 안 드실래요? 제가 살게요.” “괜찮아요.” “저 혼자 마시기 그래서 그래요. 혹시 탄산음료 좋아하세요?” “즐기지는 않아요.” “아, 그럼 이온음료?” “…같이 가서 고르죠.” 세미나실 바깥에 음료수 자판기가 있었기에 멀리 갈 필요는 없었다. 투입구에 지폐를 넣은 뒤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단유에게 뭘 마실 건지 물어보는 여학생이다. 단유는 ‘아무거나’라고 말하려다 또 별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을 것 같아 주황빛의 오렌지 맛 탄산음료를 눌렀다. 캔커피를 고른 여학생이 배출구에서 음료수를 꺼내 단유에게 건넸다. “잘 마실게요.” “네.” 캔이 열리며, 음료 입자에 녹아있던 이산화탄소의 용해도가 줄어들고, 캔 내부 압력이 줄며 음료 입자에서 이산화탄소가 떨어져 나와 음료의 위로 솟아오른다. 작은 방울들이 수면에서 공기와 접촉하며 터지는 미세한 소리들을 들으며 한 모금 마시니, 시원할 뿐 아니라 감미료의 강한 단맛과 오렌지 맛을 내는 성분이 혀를 자극했다. 틱틱거리는 소리에 돌아보니, 손톱이 길어 음료수를 열지 못하는 여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따 드릴까요?” “아, 예. 부탁드릴게요.” 단유는 자신의 음료를 건네고 그녀에게서 캔을 받아 가볍게 열었다. “여기요.” “고마워요.” 단유는 자신의 음료를 받아 다시 한 모금을 마시며 세미나실로 이동했고, 여학생은 그 뒤를 따랐다. 다시 세미나실로 돌아온 단유는 시계를 보며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음을 확인한 뒤, 책을 펼쳤다. 홀짝거리는 소리 없이 커피를 음미하는 여학생의 배려 덕분에 책에 집중할 수 있어 좋았다. “저기, 오빠.” “응?” “저, 다했는데요.” “아, 그래요. 그럼 같이 복사실 가죠.” “네.” 세미나실이 있는 건물의 지하층에 복사실이 있었기에 두 사람은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갔다.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 사이로 콧노래가 들린 듯해서 뒤를 돌아봤더니, 여학생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뭐가요?” “아니, 그게…그…제가 맡은 부분을 다 끝냈더니, 기분이 좋아서 저도 모르게….” “괜찮아요. 신경 거슬려서 본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여학생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오빠.” “네?” “오빠, 저… 아니에요.” 문득, 무슨 말을 하려다 멈추면 듣는 상대방이 얼마나 답답한지 아냐며 분개하던 명수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단유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지, 라는 생각이었기에 관심을 끊었다. 출력과 복사를 모두 마친 후 다시 세미나실로 왔더니, 남학생 한 명이 들어와 있었다. “조장님, 일찍 오셨네요? 유영이 넌 언제 왔어? 내가 늦은 건 아니지?” 쾌활한 웃음으로 인사를 건네며 유영의 옆자리에 앉는 남학생은, 역시 노트북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아까.” “이야, 다들 부지런들 하시네. 나도 나름 일찍 온다고 온 건데 말이야. 아, 조장님은 다 하셨어요?” 남학생은 파워포인트를 맡았기에 따로 자료 수집을 맡기지 않았다. 단유와 유영, 그리고 또 다른 학생이 고생하는 동안은 홀가분했겠지만, 오늘 모인 자료들로 발제문이 만들어지면, 그 내용을 토대로 파워포인트를 만드느라 앞으로 고생 좀 해야 할 테다. “네.” “잠깐 봐도 돼요?” “여기.” “…와, 형 되게 내용이 많은데요?” “취합하다 보면 대부분은 버리게 될 거지만, 그래도 미리 준비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요.” “와, 역시 조장님은 뭔가 다르네요.” 넉살 좋게 웃음 짓던 남학생은 유영에게로 고갤 돌렸다. “네 거도 좀 보자.” “거기 앞에.” 턱짓으로 책상 앞에 놓인 복사물을 가리키는 유영. 남학생은 히죽 웃으며 복사물 1부를 집어 살폈다. “요점만 넣은 거야.” 단유와 비교해 수집된 내용이 많지 않은 까닭에 미리 변명처럼 이유를 늘어놓는다. “잘했네, 뭘.” 단유는 어쩐지 유영의 태도가 갑자기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역시 물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자신은 고작 조장일 뿐이고, 잠시 후에 있을 회의 때 취합할 내용들과 발제문을 어떻게 작성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자신의 몫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어 또 한 사람이 세미나실로 입장했다. 이번에는 두 여학생 중 다른 한 명이었는데,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는 유영과 단유의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너 오늘 되게 멋있게 입고 나왔다? 오늘 무슨 소개팅이라도 있어?” “소개팅은 무슨. 그냥 주말이라 기분 좀 낸 거야.” 복장에 맞게 시크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유영의 말에 여학생이 입꼬리를 내렸다. “학교 오면서 무슨 기분이니? 난 오늘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귀찮아 죽는 줄. 아, 오해하지 마세요. 조 모임 오기 싫었다는 소린 아니에요.” “아뇨, 괜찮아요.” “야, 나도 그렇더라. 오늘처럼 날이 좋으면 학교가 아니라 놀이공원을 갔어야 했는데.” 남학생이 히죽 웃으며 여학생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다른 한 사람 마저 오면 빨리 이야기 끝내고 나가죠.” “빨리 끝날까요?” “노력해보죠. 다 같이.” 이윽고 모든 조원이 모였고, 단유의 주도하에 회의를 진행했다. 미리 유영의 몫까지 검토를 끝냈던 단유 덕에 회의는 빠르게 진행되었고, 발표를 맡은 여학생과 파워포인트를 맡은 남학생에게 주요 포인트를 정확하게 지시해주며 회의를 마칠 수 있었다. PPT가 완성되면 다시 모여서 마지막 준비를 끝내는 것으로 약속을 정한 뒤, 모임을 마무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짐을 챙겨 세미나실을 나와 인사를 나눴다. 주말에 학교에 남을 이유가 없기에 다들 통학 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초록빛 잎새를 닮은 바람이 슬며시 다가와 온기를 나눠주고 지나가는 거리를 걷다 보니 괜히 오늘은 그냥 걸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그냥 걸어갈게요.” 단유의 말에 조원들이 돌아보며 인사했다. “네, 조장님.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조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단유는 후문 쪽으로 걸어갔다. 보도 옆으로 푸른 잔디가 자란 둔덕을 감상하며 걷고 있을 때, 뒤에서 빠르게 따라붙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기도 전에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오늘 모인 이들 중 하이힐을 신은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오빠.”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은 모두 ‘조장님’이라고 부르는데 그녀만 단유를 ‘오빠’라고 호칭했다. 단유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바람에 흩날리는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다가온 유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식사하셨어요?” 회의를 세 시간 정도 한데다 두 사람은 모임이 있기 한 시간 전에 같이 세미나실에 있었으니 식사를 했냐는 물음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 텐데 왜 저렇게 물을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며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같이 식사하실래요?” “배고프세요?” “네? 아, 저…조금요.” “그럼, 후문 쪽 식당에 가서 같이 식사해요.” 저녁을 먹기엔 아직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렇다고 못 할 정도는 아니라 상관은 없었다. “근데, 한 사람 더 불러도 돼요?” “네? 누구요?” “후문 쪽에서 자취하는 앤데, 같은 학부 동기예요.” “아, 오빠랑 자주 같이 다니던….” “새벽이요.” “아, 예. 뭐, 그래요. 괜찮아요.” “그럼 전화해볼게요.” 단유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통화를 시도했다. 등 뒤에서 조금 긴 한숨 소리가 들린 것도 같지만, 지금 걷는 길이 비탈길이라 하이힐 신고 걷기에 조금 불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 [596] 사랑은 아무나 하나(6) 여자 동기랑 같이 있다고 언질을 줬건만, 새벽은 유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가까운 곳에 추천할 만한 식당이 있다며 앞장선 새벽의 걸음은 경쾌했다. ‘레이디 퍼스트’라며 먼저 식당에 들어가도록 문을 열어주기도 하고. 뒤따라 단유가 들어갈 때, 새벽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 고마워요!” 딱히 고마워할 필요까지는 없는데. 새벽의 인사를 넙죽 받기도 뭐해서 단유는 대꾸없이 식당으로 들어갔다. 같은 학부의 동기라 그런지 대화가 어렵지 않았다. 셋 모두 신입생들이었기에 대학의 강의를 들으며 느낀 소감들만 늘어놓아도 충분히 대화가 가능했다. 특히 새벽이 연신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대화를 주도해나가서 단유는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으면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 비정상적이라 할 만큼 높았던 새벽의 텐션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쳤을 즈음에는 차분한 평소의 새벽으로 돌아온 듯 보였고, 유영은 잘 먹었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형.” “응?” “쟤 형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아무리 경험 없는 새벽이라도 눈치가 아예 없진 않았다. 여러 주제를 들먹이며 대화를 주도하던 와중에 유영이 틈틈이 단유를 살피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자신과의 대화는 겉돌기만 한다는 것이 느껴지니 새벽으로서도 흥을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거 아냐.”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좋아한다’는 감정을 갖기엔 유영과 단유의 교류했던 시간이 너무 짧았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도 있지만,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일이 단지 첫눈에, 외모만을 보고 결정된다면 과연 그 사람의 진심을 신뢰할 수 있을까? 설령 유영이 단유 본인도 모르는 매력을 짧은 시간에 찾아냈고, 그래서 단유를 좋아하게 됐다고 한들, 단유는 그 마음에 동조해줄 의사가 없었다. 단유는 유영을 잘 모르니까. 예전 나윤과 ‘연애’를 할 때도 그랬듯이, 상대에게 호감 이상의 마음을 품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가능하다. 지금의 유영은 아니었다. “지금 우리 과에 몇 안 되는 여신이 눈에 안 찬다는 말씀이시네요? 역시 형은 대단해요.” 그런 뜻은 아닌데, 애써 부정할 마음도 안 생긴다. 단유는 혀를 차며 돌아섰다. **** “어머, 너 오늘 좀 늦을 거라며?” “아, 일찍 끝났어.”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답한 유영은 하이힐을 벗어 던진 후 방으로 들어갔다. 백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대로 침대 위에 풀썩 드러누운 유영은 긴 한숨을 내쉬며 이불보를 쓰다듬었다. 실크 재질의 부드러운 이불보의 촉감이 마음을 달랜다. “밥 먹었어?” 주방에 계시던 어머니의 물음에 유영은 ‘먹었어’라고 짧게 대답하곤 눈을 감았다. 오늘 하루, 평소보다 심력을 많이 낭비한 탓에 유난히 피곤함을 느낀다. “왜? 무슨 일 있어?” 방에 들어간 딸이 나오지 않고 조용히 있으니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들어온 어머니다. 유영은 누운 상태에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근데 왜 그러고 있어?” “…….” “남자가 별로였어?” 유영이 벌떡 일어났다. “얘, 평소에 안 입던 옷을 빼입고 싱글벙글하며 나가는데 설마 모를 줄 알았어?” “알아도 모른 척하지.” “그래서, 별로야?” “아니.” “그럼?” 쉽게 입을 열지 않는 딸의 곁에 앉은 어머니는 책상으로 시선을 던졌다. 책상에 작은 액자가 있었는데, 그 액자에는 한 남자아이가 무릎을 꿇고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유영이 중학생 시절 우연히 본 영상의 한 컷을 컬러 사진으로 프린트해서 액자에 끼워놓은 것인데, 주인공은 다름 아닌 단유였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의 유영이 저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보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가디스R이라는 걸그룹의 데뷔곡을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들어야만 했었던 기억이다. “지난번에 쟤가 너랑 같은 학교 다닌다고 자랑하더니, 쟤 보러 간 거지?” “나보다 나이 많아. 오빠야.” “몇 번 봤다고 오빠니?” “아무튼.” 어머니는 입꼬리를 올리며 슬쩍 물었다. “직접 보니까 실망했어? 하긴 저건 연출된 장면이니까 멋있게 보일 수밖에 없었겠지. 그리고 시간도 많이 지났잖아? 나이가 들면 얼굴도 바뀌니까.” “그런 거 아냐.” “그럼?” 우물쭈물하더니 수줍게 고백한다. “…더 멋있어졌어.” 어렵게 말을 뱉더니 입이 트였는지, 자신이 본 단유의 매력을 술술 털어놓는다. “키도 크고, 얼굴은 더 잘생겨졌고, 어깨도 넓고, 눈도 되게 깊어. 말 안 하고 있을 때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데, 되게 남자답고 멋있어.” 그 입술이 살짝 열리며 그 안으로 음료수가 들어가는 장면을 훔쳐보았을 때, 유영은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말도 조리 있게 잘하고, 똑똑하고, 배려심도 깊어.” 다른 조별 과제를 많이 경험해 보진 못했지만, 단유가 조장이었기에 이번 조별 모임이 순탄하게 진행된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어머니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완전히 빠졌구나, 빠졌어. 그런데 뭐가 문젠데?” “나한테 관심이 없어?” “아니, 왜? 우리 딸이 얼마나 예쁜데 어떻게 관심이 없대?” “몰라. 그래서 신경질 나.” “너 막 들이댄 건 아니지?” “아냐, 안 그랬어. 그냥, 음료수만 사줬어. 자판기에서.” “더 비싼 거 사주지 그랬니?” “엄마, 나 놀려?” “장난이야, 장난. 그런데 정말 왜 관심이 없을까? 객관적으로 봐도 우리 딸이 얼마나 예쁜데? 게다가 머리도 좋고.” “엄마가 어떻게 객관적일 수 있어? 고슴도치도 자기 자식은 예쁘다는 말처럼, 엄마도 내가 엄마 딸이니까 예쁘다고 하는 거지.” “아냐, 엄마 친구 딸들 다 봐도, 우리 딸이 제일 예쁘더라.” “치.” “그래서 실망했어?” “실망 아니고, 그냥 조금 아쉬워서.” “뭐가 아쉬워?” “좀 더 적극적으로 해 보지 못한 게 아쉬워.” “어이구, 우리 딸 아주 연애하고 싶어 안달 난 사람 같아?” “그런 거 아닌 거 알잖아?” “엄만 모르겠다. 알아서 잘해 봐.” 어머니는 끙, 소리를 내며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엄마.” “왜?” “뭐 해줄 말 없어?” “무슨 말?” “조언 같은 거.” “조언은 무슨. 네가 알아서 해.” “엄마는 걱정도 안 돼?” “걱정? 얘, 내가 언제 너한테 이래라저래라 한 적 있니? 그것도 다 경험인데 네가 알아서 해결해야지.” 유영의 어머니는 무간섭 원칙을 재차 천명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유영에게 공부하라는 등의 이야기는 일절 한 적이 없던 어머니다. 일찍 들어오라거나, 라면 많이 먹지 말라거나, 청소 좀 하고 살아라, 같은 잔소리도 없었다. ‘자기가 알아서 해야지’ 그게 어머니의 소신이었다. 물론 그런 잔소리가 안 나오게끔 유영이 잘 행동한 것도 있지만, 어쩌면 그런 어머니의 교육 방침이 지금의 유영을 있게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머니의 자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 어머니를 평소에도 고마워했던 유영이지만, 오늘은 조금 미웠다. 유영의 시무룩해진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 남자애, 인기 많아?” 겉으로 티 내는 사람은 없지만, 보면 안다. 같은 학부 내의 여자 아이들의 시선뿐만 아니라, 스쳐 가며 지나가는 타 전공 학생들의 시선도. 오직 단유 본인만 그런 시선을 모를 뿐. 아니, 진짜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딱히 다른 여자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괜한 자존심에 뭉그적거리다가 뺏긴다?” 능글스러운 어투로 딸의 속을 찔러대는 어머니. 그리고 그런 어머니를 흘겨보는 유영의 표정에, 어머니는 웃음을 터뜨렸다. “너희 아빠도 왕년에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아니? 만약에 엄마가 너처럼 꾸물대며 눈치만 봤으면 벌써 딴 여자한테 뺏겼을 거야. 그럼 넌 그 여자한테 엄마 소리했겠지?” “아이참! 엄마도 주책이야!” “그게 사실인걸?” “모녀가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고 있어?” 마침 아버지가 들어오다 딸의 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몸을 들이밀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팔짱을 끼며 ‘아무것도 아니에요’라고 대꾸하며 거실로 아버지를 끌고 나갔다. “왜 둘만 재미있는 얘기를 해? 나도 우리 딸이랑 이야기 좀 하자.” “됐어요. 저녁 먹었어요?” “아직 안 먹었지.” “밥 차려드릴게요.” 거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유영은 다시 침대에 엎드렸다. 그리고 어머니가 남기고 간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애를 썼다. **** 다시 주말이 지나고 한 주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주말 경기를 끝낸 명수가 집으로 찾아왔다. “오늘은 하루 자고 갈 거야.” “그래도 돼?” “주말 경기 모두 승리한 보상.” 그중 토요일 경기에서 명수는 다시 한번 투데이MVP를 따냈다. “그건 뭔데?” “이거?” 명수는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상자를 개봉했다. “이번에 새로 나온 최신형!” 게임기였다. 당연히 상미가 제일 반겼다. “나 이거 사려고 했는데! 깜빡하고 예약을 못 해서 조만간 용산에라도 가야 하나 싶었는데!” “훗. 이게 그 유명한 예약 특전판이다, 이거야!” “대박. 언제 했대?” 미래적 디자인의 깔끔한 게임기는 장식용으로 선반 위에 두어도 될 것 같다. “오늘 이거랑 이거 하려고 가져왔지롱.” 게임 타이틀을 흔들어 보이는 명수의 모습에 단유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거실 TV에 게임기를 설치하고 곧바로 게임에 들어갔다. 시리즈물로 유명한 대전 게임이었는데, 오프닝 영상이 화려해 명수는 눈을 떼지 못했다. “TV가 크니까 기분 난다.” “너 그냥 쉬는 게 낫지 않아?” 단유가 소파 앞 테이블에 콜라를 내려놓으며 물었더니, 명수는 ‘이게 쉬는 거야’라고 짧게 대답한다. ‘본투비(Born to be) 게이머’ 명수다운 대답이다. “너도 앉아서 구경해. 조금 있다 시켜줄게.” “됐어. 너희들끼리 해.” 커플은 각자 게임 패드 하나씩을 붙잡고 게임을 시작했다. “안 봐준다?” “내가 할 소리네요. 너 기억 안 나? 이 게임, 내가 가르쳐줬어.” “그래도 피지컬은 내가 좀 더 좋지.” “네 피지컬은 운동장에서나 쓸 데 있지, 여기서는 내가 더 낫거든?” “그래 오늘 아주 끝장을 보자.” 손가락들이 쉴새 없이 버튼과 스틱 위를 움직이며 캐릭터를 조종했고, 각자의 캐릭터들은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공격과 놀라운 타이밍의 방어로 공격을 무효화시키는 액션들을 선보였다. 이런 곳에 쓸 만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용호상박이다. “아싸!” “아, 한 끗 차이다.” “웃기지 마라. 저게 무슨 한 끗이냐? 내 체력이 반이나 남았거든?” “내가 어제까지 경기하다 와서 피곤해서 그래.” “그럼 단유 말대로 아주 쉬던가.” “콜라로 도핑하고.” 앞에 놓인 콜라를 벌컥벌컥 마신 명수는 트림을 거하게 하고는 다시 패드를 붙잡았다. “컴온!” 두 사람의 게임은 무려 하은이 돌아올 때까지 이어졌다.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온 하은이 두 사람을 보며 혀를 찼다. “밤샐 거니?” “적당히 하다 자야죠.” 명수의 말에 하은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 말했다. “그래 적당히 하다 자라. 대신 조용히 하던가, 아니면 올라가서 자던가.” “네? 무슨?” 상미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거실이 어두워 제대로 본 사람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새벽 운동을 하러 나온 단유는 소파 위에서 기절한 채 쓰러진 두 사람을 발견했다. 서로 머리를 맞댄 채로 자고 있는 두 사람을 보니 웃음이 났다. 그 와중에도 게임 패드를 놓지 않고 있는 두 사람. 마치 14살, 그 시절의 아이들을 보는 것 같다. 몸만 컸지 여전히 아이들이다. 그래도 편안해 보이는 표정을 보니, 왠지 기분이 좋다. ‘나이가 들어도,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연인이라.’ 어쩌면 그래서 두 사람은 천생연분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저런 관계가 어쩌면 단유가 바라는 이상적인 연인 관계인지도 모르겠다. 서로 편안하게 마주 앉아서 밤새 양자장론의 스핀-통계 정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양자역학적 동일 입자의 성질에 대해 의견을 교환해보는 건 어떨까, 잠시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 ======================================= [597] 방심(1) 이것저것 하다 보니 어느새 6월이다. 그 사이 조별 과제는 무사히 마쳤고, 교수님께 호평을 받으며 그간의 노력을 보상받을 수 있었다. “다 오빠 덕이에요.” “뭘, 전부 여러분들이 잘해주신 덕분이죠.” “내가 발표를 잘해서 그래요. 그쵸?” “네. 발표 잘하셨어요.” 서로의 노고를 치하하는 시간은 짧게 끝내고, 뒤풀이 겸으로 함께 점심을 먹는 것으로 조별 활동의 끝을 맺었다. “다음에 또 같이했으면 좋겠네요.” PPT를 맡았던 남학생의 소감에 다른 이들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중 유영은 단유를 지긋이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기회가 된다면요.” 나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조별 활동이 자신의 공부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도 할 수 없어, 단유는 그렇게만 말했다. 그리고 유영과 눈이 마주쳤다. 눈을 반짝이는 유영이 살짝 부담스러웠지만, 언제나 그랬듯 단유는 옅은 미소로 거리를 지켰다. 이제 남은 것은 기말고사다. 첫 기말고사였지만, 수업의 난이도를 생각하면 그렇게 어려운 편은 아니다. 죽어가는 얼굴을 하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는 선배들에 비하면 말이다. 하지만 1학년 1학기부터 학점 관리에 들어간 신입생들도 없지 않아, 새벽까지 개방된 열람실에서 허옇게 뜬 얼굴로 책을 보다가 잠을 쫓기 위해 도서관 앞마당을 서성이는 좀비 같은 사람들도 종종 볼 수 있다고 했다. “너도 그중 하나고?” “그렇죠, 뭐.” 피곤을 눈두덩에 덕지덕지 붙인 새벽이 하품을 크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형은 공부 많이 하셨어요?” “대충.” “긴장도 안 되나 봐요.” “긴장해서 시험 보면 망쳐. 알잖아?” “알아도 안 되는 일이 있어요. 저는 형처럼 강심장도 아니라고요.” “열심히 했으니까, 잘할 거야.” “고마워요.” 시험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어렵고, 힘들고, 피곤하다. 아무리 단유라고 해도 시험의 부담감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강의 별 기말고사가 끝날 때마다 안도와 해방감을 느꼈다. 큰 산, 까지는 아니더라도 언덕 하나를 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였다. 단유가 잠시나마 경계심을 풀었던 이유. **** “아, 씨발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더러워도 어쩌냐? 입에 풀칠하고 살려면 이렇게라도 해야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이게 사는 거냐?” 대희는 작은 소주잔을 꽉 움켜쥐고는 부들부들 떨다시피 했다. 마주 앉은 친구가 쳐진 눈꼬리를 문지르며 술을 따라주었다. “어쨌든 너랑 나랑 이렇게 술잔 기울이며 살고 있지 않냐?” “씨발, 날이 갈수록 입에 걸레만 물고 살게 되는데, 이게 사는 거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게 이런 건 아니잖아.” 풀 길 없는 분노를 안고 사는 게 도움이 될 리 없다. 술에 털어 넣으라는 충고를 친구가 건넨다. “됐다. 계속 곱씹을수록 기분만 좆같아지니까 그냥 술이나 마셔.” “크으.” 친구는 대희가 얼굴을 찡그리는 걸 보며 함께 잔을 비웠다. “술맛 좋네. 안 그러냐?” “좋긴…, 쓰기만 쓰다.” “왜 그런 말 있잖아? 인생보다 쓴 술은 없다고.” “쓴맛도 질린다, 질려.” 친구는 젓가락으로 앞에 놓인 파전을 먹기 좋게 갈기갈기 찢었다. “어쩌겠어. 흙수저로 태어난 게 죄지. 그래도 우리가 준희보다는 낫지 않냐? 준희, 걔는….” “야, 걔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라.” 슬쩍 대희의 눈치를 보는 친구. “왜? 불쌍하냐?” 친구의 물음에 대희는 짧게 혀를 차며 자신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내 인생도 처참한데 다른 사람 신경 쓸 틈이나 있어? 신경 쓰기 싫어.” “걔도 참 독해. 어떻게 싫다는 소리 한 번을 안 하지?” “안 하긴.” “했냐?” 대희는 대답 대신 술을 털어 넣었다. 입가에 묻은 소주를 엄지손가락으로 훑으며 입을 열었다. “…됐다, 이 이야긴 그만하자.” “하긴. 걔도 여잔데 그런 대접 받으면서 한마디 안 했을까.” 친구의 중얼거림에 대희는 목소리를 깔았다. “그만하라고. 그리고 입조심 해. 여기 듣는 귀가 얼마나 많은데.” “야. 여기 시끄러워서 들리지도 않아.” “그래도 조심하라고, 새끼야.” 친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파전 하나를 집어 오물거렸다. “사람들은 알려나 모르겠다. 저명하신 교수님의 실체를.” 대희는 고개를 저었다. “저명은 개뿔. 서울대 교수가 뭐 별거 있는 줄 알아? 서울대? 그것도 다 옛날 말이다. 요즘 서울대 별거 없어. 점점 더 별거 없어지는 중이고. 지방 삼류대학이랑 서울대랑 차이도 없어.” 친구는 키득거리며 대희의 말을 부정했다. “야, 아무리 그래도 서울대다. 지금 여기서 얘 서울대 대학원 다닌데요, 라고 소리쳐봐. 사람들이 다들 널 다르게 볼걸? 아니, 서울대생이 왜 이런 허름한 데 있대? 이러면서. 무슨 말인고 하니, 아직까지도 서울대의 명성은 여전하단 소리고, 넌 그 명함 하나로도 앞으로 살길이 막막하진 않다는 희망이지.” “그거 다 지랄인 거지. 학교 안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지는데. 학교 명성 더럽힌다고 자기들끼리 쉬쉬하고, 소문내지 말라고 협박하고….” 대희의 소주잔은 비기가 무섭게 채워지고 또 채워졌고, 밤이 깊어갈수록 그의 푸념은 끝날 줄 몰랐다. **** 서울대 내부를 들락날락하는 차량의 수는 하루 1만 대를 훌쩍 넘는다. 통학용 버스는 기본이고, 교수들의 차량과 학생들이 끌고 온 차들, 그리고 택시, 버스, 화물차, 승합차들로 좁은 학내 도로가 비좁을 정도다. 그에 비해 주차 시설은 턱없이 부족해, 민원이 많이 들어오기도 한다. 이런 사정이니 도로 위에서 어떤 사고가 나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 나올 법하다. 물론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주의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긴 하지만, 사고는 일방의 조심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학내 도로의 규정 통행 속도는 시속 30㎞. 그러나, “아저씨, 좀만 빨리 가주세요.” “네.” 택시 기사를 채근하는 학생들의 주문에 ‘규정 속도를 준수해야죠’라고 대답할 이는 별로 없다. 시속 40~50㎞로 달리는 차들로 인해 언제라도 사고가 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야, 조심해!” 주차장에서 자전거를 빼서 나가려는 새벽을 붙잡으려 했지만, 코너를 돌아오던 차의 속도가 더 빨랐다. 새벽이 너무 놀라 페달에서 발을 뗐지만 달려오던 차는 그보다 더 빨리 자전거 앞바퀴를 치고 지나갔다. 끼익, 브레이크 밟으며 차가 급제동하는 소리와 쾅, 부딪히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나며 새벽은 뒤로 튕겨 나갔다. “새벽아!” 단유가 달려가 새벽의 상태를 살폈다. “으으.” 무릎께를 붙잡고 신음을 흘리는 새벽은 이를 악물고 있었는데 고통이 꽤 심한 듯 보였다. 시선을 내려 살피니 청바지 위로 모래에 쓸린 자국과 올이 나간 사이로 배어 나온 짙은 핏물이 보였다.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어.” “아, 아파요.” “조금만 참아, 바로 119 전화할게.” 그 사이 택시 기사가 차에서 내려 단유의 뒤로 섰다. “학생 괜찮아요?” 새벽은 신음을 참는 듯 이를 악무느라 대답할 겨를이 없었고, 단유는 119에 신고하느라 대답할 수 없었다. “여기 서울대고요, 공과대 31동 앞이거든요? 네, 교통사고인데, 자전거에 타고 있다 부딪혔습니다.” 단유는 신고를 마치고 새벽에게 물었다. “다리 말고 다른데 다친 데는 없어? 머리는?” “…괜찮은 것 같아요.” ‘아, 이거 참’ 곤란하다는 듯 새벽을 내려다보던 택시 기사가 핸드폰을 꺼내 회사에 전화를 걸 때, 택시 뒷문이 열리며 감색 정장 차림의 20대 중반 혹은 그 이상으로 보이는 여자가 내렸다. 그녀는 다가와 새벽을 슬쩍 보곤 기사에게 말했다. “아저씨.” “네, 네?” “여기서 내릴게요.” “아, 예.” “계산해주세요, 얼른.” 카드를 눈앞에서 흔들어 보이는 여학생은 짜증 난다는 얼굴을 하고 새벽과 단유를 쳐다보았다. “예, 금방 해드릴게요.” 기사는 카드를 받아 상체를 택시 안에 들이밀었다. 그 사이 여자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아빠. 나 다 왔는데, 여기 앞에서 사고가 나서. 아니, 난 안 다쳤고. 응. 그냥 교수회관으로 가서 기다릴 걸 그랬어. 괜히 아빠 있는 데로 간다고 하다가 사고 나고 말이야. 짜증 나게.” 단유는 도대체 어떤 여자인지 궁금했다. 바로 앞에 사고가 난 당사자가 누워있는데, 비록 가해자는 아니더라도, 사고 피해자 앞에서 ‘짜증 난다’는 식의 말을 하는 건 너무 예의 없지 않은가. “내려온다고? 여기, 잠시만. 저기요.” 단유는 가만히 지켜봤다. “내 말 안 들려요?” “…왜 그러시죠?” “여기 정확한 위치가 어떻게 돼요?” 이곳 학생은 아닌 모양이다. 그리고 저 정도 장성한 딸이 교수회관으로 가려 했다면, 아버지는 교수인 모양이다. 택시 기사가 다가와 카드를 내밀자, 신경질적으로 낚아채면서 단유를 쏘아붙였다. “이봐요? 왜 사람이 묻는데 빤히 쳐다만 봐요? 예의 없게? 혹시 여기 학생 아니에요?” “맞는데요.” “그런데 여기 어딘지 몰라요? 아니면 사람이 묻는 말을 그렇게 씹는 게 예의에 어긋난다는 거 몰라요?” “여기 제 친구가 다쳐서 누워있는 건 안 보이세요?” “댁이 다친 건 아니잖아요? 왜요? 내가 그 학생을 치기라도 했어요? 사과라도 해야 돼요?” 여자가 독한 어조로 쏘아내다 귓가에 들고 있던 핸드폰에서 상대방이 뭐라고 한 모양이었다. “응? 아, 몰라. 이상한 애가 말도 안 하고. 여기가, 아, 여기!” 여자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손을 번쩍 들고 흔들었다. 여자의 시선을 쫓아보니 백발의 남성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단유도 익히 눈에 익은 이였는데, 다름 아닌 물리학과 교수님이셨다. 지난 수리물리학 도강 시, 교탁 앞에 서 계시던 모습을 뵌 적이 있었다. “주아야.” “아빠.” “어디 안 다쳤어?” “응. 난 괜찮아.” 교수님의 시선이 바닥에서 신음을 흘리는 새벽과 그를 옆에서 지키는 단유에게로 옮겨졌다. “자네들은? 괜찮나?” “보시다시피 제 동기가 차에 부딪혀서 119에 신고를 한 참입니다.” 여자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아 말이 곱게 나오질 않았다. 교수님도 단유의 날 선 어투가 거슬렸는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러나 단유에게 뭐라고 하는 대신 옆에서 어쩔 줄 모르는 택시 기사에게로 시선을 옮긴 뒤 물었다. “어떻게 사고가 난 겁니까?” “아, 저기 제가 저쪽에서 내려오는데 저쪽 골목에서 자전거가 갑자기 나와서요. 이쪽이 내리막이기도 해서 속도가 조금 붙긴 했는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채 피하질 못했네요. 죄송합니다.” “거, 보니까 택시 하루 이틀 운전하신 분도 아니신 거 같은데 조심 좀 하시지.” “죄송합니다.” 택시기사는 도대체 왜 저렇게 허리를 굽혀 사과하는 걸까? 누구에게? “아빠.” “응.” “나 아까 차 설 때 무릎을 조금 다쳤나 봐. 무릎이 시큰거리네.” “그래? 너 병원 가서 검사받아봐야 하는 거 아니니?” “그래야 하나?” “거기 학생.” 콕 집어 묻는데 대답을 피할 수 없었다. “네.” “119 불렀다고 했지?” “네.” “주아야, 조금 있다가 119 오면 그거 타고 가보자.” “근데 아빠. 나중에 가면 안 돼?” “왜?” “오늘 모처럼 빼입고 왔는데, 이대로 병원 가기 아깝잖아.” “인사는 나중에 해도 돼. 아빠가 말 잘해 놓을게.” “괜히 안 좋게 보시는 거 아냐?” “안 좋게 보긴. 사고가 났는데 불가항력인 걸 어떡하겠어?” 저 모습만 보면, 상심에 빠진 딸을 다독이는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그들 앞에 자교 학생이 다쳐서 쓰러져 신음을 흘리고 있고, 옆에서 진땀을 흘리는 택시 기사가 있다는 상황만 배제한다면. “아니면 아빠가 차 가지고 올까? 차라리 그게 더 나을까?” “응. 나 무서워서 다른 차 못 타겠어.” “그럼 기다리고 있어라. 금방 차 갖고 올 테니까.” “응, 아빠.” 그때 새벽이 단유를 불렀다. “형.” “응, 왜?” “자전거요.” “자전거 뭐?” “저거 저대로 두면 안 되는데.” “신경 쓰지 마.” “안 돼요. 비싼 거잖아요. 누가 가져가면 어떡해요.” 그새 자신이 구급차를 타고 가면 방치된 자전거를 누가 들고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나 보다. 단유가 나뒹굴던 자전거를 잠시 바라볼 때였다. “오빠!”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유영이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 [598] 방심(2) 사고로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주위에 지나가던 학생들이 조금씩 몰리기 시작했다. 학생뿐 아니라 차도 막히기 시작했는데, 택시 때문에 병목현상이 생긴 탓이었다. 그래도 구급차는 일찍 도착했다. “유영씨,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예, 뭔데요?” “저기 저 자전거 좀 챙겨 주실래요?” “자전거요?” “얘가 자기 아픈 거보다 자전거를 더 신경 쓰네요.” 유영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갔다. “웃으면 안 될 상황인데.” “미안해요. 귀찮은 부탁드려서.” “아뇨, 괜찮아요. 제가 맡아 놓을게요.” “여기 자물쇠요. 본부 옆 자전거 주차장에 세워두시기만 하면 돼요.” “네.” “제가 조금 있다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예. 새벽 씨, 조금만 참아요.” “으윽, 아, 네. 전, 괜찮, 습니다.” 애써 미소를 지으려는 새벽의 모습이 참 안쓰럽게 느껴졌다. 단유는 구급차에 같이 올라타며 유영을 향해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구급차의 뒷문이 닫힐 때, 유영의 뒤로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유영을 향해 지었던 표정이 빠르게 굳어갔다. 단유가 응급실 앞 대기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때, 유영이 다가왔다. “왜 왔어요. 안 와도 된다니까.” “어떻게 안 와요.” 그날 저녁, 새벽과 같이 식사했던 자리가 그렇게 좋았나? 보기엔 말수도 적어서 별로였던 게 아닐까 짐작했었는데. “어떻대요?” “골절이랑 근육 긴장으로 통증이 심할 뿐이고, 깁스하고 쉬면 나을 수 있대요.” “심한 건 아니죠?” 두 달간 왼쪽 다리를 못 쓴다고 하니, 심하다면 심할 수도 있겠다. 달리 생각하면 두 달 동안 다른 데 신경 쓰지 않고 책만 볼 수 있으니까 자기 계발의 시간으로 이용할 수도 있겠다, 는 단유의 생각을 새벽에게 전하면 아마 크게 실망하겠지만. “이왕 왔는데 얼굴 보고 가야죠.” “지금, 볼 수 있어요?” “조금 전에 검사실 갔다 와서 침대에 누워 있어요.” 머뭇거리는 유영을 뒤에 데리고 새벽에게로 향했다. “형.”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단유를 부르던 새벽이 단유 뒤에 따라오는 유영을 보곤 벌떡 일어나려다 통증을 느끼며 이를 꽉 깨무는 모습에 단유는 피식 웃고 말았다. “누워 있어. 여기 유영 씨가 일부러 너 괜찮은지 보려고 오셨대. 괜찮지?” “괜찮고말고요. 정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으세요?” “그럼요. 별로 아프지도 않아요. 솔직히 부끄럽기만 하죠. 바로 피하면 되는데 그걸 못해서. 여기 왼쪽 다리만 살짝 부딪힌 거예요. 다른 쪽은 건강해요.” 단유가 보기에 새벽은 지금 입에서 나오는 대로 생각 없이 말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까 의사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머리에는 이상이 없다고 했는데. “집에는 연락했어?” “예, 조금 전에요.” “걱정 많이 하시지?” “그렇죠, 뭐. 교통사고라고는 말 안 하고, 자전거 타고 가다가 넘어졌다고만 했어요. 그래도 크게 안 다쳤냐고 소리를 지르시더라고요. 앞으로 자전거 타지 말란 이야기도 하시고. 그런데요, 형. 자전거는….” 단유가 유영을 바라보자, 유영이 ‘본부 옆 주차장에 세워놨어요’라고 말하며 새벽을 안심시켰다. “내가 나중에 너희 자취집에 가져다 놓을게.” “고마워요, 형.”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자전거를 주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도 들어.” “그건 아니죠. 제가 실수를 한 건데.” “그건 맞아.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네 실수도 있어. 그런데 네 실수만은 아냐. 그 차는 규정 속도 이상의 속도를 냈고, 전방 주시 의무 위반도 있으니까. 아, 조금 있다가 그 택시 가입된 보험사에서 연락 올 거라고 하더라. 그건 네가 전화를 받아야 할 거야.” “예.” “혹시 모르니까, 전화 받고 나서 내용을 알려줘. 만약 부당하게 처리된다면 따로 조치를 취해야 할 테니까.”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됐어. 이제 푹 쉬어.” “가시게요.” “왜? 같이 있어 줘?” “아, 아뇨.” 새벽의 눈동자가 뒤를 향하는 것을 보고 단유는 코웃음을 쳤다. “집에 들러서 필요한 것들 좀 챙겨 와야지.” “아.” “칫솔이나 이런 건 그냥 사면 되겠지만, 위에 걸칠 옷 정도는 미리 준비해놔야 하지 않겠어? 슬리퍼라든가. 아니면 그냥 다 새 걸로 사다 줄까?” 새벽은 깜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아뇨, 아뇨. 뭐하러 새로 사요? 집에 있는 거 쓰면 돼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내가 가져올게.” “죄송해요.” 몇 번을 더 물은 뒤에야 새벽은 더듬거리며 노트북이랑 충전기 따위의 것들을 읊었고, 단유는 그것들을 기억해서 가져오겠노라 대답했다. “자상하시네요.” “제가요?” “네.” “아픈 사람인데 옆에 따로 봐줄 이도 없으니까요.” “아프면 다 그렇게 해 줄 수 있어요?” “가까운 사람이라면요.” 유영은 진지하게 자신에게 어떤 병이 있지는 않았는지 떠올려보았다. “이제 그만 가보셔도 돼요.” “네? 아니, 저기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어딜요? 새벽이네 집이요?” “…….” 침묵이 잠시 흐른 뒤, 유영은 머뭇거리다 허릴 숙였다. “가보겠습니다.” “오늘 고마웠어요.” “네.” “이렇게 병문안까지 와주신 것도 고맙고요.” “네.” 단유도 마주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병원 정문 앞에서 등 돌리고 가는 단유를 잠시 바라보던 유영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휴, 바보네.’ 그때 단유가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유영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어찌 생각해보면 참 운이 없는 경우라고도 할 수 있다. “어떻게 시험 다 끝내고 이런 일을 당하냐?” 또 달리 생각하면, 운이 좋았다고 할 수도 있고. “병상에 누워 시험을 안 보는 것보단 낫지 않아요?” “으이구, 이 철없는 것아.” 새벽의 어머니의 찰진 스냅에 새벽이 비명을 질렀다. “아야!” “엄살은.” 그래도 아들의 상태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시니 저렇게 때리는 시늉이라도 하신다. 아니, 시늉이 아닌가? “다른 사람도 보는데 좀 그러지 마요.” 그러자 어머니가 옆에 앉은 단유를 돌아보며 만면에 미소를 짓는다. “내가 이놈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그렇게 잘 챙겨 준다고요? 고마워요.” “아닙니다. 새벽이 덕분에 저도 많이 도움받았습니다.” “엄마, 나 도와준 거 하나도 없어요. 저 형이 맨날 나 도왔지.” “으이구, 자랑이다, 이놈아. 이놈이 이렇게 철딱서니가 없어요. 내 아들이지만 저런 철없는 놈이 어떻게 서울대를 갔는지 몰라.” 단유는 그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데 어쩜 이렇게 사람이 진중해? 그래도 몇 살 더 먹었다고 큰 형 노릇 하는 것도 보면 고맙기 이를 데가 없어요.” 어머니는 평소 새벽이 전화해서 단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며, 그래서 전혀 낯설지 않다 말씀하셨다. 그렇게 사소한 이야기로 잠시 시간을 보내다가 두 사람만 이야기하도록 두고 단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으로도 우리 새벽이 잘 부탁해요.” “네. 친동생처럼 잘 돌볼게요.” 어머니의 얼굴에 보름달 같은 미소가 떠오른다. **** “대휘야.” ―네, 교수님. “어디지?” ―…집입니다, 교수님. “아, 그럼 잠시 이쪽으로 오겠나? 내가 술을 좀 마셔서 말이야.” ―…어디로 갈까요? 통화를 마친 붉은 얼굴의 교수가 기분 좋은 얼굴로 마주 앉은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끝내기 아쉬운데, 2차 가셔야지요?” “이거 넙죽넙죽 받아먹는 것 같아 미안한데요?” “처장님 덕분에 저희 딸이 면을 서게 됐는데, 애비로서 이 정도 성의 표시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씀을. 교수님께서 저희 학교를 위해 헌신하신 거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어차피 빈 자리였는데요. 오히려 훌륭한 인재를 너무 작은 자리로 보내는 것 같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비록 제 딸이지만 그런 과찬을 받을 정도는 아니죠. 그저 미국에서 학위 하나 받았을 뿐인데요.” “그저라뇨? 무려 미국 명문대 출신 아닙니까?” “허허, 우리 처장님께서 너무 띄워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속없는 이야기들이 오고 가며 흥을 돋운다. 옆에서 미소를 팔던 여인들이 그들의 빈 잔에 술을 채워주고 그들은 1차의 마지막 잔을 비웠다. “미친다, 미쳐.” ―또, 왜? 혹시 교수님? “그래. 이 시간에 부르고 지랄이다.” ―아주 지랄이 풍년이네. 술 마셨대? “내가 지 개인 기사야, 뭐야? 아주 부려먹으려고 난리다.” ―또 룸이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야, 그러지 말고 그냥 확 질러. 더러워서 못 해 먹겠다고. 내가 공부하러 왔지, 니 시다바리 하러 왔냐고 질러버려. “…그게 그렇게 쉬웠으면 이 고생을 했겠어?” ―…그래, 그도 그렇지. 정말 흙수저라 고생이다. “내가 진짜 제대로 공부해서 꼭 출세하고 만다.” ―그래, 그게 진정한 복수지. “…미안하다.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아주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다.” ―아냐, 임마. 친구가 뭔데? 이럴 때 이야기 들어주는 게 친구지. “고맙다.” ―별소릴 다 한다. 야, 밤도 늦었는데 운전 조심하고. 사고 안 나게, 응? “알았어. 얼른 자라.” 대휘는 전화를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네온사인이 빛나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입구에 들어서기도 전에 끈적끈적한 공기가 불어와 숨을 막히게 하는 기분이었다. “아우, 스트레스.” 대휘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 마지막 기말고사를 끝으로 1학기가 끝이 났다. 고등학생 때는 이 시기에도 교실에 처박혀 교과서에 눈을 들이밀고 있어야 했는데, 그런 점에서 확실히 대학은 시간적 여유가 많은 편이다. 하지만 강제하지 않는 이 시간에도 ‘자율적’으로 공부를 하지 않으면, 비싼 등록금 내며 다니는 이유가 없다. 그러나 1학년은 다르다. 전국의 수재들만 모아놓았다는 서울대라고 해도, 고교 3년간 청국장처럼 묵혀놨던 젊음의 혈기를 계속 묵힐 1학년은 별로 없었다. 개강까지 대략 2개월 반. 그들은 자유를 찾아 떠나기 시작했다. 산으로, 바다로, 혹은 해외로. 어떤 이는 지방으로. 또 어떤 이는 PC방으로. “내가 꼭 여길 와야 하는 거야?” “해주기로 했잖아?” “그건 네가 비밀을 지킨다는 전제 조건이 있었지. 넌 그 전제 조건을 깔끔히 무시했고.” “사소한 건 따지지 말자?” “그냥 니 남친 불러.” “니가 불러 줄래?” 단유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무슨 게임 대회 예선이라는데, 왜 자신이 이곳을 순순히 따라왔는지 모르겠다는 심정이었다. 강의 시간을 쫓아 다닐 필요도 없고, 시험 준비나 리포트 걱정은 할 필요도 없는, 자유의 시간이었다. 그 자유의 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고, 어떻게 알차게 보낼까를 계획하며 있었는데, 종강의 시간에 맞춰 말도 안 되게 게임 대회 따위에 끌려오게 되었다. 물론 꺼낸 말이 있긴 해도 지킬 필요는 없다 여겼다. 쌍방의 이행 조건이 어긋났으니까. 그런데도 단유는 따라왔다. “넌 정말 좋은 친구야.” “됐다. 어디로 가면 돼?” “가서 물어봐야지. 아마 접수 순번대로 자리 정해져 있을 거야.” 씩씩하게 안내원에게로 걸어가는 상미를 보며 단유는 몰래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엄살을 부리긴 했지만, 그렇게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일도 아니고, 무엇보다 친구가 저렇게 즐거워하는데, 즐거워하는 친구를 보는 게 기분 좋은 일이다. 문득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뒤쪽에는 대회 예선에 참가하기 위해 PC방을 찾아온 이들로 인해 번잡했고, 그래서 누구의 시선이었는지 알기 어려웠다. 하지만 즐거운 기분을 깨뜨릴 정도의 흉흉함이 느껴졌다. 상미를 따라온 또 다른 이유.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그녀를 쫓는 그 시선으로부터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더라도 안심할 순 없으니까. “야, 이쪽이래.” 상미의 부름에 단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닭이 홰를 치듯 팔을 휘젓는 상미를 보며 단유는 표정을 풀었다. “1등 하자, 우리?” “그게 마음대로 돼?” “돼.” “어떻게?” “니 실력은 내가 인정하니까.” 니가 그걸 인정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단유의 말에 상미는 호탕한 웃음으로 단유의 등을 두드렸다. 그래, 하는 데까지는 해보자.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낫고, 이왕에 하는 거면 1등하는 것도 좋지. 지겹도록 1등만 해왔던 단유의 마음가짐이었다. ======================================= [599] 방심(3) “언니, 언니 팬이에요.” “고맙습니다.” “방송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홉 명 정도의 사람들이 상미를 에워싸고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단유는 살짝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는데, 훈훈한 광경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여기 선물이요.” “이런 건 부담스러운데.” “저도 혹시나 해서 가져왔는데, 받아주세요. 그리고 방송 열심히 해주세요.” “네, 더 열심히 할게요.” 상미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수줍은 미소로 팬이라고 찾아온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선물을 받아들었다. 몇몇 이들은 상미가 건물에 들어올 때부터 인사하고 싶었는데, 혹시 대회에 지장이 갈까 봐 지켜만 봤다고 이야기했다. 대회가 끝난 뒤에야 이렇게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는 그들의 말에 상미는 다시 한번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중 한 사람이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상미를 기다리는 단유를 눈짓하며 물었다. “혹시…남자 친구예요?” “아뇨. 그냥 친구요. 중학교 때부터 친구.” “아, 그럼 혹시 지난번 방송 때 같이 하셨던 그 친구분이신가요?” “방송 보셨어요?” “네. 아, 그 에임 끝내주던 분 맞죠? 좀비 전사 세 마리를 한꺼번에 잡던 분?” “맞아요.” “아, 나도 기억난다. 내가 그때 계속해 달라고 채팅도 썼었는데.” 단 한 번의 출연이었지만 꽤 인상적인 플레이를 남겼던 탓에 단유도 시청자들로부터 호감을 끌어냈다. “잘생기셨어요!” 여성 시청자는 실물로 본 단유의 모습에 멋있다며 발을 굴렀다. “같이 계속 방송해주시면서 안 돼요? 그때 방송 되게 재밌었는데. 상미님도 그때 포텐 터지셨었잖아요?” “그랬나요? 헤헤. 그런데 저 친구는 공부하느라 바빠서 같이 게임 할 시간이 없어요.” “대학생인가요?” “네.” “아, 아쉽다. 같이 방송하면 좋은데.” 아쉬워하는 팬들을 위해 상미는 단유를 불러 인사를 시켰다. “낯가림이 심해서 이래요. 인사 좀 해줘. 우리 방송 시청자분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악수 한 번만 해주시면 안 돼요?” 남성 시청자와 악수를 나눴더니, 그 뒤로 다른 시청자들과도 악수를 해줘야 했다. 교복을 입고 있던 여학생은 ‘오빠 멋있어요’라는 말로 단유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대회는 잘하셨어요?” “아, 저희 일단 예선은 통과했어요.” “와, 역시 상미님은 통과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럼 이번 토요일에도 여기 오시겠네요?” “아마도요?” “다음에 저도 선물 가져올게요. 꼭 받아주세요.” “아뇨, 아뇨. 그러지 마세요. 제 방송 잘 봐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선물 같은 거 안 주셔도 돼요. 지금 이것도 되게 부담스러워요.” 상미는 양손에 들고 있던 종이가방을 들어 보이며 난색을 보였다. “그냥 성의니까 받아주세요. 상미님 덕분에 요즘 얼마나 즐거운데요. 항상 즐겁게 방송해주시니까, 방송 보는 내내 웃음이 안 그쳐요.” “저도요.” 모인 사람들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상미님은 왜 캠방 안 해요?” “그래요, 언니. 언니 캠방 해도 될 거 같은데? 완전 외모 인정.” “응, 안 해.” 교복녀의 말에 상미가 재치있게 대답하자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왜요. 상미님 캠방하면 지금 시청자의 두 배는 더 들어오겠는데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돼서요. 그래도 아주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니까, 기다려주세요.” “꼭 좀 해주세요. 꼭이요.” “네.” 그렇게 짧은 팬미팅을 끝내고 상미와 단유는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만나요.” 상미는 손을 흔들어 보인 뒤 돌아섰다. “우리 팬들 매너 너무 좋지 않아?” “그래.” 단유는 짧게 대답했다. 단유의 표정을 살핀 상미가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왜? 뭐 안 좋은 거라도 있어?” 단유는 대답 대신 뒤를 살폈다. 아직도 그 자리에서 자기들끼리 뭔가를 이야기하며 웃음을 터뜨리는 이들. 아마도 같은 감정과 경험을 공유하는 이들끼리 모였으니 낯가림보다 반가움이 더 큰 탓일 게다. 어쩌면 저들끼리 식사를 하러 간다거나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저 아홉 중 한 사람은 눈에 밟힌다. 다른 사람과 비슷한 표정과 어투로 상미와 대화를 나눴지만, 그 사람은 눈빛이 달랐다. “택시 탈까?” “택시? 여기서 택시 타면 돈 많이 나올 건데? 왜? 뭐 안 좋은 거라도 있었어?” 상미를 볼 때는 그래도 나름 감정을 억제하는데, 유독 단유에게 시선이 스쳐 지나갈 때면 들끓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단유는 그렇게 느껴졌고, 그래서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대신 악수를 하며 한 사람 한 사람과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그 사람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단유는 그 눈빛에서 불쾌함을 느꼈다. 단유는 도로변에 서서 마침 지나가는 택시를 붙잡으려 손을 들었다. “조금 있다가 이야기해 줄게.” 기분 좋은 만남을 끝내고 나온 마당에 갑자기 불안감이 드니 상미는 캐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 도대체 뭐가? 진짜 뭐가 있는 거야?” 단유는 난감하다는 듯 볼을 긁적이다가 말했다. “…어쩌면 너를 쫓는다던 그 스토커 말이야.” 상미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아니, 입을 열 수가 없었으리라. 파랗게 질린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는 상미에게서 두려움의 감정이 진하게 느껴졌다. 마침 택시가 잡혀서 단유는 상미를 먼저 태운 뒤 올라탔다. 상미의 표정이 너무 좋지 않아 보였다. “확실한 건 아냐.” “확실하지 않다고?” 스토커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그저 상미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문득, 단유는 상미가 지나치게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유는 섣불리 말했던 것을 자책하며 상미를 달랬다. “응. 내 느낌일 뿐이니까. 아닐 수도 있어.” “…나 지금 되게 무서워.” “내가 예민해서 그렇게 느낀 것일지도 몰라.” 두 팔을 감싸며 떠는 게 느껴져, 단유는 고개를 돌렸다. 평소의 상미를 생각하면, 지금 이런 반응은 단유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물론 상미가 외강내유형이라, 겉으로 강한 척하는 면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토록 두려워할 줄은 몰랐던 게 실수다. “아저씨.” “네?” “한남동 말고요….” 택시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이야기했다. 상미가 놀라는 눈이었지만, 단유는 의식하지 않았다. 곧 택시가 도착하고 미리 연락했던 인물이 나와 있음을 발견했다. “명수야.” “야, 무슨 일이야? 갑자기. 상미랑 갑자기 왜 찾아온 거야?” 뜬금없이 전화가 와서는 ‘지금 나와, 너희 숙소 가는 중이야’라는 단유의 말에 허겁지겁 뛰쳐나온 명수였다. 단유는 상미를 흘깃 본 후 말했다. “우리 아직 저녁 안 먹었는데.” 사정을 모르지만, 어디 들어가서 이야기하자는 이야기임을 명수는 눈치챘다. “아, 저녁? 잠시만 나 그냥 나와서 아무것도….” 단유가 품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여기 맛있는 데 있어?” “응. 자주 가는 데 있어.” 단유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명수에게 주었다. 어리둥절 해하는 명수에게 ‘먼저 가 있어’라고 이야기한 뒤, 억지로 명수와 상미의 등을 밀었다. 둘이 멀어져가는 것을 확인 후, 단유는 뒤돌아섰다. 긴 6월의 낮도 이미 저물어 하늘은 새카맣게 물든 시간이었다. 주택가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이라 주변에 켜진 가로등 불빛과 서울 유나이티드가 숙소로 쓰는 건물에서 나오는 빛을 제외하고는 별달리 거리를 밝힐만한 곳이 없는 곳이었다. 당연히 인적도 드물었다. 그리고 이런 인적 드문 곳에, 이 시간에 택시가 와서 섰다면, 당연히 의심해 봐야 한다. 게다가 그 차가 줄곧 자신들이 탄 택시를 쫓아왔다는 의심이 든다면 말이다. “거기 계신 분.” 단유가 나직하게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굳이 예민한 감각을 들이밀지 않아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니 단유가 허공에 대고 혼잣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오세요.” 어둠 속에 숨어있던 사람은 단유의 시선이 정확히 자신을 가리키니 계속 있기가 어려웠다.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뚜벅뚜벅 걸어 나오니 가로등 불빛이 그를 반겼다. “또 뵙네요.” 불과 몇 십분 전에 만나서 인사를 했던 사람이다. 이름은 모르지만, 상미의 팬이라며 상미를 향해 방긋방긋 웃던 사람. “안녕하세요.” 사내가 쭈뼛거리며 인사를 했다. 그도 난감할 테다. 이런 상황을 계산에 두진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단유로서도 그가 원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비록 명수에게 도움을 요청한 셈이긴 하나, 명수조차 위험에 빠뜨리긴 싫었다. 그러니, ‘내 손으로 처리해야지.’ 단유는 그렇게 마음 먹었다. “우연이네요.” “네? 아, 네. 우연이에요.” 사내가 엉겁결에 대답했다. 이성적이지 못한 답변이니 아마도 꽤 당황한 모양이리라. 단유는 담담하게 다시 말을 이었다. “왜 따라오셨죠?” “예? 아, 아뇨. 그냥 우연히 여기 볼 일이 있….” “변명하지 마세요. 눈이 있으면 주위를 둘러보시고요.” 그제야 정신 차린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혀를 차는 사내다. 사내는 솔직히 정신이 없었다. 피시방 앞에서 모인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모인 김에 같이 밥이라도 먹을까요’라고 제안했고, 여중생인지 여고생인지 모를 애가 적극적으로 찬성하며 분위기를 몰아가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빠질 타이밍을 찾지 못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상미의 뒤를 훔쳐보던 중에 상미네가 길가에 서서 택시를 잡으려 하는 것을 보고 얼른 입을 열었다. “저, 죄송한데 전 다른 볼 일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할 거 같아요.” “아, 그래요? 되게 아쉬운데요?” “어차피 토요일에 다시 또 만날 거잖아요? 그때 뵈면 되죠.” 주말이라도 사람마다 시간 여유가 다른 법이니, 이 중에는 토요일에 이곳에 못 올 사람도 있을 것이고, 혹 모인다 해도 지금처럼 함께 식사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지만, 사내는 그렇게 둘러댔다. 그로서는 이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둘 필요가 있었다. 단유가 택시를 잡고 상미가 타는 것을 확인 후, 더 마음이 급해져 얼른 고개 숙여 인사하고 돌아섰다. 곧바로 나와 택시가 지나가는 것을 눈으로 확인 후, 뒤따라 지나가던 택시를 붙잡았다. “저 택시, 8012 좀 따라가 주세요.” “예?” “중요한 일입니다.” “아, 네.” 몸을 앞으로 쭉 빼고는 앞서가는 택시의 뒤꽁무니만 눈에 담으며 따라왔다. 중간에 다른 차가 끼어들기라도 하면, 나직하게 욕을 뱉으며, 몸을 기울여 택시의 향방을 쫓기 바빴다. 도착하고도 몸을 숨기고 상미의 뒤를 쫓기 바빴으니, 도착한 곳이 이렇게 인적이 드문 곳이라는 상황 파악이 잘 안 됐고, 그래서 단유의 물음에 홀랑 넘어가 버렸다. “쳇. 그래서 뭐요?” 사내가 태도를 바꿨다. “내가 뭐라도 했어요?” 단유는 아무 말도 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사내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다가 여기 오기 3분여쯤 전에 큰길가에서 골목으로 접어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상한 오해 받기 싫고요, 진짜 우연히 온 겁니다. 길을 잘못 들어서 그래요.” 사내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자리를 빠져나가려 했지만, 단유가 놓아주지 않았다. 이대로 놓아주면 이 남자는 다른 곳에서 또다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다. “상미한테 관심 끊으세요.” 남자는 심각한 모욕을 받았다는 듯, 벌컥 화를 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관심을 끊으라니 말라니 하는 겁니까? 그리고 관심을 받기 싫었으면 애초에 방송을 하지 말든가?” “범죄입니다.” “범죄? 범죄요? 아놔. 되게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네. 이봐요, 당신이 그, 친구면 다야? 응? 당신이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사내는 눈을 부라리며 단유에게 성큼 다가갔다. “이런 식으로 쫓는 게 팬심이라도 됩니까?” “팬심은 무슨. …그리고 당신, 계속 날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데, 나 이래 봬도 남들 부러워하는 직장 다니는 사람이거든? 당신, 내가 얼마나 버는 줄 알아?” “돈…그래서 상미한테 지금껏 돈으로 마음을 얻으려 한 겁니까?” “마음을 얻으려 한 게 아니라, 마음이 통한 거야! 당신이 나랑 그 여자 사이를 알아? 내가 그나마 지금까지 바빠서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니까 그나마 돈으로라도 챙겨준 거야. 그 여자는 그걸 고마워했고! 아무것도 모르면 말을 하지 마!” “경고하는데 다시 한번 이런 스토킹이 있으면 신고해서 법적인 처벌을 받게끔 하겠습니다.” “뭐, 스토킹?” 사내는 단유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버럭했다. “이 새끼가, 사람이 말이면 단 줄 아나!” 그리고 흥분을 참지 못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단유는 그 주먹을 가볍게 틀어막았다. 덩치가 조금 있는 사내라 주먹이 가볍진 않았다. 하지만 싸움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인지 주먹질이 서툴렀다. “예전 같으면, 제가 기술이 없어서 어떻게 할 수 없었는데 말이죠.” 단유는 사내의 주먹을 뿌리치고는 손목을 돌렸다. “이제는 좀 할 줄 알거든요. 싸움.” 단유는 사내를 향해 한 발 내디뎠다. ======================================= [600] 방심(4) 사내가 뛰쳐나오며 가로등 아래 선 탓에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며 상황을 파악하려는 눈치가 선명하게 보인다. 감색 세미 정장을 입고 푸른 넥타이를 맨 그는, 불과 몇십 분 전 점잖은 미소로 상미에게 파이팅을 외치던 남자다. 가벼운 경고에 흥분해서 주먹을 휘둘렀던 사내는 자신의 공격이 쉽게 막히자 당황한 기색을 보였고, 이내 경계 모드로 태도를 전환했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뭔데 사람을 협박해? 스토킹? 당신 그거 모욕죄인거 알아 몰라!” 괜히 목소리를 높이는 건, 고작해야 센 척 해보려는 허세다. 그리고 그런 허세가 단유에게 먹힐 리 없었다. 단유는 입술을 굳게 닫은 채로 그에게 다가갔다. 사내의 얼굴에 긴장이 떠오르며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 “단유 혼자 보내도 괜찮을까?” 상미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명수 역시 미간을 좁히며 상미의 걱정에 동의한다는 뜻을 밝혔다. 비록 단유가 마치 둘 만의 데이트를 위해 카드를 쥐어 보내긴 했지만, 그 행동의 의미를 모를 수 없었다. “괜찮을…거야.” 명수는 단유를 믿었다. 섣불리 행동할 사람도 아니고, 더구나 현명하기로는 세상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의 친구,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친구이니 의심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불안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잠깐 여기 있을래? 내가 잠깐 갔다 올게.” “같이 가.” “너랑 같이 가면, 단유 혼자 거기 남은 이유가 없잖아?”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명수 역시 혹시 모를 사건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라는 단유의 배려 때문에 상미와 함께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냥 같이 가자. 만약 무슨 일이 있어도 너만 빠지면 돼.” “야, 그게 말이냐? 너는?” “난 고작 인터넷 방송이나 하는 스트리머고, 넌 나랑 급이 다르잖아?” “이상한 말 하지마. 네가 위험해지면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아?” “알았어, 니 마음 다 아니까 괜히 나설 생각하지 마. 너 잘못 되면 나 평생 후회할지도 모르니까.” 상미나 명수나 결국 서로에 대한 걱정 때문에 쉽게 돌아서지 못했다. 그럼 단유는? “가자.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도 없고, 혹시 문제가 있으면 경찰에 신고하는 게 더 빠를 거야.” 결국 명수가 결심을 했다. “정말 위급한 상황만 아니라면 나서지 않을게. 하지만 정말 위급한 상황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나설 거야.” 친구가 위험에 빠졌는데 나 몰라라 할 수 없다. 단유의 위험을 앞에 두고 미래를 보존할 마음은 없으니까. “그건 네가 이해해줘.” “알았어. 나도 단유가 위험해지는 건 원치 않아.” 두 사람은 발걸음을 돌려, 택시에서 내렸던 그 장소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장소로 갔을 때, 단유나 단유 이외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안 보이는데?” “전화해 볼까?” 핸드폰을 들어 보이던 상미는, 그러나 통화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어둠에 가려 있던 거리 끝에서 누군가 천천히 다가왔기 때문이다. “벌써 밥 먹었을 리는 없는데?” 태연하게 말을 건네는 단유의 등장에 명수가 재빨리 다가가 물었다. “괜찮아?” “뭐가?”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냐?” “별일 없었어.” “…그럼 왜 우리 둘만 보낸 건데?” “상미가 불안해하니까, 네가 달래주라고 보낸 거잖아.” “…정말?” “가자.” 단유는 명수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상미 역시도 흔들리는 시선으로 단유와 단유 너머의 거리를 바라보며 물었지만, 단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둘러대고 두 사람과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거기 맛은 괜찮아?” “괜찮아. 맛은 보장할 수 있어.” “네 입맛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너의 보장을 어떻게 신뢰할까.” “나뿐만 아니라 우리 선수단 사람들이 모두 맛있다고 그랬어. 자주 가는 단골이니까, 너도 좋아할 거야. 그리고 솔직히 니 입이나 내 입이나 거기서 거기 아냐?” “하긴 그렇다.” 단유는 피식 웃었다. 명수가 단유의 표정을 살피며 몸을 살짝 기울여 어깨로 단유를 툭 쳤다. “야, 난 보이지도 않아?” 단유와 명수가 고개를 돌리니, 삐친 척 시늉하는 상미가 멈춰 서 있었다. 둘은 상미를 사이에 두고 웃으며 식당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안도의 웃음이라기보다는 어색한 상황을 빨리 풀어버리려는 의지의 웃음이었다. **** 상미와 명수가 돌아오기 5분 전. 사내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속을 들킨 것 같은 상황에 대한 당황과 그동안 공고히 쌓았던 사회적 위치가 무너저 내릴 수 있다는 불안감, 그리고 그 감정들을 느끼게 만든 주범을 향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주범이 자신의 주먹을 힘들이지 않고 막아낸 뒤, 읽을 수 없는 표정을 하고 다가서는 순간 섬뜩함을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눈앞의 남자가 평범하지 않다는 촉이 왔다. 상대와 자신 사이의 힘의 저울을 빠르게 측정하여 태도를 정하는 것은 사회 활동을 오래하며 체득한 생존 노하우다. 아니면 단지 어두운 길거리에, 자신보다 키도 크고 젊은 남자의 접근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거나. 그래서 사내는 단유의 접근에 맞춰 뒷걸음질 쳤다. “뭐야, 오지 마.” 하지만 두 사람은 너무나 가까웠고, 사내의 뒷걸음질보다 단유의 접근이 더 빨랐으며, 단유의 손은 그보다 더 빨랐다. 와락 멱살을 움켜쥐는 단유의 행동에 남자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단유의 얼굴이 점점 눈앞으로 다가오니, 깊이를 가늠키 어려운 새까만 눈동자가 사내의 눈을 파고 든다. “또 다시 상미의 근처를 얼씬거리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이, 이 사람이! 당신, 나 협박하는 거야!” “예, 협박입니다. 강도경 씨.” “흡!” 사내는 숨이 덜컥 멈추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아는 거지? 아까 팬미팅 때도 자신의 이름은 말한 적이 없는데? “당신이 사는 곳, 당신의 직장, 당신의 부모.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당신에 대한 모든 걸 밝히겠습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그리고 내, 내가 뭘 했다고!” “지금, 당신이 생각하는 그것.” 도경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 순간 자신의 머리를 스쳐 가는 영상들. 과거 자신의 방에서 상미의 방송을 보며 사타구니를 긁던 자신의 모습, 후원금을 받고 좋아하던 상미의 모습에 심술 나서 썼던 채팅들. 아슬아슬한 수위를 넘나드는 채팅과 자신을 각인시키기 위해 구독과 후원금을 집어넣던 일. 자신의 후원금에 감격해마지않던 상미의 목소리를 들으며 흥분에 빠졌던 그날의 기억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 생각을 알 리가 없잖아!’ “내가 모를 것 같나요?” ‘헉!’ 도경은 심하게 놀라서 딸꾹질을 했다. 눈앞의 남자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 세상 사람이 아닌지도 몰랐다.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단 말인가. “다시 한번 협박합니다만, 두 번 다시 상미 곁에 얼쩡거리지 마세요. 방송 보는 것까지는 안 말리지만, 방송을 보면서 쓸데 없이 자신을 노출하려 든다면, 그 순간 당신의 사회적 생명은 끝이 날 겁니다. 그렇게 만들 거예요.” “즈, 증거 있어! 내가, 내가 해….” “자신 있으면, 해 보세요.” “…….” “사회적 생명 정도로 겁먹지 않겠다면, 당신의 생물학적 수명도 마침표를 찍게 해드리겠습니다. 당신 집 주소 쯤은 알고 있으니까.” 협박을 가하는 단유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고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는 단조로운 어투였다. 그래서 더 무겁고 두렵게 느껴졌다. 단유가 멱살을 풀었다. 그리고 등을 곧게 세우며 사내를 내려봤다. “가세요.” 단유의 날카로운 눈빛을 받으며 사내는 힘겹게 뒷걸음질 치다 몸을 돌려 달아났다. 쫓아오지 않을 것도 알고, 뒤에서 위협을 가하지 않을 것도 알지만, 그런 이유를 막론하고 단유의 곁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리 멀어지려 하는 본능 같은 움직임이었다. 마치 맹수를 피하는 초식동물처럼 말이다. 사내가 다시 자신이 몸을 숨겼던 그 방향으로 달아나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단유는 뒤에서 다가오는 이들의 움직임을 눈치챘다. “후.” 긴 호흡으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돌아서서 그를 걱정하는 친구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 그러고 보니 최근 마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사람을 협박하거나 위협을 가할 때만 쓰게 되는 것 같아 씁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도를 하려던 여인들에게도 그랬고, 방금 전 사내에게도 그랬다. 따지고 보자면, 단유의 환상 마법은 최초에는 이런 식이 아니었다. 단유가 보여주고 싶은 어떤 물체를 사람들에게 보고 있다는 착각을 주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게 조금 더 발전하여 호빵에게도 보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 응용법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여행을 하면서 환상 마법은 용례가 변화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변화보다 진화였다. ‘보이게’ 하는 것에서 ‘보여주는’ 것으로.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골라 보는 습성이 있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하지만 그런 취사선택의 저변에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을 상상하는 힘도 있었다. ‘난 이런 걸 보고 싶지 않아.’ 혹자는 그것을 Defense Mechanism, 방어 기제라고 말했다. 스트레스 및 불안의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욕망을 숨기고 속이며 대체하는 방식을 말한다. 단유의 환상 마법은 그런 방어 기제를 해제시켰다. 상대가 보기 싫어하는 것을 보게 하는 법은, 그저 그들이 상상하는 것을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더욱 그들의 공포심을 자극하며 두려움에 떨도록 하였다. 지난 여행 동안, 단유는 여러 사람을 만나며 사람에 대한 깊은 고찰의 시간을 갖게 해주었고, 덕분에 마법도 성장하였다. 솔직히 그리 달가운 방식은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의 단유는, 현대 국가의 안전 시스템을 신뢰했으며, 소소한 위기 속에서도 국가, 혹은 기관의 도움으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알게 되면서 ‘마법’이 필사의 순간에만 사용될 힘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되었다. 오히려 너무나 자주 자구(自救)의 수단으로서 이용되어야 한다는 문제로 곤란할 지경이었다. 들키지 말아야 할 힘이기에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하고 싶지만, 세상은 오히려 그런 힘을 사용하지 않고는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만약 단유에게 마법이 없었다면, 그는 더 많은 위기 속에서 무방비로 희생을 강요받았어야 했을 것이다. 멀리 볼 것도 없다. 지금도 뉴스에서는 얼마나 많은 약자들이 억울한 희생에 눈물 흘리며 하소연하는가? [오늘 새벽 2시경 한 30대 여성이 자택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용의자는 여성의 전 남자 친구로, 오늘 아침 인근 피시방에서 긴급 체포되었습니다. 남성은 여성의 이별 통보에 앙심을 품고….] 흔한 뉴스. 이제는 이런 뉴스를 들으면서도 사람들은 덤덤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움직여 식사를 이어나간다. “상미야.” “응?” “넌 남자 친구 잘 만난 줄 알아.” “무슨 소리야?” “난, 니가 나한테 헤어지자고 해도 저렇게는 안 할 거니까.” 상미는 명수의 등을 찰지게 때렸다. “아야!” “야, 이 미친 놈아. 그게 여자 친구한테 할 소리냐?” 명수는 등이 따가워 미치겠다는 얼굴을 하고 투덜거렸다. “왜 그러냐? 그만큼 내가 널 사랑하니까, 헤어져도 다 이해한다는 거잖아?” “그게 밥 먹으면서 할 소리냐? 아우, 진짜. 야. 내가 이런 놈하고 계속 사귀는 게 맞냐, 틀리냐?”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노 코멘트.” “친구라고 감싸니?” “너희 둘 사이에 끼기 싫다는 소리야.” “하여튼, 이럴 땐 미꾸라지처럼 빠지지.” 미꾸라지가 아니라, 너희 둘 사이에 끼면 나도 바보 소리 들을까 봐, 라는 말은 차마 단유 입으로 할 수가 없었다. ======================================= [601] 방심(5) 집으로 돌아온 도경은 숨을 헐떡였다.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현관 앞에서 숨을 헐떡이다 불에 덴 듯 놀라며 신발을 벗어 던지고 거실로 뛰어갔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커튼을 잡아 끌었다. 거실을 환히 밝히던 바깥의 불빛이 암막 커튼에 가려졌다. 커튼 자락을 붙잡은 채로 숨을 헐떡이던 도경의 숨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주변의 상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요한 어둠에 잠겨 있는 거실. 매일 보던 거실이지만 어쩐지 낯설게 느껴진다. “상미의 근처를 얼씬거리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갑자기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에 도경은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쳐들었다. 목뼈가 나가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주위를 홱홱 돌아보던 도경은 빠르게 거실 가운데 탁자로 향했다. 그리고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아침 인근 피시방에서 긴급 체포되었습니다. 남성은 여성의 이별 통보에 앙심을 품고 살인을 계획한 전 남자친구로 밝혀졌으며, 현재 경찰은 보다 구체적인 살인 동기와 방법을 조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 이 남성은 지난 밤 11시경 여자 친구를 찾아간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과정에서 꽤 심한 다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이웃 주민들의 신고가…] 뉴스에서는 여기자의 리포팅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도경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집안에 드리운 고요함과 환청처럼 울리는 남성의 목소리를 지우고 싶은 마음에 틀었을 뿐이니까. 자신보다 한 뼘은 더 큰 키와 넓은 어깨를 가진 남자가 쏘아내던 눈빛이 떠오른 도경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 거지? 진짜 여길 아는 거야? 회사도?’ ‘아닐 거야. 내 이름은…그래, 사이트 관리자한테 물어서 알 수 있다고 쳐도 주소까지는 알 수 없잖아? 그 사이트 가입할 때 주소는 입력하지 않았잖아?’ ‘아냐, 어쩌면 해킹해서 내 이름이랑 주소를 알았을지도 몰라. 그럼 회사 주소는 어떻게 알지?’ ‘그래, 뻥카야. 모를 거야. 무슨 수로 안다는 거야!’ “내가 모를 것 같나요?” “헉!” 도경은 너무 놀란 나머지 순간적으로 숨을 멈추며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하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환청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에야 겨우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러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고, 갑작스러운 경직에 어깨 근육이 결렸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살 수는 없다. 불안감을 만드는 근본 요소를 해결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그의 말처럼 상미에게 접근하지 않고 사는 것은 해결이 될 수 없다. 그의 방해로 상미를 만날 수 없었지만, 분명 자신을 만난다면, 상미 그 아이도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 반겼을 것이다. 그의 일상도 지켜야 한다. 그의 직장도 지켜야 하고, 지금의 삶도 지켜야 한다. 상미와의 관계도 진전시키면서 동시에 그의 삶도 유지하는 법. 간단하지 않은가? 다만 혼자서는 어렵다는 걸 인정한다. 그래, 모든 게임이 다 그렇지 않은가? 예부터 공주를 구하기 위해서는, 공주를 가두고 있는 괴물같은 수문장을 부셔야 하는 법이다. 이번에 그 수문장의 존재를 알았으니 그를 어떻게 공략할 것인지 연구를 하면 된다. “자신 있으면, 해 보세요.” 또다시 환청이 들린다. 자신? 만약 이게 진짜 게임이라면 자신이 없다. 도경은 싸움도 해 본 적 없고, 운동을 자주 하는 편도 아니니까. 힘이든 체력이든 그 무엇도 그 남자에게는 견줄 수준이 안된다. 하지만 현실은 게임과 다르다. 현실에서는 자신의 부족을 채워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돈. 돈만 있으면 그 부족함도 다 채울 수 있다. **** “형, 이렇게 자주 오시지 않아도 돼요.” “그런 것 치고는 많이 반가워하는 표정인데?” 단유는 들고 온 것을 침대 옆 탁자에 내려놓으며 어머니께 먼저 인사했다. “어휴, 매번 올 때마다 뭘 이렇게 많이 사와요?” “어머니 드시라고 좀 사왔어요.” “괜찮다니까.” 단유는 새벽을 슬쩍 보며 말을 이었다. “새벽이야 병원밥만 먹어도 된다지만, 어머니는 맛있는 거 드셔야죠.” “와, 왜 저는 병원밥이에요? 저도 병원밥 질리는데?” “넌 빨리 나아야지.” “형이 우리 엄마 아들 해야겠다.” “나야 좋지.” 단유의 너스레에 어머니가 웃음을 지었다. “단유군이 우리 아들이었으면 나도 좋지. 차라리 이번 기회에 아주 바꿀까보다. 맨날 사고나 치는 이런 놈보다 백배 낫네.” “엄마도 말씀 되게 섭섭하게 하시네.” “그럼 사고를 치지 말든가, 이 녀석아.” 웃음을 지으며 아들의 머리를 쿡 박는 시늉을 하시는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나 잠깐 화장실 좀 갔다올게.” “네, 다녀오세요.” 어머니가 나가신 후, 새벽이 단유에게 말했다. “매번 고마워요, 정말.” “그런 소리 한 번이면 족해.” “정말이에요. 형한테 받는 도움 어떻게 다 갚을지 걱정이라고요.” 서울에는 친구도, 친척도 없다. 그러니 병실에는 늘 어머니 혼자 새벽의 곁을 지켰다. 지방에서 올라와 아들의 병실 곁을 지켜야 하는 어머니 때문에 새벽도 속이 말이 아니었다. 아마 지금도 화장실을 핑계로 나가서는, 집에서 홀로 생활하실 아버지께 전화를 하고 계신 게 틀림없다. 식사는 잘 하시는지, 생활에 문제는 없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계실 게다. 그런 어머니이기에 새벽은 혼자 있어도 괜찮다며 말씀드렸지만, 역시 아들 혼자 두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으신 어머니기에 내려가실 생각을 하지 않으셨다. 그런 와중에 단유가 이렇게 매일 와서 잠시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필요한 것들을 사다주는 것이 심적으로 많은 도움이 된다. “저 다음 주 월요일에는 김천으로 내려가려고요.” “괜찮아?” 단유의 시선이 새벽의 다리 쪽을 향했다. “금만 간 건데 괜히 요란을 떤 거니까요. 병원에서도 깁스만 제대로 하면 된다니까, 내려가서 요양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근처 병원에서 계속 진료를 받는 게 새벽 본인으로서도 도움이 되고 어머니도 혼자 아침을 챙겨 드실 아버지 걱정을 덜 테니 그게 맞다. “방학 때 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아, 그 택시 보험사에서 왔었는데요, 대인 배상금으로 입원비랑 치료비 같은 거 나온다네요.” “다행이네.” “그런데 8:2라서 택시 수리비의 20%는 제가 물어야 된대요. 블랙박스 확인해서 한 거라는데.” 새벽은 조금 억울하다는 눈치로 말을 꺼낸 거지만 그렇다고 이를 어떻게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 새벽은 단지 억울함을 토로하기 위해 그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제 자전거, 아니 형 자전거 있잖아요? 그건 고장이 안 났다네요?” 사고 당시, 새벽도 경황이 없어 자전거가 어떻게 됐었는지 살펴볼 겨를이 없었는데 손해사정사 직원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자전거에 수리를 요하는 고장이나 훼손이 없었다는 증언이었다. “손해사정사 말로는 정말 고급 소재 자전거라서 그런지 모르겠다며 혀를 내두르시더라고요. 만약 그 자전거가 부서지거나 했다면 택시 기사분은 엄청난 돈을 물었을지도 모른다면서. 그런데 그 자전거, 진짜 비싼 거였어요?”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해했다. 비싸게 샀냐고 묻는다면, 몇백 만원씩이나 하는 고가의 자전거는 아니었으니 ‘아니’라고 대답하겠지만, ‘비싼’ 자전거냐고 가치를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티타늄 소재 프레임과 직접적인 비교를 해보진 않았지만, 단유의 마법으로 당시 구현 가능한 최강의 경도와 탄성을 부여했으며, 잘 드러나지 않는 부품―기계식 디레일러, 디스크 브레이크, 풀리 등―들도 성능에 맞춰 마법적 개조를 가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얼마나 물어주기로 했는데?” 단유는 대답을 피하며 물었다. “일단 대물 12만원이요.” 그쪽에서는 수리비로 60만원이 나왔다고 한다. 뭐가 그렇게 많이 나왔나 싶은데, 범퍼랑 헤드램프를 수리해야 한다고 손해사정사가 알려주었다. 그런데 ‘일단’이란 말이 걸린다. “그런데 문제는 형이랑 상의를 해야 돼요.” “응?” “당장은 운행에 문제가 없는 수준이니 괜찮지만, 비싼 자전거는 스크래치가 나거나 혹은 휠에 문제가 있거나 하면 수리를 한다는데, 그래서 수리를 해야 한다면 돈이 많이 나올 거라고 하고, 그러면 그 돈을 보험사에 지급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물어보더라고요. 어떻게 하겠냐고. 그래서 생각해보니까 이걸 저 혼자 결정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어차피 수리가 필요한지를 알아보려면 수리점에 맡겨야 하고, 저는 당장 병원에 묶여 있으니 나갈 수도 없고요. 그리고 원래 형 거니까, 수리비를 받아도 형이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뭔가 복잡한 일에 얽힌 듯한 기분이었다. 자전거를 개조한 이후 한 번도 수리점 같은 곳에 맡겨 본 적이 없기도 하거니와, 맡긴다고 한들 수리점에서 그 자전거의 정확한 금액을 계산해낼 수 있을까? “알았어. 그리고 ‘일단’이란 말은 다른 게 또 있다는 이야기야?” “그게요, 거기 택시에 타고 있던 분 있잖아요?” 단유는 사고 당시 택시에서 내려 오만하게 굴던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여자도 사고 이후에 병원에 입원을 했대요. 일단 택시공제조합 측에서 그 여자에 대한 치료비를 전액 부담하는데, 저한테도 과실이 있기 때문에 향후 합의금 계산 시에 그 금액을 상계처리한다네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아니, 일단 당장에 떠오르는 건 그 여자가 다친 곳이 보이지 않았다는 거였다. 물론, 택시가 급정거를 했으니 그 상황에서 뒷자리에 타고 있던 여성이 다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기억에서는 어떤 통증을 호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단유에게 엉뚱한 걸 물으며 신경질을 부리지 않았던가. ‘아, 어쩌면 아파서 신경질을 냈던지도.’ 그렇지 않고서는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던 여자의 심성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실 저나 어머니나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조금 헤맸는데요, 아무래도 형한테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아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잘했어. 내가 봐줄게. 자전거도 수리점에 맡겨서 알아보고, 그 합의금인가 하는 것도 알아보고 이야기해볼게.” “그냥 자전거만 부탁드릴게요. 합의금이야 뭐, 제 실수도 있으니까 조금 덜 받는다고 해도 이해해야죠.” “아냐. 내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분한테 부탁하면 잘 알아봐 주실 거야.” “너무 실례되는 걸 부탁하는 거 아니에요? 별로 큰일도 아닌데.” “큰일이 아니니까 간단히 알아볼 거야. 넌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낫는 것만 생각해.” “제가 좀 칠칠치 못해서요.” “그런 말 하지 마. 솔직히 내가 잘 모르니까 여기서 장담은 못 하겠지만, 그 사고에서 네 실수는 있다고 해도 그렇게 크지 않아. 오히려 그 택시가 잘못한 게 더 많다고 생각해, 난. 같이 있으면서 신경 써주지 못했던 나도 도의적인 책임을 느끼니까 넌 그냥 푹 쉬기나 해.” “에이, 그건 아니죠. 형이 무슨 책임이 있어요?” “알았어. 아무튼 네 말대로 별일 아니니까, 그냥 알아만 볼게. 그건 별로 힘든 것도 아니니까. 알겠지?” “예, 형. 고마워요.” 마침 어머니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신 어머니와 함께 앉아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 단유는 병실을 나왔다. 그리고 택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벽에 대한 이야기를 한 뒤, 도움을 받을 방법을 물었고, 택윤은 자신이 그 손해사정사에게 전화를 해보겠다고 답했다. “아뇨, 변호사 한 명만 소개해주세요.” “변호사요?” 자세한 정황은 모르지만, 들은 바에 따르면 굳이 변호사를 불러 처리할 정도의 사안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 택윤이 머뭇거렸다. “그것 말고도 이것저것 여쭤 볼 게 있어서 그래요. 앞으로도 도움 받을 일도 많이 생길 것 같아 그러니, 그쪽으로 유능하신 분 소개 시켜 주세요.” “비용이….” “돈 걱정은 마시고요.” “아.” 택윤은 잠시 깜빡했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툭 하고 때렸다. ======================================= [602] 방심(6) 방학을 맞이한 대학이지만 교정을 누비는 사람들은 적지 않았다. 학기 중일 때만큼은 아니지만, 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계절학기나 세미나 등의 이유로 학교를 찾아와 강의실로 들어갔다. “너 이번에 몇 학점이야?” “9학점.” “꽉꽉 채웠네?” “놀면 뭐해? 방학이라고 마냥 쉬는 것보다는 수업을 듣는 게 효율적이지. 넌?” “6학점. 작년에 대학국어 빵꾸나서 그거 메운다.” “대학국어? 그걸 왜?” “작년 초에 선배들 따라 다니다가 출석 못 채워서 빵꾸났잖아. 어휴, 이걸 다시 들으려고 하니까 아주 미친다. 너는 뭐 듣는데?” “나는 민법총칙이 듣고 싶었는데, 결국 개설이 안 됐더라. 그래서 역사와 철학 듣는다.” “듣기만 해도 졸린다야.” “너만 하겠냐? 날도 더운데 30분 듣다 보면 머리 박고 자고 있겠지.” “모르겠다. 아, 너 혹시 심리학과 교양 듣냐? 그거 이번에 정원 꽉꽉 채웠던데?” “‘행복의 과학적 탐구’? 제일 만만하다고 해서 수강했는데 모르겠다, 어떻게 될지.” “그거 사람이 너무 많아서 강의실 옮긴다고 하더라.” “진짜? 그런 이야기 못 들었는데?” “확인해봐. 다른 애들도 그거 몰라가지고 허둥대던데.” “아이 씨. 알았다. 빨리 알아봐야겠네. 아무튼 고생해라. 끝나고 전화해. 같이 밥이나 먹자.” “그래. 너도 수고해.” 강의가 없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드물게 친구들과의 약속을 위해 왔거나, 혹은 개인 공부를 위해 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이었다. 중앙 도서관에는 오늘도 사람으로 가득했다. 학기 초에도 그랬듯, 지금도 각종 시험을 앞두고 밤새가며 공부하는 학생들로 가득했고, 그들의 열기가 더해져 도서관의 에어컨은 맹렬히 돌아갔다. 에어컨 덕분에 시원해진 열람실에서 책과 씨름하는 학생들 사이에 단유도 자리 잡고 독서에 열중했다. 멀리서 보면 옆의 학생들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지만, 자세히 보면 단유는 그런 이들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보여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옆자리의 학생들이 책과 노트, 필기구를 펼쳐두고 열심히 손을 움직여 필요한 부분들을 발췌하거나 암기하며 책과 싸우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면, 단유는 편안한 자세로 여유롭게 페이지를 넘기며 독서를 즐기는 모양새였다. 그런 묘한 분위기에 주위 사람들이 호기심을 느끼며 단유의 어깨 너머로 슬쩍 시선을 던져 뭘 보고 있는지 살펴보는데, 펼쳐진 페이지를 보자마자 사람들은 시선을 돌렸다. […Independently proposed by Physicists, and were introduced as parts of an ordering scheme for hadrons…] 삽화 없이 영어로만 된 원서를 소설책 읽듯 넘기는 이에게 더 쏟을 관심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툭툭, 누군가 단유의 어깨를 두드렸다. 뭐지, 싶어 고개를 돌리니 눈앞에 작은 이슬이 맺힌 캔 커피가 나타났다. 고개를 들어 캔 커피를 쥐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니, 유영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드세요.” 옆 사람에게 방해가 될까 봐 조용히 말하는 유영. 그런 유영이 신경 쓰인다는 듯 힐끗거리는 주위 남학생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괜찮아.” 단유는 정중히 거절했다. 설마 거절할 줄 몰랐던지 유영의 얼굴이 붉어졌고, 흥미로운 장면을 본다는 듯 주변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커졌다. “…….” 어쩔줄 몰라하는 유영을 본 단유는, 나직이 한숨을 쉬며 책을 덮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유영의 커피를 받아들었다. “나가죠.” 단유가 앞장서고, 그 뒤를 유영이 졸졸 쫓아가니, 또 그 뒤를 남학생들의 시선이 쫓는다. 몇몇 여학생들의 시선도 섞여 있지만, 두 사람의 모습이 열람실에서 사라지고 나니, 부산스러움은 사라지고 다시 에어컨과 맞서 싸우자는 투지와 열기가 슬금슬금 올라오기 시작하며 학생들의 눈동자는 책과 노트로 집중되었다. “열람실 안에서는 음료수 반입이 안 돼요.” “아, 깜빡했어요.” “괜찮아요. 아무튼 잘 마실게요.” “방해해서 죄송해요.” “아뇨, 어차피 쉬려고 했어요.” 단유는 고갤 돌려 벽에 붙은 시계를 확인했다. “또 조금 있다가 나갈 일도 있고.” “아, 어디 가시는데요?” 단유는 유영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그걸 왜 궁금해하지?’라는 시선을 보냈다. 유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죄송할 거까지야. 그냥 밖에 볼 일이 있어서요. 뭐 살 것도 있고.” “네.” 어떤 ‘볼 일’인지, 무엇을 ‘산다’는 것인지 궁금해서 입이 근질근질하지만, 주제넘은 참견이기에 유영은 그저 캔커피만 홀짝일 뿐이었다. 달콤쌉쌀한 커피 한 모금에 눈치 한 번. “아, 저기 새벽이는 어때요?” 열심히 머리를 굴리다 공통 화제를 하나 찾아낸 유영이 급하게 물었다. “며칠 전에 집으로 내려갔어요. 서울에서는 연고가 없어 혼자 병실에 있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어머니가 서울에 올라와 계시려니 아버지가 혼자 계셔야 하니까 차라리 새벽이 내려가는 게 낫다고 판단 했나봐요. 어차피 방학이기도 하니까.” “아, 그렇군요.” “혹시 궁금하면 전화 한 번 해봐요.” “네? 아니….” “아마 유영씨가 전화 주면 새벽이도 고마워할 거예요. 아, 전화 번호 아세요? 모르시면 가르쳐드릴까요?” “아뇨, 지난번에 전화번호는 받아놨었어요. 나중에, 나중에 전화해 볼게요.” “그래요.” 단유는 커피를 마저 들이키고는 빈 캔을 버리기 위해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그사이 유영은 좀 더 머리를 굴렸다. ‘기회가 많지 않아.’ 솔직히 유영 본인도 이렇게 행동하는 게 좋은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남자친구와 교제를 해 본 경험도 없지만, 자신도 아직 단유를 그렇게 좋아한다고 확실하게 말하기 어려운 탓이다. 애초에 오늘 학교에 나온 이유는 방학 동안 할 수 있는 학내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다고 해서 나온 참이었다. 솔직히 과외를 하는 게 제일 낫지 않나 싶기도 했는데, 당장 과외 알바가 나오지 않기도 하거니와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게 솔직히 자신 없기도 했다. 문화인큐베이터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선 길에, 날도 덥고 하니 도서관에서 가볍게 읽을 만한 책이라도 하나 빌려 나오자는 생각으로 들렀다가 이질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단유를 발견했다. 그 순간 느슨하게 풀려있던 긴장의 끈이 조여지면 동시에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드라마, 영화, 소설에서 봤던 각종 장면들이 재생되기를 반복하다 마침내 캔커피를 떠올렸고, 도서관 정문 옆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다 슬그머니 접근했다. 지금의 감정을 유영도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웠다. 이성으로서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다. 호감은 가지만, 이 감정이 이성적 관심인지는 가늠하기 어려웠고, 그렇다고 단순한 호기심이냐고 묻는다면 그것보다는 좀 더 깊은 관계를 원한다고 볼 수 있다. ‘무슨 소리야.’ 유영은 머리를 흔들었다. 어떻게 자신의 마음인데 이렇게 통제가 안 될까? “전 이만….” 어느새 단유가 다가와 유영에게 작별을 고하려는데, 유영이 그 말을 잘랐다. “식사, 하셨어요?” “…아직 안 먹었어요.” “같이 밥 먹죠?” “저….” “밥 사주세요.” 갑자기 저돌적으로 나오는 유영의 태도에 단유는 눈만 껌뻑거렸다. 너무 배가 고파서 미칠 것 같아요, 라는 의미 이상의 무언가가 담긴 듯한 유영의 촉촉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안 되겠는데요’라는 말을 뱉기가 어려웠다. “죄송해요.” 유영은 오늘만 몇 번을 사과하는지,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 만약 어려운 자리였으면 애초에 유영씨를 데리고 오지도 않았죠.” “그래도… 이런데서 선약이 있으신 줄은 몰라서….” “여기가 어때서요. 그냥 밥 먹는 자린데요, 뭘.” 유영은 오른쪽 왼쪽 시선을 옮겨가며 주위를 훑었다. 정숙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레스토랑인데, 자리 잡은 이들도 모두 꽤 ‘교양’있어 보이는 사람들로 보인다. 일단 자기 나이 또래의 사람은 보이지도 않는데다, 복장도 고급 정장이나 품위를 갖춘 복식을 하고 있어, 얇은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백팩을 맨 유영은 어울리지가 않는다. 물론 단유도 그런 면에서 유영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어쩐지 단유보다 자신이 더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예약 하셨습니까?” 단정한 슈트를 입은 여직원이 다가와 공손히 물었다. “최양규 변호사님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있을 텐데요.” “아, 이미 와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여직원은 두 사람을 데리고 레스토랑 안쪽 자리로 데려갔다. 레스토랑의 넓은 홀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니 따로 룸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로 꾸며져 있었다. “왔어요?” 이미 자리에 앉아 폰을 들여다보던 중년의 남성이 단유를 발견하고 손을 들어 맞이했다. “늦지 않았나요?” “아뇨, 괜찮아요. 제가 일찍 온 건데요. 그런데, 그쪽 분은?” “아, 저희 학교 동긴데 불편하지 않으시면 같이 식사해도 괜찮을까요?” “저야 상관없죠. 클라이언트가 원하시는 거면 저야 무슨 상관 있나요?” “네, 그럼 동석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앉아요.” “고맙습니다. 죄송합니다.” 단유에게 고개 숙이고 미리 자리하고 있던 남성에게도 허리 숙여 사과하니, 남자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을 저었다. “죄송하다뇨. 괜찮아요, 저는.” 세 사람이 자리 잡고 앉으니 남자 직원이 다가와 주문을 받았다. “뭘로 드시겠습니까?” “저는 잘 모르니까, 변호사님이 주문해 주실래요?” “그럴까요? 그쪽 아가씨는?” “저도요.” “그럼 제가 알아서 주문하도록 하죠.” 이후 변호사는 익숙하게 몇 가지를 주문했고, 직원은 룸을 나갔다. “그런데 두 분 관계가?” “동기에요. 나이는 제가 좀 더 많고요.” “그냥 대학 동기?” “네.” 변호사는 볼을 감싸는 유영과 단유를 번갈아 보며 또 웃음을 지었다. “뭐, 남녀가 그렇죠. 처음에는 친한 오빠 동생 하다가….” “그런 거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유영이가 불편해해요.” “그럴까요?” “아무튼, 식사 나오기 전에 잠깐 이야기 좀 듣고 싶은데요.” 변호사의 웃음이 잦아들었다. “음, 일단 알아봤는데요. 사고가 난 뒤, 정확히 3일 뒤에 택시공제조합에 사고접수가 되었더군요.” “왜, 그 날 바로 안 되고요?” “이게 좀 관례적인 문제도 있는데, 영업용 택시의 경우 사고가 나도 바로 보험 접수를 하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왜요?” “회사 입장에서는 보험 적용이 된다는 것은 다음 보험 계약일에 보험료 납입 금액이 인상된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그러면 회사에게 불이익이 가잖아요? 그래서 큰 사건이 아니라면, 보험 접수보다 택시 기사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경우가 생기는 거죠.” “이해가 안 되네요. 운전자도 이런 경우에 보상받으려고 가입하는 거 아닌가요?” “일반 운전의 경우에도 작은 접촉 사고일 경우에는 보험사를 부르지 않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 것과 비슷해요. 다만 이 경우에는 회사가 기사에게 책임을 넘긴다는 게 다르죠. 택시 기사의 경우도 사고가 크지 않다면 자기가 책임지려 하고요.” “이상하네요. 뉴스에서 보기론 택시 기사분들 하루 벌어 하루 먹는다고 할 만큼 돈을 많이 벌지 못 하시는 걸로 아는데, 그런 분들이 이런 사고를 자기 돈을 들여 책임을 진다고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회사에서 짤릴 수 있으니까요.” 결국 지금 당장의 손실을 감수하고 미래 수익을 보장받기 위해 회사 대신 기사가 책임을 진다는 이야기다. “그럼 왜 3일 뒤에 사고접수를 한 거죠?” “그게, 그쪽 택시에 타고 있던 승객 분 쪽에서 클레임을 강하게 걸었더라고요. 알아보니까 그 승객 분이 단유씨가 다니는 학교 교수님의 자제분이시던데요.” 그건 이미 그때 알아보았다. “그 교수님께서 클레임을 거니까, 회사에서 바로 깨갱하고 넘어간 거죠. 아마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렇게 쉽게 태도를 바꾸지 않았을 거예요.” 교수라는 직함, 그 사회적 신분이 대단하긴 한가 보다. 전화 한 통에 회사가 태도를 싹 바꿀 정도라면. “뭐, 아무튼 그쪽은 비용을 조금 줄이고 싶은 생각이었는지 새벽군의 합의금을 상당 부분 낮추려 했던 모양이에요. 하지만 제가 나선다는 걸 알고는 태도를 바꾸더군요. 그쪽 손해사정사가 조금 당황스러워 하던데요? 게다가 단유씨 자전거 문제도 확실히 그쪽엔 충격이었겠죠.” 꽤 유명한 자전거 센터에 단유의 자전거를 맡기고 의뢰를 했더니, 금액이 상상 초월할 정도로 나왔다. 애초 손해사정사 측에서는 자전거가 튼튼해서 별문제가 없더란 이야기로 마무리 지으려 했지만, 수리점에서는 자신들도 처음 보는 고탄력 소재의 프레임인데다 앞바퀴의 휠부분이 다소 휘어졌는데 이건 수리를 한다고 해도 공임비가 엄청나게 나올 거라고 증언했다. 만약 교체를 한다고 하면, 부품을 구할 수나 있을지 모른다고. “그 부분은 뭐 대충 됐고요, 그럼 새벽이 합의금 문제는 깨끗하게 정리된 건가요?” “네. 일단 그 부분도 제가 처리하면 아마 다음 주면 합의금이 나올 겁니다.” “고맙습니다.” “뭘요. 오히려 별일 안 하고 돈만 챙기는 것 같아 제가 더 죄송하죠. 아, 그리고 여기.” 변호사는 허리 숙여 옆에 두었던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들었다. “자동차 등록 서류랑 몇 가지 서명하셔야 할 것들인데, 작성하시면 됩니다.” “차는 나왔나요?” “네. 주차장에 세워뒀으니 타고 가시면 됩니다. 서류 처리는 제가 알아서 끝내도록 하죠.” 마침 직원이 카트를 끌고 들어왔다. “마침 타이밍 좋게 오네요.” 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식욕이 돋았다는 듯, 변호사는 포크를 집으며 웃었다. “밥 먹죠.” ======================================= [603] 방심(7) 식사를 마친 후, 계산은 변호사가 했다. “이걸 수임료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한 일에 비해 지나치게 많이 받은 것 같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는 뜻에서 계산은 제가 하겠습니다.” 세 명의 식사라고 해봐야 얼마나 나올까 했는데, 가격을 듣고 유영은 위 활동이 멈추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건 약과였다. 가게 밖으로 나와 변호사가 준비해뒀다는 차를 보고는 뇌 활동마저 정지하는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차인가요?” “네. 단유 씨가 운전하기 편하고 좋은 차를 원하신다 해서 고르고 고른 차입니다. 사실 제 드림카이기도 하죠. 하하.” 단유는 볼을 긁적이며 변호사가 자랑하듯 손을 뻗은 끝에 기다리고 있는 자동차를 바라보았다. ‘운전하기 편하고 좋은 차’라는 모호한 주문을 한 탓도 있지만, 그 말에는 ‘무난하게 좋은 차’라는 말과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끌지 않는 차’라는 기호가 섞인 표현이라고 생각했는데,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 가격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었지.’ 그 역시도 단유에겐 가격 상관없이 사람들이 많이 찾는 차, 라는 의미였지만 변호사에겐 돈이 넘쳐나는 젊은 남성이 원하는 최고급 차량, 이란 의미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지금 눈앞에서 광채를 뿜어내는 이 차는 누가 봐도 ‘돈지랄’이다. 단유가 말없이 바라보고 있으니, 변호사는 설명이 더 필요하다 느꼈는지 쾌활하게 설명을 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드림카이기 때문일까? 딜러도 아닌데 차를 설명하는데 애정이 듬뿍 묻어났다. “트윈터보 V8엔진을 탑재한 이 차는 최대출력 528마력에 제로백은 4.9초, 최고속도는 306㎞/h입니다.” 차량 앞에 붙은 B 심벌과 날개 모양, 그리고 그 아래로 넓게 자리 잡은 그릴을 가리키며 변호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공감하기 힘든 흥분이어서 단유는 묵묵히 설명을 듣기만 하다 키를 건네받았다. “이것보다 더 화려한 스포츠카들도 있지만, 사실 국내에서는 스포츠카를 타고 다닐만한 곳이 없거든요. 트랙에서 달리는 거면 모를까. 사실 국내 도로 노면 상태가 썩 좋지 않아요. 고속도로도 마찬가지고. 자칫 과속으로 달리다가는 타이어가 터지는 경우도 생기니까 굳이 스포츠카를 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고 그래서 적당히 묵직하고 승차감 좋은 차를 고른 겁니다.” “고맙습니다.” “과속하지 말고 안전 운행하세요. 혹시 사고 나면 연락 주시고.” “…네.” “타, 데려다줄게.” “…네.” 유영은 쭈뼛대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처음 타보는 고급 차였다. 이제껏 타본 차들이라고 해봐야 아버지가 몰고 다니시는 국산 중형차나 택시 정도밖에 없었는데, 이 차는 외형도 외형이지만, 실내 인테리어의 차원이 달랐다. 손때라도 묻을까 봐 어디 손도 댈 수 없었다. “안전벨트 매.” “네.” “운전면허 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천천히 운전할게.” “네.” “그래도 사고는 안 낼 테니까 걱정마.” “걱정 안 해요.” 도리어 유영 본인이 잘못 손대서 고장이라도 날까 봐 무섭다. 깍지 낀 두 손을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두고 정면만 바라보았다. 시동을 걸자 동굴 저 안쪽에서 정체 모를 야수가 으르릉대는 것 같은 엔진음이 들려왔다. ‘조금이라도 움직여봐라. 어흥 하고 잡아먹을 테다.’ 그렇게 들렸다. 걱정과 달리 자동차는 부드럽게 도로 위를 달리기 시작했고, 단유는 침착하게 핸들을 조종해서 차를 운전했다. 처음 차를 보았을 때의 부담스러움은 남아있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자동차 학원에서 몰았던 차에 비해 승차감이 좋고 운전하기도 여간 편한 게 아니었다. 변호사에게 부탁했던 ‘운전하기 좋은 차’라는 관점에서는 합격점이라 하겠다. 물론 비교 대상이 운전학원의 싸구려 자동차에 한해서이지만, 당장은 편안하게 운전할 수 있으니 좋다. 또 하나 좋은 점은 주위의 차들이 심하게 들러붙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느리게 주행 중이지만 앞쪽으로 끼어드는 차량은 많지 않았고, 끼어들어도 한참 앞에서 차선 변경이 이루어지니 앞뒤로 널찍한 공간이 만들어져 마음의 여유를 줬다. 이런 여유가 동승자인 유영에게도 전달되리라. 하지만 단유의 생각과 달리 유영은 별로 여유롭지 못했다. 여유롭게 주위를 살필 여력도 없었고, 그저 앞만 보다가 간간이 눈동자만 굴려 오른쪽만 훔쳐 볼 뿐이었다. 단유의 운전 실력에 대한 불안감 때문은 아니었다. ‘어쩌면 좋지?’ 생각이 많아졌다. 밥 사달라고 조를 때까지만 해도, 그래 이왕 저지른 거 한번 밀어붙여 보자, 라는 심정이었다. 헤픈 여자처럼 보이고 싶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여자가 먼저 고백하는 건 자존심 상해, 라는 마인드도 없었다. 그저 호감이 가니 마음이 가는 대로, 관계를 진전시켜 보자는 정도의 마음이었고, 마침 본인이 단유보다 나이도 어리니 여동생같이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계산이었다. 함께 밥을 먹어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 그리고 시간만 맞으면 같이 쇼핑이나 영화관람 정도는 같이 할 수 있는 사이, 그러다 더 친해지면 서로의 고민도 나눌 수 있는 관계, 정도가 유영이 그리던 관계였다. 그러나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대학생은 물론이고 일반 서민들은 상상도 하기 힘든―그래서 변호사가 ‘드림카’라고 부르기까지 한―자동차를 타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감히 말을 붙이기가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유영이 단유에게 친근하게 군다? 어쩌면 단유는 유영을 돈 많은 남자를 보며 밝히는 ‘속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친한 척하지도 않다가―기껏해야 ‘밥 사주세요’가 다였는데―, 단유의 재력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 친하게 구는 것은 타이밍이 좋지 않다, 고 유영은 생각했다. 그렇다. 결국 타이밍의 문제였다. ‘조금만 더 일찍 말을 붙여 볼걸.’ 결국 후회와 한숨만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단유를 쳐다보지도 못하는 유영과, 그런 유영의 생각을 조금도 모르는 단유를 태운 고급 승용차의 뒤로 불가피하게 속도가 느려진 자동차들이 방향지시등을 깜빡거리며 속을 태우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차는 부드럽게 정차했고, 그제야 단유는 유영을 돌아보았다. 긴장한 티가 역력해 보였다. 귀밑으로 땀도 흘리는 것 같은데 그건 좀 이해가 안 됐다. 혹시나 더울까봐 에어컨도 틀어서 오히려 차 안은 서늘하다고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여기 맞아요?” “네.” “그럼 잘 가요.” “…….” 입술을 꾹 다문 유영은 단유의 인사에 화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을 살짝 찌푸리는 듯했다. 조금 당황스러워하는 것도 같고. “왜?” 단유의 물음에 여전히 대답도 하지 않고 차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않는 유영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단유는 예전에 명수와 함께 보았던 드라마의 몇몇 장면이 떠올랐다. 혹시 새차 샀으니까 드라이브라도 하자는 걸까? 드라마에서 보면 여자들은 남자에게 바닷가로 놀러 가자고 꼬시던데. 이런저런 추리를 하던 중, 유영이 힘겹게 입술을 열고 말을 꺼냈다. “…안 돼요.” “응? 뭐가요?” 혼자 끙끙대는 듯 하더니 다시 말을 잇는 유영. “몸이 움직이질 않아요.”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유영은 거의 울기 직전인 얼굴로 ‘쥐가 나서 다리가 움직이질 않는다’고 토로했다. 순간 단유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유영은 그게 자신을 비웃는다고 느꼈고, 그래서 더 울먹거리는 소리로 변명했다. “너무 긴장했단 말이에요!” 지금 유영은 어깨에서부터 다리까지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게다가 집까지 오던 중에 다리가 저릿해지더니 지금은 감각이 느껴지질 않을 정도였다. 어깨도 딱딱해서 팔을 움직이려해도 통증 때문에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고. 그래서 안전 벨트도 풀지 못하고 바보같이 눈물만 글썽이는 중이었다. 너무 속상했다. 그래도 나름 조신하게, 예뻐 보이고 싶은 게 여자 마음인데 이런 흉한 꼴을 보이고 말았으니. 게다가 단유는 비웃기까지 했다. ‘망했어.’ 오늘 하루 종일 망한 하루였다. 아예 오늘 하루를 통째로 잊고 싶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단유에게 밥 먹자고 조르지도 않았을 것이고, 식당에서도 바보처럼 멍 때리고 있지만도 않았을 것이며, 차에 타서도 자연스럽게 주위를 돌아보며 불편하지 않은 대화를 주도했을 것이다. ‘이게 뭐야. 완전히 이상한 여자로 볼 거 아냐.’ 만약, 그럴 리 없겠지만, 그래도 만약에 단유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었다면, 오늘 자신의 행동들을 보면서 그 호감은 산산조각 났으리라. 딸깍. 안전벤트 걸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유영의 앞으로 단유의 팔이 지나갔다. 안전벨트 걸쇠가 유영을 때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풀어준 단유였다. 그리고 차에서 내린 단유는 조수석 쪽으로 다가와 문을 열어주었다. “내가 부축해 줄 테니까 내려볼래요?” 유영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불편하면 이야기해요.” 단유가 손을 내밀자 유영이 그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그리고 몸을 틀어 다리를 억지로 차 밖으로 내도록 했다. ‘그나마 바질 입고 오길 잘했어.’ 그 순간에 유영이 떠올린 생각이었다. 몸을 틀어 두 다리를 밖으로 내놓긴 했는데, 그마저도 무리였는지 다리에 쥐가 났다. 저릿저릿한게 너무 고통스러워 유영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왜 그래요?” “…아파요.” 단유는 유영의 다리를 한 번 보고는,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유영의 종아리를 두 손으로 쥐었다. 그 순간, 지금까지의 고통은 우습다는 듯 찌릿한 전기가 온몸을 타고 흘렀다. “읍!” 육성으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얼굴은 붉다 못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수치, 치욕, 이런 단어들로도 모자라다. 앞으로는 절대 단유 앞에 나타날 수 없으리란 걸 확신하는 순간이었다. 그런 유영의 사정을 모르는 단유는 부드럽게 유영의 다리를 주물렀다. 종아리 구석구석을 꾹꾹 누르던 단유의 손은 이어서 발 쪽으로 향했다. “신발은 벗기 힘들죠? 벗으면 좋긴 한데, 부끄러울 수 있으니까 이대로 할게요.” 그 말이 더 부끄럽다고! 넓은 평야에서 대(大)부대를 호령하는 장수의 외침 같은 목소리가 유영의 가슴 속에서 터져 나왔지만, 끝내 입술을 뚫고 나오진 않았다. 귀머거리같은 단유는 태연하게 유영의 신발 아래를 한 손으로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유영의 가는 발목을 붙잡아 돌렸다. 솔직히 종아리를 주무를 때, ‘허벅지까지 손이 올라오면 어떡하지?’ ‘손을 내치며 ‘변태!’라고 외쳐야 하나?’ ‘아니면 ‘왜 이러세요’라고 앙칼지게 소리쳐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모른 척 가만히 있을까?’ 온갖 방안들이 비누 거품처럼 부풀어 올랐는데, 단유의 손이 발 쪽으로 향하자 거품들이 걷히며 혼자 엉큼한 상상을 한 것 같아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친구가 운동선수예요. 그래서 같이 운동할 때가 많은데 가끔 다리에 쥐가 나는 경우가 있어요. 그때마다 제가 풀어주곤 했거든요? 이런 거 익숙하니까 믿으셔도 될 거예요. 금방 낫진 않아도 이렇게 혈액 순환을 시켜주면 풀리니까. 괜찮죠?” “더러운데.” “네?” “신발 더럽다고요. 그 손.” 신발 밑창을 맨손으로 붙잡고 있는 걸 가리키자, 단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아, 괜찮아요. 닦으면 되죠.” 단유는 다른 쪽 다리도 똑같이 붙잡고 풀어주었다. 그러는 동안 유영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유영은 그게 단유의 배려라는 걸 알았고, 그런 배려 때문에 또 마음이 쿵쾅거렸다. “이제 한 번 걸어봐요.” 단유가 일어나 자리를 비켜주었다. 유영은 조심스럽게 발을 땅에 딛었다. 발을 딛는 힘과 땅에서 밀려오는 반탄력을 느끼며 대답했다. “괜, 찮네요.” “다행이네요.” 단유에게로 고갤 돌리니 단유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유영은 눈을 깜빡거리며 단유를 바라보았다. “왜요?” 멍하게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으니, 또 뭔가 있나 싶어 물었다. “좋아해요.” “네?” “오빠가 좋아요.” “…….” 말없이 유영을 바라보는 단유와 그를 바라보는 유영. 어느 순간 유영이 화들짝 놀라더니 뒷걸음질을 쳤다. 뒤늦게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마음속 진심이 잠깐 방심한 사이에 충동적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는 것을. “아!” 아직 무리였던 걸까? 오른쪽 무릎이 풀썩 꺾이며 뒤로 넘어지려는 유영. 단유가 얼른 다가가 유영을 붙잡았다. 허리를 감싸 안으며 유영을 부축한 단유의 도움으로 쓰러지는 것은 피했지만, 오히려 더 큰 충격이 유영에게 가해졌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충격이. ======================================= [604] 헤드샷(1) 방문을 열고 들어와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가슴 위로 손을 가져다대니 쿵쾅거리는 심장이 멈출 줄을 모른다. 예전에 한눈에 반했던 남자 아이돌을 실물로 직접 봤을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심장이 진정하길 기다리며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어두운 장막 위로 단유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야!’ 유영은 눈을 번쩍 뜨고 다시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 정확히 기억나질 않았다. 희미하게 웃던 단유의 미소와 갑자기 눈앞으로 다가왔던 얼굴, 가슴을 밀쳐 내고 물러났던 기억과 허겁지겁 뒤돌아서 아파트 안으로 들어왔던 기억들이 마구잡이로 섞여 혼란스러웠다. 그 와중에, 손에 남아있는 감촉. ‘가슴이 단단했던 것 같아.’ 순간 화끈거리는 얼굴. 누가 볼세라 볼을 감싸 쥐니 손이 뜨거울 정도다. 오늘 하루 동안 얼마나 볼을 붉혔는지, 이러다가 템퍼링(Tempering)으로 피부의 인성(靭性)과 연성(延性)이 강화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시 스쳐갔다. 유영, 그녀 역시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한 물리학도였다. **** 7월로 접어들면서 날이 점점 더워지기 시작했다. 뉴스에서는 외출을 자제하고 야외에서 격한 운동을 삼가라는 뉴스가 간간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집에만 틀어박혀 있을 순 없었다. 산으로, 바다로 여름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고,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더위를 피하는 방법은 그 외에도 많았다. 이를테면, 도서관에 틀어박혀 에어컨 바람 쐬면서 독서를 즐기는 것도 그 방법 중 하나다. 당연히 단유가 선택한 방법이기도 했다. 차를 사고 좋은 점 중의 하나는 역시 통학이 편하다는 것이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한다고 해도―버스든, 지하철이든―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주긴 하지만, 사람들 속에 묻혀 있는 것과 홀로 쾌적한 바람을 쐬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몇 차례 운전했더니, 그새 경험이 쌓여 이제는 적당히 속도를 내면서 달려도 무난히 시내 주행을 할 수 있었고, 주위 차들의 도움(?)도 여전해서, 붐비는 서울 시내에서도 나름 쾌적한 드라이빙이 가능했다. 동작대교를 지나 길을 따라 가다 강남순환도시고속도로에 올라타 봉천 터널을 지나면 금방 서울대에 이른다. 대략 30분 정도인데 평소 한 시간이 조금 넘던 거리가 반으로 줄어드니 여간 편한 게 아니었다. 사실 이런 편리함을 느낄 때마다, 예전에 사용하던 마법을 떠올리게 되고, 그때마다 마법의 강력함과 편의성을 느끼며 좀 더 구사할 수 있는 마법의 종류를 늘리고 싶다는 갈증을 느꼈다. 최첨단 현대 문물의 편의성도 마법의 힘을 넘지 못하니, 마법이란 것이 가히 초월적인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더 빨리, 더 많은 마법을 사용할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도 단유는 도서관으로 향한다. 요즘은 열람실에 자리가 없다시피 꽉 찬다. 이유는 며칠 뒤에 있을 시험 때문이었다. 불과 며칠 전, 그러니까 6월 말쯤에 공무원 7, 9급 필기시험이 있었는데, 그 시험이 끝난 후 사람이 쫙 빠져나갔다. 예전에는, ‘서울대 나와서 고작 9급 공무원 시험이나 치냐’는 말이 있었다지만 다 옛말이었다. 지금은 어떻게든 빨리, 졸업 전에 취업을 확정 짓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래서 7, 9급 공채 시험을 위해 밤잠 설치며 공부하던 이들이 한동안 열람실에 가득했고, 시험이 끝나니 해방을 외치며 도서관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 들어오더니 다시 자리 경쟁이 시작되었다. 곧 있을 5급 공채 시험과, 하반기 채용을 대비한 공부를 위해서였다. 그런 점에서 단유는 다른 이들과 사뭇 달랐다. 시험을 준비하지도 않았고, 취업을 걱정하지도 않았다. 남들처럼 색색깔의 볼펜을 준비해 노트를 꾸미지도 않았고, 다크서클이 생기도록 오래도록 책을 보지도 않았다. 그날 읽을 책 한 권, 혹은 두 권을 앞에 두고 그냥 ‘독서’를 할 뿐이었다. 물론 주위의 학생들은 그런 단유에게 뭐라 하지 않았다. 당신은 왜 공부를 하지 않습니까, 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고 분위기 나빠지니까 다른 곳에서 읽으세요, 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자기 공부하기도 바쁜 사람들이었고, 가끔 굳은 몸을 풀기 위해 스트레칭을 하다 슬쩍 시선이 머물렀다 갈 뿐이었다. 그마저도 바로 곁의 학생들이나 그렇지, 넓은 열람실에 자리 잡은 대부분 학생들은 단유를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단유를 신경 쓰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단유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더러 있었는데, 그들은 보통 도서관에 늦게 나온 이들이거나 자리를 뺐다가 다시 열람실을 찾은 이들이었다. 빈자리 없이 빼곡이 들어찬 열람실을 둘러보며 배회하다보면 거의 90% 이상 단유가 눈에 들어오게 되니까. 주위의 풍경에 위화감을 느끼게 만드는 단유의 모습에 학생들은 괜히 단유 주위를 돌면서 눈치를 줬다. ‘고작 책 한 권 읽으려고 여기서 자리를 뺏어?’ ‘진짜 양심 없네. 다른 공부하는 사람 안 보이나?’ 그래도 교양과 인성을 겸비한 대학생들이라 면전에서 욕하거나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대신 눈에 힘주고 단유를 째려보며 주위를 맴돌 뿐이었다. 한두 번이면 모를까 계속되는 날카로운 시선을 무시하며 자리에 앉아 있기란 단유로서도 힘겹다. 자료실은 서고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번잡함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잘 가지 않았던 것인데, 그보다 더한 시선을 받으며 평화로운 독서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냥 가기는 미안해서 근처에서 쏘아보고 있던 학생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네?” “눈치 없이 자리 차지하고 있어서 죄송합니다.” “네?” 백팩을 매고 방석과 책을 한 아름 안고 있던 남학생은 단유의 사과를 받으며 얼굴이 붉어졌다. ‘그걸 왜 나한테?’ “여기 앉으세요.” 그리고 단유는 쿨하게 열람실을 떠났다. 남학생은 자기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사과를 받았고, 그 때문에 주위 학생들의 시선을 모을 수 있었다. 억울하다는 생각에 울컥했다. “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비켜달라고 하지도 않았어요!”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다른 학생들은 ‘멀쩡히 앉아 있는 사람을 내쫓는 독한 녀석’이라는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남학생, 그리고 몇몇 배회하던 학생들은 단유의 빈자리를 보고도 앉을 수가 없었다. 그 후로 단유는 열람실 출입을 끊었다. 비록 자료실이 번잡하긴 하지만 책에 집중만 한다면, 그런 것쯤은 무시할 수 있었다. 다만 열람실의 공부하는 분위기가 좋아서 갔던 것 뿐이니, 딱히 마음 쓸 일도 아니었다. 요즘은 연락 오는 데도 없었다. 6월까지만 해도 도연에게서 가끔, 아주 가끔 연락이 와,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자기 일상을 이야기하거나,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단유의 일상을 듣고 싶어했으며, 전혀 알고 싶지 않았던 그녀의 스케줄을 외워야 했다. 그러다 컴백이 얼마 남지 않아 준비를 해야 된다던 마지막 연락을 끝으로 단유를 귀찮게 하는 연락은 오지 않았다. 자주 연락하자던 유진은 동남아 쪽에 촬영 스케줄이 있어서 가야 한다며 자랑한 뒤로 연락이 없었다. 아마도 바빠서 연락할 틈이 없는 모양인데, 단유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유영은…. ‘후.’ 유영을 생각하면 괜히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엉뚱한 고백 이후로 연락 한 번 없었고 학교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날 밤 그녀가 밤새도록 이불킥과 실성한 듯 웃음을 흘리며 자책했다는 것을 모르는 단유는 그저 귀찮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고마워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긴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뭔가 제대로 맺음이 되지 않은 채로 어영부영 시간만 흘러가는 게 찝찝했다.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때 그 일보다 더 큰 음모(?)를 획책하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유는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먼저 연락할 이유는 없었고, 사소한 몇 가지만 제하면 지금의 단유는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뿌듯한 마음으로 도서관 자료실로 향하던 단유는 자료실 입구에서 누군가의 부름에 걸음을 멈춰야 했다. “학생?” 정확히 자신을 부른 건지 확신은 못 하지만, 일단 ‘학생’이라는 지칭에 단유는 고개를 돌렸다. “잠깐 이것 좀 도와줄래요?” 뭔가 싶어 바라보니 그레이 계열의 세미 정장을 입은 여인이 도서관 자료실 앞 홀에 놓인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테이블 위에는 몇 권의 책과 논문들이 올려져 있었다. “무거워서 그러니까 좀 들어줘요.” 단유는 대답 대신 여인을 바라보았다. 눈에 익은 여자였다. 바로 한달여 전 새벽이 사고 났을 때 보았던 그 여자였다. 변호사에게 추가로 듣기로는 전치 4주가 나왔는데 1인실에 입원해 있다고 들었다. 물리치료와 약물치료를 병행한다던가? 그래서 꽤 비싼 배상금을 받게 되었다고 했다. ‘벌써 나았나?’ 보기엔 멀쩡해 보였다. 하지만 겉으로만 그럴 뿐 속으로는 고통을 참는 건지도 모른다. “뭐해요? 내 말 안 들려요?” 앙칼진 목소리에 지나가던 몇몇 학생들이 쳐다보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네.” 단유는 짧게 대답하고 테이블 위의 책들을 들었다. 두 덩이로 나눠진 책과 논문 중 무거울 게 뻔한 책을 들었다. [분석화학 기초], [분자설계 및 합성]과 같은 책 제목들로 봐선 화학 계열 자료들인 것 같았다. 잠시나마 책 제목을 통해 여자의 정체에 대해 유추해보려던 찰나 들고 있던 책 위로 나머지 논문들이 턱 올려졌다. 당사자는 손을 탁탁 털더니 가벼운 어조로 말을 건넸다. “가요.” 그리고는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도서관 중앙 홀에 경박한 하이힐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중앙도서관에서 자연과학관 건물까지는 별로 멀지 않다는 점이었다. 도서관에서 나오면 바로 왼쪽에 보이는 건물들이 자연과학대 건물들이었고 조금만 발품 팔면 금방이다. 그런데 그 여자는 단유나 학생들이 주로 사용하는 자연과학관 방향 건물이 아닌 행정관 쪽 길로 향했다. “어디까지 가시나요?” 호기심에 물었더니, 여자는 왜 그런 걸 물어보냐는 눈으로 단유를 쏘아보며 말했다. “503동이요.” 503동이라면 서쪽 순환로에 있는 출판문화원 옆이다. 만약 거길 가는 거라도 해도 이쪽 길보다는 학생회관을 지나는 길을 사용하는 게 더 빠르다. 하지만 여자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도 안 쓴다는 듯 마이웨이 식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아, 더워.” 손부채질을 하며 투덜대는 여자는 단유가 잘 따라오는지 돌아보며 확인했다. “빨리 와요.” “네.” “의외로 허약 체질인가봐요? 보니까 운동도 좀 한 것 같은데 빨리 따라와요.” 단유는 대답 대신 걸음을 빨리해서 여자의 뒤를 쫓았다. 몇 개의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닿을 수 있었던 곳을 멀리 둘러서, 겨우 목적지에 도달했다. 건물 내로 들어가자 따갑던 햇볕이 가려져, 그것만으로도 온몸을 감싸던 더위를 한주먹 정도 덜어낼 수 있었다. 정장 여성은 아까보다 기운이 빠졌는지, 1층 홀 바닥을 딛는 하이힐 소리가 별로 경쾌하지 못했다. 마침내 어느 방 앞에 선 여자는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에 걸려 있던 교수님의 이름을 살폈는데, 눈앞의 여성이 주인은 아닌 듯했다. “거기 책상 위에 놔두고 가요.” 교수 전용 의자에 털썩 앉으며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뭉치를 집어 부채질을 하는 여자의 얼굴은 짧은 운동이 과했던지 얼굴이 꽤 상기되어 있었다. 이쯤 되니 아무리 단유라고 해도 괜히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다. 본래 단유는 자신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무던히 참는 성격이었고, 어쩌다 불편을 끼치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웬만해선 그냥 피하고 보는 편이었다. 하지만 봉사를 강요하고, 그 봉사에 대한 적절한 감사 표시도 않는 이 여성에게는 이전처럼 그냥 넘어가기가 싫었다. 단유는 책을 내려놓고 여자에게 다가갔다. “뭐, 뭐예요?” 자신보다는 어려 보이지만 덩치도 크고 힘도 셀 것 같은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 다가오니 덜컥 겁이 났다. 게다가 여기는 교수실. 방학기간이라 옆 교수실에는 사람이 없을지도 모른다. 복도도 조용하고, 지금도 다가오는 남성의 발소리 외에는 들리는 게 없다. 단둘만 있는 교수실에서 무력한 여성에게 달려드는(?) 남성. “까악!” 여자는 비명을 질렀고, 단유는 그 비명을 그치도록 행동했다. ―짜악! 볼이 얼얼할 정도로 매섭게 뺨을 날린 단유였다. ======================================= [605] 헤드샷(2) 이보다 황당한 경우가 없다. 감히 누굴 때려? 강주아는 미국 동부의 명문 대학을 졸업한 수재(秀才), 라는 평가를 받길 원하는 여자였다. 비록 명문 대학이라는 곳도 겨우 들어간 데다 졸업도 겨우 하긴 했지만, 다른 평범한(?) 사람들은 해낼 수 없는 간판을 따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다만 그 간판이 ‘취직’으로 이어지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취업을 하려 했지만, 인턴십 제도가 활성화되었다는 미국임에도 1차 면접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자리를 잡을 수 없었다. 물론 그녀가 취업에 유리한 전공을 이수하지 않았다는 점도 영향이 있을 테고,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도 소홀했던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문대 간판이 취업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개인적으로 억울할 정도였다. ‘어떻게 들어간 학교며, 어떻게 졸업한 학교인데!’ 그렇다고 동네에서 파트타임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 피자집에서 허름한 앞치마를 매고 아르바이트하는 주위 학생들은 애초에 그런 직업이 어울리는 애들이나 하는 거였다. 게다가 명문대 학생이라는 자존심에 일주일은 씻지 않은 것 같은 백인 뚱땡이에게 웃음을 파는 짓이나 눈깔을 번들거리며 저속한 말이나 늘어놓는 흑인에게 굽신거리는 짓은 하기가 싫었다. 굳이 그런 걸 하지 않더라도 집에서 보내주는 용돈은 넉넉했고, 오히려 그런 일을 하기보단 번듯한 직장을 잡는 게 진정한 효도라고 생각했다. 사실 강주아는 자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흔히들 말하길 미국은 스템(STEM)전공자들에게는 상당한 특혜를 주는 나라라고 했기 때문이다. 주아는 그중에서 S, 과학(Science)계열 전공을 이수했다. 그러나 인터뷰는커녕 1차 면접 기회 자체가 없었다. 어쩌다 인터뷰를 해도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낙방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결국 집에서 귀국을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차라리 국내에 취업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에 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몇 안 되는 미 명문대 간판을 단 유학생 출신이니 귀하게 써주지 않겠냐는 심산이었다. 그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되는 건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명문대 출신 학생이 자기 외에 얼마나 더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간판이 국내 회사에 먹히지 않는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자유로운 분위기인 미국에서 공부하셨는데, 저희 회사의 조직문화에 잘 어울릴 수 있겠습니까?” 면접장에서 면접관이 주아에게 한 질문이었다. 실상 질문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누가 들어도 명백한 거절 사유였다. “회식이나 야근을 싫어한다던데 강주아씨는 그렇진 않죠?” 대답이 요구하지 않는 질문이었다. ‘니가 무슨 말을 하든, 우린 정답을 알고 있어’라는 의미가 담겨있지 않은가? 주아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하지만 주아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아버지. 귀여운 늦둥이 외동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아만을 생각했고, 주아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능력이 닿는 한까지 해 주었다. “우리 학교에서 일해라. 요즘은 행정직도 나쁘지 않다.” 무려 서울대다. 거기서 괜찮은 신랑감을 만나면 더 좋다. 아버지는 주아의 미래까지 생각해서 일자리를 알아봐 주었다. 몇백 대 일이라는 경쟁률은 의미가 없었다. 다행히 학벌과 토익 점수 등이 기본 서류를 꾸미기에 적당했기에 문제가 없었다. 학교 관계자를 사석에서 만나 웃음 한 번 짓고 적당히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취업이 됐다! (형식상 면접도 진행됐지만, 결과는 나와 있었다!) ‘역시 아버지 뿐이야!’ 취업 후, 같이 일하는 이들은 ‘강 교수님 자제분’이라는 타이틀에 고개를 끄덕였다. 미 명문대 출신이라는 간판도 ‘지성’과 ‘미모’를 한 몸에 갖춘, 이라는 수식어를 꾸미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것이 강주아, 그녀가 원하는 그림이었고, 마침내 화판에서 붓을 뗄 수 있었다. “화학과에 경진범이라는 친구가 있다. 젊은 친군데 꽤 괜찮아.” 국제협력 업무 파트에 들어간 주아는 한 달쯤 지난 뒤, 아버지로부터 소개를 받았다. 미국에서야 워낙에 되는 일이 없어 그랬다지만, 한국에 돌아오고 난 뒤 주아의 자신감은 넘치다 못해 흐를 정도였다. 남자? 그가 누구든 자신의 외모와 실력(?)으로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되는 업적을 세우기도 한 데다, 외모도 썩 나쁜 편은 아니었고 매너도 좋았다. 주아는 그가 자신의 짝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판단했다. 몇 번의 만남으로 관계를 진전시키는 와중에, 주아는 젊은 교수로부터 부탁을 받았다. “아, 제가 좀 도와드릴게요. 네? 괜찮아요. 시간 남는걸요. 교수님 연구실에 가져다 놓으면 될까요?” 사실 부탁이라기보단 주아가 먼저 나서서 선심을 베풀겠다는 뜻을 보인 셈이었으나, 이런 식으로 자주 만남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눠야 자신의 친절과 마음 씀씀이에 매력을 느낄 거라고 계산했기에 스스럼없이 나섰다. 그리고. 세상에 이런 황당한 경우가 있나 싶은 상황에 직면한 주아는 뺨을 감싸 쥔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잠깐 사이 느꼈던 낯선 남자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대신 자신을 때렸다는 행위에 대한 분노만 자리 잡았다. “야!” 주아가 빼액, 소리를 지르자 텅 빈 복도가 울릴 정도로 높은 고주파 음역의 파장이 단유를 스치고 지나갔다. “네?” 단유가 눈을 껌뻑이며 대답하자, 주아는 벌떡 일어나 손가락질하며 욕을 한 사발 퍼부으려 했다. 그러나 주아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 자기가 앉아 있던 책상 앞에까지 다가와 뺨을 때렸던 남자가 어느새 교수실 입구에서 들고 왔던 책을 든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조금 전, 자신이 교수실 문을 열고 들어와 빈 의자에 앉으며 바라봤던 전면 풍경 속의 그 모습 그대로. ‘뭐, 뭐야?’ 힘껏 치켜들었던 손가락은 힘이 빠져 점점 내려가고, 논리적인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눈동자도 갈 곳을 잃어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누빌 뿐이었다. ‘여기 어디? 무슨 일이?’ 단유는 문가에서 가만히 서 있다가 물었다. “이 책, 어디에 두면 되나요?” “…….” “저기요?” 주아는 볼을 만졌다. 화끈거리는 느낌에 만져보니 꼭 맞은 것처럼 통증이 느껴지는 것도 같다. 그런데 맞았는지 맞지 않았는지 헷갈린다. “저기요?” 안 그래도 머릿속은 복잡하고 심장은 미친년 널뛰기하는 마냥 날뛰어서 신경 사나운 마당에 ‘저 새끼’는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짜증나게 만든다. “거기 아무 데나 두면 되잖아!” ‘사람이 눈치가 없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데, ‘저 새끼’의 동태가 심상찮다. 턱턱 걸어와 교수실 가운데 있는 테이블에 책을 던지듯 내려놓더니 자신을 째려본다. ‘…응?’ 사내가 뚜벅뚜벅 걸어오기 시작하자, 다시 심장이 두방망이질하듯 뛰기 시작했다. 숨이 점점 가빠질 무렵, 사내는 주아의 앞에 마주 섰다. 그리고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예상한 바와 같이’ 사내는 오른손을 사선으로 밀어 올리며 주아의 뺨을 사정없이 갈겼다. “아악!” 자리에서 엎어지며 쓰러진 주아가 뺨을 감싼 채로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자, 사내는 감정을 알아보기 힘든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사람이 왜 그럽니까? 도움을 청한 상대에게 말도 함부로 하고 말입니다.” “…이 자식이. 야! 내가 누군 줄 알아!” “제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너 누구야! 어디 학생이야!” “…제가 누군지도 모르시는 분이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면 안 되죠.” “너 몇 살이야! 응? 여기 학생이야? 여기 학생이 나한테 함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해?” “존중받고 싶으면 먼저 존중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란 거 모릅니까?” “뭐야? 이 미친 새끼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오른 주아는 찬 바닥을 밀치고 일어나 손을 휘둘렀다. ―부웅. 정말 소리가 날 정도로 세차게 주먹을 휘둘렀건만, 주아의 주먹은 공중을 헛돌고는 돌아왔다. 자신이 휘두른 힘에 밀려 비틀거릴 정도로. 하지만 한 번의 공격이 실패했다고 포기할 주아가 아니었다. 이미 이성을 잃은 주아가 다시 반대쪽 손을 휘두르려는 찰나였다. ‘…….’ 조금 전까지 책상 옆에 서 있던 사내가 보이지 않았다. 그새 어디로 숨었나 싶어 눈동자를 돌리는 순간, 주아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느낌을 받았다. 문가에서, 아까 전과 같이, 양손으로 책을 든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 그 눈이 마치 ‘혼자서 뭐하는 겁니까?’라고 묻는 눈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이 책 어디에 두면 되죠?” 주아는 입을 반쯤 벌리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사내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귀신이나 이런 건 전혀 믿지 않았건만, 해가 너무 짱짱해서 더울 정도인 대낮에 귀신과 마주하고 말았다. “너, 누구야?” “네? 저기 이 책 여기 두면 되나요?” “누구냐고!” 주아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사내가 한숨을 쉬며 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몇 번을 본 장면이라 이제는 그다음 장면이 절로 떠오른다. 그리고 그 장면 속의 그 모습을 그대로 재연이라도 하듯,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왔다. 주아는 뒷걸음질 치며 뒤로 물러섰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새끼야!” 사내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고, 이번에는 마음의 준비까지 했건만, 방어 동작을 취하기도 전에 날아든 따귀에 주아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졌다. 어쩐지 반복을 할수록 세기가 강해진다는 느낌도 받았다. 바닥에서 몸을 웅크리고 사내를 올려다보는 주아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깃들었다. 자존심? 이미 이 상황에서 그런 건 의미가 없었다. “사람이 왜 그렇게 예의가 없어요?” 들었던 말이다. “존중받고 싶으면 상대를 존중할 줄도 알아야죠. 쇼펜하우어 몰라요?” 모른다. 모르는데 안다.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주아는 사내의 정체보다 이어질 상황이 두려웠다.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고 덜덜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여 물었다. “귀, 귀신이세요?” 그러자 사내가 한 걸음 다가왔다. 작은 움직임이지만 주아는 놀란 마음에 눈을 꽉 감았다. 그리고 외쳤다. “죄송해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눈물이 나왔다. 눈물이 흐르며 검은 마스카라 자국이 볼에 깊게 그어졌지만 주아는 그걸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잘못 했어요, 잘못 했어요.” 몸을 웅크리고 두 손을 싹싹 비는 그녀의 모습을 단유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괜찮으세요?” 몇 번의 부름에 주아는 겨우 실눈을 떴다. 설마, 하며 바라보니 역시나 사내가 저 멀리 책을 들고 서 있었다.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세요?” 저게 ‘어디 아프신 데라도 있으신가요’라는 말을 돌려 하는 거라는 걸 주아는 한참 뒤에야 알아들었다. 회색 계열의 세미 정장이 연구실 바닥을 뒹굴며 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는 자신을 보며 사내는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사내는 멀찍이서 가만히 지켜보더니 테이블 위에 책을 올려놓고는 ‘수고하세요’라고 어울리지 않는 말을 던지고는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혼자 연구실에 남게 된 주아는 그 뒤에도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바닥의 한기에 오슬오슬해질 무렵에야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몸이 말이 아니었다. 어깨부터 발끝까지 몸이 쑤시고 얼얼했다. 비틀거리며 벽에 걸린 거울로 다가간 주아는 그제야 자신의 몰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산발이 된 머리와 눈물과 마스카라와 색조 화장이 엉망으로 뒤섞인 얼굴. 저도 모르게 침까지 흘렸는지 입가에 하얗게 말라붙은 자국도 보였다. 옷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주아는 조금 전 자신이 겪었던 상황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거울을 보니 볼을 빨갛게 부어 있었다. 통증도 확실히 느껴졌다. 맞은 게 분명했다. 맞은 게 분명한데 맞았다고 단언할 수가 없었다. 감각과 이성에 혼란이 왔다. 그런데 사람이란 게 참 신기하다는 것이, 그 와중에도 주아는 혹시라도 경 교수가 방에 돌아와 자신을 발견하게 될까 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런 꼴을 보면 자신에게 호감이 있었다고 해도 정이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우선 연구실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다가 우연히 천장 구석에 CCTV가 깜빡이고 있음을 발견했다. 주아의 눈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 [606] 헤드샷(3) 몇 해 전, 교수실에 도둑이 몰래 들어와 교수의 지갑을 훔쳐 달아난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었다. 그 후로 교수의 개인 연구실에는 CCTV를 달도록 했다. 그리고 그 CCTV는 방학 기간인 오늘도 열심히 작동하고 있었다. “저기요, 죄송한데 한 번만 보여주시면 안 돼요?” “안 됩니다.” 경비업체 직원은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표시했다. “교수님은 안 계셨어요. 저만 거기 있었다고요. 제가 어떻게 나왔는지 보려고 한다니까요?” 직원은 주아의 요구를 들으며 속으로 ‘뭐 이런 미친…’이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래도 교수님 허락 없이는 볼 수 없습니다.” “그냥 조금 전 걸 확인하려는 것 뿐이라니까요?” 날도 더운데 왜 이렇게 짜증 나게 하는지 모르겠다. “개인정보열람은 허락 없이 안 된다는 거 모르십니까? 정 보고 싶으시면 교수님께 허락을 받으세요.” 하지만 주아로서도 그 부분은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만약 자신이 진짜 폭행을 당했다면, 그 영상을 통해 확인하고 가해자를 신고하면 된다. 하지만 만약 그게―주아를 미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인―‘헛것’이었다면 카메라에는 혼자 ‘지랄발광’하는 장면이 찍혀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현재까지는 ‘그 지랄’을 본 사람이 이름 모를 사내 한 명에 그치지만, 경 교수에게 알려지면 자신은 결코 이 대학에서 자리 붙이고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라, 어쩌면 언덕 위 병원에 한 자리 차지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저씨?” “네?” “제 얼굴 보세요? 누구한테 맞은 것 같죠?” 직원은 주아가 가리키는 볼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부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다. 다른 쪽 볼에 비교해서 조금 더 부풀어 오른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뭔갈 많이 처먹고 부은 건지도 모르겠다. “…모르겠는데요? 그래서 맞았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걸 알아보려고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걸 왜 CCTV 영상으로 본단 말인가? 자기가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도 모른다고? “…교수님이 때리신 겁니까?” “아뇨, 그건 아니고요. 아무튼 좀 보면 될 거 아니에요?” 직원은 고민하다 말했다. “그럼 일단 제가 관리자 코드로 확인하고 말씀드리죠. 하지만 함께 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결국 주아도 한발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해주세요.” 10여 분 후, 직원이 영상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눈을 껌벅거리며 주아를 주시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예? 저 맞았어요?” “…아니요.” “…그럼요?” “그…아, 이거…참 곤란한데….” 주아의 눈치를 보며 입을 떼기 어려워하던 그는 결국 자신이 본 것을 말했다. 주아의 원맨쇼를. 주아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괜찮으신 거 맞죠?” 경비는 마지막으로 확인사살을 했다. 결국 주아는 또 다른 목격자를 하나 더 만든 셈이 되었다. 떠나는 주아를 보며, 직원은 조금 전 봤던 영상을 떠올렸다. 사실 제일 이상한 건 역시 혼자 ‘쌩쇼’를 펼친 주아였지만, 또 하나 이상했던 것은 문가에 서 있던 남학생의 모습이었다. 멀찍이 서서 주아를 바라보면서도 미동도 않던 그 모습은 살짝 기이하다 못해 섬뜩하기까지 했다. 비록 화면상에서 표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진 않아 확신할 순 없었지만, 눈앞에 펼쳐졌던 광경을 무표정으로 구경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라면 그렇게 있었을까?’ 그러나 앞서 말했듯, 확신할 수 없는 문제였고, 주아에게 해를 끼친 것도 아니었기에 직원은 그에 대해 언급하기를 피했다. **** 본래 단유는 그녀의 대접에 불만을 품고 해코지를 할 생각이 아니었다. 새벽의 사고 때, 그녀가 새벽에게 보였던 태도에 대한 응답 정도였다. 말 그대로 예의 없이 굴지 마, 라는 메시지를 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고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며 단유는 조금 지나쳤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에는 그 상황에 맞게 행동했다고 생각했다가도 얼마 후에는 왜 그렇게 했을까, 라고 후회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단유도 그런 후회가 깃든 일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런 후회가 있을 때마다 다음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우스갯소리처럼 사용하는 ‘인간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격언처럼, 다짐이 무의미하게 또 실수하고 후회를 반복한다. 그래도 최근에는 그런 일들이 많이 줄었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도서관 열람실에서 다른 학생에게 한마디 했던 일이나, 조금 전 무례함의 표본 같던 여자에게 했던 행동은 단유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조금 더 냉정하게 말하면, 단유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준 것도 아니니 그냥 눈 감고 모른 척하면 그만인 상황이었다. 단유의 일상에 크게 영향을 줄 사람도 아니었고 앞으로도 어쩌다 한 번 스쳐 지나가며 보기나 할까 싶은 사람들이었다. 태생이 동방예의지국 출신인 것도 아닌데 예의범절을 퍼즐 피스 맞추듯 지켜야 한다는 사고를 가질 리 만무하고, 더욱이 상대에게 예의를 강요할 생각은 눈꼽 만큼도 갖지 않은 단유였다. 그러니 조금 전의 일은 스스로 돌이켜보건대 ‘오버’했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후회, 는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음이 전혀 거북하지 않았고, 오히려 후련했으니까. 좀 더 솔직히 말해서, 새벽의 사고가 있었을 때 진작 이렇게 할 걸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아니, 생각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 그렇게 움직이도록 만들었다고 표현해야 정확할까?’ 감성이라고 표현하기도 애매하지만, 분명 이성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남들 다 하는 핑계처럼, 날이 더워서 살짝 정신줄을 놓은 것이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이성적으로만 판단하려 했던 지난 행동들과 비교하면 확실히 개운한 마음이 들고 기분이 좋다. 그 와중에도 연구실 천장에 달려있던 CCTV를 확인하긴 했지만 말이다. 조금 더 생각을 전진시켜보면, 이건 ‘Give and Take’이다. 상대를 존중할 줄 모르면 자신도 존중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는 비단 쇼펜하우어의 말일 뿐 아니라,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언제나 진리로 통용되던 원칙의 하나였다. 노나라 대부 양화(陽貨)의 계략에 공자가 똑같이 대응했던 것처럼, 혹은 반대로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에 나오는 의구(義狗)의 설화처럼, 사람들은 주는 만큼 받는 것, 당한 만큼 갚는 원리에 대해 본질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 본질이 곡해될 때, 사람들은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배은망덕, 적반하장과 같은 말처럼. 이러한 사고는 물리학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뉴턴의 제 3 법칙인 작용-반작용이 바로 그 원리다. 작용-반작용의 원리가 물리학적으로 규명되기 전부터 사람들은 이 원리를 몸으로 깨닫고 있었던 셈이다. 도끼로 나무를 찍고, 삽으로 흙을 파고, 칼로 짐승을 내려칠 때 사람들은 작용-반작용의 원리를 몸으로 체득하며 이해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진리’임을 말이다. 역으로 생각하면, 과학적으로 밝혀내는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이전부터 사람들이 몸으로 익히고 가슴으로 깨달았던 진리의 한 조각들일 것이다. 단지 현대 과학의 언어로 풀이하지 못했을 뿐이니, 이를 세밀히 살피고 연구하면 과학적 난제들의 실마리도 풀릴 수 있지 않을까? 이미 동양적 신비주의를 과학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있고 양자 이론과 상대성 이론마저 불교나 도가적 시선으로 분석, 이해하려는 과학자들도 있다. 다시 작용―반작용의 원리로 돌아가면, 이는 미립자적 세계에도 통용된다. 입자물리학 표준모형(standard model)에서 페르미온과 보손이 어떻게 질량을 갖게 되는지를 설명할 때도 이 원칙, 정확히는 ‘대칭성’이라는 원칙이 적용된다. 미립자 단위에서도 통용되는 상호작용, 그 원리를 인간이 무의식중에 체득하고 있다는 것을 논리적 과장이라고 포장하긴 힘들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눈앞에서, 그리고 전 우주에서 이 상호작용은 쉬지 않고 일어나는 중이다. 불현듯 단유는 허기를 느꼈다. 정말로 배가 고파 느끼는 허기가 아니라, 긴 생각의 꼬리를 쫓던 중에 떠오른 아이디어의 끝을 알고 싶다는 지적 호기심의 허기였다. 단유는 좀 더 빠른 걸음으로 도서관을 향해 걸어갔다. 이번에 도서관으로 갈 때는 아까처럼 돌아가지 않고, 학생회관을 지나가는 길을 이용했다. **** 늦은 시간 집에 돌아가니, 호빵이 헥헥거리며 마중 나왔다. 그런데 호빵 말고 다른 시커먼 게 옆에 붙어 있었다. ―왈왈! 이 시커먼 녀석은 호빵과 달리 요란스러웠다. 정말 뜻밖의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닌 이상은 잘 짖지도 않는 호빵과 달리 이 녀석은 시도 때도 없이 짖었다. 몸집은 호빵보다 작은 데도 목청은 아주 우렁차다. 물론 그래봐야 강아지 수준이긴 하지만, 발랄하다는 점에서는 호빵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패티, 너 또 아무데나 오줌 싼 건 아니지?” 단유는 들어오자마자 거실 불을 켜고 거실을 둘러봤다. 다행히 눈에 보이는 건 없는데, 그래도 믿을 수 없어 거실과 주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싱크대 근처 어두운 곳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단유는 한숨을 쉬며 휴지로 흔적을 닦아낸 뒤, 두 개를 데리고 거실로 향했다. 그때 상미의 방문이 열리고 상미가 고개를 내밀었다. “왔어?” “응. 방송 중?” “아니, 잠깐 쉬는 중이야. 패티 오줌 쌌어?” 단유의 손에 들린 휴지를 보며 물었다. ‘아까 거실 가운데 눈 건 닦았는데’라며 말끝을 흐리는 상미가 바로 패티를 데려온 장본인이었다. 한남동으로 이사 온 후, 상미는 호빵의 친구를 만들어주겠다며 벼르다가 7월이 되어서야 개 한 마리를 입양해서 데리고 들어왔다. 유기견 보호소에서 데리고 왔다는데, 다행인건 생각보다 빨리 가족들과 친해졌다는 점이고, 불만은 오줌을 가릴 줄 모른다는 점이다. “보통 유기견들은 새 주인을 만나도 친해지는 데 오래 걸린다던데 다행이잖아? 안 그래?” 패티는 시추 종이었는데 검은색과 흰색의 믹스견이었다. 다만 유달리 검은 부분이 많아 어두운 곳에서 보면 호빵과 달리 시커멓게만 보였다. 그리고 찾아본 바에 따르면 ‘온순하고, 덜 짖는 편’이라고 하던데 패티는 도대체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잘 짖고 잘 뛰어다닌다. 호빵이 너무 얌전해서 더 활발하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덕분에(?) 늘 쥐죽은 듯 조용하던 거실에 활기가 생겼다. “너 얘 교육 안 시켜?” “시켰는데 말을 잘 안 듣네. 어디 강아지 교육시키는 학원에라도 보내야 할까?” 말은 저렇게 해도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솔직히 이 집에서 강아지로 인해 더럽혀지는 집안 환경을 민감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단유 밖에 없었으니까. 상미는 가끔 거실에 나와서 패티가 흘린 오줌이 있나 슬쩍 돌아보고 있으면 닦아주기라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예민하게 굴진 않았다. 그나마 강아지 밥 채워주고 제때 물 갈아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랄까? 상미가 다시 방으로 들어가고 난 뒤, 단유는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호빵과 패티가 다가와 단유를 올려다본다. 그 두 녀석의 맑은 눈동자를 보며 막 껴안고 싶어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래도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노라 마음먹었다. 그날 패티는 천국과 지옥을 왕복했다. 과연 개에게도 천국과 지옥이 있을까 싶지만, 패티는 그렇게 느낄 수 있도록 단유가 도왔다. 거실 한쪽에 패드를 깔아두고, 패티를 지켜보다가 패드가 깔리지 않은 맨바닥에서 실례할라치면, 바닥에서 갑자기 무섭게 생긴 괴물들이 얼굴을 들이밀며 나타났다. 입을 쩍 벌리고, ―어흥! 하고 외치면 패티는 놀라서 달아나 숨기 바빴다. 그리고 다시 살피면 이미 그 장소에 괴물은 보이지 않았다. 눈치를 살피며 끙끙거리다 요의를 느끼고 자세를 잡는 순간, 다시 괴수가 나타나 눈알을 부라리며, ―어흥! 하고 외친다. 도망가고 숨고 도망가고 숨기를 반복하다, 패드 위에 자리를 잡으면 괴물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 위에서 참았던 요의를 해결하지만 걱정했던 괴물은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단유가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간식을 주었다. 그 과정이 몇 시간에 걸쳐 반복되었고, 하은이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안 자고 뭐하니?” “패티 소변 교육시키고 있어요.” 거실에서 왔다 갔다, 바닥을 킁킁대는 패티를 지켜보던 하은이 기지개를 켜며 방으로 돌아갔다. “너무 늦게까지 놀지 마.” “주무세요.” 처음에는 재밌다는 듯 함께 뛰어다니며 킁킁대던 호빵도 단유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워서 패티의 원맨, 아니 원-도그 쇼를 흥미롭게 지켜보다 눈을 감았고, 단유는 패티가 스스로 패드 위에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자신의 방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 [607] 호령(1) 개는 반복 훈련을 해서 나쁜 습관을 고칠 수 있다지만, 사람은? 사람도 꾸준하게 교정과 반복을 이어나가면 나쁜 습관을 고칠 뿐 아니라, 바른 습관을 만들 수도 있다. 한때 이런 내용의 자기계발서가 유행하기도 했으니, 그 유효성은 인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유효성과 달리 실효성이 있는지 묻는다면? 과연 그 자기계발서를 읽고 좋은 습관, 바른 습관을 만든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물며 고작(?) 뺨 몇 대 맞았다고 사람이 바뀔까? **** 대휘는 동료들과 함께 ‘다광자 양자얽힘 상태 생성’에 대해 연구중이었다. 본래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선배의 논문 주제였는데, 대휘는 보조 협력으로 논문 저자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개인 논문 준비도 준비지만 임팩트 팩터(impact factor)에서 5점 이상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주목받는 논문에 참여할 수 있다는 건 흔치 않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현석의 말에 함께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다른 선배가 놀란 얼굴로 돌아보며 물었다. “너무 이른 거 아니에요?” “금요일이잖아? 오늘 하루 쯤은 일찍 가자. 어차피 내일도 나와야 하는데.” “어, 이제 보니 형수님이랑 데이트 있으시구나.” “야, 그런 건 알아도 모른 척해라. 그리고 니네는 불금인데 남자들끼리 이렇게 있고 싶냐?” “저희가 뭐라 했나요? 저희도 좋죠.” 두 선배가 키득거리는 동안 대휘는 컴퓨터로 일과 보고서를 작성해 출력했다. “아, 그리고 상준이 형이 데이터 취합해서 이메일로 보냈다는데 확인했어?” 현석의 질문에 대휘가 빠르게 대답했다. “아까 보낸 것만 확인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내용은 아직 못 봤어요. 지금 확인해 볼까요?” “아니다. 당장 급한 것도 아닌데.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데이터 분석하는 건 내일 하도록 하자.” “네. 그럼 전 위에 올라가서 이거 드리고 올게요. 아, 7월 랩미팅 일정도 말씀드려야 하는데, 이 일정으로 보고해도 되나요?” “7월 21일이지?” “네.” “그래, 그렇게 보고하고 공지문도 이메일로 돌려놔.” “네, 형.” “그래, 그럼 수고 좀 해.” 대휘는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고 연구실을 나왔다. 그리고 위층에 있을 교수님께 오늘 일과 보고를 하기 위해 계단을 올라갔다. 위층에 올라가 적막한 복도를 걸어가자니 뒤에서 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더니 교수님의 자제분이었다. “안녕하세요.” 듣기로는 대외협력처에 들어갔다는데, 사실 말이 없을 수 없다. 연초도 아니고 방학 기간에 뜬금없이 취업된 교직원인데다, 알고 보니 자대학 전임교수의 딸? 쉬쉬거리긴 해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눈치주는 사람은 뒤에서 눈치 주기 바빴다. 그런데 또 이 여자가 어찌나 뻔뻔한지 그런 눈치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고개 들고 다닌다고 한다. 자신이 영어를 잘한다는데, 사실 그 정도 영어 못하는 사람이 어딨느냐고 사람들이 뒷담화를 하는 형편이다. “네, 안녕하세요. 아, 우리 아빠 있죠?” “아마도요.” 대휘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린 여성은 이내 또각또각 걸어 연구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빠 있었네?” “주아 왔구나. 그럼 여기 있지, 어디 있었겠어?” “아니, 저 사람이 아빠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고 해서 말이야.” 교수의 시선이 문가에서 꾸벅 고개 숙이는 대휘에게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널 여기서 보기로 했는데 어딜 가겠어. 밥은 먹었고?” “아까 먹었어.” “미안하네. 같이 먹고 싶었는데, 아빠도 점심 약속이 있었거든.” “괜찮아. 내가 무슨 어린앤가? 맨날 아빠랑만 밥 먹게.” “그래? 나는 맨날 우리 딸이랑만 밥 먹고 싶은데?” “치, 퇴근 안 해?” “이제 해야지. 이거 정리만 하면 끝난다.” “아빠, 좀 쉬엄쉬엄 해. 그러다 병 나.” “아이구, 우리 딸 걱정도 많다.” 부녀가 아주 알콩달콩 정이 넘친다. 그 모 교수가 자기 지도 교수라는 점에 실망했다? 대휘는 그런 거로 실망하지 않았다. 아니, 이미 지도 교수에게 실망할 건덕지도 남지 않았다. 사실 지도 교수는 절대군주다. 이곳은 절대군주정이고 절대군주의 말에 토도 달 수 없는 세계이다. 그의 말은 법이며, 그의 기분에 따라 연구실 분위기가 결정된다. 학생들, 연구원들은 딸랑이가 되든지, 아니면 아예 눈에 띄지 않든지 해야 한다. 만약 지도 교수가 제자 양성에 열성적이며, 하나라도 더 가르치기 위해 열정적인 분이라면, 그 팀은 축복받은 팀이다. 그러나 모든 군주가 현명하지 못하고 어질지 못하듯, 어떤 지도 교수는 자신의 권력을 칼처럼 휘두르며 폭정으로 제자들을 짓눌렀다. 대휘에게 강교수는 폭군이었다. “교수님.” “뭔가?” “금일 일과 보고서입니다.” “거기 두게. 그런데 오늘은 빠르군?” “네. 현석이 형이 오늘은 여기까지 해도 될 거라고 해서요.” “그래?” 보아하니 일찍 랩을 닫는 게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현재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랩의 실무자인 현석이 결정한 것이기에 교수님은 그 결정을 번복할 수 없었다. 다만 나중에 현석을 따로 불러 다른 사유로 갈굴 것이다. 하지만 현석도 경험치가 쌓여 이 정도는 간단하게 무마할 자신이 있으리라. “그리고 7월에 랩 미팅을 갖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는 저희 랩에서 모이기로 했고, 시간은 7월 21일 오후 2시로 잡았습니다.” “21일이면….” “수요일입니다.” “그래, 그렇게 해.” “네, 교수님.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잠시만.” “네?” 교수님은 책상 위에 있던 노란 봉투를 집어 들었다. “이거 좀 우체국에 보내고 가게.” “아, 네.” 대휘가 봉투를 받아들고 다시 허리를 숙일 때였다. “아, 참. 저기요. 우체국 가시는 거면, 그 옆에 대외협력처 있잖아요? 거기에 이거 좀 가져다 주실래요?” 주아는 핸드백에서 열쇠를 하나 꺼냈다. “이게 뭔데요?” “…보면 몰라요? 열쇠잖아요?” 누가 그걸 모르나. 그런데 그 열쇠를 왜 자신에게 주냐는 물음이었는데, 주아는 오히려 역정을 냈다. “대외 협력처에 있는 캐비닛 열쇠에요. 모르고 들고 나온건데, 거기 좀 주고 와요.” 대휘는 여자의 태도에 얼이 나가는 기분이었다. 사실 대휘는 성격이 꽤 내성적인 편이다. 그래서 선배들이 궂은일 시키는 것도 마다않고 하는 편이었고, 지도 교수가 가끔 말도 안되는 이유로 폭언을 할 때도 묵묵히 듣는 편이었다. 물론 성격 이전에, 사회적 관계도 상에서 대휘가 대들 수 없는 대상들이기에 감내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눈앞의 여성은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지 않은가? 굳이 있다면 지도 교수의 자제라는 점이지만, 그게 대휘가 심부름꾼으로 전락할 이유는 못 된다. 상냥하게 부탁하는 것도 아니고, 대뜸 심부름을 시키는 저 권위적인 태도는 아무리 얌전한 고양이라도 발톱을 드러내게 만들 뿐이다. 그러나. “…….” 절대군주. 그의 시선 아래에서는 호랑이도 머리를 땅에 박고 기어야한다. 열쇠를 받아 챙기는 대휘를 보며 교수는 짧게 혀를 찼다. 뒤돌아서는 대휘 뒤로 ‘쟤 왜 저래?’라는 말과 ‘신경 쓰지 마라. 모자란 놈이다’ 따위의 말이 들리는데도 못 들은 척하며 교수실을 나왔다. 열쇠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여보세요? 아, 나야. 별일 아니고,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술이나 한잔하자고. 응? 당연히 스트레스받지. 스트레스 안 받고 사는 날이 있겠냐? 말도 마라, 내가 오늘은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시다 죽을란다. 오늘은 진짜 죽어보자.” **** 며칠 전의 떠올랐던 아이디어의 끝을 보기 위해 단유는 미친 듯이 노트를 메워 나갔다. 가끔 열람실에 자리가 차서 자료실로 올라와 공부하는 사람들도 없진 않다. 그러나 단유처럼 미친 듯이 펜을 놀려 노트를 새까맣게 채워나가는 학생은 보기 드물다. 책장을 넘기던 사람도, 서고를 지나며 책을 고르던 사람도, 형광펜으로 노트를 채우던 학생들도 단유를 주시했다. 하지만 단유는 그런 시선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어떤 때는 디락 방정식(Dirac equation)을 이용해 양자장 내의 파동을 계산하다가, 벡터 연속 방정식을 응용하여 장내 질량 보존이 유의미한가를 검증하고, 밀도 범함수로 장내 파동이 아닌 밀도 모양 p(r)을 계산하기에 이르렀다. 단순한 아이디어, 작용-반작용과 같은 균질의 역학적 상호작용이 미립자적 세계에서 어디까지 적용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상호작용에 의한 생성과 해체, 조합과 분해를 이론적으로 규명해보는 것이다. 며칠 동안은 차분하게 아이디어를 풀어나갔다. 다행히 도서관에는 참조할 만한 책과 논문들이 있었고, 해외 저널과 논문도 검색만 하면 찾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때로는 단유가 이해하기 힘든 방정식도 있었고, 그래서 방정식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자료를 읽느라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새로운 아이디어의 편린을 얻고, 그 편린들을 하나 하나 기록하고 모으다 보니 어느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가설을 하나 얻었다. 그 뒤로 그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도서관 자료실이 문을 열면 자리를 잡고 앉아 책과 노트를 오가며 이론을 검증해나갔다. 그러다 오늘, 단유는 거의 마지막에 다다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그 느낌마저 이제 잊었다. 거의 몰아(沒我)의 경지에 이르러, 지금은 손과 머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잊을 정도였다. 누군가가 옆에서 말려야 하나 싶을 정도로 단유는 몰입했다. 누군가가 노트를 한 장 넘겨줘야 하나 싶을 정도로 노트가 새까맣게 변했다. 공부를 하는 척하지만, 실은 그저 낙서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노트를 끄적대는 소음이 다른 주위 소음을 압도할 정도가 되었고, 누군가는 헛기침으로 주의를 끌려 했으나, 단유의 시선은 노트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리고 마침내 노트 위에 공백 하나 보이지 않는다 싶을 때, 펜이 멈췄다. 그 순간, 도서관의 모든 사람들은 시간이 정지라도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도서관이라는 공간 내에 모든 사물과 시간, 소리와 빛이 멈춘 느낌이었다. 그들 모두의 시선은 단유의 펜에 머물러 있었고, 펜이 다시 움직이기 전에는 그 무엇도 움직일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펜을, 단유를 바라보던 중 펜을 잡고 있던 손가락에 힘이 풀리며 펜이 손가락을 벗어나기 시작하는 걸 보게 되었다. 엄지 손가락 끝에 살짝 걸린 펜은 빙글 돌며 쓰러지기 시작했고, 종이와 맞닿아 있던 펜촉이 슬쩍 떠올랐다. 펜은 무거운 공기를 밀어내며 천천히 쓰러지더니 마침내 펜이 노트 위에 모로 눕는 순간, 쿵 하고 소리가 들린 착각을 받았다. ―꿀꺽. 누군가가 침을 삼킨 걸까? 아니면 자신이 침을 삼킨 걸까? 긴장했던 목울대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순간, 몰아치듯 소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도서관 바깥에서 들리는 소음과, 자료실 천장에서 에어컨이 뿜어내는 바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목표를 잃은 눈동자가 방황하며 주위를 탐색케 하였고,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담은 눈동자들과 마주치며 황당함을 토로했다. ‘너도?’ ‘너도?’ 그러나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고, 입을 여는 순간 조금 전의 장면에서 느꼈던 정체 모를 느낌이 흩어질 것 같았다. 언젠가는, 아니 고작 몇 분만 지나면 방금 자신이 겪었던 환상 같은 순간, 현실 같지 않은 감각, 두 번 다시 경험하기 힘들 것만 같은 긴장감을 떠벌리느라 바쁘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 여운을 잊고 싶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의 여운은 한 사람의 움직임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후우.” 깊이 들이셨던 숨을 길게 내뱉는 단유,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른한 오후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와, 책상 위에 한 팔을 걸치고, 무수한 먼지들이 노란 햇볕에 반짝이며 주위를 떠돌아다닌다. 자료실 특유의 묵은 책 냄새가 흘러와 후각을 자극하고, 천장에서부터 내려온 서늘한 바람이 살갗에 맞닿자 소름이 살짝 돋는다. 의자가 끌리는 소음이 들리고 책상이 삐걱대며 철제 프레임이 우는 소리가 난다. 책과 노트가 책상에서 치워지고, 한 사람이 유유히 자료실을 빠져나가자, 그 순간 도서관은 현실로 복귀했다. ======================================= [608] 호령(2) 자료실 내의 분위기 따위는 개의치 않고 도서관 밖으로 나온 단유는 내리쬐는 햇볕 아래서 다시금 길게 숨을 토해냈다. 긴장과 흥분으로 달궈졌던 몸을 정돈하기 위한 호흡이었지만, 그 끝은 어쩔 수 없는 한숨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아.” 처음부터 많은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고, 작은 실마리라도 잡아 막혀 있던 벽을 넘을 수 있는 계기를 잡길 희망하며 시작했던 작업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꽉 막혀 있던 벽의 틈에서 새어나오는 빛을 포착했고, 점점 그 빛이 커지는 것을 느끼며 단유는 욕심이 생겼다. 어쩌면, 이번엔 벽을 허물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조급하게 굴진 않았지만, 그래도 몇 년간 정체되어있던지라 저도 모르게 욕심이 난 것이리라. 집중하고 또 집중하며 파고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단유는 벽을 깼다. “하아.” 그러나 다시 한숨. 벽을 깼더니 또 다른 벽이 있다. 아직 자신의 공부가 부족하기 때문이고, 여전히 먼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벽 하나를 깼으니 뿌듯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욕심을 냈던 만큼 실망도 있었다. 그나마 성과라면, 처음의 생각처럼 ‘진리’라는 건 단순히 복잡한 학문을 통달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쿼크, 렙톤, 힉스를 몰라도, 스핀 1½인 페르미온을 다루는 라리타-슈윙거 방정식이나 슈뢰딩거 방정식을 몰라도, 세상의 진리를 체감하고 체득하는 것은 가능하다. 예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언급했던 이야기들, 동양 고전 철학이나 서양 철학사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그런 진리의 파편들을 언급하고 있었다. 어쩌면 현대의 학문은 고전이 전하는 진리와 진실을 검증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현대의 학문이 새롭게 발견해낸 것들도, 사실은 지금껏 사람들이 무의식적로 체감하고 있던 것들을 의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가시화시키는 것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모든 답을 안다. 다만 그 답을 의식하지 못할 뿐. **** “아, 맞다.” “왜 그러니?” “이것도 줘야 하는데.” 주아는 핸드백에서 USB카드를 꺼내 들었다. “윤 주무관한테 빌린 건데 돌려주는 걸 깜박하고 들고 왔네. 아빠, 잠시만.” “정신머리하곤. 얼른 돌려주고 와.” “응. 잠깐만 기다려, 아빠.” 주아는 핸드백을 자리에 두고 USB카드만 쥔 채로 연구실을 뛰어나왔다. “저기요!” 불러봤지만 대답이 없어, 복도를 총총 뛰어 엘리베이터로 갔더니 이미 문이 닫힌 후였다. “에이, 씨.” 혀를 짧게 차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채로 기다렸다. “내려갔어?” 강교수가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선 딸을 향해 물었다. “응. 되게 성격 급한 사람인가봐. 불러도 대답도 안 하고.” “기다려봐라, 아빠가 전화해볼게.” “응, 어? 엘리베이터 올라온다. 아빠, 일단 내가 1층으로 갈 테니까 그 사람 1층 로비로 오라 그래.” “그래.” 핸드폰을 꺼내 주소록을 훑으며 짧게 대답하는 강교수였다. 주아는 하이힐 앞코를 까닥거리며 엘리베이터 지시등을 바라보았다. **** 조금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오늘은 더 자료실에 머무를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단유는 차를 주차 시켜 놓은 자연대 쪽으로 향했다. 그러다 가려는 방향에서 마주 오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아직까지는 데면데면한 인사 정도나 나눌 뿐이지만, 그래도 같은 학과의 선배이고 방학 기간에도 근방에서 여러 번 얼굴을 마주치다 보니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식당 가니?” “아뇨, 이제 집에 가려고요.” “아, 그래.” 보통 해가 진 뒤에도 연구실에 남을 일이 많던 대휘는 가끔 연구실 동료들과 함께 먹을 야식을 사기 위해 나올 일이 많았다. 그리고 그즈음에 집으로 돌아가는 단유와 마주치는 일이 잦아서 ‘여간 열심히 하는 게 아니구나’ 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그러나 오며 가며 인사만 나누는 사이에 더 자세한 이야기를 물을 생각도 없었고, 궁금하지도 않았던 대휘는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지나가려 했다. “수고해.” “네.” 단유 역시 간결하게 대답하고 계속 걸음을 이어가려 했다. 그때 대휘의 핸드폰이 울리고 대휘는 전화를 꺼내 들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봉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마침 발 앞에 떨어진 터라 단유가 허리를 숙여 봉투를 주워들었다. “여보세요? 네?” 봉투를 대휘에게 건네던 단유는 와락 일그러진 대휘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예,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후,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며 대휘는 작게 욕을 중얼거렸다. “씨발, 내가 무슨 종이야?” 목소리는 작았지만, 마주 섰던 터라 단유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주제넘게 무슨 일인지 물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고, 그저 들고 있던 봉투를 받아들 때까지 기다렸다. 신경질적으로 봉투를 낚아채던 대휘는, 아차 하는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며 사과했다. “아, 미안. 너한테 화낸 거 아니다.” “네.” “하아, 정말…. 너도 나중에 대학원 갈 생각이면, 지도교수 신중하게 골라라. 지도교수가 엉망이면 아예 전공을 바꿔. 그게 속 편하게 사는 길이다.” 영문을 모르니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지만, 대충 상황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낄 사안이 아니란 것도 알았다. 빨리 자리를 피해 주는 게 더 좋을 거라 생각해 인사를 하고 지나가려는데 대휘가 먼저 돌아서서 왔던 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휘를 기다리던 사람은 참을성이 많이 부족한 이였다. “이봐요! 왜 사람이 부르는데 못 들은 척하고 가는 거예요?” 성이 났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며 성큼성큼 걸어오는 여자의 모습에 어이가 없는 일을 당한 사람마냥 입을 벌리고 쳐다보는 대휘였다. “절 불렀다고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되묻는 대휘였으나 반쯤 멘탈이 나간 상황으로 보였다. 물론 주아는 그런 걸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다. “못 들었어요?” “네, 못 들었는데요?” 대휘의 대답에 주아는 감히 상상도 못 했던 욕을 들었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하, 참 나. 기가 막혀서. 내가 가서 엘리베이터 내려가는 거 확인했거든요? 제가 불렀을 때 분명히 엘리베이터 문 닫히기 전이었던 거 알거든요?” “문 닫히고 내려갈 때도 안 들렸습니다.” “아, 웃기는 사람이네. 그렇게 오리발 내미면 다예요?” 주아의 억지에 대휘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하지만 끝끝내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대화를 계속 이어가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왜 부르셨는데요?” “…됐고, 자요.” 불쑥 내미는 손에 USB카드가 들려 있었다. “이거 저희 사무실에 윤 주무관님께 전해줘요.” “뭔데요, 이게?” “그건 알 거 없고요. 그냥 주면 알 거예요. 왜 이렇게 사람이 말이 많아요? 그냥 시키면 해요.” 그 말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끈이 뚝 끊어졌다. “당신이 뭔데 시켜요?” “…네? 지금 뭐라고 했어요?” “제가 당신이 시킨다고 해야 합니까?” 대휘의 격앙된 어조에 주아는 손가락을 치켜든 채로 금붕어에 빙의된 듯 입을 뻐끔거리며 대휘를 바라보았다. 입술에 바른 새빨간 립스틱보다 더 붉어진 얼굴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했다. ‘아.’ 그 모습을 보니 통쾌함보다 후회가 밀려든 대휘는 더 몰아붙이지 못하고 주아와 대치상태를 이어나갔다. 머릿속에는 앞으로 석사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걱정과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는 치기가 충돌하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때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등장한 인물은 강교수였다. “자네, 그게 무슨 말버릇인가?” 정리가 아닌 처리를 하기 위해서일까? 대휘는 순식간에 핼쓱해진 얼굴로 교수를 향해 변명을 털어놓으려 했다. 그러나 교수는 그런 변명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아니, 그럴 생각을 가질 틈도 주지 않는 딸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 주아가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돌아서는데, 울먹거리는 듯한 목소리에 교수가 놀란 얼굴로 딸을 감싼다. “괜찮니?” 대답 대신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모양새에 대휘는, 또 한번 어이가 털리는 기분을 느꼈다. 도대체 조금 전 상황에서 어떻게 저런 반응이 나온단 말인가? 오히려 억울한 사람은 자신 아닌가? 그러나 그런 항변을 받아줄 교수가 아니었다. “자네, 제정신인가? 왜 애꿎은 사람한테 소리를 질러!” “아니, 그게 아니고요.” “아니면! 내 딸이 여자라고 그런 건가? 만만해서?” “아닙니다.” “그럼 아무한테나 윽박지르고 그러나? 내 앞에서만 겸손한 척 위선 떨다가 밖에서는 아무한테나 소리 지르고 그러냐고!” “…….” “여기가 자네 집 안방이야? 어디서 함부로 소리 지르고 그러는 거야! 설마… 그 심부름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 봉투 하나 갖다 주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 난동을 부린 거야!” 엄밀히 말하면, 심부름시킨 건 봉투 하나만이 아니고, 위압적으로 굴었던 건 오히려 교수와 그의 딸이 아니던가. 소리를 질러도 대휘보다 주아가 먼저 언성을 높였고, ‘만만한 건 당신 딸이 아니라 나잖아!’ 머리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교수님. 솔직히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따님 심부름꾼도 아니고….” “야, 조대휘!” 노교수의 쇳물 끊는 듯한 노성이 면전에서 터져 나왔다. “누구 앞에서 그런 말버릇이야? 위아래도 없어!” 교수의 목소리가 올라가자 대휘의 얼굴이 검게 변했다. “감히 교수 말에 따박따박 말대꾸나 하는 그런 심성으로 내 제자를 하겠다고 있었던 거냐!” “아빠, 아빠. 참아. 이렇다 혈압 때문에 쓰러지겠다. 응?” “내가 이런 녀석을 제자라고 두고 있었다니….”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잖아?” “너 같은 놈이 말이야, 어디 가서 내 제자라고 떠들고 다닐까봐 겁이 나서라도 이대로 못 지나가겠네. 제자 교육 잘못시켰다는 소리라도 들으면 내 체면이 어떻게 되겠어? 위아래도 모르는 자식이 말이야!” 목이 붉어지도록 노성을 지르니 드문드문 지나가던 이들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기 시작했고, 자연대 건물 안에 있던 인물들도 바깥의 소란에 관심을 기울이며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노교수의 분노를 자아내게 만든 이. 어떤 이유로든 평탄한 석사 생활은 물 건너간 셈이다. **** 대학교수. 상아탑이라 불리는 대학에서도 지성의 꼭지점을 이루는 사람. 교수라는 직함을 달기 위해 지난 세월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셀 수 없이 많은 책과 논문을 쌓아놓고 씨름했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사람과 부딪히며 자신의 업적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을까? 그런 사람이니 뭇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난 합리적 이성으로 세계를 읽고, 논리적인 언어로 사람을 가르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눈앞의 교수에게서는 이성이나 논리는 없었다. 석사? 박사? 이런 지도교수 아래서는 힘들기도 하거니와, 함께 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슨 부귀 영화를 누리겠다고 그 고생을 했던가. “대휘야.” 대휘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옆을 돌아보았다. 저녁 약속을 잡았던 친구가 어느새 여기까지 와서 자신의 수모를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 “너…여태 이런 꼴 당하고 있었던 거냐?” “…….” “야, 이건 아니잖아. 이런 대접 받으려고 대학 다닌 거 아니잖아?” “…미안하다. 이런 꼴 보게 해서.” “그게 지금 할 소리는 아니지.” 친구는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리고 교수를 노려보며 팔을 걷어붙였다. 말려야 하나? “듣자 듣자 하니까, 아주 어이가 없네요? 뭐? 위아래? 나 참.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위아래를 찾고 있어요? 당신이 교수면 답니까? 교수면 사람 무시하고 욕하고 해도 돼요?” 교수는 불청객의 등장에 놀란 얼굴을 하고 말을 더듬었다. “뭐, 뭐야?” “난 당신 제자도 아니고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말해도 되죠? 당신이 이 친구만 했을 때, 그러니까 당신이 학생이었을 때는 교수가 막말해도 그냥 참고 지냈나 본데요, 아저씨. 아니, 영감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무튼 이러면 안 돼요. 응? 이러면 안 된다고. 막말로 이러다 당신 칼 맞을 수도 있어요.” 교수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는 젊은 친구의 말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교수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 [609] 호령(3) “영감님? 아니, 영감? 배울 만큼 배운 양반이 그러면 쓰나?” 교수의 가슴을 한 손으로 밀치며 이죽거리는 친구의 말에 교수의 늘어진 볼살이 부들거렸다. “어디 아까처럼 계속 말해봐요, 영감. 나 혼자 잘났다는 듯이 말해보라고. 왜? 난 내 친구처럼 만만하지 않은가 보지? 잘난 척 훈계라도 해보지그래? 욕도 하고 그래 보라니까?” “이익!” 늙은 교수의 앙다문 턱에서 뿌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평생에 이런 치욕을 언제 겪어봤을까? “그, 그만 해요.” 옆에 섰던 딸이 아버지를 한쪽 팔로 가리며 부탁했다. “응? 이 분은 또 왜 이러시나? 아까처럼 명령해 보시지? 잘난 듯이 심부름시킬 땐 언제고, 왜 갑자기 연약한 척일까? 아, 이것도 연긴가? 보니까 마음에도 없는 눈물을 흘릴 것처럼 애잔하게 굴던데, 이번에도 그건가? 왜? 사람들이 막 쳐다보니까,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당신을, 당신 아버지를 동정할 것 같아? 웃기지 마. 당신 아버지, 이 영감, 이미 사람들한테 찍힐 만큼 찍힌 사람이야. 제자라고 떠들까 봐 겁나? 웃기시네. 정 반대라고, 이 영감아. 당신 제자라고 사람들이 손가락질 할까 봐 겁난다고.” 대휘는 자신이 술자리에서 털어놨던 이야기를 하나도 잊지 않고 술술 털어놓는 친구의 기억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감탄은 감탄이고, 이대로는 도가 지나칠까 겁이 나기 시작했다. ‘말려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자신을 대신해 속 시원히 쏘아붙이는 친구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싶은 마음도 컸다. “너, 너!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공갈, 협박죄야, 이거!” “공갈, 협박? 허, 참. 공갈이랑 협박은 지금까지 당신이 한 게 공갈이고 협박이야. 불쌍한 제자들, 그저 공부에만 매진해보겠다고 밤잠 설치는 학생들을 석사, 박사 학위 논문 심사를 핑계로 종 부리듯 부려 먹은 게 공갈이고 협박이야.” 눈을 부라리며 강 교수를 노려보는 친구의 기세에 눌린 걸까? 교수는 대꾸도 못 하고 그저 마주 노려볼 뿐이었다. 하지만 친구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양반 아주 내로남불이네? 응? 영감 사고방식이 그따위니까 영감 딸내미도 아주 못 배워 처먹어서 이 꼴인 거야. 알아? 당신 미국 명문대 출신이라며? 미국 명문대 출신이면 아버지 빽으로 낙하산 취업해도 되는 거야? 당신 때문에 수년간 준비하던 사람이 불합격하는 게 말이 돼? 서류 심사 한 번 안 거치고 들어온 것도 모자라, 뻔뻔하게 얼굴 들고 다니지? 그리고, 여기가 어디라고 상전 노릇이나 하고 다녀? 네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알아?” 친구가 무슨 해코지라도 할까 봐 아버지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주아, 그녀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봐요, 이제 그만 해요.” 지나가다 걸음을 멈추고 지켜보던 사람 중 한 명이 끼어들어 교수 앞을 막았다. 복장으로 보아 학생같이 보이지는 않는데, 교직원일까? 그가 끼어들자 옆에서 구경만 하던 몇몇 이들도 슬슬 끼어들어서 더 큰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 말리겠다는 자세를 보였다. 이쯤 되니 대휘도 이 싸움을 말려야 하지 않을까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비록 친구가 대신 나서주긴 했지만, 괜히 자기 때문에 좋지 않은 일에 말려들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누군가가 자신의 손목을 붙들었다. “선배님.” 돌아보니 단유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마주쳤었지. 집에 간다더니 아직 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마 자신과 교수 자제분 사이의 일을 지켜보느라 걸음을 멈췄던 모양인데, 자신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만 하세요.” “응?” 안 그래도 이쯤에서 그만두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만 해요.” 재차 말을 잇는 단유의 깊고 검은 눈동자가 정확히 대휘의 눈동자를 향하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그의 눈동자가 대휘를 붙들었다. 그 순간 대휘는 뭔가 어긋났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게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 그만두게 하려고 했어, 나도. 내 친구가 말이 좀 심했다고 생각했어. 내가 말려야지.” “선배님.” 단유는 더 세게 대휘의 손목을 쥐었다. 대휘는 생각보다 강한 손아귀 힘에 통증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야, 왜 이래? 이거 놔.” 그러나 단유의 시선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고, 그런 단유를 바라보던 대휘는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랬는데, 주위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선이 이상하다. 마치 이상한 사람을 보는 마냥. 고개를 뒤로 돌려 교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교수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분노로 핏발이 섰던 눈동자에 의문형 부호가 함께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의 딸은, ‘두려워한다?’ 그런데 갑자기 정적에 휩싸인 현장에서 문득 이상한 점을 느꼈다. 친구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내 친구는 어디 갔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찾아도 친구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자기 앞에 서 있던 친구였는데? 단유가 자신의 손목을 잡았을 때, 잠시 한눈 판 사이에 어디로 간 것일까? 설마 도망간 것은 아니겠지? 그렇게 교수를 몰아붙이던 친구였는데, 갑자기 상황의 불리함을 느껴 도망친다? 말이 되지 않는다. “내 친구는?” 단유가 친구가 있던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을 테니 그 행방을 알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물었는데, 단유가 대답했다. “친구라뇨?” “조금 전까지 여기 있던 친구 말이야. 그래, 내 친구가 말이 조금 심하긴 했어. 그래도 교수님한테 그러면 안 되는데 말이야. 그래서 나도 말리려고 했었어. 정말이야. 그런데 진짜 내 친구 어디 갔지?” 두리번거리는 대휘에게 단유가 대답했다. “선배님, 친구가 누굽니까?” “응? 방금 여기 서 있던 친구 말이야? 오늘 저녁에 같이 술 한잔하기로 약속했던 친군데, 미리 왔다가 우연히 내가 말싸움하는 걸 보고 끼어들었는데….” “친구분, 이름이 뭔가요?” “…그걸 왜 묻지?” 혹시 친구의 인적사항을 알아내서 신고하려는 걸까? 그래도 자신을 대신한 친구인데 보호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걸 니가 알 필요까진 없잖아?” 단유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이더니 말을 이었다. “선배님, 여기에 다른 사람은 없었어요.” 뭐라고? “선배님만 혼자 계셨어요.” ****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도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기울기 시작하며 고층 건물의 그림자도 길게 늘어지고 더위도 점점 꺾이기 시작했다. 거기다 건물 사이를 가르며 수목들을 흔들고 지나간 바람에 사람들의 목덜미에 맺혀있던 땀방울을 식혀주었다. 그러나 그 바람도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잠재울 정도는 되지 못했다. “저 사람 뭐야?” “언제부터 저랬는데? 나 조금 전에 와서 뭐가 뭔지 모르겠다.” “보다가 소름 돋는다, 이것 봐라.” “경찰 불러야 하는 거 아냐?” “119를 불러야 할 거 같다.” “말로만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까 무섭네.” “공부를 너무 많이 한 부작용 같은 건가?” “예전에도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애가 갑자기 미쳐서 소리 지르고 한 적 있지 않았나? 그때 사람들 전부다 멍 때렸다던데.” “그 정도면 다행이지. 해마다 한 번씩은 꼭 자살 소동 벌어지잖아?” 보일 듯 말 듯 은밀한 손가락질이 대휘를 가리키고, 좌판에서 튀어나와 시장 바닥을 뒹구는 더러운 생선을 보듯 대휘를 바라보는 사람들. 모인 이들의 시선이 홀로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대휘를 향할 때, 단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사람!’ 주아는 대휘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단유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 자신의 뺨을 때렸, 다고 생각하게 만들, 었지만 정말 현실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어 혼란케 했던 남자가 몇 미터 앞에 서 있었다. 그일 이후로 혹시라도 마주칠까 봐 도서관 가는 방향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서 마주치게 되다니. 지금 당장은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그가 자신을 보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었기에 주아는 몸을 떨었다. 스스로는 ‘이유 없는 폭력의 희생자’라고 생각하며 억울하고 두려울 뿐이었던 주아는 시선을 떨군 채로 아버지의 옷깃을 세게 붙잡았고, 딸의 그런 모습이 대휘에 대한 두려움이라 생각했기에 강 교수는 더 큰 분노에 싸였다. 그리고 조금 전 홀로 대휘와 마주 설 때와 달리, 지금은 둘 사이에 끼어든 구경꾼이 있었기에 조금 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다 봤지? 이 미친 녀석이, 여자한테 함부로 막말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지 선생한테까지 폭언에, 농락을 했어! 응? 네가 그러고도 무사히 대학을 다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당장 경찰에 신고해서 네 녀석, 더는 이곳에 발 못 붙이게 만들 거야! 이런 위험한 놈이 내 랩에서 공부를 해? 어림도 없다, 이 녀석아!” 분노에 휩싸인 강 교수의 일갈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단유의 시선이 잠시 그에게 머물렀다가 대휘에게로 돌아갔다.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대휘. 아마도 일전에 그를 바라보며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던 모양이라, 짐작했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다. 대휘가 평소 어떤 성격인지도 자세히 모르고, 강 교수란 사람이 어떤 성품을 지녔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당장에 벌어졌던 일만 보면, 그가 벌인 일이 꼭 무조건적으로 욕을 먹어야 하는 일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단유는 대휘를 뒤로 물리며 나섰다. 그리고 어느새 바닥에 떨어져 있던 노란 봉투를 다시 집어 들며 말했다. “교수님.” 여전히 씩씩대는 교수님의 시선이 단유에게로 향했다. 단유의 정체를 묻는 얼굴이다. “이 봉투는 제가 선배 대신 전하겠습니다.” 봉투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우체국, 에 보내려던 것 맞으시죠?” “뭐?” “그리고….” 이어 넋 놓고 있던 주아에게서 USB도 가볍게 뺏어 들었다. “이것도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아까 들어보니 이 분 근무하시는 사무실의 윤 주무관님? 그분께 드리라고 했던 거 같은데, 이것도 제가 대신 드릴게요.” 교수는 당황했다. “자네가 그걸 왜 하나?” “어차피 여기, 선배님한테 시키시려던 거였잖아요? 보시다시피 선배님이 심부름을 대신 할 수 없는 상황이니, 제가 대신해드리려고요. 그리고 또 뭐 시키실 일이 있으신가요?” “아니, 그게….” 갑작스러운 단유의 개입에 교수가 말을 잇지 못하자, 단유는 능청스럽게 돌아서 대휘를 보았다. “또 제가 대신 해야 할 일이 있나요?” 멍하게 단유를 바라보던 대휘가 호주머니에서 슬그머니 꺼낸 것은 열쇠였다. 곧 그 열쇠도 가볍게 뺏어 들었다. “이것도 전해주면 되나요? 누구한테요?” 대휘는 대답 대신 주아를 바라보았고, 단유의 시선은 주아에게로 옮겨졌다. 동시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도 주아에게로 향했다. “이것도 윤 주무관님이란 분께 드리면 되는 거죠?” “…….” 주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이게 뭐하는 짓인가!” 그래도 교수라서 그런지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단유는 교수의 화를 무던히 받아냈다. “말씀드렸다시피, 선배님을 대신해서 심부름을 해드리는 겁니다. 어차피 이 선배님 아니면 다른 사람을 시키셨을 일 아닌가요?” 사람들에게는 단유의 말이 마치 ‘어차피 본인은 이런 일 안 하실 거 아닌가요?’로 들렸다. 몇 마디 말이 오갔을 뿐이지만, 단유의 말을 통해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움이 없었다. “저 교수님이 저 사람한테 심부름을 시킨 거네?” “교수님이랑 저 딸이랑 같이 심부름을 시킨 거지.” “미친 거 아냐? 교수님은 그렇다 쳐도 저 딸은 뭔데 지 일을 남한테 시킨대?” “그래놓고 교수는 딸 심부름 안 해준다고 역정 낸 거야? 대박.” 수군대는 목소리가 정확히 들리지 않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바뀐 것을 교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서울대학교 대나무숲에 짧은 동영상과 글이 올라왔고, 그 영상은 곧 수많은 학생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했다. ‘정신병에 걸린 학생’과 ‘학생을 종 부리듯 한 교수’에 대해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누가 옳고 그른가에 대한 문제 제기도 있었지만, 주요 논제는 ‘왜 한 사람이 저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에 대한 추론이었으며, ‘신성한 학문의 장에서 시대착오적인 대우가 웬 말인가’라며 성토하는 글도 다수의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게 되었다. 특히 이 사건에서 나름 중심 캐릭터인 강 주아, 라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쏟아져 나왔는데, 소수의 사람들에게나 알려져 있던 일이 크게 알려지며 학내 비리와 부패에 대해 학생들이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날 이후 그녀는 학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고, 더불어 교수 역시 대학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 교수에 대한 학교 측의 제재는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록 교수의 언행에 대한 문제는 각자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으니, 이를 처벌의 빌미로 삼을 순 없었지만, 역시나 딸을 취업시킨 행정 비리 문제에 연루되어 있었기에 제재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대휘, 그도 이후로는 대학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 [610] 호령(4) “미안하다.” “사과받을 일은 한 적이 없는데요.” “괜히 곤란하게 만든 것 같아서 말이다.” 용기내서 하는 말이란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단유는 대휘의 사과를 받지 않았다. “저한테 사과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지금은 그런 거 잠시 잊으시고 빨리 나으실 수 있도록 힘쓰세요.” 단유의 말에 대휘는 구급차 곁에서 대기하는 구급요원들을 흘깃 바라보았다. “고맙다. 고맙고 미안하다.” 말리지 않으면 석고대죄라도 할 모양으로 죄책감을 느끼는 대휘를 보며 단유는 볼을 긁적거렸다. “법으로도 심신미약 상태에서의 행위에 대해서는 정상참작을 하죠. 더군다나 선배님은 딱히 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일을 저지르지도 않으셨고요. 굳이 사과를 하신다면, 교수님께 하셔야겠죠.” 의도적으로 한 행동은 아닐지라도, 늙은 심장에 무리가 갈 만한 말들만 했으니 말이다. “그래, 교수님께도, 사과를 드려야지.” 기운 빠진 얼굴로 하늘을 응시하는 대휘.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날씨이건만, 둘이 마주선 이 자리는 서늘하다 못해 처연할 지경이다. “그렇지만 너한테도 미안하다. 괜히 나 때문에 학교 생활 힘들어지는 건 아닐지….”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선배님의 사과를 받지 않으려 했던 것은 결코 선배님을 위해서 나섰던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 “선배님, 전 다른 것과 틀린 것은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눈치다. “사람은 백 명이면 백 명이 다 다르다고 하죠? 성격, 습관, 살아온 환경이 다르니 생각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를 겁니다. 다른 건 그냥 다를 뿐이죠. 다르다고 차별해서는 안 되고 무시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들 그렇게 이야기들 하잖아요? 하지만 틀린 건 틀리다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틀린 걸 보고도 모른 척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대휘는 그동안 입 꾹 다물고 참으며 지냈던 시간들을 되돌아보았다. 틀린 건 틀리다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자신이 ‘친구’라고 불렀던 또 다른 인격체를 만들어냈던 이유가? 자신을 위로해주고 달래주며 잘못된 것, 틀린 것을 향해 욕을 해주던 ‘친구’. 솔직히 아직도 그 친구가 현실이 아니라는 말을 믿기 힘들다. “전 그 교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정확히 몰라요. 그 교수님이 선배님이나 또 다른 제자분들에게 어떻게 하셨는지 알지도 못하고, 조금 전의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다고 추측은 해도, 확신은 하지 않아요. 하지만 조금 전의 일은 분명히 틀린 행동이었고, 틀린 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흔들리는 대휘를 보며 단유는 침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건 틀린 것이라는 걸 스스로 알게끔 대처했던 것이지, 선배님을 돕겠다거나 교수님을 일부러 곤란케해서 모욕을 주려던 게 아닙니다. 물론 교수님은 다르게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지만요.” 다툼이 벌어졌던 그 자리를 피하기 전, 단유를 노려보던 교수의 시선을 떠올리면, 교수는 ‘곤란’이나 ‘모욕’ 이상의 불쾌감을 느꼈으리라 짐작 가능하다. 하지만 불쾌하다고 그냥 둘 순 없는 일. “모든 것은 원칙대로 흘러갑니다. 제가 그 자리에서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요. 다만 제 나름의 방식으로 그 사실을 일찍 알려드렸을 뿐이죠.” 딱히 단유에게 해를 끼친 것도 아니니, 단유가 나서서 그들을 단죄할 것도 아니다. “저 분들 너무 오래 기다리시는 것 같네요.” “…그래. 네 말은 알겠다. 그래도, 내 개인적으로는 고맙다.” 이제 갓 대학에 들어온 신입생이니까, 아직 대학의 현실을, 사회의 현실을 모르니까 할 수 있었던 무모한 행동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니 대휘는 고마운 마음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런 말 할 자격은 없지만, 그래도 다음부턴 이런 일이 있어도 함부로 나서지 마라. 위험하니까. 원리 원칙보다 중요한 건 네 자신이다.” 그가, 그리고 그의 선배들이 원칙을 몰라서, 혹은 부도덕해서, 이제껏 가만히 있었을까? 그런 스탠스를 유지했던 이유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갈게.” 대휘는 단유의 어깨를 두드리고 돌아섰다. 그리고 구급요원들에게 기다려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구급차에 올라탔다. ****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버지는 핸드폰을 붙들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아마도 아버지는 주변 분들에게 오늘의 사실을 알리며 자신의 편을 만들거나 오늘의 상황을 수습하려는 것, 이라고 주아는 생각했다. 그런 아버지와 달리 주아는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자신의 친구들에게 오늘 있었던 황당한 일을 떠든다고 한들, 자신을 위로하거나 도와줄 사람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친구, 라고 부르는 이들은 고작해야 쇼핑할 때 어딜 가서 무엇을 사야 좋은지를 알려주거나 어떤 게 자신에게 어울리는지를 조언해 주는 정도였으니까. 물론 그런 이유 말고도 주아가 다른 어떤 대처도 못 하고 방에 틀어박혀 손톱을 뜯는 이유가 있었다. ‘그 녀석이야. 그 사람이 그런 거야.’ 건방진 학생 뒤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남학생.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해서 아버지를 당황케 만들고 자리를 피하게 만들었던 남학생. 자리를 떠나기 전, 잠깐 시선이 부딪쳤을 때 주아는 남학생의 눈동자에 서린 이유 모를 섬찟함에 소름이 돋았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을 때리고도 증거를 남기지 않았듯, 이번에도 수를 쓴 것이 틀림없다고 주아는 여겼다. 멀쩡한 학생이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아니 진짜 미쳤겠지만, 아무튼 보이지 않는 사람을 보는 듯 행동하고 눈빛이 바뀌어서는 아버지에게 악담을 쏟아붓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여겼다. ‘전부 그 녀석이 뒤에서 조종한 거야.’ 손톱을 잘근잘근 씹다보니 애써 기르고 꾸민 손톱이 망가질 수밖에 없다. 짜증이 난 주아. “Fuc*!” 생각해보니 자신이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불안에 떨어야 하나 싶어, 억울하고 분했다. 눈물이 났다. **** 집에 돌아오니 집안이 썰렁했다. 호빵과 패티만이 달려와 단유의 발등을 핥으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지지.” 단유는 두 개를 품에 안고 거실로 향했다. 생각해보니, 오늘 상미는 명수의 저녁 경기를 직관하러 경기장에 간다고 했었다. 하은은 아직 학원 일이 끝나지 않았으니 돌아올 리 없었고. 결국 지금 이 집에는 단유만 있는 셈이다. 안고 있던 두 녀석이 모두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버둥거렸다. 거실에 내려놓으니 신난다고 거실을 뛰어다녔다. 당연히 거실에 개 털들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단유는 한숨을 쉬며 그 녀석들이 하는 꼴을 바라보다가 허리를 굽혀 날리던 털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가늘고 새까만 털을 보니 패티의 것이다. 살짝 흔들면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털이지만 하얀 대리석 바닥 위에 놓으면 금이라도 간 것처럼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단유는 도서관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사실 대휘의 일이 아니었으면, 좀 더 일찍 집에 돌아와 차분하게 오늘의 소득을 되짚어보고 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갑자기 원치 않던 일에 끼어들면서 시간도 지체되고 머릿속도 괜히 복잡해졌지만, 다행히 도서관에서 얻은 깨달음은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깨달음이라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다. 애초에 기대했던 정도에는 못 미쳤고, 이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은 까닭이다. 굳이 표현하면 반쪽짜리 성공이었고, 반쪽짜리 깨달음이라고 해야겠다. 물질의 본질, 이 세상의 원리를 탐구하던 중이었으니,―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면―어떤 형체의 물질이든 만들어낼 수 있는 수준을 기대했지만, 그런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아직도 많은 벽을 넘어야 한다는 것만 깨달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하나의 벽을 넘은 성과가 있었으니, 이제 그것을 실제로 마법에 적용해 볼 차례였다. ‘그런데 이걸 어디에 쓰나?’ 그 물음이 계속해서 떠올랐지만, 적당한 대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손에 들린 개털을 보니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물질은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일정 규칙에 따라 입자가 조합되면 물질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규칙이 바로 오늘 단유가 알아내려 했던 것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실패했다. 그러나 그 메커니즘에 대한 이론적인 지식을 쌓으면서 단유가 얻은 능력은 바로, ‘해체(Dismantle).’ 그러자 단유의 손에 들려 있던 개털이 번쩍이더니 사라져버렸다. 흔적도 없이. ‘됐네.’ 손끝을 비비며 남아 있던 흔적을 흩어냈다. 어떤 물체를 미립자 단위로 분해 시켜버리는 것이 바로 오늘 단유가 얻어낸 성과였다. 분자, 원자를 지나, 더 작은 단위에서 ‘해체’를 시키는 것. 없애는 것(Delete)은 아니다. 극한의 미시세계에서나 관측 가능한 구조체를 각각의 단위체로 억지로 떼어내는 것이 '해체'였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에너지는 빛과 열로 치환되었다. 아주 작은 질량체였기에 상대적으로 치환된 에너지 역시 크진 않았다. 그러나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약간의 유도만으로 유용한 에너지로 전환시켜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전환하는 방법도 모를뿐더러, 당장 에너지로 변환시킨들 어디에 쓸 수 있을까? 변환된 에너지를 저장하거나 사용할 수 있는 매체가 없는데. 만약 조합의 원칙을 알았다면, 단유는 해체와 동시에 조합으로 물질을 ‘생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원하지 않은 방식의 에너지로 소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당장에 어떤 물질을 자의적으로 전기 에너지화 시킬 수 있다면, 더는 전기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물론 지금도 전기세 정도를 걱정하진 않지만, 그렇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란 가정이다. ‘이걸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손끝을 비비며 고민하던 단유는 문득 자신을 올려다보는 두 마리 개에게 시선이 옮겨졌다. 그리고 그 두 마리가 짧은 시간에 벌인 난장판도 발견했다. 잠시 후, 거실에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여러 차례 번쩍번쩍하니까 거실에 보이던 모든 털들이 사라졌다. 그게 또 보기 좋았는지 두 녀석이 미친 듯이 뛰어다녔고, 그 덕에 또 번쩍번쩍 거렸다. 하는 김에 이것저것 다 ‘해체’를 시켜보았다. 거실에 떨어진 개털을 ‘해체’ 시키고, 거실 벽에 붙은 TV 위의 먼지들도 ‘해체’ 시켰다. 거실 쓰레기통에 있던 휴지들도 보이는 김에 다 ‘해체’를 시켰다. ‘해체’는 딱히 어떤 제약이 없었다. 크든 작든 상관없이 가능했다. 원래 무언가를 만드는 것보다 때려 부수는 것이 쉬운 법이다. 모래성을 쌓기는 어려워도, 부수는 건 쉽듯이 말이다. “어머? 단유야, 청소했어?” “응.” “와, 집이 엄청 깨끗해 보인다? 갓 이사온 집 같애. 어? 소파도 청소했어? 새로 산 거 같은데? 설마 돈 많다고 새로 산 건 아니지? 와, 여기 먼지 하나 없네?” 여기 저기 둘러보며 놀라워하던 상미가 단유를 돌아보며 눈썹을 내려뜨렸다. “야, 힘들게 왜 혼자 했어? 나랑 같이 하지. 이러면 나만 미안해지잖아.” “괜찮아. 별로 안 힘들었어.” “야, 이 넓은 집을 너 혼자 청소했는데 안 힘들었을려고? 잠시만 뭐 먹을래? 내가 시켜줄게.” “됐어.” “다음에 대청소할 거면 미리 말해줘. 나도 한팔 거들 테니까.” 팔을 들어 보이며 히죽 웃어보인 상미는, 자신의 방에 들어가서는 또 한 번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와, 대박! 내 방도 했어? 와! 여기 마우스 패드는 어떻게 청소했대? 안 그래도 내가 이거 조만간 빨려고 했었는데. 키보드도 했네? 야, 이거 설마 물로 부어서 청소한 건 아니지?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깨끗하게 했어? 책상 밑에도 다 했네? 너 설마 오늘 하루 종일 청소만 하고 있었던 거야?” 단유는 새로 얻은 마법이 청소 특화 마법이라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 [611] 실험(1) 그러나 만족으로 끝난다면 어떤 발전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단유에겐 비록 이루진 못했으나 명확한 목표가 있었으니,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했다. 처음 마법을 사용할 때는 몰랐지만, 마법을 거듭할수록 각 마법의 시전 시 보이는 빛의 밝기가 미세하게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이 더 밝은데?’ 그리고 또 경우에 따라 전환되는 열 에너지의 양에도 차이가 난다는 것이 감각적으로 느껴졌다. 당장 느껴지는 차이가 이렇다면, 체감할 수 없는 부분에서의 차이도 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몸으로만 어렴풋이 느끼는 정도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 단유는 남은 방학 기간 동안 도서관엘 나가지 않고, 대신 방에 틀어박혀 호기심을 채우는 작업을 이어나갔다. 이 작업을 위해 단유는 레이저 비접촉식 온도측정기와 실험용 온도센서 장치, 정밀 조도계 등을 구입했다. 번쩍, 하는 불빛이 조그만 강화 아크릴 상자 안에서 뿜어져 나올 때, 단유는 각 기기들에 측정된 값들을 확인했다. 그리고 끼고 있던 보안경을 벗으며 책상 위 노트에 그 값들을 기록했다. ‘450lx, 68℃.’ 조금 전 같은 상황에서 200lx에 71℃가 나왔던 것과 비교하며 단유는 머리를 긁적였다. 개인적으로 하는 실험이기에 정밀하게 똑같은 조건을 만들 수 없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매번 측정값이 달라지는 것은 단유가 미처 알지 못한 변수가 있다는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었다. 애초, 실험을 시작하기 전부터 짐작했던 것 중 하나는 에너지 손실에 대한 부분이었다. 핵분열마저도 이론적으로는 질량을 손실 없이 에너지로 전환 시켰을 때, 막대한 양의 에너지가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실제로 에너지 변환 효율은 2~3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내긴 하지만, 어쨌든 에너지 변환 시 통제되지 않는 손실분이 있다는 것이다. 단유의 실험은 최첨단 실험실도 아닌 작은 방에서, 무거운 원자핵을 강제 분열시키는 것도 아니고 미립자 단위로 ‘해체’를 시킨다. 원자는 물론 전자와 극소 입자마저 뿔뿔이 흩어놓는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에너지가 대량 발생할 거라고 짐작은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 과정에서 흩어진 입자들과 에너지가 단유가 미처 알지 못한 방식으로 ‘재조립’된다는 것이다. 입자와 입자들이 합쳐지고 흩어졌던 에너지들이 모인다. 그리하여 일부는 빛으로, 또 일부는 열로 표현되며, 때로는 알아채기 힘들 정도의 미세한 파동으로 전환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전체의 일부분이어서, 대부분의 입자들과 에너지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에너지보존법칙에 따라 분명히 관측되어야 할 에너지들인데 말이다. 그러니 고작해야 눈이 부신 정도, 손끝이 따뜻해질 정도의 열만 남기고 마는 것이다. ‘더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는 실험실이 있으면 좋겠다.’ 노트 위에 끄적거려 놓은 관측값들을 살피다가 단유는 한숨을 토해내고 목을 뒤로 젖혔다. 평소에는 실감하지 못했던 천장의 높이가 생각보다 높다고 느꼈다. 아득하게 멀어 보이는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주먹을 쥐었다. 그때, 단유의 방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 문이 빼꼼히 열리며 하은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바쁘니?” “아니요.” 하은은 웃으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혀를 내둘렀다. “점점 네 방도 상미 방처럼 변하네.” “어디가요?” “점점 이상한 장치들이 많아지는 거.” 단유는 동의할 수 없다는 뜻으로 물었지만 하은은 둘 모두 이해하기 힘들다는 뜻으로 대답했다. 상미의 방은 인터넷 방송을 위해 구비한 장비들로 가득했고, 단유의 방은 실험을 위해 구비한 장비들로 채워지는 중이었다. 그래봐야 넓은 방에 티도 안 날 정도, 라고 단유는 생각했지만 하은의 눈에는 아니었나보다. 하긴 하은의 방에는 소소하게 읽어보는 몇 권의 책을 제외하면 심플하기 그지 없었으니까. “오랜만에 나가서 밥 먹자.” “외식이요?” “그래.” 단유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렇지 않아도 기대에 못 미치는 미흡한 장비들로 인해 아쉬운 마음이 커서 기분이 다운되었던 차였다. 가족과의 외식으로 기분 전환이라도 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근데 네 방은 공기가 다른 것 같다? 공기 청정기라도 샀니? 아니면, 이것들이 공기 청정기 같은 거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딱 봐도 공기 청정기와 멀어 보이는 계측기들이 아크릴 박스 주위를 두르고 있을 뿐이니 하은의 농담이리라. 다만 공기의 경우, 수도 없이 그것들을 대상으로 ‘해체’를 계속했더니, 방 안의 미세먼지들 마저 사라졌을 뿐이다. ‘음, 청소용에 공기청정용으로 써야 하려나?’ 몇 주간의 실험을 반복하며 또 다른 응용법을 발견했다. **** “엄마, 나 나갔다 올게.” “언제 올 건데?” “몰라요.” “저녁 먹고 올 거니?” “다녀오겠습니다.” “너무 늦지 마.” 유영은 어머니의 질문에 대충 답을 하고 집을 나섰다. 거의 한 달만에 학교에 가는 유영은 단지 학교에 간다는 이유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끝이 저린 느낌이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학교에 간다는 사실보다 학교에서 보게 될 단유 때문이었지만. ‘뭐라고 말해야 하지?’ 그날, 뜬금없이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후로 학교를 나간 적이 없었고, 단유에게 따로 전화를 건 적도 없었다. 학교야 방학이니 나가지 않아도 상관은 없었지만, 단유에게 연락을 하는 문제는 매일 밤 그녀를 잠 못 들게 했던 원인이었다. 물론 그 전에도 자주 연락을 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핸드폰의 검은 액정을 바라보며 지난 사건(?)에 대해 변명을 해야 할까 고민하길 수십 번, 당신의 마음은 어떤지, 물어보고 싶다는 충동을 누르길 수십 번. 그러나 매번 단유의 전화번호를 액정에 띄어놓고 바라만 보다가 집어던지길 수십 번이었다. 하지만 며칠 전, 우연히 페이스북에 들어갔다가 서울대 대나무숲에서 단유의 그 사건을 알게 되었다. 어떤 이가 올린 4분 여의 동영상에서 그리운 사람의 얼굴을 보고 놀란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놀람과 동시에 그에 대한 걱정이 들었다. 물론 교수가 잘못한 일이라고 다들 이야기는 하지만, 그래도 교수에게 저런 식으로 이야기한 학생을 학교 측에서 그대로 둘 리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세상 일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정의로운 내부고발자를 칭찬하기보단 세간의 관심이 잦아들었을 때 숙청하여 내부 결속을 다지는 모습이 이제껏 보아온 세상이었다. 사실은 핑계다. ‘걱정돼서 오빠 보러 왔어요’ 라고 말하면 좀 괜찮아 보이지 않을까. 그 핑계로 단유 얼굴을 한 번 보고, 그 핑계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지난번 일도 부담 없이, 자연스럽게…. ‘말할 리가 없잖아!’ 버스 정류장의 벤치에 앉아서 버스를 기다리던 유영은 고개를 풀썩 떨구곤 머리를 흔들었다. ‘안 돼, 안 돼. 그냥 이렇게 가서 만나면 이상한 사람으로 볼 거야.’ 유영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냥 가지 말까?’ 다시 발을 동동 구르며 머리를 흔들었다. ‘아냐, 이번 기회가 아니면 영원히 오빠를 보지 못할지도 몰라.’ 실실 웃음이 났다. ‘어쩌면 오빠도 나 보고 싶어 하지 않을까? 어쩌면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다고 인사할지도 모르잖아?’ 그러다 다시 머리를 격렬하게 흔들며 고개를 숙이는 유영. ‘그럴 리가 없잖아. 서로 어색해서 쳐다도 못 볼 거야. 지난번에 자기한테 했던 말이 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 거야?’ 갑자기 고개를 쳐든 유영. ‘그래, 이참에 확실하게 말하는 거야! 오빠를 좋아한다고 말해. 할 수 있어.’ 문득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니 유영의 주변으로 빈 공간이 생겨 있었다. 그리고 멀찍이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유영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피다 벽에 붙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유영. 머리는 산발에 얼굴은 홍시보다 붉어진 채였다.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버스 정류장을 빠른 걸음으로 벗어난 유영은 학교에 가지 말아야하나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다. 그래도 용기 내어 나온 걸음인데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생각과, 이 핑계가 아니면 개학하고 나서도 얼굴을 보기 힘들다는 생각, 그리고 개학 때까지 기다리기도 힘들다는 생각이 합쳐져 마침내 유영은 학교로 향할 수 있었다. 도서관 앞에서도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하고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단유는 도서관에 없었다. 자료실에도, 열람실에도 단유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자연대 건물과 학생회관 주변도 살피고, 단유의 차가 주차된 곳은 없는지 주차장을 모두 돌아다닌 후에야 단유가 학교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유영은 자신의 계획에 가장 큰 맹점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왜 그 오빠가 학교에 매일 나올 거라고 생각 했던 거지?’ 방학기간인데 말이다. 풀이 죽은 유영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학교를 빠져나왔다. **** 그 시간 단유는 모처럼의 외식을 위해 하은, 상미, 명수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명수도 시합이 없는 날이라 시간을 빼서 참석했기에 오랜만에 다 같이 함께하는 자리가 되었다. “오늘은 누가 쏘는 건가?” “오늘은 모처럼이니까 내가 쏠게.” 지난 시합에서 또 한 번 라운드MVP를 차지한 명수의 호기에 상미가 반대했다. “내가 쏠게. 매번 얻어먹기만 하는 것도 미안하고. 게다가 이번에 나 정산도 받았거든? 거하게 한 번 쏘자.” 하은이 두 사람을 말렸다. “얘들아. 어른이 있는데 니들이 나서야겠니? 그리고 니들은 한 푼이라도 더 아껴야 할 때야. 지금 돈 좀 있다고 막 쓸 생각하지 말고, 아껴 써.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선생님이 쏜다.” 하은의 이야기에도 서로 내겠다는 상미와 명수 때문에 시끄러워질 무렵, 단유가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셋의 시선이 단유에게 향하자, 단유가 입을 열었다. “나보다 돈 많은 사람?” 셋은 입을 꾹 다물었다. 소소한(?) 겨룸이 끝나고 곧 식사를 시작했다. 명수는 거의 집 밖에서 생활하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한집에 사는 하은이나 상미, 단유도 서로의 일이 바쁘다 보니 마주 앉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때문에 이런 외식 자리가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정을 돈독히 할 수 있는 기회였다. “대표팀?” “응. 기술위원회에서 내 시합 보러 왔다고 하더라고.” “이번에는 선발로 뛸 수 있는 거야?” “그렇게 되면 좋겠는데, 잘 모르겠어. 워낙 나보다 잘하는 선배들이 많아서.” “야, 너보다 잘하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그러냐? 내가 아무리 바쁜 와중에도 K리그는 꾸준히 모니터링 하는데, 너만한 선수 없어.” 명수가 상미를 흘겨보며 물었다. “진짜 모니터링해?” 상미는 시선을 살짝 들어올리며 대답했다. “뭐, 정확히는 게임 내 선수 데이터로 보는 거지만, 그것도 실시간으로 반영되는 거란 말이야.” “나도 있어?” “야, 너 인기 되게 좋아? 네 카드 뽑으려고 현질 한다는 애들도 있어.” “K리그가 인기가 그렇게 많을 리가 없는데?” “뭐, 조금 오버하긴 했다. 그래도 K리그 선수들로 플레이하는 매니아도 없잖아 있어. 이를테면 나 같은 사람.” 단유는 마침 화제가 돌아간 틈에 물었다. “요즘 방송은 어때?” “괜찮은 편이야. 조금 전에 말했잖아? 정산 받았다고. 조금씩 수익도 오르는 편인데, 이대로면 대기업 연봉 수준까지도 얼마 남지 않았다.” 상미의 자신감 넘치는 발언에 명수가 입안에 든 밥알을 흘리며 감탄했다. “오오, 대박인데?” 그런 명수를 흘겨 바라보며 입가를 닦아준 상미가 하은에게로 고갤 돌렸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선생님도 인터넷 쪽으로 가시는 게 어때요?” “나? 내가 무슨.” “왜요? 선생님 정도면 인기 되게 많을 거예요.” “난 게임 못 해.” “꼭 게임 아니더라도 돼요. 교육 방송 컨셉으로 해도 되고, 아니면 그냥 수다방 컨셉으로 해도 되고.” “수다방?” “컨셉이야 자유니까요. 사실 진행자가 말만 잘하고 재밌으면, 어떤 컨텐츠라도 먹힐 가능성이 있고, 먹히기만 하면 수익도 따라오니까요. 지금 막 생각난 건데, 교육 방송 컨셉으로 방송하면 학습지 광고도 붙지 않을까요? 그럼 광고비도 받을 수 있으니까 수익 시스템이 될 거 같은데요?” 뭔가 재미있을 것 같다는 얼굴로 조잘대는 상미를 명수가 제지했다. “야, 선생님한테 바람 넣지 마. 그리고 솔직히 누가 교육방송 컨셉을 보냐? 공부를 할 거면, 차라리 EBS나 인강을 듣지.” “재미있는 강의를 하는 거지. 역사 강의 같은 거 있잖아? 딱히 시험 공부용이 아니라 교양 강의처럼. 대신 재미있게 풀어나가야겠지만 말이야. 즉흥적인 재미를 찾는 사람도 있지만, 다큐멘터리 같은 방송만 찾아 보는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이러다 단유까지 인터넷 방송 하자고 꼬시겠네.” “뭐, 어때서? 솔직히 단유는 하기만 하면, 팬들도 금방 생길걸? 이미 우리 방에도 단유 팬들이 있는데.” “정말?” “팬까지는 아니라도 단유랑 같이 방송하자고 조르는 사람도 있어.” ======================================= [612] 실험(2) 이후로 식사가 마칠 때까지 네 사람은 인터넷 방송에 관해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상미도 꼭 같이 하자는 것보단 그냥 식사 중에 나눌 수 있는 소소한 화제 정도로만 여겼기에 다들 부담 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식사가 끝난 후, 하은과 상미가 화장실에 간 사이 명수가 말을 꺼냈다. “단유야.” “응?” “네 덕이다.” “갑자기 뭔 소리야?” “상미가 저렇게 편하게 방송할 수 있게 된 거.” “고작해야 방송 장비 몇 개 사준 게 다인데 뭘.” “그거 말고. 상미, 그 이상한 놈 때문에 방송 접을 생각까지 했었잖아? 그런데 네 덕분에 다시 방송하는 거 좋아하게 된 거 같아서, 그렇게 되도록 도와줘서 고맙다고.” “그걸 왜 네가 고맙다고 그래?” “그냥. 고맙네.” “고마우면, 앞으로도 상미랑 잘 지내. 잘 지내는 모습 보여주면, 나도 좋으니까.” “그래. 그럴 거야. 그런데 이제 그 새끼는 더 안 나타나는 거지?” “그럴걸?” 사람은 지킬 게 없다고 여기면 무모해지기 마련이지만, 반대로 지킬 게 있다면 조심스러워진다. 단유는 그 점을 공략했을 뿐이다. “만약에 그 새끼 또 오면 그땐 바로 연락 줘. 내가 시합이고 뭐고 당장 달려가서 죽여 버릴 거니까. 지난번에도 알았으면 그렇게 쉽게 안 갔을 건데.” 명수 성격에 그 사실을 알았다면, 분명 앞뒤 안 가리고 그 사람을 죽도록 팼을 거다. 그래서 자리를 피하도록 했던 것이고. “너한테 왜 연락하냐? 경찰에 연락해야지.” “한 대 쥐어패고 보내야지.” 그때 상미가 나타나며 명수의 머리를 툭 때렸다. “아야!” “바보냐? 같이 손잡고 경찰서 가려고?” 머리를 문지르며 상미의 눈치를 보는 명수는 소심하게 항변했다. “…아무도 모르게 때리면 되지.” “…얘 바보 아냐?” 상미의 말에 하은이 혀를 차며 말을 받았다. “이러는 거 하루 이틀 보냐? 밥 다 먹었으면 나가자.” 하은의 눈총을 받으며 엉거주춤 일어나는 명수를 보며 단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 무더운 여름이 다 지나고 다시 개강날이 되었다. 한동안 한산했던 캠퍼스가 다시금 인파로 가득 찼다. 오랜만에 만나는 얼굴들을 보며 인사하는 사람들로 인해 강의실도 시끌벅적했다. 그 가운데 단유는 조용히 수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형!”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얼굴이 까맣게 변한 새벽이 환하게 웃으며 단유 옆자리로 다가와 앉았다. “잘 지내셨어요?” 단유는 새벽의 얼굴을 살피며 대답했다. “너보단 못 지낸 거 같은데? 아파서 집에 내려갔다는 녀석이 얼굴은 왜 그렇게 탔어?” “아프긴요. 그냥 발목만 조금 다친 건데.” 집에만 있기에는 답답해서 돌아다니다 보니 얼굴이 탔다는 새벽의 대답에 단유는 웃음을 지었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네. 다리는 완전히 나았어?” “네. 이제 괜찮아요.” “그래도 조심해.” “당분간은 무리하지 않으려고요. 그래도 자전거는 탈 수 있어요.” “그 사고를 당했는데 자전거를 타고 싶어?” “에이, 사고 무서워서 자전거를 못 탈까 봐요? 그리고 오히려 자전거를 타는 게 걷는 것보단 다리에 덜 무리가 가네요.” 고개를 갸웃해 보였지만, 당사자가 괜찮다니 단유로서도 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형은 방학 동안 어디 안 가셨어요? 얼굴 하나도 안 탔네요?” 집에 틀어박혀서 실험만 했다. 조금 더 돈을 들여서 제대로 실험실을 만들어볼까도 생각했지만, 당분간 그 계획은 보류하기로 했다. 하는 일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개강도 얼마 남지 않은 마당인데 일을 크게 벌려 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그리고 만약 일을 벌인다고 해도 단유가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만약 실험을 보조해 줄 사람이 있다면 도움을 받아서 할 수 있겠지만, 단유의 실험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결국 홀로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는데, 2학기는 그 준비를 위한 시간이었다. “수강 신청은 다 하셨어요?” “다 했으니 여기 있겠지?” “전 이번에 수강 신청하다가 열받아 죽는 줄 알았잖아요. 서버가 몇 번이나 다운이 되는지….” 수강 신청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이는 비단 새벽뿐만이 아니었다. 강의실에 모여든 학생들 중 반 이상은 수강 신청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형은 바꿀 과목 없어요?” 개강 후 일주일 동안은 수강 신청 변경 기간이고, 그 기간 동안 수많은 학생들이 민족 대이동에 버금가는 과목 변경을 시도한다. 사실 수강 신청 기간 내에 자신이 원하는 과목을 모두 신청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고, 원하는 과목이라 할지라도 수업을 진행하는 교수님, 강사님이 어떤 분이냐에 따라 과목 변경을 신청하기도 하기에 개강 후 일주일은 혼돈,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별로.” “와, 부럽다. 전 바꿀 거 천진데.” “6학점까지만 변경 가능한 거 알지?” “일단 3과목은 바꿀 수 있으니까, 알아보고 바꿔야죠. 그런데 이왕이면 형이랑 같은 과목 들으면 좋을 거 같은데. 형, 이번에 뭐뭐 들으세요?” 수강 내역을 알려달라는 새벽의 부탁에 단유는 흔쾌히 보여주었다. 새벽은 단유의 수강 내역을 확인하고 입을 쩍 벌렸다. “이거 뭐예요?” “뭐긴, 수강과목들이지.” “이, 이게 다 몇 학점이에요? 18학점 넘는 거 같은데? 이렇게 들을 수 있어요?” “들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 학점 인정은 18학점까지만 되지만, 다른 과목은 과락제로 들을 수 있다더라.” “프로그래밍방법론? 이건 전공과목 아니에요?” “컴공 전공과목 맞아.” “이걸 들으려고요?” “응.” “와, 대박.” “대박은 무슨, 고작해야 일주일에 3시간 더 듣는 것 뿐인데.” “지난 학기에는 우리 과 전공도 도강해서 들으시더니, 이번에는 타전공 과목을 듣는다고요? 아니면, 혹시 복수 전공?” “아직 복수까지는 생각 안 해봤지만, 모르지. 나중 일은.” “에휴, 전 그냥 교양 필수만 형이랑 같은 거로 해야겠네요.” 새벽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노트에 단유가 신청한 과목의 과목 번호를 적어 나갔다. 단유는 새벽을 슬쩍 쳐다보곤 다시 앞에 놓인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란스러웠던 강의실은 강사의 등장으로 조용해졌다.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에 이어 수업이 진행되었고, 학생들 사이의 들뜬 분위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차분하게 변해갔다. 몇몇 학생은 머릿속으로 수강 변경을 계획했으며, 몇몇 학생은 교단에 선 강사의 성향을 파악하여 어떻게 이 수업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낼 것인지를 고민했다. 새벽도 차분한 자세로 수업에 집중하며 이따금 필기가 필요하면 속기사의 그것처럼 빠르게 손가락을 놀려 교수의 말을 받아 적었다. 수업이 끝난 후, 모두가 가방을 챙겨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딱히 서두를 일도 없어 단유는 천천히 가방을 챙긴 후, 강의실을 빠져나가려는 사람들로 인해 생긴 혼잡함이 잦아든 뒤 나가려고 기다렸다. 이윽고 사람들 대부분이 강의실을 나갔을 때, 단유가 일어서자 새벽이 단유를 불렀다. “형.” 단유는 새벽을 돌아보았다. “근데, 형. …별일 없으시죠?” “무슨 일?” “그게…사실은 동영상 봤거든요.” “동영상? 무슨 동영상?” “형 나온 영상이요. 대나무숲에 올라온 거. 혹시 모르세요?” “모르겠는데?” 새벽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자신의 핸드폰으로 단유에게 동영상을 보였다. 그 영상을 본 뒤에야 단유는 새벽이 아까부터 괜히 마음에도 없는 말을 던지며 자신의 눈치를 보던 이유를 알아챌 수 있었다. “이것 때문에 그렇게 오버했던 거야?” “네? 아…. 아니, 꼭 그렇진은 않고요. 오버는 오번데, 솔직히 형 수강신청한 거 보면 오버할 수밖에 없잖아요? 1학년 신입생들 중에 형처럼 수강 신청한 사람은 우리 대학에서 열 명도 안 될 걸요?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요, 형 정말 괜찮아요?” “안 될 게 뭐 있어?” “여기 보니까, 교수협의회 측에서 형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데요.” “그건 누군가가 쓴 소설이지. 시쳇말로 뇌내망상이라든가? 아무튼 그럴 일 없어.” “그래도 이렇게 공개적으로 교수를 망신시켰으니, 교수님이 가만있지 않을 거 같은데요. 물론 이 교수가 생각이 있으면, 형한테 그렇게 하지 않겠지만, 여기 댓글에는 교수가 가만있지 않을 거라잖아요.” “상관없어. 그리고 잘못된 걸 보고도 모른 척하기 싫어서 그랬던 거니까, 후회는 안 해.” “…그렇긴 하죠. 안 그래도 여기 그런 말도 있긴 해요. 속 시원하다고. 어떤 사람은 좀 더 강하게 했어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어요.” “강하게?” “말이 그렇다는 거죠. 솔직히 자기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더 심하게 했을 거라는데, 그거야 키보드 워리어들의 전형적인 어그로죠. 실제로 그 자리에 있었으면 한 마디도 못했을 사람들인데. 이 영상에서도 주변에 선 사람들 중에 나서는 사람은 한 명도 없잖아요.” “그건 그 사람들이 상황을 잘 모르는 상태였으니까. 알았다면 그 사람들 말대로 했을 지도 모르지.” “에이, 그럴 리가요. 저만 해도 형처럼은 못 했을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교수님인데, 교수님 앞에서 누가 그렇게 말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형이 걱정되는 거고요, 라는 새벽의 말에 단유는 쓴웃음을 지었다. “됐어, 그만해. 그 이야긴.” “아까 강의실에서도 사람들이 형 계속 훔쳐보는 거 봤어요? 다 이 영상 때문이에요.” 단유는 다시 한번 새벽이 건넨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아래에 달린 댓글들도 훑어보았다. 문득 예전 중학교 때의 일이 떠올랐다. 보이지 않는 손, 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눈, 이 늘 자신을 따라다니는 것만 같다. 그런 단유의 생각을 모르는 새벽은 단유의 곁에서 계속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지금 청원 운동을 하자는 사람도 있어요. 강 교수란 사람이 직위를 남용하여 부정 청탁을 했으니 교수직 해임을 해야 한다고. 어떤 사람은 그 교수의 연구실 앞에서 사퇴 운동을 하자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 그게 다 말뿐인 거죠. 형처럼 나설 사람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정말 성격 이상한 사람들 많은 거 있죠? 상황이 잘 설명되어 있는데도 형한테 이상한 이야기 쓴 사람도 있고.” 차마 그 이상한 댓글들을 입에 올릴 수는 없었다. ‘지가 뭐라고 나대냐?’부터 시작해서 ‘자기가 무슨 정의의 용사냐’, ‘교수한테 비꼬는 식으로 말하는 건 용서가 되냐’ 같은,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비난과 비판들도 있었다. “제가 이거 보고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단유는 새벽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그만해. 그게 뭔 대수라고.” “아니, 형은 열 안 받아요? 얘들이 바로 프로불편러들이에요. 뭐만 하면 불편, 불편 이러면서 이상한 글이나 써대고 말이죠. 형은 괜찮아요?” 단유는 볼을 긁적였다. “딱히. 솔직하게 말하자면, 난 별로 상관없어.” “왜요?” “뭔가 오해를 한 거 같아서 말하자면, 난 그렇게 정의로운 사람이 아냐. 그 교수와의 일도, 내가 불의를 참지 못해 나선 것만도 아니고. 프로불편러라고? 사람은 다들 생각의 차이가 있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 표현을 거칠게 하는 사람이 있고, 표현을 부드럽게 하는 사람이 있어. 나와 생각이 다르고, 표현을 거칠게 한다고 해도 그게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비판할 부분은 아니라고 봐. 아니, 그전에 그 사람에게 나랑 같지 않다고 설득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가지지 않으니까 문제가 없지.” “전 아니라고 봐요. 그런 사람들이 사회에 많으면 많을수록 이 사회에 문제가 많이 생기지 않을까요? 비논리적인 말로 선동을 하거나, 반대를 위한 반대로 사회적 협의를 무시하는 행위가 지금도 여의도에서 벌어지고 있다고요.” “여의도?” 새벽도 이런 쪽으로 생각을 많이 하는 친구였구나, 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어쩌면 새벽은 교수나 대학에서 행할 조치보다 이런 댓글을 더 걱정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정치 담론으로 확장해서 끌고 간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지겠지만, 글쎄. 이런 영상에 댓글 다는 정도로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나?” “형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응. 굳이 내가 나서서 이 사람들과 얼굴 마주하고 지낼 것도 아니고, 게다가 네가 이 페이지를 보여주기 전에는 알지도 못하던 이야긴데 새삼스럽게 열 받을 이유가 있나? 그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고 다니든, 내 생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거든.” “그럼 괜히 보여드린 거네요.” “그리고 내가 예전에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데, 이 정도는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면 돼.” “이보다 심한 경우도 있었어요?” “직접 한 건 아니지만, 경찰에 고소한 적도 있었으니까.” “아, 맞다. 형 연예인이었지.” “연예인은 무슨. 그런 거 아냐. 그만 나가자. 다음 수업 시작하겠다.” 단유는 새벽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고 강의실을 나갔다. ======================================= [613] 실험(3) 다음 수업은 이번 학기에 처음으로 듣게 된 전공과목이었는데, 본 전공과목이 아니라 컴공과의 전공 과목이었다. “컴퓨터 기초 교양으로 듣는 게 낫지 않아요?” 새벽은 단유의 선택을 이해하기 힘들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관해서 좀 공부해보고 싶어서.” 물론 수업 하나 듣는다고 프로그래밍에 대해서 모든 걸 알게 될 리는 없다. 대학교의 수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1학기였다면 그런 착각을 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이제는 그게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게 되었다. 그저 혼자 도전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으니 수업을 들으면서 도움을 받는다는 정도가 적당하다. 고등학교 때도 그랬지만, 대학교에서도 결국 개인이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얻을 수 있는 성과가 달라진다. “혹시 프로그래머로 나가시려고요?” “프로그래머는 무슨. 그냥 컴퓨터를 좀 더 잘 사용하고 싶어서.”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프로그래밍을 좀 배워서 써먹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개인적으로 실험실을 꾸미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점검하다 보니, 필요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제일 중요한 건 역시 실험에 필요한 기기를 구입할 돈이었지만, 돈이야 지금도 충분히 있고 소소하게라도(?) 벌고 있으니 문제가 없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역시 사람이었으니, 단유는 이를 해결할 방법으로 시스템을 떠올렸다. 사람의 개입을 최소한으로 하고, 자동으로 실험을 관측하고 기록하며 분석하는 수준의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유사한 프로그램은 이미 대형 연구소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사실 기기 구입시에 프로그램까지 구매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도 단유가 준비하는 실험에 맞지 않는 면이 있었고, 향후에 단유가 다른 실험을 계획할 때 달리 필요한 프로그램이 생길 수도 있기에, 이번 기회에 공부해 두겠단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뭐든 배워 놓으면 언젠가는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전문가 수준으로 잘할 자신은 없지만 말이다. **** <프로그래밍방법론>은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위한 기술과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학습하는 과목이다. “기본적으로 Java 언어를 공부한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이기 때문에, 해당 언어를 배우지 못한 학생이라면 수강 변경을 하시기 바랍니다.” 강사의 말에 한 학생은 가방을 싸서 강의실을 빠져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30명 남짓한 학생들 대부분은 자리에 앉아서 강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여기 타 전공 학생도 한 명 있네요. 김단유 학생?” 강사의 부름에 단유가 손을 들고 대답했다. “네.” 다른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단유에게로 몰렸다. “신입생인데, 괜찮나요? 혹시 일반 컴퓨터 교양 수업을 생각하고 왔다면 굉장히 후회할 텐데?” “괜찮습니다.” “학점에 문제가 생기면 학생에게만 손해에요. 그 점 기억하고 수업 듣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강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는 단유를 한 번 더 쳐다본 뒤,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했다. 하지만 학생들의 시선은 단유에게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쟤야?” “맞네. 걔네.” “대박. 실물은 괜찮네.” “실물은 무슨. 쟤 혹시 전과하려는 거 아냐?” “그럴지도 모르지. 자기 과에서 완전히 찍혔을 거 아냐?” 수군대는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리니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던 강사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자, 조용. 오늘은 간단하게 오리엔테이션만 하고 끝낼 테니까 집중 좀 하시고. 이 수업은 여러분들이 준비할 게 많아요. 제대로 안 들으면 고생만 할 뿐 아니라, 재수강도 걱정해야 할 거예요.” 안경을 추켜올리며 학생들을 돌아보는 그의 눈에 담담히 자신을 바라보는 단유를 볼 수 있었다. 사실 강사 본인도 단유가 신경이 쓰였다. 강의실에 들어올 땐 몰랐지만, 출석부의 이름과 얼굴을 확인한 뒤 그가 최근에 강사와 교수들 사이에서 거론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단유의 행동이 그리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자신도 박사 과정 당시 별 도움도 안 주는 지도교수 덕에 고생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휘가 교수 에게 막말을 퍼붓던 영상을 볼 때는 일정 부분 공감이 가기도 했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단유의 교수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 지적하는 이도 있었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건방졌다고 평가하는 이도 있었다. 그래서 교수 개인의 건과 별개로, 단유에 대해 학교 측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조금 전까지 그러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 사이에 껴 있다가 온 강사는, 그때까지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막상 단유가 자신의 수업을 듣는다고 하니 괜히 부담스럽기도 하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소위 말하는 요즘 젊은 것들, 중의 하나이니 교수의 권위에 대해 존경심을 보이지도 않고, 말 한마디 잘못 하면 인터넷에 온갖 악의적인 글들을 올려서 곤란케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내 수업이야.’ 게다가 전공자도 아니니 수업을 제대로 따라오기나 할까, 괜히 수업 분위기만 흐리게 만드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단유는 강사의 걱정과 학생들의 수군거림을 전혀 모르는 얼굴로 앉아서 수업에 집중할 뿐이었다. **** 고작 하루였지만, 단유는 새벽이 보였던 걱정의 정체를 실감할 수 있었다. 들어가는 수업마다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시선이 몰려서 절로 경계심이 생길 정도였다. 그나마 오랜 세월 단련된 단유 특유의 무표정 때문에 사람들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가 지속 되면 수업을 편하게 듣기 힘들 것 같았다. 점심때는 유진에게서 연락이 왔다. ―너 어디야? 뭔가 화가 난 듯한 날선 반응의 유진에게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려 준 단유는 몇 분 후, 눈썹을 치켜들고 달려드는 유진을 만날 수 있었다. “야, 넌 도대체 무슨 사고를 이렇게 치니?” “사고?” “사고지 그럼. 학교 전체가 전부 니 이야기만 하는데.” “내가 잘못한 거야?” “잘못, 은 아니지. 아니지만 사람이 좀 눈치를 봐가면서 끼어들어야지. 게다가 교수님이라며?” “교수가 잘못을 해도 침묵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 “그게 아니지. 거기 보니까 다른 사람도 많더만, 왜 굳이 네가 나서냐는 이야기야, 이 바보야.” “내가 너한테 바보 소릴 들을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그렇긴 하지. 그래도 넌, 이번에 바보짓 한 거야.” “그래, 그건 그렇다 치자. 여행은 잘 다녀 왔어?” “지금 내 여행이 문제야?” “얼굴 많이 탔는데?” “정말? 매일 선크림 발랐는데?” “이마, 여기, 좀 탄 거 같은데?” “괜찮아. 어차피 앞머리 내리고 다닐 거니까. …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밥 먹자.” “…그래, 일단 밥 먹자.” 학생 식당에 들어가서도 구석에 자릴 잡고는 단유에게 잔소리를 퍼붓는 유진이었다. “그런데 왜 니가 이렇게 열 내는지 모르겠다?” “난 니가 왜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지 모르겠거든?” “그래서 결론이 뭔데?” “나서지 말라고. 네가 얼마나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지는 내가 예전에도 겪어 봤으니까 알아. 알지만, 그때는 어릴 때라서 그렇다고 쳐도, 이제는 너도 세상 좀 알 나이잖아? 이런 식으로 대처하는 거 너한테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기 바란다.” “다들 비슷비슷한 생각이구나.” “누가 또 그래?” “새벽이라고, 그때 한 번 봤을 텐데? 나랑 동기인 신입생.” “아, 기억난다. 아무튼, 우리보다 어린 걔도 알 정도라면, 너도 이제 제대로 행동해. 맨날 공부만 하니까 세상 무서운 줄 모르나 본데,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알았니?” “그래, 알았어.” 묵묵히 식사를 이어나가는 단유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네 차례야.” “응? 뭐가?”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 “없는데?” “왜? 아까 물어봤잖아? 여행 잘 다녀왔냐고.” “잘 다녀왔다며?” “야, 그때는 니 이야기 하는 중이었으니까 대충 대답한 거지. 방학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지 않아?” “여행 다녀왔잖아?” “아, 열 받네.” 씩씩거리며 숟가락질 하던 유진은 말없이 밥을 먹던 단유를 흘깃 본 뒤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다, 알았어. 그냥 이야기할게. 방학하고 나서 동남아 촬영 계획이 잡혔었거든. 그래서 이왕 간 김에 가족들이랑 같이 여행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서, 다 같이 간 거야. 가서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지만, 혼자 조잘대는 유진. 단유는 유진의 빛나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면서 그녀의 수다를 받아주었다. 2시에 두 사람 모두에게 수업이 잡혀 있었기에 수다는 자연스럽게 마무리되었다.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단유는 지난 방학 동안 유진의 행적을 고스란히 알게 되었고, 유진은 후련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또 이야기해. 알았지?” “아직 남았어?” “콱! 나중에 전화할게. 바이!” 기운이 넘치는 친구, 라는 생각을 하며 유진을 배웅한 단유는 수업을 들으러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뒤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지 싶어 고개를 돌렸는데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몇몇 학생들이 단유에게 시선을 던지며 수군거리는 모습도 보였지만, 오늘 아침부터 계속 이어지던 일인지라 특별할 것도 없었다. 여름이 지났지만 여전히 푸른 잔디밭과 잎이 무성한 가로수들, 대부분 반팔이지만 더러 소매가 긴 맨투맨 티셔츠를 입은 이들도 있었다. 하얀 블라우스의 청바지를 입은 긴 머리 여성도 있었고, NBA 저지를 입은 캐주얼 복장의 남학생들도 있었다. ‘뭐지?’ 단유는 볼을 긁적이다 다시 몸을 돌렸다. ‘후우.’ 갑자기 단유가 돌아서는 바람에 놀라서 저도 모르게 몸을 돌린 유영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책으로 가리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바람에 머리가 흩날리며 헝클어졌지만 책에서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으며 단유의 시야에서 벗어난 뒤에도 한참을 더 걷다가 걸음을 멈췄다. 조심스럽게 돌아보니 단유는 보이지 않았고, 다시 돌아가 원래 단유가 있던 방향을 바라보니 이미 자리를 떠난 지 오래였다. ‘왜 숨었지?’ 다시 생각해보니, 자신이 피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단유가 돌아봤을 때, 자연스럽게 인사하면서 만났더라면 좋았을 테다. 아쉬움에 한숨을 내쉴 때, 뒤에서 ‘저기요’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라 돌아보니 새벽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네. 수업 가시는 거예요?” “네? 아, 네.” “고급물리2요?” “네.” “아, 그럼 저랑 같네요. 같이 가실래요?” “네.” 멈춰섰던 두 사람은 강의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잠시 걷던 중 새벽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근데, 우리 지난번에 서로 말 놓기로 했었는데….” “네? 아, 네.” 얼굴이 붉어진 채인 유영을 바라보며 새벽이 다시 말을 건넸다. “그때 병원까지 와줘서 고마워…요.” “고맙긴…요. 별거 아니었어…요.” “근데, 조금 전에 누구 기다린 거…요?” “아니…요. 그냥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서…요.” 말을 놓자고 했지만, 새벽도 막상 말을 놓지 못해 계속 말끝을 흐리다 보니 대화가 불편했다. 결국 두 사람은 이후로 말없이 강의실로 향했는데,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나란히 걷고 있으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말 걸지 말걸.’ 그런 후회가 생길 정도였다. 다행인 건 강의실에 들어선 후, 그 어색함을 떨칠 핑계가 생겼다는 점이다. “형.” 미리 와서 자리 잡고 있던 단유를 부른 새벽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왔어?” 반면, 어쩔 줄 몰라 하던 유영은 강의실 입구에서 눈치를 보며 서성거리다가 단유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 안녕하세요.” “응. 안녕.” 단유의 건조한 인사에도 볼이 붉어지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한 유영은 단유를 지나 단유 뒤의 빈자리로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뒤에서 책을 챙기는 척하며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형, 수업은 어땠어요?” “그냥 그랬어. 오늘은 오리엔테이션만 해서 잘 모르기도 하고.” “들을만 한 거면 같이 들어볼까 했는데.” “Java랑 컴퓨터 기초를 알아야 한다더라.” “Java요? 그거 모르는데. 형은 알아요?” “공부해야지.” “하긴, 형은 똑똑하니까 금방 배우겠죠? 내 머리로는 안 될 거야.” “안 되는 게 어딨어, 하면 다 되지.” “방금 그 말은 전혀 진심이 안 담겨 있는데요?” “그래? 사실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으니까, 개중에는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사람도 있긴 있을 거라는 생각을 잠시 했던 건데, 티가 났나 보네.” “제가 안 되는 사람이란 건가요?” “농담이야.” “…형 농담은 적응이 안 되네요. 너무 진심같이 말하니까.” “미안.” ‘농담하고 사과하는 건 무슨 경우냐’며 새벽은 고개를 저으며 책을 꺼내 펼쳤다. 그때, 단유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유영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흠.” 단유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유영은 슬쩍 눈동자만 들어 단유를 확인하고는 소리 나지 않게 숨을 천천히 내쉬는 찰나, 핸드폰에 문자 알림이 왔다. ―수업 끝나고 무슨 일인지 이야기해줘요. 단유였다. ======================================= [614] 실험(4) 그 문자를 받은 뒤로 유영은 머리가 하얘지면서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너무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던 탓에 강의 중에도 담당 교수가 몇 번 지적할 정도였다. 어떻게 수업이 끝나는 줄도 모르고 멍하니 앉아있던 유영은 주변의 분주한 움직임에 수업이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연히 앞에 앉아 있던 단유에게 시선이 향했다. 그리고 마침 일어서서 돌아보던 단유와 눈이 마주쳤다. “새벽아, 너 먼저 가라.” “왜요? 오늘 수업 또 있어요?” “아니, 수업은 없는데, 잠깐 볼 일이 있어서.” 새벽은 입을 살짝 벌리고 앉아 있던 유영을 흘깃 본 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네, 저 먼저 갈게요.” 그리고 눈을 찡긋거렸다. 단유가 미간을 좁히자 얼른 가방을 챙겨 강의실을 나갔다. 다음 수업이 있는지 학생들이 들어와 빈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나가서 잠깐 이야기 좀 할까요?” “…네.” 유영은 나름 조신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목이 잠겼는지 이상한 목소리가 났다. 유영은 얼굴을 붉혔지만 단유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강의실을 나갔다. 아무래도 개강 첫날이다보니 캠퍼스에 학생들이 많아서 조용히 대화를 나눌만한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수업 더 있어요?” “크흠. 아니요.” 짧게 헛기침을 하고 대답한 유영. “그럼 잠깐 학교 밖에 나가서 이야기할까요?” “…네.” “가시죠.”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단유. 유영은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버스를 타고 학교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가까운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에도 사람은 많았지만, 대화를 나누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적당한 소음이 두 사람의 대화를 가려줄 것 같았다. 간단하게 음료수를 주문한 뒤, 자리에 앉은 두 사람. 유영은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나눌지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까 나 따라온 거 맞죠?” 단유가 밑도 끝도 없이 꺼낸 한 마디에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유영을 보며 단유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아까 수업 들어갈 때, 계속 뒤에서 누가 쳐다보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그런 게 조금 예민하거든요.” “…….” “강의실에서도 비슷한 느낌이 들길래 보니까 유영씨더라고요.” “…….” “그러고 보니까 유영 씨랑 할 이야기도 있었다는 걸 뒤늦게 생각해 냈는데, 사람들 많은 데서 이야기하는 것보단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해서 여기 오자고 한 거예요.” “…….” 말을 계속 이어도 대답이 없는 유영을 보며, 단유는 볼을 긁적였다. 괜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여전히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는 유영을 향해 다시 말을 꺼냈다. “방학, 잘 보냈어요?” **** “오빠는 왜 깜빡이도 없이 훅 들어와요? 처음에 먼저 그런 걸 물어야 했던 거 아닌가요?” “그래요?” “오빠랑 저 한 달 만에 본 거잖아요. 그러면 당연히 너는 그동안 잘 지냈냐? 별일 없었냐? 건강하게 잘 지냈냐? 같은 이야기로 먼저 안부를 묻는 게 순서 아니에요? 어떻게 사람 민망하게 그런 걸 먼저 물어요?” “그렇군요.” “그리고 저한테 궁금한 게 그렇게 없어요? 만약에 아까 오빠 뒤를 따라갔던 사람이 저라면, 물론 그게 사실이긴 해도, 그걸 굳이 그렇게 밝혀서 사람을 곤란하게 하셔야 해요? 안 그래도 오빠 앞에서는 말 한마디도 하기 어려운데, 굳이 그렇게 하셔야겠어요?” “미안해요.” ‘이건 아닌 거 같은데.’ 유영은 머릿속에서 대화를 그려보았지만, 결코 좋은 방향의 대화법은 아닌 것 같았다. 단유에게 대화를 받아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단유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몰아붙일 일도 없었다. 괜히 자신의 지금 처지가 민망하니까 들키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것밖에 안 되는 것 같다. “오빠는 저 안 보고 싶었어요?” “응?” “제가, 오빠 좋아한다고 했었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기억…하죠.” “그런데 왜 대답 안 해줘요? 오빠 제 전화 번호 몰라요?” “알죠.” “그런데 왜 전화도 안 해요? 오빤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 여자가 먼저 고백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고, 궁금한 것도 없고, 고작해야 이 사람이 날 따라왔나 안 왔나 그걸 확인하는 게 제일 궁금한 거였어요?” “미안해요.” ‘이것도 아닌데.’ 대화를 궁리하다 보면 계속 몰아붙이는 식으로만 이어진다. 그게 자신의 창피함을 가려보려는 졸렬한 방식임을 모르지 않지만,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단유를 바라보면서 대화를 나눌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머릿속으로 가상의 대화를 구성해보며 최적의 대화법을 찾아보지만 쉽지 않았다. 그때, 똑똑, 하며 주위를 환기시키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니 단유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들기고 있었다. “네?” “무슨 생각 해요?” “…아무것도요.” “방학 잘 보냈어요?” “네.” “그래? 방학 전에 아르바이트도 하고 싶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르바이트라도 하고 지냈어요?” “네.” “무슨 아르바이트?” “네? 아, 저기, 그게, …안 했어요.” 횡설수설하는 유영을 보며 단유는 피식 웃었다. “아르바이트 구하기 쉽지 않죠?” “네.” 짧은 대답 뒤,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을 깨뜨린 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진동벨의 울림이었다. “제가 가져올게요.” 단유가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향하고, 유영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까 단유의 뒤를 쫓을 때도 봤었지만, 큰 키와 넓은 어깨, 단정한 옷 맵시, 무엇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볼수록 마음에 드는 남자. ‘무슨 생각이야, 너!’ 볼을 감쌌더니 손바닥이 뜨거웠다. 잠깐 거울을 꺼내 화장이 이상하진 않은지 확인하고 싶은데, 단유가 금방 돌아올 테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 “자, 여기.” “고맙습니다.” 차가운 커피를 시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유영은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단유도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마셨다. 다시 조용한 테이블. “저기요.” “네?” “왜 아무 말씀도 안 하세요?” 유영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단유는 웃음을 지었다. “제가 계속 이야기를 하면, 유영씨가 하고 싶은 말을 못 할 거 같아서 기다리는 건데요?” “…….”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요?” 심호흡을 하는 유영의 얼굴이 혈색을 되찾았다. “제가 오빠한테 했던 말 기억해요?”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이었어요.” 단유는 앞에 놓인 커피를 집어 들었다. 플라스틱 컵 바깥으로 송글송글 물방울이 맺혀 있다. 단유의 목울대가 꿀렁거리는 걸 바라보며 유영은 침을 삼켰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유영씨.” 그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유영은 호흡이 가빠지는 기분이었다. 최근에 이렇게 긴장한 적이 있었을까? **** 단유와 유영을 뒤로하고 나온 새벽은 입꼬리가 계속 씰룩거렸다. 바보가 아닌 이상, 유영이 단유를 좋아한다는 걸 모를 수 없었다. 단유가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유영은 자연대에서 꽤 인기가 많은 여학생 중 한 명이었다. 애초에 여학생이 인문대만큼 많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유영의 ‘청순’하게 보이는 외모가 많은 남자들의 가슴을 흔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새벽도 유영을 좋아했다. 이성적으로 좋아했다기보다는 예쁜 여자를 보고 호감을 가지는 정도였지만, 어쨌든 유영을 좋게 보았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이 존경하고 따르는 형을 좋아한다고 하니, 괜히 기분이 좋기도 한데, ‘옆구리가 시린달까.’ 시샘이 난달까, 그런 정도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현 상황이 너무 아쉽다. 1학기 때야 갓 대학에 올라온 터라 학사일정을 따라가기도 바쁘고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제 어느 정도 돌아가는 상황을 알게 된 마당이다. 가끔 가다 보이는 CC들의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면 새벽도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것이다. ‘나도 남잔데 그런 마음 생길 수 있는 거잖아!’ 하지만 자연대 수업에는 여자가 별로 없기에 경쟁률(?)도 치열하고, 그 경쟁에 과감하게 끼어들 만큼 자신감도 없었다. ‘ASKY…. 그게 내 이야기일 줄은 몰랐어.’ 새벽은 한숨을 내쉬며 건물을 나와 자전거를 세워둔 곳으로 향했다. 자전거 체인을 풀고 나가려는 그때, 누군가가 새벽을 불렀다. “저기요.” “네?” 새벽이 돌아보니 남녀 한 쌍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속으로 ‘또 커플이야’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남학생이 물었다. “혹시 자전거 주인이세요?” 새벽은 살짝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요?” “아, 저희는 자전거 동아리인데요, 마침 지나가다가 그 자전거를 봤거든요. 이거 주문 제작한 자전거 같은데, 맞나요?” 자전거 동아리라는 말에 새벽은 오해를 풀었다. 자전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니 이 자전거를 보고 관심이 생겨 접근을 했었으리라. 새벽도 지난 교통 사고 때 자전거의 가치를 전해 듣고 입을 다물 수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귀한 자전거를 아무렇지 않게 타라고 넘겨 준 단유에게 또 한 번 감탄하기도 했었고. “아, 전 잘 몰라요. 사실 제 건 아니고 형 건데 형이 타고 다니라고 빌려준 거라서요.” “아, 그러시구나. 저희는 혹시 자전거 좋아하시는 분이시면 같이 동아리 활동하지 않겠냐고 물어보려고 했거든요.” “동아리요?” “저희 동아리 아시나요? 저희 동아리가 교내 유일의 자전거 동아리에요. 주말에는 서울 근교로 정기 라이딩도 하고, 방학 때는 국내나 국외로 자전거 여행을 떠나기도 하거든요.” 여학생이 남학생의 말을 받아 덧붙였다. “지난 여름에는 제주도 라이딩도 했었고요.” “가끔은 다른 대학교 동아리랑 같이 조인트도 하는데. 혹시 관심 있으세요?” 그 순간 새벽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장면들이 슬라이드쇼처럼 지나갔다. 해변가를 달리는 장면, 산악 사이클을 타는 장면, 한강변을 달리는 장면. 그리고 그 장면들마다 긴 머리를 흩날리는 여학생들이 곁에서 함께 웃으며 달리고 있었다. “동아리에 여자도 많나요?” 라는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새벽은 바보가 아니니까. 대신 물었다. “혹시 라이딩 촬영한 사진 같은 것도 있나요?” “사진이요?” “그냥, 어떤 식으로 활동을 하는지 보고 싶어서요. 아, 요새 그런 거 있잖아요? 길막하면서 자전거 라이딩하다가 욕도 먹고 그러니까.” “아, 저희는 그렇게는 안 하고요, 철저하게 교통 법규 지키면서 라이딩을 해요. 저희의 즐거움 때문에 다른 분들이 피해를 받으시면 안 되니까요.” “제가 보여드릴게요. 한 번 보실래요?” 여학생이 핸드폰으로 사진첩을 열어 보여 주었다. 여학생의 것이라 그런지 몰라도, 사진에는 여자들과 찍은 사진들이 많았다. 가끔 남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찍은 사진도 있었는데, 그 정도면 새벽도 충분히 판단할 수 있었다. “가입할게요. 어떻게 가입하면 되죠?” 새벽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동아리방에서 가입신청서 쓰시면 돼요. 같이 가실래요? 저희도 동아리방 가는 중이었거든요?” “네. 그럴게요.” “혹시 1학년이세요?” “네.” “아, 그렇구나. 이렇게 좋은 자전거 타고 다녔으면 예전에 말이 나왔을 텐데 이번에 처음 봤거든요.” 1학기 때도 가끔 타고 다니긴 했는데, 그게 1학기 말이어서 아마도 못 봤었나 보다. 뭐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이 타이밍이니까 새벽도 동아리에 가입할 마음이 생긴 것일 테다. 동아리 방에 들어서니 넓지 않은 방에 적지 않은 학생들이 의자나 소파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중 반 이상이 여자였다! ‘여기다! 내 마음의 안식처!’ 새벽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들키지 않기 위해 힘차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천문물리학부 1학년 강새벽이라고 합니다!” 새벽의 씩씩한 인사말에 까르르 웃음소리가 화답처럼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