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룬의 아이들 1 지은이 : 전민희 출판사 : 제우미디어 출판년도 : 2001년 7월 27일 저자소개 :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연구원을 거쳐 1999년 출간한 장편 판타지소설 400만회 조회수. 연사와 문학, 신학 등을 비롯하여 최근 철학의 신조류까지 섭렵한 지식광. 룬의 아이들 겨울의 검 1장. Bleeding 1.늦여름의 늪 " 에메라 호수에는 아이들을 잡아가는 망령이 있어요. " 들판의 끝에는 죽은 호수가 있었다. 썩은 수초가 마녀의 머릿단 처럼 뒤엉킨 그곳은 한낮의 태양 빛 조차 거의 닿지 않는 그늘진 늪이었다. 그곳까지만 가지 않으면 아이든지 돌아다녀도 좋다고 유모는 말 해 주었다. " 그러니까 에메라 호수 쪽은 근방에도 가면 안돼요. 아무리 밝은 낮에도 안 되지요!. 거기엔 망령이 빨간 눈을 번쩍거리면서 잡아먹을 아이들이 없나 늘 노려본 있단 말이에요. 아이 참, 듣고 계신 거예요, 도련님? 밤만 되면 저택에서도 보인답니다. 제가 도련님처럼 꼬마였을 때부터 폭풍이 몰아치는 날이면 늘 보았어요." 진네만 가문의 어린 도련님 보리스는 유모의 말을 반신반의했지만 일단 믿는 쪽으로 하고 있었다. 사 실 폭풍이 몰아치는 밤마다 에메라호수의 망령을 보려고 저택 밖까지 나가 어둠 속을 뚫어져라 바라보 곤 했지만 한 번도 유모가 말한 빨간 눈을 본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유모뿐 아니라 다른사람들도- 특히 늙은 여자일수록- 사실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아예 거짓말로 치부하기에는 좀 꺼림 칙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가 없어도 흉흉한 일이 많은 저택이었다. 언제부턴가 그는 가능한 한 슬픈 일은 생 각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악몽에 시달리다 온 몸이 땀을 흠뻑 젓어 깨어나는 날이면 늘 찾아오는 답 답함에 우울함이 싫었다. 물론 그는 아직 열두 살에 불과했고 두고두고 악몽에 나타날 법한 두려운 것 을 목격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저택 위를 떠돌고 있는 어두운 구름을 모를 정 도로 어리지도, 어리석지도 않았다. " 그런 건 네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야. 꼬마 보리스. " 문득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형 예프넨의 손길을 느꼈을 때 올려다 본 하늘은 초상화 속 어머니의 드레 스처럼 푸르렀다. 그러나 그것을 올려다보는 소년의 눈동자는 흐린 하늘빛 같은 그레이 블루였다. 형은 하늘을 등진 채 하늘마냥 맑은 눈을 하고 짧은 연갈색 머리를 흩날리며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한 풀빛이 사방으로 지평선을 이루는 이곳은 진네만 가문의 영지인 롱그르드에 속한 넓은 들판이였 다. 옷자란 풀들은 들판 너머 저택언저리까지 빼곡하게 메웠다. 대륙의 중앙, 조개반도를 휩싸고 도는 카투나 산맥 아래의 땅이 대부분 그렇듯 이곳도 스텝형 초원이 서쪽으로 어디까지나 뻗어 있었다. 풀대가 길게 자란 늦여름 들판에 누우니 머리까지 푹 파묻혔다. 풀벌레일까. 자꾸만 뭔가가 날아들어 코끝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러니 그것보다 형의 평소보다 환한 미소가 어쩐지 더 마음에 걸렸다. 뭐지.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은. 그럴 필요는 전혀 없잖아. 정말로. 아니. 형은 늘 밝았었다. 수줍은 타는 소녀처럼 잘 웃지도 않는 동생의 손을 끌어 잡고 영지 곳곳을 돌 아다니며 재미있고 우습고 밝은 것만 보여주려 애썼다. 어쩌다 동생이 웃음이라도 터뜨릴라치면 몇 배 로 더 기뻐져서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형이었다. 훤칠하게 키도 크고 잘생긴 형. 근처 영지의 젊은이들 기운데 가징 빼어난 검술 솜씨를 가져서 아버지 의 자랑 거리도 되는 형이다. 그리고 꼬마 보리스가 유일하게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한 형, 예 프넨 진네만. " 자. 약속한 대로 대련 연습이다!"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발딱 일어났다. 어깨를 덮은 긴 머리카락이 형의 그것처럼 바람에 나풀거렸 다. 형은 동생의 머리를 흐트러뜨리는 것을 좋아했다. 손에 목검을 쥐어 주면서 어느새 보리스의 머리꼭 지를 까치집처럼 만들어 놓았다. 보리스는 어린아이처럼 불만을 터뜨리는 대신 약간 입술을 움직이며 씩 웃었다. " 휘어이, 휘이! 우리 동생 머리에 알을 넣으면 안돼요!" 형은 있지도 않은 새들을 쫓는 시늉을 하고, 보리스는 일부러 속아 주려는 것처럼 훌쩍, 뒤를 돌아보았 다. 그 툼에 형이 든 목검이 보리스의 옆구리를 슬쩍 찌른다. 동생이 돌아볼 즈음이면 이미 멀찍이 물어 나 있었다. 건들건들, 장난스레 방어 자세를 잡고 있는 형의 얼굴은 여전히 미소였다. 보리스는 문득 이상한 것을 느꼈다. 형이 내민 목검을 치려고 쫓아가다가 발을 헛디뎌 무릎을 찧고. 다쳤나 싶어 다가온 형을 밀쳐 눌러 킬킬거리며 풀밭에 같이 구르면서도 내내 이상한 기분은 기시지 않았다. 그리 오랜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부턴가 보리스는 자신에게 이상스러운 직감 같은 것이 갖춰져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직감이란 사실 내킬 때 쉽게 발휘되는 성질의 능력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끔씩 그 것은 아주 강하고 예민해져서 볼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예지에 가깝게 변했다. 보리스는 검은 기초도 모르는 꼬마고 예프넨은 이미 몇 년이나 검을 배운 젊은이였으므로 본래부터 둘 은 대련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다만 보리스가 목검 휘두르는 것을 좋아해서 반사 신경을 길러 준다 는 구실로 함께 들판에서 뒹굴며 놀아주는 것이다. 아버지는 예프넨이 동생과 놀기보다는 좀더 엄격하 게 검 수련을 하길 바랬지만 이 선량한 젊은이는 검술이 향상되는 것보다 동생이 한번 깔깔대며 웃는 걸 더 좋아했다. 그들의 아버지, 율켄 진네만은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보리스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예프넨이 동생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도 아직 그가 어리고 감정에 잘 휩쓸려서 그렇다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율켄 진네만이 생각하기에 동생이란 전혀 사랑할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강도처럼 등뒤에서 다가와 목에 탈을 들이대지 않으면 다행이랄까. 예프넨은 맏아들이다. 율켄에게 유일하게 믿을 만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였다. 단지 신뢰의 대상만이 아니라 전폭적인 기대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예프넨 역시 아버지인 자신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예프넨도 어리다. 조금 더 자라면 아버지가 뭘 원하고 뭘 기대하는지 알게 되겠지. 딱! 경쾌한 타격음이 들판을 울리며 퍼져나갔다. 오랜만에 둘의 목검이 제대로 부딪친 모양이었다. 예프넨 은 놀란 시늉을 하며 두 발짝 물러났다. 동생이 좀더 적극적으로 치고 들어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보리스는 이번엔 발을 헛디디지도 않고 빠르게 형 앞으로 달려들었다. 형이 가르쳐 준 대로 움켜잡은 목검이 좀 흔들거리긴 했지만 그만하면 괜찮은 자세였다. 좌측으로 휘둘러 어깨를 치려 했다. 형은 맞아 줄 듯 하다가 슬쩍 비켰다. 보리스는 오기가 나서 더욱 바짝 다가들었다. 어느새 형이 말해줬던 사정 거리를 넘었다. 형의 목검이 똑바로 보리스의 목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비킬 새도 없었다. "아!" 예프넨은 깜짝 놀랐다. 그만큼 동생이 잘했기 때문일까, 순간적으로 몸에 익은 반격이 튀어나왔던 것이 다. 목검이라고는 했지만 끝은 제법 날카로웠다. 보리스의 목 가운데에 붉게 찔린 자국이 생기더니 곧 피가 방울져 맺혔다. "이런!" 목검을 내던지 예프넨이 다가와 놀란 동생의 빰을 감쌌다. 한 손으로 등을 쓸어 다독이며 상처를 살펴 보니 다행히 심한 것을 아니었다. 그러나 맺혔던 피는 점차 굵어지더니 이윽고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예프넨은 자기 소매로 핏방울을 훔치며 손수건을 꺼내 상처를 눌렀다. 그다지 많은 피가 나지는 않았 지만 동생의 맥박이 작은 새처럼 두근두근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놀랐지?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형이 실수했어.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물론 보리스도 놀랐었다. 순간적으로 느낀 목검의 속도는 몹시 빨랐고, 상대방이 누구인지 깜빡 잊어버 릴 정도였으니까. 정말로 어떤 사람이 자신을 치려 한다는, 뜻밖의 공포가 짧은 순간 스치고 지나갔었 다. "......으응." 그때였다. 두 형제를 부르는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저택 방향에서 사람이 뛰어오고 있었다. "예프넨 도련님! 보리스 도련님!" 저택에서 항상 보리스를 돌보는 하인이였다. 예프넨은 안 그래도 저택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는데 잘 되 었다고 생각하며 보리스의 손을 끌어 잡았다. 그러나 달려오는 하인의 태도가 이상했다. 그는 마치 다가 오지 말라는 것처럼 손을 내젓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하인은 이윽고 형제가 선 곳에 도착했다. 몹시 급하게 달려온 듯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의 얼굴 이 파랬다.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하인은 간신히 고개를 들고 두 형제를 향해 공포에 질린 표정을 보였다.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이 틀 림없었다. "도련님들, 저택에 잠시 들어가지 마세요! 큰일이 났습니다요!" 예프넨은 다그쳐 묻는 대신 하인이 마저 설명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본래 하인들의 호들갑을 알기 때문에 크게 긴장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오늘 아침부터 하루 종일 예민해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는 신호처럼. "블라도 진네만... 그 어른이 돌아왔습니다요!" 예프넨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히 굳었다. 그는 먼저 동생이 놀랄까 싶어 손을 꽉 쥐어 주었다. 그러나 자신의 손조차 차가워져 있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 "그래, 그렇구나......" 보리스는 하인의 말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을 애매하게 떠돌던 예감이 갑자기 기정 사실화된 충격이랄까. 그는 형의 시선도 느끼지 못한 채 천천히, 마치 남의 일을 말하듯 되풀이했다. "블라도 삼촌이...돌아왔다고......?" 비를 품은 바람이 형제의 머리 위에서 서서히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하나씩, 젖은 회색 깃털들이 떨 어져 내렸다. 골든 리트리버 종인 개가 문간에 엎드려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으르렁거렸다. 평소 순한 녀석이어 서 그 덩치에도 불구하고 꼬마 보리스 조차 편안히 기대 장난쳐도 좋은 녀석인데 지금만은 달랐다. 개 는 긴장하여 털을 곤두세우고 사납게 커컹 짖어댔다. "허, 저 녀석이! 오랜만이라 사람을 몰라보는군. 멍청한 놈 같으니." 후리후리한 키에 팔이 유난히 긴 남자였다. 거므스름한 얼굴을 남방의 강한 태양 빛에 빛깔이었다. 주 름투성이 눈꼬리 안쪽의 노르스름한 홍채를 자진 눈동자는 악어 가죽에 박힌 장식 보석처럼 번쩍거렸 다. 사내는 발길질이라도 할 듯 구두를 딱딱거리며 다시 소리쳤다. "처리 가라! 저리가!" 개는 여전히 맹렬하게 짖어댔지만 훈련이 잘 되어 있었기에 주인의 허락이 있기 전에 먼저 사람을 물 지는 않았다. 뚜벅뚜벅. 거실 안쪽으로부터 발걸음이 다가와 멈췄다. 악어 눈동자를 가진 사내가 입가에 주름을 만들며 씨익 미소지었다. "오랜만입니다, 율켄 형님." "쉿! 조용히 해라. 말로리." 율켄 진네만은 먼저 개를 조용히 시켰다. 그리고 몇 년만에 만나는 동생을 향해 냉랭한 시선을 보냈다. 흥... 그는 미소지었다. 그도 동생도 전보다 휠씬 늙어 있었다. 다른 사람보다 두배로 맹렬히 살아오기 라도 한 듯, 그렇게 일그러진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용케 살아 있구나, 블라도." "어라, 불만이기라도 하신 겁니까?" 그것은 의미 없는 대화였다. 이제 두 형제는 전처럼 억지 예의를 지킬 필요조차 없었다. 형제를 낳았던 부모는 재작년에 나란히 죽어 없어졌다. 좀더 일찍 죽어 줬더라면 5년 전에 만났을 때 저놈을 죽여 없 앴을 텐데...... 그렇게 되씹던 율켄은 동생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문득 새삼스런 경계 심을 느꼈다. "5년만인데, 자리 정도는 권해 달란 말입니다." "앉거라." 둘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걸어가 접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않았다. 쿠르르...... 천둥이 울렀지만 비는 아직 내리지 않았다. 율켄은 문득 예프넨이 집으로 돌아왔던가 생각했다. 하긴, 동생 녀석이 현관으로 걸어 들어왔을 때부터 하인들은 혼비백산했을 테고, 그 중 한둘 정도는 아들들을 찾아 뛰어나갔을 것이다. 누누이 일러두었다시피 율켄 자신에게 문제가 생길 경우 집안의 수장은 예프 넨이다. 하인들을 비롯해서 그가 거느린 병사들도 지금쯤은 예프넨을 찾아내어 보호하며 명령을 기다리 고 있을 것이다. 내 하나 뿐인 동생 블라도 진네만. 무슨 속셈으로 네가 이 먼 죽을 자리까지 찾아왔느냐. "형님, 뭐 미실 거라고 줘요. 한나절 말을 달렸더니 목이 말라서 죽겠데." 율켄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천천히 말했다. "그래. 흑맥주라고 마실 테냐?" "하하. 오래 외지에서 지내다 보니 입맛이 바뀌어 버려서. 난 그냥 진저에일이나 마실 테요." 진저에일 처럼 알코올이 거의 들지 않은 음료는 본래 블라도 가 즐기던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하녀에 게 손짓하여 마실 것을 가져오도록 하는 율켄도 동생의 속셈을 모르지 않았다. 언제고 블라도가 결국 돌아오리라는 걸 율켄이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에 대비해서 블라도가 즐겨 미시는 종류의 음료 에 독약을 카서 준비해 두지 않았을리란 보장이 어디 있는가. 율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희끗희끗한 새치가 머리카락 곳곳에 섞인 형제는 문득 상대방이 자신과 비 슷한 표정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 피가 닿았음은 분명하겠지. 하지만 10년도 넘게 대립해 온 사이다. 서로에게 이제 타협의 여지 따위가 없음은 너무도 명백했다. 자 신에게 패배해서 5년 동안이나 집을 떠나 있었던 동생, 이제 무슨 카드를 들고 제 발로 다시 나타난 것 일까. 형제는 진저에일 잔을 하나씩 들어 입술을 대었다. 눈 색깔과 머리 길이를 빼면 섬뜩한 정도로 둘은 닮아 있었다. " 찾아온 용건을 물어야 된는 건가?" 노란 논의 블라도는 율켄과 반대쪽 입꼬리를 올렸다. "뭐, 수고도 덜어드릴 겸, 직접 말씀드리죠." 오래 침묵하지도 않았다. 블라도는 이어 입을 뗐다. "칸 선제후 님을 아실 테지요? 형님도 수도 소식에 영 귀 닫고 지내는 분이 아닌 건아니까. 이번에 나 는 그 분 곁에서......" 흥, 하고 율켄은 코웃음을 쳤다. "되잖은 소리나 하려거든 썩 나가서 다른 둥지나 찾아봐라." 블라도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웃지 않았다. 노란 눈빛을 번쩍이며 그는 사납게 대꾸했다. " 이 둥지는 형 혼자 것이 아니잖우? 롱고르드는 부모님이 우리 형제들에게 똑같이 물려준 영지란 걸 형 혼자만 잊은 것 같수." 발끈하자마자 젋은 시절의 말투가 곧장 뛰어나오는 불라도를 율켄은 차갑게 노려보았다. " 그 권리를 네가 어떻게 차버렸는지 잊었던 말이냐? 억울하게 죽은 예니치카가 땅 밑에 누워서 오늘 네 놈이 돌아오는 걸 지켜보고 있었을 거다." 블라도는 입술을 질근질근 비틀며 대꾸했다. "그 기집애를 죽인 게 어째서 나란 말이우?" 순간 율켄은 울컥 목에서 뭔가 치미는 것을 느끼며 쾅, 하고 잔을 세차게 내려놓았다. 갈색 물방울들이 탁자에 흩뿌려졌다. "네놈의 농간이 아니면 어째서 그 애가 어려서부터 얘기만 들어도 벌벌 떨던 에메라 호수에 혼자서 갔 겠느냐!" "흥. 예니는 호수에서 돌아왔을 때만 해도 죽지 않았잖우! 미쳐 날 뛰는 그 애를 치료도 제대로 안 시 켜보고 죽이라고 한 건 결국 형이 아니었수?" "어디서 더러운 궤변을 지껄이는 게냐!" 조가. 남아 있던 에일 방울들이 블라도의 얼굴에 끼얹어져 흘러내렸다. 블라도는 얼굴에 패인 주름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소매로 슥 닦았다. 그리고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말하기 시작했 다. "흥...어디 좋아, 잘 해보쇼. 형의 의견 따위. 처음부터 들어볼 것도 아니었지. 어디 우리 집안 사람들이 목에 칼이라도 들어오기 전에 정치적 신념을 꺾는 일이 있었수? 하. 하. 우리 부모님도 제각기 다른 당 파에 뛰어들어간 아들들 고집 못 꺾었고, 예니도 신랑 될 사내 때라 불꽃모르파 명부에 결국 제 이름 써넣었더랬지. 재닌느 고무님은 달랐소? 지금도 3월 의원파에서 앞장 서 휘젓고 다니잖수? 하, 하. 하. 그래. 형님 아들들은 다를 것 같수? 그놈들도 조금 더 크면 형님이 신처럼 받드는 '카챠'를 버리고 전혀 엉뚱한, 예를 들면 진군파 같은 데 들어가겠다고 살칠 지도 모른다는 거야! 전혀 무리가 아니지!" 율켄의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흐린 날씨 탓에 점차 어두워지고 있는 거실에는 촛불도 하나 없었다. "훗훗, 그렇게 되면 한 집안에 당파만 다섯 개야. 다섯 개! 아니, 부모님들은 죽었으니까 이젠 네 개가 되어야 하나?" 율켄은 더 대꾸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단지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가라." "나가드리지." 불라도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여전히 비웃음을 입가에 문 채 형을 가리킨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 다. "하지만 후회하게 될걸? 오늘 내가 형에게 마지막으로 화해를 청하려 왔었다는 걸 잊지 마시란 말요. 그래, 마지막 기화였지. 형이 그놈의 '윈터바텀 킷(Winterbottom Kit)'을 내놓기만 했다면 난 과거를 모 두 잊고 형을 그만 용서하려 했었수. 어때. 한 번 더 생각해 볼 테우?" 율켄은 씹어 뱉듯 중얼거렸다. " 내 머리가 두 쪽 나기 전에 그게 네 놈 손에 들어갈 일은 결코 없을 거다." " 흥, 좋은 지적이군. 잘 알았수다." 블라도는 예상했다는 듯 얼굴의 주름을 한층 드러내며 싱글싱글 웃었다. 이윽고 다시 입을 연 그는 한 결 어두워진 율켄의 얼굴을 감상이라도 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칸 선제후님이 이번 선거에서 트라바체스의 통령이 되는 것은 장님이 봐도 뻔한 사실이우. 이제 그 분 을 따르지 않고서 감히 우리나라에서 발붙일 테가 있을 거라고 보우? 게다가 칸 선제후께서 가장 미워 하는 상대인 '카챠'의 사람인 형한테 다른 탈출구가 있을까? 선거만 끝났다 하면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 는 것을 알아야지 동생이 아량을 베풀 때 얌전히 설득 상하는 편이 좋았을 텐데. 아니. 그건 역시 진네 만 가문 사람으로서 할 만한 일이 아니었나?: "나라라지 않았나!" 블라도가 하는 말의 뜻을 율켄은 남김없이 알아듣고 있었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사실도 아니었다. 동생 이 오랫동안 섬겨 온 칸 선제후는 벌써 열 다섯 선제후 가운데 절반 이상의 지지를 획득한 상태였다. 오직 반대하는 것을 블라도가 '카챠'라는 모욕적인 별명으로 부른 카츠야 선제후를 비롯한 세 명에 불과 했고 나머지들은 공식적인 지지를 표명하진 않았어도 대세에 따르는 분위기였다. 이미 진 선거다.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진네만 감누. 아니 트라바체스 공화국에서 조금이라도 이름 있다는 집안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명 다음으로 중시하는 것이 정치적 신념 아닌가. 그리고 그 가운데 상당수는 신념 쪽을 생명보다 더 높이 치고 있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진네만 가문은 그 점에서 적지 않은 명성마저 가지고 있었다. 형제까리 이토록 참혹하게 갈리게 된 것도 그 명성을 높이 산 여러 선제후들의 유혹이 심했던 탓 일지 도모르는 일이다. 그래. 언제부터인지는 모른다. 온 나라가 빵 조각도 제대로 못 먹는 주제에 신념이니 당파니 하는 것에 넋을 놓고 들썩거리게 된 것은. 아마도 트라바체스가 이처럼 불안정한 제후 선출식 공화정을 도입한 후 부터인가? 아니. 정식으로 하지만 이건 공화국도 아니다. 전 국민이 수백 개의 당파로 갈려 부자간에. 형제간에, 친구간에 화해조차 모르고 싸우도록 만든 악독한 변형 군주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결코 꺾을 수는 없었다. 트라바체스에서 한번 지지하는 섬기기로 한 선제후나 당파을 버린 다는 것은 어떤 행동으로도 씻기 힘든 불명예로 간주되었다. 그게 바로 공화국 건설 당시부터 서서히 갈려 온 수백 개의 당파가 여전히 조금도 합치지 못하고 투쟁과 암살로 얼룩진 채 볼썽 사납게 싸우고 있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그들은 지금도 갈라지기만 한다... 겨우 백 여명의 지지 세력을 가진 자들도 60명과 40명으로 갈릴 망정. 비슷한 규모의 다른 정파와 손잡아 2백이나 3백이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 는다. 모두 상대가 숙이고 들어오기만을 바랄 뿐. 그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율켄 역시 아버지와 어머니의 정파를 따를 수 없었고. 동생과 합칠 수 없었 으며. 여동생의 결혼 상대자를 끌어들일 수 없었다. 그 윗대도 마찬가지 일의 반복이었다. 이런 식으로 정치 때문에 집안이 파탄 지경에 이르는 것을 트라바체스에서는 크게 드문 일이 아니다. 수많은 선제후들과 다음 선거에서 선제후가 되기를 원하는 의원들은 조금이라도 힘있는 집안 사람이라 면 그중 한명이라도 제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잦은 술책과 회유를 동원했다. 형과 누이가 갈리고 남편 과 아니가 갈리며 아버지와 딸이 등을 도렸다. 나라는 붕괴 직전이 되어도 누구도 서로를 용서하거나 용서를 빌지 않았다. 오직 자기 당파가 정권을 쥐는 것. 트라바체스에서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것 하 나만이 지상 목표일 뿐! 인사도 없이 걸어나가던 동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히죽거렸다. "오늘 내말을 들었으면 진네만 집안이 둘째 아들에게 이러지는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우. 어디, 내가 빼앗아 갈 때까지 모조리 꼭 끌어안고 잘 버텨 보슈." 쾅. 문이 닫혔다. 홀로 남은 율켄은 석상이 된 것처럼 꼼짝 않고 않아 있었다. 그도 오랫동안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 온 사내다. 트라바체스에서 어떤 식으로 한 정파가 다른 정파를 말살하고 제압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동생이 화해를 청하러 왔다는 소리는 입에 발린 개소리고 실은 선전 포고를 하러 왔을 것이다. '윈터바텀 킷'을 찾으러 왔다고? 어림없는 소리! 율켄이 그걸 순순히 내줄 리가 없다는 것을 블라도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당연히 혼자일 리 없었다. 저택 밖에는 이미 습결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을 테고. 방금 역 시 자신의 몸을 보호할 방책쯤은 마련해서 온 것이다. 비록 자신이 태어난 곳이지만 이제는 적진과 다 름없는 저택에 홀홀 단신 들어올 불라도가 아니었다. 녀석도 저 나이가 되도록 정치판에서 구를 대로 구르고. 피 맛도 볼대로 봤을 테니까. " 튤크" "예, 주인님." 거실 뒤의 커튼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항쟁이다." "예, 준비하겠습니다." 커튼 뒤에 서 있던 사람의 자취가 스르르 지워졌다. 그 뒤에는 밖으로 곧장 통하는 비밀 통로가 만들 어져 있었다. 율켄은 쏟아진 에일 방울들과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컵을 내려다 보다가 이윽고 일어섰다. 길쭉하게 솟 을 창을 말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말에 올라타는 동생 곁에 두 명의 종자가 역시 자신들의 말을 끌어 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이윽고 말에 올라타더니 박차를 가해 두 형제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들판을 향해 달려갔다. 2. 눈의 갑옷. 겨울의 검 예프넨은 걸음을 서둘렀다. 하인이 맡겠다는 것을 마다하고 굳이 직접 동생을 번쩍 안아든 채 저택을 향해 내달렸다. 현관에 도착했을 때까지 비는 조금만 흩날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2층에 계십니다." 들판 너머로 블라도 삼촌이 탄 말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었다. 동생은 자기보다 더 진장해 있었다. 하인 의 대답을 듣고 예프넨은 다시 물었다. "튤크 집사가 내려왔나?" "예, 아까 전에 벌써 연병장으로 나가셨습니다." 예프넨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다면 가볼 필요는 없겠지. 보리스. 방으로 가자." 흙 묻은 신발을 갈아 신을 틈도 없었다. 말끔하게 닦아 놓은 바닥과 잘 손질된 융단에 풀씨와 진흙이 뭉개졌다. 가로막는 문을 거칠게 열어제치며 방으로 달려들어간 예프넨은 침실 문만은 닫고 단단히 잠 갔다. 보리스가 가쁜 숨을 내쉬며 침대로 주저앉는 동안 예프넨은 당장 장롱을 열어제치더니 잘 접어놓은 옷 들을 마구 꺼내 바닥에 내던졌다. 강철 경첩이 붙은 작은 상자가 발견되자 주머니에서 열쇠를 뽑아 돌 렸다. 뚜껑이 열리고 나온 것은 손가락 두 개 두께만큼 굵고 시커먼 열쇠였다. "보리스. 네 방에 가서 아버지가 주신 브리간딘(brigandine) 갑옷을 꺼내 입어라. 검과 부츠를 가져오는 것도 잊지 말고. 알지? 어떻게 해야 되는지." 동생의 어두운 눈동자가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 옷가지들을 훝어진 옷가지들을 훑는 것을 느꼈지만 마땅히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보리스는 일어나 바로 곁에 붙어 있는 자기의 방으로 들어갔다. 보리스가 곧이어 뛰어들어온 유모의 도움을 받아 무장을 마칠 즈음 예프넨의 급한 손길도 할 일을 해 내고 있었다. 묵직한 장롱을 밀어내고 뒷벽에 난 위장된 나무판을 다음 그 너머에 장치된 철 금고에 붙 은 구멍을 손가락으로 더듬어 찾았다. 굵직한 열쇠를 꽂아 힘껏 돌리자 덜컹,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보리스가 돌아왔을 때. 난장판이 된 형의 침대 위에는 두 개의 신성한 물건이 놓여 있었다. 형제는 잠시 침묵했다. 보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스노우가드 (snowguard)....." 은백색으로 번쩍이는 체인이 수천 개의 눈 결정을 모아 엮은 듯 눈부셨다. 그것은 가까이에서 들여다 보면 눈 둘 곳을 잃을 정도로 한층 황홀한 결정들이었다. 보리스는 한 걸음 다가가 그 위에 손을 얹었 다. 차갑다가...따뜻해진다. 그랬다. 거짓이 아니었다. 외부의 열을 흡수하여 내부에 이르기 전에 분쇄해버린 다는 신비로운 힘은 마법 갑옷 스노우가드의 수많은 능력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었다. 어떤 강 렬한 불꽃도 결코 뚫을 수 없다는 눈의 갑옷 스노우가드. 그것이 진네만 가문의 손에 들어온 것은 네 새대 전엔 예프넨과 보리스의 증조부가 이룬 업적이었다. 예프넨이 이어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윈터러 (Winterer)." '겨울을 지새는 자'라는 이름 그대로, 추위와 얼음의 힘으로만 제련된다는 기이한 금속이 한 줄기 섬광 처럼 벼려진 채 침묵하고 있었다. 검이다. 날씬한 자태만큼이나 귀족적인 싸늘함을 지닌 하얀 검이다. 무늬 없는 백색 검집 위로 튀어나온 손잡이는 비교적 얇은 검신에 비해 두 손을 넓혀 쥘 수 있을 만큼 길었다. 한 손으로도 두 손으로도 쓸 수 있다고 해서 사생아라는 별칭을 가진 바스타드 소드( sword)였 다. 보리스가 어린 시절 단 한번 본 기억이로도 검집 안에 든 날 역시 차가운 백색 광택을 지니고 있었 다. 이 두 가지 물건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 바로 윈터바텀 킷. 지금은 진네만 가문의 보물이 되어 있지 만 과거 수많은 신분 높은 가사와 방랑 전사들이 옳지 못한 피를 뿌리고라도 손에 넣으려 안간힘을 다 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검을 쥐는 자라면 누구나 풍문으로라도 전해 듣고 동경하게 되는 신비로운 무구, 명성 자자한 무구였다. 보리스의 증조부는 스노우가드를 손에 넣기 위해 들리는 말로 99명의 기사와 전사를 살해했다고 했다. 당시 스노우가드의 주인은 외국의 영주였다고 하니 그를 호위하는 군사가 그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아들이 다시 검인 윈터러를 손에 넣기까지는 30여년이 걸렸다. 그 역시 아버지보다 적 게 죽이지는 않았다. 한번 손에 넣는다고 거기서 일이 끝날 리 없었다. 윈터바텀 킷이 한주인의 손에서 완성되었다는 이야 기는 검을 쥔 자들 사이에 한층 열렬한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그 즈음부터 윈터바컴 킷을 손에 넣으면 최가의 검사가 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조금 지나자 소문은 '원터바텀 킷을 손에 넣어야 만 최강의 검사'라는 식으로 바뀌어 버렸다. 일단 손에 넣은 보물을 광적인 도전자들로부터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한 가지,걸려 오는 무든 도전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윈터비텀 킷으로 무장하고 나와 정정당당히 겨루고 보물은 이긴 자의 전리품으로 하자는 요구들에 보리스의 할아버지는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물래 숨어든 도둑들은 대기하고 있던 사 병들에 의해 깨끗이 격퇴 당해 모두 목이 잘렸다. 당시만 해도 진네만 가문은 트라바체스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당당한 집안, 1대1 결투의 방법이 아니면 그 누구도 강압적으로 윈터바텀 킷을 빼앗아 갈 길은 없었다. 또한 달리 말하자면 아무리 좋대 봤자 일개 무구일 뿐이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그물처럼 엮어진 집안 간의 유대를 중시하는 가문들은 검 한자루. 갑옷 한 벌 따위를 뺏자고 여럿이 죽고 죽이는 항쟁 따위를 벌일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그렇게 몇십 년이 흐르자 소문이 서서히 사그라졌다. 보리스의 할아버지는 그토록 힘들여 얻는 무구인데도 한 번도 윈터바텀 킷을 몸에 걸치고 밖에 나서지 않았다. 탐욕스런 자들의 욕망이 불붙을 여지를 원칙적으로 봉쇄했던 것이다. 더 세월이 흐르자 '이미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갔다더라'는 의견이 지배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윈터바텀 킷은 여전히 진네만 저택에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 전통대로, 두 명의 아들들 손에. 다시 말하지만 두 명의 아들이다. 보리스의 할아버지는 이 윈터바텀 킷을 놓고 아들들이 싸우지 않기 를 원해서 그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고 서로 협력하라고 유언했다. 한쪽이 늙어 죽은 후에야 그것을 다 시 한사람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블라도는 형인 율켄에게 내 쫓겼고 당연히 소유권도 빼앗겼다. 이 제 그것을 되찾으려 하는 마음에 추호도 망설임이 있을 리 없었다. 율켄 역시 두 아들을 두었다. 그러나 그는 죽은 아버지와 생각이 달랐다. 윈터바텀 킷은 합해졌을 때 강 력한 힘을 발한다. 나누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지 않은가. 그것은 당연히 가문을 이을 큰아들의 것이었다. 열두 살인 보리스보다 예프넨은 여덟 살이나 많았다. 그 정도 나이 차이면 동생을 제압하여 감히 거역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율켄은 생각했다. 그러나 예프넨의 생각은 또 달랐다. "보리스. 네게 이 검을 잠시 빌릴게." 겨울의 검 윈터러는 그 정체 모를 재질 탓인지 일반적인 바스타드 them에 비해 비교적 가벼웠지만. 역 시 열두 살 어린아이가 휘두르기에 벅찼다. 보리스는 가만히 형을 올려다보았다. 율켄이 윈터바텀 킷을 아들 예프넨에게 넘겨 준 것은 올해 초, 예프넨이 스무 살이 되던 때였다. 그러 나 예프넨은 그날 밤 자기 방으로 보리스를 불러 두 가지 물건을 보여주며 어느 쪽이 좋아 보이느냐고 물었다. 보리스는 별 생각 없이 무거운 갑옷보다는 검이 멋진 것 같다고 답했고, 그러자 예프넨은 네가 검을 휘두를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그걸 네게 주겠다고 말했다. 깜짝 놀라는 보리스에게 부드럽게 웃으 면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보리스는 자신이 그 말을 믿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 후로도 형은 몇 번이나 기회가 닿을 때 면 '윈터러는 네 거다'고 말해 주었고 언제부터인가 그도 그렇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오늘과 같은 날 형은 다시 한 번 그게 말하고 있었다. 문득, 보리스는 여전히 자신을 그 이름 높 은 검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보리스는 항쟁이 무엇인지 모르는 나이가 아니었다. 트라바체스 공화국에서 가문간 항쟁으로 일어난 일은 재3자가 책임을 묻지 않은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 오늘 밤 누가 살해당한다 해도 이 자리 에 있는 사람들 외에 울어 줄 사람은 없었다. 아직은 전력이 될 수 없는 어린아이는 자신, 그러니 형이 검을 쥐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인 형이. 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형 거야." "아냐. 이번 항쟁이 끝나면 반드시 돌려주겠다. 네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빌려 가지도 않을 거야." "돌려 줄 필요 없어. 형 거야." "보리스." 예프넨은 윈터러의 칼집 쪽을 잡더니 보리스에게 내밀었다. 약간 망설이다가 손잡이를 잡자 형은 손을 놓았다. 휘청, 팔이 아래로 떨어지며 바닥에 부닿친 검이 요란한 소리를 울렀다. "들어 봐." 힘껏 들어올리려 했지만 한 손으로 지탱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두 손으로 잡자 간신히 허공을 향해 쳐들고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팔뚝이 부들부들 떨리고 검 끝이 불안정하게 작은 원들을 그렸다. 더 이상 못 견디겠다고 생각했을 때, 형의 손이 검집으로 감싸진 끝을 탁, 잡았다. 팔에서 힘이 빠지자 어깨가 축 늘어졌다. "거봐, 너도 들 수 있잖아." "이런 걸로는......" 그러나 예프넨은 동생이 더 말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허리를 굽히며 얼굴을 바싹 갖다 대더니 조 그맣게 속삭였다. "더 잘 하게 될 거야. 멋지게 해내게 될걸. 너는 전사(warrior)니까, 이름 그대로 전사니까(Boris는 '전 사'라는 의미)." 형의 따뜻한 입김이 기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때, 다시 한번 이상한 기분이 목덜미를 서늘하 게 감싸며 다가왔다. 자신은 실제로 검을 갖게 될 것이다. 저 윈터러를. 그것도 원치 않은 슬픈 결과로 인해. 괴괴한 침묵이 저택 전역에 감돌았다. 아버지가 거느린 2백여 명의 사병이 저택의 앞뒤를 삼엄하게 지켰다. 진네만 가문의 전성기에는 천여 명도 넘었다는 사병이 지금은 저토록 줄어들어 있었다. 전성기란 윈터러를 가져왔다는 보리스의 할아버 지 시절을 뜻했다. 보리스와 예프넨은 2층에서, 뒤뜰로 곧장 이어지는 계단이 붙은 곳에 서 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싸움 의 전면에 나설 필요는 없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어차피 아버지의 존재로 결정되니까. 그러나 또한 어린 아이인 보리스라고 해서 싸움에서 아예 빠질 수는 없었다. 그 역시 진네만 가문 주인의 아들이었으므로. 일부러 그런 것처럼 약간 열려진 창문 밖 뜰로는 병사들의 뒷모습이 검은 말뚝처럼 일정한 거리를 두 고 박혀 있었다. 그들은 제2진이다. 1진은 저택에서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나가 있었다. 진네만 저택은 여러 번 고쳤음에도 불구하고 방어적인 항쟁을 하기에 용이한 환경은 되지 못했다. 아 니, 실은 저택까지 적이 들어오면 그 항쟁은 거의 졌다고 봐야 했다. 일단 저택에 들어온 적은 가재 도 구에서 진귀한 물건들이 이르기까지 손닿은 물건마다 남김 없이 부수고 약탈해 버린다. 싸움에 이기고 지고를 떠나 저택이 침탈 당한 집안은 거의 항쟁에서 진 것이나 다름없는 꼴이었다. 이러한 항쟁은 한 해에도 몇 번이나 일어났다. 이름 있는 가문이 항쟁에 연루되었을 때만 그것은 널리 아야깃거리가 되었고. 보통은 그냥 저들 집안끼리의 일로 묻혀 버렸다. 그러나 실제로 항쟁에서 진 가분 은 어린아이까지 모조리 몰살당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것은 불화가 있는 가문들이 가장 자주 택하는 해결 방식이기도 했다. 진네만 가문처럼 가문 안에서 쫓겨난 형제나 자매가 항쟁을 걸어오는 경우도 아주 드물지는 않았다. 정견이 달라 집을 나가는 형제란 트라바체스에서 매우 흔한 것들 중 하나였다. 예프넨의 시선이 창문 틈에 박혀 있었다. 보리스는 계단 쪽을 돌아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계단 아래에는 십여 명 이상의 병사가 지키고 있을 것이다. 적어도 진네만 가문의 젊은 두 형제보다 먼 저 죽기 위해서. " 보리스. 저길 봐." 불쑥 들려온 형의 목소리에 보리스는 재빨리 창문턱으로 다가들었다. 붉게 흐린 하늘과 보랏빛 기류가 뒤엉켜 번져 나가가는 들판머리에 새로운 광채가 곹 가세했다. 횃불이었다. "시작이다." 늑골 아래가 쿡 찔러지는 듯한 충격이 올라왔다. 보리스는 잠깐 숨을 멈췄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소리가 번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우우, 또는 와이... 라고 외치는 듯한 뭉개진 목소리들이 점점 가까이 닥쳐왔다. 어두워서,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새 저택 주위는 온통 타오르는 횃불로 휩싸여 있었다. 얼마나 될까...수백?1천? 지독히 불리하다. 예프넨은 입술을 꼭 깨물며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되새겨 보았다. '사태가 불리하거든 윈터바텀 킷을 가지고 저택을 빠져나가라. 미리 일러 둔 그 방향으로.' 이버지는 보리스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것일까? 하지만 예프넨에게는 보리스 가 우선이었다. 자기 혼자라면 어둠을 뚫고 달아날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첫째는 아버지를 두고 가야한 다는 사실, 둘째는 동생을 안전하게 데려가야 한다는 임무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아버지가 말한 대로 웬터바텀 킷을 삼촌에게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도. 또래보다 유능한 점이 많다고는 해도 예프넨은 스무 살. 그만한 짐을 한꺼번에 짊어지는 것은 당연히 벅찼다. 그러나 그렇게 길러진 탓일까. 그는 자신의 짐이 부당하다고는 느끼지 않았다. 단지 자신에게 그만한 능력이 아직 없다는 것을 안타깝게 느낄 뿐이었다. 그 와중에 그는 이곳에서 피를 뿌리게 될 병사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주인이 되었다면 당연히 돌보아야 했을 가문의 사병들이었다. 각 가문에 속한 사병이란 일시에 모아져 급작스레 형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아 왔으며 진네만 가문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며 커온 자들이 그들이었다. 그들의 존재 이유는 다름 아닌 항쟁, 바로 그 항쟁을 위해서 평상시 평민의 몇 배나 되는 대우를 받으며 비교 적 편안한 생활을 해온 자들인 것이다. 그러니...오늘은 끝나는 날이로구나. 횃불이 동생의 얼굴에까지 어른거렸다. 예프넨은 검을 꽉 쥔 채 일단은 저들을 하나라도 더 벨 일을 생각했다. 그들 가운데 삼촌이 어디 있는지 알아볼 수 없었다. 다행히 가장 먼저 삼촌을 벤다면 일은 좀 더 수월해지리라고 생각하며 그는 쓴 미소를 삼켰다. 그때, 보리스는 창문 곁에 걸린 한 장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 드레스를 입은 채 처연한 미소 를 짓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림 속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말을 거는 수한 눈이었다. "오늘, 진네만 가문의 주인은 바뀐다! 들었느냐! 오늘 가문의 주인은 바뀌었다!" 목소리 큰 자 여럿이 입을 맞춰 외치는 소리를 율켄 역시 듣고 있었다. 살아오며 여러 가지 경로로 겪 은 항쟁은 십여 번 이상이었다. 저런 수순에 대해서도 알만큼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자신을 향해 말해지는 기분은 상상보다 훨씬 썼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자는 죄를 묻지 않는다! 새 주인에게 봉사하여 다시 진네만 가문을 일으킬 자는 앞으로 나오너라!" 저런 회유에 마음 흔들질 자들이라면 이미 몇 년 전부터 기울어지는 것이 확연했던 진네만 가문을 예 전에 떠났을 거다...라고 중얼거린 율켄은 몸을 일으켰다. 저들의 헛소리를 끝까지 들어 줄 필요는 전혀 없었다. 피를 뿌릴 때가 왔다. 갈 테냐? 성큼, 한 걸음 나선 그의 입에서 벽력같은 고함이 터졌다. "나서라, 감히 롱고르드의 땅을 침범한 자여! 진네만 가문의 미래를 서툰 입으로 논하는 자여. 빛 아래 로 나오라!" 횃불로 둘러싸인 앞마당이 저물 녘처럼 불그레했다. 율켄은 정면 2층 테라스에서 서서 아래를 나려다 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적들의 석궁이 닿는다면 닿을 수도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당당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병사들이 움츠러들기 때문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순이었다. "율켄 진네만이다! 테라스 위다!" 병사들이 테라스로 횃불은 가져와 높이 들었다. 붉게 타오르는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율켄은 생각 했다. 1진은 어찌 되었을까? 괴멸 당한 것일까? 아니면 길이 엇갈렸나? 적이 만든 횃불의 따기 율켄의 시야에서 2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일렁이는 곡선을 이루고 있 었다. 눈속임이 섞였다 해도 5백은 훨씬 넘는 수였다. 율켄을 다시 한 번 외쳤다. "불을 올려라!" 저택 전면에 포진한 병사들의 발아래 흰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하여 붉은 횃불의 띠와 대치하는 선을 이루었다. 흰 불꽃은 저택에 마법의 힘이 있음을 과시하는 것이고, 동시에 병사들의 사기와 체력을 끌어 올리는 마적 효과도 있었다. 집사 튤크가 해내는 일들이었다. "소심한 자야, 나오지 못하는 것이냐? 너희의 오합지졸에 3백여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젠네만 가문이 쓰러질까보냐!: 그 순간. 대답 대신 거대한 뱀이 시잇거리는 듯한 싸늘한 굉음이 저택과 벌판 전체에 올려 퍼졌다. 병사들, 저택 안의 사람들, 테라스에 선 율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붉은 보랏빛 대기가 일그러지며 언뜻 흰 불빛 같은 것이 내비쳤다고 생각된 순간이었다. 자장 먼저 사태를 알아챈 것은 율켄 이었다. " 나가라! 모두 저택 밖으로 나가라! 2진은 자리를 지켜라!" 우우우와아아......비명에 가까운 함성과 함께 저택의 모든 문이 안에 포진했던 병사들을 토해 놓기 시작 했다 그러나 율켄 자신은 밖으로 나가는 대신 몸을 돌려 성급하게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단 한가지밖에 없었다. 그러나 율켄과 거의 비슷한 순간에 사태의 위급함을 판단한 사람이 있었다. 예프넨은 동생을 와락 끌 어안고 계단으로 뛰어 내러가려는 순간, 달려오는 아버지와 마주쳤다. 아버지의 얼굴이 창백하게 일그러 져 있었다. "예프넨! 어서......" 그때 율켄은 예프넨이 보리스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는 당장 예프넨 의 품에서 보리스를 빼앗았다. 두 아들이 모두 상황을 몰라 아연실색하는 것을 보면서 율켄은 사납게 소리쳤다. "혼자 가러가! 보리스는 내 곁에 두겠다!" "하지만......!" 율켄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어떻게 제대로 도망을 치겠다는 거냐! 네가 지금 어떤 것을 지키고 있는지 모른단 말이냐! 어서 가라!" 예프넨은 감히 반대 의견을 말할 틈도 없었다. 아버지는 보리스를 옆구리에 끼다시피 한 채 어두운 복 도 넘어 사라져 버렸다. 그때, 다시 한번 저택의 벽이 울리는 것을 느껴졌다. 쿠르르르르...... 입술을 깨물었지만 어쩌는 수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복종해 온 아들이었다. 허리에 찬 윈터러를 꼭 쥔 채 그는 한 걸음에 세 단 씩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더러운 놈......" 율켄은 저택 안을 지키던 병사들을 이꿀로 저택 뒤쪽으로 빠져 나와 있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튀어나 온 거대한 괴물의 머리가 저택 지붕을 덮치는 것을 바라보았다. 만년설의 산이 갑자기 솟은 듯. 새하얀 대가리 주위로 성근 눈발이 날리는 듯했다. 보이는 거라고는 머 리와 목. 그리고 갈고리 같은 발톱이 줄줄이 세워진 한쪽 앞발뿐이었다. 나머지는 자줏빛으로 맥동하는 구름 속에 가려져 있었다. 써늘한 청록빛 눈동자가 잔인하게 번들거리며 목표물을 주시했다. 뱀처럼 생 긴 머리통은 언뜻 반투명했다. 몸 전체가 소화되지 못한 탓이리라. 병사들이 두려움에 떨며 웅성거리는 소리가 율켄의 귓가를 아프게 자극했다. 틀림없었다...... 트라바체 스 안에서 단 세명의 마법사만이 소환할 수 있다는 얼음 이계의 소화수 '크리갈'이다. 말로만 들었을 뿐 실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분명 칸 선제후를 섬기는 대마법사 종그날의 작품이리라. 그가 이곳까지 함께 왔을 줄이야. 그 정도로 동생의 위치가 높단 말인가, 아니면 더 큰 전략적 가치가 이곳에 주어져 있단 말인가. 흰 뱀처럼 생긴 머리가 드디어 입을 쩍 벌리더니 동쪽 지붕을 물어뜯었다. 우지끈, 서까래가 무너져 내 리고 기둥이 부러지는 소리가 이 곳까지 들렸다. 오랫동안 지키고 가꾸어 온 저택...... 그러나 사실 그것 은 문제조차 아니다. 부서진 집은 고치면 되지만 저 강대한 이계 소환수 '크리갈'은 이빨에서 맹독성의 액체를 쏟아내었다. 독액이 집을 적셔버리면 그 안에 있던 사람이 몰살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후 정화 마법을 써도 회복 되는 데 며칠로는 어림도 없었다. 자연 상태로 둔다면 3년 이상은 들어갈 수조차 없는 폐가 되어버린다. 율켄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전략적으로 저택에서 자신들을 내쭟는 것이 아무리 필요했다고 한들. 블라도에게도 역시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들인 저택인 것이다. 그것을 저렇게 더럽히면서 일순의 망설임조차 없다는 말인가. 으득...... 저절로 이가 갈렸다. " 저놈을 용서하면 내, 진네만 가문 사람이 아니다." 창백한 얼굴로 씹어 뱉는 소리였다. 그의 곁에서 말을 잊는 표정으로 하늘을 오려다보던 보리스가 문 득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화수 크리갈... 그 거대한 머리가 지붕을 씹어 부스는 것을 바라보는 보리스의 가슴이 이상할 정도로 싸늘했다. 2층에는 어머니의 방이 있었다. 형은 가끔 어머니가 그립4다고 말했지만 자신으로서는 기억조 차 없는 어머니였다. 늘 깔끔하게 청소되어 생전 어머니가 놓아둔 그대로의 모습으로 유지시키고 있는 그 방에 가끔 보리스를 데리고 들어간 형은 어머니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말하곤 했었다. 하지만 보리스로서는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기억나는 어머니는 초상화 속의 푸른 드레스와 창 백한 얼굴일 뿐, 그리고 방에서는 하녀들이 꽂아 놓은 말린 갈대나 들꽃의 냄새가 났을 뿐이다. 하지만 형이 저걸 본다면 슬퍼하겠구나...... 형과 떨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불안한 마음이 한시도 가시지 않았었다. 왜 아버지는 형과 자신을 떼 어놓았을까. 어린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는 건 무리라고 했지. 역시 형의 짐이 될 필요는 없는데. 아버지는 별 역할도 할 수 없는 어린 아들보다는 대를 이어갈 큰아들. 그리고 가문의 보물이 중요한 거다.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르지. 자신은 아직 진네만 가문에 중요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그의 불안함은 이상하게도 자신이 아닌 형에게 닿아 있었다. 오늘 내내 형에게 무슨 일이 벌 어질 것만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율켄은 보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곁에 다가선 집사, 아니 마법사 튤크에게 명령했다. "1진과 2진의 상태를 점검해 봐라. 얼마나 남아 있는지." 튤크는 말없이 긴소매를 한 번 휘둘러 허공에 영상을 열었다. 영상으로 드러나 저택 전면의 들판에는 흰 불길과 붉은 불꽃이 엇갈려 타올랐고 남은 병사 몇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전세가 불리한 것은 누 가 보아도 자명했다. 전면전을 할 만한 병사는 남아 있지 않았다. 보리스는 섬뜩한 기분으로 그것을 바 라보고 있었다. 율켄은 잠시 침묵했다가 곧 입을 열었다. "저택 양쪽으로 친다. 남은 병사들은 둘로 나눠라. 모두 풀이 길게 자란 쪽으로 다가가 몸을 숨기고 명 령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라고 해라." 보리스는 깜짝 놀랐다. "아버지, 저 괴물이 있는데 어떻게......" 율켄이 낼앨하게 내뱉었다. " 저놈의 몸은 절반이 이계에 남아 있으니 이 세계에서 살아 있는 자에게는 힘을 발휘할 수 없어." 그러더니 율켄은 성큼 걸어가 보리스에게 들리지 않도록 튤크에게 몇 마디 속삭였다. 튤크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두어 마디 답했다. 이윽고 마법사는 미리 약속해 둔 마법의 휘파람을 불어 어둠 속에서 병사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밖에 걸맂 않았다. 보리스는 율켄의 손에 이끌려 저택의 동쪽으로 돌아갈 병사들과 함께 풀 숲 아래에 엎드려 있었다. 반대쪽 병사들을 이끌고 있는 튤크가 마법으로 신호를 보낼 것이었다. "보리스, 넌 천천히 따라오다가 뒤로 빠져서......" 아버지는 입을 떼더니 잠시 머뭇거렸다. 뭔가 숨기는 거라도 있는 듯한 사람의 태도였다. "우리가 사움을 시작하거든 곧장 들판 뒤로 돌아 달려가라. 도망치는 거다, 알았지?" 보리스는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자신이 싸움에 도움이 될 리 없었다. 그렇다면 역 시 형과 떼어놓은 것은 형을 번거롭게 하지말고 조용히 잡혀 죽으라는 것일까? "어느...쪽으로요?" "에메라 호수 쪽." "거긴......" 이번에는 보리스도 놀란 가슴을 쉽게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것에는 붉은 눈의 유령이 살고 있지 않 은가! 보리스의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아버지는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유령 따위는 없어. 늙은 여자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야 어떻게 진네만 기문의 사내랄 수 있겠느 냐? 오히려 덕택에 그 쪽으로 달아났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호수가 보이는 근처에 숨어 있 으면 아버지가 싸움을 끝내고 데리러 가마. 그렇지, 검은 둥치를 가진 나무가 세 그루 서 있는 곳에서 기다려라. 알겠느냐?" 보리스는 제대로 대답할 틈이 없었다. 튤크가 율켄의 귓가로 마법의 속삭임을 보내 왔던 것이다. 가벼 운 째깍거림 같은 소리. 신호였다. 율켄은 손을 올렸다. "가라!" 벌떡 일어난 율켄은 아들을 더 이상 돌아보지 않은 채 들판을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버지!" 마지막이었을까......아버지의 그림자는 완전히 어둠 속으로 묻혀버렸다. 이계의 생물체가 굽어보는 가운데 같은 성을 가진 형제의 병사들이 서로 뒤엉켰다. 흰 불꽃, 붉은 불꽃 이 어우러져 타올랐다. 불라도 진네만은 칸 선제후가 하사한 흑날의 세이버(saber) '하그룬'을 뽑아들고 연신 닥쳐드는 병사들 을 요리했다. 등뒤는 호위병들이 든든히 지켜주고 있다. 오직 앞만 잘 보면 되었다. 어깻죽지를 꿰뚫었던 검이 곧장 다른 자의 이마를 찢고, 목을 찔렀다. 다시 한 바퀴 휘두르자 상대의 손목이 잘려 나갔다. 그는 저택을 떠나가 전 자신의 솜씨가 형만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 금도 그렇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먼발치에서 형을 찾으려 했다. 잡작스레 눈앞에서 맞닥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멀리서 싸우는 것을 보고. 기회를 보아 기습하리라 마음먹었다. 죄책감 같은 것은 없었다. 형이야말로 그때 음모를 꾸며 자 신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고 내 쯫은 처지 아닌가. 조금 늦긴 했어도 보답을 받기에 모자란 행동을 아 니다 싶었다. 어쨌든 형은 자신보다 늙었다. 얼마나 잘 휘둘러댈지 그 솜씨를 좀 보자꾸나! "율켄 진네만이다! 율켄 진네만이 여기 있다!" 병사들에게 형을 발견하면 외치라고 말해 두었었다. 이윽고 저택 동쪽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이곳까지 퍼져왔다. 블라도의 주름진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흘렀다. 이제 흑날의 하그룬이 은백의 윈터러로 바뀔 날도 멀지 않았다. 율켄은 블라도와는 반대였다. 그는 기를 쓰고 동생을 찾아내려 했다. 마흔이 넘었는데도 그의 검은 아직 매서웠고, 많은 병사들은 압도해서 달아나게 하고도 남았다. 동생이 이 손에 걸린다면... 그 목에 찔러 꿰뚫기 전엔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죄 많은 동생을 이 손으로 끝장내어 주리라. 그의 바램은 곧 현실로 다가왔다. 그것은 예상했던 것처럼 정정당당한 대결은 아니었다. 갑자기 그의 앞에 지금까지보다 많은 병사가 몰려든다 싶었다. 이를 악물고 상대의 머리며 손목을 후 려쳐 나갔다. 적은 줄어들었지만 계속해서 다시 가세해 왔다. 율켄은 갑자기 뭔가 이상하다는 기분을 느 꼈다. 답은 금방 왔다. "오후에 뵙고 다시 뵙수. 형님" 옆구리에 뜨끈한 기운이 번져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 다음이었다. 그만큼 동생의 목소리에 반색하는 기분이 컸던 것이다. "너, 너 이놈 블라도 진네만!" 푸욱...... 다시 한번 차고 날카로운 뭔가가 가슴 아래쪽으로 예리하게 쑤시고 들어왔다. 목구멍에서 뭔가가 솟구 쳤다. 귓가에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 어른!" 흥... 블라도는 비웃으며 돌아섰다. 집사 노릇을 하는 마법사인 튤크는 실력이 상당했지만 공격적인 마 법은 아무 것도 없었다. 놈쯤은 조금도 겁나지 않았다. "같이 죽지!" 번쩍! 그 순간 허공에 번뜩인 것은 자연의 번개였다. 그러나 블라도는 놀라 잠시 멈칫했다. 눈앞에 마법사가 있는 순간이었으니까. 이 놈이 모르는 사이에 전격 계열 마법도 익혀 놓은 건가? 튤크는 하늘이 내려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블라도는 눈앞이 시커먼 안개로 가려지는 것들 느꼈다. 안 되지...그는 뒤로 펄쩍 물러나며 자신의 마법사를 마음속으로 불렀다. 바로 등 뒤에 있었다. 블라도가 데려온 카 선제후의 마법사가 팔을 벌려 날개 형상의 수인을 맺는 순 간 돌풍이 몰아쳐 안개를 날려 보냈다. 그러나 검을 고쳐 잡은 블라도는 낭패한 심정으로 방금 전까지 형이 서 있던 곳을 노려보았다. 둘 다 사라져 버린 것이다. 3. 쫓김 혼자 남겨진 보리스는 침착해지려고 애쓰면서 수풀을 헤치고 나아갔다. 그의 두려움은 두 가지였다. 하 나는 보지 않아도 소리로 느껴지는 저택의 참상, 또 하나는 점차 가까워지는 에메라 호수였다. 소리는 점차 멀어졌고, 침묵은 한층 다가왔다. 어느 시점에서 그는 멈추어 섰다. 그리고 망설이다가 다시 걸었다. 그러나 또다시 멈췄다. 뭔가가 그의 뒤꿈치를 잠아당겨 느리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둠이 앞뒤로 깔려 이제는 가릴 수없이 캄캄해졌다. 더 이상 못 견디겠다는 심정이 되지 그는 다시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방향을 바꾸어 호수를 우회하기 시작했다. 물소리가 들린다. 아니면 착각이었을 것이다. 호수로 흘러드는 시내가 있는지 아닌지 보리스는 몰랐다. 아니면 차라리 비가 내리려 한다고 믿을 참이었다. 더 다기기고 싶지 않았다. 주위는 고요했다. 놀랍게도 그의 눈은 달빛에만 의지해서 아버지가 말한 세 그루 나무를 찾아내었다. 그것은 호수에서 2, 30 여 걸움 정도 떨어져 있었다. 나무는 꽤 커서 충분히 등위를 가려줄 것 같았다. 그래서 소년은 식은 땀을 닦으며 그 자리에 주저 앉아있었다. 달빛을 등진 까닭에 그림자가 앞으로 늘 어졌다. 몸이 무거웠다. 간단한 무장이었지만 열두 살 소년에게는 충분히 부담스러웠다. 아버지는... 죽지만 않는다면 그를 찾으러 올 것이다. 깊은 애정을 보여 준 일은 없는 아버지지만 책임 감만은 무엇보다도 강했던 거이다. 그렇지만 만일 돌아가신다면? 그러면 그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누가 알고 찾아 줄까? 보리스는 고개를 젓다가 다시 얼굴이 창백해졌다. 사실 더 큰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돌아 가신다면 그가 돌아갈 진네만 가문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삼촌은 아주 어렸을 때도 보리스를 죽 이러 한 일이 있었다. 지금도 달라지기는커녕 한층 더 집요하게 아버지의 아들들을 없애려 할 것이다. 형은...... 그때였다. 어두운 가운데 더 검은 그림자가 등뒤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을 정면으로 본 그는 비명조차 막혀버린 채 얼어붙었다. 감히 뒤를 돌아볼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눈을 부릅뜬 채 자기의 그림자 보다 몇 배나 큰 그림자가 주위를 뒤덮어 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쓰으으......쓰릅......씁. 거대한 곤충이 날개를 비비는 듯한 소리가 나다가 뚝 멎었다. 다음 순간, 보리스는 뭔지 모를 손아귀가 자신의 몸을 잡아채어 허공으로 번쩍 들어올리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목이 트이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아아악!" 소년의 몸은 지상에서 세 걸음 정도 뛰어오른 위치에 멈췄다. 보리스는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앞은 볼 수 있었다. 바닥으로 떨구어진 시선이 거대한 그림자를 더듬었다. 처음에는 알아보기 힘든 덩어리라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레 머리 위로 길쭉하게 날카로운 칼날 같은 것 이 솟아나는 것이 보였다. 하나가 아니었다. 둘, 셋, 넷...... 그것이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의 촉수, 또는 팔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 간이 걸리지 않았다. "......" 팔다리를 움직일 수 있는데도 꼼짝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다음 순간 무슨 일이 닥칠 지 알 수 없는 , 아니 실은 단숨에 갈기갈기 찢겨진 대도 이상할 것이 없는 시점에서 소년은 얼어붙은 듯 굳어버린 듯 어떤 판단도 내리지 못했다. 그리고...... 푸우우욱! 푸르스름한 빛이 번쩍, 하고 지나갔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머리 위로 역겨운 냄새나는 물이 흠뻑 쏟아 져 내렸다. 주르륵, 발 밑까지 타고 내렸다. 둥위를 움켜쥐었던 손아귀가 약해지는 것과 동시에 허공에 쳐드렀던 보리스의 몸은 바닥으로 떨어졌 다. 조금쯤 중심을 잡지 않았더라면 발목이라도 접질렸을 것이다. 그러나 형과 오랫동안 언덕 위에서 구 르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가지 자세를 익혀 온 보리스는 재빨리 무릎을 굽히며 한 바퀴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급히 일어나 고개를 들고 뒤로 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마치 물 빠진 가죽 주머니처럼 널브러진 기묘한 시체였다. 그 주위에는 지금 그의 온 몸을 끈적하게 적시고 있는 눅진거리는 액체가 잔뜩 흘러 있었다. 그 뒤에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검을 든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열과 어둠 소에서만 초승달처럼 푸른 광채를 내는 검. 그것은 윈터러...... "보리스! 너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야!" 얼굴에 물처럼 흐르는 땀을 손등에 씻어낸 예프넨은 울화가 치민다는 듯 소리질렀고, 곧이어 동생을 와락 끌어당겨 껴안았다. 이만큼이나 땀이 흐른 것은 더위나 싸움의 피로 때문이 아니라 오직 긴장 때 문이었다. 예프넨은 또래들에 비해 실력이 출중했지만 아직 경험 많은 전사는 아니었다. 동생을 닮은 소 년을 움켜진 괴물에게 달려드는 짧은 순간 동안, 그렇게 많은 땀이 흘렀던 것이다. 몸을 뗀 형제는 이제 둘의 몸으로 번진 기분 나쁜 액체를 보며 다시 한 번 몸서리쳤다. 보리스가 입을 열었다. "아 아버지가 여.여기......" "아버지가 이리로 가라고 했다고?" 예프넨은 순간적으로 알아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보리스를 이리로 보낸 것은 자신이 여기로 온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즉, 아무리 삼촌이라고 해도 에메라 호수로 그들 이 달아났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할 거란 사실 말이다. 에메라 호수는 오래 전부터 불길한 곳이었지만 실질적으로 고모가 죽은 뒤로는 아예 입밖에 조차 내서는 안될 금기의 장소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곳에는 소문만이 아니라 진짜로 괴물이 있었다. 그것만은 예프넨 또한 분명히 알고 있었다. 방금 봤대서가 아니라. 그는 이미 오래 전에 호수 근처를 홀로 배회하며 고모를 죽였다는 그 괴물의 정 체를 직접 보려 시도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방금 죽인 것과 같은 괴물이 한 마리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냈었다. 그리고 그것뿐이 아니라는 사실도...알고 있었다. "그런데 형은 왜...여기에 있어?: 보리스는 아버지가 형에게 마지막으로 외쳤던 말을 떠올리며 물었다. 분명 먼저 멀리 달아나라고 하지 않았던가? 예프넨은 동생의 청색 머리카락에 묻은 액체를 닦아주면서 잠시 말을 지체했다. 그래서 보리스가 들은 대답은 작고 간결했다. " 아버지를 기다리는 거야." "뭐라고?" 예프넨은 보리스가 알아듣지 못했다고 생각한 듯, 이번에는 보다 크고 분명하게 말했다. "아버지를 기다려. 난 아버지와는 생각이 달라. 내게는 보물보다 아버지와 너, 그리고 우리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더 중요해." "그렇지만 아버지는 윈터바텀 킷을 지키는 것이 형의 임무라고 해지 않았어? 그건 할아버지께서......" "그래, 할아버지께서 목숨을 걸고 얻었고. 또한 명예를 버려가며 지녀낸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머릿 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오갔지만 그는 어린 동생에게 일부러 간단명료하고도 단호하게 말했다. "보물은 이런 때 쓰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라면 애써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잖은가. 긴 세월을 두고 볼 때 진네만 가문의 이름이 윈터바텀 킷의 명성 보다 오래가지 못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는 보물의 주인 가운데 한 명이 되는 것보다 자신이 속한 가문의 일원으로서 행동하는 것이 중요했다. 진네만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보물의 이 름이 꺽어지더라도 그만 아닌가? 어차피, 보물보다 오래 살아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말이지. "그럼 아버지 계신 곳으로 돌아갈 거야?" 보리스의 질문에 예프넨 은 고래를 저었다. " 아니. 지금은 아니." "그러면?" 예프넨은 자신의 복잡한 심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몰랐다. 그래서 어스름 속에 잠긴 호수를 곁눈 질하며 동생을 바닥에 앉혔다. 그리고 첫 마디를 뗐다. " 싸움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해." 보리스는 동그란 눈동자를 치뜨더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아버지께서 그동안 돌아가실 지도 모르는데?" "아버진 안 돌아가셔." 밤바람은 젖은 몸에는 다소 싸늘했다. 두 형제는 몸에 붙은 액체가 점차 말라붙어 가는 것을 불쾌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보리스. 지금 우리 집안이 상대하고 있는 것은 단지 탐욕스런 삼촌 한 사람이 아냐. 삼촌의 뒤에는 칸 선제후가 있지. 그가 블라도 삼촌에게 천여 명에 달하는 군대를 빌려준 것이 단지 오랜 충성의 대가라 고만 보기는 좀 어려워. 진네만 가문은 기울긴 했어도 아직 몇 백 명 정도의 병사로 처치할 수 있는 집 안은 아니지. 그러면 결론은 뭘까? 뻔하지, 모종의 뒷거래가 있는 거야. 그리고 그 내용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지." 보리스는 형이 걸친 은백색 갑옷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스노우가드...윈터러?" "그리고 진네만 가문 전체의 충성과 협력 정도겠지. 아버지를 없애는 것은 당연한 전제고." "그런데?" 보리스는 들을수록 아버지가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형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 일까? 예프넨은 가라앉은 눈동자로 동생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을 나보다도 훨씬 잘 알고 계신 아버지다. 정면 대결이 승산없다는 것에 대해서 도, 누구보다 더 더. 나와 너를 이렇듯 빠져나가게 하신 것만 봐도 모든 것을 짐작하고도 남는 것이지. 아버지께서 승산없는 싸움에 목숨을 바치실 분으로 보이니? 결코 아냐. 아버진 너를 여기로 보냈어. 그 러니 아버지도 이리로 오셔," 아버지는 충성으로 바치는 사병들을 모조리 희생시켜서라도 실리를 택하실 분이다... 그건 틀림없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하지만 형은 내가 여기 와 있을 줄은 몰랐잖아?: 예프넨이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아버지와 자신의 머릿 속에 똑같이 삼촌의 군대로부터 안 전한 곳은 여기뿐이라는 생각이 떠올랐음은 분명했다. 그걸 짐작했기에 자신은 여기에서 아버지를 기다 리려 했던 거다. 그러나 삼촌이 없다 해도 호수는 사실 얼마나 위험한 곳인가? 어린 아이를 혼자 보낸 것은 도저히 이 해하기 힘들었다. 아버지는 이곳으로 도망쳐 왔을 때 보리스가 기다리고 있어도 그만, 불운하여 위험을 만났다 해도 그것으로 그만, 정말 그런 것이었을까? 예프넨은 이윽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왜 내가 몰랐겠니. 네가 위험하면 내가 그걸 느낄 수 있다고 전에 말했잖아." 분명 형은 처음 나타나서 ' 너 어째서 여기 있는 거야!' 라고 외쳤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뭔가를 알기라 도 하는 것처럼 더 캐묻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존재 가치를 알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충격도 어느 정도 가라앉고 숨고 고르게 되었다. 눈이 어둠에 점차 익숙해져 느낒 못했지만 그들은 바로 곁에 지나치는 사람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어둠게 있었다. 달빛이 높이 솟아 거대한 알이 깨져 흩어진 듯한 괴물의 시체를 비추자 보리스는 한 번 부르르 떨며 물었다. "저건 뭐였지...형, 저건 뭐였어? 저게 에메라 호수의 망령이야? 그걸 형이 해치운 거야? "아니." "그럼, 또 뭔가 있는 거야?" "그래." 검 끝을 바닥으로 향하게 짚고 있던 예프넨은 보리스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약간 떨었다. 실력과 운 이 언제나 동시에 겹쳐 주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는 동생을 지키겠지만...... 마른 입술을 핥으며, 그는 아버지가 어서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래야만, 아버지가 와야만 이곳에서 어 서 떠나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을 테니까. 붉은 눈의 망령을 보지 않아도 될 테니까. "놓쳤나!" 저택을 둘러싼 혼란은 수습되고 있는 중이였다. 율켄의 진네만 가문에는 좋지 않은 방향으로. 지휘관을 잃은 가문의 사병들은 침입자의 군대에 자꾸만 쓰러져 갔고. 이제 남은 숫자는 백여 명도 채 되지 않았 다. 그 가운데 완강하게 저항하는 것은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찾지 못했단 말이냐!" 블라도 진네만은 형을 눈앞에서 놓치자마자 곧장 마법사 종그날을 불러 미리 영지의 경계에 대기시켜 두었던 소규모 척후병들에게 신호를 보내도록 지시했다. 칸 선제후의 마법사인 종그날은 비록 자기 주 인의 멍에 따라 이 항쟁에 참가했지만 실제로는 블라도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특별히 싫어하지 도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그의 지시를 받을 입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칸 선제후의 마법사들을 총괄하는 대마법사의 위치에 있는 자신인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현재는 블라도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그것을 뜻했다. 척 후들은 신속하게 움직여 계획된 대로 외부 영지로 빠져나가는 길들을 차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충분한 시간이 흘렀는데도 율켄 진네만과 마법사 튤크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자가 아무도 없는 것이다. 기껏해야 순간이동이었을 테네 멀리 갈 수는 있었을 리가 없었다. 허공을 뿌려 두면 저절로 마 법이 깃들인 물체를 감지해내는 ' 힌텐의 가루'를 몇 주머니나 가지고 있는 척후들이니 투명화 따위의 마법으로 몸을 숨겼다 해도 웬만해서는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블라도도 화가 났지만 종그날도 기분이 나빴다. 그렇지 않아도 한 수 지위가 낮은 인간에게 지휘를 받 고 있는데 심지어 그 자에게 쓸모 없다는 평가를 듣게 되어서야 더더욱 체면 구겨지는 꼴일 것이다. 블라도가 척후들의 보고를 듣고 일그러진 얼굴로 종그날을 돌아보자 그는 속으로 뭔가가 치미는 기분 을 느끼며 차갑게 말했다. "내게 맡겨. '퀴레의 여든 개의 눈동자'를 써줄테니까." 종그날은 ' 너 따위의 일에 이토록 강력한 마법을 써 주니 감지덕지한 줄 알아라' 는 듯한 어조로 말했 고 블라도도 알아들었다. 그러나 블라도는 발끈하기보다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부턱드리죠." 쉽고 단순한 마법들은 연원도 오랜 까닭에 간단한 기능 위주의 이름들이 붙어 있지만 개량된 강력한 마법들에는 창시자의 이름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 가운데서도 다그네스 퀴레는 시야를 넓혀 먼 곳, 또는 가려진 곳을 꿰뚫어보는 마법에 일생을 바친 자였다. '야든개의 눈동자'는 그의 마법 가운데 두 번째로 강력한 것이다. 그것을 직경 10킬로미터에 달하는 범위 안에서 짚더미 속에 떨어진 바늘 한 개 조차 찾아낼 수 있는, 실로 두려울 정도의 정확도를 자랑하는 마법이었다. 종그날이 마법을 준비하는 동안 블라도를 비롯한 칸 선제후의 군대는 진네만 가문의 잔병들을 끝장났 다. 죽거나 달아나거나 숨어버려 더 이상 눈에 뜨지 않는 자들을 제하고 한 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달빛 먹인 석필로 그리는 마력의 원과 룬들이 모두 완성되었다. 그건 범위가 무척 넓었다. 무려 반경 2 미터에 달하는 원이었고 그 안에 수십 개의 겹쳐진 원과 룬, 주문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종그날은 원 중심에 그려진 삼각형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천천히 수인을 맺어 나가기 시작했다. 방 해하지 않기 위해 비켜난 병사들이었지만 대마법사가 이 정도로 준비된 마법을 쓰는 것을 보는 건 처음 이지라 호기심 어린 눈동자가 모두 쏠려 있었다. 하나, 허공에 수평으로 원을 그린 손가락이 지면을 찍는다. 둘, 입으로 세 가지의 짧은 단어를 외우며 손바닥을 마주 댄다. 셋, 겹쳐진 손을 천천히 올리며 뗀다. 한 가지 수인이 맺어질 때마다 석필로 그려진 룬이 불꽃을 내기 시작했다. 타닥, 타닥, 힘있는 필체로 그려진 룬이 타오르며 마력의 원안이 온통 불빛으로 밝혀졌다. 종그날의 감겨진 눈꺼풀에 노르스름한 빛이 어렸다. 마지막 수인, 종그날의 감겨진 눈꺼플에 노르스름한 빛이 어렸다. 마지막 수인, 종그날의 두 손이 눈을 가렸다가 앞으로 펼쳐지자 순간적으로 광채의 고리가 형성되며 원형으로 팍 퍼져 나갔다. 그것은 원을 넘고 병사들이 선 곳을 너머 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단숨에 뻗어나갔고, 사라져 버렸다. 번쩍이는 빛이 한순간 밀려온다고 생각했다. 빨랐다. 모언가 느끼려는 순간 사라져버렸고, 그래서 예프 넨과 보리스로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가 벌어진 일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눈앞의 허공이 물처럼 흔들리더니 갑자기 사 람의 모습을 토해 놓았다. 마치 거울에서 걸어나오기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두 사람이었다. 예프넨 이 먼저 외쳤다. "아버지!" 그리고 조금 달라진 어조로 다시 외쳤다. "어떻게...된 겁니까!" 율켄은 간신히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튤크가 몇 번에 걸쳐 회복 마법을 사용했지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블라도가 그를 찌른 흑날의 검 하그룬은 상처의 회복에 저지하는 강력한 마법 독을 자지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크게 날카롭지 않은 검인 하그룬을 명검 대열에 끼게 함드는 원인이기도 했다. 튤크는 가문의 마법사이자 평소에는 집사였지만 아들들과 그리 많은 대화를 한 일이 없는 약간 음험한 인물이었다. 그는 오직 주인인 율켄하고만 모든 일을 상의했다. 그는 가문의 장남인 예프넨에게 짧게 목 례로 예를 표한 뒤 낮게 말했다.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회복 마법을 쓰지 않으신 건가요?" 예프넨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튤크는 공격계열 마법을 갖지 못한 만큼 회복 등의 보조계열 마법에는 단연 발군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튤크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소용없습니다." 그때 보리스가 천천히 아버지에게로 다가갔다. 튤크의 어깨에 늘어져 기댄 율켄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두 아들의 얼굴을 번갈아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얼굴이 굳어졌다. 튤크가 대신 말했다. "예프넨 님께서는 어째서 먼저 떠나지 않으셨습니까." "......" 예프넨은 입술을 깨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설명해 보았자 통할 리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도 잘 아는 탓이었다. 그는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며 보리스를 흘끗 쳐다봤다. 튤크는 율켄의 얼굴을 내려다보더니 그가 하고픈 질문을 대신하듯 다시 말했다. "이곳에 있는 동안 이상한 일은 없었습니까?" "이상한 괴물에게 습격 당했어요. 하지만 형이 죽였어요. 저 윈터러로." 대답한 것은 보리스였다. 그는 형이 책망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급히 형이 잘한 일을 말하려 했다. "형이 아니었으면 저는 살아남지 못했을 거예요." 튤크는 형제의 뒤쪽에 아직도 남아 있는 가죽 주머니 조간 같은 시체와 점액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것입니까?" 튤크는 괴물의 존재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다시 물었다. "그것말고 다른 일은 없었습니까? 어떤 마법이라든가." 그때 예프넨이 말했다. "방금 전에 밝은 빛이 저택 쪽에서 몰려오는 것 같더니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예프넨은 자신이 한 이야기가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가지는지 몰랐다. 그러나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튤크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는 것을 보고는 당황해서 급히 물었다. "그게 뭡니까? 뭔가 끔찍한 것인가요?" 무의식중에 예프넨은 보리스의 손을 끌어당겨 잡고 있었다. 튤크는 율켄의 얼굴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들들이 아닌 아버지에게 말했다. " 짐작컨대 '퀴레의 눈동자'가운데 어떤 것이 발동된 것 같습니다. 종그날이라면 충분히 '여든 개의 눈 동자' 까지는 쓸 수 있을 것입니다. 도련님들이 번쩍이는 빛을 보셨다고 했으니 도련님들의 위치는 이미 발각 당했습니다. 다만 주인님과 저는 이동 중이었으므로 어떤 위치가 스캔되었는지는 불확실합니다." 이번에는 보리스조차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예프넨이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 튤크는 율켄의 몸을 바닥에 내려놓더니 다시 한 차례의 회복 마법을 썼다. 그는 단시 두 개의 룬 을 입 속에 외웠을 뿐이며 그 외에 어떤 복잡한 과정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튤크의 대답이 들려왔을 때 보리스는 차가워진 대기 속에 있는 옅은 물방울들을 보기라도 하려는 것처 럼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행운을 기도해야겠지요." 예프넨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았다. 즉, 희망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4. 다시 한 번 잃어버린 역시 형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일그러뜨린 입가는 어느새 미소로 변했다. 블라도는 자신이 형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 만 동시에 예상할 수 없었던 점도 많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뜻밖이랄지, 형은 오랫동안 기울어 가는 진네만 집안을 굳건히 지킬 정도로 강했다. 집안이 기우는 것 은 처음 뜻을 주었던 상위 가문, 즉 카츠야 선제후가 몰락해 감으로써 저절로 초래된 것일 뿐 형 율켄 의 잘못은 아니었다. 한 번 기울기 시작한 집안은 섬기던 상위 가문이 다시 부흥하지 않는 한 결코 돌 이킬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이다. 강하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해 가는 사위 가문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섬기던 자 를 배신하고 다른 가문에 가 붙는 것이 어느 정도로 천한 일인가 하는 것은 현재 자신의 처지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한때 섬기던 다른 선제후를 배신하고 들어온 탓에 지금처럼 칸 선제후의 심임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모욕을 견디고 지저분한 거래를 트지 않으면 안되었나. 그건 실로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차라리 섬기던 가문과 함께 조용히 몰락해 가는 것이 낫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세월 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진네만 가문처럼... 머리와 함께 서서히 기울어 가는 집안을 바라보는 동안 '한 번 뜻을 준 상대'를 바꾸어 되살아나고 싶은 충동은 그 얼마나 강한 것인가. 영혼을 팔아서라도. 그 길을 되짚어 돌릴 수만 있다면. 그러나 형은 견디었다. 변치 않고. 그러니 형을 얕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에메라 호수변이라......" 수백의 병사와 함께 말을 달리던 블라도의 입안에서 나지막이 맴돌다가 떨어진 단어는 오래 잊고 있었 던 섬뜩한 어감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오싹한 오한이 잠시 입술을 질리게 했다가 이윽고 사그라졌다. 이제 가고 있는 그곳에 진네만 가문이 살아온 롱고르드 지방 안에서 오랫동안 공포의 대상이 되어 온 장소였다. 그리고 형제에게는 또한 금기의 장소였다. 그 예프고 상냥하던 예니치카가 눈이 불게 변해서 짐승처럼 옷을 찢어발기며 미쳐 날뛰던 모습이 새삼스레 눈앞에 선해진다. 부르르...... 블라도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누이는 젊은 모습으로 죽어 이제 더 자라지 않는데...나이 들어 늙 어 가는 자신은 이제 살금살금 다가가 누이의 눈을 가리던, 저 못생기고 약해 빠진데다 치기만 가득하 던 작은 오빠가 아닌데. 어려서부터 작은 일로도 자주 반목하던 형제가 유일하게 함께 아꼈던 어린 예니치카였다. 갈대꽃과 새 의 깃털을 사랑하던 금빛 눈동자의 어린아이, 찾아 헤매는 두 오빠를 피해 장롱 속에 숨었다가 잠들어 버렸던 개구쟁이 누이동생... 그리고 초록빛 사과처럼 풋풋하게 자랐던 처녀.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형제는 서로 용서할 수가 없었다. 작은 오빠의 꾐에 빠져 에메라 호수에서 약 혼자를 찾아 헤맸고. 큰오빠의 손에 결국 죽었다. 피어 보지도 못한 꽃이, 그렇게 좋아하던 아기도 낳아 보지 못하고서. '그건 당신 탓이다.' 누이동생이 돌아온다면 과연 누구를 더 탓할 것인가. "거의 다 왔습니다1" 블라도는 손을 들어 병사들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달려온 방향을 등진 채 반원형으로 진을 쳤다. 검과 창을 든 병사들이 수풀 속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활을 든 병사들은 화살을 팽팽하게 메긴 채 눈을 빛내 며 대기한다...... 형을 죽일 테다. 누구를 위해서였든. 어느새 그가 지금껏 수모를 견디며 살아온 그가 되어버린. 그 형 을, 죽일 것이다. "이쪽입니다! 발자국이 있습니다!" 에메라 호수는 오래 전부터 늪이 되어버린 까닭에 주위는 온통 진창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발자국이 남지 않을 리 없지만 형이 이곳에 있다면 튤크도 있을 테고, 그가 설마 발자국이 남게 내버려 두었을리 없다고 생각했다. 블라도는 마음속으로 이곳에는 두 조카밖에 없는 것 같다고 단정했다. "원을 좁혀서 수색해라!" 예프넨과 보리스는 아내도 자식도 없는 블라도의 단 둘뿐인 조카들이었다. 블라도는 만일 둘 중에 하 나라도 계집애였다면, 그리고 조금이라도 예니치카를 닮았더라면...혹시 마음이 흔들렸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카들은 예니를 닮지 않았다. 두 소년에게는 예니가 가졌던 금빛이라고는 없었다. 머 리털도. 눈동자도. 그 애들에게는 아무런 애정도 동정심도 없다... 블라도의 누런 눈동자를 둘러싼 잘다진 주름들이 감정 의 동요를 드러내듯 꿈틀거렸다. 그 애들이 질러대는 비명에 귀를 막고 달아나도록 해주지... 그 애들을 죽여서 형이 내 앞에 뛰쳐나오도록 하고 말 테다! 호수 남쪽은 기 진창이 이어져 있어 가까이 다가가기 힘든 까닭에 병사들은 동, 북. 서로만 포위를 좁 혀 들어갔다. 이윽고 에메라 호수가 가까이 보이기 시작했다. 죽은 나무들이 검게, 또는 희게 얽혀 이미 사라진 생명 을 가장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많은 것들이 죽어가고 죽어갈 호수에는 유백색의 동물성 기름이 떠서 번들거리고...... 그것은 기억 속의 호수였다. 이제 다가갈 곳을 정확히 보기 위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곳을 완벽 히 봐 두기 위해서 블라도는 마법사에게 빛을 요구했다. 파앗! 대낮 같은 광채같은 광채가 호수가 뱉어낸 불덩이처럼 솟았다. 사방 20미터 안팎으로 풀숲을 나는 날 벌레들조차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블라도 뿐 아니라 수백 개의 달하는 눈동자가 거기에서 움직이는 무 엇인가를 찾아내려고 달려들었다. "가장 먼저 찾아내어 외치는 자에게 1천 엘소의 상금을 내리겠다!" 외침이 들려오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만 그것은 블라도가 기대한 것과는 약간 다른 소 리였다. 그리고 한 명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곡 다시 한번의 비명들이 허공을 찢고 갈랐다. "자, 지금입니다. 기십시오." 튤크의 목소리가 떨리지도 격앙되지도 않았다. 늦었으니 이제 그만 침대로 들어가 자라고 하는 것처럼 건조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을 뿐이었다. 예프넨은 턱을 약간 떨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끝끝내 그에게 익숙해질 수는 없었다. 이제는 더 노력해 볼 시간도 없으리라. 바로 다음 순간, 그들에게 절대절명의 의미라 할 만한 빛이 주위를 휘황하게 비췄 다. "행운을." "난 가지 않아요." 그제야 튤크의 무표정한 얼굴에 약간의 변화가 일었다. 그는 반박하지도 않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가십시오. 아버님의 뜻을 아신다면."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뜻이 있다면 내게는 내 뜻이 있습니다. 내게는 한낱 무구 따위보다 아버지의 존 재가 더욱 소중하다는 거죠." 율켄의 고개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시선은 이미 아들을 향해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쏘 아보았다. "......" 말하지 않는 아버지를 향해 예프넨은 말했다. "뭐라 하신다 해도 제 뜻은 변치 않습니다." 튤크는 여전히 주인의 눈빛만으로도 하고 싶은 말을 알아챘다.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희망 없는 것에 '뜻'을 거지 마십시오." "아버지는 희망 없는 곳에 뜻을 거지 않으셨던가요? 바로 카츠야 선제후 말입니다." 예프넨은 마치 튤크가 통역하는 사람에 불과한 양 아버지를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진네만 가문은 희망 없다고 해서 한번 결정한 '뜻'을 꺾는 자식을 낳는 곳이 아니잖습니까. 훌륭한 무 구란. 최악의 순간에 함께 하기 위해 그토록 귀하게 지켜지는 것 아니던가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보리스는 아버지의 불길 같은 눈을, 그리고 형의 단호한 눈동자를 보았다. 자신은 거기에 끼여들 수 없는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어렴풋하게 둘의 대립을 이해했다. 예프넨은 아버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다시 입을 열어 보리스를 불렀다. "보리스," 보리스는 한 걸음 다가갔다. 형의 손이 다가와 손목을 쥐었다. "너도...알 수 있겠지?" "난......" 보리스는 자신의 뜻을 듣지 않는 진네만 가문의 자식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형이 아버지를 생 각하는 만큼이나 자신 역시 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형과 아버지가 없는 세 상에서 혼자 살아남을 생각 따위는 없다는 것, 역시도. 그러나 한 마디도 말이 되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린 듯 입술을 굳게 닫혀 있었다. "우린 적어도 함께 죽는 것을 선택할 수 있어. 그것을 명예로 생각하자. 보리스." 보리스는 그 말이 형이 평소 해오던 말과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아니라 면 결코 이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아는 예프넨은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죽자고 말하는 사 람이 아니었다. 지금 그는 동생을 살릴 방법을 도저히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예프넨은 더 말하지 못한 채 잠시 동생을 내려다 봤다. 그리고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억지로 미소를 지 어 보였다. 보리스는 문득 형의 눈동자가 푸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참으로 익숙한 빛깔이었다. 항상 보아 와 사? 아니야... 그제야 형과 들판에서 구르며 웃을 때부터 내내 느꼈던 그 이상한 직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 다. 형의 미소 때문이었다. 어쩐지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던 그 미소. 그것은...... 초상화 속의 어머니를 닮아 있었다. "이제...갑시다." 예프넨은 피가 끓는 기분으로 중얼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튤크는 대답 없이 아버지가 일어나는 것을 도왔다. 끝까지 말이 없을 줄 알았는데 뜻밖으로 목소리가 들렸다. "두 분은 맨 뒤로 오십시오. 제가 죽는 것을 볼 때까지 앞으로 나서 마십시오." 예프넨은 문득 말문이 막혔다. "......" 7sis이던가...처음 진네만 자문의 집사가 되었을 때부터 튤크는 마지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실체가 지 나간 자리에 대산 남아 있는 그림자. 정확히는 아버지의 그림자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었다. 아버지의 뜻이 이행되도록 돕거나, 대신 이행하는 사람. 그림자에게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을 리 없다. 그도 그랬다. 그가 아버지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과 동 생을 위해서 죽겠다고 하는 시점에서조차 어떤 친근감도 느낄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심정. "저기다!" 그런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그것을 수십 명이 한꺼번에 내지르는 lq명에 무뎌 버 렸다. 상황을 알아볼 겨를도 없이 그들은 늪을 향해 다가갔다. 슈슈슈...콰쾅! 번쩍거리는 불빛과 더불어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음이 계속되었다. 예프넨은 문득 이상한 것을 느꼈다. 저렇게 강력하고 공격적인 마법은 이미 다쳐서 기력이 없는 아버지를 비롯한 네 사람을 상대로 쓸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도 삼촌도 이미 이곳에서 맞닥뜨릴 다른 상대에 대한 준비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제 곧 보게 될 테지. 눈이 벌겋게 된 블라도는 병사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아니, 실은 헤칠 필요도 없었다. 병사들은 이미 명령 따위는 귀에 들리지도 않는 듯 정신 없이 우왕좌왕하며 달아나려 애쓰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늪을 두고도 블라도가 침착할 수 있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그는 무엇이 나타날지 알고 있는 것이다.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놈의 얼굴을 똑바로 볼 마음은 있었다. 천사 같은 예니를 앗아간, 저 망령의 붉은 눈을. 늪가에 도착한 튤크는 팔에 안긴 율켄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준 비되었느냐고 묻는 것처럼. 율켄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상처가 깊어 입을 열기도 힘들었지만 어떤 말을 하고자했다면 억지로 목살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말없이 튤크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키고, 검을 잡았다. "그래...드디어......" 에메라 호수는 거대한 지옥처럼 영원히 가라앉는 무엇이었다. 눅눅하게 젓은 관목의 울타리, 서서히 썩 어 가는 나무들로 가려졌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속내로 그는 한 발짝씩 다가갔다. 삶의 종말이 내는 고약한 악취가 물씬했다. 시체들, 썩은 시체들의 늪. 처음에는 작은 목소리였다. 그는 이름을 불렀다. "예니......" 시체가 썩으면 어디에 버리나. 그 발톱은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동시에 할퀴어 간다. 한 번 낙인이 찍 히면 그걸로 끝인 것이다. 망령에 사로잡힌 혼, 다시는 위로 받지 못할 곳으로...... 예니의 시체를 일부러 늪까지 가져와 버릴 때, 그 자리에는 율켄도 블라도도 와 보지 않았었다. 동시에 맞은편에서 더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외쳤다. "예니!" 형제는 사실 서로를 직접 상대하고 싶지 않은 것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용서받으려 하기엔 누이의 선한 혼도 악령으로 변할 정도로 썩었을 거다. 누이는 용서하지 않아. 결코, 결코, 이제 해묵은 빚은 형제끼리 청산할 때지! 율켄은 몸 안에서 서서히 솟아오르는 정체 모를 기운에 의지하여 감을 움켜쥐고 늪을 둘러싼 검은 숲 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병사들의 비명은 그치지 않고 있었다. 단 한 번 들려온 블라도의 목소리는 다시 없었다. "으, 으, 으아아아악!" "살려 줘...제발......!" 오랜만에 본 에메라 호수, 아니 늪은 바닥으로부터 서서히 맥질해 올라오는 더러운 동물성 쓰레기들로 인해 반쯤 메워지다시피 한 상태였다. 그 정체는 바로 오랫동안 죽어간 시체들이었다. 그것은 누군가는 알고 누군가는 영원히 모르는 롱고르드 지방의 비밀이었다. 호수는 다시 한 번 싸늘한 살갗을 퇴비가 될 때까지 썩히는 임무를 맡는다. 그 세월이 한 해, 열 해, 스므해가 지나면서...... 이 호수가 한때 녹옥빛 맑은 물 때문에 '에메랄드'라고 불렸다는 사실을 그 누가 믿을 것인가. "호수를 썩게 한 건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원한이지." 그리고 드디어 형제는 서로를 방어할 수 있는 위치에서 마주보았다. 그건 두 번째 들려 온 블라도의 목소리였다. "자, 저 시체들 속에 예니의 금발도 있는가 한 번 찾아볼까?" 튜르는 보호구의 마법을 시전하여 주인의 몸을 보호했다. 반투명한 막에 둘러싸인 형과, 그가 입은 깊 은 상처를 본 블라도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자, 협력해서 먼저 저 억울한 시체들부터 없애버릴까?" 블라도의 뒤에는 종그날이 있었다. 그는 양손에 불꽃을 불러드려 다가드는 시체와 늪의 괴물들을 지져 버리고 있었다. 보리스를 처음 공격한 놈과 같은 종류의 그 괴물들은 불꽃이 닿을 때마다 퍽, 퍽. 소리 를 내며 더러운 액체를 내뿜었다. "아니면, 저 붉은 눈의 악마가 나타날 때까지 묵은 원한의 깊이라도 재어 볼 건가?" 블라도는 흑날의 하그룬을 반 바퀴 돌리더니 금방이라도 찔러 넣을 듯 자세를 보였다. 여유 만만한 태 도였다. 이제 병사들은 거의 다 달아나고 없었다. 늪에서 상체만 내민 시체들이 흔적뿐인 눈으로 형제를 지켜 보았다. 율켄의 검이 약간 떨리다가 고요해졌다. 예프넨은 늪을 가득 메운 녹색 진흙과 썩은 시체더미를 보며 발열에 가까운 오한을 느꼈다. 그의 존재 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고 있는 병사들도 보았는가. 늪을 사이에 둔 채 아버지를 노려보고 있는 삼촌이 검을 뽑아든 것도 알았다. 긴장감은 터질 듯했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한 가지 때문에. 그래, 언제지, 놈이 나타나는 것은? 시체를 먹고 강해지는 붉은 눈의 악령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언제지? 형과 등을 대고 선 보리스는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 한 가지 할 수 있 는 것이 있다면 형의 등뒤에서 서 있다가 첫 번째 들어오는 공격을 형 대신 맞는 정도일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그 임무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도 아버지도 마찬가지로 이 집안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흘끗 돌아본 형은 윈터러의 손잡이를 손목에 부르르 떨릴 정도로 꽉 쥐고 있었다. 그리고 예프넨이 아 직 깨닫지 못한 사이, 보리스는 예프넨의 몸을 감싼 스노우가드의 은백광이 서서히 밝아지는 것을 느꼈 다. 뭔가 다가온 건가? 바람이 시잇거리며 울었다. 마치 거대한 뱀이 수풀에 배를 깔로 지나는 듯한 소리였다. 동생의 목소리 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형, 스노우가드가......" 이제 스노우가드의 공채는 시야를 일부 가릴 정도로 광기 어린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예프넨의 검이 하얗게 번쩍였다. 예프넨은 보다 구체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갑옷이 죽은 냄새를 맡은 거다. 다가오는 자를 스노우가 드가 먼저 느끼고 있는 거다. 그그그그그그그...... 들린다. 아니, 아니...그래, 들린다. 그렇게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어둠 너머에서, 무언가가 다가온다. 그것은 붉은 눈을 가졌고, 검은 불꽃으로 감싸진 채...... 보리스는 귀가 아닌 자신의 정신 속으로 파고드는 섬뜩한 목소리를 똑똑히 들으며 그 자리에 목 박혀 있었다.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목소리와 함께 다른 것 역시 다가오고 있는데도. 예쁜 아이구나. 흐, 흐, 흐. 2장. parting 1. 첫 저녁 식사 보리스는 풀밭에서 눈을 떴다. 밝은 햇빛이 얼굴에 따뜻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는 검 하나를 지녔을 뿐 빈 몸이었다. 주위에는 아무 도 없었다. 그는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고 이곳이 전혀 익숙하지 않은 곳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여긴 어딜까? 그는 곧 전날 밤의 일을 기억해 냈다. 형과 등을 대고 서 있었던 것까지는 기억났다. 가쁜 숨소리도 턱까지 뜨겁던 것도 생각해 낼 수 있었 다. 그러나 그 다음은? 큰 충격이 머릿속을 휘저어 버린 것처럼 이후는 혼돈 뿐이었다. 보리스가 기억의 부재가 혼란스러운 나머지 그때 자신이 기절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뭔가... 보았던 것도 같은데...... "보리스! 깨어났구나?" 그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 맞은 듯한 기분이 되어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 물 담긴 나무 바가지를 든 채 걸어오고 있는 예프넨을 보았다. 그의 입술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 말이 떨어졌다. "......형?" 예프넨은 얼떨떨해하고 있는 동생에게 바가지를 건네주며 빙긋 웃었다. "그래,임 마 너한테 나 말고 형이 따로 또 있기라도 했냐?" 보리스는 물을 마실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예프넨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왜인지 몰랐다. 갑자기 그의 눈에서 눈물이 두 줄기 주룩 흘러내렸다. 예프넨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예프넨이 다가와 이마를 짚는 순간 보리스가 바가지를 떨어뜨리고 형을 와락 껴안았다. 쏟아진 물이 둘의 바짓가랑이를 적셨다. 예프넨이 뭔가 묻기도 전에 보리스가 먼저 말했다. "아냐, 형... 나,난. 그냥, 그냥 반가워서 그래......" 실은 보리스도 그 이유를 몰랐다. 어젯밤의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장면들만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다른 기억은 멀쩡한데 그 부분만이 생각나지 않다니. 예프넨은 별 말 없이 보리스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고는 몸을 땠다. 그리고 무릎을 꿇어 동생과 눈높이 를 맞추더니 뺨을 쓰다듬었다. "자식, 너 뭔가에 많이 놀랐구나." 마음이 진정되고 나자 둘은 쏘다진 물 대신 바가지를 집어들고 직접 샘으로 향했다. 그리 먼 곳은 아 니었다. 주위는 마치 고향 롱고르드의 그곳이 그랬듯 사방이 들판이었다. 샘은 작았다. 동근 돌로 빙 둘러져 있고 아마 예프넨이 끊어낸 듯한 바가지의 끈이 한쪽 말뚝에 남아 있었다. 두 형제는 물을 실컷 마신 후 바가지를 다시 처음처럼 매어 두었다. "형,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귀렘 가문 영지의 일부인 하타 고원이야, 롱고르드는 여기서 남쪽이지. 너도 이곳의 이름을 들어보지 않았니?" 예프넨은 뭐가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보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 다. "어떻게 하룻밤도안 그렇게 멀리 올 수 있는 거지?" 예프넨이 팔을 저어 샘 뒤쪽을 가르켰다. 거기에는 낯선 말 한 마리가 매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밤새 저 말을 타고 왔다고 생각하자 다시 한 번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흔들리는 말 위에서 계속 깨어 나지도 않아고 기절해 있었다는 건가?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정신을 잃을 수가 있는거지? 그 다음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보리스가 형의 태독 너무도 밝고, 또 주위가 평화로운 것에 이끌려 나쁜 대답이 나올 것은 기대도 하지 않은 채 물었다. "아버지는 어디 계셔?" "아......" 예프넨은 입을 벌렸지만 그리 빨리 밥하지는 못했다. 보리스가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눈이 동그래지자 예프넨은 급히 말을 이었다. "아. 그러니까..여가가 아닌 다른 데로 가셨어. 튤크 집사하고... 그런데 어딘지 정확히 모르겠어. 워낙 엉망진창이어서 흩어져...달렸거든." "그럼 어떻게 아버질 찾아?" 예프넨은 빠른 목소리로 대꾸했다. "튤크 집사가 우리한테 마법으로 연락을 줄 거야." 보리스가 그렇구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럼 그 동안은 우리끼리 있어야 되겠네? 그럼 우린 집으로 돌아가도 되는 거야? 저어, 그럼 블라도 삼촌은?: "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조금 무리지만....." 예프넨이 말을 흐리자 보리스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삼촌의 무서움은 보리스가 다섯 갈이 었을 때 이미 충분히 경험한 바 있었다. 그때 삼촌은 혼자 아버지를 찾아와서 마당에서 놀고 있던 보리 스를 붙잡아 옆구리에 낀 채 우물에 빠뜨리려는 시늉을 하며 싱글싱글 웃었다. 아버지가 어떻게 삼촌을 쫓아낼 수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처음ㅇ네 삼촌이 장난으로 겁을 주는 줄 알고 까륵거리며 웃었었다. 그러나 점점 시커먼 우울이 무섭게 느껴질 즈음이 된 후에도 삼촌 은 그 '장난'을 멈추지 않았고 아버지가 그 앞에서 삼촌과 뭔가 어려운 대화를 하셨던 것은 기억하고 있 었다. "우리 고모할머님한테 갈까?" 예프넨이 불쑥 제안하자 보리스는 의아해서 눈을 깜빡였다. 고모할머니라면 한 사람 뿐인데 보리스는 아직까지 만나는 일이 한번도 없었다. 아버지의 고모지만 아주 멀고 낯선 존재였다. 아마도 아버지와는 속한 정파가 다르다고 들었다. 서시조차도 오가지 않는 사이인데 형은 고모할머니를 잘 아는 걸까? "쟈닌느...고모할머니?" "그럼. 3월의원파의 스무렌 의원이 시장으로 있는 엘머 시에 계실거야. 좀 걸리긴 하겠지만 늦어도 한 달 안에 갈 수 있어." "그렇지만 고모할머니께서 우릴 환영해 주실까?" 예프넨은 고개를 움직여 머리카락이 양쪽 어깨에 번갈아 닿도록 하더니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그건 확신할 수 없는 무제야. 하지만 아버지께서...우릴 찾으시기 전에 딱히 갈 곳도 없거든. 고모 할머니가 속한 3월의원파는 아버지와 완전히 대립하고 있는 곳은 아니라서...아, 전혀 대안이 없는 것도 아니긴 하지." "뭔데?" 예프넨 형은 세상에서 가장 곤란한 이야기를 하려는 사람처럼 어깨를 늘어뜨리더니 대답했다. "카츠야 선제후." "아아." 보리스도 말이 없었다. 어려서 잘 모르긴 했지만 아버지가 섬기고 있는 아주 높은 분이라는 것만을 알 고 있었다. 예프넨은 아버지를 따라 아주 높은 분이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예프넨은 아버지를 따라 몇 번 간 일이 있으니 알고 있지만 보리스로서는 본 일도 없는 데다 무척 어렵게까지 느껴지는 대상인 것이 확실했다. 게다가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많다고 들었으니 이런 입장인 형제가 가 봤자 그다지 좋은 대접을 기대하긴 어려울 성 싶었다. "형... 우리 그냥 아무 데도 가지 않으면 안돼?" 예프넨은 동생이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약간 더듬거리다가 말했다. "왜?. 그들이 환영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 "그것도 그렇지만...낯선 사람들한테 받아들여 달라고 애걸하는 것보다 그냥 우리끼리 평민들처럼 잠시 살 수도 있잖아. 그리고, 그리고 아버지가 곹 연락해 오실 거 아냐? 그러니까 잠깐일 뿐일 테고, 또......" 예프넨은 우울한 것도 같고 답답한 것도 같은 표정으로 동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답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싶은 듯한 얼굴이었다. "보리스. 그런 생활은...너나 나는 저택에서 죽 하인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평민들처럼 사는 것은 많이 힘들 거야. 난 가진 돈이 그리 만지 않아. 넌 아직 어려서 잘 모를 거야. 돈이 없는 평 민들의 생활은 무척 고달프거든. 일단 삼촌이 이겨서 저택을 차지한 이상 얼마간은 다른 이로 바빠서 우릴 쫓아오지는 못하겠지만 우리가 윈터바텀 킷을 갖고 있는 이상 그리 오래 내버려두지는 않겠지. 그 말고 다른 위험도 얼마든지 있어." 보리스는 형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 상황을 심각하게 느끼지 못했다. 그에게는 든든한 형이 있었다. 뭐가 겁날 게 있단 말인가. 더구나 곧 아버지가 그들을 찾을 텐데. "난 괜찮아. 잠깐 뿐인데 그거도 목 견딘다면 아버지가 진네만 이름을 가질 자격도 없다고 꾸짖으실 거 야." 그렇게 말하며 보리스가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형을 안심시키고 싶었다. 걱정거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예프넨은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어차피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일 지도 모르지. 우선 가장 가까운 마을부터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 그런 다음에 어느 쪽으로 갈지 천천히 생각해 보자." 마을을 찾아냈을 때는 이미 저녁 무렵이었다. 오는 동안 두 형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점검했다. 당연히 예프넨이 지니고 있는 두 가지 무구, 위너바텀 킷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오직 지켜야 하는 것들이니까. 그 다음으로 예프넨은 허리에서 자궂 주머니를 끌러 집에서 탈출하기 전에 준비해 둔 금화들을 보여 주었다. 아노마라드에서 T는 큼직한 1백 엘소 금화가 열 개 가량, 그 절반 가치를 지니는 1백 고블룬 금화가 30개쯤 되었다. 그 정도면 넉넉히 써도 한달 이상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은 없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돈이 될 많나 물건들이 있었다. 남자들이다 보니 그다지 값나가는 장신구는 가진 것이 없 었다. 예프넨은 사파이어가 아로새겨진 손바닥만한 덮게 거울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보리스는 아무 것도 없었다. 주머니에서 나온 거라고는 저녁을 못 먹어서 대신 넣어 둔 말라비틀어진 빵이 고작이었다. 그거라도 형제는 유쾌하게 나눠 씹으며 마을을 도착했다. 그들은 자리를 잘 몰라서 마을의 이름이 뭔지는 몰랐다. 사실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도 않았다. 보리 스가 뭔가 새로운 모험이라도 시작하려는 것처럼 약간 들떠 있기까지 했다. 마을은 작지 않았다. 그들은 들판을 가로질러 왔지만 입구에는 멀리서부터 이어져 온 듯한 길이 뚫려 있었다. 그들은 경비병에게 신분이나 가문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껏 번화한 거리라고는 롱고르드 지방에서 장이 서는 카즈난 시에 나갔을 때 본 것이 전부였다. 그 곳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북적거림이 곳곳에 가득했다. 사람 사는 곳이었다. 보리스가 촌뜨기처럼 두리번거리지 않으려 애썼지만 실상은 계속해서 그런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다. "저. 이 근처에 여관이 어디 있습니까?" 행상 아주머니에게 물어서 찾아간 여관은 다락이 높게 솟은 2층 건물이었다. 여러 마리의 말이나 마차 를 타고 온 여행객들이 입구를 메우고 있어서 그들을 피해 들어가는 것부터 애를 먹었다. 말 한 마리를 함께 탄 그들은 그야말로 단출한 손님이었다. "어서 오십쇼!" 커다란 목소리 때문에 보리스는 깜짝 놀랐지만 그건 그들에게 지른 소리가 아니라 뒤따라 들어오고 있 던 네댓 명의 모험가들을 환영하는 목소리였다.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곧장 형제를 앞질러 카운터로 다 가간 그들은 저들끼리 쉴새 없이 뭔가 지껄이며 방 두 개를 주문했다. "형, 방은 하루 빌리는 데 비싼거야?: 우스운 일이었지만 그건 예프넨도 몰랐다. 여행을 한 일은 있었지만 들었던 여관은 항상 이보다 훨씬 좋은 곳들이었고. 시중드는 하인들과 함께였으므로 한 번도 직접 카운터에서 계산한 일이 없었던 것이 다. 진네만 가문은 전통적으로 무인의 가문인 까닭에 돈을 직접 만지는 것을 약간 천시해었다. "방을...하나 주십시오." 커운터의 여급은 방 가격을 말하지도 않고 벽에 죽 붙은 고리에서 열쇠를 하나 떼어 내놓았다. 예프넨 은 금화밖에 없었기 때문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말로 돈이 오가는 일에 대해서는 서툴렀다. 여금이 묘한 눈길로 예프넨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예프넨은 그것이 왜 빨리 돈을 주지 않느 냐는 뜻이라고 판단했다. "얼마죠?" 여급은 입술 끝을 실룩이며 애매한 미소를 보이더니 '10엘소' 라고 말했다. 예프넨은 50엘소의 가치를 가지는 고블룬 금화를 한 개 내었다. "어머, 젊은 분이 큰돈을 가지고 다니시네요." 여급이 거슬러 준 은화들을 집어 주머니에 넣고 돌아서려니 여급이 피식피식 웃으며 뒤통수에 대고 말 을 걸었다. "저년 식사는 안하나요? 내일 아침은?" 다시 은화 몇 개를 꺼내 주고 계산을 했다. 또 돌아서려는데 여급이 이제는 완연히 비웃는 듯한 어조 로 다시 한 번 말했다. "메뉴 정도는 고르지 그래요?" 집에서 준비해 주는 음식만 먹었던 그들이었다. 이런 곳에서 뭘 주문해야 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예 프넨은 얼굴을 붉히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대꾸했다. "그냥 적당한 것으로 주면 좋겠소. "아아. 난 귀한 집 아드님들이라 아무 음식이나 입에 못 댈 줄 알았죠." 카운터 주위를 오가던 급사들마저 킬킬거리가 시작했다. 사실 별로 우스운 상황은 아니였다. 그들은 일 부러 노골적으로 비웃기 위해 웃는 것 같았다. 예프넨은 약간 화가 났지만 꾹 참고 테이블로 걸어가 앉았다. 보리스는 형의 얼굴을 쳐다보고 상황을 깨달았지만 일단은 잠자코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음식은 금방 나왔다. 그러나 곧 더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다. " 이 정도 음식쯤이야 충분히 드시겠지. 안 그래요?" 음식을 가져온 예프넨과 비슷한 또래의 급사는 비아냥대는 듯한 말투로 지껄이더니 두 형제의 앞에 널 찍한 그릇 두 개를 내려놨다. 보리스는 그릇 안을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죽이나 수프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 그 안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보리스는 기겁하 여 의자를 뒤로 물렸다. 드르륵, 소리가 나는 순간 등뒤에서 몇 명이 거침없이 웃어젖히는 소리가 들렸 다. 예프넨은 가만히 그릇 속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열 마리, 스무 마리... 새끼 손가락 한 마디 만한 허연 벌레들이 묽은 죽과 뒤엉켜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뱃속의 것을 다 토해 내고 싶을 정도로 역겨운 광 경이었다. "어이, 숟가락 들라고! 여기 여관 특실을 내줬는데 식용이 좀 없다해도 맛은 봐야지?" "별로 배고프지 않은 모양이군? 그렇지만 요즘 같이 어려운 시절에 음식을 남기면 쓰나." "어린 도련님은 요리를 먹을 줄 모르는 모양인데 이 몸이 한 숟갈 떠 먹여 줄까나?" 보리스가 고개를 들어보니 여관 곳곳에 서서 잡담이나 주고 받던 잡패들이 한꺼번에 지껄이기 시작하 는 것이 보였다. 그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괴롭히는 건가? 묵은 원한이라도 있단 말인가? 그들 중에 안면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예프넨이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는 윈터러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리고 푸른 눈을 들어 비웃는 자들을 쏘아보았다. 예프넨의 눈길을 받은 자들 가운데 몇은 그의 눈빛에 깃들인 분노에 약간 흠칫하긴 했지만 대다수는 대수롭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마침내 예프넨이 입을 열어 말했다. "누군가, 이 음식을 먹는 법을 좀 가르쳐 주지 않겠소?"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자 그는 이어 말했다. "직접 한 입 먹는 것으로 말이오." 약간 잠잠해진 가운데 한 명이 킬킬러리며 말했다. "남은 음식을 얻어먹을 정도로 배고프지 않은데 어쩌지?" 그 순간 그자는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눈을 의심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근 예프넨의 손에 붙잡혀 테이블 앞으로 끌려와 있었고. 곧장 턱이 테이블에 처박아졌다. "큭...뭐야!" 예프넨은 여전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이 식탁의 손님으로 초청하고자 합니다. 사양치 말고 드시지요." "으으......" 예프넨은 그 자의 목 뒤를 바짝 눌러 턱을 테이블에 떼지 못하게 한 채 숟가락을 잡았다. 둘러섰던 사 람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예프넨은 숟가락을 벌레가 들끓는 그릇 속에 푹 집어넣었다. "아으...안돼......" 그 자는 호리호리한 몸매의 아름다운 얼굴을 한 이 청년의 손아귀에서 이처럼 강한 힘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한 손으로 목을 눌렀을 뿐인데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예프넨은 드디 어 한 숟가락을 그릇에서 떠서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 숟가락 속에는 벌레가 세 마리나 들어있었다. "요, 용서해 줘!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다니까!" 비굴하게 외치는 그 자의 입술 근처까지 숟가락이 들이대어졌다. 땀을 질질 흘리며 입술을 악물었지만 고개조차 제대로 저어지지 않았다. 바로 코앞에 벌레들이 굼실거리는 것이 보였다. "형!" 보리스가 외친 것과 거의 같은 순간, 예프넨은 숟가락을 멈췄다. 여관의 홀을 메운 손님들이 어느새 모 조리 침묵하고 있었다. 오직 예프넨의 목소리만이 들렸다. " 그 입에 벌레를 처넣을 정도로 내가 강심장이 아니란 것에 감사하시오." 숟가락은 몰려지고, 그릇 속에 내려놓아졌다. 동시에 목을 누르던 손이 풀렸다. 보리스가 외치지 않았 어도 예프넨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일부러 강한 채 그것을 숨기지도 않았다. 예프넨의 손에서 놓여난 자는 비척거리면서도 급히 뒤로 물러났다. 화가 난 얼굴로 목을 매만지던 그 는 주위의 몇 명과 빠른 눈짓을 나눴다. 고개를 끄덕인 자들이 있었고, 순식간에 사태는 급변했다. "덮져!" 동시에 예닐곱 명이나 되는 사내들이 테이블을 타넘어 달려들었다. 뜻밖에 상황 전개에 당황한 예프넨 은 재빨리 동생을 막아섰지만 이미 한 박자를 놓치고 있었다. 칼을 뽑았더라면 여러 사람을 죽이지 않 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예프넨은 의자를 들어 첫 번째로 다가드는 놈을 후려친 다음 그 의자를 내던져 또 한 명을 쓰러뜨렸 다. 그러나 그 다음은 역부족이었다. 등뒤에서 세 개나 되는 몽둥이가 한꺼번에 날아들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예프넨의 허리를 정통으로 가격했다. "......" 비명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보리스가 달려들어 형을 껴안았고 달렫르었던 사내들은 두 형제 를 바닥에 쓰려뜨린 채 마구 걷어차고 짓밟았다. "뭐에 감사하라고? 어디서 감히 헛소릴!" "체, 개뿔도 안 되는 것이 그런 잡소릴 늘어놨냐?" "이런 병신 같은 놈은 아주 얼굴을 짓이겨 놔야 정신을 차리지!" 예프넨은 자기 몸으로 보리스를 덮어 누른 채 대부분의 발길질을 혼자서 맞았었다. 스노우가드로 보호 되는 곳은 괜찮았지만 다른 곳은 옷이 찢겨져 나가고 드러난 살갗은 거친 부츠에 긁히고 채여 곳곳에서 피가 흘렀다. 예프넨이 용서해 주었던 사내가 가장 날뛰었다. 그는 발길질로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갑가지 흉물스러 운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꼴 좋다! 누굴 초청하고 뭘 어쨌다고...... 그래, 이 자식들한테 훌륭한 만찬을 직접 먹여 드리는 친절이 나 베풀어 드릴까!" 그 자가 팔을 뻗어 예프넨의 멱살을 움켜쥐자 주위의 패거리들이 달려들어 쓰러진 그의 몸을 일으켜 세우고 팔을 위에 꺾어 잡았다. 다른 자는 보리스를 거칠게 붙잡아 한 손으로 옆구리에 끼더니 테이블 로 성큼 다가갔다. 다른 자가 숟가락을 다시 쥐었다. 그걸 본 보리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 한 숟갈 가득히... 관대하게 퍼 줘야지." 숟가락은 그릇 속에 들어갔고. 다시 나왔을 때는 그 위에 일곱 마리나 되는 벌레들이 꿈틀대는 것이 보였다. 역겨운 누런 죽은 벌레들이 몸을 뒤챌 때마다 숟가락 사이로 뚝뚝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숟가락이 보리스의 입가로 다가왔다. 미친 듯 몸을 비틀며 고개를 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입을 열었 다가는 곧장 저 벌레들이 입안으로 들어올 것만 같았다. 사내들의 팔을 뿌리치려 애쓰던 예프넨이 외쳤다. "동생은 매버려 둬! 어린아이에게 그게 무슨 짓인가!" 팡르 잡아TEjs 사내가 떠보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네가 대신 먹을 테냐?" 갑자기 재미있는 문제라도 냈다는 듯 사내들은 예프넨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젊은이의 잘생긴 이마가 고민으로 잠시 찌푸려지고 이윽고 입술을 깨물며 동생을 바라보는 것도 보았다. 그들은 정말로 예프넨 이 동생 대신 저 벌레들을 삼키겠다고 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고민을 시켜 놓고 즐기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비열한 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고뇌가 예프넨의 머릿속에서는 빠르게 맴돌고 있어TEk. 그는 지금 단 하나 가지고 있는 희망이 무엇인데,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조금 밖에 없을 텐데. 이윽고 예프넨은 단호하게 내뱉었다. "그래. 내게 가져와라." "뭐...뭐?" 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들은 주위의 동료들을 둘러보며 자신이 잘못 듣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서로의 얼굴에는 "'뭐 저런 놈이 다있지?' 하는 감정이 드러나 있었고 그것은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한 사람이 말했다. "쳇, 그만 두지. 난 저런 놈은 질색이다." "기분이 나빠졌다. 젠장, 이건 장난이 아니잖아." 다들 비슷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한 사내만은 달랐다. 바로 예프넨에게 용서받은 그 남자였다. 이름은 귀트라고 했다. "저런 건방진 놈들을 그냥 두자고? 그런 어설픈 꼴로는 웃음거리밖에 안 된다는 걸 모르냐! 한번 했으 면 끝장을 봐야 되는 거다.!" 귀트는 다가가 동료로부터 숟가락을 빼앗더니 담긴 것을 쏟아 버리고는 새로 한 숟가락 듬뿍 떴다. 그 리고 직접 예프넨 앞으로 다가가 기분 나쁜 눈초리로 젊은이를 쏘아보았다. 본래 낯선 자들에게 텃세를 부리는 것이 이들 무리의 버릇이자 소일거리였지만 예프넨과 같은 여행자 들은 특히 불쾌한 존재이기도 했다. 옛 귀족 출신이나 되는 듯이 반반한 얼굴에 예의바른 말투. 괜찮아 보이는 무과와 어느 정도는 갖고 있는 돈. 그런 자들은 자기들의 저택이나 영지에 처박혀 조용히 지내면 되는 거다. 뭣 때문에 자기들처럼 지저 분한 놈들이 뒹구는 여관 따위에 오는 거냐. 특히 가장 싫은 것은 바로 예프넨의 침착한 눈동자였다. 너희들의 속성쯤이야 익히 알고 있다는 듯, 너 희 같은 종자들은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겠지...라고 하는 듯한, 그 당황하지 않는 표정이 싫었다. 그 런 놈일수록 놀라고 절망하여 주저앉는 꼴을 반드시 보고 싶은 것이 퀴트와 같은 자들의 공통된 심정이 기도 했다. "자. 입 벌려." "......" " 뭐야, 이제 와서 싫다는 거냐?" "......" "그럼 동생에게 먹일 박에." 그가 과장된 몸짓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예프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러나 귀트는 기대와는 달 리 여전히 흔들림 없는 목소리였다. "그만둬." 젠장...재수 없는 놈. 그는 다짜고짜 왼손을 내밀어 예프넨의 턱을 움켜쥐더니 억지로 입을 벌리게 했다. 그리고 숟가락을 푹 쑤셔 박아 버렸다. "흐읍......" 귀트 자신조차 잠시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던 것이다. 그러나 숟가락을 빼내며 슬쩍 예프넨의 얼굴을 보았을 때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본 그는 경악하여 말을 잊었다. 예프넨은 천천히 턱을 움직여 입안에 든 것을 씹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가벼운 비웃음까지 띤 채 로 그것을 삼켜버렸다. 깨끗이. 감켜버렸다. "저, 저런......저런......" 예프넨의 팔을 잡았던 자들은 어느 새 놀라 팔을 놓고 있었다. 어쩌면 예프넨은 좀 전부터 그들을 뿌 리치고 입안의 것을 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팔을 빼 며 한 걸음 귀트에게 다가갔다. 귀트는 예프넨의 손이 허리에 찬 칼의 손잡이로 가 올려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싸늘한 목소리가 들 려오는 것도 느꼈다. "네게 정신으로 결투를 신청한다. 나는 예프넨 진네만, 롱고르드의 영주 율켄 진네만의 맏아들이자 영 지의 후계자다. 네 신분을 밝혀라." 그 누구도 다시 예프넨의 몸에 손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제야 예프넨의 허리에 찬 검을 불안한 눈으로 살폈고. 그것이 예사 검이 아니라는 사실도 눈치챘다. 칼집은 무늬 없이 간소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백색의 광채가 감돌고 있었다. 게다가 영주의 아들이라고? 그렇다면 이겨도 큰일. 져도 큰일이 아닌가! 귀트는 더듬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하고 몇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홀에 낮은 사람들의 눈이 모조리 그 에게 돌려져 있었다. 여행자인 예프넨과는 달리 그는 이 마을에서 깡패 노릇을 하며 살아가는 입장이었 다. 여기서 자칫 굴복했다가는 다시는 얼굴을 들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조직은 물론, 마을 사람들에게까 지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나는...귀트...필로네다." 예프넨은 이제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는 보리스를 붙잡고 있는 사내에게 잠시 눈길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그가 주춤거리며 동생을 내려놓게 만들었다. 그리고 손짓으로 보리스를 불러 옆에 자리하게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말투로 예프넨이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난 물론 너를 죽일 것이다." 귀트의 얼굴은 점차 희게 변해갔다. 예프넨은 말을 이었다. "네가 살아남으려면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결투하여 내가 너를 죽이기 전에 네게 졌음을 말하고 바닥에 엎드려라. 그러면 너를 죽이지 않겠다. 그 대신." 예프넨은 왼손으로 식탁 위에 아직도 놓여있는 그릇을 가리켰다. " 저 그릇에 남은 것을 네놈에게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먹일 것을 가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 겠다" 이제는 피할 길이 없었다. 귀트는 숨을 거칠게 쉬면서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더니 사나운 눈으로 동 료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동료들은 모두 그의 눈을 피했다. 예프넨은 고개를 돌리더니 카운터의 건방진 여급을 향해 말했다. "뒤뜰에서 결투를 할 수 있나?" 처음 여관에 들어와 방을 달라고 하고 돈을 계산할 때까지 예프넨은 모든 일에 익숙하지 않은 초보 여 행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검과 결투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늘 배워오고 겪어온. 그레에 가장 ld 익숙한 삶인 것이다. 가문의 이름을 말한 이상 추호의 망설임도. 머뭇거림도 필요 없었다. 여급도 이번에는 감히 농담을 걸지 못한 채 단지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예프넨은 홀을 휘둘러보 고는 가장 이들과 관계가 없어 보이는 한 상인 일행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입회인이 되어 줄 것을 청했 다. 이미 예프넨의 기세에 눌린 그들은 거절할 리는 없었다. 트라바체스의 관습으로는 각 측에서 입회인 둘이 결투를 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전혀 죄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보리스와 함께 뒤뜰로 나갔다. 호기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우르르 따라나왔다. 귀트 일행 이 밖으로 나온 것은 그보다 한참 뒤였다. 그러나 감히 도망치지는 못했다. 1.윈터러 예프넨과 마주 선 귀트는 아직도 불안감을 완전히 누르지 못한 채였다. 쉴 새 없이 들썩거리는 어깨가 그것을 반증했다. 그의 손에도 검은 들려 있었지만 그다지 익숙한 듯 보이지는 않았다. 그의 반해 예프넨은 완전히 숙달 된 자세로 검 손잡이에 손을 얹고 섰다. 보리스는 형이 이웃 여지의 아들들과 검격을 겨루는 것을 본 일이 몇 번 있었다. 그때는 대부분 서로 죽고 죽이는 결투는 아니었다. 검술 시합과 비슷한 것이었고, 한 쪽에서 상처를 입으면 그것으로 대결은 끝났가. 물론 형이 누군가와 결투를 한 일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결투하는 순간의 형을 본 일은 없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바라본 형의 푸르고 차가운 눈동자는 평소의 따뜻한 눈빛과 는 판이하게 달랐다. 과연 같은 사람인가 의심될 정도로. 그리고 예프넨이 입을 열어 짧게 말했다. "검을 뽑아라." 귀트가 검을 뽑는 것과 거의 동시에 예프넨도 검 손잡이를 쥔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윈터러의 날이 뽑혀 나오는 순가, 입회인들을 비롯한 구경꾼들의 눈은 모조리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그들 가운데 몇 은 곁의 사람들에게 급히 속삭였다. "저 백색 날을 봐...저건 보통 검이 아냐." "저건 도대체 뭐지? 저 검에 대해서 들어본 사람 있어?" 서녘 태양의 광채가 붉게 깔린 뒤뜰이었다. 둘러선 사람들의 얼굴도 술 취한 듯 불그레했다. 그 가운데 희게 솟아난 윈터러의 공채는 보는 사람의 가슴속에 얼음 한 조간 찔러 넣을 듯 싸늘한 충격을 주었다. 한 사람이 다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세상에는 겨울의 검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던데......" 그때 두 결투자는 뜰 가운데로 훌쩍 뛰어들어왔다. 이어 검과 검이 서로를 노렸다. 이윽고 석양을 빨아 들인 윈터러가 붉게 타기 시작했다. 먼저 공격을 감행한 것은 귀트였다, 그는 초보 검사답게 선제 공격이 제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 다. 그러나 자신의 검이 윈터러와 스치는 순가. 그는 이 결투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래 힘을 줄 수도 없었다. 날씬한 젊은이인 예프넨의 팔 힘은 동네에서 주먹으로 먹고 살던 자신보다 훨씬 강했고. 윈터러는 마술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악마 같은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었다. 귀트는 검 끝일 부가 싸악 갈라져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그는 혼비백산하여 뒤로 물러서기에 급급했다. 이번에는 예프넨의 차례였다. 그는 단 두 걸음만에 적의 사정 거리로 급습하여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검을 대각으로 후려쳤다. 칼날이 서로 비껴 미끄러졌다. 그 순간 귀트의 검이 금속성의 마찰음과 함께 부르르 떨리더니 잠시 후 쩡, 하는 소리를 냈다. 사람들은 그 소리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건 윈터러를 써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소리였으니까. 귀트가 이마에 핏줄을 세우더니 평소의 최고 실력을 내어 윈터러를 두 차례 막아 밀쳤다. 그리고 그것 이 끝이었다. 츠르르...챙그랑! "저, 저런......" 그건 귀트만이 낸 소리가 아니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충격으로 탄성을 질렀다. 귀트 의 검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바닥에 우수수 떨어지는 것이 보리스의 눈에도 보였다. 결코 두 조각이나 세조각으로 부서진 것이 아니었다. 쇠로 만든 검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저 백색의 검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 귀트는 상황을 깨달았다. 망설임도 없이 예프넨의 윈터러가 곧장 앞으로 찔러져 오는 것을 본 그는 무 작정 바닥에 납작 엎으려 머리를 흙바닥에 박았다. 그리고 손을 앞으로 내밀어 싹싹 비볐다. "제, 제발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제발......" 이젠 체면이고 뭐고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예프넨은 귀트의 뒷목을 똑바로 겨누며 검을 멈췄다. "승복하는 건가?" "예, 예, 물론입죠, 그렇고 말고요." 그러자 예프넨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나와 한 약속도 기억하고 있겠지?" "그건......"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나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귀트는 잠시 후 덜덜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라." 해가 서서히 졌다. 여관에서 램프를 내어 밝히는 가운데 예프넨은 윈터러를 겨눈 채로 귀트를 여관 안 으로 들어가게 했다. 뒤따라 들어간 보리스는 형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그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형 이 정말로 저 자에게 저걸 다 먹게 할까? 평소의 형이라면 절대로...하지만 아까 형 역시 저걸 씹어 삼 키지 않았던가. 사람들의 눈이 윈터러에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예프넨에게 들리지 않게 저들끼리 말을 주고 받았 다. 실내에 들어오자 윈터러는 다시 씻긴 듯 싸늘한 흰빛을 내었다. 귀트가 테이블 앞에 앉고, 예프넨은 선 채로 등위에서 검을 겨누었다. 그리고 단지 짧게 말했다. "먹어라." 귀트는 숟가락을 들었다.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동안 그릇 속에서는 여러 마리의 벌레들이 kqR으로 기어 나오고 있었다. 전체적인 앵은 줄었는지 모르지만 그 광경은 더더욱 역겨운 심정을 부추겼다. 그는 먹기도 전에 벌써 끅끅거리며 구역질을 했다. 예프넨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렸다. "두 번 말하지 않는다." "형......" 보리스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예프넨은 시선을 주지 않았다.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늘 보리스 에게 밝게 웃어주던 그 형이 아니었다. 점차 사람들이 눈길을 돌렸다. 어떤 결과가 오든 보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아 예 나가버리는 사람은 없었다. 귀트는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그릇에 집어넣었다. 점점 그의 어깨까지 떨리는 것이 뒤에 앉은 사람 들에게도 잘 보였다. 그는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예프넨은 마지막까지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귀트가 그릇에 든 것을 몇 숟갈 먹고, 토하고. 다시 먹고. 또 토하고 하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완전히 녹초가 된 귀트가 드디어 숟가락을 놓고 미친 듯이 토해 내고 구역질을 하다가 기절해 버리는 것까지 본 다음, 그는 보리스르 데리고 자리를 떴다. "형." "왜?" 예프넨은 막 촛불 심지를 살펴보고 침대 와 읹은 참이었다. 문득 바라보니 보리스는 침대 위에 쪼그리 고 앉아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예프넨은 표정을 부드럽게 했다. "뭔가 걱정되니?" "......" 예프넨은 부츠를 벗어 한쪽 모서리에 세워 놓은 다음 침대 위로 올라가 보리스의 등을 쓰다듬었다. 동 생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자아. 형한테 예기해 봐." 보리스의 푸른 잿빛 눈동자가 형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은 형의 평화로운 표정을 보며 마치 뜻밖이 라는 듯 흔들렸다. 예프넨은 보리스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보리스.너......" "형이 괜찮아서 다행이야." 보리스의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형이 그 남자를 이긴 것도 물론 다행이야. 하지만 난...그때 형이 뭔가 달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아, 형이 잘못했다는 건 아냐...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도 알아.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분명 히 형에게 잘했다고 하셨을 거야. 하지만, 하지만......" "아니야." 예프넨이 갑자기 말했다. "아니야, 보리스. 네가 제대로 본 거야. 너만큼 그걸 잘 알아낼 수 있는 사람도 없겠지." 예프넨은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보리스로부터 약간 떨쳐 벽에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자신을 쳐다보는 보리스를 외면한 채 열린 덧창너머를 잠시 바라보았다. "보리스. 난 말이지......" 예프넨은 다시 말을 끊더니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보리스는 형을 따라 창 밖을 쳐다보았다. 별이 총 총히 박혀 반짝거렸다. "나와 너는 언제고 아버지의 뜻에 맞는 아들들이 아니었지, 안 그래?" 보리스도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형제의 우애를 탓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그보다 좀더 강인하고 냉정하여 애정 따위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바랬었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삼촌과 대립하며 철 저히 그를 증오했던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이 전혀 무리가 아닐 정도로. 촛불이 깜빡거리고, 예프넨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난 말이다, 아버지의 말도 옳았다고 이제 외서야. 이리도 늦어버린 뒤에야 생각하게 된다. 아버지를 대 신해서 이제 나라도 네가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동정심 같은 걸로 마음 약해지지 말라고. 어떤 고통 이나 아픔을 겪어도 능히 이겨낼 수 있도록. 그렇게 되라고 말아야." 형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내가 오랫동안 너를 보살필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네가 지금처럼 따뜻한 가슴으로, 여린 눈동 자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언제고 지켜 줄 텐데." 왜 형은 곧 떠날 사람처럼 저렇게 말하는 것일까? "그렇지만 난 언제까지나 네 곁에 있을 수는 없는 거지. 아니, 있을 수 있다 해도 그래서는 안 되는 거 지. 네게는 너만의 길이 있을 텐데. 그걸 스스로 찾아나갈 수 있도록 너는 충분히 강해져야 하는 거야. 충분히...단단해져야 하는 거야." 어머니를 닮은 푸른 눈동자가 문득 물기를 머금은 듯 보였다. 예프넨은 마치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애써 하는 사람처럼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었다. "보리스. 바위가 될 수없다면 조개가 되는 거다. 네 속이 여려도 아무도 알아볼 수 없도록. 그걸 아무도 열어볼 수 없도록 꽉 닫아버려. 하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깊은 골방에서는 눈물 흘려도 좋으니까. 거기 서만은 누구도 탓하지 않으니까." 보리스는 영문을 몰랐다. 형이 갑자기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이 야기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 이야기는 갑작스러웠다. 평소처럼 자연스러운 이야 기가 아니었다. 어린아이를 갑자기 어른으로 성장시키려는 것처럼. 그래야만 하는 어떤 이유가 생긴 것처럼. "널 작고 선량한 소년으로 내버려두는 세상이 아니라는 걸....네가 빨리 깨달았으면 좋겠다." 빨리, 빨리...예프넨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깃들여 있었다. 동지가 없어져 버린 어린 새가 한시바삐 날 수 있기를 바라는 듯한. 그런 불가능한 일을 바라는 듯한. "그래서 형은 그런 사람이 되기로 한거야?" 한참만에 보리스가 묻자 예프넨은 말을 삼킨 채 잠시 시선을 다른 곳에 주었다가. 이윽고 대꾸했다. "그래." "그렇구나......" 보리스는 가문이 몰락한 지금 자신이 약해질까 봐 형이 암시를 주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형을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였다. 오늘의 일은 분명 그들이 롱고르드의 저택에서 만 살았더라면 겪었을 리 없는 사건이었다. 형이 다른 면모를 보였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 이곳을 모두가 보호해 주는 글들의 영지가 아니니까. 사방에는 낯선 사람 아니면 적뿐이었다. 잘 준비를 하고 옷을 벗으려니까 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잡옷은 벗지 마라. 보리스." "왜?" 예프넨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쩌면 우리를 노리고 찾아올 자들이 있을 지도 모르니까. 자, 형이 보초를 설 테니까 너는 자도 좋아. 내가 이따가 새벽녘에 깨워 줄게." 훅, 예프넨이 촛불을 불어 껐다. 보리스는 처음에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차츰 잠이 달아나자 꿈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 었다. 윈터러를 바닥에 세우고 앉은 형이 보였다. 그는 침대에 몸을 기댄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처음엔 무슨 소리 때문에 깼나 했다. 그러나 곧 형이 소리를 죽여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보리스가 깨어난 것도 어쩌면 그 소리 때문이 아닐지도 몰랐다. 아니 다... 보리스는 캄캄한 어둠 속에 흐르는 정적만으로도 예프넨이 어떤 중대한 일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방안을 흐르는 침묵은 소년의 귀를 먹먹하게 했고 가슴을 터질 듯 짓눌렀다. 마치 이 슬픈 침묵 그 자체가 그를 깨운 것만 같았다. 말을 걸었어야 했을까. 그러나 보리스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이제 소리가 나지 않는데도 한층 아픈 침 묵이 생생하게 그의 뇌리에 파고 들었다. 보리스의 관자놀이는 타고 눈물이 줄줄 흘렀다. 이유도 모른 채. 그렇게 소리 없이 눈물이 흘렀다. 왜일까. 아아, 왜일까. 다음날 낮. 그들은 마을을 떠나 다시 들판을 걸었다. 한 필뿐인 말은 주로 보리스가 탔고 예프넨은 고삐를 쥐고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그 이야기들은 저택에서 지낼 때 해주곤 하던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나 이웃 영지의 우스운 사건 같은 것은 아니었다. 못 보던 나무나 꽃을 보면 보리스는 예전처럼 어김없이 형에게 물었지만 이제 형은 간 단히 이름만 말해 줄 뿐이었다. 전처럼 거기에 얽힌 아름다운 전설이나 우와 같은 것은 예프넨의 입에 서 나오지 않았다. "형, 형은 예전에 많이 알던 얘기들은 다 잊어버렸어?" 그렇게 보리스가 묻자 예프넨은 입술만 움직여 웃더니 대답했다. "그런가봐." 그게 진심으로 웃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보리스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저녁때까지 걸어도 새로운 마을은 나타나지 안았다. 마을을 떠나기 전에 충분히 물어 둔 터였지만 역 시 길을 잘못 둔 모양이었다. "오늘밤은 아무래도 야영을 해야겠구나." 더 어두어지기 전에 형제는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자리를 잡고 마른풀과 나뭇가지 따위를 모아 화 불을 지폈다. 예프넨은 예전에 이웃 영지의 젊은이들과 며칠씩 걸리는 사냥을 여러 번 떠났던 탓인지 이런 일에는 익숙해 보였다. 말은 야트막한 관목을 묶었다. 적당한 나무가 없었던 탓이었다. 불을 보고 있자나 저택을 둘러쌌던 횃불이 생각났다. 나무 그림자들이 불꽃의 움직임에 때라 이리저리 일렁거렸다. 처음엔 금방 깨닫지 못했다. 잠시 후 예프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리스. 검을 잡아." 긴장이 확 끼쳐오는 순간 온 몸의 털이 곤두섰다. 예프넨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불 속에 나뭇가 지를 하나 던져 넣었다. 그리고 원터러를 잡은 채 일어나 섰다. " 그 정도 수로도 숨을 필요가 있나." 이후 보리스가 예프넨을 기억할 때마다 떠오르는 모습이 세 가지 있었다. 하나는 에메라 호수 앞에서 함께 죽자고 말하던 형의 푸른 눈동자, 또 하나는 바로 윈터러를 잡은 채 모닥불을 바라보고 선 형의 어두운 뒷모습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건방 떠는 어린놈이......" 보리스는 짤막한 검을 꼭 쥔 채 꼼짝고 하지 않았다. 예프넨은 윈터러를 천천히 뽑았다. 모답불뿐인 어 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고상한 칼날이 암흑 가운데 갈라진 틈새처럼 번뜩였다. "포위해!" 곧 보리스도 볼 수 있었다. 모닥불 앞의 두 형제를 둘러싼 자들은 대략 보아도 20여명은 넘어 보였다. 거기다 모두 칼 따위의 무기를 꼬나들고 있었다. 예프넨은 그 가운데 아는 얼굴을 발견하고는 냉랭하게 말했다. "호위하는 부하들이 많군 그래, 귀트." 그건 도발성 발언이었다. 귀트가 얼굴을 찌푸리는 가운데 다른 자들이 불쾌한 듯 입을 열었다. "누가 저 놈을 돕겠다고 이곳까지 온 줄 알아?" "흥, 아직도 상황을 잘 모르는군." 적들이 빙 둘러서서 진을 갖추기 시작했다. 매어져 있던 말을 끌어들어 쫓아버리는 소리가 저만치에서 들렸다. 그림자들이 사방에 어슬렁거렸다. 예프넨은 재빨리 눈을 돌리며 그 가운데 지휘자일 법한 자를 찾았다. "뭘 원하지?" 보리스는 일어섰다. 그리고 모닥불을 사이에 둔 채 형과 등을 맞대고 섰다. 목검말고는 휘둘러 본 일이 없었지만 지금으로서는 검을 다를 줄 모르는 어린아이로 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세는 비 교적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적은 압도적이었다. 지휘자인 듯한 자가 모닥불 쪽으로 한 발짝 나서며 말했다. "네 검. 그게 바로 윈터러 라는 검이지?" 예상 대로다... 예프넨은 입술을 깨물며 검을 단단히 쥐었다. 결투를 위해 이름을 밝힌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그러나 이름도 밝히지 않고 상대를 죽일 수 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 예프넨이었다. 위험 하다 해도 명예를 위해 결투하기로 한 이상 거치지 않을 수 없는 수순이었다. "얌전히 내 놓으면 둘 다 조용히 보내주겠다." 지휘자로 보이는 자는 검은 구레나룻을 기른 키 큰 남자였다. 우렁우렁한 목소리의 소유자였고. 드러낸 가슴팍에는 두 갈래의 칼자국이 남아 있었다. 저 정도의 인원을 꿀로 올 정도면 상당한 실력자일 것이 었다. 그자가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어린 동생은 아직 죽기엔 이른 것 같군. 안 그런가?" 스무 명이나 되는 적을 처치할 실력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죽기 전에 검을 내줄 생각도 없었다. 그 러나 보리스는? 그때 보리스가 입을 열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12년은 사리를 알기에 그리 적은 나이라 할 수는 없어." "허,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꼬마야?" 언뜻 검을 내놓겠다는 말이 아닌가 생각한 검은 구레나룻을 향해 보리스는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죽어야 할 때 정도는 알 수 있다는 뜻이다." 더 말이 필요 없었다. 첫 번째 적이 검을 높이 쳐든 채 측면에서 튀어나왔다. 예프넨이 쥔 윈터러가 가 로로 번뜩이고. 어둠 속에서 핏방울이 튀었다. "조심해!" 좌측에서 내밀어진 두 번째 검을 윈터러의 가드로 쳐내는 순간 예프넨의 손등이 찢겨나갔다. 짧고 흰 검이 정면 대각선으로 베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검을 바짝 당겼다가 밀쳤다. 동시에 뻗어나간 윈터러의 공격에 상대방의 이마가 뚫렸다. 뜨거운 액체가 칼날을 타고 흘렀다. 보리스가 어둠 속을 똑바로 보려 애썼다.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무기가 아닌 밧줄과 같은 것이었다. 흠칫 물러서려다가 불타는 나뭇가지를 밟고는 무작정 검을 비스듬히 휘둘렀다. 훅, 하는 소리와 함께 밧 줄이 끊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너무 이를 악문 나머지 입술에서 피가 흐르는 데도 깨닫지 못했다. 누군가 예프넨의 머리를 향해 모닝스타를 휘두르자 윈터러의 날이 사살을 휘감아 버렸다 두 손으로 검 을 곽 쥐는 순간 다시 한 번 쩡, 하는 소리가 울렸다. 사슬이 투둑 끊겨 나가며 쇳덩어리가 모닥불 속으로 떨어져 글렀다. 타던 나뭇가지들이 부서지고 불티 가 확 일어나 사방으로 날려쌌다. "흥...과연 저게 바로 소문으로만 듣던 윈터러의 '프로즌 브레이크' 로구나." 프로즌 브레이크란 윈터러의 특수한 능력들 가운데 비러 '극저온 폭발'을 칭하는 별명이었다. 맞닿은 물질의 온도를 순간적으로 극저온으로 끌어내려 분자구조를 파괴해 버리는 이 강력한 힘은 본래 스노우 가드와 함께 사용될 때에만 본령을 발휘했다. 무기를 부수기 위해 만드는 소드 브레이커 따위의 능력과 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마력적인 힘이다. "흥, 솜씨 좋구나! 하지만 동생의 배때기에 구멍을 뚫려도 그럴 수 있을까?" 동시에 세 명의 적이 보리스를 둘러싸고 접근했다. 모닥불 탓에 형제의 움직임은 적들에게 완전히 노 출되었다. 대신 적들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예프넨도 그 점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혼자 적들 속으로 뛰어든다면 보리스는 꼼짝없이 붙들려 당할 것이다. 그것이 그가 이 포위를 뚫고 전장을 바꿀 수 없는 이유였다. 설상가상으로 빛에 익숙해져버린 형제의 눈은 자꾸만 어둠 속에서 적의 움직임을 놓쳤다. 둘의 사이를 바로 찌르고 들어온 검을 뒤늦게 발견한 예프넨이 미처 방어하기도 전이었다. 보리스를 노리는 척하던 적은 예프넨의 옆구리를 힘껏 찔렀다. 그극...... 기묘한 소리가 울러 퍼졌다. 검은 스노우가드의 표면에 닿아 미끄러지며 약한 마찰열을 냈고 그 순간 이해할 수 없는 진동이 발생하여 검을 쥔 손에까지 몰려왔다. 찔렀던 적은 놀라 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충격으로 어깨까지 저릴 지경이었다. 검은 구레나룻을 가진 자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주위에 들리지 않 게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윈터바텀 킷이 모두 저 놈의 수중에 있는 건가?" 진네만 가문에 일어난 일은 아직 그리 멀리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로서는 그 가문의 아들들 이 왜 이 먼 곳까지 와서 여행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귀 기울이 고 탐내 오던 보물에 대한 소유욕만은 강해서 상대가 누구든 조금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어디, 그렇다면 이 검도 받을 수 있을까?" 드디어 그 자와 예프넨이 정면으로 맞붙었다. 한 번, 두 번 부딪쳐는 동안 둘 다 상대의 실력이 여간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러나 예프넨은 젊은이였고 그 자는 오랫동안 칼을 휘두르는 것으로 먹고 살아 온 노련한 자였다. 그는 슬슬 물러나는 체하며 예프넨을 앞으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한 걸음 옮기기 시작한 이상 쉽게 뒤로 물러서기는 어려웠다. 자칫 박자를 놓쳤다가는 완전히 수세에 몰리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적은 윈터러의 힘을 알기 때문인지 일부러 검을 오래 맞대지 않고 조심스 럽게 빈틈만을 노렸다. 반 발짝 움직일 때마다 예프넨은 기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 실력으로는 결코 일방적으로 제압할 수 없는 상대였다. 약간만 실수를 했다가는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츠르르...챙! 검이 한 차례 얽혀 미끄러지고 상대는 프로즌 브레이크를 피하기 위해 재빨리 검을 뗐다. 예프넨은 그 틈을 노려 재빨리 공격을 감행했다. "하아!" 거의 되었다 싶은 순간이었다. 윈터러의 날이 상대의 목을 뚫고 들어가기 직전, 갑자기 이상한 일이 일 어났다. "......" 상대의 몸이 축 늘어지더니 바닥에 엎어져 버렸다. 검 날은 아직 닿지도 않았는데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쓰러졌다. 3. 쓰디쓴 가르침 다른 놈들이 놀라 웅성대려는데 곧 이어 같은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몇 명이 그 자리에 무너지듯이 주저 앉았고. 도망치려던 자들도 하나씩 엎어지기 시작했다. 예프넨은 재빨리 물러서며 보리스를 가지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검을 세운 채 정체 모를 적을 노렸다. "잘 싸우더군, 젊은이." 20여명에 달했던 적들이 거의 다 쓰러지거나 달아나고 나자 어둠속에서 네 명의 낮선 사람들이 나타났 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의 손에 작지만 정교한 석궁이 들려 있었다. 여전히 새 볼트가 메겨진 채였는데 모양이 좀 특이했다. 볼트 끝의 촉이 약간 뭉툭하고 그 끝에 다시 바늘처럼 뽀족한 침이 튀어나와 있었 다. 예프넨은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물었다. "당신들은 누굽니까?" 처음 말했던 사람이 허허거리며 웃었다. 그런데 가만히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니 조금 이상한 점 이 있었다. 마치 여자의 목소리 같달까? "명색이야 어찌됐든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데 좀더 친절한 대답을 기대할 수는 없는 건가?" 여자 목소리를 가진 그 자는 중키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난 팔을 튼튼한 근육이 엉겨 있어 오랫동안 검을 위 두른 노련한 검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예프넨은 여전히 자세를 푸지 않은 채 대꾸했다. "그것이 무상의 도움이었다면, 감사드리겠습니다." "허, 허허. 허허허허......." 이윽고 그들은 모닥불 근처로 다가와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 목소리를 가진 검사가 아마도 리더인 듯 했는데 상체만 보호하는 검은 가죽 갑옷에 큼직한 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파이프를 꺼내더니 예프넨의 대답도 듣지 않고 모닥불로 다가가 불을 붙였다. 한 모금 빨아 뱉으며 그는 다시 말 했다. "무상이고 뭐고, 우리에게 치를 만한 뭔가를 갖고 있기나 한가? 우리 웬만한 것은 필요 없는데." 보리스는 주위에 흩어진 시체들을 보며 기분이 이상했다. 방금 전까지 살아서 그들을 위협하던 자들인 데 비명 한 마디 지르지 못한 채 순식간에 시체로 변했다. 도대체 이 자들은 얼마만큼의 실력을 가지고 있기에? "보아하니 여행을 즐기는 자들도 아닌 것 같은데. 우리한테 줄게 있기나 하겠소, 니카? 그냥 불이나 얻 어 쬐면 족할 것 같은데." 석궁을 들었던 자가 그렇게 말하더니 서슴없이 모닥불가로 다가와 앉았다. 각반을 쳐서 입은 푸르스름 한 가죽 바지가 불가에 오니 오묘한 색깔로 번쩍거렸다. 예프넨은 잠시 사이에 두었다가 약간 태도를 바꾸어 말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은 강한 여행자들인 것 같군요." 네 사람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더니 분분히 자기 소개들을 했다. "난 윌스 캄브라고 하네." "조아킴이라고 브르게. 섬은 없어." "난 로마바크 율, 뭐. 보면 알겠지만 '볼트의 로마바크' 란 별명을 갖고 있어" 석궁을 든 자가 한 소개였다. 마지막으로 여자 목소리를 가진 리더가 입을 열었다. "야니카 고스, 보통은 야니라든가. 니카라고 불러, 착각할까봐 말해 두겠는데 이렇게 보여도 여자란 말 이지."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잖아?" 조아킴이라던 남자가 히죽히죽 웃으며 모닥불가로 다가와 앉았다. 이렇게 되자 예프넨과 보리스만 서 있는 모양이 되었다. 그러나 예프넨은 일부러 그들과 약간 거리를 두며 떨러져 서더니 보리스를 껴안은 듯한 모양새로 자리에 앉았다. 로마바크가 불쑥 말했다. "아직도 우리가 안심이 안 되는 모양이지? 흥, 흔히 있는 일이니까. 같이 있는 것이 불편하다면 우린 가겠네." 예프넨은 약간 당황해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네 명의 여행자는 이윽고 나무 컵이며 물주머니, 말린 과일 따위를 꺼내고 저들끼리 나누어 먹으며 건 성으로 예프넨에게도 권했다. 그가 사양하자 야니카가 보리스를 보더니 말했다. "동생인가보지?" "그렇습니다." "이런 황야를 돌아다니기엔 아직 어린데." 그러면서 야니카는 배낭에서 아직 싱싱해 보이는 사과를 하나 꺼내더니 솜씨 있게 휙 던졌다. 보리스 가 사과를 받아내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아기는 아니군. 독은 들지 않았으니까 안심하고 먹으라고." 보리스는 형을 쳐다보았고. 예프넨은 약간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리스가 사과를 깨물어 먹기 시작하자 야니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우린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돈이 될 만한 일을 맡아 하는 사람들이야. 가끔 무료해지면 '필 멸의 땅' 으로도 가지. 변경만 돌아다녀도 꽤 짭잘한 수입을 챙길 수 있거든." 예프넨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생각하면서 되물었다. "필멸의 땅이라고요?" 야니카는 웃을까 말까 하는 표정이 되어 예프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그냥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필멸의 땅. 당신이 아는 그 이름이 맞아?" 보리스는 눈이 둥그래졌고 예프넨은 말문이 막혔다. 필멸의 땅, 산 자가 그곳에 들어가 무사히 나올 수 도 있단 말인가? 천천히 듣거나 읽은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필멸의 땅, 모탈렌드는 까마득한 옛날 벌어졌던 전 대륙적 규모의 마법 전쟁에 의해 풀씨 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초토화되어버렸다고 했다. 현재 대륙의 3 분의 1가량을 뒤덮을 정도로 넓은 영역인데도 어느 나라도 감히 차지하려 하지 않는 땅이 그곳이다. 수 많은 영역인데도 어느 나라도 감히 차지하려 하지 않는 땅이 그곳이다. 수많은 고대의 인간들이 언데드 (undead)로 변해 거닐며 산 자의 생명력을 빼앗지 못해 발광한다는 그 거대한 황무지는 지금도 계속해 서 넓어지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감도는 곳이기도 했다. "뭔가 끔찍한 상상을 하는 듯한 얼굴이군." 로마바크가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는 석궁의 볼트를 조사하는 중이었다. 하나씩 들어올려 끝이 상 하지나 않았나 살피는 것처럼 모닥불에 비추어 보았다. 예프넨이 말했다. "예, 솔직히... 그곳에 가서 살아 나올 수 있다는 이야기가 믿어지지 않는군요." "우리가 거짓말이라도 하는 걸로 들린단 거군." "아, 아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로마바크는 들여다보던볼트를 내려놓고 그 가운데 하나를 다시 집더니 예프넨에게 다가왔다. 그가 볼 트를 예프넨의 코앞에 내밀자 보리스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자, 보야? 요기 이상한 점이있는 것 같지 않아?" 청음 예프넨이 이상하게 생각한 그대로 였다. 이중 촉을 가진 볼트였다. 로마바크는 예프넨의 손에 그 것을 건넸다. 볼트는 보기보다 묵직했다. "그 끝을 잘 봐. 거기. 바늘 끝에 뭔가 묻어 있지?" 그의 말대로 미세한 액체의 흔적이 남은 것이 보였다. 예프넨은 뭔가 불안한 기분을 느꼈다. 로마바크 가 머리를 들이민 채 보리스의 동그란 눈동자를 보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극독이야. 조심해 손에 닿는 순간 그대로 타 들어가니까. 유령조차 죽일 수 있는 독이야." 예프넨이 흠칫, 하는 순간 보리스는 더 놀랐다. 둘의 표정을 보고 로마바크는 한층 유쾌한 것처럼 웃었 다. "크크큭... 그거라면 한 번 죽은 놈도 또 다시 죽일 수 있다고, 우린들 왜 필멸의 땅이 두렵지 않겠나. 하지만 그 땅에서 쓰러진 건 산 놈들 뿐, 처음부터 죽어 있던 보물이란 놈들은 모조리 그대로야. 그곳이 바로 전설 속의 마법 왕국 가나폴 리가 있던 곳이라는 거,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니지? 무슨 미친 짓거 리를 했는지, 하여간 끔찍하고 철저하게 망해버린 그 가나폴리는 사실 황금으로 도로를 포장하고 보석 의 원석을 화분에 깔 정도로 무시무시한 부를 가진 왕국이었단 말이지. 흠,흠, 과연 헛소문은 아니더란 말이야." 로마바크는 자신이 말하면서도 침을 꿀꺽 삼켰다. 생각만으로도 몸이 다는 모양이었다. "그만 해, 로마바크, 그래 봤자 진짜 가나폴 리가 시작되는 곳까진 가보지도 못한 처지잖아. 기껏해야 유령들이 차고 이었다. 금붙이에나 만족해야 될 실력이니까 말이지." 야니카가 핀잔을 주자 로마바크는 예프넨의 손에서 볼트를 다시 건네 받더니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볼트를 가져갈 때까지 예프넨은 자신이 몹시 긴장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방금 적 들을 소리 없이 죽여버린 것이 이 무기라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었다. 야니카가 옷 안쪽을 뒤지더니 손바닥에 뭔가를 얹어서 그들 형제의 눈앞에 내밀었다. 보리스가 얼결에 받아들고 보니 그것은 두툼한 황금 팔찌였다. 발갛게 타오르는 모닥불 빛 속에서 팔찌의 테두리를 장식한 무늬가 어른거리며 떠올랐다. 수십 명을 될 듯한 춤추는 무희들이 바늘로 그린 듯 미세한 선으로 새겨졌고 곳곳에 깨알같은 보석들이 박혀 반짝 거렸다. 좀더 밝은 곳에서 본다면 무희의 옷차림과 장신구까지 알아볼 수 있을 듯 정밀한 조각이었다. 세공의 수준은 감히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내 보물이지."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보리스는 얼른 되돌려 주었다. 야니카가 소리내어 웃었다. "착한 아이로구나." 보리스의 머릿속에도 언뜻 황금 도시의 상상이 스치고 지나갔다. 백열의 태양 아래 녹아 내릴 듯 아른 거리고 모래 먼지와 곳곳에 속은 금빛 기둥들. 루비가 아로새겨진 사원의 첨탑과 같은 것들......그것은 일종의 직감이었을까? "자, 자 이러고 있을 때는 아니지. 시체에 둘러싸여 잠을 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게다가 다른 놈들이 또 쫓아올지도 모르잖아." 야니카가 황금 팔찌를 집어넣고 일어서자 로마바크를 비롯한 다른 일행들도 따라 일어섰다. 야니카가 예프넨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우리와 잠시 동행 할 텐가? 우린 사바논 마을로 가는 중이야. 밤길도 잘 아니까 마을까지 데려다 줄 수는 있겠지. 어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형제도 짐을 챙겨 일어났다. 사바논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벽이었다. 야니카 일행은 이곳에 여러 번 와본 듯 익숙한 솜씨로 여관을 찾았다. 여관 주인도 이들을 아는 눈치 였다. 예프넨도 이번에는 비교적 나은 태도로 방을 잡았고. 밤새 걸어온 탓에 지친 터라 그들은 간단한 인사도 나누고 각자의 방으로 갈라져 들어갔다. 예프넨도 이번에는 보초를 설 만한 체력이 부족했다. 문단속을 단단히 하긴 했지만 그리 많은 걱정은 하지 않았다. 어찌 됐든 그들의 행선지를 알고 뒤쫓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어차피 처음부 터 딱히 목적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잖은가. 눕자마자 긴장했던 것이 풀림과 동시에 피로가 확 몰려왔다. 두 형제는 정신 없이 곯아 떨어졌다. 요란한 소리르 들은 것 같았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외치는 것도 같았고, 그 가운데 한 목소리는 형 예프넨의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잠시 후 지독한 잠이 다시금 쏟아졌고.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채에서 보리스는 다시 잠들어 버렸다. "보리스...일어나." 아마 그 목소리는 한참 동안 올렸던 모양이었다. 보리스가 눈을 떴을 때 주위는 어두웠고. 바닥은 차고 딱딱했다. 자세가 불편하다 했다. 깨닫고 보니 팔이 뒤로 돌려 묶여 있었다. "깼구나." 눈가로 따뜻한 입김이 끼쳐왔다.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예프넨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데도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형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달리 탁하게 갈라져 있었던 탓이었다. 약한 빛이 새어들어 왔다. 적어도 밤은 아니었다. "몸을 일으킬 수 있겠어?" "아......" 그건 생각보다 몹시 힘든 일이었다. 무릎이 꿇려진 채 쓰러져 있어서 힘주어 자세를 바로잡는 것이 곤 란했다. 한참 악전고투 끝에 보리스는 바로 일어나 앉았다. 어둠에 눈이 좀 익숙해지고 나니 형의 못브 도 정확히 보였다. "여기가 어디야?" "글세." 단순한 대답이었지만 의미는 간단하지 않았다. 이곳은 그들이 잠들었던 곳이 아니고, 스스로의 의지로 온곳도 아니었다. 보리스는 다시 한 번 물었다. "형이 날 여기로 데려왔어?" "아니." 하긴, 그럴 리가 없다. 형이 무엇 때문에 자신의 팔을 묶어 놓는단 말인가. "그렇다면......" 보리스가 뭔가 불길한 예상을 입밖에 내어 말하기 전에 예프넨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길 빠져나가야겠다." 그러나 예프넨의 팔 역시 묶여 있었기 때문에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그것은 서로 등을 맞대고 돌아앉 아 손을 조금씩 움직이는 것으로 상대의 손목을 묶은 밧줄을 풀었다. 예프넨이 먼저 보리스의 손을 풀 었고. 손이 풀린 보리스가 형을 풀어 주었다. 손을 털고 일어나서 보니 예프넨의 손목이 밧줄에 긁히다 못해 피가 맺혀 있었다. 밧줄에 묶인 채 보리스의 손을 풀어주느라고 그런 것이 분명했다. "이제, 윈터러를 찾으러 가야지." 보리스는 윈터러가 없어졌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 나 곧 깨달았다. 누군가가 그들을 납치해 이런 곳에 감금해 놓는다면 이유는 하나 뿐인 것이다. 그러나 누가? 누가 그들을 이곳까지 따라왔을까? 보리스의 의문을 풀어 줄 새도 없이 예프넨은 그들이 갇힌 장소의 곳곳을 조사했다. 그리고 곧 허술하 게 빗장이 질러진 문짝을 발견했다. 그들을 여기 가둔 자들은 이들을 상당히 과소 평가했음에 틀림없는 것 같았다. 예프넨은 문을 몇번 밀어보다가 물러섰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달려들며 힘껏 문을 걷어찼 다. 삐걱, 하는 거친 소리와 함께 문이 반쯤 벌러졌다. 빗장이 부서진 것이 아니라 벽에 문을 고정시킨 쇠 가 빠져 버렸다. 어이없이 문이 열려버린 것을 보고 예프넨은 당황한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가 잠시 후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은 금방 그치지 않았다. 보리스가 문틈으로 낯선 바깥의 풍경을 살펴보고, 다시 고개를 돌려 형을 바라볼 때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푸후훗, 루훗, 루후후하하핫......" "형?" 예프넨은 애써 웃음을 멈추었지만 아직도 표정만은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보리스는 알 수 있었다. 형이 즐거워서 웃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정말로 아름답지 않니......정말로 아름답지 않아? 이런 상황들, 이런 꼴들, 후훗,푸후후훗......" 예프넨은 문을 밀치고 먼저 밖으로 나간 뒤 보리스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낡은 헛간이 등 뒤에 솟아있고 눈앞에는 좁은 소로가 나 있었다. 아직 대낮이었다. 아마도 그들이 도착했던 그 마을 안 어디가일 것이다. 얼마나 넓은 곳인지도 모르는데, 찾아낼 수 있을까? "보리스. 잘 기억 둬라. 지금 일." "......?" 예프넨은 몸이 달아오르는 듯 아랫입술을 한 차례 빨며 가진 것 없는 빈손을 비볐다. 웃음이 그친 형 의 표정은 싸늘했다. 손목이 맺혔던 피가 이미 말라붙어 있었다. "조금 있으면 기가 막힌 꼴들을 보게 될 테니까." 가슴속에서 뭔가가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형이 평생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어떤 일을 하려 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어쩌면... 이 정도 당했으니 보복하는 것도 당연하겠지. 하지만...... 하지만....아니다. "형도 말이지... 실은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나 다들 것 없는 처지지. 하지만 말이다. 내 나이 가 되었을 때 너는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버지가 계셨다면 네게 처음부터 보여 주셨을 태도를 이 제부터 내가 보여 줄 테니까, 잊지 마. 지금처럼. 당한 만큼은 되돌려 주는 거다. 아니, 그보다 처음부터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지." 잠깐 사이를 두고 예프넨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적이 될 법한 상대를 먼저 끝장내어 버리는 거다." 언젠가 아버지가 하셨던 말이다...라고 보리스는 생각하며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렇게 이미 실수를 저질러버렸다면 말이야. 그걸 돌이키는 방법을 내가 알려줄게." 보리스는 그것이 평소 보아 오던 형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최근 일어난 일들이 형의 신경을 날카롭게 한 것인가? 아니면 그보다 더한 중대한 변화가 있는 것일까? "준비해." 아마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예프넨은 그들이 갇혀 있던 헛간을 돌아 그 헛간이 딸려 있는 건물의 입구를 찾아냈다. 그리고 망설이 지도 않은 채 성큼성큼 들어갔다. 보리스도 따라 들어갔다. 그 건물 역시 아마도 창고인 것 같았다. 안에는 두 명의 중년 사내가 선 채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 고 테이블 하나에 다가않은 사내가 뭔가 장부에 써넣고 있는 중이었다. 주위에는 술통으로 생각되는 둥 근 통들이 천장까지 닿도록 쌓여 있었다. 그들이 들어온 것을 보고 눈길을 보내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들이었다. 예프넨은 세 사람을 둘러보며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책임지냐." 한 명이 다시 돌아보았다. 뭐 저런 어이없는 게 다 있나... 하고 생각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또 한 사람 은 피싯 웃는 것처럼 어깨를 움츠렀다. 예프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두 번 말하게 하는군. 누가 여기 주인이냐." 테이블에 앉았던 자가 고개를 들더니 퉁명스레 말했다. "적어도 넌 아니니까 조용히 꺼져라." 예프넨은 그를 흘끗 쳐다보다니 세 걸음만에 그 앞에 다가섰다. 그리고 손으로 장부를 탁, 소리나게 짚 었다. 쓰던 곳이 가려지자 사내는 발끈했다. "개뼈다귀 같은 애새끼야. 가랄 때 냉큼 꺼지지 못해!" 보리스가 봐도 그 반응은 조금 이상했다. 마치 그들 형제를 이미 알고 있지만 상대하지 않겠다는 태도 같지 않은가? 그러나 다음 순간 일어난 일에 비하면 방금 전 보리스의 의문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예프넨은 장부 를 짚었던 손을 떼더니 그대로 상대방의 뺨을 냅다 갈겼다. 턱이 돌아갈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그리고 상대가 뭔가 더 항변하기도 전에 멱살을 움켜쥐어 강한 팔 힘으로 치켜올리더니 바닥에 힘껏 내동댕이 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내는 키만 컸지 몸은 비쩍 말라 기운도 별로 없었다. 오랜 검술로 단련된 예프넨의 강철같은 팔에 감히 당할 바가 아니었다. 다른 두 사내가 재빨리 물러서며 경계 태세를 취했 다. 그래 보았자 정식 검술과 체술 훈련으로 10년을 넘게 보낸 젊은 예프넨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을 터 였다. 예프넨은 쓰러진 사내는 개의치 않고 나머지 사내 가운데 한 명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너희들과 시비 벌이기 싫다. 저 헛간으로 나와 이 아이를 데려온 자들이 어디로 갔는지만 말해라. 누 구든, 한 명만 말해라." 쓰러졌던 사내가 비틀비틀 일어섰다. 우습게도 방금 덜 마른 잉크를 짚은 손으로 맞은 탓에 얼굴에는 글자가 몇 개 그려져 있었다. "그건 말이지 ...... ." 뭔가 말하려는 것처럼 하며 그는 슬금슬금 예프넨에게 다가갔다. 급습을 느낀 순간, 보리스는 앞 뒤 생 각할 겨를도 없이 그 자에게 달려 들어 와락 매달렸다. 목을 감싸쥐어 누르자 아무리 어린아이라지만 숨이 막혔다. 예프넨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단숨에 어깨를 움켜쥐어 올린 다음 빈손을 오므려 주먹을 쥐더니 배 와 가슴 사이를 두 차례 가격했다. 그리고 다시 어깨를 움켜잡았다가 무릎을 들어 그대로 걷어찼다. 밀 려난 몸이 술통이 쌓인 벽에 가 부딪치자 통에 담긴 술들이 출렁거리는 소리가 온 방에 펴졌다. 이번에는 예프넨도 다시 상대가 반격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두 번째 사내가 희생물이었다. 예프넨 의 손이 뻗어가 목덜미를 움켜쥐자마자 그대로 테이블에 머리를 세 차례나 쳐 박았다. 이마인지 코인지 모를 곳에서 피가 흘러 장부를 물들였다. 세 번째 사내가 단도를 꺼내들었지만 예프넨이 두 번째 사내 를 잡은 채 기가 막힌 몸놀림으로 차 버렸다. 예프넨이 눈짓하자 보리스가 달려가 단도를 집었다 "너희들과 장난하는 것, 재미없다" 예프넨은 보리스의 손에서 단도를 건네 받았다. 그리고 두 번째 사내의 ajl를 테이블에 처박은 채 힘껏 단도를 내리치러 했다. 헉, 하는 비명이 울림과 동시에 단도는 그 자의 목을 살짝 스치며 바로 옆에 가 박혔다. "한 번 더 묻게 한다면 ...... ." 거기까지 말하며 예프넨은 단도를 다시 뽑아들었다. 그걸로도 이미 충분했다. "마, 말하지! 그 치들... 헬머네 술집으로 갔다. 오늘밤에 떠날 거야. 본래 밤에 움직이기 좋아하는 자 들이라... 우리도 이따위 일에 상관하고 싶지 않았는데... 약점을 잡혀서...... ." "우리 가둬 뒀다가 어쩔 참이었지?" "조금 있으면 너희들을 사들인 자들이 올 참이었어... . 레코르다블에 있는 용병단인데 언제고 사람이 부족한 치들이라서, 사람을 사서 몸값을 다 갚을 때까지 놓아주지 않고 용병으로 쓰는 놈들이다." "우리를 샀다고?" 예프넨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레코르다블은 용맹단으로 유명한 동쪽의 사막 국가였다. 용 병단이라는 말을 듣고 보리스는 약간 얼어 있었다. 자신들을 얼마를 주고 살 수 있는지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예프넨은 아까 술통에 부딪치며 쓰러진 남자를 쳐다보더니 물었다. "헬머네 술집은 어디냐?" "저... 그 문으로 나가서 왼쪽으로 걷다가 첫 번째 나오는 모퉁이를 돌아가서 좀더 걸으면 검은 개를 키우는 집이 나오는데... 그 집을 끼고 다시 왼쪽으로 꺾어져서 똑바로 큰집을 따라가면 나와. 간판이 있 으니 금방 찾는다." 그 자는 포기한 것인지 술술 대답해 주었다. 뺨에 찍힌 글자 자 국어 말할 때마다 실룩거려서 자못 우 스운 꼴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예프넨은 선 채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마지막 사내에게 물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 중에 특이한 것은 없었나?" 마치 세 사람이 책임을 나누어 갖도록 하려는 것처럼, 예프넨은 하나씩 돌아가며 질문을 던졌다. 그는 가장 겁이 많은 자였던 모양으로 별달리 당한 것도 없는 주제에 입술을 움찔거리며 대꾸했다. "뭐, 뭔가 좋은 걸 손에 넣었다고 시시덕거렸어. 크, 큰돈을 받고 팔셈인 모양이던데." "좋아." 예프넨은 단도를 손에 쥔 채 보리스에게 물러나라고 눈짓을 했다. 보리스가 문 밖으로 나가자 예프넨 은 뒷걸음으로 한달음에 문 앞까지 가더니 말했다. "미안하지만, 잠시 이 안에서 있어 줘야겠다." 문을 닫고, 예프넨은 바깥쪽 빗장을 찾아내어 걸었다. 그도 물론 그런다고 그들이 오래 갇혀 있을 거라 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가자, 보리스." 보리스는 금방이라도 용병단이 나타나지나 않나 하는 눈동자로 불안하게 골목을 한 차례 바라보았다. 그리고 먼저 걷기 시작한 예프넨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서서히 황혼이 내리기 시작했다. 헬머네 술집이라는 곳은 손님이 그리 많은 곳이 아니었다. 예프넬은 아까처럼 단숨에 들어가는 대신 뒤뜰로 돌아갔다. 그늘져 어둑어둑한 뒤뜰에서 예프넨은 벽을 살펴 기어올라갈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 러더니 보리스를 불러 몇 가지를 귀띔하고는 그늘에 상자가 많이 쌓인 곳으로 기어 들어가 숨도록 했 다. 난간만을 붙잡고 간단히 2층으로 올라간 예프넨은 창문을 하나 열더니 가뿐하게 몸을 솟구쳐 안으 로 들어갔다. 다행하게도 빈방이었다. 예프넨은 방을 나가 바닥을 기어 1층으로 향하는 계단 언저리로 다가갔다. 그 리고 난간에 숨은 채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있었다. 윌스와 조아킴이 마주앉은 채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각자의 앞에는 술잔이 놓여 있었지만 그리 열심히 마시는 기색은 아니었다. 야니카와 로마바크는 보이지 않았다. 예프넨은 울컥 감정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지만 억누르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그는 철저한 응징을 보 여주어야 했다. 속이고 배신한 자들 때문이 아니라 보리스를 위해서였다. 사랑스러운 동생... 그 녀석이 지금처럼 착하고 순진하도록 내버려둘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이미 시간이 거의 없다. 그 생각을 하자 이마에서 식은 땀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침착하게 기다리다가 계 산 위로 올라오는 급사를 보고는 재빨리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하압!" 모퉁이를 도는 그 자를 곧장 그늘진 곳으로 끌어당겨 뒷목을 세게 내치쳤다. 급사가 기절하자 흰 앞지 마만을 빼앗고 쟁반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쓰러진 급사는 질질 끌어 방금 나온 반방에 집어넣고 문을 닫아버렸다. 그런 다음, 예프넨은 태연하게 앞치마를 두르고 빈 쟁반을 든 채 아래로 내려왔다. 굳이 얼굴을 숨기려 고는 하지 않았다. 잠깐 동안만 속아 주면 되었으니까. 주인의 눈에 띄지만 않으면 되었다. 윌스와 조아킴이 있는 테이블로 다가간 그는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면서 말했다. "부르셨습니까?" 그들은 흘끔 고개를 돌려 급사는 앞치마만을 확인하고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말했다. "네가 불렀나. 조아킴?" "뭐야. 아까 술은 더 안하겠다면서?" 술이 약간 취한 그들은 서로의 말이 엇갈리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둘 다 부르지 않았다고 말 하려는 참일 텐데 이번에는 예프넨이 다시 말했다. "저 밖에서 여자 손님 한 분이 두 분께 가보라고 하셔서요. 뭔가 전해주실 거라고 하시던데요." 그들은 다시 얼굴을 마주보았다. "야니는 상인들을 만나러 간 것이 아니었나?" "아냐, 맞아. 아까 분명 거기로 갔다가 곧장 마을 입구에서 합류하자고 말했다고. 아직 시간이 안 됐잖 아." 그렇게 말하면서 뭔가 의심쩍다고 생각한 조아킴은 고개를 들어 급사의 얼굴을 바라보려 했다. 테이블 에 손을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쿡! "으아아아악!"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홀 전체가 조아킴의 절박한 비며에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그리고 놀라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테이블에 놓인 조아킴의 손등에 단도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얼마나 세게 박았는지 테이블까지 뚫고 들어갔다. 벌건 피가 손바닥 아래에서 흘러나와 무늬처럼 번져갔다. 예프넨은 혼란의 틈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조아킴의 허리에서 롱소드를 뽑아들었다. 한 손은 여전히 조아킴의 손을 꿰뚫은 단도를 쥔 채였다. 오랫동안 강한 전사가 되도록 훈련은 받은 예프넨은 양손을 어느 정도 막힘 없이 썼다. "누, 누구냐!" 윌수가 벌떡 일어나 검을 뽑아들었다. 그는 이미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었다. 조아킴을 지키려는 것보 다는 자신의 안위가 우선인 것 같았다. 예프넨은 기둥을 등지고 섰다. 그리고 냉랭하게 말했다. "술에 취했다고 벌써 잊었나." "너, 너는!" 조아킴이 비참하게 부르짖었다. 예프넨의 왼손이 단도를 움켜쥐고 놓지 않은 까닭에 그는 어떤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윌스는 눈이 재빠르게 예프넨의 주위를 훑었다. 인질이 될 수 있는 보리스를 찾는 모 양이었다. 예프넨이 차갑게 말했다. "...어디 있지? 너희들이 가지진 않은 것 같군." 긴 대화가 필요 없었다. 그때 윌스가 짜르기로 밀고 들어왔다. 예프넨은 한 손만으로 조아킴의 칼을 휘 둘러 윌스의 공격을 능숙하게 막아냈다. 바스타드 소드인 윈터러를 쓰던 그의 손에 롱소드는 오히려 가 벼웠다. 그의 손에서 검은 춤추듯 놀려져 세 번의 연속된 공격을 막아냈다. 자리를 옮길 필요조차 없었 다. 그러면서도 예프넨은 은근히 어디선가 날아올지도 모를 로마바크의 석궁을 주의했다. 그 독이 든 석궁 의 위력은 이들을 만난 날 밤에 충분히 본 터였다. 확인되지 않은 야니카의 칼솜씨보다 그의 석궁이 더 두려웠다. "어디 있지!" 이번에는 예프넨이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홀의 사람들을 압도하고도 남을 감정이 담긴 목소리였다. "네놈이 알 거 없다!" 윌스의 공격을 한 차례 더 막아낸 예프넨이 내뱉듯 말했다. "치졸한 도둑놈 주제에 이것까지 하나?" 그러면서 그는 조아킴이 낮은 의자를 한 차례 세게 걷어찼다. 비명이 홀을 뒤덮었다. 테이블에 박힌 손 의 상처가 찢어지는 고통이 대단했던 것이다. 이쯤 되자 사람들은 상관하기 싫다고 생각했는지 슬슬 홀을 빠져나갔다. 예프넨은 일을 빨리 끝내겠다 고 마음먹고 조아킴을 향해 말했다. "말해라. 아니면 손목을 잘라버린다." 그런 협박은 예프넨으로서도 평생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늘 평생 처음 해보는 일을 너 무도 많이 했다. 처음부터 모든 일이 그의 천성에 맞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했다. 오직 한 사람에 게 뭔가를 깨닫게 해 주고 싶어서였다. "......" 조아킴은 오른손잡이였다. 오른손을 잃는다면 다 앓는 것이다. 예프넨의 태도로 보아 오재 지체할 것 같지도 않았다. 동료인 윌스는 이미 공격에 별로 열의가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적이 쉽게 제압할 수 있 는 상대도 아닌데다, 여차하면 조아킴을 버리고 야니카 등과 합류해서 달아나면 그만인 것이다. 손해는 없었다. 어차피 돈을 바라보고 모인 사이라 동료애 같은 것도 별로 없었다. "말하기 싫은가?" 예프넨이 검을 빠르게 쳐들었다. 그 검은 조아킴의 것이고, 따라서 위력이 어떤지는 조아킴 자신이 가 장 잘 알고 있었다. 날도 잘 갈아두었었다. 남의 검보다 자신의 검이 몸에 박힌다는 사실이 더욱 끔찍하 게 느껴졌다. "그 검...야니카가 갖고 있어." 윌스는 기분 나쁘다는 듯 다시 두 걸음 물러나 검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그러더니 소리쳤다. "우릴 배신하는군! 야니카가 널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다!" 조아킴은 부르르 떨더니 마주 소리질렀다. "네놈이 먼저 나를 버리잖아! 가서 야니카에게 전해! 계약은 끝이라고 말이다!" "야니카 고스가 네 멋대로 계약을 끝장내게 내버려둘까"?" 윌스는 뒷걸음으로 물러서서 입구까지 갔다. 그리고 나가기 직전에 다시 한 번 외쳤다. "전부 목들 잘 보관하고 있으라고! 검은 장갑의 야니카가 네놈들의 목을 받으러 갈 거다!" 윌스는 문을 열더니 빠른 걸음으로 가 버렸다. 어쩐지 자신 역시 뭔가를 피해 달아나려는 듯한 걸음이 었다. "저런 놈이야말로 최악인데...이렇게 될 줄 알았지. 젠장, 그런 더러운 계략에 말려드는 것이 아니었어." 조아킴은 불쾌한 듯 중얼거리더니 현기증을 느끼는 듯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피가 많이 흘러서 이 제는 테이블 밑에까지 고였다. 그는 내뱉듯 말하기 시작했다. "야니카는 흥정하러 갔지만 형식적인 행동일 뿐이고, 실제로는 자기가 차지할 생각일 거다. 로마바크도 검이 탐났겠지만 자기는 검이 아니라 석궁을 쓴 처지고, 해서 검을 팔아서 이익을 나누자고 우겨댔지. 그 자식, 야니카의 비위를 거슬려서......" 조아킴은 갑자기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냈는지 목소리가 처졌다. "야니카는 무시무시한 여자다. 나도 그리 무사하진 못하겠지." 예프넨은 마음에 동정심이 일어나는 것을 억눌렀다. 아차피 이자 역시 윈터러를 빼앗는 데 한 몫 담당 한 놈일 뿐인 것이다. "자정 언저리에 마을릐 북쪽 입구에서 야니카를 볼 수 있을 거다. 아마 그 때쯤엔 야니카가 거슬리게 구는 로마바크의 머리를 이미 날려버렸을 지도 모르지. 그 여자 성질이라면 그러고도 남으니까." 예프넨은 이 자들의 조악한 동료 관계에 역겨움을 느끼며 아미를 찌푸렸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침이 쓰게 느껴졌다. "그렇다 해도 야니카 혼자는 아니야. 용병단이 와 있을 거다. 너희들을 못 붙잡았으니 야니카에게 따지 려 할 테고, 그 상황에서 너희들이 나카나면 야니카는 옳다구나 하고 너희들을 그들에게 넘겨버린 다음 튀어버릴 거야. 내가 해줄 수 있는 얘긴 이게 전부다." 예프넨은 단도를 움켜잡더니 힘껏 다시 뽑아냈다. 칼날에 핏방울이 엉겨 있었다. 이 단도는 그리 좋은 것이 아니어서 그가 그토록 힘을 다해 박지 않았다면 손바닥을 뚫고 테이블까지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 다. 그만큼 조아킴의 상처도 너덜너덜했다. 조아킴은 아직 무기가 없는 탓인지 잠자코 있었다. 그때 머리 위에서 예프넨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윈터러를 찾지 못한다면 분명 이 행동을 후회하겠지만, 가시오. 다시는 만나지 맙시다." 조아킴은 손바닥을 감싸쥔 채 술집 밖으로 나갔다. 테이블과 바닥에 흐른 피를 보며 예프넨은 울컥 욕 지기가 치밀어 올랐지만 꾹 눌렀다. 어쩔 수 없는 수순이다. 이럴 수 밖에 없는 거다. 밖으로 나가며 그는 보리스를 불렀다. "형......" 약속한 대로 보리스는 모두 보고 있었다. 뒤뜰에 쌓여 있던 상자를 타고 주방으로 넘어 들어가 구걸하 는 체 하면서 형이 하는 행동을 모두 보고 있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모든 것을 보고도 쉽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사과를 던져 주던 야니카와 황금 팔지 하 나에 고대의 왕국을 이야기하던 그들..잠시 봤을 뿐인 그들을 신뢰해서가 아니다. 아무런 적대감도 없었 는데, 친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분명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고 이쪽에서도 그렇게 대했는데, 어째서 그런 짓을? 갑자기 윈터러가 탐이 났기 때문에? 아니야...그런 것은 아냐. 그들이 모닥불에 함께 둘러앉았을 때 조금이라도 윈터러에 신경 쓰는 기색이 있었다면 예프넨이 재빨리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결과는 뭔 가. 설마. 그들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계획하고 노렸던 거였나? 계획적으로 접근해서 그들 형제의 경계심 을 풀고, 교묘하게 속여 모든 것을 빼앗으려 했나? 왜...왜 그런 식으로 좋은 감정을 상해야 하는데? 그까짓 보물 따위가 다 뭔데? 형제는 어두운 길거리로 나왔다. 보리스는 윌스가 사라진 방향을 손으로 가리켜 준 뒤 침묵했다. 예프 넨이 한참 후 말했다. "쓰지." 짧은 말이지만 의미는 모두 함축되어 있었다. 보리스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더욱, 더...쓰디쓸 거다. 점점 더, 모두 다......" 예프넨은 단도를 내버렸다. 솔직히 더 갖고 있을 용기가 없었다. 그도 본래는 마음 약한 젊은이 였다. 지금과 같은 행동을 할 수 있게 하는 지독한 동인만 아니라면, 그 누구의 강요였다 해도 스스로의 뜻으 로 이런 행동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쓰디쓴 인생이겠지...... 초조하고 답답하고 안타깝고 불안했다. 형이라는 자가 동생에게 해 줄수 있는 것이라고는 겨우 이것뿐 이라는 것이, 그리고 그것조차 오래 가지 못하리라는 것이. 예프넨은 피가 묻은 손을 내려다보고는 그 손을 보리스의 눈앞에 내밀었다. "봐라." 보리스는 가라앉은 눈으로 그것을 보고 있었다. "형도 할 수 잇는 일인 거야. 아버지뿐만 아니라...형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거다." "......" " 너도 마찬가지야." 갑자기 한 쪽 가슴이 쿡 하고 아파 왔다. 보리스는 눈을 들어 형을 보았다. 그리고 형도 자신과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은 것을 알았다. "무언가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게 되는 거지. 그러니까 너도, 너도 너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라. 어떤 보물보다도, 윈터러나 그 밖에 무엇보다도 소중한 건 너 자신이니까. 형이 너를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것처럼. 너도 너 자신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야 하는 거다." 보리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가슴속에 불안한 예감이 서서히, 느리지만 분명하게 몰아쳐 왔다. "너 자신을 힘껏 지켜라...... 결코 죽지 않도록, 결코 버려지지 않도록... 결코 아프지 않도록, 다치지도 않도록......" 할 수 있는 한, 힘껏 살아남아라. 미치도록 힘겨운 아 세상 속에서, 그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견디고, 끝까지 살아남아라. 4.용병단의 작은 소녀 자정에 그들은 마을 어귀에 있었다. 보리스는 자신의 어깨를 감싼 예프넨의 손이 차갑다고 느꼈다. 손뿐이 아니라 팔과 가슴과 옆구리조차 그의 몸보다 싸늘했다. 형제는 마을의 북쪽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농가의 야트막한 지붕 위 에 올라가 있었다. 아래에 사람이 있을 테니 기척을 내어서는 안 되었다. 보리스는 생각했다. 아마도 눅눅한 밤공기 탓일 것이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오늘밤은 최근 유래 없이 서늘한 날씨였다. 이미 가을이라고 느낄 정도였다. 며칠 더 있으면 차 오를 달이 수면처럼 갠 밤하늘에 떨어진 목걸이추인 양 박혀 있었다. 주위에 점점 쏟아진 은빛 별들은 흩어진 목걸이를 이었던 구슬 끈. 이윽고 예프넨의 눈이 찾던 자를 포착했다. "......" 이제부터야말로 어려웠다. 아직까지 솜씨를 보지 못했지만 야니카고스가 그날 저녁 보았던 것처럼 단 순히 소탈한 모험가가 아니라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이상 더욱, 더. 그들의 시야가 닿는 곳에서 야니카는 그렇게 나타났다. 봤던 것과 다를 것 없어 보이는 가뿐한 걸음걸 이로 입구까지 왔다. 그리고 경비병과 뭔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누군가 에게 손짓했다. 어둠 속에서 예상을 어그러뜨리고 로마바크가 여전히 살아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일이 어렵겠구나. 당연하 직감이었다. 예프넨은 아직 정체를 알 수 없는 야니카보다 저 끔찍스런 독을 바른 로마바크의 석궁이 더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윌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야니카와 로마바크는 나란히 입구 근처의 나무 밑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자못 친구한 태도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시덕거렸다. 낮은 목소리라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달이 비교적 밝아 충분히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예프넨은 그러고도 한참을 살피고 있었다. 야니카의 짐에서 아직 윈터러를 발견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허리에 검이 매어져 있긴 했지만 예의 흰 칼집은 아니었다. 눈이 멀기라도 하기 전에는 못 알아볼리 없 는 예프넨이었다. 그때, 보리스가 형의 팔을 툭툭 쳤다. "저기." 드디어 어둠 속에서 여러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 나타난 자들만도 대략 열 명 이상은 되었다. 그러고도 계속해서 나타났다. 거인처럼 키가 큰 자, 자루 긴 낫처럼 생긴 싸이드를 든 자. 로브를 바닥 에 질질 끄는 자, 뿔 달린 높직한 투구를 쓴 자...... 레코르다블에서 왔다는 용병단이 틀림없었다. 척박한 사막 국가인 레코르다블에는 통일된 규칙 없이 수십 명에서 수백 명까지 다양한 숫자로 구성되는 크고 작은 용병단들이 흔했다. 그 가운데 많은 숫자 를 모아 정예 조직을 갖게 되는 용병단도 있었고 그런 자들이 심지어 레코르다블의 권력까지 좌지우지 한 일도 있었지만. 역시 대부분의 용병단들은 쉽게 만들어 졌다가 금방 흩어지는 불확실한 조직에 불과 했다. 그들은 돈을 내는 자만 있다면 대륙 어디로든 갔다. 아마 꺼리는 곳이 있다면 저 악명 높은 필멸 의 땅. 모탈 랜드 정도랄까. 이름 높은 용병단 몇은 대륙 각 국가에서도 거액의 몸값을 내고 데려다 썼다. 효과는 아주 좋았다. 이 사막의 전사들은 해전을 제외하고는 어떤 전투에서도 강인한 생명력과 끈질긴 전투욕, 그리고 적에 대 해 필요이상의 잔인함까지 보여 주어 고용주들을 만족시켰던 것이다. 저들 역시 지금은 수십 명 정도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큰 세력을 가진 자들일지도 몰랐다. 조금도 방심 할 수는 없었다. 갑자기 야니카가 일어나더니 용병단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래, 볼일 있다고?" 어두워서 정확히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용병단의 규모는 대략 4,50은 되는 듯했다. 비록 스무 명가량의 적을 단숨에 해치웠던 야니카와 로마바크지만 이들은 동네 깡패들이 아닌 전쟁으로 단련된 전사들이었 다. 비위를 거술러 싸움이 벌어진다면 불리한 것은 역시 두 사람 쪽이었다. 용병단 쪽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는 야니카보다 머리 하나만큼이나 장대했다. 머리는 번 질거리는 대머리였는데 투구는 쓰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다가오더니 횃불을 두 개 올렸다. 그로서 예프넨과 보리스도 상대방을 잘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두목으로 생각되는 자는 이상하게도 갑옷은 입지 않았다. 대신 몸 곳곳의 관절마다 보호대가 부 착되어 있었다. 어깨, 팔꿈치, 손목, 무릎, 발뒤꿈치 등등. 손에 쥔 것은 길쭉한 창이었다. 창이라면 비교적 장거릴에서 공격 할 수 있는 무기이고. 따라서 몸을 가볍게 움직이는 쪽에 좀더 초점을 두고 무장한 모양이었다. 야니카는 한 걸음 걸어나왔다. "이거, ; 호아금 창날' 의 데라키 대장을 직접 뵙다니 무한한 영광인데." 그러더니 그녀는 약간 과장되게 허리를 굽히며 궁정식 절을 했다. 데라키 대장이라는 자는 답례도 하 지 않은 채 무뚝뚝하게 입을 뗐다. "손해를 벌충해라." 야니카는 몸을 바로 세우더니 허리에 손을 넞고 목을 한 바퀴 돌렸다. 여자인데도 우드득, 하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렸다. "손해? 무슨 손해?" "너희가 팔기로 한 자들이 도망쳤다." 데라키 대장의 목소리는 음산하게 느껴질 정도로 저음이였다. 데라키 대장의 뒤로 두 명이 검을 찬 자가 다가오더니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상대를 위압하려는 태도인 모양이었다. 또한 그 뒤에는 수십 명의 한패들이 있었다. 그러나 야니카는 조금도 움츠러르지 않은 채 대수롭잖다는 듯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 그래? 하지만 그건 늦게 간 너희 잘못 아닌가? 아니면 놈들을 지키고 있던 자들이 어수룩해서 그 런 거이거나 말이지." 데라키 대장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그녀는 말을 맺듯 재빠르게 덧붙였다. "어느 쪽이든, 우린 평소 하던 방식대로 인수를 마친 거잖아. 우리 할 일은 다했다고. 그 뒤에 일까지 우리가 책임져야 하나?" 그 말을 듣고 보니 야니카 일행이 이런 식으로 사람을 납치해서 용병단에 팔아먹은 것은 처음이 아닌 모양이었다. 지켜보던 예프넨은 싸늘한 눈빛으로 이마를 찌푸렸다. 그리고 데라키 대장이 다시 말했다. "우리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것만이 분명한 사실이다. 손해는 너희가 벌충해라." "억지 부리지......" 야니카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뒤어서 로마바크가 끼어들었다. 그는 아마 비굴한 웃음을 입가에 띠었으 리라 생각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지들 말고...그래, 데라키 대장님, 우리가 어떻게 손해를 메워주기를 바라는 거요? 일단 말이라도 들어 봅시다." 데라키 대장이 말했다. "두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로 우리가 준 돈의 두 배를 내놓아라. 너희 때문에 바쁜 일정이 엉망이 되었 으니 배상을 해야 한다. 그게 싫다면." "싫다면?" 벌써부터 야니카는 불쾌하다는 듯 불쑥 되물었다. "너희가 대신 용병단에 들어와 일을 해서 값을 치러라." "뭐야!" 야니카가 울화가 치말어 소리를 지르는데 로마바크가 재빨리 막았다. 지금 용병단의 비위를 건드릴 때 가 아닌 것이다. 황금 창날의 데라키 대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성격의 사람인지는 두 사람 모두 충분 히 알고 있었다. 야나카가 자신의 실력을 믿어서인지 아니면 본래 성품 탓인지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에 비해 로마바크는 자신의 처지를 잘 깨닫고 있었다. 그는 데라키 대장을 향해 애써 부드러운 목소 리로 말했다. "손해가 있으시다니 물론 우리가 배상해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황금 창날과 우리 한두 해 거래 한 사이도 아니잖습니까? 하지만 아시다시피 야니카와 저는 용병단의 조직에 몸담을 만한 성질이 못됩 니다. 혼자 다녀버릇한 저희 같은 자들은 오히려 대장님의 일에 방해만 될 겁니다. 좋은 결과는 오지 않 을게 뻔하죠. 하지만 전적으로 저희 잘못은 아닌데 두 배나 되는 배상도 조금 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저희가 받는 돈을 그대로 돌려드리는 선에서 해결할 수는 없겠습니까? 데라키 대장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안 된다. 돈을 내던가. 일을 해라." 야니카가 어깨를 부르르 떨며 성큼 앞으로 나서려 하는 것을 로마바크가 다시 막았다. 그 역시 이맛살 을 찌푸리고 좋은 방법이 없나 궁리하는 중이었다. 그는 다시 제안했다. "그럼, 본래 가격의 절반만큼 더 쳐 드리지요. 하룻밤도 되지 않는 사이에 1.5배입니다. 어디에 걸어도 그 이상의 수익은 힘들죠." "로마바크!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왜 우리가 저들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줘야 해!" "야니, 제발 좀......" 그러나 로마바크는 야니카를 말리는 데 실패했다. 야니카는 거칠게 로마바크의 어깨를 밀어젖히고 데 라키 대장 앞으로 나와 어깰를 폈다. 그리고 오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돈은 도로 주겠어. 그거나 갖고 꺼져." 데라키 대장은 다시 말했다. "두 배다." "이런 사기꾼 같은 법이 어디 있어! 황금 창날이 많이 컸군 그래! 이야니카 고스가 우습게 보이나 본 데, 그런 식으로 해서 어디 후환이 없나 보자!" 한바탕 소리지른 야니카는 씩씩거리다가 다시 외쳤다. "치졸한 지식들아. 너희 돈 여기 있다!" 품속에서 금화가 든 듯한 묵직한 주머니가 나와 바닥에 내던져졌다. 데라키 대장 곁의 한 부하가 다가 가 주머니를 집고 두 사람이 함께 금화를 세었다. 자세히 셀 필요도 없었다. 데라키 대장이 입을 열었는 데 목소리를 실로 굉음에 가까울 정도로 울렸다. "너희 따위 건달 용병들이 있든 없든 조금이라도 신경 쓸 황금 창날이 아니다. 돈도 몸도 내놓지 않겠 다면 네놈들을 죽이겠다." 로마바크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마자 재빨리 뒷걸음치며 석궁을 준비했다. 야니카는 펄쩍 뛰어 물러 나며 여전히 신랄한 한 마디를 던졌다. "죽여 보시지! 그렇게 쉬울까나?" 순식간에 황금 창날의 용병들이 두 사람을 반원형으로 포위했다. 분분히 무기를 꺼내드는 소리가 사방 에서 울렸다. 로마바크는 야니카에게 다가가며 절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발! 정말로 여기서 죽고 싶은거야?" 야니카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신랄하게 내뱉었다. "그럼 이대로 노예나 된 것처럼 끌려갈 생각이냐?" "그게 아니라고... 이봐, 꼭 끝까지 따라갈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야니카는 로마바크가 암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금방 알아챘다. 일단 따라가는 체 하다가 기회를 봐서 달아나자는 것이다. 두 사람 정도의 실력이라면 보초 몇 명 뚫고 달아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자 존심 때문에 얼굴이 가렵긴 하지만 이런 곳에서 개죽음 당하는 것에 비하랴. " 잠깐, 데라키 대장! 하나 묻겠는데 설마 우리더라 죽을 때까지 당신들을 따라다니란 얘기는 아니겠 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야니카는 묻자 데라키 대장이 여전히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첫 임무에서 공을 세우면 풀어 주겠다." 사실은 이랬다. 총 백여 명도 넘는 용병단을 휘하에 거느린 데라키 대장이 굳이 두 사람을 데려가려 하는 것은 계약상의 문제 때문이었다. 트라바체스 공화국의 칼마세 의원이 그들 가운데 40명을 고용했 는데 숫자를 맞춰서 이동하는 도중 사고로 두 명이 희생되었다. 이곳까지 와서 다른 의뢰처에 보낸 부 하들을 부르기도 곤란해진 그는 현지에서 사람을 사서 숫자를 채울 계산을 했다. 예프넨과 보리스를 사게 된 것도 물론 그것 때문이었다. 보리스는 어린애에 불과해서 쓸모가 없는데도 일단 계약상의 숫자만 맞추면 억지 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대륙 최고의 공격력을 가지고 있다는 레 코르다블의 무장 용병들인 것이다. 사소한 문제로 그들을 화나게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 다. "좋아!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가서 한바탕 하면 되다는 거지? 까짓거, 못할 것도 없지. 나중에 딴소린 말라고." 일촉즉발의 상황이 해소되려는 순간이었다. 그때 예프넨의 눈이 야니카의 등뒤에 불쑥 튀어나온 갈쭉 한 자루에 가 닿았다. 지금까지 겉옷 안쪽으로 꽂혀 있었던 탓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갓무속 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미는 것을 느낀 그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숨겼던 곳에서 벌떡 일어나 야트막한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멈춰!" 모두 그 목소리를 들었다. 야니카가 가장 먼저 소리쳤다. "뭐야, 달아난 게 아니었잖아!" 보리스는 엉겁결에 형을 따라 뛰어내려 트인 곳으로 나갔다. 예프넨은 조아킴에게서 빼앗은 칼로 야니 카를 가리키며 외쳤다. "사기꾼 같은 여자! 내 검을 내놔라!" 그러나 야니카는 이들이 나타나 줘서 오히려 잘됐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데라키 대장을 쳐다봤 다. "여기 당신들이 찾던 사람이 나타났잖아? 그럼 우린 그만 가도 되는 거겠지? 아참, 방금 돌려준 돈도 도로 내놓으라고." 예프넨은 겨눈 칼을 거두지 않은 채 분개한 목소리를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너희가 무슨 근거로 자유민을 사고 파는 거냐?" 여긴 노예제가 없는 나라라는 것을 잊었나!" 곁에서 로마바크가 키들거리며 거들었다. "우습지도 않은 소리는 집어치워. 실력이 모자라 붙잡혀 팔렸으면 얌전히 말을 들을 것이지. 어디서 누 굴 가르치려 들어? 어린애 투정은 집에 가서 엄마한테나 해라." 보리스는 어머니의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아이였다. 평소에는 얌전하지만 실제로는 형 못지 않은 고집을 갖고 있는 그는 발끈해서 소리쳤다. "너희는 우리가 자고 있을 때 비겁하게 행동했잖아! 그게 설마 자랑스러운 거야?" 로마바크는 코방귀를 뀌었다. "자랑스럽다면 어쩔 테냐? 너희 같은 애송이들이 설사 정면으로 덤볐다 한들, 우리한테 한 칼 거리나 됐을 거 같냐? 집에서 막대기 몇 번 휘둘러 봤다고 건방지게 검을 갖고 다니는 게 아냐." 옆에서 야니카가 까르르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잘 맡아 줄게, 응? 너희한테는 너무 위험하거든 후후훗......" "너희가 더 비겁한 건......" 보리스는 창고에 갇혔을 때 들었던 형의 웃음소리를 기억해 냈다. 그는 예프넨이 있는 능력과 무든 힘 을 다해서 그를 보호해 주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형을 깔보는 자들의 목소리 따위도 싫었 다. 설혹 형이 정말로 애송이에 불과해서 저들에게 상대가 안되더라도, 형은 분명 최선을 다해 동생에게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려 애썼으니까.....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비겁한 자들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 미리 상대를 의심해서 경계하는 행동 따위는 지혜로운 것을 떠나서 형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형은 그건 사람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너희를 믿는 마음을 이용하려 했다는 거야! 사실 너희는 처음부터 다 알고서 우리한테 접근한 거지? 그 자들을 해치워 준 것도 실은 속임수였지? 죽인 것도 아니었을 거야!" 말이 입에 붙는 대로 튀어나왔다. 사실 뒤의 말은 지금까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일도 없었던 사실이 었다. 하지만 로마바크가 석궁을 이용해서 스무 명이나 되는 적들을 순식간에 죽였다는 것, 그게 정말이 라면 왜 여기서 그 능력을 발휘해서 저 용병들을 죽이지 않는 거지? 그땐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는 데? "저 저 젓비린내 나는 애새끼가......" 로마바크는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이었다. 곁에서 야니카가 팔을 한 번 치자 뒤로 몰러나며 눈을 부라 렸다. 그때, 보리스는 누군가가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 눈길은 빠르게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대신 데라키 대장의 눈 또한 자신에게 향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뒤에 수십 명의 용병들이 나무처 럼 빽빽하게 서 있었다. 멀리서 보던 것에 비해 바로 그들을 둘러싸고 선 용병들은 훨씬 더한 위압감을 주었다. 특히 가까이서 보니 데라키 대장의 얼굴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왼쪽 눈가로부터 관자놀이로 이어지는 움푹 패인 칼자 국을 따라가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넓게 째진 눈매에 박힌 부리부리 한 눈알은 약간만 움직여도 뒤까지 돌아볼 수 있을 듯했다. 그는 그런 눈으로 보리스를 보다가 곁에 선 예프넨을 흘끗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가 입을 열어 뜻밖의 말을 할 때까지는. "서로 의견이 다르군 그래." 야니카가 문득 불길함을 느꼈는지 먼저 데라키 대장을 보며 외쳤다. "무슨 소리야! 발리 일을 처리하라고! 우린 갈 길이 바쁘니까 말이지. 어서 돈이나 내놓아!" 데라키 대장은 돈을 주는 대신 천천히 팔짱을 꼈다. 그리고 말했다. "다시 한 번 서로 공격해서 한쪽을 사로잡아 팔아라. 이긴 쪽에게 돈을 주고 진 쪽은 끌로 가겠다." "뭐야!" 야니카가 분개해서 어쩔 줄 모르는 동안 예프넨이 오히려 상황을 빨리 파악했다. 속사정은 모르지만 저 험상궂은 용병 대장이 그들의 편을 들어준 것이다. 그것이 그리 오래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할 때 한시바삐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예프넨은 단장 한 발 물러서며 그녀의 공격에 대비하는 자세를 취했다. 아무리 증오스럽다 해도 아직 싸울 의지가 없는 상대를 먼저 공격할 그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야니카를 이길 수 있을까? "젠장, 시체로 만들어서 넘겼다고 날 원망하진 말라고!" 화난 목소리를 외친 야니카는 등뒤에서 윈터러를 뽑으려다가 생각을 바꾼 듯 허리에 꽂힌 칼을 잡아 뺐다. 그녀도 바보가 아닌 이상 여기서 좋은 검을 선보였다가는 그대로 데라키 대장의 손으로 굴러 들 어가게 된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시작한다는 말도 없이 둘은 동시에 격돌했다. "......" 보리스는 야니카의 검이 감히 눈으로 따라가기 힘들 정도의 속도를 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첫 일격 을 예프넨이 힘겹게 막아내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두 번째는 아니었다. 야니카의 검은 눈 깜짝r할 사이 에 예프넨의 오른쪽 어깻죽지를 찔렀고, 목과 턱에 걸쳐 스친 상처를 냈으며, 다시 한 번 오른 손목에 명중했다. 그리고 나서 노련하게 한 박자 뒤로 물러나며 눈을 번쩍인 그녀는 다시금 폭풍 같은 기세로 돌격해 왔다. 적지 않은 피가 흘러내렸지만 상처들은 치명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예기를 꺽기에는 충분한 공세였다. 예프넨은 저도 모르게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중하고 있었고 그런 그를 마음대로 요리할 자신이 있다는 듯 야키카의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마저 떠올랐다. 보리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얼굴이 하얗게 되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런 그가 다시 한 번의 시선을 느 낄 수 있었던 것은 실로 이상할 정도로 예민한 감각인 셈이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그것이 자신에게 주 어진 놀라운 재능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찾아내려는 순간, 형이 위기를 맞는 것이 보였다.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짧게 비명을 질렀다. "아!" 야니카의 칼이 예프넨의 목을 노리고 베어져 들어오는 순가. 예프넨은 이미 방어선 침범을 허용해 버 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거리에서 이미 검은 소용이 없었다. 팔조차도 늦다. 끝장인가? 그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예프넨은 몸을 뒤로 젖히며 제자리에서 껑충 뛰어올랐다. 그런다고 피해지는 공격이 아니었다. 야니카의 칼은 목에서 어긋나 곧장 예프넨의 가슴을 푹 찔렀다. "!" 그리고 야니카는 흠칫 놀라며 제자리에서 굳어졌다. 그때 예프넨은 가슴에 꽂힌 듯했던 칼에서 비스듬 히 미끄러지더니 야니카을 끌어당겨 껴안아 버렸다. 보리스도, 그리고 용병들도 놀랐다. "이잇!" 야니카는 금방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녀의 등뒤로 돌아간 예프넨의 손에는 본래 조아킴에게서 빼앗은 칼이 들려 있었다. 그러나 그는 칼을 놓아버리고 야니카의 등뒤에 있는 위커러의 손잡이를 잡았다. 마침 용병들에게 등을 보이고 선 까닭에 그들에게는 단지 칼 한 자루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만 보였다. 그것 은 언뜻 보아 예프넨의 상처를 견디지 못하고 무기를 떨어뜨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야니카는 알고 있었다. "으으윽......" 칼집에서 뽑아내지 않은 윈터러가 갑자기 강력한 냉기를 내뿜어 그녀를 꼼짝할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야니카의 실수는 의심할 바 없이 한 가지였다. 바로 예프넨은 아직도 옷 안쪽에 입고 있는 스노우가드 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 잠시 떨어졌던 윈터바텀 킷은 다시 한 사람의 소유로 돌아가는 순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힘을 발휘했 다. 예프넨이 윈터러를 칼집 채로 뽑아내고 야니카를 밀치자 그녀는 마치 석궁으로 변한 것처럼 그 자 리에서 쓰러졌다. 예프넨은 호흡이 거칠었다. 보리스는 형에게서 눈도 떼지 않고 있다가 형이 야니카를 놓아버리자 당장 그에게 달려갔다. 그때였다. "흐음." 데라키 대장이 가볍게 목젖을 울리는 순간, 흰 깃 달린 재빠른 화살과 같은 것이 두 형제의 눈앞을 번 쩍, 스치고 지나갔다. 반짝임이 남긴 착시의 잔상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으,으윽!" 그것은 로마바크의 목소리였다. 그제야 돌아본 형제는 그가 이미 석궁에 볼트를 준비해서 쏘려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팔이 마비된 듯 덜덜 떨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팔에 꽂힌 세 개의 작은 단도를 알아보는 데는 잠시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다시 돌아보았을 때, 데라키 대장의 곁에는 방금 진짜지만 해도 없던 새로운 사람이 서 있었다. 데라키 대장이 그를 불렀다. "나야." 이름을 불린 당사자는 대답 없이 고요한 눈동자를 내렸다가 보리스를 다시 한 번 쏘아보았다. 스스로 도 알 수 없는 직감으로 인해 보리스는 그때까지 자신을 주시하던 눈동자의 주인이 그 앞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그 손에 로마바크의 팔에 박힌 것과 똑같은 단도가 세 개 더 집혀 있는 것을 본 예프넨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저토록 정확한 솜씨를 가진 상대는, 겨우 열 살이나 되어 보일까 싶은 조그마한 소녀가 아닌 가? 길게 땋아 늘인 은빛 머리카락이 어둠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다. 머리에는 긴 천을 둘둘 감아 만든 '터번' 이라고 하는 것을 썼는데 이는 레코르다블에서도 어떤 특정 종교를 가진 사람들만이 사용하는 머 리장식이었다. 먼지에 바랜 듯한 보라색 터번은 소녀의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와 묘하게 어울렸다. "저 두 놈을 잡아라." 데라키 대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두 명이 앞으로 나와 꼼짝도 하지 못하는 야니카의 팔을 움켜쥐어 일 으켰고, 다른 세 명이 로마바크에게 다가갔다. 그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덜덜 떨리는 팔로 석궁을 들 어 그들을 겨냥했다. 그리고 악의로 인해 비틀린 목소리로 외쳤다. "이럴 수가 있는 거냐! 그동안 거래해오던 우리를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본 적도 없는 젖내나는 어린앧 르의 편을 들다니! 상황 파악을 잘하는 줄 알았더니만 완전히 맹물이잖아! 빌어먹을 모성애라도 발동된 거냐? 퉤. 더러운 놈들! 퉤,퉤!" 그때 예프넨이 호흡을 고르며 느리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후훅, 훅, 당신은 어머니라는 존재를 아주 시시한 걸로 생각하는 모양이지만...하아...당신 어머 니 앞에 가서도 자신이 이토록 최악의 인간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나? 너는 버러지만도 못 한 놈이니까..목숨 붙어 있는 동안 어머니는 만나지 않는 편이 좋을거다." 로마바크의 얼굴이 비참하게 일그러졌다. 이런 모욕을 받고 상대를 죽여버리지 못하는 것은 이번이 처 음이었다. 믿었던 야니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하여간 쓸모가 없어졌다. 지금 저 용병들을 따라갔다가 는 언제 빠져나갈 수 있을 지 전혀 모를 판이었다. 그렇지만... 젠장! 따라가지 않을 방법이 전혀 없잖은가! 그때 은빛 머리를 땋아 내린 소녀가 성큼 걸어 앞으로 나왔다. 보리스와 예프넨을 지나쳐 로마바크에 게 다가가던 용병들 근처까지 갔다. 그녀의 발걸음은 가벼우면서도 이상한 기품이 있어서 앳된 얼굴과 자그마한 키에도 불구하고 쉽게 가로막히 힘든 그 무엇이 있었다. 로마바크를 둘러쌌던 용병 가운데 한 사람이 그녀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나야트레이. 네가 나설 필요까진 없어." 소녀는 대꾸가 없었다. 입술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꼭 다물려져 있었다. 그녀는 로마바크를 한번 쏘아보 더니 갑자기 몸을 솟구쳐 두 걸음 앞을 찍고 빙글, 방향을 돌렸다. 순식간에 후방으로 돌아 흡사 자신이 던졌던 단도처럼 빠르게 접근하는 것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다음 동작은 결코 눈으로 볼 수가 없 었다. 언뜻 팔을 휘두르는 듯하더니 길게 땋은 머리채가 허공을 춤추듯 갈랐다. 그것은 타격 계열의 기술은 아니었다. 로마바크는 당황했을 뿐, 비명을 지르지도 쓰러지지도 않았다. 타닥. 어느새 자신이 뛰어든 방향의 반대쪽으로 빠져나가며 바닥을 내리딛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쪽 무릎을 꿇고 왼팔로 얼굴을 가리며 차지한 동장은 흠잡을 데가 없는 완벽 그 자체였다. 걷기 시작할 때부터 체 술을 익히지 않고는 결코 그 나이에 가능한 동작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보리스는 로마바크를 한 번 바라보고서야 상황을 깨달았다. 그의 손에 들려 있넌 석궁을 비롯해서. 심지어 팔에 꽂힌 세 개의 단도조차 뽑혀 사라지고 없었다 소녀는 맨손으로 무 기를 빼앗는 기술의 달인이었다. 그런 기술이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 실제로 보는 것은 예프넨 조차 처 음이었다. "깔끔해졌군, 잘했다, 나야." 나야트레이. 라는 이름을 가진 듯한 그 소녀는 일어서자 데라키 대장을 향해 가벼운 목례로 답했다. 데 라키 대장은 용병들을 손짓해 불렀다. 더 이상 예프넨과 보리스에게 상관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형 제 역시 그들과 더 이상 어떤 시비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야트레이가 데라키 대장에게 걸어가자 아까 말을 걸었던 용병이 그녀를 뒤따라가며 머리를 살짝 쓰 다듬어 주었다. 빨간 머리를 조금 길러 뒤로 졸라맨, 스믈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나야트레이라는 소녀는 그를 간단히 올려다보았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쾌한 듯 보이지도 않았다. 지금껏 보인 침착하고 차가운 모습을 생각할 때 그리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듯한 일인데도. 용병단은 이윽고 마을 밖으로 사라져 갔다. 나야트레이는 보리스에게 다시 눈길을 주지는 않았다. 5. 긴 자장가 "아마 우리가 피곤한 나머지 방심하고 곯아떨어지게 하기 위해 일부러 밤새 걸어야 하는 먼 마을을 택 한 거겠지." 타고 오던 말도 잃어버리고 갈 곳도 없는 형제가 들판을 걷고 있었다. 트라바체스 남부는 이런 식으로 어떤 곡식이나 작물도 재배하지 않는 땅이 많았다. 잡풀이 무성하긴 해도 애써 가꾸면 버릴 땅은 아닐 텐데, 정치에 미친 이 나라의 국민들은 이미 정성스러운 농사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곳곳에 버려 진 땅 일색이었다. "역시 그럴까." 예프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보리스는 상당히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마음을 떠날 때 문을 지 키는 보초에게서 이곳에서 가까운 작은 마을이 상당히 여럿인데다 큰 성인 그와레도 있다는 아야기를 들었고, 지금 말하고 있는 것도 그 화제였다. 예프넨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부터 상대를 등쳐먹을 마음으로 접근하는 자가 세상엔 너무 많지." 그러나 형제는 마을을 찾고 있지 않았다. 돈이 없었던 것이다.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용병단의 데라키 대장은 약속했던 돈을 내놓지 않고 그대로 사라져 버린 것이었 다. 예프넨과 보리스도 윈터러를 다행히 되찾은 일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돈에 대한 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게다가 본래 얼마간 갖고 있던 돈 역시 야니카와 로마바크가 윈터러를 빼앗을 때 모조리 털어 간 후였다. "거기다가 생각해 보면 말야, 우리가 왜 그 많은 사람들에게 쫒기고 있는지 묻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누가 옳고 그른지조차 따져보지 않은 채 스물이나 되는 패거리들을 죽였단 말이야. 실은 죽이지 않았는 지도 모르긴 하지만. 어쨌든 우리가 그 사람들한테 잘못을 저질러서 공격받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데 말 야." 예프넨은 고행에서 그랬던 것처럼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동시에 헝클어 뜨렸다. "보리스가 형보다 더 똑똑하구나." 저녁 먹을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마을에서 떠나기 전에 남은 은화를 털어 샀던 마지막 빵을 아침과 점심에 걸쳐 나누어 먹고 나니 이젠 정말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보리스는 살아오며 한 번도 이렇게 배를 곯아 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배고픈 것보다 그는 형의 기분이 걱정되었다. 자긴 괜찮다고 하고 싶지만 형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은 뻔했다. 말할 것도 없는 최악의 상 황인데 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좀 쉴까?" 어차피 짐작하고 있던 야영이었다. 제대로 된 짐조차 없는 그들은 커다란 나무 아래 풀이 비교적 고르 게 자란 곳을 골라 앉았다. 담요 한 장 없는 것은 물론, 말에 매어 놓았던 짐이 모조리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불을 피울 부싯돌이나 부싯깃조차 없었다. 둘은 잠시 앉아서 말없이 트인 들판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어두워서 보이는 거라곤 달빛에 젖은 풀잎들의 끄트머리 뿐이데도 그렇게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보리스느 자신이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첫 번째 기억은 끔찍한 악몽에 대한 것이었다. 잔인한 손마디가 소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전혀 숨을 쉬 수가 없었다. 벗어나려 몸부림 쳤지만 소용없었다. 보리스는 괴로워서 온 몸을 비틀며 다리를 버르적거렸다. 발 끝에 뭔가 차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발치에 엉켰다가 곧 멀찍이 차내어졌다. 그때, 손이 풀렸다. 이직도 꿈과 현실이 구분하지 못한 그는 눈을 감은 채 목구멍이 아플 정도로 가뿐 숨을 몰아쉬고 있었 다. 쥐고 있던 손이 사라진 목덜미에 서늘한 바람이 느껴지고서야 그는 자신이 잠에서 깨어 있다는 사 실을 알았다. 보리스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캄캄했다. 아직 날이 새지 않았다. 그는 가장 먼저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나 지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구겨 박힌 옷 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천천히 그것을 집어 당겼다. 예프 넨의 겉옷이었다. 아마도 그가 잠든 뒤에 덮어주었으리라는 짐작이 갔다. 눈으로 더듬어 가며 조금 떨어진 곳에 누워 있 는 형이 보였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마치 누군가가 힘껏 밀치거나 해서 쓰러지 stkfka처럼 팔다리 가 아무렇게 내던져진 모습이었다. 평소 평은 잠버릇이 거친 사람이 아니였다. 보리스는 흠칫 자신의 목을 조르던 자가 먼저 형을 해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벌떡 일어났다. 다가가서 형을 살펴보다가 코 끝에 손이 대어 보니 약간 거칠 진했지만 다행히 숨을 쉬고 있었다. 흔들어 깨우려다가 먼저 손목을 잡았다. 그런데 손바닥이 이상할 정도로 몹시 따뜻했다. 이마에 손을 대어 보니 빰이나 이마도 따끈했다. 어린 마음에도 자신의 옷까지 벗어주고 이런 야외에서 잠드는 바람 에 열이 나는 건 아닐까 싶어 걱정스러웠다. 보리스는 자신에게 덮어 주었던 형의 겉옷을 가져왔다. 그리고 형의 몸에 덮어준 뒤 조금이라도 따뜻 해지라는 생각에 등을 맞대고 누웠다. 탈진했지 때문인지 잠은 금방 왔다. 다음날 어찌어찌 마을에 다다랐을 때, 예프넨은 보리스의 손을 잡고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 리고 사람들에게 금붙이 따위를 사들이는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보리스는 형의 손에서 여전히 열이 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렇게 봐 선지 얼굴도 수척해진 듯 생 각되었다. 몇 번이고 아픈 건 아니냐고 물었지만 형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다. 나중에 동생 이 너무 집요하게 묻자 형은 억지 웃음까지 지어 보였다. 이윽고 사람들이 가르쳐 준 대로 큰길가에 입구가 나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휑할 정도로 별다른 물건 이 놓여 있지 않은 집이었다. 좌측에 창고로 올라가는 듯한 사다리가 하나 천장에 난 구명에 걸쳐져 있 을 뿐, 방 구분도 없었다. 저 안쪽으로 나무 상자 같은 것 앞에 의자를 놓고 앉은 한 사내가 끄떡끄떡 졸고 있었다. "얼마 쳐주시겠습니까." 예프넨이 내민 것은 어머니의 유품인 덮개 달린 거울이었다. 망설이지도 않고 대뜸 꺼내는 것을 보고 보리스가 오히려 놀랐다. 그것은 형이 오랫동안 아끼던 하나 뿐인 유품이었다. 아버지는 아들들이 어머 니를 추억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서 그런 것을 간직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졸고 있던 사내는 천천히 한쪽 눈을 뜨고 물건을 보다니 갑가지 퍼뜩 잠에서 깨어나며 예프넨의 얼굴 을 쳐다봤다. 그러더니 급히 눈을 비비며 나무 상자 한쪽에 수건 속에서 돋보기를 꺼냈다. 거울을 건데 받자마자 뚜껑에 붙은 사파이어를 유심히 관찰했다. 거울은 고풍스러운 물건이었다. 조개껍질처럼 생긴 상아빛 표면에는 간소한 무늬가 새겨져 있엇고 그 가운데 어두운 청색의 사파이어가 매끈하게 박혀 있었다. 뚜껑 안쪽에는 어머니의 이름 머릿글자가 새 겨져 있었다. "괜찮은 물건인데. 3백 엘소 내지. 어때?" 예프넨은 충분히 그 이상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뭐가 반박하면 좋을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한참만에 한 말이 이것이였다. "그건 좀 적은 것...같습니다." 살아오며 한 번도 가격을 흥정하려 해본 일이 없는 예프넨이었다. 물건을 살 때 값을 깎으려 한 일도 없는데, 팔면서 돈을 더 쳐 달라고 하는 것이 어쩐지 굴욕적인 것 같아서 뺨이 다 발그레해졌다. 사내는 예프넨의 얼굴의 흘끗 쳐다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퉁명스런 목소리를 쏟아 내는 말을 들으며 예프넨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몰랐다. "젊은 사람이 새것과 쓰던 것의 차이나 알겠어? 쓰던 것 파는 건데 3백 엘소 이상 받으려 들면 도둑놈 이라고. 내가 그래도 시골 사람이라 잘 쳐주는 거야. 다른 데 가면 절대 2백 70엘소 이상은 안 줘." "......" 예프넨이 대답을 못하자 그는 계속해서 지껄여댔다. '게다가 이런 물건을 쓸 법한 귀부인들은 남이 쓰던 물건은 안 사. 기껏해야 술집 계집애들 손에 들어 가거나 아니면 보석만 뽑아서 다른 세공에 쓰는 게지. 또 이런 세공은 유행도 이미 지난 거라고 보석 가치만 치면 1백 엘소나 될까말까할텐데 그나마 세공값을 쳐주는 걸 다행으로 알라고," 도저히 그앞 에서 다른 논리를 펼 수 있는 예프넨이 아니었다. 그는 보리스의 얼굴을 한 번 내려다보 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럼... 그 가격으로 해 주십시오." "형 ...... ." 예전 같으면 3백 엘소 아니라 3천 엘소를 준다 해도 어머니의 유품을 남의 손에 넘길 에프텐이 아니었 다. 그러나 예프넨은 덮개 거울을 건네주었고 그것이 곱게 천으로 싸져서 사내의 소지품 자루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죽 지켜보고 있었다. 3백 엘소를 담을 주머니조차 없어서 주인 사내는 선심 쓰는 체 하며 무명 주머니를 하나 내주었다. 1 백 엘소 금화였다면 세 개 밖에 안되었을 텐데 주인이 내준 것은 모조리 은화였다. 그걸 주섬주섬 주워 담아서 밖으로 나왔다. 보리스는 형의 옆얼굴을 흘끔 쳐다보며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형은 단지 약간 씁쓸 한 얼굴이었을 뿐이지만 그 얼굴위에 숨겨진 감정을 알아보지 못할 보리스가 아니었다. 그가 어떻게든 말을 꺼내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예프넨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 이제 돈이 생겼으니 뭔가 먹을 수 있겠구나! 뭘 먹고 싶나? 뭐든지 사줄 테니까 얘기해 봐." "...... " 겨우 3백 엘소 밖에 없는 것을 아는데, 그것도 그 돈이 무얼 팔아서 마련한 것인지 너무도 잘 아는데 보리스의 입에서 말이 쉽게 떨어질 리가 없었다. 배고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가슴 한구석이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묻지 않으려 했던 질문을 하게 되어버린 것도 실은 그것 때문이었다. "형... 아버지는 언제 연락을 주시는 거야?" 쾌활함을 가장하며 앞장서 걷던 예프넨의 걸음이 아주 잠깐, 미세하게 멈추었다. 그러나 그는 곧 동생 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야, 아무래도... 아버지의 부상을 치료하느라 오래 걸리는 것이 아닐까? 건강해지고 나서 우릴 만나 시려고 말이야." 마치 미리 준비해 뒀던 듯한 대답이었다. 보리스는 형의 눈을 올려다보려다가 급히 시선을 내리깔았 다.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형의 눈가에 가볍게 맺혀 빛나는 것은 눈물이겠지. "그...래." 고개를 숙인 김에 아예 고개를 끄덕이는 체 하며 대꾸하고 말았다. 예프넨은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걸었다. 품안으로 넣어진 오른손은 은화가 든 무명 주머니를 꽉 쥐고 있었다. 그래서 그 날 밤은 여관이었다. 점심과 저녁을 제대로 먹어버렸더니 그 많던 은화도 벌써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그냥 마른 빵 조각 에 물만 마셔도 괜찮은데, 라고 생각했지만 보리스는 동생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는 형을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형제는 나란히 놓인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또다시 새로운 악몽에 시달렸다. 이번에는 누군가의 손이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고 흔들고 있었다. 숨이 가뻐지면서 기침이 연달아 나왔다. 목이 정 신 없이 휘둘리다가 뒤로 휙 꺾어지는 순간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저도 모르게 곧장 비명이 뛰어나왔다. "으아악!" 그의 가슴을 움켜쥔 것은 시커먼 그림자였다. 비명을 질렀던 공포도 잠시, 그는 더한 사실을 깨닫고 경 악하여 멍했다.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형이었다. "혀,형...왜...... ." 그러나 말을 통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예프넨은 동생의 몸을 침대 위로 내 던지듯 밀치더니 이번에는 주먹을 쥐고 힘껏 배를 내질렀다. 그건 평소에 예프넨이라면 어떤 일이 있어 도, 심지어 죽음의 강요한다 해도 결코 하지 못했을 행동이었다. "음...... ." 보리스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통증을 느꼈으나 더 이상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형의 손이 움 직이는 대로 나뭇개비처럼 이리저리 휩쓸리고 내던져질 뿐이었다. 아픔보다 심한 것은 정신적인 충격이 었다. 형이 왜, 도대체 왜? 반항하려 해도 열두 살 먹은 보리스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이는 결코 장난이나 몽유병 정도 가 아니었다. 예프넨은 정말로 동생을 죽여버리려는 것처럼 격렬하게 내던지고는 다시 움켜잡아 흔들고 쳤다. 만일 그 손에 단도라도 하나 쥐어져 있었더라면 보리스는 이미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형의 정신이 이상해지기라도 한 것인가? "형 ...... 예프...넨...... ." 목소리는 모기소리처럼 가늘기만 했다. 그때 예프넨은 몸을 일으키더니 뭔가를 찾는 것처럼 잠시 동작 을 멈춘 상태였다. 그 순간, 공포에 질렀던 보리스는 원터러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 냈다. "아, 안돼!" 그것은 자신이 살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지독한 실수를 저지른 후 형이 느낄 충격을 막고자 하는 마음 이 더 강했기에 나온 행동이었다. 타박상투성이의 몸으로도 기적인 양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난 보리스 는 다짜고짜 두 팔을 벌려 형을 껴안았다. 물론 에프넨이 밀치려 한다면 얼마든지 저 방구석으로도 던져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 게도 그 즈음 예프넨의 몸에 들끓던 살기는 갑작스레 사라졌다. 맥이 풀린 듯한 형의 몸을 놓는 순간, 두어 걸음 비척거리며 걷던 형은 자신의 침대에 풀썩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잠든 것이지도 모른다...... . 보리스는 일어나 조심조심 형에게 다가 갔다. 형의 상태는 어젯밤과 비슷했 다. 얼굴과 손발이 뜨거웠고, 입에서는 가쁜 숨이 뿜어져 나왔다. 보리스는 자신의 침대로 돌아왔다. 놀라고 흥분하고. 또한 온 몸이 쑤신 나머지 두근거리는 가슴도 진 정되지 않았다. 잠은 더더욱 이를 수가 없었다. 꿈에서도 상상해 보지 못했던 충격이었다. 도무지 사태 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건가. 새벽녘이 지나고서야 어렴풋이 잠들었던 보리스가 깨어났을 때 예프넨은 이미 일어나 나갈 준비를 모 두 마치고 침대 곁에 앉아 있었다. 깨어나지 않는 동생을 걱정스럽게 굽어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된 거야. 몇 번이나 깨웠어. 나쁜 꿈이라도 꿨니?" "......" 보리스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형의 얼굴을 보는 순간 사슴이 한 번 크게 뛰는 것을 느꼈다. 심 장이 몸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나 싶을 정도로 놀랐다. 자신의 표정이 이상해지지 않았나 싶어 순간적으로 당황한 보리스는 얼른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이내 신음 소리를 내며 쓰러지고 말았다. "아윽......" "왜 그래? 어디 아파?" 예프넨의 얼굴이 놀란 듯한 그것으로 바뀌는 것을 보며 보리스는 어젯밤 검은 실루엣으로만 보았던 형 의 마습을 다시 한 번 기억해 냈다. 그때 형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그가 지금껏 보았던 어떤 얼 굴도. 그 순간 그에게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아, 아니야. 그...자다가 침대에서 떨어졌어" 순간적으로 생각해 낸 거짓말이었다. 말해놓고 보니 정말로 몸 곳곳에 든 멍을 설명할 길은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았다. 예프넨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이런, 평소엔 안 그랬으면서. 역시 많이 피곤했던 거구나." 두 형제는 모두 잠버릇이 얌전한 편이었다. 예프넨은 보리스가 몸을 일으키도록 도와 주었다. 순간 목 과 어깨가 으스러질 듯 아팠지만 보리스는 내색하지 않고 꾹 참아냈다. "우리 여기서 하루 더 지낼까? 네 표정이 많이 안 좋은데, 혹시 다른 데 어디 아픈 거 아냐?" 보리스는 가까스로 물을 수 있었다. "형은...괜찮아?" "나?" 예프넨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팔을 펴 보였다. "내가 뭘. 어제도 그렇게 묻더니 아직도 내가 아파 보이니?" 그러나 예프넨의 얼굴은 어제보다 더 수척해 있었다. 정말로 열병을 앓는 사람처럼. 일어나 옷을 입고 늦은 아침을 먹으러 내려갈 때까지 보리스는 내내 지신이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힘 들게 가늠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어쩐지 해서는 안될 것만 같았다. 여관에 하루 더 쉬기로 한 다음날 밤, 보리스는 침대에 누운 채로 형이 잠드는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한참이나 그러고 있었는데도 형은 자는 것 같지가 않았다. 잠시 후에는 아예 침대에서 일어났다. 맨발로 방을 왔다갔다 거닐더니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어깨와 팔을 풀었다. 보리스는 알 수 없는 상상으로 오싹해졌다. 그러나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서 보리스는 형 이 잠들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 더, 조금 더 버티려 했지만 결국 보리스는 잠들어 버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오랜만에 제대로 아침 에 깨어났다. "형, 설마 자지 않은 거야?" 약간 붉어진 눈으로 침대에 앉아 있는 예프넨을 보고 보리스가 놀란 목소리를 냈다. 예프넨은 약간 불 편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일찍 일어났을 뿐이야." "피곤해 보여." 피곤한 정도가 아니었다. 예프넨은 단순히 잠을 자지 않은 것뿐 아니라 밤새 뭔가 고민하느라 해쓱해 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 이제 오늘은 움직여 봐야지." 그들은 마을을 떠났다. 목적지는 암묵적으로 쟈닌느 고모할머님이 있는 곳이었지만 정말로 그들이 거 기까지 갈 수 있을지, 또는 가고자 하는지조차 불명확했다. 마치 어디론가 걷고 있는 것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귿릉느 단지 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예프넨은 점차 자칫 걸음조차 비틀거릴 정도가 되어 있었다. 보리스 역시 오랫동안 고민했다. 입을 떼 었을때는 이미 점심 무렵이었다. "형, 역시 아버지는 오시지 않는 거지?" "응?" 그건 질문의 내용에 비해 무심하게까지 들리는 대꾸였다. 잠시 후. 보리스는 예프넨의 얼굴을 보며 그 가 자신의 말을 빨리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평소엔 그럴 형이 절대로 아닌데, 마치 다른 곳 에 정신을 팔고 있는 것처럼 멍해지고 무디어져 있어Te. "아......" 그제야 말을 이해한 에프넨은 꿈속을 헤매는 사람처럼 허공을 향해 눈동자를 굴렸다. 대답이 나온 것 도 한참 만이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의무적으로까지 들리는 대답이랄까. 지금까지 동생을 납득시키려고. 또는 속이려고 진지하게 노력하던 대답과는 천지차이의 어감이었다. 보리스는 걸음을 멈췄다. "형, 내게 솔직하게 얘기해 줘, 난 괜찮으니까. 아버지는 어떻게 되신 거야? 삼촌한테 붙잡히신 거야?" 그리고 예프넨도 걸음을 멈췄다. 그는 머리가 아픈 듯 잠시 두 손으로 양미간을 누르더니 그 자리에 천천히 주저 않았다. 그리고 고개를 무릎에 박은 채 머리를 감싸쥐었다. "잠깐만......" 여름이 가고 하늘은 나날처럼 푸르렀다. 비가 왔던 것은 항쟁의 밤이 마지막이었던 것처럼. 그래서인 가. 오히려 그 날의 기억은 방금 전에 겪은 양 생생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저택을 감쌌던 횃불, 거대한 소환수의 모습...그리고 홀로 호숫가에 앉아 있다가 보았던 정체 모를 괴 물, 나타나주었던 형의 질책 어린 외침조차도...선명하다. 그래서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다른 것은 이토 록 분명한데 왜 어느 순간 이후의 기억만이 이렇게 엉망으로 흔들려 버린 것인지. 안개 속이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기억이라고는 아버지가 늪가에서 삼촌과 대치하고. 자신은 형과 등을 맞댄 채 서 있다가 뭔가 모를 이유에 의해 바닥에 주저앉던 기억 정도일까. 그게 도대체 뭐였지? 무언가 지독한 공포와...전율의 감정이 기억을 떠올리려 할 때마다 등골을 싸늘하게 타고 내려갔다. 더 생각해내려 하다가는 정신이 이상해지지 않을까 싶어질 정도로 어지러웠다. 갑자기 예프넨이 고개를 들었다. "보리스. 이리 와서 이걸 들어봐라." 예프넨이 내민 것은 다름 아닌 허리에서 끌러낸 윈터러였다. 보리스는 영문을 알지 못한 채 다가가 검 을 받았다. "뽑아서. 휘둘러 봐." "지금?" 보리스는 조금 망설이다가 두 발짝 물러나 허공을 향해 검을 뽑았다. 솔직히 쉽지 않았다. 칼집에서 뽑 아내는 것까지는 할수 있었지만 팔을 뻗는 순간 무게 때문에 몸이 휘청했다. 윈터러는 정체 모를 구성 물질 때문에 철로 만들어진 일반적인 바스타드 소드보다 가벼운 편인데도 그랫다. "아직 무린가......" 예프넨이 일어나 다가오더니 등뒤에 서서 보리스의 팔을 받쳐 주었다. 형의 팔이 부목처럼 대어지자 그나마 검을 들고 있는 것이 수월해 졌다. 두 손으로 보리스의 손목을 잡은 채로 예프넨은 천천히 검을 허공에 휘두르게 했다. "이렇게......" 반원을 그리며 무지개처럼 뻗어나가는 찬란한 칼날... 날카롭게 다듬어진 칼끝과 희게 스치는 낮의 빛, 그곳에 머물러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기억의 광채와...... 동생을 감싸안은 형의 따스한 체온, 나의 형. 어느새 입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가지 마, 형, 가지 마. 날 혼자 두고 가지 마. "네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좋았을 텐데." 머리 뒤에서. 형이 가만히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보리스는 진심으로 그렇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이렇게 무력한 어린아이가 아니라 형을 도울 수 있는 존재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열 일곱, 아니 열 여 섯만 되었어도. 흰 날의 윈터러가 텅 빈 들판에서 상대할 적도 없이 허망하게 저어지고 있었다. 위로, 아래로, 다시 옆 으로... 뭔가 단 하나라도 더 동생에게 남겨주고 싶어 안간힘을 쓰는 예프넨의 눈동자 역시 시력을 잃을 정도로 하얗게 빛나는 칼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귓가에서 속삭이듯, 예프넨의 목소리가 보리스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으시지... 아버지는 돌아올 수 없는 곳에 계셔. 벌써부터, 아주 전부터 말이지. 집 사 님이 함께 계실 테니 불편하진 않으실 거다. 우리가 없어도 그 분께서 아버지의 뜻을 언제고 충실히 따라 주실 거야." "......" 보리스는 대답 없이 듣고만 있었다. 분명히 모르고 있었던 뜻밖의 사실인데, 어쩐지 가슴이 들끓지 않 았다. 알고 있던 사실을 단지 확인 받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제야 자신이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런 결과를 짐작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졌다. 아니 그보다도 실은 모 든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었다. 아버지의 죽음도. 형의 고통도. 전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망각이 몸 속에 들어와 있어서 그의 기억 일부를 삼킨 채 침묵하고 있는 것 뿐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하나씩 꺼내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번쩍, 눈앞을 가리는 영상이 있었다. 쿠르르릉...... 그것은 지난날의 천둥이었다. 영지에서의 마지막 밤. 그 순간 가운데서도 가장 마지막 기억이 억지로 감춰져 흐려졌다가, 갑작스럽게 수정 구슬 속을 보듯 명확해졌다. 거대한 날개를 보았었다. 예프넨은 보리스의 팔이 갑자기 떨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고 더욱 힘주어 그의 팔을 감쌌다. 동생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충격을 받은 거라고 생각하고는 가능한 한 따뜻하게 감싸주려 했다. "하......" 베일에 걷히고 기억이 책장처럼 하나씩 펼쳐져 갔다. 안개로 만든 듯 너울거리는 적회색 날개. 장려한 날갯짓과 함께 그것은 실로 5미터는 넘을 법한 길이로 펼쳐졌었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아니었다. 피막으 로 뒤덮인 섬뜩한 날개를 둘러싼 것은 수백 개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발톱들이었다. 날개 끝을 빙 둘러 이빨처럼 박힌 채 희생자를 노리는 발톱이었다. 목소리가 기억난다. 그것은 갈퀴로 철문을 긁어대는 듯한 소리가 아니었던가. 가슴속조차 후벼팔 듯. 피부와 점막을 온통 따갑게 스치는 소리가 아니었던가. 보리스가 윈터러를 떨어뜨렸다. 잔풀이 듬성듬성 자란 흙바닥에 검이 비스듬히 꽂혔다. 예프넨이 와락 보리스를 끌어안았다. 동생의 몸이 온통 화끈거리고 덜덜 떨리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보리스, 너......" 망령이라고 했었다. 그래, 망령이었다. 그것은 이 세계에서는 죽은 생물이었다. 마치 이계에서 몸의 일 부만 소환되어 온 저 뱀 모습의 환수 크리갈처럼. 실체를 가지지 못한 불투명한 날개 안쪽으로 너무도 생생하게 번뜩이는 불덩이 같은 눈동자와...아아, 날개에 가려져 놈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얼 마나 다행이던가. "혀, 형... 그, 그... 그... 날개......" 예프넨은 동생의 몸을 돌려 바로 얼굴을 바라보게 하고는 천천히 물었다. "기억났니?" 압도적인 장면에 대한 기억이 돌아오자 곧장 그때 벌어진 장면들이 파도처럼 빠르게 밀려왔다. 그 날 밤, 오랫동안 두려워하던 에메라 호수의 명령을 눈앞에서 맞닥뜨려 넋이 나갔던 보리스는 갑가지 형이 앞으로 뛰어나오며 자신을 와락 뒤로 밀치는 것을 느꼈었다. 너무 세게 밀어서 중심조카 잡지 못한 채 바닥에 처박혔고, 그 다음 본 것은 거대한 날개가 형을 향해 내리쳐지는 모습이였다. 그 끝에 달린 발톱 들이 피를 원하는 이빨들처럼 번뜩거렸고...... 그는 달아났다. 자신이 그럴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는데, 공포에 사로잡혀 정신 없이 달아나고 있는 자신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늪을 향해 후퇴했고. 거기에서 앞 뒤 사정은 알지 못한 채 아버지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마지막 외침이 있었나? 그래...달아나, 이곳에서 떠나. 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지금까지도 쟁쟁했다. 영상이 흔들렸다. 그 순간 그는 확실히 기절했던 것 같았다. "형...형은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된 거지?" 그러나 보리스는 이제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자신이 기억을 부분적으로 잃고 있었던 장면에 대해서, 그것은 결코 받아들이고 싶지 않는 장면을 보았던 까닭이었다. 가장 원하지 않았던, 언제고 두려워하던 일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벌어져 버렸고, 연약한 그의 정신은 그 사실을 기억하길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예프넨은 대답하지 않았다. 밤은 추웠다. 형제는 너울거리는 불꽃을 마주보며 앉아 있었다. 낮에 있던 그 장소 그대로였다. 그들은 이제 더 어디 론가 여행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이제 어디로 가는 것은 다 소용없었다. 보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그만 자." 예프넨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 다시 모닥불로 눈길을 보냈다. 어머니의 유품을 팔아 얻 은 돈으로 만들 수 있었던 모닥불이었다. 한참만에 예프넨이 입을 열더니 뜻밖에 말을 했다. "내일 아침 일어나거든 혼자 가라, 보리스. 우리 헤어지는 편이 낫겠다." 모든 진실들에도 불구하고 그 말은 보리스에게 가장 싸늘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는 급히 고개를 저 었다. "싫어." "싫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냐. 난 이미 너하고 함께 있을 수 없어. 이미...얼마 남지도 않았다." 보리스는 모닥불 너머 형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아주 완강하게. "절대로 싫어. 끝까지 형의 곁에 있을 거야." 예프넨의 눈이 슬퍼졌다. 그는 일부러 긴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뒤적이며 조용히 말했다. "내가 다시 발작하면, 너를 죽일 지도 모르는데도?" 망령, 에메라 호수의 망령...그것이 바로 예니 고모를 죽였다고 형이 말해 주었다. 보리스는 예니 고모 의 얼굴을 몰랐다. 그런 사람이 집안에 있었다는 사실 밖에는 아무 것도 몰랐다. 저택 안에는 예니 고모 의 방이 있었고. 그곳은 어머니의 방처럼 늘 말끔히 청소되어 있었다. 한 번인가 들어가 보았을 때 그 방에 딸린 자그마한 거실에서 그리다 만 그림을 발견했었다. 보리스의 눈으로는 얼마나 훌륭한 솜씨인 지 이해할 수 없는 그 미완의 그림은 한 젊은 남자를 그려 놓고 있었다. 죽은 자의 고요한 방에 얼굴 윤곽과 단아한 턱선 만으로 남은 남자. " 예니 고모는 착하고 상냥한 분이셨지. 나, 그 분의 손에서 과자도 많이 얻어먹었다. 어머니께서 숨기고 주지 않는 달콤한 과자들은 예니 고모의 치마를 잡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쳐다보기만 하면 쉽게 내 손에 쥐어졌어. 그 분은 마음이 너무 여려서 아무 것도 거절하지 못하는 분이었으니까. 고모가 곹 혼인해서 저택을 떠나게 되었다고 했을 때 내가 얼마나 울면서 매달렸는지 고모는 방에 들어가서 며칠이고 나오 지 않으셨단다. 내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이 겁나서 말이지." 그런 고모가...블라도 삼촌의 거짓말에 속아 약혼자를 찾겠다고 그토록 두려워하던 에메라 호수까지 갔 었다. 약혼자는 다친 데도 없이 살아서 저택의 지하실에 갇혀 있었는데. 도대체 왜 트라바체스의 인간들 은 화합하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쌓어야 하는 것일까. 서로의 핏줄조차 잊고, 끝끝내 자신이 아끼던 자의 마음을 더럽히고, 피로 물든 결말이 맺어질 때까지. "찾으러 갔을 때는 이미 늦었어. 그들이 발견한 것은 아리따운 금발처녀인 예니 고모가 아닐라 발광하 여 옷조차 찢어발긴 채 날뛰는 짐승 같은 미친 여자였지. 난 기억이 나... 고모를 찾으러 나가셨던 아버 지와 병사들이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황급히 나를 당신의 방으로 붙잡아 들이고는 결코 나가지 못하게 막던 것을 말이지. 난 걱정이 되고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더. 나도 고모를 몹시 좋아했으니까. 무섭다 는 호숫가에 혼자 간 고모가 많이 다친 것은 아닐까. 설마 죽거나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두려웠지. 그 래서 나는 끝내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뛰어나가고 말았어. 어머니가 뒤쫏아왔지만... 난 이미 모든 걸 봐버린 후였지." 병사 세명이 간신히 붙잡고 있었던 예니 고모는 너덜거리는 옷자락 속으로 감추던 처녀의 몸을 다 드 러나 보였고, 산발한 머리 곳곳에 피가 얼룩져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다. 고모는 예프넨은 물론이고 아버 지를 비롯한 가족 중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다. 오직 주위의 모든 인간들이 적으로 느껴지는지 이해할 수 없는 괴성만을 지를 따름이었다. 그것은 평소 듣던 고모의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조금도 같지 않았다. 그건 단지 괴물의 울부짖음이었다. "아버지와 삼촌은 무섭게 싸웠다. 지금에야 생각하는 거지만 삼촌은 고모가 차마 그렇게 까지 될줄은 생각하지 못하셨던 것 같아. 단순히 삼촌이 속한 당파의 부하들이 혼자 나간 고모를 납치하기만을 기대 한 거였지. 아버지도 정파가 다른 집안을 택한 고모의 결혼이 달갑지는 않았기에, 감히 고모를 에메라 호수로 보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지하실로 갇힌 약혼자에 대해서는 방관한 모양이야. 어찌 됐든 죄인이 된 삼촌의 입지는 약했지. 아버지는 단호하게, 호수의 망령에게 당해서 일으킨 광증은 죽여서 해 소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셨어." 그리고 묻혔던 집안의 과거는 이제 갑작스런 현실이 되어 눈앞에 있었다. 보리스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 앞에서 미칠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울며 말리는 할머니와 차마 보지 못하겠다며 밖으로 나가 버린 할아버지도, 결국 이미 실질적인 집안 의 주인이 되어있는 아버지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고모는 죽었다. 그게 누구의 손에 의해서였든 간 에, 예프넨은 아버지의 성격상 예니 고모를 다른 사람이 죽이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 다. 세월이 지난 지금에 있어서는 단지 두려운 악몽이었을까.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자신의 일이었다. 단순에 나타나야 할 광증이 지연되다가 이제야 천천히 진행되는 것은 자신이 고모와는 달리 약한 상처 만을 입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절망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애써 희망을 자지려고 애썼었다. 상처가 가벼우니까.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보리스가 혼자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성 장한 후에야 진행될 지도 모른다. 제발 그렇게만 된다면, 그렇게만 되어 준다면 어떤 대가라도 치를텐 데, 어떤 추한 몰골도 견뎌낼 텐데.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현실, 어김없이 그의 곁도 비껴 가지 않았다. "상관...없어." 낮부터 저녁까지 오랜 대화를 차례로 떠올리던 보리스가 드디어 입을 열어 말했다. "형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형도 알다시피, 혼자 남은 내가 얼마나 오래, 잘 살 아갈 수 있겠어? 윈터러 때문에 며칠 동안 일어난 일들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 난 이대로 끝까지 형 곁에 있을래. 그래서 차라리 형 손에......" "보리스!" 손간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몸을 일으켜 다가온 예프넨은 보리스의 빰을 힘껏 때렸다. 그리고 소리쳤 다. "너, 우리가 창고에서 나와 윈터러를 찾으러 갈 때 내가 했던 말, 벌써 잊어버린 거냐? 벌써 잊어버렸 어! 내가 그때 뭐라고 했지? 뭐라고 했는지 말해 봐!" 형이 자신에게 이토록 화내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러나 형이 왜 화를 내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살아...남으라고......" 예프넨은 아버지와는 달랐다. 그의 발광한 여동생을 자기 손으로 죽여서 끝을 맺어주는 성격이 아니었 다. 자신이 아끼는 사람이 살 수 있는 데까지 살아남아서...고통스런 삶 속에서도 한 줌의 행복을 찾아 움켜쥐기를 바랬다. 누구의 가능성도 빼앗고 싶지 않았다. 그였다면 방황한 동생을 골방에 가두어서라도 끝끝내 제정신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렸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돌보게 되더라도 말이다. "다시는 죽는다는 말 하지마." 예프넨은 감정을 억누르는 사람처럼 빰을 실룩거리면서 말했다. "네 삶은 나와는 별개야. 단지 너 자신만을 따르는 거다. 다른 사람의 사정에 귀 기울이지 마. 결코, 널 약하게 하는 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 보리스는 그 말의 뜻을 다 생각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예프넨은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 다. "내가 죽고 나면...넌 정말로 강한 마음을 잦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아무도 네 방패가 되어주지 않을 거고, 누구 앞에서도 방심할 수 없어. 힘들겠지만... 그건 할 가치가 있어. 왜냐면 살아남는 일이니까. 네 삶에 깃들인 무한한 가능성을 모조리 다 실험해 볼 때까지 살아남기 위한 일이니까." 예프넨은 보리스에게서 물러섰다. 그리고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그가 고개를 수그렸을 때, 보리스는 형이 스스로 한 말이 자신에게는 해당될 수 없음에 슬퍼하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결코 잊을 수 없는 마지막 세 번째 모습이었다. 보리스가 천천히 다다가 형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상태 그대로 아주 오랫동안 있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예프넨은 잠들지 않았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의 몸은 갈수록 쇠약해졌고 이제는 깨어 있을 때조차 발작을 일으키는 일이 잦아졌다. 윈터러는 이미 보리스에게 주어 가지고 있게 했다. 검을 주면서 예프넨은 여차하면 자신 을 찔러도 좋다고 말했다. 보리스는 단지 형을 위해서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가 정말로 그런 일 을 할 수 있을리 없었다. 이제 예프넨은 자신의 기억 곳곳이 비어버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몇 시간이고 광증을 일으켰을 댸 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낮이었고. 한밤중에 모 닥불을 피우던 것이 기억나고 나서 그 뒤는 새벽 별이 뜨는 모습이었다. 그때마다 그는 동생이 눈앞에 없는 것에 감사했다. 이미 형과 함께 제대로 잠들지 않게 된 보리스는 좋지 않은 기미가 보일 듯하면 재빨리 그의 곁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또한 멀리 가지는 않았다. 그 날 밤, 예프넨은 스노우가드를 벗어서 동생에게 주었다. "이제 네가 가지고 있어. 내겐 필요 없으니까 말이지." "하지만, 그건 형 거야." 보리스는 아직도 형이 곧 죽어야 할 사람이라고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예프넨이 희미하게 웃었 다. "죽은 사람에게 갑옷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예프넨은 억지로 눈빛 찬란한 갑옷을 동생에게 입혔다. 그리고 다시 겉옷을 입혀 주고 나서 오랜만에 즐거워했다. 뭔가 하나라도 주어서 동생의 몸을 지키게 되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게 생각되는 모양이었 다. 그 날 예프넨은 평소와는 약간 다른 이야기를 했다. 바로 삼촌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 결론적으로 삼촌이 아버지를 죽게 한 것은 사실인 거다. 그렇지만 결국은 호수의 괴물들과 그 붉은 눈의 악령이 아버지의 목숨을 빼앗었어. 물론 삼촌이 미라 아버지에게 상처를 입혀 놓지 않았더라 면 아버지께서 그리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았을지도 몰라. 그리고 결국 희생된 것은 삼촌이었을 지도 모 르고, 어찌됐건 책임을 묻자면 한없이 거슬러 올라가 따지고 씌울 수 있을거야. 보리스, 나하고 한간지 약속하겠니?" "응?" "결코, 복수하지 마." 복수하지 말아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는 뻔했다. 보리스는 이해하지 못한 채 눈을 크게 떴다. "네게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난...너만은 그 복잡한 집안의 은원에 말려들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이 몇 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야. 정치적 파벌의 문제는 언제고 트라바체스의 수많은 가족들이 갈가리 찢어 왔지. 그것은 그들이 결코 잊지 않기 때문인 거란다. 어느 한쪽이라도 잊어 줬더라면 그건 반복은 없었을 텐데. 또는 용서해 줬더라면." "하지만 아버지는......" 예프넨이 보리스의 말을 막았다. "만일 살아 계셨다면 아버진 네게 이렇게 말하지 않으셨겠지. 이럴때는 오히려 네가 어리다는 것이 다 행으로 느껴진다. 더 자라면서 많은 일을 보고 겪을 테니까 어린 시절의 일은 잊어. 아니 용서해 버려. 그렇지 않고는 너도 그 끊어지지 않는 사슬에 다시 말려들게 돼. 그리고 네 아랫대의 사람들 역시 그 피의 유산을 물려받겠지." 보리스는 여전히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미 다른 문제로 충분히 고통받고 있는 형의 뜻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형의 마음이 편해지는 것 외에 지금의 그가 바라는 것은 없었다. 보리스가 알겟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예프넨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당부하며 약속을 시켰다. 그때 그 것을 약속하던 보리스는 곧 죽게 될 사람과 하는 약속이 얼마나 큰 무게를 지니는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 날도 예프넨은 잠들지 않으려 애썼다. 가장 먼저 일어난 발작이 잠들어 있던 때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만큼이나 악화된 자신이 다시금 잠들었을 때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지를지 몹시도 두려웠던 것이다. 보리스는 모닥불 가까이에서 잠들었다. 그는 붉어진 눈으로 동생을 지켜보며 자신의 정신을 온전하게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나흘째 잠들지 못한 그가 쉽게 졸음을 참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지금까지 버틴 것도 이미 초인 적인 노력인 것을.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며 꿈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 상태로 혼 들거리며 그는 한밤 중까기 견뎌냈다. 그러나 이미 아무 것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꿈인 듯, 생시인 듯,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따뜻한 입김이 그를 기분 좋게 했다. 마지 어머니의 목 소리인 양. "괜찮아, 형. 그냥 자... 쉬어도 돼. 편안하게......"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들판에 누운 듯, 부드러운 흰 시트에 지친 몸을 묻듯, 따뜻한 물 속에 온 몸을 잠근 듯, 그를 둘러싼 세상이 갑자기 평화로워졌다. 마음이 삽시간에 녹아 내리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그는 어떤 진실을 깨달았다. 이 고통스러운 현실이 닿을 수 없는 잠에 대해서. 이젠 동생의 기척이 다시 자리로 돌아가고 누워 잠을 청하는 것까지 인지할 수 있었다. 정신이 맑아지 고, 깨끗해졌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너무도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단지 단 하나 남은 일, 자신이 동 생을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 이제 그 때였다. 보리슨 어렴풋한 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영상을 보았다. 형이었던가... 한 사람이 검 한 자루와 손만 가지고 흙바닥을 파내고 있었다. 너무도 이상한 모습이라 그는 단지 묘한 꿈이라고만 생각했다. 혼미한 정신이 곧 눈앞에 영상을 덮었다. 그것이 마지막인데도. 그렇게. 늦은 아침이 되어 깨어난 보리스는 이제 꿈이 아닌 현실의 결말을 보았다. 자신이 잠들었던 곳에서 조 금 떨어진 위치에 바로 꿈속에서 봤던 구덩이가 있었다. 그것은 잠결에 본 것보다 휠씬 넓게 파져 있었 다. 파낸 흙이 한쪽에 작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좋은 날씨였다. 높이 비상하는 종다리가 아침 노래를 지저귀었다. 이미 떠오른 해와 함께 하늘은 푸른 강물처럼 말갛게 개었고, 공기는 적당히 차고 맑았다. 소년은 커다랗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형이 없었고...그리고 윈터러가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가 소년은 다시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천천히 구덩이를 바라보며 생각 을 거듭했다. 자신이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 무엇일지에 대해서. 굵고 뾰족한 바늘이 가슴속을 깊숙이 찌르고 들어오는 듯 그토록 아픈 것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창 에 꽂힌 작은 짐승처럼 고통스러워하며 목으로 치미는 무엇인가를 삼켰다. 간신히 옆은 숨소리만이 흘 러나올 따름이었다. 목이 꽉 막혀 말 한 마디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애써 일어난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형은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그가 속삭였던 대로 아주 편안하게, 그렇게 깨어나지 않는 잠을 자고 있었다. 마치 자장가를 들으며 잠든 듯 그렇게 평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가슴 약간 아래쪽 명치 부분에 깊은 상처가 보였다. 그 주위에 시커멓게 변한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 다. 그러나 검은 그 자리에 꽂혀 있지 않았다. 윈터러는 구덩이 한쪽에 쓸쓸하게 버려져 있었다. 긴 검인 윈터러는 분명 자살을 하기에 좋은 무기는 아니었다.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바닥에 꽂거나 해서 그 위에 몸을 던졌을 것이고, 동생이 보게 될 것을 대비해서 마지막 힘을 다해 검을 다시 뽑아 낸 것이다. 밤새 흙을 파냈을 형이 손끝이 갈아지고 누렇게 얼룩진 것이 보였다 산 자에게 단 하나의 수고로움조 차 남기지 않으려 한 그 노력은... 살아남은 자로서 실로 원망스럽기까지 한 것이 아닌가. 왜, 왜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서...... 소년은 그 앞에 앉은 채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해가 떠오르고, 낮의 바람이 뺨을 스쳐갔다. 세 월처럼 시간이 흘러갔다......그러나 돌로 변하기라도 한 듯 소년은 움직이지 않았다. 눈물도 흐르지 않았 다. 중천에 떠올랐던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 석양이 황량한 풍경을 더욱 불게 물들었다. 꼬리 긴 바람이 들판의 풀들을 훑고 자나가며 소년의 긴 머릿결을 흩날리게 했다. 살아있는 사람과 마찬가지 로, 바람은 창백한 뺨을 한 스무 살 젊은이의 머리카락도 쓸로 지나갔다. 이제 다시는 나이먹지 않을, 영원히 청춘을 갖게 된 젊은이의 잠든 얼굴을 위로하려는 것처럼. 문득, 보리스가 움직였다. 그는 겉옷을 벗더니 그 안에 입고 있던 스노우가드를 벗어 들었다. 그리고 구덩이 안으로 내려갔다. 형의 시체를 끌어당겨 일으켜 세우고. 그의 몸에 다시 스노우가드를 입혔다. 힘이 부쳐 땀을 벌뻘 흘리 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애쓰는 그의 얼굴은 흡사 미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친 사람 의 미친 행동이라 해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단호한 결심이 그 얼굴에 서려 있었다. 애쓴 끝에 결국 성공할 수 있었다. 다시 눕혀진 형의 몸에서 이제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흰 갑옷은 그 대로 흰 수의가 되었다. 나지막하고 약간 쉰 듯한 목소리가 새어나왔을 때 이미 하늘에는 별이 하나씩 솟아나기 시작하고 있었 다. 힘든 하루가 지나갔으니 이제는 잠잘 시간 별똥별도 꼬리 끌며 엄마별 곁으로 자러 갔네 걱정말고 편히 자거라, 내가 지켜 줄 테니 아무도 우리 아가를 깨우지 못할 거예요. 일어난 소년은 구덩이 밖으로 나와 천천히 쌓여있던 흙더미를 밀어넣었다. 잔돌이 섞인 흙덩이들이 백 색의 갑옷을 걸친 창백한 얼굴의 젊은이 위로 쏟아져 내렸다. 캄캄한 밤이 무서워도 곧 아침이 오니까 힘든 세상 모두 잊고 눈물도 흘리지 말고 잘 자라고 키스해 줄게, 내가 곁에 있어 줄게 행복한 꿈꾸다 보면 긴 밤도 금방 가니까 이제는 다시 볼 수 없을 얼굴이 흙에 덮이고. 그렇게 덧없이 사라져 갔다. 다 만들어진 무덤에는 봉분도 없었다. 며칠을 지내는 동안 자나가는 사람 한 명 없던 황량한 들판이었 다. 소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뭔가 표시를 하는 대신 주위의 모든 것을 가슴속에 새겨 넣었다. 이제 떠날 시간이었다. "잘 자, 형." 이미 한밤이었다. 그러나 더는 떠나는 것을 지체하지 않았다. 다시 돌아보지 않은 채, 천천히 걸어서 그 곳을 떠나는 보리스의 마음은 이미 열두 살 아이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 밤으로부터. 달빛조차 없는 길고 긴 겨울이 시작되었다. 3장 Blinding 1. 로즈니스 아가씨 산이 내려다보고 하늘이 내려다 본다. 어디까지라도 뻗은 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걷는다. 그이 뒤로 계절이 진다. 그림자가 진다. "아이 참! 왜 내가 그런 하녀들이나 입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야!" "하지만 아가씨... 다른 옷이 있어야지요." 화가 난 어린 아가씨의 비위를 맞추는 시종들은 연신 굽실거렸다. 실은 처음부터 이토록 까다로운 아 가씨를 모시고 먼 외국까지 여행을 나온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러나 주인님이 허락해 버린 걸 그 들이 감히 어쩌겠는가. 덕택에 여행은 하루도 빠짐없이 무슨 일인가 터져 삐걱거렸다. 그래도 극히 다행스러운 것은 이제 여 행의 볼일은 끝났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중이란 점이었다. "다른 옷을 가져와! 난 백작 가문의 아가씨라고! 이런 옷을 입고 다니면 아버지의 체면이 깎인단 말이 야!" 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곳이 떠나온 본국 아노마라드의 장원 안이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여기가 본국의 장원과는 열흘 거리도 넘게 떨어진 타국 땅 트라비체스였고, 백작 가문의 체면을 논할 아노마라드 귀족은 아무 데도 없었다. "하지만 아가씨, 아무리 그러셔도 여긴 시골이라 새 옷을 사올 데가 없는뎁쇼." 나올 대답은 뻔했다. "뭐 그 따위 나라가 다 있어!" 열두 살 먹은 백작 가의 꼬마 아가씨 로즈니스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아노마라드의 수도 겔티카의 거 리처럼 곳곳에 최고급 의상실이 줄지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허술한 옷을 입을 바엔 아예 평생 밖에 나오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그녀인데 이런 여행길에 이따위 사고라니! 전날 밤에 내린 비로 길에 진창이 생겨서 그들은 호숫가에 마차를 잠시 세웠었다. 그런데 누구의 부 주의인지 닫혀 있어야 할 마차의 문이 갑자기 열리는 바람에 아가씨의 드레스 상자가 통째로 물에 빠져 버렸던 것이다. 아침부터 바람 쐰다고 마차에서 내려 돌아다녔던 로즈니스는 아미 드레스 자락을 흙탕물에 다 망쳐버 린 뒤였고, 이번 여행에서 아가씨의 시중을 책임지고 있는 고참 하녀 윌라는 마차의 문을 제대로 다지 않은 사람이 누구인지 잡히기만 하면 손목을 분질러 버리겠다고 별렀다. 그녀는 뼈대가 굵고 키가 겄 으며 몸무게도 보통 남자의 배는 넘었기에 그런 결심이 실행에 옮겨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 다. "싫으면 지금 그 옷을 계속 입고 다니려무나, 로즈." 구원가가 나타났다. 마을에 잠시 나갔던 백작 일행이 돌아온 것이다. 또래 아이 여덟은 합쳐 놓은 만큼이나 까다로운 꼬마 아가씨지만 단 하나, 고분고분 말을 듣는 상대가 있긴 했다. 벨노어 백작은 딸을 몹시 귀여워해서 늘 로즈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가져다주었 지만, 버릇없이 구는 것만은 용서하지 않는 아버지였다. 하인들고 얽힌 일에서도 언제나 공정해서 피고 용인들조차 모두 백작을 존경했다. "아빠, 이건 흙이 묻었는걸..... " 애교를 섞어 조금쯤 항변해보려 하지만 곧 소용없다는 것 깨닫고 하녀 윌라가 내미는 옷을 마지못해 받아들었다. 로즈니스의 말이 아예 틀리지는 않았다. 그 옷은 잔심부름하는 소녀인 캐미아의 옷이었 다. 그래도 백작 집안 하녀의 옷이니 만큼 그리 지저분하거나 나쁜 옷도 아니었다. 옷을 다 입고 난 로즈니스는 장식도 별로 없고 심지어 길이조차 무릎 언저리까지밖에 오지 않는 치마 때문에 잔뜩 부아가 났다. 바로 옆에 나이도 똑같은 어린 하녀 캐미아가 있었다. 로즈니스는 화풀이를 그 애에게 했다. "저라 가! 네가 옆에 있는 걸 보니까 화가 나 죽겠어!" 캐미아는 얼른 종종걸음쳐 마치 뒤로 돌아갔다. 하긴, 자기가 아가씨와 똑같이 생긴 옷을 입고 있느 니 이런 때 그 앞에 서 있는 건 좋은 수가 아니었다. "로즈, 흙탕물에 다시 옷을 더럽힐 지도 모르니까 마차 안에 들어가 있거라." 아버지가 말할 때만 옳은 말을 옳다고 받아들일 줄 아는 로즈니스여서 곧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 문을 열었다. 윌라가 다가와 번쩍 안아 안에 들여놓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고래를 돌려 휴, 한숨을 내쉬 었다. 마차가 세 대나 되는 대 행렬이었다. 백작의 신분으로 왕국 아노마라드를 떠나 트라바체스 공화국까 지 온 것은 아내 쪽으로 먼 친척이되는 어떤 유력한 선제후를 만나 몇 가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항상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트라바체스였기에 어느 날 갑자기 정권이 뒤집혀 친분으로 엮어 두었던 관 계들이 박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벨노어 백작의 장원은 아노마라드 왕국의 식민령인 티아 를 제외하면 트라바체스와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었으므로 결코 이 나라와의 관계에 소홀할 수는 없었 다. 남부 아노마라드는 예로부터 포도아 아몬드, 그리고 미식가들은 이름만 들어도 입에 침이 괸다는 송 로(버섯의일종)의 산지로 대륙에 이름을 떨치는 곳이었다. 남부 아노마라드를 가로로 자르며 솟은 파노 라자fp 산맥의 양 끝자락을 각각 아라종, 그리고 벨크루즈라고 부르는데 두 지방 모두 천혜의 따사로운 기후와 아름다운 시골 풍광, 그리고 남부 특산물들이 풍부하게 나는 것으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고 했 다. 벨노어 백작의 장원이 바로 그 벨크루즈에 속해 있었다. 트라바체스에도 돈 많은 부자들이 있는 고 로 미식을 탐내지 않을 리 없었다. 무역을 위해 길을 뚫는 것은 언제나 중요했다. 비록 수도에 왕이 있다해도 이 정도의 권한은 영지의 주인인 백작의 것이었다. 백작이 자리를 비운 동안 일행을 지키는 책임을 맡은 비서인 휴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백작이 말 했다. "그래, 달리 문제가 있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주인님께서 가신 일은 잘 되었습니까?" "암, 잘 되었지." 고개를 끄덕인 휴는 화제를 바꾸어 말했다. "제가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니 티아 국경까지 사흘 정도면 닿을 것 같다더군요. 티아 땅에 들어서면 아가씨께서 편히 쉬실곳 정도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맞닿아 있으니 만큼 대국 아노마라드의 비위를 거스를 생각이 없는 티아의 군소 기사나 영주들 은 벨노어 백작을 언제고 깍듯하게 모셨다. "그래, 오랜 여행이라 로즈가 많이 지치기도 했겠지. 늘 집에서만 지내던 아니인데." "그래도 그만하면 얌전하게 버티셨습니다. 이제 곧 다시 상냥해지시겠지요." 휴의 말은 별로 진실이 아니었다. 로즈니스가 상냥하게 구는 상대는 몇 명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휴 는 그 안에 절반 정도만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직업 의식이 투철한 그는 개의치 않았다. 친창길이 어는 정도 말랐기에 마차 행렬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기 전에 닌근에서 가 장 큰 성인 그와레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별로 친분이 없는 곳이라 성에서 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좋은 여관은 몇 군데 있을 터였다. 가서 맛있는 음식으로 우울해진 로즈니스를 달래고 불확실한 정보 도 좀더 확인할 마음이었다. "저기, 저 녀석 좀 봐라." "웬 어린놈이 어른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지?" "저런 게 어디서 난 거야?" 그와레는 큰 성이긴 했지만 일종의 장원이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이웃과 외지인을 한 눈에 구별할 수 있었다. 성이 크다 해도 교통상의 요충지에 자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외지인의 비율은 항상 일정 수준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나마 오늘 들어온 외지인 가운데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세 대나 되는 마차에다 말 탄 기사가 열 둘이나 따라붙은 어느 외국 귀족의 행렬이었다. 맨 앞에 일행의 주인인 듯한 30대 중반 가량의 남자가 훌륭한 백마를 타고 가고 있었다. 그런 일행은 갈 곳이 뻔했다. 틀림없이 그와레에서 가장 훌륭한 '사 프란 대문' 여관일 것이다. 그와레를 비롯해서 트라바체스 중남부에는 고급 향료인 사프란이 많이 나서 그나마 몇 안 되는 수출품 이 되어 주고 있었다. '사프란 대문' 여관에서 가장 훌륭한 요리는 당연히 사프란을 듬뿍 깔고 나오는 훈제 연어 스테이크였다. 물론, 해안 지방에서 훈제 연어를 잔쯕 싣고 오는 장사꾼이 성에 들어오는 날 만. "많이 지쳐 보이는데." 성 사람 몇이 선 채로 주고받는 화제의 대상이 된 것은 번화한 길거리를 혼자 느리고 걷고 있는 한 소 년이었다. 행상이 그리 초라하지 않아서 소년 거지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 오히려 그들의 의아하 게 했다. 그러나 소년이 여러 사람의 눈길을 끈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소년이 질질 끌며 가고 있는 한 소지품이었다. 그건 검임에 분명해 보였다. 무엇으로 만든 건지 새하얀 칼집은 상점의 램프 빛만 받아도 수십 가지 빛깔로 희번덕거렸다. 어린 소년이 들기에는 지나치게 컸고. 또 지나치게 좋은 것으로 보였다. 칼을 매 다는 혁대는 차고 있긴 했지만 블레이드가 워낙 길어서 소용이 없었고, 소년 역시 검을 옆구리에 낀 채 끝을 질질 끌며 걷고 있을 따름이었다. 눈길을 끌게 되긴 해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 같았다. 아 직 어린 소년인데 그만한 검은 가벼운 짐이 아니었다. 소년을 쳐다보고 있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거리 곳곳에서 의아한 눈동자로 그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는 몇몇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벨노어 백작 집안의 얼니 하녀인 캐미아는 로즈니스의 성화에 못이겨 새 드레스를 구할 데가 없을까 하고 거리에 나와 있었다. 사람들에게 물어 가며 거리도 구경할 겸 천천히 걷던 그녀의 눈에 검을 끌고 가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뛰었다. 워낙 희한한 모양새라 캐미아의 눈도 한참이나 그 뒤를 따라갔다. 그 리고 무심결에 뒤따라 걷기 시작했다. 의상실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커 보이는 바느질 집을 발견한 캐미아가 걸음을 멈췄을 때, 소년도 멈 춰 서서 거리의 한 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허술한 여관처럼 보이는 건물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백작 저택에서 자라 온 캐미아였는지라 어쩐지 저런 여관 안에는 거친 깡패들만 자리잡고 있을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 얘! 저런 덴 너 같은 어린애가 들어가기엔 위험하다고." 소년은 얼른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시선이 캐미아의 얼굴로 옮겨갔다. 소년의 얼 굴을 똑바로 바로 본 캐미아는 문득 움찔했다. 자기 또래 정도로 생각되었는데 눈빛은 결코 어린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12년 동안 주위 사람들의 눈치만 보며 자라 온 캐미아에게는 사람 보는 눈이 저절로 길러져 있었다. 소년의 눈은 어둡고 움푹했다. 단순히 굶거나 고생을 해서 해쓱해진 것이 아니라 눈 주위에 검은 그늘 이 한겹 드리워져 있었다. 아직 어린 캐미아는 거기까진 몰랐지만 그런 눈은 한때 결코 보아선 안될 자 면을 보고 애써 견뎌낸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눈이었다. "괜찮아." 짧은 대답이 떨어졌다. 소년은 몸을 돌려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캐미아는 잠시 당황하고 있다가 곧 정 신을 추슬러 바느질 집으로 돌아들어갔다. 그날은 보리스가 형을 떠난 지 닷새 째 되는 날이었다. 형이 어머니의 유품을 팔아 남겨 준 돈이 아직은 약간 남아 있었다. 그 닷새 동안 그는 천지간에 버려 진 아이 같았던 자신 곁에 형이 있었던 것이 얼마나 큰 그늘이 되어 주었는지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전이라고 알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생각만 하는 것과 실제로 형이 없는 현실에 직접 부딪치 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첫날, 그는 돈을 아끼기 위해 가다가 만난 인가에서 구걸을 했다. 집을 지키고 있던 아주머니는 의심쩍 은 눈으로 보다가 그가 정말 오갈 데 없는 아이라는 것을 알고는 들여보내어 죽 비슷한 것을 한 그릇 주었다. 그가 죽을 허겁지겁 먹어치우고 아주머니가 가리킨 대로 헛간에 들어가 잠을 청하고 있는데 밤 이 되어 집 주인인 남자가 돌아왔다. 보리스를 보고 친절한 채 마음놓고 쉬라고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 갔다. 생각이 많아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던 그의 귀에 벽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봐도 거지는 아닌 것 같은데 저런 아이를 넘겨주면 부모를 찾아내어 돈을 받고 파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였 다. 물론 아이를 넘긴 그들 역시 몇 푼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만일 그 자들이 부모를 찾지 못하면? 그 러면 노예 제도가 있는 아노마라드에 팔아 버리거나 용병단 따위에 넘긴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리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모양이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아주머니도 혹하는 눈치였다. 보리스는 부부가 잠들기를 기다려 살그머니 헛간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밤새 걸어서 그곳을 벗어났 다. 주위에서 큰 새만 푸드덕거리며 날아놀라도 깜짝 놀랐다. 저택에서 지낼 때는 형과 함께 자고새 사냥 을 나가서 한두 마리 잡아오기도 했었던 그가 이렇듯 변해 있었다. 밤이 되어 불을 피워보려 했지만 아 무리 애써도 되지 않았다. 형이 시범을 보여주었던 그대로 했건만 불씨는 제대로 붙기도 전에 피시식 꺼져 버렸다. 바짝 웅크린 채로 밤을 지새고 다음 날 다시 걸었다. 방향조차 알길이 없었다. 유일한 유품이라 할 만 한 윈터러는 점차 더 무거워졌다.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형과 지낼 때 가끔씩 잡곤 했던 토끼 같은 작은 동물이나 심지어 새알조차도 그의 눈에는 발견되지 않았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 나 때서 먹은 열매는 시고 떫은 맛만 났다. 그래도 그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한 채 그것을 다 먹어치웠 다. 다음 날 순전히 운이 좋아 발견한 마을에서 그는 다시 인가로 가 구걸을 해야 할 지 아니면 여관으로 가야 할 지 결정이 서지 않았다. 그는 결국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 빵만 조금 사서 사람이 드문 구석을 찾았다. 아직 가을걷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아 곡식을 쌓는 창고가 비어 있었다. 텅 빈 창고에는 짚단조차 없었다. 이제 차고 딱딱한 바닥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상도 없는 그는 빵을 몇 입 뜯어먹은 다 음 거기에 누워 눈을 붙였다. 새벽이 채 밝기도 전에 그는 잠에서 깨었다. 갑자기 가슴 한쪽이 아파지면서 눈물이 한 줄기 주르륵 흘렀다. 그러나 그는 애써 눈물을 닦아내고 마른 입으로 다시 빵을 씹었다. 그는 이미 고모할머니를 찾아가는 것은 포기하고 있었다. 그도 트라바체스에서 나고 자란 만큼 서로 대립되는 정파에 속한 친척이란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 그는 홀로 생각한 끝에 그가 갈 곳이란 없고 어딘가에서 심부름꾼 으로라도 써 준다면 뭄 붙이고 사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출신이니 자존심이니 하는 따위, 이 미 이런 상태에 이르러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형의 말대로 살아남은 것만이. 오직 그것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만일 일을 얻는다면 그래도 큰 도시 쪽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그는 그 마을을 떠나 일전에 들어 두었던 그와레 성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닷새 째 되는 날 그와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방 좀 주십시오." 여관의 카운터를 맡아보고 있는 토냐는 열 여덟 살 먹은 주인의 딸이었다. 그는 조그마한 소년이 혼자 걸어와서 어른스런 말투로 방을 달라고 말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너 혼자니?" "그렇습니다." 소년은 작았지만 말투로 보아 철없는 아이 같지는 않았다. 목소리는 겁먹은 것도 아니었고 당황하거나 망설이지도 않았다. 토냐는 잠시 후 어깨를 으쓱하며 뭐 어떠랴, 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래, 싼 방으로 줄까?" "그렇게 해 주세요." "5엘소란다. 저쪽 부엌 옆에 딸린 방이야. 침대가 좀 작지만 너한테는 상관없을 것 같구나." 보리스는 미리 세어 두었던 은화를 호주머니에서 꺼내 내주었다. 돈주머니를 내보이는 것이 좋지 않다 는 것은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토냐가 돈을 받자 보리스는 좀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 그리고......" 서글서글한 성격인 토냐는 혼자 여행하는 어린 소년에게 호기심을 느꼈으므로 평소보다 친절한 목소리 로 되물었다. "그리고?" "혹시, 저기. 저 같은 어린아이라도 써줄 만한...그런 곳을 알 수 없을까 하고요. 돈은 주지 않더라도 그 냥 먹고 잘 수만 있으면 되고....그런 데요." 보리스도 어느 정도는 예프넨과 비슷한 성격이었기에 그런 말을 꺼내는 데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토냐는 눈을 약간 크게 뜨며 상대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일자리를 구하니?" 이번엔 대답이 쉬었다. "네." "흐음......" 보리스는 토냐의 얼굴을 처음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자기가 그녀 정도의 나이만 되었더라도 얼마 나 좋을까 생각했다. 토내도 보리스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장사꾼인 그녀는 이 소년이 평민 가정에서 자란 것 같지는 않다고 짐작했다. "정말로 아무 일이나 상관없어?" 그리고 토냐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나오자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대답했다. "네, 어떤 일이든지." "뭐 나도 확신은 할 수 없어. 저번에 대장간의 부닌 아저씨가 조수가 필요하다고 했던 것 같으니까 일 단 물어 볼게. 아니라면 이 근처에 드나드는 상인들이 잔심부름꾼을 필요로 할 것 같기도 하고." 눈을 천장으로 굴리며 중얼거리던 토냐는 불쑥 이어 말했다. "너처럼 예쁘게 생긴 애는 돈 많은 마나님들도 시종으로 마음에 들어할 것 같은데." 보리스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는 얼굴로 약간 눈을 바로 떴다가 다시 내리깔았을 뿐이었다. 그런 소년을 내려다보며 토냐는 웃는 것처럼 입가를 실룩거렸다. "어쨌든 혹시라도 좋은 얘기가 있으면 전해 줄 테니까 그만 방에 가서 쉬도록 해." 보리스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방에 들어간 후 토냐는 저 애가 저녁은 먹은 걸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없더란 말이야?" 캐미아는 동갑내기 아가씨의 얼굴을 보는 것이 두려웠다. 아직도 아가씨는 자신과 같은 옷을 입고 있 을 터였으므로. 게다가 좋은 소식도 없었다. "그럼 다른 델 찾아보면 되잖아! 이만큼이나 큰 성인데 여기 귀족들은 그럼 뭘 입고 산단 말야!" "여긴 시골이라서요 아가씨... 아가씨 같은 분이 입으시는 옷은 주문을 받아야만 만든대요." "흥!" 로즈니스는 화가 나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로즈, 아버지다. 들어가도 되겠니?" 아직 어린 딸이지만 꼬마 숙녀 취급을 해 주는 아버지였기에 이런 모습으로 있을 수 는 없었다. 로즈 니스는 얼른 발딱 일어나서 치마를 정돈하고서 대답했다. "네, 아버지." 문을 열고 들어온 벨노어 백작의 팔에 걸쳐진 젓은 로즈니스가 가장 좋아하는 초록빛 천으로 만든 귀 여운 드레스였다. 완전히 새 것이였고. 만족스러울 정도로 고급이었기에 로즈니스는 깜짝 놀라며 소리쳤 다. "아빠!" 뒤따라 들어온 비서 휴가 문을 닫았다. 벨노어 백작이 말했다. "우리 꼬마 숙녀님이 옷이 없어서 쩔쩔매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얼른 가서 구해왔단다. 마음에 드느 냐?" 벌써 드레스를 받아들어 몸에 대어보고 있던 로즈니스는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마음에 들고말고요!" "그럼 얼른 입어라. 아버지와 밤나들이 가자꾸나. 다른 나라의 풍습도 많이 구경해야 현명한 숙녀가 되 지." "네!" 백작이 나가고 나서 로즈니스는 캐미아의 도움을 바당 싫었던 옷을 벗어버리고 서둘러 드레스로 갈아 입었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본 그녀의 얼굴에 슬그머니 미소가 피어올랐다. 밝은 레몬빛 머리카락을 곱게 늘어뜨리고 초록색 눈을 보석처럼 빛내는 자신은 스스로도 깜짝 놀란ㄹ 만큼 예뻐져 있었다. 실은 단순히 드레스 때문에 아니라 반나절 동안 구질구질하던 기분이 맑아졌던 탓 이었다. 캐미아도 옆에서 손뼉을 치며 아가씨의 비위를 맞춰 주었다. 곧 둘은 신이 나서 아래층으로 내 려왔다. 백작은 이미 타고 갈 말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었다. 백작이 말에 오르고, 하인의 도움을 받아 두 다리를 안장 한쪽으로 모아 내린 채 말에 탄 로즈니스는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아빠. 어디서 옷을 구하셨어요? 캐미아는 바느질 집밖에 못봤다는데." "아버지도 그 바느질 집에서 샀지." 로즈니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요?" "이웃 마을에서 주문 받아 만들고 있던 드레스를 두 배 값을 주고 사왔지." "아아." 로즈니스는 그제야 생긋 우승며 이해했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고삐를 쥔 아버지의 품에 편안하게 기댔다. 말이 출발했다. 백작의 뒤로 비서 휴와 기사 셋이 역시 말을 타고 따랐다. 캐미아는 떠나는 말들을 바 라보며 저렇게 좋은 아버지가 있는 아가씨가 부럽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이 태어나자마자 귀족 집의 몸종으로 팔아먹었고, 돈 몇 푼만 생기면하루도 빠짐 없이 취해 있는 주정뱅이였으며 그나마 도 몇 년 전에 집을 나가서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얘, 얘... 문 좀 열어 봐." 토냐는 소년의 이름을 물어두지 않은 자신의 바보스러움을 탓하며 문을 두드렸다. 한참 잠들었을 테니 금방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금방 대답이 들리고 문이 열렸다. "이리 나와 봐. 대장간 아저씨가 널 좀 보자고 하셔." 보아하니 소년은 잠들지도 않았던 모양이었다. 걸어가는 동안 토냐가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보리스...입니다." "난 토냐라고 불러." 왠지 모르게 진네만이라는 성을 말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토냐도 더 묻지 않은 채 그를 한쪽 구석의 테이블로 데려갔다. 거기에는 키가 크고 유난히 팔뚝만 굵은 40대 남자가 앉아 맥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부닌 아저씨. 얘에요." 남자는 곁눈으로 슬쩍 보리스를 훑어보더니 말했다. "비리비리한 녀석이군. 너, 대장간 일을 견딜 수 있겠냐?" 대장간 일이 무엇인지 알 리 없는 보리스였다. 그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려다 마음을 고쳐먹고 입을 열었다. "솔직히 어떤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허." 부닌이라는 남자는 맥주잔을 내려놓더니 다시 한 번 소년을 살피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말했다. "거짓말하는 녀석은 아니군. 널 딱 보고서 한 눈에 평민 출신은 아니란 걸 짐작했다. 어느 집안이냐? 최근에 항쟁이 있었나?" "......" 보리스의 어두운 눈동자가 문득 마음에 걸린다 싶었다. 부닌은 대장장이였기 때문에 항쟁에 쓰일 무기를 댄 일이 여러 번 있었고. 덕택에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항쟁이란 주로 지배 계층들끼리 일어나는 법이고 주인이 바뀌어도 장원의 평민들은 그냥 살아가면 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이 대뜸 짐작하여 물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문 편이었다. 트라바체스가 공화국이 되었어도 아직은 틀림없는 계급 사회였다. 평민들에겐 선제후나 의원을 뽑을 투표권조차 없었 다. "말하지 실은 게냐?" 말없이 서 있는 보리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부닌이 재차 물었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맥 주를 마저 들이키더니 말했다. "내일 아침 일찍 대장간으로 와라. 일을 조금 시켜 보고 별 볼일 없으면 쫒아버리겠다." 보리스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지만 토냐의 얼굴은 환해졌다. 그녀는 부닌 아저씨를 잘 알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면 합격이나 마찬가지란 걸 알고 있었다. "얘, 어서 감사하다고 말하지 않고 뭘 하고 있어?" 보리스는 토냐가 다그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고, 다시 그녀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돌아왔다. 토냐는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주방으로 가서 따뜻한 수프를 한 그릇 가득 떠 가직 돌아왔다. " 너 저녁 안 먹었지? 이거라도 마셔 봐." 수프는 속에 든 것도 없이 허여멀건 물이 아니라 꽤 충실하게 야채니 고기 조각이니 하는 것이 들어 있었다. 보리스는 토냐를 잠시 쳐다보다가 수프 그릇을 받아들고 한 모금 마셨다. 토냐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 "얘, 너는 고마우면 고맙다고 말하는 버릇 좀 들여야겠다." 탓하려고 꺼낸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보리스의 눈에서 충분히 고마움을 일었던 것이다. "고마워요...누나." 좀 창피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보리스는 주머니에서 말라비틀어진 빵조각을 꺼내어 수프에 찍어 먹었 다. 그러나 토냐는 그저 미소만 지었을 따름이었다. 먹고 나니 몸이 좀 따뜻해졌다. 토냐가 그릇을 가지고 돌아가자 보리스는 잠시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 겼다. 대장간이라는 곳은 아마 농기구나 무기 따위를 만드는 곳이나 분명 힘들고 거친 일일 터였다. 그러나 그런 것은 별로 문제되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최근 얼마간 겪어 온 일들로 인해 그의 마 음에 생겨난 교훈 같은 것이었다. 저들을 믿어도 좋을까. 생명의 은인인 양 접근해서 탐내던 검을 빼앗고 용병단에 팔아버리는 자들도 있었다. 친절하게 재워 주는 체 하며 역시 어떻게 돈이나 몇 푼 챙겨 볼까 하는 어른들도 보았다. 친한 동료처럼 보이는 자들 도 간단한 위기만 닥치자 금방 서로를 배신했다. 토냐 누나나 부닌 아저씨 지금 친절해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유난히 친절한 체 하던 자들일수록 꼭 더 악랄한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속으로 이리 저리 고민하던 보리스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옆에 끼고 밖으로 나왔다. 이미 늦은 밤이 되어 있었다. 그는 카운터에서 바쁘게 일하는 토냐의 눈을 피해 여관 밖까지 나왔다. 대장간 이 정말로 있는지 찾아볼 셈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대장장이가 정직한 사람인지도 알아볼 생각이었 다. 여관 문 앞에서 거리로 걸어나오던 그는 갑자기 달려오는 네 마리나 되는 말에 그대로 밟힐 뻔했다.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기수들이 길거리의 사람들을 무시하고 부주의하게 달려왔던 것이다. 거리에는 사 람들이 이리저리 개미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워엇!" 보리스가 미처 피하지 못한 채 바닥에 바짝 웅크렸을 때, 그의 등바로 위에서 말이 멈추었다. 멈추고도 다리를 움직거리던 말이 보리스의 옆구리를 툭 걷어찼다. 간신히 옆으로 굴러 빠져나왔지만 통증이 멈 추지 않았다. "뭐냐! 죽고 싶어서 길을 막는 거냐!" 길을 막았다는 것은 순 억지였다. 보리스가 애써 몸을 일으켰을 때 기세 등등한 네 명의 기수가 푸르 륵 대는 말을 세운 채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마치 시비를 걸기 위해 나타나기라도 한 것처럼 저들끼리 피식거리는 웃음을 주고 받았다. "이 어른의 앞길을 막았으면 얼른 엎으려 빌 것이지 뭘 그리 쳐다보고 있느냐!" 그들의 기세가 하도 높아서 주위 사람들은 감히 끼여들고 싶지 않은 듯 눈치만 보며 흩어져 갔다. 보 리스는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 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는 아직 고개 속이는 데 익숙하지 못했다. "길을 방해해서 죄송하지만...사람 많은 거리에서 말을 달린 아저씨들도 잘못인 것 같습니다." "허어?" "저 녀석 말하는 것 좀 봐라. 아직 정신이 덜 든 모양이구나." 기수들이 어이없어하며 헛웃음을 흘리는데 한 명이 말했다. "정신 번쩍 나게 형님이 맛 좀 보여주지 그러오."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다!" 맨 앞에서 달려왔던 자가 말채찍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다짜고짜 보리스를 향해 내리쳤다. 철썩! 채찍은 피할 겨를도 없이 등과 어깨에 감겨 날카로운 상처를 냈다. 그런 일격을 맞고 서 있을 어린아 이는 없었다. 보리스가 비틀거리며 주저앉자 그들은 히죽거리며 다시 한 번 채찍을 들었다. 살갗이 터져 나가는 통증이 다시 한 번 피부를 파고들었다. 채찍 끝이 얼굴에 스쳐 입가에도 피가 흘렀다. "형님이 버릇을 가르치니까 저절로 무릎을 꿇는군요." 보리스가 쓰러진 것을 보고 한 남자가 킬킬거리며 말했다. 또 다른 남자가 말했다. "알겠냐, 꼬마야? 송장 치우게 되기 전에 얼른 무릎 꿇고 빌어라." 토냐는 밖이 소란스럽다는 것을 느끼고 뭔가 싶어 밖으로 나왔다가 이 꼴을 목격했다. 그녀는 화가 치 밀어 올랐지만 동시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도 저들처럼 행색 좋은 망나니들에게 함부로 대들었다가 는 무슨 수모를 당하게 될 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망설이다가 여관으로 뛰어들어간 그녀가 소 리질렀다. "아빠! 아빠 어디있어요! 부닌 아저씨, 이리 좀 나와 보세요!" 보리스는 주위의 모든 것이 벌떼처럼 윙윙거린다고 느꼈다. 통증보다도 수치심이 얼굴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그는 옆구리에 낀 윈터러의 자루를 보았다. 이 검을 휘두를 수 있을 정도로 내가 자라기만 했 더라면, 아니 여기에 형이, 예프넨이 있기만 했어도...... 그러나 소용없는 기원일 뿐이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그는 비척거리며 검을 짚고 있어났다. 후들 거리는 다리조차 가누기 힘들었지만 그는 똑바로 섰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항변하지도 않았지만, 여전히 굴복하지도 않았다. "저런 표독스런 자식을 봤나......" 한 사람이 말에서 내렸다. 넷 가운데 가장 막내인 듯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짜고짜 보리스의 멱살을 움 켜쥐더니 힘껏 여관의 기둥에 부딪쳤다. 얼마나 세게 내리쳤는지 기둥이 다 흔들렸다. "너 같은 놈은 혼쭐내서 버릇을 가르쳐야 해. 어딜 거지 자식이 귀족한테 대드나, 대들길!" 쾅!쾅! 두 번 연속으로 기둥에 처박더니 다른 손으로 얼굴을 움켜쥐고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커다란 손은 소 년의 얼굴 전체를 덮어 일그러뜨렸고 강인한 손목이 머리를 옆으로 꺾어 돌렸다. 목이 뒤로 꺾어질 지 경이 되었을 때 다시 한번 기둥으로 밀쳐 박았다. 심한 충격으로 머리가 텅 비어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이 번쩍 나냐?" "......" 대장장이 부닌이 토냐와 함께 밖으로 뛰쳐나와 그 꼴을 보는 순간이었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우직 한 사내인 그가 다짜고짜 달려들려는 그 때 등뒤에서 엄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 무슨 소란이냐!' 사람들의 눈이 뒤로 돌아갔다. 오늘은 말 탄 자들이 연이어 들어닥치는 날인 모양이었다. 다섯 마리나 되는 말이 멈춰 있었고 그 가운데 맨 앞에서 백마를 탄 고급스러운 옷차림의 남자가 호통을 치고 있었 다. 토냐가 보니 아까 저녁 무렵 성으로 들어온 외국 귀족이 분명했다. "뭐야!" 보리스를 구타하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 때 백작 일행의 두 남자가 말에서 뛰어내려 그에게 달려 갔다. 그리고 당장 그 자를 붙잡아 밀치고 보리스를 부축했다. 보리스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을 정신이 아니었다. 머리를 심하게 얻어맞아서 정확한 판단 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대로 부축하는 자들의 손에 축 늘어졌다. "넌 뭔데 참견이야!" 말채찍을 휘둘렀던 자가 따지려 했지만 백작의 목소리가 단호하고도 위엄 있게 그를 눌렀다. "난 이곳 사람은 아니지만 너희 같은 무뢰배들이 어린아이 하나를 때리는 모양을 그냥 보아 넘길 사람 은 아니다. 매운 맛을 보고 싶지 않거든 썩 물러나라." "어쭈, 제법 큰소리치는데!" 결국 칼싸움으로 번질 모양이었다. 여기저기서 무기를 뽑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슬금슬금 뒷걸음 질치면서도 구경을 하려는 자세가 되었다. 토냐와 대장장이 부닌은 손쓰기가 뭣해져서 그들이 하는 양 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구경꾼들의 기대대로 되지는 않았다. 백작이 일단 칼을 뽑고 그 부하들이 말머리를 나란히 하 자 처음의 무뢰한들은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특히 중년 백작의 칼 솜씨는 매우 놀라워서 단숨에 두 사람을 말 등에서 떨어뜨리고도 상대가 크게 다치는 것은 교묘히 피했다. 말에서 떨어진 자는 욕을 퍼부었지만 그들 패거리가 모두 지는 것을 보고서 얼굴빛이 변해서 엉금엉금 기어 구석으로 달아났다. 백작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어서 네놈들의 말을 끌로 이 자리에서 썩 사라져라!" 더 추궁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들은 한 마디 대거리도 없이 시킨 대로 얼른 달아났다. "아이를 말에 실어라. 그리고 의사도 수소문해 봐라." 백작이 명령하지 한 사람이 고개를 숙이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토냐에게 다가와 이 근처에 의사 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뭔가 씁쓸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의사는 아니지만 저쪽 골목을 돌아가서 세 번째 집에 약사 할머니가 살아요." 상황이 해결되자 백작은 말을 돌려 비서 휴가 안고 있는 로즈니스에게 다가갔다. 갑작스레 칼싸움 장 면을 보게 된 로즈니스는 눈이 동그래져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괜찮다. 로즈, 다 끝났단다. 아버지가 늘 말했지? 불의한 상황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것은 귀족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너도 기억해두거라. 귀족에게는 귄리만큼이나 다 나름의 의무가 있는 거란다." 로즈니스는 아버지가 거느린 기사 한명이 안아 말을 태운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소년은 이미 정신이 반쯤 혼미해져 있었다. 그래서 이후에도 이날 로즈니스가 내뱉은 말을 금방 기억해 낼 수는 없었다. "난 저렇게 더러운 아이는 싫어!" 로즈니스가 뭐라고 말했든 백작 일행은 보리스를 데리고 여관 앞을 떴다. 2. 삶의 갈림길 "으, 으음......" 천장에 무늬 있는 벽지가 발라진 방이었다. 순간 롱고르드의 저택에 돌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일었다. 그것도 저택에 있는 어머니의 방, 더 어렸을 때 무심결에 잠들었다가 깨어난 일이 있는 그 침대 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에게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방이었지만, 형에게는 늘 느껴진다는 그 어머니의 냄새를 맡아보려 했었다. 혼수 상태에서는 깨어났지만 한쪽 눈이 부어 올라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되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내 검은?" 몸을 일으키려는 그를 다시 눌어 눕혀버리며 눈가에 물수건을 얹어 주는 목소리가 대꾸해 왔다. "검이라고?: 낯선 여자의 목소리였다. 대략 서른 정도 먹은 아주머니인 듯했다. "여기가...어딘가요?" 보리스는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아까의 손이 사정없이 그를 도로 눌러버리며 이번에는 어 깨를 싸고 있던 붕대를 풀었다. 서른 먹은 아주머니라는 생각은 정정되어야 할 것 같았다. 손의 힘은 같 은 나이대의 아저씨와도 맞먹었다. "가만히 좀 있어. 궁금한 건 차근히 가르쳐 줄 테니까." 시킨 대로 보리스는 상대방이 몸 곳곳의 붕대를 풀어 상처를 닦고 다시 새 붕대로 감도록 가만히 기다 리고 있었다. 치료가 끝나자 몸이 한결 시원해졌다. 한쪽 눈이나마 뜨고 옆에 애써 바라보니 매우 뚱뚱한 아주머니 가 더러운 붕대와 대야를 챙기고 있었다. 다른 하인이 들어와서 그것들을 가져가고 나자 아주머니는 그 제야 보리스의 얼굴을 바로 바라보았다. "집은 어디냐?" 갑자기 눈앞에 어지러울 정도로 어머니의 방이 머릿속에서 어른거렸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답했다. "없어요." "떠돌이라고?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바른 대로 말해 봐. 피해는 끼치지 않으니까."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지만 악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집이 있다 해도 돌아갈 수 없으니까 없는 거나 다름없어요." "흥, 너도 네가 비극의 주인공인 줄 아는 가출 소년이야?" 너무 어이없는 반응에 보리스는 뭐라 답해야 할 지 몰랐다. 아주머니가 뭘 말하고 싶은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꼭 집안 환경도 좋은 것들이 제 집이 제일 편한 줄 모르고 가출해서 헛소리들을 지껄인다니까. 아버지 가 동생만 사랑해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둥, 살짝 돌아서 어머니한테 마음 아플 소리를 해버렸으니 돌아갈 면목이 없다는 둥......" "......" "얼른 솔직히 말해. 어느 집이야? 넌 입은 옷도 좋은 것이고 손에 박힌 굳은 살이라고는 겨우 검을 잡 았던 흔적밖에 없으니 평민의 자식일 리가 없단 말이다. 백작 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서 널 구해주셨지만 언제까지나 데리고 다닐 거라 생각해선 안 돼. 얼른 집에 가서 얼토당토않은 오해나 푸는 게 옳지." 보리스는 점차 이 아주머니가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것은 아닌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말도 끊 을 겸 낯선 단어를 질문했다. "백작...님이요?" 아주머니는 이불을 바로 펴서 덮어 주면서 말했다. "그래. 백작 님...아참, 이 나라엔 백작이 없지? 널 구해주신 분은 아노마라드의 귀족이신 벨노어 백작이 시다. 설마 백작이 무엇인지 모르는 건 아니지?" 보리스가 뭔가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덜컥 열리더니 한 소녀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월라 아줌마!" 보리스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소녀 쪽에서는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사뿐사뿐 들어오더니 눈을 흘기는 시늉을 했다. "거 봐. 그런 여관에 들어가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라고." 캐미아가 보리스의 부어오른 눈을 보더니 조그맣게 혀를 찼다. 그러나 그녀는 기본적으로 보리스를 다 시 만나게 된 걸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캐미아는 곧 입을 열어 말했다. "어쨌든 우리 주인님께서 마친 그곳을 지나고 계셔서 다행이었다. 아가씨께선 많이 놀라신 모양이지만 지금은 괜찮으시고. 우음...너, 집으로 돌아갈거니?" 보리스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아주머니의 질문은 어른인 만큼 당연한 것이었을 지 몰라 도 캐미아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였다. 더구나 캐미아의 어조는 마치 '아니'라는 대답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는 듯해서 더욱 이상했다. 옆에서 윌라 아주머니가 다시 불쑥 끼여들었다. "그럼 당연한 게 아니겠느냐, 캐미아. 주인님께선 어서 영지로 돌아가셔야 할 분이신데." 캐미아는 일부러 아주머니의 말을 외면하는 체 하며 다시 말했다. "으응, 뭐 돌아갈 곳이 있다면 가야겠지만." 윌라는 평소 로즈니스의 곁에 붙어 있는 캐미아가 뭔가 주워들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다고 딱 짐작했 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물어대기 시작했다. "주인님께서 무슨 말씀이 있으셨대냐? 응? 로즈니스 아가씨께서 무슨 얘기라도 하셨어?" "아아,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이야기인걸요." "이 에... 아니, 이름도 모르잖아. 하여튼...쟤가 어느 집안 앤지 알아내셨대? 보리스는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그는 캐미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캐미아는 고개를 내 저었어다. "난 몰라요.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아이 참. 난 그만 아가씨한테 가볼래요. 찾는데 없다고 또 꾸 중들을지도 몰라." 그러더니 캐미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보리스에게 가벼운 미소를 보냈다. "또 봐." 보리스가 윈터러를 다시 보게 된 것은 그 날 저녁 무렵이 되어서였다. 혼란한 꿈속에서 문득 깨어나 보니 윈터러는 검은 보자기에 둘둘 감아져서 침대 바로 아래에 놓여 있었다. 전날 밤으로부터 하루를 꼬박 잠을 보낸 것이다. 어질어질하던 머릿속에 토냐와의 약속이 떠오르고서 야 그는 자신을 돌봐주고 있는 이 사람들이게 뭔가 말해야겠다고 느꼈다. 때마침 윌라가 몸이 좀 나아 졌으니 백작 부녀와 함께 저녁을 들도록 하라는 전갈을 가지고 왔다. 눈의 붓기가 가라앉고 붕대로 감았던 곳도 어느 정도 옷으로 덮어 입을 수 있게 된 터였다. 그가 안내 된 곳은 이 여관 안에서도 특실에만 딸려 있는 거실 겸 작은 식당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미 백 작과 로즈니스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음식 시중을 들기 위해 윌라와 캐미아도 들어와 있었다. "어서 오거라." 백작이 먼저 말하자 로즈니스도 비교적 나쁘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와." 빈 의자가 여러 개 놓여 있어서 보리스는 어디에 앉아야 할 지 몰랐다. 백작이 로즈니스의 바로 옆자 리를 가리켰다. "저기 앉거라."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처럼 소수의 사람이 즐기는 만찬치고는 꽤 푸짐한 편이었다. 얇게 자른 햄 과 흰 치즈를 얹은 빵, 샐러드 접시가 나오고 나서 곧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테이블 가운데 커다란 빵 덩어리가 놓여 있었는데 보리스는 그것이 무엇에 사용하는 것인지 몰랐으나 백작 부녀가 하는 것을 보고 곧 알게 되었다. 그것은 접시에 남은 부스러기를 닦아 내는 꽤나 사치스러운 용도였다. 토끼고기를 잘게 썰어 양념한 질그릇 요리와 통후추 열매를 드문드문 뿌린 큼직한 벨크루즈 소시지, 그리고 포도주빛이 도는 얇게 썬 양고기 등등이 붉은 포도주와 함께 나왔다. 보리스는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게 된 사람처럼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간단하게 감사 인사를 한 뒤 두 사람을 기다려 식사를 시작했다. 잠시 후 조금 늦게 오믈렛이 하나 사왔는데 그걸 보며 아버지와 딸은 서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 받 았다. 백작이 말했다. "이걸 먹어 보면 벨크루즈의 진짜 맛을 알게 되지." 무엇인지도 모르고 보리스는 오믈렛을 한 조각 잘라 입에 넣었다. 그리고 약간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입에서는 두툼하게 자른 일종의 버석이 씹혔는데 그 맛이 아주 희한했다. 부드럽고 촉촉했으며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진하고 독특한 향미가 입안에 퍼졌다. 소년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보고 로즈니스가 재빨 리 말했다. "송로야. 우리 집안의 영지에서 나는 것은 아주 유명하거든." 처음 먹어 보는 것인데도 진미라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보리스는 설명에 감사하듯 로즈니스에 게 가볍게 고래를 숙여 보였다. 로즈니스의 등위에 서 있던 캐미아가 살짝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러고도 로즈니스는 보리스가 식사하는 양을 슬쩍슬쩍 곁눈질해 쳐다보았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익숙한 손놀림과 정확한 식사 예법을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차츰 안심하기 시작했다. 이 낯선 소년이 불쾌한 일을 저질러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 가능성은 많이 줄어들었다고 느낀 탓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오랜만에 잘 먹은 탓에 보리스의 마음도 약간은 풀렸다. 그러나 여전히 경계심을 완전 히 버리지는 않은 채 후식으로 나온 타트와 차를 맛보았다. 브랜디를 마시던 백작이 하녀들을 나가게 하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정식으로 소개를 안했군. 나는 아노마라드 남쪽 지방인 벨크루즈의 절반을 차지하는 벨노어 영지의 백 작 가니미드 다 벨노어다. 이 아이는 내 외동딸이자 상속녀인 로즈니스 다 벨노어라고 하지." 보리스는 순간 당황했다. 상대방이 이렇듯 정식으로 소개하면 자신의 신분도 밝히지 않을 수 없게 되 는 것이다. 보리스는 입 속으로 약간 망설이다가 외국인인데 그리 크지도 않은 자신의 가문을 설마 모 르겠지 하고 생각하며 말했다. "보리스 진네만입니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백작이 되물었다. "롱고르드의 그 진네만 가문인가?" 거짓말을 할 수도 없게 되었다. 망설이긴 했지만 보리스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백작은 의아 한 표정이 되었다. "그곳이라면 트라바체스에서도 이름 있는 무사 가문이라고 언뜻 들었는데...집안에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인가?" 다행히도 백작은 앞서 소설 좋아하는 아주머니처럼 얼토당토않은 지레짐작은 하지 않았다. 이쯤 되니 솔직하게 털어놓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보리스는 짧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삼촌께서 집안을 관리하게 되셨습니다." "흐음......" 로즈니스의 상식으로는 보리스의 말이 무슨 상황을 뜻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셔 서 삼촌이 집안을 맡게 되었다면 그 아래에서 계속 보호를 받으면 될 일 아닌가? 그렇다면 그 말은 '아 버지께서 돌아가셔서, 삼촌께서 집안을 관리하게 되셨다' 가 되었어야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리스의 말 속에서 인과관계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백작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는 자주 트라바체스에 드나들었던 만큼 아 나라의 고 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들어 알고 있었다. "역시 정치적인 견해가 다른 것인가? 그런 것이겠군." "......" 문득 외국인 앞에서 자기 나라의 치부가 드러나는 듯한 기분에 얼굴이 붉어졌다. 아직 정치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나이이지만 이런 식의 공화정이라면 신물이 난다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었다. 아노마라드는 왕정이라고 들었는데 그 나라는 좀더 나은 상태일까? "그렇다면 이제 어디에 몸을 의탁할 생각인가?" 보리스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작정했다. "딱히 정해진 곳은 없습니다. 다만 이 도시의 대장장이 어른께서 도제로 거둬 주실 지도 모른다고 하셔 서 그곳에 찾아가 볼 생각입니다." 로즈니스는 대장장이를 '어른' 이라고 말하는 보리스의 말을 들으며 푸훗, 하고 웃었다. 이 희한한 대화 가 즐겁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거기에 약간의 우월감이 또한 그녀를 기분 좋게 했다. "그래, 그럼 대장간 조수가 되겠군. 전에도 그런 일에 관심이 있었나? 그 일이 마음에 들 것 같나?" 그럴 리가 없었다. 보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만은 달 리 말했다. "이제부터 마음에 들도록 노력해야겠지요." 웃고만 있던 로즈니스가 불쑥 끼여들더니 말했다. "아빠, 그럼 이 소년은 귀족인가요? 귀족이 대장간 일을 하게 되나요?" "아니다. 로즈. 이 나라에는 아노마르드에서와 같은 귀족이 없단다. 다만 오랫동안 세습되어 온 선제후 와 의원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들이 나라의 중요한 일을 책임질 사람들을 뽑지." 로즈니스는 장차 영지를 상속할 딸이였기에 아버지로부터 여러 가지 들은 것이 조금 있었다. 그래서 반문했다. "그러면 나라 안의 영지들은 어쩌고요? 귀족이 없다면 누가 그것들을 관리하나요?" "영지들에는 대대로 내려온 주인이 있지. 그러나 그들도 귀족은 아니란다. 대부분은 앞서 말한 선제후 나 의원 가운데 뜻을 함께 하는 사람을 찾아서 그들에게 조력을 제공하고 반대로 도움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한 영주들의 투표가 선제후와 위원을 결정하게 되는 만큼 그들의 지지를 얻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인 것이지. 어찌됐든 그들 윗사람이 힘을 갖느냐, 또는 쇠망하느냐에 따라서 영지들은 때때로 그 윗사람과 운명을 같이하게 되고, 그럴 때면 영지의 주인도 바뀌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백작이 길게 설명을 하면서 대장간에 대한 것은 어쩐지 뒤로 밀려나 버린 것 같았다. 보리스는 외국인 인 백작이 우리나라에 대해 상당히 잘 아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다시 말했다. "그런 까닭에 오랫동안 염치없이 신세를 지고 있었습니다만, 이만 떠나 대장간으로 가볼까 합니다. 본 래는 아침에 가기로 했는데 늦어지게 되었으니 저도 그 분께 면목이 없게 되어서 더 지체할 수가 없을 것같아요." 백작은 잠시 말하지 않고 조용한 눈길로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이것저것 생각하던 로즈니스도 아버지 의 분위기에 동요되어 같이 보리스를 쳐다봤다. 보리스가 두 사람의 눈길에 불편해할 정도가 될 무렵, 백작은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보리스 진네만이라고 했지? 자네, 대장간으로 가기보다는 우리와 함께 아노마라드로 가는 것이 어떻겠 는가?" 보리스도 놀랐지만 로즈니스도 금시초문이었던 모양이었다. 깜짝 놀란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빠! 얘가 우리와 함께 간다고요? 우리 집으로요?" 백작은 빙그레 웃었다. "그건 진네만 군이 결정할 문제지. 난 일단 제안을 했을 뿐이니까." 그들이 몇 마디 나누는 사이 보리스는 갑작스런 제안으로 인한 혼란에서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당장 질문이 튀어나왔다. "죄송합니다만, 어째서입니까?" "어째서라. 이유를 듣고 싶은가?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원한다면 이유를 들려주겠지만 난 듣지 않는 쪽 을 권하고 싶군." 보리스는 잠시 테이블 아래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곧 단호하게 고개를 떨쳐 들며 말했다. "전 듣겠습니다." 그러자 백작도 망설이지 않고 단숨에 말했다. "자네를 이용하고 싶어서다." 보리스는 숨을 훅, 하고 짧게 들이켰다. 그리고 말했다. "이용...이라고 하셨습니까?" 보리스는 이 낯선 귀족이 뜻밖에 친절을 베풀 때부터 이미 약간의 의심을 품고 있었다. 게다가 심지어 함께 가자는 이야기까지 꺼냈을때는 더 망설임 없이 이자가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고 판단했다. 보리스는 이제부터 그게 무엇인지 상대방의 변명으로부터 추론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듣게 된 대답 은 전혀 엉뚱한 것이어서 그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백작의 눈이 묘한 빛으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직 어린 보리스가 속내를 알아보기에는 너무 도 다의적인 의미를 품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말하고 그 뒤를 말하지 않을 순 없지 그래, 난 실제로 자네가 필요 없다. 내게는 무엇 하 나 부족한 것이 없고 사랑스런 딸애가 있으니 더 이상의 자식도 원치 않아. 그런데 뜻밖으로 내게 딱 네 나이의 소년이 필요한 일이 생겼다. 실은 소년이 아니라 소녀라도 생관 없었지 네가 좋은 검을 갖고 있는 걸 봤다." 보리스의 눈동자도 그 즈음에서 어린아이답지 않은 차가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주도면밀한 자세로 그 는 상대의 말을 들었다. "난 오래 전. 로즈가 태어나기도 더 전에 여러 친구들 앞에서 한 친구와 내기를 걸었었다. 결혼하여 자 식을 낳게 되면, 그 아이가 열 세살이 되었을 때 서로 검을 겨루게 시켜서 이기는 쪽이게 진 쪽이 무슨 소원이든 들어 주기로 말이지. 그 후로 로즈가 태어났고 난 오랫동안 그런 내기는 잊고 있었다." 전혀 뜻밖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들으며 보리스는 더욱 정신을 차려 상대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리고 바로 작년에, 아주 오랜만에 그 친구의 소식을 다시 듣게 되었지 그 자는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 쪽은 불행하게도 백치라고 하더군. 그는 내가 딸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는 동생 쪽을 맹렬하게 교육시켜서 그 나이에 보기 드문 소년 검사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 자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바로 내 딸 로즈였지 그는 백치인 아들과 내딸을 혼인시키기를 바라고 있는 거다." "어머나!" 로즈니스가 깜짝 놀라 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엎질러진 음료수를 닦아 낼 하녀들은 이미 밖으로 나 간 상태였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로즈니스는 얼굴이 새파래져서 아버지를 다그쳤다. "아빠, 그게 정말이에요? 백치하고 저를 결혼 시키신다고요?" 백작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내 모든 명예와 이름을 걸고 그런 일은 없다. 안심해라. 로즈." 아버지의 단호한 말에 로즈니스는 조금 안심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미심쩍은 표정으로 보리스를 다시 쳐다보았다. 보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그 사람과 싸울 소년으로 저를 택하시려는 것인가요? 하지만 저는 백작 님의 아들이 아닌데 어떻게 그 소년과 싸울 자격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딸에게서 고개를 돌린 백작은 웃지도 않고 말했다.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지. 오래 전에 양자로 들여 다른 지방에서 키우던 아이를 이번에 데려왔다고 하면 되는 일이야. 그 외에도 수많은 방법이 있으나 모두 내가 신경 쓸 일이고 자네가 고민할 문제는 아니네. 다만 자네는 내 제안에 찬성 또는 반대를 표해 주기만 하면 되는 거지. 만일 나를 따라 준다면 나와 함께 아노마라드의 내 성으로 가서 내 아들과 마찬가지의 대접을 받으며 자내게 될 것이지만 검술 훈련만은 혹독할 걸세. 오랫동안 훈련을 받아 왔을 그 소년을 반드시 이겨야만 하니까 말이지. 기간이 그리 길지도 않아. 만일 성공하게 되면 나는 자네에게 큰 사례를 하고. 원한다면 다시 혼자 자유롭게 살 아갈 수 있도록 충분한 지원을 해주겠네." "만일 지게 된다면?" 백작은 무표정한 눈동자로 보리스를 내려다보더니 내뱉듯 말했다. "벌써 그런 것이 걱정되마?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은 아닌가 염려되는군. 걱정 말게. 실패한다고 해서 자네에게 벌주지는 않아. 다만 조용히 내 집에서 나가 주면 되는 것이지. 그러면 나는 로즈를 그 자에게 보내지 않기 위해서 좀더 부자연스러운 술책을 쓰지 않으면 안되게 되겠지. 나는 여러사람 앞에서 한 내기 약속을 지키는 차원에서 이 불미스러운 일을 마무리짓고 싶네." 보리스의 얼굴도 굳어졌다. 그도 이제 이 일이 단순히 어른으로부터 친절을 받고 보답하는 차원이 아 니라 대등한 입장에서 거래하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결코 예의로 인사하고 웃고 헤어 지는 아야기는 아닌 것이다. 다음으로 느껴진 것은 약간의 서글픔이었다. 로즈니스에게는 아버지가 있어서 그녀의 문제를 뭐든 해 결해 주려고 협상의 전면에 나서 있지만 자신은 혼자뿐이었다. 누구도 자신에게 조언해주지 않았고, 결 정을 대신해 줄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막대한 권력과 부를 지녔을 외국의 귀족 앞에서 자신은 돌아갈 집조차 없는 초라한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보리스는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그러나 왜 하필 저를 택하신 건가요? 저는 어제 우연하게 백작 님의 은혜를 입게 되었을 뿐, 저에 대 해 어떤 것도 모르시지 않습니까?" 백작은 약간 얼굴을 누그러뜨리고는 말했다. "진네만이라는 가문이 윗대부터 검으로 유명한 곳이라는 이야기도 들어 알고 있다. 자넨 아직 어려서 많은 교육은 받지 못했겠지만 틀림없이 어느 정도의 기초적인 재능이 있겠지. 그리고 자네가 가진 그 검, 그걸 보고서 처음 이 계획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야. 그만한 검을 지닌 집안이라면 분명 자 질 있는 자손을 가졌을 거라고 말이다." 보리스는 조금 냉랭하다 싶을 정도의 어조로 말했다. "전 제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 "그래? 그럼 시험해 보고, 아니라면 다시 내치면 그만이다. 내가 자네를 택한 것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는데, 바로 자네가 일종의 귀족- 물론 트라바체스에는 귀족이 없지만- 출신이면서 돌아갈 곳이 없 다는 사실이 그것이야. 평민 소년이라면 열 명도, 스무 명도 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자네 또래 이면서 어려서부터 귀족답게 교육받아 온 소년을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아, 아노마라드로 가면 자네는 내 양아들로서 행동해야 할 텐데 예법도 격식도 모르는 평민 소년에게 그런 것까지 가르칠 여유는 없네." 백작은 말을 끊었다가 강조하듯 다시 말했다. "또한 실수를 저질러 나나 로즈를 무안하게 만드는 일 따위도 없기를 바라고." 반쯤은 경고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백작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모두 다 한 셈이 되었 다. 보리스는 혼자서 생각에 잠겼다. 수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가운데는 토냐와 대장장이 부닌 씨에게 약속한 것에 대한 부담감도 분명히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미래에 대한 계획은커녕 당장 몸담을 곳조차 없는 처지였는데 이제는 갈림길에서 선 택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란 것이 이런 형편인데도 인간이 미래에 대해 뭔가를 짐작하여 준비하거나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것이 과연 가능 하기나 한 일일까? 아노마라드는 그의 관념에서 까마득히 멀리 있던 땅이었다. 지리적인 거리만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까 지 그의 삶에서 그랬다는 것이다. 또한 백작이 제안한 새로운 삶은 그야말로 도전과 시험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해낸다면 그만큼 큰 보답이 있을 테고, 실패한다면 스스로의 능력 없음을 탓할 밖에 도리가 없 을 것이다. 그에 비해 대장장이 조수로서의 삶은 더 이상의 격랑 따위와는 거리가 먼, 안정되고 조용한 삶을 그에 게 가져다 줄 거라고 생각되었다. 최근 얼마간 너무나 많은 원치 않는 일들을 겪었기에 오히러 그런 삶 이 주는 매력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끌렸다. 그런 곳에 조용히 숨어서 지내게 된다면 어떤 새로운 아 픔도 없겠지. 어떤 새로운 희생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겨우 열두 살이었다. 삶의 변화와 가능성을 모두 묻어버리기에는 아직 너무 어린 나이인 것이다. 보리스의 정신은 본래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나 막연한 동경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편이 었다. 그러므로 그런 모든 것보다도 그의 마음을 실질적으로 끈 사실은 바로 한 가지였다. 트라바체스를 떠난다는 것. 이 땅을 떠나, 한동안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는 것. "데러가...주십시오." 우선은 블라도 삼촌의 추격을 피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마음의 독립을 얻을 수 있을 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를 죽이고 형을 죽인 땅이었다. 그런 죽음이 온 대지 곳곳에 만연한 땅이었 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 땅을 등지고 싶었다. 아버지와 형의 죽음을 잊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조차도 그러한 지독한 운 명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자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분노였다. 왜 그렇게 밖에 살아갈 수 없는가에 대한 답답함과 억울함이었다. 결코 원치 않았는데 단지 이 땅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휘말려 잃은 것이 얼마인가. 얼굴을 알 수 없는 고모로부터, 자신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가장 사랑한 사람. 예프넨 진네만이 이르기까지. 나중에 이 결정을 잘 했다고, 결코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잘 결정해 주었다. 그만 돌아가 쉬고......" 백작은 말을 약간 끌더니 덧붙였다. "만일 원한다면 그 대장간에 가서 인사를 하고 와도 좋네." 보리스는 일어나 백작 부녀에게 깊숙이 절하고 밖으로 나갔다. 3. 아노마라드 야트막한 구릉이 소박한 굴곡을 가지고 끊임없이 이어지며 따라왔다. 지금 바라보고 있는 이 땅은 아 노마라드였다. 트라바체스가 자리한 조개 반도를 시계방향으로 꺾어 돌며 그 지역의 기후를 결정해버 리는 카투나 산맥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축복 받은 녹색 대지를 가로지르는 파노자레 산맥 아래 아름다 운 땅으로 들어온 것이다. 고봉준령보다는 샘과 고원을 많이 품고 있는 파노자레 산맥 아래에는 수많은 크고 작은 영지와 지방들 이 산채해 있었으며 그 모두가 남부의 화창한 기후의 은혜 아래 있는 곳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을 말하라면 대부분의 남부인들 모두 의견이 일치했다. 서쪽 끝자락을 타고 내리며 탁 트인 평원으로 이어지는 백포도주의 아라종, 그리고 동쪽의 비교적 가파른 능선을 싸고 돌며 곳곳으로 뻗어 나는 송로의 벨크루즈, 그 두 지방. 최고가 둘이라는 것은 항상 문제였다. 두 지방 사람들의 자부심은 몹시 대단해서 그들 앞에서 함부로 이 화제를 꺼냈다가는 본전도 건지지 못하는 경우가 흔했다. 그러나 평범한 방문객의 입장에서는 어느 쪽도 빠지지 않는 경치인 쪽이 오히려 즐거운 것이다. 그리 고 당사자들 역시 방문객들이 입을 딱 벌리며 연달아 감탄사를 내뱉을 때 가장 큰 자부심을 느낄 수 있 는 법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리스는 환영 받을만한 방문객으로서 아무래도 실격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서서히 마차 가 벨크루즈로 들어설 무렵부터 로즈니스는 보리스가 언제 감탄하는 얼굴이 되나 하고 줄곧 쳐다봤지만 거의 소득을 올리 수가 없었다. 소년의 무심한 눈동자는 연신 창 밖을 향해 있었지만 얼굴에는 어떤 놀 란 기색도, 입에서도 칭찬의 말 한 마디 나오지 않았다. "치잇." 재미없었다. 차라리 캐미아를 놀리는 편이 휠씬 나을 것처럼 생각됐다. 비록 잠깐이긴 하겠지만 아직껏 가져본 일 없었던 동생( 또는오빠)가 생기게 되는 것인데 도대체 재미있을 기미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얘, 나 좀 봐." 보리스는 고개도 움직이지 않은 채 시선만 로즈니스에게 돌렸다. 로즈니스는 어깨와 허리, 끝단에 분홍 빛 라인이 들어간 베이지색 드레스 차림으로 스무 살은 먹은 아가씨처럼 새침하게 앉아 있었는데 캐미 아만은 아가씨가 심심해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너 열두 살이랬지? 그런데 나도 열두 살이어서 말야, 그럼 우리 중에 누가 동생이 되는 거야?" 로즈니스는 이 문제가 재미있는 논쟁이 될 줄 알았다. 아마 저쪽에서도 오빠가 되겠다고 우길 테니까... 그러면 태어난 달을 따져보자고 하고. 그래도 안되면 내가 먼저 이 집에 있었지 않느냐고 우길 참이었 다. 만일 말도 안된다고 나오면? 그러면 넌 양자고 난 친딸이니까. 라고 주장하면 된다! 그러나 보리스는 로즈니스를 잠시 바라보다가 짧게 말했다. "좋을 대로 해. 누나 쪽이 좋으면 그렇게 부를게." "에에......" 로즈니스는 혼자 이것저것 짐작으로 계획을 세워서 그게 하나씩 맞아들어 가는 것을 몹시 좋아했다. 그런 것을 아는 주위 하인들이나 하녀들은 일부러 그녀가 원하는 답만 차례대로 해서 비위를 맞추곤 했 었다. 물론 로즈니스 자신은 그런 사실을 몰랐지만. 어쨌건 이렇게 허무한 결론은 그녀의 취향에 전혀 안 맞았다.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가 펴더니 저도 모 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네 생일은 언젠데? 난 4월 8일이야." "7월 12일" 이게 어찌된 일이지? 또다시 그녀가 미리 세워 놓은 계획은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캐미아는 로즈 니스의 얼굴을 슬쩍 건너다보고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그맣게 킥킥거렸다. 이건 벼로 내키는 진행이 아니잖아, 라는 것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던 탓이었다. 끄응, 하는 소리를 목에서 낸 로즈니스는 참지 못하고 목소리에 힘을 주며 다시 말했다. "어차피 생일 같은 건 별로 의미 없잖아? 우리가 진짜 남매도 아닌데. 중요한 건 우리가......" 그때 마차 밖으로 나타난 아름다운 아몬드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던 보리스가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그래 알았어. 그럼 오빠와 여동생으로 해 둬." 로즈니스의 얼굴빛이 갑자기 확 바뀌었다.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그순간 깨달았던 것이다. "그......" "푸후하하하하하......" 캐미아가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려 버렸다. 물론 그 다음에는 아가씨에게 수도 없이 다리를 꼬집혀 야 했지만. 여덟 명의 기사들과 함께 마차 밖으로 말을 타고 가고 있던 벨노어 백작이 안에서 나는 웃음소리를 듣 더니 비서에게 말했다. "아이들이 잘 어울리는 모양이군." "그런가 봅니다." "다행이로군." 그렇게 백작과 비서의 오해와 함께 마차는 달려 가을 물이 들기 시작한 나뭇잎들이 떠가는 시냇가를 따라가다가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를 건넜다. 벨노어 가문의 문장인 마르그리트꼿이 돌다리의 난간에 섬 세하게 새겨진 것이 내다보였다. 작지만 고풍스러운 돌다리였다. 부드러운 빛이 내려와 물결을 황금빛으로 적셨다. 푸르고 노란 잎새들이 뱅글뱅글 돌며 흘러가는 가운 데 햇살은 단단하고 매끈한 후박나무 잎새에도, 갸름하고 소복한 월계수 잎사귀에도 너울거리며 춤을 췄다. 창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것은 숲의 알싸한 냄새였다. 귓가에 뭔가가 속삭이고 있었다. 어서 와, 어서 이리로 와. 사철 금빛으로 반짝이는 땅. 벨크루즈의 향긋한 숲이 이곳이야. "먼저 알려가 도착을 알려라!" 비서 휴의 명령으로 두 병의 기사가 성을 향해 말을 달려갔다. 깃털구름이 하늘 머리에 길게 누워 마 차 행렬을 굽어보았다. 로즈니스를 태우기 위해 가져간 사두 마차가 하나였고, 두 마리씩의 말이 끄는 나머지 두 대에는 여자 한인들과 함께 트라바체스에서 사온 선물이 가득 실려 있었다. 마차가 마지막 모퉁이를 돌았다. 드디어 등나무 덩굴이 멋지게 감겨 올라간 벨크루즈의 명물 벨노어 성이 정면으로 보였다. 전체적으로 약간의 베이지빛을 띠는 벽에 둥글게 튀어나온 탑들의 지붕이 고풍스런 진갈색으로 마무리 된 벨노어 성은 비록 4층밖에 되지 않았지만1백 25개나 되는 방과 맨 위층까지 뚫인 세 군데의 대형홀, 2백여 마리의 말이 들어갈 수 있는 마구간 등이 딸려 있는 유래 없이 거대한 규모의 성이었다. 이만큼 의 규모의 성이었다. 이만큼의 규모와 시설을 가진 성은 수도 켈티카까지 가기 전에는 아노마라드 안에 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검은 황금이라고도 불리는 송로의 주산지 벨크루즈가 얼마나 대단한 부를 이룩하고 있는지 상징적으로 나타내어 주는 건물인 셈이었다. 기사가 가서 알렸기 때문인지 정문 앞에는 십여 명의 하인들이 나와 시립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이 성의 안주인이라고 여겨지는 여자가 하녀 둘을 거느리고 서 있었다. 백작이 말에 내리고 하인들이 다가와 마차의 문을 열었다. 로즈니스가 내려 어머니에게 달려가고 나서 뒤늦게 내린 보리스는 성의 위용을 채 느끼기도 전에 좁고 긴 드레스에 녹색 숄을 걸친 여인을 먼저 보 게 되었다. 그녀는 마침 남편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 아이가......?" 백작이 작은 목소리로 뭐라 대답하자 그녀는 보리스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건 순간적으로 상대를 당황하게 할 정도로 거리낌없는 시선이었다. 다행히 이 자리에서 인사를 하는 불편함은 겪지 않게 되었다. 백작부인은 아직까지도 드레스를 입은 채로 뛴다고 로즈니스를 약간 꾸짖었고 로즈니스도 어머니 앞에서는 응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성 안으로 들어갔다. 보리스는 처음부터 벨노어 백작부인이 대하기 힘든 사람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아이를 낳았을까 싶을 정도로 선병질적으로 마른 체구에다가, 꽤 미인이긴 했으나 유난히 미간이 좁아서 까다 로운 인상을 주는 여자였다. 잘 웃지도 않았고, 하녀들 역시 암암리에 그녀 앞에서 행동을 조심하는 것 이 느껴졌다. 이런 백작부인이 천방지축으로 쾌활한 로즈니스와 닮은 점이라면 오직 환한 레몬빛 머리 카락밖에 없었다. 하인에 의해 성 안의 어떤 방으로 안내된 보리스는 잠시 마음놓고 쉬기도 전에 다시 부름을 받았다. 이번에 간 곳은 커다랗고 화려한 응접실이었다. 백작과 백작부인, 그리고 로즈니스가 모두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외출복 차림인 것은 자신밖에 없었다. 어쩐지 약간의 위화감이 느껴져 마음이 불편했다. 하인이나 하녀는 한 명도 들어와 있지 않았다. 의자에 가서 앉긴 했으나 딱히 뭐라 말할 수 없는 어색 함이 감돌았다. 테이블에서는 쿠키와 차가 식고 있었다. 백작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미 전갈을 받기도 했었고, 대강의 이야기는 다 들었다. 여기 있는 동안은 내 집인 양 생각하고 편히 지내도록 해라." 그러나 말투에서는 전혀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형식적으로 하는 말은 아니었고. 다만 감정이 결여된 듯한 인상을 주었다. 로즈니스가 불편한 기색을 느낀 듯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전 오래 전부터 오빠를 갖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동생이 되기로 했어요." "그러니?" 딸에게 하는 대답에서도 아버지인 백작이 하듯 넘치는 애정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딸에게 애정이 없어 서라기보다는 예의를 보다 강조하는 어머니인 듯했다. 보리스는 문득 이 부인이 아주 대단한 집안 출신 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작이 입을 열었다. "이곳에 있는 동안은 나를 아버지, 그리고 여기 있는 이자보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너는 트라바체스 공화국 그반스크 지방의 몰락한 영주인 캄브 엘굴덴의 막내아들로서 다섯 살 때 내 양자가 되었지만, 지금까지는 재정적 지원만을 받으며 친아버지와 함께 자랐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셔서 얼굴 을 모른다. 그러나 올해 갑자기 아버지도 돌아가시는 바람에 이곳으로 옮겨와 살게 된 것이다." 마치 소설처럼 술술 쓰여지는 자신의 과거에 귀를 기울이는 기분은 참으로 이상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쩐지 자신의 진짜 과거와 조금씩 일치하는 부분도 있었다. 백작은 이어서 말했다. "이 성의 사람들 가운데 네가 이곳에 오게 된 사연을 조금이라고 아는 사람은 d제부터 내가 거명하는 인물들뿐이다. 내 비서인 휴, 너를 간호했던 하녀 윌라. 로즈니스의 하녀인 캐미아. 그리고 트라바체스까 지 갔던 기사들 가운데 너를 구할 /때 옆에 있었던 게리보, 델레메르, 그로미어스. 그러나 이들도 네가 어떤 목적으로 언제까지 있게 되는지는 모른다. 그걸 아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부부와 잠시 네 동생이 될 로즈니스뿐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말한 과거에 맞춰 말하도록 해 라." 로즈니스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정말로 비밀이 지켜질수 있을까 의아해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사실 철저한 비밀이 지켜지기에는 상황에 대해 어렴풋한 단서라도 일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보리 스도 백작의 말이 단지 외부에 소문이 나지 않도록 주의하기 위한 것이라고 짐작했다. "내가 지금 말한 것을 다 기억할 수 있겠느냐?" 보리스는 낮게 대답했다. "예." 백작부인이 입을 열었다. "아이가 잊어버릴 지도 모르니까 정확히 써서 넘겨주도록 해요." "안 그래도 그럼 참이오. 휴가 이미 준비해 두었을 거요." "잘 됐네요." 아무도 차를 마시거나 과자를 손을 대는 사람은 없었다. 너무 당연한 일이고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지 만 보리스는 저들 가족으로부터 소외된 존재인 자신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한 가지 선택을 한 이상 끝까지 제대로 해내겠다는 결심은 이미 서 있었다. "그럼 당신은 보리스의 방을 준비해 주도록 하시오. 로즈의 방과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아, 그 방이 좋겠군. 문샤인 탑 2층의 그 방." 백작부인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말했다. "알겠어요. 당신의 말대로 하죠." 로즈니스조차도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보리스는 문샤인 탑 2층의 방이 뭐 어떤 곳인지 알지도 못했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백작이 다시 보리스를 보며 말했다. "나는 며칠 안으로 네게 검술을 가르칠 스승을 구하마. 그 전까지는 여독도 풀 겸, 푹 쉬도록 해라. 오 늘 하룻밤 자고 내일은 로즈가 오빠에게 성을 구경시켜 주는 것이 좋겠구나. 성이 매우 넓어서 자칫하 면 길 잃어버리기 쉽단다." 마지막 말투는 문득 딸에게 하듯 자상함을 띠어서 보리스는 오히려 흠칫했다. 사실 보리스는 친아버지 로부터도 자상한 말 같은 것은 들어본 일이 없었다. 비록 백작이 무심코 말한 것이라 해도 보리스는 갑 자기 가슴이 한 번 크게 뛰는 것을 느끼고 스스로도 놀랐다. 로즈니스가 문득 말했다. "아빠... 아버지, 오빠에게도 시종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어머니가 곁에 있어서 말을 조심한 것이 분명했다. 보리스가 앞에 서 있어서인지 백작부인은 딱히 뭐 라 말하지는 않았다.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우리 로즈가 벌써부터 오빠를 챙기는구나. 벌써 생각하고 있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내일 오전은 하 인들을 모아 놓고 보리스를 소개할 생각이니 그 자리에서 오빠를 시중들 하인을 하나 뽑도록 하자." 이야기를 끝났다. 백작부인이 종을 울리자 문이 열리고. 대기하고 있었던 듯 하녀가 들어와 아무도 마 시지 않은 차 테이블을 정리했다. 보리스는 새 부모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나서 하인을 따라 방으로 돌아왔다. 그들과 헤어지는 순간 갑자기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방에서는 이날 하루동안만 지내고 내일이 면 새 방으로 옮겨가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조차도 진네만 저택에서 자신이 쓰던 방보다 오히려 나았다. 방은 언제라도 손님이 오면 내줄 수 있도록 항상 정리되는 모양이었다. 침대에는 새하얀 시트와 홑이 불, 겨울용 담비털 이불이 깔려 있었고 레이스 커버가 깔린 매끈하고 작은 탁자는 테두리에 세심하게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심지어 의자 커버조차 정교한 프티푸앵자수로 장식되어 있었다. 금색 실과 흰 실 로 수놓은 하얀 마르그리트 꽃 세 송이였다. 장롱을 열어 보니 잠옷 한 벌과 실내에서 입게 될 법한 새 옷 한 벌만 달랑 들어 있었다. 후자는 아마 도 내일 입게 될 옷인 모양이었다. 지금 옷은 외출복이라 불편했는데 마땅히 갈아입을 옷이 없었다. 어 차피 저녁 식사도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 보리스는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침대에 앉았다가 뭔 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참지 못하고 일어서서 방을 몇 바퀴 돌았다. 그제야 덧창으로 닫힌 창문이 눈에 띄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창의 존재가 말할 수 없이 반갑 게 느껴졌다. 창의 고리를 풀고 안쪽으로 활짝 열어제쳤다. 산뜻한 바람이 불어 들어오면서 그제야 이방 안에 약간 오래된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 다. 의자를 끌어다 앉은 보리스는 창 밖을 멍하니 내다보았다. 자신이 마차를 타고 오던 굽어진 길과 그 주위에 우거진 각종 나무들의 작은 숲, 그리고 먼 데서 반짝 거리는 시냇물까지 한눈에 다 보였다. 성 근처의 정원은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그 너머는 이슬을 품은 영롱한 숲이었다. 방금 지나온 곳인데도 그곳에 다시 가고 싶다고 생각되었다.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게 되면 꼭 가서 천천히 산책해 보고 싶었다. 그곳에도 형과 뒹굴던 언덕과 같은 곳이 있을까. "......" 그럴 리 없었다. 트라바체스의 자연은 이곳보다 거칠었고, 손질되지 않은 웃자란 풀들의 초원이었다. 여기엔 그런 곳은 없었다. 휠씬 다정다감하고 매력적인 자연만이 곳곳에 들어차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쩐지 그와는 거리가 먼 것, 이방인이 느낄법한 낯설음만을 품고 있을 따름이었다. 예쁘긴 하지만 결국 그와는 관계없는 소녀, 로즈니스와 마찬가지로. 좀더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자 좌우로 웅장하게 뻗은 성벽의 위용이 눈에 들어왔다. 2층이었지만 아래 로 내려다보이는 바닥도 몹시 까마득했다. 저 먼 곳에서 바라보았을 때 느낀 것과는 완연히 다른 견고 함, 그리고 거대함의 장소였다. 그는 밖에서 이 성을 바라보고, 그리고 그가 있는 창문이 보일 것을 상상해 보았다. 그것은 지독히 작 아서 결코 눈에 띄지 않을 것처럼 생각되었다. 존재 자체가 불필요한 작은 점처럼, 그렇게 너무나도 작 은 일부분으로 묻혀 있겠지. 벨노어 성의 느낌은 그가 이곳에서 겪게 될 생활에 대한 인상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는 너무 작았고, 그가 헤아릴 수 없는 현실은 너무도 컸다. 이렇듯 단단하고 위압적인 곳에 파묻혀 살아가는 동안, 한껏 참았던 숨을 조그맣게 내쉴 작은 창을 발 견할 수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이곳은 이방의 땅이다. 다음날 아침, 그는 백작이 불러 하인들을 만나러 가게 되기 전에 로즈니스의 방문을 먼저 받았다. 그녀 는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뺨이 발그레해져서 들떠 있었다. "아침 맛있게 먹었어, 오빠?" 식사는 하녀가 방으로 가지고 왔었다. 로즈니스는 처음으로 하는 '오빠'라는 말이 약간 어색한지 쑥스 럽게 씩 웃었다. 어쩐지 겨우 대답할 수 있었다. "......그래." "아빠가 나하고 성 구경하라고 하셨지? 가자! 오빠가 있게 될 방부터 보여줄게. 다른 데로 보여줄 것이 아주 아주 많아! 아마 깜짝 놀랄걸?" 물론 르즈니스가 이렇게 친절하게만 말할 리 없었다. 그녀는 턱을 쳐들며 한 마디 덧붙였는데 그 모습 도 나름대로 귀엽게 보였다. "한눈팔지 않고 내 뒤만 따라오면 길을 잃지 않을 거야." 그들은 높직한 천장에 꽃봉오리처럼 생긴 대형 램프들이 달린 복도를 가로질러 갔다. 아침 햇빛이 복 도에 줄지어 난 창으로 구석구석 새어들었다. 복도의 창은 그가 잤던 방처럼 나무 덧문이 달린 것이 아 니라 보기만 해도 황홀한 진짜 유리로 만들어져 있었다. 또한 세로로 길고 높직했다. 두 소년 소녀가 가 뿐한 걸음걸이로 지나가는 융단 깔린 바닥에는 창틀의 그림자가 빛으로 된 그물처럼 너울졌다. 위에서 볼 때 정사각형을 이루는 벨노어 성의 네 귀퉁이에는 둥그스름하게 외부로 튀어나온 곳이 있어 서 이것을 탑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성 안에서는 복도로 곧장 이어져 있었으므로 탑이라기보다는 성의 일부분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 문샤인 탑은 남쪽 방향에 있는 귀퉁이였다. 로즈니스는 이날 캐미아도 데리고 오지 않았다. 앞으로 달려가 손수 높다란 두짝 문을 열어제치자 전 날 보았던 응접실에 비해서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잘 꾸며진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단지 크기만이 절반 정도로 작을 뿐이었다. 사방의 벽은 땅콩버터 빛깔이었다. 곳곳에 여자들의 드레스에 달린 프릴처럼 굴곡진 무늬들이 만들어 져 있었는데 어디나 금줄로 된 라인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천장에는 수십 개의 크리스털 장식이 달 린 샹들리에가 깨끗이 닦아져 있었고 차 테이블과 서랍장, 편지를 쓰는 책상, 아름다운 의자들, 여러 권 의 책이 꽂힌 책꽂이 등등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바닥에는 흰빛과 자줏빛의 백합꽃이 패턴 형태로 둥 글게 배열된 고급 융단이 깔려 있어서 발 딛는 곳마다 푹신푹신했다. 지금까지 벨크루즈의 자연이나 벨노어 성의 아름다움에 대해 별로 감탄한 기색을 보이지 않던 보리스 도 자신이 이 방에서 실제로 지내게 될 거라는 사실 때문인지 마음이 좀 움직인 것 같았다. 그는 직접 걸어가 주위를 둘러보았고. 그리고 거실 가운데 선 채로 로즈니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그때까지 보리스의 기색을 살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뭔가 눈치챈 듯 쌕 웃어 보였다. 그때 느지막이 아야기를 듣고 온 캐미아가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와 로즈니스 앞에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 용서해 주세요. 제가 이렇게 정신이 없어서......" 키조차 비슷한 동갑내기 소녀들 사이에 성립되어 있는 확고한 주종관계는 보리스의 눈에 그리 달가운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끼여들 입장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행히 오늘 로즈니스는 기분이 좋았다. :됐어. 난 오빠하고 다닐 테니까 뒤에서 좀 떨어져서 따라와." 이윽고 그들은 거실 안쪽에 있던 두 개의 문 가운데 하나를 열었다. 짐작했다시피 그것은 침실이었다. 장식이나 가구의 훌륭함은 전날 잤던 방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로즈니스는 자신이 앞장서서 다가가 장 롱 문을 열더니 그 안에 가득히 들어 있는 고급 옷들을 보았다. 비록 순수한 마음에서는 아니라 해도 로즈니스는 자금 보리스에게 이것저것 베푸는 기분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하인이 생기면 이런 옷들을 언제 입어야 되는지 다 가르쳐 줄 거야." 보리스는 그녀처럼 옷에 대한 관심이 강하지 않았으므로 단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침실의 크기 는 거실보다는 작았지만 역시 꽤 컸다. 침대만을 놓는다면 다섯 개도 나란히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로즈니스는 드레스 입은 아가씨 답지 않게 발끝을 까딱거리면서 말했다. "이 방이 우리 성에서 부모님이 쓰시는 방을 제외하면 제일 좋은 방이야. 사실 나, 본래 이 방이 갖고 싶었는데 아빠가 나한테는 너무 크다고 그러셨어. 내가 열 다섯 살이 되면 준다고 하셨거든? 그때쯤엔 오빠가 없을 테니까 분명히 나한테 주실 거야. 그러니까 그동안 방 깨끗이 써?" 로즈니스는 그새 오빠라는 말이 입에 붙은 듯 연달아 쉽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의 내용은 참 묘 했다. 이렇듯 친근하게 말하고 있는데도 곧 떠날 것을 쉽게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열두 살 어린 소녀인 데도 그런 것이 그렇게 간단히 받아들여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은 좋은 남매, 하지만 내년이 되면 남남. 방을 다 구경하고 나서 아직 서로가 낮선 의남매는 다리가 아플 정도로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로즈니 스는 구경시켜 주는 방식에 기준이 없어서 전망 좋은 창을 소개했다가 손님방을 하나씩 열어 보여주기 도 하고 심지어는 거대한 부엌에까지 데려갔다. 조리를 하는 하녀들은 완곡하게 말해서 두 사람을 밖으 로 쫓아냈다. 식당은 감탄할 만했다. 대략 서른 명이 함께 앉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긴 테이블이 세 개나 있었고 가운데에는 휠씬 잘 꾸며진 둥근 테이블이 있었다. 그러나 평소에는 쓰지 않은 모양이었다. 로즈니스와 백작 부처는 좀더 작고 아늑한 식당에서 식사한다고 했다. "이제 다 구경한 건가?" 로즈니스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캐미아가 다가와서 말했다. "서재 구경을 안 하셨어요. 지금쯤 주인님께서는 비워 두셨던 영지를 돌아보러 가섰을 테니까 가 봐도 괜찮지 않을까요?" 로즈니스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손뼉을 쳤다. "정말 그렇겠네! 서재로 가자, 오빠 음. 서재는 책이 무지무지 많은 곳이야." 보리스도 서재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문득 아버지가 살아 생전에 서재에 앉아 계시던 모습이 떠 올라왔다. 고향의 저택에서도 서재는 아버지가 안에 계신 한 쉽게 들어갈 수는 없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집사 튤크를 불러 자신으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지시를 하곤 하셨다...... 의아한 일이었다. 보리스는 그렇게도 엄하고 차갑기만 했던 아버지가 그립게 느껴지는 자신이 이상하 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것은 형에 대한 향수와는 달랐다. 아버지의 존재는 자신의 옛 삶 자체, 생활의 느낌을 직접적으로 상징하고 있었다. 서재는 3층에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 가득히 펼쳐진 책의 바다를 감상하기도 전에 뜻 밖의 사건이 터졌다. 갑자기 로즈니스가 화난 걸음걸이로 한쪽 책꽂이 앞으로 다가가더니 손가락을 쳐 들며 언성을 높였다. "란지에! 너 또 아버지 책 멋대로 읽은 거야?" 한 소년이 거기에 서 있었다. 옷차림으로 보아 피고용인임이 분명한 그는 손에 두꺼운 책 한 권을 펼 쳐 들고 있었다. 나이는 역시 그들과 또래인 듯. 연한 하늘빛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이마는 단단하고 곧아서 고집, 또는 그 이상의 어떤 이상에 대한 집착을 나타내는 듯 보였다. 지금까지 아노마라드에서 보았던 어떤 것과도 닮지 않았다. 그의 존재는 이 따사롭고 아름다운 고장에서 실로 이질적인 외국의 것처럼 보였다. 서늘하고, 맑았다. 그러나 그런 것을 떠나 어디에 데려다 놓아도 눈을 뛸 정도로 수려한 외모의 소년이었다. 그는 화를 내는 로즈니스 앞에서 당황하지도 않은 채 단지 책을 접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슬쩍 어깨 너머로 낯선 소년인 보리스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눈동자에 이르렀을 때, 보리스는 약간 놀라며 그것을 자세히 보았다. 햇빛을 받아 색깔이 다르 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분명 선명한 진홍빛이었다. 그런 빛깔의 눈동자가 있을 수 있다는 사 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루비가 아로새겨진 듯한 그 눈빛은 생각보다 몹시 아름다웠다. "아버지 사재에 몰래 숨어 들어와서 책을 훔쳐보다니!" 로즈니스는 란지에라는 소년이 책을 다시 꽂기 전에 재빨리 빼앗더니 힘껏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캐미아가 깜짝 놀라 얼른 떨어진 책을 주웠다. 책 커버 한쪽이 이지러진 듯 보이자 안절부절못하며 손 으로 만져 바르게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책을 던진 당사자인 로즈니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태도로 손가락을 들어 란지에의 이마를 쿡쿡 찔렸다. "네 분수를 좀 알아!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내쫓게 할까보다!" 보리스는 하인에 불과하지만 고상한 자태를 가진 이 소년이 뭐라고 대꾸할 까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 의 대답은 보리스의 기대와 어긋났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잘못했어요." 뭔가 그 외의 대답을 기대한다는 것은 사실 무리가 아닌가? 그러나 말투는 완전히 굽혀 고분고분한 것 과는 좀 달랐다. 로즈니스도 오랫동안 아가씨로 떠받들어지며 살아온 만큼 그런 것에 대한 눈치는 빨랐 다. 여전히 불만스런 눈치로 한 발짝 물러서더니 보리스를 힐끗 보며 쏘아붙었다. "오늘은 오빠가 옆에 있어서 참는 거야. 다음에 한 번만 더 이런 짓하다가 걸리면 그대로 아버지한테 일러버릴 테다!" 오빠라는 단어는 분명 그에게는 낯선 것이었을 텐데도 란지에는 궁금한 기색을 보이지 않은 채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보리스의 곁을 지나 밖으로 나갔다. 캐미아가 얼른 달려오더니 책을 책꽂이에 꽃았다. 그제야 로즈니스도 책이 상하지는 않았나 살펴보는 기색이었다. "뭐, 괜찮겠지. 저 정도는" 나름대로 하인들을 다루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로즈니스였다. 그런데 작년 초에 아버지는 켈티카에 갔다가 데려운 시종 소년만은 간단하게 되지 않았다. 겉으로는 소리 지르면 고개 숙이고 무리한 일을 시켜도 고분고분한 듯 보이지만, 속내로는 자기 따위 조그마한 아가씨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가 점점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지금 신분이며 처 지가 어쩔 수 없는 만큼 원하는 대로 굽혀주겠지만 내 마음만큼은 네가 어쩌겠느냐, 라는 그 눈빛이 불 쾌했다. 다른 하인이나 하녀들처럼 주인이 오늘 짜증을 내지는 않는지, 화가 나는 일은 없었는지( 그 이유는 무 엇이었든 간에_ 조심조심 눈치를 살피다가 어떻게든 기분 좋게 만들어 드려서 운 좋으면 칭찬이나 보답 을 받게 되고. 아니라 해도 어쩔 수 없는 관계, 주인이 이기고 싶어하면 져 주고, 잘난 체 하고 싶어하 면 멍청한 체 해 주는 그런 것이 로즈니스가 원하는 하인의 이상이었다. 비록 란지에와 자신이 한 또래 지만 나는 주인 아가씨고 너는 하인인데 그런 식으로 수평 관계를 유지하려 하는 것은 단지 가증스러운 시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만 란지에에게는 유일한 약점이 있었다. 바로 여동생이었다. 4. 란즈미, 10세, 자페아. "구경 다했지? 그만 가자." 들떴던 기분이 갑작스레 식어버린 로즈니스는 서재를 구경시키는 것 따위에는 이제 관심이 없어진 듯 쌀쌀맞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 보리스는 본래 책에 큰 관심을 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다만 나가기 전에 다시 한 번 둘러본 빽빽한 책 꽂이 앞은 백작과 같이 필요한 지식만을 얻어 가는 사람보다는 몰래 숨어 한 권 한 권 읽어나가는 란지 에 같은 소년이 좀더 어울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문득 떠올랐다. "너희들이 지금 보고 있는 이 사람들은 내가 7년 전에 양자로 들인 보리스 벨노어다. 이제부터 성에서 함께 지내게 될 테니 로즈니스와 마찬가지로 정성을 다해 모셔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백작의 말에 대표로 대답한 것은 늙은 집사인 말투였다. 보리스는 이 노인이 본래 트라바체스 출신이 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벌써부터 크게 경계하고 있었지만 상대방 쪽에서는 그리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 었다. 성 안에서 두 번째로 큰 홀에 모인 성의 피고용인들은 백작의 말을 들으며 다들 백작 곁에 나란히 선 보리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백작은 보리스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정말로 아버지와 아 들인 양 매우 친근해 보였다. 아내와 딸의 황산 머리빛깔과는 달리 검은 머리를 갖고 있던 백작이었기에 곁에 선 보리스의 어두운 청동빛 머리는 더더욱 두 사람이 비슷하게 보이게 했다. 하인들 가운데 몇몇은 양아들이 아니라 어딘가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를 데려온 것은 아닐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기까지 했다. 보리스는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이만한 일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제 부터 어떤 외줄타기가 시작될지도 모르는데 이런 정도에 기가 죽어서는 안 되었다. 무감정하게, 대담하 게, 그리고 신중하게. "자. 이 가운데 네가 마음에 드는 시종을 골라 보아라. 아니면 네가 원하는 것을 말하면 내가 적당한 사람을 골라주마." 보리스는 나이 많은 하인과 함께 다니며 행동을 조심하게 되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언제 어떤 실수 를 할지 모른다면 비슷한 또래일수록 슬쩍 넘어가기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와 같은 나이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확한 발음으로 그렇게 말하는 보리스의 눈동자는 맨 끝줄 즈음에 서 있는 란지에에게 향해져 있었 다. 실은 꼭 그가 아니라도 상관없을 것이다. 오히려 너무 영리한 시종보다는 조금 멍청해서 속여넘기기 좋은 편이 나을 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보리스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자꾸만 궁금했다. 호감과는 약간 달랐고. 오히려 호기심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과 완연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 다른 것이 오히려 마음을 끌었다. 백작은 약간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가 곧 마음을 고쳐먹은 듯 말했다. "저 맨 끝에 선 아이는 란지에 로젠크란츠다. 그 애를 네 시종으로 삼고 싶으냐?" 조금 망설이다가 결국 대답이 나왔다. "예." 결정이 나는 순간까지도 란지에는 보리스의 얼굴을 관심있게 쳐다보지 않았다. 백작이 손짓하자 그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말했다. "란지에 로젠크란츠입니다. 도련님."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 보리스는 문득 로즈니스가 그를 어떻게 느끼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순간 느꼈던 것이다. 상대방에게 굴복하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가벼운 존중조차도 내주지 않은 감춰진 어감을. "보리스 도련님이다. 정성을 다해 모시거라. 이제부터 보리스의 시중이 네 일차적인 임무가 될 것이다. 그동안 맡고 있던 일들은 이제 그만두어도 좋다." "예. 주인님." 백작에게 말하는 목소리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백작은 어른이었기 때문에 어린 소년의 사소한 감정 상태에는 그리 유념하지 않은 것 같았다. 백작의 명령으로 모였던 하인들이 흩어졌다. 백작은 집사인 말쿠와 할 이야기가 있는 듯 둘에게 그만 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둘은 나란히 걸어서 복도로 나왔다. 란지에가 입을 열었다. "도련님의 방으로 가시지요. 성에서 편히 지내시기 위해 아셔야 할 것들을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한결 차갑게까지 들리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보리스는 단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탁, 탁, 탁. 탁. 결코 친구가 아닌 그들의 방으로 걸어가는 도중 우연하게 발소리가 맞춰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란지에 쪽에서 의식적으로 걸음을 조정했다. 보리스는 무엇인가를 느끼고 이번에는 천천히 그의 걸 음에 맞쳤다. 다시 발소리가 똑같아지자 란지에의 걸음은 더 느려졌다. 그런 일은 조금 더 지속된 후 보리스가 불쑥 말했다. "불편하다면 내가 먼저 가 있지." 대답도 듣지 않고 보리스는 걸음을 빨리 해서 앞질러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돌아서서 란지에 가 따라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문을 닫고. 화려한 거실의 중앙까지 온 그는 보리스를 똑바로 보면 서 말했다. "먼저 앉으시지요." 둘은 마주 앉아 잠시 말이 없었다. 한참만에 보리스가 말했다. "목이 마른데." 란지에가 일어섰다. 그리고 한쪽의 차 테이블에 놓여 있는 은주전자에서 물 한 잔을 따라 쟁반에 받쳐 들고 왔다. 보리스의 앞에 물이 찰랑거리는 크리스털 잔이 놓여졌다. "드시지요." 그건 어쩌면 장난감 극장에서 하는 인형놀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당연한 말을 또박또박 되풀이해 말 하면서 자신의 배역을 망치지는 않겠다는, 최소한의 성의와 같은 것. 보리스는 잔을 들어 물을 마셨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겠다던 이야기를 해 줘." "먼저 주인님 가족의 생활에 대해서 말씀드리지요." 보리스는 란지에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차분한 말소리가 이어졌다. "주인 어른께서는 열흘에 한 번 정도 영지를 시찰하시고 두 달에 한번 꼴로 타지 여행을 떠나십니다. 목적지는 켈티카 행이 가장 많고 나머지는 대부분 송로 거래가 이루어지는 외지의 영지들입니다. 여행 은 짧으면 닷새 정도에서 길어질 때는 한달 이상 걸릴 때도 있습니다. 성에 계실 때는 오전 중에 주로 서재에 계시고 오후에는 마님과 담소를 나누시거나 로즈니스 아가씨와 산책을 하거나 하며 지내십니다. 사냥을 좋아하셔서 기사 분들을 이끌고 근처의 산으로 떠나실 때로 있는데 며칠씩 돌아오지 않으시는 일도 있습니다. 주인님은 주위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분이시지만 일단 경우에 어긋나는 일은 또한 쉽게 용서하지 않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외운 대사를 기계적으로 나열하듯 하는 목소리였다. 보리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말하기를 기다렸다. "주인 마님은 바깥출입이 거의 없으신 분입니다. 거의 항상 성 안의 살롱에서 자수를 놓으시거나 햇빛 을 쬐며 편지를 쓰시거나 합니다. 아침에는 몹시 일찍 일어나시고 주무실 때로 일찍 주무십니다. 마님은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작은 잘못에도 크게 마음을 상하실 수 있는 분이니 그 분의 심기를 잘 살펴 헤어 려 드리십시오." 보리스는 란지에가 완곡하게 돌려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도 백작부인은 몹시 하인들에게 까다로운 마님임에 틀림없다는 것 같았다. 그것은 잠시 자식 노릇을 해야 하는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이 리라. "로즈니스 아가씨는......" 란지에는 말꼬리를 살짝 끌다가 멈췄다. 아침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보리스는 그가 무슨 말을 할 지 궁금해졌다. "이미 어떤 분인지 충분히 아시겠지요." 란지에라는 소년은 곤란한 상황을 빠져가는 데 재수가 있었다. 그러고도 그는 계속해서 이어 말했다. 성 안에서 주로 가게 될 방이나 홀들의 용도에 대해서, 이 방 안 의 여러 가지 물품들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하인들의 성품에 관해서. 영지의 구성에 관해서. 특별 한 행사들에 관해서. "......다음 달에 마님의 생신이 돌아오면 수도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많은 손님들이 오십니다. 대부분은 마님의 친정 집안인 크레산느후작 가문의 친지들과 그 가문을 섬기는 집안의 부인들이십니다. 이틀 정 도 걸리는 파티가 열리고 밤에는 무도회가 벌어집니다. 도련님께서는 춤을 잘 추십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보리스는 대답을 망설였다. 트라바체스에는 귀족이 있지도 않았고. 영주를 비롯한 지 배 가문들도 서로 경계하고 파멸시키기에 급급한지라 우의를 다지기 위한 여흥 모임은 그다지 발달하지 못한 곳이었다. 더구나 진네만 가문에는 오래 전부터 안주인이 없었다. 보리스가 그런 것을 배울 기회가 있었을 리 없었다. 그러나 무작정 모른다고 말하는 것도 불안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가 망설이는 동안 란지에가 먼저 말했다. "익숙하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원하신다면 제가 가르쳐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더더욱 뜻밖의 말에 보리스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몰랐다. 그러나 란지에는 별 감정 없는 얼굴 로 다시 말을 시작했다. 몇 가지 더 언급한 뒤 란지에의 이야기는 곧 끝났다. 그러고 나자 두 소년은 더 이상 말이 없게 되었다. 보리스는 뭔가 말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 실수라도 자신의 정체를 암 시하게 될까봐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문득, 상대방의 이야기를 물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쓰쳤다. "넌 내가 오기 전엔 지금까지 이 성에서 어떤 일을 했니?" "백작 님을 가까이에서 시중드는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여긴 언제 왔지?" "작년 초입니다. 1년 반 정도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켈티카에서 살았습니다." 조금 이상한 말인 것 같았다. 보리스는 당연히 켈티카에 가본 일은 없지만 그곳이 엄청나게 멀다는 것 만은 알고 있었다. 아노마라드의 수도이지만 북쪽에 상당히 치운친 도시였다. 그곳에서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가 뭐란 말인가? 문득 가난한 집안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런 곳에서는 아이들을 부자들의 하인으로 팔기도 한다고 했 던가. "부모님은 살아 계셔?" 란지에에게는 보리스의 질문을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주인이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리스는 그 순간 란지에의 얼굴을 보며 이런 질몬을 다른 사람이 했더라면 결코 답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에 가 까운 직감이 들었다. "잘 모릅니다. 적어도 저와 헤어질 때는 살아 계셨으나 지금은 어떻게 되셨는지 알 수 없지요." 보리스는 이 이야기를 더 진행시키는 것이 란지에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멈추지 않고 물었다. "그럼... 지금은 혼자 뿐인 거군?" 란지에의 눈동자는 분명 따뜻한 진홍빛인데 지금은 너무도 차갑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한 톤 낮아 진 목소리로 답했다. "여동생이 있습니다. 주인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이 성 안에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더 끄는 것은 심한 감정적 대립을 초래할 것 같아 보리스는 질문을 중단했다. 이미 점심 시 간이었다. 나흘이 흘렀다. 보리스도 점차 성 안의 생활을 배워나가고 있었다. 작정을 하고 배우려 한 탓인지 진전도 몹시 빨랐다. 벌써 성 안의 웬만한 곳에서는 길을 잃지 않을 정 도가 되었고 하인들을 대하는 것도 자연스러워졌다. 로즈니스와는 그럭저럭 잘 지냈다. 시시각각으로 기분이 변하고 기본적으로 거만해서 그렇지 본성이 그리 나쁜 것은 아니어서 적당한 선만 유지하면 얼굴 붉힐 일은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일단 보리스는 로즈니스의 비위를 건드려 봤자 시끄러운 일만 만들게 된다는 것을 일찌감치 터득했다. 또한 로즈니스 도 보리스가 이 성에 와있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하녀들이 뜻밖이라고 쑥 덕거릴 정도로 보리스를 살갑게 대해 주었다. 주로 방에 박혀 있다는 백작부인과는 그다지 마주칠 일이 없어서 그나마 안심이었다. 남는 시간에는 거실에 꽂힌 책을 이것저것 꺼내보며 지냈다. 사실 책은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약속한 임무에 대한 책임감 탓인지 빨리 검을 연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백작이 아직 적당 한 선생을 물색하지 못한 터라 교육은 미루어지고 있었다. 윈터러는 여전히 검은 천에 싸여진 채로 침대 밑에 보관되고 있었다. 그는 전날 밤에 그것을 단 한 번 꺼내보았다. 자신에게는 아직도 무거운 검이었다. 그런 그것을 능숙하게 휘두르던 형의 모습이 희미하게 떠올라왔 다. 여러 가지 의미로. 그것은 아득히 멀리 있는 영상처럼 여겨졌다. 그는 검을 도로 넣고 다시는 꺼내 보지 않았다. "보리스 도련님." 점심을 먹고 여전히 재미없는 책을 하나 펼져 보고 있는데 란지에가 다가와 그를 불렀다. "허락하신다면. 잠시 여동생에게 갔다가 오겠습니다." 보리스는 본래 시종이 항상 곁에 있어야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청이 오늘 처음인 것도 아니었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갑자기 그 편이 좀더 흥미롭게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도 같이 갔으면 좋겠는데." 란지에의 얼굴에 감정이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은 재미있었다. 그는 이번에 오래 망설였다. 그의 얼굴 은 마치 숨겨 놓은 보물을 구경시켜 달라고 부탁 받는 사람의 그것과 비슷했다. 역시, 거절할 수 있다면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겐 그런 힘이 없었다. 보리스가 그런 일을 할 사 람이 아니긴 했지만 백작이나 백작부인에게 거절하더라는 이야기를 해버리기라도 하면 어떤 결과가 올 지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판단을 끝내고도 그는 좀더 망설였다. 그리고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여동생이 있다는 방을 향해 나란히 걸어가는 도중 란지에가 갑자기 말했다. "도련님, 당신은 신사이십니까?" "뭐?"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란지에는 곧 이어 스스로 답해버렸다. "그렇다고 믿겠습니다." 방은 아담했고.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크기는 보리스가 쓰는 침실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한쪽에 침대. 자그마한 장롱. 탁자와 의자 두 개가 그 안에 있는 가구의 전부였다. 그중 한 개의 의자를 창가에 끌어다 놓고 돌아앉아 있는 소녀가 눈에 띄었다. 오빠와는 전혀 다른 황금빛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찬란했다. 그러나 길게 자라지 못한 채 귓가에서 싹둑 잘려 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잘려나가 나풀거리는 머리카락은 가슴 아픈 느낌이었다. 사람이 들어오는 기척에도 불고하고 소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란즈미." 오빠의 목소리에 드디어 반응이 왔다. 소녀의 왜소한 어깨가 약간 움찔거리더니 힘겹게 몸을 돌려졌다. 란지에가 가까이 다가가더니 소녀의 자그마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보리스는 소녀의 얼굴을 보고 약간 충격을 받았다. 그 오빠의 여동생이니 만큼 짐작은 했었다. 좁고 갸 름하며 창백한 얼굴, 덜 자란 흰 튤립의 봉오리처럼 연약하고 고운 미소를 가진 소녀였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흡사 영혼이 없는 밀랍인형처럼. 그린 듯 섬세한 눈썹이며 눈동자, 빰도 입술은 어떤 소리나 장면 앞에 서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눈동자에는 정확한 초점이 없었다. 오빠를 보고도 그것은 마찬가지였 다. "도련님. 그쪽의 의자에 앉으십시오." 보리스는 뭔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아버린 기분으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가 있는 곳과 남매가 있는 곳 사이에는 세 걸음 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란지에는 바닥에 무릎을 반쯤 꿇고 앉아서 누이동생 의 손을 감싸쥔 채 또박또박 느리게 말을 걸었다.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 누구라 해도 쉬이 침범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광경이었다. 바로 가까이 있는 데도 손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있는 것 같았다. 란지에는 천천히 누이의 손을 쓰다듬으며 날씨에 대한 이야기, 성에서 일어난 이야기, 오늘은 무엇을 먹었고 무엇이 즐거웠으며 란즈미는 오늘 어떻게 보 이는가에 대해서 말했다. 그리고 오늘 본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해 나갔다. 도중에 가끔 질문 조로 말을 던지기도 했지만 누이동생은 고개를 숙여 오빠의 말을 듣고 있을 뿐 결코 대답하는 일은 없었다. 란지에도 이미 그것을 알고 있는지 조금 기다리다가 곧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곤 했다. 그것은 마치 가만히 앉아서 남의 내면을 몰래 들여다보는 듯한 경험이었다. 란지에가 오늘 무엇을 어 떻게 보고 듣고 느꼈는지에 대해 스스로 말하는 나직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 이 모두 진실은 아닐지 몰라도 보리스는 약간 놀라고 있었다. 차갑고 딱딱한 녀석이라고만 생각했던 란 지에의 눈에 얼마나 아름다운 것들이 자주 비치는지에 대해서,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 아닌가. 보리스에 대한 이야기도 몇 마디 나왔다. 모두 좋은 이야기뿐이었다. 본래 나쁘거나 슬폈던 일은 이야 기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란즈미.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오늘 보니 머리도 많이 자란 것같으니 이런 식이라면 금방 다시 길 어질 거야. 햇볕을 쬐는 것도 너무 오래 하면 건강에 좋지 않으니까. 그만 들어가서 낮잠을 한 잠 자는 게 어때? 푹 자면서 밀르 아즈체나를 마저 모으는 꿈을 꾸는 거야. 저번에 아이린과 크리스티나를 찾아 냈다고 했지? 그럼 이번에는 질리언을 찾을 차례구나?" 밀로...뭐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아마 남매 사이에만 있는 어떤 비밀 같은 것이리라 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비밀. 란즈미가 살짝 고개를 끄덕인 것 같았다. 그러자 란지에는 일어나 누이동생을 번쩍 안아들어 침대로 데려갔다. 그 나이 소년으로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란즈미가 워낙 약하고 가볍기 때문에 가능했다. 동생을 눕힌 그는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 주고 휘장을 내려 주었다. 그리고 그제야 보리스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말했다. "그만 가시지요. 도련님." 그 말이 들렸을 때 보리스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약간 멈칫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먼저 문밖으로 나갔다. 란즈미는 란지에보다 두 살 적은 열 살이었다. 란지에가 성에서 시종 역할을 하고 있는 반면 란즈미는 단지 보살핌만을 받고 있었다. 어려서 겪은 소아마비의 후유증으로 절름발이인데다 약한 자폐 증세까지 있으서 하녀가 되기는커녕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조처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다만 이 가녀린 소녀의 외모만은 오빠와 마찬가지로 빼어나게 예뻤다. 오갈 데 없는 처지였다. 이 남매 를 벨노어 백작이 받아들였을 때. 란지에는 급료를 주지 않는 대신 동생을 돌보아 달라고 청했다. 그 요 청이 받아들여져서 란지에는 백작을 곁에서 모시는 시동이 되었고. 란즈미는 방 하나를 얻오 다른 하녀 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가게 되었다. 란지에는 동생을 지극히 아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우선이었고 시중을 드는 데에도 헌신적이었다. 로즈 니스가 오빠를 갖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란지에가 동생에게 하는 것을 보아 온 탓도 어 느 정도는 있었다. "그 애 봤어? 아휴, 난 걔가 싫어.정말 짜증스러워." 아마도 로즈니스가 가정교사와 공부하다가 기분이 많이 나빠진 모양이었다. 공부가 끝나자마자 다짜고 짜 캐미아를 끌고 오빠의 방으로 쳐들어온 그녀는 란지애가 아버지의 부름을 받아 잠시 나간 것을 알자 망설임 없이 툭툭 내뱉었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보리스가 무안해질 지경이었다. "왜 싫은데?" "바보 같잖아! 하루 종일 우두커니 앉아서 창 밖으나 내다보고, 남한테 폐나 끼치면서 백치처럼......" 갑자기 그녀는 말을 중단했다. 백치라는 말에서 자신이 자칫하면 시집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집안의 아 들이 연상된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고개를 젓거나 미간을 찌푸려 가며 몇 번이고 불쾌하다는 감 정을 다양하게 표현했다. "그런 애야말로 질색이야. 말할 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말은 왜 안해? 초점 없이 쳐다보는 눈동자를 보면 한 대 때려주고 싶다니까." 보리스는 그때까지 란즈미가 벙어리는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기에 로즈니스의 말이 다소 의외였다. "어디 아픈 것 아닌가? 환자처럼 보이던데." "환자는 환자겠지! 어쩌면 지독히 게을러서일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그 애가 실질적으로 아픈 데라고는 약간 저는 다리밖에 없어. 다른 덴 다 멀쩡한단 말이야. 그런데도 방안에서 꼼짝도 안 하잖아! 책을 읽 거나 자수를 놓은 것도 아니고 무엇 하나 배우는 것도 없어. 게다가 그 오빠라는 애도 무슨 금덩어리나 되는 것처럼 숨겨 놓고 누가 보자고 하면 끔찍이 싫어한다니까!" 그때 그 오빠라는 자가 문을 두드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보리스는 계속해서 로즈니스가 이런 헌담을 늘어놓을까 봐 긴장했는데 놀랍게도 로즈니스는 이야기를 그쳤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그러는 것처럼 다 른 얘기를 꺼냈다. "아참, 아빠가 드디어 오빠의 검술 사범을 구하셨대. 오늘 아침을 먹고 아빠한테 가니까 그렇게 얘기해 주셨어.: "그래?" 그건 듣던 중 반가운 얘기였다. 보리스가 더 묻기도 전에 로즈니스는 줄줄 아는 것을 다 말했다. "내일 오전 중에 오기로 했다나 봐! 그런데 조금 특이한 사람이어서 오빠가 고생할지도 모른대. 실력은 최고인데 성격이 괴팍하다나, 뭐 그래." "음......" 그건 직접 만나보기 전에는 모를 일이었다. 예전에 형이 가르쳤던 검술 선생이 두 명 있었는데 나중에 형이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란 묘한 것이어서 다른 사람에게는 최악의 스승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최고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고 했다. 예프넨은 처음 가르쳤던 사람은 최악의 스승 쪽이었다. 아버지가 몹시 신경 써서 고른 인물이었던 모 양인데 형과는 영 성격이 맞지 않아서 늘 티격태격하며 실력은 제자리걸음이었다. 그 사람을 내보내고 두 번째로 만난 사람은 그다지 큰 명성은 없었는데 놀랍게도 예프넨에게는 적격이었다. 형이 그 후 일 취월장하는 실력을 갖게 된 것은 모드 그 선생 덕택이었다.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형은 얼마 가지 않아 그 선생의 실력을 뛰어넘었다. 그러고도 그들은 꽤 오랫동 안 스승과 제자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 형에게는 더 이상 스승이 필요 없었다. 갑자기 로즈니스가 뜻밖의 소리를 했다. "아빠한테 졸라서 나도 검술을 배운다고 해야지!" "......" 말릴 수야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녀의 성격으로 얼마나 배울 수 있을지는 자못 우려가 됐다. 5. 후두 선생 보리스는 이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성문 밖으로 나갔다. 며칠 동안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다 보니 굳어 져서 검술 선생이 오면 처음부터 고생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성 입구를 떠나 천천히 길을 따라 숲이 있는 곳까지 걸었다. 마차를 탔을 때는 금방 지나쳐 온 길이었 는데 걷다 보니 꽤 긴 길이었다. 그래도 아침 공기는 상쾌하고 쾌적하게 걸을 수 있었다. 일부러 란지에도 데리고 나오지 않았다. 시종이 곁에 있으면 분명 편한 점도 있지만 혼자 있는 시간은 갖기가 힘들었다. 보리스는 본래 여러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걷다 보니 아직 덜 익은 열매들이 잔뜩 달린 커다란 나무가 줄지어 있었다. 호두나무였다. 날씨가 서늘해지기 시작해서 익은 열매가 없지는 않을 것 같은데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바닥에는 오 래 쌓인 푹신하고 해서 그는 잠시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나무에 올라가 보는 것은 어떨까 궁리 하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형에게 무등 태워 달래서 얼른 올라갔겠지만 지금은 주위의 이목이 있는지라 혹시라도 해 서는 안 되는 행동일까 봐 걱정스러웠다. 꼭 호두가 먹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소년의 본능으로서 가지마다 그득그득 달린 열매들을 보니 따고 싶은 충동이 들었던 것이다. 후둑, 후두두둑...... 갑자기 머리 위에서 십여 개의 열매가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바람에 보리스는 놀라 벌떡 일어섰다. 그 리고 얼른 옆으로 피해 위를 올려다보았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뭔가 살아 있는 것이 그 위를 왔다갔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보이는데도 그 모습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문득 두려 운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상한 짐승 같은 것은 아닐까? 그것도 에메라 호수에 있었던 것처럼 위험한!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지금이 환한 아침이었고. 여긴 대여서 걸음만 걸어나가면 마차가 지나가는 길이 나오는 곳인데 그런 것이 있을 리 없는 노릇이었다. 쓸데없이 예민해진 자신의 신경을 생각하며 피식웃 는데 갑자기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호두 좋아하냐?" 역시 사람이었다. 사실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닌가. 보리스는 참지 못하고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스스 로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건 형이 죽은 후로 처음 소리내어 웃은 웃음이었다. "거기 호두 좀 모아놔라!" 명령조로 들린 목소리에 대꾸도 하기 전에 머리 위에서 호두들이 천둥 치듯 와르르 떨어지기 시작했 다. 한 나무에서뿐만 아니라 사방 곳곳에서 다 굴러 떨어졌다. 호두를 줍기는커녕 머리를 감싸쥐고 피해 야 할 판이었다. 후둑둑, 툭. 갑자기 쏟아지던 호두 소나기가 멈췄다. 그리고 수상한 기척이 척척 나무를 닫는 소리와 함께 쏜살같 이 아래로 내려왔다. 보리스는 몇걸음 뒤로 물러섰다. 다시 한 번 척, 하는 소리와 함께 녹색 그림자 하 나가 눈앞에 내려섰다. "하. 참, 호두 좀 모아 놓으라니까. 되게 많이 떨어졌네. 야, 좀 도아봐라. 자칫하다간 종일 걸리겠다." 얼토당토않게 멋대로 지껄이고 있는 그 자가는 190센티미터는 되어 보이는 후리후리한 장신에 길게 기 른 숱 많은 갈색 머리를 높직하게 올려 묶고 있는 모습의 중년 남자였다. 등위로 유난히 블레이드가 긴 검 하나가 붙들어매어진 것이 보였다. 겉에는 비 올 때나 들쓰고 다닐 법한 큼직한 로브를 입었는데 그걸보니 나무 위에서 그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로브는 온통 나뭇잎 색깔과 같은 녹색이었다. 그런 색깔 로브를 입 고 다니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보리스가 쳐다보는 것을 느끼고 그는 온통 짤막한 수염투성이인 턱을 움직이며 씨익 웃어 보였다. 그 러더니 주섬주섬 로브를 벗었다. "뭐가 이상하냐? 여기에 호두나 담자." 그런데 놀랄 만한 일이었다. 머리 위에는 아직 덜 익은 호두가 잔뜩 달렸는데 떨어진 놈은 모두 제대 로 익은 것들 뿐이었다. 발끝으로 특특 건드리면 저절로 껍질이 까질 정도로 튼실하게 여물어 굴러다니 고 있는 호두열매들 가운데 하나를 의아한 눈으로 집어들자 남자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임마! 껍질 안 깐 호두는 손으로 집으면 피부병 생긴다!" 그 비슷한 이야기를 형에게 들은 것 같기도 했는데. 보리스는 얼른 호두를 떨어뜨리며 손을 뒤로 감춘 채 다시 사내를 쳐다봤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로브 안에 거의 7,80 개는 되지 않을까 싶은 호두들이 담겼다. 남자는 로브를 둘 둘 말아 마치 자루처럼 한쪽 어깨에 둘러메더니 앞장서서 성큼성큼 걷지 시작했다. 보리스는 볼수록 그 남자가 재미있었다. 그래서 뒤따라가며 물었다. "어디로 가시지요?" "저기, 저기 보이는 저 성." "왜 가기는데요?" "그건 네가 알아서 뭘 해." "거기가 어딘지는 아시는 건가요?" "뭐? 저기에 이 벨크루즈에서 둘째가라면 서럽...은게 아니라. 아무도 둘째가란 소리 따위는 하지 않는 호화 찬란한 성이란 걸 모르는 자도 있느냐? 음, 그런데 성 이름이 뭐랬더라." 보리스는 이 사람이 자신이 누구인지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생각건데 오늘 아침에 오 기로 했다는 그 검술 선생이 맞는 것 같은데 길가다 만난 소년을 대하듯 모든 대화가 자유스러웠다. 물 론 보리스는 그런 것을 더 좋아했다. 진짜 백작의 아들도 아닌데 도련님 어쩌고 하며 굽실거리는 것이 오히려 불편했다. 이 자가 진짜 선생이라면 어느 정도 친해 놓는 것이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리스는 그와 비슷 하 수준으로 대화를 하기로 마음먹고 뒤따라 걸으면서 말했다. "그럼 그 호두는 선물이군요?" "으흠. 남의 집에 방문하면서 변변한 선물 하나 없이 갈 수는 없는 법이지." "집 주인이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할까요?" "손님이 가져온 선물이 마음에 안 든다 해서 그걸 내색하는 자라면 주인 자격이 없는 놈이야. 그런 놈 은 집 없는 비렁뱅이 노릇이 딱 알맞지." "그럼 역시 선물은 아무거나 가져가도 되는군요?" "그건 또 손님의 예의가 아니지. 자고로 선물이란 말이야......" 선물의 유래와 방식의 주의할 점과 실례 따위에 대한 강좌 아닌 강좌가 끝날 무렵이 되어 그들은 성 입구에 도착했다. 보리스는 은근히 이 자를 놀리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문지기를 불렀다. "아버지께 손님 오셨다고 알려라." "아, 예, 도련님." 문을 지키는 병사 가운데 한 명이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보리스는 고개를 모로 꼬며 상대방의 얼굴을 살펴보려 했다. 워낙 키 차이가 많이 나는 터라 웬만큼 머리를 들어서는 얼굴이 보이지도 않았다. "뭘 쳐다봐" 도련님이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바뀐 말투가 아니었다. 그제야 보리스는 이 사람이 아 까부터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련님. 손님과 응접실로 드시랍니다. 주인님께서 아가씨와 힘께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타난 다른 하인의 뒤를 따라 그들은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이 자는 로브 안쪽으로도 뭔가 오래 입 어서 닳은 듯한 옷가지들만 걸치고 있어서 곳곳에 화려한 장신이 된 성의 복도와는 지나칠 정도로 안 어울렸다. 보리스는 예전에 형이 검을 잘 쓰는 자들 가운데는 이상스런 괴짜도 많다고 얘기했던 것을 떠올리고 일단 그런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나 심지어 자루처럼 짊어진 로브 안에서 호두열매가 한씩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진 호두는 그 충격으로 껍질이 벌어지기도 했고 그냥 떽데구르르... 굴러서 복도 구석에 처박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자는 주울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심지어 떨어진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처럼 계속 성큼성큼 걷고 있 을 따름이었다.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모르는 체 했는데 조금 있자니 지나가던 하녀들이 입을 막고 칵칵 웃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좀 더 지나니까 이제는 호두를 주워 가는 하녀들까지 생겨났다. 보리스가 슬쩍 뒤를 돌아보니 까 앞치마에 몇 개 담아서 소르륵 사라지고. 도 다른 어린 하녀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가 호두 몇 개 를 주워서 쪼르르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도 귀족 집안의 하녀인 만큼 먹을 것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다만 소녀들의 성격상 먹을 수 있는 열매가 한 개도 아니고 r:P속 내버려져 있는 것 이 자꾸 눈에 밟혀서 그런다는 쪽이 정확했다. 그들 일행이 응접실 앞에 도착했을 때 로브 안에 호두는 이미 반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가 걷는 내 내 호두들이 그 안에서 서로 바지락거려서 보리스조차도 자꾸만 나오는 미소를 멈출 수가 없었다. "어서 오시오." 문을 여니 백작이 직접 일어서서 그들을 맞았다. 백작부인은 어제부터 몸이 불편하다고 식사시간에조 차 나타나지 않더니 이곳에도 오지 않았다. 로즈니스는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를 기대로 잔뜩 부풀린 채 저 호두를 짊어진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남자는 어깨에서 호두 더미를 내리더니 갑자기 백작을 향해 불쑥 내 밀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흡하나마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말투는 그럴싸했는데 그 내용물이라는 것은...... 그러나 백작은 역시 비렁뱅이가 되어야 할 체질은 아니었다. 무엇인지 들쳐보지도 않은 채 일단 정중 하게 감사를 표하더니 하나을 불러 그것을 가져가도록 했다. 그런데 건네주는 과정에서 짓궂은 호두 한 개가 탁자 위로 뚝 떨어지고 말았다. "어머!" 로즈니스의 눈이 동그래져 버렸다. 이제 뭔가 하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흘끔 눈길은 준 남자 는 보리스에게 말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어조로 말했다. "이건 비밀의 열매예요. 아가씨. 아가씨 같은 사람이 먹으면 한 개 먹을 때마나 나이가 한 살씩 먹는 거죠. 여덟 개만 먹으면 하룻밤 자고 일어나자마자 스무 살짜리 처녀가 될 수 있는 거랍니다." 로즈니스는 더더욱 놀라서 테이블에 떨어진 채 시치미떼고 있는 갸름한 호두열매를 빤히 쳐다보았다. 물론 로즈니스가 호두가 무엇인지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호두는 아직 겉껍질을 벗기지 않았 기 때문에 흔히 보는 오톨도톨하고 반질거리는 연갈색 껍질이 드러나지 않은 상태라서 숲 같은 데 나다 니지 않는 그녀로서는 정체를 알아 볼 길이 없었다. 더구나 훌륭한 검술 선생이라고 모셔온 자가 그런 소리를 하니 어린 마음에 혹시나...하는 마음이 드는 모양이었다. 보리스가 보고 있으니 로즈니스의 눈동자는 점점 더 호두열매의 집중되어서 나중에는 두 눈동자가 가 운데로 붙을 지경이었다. 보리스는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방금 전에 숲에서 따온 호두를 놓고 비밀의 열매라니. 게다가 저란 거짓말을 능청스런 얼굴로 잘도 해내고 있잖아. 문득 그는 한 가지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로즈니스가 어떻게 열두 살인지 아셨죠?" "그거야 한 번 보면 딱 알 수 있는 법. 너도 열두 살이지?" 보리스는 고개만 조금 끄덕이면서 이 사람이 백작으로부터 미리 들었던 거겠지, 하고 생각해 버렸다. 백작조차도 딸이 하는 양을 보더니 은근슬쩍 그 남자의 장난에 동참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서 갑자기 비밀의 열매로 둔갑한 호두들은 하인의 손으로 정중히 운반되어 갔다. 로즈니스는 잠깐 눈치를 보다가 테이블 위에 혼자 남은 열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보리스가 점잖 게 주의를 주었다. "그건 손으로 그냥 만지면 피부병이 생겨." 닿으려던 손가락이 움찔, 하며 떨어졌다. 그리고 이제는 더 신기한 눈동자로 그녀석을 살펴봤다. 뭐 보 리스로서는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게 되었다. 호두 겉껍질을 만지면 안 되는 것은 틀림없으니까. 잠시 후 하녀의 손으로 따뜻한 차가 차려지고 나서 백작이 입을 열었다. "그럼 휘틀러 선생. 이쪽은 내 아들 보리스. 그리고 이쪽은 딸 로즈니스......" 갑자기 의자에 앉았던 남자가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아, 휘틀러는 내 진짜 이름이 아닙니다. 이 지방에 와서 잠시 말들어 쓴 가명이 뿐이죠." "그러면 본명이 어떻게......" 백작은 이 아름다운 응접실에 어울리지 않는 거친 옷차림의 남자를 매우 점잖게 대하고 있었다. 그러 나 남자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죄송하군요. 저는 본명을 밝힐 수가 없습니다. 제게는 어떤 신념상의 이유가 주어져 있어서 다른 사람 에게 이름을 밝힐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휘틀러라는 이름으로 다시 부른다면 되겠소?" "그건 안되지요. 생활하는 곳이 바뀌면 가명도 바뀌어야 합니다. 음. 그렇지. 윌넛 선생은 어떨까요. 그 거 괜찮은데." 이쯤 되면 로즈니스도 알아챘어야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저 비밀의 열매의 효능이 잔뜩 궁금해져서 거 기에 빠진 나머지 이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지 않았다. "그럼 원하는 대로 그렇게 부르도록 하겠소. 어쨌든 이렇듯 만나게 되어 반갑소이다. 앞으로 아이들을 잘 지도해 주시길 바라오." "아니, 그러면 따님도 함께입니까?" 백작은 곤란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로즈니스를 한 번 바라보고는 답했다. "그렇게 되었게 되었소. 그냥 같이 보고 연습이나 좀 할 정도면 되겠소이다." 백작의 어조를 듣고 월넛 선생도 알아챈 모양이었다. 로즈니스는 성격상 고운 손에 굳은 살이 박히고 몸 곳곳이 쑤시고 하는 훈련을 견뎌낼 수 있는 아이가 아니었다. 아마도 여기 앉아서 내내 아버지를 졸 라댔을 것이다. 호기심이 왕성한 것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으니까. "곧장 오늘부터 시작할 것이라면 하인에게 연습장으로 안내하라고 하겠소이다만......" "아니, 뭐 그렇게 바쁜 일이 있다고. 공부는 내일부터 하고 오늘은 얼굴이나 좀 익히지요. 아참. 한 가 지 양해를 구할 것이 있군요. 제 방침상 교육을 하는 동안 아이들에게 존대는 하지 않겠습니다." 백작은 선선히 그러라고 허락했고 조금 더 대화가 오간 뒤 월넛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보 리스를 보더니 말했다. "먼저 네 방으로 가서 얘기나 하자. 여자 애는 조금 있다가 얘기하기로 하고." 로즈니스는 자신을 '여자 애' 라고 지칭하는 소리를 평생 처음 들어보았다. 어이가 없는 동시에 화가 났지만 아버지가 허락한 이상 딱히 할 말도 없게 되었다. 월넛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백작에게 인사한 다음 손가락을 휘휘 저으며 보리스더러 방으로 안내하라고 말했다. "너, 머리가 그게 뭐냐? 길렀으면 깔끔하게 좀 묶어봐라." 문샤인 탑에 있는 방으로 와 자리에 앉자마자 한 첫마디가 그것이었다. 월넛의 머리는 높이 울려 묶었 는데도 길이가 허리 언저리까지 닿았지만 보리스는 기껏 어깨를 조금 넘을 정도라 굳이 묶을 필요까지 는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은 다짜고짜 주머니에서 리본을 하나 꺼내더니 보리스의 머리를 질끈 올 려 묶어 버렸다. 그러자 마치 작은 월넛 선생이 하나 생겨난 것처럼 되었다. "하, 이제 보기 좋군 그래." 란지에가 차를 드시겠냐고 물었지만 월넛은 ' 이 집은 밤낮 차만 주단 말아냐. 난 헛배부른 것은 질색 이다.' 라고 말하더니 잠시 궁리하다가 뭔가 입맛 다실 것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란지에는 밖으로 나갔 다가 조금 후 깨끗하게 까서 먹기 좋게 만든 호두를 한 접시 가져왔다. "주방에서 드리는 선물이라고 전래 드리랍니다." 보리스는 뒤따라오며 호두를 줍던 하녀들을 떠올리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란지에는 며칠 전 만난 이후 지금껏 소리내어 웃는 법이 없던 보리스는 기억하고 있었기에 약간 뜻밖이라고 느끼는 듯했지만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월넛 선생이 란지에를 보며 말했다. "시종이라면서 꼭 도련님이나 되는 것처럼 생긴 녀석이구나. 너도 검이나 배워볼래?" 갈수록 보리스는 상식과는 어긋나는 행동만 하는 선생이었다. 아무나 붙들고 '검이나 배워볼래?' 라니 보통 훌륭한 검술을 가진 자는 아무한테나 그걸 전수하지는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란지에는 예의바르게 답했다. "저는 그런 임무는 받지 있지 않습니다." "허." 그는 자기 복을 스스로 차버린다는 둥, 다 타고난 복이 있어서 어쩔수 없다는 둥 혼자서 중얼대다가 갑자기 의자에 풀썩 기대앉으며 말했다. "문샤인 탑이라. 거 이름 한 번 좋구나." 또다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탑 이름은 어떻게 아셨지요?" "선생을 뭘로 보냐.넌? 선생은 본래 모르는게 없는 거야." "......" 점차 이 자가 제대로 된 교육을 해줄 것인가 의심되고 있는데 월넛이 다시 불쑥 말했다. "너, 아까 그 여자 애하고 친남매 아니지?" 보리스는 물론 란지에도 약간 의외라는 얼굴이 되었다. 어차피 숨길 일도 아닌지라 보리스는 솔직하게 말했다. "예, 말씀대롭니다." "그 여자 애가 백작의 친딸이지? 넌 그럼 양자냐?" 더더욱 놀랄 일이었다. 이 자가 보기보다는 눈치가 빠른 건가? "그렇습니다." "보리스. 보리스라... 혹시 트라바체스 출신이냐?" 그것까지도 백작이 만들어 준 과거에 속해 있었다. 보리스 역시 고개를 끄덕었다. 그러지 월넛은 더더 욱 황당한 소리를 했다. "내가 어떻게 알았게?" 이거야 정말. 장난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보리스가 입을 다물고 있는데 뜻밖으로 란지에가 입을 열어 말했다. "도련님과 아가씨는 나이가 같으시니까요." 월넛은 란지에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그래, 너 역시 보기 '만큼' 똑똑하구나. 그러면 내가 둘이 나이가 같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게?" "그건......" 란지에도 딱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실 백작 님께 이미 들은 것 아닙니까. 라고 하면 가장 그럴법한 답이었지만 어쩐지 그런 답을 원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말해주지. 그건 내 초능력이야." "네?" "초능력 몰라? 특별한 능력이라니까. 남의 나이 맞추는 거 말야." "그럼 란지에는 몇 살인지 아십니까?: 보리스가 묻자 월넛은 란지에를 잠시 쳐다보다가 말했다. "역시 열두 살. 달수로는 너보다 많다." 보리스는 란지에를 돌아보며 물었다. "란지에, 몇 월 생이지?" 란지에도 놀라고 있었다. 그는 짧게 대답했다. "2월입니다." 역시 맞았다. 이번에만은 놀라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보리스가 다시 물었다. "어떻게 알아보시는 겁니까? 그냥 보기만 하면 저절로 압니까? 아니면 오랜 경험으로......" "경험은 무슨 얼어죽을 놈의 경험이야. 난 그냥 사람을 보면 나무의 나이테를 보는 것처럼 얼마나 살아 왔는지 딱 보인다." 보리스는 슬쩍 물었다. "그럼 로즈가 저보다 어리다는 것도 아셨겠군요?" 이건 떠보는 말이었다. 어차피 로즈니스는 그를 오빠라고 부르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월넛은 얼굴을 찌 푸리더니 갑자기 큰 소리를 쳤다. "선생을 놀리려 들어! 그 아이가 너보다 석 달은 일찍 태어났다!" 더 이상 반론을 펼 여지도 없었다. 보리스는 7월 생, 로즈니스는 4월 생. 정확히 석 달 차이였다. 잠시 후 월넛 선생은 얼굴을 풀더니 보리스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흥, 너도 소질이 전혀 없지는 않구나. 잘하면 훌륭한 검사가 되겠어." 이번엔 뭘 보고서 하는 소리일까? "그런 것도 딱 보면 알 수 있는 건가요?" "무슨 소리야! 네가 거짓말하는 걸 보고 한 소리다." 이 자와의 대화에 있어서는 넘겨짚는다는 것이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야말로 말이 어디로 튈 지 알 수가 없었다. 보리스가 항변했다. "거짓말과 검술은 도대체 무슨 상관입니까?" "그럼 넌 대륙에 이름난 훌륭한 용사라는 작자들이 다 하루종일 검만 휘둘러서 그렇게 된 줄 알았냐? 아니지. 검이 아니고 도끼를 쓰는 놈도 있긴 하군. 하여간 에 무기만 잘 휘두른다고 훌륭한 용사가 되는 게 아냐. 필요한 것은 빠른 직감, 그리고 상대보다 앞서 생각하는 머리다. 그게 없는 놈은 비록 나름대 로 일가를 이루는 검술의 소유자가 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앞서 말한 게 갖춰진 놈을 만나면 바로 패 해버려. 똑바른 길만 걷던 놈은 꼬불꼬불한 길에 가면 어디로 가야 될지를 몰라. 평지에서만 싸움하던 놈이 비탈진 곳이나 발을 물에 담그고 싸워야 되는 데를 가면 어어 소리만 지르다가 그냥 끝장나는 거 지." 알쏭달쏭한 소리만 하는 주제에 말은 무진장 빨랐다. 어쨌든 처음으로 검에 관해 늘어놓기 시작한 장 광설이라 끝까지 들어볼 마음으로 월넛을 쳐다보았다. 그는 호두를 한 줌 집어서 입안에 털어 넣더니 우물우물 씹으면서 계속 말했다. "머리가 좋은 놈이 응용도 잘한다. 남의 동작을 먼저 읽어야 그보다 먼저 공격을 할 수 있는 거야. 한 수 앞질러 생각하는 놈들이 가장 잘하는 것이 뭘까? 바로 거짓말이지! 남을 속이는 건 아무나 하는 줄 아냐? 속이고 싶어도 못 속이는 놈들이 세상에 깔렸다. 예를 들면 아까 그 계집애처럼 말야. 하루바삐 처녀가 되고 싶어하는 애한테 그런 거짓말을 하니까 바로 먹히지 않든?" 보리스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로즈니스가 얼른 처녀가 되고 싶어하는 애였나? 란지에는 다른 이유로 희한한 표정이 되었다. 로즈니스 아가씨더러 계집애라니? 그러나 계속 훌륭한(?) 이야기가 진행될 줄 알고 있었던 두 소년은 곧 다시 한 번의 충격을 맞았다. 그 는 아까 입에 넣은 호두를 다 씹어 삼키고 남은 호두까지 두 줌으로 끝장을 내더니 갑자기 기지개를 켰 다. "아, 쓰, 말을 많이 했더니 피곤해서 졸립군. 남은 얘기는 언제 생각 날 때 다시 하자. 저 안에 침실이 지? 선생님 한 숨 잘란다." "......" 대답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성큼성큼 침실로 가더니 문을 닫지 않고 깨끗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눈을 감아버렸다. 나은 얘기는 생각날 때 다시 한다고? 좀 전에 난데없이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을 때도 어쩐지 이건 앞뒤차례로 없이 아무데나 뚝 잘라 말하 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그러니 이제 정체가 밝혀졌다. 저 자의 교육이란 체계라고는 싹 도 안 보이는 방식이었다. 그 교육 전체의 질이야 어찌 됐든. 저만치 누어 있던 월넛의 큼직한 발바닥(흡사 개구리처럼 발가락사이가 벌어져 있었다.)을 바라보던 보 리스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접시를 들고 밖으로 나가는 란지에의 입가에 까닭을 알 수 없는 미 소가 머물렀다. 아노마라드의 호두를 익게 했던 가을을 트라바체스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서서히 적황빛을 띠기 시 작하는 창 밖의 낙엽을 바라보며 블라도가 말했다. "여름이 끝났군." 누군가가 다가오더니 탁자 위에 촛대에 불을 붙였다. 세 가지로 갈라진 촛대에 꽂힌 초에 하나하나 옮 겨지자 어둠 속에서 동그란 빛이 세 개 떠올랐다. "그래서 성과가 있었다고?" "예, 주인님." 롱고르드의 진네만 저택에 있는 서재는 저 벨크루즈의 벨노어 성에 있는 굉장한 서재의 규모와는 비교 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몹시 어둡기도 했다. 벨노어 성의 서재에는 많은 창문이 있었고 그것도 모두 유 리였다. 그러나 이곳의 창문은 단 하나뿐이었다. 블라도는 그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이 서제에서 한 달 전과 유일하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바로 자신 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피식 웃었다. 테이블에 놓인 종이를 집어 들더니 촛불에 비추어 가며 읽었다. 모 드 읽고 내려놓은 다음 그는 그것을 가져온 자를 바라보았다. 진네만 집안의 집사 튤크가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흥......" 저 자에게는 진네만 지금의 주인이 형인가 동생인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인가. 그럴 지도 모른 다. 어찌 보면 블라도 자신과 아주 잘 어울리는 집사가 아닌가. 그 역시 본래의 주인을 배신하고 지금의 주인인 칸 선제후를 섬기게 된 것이니까 말이지. "그래, 꼬마 녀석이 아노마라드로 갔단 말이지." "예, 그 귀족은 아노마라드 출신이 분명해 보였다고 합니다. 다만 여관에서 가명을 썼기 때문에 정확한 정체는 알 수는 없었습니다. 조만간 수소문하여 그가 누구인가를 알아내겠습니다." 블라도가 보리스를 찾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그의 입에서 바로 그 질문이 나왔다. "윈터바컴 킷도 함께?" 튤크는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 대답해 왔다. "그건 알 수 없습니다. 그 형인 예프넨의 행방이 아직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리스로 추정되 는 소년이 흰 칼집에 든 커다란 검을 들고 있었다는 것만은 확인되었습니다." "적어도. 원터러라는 거군." 이제 튤크는 율켄의 두 아들을 도련님이라고 지칭하지 않았다. 아내도 없고 자식도 없는 블라도는 저택을 고치라거나 형의 물건을 버리라거나 하는 지시는 내리지 않 았다. 그는 그런 것에는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율켄이 쓰던 서재를 그대로 사용하고. 그가 앉았던 침대 에 누워서 잤다. 튤크를 데리고 와서 쓰게 되면서 집안의 하인들도 대부분 갈아치우지 않고 그냥 썼다. 다만 율켄이 키 운 병사들만은 달아난 자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죽였다. 그러나 하인과 하녀들은 이미 대다수가 싸움이 일어나던 밤에 도망쳐 버려서 숫자는 율켄이 있던 때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블라도는 그것조차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는 저택을 수시로 청소하고 다듬 고 할 사람들의 존재 같은 것은 애당초 관심 밖이었다. 수백의 병사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저택의 모습은 몹시 황량했다. 칸 선제후가 빌려 준 마법사 종 그날은 벌써 선제후의 성으로 돌아갔지만 그가 소환했던 환수 크리갈이 부슨 지붕은 수리되지 않은 그 대로였다. 그나마 종그날의 힘이 며칠 동안 최대한으로 쏟아 부어져 강력한 정화를 거치고 나서야 크리 갈의 독액을 없애고 돌아갈 수 있게 된 집이었다. 그러나 지붕이 뚫려 지금도 2층의 일부까지 비가 새는 상태에서 곧 겨울이 닥치면 크게 고생하게 돌 거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러나 블라도는 저택에서의 안락한 삶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는 것처 럼. 아니 사실은 이 저택이 자꾸만 부서져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대하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저택의 그 어떤 곳에도 손대지 않았다. 한 번 크리갈의 독액에 부식된 돌들은 시시각각 헐어가고 있었다. 실은 그 안에서 계속 지내기에도 위 험한 저택이었다. "좋다. 녀석을 추적해라. 그리고 예프넨의 행방도 계속 알아봐라. 그 놈이 나머지 반쪽을 가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알겠습니다. 주인님." 튤크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이고 물러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블라도는 천천히 턱을 괴었다. 눈앞에서 촛불이 무엇엔가 흔들렸다. 바람이 들어오는 곳이 없는데도, 자꾸만 흔들렸다. 저택을 돌보지 않고 있으니 만큼 어딘가 낡아져서 뚫려버린 구석에서 공기가 들어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촛불을 바라보며 입끝을 조금씩 올렸다. 조금 더. 조금 더 올려서 마침내 미소와 비슷한 것을 만들어 냈 다. "형님, 아직도 여길 뺏긴 게 분하우?" 촛불이 약간 부풀어오르더니 다시 한꺼번에 왼쪽으로 흔들렸다. 주름진 얼굴에 박힌 블라도의 노란 눈 동자는 꼼짝 않고 춧불을 주시하고 있었다. 긴 그림자가 등 너머에서 날개처럼 일렁였다. "원한다면 한번 자리에 앉아 보슈. 내 몸 위로 그냥 앉을 수 있을 거 아니우? 유령이란 본래 그런 게 아닌가?" 실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유령을 향해 말을 걸고 있는 블라도는 이상하게도 씁쓸한 얼굴을 하고 있었 다. 사실은 승리의 가을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블라도는 마침내 그가 오랫동안 별러 오던 것을 모조리 갚 았다. 자신을 핍박하던 율켄 형은 죽었고 그 자식들은 가 곳 없이 뿔뿔히 흩어졌다. 누이의 망령도 더 이상은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비록 형을 자신의 칼로 죽이지는 못했지만. 저 배신한 집사 놈이 대신 일을 끔하게 해주었다. 생각하면 저 집사 놈도 참 의란 걸 조금도 모르는 놈이다. 그 상황에서 섬겨 오던 주인을 등위에서 찔러 늪에 내 던지는 것은 트라바체스 사람으로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터인데. 그러나 결국 저 자의 마법 덕택에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저 붉은 눈의 악마가 나타나는 것을 놈을 벌써 알고 있었던 거다. 조금 더 지체했더라면 모두 몰살이었겠지. 종그날조차 저 자에게 은혜를 입고 말았다. 단지 혼란 중에 말을 빼앗겨 두 조카를 놓친 것만이 분할 뿐이었다. 아직 그 속을 알 수 없는 놈이긴 해도. 곁에 두는 것은 편리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형에게 충성하던 자 를 손에 넣었다는 일종의 자긍심도 있었다. 복수심 역시 만족시켜 주었다. 그런데도... 어딘가 모르게 가슴속이 싸늘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부족했다. 충족되지 못한 곳에 바람이 드나드는 구멍이 뚫린 듯 추웠다. 별다른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분명 큰 승리를 했는데. 다음 달에 있을 선거에 대한 막바지 준비로 한층 바쁠 칸 선제후조차 항쟁의 승리는 축하한다는 친필 서신과 힘께 선물로 순금으로 된 커다란 괘종시계를 보내왔었다. 물론 빠른 시일 내에 윈터바텀 킷을 되찾길 바란다는 내용을 덧붙여서. 블라도가 갖게 된 진네만 저택에서 바뀐 것이 있다면 입구로 들어오 자 마자 맞닥뜨리게 되는 홀 정면에 놓이게 된 그 시계뿐이이었다. 시계의 몸체를 이루고 있는 휘황찬란한 순금 기둥은 과거 율켄이 관리하고 있던 진네만 저택에도 어울 리지 않을진대, 내버린 집이나 다름없이 쓰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거슬릴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더 나쁜 것은 시계의 종소리였다. 뎅, 뎅, 뎅...... 종소리는 고요한 저택 전체를 구석구석 울리며 퍼졌다. 아홉 번 울릴 것이다. 그는 마음 속으로 계산했 다. 저녁을 먹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좀 전에 여덟 번 울린 일이 있었던 것만은 기억했다. 삶이 오직 저 시계의 종소리만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뎅...... 마지막 음향이 서서히 잦아들 즈음 촛불이 다시 몸을 비틀었다. 그러더니 하나가 훅 꺼졌다. "형님도 저 시계가 싫수?" 블라도의 목소리도 메아리 가진 것처럼 서재를 울렸다. 대답은 없었다. 12시. 설핏 들었던 잠에서 퍼뜩 깨어난 보리스는 이상하게 몸에 한기를 느꼈다. 이불을 끌어당겨 덮고 아시 잠을 청하려 했지만 쉽게 되지 않았다. 별난 스승은 이 방 침대에서 무려 네 시간이나 퍼져 자다가 간신히 란지에가 깨워서야 나가더니 세수 도 안한 채 로즈니스를 보러 가겠다고 수선을 떨어서 또한 말려야 했었다. 보리스는 월넛 선생이 재미 있는 사람이지만 과연 검을 제대로 가르칠 지는 잘 알 수 없다고 느꼈었다. 그가 잘 해주지 않는다면 로즈니스를 위해 맞서 싸우게 될 그 소년을 꺾지 못할 것이다. 그가 꼭 이겨야 하는가? 그건 모호한 질문이었다. 일단 백작 일가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결코 누리지 못했을 안락한 생활. 그리 고 추적자나 도둑들의 눈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것. 두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백작에게 신세를 졌다고 할 수 있었다. 그걸 갚고 싶다는 생각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그는 냉정하게 말해 단지 거래를 한 것에 불과했다. 결코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백작은 이기면 좋고. 지더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었다. 지나치게 조건 좋은 거래인 것 같지만 어쨌든 그 는 주어진 환경 내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은 해 보고. 아니만 그만인 것이었다. 사실 그 이상을 그에게 바 란다는 것은 무리였다. 아직 이길 수 있는 실력이 없는 그를 데려오기로 결정한 것은 백작이었다. 그건 어쩌면 무리한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저러한 것들을 그가 모두 신경써야 하는가? 자신은 생존하기 위해서 택해야 하는 많은 길 들 가운데 하나를 택한 것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었다. 만일 백작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실패한 그를 벌주려 한다면 '책임을 지고 무슨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라고 할 것이 아니라 재빨리 달아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는 백작의 목적을 달성시켜 주기 위해 태어난 자가 아니었다. 오직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태어난 자였다. 하지만, 일단은 노력하자. 검을 잘 쓰게 된다는 것은 장기적으로 그 자신에게도 이익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욕망 가운데 하나인 저 검. 형이 물려준 분신과도 같은 저 윈터러를 제대로 휘두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싶었다. 그 검을 다 른 자에게 빼앗기지 않을 만큼 강해져서. 누구의 참견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되고 싶었다. 누구의 신세도지지 않고.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보리스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려와 침대 밑에 두었던 검을 찾았다. 손을 아래로 넣어 더듬었다. 그런데 당연히 잡혀야 할 검을 싼 천자락이 얼른 집히지 않았다. 팔을 더 깊이 넣어 만져 보았지만 역시 없었다. 침대가 너무 커서 반대쪽 모서리까지 팔이 닿는다는 건 무리가 였다. 저쪽으로 넣었던가? 반대쪽으로 넘어가 팔을 넣어 더듬어보던 보리스는 차츰 긴장했다. 뺨과 코로 차가운 뭔가가 흘렀다. 이마에서 줄줄 흐르는 식은 땀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지금까지 그는 알지도 못했었다. "......" 드디어 손에 잡힌 천이 질질 밖으로 끌려나왔다. 그것 뿐이었다. 침대 밑으로까지 기어 들어가 봤지만 소용없었다. 없었다. 아무 데도 없었다. 그곳에 두었던 윈터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 2권에서 계속) 제목: 룬의 아이들 2권 덫을 뚫고서, 폭풍 속에 지은이: 전민희 펴낸이: 서인석 출판사: 제우미디어 출판년도: 초판 1쇄 인쇄 2001년 8월 30일 초판 2쇄 인쇄 2001년 9월 6일 저자소개: 전민희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 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역사와 문학, 신화 등을 비롯하여 최근 철학의 신조류까지 섭렵한 지식광이며, 판 타지 동회에서 남미 환상문학에 이르는 다양한 판타지에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 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연구원을 거쳐 1999년 출간한 장편 판타지 소설 "세월의 돌"은 통신 연재사상 전설적인 400만회의 조회수와 더불어 전국 판타지 독자들의 입문 필독서로 자리잡았다. 4대 통신망과 유명한 인터넷 커뮤니티들마 다 작가의 팬클럽이 빠짐없이 결성되어 있으며, 현재 (주)이삭커뮤니케이션에서 <모룬드 온라인>이라는 이름의 3D 온라인 게임으로 제작중이다. 또한 "세월의 돌"은 총 5부작으로 예정된 <아룬드 연대기 Arund Chronicles>의 3부로서, 1부 격인 "태양의 탑"이 이듬해 출간되었다. (주)소프트맥스의 온라인 커뮤니티 서비스 <4Leaf>의 제작에 참여, 배경세계와 스토리, 캐릭터 설정을 담당하였으며, 곧 출시될 온라인 게임 <테일즈 위버>에서 도 동일한 설정을 사용하게 된다. 현재 100만 명에 육박하는 회원들이 이용하고 있는 <4Leaf>의 아바타 캐릭터들이 직접 등장하여 지금까지 감춰졌던 이야기들 을 펼치게 될 연작 소설 시리즈가 바로 "룬의 아이들"이며, 그 가운데 "룬의 아 이들-윈터러"는 첫 번째로 공개되는 매력적인 비밀이 될 것이다. 룬의 아이들-윈터러 겨울을 지새는 자여, 그것은 아주 길고 긴, 결코 끝나지 않는 겨울일지도 모른다. 서리와 눈보라를 이기고 바람과 눈물을 견뎌 마침내 찾아올 그 봄은 네 시체 위에 따뜻한 햇살이 되어 내릴 지도 모른다. 그러니 마음을 푸른 칼날처럼 세워 천년의 겨울을 견딜 수 있도록 대비하라.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1장. Empathy 1. 달과 검, 그리고 사악한 밤 한동안 만져보지 않았던 짧은 칼을 잡은 채 캄캄한 복도로 뛰어나올 때까지는 아무런 생각 도 없었다.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놓친 것에 대한 극도의 자기 혐오 때문에 정신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겨우 이것밖에 안 된단 말인가. 눈 깜짝할 사이에 바뀌어버린 삶에 적응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시절, 형을 자기 손으로 묻 고 떠나온 지 채 한 달도 흐르지 않았다.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도 말없이 견 뎌냈던 형이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남은 생명을 모두 다해서 여린 동생을 조금이라도 지 켜 주려고, 자신이 떠난 뒤에도 혼자 살아나갈 수 있도록 가르치려고 얼마나 애썼던가. 실제로는 그 자신이 훨씬 힘들고 아팠을 텐데. 벌써 그런 것을 모조리 잊어버린 것처럼, 자신은 마음이 풀어져 지켜야 하는 것조차 잊고 이토록 방심했었다. 형이 무어라고 했는데, 형이 그에게 무어라고 가르쳤는데! 반쯤 넋을 놓고 복도를 뛰다시피 걷던 보리스는 갑자기 멈추어 섰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문득 정신이 돌아왔다. 그제야 당연한 추리가 떠올라왔다. 윈터러는 방 안의 침대 아래에 놓여 있었고 그 안에 드나들 수 있었던 것은 자신과 란지 에, 그리고 새로 나타난 월넛 선생밖에 없었다. 게다가 월넛 선생은 그 자리에 누워서 네 시간도 넘게 자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는 동안 자신과 란지에는 몇 번인가 그 방을 비웠을 것이다. 그때 그가 어떤 식으로인가 검을 꺼내 어 숨겼다면? "......" 자신의 어리석음을 생각하니 식은땀이 저절로 흘렀다. 오늘 처음 만난 자를 어떻게 믿을 수 있다고 윈터러가 놓여 있는 방에 혼자 있도록 했단 말인가. 아니, 믿고 안 믿고의 문제도 없었지! 처음부터 별 생각이 없었으니까! 어찌됐든 그 자가 명검을 찾아내어 횡재한 셈치고 당장 내뺀 것이 아니라면 아직까지 뻔뻔 스럽게 자고 있을 그의 방으로 달려가는 것이 순서였다. 그런데 그 월넛 선생에게 주어진 방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다. 그가 이런 밤중에 멋대로 깨워도 좋은 사람은 한 명밖에 없 었다. 그는 오던 복도를 되돌아갔다. 자기 방 바로 곁에 있는 작은 방의 문을 두드린 뒤 대꾸도 기다리지 않고 들어갔다. "란지에, 잠깐 일어나 봐." 평소 같았으면 이미 깊이 잠들었을 상대방을 이런 식으로 대뜸 깨우는 일은 결코 하지 않 았을 보리스였다. 그가 자신외 시종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의 그에게 그런 것 은 생각나지도 않았다. 오직 윈터러를 찾는 일만이 급했다. 잠깐 사이를 두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리스‥‥ 도련님?" 일어나는 기척이 들리고 곧 촛불 하나가 밝혀졌다. 약한 불빛이 마주선 두 소년을 비췄다. 란지에는 졸린 기색이라기보다는 피곤해서 해쓱해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제야 미 안하다는 생각이 났다. "이런 밤중에 깨워서 미안해. 하지만 중요한 일이 있어서." "제 의무입니다. 말씀하십시오, 도련님." 잠결에 일어났음에도 조금의 불쾌한 모습도, 더듬거리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보리스는 그것이 의무에 대한 성실함 때문일 뿐 자신에 대해 개인적인 충성심을 갖는다던가 하는 것 과는 관계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월넛 선생이 자고 있는 방을 찾아 줘." "알겠습니다. " 왜 찾는지 되묻지도 않았다. 란지에는 방 한쪽에서 손잡이가 달린 램프를 찾아내어 불을 붙이더니 앞장서 나가려다가 문득 보리스외 모습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램프를 내려놓 았다. "그런 모습으로는 밖에 못 나가십니다. " 그제야 보리스도 자신의 꼴을 내려다 볼 정신이 들었다. 잠옷 차림에 무심코 집어들고 나 온 것은 길이도 허리까지밖에 오자 않는 데다 소매까지 부풀려진 엉뚱한 겉옷이었다. 란지 에가 돌아서서 장롱을 열더니 큼직한 회색 망토를 하나 꺼냈다. 그러더니 보리스 앞으로 다 가와 재빨리 손수 몸에 둘러 주었다. 보리스는 란지에가 순간적으로 손을 주춤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보리스의 손에 쥐어진 검을 보았지만 못 본 것처럼 나지막이 말했다. "가시지요." 한쪽 어깨에 붙은 핀을 채우고 나니 온 몸이 망토로 가져져 자객이나 되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그런 모습으로 서둘러 란지에의 뒤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월넛 선생에게 주어진 방 앞에서 란지에는 정중하게 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자 그는 보 리스를 돌아보았다. "그냥 문을 열까요?" 끄덕, 하자마자 란지에는 문고리를 돌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보리스가 문간에 서 있는 동안 램프를 들어 방 안을 이리저리 비추던 그는 침대 쪽으로 다가가더니 보리스를 돌아보았다. "계시지 않는군요. 잠시 자리를 비우셨나 봅니다. " 그러나 보리스는 도저히 란지에처럼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사라진 윈터 러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방 안을 전부 밝혀 줘." 곳곳의 촛대에 불이 붙여졌다. 방은 확실히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한쪽에 그 자가 입고 왔던-그리고 호두도 담아왔던-로브가 그대로 걸려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란지에도 그제야 보리스의 기색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듯했다. 먼저 창문으로 다가가 열었던 흔적이 있는가 확인하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보리 스에게 말했다. "뭔가 찾으십니까? 이 방 안에는 장롱과 침대 밑 정도를 제하면 물건을 숨길 만한 곳이 없 습니다. " 란지에의 말 대로였다. 보리스는 점차 가설이 현실화되는 것을 느끼며 현기증마저 느꼈다. "성문 밖으로 나가려면 경비병을 거쳐야겠지?" "밤이 되면 주인님의 허락 없이 성문을 열지 못합니다." "그 밖의 통로는?" "다른 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북쪽문은 열려 있겠지만 정원에서 외부로 나가는 입구 쪽에 역시 경비병이 있습니다. 정원을 산책하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그 문으로 나가보았자 소용없 을 것입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백작에게 알리는 것?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에 불과한데 자신의 개인적인 물건을 찾기 위해 자고 있는 백작을 깨 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고려에 앞서서 그 자신이 원하지 않았다. 마음 깊이 편하다 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신세를 진다는 것은 늘 머릿속에 오랫동안 불편하게 남곤 했었 다. 백작은 그런 부탁을 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아직 날이 새려면 대여섯 시간은 넘게 남아 있었다. 보리스는 여전히 판단을 제대로 내리 지 못한 채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어쨌든 그 문으로는 지금 나갈 수 있다는 거지?" 달이 하얗게 떠올라 있었다. 어둡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정원의 풀들을 푸르게 적시는 달빛이 환했다. 오히려 성 안의 복도 쪽이 더 캄캄했던 것 같았다. 란지에가 램프를 낮추어 들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보리스는 란지에가 걸쳐 준 망토 안쪽으 로 검 손잡이를 꽉 쥐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지만, 일단 결정을 하게 된다면 결코 망설일 생각은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유품이다, 형과 아버지의... . 그것조차 지켜내지 못한다면 진네만이라는 성 을 가질 자격조차 없는 거다. 그러나 이미 멀리 달아나 버렸다면? "잠깐..... ." 란지에가 갑자기 몸을 수그리는 순간이었다. 보리스의 눈에도 뜻밖의 모습이 띄었다. 뭔가 흰 불빛 같은 것이 짧은 꼬리를 끌며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인 듯했지만 또한 하나가 아닌 듯했다. 달빛이 잠시 반딧불로 화하고 유성처럼 날아 떨어지는 듯,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광경이 그들의 걸음을 묶어 버렸다. 그가 찾던 그 자가 거기에 있었다. 사라졌던 윈터러를 손에 들고. "..... ." 보리스는 당황해 있었다. 한 번도 보지도,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이었다. 분명 잘 알고 있는 물건이라 생각했는데, 윈터러는 이 순간 이미 그가 알던 그 검이 아니었다. 저 정체 모를 자 의 손에 쥐어지자 그 것은 이 세상에서 존재할 수 없을 듯한 엄청난 빠르기, 그리고 감당하 기 힘든 살기를 내뿜는 악마의 검으로 돌변해 있었다. 예프넨의 손에 쥐어졌을 때도 저러한 모습을 본 일은 없었다. 그 자가 손을 뻗어 검을 움 직이는 것에 따라, 눈뜨고 보기 힘든 광채가 곳곳으로 흩날려 갔다... 아니, 춤을 추었다. 뺨이 오싹해지면서 가슴속까지 선뜩해졌다. 겨울의 검이라는 별칭은 누가 처음으로 붙인 것일까, 보리스의 조상일지도 모를 그 사람은 지금의 저 자처럼 신들린 듯 검을 춤추게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을까. 어제 만났을 때는 저 자에게 검을 가르칠 만한 능력이 있는지 조차도 의심하고 있었는데. "하아..... ." 빛, 보이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잠시 잠깐 동작을 멈출 때를 제외하면 윈터러의 모습은 육 안으로 식별할 수조차 없었다. 무덤가의 귀신불처럼 칼날 전체가 넘실거렸다. 똑바로 내찔러지고, 다시 걷어들여져 호를 긋는 듯하더니 어느새 머리 위를 단단히 봉쇄했 다. 하늘 꼭대기에는 그날따라 광기를 부르는 것처럼 하얗게 타는 달이 있었다. 산 자와 죽 은 자를 동시에 미치게 할 수 있을 듯한, 무생물조차 빨아들여 삼킬 듯한 빛으로. 그것은 단순히 기분이었을지, 또는 깨달음이었을지, 보리스는 저 윈터러가 지금껏 자신에게 본 모습을 숨기고 있었던 것만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느껴지는 것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저 자에게 덤벼들어 이길 수는 없겠다는 그런 감정과는 질이 달랐다. 그가 지금 도저히 입을 떼지 못한 채 되풀이해서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감정은 저 겨울의 검은, 결코 선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지지는 않았다는 사실. "저것이... 도련님의 물건입니까?" 곁에서 란지에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보리스는 그 목소리에 자신과 비슷한 감정이 실려 있음을 알고 놀랐다. 란지에는 다시 앞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무언가, 악한 역사가 존재하는 검 같군요." 마지막 빛이 화살처럼 쏘아져 무지개를 그리더니 이윽고 끊어졌다. 월넛 선생은 이미 자세 를 바로 하고 검을 내린 채 서 있었다. 그렇게 보아서일까, 그는 하늘에 뜬 달을 바라보고 있는 듯 생각되었다. 한참 동안 그렇게 달을 주시하던 그는 갑자기 두 소년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구경거리는 끝났으니 그만 일어나라고." 낮과 마찬가지로 익살맞은 어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다른 듯 느껴지는 것이 있 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마치 살인을 저지르고서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양 얼버무리려는 사람 같은 목소리였다. 두 소년은 일어났지만 그림자처럼 선 채 말이 없었다. 월넛은 그들에게로 걸어왔다. 비록 아래로 내려졌건만 윈터러의 살인적인 광채는 여전히 피를 원하는 괴물처럼 번쩍거렸다. 보리스는 이를 악물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서 상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것은 제 검입니다. 잠시 구경하신 것으로 알겠으니 그만 돌려주십시오." 머리 너머로 달을 인 채 역광으로 어두운 얼굴을 한 월넛 선생은 보리스를 향해 가만히 눈 을 내리깔았다. 그 눈동자가 이상하리만큼 번뜩인다고 생각했다. 뜻밖의 대답이 울렸다. "그리고 넌 그걸 잃어버렸지." 보리스는 망토 속의 검을 움켜쥐며 몸을 긴장시켰다. 그리고 힘주어 대꾸했다. "남의 집 식탁 아래에서 숟가락을 주웠다고 말하실 셈인가요?" "네게 되찾을 능력이 있느냐?" 보리스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번에는 턱을 쳐들며 상대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시는군요. 저는 당신이 제 검술 스승으로 온 줄로 알고 있었습니 다만." '아니라면 당신은 도둑이었다는 말이냐'는 뜻이 함축된 말이었다. 역광속의 얼굴이 문득 일 그러지더니 미소 비슷한 것을 보였다. "어린 녀석이 대담하구나, 그러나 이건 너 같은 아이가 쥘 수 있는 검이 아니다." "아이도 어른이 되죠." 구름에 가려지기 시작한 달빛이 마지막으로 칼날처럼 두 사람의 옆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월넛의 목소리에 이제 웃음기 따위는 없었다. "그 전에 검이 네 피를 먼저 원할 것이다. 내 진지하게 묻겠는데, 이런 검을 어떻게 손에 넣었느냐? 이것이 바로 오래 전에 자취를 감추었다던 겨울의 검이냐?" 이제와서 숨길 이유는 없었다. 보리스는 짧게 대답했다. "윈터러를 말하는 거라면, 바로 그것입니다." "허." 여전히 월넛은 윈터러를 칼집에 넣지 않은 채 여차하면 상대를 벨 수도 있다는 것처럼 그 대로 잡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단지 학생을 놀리 는 선생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인가? 아니면 실제로 이 검에 대해 어떤 욕망 내지는 불안감을 가지고 넘겨주지 않으려고 마음먹은 것인가? 이어서 그는 약간 고개를 기울이며 보리스를 자세히 내려다보았다. 몇 가지 사실을 가지고 추리를 하고 있는 듯, 침묵하던 그의 입에서 드디어 말이 떨어졌다. "네 성은 본래... 진네만이군. 트라바체스의 진네만, 윈터바텀 킷 (winterbottom Kit)을 이루 는 두 가지 물건을 모두 소유했던 집안. 그렇지 않은가?" 보리스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당신에게 중요합니까? 당신의 제자가 될 소년은 보리스 벨노어일 뿐인데. 그 이상의 것을 당신이 알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 그는 결심한 듯 윈터러를 칼집 안으로 도로 집어넣었다. 그 동작은 보리스가 기억하 는 그 누구의 것보다도 유연하고 빨랐다. "검은 돌려주지 않겠다." 보리스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그는 짧게 답했다. "돌려 받겠습니다. 절대로." 월넛 역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이제는 잔인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가 대꾸해 왔다. "빼앗아 가라." 보리스는 한 걸음 물러서더니 자세를 약간 낮추었다. 그리고 망토를 젖히며 검 손잡이를 내보였다. 위협 따위가 통할 리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죽더라도 결코 다른 사람의 손에 윈터러를 빼앗길 수는 없었다. 두 눈을 번히 뜨고 있는 동안은 더더욱 그 럴 수 없었다. 그가 내보인 것은 검이 아닌 그의 의지였다. "조용히 떠나고 싶으면 지금 절 죽이시죠." 검은 보랏빛 구름이 빠르게 소용돌이치며 흐르고 있었다. 이지러지고 뭉쳐지고 다시 서로 를 앞지르며 달려갔다. 달은 언뜻언뜻 그 얼굴을 보였다. 침묵하는 밤은 흡사 진실로 피를 바라는 듯 숨을 죽인 채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월넛이 커다란 목소리로 웃어젖혔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 웃음소리는 구름 뒤에 숨겨졌을 마른 벼락처럼 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북처럼 둔중하게, 끊임없이 울리고 있는 것은 미칠 듯 뛰어오르는 심장의 박동이었다. 월넛은 한참만에 웃음을 그치더니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으며 자세를 낮추어 보리스와 눈 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 그를 똑바로 보았다. "이것 참, 흔히 보기 힘든 녀석이 아닌가.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난 네 물건을 가지고 도망치지 않는다. 어린아이를 베는 일도 없고. 설마 내가 네가 휘두르는 검을 피해 도망쳐야 한다는 것은 아니겠지? 좋다. 나와 내기를 해 보겠나?" "......" 대꾸가 없는 보리스를 향해 월넛은 계속해서 말했다. "난 너를 가르치기로 했으니 가르친다. 내가 신용 없는 자로 보인다 해도 그것은 내가 원 해서 자초한 일이기도 하니 어쩔 수 없는 결과겠지. 하지만 나는 내년 봄까지 너를 가르치 겠다고 백작과 이미 약속했다. 그러니 그 약속은 지킬 테다. 그러니 그때까지 네가 방금 네 입으로 말한 죽음의 기간을 늘려주마. 어떤가?" "무슨 뜻입니까?" 보리스는 여전히 조금도 누그러진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때까지, 매일같이 내 손에서 검을 빼앗을 기회를 주마. 만일 네가 성공한다면 나는 살아 있는 한 다시는 이 검, 윈터러에 손대지 않겠다. 하지만 만일 내가 떠나는 날까지 네가 성공 하지 못한다면, 나는 너를 베고 떠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 검을 내 것으로 하겠다. 내 말 이 이해가 가나?" "....." 살기 위해 해야하는 선택을 느쪘다. 살아남기 위해 명예를 버릴 수도, 명예를 버리고 단지 생존하기만 할 수도 없다면, 택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불안한 줄타기뿐이라고. 그의 어깨에는 형의 생명이 짐처럼 지워져 있었다. 결코 쉽게 죽을 수는 없었다. 목숨도 검 도 함부로 버릴 수는 없었다. 그는 언제까지나 살아남을 것이니까. 영원을 사는 저 불멸자들처럼. "약속을 무엇으로 증명합니까?" 월넛은 망설임 없이 품속으로 손을 넣더니 단도를 하나 꺼내어 보리스의 손에 넘겨주었다. 그것은 가드(guard) 없이 칼날과 손잡이가 일직선으로 이어진 폭이 넓은 단도였다. 특별한 장식이 없어 단순하게 보이지만 칼집에서 뽑아보니 칼날 표면에 초승달 모양의 구멍이 뚫린 것이 이색적이었다. 손잡이에는 문장이 한줄 새겨져 있었다. '재앙을 기억하라'. 월넛이 말했다. "그것을 징표로 맡겨 두겠다. 그것은 내게 매우 중요한 물건이다. 만일 네가 성공한다면 그 때 그 단도를 내게 돌려다오. 만일 끝내 성공하지 못한다면 내가 직접 그것을 네게서 되찾 아가겠다." 보리스는 단도를 손에 든 채 계약을 받아들일 것인지 잠시 망설였다. 이것은 그의 생애에 이루어지는 두 번째 계약이었다. 뜻밖으로 바로 뒤에서 란지에의 목소리가 들렸다. "받으십시오, 도련님." 그것은 단순한 말에 불과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마음을 놓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보 리스는 천천히 단도를 망토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다시 정면으 로 주시했다. 그 눈을 통해 방금 들은 말이 얼마나 진실 된 것인지 느껴 보려는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그의 예지가 퍼뜩 눈을 떴다. 방금 뭔가 중대한 것 이 두 사람 사이에 오갔었다. 단도라든가 검이라고? 아니, 그것보다 뭔가 더 중요한 것이 있 었다. 그의 몸 전체로 약하지만 짜릿한 전율이 흐르고 지나갔다. 이것은 열쇠이자 문인가? 아직 캄캄한 암흑이나 다름없는 인생에 첫 번째 지표가 되어 줄 선명한 별빛인가? 계약은 성립되었다. 월넛은 다시 몸을 일으키더니 두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돌아가라. 내일부터 수업이 시작될 것이니까." 보리스는 돌아서기 전에 천천히 입술을 열어 말했다. 사답게 신의를 지키시기를." "그래, 네 이름대로 너 역시 전사겠지. 알겠다." 보리스가 그 자리를 떠났을 때 란지에는 잠시 지체하며 월넛을 올려다보았다. 월넛은 또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란지에가 입을 열었을 때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그것이 언제가 되든, 떠나기 전에 도련님의 검을 돌려 드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 월넛은 피식 웃으며 약간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 "보기보다 충성스러운 하인이라 그건가?" 그는 이미 란지에가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며 그것을 생애의 보람으로 삼는 형태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란지에는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나지막이 말했다. "제겐 이미 당신의 정체가 짐작되는군요. 일단은 교육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하겠지만, 도련 님을 지나치게 놀린다면 저도 달리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월넛은 과장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떠 보였다. 그러더니 말했다. "조그마한 녀석이 다짜고짜 협박이군. 하지만 네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그게 무엇입니까?" 월넛은 어조를 낮추더니 다시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행동은 지금 네 주인의 능력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 돼." 그러나 란지에의 대답은 차가웠다. "그런 것은 저와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가치를 독자적으로 증명하 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어린 소년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은 분명 아니었다. 월넛은 겉으로는 아무 것도 느 끼지 않은 양 가볍게 답했다. "단지 의무만을 행한다 그건가? 그것만을 최대한으로? 좋아. 난 너와 계약을 하지 않지만 네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볼 마음은 나는군. 너도 좋을 대로 나를 지켜봐라. 무슨 결과가 오 든지 말이지." 그러나 이어서 나온 란지에의 말은 더욱 놀라웠다. "제 자유 의지에 속한 일을 허락하듯 말하지 마십시오. 그럼 이만." 소년은 돌아서더니 앞서 간 자기 주인의 뒤를 빠른 걸음으로 되짚어 따라갔다. 월넛은 그 자리에 선 채 약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유 의지? 자유 의지라고?" 그 말은 어린 소년의 입뿐 아니라 이 대륙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가 평생 들어 보지도 못했을 단어였다. 그러나 월넛은 그 단어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2. 대륙의 검사들 다음 날부터 보리스의 검술 수련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보리스가 선생이 오기를 며칠 동안 기다리며 상상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연습장 은 성 뒤쪽에 마련된 원형의 공터였는데 첫날 월넛은 백작으로부터 받은 소년용 검을 보리 스에게 내주어 허리에 차게 했다. 그러나 그 검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심지어 열 흘이 지나도 단 한 번 뽑아지는 일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첫날, 맨 처음 보리스가 명 받은 것은 단순한 달리기였다. "급하게 할 건 없어. 적당한 속력으로 성 주위를 돌기만 하면 되는 거야. 멈출 시기는 내가 알려 줄 테니까." 실은 그 명령을 받았을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았다. 보리스가 성을 두 바퀴 돌 때까지 그 래도 월넛은 처음의 자리에서 자기 검을 뽑아 몸이라도 푸는 체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 바 퀴 째 돌 무렵 그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겠거니 하고 네 번째 바퀴를 돌았다. 벨노어 성의 규모는 잘 알려진 대로 벨크루즈 최대라고 이름날 정도라, 그때쯤이 되자 보리스도 온몸에서 땀을 흘리고 있 었다. 월넛은 또 자리에 없었다. 아마도 돌아왔다가 잠시 다른 곳으로 간 것이겠지. 그러나 다섯 바퀴, 여섯 바퀴, 그리고 일곱 바퀴 째를 돌 때도 그는 자취를 감춘 채 코빼기 도 내보이지 않았다. 몇 바퀴 더 추가되자 이제 이것은 단순히 선생의 나태함 정도가 아니 라 죽고 사는 문제가 될 정도로 절박해졌다. 그만 뛰라고 해야 할 선생이 도대체 돌아오지 를 않으니 멈출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 정도면 이제 그만 해도 되련만, 보리스는 이런 점에서 묘한 고지식함이 있어서 월넛이 돌아와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계속하는 것으로 처음부터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아마도 전 날 밤 그 손에서 빛나던 윈터러를 본 후부터일까. 월넛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단순하거나 우스운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와 생애 두 번째 계약을 했다. 내기란 공정해야만 하는 것이라 그가 결코 자신을 나태하게 가르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장난하는 것처럼 나타나지 않고 있어도 다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물론 월넛이 대단한 검술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실상 정신상태는 형편없는 자여서 단지 보 리스를 속이거나 놀리려고만 하고 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보리스 는 그런 가능성을 마음속에서 죽여 버렸다. 그런 것으로 불안해 할 바에는 처음부터 내기고 계약이고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시작한 이상, 쉽게 꺾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야 말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 검에 어울리는 주인이라는 것을, 이기기 위해서 뭐든 상대로부터 흡수해 내고 말리라는 것을. 어쩌면 보리스가 심할 정도로 진지하고 심각한 성격을 지닌 탓이었을까. 그래도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기는 했다. 바로 란지에였다. 그러나 그는 지시 받은 일 이외에 어떤 다른 일도 하지 않으면서 예의 차가운 눈으로 보리 스를 지켜보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만 하라고 말리지도, 물이라도 한 잔 권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월넛 선생을 찾으러 가지도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점차 눈앞의 길이 아득해져 갔다. 보아오던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 쓰면서 문득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이렇게 애를 쓰는데 몸이란 건 형편없이 약해빠진 거구나. 겨우 한두 시간의 달리기만으로도 죽을 듯 괴 로워서 어쩔 줄을 모르고, 좀더 계속한다면 정말로 죽기도 하겠지. 아니면 의식이 끊기고 무의식으로 돌아서는 순간, 육체는 다시 살아남기 위해 모든 행동을 개시할 것이다. 바닥에 쓰러진다든가, 남이 권하는 휴식이나 물 따위를 조건 없이 받아들이 겠지. 끝까지... 살아 남기로 했는데..... 휘청,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하더니 어느새 입가에 찝찔한 뭔가가 흘러 들어왔다. 머리를 바닥에 부딪친 충격을 느끼기까지는 오히려 시간이 걸렸다. 침을 몇 번 애써 뱉으며 다시 정신을 차려 비척비척 일어났다. 그러다가 다시 무릎을 꿇었다. 이미 몇 바퀴 째인지는 기억 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월넛 선생은 뛰라고 했지 기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끝까지 뛰어서... 자신이 살아남기에 적합한 자라는 것을... 증명하고야 말 테다..... 쿵! 그렇지만 주위가 이렇게 어두워서는..... . 다시 눈을 떴을 때 자신은 연습장으로 쓰이는 원형의 공터에 팔다리를 펼친 채 대자로 누 워 있었다. 눈뜨는 순간, 가을 햇빛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작렬하는 태양 빛이 곧바 로 각막을 뚫고 들어왔다. 오히려 그것이 다행이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다시 감는 순간, 머 리 위에 찬물이 한통 뒤집어 씌워졌다. 오히려 시원하고 좋았다고 해야 할까, 보리스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탄력으로 그 자리에 서 곧장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눈앞에 란지에가 있는 것을 보았다. 란지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바닥에 물통을 내려놓고는 보리스를 향해 마른 수건을 내밀었 다. 그것을 받아 얼굴을 닦는데 란지에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께선 아직 오시지 않는군요. 제 임의로 한 행동을 용서해 주십시오." 마치 용서하기 싫으면 어디 좋을 대로 해 봐라, 라는 듯한 말투에도 보리스는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행동을 해 준 란지에가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몇 시간동안 고생을 해서 머리가 단순해진 탓이었을까. "알았어. 고마워." 물이 옷 전체로 줄줄 흘러서 그는 허리에서 검을 풀어놓았다. 아무래도 물에 젖으면 그리 좋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다시 아무 말 없이 본래의 코스로 돌아 가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바퀴 정도 다시 뛰었을 즈음인가, 월넛 선생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로즈니스를 곁에 데리고서. 사냥복 차림의 로즈니스는 손에 얇고 가벼워 보이는 연습용 검을 하나 들고 있었는데 보리 스와는 달리 이 모든 과정이 매우 신나고 흥미로웠던 모양이었다. 얼굴이 발그레하게 상기 되어서는 월넛 선생에게 끊임없이 종알종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녀가 든 검은 옷깃조차 베기 힘들 정도로 무딘 날에 장식만 화려한 물건이었다. 그것을 가지고 계속해서 허리에 꽂았다가 다시 뽑아 겨누는 동작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녀의 질 문을 어느 정도 받아주고 있던 월넛 선생은 이윽고 저만치에서 달려오고 있는 보리스를 보 았다. 그리고 안색이 변했다. "멈춰!" 서서히 느리게 뛰면서 드디어 월넛 선생 앞에 가 멈출 때까지만 해도 보리스는 이 선생이 깜빡 잊어서 미안하다는 식으로 변명하면서 '그런다고 진짜 계속 뛰고 있다니 너도 참 대단 한 고집이구나' 정도의 말을 해주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떨어진 것은 뜻밖의 불호령이었다. "왜 검을 풀어놓았느냐!" 보리스와 란지에 모두 월넛이 화내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로즈니스조차 움찔 놀라서 하려던 말을 삼켜버렸다. 보리스는 잠시 멍해져서 상황이 어떻게 되었다고 설명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입만 벌리고 있었다. "네가 지금 달리기 연습이라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내가 네게 가르치는 것은 검이 다! 무겁다고 검을 풀어놓는 정신으로 무슨 검술을 배우겠다는 거냐! 이런 한심한!" 물론 무거워서 검을 풀어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이 순간 대꾸도 변명도 필 요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당장 풀어놓았던 검을 집어든 채 선생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 금까지 자기가 아버지가 아닌 그 누구 앞에서도 무릎 꿇은 일이 없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월넛의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자신이 명백히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거기에 변명의 여지 따위는 없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에 이어지는 말은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따위가 아니었다. "벌을 주십시오." 월넛도 기다렸다는 것처럼 냉큼 대꾸해 왔다. "그래, 벌을 주마." 로즈니스는 놀란 나머지 몇 걸음 물러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저만치 캐미아가 선 것이 보이자 얼른 이리로 오라고 정신 없이 손짓했다. 자신 또한 이 월넛 선생의 제자가 되기로 한 까닭에 자신의 처지도 보리스와 다를 것 없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던 것이다. 월넛 선생은 란지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 보리스가 벨노어 성을 몇 바퀴 돌았느냐?" "열 다섯 바퀴입니다." 월넛은 다시 보리스를 내려다보며 딱잘라 말했다. "앞으로 매일, 똑같은 일을 아침마다 해라. 내가 이 성을 떠나는 날까지." 로즈니스를 비롯해서 방금 달려온 캐미아의 얼굴까지 파래졌다. 이 성을 하루에 열 몇 바 퀴씩 돌라고? 그러나 보리스는 어려서부터 강한 개인임과 동시에 정치적 인간이 되도록 가르치는 트라바 체스에서, 응석을 받아주는 일 따위는 기대할 수도 없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커온 소년이었 다. 그는 짧게 답했다. "감사합니다." 사실 로즈니스는 이 선생을 새삼 겁낼 필요가 전혀 없었다. 보리스와 이야기를 끝낸 월넛 은 고개를 돌려 두 꼬마 아가씨를 보더니 다시 실실 웃는 표정으로 돌변했다. 그리고 다시 장난감 놀이 같은 검술 지도를 위해 연습장 한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보리스가 몸을 돌리자 란지에가 어느 새 그가 마실 물 한잔을 받쳐 들고 서 있는 것이 보 였다. 여전히 복종하지 않는 이 시종의 손에서 물을 받아 마시면서 보리스는 그가 질기게 버터야 하는 이 싸움의 동지라도 되는 양 느껴졌다. 그러나 로즈니스와 캐미아가 검을 갖고 어울려 놀도록 해 버린 뒤 멀찍이 물러나 선 월넛 은 잠시 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허, 참... 내가 도대체 왜 쓸데없이 저 녀석한테 화를 낸 거지. 정신이 잠시 어떻게 됐었 나." 그 일이 있은 후로 보리스는 다시는 검을 허리에서 풀어놓지 않게 됐다. 연습을 끝내고 쉴 때는 물론이고 식사를 하거나 백작 내외를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잠잘 때에도 언제든지 뽑을 수 있도록 바로 머리맡에 놓아두고 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리스는 검을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다는 행동의 의미에 대해 스스로 정 확히 깨닫게 됐다. 이곳은 평화로운 고장의 아름다운 성, 하인들은 모두 그를 섬기고 백작 내외는 겉으로 그를 아들처럼 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모두 허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너무 도 당연한 일인데, 자꾸만 잊었던 것이다. 그러나 검을 항상 몸 곁에 둠으로써 그것은 이제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 분명한 사실이 되어갔다. 자신은 적진 한가운데 내던져져 있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 없는 상태였다. 스스로가 아직 약해빠진 나머지 이 이상 경계한다 해도 일어날 일을 막을 능력이 없기 때문이지, 사실을 말하자면 밤낮으로 눈을 뜨고 있어도 모자란 상황이었다. 살겠다고 발버둥치고 있지만, 언제 누가 다가와 목을 베어버린다 해도 지금의 그에게 막을 방법이 있는가. 그러나 그 검이 뽑혀지는 일은 도무지 없었다. 연습장에서조차, 월넛 선생은 로즈니스와 캐 미아를 붙들고 시답잖은 놀이를 계속할 뿐, 보리스에게는 아무런 체계적인 지식도 주지 않 았다. 명령한 대로 매일같이 달리기를 하는 생활만이 한 달도 넘게 계속되었다. 달리기가 끝나고 나서도 시간과 기력이 남게 되자 마지못해 시킨 것이 검을 머리 위로 똑바로 올렸다가 아래 로 내려 겨누고, 다시 올리고 하는 일의 반복이었다. 마치 일부러 지루한 것만 골라 시켜서 지쳐 나가떨어지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지루한 일을 반복하는 보리스를 유일하게 지켜보아주는 것은 항상 곁에 있는 란지 에뿐이었다. 어떤 평가도 조언도 격려도 하지 않았지만, 그 지켜보아 주는 눈이 있다는 것만 으로도 보리스는 묘하게 힘을 얻었다. 그조차도 없었다면 정말 지쳐버렸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란지에에게 하지는 않았다. "아가씨, 오늘은 아무래도 비가 내릴 것 같아요." 주방 아주머니에게 갔다가 이야기를 얻어듣고 온 캐미아가 자기도 뭔가 볼 줄 안다는 듯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 즈음이 되자 캐미아가 아니라 그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하늘은 어슴푸레한 비구름을 품고 있었다. "정말 그러네?" 로즈니스의 목소리는 일부러 월넛 선생더러 들으라는 것처럼 살짝 높아져 있었다. 예상대 로 선생이 곧장 대꾸해 왔다. "그럼 오늘은 연습 그만두고 들어가서 이야기나 할까?" "네!" "재미있는 이야기예요, 선생님?"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월넛은 보리스와 로즈니스를 드러내 놓고 차별했다. 로즈 니스가 뭔가 하자고 하면 뭐든 선선하게 들어주었지만 보리스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았 다. 보리스가 본래 요구하는 것이 거의 없는 소년이기도 했지만, 월넛은 심지어 그와 대화하 는 것조차 피하는 것 같았다. 로즈니스까지도 이미 눈치를 채고 있을 정도였다. 본래부터 남들과 달리 특별 대우를 받는 데 익숙해져 있는 그녀였지만 그래도 보리스의 경우는 약간 달랐다. 일단 한 가지만 생각해 도 그랬다. 보리스가 그 뭐라는 소년을 이기지 못하면 바로 자신한테 재앙이 닥치지 않겠 는가! 백치한테 시집을 가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로즈니스는 여전히 검을 올렸다 내리는 연습을 하고 있는 보리스 쪽을 흘끗 보더니 말했 다. "여기 있으면 비 맞을 텐데, 오늘은 오빠도 같이 들어가서 얘기 듣게 해요, 네?" "그럴까?" 예상 대로였다. 로즈니스가 말하자 보리스와 란지에도 함께 성 안의 거실로 들어가게 되었 다. 그들이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곧 비가 내렸다. 유리창 밖으로 푸른 직선의 비가 끊임없 이 그어지는 것을 보리스는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이 대륙에는 많은 나라들이 있고, 또 많은 검사들이 있지. 오늘은 그들에 대한 얘기나 해 줄까." 드디어 월넛 선생이 입을 뗐다. 그러더니 사이를 두고 과자를 세 개나 집어서 한 입에 쑤 셔 넣었다. 그리고 목이 막히자 따뜻한 차를 물처럼 꿀꺽꿀꺽 마셔서 다 녹여버렸다. "아, 거 맛 좋다. 갑자기 배가 더 고파지는데. 본래 뭔가 한참 먹고 있을 때 더 배가 고픈 법이란 말이야. 넌 그런 거 느껴 봤냐? 한참 배고프다가 드디어 음식을 잔뜩 쌓아놓고 먹어 대는데, 어차피 자기가 다 먹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한시라도, 더 빨리 먹고 싶어서 초조해지고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기분 말이다. 느껴 봤어?" 보리스는 어리둥절해져서 월넛을 올려다보았다. 검사 이야기를 한다고 하다가 이야기가 엉 뚱한 데로 샜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독하게 배고프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는 보 리스였지만 아직껏 그런 감정은 경험한 일이 없었다. 이미 먹고 있는데도 더 먹고 싶고, 이 미 자기 것인데도 그걸 어서 씹어 삼키지 못해 안달하게 된다고? 실제로 배를 곯아본 일이 없는 로즈니스는 아예 황당한 듯한 표정이었다. 귀족인 그녀가 음식에 대해 저런 식으로 집착하는 것을 점잖게 느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월넛은 두 사람의 표정에도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식욕이란 것도 실은 대단히 강력한 욕망인데 말야, 거기에 사로잡혀서 도저히 그걸 억누 를 수가 없고 충분히 만족스러운데도 자꾸만 더 탐닉하게 될 때가 있다. 게다가 인간이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양에는 한도가 있기 때문에 그건 더 불안정한 욕망이지. '먹고 싶다!'라 는 것은 틀림없는데 조만간 더 먹지 못하게 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란 말이야. 그러면 어 떻게 되느냐, 지금 먹고 있는 그것을 가능한 한 더 좋은 걸로 하려고 신경을 쓰게 돼. 한시 바삐 뱃속에 먹을 것을 쓸어 넣고 싶은 것과는 별개로 그 중에서도 최고의 맛, 최고의 조합 으로 배를 채우고 싶어서 골몰하게 되지. 평소 같으면 그냥 먹었을 맛없는 부분에는 손도 대지 않고 오직 가장 나은 부분만 골라서 먹는 거야. 문제는 이렇게 식사를 끝내고 나면 쓰 레기가 많아져. 먹다 남긴 것 투성이가 되거든." 보리스는 문득 이 이야기가 단순히 식욕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실은 그건 모든 욕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가지고 또 가져도 더 갖고 싶고, 올라가고 또 올 라가도 더 올라가고 싶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식욕에는 분명 어느 순간 분명 한계가 오는 것이 틀림없는데 다른 욕망들은? 그런 욕망들은 언제 한계가 그어져 끊기는 것일까? 갑자기 월넛이 로즈니스를 보며 물었다. "로즈니스, 네가 가장 원하는 것은 무어냐? 이렇게만 된다면 소원이 없겠다, 싶을 정도로 원하는 게 있냐?" "네?" 평소 갖고 싶은 것을 참은 적이 없는 그녀인지라 그런 질문이 낯설었던 듯했다. 아버지가 '뭐가 갖고 싶으냐, 로즈?'하고 물을 때는 그 것을 주기 위해서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은 아니었다. '아마 가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소원이 있다면 그게 뭘까?' 라는 식의 생각 은 그녀에게 전혀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전 다 갖고 있어요. 또 뭔가 갖고 싶으면 아버지가 다 해주시니까 걱정할 필요도 없고요." "아닐 텐데. 아버지가 들어 줄 수 없는 '그 소원'이 있지 않으냐." "그게 뭔데요?" 월넛은 고개를 젖혔다가 묶은 머리채를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하하... 아니, 아버지가 좀 도와줄 수는 있겠군. 너, 켈티카의 궁정에서 데뷔하게 될 때 가 장 아름다운 처녀로 주목받고 싶다고 바라고 있지 않으냐? 그래서 수많은 귀족 청년들의 프 로포즈를 받으며 누구를 택해야 할 지 고민하게 되고 말이지, 안그래?" "네... 네에?" 로즈니스는 어찌 보면 그런 생각은 꿈에서도 해본 일 없다는 듯한 얼굴로, 또 달리 보면 완전히 정곡을 찔린 듯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월넛은 이제 보리스를 돌아보았다. "넌 어떠냐? 내가 말하기 전에 먼저 네 소원을 말해 볼 테냐?" 그 즈음 보리스는 이미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언지 확실히 결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별로 숨길 필요도 없는 것이라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누구의 은혜도 입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자립할 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월넛은 대뜸 말했다. "로즈니스의 소원보다는 이루어지기 쉽군. 적어도 경쟁자는 없을 테니까 말이야." "경쟁자라고요?" 다짜고짜 그렇게 묻는 로즈니스는 방금 전에 소원 같은 건 없다고 말하던 것은 그새 잊어 버린 듯한 얼굴이었다. 월넛은 대수롭잖은 어조로 대꾸했다. "아, 너한텐 경쟁자가 있어. 딱 네 나이 또래인데, 벌써부터 켈티카 사교계에서 아노마라드 최고의 신부감으로 자랄 거라고 소문이 자자 한 아이가 있거든. 그 애를 제치지 못하면 네 꿈은 물거품이 되겠지." "게 누군데요!" 정말로 화난 것 같은 목소리였다. 보리스는 로즈니스가 아무래도 오늘 안에 기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티나 공작의 딸, 클로에 다 폰티나라는 애지. 직접 봤지만 정말로 미인이 되겠다 싶은 얼 굴이었다고." "도 안 되잖아! 거짓말이야!" 월넛 선생은 로즈니스를 놀리고 있었지만 로즈니스에게 이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처 음 왔을 때 호두열매 때문에 한 차례 속았다고 팔짝팔짝 뛰었던 적이 있는데도 월넛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그녀를 보며 보리스는 어이가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보리스는 솔직히 월넛이 말한 저 클로에라는 소녀가 실제 인물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하시고 하시던 이야기나 마저 해주시죠." 보리스는 월넛이 가끔 하는 장난을 달갑게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았다. 그의 입장에서 저 자는 아직 속을 알 수 없는 경계 대상이었다. 뽀로통해져서 더 말도 하지 않게 된 로즈니스를 쳐다보며 한 차례 키득거린 월넛은 남은 과자를 우걱우걱 다 먹어버리고는 과자 가루를 곳곳에 흘리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아노마라드 최고라고 하는 기사가 누군지 아느냐?" 외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보리스였다. 당연히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견문이 좁은 녀석이군. 강피르 자작이다. 기사답게 창을 잘 쓰고, 또 말을 다루는 솜씨에 있어서도 대적할 자가 없지. 벌써 마흔이 가까운 나이인데도 아노마라드 안에선 아직 그에 버금가는 기사가 없다고들 그런다. 현재 체첼 국왕 폐하의 근위 대장이고 폐하의 총애도 아 주 두텁지. 먼발치에서 봤는데 콧수염을 두 갈래로 날렵하게 기른 것이 무지 점잖아 보이는 자였단 말이야. 과연 평판 만큼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특히 부인네들한테 예의바르고 정도 에서 어긋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자라고 소문이 들었어." 그 정도 설명만으로도 대강 어떤 사람인지 짐작이 갔다. 월넛은 계속 말을 잇고 있었다. "아노마라드 북쪽에 있는 오를란느(Orlanne)는 영토가 아주 좁지도 않은데도 공국을 자처 하며 아노마라드의 국왕 폐하를 죽 주군으로 모시고 있는 나라지. 그 방식의 편리한 점을 일찍이 깨달아버린 자인 것 같아. 그 오를란느의 공작이란 자 말이야." 또 옆길로 새는 건가 싶었지만 다행히도 그렇지는 않았다. "그 오를란느 공작의 아들이 바로 그곳 최고의 검사라지. 이제 열여덟쯤 되었다고 했던가? 나이답지 않게 겸손한 자라서 그걸로도 상당한 명성을 얻었지. 몇 년 전 하이아칸(Haiacan) 의 항구 도시 엠그란드에서 열렸던 '실버스컬(Silver Skull)' 에서 우승을 하고도 그 영예를 주최국인 하이아칸의 소녀 여왕에게 돌린 일은 아주 유명하지. 그녀가 떨쳐 일어나 출전했 더라면 자신에게 이런 영광이 오지는 못했을 거라고 했던가? 덕택에 젊은 공자가 하이아칸 여왕에게 청혼하려 한다는 소문이 한동안 사람들의 입과 귀를 즐겁게 해 주기도 했고 말이 야." "실버... 스컬이 뭐죠?" 보리스는 정말로 이런 일들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었다. 앞서 말한 소문 역시 듣도보도 못 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월넛 역시 똑같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실버스컬을 몰라? 열 다섯 살부터, 스무 살 생일을 넘기지 않은 대륙의 모든 소년 소녀들 이 루그란(Rugran) 국왕이 내리는 순은의 해골을 놓고 한 해에 한 번 무예를 겨루는 대회 라고! 본래는 루그란 전통의 풍습에서 시작했지만 이제는 전 대륙적인 제전이 된 경기지. 설마 트라바체스 사람들은 실버스컬에 출전하지 않는 건가? 하긴 아직껏 트라바체스 출신이 우승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일이 없긴 하지만 말이야." 보리스는 정말로 트라바체스 사람들이 실버스컬 대회에 출전하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몰 랐다. 그러나 형 예프넨을 떠올리지 않을 수 는 없었다. 형은 훌륭한 검술을 지니고 있었지 만 한 번도 그런 대회에 대해서 언급한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트라바체스에서 그런 대회에 출전하는 것은 그리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음이 분명했다. "어쨌든 그건 그렇고... 그럼 그 옆의 렘므(Lemme) 왕국으로 가볼까. 거기엔 진짜 무시무시 한 자가 두 명 있는데, 하나는 렘므 국왕의 여동생인 지나파 공주고, 또 한 명은 바로 님 (Nym) 반도 끝과 엘베(Elbe) 섬 등지에서 지금도 흩어져 살고 있는 야만족 캄자크의 한 전 사다. " 빗발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클로에라는 정체 모를 소녀의 일에 골몰하고 있던 로즈니스 도 슬슬 다시 월넛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어때, 공주와 야만족이라니 꽤나 이질적이지? 그게 렘므의 방식이야. 가장 강력한 캄자크 를 비롯해서 대략 네 부족의 야만족들이 북방영토 내에서 활개치며 살아가고 있는데 국왕은 어느 정도 그것을 수수방관하지. 특별히 저들의 영역을 침범하지만 않으면 야만족들은 저 절로 렘므의 국경을 지켜 주거든? 물론 야만족들도 머리는 있는지라 강대한 군대를 가진 렘 므 왕국에게 정면으로 덤볐다가는 승산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 하여간에 이 별난 공 생관계 덕택에 북 렘므, 즉 님 반도 끝과 그 근처 섬들은 호위 용병을 고용하지 않고는 감 히 돌아다닐 수 없는 곳이야. 야만족들은 렘므 사람을 잡으면 몸값을 흥정하지만, 그 외 다 른 나라 사람을 잡으면......" 월넛은 갑자기 로즈니스를 빤히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머리털이 붙은 채로 가죽을 벗겨서 썰매 장식을 만들지." "엄마야!" 화들짝 놀란 로즈니스가 저도 모르게 보리스의 팔을 움켜잡았다가 다시 급히 놓았다. 그러 고도 안심이 안 되는지 두리번거리다가 옆에서 있는 캐미아를 붙들어다 손을 꽉 쥐고는 한 숨을 휴 내쉬었다. 월넛은 그저 씩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다지 만족한 웃음 같지도 않았다. "지나파 공주는 렘므 왕가의 전통적인 혈통대로 타고난 무골이라 키도 크고 체격도 대단한 여자지. 한때 야만족들이 렘므 왕국의 통치에 반발해서 전쟁을 일으켰을 때 지나파 공주가 선봉에 섰는데 그때 수많은 야만족들의 골통을 빠갠 걸로 유명해진 것이 바로 그녀의 플레 일(flail) '새비지이터(Savage Eater)'야. 무기의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는 반항하 는 야만인들을 아주 싫어하거든? 그런데 그런 그녀한테 끝끝내 굴복하지 않는 야만인이 또 있으니 그 자가 캄자크 족의 시고누라는 자란 말이야. '꺾이지 않는 시고누', 들리는 바로 그 자는 무기도 필요 없고 아예 맨손에 맨몸 자체가 그대로 무기인 자라는데, 직접 본 일은 없 지만 기가 막힌 주먹질과 발차기를 구사한다고 하더군. 둘은 4차 엘베 전투에서 직접 마주 칠 기회가 있었는데 결판은 내지 못했어. 그래서 아직도 누가 최고인지 가리지 못한 거지. 둘은 직접적인 원한은 없다 해도 서로 결코 화해할 수는 없을걸." "야만인이 공주를 이기지 못해서 다행이에요." 호르르 한숨을 쉬며 로즈니스가 말했다. 그녀는 지나파 공주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야만족 이 공주의 머리가죽을 벗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새삼 오싹해지는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루그두넨스 연방이다. 뭐 말할 것도 없이 레코르다블 출신일 거란 사실은 뻔 한 거고...... 바로 용병대장 두르가나라는 잔데, 그 자가 이끄는 용병단 '청동 번개'는 천여 명도 넘는 대규모 용병단으로 웬만한 왕들의 직속 부대보다 더한 규모와 전투력을 자랑하는 조직이란 말야. 레코르다블은 강한 세력을 가진 용병단들이 정권조차 좌지우지하는 곳인데 그 중에서도 '청동 번개'는 첫째, 아니면 둘째로 꼽히는 강력한 집단이다. 청동 번개의 중요 한 인물들은 다들 한 번 이상 두르가나에게 도전해서 굴복당하고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라는 이야기는 유명하지. 두르가나는 잔인하면서도 또 대단히 영리한 자라, 한 번 적대 관계가 되 었던 자는 언제라도 찾아내어 반드시 죽여버린다고 그래. 다만 그 자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웬만한 전투에서는 직접 선봉에 서는 일이 없어졌어. 그러니 실력은 좀 녹슬었을 수도 있겠 군." 이야기가 맺어지는 분위기인데도 트라바체스 이야기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모국에 대한 어설픈 애국심 같은 것은 보리스에게도 없었고, 다만 평소 항쟁으로 밤낮을 보내는 그곳에 서 이름난 전사 한 명 탄생하지 않았다는 것이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니, 솔직하게는 한 심하다는 생각이었다. "네 나라 얘기가 안 나와서 좀 섭섭하지?" 흡사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한 마디 하더니 월넛은 벌렁 의자 등받이로 몸을 누이고 두 학 생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씨익 웃었다. 보리스는 그가 왜 웃는지 몰랐다. "그것 참, 이상한 녀석들이란 말이야. 너희는 대륙에서 강하다는 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무슨 생각이 나냐? 응? 로즈니스부터 말해 봐." 로즈니스는 뭔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눈을 아래로 굴리다가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우리나라의 용사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강하면 좋겠구나, 뭐 그런 정도요?" 월넛은 단지 피식 웃기만 하더니 이번엔 보리스를 보았다. "넌?" 보리스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들은 그들이고 저는 저고, 별 생각 없습니다. 적으로 마주치지 않으면 그만이지요." 월넛은 약간 진지한 표정을 했다. "바로 그게 문제야. 그들보다 강해지고 싶다거나, 그들의 실력을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다 거나, 그런 생각이 안 든단 말이지? 검을 배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최고가 되고 싶다는 생 각이 없단 말이냐?" 보리스는 월넛의 말을 들었지만 여전히 별다른 생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저도 모르게 이 런 말이 나왔다. "그렇게 많이 강해져서 무엇합니까? 제가 그들과 만날 가능성은 몹시 희박할 테고, 만나더 라도 적이 될 가능성은 더더욱 적겠죠. 전 그냥 큰 위험 없이 살아갈 정도면 족합니다. 오히 려 어줍잖은 실력으로 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더 죽기 쉽지 않을까요?" "허, 허허, 허허허허......" 월넛은 이제 완연히 당황한 얼굴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보리스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얼굴에서 뭔가 특별한 것을 찾아내려는 사람처럼 그렇게 구석구 석 살펴보다가 말했다. "넌, 네 목표는 단지 살아남는 것, 그것 하나뿐이냐?" 아주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예." "똑같이 살아남더라도 더 훌륭하게, 더 만족스럽게 살아남고 싶다는 마음은 없는 거냐?" 그것은 어조보다 훨씬 진지한 질문이었다. 보리스는 월넛이 그로부터 뭔가 구체적인 것을 끌어내고 싶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강한 것, 단단한 것, 씨앗 속의 핵과 같은 것을.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제게 그런 것이 허락되어 있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가능한 한 더 오래, 덜 위험 하게 사는 길을 택할뿐이지요." "허락이란 말은 모호하군. 운명을 거스르지 않는 한도 내에서, 운명의 눈에 띄지 않고, 조 용히 머리 숙이고 살겠다는 말이냐? 비록 짧은 인생일지라도 모두의 가슴속에 오랫동안 남 을 위업을 이루고 싶은 마음은 없는 거냐? 절정의 순간 화려하게 지는 꽃잎이 아름답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냐?" 서서히 보리스는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해답을 무의식중에 끌어내기 시작하고 있었 다. 자신조차 몰랐던 인생에 대한 느낌이 말이 되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죽으면 그걸로 끝이지요. 누구도 보상해주지 않을 테죠. 고작 남은 사람의 가슴속에 남는 것이야말로 구질구질하게나마 살아남는 것보다 훨씬 시시한 일인 것 같습니다. 죽은 사람의 인생은 거기서 멈추는 거지요. 박제처럼... 화려하지만 아무 의미도 없는 그런 것...... 한 순간 불타올라 짧게 빛나고, 그걸로 끝나는 것은 싫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만족을 주는 것은 자신 도 만족할 수 있을 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면, 그 후의 일은 어찌 되도 좋은 거죠." 월넛은 잠시 보리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더니 뜻밖의 질문 을 했다. "지금까지 너를 위해 죽은 자는 몇이지?" "'......" 말문이 막혔다. 구체적으로 '나를위해' 죽었다고 말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형 예프넨조차 어찌 보면 손쓸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의 안식을 택한 것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리스 는 누군가는 죽고 자신은 살아남았다는 사실의 대비를 아주 강렬하게 느끼고 있었다. 아버 지와, 어머니와, 고모와, 수많은 병사들...그리고 형은 죽었고, 자신은 살았다. 여기서 더 누군 가를 위해 죽는 일 따위가 필요한가? 죽어 누군가의 가슴속에 남는다는 것, 듣기는 좋지만 그건 실은 산 자의 짐일 수도 있는 것인데? "...그런 사람 없습니다." "넌 너무 여러 사람의 삶을 살고 있어.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오래 산다고 치자. 그런다 고 죽은 사람들의 생애를 모두 합한 만큼 오래 살 수 있을 거 같으냐? 넌 불멸자가 아니야. 인간은 다 죽는다. 그리고." 월넛의 눈동자는 죽은 나무와 같은 흑갈색이었다. 거기에서는 희미한 나무진과 재, 죽은 자 를 태우는 연기의 냄새가 났다. "인간이 죽는 때가 바로 욕망이 죽는 때다." 무슨 의미였을까, 문득 보리스는 맨 처음에 음식에 대한 욕망을 이야기하던 목소리를 기억 해 냈다. 식욕에는 끝이 있는데 다른 욕망들의 끝은 어디인가, 그렇게 생각했던가? "그러나 살아 있는 한 욕망을 부정할 수는 없어. 언젠가는 끊어지는 때가 온다는 것을 알 기에 현재의 욕망을 정성스럽게 충족시키고자 하는 갈망은 더 커진다. 마치 배가 불러질 것 을 알기에 일부러 가장 맛있는 것으로만 골라 배를 채우듯. 그런데 말이지, 욕망을 쉽게 충 족시킬 수 있는 자들일수록 고르고 고르느라 쓰레기를 많이 남기게 된단 말이야. 그런 자들 이 살아간 자리는 곳곳이 먹다 버린 쓰레기들이야. 그러나 자신의 욕망을 쉽게 채울 수 없 는 자들은 다르지. 언제 배가 고파질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면 닥치는 대로 먹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 그때까지만 해도 보리스는 월넛이 자신에게 하려는 말이 무언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 순 간, 갑자기 월넛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래서 난 네 생각이 부조리하다고 하는 거다! 넌 배고픈 자야. 그러면 땅에 떨어진 것이 든, 누가 먹다 남긴 것이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먹어야 되는 거지. 게걸스럽다는 것은, 그게 인생에 대한 것일 땐 전혀 흠이 되지 않아. 그러나 너는 식탁에서 한 발짝 물러나 뚜 껑으로 가려진 접시들을 단지 바라보기만 하고 있어. 그러면서 오래 살겠다고? 굶어죽지 않 으면 다행이란 걸 알아야지!" 보리스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수많은 생각들이 오랫동안 삼켜 눌렀던 파도처럼 치밀 어 올랐다. 그는 그 자신도 놀랄 정도로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리 배고프다 해도 먹고 싶지 않아서 안 먹는 건 자기 마음이죠! 굶어죽더라도 자기 책임인데 누가 참견합니까? 죽고 나면 모두 마찬가진데 왜 마음대로 살지 못하죠? 제가 강 해져서 저 위대하다는 용사들을 모두 죽인다 해도 달라지는 게 무엇입니까!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이... 말을 하려 했었던 것일까. 다시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 죽은 사람. 그러나 월넛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은 채 매서운 눈으로 보리스를 쏘아보았다. "틀렸어! 넌 네 삶을 스스로 더 빈약하게 만들고 있어. 네게 부족한건 바로 의지야! 죽은 사람의 삶은 그걸로 끝이라고 말하면서 어째서 네 삶의 가치를 자꾸만 그들의 죽음에 두는 거냐? 정말로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모조리 끝장내어 버리고 넌 너대로 네 욕망을 쫓으며 새 롭게 살아라, 아니면! 그들을 위해서라도 더 힘껏, 더 오래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네가 불 멸자가 될 수 없는 한, 너는 네 삶의 밀도와 가치를 높임으로서 그들이 잃어버린 삶을 대신 할 수밖에 없다, 만일 네가 그러고 싶다면!" 어느 쪽이든 가리키고 있는 것은 한 방향이었다. 흡사 나침반의 바늘 같았다. 까닭을 알 수 없었지만 보리스는 그러한 삶의 지침이 자꾸만 회의적으로 느껴졌다. 무언가를 위해서 사는 것조차 다 쓸데없는 일처럼, 전에는 이렇지 않았었다..... 한때 그는 열렬히 그의 집안이 안전 해지기를 바랬고, 형이 살아남기를 원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열정이 다 타버리고 재만 남은 것처럼 어떤 소원도 느낄 수가 없었다. 형처럼 윈터러 를 휘두를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그것조차 누군가에게 신세지거나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감정의 연장선상에 있을 뿐이었다. 살아남는 것, 그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는 건가? 예프넨은 그에게 말했었다. 살아남으라고, 네 생애의 모든 가능성을 다 실험할 수 있을 때 까지 오래오래 살아남으라고, 그렇게 말했었다. 그는 쉽게 죽지 않을 것이다. 결코 쉽사리 굴복해서 잊혀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 게 해서 얻는 긴 세월... 그건 무엇을 위해 써야 하는 것일까. 긴 침묵을 갠 것은 로즈니스의 목소리였다. "선생님은 왜 오빠가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하시죠? 오빠는 우리 집에서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잘 살고 있어요. 배고파지는 일 같은 건 없다고요.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알 수가 없네요." 월넛은 갑자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이 서서히 평소의 그것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리 스는 여전히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보고 있었다. "아, 역시 그렇겠지. 하지만 난 배고픈 사람이라서 뭔가를 먹어야해. 란지에, 가서 뭔가 먹 을 것을 좀 달라고 해라. 따뜻한 게 좋겠어. 식당에 한 상 차려 주면 더 좋고." 란지에는 그때까지 그들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를 말없이 계속 듣고만 있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서서 나가기 전에 보리스에게 다시 한 번 눈길을 주었다. 비 오는 날의 이상한 토론은 그렇게 끝이 났다. 3. 엇갈림과 겹침 그러나 밤의 그들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밤 11시가 되면 보리스는 흘로 검을 집어들고 연습장으로 나왔다. 거기에는 어김없이 월넛 선생이 한 손에는 윈터러, 다른 손에는 떡갈나무 막대를 든 채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마주 선 채로 서로를 쏘아보았다. 내려다보는 것은 달빛뿐이었다. 홀리게 하는 푸른 달빛. "자, 다시 시작해 볼까?" "......" 검을 뽑았다. 저기 저 자의 손에 흰 칼집의 윈터러가 쥐어져 있다. 그것을 빼앗는 것이다. 보리스는 땅을 박차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트탁! 검이 단단한 막대에 부딪치자마자 몸 전체가 뒤로 밀쳐지는 것이 느껴졌다. 월넛은 윈터러 를 옆구리에 낀 채 떡갈나무 막대 하나로 보리스를 상대했다. 그러나 그 막대는 검에 맞아 도 잘라지지도, 부러지지도 않았다.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물러났다가 다시 몸을 수그리며 공격으로 들어갔다. 이젠 월넛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보리스가 든 것은 날이 선 검이었고 그걸로 실제로 사람을 벨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보리스도 처음에는 이 대전에서 약간은 주저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보리스가 날이 선 검 아니라 저 윈터러를 빼어 들고 있었다 해도 월넛의 나무 막대 한 개를 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한 번도 성공한 일이 없 었다. 처음 윈터러를 빼앗긴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매일 같은 시간에 이 자리에 나와 이 기이한 싸움을 벌였지만, 윈터러를 되 빼앗기는커녕 월넛의 옷깃 하나 베지 못했다. "오, 꽤 빠른데?" 그것은 예프넨 형과 언덕에서 목검을 들고 대전하던 때, 형이 곧잘 던지곤 했던 칭찬의 말 과는 달랐다. 반쯤은 비웃음 같았고, 달리 보면 그를 부추겨 더욱 포기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간에 보리스는 조금도 굴복하지 않고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넘어지고 쓰러져 도, 상처를 입고 피를 흘려도, 정해진 시간이 지날 때까지는 한시도 쉬려 하지 않았다. 달려 들고, 달려들고, 또 달려들었다. 언젠가는 모두의 관심에서 벗어나, 누구의 참견도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걸 위해서는 저 윈터러를 쓸 수 있을 정도의 힘은 지녀야 했다. 왜냐면 저건 수많은 사람 이 노리는 검이니까, 지키기 위해서는 확실히 실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건 수단일 뿐, 목적은 아니었다. 그는 조용한 삶을 위해서 필요한 만큼 강해지려 할 뿐 그 이상의 것에는 관심 없었다. 대륙의 강자들이 저들끼리 대륙을 나누어 가지더라도 그는 그가 숨어 있을 하나의 동굴을 발견해 낼 것이다. 또는 바다를 건너갈 것이다. 홀로, 누구의 위협도 당하지 않고, 하고 싶은 생각에 잠길 수 있도록. 원하는 만큼 슬퍼하고 울 수 도 있도록. 답답하다...... 눈물 흘릴 수 없는 곳에 갇혀 있는 자신의 감정 때문에...... "딴 생각을 하는 게냐!" 갑자기 수비에 치중하던 월넛이 공세로 돌아섰다. 막대를 뽑아 앞으로 힘껏 내치며 보리스 의 어깨를 쳤다. 급히 피하려다가 발을 헛디뎌 바닥에 굴러 버렸다. 찝찔한 땀이 흘러 입술 에 고였다. 넘어지면서 무릎을 돌에 찧어 종아리가 한동안 마비될 정도로 얼얼했다. 그러나 월넛은 형이 아니었다. 달려와서 뺨을 감싸며 '다치지 않았어?' 하고 묻지는 않았다. 한달음에 다가오더니 곧장 막대로 보리스의 등을 찌르려 했다. 힘껏 뒤채며 옆으로 굴렀다. 젖은 뺨이 흙투성이가 되었지만 다음 공격이 오기 전에 급히 다른 쪽 무릎을 짚고 몸을 일 으켰다. 다리의 통증은 금새 사라졌다. 소매로 입가의 땀을 슥 닦으며 그는 다시 공격할 태세를 취 했다. 급한 숨으로 들썩이는 머리 위를 달빛이 하얗게 적시고 있었다. "갑니다!" 탁, 탁탁... 힘껏 달리며 몸을 솟구쳤다. 키가 큰 월넛의 목을 노렸다. 월넛은 일부러 그런 것처럼 자세를 약간 낮추더니 막대를 가로로 횝쓸듯 휘둘러 보리스의 허리를 치려 했다. 그 러나 보리스는 그 자세에서 발을 올리며 다가오는 막대를 세게 걷어찼다. 자세는 좋았다. 그 러나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막대는 주춤, 물러나다가 말았다. "좋은데!" 검이 반짝, 광채를 머금고 월넛의 목을 향해 찔러져 들어갔다. 월넛은 목을 젖히더니 팔꿈 치를 확 올리며 검을 쥔 손을 쳐내 버렸다. 그러나 보리스는 검을 놓치지 않았다. 이 며칠간의 투쟁에 가까운 싸움으로 보리스에게는 점차 강한 투지가 길러지고 있었다. 이 대결에 제한 시간이 있고 그 후에는 멈추어야만 한다는 것이 그런 투지를 더욱 강하게 했 다. 매일 밤 한 시간, 자정이 되면 끝이었다. 잠간의 기회는 사라져 버렸다. 사실 이 시간을 제하면 월넛은 보리스에게 검을 잡게 하는 법이 없었다. 대련은 상상할 수 도 없고, 지금 맹렬히 공격하고 있는 저 막대 조차 꺼내는 일이 없었다. 로즈니스와 연습용 레이피어(Rapier)로 장난이나 치면서 보리스가 시킨 훈련을 다 하든 말든 관심도 쏟지 않았 다. 낮에 보리스는 월넛 선생이 아니라 란지에와 함께 훈련을 하는 기분이었다. 지켜보아주 는 것은 그 혼자뿐이었다. "마지막 한 번!" 신기할 정도로 시각을 잘 아는 월넛이 그렇게 외치면 보리스의 투지는 한층 더 강하게 불 붙었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이 있지만, 언제까지나 있을 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빼앗아야 한다, 반드시! 처음으로 보리스의 검이 강한 각도를 그리며 월넛의 막대가 예상한 방향을 비켜 가슴으로 찔러져 들어왔다. 월넛은 흠칫하며 막대를 검처럼 내밀어 마주 미끄러뜨렸다. 흠집이 난 일 조차 없었던 떡갈나무 막대가 칼날과 닿아 긁히면서 하얗게 가루가 튀었다. 월넛은 한쪽 손으로 윈터러를 들고 있었기에 막대도 한 손으로 잡을 수밖에 없었다. 두 손 으로 검을 쥔 보리스는 있는 힘을 다해 버티며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 월넛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어렸다. 잘못 본 듯 했으나 아니었다. 잠시 후, 보리스의 입 끝도 살짝 올라가며 미소 비슷한 것을 그렸다. 둘은 마주 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그때였다. "방심하는 거냐!" 막대가 갑자기 주르륵 검의 가드까지 미끄러져 내려오더니 압도적으로 강한 힘을 이용해서 손을 짓이겨 눌렀다. 한 순간이었다. 팔이 휘청거리고 손가락이 풀리면서 검이 허공으로 날 아갔다. 절그럭, 척. 등뒤에서 검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보리스는 등줄기를 싸늘하게 타고 내리는 오한을 느쪘다. 며칠 밤을 싸웠어도 한 번도 검을 놓친 일은 없었다. 몸에서 검을 떼어놓지 않게 된 후로 그것은 한층 더 강하게 집착해 온 가치였다. 늘 졌지만, 쓰러질지언정 검은 놓지 않았 었다. 그런데...... 월넛은 막대를 내린 채 보리스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소년의 턱이 부르르 떨렸다. 울컥, 뭔가가 솟아올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을 압박했다. 그러나 동시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이런 한심한 녀석!" 외침과는 달리 막대를 바닥으로 내던지고 윈터러조차 놓아버린 월넛은 와락 달려들어 작은 소년인 보리스를 번쩍 들어올렸다. 강한 두 손이 그의 겨드랑이를 잡아 머리 위까지 올려 한 바퀴 빙그르르 돌리더니, 다시 왈칵 끌어안아 버렸다. 땀 냄새와 뜨거운 입김... 수염투성이 얼굴애 몇 번이고 소년의 보드라운 뺨을 비비는 그의 입에서는 도무지 감정을 집작하기 힘든 말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한심하구나! 한심하구나, 이 녀석아! 정말로 한심하구나!" 그러나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견딜 수 없이 귀엽다는 듯 그는 소년의 몸을 몇 번이고 강하게 끌어안았다. 보리스의 눈에서 눈물이 몇 줄기 흘러내렸다. 이 상황 때문은 아니었다. 가슴속에 단단하게 응어리졌던 저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가 팍 깨지고 녹아버린 것처럼 거 침없이 눈물이 그렇게 흘렀다. 숨을 제대로 쉬기 힘들 정도로 소리 없는 울음이 쏟아졌다. 형이 죽고 나서, 그를 이렇게 힘껏 끌어안아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누구였던 가슴 은 뜨거웠다. 어떤 열렬한 감정을 느끼는 인간의 가슴이었다. "넌 세상을 다 산 것이 아니야, 이 작은 녀석아.... 무얼 그렇게 참으려 애쓰는 거냐. 이 세 상엔 힘들지 않은 자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싶다는 욕망을, 그리고 더 훌륭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을 숨기지 않으면서, 그렇게 살고 있단 말이다. 인간은 언젠가 죽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야. 한시라도 살아 있을 그 내일을 위해 살뿐인 것인데......." 귓가에서 뜨거운 목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오고 있었다. 달빛이 회오리치며 푸른 밤의 중심 을 흐르는 가운데, 위로 받으면서, 그러나 위로하지는 않으면서, 거친 숨을 공기 중으로 내 보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윈터러가, 마치 산 자의 감정을 흡수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차례 부 르르 떨렸다. 10월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틀 후면 이자보 다 벨노어, 즉 벨노어 백작부인의 생일이었다. 이날은 1년 중 벨노어 성 에서 가장 성대한 파티가 열리는 날이었다. 이미 오늘 도착한다는 기별을 보내 온 손님들도 제법 되었다. 어째서 백작이 아닌 백작부인의 생일인가는 좀 모호했지만, 어쨌든 하인들은 이것도 너그 러운 백작이 실천하는 아내 사랑 정책의 일환이라고 단순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리 스가 보기에 그것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점이 있었다. 그 의문은 손님들이 도착하기 시작 하면서 서서히 풀렸다. "오빠, 얼른 얼른! 켈티카에서 아멜리 이모님 내외하고 실비엣이랑 줄리나가 왔단 말이야!" 며칠 전부터 로즈니스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바에 의하면 실비엣과 줄리나는 백작 부인의 여동생이 아르장송 자작과 결혼하여 낳은 두 딸로서 나이는 열 다섯과 열 둘이었다. 둘 다 예쁘기도 하지만 수도의 세련된 예절을 익힌 소녀들이어서 지방에 사는 로즈니스로서 는 크게 부러워하는 처지이기도 했다. "절대로 실수하면 안 돼, 알지? 그 애들한테 트집 잡히면 절대로 안된단 말이야!" 그렇게 지껄여 놓고서 금방 또 얼굴을 달리하더니 말했다. "오늘은 주인이니까 주인답게 굴어야지! 게다가 난 백작 가문의 딸인걸! 그 애들한테 처질 것은 전혀 없지 뭐야!" 가끔 너무도 솔직한 로즈니스의 말을 듣고 있으면 세상이 모두 그녀가 관심 갖는 그런 일 들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생각될 때도 있었다. 적어도 로즈니스는 새침 떨면서 자 기의 의도를 음험하게 숨기는 아이는 아니었다. 자기의 욕망에 충실하기도 했고, 그것에 대 해 분명한 열의도 가지고 있었다. 보리스가 로즈니스의 요구대로 완벽한 옷차림을 하는 데는 란지에의 손길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캐미아까지 넷이서 응접실로 향하는 동안 로즈니스는 란지에를 흘끔 쳐다보며 피식 미소지었다. 보리스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뭔가 사연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서들 오너라." 처음 보리스가 이 저택에 도착했을 때 백작 가족과 마주앉았던 그 응접실이었다. 이번에는 사람이 여럿이었다. 백작 부처는 물론이었고 로즈니스가 말하던 아르장송 자작 가족, 그들의 하인들, 그 외에도 전혀 설명을 듣지 못찬 것 같은 사람들이 세 명 더 들어와 있었다. 성장 한 부인 한 명과 스물 안팎으로 보이는 부드러운 인상의 젊은이, 그리고 보리스 또래로 보 이는 소년 한 사람이 그들이었다. 갑자기 로즈니스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 아‥‥ 안녕하세요, 아멜리 이모님, 그리고 이모부님. 엘리노 아주머님도 오셨네요. 오 신다는 소식을 듣지 못해서 더욱 반갑게 생각됩니다. 사촌 분들도 모두 편히 쉬시다 가시길 바래요." 보리스는 백작이 해 주는 소개를 기다려야 하는 입장이었다. 로즈니스와 함께 테이블 앞으 로 가자 백작이 보리스를 가까이 서게 하더니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이 아이는 내가 오래 전에 양자로 들인 트라바체스 출신의 아이로 보리스 다 벨노어라고 하지, 본래는 어른이 될 때까지 친부와 함께 지낼 예정이었는데 불의의 사고로 친부가 사망 하게 되어서 당연히 내가 데려오게 되었네. 이제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되었으니 얼굴들 잘 익혀 두도록 하지." 임시에 불과한 양자인데도 친척들에게 소개하는 말투에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보리스 는 그 사실에서 오히려 거리감을 느쪘다. 사실을 말하자면 친척들조차 속이고 있는 꼴이 아 닌가? 그런 것이 백작 가문의 명예라고 하는 것인가? 소개가 죽 돌아가고 나서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은 다과를 들며 점잖게 이야기꽃을 피웠다. 아르장송 자작부인인 백작부인의 여동생은 줄곧 보리스를 약간 불편할 정도로 쳐다보았는 데, 그 점에서는 언니와 정말 닮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역시, 벨크루즈는 소문난 휴양지가 될 만해요. 여기까지 오니 가슴 속까지 탁 트이는 기분 이군요. 날씨도 너무 좋고, 모레는 멋진 파티가 될 것 같아 가슴이 설레는군요." 엘리노 아주머니라는 사람은 키가 작고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여자 였는데 말하는 것도 솔 직하고 온화해서 아멜리 이모라는 사람과는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곧장 아멜리 이모가 말을 받았다. "여기도 좋지만 역시 가장 멋진 곳은 루그두넨스 연방의 하이아칸 이지요. 저 남쪽 바다 아쿠아 코럴 제도(Aqua Coral Islands)의 섬에 별장 하나 갖는 것이 내 평생의 꿈이라니까 요. 딱 한 번 가보았지만 정말 천상의 경치였어요. 거기 가보셨어요?" "아뇨. 하지만 전 여기로도 충분히 만족인걸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경치 좋은 곳이 여기잖 아요. 벨노어도 이름난 아름다운 성이고요." 그러나 자작부인은 손님으로 온 주제에 도무지 물러설 줄을 몰랐다. "하이아칸과 아쿠아 코럴을 못 보셔서 그래요. 거길 가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걸요. 단순 한 시골 풍경이 아니라 새파란 바다와 흰 백사장 너머로 바라다 보이는 녹색 섬들이......." 그때 백작부인 이자보가 입을 열었다. "아멜리, 그곳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해라. 이미 그곳 별장을 알아보고 있으니까. 일이 잘 되 면 초대해 줄 테니 모두 함께 가보면 되지 않겠어." 각각 백작부인과 자작부인이 된 자매는 크게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동생과 나란히 있 으니 언니 쪽이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언니의 권위도 강했다. 부드러운 말투 같지만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하라' 는 의미가 강하게 들어 있는 한 마디에 자작부인 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언뜻 보니 아르장송 자작이 아내를 보며 눈치를 약간 주는 모습도 보였다. "그래, 이제 인사들 했으니 아이들은 저쪽 보리스의 방 거실로 가서 함께 놀도록 해라. 오 랜만에 만났으니 너희들끼리도 인사를 해야지." 백작부인이 말하자 로즈니스가 먼저 일어서서 어른들에게 나가 보겠다고 인사를 하고 나머 지 아이들도 일어섰다. 스물 가까이 되어 보이는 젊은이도 함께 일어서며 말했다. "저도 이 아이들과 오랜만에 이야기나 하지요. 특히 로즈니스는 아주 오랜만이고요. 그럼 좀 있다 뵙겠습니다, 어머니." 문샤인 탑에 있는 보리스의 방에 들어서자 손님인 귀족 소년 소녀들은 다들 약간씩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 또래의 아이들이 쓰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규모도 크고 화 려한 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솔직하게 입밖에 내어 말한 것은 한 사람 뿐이었다. "우와, 이 방 정말 좋잖아. 멋진 곳이군." 엘리노 아주머니라는 사람의 둘째아들인 듯한 소년이었다. 이름은 에를 폰 하미즌이라고 했었다. 그는 휘둥그래진 눈동자를 천장까지 굴리더니 보리스를 보며 씩 미소지었다. 귀족 소년치고는 꽤 소탈한 미소였다. "로즈니스의 오빠라면 형이군. 잘 부탁해." 로즈니스가 약간 과장되었다 싶을 정도로 까륵 웃으며 끼여들었다. "아냐, 얘. 오빠는 사실 나하고 나이가 같아. 하지만 쌍둥이는 아니니까 그냥 우리끼리 오 빠동생 하기로 한 거야." 곁에서 줄리나라는 소녀가 불쑥 말했다. "로즈너스는 양오빠하고 벌써 굉장히 친한 모양이구나?" 줄리나 드 아르장송은 아멜리 이모의 열둘 살 먹은 둘째딸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말투가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 마치 근본도 모르는 양 오빠를 맞아들여 놓고 좋다고 나대는 것이 좀 천박하지 않느냐는 듯 한 어조였다. 로즈니스는 곧장 민감하게 반응했다. "남매끼리 의좋게 지내라고 부모님께서 늘 말하시지 않아? 줄리나 너한테는 오빠가 없어서 잘 모를 지도 모르겠네." 줄리나라는 소녀도 지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실비 언니하고 나에게는 오빠 역할을 해 주는 사람이 얼마든지 많아. 켈티카 의 사교계에서는 좋은 가문 출신 아이들끼리 서로 의남매를 하는 것이 요새 유행이니까. 저 폰티나 공작 가문의 젊은 상속자만 해도 언니한테 얼마나 잘해 준다고. 하긴 로즈니스 너야 시골에서 사니까 우리 유행은 잘 모르겠구나." 로즈니스는 아직 어려서인지, 또는 성격 탓인지 은근히 비꼬는 데는 별로 익숙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줄리나의 이야기 속에서 최근 관심 있었던 이름이 튀어나오자 참지 못하고 묻 고 말았다. "폰티나 공작 가문? 거기가 어딘데?" "어머, 넌 폰티나 공작 가문도 모르니? 안리체 왕비 마마의 친정 가문 아니야? 거기라면 켈티카 사교계에서도 으뜸으로 쳐주는 가문인데 그런 곳도 모르다니, 너 나중에 수도에서 데뷔하려면 고생 좀 많겠다." 줄리나의 무시하는 듯한 말투에 발끈한 로즈니스가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 다. 그러나 귀족답게 교육받아 온 터라 하녀들에게 하듯 거칠게 말하지는 못하고 간신히 참 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내가 듣기로는 폰티나 가문에는 대단한 미인인 딸이 있다 더라. 그런 누이동생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안목도 높겠지." "흥, 두말하면 잔소리지! 우리 언니를 봐. 요즘 귀족 젊은이들 사이에서 얼마나 인기 있는 지 넌 모를걸. 폰타나 가문의 딸이라면 아마도 클로에를 말하는 거겠지? 그 애가 예쁘긴 하 지만 우리 언니를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다고." 클로에라는 소녀가 실제 인물이긴 한 모양이다, 라고 보리스는 무심코 생각했다. 켈티카에서 자랐다는 줄리나는 로즈니스와는 달리 말을 조심하는 기색이 없었다. 로즈니스 는 시골 장원에서 자란 터라 오히려 옛 예의를 잘 지켰지만 또래 귀족 아이들과 어울려 그 들끼리의 사질계를 만들면서 경쟁해 온 줄리나는 벌써부터 어른들처럼 가시 돋친 말투에 익 숙해져 있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녀는 곧장 다음 말까지 내뱉고 말았다. "실비 언니는 조금만 더 나이가 들면 공작 부인이 될 거라고!" "조용히 해라, 줄리나." 그제야 말없이 앉아 있던 실비엣이 입을 열어 동생에게 주의를 주었다. 보리스는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 열 다섯 살이 되어 슬슬 처녀티가 나기 시작하는 실비엣은 날씬한 자태에 갸름한 얼굴이 좨 매력적이었지만 솔직히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미인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보리스는 그녀의 얇게 내리깐 눈매와 무표정한 얼굴을 보며 좋은 인상만을 받지는 못했다. 무언가 청초해 보이는 듯 하면서도 음험한 인상이었달까. 줄리나는 입을 다물었지만 여전히 로즈니스를 향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걸 잊 지 않았다. 그제야 이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젊은이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신경전이라니 보기 좋지 않구나. 사촌들끼리 의좋게 지내야지. 로즈, 줄리, 그리고 실비도." 로즈니스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오스카 오빠. 이번에 다들 만나게 되어서 정말로 반가운걸, 이 근방에는 또래 친구가 없으니까 난 몹시 심심해요. 그래서 다들 오는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평상시 보던 로즈니스를 생각할 때 뜻밖이랄 정도로 어른스런 말이라 보리스는 오히려 의 아하게 느낄 정도였다. 보아하니 로즈니스는 이 친척 오빠에게 다분히 호감을 품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그녀의 한 마디에 어느 정도 분위기가 누그러져 이것저것 친근하게 대화가 오 가기 시작했다. "정말 다들 예쁘게 컸구나. 실비는 이제 완연히 처녀티가 나는데? 젤티카 사교계에서 얼마 나 인기 있을지 보지 않아도 다 알겠어." 오스카 폰 하미즌은 좀 약해 보이지 않나 싶은 외모에 미소가 입가에서 떠나지 않는 젊은 이였다. 실비엣과 줄리나는 작년 파티 때도 왔지만 친척이라 해도 꽤 먼 셈인 이들 하미즌 일가가 온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로즈니스가 처음 응접실에 들어서며 얼굴을 붉힌 것도 이 때문이었는데, 좀더 어렸을 때 그녀는 이 상냥한 오빠를 몹시 좋아하며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몇 살 더 먹은 지금 다시 보니 오스카 오빠는 지나치게 연약한 것처럼 보였다. 전 과 같은 관심은 일어나지 않았고 단지 친근감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로즈니스는 스스로도 자신의 면화가 신기하게 생각되었다. 그것이 무엇 때문인가는 깨닫지 못하면서도. "보리스라고 했지? 난 오스카 폰 하미즌이다. 로즈니스하고 6촌이 되니까 너와도 마찬가지 이겠군. 앞으로도 잘 지내자." "반갑습니다, 오스카 형." 둘은 악수를 나누었다. 보리스는 선량해 보이는 상대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에 약간의 죄책 감을 느꼈지만 간단히 눌러 없애 버렸다. 살기 위해서 하는 일에 무슨 죄책감이 있을 수 있 겠는가. 그것 말고도 자신과는 몹시 달라 보이는 이 이국의 귀족 아이들 사이에서 느끼는 불편함도 있었다. 그들이 불쾌하게 굴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 걱정 없이 느긋한 그들과 생존을 위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도 다르게 느껴졌던 것이다. 비슷한 또래들도 그랬지만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오스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귀족 사회에서 보호만 받으며 자란 유약 한 젊은이인 그는 비슷한 나이였던 자신의 형 예프넨과는 느낌부터가 달랐다. 처음 혼자 방랑하다가 백작을 만나고, 그 사람이 아버지로서 로즈니스를 보호하는 것을 보 고 느꼈던 것과 같은 소외감은 이제 들지 않았다. 지금에 이르자 그런 사람들과 자신의 길 은 완연히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오히려 어른들의 그늘에 기대어 살고 있는 그들보다 자신 이 강하다고 생각되기까지 했다. 부당함이나 슬픔보다는 거리감이 느껴질 뿐이었다. 간식을 준비하기 위해 캐미아와 함께 나갔던 란지에가 혼자 돌아와 보리스에게 다가왔다. "월넛 선생님께서 오늘은 수련을 쉬실 것이냐고 여쭤 보라 하셨습니다." 오늘부터는 손님들이 많이 오게 되니 로즈니스도 보리스도 공부는 파티 이후로 미루라고 백작이 말해 둔 터였다. 로즈니스는 그런 이야기에 뛸 듯이 기뻐했지만 보리스는 공부였든 파티였든 모든 것이 임무의 일환에 불과한지라 기쁨 같은 것도 별로 느껴지지 않았었다. 란지에도 그것을 모르지 않을 터인데 굳이 다가와 이렇게 말하는 까닭이 뭘까? 월넛 선생 이 사정을 모르고 오늘 일정을 물었다면 그가 백작의 뜻을 전해 주면 그만 아닌가. "선생님은 연습장에 나가 계신가?" "예." 로즈니스가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로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시작하려는 찰나였다. "오늘은......." 그 순간 보리스는 마음속으로 뭔가를 깨닫고는 즉시 대답했다. "곧 간다고 전해 줘. 기다리시게 하는 것에 대해서도 벌을 받겠노라고 말씀드려." "알겠습니다." 란지에는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이고 밖으로 나갔다. 보리스가 나가는 그를 잠시 눈으로 쫓다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곁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눈을 돌려보니 실비엣이 관 심 있는 눈으로 보리스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4. 타인들의 연회 그 날은 보름이었다. 약간 쌀쌀해진 날씨라 파티는 실내에서 열렸다. 손님은 그 날 이후로도 꾸준히 도착해서 파티가 열리는 당일 오후가 되자 백여 명에 달하 는 방문객들로 성 전체가 북적거렸다. 절반 가량은 친척들이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친분이 있다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거북하게 보일 정도로 인사치레니 선물이니 하는 것에 신경 쓰면서 백작부인이 여왕이라도 되는 양 비위를 맞추려 애썼다. 상류 사회의 경험이 없는 보리스의 눈에도 확연히 보일 정도였다. 백작의 영애인 로즈니스는 당연히 공주 대접이었다. 연 이틀 동안 벌떼처럼 몰려든 사람들 로부터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미인이라느니, 귀엽다느니, 영리하다느니, 흠잡을 데 없는 예 법이라느니 떠받들어지다 보니 처음에 사촌인 줄리나와 신경전을 벌이던 일 같은 것은 깨끗 이 잊혀진 모양이었다. 로즈니스가 이 파티를 손꼽아 기다리는 이유도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파티의 주최자가 아닌 까닭일 수도 있겠지만, 처음에 로즈니스 앞에서 잘난 체하던 사촌 아가씨들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보리스는 그녀들이 속한 아르장송 자작 가문은 실제로 그다지 세력 있는 가문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백작 부인의 친정이라는 크레산느 가문이 대 귀족이라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것만으로 이 만한 인원이 모인다는 것은 종내 불가사의였다. 만일 친정 집안의 위세 때문이라면 아르장 송 자작부인에게도 비위를 맞추어야 정상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아 첨은 모두 백작부인 한 사람에게 쏠려 있었다. 그 의문이 풀린 것은 수도에서 왔다는 귀족이 술을 한 잔 마시고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은 직후였다. "이번에는... 왕비 마마에서는 안 오시는 모양이군? 마마에서 혹시나 오실까 싶어서 예물도 두 배로 준비했더니만......." 이자보 드 크레산느, 즉 벨노어 백작부인은 아노마라드의 왕비인 안리체의 소꿉동무였다. 아마도 매우 절친했던 모양이었다. 지방 귀족이긴 하지만 강대한 자치권을 누리고 있는 벨 노어 백작과 결혼한 후로도 몇 번인가 안리체 왕비는 이 생일 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 린 시절의 소꿉동무가 중요한 국경을 지키는 변경백(邊境伯)인 벨노어 백작의 부인이 된 만 큼 여러 가지 정치적인 고려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왕비가 이런 남부까지 친히 행차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현 국왕 체첼 다 아노마라드가 몇 년간 켈티카를 장악했던 공화국 정부를 군사력으 로 무너뜨리고 신 아노마라드 왕국의 국왕이 되는 데에 결정적인 배후 지원을 한 폰티나 공 작의 누이동생이자, 작전 참모로도 최고급이었다는 왕비 안리체다. 안리체 다 폰티나가 없 었다면 지금의 체첼 국왕도 없다는 이야기는 이미 정설이었고, 지금의 켈티카 궁정에는 두 국왕이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소문이 파다한 지금, 그녀의 친구라는 위세가 크지 않을 리 없었다. "왕비 마마께서는 올해 왕자님 문제로 몹시 바쁘시잖나. 그 왕자님께서 좀 야단스러운 분 이셔야 말이지." 보리스는 어느 모로 보나 이 파티에서 불편한 존재였다. 사람들은 백작가에 갑작스런 양아 들이 생겼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고, 보리스 역시 그들에게 억지로 적 응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날 파티의 공공연한 화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보리스에 대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아들이 생겼다 해도 백작가의 작위와 벨노어 성을 물려받는 것은 로즈니스일 거라고 속삭였다. 보리스는 일부러 월넛 선생과 오후 늦게까지 수련을 하고 나서 땀에 젖은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느지막이 나타났다. 그리고 란지에에게 배워둔 바 있었던 아노마라드 식 예 법으로 사람들에게 인사 했다. 잠시 후 파티장 안에는 예의 두 번째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저 소년, 사실은 백작이 다른 데서 낳아온 자식 아닐까. 백작부인의 표정을 봐, 영 탐탁찮아 하는 것 같잖아? 파티 자체는 트라바체스 시골에서 온 소년의 눈을 휘등그렇게 만들기에 충분할 정도로 화 려했다. 흡사 '아노마라드 식'이라는 것이 무언지 보여주기 위해서 고안된 것들로 가득 찬 것 같았다. 풍요한 강대국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나 나을 법한 끝없는 음식과 넘치는 술, 끊이 지 않는 음악과 춤....... 열정에 불타 온 몸을 바치며 노는 것도 아니면서, 그치는 일 없이 흘러나오는 이런저런 속 삭임들과 나지막한 웃음들로 밤을 새우는 데 익숙한 자들이었다. 갑자기 큰 소리를 내거나, 뭔가 설명하느라 약간 과장된 동작을 취하거나 하는 것조차 모두 무경우한 사람의 보기 싫 은 행동이 되었다.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누군가 시선 끄는 행동을 한 사람을 힐난의 눈길 로 쳐다보고, 나른한 몸짓으로 잔을 들어올리는 것 이상의 행동은 견딜 수 없는 노동이라도 되는 것 같은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아이들은 한쪽에 모여 있다가 가끔씩 나아가 저택 구석의 연습실에서 가다듬었을 듯한 어 른다운 춤 솜씨를 능숙하게 선보이곤 했다. 멋지게 잘 해내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작은 갈채 가 쏟아졌다. 그러나 그 것조차 로즈니스의 경우에 이르면 잘 하고 못 하고도 없었다. 그녀 가 치마 끝자락을 올려 들고 사뿐사뿐 걸어나오기만 해도 사람들은 나지막이 비명을 울리고 몸을 꼬며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한 표정들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했다. 심지어 백작 부인을 둘러싸고 선 사람들의 표정은 가히 희극적일 정도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꼬마 천사 가 강림했다 해도 그 이상 감명 깊은 표정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어쩜 저렇게 깜찍할까!" "휴.... 벨노어 양은 정말 하늘이 내린 미모네요." "세상에, 저렇게 앙증스럽고 예쁜 딸을 가질 수 있다면 무얼 내놓아도 아깝지 않겠어요!" "켈티카에 간다면 내로라 하는 집안들마다 너나없이 청혼하지 않고는 못 배길텐데!" 보리스는 엉겁결에 그녀에게 붙잡혔다. 로즈니스는 어떤 것을 보여주면 사람들이 더 감탄 하여 찬사를 보낼 지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키도 반 뼘 차이나 날까 싶은 귀여운 의 남매가 손을 맞잡고 댄스를 보인다면 누구도 눈을 뗄 수 없을 것이다. 그건 틀림없는 계산 이긴 했다. 단 한 가지 문제만 제한다면. "나, 난......." 거절하고 어쩌고 할 틈도 없었다. 순식간에 그들은 파티장 한가운데 와 있었다. 그새 로즈 니스가 뭔가 시작하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눈길을 집중했다. 마침 음악이 바뀌었다. 로 즈니스가 가장 좋아하는 3박자 가야르(Gaillard) 춤곡이었다. 그러나 실로 불행하게도 보리스로서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곡이었다. 란지에가 몇 가지 가 르쳐 주었지만 기본적인 춤들에 불과했고, 세 번에 한 번 도약해야 하는 가야르처럼 난이도 가 높은 곡은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빠, 한 곡 추시겠어요?" 웃음거리가 되느냐 마느냐 하는 순간이었다.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의 눈이 쏠려 있었다. 그 순간, 구원자가 나타났다. "도련님, 주인님께서 급히 부르십니다. 잠시 같이 가시지요." 란지에가 둘 사이를 갈라놓듯 바로 곁에 다가와 한 말에 로즈니스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계획이 어긋나는 것을 몹시도 싫어하는 그녀인 것이다. 그러나 란지에는 곧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에롤 도련님이시군요. 도련님은 가야르에 능숙하시지요?" 의도가 뻔한 권유였는데도 두 사람 모두 금방 받아들였다. 서로 이유는 달랐지만 그 순간 만은 스스로를 위해서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로즈니스는 에롤 폰 하미즌과 손을 잡 았고 보리스는 란지에와 함께 사람들 틈을 빠져나왔다. 란지에는 곧장 정원으로 나갔다. 백작이 이런 곳으로 자신을 부르다니 좀 이상하다고 생각 할 무렵이었다. 성 곳곳을 환하게 밝힌 램프들로부터 멀어져 어스름한 그늘을 만들고 있는 나무들 사이까지 온 란지에는 걸음을 멈췄다. "잠시 기다리시지요." "이리로 오신다고?" 란지에는 보리스의 반문에 미소도 아닌 입 끝만의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그럴 리가요." 보리스는 상황을 짐작하면서도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왜 날 이리로 오게 한 거지?" 이어 나온 대답에 보리스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야기나 할까 하고요." 보리스는 란지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상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물론 그들은 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어 왔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야기라기보다 일방적 인 도움을 받았었다. 보리스는 란지에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어느 정도 궁금증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일은 아마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친절하고 예의 바른 것 같지만 결코 마음을 열지는 않고, 많은 배려를 베풀지만 그것이 단지 의무에 불과 한 듯 수행하는 상대였었다. 둘은 나무 아래에 나란히 주저앉아 있었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먼저 침 묵을 깬 것은 의외로 란지에였다. "당신도 부모님이 안 계시군요, 그렇지요?" '당신'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해오던 '도련님'과는 크게 어감이 달랐다. 그러나 그다지 불쾌 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본래부터 자신은 도련님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네 부모님은 살아 계실 지도 모른다고 했지 않아?" "아, 물론. 하지만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살아 있다 해도 달라질 것이 없어서." 바람이 불었다. 란지에는 손목에 채워진 단추를 하나 풀더니 양손으로 짧은 머리카락을 뒤 로 쓸어 넘겼다. 여전히 하인의 차림새였지만 지금까지 그가 그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행동 하는 것은 처음 본 듯 한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자신의 필요를 위해 뭔가 하는 것을 본 일이 있던가? 란즈미를 만났을 때를 제한다면 딱 한 번, 처음 만남 때 백작의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던 모습이 유일했다. 문득 보리스는 자신이 줄곧 그에게 관찰당했을 뿐, 상대를 자세히 본 일은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에게는 형제도 없었습니까?" 예프넨의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 말해도 좋을까 싶었다. 아마도, 형이 한 명 있었다는 정도 는 말해도 상관없겠지, 이미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 란지에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아마 당신을 잘 돌봐 주는 형이었겠지요, 그렇지 않나요?" 보리스는 무심코 자신이 고개를 숙였음을 깨닫고 머리를 들어 란지에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내가 보살핌에 익숙한 사람인 것처럼 보인 건가?" 란지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러면?"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듯 보였죠." 갑자기 가슴 한 구석에 굵고 날카로운 바늘이 쿡 찔러 넣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으로 느끼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잊으려고, 숨기려고 했던 것 같은데.... 결코 겉으로 드러내어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넌......." "그냥 지켜본 겁니다, 죽. 다른 할 일은 제게 없었으니까요." 긴 손가락들이 귓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단추가 끌러져 흘러내린 소맷자락 안쪽으로 보이는 가늘고 흰 팔목은 검을 잡는 자신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신체적인 약 함과는 다르게 강한 중심과 같은 것이 그 안에서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내겐 가족들이 있어." 란지에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 보리스를 쳐다봤다. 별 표정이 없었음에도 힐난하는 듯한 눈빛이라고 느낀 보리스는 마음을 다잡고 침착한 얼굴을 했다. "시간이 갈수록 더 익숙해지겠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좋은 분들이고 로즈니스는 귀여워. 모 두 친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난 자신이 있어." 란지에는 앞서의 눈빛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그보다는... 백작 가에서 자라면 미래에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라고 말하시는 편이 훨씬 그럴듯하게 들릴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그것은 언뜻 '사실 백작 가의 도련님이 되고 싶어서 싫은 사람들과 사는 것을 참고 있는 거지?' 라고 묻는 것 같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더한 함의를 품고 있었다. 지금 한 그 말이 '그렇게 말하는 편이 좀더 그럴듯한 거짓말이 될 테니까, 거짓말을 하려면 그 쪽을 택 하라'는 의미였다면, 그 말 내부에서 이미 보리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 지 않은가? "솔직하지 못하시군요. 아니, 솔직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언제고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은 알고 있습니다. 제가 실례되는 질문을 하고 말았군요." 란지에가 한 발 뺐지만 보리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난 좀더 설명이 필요한데. 그럼 내게 이 집의 가족이 되는 것 말고 뭔가 다른 목적이라도 있단 말이야? 뭘 봐서 그렇게 생각한 거지? 불쾌함을 떠나서, 이유부터 듣고 싶은데." 도박이라고 할 만한 질문이었다. 뭔가 비밀을 알고 있다면 다 털어 놓아 봐라, 라고 다그친 셈이었다. "아뇨. 전 아무 것도 모릅니다. 다만......." 란지에도 이번에는 전혀 모르는 체 하며 도망치려고는 하지 않았다. "당신의 태도가, 진심으로 이 집 식구가 되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만은 알고 있습니 다." 보리스는 가만히 숨을 삼켰다. 그리고 일부러 냉랭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건 나 개인의 문제일 뿐이야. 내가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일지 모르지 만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그 가장 큰 증거는." 란지에의 목소리가 살짝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약간 격앙되어 있기도 했다. "당신은 내가 하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종종, 실은 매우 자주 잊는다는 겁니다. 바로 지금 처럼." 보리스는 말없이 눈썹을 움찔, 움직이더니 말했다. "내가 나만을 시중드는 하인을 두는 것에 익숙하지 못해서겠지. 트라바체스에서 살 때는 어렸을 적부터 돌봐 준 유모가 있었을 뿐이야. 너와 내가 동갑인데 한 명은 존댓말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라는 것이 내게 그리 쉽게 당연해지지는 않아." 란지에는 일단 수긍하는 것처럼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가 이윽고 쳐들더니 보리스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늘진 자색의 눈동자. 지금껏 한 번도, 성 안의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않았던 자유로운 눈 빛이 어린 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늘 내리깔고 있던 눈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서 로 범접할 수 없는 경계를 가진 진짜 인간으로서, 동시에 상대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움켜잡 아 멈추게 하는 본심의 눈동자. 그런 눈을 가진 자가 누준가를 섬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코 상상될 수조 차 없는 일이다. 왜 지금까지는 그 눈 속에 가려진 것을 깨닫지 못했을까. 심지어 그가 그렇 듯 변할 수 있다는 것조차도. "감사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걸 부인하지는 마시지요. 당신은 실은 조금 도 적응할 생각이 없습니다. 자신이 백작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지도 않고 로즈니스를 친누이처럼 여기지도 않습니다. 친척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싶어하지도 않죠. 벨노어 성 안에서 당신에게 주어진 물건들이나 하인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합 니다. 이 성 안에서 당신의 태도는 하룻밤 파티를 위해 임시로 빌린 옷을 몸에 걸친 사람과 같습니다. 빌린 옷을 험하게 입을 수는 없는 것이죠." 란지에의 말 속에서 항상 '주인님'이었던 사람이 그냥 '백작'으로 불려지고, 로즈니스 역시 이름만으로 지칭되는 가운데에서도 보리스는 그런 어조가 낯설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 런 것이 본래부터 당연했던 사람인 것처럼 그 목소리는 태연했다. "로즈니스의 하녀인 캐미아를 아실 겁니다." 보리스는 말없이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이제는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모조리 들 어보고 싶었다. 한 인간으로서, 그가 낯설면 서도 경이로웠다. 무엇을 보고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일까. "그 소녀가 처음에 당신을 좋아했더군요. 처음엔 비슷한 처지의 또래 친구처럼, 그 다음에 는 갑작스레 신분상승을 이룬 왕자님을 보는 느낌으로요. 그렇지만 이제는 좋아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녀는 당신이 이제 둘 가운데 어느 쪽도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습니 다. 당신은 먼발치에서 바라볼 동경의 대상도, 가까이에서 친하게 지낼 또래 친구도 아닙니 다. 그저 오직 멀리만 있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당신의 신분이 높다거나 태도가 차가워서 멀 리 있다고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세계는 우리 또래들이 흔히 머무는 그곳이 아니 고, 화려하거나 멋져서 동경할 만한 세계는 더구나 아닙니다. 그저, 아주 싸늘하고, 즐겁지도 않으며 접근하기조차 힘든 멀고 황량한 외국에 불과하니 그 누가 가고 싶을까요." 그때 보리스가 입을 열어 말했다. "조금 의미가 다를 지 몰라도... 그건 너 역시 마찬가지인데?" 란지에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제 세계는 당신보다 훨씬 따뜻한 열의 세계입니다. 당신은 아마도 얼음의 세계에 살고 있 겠지만 말이지요." 이상한 말이었다. 란지에는 이어 말했다. "그래서 제가 당신의 세상을 궁금하게 느끼나 봅니다." 란지에의 눈동자는 타오르는 불꽃같은 진홍빛이었다. 그리고 보리스는 얼어붙은 안개처럼 싸늘한 회색 눈을 하고 있었다. "넌 어째서 이곳에 머무르지? 단지 란즈미 때문인 거야?" 그게 아니라면, 너 역시 이곳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는건가. "언제까지나 이곳에서 살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어느 날인가는 떠나게 되겠지요. 단지 지금 이 아닐 뿐." 아마도 보리스보다는 나중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을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란지에를 믿 는 것은 위험했다. 매력적인 사람일수록 상대방을 속이기 쉬울 것이다. "왜 너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지? 내가 만일 아버지제 지금 오간 이야기를 한다면, 넌 내게 한 몇 가지 말만으로도 충분히 쫓겨나고 남을 텐데. 네가 란즈미 때문에 여기에 남아 있고자 한다면 그 목적을 충실히 지켜야 옳잖아?" 란지에는 작게 미소지었다. "그런 짓을 할 사람들은 내게 왜냐고 묻기 전에 이미 벌떡 일어나서 화난 목소리로 한두 마디 소리친 다음 가버립니다." 보리스는 자신이 란지에가 방금 말한 것과 같은 연기를 해내야 할 것인가 짧게 고민했다. 그때 란지에가 이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렇게 할 만한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낼 저도 아니고요." 도대체 란지에는 어느 정도로 보리스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단 말인가? 무엇이 그를 이토록 확신하게 하는 건가? "어찌됐든 일단 좋아. 뒤의 행동은 내가 내키는 대로 결정할 거야. 그러나 묻는 말에는 대 답해줘야겠어. 네 말대로라면 난 정말로 너와 아무 관계없는 존재겠지. 그런 내게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저의가 뭐지? 아무런 이익도 없잖아? 설마 심심해서라고 답할 참은 아니겠 지?" "위험해 보여서죠." 짧게 잡아 끊는 말이 문득 보리스의 귓가를 강하게 파고들었다. 란지에가 뭔가 더 말하려 하는 순간이었다. "아니 란지에, 너 여기서... 도련님도 계시네? 여기서 뭘 하고 계시죠? 지금 파티장에는 66 년 묵은 아라종 백포도주가 한 상자나 나와서 난리라고요. 가서 맛보시지 않을 거예요?" 지나가던, 그러나 실상은 그들처럼 파티장을 벗어난 사람들을 찾으러 나온 듯한 하녀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궁금해할 틈도 없이 바삐 다른 나무그늘을 향해 뛰어갔다. 란지에가 보리스를 보며 미소지었다. "백포도주 한 잔 가져다 드릴까요?" 란지에는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보리스는 한참이나 혼자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란지에가 어딘가에서 정보를 얻었다면 일단은 성 안에서 그의 일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의 심해 봐야 했다. 백작 내외와 그 비서는 일단 제쳐놓고, 로즈니스는 란지에를 매우 싫어하니 함께 앉아 이야기할 가능성이 극히 적었다. 기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성 안의 소년 하인 과 친하게 지낼 리 만무한 자들이니까. 그렇다면 의심 가는 것은 윌라와 캐미아였다. 그리고 아까 란지에가 한 이야기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캐미아가 뭔가 이야기했을 가능성이 가장 클 듯했다. 란지에의 말 중에서 '비슷한 처지의 또래 친구' 라는 말이 가장 먼저 걸렸다. 캐미아가 처 음 보리스를 만났을 당시의 모습에 대해 발설했을 가능성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연애상담과 비슷했을 둘의 대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그 이상의 이야기도 했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보리스가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란지에가 눈치챘다 해도 이상 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백작에게 해야 할 지는 여전히 감이 서지 않았다. 당신의 세상이 궁금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말일까. 더구나 보리스의 성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듯했던 말들을 되새겨 보니 오한마저 끼쳤 다. 처음부터 란지에를 하인으로 삼은 것 자체가 잘못이었을지도 몰랐다. 실제로 보리스는, 란지에가 이보다 더한 말을 한다 해도 그가 저 불운한 소녀인 란즈미와 함제 밖으로 내쳐지 도록 백작에게 고자질할 수 있는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런 성격을 간파 당하는 것은 약점을 잡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위험해 보인다는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 자신의 연기가 서투른 나머지 란지에조차 속이지 못할 정도로 틈이 많이 보인다는 걸까. 또는 그 말고 다른 의미가 있는 걸까. 그 모든 것을 떠나서 그가 란지에를 이대로 내버려두어도 괜찮을지 심히 망설여졌다. 아마 도 자신의 안전이 걸린 문제인 만큼 란지에도 자신이 알아챈 사실들을 남에게 함부로 발설 하지는 않을 것이고, 만에 하나 백작의 귀에 들어간다 해도 캐미아에게 책임을 떠넘기면 그 만일 터였다. 란지에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냉정하다면, 순진한 체 하며 보 리스와 캐미아를 동시에 옭아 넣고 자신은 빠져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보리스가 반격 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그러나 자신이 반격을 한다면? 마치 으뜸패 카드를 쥐었지만 상대방을 거지로 만들 것이 걱정스러워서 던지지도 못하고 서서히 져 가고 있는 것과 비슷한 꼴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까지도 란지에는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 정도면 이미 파티장까지 세 번은 왕복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보리스는 몸을 일으컥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에게 꼭 기다려야 하는 의무는 없었다. 파티장의 불빛이 발끝에 느껴지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그는 바로 옆의 풀숲 너머에서 익숙 한 목소리를 들었다. "말을 듣지 않겠다고?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잊기라도 한 거야?" 잘 아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목소리만으로도 확연히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아르장송 자작 의 딸인 실비엣이었다. 그러나 어조는 그가 알던 그녀의 말투와 판이하게 달랐다. 가만히 내리깐 얇은 눈매에, 조 용하면서도 싸늘한 목소리를 가졌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지금의 말투가 수백 번은 그래본 듯 자연스럽지 않았다면 일부러 누군가의 흥내를 내고 있 지 않은가 의심될 정도로, 날카롭고 오만한 목소리가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몹시 자신만만 하게, 상대방의 대답이 없자 그녀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아마 그렇지 않았다면 보리스 의 귀까지 들려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까 죄송하다고 말했지? 용서를 바란다면 무릎 꿇고 내 구두에 입을 맞춰 보라고! 내 말 이 농담처럼 들려?" 처음에는 끼어들 생각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어 대답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보리스는 저 도 모르게 급히 그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보리스 도련님 외에 다른 분을 시중들 의무가 제게는 없습니다." 란지에가 왜 빨리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제야 이해가 갔다. 그러나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 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모르는 상태에서 함부로 끼어들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 다. 보리스가 약간 주춤, 하며 걸음을 멈추는 순간 실비엣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처음의 화내던 목소리와는 딴판으로 달라져 있었다. "변함 없는 고집이야, 정말. 작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네. 왜 내말을 듣지 않지? 너도 본래 켈티카에서 살았다고 했잖아?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거야? 내가 네게 약속할 수 있는 것은 매우 많은데, 그게 뭔지 궁금하지도 않아?" 란지에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실비엣은 천천히 목소리를 낮추며 이어 말했다. "나와 함에 있으면 좋은 일이 많을 거야. 일단 일상부터가 이런 시골구석에 박혀서 철모르 는 어린애들 시중이나 드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는 일들 투성이지. 연일 저택마다 돌아가며 파티니 사냥이니 여흥 모임이 줄을 잇는 생활이 얼마나 멋지니? 켈티카는 돈 함부로 뿌리는 귀족들이 흔한 곳이고, 너 정도면 충분히 큰돈을 쥘 수도 있고 말이야. 어느 정도요령 있다 고 정평이 난시종이라면 자기 옆에 두고 싶어서 고액의 연금을 내거는 귀족들이 줄을 선다 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나와 함께 가자. 왜 이 정도의 조건이 네게 기회가 되지 않는 다는 거지?" 보리스는 걸음을 멈춘 채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려 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 나 그는 여전히 란지에의 대답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가씨에게는 제가 필요 없습니다." 실비엣은 약간 당황한듯했다. "왜지?" "제게 아가씨가 필요 없으니까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이를 두고 뭔가 후려치는 듯한 철썩, 하는 소리만이 조용한 정원을 울렸다. "건방진‥‥ 내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발에 입을 맞춘다 해도, 내가 네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가는 걸 막을 수 없을 때가 올 거다." 그 순간, 앞으로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보리스가 모습을 나타내는 순간 두 사람의 눈동자가 모두 그쪽으로 쏠렸다. 그러나 둘 다 당황한 얼굴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서 그만 안으로 들어가려 하던 참이다. 내가 시킨 일은 어떻게 된 거지?" 일부러 딱딱한 말투로 란지에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실비엣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뜻밖으로 미처 말하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보리스로군. 내가 잠시 일을 시키고 있었어. 네 하인이라고 그런 것도 안 된다는 잔 아니겠지?" 실비엣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평소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좋게 넘어가는 체 해도 될 상황이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대뜸 대답해 버렸다. "물론입니다. 필요할 때 제게 돌려주시기만 한다면 말이죠." "흥......." 실비엣의 눈초리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녀의 가늘고 섬세한 눈매에 의외로 잘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보리스는 이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잘라 말했다. "제 하인을 꾸짖을 수 있는 건 저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실비엣 누님은 손님이시니 손님답 게 처신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실비엣의 얇은 입술이 살짝 떨렸다. 두 어린아이에게 놀림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이 루 말할 수 없이 불쾌했다. 하나는 하인, 또 하나는 어디서 굴러 들어왔는지도 모를 양자 녀 석인데! 그러나 어디까지나 자신은 벨노어 가의 손님이었다. 보리스가 어떤 성격인지 아직 잘 모르 는 터라 더더욱 조심해야 했다. 혹시라도 울며 소란을 부리거나 해서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 지 어떻게 알겠는가? 마뜩찮지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아이가 뭘 알겠어. 더 이야기할 필요도 없지." 실비엣은 즉각 몸을 돌리더니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보리스가 란지에를 바라보자 란지에 는 약간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좀 전에 그를 놀라게 했던 표정과 마찬가지로, 그런 표정 역 시 아직껏 본 일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포도주는 아직 가져오지 못했군요. 그냥 안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보리스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란지에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자신이 왜 그랬 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실비엣은 그가 잠시 몸담아야 하는 이 집안의 친척이었고, 기분을 상 하게 해서 좋을 것은 없는 상대였다. 그리고 평소 란지에를 이런 식으로 옹호하겠다는 생각 도 가져 본 일이 없었다. 방금 전에 했던 대화를 돌이켜 봐도 우호적 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서로 민감하게 다그치고 있지 않았나?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왔을까? 잠시 후 란지에가 다시 말했다. "불편한 일을 만들어 드려서 죄송합니다." 문득 파티장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본래 아노마라드의 귀 족이 아니고 실비엣의 친척도 아닌 것이다 하인은 아니지만 가진 것 없는 처지라는 면에서 오히려 란지에와 더 비슷하지 않은가? 빈 손인 주제에 대담하게 행동한 것에 맥이 빠졌다. "됐어.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 주겠어?" 죄송하다고 말한 끝이어서인지 란지에는 순순히 대답했다. "제게 부탁하실 필요는 없지요. 그냥 명령하십시오." "란즈미에게 가자." 그제야 '부탁'이라는 말을 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란지에는 조용한 표정으로 잠시 눈을 내리깔다가 말했다. "그러시지요." 란즈미의 방에 처음 들어왔던 날은 낮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밤이었다. 하얀 햇빛이 내리는 창가에 기대앉아 있던 병약한 소녀는 거기에 없었다. 아니, 없는 줄로 만 생각했다. 램프불이 꺼져 캄캄한 방 한쪽에서 약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침대 쪽이었 다. 란지에가 가져온 램프를 높이 들어 방 안을 비추었다. 하녀 가운데 누군가가 램프를 침대 머리맡에 두었을 지도 모르지만 자기 정신을 잘 가누지 못하는 란즈미를 생각할 때 실로 위 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그녀에게뿐 아니라 성 전체에 위험했다. 자칫하다가 화재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니까. 란지에가 침대 쪽으로 몇 걸음 내딛는 순간이었다. 들어올린 램프 빛이 가 닿자 낯선 그림 자 하나가 침대 앞에 앉아 있는 것이 드러났다. 그 다음 란지에가 보인 태도는 보리스로서도 깜짝 놀랄만한 것이었다. 램프를 거의 떨어뜨 리다시피 놓은 그는 다짜고짜 상대방을 향해 달려들었다. 무기 하나 없는 빈손인 주제에 잠 깐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그렇게 신속한 반응을 보이는 그를본 일이 없었다. 두 팔로 상대방의 목을 끌어안다시피 하는 순간, 그림자가 벌떡 일어나 소년의 몸을 번쩍 들어올렸다. 상대는 어른이었다. 그것도 몹시 키가 큰. "쉿! 소란 피우지 말란 말이다. 중요한 순간이야." 익숙한 목소리.... 월넛 선생이 이곳에 왜? 월넛의 손에 붙잡혀 높이 들어올려졌다가 다시 바닥에 내려선 란지에는 아직도 경계심을 풀지 않은 얼굴로 월넛을 쏘아보았다. 나오는 말도 평소보다 거칠었다. "무슨 일입니까. 어떻게 여길 들어오셨습니까. 여긴 멋대로 들어오실 수 있는 곳이 아닙니 다." "쉿‥‥ 조용히 해. 나쁜 의도는 없으니까 가만히 지켜보라고." 그렇게 쉽게 상대방을 믿을 란지에가 아니었다. 소년은 월넛의 어깨를 밀치다시피 하고 침 대 쪽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때까지 뒤에 서 있던 보리스도 란지에가 내려놓은 램프를 집어들고 다가갔다. 그제야 침 대가의 희미한 빛이 램프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란즈미의 자그마한 얼굴은 베개에 푹 파묻혀 있었다. 그 이마에 정체 모를 빛이 감돌고 있 었다. 빛 때문에 란즈미의 얼굴은 한층 더 창백해 보였다. 그러나 조금 더 자세히 보니 백랍 같던 피부에 발그레한 화기가 감돌고 있었다. "란즈미...... 란즈미?" 란지에는 누이동생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자 사나운 눈빛으로 월넛을 돌아보았다. 월넛은 대답 없이 다시 침대로 다가갔다. 무릎을 꿇은 채 팔꿈치를 침대에 올리 고 기도라도 하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 두 손을 삼각형으로 모았다. 잠시 후 소년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두 개의 룬(Rune)이 말해지며 간단한 수인이 맺어졌 다. 손바닥을 펼치고, 앞으로 내밀어 겹쳤다가 다시 본래대로 모으는 순간 덜거덕, 하고 창 가의 덧문이 세게 흔들거렸다. 작은 창을 통해 강한 바람이 몰아쳐 왔다. 그제야 밤인데도 창문이 아직 열려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보름밤의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짙푸른 달빛이었다. 그대는 영원히 소녀이겠는가. 어머니 달빛이 문을 두드리건만, 말 없는 영혼이여, 그대가 영원히 소녀이겠는가. 마지막 말은 여러 사람이 동시에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신비로운 음색을 띠었다. 흡사 파이프 오르간이 울리는 것처럼. 보리스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검사라고만 생각했던 월 넛 선생이었다. 그것도 아주 뛰어난. 그런 그가 마법까지 쓸 줄 안단 말인가? 창의 덧문이 바람에 휘말려 요란한 소리를 냈다. 월넛의 커다란 손이 란즈미의 빛나는 이 마께 놓이는 순간, 소녀의 온 몸이 푸르스름한 빛에 휩싸였다. 다음 순간, 란지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오빠......." 그가 들은 것이 정말로... 그토록 듣고자 했던 누이의 목소리란 말인가? 란즈미를 내려다보는 란지에의 어깨가 가누기 힘든 듯 가늘게 떨렸다. 그토록 오랫동안 닫 혀 있었는데, 껍질만 남고 혼은 어딘가 모를 데로 떠나버린 양 그렇게 침묵했었는데, 헤매다 집으로 돌아온 아픈 영혼처럼, 꿈인 듯 생소한 그녀의 목소리....... 망설이는 듯, 더듬거리는 듯 해도 분명 그가 기억하고 있는 어린 시절의 그 목소리로...... "란즈미......!" 월넛이 일어나 뒤로 물러서고,다가온 란지에는 누이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란즈미의 눈 은 여전히 감겨 있었지만 살짝 열린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도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은 감격을 느낄 수 있는 것일까? 보리스는 월넛이 자신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만 있도록 내버려두고 나가자는 것인가? 그러나 언제나 처럼 월넛은 예상이 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때, 내 솜씨가? 학생답게 감탄한 표정이라도 지어봐. 나 좀 만족하게." 이, 이 자는...... 그러나 보리스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혀 있는 가운데에도 란지에는 가만히 란즈미를 끌 어안은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흡사 잘못했다간 다시는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될까 염 려하는 사람처럼, 손끝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월넛이 입을 열었다. "누이동생은 이제 괜찮아. 지금은 몇 마디밖에 못하겠지만 차차 대화도 가능해질 거야." 보리스가 물었다. "어떻게 하신 거죠? 마법도 할줄 아시나요?" 그때 란지에가 고개를 들더니 월넛 쪽으로 몸을 돌혔다. 한 손은 여전히 란즈미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신 건지 꼭 물어야겠군요. 란즈미는 일곱 살 때의 사건 이 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입을 연 일이 없는 아이입니다. 그런 아이가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 니, 저로서는 부작용이 염려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그 아이의 마음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눴으니까. 오빠를 많이 생각하 더군. 아주 착해. 지금처럼 옆에서 지켜봐 주는 사람만 있으면 성인이 되었을 땐 정상적인 사람으로 돌아을 수도 있을 거다." 란지에는 란즈미의 손을 놓고 일어났다. 그리고 한 걸음 다가와 깊이 허리를 굽혀 절했다. "말씀대로라면 평생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제 모든 힘을 다해 반드시 갚도록 노력하 겠습니다." 월넛은 예의 유쾌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만일 내 말이 틀린다면 사생결단이라도 낼 것 같군 그래." 란지에는 고개를 들더니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세 사람은 다시 말없이 란즈미에게 다가가 이제 눈을 뜬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았고, 알 수 없는 흐뭇함으로 밝은 표정이 되었다. 궁금한 것이 많았을 텐데도, 드물게 들려오는 소녀의 작은 목소리에 대답해 주기 위해 그들은 서로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램프 하나만 사이에 둔 채 그들은 가끔 빙그레 웃었다. 보리스는 왠지 모르게 몸속이 따뜻 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결코 진심으로 어울릴 수 없었던 아래층의 파티보다 지금 의 고요가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5 . 겨울나기 "실비엣 아가씨는 그냥 저를 이용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거기에 응하지 않으니 화를 낸 것뿐이고요." 파티의 밤 이후로 란지에는 보리스를 '당신'이라고 부르는 일도, 백작이나 로즈니스를 경칭 없이 그냥 지칭하는 일도 없었다. 다만 란즈미가 입을 열게 된 후로 눈에 띄게 얼굴이나 태 도가 밝아졌다는 것 만은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그 날 밤 란즈미의 방에서 대화도 없이 밤을 새운 이후로 그들 사이에는 모한 유대감 같은 것이 생겨나 있었다. 찾아왔던 손님들이 하나 둘 떠나고 드디어 마지막으로 가장 먼저 도착했던 아르장송 자작 일가도 켈티카로 돌아갔다. 실비엣은 그때일 이후로 보리스에게 달리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못마땅하게 여기는 눈치는 분명했다. 그녀가 떠난 후 보리스는 오랜만에 그 날 밤의 일에 대해서 질문했다. "이용이라고?" 보리스로서는 상당히 민감하게 와 닿는 단어였다. 란지에는 비교적 자세하게 답해 주었다. "켈티카의 귀족들에게 사교 모임에서 인정받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가 봅니다. 친분 있는 귀족들끼리 돌아가면서 여러가지 주제를 가지고 모임을 여는데, 실내 모임의 경우에는 보통 외모가 빼어나고 예법에 능한 어린 남녀 시동을 대동합니다. 요즈음의 그들에게 시동 은 왜 중요한 장식품이라 시동의 훌륭함이 귀족 자신의 가치를 결정 하는 척도가 되기까지 도 하는 모양입니다." 란지에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적절히 말을 그쳤다. 그러나 궁정식 어법에 익숙하지 못한 보 리스로서는 슬슬 짐작이 가기 시작함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단지 그것뿐?" 란지에는 약간 미소짓더니 말했다. "도련님은 좋은 의미로 귀족답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보리스도 이젠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귀족처럼 되고 싶은 생각도 없었 다. 란지에가 말을 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정보를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 에 그렇습니다. 귀족들은 상대방의 시동이 마음에 들 경우 한동안 바꾸어 데리고 있는 경우 가 있습니다. 어차피 그런 자리의 시동이란 노리개에 불과한 처지라 그런 교환을 거부할 자격은 없고, 대신 상대 귀족의 정보를 캐 오는 임무를 저절로 맡게 됩니다. 그 귀부인은 누 구와 친하게 지내며, 최신 장신구나 드레스 같은 것은 어떤 경로로 구하는지, 그 집의 자식 들은 누구와 혼사가 오가고 있는지, 남에게 드러나면 명예에 치명타를 입을 만한 비밀은 없 는지. 영리하면서도 새로운 귀족의 총애도 받을 만한 아름다운 시동이 라면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인 셈이지요." 두 소년이 잠시 침묵하고, 다시 란지에가 불쑥 말했다. "도련님께서는 아노마라드가 한때 공화국이었던 시절도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공화국?" 보리스에게는 신물 나는 단어였다. 트라바체스 공화국은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갔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 공화국이란 존재는 선량한 사람들을 죽을 때까지 싸우게 하는 악의 근 원과도 같았다. 그런데 이 나라도 공화국이었던 때가 있다니? "그게 정말이야?" "아노마라드 왕국력 975년에 시작되어, 985년에 사라졌지요. 딱 10년의 역사였습니다." 아노마라드 왕국력 985년이라면 바로 작년이었다. 보리스는 놀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그런.... 그래도 다행스럽게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군." 그런데 란지에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지금 정상이라고 하셨습니까?" 잠시 후 그는 다시 말했다. "다행이라고요?" 보리스는 란지에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그리고 그제야 그가 공화국이라는 것을 자신과 는 다르게 느끼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는 가지 않았다. "그럼 너는 공화국이 마음에 든다는 거냐? 네가 무얼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지 만 난 한때 공화국에 살았던 사람이야. 그게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은 오래." 란지에의 얼굴은 서서히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는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트라바체스 같은 공화국만 세상에 있는 것은 아럽니다. 아노마라드 공화국의 10년은 안타 까울 정도로 짧은 것이었죠. 트라바체스 식의 타락한 공화정으로 변질될 시간조차도 없었으 니까요. 심지어 그 10년 내내 공화 정부의 힘은 수도 젤티카 일대와 몇몇 대도시에 한정 되 어 있었습니다. 공화국의 존재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던 구(舊)귀족들이 넓은 국토의 대부 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들이 현 국왕과 폰티나 공작의 깃발 아래 모의하여 결국 갓난아기 에 불과한 공화국을 파괴했죠. 오랫동안 이어져 온 왕정 체제가 하루아침에 뒤집히기에 아 노마라드는 지나치게 넓은 나라입니다. 그 10년은 8년, 아니 5년으로 짧아져야 할지도 모릅 니다. 초반에는 지방 대귀족들에 의해 존재 자체조차 위협 당했고, 후반에는 공화국의 정체 를 떠나 단순히 생존을 위해 싸우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던 불운한 정부였으니까요. 그러 나 그 단명한 공화국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었습니다. 선택받은 소수가 아닌 모 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수 있는 그 나라를 위해서." 보리스는 잠시 입을 다물고 단호하게 흘러나오는 그의 말을 들었다. 란지에는 평소에도 농 담을 섞어 말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방금의 그는 진지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열정적이기까 지 했다. 그것은 그에게 알 수 없는 불편함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그의 관점으로는 그 들 또래의 소년이 그런 어른들의 문제에 대해 이토록 구체적인 관심을 가지는 것조차 낯선 일 이었다. " 이 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몰라. 하지만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가 겪은 일들은 알 고 있어. 네게 다 말할 수는 없지만 난, 공화국이라면 그 존재 자체조차 증오할 정도로 충분 히 당한 사람이야. 그래, 난 공화국이 실제로 어떤 장점을 지녔든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도 없어. 내가 원한 건 내가 좋아하던 사람들의 생존과 평화였을 뿐인데, 공화국은 그것을 모조 리 빼앗아갔지. 평범한 사람들에게 평화를 줄 수 없는 나라라는 건 아무런 쓸모도 없는 거 라고 난 생각해. 공화국은 내가 알기로... 귀족 대신 평민들의 의견을 나라의 운영에 반영하 는 것이라지? 내가 봤을 때 그런 일은 불가능해. 물론 현재 트라바체스에는 귀족이 없고 내 아버지도 귀족은 아니었어. 하지만 내가 여기에 와서 보니 아노마라드의 귀족과 내 아버지 의 지위라는 것은 세력의 크기에 차이가 있을 뿐 실제로는 별다를 것도 없는 것이더군. 그 런 식이라면 귀족이 없는 나라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지?" 둘은 저도 모르게 구체적인 열의를 가지고 말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도련님께선 가짜 귀족과 진짜 평민을 착각하고 계십니다. 도련님의 아버님이란 분은 물론 이곳의 귀족들과 마찬가지였겠죠. 공화국은 이름만 바꾼 귀족들이 운영하는 곳이 아닙니다. 심지어 저와 같은 하인들조차 나라의 문제에 참여할 수 있는 곳,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제도가 만들어져 있는 곳이 진짜 공화국입니다. 아노마라드가 그런 진짜 공화국이었느냐고 요? 물론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한 과정의 하나로서 존재하려 했던 공화국이 었습니다. 아마 트라바체스도 그런 초기적 형태의 공화국으로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것이 잘 운영되지 못하여, 적어도 과거에 귀족이었던 자들의 권리를 차단하지 못하여 지금 과 같은 결과가 온 것이겠지요." "네 말대로라면 네가 말한 진짜 공화국이란 건 아직껏 한 번도 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 는 유령 같은 것이로군. 그렇다면 언젠가 정말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무슨 수로 믿 지? 뭘 근거로 그런 과정을 위해 사람들을 희생시킬 수 있는 거지? 난 차라리 안정된 왕정 을 원해. 어차피 인간은 영원히 살지 않아. 그 인간이 사랑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곧 죽 지. 그들을 한시라도 더 일찍 죽게 하는 모든 것을 난증오해." "도련님과 같이 생각한 사람들이 우리의 과거를 지배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우리는 발전 하지 못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겁니다. 권리를 가진 사람들은 영원히 모르겠죠. 인간이기 때 문에,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 삶 대신 죽음을 선택할수도 있다는 것을." "전혀. 인간은 살기 위해 존재해, 무엇이 죽음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거지? 누군가의 생명 을 빼앗아버리고서 그것을 보상할 수 있는 말이 정말로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것은 모두 변명에 불과해. 남이 아닌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그런 변명!" "나면서부터 인간인 자들에게는 인간 이전의 문제는 관심 없겠죠. 인간이 아니게 태어난 자들은, 그 당연한 가치인 '인간' 이 되기 위해 심지어 죽음도 불사할 수 있는 겁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자유 의지를 깨달은 자들이라면 모 두 그렇죠. 공화국은 인간을 인간답게 합니다. 한 줌 밖에 안 되는 귀족들이 아니라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을 말입니다!" 지금껏 둘이 이렇듯 민감하게 대립한 주제는 처음이었다. 보리스도 자신이 이렇듯 과격하 게 말한 것에 놀랐고, 란지에 역시 상대가 이토록 명확한 의견을 갖고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둘은 말을 멈추고 잠시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이성을 되찾은 란지에가 약간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됐습니다. 도련님께서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계신 줄은 모르고 제가 이런 얘기를 꺼냈군요. 사실 이 나라에서 이제 그 공화국의 일을 언급하는 것은 금기 이상의 것, 죽음이 두렵지 않 은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도련님은 백작 가문의 양자이시니까 그렇게 생각하시 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보리스는 란지에가 더 이상 그와 의견을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 정도 대립으로 자기 신념을 꺾을 란지에가 아니라는 것은 보리스도 충분히 겪어 알고 있었다. 그 러나 하인이라는 자신의 위치상 말을 적당히 끊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리스는 하 고 싶은 말이 있었다. "네가 공화국의 이야기를 꺼낸 건 결국 귀족의 비리를 말하기 위해서냐? 그게 시시하다고 말하고 있는 게 아냐. 다만 공화국이 네가 말하는 대로 그렇게 숭고한 가치라면... 적어도 아 주 큰 이상(理想)으로 만들어진 곳이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난 증오로 이루어진 나라 에는 흥미 없어. 누군가에게는 죽어야만 할 인간도 다른 사람에겐 소중한 가족들이다." 란지에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증오와 이상을 완벽히 구별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상을 가로막는 것을 증오하게 되고, 그 증오의 마음이 힘을 가져다주어 이 상으로 달려가게도 합니다. 그러나 도련님의 말씀대로 궁극적인 가치는 결국 이상의 실현 에 두어야 할 것이란 점에 대해선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보리스는 이제 평온해진 란지에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나지막이 물었다. "넌 처음에 어째서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일까. 아니, 그런 것은 묻지 않을게. 다만 수도 에 있다는 귀족들의 관습에 대해서 어째서 그렇게 잘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은... 혹시, 그러니 까 실비엣 누나의 제안에 대한 것도......." "앞서 말한 귀족의 시동, 그 자리에 직접 있어 보았으니까요." 보리스의 눈이 조금 커졌다. "실비엣 아가씨가 저를 원하는 것도 제가 그녀에게 좋은 장식품이 되어 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활로 돌아갈 생각은 이제 없습니다." 그런 더러운 요구들.... 자신이었다면 도저히 감당하지 못했을 것처럼 느껴졌다. 란지에는 할 수 있었을까. 트라바체스 사람들 사이에서 한 번 준 신념을 꺾지 않는 '강인함', 집안의 이름을 포기하지 않는 '자부심' 이라고 불리는 그런 특징들을 모자람 없이 갖고 있는 란지에 였다. 귀족들의 지저분한 요구들을 받아들이고, 남의 약점을 캐는 첩자 노릇을 하며 살아갈 만한 인간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했다고 했다. 그 강인함도, 자부심도 꺾을 수 있는 동인이라면 단 하나밖에 없었다. 란즈미. "어째서...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게 된 거지?" 란지에는 별 감정 없는 어조로 조용히 말했다. "아시지 않습니까? 아마도 제가 그들의 취향에 맞는 얼굴을 하고 있나 봅니다. 그래서 당 시 저와 동생이 뒷골목에서 쓰러져 죽지 않고 살아남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되었지요." 살아남는다는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정신이 번쩍 났다. 자신이 귀족의 성에서 잠시 생활 하느라 벌써 잊은 것인가. 살아남아야 할 강한 이유가 있는 사람에게, 살아남기 위해 못할 일은 없는 것을. 란지에에게 그것이 살아 있는 누이동생이라면, 보리스에게 그것은 이미 죽은 형이었다. 산 자와 죽은 자. 란지에가 연약한 동생의 미래를 대신 보호하기 위해 살아남으려 한다면, 보리 스는 불행했던 형의 과거를 대신 보상받기 위해 살아남으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듯 하면서도 상통하는 감정이었다. 그러나 어째서 둘은 달리 생각하게 된 것 일까. 보리스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지 못한 나라를 증오하여 떠나고자 했지만, 란지에는 그런 나라가 없다면 직접 만들어내고도 남을 듯한 태도를 보여 주었다. 어쩌면 란지에는 한 층 더 강한 사람일 것이다. 끝끝내 잃어버린 사람들을 잊을 수 없는 자신과는 달리, 더 많은 사람의 미래를 위해서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들까지도 결국은 희생시킬 수 있 을 듯한 그는. 서서히, 보리스는 해묵은 감정처럼 예감이 머리를 쳐드는 것을 느꼈다. 어떤 점으로 보아 두 소년의 처지는 비슷했다. 그러나, 그들의 신념이 발현되는 방향이 다르듯 걷게 될 길도 판이하게 다를 것이었다. 한 기점에서 만났으나 거기서부터 다시 갈라져 나아갈... 다시 만났을 때의 둘은 완전히 다 른 사람이겠지. 결코, 다시는 같은 길을 걸을 수 없는 사람이겠지. 겨울이 서서히 내리고 있었다. 보리스의 생활은 약간 바뀌어 있었다. 첫 눈이 내리기 전까지는 월넛이 시킨 연습을 꾸준 히 하고 있었고 밤이 되면 이제는 윈터러의 존재와 약간은 무관해져 버린 검술 수련을 거듭 했다. 그러나 평소 로즈니스와 놀아주거나 생각에 잠긴 채 보내던 낮 시간에 그는 책을 읽 기 시작했다. 월넛 선생이 오기 전처럼 심심한 나머지 아무 책이나 들춰보고 또 내려놓고 하는 식은 이 제 아니었다. 처음에 백작의 허락을 얻어 서재에 드나들게 된 것은 란지에가 원하는 책을 편히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실제로 초반에 그는 서가에 꽂힌 책들 의 장정이나 구경하면서 란지에가 혼자 책을 읽도록 내버려두었고, 누가 들어온다 싶으면 얼른 알려주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며칠 동안 읽던 책을 다 읽은 란지에는 보리스에게 그 책을 넘겨주며 말했다. "천천히 읽어보시지요. 재미있으실 겁니다." 가죽 장정의 두툼한 책이라 처음에는 엄두가 잘 나지 않았다. 그러나 서재 구경도 이제 할 대로 한 터라 시간이나 때울 겸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첫 페이지에 제목이 적혀 있었다. "마법 왕국의 역사". 마법 왕국이라고 하니 떠오르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한때 필멸의 땅(Mortal Land)에 존 재했다는 고대의 마법 왕국 가나폴리. 그러나 몇 페이지 뒤적이며 읽어나갔지만 가나폴리의 이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익숙하지 않은 문어체 때문에 진도는 한층 더 나가 지 않았다. ......마법 왕국이라는 이름이 그 나라를 이루고 있는 모든 구성원들의 특성을 결정짓는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한 가지 드문 예외를 제외 한다면 평민 개개인들조차 크고 작은 마법을 일상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경우는 현재의 기록에 남은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 아노마라드가 위치한 이 대륙, 그리고 바다 너머에 존재하고 존재할 다른 대륙 들 모두에는 역사상 어느 시기에 마법사들이 한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왕국들이 존재한 일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국가들 모두를 '마법 왕국' 이라고 부르는 것은 학술적 접근에 있어 무가 치할 정도로 넓은 범주를 도입하는 실수가 될 것이다. 일견 단순화가 될 위험을 무릅쓰고라 도 본 필자는 본서에서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마법 왕국이라는 정의의 범위를 다음과 같이 한정짓고자 한다. 뭔가 그럴듯한 이야기가 나올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좀더 빨리 책장을 넘걱보았다. '마법 왕국(The Kingdom of Wizardry)'이란 다음의 조건 가운데 절반 이상을 만족시키는 왕국을 말한다. 첫째, 지배자(국왕) 자신이 자국 내에서-사실 여부는 떠나-백성들에게 가장 강력한 마법사 로 인정받고 있는 것. 둘째, 새로운 지배자가 즉위할 때는 물론, 정치 내각의 중요한 인물들이 중용되는 과정에조 차 마법 수준의 측정이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 요구되는 것. 셋째, 왕국 안의 지배층(귀족)에 해당하는 자들조차 그들의 자식이 다른 직업보다도 고위 마법사가 되기를 원하는 것. 넷째, 왕국 안에서 역사에 남은 인물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그들의 마법적 업적으로 인하 여 존경을 획득하고 있는 것. 다섯째, 당시 왕국 내에 존재했던 마법이나 마법사의 이름이 어떤 형태로든 단 하나라도 현재 민간에서 기억되고 있는 것. 여섯째, 왕국 내에서 널리 쓰였던 마법적 기술들 가운데 현재의 마법으로는 도저히 구현 불가능한 것들이 존재하는 것. 일곱째, 왕국이 크게 번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최후로 몰락해 간 원인과 과정이 매우 불분명 한 것...... 그밖에도 책의 서장은 뜻밖이라 할 만한 희한한 정의들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에는 복잡 하게 느껴졌는데 1장으로 들어서면서부터 그런 정의들이 자유자재로 사용되는 것을 보자 묘 하게 흥미가 생기기 시작 했다. 미리 정의를 해 놓고 이야기를 전개시킨다는 것은 굉장히 유용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더 읽어나가자 드디어 그가 아는 유일한 마법 왕국, 가나폴리의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했 다. 형과 함께 황야를 헤매고 다닐 때 만났던 야니카 일당이 언뜻 들려주었던 이야기는 그 게 거짓이었다 해도 몹시 매력적이었기에 지금도 잊혀지지 않았다. 열심히 책장을 넘기다 보니 불쑥 눈에 들어오는 글귀가 있었다. 가나폴리는 바로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유일한 예외, 즉 왕국의 지배자에서 평민에 이르기 까지 모든 구성원들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던 진정한 마법 왕국이다. 신기했다. 그러면 가나폴리에서는 갓 태어나는 아기들도 처음부터 마법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일까? 심지어 가나폴리는 앞서 언급했던 조건들이 한 가지도 남김 없이 전부 해당되는 놀랄 만한 왕국이었다. 가나폴리의 지배자는 국왕으로 불릴 때보다 '모든 마법의 지배자' 라고 불릴 때 가 더 많았고, 내각을 비롯한 사회 지배층의 모든 인물들은 또한 훌륭한 마법사이기도 했다. 그들은 당연히 자식이 마법사가 되기를 원했으며, 이런 식이니 역사상의 위대한 인물들 가 운데 마법사가 아닌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보리스는 마법을 배운 일이 없었기에 몰랐지만, 현재 전 대륙에서 가장 이름을 떨치고 있 는 남부 아노마라드의 마법 학원 '네냐-야플리아(Nenya-Yaffleria), 즉 네냐플(Nenyaffle)'에 입학하는 학생들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학원 주위의 자연물까지 모두 장악하고 있 는 거대한 옛 결계였다. 학생들로서는 잘 모를수도 있겠지만 그 결계의 이름은 '안고니나의 커튼' 이라는 이름이었고, 안고니나는 가나폴리의 마지막 다섯 대마법사 가운데 한 명의 이 름이었다. 그리고 현재 그 땅의 명칭이 되어버린 '필멸의 땅(Mortal Land)', 이 이름 역시 가나폴리의 예언서 안에 왕국이 종국에 가서 갖게 될 이름으로 이미 기록되어 있었다는 놀라운 이야기 도 있었다. 그 예언서는 지금도 루그란 왕국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쓰여 있었다. 지금은 도저히 그 원리를 알 수가 없지만 가나폴리에는 있었다고 전해지는 것은 대표적으 로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하늘을 나는 배, 즉 비행선이었고, 또 하나는 인간과 똑같은 모양에 어느 정도의 판단력과 감정까지 갖추고 있었다고 하는 '인형'이었다. 하늘을 나는 배 가운데 가장 컸던 것은 그 안에 백여 명의 사람을 태우고 십여 일 이상 날 아갈 수 있었다고 해서 보리스는 몹시 놀랐다. 백 명이나 되는 사람이 한꺼번에 하늘을 날 수 있다니, 그것도 열흘 넘게 버틸 식량 같은 것들까지 모조리 싣고서? 상상으로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뛸 정도였다. 비록 어떻게 생겼을까는 짐작이 가지 않아도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구름을 뚫고 하늘을 날아가는 기분은 참 멋지지 않을까 싶었 다. 물론 주로 애용된 것은 4,5명이 탈 수 있으면서 길게는 한달 가까이 착륙 없이 여행할 수 있는 작은 비행선이었다. 이 책을 쓴 사람의 묘사로는 보리이삭처럼 갸름하고 날렵하게 생 긴 몸체에 돛 대신 수천 마리의 빛나는 나비들이 내려앉은 것 같은 모습이라고 했다. 그림 이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앞뒤로 여기저기 펼쳐 보았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잠시 후 보리스는 이 자도 가나폴리에서 살았던 사람은 아닐 텐데 어떻게 이렇게 정확히 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거짓이라 해도 좨 아름다운 상상력이 아닌가, 그 렇게 생각하며 그의 입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어서 사람을 닮은 인형 이야기가 씌어 있었다. 역시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는 알려지지 않 았지만 그들의 모습은 늙지 않는 영원한 미모, 자체였다. 식사도 휴식도 필요하지 않았고 마 법으로 만들어진 만큼 마법으로 파괴되기까지는 영원히 살아가는 인형이었다. 자신을 만든 마법사가 불어넣은 의지에 따라 주로 호위나 보초, 그 외에 지저분해서 누구 나 싫어하는 단순노동 따위를 맡았다는 이 인형들 덕택에 가나폴리의 사람들은 대단히 편하 게 지낼 수 있었던 모양 이었다. 최소한의 의사소통 능력도 있었고, 간단한 판단과 약한 감 정도 갖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있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옷만을 꿰매는 아름다운 인형에게 반한 젊은이도 있었고, 인형에 불어넣은 마법사의 의지가 과하여 단순히 장난삼아 시비거는 사람을 잔혹하게 죽여버리는 사고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인형이 대신해주는 일에 익숙해 진 사람들은 인형을 없애지 못했고, 그래서 그 인형들은 가나폴리가 멸망하던 그 날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멸망의 날. 그런 놀랄 만한 마법들과 함께 번영했던 가나폴리는 보리스도 들어 알고 있다시피 원인도 과정도 알 수 없는 갑작스런 멸망을 맞았다. 심지어 악한 마법이 땅을 뒤덮어 국토 자체가 오염되는 바람에 현재의 사람들은 당시의 아름다운 문명을 자취조차 구경할 수 없게 되어버 렸다. 그것은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땅에 세워졌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국의 이야기였다. "재미 있으십니까?" 사흘째 책을 넘길 무렵 란지에가 꽤 열심히 탐독하고 있는 보리스의 어깨 너머에서 그런 말을 던졌다. 보리스는 고개를 돌려 씩 웃으면서 재미있다고 말했다. 책을 다 읽는 데는 보름 가까이 걸렸다. 어려운 부분은 중간중간 넘어갔지만 애써 이해하 려고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은 곳도 있었다. 그 후로 란지에는 그가 재미있어 할 만한 책을 계속해서 골라주었다. 월넛이 검술 선생이라면 그는 보리스의 독서 선생이었다. 그가 권하는 책들은 모두 자신이 이미 읽었던 것들이었다. 얼마 후 보리스 스스로도 한두 권 골라 펼쳐 보고 마음에 들면 읽게 되는 일도 생겼다. 겨울이 깊어갈 무렵이 되자 자신과 관련 없다고 생각했던 서재의 책들이 갑자기 도전해야 할 끝없는 바다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검술 수련과 독서만으로 그 해가 저물어갔다. 그동 안 그가 읽은 책은 다음과 같았다. "조개 반도 해적의 역사" "잊혀진 역사의 나라, 동부 대륙과 그 너머" "역사속의 무구(武具)들" "마법 학원의 역사적 사건들" "비밀 결사의 역사" "주가(呪歌)의 역사와 변천" "아노마라드 구(舊)왕국사" 기타등등. 첫 번째 책을 다 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된 일이지만, 란지에는 '역사' 라는 말이 들어간 책이라면 무조건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2장. Cutaway 1. 그리고 봄이 왔다 아노마라드 왕국력 987년의 봄이 밝았다. 벨크루즈의 봄은 역시 아름다웠다. 벨노어 성 일대를 비롯한 구릉의 들판은 녹색의 풀잎과 각색의 꽃망울들로 화려하게 뒤덮였다. 성을 둘러싼 정원에는 가문의 문장에도 들어있는 하 얀 마르그리트 꽃이 피어나기 시작해서 초록빛 벌판 곳곳에 흰 리본을 매어놓은 것처럼 보 였다. 숲으로 조금만 들어가도 앵초니 제비꽃이니, 각종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핀 4월이었다. 곧 나무들도 한꺼번에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흰색과 분홍의 라일락들이 진한 향내 를 내뿜었고 소박한 목련도 흰 꽃잎을 갸웃이 내밀었다. 성문 앞에는 복숭아나무의 꽃이 연 분홍빛 구름처럼 탐스럽게 피어올랐다. 창문만 열어도 수십 가지 향기가 흘러들어 나날의 아침을 신선하게 깨웠다. 성 앞을 흐르 는 작은 시냇가에 나갔더니 뾰족하게 핀 수선화가 청초한 옆얼굴을 살짝 돌린 것이 보였다. 물 흐르는 소리마저 향기로운 봄이었다. 생일인 4월 8일이 지나 로즈니스는 열세 살이 되었다. 그러나 로즈니스는 나이만 먹었다 뿐이지 아직 철없는 꼬마 아가씨 그대로였고,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아 열두 살인 보리스 쪽이 오히려 사뭇 달라졌다. 본래부터 어른스러운 성격이었지만 겉모습만은 또래 꼬마와 다 를 것 없었던 보리스는 갑작스레 소년으로 성장해 있었다. 겨울 사이에 놀랄 만큼 쭉쭉 커진 키가 이젠 165센티미터, 벨노어 성에 온 이후로 무려 7 센티미터 이상이 자랐다. 처음에는 본래 나이에 비해 키가 큰 편이 아니어서 란지에보다도 작았는데 이제는 훌쩍 뛰어넘었다. 로즈니스하고는 이제 머리 하나 만큼은 차이가 나서 누 가보아도 오빠처럼 보이게 되었다. 전체적인 체격도 훨씬 소년다워졌지만, 유난히 팔다리의 근골이 강해지고 단단해졌다. 본래 어깨에 닿았던 머리카락도 한결 자랐다. 처음에는 월넛이 장난삼아 묶어 주었던 머리였지만, 이제는 정말로 묶지 않고 훈련을 하는 것은 무리일 정도가 되었다. 어른스럽던 눈빛은 한결 깊어졌다. 아직 수염이 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잘 깎은 조각처럼 발달된 턱선은 갓 면도한 듯 파르스름했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이렇듯 갑작스런 성장에 가장 놀란 사람 은 보리스 자신이었다. 한동안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져 가는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서 일부러 거울을 보지 않고 지냈을 정도였다. 왜일까 생각해 보았지만 전보다 규칙 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훈련한다는 것, 그리고 주위의 환경이 조금 좋아 졌다는 정도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롱고르드의 진네만 저택에 있었을 때도 먹고 싶은 것을 참아야 한다든가, 피로한 일 을 강요당한다든가 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여기는 무엇보다도 자연과 기후가 그가 나고 자란 트라바체스와는 완연히 달랐다. 사철 서늘한 기후 탓에 성장이 억눌려 키 작은 관목만 무성한 그곳과는 달리 아노마라드, 특히 남부 아노마라드는 모든 생물이 자유로이 생육하는 풍요로운 땅이었다. 흡사 모든 물자가 필요의 몇 배로 남아도는 벨노어 성의 모습 과도 같았다. 잔에서 술이 넘쳐도, 남은 음식이 즐비한 식탁에 새 요리를 가져와도, 누구도 탓하지 않는 화려한 파티. 필요한 정도의 몇 배나 되는 옷감을 들여 주름이 많은 드레스를 만들어 입고, 창고에서 썩은 곡식을 비료 삼아 밭에 뿌리는 그곳에 자신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곳에 적응해버린 자신의 몸이 달갑지 않았다. 비록 사랑스럽지 않은 모국이라 해도 자신은 그 땅의 사람이었다. 특히 롱고르드, 그 키 작은 풀의 초원은 그의 고향이었다. 그와 예프렌의 추억이 깃들인 땅이었다. "응?" 보리스는 책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책 읽기에 아예 취미를 붙여버 린 양오빠 뒤에서 맴돌며 심심해, 심심해를 연발하던 로즈니스가 뭔가 이상한 얘기를 꺼냈 던 것이다. 책에 정신을 팔다 보니 정확히 듣지 못했다. "방금 뭐라고 그랬니?" 로즈니스는 약간 삐진 듯 입술을 내밀더니 불쑥 말했다. "나 어쩐지 오빠가 점점 좋아지는 것 같다고. 이제 곧 가버릴지도 모른다는 게 좀 아쉽단 말야. 이 말 했어." "......." 보리스는 로즈니스의 녹색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벨노어 성에 온 것은 9월 초, 로즈니스를 처음 만난 것은 8월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분명 로즈니스는 아노마라드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녀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함께 지내면서 점차 어떤 성격인지 알아가게 되고, 그리 나쁜 아이는 아니란 것도 알았지만 그래도 역시 친근감은 들지 않았다. 솔직한 로즈니스, 미인이 되고싶어하는 소녀, 오만하지만 잊어버리기도 잘하는 꼬마 아가씨, 재미있는 일을 보고 못 견뎌하면서 깔깔 웃 을 때는 귀족답지 않은 사랑스러움도 가지고 있는 그녀. 그러나 자신은 언제나 적당히 거리를 두고 로즈니스를 대해 왔었다. 이곳에 머무르는 한 무례하게 굴 수는 없었고, 적당히 비위를 맞춰 주는 것이 편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녀 의 존재는 자신이 벨노어 백작과 하기로 한 거래의 한 부분에 불과했다. 자신에게는 그 거 래 기간 동안 그녀를 점잖게 대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끝나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아마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보고 싶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적당히 대해 왔는데 그런 자신에게 정이 들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니 보리스의 마음도 약간 움직였다. 좀 미안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길 떠나더라도 나중에 다시 와 줄 거지? 나 보러 다시 올 거지?" 로즈니스가 미소를 지으며 보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성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몇 명 외에는 결코 보여주지 않는 미소였다. 그걸 알기에 보리스 는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신이 상대를 사랑하는 한,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는 듯 자신감이 깃들인 미소였으니까. 그렇기에... 역시 너에게 마음을 열 수는 없는 거다. 내 추운 세계 안으로 넌 결코 들어올 수 없을 테니까. 찬바람만 새어들어도 놀라 달아날걸. "응. 보러 올게."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실은 돌아올 리가 없는 데도, 그는 로즈니스의 미소에 화답하듯 같이 웃음까지 지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로즈니스는 버릇대로 다그치듯 다시 물었다. "정말이지? 꼭이다, 꼭 약속하는 거야?" "그래." 자신이 여길 떠나 어디로 가게 될 지는 몰랐다. 그러나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점 만은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마도 잊어버리겠지. 너의 존재 같은 건. 그리고 너 역시 조금 더 지나면 나의 존재 같은 건 잊겠지. 열세 살이 된다는 것, 성장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 것일까. 밤이었다. 겨울에도 창문을 열어 놓고 잤던 월넛의 방 창가에 흰 새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푸드덕, 한 번 날개 소리를 내더니 조용히 부리를 까딱거렸다. 침대에서 사람이 일어났다. "요즈렐?" 창가로 다가온 그림자가 손을 내밀자 흰 새가 선뜻 날아올라 그 위로 올라갔다. 사내의 팔 뚝만한 몸길이에 순백의 깃틸과 황금빛 부리를 가진 새였다. 비둘기라고 하기엔 꼬리털이 좀더 길었고, 자태 또한 훨씬 우아했다. 새의 빨간 눈동자는 술잔 속의 포도주처럼 말갛게 빛났다. "네가 직접 오다니 웬일이냐? 네 부하들은 어쩌고?" 월넛이 팔을 들어 새를 머리 근처로 가져가자 황금빛 부리가 그의 귓가로 다가가 조그맣게 재재거렸다. 새의 울음소리는 아니었다. 월넛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약간 어두 웠다. "그렇구나. 알겠다." 월넛은 새를 존중하는 것처럼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다음 다시 창가로 걸어갔다. 팔을 창 밖으로 내밀자 새가 다시 푸드득, 하며 날아갔다. 하얀 자태는 곧 검푸른 하늘 너머로 사 라져 버렸다. 달은 없었다. "예, 좋은 결과를 보여드리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햇빛 잘 비치는 응접실에서 벨노어 백작 내외와 마주 앉았다. 열어 놓은 창문 너 머로 복숭아꽃의 향기가 흘러 들어오는 날씨 좋은 오후였다. 몇 마디 일상적인 대화가 오간 다음에 백작은 수련의 성과에 대해서 물었다. "그렇단 말이지. 선생과 마음이 잘 맞는 것 같아서 다행이구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수련이 정말로 잘 되어 가고 있다고 해도 대답하기 전에 조금쯤 망설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보리스는 침착 한 어조로 명료하게 답했다. 그게 사실이었든, 아니었든. 물론 그도 부담은 느끼고 있었다. 백작은 며칠 전에 대결의 날이 5월 17일로 정해졌다고 통보해 주었다. 상대 소년은 벌써 월넛 선생이 말했던 실버스컬 대회를 준비할 정도의 실력 이라 했다. 어쩌면 보리스를 부추기기 위해 백작이 거짓 소문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 느 쪽이든 좋았다. 최근 보리스는 빠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아직 월넛에게서 윈터러를 빼앗 지는 못했지만 낮에는 근력 훈련(어느새 이렇게 불리고 있었다)을 하고 밤에 짧게 대결하는 일과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24시간 중에 단 한 시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긴장과 집중을 배가시키는지는 이제 보리스 스 스로도 깨닫고 있었다. 그 한 시간을 위해 나머지 23시간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컨디션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규칙적으로 휴식하고 잠들고 식사했으며, 거듭되는 훈련 외에 달리 흥분 을 불러일으키는 일을 피했다. 그리고 밤이 오면 온 정신을 집중하여 낮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 월넛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월넛도 막대가 아닌 검을 들고 보리스를 상대했다. 물론 윈터러를 잡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보리스와 조건이 같은 것이다. 둘의 실력은 아직도 현격하게 차이가 났지만, 이제 보리스도 자신의 몸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서서 히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단순한 검술, 또는 오랜 훈련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떤 알 수 없는 흐름을 쫓아, 또는 그것을 거스르거나 가로지르며, 그 모든 동선들이 마주치는 교차점을 찾고 있는 것이 다. 현재의 상태를 이대로 지속시키고자 할 때, 지금의 교착 상황을 깨고자 할 때, 똑같이 가는 체 하면서 의표를 찌르는 반격을 하고자 할 때, 그 모든 것은 흐름의 방향을 아는 것 에서 시작되었다. 그 방향을 알고서야 그것을 거스를 수도, 피할 수도, 뛰어넘을 수도 있는 것이다. 비록 그가 능숙하게 대처하는 기술은 아직 부족했지만 흐름을 읽는 법만은 하나씩 확실하게 깨쳐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월넛도 그의 그런 변화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문제 말인데......." 백작이 빙긋 미소를 짓더니 다른 화제를 꺼냈다. 이미 봄이 오기 전부터 몇 번인가 들어 왔던 이야기였다. "약속대로 네가 이번 대결에서 이긴다면 너에게 주겠다고 했던 그 상에 대해서 말이다. 네 가 다른 것을 원치 안는다면 꼭들어주고 싶은게 있는데 말야." "뭐죠?" 몇 번인가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머뭇거렸었다. "네 가족을 돕고 싶구나." 전혀 뜻밖의 이야기였다. 보리스는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약간 치켜떴다가 나지막이 말했 다. "제게 가족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물론 지금 네가 물려받았어야 할 집을 차지하고 있는 삼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란 다. 내가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인데 어때, 네가 맞출 수 있을까?" 그에게 다른 가족이 있었던가? 자신이 모르는 가족이 어딘가에 살아 있다고 가정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아직껏 존재조차 모르는 가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 사람이 있든 없든, 죽든 살든 관계할 바가 아니었다. "송하지만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설명해 주십시오." 백작은 곁의 아내를 잠간 바라보고는 빙긋 웃었다. 백작부인도 평소 같지 않은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그들 사이에서는 이미 이야기가 된 모양이었다. "게는 형이 있다면서?" 뜻밖의 충격이 보리스의 가슴을 치고 지나갔다. 형이라니? 지금껏 말이 없던 백작부인이 입을 열었다. " 아버지는 트라바체스에 자주 드나드는 분이라 진네만 가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아볼 수가 있으셨단다. 원한다면 네 삼촌의 요즘 소식도 들려줄 수 있을 정도지. 하지만 역시 형 의 소식을 더 알고 싶지? 진네만 가문에 아들이 둘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서 벌써 작년 겨울부터 죽 행방을 찾고 재시단다. 어째서 너와 혜어진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친형제 간인데 보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하셨어. 곧 좋은 소식이 전해져 올 거다." "실은 이미 좋은 소식이 있지." "어머, 그래요?" 보리스는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의 형은 예프넨 한 명뿐 이고, 그는 죽었다. 자신이 직접 죽음을 보았고 손수 그 얼굴에 흙을 뿌렸으니까. 지금 자신 앞에 앉은 저 두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매우 흡사한 외모에 나이도 딱 맞는 젊은이를 찾았다는 소식이 오늘 전해져 왔다오. 다만 기억을 잃은 듯해서 무얼 말해도 이해하는 눈치가 아니라는군. 진네만 가문의 일이나 보리 스의 이름을 말해줘도 통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이오. 그렇지만 실성한 것은 아니고 하니 곧 좋아질 수 있겠지." "잘 되었군요! 언제 데려올 수 있답니까?" 감당하기 힘든 기분이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 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그것이 사실이기를 바라는... 간절히 사실이기를 바라는... 부조리한 감정이 솟아나 가슴속을 팍 메웠다. 숨조차 내쉬기 힘들었다. 그것이 사실이기만 하다면, 예 프넨이 그를 향해 미소짓는 얼굴을 단 한 번만 다시 볼 수 있다면, 남은 생애를 다 내놓아 도 아깝지 않을 텐데. 애써 잊으려 했던 고통스러운 소원이 갑자기 그를 사로잡았다. 마치 이미 결과를 알고 있 는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간절히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듯이, 이미 일어나 버린 비극을 되돌릴 수 있을 것처럼. 그러나 사실이 아니었다. 불가능한 갈망이었다. "그 사람이... 아닙니다." 이 말이 거짓말이라면, 틀린 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뭐라고?" 백작이 미심쩍은 얼굴로 보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지도 않은 것을 어찌 확신하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형은... 이미 죽었으니까요." 백작과 백작부인은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백작이 당황한 목소리로 약간 더듬거리 기까지 하면서 말했다. "이미 죽었다고?" 보리스의 시선은 두 사람을 떠나 환한 들판이 펼쳐진 창 밖으로 향해 있었다. 잠시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무표정하고 초점 없는 눈이었다. 당연한 사실인데도 입 밖에 내기까지는 헤 아릴 수 없는 싸움이 필요했었다. 갑자기 기운이 쭉 빠졌다. "제 손으로 직접 묻어 주었습니다." 그랬었지... 분명히 그랬었다. "......." 백작과 부인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듯했다. 그만큼 보리스의 얼굴 은 싸늘해져 있었고, 고통스러워 보였다. 형은 죽었어. 분명히, 틀림없이 죽었어. 죽은 사람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해. 4월이 끝이 났다. 월넛은 웬일로 그 날 낮부터 보리스를 불렀다. 흰 꽃이 점점이 흩어진 풀밭에 앉아 둘은 서로 잠시 마주보고 있었다. "자신 있나?" 보리스는 그가 무엇을 묻는 것인지 순간적으로 헷갈렸다. 그가 이제 곧 이겨야 하는 귀타 프라는 소년에 대한 것일까, 아니면 윈터러를 다시 빼앗는 일에 대한 이야기일까. 월넛에게 대답하는 일에 대해서만은 보리스도 백작에게 하듯 자신 만만하지 못했다. 대답 없이 무심코 짚은 손끝에 하얀 꽃술이 부서졌다. 그는 잠시 망가진 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넌 참 한심한 녀석이란 말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월넛은 싱긋 웃고 있었다. 보리스도 이제는 월넛이 하는 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어느 정도 함께 지내며 겪어 알게 된 월넛은 약삭빠르거나 야망이 높은 사람에게 끌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보리스의 욕심 없는 소박함이 오히려 그의 마음을 끌고 있는 것이다. 처음 그걸 깨달았을 때는 그것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 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그런 생각을 접었다. 월넛에게는 솔직해지고 싶어서라든가, 남의 마음을 이용하고 싶지 않아서라든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자신이 노련 한 사람을 대상으로 그런 모험을 하는 것은 오히려 나쁜 결과를 부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자신의 고지식한 순박함을 좋아하는 상대였다. 그러면 계속 그렇게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 본능에 따르는 일은 쉬운 것이니까, 일부러 꾸민 행동보다 당연히 성과가 좋을 터였다. 섣불 리 뭔가 시도하다가 오히려 신뢰를 다 잃어버리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자신이 없다 이거야? 내가 갑자기 사라져버리면 어쩔 거야?" 그 질문조차도 앞서의 두 가지를 포함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내가갑자기 가버리면 어떻게 그 애를 이길래?', '내가 갑자기 가버리면 윈터러를 어떻게 찾을래?'. 월넛은 그 두 가지 질문의 앞머리만을 잘라 다시 한 번 말했다. "내가 어느 날 갑자기 가버리면 어쩔 거야?" 머리 위에는 흰 깃털구름이 휘감기며 흐르는 푸른 하늘이 있었다. 평화롭고 느긋한 날씨였 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고민하기에는 너무도 좋은 날씨, 행복해져야 할 것만 같은 날씨였 다. 그래도 행복해질 수 없는 사람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많은 것을 잃고서 갑자기 커 버린 자신, 마음에 들지 않는 넉넉함과 한가함, 잊을 수도 없는 어두운 기억, 가슴만 아프게 해 놓고 재빨리 사라져버리는 희망. "어디론가... 가시나요?" 어쩐지 그것은 진실일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월넛의 농담 속에는 항상 과육 속의 씨앗과 같은 진실이 있었다. "그래. 간다." 뜻밖이어야 했다. 그러나 보리스는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곁에 언제까지나 있 는 것은 없었다. 무엇이 사라진다 해도 놀라지 않을 셈이었다. 가슴속이 텅 비는 듯한....... "어디로 가시나요?" "아주 멀리." 월넛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높이 묶은 긴 머리채가 바람에 휘날렸다. 거칠고 강한, 오래 된 나무 같은 사내였다. 달빛을 삼키고 자란 이끼투성이 바위 같은 사내였다 그가 보리스를 내려다보았다. "내일이면 간다. 돌아오긴 힘들 거다." 그러나 보리스는 그를 바라보며 또 한 번의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시 만나리라, 전혀 예 상하지 못한 곳에서. 그들의 생애는 몇 가닥으로 꼬인 실처럼 단단히 한 매듭 얽혀 있으리 라. "네 검에 대해서 말인데......." 당연히 꺼냈어야 할 이야기였다. 월넛은 말을 하는데 있어 보통 망설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다.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난 처음부터 네 검을 갖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 아니, 실제로 가질 수도 없는 검이지. 넌 잘 모르겠지만 그건 내 신념에 맞지 않는 검이니까 말이다. 내겐 평생을 두고 지켜야 할 중대한 신념이 있어." "......." 보리스가 말이 없자 월넛은 계속해서 말했다. 오해받을 수밖에 없는 말을 하면서도 최대한 그걸 피하고 싶어 애쓰는 듯 했다. "그렇지만 네게 돌려주는 것은 더더욱 안 되는 일이지. 솔직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 당장 어떻게 되기 때문이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 불안하기 때문에 휠씬 더. 세 살 먹 은 어린아이에게 식칼을 들려 줄 수는 없는 것이니까.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것은 월넛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했다. 그는 솔직할 때는 한없이 솔직해지는 사람이었다. "그래, 내가 하는 말이 다 사탕발림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내가 이 검에 욕심이 나서 그러 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하지만 난 걱정스러워. 차라리 내가 네 오해를 사는 한이 있더라도 그걸 네 곁에 두고 싶지가 않아."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그제야 입을 연 보리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전처럼 월넛이 훌쩍 들어올릴 수 있는 키는 아니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제게서 빼앗아 가셨고, 저는 제 능력으로 되찾겠다고 약속한 것이었죠. 하루가 남아 있으니 그 약속 지켜보겠습니다. 아직 한 번의 밤이 더 남았지 않나요." "하지만......." 월넛이 뭐라 말하려는 순간 보리스가 먼저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맡기셨던 것은 돌려드릴 테니까요. 떠나실 때 제방에 잠시 오셔서 가져 가세요." 본래의 사정을 떠나 오히려 어린 소년이 선생에게 베푸는 듯한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월넛 은 약간 당황한 듯 입을 다물었다가 손을 들어 입가를 매만졌다. 무슨 말을 한다 해도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것은 무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지 않 을 수는 없는 묘한 상황에 처해 버렸다. 변명으로 들릴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을 안 할 수 는 없다고 할까, 그러나 월넛은 말하지 않는 쪽을 택해 버렸다. "이해해 줘서 고맙다." 그것은 '내게 그 단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해줘서 고맙다'가 아니었다. 자신이 윈터러를 넘겨줄 수 없어서 죽 해왔던 고민을 이해해줘서 고맙다는 의미였다. 물론 상황은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월넛은 그냥 자신에게 느껴지는 대로, 고맙다고 말했다. 그가 돌아서려는 순간, 보리스가 처음부터 물었어야 할 말을 불쑥 던졌다. "하지만, 왜 가시는 거지요?" 월넛은 다시 몸을 돌려 보리스를 내려다보더니 그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그리고 가볍게 악수를 했다.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야." 설명은 그것뿐이었다. 보리스의 손을 놓은 월넛은 저벅저벅 걸어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그 날 밤, 마치 처음 윈터러를 놓고 대립했던 그 밤처럼 홀리게 하는 달빛이 뿌려진 연습 장에서 둘은 마주했다. 월넛과 보리스는 마지막으로 힘껏 서로를 위해 대결했다.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것이 당 연했다. 보리스는 가볍게 스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칼에 베이거나 찔린 상처를 여러 개 입었고 월넛도 옷깃 여기 저기가 칼끝에 긁히고 찢겼다. 한 번, 다시 한 번, 숨 돌릴 틈도 없이 달려드는 보리스 때문에 월넛도 몇 번인가 주춤거렸 다. 물론 그가 솜씨를 발휘한다면 보리스 정도 한 칼에 베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러 나 그는 이 소년이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지금의 싸움으로는 더더욱 그랬다. 그런 까닭 에 월넛은 수세를 취하며 보리스의 공격을 흐트러뜨리는 데만 치중하고 있었다. 보리스는 달랐다. 잠시의 틈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이 한 시간 내내 그는 완전한 긴장 상태였다. 그가 좀더 솜씨가 좋았더라면 이날 밤의 상대를 죽이지 않고는 결코 끝내지 못했 을 정도로 전의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차이가 이 날 둘의 현격한 실력 차를 어느 정도 덮 어 주었다. 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둘이 팽팽한 대결을 벌이고 있는 걸로 보 일 수도 있을 정도였다. 키가 커진 소년은 이제 팔만 높이 올리면 곧장 상대의 목을 찌를 수도 있었다. 물론 쉽게 그러지는 못했다. 그러나 밀쳐지고, 넘어지고, 구르고, 상처를 입어도 다시 벌떡 일어나는 보 리스에게는 잠시의 머뭇거림조차 없었다. 그러나, 한 시간은 짧았다. "그만. 끝났다." 마지막으로 마주쳤던 검이었다. 월넛은 갑자기 강한 힘으로 맞닿은 검을 밀쳐 보리스를 바 닥에 쓰러뜨려 버렸다. 지금까지 적당한 정도로 치고 받아 주던 힘이 아니었다. 보리스는 바 닥에 처박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이제 끝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매일 밤의 대결은 끝이 나 버렸다.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채, "일어나라." 월넛은 검을 내려놓더니 보리스의 몸을 부축하여 일으켜 앉혔다. 그리고 흙 묻은 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너 같은 학생을 가져 본 것은 처음이다." 보리스는 대답이 없었다. 월넛은 갑자기 혼자 피식 웃더니 말했다. "후훗, 실은 누군가를 제대로 가르쳐 본 것이 처음인 게야. 아직껏 가르칠 마음이 나는 녀 석을 만난 적이 없었어." 보리스가 약간 고개를 들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너처럼 마음을 열 줄 모르는 녀석도 처음 본다." 월넛은 진실을 보고 있었다. 분명 보리스는 월넛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과거에 만났던 아이들이 열렬히 선생을 흠모하며 그의 기술이라면 뭐든 배우려고, 가르쳐 달라고 덤비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자신만으로도 완벽한 것 같은 세계의 주인, 그 세상의 벽이 일부 무너졌다면 외부에서 돌을 주워 쌓을 것이고 도움의 손길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 러나 그 벽 안쪽으로 누군가를 들여놓지는 않았다. 확실히 보리스는 월넛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선생이 이끄는 대로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페이스를 가지고 눈에 띈 방식들을 하나씩 자기 것으 로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아직 실력이 일천한 소년이 압도적인 선생에게 배우면서 자기 페이스를 갖는다는 것은 본 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것은 보리스가 남들의 몇 배나 되는 천재적인 소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성격의 문제였다. 강해지고 대단한 실력을 갖게 되기보다는, 자신의 길에 올라 흔들리지 않고 걷는 것만이 목표인 보리스였다. 그 마음이 그 의 페이스를 만들었다. 월넛은 거기에 끼여들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도, 몇 번인가 열릴 듯 하면서도 결국은 열리 지 않았다. 보리스의 마음 속에는 묘하게 바깥을 향해 열린 어떤 부분이 있었다. 거기에 몇 번인가 중첩되면서 교감이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사로잡을 수 없 는 소년이 그였다.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구나. 백작에게는 말하지 않고 조용히 떠날 생 각이야. 너도 모르는 체 해라.욕을 해대겠지만 나 같은 떠돌이를 고용한 이상 어쩔 수 없는 업보로 치라지. 그 동안 즐거웠다, 너처럼 이상한 녀석을 만나서." 보리스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대결에서는...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가르쳤다. 만일 진다면 네가 그걸 네 페이스에 잘 섞지 못한 탓이야." 둘은 가끔 그랬듯 방으로 올라가는 대신 아무도 없는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월넛은 늘 숨 겨 두는 틈새에서 브랜디를 꺼내어 모조리 마셔버렸다. 이제 떠나는 판이니 끝장을 보는 모 양이었다. 보리스가 자기도 한 모금 달라고 우겼지만 아이들은 안 된다고 잘라 말한 그는 짓궂게 물통에서 물을 한 그릇 퍼 건넨 다음 브랜디와 건배했다. 보리스는 짧게 말했다. "좋은 여행을 위해." 월넛과 헤어진 보리스는 땀에 젖은 몸을 찬물로 씻고서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다음날 새벽녘, 월넛은 약간 무거운 머리로 일어나 앉아 아침식사를 하고 떠날 것인가 심 각하게 고민했다. 비록 낮이 된다 해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훌쩍 사라지는 것쯤은 그 에게 일도 아니었지만 배고픈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인 탓이었다. 더구나 이곳은 송로의 벨크루즈, 대륙의 미식가들이 한 입이라도 먹을 수 있다면 영혼이라 도 팔 듯 덤비는 그 검은 보물을 며칠거리로 먹을 수 있는 축복 받은 고장의 성이 아닌가. 본래 처음에 그가 벨노어 백작의 아들을 가르치겠다고 응낙한 것도 다른 무엇보다 송로가 그를 유혹한 탓이 었다. "쓰읍, 참고 가야지 어쩌겠어." 안타깝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그를 부르고 있는 자는 약속한 날짜의 반나절도 어길 수 없 는 상대였다. 그도 이 부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흰 새의 공주인 요즈렐이 직접 온 것만 보아도 알고도 남았다. 짐이랄 것 없는 소지품들을 간단히 꾸린 그는 윈터러를 꺼내려고 침대 밑으로 손을 넣었 다. 그리고 멍해졌다. "선생님, 이제 가십니까?" 등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자신도 몰랐지만 이때 그의 표정은 낭 패하여 심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평소 그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다. 보리스가 문간에 서 있었다. 둘은 잠시 서로를 쏘아보고 있었다. 자신이 몹시 분개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까지도 약 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는 서서히 마음을 가라앉히며 눈빛을 달리했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날 보기 좋게 속였구나." 보리스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선생님도 처음에 제 검을 몰래 가져가셨습니다. 배운 대로 했으니 칭찬해 주시죠." 월넛은 가만히 있다가 낮게 말했다. "그래, 칭찬해 주지. 잘 했다." 성에 도착한 첫날, 월넛은 보리스를 붙들고 거짓말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보리스는 실제로 그것을 실천했다. 전날 밤, 상대가 충분히 지칠 정도로 잠시의 틈도 두지 않고 열렬히 달려들던 모습을 기억할 수 있었다. 또한 월넛은 브랜디를 마시고 푹 잠 들었고, 물을 마신 보리스는 정신이 맑았을 터였다. 또한 그 브랜디의 존재에 대해 보리스가 미리 알고 있는 이상 거기에 뭔가 약이라도 타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가 그런 것을 어떻게 손에 넣었을까는 별문제로 치더라도. 언제부터 그가 이 일을 기획했을까. "......" 보리스가 손을 펴 내밀었다. 거기에는 월넛이 처음에 맡겼던 단도가 놓여 있었다. 윈터러는 다른 곳에 두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긴 그런 식으로 되찾은 검인데 위험스럽게 그의 앞에 들고 나타날 정도로 어리석은 소년은 아니었다. 월넛은 다가가 그의 손에서 단도를 집어들었다. 자신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 다. "선생님에서 저를 걱정해서 그러셨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검은 저를 위해 죽 은 제 형의 단 하나뿐인 유품입니다. 그리고 제가 태어났던 집안과 연결된 유일한 물건이기 도 하지요. 아무리 위험한 것이라 해도 저는 그것을 제게서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저는 그 검을 제 형처럼 여깁니다." 보리스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월넛에게 이런 사실을 말하는 것이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이 제는 더듬거리거나 목이 메이지도 않았다. "그래, 그런 식이다." 월넛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도 착 가라앉아 있었다. "반드시 그런 식으로 해라. 약속이나 맹세와 같은 것을 결코 어기지 않을 것처럼 행동한 다음, 결정적인 순간에 단 한 번 뒤통수를 쳐라. 그러면 결코 실패하지 않을 거다. 지금처 럼." 그것은 부드러운 이별이 되지 못했다. 월넛은 화를 내지 않았지만 자신의 감정을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그가 느꼈을 감정은 명백했다. 분명 거짓말을 잘 해야 오래 살아남고 강해질 수 있다고 말했었지만, 실제로 그는 그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보리스가 그런 사 람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에 마음에 들어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다 알고 있었음에도 보리스는 이 계획을 포기할 수 없었다. 윈터러는 결 코 내놓을 수 없는 검이었다. 말로는 월넛을 설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이 방법뿐 이었던 것이다. 실로 몇 달을 생각해 온 그대로, 그는 성공했다. "......." 월넛은 작별 인사를 남기지도 않았다. 보리스가 막고 선 방문 쪽이 아니라 창가로 다가가더 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보리스는 놀라 창가로 뛰어가거나 하는 짓은 하 지 않았다. 비록 여기가 3층이라 해도 월넛은 다칠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헤어졌다.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진 채 어린 시절의 선생은 떠나버렸다. 완연한 봄이었다. 2. 바람이 남긴 손자국 "월넛 선생님 말입니다." 란지에가 그렇게 입을 열었을 때 보리스는 만개했던 꽃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복숭아꽃의 흰 꽃잎들이 점점이 떠올랐다가 흩어지고, 몇 줄기 바람에 휘 말려 들판으로 날아갔다. 눈가에서 흰 꽃잎이 스러지는 빛의 경계 너머로, 서서히 서녘 하늘 에 걸리고 있는 태양이 있었다. 보리스는 고개를 돌렸다. 란지에가 미소지을 듯 말 듯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떠나셨는지 알고 계시는 것 같군요." 보리스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흑청빛 머리칼에도 꽃잎 같은 흰 햇살이 내려 있었다. "어 디로 가셨는지는 모르시지요?" 보리스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날따라 윈터러를 꺼내 든 채 그 손잡이를 만져보 고 있었다. 월넛이 떠난 후의 생활은 어딘가 모르게 맥이 빠진 듯했다. 이제는 혼자서 연습을 했지만 월넛과 함께 했던 밤의 한 시간이 사라진 후로 진전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오히려 란지에처럼 책만 읽어도 좋은 처지가 부럽다 싶었다. 아니, 곧 그는 생각을 정정했다. 란지에는 지금처럼 그와 함께 책이라도 읽을 때를 제하고 나머지 시간은 모두 누군가의 치다꺼리를 하며 보내는 처지였다. 하인이란 하루에도 몇 번 씩 자존심을 꺾지 않으면 안 되는 자리일 것이다. "저는 왠지......." 란지에가 드디어 망설이던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그는 책을 펼친 채로 테이블에 내려놓았 다. "도련님과 월넛 선생님제서는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인질을 교환했을 것 같군요." 보리스가 맨 처음 윈터러를 되찾지 못하고 대신 월넛의 단도를 받았던 자리에 란지에도 있 었었다. 하지만 그 일이 어떻게 끝났는지 란지에는 직접 보지 못했고, 다만 윈터러가 보리스 의 손에 돌아와 있는 것만을 보았다. 보리스는 말을 할까 하다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란지에 라면 이해해 줄 것도 같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솔직히 내보이기가 싫었다. "그 검은... 무언가 사연이 있는 물건 같았는데 말입니다. 결국 다시 도련님의 손으로 돌아 왔나 보군요." 보리스는 한 손으로 윈터러를 쥔 채 검을 뽑기 직전의 동작을 취해 보았다. 갑자기 키가 자라서인지 이제는 허리에 차고 다닌다 해도 어느 정도 자세가 나을 법도 싶었다. 여러 가 지로 수련을 한 덕택에 이제는 가누기 힘들 정도로 무겁지도 않았다. 그러나 역시 바스타드 소드(bastard sword)를 자유자재로 휘두르기에는 아직 버거운 나이였다. 란지에는 보리스가 하는 양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역시 검과 같은 것은 어울리지 않는 소년이 그였다. 문득 정말로 그럴까 싶었다. "보겠어?" 보리스는 갑자기 윈터러를 란지에의 손에 건넸다. 란지에는 얼결에 검을 받아들었지만 어느 손으로 검의 어디를 쥐어야 하는 지도 잘 몰랐 다. 윈터러의 귀족적인 흰빛은 그에게 잘 어울렸지만 보리스의 손에 있었던 때와는 달리 그 에게는 단지 장식에 불과한 것 갈았다. 잠시 후, 란지에는 검을 받아든 보통의 소년들처럼 그럴듯한 자세를 취해 보는 대신 그것 을 그냥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더니 길이를 가늠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두 팔을 벌려 양쪽 끝을 잡았다. 문득,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보리스는 이유도 모른 채 란지에가 하는 양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다시 손으로 흰 칼집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손잡이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손을 벌려 가드의 너비를 만져 보 았다. 그는 검의 아름다움이나 정교한 만듦새에 감탄하고 있지 않았다. 흡사 숨겨진 무언가 를 찾아내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무엇을? 그가 느꼈다던 검의 사악함을?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란지에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갑자기 빠른 동작으로 검을 뽑았다. ".....!" 그 순간의 동작은 검이라고는 만져본 일도 없는 것처럼 보였던 좀전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정말로 검을 다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떠나서 발검 하나만은 확실히 익힌 듯한 자 세였다. 그런 상대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던 보리스로서는 실로 뜻밖이었다. 란지에의 시선이 번쩍이는 검날을 훑어 내렸다. 눈빛은 매우 진지했다. 오랜만에 보는 윈터 러의 날은 여전히 희었고, 어지러울 정도로 날카로웠다. 그러나 란지에는 겁내는 기색이 없 었다. 아니, 어떤 표정도 없는 그 얼굴은 오히려 윈터러가 지닌 싸늘함과 동류인 양 보였다. "죄송합니다만... 도련님, 이 검은 이것 자체로 하나뿐입니까? 혹시 다른 어떤 물건과 이름 을 공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했다. 검을 뽑아든 채로 선 란지에의 모습은 생각지도 못한 섬뜩함 을 지니고 있었다.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대답하려다가 잠시 후 마음을 고쳐먹고 말했다.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나도 몰라." "그렇습니까." 그는 검을 다시 꽃았다. 그 자세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윈터러를 돌려주면서 란지에는 보 리스의 눈을 의식한 듯 말했다. "제가 검을 들고 할수 있는 일은 방금 두 가지가 전부입니다." 보리스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어째서 검을 다루지 못하면서 그것만을 배울 수가 있지? 한두 번 연습한 자세가 아닌데?" 란지에는 자조적인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귀부인들의 놀이지요. 소녀처럼 생긴 시동들을 좋아하면서 가끔은 그들에게서 남성적인 매력도 느끼고 싶어하는 악취미의 부인들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란지에의 말은 종종 열세 살 먹은 소년의 입에서 나오는 것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신랄해서 보리스를 당황하게 하곤 했다. 란지에는 자리에 앉더니 검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린 것 처럼 말했다. "전에 도련님께서는 제 과거에 대해 물은 일이 있으셨지요?" 그래서 그가 방금 한 말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귀부인의 파티 시동이라는 불유쾌한 시 절의 기억에 대해서.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 였다. "그래 ." "제게도 도련님의 옛 이야기를 좀 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갑자기 왜 그런 것을 묻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얼음 벽 앞에 마주선 것 같은 느낌 의 소년이었는데, 어느 순간 이후로는 가끔씩 이렇듯 솔직하게 말을 꺼내는 때가 있었다. "내 이야기라고 해 봤자... 별로 말할 것은 없으니까." "누구의 삶은 얘깃거리로 가득 차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뜻밖의 대꾸에 놀라 고개를 들었지만 란지에는 곧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에서 나 온 것 치고는 드물게 편안한 미소였다. "남의 얘깃거리가 되기 위해 사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도련님의 평범한 삶 이야기가 듣 고 싶군요." 상대가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시절의 이야기를 이미 들었으면서, 그런 부탁에 응하지 않는 것은 어쩐지 부당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 보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였다. 백작이 정해 준 범위 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마음 쓰다 보니 자연히 아주 어렸던 시절의 이야기가 주로 나왔다. 그게 몇 살 때 일일까. 다섯 살? 또는 여 섯 살? 그의 인생에서 결코 뺄 수 없는 존재인 예프넨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자 처음엔 떨렸지 만 곧 괜찮아졌다. 그는 가능한 한 조심스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도록 예프넨을 묘 사하는 일에 저도 모르게 집중했다. 그의 서툰 이야기 속에서 예프넨이 지녔던 빛이 바래지 않도록 애썼다. 보리스가 기억하는 소년 시절의 예프넨은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딘가 구석에 숨어서 뭔지 모를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는 형을 보리스는 반나절을 헤매서라도 반드시 찾아내곤 했다. 동생이 나타나서 '드디어 찾았다!'는 듯한 얼굴로 말갛게 미소짓고 있으면 '은둔자 예 프넨'은 어쩔 수 없이 슬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장난 반 원망 반으로 동생의 머리를 슬 쩍 쥐어박은 다음 곧장 놀아주러 뛰어나갔었다. 란지에는 보리스의 이야기에서 우러나는 애정 깊은 어조를 느낀듯했다. 그가 예프넨의 일 을 입에 올릴 때면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 주었다. 곧 보리스도 느낄 수 있었다. 란지에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사려 깊음은 란즈미를 향한 눈빛에서만 느낄 수 있 었던 그런 것이었다. 어쩌면 그는, 아파하는 누군가를 돌보는 마음에 이미 익숙한 것일 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점차 최근의 일들로 이어졌고, 드디어 저택을 떠날 때의 일을 언급할 때가 왔다. 보리스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블라도 삼촌에 대한 이야기를 빼고 아버지가 사고로 늪에서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예프넨의 죽음에 대한 것이 잘 설명되지 않았다. 이야기를 지어내는 솜씨가 없는 보리스는 말문이 막혀 더듬거렸다. 지금껏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해왔던 예프넨 이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후 란지에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까... 도련님의 형님께서도 돌아가셨는데, 도련님께서 많이 상심하셔서 그 때의 상황 을 잘 기억하지 못하시는군요." 자신이 기억하지 못했던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형을 내버려두고 자신만 살아 남겠다고 도망쳤을 때, 그 때의 기억을 저도 모르게 스스로 지웠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을 형은 그 때의 일을 탓하지도, 다시 언급하지도 않았다. 예프넨에게 그건 용서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겁에 질린 어린 동생으로서 당연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던 것 이다. "그... 래......." 란지에는 차가웠지만 어떤 때는 놀랄 만큼 사려 깊은 소년이었다. 보리스의 얼굴을 쳐다보 더니 더 묻지 않고 입을 열었다. "죽었다 해도 누군가의 가슴에 남아 있는 사람이 전 오히려 부럽습니다. 사람은 가끔 산 채로도 다른 사람의 가슴 속에서 죽어버리는 일이 있으니까요." 무슨 소리일까. 란지에는 이어 말하고 있었다 "도련님이라면 그런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난......." 그것은 보리스에게 낯선 이야기였다. 란지에는 또한 보리스가 짐작 할 수 없는 어떤 힘겨 운 일을 겪은 것이 분명했다. "잘 모르겠어. 만일 나를 자신의 가슴 속에서 죽여버린 사람이 있다면, 나도 그 사람을 똑 같이 죽여 버리면 되지 않을까? 그 사람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 그런 것이 대안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보리스도 잘 알고 있었다. 란지에는 그냥 한 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역시 그렇겠지요. 그리고 대신 마음속에 살아 있는 사람에게 더 잘해 주고요." 보리스는 수긍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란지에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어 빙그레 웃었 다. "그러니 도련님도 주위에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좀더 잘하십시오. 돌아가신 분은 그만 잊 고요." 갑자기 뜨끔, 하면서 월넛의 일이 생각났다. 월넛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몹시 잘해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도 처음엔 보리스에게 마음을 열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이성으로 설명 할 수 없는 뜻밖의 변화이기에 그도 어쩌지 못했고, 보리스도 다 깨닫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 그는 완연히 실망한 얼굴로 그의 곁을 떠나갔다. 서로한 마디 변명도 하지 않 았던 것이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때 자신의 행동을 설명할수 있을까. 아니... 아니라고 생각했다.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애정이란 꼭 상호적인 감정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여러 사람 을 한꺼번에 사랑할 수 있는 심장은 없었다. 그에게서 예프넨의 기억이 지워질 즈음...... 하지만, 결코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도 있어. 몸이 죽는 것과는 달라, 너도 널 지워버렸다는 그 사람의 실체까지 죽이지는 못할 거야. 살인자가 아니니까, 나도 마찬가지야, 마음 속의 어떤 한 사 람을 죽인다면 난 살인자가 되는 것보다도 더 큰 죄책감을 느낄 거야. 그러고 싶지 않아. 절 대로." 란지에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보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반론하지 않는 것 이 오히려 낯설었다. 한참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어려서 저는 어머니하고만 살았습니다. 란즈미까지 세 식구였죠. 별로 부족한 것은 몰랐습 니다. 집은 켈티카에서 사흘 거리 정도 떨어진 전원에 있었고, 몇 사람인가의 고용인들도 있 었습니다." 그것은 푸르고 깊은 터널로 들어가는 듯한 이야기였다. 란지에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때 저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어머니가 어떻게 하녀를 부리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우리 에게 좋은 식사를 줄 수 있는지 궁금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태어날 때부터의 일이고, 당연하게만 느껴졌던 생활이었으니까요. 그때의 란즈미는 수줍음을 타기는 해도 곧잘 사고 를 치곤 하던 호기심 많은 아이였습니다. 지금의 모습으로는 상상하기 힘드시겠지만 말입니 다." "......" 보리스가 닫지 않은 창 너머에서 복숭앗빛 꽃잎들이 작은 폭풍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잘게 부서지는 햇살 아래, 봄의 폭풍이었다. "한 달에 한 번, 또는 두 번 정도 찾아오는 점잖은 신사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오시면 흔 히 우리들에게 작은 선물을 주셨고 어머니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셨지요. 어렴풋이 저는 그 분이 어머니의 생활을 도와주는 후견인일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어머니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고, 또 오시면 돈이나 서류 같은 것에 대해서 복잡한 이야기를 하곤 하셨으니까 요. 먼 친척인데 어머니의 재산을 대신 관리해 주신다던가, 그런 분일 거라고 짐작해서 란즈 미에게도 예의바르게 대하라고 일부러 주의를 주었습니다." 란지에가 펼쳐 놓은 책장이 창문을 흔들던 바람에 한두 장 넘어갔다. 바랜 듯한 양피지 책 장 위로 바람과 햇빛이 동시에 흩날려갔다. "오후에 시간이 나게 되면 그 분은 어머니 곁을 떠나 저와 몇 마디 나누는 일도 있었습니 다. 제가 읽고 있는 책에 대해 묻기도 하고, 켈티카란 어떤 곳인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 셨지요. 어린 저에게 그 분의 식견은 존경할 만한 것이라 저도 모르게 가슴 깊이 따르는 마 음이 생겼습니다. 저는 그 분이 학자가 아닌가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치가 의 풍모가 강한 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어쨌든 저는 어느새 어머니만큼이나 그 분을 앞서 더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도 저를 사랑해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문득 란지에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한때 하인을 부렸다던 그는 이제 하인의 옷을 입고 자 신에게 말끔한 존댓말로 말하고 있었다. 나이에 맞지 않을 정도로 침착하고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흘로 세상을 견디며 살아가야만 했기에. 언제부터? 란지에의 이야기 속에 든 것은 깨질 듯 불안한 행복이었다. 모든 것이 그저 꿈이었던 것처 럼 그렇게 깨어질. 곧 나을 이야기를 짐작하면서도 그 행복이 부서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자신이 그 앞에 있었다. "아홉 살 때겠군요. 어느 날 어머니께서 저희 남매를 부르시더니 짐을 꾸리게 하시더군요. 이 집을 떠나 켈티카에서 살게 된다고, 매우 흥분하면서 또한 기뻐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왜 좋은 것인지 영문도 모르면서 짐을 챙겨 집을 나섰습니다. 오래 살았던 집인데 막상 돌아보 며 아쉽다고 느낄 사이도 없었지요. 포장이 쳐진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고, 마차는 곧장 저희 가족을 켈티카로 실어다 주었습니다. 켈티카까지 사흘 걸린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습니다. 대 신 다시 되찾아가 라면 절대 혼자서는 가지 못할 것 같더군요." 꽃잎이 하나 둘 책장 위로 떨어졌고 다시 불어온 바람이 페이지를 넘기자 마룻바닥으로 날 려갔다. 기억 속의 세월이 흐르는 것처럼, 아무도 읽지 않는 책 속의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 다. "어머니께서 저를 껴안으면서 그 분을 만나게 된다고 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래서 저 도 드디어 켈티카에 온 희망이 있구나 싶었지요. 그때 제 소원은 그 분이 저희 집에 오래 사셔서 제게 늘 좋은 이야기들을 들려 주셨으면 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것 말고는 더 바랄 것도 없었고요. 그래서 저희 가족은 마차에서 내렸고, 어떤 좋은 여관에 들어가 그 날 밤을 묵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일어났을 때 거기엔 저희 세 식구밖에 없었습니다. 마차를 비롯 해서 저희를 켈티카까지 데려온 사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으니까요." 란지에의 눈가가 희다고 느꼈다. 꿈의 한 조각 같은 오후의 빛이 진홍의 눈빛을 아릿하게 했다. 아픈 사람처럼 뺨이 파리해져 있었다. "어머니조차 처음엔 영문을 몰라 여관 사람들을 붙들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귀찮아하 는 듯한 태도뿐이었습니다. 그 날 저녁 무렵까지 어떻게든 알아보려 애썼지만, 결국 여관에 서 나오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누군가를 찾아가야 하겠는데 어머니에서는 켈티카 의 지리를 전혀 모르셨고, 저희에겐 타고 갈 말 한 필도 없었습니다. 가져온 짐이 너무 많아 서 여관에 팔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저희의 급한 사정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들도 비웃으 면서 물건에 제대로 값을 쳐주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잠시 맡아 달라고 했지만 그것조차 거 부하더군요." 급전직하의 이야기가 느린 음악처럼 나직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쉽게 절망하는 분은 아니셨습니다. 일단 마음을 결정하시자 드레스 상자며 아름다운 모자들, 신발들, 귀하게 여기던 장식품들을 모조리 팔고 쉽게 가져갈 수 있 는 귀금속류만 단단히 챙기셨습니다 그때는 초가을이었는데 저희한테도 입을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많은 옷을 입히시더니 다른 것은 다 팔아버리셨지요. 그리고 그 여관을 떠나 며칠 동안 거리를 떠돌며 누군가의 집을 수소문 하셨습니다." 란지에는 갑자기 보리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미소했다. "찾았을 것 같으십니까?" 말문이 막혀 쳐다보고 있는데 란지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바람이 넘겨버린 책장을 다시 한 장씩 되넘기고 있었다. 책장 사이로 들어간 꽃잎 몇 장이 사뿐 날아올라 그의 손등 에 떨어졌다. 꽃잎만큼의 핏기도 없는, 단단한 뼈대만 유난히 두드러진 손이었다. "예, 찾았습니다. 대략 나흘 정도 걸렸지요. 위풍당당한 저택이더군요. 저와 란즈미가 꿈에 서도 상상해보지 못했을 정도로." 그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새로운 감정이 느껴졌다. 가벼운 경멸이었다. "어머니께서도 약간 주눅이 드신 듯했지만 그래도 가능한 한 당당하게 문지기와 이야기하 시더군요. 잠시 후 저희는 저택 안으로 안내 되었습니다. 그러나 들어간 곳은 응접실이 아니 라 어떤 작은 방이었습니다. 그리고 집사처럼 보이는 사람이 어머니만 불러내서 나가더군요. 한참이나 기다렸습니다. 서서히, 저는 점차 뭔가 모를 불길한 기분이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점차 란지에는 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말하고 있었다. 전혀 흥분하지 않았고 어조조 차 변하지 않았지만 평소 보던 그의 모습과는 달랐다. 아니, 실은 같았다. 평소 그가 보이는 모든 모습이 단지 약한 반영에 불과하다면 지금의 저 모습이야말로 가장 본질에 가까운 이 데아였다. 실체와 그림자의 관계처럼, 근원과 갈래의 관계처럼. "란즈미를 내버려둔 채, 저는 일어나 밖으로 나갔습니다. 정확히 말해 나가려 한 셈이었습 니다. 문 앞에는 지키는 사람이 있었고, 그는 거칠게 저를 다시 안으로 밀어 넣더군요. 두 번, 세 번째인가 저는 갑작스럽게 뛰어나가 그를 밀치고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여러 사람이 뒤쫓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미 멈춰 되돌아가기엔 늦어 있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자 복도를 가로막은 문 너머에서 뭔가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비명 소리와 물건이 깨어지고 구 르는 소리 등등.... 무작정 문을 밀치고 이어진 응접실로 뛰어들었을 때, 저는 낯선 도시에서 헤매던 며칠 동안 정말로 간절히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보리스는 입을 열다가 멈췄지만 란지에는 곧장 이어 말했다. "예, 그 분이었지요." 그 감정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다 짐작할 수는 없었다. 그가 예프넨을 잃었을 때의 감정을 란지에가 모두 이해할 수는 없듯. 란지에는 잠시 말을 멈춘 채 자신이 넘기던 책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굴에서는 나타나 지 않았던 그의 감정이 바로 거기에 드러나 있었다. 책장은 그가 찾으려 한 부분보다 훨씬 앞쪽까지 넘걱져 있었다. 그토록 침착하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반대로 그의 손은 이성을 잃 고 있었던 것이다. "......" 둘은 말없이 그 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려앉았던 꽃잎이 페이지 한구석에 작은 얼룩을 남겼다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찍은 듯한 자국, 바람이 눌러 두고 간 손자국인 듯. 아련하고 나른한 봄의 오후와, 어울리지 않는 아픈 이야기들. 정말로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란지에가 조용히 말했다. "그 사람이 제 아버지입니다." 이야기는 짤막하게 조각난 상태로 좀더 이어졌다. 그 사람, 결국 란지에와 란즈미의 아버지 였던 그 남자는 어떤 중대한 혼담을 앞두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 시골 별장에 숨겨 두었던 평민 아내와 그 자식들을 내버리기로 마음먹은 자였다. 어린 나이로서 적지 않은 비극을 겪 었던 보리스 조차도 치가 떨릴 정도로 그 자는 잔인하고 야비했으며 심지어 교활하기까지 했다. 그는 대도시 켈티카 한복판에 내버린 이들 세 식구가 다시 찾아올 것을 미리 짐작하 고 있었으며, 그에 대비하여 철저한 대책을 다 세워 두었다. 아니, 처음에 버린 것 자체부터 가 이미 잘 짜여진 포석이었다. 갑작스럽게 나락으로 떨어뜨려 비참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하고, 결국 포기하게 만드는 것. 그 남자가 보는 앞에서 란지에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무자비하게 걷어차이며 구타를 당했 다. 란지에가 뛰어들어왔음에도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애정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계산된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반쯤 정신을 잃은 어머 니와 충격으로 멍해져 버린 란지에를 빈손으로 내쫓은 건장한 집사는 집안에 혼자 남은 란 즈미가 안전하기를 바란다면 다시는 켈티카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들이 어린 란즈미를 두고 떠날 수 있었을 리 없었다. 정신이 든 어머니는 며칠 동안 저 택 주위를 맴돌며 딸만 돌려준다면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다고 비굴하게 눈물을 흘리며 사정 했다. 꼭 열흘이 지나서 란즈미는 다시 두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미 지금과 같은 상태가 되어버린 후였다. "사죄는커녕 연민도, 심지어 경멸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는 돌멩이 세 개를 다루듯 저희 식 구를 다루었습니다. 그의 가슴 속에서 저희 세 사람이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정말로 완벽하 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를 죽였습니다, 다시는 살아날 수 없도록." 란지에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가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이었다. "마음 속으로 저질러지는 어떤 살해는, 어떤 면에서 산 자에게 저질러지는 것보다 더 잔인 합니다. 그곳에는 시체는커녕 한 조각의 감정조차 남지 않게 되며 환생은 꿈도 꿀 수 없습 니다. 그렇다고 텅 비어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 자리를 대신 메우는 것은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질러지는... 비명과 같은 것이죠." 결코 끝나지 않는. 산 자를 죽였을 때는 단한 번 듣는 것으로 끝났을 그 비명. "저도 죽어서 누군가의 가슴속에 남을 수 있다면 좋겠군요." 가벼운 어조였지만 그것이 진심이라는 것을 그 어느 때보다도 잘 알 수 있었다. 보리스도 그 순간만은 그 마음에 동화되어 자신 역시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이미 죽은 사람의 마음속에서만 살아가겠다고 생각한 자신인데.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거야." 언젠가부터 느끼고 있었다. 란지에의 모습은 마치 거울 속의 자신을 보는 듯, 닮았으면서도 또한 정반대였다. 그가 오른손을 들면 거울속의 그림자는 왼손을 들어올렸다. 그가 왼쪽으로 돌아서면 그림자는 오른쪽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돌아선 순간조차도 그들이 닮은 뒷모습을 가졌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었다. 그들이 속한 어둠 속에서, 그들은 아마도 반대쪽으로 걸어나갈 것이었다. 그리하여 다시 만 났을 때 하나는 동쪽에서, 다른 하나는 서쪽에서 온 양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 때야말로 그들이 다시는 닮지 않을, 태생부터 다른 족속이 되는 때였다. "그렇게 되겠지요?" 3. 스노우가드 그것은 실로 뜻밖의 이야기였다. 이제 그 소년, 귀타프 메르데르와 대결하기로 정한 날이 채 사흘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시합은 백작과 내기를 한 친구라는 메르데르 자작의 집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기에 출발은 내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 시점에서 백작은 갑자기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제 형의... 무덤이라고요?"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전에 네 이야기를 듣고서 이자보와 함께 많은 생각을 했었다. 네 형이라고 생각했던 사 람도 곧 다른 사람으로 밝혀졌고, 해서 네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싶었지." 보리스가 자기 손으로 직접 형을 묻었다는 말에 제대로 된 무덤이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 었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찾아내어 좋게 장례를 치러 주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이제 며칠 남지 않았지만 너는 우리 집에서 잘 처신해 주었고 로즈니스도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나는 매우 만족스러웠지. 내가 베푸는 것이 이유 없는 친절이라고는 생각하지 말 아라. 너는 그만큼의 일을 해냈으니 말이다. 네가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연습한 것을 유감없 이 발휘해서 그 아이를 이겨주기만 한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다." 이런 자리에서는 언제나 란지에도 로즈니스도 없이 보리스와 백작 내외 세 사람만이 만났 다. 보리스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 어리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 럴 여력이 없었던 탓인지 예프넨에게 정식 장례를 치러 주겠다는 생각까지는 해본 일이 없 었다. 언젠가, 라고는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가까운 미래라고 생각하진 않았었다.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백작부인이 거들었다. "생각해 볼 것이 뭐가 있겠니. 험하게 묻힌 사람은 땅속에서도 편히 쉬지 못한단다. 그리고 무덤은 네가 괜찮다면 벨노어 영지 안에 만들어줄까 생각하고 있지. 네가 한때 우리 아들이 었으니 네 형도 벨노어 가문과 전혀 인연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겠느냐. 또 너도 언제고 원할 때면 형의 무덤을 보러 와서 여기 묵어도 좋고." 본래 이곳을 떠나고 나서 쉽게 돌아올 생각은 없었다. 아니, 가능하면 돌아오고 싶지 않았 었다. 그것 역시 더 생각해 볼 문제임에 분명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가능하면 떠나기 전에 결정하는 것이 좋을 테니 내일 오전까지는 이야기하거라." 백작이 그렇게 말하고 그만 가도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리스는 응접실을 나와 방 으로 돌아갔다. 란지에가 마침 책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예의 회담이군요. 요즘에는 잦은데요." 보리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잦았던가? "아마도 그 날이 다가와서겠지요. 차 한잔 드릴까요?" 란지에도 그가 다른 소년과 검술 시합을 벌인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나면 성을 떠나게 된다는 것은 몰랐다. 보리스는 문득 란지에에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 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떠나게 된다는 이야기만은. 잠시 고민하던 그는 약간 다른 방향으로 입을 열었다. "차는 됐고... 란지에, 네가 전에 해줬던 이야기에 대해서 말인데, 어머니께서는 어떻게 되 신 거지? 지금은 너희 둘뿐이라고 했던 것이 기억나서." 란지에는 내려놓았던 책을 마저 꽂느라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간단히 말했다. "헤어졌지요. 사고였지만 어쨌든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행방이나 생존 여부에 대해서는 모 릅니다." "그래......." 그가 묻고 싶은 것은 그 다음 부분이었다. "그럼 너희 둘만 남게 되었을 때 넌 괜찮았니? 동생은 아프고, 갈 곳도 없고, 그런데도 두 렵거나 하지 않았어?" 그 말을 하면서 보리스는 어쩐지 란지에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 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으로 란지에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도 어린아이였는데요. 너무 막막하고 허망해서 란즈미의 손을 잡 고 강물에라도 뛰어들어 죽고 싶었지요." 그런 말을 하고 있는데도 란지에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가벼운 미소를 띤 그대로였 다. 책을 다 꽂은 그가 테이블로 다가와 앉았다. 그제야 보니 테이블 위에는 열쇠 다섯 개가 매달린 낯선 열쇠 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그렇지만 넌 지금까지 잘 해냈구나. 동생도 돌보고......." "여러 가지 우연이 도운 것뿐이지요." 란지에는 열쇠 꾸러미를 집어들더니 열쇠들을 하나하나 만지며 그 가운데 한 개를 골라냈 다. 그것을 꾸러미에서 끌러내더니 탁, 소리를 내며 보리스 앞에 놓았다. 보리스는 설명하라는 듯한 눈빛을 했다. 란지에는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4층 전시실로 들어가는 비밀 됫문 열쇠입니다. " "전시실이라고?" 전시실에 대해서는 로즈니스에게 언뜻 들은 일이 있었다. 백작이 개인적으로 수집하고 있 는 고서적과 값진 필사본들, 특히 오래된 태피스트리들을 모아 놓는 곳이라고 했다. 아주 중 요한 손님이 아니면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보리스는 물론이고 로즈니스조차도 함부로 들어 갈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그곳은 왜지?" 란지에는 여전히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 "내일 떠나시지 않습니까? 가시기 전에 한 번 보시라는 마음에서요" 보리스는 흠칫 놀랐다. 그가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란지에가 알기라도 한 건가? 그러나 란지에는 이어 말했다. "어차피 돌아오시겠지만 그 전에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아마 많은 것을 느끼실 수 있으실 겁니다." 란지에는 나머지 네 개의 열쇠가 달린 꾸러미를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보리스는 테이 블 위의 열쇠를 내려다보다가 그토록 중요한 곳의 열쇠치고는 좀 지나치게 소박하게 생겼다 는 생각을 했다. 보석이나 장식은커녕 기껏 노끈에 질끈 매어진 누르스름한 쇳조각이 아닌 가.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치 진짜 열쇠를 본을 떠서 조악하게 만든 모조품인 것처럼 보 였다. "새벽으로 하지요. 4시경에 도련님을 깨우러 오겠습니다." 보리스는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란지에가 그에게 의견도 묻지 않고 이렇듯 일방 적으로 일을 정해버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맨발로 걷는 바닥은 푹신하면서도 까칠했다. 벨노어 성에 온 후로는 늘 실내화를 신고 지 낸 까닭에 맨발의 느낌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진네만 저택에서는 맨발로 뛰어 다니는 일 도 잦았었는데. 캄캄한 복도였다. 램프를 겉옷자락에 감춘 채 걷는 일은 몹시 조심스러웠다. 자수로 장식된 벽이 이어지다가 어느 즈음에서 끊어지고 싸늘한 대리석 벽으로 바뀌었다. 그가 멈춰선 곳 은 남쪽 탑의 경계였다. 앞서 걷던 란지에가 망설임 없이 벽 한쪽에 붙은 작은 쪽문을 열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 았다. 그 안은 하인들이 청소 용구 등을 두는 창고였다. 둘은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벽을 타고 좁고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성 전체를 빙 두르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드문드문 작은 쪽창도 있었다. 램프를 꺼내 들고 걷다가 드디어 한 곳에 멈추었다. 란지에가 손짓하는 곳으로 다가가자 엷은 빛이 새어나오는 틈새가 보였다. 거기에 문이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웅크리고 간신 히 기어나갈 수 있을까 싶게 작아서 정말 인간이 드나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더구나 벽과 완전히 같은 재질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얼른 봐서는 쉽사리 눈 에 띄지 않을 듯했다. 열쇠를 꺼내 문을 땄다. 그때 란지에가 말했다. "저는 여기서 돌아가겠습니다. 너무 오래 계시면 날이 밝는다는 것, 잊지 마십시오." 보리스는 바닥에 무릎을 꿇으려다 말고 란지에를 올려다보았다. 램프빛으로 어렴풋하게 보 이는 란지에의 눈가가 희푸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들어가기 직전, 등뒤에서 그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렸다. "저를 다시 찾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 생각하면서 보리스는 작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붉은 천을 바탕으로 한 태피스트리에는 수백에 달할 듯한 군대가 각개 전투를 벌이는 장면 이 모사되어 있었다. 뿌옇게 보이는 태양이 서녘마루로 졌다. 천에다 짜 넣은 것이라 병사들 의 모습이 자세하지 않았고, 따라서 잔인한 장면도 없었지만 이상하리 만치 섬뜩한 태피스 트리였다. 마치 전쟁의 한 시점을 그대로 잘라온 듯, 핏빛 연못에서 방금 꺼내어 걸어 놓은 듯. 서재와 거의 맞먹는 크기인 전시실은 흡사 수많은 깃발이 서 있는 광경을 연상케 했다. 걸 어 놓을 벽이 모자랐기 때문인지 일부 태피스트리들은 받침대에 세워진 채 걸려 있었다. 보 리스가 지나가자 시간이 멈춘듯 보이던 그것들이 서서히 흔들리며 기척을 냈다. 기사 서임을 받는 젊은이는 은빛 갑주를 걸친 채 숙였던 고개를 약간 움직였고, 네 계절의 모습은 조금씩 서로의 시간을 향해 접근한 듯싶었다. 달빛이 내리는 절벽 위의 성, 구름다리 를 건너는 여왕과 시녀들, 룬(Rune)이 빼곡한 진(陳) 안에 앉아 눈을 감은 마법사, 숲을 향 해 일제히 화살을 쏘아보내는 궁수들....... 태피스트리 너머에는 고서(古書)들이 들었을 법한 상자들이 벽을 따라 죽 놓여 있었다. 그 는 천천히 구경했다. 태피스트리들은 모두 정교한 솜씨를 자랑하는 고급이었고, 아름다웠다. 몇 개인가 상자를 열어보기도 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뿐이라 다시 닫고 말았다. 필 사본이라고 했던 책들 가운데 몇 개는 세밀화가 그려진 아름다운 물건들이었다. 그렇게 태피스트리들 사이를 걷자니 좁은 통로를 따라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문득 태피스트리는 끝나고 낯선 물건들이 좌우에 늘어서기 시작하고 있었다. 창, 방패, 단검, 갑옷....... 백작이 이런 것을 수집한다는 이야기는 란지에도 하지 않았었다. 그는 좀더 앞으로 걸어갔 다. 그리고 걸음을 딱 멈췄다. 눈앞에 무언가 사라지고 빈 듯한 자리가 있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무언가 놓여진 것만 보 다가 맞닥뜨렸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보리스를 멈추게 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직감이 그의 시선을 떼지 못하게 했다. 그것은 검 모양처럼 생긴 빈 자리였다. 마치 주물을 뜨고 남은 틀이라도 되는 양, 그렇게 십자형으로 패인 자리를 흰 비단이 윤곽만 남기며 덮고 있었다. 보리스는 다가가 약간 망설 이다가 손을 대어 보았다. 그의 손이 천천히 십자 모양의 자국을 훑으며 내려갔다. 그 자리에 없는 검, 그 검의 인상 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순간 전율이 그의 몸을 타고 내려갔다. 손이 멈췄다. 그것은 윈터러였다. 손잡이 끝에 달린 폼멜(pommel)의 둥근 고리 모양과 약간 위로 휘어진 좁은 가드(guard), 그리고 바스타드 소드의 긴 검신... 그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검이었다. 한때 그의 몸을 짓누 르며 걸음을 더디게 했던 검, 움켜쥐고 휘둘러보려고 몇 번이고 무한히 시도했던 그 검의 모양과 폭, 길이까지 그는 명확히 알고 있었다. 시선을 아래로 떨구자 더 놀라운 것이 보였다. 브레스트 아머(breast armer)인 스노우가드 가 들어가면 딱 맞을 듯한 상자였다. 역시 안은 흰 비단으로 싸여 있었다. 두 가지 물건을 기다리고 있는 받침대 아래 작은 금빛 명패가 붙은 것이 보였다. '윈터바텀 킷(Winterbottom Kit)'. 보리스는 몸을 떨었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가리키는 것은 너무도 명백했다. 그러나 너무 갑작스러워서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것 처럼 잘 판단이 되지 않았다. 몇 번이고 숨을 가다듬은 다음에야 겨우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있었다. 배신. 방안 가득한 수십 장의 태피스트리가 다가올 전운을 느끼는 전장의 깃발들처럼 떨고 있었 다. 그 아래 주인 없는 검의 자리를 바라보고 선 그는 전투에 쉽쓸리지 않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달아나야 하는 어린아이였다. 의지할 수 있는 거라곤 잘 다룰 수도 없는 검 한자루 뿐. 그런 그를 아예 빈손으로 만들기 위해 오랫동안 노려 왔다는 명백한 증거가 지금 눈앞에 놓여 있었다. 자신이 아노마라드로 오기까지 겪은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뜻밖의 만남, 갑작스런 제안, 바뀌어진 운명,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평온했던 가을과 겨 울....... 그동안 그는 방심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마음을 놓고, 스스로 조심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실제로는 방심했던 것이다! 왜 무력한 어린아이인 자신의 물건을 다짜고짜 빼앗지 않았는가? 그것은 지금 눈앞에 만들 어진 윈터바텀 킷의 자리를 보면 명백히 알 수 있었다. 백작은 윈터러 하나만이 아니라 완 성된 윈터바텀 킷을 원했다. 그리하여 가면을 쓴 얼굴로 보리스를 돌보는 체, 그가 스스로의 입으로 스노우가드의 위치를 말해버리도록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예프넨의 무덤을 만들어주겠다고?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가 그 가식적인 마음에 지레 감동하여 형을 묻은 곳의 위치를 말해버렸다면, 지금 자신이 과연 살아남아 있기나 했을 것인가? 지독하다....... 분노보다도, 치욕보다도 더 견디기 힘든 것은 바로 실망감이었다. 자신을 속인 대상들에 대 해서가 아니라 속은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었다. 처음인가? 아니었다, 결코 아니었다. 이미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고 타인에게 속지 않겠다 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윈터러가 없어졌을 때 느꼈던 그 지독한 심정은? 그들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신뢰하고 있었다. 경계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경계하고 있지 않았다. 무심코, 그래, 무심코 믿고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 자신의 마음 은 이토록 무르디 무르고 약해빠졌나. 지금껏 속으면서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어리석은 선량함에 빠져서, 꿀이 든 단지 에 빠진 날벌레처럼....... "후우, 후......." 이제 숨을 가다듬었다. 실망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가야 했다. 이곳을 나가서 여길 떠나야 했다. 더 기다릴 때가 아니었다. 짧은 평화는 본색을 드러내었고, 그는 달아나야 했 다. 그러나 그냥 갈 수는 없었다. 결코 잃어서는 안될 물건, 윈터러를 되찾아야 했다. 이제는 그것을 잠시나마 자기 몸에서 떼어놓았다는 사실조차도 무한한 자책감으로 이어졌다. 그때 서야 그는 이곳에 들어오기 직전에 란지에가 마지막으로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자신의 충고를 받아들인다면 한시바삐 여길 떠나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다 시 돌아와 감사를 표할 것도 없이 즉시. 이제 그의 말을 따를 때였다. 램프조차 내버려둔 채 복도를 통과해 갔다. 창 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있어서 이제는 그리 어둡지 않았다. 밖은 조금씩 훤해지고 있었다. 날이 밝는 것이 분명했다. 아침이 되어 사람 들이 일어나기 전에 떠나야만 했다.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란지에는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있었던 것일까. 무엇을 의도 했기에 그를 이곳으로 들여보내고 그에게 이런 깨달음을....... "오빠! 어딜 갔다왔어?" 순간적으로 숨을 훅 들이킨 보리스는 온 몸이 경직되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그 자리에 섰 다. 로즈니스가 방문 앞에 지키고 선 채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일찍 일어난 거야? 산책해?" 처음에는 그녀가 일부러 말을 꼬며 그를 다그친다고 생각했다. 이미 자신이 어디에 갔다왔 는지도 다 알고 있으면서. 그러나 곧 그런 생각은 긴장한 자신이 만든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로즈니스는 순진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 오빠 싸우러 떠나잖아. 내가 행운의 선물을 주려고 했는데 방안에 없어서 깜짝 놀랐 어. 이렇게 일찍 일어나다니 너무 긴장한 것 아니야?" 로즈니스가 내민 손바닥에는 예쁜 네 잎 클로버가 수놓아진 작은 플란넬 주머니가 놓여 있 었다. 보리스는 간신히 입을 뗄 수 있었다. "넌, 너도... 너무 일찍 일어난 것 아니야?" 로즈니스는 씨익 웃더니 대꾸했다. "아냐. 나 잠 안 잤어. 밤 새워서 겨우 완성했단 말이야." 그제야 살펴보니 로즈니스의 눈가가 푸석한 것이 밤잠이 부족해 보였다. 자신에게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에 너무 골몰해 있어서 그녀의 모습 따위를 자세히 살펴볼 여유가 없었던 것 이다. "...피곤해 보이는구나." 주머니를 건네 받고 나서 침착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에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표정이 흔들렸다. 그러나 로즈니스는 착한 아이처럼 미소하며 말했다. "오빠, 너무 긴장하지 마. 오빠가 져도 난 그 백치한테 안 시집갈 거니까. 그렇지만 열심히, 최선을 다해 줘. 알았지?" 보리스가 겨우 고개를 끄덕이자 로즈니스는 하품을 하더니 손을 흔들며 자기 방으로 돌아 갔다 보리스가 맨발이라는 사실도 눈치 채지 못한 채로. 그러나 이미 다른 사람들 몰래 탈출하기에는 늦어 있었다. 하녀 몇 명이 복도를 지나갔다. 그는 전시실 안에서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고 말았던 것이다. 방으로 들어갔을 때 창밖에 약한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침이 되었는데도 밖이 밝지 않았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마차에 탈 때까지도 반쯤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어떻게 아침 식사를 하고 어떻 게 여행 준비를 마쳤는지 생각도 잘 나지 않았다. 그는 반쯤 유령처럼 움직이고 휩쓸린 끝 에 이곳까지 와 앉아 있었다. 말끔한 사냥복 차림에 소년용 검, 비스듬하게 쓴 모자, 깨끗하게 닦아진 부츠. 어느 모로 보나 벨노어 가의 도련님으로 손색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이 거기에 있었다. 그 모 습이 지금처럼 낯설었던 적이 없었다. 윈터러는 저택에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그것을 가져오려 한다면 당장에 의심받을 것이 뻔 했다. 눈치챘다는 기색을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모든 것은 끝장이었다. 비는 그쳤지만 날은 여전히 흐렸다. 그 탓인지 백작도 이번에는 말이 아닌 마차를 탔다. 백 작과 마주 앉은 채로 감정을 숨기는 일은 상상외로 어려웠다. 그런 일에 익숙하지 못한 그 는 굳은 표정을 쉽게 풀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백작 역시 로즈니스처럼 그가 대결을 앞두고 긴장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마음을 편히 가지라고 한 마디 한 뒤 혼자 생각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었다. 여행하는 것은 백작과 보리스, 비서 휴, 란지에를 비롯한 몇 명의 하인들, 그리고 열두 명 의 호위 기사들뿐이었다. 백작부인은 물론 로즈니스도 가지 않았다. 란지에의 이야기로는 백 작이 외부로 여행할 때면 수도로 가지 않는 이상 항상 열두 명의 기사를 대동한다고 했다. "역시 마음이 내키지 않는 거냐? 아니면 오늘은 그런 생각까지 하기에는 좀 힘겨워서 그러 느냐?" 저택을 떠나고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보리스는 백작이 묻고 있음을 깨닫고 문득 정신 을 차렸다 언제부터 말을 걸고 있었는지 알 수 가 없었다. "예? 아뇨... 예......." 얼결에 입을 열어 놓고 스스로 창피했다. 왜 더듬거리고 겁을 낸단 말인가. 좀더 대담하지 못하고. 저 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새해가 오도록 끈질기게 기다렸는데, 왜 자 신은 감정 하나 숨기지 못하고 어쩔 줄을 모를까. "좀 늦긴 하겠지만 오늘 밤 안에 도착하게 될 거다. 정한 날짜가 하루 남았으니까 그 동안 쉬면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겠지. 그때 조용히 생각해 보거라. 이런 일은 떠올랐을 때 얼 른 결정하는 편이 좋지." 그러더니 백작은 다정스런 목소리로 덧붙여 말했다. "이자보가 말한 것처럼 험하게 묻힌 사람은 편히 잠들지 못한다고 하니까 말이다. 네가 아 끼는 사람이라면 얼른 쉬게 해 주어야 하지 않겠니." 어제 사실을 알지 못했더라면 마음이 동했을 법한 이야기를 들으며 보리스는 새삼스러운 증오심을 느쪘다. 동시에 그 가증스러움에 치가 떨렸다. 그제야 느낀 거지만 백작의 태도는 최근 눈에 띄게 부드러워져 있었다. 스노우가드가 형과 함께 묻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보리스는 천천히 그에게 일 어난 일들을 되새겨 보았다. 처음에 백작은 보리스가 이름을 말하자마자 진네만 가문을 알고 있다고 말했었다. 아마도 거짓이 아닐 것이다. 일 관계상 자주 트라바체스를 드나든다고 했던 만큼 진네만 가문에서 일어난 항쟁과 그 결과에 대한 이야기도 그 당시, 또는 그 후에라도 전해 들었을 가능성이 컸다. 블라도 삼촌의 손에 윈터바텀 킷이 한 가지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그것은 당연히 칸 선제후에게 넘어갔을 테고, 그 소문이 곳곳에 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칸 선제후는 다른 사 람의 눈을 두려워하여 좋은 물건을 감출 필요가 없는 명실공히 트라바체스의 일인자이니까. 당연히 널리 자랑했을 것이다. 보리스는 백작을 만났을 당시 윈터러의 존재를 감출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지만, 백작은 일부러 거기에 대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아니 그래, 그때부터 이상하게 생각했어 야 했다. 딱 보기만 해도 사람들의 눈을 끌 정도로 좋은 검인데 그것의 출처를 묻지도 않았 고, 살펴보고 싶어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분명 이상했다. 보리스가 방심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벌써 그 사실을 눈치챘어야 했다. 그때 백작은 보리스가 지닌 윈터러를 눈여겨보고 스노우 가드도 갖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일까? 이렇게 되자 한층 더한 의심이 생겼다. 처음에 백작을 만나게 된 사건 자체는 과연 우연이 었을까? 여행 중에 우연히 만난 소년이 좋은 검을 갖고 있었고, 그가 알고 보니 진네만 가 문의 아들이었고, 그래서 윈터바텀 킷을 갖기 위해 즉시 계책을 꾸몄다는 가설은 어쩐지 신 빙성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백작은 사실 진네만 가문의 일을 미리부터 알고 있거나, 또는 적어도 원터바텀 킷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는 것인가? 그 순간, 정말로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그가 메르데르 자작의 집으로 가고 있는 목적, 과거에 했던 내기에 얽매여 로즈니스 를 그 집안의 백치 아들에게 주지 않기 위해 두 아들을 대결시키기로 했다는 이야기조차... 실은 모조리 꾸며진 것이 아닐까!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다 해도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쿡쿡 찔리는 기분이 들 었다. 과연 그가 그토록 치밀한 백작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윈터러를 가지고 탈출할 수 있을 까? 그것은 전적으로 그가 얼마나 연기를 잘 해내는가에 달려 있었다. 4. 빛 없는 밤을 넘어 "어서 오게, 이 밤중에 오느라 고생 많았네." "여기 오는 것도 정말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그래." 벨노어 백작과 메르데르 자작, 두 사람은 백작의 말에 의하면 어린시절 함께 같은 학원에 서 공부한 사이였다. 켈티카에 있다는 왕립 그 로메 학원은 한때 아노마라드가 공화국이었 던 시절에도 문을 닫지 않고 잘 버텨낸 곳이었다. 물론 두 귀족이 학원에 다니던 때는 아노 마라드가 공화국이 되기 전인 구(舊)왕국 시절이었다. 그 시절과 구별하기 위해 현재의 아노 마라드는 신(新)왕국이라고 불렸다. 메르데르 자작의 집은 파노자레 산맥에 속한 파노 산 산자락에 위치하여 저택이라기보다는 흡사 산장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는 사교 모임 같은 것보다는 탐험 여행이나 등산, 그리고 사냥을 유난히 좋아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한눈에 봐도 호탕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몸집 큰 남자였다. "이 아이인가? 이야... 양아들이라면서 어째서 이렇게 닮은 거야? 수상쩍잖아, 이 친구." 별로 말을 조심하는 성미도 아닌 듯했다. 그러나 백작은 화를 내기는커녕 크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이런, 의심 많은 친구야, 그럼 자네를 닮은 새끼곰 같은 아들이나 얼른 데려와 보라고." 그 아들은 마침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다. 보리스는 자기 생각에 골몰하느라 그때까지 두 사람의 대화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으나 그때만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상대 방을 보았다. "귀타프, 이리로 와서 인사드리거라." "예, 아버지." 실버스컬 대회를 준비할 정도로 검을 잘 쓴다고 했던가? 그러나 어쩐지 검보다는 도끼, 심 지어 철퇴라도 휘두르는 것이 적당할 듯한 모습을 한 소년이었다. 키는 보리스와 비슷할 정 도였지만 딱 벌어진 어깨와 팔뚝이며 목, 허리 같은 곳은 정말 곰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 도로 튼튼하고 우람했다. 게다가 인상 역시 영리하거나 날렵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두 소년은 악수를 나누었다. 그는 그리 작은 편이 아닌 보리스의 손을 자기 손바닥에 묻어 버릴 정도로 털이 부숭부숭한 커다란 손을 가지고 있었다.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푹 자고, 내일은 몸이나 풀 겸 아이들 데리고 사냥을 가면 어떻겠 나? 요새 근처에 멧돼지 몇 마리가 어슬렁거리는 것 같은데 한 마리 잡아서 바비큐 파티나 해보자고. 어때?" 귀족치고 비교적 소탈한 어조로 떠들고 있는 메르데르 자작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보리스는 다시 한 번 의문에 사로잡혔다. 이 자는 정말로 귀족일까? 정말로 백작의 친구일까? 이 집 은 그의 집이 맞을까? "그리고 자네의 그 예쁜 딸은 왜 안 데려왔나? 이거, 나는 딸 없는 아버지라서 그런지 유 난히 그 애가 귀여워 보이는데 말이야. 꼭꼭 숨겨 놓고 안 보여주긴가?" "로즈는 가벼운 감기에 걸렸어, 집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네. 안 그랬다면 오랜만의 걸음이 고 하니 데려왔을 텐데 그랬지." "저런! 얼른 나았으면 좋겠군." 물론 로즈니스가 아프다는 이야기는 거짓말이었지만 보리스는 이제 사소한 거짓말 따위에 신경 쓸 기분이 아니었다.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간단한 밤참과 함께 가졌던 인사 자리가 끝나자 백작과 보리스는 각각 침실로 안내되었다. 하루 종일 마차를 탔으니 피곤했고 또 밤이 깊었지만 보리스는 쉽게 잠을 이를 수가 없었 다.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이 모두 짜고서 연극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문득 로즈니스가 생 각났다. 그 애도 그 연극에 동참하고 있었던 걸까? 조금 마음이 가라앉자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즈니스는 그 자만심 때문에라도 자기 감정에 충실하고 솔직한 아이였다. 죽 곁에 있으면서 봐 왔기 때문에 평상시의 모든 행동을 그만큼 가짜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성격 자 체가 미숙했다. 잠은 점점 더 오지 않았고 보리스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미 침실에 들어온 지 한 시간은 넘었다고 생각되었다. 잠이 오지 않는다면 주위 사정이나 살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살금살금 걸어가 창문 밖을 살펴보았다. 2층이었지만 사정이 급하다면 뛰어내릴 마음도 있 었다. 그러나 창 아래쪽은 가시덤불이었다. 문 쪽으로 가서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문은 열렸 지만 복도는 램프들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아까 메르데르 자작이 이 근처에는 가끔 짐승 들도 출몰하기 때문에 저택에 불을 끄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갑작스런 일에 대비해서 그는 검을 껴안은 채 자리에 누웠다. 윈터러를 가지지 않고 도망 칠 마음이 없는 이상, 그럴듯하게 연기하며 저택까지 돌아간 다음 달아날 방법을 구상하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그러나 다음날은 내키지 않는 사냥이었다. 밤잠을 자지 못해 피곤했지만 어깰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백작은 열두 기사 중에서 일곱 명 을 선발했다. 메르데르 자작은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사냥꾼들을 십여 명이나 불렀다. 사냥 개도 수십 마리였다. 저택 앞마당이 온통 개 짖는 소리로 가득 찼다. "사냥꾼 다섯 명과 사냥개 열 세 마리를 빌려주지. 자네와 자네 아들, 그리고 우리, 누가 먼저 멧돼지를 잡나 경쟁해볼까?" "좋지. 하지만 데려갈 사냥꾼은 내가 고르겠네." "좋을 대로 하게, 이 사람아. 내가 자네를 놀리는 사람인가." 보리스는 저택을 떠난 후로 처음 란지에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이상하게도 함께 있지 못하고 내내 떨어져 있었다. 보리스가 란지에를 쳐다보자 그가 눈을 약간 크게 뜨더니 몇 번 깜빡였다. 영문을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백작이 말했다. "하인은 두고 가거라. 말을 타고 달려야 할 테니까." 문득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보리스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제가 이런 일에는 워낙 경험이 없다 보니 함께 가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세요." "별 도움이 안 될 텐데......." 백작은 마땅찮은 얼굴로 둘을 내려다보다가 란지에를 보고 말했다. "말을탈 줄 아느냐? 탈 줄 안다면 데려가마." 보리스는 바짝 긴장했다. 하인이 말을 탈 줄 아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란지에는 일전에 검 을 뽑을 때도 특이한 재주를 보여준 일이 있었던 것이다. 란지에가 눈을 내리깐 채 대답해 왔다. "탈 줄 압니다." "흐음... 그래. 그럼 따라와도 좋다." 여전히 불만스러운 듯했지만 자신이 먼저 말한 이상 허락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탈 줄 알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런 말을 꺼낸 것이 뻔했다. 메르데르 자작이 약간 으스대며 보리스에게 내준 말은 그 집에서도 특별히 정성 들여 키우 고 있다는 흰 콧잔등의 검은 말이었다. 란지에에게는 비교적 얌전한 갈색 말이 주어졌다. 다 른 사람들도 말에 오르고 이윽고 일행은 서쪽 숲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침 숲은 이슬에 젖어 있었다. 속력을 내기 시작하자 오솔길 위로 내밀어진 잎새들이 이 마 위를 스치며 물방울을 뿌렸다. 말발굽 아래 풀들이 사각거렸다. 아직 뜨겁지 않은 태양이 목 뒤를 따끈따끈하게해 주었다. 피로로 인한 두통도 점차 가셨다. 오랜만에 타는 말이었고, 그 흔들리는 느낌이 오히려 좋았다. 숲으로 들어갈수록 점차 정신 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저쪽이다!" 메르데르 자작은 신이 났다. 안 그래도 손님들에게 자기 사냥꾼과 개들의 솜씨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멧돼지가 일찍 나타나 준 것이다. 그는 신이 나서 소리 높여 명령했다. "아조프! 계속 쫓아라! 도웰은 남쪽 진로를 막고! 징검다리 시내 쪽 절벽으로 모는 거다, 알겠지!" 컹, 컹컹...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앞으로 몰려갔다. 멧돼지는 남서쪽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백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역시 전문가는 당하기 힘들군." 그러나 웃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방금 개들이 질러간 숲 쪽에서 갑자기 다른 멧돼지가 세 마리나 쏜살같이 달려왔다. 개들이 들쑤셔 놓는 바람에 놀란 것이 분명했다. 이 근방을 돌아 다닌다는 멧돼지들은 떼지어 이동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런!" 사냥꾼들이 활을 메길 사이도 없었다. 말을 탄 자들은 이리저리 흩어졌고 개들은 가까이 있는 적의 털가죽을 맹렬히 물어뜯었다. 세 마리나 되었기 때문에 공격은 체계가 없었다. 사 냥꾼들이 한 마리만 공격하게 하려고 개들에게 소리를 질러댔지만 한 번 흥분한 개들은 쉽 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게다가 멧돼지들은 이제 각자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사 냥꾼 한사람이 악을 썼다. "카를! 돌프! 크렐! 이쪽이다! 휘익! 이쪽이라니까!" 메르데르 자작의 사냥꾼들은 거의 다 처음 나타난 멧돼지들을 따라갔기 때문에 이곳에 남 은 것은 백작 일행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백작도 당황하지 않고 곧장 명령을 내렸다. "둘로 나눠져서 저 왼쪽의 한 마리만 몰아라! 델레메르! 그로미어스! 너희들은 다른 멧돼지 들이 공격하지 않도록 측면을 원호해라!" 기사들은 사냥에 큰 열의가 없는 편이었다. 그러나 백작의 명령이었으므로 별 수 없이 검 을 뽑아들었다. 백작은 곧장 한 무리를 지휘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숲 사이로 사 라졌다. 곳곳에 솟은 큰 나무들 때문에 공간이 좁아서 말에서 내려선 사냥꾼들은 기사들의 이동을 방해했다. 한 명이 말발굽에 채여 비명을 지르자 한 기사가 불쾌한 듯 욕설을 내뱉었다. "저 자식이 죽고 싶어서 길을 막나......." 그 순간, 보리스는 저 말을 어딘가에서 들은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아주 생생한 광경이었다. 자신을 향해 똑같은 말이 던져졌던 그 때, 그는 매우 힘겹 고 고통스러웠으며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고독한 상태였었다. 그래서 더 정확한 기억인 것일 까. 잊혀지지 않는 기억인 것일까. "죄, 죄송합니다......." 사냥꾼은 그때 남은 거라곤 악밖에 없었던 보리스처럼 행동하지는 않았다. 사냥꾼이 주춤 거리며 비켜나자 델레메르라는 기사는 흥, 하고 코방귀를 뀌더니 말머리를 다른 쪽으로 돌 렸다. 그의 손에는 길다란 말채찍이 들려 있었다. 왜 지금까지는 저 모습이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은 비참 한 인형처럼 함부로 농락 당했을 뿐이었다.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은 이제 모조리 깨어졌다. 여덟 명의 기사, 그랬다. 항상 열두 명의 기사를 대동한다는 백작이 트라바체스에서 돌아올 때는 단지 여덟 명만을 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여관 앞에서 그에게 시비를 걸었던 남 자들은 모두 넷이었다. 이쯤 되면 바보라도 알 수 있는 셈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 네 사람은 아노마라드 사람들만이 쓰는 '귀족' 이라는 단어를 썼었 다. "도련님, 이쪽으로." 곁에서 란지에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보리스는 멍해지는 머리를 추스르며 간신히 그 를 뒤따랐다. 사람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몇몇 기사들은 딱히 주어진 일이 없으니 멋대로 다 른 멧돼지를 쫓기 시작 했다. 그들 가운데 한 무리를 따라 정신없이 달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란지에와 그, 두 사람만이 숲 사이를 달리고 있었다. 앞선 란지 에는 능숙한 솜씨로 말을 몰아 달려갔다. 옅푸른 머리가 일정한 리듬으로 흩날리는 뒷모습 은 흡사 귀족 자제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들은 서서히 무리 지은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란지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고 멈추지도 않았다. 커다란 나무들 사이로 접어들어 더욱 깊은 숲 속으로 달렸다. 주위에 아무 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곳곳에 드리워진 나무 그림자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곳으로. 과악! 숲의 어두운 틈새에서 검은 새들이 솟아나 달려들었다. 포물선을 그리는 날개, 한 순간 스 러지는 깃, 긴 어둠 끝의 빛. 수많은 소리가 들리고 있는데도 고요라고 생각되었다. 물방울이 떨어지고, 잎새가 소곤대 고, 바람이 휘파람을 불고, 볕이 잔 그림자를 남기며 흘러갔다. 긴 터널을 지나 서서히 바깥 의 공기를 느끼기 시작하는 사람처럼 호흡이 트이고 있었다. 착각일지라도 이대로, 좀더 오 랫동안 달리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리고, 멈췄다. 히히히히히힝! 말이 길게 울부짖었다. 검은 말의 목에는 땀과 함제 흰 윤기가 후광처럼 흘렀다. 알 수 없 는 숲 속이었다. 나무로 둘러싸인 공터에는 봄볕이 뿌린 열기가 가득했다. 란지에는 말의 방향을 돌리더니 훌쩍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보리스도 말에서 내려섰다. 란지에가 입술을 약간 움직이더니 웃었다. "결국 못 가셨군요." "......" 보리스는 대답하지 못한 채 란지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란지에는 그에게 대답을 듣고자 하지는 않았다. "자, 시간이 없습니다." 란지에가 타고 온 말의 옆구리에는 사냥 나온 다른 사람들처럼 간단한 도시락과 화살통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도시락 꾸러미를 끌러 보리스에게 내밀었다. "...란지에, 넌......." "받지 않으실 겁니까?" 도시락을 받았을 때 보리스는 팔이 휘청하는 것을 느꼈다. 그가 버틸 수 없을 만큼 무거워 서가 아니었다. 기껏해야 빵을 비롯한 몇 가지 음식이 들어 있어야 할 도시락이 예상외로 묵직했기 때문이었다. "이건?" "멀리 가시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겠지요." 그제야 짐작했다. 아마도 돈이나 그 밖의 여행 물품일 것이다. 이런 것을 어떻게 란지에가 손에 넣었을까? "그리고." * 란지에가 이번에는 화살통을 내렸다. 그 안에 갈색 가죽과 끈으로 싼 길쭉한 물건이 있는 것을 그제야 보리스도 알아보았다. 그는 할 말을 잃은 채 란지에를 쳐다보았다. 말을 하려 해도 목이 막혀 나오지 않았다. 란지에가 물건을 꺼내자 반대쪽 끝에서 익숙한 검의 머리가 드러났다. 자신이 가지고 나오려 했다면 분명히 백작의 눈에 발각당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러나 하인인 란지에의 물건은 백작도 주목해서 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것은 그의 눈에도 마치 화살을 여러 개 싸서 묶어 놓은 것처럼 보였으니까. 활을 쏠 줄 모를 것 같은 란지에 가 떠나기 전에 활과 화살을 달라고 했을 때 보리스는 그 이유를 전혀 몰랐었다. "어째서 내게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넌... 넌 내가 어떤 처지에 처한 줄도 모르면서......." "모릅니다만, 짐작은 갑니다." 란지에는 이런 것쯤 부담스럽게 느낄 필요 없다는 듯 가벼운 표정이었다. 그는 말등을 쓰 다듬으며 몸을 약간 기댔다. 오랜만에 보는 그 자신다운 표정이었다. 파티의 밤에 소매를 끄 르고 머리를 넘기던 때처럼. "다만, 죄송합니다. 좀더 일찍 확신했더라면 더 나은 때를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저 역시 도련님을 조금쯤 의심하고 있었던 거지요. 제가 이 검을 보다 일찍 살펴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 유감입니다. 그랬다면 제가 품었던 모든 의문에 좀더 빨리 답을 내릴 수 있었을 것이 고, 지금보다 위험을 덜 무릅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보리스는 아직까지도 란지에를 완전히 믿어야 할 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것이 지금껏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큰 친절이었기에, 그리고 큰 친절을 베푸는 자들은 보통 그 뒤에 더 큰 음모를 숨기고 있었기에. "어떤 의문이었지?" 란지에의 눈동자가 점차 계산된 침착함에서 자유인만이 가질 수 있는 그것으로 변해 갔다. 그는 자유 의지로서 보리스를 돕고 있었다. 동정심, 연민, 충성심, 보답과 같은 감정과는 무 관하게 일대일의 사람으로서. "저는 처음부터 도련님께서 정말로 양자가 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 았습니다. 그러나 한동안은 도련님 역시 백작의 음모에 동참하여 무언가 모를 목적에 봉사 하고 있다고 여겼지요. 도련님 때문이 아니라 백작이 무언가 획책하고 있다고 여겼기에 그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겠다고 마음먹었고, 그리하여 천천히 도련님을 관찰해 왔습니다. 그리 고 아마 잘 모르시겠지만......." 란지에가 약한 미소를 띄웠다. 평소의 진지함보다는 편안함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도련님께서 이곳에 오기 전부터 저는 이 집안의 여러 가지 비밀들을 손에 쥐고자 노력해 왔었습니다. 그것만이 제 살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본래 저를 사들였던 켈티카의 귀족 으로부터 도망쳐 온 몸 입니다. 백작은 그 사실을 다 알고서 저희 남매를 받아들였습니다. 아마 필요하다고 느낄 때 란즈미를 미끼로 제게 거절할 수 없는 요청을 하려 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지도 이미 짐작이 갑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 제시할 반대의 카드를 손에 쥐기 위해 이곳에 도착한 첫날부터 부단히 노력해 왔습니다. 백작의 서재, 침실, 숨겨진 서랍들의 열쇠를 차례로 손에 넣었고 비밀로 하고 있는 서류들을 조금씩 읽어 나갔습니다. 그 즈음 도련님께서 오셨고, 도련님의 목적을 관련시켜 추리해 나가는 과정에서 윈터바텀 킷이라는 물건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름과 월넛 선생님 때문에 보게 된 그 검을 연관시키 게 되는 데는 좀 시간이 걸렸습니다. 전 윈터바텀 킷이라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 전혀 몰랐으니까요. 제가 읽으라고 권해드린 "역사 속의 무구(武具)들"이라는 책에도 이것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 않습니까?" 란지에는 책 한 권조차 이유없이 권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 때도 보리스의 반응 을 떠보고 있었을 것이다. "도련님께 직접 사실을 확인하는 대신 백작의 전시실 열쇠를 구해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도련님께서 본 것과 똑같은 것을 보았지요. 물론 그렇게 하기까지는 몇 달이나 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즈음 도련님제서는 제게 검을 자세히 볼 기회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복숭아꽃이 흩날리던 날 검을 뽑아 들었던 란지에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그가 살핀 것 은 윈터러의 모양새와 전시실에 마련된 자리와의 유사함이었다. "아마 그 전에 도련님께서 제게 돌아가신 분의 이야기를 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전 도련님 역시 그 검의 가짜 주인으로서 실제로는 백작의 목표를 위해 봉사하고 있을 뿐이라고 결론 내렸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리스는 뭐라 답하지 못했다 란지에는 그가 짐작한 것보다 훨씬 지독한 줄타기를 하며 살 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실수없이 그 모든 일을 해낼 정도로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란지에가 불쑥 말했다. "이제 의심이 풀리셨습니까?" 보리스는 자신이 란지에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눈치챈 것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그냥 이대로 떠날 수는 없었다. "왜지? 왜 이런 위험을 무릅쓰는 거지? 나의 일일 뿐인데, 그것이 너와 무슨 관계가 있다 고?" 란지에는 이제 가벼워진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말했다. "제게 별로 재능은 없습니다만, 그나마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은 힘의 흐름을 깨닫는 것입 니다. 힘이 어디에서 발생해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하여 종막에 이른 힘이 무슨 작용을 일으키게 되는지. 바로 당신에게는 하나의 힘이 뭉쳐져 있군요. 그것을 흘려 보내려는 것뿐 입니다. 아직은 부딪쳐 폭발할 때가 아닙니다. 아마도 저는 당신을 좋아하지만......." 란지에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갑자기 삼켜버린 것처럼 나직이 말했다. "저는 별로 순수한 인간이 못 됩니다." 보리스도 이제 말에 올랐다. 그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제 돌아가면 넌 어쩌지? 백작이 이런 일을 안다면......." 란지에는 그 말을 끝까지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약간 웃으면서 말했다. "모든 일을 제쳐놓고 도련님을 가장 우선으로 모시라고 하셨으니, 주인님께서도 별 말씀은 못하시겠지요." 보리스는 그것이 우울한 농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란지에가 이런 짓을 하고서 백작의 손에서 무사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영리한 란지에이니 만큼 무슨 다른 수를 꾸며 두었을까? 모른다, 그것은. 그러나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그는 가야 한다. 그것이 어떤 것이었든, 과정에 불과한 아픔 은 이겨내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비록 고통을 남기더라도. 두 마리의 말이 다각거리며 서로 돌아섰다. 란지에는 서쪽으로 뻗어 내려간 사면을 가리켜 보였다. 그 아래는 백포도주의 아라종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보리스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나지막이 말했다. "잊지 않고... 꼭 갚겠어."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가파른 내리막이었다. "다시 만날 때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보리스가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 달리기 시작한 말발굽 소리에 묻혀 목소리는 환영처 럼 아련히 울렸다. 다시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느새 접어든 평야를 가로질러 달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어두울까, 누구의 눈에도 띄고 싶지 않은 그를 숨겨 주려 그런 것이리라. 달빛도, 별빛도, 왜 이리 흐릴까. 알고 있던 것을 모두 잊고 다시 처음부터, 하나씩 새로이 알아가라는 것처럼.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랐으나 돌아설 수 없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두려웠으나 동시에 두려워하지 않았다. 껍질을 벗어버린 듯 홀가분했지만, 동시에 남기고 온 것들이 마음에 걸 렸다. 다시 혼자였다. 그러나 전보다는 성장해 있었다. 아주 오래 달려나갈 것이다. 이 길이 어디로 가 닿든 간에. 어둡지만, 어두워서 더욱 모든 것을 감싸줄 것 같은 밤속으로. 빛 없는 밤을 뚫고서. 3장.Intensify 1. 첫 살해 다음날이 밝아올 무렵, 보리스는 온 몸에서 통증을 느꼈다. 뼈와 살이 어긋나 제멋대로 삐 걱거리는 느낌이었다. 산길을 내려오고 평야를 달리는 동안 가끔씩 느려지다 빨라지다 했지 만 너무 오랫동안 말 위에서 흔들렸던 것이다. 더구나 마지막으로 말을 탄 것은 이미 작년 의 일이었다. 그의 온 몸 근육은 최근 말타기에 적합하게 단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가 추적을 깨달은 것은 푸르스름한 새벽이 하늘 곳곳으로 번져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반쯤 중독된 듯 앞으로 달리기만 했기에 앞일도 뒷일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밤이 올 무렵부터는 어지럽던 머리도 맑아져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다 시 혼자라는 것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다시 아무도 보호해 주지 않는 혼자로 돌아간 것이다. 백작이 언제쯤 그가 없어진 것을 깨달을 수 있을까. 점심 시간이 가까워 올 무렵이었으니 만큼, 식사시간이 되었을 때 돌아오지 않는다면 수상쩍게 생각할 것이었다. 데리고 간 기사 를 풀어서 주위를 수색할 테고, 란지에를 만난다면 아마도 추궁하겠지. 그가 뭐라고 대꾸를 할까. 그로서는 짐작하기 힘든 노릇이었다. 메르데르 자작 역시 거느린 무사들이 소수 있었고, 그들 역시 추적에 동참할 것이 뻔했다. 벨노어 성으로도 곧장 연락을 넣겠지. 빠른 말을 탄 연락자에 의해 소식이 들어가기까지 걸 리는 시간은 대략 반나절. 곧장 남은 기사들이 총동원되어 그를 찾기 위해 기를 쓸 테고, 그 즈음이면 그도 완전히 숨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디로 가는 것이 적당할까. 사람이 없는 곳? 아니면 오히려 사람이 많은곳? 어느 쪽이 좋다고 생각되든, 그에겐 선택해서 갈 수 있는 방법조차 없었다. 그가 있는 곳이 지금 벨크루즈인지 아라종인지도 구별할 수 없는 그였다. 동서남북을 간신히 판별하는 것이 다였고, 주위는 온통 비슷비슷한 산마루와 녹록한 평야였다 아노마라드는 지독히 넓었다. 작 은 점에 불과한 그가 밤낮으로 달리고 달려도 벗어나기 힘들 정도로. 그래서 추적자를 만났을 때, 그는 오히려 덜 당황할 수 있었다. 어차피 닥칠 일이라고 생각 하고 있었다. 그가 말을 타고 하루 반 동안 갈 수 있는 거리란 뻔한 것이었다. 추적자는 두 명의 기사였고, 그들은 소년을 보자 박차를 가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인적 하나 없는 새벽녘의 들판과 짙푸른 빛이 번져 가는 하늘, 등뒤로 솟은 산, 곳곳에 돌 부리와 바위가 솟아오른 길 없는 땅....... "하아!" 푸르릅! 보리스의 말은 지쳐 있었다. 도망자와 추적자가 포물선을 그리며 들판을 꺾어 돌았다. 회색 바위들이 시야에 뛰어들었다가 획획 뒤로 지나쳐갔다. 애써 다리에 힘을 주었지만 오래 버 틸 수 없으리란 것을 직감했다. 메르데르 자작의 말이 그래도 훌륭했기에 지금까지도 잘 버 텨준 셈이었다. 말라비틀어진 잡목들이 흩어진 나지(裸地)가 나타났다. 흙먼지가 일어나 말발굽을 하얗게 뒤덮었다. 보리스는 최대한 몸을 말 등에 붙인 채 달리고 있었다. 오래 전 형이 가르쳐 준 대로 잘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나 잘해내는 것만으로는 소용없었다. 살아남지 못하면 다 쓸데 없었다. 그가 나이에 비 해 뛰어나다고 해도 어른들과 상대하고 있는 처지였고, 그들에게 이기지 못하는 한 객관적 인 평가 따위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다. 드디어 싸우지 않으면 안될 때가 왔다. 두 마리 말은 이제 10여 미터 뒤까지 따라붙었다. 그중 한 명은 창을 들고 있었다. 도망칠 수 없었다. 어디서 내려서야 할까. 그는 자신의 실력에 대한 확신을 떠나 상황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 했다. 그때 저만치 낮은 허공에 무리 지은 새들이 빙빙 돌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들 가운데 한 마리가 쏜살같이 아래를 향해 활강했다. 다른 새들도 뒤를 이었다. 그 모습은 곧 시야에서 지워져 버렸다. 위험한 도박이 머릿속에서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조금 더,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해갔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말은 마지막 힘을 짜내 어 미친 듯 달리고 있었다. 너무 빠르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것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여 기쯤일까, 아니, 조금 더일까, 이미 지나쳐 버렸을까....... "하!" 힘껏 고삐를 움켜쥔 채 강한 선회를 감행했다. 빨리 달리던 말은 제대로 방향을 틀지 못했 지만, 그는 최대한의 힘과 실력을 다해 있는 대로 몰아붙였다. 아니면 죽음이었다. 간신히 오른쪽으로, 조금 더 틀어진 채로 말은 아슬아슬하게 가장자리를 스쳐갔다. 발굽이 찬 돌부 리가 부서져 아득한 소리를 내며 저 아래로 떨어져 갔다. 타닥, 툭, 툭, 툭, 투두둑....... "억!" 외마디 비명 소리가 왼쪽 귓전을 때렸다. 찢어질 듯 울부짖는 말의 소리도 들렸다. 날카로 운 것이 돌을 긁어내는 듯한 파열음과 부서져 흐르는 돌멩이들의 소리, 생각보다 더, 폐부를 깊숙이 찌르고 들어오는 소리들. 귀를 막고 싶었다. 그러나 손은 고삐를 놓을 수 없었다. 성공했을까, 둘 다 떨어졌을까. 아아아아아아악....... 그 끝은 절벽이었다. 결국 한 명의 적은 속력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 다. "저 쳐죽일 놈!" 뒤늦었던 말 한 마리가 간신히 절벽 끝에서 멈출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보리스의 말이 지 쳐 속력이 떨어지는 동안, 분노한 소리를 지른 적의 말이 질풍처럼 휘몰아쳐 왔다. 눈앞은 잡목숲이었다. 그가 다시 한 번 방향을 틀려고 애쓰는 동안 직진한 적이 곧장 따라붙었다. 결국 말은 잡목숲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몸을 가리기에는 어림없었지만 진로를 방해하기에 는 오히려 충분했다. 마음을 비워야 할 시점이 왔다. 보리스는 말의 속력을 늦춰가다가 윈터 러만을 움켜쥐고 바닥으로 뛰어내려 한 바퀴 굴렀다. 말은 그러고도 몇 미터 더 가서 쓰러 질 듯 멈췄다. "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아!" 적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도 말에서 내렸다. 장검을 뽑아들고 성큼 다가서는 그 모습이 저 호수의 괴물만큼이나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여기엔 그를 지켜줄 형은 없 었다. 보리스도 윈터러를 뽑아 들었다. "......." 떨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비록 저 노련한 전사와는 비교도 안 되겠지만 그도 최대한의 노력으로 지난 겨울을 보냈었다. 산 자는 점점 더 강해진다. 살아남아서 더 강해질 것이다. 형이 물려준 검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비록 죽더라도....... 아니, 난 결코 죽지 않아! "하아아압!" 지난 겨울 동안 그의 유일한 대련자는 월넛이었다. 그와 수십, 수백 번을 되풀이하여 싸운 결과 그는 어느새 그와의 싸움에서 다칠 것을 두려워하여 몸을 사리지 않게 되었었다. 지금 적이 그 자라고 생각했다. 그때처럼, 그렇게 해보리라 마음먹었다. 챙! 그러나 검이 첫 번째로 부딪쳤을 때, 그는 손목이 꺾어질 듯한 고통을 느끼며 압도적인 힘 의 차이를 절감했다. 맞붙었던 검이 떨어지는 순간, 간신히 뒤로 물러났지만 적은 전혀 사이 를 두려 하지 않았다. 월넛은 그를 가르치고자 했지만 이 자는 적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생 쥐만도 못한 어린아이였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다만, 소년이 쥔 검만은 그의 눈길을 끌었다. 새벽에서 아침으로, 이제 붉게 변한 햇볕이 표면에 닿을 때마다 현란한 광채가 눈을 부시 게 했다. 게다가 소년은 비교적 검을 가볍게 썼다. 보리스가 있는 힘을 다했기 때문이었지만 사정을 모르는 기사의 눈에 저 검은 보기보다 가볍다는 인상을 주었다. 바스타드는 제대로 수련하지 않는 한 스무 살이 되어도 제대로 휘두르기 힘들다. 철로 만 들어진 검이라면 일정한 무게가 있을 텐데 저토록 가벼운 검의 정체는 뭐지? 백작은 부하들에게 윈터러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일이 없었다. 두번 검이 맞부딪치고 다음 순간, 보리스가 민첩하게 왼쪽으로 몸을 빼며 검을 똑바로 찔렀다. 순간적으로 검의 모습을 보며 한눈을 팔다가 팔꿈치를 찔리고 말았다. 소년은 그가 얕본 것보다 기본기가 탄탄했다. "건방진 새끼가!" 그래, 단지 장식품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팔꿈치에 두터운 가죽 보호대를 붙이고 있었는데 소년의 검은 간단히 그것을 잘라 버리고 팔꿈치에 제대로 된 상처를 입혔다. 피가 서서히 흘러내려 손목을 적셨다. "원대로 죽여주지!" 적의 검이 순식간에 빨라졌다. 강한 힘으로 검을 눌러 밀치고 사슬 건틀렛(Gauntlet)을 낀 손으로 검을 쥔 보리스의 손을 짓눌렀다. 동시에 발을 들어 배를 걷어차려 했다. 그러나 일전에 난데없이 시작했던 달리기로 오랫동안 다리를 단련해 온 보리스는 재빨리 발을 올려 상대방의 오금을 비스듬히 걷어차 버렸다. 약간 비틀거린 적은 급히 물러나 곧장 베기로 들어갔다. 어깨를 한 번 피하고, 다시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피한 보리스는 상대방 이 그를 죽이려 하지는 않는다는 걸 눈치챘다. 백작은 그가 생포되어 오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스노우 가드를 함께 얻어 윈터바 텀 킷을 완성하기 위해서겠지. 그가 죽는다면 스노우가드의 행방을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 을 테니까. 다만 팔이나 다리 하나쯤 잘라 버린대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적은 보리스가 의외로 검을 여러 번 연속해서 받아치는 것에 의아해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부딪쳤을 때, 윈터러가 희 한한 소리를 내며 우웅, 하고 떨었다. 보리스는 깜짝 놀랐다. 마치 프로즌 브레이크(Frozen Break), 극저온 폭발이 일어날 때와 비슷한 소리가 아닌가!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스노우가드가 없는데? 적도 흠칫 놀란 모양이었다. 약간 떨어져 경계 태세를 취하다가 다시 생각을 바꾼 듯 성큼 방향을 돌렸다. 반 바퀴 뒤로 돌아가자 보리스도 몸을 돌렸다. 검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날 아왔다. 츠컥! 검은 보리스의 옆구리를 후벼팠다. 갑옷이 없었기 때문에 단숨에 핏줄기가 솟았다.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이 온 몸을 휩쌌다. "......." 이토록 큰 상처를 입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당황한 마음이 더욱 컸다. 페이 스를 잃는 순간 적은 어느새 검을 쥔 손을 강하게 내리쳤다. 비척, 검이 손에서 떨어져 나가 려는 순간 반대쪽 손으로 간신히 부여잡았다. 검을 놓치는 것만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 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적은 칼등으로 그의 옆얼굴을 냅다 후려쳤고, 보리스는 쓰러지 지 않으려고 검을 바닥에 짚었다. 적은 곧장 접근하더니 한 손으로 그의 목을 움켜쥐어 졸 랐다. "어린놈이 제법 버텼다만 이제 끝내야지." 적은 바닥에 짚은 보리스의 검을 옆으로 탁 걷어차면서 그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그리고 흙 묻은 발로 손을 밟으면서 윈터러를 보리스의 손에서 비틀어 빼냈다. "흐음......." 눈빛에 서서히 탐욕이 어렸다. 검은 놀랄 만큼 예리하고 신기할 정도로 가벼웠다. 또한 아 름답기까지 했다. 그는 눈으로는 칼날을 훑으면서 발로 소년의 가슴이며 머리 등을 가리지 않고 걷어찼다. "이런 검을 갖고 도망쳤으니 주인님께서 네놈을 잡아오라고 하셨구나. 제 분수도 모르는 놈 같으니라고." 윈터러를 잠시 흙바닥에 푹 꽃아 넣고 그는 보리스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축 늘어 진 소년을 나무 등치로 밀어젖히며 몇 번 처박았다. 백작을 만났을 때 그를 족치던 자들의 방식과 확실히 유사했다. 보리스가 의심하고 있는 그대로. 그는 보리스를 도로 바닥에 내던지더니 윈터러를 다시 한 번 흘끔 보았다. "쓰읍......." 이 자는 이제 확실히 고민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몹시 탐나는 검이었다. 검사 생활 십 몇 년 만에 이렇게 좋은 검은 처음 보았다. 방금 바닥에 찔러 넣을 때도 놀랄 만큼 부드럽게 들어가지 않았던가. 그러나 겨우 검 한 자루 때문에 오랫동안 섬겨 온 주인을 배반하기는 좀 뭣했다 다만 모든 일이 숨겨질 수만 있다면 검도 갖고 백작에게도 시치미를 뗄 텐데 싶었다. 그때 저 교활한 녀석의 계략으로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동료가 생각났다. 그래, 저 녀석도 말과 함께 절벽으로 밀어 버리자. 떨어져 죽은 시체 옆의 검을 누가 집어 갔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테고, 그는 단지 소년을 보지 못한 체 하면 되는 것이다. 죽 은 자와 소년은 맹렬히 추격전을 벌이다가 둘 다 절벽을 보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져 죽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방금 전에 저 동료 기사와 마주친 것도 우연이었으니 다른 녀석이 또 이 길을 탐색하러 올 테지. 백작이 상금을 제대로 내걸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보리스는 쓰러진 채 상대의 얼굴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 어떤 문제를 생각하고 있는지도 대강 짐작 했다. 그러나 손쓸 방법이 없었다. "일어나." 한 손에는 윈터러를, 또 한 손에는 자신의 검을 든 적이 턱짓하며 말했다. 보리스는 자리에 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패배한 몸에 남은 상처는 한층 더 고통스러웠다. "이리 와. 자, 얼른." 기사는 도망치지 않고 서 있는 보리스의 말을 향해 다가가며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 리고 자기 말안장에서 밧줄을 꺼내 들었다. 그 밧줄로 보리스의 목을 몇 번 감아 꽉 묶더니 그 끝을 자기 손에 단단히 감아 잡았다. "말에 타라." 그 말에 따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보리스는 말에 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보리스는 이 자가 이대로 자신을 백작에게 데려가려는 줄로만 알았다. 자 신이 달아나려 마음먹고 말의 배를 걷어찬다 해도 저쪽에서 밧줄만 당기만 목이 졸리거나 바닥에 나뒹굴게 되어있었다. 도망칠 길이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속은 초조한 심정으로 가득 찼다. 그 순간, 그는 한쪽 손이 안장에 달린 란지에의 도시락 주머니에 닿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래로 늘어진 주머니의 주둥이에는 뭔가 단단한 것이 약간 튀어나와 있었다 그것은 별다른 동작 없이도 그의 손에 충분히 잡혔다. 기사는 만족한 얼굴로 검을 허리에 찬 칼집에 꽂은 다음 윈터러의 칼집도 찾아 꽂더니 자 기 말안장에 매달았다. 그리고 말에 훌쩍 올라탔다. "말 몰 줄 알지?" 그리고 그는 보리스를 앞세워 서서히 절벽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적당히 다가간 다음 밧줄을 놓으면서 채찍으로 보리스의 말을 한 대 후려칠 생각이었다. 그러면 저절로 떨어져 줄 것이다. 그러한 계획을 보리스가 알아챈 것은 이미 절벽 근처까지 가까이 간 후였다. 순간적으로 등골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보리스는 돌아보았다. "어, 어떻게......." 이미 돌이키기에는 늦은 상황이었다. 기사는 대답하는 대신 비릿한 웃음을 보였다. "잘 가라고." 더 생각할 여유도 없는 상황이었다. 기사가 고삐를 잠시 놓고 채찍을 드는 순간, 보리스는 다리의 힘만으로 힘껏 말 등을 박차고 가능한 한 먼 곳으로 떨어져 굴렀다. 동시에 순간적 으로 목이 꽉 졸리며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다. "어 억 !" 기사는 손에 감아쥔 밧줄을 아직 풀지 못한 채였다. 갑자기 줄이 당겨지자 그 역시 순간적 으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함께 말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말고삐를 놓은 채 한 손에는 밧줄, 또 한 손에는 채찍을 들었던 행동의 결과였다. 그는 급히 정신을 추스르고 일어나려 했지만 절벽이 근처라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좀 전에 동료가 떨어지는 모습을 바로 곁에서 보았던 탓이 컸다. 보리스는 얼굴을 심하게 바닥에 부딪쳤지만 곧 죽을 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심정 때문에 벌 떡 일어날 수 있었다. 동시에 도시락 주머니에서 빼든 단도로 목을 감았던 밧줄을 끊었다. 옆구리의 통증도 잊었다. 저쪽에서 정신을 차리고 검을 뽑는 순간 상황은 뒤바뀌게 되어 있 었다. 짧은 순간, 기회는 단 한 번뿐. 망설이면 자신이 죽는다! 손에 쥐어진 단도에 힘이 실렸다. 한달음에 달려간 그는 단도를 힘껏 상대의 등에 꽂아 넣 었다. "크억......!"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일까. 순식간에 옷 전체로 번져 가는 핏자국을 보며 보리스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그가 찌른 곳은 목과 등이 이어지는 언저리였고 검붉은 피는 그야말로 물밀 듯 쏟아져 나왔 다. 급박한 상황에 처해 인간이 아닌 무엇을 찌른 듯 느꼈던 기분은 순식간에 생생한 살해 의 감정으로 변했다. 온 몸이 덜덜 떨렸다. 단도를 찌를 때까지만 해도 다른 생각은 할 겨를도 없었고, 공격하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으으윽......." 상처는 깊었지만 적은 아직 죽지 않았다. 분노하고 동시에 당황한 기사는 몸을 돌려 보리 스의 목을 움켜잡으려 했다. 그러나 보리스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충격을 받아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저도 모르게 손이 뻗어 나갔다. 단도를 너무 꽉 움켜쥐고 있었던 것일까. 푸욱! 날카로운 칼날은 곧바로 상대의 목을 뚫고 들어갔다. 너무도 쉽게, 그렇게 찔러져 버렸다. 그 순간, 옷을 타고 번지던 방금 전과는 달리 맹렬한 핏줄기가 솟구쳐 그의 얼굴에 피보라 를 씌웠다. 동시에 상대방의 크게 열린 동공이 바로 눈앞에 생생히 들어왔다. 죽어 가는 자 의 눈,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과거를 주시하고 있을 지도 모를 흰 눈자위와 똑바로 눈이 마 주쳤다. 아니, 그것은 자신이 살해한 자의 눈이었다. "으... 아...... 으......."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적은 풀썩 쓰러졌다. 피는 쏟아진 우유처럼 흙바닥을 적시며, 다시 는 주워담을 수 없을 몸 속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썰물처럼, 그렇게. 부르르. 보리스가 몸을 떠는 것과 함께 시체도 몇 번인가 간헐적으로 떨렸다. 이윽고 단말마의 고 통은 완전히 멈췄다. 그러나 보리스는 멈출 수 없었다. "아, 하, 으흐... 하악, 학......."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가 않았다. 너무도 꽉 쥐었던 단도는 아직도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손이며 얼굴, 가슴 언저리가 모조리 피범벅이었고 곳곳에 맺힌 피가 뚝뚝 떨어졌다. 이대로 몇 명이고 계속해서 죽여도 더 달라질 것조차 없을 정도로.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죽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 었다. 왜인지 알 수도 없게 그냥 울음 비슷한 것이 먹먹하게 가슴을 메우고 있었다. 무어라 고 표현해야 좋을 지 몰랐다. 슬픔도 아닌, 고통도 아닌, 안도감도 아닌. 뭔가 엄청난 일을 저질렀는데 누구도 그를 안고 '괜찮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한 생명이 삶을 그쳤는데 자신은 그를 위해 슬퍼할 수도 없었다. 폭풍이 그친 아침에 둥지에서 떨어져 죽은 새끼 새를 보고도 슬퍼할 수 있는데, 저 사람만은 애도할 수 없었다. 그의 생명을 자기 손으로 없애 버렸다. 그것도 바로 이 손으로. 그것은 좀 전에 절벽으로 떨어진 사람에 대해 느꼈던 것과는 분명히 달랐다. 절벽으로 떨 어진 자에게 죄책감을 느쪘다면 지금 느끼는 것은 공포와 혐오감이었다. 세상일은 본래 아 무 것도 돌이킬 수 없는데, 이것만이 돌이킬 수 없는 양 그렇게 두렵고 아득했다. 동시에 자기 자신이 무서웠다. 누군가를 죽인 손, 마치 자기 자신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 다. "형......." 그의 입술이 저도 모르게 형을 찾았다. 그 순간, 그는 형이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며 슬픈 얼굴로 한말이 생각났다. 형도 할 수 있는 일인 거야. 아버지뿐만 아니라... 형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거다. 너도 마찬가지야. 형의 말이 옳았다. 이제 그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 모든 인간이 다 닥치는 순간 해치울 수 있게 되는 걸까. 본래 그런 걸까.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에 대한 경험. 그러나 그것은 성장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돌아올 수 없는 길에 본의 아니게 한 걸음 들어와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점차 환한 낮이 되어가고 있는데도 그의 마음은 피로 얼룩진 듯 어두워졌다 첫 살해를 저 지른 피투성이 소년의 머리 위로 이윽고 흰 태양이 떴다. "놓쳤나!" 속속 들어오는 보고를 들으며 백작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져 있었다. 다음날 아침까지 칠십 여 명에 달하는 추적자들을 벨크루즈와 아라종 일대에 풀었는데 소년의 그림자라도 보았다 는 자조차 없으니 답답하다 못해 울화가 치밀 지경이었다. 그들 가운데 보리스의 얼굴을 모르는 자가 아무도 없고, 심지어 절반 이상은 전날 점심 식 사가 채 끝나기 전부터 수색을 시작했는데도 그 지경이었다. 도대체 그 놈이 도망친 시점은 언제인 거지? 왜 아무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거냐! 벨노어 성으로 급히 돌아와 밤새 보리스가 쓰던 방을 뒤집어엎다시피 수색했지만 물론 윈 터러는 나오지 않았다. 그 녀석을 이곳으로 데려온 이후로 처음으로 멀리 내보내게 되는 터 라 백작 자신이 일부러 눈여겨봤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숨겨서 갖고 나갔는지 모를 노릇이 었다. 영문을 모르는 로즈니스가 아침에 깨어나자마자 달려와 오빠의 행방을 캐물었지만 백작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할 기분이 아니었다. "오빠가 졌나요? 그래서 아빠가 오빠를 쫓아낸 거예요? 그런 거죠? 네? 말씀해 주세요!" "시끄러우니 네 방으로 가라!" 백작이 딸에게 이런 식으로 소리지르는 일은 좀처럼 없었기에 로즈니스는 금방 눈에 눈물 이 그렁그렁해졌다. 그러나 어리광쟁이인 만큼 고집도 보통이 아닌 그녀였다. "아빠가 미워요! 오빠는 착했는데.... 아무리 졌다고 해도 어떻게 집에도 데려오지 않을 수 가 있죠? 난 오빠한테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아빠가 이럴 줄은 정말 몰랐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작이 별 대꾸조차 하지 않자 로즈니스는 마음이 몹시 상해서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그러나 백작은 머릿속으로 이미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가서 란지에를 데려와!" 반쯤 끌려오다시피 해서 백작 앞에 나타난 란지에는 매우 놀란 듯한 얼굴로, 그러나 동시 에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백작을 바라보았다. 백작이 위협적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너, 그 날 사냥 중에 보리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냐! "예?" 백작의 눈에 란지에는 갑작스런 질문의 의도를 몰라 당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더듬거리다가 입을 연 그는 기억을 애써 더듬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니까... 멧돼지 세 마리가 갑자기 나타나서 다들 매우 놀라서... 저는 멧돼지를 처음 봤 기 때문에 너무 무서워서 급히 말을 돌려 도망쳤습니다. 그때 도련님께서도 마찬가지로 놀 라시는 것 같았는데... 달리다 보니 어느 쪽으로 가셨는지는......." 말만은 그럴듯했다 백작은 한쪽 눈을 약간 작게 뜨면서 날카롭게 다시 물었다. "분명 너희 둘이 같은 쪽에 있는 것을 보았다. 너는 그의 시종인데 멀리 떨어졌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란지에는 갑자기 자리에 주저앉아 무릎을 꿇더니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제가 책임을 다하지 못한 거라면 무슨 벌이든 받겠습니다. 제가 살펴 드리지 못해 도련님이 위험해지신 거라면......." 끝까지 란지에는 보리스가 단지 행방불명이 된 걸로 아는 듯 행동했다. 백작은 어이가 없 어서 혀를 찼다. 이 녀석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화를 내고 있는지조차 모르지 않는가. 그런 녀석한테 시간을 들여 추궁할 가치나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작은 다시 한 번 다짐하듯 소리를 높였다. "설마 너, 내게 감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녀석이 떠나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못 본 체 한 것이 밝혀진다면 이후 살아남지 못할 줄 알아라!" 란지에는 눈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당황한 듯한 얼굴 그대로 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할 제가 도련님의 행방조차 모르는 것에 대해 서는 무슨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만.... 하지만 도련님께서 왜 저택을 떠나신다고 생각하 시지요? 단지 숲 속에서 길을 잃으신 것은 아닐지......." 백작은 란지에의 말을 더 듣고 있지 않았다. 비서 휴에게 몸을 돌리며 명령했다. "계속 수색하도록 하고, 찾지 못하고 돌아온 자들의 몸수색을 철저하게 해라! 만일 그 녀석 을 보고도 거짓을 고하는 자가 있다면 이후 목숨을 보전치 못하리라고 말해라!" "예, 주인님!" 백작이 계속해서 몇 가지 명령들을 더 내리는 동안 란지에는 엎드려 있다가 일어나 천천히 물러 나왔다. 복도를 따라 걷던 그의 발걸음이 문득 멈췄을 때, 그는 문샤인 탑 2층의 그 방 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이곳으로 오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다시는 저기에 들어갈 일이 없겠지. 그는 쓴웃음을 한 번 짓고는 창 밖의 푸른 하늘로 시선을 보냈다. 거기에는 대열에서 떨어 진 작은 새 한 마리가 힘찬 날갯짓으로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란지에 로젠크란츠는 손 을 올려 눈가의 햇빛을 가린 채 오랫동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2. 북방 선원의 나라, 렘므로 가며 겪은 세 가지 일들 대장간 주인 드와릿은 느지막이 그 날의 일을 접으려 하고 있었다. 그의 대장간은 마을에 서 약간 떨어진 화강석 채석장을 등진 곳에 있었지만 근방에 알려질 정도로 실력이 좋았기 때문에 벌어먹고 사는데 별 지장은 없었다. 그러나 그 날은 별다른 손님이 오지 않았다. 인근 마을에서 농기구를 고치러 온 농부가 두 엇, 아버지의 녹슨 철검을 손봐 달라고 가져온 소녀 한 명이 전부였다. 그래도 며칠 전부터 맡아놓은 일이 많았기 때문에 그는 늘 저녁 시간 전까지 일했다. 나이가 들었지만 결혼도 하지 않았고, 당연히 자식도 없었기에 일하는 시간은 그가 내키는 대로였다. 저녁 생각도 별로 없는데 오늘은 마을로 나가서 맥주나 몇 잔 마실까. 풀무니 수건이니 하는 것들을 한쪽으로 치우고 가죽 앞치마를 벗어 걸쇠에 거는데 저만치 들판 쪽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언뜻 보였다. 농번기가 다가오는 봄철이라 할 일 없이 돌아다 니는 사람은 드문 편인데, 멀리서 온 여행자인가 싶었다. 그림자는 점차 다가왔다. 바람이 긴 날개처럼 들판을 부드럽게 쓸어 내렸다. 그 바람 속에 서 검푸른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있었다. 말을 탔고 여행자의 몸차림이었지만 어른치고는 키가 좀 작다 싶었다. 대장장이가 장갑을 벗어 선반에 얹고 돌아보니 그림자는 이미 몇 걸음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아직 앳된 뺨을 가진 소년이었다 그런데 온 몸이 물에 빠졌다가 방금 나오기라도 한 것처 럼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런 모양이니 당연히 소년은 떨고 있었다. 봄이 깊었다지만 아직 저 녁 공기는 싸늘했다. 소년은 대장장이 앞에 오더니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일은 끝내신 건가요?" 소년은 가진 것이 별로 없어 보였다. 안장에는 도시락 주머니 비슷한 것이 매달려 있었고, 손에는 검이 한 자루 들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 검의 모습이 희한했다. 오랫동안 대장장이로 잔뼈가 굵어 온 자신조차 한 번도 보지 못한 재질로 만들어진 칼집이었다. "무슨 볼일인데 그러느냐?" "이 검의... 칼집을 새로 구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대장장이는 저도 모르게 놀란 목소리로 말하고 말았다. "그 검을?" 그가 보기에 칼집은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낡기는커녕 흠집조차 없는 순백의 아름다운 표면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거기에 꽂힌 검과 아주 잘 맞았다. 그런 칼집을 왜 바꾸겠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소년은 대장장이의 기색을 보고는 그런 생각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아직 어린데도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눈가는 더욱 움푹하게 그늘져 있었다. 못 볼 것을 많이 본 눈... 대장장이 가 문득 떠올린 생각이었다. 소년은 단순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새 칼집은 가능한 한 눈에 띄지 않는 단순한 것이라면 좋겠습니다. 물론 돈은 치르겠어요. 아아, 그리고 기다릴 시간이 없어서... 가능하다면 다른 검의 칼집을 그냥 제게 주시겠습니 까? 잘 맞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대장장이는 소년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죽은 조카도 저와 비슷한 날카로운 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아이는 아버지를 죽인 자를 죽이겠다고 말했고, 결국 자신의 목숨조차 원수에게 맡기는 것으로 짧은 생애를 마무리지었 다. 그는 형을 말리지 못했고, 조카를 말리지 못했으며, 홀로 살아남았다. 아이를 낳지 않겠 다고 결심한 것은 밤을 틈타 조카의 시체를 훔쳐 몰래 묻어주던 무렵 이었던가. "들어와라." 대장장이 드와릿은 대장간 안에서 자신이 만든 바스타드 소드들을 모조리 끄집어내어 소년 에게 보였다. 원하는 것을 가지라고 눈짓했다. 그 가운데는 영주나 인근의 부자에게 바치기 위해 만든 훌륭한 것들도 섞여 있었다. 청동에 보석의 원석이 아로새겨진 것도 있었고, 정교 한 문양으로 표면을 다듬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한참을 살펴보다가 마치 투핸드소드(two-hand sword)에나 어울릴 법한 폭 이 넓고 묵직한 칼집을 골랐다. 끝이 닳지 않도록 둥그런 쇠가 박힌 투박하고 거친 모양새 였다. 그러더니 소년은 자신의 칼을 뽑았다. 아, 하고 대장장이는 경탄했다. 사십여 평생을 대장장이로만 살아왔는데 아직껏 저런 검을 보지 못했다니 헛살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 광채와 그 예기(銳氣), 완벽한 선과 단호한 이음매를 보는 눈이 시릿할 정도였다. 소년은 흰 칼집을 내던지고 투박한 칼집을 집 어 검의 광채를 가렸다. 보고 있는 대장장이가 안타까워질 정도였다. 저토록 완벽한 결합을 떼어버리려 하다니, 저토록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하나의 신물(神物)을 어지럽히다니. "이걸로 하겠습니다. 얼마를 치르면 될까요?" "꼭 그렇게 해야겠느냐? 지금 그건 네 훌륭한 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탐욕이 아니라 검이라는 존재에 대한 진지한 애정으로 대장장이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별다른 표정은 없었다. "상관없습니다. 이 칼집은 어차피 버릴 테니 원하신다면 드리겠습니다. " 대장장이는 고개를 젓다가 잠시 후 다시 끄덕거렸다. 소년이 내려놓은 흰 칼집을 집어든 그는 홀린 듯한 눈동자로 그것을 훑어보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돈은 치를 필요 없다. 아니, 오히려 내가 네게 이 칼집의 값을 쳐주어야 할 것 같구나." 소년이 미처 거절하기도 전에 대장장이는 대장간 한구석을 뒤지더니 누런 가죽으로 된 특 이한 허리띠를 하나 찾아 내주었다. 두 갈래 가죽끈을 엇갈리게 해서 어깨까지 이어지도록 만든 그것은 묵직한 검을 허리 뒤로 돌려 가로로 걸고 다니도록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재료 로 쓴 가죽과 버클의 만듦새는 말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소년은 거절하려다 그만두고 짧은 말로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서 지금껏 들 고 다니던 검을 찼다. 둘은 길게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소년은 말에 올랐고, 아주 먼 곳으로 멀어져 갔다. 비가 내렸다. 이미 젖어 있기에 더 이상 젖지 않았다. 온 몸에서 물이 흘러내렸지만 그것이 오히려 마음 에 들었다. 몸에서 한없이 씻어내고 싶은 것이 있었기에 이렇게 계속 젖어 있는 편이 좋았 다. 피 냄새가 사라질 때까지 물 속에 푹 잠겨 있고 싶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 짧은 망토는 묵직해지고 부츠에서는 물이 질벅거렸다. 지칠 대 로 지친 말을 잠시 쉬게 하려는 마음에서 걷기 시작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여행을 멈출 수 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낮에서 밤, 밤에서 낮으로 넘어가는 경계의 하늘에 번진 붉고 푸른 광채 는 단색의 하늘보다 항상 황홀했다. 비가 내리고 있는데도 어째서 지는 햇빛이 보이는 것일 까. 참으로 이상한 날씨구나. 비도 그치고 어두워질 무렵 들어선 곳은 작은 마을이었다. 정말로 작아서 마을 안의 모든 집을 합쳐도 서른 채도 안될 법한 그런 곳이었다. 돈은 있었기 때문에 어딘가에 유숙을 청 할 셈이었다. 아직 어리긴 했지만 이제 어엿한 소년 검사로 보이는 자신이었으므로 작년 여 름이 끝나갈 무렵처럼 사람들이 두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을 안쪽으로 들어설 무렵, 그는 뜻밖의 광경을 목격했다. "죽여라!" "저 놈, 죽여버려!" 사람들이 한 사람의 희생자를 둘러싼 채 욕을 퍼부으며 돌을 던지고 있었다. 창칼을 든 사 람은 없었지만 쇠스랑이나 낫을 든 사람은 있었다. 다행히도 찌르지는 않았고, 대부분은 발 길질이나 썩은 사과를 던지는 정도로 자신들의 감정을 표현했다. "어딜 남의 동네에 와서 그딴 말도 안 되는 수작이냐!" "저런 놈은 국왕님께 보내서 단숨에 목을 치게 해야 돼!" "퉤! 멀정히 조용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 괜스레 그런 문제에 끌어 들이지 마라!" 지나쳐 걸을 수가 없었다. 둘러싸인 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는 사람은 예순은 넘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무슨 잘못을 했기에 저렇게 핍박받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또한 끼여들려고 하지는 않았다. 자신도 깨끗하고 정직한 인간은 이미 아니었다. 남 의 불행을 좀 지나친다고 해서 뭐가 문제가 되겠는가? 또한 돕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랴? 돌과 가래침 세례를 받던 노인은 잠시 후 벌떡 일어나더니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로 뭐라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버럭 외쳤다 둘러싼 사람들이 움찔할 정도로, 그러나 보리스의 귀에는 그 말이 얼른 들어오지 않았다. 마지막 몇 마디를 제외하고는. 그 내용이 너무 낯설었기 때 문일까. "......너희는 사람답게 사는 것을 저버린 자들이야! 어서 날 죽여라! 당장 죽이란 말이다! 이 제 결코 다시는 너희 같은 자들을 위해 싸우지 않겠어!" 분노한 사람들의 발길질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노인은 더 말하지 못한 채 몸을 구부리고 자리에 쓰러졌다. 피와 침... 흙과 먼지에 뒤엉켜 흩뿌려지는 인간의 흔적을 보며 보리스는 뒷걸음질쳤다. 다행히도 사람들은 노인을 죽이지는 않았다. 화풀이를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자 그들은 욕 을 내뱉으며 하나 둘씩 떠났다. 그 자리에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보리스는 한 걸음 다가가 섰다. 그리고 쓰러진 노 인을 내려다보았다. 노인이 마지막으로 외친 말이 어딘가 모르게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아직 까지도 마음 속에 남은 한 사람이 했던 말과 같았기 때문일까. "......." 보리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도 노인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상대방이 누 구이든 상관없다는 듯,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뭐지... 큭, 아직까지 날 비웃을 자가 남아 있었나... 컥, 쿨럭! 가버려라! 어차피 뒤집히지 도 않을 세상......." 보리스는 나지막이 물었다. "아저씨는 공화국 지지자입니까." 노인의 시선이 문득 보리스 쪽을 향했다. 그리고, 그제야 보리스는 노인의 눈이 거의 보이 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보리스의 턱 언저리에 어설픈 시선을 보낸 채로 말했다. "당신은 누구요? 목소리는 아이 같은데 모습은 어른이로군 이제 와서 왜 내게 그런 걸 묻 는 거요? 당신이야말로 날 저 국왕놈에게 넘겨 목이라도 자르게 할 셈인가." 죽기를 각오하지 않은 다음에야 '국왕놈' 이라는 말을 내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보리 스는 여전히 선 채로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공화국을 지지하는 건가요? 트라바체스 공화국 같은 꼴이 그렇게 좋 아 보인단 말씀입니까?" "그건... 모르는 소리야......." 노인은 천천히 일어나 바로 앉았다. 그리고 잘 보이지 않는 눈을 허공을 향해 굴리며 비교 적 똑똑한 목소리로 말했다. "트라바체스는 공화국이 아냐. 그 나라에서 평민들이 투표에 참여 하던가? 오직 영주놈들 이 선제후를 뽑고, 선제후들이 통령을 뽑을 뿐이지. 몇 명 안 되는 자들 사이에서 강자가 되 려니 사분오열하여 서로 전략적 제휴만 노리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고, 그 와중에 겉모양 만... 프흡, 쿨럭! ...다른 신념들을 내세워 수많은 정파들이 탄생하는 거야. 정권을 잡기만 하 면 그것으로 그만, 갑자기 세력이 약화되지 않는 한 종신에 가까운 통령직, 대대로 세습되는 영주의 장원, 거기에서 뽑히는 반 세습의 선제후....... 절반뿐인 공화제는 그렇게 무섭지. 그 렇게 되지 않으려고 우리 아노마라드 공화국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국민 총 투표를 실시하 려 했어. 하지만 단 한 번도... 오히려 계속되는 귀족놈들의 켈티카 공략을 막는데 급급했을 뿐 그렇게 애썼던 국민 투표는 켈티카 내에서도 단 한 번 시행되는데 그쳤단 말이야. 켈티 카 공방전... 사방을 포위한 신국왕군 놈들의 총공격을 기다리며 새웠던 사흘 밤... 결코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지. 아니, 죽어도 잊을 수 없을 거야. 수 차례에 걸친 항복 권유를 받아들 이려는 자는 아무도 없었지. 마지막 새벽이 밝을 때 수천의 군대가 몰아닥쳐 인간 사슬을 이루고 있던 동지들을 갈가리 난도질하는 것을 난 분명히 보았어. 흥... 그 누가 다시 산 시 체가, 가축 같은 노예가 되기를 바라겠나? 저 전쟁 포로들만 노예인 줄 아나? 이 땅에 살고 있는 자들은 모조리 노예야. 저 귀족들만 빼고!" 보리스는 말문이 막힌 채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아직도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투표해서 대표자를 뽑는다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일인지, 또 그렇게 한다고 해서 과 연 평민이 영주나 귀족과 같아질 수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평민과 영주란 태어날 때 부터의 신분적 격차보다 실제로는 돈과 권력의 유무에서 더 큰 차이가 나는 것 아니던가? 투표를 하게 된다고 돈이 생기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또한 돈이 없는 자에게 권력 이 생길 리 만무한 것이다. "정말로 그것뿐입니까? 그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죽은 이유가 겨우 자신의 투표로 대 표자를 뽑을 수 있는 권리, 그것 하나를 얻기 위해서란 말입니까?" 보리스의 질문에 노인은 이상하게도 힘을 얻는 것처럼 보였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국민의 투표로 선출된 그 대표자는... 국민의 지지가 없으면 다시 실각하는 거다. 임기는 정해져 있고, 그 안에 국민이 지지할 만한 정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만일 임기 안 에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국민에게는 그를 쫓아낼 권리가 있어. 그러면 국민이 지지할 만한 정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올바른 법의 제정이야.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법 을 만들어서 올바르게 시행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만민이 바라는 정치가 되는 거지." 보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그 법이 잘못 제정된다면? 아니, 올바른 국왕이 있어서 처음부터 잘 정치한다면 그런 법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지요? 게다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두 옳은 일만을 생각한다는 보 장이 어디 있습니까? 보통 사람들이라고 해서 선량한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들 역시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린아이를 팔아 넘기고 남의 물건을 뺏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족속인 데 그들에게서 무슨 올바른 합의가 나올 수 있죠?" 그것은 뼈아픈 경험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 조건 없이 선량했던 사 람이 있던가? 아니, 그런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고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모두 남을 등쳐먹 을 궁리만 하고 있는, 기회가 온다면 곧장 강도로 돌변할 수 있는 인간뿐이지 않았는가? "뼛속까지 악한 사람은 드물지... 그런 결정의 문제를 공공의 영역으로 끌어내게 되면 사람 들은 사회적인 정의에 마음이 쏠리게 된다. 평소에는 저질적인 범죄를 저지르고 있더라도 자신을 다스리는 자가 악을 저지르기를 바라는 사람은 적어. 아니, 모두 올바를 필요도 없 다. 그 가운데 절반 이상만 올바르다면 돼. 투표의 결과는 옳은 쪽을 가리킬 테니까. 옳은 것을 바라는 열망은 결국 전달된다. 그것이 전달될 통로만 있다면 말이지. 그게 바로 투표를 비롯한 권리들이야. 빈민이든 평민이든 누구나 지휘자가 될 투표의 장에 후보로 나설 수 있 고, 또 지지할 수 있는 그런 나라가 공화국이다. 그것을 원하지 않는 것은 기득권을 가진 저 귀족들 뿐이야. 악한 왕을 몰아낼 권리가 우리에겐 있어야만 하는 거다." 보리스는 한 발 물러서며 말했다. "저라면 전 국민의 절반이 올바르기를 바라기보다 그들 가운데 몇 명이 올바르다는 쪽에 걸겠습니다. 무리 지은 사람들은 처음엔 서로 눈치를 보지만 한 방향으로 횝쓸리기만 하면 더 큰 죄도 서슴없이 저지르지요. 악한 왕을 몰아낼 권리, 좋습니다. 하지만 그걸 위해서 파 괴되는 사람들과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무엇으로 보상받지요? 세상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있는데, 그걸 잃고 나서 모든 사람이 행복해졌으니 수긍하라고 한다면 전 거부하겠습니다. 더구나 사람이란 옳은 일보다는 이익에 민감한 법이고, 뭔가 이해 관계가 걸려 있기만 하다면 서슴없이 악한 쪽을 지지할 겁니다. 그런 불완전한 것을 위해 목숨보다 아끼고 있는 것들을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노인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자네는 귀족답지 않은 귀족인 모양이군." 그 말은 한때 란지에가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보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공화국은 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하지만, 그들을 인간답게 해주는 나라다. 인간이기에 피도 흘릴 수 있는, 그런 나라. 인간이 아니었던 자들은 인간이 되는 순간 죽어도 여한이 없 을 수 있어. 처음부터 가졌던 것이 있는 자들만 잃을 수 있는 거지. 잃을 것이 없는 자에게 두려울 게 무에 있겠나?" 어쩌면 그렇게 과거 자신이 들었던 말과 같을 수가 있을까. "당신은 누구입니까?" 보리스는 문득 알 수 없는 압박감 같은 것을 느끼며 그렇게 말했다. 말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 저 노인은 공화국을 대단히 낭만적인 무엇으로 느끼는 사람인 듯 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공화국을 원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렇게 이상을 위 해 자신의 목숨 따위 헌신짝처럼 내버릴 수 있다고 말한단 말인가? 트라바체스에도 이념을 논하는 자는 많지만 그걸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은 소수였고, 오히려 자신의 머리가 되는 주군 또는 주인의 명령 몇 마디에 목숨을 걸었다. 어떻게 눈에 보이는 권력자가 아니라 미 래조차 불분명한 하나의 정체(政體)를 위해 저토록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가 있을까? "늙고 병들어 이젠 쓸모없는 공화주의자지. 공화주의자, 그건 인간다운 삶을 위해 목숨이라 도 바치고자 하는 자들의 이름이다." 노인을 처음 보았을 때는 사람들에게 매나 맞는 어리석은 자로밖에 보이지 않았었다. 그가 문득 외쳤던 한 마디만 아니었다면 멈춰 서서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공화국이란 인간을 분열시키는 존재다, 라고 그는 굳게 믿고 있었다. 분열이 가져오는 비극 이란 폭군의 정치보다 몇 배 두려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한 명의 폭군을 모두 증오 하고 있는 편이 훨씬 나았다. 아끼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서로 죽고 죽여야 하는 상황에 비하면. 그러나, 확실히 공화국이란 참으로 이상한 존재였다.... 사람들의 마음을 중독시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도록 빠져들게 하는 마력적인 흡인력을 가진 존재였다. 노인은 일어났다. 그러더니 천천히 마을 바깥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트라바체스라, 가보고 싶은 곳이군. 거기에는 또 어떤 인간 아닌 자들의 비극이 있을까." 노인이 발을 끌며 멀리 떠나갈 때까지 보리스는 그 자리에 못 박힌듯 우뚝 서 있었다. 트라바체스는 자신이 돌아갈 수 없는 나라였다. 그 나라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이해할 수 없는 애증이 자신의 가슴을 짓눌렀다. 아마 트라바체스에서 태어 나고 자란 자가 아니라면 그 비극을 다 이해할 수는 없으리라. 그리고 아노마라드, 이곳 역시 그가 머무를 수 없는 나라였다. '공화국' 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괴물에 대해 생명과도 바꿀 열정을 불사르는 사람도 있었 다. 낭만적인 늙은 공화주의자 뿐만 아니라 란지에와 같이 영리한 소년의 마음조차 온통 사 로잡아 버린 존재인 것이다. 이곳에도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역사가 있었다. 다시는 공화국으 로 되돌아갈 수 없을 지라도, 이곳은 천혜의 아름다운 국토만큼 행복만이 가득한 땅은 아니 었다. 이 나라의 그 풍요로움을 한 때 증오했었다. 그러나 그 땅에서도 가지지 못해 저토록 새로 운 나라를 열망하는 사람이 있었다. 풍요란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지지는 않는 것일까. 동전 의 양면처럼 두 가지 얼굴을 가진 아노마라드, 그는 그 두 가지 면에 모두 적응할 수 없었 다. 이 나라를 떠나자, 그는 생각했다. 다른 곳으로 가자. 트라바체스에서는 그를 잡으려는 블라도 삼촌의 손길이 있을 테고, 이곳에서 당연히 백작 이 그를 찾아내려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들을 억지로 이해하려 하기에는 그 자신에게 주어진 고뇌가 너무나 컸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논할 넓은 땅이 아니라 방해없이 홀로 숨을 수 있는 외딴 동굴이었다. 문득, 월넛 선생이 말해 주었던 북방 야만인의 땅이 생각났다. 외부에서 들어온 자들을 싫 어하여 머리 가죽을 벗긴다고 하던 야만인들이지만 적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강요받지는 않아도 될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북방 선원의 나라, 야만인과 공존하며 살아간다는 거친 국민 들의 땅. 깎아지른 해안 절벽과 차고 검푸른 파도의 땅. 렘므. 이제 그는 추위의 땅으로 가고 싶었다. 받아들이기 힘든 기묘한 풍요의 됫면에는 빈곤자들 의 지독한 열망이 새겨진 이 땅을 떠나기를 원했다. 봄이 끝나가고 있었다. 갈색 망토 안쪽으로 허름한 칼집의 검을 비스듬히 차고, 길고 검푸른 머리카락과 훌쩍 큰 키를 가진 소년이 번화한 길거리에 서 있었다. 그 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지나가고 있 었다. 아노마라드 안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도시인 잔포드는 국경 근처 길목에 위치한 도 시인지라 곳곳에 외지인들이 들끓었다. 그 가운데 특히 많은 것은 상인들이었다. 오를란느와 아노마라드, 그리고 렘므 왕국에 이르기까지 세 나라의 영지가 맞닿아 있는 대륙 최대의 호 수 로젠버그(Rosenberg) 호는 대륙 북부 상업의 중심지였고, 잔포드는 바로 그 호수의 남쪽 호반에 위치해 있었다. 조금만 더 동쪽으로 가면 렘므와의 국경이었다. "훠어이! 드메린 칼츠 님의 행차이시다! 얼른 길을 비켜라!" 귀족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단지 이름뿐이고 작위를 말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런 건 아 닌 것 같았다. 큰 거리를 메우고 있던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갈라져 흩어지고 그 중앙에 당 당한 가마의 행렬이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요즘 시절에 마차도 아니고 가마라니, 대단히 특이한 사람이 아닌가 싶었다. 화려한 금빛 천으로 만든 휘장 주위로 정교하게 세공한 보석이 빙둘러가며 십여 개나 장식 된 것이 보였다. 가마꾼들의 모습 또한 같은 복장으로 통일된 것을 보니 대단히 돈 많은 사 람의 행차인 모양이었다. 꼭대기에는 가문의 문장으로 보이는 것이 새겨져 있었는데 바로 금빛 까마귀였다. 까마귀는 재보를 모으는 짐승이니 아마도 이 자의 정체는 상인일 터였다. 사람들이 곳곳에서 수군대며 감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메린칼츠라는 자는 외지인들 에게조차 유명한 상인인 모양이었다. 지나쳐 가려나 했던 가마가 그 자리에서 멈추더니 바닥에 내려졌다. 한쪽 휘장이 들리고 온통 비단과 보석으로 치장한 풍채 좋은 남자가 걸어나왔다. 키도 크고 금발에 비교적 잘생 긴 얼굴인데 배만은 이상할 정도로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아마 저 배 때문에 마차보다는 가마를 선호하는 모양이었다. "칼츠 상단의 대표이신 드메린 칼츠 님께서 오셨다! 얼른 나와서 인사드리지 않고 뭘 하 나!" 우스운 광경이 벌어졌다. 가마가 멈춰 선 곳은 3층으로 된 대형 주점의 앞이었는데 급사들 이 혼비백산해서 뛰어들어가고 곧 주인으로 보이는 잔뜩 치장한 여자가 구르듯 달려나와 허 리를 굽혔다. 그 뒤로 대여섯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같이 코가 땅에 닿을 듯 절을 하고 있었다. "어, 어쩐 일이십니까, 이런 누추한 곳까지 직접 오시다니요....... 아랫사람을 시켜 기별만 주셨으면 저희 쪽에서 만사 제치고 달려갔을 터인데......." 여주인은 보기에도 안쓰러을 정도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이전에 뭔가 잘못한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강대한 상단의 인물이라 해도 저토록 어쩔 줄 몰라하 는 것은 확실히 수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배를 내밀고 선 칼츠의 호통이 떨어졌다. "어쩐 일로 왔냐고? 지금 그걸 몰라서 묻고 있는 겐가! 정말 몰라서 물어? 지금 나와 장난 을 치자는 건가 뭔가!" 여주인을 비롯한 주점의 사람들은 모두 부들부들 떨었다. 칼츠라는자의 한 마디가 주점의 문을 영영 닫게 할 수도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구경거리를 보러 모여든 사람들도 다들 불 안한 얼굴로 그 모습을 주시했다. "저, 저로서는... 정말로 무슨 일로 그리 역정을 내시는지......." 드메린 칼츠는 더욱 분노한 얼굴이 되었다. 한층 더한 불호령이 주위 사람들이 귀를 막을 정도로 쩌렁하게 울렸다. "내 하나 뿐인 아들녀석! 그 녀석이 여기 왔지 않아! 설마 모른다고 잡아뗄 생각은 아니겠 지!" 여주인의 낯이 흙빛이 되었다. 그녀는 뒤의 사람들을 돌아보며 그 아들이란 자를 본 사람 이 있으면 얼른 말하라는 듯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른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그 뒷말을 결코 듣고 싶지 않은 듯, 여주인은 갑자기 바닥에 납작 엎드리면서 애원하는 목 소리로 말했다. "저희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어르신...... 귀하신 아드님께서 본래 변장을 즐기시는 터라 우매한 저희가 혹시나 알아보지 못하고 죄를 짓게 된 거라면......." 그때 보리스는 자기 옆에 선 소년 한 명이 소리 죽여 키득키득 웃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 다. 처음에는 이런 상황에서 웃다니 도대체 겁이라고는 없는 녀석인가 싶었다. 그러나 소년은 남루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하얀 뺨에는 귀하게 자란 듯한 기품이 흘렀고, 머리카락은 햇 빛처럼 곱게 반짝이는 금발....... 보리스는 배가 나온 칼츠 씨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두 사람의 얼굴 윤곽이 비슷한 것은 물론, 금발의 빛깔조차 거의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소년을 바라본 그는 문득 화 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잠시." 손을 뻗어 소년의 어깨를 잡고 사람들 속으로 끌어당겼다. 웃어대고 있던 소년은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낯선 소년인 보리스를 쳐다보았다. 새파란 눈동자를 보는 순간 갑자기 예 프넨이 연상되었지만 이 소년이 가진 것은 근심 걱정의 기색 따위는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 는 해맑은 눈이 었다. "왜 그래?" 묻는 것조차 아이처럼 천진했다. 정말로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모든 책 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은 알지도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얼굴이었다. 갑자기 말문이 막혔 지만 결국 입을 열어 말했다. "저 사건의 원인은 아마도 너겠지?" "어? 어떻게 알았어? 본래 내 얼굴 알고 있었던 거야? 나, 완벽하게 변장했다고 생각했는 데......." 완벽한 변장은 무슨, 얼굴에 흙이라도 찍어 바르고 나서 그런 소릴 해라, 보리스는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소년의 등을 떠밀었다. "으, 왜 미는 거야?" "가서 너라는 걸 밝혀. 저 사람이 너 때문에 벌을 받게 되어도 좋단 말이냐?" 너 같은 철없는 장난꾸러기 때문에, 라는 말이 나오려는 것을 눌러 참았다. 자신 역시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시무룩해지거나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소년은 보리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갑자기 말했다. "응, 네 말도 맞는 것 같군. 그건 알겠는데 너 말야,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야? 얼굴 좀 풀고 살라고." 뭐라 대답할 틈도 없었다. 소년은 그 자리에서 갑자기 앞으로 튀어나갔고 순식간에 드메린 칼츠의 등 뒤로 접근해서 와락 껴안아 버렸다. 시킨 보리스조차 당황해서 멍해질 노릇이었 다. "아버지, 나 여기 있어! 이 사람들은 아무 죄도 없다고! 그러니까 이 사람들 혼내지 말고 내가 가서 대신 혼날게. 그러면 되지? 음... 사흘 동안 외출 금지할까?" 드메린 칼츠와 주점의 여주인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이 그 순간 멍해지다 못해 동작을 멈 추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눈치 없는 눈동자를 한 바퀴 굴리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사흘은 너무한 거 같다. 하루만 근신하면 안 될까? 대신 저녁에 삶 은 당근이 나와도 한 번은 얌전히 먹을 테니까......." "으이고, 이 철없는 녀석아!" 드메린 칼츠는 갑자기 아들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더니 곧장 자기가 타고 온 가마 속으로 와락 밀쳐 넣었다. 그리고 여주인 쪽으로 몸을 돌려 애써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덕분에 아이를 찾아냈으니 근시일 내에 사례하도록 하지." 여주인은 사례고 뭐고 간에 방금 위기를 넘긴 것만으로도 십년 감수한 듯한 표정이었다.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화려한 옷자락에 묻은 흙을 털 생각도 하지 않고 머리를 조아 리며 말했다. "사례라니, 당치도 않으십니다. 루시안 도련님께서 안전하신 것만으로도 저희는 충분히 기 쁘게......." 드메린 칼츠는 여주인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있지 않았다. 몸을 돌려 자기도 가마 안으로 들 어가 버렸고 얼른 가마꾼들이 휘장을 내렸다. 가마는 다시 번쩍 들려서 휑하니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가마가 바로 옆을 지나갈 때 보리스는 문득 자기에게 거는 짓궂은 목소리를 들었다. "얼굴 펴라니깐!" 살짝 들렸던 휘장이 내려지면서 가마 안에서는 아들이 또다시 아버지에게 꿀밤을 얻어맞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이런 소리도 들렸다. '으씨, 왜 두 번씩이나 때려요!', '집에 가면 하인 을 붙여서 꼼짝도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니 각오해!'. 보리스는 그 자리에 잠시 선 채로 당황해 있었다. 주위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칼츠 님의 저 개구쟁이 아드님 말이야, 올해 열세 살 생일을 넘기셨는데도 아직도 그대로 니 칼츠 님도 속 깨나 썩이시겠어." "자네 루시안 도련님 생일 잔치 가봤나? 4월 초였잖아. 진짜 눈이 돌아갈 정도로 음식이며 술이며 원 없이 나왔다던데? 그런 구경이 다시 없었다고 들었어." "나오다 뿐인가! 아예 저택 문밖에 하인들이 서서 길가는 사람들한테까지 모조리 과일이니 과자니 하는 것들을 뿌렸다니까, 자기 생일 인데도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그렇게 우 겼다지 뭐야?" "저 도련님이 칼츠 상단을 물려 받았다간 3년도 안 가서 거덜나겠구먼 그래." 보리스는 다른 이야기는 듣고 있지 않았다. 저 아이가 자신과 같은 해 태생이라는 것, 그것 만이 귀에 선명하게 들어와 박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왜 이토록 다른 것인가. 둘에게 는 같은 숫자의 해가 주어졌는데 그것은 얼마나 다른 일들로 흘러가 버렸단 말인가. 다른 사람이 앞서의 말에 반박해서 말하고 있었다. "아냐. 저렇게 돈에 대해 개념없는 철없는 도련님들이 사업을 물려받고 나면 갑자기 아버 지들보다 더한 장사꾼으로 변신하는 일도 허다하다고." 3. 굴복하는 법, 치욕을 견디는 법 드디어 렘므의 관문이었다. 잔포드에서부터는 상인들의 행로를 따라 죽 여행해 왔다. 그들 대부분은 렘므와 아노마라 드 사이를 오가며 중개 무역을 하는 자들이었기에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라도 지름길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온 보리스는 꽤 빠른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관문 도시인 사스포네에 이르러 그는 뜻밖의 문제에 봉착했다. 아니, 실은 그가 아 직 어렸기 때문에 지금까지 중대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가 구체화된 것이라 할 수 있었 다. 그에게는 국경을 넘을 수 있는 통행증이 없었다. 통행증을 얻을 방법도 없는 주제에 무작정 국경으로 오다니! 조금만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어른이었다면 이런 바보 같은 일은 저지르지 않았겠지만, 많은 일을 겪었다고는 해도 보리 스는 아직 그런 문제에 대해 무지한 어린아이였다. 그나마 지금까지 별 충돌 없이 안전하게 여행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청천벽력의 상황이 닥친 셈이었다. 상인들은 대부분 렘므와 아노마라드를 오갈 수 있는 양국의 허가증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 서 안전하게 관문을 통과해 갔다. 본래 아노마라드와 렘므를 잇는 국경선은 대륙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드라켄즈 산맥(Drakens Mountains)으로 가로막혀 있었기 때문에 로젠버그 호수 근처에 자리잡은 로젠버그 관문을 비롯하여 몇 군데의 관문을 제하면 제대로 뚫린 곳이 거 의 없었다. 떠들썩한 여관이었다. 렘므로 넘어가기 위해 온, 또는 렘므에서 방금 넘어온 사람들이 무리 지어 모여 앉아 저마다의 이야기를 소리 높여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절반 가량은 로젠버그 관문의 개방 시간인 내일 오전 10시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여관 한구석 에 놓인 램프시계가 서서히 기름을 줄여나가고 있었다. 밤새 걸어온 터라 몹시 피곤했지만 보리스는 어떻게 해야 할까 궁리하느라 쉴 수 있는 마 음의 여유가 없었다. 따뜻한 우유를 한 잔 주문한 그는 그의 긴 머리카락과 큰 키가 나이를 가려 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구석진 테이블에서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다. 그런데 바로 등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두 남자가 애써 목소리를 낮추어 가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니까 말이오. 4백 엘소 정도면 적당하리라고 보는데." "에이, 이보소! 4백 엘소면 켈티카까지 한 번 더 갔다 오겠구려. 그런 소리 말고 딱잘라서 2백 엘소만합시다. 응?" "어허, 4백이면 4백인 거지 웬 잔말이 그리 많소? 싫으면 관두시구려. 안 그래도 돈 낼 사 람은 널렸으니까." "거기에 한 명 더 얹으면 당신 이익이지 내 이익이오? 너무 그러지 말고 끼워 주시구려. 한두 해 거래하고 지낸 사이도 아닌데." "쳇, 돈을 내기 싫으면 통행증을 만들어 가지고 올 일이지! 나도 이 짓 해서 벌어먹는 거 이제 얼마 안 남았단 말이오. 렘므 쪽에서 눈치를 챘다는 소문이 있어서 말이야. 요새 아주 아슬아슬해 죽겠어." "엣다, 그럼 2백50! 딱 요렇게만 합시다. 내 돌아을 때 당신 마누라 손에 쥐어 줄 선물 한 두 가지 안 가져다 줄 줄 아오?" 남자는 여전히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지만 오가는 말과는 달리 둘은 그다지 대립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남은 술을 다 마시더니 서로 몇 푼 안 되는 술값을 계 산하겠다고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2백50 엘소 내겠다는 사내 쪽이 이겨서 술값을 냈다. 그 리고 서로 고개를 맞대고 뭔가 작게 속삭이면서 거리로 나갔다. 보리스는 돌아앉은 채 단편적으로 들은 이야기만으로도 상황을 대강 알아들었다. 로젠버그 관문을 통하지 않고도 렘므로 넘어가는 길이 어딘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 길 안내자가 지금 값을 흥정하는 중일 것이다. 4백 엘소라면 그에게도 있었다. 보리스는 일어나 주인에게 돈을 치르고 그들을 따라나갔다. 그때 한구석에서 보리스를 가 만히 지켜보고 있던 사람 하나가 슬그머니 그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푸르스름한 달이 그림처럼 빛났다. 새벽 4시의 하늘은 두터운 휘장으로 덮인 듯 낮게 내려 앉아 있었다. 보리스는 걸음을 서둘렀다. 남자들은 골목 모퉁이를 돌아가더니 어느 야트막한 지붕을 가 진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문간에는 다른 남자가 지키고 서 있었는데 그들을 보더니 별 말 없 이 들여보내 주었다. 보리스는 잠시 망설였다. 저들을 믿어도 될 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였다. 저들은 어른이고 전부터 서로 잘 아는 사이여서 서로 속이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그의 입 장은 달랐다. 한패끼리는 짐짓 좋은 사람인 체하는 자들도 낯설고 약한 상대를 발견하면 돌 변해서 자기 뱃속을 채우려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4백 엘 소라는 큰돈을 가진 것을 보면 더 많은 돈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 하고 강도짓을 하려 할 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아직 몇 백 엘소의 돈이 더 남아 있었고 말도 한 필, 그리고 무엇 보다도 윈터러가 있었다. 모험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 선 채로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문 앞을 지키던 남자는 하품을 하더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밖에는 처마에 달린 램프 하나만 달랑 남았다. 보리스는 그 아래 한 가지가 더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거무스름한 뭉치, 또는 작은 자루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 것은 보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 것처럼 슬그머니 움직였다. 나무 기등 옆에서 몸을 약간 비틀더니 어깨를 부르르 떨며 기지개를 켰다. 길쭉한 꼬리가 동그랗게 말리며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놈의 정체는 고양이였다. 보리스가 살았던 트라바체스에는 고양이가 드물었기에 그는 호기심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 다. 회색과 검은색으로 된 줄무늬에 파란 눈을 가진 고양이였다. 처음에 고양이는 보리스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처럼 한참 동안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털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 러나 조금 지나자 이윽고 한 걸음 램프 빛 아래로 걸어나와 자길 지켜보는 인간더러 이보라 는 듯 당당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제야 자세히 보니 고양이는 드물게 큼직할 뿐만 아니라 온 몸 털 구석구석 성한 곳이 없 을 정도로 만신창이인 놈이었다. 꼬리는 절반 정도로 잘렸고, 눈 한쪽이 짜부라졌으며, 다른 고양이의 발톱으로 털이 뜯겨나간 듯한 상처가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귀조차도 이상한 모 양으로 접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리를 절거나 몸이 아픈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구석에 숨어서 갑자기 움직였다가는 발견한 사람 쪽에서 오히려 흠칫 놀랄 정도로 큰 몸집에 튼튼한 골격 을 가지고 있었고, 거친 인상만큼이나 느긋한 여유까지 지닌 고양이였다. 흡사 노련한 전사 의 풍모를 지닌 고양이랄까. 용병, 또는 방랑 검객이랄까. "......." 입을 한바탕 벌렸지만 특유의 야옹거리는 소리도 내지 않은 채 몇 걸음 걸어가더니 구석에 고인 구정물을 조금 핥았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보리스는 고양이가 따라오라 고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잠시 동안 아이다운 심정으로 돌아간 보리스는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키면서 조그맣게 말했다. "나?" 고양이는 흡사 대답하듯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한 입을 크게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여전 히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따라오라고, 네게 보여줄 것이 있다고 하는 것처럼.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고양이가 가는 쪽으로 몇 걸음 내딛었다. 그리고 망설임 따위는 뒤 에 남겨둔 채 고양이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고양이는 다시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저 반쪽뿐인 꼬리를 흔들거리며 성큼성큼 걸어 서는 통이 잔뜩 쌓인 골목으로,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창문을 여는 거리로, 그 리고 마을 외곽을 삐져나와 로젠버그 관문이 있는 방향의 산길로 계속해서 가고 있을 따름 이었다. 중간에 엉뚱한 곳을 기웃거리거나 멈춰서 다른 일을 하는 법도 없었다. 보리스가 꽤 많이 따라오고 말았다고 생각했을 무렵, 고양이는 갑자기 처음으로 소리를 냈 다. 약간 목이 걸걸한 사람이 흉내내고 있는 것처럼 거친 가르릉 소리였다. "이리 와." 흠칫, 보리스는 고개를 들어 난데없이 나타난 사람을 쳐다보았다. 눈앞에는 길고 검은 로브 로 온 몸을 감싸고 후드를 깊게 내려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사람이 서 있었다. 고양이는 그 사람 앞으로 다가가더니 발치에 가만히 엎드렸다. 보리스는 말문이 막혀 잠자코 있었다. 내가 왜 여기까지 따라왔지? "무슨 볼일이냐?" 낯선 목소리가 묻고 있었다. 보리스는 머뭇거리고 있기보다는 정직하게 대답하리라고 생각 했다. "고양이를 따라왔을 뿐이에요. 당신의 고양이였다면 미안합니다." "내 고양이는 아냐. 이 놈은 누군가한테 속할 고양이가 아니니까." 뜻밖으로 시원스런 대답이었다. 그러더니 오히려 그쪽에서 되묻고 있었다. "이쪽 길이라면 로젠버그 관문을 넘어가나 보군. 렘므로 가나? 아니면 렘므에서 넘어온 건 가?" 별로 숨길 필요는 없었다. "렘므로 갈 생각이었지만 통행증이 없어서 못 가고 있습니다." "통행증이 없다고? 그러면 통행증이 있는 사람과 일행인 체 하고 함께 가면 될 텐데?" 그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해결책이었다. 하긴 상인들이 데리고 있는 수십 명의 일꾼들이 모두 다 자신의 통행증을 갖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려줘 서 고맙다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상대가 먼저 가로채어 말하고 있었다. "정체도 모르는 자들한테 돈까지 내고 밀수 통로를 안내 받는 쪽보다는 휠씬 안전하지." 마치 자기 마음속을 들여다본 듯한 말에 보리스는 이상한 표정이 되어 상대방을 올려다보 았다. 그러나 상대의 얼굴은 후드 때문에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매우 키가 큰 사람이라 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전 그만 가보겠습니다." 돌아서려 하자 남자가 다시 말했다. "이 고양이를 따라온 걸 보고 넘겨짚은 것 뿐이야. 이 놈은 주로 밀수꾼들의 뒤를 잘 따라 다니니까 말이지." 별다르게 물은 일은 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또다시 이어서 말했다. "어때? 내가 데리고 넘겨 줄까?" 순간 마음속에서 의심이 확 일었다. 보리스는 차갑게 대꾸했다. "당신도 정체 모르는 사람이기는 마찬가집니다. 실은 밀수꾼보다 더한 사람인지 겉만 보고 어떻게 알겠습니까." 갑자기 남자는 보리스를 내려다보며 키들거리기 시작했다. "후훗, 훗훗, 어린아이면서 꽤 똑똑한 체 하잖아? 하지만 그런 식으로 정체도 모르는 사람 의 비위를 함부로 건드리면 곤란하지. 내가 '날 밀수꾼과 비교하다니, 이런 건방진!' 하고 외 치면서 검이라도 뽑아들면 어쩔 거지?" 점점 더 이상한 소리만 지껄이는 남자였다. 보리스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대꾸했다. "저도 검을 뽑겠죠. 하지만 당신과 싸우고 싶지는 않으니 그만 가겠습니다. 실례를 저질렀 다면 사과 드리겠습니다." "저런, 기대를 저버리면 곤란하지. 그럼 잘 가라고." 기대를 저버리면 안 된다, 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돌아서서 걸으면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꾼 자리는 쉽게 얻을 수가 없었다. 보리스는 본래 거래를 잘 하는 사람이 아니었 기 때문에 '자, 저를 국경 너머로 데려가 주시면 2백 엘소 드리겠습니다'와 같은 말을 쉽게 하지도 못했고, 애써 비위를 맞춰 가며 데려갈 마음이 내키게 행동하지도 못했다. 이윽고 오전 10시가 가까워졌다. 보리스는 다시 한 번 그 남자와 마주쳤다. 전사 고양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어이, 함께 갈 패거리는 구한 거야?" 그가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면 같은 사람인지 알아보는 것도 실은 무리였다. 그 자는 여름 이 가까워오는데도, 그리고 날이 밝았는데도 여전히 후드를 젖힐 줄을 몰랐다. 보리스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유연하게 대꾸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과 한 패거리가 될까 궁리 중이었죠." "흥, 내 조건은 까다로운데. 들어 볼 마음이 있다면 말해 줄 수도 있고." 이상스럽게 개구쟁이 같은 저 태도는 누군가를 연상하게 하는 점이 있었지만 근거 없는 억 측은 접어버렸다. "말해 보시지요. 돈이라면 약간 드릴 수도 있어요." "난 돈은 필요 없어. 대신 성격에 문제가 있는지 누군가를 학대하는 걸 엄청 좋아해서 말 이야.... 국경을 넘는 동안만 내 제자인 척 하라고. 다만 그동안 내가 온갖 욕지거리며 손찌 검 따위를 계속해서 퍼부을 텐데 모조리 꾹 참아야 되는 거지. 무슨 일이 있어도 반항하거 나, 토를 달거나, 쥐어박는 내 손을 피하거나 해서는 안 돼. 국경을 넘어서 헤어질 때까지만. 무슨 말인지 알겠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이상스런 조건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조건의 내용을 들으면서 보리 스는 이 자가 자신을 속이려는 것은 아니라는 기분이 들었다. 본래 누군가를 등쳐먹으려는 자는 처음에 친절하고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체 하는데 이 자는 정 반대이지 않은가.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리하여 계약은 성립되었다. "일루 와! 어딜 기웃거리는 거야, 거지새끼처럼! 좀 빨리빨리 못 와? 왜 그리 굼떠? 빌빌대 는 꼬락서니하고는, 죽도 못 얻어 처먹었냐?" "야, 이 빌어먹을 곰새끼야! 여기 서 있으랬더니 어딜 지 멋대로 싸돌아 다니는 거야! 덜떨 어지기는 곰보다도 못해서는... 저, 저, 누가 또 그러고 오래? 엉?" "로브 앞쪽 단정히 하랬지! 나이 그만큼이나 처먹은 놈이 아직 옷도 제대로 입을줄 모르 냐? 만사가 그 따위니까 장로님이 하루가 멀다 하고 매타작을 놓는 거야, 알어? 그래놓고 찔찔 짜기는 병신같이......." "이제 그만하면 이불에 오줌은 그만 쌀 때가 됐잖아! 아침마다 내가 여관 주인한테 이렇게 빌어야 되겠어? 세 살 먹은 애새끼보다 못한게, 눈 치뜨지 마! 아래로 뜨랬지!" "언제 글 좀 읽게 될래? 여기 뭐라고 쓰여 있는지 아직도 몰라? 내가 여기 올 때마다 너한 테 크게 읽어서 가르쳐줬잖아, 이 등신아! 로, 젠, 버, 그, 관, 문, 로젠버그 관문이라고 쓰여 있잖아!" ......조건은 생각보다 횔씬 어려운 것 같았다. 로젠버그 관문까지 채 가기도 전에 평생토록 들어온 것보다도 더 많은 욕지거리를 듣고 수 십 번은 더 쥐어 박혔다. 그렇게 많은 종류의 욕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러나 그런 욕이 단순히 귀에 들려오는 것과 자신을 향해 말해지는 것 사이에는 도저히 간격을 좁힐 수 없을 정도로 크나큰 차이가 있었다. 몇 번인가 자신의 처지를 잊어버릴 정도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꾹꾹 눌러 참았 다. 어떤 때는 억울해서 손까지 떨릴 정도였으나 힘껏 자신을 억제했다. 그런 자신을 보며 보리스는 스스로가 보기보다 자존심이 강하다는 사실까지 부수적으로 발견하고 있었다. 어 린 나이에 지금껏 별별 꼴을 다 당해온 터에 욕 몇 마디 듣는 것쯤 어떠랴 했는데, 생각과 는 천지 차이인 인내심의 시험이라는 것을 깨달은 셈이었다. 그래도 욕하는 것은 어떻게 참겠는데 사실이 아닌 것까지 마치 사실인 양 혀까지 차며 말 하는 것은 심해도 너무 심했다. 관문 근처까지 올 즈음이 되자 비슷한 거리에서 함께 걸어 오던 사람들이 모두들 보리스를 흘끔거리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멀정하게 생겼는데 사실은 몇 번씩 가르쳐 준 글자도 못 읽는 바보에 아직까지 소변도 가릴 줄 모르는 지진아라고. 뺨이 귀밑까지 붉어지다 못해 앞서 가는 사내처럼 후드로 얼굴이라도 가리고 싶은 심정이 었다. 이 정체 모를 남자가 그에게도 거무튀튀한 로브 한 장을 내주긴 했다. 그러나 불행히 도 거기에 후드는 달려 있지 않아서 꼼짝없이 사람들에게 얼간이의 얼굴을 선전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이리 와, 멍청아! 여기 얌전히 서!" 관문 앞에서 남자는 특이한 통행증을 내밀었다. 그것은 전 대륙을 순례하며 봉사하는 것으 로 일생을 보내는 프라바(Prabha) 순례인의 표지인 은으로 만든 납작한 판이었다. 거기에는 단지 드래곤(Dragon)한 마리의 모습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을 뿐 통행증에 필수적인 유효기 간이나 승인 사증을 비롯한 어떤 것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문 수비대 는 그 표지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보리스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 남자가 말했다. "아직 견습이어서 표지가 없네. 한 바퀴 죽 돌아야 자격이 생기지." 그러자 수비대는 보리스도 무사히 통과시켰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간단했지만 보리스는 아직도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그 남자는 이 제 곧 보리스와 헤어지게 된다 싶으니까 아예 한시도 입을 쉬려 하지 않았다. 뺨을 꼬집기 도 하고 어깨를 툭툭 치기도하는 데다 심지어 발로 걷어차기까지 하며 가능한 모욕은 다 주 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묵묵히 참아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을 터였다. 일단 자신을 속이 지 않고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게 해준 이상 어떤 모욕이라도 다 견뎌 줄 참이었다. 인고의 시간도 이제 끝났다. "마지막으로 무릎 꿇고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해라. 그러고 나면 이제 다 끝나고 헤어지는 거지." 아직껏 아버지와 또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무릎 꿇어 본 일이 없는 그였지만 말없이 무릎 을 꿇고 안전한 여행이 되라고 이야기했다. 순간 순간 울컥 하고 치밀어 모두 다 때려치우 고 싶은 마음이 들곤 했지만 결국 이렇게 참아낸 자신이 대견하게까지 여겨졌다. 긴 고갯길 로 이루어진 관문을 모두 통과하는 데는 몇 시간이 걸렸을 뿐이지만, 아직껏 시간이 이렇게 느리게 느껴진 일은 다시 없었다. "자, 끝났다. 생각보다 힘들지?" 끝났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편해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갑자기 방금 전까지 억 울했던 것을 모조리 갚고 싶은 마음이 와락 드는 것을 느끼며 스스로도 놀랐다. "분통 터지는 상황에서 분연히 화를 내고 행동을 개시하는 것은 물론 용기다. 그렇지만 견 뎌야 할 때 끝까지 자신을 억누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 것이지. 안 그래?" 비웃는 건지 충고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불편해도 계약은 계약이라고 생각하며 간신히 자신을 억제했다. 그런 보리스의 표정을 보며 상대는 희한하게도 유쾌한 목소리로 웃었다. "내가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게 있는데 말야." "뭐죠."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굳어져 있었다. 계약이었을 뿐이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도 잘 되지 않았다. "렘므 왕국을 여행할 생각이라면 나도 길이 같은데 말야, 우리 동행이 될까?" "......." 뻔뻔스러움도 정도가 지나치다 싶었다. 이만큼 했으면 췄지 또 뭘 얼마나....... 그러나 갑자기 다른 생각이 들었다. 저 자는 단지 동행하자고 했을 뿐이지 지금과 같은 관 계를 계속 유지하자고 하지는 않았다. 한 차례의 계약이 끝났으니 당연히 방금 전의 규칙이 적용될 리 없었다. 그는 단지 동등한 상태로 동행하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조금도 내키지 않았다. "싫습니다." "감정에 횝쓸려 득과 실을 구별하지 못해서야 쓰나. 내 곁에 있으면 배울 것도 많을 테고, 또 검술도 가르쳐 줄 텐데 그래도 싫어? 또한 안전하기도 할거란 말이다. 난 한 번 마음먹 고 약속한 일은 어기는 법이 없는 사람이니까. 혼자 여행하기에 너 자신이 너무 어리다고는 생각 하지 않나?" 희한할 정도로 친절한 권유였지만 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 말이 다 옳지만 그래도 싫은 건 어쩔 수 없군요. 그만 가겠습니다. 덧붙이자면 다시 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고요." "정 그러면 좋을 대로 하셔. 나중에 후회는 말고." 둘은 헤어졌다. 보리스는 일부러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려는 것처럼 지금껏 끌고 오던 말 에 올라타 배를 걷어찼다. 처음에는 아노마라드와 다를 것도 없는 자연이다 싶었다. 그러나 밤이 되는 순간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차갑고 강한 바람이 나무조차 몇 그루 없는 휑뎅그렁한 들판을 가득히 메웠다. 바람 소리 가 가장 확연히 낯설었다. 트라바체스의 들판에 불던 바람과는 얼굴에 닿는 느낌부터가 달 랐다. 아노마라드에서 불던 훈풍과는 비교조차 무용했다. 그리고 그 바람만큼 거친 환경이 처음부터 그를 맞았다. "꼬마야, 가진 것 다 내놓고 조용히 떠나거라."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랐다. 산적? 또는 강도질을 하고 싶어진 상인들? 그도 아니면 이 일대의 깡패들? 어느 쪽이든 십여 명 가량 되는 무리는 태연한 모습으로 다가와 보리스 를 둘러쌌다. 그 표정이며 태도가 그렇게 여유 있을 수가 없었다. "말 들었지? 말에서 얼른 내려. 말도 내놓고 짐도 다 내놓고 몸만 가지고 얼른 꺼지는 거 야. 이해가 가냐?" "그 자식 느리네! 빨리빨리 하라고!" 눈을 돌려 주위를 훑었다. 열한 명. 모두 말을 탄 어른이고 검을 비롯한 무기들을 뽑아든 채 기세 등등하게 포위하고 있었다. 적이 모조리 실력자들은 아니라 해도 십여 명을 당할 재주가 한 사람에게 있기란 힘든 노릇이었다. 더구나 저들은 어른, 자신은 아직 아이. 처음 부터 대결이 성립되지 않았다. 불안감과 함께 답답함과 좌절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한때 채찍으로 그를 핍박했던 저 가짜 깡패들 앞에서도 무릎꿇지 않았던 자신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만용에 불과했다는 사실 도 잘 알고 있었다. "얼른 말 엉덩이를 한 대 때리는 거야. 그러면 말이 이쪽으로 오지. 그러면 넌 조용히 걸어 서 떠나면 되는 거라고." 마음속에서 한 번 대항해 볼까 하는 마음이 머리를 쳐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때 문득 무례한 순례자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충고로 느끼지도 않았는데 정말로 갑자기 그 말이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그리고 그 소리야말로 자신의 인생관에 딱 맞는 이야기라 는 생각이 들었다. 참아야 할 때 참지 못해서 죽어버릴 수는 없는 거니까. "말하고 짐을 드리면 정말 보내주시는 거지요?" "두말하면 잔소리야. 얼른 얼른 해." 보리스는 말에서 내렸다. 오랫동안 타고 다니던 말에 꽤 정이 들었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짐이라고 해 봤자 란지에가 준 도시락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단도와 금화 조금, 약간의 여 행용 물품들과 식량이 전부였다. 그리 아깝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말 엉덩이를 툭 쳤다. 말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앞으로 걸어갔고, 사내들 가운데 한 명이 고 삐를 잡았다. 보리스는 됫걸음질로 물러나서 등 뒤로 둘러싼 두 사내의 말 사이로 걸어갔다. 사내들은 말에 달린 주머니를 끌러서 풀어 보고 있었다. 든 것이 별로 없자 실망하는 눈치 가 역력했다. 막 포위를 빠져나가려는 참인데 갑자기 한 사람이 말했다. "저 녀석, 검도 괜찮아 보이는데?" 다른 사람이 말을 받았다. "저 허름한 거? 저게 뭐 좋다고......." "아냐, 잘 봐. 칼집만 허름하지 손잡이는 그럴듯하게 생겼다고. 제대로 만든 검 같은데." 저들끼리 몇 마디 수군대는 소리를 들으며 보리스의 가슴이 심하게 두방망이질 쳤다. 걸음 을 서두르려 하는데 한 사람이 소리 높여 외쳤다. "야, 꼬마야! 허리에 검도 풀어서 내려놓고 가거라. 살펴보고 쓸만한 거면 이 어른이 좀 쓰 셔야 되겠다." 보리스는 걸음을 멈추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돌아서지도 않았 고, 검을 풀지도 않았다. 형은 분명 윈터러보다 목숨을 소중히 여기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치욕까지 견디 면서 구차하게 살아남으려 해야 하는가? 아직껏 자신의 실력도 한 번 시험해 보지 못한 채 아끼는 것을 함부로 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아니다, 할수 있는 일이 있다면 끝까지 해보아야 하는 거다. 보리스는 돌아섰다. 손이 부르르 떨렸지만 그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이마가 땅에 닿도록 고개를 숙였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이 검만은... 돌아가신 아버지께 받은 마지막 유품이라 생명처럼 아끼 고 있습니다. 별달리 좋은 것도 아니니 그냥 가져가도록 허락해 주세요. 베풀어주신 은혜 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 한 남자가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그냥 보내 줄까? 별로 좋은 것도 아니라는데." 다른 사람도 말했다. "아버지 유품을 뺏기란 좀 꺼림칙하군 그래. 그냥 보내자고. 아직 어린앤데 저렇게까지 말 하잖냔 말야." "으음......." 약간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몸을 숙여서 얻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얻을 참이었다. 치욕을 견딜 수 있는 자만이 더 큰 것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이 생생하게 가슴속을 채웠다. 자신은 약자였다. 약자의 생존방식을 몸에 익혀야만 했다. 그러나 의견은 반반으로 갈렸다. 다른 남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소리야! 안 좋은 거라고 헛소리하는 놈들이 갖고 있는 게 본래 제일 좋은 거라는 거 몰라? 저렇게까지 하는 걸 보니 더욱 수상쩍은데, 난 꼭 뺏어서 봐야겠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야. 겨우 말 한 필에 동전 몇 푼 뺏고서 알짜를 놓치면 안 되지. 꼬마 야, 허튼 수작 하지 말고 그 검 풀어놓고 조용히 꺼져라." "들었지? 얼른 시키는 대로 하라고!" "......." 보리스는 쉽게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낮게 해서 호소했다. "그냥 보내 주세요, 제발.... 이 검을 잃어버린다면 저 세상에 계신 아버지와 다른 가족들을 만날 면목이 없습니다. 집안 전체에서 겨우 저 한 사람 남았는데... 이 검은 제 가족이나 마 찬가집니다. 지금껏 이것 때문에 죽지 못하고 살아남았습니다. 다른 것이라면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훌륭한 어르신들......." 몇 마디 하다 보니 이제는 애원하는 것뿐 아니라 상대방을 높여 말하며 자기 자존심을 꺾 는 것까지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의 자신이었다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조그만 녀석이 횡설수설 말도 많네. 으씨, 얼른 가랄 때 가. 알아들어?" "안 돼! 어딜 맘대로 가려고! 검 안 내놓고 가면 목을 따버린다!" "너무 그러지 말라고. 우리가 언제부터 어린애 놀리며 사는 사람들이 었다고......." "놀리긴 개뿔! 이 짓 한두 해 해먹는 거냐! 저런 놈들이 가진 건 분명히 좋은 거야. 어디, 내 손으로 직접 뺏어서 봐야겠다!" 한 남자가 성큼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더니 검을 빼어들고 보리스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 다. 일이 그쯤 되자 말리던 사람들도 더 이상 별 소리를 하지 않게 되었다. "일어나! 얼른!" 보리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른손을 윈터러의 손잡이에 얹은 채, 그리고 차가운 눈동 자로 상대방을 쏘아보았다. 그 남자는 지금까지 애원하던 녀석의 갑자기 달라진 표정을 보 고 어이가 없어진 모양이었다. "이 자식이 갑자기 미쳤나, 뭘 째려봐! 흰눈 뜨고 보면 네 주제에 뭘 어쩔 건데!" "......." 보리스는 대답 없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보리스는 이미 포위망 에서 약간 벗어나 있었다. 적이 검을 불쑥 코앞으로 들이댔다. "이 자식이! 한 번 해보겠다는 거야, 뭐야!" "꼬마야, 후회하게 될 걸?" 보리스의 손은 윈터러의 손잡이를 힘있게 움켜쥐었다. 다른 손이 칼집을 잡았다. 이제 더 물러설 곳은 없고, 오직 싸움만이 있을 뿐이었다. "누가 후회하게 되나, 두고 봅시다." 스르릉. 드디어 낡은 칼집에서 순백의 칼날이 뽑혀 모든 사람의 눈앞에 내밀어졌다. 새파랗게 맑은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비칠 정도로 맑은 검신, 싸늘한 냉기가 파랗게 뿜어 나오는 아름다운 검이 소년의 손에 있었다. 사내들은 눈이 휘둥그래지다 못해 말문이 막혔다. 한 명이 화가 치미는 듯 소리쳤다. "저것 봐! 저런 걸 두고 지금 그냥 가자고 한 거냐!" "빌어먹을!" 보리스는 칼집을 허리띠에서 빼어 내던졌다. 그리고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나면서 검을 세워 닥쳐을 상대를 노렸다. 가장 먼저 소리친 남자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고, 다른 자는 말의 배를 걷어찼다. 말발굽으로 뭉개 버릴 셈인 듯했다. 싸아악! 사내의 검이 윈터러의 칼날과 닿아 미끄러졌다. 손잡이까지 가기 전에 힘껏 밀치고 다시 물러났다가 곧장 앞으로 찔렀다. 두 손으로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쥔 채 공격과 방어를 겸했 다. 윈터러를 진짜 바스타드답게 사용하는 것이다. 트팍! 턱! 보리스의 팔 힘은 이제 생각보다 많이 강해져 있었다. 과거 죽기 직전의 예프넨만큼은 아 니라 해도 보통 성인 남자의 검 정도는 쉽사리 밀칠 수 있었다. 윈터러의 날이 얼음 칼날처 럼 사내의 목으로 쇄도했다. 목을 꿰뚫지 못하는 대신 턱을 찢었다. 진한 핏방울이 허공을 갈랐다. "오냐, 네놈이 죽을 자리 잘 만났다!" 이번에는 두 개의 검이 한꺼번에 양쪽에서 찔러져 들어왔다. 아래쪽으로 들어오는 검을 단 련된 발로 걷어차 넘기면서 동시에 다른 쪽을 검으로 받았다 살짝 당겼다가 와락 밀쳤다. 그리고 곧장 가로로 휘둘러 베었다. "크윽!" 이번에는 제대로 된 상처였다. 사내는 리벳(rivet)이 박힌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윈터 러의 날은 리벳까지 모조리 베어버렸다. 그러면서 동시에 배에 깊숙이 그어진 상처를 입혔 다. 말을 타고 달려들려 했던 남자는 동료들이 보리스와 뒤엉킨 까닭에 제대로 하려던 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보리스는 일부러 사내들이 모여선 쪽으로 빠르게 뛰어들었다. 그리고 검을 사방으로 돌리며 자신을 방어했다. 결국 말에 올랐던 사내들도 다 내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생각보다 적들의 검 실력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저 자식! 죽여버려!" "감히 우리를 속이려 해? 오늘 여기가 네놈 무덤이 될 거다!" 기회를 보아 말에 올라타야 했다. 어느 말이든 좋았다. 잘 훈련된 말들은 주인들이 내렸는 데도 멀리 가지 않고 약간 떨어진 곳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를 잡아타지 않는 한 이 싸움은 승산이 없었다. "하압!" 이제는 놀랄 만큼 가볍게 자신의 손에서 윈터러가 휘둘러지고 있었다. 비록 완벽한 검술은 아니라 해도, 이제 형이 했던 것처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 검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짐이 아니라 무기였다. 자신의 분신인 양, 바로 자신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검이었다. 마치 몸의 일부가 된 것처럼....... 두 사내가 목덜미와 어깻죽지를 찔렀지만, 대신 보리스도 허벅지와 등에 날카롭게 찔린 상 처를 입었다. 사내들은 뜻밖으로 제대로 정련된 검술을 만나 약간 당황하고 있었으나 곧 자 신감을 되찾고 서서히 포위망을 짜기 시작했다. 열한 명 대 한 명이었다. 진다면 말이 되지 않았다. 츠르르... 번뜩! 저런 것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소년의 검은 미치도록 훌륭했다. 저런 것이 소년의 손에 들려 있기에 망정이지 만일 제대로 된 검사의 손에 들려 있었더라면 정말 오합지졸 열한 명 쯤은 순식간에 쓰러뜨리고도 남을 검이었다. 솔직하게 저 검 하나만의 가치만 해도 몇 백 명 군대에 맞먹을 정도였다. 검 하나로 그 정도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드물 고 가치있는 물건이란 뜻이었다. 그런 것을 어린애한테서 빼앗지 못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보리스는 처음부터 너무 긴장하여 싸운 나머지 점차 몸 곳곳이 지치는 것을 느꼈다. 그러 나 그에 비례해서 정신은 더욱 맑고 또렷해졌다. 늘 가지고 다니기만 했던 윈터러에서는 쓸 수록 더한 가치가 느껴졌다. 단도로 처음 사람을 죽였을 때 느꼈던 충격과 죄악감조차 이 검의 중독적인 아름다움 앞에서는 빛이 바랠 듯했다. 검이란 살해를 위해 태어난 물건이고, 그 목적을 위해 완벽한 것이 검의 아름다움이 아닌 가. 그것을 두려워하고 피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지금껏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생각이 머릿속을 속속들이 채웠다. 자신이 왜 이런 생각에 사 로잡히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검과 일체가 되어 그것을 휘두를수록, 더 나은 솜씨로 검을 능숙하게 쓰면 쓸수록, 그는 어딘가 모르는 곳에서 솟아나는 힘을 느끼고 그것 을 온전히 가지고 싶어졌다. 거기에 익숙해지고 싶어졌다. 더 강하게! 윈터러의 날이 드디어 한 사람의 가슴을 뚫었다. 피가 허공으로 솟구치며 샘솟았다. 그러나 그 모습은 오히려 그를 흥분시켰다. 전처럼 사람을 죽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멍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잘 해냈을 뿐이다, 그런 생각과 함께 그는 오히려 빨라진 몸놀 림으로 뒤쪽으로 다가드는 검을 낮게 후려쳤다. 반원을 그리며 날아간 칼날이 사내의 발목 을 잘라 버렸다. 아주 깔끔하게, 단숨에 잘라져 버렸다. 보리스로서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큭... 크아아아아악!" 비참한 비명 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윈터러는 처음 그가 사용하던 때보다 더욱 날카롭게 잘 들고 있었다. 방금 간단한 동작으로 사람의 발목을 잘라버린 것은 도저히 보통 검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기이한 광채가 검날 전체를 감싸고 서서히 번져나가고 있었다. "한꺼번에 달려들어!" 닿기만 하면 잘려나가는 검 앞에서 그들도 이제 무작정 덤벼들 수는 없게 되었다. 사내 세 사람이 말을 잡아탔다. 그리고 사납게 몰아 바로 앞까지 달려왔다. 피하면서 보리스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말 한 마리의 다리가 잘라지는 것이 보였다. 이상하게도 상쾌한 기분이 몸을 감쌌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개자식아, 받아라!" 한 사람이 날린 짧은 단도가 정확하게 보리스의 등에 푹 꽂혔다. 정확히 그 순간부터였다. 보리스는 갑자기 온 몸에 오한이 일며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하는 생각에 쉽싸였다. 등뒤에 꽂힌 단도... 그것은 자신도 과거 한 번 했던 일이 아닌가? 고조되었던 감정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손에 힘이 빠졌다. 상처는 극심했지만 그것보다 정상으로 돌아온 그의 정신이 갑작스레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심한 충격을 가져다 주었 다. 비틀거리는 그를 한 사내가 재빨리 움켜잡았다. 다른 사내는 검을 든 손을 비틀었다. 윈 터러가 손에서 떨어졌다. 한 사람이 검을 도로 줍지 못하도록 발로 짓밟았다. 또 다른 사내가 등에 박힌 단도를 뽑 았다. 대신 주먹이 날아와 턱을 강타했다. "이 자식아, 넌 오늘 죽었다! 되지 못한 목을 쳐서 산채 앞에 내걸어놓을 테다!" 발목이 잘린 남자가 바닥에 쓰러진 채로 욕설을 퍼부었다. 다른 사내들이 보리스의 두 팔 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그때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다. 슈욱! 등뒤에서 벌어진 일이라 처음에 보리스는 왜 사내들이 자신을 놓아버리고 황급히 물러나는 지도 몰랐다 맥이 다 빠져 있었던 까닭에 저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때 한 사 내의 발 밑에 깔린 윈터러가 보였다. 그 사내도 그걸 주우려 했고, 보리스도 그것을 잡으려 했다. 손은 거의 동시에 닿았다. "저리 꺼져!" 손잡이 부분에서 둘의 손이 맞닿자 사내가 버럭 소리지르며 보리스의 손을 밀쳤다. 그러나 보리스는 필사적으로 이번에는 검날을 움켜잡았다. 당장 손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 나 놓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 자식이!" 그때였다. 머리 위에서 검은 옷자락이 획 스쳐 지나가고 동시에 윈터러의 손잡이를 쥐었던 사내가 비명을 울렸다. 한 사람이 그 너머에 가뿐하게 내려서고 있었다. 고개를 드니 긴 장 검이 사내의 등에 꽂혀 배까지 관통된 것이 보였다. 로브의 남자는 어려운 기색 없이 검을 도로 뽑았고 다시 한 번 폭풍 같은 기세로 적들을 향해 달려들어갔다. 보리스는 윈터러를 집었다. 오른손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피가 철철 흘렀다. 착각일지도 모 르지만 윈터러는 방금 전투를 벌이는 동안 이상스러을 정도로 매우 날카로워져 잠깐 손대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상처를 입혔다. 좀더 쥐고 있었다면 정말 손가락이 잘려나갔을 지도 몰 랐다. 윈터러를 쥔 보리스는 바로 몸을 돌렸다. 비스듬하게 들어오는 수 많은 사선들의 엇갈림... 무한히 빠르게 번뜩이는 검. 그의 눈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들어왔다. 장검 하나를 든 로브의 사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적들을 해치우고 있었다. 그의 모든 동작 은 눈으로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빨랐고, 또한 유연하고 정확했다. 검은 윈터러와 비슷한 크기의 바스타드였으며 그 자 역시 두 손으로 검을 썼다. 한 사내의 목을 긋고 동시에 다른 자의 뺨을 푹 찔렀다. 몸을 수그렸다가 뒤로 접근하는 자를 냅다 올려 찼다. 한 발로 딛고 몸을 솟구치더니 말을 탄 사내의 팔을 베어 버렸다. 동 작 하나 하나가 날래고 완벽했으며, 그 손에 쥐어진 검 역시 한껏 힘을 머금은 듯 보였다. 순식간에 사내들 가운데 절반이 쓰러지고 나머지는 황급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낯선 남자는 달아나는 자를 뒤쫓지는 않았다. 흡사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허겁지겁 말을 집어타고 달아나는 자들을 감상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고 있었 다. 군데군데 뿌려진 핏자국, 그리고 두 사람만이 남았다. 보리스의 말은 달아나지 않고 근처에서 어슬렁대고 있다가 주인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보 리스는 말을 돌보기보다는 눈을 크게 뜬 채 우뚝 서서 상대방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당신......." 그랬다. 첫 번째로 저 익숙한 로브와 후드는 그날 오전에 로젠버그 관문을 넘자마자 헤어 진 그 불쾌한 사내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보리스가 입을 떼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헛것을 본 듯 지금 자신이 본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 검 술, 그에게 너무도 익숙한 동작과 몸놀림들. 어떻게? 어떨게 이 순간, 이 자리에, 이런 식으로? 남자는 몸을 돌리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그 검, 칼집에 어서 꽂아라. 더 늦기 전에." 저도 모르게 그 말에 따르고 있었다. 허름한 칼집은 저만치 말발굽에 약간 짓밟혔던 흔적 과 함께 떨어져 있었다. 칼집을 들어 윈터러를 꽂는 순간, 그는 자신의 가슴속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던 무언가가 갑자기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윽고 윈터러의 흰 광채는 완전 히 가려졌다. "첫 번째 가르침은 잘통하더냐?" 보리스는 허리띠를 주울 생각도 하지 않고 상대방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등의 통증과 함께 여러 가지 혼돈이 휘몰아쳤다. 상대방이 다시 말하고 있었다. "생명의 은인에게 보답도 해야지?" "당신은......." 들판의 풀이 날렸다. 북부의 차가운 바람이 맴도는 황량한 벌판에도 여름이 오고 있었다. 어디에서든 언젠가는, 꼭 또다시 오고 말 여름이었다. "별로 멋은 없지만......." 상대방의 목소리가 서서히 바뀌었다. 약간 고음의 짜증스런 목소리였는데 점차 가라앉으며 부드러운 저음으로 변했다. 단순히 목소리를 약간 다르게 낸 정도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목 소리가 한 사람에게서 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변화는 마법이 아닌가 느껴질 정도로 기이한 경험이었다. 그 이상한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보리스도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당장 알아보았 을 것이다. 후드가 젖혀졌다. 높이 올려 묶은 갈색 머리카락이 허리에 닿을 듯 늘어뜨려진 모습을 잊 을 수 있었을 리 없었다. "이런 식의 만남도 괜찮겠지?" 울컥, 긴장이 풀리며 가슴 속에서 단단히 매어져 있던 끈 하나가 툭 풀어졌다. 그 사람이었 다. 그가 실망시켰던 사람, 그 실망한 얼굴을 감추지도 않은 채 그의 곁을 떠났던 사람, 바 로 그였다.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4. 호수 속 금빛 그림자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깨끗한 시트와 소박하지만 정결하게 청소된 방, 약간 열린 창문, 그리고 누군가 떠다 놓은 세숫물이 있었다. 자신은 침대 위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다가 갑자기 등을 찌르는 지독 한 통증에 도로 쓰러질 뻔했다. 그제야 등에 입었던 상처 생각이 났다. 어제 약을 발랐지만 아직 나으려면 한참은 걸릴 듯한 상처였다. 애써 조심조심 일어나 침대 아래로 내려왔지만 세수를 하기 위해 팔을 들어올리는 것조차 도 거의 초인적인 노력을 필요로 했다. 그냥 얼굴을 물 속에 잠시 넣었다가 꺼내면 안될까 궁리했지만 대야가 야트막해서 그것조차도 용이하지 않았다. 꾹 참고 왼쪽 손만 움직여 얼 굴을 닦았다. 상처는 오른쪽 어깻죽지 근처였다. 죽는 것도 아닌데 이까짓 상처쯤 견디지 못하는 것은 우습다고 생각하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 방문 밖으로 걸어나가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든지 몰랐다. 그래서 아래층으 로 내려왔을 때 보리스는 벌써 그 날의 할 일을 다 해버린 사람처럼 맥이 빠져 있었다. "여 어." 아아... 아는 사람의 얼굴. 자신이 그를 좋아했던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조금쯤 좋아하고 있었을 것이고, 불 명확한 교감도 몇 번인가 느꼈었다. 그러나 꼭 다시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을 정도는 아니었 다. 그런데도 몹시 반가웠다. 오랫동안 홀로 떠돈 결과 그는 안면 있는 사람의 얼굴에 몹시 굶 주려 있었다. "와서 아침 들어. 아무도 안 떠먹여 주니까." 아픈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웃음이 나려 했다. 입가는 약간 움직였지만 가슴에 무리가 가는 순간, 등의 상처가 심하게 쑤셨다. 웃는 것은 고사하고 말조차 크게 할수 없을 지경이었다. 애써 자리에 앉고 보니 자기 앞에는 곡식죽과 빵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런 주제에 상대 방 앞에는 삶은 닭고기가 한 사발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넌 상처 때문에 고기는 안 돼. 거기다 빵이나 찍어 먹으라고." 보리스는 불만 없이 주어진 음식을 들었다. 비교적 질 좋은 음식을 먹으며 자라왔고, 한때 벨노어 성에서 최고급 요리들도 수없이 먹어 본 그였지만 이상하게도 음식에 대한 욕심은 별로 없었다. 입맛도 상당히 관대했다. 미적지근한 죽과 빵을 금방 다 먹어치우고 물러앉는 그를 보며 상대방이 말했다. "먹는 것이 단순한 자는 뭐든 할 수 있다, 라고 했던가." 보리스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월넛 선생님......." 갑자기 그 자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이젠 그 이름이 아니지. 사는 땅이 바뀌었잖아? 그 이름은 잊어버려. 이젠 이실더다. 이실 더 산. 딱 렘므 사람 같은 이름이잖아?" 이제 이실더가 된 월넛 선생은 전보다 더 건장해진 듯 보였다. 머리도 더 길어졌다. 뺨 곳 곳에 비죽비죽 튀어나온 수염은 그대로였지만 얼굴은 좀더 그을었고, 그리고....... "이마가 넓어지신 것 같네요." 무심코 튀어나온 솔직한 감상이었는데 이실더 산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무슨 소리야! 전에도 이거 그대로였다고 설마 내가 대머리가 되어 가고 있다고 말할 셈은 아니겠지?" 그런 의도는 없었지만 이런 데서는 눈치 없다 싶을 정도로 솔직한 보리스는 툭 던지듯 대 꾸했다. "그 추측도 나름대로 신빙성이 있겠는데요." "그런 근거 없는 추측이 네 건강에 미칠 영향을 생각해 보고서 말해라." "추측이 아니라 사실일 경우 선생님 본인의 건강에 미칠 영향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듯 한...." 전에도 이렇게 티격태격했었나 싶었다. 그러나 이실더의 식사가 다 끝나도록 둘은 비슷한 쓸데없는 주제를 가지고 주거니 받거니 소리를 질렀다가 웃었다가 했다. 보리스는 크게 웃 을 수가 없는 처지여서 몇 번인가 힘겨운 신음 소리를 내는 걸로 웃음을 대신했다. 이번에는 보리스가 소리칠 차례였다. "무슨 소리예요! 로즈니스와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요!" "왜 아무 사이가 아니야? 한때 '의남매' 였던 사이잖아!" "그런 얘기가 아니고......." 조금 더 있자 다시 이실더가 소리를 지르게 되었다. "말도 안 돼! 내가 널 가르치기 싫어서 도망쳤다면 왜 지금 와서 또다시 만나고 있겠냐? 그때 나는 부득이하게 내가 참석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 때문에......." "저런, 결혼을 앞두고 계셨군요?" "그, 그런... 컥! 켁!" 이실더는 먹던 닭고기가 목에 걸렸는지 한참 동안 불쌍할 정도로 기침을 했다. 보리스는 웃지 않고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안 하던 농담까지 하고 있는 자신이 생각 외로 마음에 들었다. 반가운 심정을 어떤 식으로든 표현하고 싶었다. 겨우겨우 식사가 끝났다. 둘은 서로 눈을 흘겼지만 화난 상태와는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보리스가 힘겹게 다시 2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뒤따라오던 이실더는 키득키득 웃고 있기까지 했다. 둘은 보리스의 방으로 들어와 마주앉았다. 이실더는 로브를 벗었는데 로브의 안감은 전과 같은 나뭇잎 색깔이라 보리스는 새삼스러운 감회에 잠겼다. "넌 영 사랑스럽지 않은 놈이다." 이실더는 중얼거리듯 첫 마디를 떼더니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그도 뭔가 할 말을 궁리할 필요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보리스가 먼저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저를 찾아내신 거죠?" 금방 대답이 날아왔다. "널 찾아내다니, 내가 널 찾아다닐 만큼 할 일 없는 사람으로 보이냐?" "할 일이 있으신지 없으신지는 모르겠지만......." 보리스는 빙그레 웃었다. 이렇게 쉽게 웃을 수도 있는 자신이라는 것을 전에는 잘 모르고 있었다. "제가 뭔가 필요한 순간을 잘도 알아내셔서 두 번이나 나타나 주셨군요. 고맙습니다." 분명 비꼬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대사에서는 진심말고도 분명 장난스러운 어조가 느껴졌다. 이실더는 한참 보리스를 노려보고 있다가 결국 할 말이 없었는지 턱을 치켜들고 고개를 내두르며 말했다. "우연이야, 우연이라고." "고양이까지 보내주시고......." "우연이랬잖아!" 푸후훗.... 보리스는 웃기만 하면 등의 상처가 아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만히 속 으로 웃는 것으로 대신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런데 로젠버그 관문에서는 왜 그렇게 저를 욕하셨던 건가요? 그렇게 저한테 쌓인 원한 이 많으셨나요?" 낯선 사람한테 욕을 얻어먹고 있을 때는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몰랐는데 그 사람이 월넛, 아니 이실더라는 것을 알고 나니 흥분되기는커녕 오히려 유쾌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와 마 지막으로 헤어진 후 씁쓸했던 감정이 그 욕지거리로 인해 다 날아가 버린 것처럼 속시원했 다. 마치 오래 묵혀뒀던 셈이 저도 모르게 끝나버린 느낌이랄까. "넌 욕 들어도 싸. 앞으로도 계속해서 욕해줄 거다." 보리스는 이번엔 등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아, 그러면 역시 이제부터 저와 함께 다니기로 하신 거군요? 푸하하핫... 아얏!" 여유가 생긴 것일까. 예전에 벨노어 성에서 '월넛'과 함께 지내던 자신과 이제 다시 '이실더' 와 마주친 자신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때 그를 대하던 경계심 섞인 감정과 이제 더 숨길 것이 없는 자신의 태도 사이에는 어떻게 메워졌는지 모를 정도로 큰 격차가 있었 다. 믿어도 좋을 것 같은사람...을 만난 것이 얼마 만인 걸까. "내가 그렇게 친절한 사람인 줄 알았냐?" 이실더는 불만스런 얼굴로 툭 한 마디 내던지더니 허공에 팔베개를 하며 허리를 한바탕 젖 혀 폈다. 보리스 뿐만 아니라 월넛과 이실더 사이에도 변화는 있었다. 전엔 벨노어 백작의 가짜 양 아들을 가르치던 스승이었지만 이젠 속한 데 없이 떠도는 소년을 만난 방랑 검사였다. 휠씬 자신의 본질에 가까운 태도였으며, 여유마저 넘쳤다. 그때의 그가 좌충우돌하는 사람이었다 면 이제의 그는 당연한듯 자유분방했다. "어제 하다가 만 얘기를 해야지. 생명의 은인에게 무엇으로 보답할 테냐? 난 셈이 철저한 사람이라 받아 챙길 것은 하나도 안 놓치거든. 난 이제 네 선생이 아니라고. 널 구해줘야만 하는 의무가 없단 말이야." 그러면 로젠버그 관문에서 그렇게 헤어진 주제에 몰래 뒤따라오고, 지켜보다가 딱 필요한 순간 나타나 도움을 준 이유는 뭐란 말이죠? 보리스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떻게 보답하면 되겠습니까?" "음, 글쎄." 그런 것도 생각해 놓지 않은 주제에 다짜고짜 물었던 모양이었다. 잠시 후 이실더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말했다. "보답 대신 그 검은 어때? 다시 내놓는 거 말야." 보리스는 방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지한 얼굴이 되어서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합니다." "방금 전에 그 검이 어떻게 변하는지 좀 느꼈을 텐데?" "예?" 그게 자신의 착각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래도 네가 계속 지니고 다녀도 될 것 같단 말이냐? 그 검은 살인을 당연하게 즐기는 것 같던데. 그 검에 익숙해진다면 몸을 지키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너 자신은 지금과 다른 사람 이 되어버려. 피에 무감각해지다 못해, 그걸 즐기게까지 될 지도 모르지. 아니지, 어쩌면 그 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닐 지도 몰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이 깃들인 물건이란 것은 인간 에게 좋은 결과보다 나쁜 결과를 더 자주 가져오지. 또는 처음부터 파멸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도 있단 말이야." 보리스는 뜻밖의 이야기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잠시 후 생각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럴 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능성이 얼마나 높은가 하는 문제를 떠나서, 정말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제가 일생 지키기로 마음먹은 검입니다. 쉽게 깰 수 있는 결심은 결코 아니고요. 검은 어차피 검일 뿐, 인간이 자신을 위해 사용하기 마련 아닐까요? 아무리 악한 의지가 이 검을 사로잡고 있다고 해도, 제가 굳게 마음먹기만 한다면 인간의 의지가 설마 검의 의지를 이기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이실더는 잠시 감탄한 건지 비웃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보리스를 건너다보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좋은 생각이긴 한데 말이지, 그리고 나도 그렇게 되길 바라긴 하는데 말이야. 과연 잘 될 지 모르겠다. 아니, 잘 될 수 있는지 어디 적당한 사람한테 물어가서 알아봐야 되는 건지도 몰라. 넌 그 검에 대해 뭘 알고 있지? 네 집안에서는 처음에 어떻게 그 검을 손에 넣은 거 지?" 보리스는 스노우가드의 이야기를 해야 할지 약간 망설였다. 그러나 오래 망설이지는 않았 다. "한 짝이 되는 갑옷이 있습니다. 스노우가드라는 이름이죠. 합쳐서 윈터바텀 킷이라고 부릅 니다. 하지만 지금 제 손에는 없습니다.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 버렸으니까요. 그것 외에 제가 아는 것은 없습니다. 제 조상이 어디서 그 검을 찾아내어 손에 넣게 되었는 지에 대해서도, 그리고 무슨 힘을 가졌는가에 대한 것도." 이실더는 스노우가드의 행방을 캐물으려 하지는 않았다. 다만 오히려 약간 안심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검은 힘이 약화되어 있다는 말이겠군. 짝이 되는 물건이 영영 나타나 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의 입가가 올라가며 미소가 떠올랐다. 벨노어 성의 연습장에서 한밤중에 대결을 보이다 가 문득 서로에게 보냈던 그 미소처럼 친근한 웃음이었다. "좋다. 과연 인간이 이기나 검이 이기나 보기로 할까, 시도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라는 말은 나도 못하겠군. 그래, 하지만 일단은 그 검을 함부로 휘두르지 말아라. 부득이하게 뽑게 되 더라도 그걸로 인해 네 마음 속에 뭔가 다른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지 주의 깊게 살피도록 하라고. 만일에라도 무언가 불안한 변화가 있거든 즉시 내게 말해라. 가능한 상황이라면 검 을 어서 칼집에 꽂는 것이 가장 좋겠지." 보리스는 가슴 속에서 서서히 치밀어 오르는 즐거움을 흡족하게 맛 보고 있었다. 자신이 이만큼이나 기뻐하게 되는지, 정말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건지 궁금했지만 그보 다 원초적인 기쁨이 앞섰다. 이제 혼자가 아니게 될 지도 모른다는 것, 다시 누군가와 서로 의지할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럼 역시 저하고 함께 있어 주실 거군요?" 이실더는 손가락을 하나 빼들었다. "내가 로젠버그 관문 앞에서 이미 너한테 한 번 동행을 제의한 적이 있다는 거 기억하냐? 그때 아주 냉정하게 거절하던 게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데? 게다가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그러지 않았냐?" 이 양반이 애들처럼 응석을 부리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보리스는 피식 웃었다. "사과 드릴게요." "아냐, 아냐. 이건 사과로 끝날 문제가 아냐. 처음 온 기회를 놓친 사람에게 똑같은 기회가 다시 오는 법은 없어. 더구나 넌 내게 지금 빛을 졌지? 좋아, 어제 한 계약을 다시 적용해 볼까?" 보리스는 눈을 둥그렇게 뜨며 반문했다. "설마 다시 그때처럼 욕을 하시겠다고요?" 사실 이실더는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빙그레 웃더니 더 재미있 는 것이 없나 생각하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 걸 매일 하라면 나도 힘들어서 못할 노릇이고... 그래, 이번엔 백작가 도련님도 아니 고 동등한 동료도 아니라, 진짜 제자답게 내 시중을 들어라. 난 널 보호해 주고, 넌 내 심부 름을 하는 거지. 어떠냐?" 보리스는 자신도 놀랄 정도로 시원스럽게 대꾸했다. "그러죠." "만만찮게 부려먹을 텐데 버틸 수 있겠어?" 보리스는 작게 웃더니 말했다. "선생님은 본래 만만찮았어요." 그 말을 듣더니 이실더가 불쑥 말했다. "날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마라. 이젠 그런 관계가 아니니까. 왠지 껄끄러워," "그럼 뭐라고 부르죠?" "이름을 불러, 그러면 되잖아." "그럴 순 없어요. 그건 제 쪽에서 오히려 불편하군요." 이실더는 잠시 고민하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한참이나 궁리하더니 그는 결국 어쩔 수 없 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당신, 이라고 부르면 되잖아. 별 대안도 없고." 그 말은 어쩐지 란지에가 말한 일 있던 '당신'을 연상시켰다. 별로 친근감 있는 호칭은 아 닌데도 그 때문인지 상대방을 한결 가깝게 부르는 말처럼 느껴졌다. 둘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즈음 보리스는 자신이 왜 백작 의 성을 나와 이런 곳에서 떠돌고 있는지에 대해 이실더가 전혀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 다. 마치 모든 사정을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성을 떠날 때는 분명히 몰랐을 텐데? 이실더의 두 손이 갑자기 불쑥 내밀어지더니 보리스의 양 뺨을 감싸쥐었다. 약간 거친 손 짓이긴 했지만 몇 번 쓰다듬으며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보리스는 문득 느꼈다. 그의 얼굴 을 이렇게 감싸주었던 옛 사람, 그 사람에게서 느쪘던 기분을 지금 다시 느끼고 있다고. 똑 같지 않더라도 분명히 그러고 있다고. 이실더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아, 한심한 자식. 정말이지 눈앞에 없으니 불안해서 못 견디겠더라니까. 오죽이나 한심 하면. 정말이지, 정말이지." "란지에가... 그랬단 말이지." 벨노어 성에서 마지막으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서 막 이야기가 끝나고 있었다. 키 큰 선 생과 그보다는 작은 제자, 둘은 렘므 땅의 돌투성이 평야에서 말 한 마리를 끌며 걷고 있었 다. 함께 여행하게 된 후로도 이미 어느 정도 시일이 흘렀다. 저녁무렵이 되어가고 있는 하늘 이 몹시도 높았다. 북부를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인 여름이 와 있었다. "아직도 그 애의 정체를 잘 모르겠어요. 아니, 그 애가 과거를 거짓말로 꾸며서 말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을 잘 모르겠다고요. 도저히 제 또래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른 같지도 않은 것이... 친해질 수도 미워할 수도 없달까요. 불쌍한 것 같지만 동정의 대상은 아니고, 강한 것 같지만 분명 약점도 있었죠. 그러니까......." "다시 만난다 해도 친구가 되기는 어려을 것 같다, 이거지?" 이실더의 말은 정곡이었다. 보리스는 란지에와 친구가 될 수 없었고, 그 후로도 될 수 없을 거란 사실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내 생각엔 말이야." 이실더는 묶어서 늘어뜨린 머리채를 버릇처럼 만지작거리면서 보리스의 긴 머리를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그 머리도 조만간 묶어줘야지, 하고 마음먹으면서 말했다. "란지에는 상당히 정치적인 녀석이다. 미워한다고, 마음 속에서 죽여버렸다고 하긴 했지만 결국 어느 정도는 자기 아버지를 닮아 있는 거야. 백작의 성안에서 무게 중심을 잃지 않은 채 잘 해내는 줄타기라든가, 이후에 닥칠 일을 대비해서 미리 백작의 뒤를 캐내고 하는 것 들, 당연히 보통의 아이로서는 생각도 하지 못할 일들이다. 물론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이겠 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야. 그 애를 이루고 있는 정신을 내가 분명하게 느꼈던 때가 있는 데, 바로 란즈미의 말문을 열게 해 줬을 때 보인 모습이지. 기억해? 내 도움이 진심이라면 평생 잊지 않고 보답하겠지만, 만일 일이 잘못된다면 사생결단도 불사하겠다는 듯한 태도." 보리스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치적인 사람이란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 겁니까?" 아직 정치에 대한 감각이 없는 보리스로서는 '정치적 인간'이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 해할 수가 없었다. 보리스의 관심사는 여전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차원의 애증에 국한되어 있었다. "은혜와 원한의 경계가 확실해서 우유부단하게 망설이지 않는 것,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 어서 주위의 유동하는 상황에 정확히 대처할 대책을 미리 찾아 놓는 것, 불확실한 행운이나 호의를 믿지 않고 하나하나의 행동에 미래를 위한 포석을 깔아 놓는 것. 한 가지 행동을 해 도 그 행동이 연못에 던진 돌처럼 일으킬 파문들을 모두 계산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이실더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보리스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너 같은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의 성격이 지닌 장점과 단점을 짧은 시간 내에 파악하 는 것." 보리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른다고 이미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라면 저를 도와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당시 제가 그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이라고는 전혀 없었고, 앞으로 대단 한 위치에 오를 것 같지도 않은 저인데요." "그 애가 널 도와준 것은... 모호한 표현이겠지만, 특별한 일이면서 동시에 근본적인 일이었 어. 좀더 연결해 보자면 위험을 무릅쓰고 널 돕는 그런 심정은 그 애가 란즈미라는 여동생 을 소중하게 돌보는 것과 상통하고 있는데, 그 녀석의 정치성 한 가운데에 든 핵이 약한 인 간에 대한 연민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랄까. 또한 그 안에는 더 먼 미래에 대한 예감 같 은 것도 깔려 있었을 거야. 네가 어떤 사람으로 자랄 것인지 미리 짐작해 보고 아주 긴 수 를 던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민에 기초해 있다 해도 정치적인 인간은 강하지. 그 애 가 좀 더 자라서 그 빼어난 정치력을 자신이 원하는 공화국을 위해 정말로 발휘하게 된다 면......." 이실더의 목소리는 약간 낮아지면서 동시에 진지해졌다. "신왕국 아노마라드는 어쩌면 쓸만한 적을 하나 갖게 될 지도 모른단 말이야." 보리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등의 절반 가량을 덮을 정도로 자란 흑청빛 머릿결 아래 황색 가죽띠로 연결된 곳, 이실더 로부터 얻은 검은 망토 안쪽에는 윈터러의 낡은 칼집이 있었다. 오른손이 돌려져 검의 손잡 이를 만지작거렸다. 많은 것을 지키려 애썼지만 많은 것을 잃었고, 그리고 이제 자신에게 남 은 것이었다. 그것을 남기도록 도와준 사람이 란지에였다. 언젠가는 반드시 갚겠다고 말했었 다. 둘은 우정으로 연결된 사이가 아닌데 어떤 식으로 그것을 갚을 수 있게 될까. 렘므가 북방의 추운 땅이라는 것을 알려 주려는 것처럼 서늘한 푸른 빛 하늘이 머리 위를 뒤덮고 있었다. 밤이 가까워오는 검푸른 하늘 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어느새 걸음을 멈추고 있는 이실더를 보았다. "당신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지요?" 이실더는 입 모양으로만 미소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발을 들어 돌멩이 하나를 멀리 차보냈 다. "인간은 땅에서 와서 땅으로 돌아가는 거잖아." "그런 것 말고요. 당신에게 가족이나 고향은 없나요?" 이실더는 검을 뽑지 않은 빈손인 채로 정면을 향해 검을 겨냥했다가 당기는 듯한 몸짓을 했다. 그의 옆얼굴이 말했다. "달이지." 획, 존재하지 않는 검이 허공을 가르며 바람 소리를 냈다. "마음의 고향."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으면 오래된 이야기가 떠오르는 법이었다. 보리스는 같은 불을 보며 그의 형이 피웠던, 그리고 스스로는 아무리 해도 피울 수 없었던 그 불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불이 꺼지고, 그는 차가운 세상으로 들어왔었다. "달을 옛 어머니로 받들며 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많지 않은 동류를 모아 부락을 이루었고, 제사장을 뽑아 옛 재앙을 속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그 삶 속에는 검과 노래 가 같이 들어 있어서 서로 혼연 일체로 융합되어 있는 거야. 용서와 복수가, 온화함과 잔인 함이 동일시되는 한 잊혀진 문명이다. 이 검을 들어." 이실더가 단검 하나를 뽑더니 갑자기 바닥에 푹 내리꽂았다. "한 생명을 죽임과 동시에 해방시켜 줄 수도 있는 것처럼." 푸른 안개가 그들의 주위를 감돌았다. 모닥불조차 약간 젖어 있는 듯했다. 숲 너머에는 넓 지 않은 호수가 있었다. 렘므의 땅이 차듯 호수의 물도 뺏골까지 시리게 할 정도로 찼다. 그 들은 그 물에 세수를 하고 손을 씻고 돌아와 잠들기 전에 몇 마디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그 문명이 당신의 고향인가요? 그곳은 어디 있지요?" "가보고 싶으냐?" 고개를 돌려 보리스를 보는 이실더의 눈은 그리 친절해 보이지 않았다. 이중적인 감정이 깃들인 눈이었다. 어떤 곳인지 보여주고 싶으면서 또한 그런 곳으로 가는 것을 막고 싶기도 한 듯, 불안정한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당신이 태어나 자란 곳이라면 궁금하게 느껴지는데요. 당 신은 훌륭한 검술뿐만 아니라 뭔가 이상한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전 아마도 배을 수 없겠지만......." "배우고 싶은 거냐?" "......." 이실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보리스를 향해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둘은 호숫가로 갔다. 모닥불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호숫가는 그림자조차 느낄 수 없을 정 도로 어두웠다. 그곳에 둘은 나란히 섰다. 이실더는 말없이 품안으로 손을 넣더니 뭔가를 꽉 쥐었다. "네가 무엇을 보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또는 무엇을 보고 싶은 지도 모르겠지만......." 이실더가 품에서 손을 꺼냈다. 보리스의 눈에도 오랫동안 익숙했던 단도가 거기에 있었다. 칼날 표면에 초승달 모양의 구멍이 뚫리고, 섬뜩한 글귀가 새겨진 그 단도. 이제 이실더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검은 호숫물이 찰랑거리며 밀려와 바지자락을 적셨다. 보리스는 선 채로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도가 서서히 물 속으로 들어갔다. 거기서부터 황금빛 물결이 만들어져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마치 열쇠를 꽂아 빛의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연 것 같았다. 금빛 물결은 이윽고 수면 위에 서 거대한 거울처럼 둥그렇게 자리잡았다. 처음에는 단지 빛뿐이었다. 그러나 곧 거기에 어 떤 영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건......." 그것은 이실더가 쓰고 있는 마법이 아니었다. 전적으로 그 달빛 무늬의 단도가 가지고 있 는 놀라운 힘이었다. 이실더가 나지막이 말했다. "마음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는 힘이랄까, 그런 것을 가진 물건이지, 네가 보고 싶은 것을 이 단도, 루네트(Lunette)는 이미 알고 있을 거다. 그게 무얼까." 금빛으로 반들거리던 수면 위에서 서서히 어떤 영상의 윤곽이 잡혀 갔다. 가장 먼저 나타 난 것은 높은 산의 봉우리였다 비탈져 솟은 산 아래 이곳처럼 호수가 고였고, 여름 풀벌레 들이 노래하는 풀꽃의 골짜기가 긴 자락을 펼쳤다. 산 고원에 핀 야생화의 천국, 그 아래로 나무 틈새며 바위 너머에 숨겨진 얕은 지붕들이 내려다보였다. 영상은 물처럼 흘러갔다. 높직한 돌이 일곱 개, 빙 둘러 세워진 풀밭이 눈에 들어왔다. 중 심에 커다란 베개처럼 생긴 네모진 돌이 놓여 있고, 둘러선 돌의 표면엔 알 수 없는 문양들 이 새겨져 있었다. 어쩌면 보리스가 알지 못하는 옛 마법의 룬이었을 것이다. 그곳은 평화로운 도피처 같았을까.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행복할 듯했을까. 대 륙에서는 사라진 신비로운 마법이 그곳에서만 살아 있고, 모두에게 잊혀진 고대의 이야기들 이 여전히 속삭여 말해 지고 있는 그런 곳이었을까. 이실더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힘들이듯 느리게 말했다. "바다 건너, 아주 머나먼 길을 가야 하는 곳이지. 길을 모르는 사람은 우연하게라도 찾아들 수 없을 정도로 험난한 해로 너머, 주가(呪歌)의 도움 없이는 결코 살아서 건너기 힘든 바다 의 끝에 있는 땅이다. 대륙의 사람들은 그 존재를 모르고, 그들 역시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 아. 옛 '재앙' 이후로 단절된 역사를 가지고 홀로살아온 사람들이 그곳에 있지." "하지만 당신은 거기에서 왔잖아요?" "응, 그리고 다시 돌아가기도 하겠지." 잠시 후 그는 다시 말했다. "그리 아름답기만 한 곳은 아냐." 그러나 보리스는 그 영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조용한 곳일 것 같은데요." 금빛 태피스트리처럼 영상이 부드럽게 나부꼈다.... 소리까지는 들려오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정적이고 고요한 곳인 듯 느껴지는 장소였다. 산을 떠나, 마을을 떠나, 높 직한 절벽 언저리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집이 비춰질 때까지 보리스는 알 수 없는 평화로 움에 취해 물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 무언가 말할 듯했던 이실더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언뜻 스쳐지나간 듯했던 그림 자, 잠시 후 보리스는 그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한 여인이었다. 넓은 벨트가 달린 아마빛 긴치마 위로 하얀 허리가 설핏 드러나는 헐렁한 스웨터, 거친 털 로 짜 만든 듯한 녹색 웃옷 차림이었다. 여자는 집 옆에 놓인 항아리 뚜껑을 열어 안을 들 여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뚜껑을 닫더니 천천히 걸어 풀밭으로 내려왔다. 짧게 쳐 올린 금빛 머리칼이 달빛에 젖어 반짝거렸다. 매끈한 곡선으로 드러난 귀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아직껏 두 귀가 드러날 정도로 그렇게 짧은 머리를 한 여자를 본 일이 없었 다. 비탈진 풀밭에 무릎을 세우고 앉은 그녀는 한쪽 팔을 올려 턱을 괴고 어두운 숲을 바라보 았다. 흰 발목이 치맛자락 아래로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오다 멎었다. 발목에는 자그마한 보 석의 원석들을 얇은 금줄로 이어 만든 발찌가 걸려 있었다. 소녀일까, 또는 처녀일까, 열 여섯에서 스물 하나까지도 잡아볼 수 있을 듯한 모호한 매력 을 가진 여자였다. 날카로운 창날처럼 갸름한 옆얼굴에 담긴 싸늘한 무표정 속에는 무언가 모를 상실감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낯선 아름다움이었다. 같은 인간이 아닌 듯, 멀어서 더욱 동경하게 되는 미(美)였다. 문득 귓가에 밤새가 종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물론 영상 안의 세계가 아니라 호숫가를 날아다니는 진짜 새의 소리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순간 여자의 곁으로 희고 우 아한 새 한 마리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내민 손가락 끝에 앉더니 무어라 말하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여자가 입술을 열 어 들리지 않는 무언가를 말하는 동안 보리스는 그녀의 손을 보았다. 그것은 로즈니스처럼 곱게 자란 소녀가 지닐 법한 작고 고운 손이 아니었다. 단단한 마디 사이로 파르스름한 핏 줄마저 돋아난 강인한 손이었다. 이실더가 나지막이 속삭이듯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잘 지내고 있구나, 이솔렛." <3권에서 계속> 부록 룬의 아이들의 세계에 대해서 <대륙의 국가들> *아노마라드(Anomarad) 왕국 대륙 서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강력한 나라. 비교적 높지 않은 산세를 지닌 파노자레 산 맥(Panossare Mts.)이 좌우로 가로지르는 남부는 대륙에서 가장 살기 좋은 땅으로 알려져 있다. 한때 공화국이었던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현재는 왕정으로 돌아섰다. 동쪽 변경에 트 레비조(Ttebeezo), 잔(Jhan), 티아(Tia)의 세 식민령을 거느리고 있다. 수도는 켈티카(Keltica). 로젠버그 호수의 지류인 블루엣 강(Bluette River)이 도시를 통과 하고 있다. *오를란느(Orlanne) 공국 아노마라드 북부에 위치한 북방성 기후의 작은 나라. 스스로 아노마라드 국왕의 신하로서 공작임을 자칭하며 예를 갖추고 있으나 내정은 독립되어 있다. 수도는 오를리(Orlie), 역시 로젠버그 호수의 지류와 연결되어 있다. *렘므(Lemme) 왕국 대륙 동북쪽으로 뻗어나간 님 반도(Nym Peninsula)와 그 주위의 도서 지방을 중심으로 성 장한 해양국가. 전형적인 북방 해양성 기후를 가지고 있으며 아노마라드에 대적할 만한 국 력을 가진 유일한 나라이다. 님 반도 북부와 엘베 섬(Elbe Island) 일대에는 캄자크 족을 비 롯한 몇 개 부족의 고대 야만인들이 살고 있는데 몇 번의 내전을 겪은 결과 이들은 현재 토 벌되기보다는 오히려 렘므 인과 특이한 공생 관계를 이루며 해안 국경을 지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수도인 엘티보(Eltivo)는 로젠버그 호수에서 뻗어 나온 트레네 강(Trene River) 하류에 자 리잡고 있다. *트라바체스(Travaches) 공화국 대륙 남쪽 중앙의 조개(Seashell) 반도를 대부분 차지하고 있으나 동쪽의 카투나 산맥 (Katuna Mountains, 남 드라켄즈 산맥의 일부)으로 해안이 둘러싸여 해운업은 발달하지 못 했다. 산맥의 영향으로 남부임에도 불구하고 스텝형 초원이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공화정을 선포한 이래 귀족이라는 명칭은 쓰지 않지만 대신 영주, 의원, 선제후, 통령이라 는 새로운 계급이 존재하고 있다 가문간의 항쟁이라는 특이한 전통과 파벌전쟁으로 얼룩진 정치적 분란 탓에 내정이 몹시 어지럽다. 수도는 론(Ren). *산스루리아(Sansruria) 왕국 아무도 접근하려 하지 않는 대륙 중앙의 '필멸의 땅(Mortal Land)' 너머 동쪽 해안에 자리 잡은 나라. 지리적인 요인 탓에 외국과의 왕래가 거의 없어서 특이한 신정일치의 왕정이 발 달했다. 왕족은 모두 산스루 신을 모시는 신관 또는 무녀이며, 전통적으로 여왕만이 즉위한 다. 렘므 왕국과는 어느 정도의 교류가 있으나 구체적인 모습은 아직까지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수도는 그들이 신봉하는 신의 이름을 딴 산스루(Sansru). *루그두넨스 연방(Rugdurnense Union) 대륙 동남부의 메리골드 반도(Marigold Peninsula)와 사파이어 만(Sapphire Gulf), 아쿠아 코럴 제도(Aqua Coral Islands)에 흩어져 있는 도시국가들의 연방체. 처음에는 루그란과 두르넨사의 두 도시국가가 합치며 루그두넨스라는 이름이 되었지만 오 랜 변천을 겪은 결과 현재는 다섯 국가로 이루어진 연방이 되었다. 그러나 연방이 성립될 당시 작은 도시에 불과했던 나라들이 점차 영토형 국가로 성장함에 따라 연방의 결속력은 매우 느슨해졌다. 연방의 존립이 불투명해질 정도로 심한 대립이 있었던 십여 년 전에 연방 수도가 폐지되었으며 현재는 각 소속국가의 수도(즉, 최초의 도시국가가 생겨났던 곳)에서 돌아가며 1년씩 수도 역할을 맡고 있다. -레코르다블(Lekordable) : 메리골드 반도의 북쪽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라. 연방 내에서 가 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지만 북쪽으로 '필멸의 땅' 과 접경하고 있어 국토의 절반 가량이 쓸모 없는 황무지와 사막에 불과하다. 유목민적 생활 전통 때문에 용병이라는 직업이 기형적일 정도로 발달하여 대륙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용병단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용병단들 가운데 일부는 정권조차 좌지우지할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떨치고 있다. 내부에는 연원을 알 수 없는 소수민족들이 그들만의 종 교과 풍습을 유지하며 일부 분포해 있으나 대부분은 탄압의 대상이다. -두르렌사(Durnensa) : 메리골드 반도와 조개 반도 사이에 위치한 사파이어 만을 끼고 서쪽 으로 발달한 상업 국가. 본래 상인 연합체에서 출발한 국가로 두르넨사 상인들은 현재도 대 륙 전체에 각자가 개척한 점조직 상업망을 공유하며 서로 협력하고 있다. 연방 내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이기도 하다. 남부 해적들의 근원지인 조개 반도를 끼고 있어서 일찍이 해적들 과 손을 잡고 서로 공생하는 관계가 되었다. 이들 해적들은 일반적으로 국적이 없는 자유민 이면서도 종종 두르넨사의 의뢰를 받고 타 국가의 선박들을 공격하곤 하는데, 항의가 들어 와도 해적에게 국적이 없는 것을 내세워 교묘하게 회피하기 때문에 책임지지 않는 해적 국 가로 악명이 높다. -팔슈(Palshu) : 사파이어 만의 동쪽에 위치한 작은 나라. 두르넨사의 방계 왕가가 세운 곳 으로 현재도 두르넨사를 주인의 나라로 섬기고 있다. 매년 두르텐사에 공물을 바치는 대신 두르넨사에 속한 해적들의 비호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루그란(Rugran) : 메리골드 반도의 허리에 위치한 작은 나라. 연방 내 국가들 가운데 가장 먼저 출현한 나라로 오랜 역사와 예술적 전통을 지니고 있어 연방의 문화적인 종주국 역할 을 하고 있다. 15세에서 19세까지 모든 젊은이가 출전하여 기량을 겨룰 수 있는 전 대륙적 검술 대회인 '실버스컬(Silver Skull)'이 처음 시작된 곳이기도 하며 루그란 국왕은 현재도 연방 차원에서도 많은 행사를 주관한다. 그러나 국력은 점차 쇠퇴 일로에 있어서 조만간 활 로를 모색하지 않으면 두르넨사나 하이아칸 등에 밀려 2류 국가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있다. -하이아칸(Haiacan) : 메리골드 반도의 남쪽과 아쿠아 코럴 제도 전체를 영유하고 있는 나 라. 농사를 지을 평야는 많지 않으나 아름다운 산과 호수, 섬과 해안이 곳곳에 펼쳐져 있는 까닭에 여행객들이 많이 몰려들며, 특히 각 국 귀족들의 별장을 정책적으로 유치한 결과 크 게 융성하고 있다. 가장 늦게 연방에 합류했으나 현재는 두르넨사와 어깨를 겨룰 정도로 부 유한 나라가 되었다. 내부에서 연방 잔존 여부에 대해 가장 격렬하게 찬반양론이 제기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대륙의 지리> *필멸의 땅(Mortal Land) 대륙 중앙의 거대한 황무지. 렘므, 산스루리아, 레코르다블 등과 모두 국경이 닿아 있을 정 도로 영역이 광대하지만, 어느 나라도 감히 침범하여 영토를 넓히려 하지 않는 곳이다. 까마 득한 옛날에는 이곳에 고대의 마법 왕국 '가나폴리(Ganapoly)'가 세워져 있었다고 전해지며, 그 나라가 원인이 정확치 않은 마법 전쟁으로 멸망한 뒤 이 땅은 산 자를 품지 않는 곳, 즉 '필멸의 땅' 이 되었다. 언데드(Undead)나 새도우(Shadow)로 변한 고대의 인간들을 비롯하여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들이 아직까지도 이 땅에서 떠돌고 있으며 옛 가나폴리의 보물을 노리고 들어오는 자들 을 용서 없이 살해한다. 그 안에 감춰진 비밀들은 아직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또한 이 땅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매년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고 한다. *드라켄즈 산맥(Drakens Mts.) 대륙 중앙을 종단하는 거대한 산맥을 널리 톤칭하는 이름. 산맥의 규모가 워낙 크고 지형 도 다양해서 각 지방에서는 그들의 땅으로 뻗은 드라켄즈의 이름을 각각 다르게 부르고 있 을 정도이다. 님 반도 일대의 만년설 지역을 비롯하여 북부로 갈수록 높고 험준해지며(최대 해발 8천 미 터) 남부로 내려오면 비교적 낮고 완만해진다(평균 1천 미터). 이 산맥의 존재는 메마른 필 멸의 땅과 기름진 아노마라드의 국토를 갈라 주는 방파제와 같은 역할도 하고 있다. * 로젠버그 호수(Rosenberg Lake) 아노마라드 북쪽에 자리잡은 대륙 최대의 규모의 호수. 블루엣 강과 트레네 강을 비롯한 여러 강의 발원지이다. 안쪽에는 실버리프(Silver Leaf)와 폴른스타(Fallen Star)를 비롯한 몇 개의 큰 섬들이 존재하여 호수와 강을 이용한 수운의 요지를 이루고 있다. 이 호수 일대는 아노마라드와 오를란느, 렘므를 잇는 상권의 중심지이며 드라켄즈 산맥을 뚫고 이어지는 고갯길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로젠버그 관문은 아노마라드와 렘므를 잇는 가 장 큰 관문으로 알려져 있다. * 달의 섬(Moon Island) 대륙의 동북쪽 바다를 오랫동안 헤치고 가야만 닿을 수 있는 섬, 대륙에서는 이 섬의 존재 를 아는 사람조차 드물며, 렘므의 뱃사람들 사이에서 풍문으로 전해지는 전설의 섬일 뿐이 다. 그곳에 살고 있는 자들의 근원과 문화에 대한 것 역시 비밀에 싸여 있다. * 썰물섬(Ebb Isle) 달의 섬으로 가는 항로에 있는 조그마한 섬. 이 섬을 거치지 않고는 달의 섬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항해를 어떤 배도 견딜 수 없다. 역시 대륙에서는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섬이다. <기타> * 마법/검술 학원 네냐플(Nenyaffle) 남부 아노마라드의 파노자레 산맥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마법과 검술을 교육하는 학원. 본 래의 명칭은 네냐-야플리아(Nenya-Yaffleria)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네냐플이라고 부른 다. 오랜 역사와 전통에 걸맞게 높은 수준의 교육으로 유명하며, 대대로 대륙 최고로 일컬어지 는 마법사들이 학장직을 맡아 왔다. 마법, 연금술, 고문학, 수학, 음률, 검술 등에 걸쳐 아홉 명의 마스터들이 있으며 이들 모두는 각 분야에서 대단한 명성을 지닌 훌륭한 선생들이다. 전통적으로 평민과 귀족을 구별하지 않고 받아들이지만 입학시험이 몹시 까다로우며, 매 학기마다 승급 시험 낙제생들을 곧장 퇴학시켜 버릴 정도로 엄격한 학제로 인해 상당한 악 명도 얻고 있다. 제목 : 룬의 아이들-윈터러 지은이 : 전민희 펴낸이 : 서인석 출판사 : 제우미디어 출판년도 : 초판발행 2001년 10월 17일 초판 5쇄 인쇄 2002년 12월 8일 저자소개 : 전민희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역사와 문학, 신화 등을 비롯하여 최근 철학의 신조류까지 섭렵한 지식 광이며, 판타지 동화에서 남 미 환상문학에 이르는 다양한 판타지에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연구원을 거쳐 1999년 출간한 장편 판타지 소설 [세월의 돌]은 통신 연재사상 전설적인 400만회의 조회수와 더불어 전국 판타지 독자들의 입문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4대 통신망과 유명한 인터넷 커뮤니티들마 다 작가의 팬클럽이 빠짐없이 결성되어 있으며, 현재 (주)이삭커뮤니케이션에서 <아룬드 온라인>이라는 이름의 3D 온라인 게임으로 제작중이다. 또한 [세월의 돌]은 총 5부작으로 예정된 <아룬드 연대기>의 3부로서, 1부 격인 [태양의 탑]이 이듬해 출간되었다. (주)소프트맥스의 온라인 커뮤니티 서비스 <4leaf>의 제작에 참여, 배경세계와 스코리, 캐릭터 설정을 담당하였으며, 곧 출시될 온라인 게임 <테일즈 위버>에서 도 동일한 설정을 사용하게 된다. 현재 100만 명에 육박하는 회원들이 이용하고 있는 <4leaf>의 아바타 캐릭터들이 직접 등장하여 지금까지 감춰졌던 이야기들 을 펼치게 될 연작 소설 시리즈가 바로 [룬의 아이들]이며, 그 가운데 [룬의 아이 들-윈터러]는 첫 번째로 공개되는 매력적인 비밀이 될 것이다. 작가 전민희 홈페이지 www.fairytale.pe.kr [룬의 아이들-윈터러]홈페이지 www.jeumedia.com (주)소프트맥스의 <4leaf>홈페이지 www.4leaf.co.kr 차례 : 1장 Never Eyes 1. 겨울 땅의 헤베티카 2. 그 상처의 약 3. 썰물섬 4. 자신을 모르는 자 5. Will You Remember? 2장 Sever Nights 1. 월계수 자라던 나라 2. 적대자들 3. 산 위의 공주, 산 아래의 공주 4. 윈터바텀 킷 3장 Ever Rose 1. 마법의 계단 2. 두 가지의 음모 3. 그림자 도시와 죽은 자의 오벨리스크 1장 Never Eyes 1. 겨울 땅의 헤베티카 트라바체스의 가을은 빨랐다. 파랗게 타던 밤하늘이 8월 중순경부터 점차 서늘한 어둠으로 바뀌어갔다. 새벽녘, 아직까지도 여름의 열에 들뜬 청색 밤이 희뿌옇 게 흐려져 갈 무렵 트라바체스의 수도 곤의 어느 저택에서는 아기 하나가 태어났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아기의 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높은 사람의 명을 받고 한 달 전부터 다른 나라에 가 있었다. 아기가 태어날 때 가 다된 터라 맞추어 돌아오기로 한 것인데, 아기는 예상보다 두 달이나 일찍 태어나 버렸다. 그래서 아기 아버지가 돌아온 것은 아 기가 태어나고도 두 달이 흐른 뒤가 되었다. 그러나 아기는 저택에 남아 있던 사람들의 사랑과 축복을 듬뿍 받았다. 첫 아기였고, 모두가 기대하던 아이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 다. 저택의 주인을 모시는 사람들은 이 아기가 점차 자라나면서 아기 아버지의 얼어붙은 마음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해 주리라 기대 하고 있었다. 그것도 부디 여자아이이기를. 아기 어머니조차도 아직 그 마음의 벽을 미처 허물지 못한 남편이지만, 사랑스런 딸의 힘 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태어난 아기는 상냥한 눈동자를 가진 딸이었다. 아직 채 자라지도 않은 금빛 머리털과 꼭 같은 빛깔의 눈동자가 자못 어른이라도 된 듯 깊었고, 또한 고요했다. 그러나 달을 다 채 우지 못하고 태어나서인지 아기는 몸이 약했다. 아기 아버지가 섬기는 사람이 친히 보내 준 몇 명의 의사들과 치유술사들이 한 달 내 내 붙어 있는 가운데도 몇 번이나 어려운 고비를 넘겼고, 이제 곧 죽지 않을까 생각한 날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아기는 살아났다. 많은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하려는 것처럼, 매일 그칠 날이 없던 아기 어머니의 눈물도 멈추게 하고, 곧 돌아오마. 편지한 아기 아버지의 기대도 저버리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부터인가 언제 그랬냐는 듯 건강해져서 잘 먹고, 잘 자게 되 었다. 그 후로도 아기는 언제고 사람들이 바라는 일을 쉽사리 고개 돌려 저버리지 못하는 소녀로 자랐다. 여러 사람이 눈물 흘려 기 원한 기적을 몇 번이고 일으키면서, 애써 붙잡는 사람들을 뿌리치지 못해 세상을 버리지 못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깥 햇빛을 보던 날, 작은 새처럼 푹신한 아기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정원 안뜰에 나와 있었다. 워낙 얌전 해서 칭얼댈 줄도 모르는 아기였다. 세상 모든 평화를 다 기진 듯 편안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아기 어머니 앞으로 한 사람이 다가 왔다. 저택의 주인이 먼 곳에서 데려왔다는 말 없는 집사였다. 아직까지 저택의 다른 사람들과 어떤 구체적인 교류도 가지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비운 이 저택을 대신 책임질 정 도로 신임을 받고 있는 남자였다. 아기 어머니는 그를 약간 무서워했다. 남편이 없는 가운데서도 모든 일을 빈틈없이 처리해 주었지 만 마음을 터놓고 의론하기에는 지나치게 차갑고 음울한 사람이었다. 아기는 잠들어 있지 않았다. 이 평화를 느낄 줄 아는 것처럼 햇빛내리는 정원에 가만히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잠시 아기를 들여다 보던 집시는 이윽고 전에 없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기가 죽은 고모를 닮았군요.” 아기의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 아직껏 이름이 없던 작은 소녀의 이름은 예니가 되었다. 렘므의 12월은 혹독했다. 땅이 얼어 서리가 바삭바삭 밟히는 들판을 두 사람이 질러 걷고 있었다. 엇비슷해 보이는 검은 로브 차림이었지만 키가 작은 쪽이 입은 것은 후드 달린 망토에 가까웠다. 언뜻 아버지와 아들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좀더 친구 같았고, 그렇다고 동료로 보기 에는 나이 차이가 너무 났다. 그러나 둘의 걸음은 가벼웠고 이날의 추위도 별로 느끼지 못하는 거 같았다. 갑자기 나이든 남자 쪽이 소년을 내려다보더니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소년 쪽에서도 즉시 응답해 왔다. “당신도요.” 소년의 목소리도 추위에 언 듯 발음이 불명확했다. 둘은 서로를 향해 오기와 장난기가 뒤섞인 눈짓을 하더니 다시 기운차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하늘은 눈이라도 내릴 듯 누르스름하게 변했다. 서로의 얼굴까지 노랗게 보일 정도로 흐린 날이었다. 잠시 후 눈발이 가늘게 날리기 시작했다. 매운바람 탓에 두 뺨이 돌덩이처럼 단단하게 얼었다. 그런데도 둘은 걸음을 멈추기는커녕 한층 빨리 걷기 시작하고 있었다. 서리 깔린 마른 들판은 끝날 줄을 몰랐고, 낮의 빛은 빠르게 졌다. 노숙할 만한 날씨는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달리기 경주라도 하듯 속 도를 올리기만 하던 그들은 결국 본의 아니게 멈출 수밖에 없게 되고 말았다. “강이군.” 가까워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들은 먼저 멈추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이번에는 의도적으로 걸음을 늦추 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어붙은 강 앞에 도착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다시 키 큰 남자 쪽이 소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건너갈 테냐?" 소년은 미소 지으려 했지만 얼굴이 너무 얼어서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냥 짧게 대답했다. “당신이 간다면.” “흥, 고집 부리긴.” 얼음 위로 올랐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강폭은 대략 20미터가랑, 그리 넓은 강은 아니었지만 얼마나 깊을지는 짐작할 수 없 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얼음이 얼마나 단단히 얼었는지도. 그러나 최근 며칠간 몰아닥쳤던 혹한을 생각할 때 그리 쉽게 부서질 염려 는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얼음 밑으로 흐르는 물의 유속 때문이었단, 아니면 오전 내내 내리쬐었던 햇빛 때문이었든. “보리스!” 먼저 알아챈 것은 어른 쪽이었다. 앞질러 걷고 있던 소년이 강 중심부로 접어들자마자 얼음판 곳곳에서 얇은 금이 생기기 시작하다 가 급기야 찌익 소리를 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소년은 다행히 큰 얼음 조각위에 있었다. 그러나 그 여파로 주위의 얼음들이 죄다 부서져나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오히려 소리친 사람 쪽이 위험했다. 날카로운 금이 곧장 번져 그의 발밑으로 다가왔다. “선생님!”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는데도 위급한 상황이 되면 저절로 튀어나오는 이름이었다. 다가오려던 남지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다가 갑자기 몸을 솟구쳐 눈앞의 부서진 얼음 하나를 딛고 순식간에 소년이 선 얼음 위에 도달했다. 그러나 미처 소년의 손을 잡기도 전에, 그가 내려선 충격으로 또다시 얼음을 두 조각으로 갈라져 버렸다. 얼음 아래 빠르게 흐르는 물살이 얼음들을 계속 하류로 밀고 있었다. 그가 탄 얼음이 뒤쪽의 얼음에 부딪치는 순간, 소년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미끄러져 넘 어졌다. 무게가 한쪽으로 쏠리자 얼음이 기울어지며 물 속으로 밀려들어가고, 소년의 몸도 동시에 빠져버렸다. 닿는 순간 온 몸이 바싹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물이었다. “이런! 안되겠다!” 소년의 머리는 물에 잠겨 이미 보이지 않은 상태였다. 몸이 자칫 얼음 아래로 흘러갔다가는 얼어 죽기 전에 먼저 숨이 막혀 정신을 잃게 될 것이 뻔했다. 약하게 남은 햇빛 아래 시커먼 강물만이 번쩍거렸다. 다른 대안을 생각해 내지 못한 남자는 앞 뒤 가릴 것 없 이 물속으로 뛰어들려 했다. “푸후, 헙......” 소년의 머리가 순간적으로 잠시 떠올랐다. 이 아이가 수영을 할 줄 알던가? 더 판단할 겨를도 없이 남자는 얼음 위에 엎드린 채 손 을 내밀어 소년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힘껏 앞으로 끌어당겼다. “......” 잠깐 사이에 소년의 몸은 흡사 얼린 생선처럼 딱딱해져 있었다. 놀라운 힘으로 상반신을 잡아 올려 숨을 쉬게 하는 데는 성공했지 만 그런 자세로는 더 이상 끌어올릴 재간이 없었다. 자칫 힘을 주었다가는 그가 몸을 의지한 얼음도 부서져버릴 터였다. “전...괜찮...아요......” 그러나 순식간에 얼어버린 다리는 이미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눈앞에는 그를 붙잡은 사람의 안타까운 눈동자가 보였다. 어떻게든 팔을 움직여 얼음 덩어리를 부여잡아보려 해도 이미 제대로 말을 닫지 않는 몸이었다. 죽는 건가...... 소년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약한 불씨처럼 떠올라 깜빡일 무렵이었다. 어딘가에서 낯선 목소리가 외치는 것을 들은 것 같았다. 혹시 꿈이나, 착각은 아닐까? 그러나 그 목소리는 점차 명확해져서 물 밖의 남자나 물 속의 소년 모두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억양이 특이한 전형적인 렘므 사투리였다. “거기서 뭣들 하신가요? 이 추운 겨울에 목욕이라도 한다는 거다요?” 얼음에 엎드린 남자가 간신히 고개를 돌려보니 건너편 기슭에서 농민으로 보이는 세 명의 남자와 한 여자가 그들을 보며 쑥덕거리 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외친 사람은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런데 이 급박한 상황에 그들은 킬킬대며 웃어대고 있지 않은가! 소년을 잡고 있던 남자는 화가 나서 소리 질렀다. “사람이 죽어 가는데... 거기서 웃고만 있을 겁니까!” “죽긴 누가 죽는다고 그러요! 거, 그려, 당신도 접시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쪽요?” 갑자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되었다. 소년은 오그렸던 발을 내려 물 바닥을 더듬어 보았다. 다리에 느낌이 없어서 얼른 알 수는 없었지만, 물이 가슴 언저리까지 올라올 즈음 발을 더 내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래는 단단한 바닥이었다. “......” 함께 서 있던 여자가 웃고 있는 남자들을 향해 눈을 흘기더니 말했다. “영문 모르는 사람들을 놀리니 재밌나요? 노닥대는 동안 어린애는 동상에 걸려요!” 여자는 양털로 짠 두툼한 긴치마 차림에 2미터도 넘는 장대를 짚고서 있었는데 놀랍게도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다짜고짜 얼음 위 에 올라섰다. 그리고 장대를 물 바닥에 박아 넣으며 그 반동을 이용해 몸을 띄우는 방식으로 몇 번 만에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녀 가 얼음에 내려서는 것이 어찌나 가벼운지 아까 사내가 한 방식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멍해있는 동안 여자는 막대에 몸 을 의지한 채 아이에게 손을 내밀더니 말했다. “꽉 잡고, 바닥을 힘껏 차는 거라.” 순식간이었다. 여자가 셋, 하고 구령을 붙이더니 단숨에 소년을 물에서 글어내어 얼음 위에 내려놓아 주었다. 소년은 착지가 서툴 러서 금세 얼음이 다시 갈라졌다. 그러나 잠깐 사이에 또다시 들어올려졌다. 여자는 장대 하나만 가졌으면서도 흡사 튼튼하게 솟은 나무에 매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능숙한 솜씨로 소년을 강기슭까지 데려다 주었다. “아아...후......” 당장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온 몸이 젖어서 떨고 있는 소년을 본 여자는 옆에 있는 남자 한 명의 망토를 냉큼 빼앗아서 소년의 몸에 둘러 주었다. 망토를 빼앗긴 남자는 항의도 하지 않은 채 머쓱하게 웃을 뿐이었다. 할 일을 다 한 여자는 막대를 휘둘러 물기를 탁탁 털더니 아직까지도 얼음 위에 엎드린 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를 쳐다 보았다. 그러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한 마디 던졌다. “어른은 혼자 나와.” 농부들은 그들을 기꺼이 초대해 주었다. 최초의 멍청한 짓거리를 해서 그들을 즐겁게 한 것이 오히려 호감을 주게 된 것 같았다. 렘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외지 사람에게 배타적이었으나 어느 순간 기분이 나면 갑자기 한정 없이 친절해지는 기질의 소유자들이 었다. 실제로 그들은 잠자리와 저녁 식사는 물론이고 물에 빠진 소년을 위해 데운 목욕물까지 준비해 주는 놀라운 친절을 발휘했다. 물론 다음날 아침 이실더 산과 보리스 진네만은 그게 공짜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니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둘이 얼굴을 보고 고개를 돌리며 키득거리는 상황이 속출했다. 말하자면 구경거리를 제공한 대가였달 까. 물론 아이의 키 보다도 얕은 강에 빠져서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양 심각하게 군 걸 생각하면 본인들도 그리 좋은 기분만은 아니었다. “널 만난 후로 나까지 덩달아 자꾸 바보짓을 해대게 된 기분이 든단 말이야.” 보리스는 말없이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런 식으로 철없는 소리를 곧잘 지껄이는 것은 이실더의 버릇이자 매력이기도 했다. 둘은 대략 이틀 동안 누가 더 쉬지 않고 추위 속을 오래 걸을 수 있나 내기를 했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어쩌다 그런 걸 하게 된 건 지도 모를 노릇이었지만 어쨌든, 그 내기가 아니었더라면 얼어붙은 강을 그렇게 무식하게 건너려 하는 일 역시 없었을 터였다. 전날 밤새 쉬지 않고 걸었고, 다시 다음날 낮 내내 계속해서 불도 한 번 피우지 않고 걸어왔다. 물에 빠진 것은 고사하고 귀나 손 따위가 동상에 걸리지 않은 것만도 천행이었다. 님 반도 중에서도 북 드라켄즈 산맥 동쪽 지방에서 12월에 그런 일을 벌였다는 소릴 했다간 렘므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바보취급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보리스는 얇게 흩날리는 눈발을 보다가 작게 말했다. “어쨌든 제가 졌네요.” 갑자기 이실더는 발끈한 목소리고 외쳤다. “이 자식아, 내가 태어나 살던 곳은 사철 녹지 않는 눈이 골짜기마다 쌓인 곳이란 말이야! 난 그 눈 속에서 뒹굴며 자랐어. 웬만 한 추위는 내 적수가 못 된다고! 처음부터 성립될 수도 없는 내기였단 말이야.” 보리스는 약간 고개를 올리며 씩 웃었다. “그래도 다행히 무사했죠?” “......” 이실더가 흥분한 것은 어린 녀석의 고집을 꺾으려다가 어른인 자신조차 이성적이지 못한 짓을 했던 것에 대한 약간의 자학이었다. 비록 웃긴 짓거리가 되긴 했지만 보리스가 물에 빠졌던 당시는 정말 진심으로 그의 생명을 걱정하고 자신의 경솔함을 탓했던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른치고는 천진한 사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곧 이런 문제를 일으키고 만 괘씸한 꼬마 녀석을 어떻게 혼내 줄 방법이 없나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래 , 접시 물에서 헤엄친 소감은?” 장대를 든 여자와 다른 남자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부락 중앙에는 모닥불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주위에서 몇 명의 사내들이 양철 술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오전부터 술이라니, 역시 강추위를 자랑하는 고장의 풍습답다 싶었다. 이실더가 약간 불만스럽게 대꾸했다. “거, 멋대로 깨져버리는 접시 뚜껑이라니 이름 높은 렘므의 추위도 예전 같진 않군 그래.” “렘므 사람이라고 죽으란 법 있겠어. 버림받은 땅에도 은총이 좀 내리려나 보지.” 여자는 렘므 사투리가 아니라 이들에게 익숙한 남부 말씨로 단정하게 말하며 다가와 섰다. 두 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잠시 키 큰 상대방을 올려다보고 있더니 이윽고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당신, 어쩐지 처음 보는 사람 같지가 않은데?” “잘 봤어.” 대수롭잖게 대꾸해 놓고 더해지는 설명이 없었다. 보리스는 이실더가 말하는 방식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별로 개의치 않았지만 여 자는 계속해서 의심스런 눈초리로 상대를 구석구석 살펴봤다. 그러더니 다시 말했다. “몇 년 전인가, 여기 온 적이 있어. 분명. 당신 이름은 뭐야?” “이실더, 이실더 산.” “그런 이름은 아니었는데.” “그럼 우리 형이 왔었나?” 예의 태평스런 말투로 아무렇게나 말해버리는 걸 보며 보리스는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곧 이실더는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당신 이름도 말해야지.” 여자는 장대를 고쳐 쥐며 약간 위협하는 듯한 자세로 대꾸했다. “헤베티카.” “오, 성도 없는 여자치고는 우아한 이름이잖아?” 헤베티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는 긴장대로 맞은편 손바닥을 탁탁 때리면서 무표정하게 말했다. “지금 들은 내 이름이 당신에게 뭘 요구하고 있는지 모르나? 당신, 야만족 출신이야? 아니면 그쪽도 몇 대 맞지 않으면 얌전해지 지 않는 남자인가?” 처음 만난 사람에게 하는 말치고는 발끈할 정도로 거친데도 이실더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말했다. “야만족이라니, 그런 뜻밖의 말씀을, 당신 이복오빠가 들으면 섭섭해 하겠는걸.” 헤베티카의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눈썹을 찌푸린 채 그녀가 말했다. “그 사름을 알아? 지금 어디에 있지?” “이봐, 내가 그런 걸 알 리가 없잖나? 설마 날 정말로 야만족으로 보는 거야? 단지 소문을 들었을 뿐이라고, 게다가 당신을 보니 까 마침 딱 닮은 것 같기도 해서 말이야.” “닮다니, 지금 말 다 했어?” 헤베티카와 함께 온 남자가 히죽 웃더니 말했다. “헤베티카는 열 살 때부터 노 젓기로 잔뼈가 굵은 여자라. 할머니 때부터 뱃사공인 집안이다니. 장대 다루는 솜씨는 근방에서 당 할 자가 없다라. 아가씨라고 얕보았다간 큰코다치니 조심하게라.” “그래? 역시 노 젓기로는 당할 수 없겠는걸. 내가 진 걸로 하지. 음 훗훗.” 여자는 <누가 노 젓기 내기라도 하자고 그랬냐>는 듯 어이없는 표정으로 이실더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실더는 이어 계속 말했다. “당신도 성 하나 만들어서 그냥 붙여. 이름이 아깝네. 헤베티카 카잔니스는 어때? 헤베티카 알츠로즈도 나쁘지 않고, 헤베티카 솔 론도 괜찮은데?” “어이, 당신, 그렇게 자꾸 장난하다가는 정말로 한 대 맞는 다라!” 헤베티카는 유난히 하얀 얼굴에 길게 기른 흑갈색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이십대 후반의 여자였다. 옆의 남자가 짓궂게 경고하는 가운데 그녀는 장대를 고쳐 쥐었다가 다시 반대쪽 손으로 옮기고, 또다시 다른 손으로 꼬나 쥐었다가 이윽고 내렸다. 그리고 한쪽 입 술을 약간 말아 올리면서 말했다. “이제 기억이 났어. 4년 전쯤인가, 아마도. 생각보다 오래됐네. 데칸 야만족들이 쳐들어왔을 때 별로 도와주겠다는 말도 없이 멋 대로 끼여서 싸우고는 사라졌던 그 사람, 맞지? 그래서 우리 오빠를 알고 있는 거로군?” 이실더는 생각에 잠긴 체 하면서 말했다. “아, 그래. 우리 형이 아니라면 역시 나일 거라니까.” 헤베티카는 다시 손에 든 장대를 바닥에 탁탁 찍으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도와줘서 감사하다는 말이 그렇게나 듣기 싫어?” 이실더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이어 나온 대답을 들은 여자는 약간 얼굴색이 변했다. “새삼스럽게 예전의 은혜를 생각해내서 화제 삼는 사람은 흔히 2차의 용건을 가지고 있더라고.” 여자는 잠시 입술을 비죽거리며 장대만 매만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심한 듯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래, 바로 맞췄어. 용건이 있지.” “한 문장으로 줄여서 말해 봐.” “그때처럼 다시 협조해 줘.” “날더러 싸우라고?” 이실더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두 손을 펴서 들어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난 이제 늙어서 그런 건 못해. 뭐 다른 용건은 없어? 내년 파종을 위해서 땅을 갈아엎어 달라던가, 묵은 포도주가 처치 곤란이니 좀 먹어 없애 달라던가, 그런 거라면 기꺼이 도와줄 텐데.” 헤베티카는 갑자기 희한한 표정으로 웃더니 말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것과 별로 다를 것도 없는 일이야. 열심히 해 준다면 묵은 포도주쯤은 실컷 줄게.” “오, 그래? 먹고 남는 것은 좀 싸 갖고 가도 되겠지?” 정말로 일의 내용을 다 물어보지도 않은 채 이실더는 그녀의 제안을 간단히 수락해 버렸다. 헤베티카는 손가락을 들어 북쪽으로 솟 은 언덕배기를 가리키며 내일 아침 일찍 저리로 나오라고 말했다. 이실더가 고개를 끄덕이고 그 자리를 떠나자 보리스는 뒤따라가며 물었다. “정말로 형이 있어요?” “음, 없지 않다면 있는 거겠지.” 보리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있지 않다면 없단 뜻이군요.” 해양성 기후인 님 반도에서도 내륙 지방의 겨울은 맑고 사늘했다. 북쪽 하늘 지평선 언저리에 두텁게 쌓인 회색 구름층이 있었고, 그 위로 뭉게구름 몇 조각이 떠오르는 중이었다. 이실더와 보리스는 헤베티카와 약속한 언덕에 미리 도착해서 아침이 되기를 기다리 고 있었다. 보리스는 구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이실더가 한 말을 다시 한 번 뇌까려 보았다. “야만족이라고?” “그래, 내가 전에 벨노어 성에 있을 때 해준 얘기 생각 안 나냐?” 독백하는 듯한 분위기와 딴판으로 이실더는 바로 옆에 선 채 묵은 포도주 한 병을 따느라 애쓰고 있었다. 흡사 달려오는 군마가 일 으킨 흙먼지처럼 보이는 회색 구름을 불안한 듯 바라보던 보리스가 다시 말했다. “생각납니다. 야만족과 공주에 대한 이야기였죠.” “그래. 그때 렘므 사람들과 야만족들 사이의 묘한 공생관계에 대해 설명해 준 일이 있지? 한때 원수처럼 싸웠지만 지금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 가면서, 서로 좋아하진 않지만 때로는 돕기도 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고. 지금 일도 그런 상황의 연장선상에 있는 거 지. 어쨌든 간에 이번 일은 간단한 것이고, 신세도 졌고 하니 헤베티카를 지켜 줘야 갰지.” 처음에 보리스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를 지킨다고요?” “아냐, 아냐.” 이실더는 머리를 젓더니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하는 표정이 되었다. “헤베티카라는건 사람 이름이기 전에 뜻이 있는 단어인데 말이야, 옛 렘므 말로 <예의>와 비슷한 뜻이랄까, 아니, 예의하고는 조 금 다를 수도 있는데...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 땅의 오랜 풍습을 따른다>에 가깝겠다. 그런 뜻이야. 그녀가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니고.” 보리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사람에게 그런 이름을 붙이죠?” “그것도 그냥 풍습이야. 부락 안에서 몇몇 사람에게 어떤 특별한 이름을 물려받게 하는 거지. 그들이 부락 안에 존재함으로써 그 단어, 또는 의미가 대대로 잊혀지지 않도록 하려고 말이야. 헤베티카라는 이름은 외지인들의 출입이 잦은 지역의 부락에서 흔히 발견 되지. 바로 외지인들에게 헤베티카를 강조하여 지키게 하기 위해서라고. 그것 말고도 있어. <림사르>라고 하면 <싸움에서 항상 선두 에 선다>는 의미가 있지. 주로 이민족들과 오랫동안 투쟁해 온 부락에서 이어져 오는 이름이야. 큰 강을 끼고 있는 마을에는 흔히 <코로누스>가 있어. 그건, 음...<치수자>라는 의미랄까. 물이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미니 잘 다스려 놓으라는 얘기지.” 보리스는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당신은 모르는 게 없네요.” “그럼, 모르는 거 빼고는 다 아는 거야.” 보리스는 그의 버릇이다시피 한 기고만장이 잠잠해지길 기다렸다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야만족이 렘므 인의 부락을 공격하죠? 방금 선생님...아니, 당신이 말하기로 야만족은 렘므 인과 공생한다면서요? 서 로 도우면서 국경을...” “그래, 그래. 하지만 그건 렘므 왕국과 야만족 전체, 이렇게 크게 보았을 때 그렇다는 거고 작은 단위로는 항상 다툼이 있기 마련 이지. 두 집의 아들들끼리 동네에서 몇 번 치고 박고했다고 집안끼리 원수가 되는 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이런 싸움에서 운이 없어 한쪽이 전멸한다 해도 렘므 왕국도, 야만족의 족장도 별달리 신경 쓰지 않을 거다. 일부러라도.” 잠시 후 이실더는 흐음, 하더니 말을 정정했다. “야만족의 족장은 조금 다를 지도 모르겠군. 어쨌든 그들은 렘므 왕가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무리니까. 아마도 무모하게 행동 한 저들의 일족에 대해 화를 내겠지. 어리석은 자라면 반격을 원하는 자들을 지원해서 결국 렘므 왕가의 공식 병력을 움직이게 할 거 고 말이다. 뭐, 하지만 이번 일은 그리 비극적인 상황을 만들 것 같지는 않다. 얘기를 들어보니 단순히 옥수수 경작지 다툼이 있는 것 같으니까. 하여간 아옹다옹 거리는 이웃사촌 같은 사이라니까.” 조각난 구름들이 점차 넓게 퍼지며 번져나가고 있었다. 하늘은 얼어붙은 푸른색이었고 태양은 구름 뒤에 가려져 있었다. 보기 드문 장관의 새벽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그 <헤베티카>를 지키려면 어느 정도로 그들을 도와야 하나요? 그 <림사르>처럼 맨 앞에 서서 달려가야 되나요?” 이실더는 혀를 내밀면서 고개를 저어 보였다. “몰라. 내키는 대로 해버리라고.” 보리스는 자못 어른 같은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지평선의 구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죽이는 건 싫거든요.” 놓치지 않고 이실더의 주먹이 날아와 보리스의 이마를 쿡 쥐어박았다. “나도 싫어, 이 녀석아!” 둘은 고개를 돌려 코를 맞댄 채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벨노어 성을 떠나자 그다지 자라지 않게 된 보리스의 키는 이제 167센티, 닥 이실더의 목 언저리에 닿는 키였다. 둘은 비슷한 얼굴로 뺨을 부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하지만 멋지게라고.” “남의 나라 예의 지키는 법을 배우러 가는군요.” 이럴 때의 둘은 영락없는 <친구>였다. 보리스는 그가 좋았다. 진심으로 그가 좋았다. 그가 떠나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자, 가볼까?” 그건 둘만의 구령 비슷한 것이었다. 몽둥이를 꼬나든 마을 사람들은 이미 한참 전부터 아우성 비슷한 내용 모를 외침을 울리며 앞 다투어 언덕 아래로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뒤로 처진 사람들이 달려오다가 그들의 등을 퍽퍽 치고 지나갔다. 혼란의 한가운데에 서 서 그들은 묘한 동료의식으로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보리스는 어깨 너머를 슬쩍 넘어다보며 말을 건넸다. 이실더는 아까 애써 뚜껑을 딴 포도주의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고 있었다. “포도주씩이나 받고 하는 일 치고 너무 뒤쪽에 처져 있는 것 같은데요.” “걱정 마. 묵은 포도주니까. 넌 자칫 검을 뽑지 않도록 조심하기나해.” “설마 그 정도 일이야 있겠어요?” 윈터러(Winterer)이야기였다. 처음 마주친 날 이후로 이실더의 충고를 받아들인 보리스는 다시 윈터러를 뽑지 않고 있었다. 대신 이실더가 사 준 짤막한 검을 썼다. 어쨌든 이날의 싸움이란 단순히 몽둥이 싸움 정도가 될 듯했다. 이실더가 말한 대로 렘므 사람들도, 야만족들도, 자칫 피를 흘렸다 가는 엄청난 결과가 오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다. “자, 그러면 포도주 값을 좀 해볼까.” 모였던 사람들이 거의 뛰어 내려가 버리고 나자 언덕에는 응원 나선 아이들과 소녀들만이 드문드문 남았다. 그들 역시 지금껏 두드 려 대고 있던 무쇠 솥뚜껑 따위를 들고 계속해서 행렬의 마지막을 따라갈 태세였다. 보리스는 아직도 약간 어이가 없는 기분이라 나 직이 중얼 거려 보았다. “옥수수 재배지 쟁탈전이라.” 그 순간, 이실더가 갑자기 광분한 마을 사람들과 비슷한 목소리로 고함을 내질렀다. 너무 큰 목소리라 솥뚜껑을 두드리던 소녀들도 놀라 쳐다봤을 정도였다. “옥수수는 내줄 수 없다아아앗!” 그리고 그는 마을 사람들과 똑같이 팔다리를 휘저으면서 언덕 아래로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애써 포도주 한 병을 다 마셔버린 까닭을 알게 하는 장면이었다. 보리스는 약간 당황했다. 그러나 곧 그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견디기 어려운 즐거운 욕구였다. “옥수수...땅을 내놔라아앗!” “우리 땅에서 옥수수 한 알도 못 거둬먹게 하겠다아아아......” “야만족들아, 옥수수는 너네 집 뒷마당에나 가꿔라!” “옥수숫대를 입에 틀어박기 전에 조용히 꺼져라, 야만족들아!” 입을 다투어 외쳐지는 새롭고도 신선한(?) 구호들이 먼 들판으로 메아리쳐 갔다. 서른 명 남짓한 <옥수수 경작지 수호 대>와 <침략 자>들은 그 들판 어느 구석인가에서 몽둥이를 휘두르며 격돌하였다. 그들 가운데는 누구보다도 목청껏 옥수수에 대한 사수 의지를 밝 히며 달려가고 있는 한 어른과 한 소년이 있었다. 2. 그 상처의 약 흡사 봄과 같은 겨울 하루가 기울어 갔다. 1월이 지나 이제 2월이었다. 보리스는 아직껏 올해처럼 별다른 일 없이 새해 첫 달을 보낸 기억이 없었다. 기념 만찬도, 폭죽 행사 도, 밤샘 놀이도 없이 그냥 다른 때와 다름없는 조용한 나날이었을 뿐이었다. 1월 1일 저녁에 이실더와 보리스는 모닥불을 마주하고 앉아 마른 빵을 물어뜯고 있었다. 음식을 가리지 않는 보리스는 허술하기 이 를 데 없는 새해 만찬에도 불구하고 별 불만 없이 빵을 모두 먹어치우고 데운 밀죽 비슷한 것을 마셨다. 밀죽 그릇을 들여다보고 있는 소년을 흘끗 바라본 이실더가 불기가 어른거리는 얼굴 곳곳에 움푹한 그늘들이 번진 것을 발견했다. 소년은 확실히 전보다 말라 있었다. 뽀얗던 뺨의 젖살이 빠지고 얼굴 윤곽은 한결 남자답게 뚜렷해져 있었다. “새해를 위해 건배.” 둘은 밀죽이든 나무 그릇을 부딪쳤다. 그러나 보리스는 그 어느 때 보다도 마음의 짐이 가벼운 새해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했다. 집안의 일도, 생존의 문제도, 이날만은 그의 마음을 괴롭히지 않았다. 자신이 작년보다 한결 당당해졌다고 느꼈다. 앞으로도 계속 잘 해 나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점차 북부로 가고 있었다. 딱히 어떤 목적지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보리스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실더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 았고, 지금껏 방향을 결정해 온 것도 그였다. 보리스는 그에게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 지난 해 11월 경, 드라켄즈 산맥의 본줄기와 오를란느 공국 방향으로 뻗은 소 드라켄즈<오를란느에서는 마리메조 산맥>가 갈라지는 지점에 위치한 모리더 산 아래에 이르렀을 때, 보리스는 렘므의 수도인 엘티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모리더 산은 렘므 내륙 지방에서 님 반도로 접어드는 경계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곧장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님 반도의 뿌리를 가로질러 가면 닿을 수 있는 바닷가에 엘티보가 있었다. 아노마라드의 수도인 켈티카에 이어 대륙에서 둘째가는 규모, 그리고 특이한 북부 문물을 자랑하는 도시였다. 한 번쯤 가보고 싶다고 말했지만 이실더는 고개를 저었다. 수도이면서 동시에 날카로운 만을 끼고 발달한 항구 도시이기도 한 엘티 보는 렘므 사람의 기질, 즉 북방 선원의 기운이 가장 폭발할 듯 충만한 곳 가운데 하나였다. 플레일(flail)을 휘두르는 지나파 같은 공주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나라인 것이다. 수도라는 곳은 보통 문화의 집결지가 되기 마련이라 유동적으로 드나드는 외지 민족이나 별난 풍습에도 관대하기 마련인데 엘티보는 그렇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관대한 층과 그렇지 않은 층으로 확연히 갈려 있었다. 몇 백 년 역사를 가진 항구인 엘티보를 수도로 정해서 옮겨 온 왕족과 귀족들, 그 뒤를 따라온 이주자 출신들은 무관심하면서 너그러웠고, 토박이 출신인 선원들은 날카롭고 짓궂었 다. “엘티보는 우리 같은 평민들이 초대장 없이 놀러갈 만한 곳이 아니야. 다시 말해 연줄이 있어야만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편안히 지 낼 수 있다는 뜻이지.” 그래서 엘티보 행은 포기되었다. 그들은 드라켄즈 산맥으로부터 뻗어 나온 산자락 틈새에 자리 잡은 마을들을 가끔씩 거치며 북으로 , 또 북으로 갔다. 동쪽으로 휘어진 님 반도 아래에 위치한 커다란 만을 티보 만이라고 불렀다. 렘므의 화폐 단위와도 같은 이름이었다. 두 사람은 배 를 타지 않은 채 북쪽 길을 택해 그 만을 우회해 갔다. 그리고 2월 말이 되었을 때 렘므 전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도시라는 나르닛사에 도착했다. 국토의 대부분이 빙설 산맥으로 채워진 렘므 땅에서 큰 도시란 거의 다 항구들이었다. 나르닛사는 렘므에서 가장 큰 섬인 엘베 섬을 바로 내려다보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엘베 섬으로 가는 배, 또는 해류를 타고 서쪽으로 돌아 티보만 주변의 작은 항구들을 거 쳐 다니며 무역하는 배들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출항했다. 물론 그들은 엘베 섬으로 갈 계획은 없었다. 그들이 추운 겨울에도 정착하지 않고 꾸준히 이동하여 이곳까지 오게 된 이유를 보리스 가 알게 된 것은 결국 그 날 밤이 되었다. 둘은 돈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뒷골목을 이리저리 뒤진 끝에 허름하지만 비교적 조용해 보이는 여관을 발견했다. 삐걱거리는 계단 을 세 단 올라가 문을 밀고 숙박계로 다가간 이실더는 방을 하나만 달라고 말했다. 예순쯤 되어 보이는 늙은이가 꾸벅꾸벅 졸고 있다가 퍼뜩 깨어 이실더가 부르는 대로 이름을 적었다. 서서히 정신이 든 노인은 보리 스 쪽을 내려다보더니 무심코 물었다. “아들이 다요?” 그러자 이실더가 망설이지도 않고 냉큼 대꾸했다. “그러요.” “안 닮았구마는?” “쳇, 남의 아픈 데 찌르지 말고 방이나 주요.” 이실더는 렘므 말투를 능청스럽게 흉내 내어서 비록 민족은 다를지 몰라도 이 땅에서 오래 산 사람인 양 행동했다. 노인은 열쇠를 떼어 내주면서 이죽거렸다. “그러기에 마누라 관리를 잘 해야 되는 법이다요.” 이실더는 화를 내는 대신 한탄조로 말했다. “아들 녀석이 듣는 데서 못 하는 소리도 없는 노망난 늙은이한테 충고랍시고 듣자니 한숨이 절로 나오요.” 그때 등 뒤에서 어떤 사람이 말했다. “어라, 형님한테 마누라도 있고 아들도 있었소? 난 지금까지 전혀 몰랐소, 그래?” 이 연극 같은 놀음에 사정 모르고 끼어든 사람이 누군가 싶어 지금껏 눈만 말똥말똥 굴리고 있던 보리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실더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큰 키를 가진 백발의 남자를 발견하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실더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농담조로 말을 받는 대신 안색이 변했다. 노인이 이실더의 건방진 말에 뭐라고 꿍얼대며 팔을 툭툭 치는 가운데에서도 이실더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 남자를 묵묵히 바라 보고 있었다. 약간 너덜거리는 가죽조끼 안쪽으로 흰 무명옷이 들여다보이는 남자의 손에는 방금 벗은 듯한 두터운 털옷이 들려 있었다. 딱 벌어 진 어깨와 팔, 추위에 단련된 듯 거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목 안쪽으로 보이는 피부는 본래 희었던 모양이었다. 어깨 너머로 흐트러 진 흰 백발과 거칠거칠한 눈매에도 불구하고 삼십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남자였다. 지금껏 보다 온 렘므 사람들이 바닷사람 느 낌이었다면 그는 마치 산사람인 양 튼튼하고 강인해 보였다. “오랜만이잖소.” 백발 남자가 손을 내밀자 이실더도 마주 손을 내밀어 둘은 악수를 했다. 그러나 보리스는 이실더의 태도가 약간 경직되어 있다는 것 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랜만이군, 동생.” 뒤에서 노인네가 툴툴대고 있었다. “아들에, 마누라에, 이번엔 동생요?” 백발 남자가 고개를 돌려 노인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노인장, 나도 방 하나 주시오, 우리 형님 바로 옆방으로 말이오. 상관없겠소?” “좋은 대로 하요.” 북부 전나무처럼 건장한 두 남자가 실제로 친한 사이라는 걸 알아 본 노인은 더 시비 걸 생각이 없어진 모양이었다. 백발 남자가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보리스를 흘끗 보더니 다시 말했다. “오랜만에 회포나 풉시다. 그건 그렇고 진짜 저 아이는 도대체 누구요? 정말 숨겨 놓은 자식이오?” 눈앞에는 반쯤 채워진 술잔이 놓여 있었다. 이실더는 그것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잔이 비자 상대방의 손이 움직여 다시 술을 따 랐다. 이실더는 찰랑이는 술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일 떠나겠소?” “......” 이렇게 만날 줄 알고서 이리로 온 것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심란한지 몰랐다. 물론 정확히 누가 사자로 올 것인지는 짐작하지 못하 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 오든, 그가 무슨 전언을 말할 지는 이미 다 짐작하고 있지 않았던가. 흰 빛깔은 어쩌면 본래부터 이별의 전조였을까. 이렇게 흰 머리칼을 한 사자를 보내어 그를 다시 부르고 있었다. 섬은, 그가 영원히 떠나고 싶어 할 섬은. 본래 간단한 식사를 위해서만 쓰이는 듯한 1층 홀은 고요했다. 깨어있는 사람이라고는 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어스레하게 보이는 계단 쪽에 램프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초가 하나 꽂혀 있었다. 빛이라고는 그게 전부였다. 두 빛이 동시에 일렁였다. “망설이시오?” 이실더의 손이 다시 나무 술잔을 잡았다. 들어올려지는 잔은 향해 다른 잔이 다가오더니 가볍게 탁, 치고 지나갔다. 팔이 멎었으나 술은 여전히 출렁거렸다. “혼자 너무 마시는 것 같소. 뭔가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소?” 이실더는 마시지 않고 그냥 잔을 내려놓았다. 상대가 다시 물어 왔다. "아까 그 소년이오? “ 잠시 침묵이 흐르고 이실더가 입을 열었다. “에니...아니, 이곳에서는 무슨 이름이지?” “단센이오, 그냥 단센.” “그래, 단센.” 이 자 역시 이실더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땅에서는 새로운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실더는 진지한 눈동자로 그를 보며 말했다. “꼭 돌아가야 할까?” “왜 그러시오? 이제 돌아올 때가 되었다는 것쯤은 형님이 더 잘 아시지 않소? 알고 이리로 오신 것이 아니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르지.” 단센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형님의 자리가 있소. 해야 할 일도 있소. 오직 형님만을 기다리면서 밤낮 없이 수련하는 아이들도 있잖소. 10년 만에 치러지는 <7원례>를 위해서는 형님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니 지체할 수도 없......” “그런 것들이 모두... 그렇게 중요할까?” 백발의 사내 단센은 눈을 크게 뜨더니 대꾸했다. “그게 아니면 뭐가 중요하다는 말이오?” 이실더는 술잔으로 시선을 떨어뜨린 채 자신 없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난 내 삶이 중요해.” 단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저었다. 이해는 하지만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형님의 문제를 모르는 내가 아니란 것, 잘 알지 않소. 그러니까 이렇듯 내내 대륙에 머물러도 어른들께서 아무 말 않으셨던 것 아 니오? 하지만 이번 7원례의 문제가 아니라 해도 평생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오. 아직껏 특별히 건강에 이상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 구 료. 어른들께선 이제 그만 형님이 정착해서 신성한 직분을 수행하시길 바라......” “난 이미 한 가지 약을 찾았어.” 단센은 얼굴을 펴면서 물었다. “오, 그렇소? 무슨 약이오?” 이실더는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작게 대꾸했다. “그 소년이다.” “......”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단센이 먼저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형님을 이해할 수가 없고. 지금 섬에는 형님만을 존경하고 따르며 평생을 형님에 대한 봉사로 바치고 싶어 하는 어린 녀석들이 헤아릴 수도 없는데 왜 하필 외인의 아이요? 왜 그런 아이한테 연연하오? 혹시 그 아이에게 놀랄 만한 천부의 자질이라도 있는 거요? 형님은 사실 천재를 찾고 있었소?” 그의 말은 약간 비난조였다. 그러니까 <천재를 찾아 교육하고 싶어서 지금껏 성실한 아이들을 외면해 온 것이냐>는 속뜻이 섞여 있 었다. 이실더는 풋, 하고 조소를 내뱉으며 입 끝을 올렸다. “천재라, 후, 천재라. 생각해 봐. 나는 천재였니? 아니, 오히려 반대지. 주어진 행운도 잡을 줄 모르는 자였지. 일러오스님의 제자 가 될 수 있는 최고의 황금빛 미래를 제 발로 박차고서 쭈그렁 궁상 노인네 밑으로 달아난 미친놈이 아니었냔 말이야. 천재? 내게 그 런 말은 하지 마. 난 그런 녀석들을 싫어해.” “낮은 마루에 낀 먼지는 오래 기억하오. 형님.” 그것은 그들 무리가 말하는 방식이었다. 두 번, 세 번 꼬인 비유로 말하는 것으로 간단히 말해 <입 조심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외 인의 땅에서 본명을 말하는 것은 금지된 일이었다. 그것이 이미 죽은 자의 본명일지라도. “그래 술잔 속에서도 파도는 멎는 법이 없지. 잘못했군.” 같은 의미의 말이었다. 이실더는 자신이 술기운 탓에 실수한 모양이라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실은 그는 술이 아니라 헤어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좋소. 그렇다면 내가 형님이 외인의 문제로 의무를 등한히 하려 한다고 행각해 버리기 전에 방금 한 말은 취소하는 것이 좋겠소.” “그 녀석은......” 상대가 한 말의 울림이 채 멎기도 전에 시작된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것은 더뎠다. “......내게서 아무 것도 얻어가려 하지 않아.” 단센은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한 번 기울였다. “무슨 소리요?” 이실더의 목소리는 점차 정확해졌다. “그래... 섬에 가면 내 곁에서 평생토록 잔심부름꾼 노릇이라도 기꺼이 하려 할 녀석들이 갓 엮어놓은 보릿단처럼 얼마든지 있다. 예전 그 분 앞에 서려고 한 젊은이들이 많았던 것처럼. 그 놈들의 인내는 내, 높이 사지. 높이 사겠다고. 하지만 왜? 왜 자신의 삶 을 그런 식으로 낭비하고 싶어 하지? 인생의 즐거움들은 다 어쩌고? 왜 칙칙한 사내 옆에서 쇳조각이나 만지작거리며 생애를 마치려 는 녀석들이 이렇게 많은 거지?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일이냔 말이다. 난 이해할 수가 없어. 받아들일 수도 없고. 녀석들의 그런 태도는 비굴한 것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아. 원하는 목표에 다다르기 위해서라면 보석 같은 삶의 시간쯤이야 얼마든지 희생해도 좋다 고 여기는 그 녀석들이 불쾌해. 그런 녀석이 한두 명이 아니라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곳... 분위기가 싫어.” 그러나 이실더 역시 감히 <섬이 싫다>는 말은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벗어나고자 간절히 발버둥쳐 온 그의 마음도 오래된 굴레들에 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달라. 단지 내게 동료다운 신뢰를 줄 뿐이야. 아니, 그것조차 완벽한 신뢰는 아닐 테지. 어린 나이인데도 이미 자신만의 독자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녀석이란 말이다. 누구를 믿거나 돕거나 받아들이거나 하는 것은 모두 매 순간의 판단이고 , 아부하여 내게 얻어가려 하는 것도, 속여서 빼앗으려 하는 것도 없어. 내가 그 녀석을 가르치고자 하느냐고? 전혀 틀려. 내가 한 인 간이라면 그도 한 인간, 친구처럼 존중하고 서로의 이상을 말하는 사이지. 아니, 나는 실제로 그 아이의 독립된 정신이 오히려 부러웠 어. 어디에도 발 묶일 필요 없이 저 해안 절벽의 동굴에 들어가 혼자 은둔하더라도 만족할 수 있을, 하나로 충분하고자 하는,,, 자유 로운,,, 그는 자유로워지고자 하고 있어. 명예로도 원한으로도 묶일 수 없는 자가 되고자 하지. 왜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을까, 아니, 왜 섬의 아이들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거지?” 단센은 눈썹을 찡그리더니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오, 형님? 그 아이들이 왜 다들 그러는지 이미 잘 알지 않소? 우리에겐 오랜 책임이 있소. 모두가 죽을 때 죽지 않았기에 갚아야 할 빚이 있지 않소? 한두 사람의 행복쯤 끊어 내주는 걸로는 감히 셈도 맞추지 못할 거대한 채무가 있지 않소? 그건 까마득하게 깊은 빈 우물이오. 바닥조차 채 메우지 못한......” “그 녀석들이, 우리 무리의 빚을 생각해서 그런다고? 어림없는 소리. 그런 게 아니야. 놈들은 단지 미래의 영광과 자랑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야. 그것이 얼마만큼의 책임을 필요로 하는 자리인지도 모르면서 내 자리를 무작정 탐낸 뿐이다. 내게 잘하고 싶겠지. 그래 서 뼛골의 정수까지 빼앗아 가고 싶겠지. 몇 년, 몇 십 년쯤 내 시중을 들며 희생하는 일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겠지. 그래, 정말로 아 무것도 아니지! 어차피 그 세월이 그리 길지 않을 거란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 아닌가!” “형님!” 탁자를 짚고 있던 팔꿈치가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술잔이 툭 건들려 옆으로 밀려났다. 탁자에서는 몇 년간 찌들었을 싸구려 술 냄 새가 물씬 났다. 술잔과 나란히 놓인 머릿속에서도 똑같이 갈색 술이 출렁 거렸다. 계단 앞에 놓인 램프가 낯선 그림자 하나를 붙들고 그림자 인형극처럼 춤을 추었다. 어딘가에서 바람이 새어들어 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질 대답은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확인하듯 대답이 울렸다. “외지인을 데려갈 수는 없잖소.” 단센은 섬의 법도에 따라 밖에서는 철저히 이실더를 형으로 불렀으며 실제로도 오랫동안 그를 친형처럼 생각해 온 사람이었다. 그 런 만큼 이실더와 생각이 달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만은 분명히 있었다. 밖으로만 나도는 이실더와는 달리 단 센은 지시를 받기 전에는 대륙에 나오는 일도 없을 정도로 고지식한 <따르는 자>였다. 그건 앞서 한 그의 발언들이 섬의 <어른>들이 늘 하는 말 그대로라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그는 어떻게든 공감하고 싶다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에 퍽 얌전해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눈가가 유난히 깊은 것이 아이 치고는 음험해 보였소. 그 아이가 몇 살이오?” 이실더는 갑자기 아들의 나이를 질문 받은 아버지가 된 듯, 일말의 자랑스러움을 품은 얼굴로 대답했다. “올해 7월이면 열 넷이 되지.” “허어, 열 셋이란 말이오? 도저히 그렇게는 보이지 않던데. 나는 넉넉잡아 열다섯도 가능하리라고 봤소이다. 그 나이에 그만한 검 을 지니고 다니니 상당한 근골이겠소.” “실력도 상당해. 벌써 사람을 죽여 본 일도 있는 아이다.” 단센은 눈을 약간 크게 떴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그거 좋지 않은 소식이오.” 이실더는 피식 웃었다. “핏자국만은 아무리 말라붙었다 해도 금방 보인다는 그 소리겠지? 하지만 무슨 소용 있겠나. 그걸 알아볼 사람들 앞까진 갈 수도 없을 터인데.”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잖소.” 이실더는 고개를 들더니 단센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단센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견습 순례자로 입문시키시오.” “안 돼, 그건 절대 안 돼!” 이실더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앉은 채로 올려다보는 백발의 동생을 쏘아보며 나직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벗어나고 싶어 하는 길을 그 애에게 걷게 한다고? 결코 안 될 말이다. 그 앤 이제 겨우 열세 살이야. 아직 사리 분별도 완벽 하게 자리 잡히지 않았을 나이인 아이에게 그런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라고는 말 못 해. 그것이 어떤 길인지, 겨우 열세 살 먹은 아이가 깨달을 수 있을까? 이후 나를 원망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것은 내 욕심만으로 권하기에는 너무도 중대한 일이야 .” 단센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제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었다. “형님 말 대로요. 다행히 아이가 아직 열 셋에 불과하잖소. 열다섯만 되었어도 이미 입문은 불가했을 테요. 그 아이와 헤어지고 싶 지 않다면, 데려가시오. 가서 섬의 풍습을 가르치고 검을 가르쳐 평생을 함께 하면 되지 않소? 무엇이 나쁜 길이오? 형님이 싫어한다 해서 아이도 싫어하리라 보장할 수 있소? 이렇게 해서라도 형님이 섬으로 돌아가 준다면 나는 기꺼이 어른들 앞에서 저 아이의 신분을 보증하고 의식에도 입회하겠소. 원한다면 그 아이의 대부도 되겠소. 함께 섬으로 돌아갑시다. 모두, 함께.” 단센의 말은 사실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그러나 이실더는 힘겹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 그건 사슬을 얽어매는 짓이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묶여버리고 나면 결코 풀려날 수 없는 사슬이지. 한 번 발을 들여 놓는 순간 다시는 혼자로, 자족적인 인간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단 말이야. 거기서 태어난 나는 어쩔 수 없겠지. 하지 만 왜 죄 없는 인간에게 그런 짐을 지워야 하지?” “자신이 원하니까요.” 대답 소리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동생이 아니라 램프가 흔들리던 계단 쪽에서 들렸다. 이윽고 하나의 그림자가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와 섰다. “너, 어떻게......” “엿듣게 되어서 죄송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보리스는 먼저 단센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여 절했다. 그리고 다시 얼굴을 들며 말했다. “저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해주시겠다고 말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모든 일을 기꺼이 부탁드리겠습니다.” 보리스는 이미 오래 전부터 계단에 앉아 턱을 괸 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단센의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들, 이실더의 감정 적인 반응, 그리고 정체 모를 굴레의 존재와 그 선택에 대한 것도. 흔들리는 램프, 그 램프가 계단 너머로 만드는 긴 그림자, 그림자 아래의 자신, 그림자보다도 훨씬 작은 자신, 버려짐, 헤어짐, 잃 어버림, 결코 다시는 잡을 수 없는 사라진 것들. 이실더와 함께 보낸 반 년. 예프넨을 떠난 뒤로... 아니, 예프넨과 함께 저택에서 살던 그 때조차도 자신을 짓누르던 모든 악몽으로부터 이토록 자유롭지는 못 했다. 작년 여름부터 이 겨울까지, 그는 한 사람의 보호 아래에 있었고 그와 자신은 서로를 존중하여 친구로 대했다. 지금도 그는 예프넨을 가장 사랑하지만... 이제 살아 있는 사람 가운데 이 한 사람만을 신뢰한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제 그를 떠나 다른 사람을 다시 믿으려 노력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아무도 믿지 않게 된다면 모를까, 이제 다시 그런 사람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론 믿을 수 있는 사람 따위, 없어도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어느 순간부터 씨앗처럼 심어진 것은 어떤 진 심어린 관계에 대한강한 욕구였다. 한때 아무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자신은 자랐고, 성숙해졌으며, 죽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 돌아본 자신은 지독 히 황폐한 인간이었을 뿐. 친구가 될 수 있었을 소년의 마음조차 끝내 얻지 못한 불완전함, 피 묻은 손을 보며 위로해 줄 사람이 없 어 떨며 울었던 연약함, 그리고 자신의 나이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는 소년을 보며 느꼈던 부러움까지도 오직 홀로, 타인의 존재 없 이도 만족스럽게 살아가는 <원했던 그런 사람>과는 아득하게도 멀었다.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함께 있고 싶었다. 그의 곁에서 다시 그 나이의 소년답게 살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영원히 믿고 싶었다. 가족을 잃고, 믿었던 사 람에게 배신당하고, 사람을 죽였던 자신, 그런 자신조차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 줄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다시 시작할 수는 없을까. 그가 있는 곳에서. “넌... 잘못 생각하고 있어. 네가 지금 어디까지 얘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거긴 절대 살기 좋은 곳이 아니야. 그리고 쉽게 빠 져나올 수 있는 곳도 아니야. 일단 그곳에 들어가게 되면 대륙에는 허락 없이 나올 수도 없게 되고, 대신 수많은 의무들을 수행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없게 되는 곳이 그곳이야. 난 네가 그런 굴레에 매이는 것, 그다지 원치 않아. 결단코, 넌, 넌... 원한다면 자유로 워질 수 있는 사람이잖아. 일부러 얽매이지 마. 분명... 후회하게 될 거야.” 단센은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갑자기 불쑥 말했다. “그 말은 사실이다.” 단센은 이실더를 섬으로 데려가기 위해서라면 보리스가 어떻게 되든 별로 관심 없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친형이나 다름없는 사람 이 이토록 진심을 다해 말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약간 움직인 듯했다. 비교적 솔직한 어투로,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보리스는 조용히 눈을 들어 이실더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신을 지킬 힘이 있어야 된다는 것, 저보다 더 잘 아시잖아요? 홀로 살아갈 힘이 없기 때문에 따라간다고 생 각하셔도... 그렇게 생각하셔도 좋아요. 결정을 제가 하듯 후회도 제가 하게 될 겁니다.” “......” 이실더가 침묵을 지키는 동안 보리스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당신은 내가 곁에 있는 것이 싫은 건가요?” 이실더는 고개를 숙여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술이 흐른 자국이 보였다. 그의 눈에는 그것이 흡사 바닷물처럼 깊고 넓어서, 수많은 파도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열흘 뒤, 그들은 티보 만류를 타고 엘베 섬을 서쪽으로 우회해 가는 배 안에 있었다. 티보만을 동서로 가르는 기준점인 새줄리프 지협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대륙에서 튀어나온 새줄리프 곶과 엘베 섬의 남곶이 마주보는 곳에 형성된 좁은 해로였다. 이 지협을 지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숙련된 항해술이 필요했다. 엘베 섬 주변을 돌아다 니는 배의 선장들은 대부분 이런 지협 항해의 명수들이었다. 낮 4시경, 선령 14년의 알탄 시그머 호는 새줄리프 곶을 무사히 지났다. 드디어 서 티보 만에서 동 티보만으로 들어선 것이다. 보 리스는 선미에 나와 선 채 멀어져 가는 곶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땅 전체가 그로부터 멀어져 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정확히는 대륙, 그가 발 딛고 살던 곳으로부터 멀리 던져져 한없이 날아 가는 작은 돌멩이가 된 것 같았다. 아직은 동 티보만을 지나야 했고, 그러고도 수많은 얼음 섬들로 이루어진 화이트 크리스탈(White Crystal) 제도에 이으러 그것을 넘어서야만 첫 트인 바다, 북해(North Sea)로 나가게 될 터였다. 그러나 곶이 멀어져 버리고 나니 아제 바다에 점점이 박힌 섬 머리 들조차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공깃돌들에 불과한 듯 보였다. 던져진 그대로, 바다로 가게 될 자신. 섬이란 어떤 곳일까. 뱃전 아래로 보이는 바닷물은 닥치는 대로 모든 것을 삼킬 듯 서슬 시퍼런 청색이었다. 만일 물에 떨어진다면 아마도 닿는 순간 얼 어붙어 버릴 거란 생각이 들었다. 헤베브로 마을 근처에서 얕은 강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때의 기분과 비슷하겠지. 약한 배에 의지해 서 빠져나라고 잇는 이 얼음 바다. 그 너머에는 과연 안식처가 있을까. 자신의 선택은 과연 옳은 것이었을까. “날씨가 춥다. 안으로 들어가거라.” 백발의 단센이 가까이 와 서며 말했다. 보리스는 이 자에게서 비록 조금이긴 해도 어딘가 모르게 이실더와 비슷한 느낌이 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섬이란 곳에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일단 외모부터 그랬다. 얼어붙은 땅에서 자란 질긴 나무, 그 껍질처럼 단단한 피부를 한 그들은 진정 대륙의 인간들과 다른 종류인 것일까. “괜찮아요.” 단센은 더 권하지 않은 채 자신도 뱃전에 서더니 말했다. “남쪽 태생이라고 들었다. 렘므에서 첫 겨울을 보내면서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다니 놀랍구나.” “그리 따뜻한 남쪽은 아니었습니다.” 더 설명할 필요까지는 느끼지 않았다. 트라바체스는 서늘한 여름과 추운 겨울을 가진 나라였다. 물론 렘므에 와서 느끼는 추위만큼 은 아니었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도 알지 못하면서……. 가겠다고 한 것은, 그만큼 형님을 믿기 때문이냐?” 단센은 보리스를 바라보지 않고 바다로 시선을 보낸 채 그렇게 말했다.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 어떨지 몰랐다. 단지 이실더 의 존재에만 의지해서 간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결국 그의 선택이고 그의 인생인데 누구에게 책임을 미룰 생각은 없었다. “그냥... 최선을 다할 생각일 뿐이에요.” 이실더는 배에 탄 이후로 말이 없어졌다. 둘이 다닐 때는 그토록 유쾌한 사람이었고,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싶으면 자기가 먼저 장 난을 걸던 그가 판이하게 달라졌다. 뭔가 무거운 것이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특히 보리스에게 더 말을 걸지 않았다 . 그리고 보리스도 굳이 기분 밝은 체 하지 않았다. “난 말이지, 오랫동안 형님을 좋아하면서도 늘 이상한 분이라고 생각해 왔었지. 그 속을 다 알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을 거라고 말 이야. 형님이 섬을 떠나 대륙을 방랑하게 된 것에는 여러 가지 타당한 원인들이 있었지만, 나로선 역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이었다. 섬사람이 섬을 떠난다는 것은,,, 그리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해 왔어. 그런데 널 보니까 말이다.” 그들이 가고자 하는 섬은 아주 멀리, 고기잡이배들이 드나드는 바다를 지나 북해의 끝이라고 부르는 몇 개의 섬조차 넘어 위로, 더 북으로 간 끝에 도달할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실로 세계의 끝에 경계석처럼 솟아오른 섬이었다. 그곳의 존재는 대륙 사람들에게는 비밀이었다. 섬사람들은 항상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그리고 섬으로 가는 길이 알려지 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 길은 단 하나뿐이었고 오직 섬사람들만이 알고 있었다. 보리스도 이제 그 의무를 지켜야 하는 사람이 될 것이었다. “너는 형님의 그 이상함을 닮아 있구나.” 겨울새가 먼 하늘머리를 스쳐갔다. 머리카락이 날렸다. “나로서는 단지 <이상함>이라고 지칭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 뭐라고 더 설명할 재주는 없지만, 닮아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단 말이야. 네가 어리지만 여러 가지 일을 겪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형님도 그리 편안한 삶을 살아온 사람은 아니지. 단순히 힘든 삶을 살아왔다고 해서 사람이 비슷해진다는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형님이 이처럼 누군가에게 마음 쓰는 것만은 그리 흔한 일이 아냐. 너도 섬으로가 보면 알게 되겠지만......” 단센의 백발은 힘든 세파를 견뎌오느라 빛이 바랜 듯 보였다. 울긋불긋한 얼굴과 보랏빛에 가까운 입술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는 색 깔이었다. “형님은 사람에게 쉽게 마음 주는 분이 아니다. 어쩌면 너는 정말로 형님의 좋은 약인지도 모르겠구나.” 약이란, 아마도 상처가 있을 때 필요한 것이리라. 북쪽 하늘은 멀고 추워 보였다. 3. 썰물섬 세 사람은 엘베 섬의 동쪽 곶에 있는 작은 항구마을에 이르러 배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돛이 하나 달린 보트를 사들였다. 알고 보니 이곳에서는 이런 배를 팔고 사는 사람이 꽤 많았다. 따라서 그들이 배를 산 목적에 대해 별달리 의문을 갖는 사람은 없었 다. 여기엔 큰 배보다 오히려 이런 작은 배를 만드는 배목수가 많았는데 그런 배가 왜 그렇게 수요가 많은지는 잘 알 수가 없었다. 배를 타자 자연스럽게 이실더가 키를 잡고 단센이 돛을 조절했다. 보리스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바닥에 앉아 있었다. 배 라는 것은 처음부터 그에게 낯선 존재였다. 배가 서서히 물 위로 떠가는 것을 보며 보리스는 큰 배를 탔을 때와는 다른 서늘한 공포감을 느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물이 나무로 만든 뱃전 하나를 사이에 두고 끝없이 깊고 넓게 펼쳐져 있었다. 날씨는 코가 맹맹해질 정도로 추웠다. 이 배는 뒤집히지는 않는 걸까. 또는 바닥에 구멍이 뚫리면 어쩌나. 그러나 누구한테 매달려 불안감을 토로할 만한 입장은 되지 못했다. 두 남자는 모두 이 자그마한 배가 안전히 떠가도록 하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닥에 앉은 보리스는 배의 몸체를 치고 지나가는 물결조차 자신의 몸에 부딪쳐 오는 것처럼 느끼 고 있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엘베 섬과 이어지는 화이트 크리스탈 제도 가운데서도 물방울 열도라고 불리는 곳은 첫 번째 섬이었다. 그들은 섬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항해했다. 작고 날씬한 배는 물굽이를 매끄럽게 빠져나갔다. 가끔 그들이 탄 것과 비슷한 배가 수평선 쪽에서 지나가는 것을 볼 때도 있었다. 본래 이렇게 만들어져 팔리는 배의 목적은 근해의 고기잡이와 더불어 이곳 해역만의 특별한 돈벌이라 할 수 있는 유물 건지기였다. 약 30여 년 전에 일단의 어부들에 의해서 작은 대리석 석상이 건져진 일이 있었다. 석상의 눈에는 사파이어가 박혀 있었고, 손톱과 머리 장식을 비롯한 장신구들은 온통 황금이었다. 이것은 고대 마법왕국의 유물이가는 소문이 돌면서 탐색 열풍이 갑작스레 불었고, 초기에는 렘므 왕가에서도 수색선을 파견하는 둥 부산을 떨었지만 기대와는 달리 그다지 큰 성과는 없었다했다. 대신 민간인들이 은밀히 행한 탐색에서 발견된 보물들이 아직까지도 암시장을 돌아다니면서 꾸준히 새로운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이 근처 마을들에서 영 수지가 맞지 않을 것 같은 작은 돛단배를 이렇게 대량으로 만들어 팔게 된 것도 순전히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제 이 일은 가끔씩 고대 왕국의 환상에 사로잡힌 젊은이들을 불러 모을 뿐 그냥 이 자방의 특색 정도로 인식되고 있었 다. 다만 지금은 겨울이기 때문에 아무리 추위에 강한 렘므 인이라 해도 물밑 탐색이 어려워서 탐색선은 거의 없었다. 가끔씩 지나치는 배들은 열에 들떠 계절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무작정 달려온 돈 많은 젊은이들이나, 이미 사들인 배로 겨울동안 수지나 맞추러 돌아 다니는 어부들을 태우고 있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가 보리스는 몇몇 사람들이 그토록 진절머리 나게 이야기했던 뱃멀미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 다. 그가 평생 처음으로 타본 배는 나르싯사에서 탄 알탄 시그머 호였고, 그것이 비교적 큰 배여서 괜찮았던 거라면 이 배는 흔들림 이 많은 작은 돛단배였다. 너무 긴장해 있어서 오히려 그런 것을 느낄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 어쨌든 그는 낯설고 험한 환경에 이상스럽게 잘 적응하는 고산식물처럼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노마라드 땅에 가서 갑작스레 쑥쑥 자랐던 일, 그리고 처음 겪는 렘므의 추위에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고 튼튼했던 것처럼 환경에 낯가림하지 않는 체질의 소유자일지 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 음식이나 불만 없이 잘 먹고, 불편한 잠자리에서도 잘 잠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틀이 지나자 배는 물방울 열도를 벗어나 넓은 바다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동안 한번 어떤 섬에 들러 음식과 물, 기름과 밧줄 따위의 물품들, 그리고 특히 겨울옷과 모포를 단단히 준비했다. 보리스의 눈에는 모든 일이 순식간에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북해로 빠져나가자마자 매일 정확히 계산해서 나눈 음식이 주어지기 시작했다. 두 섬사람은 번갈아 가며 잠을 잤다. 보리스는 어떤 때는 단센과 함께 깨어 있었고, 어떤 때는 이실더와 함께 깨어 있었다. 밤과 낮이 몇 번인가 지나갔다. 날씨는 혹독했으나 폭풍은 없었다. “괜찮으냐?” 이실더가 보리스에게 말을 붙인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안개가 자욱한 새벽녘에 깬 이실더는 자기가 덮고 있던 모포를 단센이 잘 수 있도록 내준 뒤 가죽 장갑을 꺼내 끼고 돛 줄을 조절했다. 보리스는 멍한 기분으로 모포에 휘감겨 있다가 눈동자를 약간 굴렸다. “네.” 이실더는 이물 쪽에 앉아 손을 문지르며 다시 말했다. "겨울 항해는 섬사람들도 흔히 하지 않는 바야. 일부러 괜찮은 체 할 필요 없어.“ 보리스는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배가 흔들리는 것은 아직도 약간 무서웠다. “하지만 굳이 불평할 만큼 그렇게 힘들지도 않은 걸요.” 이실더가 추위로 굳어진 뺨을 풀려고 입을 벌려 괴상한 표정을 연달아 짓다가 문득 약간 미소를 지었다. “이럴 때면 네가 귀족 출신이라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트라바체스에는 귀족이 없다고요.” 그건 그들이 함께 렘므를 여행하던 시절에 자주 주고받던 농담 가운데 하나였다. 아니, 농담이랄 것도 없이 누가 그 말을 꺼내면 당 연하게 따라오는 대답이랄까, 그런 것이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오랜만에 옛날 기분에 잠겼다. 실은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닌데 왜 이리 먼 것만 같을까. 잠시 잠자코 있다가 보리스가 불쑥 말했다. “실은 당신 쪽이 좀더 힘든 것 같은데요.” 이실더는 얼굴을 다 풀었다. 그리고 멀쩡한 표정으로 돌아와서 말했다. “그럼 내 속이 편할 리가 있겠냐, 넌 지금 내가 널 어떤 구렁텅이로 끌어들이고 있는지 좀 알아야 해.” “알고 있어요. 아마 당신이 태어나고 자라 온 구렁텅이겠죠.” 이실더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전 같으면 잡아먹을 듯 눈을 부라리며 좀더 농담을 이어갔을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대 신 이렇게 말했다. “얼음과 눈 구렁텅이야. 크레바스(crevasse)라고 하지.” “그게 뭔데요?” 이실더는 두 팔을 넓게 벌려 보았다. “거대한 빙하 협곡에......” 그는 손을 모으며 쭉 뻗는 시늉을 했다. “커다랗게 갈라진 끔찍한 틈이지. 한 번 떨어지면 그걸로 끝장이야. 녹지 않는 눈이 있는 산에 올라가면 그런 것이 곳곳에 흩어져 있어. 미끄러지거나 헛디디는 놈들을 한 입에 삼켜버린다고.” “무시무시하군요.” “그뿐이 아냐. 봄이 되면 눈사태가 수시로 일어나서 어떨 때는 마을 절반을 묻어버리지. 또 산에는 맹수들이 살고 있고 놈들은 얼 마나 억세냐 하면......” 그런 식으로 이실더는 한참 동안이나 섬에서 만날 수도 있는 위험들에 관해서 열렬히 역설했다. 이미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인데, 괜 스레 경고하면서 뻐기는 어린 골목대장처럼.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래서 당신은 섬으로 가고 싶어 하지 않았군요?” 이실더는 말을 멈췄다. 그는 잠시 지체하다가 시선을 안개 속으로 돌리며 말했다. “어디서나 가장 힘든 건 사람의 문제야. 사람이 괴물이지. 가장 무서운 괴물.” 말의 마지막은 정말로 안개 속에 묻혀버린 듯 희미했다. 단센과 함께 깨어 있을 때면 보리스는 섬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보리스가 선입견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아름다운 곳인 양 꾸미려는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들은 아주 오래 전에, 언제라고 딱히 말할 수 없는 고대에 그들의 나라에서 벌어진 어떤 재앙을 피해 도망쳐 온 사람들의 후손이 라고 했다. 처음에는 1백여 명이나 될까 했지만 늘고 줄고 하다가 지금은 대략 5백여 명 가까이 살고 있었다. 외부인의 유입은 지금의 보리스처럼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기에 섬사람들 가운데는 위로 따져 올라가면 피가 닿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 래도 아직은 모두가 친척이 되는 경우까지는 가지 않았다.. 섬에는 네 개의 지파가 있었다. 서로 적대 관계는 아니었고, 다만 초기의 이주민들 가운데 지휘자였던 몇 명을 중심으로 이어져 내 려온 전통이 지금의 지파로 정착되었다고 했다. 이 지파는 주로 혼인을 할 때에 유용했다. 다른 지파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이실더와 단센은 <은빛매(Silver Falcon)지파>에 속했다. 일전에 단센이 말한 대로 섬사람들은 그 오래된 재앙으로부터 자신들만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대단한 빚이자 짐으로 느끼고 있 었다. 새로 태어나는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생각보다 많은 젊은이들이 아직도 그렇게 생각 했다. 심지어 본래의 고향으로부터 벗어나 돌아가지 못하고 떠돈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순례자>라고 불렀다. 이 섬사람, 또는 순례자들에게는 3대 의무라고 불리는 것이 있었다. 사라진 것들을 조금씩이라도 복원하는 일, 남아 있는 것들을 온전히 보전하는 일, 그리고 언젠가 재건될 옛 왕국을 위해 준비하는 일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종교적 사명과도 비슷한 것으 로 단센 역시 그 의무들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너도 거기에 동참해야 한다. 만일 네가 정식으로 입문하게 된다면.” 단센이 말한 대로 보리스는 아직 정식 입문자가 아니었다. 정식 입문례는 섬에서만 치러질 수 있었다. 섬에는 외인을 데려오는 것이 철저히 금지되어 있었다. 그런 일을 임의로 저질렀다가는 어떤 참혹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 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실은 그런 일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것은 그 섬으로 가는 도중 거쳐야 하는 단 하나의 기착지, 그곳에 서 들키지 않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외지인을 데려오는 방법은 단센이 말한 대로 유일하게 한 가지뿐이었다. 두 사람 이상의 섬사람이 그의 신분을 보증함과 동시에 들 어오게 될 본인의 견습 순례자가 될 의지를 밝히고 짧은 입문례를 행해야 했다. 그러나 또한 그 외지인의 나이가 15세 이상일 경우는 처음부터 모든 것이 불가능했다. 다만 그렇게 시작한 견습 순례자가 모두 정식 순례자가 된다고는 볼 수 없었다. 외지에서 들어온 견습 순례자는 15세가 되고 처음 맞는 정화 의식에서 스스로의 의지를 분명히 밝히고 순례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고백해야 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주어지게 될 모든 의무를 따르겠다고 서약해야 했다. 한 가지라고거부하게 되면 그는 순례자가 될 수 없음과 동시에 섬에서 영원히 추방되었다. 이후의 삶은 자유지만 다시 섬으로 들어오려 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완전한 의미에서 자유라고 할 수는 없었다. 섬을 떠날 때 그 사람은 섬에 있는 어떤 특별한 그릇 속에 자신의 머리카락 한 줌과 침 묵의 서약을 남기게 되어 있는데, 만일 대륙으로 나가 외인들 앞에서 섬에 대한 비밀을 발설하게 될 시에는 그 머리카락이 저절로 불 타면서 멀리 있는 그에게 마법적인 고통을 가했다. 죄의 정도가 심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고통이었다. 그걸 결정하는 것은 오직 그 비밀스러운 그릇의 재량이었다. <섬>은 북쪽 바다에 있는 네 개의 큰 섬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전체 규모는 엘베 섬과 화이트 크리스탈 제도를 모두 합친 것만큼 이나 컸다. 그러나 곳곳에 산맥과 화구가 있어서 실제로 살아갈 수 있는 땅은 그리 넓지 않았다. 가장 큰 섬은 기억(Memory), 두 번째는 침묵(Silence)이라고 불렸다. 두 섬 사이에 위치한 두 개의 작은 섬은 남쪽의 것은 상실 (Lose), 북쪽의 것은 기원(Prayer)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대부분 머무는 곳은 기억섬이었고, 다른 섬들에는 방어용 성곽이나 감시 초소 비슷한 것만이 세워져 있고, 섬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은 자들이 고대로 그곳을 지켰다. 그리고 그 모든 섬을 합쳐 순례자들이 일시적으로 머무는 고향, 그곳을 그들은 <달의 섬(Moon Island)>이라고 불렀다. “바람이 분다.” 갑자기 이야기를 멈추고 손바닥을 세워 쳐들고 있던 단센이 이윽고 말했다. 보리스는 무엇을 보아야 할지도 모르면서 하늘을 살폈 다. “바람은 죽 불고 있었잖아요?” “그런 바람이 아니라, 나쁜 바람이 분다.” 무엇을 보고 그런 걸 알 수 있는지 보리스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았지만, 그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나쁜 바람이라, 폭풍을 말하 는 것일까? “형님을 깨워라.” 보리스는 잠든 지 세 시간정도 된 이실더를 살살 흔들어 깨웠다. 이실더는 잠깐 웅얼대더니 이윽고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 다. 그러더니 단센과 똑같은 말을 했다. “나쁜 바람이 부는군.” 일정한 무늬를 그리던 잔물결이 이리저리 겹치며 부딪치기 시작했다.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돛대를 붙잡았지만 갑자기 머리 위에서 이실더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흠칫 놀라 놓치고 말았다. “이 꼬마 녀석아, 이제야 겁나는 게 있는 거 같으냐?” 겁나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니었다. 정말로 오랜만에, 보리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구나, 하는 어린아이다운 두려 움에 사로잡혀 몸을 떨었다. 그 때 한쪽 뱃전으로 밀려든 물결이 드러난 뺨까지 차갑게 부딪쳐 왔다. 이 아래에는 인간의 키로는 몇 백 명을 더해도 부족할 만큼 깊은 물이 있을 텐데, 그것이 한 번 뒤집혀 일어난다면 조개껍질 같은 작은 배 따위,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이 너무도 분명했다. 그런데 잠시 후 둘러보니 자신을 제외한 다른 두 사람은 전혀 태도가 달랐다. 곧 다가올지도 모를 폭풍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거나, 쉽게 헤쳐 나갈 수 있다는 듯 자신만만한 태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마치 자신도 한 명, 바다도 한 명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진지하지만 확고한 눈빛을 가지고 주위를 살폈다. 그것은 렘므 뱃사람들과도 다른 태도였다. 뱃사람이란 바다가 삶의 터전이자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인 까닭에 어떤 상황에서도 바다를 이들처럼 오만하게 쏘아보 는 일이 없었다. “어떻소, 형님.” “시작해 볼까.” 시작하는 것은 이실더가 아닌 단센이었다. 그는 두 손을 가슴 쪽으로 모으더니 조용히 합장하고 짐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새 배는 높아진 파도를 두 번이나 솜씨 있게 타넘고 전진했다. 세 번째 큰 파도가 다가왔을 때 이실더는 재치 있게 배의 방향을 조절해서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보리스는 온 몸이 와들와들 떨려 어디를 붙잡고 지탱해야 좋은지 모를 지경이었다. 육지에서만 살아온 그로서는 이런 식으로 바닥이 순식간에 몇 미터씩 높아졌다 낮아졌다를 반복하는 상황에 전혀 익숙해질 수가 없었 다. 몸을 가누기는커녕 정신조차 주체하기 힘들었다. 그 때, 단센의 입이 열렸다. “검은 덩굴 엮어 긴 머리 드리운 흰 얼굴 여인이 아래를 굽어보고 땅과 물의 일이 아주 멀다 말하니 그 거리 가히 신과 인간의 거리라 바다뱀의 흉폭함에 비할 파도를 보매 새끼양 마냥 상냥히 뛰논다 말하고 대지가 뒤흔들려 갈라짐을 들으매 조약돌 부딪쳐 손놀음 한다 말한다“ 거세어진 바람과 철썩이는 파도 소리, 그리고 우렁차게 말하는 단센의 목소리 때문에 보리스는 반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단센의 손에는 수인이 맺어지는 순간, 강한 울림 같은 것이 공기를 찢고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흡사 거대한 쇠징을 있는 힘껏 울린 것 같은 음파였다. 그러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타아아아...타아... 하는 듯한 울림이 계속해서 사방을 메웠지만 그것을 들은 것은 귀가 아닌 살갗, 그리고 온 몸이었다. “<기원(Prayer)>이라는 거다. 섬사람들 가운데 몇 명은 반드시 가지고 태어나는 힘이지.” 이실더는 혼자서 배를 지탱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와중에서도 보리스에게 그렇게 말했다. 보리스는 돛대조차 꺾을 듯 맹렬히 부는 바람에 질린 나머지 아예 바닥에 엎드려 있었기 때문에 이실더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고생은 오래가지 않았다. 잠시 후, 보리스는 거짓말처럼 배의 진동이 멎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기다시피 몸을 일으켜 바다와 하늘을 보았다. 놀란 감정을 뭐라 토로하기도전에 단센이 유쾌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역시, 형님은 <항해자>란 말요. 형님의 배 다루는 솜씨를 파도인들 당하겠소.” 이실더도 웃으면서 대꾸했다. “어떤 인간은 주어진 이름 때문에 오히려 거기에 맞는 삶을 살게 되곤 한다지.” 심각한 위기를 넘긴 직후였지 때문이었을까, 보리스는 그 말이 마치 자신에게 들어맞는 말인 양 느껴졌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보름 이상을 항해해 갔다. 작은 무인도에서 잠시 쉴 기회가 있었다. 횡단하는데 걸어서 한 시간이면 충분할 듯한 작은 돌섬에는 곳곳에 돌바닥을 파낸 듯한 자국이 몇 군데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어김없이 기름 먹인 가죽으로 단단히 포장된 유용한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찢어진 돛 대신 사용할 범포, 갈라진 배 바닥을 메울 역청, 돌처럼 단단하게 말린 과일과 육포, 그리고 식수도 있었다. 무인도를 출발하자 이실더와 단센은 지금껏 동북쪽으로 잡았던 진로를 남동쪽으로 틀어 하루 동안 내려갔다. 다음날 낮 무렵 드디어 그들이 찾던 것이 나타났다. 해류였다. 빠른 해류가 그들과 배를 휘감아 순식간에 다시 북쪽으로 데려갔다. 해류는 놀랄 만큼 빨랐고, 바람조차 딱 적당해서 그들은 오랜만에 쾌적한 항해를 했다. 바람을 충분히 받은 돛은 흰 새의 날개처럼 듬뿍 펼쳐진 채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한동안 보리스는 추위조차 잊은 채 작은 배의 속도에 경탄하고 있었다. 실제로 추위는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이미 3월도 끝물이었다. 4월로 접어든 첫날이었다. 한밤중이었는데 보리스는 문득 이상한 것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 누운 채로 반시간 정도 생각해 보니 배의 움직임이 좀 이상했다. 아주 큰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깼니?” 이실더가 고물 쪽에 앉아 가만히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아셨죠?" "눈뜨는 소리가 들렸어.“ “......” 보리스는 몸을 일으키며 농담을 주고받을 준비를 했다. 그 때 이실더가 다시 낮게 말했다. “조심해라.” “뭘요?” 이실더는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찾는 것처럼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실체가 있는 것을 찾는 듯도, 또는 없는 것을 찾는 듯도 했다. “여기부터는 이제 섬의 영역이야. 상륙하게 되면 나와 단센 외에 처음으로 섬사람, 즉<순례자>를 만날 수 있게 될 거다.” 보리스는 조심스럽게 되풀이해서 물었다. “그런데 뭘 조심하죠?” “사람을. 사람이 가장 두려워.” 보리스는 하품을 한 번 하고 나서 말했다. “난 당신이 제일 무시무시한걸요.” “나처럼 관대한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그래, 이 녀석아.” 보리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은 이 먼 곳까지 나를 따라오게 했죠. 내게 다른 선택을 할 마음조차 들지 않게 만들었죠. 뭐. 고향으로 돌아가야 된다거나 하는 생각은 없었지만, 새로운 고향을 갖게 되리란 생각도 한 적 없는 저인데 이렇게 낯선 집단에 스스로 소속되겠다고 마음먹게 했죠. 되새겨 볼수록 무시무시하군요. 내게 당신과의 관계를 위해 자유의 일부를 맞바꾸게 했어요. 탓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하고 싶도록 만들었어요, 당신은.”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만 있던 말이 어둠을 빌려 쉽게 흘러나왔다. 이실더는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마치 어린 소녀로부터 예상치 못한 애정 고백을 받고 당황한 젊은이처럼. 이윽고 이실더는 입을 열어 천천히 말했다. “옳은 일인지는 아무도 몰라. 하지만 말이지, 시작한 이상 끝을 보라고 나는 말할 테다. 낯선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외면당하면 너는 지쳐 쓰러질까?” “아마도 그렇겠죠. 좀 쓰러져 있다가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요.” “하지만 비척비척 일어나면서 나를 원망하지 않을까.” “그게 겁나요?” 상황이 거꾸로 바뀐 꼴이었다. 보리스는 자신이 아니라 마치 자기보다 훨씬 나이도 많고 본래부터 섬사람인 그를 걱정하는 듯한 말 투였다. “겁내지 말아요. 삶은 한 순간에 불과한 건데 뭐가 검나나요.” 이실더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이미 그리 조그마하지는 않은 녀석을 빤히 보다가 대뜸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이 자식이 남의 말을 훔쳐서 도로 가르치려 드네.” 보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직은 따라하는 것이 적당한 나이잖아요.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거기다 자기 합리화까지. 아주 못쓰겠군 그래.” “잘 됐네요. 본래 아무 쓸모도 없거든요. 섬에 데려다가 말뚝으로나 쓰면 어떨까요.” “말뚝으로 쓸 장작이 있으면 몸이나 데우겠네. 거기가 얼마나 추운 곳인데.” “아뇨, 실은 말뚝이 되는 것이 꿈이에요. 세게 꽉꽉 박아서 까딱도 하지 않게 되면 정말로 멋질 텐데.” 이실더는 고개를 흔들다가 말했다. “너, 정말로 그 섬에 적응하기로 마음먹은 거냐? 어떤 데인지도 다 모르면서?” 보리스는 짐짓 턱을 높이 쳐들었다. 이실더 앞이 아니라면 결코 짓지 않을 짓궂은 표정과 함께. “그렇게 쉽게 아무거나 결정하는 사람은 아니라고요. 굴레를 지게 될 거랬죠? 아예 말뚝에 단단히 매여 있을 셈이에요.” 이실더는 말이 없었다. 평소 같으면 <요 녀석아, 어디서 잘난 체야>하며 볼을 꼬집어도 몇 번은 꼬집을 텐데 그냥 보리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보리스 역시 평소와는 달리 안 하던 장난까지 치며 일부러 너스레를 떤 셈이었다. “제발 계속되기를.” 짧은 말이라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했다. 그러나 이실더는 이제 한결 단호해진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아니, 계속되게 해야겠지. 근거 없는 희망도, 용기도, 절반은 네 어리석음, 그리고 절반은 내 욕심으로 여기까지 왔으니까 분명 공동 책임이다. 단단히 협력해 보자, 얼마나 단단한 바위를 부술 수 있을지. 끝까지 네 곁을 떠나지 않을 테니까 말이지. 그러니까 .” 이실더는 갑자기 손을 내밀어 보리스의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너도 내 곁을 떠나지 말아라.” 단순히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실더는 맹세를 하고 있었다. 소년은 비록 깨닫지 못했지만, 지켜내고야 말겠 다고 자신에게 굳게 맹세하고 있었다. 이 일이 일어나도록 한 것은 결국 그가 소년을 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숨을 틔울 작은 숨구멍으로 곁에 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 자신이 그를 보호할 차례였다. “썰물이 오기를 기다리는 거다.” 그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지며 되풀이되었다. “언젠가는 썰물이 올 테니까.” “썰물이 되면 걸어서 돌아가죠. 넓은 바다도 걱정하지 않아요.” 둘은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은 채 작게 미소 지었다. 잠시 후 이실더가 속삭이듯 말했다. "썰물섬(Ebb Isle)이다." 그것은 분명 섬의 이름이었다. 새벽녘에는 뾰족한 바위 절벽만 보이던 것이 간조가 되자 몇 백 미터에 달하는 해안선을 가진 섬으로 변했다. 섬의 상부는 날카로운 바위가 대부분이어서 썰물 때만 드러나는 모래사장 없이는 어떤 배도 섬에 발을 들이기 힘들 듯한 섬이었다. 그런 까닭에 순례자들이 붙인 이름도 썰물섬이었다. 이 섬의 이러한 특징은 여러 가지 특별한 장단점을 만들어냈다. 일단 밀물이 되면 웬만큼 가까이 지나가기 전에는 이곳이 상륙할 만한 섬이라는 것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므로 비밀스런 통로의 길목 역할을 하기에는 조건이 매우 좋았다. 그러나 썰물이 되어 배를 대고 나면 섬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해안선이 남아 있는 동안에 불과했다. 그 이상 머물렀다가는 해안에 묶어 둔 배가 침몰하거나 떠내려가 버렸다. 밤과 아침의 경계가 새파란 빛을 내며 하늘 전체로 번져갔다. 거무스레한 돌투성이 실루엣 너머로 무른 보랏빛 구름들이 작게 덩어리진 것이 보였다. 그 위로 펼쳐진 것은 실로 기이한 빛깔의 하늘이었다. 청 보랏빛으로 빛나는 구름 무리가 하늘 가운데 부챗살 같은 경계를 그으며 뻗어나갔다. 신의 다섯 손가락처럼 찬란한 곡선들, 그 사이에 말갛게 젖은 푸른 구름들이 번져 있었다. 하늘 전체에서 거대한 커튼을 걷기 직전인 것 같았다. 커튼 너머는 낮의 세계, 안쪽은 밤의 세계. 배는 해안을 향해 미끄러져 갔고, 머리 위로는 회색과 보라와 청색의 커튼 오로라 같은 하늘이 서서히 개어났다. 보리스는 고개를 젖혀 오랫동안 하늘을 바라보았다. 썰물섬, 오랫동안 기억될 듯한 만남이었다. 섬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해안에 낯선 배 한 척이 대어져 있는 것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썰물이 시작된 후 들어온 배일 것이 분명했다. 보리스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얕은 물에 이르자 세 사람은 배에서 뛰어내려서 무릎 언저리까지 차는 물 속을 걸어 섬에 상륙했다. 단센이 삐죽이 튀어나온 돌을 하나 골라 배와 연결된 밧줄을 묶는 동안 이실더는 감회가 새로운 듯 섬의 경관을 둘러보고 있었다. 경관이라는 것은 별 것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밀물이 되면 절반 가까이 잠겨 버리는 곳에 서 있는지라 주변은 온통 해초며 물이끼, 조개를 비롯한 작은 바다 생물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보리스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그는 바닷가 출신이 아니었으므로 물이 빠져 나간 해변에서 놀아 본 경험은 없었다. 그 또래 소년에게 이런 곳은 온통 흥미를 끄는 것 투성이였다. 불행히도 이실더는 보리스가 해변에서 놀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손을 잡아끌어 울퉁불퉁한 바위산이 있는 쪽으로 올라갔다. 밀물이 되어도 바닷물 속으로 잠기지 않는 그곳이었다. 가까이 다가가고서야 알았지만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바위벽으로 보이는 이곳은 일종의 자연 성채였다. 중간쯤 올라가자 튼튼한 쇠문이 달린 것이 보였다. 문에는 손잡이 대신 타원형의 흠집이 남겨져 있었다. 이실더는 거기에 손바닥을 얹고 입 속으로 뭐라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덜컹, 하고 문이 열리자 둘은 안으로 들어섰다. 마법으로 열리고 잠기는 문이었다. “단센은요?” “해변에 남아 있을 거야.” “같이 안 가나요?” “모든 사람이 다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아니야.” 가끔 물이 들어온 일도 있는 듯 습기가 남아 있는 돌 통로를 따라가며 보리스는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실더와 단센은 친형제처럼 친밀해 보였는데, 어째서 이실더가 갈 수 있는 곳에 단센은 갈 수 없는 것일까? 그러나 그것은 그가 섬으로 가서 겪게 될 낯선 생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에 불과했다. 통로는 그리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지 않았다. 발에 걸리는 돌부리나 벽에 난 흠집은 물론이고, 천장을 비롯한 곳곳에 크고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어서 당연한 듯 빛이 새어 들어왔다. 아마 작은 짐승들도 드나들 수 있을 듯했다. 이미 해가 떠올랐기 때문에 그들이 걷는 길은 여기 저기 빛으로 흰 얼룩이 졌다. 벽에는 가끔 특이한 조개껍질 같은 것이 본래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박혀 있었다. 길은 성채 꼭대기로 통했다. 창고로 쓰이는 몇 개의 방도 있는 듯했지만 들어가지는 않았다. 발소리가 사방을 울리는 것에도 점차 익숙해졌다. 위로 갈수록 주위는 점점 더 밝아졌다. 드디어 성채 꼭대기에서 마지막 계단을 딛고 오르는 순간 보리스는 머리 위에 천장이 없는 것을 보고 문득 놀랐다. 서늘한 바람이 머리 위를 스치고 있었다. “자, 봐라.” 사방 스무 걸음 정도 되는 정상은 약간 비스듬하게 경사가 져 있었다. 일곱 개의 길쭉한 돌이 원을 그리며 세워진 것이 보였다. 그들은 바로 그 돌기둥들의 중앙 바닥에 뚫린 구멍에서 걸어 나와 있었다. 정상 아래로는 거머잡을 데 하나 없어 보이는 절벽과 바위 비탈만이 먼 해변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머리 위는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텅 빈 공간뿐, 지탱하기 힘든 넓이와 깊이를 가지고 뻗어난 푸름의 곡선 외에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손을 뻗어 잡고자 먼 데 눈 둘 곳이라고는 태양이 아니면 달, 또는 별뿐인 곳일까. 너무 작아서 잃을까 두려운 것이 있다면, 너무 거대해서 가누기 힘든 것도 있었다. 세상 전부를 내려다보고 선 듯, 그러나 그 세상에는 본래 아무 것도 없었던 듯, 주어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듯, 보아도 보았다 말할 수 없을 듯...... “저기 저 곳에 우리가 타고 온 배가 있다. 그곳에서 다시 배를 띄우면......” 이실더의 손이 북동쪽으로 뻗어나갔다. “저쪽이다. 섬으로 향하는 배가 가게 될 길이지.” 아직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도, 그리고 아직 누구인지 모르는 낯선 방문객도 배를 띄우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만일 배가 뜬다면 그쪽 절벽은 비교적 급경사여서 이곳에 남은 채로도 뱃전에 선 사람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지도 몰랐다. 사방으로 트인 이곳은 섬으로 접근하는 배를 발견하기에는 최적인 터였다. 보리스의 눈이 아무 것도 없는 물길을 더듬고 있는 동안, 등 뒤에서 갑자기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이게 누군가? 정말로 돌아온 건가?” 이실더가 몸을 돌리고 보리스도 이어 뒤를 돌아보았다. 때마침 바람이 갑작스레 뒤에서 몰아쳐 두 사람의 긴 머리칼을 온통 흩어 놓았다. 둘은 거의 똑같은 동작으로 시야를 가린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헤치면서 상대방의 얼굴을 보았다. “히랏세이!” 이실더가 놓아버린 머리채가 다시 앞으로 날려 넘어왔지만, 그는 개의치 않은 채 달려가 낯선 남자의 어깨를 덥석 끌어안았다. 보리스는 돌기둥 하나를 짚은 채 바람 속에서 휘날리는 두 사내의 머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참으로 비슷한 갈색이었다. “3년만인가, 아니 4년만이군. 자네, 작년에 루그란 쪽으로 왔었다면서? 그때 나는 다루마치님을 만나러 하이아칸에가 있었지.” “나는......” 그 때 히랏세이라고 불린 남자는 보리스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넌 누구니? 내가 오래 섬을 떠나 있어야 하는 임무를 받은 사람이라 어리석게도 네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구나. 혹시 어려서 날 본 기억이 있니?” 보리스는 약간 당황하면서 저도 모르게 말했다. “아, 아뇨......” “다행이군. 피장파장이 되었으니 말이야. 순례자의 아이도 못 알아볼 정도로 내 모리가 나빠졌다니 이거 심각한 노릇이잖아. 네가 어렸을 때하고 유난히 다른 모습으로 자란 게 아니라면 말이다.” 굉장히 친근한 태도였고, 또한 알아보지 못해 미안한 듯 열없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보리스는 그런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우물쭈물하며 이실더를 쳐다보았다. “참, 이름이 뭐냐? 어머니는?” 이야기가 순식간에 진행된 탓인지 이실더 역시 잠시 경황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제 정신을 차린 그가 말을 막고 히랏세이를 정면으로 보며 말했다. “이 애는 순례자의 아이가 아니네.” “뭐라고?” 단순히 놀란 정도가 아니라, 당황하다 못해 분노한 표정이 그의 얼굴 전체에 퍼져나갔다. 그는 심지어 말마저 더듬었다. “섬의 아이가 아니라고? 그럼 누구지? 아니,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자네가 데려왔나?” 보리스는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변하는 것을 보며 스스로도 모를 예감으로 움찔하여 뒤로 반 발짝 물러섰다. 처음에는 누구인지 몰랐고 지금도 역시 모르는데 그 태도의 차이란 것은... 우연히 만난 길 잃은 아이에게 친절하게 도와줄 듯 말하다가 갑자기 돌변하여 내치는 것에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유 불문하고 호의적이었다가, 이유 불문하고 적대적으로 변해버렸다. 순례자의 아이가 아니라는 단 한 마디만으로. “설명을 해 봐?” “순례자가 되려는 아이네.” 히랏세이의 얼굴이 세 번째로 변했다. 이제 적대감 대신 혼란이 그의 얼굴을 덮었다. “이, 이런... 내가, 아니, 나는 지금까지...... 아, 아니네. 그만두지. 하, 이것 참.” 그러나 보리스를 바라보는 눈이 처음과 같은 것으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실더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다짐하듯 다그쳐 물었다. “자네 말이니 내 한 마디로 믿겠네만, 분명한 사실이겠지? 입회인은 누군가?” 이실더가 맥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백발의 기원자, 단센이다.” “흐음, 흐으으음... 만일 사실이 아닐 경우 일어나게 될 일에 대해서는......” 이실더가 단정 짓듯 단호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잘랐다. “나도 외인을 이곳에 무작정 데려올 정도로 무경우한 인간은 아니네. 비록 바다에서 우연히 구조했다 할지라도, 살려 데려올 수 없다는 것쯤이야 누구나 아는 일 아니겠나.” 보리스는 눈을 크게 뜬 채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 그도 더 이상 불안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대신, 그가 낯선 곳으로 왔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트라바체스에서 아노마라드로, 또 렘므로 갔지만 그것은 모두 대륙의 나라였고 서로의 존재를 납득하고 있는 나라였다. 이제 그는 외부인 을 철저히 적대시하는 곳에 소속되기 위해 가고 있었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제 분명히 실감하게 된 사실이었다. 섬은 그를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4. 자신을 모르는 자 흙이 푹 젖어 있었다. 보리스가 처음 섬의 땅을 밟으며 느낀 것은 이것이었다. 얼어 있다가, 방금 녹은 듯, 흠뻑 젖어 있다. 기억섬 안에서 배를 대는 곳은 한 군데로 정해져 있었다. 큰 배는 눈에 띄지 않았고 모조리 그들이 타고 온 것과 비슷한 자그마한 배들뿐이었다. 배가 선착장에 닿는 동안 보리스는 멀찍이 떨어진 수평선에서 순례자의 네 섬이 고요히 떠올랐던 때를 회상하고 있었다. 그 섬들은 난데없이 불쑥 나타나지 않았다. 황금빛 긴 띠로 시작해 지평선을 감싸고 떠오르는 태양처럼, 가장 높은 봉우리로부터 야트막한 해안선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 길쭉하게 누운 윤곽이 시야를 가득히 채울 때까지 그는 눈을 떼지 않고 그 섬을 바라보았다. 배는 기억섬 남쪽 항구로 미끄러져 들어가 드디어 멎었다. 배에서 내릴 때 검은 머플러를 두른 세 남자가 선착장에 서 있다가 다가와서 조용한 말씨로 그들의 귀환을 축하한 뒤 보리스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다. 이실더가 나직이 몇 마디 말하자 그들은 놀라움과 경계심을 동시에 담은 눈길로 작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환영하는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잘 왔다는 식의 말은 빈말로도 하지 않았다. “<지팡이의 사제>께 먼저 보고해 두겠소.” “이것은 매우 드문 일이니까.” 이실더는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 지었다. “살아생전 못 볼 일도 아니지 않소.” 그러나 상대는 냉랭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당신이니까 저지르는 일이오, 나우플리온.” 보리스는 생소한 이름을 들으며 의아한 눈빛으로 곁에 선 자를 쳐다보았다. 낯선 이름 <나우플리온>으로 불린 이실더는 <황당하 냐?>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씩 웃었다. 약간 쑥스러운 듯한 표정도 함께였다. “들었지?” “그것도 당신 이름이에요?” 보리스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앞장서 걸어가려던 검은 머플러의 남자들이 동시에 몸을 돌려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엇을 실수했는지 알 수 없는 보리스는 당황해서 눈썹만 약간 올렸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마치 지적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다시 몸을 돌려 그대로 걸어가 버렸다. 단센이 먼저 육지로 오르며 나직이 말했다. “형님은 이곳에서 고귀한 지위를 가지고 있단다. 말을 조금쯤 조심하는 것이 좋을지도 몰라.” 단센은 먼저 <지팡이의 사제>를 만나겠다고 말하며 검은 머플러의 남자들 가운데 한 명과 함께 빠른 걸음으로 앞서 가버렸다. 뒤에 남은 보리스와 이실더는 다른 남자들을 따라 선착장을 벗어나 앞으로 나아갔다. 보리스는 점차 이곳의 풍경이 기본적으로 썰물섬의 그것과 비슷한 느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자연은 필요한 부분만 최소한도로 다듬어져 있었고, 나머지는 거의 손질하지 않은 야생 그대로였다. 선착장을 벗어나자 드문드문 풀과 나무가 솟은 흙길이었고, 길은 그대로 숲 속으로 이어져 들어갔다. 숲은 매우 먼 곳까지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직접 그 안으로 들어서기 전까지는. 보리스는 자신이 숲 속에 들어와 있다고 느끼는 순간, 눈앞에서 갑자기 나무들이 사라지며 넓은 고원이 펼쳐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 후로도 얼마간 그는 이 비밀을 몰랐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매우 긴 길이었다. 그 때 보리스가 뒤를 돌아보았더라면 바로 뒤에 수천 그루는 될 듯한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찬 광대한 숲과, 하얀 돛배들이 장난감인 양 떠 있는 먼 바다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몇 걸음 걷지도 않은 그가 어느새 고원이라 불릴 정도로 높은 곳에 이르러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고원 뒤로 하얀 눈을 쓰고 솟은 산봉우리 세 개가 보였다. 그 주변은 하루 안에 가 닿을 수 없을 듯 멀어 보이는 험준한 산지였다. 섬은 생각보다 상당히 컸다. 이어 그들은 고원의 남쪽 절반을 둘러싼 연갈색 벽과 마주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그것은 갈색이긴 해도 갖가지 밝기를 가진 다양한 돌들로 만들어져 있었다. 언뜻 보아도 대략 높이 10미터는 넘어 보였다. 자연의 돌을 가능한 한 이가 맞도록 쌓아올려 만든 것이기에 표면도 매끈하지 못하고 곳곳이 울퉁불퉁했다. 그러나 방어 용도의 성은 아닌 듯한 것이 그 높이에도 불구하고 높은 곳에서 유리한 방어를 할 수 있는 구조가 전혀 아니었다. 돌출된 탑이나 톱니형 흉벽 따위는 고사하고 두께가 1미터도 단 되는 벽 위에는 사람이 올라갈 만한 공간조차 없었다. 오던 길과 연결되는 위치에 수레 두 대가 나란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큰 아치형 입구가 뚫려 있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입구를 닫을 수 있는 문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입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검은 머플러의 남자 가운데 한 명이 손에 무언가를 쥔 채 가슴 가운데서 크게 십자를 그리고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그 때까지 보이지 않던 투명한 막 같은 것이 거품처럼 너울거리며 좌우로 갈라져 열렸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섰다. 마법일까, 들어서면서 보리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도 매우 일상화된 마법. 그러나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보리스는 당황해서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여, 여기는......”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보리스의 눈에 보인 것은 사람이 살 수 있게 생기기는커녕, 곳곳에 크고 작은 돌무더기들만이 흩어진 곳이었던 것이다. 집으로 만들려다가 멈춘 듯, 또는 만들어졌던 집들이 오래 전에 수명을 다한 듯, 부서진 돌 조각들이 무덤처럼 곳곳에 솟아 있었다. 그 사이사이로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팔을 벌려야 겨우 감싸 안을 수 있을 듯 육중한 원형 기둥들이 머리를 잃은 채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기둥들은 두 줄로 십자열을 이루며 멀어져갔다. 바닥에는 한때 매끈하게 깔려 있었을 듯한 대리석 포석이 이음매가 깨지고 곳곳이 움푹 꺼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부서진 돌 틈 사이로는 악마의 손아귀 같은 정체 모를 검은 덩굴식물이 수북했다. 산 것이라고는 오직 그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끔직한 것은 끝나지 않았다. 보리스는 분명히 들었다. 그의 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포석을 밟고 돌아다니는 듯한 소리가 생생히 들려왔다. 아무도 없는데, 밤도 아닌 환한 대낮에 눈앞에 펼쳐진 폐허 위에는 보이지 않는 자들이 발걸음도 가볍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타닥, 타다닥, 타닥...... 타다다닥, 타닥, 탁, 탁, 탁. “......”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곁에 선 이실더, 또는 나우플리온의 팔을 꽉 붙들었다. 목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고, 눈동자마저 부들부들 떨렸다. 잡힌 팔을 통해 전해져 오는 불길한 기색을 느낀 남자가 재빨리 그의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왜 그래? 뭘 보고 있지?” 보리스는 한동안 대꾸는커녕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 있었다. 겨우 보리스의 입이 열렸을 때 이실더는 당장 사태를 알아차렸다. “저, 저... 소리가... 안 들려요? 저 부서진 도, 돌 위를... 뛰, 뛰어다니는 발소리......” 이실더는 보리스의 어깨를 움켜잡고 꽉 끌어안았다가 몸을 떼며 빠르게 물었다. “뭐가 보이지? 자세하게 말해 봐!” “돌무더기하고... 기둥... 검은 덩굴......” “......!” 검은 머플러의 두 남자도 보리스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도 몹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다가오더니 품에서 뭔가 꺼내 보리스의 손에 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실더가 손을 내저으며 그것을 밀쳐 버렸다. “잠깐만......” 이실더는 보리스를 뒤로 돌아서게 하더니 한쪽 손으로 소년의 두 눈을 가렸다. 그리고 다른 팔로 그의 몸을 끌어안은 채 가능한 한 침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으니까 천천히 말해 봐. 방금 본 것들. 네 눈에 보인 대로 전부다. 우리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하나씩 설명해 봐라.” 눈앞이 캄캄해지자 그를 그토록 놀라게 했던 발소리도 사라져 버렸다. 동시에 머리가 차가워지며 흥분되었던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그 즉시 그는 의심스러워졌다. 방금 자신이 본 그것이 과연 진짜였을까? 환각이나 착각이 아니고? 그러나 지금 말하지 않는다면 흡사 꿈을 꾼 것처럼 몇 분 안에 모든 것이 지워져 버릴 듯한 기분이었다. 보리스는 입을 열었다. “아무 지붕도 이고 있지 않은 둥근 기둥들이 두 줄로 늘어서서 까마득히 먼 곳까지 이어져 있죠...... 그리고 그것을 좌우로 가로지르는 또 다른 기둥의 열이 있어요. 그러니까 기둥은 십자열...... 그 사이사이에는 큰 망치 같은 걸로 일부러 부순 듯한 돌들이 흩어져 있고요. 돌은 본래 지붕 같은 것을 만들었던 것 같아요. 바닥에는 네모진 포석이 깔려 있는데 거의 다 깨졌어요. 그 사이에서 검은 식물이 올라와 자라고 있고요. 아무도 없는데, 아무 것도 살아 있지 않은데... 발소리가 들리죠. 지금은 안 들리는데 아까는 들렸어요. 아이들이 뛰어 노는 것 같은 작고 가벼운... 그런 발소리였어요. 아주 많이, 수십 명 정도가 한꺼번에 술래잡기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이실더는 보리스의 눈을 가렸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보리스는 방금 전의 풍경에서 등을 돌린 채 이실더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닥에 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이실더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쁜 것인지, 당황한 것인지, 우려하는 것인지도 잘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리 주시오.” 보리스의 어깨 너머에서 이실더가 뭔가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보리스의 손에 쥐어 주었다. 손바닥을 펴 보니 은으로 만든 작고 동그란 메달이었다. 끈을 꿰어 목에 걸 수 있도록 한쪽에 구멍이 뚫려 있었지만 끈은 없었다. 앞뒤로 매끈한 것이 아무런 표식이나 글씨도 없었다. 이실더가 불안한 듯한 한숨을 내쉬면서 보리스를 다시 돌려 세웠다. “아......” 두 번째의 충격이었다. 방금 전에 보았던 광경은 눈앞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겨울나무들과 그 사이사이에 자리 잡은 야트막한 집들이 보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무심하게 오가고 있는 살아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닥에는 포석은커녕 흙뿐이었고, 기둥 따위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검은 덩굴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 보리스가 말문이 막혀 있는 동안 이실더가 뒤로 다가와 어깨에 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방금 전에 봤던 것, 잘 기억해 둬라.” 보리스는 스스로 겪은 놀라운 일에 멍해진 나머지, 검은 머플러의 남자들이 조금 전과는 사뭇 달라진 시선으로 그를 보고 있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했다. 나무들이 워낙 곳곳에 많아서 어느 정도 크기의 마을인지도 잘 짐작되지 않는 고요한 곳이었다. 저 이름 모를 호수에서 비추어 보았던 영상과는 달리 지금은 겨울이었기 때문에 마을 뒤로 뻗어 올라간 산비탈은 눈 녹은 회색을 띠고 있었다. 마을의 중심부까지 걸어 들어가자 비교적 높직하게 우뚝 솟은 사각형의 건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보리스는 멈춰 선 채로 건물의 희한한 외관을 올려다보았다. 공회당이 아닌가 싶은 이 석조 건물은 방금 전에 환각에서 본 기둥들을 절반 정도로 작게 줄여 놓은 듯한 크기의 기둥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기둥들 안쪽에 다시 상자 모양의 큼직한 건물이 있었다. 여전히 문도 없이 그냥 뚫린 입구를 중심으로 사면에 세워진 벽들에는 온통 무엇인지도 모를 부조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어서 보는 눈이 다 어지러웠다.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섬에서 본 것들 가운데 처음으로 마주한 장식다운 장식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그 어지러운 장식은 섬 전체에 감돌고 있는 분위기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섬의 느낌은 무어라고 해야 할까. 단순함과 쓸쓸함, 곳곳에 문도 없이 뚫려 있는 입구들에도 불구하고 닫힌 느낌인 이곳. 일행은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사각형의 널찍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탁자 하나, 의자 하나도 없는 방이었다. 양쪽 벽에는 창문이 뚫려 있어서 햇빛이 들어왔다. 바닥 한 가운데를 보니 일곱 개의 원이 그려져 있었다. 푸른 삼각형과 붉은 타원 따위로 이루어진 다종다양한 무늬가 들어찬 일곱 원들은 또한 전체적으로 하나의 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 중 두 개의 원에 두 명의 사람이 각자 방석을 깔고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순례자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안식이여!” 한 명이 그렇게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또 한 사람은 좀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하루살이에게도 돌아가 죽어야 할 잎사귀가 있다. 귀환을 축하하네, <검의 사제>나우플리온.” <검의 사제>는 성큼성큼 걸어가 환영하는 두 사람과 각각 세 번의 포옹을 나누었다. 보리스는 다른 두 남자와 더불어 입구에 선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일어섰던 사람은 깡마른 체격에 마흔 남짓해 보이는 중키의 남자였다.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반들반들한 머리통과 유난히 두터운 입술이 보리스의 눈길을 끌었다. 그는 목에 번쩍이는 금빛 메달을 걸고 있었는데 상당히 묵직해 보이는 메달의 크기는 손바닥보다도 컸다. 두 번째 사람은 먼저 남자보다는 좀더 나이 들어 보이는 마흔 중반 정도의 여자였다. 그녀가 일어선 자리에는 큰 지팡이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크리스탈처럼 투명하게 반짝이는 돌이 초승달 모양으로 깎여 지팡이 머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이 또한 주먹 세 개를 합친 것만큼이나 큼직했다. “이렇듯 돌아와 두 분을 뵙게 되어 기쁘군요.” “진심이냐? 물론 아니겠지?” 그 나이치고는 활달하고 시원스런 목소리를 가진 지팡이 여자가 웃으면서 농담 반, 진담 반의 첫 마디를 던졌다. 나우플리온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을 뿐이지만 메달의 남자가 오히려 불만스런 어조로 말을 받았다. “그런 말은 마오. 설마 다시 떠나리라고는 이제 생각지 않으니까. 잘 왔고, 검은 사제.” “메달의 사제께서도 건강하신 듯 보이는군요.” 나우플리온은 몸을 돌렸다. 세 사람의 눈이 동시에 보리스에게가 닿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지팡이를 가진 여자였다. “저 아이냐? 얘야, 이리로 오너라.” 보리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똑바로 걸어서 그들 앞까지 갔다. 그리고 허리를 굽히면서 말했다. “보리스 진네만입니다.” “허!” 메달을 가진 남자가 불만스런 듯 첫 마디를 터뜨렸다. 그러자 지팡이의 여자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애, 새 이름을 지어야겠구나. 그 이름은 너무 대륙 냄새가 난다. 견습 입문례를 행하고 왔다고 에니오스에게서 들었다. 하지만 곧 다시 정식 입문례를 행해야겠지.” 여자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내 이름은 데스포이나라고 한단다. 흔히들 데시라고 부르지. 너도 그렇게 부르렴.” 그러면서 데시는 메달을 가진 남자를 쳐다보았다. 어쩔 수 없이 그 남자도 입을 열어 말했다. “나는 테스모폴로스다. 일곱 원의 수호자 가운데 한 명인 <메달의 사제>로서 이후 네 행동을 소상히 지켜볼 것이다.” 데시가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테스모라고 부르면 된단다. 그렇게 긴 이름을 늘 발음하는 건 괜스레 삶만 숨 가쁘게 만들뿐이지.”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가 곧 멈췄다. 테스모가 불쾌한 듯 고개를 돌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지팡이의 사제>인 데시, <메달의 사제>인 테스모, 그리고 그가 오랫동안 알았던 남자는 <검의 사제>나우플리온이라고 했다. 대강의 분위기로 보아 이들이 섬의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는 높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분명한 듯했다. 보리스는 새삼스레 긴 갈색 머리를 수건으로 질끈 묶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가 어딘가 멀어 보이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보리스를 잠시 내려다보고 있던 데시가 이윽고 무언가 마음속으로 결장한 바가 있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네 이름은 내가 지어 주도록 하마, 아이야. 이름을 지어 받을 때까지는 누구에게도 자신을 소개하지 말도록 해라. 이제까지의 네 이름은 이제 너와는 관계가 없어졌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거라. 너는 이제 <자신을 모르는 자>이다.” 그 날 밤 보리스의 꿈속에서는 불타는 저택이 나타났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항쟁의 밤, 그 날의 진네만 저택은 횃불에 둘러싸이고 환수 크리갈의 독액에 부식되어 부서졌을지언정 불에 타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보리스의 꿈에 나타난 저택은 온통 검붉은 불꽃에 휩싸여 있었다. 재가 되어 무너지지 않고 서 있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보리스는 홀로 우뚝 선 채 저택을 올려다보며 원초적인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것이 아무도 없이 혼자라는 데에서 오는 두려움인지, 저택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인지, 또는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는 것을 잃어버리고 상실감에 못 견뎌하고 있는 것인지도 불확실했다. 다만 감정은 녹은 초콜릿처럼 진하고 검었다. 무슨 일이 터질 듯한 기분을 도저히 못 견뎌낼 지경에까지 이르렀을 때 갑자기 마음 속, 또는 마음 밖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귀청을, 또는 가슴을 둔중하게 때렸다. 네가 달아나려 한다면 뒤따라 갈 것이다. 어디까지고, 언제까지나. 저택에서 그림자가 거대한 손처럼 뻗어 나왔다. 불길이 순식간에 아득히 멀어지면서 그림자가 그가 선 곳을 온통 뒤덮어 버렸다. 어둠 속에서 한 개의 붉은 점으로 변해 버린 저택을 바라보며 보리스는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자신을 따라올 것이 책임감인지, 죄책감인지, 애정인지, 증오인지도 모르면서. 그러나 또한 그것을 기다리면서. “이리 와! 잡아 보라니까! 얼른!” 새가 지저귀는 소리 같기도 했다. 눈가를 하얗게 적시는 햇살을 느끼며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침대에서 눈을 떴다. “달란 말이야! 돌려 줘!” “나 잡으면 주지! 나 잡으면 천재!” 처음에 그것은 전날 환각의 폐허 앞에서 들었던 발소리의 아이들이 이제 소리 내어 말하기 시작한 듯 느껴졌었다. 그러나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자 말하고 있는 것은 현실의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아주 활기차게 소리치고 있었다. “싫어... 돌려달란 말이야...... 난 못해......” “그러니까 네가 바보 땅다람쥐지. 에헤헤헤헷!”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자 까칠한 이불이 흘러내렸다. 침대 바로 옆에는 창문이 있었다. 손을 내밀어 덧문을 열어 제치고는 밖을 내다보았다. 하얗게 날이 밝아 있었다. 잠시 망설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거칠게 다듬어진 나무 들보가 머리 위에 그대로 드러난 것이 보였다. 방은 작았지만 집은 작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자고 일어난 이 곳은 <지팡이의 사제>데시의 집이었다. 어제 오후에 데시 본인의 인도를 받아 이 방에 들어온 후로 한 번도 나가지 않은 채 식사도 여기서 하고 잠도 여기서 잤다. 데시는 이름이 생기기 전에는 가능한 한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창 밖에서는 세 명의 아이가 한 명을 피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실은 피한다기보다 그들이 뒤따라오는 한 명을 놀리고 있다는 말이 맞았다. 달아나는 소년들은 손 때 묻은 산양가죽 주머니 비슷한 것을 쥐고 뛰다가, 잡힐 듯 하면 다른 동료에게 던져 줘버리며 뒤쫓는 소년을 골탕 먹이고 있는 중이었다. 따라가는 아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키도 작고 형편없이 말라 있어서 그냥 뒤쫓는다 해도 다른 건강한 아이들을 잡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겁먹은 듯 커다란 눈망울을 안절부절못하고 쉴 새 없이 깜빡거렸다. “바-아-보-! 바보 땅다람쥐!” “울보 땅다람쥐야! 여기다, 여기!” 다시 주머니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창가에서 아주 가까운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옳지! 이번에는 이쪽이다! 이쪽으로 와 보라고!” 땅다람쥐라고 불리는 소년은 갑자기 곁으로 다가온 상대를 급히 잡으려 하다가 바닥에 굴러다니던 장작개비를 헛디뎌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한바탕 굴렀지만 생각 외로 벌떡 일어난 그는 놀리던 소년 한명의 다리를 꽉 부여잡았다. “돌려 줘!” “쳇!” 다리를 잡힌 소년은 당연한 듯 주머니를 다른 친구에게 던져 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잡히지 않은 쪽 발로 꼬마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아픔을 견디지 못한 꼬마는 온 몸을 고슴도치처럼 동그랗게 움츠린 채 신음 소리를 냈다. 그것은 친구들끼리의 장난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사정을 봐주지 않는 사나운 발길질이었다.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무언가 모를 섬뜩함을 느끼며 그 광경을 보았다. 그러나 발길질을 다 견딘 꼬마 <땅다람쥐>는 발딱 일어나 앉더니 눈물이 글썽해진 눈으로 소년들을 번갈아 올려다보며 사정했다. “이만하면 충분히 놀리지 않았니? 이제 그만 돌려 줘. 부탁이야.” 왜 때리느냐고 항의한다던가, 화를 낸다던가 하는 태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친구는 아니라 해도 원한관계일 리는 없을 텐데, 소년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꼬마에게 모질었다. “천만에, 난 아직 안 질렸어.” 맞은편에서 주머니를 받아 든 소년이 잔인하게 웃으며 친구에게 눈짓했다. 친구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주머니의 주둥이를 열더니 안에 든 것을 뒤집어 쏟아버렸다. 툭, 투두둑, 툭. 창 너머로 보기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돌멩이 비슷한 것들이 십여 개 가량 떨어지더니 사방으로 흩어져 굴러갔다. 아침 햇빛을 말갛게 반사하는 반투명한 돌들이었다. <땅다람쥐>는 화들짝 놀라 아픈 것조차 잊고 돌들이 떨어진 곳으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그가 울먹거리며 쏟아진 것들을 주워 모으려는데 한 명이 갑자기 달려들어 바닥에서 반짝이던 돌을 냅다 걷어찼다. 채인 돌이 수풀 속으로 날아가 박히자 소년은 휘파람을 불며 손뼉을 치고는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어때, 멋진 발차기지?” 더한 도발은 필요 없었다. 순식간에 두 소년이 마저 달려들더니 땅다람쥐의 작은 손이 더듬거리며 잡으려는 돌들을 사방 곳곳으로 차 보냈다. 이리저리 비틀거리면서도 그것을 막아보려 하는 무력한 꼬마땅다람쥐는 동네 애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떠돌이 강아지와 다를 바 없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저도 모르게 울컥하는 것을 느끼고 침대에서 뛰어내려 망토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곧장 밖으로 나가려다가 갑자기 멈췄다. 끼어들어도 좋은 것일까. 데시 아주머니는 분명, 이름이 정해지기 전에는 사람들과 마주하는 것을 피하라고 했었다. 그러나 반쯤 열렸던 문 바깥쪽에서 절반은 울음에 가까운 땅다람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소년은 방금 전의 생각을 깨끗이 지워버리고 성큼 밖으로 나섰다. 희게 쏟아지는 햇살 때문에 저도 모르게 잠시 눈을 가렸지만 곧 모든 것이 보였다. “너무해... 정말 너무해... 너희는 남이 소중하게 여기는 걸 멋대로 부숴 버리는 것이 재밌어...? 남이 지키고 싶어 하는 걸 이렇게까지 짓밟아 버릴 수 있냐고!” 한 소년이 대꾸했다. “지킬 힘이 없는 네가 잘못이야. 너 같이 약해빠진 애한테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다른 소년이 말했다. “넌 <달 여왕(Lunar Queen)>의 가르침도 몰라? 힘이 없거든 가지지도 말라고 했어.” “처음부터 아무 것도 감추지 않으면 빼앗기지도 않잖아? 앞으로는 좋은 것이 생기면 얌전히 갖다 바치란 말이야. 그러면 괴롭게 우는 일도 없지.” 마지막 소년의 말이 맺어지는 것과 동시에 <자신을 모르는 소년>이 입을 열어 말했다. “그러면 너희보다 힘센 사람이 나타나면 너희 것도 빼앗기는 것이 당연하겠군, 안 그래?” 세 소년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간에 선 소년을 쳐다보았다. 낯선 얼굴을 보며 한 명은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거렸고, 또 한 명은 참견에 대해 화를 냈다. “혼나기 싫으면 저리 꺼져!” “잠깐, 저 애는 뭐야? 너 저 애 알아?” “몰라.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모르는 아이가 어떻게 여기 있을 수 있지?” 그러나 그 질문에 답한 것은 마지막 소년이었다. “아아, 너... 어제 섬에 들어왔다던 그 녀석이구나? 너 외지인이지? 약골에 얼간이밖에 없는 대륙에서 왔지?”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그 말에 대해서는 반론하지 않았다. 다만 잠자느라 풀어놓았던 긴 머리카락을 주머니에서 낸 끈으로 돌려 묶으며 천천히 대꾸했다. “내가 어디서 왔는가는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방금 내가 한 말은 분명 너희들의 의견이었지?” 세 소년은 얼굴을 마주보았고, 다시 마지막 소년이 말했다. “참견이나 좋아하는 말라비틀어진 자식이냐? 네 말이 맞지! 하지만 우리보다 힘세려면 세 명을 동시에 이겨야 할 걸? 우리가 서로 돕는다는 것도 우리 힘이니까!” 그가 그렇게 말하자 다른 두 소년도 힘을 얻은 얼굴이 되어 눈동자를 반짝거렸다. 새로운 장난에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었다. 다른 한 명이 소리쳤다. “당연한 일이지! 덤비고 싶으면 덤벼 봐! 우리 셋이 동시에 상대해 줄 테니까!” 마을 안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세 소년이 대륙에서 왔다는 정체모를 녀석의 존재에 대해 전해들은 것은 바로 오늘 아침이었다. 마침 이곳에 있는 줄은 몰랐지만 맨 처음 기를 꺾어준 것이 자기들이라고 알려지는 것도 상당히 괜찮은 사건일 듯 생각되었다. 물론 그들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앞에 나타난 소년이 마르긴 했지만 상당히 다부진 몸매에 눈빛도 날카롭다는 것을 못 알아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기들이 셋인 다음에야 무서울 건 없다 싶었다.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그들이 한 말에 전혀 마음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망토를 약간 젖히며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 말이 물론 맞아.” 힘의 논리에 정정당당함 따위가 끼어들 틈이 있을 리 없었다. 이미 그런 문제에 대해서라면 몇 년간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느껴온 자신이었다. 물론 그들의 말을 그대로 적용하자면 자신은 실리 없는 싸움에 끼어들고 있으니 바보짓을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방금 전 작은 땅다람쥐의 절망적인 목소리에서 2년 전의 자신과 비슷한 그림자를 보았다. 힘이 없으면 괴롭힘을 당하는 것도 당연할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고통을 견디고라도 그런 그를 지켜주려 했던 사람이 있었듯, 지금의 저 소년에게 그런 사람이 있어 안 될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가 자신보다 약한 누군가를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땅다람쥐>가 불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 난... 나 같은 걸 위해서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는데......”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무표정하게 말했다. “너하고는 상관없어. 네 물건이나 찾아봐.” 자신이 형을 향해 품어왔던 것과 같은, 다루기 힘들고, 벅찬 애정 같은 것은 받게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 발짝 다가서자마자 한 소년의 목덜미를 움켜잡아 다른 소년을 향해 밀쳐버렸다. 이미 몇 년간 검을 잡아 온 그의 손아귀 힘은 또래의 보통 소년들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중심을 못 잡고 저도 모르게 밀려 쓰러졌던 소년들은 곧 다시 벌떡 일어나 공격해 왔다. 세 번째 소년이 달려들기를 기다렸다가 무릎을 올려 허벅지 안쪽을 걷어차고, 살짝 물러나며 뻗은 발로 배를 힘껏 차 버렸다. 그리고 세워 편 손모서리와 팔꿈치만 이용해서 다른 두 소년을 가볍게 쓰러뜨렸다. 솔직히 싸움이라 부르기에도 싱거울 정도였다. 세 소년들은 그에게 전혀 상대가 안 되었다. 몰려다니며 저들끼리 몸싸움이나 조금 해보았을까, 싸움의 기본조차 모르는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검은 물론이고 이실더와 함께 다니면서 다양한 체술을 익힌 바 있었다. 비록 정식 교육은 아니었고 노련한 어른들에 비할 만큼 대단한 실력자라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실전 경험으로 만들어진 반사 신경은 그 또래 소년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달려들려던 소년들은 상대방의 망토가 살짝 열리는 순간 그 안쪽에 단단히 매어진 것을 보고 말았다. “검이 있다!” “검을 갖고 있어!” 갑작스레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소년들은 더 이상 덤벼들려 하지는 않았지만 방금 전의 치기 어린 눈빛과는 전혀 다른 적대적인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며 모여 섰다. 한 명이 외쳤다. “섬 안에서 검을 가질 수 있는 건 <검의 사제>님의 허락을 받은 사람뿐이야!” 억지를 부리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이 사건에 긴장하는 동시에 흥분하고 있었다. “허락 없이 검을 갖고 다니면 큰 벌을 받게 된다고. 모르냐? 넌 이제 죽었어!” “얼른 어른들한테 알리자! 사제님한테 가자고!” 핑계가 마침 좋았다. 잠깐 싸워 본 것만으로도 저 대륙 소년이 저들 또래의 실력이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기에 이길 자신감 같은 것은 애당초 사라진 후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다른 친구들보다 먼저 물러서서 비겁자 취급을 받게 되기는 싫어서 어물거리고 있었는데 시기적절하게 이 문제가 터져 주었다. 소년들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치다가 한시바삐 이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급선무라는 듯한 얼굴로 줄행랑을 놓아버렸다. 남은 것은 입장이 묘해져 버린 소년 자신, 흩어진 구슬들, 점차 중천으로 오르고 있는 하얀 해, 그리고 주저앉은 채 멍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땅다람쥐라는 별명의 소년뿐이었다. 이윽고 땅다람쥐는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겁먹은 표정을 애써 감추려 노력하면서 말했다. “저어, 저...... 난 오이지스라고 해. 그건 <아픔>이라는 듯이고.”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두 가지 의미에서 당황했다. 첫째는 자신에게는 아직 소개할 이름이 없다는 문제 때문이었고, 둘째는 어 린 소년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불길한 뜻에 놀란 탓이었다. 대륙의 부모 가운데 그 누가 자신의 아들에게 <아픔>이라는 이름을 지 어주고 싶어 하겠는가? 누구나 자신의 자식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랄 터인데 왜 일부러 나쁜 의미의 이름을 짓는단 말인가? 그게 정말로 본명이라고? 그 생각에 빠진 나머지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상대가 어떤 심정으로 이름의 뜻을 밝혔는지는 느끼지 못했다. 섬에서 자기 이름 에 깃들인 <진짜 의미>를 낯선 사람에게 초면부터 밝힌다는 것은 대단한 신뢰를 의미하는 행동이었다. “그런... 네 이름은 누가 지었니?” 본래 그렇게 친근하게 물을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이름을 말하며 소년이 체념한 듯한, 동시에 창피해하는 것도 같은 표정 을 보고서 저도 모르게 안됐다는 마음이 들어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땅다람쥐> 오이지스는 약간 표정이 밝아지면서 말했다. “돌아가신 루마나리스 사제님께서 지어 주셨어. 물론 우리 어머닌 그 이름을 듣고 별로 좋아하시진 않았어.” “여기선 이름을 다 사제님들이 짓는 거니?” “새로 태어난 아이의 미래에 어울리는 이름을 알아낼 수 있는 건 사제님들이나 수도사님들뿐이잖아. 아아, 하지만 넌 대륙에 서 왔으니 잘 모르겠구나......” 오이지스는 말끝을 흐렸다. 그 역시도 좀 전의 세 소년이 말한 것처럼 <대륙의 사람들은 어리석으며 또한 약하다>라는 편견에 서 자유롭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이지스의 생각을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또 다른 궁금증이 생겨서 질문했다. “이곳의 이름에는 다 그렇게 뜻이 있니? 그 사제님의 이름은 무슨 뜻이야?” 오이지스는 약간 망설였다. 실은 많이 망설여야 하는 일이었지만 그는 금방 입을 열었다. “엄마는 남의 이름에 든 뜻을 함부로 여지저기 알리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하였지만, 돌아가신 분이시니까 아마 괜찮을 거야. 음, 루미나리스는 <무화과나무>라는 뜻이래. 하지만 나도 무화과가 뭔지는 몰라.” 그러고서 대화가 끊겼다. 두 소년은 마주선 채로 잠시 동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 만에 다시 입을 연 것은 오이지스였다. “넌 정말 강하더라... 난 너 같은 사람을 보면 참... 신기해.” “신기하다고?” 오이지스의 어조에서는 약간의 두려운 심정과 동시에 동경심 같은 것이 묻어났다. 당연히 자신과는 멀리 있어야 할 존재인데 기 적이 일어나 이렇게 가까이에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난 죽었다 깨어나도 결코 할 수 없을 것 같거든. 너처럼은 말이야. 절대로.”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침묵을 지켰다. 실은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몰았다. 자신은 전혀 빼어나거나 특별한 존재가 아닌데 이 작은 소년은 지금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갑자기 매우 부담스러운 심정이 되었다. 문득 생각이 났다. 자신이 형을 바라볼 때, 형도 어쩌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러나 자신을 변명할 만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보잘것없는 자신이지만 할 수만 있다면, 그런 기대를 충 족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오이지스는 자신이 이 소년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워하는 눈빛이 되어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쪼그려 앉아 구슬 하나를 주워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네 이름은 뭐니?” 소년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자신을 모르는 자>일 뿐이야. 이 섬에선 아직 이름이 없는, 무형의 존재에 불과하지.” 5. Will You Remember? 렘므에서는 이실더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이제 섬으로 돌아와 본명을 찾은 남자가 산비탈을 걷고 있었다. 그는 대륙을 여행하던 시절과 다를 것 없는 복장을 하고 있었으나 허리에만은 낯선 검 한 자루를 차고 있었다. 그 검은 그가 섬을 떠나 있는 동안 다른 사제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고, 이제 그가 돌아오자 다시 그의 손에 넘겨진 물건이었다. 우레의 룬(Rune of Thunder). 그것은 섬 전체에서 오직 한 사람을 제하고는 가장 높고도 동등한 권리를 갖는 여섯 사제 가운데 <검은 사제>가 물려받아 지니게 되는 성물이었다. <우레의 룬>이라는 이름은 검 표면에 새겨진 룬문자의 이름이기도 했다. 천둥과 번개를 다스리는 힘을 지닌 우 레의 룬의 권능은 그대로 검에 깃들여 있었으며, 그 힘으로 섬의 모든 존재와 신성한 제사의 의식을 수호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가 검의 사제가 되어 우레의 룬을 물려받은 것은 스물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 물론 그 때까지 검의 사제였던 사람이 더 이상 그 일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제직은 자신이 그 일을 더 이상 효과적 으로 수행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스스로 내놓는 것이 관례였다. 여섯 사제들 가운데 검의 사제는 섬 전체에서 가장 훌륭한 검 술을 지녀야만 하는 터라 사제로 임명받는 시기는 물론, 사제직을 내놓는 시기도 다른 사제들에 비해 빠른 편이었다. 보통은 쉰 살 이 되기 전에, 몸이 쇠약하다면 그보다 좀더 일찍 스물에서 서른 살 사이의 새로운 사람을 찾아내서 사제직을 넘겨주고, 고문역인 원로원의 일원으로 물러났다. 그 새로운 사람은 전임 사제의 제자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가 처한 경우는 예외였다. 그는 전임 사제의 제자도 아니었고, 전임 사제 역시 스스로 물러난 것이 아니었다. 전임 사 제는 원로가 되지도 못했다. 아직 십 년이 되지 않았다... 그리 원했던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를 제하고 그 일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 다. 하나의 슬픈 사건, 그 사건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섬의 일에서부터 그의 생애에 이르기까지. 나우플리온은 나직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는 어느새 일곱 개의 돌이 서 있는 곳에 이르러 있었다. 10년에 한 번 돌아오는 신성한 축원의 행사인 <7원례>가 치러지는 곳이자 달 여왕에게 바치는 중요한 제사들이 주로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골짝의 들장미 철없는 아이인 양 가슴 속 깊은 곳 진실을 말한다 돌아오라고, 그를 그리워하라고 말하리라고, 네게 돌아가겠다고 이제는 <자신을 모르는 자>가 된 소년 보리스와 함께 렘므의 호숫가에 앉아 루네트(Lunette)단도의 힘으로 열어 보였던 그 풍경이었다. 그는 휘파람 곡조 속의 노랫말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면서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파르스름한 봄기운이 번져가는 가운데 곳곳에 누렇게 변색된 옛 풀들이 보였다. 그는 강아지풀 하나를 뽑아 입에 물고는 벌렁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복잡한 심경과는 달리 맑게 갠 하늘이었다. 잠시 후 그는 휘파람의 박자를 바꾸었다. 실심한 어린 처녀 언덕 위에 홀로 있어 누구의 위로도 거절하고 오직 홀로만 있어 죽은 아비 넋 달래려 풀꽃다발 엮으며 죽도록 혼인치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다네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무언가 편치 않은 듯한 표정이 되어 입가를 실룩였다. “어머나, 나우플리온님 아니세요?” 갑자기 머리맡에서 들려온 소녀의 목소리에 그는 그만 한층 더 우울해져 버렸다. 별로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혼자 여기서 뭐 하세요? 돌아오셨다고 얘기만 들었는데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래” 나우플리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높이 묶은 긴 머리채에는 누런 풀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작고 귀여운 손이 다가와 기다 란 풀을 하나 떼어내더니 손가락에 몇 바퀴 감았다. 무릎 정도 오는 노란 치맛자락이 눈앞에서 나풀거리고 있었다. “제가 별로 반갑지 않으신가 봐요?” 치마를 입은 것치고는 조신하지 못한 동작으로 폴짝 뛰어 나우플리온 앞에 주저앉은 사람은 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날씬하고 아 름다운 소녀였다. 밝은 적갈색 고수머리를 절반 정도만 모아 올린 전형적인 머리 모양과 개구쟁이 짓을 하다가 다쳤는지 턱에 생 긴 하얀 흉터조차도 타고난 미모를 빛바래게 하지는 못했다. 매끈한 이마 아래로 뻗은 시원스런 콧날 주위에는 귀염성 있는 주근 깨가 약간, 살짝 그을린 뺨 역시 발갛게 상기되어 건강하게 보이는 소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우플리온을 알고 있었다. 곧 나우플리온은 대뜸 장난스런 목소리고 불렀다. “주근깨 백합꽃!” 예상대로 소녀는 발끈했다. “아직까지도 그걸 기억하다니, 너무하잖아요! 멀리 떠났다 돌아온 보람이라고는 전혀 없네요!” “기억력 좋은 사람은 어려움이 많단 말이야. 알았어. 이제는 정식으로 이름으로 부를 나이가 되었다 이건가?” “이미 그런 나이가 된 지 2년이나 지났죠. 이제 저도 열 두 살이니까 엄연히 한 사람의 어른이 된 거죠. 주근깨 백합꽃이 아니 라 리리오페라고요, 리리오페. <리리>라고 부르는 정도는 용서하겠어요. 왜냐면 아빠도 그렇게 부르시니까!” 리리오페라는 이름은 <백합의 목소리>라는 멋진 의미였지만 백합을 비롯한 나리꽃들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꽃잎 가운데 까맣 게 박힌 주근깨의 존재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아주 꼬마였던 때부터 이 나이가 되도록 없어지지 않은 엷은 주근깨 때문에 그녀 도 지금껏 여간 고민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반쯤 포기했는지 비교적 농담도 잘 받아넘기게 되었다. 어쨌든 리리오페는 손가락을 쳐들며 자못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지만 나우플리온은 푸훗, 하고 웃음을 터뜨렸을 뿐이었다. 소녀는 그린 듯 예쁜 눈썹을 찡그리더니 그의 손을 탁 쳤다. “뭐가 우스워요! 이제 3년만 더 있으면 결혼도 할 수 있는 나이라는 거 몰라요? 열 살에 약혼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우플리온은 웃음을 그쳤지만 어쩐지 씁쓸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소녀가 무심코 한 말이 아픈 추억을 되살아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리리오페로서는 기억할 수도 없는 어린 시절의 일일 뿐이었다. 당연히 그런 것을 생각하고 한 말일 리가 없었다. 자신의 기분을 들키고 싶지 않은 터라 그는 일부러 농담조로 입을 열었다. “그래, 어른이라니 속는 셈치고 한 번 믿어 보잔 말이지. 그럼 결혼 할 사람은 있는 거냐?” “뭐예요, 나우플리온님도 결혼할 사람 같은 건 없잖아요. 그럼 나우플리온님도 어른이 아니겠네요?” 나우플리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난 아직 청춘이고 싶어. 어른 같은 건 영영 되고 싶지 않다고.” “징그러워라!” 잠시 후 둘의 얼굴에서 모두 웃음이 번졌다. 리리오페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하긴 그래요. 결혼하기 전엔 진짜 어른이 아니라고 아버지께서도 말하셨거든요. 그러니까 나우플리온님도 진짜 어른은 아닐 지도 몰라요! 후후훗... 하지만 전요, 정말로 사랑에 빠지기 전엔 결혼 같은 거 절대로 하지 않을 거예요. 아무리 아버지나 어머니가 권한다 해도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해요.” “그 말을 들으니 권하는 사람은 있는 모양이군! 이런, 섭섭해라. 다섯 살 먹었을 때는 나 아니면 절대 결혼 안 하겠다고 고집스럽게 우겼잖아?” “그렇게 오랫동안 섬을 떠나 있으니 버림받는 건 당연하다고요!” 나우플리온이 이 소녀, 리리오페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소녀가 겨우 아홉 살 먹었던 때였다. 어려서 나우플리온을 몹시 따랐던 리리오페는 그가 떠난다는 말도 없이 훌쩍 섬을 등지고 나자 며칠 동안이나 울며 소동을 부려서 고귀한 지위를 가진 그녀의 아버지를 상당히 난처하게 만들었었다. 그러나 이제 세월이 흘러 열두 살이 되고 나니 그녀도 옛 일 같은 것은 많이 잊었다. “그런데 말예요. 같이 오신 분이 있다면서요?” 리리오페는 끝내 누구와 혼담이 오가고 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나우플리온은 머릿속으로 보리스의 불안해하던 얼굴을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갑자기 재미있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네 또래 남자애야. 대륙에서도 대단한 지위를 가진 귀족의 아들이었는데 나와 함께 있고 싶어 해서 순례자가 되기로 마음을 정했지. 아주 멋있는 녀석이거든.” 짐작대로 리리오페는 반색하며 물었다. “대륙에 있는 귀족이라고요? 어떻게 생겼어요? 어디 가면 볼 수 있나요?” “데스포이나 사제님께서 데려가셨으니 난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이곳에 온 이상 이름을 받을 때까진 그 분의 관할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궁금하면 아버지께 여쭤 보렴. 그 분이라면 아시겠지.” 리리오페는 짓궂게 입술을 내밀며 말했다. “됐어요. 아버지한테 괜스레 물었다가 오해만 받으라고요. 아, 아니지. 어쩌면 그 쪽이 좋을 지도 모르겠네요.” “무슨 소리야?” 그러나 리리오페는 발딱 일어나더니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노랫가락 비슷하게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집가기 싫거들랑 산으로나 들어가 버려라 아기 낳기 싫거들랑 호수에나 빠져 버려라 아비 말도 안 듣는 딸 걷어 먹일 일 없으니 보기 싫은 골 얼른 치워 사라져 버리려무나 제가 보기 싫으시면 아니 보시면 그만이지요 키워 주기 싫으시면 내쫓으시면 그만이지요 한 번 싫은 사람 다시 좋아질 일은 없으니 차라리 외지 사내 따라가 살아 버리렵니다. 그 날 오후 무렵,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땅다람쥐 오이지스와 함께 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닌 끝에 다시 공화당으로 돌아와 있었다. 전날 처음 보았던 때 느꼈던 위화감은 많이 사라지고 그럭저럭 친근하게 보이기 시작한 건물이었다. 이 한나절 동안 오이지스로부터 섬에 대해 몇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첫째로 검의 소지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 실제로 여기에서는 15살이 되지 않은 아이가 검을 비롯한 무기를 갖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15살은 첫 번째 정화 의 을 받게 되는 나이이기도 했고, 여덟 살부터 섬의 모든 아이들이 입학하여 교육받게 되는 의무 학원 <스콜리>를 졸업하는 나이이기 도 했다. 스콜리를 졸업한 아이들은 자신의 직분을 정하게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는 섬을 수호하는 전사가 되는 <검의 길>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었다. 그 길을 택한 아이들만이 드디어 검을 소지할 수 있게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특별한 경우 검의 사제가 직접 허가해 주지 않으면 이후로도 무기를 결코 가질 수 없었다. 그러므로 실제로 그가 검을 가지고 있다가 다른 아이들에게 들킨 것은 큰 문제로 번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모 르는 소년>은 마음 쓰지 않기로 했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어떤 경우가 온다 해도 버릴 수 있는 검이 아니니 지금 들키지 않았 다 해도 언젠가는 문제가 되었을 것이었다. 그 외에도 오이지스는 섬의 관습이라든가 조직 등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에게 그런 것을 알려줄 수 있다는 것을 상당히 즐거워하고 있는 것 같아서 <자신을 모르는 소년>도 굳이 그치게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오이지스의 이야기 가운데는 사실 쓸모 있는 것도 있었지만 별로 관심이 없는데도 자꾸 되풀이되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 가운데는 섬의 지배자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많았다. 섬에서 여섯 사제 위에 가장 높은 사람, 즉 왕이라 부를 만한 사람이 있는데 그를 절대로 왕이라 불러서는 안 되었다. 오이지스의 설명에 의하면 섬사람들은 모두 까마득한 옛날에 어떤 먼 곳에 있는 큰 나라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로서 그 나라는 어떤 재앙을 만나 멸망해 버렸다고 했다. 그 나라가 멸망할 때 사람들은 여러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탈출했는데 지금 섬에 살고 있는 <순례자>들은 그 가운데 한 척의 배에 탔던 사람들이었다. 다른 배들은 오는 도중 어디론가 흩어져 버렸고 그런 배들 중 한척에 바로 그들의 왕이 타고 있었다. 아니, 단순히 왕이 될 자격을 가진 자였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가 살아 있거나 죽었거나 간에 왕은 그였다. 이곳의 지배자는 그의 대리인에 불과했다. “그래서 말이야, 아까도 말했지만, 우린 그 분을 <섭정 각하>라고 불러야 해. 제사를 지낼 때가 되면 그 분은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곳에 안 계신 왕께 그동안의 일들을 자세히 고하고 폐하의 뜻을 따르겠다고 말하시거든. 하지만 왕은 안 계시기 때문에 대답을 할 수 없잖아? 그러니까 대답이 없어도 들은 걸로 치고 그냥 제사를 지내는 수밖에 없어. 하지만 만일 왕께서 돌아가셨다면 혼백이 되어 오셔서 보실 지도 모르지. 어쨌든 우리는 왕의 백성이기 때문에......” 꼬마 오이지스는 옛날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아이였는데 역사를 좋아하던 란지에와는 달리 말을 조리 있게 하거나 재미있게 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이야기는 자꾸만 빙글빙글 돌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세 번째로 되풀이된 이야기를 인내심 깊게 들은 다음 그냥 미소 지어 보였다. 오이지스가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로 보이는 것은 물론이었지만 그게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아이들이 다 그와 겪은 것과 같은 일들을 겪으며 미리 어른이 될 필요는 없었다. 그런 것은 나중에도 충분히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라면 그 때의 왕이 살아 있을 리는 없지 않니?” 문득 그렇게 묻자 오이지스는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면서 황급히 부인했다. “아냐, 그렇지 않아. 왕께서는 마법사거든! 그러니까 굉장히 오래 사실지도 모른다고. 으음, 만약에 그 분이 어딘가 다른 땅에 도착하셨다면 돌아가실 때가 되어서 왕위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셨을 거야. 그러면 다음 왕이 있을 거고, 그리고 또 다음 왕이 그 뒤를 이어서......” “야, 땅다람쥐! 뭘 그렇게 횡설수설 중얼대는 거냐?” 두 소년은 공회당 앞 계단에 걸터앉은 채 이야기에 정신을 파느라고 다른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정신 차려 고개를 들고 보니 십여 명도 넘는 소년들이 두 사람을 둘러싸고 서 있었다. 오이지스는 벌써부터 겁을 먹고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무, 무슨...일이...야?” “너한테 불일 없으니 떨 거 없어, 얼간아.” 두 사람을 둘러싼 소년들 뒤쪽에 약간 떨어져 혼자 서 있는 소년이 있었다. 사람들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상당히 큰 키에 붉은 머리, 윤곽이 뚜렷한 얼굴을 가졌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 소년은 다가오지 않은 채 팔짱을 끼고 서서 그들이 있는 쪽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사제님들한테 가잔 말이야. 당장.” 한 녀석이 발로 계단을 툭툭 차며 명령조로 말했다. 오이지스는 더 윽박지를 필요도 없이 즉시 일어나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용건을 말해.” “흥, 모르겠냐? 네가 이제 무슨 꼴을 당하게 될지는 사제님들만이 정확히 알겠지. 모르긴 해도 아마 간단히 끝나지는 않을걸? 시간 끌지 말고 얼른얼른 일어나!” 유난히 말이 짜증스럽게 구는 소년은 홀쭉하게 마른 몸에 품이 넓은 T자형 튜닉을 발목까지 오도록 길게 입어서 허수아비에 보자기를 덮어씌운 것처럼 보이는 녀석이었다.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잠시 그 소년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일어서더니 몸을 돌려 공회당 쪽으로 걸어갔다. 튜닉을 입은 소년이 당황해서 외쳤다. “야, 어디가!” 중간에 끼인 꼴이 된 오이지스가 어쩔 줄 모르고 양쪽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공회당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은 소년들 가운데 한 명이 우물거리다가 말했다. “우리도 들어가자. 어차피 사제님들을 뵈려면 안으로 들어가야 되는 거잖아?” 왠지 뒤따라가는 꼴이 되어버린 것 같아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시작부터 불쾌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뚜렷이 떠올랐다. 그 뒤를 따라 들어가기 전에 튜닉의 소년은 갑자기 오이지스의 어깨를 붙들었다. “왜, 왜 그래......” 대답 없이 에키온이 눈짓을 하자 갑자기 소년들이 달려들어 오이지스를 거칠게 걷어찼다. 그러나 고꾸라지지 않도록 한 소년 이 그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구타는 한 차례로 그쳤다. 앞서의 일에 대한 앙갚음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는 땅다람쥐에게 에키온 이 얇은 입술을 움직여 희한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내 말 똑바로 듣고, 그대로 하는 거다. 알겠지?” “무...슨......” 에키온은 손을 내밀어 땅다람쥐의 뺨을 세게 꼬집어 당겼다. 아얏 하고 비명이 터지자 그는 다시 이어 말했다. “말대로 하지 않으면 반 죽여 버린다.” “왜 그래야만 하죠?” 단호하지만 동시에 음악적인 울림을 가진 목소리가 높은 천장을 울렸다. 여자의 질문에 답하는 사람은 답변에 상당히 곤란을 겪고 있었다.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래 줬으면 좋겠다는 거지. 강요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너도 네 위치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 게 아니냐. 젊은 여자가 그렇게 혼자 산 속에 틀어박혀 지내는 것 역시 누가 봐도 보기 좋은 일은 아니고.” “섬 안 어디에 살든 그건 제 자유예요. 누구에게 폐를 끼친 일도, 스스로 곤란을 겪은 일도 없어요. 왜 제가 제 생활을 버려가 며 그런 일을 맡아야만 한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능력이 있다면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옳지 않으냐? 그런 식의 은둔은 너 자신을 위해서도 좋지 않아. 이미 많은 세월 이 흘렀어.” “전 별다른 능력이 없어요. 그리고 누군가를 가르칠 정도로 나이가 많지도 않고요. 제게 섬을 위해 봉사할 때가 되었다고 말씀 하시지만 시집갈 날을 기다리며 나날이 꽃이나 꺾으러 돌아다니는, 저보다 훨씬 나이 많은 언니들에게는 왜 그렇게 하라고 말하지 않나요?” “넌 다른 애들처럼 멋대로 행동해도 되는 단순한 소녀가 아니지 않으냐.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들은......” “전 단순한 소녀에 불과해요. 다른 애들과 똑같은.” “이솔렛......” 갑자기 입구 쪽에서 사람이 걸어 들어오는 바람에 말은 중단되었다. 두 사람은 모두 기척이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소년, 그리고 다른 많은 소년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소년은 걸음을 멈췄다. 금빛...... 양쪽 벽에 높이 뚫린 네모진 창에서 햇빛이 들어와 발밑을 비추었다. 공회당 가운데 그려진 일곱 개의 원, 그 가운데 한 소녀가 선 채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었다. 아련한 금빛 눈썹아래 흰 얼굴, 연한 분홍빛이 감도는 투명한 눈, 긴 목,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며 드러난 귀...... 그 여자였다. 렘므의 호숫가에서 마법으로 펼쳐졌던 영상 속에서 보았었고, 그 후로 다시는 들을 수 없었던 이름의 주인이었다. 이번에는 치마가 아니라 종아리까지 오는 짧은 바지 차림이었다. 또한 그보다 한층 낯선 물건이 그녀의 어깨 너머 등 뒤에 교차된 채 매달려 있었다. 바로 두 자루의 짤막한 칼, 쌍검이었다. 매끈하게 닳은 손잡이로 보아 결코 장식용이 아니었다. 의혹이 담긴 섬세한 눈초리가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곧 그렇게 말할 것만 같았다. <왜 그렇게 나를 쳐다보지?> 그렇게 말한다면...... “무슨 일이냐?” 입을 연 것은 그녀 옆에 선 낯선 사제였다. 저도 모르게 이 자는 무슨 특별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가 먼저 살펴보았다. 허리에 넓은 띠가 둘러져 있고 거기에 매달린 화려한 상자가 눈에 띄었다. 열었을 때 주먹 한 개 정도가 들어갈 법한 정사각형의 상자였다. 붉은 색과 노란색 금속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었으나 기본 재질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아, 마침 계시는군요. 궤의 사제님!” 좀 전과는 사뭇 다른 유창한 말투로 입을 연 것은 튜닉을 입고 있던 말라깽이 소년이었다. 그는 성큼 앞으로 나서더니 중대한 것을 말하려는 것처럼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입을 오므렸다가 손을 휙 돌리며 <자신을 모르는 소년>을 가리켰다. “저 아이가 섬의 법을 어겼습니다. 그것도 아주 중대한 법도를요.” 그는 다시 빙그르르 몸을 돌리면서 곁눈으로 흘끗 이솔렛을 바라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마땅히 엄하게 벌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건 사제님의 소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궤의 사제라는 남자는 불쾌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가 일깨우지 않으면 내가 내 임무를 잊기라도 할 것이라 생각하느냐, 에키온?” 뜻밖의 질타에 에키온이라는 말라깽이 소년은 움찔했지만, 곧 생각을 바꾸어 허리를 잔뜩 굽히며 비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할 리 있겠습니까. 제가 사제님을 화나게 했다면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그때 입구 쪽에서 또 한번의 기척이 있었다. 이번에는 몇 명의 어른들이 안으로 들어와 소년들 뒤에 섰다. 그 중에는 나우플리온과 이야기를 나누던 적갈색 머리에 노란 치마의 소녀, 리리오페도 섞여 있었다. 리리오페는 처음에 약간 머뭇거렸으나 곧 어른들로부터 떨어져 공회당 동쪽 벽의 높직한 창문 쪽으로 가더니 뭔가 살펴보는 시늉을 했다. 물론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는 단지 한 사람을 자세히 보기 위해 자리를 이동했을 따름이었다. 나비처럼 가볍게 치맛자락을 팔랑거리며 창가로 다가가 몸을 돌렸다. 그런 소녀를 특별히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한 사람 있었다. 처음부터 일부러 멀찍이 떨어져 상황을 주시하기만 하던 붉은 머리의 소년은 그때까지 오직 <자신을 모르는 소년>에게만 시선을 주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이 처음으로 떨어져 리리오페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훤칠한 키를 자랑하듯 화살처럼 곧은 자세로 선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눈동자만을 약간 움직였다. 궤의 사제가 여전히 불쾌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용건이나 말해 봐.” 에키온은 고개를 들더니 다시 눈을 빛냈다. “저 아이는 검을 지니고 섬 안을 돌아다녔습니다. 아무도 허락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게다가 그걸로 저희를 겁주기까지 했고요 ! 저희는......” 에키온의 뒤에는 오전에 몇 대 얻어맞았던 소년들이 있었다. 그들이 곧 저마다 나서서 <자신을 모르는 소년>을 비난하기 시작했 다. “검을 꺼내서 저희를 위협했어요!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말했죠! 우리가 도망치지 못했다면 진짜로 우리를 찔렀을 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그리고 결국 이렇게 심하게 때리기까지 하고요! 전 온 몸에 멍이 들었어요! 저희 아버지께서도 몹시 화내시고 계시는데다가.. ....” “저 아이는 섬의 법도를 완전히 무시했으니 중벌을 받아야 마땅해요! 미칠 듯이 억울해요!” 그들의 말을 들은 에키온은 만족한 듯 미소를 머금으며 궤의 사제를 바라보았다. “일전에 몰래 검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것은 암살자나 다름없는 행동이라고 말씀하셨죠? 저 검으로 누굴 해치려 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요! 저 아이는 대륙에서 왔다고 들었습니다. 악당만 들끓는다는 그런 곳에서 왔으니 선한 마음을 갖고 있을 리 없지 않겠어요? 외지인을 믿어선 안 된다고 늘 말하셨죠? 저는 절대로 믿지 않아요! 더 큰 일을 저지르기 전에 섬 밖으로 내쫓거나, 큰 벌을 주어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 또래 소년 치고 그의 언변은 정말로 청산유수였다. 궤의 사제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자신을 모르는 소년>을 건너다보았다. 그 소년은 전혀 자신을 변명하지 않은 채 그대로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궤의 사제는 갑자기 땅다람쥐 오이지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들의 말이 사실이냐?” “네? 저, 저는......” 말문이 막힌 오이지스는 당황한 눈동자로 에키온을 보고, 다시 <자신을 모르는 소년>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죄를 고 발하던 소년 가운데 한 명이 오이지스를 돌아보며 사나운 눈짓을 보냈다. 잘못했다가는 재미없을 거라는 무언의 위협이었다. 오이지스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간신히 입을 뗐다. “그러, 그러니까...때린 것은...사...실이지만......그건......” 그때 에키온이 갑자기 화난 목소리로 윽박지르듯 나직이 말했다. “지금 말이나 더듬고 있을 때야? 네가 겁이 많은 것은 알지만 이런 식으로 친구들의 억울함을 모르는 체 한다면 어떻게 앞으로도 우리가 친구라고 할 수 있지?” 다른 소년이 한쪽 발을 살짝 올렸다가 세게 내려딛어 보였다. 또 한명은 화가 난 듯이 한쪽 주먹을 꽉 쥐고 다른 손 손바닥에 비 벼댔다. 오이지스는 떨면서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에키온의 ...말이 다 맞아요...... 그가 우리를 때렸고...겁을 줬어요......” 보란 듯 돌아선 에키온이 목소리를 높였다. “들으셨죠? 아시다시피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제 어머니께서 거짓말을 하시지 않는것처럼요!”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그 말을 모두 듣고 있었으나 고개를 들어 돌아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두려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힌 오이지 스가 말을 맺기도 전부터 연신 그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표정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양쪽 입 끝이 약간 실룩거렸다. 마치 웃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그가 비웃은 것은 자신의 어리석음이었다. 그래, 이 자책은 이제 지겨울 정도다. 도대체 몇 번째인가. 감정이 가는 대로 이끌려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결과를 자초하는 일은 없다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던 것이 도대체 몇 번째인가. 그가 마음을 놓을 때 마다 벌어졌던 최악의 사건들이 그만큼이나 교훈을 주었는데도, 이처럼 작은 일에서조차 결국은 실수를 해버리는구나. 이런 결과가 된다는 것,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 않나? “네 말이 사실이라면......” 궤의 사제는 <자신을 모르는 소년>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을 떼지 않은 채 잘라 말했다. “정말로 암살자에 준하는 벌을 내려야 하겠지.” 오이지스가 놀라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암살자에 준하는 벌이 무엇이기에? 동시에 창가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는 체 하고 있던 노란 치마의 소녀도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 역시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사제는 말을 이었다. 목소리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다. “왜냐하면, 이런 고발을 들으면 검을 내놓고 자신을 위해 변론함이 당연할진대, 아직까지도 가졌던 검을 도로 바치지도 않고, 용 서를 빌지도 않는 것을 보니, 전혀, 반성할 마음이 없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지!” “......” 지금까지도 멀찍이 물러난 채 이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던 붉은 머리털의 소년이 약간 몸을 움직여 다가오려다가 다시 동작을 멈추 었다.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그때까지도 절반은 다른 생각에 잠겨 있어서 그들의 말은 별로 귀담아 듣고 있지도 않았다. 그에게 이 순간 중요한 일은 소년들의 유치한 고발 따위가 아니었다. 그런 것쯤이야 어찌되든 좋았다. 자신이 앞으로도 되풀이해서 어리석 은 일들을 저지르게 되는 것에 비하면. 그들의 모함이나 거짓말을 밝혀내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자신을 모르는 자야, 아직도 네 죄를 모르느냐?” 궤의 사제는 이미 지팡이의 사제 데시로부터 이야기를 들어서 이 소년이 이렇게 불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 말하 는 그의 목소리는 좀 전에 이솔렛과 대화하던 때와는 사뭇 다를뿐더러 말투조차 엄격하게 변해 있었다. 그는 이 섬에서 반드시 지켜 져야만 하는 규범과 율법을 수호하는 사제였다. 그러므로 이 순간 그의 말은 곧 돌이킬 수 없는 판결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에키온을 비롯한 소년들은 사제가 단숨에 결정을 내리도록 하기 위해 그토록 열심이었던 것이다. 그때 <자신을 모르는 소년>이 입을 열었다. “제 죄를 알겠습니다.” 에키온과 다른 소년들은 뜻밖의 대답을 들으며 오히려 어리둥절해져 버렸다. 궤의 사제는 눈썹을 약간 올렸다가 내렸다. “그렇다면 네 자신의 행동을 변론할 수 있느냐?” 이어진 대답은 간단하면서도 단호했다. “없습니다.” “없어?” 사제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튀어 올라갔다. 이제 곧 무거운 죄를 받게 될 시점에 이르러 끝내 자신을 변론하지 않겠다고 하는 자는 그가 궤의 사제가 된 이래로 처음 보는 터였다. 이 아이가 아직 자신이 무슨 벌을 받게 될지 몰라서 저러는 것인가 싶었다.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엄숙하게 다시 말했다. “넌 네가 무슨 벌을 받게 될지 알고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냐?” “아니오, 모릅니다.” “암살자의 죄는, 집게손가락을 제외한 손가락 세 개를 잘라내게 되어 있다.” 보통의 아이라면 새파랗게 질리고도 남을 이야기였다. 그러나 대륙에서 온 낯선 소년은 표정 변화조차 없는 얼굴로 단지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제가 섬에 온 후로 처음 받게 되는 선물입니까?” 사제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소년의 말을 충분히 알아들었다. 무지에 대한 단죄가 지나치게 심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리 라. 그는 고지식한 사람이긴 했지만 자신의 직분만큼이나 마음의 정의에도 충실한 사람이었다. 곁에서 이솔렛이 약하게 기침 소리를 내는 것이 들려왔다. “그렇다면 너를 변론하면 될 일이 아니냐? 이 소년들의 고발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냐? 아니면 그들의 말에 틀린 점이 있느냐? 어느 족이든 네 행동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안다면 사죄하고 고치는 것이 지당할 터인데.” “......” 소년은 잠시 침묵하고 있었다. 그 틈을 타 에키온이 소리쳤다. “아직까지도 검을 내놓지 않다니! 저건 분명 나쁜 의도를 감추고 있기 때문임이 틀림없어!” “어서 검을 내려놓아라.” 이번에는 궤의 사제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그가 검을 내려놓고 용서해달라고 빌 것을 기대했다. 그의 적들도, 그리고 그의 우호 자들도,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시선을 바로 하며 정중하지만 의지가 깃들인 목소리로 답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아니, 그러지 않겠습니다.” “뭐라고?” “이 검은 제 생명과도 다름없는 물건입니다. 설사 손이 아니라 목을 벤다 해도.” 소년의 눈동자가 회색에서 푸른색으로 변했다. 그것은 평범한 소년이 결코 가질 수 없는 깊고 어두운 눈동자였다. 마지막 말을 할 때의 그는 심지어 약간의 오만함마저 띠고 있었다. “결코 내놓을 물건이 아닙니다.” “무례하다!” 그렇게 외친 것은 사제도, 말 많은 에키온도 아니었다. 지금껏 한 마디도 않고 있던 자, 바로 뒤 쪽에서 사태를 관망하고만 있던 붉은 머리 소년이었다. “헥토르!” 사제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정말로 키가 컸다. <자신을 모르는 소년>보다도 더 컸다. 헥토르라고 불린 소년은 사나운 눈동자를 낯선 소년에게로 돌렸다. 붉은 머리털 아래 진한 눈썹과 눈매, 그리고 굵은 윤곽의 이 목구비가 그의 존재를 한층 돋보이게 했다. “네 법은 대륙에서 끝났다. 이제 섬의 사람이 되었으니 섬의 법도를 지키는 거다. 건방지게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그걸 모욕으 로 받아들일 사람도 있으니까.”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그를 바라보았지만 곧 눈을 돌려 버렸다.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태도는 충분히 상대방을 격분시키 고도 남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화를 낸 것은 헥토르가 아닌 에키온이었다. “너, 감히! 우리 형에게 그 따위 태도라니 용서할 수 없어!” “조용히 해라!” 사제는 갑자기 끼어든 헥토르에게는 별 말을 하지 않았으면서 에키온에게는 대뜸 호통을 쳤다. 그리고 곧 이어 <자신을 모르는 소년>에게도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당장 검을 내놓아라! 아니면 네가 원하는 벌을 실컷 받게 될 것이다!” 목소리들이 높아지면서 사태는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변했다. 이제 화가 난 궤의 사제가 한 마디 외치기만 하면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돌이킬 수 없는 판결을 받게 될 참이었다. 그가 한 번 내린 판결은 섬의 최고 지배자인 섭정조차도 쉽사리 바꾸게 하지 못 했다. 창가에 서 있던 리리오페도 금세 뛰어내려올 듯한 자세가 되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사제들의 권위, 그리고 한계에 대해서 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소녀였다. 그때 나지막하고도 싸늘한 목소리가 뜨겁게 달궈진 공기를 갈랐다. “이해가 가지 않아요.” 희게 드러난 종아리 아래로, 아마빛 양가죽을 얇게 무두질해 만든 굽 없는 신발이 두 걸음 앞으로 움직여 왔다. 발목 언저리에 좀 더 여유를 두어 만든 그 신은 단단히 조일 수 있는 끈이 꿰어져 있긴 했지만 지금은 넉넉하게 풀린 상태였다. “섬 안에 검을 지닐 자를 선별하여 허가하는 것은 누구지요?” 그녀의 질문은 궤의 사제에게 향해 있었으나 눈은 다른 곳에 닿아 있었다.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약간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 지 않았다. 청동빛 광채를 지닌 머리였다. “그건 당연히......” 대답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여섯 사제 가운데 검의 사제의 소관인 것이다. 그렇다면? “네. 하지만 제가 보기로, 검의 사제는 저 소년의 검을 이미 허락하지 않았나 싶은데요.” “뭐라고?” 궤의 사제가 놀라 주위를 휘둘러보는 동안 에키온이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이 소년은 겨우 어제 왔는데 그런 것을 허락 받을 리가......” 사제 앞에서도 앞 뒤 가리지 않고 설치다 혼나던 그가 이 소녀, 이솔렛 앞에서만은 말을 조심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었다. 궤의 사제조차도 처음으로 그녀에게 삼가며 말하지 않았던가? “저 소년을 데려온 사람이 검의 사제, 본인이 아닌가요? 그가 소년에게서 검을 빼앗지 않았다면 그것이 곧 허락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죠?” 에키온을 비롯한 다른 소년들은 <자신을 모르는 소년>을 데려온 것이 나우플리온이라는 사실까지는 몰랐던 모양이었다. 무슨 까닭인지 아직까지도 검의 사제의 귀환은 섬 전체에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고 있었다. 그때 헥토르가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말할 수만은 없죠. 검의 사제께서는 오랫동안 섬을 떠나계셨으니 섬의 법도를 잠시 잊으셨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 아이는 아직 열다섯을 넘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것이 검의 사제께서 관할하는 일이긴 하나, 다른 사제님들과, 심지어 섭정 각하와 상의하지도 않고서 그리 쉽게 내릴 결정입니까?” <섭정 각하>라는 말을 할 때 헥토르의 눈은 창가에 선 소녀에게 잠깐 가 닿았다. 그러나 아주 잠시였다. 이솔렛이 뭔가 더 대답하기도 전에 엉뚱한 곳에서 답이 울렸다. “내가 섬의 법도를 잊었다고? 누가 그렇게 말하던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너인가?” 타닥. 소년과 헥토르, 그리고 궤의 사제가 선 가운데로 사람의 그림자가 뛰어내려 섰다. 공회당 위에는 여러 개의 들보들을 지탱하는 대들보를 중심으로 넓은 석조 다락이 만들어져 있었다. 제사를 지낼 때 쓰이는 중요한 물품들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방금 뛰어내린 사람이 지금까지 숨어있던 곳은 바로 거기였다. 그것은 방금 전 오간 이야기를 죽 다 듣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긴 머리채를 젖히며 몸을 일으킨 나우플리온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가장 먼저 이솔렛을 보았다. 그리고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 제자를 그렇게까지 변호해 주다니 고마운데.” “......” 이솔렛은 그를 흘끗 쳐다봤을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자>라는 말에 놀란 것은 그녀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 전부 였다. “제...자라고요?”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다름 아닌 헥토르였다. 그는 당황한 나머지 그때까지의 당당한 태도를 잊고 말까지 더듬었다. 얼 굴은 흙빛이 되어 있었다. 오이지스가 아까 사제의 질문을 받았던 때 이후로 처음으로 입을 열어 중얼거리고 있었다. “제자, 제자가 된다... 제자가 된다......” 에키온은 아예 말문이 막혀 버렸고, 그것은 다른 소년들도 마찬가지였다. 궤의 사제가 간신히 충격을 수습하여 입을 열었다. “그게 정말이오, 검의 사제여? 그대가 정말로 첫 번째 제자를 거두게 되었단 말이오? 그리고 그것이 저 소년이고?” “말씀하신 그대롭니다. 이리로 와라, 보리스.” 나우플리온은 대륙에서 부르던 이름대로 소년을 불렀지만 아무도 그에 대해 뭐라 지적하지 않았다.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다가 가 그의 곁에 섰다. 나우플리온이 그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제 첫 제자가 맞습니다. 이미 대륙에 있을 때 입문례와 더불어 의식을 치렀습니다. 저라고 해서 죽을 때까지 전인 한명 없이 있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 그렇다면...축하할 일이겠지.” 나우플리온은 검소지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미 그것은 문제조차 되지 않았다. 검의 사제의 첫 제자가 된다는 것 은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대대로 검의 사제 자리는 전임자의 첫 번째, 또는 두 번째 제자들이 이어받아 왔다. 그러나 나우플리온 은 전례를 깨고 지금까지 단 한명의 제자도 거두지 않았었다. 그것은 나우플리온 역시 윗대 검의 사제의 재자가 아니었다는 것과도 관계가 있을는지 몰랐다. 진실은 본인만이 알 일이었다. 지금까지 뒤에서 지켜보고만 있던 몇 명의 어른조차 술렁이며 이일이 실로 놀랍다는 표정들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소년 들, 특히 헥토르의 얼굴에 나타난 열패감과는 달랐다. 이솔렛만이 당연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별 표정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나우플리온이 진심으로 자신을 지켜 주고자 마음먹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썰물섬에 도착하 기 직전, 배 위에서 했던 그 말 그대로. 사람들이 놀라는 것으로 보아 이 일이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더구나 대륙에서 함께 지낼 때 나우플리온은 자신을 <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조차 거부했었다. 이미 의식을 치렀다느니 하는 말들은 모두 즉석에서 꾸며댄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 나우플리온은 신념을 가지고 소년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를 믿고, 그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를 위해서는 속임수를 쓰는 것도, 타인의 질시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의 불편은 더더욱 마음 쓰지 않았다.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아직 몰랐지만 이 일을 위해 나우플리온은 오래 전에 결심하여 지금껏 실천해 온 중대한 신념조차 꺾어 버렸다. 자신의 존재가 <검의 사제>라는 직 분의 계승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도록 끝내 한 명의 제자도 두지 않겠다는, 스스로에게 한 옛 맹세가 그것이었다.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섬으로 오기 전부터 결심하고 있었다. 월넛이었고 이실더였으며 이제 나우플리온이 된 그,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고 결국 섬으로 따라오게까지 되면서 먹었던 마음은 분명하고 진심 어린 신뢰였다. 그의 결정을 따를 것 이었다. 아니, 자신이 오히려 원했다. 그를 스승으로 따르고 싶다고, 그의 모든 것을 잊고 싶다고. “이 일은 확실히 중대하군. 그 자네...아직 이름도 없지 않아...그렇군. 이름을 받게 되는 의식도 앞당기는 것이 좋겠어. 내일 아침, 그래, 내일 아침은 어떤가? 지팡이의 사제에게는 내가 말하도록 하지. 분명히 좋다고 할 테니까 말이야. 이런, 이런, 내가 정신이 없군. 해야 될 것이 있는데.” 그 전까지 엄숙한 태도를 보였던 궤의 사제는 혼자 머리를 긁적이거나 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윽고 <자신을 모르는 소년>에게 다가간 그는 두 손을 교차시켜 소년의 어깨에 얹었다. 입 속으로 축복에 쓰이는 룬을 몇 개 외우자 어깨 쪽에서 빛이 생겨나 팔을 타고 손으로 내려가더니 소년의 어깨에 닿으면서 사라졌다. 옆에서 나우플리온이 얼른 말했다. “궤의 사제님께 어서 감사한다고 말씀드려라. 방금 네게 걸려 있던 모든 금제를 풀어주신 거다.” 금제를 풀어준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몰랐지만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고개를 숙이며 “고맙습니다.”하고 말했다. 다른 소 년들은 그런 모든 모습들을 불쾌감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헥토르는 질투심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 이 너무도 역력히 드러났다. 그러나 그런 그들과는 완연히 다른 표정으로 <자신을 모르는 소년>과 나우플리온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창가에 서 있 던 노란치마의 소녀, 리리오페는 아무도 자신을 주목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인지 얼굴 가득 흥미로운 빛을 띠고 그들, 특히 <자신 을 모르는 소년>을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재미있는 계획이 만들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솔렛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조차 의식적으로 나우플리온과 대화를 나누는 일을 피하는 것 같 았다. 그러나 인사를 마치고 난 소년은 다시 한번 그녀를 향해 눈을 돌렸다. 어쩐지 잘 기억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당신 역시 나를 기억할 수 있겠느냐고 묻고 싶은 기분이었다. 지금의 나를, 지금의 이 때를. 2장. Sever Nights 1.월계수 자라던 나라 “월넛과 이실더에 이어 이번에는 나우플리온이란 말이지요. 그것참, 한 인간의 이름을 세 개째 외워야 하다니 이만저만 불공평 한 게 아닌데요.” “적당히 줄여서 불러. 나우플이라든가, 노플이라든가. 나우라든가.” “나우라니, 왠지 어감이 웃기잖아요.” “너도 남의 일 말하듯 할 게 아니야. 이제부터 너도 이름이 생길 참인데, 줄이기도 곤란한 기나긴 이름이 난데없이 붙여지지 않 으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냐.” “예를 들면?” “테스모폴로스라든가.” 소년은 쿡, 하고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 이름의 주인공이 마침 그들 앞을 가로질러 지나가고 있 었기 때문이었다. 나우플리온도 방금 그를 발견하고 그렇게 말한 것이 분명했다. 이어서 나우플리온은 반가워 죽겠다는 듯한 태도로 손을 흔들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메달의 사제님! 좋은 아침입니다!” 테스모 쪽에서도 어물어물 손을 흔들며 답을 해 왔다. 그가 다시 제 갈 길을 가자 나우플리온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저 정도면 그래도 양호한 거야. 브라토마르티스라든가, 테르크시에페이아라든가 하는 이름이 걸리면 남은 생애 동안 정식 이름 을 불릴 기대 따위는 조용히 접고서 사는 편이 좋지.” “그런 이름을 누가 기억하겠어요. 자신조차 안 잊어버리면 다행일 텐데.” “날 봐. 방금 정확히 발음하는 거 못 들었어?” “오호라, 그 두 아가씨는 도대체 누구죠?” 그 날은 <자신을 모르는 소년>을 위한 세례식과 정식 입문례가 동시에 치러지는 날이었다. 두 사람은 공회당 뒤편까지 걸어가 넓 은 뜰과 같은 곳에 이르러 멈춰 섰다. 약간 흐린 날씨였으나 희미한 햇살이 뜰을 비추고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나와 담소를 나누며 이리저리 거닐고 있었다. 지금껏 본 중 가장 많은 섬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뜰을 처음 본 순간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마음속으로 까닭을 알 수 없는 약한 충격을 받았다. 바닥은 대부분 흙이었고, 중앙에 만들어진 좁은 길에는 납작한 포석이 죽 깔려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그가 처음 섬의 마을에 도착했을 때 순간적으로 보았던 폐허의 환각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어쩌면 느낌이 비슷한 것일 지도 몰랐다. 사발 비슷한 모양의 커다란 청동그릇들이 길 양 옆에 드문드문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물이 반쯤 담겨 있었다. 언뜻 보아도 물은 비교적 깨끗했고 가끔 나뭇잎 몇 개만이 떠다닐 따름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릇 중심에 둥근 구멍이 뚫려 아래로 통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 왔군. 어서 이리로 오게나.” 포석 길 맨 끝, 그러니까 공회당 뒷벽과 닿아 있는 위치에 돌로 된 제단과 같은 것이 마련되어 있었다. 지팡이의 사제 데시가 그 제단 아래에 내려선 채 그들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데시는 첫날 보았던 것과는 달리 치렁치렁한 갈색 옷을 걸치고 머리에는 은빛 관을 쓰고 있었다. 이 은관은 모양이 희한했다. 곧게 솟아 올라가는 여러 개의 나뭇가지들을 형상화한 것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가장 높은 부분은 무려 30여 센티미터나 되었다. 손에 든 것은 전날 본 일이 있던, 초승달 모양의 수정으로 머리를 장식한 지팡이였다. <자신을 모르는 소년>은 나우플리온으로부터 떨어져 데시 앞으로 가 섰다. 데시는 계단을 향해 큰절을 한 번 올렸다. 그리고 다시 돌아서더니 자신 앞에 놓인 물그릇에 손을 넣었다. 의식이 시작되어도 사람들은 단지 잡담을 그쳤을 뿐, 열을 지어 늘어선다거나 동작을 모두 멈춘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새로운 이름을 받게 될 소년이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사귀게 되어 그 이름이 널리 불릴 수 있게 되도록 이곳에 나와 준 손님들일 뿐, 의식에 직접 참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실은 반드시 이곳에 나와야 할 필요도 없었다. 마치 생일 파티의 하객과도 같아서 초를 불면 박수를 칠 의무 정도밖에는 없었다. 데시는 물그릇에 넣었던 손을 빼며 소년의 머리에 물을 가볍게 뿌렸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나우플리온도, 에니오스<단센>도, 리리오페도, 헥토르도, 에키온도, 오이지스도, 다른 모든 사제들도, 모두 사람들 속 어딘가에 선 채로 이 의식을 주시하고 있었다. “옛 고향, 대륙으로부터 건너와 사흘 간 자신을 알지 못하는 소년아, 이제 섬의 사람, <달의 순례자>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소년아.” 다만 이례적이라면 이 의식을 집전하는 사람이 여섯 사제들 가운데서도 암암리에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지팡이의 사제라는 점이었다. 이름은 사제들이 지을지언정 세례식은 대부분 여섯 사제들보다 한 단계 낮은 자들, 즉 열일곱 명의 수도사들이나 또는 <스콜리>의 선생들이 집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단순히 마을의 나이 많은 어른이 하게 되는 경우도 흔했다. 물론 그런 세례식은 어린 아기일 때 치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이렇듯 나이든 소년의 세례식 자체가 드문 일이긴 했다. 몇몇 사람들은 이 의식이 순례자로서의 입문례를 겸하고 있기 때문일 거라고 수군거렸다. 어쨌든 섬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날 때부터 순례자였으므로 입문례라는 것을 거칠 필요가 없었다. “내, 달 여왕의 지팡이를 빌어 네 묵은 이름을 지우고 새 이름을 지어 붙이고자 하니, 이는 삶을 이루는 열 가운데 한 점을 바꿈으로써 지난 생애의 전체를 망각 속으로 흘려버리고자 함이다. 밤하늘의 여인은 바라는 자를 위해별을 내림이니, 이후 삶은 그 별을 따를지니라.” 그러면서 데시는 두 손으로 물을 떠올려 허공으로 높이 들어올렸다. 거기에서 희미한 빛이 떠올라 소년의 머리를 비췄다. 빛은 이윽고 붉은 광채로 변했고, 군중들 사이에서 “아” 하는 탄성들이 들려왔다. 헥토르의 표정이 어두웠다. 세례식에서 보이는 붉은 광채는 <검의 길>을 뜻했다. 직접 기억할 수는 없지만 헥토르 자신의 세례식 에서도 저것과 같은 색깔의 빛이 보였다고 했다. 처음부터 알아보았다시피 저 녀석은 그의 경쟁자였다. 뒤에서 사람들이 수군대는 목소리가 그의 귀를 불쾌하게 찔렀다. “역시 검의 사제가 고른 소년인가.” “틀림없겠지. 저 허리의 검을 봐. 어딘가 예사롭지 않잖아.” “어쩐지 다음 검의 사제가 누구일지 짐작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심지어 다음 의식이 이어질 시점이 되어서도 붉은 광채는 사라지지 않고 한층 강렬한 빛을 발했다. 그리고 점점 더 커졌다. 사람들이 놀란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어버렸을 즈음, 직경 20센티에 이를 정도로 커졌던 광채는 데시의 손짓에 의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소란을 무마시키려는 듯 한층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을 알게 될 소년아, 너는 이제 다프넨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이다. 너는 다프넨이다.” 다프넨......? 보통 섬사람들은 그들의 이름을 짓는 옛 언어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당장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것은 이제 다프넨으로 불리게 된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는 그 이름이 형의 이름인 <예프넨>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약간의 만족을 찾았다. 의식을 돕는 젊은 여자 한 명이 옆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다가와 섰다. 그녀의 손에는 커다란 은 가위가 들려 있었다. 데시가 낮게 말했다. “이제 새 이름을 받아 새로 태어난 소년아. 네 속의 옛 것들은 지금 마음 밖으로 영원히 흘려버리려무나.” 여자가 그의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모아 쥐고 가위를 갖다 댔다. 사각, 사각, 소년의 검푸른 머리카락이 잘려 바닥에 떨어졌다. 흰 포석 위에 새의 깃처럼 곱게 흩어져 내렸다. 등을 거의 덮을 정도로 자랐던 머리였다. 그러나 별 미련은 들지 않았다. 이제 이곳에서 자신을 지켜줄 사람에게 어울릴 수 있는 삶을 살아가기로 마음먹고 있었고, 잘라 떨어진 머리카락은 그런 결심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홀가분해졌다. 과거와 연결된 끈이 하나 끊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데시는 마지막으로 지팡이를 두 손으로 모아 쥐고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너의 세례는 견습 순례자의 것이므로 여기에서 맺어질 것이다. 너는 이제 작은 순례자, 즉 배워 살아갈 자이다. 네가 훌륭히 배우고 살아간다면 15세의 정화 의식을 통해 너는 진실한 순례자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달 여왕의 의지와 옛 역사, 그리고 너의 별이 가리키는 길을 위해 탐구하거라, 이곳에는 분명 너 한사람만을 위해 준비된 약속이 있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은 너이다.” 데시의 지팡이에 붙은 수정 초승달이 부드럽게 빛을 냈다. 그것으로 의식은 끝났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소란스럽지 않을 정도의 박수를 보냈다. 사람들이 서서히 흩어져 갔다. 다프넨은 그 자리에 좀더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는 어젯밤 데시가 그가 임시로 기거하던 방에 찾 아온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데시는 그의 앞에 커다란 은 쟁반을 내밀었다. 그리고 거기에 두 손을 얹어 놓고 눈을 감고 있게 했다. 소년은 솔직히 당황했으나 그곳에는 사정을 물어 볼 나우플리온도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면서 그는 데시가 되었다고 말할 때까지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눈을 떠 쟁반을 바라보았다. 그러 자 거기에는 이상한 그림이 나타나 있었다. 무엇인지 얼른 알아볼 수 없는 그림이었다. 기름이나 물이 번진 무늬 같은 것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커다란 우물과 그 주변에 흩어 진 주춧돌들을 나타내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가 신기해하고 있는 동안 데시는 쟁반을 옆으로 치우며 말했다. “그림에 대해서는 신경 쓸 것 없다. 아직 네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네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쟁반의 빛 이 변하는 것을 보았다. 너는 아직 진심으로 이곳에 소속되고 싶어 하지는 않는구나. 네가 온 것은 어떤 특정한 일, 또는 특정한 사람 때문이겠지. 하지만 결코 속임수나 악에 물든 마음은 없다는 것을 알겠다. 15살이 되어 미래를 다시 한번 결정하게 될 때까지, 네가 이곳에서 무엇을 찾고 얻을 수 있을지 잘 알아보려무나. 너의 혼돈이, 과연 여기에서 치유를 찾을 수 있을지.” 데시는 그의 혼돈을 알고 있었다. “그만 가자.” 나우플리온이 다가와 어깨를 가볍게 쳤다. 생각에서 깨어난 다프넨은 어디선가 본 듯한 소녀 한 사람이 눈앞에서 싱긋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디서 봤더라? “안녕? 난 리리오페야. 리리라고 불러도 좋아. 머리 자른 모습도 보기 좋은데? 나한테 첫 번째로 네 이름을 직접 말해줄래?” 다프넨은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면서 얼떨결에 대답했다. “아... 난 다프넨이야. 반가워.” 옆에서 나우플리온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 하다가 생각을 바꾼 듯 그만두었다. 리리오페는 씩 웃더니 이어 말했다. “반갑다고? 정말이야?” 이번에도 얼결에 그는 진심을 말해 버리고 말았다. “글쎄.” 말을 뱉자마자 실수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리리오페는 <당연히 화내야 할 일을 봐줬으니 넌 내게 빚졌다>라는 듯한 표정으로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 “흐응, 너무 솔직한 건 곤란해. 하지만 잘생겼으니까 봐 줄게.” 이번에야말로 할 말을 잃어버린 다프넨은 입을 약간 벌린 채 당황한 눈으로 리리오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소리 내어 웃더니 팔짝 뛰어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놀랐지? 하지만 사실을 말한 거니까 내가 잘못한 건 아냐! 그리고 만에 하나 기분이 나쁘더라도 봐줘. 왜냐면 난 예쁘잖니? 그것도 아주 많이!” “......”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직껏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외모나 귀여움에 대해 단단히 확신하고 심지어 자랑스러워했던 로즈니스조차도 그런 얘기를 저렇게 입 밖에 내어 당당히 말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그다지 소녀가 불쾌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리리오페는 단지 혀를 쏙 내밀었다가 입 끝을 씨익 올리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을 뿐이고, 그것은 로즈니스가 흔히 짓던 자부심 가득한 표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굳이 말한다면 남이 깜짝 놀랄 말을 해 놓고 즐기는 개구쟁이의 치기와 비슷하달 까. 그 말이 무슨 내용이었는가 하는 점은 중요하지도 않고. “그럼 예쁜 아기씨는 갈 테니까, 혹시라도 또 보고 싶어지면 하루 전에 미리 신청해! 안녕!” 리리오페는 손가락을 들어 눈가에 댔다가 경쾌하게 떼더니 어느새 사람들 사이로 달려가 버렸다. 남은 두 남자는 한참 동안 말문이 막혀 있다가 잠시 후 비슷한 동작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나우플리온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거 참, 쟤가 언제부터 로즈니스보다 한 수 더 뜨게 되었지.” 나우플리온도 그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프넨은 이제 분명히 스승이 된 남자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잘 아시나요, 저 애?” “그래.” “어떤 애죠?” “관심 있냐?” “네에?” 나우플리온은 갑자기 얼굴 가득 장난기를 띠며 말했다. “응, 실은 말이지, 내가 여길 떠나기 전에는 나하고가 아니면 결혼 하지 않겠다고 그러던 애거든. 하지만 이제 너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으니 원한다면 내가 양보할까 한다. 오, 이 관대함, 너그러움, 역시 훌륭한 스승의 풍모야.” “차라리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친딸이라고 하시면 믿겠네요.” “쟤가 어딜 봐서 날 닮았냐?” “당신은 로즈니스하고도 죽이 잘 맞았잖아요? 분명 쟤하고도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 “넌 안 맞았냐? 너도 걔하고 잘 놀았잖아?” “그거야......” <그때 난 싫고 좋고를 가릴 입장이 아니지 않았느냐>라고 말하려는 참이었다. 나우플리온이 말을 가로막았다. “그래, 그거야. 지금 네가 하려는 말이 바로 내가 하려던 말이다. 나도 그랬어.” “로즈가 불쌍해요.” “바보야, 더 불쌍한 건 우리야. 잘 생각해 보라고.” 생각해 보니 정말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둘은 그러고도 한참 동안이나 전에 하던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런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는 눈이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로, 아니, 사실은 약간 달랐다. 다프넨 쪽에서는 몰랐지만 나우플리온은 이미 한참 전부터 눈치 채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죄송합니다만.” 눈앞에 나타난 붉은 머리의 소년을 보면서 다프넨은 <자신을 모르는 소년>이었던 당시 한 번 들었던 그의 이름을 기억해 내 보려 고 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비교적 간단했던 그 이름이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다행히도 이 소년은 그가 아닌 나우플리온 에게 용건이 있는 것 같았다. “검의 사제님,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뭐지?” “저 아이가 말입니다.” 그 순간 다프넨은 그의 이름을 기억해 내려 했던 노력을 중단했다. 방금 한 말을 들음과 동시에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챘던 것이다. <다프넨>이라는 이름은 방금 전에 데시 사제 에 의해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선포되었다. 그 이름을 굳이 부르지 않을 이유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일부러 존재 자체를 무 시하려는 것. “정말로 사제님의 첫 번째 제자입니까?” “그렇다만, 그런데 뭐 잘못됐냐?” 여느 때처럼 대수롭잖게 대꾸한 나우플리온에게 붉은 머리 소년, 헥토르는 대담한 목소리고 말했다. “잘못되었지요.” 둘은 잠시 서로의 눈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윽고 들려온 나우플리온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프넨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가 그 런 목소리를 내는 것을 아직껏 상상해 본 일이 없어서였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말해라. 당장 나를 납득시켜라. 서투른 핑계를 용서하지 않겠다.” 딱딱한 목소리 속에는 경멸조차 뼈처럼 박혀 있었다. 나우플리온과 같은 사람이 아직 어린 소년을 그렇게 불쾌하게 대한다는 것부터가 다프넨이 전에 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헥토르는 오히려 익숙한 듯 당황하지 않은 채 일단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며 말했다. “첫째로 저 아이는 아직 달 여왕의 가르침조차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제대로 된 순례자라고 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아까 지팡이의 사제님께서도 세례식 도중에 지적하셨지요. 지금의 저 아이는 우리가 그토록 배척해야 마땅하다고 배워온 외지인과 거의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이 일을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들로서는 저 아이에 대해서 사제님과 개인적 친분을 가졌다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런 아이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조차 시간이 걸릴 터인 데 어떻게 갑작스레 그런 중대한 위치에 오르게 할 수 있습니까? 어떤 과거를 거쳤는지, 어떤 성품을 지녔는지, 심지어 이전에 어떤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왜 하필 그런 아이를 받아들이라고 말하십니까? 좋은 혈통을 가진 섬 태생의 아이들, 의심할 필요가 없는 투명한 생애를 살아 온 아이들을 내버려두고요.” 다프넨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살아온 과거는 어둡고, 성격은 좋지 않고, 심지어 사람을 죽인 일도 있는 자신이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일을 확인한 것뿐이다. 다만 저 소년은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불쾌감과 불안감을 표현해버린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왜? 왜 그 사실이 그렇게나 불쾌하고 불안한가? 그때까지 다프넨은 나우플리온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어느 정도 중대한 일인지 잘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부러움을 살 만한 자리란 건 이해하겠지만 그게 그렇게까지 자신을 미워하고 질투할 이유가 되는 걸까? 그때 나우플리온이 그에 못지않게 딱딱하고도 위압적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가 너를 제자로 삼기라도 했어야 한다는 거냐? 내 고유의 권위를 놓고 함부로 옳고 그름을 논할 권리가 네겐 없다 . 그렇게 애써 길게 말했으니 나도 예의상 짧게나마 설명을 해 주지. 자, 지금 너와 이야기하고 있는 나는 대륙에서 이미 5년여 를 살다가 왔다. 아무래도 대륙의 문물과 관습에 물들었기가 쉽겠지? 너도 그것조차 불안하게 여길 테냐? 내 제자라는 위치가 무 슨 책임이나 권리를 갖는 자리냐? 단지 내 마음에 들었다는 것뿐이다. 그것에 대해 제 3자가 왈가왈부할 필요가 있느냐? 훗, 난 네가 누구를 만나고 사귀든 관심조차 없는데 왜 너는 그에 대해 논하려 하지? 자, 비켜라. 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숙취에 시 달려 머리가 몽롱한 것 같은 느낌이다. 다신 나를 귀찮게 하지 마라.” 나우플리온은 다프넨의 손을 끌어 잡더니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그러나 헥토르는 그대로 좀더 오랫동 안 서 있었다. 잠시 후 몸을 돌린 그는 어느새 주위를 둘러싼 소년들과 함께 반대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 가운데는 헥토르 의 동생인 에키온이 있어서 무언가 열렬히 자신의 계획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봐, 보리스.” 나우플리온과 다프넨은 산비탈에 푸르게 깔린 클로버들 위에 앉아 무심결에 손을 넣어 잎사귀들을 헤집고 있었다. 문득 그 이 름으로 불리니 가슴 한쪽이 핀으로 찔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운 어감이군요.” “네 이름말이야, 굳이 바꿀 필요 없어.” “네?” 나우플리온은 큼직한 손으로 클로버를 한 움큼 뽑더니 사방에 흩뿌렸다 그러더니 말했다. “네 이름의 뜻, 알고 있냐? 섬사람의 이름엔 다 뜻이 있다는 거 말이다.” “그런 얘기는 들었어요. 다프넨이라는 이름의 뜻은 뭔가요?” “다프넨...월계수라는 뜻이지.” “월계수라고요?” 그런 나무 이름을 들어본 일은 있었다. 보았던 적도 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았다. 보았더라도 아마 그 나무가 월계수인지 몰 랐을 가능성이 컸다. 식물 같은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니까. “월계수는 이 섬에서 자라지 않아. 대륙에 가면 볼 수 있지. 아마 이 섬에서 태어나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사람들은 월계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를 거다, 심지어 지팡이의 사제인 데시 님 조차도 모르겠지. 그녀도 밖으로 나간 일이 없으니까. 하지만 아 름다운 나무야. 대륙에서 그 나무의 푸른 잎사귀는 승리자를 위한 관을 장식하는 데 쓰이곤 한다지.” “그런데 어째서 본 적도 없는 나무 이름을 섬에서 사람 이름으로 쓰는 거죠? 전에 <무화과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사제님도 있 었다고 들었는데 그걸 말해준 아이는 무화과가 뭔지 모르더군요.” “우리가 본래 살았던 곳은 월계수도, 무화과나무도 무성하던 곳이었다고 해. 하지만 기억하는 자는 거의 없어. 우리는 고향에 서 멀어져 버린 유랑자들이야. 이제는 뿌리조차 희미하지.” “그곳은 어디였죠?” “몰라. 아마 아무도 모르진 않을 거야. 섭정 각하나 저 나무 탑 속의 현자께서는 알고 계실 지도 모르지. 하지만 보통 사람들 은, 심지어 나 같은 사람들조차 이미 모르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어쩌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 거야. 우리가 과거의 왕 국과 공유하고 있는 부분은 이제 극히 일부가 되어버렸으니까.” “나우플리온... 그렇다면 당신의 이름은 무슨 뜻인가요?” “항해자.” 항해자... 그 말은 분명 나우플리온과 아주 잘 어울렸다. 항해란 말의 뜻을, 배를 타는 데만 국한해도 그렇고, 멀리 떠돈다는 의미로 보아도 그랬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보면 더욱 더 그랬다. 이 섬까지 오던 도중 폭풍우를 만났던 때, 에니 오스<단센>가 나우플리온에게 <역시 형님은 항해자요>라고 말하던 것이 생각났다. “지금은 돌아가신 옛 사제님이 지어주신 것이고. 후후. 정말로 놀랍단 말이야. 너, 이런 이름들이 단순히 그냥 지어지는 게 아니란 것, 알고 있냐?” “그럼 어떻게 지어지는데요?” 클로버들이 연신 뜯겨 바람에 날려갔다. 꺾어진 풀대에서 나는 싸한 풀 내가 코끝을 간질였다. 나우플리온은 손을 내밀더니 다 프넨의 짧아진 머리털을 흐트러뜨렸다. 그런 행동은 과거 예프넨이 하던 그것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지금 그의 머리는 진네만 저택을 떠날 때보다 훨씬 더 짧아져서 겨우 귀를 넘길 정도가 되었다. 아까 의식 중에 가위로 대강 잘라서 끝도 들쭉날쭉했다. “미래를 내다보고서이지. 새 이름을 받게 될 아이의 미래를 들여다보고 거기에 어울리는 이름을 붙이게 되는 거야. 내 이름의 뜻을 처음 깨닫던 나이에 나는 이미 밖으로 나가 떠돌게 될 삶을 예감했어. 그렇다면 너는 뭘까. 월계수가 네게 의미하는 건 뭘 것 같니?” “전혀 모르겠어요. 월계수라는 나무에 대해서는 아무 느낌도 없는걸요.” 나우플리온은 웃었다. “이 이야기를 해도 좋은지 모르겠지만... 본래 네 이름은 다프넨이 될 것이 아니었다. 지팡이의 사제께서 본래 네 미래를 예감하며 가장 먼저 지은 이름은 다른 것이었지. 그런데 그 분은 무슨 생각이셨는지 그 이름에 대해 내게 와서 의논하시더군, 그래서 내가 말렸어. 그런 이름은 붙이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말이야.” “무슨... 이름이었는데요?” “아타나토스.” “에엣, 훨씬 길군요.” “임마, 길어서 말린 게 아냐. 아타나토스가 다프넨으로 변할 줄은 나도 모르고 있었단 말이야.”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인데 그래요?” 나우플리온은 약간 망설이다가 말했다. “불멸, 불사... 죽지 않는 자라는 의미다.” 죽지 않는다고? 다프넨이 당황하고 있자 나우플리온은 고개를 숙였다가 저으면서 나직이 말했다. “잊어버려. 그런 이름 따위, 네게는 어울리지 않아. 월계수라는 두 번째 이름 역시 무슨 의미로 택했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 네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역시 네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야. 네게는 전사, 보리스라는 이름이 제일 잘 맞는 것 같아. 삶의 전사, 삶 전체를 통해 모든 것들과 부딪쳐 싸워나가야만 하는 전사 말이다.” 자신이 이름이 될 뻔했다는 낯선 개념에 대해 생각하느라 말을 잊고 있던 다프넨이 한참 만에 물었다. “저를 계속 보리스라고 부르실 건가요?” “적어도 둘이 있을 때는 그러기로 할까?” 어딘지 모를 옛 땅에 월계수가 푸르게 자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했다. 이제 모두가 떠나고 비어버린 대지에는 아직도 월계수가 녹색 잎을 달고 서 있을까. 아니면 모두 사라져 황무지로 변해버렸을까. “우리들의 옛 왕국에 자랐다는 월계수는 종종 성의 입구에 심어두기도 했다고 그래. 방문객을 환영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 었다고 하거든, 네 이름이 다프넨이 된 건 만일 네가 그곳에 가게 된다면 환영받는 사람이 될 수 있단 뜻이지 않을까?” 나우플리온은 무언가 더 알고 있지만 숨기는 듯한 태도로 말을 멈췄다. 2. 적대자들 사흘 뒤, 다프넨은 <스콜리>로 안내받아 갔다. 마을에서 북쪽으로 뻗은 완만한 비탈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널찍한 탁상지가 있었고, 거기에 모든 아이들의 학교인 스콜리가 있었다. 배우는 것은 순례자의 임무와 달 여왕의 가르침, 옛 역사 약간, 그리고 막대 호신술 정도였다. 막대 호신술이라는 것 은 2미터가 조금 안 되는 막대만을 이용해서 무기를 든 적조차 제압하는 기술로서 섬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익히고 있는 전통 무예 같은 것이었다. 그는 이제 달 여왕이라는 것이 실제로 하늘에 떠 있는 달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냥 달과 <달 여왕>이라고 불릴 때의 달은 성격이 전혀 달랐다. 달 여왕은 오만하지만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며 변덕스러우면서 동시에 지혜로웠다. 그녀의 성격은 두 가지로 나누어졌다. 하나 는 강한 자를 좋아하고, 게으르거나 유약한 자를 못 견뎌하는 초승달의 성격이고, 나머지 하나는 예지와 마법을 주관하며 오랜 지혜를 나누어주는 보름달의 성격이었다. 그녀의 그런 모순 되는 성격을 잘 이해하고, 그녀가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달의 순례자가 추구하는 길이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두 가지 성격은 서로 상반되기에 때로는 이쪽에 걸리고, 때로는 저쪽에 맞지 않았다 . 단순히 중용의 길을 걸으라는 의미도 아니었다. 달 여왕은 우유부단한 자를 증오했다. 그녀의 감정 표현은 때로는 은근하지만 때로는 매우 명백하게 직설적이었다. 그녀는 아주 가끔씩 직접 손을 써서 마음에 들지 않는 자를 벌했다. 그러나 어떤 악은 아 주 오래오래 번성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 이 섬에 정착한 사람들의 조상은 옛 왕국에서도 달을 섬기는 종교를 지녔던 자들이었다. 따라서 연원이 오랜 만큼 이 신 앙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초월자의 모순 된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어찌 하찮은 인간으로서 간단한 일이겠는가. 우리는 단지 끝없이 그녀에게 가까워 지려 노력할 뿐이지. 오직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이야.” 다프넨은 스콜리 입구에서 한 노인을 만나 그런 말을 들었다. 노인은 한때 스콜리의 선생 가운데 한 명이었지만 현재는 은퇴 하여 정원을 다듬고 있었다. 다프넨은 노인을 지나쳐 야트막한 1층 건물인 스콜리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복도를 끝까지 따라가니 방문이 있었다. 그는 노 크하고 들어갔다. “그래, 네가 다프넨이구나.” 스콜리의 교장은 수도사, 즉 사제 바로 아래 단계에 속하는 지위의 순례자였다. 방안에는 한 명의 소녀가 앉아 있어서 그를 놀라게 했다. 세례식 날 그를 당황하게 했던 리리오페였다. 그러나 이번에 그녀는 발목까지 오는 다소곳한 긴치마 차림에 어울리게 얌전한 미소만 띠었을 따름이었다. 양 갈래로 묶은 머 리만이 그녀의 장난기를 약간 나타내고 있달 까. 정말이지 수십 가지 얼굴을 가진 소녀임에 틀림없었다. 인사가 끝나자 교장이 말했다. “리리오페는 너보다 한 살 아래지만 학교에 오래 있었고, 또 네가 학교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안내역을 맡겠다고 자청했단다. 그러니 서로 친하게 지내고 고맙게 생각하도록 해라.” 다프넨은 리리오페를 바라보며 “고마워”하고 말했고, 리리오페 역시 기쁜 듯 예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여기까지는 좋은 진행이었다. “그러면 나가 보거라. 오늘은 학교가 쉬는 날이니 천천히 둘러보고, 수업은 내일부터 시작하자. 네가 가야 할 교실이나 준비할 것들에 대해서는 리리오페가 잘 이야기해 줄 거다.” 둘은 교장실을 나와 몇 걸음 복도를 되짚어 걸어갔다. 그때부터 일이 터지기 시작했다. “굳이 오빠라고 안 해도 되지? 난 도저히 네가 나보다 오빠라고 못 믿겠어. 너무 귀엽기만 한 얼굴이잖아. 후훗.” “......” 귀엽다는 말은 진네만 저택에 살 때 예프넨 형한테나 들어보았을까? 형을 잃은 후로 그런 생각을 떠올려 본 일조차 없던 그로서는 황당하다 못해 무례하게까지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러나 리리오페는 그런 말이나 한 주제에 너무도 해맑게 웃고 있어서 화를 내기도 좀 애매했다. “......그런 말은 싫어해.” 싫어했던가? 방금 생각해 낸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럭저럭 적당한 대답이 된 것 같았다. 그러나 리리오페는 이런 문제에서 만만한 상대가 절대 아니었다. “아, 미안. 귀엽다는 얘긴 앞으로 안 하도록 노력해 볼게. 어쨌든 그러면 오빠라고 안 불러도 된다는 건 허락한 거지? 고마워, 관대한 오빠. 이건 마지막으로 불러 준 거야!” 그러더니 곧장 앞질러 몇 걸음 뛰어가서 복도 옆으로 난 첫 번째 문을 경쾌하게 열어 젖혔다. 안으로 들어갔다가 상반신만 쑥 내밀더니 어서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어쨌거나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아, 여기는 우리 학교에서 제일 크고 좋은 교실이야. 뭐, 그래봤자 교실이라곤 두 개 밖에 없지만 말이야.” 널찍하고 둥근 테이블이 가운데 놓여 있었는데 리리오페는 잰걸음으로 춤추듯 빙글빙글 돌며 테이블 주위를 반 바퀴 정도 돌아갔다. 폭이 넓고 트임이 있는 치마가 펄럭이자 하안 발목과 종아리가 드러났다. 한 개의 의자 앞에 멈춰 선 리리오페는 손가락을 탁자에 탁, 짚으며 말했다. “아무데나 앉아도 되지만 여기가 명당이지! 햇빛도 잘 들고 선생님 얼굴을 정면으로 보지 않아도 되거든. 그러니까 여기 앉아. 알았지? 그리고 난 네 옆자리, 여기 앉을 거야. 이 교실에선 이드몬 선생님께서 읽고 쓰는 것을 가르치시고, 또 필로멜라 선생님은 간단한 마법 주문들을 가르쳐 주셔. 제네시 선생님은 순례자의 길과 옛날 역사를 얘기해 주시고 또 우리들의 의견을 말하게 하시지. 그것 말고도 주로 나이 많은 학생들의 수업은 다 여기서 해.” 두 번째 교실은 바로 맞은편에 붙어 있었다. 앞서의 것보다 훨씬 작았지만 생긴 것은 비슷했다. 우측 벽 쪽으로 약간 넓은 공간을 비워두었고 중앙에는 둥근 테이블과 의자들이 있었다. 나무로 바닥을 깐 교실 옆벽에는 덧문을 열어 놓은 작은 창들이 있었다. 그리고 들어온 완만한 햇살이 갈색 테이블을 갓 구운 빵처럼 폭신하게 보이게 했다. 그런데 그 너머에 기대하지 않았던 인물이 창 밖을 내다보며 앉아 있었다. 리리오페가 별로 곱지 못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어머, 땅다람쥐잖아? 여기서 혼자 뭐하니?” 그 아이, 오이지스는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가 다프넨과 눈을 마주치고는 더욱 당황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몸을 움츠렸는데, 흡사 그렇게 해서 자신이 안보이게 될 수 있다고 믿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겨우 등받이 뒤에 숨으려 한 것에 불과했다. “뭐, 있는 거야 자유니깐.” 리리오페는 오이지스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은 듯 쌀쌀맞게 말하며 다프넨을 왼쪽 벽으로 이끌어 갔다. 거기에는 크지 않은 책꽂이가 있었고 낡아빠진 책들이 마흔 권정도 꽂혀있었다. 아이들의 손이 닿아 해어진 모양이었고, 책의 내용들도 대부분 쉬운 것들인 듯했다. 학교 안에서 도서실이라 할만한 건 그것이 전부였다. “여기 책은 마음대로 봐도 돼. 그렇다고 해 봤자 별로 보는 사람도 없지만 말이야. 너도 책에는 그다지 관심 없지? 검의 사제님의 제자잖아! 후우, 난 책이 많이 있는 것 보면 머리가 아파져. 사실 여기도 너무 많은 것 같거든. 넌 이렇게 많은 책이 한 곳에 있는 걸 본 일이 있어?” 다프넨은 여러 사람이 읽어서가 아니라 이리저리 던지고 놀다가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책들의 소박한 규모를 올려다보았다. 바다처럼 넓은 벨노어 백작의 서재를 보았고, 한때 그 안에서 책을 읽으며 겨울을 보냈던 그였으므로 이 정도 책은 시골 사람의 개인서가 정도로도 보이지 않았다. 너덜거리는 표지에다가 들쭉날쭉하게 멋대로 꽂힌 책들 역시, 그가 읽었던 책들에 비해 얇기도 했고 제목도 단순하고 쉬웠다. 벨노어 성의 서재를 떠올리자 이어 란지에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해졌다. 햇빛 좋은 창가에 걸터앉아 두터운 책장을 넘기고 있는 하늘빛 머리카락의 소년, 그의 나직한 목소리와 침착한 눈빛이 어제 본 듯 생생했다. 그만큼 인상 깊은 사람이었다. 이제 다시 볼 수는 없을 지도 모르는데. 바다를 건너고 평야와 산들을 넘어 아름다운 남부의 땅에서 그는 아직도 살아가고 있겠지. “뭘 생각해?” “아니.” 리리오페가 궁금한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다프넨은 책장에서 책을 하나 꺼내서 넘겨보았다. 어린이들을 위한 전설 집 같은 것이었다. 동갑내기 독서 선생이 곁에 없으니 책들이 다 부질없어 보였다. 그는 책을 다시 꽂아 넣고 돌아섰다. 오이지스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 나는......” 버릇처럼 말을 더듬으며 그는 잠시 호흡을 지체했다. 다프넨은 무감정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실제로 무감정했다. 거친 아이들의 협박에 굴해 불리한 증언을 했지만 그리 신경 쓰이는 일도 아니었다. 새로이 누군가를 사랑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듯, 누군가를 딱히 미워할 기분도 나지 않았다. 갑자기 리리오페가 끼어들어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넌 무슨 자격으로 얘한테 말을 거는 거니? 용기가 없으면 최소한 양심이라도 있어야 할 거 아냐? 정말 겁쟁이에다 형편없는 애라니까! 내가 무슨 일 때문에 너한테 이렇게 말하는지는 너 역시 잘 알고 있겠지?” 용기가 없으면 양심도 지킬 수 없다는 것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다프넨이었다. 하지만 일말의 불쾌감 때문인지 연민은 들지 않았다. 오이지스는 모진 말을 듣고도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나...다 알고 있어...... 하지만...아니, 변명하지는 않을 거야. 난 이거밖에 안 돼... 정말로, 리리오페 말대로 겁쟁이고... 형편없어...... 미안하고... 차라리 날 실컷 때려 줬으면... 마음이 편하겠어......” 그러나 리리오페는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네 마음 편해지라고 얘가 굳이 널 때리기까지 해야 한단 말이니? 무슨 그따위 소리가 다 있니? 생각하는 것마다 엉터리없어서... 너 같은 애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거 모르니? 매일같이 맞기만 하다 보니 아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오이지스는 리리오페가 하는 말을 모조리 곧이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반박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자기 비하에 익숙해 온 나머지 화를 낼 줄도 모르게 된 소년의 모습이었다. “너란 애는 도대체......” “그만해.” 리리오페는 다프넨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말을 그쳤다. 그리고 새침하게 입가를 실룩이며 팔짱을 꼈다. 다프넨은 오이지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별로 신경 쓰고 있지 않으니까.”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보다 구체적으로 말했다. “데시 사제님께서는 머리카락과 함께 지난 일들을 털어 버리라 하셨지. 내 짧아진 머리가 보이겠지? 내가 그 일에 더 이상 마음 쓰게 하지 마. 끝났으니까.” 그는 돌아서서 교실을 나왔고 리리오페가 뒤를 따라왔다. 다프넨은 걸으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방금 자신이 오이지스를 용 서한 것인가, 아니면 사죄조차 차단해 버린 것인가. 리리오페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 9시에 작은 교실로 와. 소매의 사제, 페트라님한테 가면 스콜리 입학생을 위한 준비물들을 주실 거야. 그 분은 공회당 동쪽에 전나무 묘목이 많이 있는 집에 사셔. 어쨌든 학교에 오면 선생님들이 차례로 네 실력을 시험에 주실 거야. 대부 분 읽고 쓸 줄 알면 별로 문제없는 시험이니까 걱정할 건 없고, 그나저나 너, 나우플리온 사제님하고 같이 살게 된 거지?” 둘은 헤어졌다. 리리오페는 도로 스콜리 건물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녀로서도 뭔가 생각에 잠길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 네가 대륙에서 온 다프넨 군이군? 그래, 그게 너로군?” 몇 번째일까. 그가 섬으로 온 뒤 하루도 빠짐없이 만나 온 적대적인 사람들이 또다시 한 명 늘어난 모양이었다. 그는 스콜리 의 막대호신술 선생인 질이었다. 본래 이름은 질레보라고 했다. 나우플리온과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두 손을 넓혀 움켜쥔 막대를 양쪽으로 번갈아 움직여 어깨 근육을 풀면서 말없이 소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주위에는 여러 소년 소녀들이 비슷한 막대를 든 채 선생이 시킨 대로 연습에 열중하고 있 었다. 스콜리의 뒤뜰이었다. 오후였다. “그러니까 네가 그, 훌륭하신 분의 제자라고? 그것도 섬에 들어와 이름도 받기 전에 말이야, 아주 파격적으로.” 그제야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막대호신술선생 질은 움직이던 팔을 멈췄다. “시험해 볼 필요가 있겠어? 보나마나 훌륭하겠지, 안 그런가? 그렇게 훌륭하신 분의 제자인데 대단하지 않다면 그것이 이상 하겠지. 아참, 그러고 보니 어쩌면 나보다 더 나은 실력을 가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겠군?” 그날 다프넨은 여러 명의 선생들로부터 기초적인 학습 능력을 시험받았다. 이드몬 선생이라는 사람은 그의 읽기 쓰기, 그리 고 심지어 작문 실력조차도 그 또래들에 비해 뛰어나다고 말했고, 필로멜라 선생은 이 아이가 마법에는 전혀 지식이 없지만 좋은 목소리를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제네시 선생조차 그가 보기보다 책과 친숙한 것에 놀랐다고 전해 주었다. 요즘 섬에서는 책을 읽는 아이를 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네 번째로 오게 된 곳이 이곳이었다. 다프넨은 말없이 질 선생을 올려다볼 뿐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한 마디라도 나우플리온을 비난하는 말을 한다면 바로 반박해 줄 참이었다. “보기나 하자고, 어디까지나 보기만 하는 거니까 그분께 감히 제자를 시험해 봤다고 화내시진 말라고 말씀드려라.” 다프넨은 윈터러를 풀어 바닥에 놓고 막대를 잡았다. 그리고 세 발짝 떨어져 섰다. 질은 막대를 앞으로 내민 채 상대방을 놀 리기라도 하듯 휘휘 젓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빠른 동작으로 그의 어깨를 찔렀다. 정확히 받아내지 못하고 얼결에 피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반사적으로 손에 든 막대가 튀어나가고 말았다. 막대는 정확히 선생 의 팔꿈치를 스치고 지나갔다. 질 선생의 얼굴이 변했다. 물론 막대는 날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베듯 휘두르는 것은 별로 쓸모가 없었다. 그제야 형과 목검을 휘두르던 때의 일을 떠 올렸지만, 그때도 검의 대용으로 썼을 뿐 막대의 특징을 살려 사용하는 법을 익힌 것은 아니었다. 다프넨은 다시 물러섰다. 선생은 팔을 빼더니 빠르게 세 번, 그의 얼굴 양쪽을 찔렀다. 모두 피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눈속임이었다. 상대가 혼란해진 틈을 타서 막대는 다프넨의 다리를 내리쳤다. 이번에는 얻어맞고 말았다. 긴 막대는 순식간에 거두어져 갔다. “저런, 그래서야 어디 내 코를 납작하게 하겠어?” 선생의 코를 납작하게 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럴 실력이 있다고 믿지도 않았다. 그러나 은근히 화가 치미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자, 이번엔 공격해 보라고!” 다프넨은 막대의 중간쯤을 두 손으로 잡았다. 이렇게 긴 무기를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선 전혀 몰랐지만 검이라면 얼마든지 써 본 자신이었다. 좌우 같은 길이가 된 막대의 양끝을 두 팔로 움직이는 것처럼 휘둘렀다. 그런 식으로 하다가 갑자기 한쪽을 빠르게 밀었다. 그러나 질 선생은 이렇게 생긴 막대를 사용하는 법만 평생 연구해 온 사람이었다. 초보자의 응용공격쯤은 이미 다 간파하고 있었다. 막대는 봉쇄당하고, 이어 격파 당했다. 공격에 실패하자 자연 허점이 드러났다. 질 선생은 아주 경쾌한 동작으로 그의 허리를 내리치고 팔을 찍었다. 그리고 발을 쳐서 넘어뜨리려했다. 그때 다프넨은 그냥 넘어져 주는 편이 좋다는 것을 깨닫고 일부러 바닥에 넘어졌다. 그러자 시점을 정확히 조절하지 못해 막대가 닿자 넘어진 꼴이 되고 말았다. 선생이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질 선생이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네가 뭔데 감히 지는 체 하려는 거냐! 그러지 않으면 내가 널 이길 수 없기라도 하다는 거냐?” 조금 전에 비꼬던 때와는 전혀 다른 말투였다. 다프넨은 다시 일어나서며 침착하게 말했다. “저는 선생님을 이길 재간이 없습니다.” “허! 갈수록 건방지군, 봐주는 체 하지 마라. 너 같은 어린애한테 그런 취급이나 받을 정도로 허술한 실력을 가진 내가 아니다. 네가 나우플리온 사제님의 제자라고 해서 선생인 나보다 잘났을 줄 아느냐?” 그런 말은 입 밖에 낸 일조차 없었다. 그제야 다프넨은 질 선생이 나우플리온에게 어떤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말끝마다 그의 일을 들먹이면서 상대를 화나게 하려다 점점 더 흥분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그쪽이었다. “사제님께서는 훌륭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어리고 실력이 없습니다.” “웃기지 말아! 이미 기고만장해서 나조차도 눈 아래 두지 않았느냐! 제대로 겨루어 볼 테냐? 내 앞에서 걸어서 나가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듣자 다프넨도 약간의 오기가 올랐다. “저도 익숙하지 않은 막대를 들고 선생님에게 이길 자신은 없습니다.” “뭐라고? 그럼 네가 검을 들면 날 이길 수 있단 말이냐? 어디 해 봐라, 검을 쥐고 내게 덤벼 봐! 나우플리온 사제한테 배운 그 잘난 실력으로 나를 눌러보란 말이다! 어디, 나도 검을 잡아 줄까?” 그제야 말을 실수했다는 것을 느꼈지만 어떻게 돌이켜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질 선생은 당장 옆의 소년에게 창고로 가서 검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주위의 아이들은 어느새 연습을 멈추고 두 사람의 다툼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프넨의 처지를 동정하는 아이는 거의 없었다. 단지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한 눈빛들에 불과했다. 검을 든 질 선생은 다시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어서 검을 뽑아라!” “선생님과 싸우지 않겠어요.” “누구 마음대로! 그러면 나우플리온 사제의 실력이 나보다 못하다는 걸 인정할 테냐?” 죽어도 그럴 수는 없었다. 다프넨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께서 제게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우플리온 사제님과 실력을 겨루고 싶으시면 그 분과 만나시면 될 일이 아닌가요? 어떻게 어린 제가 선생님과 겨뤄 이길 수 있단 말입니까? 제가 어리석어 좋은 가르침을 다 이해하지 못하니 실력이 모자란 것뿐입니다. 제 형편없는 실력을 놓고 나우플리온 사제님의 이름을 자꾸만 거론하지 마십시오.” 그때 질 선생 옆으로 한 소년이 다가왔다. “선생님, 직접 어린 녀석과 상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이 훌륭하다는 것은 선생님께 배운 제가 증명하지요.” 선생과 다프넨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헥토르가 거기에 서 있었다. 질 선생은 조금 놀란 듯하더니 곧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네가 내 명예를 위해 싸우겠다니 의외이긴 하다만, 그 말은 확실히 옳은 것 같군. 둘이 싸우면 누구의 가르침이 더 훌륭한지 알 수 있겠지.” 보아하니 질 선생과 헥토르도 그다지 좋은 사이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다프넨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둘 다 똑같이 다프넨을 미워하고 있었다. 헥토르가 앞으로 나서더니 말했다. “자, 나하고 겨뤄 볼까. 검이 좋다면 검으로 해 보자고. 어서 네 검을 뽑아.” 질 선생의 손에서 검을 넘겨받은 헥토르는 눈을 빛내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나 다프넨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이 검을 뽑을 수 없어. 내게도 연습용 검을 준다면 싸우겠다.” 헥토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네 좋은 검을 쓰면 내가 다칠까봐 그러냐? 걱정할 거 없어. 난 네 손에 상처 하나 입지 않을 거니까.” 나우플리온의 충고가 있은 후로 한 번도 뽑지 않았던 윈터러였다. 렘므에 있는 동안 윈터러 대신 얇은 소검을 차고 다녔지만 섬으로 오면서 팔아 버렸다. 검을 두 개나 갖고 있는 것이 공격적으로 보일까봐 그랬고, 또 이곳에 와서 그렇게 검을 휘두를 일이 빨리 생기리란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프넨은 고개를 저었다. “안돼. 이 검을 함부로 뽑을 수 없는 검이야. 다른 검을 주지 않으면 너와 싸우지 않겠어.” 질 선생이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꼬마 녀석이 여러 가지로 복잡하게 구는군! 저 녀석에게 연습용 검을 가져다 줘라!” 헥토르가 비아냥거렸다. “흥, 실은 검의 상태가 아주 엉망인가보지? 매일숫돌에 가는 걸 게을리 해서 이가 다 빠진 고철 검인가?” 그런 시시한 도발에 일일이 응할 생각은 없었다. 드디어 둘 다의 손에 연습용 검이 쥐어졌다. 그때 구경하던 아이들은 한쪽에 내려놓은 윈터러를 흘끔거리며 몹시 궁금해 하는 기색이었다. 둘은 말없이 격돌했다. 헥토르의 검이 먼저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다프넨보다 키가 클 뿐만 아니라 팔까지 상당히 긴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검은 똑같은 연습용 검이어서 길이는 물론 모양까지 거의 비슷했다. 다프넨은 평소 쓰던 것보다 검이 너무 가벼워서 오히려 불편함을 느꼈다. 움직이려 한 지점과 실제로 검이 휘둘러진 지점이 미묘하게 달랐다. 다프넨의 검이 헥토르가 든 검의 자루 쪽을 쳤지만, 개의치 않고 내찌른 헥토르의 검이 다프넨의 이마를 살짝 그었다. 처음부터 머리를 다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오랜 실전 경험 때문에 다프넨은 당황하지 않았다. 물러나 곧장 재공격에 들어갔다. 두 발짝 앞에서 방향을 틀며 왼쪽 허리를 찔러갔다. “어림없어!” 헥토르가 희한한 동작으로 팔을 틀며 접근한 검을 쳐내 버렸다. 다프넨은 흠칫 놀랐다. 저런 자세로 이 정도의 위력을 낼 수 있다니, 도대체 어느 정도의 힘인 거지? 당황한 틈을 타서 헥토르가 내민 검이 상박에 명중했다. 다행히도 왼팔이었다. 피가 옷을 적시며 번져나가는 것이 구경하는 아이들의 눈에도 보였다. 보통의 소년이라면 이 정도 상처에도 놀라 움츠러드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다프넨은 달랐다. 위기를 느낀 순간 오히려 놓친 반 박자를 되찾아 기세 좋게 달려가며 내리그었다. 촤악, 핏줄기가 튀며 헥토르의 오른쪽 어깨 부분의 옷이 찢어져 너덜거렸다. 한 번씩 주고받은 셈이 되었지만 아직 서로의 실력을 알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어머나, 어찌 된 거야? 두 사람 실력이 비슷한가 보네?” 목소리가 크지 않았는데도 헥토르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그것은 리리오페의 목소리였다. “헥토르 오빠는 다프넨보다 두 살이나 많은데 어떻게 된 거야? 설마 동생 하나 쉽게 못 이기는 거야?” “......” 리리오페의 말에는 다분히 감정을 자극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었다. 주위 사람들 모두가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손가락을 코에 갖다대며 짓궂게 말을 이었다. “그럼 앞으로 2년 더 있으면 다프넨이 오빠보다 더 나을 지도 모르겠네?” 그 순간, 헥토르의 검이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깊숙이 찔러져 들어왔다. 상대를 단숨에 제압하려는, 방어는 완전히 무시하다시피 한 공격이었다. “!” 다프넨은 한 발짝 물러남과 동시에 춤추듯 날쌔게 어깨를 틀어 피하며 상대의 검을 밀어 쳤다. 그러면서 다리를 들어 무릎을 걷어차 버렸다. 상대의 검을 밀쳐내자마자 당장 베기로 들어갔다. 기회를 잡은 이상, 무자비하다 싶을 정도로 몰아쳐 상대를 단숨에 누르는 것이야말로 모든 실전의 기본이었다. 대련보다는 실전에 익숙한 다프넨은 바로 그대로 행동했다. 거칠 것 없는 검이 헥토르의 눈가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그때까지도 망설임조차 느끼지 못한 그였다. “그만둬!” 다른 목소리였다면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우플리온의 목소리였다. 다프넨의 검이 멈췄다. 바로 헥토르의 얼굴을 긋기 직전이었다. 나우플리온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다프넨의 팔을 움켜잡으며 질 선생에게 소리쳤다. “아니, 졸업도 하지 않은 아이들끼리 실검으로 대결하게 하다니, 정신 나갔나! 왜 스콜리에서 막대호신술만 가르치게 하는 지 잊었단 말인가?” 정신을 차린 헥토르는 이마와 등줄기에서 땀이 줄줄 흐르는 것을 느꼈다. 좀 전에는 모든 진행이 너무나 빨라 당황할 틈조차 없었다. 그러나 눈앞에서 딱 멈추는 검 날을 보았을 때는, 정말로 세상 전부가 멎었다가 다시 돌기 시작한 듯한 느낌이었다. 다프넨도 그제야 자신이 상대를 죽일 뻔했다는 것을 알고 마음속으로 충격을 받았다.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그렇게 흥분할 필요는 없었는데, 게다가 손에 든 검이 윈터러도 아닌데 왜 그 순간 그렇게 살기에 익숙한 듯 행동했던 것일까? “내... 수업에 참견하지 마.” 보아하니 질 선생과 나우플리온은 서로 반말을 하는 사이였다. 나우플리온은 몹시 화가 나 있었다. “방금 한 아이가 죽을 뻔하지 않았나! 선생이란 자가 그런 것을 막지 않고서 무얼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지?” “너, 너는......” 질 선생은 불쾌감으로 온 몸을 떨고 있었다. 헥토르가 다칠 뻔했다거나, 다프넨이 살인을 저지를 뻔했다는 일 따위에 대해선 애초에 관심조차 없는 것 같았다. “넌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할 자격이 없어! 평생을 참회해도 모자랄 죄인인 주제에...너, 넌 여기 들어와 수업에 끼어들 수 없 어. 넌 스콜리에 들어올 수도 없어, 넌, 넌, 이 섬에 있을 자격도 없어!” 다들 나우플리온이 정신 나간 소리를 지껄이는 선생에게 크게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우플리온은 입술을 꾹 다물 더니 다프넨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만 나가자. 저 자의 수업을 받지 마라.” 그러나 실 선생은 아무도 그 까닭을 모르는 격분에 사로잡혀 중풍 환자처럼 떨고 있었다. 나우플리온의 모습을 보는 순간 모 든 것이 폭발해 버린 것 같았다. 돌아선 상대의 뒤통수에 대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질렀다. “왜 돌아왔지? 그래도 대륙에서 떠돌이처럼 살다가 죽어버릴 것이지! 섬사람들이 다 너를 환영할 줄 알았나? 어림없는 소리 , 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 비겁자 나우플리온! 네가 양심이 있다면 감히 이솔렛의 얼굴을 마주보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우플리온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모든 아이들의 시선을 등 뒤로 받으며 그 자리를 떴다. 다프넨은 스승을 따라가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며 헥토르의 얼굴을 살피려 했다. 그러나 먼저 들어온 것은 리리오페의 모습이 었다. 그녀는 큰일을 당할 뻔한 헥토르는 아랑곳도 않고, 오른손 손바닥을 쫙 펴서 든 채 눈동자만을 굴려 그에게 인사를 보냈다. 3. 산 위의 공주, 산 아래의 공주 지금까지 함께 지내오면서 나우플리온이 결코 대답하지 않는 화제가 한 가지 있었다. 그들은 렘므에서 재회했을 당시, 나우플리온은 제사용 마법단도인 루네트를 이용해서 섬의 모습을 보여 준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이솔렛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를 보았었다. 다음날쯤 되어 그는 그 소녀가 누구냐고 넌지시 물어 보았다. 누이 동생일까, 생각해 봤지만 전혀 닮은 얼굴이 아니었다. “글쎄 말이다.” 나우플리온이 대꾸하기 싫은 일을 은근슬쩍 넘기려 할 때 종종 하곤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일단은 그렇게 넘어갔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인가 가족에 대해 서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그는 자신의 고향과 진네만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와 삼촌 사이에 얽힌 오랜 애증, 고모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예프넨의 죽음에 대한 것까지. 그런 다음 나우플리온의 가족에 대한 것을 물어보았다. 알고 보니 나우플리온에게는 마땅한 가족이 없었다. 부모를 일찍 잃었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자식을 낳고서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떴다고 했다. 졸지에 고아가 된 그는 섬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그 가운데서도 그의 이름을 지어 준 전임 지팡이의 사제는 그를 자식처럼 돌보아 주었다. 그 전임 사제는 현재 지팡이의 사제를 맡고 있는 데시의 친아버지였다. 그때 다시 한 번 이솔렛에 대한 것을 물어보았지만 나우플리온은 또다시 함구했다. 그녀에 관한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섬으로 오고 드디어 이솔렛에 대한 것을 물어보았을 때, 다프넨은 첫눈에 그녀에게서 묘한 충격을 느꼈다. 아름다워서? 아니다, 그것조차 사소한 특징에 불과할 정도로 그녀에게는 어떤 특별한 것이 천분처럼 주어져 있었다. 가장 먼저, 온 몸에 감도는 비인간적인 싸늘함에서부터. 얼음 조각처럼 고운 얼굴과 검사답게 균형 잡힌 단단한 몸매는 분명 대조적이었으나, 살아가는 데 남의 도움 따위 필요 없다는 오만한 자태만은 어느 쪽이든 똑같았다. 목소리는 여성치고는 약간 낮은 저음에 풍부한 울림이 깃들여 종종 낯설게까지 느껴지는 허스키로 변했다. 이 섬에 와서 모든 것이 낯설었고 모든 사람이 그와 달랐지만, 그녀만큼 별개인 양 느껴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존재 자체로 이미 먼별에서 온 듯 다른 누구와도 구별되어 보였다. 흡사 섬뜩한 전설 속에 나오는 손댈 수 없는 미인처럼. 그리고 그렇게 느끼는 것이 다프넨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우플리온이 말한 대로, 다프넨은 더 이상 질 선생의 수업을 듣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다. 더 있어 봐야 제대로 된 것을 가르쳐 줄 리도 만무하고, 자신의 잘못이 아닌 다른 외적 조건 때문에 저렇듯 증오를 내보이니 그 마음을 되돌리기란 힘들 거란 생각이었다. “네가,,, 그러니까 막대호신술을 더 이상 배우지 않겠다는 거냐? 흐음......” 다프넨은 나우플리온과 함께 교장의 방에 다시 와 있었다. 그는 나우플리온의 입을 빌리지 않고 솔직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 혔다. 교장도 어제 사건을 알고 있었기에 대략의 상황을 짐작하여 그리 비난하지는 않았다. 어제 사건은 확실히 여파가 엄청났 다. 섬사람들은 헥토르와 대등하게 겨룰 정도의 실력자 소년이 나타났다는 것에 큰 관심을 보였고, 그가 결코 뽑지 않는 검에 대한 이야기도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억측들과 함께. 교장은 나우플리온을 바라보았다. 나우플리온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간단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다프넨은 검의 사제님께 검술을 배울 터이니 막대호신술은 배우지 않아도 무방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달리 무엇을 베울 수 있을까요? 스콜리를 정식 졸업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이상의 교육성과를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사제님 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으로서는 스콜리의 학제 내에 적당한 과목이 없습니다만.” 교장은 나우플리온을 다프넨의 보호자로 생각하는 듯 그를 향해서 말했다. 나우플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프넨을 한 번 내려다본 다음 대답했다. “노래, 그러니까 신성 찬트(Chant)를 배우게 할 생각입니다.” 교장은 뜻밖이라는 듯한 얼굴로 눈을 비볐다. “그걸 누가 가르칩니까?” 나우플리온은 간단하게 말을 맺었다. “한 명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다프넨이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끼어들었다. “신성 찬트란 무엇인가요? 아니, 그것보다 네 가지를 증명해야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죠?” 나이 지긋한 늙은 교장은 낙관적이고 온후한 인물이었고 다프넨뿐 아니라 학교의 모든 아이들에게 관대했다. 그는 끼어든 것을 탓하지도 않고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스콜리의 학제는 본래 묘하게 느슨해서 입학 나이와 졸업 나이만이 정해져 있을 뿐이고 학교에 다니는 동안 종종, 심지어 중간 에 몇 달 정도 집안 일이 바빠 쉰다고 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단지 졸업 무렵에 간단하게 치러지는 몇 가지 시험을 통해 어 느 정도 성취를 이루었다는 것을 보이기만 하면 되었다. 수업도 하루에 많아야 네 번 정도 불과했고, 그나마 오후 2시 정도면 상 급생들까지 모든 수업이 끝나버렸다. 그러나 수업이 끝나도 학생들은 학교에 남아 4시 정도까지는 왁자하게 떠들며 노는 것이 보 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졸업 시험에서 모든 학생은 기본적으로 스콜리에서 얻은 네 가지 성과를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성취도 의 수준은 점차 낮아지고 있었지만 그 가짓수만은 옛 왕국으로부터 내려온 전통이라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지금으로서 다프넨은 역사, 간단한 마법, 그리고 <교양>이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읽기, 쓰기, 작문, 독서, 그 외 선생이 내키는 대로 얘기해 주는 잡다한 옛날이야기 같은 것들이 순례자와 달 여왕에 대한 것, 통째로 혼합되어 있는 과목까지 세 가지를 배우게 되어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거기에 더해서 막대호신술을 배웠지만, 그것을 거부한 이상 새로운 선택이 불가피했다. “예전엔 말이다, 이보다 택할 수 있는 수업의 종류가 다양했단다. 지금은 교양이란 이름으로 뭉떵 그려져 있지만 본래는 철학, 문학, 논리학, 토론, 수학, 지리학 같은 다양한 과목들로 나누어져 있었지. 마법도 지금보다 훨씬 단계가 세분화 되어 있었어. 하 지만 그건 옛 왕국에서 떠나오기 전의 이야기고, 여기에 도착한 사람이 겨우 백여 명에 불과하다 보니 서너 세대 정도가 지나면서 대부분의 학문들은 맥이 끊겨버렸지. 척박한 땅에서는 살아가는 문제가 가장 우선이기 마련이고, 대저 학문이란 여러 천재들의 뛰 어난 천분과 노력이 동시에 쏟아 부어져도 간신히 유지될까 말까 한 것이기 때문이지.” 교장은 정말로 예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시절에 교장은 태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교장의 설명이 끝나기를 기다려 나우플리온이 말했다. “신성 찬트란 기본적으로 마법적인 능력이 깃들인 노래를 말하는 것이지. 그러나 그런 표면적 기능만으로 설명하기는 힘들고, 사람의 마음과 더 나아가 영혼을 정화시키는 성스러운 노래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보통 사람도 한두 소절 정도는 배워서 부를 수 도 있지. 하지만 완벽히 익혀서 자유자재로 부르기까지는 그 과정이 매우 까다롭고, 소질도 많이 필요해. 예전에는 전승자가 그래 도 여럿이었는데 일전에 역병이 한 번 돌면서 신성 찬트 뿐 아니라 많은 마법적 전승들의 맥이 끊겼지. 그래서 지금 신성 찬트를 제대로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야.” 다프넨은 무심코 창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한 소녀가 흥얼거리는 소박한 노랫소리였다. 솔방 솔방 솔방울 달랑 달랑 매달린 나무 그늘 따라서 걸음 걸음 걸어서 숲에 가자 친구야 숲으로 가자 “제가 제대로 배우기란 힘든 것이겠네요.” “그래, 단지 마음을 다스린다고 생각하고 천천히 익혀 나가는 것이 좋을 거야.” 그때 교장이 말했다. “만일...그 아이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찌하지요?” 나우플리온은 단지 미소 지었다. “이미 궤의 사제에게 수긍하는 뜻을 밝힌 터라 거절할 명분은 없을 겁니다. 물론 이렇게 빨리 학생이 생길 줄은 몰랐겠지만 요.” 좀 더...검 같은 것과는 다른 평화로운 배움일지도 모른다. 서로 경쟁할 필요가 없고, 단지 자기 혼자서 천천히 수련해 나갈 수 있는 그런 것. 노랫소리가 천천히 멀어져 갔다. 볕이 좋았다. 산들 산들 산바람 속살 속살 숲바람 새콤 달콤 산딸기 시나브로 시냇물 우리 가자 친구야 숲으로 가자 산허리에 펼쳐진 녹색 초지였다. 북동쪽으로는 섬 북쪽의 휴화산과 빙벽으로 이어지는 높은 절벽이 솟았고, 서쪽에는 가파른 비탈이 내리닫고 있었다. 불쑥 튀어나온 둥근 바위 세 개, 남쪽을 바라보며 선두 그루 전나무, 가득한 풀 냄새, 동그랗게 떠오른 정오의 태양, 그리고 세 사람뿐이었다. 나우플리온과 다프넨, 그리고 이솔렛이었다. “......” 다프넨과 이솔렛은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우플리온이 천천히 입을 열어 다시 한 번 말했다. “네 첫 번째 학생이야.” “사제님의 첫 번째 제자잖아요.” “그것과는 다른 문제지.” “당신의 결정인가요?” 그들 또래에서 나우플리온을 <당신>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다프넨을 제외하면 그녀가 유일했다. 나우플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솔렛은 홱 몸을 돌려 다프넨을 자세히 보더니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지극히 방어적인 태도였다. 나우플리온은 그런 그녀를 안타깝다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무어라 할 문제는 아니겠지. 난 단지 소개하기 위해 따라온 것뿐이니까.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 반목해야 할 조건만 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아니, 어쩌면 비슷한 데가 있을 지도 모르니, 둘 다 어머니의 얼굴을 모르고...몇 년 전 아버지를 잃었다는 것마저도.” 순간 이솔렛이 눈을 크게 치뜨더니 단호하게 내뱉었다. “당신한테서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군요. 내 입으로 한 약속이 가져온 결과니까 어찌하든 내가 알아서 하겠어요. 한 가지 부탁하겠는데.” 나우플리온은 약간 우울한 얼굴을 한 채 이어지는 말을 듣고 있었다. “당신은 내 앞에서 사라져 줘요. 지금 당장.” “......” 나우플리온은 말없이 몇 걸음 물러나더니 자신을 쳐다보는 다프넨에게 맥 빠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돌아서 비탈을 내려갔다. 남겨진 두 사람 사이에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둘 다 앉지도 않았다. 다프넨은 섬에 들어온 후로 나우플리온에게 이렇게 무례한 말을 내뱉은 사람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었지만 잠시 후, 그는 그녀의 목소리에 깃들인 강렬한 감정을 눈치 챘다. 다프넨이 특별한 사람이어서 그걸 알아챈 것은 아니었다. 실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감정은 다프넨 자신의 것과 비슷했던 것이다. 지독하게 뒤엉켜 풀 수도 없게 되어버린 애증, 그리고 원망과 같은 것. 왜일까. 둘 중 한 사람이 입을 연 것은 해가 이미 머리 위까지 올라간 후였다. “이해할 수가 없네.” 평소와는 달리 살짝 높게 울렸지만 그 안에 감춰진 울림만은 변함없는 것이었다. “전에 저를 처음 보셨을 때도 그런 말을 하셨죠.” 공회당에서 어이없는 누명을 쓰고 몰리고 있을 때 고맙게도 변명을 해 주었던 그녀였다. 그때도 그녀는 <이해가 가지 않아요>라 고 첫 마디를 뗐었다. 이솔렛은 대답하지 않은 채 성큼성큼 걸어가 바위 하나에 걸터앉더니 한쪽 다리를 위로 끌어올렸다. 가까운 곳에서 본 그녀는 지 금까지 보지 못했던 또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에 섞인 새로운 빛깔이었다. 귀와 목이 드러나도록 짤막하게 쳐 올려진 연한 금빛 머리칼, 그것과 대조적으로 턱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뜨려진 한 움큼의 앞머리가 있었다. 매끈한 곡선을 그리며 오른쪽 귀를 살짝 가리는 그 머리 가운데 절반은 놀랍게도 흰색이었다. 햇빛을 받아 하얗 게 빛나는 백색. “무얼 쳐다봐?” 이 말은 그 날 그녀가 자신에게 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말이었기에 다프넨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그가 웃자 이솔렛의 표정이 약간 이상해졌다. “당신의 흰 머리카락이요.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 궁금해서 말이에요.” “그냥 그럴 뿐이야. 단지 두 가지 머리색깔을 가졌다고 해서 내내 불편한 시선을 받아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아, 미안해요.” 다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이솔렛이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기에 다프넨은 다시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저를 가르치기 싫으신가요?” “너여서는 아냐.” <누구였다 해도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의미인 듯했다. 다프넨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도 누구한테 배우게 되는가 하는 것은 모르고 있었죠.“ “지금이라도 도로물릴 생각 없어?” 사실 둘은 선생과 학생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나이 차이가 적었다. 들은 바로 이솔렛은 올해 사월부터 열일곱 살이 되었다고 했다. 다프넨과는 대략 4년 차이었다. 다른 선생들이 적어도 20대 후반인 것을 생각하면 그녀가 그다지 선생답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닌 셈이었다. “그러면 제가 원하는 건 누가 가르치게 되죠?” 이솔렛은 손을 뻗어 천천히 발목을 쓰다듬고 있다가 싸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무도 없어, 나 말고는.” “그럼 별 대안이 없군요.” 이솔렛은 잠시 후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약간 화난 듯한 눈초리로 다프넨을 쏘아보다가 말했다. “그럼 노래를 하나 불러 봐. 찬트라는 것은 단순한 노래하고 다르긴 하지만 그렇다고 노래가 아닌 것은 아니야. 기본적으로 노래가 되어야 거기에 신성력도 깃들일 수 있어. 내가 네게 발성부터 가르치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니까.” 실은 그건 불친절한 억지였다. 다프넨은 한참 동안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결국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끝까지 부를 만한 노래가 없어요.” “단 하나도?” 이솔렛은 어이가 없어져서 소년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삭막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고...아니 , 그보다 노래도 한 곡 모르는 주제에 어떻게 신성 찬트를 배우겠다고 나선 거지? 그러자 소년은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하지만 신성 찬트를 가르치는 선생님 앞에서 귀여운 다람쥐가 어쩌고 하는 노래나 부르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풋,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다프넨이 의아하게 쳐다보는 가운데 이솔렛은 황급히 웃음을 그친 다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선생님이라고 하지 마. 듣기 불편하니까.”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죠?” “그냥 이름 불러.” “당신은 선생님이기도 하고 저보다 나이도 많죠. 그렇게 부를 수는 없습니다.” 이솔렛은 무미건조하게 탁 내뱉었다. “왜 내가 날 부르는 호칭조차 고를 수 없다는 거지? 싫다면 아예 날 부르지 마.” 다프넨은 입을 다물고 있다가 한참 후 말했다. “알았어요. 그냥 이름을 부르죠, 이솔렛. 전 다프넨입니다.” 이솔렛은 무관심하게 그저 고개를 까닥했다. 아무래도 쉽게 잘 지내게 되기는 힘들 듯했다. 다프넨이 땅다람쥐 오이지스와 다시 한 번 단둘이 마주치게 된 것은 그러고도 사흘 이상 지난 후였다. 그 동안 오이지스는 아프다며 학교에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저, 저기......” 그쪽에서 먼저 말을 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프넨은 걸음을 멈춰 꼬마를 돌아보았다. “나하고...잠깐만, 아주 잠깐만 같이 가주지 않을래? 절대 위험한 곳이 아냐. 애들도 없을 거야. 제발 부탁해... 정말로, 다 시는 귀찮게 하지 않을게.” 약간 망설이는 마음이 일어났다. 저번에 그를 도와주다가 귀찮은 일을 당한 것을 생각하니 이번에도 누군가의 협박을 받고서 저러는 것은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저 겁 많은 소년이라면 충분히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다프넨이 의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며 얼른 따르지 않자 오이지스는 눈에 눈물이 글썽해지며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번의 일 때문에 나를 믿지 못한다는 거, 알아. 하지만...이번엔 절대로 아니야. 달 여왕의 이름에 두고 맹세해도 좋아. 딱 한번만 내 부탁을 들어줘. 꼭 같이 가고 싶은 데가 있어.” 달 여왕이라는 말에 다프넨의 마음이 움직였다. 저 소심한 소년은 달 여왕의 이름을 놓고 거짓말을 할 정도로 악하지도, 대담하 지도 못했다. 남을 속이기 위한 의도라면 더더욱 그런 이름은 입 밖에 내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를 따라서 간 곳은 마을 뒤쪽의 세 봉우리 가운데 가장 왼쪽에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었다. 꽤 한참이나 올랐다. 마을이 한 눈 에 내려다보인다 싶은 곳까지 올라왔을 때, 그의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나타났다. 오이지스가 걸음을 멈췄고, 다프넨도 멈췄다. 높이가 10미터도 넘을 듯한 목조탑이 그곳에 서 있었다. 탑의 모양은 실로 이상했다. 원기둥처럼 둥근데다가 높이에 비해 매우 좁았고, 위로 갈수록 뾰족해져서 흡사 바늘을 연상케 하 는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꼭 닫힌 나무문 위로는 덧문 달린 창문들이 보였는데, 층 구별도 없이 아무데나 만들어져 있어서 도무지 내부 구조를 짐작하지 못하게 했다. 저 탑 안에는 창문이 바닥에 있거나, 또는 층과 층 사이에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렇게 어린아이가 장난삼아 그려본 스케치처럼 탑은 그곳에 서 있었다. 푸른 절벽을 배경으로 해서, 잘못 나타난 어떤 것처럼 낯선 빛깔을 하고서. “저건...도대체 뭐지?” 오이지스는 얼굴을 약간 붉혔다. “저긴, 음...날 숨겨주는 안전한 성이야. 아주 행복한 곳이고.” 오이지스가 앞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대답이 없는데도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밝은 곳에 있다가 들어와서인지 안 은 몹시 어둡게 느껴졌다. 사방 5미터나 될까 싶은 동그랗고 좁은 방이었다. 바닥에는 양탄자 비슷한 것이 갈려 있고 의자가 몇 개 둘러 놓여 있었다. 그리고 불이 없는 벽난로가 있었다. 사실 밖에서 본 탑의 모습으로 생각해 봐도 이 이상 넓은 공간이 있을 수는 없을 것 같긴 했다. 한쪽에 사닥다리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위층으로 통하는 듯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거기까지 시선이 갔을 때, 갑자기 그쪽에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우리 꼬마 학자가 왔구나. 어, 오늘은 친구도 함께인가?” 이윽고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온 것은 마흔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저씨였다. 작업복 비슷한 옷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에도 색 바랜 수건을 쓰고 있었다.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그는 얼른 수건을 벗고 손을 털더니 빙긋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그의 손은 크고 부드러웠지만 어쩔 수 없 는 먼지 투성이었다. “오이지스가 친구를 데려온 것은 네가 처음인걸? 반갑다. 난 제로라고 한다.” 회갈색 수염이 턱을 가득 덮고 있어서 말할 때마다 흔들렸는데 거기에서도 먼지가 떨어졌다. 그의 손을 잡은 다프넨의 손바닥도 금방 새카맣게 되었다. “전 다프넨이에요.” “다프넨? 어, 그 이름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오이지스가 옆에서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전에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대륙에서 왔다고요.” “아!” 갑자기 제로는 두 손으로 다프넨의 손을 꽉 움켜잡으며 반가운 얼굴을 했다. 이젠 아예 손목까지 까매져 버렸다. “네가 그 아이로구나. 요 녀석한테 친절하게 해 줬다면서? 정말 고맙구나. 이 녀석이 책만 좋아했지 도무지 친구 사귈 줄을 몰 라서 걱정 했는데 말이야. 또래 아이하고 그렇게 오래 이야기한 건 네가 처음이라고 하더라.” 다프넨은 약간 당황해서 오이지스를 쳐다보았다. 이 아저씨는 이 괴상야릇한 나무 탑에서만 틀어박혀 지내는지 바깥세상 소식은 도무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오이지스도 뺨이 빨개진 채 얼른 제로 아저씨의 팔을 잡았다. “그, 그런 말은 그만두시고요, 저....... 제 얘기를 좀 들어 주세요.” 그래서 세 사람은 의자를 끌어다 놓고 마주앉게 되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다프넨이었다. “혹시 오이지스의 아버지세요?” 재로 아저씨는 입을 크게 벌리며 씨익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얼굴에 생기는 많은 주름조차 다정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아냐. 저 녀석 아버지는 티플로스 씨지. 난 그냥 녀석의 친한 친구일 뿐이야. 허허허.” 그가 꼬마를 놓고 <친구>라고 말하는 순간 다프넨은 나우플리온의 얼굴을 떠올랐다. 렘므에서 그들 둘도 친구임을 자처했었다. 스승과 제자도 아니고, 어른과 아이도 아니며, 여행자와 그가 보호하는 소년도 아닌. 오이지스와 제로 아저씨는 자신과 나우플리온보다 훨씬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그런데도 나란히 입을 벌려 웃는 그들은 어쩐지 정말로 친구인 양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이지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말을 꺼낸 그는 눈 둘 곳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것처럼 불안하게 이곳저곳을 쳐다보았다. “아저씨, 제가 전에 얘기하면서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있어요.” “응, 뭐지?” “정확히는 제가 숨긴 거예요. 그때 전 다프넨을 좋아하게 될 것 같다고 말씀드렸지만......” 다프넨이 약간 놀라 오이지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꼬마는 그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고 오직 제로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서 뭔가 대단한 결심 같은 것이 느껴졌다. “실은 이미 다프넨의 신의를 한 번 배신했어요. 저를 때리고 협박하는 아이들이 무서워서... 거짓말을 하고 말았거든요. 없는 이야기를 해서 다프넨을 곤란하게 만들었죠. 그때 이솔렛 누나하고 나우플리온사제님이 도와주시지 않았더라면...다프넨은 큰일을 당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어요. 아뇨, 솔직히 말할게요. 다프넨은 검을 갖고 있었는데......” 다프넨은 지금도 윈터러를 가지고 있었다. 제로의 눈이 언뜻 검에 잠깐 닿았다 떨어졌다. “......해서 손가락 세 개를 잘리는...무서운 벌을 받게 된 참이었어요. 저는 그때 다프넨을 변호했어야 했어요. 저를 도와주 느라 그랬다고, 저를 때린 건 다른 아이들이라고 말했어야 했어요. 그런데...저는 못했어요. 저는 정말로 비겁하고 쓸모없는 녀석 이에요. 그를 친구라고 부를 자격도 없어요.” “......” 제로는 입을 꾹 다물고 그 말을 듣고 있다가 가만히 오이지스의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이 손에 손가락 세 개가 없다면...아마 저 위에 있는 무거운 책들을 들고 볼 수도 없겠지. 앞으로 그런 일이 있거든 말이다, 그런 비겁한 짓을 저지른 것을 진심으로 반성할 수 있다면 말이지, 네 스스로 같은 손가락을 잘라내도록 해라.” “......알겠어요.” 그리고 제로는 다프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이 녀석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무리이겠구나. 이 녀석은 아마도 내 앞에서 자기 잘못을 고해하고 싶어서 널 데려온 것 같다. 아직 여리고 어리석어서 자기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밖에 생각할 줄 모르지. 여기까지 와 주다니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다 해준 것 같구나. 너같이 좋은 아이를 잠시나마 알아서 오이지스도 행복했을 거다.” 다프넨은 쉽게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아무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한참 만에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게도...가장 비겁했던 순간이 있었죠. 지금까지도 잊어버리지 못하고 몇 번이고, 그 책임을 아프게 되씹으면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에 괴로워했죠. 다행히도 이번엔 돌이킬 수 없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군요. 어쩌면 그건 오이지스에게 주어진 행운이겠죠. 그런 점에서 저는 그가 부럽습니다. 가끔은...그걸 돌이킬 수만 있다면 가진 것 전부를 지불하더라도 아깝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하곤 합니다. 비록 제가 가진 것은 별 것이 없지만......." 오이지스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프넨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고, 기억 속의 소년으로 되돌아가듯 고통스러워 졌다. 제로가 보기에도 그것은 그 나이 소년이 흔히 가질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런 제가 어떻게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할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은 제게 누구도 뼛속 깊이 미워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지워지지 않는 원한이나 원망 따위는 검은 등불을 켜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제 삶은 이미 충분히 어둡습니다. 오히려 밝은 불을 몇 개 켜야 할 정도로요.” 저 호수의 망령 앞에서 예프넨을 두고 도망쳤었다... 동생을 지킨 형이 치른 목숨의 대가, 그것 때문에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 을 한 순간도 잊은 일이 없었다. “저는 오이지스를 별로 원망하지 않습니다. 친구가 못 될 이유도 없겠지만 꼭 친구가 되어야 할 필요도 없겠죠. 제가 좀 더 현 명했더라면 처음부터 괴롭힘 당하는 저 애를 외면했겠죠. 그러지 못했으니 돌아온 몫일뿐이고요. 더 할 말은 없습니다.” 다프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이지스는 조그맣게 되어서 감히 그를 올려다보지도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제로는 따라 일어서더니 등 뒤의 선반에서 책을 한 권 꺼내서 내밀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한권 가져가거라. 이곳은 본래 섬의 장서관이란다. 하지만 오는 사람은 별로 없지. 그래서 여기에 처음 들어 오는 사람에게는 책을 한 권 주는 것을 나름의 원칙으로 하고 있어. 부담 가질 필요는 없다. 네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다프넨은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책을 받았다. 실제로 요즘 책이 조금 그립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도 그의 성의를 무시할 이유가 없어서였다. “또 놀러 오너라.” 쾅, 문이 닫혔다. 스콜리의 생활도 다프넨에게는 쉽지 않았다. 첫날에는 막대호신술 선생과의 사건이 있었고, 둘째 날은 교장과 이야기하고 이솔렛을 찾아가느라 하루 수업을 빠졌다. 셋째 날 부터 제대로 시작된 수업에서 그는 처음으로 절망을 느꼈다. 수업 내용이 어려워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에게는 모든 수업이 지나치게 쉬웠다. 아이들의 독서 수준은 형편없었고, 그나마도 한눈을 팔며 대부분의 수업 시간을 보냈다. 쉬는 시간이 되면 막대호신술 실력이 누가 낫고 누가 누구를 이겼는지에 대해서만 떠 들어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법 수업에서는 몇 명의 아이들만이 관심을 보였는데 그 아이들은 아마도 졸업 후 진로를 그쪽 방향 으로 잡을 작정일 듯했다. 다른 아이들은 거기에도 관심 없었다. 그러나 다프넨은 아이들의 이야기에 낄 수 없었다. 오히려 첫째 날 막대호신술 시간에 헥토르와 싸우기 전에는 그에게 호기심을 보이고 말을 걸어오는 아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이 있고부터는 모든 아이들이 철저히 그를 무시했다. 무시한다고 해서 비웃거나 놀려대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마치 사자를 외면하는 승냥이들처럼 행동했다. 가까이 가는 것을 피했고, 혹시라도 그가 다가갈라치면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재빨리 흩어져 버렸다. 아니면 노골적으로 불쾌한 시선 을 보냈다. 한 아이가 용기 있게 내뱉었다. <대륙에서 온 악마 녀석>이라고. 그들의 변한 태도가 헥토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짐작되고도 남았다. 그러나 헥토르가 그들에게 그러라고 시킨 것인지, 아니면 저들이 지레 겁먹고 알아서 저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예외가 있다면 리리오페 한 면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이가 어린데도 모든 수업의 진도가 몹시 빨라서 한 가지 수업을 제외 하고는 그와 겹치는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도 다른 아이들이 많이 있는 곳에서는 그에게 함부로 말을 걸거나 하는 것을 삼갔 다. 까닭은 몰랐지만 보통 아이들은 리리오페의 비위를 맞추려고 열심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 역시 다프넨에게 친근하게 구는 것이 다른 아이들의 반감을 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이지스와 함께 장서관에 갔다 온 다음날이었다. 그 날부터 오이지스도 학교에 나왔다. 그러나 그의 처지도 다프넨과 다를 것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나빴다. 아이들은 그냥 교실을 가로질러 걸어가면서도 일부러 오이지스를 툭툭 치고 지나갔다. 오이지스 는 항변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그냥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점심 식사는 학교에서 먹도록 되어 있었다. 식당이면서 동시에 강당으로도, 기도하는 곳으로도 쓰이는 널찍한 방에 가면 마을의 아주머니들이 번갈이 가며 마련한 식사가 아이들에게 나누어졌다. 그 날의 식사는 푸른 콩 수프와 귀리빵, 염소젖 치즈, 그리고 물 한 잔이었다. 다프넨은 음식 그릇을 받아 한쪽에 있는 식탁에 앉았다. 아이들이 많았고 식탁은 적었기 때문에 식탁마다 의자가 네 개씩 딸려 있었다. 실은 그나마도 모자랐다. 그런데도 다프넨과 같은 식탁에 앉으려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앉을 자리가 없어 서서 기다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가 있는 쪽을 흘끔흘끔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이날은 리리오페조차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제 그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을 정한 참이었다. 그래서 조용히 귀리빵을 한 입 베어 물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오히려 두리번대는 아이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나, 같이 앉아도 될까?” 수프에 귀리빵을 적시던 다프넨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누가 그에게 이런 말을, 아니 말을 걸기라도 한단 말인가? 눈앞에는 오이지스가 수프 그릇을 들고 서 있었다. 그리고 약간 수줍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얼굴이 밝아진 오이지스가 의자를 끌어당겨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다프넨은 수많은 아이들의 눈이 그들을 향해 쏠린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콩 수프 맛없지?” 수프는 확실히 밍밍했다. 색깔만 푸르스름할 뿐 콩을 다 어디로 갔는지 겨우 반 조각 눈에 띌 뿐이었다. “그러네.” “에라토 누나네 어머니께서 오신 날은 음식이 맛있어. 아마 내일 오실 거야.” “그렇구나.” 시시한 대화였는데도 마음이 한결 나아지는 자신을 느끼고 다프넨은 우스워졌다. 역시 드러내놓고 보내는 또래 집단의 적대적인 눈빛 속에서 버티는 것은 그로서도 힘든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오랫동안 모진 세상에 내던져져 속고 쫓기고 했던 자신조차도. 그때 술렁이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갑자기 잦아들었다. “아, 헥토르구나.” “헥토르가 왔네.” 헥토르와 그의 동생 에키온, 그리고 그들 패거리인 다섯 명의 소년들이 한꺼번에 식당으로 들어섰다. 상급반 막대호신술 수업이 마침 끝난 모양이었다. 동시에 수많은 눈들이 다프넨과 오이지스에게도 돌려졌다. 헥토르는 흘끗 쳐다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에키온은 잘 걸렸다는 듯 소리쳤다. “저기 저건 뭐지? 놀아주는 사람 없는 바보들 둘이서 뭉쳤잖아?” 한패거리들이 그에 맞춰 웃음소리를 냈다. 헥토르는 약간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그냥 음식을 나누어주는 아주머니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러나 에키온은 막대호신술 수업에서 쓰던 막대를 손에 든 채 선뜻 그들 둘이 있는 식탁 앞까지 왔다. “야, 겁쟁이 땅다람쥐.” 막대가 다가와 오이지스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오이지스는 몸을 움츠리며 숟가락을 놓았다. 그러나 다프넨을 쳐다보지는 않았다. “야, 일어서 임마! 어딜 저런 녀석하고 같이 식사를 하고 있어? 누가 그러라고 했어?” 뒤에서 다른 소년들도 거들기 시작했다. “일어나, 일어나 임마!” “건방지게 누구 허락을 받고 겁도 없이......” “땅다람쥐 너 또 한바탕 맞고 싶냐?” 오이지스의 팔이 눈에 띌 정도로 덜덜 떨렸다. 그러나 굳은 결심을 한 듯, 그는 입술을 꽉 깨물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막대기는 곧 세 개로 늘어났다. 이제는 찌르는 것뿐 아니라 머리를 때리고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하는 둥 가지각색이었다. “말 안 들어, 이 자식아?” “땅다람쥐 너 자꾸 버티다간 그 자리에서 평생 못 일어나게 해버린다?”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어진 다프넨이 고개를 들어 그들을 쳐다보았을 때, 오이지스가 겁먹긴 했으나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같이 점심 먹을 자유가 있어. 제발 날 그냥 내버려 둬.” 그 말은 소년들을 정말로 화나게 해버렸다. “야, 끌어내!” “바닥에 내던져 버려!” “어딜 말대답이야, 저 미친 자식이! 너 오늘 죽었어! 뒤지게 밟아버릴 거야!” 소년들 중에는 다프넨이 <자신을 모르는 자>였을때 그에게 맞고 달아났던 아이들도 섞여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등 뒤에 든든한 아군들이 잔뜩 있다고 여겨서인지 전혀 망설이는 기색이 없었다. 그들이 다짜고짜 오이지스를 의자에서 끌어내려는 순간 다프넨이 느리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멈춰.” 그들의 팔이 잠시 움찔했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오이지스는 의자에서 끌어내어져 바닥에 주저앉으면서도 다프넨을 쳐다보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늘 겁먹은 듯했던 눈에도 의지가 담겨 있었다. 비록 맞더라도 자신은 버틸 수 있으며, 자기 일 때문에 피해 입지 말라고 말하는 눈이었다. “멈추지 않으면......” 사실은 식당 안의 모든 아이들이 그 나지막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음식을 퍼 담던 아주머니들조차도 무슨 일인가 해서 고개를 뺐다. “너희 모두 지독히 후회하게 되겠지.” 이런 말을 할 줄 아는 자신이었던가, 하고 생각하며 다프넨은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나 섰다. 이 순간만은 트라바체스의 황야에서, 아노마라드의 벌판에서, 홀로 누구에게도 속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걸어가던 그 순간과 똑같은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달라진 것이라면 짧아진 머리칼뿐이었다. 오이지스를 잡았던 소년들은 일전에 몸소 다프넨의 실력을 경험했던 아이들이었으므로 저도 모르게 손을 멈추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도 대부분 며칠 전 막대호신술 수업에서 벌어진 일을 보았거나, 전해 듣고 있었다. 저 <대륙에서 온 악마>라고 불리는 소년이 얼마나 강한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러나 에키온만은 달랐다. “꼴같잖은 협박을 집어치워! 네가 우릴 막을 힘이 있으면 지금 당장 보여주면 될 것 아냐? 그럴 실력이 없으니까 입으로만 떠드는 거지?” 그리고 보란 듯 오이지스의 옆구리를 한 번 세게 걷어찼다. 그러나 오이지스는 이를 악물고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것은 오이지스가 자신의 손가락을 직접 자르지 못한 대신 스스로에게 지운 책임이었다. 제로 아저씨 앞에서 들었던 다프넨의 이야기가 그에게 준 충격은 컸다. 그런 사람 앞에서 부끄럽게 되고 싶지 않았다. 다프넨은 에키온을 똑바로 보며 입 끝만 올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남 앞에서 지은 비웃음이었다. “그럼, 후회해라.” 그 순간이었다. “그만둬라, 에키온!” 들려온 것은 헥토르의 목소리였다. 음식을 내버려두고 일어나 사건을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그는 식탁 에 단정하게 앉아 숟가락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쪽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다시 큰 소리로 말했다. “그를 화나게 하지 마라. 네게 맞는 상대가 아니니까.” 중의적인 말이었다. 너는 상대도 되지 않을 것이다, 또는 네게는 상대도 되지 않을 자다. 소년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에키온도 형의 말에는 절대 복종했다. 사나운 눈으로 쳐다보긴 했지만 그 역시 뒤로 물러났 다. 다프넨은 오이지스를 내려다보며말했다. “나가자.” 식사를 하다 말고 일어선 아이들이 모두 쳐다보는 가운데 두 사람은 식당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그들이 밖으로 나갈 때까지 아이들의 눈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솔렛?” 다프넨과 오이지스는 발 닿는 대로 걷다가 한갓진 비탈에 주저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들은 전 부 별 것 아닌 화제들뿐이었다. 그런데도 둘은 최근 어떤 날보다도 평화로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좀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오이지스는 다프넨이 이솔렛에게서 신성 찬트 수업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듣고는 크게 감동했다. 놀라서 동그래지는 눈을 보니 정말로 다람쥐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다프넨이 픽 웃고 말았다. “신기하다. 그 누나는 섬에서 가장 신비로운 사람이어서 난 말도 한번 걸어보지 못했는데. 사람들은 그 누나를 <산 위에 사는 공주>라고 불러.” 다프넨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 그렇게 부르는데?” “이솔렛 누나의 아버지가 바로 지금 나우플리온 사제님 이전에 검의 사제를 지낸 분이거든? 그 분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누나 에 대해서 다른 사제님들한테 이야기한 것이 있대.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그 다음부터 누나는 사제님들의 회의에도 들어갈 수 있게 됐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수도사님들이 누나한테 뭔가 물어보러가는 일도 있었어. 하지만 몇 년 전부터는 마을의 일에 전 혀 관여하지 않고 산 위에 있는 집에서 혼자 살아. 하지만 누나는 아름답고, 또 어딘가 무섭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게 됐어.” 그 별명은 비꼬는 것이 아니라 경외의 의미였다. 오이지스의 눈에도 분명 그런 감정이 깃들여 있었다. 그러나 오이지스는 그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는 몰랐다. 그녀가 왜 나우플리온을 불쾌하게 대하는지, 질 선생은 왜 나우플리온이 그녀에게 사과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인지, 그리고 질 선생과 나우플리온 사이의 원한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다만 오이지스는 좀더 있다가 이솔렛에 대해서 <전사와 사제를 섞은 것 같은 느낌의 누나>라고 표현했다. 이어서 그는 그녀 말고 도 비슷한 별명, 즉 <산 아래의 공주>라고 불리는 사람이 하나 더 있다고 말했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고 그냥 씩 웃기만 했 다. “산 위의 공주님한테서 노래를 배우게 됐다면서?” 리리오페는 때때로 마치 그의 뒤를 밟고 있었던 것처럼 갑작스럽게 눈앞에 나타나곤 했다. 이번에도 다프넨이 오이지스와 헤어져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 새끼손가락을 빼물며 생긋 웃어 보였다. “그래.” “좋겠네! 그녀는 정말 아름답지? 보고 있기만 해도 황홀해지지 않아? 그런 그녀를 날마다 보게 됐으니 얼마나 좋아?” 다프넨은 그녀가 무슨 소릴 하려는 건지 몰라 대답 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리리오페는 이윽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마을의 남자들이 하는 말을 그냥 옮긴 것뿐이야. 난 여잔데 여자를 보고 황홀해질 리가 있겠어? 아주 멋있는 남자라면 또 모를까.”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를 지었다. 유난히 작은 입숙이 심술궂은 꼬마처럼 귀엽게 움직였다. “그래도 솔직한 기분으로는 좋지? 그녀가 친절하게 대해 줘? 넌 그녀한테 관심 없어? 겨우 네 살 차이일 뿐이잖아!” 다프넨은 리리오페의 상상력에 웃음이 나왔지만 그냥 조용히 말했다. “이솔렛 선생님은 그냥 내게 찬트를 가르치실 뿐이야. 그나마 내 실력이 형편없어서 고생스러우시겠지.” “선생님? 그녀가 그렇게 부르라고 해?“ “아니.” “칫.” 살짝 뾰로통한 표정을 짓던 리리오페는 몸을 돌려가려고 하다가 갑자기 떠오른 것처럼 검지손가락을 세워 저어 보였다. “그녀만 공주님인 건 아냐! 뭐, 그런 별명은 다른 사람들이 붙여 주는 것이니까 자기가 불리고 싶다고 그렇게 되는 건 아니라고 ! 정말이야!” 그때까지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르고서 그냥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 날 저녁 무렵이었다. 느지막이 들어온 나우플리온을 기다려 렘므에서 여행하던 시절처럼 직접 끓인 수프를 내주었다. 다프넨이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갑자기 수프를 먹던 나우플리온이 발작적으로 웃기 시작했다. “리리가 그렇게 말해? 자기 입으로? 푸하하하하... 이거 참 사건인데, 사건이야.” “그게 무슨 뜻인데 그래요? 게다가 그렇다고 아까운 수프를 뱉으실 건 없다고요.” “푸하핫, 푸하하하하......” 그렇게 한참이나 웃던 나우플리온은 웃음을 그치고 수프를 마저 퍼 먹어 버린 다음 사실을 말해 주었다. “산 아래의 공주는 리리오페 자신이야. 내가 섬을 비운 사이에 생긴 별명들인 모양이더라고. 하지만 지금까지 리리오페는 공주가 어쩌고 하는 말이 간지럽다면서 누가 그렇게 부르면 발끈해서 화를 내곤 했다고 하거든. 그래서 요새는 걔 앞에서 그 별명 부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그런데 걔가 너한테 관심이 있긴 한가 본데? 그런 달갑지 않은 별명을 끌어대어서라도 자기에 대한 평가도 처지지 않는다는 걸 은근히 과시하려는 게 틀림없잖아? 음, 아닌가, 본래 속으로는 그 별명을 좋아했었던 건가?” “그렇다면 이솔렛님은요? 그 분은 그런 별명을 좋아하시나요?” 나우플리온은 텅 비어버린 그릇에 아직도 수프가 남아 있기라도 한 양 자꾸 숟가락질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당연히 대답은 없었 다. 4. 윈터바텀 킷 달의 섬으로부터 수백만 킬로미터도 넘게 떨어진 트라바체스 땅, 롱고르드 영지에는 폐허가 다 된 저택 한 채가 서 있었다. 한때 잘 손질되어 비록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깨끗하고 안정된 자태로 영지를 내려다보던 저택이었다. 그러나 이제 낡아빠진 문짝은 축구를 막기 위해 둘러쳐진 쇠사슬에 의지해서 간신히 서 있을 뿐이고, 덧문이 떨어진 창문들이 음산하게 입을 벌려 낙엽과 먼지를 쓸어 넣고 있을 따름이었다. 저택 머리에는 무언가 커다란 입이 물어뜯은 듯 우지끈 무너져 내린 구멍이 수리되지 않은 채 그대로 뚫려 있었다. 부서진 지붕 아랜 색 바랜 양탄자에는 썩은 나뭇잎만이 수북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듯 보이는 이 스산한 저택 앞으로 마차 한 대가 와 멈추었다. 검은 포장을 씌워 안에 탄 사람을 보이지 않게 한 마차였다. 내린 것은 일부러 수수하게 입긴 했지만 본래 타고난 부귀함을 숨기기 힘든 모습의 중년 남자였다. 남자는 모자를 벗고 저택 위를 올려다보더니 헛, 하고 웃음을 흘렸다. 마차 안에서 한 사람이 말을 걸었다. “정말로 제가 뒤따르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백작님?” “안으로 들어갈 것도 아닌데 걱정할 것 없네, 휴.” 백작과 그의 비서 휴...... 그들은 다름 아닌 벨노어 백작의 일행이었다. 이번에는 모든 면에 있어 전의 여행에 비해 단출한 모습의 일행이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을 피하고 싶은 듯했다. 벨노어 백작은 혼자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저택 입구로 이어진 계단을 올랐다. 입구에 친친 감긴 쇠사슬을 잠시 살펴본 다음 혼잣말을 했다. “확실히...다녀가긴 했군.” 쇠사슬은 오랜 시간 풍파에 찌들어 삭아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는데 그 중 일부가 긁혀나간 듯한 자국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 최근에 벗겼다가 다시 묶은 것이 틀림없었다. 백작은 계단을 내려와 이번에는 저택 뒤로 천천히 돌아갔다. 거친 벽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작은 저택 뒤편의 흙바닥에서 단단하게 말라붙은 마차바퀴 자국을 발견했다. 그는 서슴지 않고 허리를 굽혀 거기에 손을 댔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조금 더 돌아갔다. 이윽고 그는 저택의 서쪽 사면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마침 해가 지려는 참이었다. 벽에는 집에 비해 별로 낡아 보이지 않는 손수레가 하나 기대 세워져 있었다. 백작은 손수레의 손잡이를 잡아당겨 바닥에 바로 서게 했다. 손수레 안에는 물이 번진 듯한 흔적이 있었다. 시금털털한 냄새가 풍겼다. “포도주라도 드셨나 보군.” 그는 블라도 진네만이 엿새 전, 이곳에서 며칠 거리 떨어진 사바논 마을에 나타났다는 정보를 들어 알고 있었다. 사바논은 그도 들었던 곳이었다. 아마 블라도도 벨노어 백작과 같은 목적으로 그곳에 갔을 터였다. 사바논에서 백작은 진네만 가문의 형제를 낡은 창고에 가두었던 사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아노마라드 국경을 오가는 노예 상인들 쪽을 수소문한 결과였다. 오갈 데 없고 의지가지없는 자들에게 가장 먼저 눈독 들이는 것이 그들 아닌던가. 블라드 진네만은 그 자신과 마찬가지고 인터바컴 킷(Winterbottom Kit)을 쫓고 있는 벨노어 백작의 존재를 아직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만일 보리스의 행로를 계속 추적했더라면 무언가 눈치를 챘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자는 벨노어 백작을 견제할 필요성 까지는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잘 된 일이었다. 덕택에 이렇듯 뒤를 밟을 수 있었고, 블라도가 아직 윈터바텀 킷 가운데 어느 쪽도 손에 넣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은 좋은 수확이었다. 백작은 오래 전부터 블라도가 이미 스노우가드(Snowguard)를 손에 넣은 것은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바논 마을에서 블라도는 예프넨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벨노어 백작 자신과 같은 목적일 것이다. 블라도 진네만은 이제 트라바체스의 통령 자리에 오른 칸 선제후로부터 지속적으로 윈터바텀 킷을 찾아내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벨노어 백작과 경쟁해야 할 블라도는 뒤늦게 얻은 외동딸의 재롱에 완전히 홀려서 최근엔 칸 통령의 성에 들르는 일조차 적어져 버렸다. 견디다 못한 통령의 협박에 가까운 독촉이 있고서야 그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한동안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고 해도, 블라도는 과거 선제후 칸의 최고가는 모사 가운데 하나로 이름을 날렸던 전적이 있는 자였다. 일단 조사를 시작하자 순식간에 보리스가 어떤 경로로 아노마라드로 건너갔는지, 어디에서 지냈는지, 그리고 언제 있던 곳을 떠났는지 마저 알아낸 모양이었다. 그리고 어떤 길을 거쳐 아노마라드 북부로 이동해 갔는지도 추적해 냈다. 물론 벨노어 백작 자신도 거기까지는 대략 조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로젠버그 호수를 끼고 발달한 관문 도시 사스포네에 이르러 소년의 자취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그곳까지 간 것을 보면 렘므로 넘어가려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텐데, 로젠버그 관문에서는 그런 소년을 보았다는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 일행이 생겼거나 아주 훌륭하게 변장을 했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렘므 땅은 아노마라드 사람이 쉽게 조사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백작의 신분인 자신이 정식 사증을 얻어 렘므에 입국했다가는 당장에 근처의 관리들이 무슨 일인지 조사하려 덤빌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최근 평화롭다 해도 렘므는 오랜 기간 아노마라드의 적대국이었다. 거기서 조사가 막힌 것은 블라도 진네만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블라도는 다른 이유에서, 그러니까 그곳까지 미칠 만큼 강력한 기반이 없다는 점에서 한계에 부딪쳤다. 그래서 그는 트라바체스로 되돌아와 칸 통령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것이 어떻게 결론이 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블라도는 칸 통령의 성을 떠나 오랜만에 이 근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벨노어 백작은 블라도 진네만 역시 이곳 저택까지 돌아와 아무 정보도 얻지 못했다고 추측할 수 있었다. 쇠사슬을 보면 저택으로 들어갔음이 분명하고, 마차 자국을 보면 혼자 온 것은 아닐 터였다. 아랫사람들은 풀어 뭔가 한 가지라도 정보를 얻었다면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손수레로 포도주를 실어다 마신 것으로 보아 그는 천천히 머물다 떠난 듯했다. “그러니까...그 검은 이리로 오지 않았다는 거지.” 소년은 확실히 트라바체스로 돌아오지 않았다. 만일 잠깐이라도 발을 들여놓았더라면 고향 근처를 둘러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 출신인 블라도 진네만이 보기에 이 영지 안에는 소년이 들른 흔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핏줄끼리의 일이니 아마 믿어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 백작은 마차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부에게 새 용병들을 만나기로 한 곳으로 가자고 말했다. 마차가 출발하자 휴는 백작을 붙잡고 그 여자 용병이 아무래도 인상이 좋지 않다는 얘기를 또다시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작은 그저 빙긋이 미소 지을 따름이었다. 그에게는 이미 세워둔 중대한 계획이 이었다. 행방이 반쯤 드러난 거나 마찬가지인 윈터러는 일단 두고, 사라진 스노우가드를 먼저 찾을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여자 용병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다프넨은 데시 사제의 부름을 받고 그녀의 집에 와 있었다. 한때 며칠 간 먹고 자고 한 일이 있던 그곳이었다. 그러나 한 방에 거의 갇혀 있다시피 한 터라 꽤 넓은 편인 이 집의 구조는 잘 몰랐다. 잠깐 기다리고 있자니 한 소년가 걸어와 사제님께서 들어오라 하신다고 전해 주었다. 다프넨은 몸을 일으켜 휘장이 쳐진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너라.” 거기에 앉은 것은 지팡이의 사제인 데시, 그리고 아직껏 한 번도 본 일이 없던 낯선 남자였다. 그러나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에 투명한 초승달 보석이 박힌 은빛 서클렛이 씌워져 있는 것을 보고서 그가 서클렛의 사제, 모르페우스라는 것을 알았다. 이 사제에 대해서는 일찍이 다른 사람들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여러 가지 섬세한 기예와 함께 특히 의술을 담당하는 사람인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집에 틀어박혀 거의 밖에 나오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섬에 오고 보름가량이 지나도록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인사해라.” 모르페우스 사제는 의술을 담당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무서운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길쭉한 얼굴에 짙은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 큰 입, 허리에 닿도록 기른 새카만 곱슬머리가 특히 그랬다. 그의 옆에 서면 나우플리온조차도 연약하게 보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랄까. 나이는 서른 중반 정도. 그런데 황당하게도 저토록 엄숙하고 무시무시하게 생긴 저 사람은 종종 사람들한테 <꼴통 모르페우스>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모르페우스라고 불러라.” 이곳 사람들은 자신이 긴 이름을 가졌을 경우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자신의 별칭을 말해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모르페 사제님께서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으시단다.” 오늘의 용건 자는 데시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모르페우스는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네 검, 잠깐 보여주지 않겠나?” 순간적으로 망설였다. 일전에 헥토르와 싸울 때 윈터러를 뽑지 않겠다고 한 뒤 마을 전체에 퍼져 있는 이상한 소문들을 듣고 그 러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나우플리온은 서클렛의 사제가 자신의 친우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좀 별나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그러나 다만 그 별나다는 게 좀 심한 것만이 문제라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일단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는 검은 풀어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눈을 떼지 않고 주시했다. 윈터러를 이리저리 돌려보던 모르페우스는 윈터러의 낡은 칼집과 겉으로 보이는 고귀하고 깨끗한 손잡이가 전혀 울리지 않는다 는 것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검을 약간 뽑으려는 순간 다프넨이 갑자기 말했다. “검을 완전히 뽑지는 마십시오.” 모르페우스는 손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손을 움직여 한 뼘 정도만 검을 뽑았다. 오랜만에 보는 흰 광채였다. 오랜만에 보아서인지 그 빛은 전보다 한층 더 강렬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면 정말로 그런 것일 지도 몰랐다. “흐음.” 모르페우스는 약간 뽑은 상태 그대로 윈터러를 바닥에 내려놓더니 품 안에서 진주처럼 생긴 동그란 구슬을 하나 꺼냈다. 구슬에는 기다란 은빛 끈이 달려 있었다. 모르페우스는 그 끈의 끝을 잡고 구슬을 검이 있는 쪽으로 내렸다. 잠시 후, 구슬이 요 동치기 시작했다. 위이이이잉...... 이상한 소리를 내며 구슬과 검은 서로 공명했다. 구슬은 제자리에서 큰 원을 그리며 돌았다. 다프넨은 놀라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그가 하는 양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얘야, 다프넨.” “예.” 모르페우스는 구슬을 거두어 다시 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열성적인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우플리온에게서 얘기를 조금 들었다. 너 역시 그 검의 유래를 모른다지? 나는 마법사는 아니지만 옛 물건들의 힘과 기능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란다. 네 검을 잠시 내게 빌려줄 수 없겠나? 이틀정도면 된다. 그러면 그 검의 유래와 그 안에 깃들인 능력에 대해 알아내어 네게 알려주마. 악한 힘이라면 악한 대로, 선한 힘이라면 선한 대로, 그것은 중대하고 가치 있는 일 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다프넨은 더 생각할 여유도 두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그건 제 몸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검입니다.” “단 하루도 안 되겠니?” “안 됩니다.” “흐음.” 모르페우스는 검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뭔가 궁리하는 듯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몇 번 바닥에 짚어 탁탁 울렸다. 그의 손은 몹시 크고 손가락도 억셌다. “그렇다면 네가 며칠 만에 한 번씩이라도 내 연구실로 찾아와 줄 수는 없겠나? 네가 지켜보는 앞에서 검을 살펴볼 테니까 말이 야. 한 환일(7일씩 묶어진 날짜의 주기)에 한번씩만 와 줘도 좋아. 그렇게 와서 한 시간씩만, 어떤가?” 데시가 옆에서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모르페, 당신의 그 쑥대밭 연구실에 다른 사람을 들이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인데요.” 모르페우스는 어깨만 으쓱할 뿐 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다프넨의 얼굴만을 쳐다보았다. 사제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허락하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또한 다프넨 역시 윈터러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이 정말로 사악한 힘인지에 대해 알고 싶었던 터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요.” 그것은 생각보다 중대한 결정이었으나 이때의 다프넨은 알지 못했다. 3. Ever Rose 1. 마법의 계단 다프넨이 이솔렛과 잘 지내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스콜리에서 힘겹게 버티느라 몸과 마음이 녹초가 된 채로 그녀와 수업을 하는 풀밭으로 올라오면, 이솔렛은 언제나 미리 와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를 위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본래부터 이 풀밭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편이었다. 다프넨이 오면 그녀는 바위에 앉은 채 한참이나 말없이 있다가 가끔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노래를 한두 곡 불렀다. 노래들은 신성 찬트가 아닌 그냥 보통 노래였다. 어떤 때는 다프넨이 눈앞에 있지도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가끔 대화가 오갈 때도 있지만 언제나 이솔렛 쪽에서 먼저 말을 중단하고 일어나 버렸다. 식당에서의 일이 있은 후 아이들이 오이지스를 괴롭히는 빈도는 눈에 띄게 줄었다. 그리고 다프넨에게는 더더욱 접근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헥토르가 없을 때 에키온 일당이 가끔 다가와 기분 나쁜 말을 던지고 가곤 했다. 또한 리리오페가 가끔씩 스콜리 안 에서 그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그러면 모든 아이들이 쳐다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못 견디게 답답해질 때가 있었다. 차라리 혼자일 때가 더 나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나우플리온은 검의 사제이면서도 5년씩이나 섬을 비웠던 터라 오랜만에 섬 전체를 돌아보기 위한 여행을 떠나 있었다. 기억섬 뿐 아니라 보초들 외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침묵섬도 둘러보고, 상실섬과 기원섬에도 들를 예정이었다. 꽤 긴 일정이었다. 따라 서 다프넨은 집에서도 혼자였다. 이솔렛과 헤어져 혼자 집에 돌아와 있노라면 저녁 만들어 먹을 생각도 나지 않았다. 고픈 배를 움켜쥐고 자리에 누워서 생각하 곤 했다. 나우플리온, 아니 이실더와 렘므를 여행하던 시절은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렇듯 많은 사람의 존재조차도 그의 외로움을 한시도 덜어주지 못하다니. 오이지스조차도 학교에 나오지 않았던 어느 날, 하루 종일 한 마디 대화도 나누지 못한 다프넨은 몹시 지친 기운으로 이솔렛을 찾아갔다. 그리고 여전히 침묵하는 그녀 앞에서 잠시 앉아 있다가 갑자기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고 세운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얼굴을 가리지 않고는 도저히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머리가 뜨거워지고, 가슴 속에 뭉쳐져 있던 단단한 응어리 같은 것이 목 을 타고 솟아 나오려 했다. 숨을 죽여 그것을 억눌렀다. 말없는 사람들,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인 사람들, 아니,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그를 비참하게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심장 깊은 곳에서 소용돌이쳤다. 이솔렛이 그를 한참 전부터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벌떡 일어났고, 인사도 없이 산비탈을 내려가 버렸다. 그러고서 며칠 동안 그는 이솔렛을 찾아가지 않았다. 이솔렛 역시 그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찾는 일은 없었다. 그가 수업을 받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교장도 몰랐다. 이대로 영원히 받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집에 혼자 틀어박혀 있던 그의 눈에 문득 책 한권이 띄었다. 오이지스와 함께 갔던 장서관에서 가져온 책이었다. 그는 책을 집어 무작정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눈물이 한 줄기 흘렀다. 결코 친구는 될 수 없었던 소년, 란지에와 나누었던 모든 대화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그리워졌다. 의견이 다르더라도, 비밀을 들킬까봐 긴장하더라도, 말을 하고 싶었다. 그는 지금도 여동생을 돌보고, 벨노어 저택에서 누군가를 시중들며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면 전에 말했던 대로 다른 삶을 택해 그곳을 떠났을까. 흐려진 눈을 닦고 십여 페이지나 읽고 있던 것이 무엇인가 그제야 살펴보았다. 겉표지에는 제목이 없었지만 안쪽에는 있었다. [가나폴리 이주의 역사] <역사>라는 단어를 보니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그는 눈물을 닦으면서 동시에 웃음도 터뜨렸다. 란지에가 있었다면 이 책도 권해 주었을까. 아마 그랬을 지도 모른다. 그날 저녁때까지 그는 열렬히 그 책을 탐독했다. 어두워지자 달빛에 비추어서라도 마저 읽고 싶어질 정도였다. 책은 그리 두꺼운 편이 아니었기에 다음날 스콜리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한 권을 완전히 독파할 수 있었다. 그런데 끝이 조금 이상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맨 끝장 십여 페이지가 뜯겨나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책을 옆구리에 낀 채 스스로 장서관을 찾아가게 되었다. “아, 다프넨이 왔구나.” 제로 아저씨는 별로 놀란 기색이 없이 그렇게 반겨 주었다. 오이지스는 오늘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프넨은 책을 내밀며 말했다. “전에 주신 책인데 뒷장이 찢어져 있어서요. 이 책 뒷부분을 읽고 싶은데요.” 제로는 책을 받아들며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그에게 사닥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가자고 손짓했다. 앞서 올라가는 아저씨를 따라 사닥다리 위로 오르니 놀라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원뿔형이라고 밖엔 표현할 수 없는 방이었다. 그가 선 곳에서부터 원뿔 끝에 해당하는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원형 벽 전체가 모두 계단식 책꽂이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 책꽂이에 수천 권도 넘을 듯한 책들이 가득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흡사 머리 위로 솟은 책의 첨탑이었다. 그러니까 이곳에 방이란 딱 두 개 분이었다. 처음에 들어왔던 아랫방과 지금 서 있는 윗방. 그리고 윗방의 천장이 꼭대기까지 솟아 있는 셈이었다. 이 많은 책들을 꺼내고 넣고 하기 위한 방편으로 두 사람 정도가 바짝 붙어 걸어갈 수 있을 듯한 너비의 나무 계단이 벽을 친친 감으며 올라갔다. 그렇게 빽빽한 책꽂이 사이사이에 일부러 비운 듯한 공간이 있고, 창문이 뚫려 있었다. 벨노어 백작의 서재에도 이 정도로 많은 책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더구나 세로로 쌓여 한 눈에 들어오는 책들의 육중한 무게감은 실로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한참 만에 다프넨은 겨우 말을 할 수 있었다. “저...창문으로 비바람이 들이치지는 않나요?” 스스로 생각해도 난데없는 질문이었지만 정말로 그는 그것이 걱정 되었다. 제로 아저씨는 싱긋 웃더니 방 한쪽으로 걸어가 매듭지어진 붉은 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모든 창의 덧문들이 일순간에 닫히는 것이 아닌가. “아...대단하군요.” 윗방에는 바닥에 편안히 앉거나 누울 수 있도록 곳곳에 방석이나 쿠션 같은 것들이 쌓여 있었다. 별로 깨끗하지는 않았지만 다프넨은 개의치 않고 한쪽에 앉았다. 제로 아저씨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더니 헤매지도 않고 다프넨이 원하는 책을 딱 찾아 빼어 들고 다시 내려왔다. 그가 올라가는 내내 계단 곳곳이 삐걱거렸다. 책을 넘겨준 제로는 쿠션 몇 개를 쌓아 놓고 방바닥에 비스듬히 드러누웠다. 자주 이렇게 하고 지내는 듯 상당히 익숙한 태도였다. 그런 다음 책으로 벽을 쌓은 자신의 성채를 만족스러운 얼굴로 감상했다. 다프넨은 결국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말이죠, 아저씨. 아무래도 제가 보기에 이 건물은 좀 위험스러워 보여요. 여기 앉아 있다가 자칫 약한 지진이라도 났다간 떨어지는 책에 깔려 죽겠는걸요. 게다가 나무 건물에 종이 책이라 불이 나기도 쉬울 것 같고요.” 제로는 한숨을 내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건물은 내 꿈의 결정체야.” 제로는 이야기해주었다. 과거 그들이 살았던 땅에는 이 탑의 수십, 아니 수백 배나 되는 거대한 장서관이 있었고 자신은 그 모양을 조악하게 본뜬 것뿐이라고. 물론 제로가 옛 왕국의 장서관을 보았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대대로 책을 수집해 온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던 그는 결국 그 장서관의 구조에 대해 적은 책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그 후로 그는 위대한 장서관을 자기 눈으로 다시 보는 것을 평생의 꿈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한 사람, 아니 수백 사람의 힘이라 해도 옛 왕국의 장엄한 장서관을 다시 재현할 수는 없었다. 장서관의 아름다움과 정교한 구조, 그리고 규모는 지금 섬 안에 있는 모든 건물을 합쳐도 모자랄 정도로 대단했다고 말하는 제로의 눈은 아이처럼 순수한 열정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냈다. 이 자그마한 나무 탑을 설계하여 세우고 흩어진 책들을 모아 이만큼 채워 넣는 일에 그의 반생이 소비되었다. 남은 반생 역시 이 꼬마 장서관을 좀더 안전하게 만들고, 더 많은 책을 모으는 일에 바칠 생각이었다. 대륙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잊지 않고 꼭 책을 부탁했다. “왜 하필 나무였나요?” “섬에는 석재가 모자라거든. 이 섬에 있던 쓸만한 석재의 거의 전부는 공회당을 짓는 데 사용했어. 공회당은 우리 순례자들이 달 여왕을 위해 반드시 지어야만 하는 건물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물론 산과 절벽에 돌이 널려 있긴 하지만 지금 우리에겐 그런 것을 뜯어낼 만한 기술이 없어. 더구나 장서관 같은 건... 이제 그런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거든.” 섬은 언제부턴가 본래의 왕국으로부터 지리적, 혈연적으로 떨어진 것뿐 아니라 정신적 문화에 있어서도 분리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학문과 예술, 그리고 말할 나위 없이 마법을 가장 숭상했던 옛 왕국의 문화는 점차 무, 그 가운데서도 특히 검을 지향하는 것으로 변질되어갔다. 학문과 예술 같은 분야들이 그것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고수준의 비평가와 많은 관중들을 필요로 하는 반면, 검은 서로 겨루기만 하면 손쉽게 승패가 갈라졌다. 섬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 인구는 쉽게 늘어나지 않았다. 겨우 몇 백, 가장 많았을 때조차 천여 명에 불과한 구성원을 가진 사회에서 사람들의 관심사는 생활과 생존에 밀접한 것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새로 자라나는 아이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강한 전사가 되기를 원했다. 그런 식이니 검의 사제 아래로 모여든 아이들의 과열된 경쟁은 이미 정도를 넘었다. 균형 따위는 예전에 사라졌다. 마법을 비롯하여 다른 모든 전승들이 겨우겨우 명맥만 유지해 나가는 동안 검의 경쟁에서 밀려나 농사라든가 염소치기, 사냥 따위를 하게 된 사람들의 불만은 점차 커져만 갔다. 심지어 신성 찬트와 같은 전승은 계승자가 겨우 이솔렛 한 명밖에 남지 않았을 정도였다. 이미 사라져버린 전승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제로는 그것을 퇴보라고 단언했다. “이미 한껏 발전시킨 바 있던 고도의 문화를 내팽개치고 도로 야만인들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짓이지. 하지만 내게는 그것을 되돌 릴 힘이 없어. 겨우 오이지스 같은 아이 한둘을 바라보고 이렇게 책을 모아 이어져가도록 하겠지만,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토 록 한 권의 책도 제대로 읽지 않아.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고 있지. 나중에 너희가 어른이 되었을 무렵엔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칠 스콜리의 선생님 한명도 구할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제로는 어깨를 움츠렸다가 말을 이었다. “상상만으로도 두렵군.” 어쨌거나 제로의 이야기를 들은 다프넨은 왜 헥토르를 비롯한 많은 아이들이 자신을 그토록 심하게 질투하고, 또 괴롭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대륙에서 온 낯선 소년 다프넨>보다 <검의 사제의 첫 번째 다프넨>을 더욱 미워하고 있었던 것 이다. 일전에 오이지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지금까지 헥토르는 스물을 넘기지 않은 섬 안의 젊은 소년 소녀들 가운데 단연 최강의 실력자로 인정받던 소년이었다고 했다. 그런 헥토르를, 비록 몇 가지 운이 겹쳤다고는 해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간 다프넨은 그 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자 동시에 불쾌함의 원천이었다. 이미 섬 안에서 섭정 각하 다음으로 존경과 선망의 눈길을 받게 된 검의 사제가 가장 아끼는 소년, 그의 뒤를 이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첫 번째 제자. 그들이 싫어해 마지않는 대륙에서 왔으니 그들의 친구도 아니며, 심지어 <산 아래의 공주>라고 불리는 리리오페에게 여러 번의 친절을 받은 일이 있기까지 한 그 자신...... 어쩌면 모든 조건이 이렇게 공교롭게 겹쳤을까. 푸훗...... 다프넨은 소리 없이 웃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로가 벌써 가겠느냐고 물었다. 지금까지 그와 이야기하는 것이 즐거웠던 듯, 아쉬워하는 눈치가 분명했다. “또 올게요. 책 빌려 읽을 수 있지요?” “물론이지. 책을 읽은 사람은 모두 내 친구야. 언제든지 놀러 오너라.” 장서관을 나서며 다프넨은 흐릿하던 것들이 많이 맑아지고, 분명해 졌다고 생각했다. 언제 그에게 호락호락한 세상이었던 적이 있었나. 한 번도, 단 한번도,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조건이라면, 그 미움을 뚫고 살아남는 것도 자신의 임무였다. 하고 싶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하긴, 적어도 속마음을 숨기고 겉으로만 친절한 체 하는 자들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리하여 닷새 만에 다프넨은 이솔렛을 다시 만났다. 그가 비탈을 올라오자 바위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이솔렛은 약간 놀란 듯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그가 다가와 맞은편 바위 에 앉을 때가지 말없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정 이야기도 없이 오랫동안 수업을 빠뜨려서 죄송합니다. 어떤 벌이라도 내리시는 대로 받겠어요.” 이솔렛은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풋, 하고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다프넨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왜 웃으시죠?” “푸후후훗......”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그 비슷한 웃음소리를 내며 혼자 웃어댔다. 웃음이 그치자 그녀는 다시 한 번 다프넨의 얼굴을 구석구석 까지 뜯어보았다. 다프넨이 말했다. “선생님도 잘 웃으시네요.” 마음을 달리 먹은 다프넨은 이제 쌀쌀맞음이나 불친절함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솔렛이 아무리 그를 외면한다 해도 다 참아내고, 대답할 때까지 끝끝내 말을 붙이리라고 마음먹고 올라왔었다. 그러나 이건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무슨 뜻이지?” “사실은 말이죠.” 다프넨은 솔직하게 씩 웃으면서 대꾸했다. “당신을 무시무시한 전설 속에 나오는 미녀처럼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이솔렛은 투명한 분홍빛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물었다. “내가 무시무시하다고?” “아, 아뇨. 무시무시한 건 전설이고 미녀는......” “그러니까 <무시무시한 전설>에 나오는 미녀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건데?” “......무시무시한 거죠.” 똑같은 결론이 나 버렸다. 그러나 이솔렛은 화를 내거나 웃는 대신 뭔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 동안 왜 오지 않았지?” “뭔가 잘못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이제는 마음을 고쳐먹었으니 다시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는 빠지지 않고 늘 오겠다고? 내게서 얻어 가는 것도 없으면서?” “아뇨. 얻어 가고 있습니다.” 다프넨은 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마도 저는 침묵하는 상대를 견딜 수 있게 되겠죠.” “......” 이솔렛은 대꾸 없이 일어나 잠시 풀밭 위를 왔다 갔다 했다. 다프넨은 저도 모르게 종아리를 덮는 바지 아래로 드러난 흰 발목 을 바라보고 있었다. 복사뼈의 곡선이라는 것도 참 미학적이구나, 하고 혼자 생각하면서. “뭔가 다르구나.” 그것은 혼잣말이었다. 다프넨이 쳐다보자 이솔렛이 이번엔 그를 보며 말했다. “난 네가 나우플리온 사제님과 매우 닮았다고 생각했었어. 그 사실이 나를 몹시 불편하게 했지. 하지만 넌 어딘가 다르구나. 그 분이라면 침묵 따위 시시한 시위를 꾸준히 참아주는 일은 없었을 테지. 꺾일지언정 휘어지는 법이 없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넌 몇 번이고 휘어지더라도 끝내 꺾이지는 않는 사람 같구나.” 어떤 심증을 굳어지게 하는 말이었다. 다프넨이 말했다. “당신도 저와 비슷한 데가 있는걸요, 이솔렛.” “어디가 비슷하지?” 다프넨은 약간 도박하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과거를 잊지도 못하고, 잊어버리려 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요.” 그 과거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대담하게 해 버린 말이었다. 이솔렛은 갑자기 걸음을 딱 멈추더니 몸을 돌려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지금까지 하던 말에는 대꾸하지 않은 채. “난 그리 좋은 선생이 못될 거야. 왜냐면 한 명도 가르쳐 본 일이 없으니까. 그리고 그리 친절한 사람도 아니라고 할 수 있어 . 아무도 내 곁에 접근하지 않는 걸 보면 알 수 있잖아? 그래도 나하고 잘 지낼 수 있겠어? 그럴 자신이 있어?” 다프넨은 잠깐 생각한 다음 대답했다. “아주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어째서?” 예전 <보리스>라고 불리던 시절처럼, 다프넨의 눈이 살짝 깊어졌다. “지금가지 좋은 조건에서 뭔가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이솔렛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흰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6월이 왔다. 비교적 순조로운 수업을 하게 된 후로 열흘정도가 흘렀다. 이제는 스콜리에 가지 않는 날에도 종종 이솔렛을 찾아갔다. 6월 초 순의 어느 날 아침, 다프넨은 스콜리 수업을 빠뜨리고서 그들만의 교실인 산 중턱 풀밭으로 올라갔다. 어쩌면 날씨가 너무 좋았 기 때문에. 그는 이솔렛이 자리에 없는 걸 보고 약간 당황했다. 항상 그녀가 먼저 와 있었고, 이곳은 본래 이런 수업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녀의 놀이터였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솔렛?” 몇 걸음 더 걸어가자 그들이 늘 앉곤 하던 바위들이 보였고, 그 뒤로 솟은 절벽이 눈에 들어왔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절벽 위를 바라보았다. 본래는 중앙 봉우리로 연결된 절벽인데 중도에 불쑥 튀어나온 평지가 있어서 풀이 약간 자라고 있었다. 전에 이솔렛은 거기에 샘이 있다고 말한 일이 있었다. 해가 떠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샘에서 반사된 햇빛이 눈부신 광채로 변해 감돌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니다, 잠시 후 다프넨은 자기가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수십 마리는 되어 보이는 하얀 새였다. 꿈인가...... 이곳에 선 채로도 넓은 날개와 순백색 깃털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새들의 온 몸에는 후광이 깃들여 있었다. 또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정말로 환각을 보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새들은 날개 치며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다시 내려오고, 빙글빙글 맴돌거나 바닥으로 내려앉거나 했다. 거기엔 새들 외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새들은 무언가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으며, 떠날 듯 하다가도 다시 되돌아왔다. 의문이 점차 확신으로 변해갈 무렵, 새 한 마리가 높이 떠오르더니 그가 있는 쪽으로 쏜살같이 날아 내려왔다. 다프넨은 당황하여 한 발짝 물러섰지만, 새는 허공에서 머물며 그의 눈앞에 황금빛 부리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접혀진 쪽지가 물려 있었다. 집게손가락으로 집어 펼쳐보았다. <오늘 수업은 여기서 하자.> 적힌 말은 그 한 마디 뿐이었다. 다프넨은 쪽지를 든 채 어이가 없어서 하, 하는 소리를 냈다. 저 절벽 위로 올라오라고? 길도 가르쳐주지 않고서? “혹시 넌 저리로 올라가는 방법을 아니?” 대답할 거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관념 속에서 새란 인간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동물이 아니었으니까. 그냥 하도 기가 막혀서 해본 말에 불과했다. 그런데 뜻밖으로 새가 머리를 까딱거리는 것이 아닌가. 마치 안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긴가민가하면서 다프넨은 다시 물었다. “정말로 알아?” 다시 한 번 끄덕, 하고 고개가 움직였다. 이렇게 신기할 데가. “그럼 가르쳐 줘.” 갑자기 새가 날개를 펴더니 조금 위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다프넨의 눈에 명백히 보이도록 고갯짓을 해 보였다. 한 마디로 이 거였다. 싫어. “......” 새는 그 자리를 떠나 다시 절벽 위로 훨훨 날아가 버렸다. 새한테까지 놀림을 당하고 나니 다프넨도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이솔렛이 저런 곳에 올라가서 여기서 수업을 하 자는 둥 하는 것은 역시 그를 가르치기 싫어서 그런 것이라고 지레짐작을 했다. 실제로 6월이 오기까지 그들이 한 거라고는 시시한 노래 연습밖에 없었다. 대화는 순조로웠지만 이솔렛은 결코 신성 찬트의 한 소절 반 토막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게다가 자기 노래는 한 번 끝까지 들려주지도 않았으면서 계속해서 다프넨에게 노래를 시키고는 틀린 점만 지적했다. 시범을 보여주지 않으니 제대로 해내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벨노어 저택에서 월넛이라고 불리던 시절 지독히 그를 가르치기 싫어했던 나우플리온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으면 있을수록 답답해지는 스콜리에 비하면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이 훨씬 즐거웠다. 아니, 시원했다. 이솔렛은 보기보다 대단히 직선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생각이나 감정을 숨기는 법이 없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바로 말했다. 그것이 섬의 관습에 관련된 것이라 해도 때로는 서슴없이 비난해 버렸다. 다프넨은 언제부턴가 그녀가 말하는 방식을 상당히 즐기고 있었다. 치기 어린 소녀처럼 도도하게 떠들어대는 것을 듣고 있으면 지금껏 자신이 너무 소심하게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평소 차가운 태도로 모든 문제를 외면하는 듯 보이는 그녀의 내면에는 적으로 간주된 자를 벼랑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박살내어버리는 격렬함도 숨겨져 있었다. 그나저나 저길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마음을 결정하지 못했으면서도 다프넨은 절벽 주위를 살피며 어딘가 통할만한 길이 없나 찾아보았다. 처음엔 아무 것도 안 보였는데 좀더 자세히 보니까 수풀로 가려진 절벽 구석에 야트막한 동굴 입구가 보였다. 허리를 한껏 구부려야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것처럼 생긴 동굴이었다. 하긴, 저런 동굴이 그리로 통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이솔렛이라고 해도 저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로 기어서 올라갈 수는 없었을 테니까. “으음......” 결국은 들어가고 말았다. 절반은 오기, 절반은 호기심으로. 동굴 안은 의외로 어둡지 않았다. 몇 걸음만 들어가니 금방 바깥쪽으로 통하는 통로가 보였다. 길은 정확히 절벽 뒤편, 그러니까 그들의 풀밭 교실에서는 절대로 보이지 않을 곳으로 통해 있었다. 동굴이라기보다는 두 개의 문을 연결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 보니 아래는 천길 낭떠러지였다. 위험천만하게도 길은 절벽을 빙글빙글 돌아가며 나 있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기도 했거니와 반드시 평평하기만 한 길도 아니었다. 주위에는 거머잡을 만한 것도 없었다. 다 좋다고 쳐도, 다프넨에게는 윈터러가 있었다. 그것은 가로로 매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칫 잘못 걸려 발이라도 허공에 헛디뎠다가는 그대로 끝장날 것이 뻔했다. 동굴로 돌아온 그는 궁리 끝에 윈터러를 풀고 띠를 이용해서 그것을 등 뒤에 잡아맸다. 상당히 고심해서 떨어지지 않도록 잘 묶었다. 잘못했다간 이번엔 검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버리는 일이 나게 될지도 모르니까. 도로 주우러 내려갈 수 있을 만한 골짜기는 절대 아니었다. 그런 다음 그는 드디어 그 절벽 길에 도전했다. 몸을 바짝 붙이고 조심조심 걸어 오르기 시작했다. 언뜻 발아래를 내려다보자 저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길은 절벽 중간 정도까지는 잘 통했다. 이런 길을 도대체 누가 만들어 놨을까 하는 생각이 들 즈음 길은 점차 좁아지더니 갑자기 끊어져 버렸다. “이런......” 몸을 돌리기조차 힘든 상황인데 눈앞에 길이 없으니 당황도 이런 것이 없었다. 길만 보고 걷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눈앞에 까마득한 허공이 펼쳐지자 더럭 겁까지 났다. 왜 여기까지 왔을까. 이런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조금도 없었잖아. 그때였다. 조금 전의 새와 비슷한 다른 새 한 마리가 사뿐히 날아 내려오더니 눈앞의 허공에서 멈춰 퍼덕거렸다. 다프넨의 눈이 따라가자 새는 살짝 움직여 약간 멀어졌다. 그제야 그의 눈에도 보였다. 발밑만 내려다보고 걷느라 지금까지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말문이 막혀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어떻게, 저럴 수가......있지?” 허공에 바위가 떠 있었다. 천지사방에 닿는 것 하나 없는데 그냥 우뚝 떠 있었다. 손이 떨려서 눈을 비비기도 힘들었다. 그것은 실로 섬뜩한 광경이기까지 했다. 마치 들어와서는 안 되는 비밀스런 마법의 영역에 잘못 발을 들여놓은 것처럼,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눈앞에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조금 정신을 차리고 나서 다프넨은 바위를 관찰해 보았다. 둥근 바위를 반으로 자른 듯 위쪽은 평평한 바위였다. 대략 사방 1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공간이 거기에 보였다. 그곳까지의 거리는 7미터 가량. 그가 있는 위치와 비교해서 바위는 약간 위쪽에 있었다. 그냥 뛰어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고...아니, 누가 저 위로 가라고 한 건 아니잖아? 퍼득...... 세 마리 새가 다시 그가 있는 곳으로 내려와 작은 포물선을 그렸다. 모두 네 마리가 된 새들은 허공에서 퍼덕이다가 날개를 접더니 마치 어딘가에 발을 딛고 앉은 듯한 자세로 멈췄다. 네 마리가 세로로 줄지어, 흡사 자신들을 하나씩 밟고 바위가 있는 곳으로 가라는 것처럼. 뗏똑. 새 한 마리가 가볍게 뛰더니 한 뼘 옆으로 옮겨갔다. 날개를 펴지 않은 그대로 똑같은 자세였다. 다른 새들도 비슷한 동작을 취하며 좌. 우로 움직였다. 그제야 다프넨도 깨달았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저곳에는 발판이 있다! 허공에 떠 있는 바위와...보이지 않는 계단? 이쯤 되자 자신이 시험받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머리를 파고들었다. 돌아서고 싶지 않다는, 불합리한 감정이 서서히 스며 올랐다. 이렇듯 자신을 오만하게 시험하는 소녀가 낸 문제, 그걸 풀어내어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다는 마음이 솟았다. 왜 그랬을까. 본래 그는 남의 평가 따위에 마음 쓰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는데. 한숨을 한 번 내쉰 다음, 다프넨은 대담하게 허공을 향해 한 발을 내딛었다. 그 순간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잘 알지 못했다. 마법이라고 믿었다. 그를 데려가 줄 것은 마법이라고. 발이 닿았다. “......” 다시 한 발, 그리고 한 발을 디뎠다. 예외 없이 그가 디딘 것은 돌처럼 단단한 계단이었다. 그 투명한 계단을 걸어서 그는 드디어 바위 위에 도착했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젖혀 저 위를 바라보았다. 빛나는 햇빛이 만드는 오묘한 그림자와...계속되는 마법의 계단...... 계단의 정체는 허공에 떠 있는 투명한 돌들의 연속이었다. 그는 다시 올랐다. 새들이 계속해서 옮겨 앉으며 그의 발걸음을 인도했다. 이미 신비로운 감정에 사로잡힌 그는 이 새들이 어째서 인간의 일을 이토록 잘 해내는지에 대해 의심하지도 않았다. 그저 오를 따름이었다. 점차 그는 햇빛 가운데로 나아가고 있었다. 절벽 위를 날고 있는 수십 개의 날개, 수천의 깃털을 보았다. 천사의 백색이랄까, 사방에 나부끼는 광채의 깃발들 가운데 축복처럼 빛이 쏟아졌다. 투명한 샘물도 보였다. 그리고 모든 것에 둘러싸인 사람을 보았다. 기원을 드리듯 높이 쳐든 두 손, 요정의 것인 양 빛나는 광채 속의 짧은 금발, 날리는 긴 소맷자락, 대리석을 깎은 듯한 목선을 가진 가장 비현실적인 소녀가 그곳에 있었다. 내민 손가락 끝에 올라앉았던 새 한 마리가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새를 올려다보느라 가볍게 들린 턱이 수려한 빛의 곡선을 그렸다. 이솔렛은 처음 보는 희고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반짝이는 바람이 치맛자락을 휘감아 갔다. 그녀가 다프넨이 올라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아......” 무엇 때문에 당황한 것일까. “!” 그의 발은 허공을 딛고 말았다. 비틀, 하며 쓰러지는 순간 지금까지 그가 딛고 오던 계단이 세차게 얼굴에 부딪쳐 와 입술이 찢어졌다. 분명 그걸 밟으며 왔는데도 무심코 존재를 불완전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그의 손이 간신히 돌 하나를 부여잡는 데 성공했으나 그 순간, 네모진 돌이 불안정하게 휙 돌았다. 그는 그만 손을 놓치고 말았다. 작은 돌처럼...떨어져 가고 있었다. 무엇을 느낄 사이도 없이, 귓가의 세찬 바람도, 멀어져 가는 빛도, 죽음에 대한 공포조차도. 그것이...느려진다고 생각한 것은 단순한 착각인 것일까. “아아......” 자신의 몸이 흡사 방금 전에 허공에 떠 있던 돌들처럼 멎어 버렸다.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서서히 위로 들어올려지기 시작했다. 속도는 느렸다. 하지만 분명하게 그는 떠 있었다...날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무엇도 잡지도 딛지도 않은 채 떠 있었다! 귓가로 파고드는 소리가 있었다. 노래였다. 라라라라라......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 때문일까, 단지 그렇게만 들리는 노래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신성한 음향으로 변했다. 푸르라, 무의 꿈속에서 기억 밖의 것을 열어 보이라 그것은 이솔렛의 목소리였다. 처음으로 듣는 그녀의 신성 찬트였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음색이 그의 귀는 물론 드넓은 사방을 가득히 채우며 널리 퍼져나갔다. 수천의 합창인 양 증폭된 음향, 그것은 한 인간의 목에서 나올 수 있는 노래가 아니었다. 또한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들을 둘러싼 모든 자연이 거기에 귀 기울이며 멈춘 것 같았다. 닿아라, 바람의 깃이여 하프와 같은 날개를 펴고서 평소에 듣던 그녀의 목소리, 약간 낮은 듯하던 허스키함은 완벽히 새로운 풍부함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수천의 빛깔이 섞여든 듯 찬란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마법이 깃들이지 않으면 세상에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로. 신성한 것, 귀한 것, 드높은 것, 그 모두가 하나의 노래와 목소리에 융화되어 있었다. 뜻을 알 수 없는 그 노래가 자신이 허공에서 떠오르고 있다는 신비로움보다도 더한 감동으로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드디어 절벽 위까지 떠오르고...발이 닿는 곳에 이르러 내려놓아졌다. 이솔렛은 아직 노래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놀라운 신성 찬트가 그를 살려냈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었다. 아니라는 생각은 할 수조차 없었다. 그 순간만은 백 명이 아니라 말한다 해도 그만은 그것을 믿었을 것이었다. 노래는 서서히 낮아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감격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채 다프넨은 손을 내밀었다. 이솔렛의 목이 있는 곳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 목에 두 손가락을 댔다. “계속, 그대로 조금 더 노래해 줘요.” 따뜻함, 그리고 가느다란 떨림이 손가락을 통해 전해져 왔다.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녀의 마력이 그에게로 이어져 오는 것처럼, 가누기 힘든 감정의 물결이 밀려들었다. “......” 이솔렛은 두 소절 정도 더 노래하다가 천천히 멈추었다. 그리고 투명한 분홍빛이 감도는 눈동자로 소년을 응시했다. 다프넨은 띄엄띄엄, 그러나 솔직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아름다워요...정말로......” 당신의 목소리가 아름답다, 라고 말하려 했었다. 그러나 <목소리>라는 단어는 저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흘러버리고 나온 것은 그 말뿐이었다. 이솔렛은 눈을 약간 크게 떴다가, 입술을 오므리고, 그리고 한 발짝 물러섰다. 푸드덕...... 흰 새들이 날아와 그녀의 주위를 감쌌다. 아무런 대답 없이 그녀는 샘가에 앉더니 두 손을 담갔다. 그 곁으로 새들이 모여들어 날개를 접고 물을 쪼았다. 다프넨은 절벽 아래로 멀어져 가는 광막한 협곡과 띠처럼 흐르는 강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밟고 올라온 투명한 돌들이 그림자를 떨어뜨릴까 생각하면서. 이솔렛이 한 번 노래한 것은 몇 십일 동안 안 되는 가락을 억지로 연습하며 실랑이한 것보다 훨씬 큰 효과가 있었다. 본래는 너무 일찍 와서 혼자 있던 그녀를 방해한 셈이었는데도 그날의 그녀는 화를 내거나 하지 않았다. 그 날 절벽 위에서 그들은 번갈아 가며 나직이 노래 불렀고, 이솔렛은 몇 번인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새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이 흰 새들은 섬의 전령들이었는데 때로는 먼 대륙까지도 갔다. 인간의 말을 알아듣는 것은 물론, 스스로의 의사를 표현하거나 심지어 충고조차 할 수 있다고 했다. 이 현명한 동물들의 조상은 그들의 먼 고향 왕국에서 온 몇 마리의 새였다고 했다. 그들의 정확한 지능은 쉽게 단언하기 힘든 것이었다. 물론 이솔렛 혼자만의 새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섬에서 단 하나 남은 신성 찬트의 전승자인 이솔렛의 목소리에 새들은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요즘의 섬은 온통 육체적으로 겨루어 강해지는 것만이 최고로 여겨져 그녀에게 노래를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분명 그런 성격이 아닌데도 일부러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아 온 그녀는 굳이 그걸 누구에게 가르치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섬의 사제들로서는 그런 중요한 것이 전승자 없이 사라져 버리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두 사람의 수업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실은 이솔렛이 누군가를 가르치고자 하는 마음을 냈다는 것부터 대단한 일이었다. 아직 정확한 까닭은 알 수 없지만 겨우 열일곱 살인 이솔렛은 <공주>라고 불릴 정도로 섬의 나이 많고 현명한 자들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존재였다. 다프넨은 그녀가 일부러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혼자 사는 것도 이런 대접들이 불편하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저 보이지 않는 계단은 아버지께서 발견하셨고, 오직 내게만 알려 주신 거야. 그러니 너도 비밀을 지켜 줘.” 이솔렛은 한 마리 새를 무릎에 앉게 해서 그 깃털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의 하얀 머리카락이 새의 동그란 머리에 갸웃이 닿아 있었다. “오직 아는 자라면 이 새들뿐이랄까.” “그런 것을 왜 제게 알려 주셨죠?” “새들이 알려준 거지.” 그녀는 새들더러 다프넨을 이곳으로 인도하라고 말한 일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왜 새들은 그를 도와줬을까? “이 새는 요즈렐이야. 흰 새 가운데 공주라고 불리지.” “당신과 같네요?” 그녀 앞에서 그 별명을 언급한 일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걸 그 순간 깨달았다. 이솔렛은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말했다. “그래, 하지만 이 새는 진짜 공주인걸. 옛 고향 땅에서 온 조상새들 가운데는 <왕>이 있었고, 이 새는 그 조상새의 후손이야.” “섬까지 온 건 몇 마리뿐이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직계가 한 마리뿐일 수 있지요?” “그건 이 새들이 정말로...자신의 왕위를 물려주는 의식을 행하기 때문이지.” 요즈렐의 목에 새의 눈빛과 똑같은 빨간 루비 한 알이 목걸이에 꿰어져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아.” 다프넨은 문득 회상에서 깨어나 자신을 부른 사람을 쳐다보았다. 하긴 집 안에서 그를 부를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뭘 그리 생각 하냐?” “이솔렛이......” 거기까지 말하고 다프넨은 급히 말을 멈추었다. 그녀와 분명히 약속을 한 터였다. 나우플리온에게 라고 해도 계단에 대한 이 야기는 할 수 없었다. “이솔렛이 뭘?”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나우플리온은 침대 위에 앉아 사과를 하나 들고는 장난스레 그것을 갉아대고 있었다. 그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는 약간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이제 나한테도 숨기는 비밀이 생기는 거구나. 아, 왠지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한테 따돌림 당하는 아버지의 기분을 알 것 같다. 젠장, 말도 안돼. 결혼도 못해 본 주제에 왜 이런 궁상스런 생각만 드는 거지?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이 나쁜 녀석아.” 2. 두 가지 음모 트라바체스의 수도 론. 트라바체스 안에 존재하는 열다섯 명의 선제후들 가운데 단지 두 명만이 수도 안에서 살 수 있었다. 하나는 통령 자리에 앉은 사 람, 또 하나는 평의회의 의장. 트라바체스의 신분, 즉 계급은 <의원>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세습적인 의원은 트라바체스 전체에 약 150여 명인데 가끔 줄어들기도 하고 늘어나기도 했다. 줄어드는 것은 주로 항쟁으로 인한 가문의 멸망 때문인지라 비교적 빈도수가 잦았다. 그러나 늘어나는 것은 기존 이원 30인 이상의 추천을 받아내야 했으므로 대단한 뇌물이 오가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이런 까닭에 나라의 사정이 좋지 않은 최근에는 계속해서 의원들이 줄어들고만 있었다. 흡사 배가 고파진 짐승들이 서로를 잡아먹 기 시작하는 것처럼, 트라바체스 전역에 항쟁이 불붙고 있었다. 의원들은 그들이 속한 지역 내에서 선제후를 선출할 자격이 있었다. 이 과정에도 수많은 비리가 개재되었다. 선제후는 세습직은 아니었지만 대신 종신직이었으므로 기존의 선제후가 죽고 나서 잠깐 동안 힘의 공백이 생기면 새로이 선제후가 되려는 자들이 갖은 모함과 술수를 다 동원하여 덤벼들기 마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내에는 죽은 선제후의 자식이 새 선제후가 되는 경우가 가 장 많았다. 결국 가장 효과적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것은 선제후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선제후들은 역시 종신직이자 세습은 아닌 통령을 선출할 권한이 있었다. 그 자신들 중에서. 선제후의 세력이 강대할 때는 비록 그가 죽는다 해도 감히 새로 선제후가 되겠다고 나서는 자가 드물었다. 이반 일렉터(Elector ) 칸 역시 그런 선제후였다. 그는 열다섯 선제후들 가운데 열한명이라는 유례없는 지지를 업고 트라바체스의 새로운 통령이 되었다 . 그리하여 이제는 이반 치프 일렉터(Chief Elector) 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4익, 유리히 프레단, 지금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것은 스물 서넛 남짓해 보이는 후리후리한 키의 미남자였다. 알현실의 높은 의자에 앉은 칸 통령은 뚱뚱한 몸을 불편하게 일으키며 턱을 약간 긁었다. “고향에는 별 일 없느냐.” “물론입니다. 염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유리히라는 남자는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입가에는 장난기가 있는 미소가 엿보였다. 칸 통령이 손짓하자 유리히는 몸을 일으켜 왼쪽으로 가 섰다. 그곳에는 이미 검은 드레스를 입은 한 여성이 서 있었다.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을 걸었다. “꼬마는 잘 크고?” “누님 염려 덕택에.” 여자는 창백한 뺨을 부채로 살짝 가리며 미소 지었다. 상당한 미인이었지만 나이는 서른이 넘어 보였다. 잡담이 그치자 칸 통령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시작했다. “오랜만에 네 날개가 다 모였군.” 유리히와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 맞은편에는 두 명의 남자가 이미 도착해 서 있었다. 칸 통령의 말이 떨어지자 그들은 동시에 똑같은 동작으로 허리를 굽혔다. 칸 통령의 입가에 만족한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내가 무슨 일로 오랜만에 너희 모두를 소집했는지 짐작이 가느냐?” 오른쪽 첫머리에 서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서른 후반에서 마흔 정도로 잡아볼 수 있는 우울한 눈빛의 남자였다. “결국 윈터바텀 킷입니까.” 네 개의 날개, 스스로를 1익, 2익, 3익, 4익으로 부르고 있는 이들은 칸 통령이 선제후였던 시절부터 그를 보좌해 온 심복들이었 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심복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칸 통령의 은밀한 지시만을 받는 암살자들이었으며, 결코 공식적인 자리에는 나타나는 법이 없었다. 트라바체스에서 권력을 유지하는 일은 이런 암살 조직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했다. 때로는 이런 암살자들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가 중요한 대세를 판가름 하게 되기도 했다. 여자가 불평을 했다. “어쩐지 이렇게 될 것 같았다고요. 꼬마를 뒤쫓는 일이라니 졸리고 한심할 텐데. 그런 것을 꼭 가지셔야 해요, 우리 통령 각하?” 그들 가운데 4익인 유리히를 제외한 세 명은 칸 통령이 아버지 선제후의 여섯 아들 가운데에서 후계자로 낙점 받고자 모함과 암 살을 서슴지 않고 자행하던 소년 시절부터 그를 도와 왔다. 그래서 말하는 것에도 별로 거리낌이 없는 편이었다. 칸 통령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어도 가져야겠다. 마리노프, 내가 너희를 굳이 부르게 된 것은 소년이 렘므 땅으로 도망쳤다는 소식이 들어 와서다. 너희는 신출귀몰한 솜씨와 더불어 여러 가지 이름을 갖고 있으니 외국으로 달아난 자를 추적하기에 적격이겠지, 유리히, 렘므 국적을 만들 수 있겠지?” “저는 렘므의 항구도시 나르싯사 출신인걸요.” 내키기만 하면 조작 따위는 문제도 아니라는 의미였다. 유리히의 능청스러움을 보며 다섯 사람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다른 사 람들 앞에서는 극히 권위를 세우는 칸 통령도 이들 앞에서는 담백한 태도를 보였다. 아니, 실은 그럴 필요가 있었다. “그래, 그러면 일단은 너와 류스노가 가라. 같이 행동해도 좋고, 어쨌든 렘므에서 소년의 자취를 찾거든 연락을 보내는 거다. 만일 소년이 아직 혼자이고 보물도 가지고 있다면 너희가 빼앗아 공을 세우는 것도 좋겠지만, 그런 어린아이가 보호자도 없이 지금 껏 혼자 버텼을 리가 만무하겠지. 그러니 섣불리 행동하지 말고 정확한 정보를 얻거든 곧장 지원을 요청해라.” 류스노와 유리히를 보내는 것은 치밀함과 속도를 택했다는 의미였다. 나머지 두 사람은 그들에 비하면 주로 전투에 강했다. 유리히가 대답했다. “하긴, 그런 식이라면 벌써 다른 녀석에게 물건이 넘어가 버렸을 수도 있겠군요. 알겠습니다.” “이번엔 물건 갖고 달아나면 안 돼.” 마리노프가 농담조로 경고를 보냈다. 유리히는 전부터 오래된 물건에 대한 애착이 유별나서 일을 다 잘 처리해 놓고서 은근슬쩍 몇개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는 버릇이 있었다. 유리히는 약간 당황한 빛을 보였으나 곧장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누님도 참. 제가 언제 푼돈이나 챙겼지 그런 중요한 걸 집은 적 있습니까? 통령 각하께서 이번 일을 얼마나 중대하게 생각하시 는지 모를 제가 아니잖아요?” 우울한 낯빛의 남자, 1익으로 불리는 류스노 덴이 말했다. “그러면 저희는 일단 출발입니까. 오랜만에 임무를 주셨으니 나름대로 정보를 모아 오겠습니다.” 그라 <정보를 모으겠다>라고 말하는 것은 보통 사람이 흔히 하듯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수소문이나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 었다. 보통 그가 의도를 내보여 말했을 경우, 결과의 완벽함과 정밀함은 수십 명을 보내어 조사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칸 통 령도 그에게 시시한 일은 절대 맡기지 않았다. 그런 건 그의 능력에 대한 모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람인 그가 좀더 정치 감각이 있었더라면 정치꾼들의 나라인 트라바체스에서 크게 출새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는 큰 그림을 짜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주어진 일은 잔인하리만치 치밀하게 처리하지만, 임무가 없을 때는 한가하게 꽃이나 가 꾸고 옷이나 재단하며 나날을 보내는 희한한 남자였다. 그는 본래 재단사의 아들이었다. 2익인 마리노프 캄브는 아름다운 얼굴에도 불구하고 크고 작은 전투용 도끼를 수집하는 무시무시한 취미를 갖고 있는 여자였다. 그녀는 이런 궁성에 나올 경우 여름에도 긴 팔 드레스를 입었는데 그건 그녀의 팔이 워낙 근육질이어서 보는 사람을 주눅 들게 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수많은 사람을 죽였는데도 소녀처럼 천진난만한 성미였고, 그런 성격은 자기가 죽인 사람의 머리카락을 잘라 기본에 묶어 보관하는 엽기적인 버릇으로 발전했다. 내내 말이 없는 3익은 톤다라고 하고 네 날개 가운데 유일하게 트라바체스가 아닌 레코르다블 출신의 남자였다. 그 나라 사람이 흔히 그렇듯 피부가 약간 검고 머리는 회색이었다. 그가 마리노프보다 나이가 많은데도 3익이 된 것은 칸 통령의 밑에 들어온 시기가 늦기 때문이었다. 평소 그는 밧줄과 그물 같은 특이한 무기들을 사용했다. 그러나 정말로 상대가 강하다거나, 또는 그를 화나게 했을 경우에는 끝이 셋으로 갈라진 창을 들었다. 이 창을 들면 반드시 적을 창끝에 꿰어서 죽이곤 했다. 마지막으로 4익인 유리히 프레단은 아직 젊어서인지 까불기도 좋아하고 놀기도 좋아하는 청년이었는데 고향 땅에 아들을 하나 두고 있었다. 이 꼬마는 그의 친아들이 아니라 길에서 주워서 입양한 아이였고, 나이로 보아도 아들이라기보다는 동생이라는 편이 알맞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는 놀랍게도 아이에게 지극 정성이어서 요즘은 돈을 벌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의 장기는 날랜 몸과 빠른 말, 그리고 팔랑개비처럼 돌리는 강철 모닝스타(morning star)였다. 그의 가늘고 약한 몸매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지는 동료들조차도 의문이었다. 아무래도 여기엔 모종의 비밀이 숨겨져 있음이 틀림없었다. “저희 말고 또 누군가 같은 임무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류스노가 신중하게 이야기를 꺼내자 다른 세 사람은 약간 긴장했다. 그러나 칸 통령은 상관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렇지. 다름 아닌 그 애의 삼촌이야.” 류스노 역시 말을 돌리지 않고 직접적으로 질문했다. “그 사람 하는 일이 신통찮습니까?” “후훗, 그 자에게는 그 자 나름대로 맞는 일이 있는 거지. 혈연이라는 이점이 있어서 지금까지는 잘 해 왔지만 지금쯤 아이에게 후견인이 있을 것이 거의 자명한 만큼 이제부터는 너희가 더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 자는 일을 오래 맡겨둔 것에 비해 성과가 너무 적었다.” 그러나 칸 통령의 생각은 거기까지가 아니었다. 그는 블라도 진네만이 쓸만한 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섬기던 자를 한번 배반한 자인만큼 완전히 신용하지는 않았다. 그간의 공을 치하하여 론에 있는 저택까지 사줘가며 가까이 두고 있으면서도 만 일을 대비해 약점을 잡아놓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전형적인 트라바체스 사람이었다. 이번 일은 결국 개인과 개인간의 싸움이 될 듯하니 아무래도 지략가보다는 암살자인 이들 <네 날개>가 성공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 할 수 있었다. 지금껏 이들 네 날개는 주어진 일에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일단 보이지 않는 경쟁을 시켜놓고, 실패하는 쪽 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이었다. 어느 쪽이든 그것을 빌미로 해서 더 충성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니까. “그렇습니까.” 류스노의 담백함은 칸 통령의 이중 계산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자야말로 트라바체스 출신답지 않은 자였다. 마라노프가 물었다. “아이는 죽여도 상관없나요?” 칸 통령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돼. 그 녀석은 산 채로 데려와라. 가능한 한 상처도 많이 입히지 말고. 데려와서 다른 한 가지 보물의 행방을 말하도록 해야 할 테니까. 다른 자는 얼마든지 죽여도 좋다. 하지만 혹시라도 인질이 될만한 자가 있다면 생포해 와라.” 너무 많은 상처를 입히면 고문의 효과가 적어지기 마련이었다. 마라노프는 입술을 내밀며 말했다. “아이, 그러면 결국 아무도 못 죽인다는 얘기잖아요? 서글퍼라.” “대신 인질의 가치가 없는 자를 죽이라고. 누님한테 양보할 테니까.” 옆에서 유리히가 천진한 얼굴로 싱글거리며 거들었다. 그러나 이 젊은이 역시 지금까지 죽인 사람의 숫자가 자기 나이보다 많은 자였다. 마라노프가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그 약속 믿어도 되겠지?” 류스노와 유리히가 모든 준비를 끝내고 렘므로 출발한 것은 그 날 밤이었다. 평소에는 한껏 게으름을 피우지만 맡겨진 일이 있으면 촌각도 지체하지 않는 자들이 이들이었다. 칸 통령이 정말로 때가 무르익었다고 생각될 때까지 이들을 부르지 않는 것에도 다 이유가 있었다. 칸 통령의 마법사 종그날이 그들을 단숨에 아노마라드 국경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들이 로젠버그 관문에 도착해 조사를 시작하리까지 꼭 이레가 걸렸다. 한때 보리스라고 불렸던 소년 다프넨은 나뭇잎이 우수수 내리는 바람 많은 언덕을 걷고 있었다. 스콜리의 수업도 끝났고, 오늘은 이솔렛에게 다른 일이 있어 하루 쉬기로 한 터였다. 언덕 꼭대기에 오른 그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몇 걸음 더 걷다가 갑자기 발끝에 뭔가가 걸리는 것을 느끼고 내려다보았다. 풀밭 속에 굴러 있는 두 짝의 신발이었다. 그제야 상황을 눈치 챈 다프넨은 싱긋 웃으며 신발을 집어 들고 근처의 수풀을 몇 군데 더 헤쳤다. 예상대로 나우플리온이 거 기서 세상모르고 낮잠에 빠져 있었다. “게으른 사제님, 당신의 첫 번째 제자가 왔다고요!” 요즘 그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즐겼다. 나우플리온의 정식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에게 불편만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섬을 비웠던 나우플리온이 한동안 쌓인 일들을 처리하느라 바빠서 전처럼 검술 연습을 할 기회는 별로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가 된 것은 그에게 즐거움의 원천이었다. 남의 질투 따위에 우쭐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받아들였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고, 그와 지내는 것은 본래 재미있었다. “으음...게으른 사제님이라니 너무 하쟎냐, 버릇없는 제자야. 스승님은 격무에 시달려 한 잠 더 주무셔야겠다.” 힘들다는 것이 괜히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나우플리온이 섬 전체를 조사하는 임무를 띠고 떠났다가 돌아온 것은 겨우 십여 일 전이었다. 돌아오고 얼마 되지도 않아 이번에는 마을 일대의 조사에 착수했다. 무기를 비롯한 보급품의 수량 조사 따위가 그의 성미에 맞을 까닭이 없었다. 지루한 일들을 되풀이하느라 요즘 그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럼 전 여기서 잠깐 기다리죠.” 나우플리온은 몸을 뒤척이더니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검의 사제란 무척 피곤한 직업이란다. 나중에 누가 너보고 하겠냐고 물으면 결단코 안한다고 그래라.” 다프넨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네? 네......” 그래서 나우플리온은 다시 잠이 들고 다프넨은 풀밭에 앉아 다리를 쭉 뻗은 채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바람의 뭉툭한 손가락이 길게 자란 풀들 사이로 이리저리 선을 긋고 있었다. 또는 긴 치맛자락으로 쓸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짧아진 머리는 바람이 불면 휙 뒤집혀 흩날리곤 했다. 누군가의 머리카락도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윈터러를 띠에서 풀어내어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약간 뽑아 보려다가 마음을 바꿔 그대로 두었다. 이솔렛에게서 드디어 첫 찬트를 배우게 된 것이 바로 어제였다. 아직 능숙하지 못해 이솔렛처럼 그 안에 마력을 불어넣지는 못했지만 일단 구조는 외워 두었다. 언제고 그도 마법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될 것이다. 자신은 대단히 훌륭한 학생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언제고 성실한 학생이기는 했다. 아직은 뜻을 잘 알 수 없는 노래, 나직이 외워 보았다. 물 속의 구슬 그 안의 세계 네 안의 마법 그 속의 노래 잃은 것을 영원히 버려 성스러워지며 맑아지리라 “그 노래, 이솔렛이 가르쳐 줬냐?” 자는 줄 알았던 나우플리온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수풀 속에 머리를 묻고 있어서인지 목소리는 한결 먼 것처럼 들렸다. “네.” “클라자니냐의 찬트구나.” “클라자니냐가 뭐죠?” 나우플리온은 누운 자세에서 상체만 벌떡 일으켜 앉았다. “지명이야. 옛 왕국의 지명.” 그러더니 나우플리온은 불쑥 질문했다. “정말로 가르치긴 하는군. 이솔렛과는 잘 지내고 있는 거냐?” 단순한 질문을 받은 것뿐인데 순간적으로 뺨이 살짝 붉어졌다. 다행히 그는 나우플리온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많이 좋아졌어요.” “다행이구나.” 잠시 사이를 두고 그가 말을 이었다. “난 너를 그녀에게 소개할 때 절반은 너를 위해서, 절반은 그녀를 위해서 그랬었지. 너를 위해서가 무슨 얘긴 지는 알 테고, 이솔렛은 너무 사람들과 교류를 안 해. 예전엔 그렇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솔직히 물어볼 기회를 잡은 것 같아서 다프넨은 말을 꺼냈다. “당신은 그녀를 잘 아나요? 왜 그녀가 그렇게 행동하는지 알고 있어요?” 또다시 나우플리온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이번엔 조금 후 입을 열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솔렛은 돌아가신 검의 사제, 일리오스님의 무남독녀야. 나 이전에 검의 사제이셨던 그 분은...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뛰 어난 분이셨지. 검술에 있어서도 물론 독보적이셨지만 학문이면 학문, 예술이면 예술, 못하는 것이 없는 분이셨어. 최고의 리라 연주자이자 작곡가였고, 그림 솜씨도 당대에 당할 사람이 없었던 데다, 건축 설계에도 정통하셔서 후세를 위해 많은 스케치를 남기셨지. 철학자이기도 했고, 역사가이기도 했으며, 심지어 지금은 거의 사라진 학문인 수학에도 능통하셨으니 말이야. 살아생 전에 그 분을 존경하지 않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거야. 당시 섭정 각하이셨던 분도 그 분의 학식과 식견에는 고개를 숙일 정 도였으니까. 그래, 진정한 의미에서 천재였다고 할까. 이 섬의 긴 역사 속에서도 그만한 천재는 쉽게 찾을 수 없지.” 나우플리온의 목소리에는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과 더불어 일말의 그리움까지 깃들여 있어 다프넨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껏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고, 그가 매번 보여준 수많은 새로운 면모들 가운데 가장 신기한 것 같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지 금까지 다프넨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오만하거나 소탈하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심지어 데시 사제 앞에서도 그다지 겸손하지는 않았다. “네가 가보았다던 그 장서관의 책들 거의 전부를 읽었던 사람 역시 제로 씨를 빼고는 그 분이 유일했을 거다. 제로 씨 도 <나무 탑의 현자>라고까지 불리는 사람이고 그 분의 좋은 친구이기도 했지. 그 두 분은 서로 협력해서 옛 왕국의 책들에 나오 는 복잡한 마법적 설계들을 직접 구현해보려 하셨지만 뛰어난 마법사가 없어서 결국 실패하셨어. 두 분이 설계한 것 중 유일하게 성공한 것이 있다면 바로 그 장서관이지. 그 외엔 이를테면 하늘을 나는 날개를 만들어 낸다든가......” 어쩐지 가나폴리의 비행선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였다. “그 분의 직분이 검의 사제인지라 검술에 있어서는 제자를 두었지만, 그밖에 다른 모든 학식과 재능들은 오직 딸에게만 전수 하셨지. 물론 지금 이솔렛이 네게 가르치는 신성 찬트도 그 분이 딸에게 가르치신 거야. 그 분의 가장 놀라운 업적 가운데 하나 가 새 찬트를 몇 곡 만드신 것이기도 해. 찬트 뿐 아니라 창작이라는 것 자체가 옛 왕국을 떠난 뒤에는 완전히 멈춰져 버리다시 피 한 것이라서......어쨌든 그만큼 그 분이 딸을 사랑하는 마음은 깊었고, 이솔렛이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도 보통의 부녀에 비할 바가 아니었어. 그런 만큼...아버지를 잃었을 때 그녀가 받은 충격도 컸지. 정말로, 따라 죽겠다고 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나우플리온이 평소 말하는 방식을 생각했을 때, 실로 장황하기까지 한 설명이었다. 그는 옛 사제 일리오스의 일을 말함에 있어 한 가지 업적도 축약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러면 지금 이솔렛이 갖고 있는 학식이나 재능도 정말 엄청나겠군요.” 나우플리온은 씩 웃었다. “응, 나 같은 건 비교도 안 된다고 할까. 게다가 그녀는 본래 아버지를 닮아서 똑똑해. 아마 지금도 아버지가 남긴 것들을 정리하면서 새로운 걸 많이 창안해 냈을 거야. 하지만,,,그녀는 살아생전의 아버지와는 달리 사람들 앞에 아무 결과물을 내놓지 않게 됐어. 아버지가 죽은 후로 섬사람들을 몹시 불시하게 되어버렸거든. 그들을 위해 재능을 사용해 보았자 돌아오는 것은 아 무 것도 없다고 느끼게 된 거지. 아버지가 죽게 되었을 때 아무도 도와줄 수 없었던 것처럼. 아니, 오히려 훌륭한 만큼 희생만이 강요된다고나 할까.” 지금도 마을 안에서 해결하기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이솔렛에게 물으러 간다는 것은 결코 소문만이 아니었다. 마을의 어떤 사람 도 도울 수 없는, 전승이 폐해지다시피 한 여러 가지 특수한 지식들에 있어 그녀를 당할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사제들조차도. “그녀의 아버지께서...어떻게 돌아가셨는데요?” 나우플리온은 벌떡 일어나 다프넨의 앞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두 손을 벌리며 처연한...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넌 정말 뭐든 다 알려고 하는구나. 좋아. 얘기를 들어봐라.” 그러면서 시작된 이야기는 정말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네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달의 섬. 그 가운데 가장 살기 좋은 기억섬에 정착한 섬사람들은 두 개의 마을을 건설했었다. 하나는 현재의 마을이고 또 하나는 좀더 북서쪽에 있었다. 두 마을 가운데 좀더 규모가 컸던 것은 북서쪽의 마을이었다. 그때는 사제들 가운데 절반이 거기에 살았고 섭정 각하가 거처 하는 것도 그쪽이었다. 두 마을 사이에는 묘한 우열 의식이 작용하여 알게 모르게 알력이 존재하고 있었으나 표면적으로 드러나 지는 않고 있었다. 현 섭정 각하의 아버지가 섭정으로서 통치하던 마지막 해에 첫 번째 재앙이 터졌다. 역병이었다. 이 정체 모를 병은 빠르게 북서쪽 마을 전체를 초토화했다. 의술을 담당하는 서클렛의 사제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수많은 환 자들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검의 사제이지만 의술에 뛰어난 일리오스까지 구원에 나섰다. 일리오스의 제안에 의해 두 마을 사이의 소통은 끊겼고, 사람들은 완전히 격리되었다. 그때 섬 인구의 절반이 죽거나 갔다. 역병이 잠잠해질 무렵, 그곳 마을 사람들은 유령 마을이 되다시피 한 그 마을을 떠나 지금의 마을로 하나 둘 이주해 왔다. 그 러나 과거의 알력도 알력이었고 역병을 옮겨올지도 모른다는 이유가 대두되어 곳곳에서 분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의 텃세에 화가 난 북서쪽 마을 사람들은 도로 자기 마을로 돌아가면서 다시는 저들과 상종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버렸다. 그리고 치민 울화를 만용으로 삼아 마을 안에 널린 시체들을 한곳에 모아 놓고 불을 질렀다. 장소는 역병이 도는 동안 임시 병원으로 쓰였기에 가장 많은 시체들이 있었던 공회당 뒷마당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재앙이 닥쳤다. 연일 계속된 여름비로 장작이 거의 다 젖어 있어서 화장은 사흘 밤낮 동안 계속되다시피 했다. 불은 꺼졌다 다시 피워졌다 하기를 반복했다. 한 곳에 모여 바닥에 깔린 시체들이 썩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악취를 풍기는 시체의 산을 뚫고 정체모를 괴물이 나타났다. 그가 괴물의 모습을 담담히 묘사하는 것을 들으며 다프넨은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온 몸이 안개로 만든 것처럼 어른거렸고, 거대한 피막 날개가 네 갈래로 갈라져 촉수처럼 너울거리는 놈이었어. 그 끝에는 주먹만한 발톱들이 끔찍한 이빨처럼 붙어 있고, 키만 해도 3미터는 넘는 데다 날개의 사정거리는 그보다 더했지. 눈 대신 번 뜩이는 불꽃 두 개가 박혀 있는 머리는...글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에메라 호수에 있던...그 망령과 똑같지 않은가! “......” 나우플리온이 약간 놀라 다프넨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괴물이 지금 눈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떠는 거야?” 일전에 집안 이야기를 나우플리온에게 해준 적이 있지만 호수의 망령에 대해서 정확히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 장면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온 몸이 후들후들 떨릴 정도의 공포가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입에 올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또한 그때 벌어진 일은 그의 가장 아픈 기억이기도 했다. “계속...얘기해 주세요...” 다프넨은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건 옛 이야기에 불과해. 망령은 이제 없는 거야. 적어도 여기엔. 나우플리온 역시 가능한 한 건조한 어조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괴물은 북서쪽 마을로 되돌아온 인간들을 모조리 잔인하게 죽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이야기 속에서는 상처만 입고 살아나 결국 광기로 죽어난 사람은 없는 모양이었다. 살아남은 자가 단 한명도 없게 되자 다행히 괴물은 아래로 내려오지는 않았다. 북서쪽 마을에 벌어진 비극은 이쪽으로 피신해 와 있던 당시 지팡이의 사제(데시의 아버지)가 마법으로 비추어 보고서야 이 쪽 마을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비상 회의가 소집되었다. 몇 명인가의 전사가 파견되었지만 손도 써보지 못하고 몰살당했다. 이 미 역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상태에서 저 괴물의 존재는 이제 섬사람 전체의 씨를 말릴 수도 있는 중대한 문제였다 . 다시 한 번, 일리오스 사제를 중심으로 원정대가 조직되었다. 그때 이솔렛은 열 두 살이었다. “일리오스 사제님에게는 세 명의 검술 제자가 있었지. 그들 가운데 실력이 모자라는 셋째 제자만을 남겨두고 나머지 두 사 람이 행동을 함께 하기로 했어. 죽어도 따라가겠다고 덤비는 이솔렛을 떼어놓기 위해서는 거의 묶어놓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 었지. 궁수와 검사, 마법사를 합해 스무 명으로 이루어진 원정대는 절반은 죽음을 예감하며 북서쪽 마을로 갔다 그 중에는... 철부지 검사였던 나도 있었지.” 문득 궁금해졌다. 나우플리온은 일리오스 사제의 제자가 아니라고 했는데 그러면 누구의 제자였을까? “싸움에 대해선 자세히 말하지 않겠다. 어쨌든 그 원정대에서 살아남은 것은 나뿐이었으니까. 하루 밤낮동안, 악취가 풍기 는 마을 곳곳의 무너진 건물들을 지형지물로 이용해 가며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일리오스 사제님과 그 분의 둘째 제자 , 그리고 나만이 남았지.” 맑은 오후 날씨였던 들판에 갑자기 빠르게 구름이 몰려들었다. 시원하면서도 거친 바람이 뭉쳐진 풀들을 소리 내어 가르기 시작했다. “일리오스 사제님은 나를 불러서 몇 가지를 일러주며 마을로 돌아가라고 하셨고...나는 그 말에 복종하여 돌아왔다. 결국 괴물은 소멸 되었지만 사제님도, 남은 제자 한 사람도 목숨을 잃었지. 돌아온 나는 그 분의 뒤를 이어 검의 사제가 되었고.” 나우플리온은 비가 올 듯 어두워진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더니 말했다. “이만하면 왜 이솔렛이 나를 싫어하는지 알겠지?” 나우플리온의 이야기에는 모호한 점이 있었다. 일단 이솔렛이 그를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가 갔고 상황 설명 도 되었지만, 그가 아는 나우플리온이라면 결단코 하지 않았을 일들이 해명되지 않은 채 그냥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괴물과의 마지막 전투에 이르러 나우플리온이 동료들을 내버리고 도망칠 사람이던가? 검의 사제니 뭐니 하는 명예를 갖고 싶어서? 그리고 왜 일리오스 사제는 자기 제자를 놓아두고 제자도 아닌 나우플리온을 살려 내려 보낸단 말인가? 게다가 한 명의 도움 도 아쉬운 형편에 한 명을 내려 보내고 결전을 벌일 정도면 마지막을 위해 숨겨둔 능력이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왜 그런 것을 처음부터 사용하지 않았단 말인가? 나우플리온은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말했다. 하던 이야기는 다 잊어버린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그만 내려가자. 비가 올 것 같은 날씬데.” 스콜리의 막대호신술 선생인 질이 사는 집은 마을 중심부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의 집에서 산비탈을 타고 20분 정도 올라가면 한때 일리오스 사제가 지어 사용한 여름 거처였으나 지금은 이솔렛이 혼자 사는 집이 있었다. 밤늦은 시각인데도 질의 집에는 아직 불이 밝혀져 있었다. 초를 만들 재료도 부족하고 램프에 넣을 기름은 더더욱 턱없이 모자란 섬에서 그런 일은 대단한 사치에 속했다. 물론 질 선생이 사치를 부릴 만한 입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일생일대의 중대한 계획을 짜고 있었기에 램프의 기름 따위를 아끼고 있을 계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인간 두 명이 있었다. 그 하나는 나우플리온이고 또 하나는 헥토르였다. 헥토르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없는>과 같은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좀 지나치다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우플리온에 대한 감정이라면 이보다 더 적절한 단어는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나우플리온을 극도로 혐오하고, 증오하고, 그리고 질투했다. 그 본격적인 시작은 일리오스 사제의 죽음에서부터였으나 연원은 좀더 오래었다. 그는 나우플리온보다 두 살이 많았으며 평범 하고 이상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그러나 사생아 출신에 부모도 없는 나우플리온보다 항상 검술에 있어 한 발씩 처졌다. 세월이 더 흐르자 그것은 한 발이 아니라 여러 발, 아니 이젠 아무리 기를 써도 좁힐 수 없는 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그가 단 한 번 나우플리온에게 승리한 적이 있었다. 바로 일리오스 사제의 제자로 들어간 일이었다. 마을 전체의 스승이자 우상인 일리오스 사제의 정식 제자로 선택받았을 때 그는 미칠 듯 기쁜 나머지, 일리오스 사제에게 이미 두 명의 나이 많은 제자가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차기 검의 사제로 낙점 되기라도 한 양 좋아 날뛰었다. 그랬다. 그가 바로 실력이 모자라 원정대에 참여하지 못하고 마을에 남았던 세 번째 제자였다. 또래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던 나우플리온은 끝내 일리오스 사제의 제자가 되지 못했다. 그 일에는 복잡한 곡절이 있었으나 질에게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기에 관심도 없었다. 결론적으로 그는 이겼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번의 재앙으로 일리오스 사제와 두 선배가 죽고 나자 결국 새로운 검의 사제가 된 것은 나우플리온이었다. 제대로 된 스승이라고도 할 수 없는 자에게서 시시한 검술을 배웠던 그가! 일리오스 사제의 정식 제자인 자신을 재치고! 결국 스콜리에서 막대 호신술이나 가르치는 선생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는 그 후로 나우플리온에 대한 일이라면 늘 게거품을 물게 되었다. 그런 나우플리온이 검의 사제직을 내팽개치다시피 하고 훌쩍 대륙으로 떠나버렸을 때 다시 한 번 혹시나 기대를 가졌던 것도 사실 이었다. 그러나 햇수로 5년이나 되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섭정 각하를 비롯하여 다른 다섯 사제들은 검의 사제를 다시 뽑아야겠다는 말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밉살스러운 나우플리온은 실컷 게으름을 피우고 놀다가 흥밋거리가 다 떨어지고 나니 슬금슬금 돌아와 당연한 듯 자기 자리를 도로 꿰찼다. 깃펜을 움직이고 있는 질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자기 이름이 왜 질레보(질투)인지에 대해 일찍부터 깨달았어야 했다. 그는 나 우플리온이 죽어 없어지지 않는 한 그에 대한 미망으로부터 놓여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런 그에게도 한 가지 희망이 있었다. 나우플리온이 몹쓸 병에 걸려 오래 살지 못한다는 소문이었다. 그건 정말로 소문이어서 누구도 사실 여부를 확인해 주지 않았지만 꽤 오랫동안 신빙성 있는 추론이 뒷받침되어 가며 사라지지 않 은 이야기였다. 누군가는 그가 괴물과의 싸움에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고 했고, 누군가는 그가 검의 사제의 증표인 <우레의 룬> 을 내던지고 대륙으로 떠난 것도 병을 고칠 약을 찾으려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 좋아. 그는 일단 그것을 믿었다. 그들 또래의 젊은이들은 북서쪽 마을에서의 두 가지 재앙으로 거의 전멸되다시피 했기 때 문에 만일 나우플리온이 죽는다면 달리 검의 사제가 될 재목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오래 걸리더라도 기다릴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그런 그에게 또 다른 적색 신호로 감지된 존재가 있었다. 바로 헥토르였다. 일단 헥토르는 섭정 각하의 누이동생의 아들로서 섬 안의 어떤 소년보다도 고귀한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아직 나이가 어렸다. 이 것은 단점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장점도 되었다. 지금 나우플리온이 갑자기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단점이겠지만, 나우플리온이 한 5-6년 정도만 더 버텨준다면 장점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검의 사제는 다른 어떤 사제보다도 육체적인 능력이 많이 요구되는 터라 대략 마흔에서 쉰 사이에 물러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굳이 너무 나이든 사람을 검의 사제로 임명해서 잠깐 사이에 다시 바꾸는 것은 오히려 혼란만 초래하게 되기 때문에, 검의 사제가 생각 외로 일찍 죽었을 경우 차라리 젊은 사람을 택하고 원로를 비롯한 다른 사제들이 도와주는 형태를 취했다. 한 마디로 간단했다. 헥토르가 스물을 넘기면, 차기 검의 사제의 자리는 헥토르의 차지였다. 게다가 이 소년은 갈수록 일취월장하는 실력을 보여주고 있어서 많은 섬사람들을 감동시키기까지 했다. 아부나 과장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일리오스 사제 같은 사람이 한 명 더 날 거라고 떠벌려대기도 했다. 또한 이런 상황은 헥토르 자신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 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가 자기 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 나우플리온의 제자가 되고자 그토록 집착해온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낯선 소년 하나가 대륙에서 들어오면서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헥토르가 다프넨에게 불타는 적개심을 보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질에게 역시 다프넨의 존재만큼 위험한 것이 없었다. 영영 제자를 거두지 않을 줄 알았던 나우플리온의 첫 제자였고, 게다가 헥토르와 맞먹거나 오히려 더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이 는 헥토르보다 더 어렸다. 결론은 명확했다. 나우플리온이 일찍 죽거나, 아니면 다프넨이 빨리 죽어주거나, 둘 중의 하나다. 헥토르의 존재도 아직 완전히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세 사람을 동시에 없애버릴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겠지만, 나우플리온의 실력은 이미 그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기에 일단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모종의 수를 써서 두 소년을 한꺼번에 없애버리는 것이 괜찮은 방법이었다. 나우플리온이 저 다프넨이라는 소년에게 꽤 집착하는 듯 보이는 것도 그에게는 기회였다. 만일 다프넨 녀 석이 죽어버린다면 나우플리온도 충격을 받고 검의 사제를 때려치우거나 다시 대륙으로 떠나버릴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우플 리온이 섬의 아이들에게 품고 있는 혐오감이나 다프넨을 보며 느끼는 희망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것을 이용해야한다는 사 실만은 본능적인 감각으로 결코 놓치지 않았다. 아마도 싸움을 붙여 서로가 서로를 죽이게 하는 것이 가장 적당할 것이다. 둘 다 죽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테고, 만일 한쪽이 살아남는다 해도 살인죄를 적용해서 씌우면 제거하는 것은 간단했다. 헥토르의 경우는 신분이 신분이니 만큼 아예 제거하는 것은 어 려울 수 있지만, 적어도 검의 사제가 되는 길은 막혀버리게 될 것이었다. 소년 시절의 더럽혀진 마음이라는 것은 사제가 되는 데 있 어 가장 큰 걸림돌 가운데 하나였다. 목표는 확실해졌고, 방법만이 남았다. 이미 그는 몇 가지 음모를 짜 놓고 실행에 들어가기 전에 장단점을 비교하는 중이었다. 이 런 문제에 대한 것만은 어쩌면 나우플리온도, 섬 안의 다른 누구도 대적할 자가 없을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3. 그림자 도시와 죽은 자의 오벨리스크 7월이 왔다. 렘므의 큰 항구 나르싯사의 번화한 거리를 경쾌한 걸음으로 가로질러 걷는 청년이 있었다. 요즘 북부에서 유행하는 오를리(Orlie)모자(앞뒤가 납작하고 양끝이 치켜 올라간 모자. 오를란느의 수도 오를리에서 유래되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를 비스듬히 멋들어지게 눌러쓰고, 통을 살짝 부풀린 바지에 카키색 양가죽 조끼를 걸친 날씬한 젊은이였다. 손에는 묵직해 보이는 가방이 들려 있었다. 항구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큰 범선 앞에서 선원을 받기 위해 서 있는 늙은 항해사를 발견하고 손은 흔들며 다가갔다. “이야, 안녕하신가요! 이게 얼마만이에요? 저 기억하시죠?” “오 이런, 유리치 군이 아닌가? 거의 1년만이로군!” 둘은 반갑게 서로를 얼싸안고 인사를 했다. 유리치라고 불린 청년은 곧 눈을 반짝이며 싹싹하게 물었다. “아직도 배 타시네요? 어디로 가는 배죠?” “여기서 출발하는 배가 다른 데 갈 데라도 있겠나? 엘베 섬 한바퀴 돌고 돌아오는 거지.” “잘 됐는데요? 저도 마침 엘베 섬으로 가려던 참이었는데 말이죠. 저 좀 태워 주실 수 있나요? 물론 사례는 하겠어요.” “사례는 무슨, 그냥 타! 마침 승객도 없고 내 손님이라면 선장도 별 소리 안 하니까. 얼른 올라가라고.” 잠시 후 유리치는 배안에 두개뿐인 승객실 중 하나에 들어가 앉아 있었다. 배는 한 시간 후 출항이었다.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하자 그는 곧 가방을 열고 검은 가죽을 돌돌 말아 놓은 꾸러미를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가벼운 손짓으로 꾸러미를 풀자 그 안에는 반들거리는 단도 다섯 개가 나란히 꽂혀 있었다. 손잡이와 칼날 사이에 구분도 없고, 폭 1센티미터에, 길이는 손바닥에 감춰질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예리함은 손가락도 소리 없이 잘라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 가운데 하나를 뽑아 왼쪽 소매 안쪽에 살짝 집어넣고, 나머지는 조끼 안쪽에 하나씩 주의 깊게 꽂았다. 만족한 듯 빈 칼집 주머니를 말아 가방 안에 넣고 이번엔 그 안에서 지도 한 장을 꺼냈다. 직접 손으로 그린 듯한 렘므 지도였다. 그러나 지형이나 중요 도시의 위치 따위는 꽤 정확하게 그려져 있었다. 다만 렘므 땅 쪽에 빨간 잉크로 그려 넣은 한 줄의 선이 있어서 그 주위의 도시들만이 구체적으로 표시되어 있었고 나머지는 텅 비워져 있었다. 각 도시 주위에는 글자도 쓰여 있었다. 로젠버그 관문. 5월 말경 통과. 자로발리 마을. 7월 21일 숙박. 가네로 시. 7월 27일 출발. 드볼치 광산. 10월중 통과. 단티보 시. 11월 12일 통과. 모리더 산. 11월 중순경 통과. 헤베브로 마을. 12월 2일 도착. 잉크와 펜을 꺼내 든 유리치는 삐뚤삐뚤 이어지다가 헤베브로 마을에서 끊어진 선을 티보 만 쪽으로 쭉 길게 이어 그었다. 그 끝에 붉은 점을 그려 넣은 뒤 유려한 글씨체로 한 줄 써넣었다. 나르닛사. 2월 경 도착. 지도는 다시 돌돌 말려 가방 안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모든 준비를 끝내고 침대위에 편안하게 앉은 그는 기분이 좋은 듯 혼잣말을 했다. “아무리 조사 추적의 천재인 류스노 형님이라 해도 나보다 더 빨리 해내진 못했을 테지.” 그는 바로 칸 통령의 <네 날개>가운데 4익인 유리히 프레단이었다. 그의 트라바체스 식 이름은 렘므에 오니 유리치가 되어버렸다. 한때 나르싯사에서 정보를 수집하며 몇 달간 살았던 적이 있는 그는 안면 있는 사람들을 손쉽게 만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이곳으로 직행한 것도 이 때문이었는데 뜻밖의 행운을 잡은 셈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 몇 가지 정보를 조합하자 드디어 결과가 드러났다. 그가 추적하던 자들이 이곳에서 또 한 명의 일행을 만났고, 결국 엘베 섬을 한 바퀴 돌아서 다시 나르싯사로 되돌아오는 배를 탔다는 것이었다. 이 항로의 배를 타는 승객은 티보만 구경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한 대부분 엘베 섬에서 내렸다. 유람 여행이 목적이라고 하기엔 그들이 탔다던 알탄 시그머 호는 낡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매우 바쁘게 움직이는 상선이었다. 처음에 함께 행동하던 류스노와 유리히는 모리더 산을 지나 작은 마을 하나를 거치면서 갑자기 목적하는 자들의 종적이 사라지자 갈라져서 추적을 계속하기로 했었다. 유리히가 나르싯사에서 그들의 흔적을 다시 찾아내기까지 열흘이 걸렸다. 그 춥디추운 렘므의 겨울을 나면서 계속 여행을 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 자들은 심지어 마을에도 잘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 때문에 추적도 이렇게나 힘이 들었다. 로젠버그 관문에서부터 나르싯사까지라니, 정말이지 지독스럽게 열심히 돌아다닌다 싶었다. 하지만 곧 좋은 소식을 알아낼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는 침대에 누워 오랜만에 잠을 청했다. 그러나 엘베 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전혀 엉뚱한 결과였다. 엘베 섬에서 배들이 정박하는 곳은 몇 군데로 정해져 있었다. 당연히 유리히는 그 가운데 가장 큰 항구에서 내렸다. 그리고 채 스무 걸음도 걸어가기 전에 류스노와 딱 마주쳐 버렸다. 워낙 경쟁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추월당했다는 것도 기분 나쁜 일이었는데 심지어 류스노의 예의 우울한 표정을 한 채 추적이 끝났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해 주었다. “그게 무슨 소리죠, 형님?” “그 자들이 여기서 작은 돛배를 샀다는 것까지는 확인했다. 그러나 그 다음이 없어. 엘베 섬 안의 다른 어느 항구에도 그들이 돌아온 흔적이 없다. 화이트 크리스탈 제도에서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곳은 모두 가보았지만 결과는 똑같아.” 언제 도착한 건지, 벌써 이 근처 섬들까지 모조리 뒤진 모양이었다. 유리히는 형님의 귀신같은 능력에 은근히 화가 치밀기도 하고, 이렇게 흔적 없이 도망친 녀석들이 밉살스럽기도 해서 소리를 치고 말았다. “아니, 바다에 빠져죽기라도 했다는 건가요? 화이트 크리스탈 제도를 넘어가면 북해가 있을 뿐인데 가면 어딜 간다는 거요?” 마리노프 앞에서 이랬다면 당장 주먹으로 한 대 얻어맞고 비틀거렸을 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류스노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글쎄, 어쩌면 배를 타고 산스루리아로 갔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작은 돛배를 타고 악명 높은 돌풍이 몰아치는 산스루 반 도를 넘어갈 수 있었을까. 어쩌면 네 말대로 정말 바다에 빠져버렸을 지도 모르는 일이겠는데. 하지만 어쨌든 이대로라면 산스루리 아에 한번 가보긴 해야 할 것 같군.” “산...스루리아라고요? 하!” 유리히는 기가 막힌 나머지 그 자리에서 몇 바퀴 빙빙 돌기까지 했다. 그리고 허공에 대고 사납게 중얼댔다. “허, 그것 참! 그 자들은 대륙을 한 바퀴 돌기라도 할 참이란 말인가? 아예 트라바체스에 먼저 가서 돌아오도록 기다리는 게 나 을 지도 모르겠군. 이거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류스노는 창백한 얼굴 그대로 돌아서더니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유리히가 뒤따라가며 소리쳤다. “정말 갈 참인가요? 산tm루리아로?” 류스노는 대답 대신 이렇게 말했다. “해로는 무리일 테니 여기서 곧장 남곶으로 가서 새줄리프 지협을 건너 대륙으로 돌아가자. 거기서부터는 긴 여행이 되겠지.” 이렇게 해서 그들은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긴 그들이 북해 너머에 숨겨져 있는 달의 섬의 존재를 짐작 한다는 것이야말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긴 했다. 7월은 10년 만에 행해지는 대제사인 7원례가 치러지는 달이어서 초순에는 섬 전체가 정신 없이 바빴다. 그것이 끝나고 나서야 모 든 사람들이 겨우 한숨 돌려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다프넨은 그 동안 약속대로 서클렛의 사제인 모르페우스의 집에 몇 번 가기는 했으나 그가 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관심 갖고 바라 본 일은 없었다. 쓸만한 결과가 나온다면 당연히 그가 알려줄 것이고, 자신이 쳐다본다 해도 알아볼 수 있는 거나 있겠느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모르페우스 사제의 집은 데시 사제가 말한 그대로 정말 쑥대밭 연구실이었다. 책이란 책은 죄다 책꽂이에서 나와 늘어놓아져 있고 , 바닥에는 뭔가 잔뜩 쓴 양피지 조각들이 숱하게 날아다녔다. 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뭔지 모를 그릇과 약품들이 즐비해서 자칫 한 개만 건드렸다가는 줄줄이 다 바닥에 떨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의 집 한쪽에는 두터운 커튼으로 분리된 공간이 있어서 그 안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 거기에 들어가면 한 가운데 가로 1미터, 세로 30센티미터, 높이 50센티미터 정도 되는 반들반들한 검은 돌이 놓여 있었다. 다프넨이 찾아가면 모르페우스는 무조건 하던 일을 다 멈추고 커튼 안쪽으로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윈터러를 받아들어 검은 돌 위에 놓았다. 보리스가 한쪽에 놓인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그는 매번 다른 몇 가지의 물건들을 가져와 실험을 했다. 처음과 두 번째엔 아무 반응도 없었고, 세 번째에는 약간의 광채 비슷한 것을 볼 수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네 번째 찾아간 날 모르페우스 사제는 구리고 만든 커다란 고리를 가져와서 그 사이에 검을 끼워 놓았다. 그리고 고리 한쪽을 잡은 채 늘 하던 대로 룬을 외웠다. 반. 시아. 다모르. 잘디. 룬으로 구현하는 마법을 전혀 모르는 다프넨도 이제는 그가 외우는 저 룬의 조합이 무얼 위한 것인지 짐작할 정도였다. 그는 두 가지 물건이 조금이라도 동일한 과거를 공유하고 있다면 서로 공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모르페우스가 까닭 없이 확신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윈터러는 최소한 수백 년도 넘는 역사를 지닌 검이었다. 구리 고리는 그들의 옛 왕국으로부터 온 물건이라고 했다. 저번처럼 빛이 나기 시작했다. 구리 고리 주위로 동그란 빛이 번지기 시작하다가 서서히 검 전체로 퍼져나갔다. 빛은 점차 강해지더니 어느 순간 허공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흡사 호수 속에 큰 바위를 던져 튀어 오른 물처럼. 치지직! 보리스는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튀어 오른 광채는 가라앉을 줄 모르고 흡사 살아 있는 것처럼 허공에서 너울거렸다. 이런 결과가 오리라고는 모르페우스도 상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의 엄숙한 얼굴에 서서히 흥분이 번졌다. “걸국은......” 빛은 한동안 어린아이처럼 멋대로 뛰놀다가 점차 어떤 구체적인 형태로 변해 갔다. 처음에 그것은 높은 산이 되었다. 그리고 곧 가늘게 뻗어 오르며 날카로운 창 모양으로 변했다. 창 아래에 그것을 쥔 손의 모양이 나타났다. 어떤 끔찍한 존재가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 멋대로 빛을 주무르는 것처럼, 그렇게 명확한 형태였다. 창 모양이 흩어졌다. 잠시 동안 빛은 수천 개의 작은 덩어리로 변해 흡사 눈처럼 흩날렸다. 아니, 정말로 눈보라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하늘거리며 떨어진 빛들은 검은 돌 위에 닿자 물처럼 녹아 사라졌고, 다시 허공으로 생겨나 떨어져 내렸다. 다프넨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빛 송이들이 회오리처럼 휘말리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중앙으로 뭉쳐지며 첨탑 같은 것으로 변했다. 그리고 다시 납작해지며 선반 같은 모양이 되었다. 그 다음부터 빛은 갑자기 온 몸을 뒤틀며 난잡하게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창에 꿰뚫어진 비참한 짐승처럼 괴롭게 솟구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목소리가 있다면 비명이 집 전체를 뒤흔들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다프넨은 그 빛의 감정에 너무도 손쉽게 동요되었다. 이윽고 빛은 서서히 사그라지며 돌바닥에 낮에 깔렸다. 무언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려 한다는 생각이 갑자기 그의 정신을 휩쌌다. 다프넨은 모르페우스 사제를 쳐다보며 무어라고 말하려 했지만, 문득 모르페우스가 수천 킬로미터 너머에 있어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는 환하던 방 안이 갑자기 한 치 앞도 바라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암흑으로 변해버리는 것을 목격했다. 지금은 분명히 낮인데? 들리는 거라곤 오직 다프넨 자신의 숨소리뿐이었다. 뭔가 대단한 마법적 충돌이 벌어졌음에 틀림없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능력은 그에게 없었다. “후우, 후, 후우, 후......” 아직도 바깥세상은 밝은 것인지, 창문 쪽을 돌아보려 했지만 방향조차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소리 내어 모르페우스를 불렀다. “사제님! 사제님! 모르페우스 사제님! 대답해 주세요! 지금 어디 계세요!” 예감대로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는 두 팔로 몸을 감싸고 움츠렸다.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가 지금 발 딛고 있는 곳 외에 다른 곳은 모두 까마득한 낭떠러지라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나섰다간 곧장 떨어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보이지 않는 공포가 이렇게 클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지금 그의 손에 검이 없다는 것도 더욱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아니, 실은 이 모든 사태가 그 검 때문에 일어난 것 아닌가? 그그그그극...... 뭔가를 긁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곁이었다. 그르르르...... 흡사 늪의 진흙이 끊는 듯한 소리였다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뒷걸음질쳤다. 다행히 뒤는 낭떠러지가 아니었다. 툭, 투둑, 툭. 다프넨은 그것이 핏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절실히 그렇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였다. 머릿속에서 뭔가가 굉음을 내며 터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굉음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그것은 목소리였다. 그의 머릿속으로만 들리는 전율스런 목소리였다. 이것에 비하면 에메라 호수의 망령이 그의 뇌리에 박아 넣었던 목소리는 어린아이 장난에 불과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 목소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누가 나를 부르느냐. 그것은 산 자의 한계를 넘어서서 무한히 오래 존재하는 힘의 음성이었다. 이 세상에 존재할 수도, 존재해서도 안 될 끔찍하고도 압도적인 <힘>그 자체가 그를 향해 건넨 첫 마디였다. 다프넨은 정신을 잃었다. 생애 두 번째였다. “정신이 드니?”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본 것은 빛이었다. 어둠은 사라져 있었다. “괜찮은가? 괜찮으면 지금 일어나 앉아 봐라.” 의술을 담당하는 사제인 주제에 모르페우스는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고, 다프넨 역시 당연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기가 누운 곳은 모르페우스의 쑥대밭 연구실 한쪽 구석에 놓인 침대였다. “괜찮군.” 확실히 몸에는 별 문제가 없는 것 같긴 했다. 그러나 그가 보고 들은 것은...... 갑자기 다프넨은 모르페우스 사제의 팔을 덥석 잡았다. “무, 무슨 일이 있었죠? 제가 들은 소리는 뭐였죠? 사제님은 뭘 보셨나요?” 모르페우스는 잠시 동안 우울하게 침묵을 지키다가 일어서서 커튼 뒤로 들어가더니 곧 손에 무언가를 들고 나타났다. 정말로 처음에는 아닌 줄로만 알았다. 그만큼 모양이 달라져 있었다. 그것은 윈터러였다. 그러나 손잡이와 가드(guard)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검집도 없었다. 남은 것은 오직 차가운 백색으로 빛나는 블레이드(Blade)뿐이었다. 손잡이에 박혔던 듯한 날 없는 부분도 블레이드와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듯 같은 광채를 가지고 있었다. 모르페우스는 큰 수건으로 감싸 쥔 윈터러를 다프넨 곁에 내려놓은 다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말해야 좋은지 모르겠군. 일단 네게 미안하구나.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나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더 미안한건 이 런 사건을 겪고도 아직 이 검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데 있겠지.” 뻔뻔스런 말투는 그의 특기였다. 그러나 이어 모르페우스의 입에서 나온 것은 놀라운 이야기들뿐이었다. 다프넨이 암흑을 보았던 그 때, 그 방뿐만 아니라 섬 전체가 몇 분 동안 어둠에 잠겼다고 했다. 당연히 섬사람들은 몹시 놀랐고, 벌써 공회당에는 사제들의 비상 회의가 소집되어 있었다. 그러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르페우스 사제는 환자를 돌봐야 한다는 명목으로 잠깐 빠져나온 참이었다. 회의는 아직도 계속 중이었다. “우리, 일단 약속 한 가지만 하자.” “뭐...죠?” 다프넨은 블레이드(blade)만 남은 윈터러를 내려다보며 섬뜩한 기분에 몸서리를 쳤다. 고개를 들어 보니 모르페우스가 흡사 미친 사람 같은 눈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오늘 일,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말아라. 친구들은 물론이고 나우플리온 사제님에게도 말해선 안 된다. 지금 사제 회의에서도 난 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전혀 모른다고 말했다. 이건 사실 내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야. 나는 위험한 실험을 한 대가고 사제 직 정도 빼앗기면 될 지도 모른다. 사실 처음부터 사제직 같은 것에 별 미련도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넌 검을 빼앗기는 건 물론이 고,,,섬 밖으로 쫓겨나게 될지도 모른다.” 모르페우스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그 무서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내 말 이해하겠니? 난 아무 생각 없이 있는 너를 끌어들인 당사자이기에 이 일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니 이번 일로 네 가 해를 입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프넨은 반쯤 멍해진 상태로 그 말을 다 들었다. 듣고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갑자기 모르페우스 사제가 다프넨의 어깨를 움켜 잡아 흔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내 말 알아듣나! 심하면 사형을 당하게 될 지도 모른단 말이다! 정신 바짝 차려라! 아무한테도 발설하면 안 된다!” 사형이라고? “왜...왜죠? 왜 그렇게까지......” 다프넨이 약간 더듬거리며 겨우 입을 뗐다. 모르페우스는 고개를 몇 번 젓다가 이윽고 숙였다. “너...아까 이상한 목소리를 들었다고 말했지?” “네......” “나는 듣지 못했다. 나는 단지 어둠을 봤을 뿐이고, 재빨리 램프에 불을 붙일 수도 있었지. 그러나 나는 곧 아무리 불을 밝혀 도 저 검을 감싸고 있는 검은 안개 덩어리만은 밝게 할 수 없다는 걸 알았지. 그리고 그건...너도 마찬 자기였다. 너 역시 어떤 검은 덩어리에 묻힌 채 머리끝 하나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으니까. 저 검이 실제로 가장 크게 반응하는 건 저 구리 고리 따 위가 아니라 바로 너, 너 자신이야!” 오한이 일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 이유까지는 모르겠지만 넌 아마 저 검의 힘에서 쉽게 놓여날 수 없을 거다. 그러니 섬에서는 저렇게 위험한 것을 지닌 너를 내쫓거나 심하면 죽이려 할 거란 거다. 안 돼, 안 될 일이지. 오늘 일은 없었던 거다. 하지만......” 그때 다프넨은 오랜만에 그의 몸속에 잠들어 있던 예지가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계속 오라는 말씀이시죠? 비록 더한 일을 겪게 되더라도 그 비밀을 밝히고야 말겠다고...마음먹으신 거죠?” 모르페우스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흥, 내가 꼴통이라는 소리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지. 꼴통답게 끝까지 가자고. 너도 갈 테지?“ 그의 눈에서 불타는 것은 어쩌면 광인이나 가질 법한 확호한 의지였다. 알고 싶은 것을 위해서는 죽음도 두렵지 않다는 듯한. 그러나 다프넨은 두려웠다. 윈터러의 정체를 알게 되면 그 후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지금보다 더 끔직 한 결과가 아닐까. 다프넨은 모르페우스가 준 큰 천으로 윈터러를 감싸서 들고 그의 집을 나왔다. 그 소동이 벌어지고 정신을 잃은 사이에 이미 밤 이 되어 있었다. 어둠이 문득 무섭다고 느껴졌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애써 마음을 다잡고 몇 발짝 더 옮겼다. 그날따라 달은 없었고, 대부분의 집들은 기름과 초를 아끼기 위해 잠들어 마을은 캄캄했다. 모르페우스 사제는 윈터러가 이렇게 변해버린 것은 최초의 본질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일 거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너, 다프넨과 가까워지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거추장스러운 손잡이니 가드니 하는 것들은 어쩌면 검 자체보다 나중에 만들어졌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 것들은 이제 사라져 버렸다. 그가 구해서 가지고 다녔던 검집 조차도, 이제 이 검을 어떻게 다루어야만 하는 걸가. 모퉁이가 보였다. 저기를 돌아가면 공회당이 있고, 그 동족으로 세 번째 있는 집이 그와 나우플리온이 사는 아늑한 보급자리였다. 그 집을 떠올리자 다프넨은 또다시 두려워졌다. 그와 나우플리온 사이에는 거짓도, 숨기는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는 오늘 있었던 일을 나우플리온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건 이솔렛이 보여 준 투명한 계단의 이야기를 말 하지 않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이야기였다. 아니, 어쩌면 말해도 좋을지 모른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다프넨은 나우플리온 한 사람만을 믿고 이곳에 들어왔었다. 그런 그가 나우플리온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이곳에 있을 이유도 없었다. 실제로 섬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 해도 나우플리온과의 신뢰가 깨지는 것보다는 오히려 나은 일일지 몰랐다. “......?” 그는 모퉁이에 놓인 표지석 같은 것을 발견하고 어리둥절해졌다. 언제부터 이런 것이 있었지? 표지석은 몹시 닳아 있어서 글자가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그가 아는 글자도 아닌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서 옆을 돌아보는데 이번엔 까마득히 높이 솟은 오벨리스크(obelisk)가 눈에 띄었다. 곳곳이 부서졌거니와 허리 부분이 부러질 듯 아슬아슬한 첨탑이었다. 오벨리스크라고? 저런 것은 몇 달 동안 섬에서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 다프넨은 저도 모르게 그 오벨리스크 쪽으로 다가갔다. 걷다 보니 발에서 돌 비슷한 뭔가가 밟혀 부스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계속 걸어 오벨리스크 앞에 선 그는 윈터러를 들지 않은 왼손을 내밀어 그 표면을 만져 보았다. 글자들이 잔뜩 새겨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절반 정도는 알아볼 수도 있을 듯한 글귀들이었다. 그는 아무 곳이나 천천히 읽어보았다. 레우코시아, 타레이나의 딸은 아들 히에라를 낳던 도중 산고로 죽다. 2845년 4월 9일. 멜라니포스, 이다이아의 아들은 장서관 건축 도중 떨어지는 석재를 맞고 죽다. 2845년 4월 9일. 티그리스, 판드로소스의 아들은 호랑이를 사냥하다가 얻은 상처로 인해 병이 겹쳐 죽다. 2845년 4월 9일. 히페레노르, 히페레노르의 아들은 198년을 산 끝에 삶의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다. 2845년 4월 10일. 코리트시, 트렐로스의 딸은 친구들과 놀던 도중 실수로 벼랑에서 덜어져 죽다. 12세의 소녀였다. 2845년 4월 10일. ......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것은 모두 그런 것들뿐이었다. 누가 죽다, 또 누가 죽다, 죽다, 죽다...... 그는 빙그르르 돌아 다른 면을 들여다보았다. 자신이 왜 그러고 있는 지도 모르면서. 뜻밖의 것이 보였다. 아마도 아는 이름이었기에 재빨리 눈에 들어왔던 모양이었다. 일리오스, 오모르피아의 아들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 이계에서 온 골모답을 살해하고 함께 죽다. 5412년 7월 22일. 틀림없는 그 이름이었다. 이솔렛의 아버지 일리오스. 괴물을 죽이고 함께 죽은 사람. 아니, 아니잖아! 다프넨은 고개를 흔들고 다시 보았다. 글씨는 변함이 없었으나 상황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단 지금은 5천 몇 년 따위가 절대 아니었다. 어느 나라의 달력을 써도 그 정도의 세월은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골모답이라는 이름, 평생 듣도 보도 못한 그 이름이 에메라 호수를 비롯하여 이곳에도 나타난 그 괴물의 이름이라고? 그러나 나우플리온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 괴물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하지 않았나? 누가 그 이름을 알고 여기에 새겨 놓을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이계에서 왔다고? 이계란 무얼 말하는 거지? 예전에 진네만 저택에서 항쟁이 벌어졌을 때 소환되었던 환수 크리갈처럼, 이곳 아닌 어떤 딴 세계에서 왔다는 말인가? 충격에 휩싸인 채로 급히 아래를 계속 읽어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바로 곁에서 뭔가 바람 같은 것이 슉 지나가는듯한 느낌이 들어 그는 몸을 홱 돌렸다. 있었다. 다프넨이 서 있는 곳 바로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서 철필로 뭔가 벽에 끼적이고 있는 존재가. 반투명한 몸을 가진...유령과 같은 것이. “뭐, 뭐야!” 다프넨이 놀라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나는 그때, 그 유령 비슷한 것은 고개를 돌려 다프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프넨도 그를 보았다. 아마도 다프넨과 비슷한 또래, 아니면 그보다 더 어릴 듯한 소년의 얼굴이었다. 그 몸을 감싼 푸르스름한 광채와 얼굴 너머로 희미하게 비쳐 보이는 오벨리스크만 아니라면 귀엽게까지 보일 듯한 앳된 얼굴이었다. 그 순간 다프넨은 머리를 퍼뜩 스치는 상상에 놀라고 당황하여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그를 둘러싸고 있던,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던 마을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마치 그가 처음 섬에 온 날 마을에서 보았던 이상스런 환각, 그 폐허의 도시와 비슷한 곳에 서 있었다. 곳곳에 부서져 내린 석조 건물, 쓰러진 채 가로놓인 거대한 기둥, 그리고, 그리고...... 방금 본 것과 비슷한 수십 명의 유령 아이들...폐허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는...... “시, 싫......” 다프넨이 정신없이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나는데 오벨리스크 앞에 쭈그리고 있던 유령 꼬마가 벌떡 일어나 그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곧 의아한 표정으로 변하더니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넌 뭐야? 넌 왜 내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지? 찌릿, 하고 골속이 울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가 그렇게 외치자마자 제멋대로 떠돌아다니는 듯했던 다른 유령들이 한 순간에 고개를 돌리며 모두 똑같이 다프넨을 쳐다보았다. 수십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그를 보고 있었다. 그것도 속이 비쳐 보이는 투명한 눈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다프넨이 지금 가진 거라고는 손잡이조차 사라져 버린 윈터러의 흰 블레이드뿐이었다. -4권에서 계속- 제목 : 룬의 아이들 윈터러 4권 사라지지 않는 피 초판발행:2001년 12월 20일 저자:전민희 펴낸이 서인석 펴낸곳:제우미디어 출판등록:제3-429호, 등록일자:1992년8월17일 121-829 서울시 마포구 상수동 324-1한주빌딩 5층 Tel:02)3142-6845, Fax: 02)3142-4540 www.jeumedia.com rune.jeumedia.com S.T.A.F.F 기획:제우미디아 기획팀 표지 및 내자편집:제우미디어 디자인팀 로고디자인,일러스트레이터:나영학 촬영:포토 인 스튜디오 도움주신 분:김창원 ㈜소프트맥스 저자소개: 전민희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역사와 문학,신화등을 비롯하여 최근 철학의 신조류까지 섭렵한 지식광이며, 판타지 동화에서 남미 환상문학에 이르는 다양한 판타지에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연구원을 거쳐 1999년 출간한 장편 판타지 소설 "세월의 돌"은 통신 연재사상 전설적인 400만회의 조회수와 더불어 전국 판타지 독자들의 입문 필독서로 자리잡았다. 4대 통신망과 유명한 인터넷 커뮤니티들마다 작가의 팬클럽이 빠짐없이 결성되어 있으며, 현재 ㈜이삭커뮤니케이션에서 <아룬드 온라인>이라는 이름의 3D 오라인 게임으로 제작이다. 또한 "세월의 돌"은 총 5부작으로 예정된 <아룬드 연대기 Arund Chronicles>의 9부로서, 1부 격인 "태양의 탑"이 이듬해 출간되었다. ㈜소프트맥스의 온라인 커뮤니티 서비스<4Leaf>의 제작에 참여, 배경세계와 스토리, 캐릭터 설정을 담당하였으며, 곧 출시될 온라인 게임 <테일즈 위버>에서도 동일한 설정을 사용하게 된다. 현재 100만 명에 육박하는 회원들이 이용하고 있는 <4Leaf>의 아바타 캐릭터들이 직접 등장하여 지금까지 감춰졌던 이야기들을 펼치게 될 연작 소설 시리즈가 바로 "룬의 아이들"이며, 그 가운데"룬의 아이들-윈터러"는 첫 번째로 공개되는 매력적인 비밀이 될 것이다. 룬의 아이들 윈터러 겨울을 지새는 자여, 그것은 아주 길고 긴, 결코 끝나지 않는 겨울일지도 모른다. 서리와 눈보라를 이기고 바람과 눈물을 견뎌 마침내 찾아올 그 봄은 네 시체 위에 따뜻한 햇살이 되어 내릴 지도 모른다. 그러니 마음을 푸른 칼날처럼 세워 천년의 겨울을 견딜 수 있도록 대비하라.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Contents 사라지지 않는 피 4 1장 Days of the Wilderness 1. 망자의 땅에서 길을 잃어 8 2. 엔디미온 31 3. 우회전략 66 4. 소풍 86 5. 하얀 조개껍질, 초록 솔방울 104 2장 Rage of the Winter 1. 함정이 예고된다. 120 2. 함정에 빠지다. 144 3. 그 정체 164 4. 반전 187 5. 겨울의 핵 208 3장 Maze of the Windward 1. 희생, 또는 갚을 수 없는 빚 224 2. 미로를 들여다보며 240 3. 대륙에서 불어오는 바람 263 4. 부서진 돌 280 [부록] 299 1장 Day of the Wilderness 1. 망자의 땅에서 길을 잃어 식은땀이 등을 타고 느리게 흘러내렸다. 안개처럼 곧 흩어져 버릴 듯한, 그러나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은 채 그를 쏘아보고 있는 눈동자들이었다. 바람이 불었지만 흔들린 것은 다프넨 자신의 머리칼뿐이었다. 머리 위에는 낯선 달, 그들의 여왕이자 때로는 보고도 매정스레 못 본 체 하는 여인이 흰 김을 내뿜으며 타올랐다. 자신의 입에서도 하얀 입김이 나왔다. 겨울일까, 갑작스런. 모든 것이 얼어붙었고, 녹아 깨어난 것은 그들뿐일까. 다프넨은 왼손으로 윈터러를 감싼 천을 걷어 검자루가 있던 위치에 천천히 감았다. 천에 가려졌던 칼날이 드러나 싸늘한 공기에 닿았다. 물론 이 따위 상태로는 제대로 된 검격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마음을 정하고 검을 고쳐 쥐기 시작하자 블레이드만 남은 윈터러에서 희미한 빛이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 칼집에서 윈터러를 마지막으로 뽑았던 것이 이미 1년 정의 일이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쥔 검은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1년 동안 스스로의 의지로 봉인하기는커녕, 날마다 생사를 같이했던 검처럼 매끈하게 달라붙는 감촉이었다. 게다가 그는 공격의사를 품었다. 분명히, 그 날 이후 처음으로. 유령 소년이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반투명한 몸이 오벨리스크 속으로 들어가더니, 겹쳐지면서 그 뒤로 사라졌다. 갑자기 조그마한 속삼임 같은 것이 사방에서 울리며 순식간에 커졌다. 그러다가 다시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조용해졌다. 다프넨은 윈터러를 꽉 쥐며 중얼거리듯 나직이 말했다. "유령이라면 썩 사라져라. 유령 따위 좋아하지 않아." 다시 한 번 속삼임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러더니 등 뒤에서 새된 여자 목소리가 외쳤다. [우리 세상에 들어와 있어!] 그에 화답하듯 수많은 목소리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따가운 울림을 막으려 다프넨은 저도 모르게 귀를 막았다. [누구지? 누구의 핏줄이지?] [어떻게 들어왔지? 어떻게 내보내지?'] [말을 걸어 봐! 네가 걸어 봐!] 순간 다프넨은 이들이 자기를 해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저들 쪽에서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령이라면 살아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을 것라고 생각해 왔는데, 사실은 달랐단 말인가? 다프넨은 몸을 홱 돌려 뒤를 보았다. 대여섯 명의 유령들이 그의 시선에 놀라기라도 한 듯 재빨리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그 가운데 좀 전에 소리쳤던 소녀 유령이 손가락을 쭉 뻗었다. [네 정체를 밝혀!] 다프넨은 당황하기도 하고 겁도 났지만 실은 그보다 어이가 없었다. 그들 말대로 여기가 유령들의 '우리 세상'이라면, 자기가 어떻게 들어오게 된 건지 묻고 싶은 것은 오히려 다프넨 쪽이었다. 길을 잘못든 것도 아니고 이상한 문을 열고 들어온 것도 아닌데, 잘 아는 집들 사이를 걷다가 어느새 들어와 버리지 않았나. 다프넨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저쪽에서 계속해서 말을 건다면 이쪽에서 대화에 응하기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경계심은 풀지 않은 채 빠르게 그들을 흝어보았다. 모두 20여 명 가량이다. "나야말로 묻고 싶은 말이야. 너흰 누구지? 왜 마을 한 가운데에 이런 이상한 곳이 있는 거지? 그리고 왜......." 그제야 생각난 사실이었다. 다프넨은 약간 긴장한 어조로 말꼬리를 끌며 말을 맺었다. "...너희는 모두 아이들인 거지......?" 갑자기 섬뜩한 생각이 연이어 일어났다. 혹시 이곳은 아이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마법 결계의 공간이고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다시는 빠져나가지 못해 결국 저렇게 죽어 유령이 되어버린다거나....... 유령들은 한동안 침묵하고 있었다. 투명한 얼굴들을 저들끼리 마주 갸웃거리면서. 그들 사이를 헤치고 한 소년 유령이 걸어나왔다. 그는 일정 거리를 두고 멈춰 서더니 다프넨에게 다가오지 말라는 듯 두 손을 펴 밀어내는 동작을 했다. [우린 산 자와 싸우고 싶지 않아. 너 역시 싸움을 원치 않는다면 손에 든 검을 바닥에 내려놓지 않겠어? 그러고 나서 무엇이든 대화를 해보자.] "......." 다프넨은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겉모습은 다프넨과 비슷한 또래로 보았다. 그러나 유령인 이상 실제로는 얼마나 오래 전에 죽었을 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반투명한 가운데서도 색깔이 느껴질 수 있음을 알고 놀랐다. 소년 유령의 머리카락에는 엷은 금빛이 서려 있었다. 뺨은 파리했지만, 살아 생전의 것과 같은 얼굴 윤곽은 뚜렷하고 힘이 있었다. 엷은 달빛이 한 겹 씌워진 긴 목과 흰 팔, 날아갈 듯 섬세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으나 그는 죽은 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의는 없어 보이는 순한 눈빛이었다. 정말로, 이 유령 소년은 지금껏 섬에서 만난 그 어떤 아이들보다도 온화하고 선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상대가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눈빛으로 누군가를 해코지하는 일 따위는 있을 수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프넨은 입을 꽉 다물었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너희 말대로 살아 있는 나는 죽은 자를 믿지 않아. 따라서 검은 내려놓지 않겠어. 너희가 날 여기로 불러낸 것이 아니라면 나가는 길을 알려줘. 그러면 우리는 다시 마주치지 않아도 되게 될 거야." 아이 같은 외모라 해도, 나쁜 의도는 없어 보인다 해도 함부로 믿을 수 있는 상대란 없었다. 저 모습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정신이 아닐 것이 틀림없듯, 상냥한 얼굴이라 해도 그 뒤엔 깊은 원한이 있겠지. 아이 모습의 유령이란 그 나이에 본의 아니게 죽었다는 뜻일 것이다. 어른이 되어보이지 못하고 소중하게 품고 있던 미래를 다 잃었겠지. 그런 존재에게 원한이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어린 유령이란 대부분 원령이고, 그래서 오랫동안 산 자의 땅을 못 떠나고 있기 마련인 것이다. [......유감이네. 넌 이해심이 별로 없구나.] 생전에 금빛 머리칼을 가졌을 소년 유령은 입가를 굳히며 한 발짝 물러났다. 유난히 크고 맑은 눈이 회의주의자의 그것처럼 살짝 가늘어졌다. 다프넨은 눈을 떼지 않고 그를 쏘아보았다. 말갛게 빛나는 눈동자는 섬뜩했지만, 동시에 가장 깊은 미로를 품은 숲처럼 서늘한 광채조차 머금은 무엇이었다. 비난도, 원망도 아니고 단지 실망했다고 말하는 듯한 그 눈빛이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다프넨은 마음을 다 잡았다. "그래, 내겐 그런 것 없어. 그러니 그냥 날 마을로 돌려보내 줘." 유령 소년의 매끈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넌 이미 마을에 있어. 처음부터 쭉, 거기에만 있었지. 그리고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마을에서 살고 있어. 예전부터 늘.] "무슨 소리지?" 다프넨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대뜸 되물었다. 소년은 한쪽 손바닥을 펴 보이고, 다시 다른 한쪽을 펴며 말했다. [마을은 하나이면서 두 개였어. 너의 마을과 나의 마을은 같은 땅 위에 있었지만 항상 별개의 공간이었다는 말이야. 그런데 어쩐 일인지 저 땅의 사람인 네가 경계를 뚫고 여기로 들어와 버린 거야. 내게 방법을 묻지 마. 우리에게 넌 낯선 침입자야. 난 널 도울 방법을 알지 못해.] 다시 한 번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저 말은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는 의미인가? 유령들은 저들 동료인 소년의 말을 들으며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곤경에 빠진 것은 저들이 아니라 인간 소년인 다프넨이며, 여긴 저들의 공간이니 두려워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게 된 듯했다. 다만, 누가 약자고 강자였든 뭔가 문제가 생긴 것만은 틀림없었다. 한 명의 유령 소녀가 그들의 대변인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도움을 청할까?] [안 돼.] 물러섰던 소년 유령은 강하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리고 갑자기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이며 두 손을 특이하게 움직였다. 다프넨은 그것이 수인(手印)의 일종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보았다. 마법을 쓰려는 것인가? "그만둬!" 그러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유령들의 표정이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금빛 머리의 유령 소년을 주시했으며, 뭔가 의견을 말하기라도 하듯 입술들을 움직였다. 계속, 계속해서. "무슨 일을 하려는 거야!" 그제야 다프넨도 자신이 이곳에서는 약자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고 새삼 두려워졌다. 이곳에는 저들 유령들끼리 통하는 어떤 의사 소통 수단이 있는 모양이었다. 자기는 끼여들 수 없었고, 물론 끼여들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저들이 무슨 음모를 꾸미는지 알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자 이제는 무슨 행동이든 해야만 하겠다는 판단이 섰다. 다프넨은 윈터러를 앞으로 내뻗었다. 검의 끝은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유령 소년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상태로 무언가 말하려 하기도 전에, 놀라운 일이 벌어져 버렸다. 파바바밧! 흰 광채가 윈터러 전체에서 물줄기처럼 솟아나더니 순식간에 그와 유령들 사이에 반원형의 보호막을 형성했다. 그러고도 검에서는 계속해서 쉿쉿거리는 뱀처럼 하얀 빛이 너울거렸다. [멈춰!] 유령들보다 먼저 충격을 받은 것은 다프넨이었다. 그는 멍해진 눈으로 눈앞에 나타난 놀라운 것을 쳐다보다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검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웅웅거리는 울림이 오른팔 전체를 감싸며 밀려들어 순식간에 심장까지 강타해 왔다. "흡~"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감싸쥐고, 다시 두 손으로 검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5미터는 넘는 높이로 솟아오른 금속성 광채의 보호막을 올려다보았다. 보호막 뒤로 유령 소년의 얼굴이 반쯤 비껴 보였다. 좀 전과는 다른 차고 매서운 눈매였다. [해보겠다는 거야?] 그가 반투명한 손을 앞으로 내미는 순간 십여 가닥의 광채가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솟아올랐다. 저마다 다른 곡선을 그리며 달려 보호막에 충돌했고, 그때마다 다프넨의 손에는 무시 못할 충격이 왔다. 단순히 물리적인 울림만이 아니라 심장을 움켜쥐고 뒤흔드는 듯한 강한 타격이자 압력이었다. 억지로 버티느라 애쓰던 다프넨이 외쳤다. "그만둬! 그만두라고! 내가, 내가 이렇게 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럼 누가 그랬단 말이야!] 유령이 만들어 낸 빛의 곡선들은 이제 한 곳으로 머리를 모으며 증폭된 일격을 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프넨의 변명을 들을 마음이 있다는 듯 두 손을 모으며 빛 곡선들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말해보라는 것처럼 턱만을 약간 움직여 보였다. [할 말이 있다면 해. 무엇이 잘못되었지?] 겨우 맥박을 추스를 수 있게 된 다프넨은 숨을 몰아쉬며 상대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어떻게든 검을 상대에게 겨누지 않고 바닥으로 내려보려 했다. 그러나 정체 모를 거대한 힘의 자기장(磁氣場)에 휘말린 것처럼 어림없었다. "이 검... 이 검이 문제야. 어쩌면 내가 여기 오게 된 것도... 이 검 때문인지도 몰라. 내 실력으로는 결코 가눌 수 없는 힘이 이 안에 있어. 난, 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것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른다고!" 거대한 은빛 구렁이처럼 꿈틀거리며, 허공으로 오르려 용트림하는 빛이 보였다. 그 너머에서 유령들은 이번에야말로 실로 유령처럼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저들끼리만 통하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무언의 속삭임이 퍼져나갔다. 그러더니 유령들은 세 명만 남고 스르르 뒤로 물러서며 어둠 속에서 녹아버렸다. 다시 말해서 사라져 버렸다. [다가오지마.] 그건 유령이 한 말이었다. 인간 쪽에서 유령에서 한 말이 아니었다. "알...았어." 다가갈 생각은 없었다. 저들을 믿지 않는다 해도 일부러 위협할 필요는 아직 느끼지 않았다. 세 유령이 차례로 입을 열어 말했다. [그러면 우리 쪽에서도 다가가지 않을 테니까.] [싸우기를 원치 않아.] [네 소개를 해 주겠어?] 그건 '넌 뭐야?'하고 외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어감이었다. 남은 유령들 가운데 한 명은 오벨리스크 앞에서 최초로 보았던 그 꼬마 유령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소녀였다. 다프넨은 약간 망설였지만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마음을 고쳐먹고 말했다. "난 다프넨이야. 본래는 이 섬에 살지 않았어. 아직도 견습 순례자지만 앞으로 정식 순례자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말하고 나니 자신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던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그가 더 생각하기 전에 아직도 손에서 광채를 없애지 않고 있던 소년 유령이 입을 열었다. [그렇구나. 어쩐지 네가 낯설다 했어.] 그 말은 묘했다. 다프넨이 물었다. "그렇다면... 너희는 이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니?" 대답이 들려왔다. [서로 아는 사이라곤 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 일방적으로 알고 있지.] 갑자기 소녀 유령이 끼여들어 말했다. 그 목소리는 몹시 맑고 경쾌했다. [그건 우리의 즐거운 놀이거든.] 놀이? 무엇이 놀이지? 다프넨은 혼란스러워지는 머리를 다잡으려 애쓰며 다시 물었다. 그러는 동안 윈터렁에서 뻗어나간 보호막의 빛이 점차 엷어지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그 말은 너희가 우리 살아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즐기고 있었다는 건가? 마치 인형극을 보는 것처럼?" 그 순간 다프넨의 몸 속에서 예지가 한 줄기 솟아오르며 자신이 방금 한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런 강렬한 예지는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것이라 스스로도 약간 놀렸다. 소년 유령의 손에서 번쩍이던 광채도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한 번 저으며 대답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겠지. 우선 묻겠는데 네가 섬 밖의 다른 나라에서 왔다면 네 손에 든 검도 네가 가져온 것이니?] 다프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 쪽에서 물었다. "너희는 언제부터 여기서 살고 있었지? 본래는 섬사람이었는데 죽어서 이렇게 된 거야?" 말을 맺고 나서야 약간 무례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유령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린 이 섬에 살았던 적이 없어.] "그러면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야? 아니... 본래는 사람이었던... 것은 맞는... 그런 건가? 혹시 나무의 정령이라든가 그런 것은 아닌지......." 짧고 간단한 대답이 울렸다. [아니.] 잠시 후 얕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맨 처음에 본 꼬마가 낸 소리였다. [웃기는구나. 우리가 나무의 정령이라면 왜 사람 모습을 하고 있겠어? 나무 모습을 하고 있어야지.] 듣고 보니 그렇구나 싶었지만 실은 생전 처음 해본 생각이기도 했다. 나무 정령은 나무 모양을 하고 있다고? 그럼 바다나 강의 정령은 물 모양이겠네? 그러면 바다나 강 자체와 영 구별되어 보이지 않을 테니까 알아보기 힘들 테지만... 사실, 정령 입장에서 볼 때 꼭 인간 눈에 띄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저들은 저들 나름대로 존재할 뿐이잖아? 만일 나무의 정령과 강의 정령이 만났는데 서로 인간 모습을 하고 있다면... 그야말로 가장 행렬이라도 하고 있는 꼴이 아니겠는가. 전혀 엉뚱한 제3자가 끼여들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아니면 나무의 정령이 보기에는 강의 정령도 나무 모습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일견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낯설고 엉뚱한 생각이라 당황하고 있는 다프넨에게 소년 유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린 서로에 대해 궁금한 게 많구나. 하지만 그런 것은 나중에라도 차근차근 물어나갈 수 있는 걸 거야. 그보다 중요한 건 첫째로 널 어떻게 산 자들의 세상으로 돌려보내느냐 하는 거고, 둘째로는 이런 일이 왜 불어졌는지 이유를 아는 것이겠지.] 그 말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제야 다프넨도 윈터러가 만들어냈던 보호막이 거의 다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나 해서 손을 만든 광채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할 생각이지? 조금이라도 짐작 가는 것이 있어?" [한 가지는 확실하지. 널 여기로 데려온 것은 네 검이라는 사실. 다시 한 번 말하겠는데 네 검을 바닥에 내려놔. 그검에는 이곳, 우리들의 세계와 맞지 않는 기운이 서려 있어. 방금 전처럼 네 의지와 관계 없는 일들이 멋대로 벌어지는 거지. 그러다 자칫하면 우리를 다치게 할 지도 모르고, 그렇게 된다면 나 역시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겠지.] 협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상대방은 실로 진지하고 솔직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말하고 있었다. 싸움의 요인을 만들지 말라는, 그러나 싸우게 된다면 양보는 없을 거라는 의지가 선명하게 전해져 왔다. 다프넨은 억지로 고개를 흔든 다음 말했다. "내가 널 믿어도 좋을 근거는 뭐지?" [내가 널 해치고자 한다면 지금 이 순간보다 좋은 때가 있을까? 넌 네 검을 네 의지로 다루지 못하지만, 난 내 능력을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있어.] "......." 이해할 수 있었다. 유령 소년의 능력은 그가 짐작할 수 있는 깊이 너머에 있을 지도 몰랐다. 사서 싸움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검을 바닥에 내려놓고, 천천히 손을 떼며 다시 일어섰다. 그러나 언제고 돌발 상황이 벌어지면 검을 다시 집을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상대를 보니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오른 것이 보였다. 다프넨은 약간 당황했다. 어째서 벌써부터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거지?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잖아? 그리고 자신이 아주 간단한 것 하나를 묻지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네 이름은 뭐니?" 공회당에서 열린 사제들의 긴급 회의는 새벽 3시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나우플리온은 지친 몸을 이끌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면서 자신의 태도가 과연 옳았던 것일까 반문해 보았다. 모르페우스, 저 물귀신 같은 꼴통 사제가 결국 다픈네을 끌고 들어갔다는 사실만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회의에 참석한 모르케우스 사제는 입 꾹 다물고 모르는 체 시치미를 뗐지만. 그는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을 본 순간 딱 하나 윈터러, 그 외의 것은 떠올릴 수도 없었다. 물론 섬 안에 그가 모르는 뜻밖의 비밀이 있을 가능성으러 배재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가 인지하고 있는 섬 안의 가장 큰 잠재적 위험은 바로 윈터러의 존재였다. 그건 분명, 나우플리온처럼 특이한 성격의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다프넨 같은 아이에게 맡겨둘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프넨의 결정을 존중해서 그에게서 검을 빼앗지 않았다만 충고를 했을 따름이었다. 함부로 뽑지 말고 기다리라고. 그런 그가 섬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만난 친구인 모르페우스에게 무심코 다프넨이 가진 검에 대한 이야기를 발설하고 말았다. 깊은 흥미를 보이는 모르페우스를 보는 순간 아차 싶었지만 이미 주워담을 수 없는 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데스포이나 사제로부터 모르페우스가 다프넨의 검에 관심을 가져서 그를 자주 찾아오게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다프넨 자신으로부터 사실도 확인했다. 그리고 이 사건이 벌어졌다. "정말이지......." 내일은 반드시 진상을 확인하리라고, 그리고 저 꼴통한테 단단히 주의를 줘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리라고 굳게 다짐하면서 나우플리온은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안은 어두웠다. 더듬더듬 침대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다프넨이 옆 침대에서 자고 있을 거란 점은 의심하지도 않은 채였다. 겉옷을 벗어 의자 위에 대강 던지고 자기 침대를 찾아내어 천천히 기어 들어간 다음 한숨을 쉬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갑자기 다시 떴다. 나직이 소년을 불렀다. "보리스!" 대답이 없었다. 한 번 더 불러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나우플리온은 벌떡 몸을 일으켜 침대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다프넨의 침대로 다가가 이불을 더듬어 보았다. 예상대로 그곳에 소년은 없었다. "보리스! 어디 있지!" 급히 램프를 찾아내어 불을 켰다. 그리 넓지도 않은 집 구석구석을 비춰 보았지만 소년이 들어온 흔적은 없었다. 당연히 원터러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이런!" 그가 다시 겉옷을 걸치고 검을 움켜쥔 채 문밖으로 튀어나오는 데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사방을 두리번거려 보고, 소년이 오다가 멈췄을 법한 곳 여러 군데로 달려가 보았다. 빠른 걸음으로 길을 따라 걷던 그는 달 하나만 동그라니 떠 있는 캄캄한 하늘 아래서 우뚝 멈춰 섰다. 길에는 없다. 어디로 가야 할까. 그거야 당연히 모르페우스의 집이겠지! 나우프리온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문을 세게 두드리며 상대방을 부르려다가 주위를 시끄럽게 해서 좋을 것이 없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래도 마음이 덜 진정된 그는 창문을 거치게 몇 번 쳤다. 예상외로 창은 금방 열렸다. "누구... 나우플리온이군? 이 시간에 무슨......." 모르페우스 사제는 말을 맺지 못했다. 나우플리온의 억센 손이 창 밖으로 머리를 내민 그의 멱살을 단박에 움켜쥐었다. "문 여시오. 내 소년을 찾으러 왔소." "이걸 놔야 문을 열지." 모르페우스는 별로 당황하지도 않은 채 잠시 안으로 사라졌다가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나우플리온은 아직도 불이 환하 게 밝혀져 있는 그의 쑥대밭 연구실을 휘 둘러본 다음 사납게 물었다. "보리스... 다프넨은 어디 있소?" 모르페우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 아이는 자네 집에 있을 텐데?" "없소이다. 당신이 다른 곳으로 보낸 것 아니오?" "그 애가 집으로 가겠다고 여길 나간 지 벌써 몇 시간이 흘렀는데? 정말로 자네 집에는 없는가?" 사제들 간에는 나이에 관계없이 경어를 쓰는 것이 관례였으나 둘은 예전부터 워낙 흉허물없이 지낸 사이라 굳이 그렇게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모르페우스는 나우플리온의 얼굴이 점차 굳어지고, 이윽고 굳어지다 못해 사납게 변하는 것을 지켜보며 이번 상 황이 과거의 친분으로 쉽게 넘어갈 만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없어졌습니다. 그 애가......." 갑자기 고함치는 듯한 목소리가 연구실을 울렸다. "사라져 버렸다고요! 아무 데도 없단 말입니다! 그런 위험한 꼴을 하고서!" 모르페우스도 사태를 눈치챘다. 그는 다시 한 번 '정말인가?'하고 묻는 식의 어리석은 태도는 취하지 않았다. 두말 않고 문을 열 어 제쳐 밖을 내다보더니,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다시 들어가 쑥대밭 연구실 한구석에서 짤막한 막대 하나를 찾아내어 쥐었 다. 그가 손에 힘을 주자 막대 전체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나가세. 짐작 가는 곳들로 서둘러 가보세나." 날이 샐 무렵, 행방불명된 소년 하나를 찾아 나섰던 두 명의 사제는 아무런 성과도 올리지 못한 채 다시 처음의 집 앞에 돌아와 서 있었다.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곳은 대륙 한구석에 자리잡은 마을이 아니라, 거친 바다로 둘러싸여 외따로 떨어진 섬 가운데 유 일한 마을이었다. 탈출하고 싶다 해도 달리 갈 곳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이미 선착장에 가 보았고 아무도 배를 타지 않았다는 것도 확인했다. 가까운 산자락 모두를 헤집고 다니는 동안 의술과 기술을 담당하는 서클렛의 사제 모르페우스가 마법을 불어넣어 만든 감지(感知)의 지팡이가 내내 빛을 발했다. 그러나 평소에는 아무리 찾으려 해도 쉽게 눈에 띄지 않던 희귀한 약초니 버섯이 니 하는 것드이 숱하게 감지되는 가운데서도 오갈 데 없는 소년 하나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해." 모르페우스는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가 일부러 밝혀 뒀던 램프를 껐다. 기름이 귀한 섬에서 밤새 램프를 켜 놓는다는 것은 큰 낭 비였지만 그는 자신이 평소처럼 연구실에서 밤샘을 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했다. 나우플리온은 따라 들어왔으나 여전히 앉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연구실 한 구석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검의 사제였고, 따라서 사람을 찾는 데 있어서는 타고난 체력 외에는 사용할 것이 없었다. 그것조차도 그를 화나게 하는 요인이었다. 더불어 미칠 듯 걱정스러웠다. 밤새 돌아다니는 동안 모르페우스로부터 대강의 이야기를 들었고, 절반 가량의 힘이 개방된 그 위 험천만한 검을 들고 사라진 제자를 생각하니 자기 숨통이 죄여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자신의 무능함에 대해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모르페우스는 나우플리온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확인하지도 않은 채 의자에 몸을 던지며 불쑥 말했다. "이 사실을 숨겨야 해." 나우플리온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은 과거 어느 적을 대했을 때보다 더 형형하게 번들거렸다. "무슨 소리십니까. 이 상황이 되어서도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는 것이 걱정스러우신 겁니까." 모르페우스는 그 무시무시한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내뱉었다. "모르는 소리는 집어치워. 이 꼴통 사제는 내일 섬에서 쫓겨나도 별로 아쉽지 않은 인간이야. 그러나 다프넨 녀석은 아니지 않나?" "......." 침묵하는 상대방을 보며 모르페우스가 말을 이었다. "다프넨 녀석이 사라진 것이 알려진다. 섬 전체가 찾으러 나선다. 그러면 혹시 녀석을 찾아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커질지는 모르지. 그러나 내 생각에는, 지금 상황 해결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데시 사제님밖에 없어. 그 애가 사라진 것이 검의 마법적인 힘 때문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아무런 소용도 없이 실종 소식이 널리 퍼지고 나면 녀석이 돌아오든 안 돌아오든 이런 일이 왜 벌어졌는지는 모두가 알게 되어버려. 너도 사제 회의의 분위기는 잘 봤을 거고, 지금 상황에서 모든 원인이 녀석의 검이었다는 게 알려지면 그 녀석이 무사할 수 있을 성싶나? 사제들에게도, 섬사람에게도, 섭정 각하에게도 용납되지 못할 테지. 결론은 딱 둘이야. 검이 끝장나던가, 검과 녀석이 동시에 끝장나던가." 갑자기 모르페우스는 의자에서 잡아 일으켜졌다. 나우플리온의 억센 손이 두 번째로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고, 다른 손은 어깨를 쥐고 있었다. 모르페우스는 나우플리온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을 보았지만 반항할 마음은 없는지 그대로 있었다. 터억! 모르페우스의 몸은 다시 한 번, 훨씬 강한 충격에 밀려 의자에 내던져졌다. 그러나 턱이 돌아갈 정도로 심하게 얻어맞았음에도 모르페우스는 화를 내지도, 아픈 시늉을 하지도 않았다. 그냥 내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입을 열었고, 피 섞인 침과 함께 부러진 이를 하나 뱉어냈다. 나우플리온이 그를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짓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다프넨이 돌아오면...... 그 이빨은 제 것으로 도로 갚지요." 이윽고 해가 높이 떠올랐다. 2. 엔디미온 해가 중천에 오른 정오, 한적한 마을길을 사뿐사뿐 걸어가는 소녀가 있었다. 아직 스콜리의 수업이 끝나지 않았을 때라 마을 안에는 소녀 또래의 아이가 거의 없었다. 소녀의 손에는 연보랏빛 풀꽃으로 만든 동그란 화관이 하나 들려 있었다.에젤다라고 불리는 이 꽃의 뿌리를 끓여 우린 물은 섬사람들이 해열제 대신 흔히 사용했다. 그 때문에 이 꽃은 아이들의 문병을 갈 때 선물로 인기가 있었다. 소녀의 한 집의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문밖에 붙은 팻말을 들여다보았다. 전에는 없었던 것이었다. 문병은 사절합니다. 간단한 글귀였다. 나무판에 칼끝으로 새긴 글자를 못내 아쉽게 들여다보다가 손가락을 내밀어 슬쩍 문질러 보던 소녀는 등 뒤에 드리워져 오는 그림자를 느끼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내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힌 남자의 정면으로 마주쳤다. 소녀는 생긋 웃었다. "마침 오셨네요!" 나우플리온은 억지로 미소를 만들어 보였지만 그리 반가운 기색이 아니었다. 그쯤은 소녀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오랜만구나, 리리." "네, 다프넨은 많이 아픈가 보네요?" "......그렇단다." "정말로 문병은 안 되나요?" 나우플리온은 리리오페의 손에 들린 에젤다 꽃을 보았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라. 내가 전해 주마." 리리오페는 화관을 든 손을 뒤로 빼며 응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직접 전해 주면 안 돼요? 이거 만드는데 한 시간이나 걸렸단 말예요. 꽃을 따러 다닌 시간까지 합하면 두 시간." "그래서 스콜리도 빼먹었군." "아픈 친구의 말동무를 해 주려고 그랬죠." "감동적인 마음씨로군 그래." "비꼬는 거예요?" 얘기를 일부러 엉뚱한 공방으로 끌고 가려 애쓰는 리리오페에게 나우프리온은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리 주거라. 지금 주지 않으면 그냥 갈 테다." "치이......." 나우플리온의 말투에 파고들 구석이 없음을 느낀 리리오페는 아쉬운 얼굴로 화관을 내주었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얼른 나으라고 꼭 전해주세요. 나흘이나 안 나오니 제가 몹시 보고 싶어한다구요. 아셨죠?" 나우플리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리리오페는 몸을 돌려 오던 골목으로 사라졌다. 리리오페의 마지막 말은 절반 장난이었지만 어쩐지 진지함도 함께 들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 같으면 한두 마디 지분거리며 놀렸겠지만 지금의 나우플리온에게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그는 닫힌 문에 천천히 기대섰다. 손에 들린 화관이 내려다보였다. 가늘지만 질긴 꽃줄기들이 소녀의 매운 손끝으로 곳곳에서 단단히 맺어지고, 그 위에 벌의 날개 같은 작고 야들야들한 꽃잎들이 곱게 덮여 있었다. 리리오페 또래의 소녀들이 머리에 얹으면 딱 맞을 법한 자그마한 것이라, 그의 손에서는 더없이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 나우플리온은 방금 열고 들어온 문의 손잡이에 화관을 걸었다. 그리고 침대로 다가가 털썩 주저앉았다. 지금쯤 모르페우스 사제는 데스포이나 사제를 만나고 있을 것이었다. 나흘이 지났지만 그의 소년은 돌아오기는커녕 남긴 흔적 하나 없었고, 두 사제가 할 수 있는 일도 한계에 달했다. 모르페우스는 웬만해서는 사과하는 성격의 사람이 아니었지만 이날 아침 나우플리온을 만나 '모든 것이 내 잘못이다'라고 말하며 스스로 데스포이나 사제를 찾아가 모든 것을 털어놓겠다고 했다. 이 상황에서 그들을 이해해줄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거니와,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도 그녀뿐이라는 것을 둘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섬사람들에게는 다프넨이 좀 아파서 집에서 쉬고 있는 것으로 해두었다. 나우플리온은 다프넨이 섬사람들의 호의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줄 알았다. 그러나 첫날 다프넨이 스콜리를 빠지자 당장 그 날 저녁에 꼬마 오이지스가 어머니가 구워 주셨다는 과자를 가지고 찾아왔고, 그 다음날에는 스콜리의 교양 선생인 제네시가 안부를 물으러 왔다. 책 안 읽는 아이들에게 은근히 질려 있던 제네시 선생이 스콜리의 책을 한 권씩 두 권씩 읽어나가는 다프넨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제네시 선생은 검의 사제인 나우를리온의 권위를 생각해서 다프넨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그에게 별다른 항변은 하지 않았지만 의아하게 생각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셋째 날, 탑의 은둔자로만 알았던 제로 씨가 머뭇거리며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된 나우플리온은 놀랍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해서 한참이나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친구가 앓고 있다고 하는데 별로 가져올 것도 없고 해서, 많이 아프지 않다면 침대에서 무료할 때 읽으라고 책이나 가져왔습니다." 제로는 나우플리온보다 한 연배 이상 나이가 많았지만 사제직을 갖고 있는 그에게 정중하게 예의를 지켰다. 그러나 그 역시 다프넨을 만날 수는 없었다. 나우플리온은 모르페우스 사제가 안정을 취하라고 했다는 얘기를 핑계삼아 겨우겨우 그를 돌려보냈다. 그나마 아픈 사람을 돌보는 임무를 맡은 서클렛의 사제가 공모자인 모르페우스여서 다행이었다. "들어가도 되나?" 문 밖에서 들린 것은 모르페우스 사제의 목소리였다. 얼른 일어나 문을 열고 보니 밖에 선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다. 완전히 뜻밖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죄책감 때문에 나우플리온은 저도 모르게 당황하며 말했다. "아니, 이런, 데시 사제님이 여기까지......." 지팡이의 사제 데스포이나, 그녀였다. 그녀는 미소도 짓지 않고 고개만 한 번 숙여 보인 뒤 안으로 들어왔다. 세 사제가 마주앉았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데스포이나였다. "모르페 사제한테 이야기는 다 들었다. 참... 어려운 일을 저질렀더구나." 일을 저지른 것은 나우플리온이 아닌 모르페우스였다. 그러나 나우플리온은 한때 큰누나나 다름없이 자신을 돌봐 주었던 데스포이나 입에서 꾸중듣는 소년처럼 입을 다물었다. 모르페우스가 말했다. "예, 큰일을 저질렀지요. 나우플리온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제탓입니다." "일단은, 그 아이가 아직 섬 안 어딘가에 있다면 반드시 찾아낼 수 있는 주문을 써 보도록 하마. 사람들의 눈에 띄어선 안 될 테니까 밤을 기다려야겠구나. 물론 지체하는 것 역시 위험할 수 있지만... 내 생각에 그 아이는 아무래도 검의 힘에 이끌려 이공간(異空間)의 경계를 넘어간 것 같다. 달리 위험한 존재들이 그 안에 살고 있지 않다면 아마 조용히 잠들어 있을 테지." 나우플리온은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데스포이나 사제는 나우플리온과 모르페우스의 고민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 일이 섬사람들에게 새어나갔다가는 다프넨이 무사하지 못할 거란 문제에 대해서. 데스포이나는 이공간이라는 것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 효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경험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 섬의 이공간에 어떤 것들이 살아가고 있는 지는 몰랐다. 그녀로서는 이 섬이 그들 순례자들이 오기 전데 비어 있었으니 그 위에 덧씌어진 여러 개의 차공간(次空間)들도 아마 비어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공간은 아예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세계인 이계(異界)와는 달리 현실 세계의 모습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데스포이나가 모르페우스 쪽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모르페 사제, 만일 이번에 다프넨이 무사히 돌아온다면 그 검의 비밀을 밝히려던 실험을 중단할 건가요?" 나우플리온도 모르페우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답이 얼른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며 저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 좀더 침묵이 흐르다가 결국 나우플리온이 입을 열고 말았다. "왜 대답하지 않으십니까, 그 아이를 얼마나 더 위험하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그러더니 나우플리온은 데스포이나 사제 쪽으로 고개를 돌려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프넨이 돌아오다면 전 제 의사를 분명히 그 아이에게 전하겠습니다. 더 이상 그런 위험한 일에 연루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요."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하지 못하도록 하겠다' 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다프넨이 자신의 의사를 가지고 행동을 결정하는 모습은 나우플리온에게 있어 더없이 큰 기쁨이기도 했기에, 그런 권리를 빼앗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때 모르페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면목 없는 소리가 될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 실험을 중지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모르페우스는 손을 들어 잠시만 말할 수 있도록 부탁한다는 듯한 손짓을 했다. 그리고 데스포이나 사제를 향해 계속해서 말했다. "이번 일로 다프넨이 위험에 처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았더라 면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저라고 안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모든 일은 결국 그 검이 제 본모습을 숨긴 채 어린 소년의 손에 있었기에 일어난 것입니다." 나우플리온은 문득 섬뜩함과 같은 것을 느끼며 그 말을 들었다. 그건 자신의 본래 모습을 숨긴 채 소년의 곁에서 잠든 체 하고 있 는 미지의 힘이었을까, 그런 것일까. "다프넨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번 일이 없었다 해도 그 자체로 이미 처음부터 위험했다는 말씀입니다. 더구나 제가 섣불리 건 드리는 바람에 그 검은 자신의 본체를 절반 가량 되찾고 말았습니다. 아니, 그게 절반인지 어떤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겠죠. 말씀드 렸다시피 그로 변했습니다. 흡사 사악한 뱀,,, 같았죠." '사악한 흰 뱀'이라는 말을 하는 순간 데스포이나의 표정이 싹 변했다. 나우플리온의 눈에는 힘이 들어갔다. '사악한 흰 뱀'이란 그들 달의 순례자들이 옛 왕국을 떠나오기 전에 보았다던 불길한 징조의 괴물을 뜻했다. 비록 그 흰 뱀으로 인 해 왕국이 멸망한 것은 아니지만, 그 뱀이 나타난 후로 잇따라 벌어진 무서운 일들이 결국 그들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나우플리온은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쉬고, 다시 들이쉰 다음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내뱉고 말았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오! 왜 그런 불길한 것을 그 아이와 연결시키는 거지!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요!" 모르페우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난 단지 그 물건의 가공할 만한 잠재력에 대해 환기시키고자 했을 뿐이야. 결코 그 아이를 모함할 생각은 없었어." "없었다 해도, 지금 한 말로 이미 그렇게 한 것이나 마찬가지요!" "됐다, 그만 , 그만." 데스포이나가 나우플리온의 손목을 잠시 잡았다가 놓았다. 그리고 따뜻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달래고 돌보아야만 했던 반항적인 어린 소년이 어느새 자라 또 다라은 아이를 감싸고 보호하려 한다는 것에 대해 묘한 향수 같은 것을 느꼈다. "모르페 사제의 말이 지나쳤다. 흰 뱀에 대한 것은 잊어버리자. 그러나 나는 기본적으로 모르페 사제의 말에 찬성한다." 나우플리온은 애써 숨을 고르다가 흠칫 놀라 데스포이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소립니까? 그의 무슨 말에 찬성하신다는 겁니까?" 나우플리온의 말대로 모르페우스는 아직 본론을 말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까 결국 검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계속 연구해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지에 대해서. 그러나 데스포이나는 이미 다 짐작하고 있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 검의 잠재적 위험에 대해서, 그대로 방치하는 것만이 올바른 해결책은 아니라는 의견 말이다. 모르페 사제의 방식이 좀 지나쳤을 수 있으나 근본적인 접근은 옳아. 다프넨이 돌아온다면 나 스스로 나서서 그 검의 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하지만......." 나우플리온의 얼굴을 본 데스포이나는 약한 미소를 지었다. "나우플리온 사제, 당신은 그 아이 다프넨이 섬에서 쫓겨나기라도 할까봐, 또는 어떤 처벌을 받거나 격리를 당할까봐 걱정하는 거지요?" 갑작스런 존대에 나우플리온은 약간 움찔했지만 곧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더불어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그 아이로부터 검을 빼앗는 것도 안 됩니다." "안 된다고요? 왜지요?" 나우플리온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몰랐다. 데스포이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스스로 검의 힘을 연구하겠다'고 한 말은 아마도 다프넨과 윈터러를 떼어놓겠다는 의미였음에 분명했다. "그건... 그런 것이 그 아이의 방식이기 때문이죠." 말해 놓고도 설득력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쩔 도리 없는 진실이었다. 그리고 물러설 수 없는 보루이기도 했다. 나우플리온은 다프넨이 남의 명령이나 제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기를 바랬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발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이기를 바랬다. 다프넨, 아니 보리스 진네만은 그 검 윈터러를 죽은 형의 분신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 을 지켜내는 일이야말로 너무 어렸던 자신이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던 형에게 작게나마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을 다른 사람이 억지로 빼앗아서는 안 되었다. 소년 자신이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전에는, 그 짐에는 떠나서는 안 되었다. 물론 나우플리온은 소년을 사랑했다. 그러나 소년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물건, 그것이 설혹 악마의 물건이라 해도 지레 겁먹고 도 망치는 인간이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평생에 걸쳐 애써 부인한다 해도 어쩔 수 없이 달의 섬에서 순례자로 자란 그는, 현실보다 의 지와 이상을 중시하는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거짓보다는 위기를 택하는 정신이었다. 소년은 그의 거울이었다. 자신이 얻어내지 못한 삶을 걸어갈 사람이었다. 그는 최대한 그것이 이룩되도록 돕고 싶었다. 위기는 제자 리에서 달아나라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방식......." 데스포이나는 나무 들보들이 나란한 직선을 긋고 있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우플리온, 너는 아마 무서운 스승일 게다. 또는 기어코 상대를 빛나게 하고야 마는 강한 동료이겠지. 확실히, 네가 그 애의 아버 지였다면 이런 결론을 쉽게 내리지는 못했을 터이다. 아이가 있는 나는 잘 알 수 있는 일이고말고. 분명 너는 내게 그 아이가 대륙 에서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겪어왔노라고 이야기했지. 그러나 그 애가 더 다치고 더 아프게 깎여나가, 결국 진짜 보석이 되기까지 한시도 내버려두려하지 않는구나." "아닙니다." 나우플리온은 고개를 젓더니 데스포이나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전 그 아이가 모든 것을 알아서 결정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단지,아직 어린 그에게 닥쳐오는 방해를 막아줄 바람벽이 되어주고 있 을 뿐입니다. 좀더 빨리, 그가 단 한 명의 스승 같은 것은 필요로 하지 않는 인간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자 신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세상 모든 인간사가 다 스승일 테죠. 그 아이는 분명 지금 저를 의지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이 끝날 때가 곧 올 것입니다. 제가 그를 거절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저를 떨치고 일어서 가게 되겠지요." 녹색 풀밭 가운데 불쑥 튀어나온 하얀 바위가 햇빛을 받고 있었다. 이미 오후이니만큼 따끈따끈하게 데워졌을 듯했다. 손을 대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냥 눈이 아플 정도로 흰 바위를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싫증도 내지 않고 죽 계속해서. 바위는 비어 있었다. 첫날에는 무슨 바쁜 일이라도 있나보다 생각하고 말았었다. 이틀째에도 약간 기분이 이상하네, 싶었을 따름이었다. 익숙한 일이 한 가지 사라져서 그런 걸까. 그냥 조금 허전했다. 빈 바위를 바라보고 있다가 입술만 움직여 몇 마디 노랫말을 중얼거려 보았다. 며칠 전에 가르쳐 주려 했던 찬트(chant)의 일부였는데 이날 불러 보니 약간 메마른 듯 들렸다. 오늘은 노래가 잘 안 되는 날인가.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겠다고 하지 않았어?" 누구가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리내어 말했다. 방금 전 노래와는 달리 이 순간의 목소리는 조금 낯설다 싶을 정도로 뚜렷하게 들렸다. 상대 없는 곳에서 혼자 연극하듯 말했을 뿐인데, 오늘 내내 한 일 그 무엇보다 생생한 어조로. 다시 한 번 불러 보았다. "대답해 봐." 다프넨은 눈을 떴다. [내 이름은 엔디미온이야.] 귓가에서 맴도는 한 마디였다. 방금 전에 들은 것 같으면서도 아주 오랜 과거에 들었던 이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때와 지금 사 이에는 긴 꿈이 가로놓여 있었다. 자신이 되물었던 말도 생각이 났다. '그럼 뭐라고 부르면 되니?' 섬사람들이 버릇처럼 이름을 줄여 부르는 것에 익숙해진 나머지 무심코 꺼낸 말이었다. 그런데 엔디미온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엔디미온이라고 부르지,뭐 또 다른 게 필요해? 별명?] 어쩌면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살아 생전 그들의 이름은 결코 줄여지지 않는,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이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 엔디미온이 놓고 간 물건이 저만치 발치에서 좀 떨어진 젖은 동굴벽 언저리에 놓여 있었다. 널찍한 청동 그릇이 있었고, 그 안에는비둘기 알만한 동그란 돌들이 십여 개 들어 있었다. 그 곁 어디에선가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며 흡사 시간을 재는 듯했다. 그는 둥글게 뚫린 입구 너머로 검은 밤하늘이 내다보이는 동굴 안쪽에 누워 있었다. 주위의 공기는 약간 축축했다. 마치 비라도 내린후인 양. 다프넨은 자신이 얼마 동안 여기에 있었을까 궁금했다. 배가 고프지 않은 것을 보면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끊임없이 계속되는 저 물방울 소리 외에는 어느 것도 흘러가는 것이 없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발치에 놓인 청동 그릇을 당겼다. 그릇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돌을 하나 집어 들었다. 파르스름한 광채와 자잘한 은빛이 섞여 곱게 발린 희한한 돌이었다. 그는 손바닥 사이에 돌을 넣고 굴려 보았다. 그러면서 서서히 기억을 되살려 냈다. 유령 소년 '엔디미온'과 그의 친구들은 다프넨의 존재가 이공간 안의 다른 '어른 유령들(그들은 다프넨이 이해할 만한 방식으로 설명하려 애썼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본디 갈라져 있어야 할 두 공간을 임의로 뚫고 들어올 수 있는 검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고, 따라서 검을 빼앗기거나 너 역시 붙잡혀 영영 나가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다프넨이 모든 것을 수긍하고 엔디미온이 내민 손끝을 잡았을 때, 주위의 모습은 바뀌고 그는 이 동굴 안에 서 있게 되었다. 그는 동굴밖에 뜬 달을 보며 본래의 세계에서 그가 보던 달과 같은 모습임에 안도했다. 달은 하현이었다. [여기서 잠시 잠을 자는 것이 좋겠다. 넌 이곳의 음식을 먹을 수도 없고, 이곳을 밤 이외의 다른 때로 느끼는 것도 불가능해. 그러니 잠을 자라. 그러는 편이 네 몸을 위해 안전할거야. 그동안 난 네가 돌아갈 수 잇는 방법을 찾아볼게.] 왜 그렇게 쉽게 이해할 수 있었던 걸까. 다프넨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동굴의 짚자리 위에 누웠고, 곧 깊이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엔디미온의 말에 의하면 그 꿈들은 그가 다프넨의 발치에 갖다놓은 구슬들에서 하나씩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첫째로 본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캄캄한 암흑이었다. 그리고 이어 하얗게 빛나는 사막이 떠올랐다. 사막은 본 일이 없는 다프넨은 그것이 왜 그렇게 빛나는지 몰랐다. 다가가 만져 보니 아주 고운 모래였다. 또 다른 꿈을 꾸었다. 처음 섬에 도착해서 보았던 환각과 비슷한 폐허의 풍경 가운데 낡은 우물이 있었다. 다만 폐허의 모습은 그때처럼 심하게 손상되어 있지 않았다. 단지 비어 있고, 삭아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우물로 다가서서 그 주위를 먼저 살펴보았다. 검은 이끼가 자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역시 어디선가 본 듯했다. 이윽고 그는 우 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우물 안은 무였다. 그리고 어딘가로 까마득히 통해 있었다. [깨어났구나.] 꿈을 하나씩 되살려 보고 있는 다프넨에게 문득 목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낯설지 않은 모습이 서서히 빈 공간 위에 그려졌다. 완벽한 모습이 되었을 때 엔디미온은 이미 다프넨의 자리 앞까지 걸어와 앉고 있었다. 반투명한 머리카락이 아지랑이처럼 떠올랐다가 내려앉았다. [꿈 꿨지?] "응." 엔디미온은 다프넨의 손에 쥐어진 구슬을 보더니 거기에 손가락 하나를 댔다. 그러자 팟, 하며 눈앞에 작고 하얀 영상이 떠올랐다가 스러졌다. 거기에는 우물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꾼 꿈이 이거였구나. '늙은이의 우물'이라고 해.] "그게 뭐니?" [그 속을 들여다본 사람을 늙은이로 만들어 버리는 우물이지. 아아, 물론 늘 그랬던 것은 아니고, 어떤 특별한 날에만, 어떤 사람은 얼굴이 늙어버리고, 어떤 사람은 마음이 늙지. 노인은 지혜를 얻고자 들여다본 자는 주름투성이 얼굴을 얻게 되고, 빨리 어른이 되고자 한 아이는 세상사에 흥미를 잃어버리게 된다나.] "그렇다면 왜 우물을 들여다보지?" [절대 잃어선 안 되는데 잃어버렸던 것들, 그런 것들이 모두 그 안에 있거든.] 엔디미온의 얼굴을 보려다 문득 동굴 밖의 지는 달을 보게 되었다. 그 달빛에 얼굴을 맡긴 혼뿐인 소년은 잃어버린 시체를 찾고 싶어하는 듯한 눈빛으로 다프넨을 바라보고 있었다. 홀릴 듯한 푸른 눈동자였다. 현실 세계에는 이제야 밤이 찾아왔다. 섬의 세 사제는 한밤의 공회당에 모여 짧은 의식을 치렀으며 답을 기다리기 위해 데스포이나만 남고 나머지 두 사제는 각자 집으로 돌아왔다. 나우폴리온은 낮과 마찬가지로 '문병 사절'의 안내판이 붙어 있는 자신의 집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익숙한 위치에서 램프를 찾아내어 불을 붙이자 방이 밝아졌다. 그리고 우뚝 멈추어 서 버렸다. 방안에는 뜻밖의 방문객이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방문을 거절하는 주인의 글귀를 보고도 대담하게 들어와 있다는 점에서 놀라야 했겠지만 그는 그보다 다른 사실 때문에 당황해 있었다. 그의 집에 결코 찾아올 사람이 아니었다. 7년 전의 사건 이후로 그들은 존재하되 서로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양 살아 왔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이솔렛이었다. "오랜만...이군." "무엇이 오랜만인가요?" 이솔렛은 의자에서 일어나며 맞은편 문고리에 걸려 있는 에젤다 꽃 화관을 흘끗 바라보았다. 나우플리온이 약간 맥빠진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날 찾은 것이." 같은 섬 안에 살면서 종종 얼굴을 마주칠 기회는 있었다. 그러나 누가 피했다고 할 것도 없이 그들은 빠르게 스쳐지나갔을 뿐이었다. 가끔 말을 했다고 해도 언제나 필요에 의한 것들 뿐, 그녀가 이렇게 찾아와 그의 집 안에 앉아 있는 것이 실로 얼마 만이던가. 아아, 정말로 7년 만인가. "사제님을 찾아온 전 아니에요." 나우플리온은 의자에 도로 앉으라는 듯 가볍게 손짓해 보였다. "응, 그럴 것 같았어."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둘은 어색하다기보다 갑자기 할 말이 다 떨어진 양, 처음부터 할 말 따위는 없었던 양 서로를 외면하고 있었다. 버릇처럼, 버릇이 되어버린 대로 스쳐지나가려 했지만 이곳은 집 안이었다. 그들은 방문객과 주인이었다. 보통의 주인처럼 마실 것이라도 권해볼까, 또는 심각한 이야기를 꺼내 7년만의 만남에 대한 것은 없었던 일인 양 비껴보내 버릴까, 계속 기다려 볼까,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모르는 체, 아무렇지 않은 채 해볼까. "다프넨은 어디로 간 거죠." 침묵은 길지 않았다. "여기 없어." "산책이라도 나갔다고 말할 참은 아니겠지요." "아니......." 말하고자 한다면 너무도 많은 이야기를 가진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주보며 선 채 둘 다 앉지도 않았다. 아솔렛은 흰 무명 치마에 달린 넓은 주머니에 한 손을 넣은 채 나우플리온을 향해 정면으로 시선을 보냈다. "무언가 숨기고 있군요." 나우플리온은 입을 다물고 있다가 천천히 말했다. "네가 평생 지킬 줄 알았던 금기를 그 아이를 위해서 깼구나." 이솔렛은 금빛 눈썹을 약간 움직이더니 말했다. "난 다프넨을 가르치는 선생이에요. 그리고 그 날 오전까지도 멀쩡했던 아이가 닷새 동안이나 문밖으로 나오지도 못할 정도로 앓고 있다니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래서 결론은 얻었어?" 이야기는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다프넨의 행방을 걱정해야 마땅할 텐데, 자신들의 모습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에 더 신경 쓰여 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는 분명 무엇인가 비밀이 있었다. "말 돌리지 마세요. 무슨 일이 생겼죠?" "걱정돼?" "물론. 그게 이상한 일이라도 되나요?" "아아, 참, 너는 그 애의 선생이었지." "......." 대화는 자꾸만 빗나갈 따름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나우플리온은 갑자기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버리고는 두 손으로 머리를 몇 번 쓸어 넘겼다. 곧 그의 얼굴에서 혼란스러운 빛이 사라지고 눈동자도 진지해졌다. 이솔렛은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래, 그래. 먼저 들어와 살펴봤으니 상황은 알겠지? 모든 것은 거짓말이었어. 다프넨은 아픈 것이 아니라 행방불명이야. 섬 안 어디에서도 찾아내지 못했어. 짐작컨대 그 애는 무언가 잘못된 가운데 휩쓸려 이공간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아. 데스포이나 사제님께서 지금 특별한 마법 의식을 통해 그 아이의 위치를 감지하려 시도하고 계셔. 그리고 이 사실을 아는 것은 나와 데스포이나 사제님, 모르페우스 사제님뿐이고 네 번째로 알게 된 너도 반드시 비밀을 지켜 주어야 해. 모든 것은 다프넨을 위해서야. 왜냐면......." 그때 이솔렛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검 때문이군요." 나우플리온은 빠른 말투로 장황하게 늘어놓던 설명을 그쳤다. 그리고 어찌된 일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어떻게 알고 있지?" "그 아이가 늘 가지고 다니는 검 말이죠. 사제님 당신께서 소지해도 좋다고 허가해주신 그 검." 이솔렛은 지금껏 다프넨과 지내면서 단 한 번도 윈터러를 화제로 삼아 이야기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결코 간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다프넨에게 가르치기 위해 신성 찬트를 한 소절씩 부를 때면 보리스의 곁에 놓인 윈터러에서 무어라 말히기 힘든 묘한 기운이 일어나는 것을 이미 오래 전부터 보아 왔었다. 노래를 그치면 금새도 하는 것처럼 주변의 공기 속에 부조화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내뿜거나, 혹은 들이쉬면서. 몇 번인가 이야기를 꺼낼까 했지만 이솔렛 역시 스스로 노래를 멈추면 그런 것을 잘 감지할 수가 없었으므로 완전히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조차 정확치 않았다. 다만 검에 어떤 이상한 기운이 깃들여 있고, 그것이 자신의 노래에 깃들인 마법과 약하게나마 반응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면 그 날의 어둠도... 그 검과 관련된 건가요?" 핵심을 찔린 나우플리온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순간 그는 이솔렛조차 함부로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이솔렛이기 때문에 더더욱 안될 수도 있었다. 그녀가 이곳까지 찾아온 것을 보면 어느 정도는 다프넨에게 호감을 품고 있는 것 같지만, 그녀의 아버지 일리오스 사제는 섬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지켜진 섬의 안전에 대해 이솔렛이 민감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그 아버지의 강직한 고집스러움을 거의 그대로 빼닮고 있는 그녀가 아닌가. 나우플리온이 침묵하자 이솔렛이 짧게 말했다. "그렇군요. 그래서 당신이 그 아이를 보호하려 이렇게 애쓰는군요." 이솔렛은 마법을 본격적으로 공부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가진 마법에 대한 지식은 나우플리온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단편적으로 오간 이야기만으로 이미 대강의 윤곽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나우플리온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넌... 이솔렛 넌, 다프넨을 어떻게 생각하지?" 이솔렛은 순간적으로 약간 당황한 듯 보였다. 분홍빛 맑은 눈동자에 약간의 흔들림이 스쳤다. "어떻게 생각하다니요? 아까 한 말을 되풀이하라고요?" 나우플리온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아냐. 그 아이를 얼마나 좋아하지? 그 애가 네게 어느 정도의 호감을 줬지? 그 애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지켜 줄 정도인가? 그 애가 가진 잠재적인 위험을 눈감아 줄 정도인가? 그게 어느 정도의 위험인지 알고도?" 이솔렛은 약하게 한숨을 내쉬며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미소 없이 말했다. "내가 다프넨을 섬에서 쫓아내자고 주창하기라도 할 것처럼 보여요?" "모르겠어. 그러니까 지금 말해 봐." "아니에요." 대답은 짧았다. 나우플리온은 확실히 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아니라고? 그러면 그 아이를 다치지 않게 감싸주고 아껴 줄 마음이 있다는 이야기야?" 방금 들은 말의 어감은 약간 이상하다 싶었다. 이솔렛이 의혹 섞인 눈길로 나우플리온을 쏘아보았지만 나우플리온은 지친 듯한 미소 를 띤 얼굴 그대로 다시 한 번 말했다. "말해 봐." 청동빛 돌 구슬에서 미묘한 빛이 흘러내렸다. 그 안에서는 자꾸만 어떤 영상이 비칠 듯 말 듯 했다. 동굴 밖의 달은 어느새 기울어 사라지고 없었다. 다시 한 번 잠들었던 다프넨은 이윽고 깨어나 먼젓번처럼 구슬들을 들여다보고 있 었다. 어느 구슬 속에선가 언뜻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본 그는 계속해서 구슬을 바꾸어 가며 그 안에 깃들여 있을 지도 모를 옛 기억을 찾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이 구슬들에 네 영혼이 가진 기억이나 상상 같은 것들이 반영되어 저장되어있다고 말해 주었다. 대신 구 슬들을 그에게 미래에 대한 예지몽을 주었다. 다프넨이 찾고 싶은 것은 단 하나, 예프넨의 얼굴뿐이었다. 꿈이란 흘러가 버리는 것이라 깨어나 기억한다 해도 거기서 느낄 수 있는 감각은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눈뜨고 있는 상태에서 직 접보는 영상이란 달랐다. 꿈이 아닌 현실에서 예프넨이 미소짓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오랫동안 바라 온 것인지, 비록 영상에 불과할지라도 볼 수만 있다면. 정말로 이 구슬들이 그의 혼이 가진 감정들을 닮는 것이라면 그 안에 예프넨의 모습이 없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뭘 그렇게 원하니?] 한참 전부터 엔디미온이 곁에 와 앉아 있었는데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다프넨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맑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아직도 놀라는구나.] "당...연하잖아. 난 사람이고 넌 유령이라고." 이렇게 말해도 엔디미온은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다프넨이 들고 있는 구슬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뭔가 간절히 원하는구나. 도와 줄까?] 더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다프넨은 단숨에 대답했다. "도와 줘. 이 구슬들 속에 내 기억들이 반영되었을 거라고 했지? 난 죽은 형의 모습을 보고 싶어. 보게 해줘." [죽은 사람을 보게 해달라고?] 엔디미온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반투명한 금빛 머리카락이 한쪽 어깨에 갸웃이 닿았다. [넌 나를 보고 무서워하잖아. 죽은 사람이 네게 말을 거는 걸 보면 그 사람이 예전에 친했던 사람이라 해도 아마 겁이 나게 될 거야.] "죽은 사람의 유령을 만나보겠다는 게 아니라고. 이 구슬 속에 있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다프넨은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리고 숨을 깊이 들이쉬더니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은...... 너... 내가 형의 유령을 만날 수도 있다는 뜻이니?" 엔디미온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답했다. [난 죽은 지 몇 백 년도 넘은 영혼이야. 그런데도 아직 이렇게 네 눈앞에 나타날 수 있잖아. 네 형이라면 몇 년 되지도 않았을 텐데 못 만날 이유가 없지.] 다프넨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도 같고, 동시에 퍼지는 것 같기도 했다. 흡사 울음과 웃음이 동시에 터지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엔디미온의 손을 부여잡으려다가 허공을 헛잡기까지 하면서 간절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마...만나게 해줘!" 엔디미온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아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상관없어! 난 겁나지 않아! 형만 괜찮다면......." 맨 뒷말은 형이 살아 있던 때의 버릇으로 얼결에 붙인 말이었다. 그런데 말을 하는 순간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혹시... 내가 형의 영혼을 만나면 형한테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 엔디미온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그런 일은 없어.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어. 네 형은 죽은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했지. 지금 너와 이야기하고 있는 나는 너무 오래 전에 죽었기 때문에 지금은 살아 생전의 고통이나 원한 같은 것이 대부분 희석되어 맑아졌어. 그래서 산 사람이 너를 만나 도 별다른 욕망이 일어나지 않아. 하지만 금방 죽은 혼들은 달라. 그들은 자신이 죽을 때 느꼈던 감정들을 뒤죽박죽 된 상태로, 심 지어는 멋대로 증폭시켜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을 알게 되면.......] 엔디미온은 말을 멈추더니 약간 머뭇거렸다. 다프넨은 견디지 못하고 재촉했다. "어떻게 되는데? 난폭하게... 되기라도 하는 거야?" [그보다 더 나빠. 그들은 온 힘을 다해 산 자의 영혼을 내쫓고 ... 육체를 빼앗으려고 하게 되지.] "......." 다프넨은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머릿속에서는 다양한 감정이 뒤엉켜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형을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 동시에 죽은 자를 만나는 것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 죽을 당시의 형이 결코 편안한 상태는 아니었다는 사실 에 대한 새삼스런 상기, 그리고 그 모든 것들보다도 더 강렬한, 쉽게 극복할 수 없는 감정....... 바로, 추하게 변한 형을 보고 싶지 않다는 애정과 이기심이 뒤섞인 심정이 그것이었다. 한 번 되뇔 때마다 심장을 도려내는 듯 지 독하게 아픈 생각이었다. 엔디미온은 다프넨이 감정을 추스르도록 한참 기다리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바깥 세계의 사람들이 널 부르고 있어. 한 번뿐인 기회일지도 몰라. 거기에 응답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걸 알려주러 왔어 .] "날...부른다고?" 똑,똑,똑, 물 떨어지는 소리가 갑작스레 그의 청각을 뚫고 들어왔다. 멈췄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응. 나도 널 도울 방법을 여러 모로 찾아봤지만 아무래도 '어른 유령들'에게 알리지 않고는 어렵겠더라. 하지만 말했다시피 그 분 들이 이 일을 아신다면 널 쉽게 보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지만 나도 외부의 부름에 답하는 방법은 알아. 갈 거지?] 마지막 말은 문득 미묘한 어감으로 다프넨의 마음을 건드렸다. 갈거냐고? 물론...그러나 돌아간다고 해서 행복한 삶이 기다리고 있 는 건 아니잖아. 어쩌면 그가 예전부터 오랫동안 갈구해 왔던 은둔자의 동굴이란 바로 여기와 비슷하지 않아? "죽은 사람의 세계는 생각보다 참 평화롭구나.... 난 지금까지 이런 세계가 존재하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어. 너희는 이곳에 서 그렇게 몇 백 년 동안 조용히 공생하며 살아 온 거야? 살아 생전의 일들에 영향 받지도 않고, 산 자의 세상에 관여하지도 않으면 서?" 엔디미온은 다프넨이 한 말만으로도 그의 심증을 꿰뚫어본 모양이었다. 그는 조용히 대답해 주었다. [ 네 생각보다 훨씬 심심하단다. 얼마나 심심하면 우리가 너희 산 자들을 관찰하면서 그들의 죽음을 오벨리스크에 기록하고 있었겠니.] 그러면서 엔디미온은 손을 내밀어 다프넨이 쥐고 있는 구슬을 슬쩍 건드렸다. 그러자 거기에서 전과는 달리 눈이 아플 정도로 밝은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만 가렴. 네가 원한다 해도 넌 여기서 살 수 없어. 왜냐면 넌 살아 있는 몸을 갖고 있거든. 그 몸이 우리 유령들이 세상에서 견디기 위해선 이 동굴에 누워 계속 잠을 자는 수밖에 없단다. 영원한 달이 뜬 영원한 밤 속에서, 꿈으로도 위로 받지 못하는 끝없는 잠을 자는 거지.] 동굴의 주인인 엔디미온은 일어서더니 손을 펴서 허공에 한 번 내리그었다. 그러자 흡사 공간의 사잇길이 갈라진 것처럼 길쭉한 틈새가 생겨났다. 그곳에서 발그스름한 빛과 따뜻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온통 푸른 안개로 메워져 있던 이곳과는 딴판의 세상이었다. [ 저 따뜻하고 밝은 곳이 네가 살던 세계야. 이제 곧 가게 될 거야. 잠시만 기다리고 있으면.] "잠깐만, 그러면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는 거니?" 무언가 모를 아쉬움이 다프넨을 사로잡았다. 엔디미온의 모습이 흐려지는 듯하더니 이윽고 물방울처럼 흩어져 버리는 것도 보았다. 귓가에 남은 것은 마지막 목소리의 흔적이었다. 그것도 끝맺어지지 않은. [아마도 우리가 다시.......]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질 말을 채 생각해보기도 전에 구슬에서 흘러 나오던 빛이 파도로 변해 다프넨의 시야를 휘감아 버렸다. 너무 밝아 눈도 제대로 뜨기 힘들 지경이었다. 몇 번인가 감은 눈을 비비고 고개를 흔든 끝에 그는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아......." 눈앞에 펼쳐진 것은 넓디넓은 들판이었다. 분명 섬 안 어딘가는 아니었다. 낯익은 니들그래스의 춤, 먼 지평선, 흐린 하늘과 메마른 흙, 이리도 황량한데 이리도 마음을 자극하는 그곳은 그의 기억 속에 오직 한 곳뿐....... 그곳에서 소년은 눈을 크게 뜨고 서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깨달았으면서도 동시에 믿지 못하고 있었다. 왜 자신이 여기에 있는 것일까? 아아... 잠시 꿈을 꾸었나? 그가 그렇듯 힘겨워하며 혼자 버티려 애썼던 몇 년 간의 고통스런 여행은 오로지 나쁜 꿈이었던 걸까? 모든 것을 잃고 오직 산 몸 하나를 이끌고 가기 위해 저질러야 했던 죄와 의심들... 그렇게 더럽혀졌던 자신은 이곳에 없었다. 이 빈 들판은 그의 고향, 그가 사랑하는 형과 더불어 달리고 뒹굴던 어린 마음을 남겨두고 온 곳....... 더듬거리는 손이 풀이삭 하나를 쥐었다가 놓쳤다. 잘 익은 풀씨들이 손가락 사이로 조르르 굴러 떨어지고, 부서진 노란 먼지가 바람 새로 날았다. 늦여름이었다. 트라바체스에서는 찬바람이 서서히 불기 시작하는 그 계절이었다. 쓸모 없는 풀들로 가득한 평원 위로 태양이 드리운 붉은 그림자가 맥없이 너울거렸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뜨거운 방울들이 턱 끝에서 희게 부서져 내렸다. 소년은 첫 걸음을 걷는 아기처럼 주춤거리며 걸음을 내딛어 보았다. 흙과 땅이었다. 손이 헤치고 있는 것은 언제나처럼 길게 옷자란 풀대들이었다. 그는 여길 떠난 일이 없었다. 잠시 꾸었던 악몽에서 이제 깨어났으니 그를 달래 줄 사람은 또한, 언제나처럼....... 보리스! 소년은 몸을 돌렸다. 자신이 들은 목소리의 주인을 찾으려 허둥거리며 사방을 두리번댔다. 한나절 잠들었음에도 못 견디게 그리운 어머니를 찾는 아이처럼, 그에게도 그렇게 보고 싶은 존재가 있었다. 문득 잠들어 나쁜 꿈을 꾸어버린 소년을 찾으러 오는 사람, 바로 저기에 있었다. "아아......!" 입에서 터진 것이 탄성인지, 또는 부름인지도 모른 채, 소년은 엎어질 듯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시야를 가리는 풀들을 두 팔을 뻗어 헤쳐내며, 그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할 세라 뛰었다. 태양을 등지고 선 채 낯익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사람이 손짓하고 있었다. 하늘을 닮은 옅푸른 눈동자를 가진 사람... 아아, 우리가 헤어진 것이 정말로 몇 년간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반나절일 뿐일 걸까. "형!" 어서 와! 저녁 먹으러 갈 시간이 다 됐어! 미소와... 눈물과... 그 모든 것이 뒤범벅된 채 소년은 달려갔다. 형은 약간 어려진 것처럼 보였다. 키도 조금 작았고, 얼굴도 조금 앳되었다. 그러나 그가 좋아하는 미소와 눈빛만은 변함 없이 그대로였다. 갈색 머리칼이 저녁 바람에 흐트러져 날리고 있었다. 그는 멈춰 섰다. "형......." 소년은 갑자기 두려운 심정이 되어 형을 마주보았다. 형의 키는 자신과 그리 다를 것이 없었다. 분명 그보다 훌쩍 큰 키여서 곧잘 손을 뻗어 동생의 머리를 흐트러뜨리곤 하지 않았던가. 아니, 그 때의 형이 아니었다. 겨우 열 다섯 정도나 되었을까. 그렇다면 자신은? 얼른 가자, 아버지께서 기다리실 거야. 형은 자신이 보는 앞에서 아주 작은 꼬마 하나를 번쩍 안아 올리는 듯한 행동을 했다. 그리고 한 번 더 팔을 추키며 그로부터 돌아섰다. 그러나 형의 팔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일곱 살 꼬마여야 할 자신은 거기에 없었다. 들판에서 낮잠 자면 감기 걸린단 말이야, 요 꼬마야. 다음에도 또 그럴 테야? 목소리가 멀어져가고 있었다. 소년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람의 등을 향해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니... 안 그럴 거야. 그런데... 형... 땅바닥에서 잤더니 어깨랑 허리가 아파......." 그럼 당연하지. 가서 유모한테 주물러 달래자. 무어라 대답해야 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도 들을 사람 없는 대답을 하는데 눈에서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그래....... 형이 안아 주니까... 따뜻해서 ... 좋다......." 열 다섯 살 소년 예프넨은 계속해서 저 멀리로 가고 있었다. 그 너머에 진네만 저택이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았다. 아무런 흠집도 없이, 깨끗한 외벽과 지붕을 가진 옛 집이 거기에 있었다. 눈앞이 흐려졌다. 눈물 때문이 아니었다. 주위가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반가웠던 메마른 잡풀들과 먼 지평선이 사라져갔다. 저택에 어스름이 내렸다. 밤이 오는 것처럼, 그리로 걷고 있는 형의 모습도 어둠 속으로 잠기고 있었다. 갑자기 소년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형, 형, 가지마!" 그는 다시 한 번 달리기 시작했다. 목청껏 부르면서, 잡을 수 없는 환각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곧 주위는 완전히 캄캄해졌다.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정신도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 3. 우회 전략 "이것 봐, 형님. 칸타 쿨구 특제 금색 전갈 요리가 싫다면 하다 못해 아무 거로나 요기라도 대강 하고 갑시다. 제발요, 네?" 다섯 번째, 중얼거리다 못해 결국 내질러버리고 말았다. 앞서 걷던 류스노의 걸음이 그제야 멈추는 기색이었다. 유리히는 만면에 희색을 띠며 재빨리 달려가 앞을 막아서더니 싱긋 웃어 보였다. " 스물 너댓 살이나 먹어 가지고 아직도 먹는 거 타령이냐?" 류스노의 말투는 언제나처럼 딱딱했지만, 유리히는 류스노가 동생어리광 탓하는 기분으로 말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시선을 요령 좋게 이용한다는 점에서 확실히 류스노보다 한 수 위일 지도 모르는 그였다. "에이 참, 전 어려서 먹는 끼니보다 거르는 끼니가 많을 정도로 굶고 자란 녀석이라 배고픈 것만은 도저히 못 견딜 노릇이란 말이오. 형님이야 좋은 집안에서 유복하게 컸으니 그런 거 모르시죠?" "...... 쓸데없는 소리." 재단사의 아들이었다고 해도 류스노의 아버지는 한때 '론의 패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안드레예프 통령의 예복을 몇 벌이나 만들 정도로 명성을 날렸던 사람이었다 따라서 상당한 정도의 재산도 모았다. 안드레예프 통령이 비명에 죽고 나서 그와 조금이라도 연관된 사람들이 모조리 론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그도 좀더 오랫동안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을 것이었다. 류스노는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평소 생각에 잠길 때면 늘 그렇다시피 그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와 있는 장소며 시각 따위를 모조리 망각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아무 명령 없이도 그를 바르게 이끌어 가는 것은 그의 몸에 깃들인 놀랄 만큼 정밀한 오감이었다. 그의 정신이 다른 데 가 있는 동안에도 이 오감만은 어김없이 알아서 그가 어디 부딪치지도, 넘어지지도, 길을 잘못 들지도 않게 했으며 심지어 주위 사람들과 일상적 대화 정도까지 나눌 수 있게 만들었다. 물론 그걸 기억한다는 건 별개의 문제다. 류스노와 유리히가 멈춰 선 곳은 사거리 한가운데였다. 아무리 오감이 발달한 류스노라고 해도 낯선 장소에서 자기가 어디 와 있는지 아는 데에는 머리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는 궁리하는 대신 유리히를 쳐다봤다. 상황을 아는 유리히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칸타 쿨구 요리점에서 10미터 떨어진 위치...가 아니라, 거위 장터 사거리죠." 류스노는 자기 손을 들여다보았다. 이럴 때 언제 집었는지 알 수 없는 물건이 멋대로 들려 있는 일은 워낙 비일비재해서 익숙해진 그는 이제 놀라지도 않았다. 이번에도 그의 손에는 난데없는 종이가 한 장 들려 있었다. 그는 종이를 펼쳤다. '칸타 쿨구' 1등 요리사 제아네르 특제 최상급 황금 전갈 갓 잡은 황금 전갈을 연안 바닷물에 푹 삶은 최고의 요리 레몬즙과 허브의 향 또한 일품 네 사람이 먹어도 충분한 요리가 단돈 1만 페페! 모든 손님에게 백포도주 두 잔을 드립니다. 유리히가 곁에서 보고 있다가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류스노는 '저도 모르게' 그 전단지를 두 번 접어 중앙에 재봉 시접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음, 크흠. 그러니까 여길 가고 싶다는 말이냐?" 유리히는 애써 킬킬거림을 멈추고는 대꾸했다. "걱정 말라고요. 형님 같은 사람을 위해서 전갈 말고 거위란 녀석도 얌전히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죠." 산스루리아 외곽 도시 칸타 파르스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이 거위와 전갈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전갈을 택할 외지인은 유리히처럼 드문 놈 빼고는 결코 없었다. 류스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고기는 몸에 안 좋아." 그러나 그로부터 10여 분 후, 두 사람은 시접 들어간 전단지를 구겨쥔 채 '칸타 쿨러' 요리점의 한 구석에 테이블을 잡고 앉아 있었다. 잠시 논쟁한 끝에 황금 전갈 요리 작은 것 하나와 샐러드 한 접시를 시킬 수 있었다. 놀랍게도 메뉴에는 류스노 같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 양 '특대 야채 샐러드' 따위가 존재하고 있었다. 의아해진 유리히가 넌지시 물어봤더니 급사는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채식주의자 분들을 위한 메뉴죠." 지금껏 '야채와 과일만 좋아하는 뭔가 잘못된 인간'은 전 대륙에 류스노 한 명뿐일 거라고 생각해 왔던 유리히는 자기 앞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류스노를 보며 평소의 의견을 전면 수정해야만 했다. 드디어 출생의 비밀이 밝혀졌군. 분명 저 자는... 아니, 저 자의 조상 중에 산스루리아 사람이 한 명, 아니 여러 명 있을 거야. 대륙에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인 산스루리아는 미식가, 아니 보통 사람들의 시각으로 볼 때는 '괴식가라고 할 만한 자들이 지천에 널린 나라였다. 다른 것은 모두의 발전이 느린데 음식 문화만은 기이할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남들은 결코 먹지 않을 법할 것들을 각종 괴이한 조리법으로 모조리 요리해 먹었고, 흔히 먹는 음식도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 팔았다. 음식점이 광고 전단을 뿌린다든가, 채식주의자 메뉴가 존재한다든가, 이 모든 것들이 대륙의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풍습들이었다. 대륙 동부에 비죽이 튀어나온 작은 반도 '산스루'와 더불어 필멸의 땅을 교묘히 가로막아 주는 자그마한 산맥 '피콕그린', 그 안쪽으로 자리잡은 초승달 모양의 녹지. 이 세 가지가 산스루리아를 이루는 국토의 전부였다. 분명히 대룩의 일부지만 필멸의 땅의 폭력적인 영향력이 다른 지역과 이 나라를 강력하게 차단하고 있어 의지와의 교류는 최소한의 인식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대륙의 역사에 영향을 끼치기에는 너무 자그마했던 것일까, 아니면 지리적인 조건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격리되어 버렸던 것일까. 대륙 사람들은 이 나라에 대해 '저들만의 특이한 종교를 가지고 무녀 여왕의 다스림을 받는 별난 나라' 정도로 이해했고, 산스루리아 사람들 쪽에서도 대륙의 일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어찌 보면 한 대륙에 살면서 서로를 소 닭 보듯 할 수 있는 것도 필멸의 땅의 공로라면 공로였다. 지금 와서 산스루리아 사람들에게 대륙의 다른 국가들과 활발히 문호를 트고 살아가라고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고역이 될 가능성이 컸다. 물론 대륙 사람들 입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만큼 그들의 문화는 별났고, 이방인에 대한 인식도 나빴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최근 소규모 교역과 더불어 장기적인 군사 협력까지 논의되고 있는 대륙 북부의 강국 렘므와의 관계였다. 이로 인해 설치된 유일한 개방 무역 도시가 이곳 칸타 프르스였고, 덕택에 류스노와 유리히도 별 위험 없이 안전하게 산스루리아에 들어올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이 칸타 프르스를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가려 한다면 그 때부터 문제가 발생하겠지만 말이다. "형님, 우리 서로 결론부터 말해 볼까요."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손가락 끝으로 나무컵을 톡톡 두드리고 있던 유리히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입을 열었다. "우릴 똥개 훈련하듯 여기까지 쫓아오도록 만든 그 꼬마놈이 여길 왔다고 봐요, 안 왔다고 봐요?" 그들은 칸 선제후로부터 받은 보리스 진네만의 전신 초상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불라도가 진네만 저택에서 뜯어낸 온 가족 초상화를 베낀 것이었다. 보리스가 열 살 무렵일 때의 그림이었으니 거기에 그려진 소년이야 꼬마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작고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달의 섬에 있는 다프넨은 얼굴만 비슷할 뿐 전체적인 느낌이나 신체적인 성숙도가 전연 달랐다. 물론 그들은 그런 것을 몰랐다. 대략 몇 살 더 먹었다는 정도는 알아도 어른들의 입장에서 아이들의 두세 살 차이쯤은 별 것 아니게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다만 양아들이 있는 유리히는 아이가 갑자기 성숙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언뜻 말한 일이 있었다. "가능성이 적지만, 좀더 조사할 필요는 있겠지." "적다고요? 난 아예 없다고 봅니다. 차라리 녀석이 배를 타고 나가 바다에 빠져죽었다는데 걸겠네요. 산스루리아로 들어오려는 사람 가운데 이 도시, 칸타 파르스 항구를 거치지 않고 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심지어 우리조차도 그러지 못했으니까. 게다가 우리 같은 외국인이 이 항구를 나가 다른 데로 가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잖아요?"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체, 물론 산스루리아의 마음 좋고 얼빠진 녀석을 하나 잡아 동행하면 되겠지요. 하지만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형님도 잘 알잖아요? 이 나라는 저들끼리는 '법 없이도 사는 나라'지만 외국인들한테는 '무법 천지'라고요." '법 없이 사는 나라'와 '무법천지'는 근본적인 뜻은 같아 보이지만 말속의 의미는 천지차이였다. 확실히 산스루리아에서 이방인들의 통행이 법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대로 된 법전도 하나 갖지 않은 나라가 여기였다. 대신 법보다 더 강한 제약이 있으니 바로 이방인을 배척하는 국민들의 존재였다. 이런 경우 법 없는 나라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가? 국민들이 이방인들을 하루에 한 명씩 돌팔매질로 때려 죽여도 조사하러 나오는 관리 하나 없었다. 사제직도 동시에 맡고 있다는 관리들은 똑 같은 문제에 아홉 번 무관심하다가 열 번째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형 선고를 내려 버리는 엽기적인 관습법 해석을 자랑했다. "너 같은 녀석이 무법 천지를 겁내다니 의외로구나." 류스노는 예의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고, 유리히는 짓궂은 미소로 응답했다. "무법자는 겁나지 않는데 귀찮게 구는 인간들은 딱 질색이라서요. 그나저나 배고파 죽겠다니까 먹을 건 왜 이리 안 나오지?" 샐러드는 이미 아까 전부터 나와 있었다. 유리히는 곧 먹게 될 음식에 대해 정보라도 얻을 겸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마침 이날 따라 전갈 요리를 먹고 있는 사람이 눈에 띄지 않았다. 물론 전갈은 흔히 먹기엔 좀 비싼 요리이긴 했다. 그러나 칸 통령으로부터 충분한 자금을 받아 온 그들에겐 그리 거슬리는 가격도 아니었다. 전갈 요리 대신 다른 것이 먼저 눈에 띄었다. 유리히는 팔을 뻗어 테이블 앞을 탁탁 두드리며 류스노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저기, 저쪽 좀 봐요." 무표정한 얼굴로 상추 한 조각을 톡 물어뜯고 있던 류스노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마침 한 남자가 식당 안에 들어서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만 사내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식당 안에 앉은 거의 모든 사람들의 눈이 입구에 쏠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들어온 사람은 하나인데 문 밖에서 엎드려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수십 명이었다. 게다가 그 자들은 모두 산스루 신관만이 입을 수 있는 흰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들 중 대표로 보이는 남자가 앞서 들어간 사람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귀하신 분, 제발 폐하께서 심려하실 일은 말아 주십시오." 앞서 들어선 '귀하신 분'이 돌아서며 대꾸했다. "폐하는 내 일이라면 심려하지 않는다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니까." 내용이야 어쨌든 명쾌한 어조로 그렇게 말한 사내는 테이블은 하나 잡고 앉더니 곧장 큰 목소리로 급사를 불러 유리히와 똑같은 황금 전갈 요리를 시켰다. 스물 세 명의 산스루 신관들은 여전히 식당 문밖에 엎드리고 있었다. 유리히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그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일단, 아무리 봐도 '귀하신 분'이라는 호칭과는 전혀 맞지 않는 생김새의 남자였다. 큰 키에 어울리는 위압적인 풍채와는 달리 무지와 선량함이 절반 섞인 듯 보이는 맑은 눈망울도 묘했다. 사내는 팔꿈치를 짚고 턱을 괸 채 곧 나올 요리를 잔뜩 기대하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류스노가 나직이 말했다. "전사다." 유리히는 그 말을 다른 사람이 했을 때보다 세 배는 강력한 의미로 이해했다. 언뜻 보아 책상머리 학자풍의 인간처럼 보이는 류스노는 그들 '네 날개' 가운데 가장 강력한 무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몇 년이 나 함께 동고동락한 유리히는 류스노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 그렇군요, 틀림없이." 어느 모로 보나 저 자는 '귀하신 분'따위가 아니라 산과 들을 달리는 야만족의 전사에 가까웠다. 외모나 옷차림과는 관계없었다. 전사들끼리만 알아볼 수 있는 동물적인 감각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리히는 힘보다는 속도에 의존하는 유형인지라 저렇듯 정공법의 전사를 보게 되면 저도 모르게 약간 움츠러드는 경향이 있었다. "쓰읍, 기분 나쁜 놈인데." '기분 나쁜 놈'은 요리에 앞서 나온 둥근 빵 몇 개를 눈 깜짝할 사이에 먹어치우고 조금 전부터 뭔지 모를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식당 안 사람들의 눈 따위는 개의치 않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의식하지도 못하는 듯했다. 열심히 쳐다보던 사람들은 산스루 신관 한 명이 따라 들어와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자 억지로라도 다들 고개를 돌렸다. 어깨가 반쯤 드러나는 간소한 웃옷 밖으로 탄탄한 근육질의 팔이 보였고, 곳곳에 크고 작은 상처가 즐비했다. 그 모습은 언뜻 3익인 톤다를 떠올리게 했는데, 유리히는 동시에 톤다가 레코르다블 출신의 사내라는 사실에도 생각이 미쳤다. 저 자는 아무리 봐도 산스루리아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외국인인데 저 콧대 높은 산스루 신관들에게 저토록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단 말인가? 타지 사람들에게 호전적인 산스루리아 국민들은 반대로 저들 나라의 지배계층에게는 절대 복종했다. 그들의 국민성이 일상 생활 이상의 것에 관심을 갖기엔 지나치게 순진한 탓도 있지만, 종교적 열기가 필요 이상 높은 까닭도 있었다. 지배 계층이란 산스루 교의 신관과 무녀들을 말했다. 국민들은 이들을 그들이 열렬히 신봉하는 종교의 일부로 간주했다. 이런 식이니 산스루 신관들의 지위는 말할 수 없이 높았고, 그런 그들이 고개를 숙이는 상대야말로 극히 드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실은 그들끼리의 높고 낮음을 제하고는 누군가에게 고개 숙일 일 따위가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다. 산스루 교의 위계 질서의 정점에는 그들의 여왕이 있었다. 그녀의 존재는 실로 산스루 신의 현신이나 다를 바가 없어서 그녀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신관이나 무녀들, 그것도 매우 고위직인 자들로 한정되어 있었다. 국민들의 반대 따위는 역사상 한 번도 존재한 일이 없었다. 현 여왕 메르제베드의 즉위는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는데, 렘므와의 관계 개선을 꾀하기 시작한 것도 그녀의 치세 이후부터라 했다. 잠시 후, 잰 체하는 유리히에게 슬픈 일이 일어났다. "특제 황금 전갈 나왔습니다." 애타게 기다리던 요리가 나오긴 했는데 방향을 묘하게 틀더니 방금 온 저쪽 사내에게로 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어이, 이봐......." 그가 뭐라고 항의를 해보려는 순간 류스노의 손가락이 다가와 그의 손목을 톡톡 두드렸다. 쳐다보니 고개를 젓는 것이 보였다. ?흥, 신관 나리들을 뒤에 업었다 이건가." 유리히도 앞 뒤 못 재는 바보는 아니었다. 산스루리아에서 산스루 신관들을 상대로 일을 벌인다는 것은 이곳의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화가 나도 이런 상황에서는 참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젠장, 성질 많이 죽였다." 그때 류스노는 입을 비죽이는 유리히를 마지못해 달래는 체 하는 대신 '귀하신 분'이 식사하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겉모습만 딱 봐도 그다지 고귀한 행동을 할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실제로 하는 행동은 더 가관이었다. 그 자는 나이프 한 자루를 능숙하게 휘둘러 가며 그 큰 전갈을 갈기갈기 찢어 놓더니, 딱딱한 껍질 틈새로 튀어나온 고기들을 열 손가락을 다 이용해서 집어먹기 시작했다. 귀족은커녕 시장 바닥의 어린아이들도 그보다는 나은 태도로 식사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 자가 나이프를 휘두르는 솜씨만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빠르기도 했지만 칼을 쥐는 손 모양이며 찔러 넣는 동작들에서 보통 사람들이 흔히 그럴 법한 더듬거림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헛손질 한 번 하는 법도 없었다. 그렇다고 검술가들, 또는 암살자들의 방식도 아니었다. 뭐랄까, 마치 소나 돼지를 많이 잡아본 자의 솜씨랄까. 또는... 인간을 많이 잡아본 자의 솜씨랄까. "음......." 류스노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계획이 서서히 떠올라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유리히의 요리는 저쪽 테이블의 사내가 요리를 절반 가량 먹어치운 시점에서야 겨우 나왔다. 지금은 꾹 참기로 작정하긴 했지만 기회만 되면 갚아주리라, 라고 생각하며 간신히 마음을 추스른 유리히는 요리로 눈길을 보냈다. 넓적한 접시에 둥근 금빛 뚜껑이 씌워져 있어 더욱 호기심을 자극했다. 급사가 손을 내밀어 뚜껑을 열었다. 잠시 후 안을 들여다본 류스노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으으으음......." 유리히도 흥미진진한 눈동자로 접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류스노의 얼굴을 흘끔 보더니 갑자기 피에로처럼 입 끝을 잔뜩 올리며 씨익 웃어 보였다. "맛있을 것 같지 않아요?" 금빛 등딱지를 가진 팔뚝만한 크기의 전갈이 큼직한 집게발을 자랑하며 당당한 위용을 뽐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주위에는 작은 새우만한 크기의 조그마한 흑색 전갈들이 뭔가 모를 소스로 푹 절여져서 그득히 담겨 있었다. 바닷물 냄새와, 고소한 냄새와, 동시에 뭔지 모를 비릿한 냄새까지 뒤섞여 도무지 맛을 짐작하기 힘든 요리였다. 류스노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그는 천천히 의자를 뒤로 뺀 다음 얼굴을 한 번 가렸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즐거운 식사되라고." 여자의 이름은 야니카 고스라고 했다. 사내 같은 체격에 얼굴만 약간 곱살해서 이상한 느낌을 주는 여자였다. 앉은 자세도 영 불손했다. 그 옆에 서 있는 놈들도 마찬가지로 좀 불쾌한 인상들이었다. 얼굴이 별나게 생긴 건 아닌데, 그다지 믿을 만한 놈들이 아니지 않나 싶은 느낌을 주었다. "좋은 제안이네요. 나, 검은 장갑의 야니카는 어르신한테 오움을 드릴 수 있다고 확신해요." 벨노어 백작에게 기분 나쁜 일은 또 한 가지 있었다. 이들을 만나겠다고 용병들의 조직에 연락을 넣은 것이 언젠데 몇 달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어슬렁거리며 나타나다니, 무슨 꿍꿍이인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생각이 없거나 게으른 건지, 또는 값을 올려보겠다는 수작인지 잘 따져볼 문제였다. "성과가 있다면 방금 말한 보상 외에도 몇 가지 이익을 더 줄 수 있다. 하지만 성과가 없다면 한 푼도 보상하지 않을 것이야. 그런데도 하겠다고 말한 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인가?" "그거야 두고 보시면 알 일 아니겠어요? 어느 정도 짐작하시는 것 같지만 저도 손해보는 일을 하는 성격은 아니랍니다. 이래봬도 용병 생활이란 게 꽤나 팍팍한 편이어서요." 어차피 미끼 아니면 사냥개에 불과한 터였다. 일단 시작이라도 해보고, 문제를 일으킬 경우 없애 버리는 것쯤이야 간단하다. "좋아, 착수금을 주지. 미리 말했다시피 내 부하와 함께 다니게 될거다. 다른 술수를 부리려 한다면 용서치 않겠다." "어머나, 저희 같은 하찮은 용병이 어찌 어르신처럼 큰돈을 내놓으시는 분께 무례를 범하겠어요? 뭐, 저희는 그런 빌빌한 젊은 녀석 따위에 관심 없으니 염려 놓으시라고요." "......." 아양을 떠는 건지 비꼬고 있는 건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백작은 착수금이 든 주머니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이 정도는 실패해도 돌려 받지 않겠다. 대신 성공적으로 잘 해내면 이걸 주지." 백작은 한쪽에 놓았던 상자를 당겨 뚜껑을 열어 보였다. 붉은 빌로드 천 위에 보검으로 보이는 금빛 단검이 놓여 있었다. 칼집의 세공만 쳐도 넉넉히 시골집 한 채는 살 만한 물건이었다. "어머, 멋지네요! 더 열심히 해야겠군요. 좀 만져봐도 되겠죠?" 호들갑을 떨며 여자가 단검을 집어들었다. 칼집을 뽑아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뒤에 서 있던 동료에게 넘겼다. 작은 석궁을 지닌 사내가 단검의 날을 보고 상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단검은 다시 상자 안으로 들어갔고 비서 휴가 뚜껑을 닫았다. "수시로 보고를 받겠다. 그럼." 백작이 일어서자 옆에 앉았던 휴가 단검 상자를 집어들며 따라 나섰다. 둘은 밖으로 나가고 방 안에는 세 명의 용병들과 그들의 감시역인 다섯 기사들만이 남았다. 착수금 주머니를 열어 본 야니카는 철없는 아가씨 같은 목소리로 기사들에게 들으라는 듯 지껄여댔다. "정말 괜찮네요! 용병이라면 이런 정도 되는 일을 해야지, 역시 딱 봐서 기품 있는 분들은 쓰는 돈도 다르다니까!" 거저 먹을 수 있는 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봤던 그 젊은이, 어린 동생을 데리고 다니던 녀석을 다시 한 번 잡아오라는 것이다. 혹시 죽었다면 묻힌 곳을 알아내면 된다고 했다. 대강 짐작이 갔다. 그들도 한때 노렸던 그 검을 가지려는 게 아니겠는가. 어찌 됐든 트라바체스 남부 전체에 퍼져 있는 용병 조직과 손을 잡고 있는 그들로서 그런 녀석 하나 잡아내는 것쯤은 시간문제였다. 게다가 그 젊은이에게는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다. '물주한테 넘기기 전에 한 번 본때를 보여줘야지. 검이야 뺏을 수 없겠지만. 아니, 손 못댈 건 또 뭐겠어?" 그러나 교묘한 지시를 내린 백작이 이미 알고 있다시피 그들이 뒤쫓아야 할 젊은이는 오래 전부터 황야의 차가운 땅 아래에 누워 있었다. 여러 사람이 찾아마지 않는 백색 갑옷을 입은 채로, 사로잡힌 혼은 빠져나가지 못한 채 긴 꿈을 꾸고 있었다. 흡사 얼음 조각인 양 싸늘하게 굳어진 시체는 썩지도 않았다. 세 걸음 앞에 있었다. 모르페우스는 단지 입을 다물었으며, 데스포이나는 가볍게 지팡이를 흔들어 주위에 약한 안개를 피웠다. 비록 새 벽이었지만 혹시라도 지나가는 사람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나우플리온은 우뚝 선 채로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흙더미 위에 떨어진, 꺾인 꽃대처럼 창백해 보이는 소년이 거기에 있었다. 요정이 살짝 데려갔다가 다시 되돌려 놓은 양, 웅크린 채 슬픈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 그는 말없이 무릎을 꿇고 소년의 몸을 감싸안았다. 흰 뺨에 흩어진 검은 머리칼을 쓸어 주고, 다시 번쩍 안아 올려 뒤로 돌아섰다. 뒤에는 이솔렛이 감정의 흔적조차 없는, 흡사 무와 같은 얼굴을 하고서 있었다. 싱긋. 그는 미소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집으로 되돌아 걸어갔다. 남은 사람들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이제 그런 식으로는 안 됩니다. 아시지요?" 날이 밝기까지 아직 한 시간 정도는 남은 시각, 공회당에 초 몇 개만을 밝힌 채 두 명의 사제가 마주 서 있었다. 지팡이의 사제, 데스포이나의 손에는 두툼한 천에 감긴 흰 블레이드가 들려 있었다. 맞은편에 선 서클렛의 사제, 모르페우스는 가죽 표지가 붙은 책 한 권을 쥐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검에 대한 연구는 데시 사제님께 맡기도록 하지요. 저는 손떼겠습니다. 다만 확실히 해 주십시오. 나우플리온은 다프넨의 의사를 존중하지만 저는 그보다는 어린 소년의 안정, 그리고 섬 전체의 안전이 더 걱정입니다. 제 말뜻 아시겠지요?" "이 단순한 물건 하나에 섬의 운명을 달리할 힘이 들어 있다면......." 데스포이나는 흰 블레이드 뿐인 윈터러를 들어올리며 표면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반투명했다. 유백색의 본체 바깥쪽을 투명한 젤리와 같은 것이 한 겹 둘러싸고 있는 듯했다. "그것도 받아들여 마땅할 하나의 길이겠지요. 우리의 옛 왕국 역시 길을 꺾지 않으려는 위대한 마법사들에 의해 그 운명이 결정되었습니다. 나는 한 개의 검이 마법 민족인 우리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이 틀려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온다 해도, 그것은 겨우 검 하나의 힘 때문에 아닙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수많은 행동들이 쌓이고 작용해서 모두 그런 결과를 향해 달려간 거지요. 나는 어쩌면 섶 위에서 불씨를 쥐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런 만큼 주의할 생각이에요. 그러나 운명은, 바꿀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검이 우리에게 왔으니 분명 그에 맞는 소명이, 그리고 이유가 있겠지요." 모르페우스는 데스포이나의 얼굴을 보고, 원터러의 날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지팡이의 사제님처럼 그렇게 크고 넓은 생각은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기예를 담당하는 서클렛의 사제이고, 그에 맞게 좁고 자세한 것을 봅니다. 알겠습니다. 일단은 사제님께서 훌륭한 판단을 하시리라 믿겠습니다." "좋아요." 모르페우스는 돌아서려다 말고 멈칫하더니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가죽 표지의 책을 내려다보았다. "그게 뭔가요?" 가죽 표지 안쪽에 묶인 양피지에는 상당히 달필인 자의 필적이 가득 남겨져 있었다. 그는 한 곳을 펼쳐 데스포이나의 눈앞에 들이대면서 말했다. "이 필적을 기억하시겠지요?" 데스포이나는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눈을 천장으로 돌리더니 나직이 말했다. "일리오스 님의 필적이군요." "예, 이솔렛의 아버지, 일리오스 사제님이 쓴 연구 일지입니다. 물론 이건 섬의 지리에 대한 연구를 기록한 부분이지만......." "어째서 그걸 모르페 사제, 당신이 갖고 잇지요?" "제로 씨가 관리하는 장서관에서 찾아냈습니다. 그곳에 일리오스 사제님이 남긴 기록들이 아주 많이 있더군요. 왜 거기 있는지 아십니까?" "일리오스 사제가 세상을 떠났을 무렵, 섭정 각하께서 그 분의 기록 가운데 중요한 것들을 장서관으로 옮겨 연구하도록 하자고 하셨지요." 데스포이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모르페우스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인지 짐작해 보려는 모양이었다. "연구는 아무도 안 했습니다. 그냥 가만히 박혀 있었을 따름이죠. 하긴 이 섬에서 일리오스 사제의 연구를 이어서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차라리 이솔렛 손에 두었더라면 그 애가 뭐든 읽고 다 알아냈을 텐데, 그 애가 어리다고 이런 걸 다 빼앗아 오다니......." "하고 싶은 말이 뭐죠?" 모르페우스는 탁 소리가 나게 노트를 덮었다. 그리고 예의 번쩍이는 눈으로 말했다. "제가 장서관에 있는 일리오스 사제님의 연구 일지들을 모두 제 집으로 가져가서 연구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가?"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무엇 때문이죠?" 모르페우스는 씩 미소지었다. "저번처럼 무시무시한 일은 저지르지 않으니 안심하시지요. 단지 읽으려는 것뿐입니다. 그 안에 아무래도 제가 원하는 어떤 내용이 있을 것만 같아서 말이죠." 데스포이나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으실 대로 하세요. 제로 씨에게 전갈을 보내 놓지요. 그런데 갑자기 그걸 새롭게 연구하려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끝내 말해 주지 않을 건가요?"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미리 말씀 못 드리겠군요. 간단한 동기만 말씀드리자면......." 모르페우스는 입을 벌리더니 손가락으로 입 안 한 곳을 가리켰다. "이 이빨 빼간 녀석한테 빚을 갚아 줘야 될 것 같아서 말이죠." 4. 소풍 "다프넨." 문득 정신을 차려 고개를 돌렸다. 여름 햇빛에 반짝거리는 은회색 바위, 금빛 짧은 머리의 소녀, 하얀 무명옷과 연초록 풀밭의 고운 빛깔. 여기는 그의 평화가 있던 곳이었다. 그녀와 이야기하고 있으면 즐거웠고 무언가에 얽매여 있던 마음이 풀리는 듯 시원해졌었다. 그곳에 그는 다시 와 앉아 있었다. 그러나 무엇인가 달라져 있었다. 그의 손에는 윈터러가 없었고, 그의 마음에는 빈자리뿐이었다. 짐짓 옛 기분을 가지려 애써 보았지만 역시 되지 않았다. 다프넨은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솔렛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달라졌구나." 이솔렛은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 초지를 한 바퀴 돌았다. 사방에서 밝은 빛이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다프넨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이솔렛은 다시 바위로 와 앉았다. 그리고 소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뭔가 다른 것을 본 걸까." 남의 일에 시시콜콜 끼여드는 사람들을 평소 경멸해 왔던 그녀였다. 그런 자신이 다프넨의 마음에 일어난 변화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고 있었다. 굳이 그런 마음을 숨기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자신을 속이는 것, 즉 경멸할 만한 일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생각 외로 다프넨은 순순히 대답했다. "옛 일들이 생각난 거죠. 이곳까지는 따라오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옛날 일들이요." '그걸 다시 보고 나니 주위의 모든 세상이 어두운 색깔로 덧칠된 것 같다'라고 말하려다가 그냥 삼켜버렸다. "옛날이라면?" 많은 것이 떠올랐으나 그는 짧게 대답했다. "제 형이죠." 다프넨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날의 하늘빛은 예프넨의 눈빛보다는 좀더 진했다. "형은 대륙에 있어?" "네.... 대륙에 남겨두고 왔죠." "왜 헤어졌어?" 다프넨의 입가에 쓴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나를 두고 가버렸어요. 다시 돌아오진 못하겠죠." 이솔렛은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들었다. 잃은 사람이 있는 자에게는 익숙한 이야기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이솔렛은 갑자기 일어나더니 손바닥 안에서 매만지고 있던 돌멩이 하나를 절벽 아래로 휙 날려보냈다. 그리고 다프넨쪽으로 몸을 돌리며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죽은 사람에 대해 털어놓기 할까?" 다프넨은 가만히 있다가 약간 미간을 움찔거렸다. 그리고 말했다. "놀이의 일종처럼 들리는군요." "살아 있는 사람에겐 뭐든지 놀이지. 너부터 말해 볼 거야? 아니면 내가 먼저 말할까?" 다프넨은 일전에 나우플리온이 들판에서 해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얘기해 주세요." 이솔렛은 다프넨 앞에 두 손등을 펴 보였다. 그걸 내려다보니 지금껏 눈에 띄지 않던 것이 보였다. 그녀의 손톱 가운데 네 개는 매끈한 곡선이 아니라 표면에 하나 이상의 각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단면으로 보았을 때 삼각, 또는 사각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오른손 엄지, 약지, 왼손의 중지와 약지가 그랬다. "내 아버지야. 이 손톱들을 물려준 건. 내가 열 두 살 때 돌아가셨지." 다프넨은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저의 아버지도 제가 열 두 살일 때 돌아가셨죠. 형도 그렇고요." 이솔렛은 다프넨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하얀 손가락 위에서 도드라진 손톱들이 햇빛을 받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짧은 미소를 보인 뒤 말했다. "난 한동안 아버지가 날 따돌렸다고 생각했어. 내가 아버지 없이 얼마나 외로워할지 다 알고 있으면서 혼자 가버렸다고, 날 정말 사랑한다면 나도 데려갔어야 한다고 말이지." 이번에는 다프넨이 희한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아버지한테 설득 당하지 않았군요. 난 형에게 설득 당해서 그를 홀로 보내고도 난 여전히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내 아버진 날 설득하려고도 하지 않았어. 그는 내가 이미 다 자란 어른이라고 생각했나봐.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신은 영리하잖아요. 저하고는 달라요." 이솔렛은 입술을 오므렸다가 억지 미소 비슷한 것을 지으며 말했다. "너도 그렇게 말하는구나. 난 그 말 싫은데.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면서 암암리에 나를 자기들과 멀리 떨어뜨려 놓지." "그런 뜻에서 한 말이 아닌데요. 어쨌든 당신은 당신의 아버지한테서 오해받았다는 거죠. 그래서 결국 손해를 보았고요." 그렇게 말하며 다프넨은 비교적 밣은 얼굴을 해 보였다. "저희 형은 늘 저를 아무 것도 모르는 꼬마 녀석으로 생각했는걸요. 그래서 뭐든 자세히 설명해 줬죠." "그러는 네 형은 어른이었나 보지?" "아뇨.... 어른스럽긴 했지만 어른은 아니었어요. 유감스럽게도... 하지만 어른이었다 해도 결코 손쉽게 할 수 없을 일들을 제게 해주었지요." 다프넨은 잠시 생각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절 떠나던 때로부터 한 달 전, 그 즈음엔 정말 어른이 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말하자면 저를 위해서 어른이 되었던 거죠." 그 말을 하면서 다프넨은 묘하게 마음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예프넨에 대한 기억이 조금쯤 상처에서 추억으로 변해 가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몰랐다. 어느새 두 사람은 번갈아 이야기하기로 한 것을 잊은 채 좋을 대로 묻거나 답하고 있었다. 예프넨에 대한 이야기를 몇 마디 듣던 이솔렛이 물었다. "네 형은 몇 살이었니?" 그렇게 묻는 그녀의 눈동자에 평소 보지 못한 온기가 감도는 듯했다. "살아 있다면 스물 두 살이겠군요." 살아 있다면 이젠 정말로 어른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맑은 눈빛을 가진 다정한 젊은이였던 그는 이제 다프넨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할 뿐, 육신은 동생이 불러 준 자장가 소리에 정말로 잠들어버린 양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솔렛은 잠시 미소지으며 나직이 말했다. "형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어. 그것도 나보다 나이 많은 오빠나 언니가 말야. 하지만 동생이라면 몰라도 나이 많은 형제가 갑자기 생기기란 무리지.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던 때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외로워져서 하다 못해 동생이라도 만들어 달라고 졸라댄 적이 있어. 그때 아빠가 지으셨던 황당한 표정이 생각난다. 후훗." 어쩌면 뜻밖이랄 수도 있는 '아빠'라는 단어에서 그녀가 죽은 아버지에 대해 품고 잇는 애정이 속속들이 느껴져 버렸다. "왜 황당해하셨을까요? 동생이 있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요?" "어머니께서 이미 돌아가신 후였거든. 아니, 어머닌 날 낳고 얼마 안되어서 돌아가셨으니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는걸. 난 어머 니의 얼굴도 몰라." 다프넨은 한참 후 말했다. "저도 어머니의 얼굴은 초상화로 보아 알고 있을 뿐이에요." 비탈 아래로 뻗어나가는 먼 지평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너머에 아마도 바다가 있을 텐데 여기선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멀리 있을까, 얼마나 계속해서 있을까, 그리고 그 너머에 대륙이 있고 다시 아득한 길을 넘어가야 고향 나라에 묻힌 형이 있겠지. "바다에 가보지 않을래?" 다프넨은 흠칫 놀라 이솔렛을 쳐다보았다. 흡사 마음을 읽힌 기분이었다. 이솔렛은 다프넨처럼 먼 곳에 눈을 둔 채 말했다. "내가 가끔 가는 바다가 있어." '가끔 가는 바다'라는 이상한 말의 의미는 곧 밝혀졌다. 그들이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물 녘까지 얼마 남지도 않은 시각이었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모양을 하고 있는 달의 섬은 북동쪽으로 갈수록 험준한 산지였으므로 배를 댈 수 있는 해안선은 남서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바다에 간다'고 말했을 때 가리키는 것은 언제나 그쪽이었다. 그러나 이솔렛의 '가끔 가는 바다'는 섬의 북쪽 해안에 위치해 있었다. 실은 해안이 아니라 해안 절벽이었다. 다프넨은 능숙하게 산을 타는 이솔렛을 따라가느라 거지반 녹초가 되어버렸지만 용케 잘 버텨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솔렛이 '다 왔어'라고 말하는 순간 맥이 탁 풀리며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곳에서는 아직 바다가 잘 안 보였다. 다프넨은 두 사람이 거쳐온 길을 되짚어 떠올려 보았다. 칼날처럼 갈라진 골짜기도 있었고 몇 백미터 아래 얇게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절벽길을 걸었던 일도 있었다. 그러나 비록 험로의 연속이긴 했으나 결코 길이 없지는 않았다. 한두 사람이 일부러 뚫은 것이 아니라 매일같이 몇 명씩이라도 꾸준히 다닌 듯, 몇 십 년에 걸쳐 다져진 길이었다. 도대체 누가 이 험한 산 속을 돌아다녔을까? "이리로 와." 그들이 있는 곳은 해안 쪽으로 툭 튀어나온 거대한 타원형 암반 위였다. 그러나 바로 아래 흙더미에서 자라 올라온 덩치 큰 나무들이 바다가 보일 법한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이솔렛은 암반 왼쪽에 의자처럼 튀어나온 돌부리를 가리키며 이곳에 앉으라고 말했다. 그녀가 그다지 지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다프넨은 솔직하게 탄복해서 존경심마저 우러날 지경이었다. 물론 다프넨은 자신이 거의 산을 탈 줄 모른다는 것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었다. 이솔렛은 다프넨 곁에 서더니 숨을 고르며 먼 북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그리고 잠시 후 찬트 구절을 몇 마디 나직이 읊었다. 내 눈이 닿는 곳 그 너머 푸른 곳 긴 사래 끄는 파도 새 나래 쳐 거닐리라 슈우우.......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굽이굽이 달려갔다. 가지들이 떨며 흔들렷다. 다프넨은 몰아쉬던 가쁜 숨을 멈춘 채 눈앞의 광경을 보았다. 나무들이 팔을 벌려 비켜나고 있었다. 그녀의 노래를 듣고 고개끄덕이며 마음을 정한 양. 그리고 바다가 열리고 있었다. 바다로 향한 길은 깃 달린 새의 길이었다. 그러나 거칠 것 없는 시선은 수평선 끝까지 닿고도 다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눈 앞을 가리는 것은 없었다. 북쪽의 바다는 짙은 청남빛이었다. 바닥 깊이 파랗게 언 심장을 품었을 것만 같은 빛이었다. 수천 년이 흐르는 동안 얼음 불꽃처럼 파랗게 타오르며 잠든 심장, 그것이 한 알의 짙푸른 보석이라면 저를 지니는 인간마저 차갑게 얼려버리는 겨울 당의 귀물이리라. "차가운 바다로군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다프넨은 북쪽 바다의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있었다. 이쪽 절벽의 바위는 둥글둥글하면서 묘하게도 희어서 바다의 진한 남빛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눈 닿는 곳 어디든 섬 머리 하나 보이지 않는 직선의 바다이면서, 또한 끊임없이 해안으로 굽이치며 밀려오는 포물선의 바다였다. "마치... 평소의 당신처럼요." "그 바다를 데우는 것이 곧 내릴 거야." 이곳에서 석양이 직접 보이진 않았으나 곧 주홍빛 안개가 천지간에 커튼처럼 드리워졌다. 바다는 통곡하는 자의 눈시울인 양 붉게 잦아들었다. 이제 광채와 열기의 보석이 저 심해로 내려가....... "그녀를 따뜻하게 하겠지." 이솔렛이 말한 '그녀'는 바다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프넨에겐 이솔렛 자신을 지칭한 듯 들렸다. "여기 자주 오나요?" "일 년에 두어 번쯤 올 뿐이야." "그럼 오늘은......." 이솔렛이 고개를 돌렸다. 뺨과 머리칼이 온통 주홍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오늘은 아무 날도 아냐." 다프넨은 갑자기 푸훗, 하고 웃었다. 이솔렛이 눈썹을 약간 찌푸렸다. "왜 웃지?" "어째서 이렇게 당신과 비슷한 것이 많은가 생각했을 뿐이에요. 제가 아버지와 형을 잃은 것도 늦여름, 역시 어떤 괴물에 의해서였 거든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이솔렛의 아버지를 죽인 것이 정체 모를 괴물이었다는 이야기를 해준 것은 나우플리온이었다는 사실이 생각 났다. 예상대로 이솔렛의 얼굴이 살짝 굳어져 있었다. "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누구한테서 들었어?" "아......." 숨길 만한 성질의 일은 아니었다. "나우플리온 사제님한테서 들었어요." "그가 뭐라고 했지?" "그 분은... 당신의 아버지를 매우 존경하는 것 같았어요. 당신이 아버지를 잃고서 대단히 상심했다고... 그랬지요." 평소의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온 이솔렛이 고개를 홱 저으며 말했다. "그런 걸 물은 게 아냐. 그가 죽음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지? 마지막으로 살아남았던 세 사람 가운데 혼자만이 끝내 되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던가?" "이유라고요? 당신의 아버지인 옛 사제님께서 나우플리온 사제님을 마을로 돌려보내셨던 것 아닌가요?" "넌 그런 어이없는 소리가 믿어져?" 다프넨은 어리둥절해졌다. 이상한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나우플리온이 거짓말을 했으리라고는 추호도 상상해 본 일이 없는 그였다. 그는 이솔렛이 나우플리온을 싸늘하게 대하는 것은 어린 시절에 가졌던 적대감이 너무 컸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새삼스레 마음을 고쳐먹기 어려워서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난 아버지께서 어떤 방법으로 그 괴물을 없앴을지 짐작해. 아버지의 기술들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잘 아니까. 그렇게 전투가 이루어졌다면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텐데, 어째서 한 명은 살아날 수 있었을까. 게다가 아버진 나우플리온 사제님을 몹시 싫어했어. 만에 하나 자신 외에 한 사람을 살려 돌려보낼 수 있는 입장이라면 아버지의 제자였던 안테모에사를 돌려보냈어야 옳겠지. 안테모에사는 아버지의 오랜 제자였고, 또 내게도 친언니처럼 가깝던 사람이니까. 혼자 남게 될 나를 위해서 그 이상 나은 선택이 있을까?" 오만하게까지 느껴지는 단호한 어조로 말을 맺은 이솔렛은 지고 있는 태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프넨은 비록 이솔렛에게 호감 을 느끼고 있긴 했지만 그때 나우플리온이 죽었어야 했다는 듯한 말에는 저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말했다. "이미 끝난 일에 대해서 누군 살았어야 하고 누군 죽었어야 한다고 말하시는군요. 그것도 당신 한 사람의 편의에 맞춰서 말이죠. 그 당시 당신이 나우플리온 사제님을 지독히 싫어했다 해도 그걸로 사람의 가치가 결정되는 건 아니죠." 이솔렛이 다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의 눈빛이 거의 붉게 보일 지경이었다. "내가 말한 건, 아버지의 결정이었다고 전해진 내용에 대한 의문일 뿐이야. 난 나우플리온 사제님이 죽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어 . 난, 난... 그를 싫어하고 있지도 않았지, 적어도 그때까진!" "싫어하지... 않았다고요?" 그건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단지 싫지는 않았다는 거였다. 그러나 다프넨은 이솔렛의 어조에서 뭔가 다른 것을 감지했다. 그의 예 지는 이제 육감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참견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들의 감정을 놀랄 만큼 빠르게 이해했 다. 한참이나 침묵이 흘렀다. 해가 거의 져서 주위가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그래, 넌 지금 나우플리온 사제님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지. 네게 가장 소중한 사람도 그일 거고.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 편이 나았어. 이제 그만 돌아가자." 그렇게 말하는 이솔렛의 얼굴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날이 밝았을 때도 더듬거리며 겨우겨우 따라왔던 길이었다. 이제 주위가 캄캄해지고 나니 한 발 떼어놓기도 어려운 산 속이었다. 이솔렛은 익숙한 듯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다프넨은 그렇지 않았다. "조심해." 다프넨이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절벽 아래로 수십 개의 돌멩이들이 떨어져 내리며 요란한 굉음을 울렷다. 그 소리가 가라앉기를 기다려 이솔렛이 짧게 한 말이었다. "조심하고 있지만......." 다프넨은 말끝을 흐렸다. 이제 조금 더 가면 낮 동안 온 길 중 가장 험난했던 절벽 사잇길이 나타날 것이었다. 빛 없이 그 길을 안전하게 갈 수 있을까? "빛이 필요해?" 이솔렛은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민들레 홀씨처럼 보이는 것을 한줌 꺼내 어두운 허공에 뿌렸다. 무언가 흩날리는 듯하더니, 조금 후 깃마다 작은 불빛이 동그랗게 붙어 타올랐다. 반딧불보다 조금 큰 자그마한 빛들이 십여 개나 어둠 속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발 아래도 어느 정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빛도 필요하지만......." 다프넨은 상대에겐 보이지도 않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 이 길을 오늘 낮에 딱 한 번 지나갔을 뿐이라고요." "가다가 정 못 가겠으면 그렇다고 말해." 피식, 그는 대답했다. "지금 그래요." "그런 말을 웃으면서 해버리면 효과가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아?" "사실은 사실인걸요. 대책은 있나요?" "지금 생각하는 중이야." "전처럼 노래 불러서 날 날아가게 해 주면 안되나요?" "그런 말 다시 하면 혼내 주겠어." "아직 돌아오지 않았군요." 나우플리온은 다프넨과 할 이야기가 있다고 그의 집까지 찾아온 데 스포이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저녁 먹을 시간은 벌써 지났고, 어두워진 지도 한참이나 됐는데 어딜 가서 오지 않는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 애가 마지막으로 간 곳이 어디지?" "글쎄... 스콜리가 끝난 다음에 이솔렛한테 가지 않았을까요?" 말하고 나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네 검에는 무언가 이상한 힘이 있는 거지?" 이미 자정이었다. 둘은 산 속에 지어진 낡은 오두막에 들어가 앉아있었다. 오던 길을 되돌아가 긴 억새가 자란 들판을 한참이나 가로질러 간 끝에 발견한 집이었다. 삭은 나무 냄새가 물씬 났다. 오랫동안 돌보지 않은 곳인 듯 싶었다. "그런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저로선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게 무엇인지." 이런 집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 의아해서 물어보니 이솔렛이 손을 들어 기둥 한쪽을 가리켜 보였다. 작은 빛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려 기둥에 새겨진 글자들을 읽었다. 이솔렛이 만들어 놓은 작은 빛들은 그들을 따라오긴 하지만 마치 살아 있는 양 멋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하나하나 통제하기가 힘들었다. 사랑하는 딸 이솔레스티 네 어머니를 기억하거라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글자들은 풍상에 낡아 있었다. 그러나 상당히 잘 쓴 글씨를 바탕으로 해서 새긴 글자들이라는 것은 지금 보아도 명백했다. 다프넨은 의아해서 약간 더듬으며 말했다. "이솔... 레스티라는 것은......." "내 본명이야. 이솔레스티." 죽 본명인 줄로만 알고 당연하게 이솔렛이라고 불러 왔었다. 새삼스레 듣게 된 진짜 이름은 낯설기도 했지만 또한 아름답기도 했다. 이솔레스티는 이솔렛보다 훨씬 우아하고 나이 든 여인의 이름이라는 느낌이었다. "이젠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지." "그 이름도 좋은데요. 무슨 뜻이죠?" 무심코 물었던 것이었다. 낡은 지붕 아래에 선 이솔렛은 큰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잠시 잠자코 있다가 말했다. "이름의 뜻은 아무한테나 묻는 것도,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야." "다프넨은 월계수라는 의미죠." 단숨에 말해버리고 다프넨은 손을 내밀어 나무 기둥의 글자들을 쓰다듬어 보았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무슨 의미인가요? 이름말고, 여기 쓰여진 글귀 말이에요." 이솔렛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두 걸음 뒷걸음질쳐 바로 그 위치에 있는 나무 침대에 익숙한 동작으로 앉았다. 나무 침대는 이제 그냥 단단한 나무였을 뿐 이불 한 조각 남아 있지 않았다. "나, 여기서 태어났어." 다프넨은 약간 움찔하며 기둥을 만지던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네 이름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었어. 처음 듣자마자 알았어. 본래 다프니스라고 하는 이름이 변형된 것이지. 여자아 이일 경우에는 다프네라고 하는 거고. 우리 이름들은 옛 왕국에서 마법사들이 사용하던 언어였다고 해. 완벽하진 못하지만 나도 어느 정도는 읽고 쓸 수 있어." "이솔레스티는요?"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진 이미 사제직에 몸담고 계셨고, 따라서 직접 이름을 지으실 수 있는 자격이 있었지. 그 덕택에 나는 섬 안에서 유일하게 옛 왕국의 언어와 관계없는 이름을 갖게 되었어." "뜻이 없나요?" "아니. 아버진 생전에 내 이름이 '고귀한 고독'이라는 의미라고 말해 주신 일이 있어. 하지만 그게 어디의 말인지, 나뿐 아니라 아버지를 제외한 그 누구도 알지 못했지. 아버진 내게 말해주지 않았고, 그래서 그냥 별 뜻 없는 이름이라고 생각해 오고 있어." 여러 번 찾게 하는 녀석이야. 나우플리온은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산길을 걷고 있었다. 일전의 일로 하도 마음 고생을 해서 10년은 늙은 것 같다고 생각했는 데, 또 얼마가 되었다고 말 한 마디 없이 집에 돌아오지 않는 걸까. 버릇을 잘못 가르쳤어... 하고 중얼거리다가 그는 갑자기 풋, 하고 웃고 말았다. 마치 철없는 아들을 놓고 투덜대는 젊은 아버지 같지 않은가. 고개를 흔들어 버리고 다시 걷는데 이번에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 자식, 저녁이나 먹은 걸까? 나우플리온의 느린 걸음이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솔렛이 혼자 사는 집이었다. 안에는 불이 없었다. 일찍 잠들었나. 과거 일리오스 사제와 반목한 이후로 다시는 제 발로 찾아온 일이 없던 집이었다. 조금쯤 망설여질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그렇 지도 않았다. 역시 저번에 이솔렛이 자기 집에 들어와 있었던 것, 그 일로 너무 놀라서 무뎌져 버린 걸까 싶었다. 문을 두드렸다. "이솔렛, 잠깐만." 대답이 없었다. "잠시만 들어가도 될까? 물어 볼 것이 있는데." 몇 번 더 두르렸지만 답이 없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아는 이솔렛은 일리오스 사제의 딸답게 상당한 수준의 검술을 지닌 검사였다. 그런 그녀가 이 정도의 기척에 눈뜨지 않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예민한 귀를 가진 그녀가 아닌가,. 귀를 덮는 머리카락조차도 싫어할 정도로. 나우플리온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고 온 램프로 주위를 비추어 본 그는 집이 비어 있음을 알았다. 5. 하얀 조개껍질, 초록 솔바울 "무슨 생각 해요?" 여름밤인지라 춥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불 조각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았겠다 싶을 밤 날씨였다. 집 안에는 낡은 벽난로가 있었지만 그 안에는 뭔지 모를 쓰레기가 가득 차 있어서 굳이 비우기가 번거로운 듯해 그냥 내버려두었다. "널 왜 데려왔을까 후회하고 있어." 이솔렛은 나무 침대 위에 무릎을 세워 껴안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반딧불 세 개 만한 불빛 몇 개가 그녀의 몸 주위를 떠돌고 있었다. 한 개는 금빛 머리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집 안의 빛이라고는 오직 그것들이 전부였다. "이 집이요?" "아니. 여기서 밤을 새우게 된 일 자체 말이야." 바닥에 앉아 있던 다프넨은 벌떡 일어섰다. "제가 있어서 불편한가 보군요. 밖에 나가 있을게요." 이솔렛이 다프넨보다 나이가 많다고는 해도 아직은 스물을 못 넘긴 소녀에 불과했다. 또한 다프넨이 어리다고 해도 만 세 살 차이일 뿐이었다. 한밤중에 단 둘이서, 그것도 첩첩 산중의 빈집에서 밤을 새우게 되었으니 불편한 것도 무리가 아닐 거라 생각했다. 다프넨이 문을 미는 순간 이솔렛이 말했다. "됐어. 그냥 여기 있어." 다프넨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야영은 익숙하니까 신겨 쓸 거 없어요." 그가 밖으로 나가 문을 닫으려는 순간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그대로 문을 열어 둬." 그녀의 말대로 문을 열어둔 채 다프넨은 밖으로 나가 집 뒤로 돌아갔다. 이솔렛이 만든 불빛 몇 개가 따라와 발 밑을 비추어 주었다. 뒤 벽 옆에 낡은 손수레 비슷한 것이 바퀴 하나가 빠져나간 모양새로 처박힌 것이 보였다. 잿빛으로 변한 손수레 손잡이 사이로 푸르게 풀이 돋아나 있었다. 그는 그 곁에 앉았다. 여름밤의 흙과 공기는 따뜻했다. 솜씨 좋은 자의 손으로 다듬어진 까닭인지 아직도 비교적 매끈한 나무 벽에 등을 기댔다. 고개를 들자 비스듬한 각으로 기울어진 처마가 올려다 보였다. 아주 작은 집, 이 안에서 17년 전에 금빛 머리 가진 한 소녀가 태어났고, 그녀의 어머니가 눈을 감았다 했다....... 별이 총총했다. 그리운 땅의 별들보다 더욱 더 환한 푸른 빛, 금빛, 오랜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후......." 오랜만에 마음 속에 평화가 찾아왔다. 유령 소년 엔디미온이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죽은 사람의 세상이 평화롭겠다고 했더니, '네 생각보다 훨씬 심심하단다'라고 말해주었지. 정말로 죽은 후에는 그렇게 산 사람들이나 관찰하면서 재미없는 삶을 살게 되는 걸까? 아니, 죽은 사람이 삶을 산다는 말 자체가 이상하잖아? 엔디미온이 말했던 영원한 밤의 영원한 잠....... 언젠가 트라바체스 땅에서, 또는 아노마라드 땅에서 쫓기고 있던 때는 얼마나 간절히 원했던 것이었던가. 그 때는 정말로 달리 원하는 거라고는 없었지. 오직 쉴 수 있었으면,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홀로 지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 그러나 지금은... 비록 몇 명뿐이라 해도 좋은 사람들이 주위에 생겨났다. 심심하다, 심심하다라... 언제부터 그런 것을 두려워하게 됐을까. 심심한 것 따위가 뭐라고. 죽는 것이나 이용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텐데. 그렇지만 지금은 심심하고 싶지 않아. 손을 내려다보았다. 금방 잡을 수 있는 위치에 윈터러가 없다는 사실이 생겨났다. 처음에 데스포이나 사제가 자신에게 잠시 검을 맡겨 달라고 말했을 때는 당황하기도 했고, 갑작스런 경계심이 들어 첫 마디에 싫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끝내는 그녀의 말에 수긍하여 검을 건네주고 말았다. 결정을 내린 후로도 검 없이 불안해질 마음을 자신이 잘 다스릴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한동안은 실제로 그러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물론 곧 돌려주기로 약속했다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그와는 다른 것, 뭐랄까....... 어쩌면 윈터러의 존재는 자신을 자신답게 유지하기 위한 강한 중심추 역할을 해 줬던 것인지도 모른다. 실은 '자신답다'는 말에도 어폐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원한 자신다움이라기보다는 상황이 강요한 자신다움이었다. 물론 살아남으려 억지로 거친 길을 걸어오는 동안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된 것이고, 그런 상태가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는 생각은 해 보지도 않았다. 그 무게 중심이 사라지고 나서 그가 느낀 감정이 불안보다는 허전함에 가까웠다는 것도 그것이 사실임을 반증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쩐지 다르다. 윈터러가 무겁게 눌러 왔던 마음을 어떤 다른 것이 채우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 무게가 잠깐 없어져도 허전해지지 않도록, 오히려 가벼워지도록. 그 검은 그에게 있어 책임과 같은 것이었을까. 과거에 대한, 과거의 무력함에 대한 보상이었던 걸까. "다프넨."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와 흠칫 놀랐다. 부스럭, 인기척을 내는 순간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말했다. "역시 거기 있었구나." 이솔렛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솔렛이 앉아 있던 침대는 바로 이 벽과 마주 붙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동그란 빛이 장난꾸러기 요정처럼 날아와 그의 뺨을 비추었다. 그러더니 곧장 벽으로 다가갔다. 가만히 눈을 따라가 보니 벽에 주먹 하나가 드나들 만한 구멍이 나 있었다. 빛이 곧장 그 안으로 쏙 들어갔다. 안에서 작은 탄성 소리가 들렸다. "아, 이 구멍, 아직도 있구나." 무얼까, 아주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 "무슨 구멍이에요, 이건?" 이솔렛의 목소리도 얼굴을 마주 보고 있던 때보다 생기가 도는 듯 느껴졌다. "아주 어렸을 때 여름이면 아버지와 둘이서 이곳으로 놀러오곤 했었어. 여긴 나와 아버지의 여름 별장이거든. 그래, 말하자면 여행을 온 건데, 아버지는 잔뜩 들떠 있는 나를 억지로 일찍 재우곤 하셨지. 이곳의 별밤이 얼마나 아름다운데. 난 지독히도 말을 안 들었기 때문에 밤하늘을 보겠다고 벽에다 구멍을 뚫어 버렸어. 결국 들켜서 혼이 났지만. 후후......." "고집쟁이였군요, 당신." 그렇게 말하면서 다프넨도 따라 웃었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웃음소리에 별빛도 따라 흔들리는 듯 보였다. "그걸로 끝나지 않았어. 아버진 구멍을 양털 뭉치로 막아 두셨는데 내가 종종 그걸 빼내고서 밖으로 흰 조개껍질들을 떨어뜨리곤 했지. 아버지가 어느 날 발견하길 기대하고서 말이야. 기대는 어긋나지 않아서 소복하게 모인 조개들을 발견한 아버지는 구멍 안쪽으로 예쁜 솔방울을 넣어 주셨어." 이솔렛의 목소리가 이렇게 아름답게 들린 일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자고 일어나서 그걸 발견하고 정말로 기뻤어." 다프넨은 구멍 아래, 조개껍질이 놓여 있었을 법한 곳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방울진 빛 하나가 슬쩍 내려가 그곳을 비추었다. 물론 그 자리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무언가 있었을 법한 흔적조차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손을 내밀어 그 자리에 놓아 보았다. 곧 떨어질 조개껍질을 받으려는 것처럼. "조개껍질이 어디서 났어요?" "바다. 우리가 갔던 그곳. 그 절벽 아래에 아주 작은 백사장이 있단다. 정말 작아. 열 명의 아이가 뛰어 놀기에도 좁을 정도야. 하지만 그건 단 한 명의 아이를 위한 놀이터였지. 아버지께서 발견하셔서 내게 선물하신 곳, 한 명의 꼬마를 위한 바닷가에서 나는 조개를 주웠어." 문득 귓가에 파도 소리가 들리는 듯한 환청이 일었다. 흰 바닷가. 한 소녀와 그녀의 아버지가 천천히 걷다가 이따금씩 허리를 굽혀 무언가를 줍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이솔렛의 아버지는 딸과 마찬가지로 멋진 금발을 하고 있었다. "백사장, 보고 싶어요. 왜 아깐 말해주지 않았죠?" 얕은 기침 소리가 한 번 들린 뒤 대답이 들려왔다. "지금은 보여주고 싶지 않아." "그래요......." 다프넨은 고개를 들어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성이 별빛 가운데 짤막한 금을 그으며 사라졌다. 생명이 다한 별이 떨어지고 나서도 여전히 남아 반짝이는 금빛별이 보였다. "네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니?" 평소 이솔렛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질문하는 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만은 여러 번 그렇게 하고 있었다. "전 당신이 부럽군요. 난 아버지와 좋은 추억이 전혀 없어요. 아버지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죠." "왜?" "내가 뭔가 잘못했기 때문은 아닐 거예요. 그리고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어서 그랬던 것도 아니었죠......." 그의 아버지, 율켄 진네만은 단지 최적의 생존 조건을 만들어내야한다는 자신의 대의에 충실하게 살았을 뿐이었다. 집안과 가보 를 지켜 내야만 했고, 동생으로부터 죽 고통을 당해 온 그의 눈에 둘째 아들로서 가장의 '동생'이 될 보리스는 예프넨의 짐이자 잠재적인 위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네 형이 아버지 대신 너를 사랑해 줬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소년은 정말로 오랜만에 갑작스런 울음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억지로 삼켰다고 생각했는데 이 상한 기척을 느꼈는지 이솔렛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지 않은 거지?" "아니... 아... 니에요." 간신히 힘겨운 한숨을 토해내는 순간, 그의 어깨에 무언가 와 닿는 느낌이 들었다. 돌아보니 그것은 손이었다. 구멍 너머에서 이솔렛이 내민 손이었다. "노래... 불러 줄게." 손끝이 약간 닿았을 뿐인데 그녀의 호흡까지 느껴져 오는 듯했다. 다프넨은 나무 벽에 머리를 기댄 자세 그대로, 가만히, 가만히, 가만히 앉아 있었다. 따르게 하네 작은 새와 눈물과 잊혀진 가락들이 하나씩 하나씩 다가올 때마다 내 마음이 그를 따르게 하네 부르게 하네 푸른 별과 앵초와 스쳐간 바람들이 하나 또 하나 돌아올 때마다 내 마음이 그를 부르게 하네 그리게 하네 낡은 옷과 리본과 바래진 타래머리 가버린 사람, 하나 그리울 때마다 내 마음이 그를 그리게 하네 "......." 목 메임이 멈추고, 눈물 한 줄기만이 뺨을 타고 흘렀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다프넨은 무안한 사람처럼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아름다운... 노래예요." 이솔렛이 가끔 부르는 노래는, 노랫말의 뜻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전하고자 하는 바는 너무도 쉽게 마음에 와 닿곤 했다. 그것이 노래 자체의 힘인지, 이솔렛의 목소리의 힘인지는 잘 알 수 없었다. "찬트란 그런 거지......." 벽이 약간 흔들렸다. 그녀가 침대에 눕는 것 같았다. "찬트는 기원의 노래지. 마음이 갖는 힘이야. 아까 네가 '이번에도 노래해서 날아가게 해주면 안 되느냐'고 물었지? 그게 안 되 는 이유는 찬트가 본래 목적을 바라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그래. 어떤 노래는 하늘을 날 수 있도록, 또 어떤 노래는 누군가 의 마음을 위로하도록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찬트를 노래하는 사람이 깊이 원하면 그에 맞는 찬트가 저절로 떠오르게 되는 거지. 노래하고, 그러면 이루어지고." 다프넨이 약간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면 꼭 당신처럼 아름다운 노래를 해야 되는 건 아니군요. 전 이렇게 노래를 못해서야 당신처럼 되기는 영 글렀구나 싶었는데 말이에요." 이솔렛이 약간 어이없어하며 대답했다. "너 자신이 노래의 아름다움과 아름답지 않음을 느낄 줄 안다면, 그래서 네 노래가 지금 아름답지 않다고 느낀다면, 그게 훌륭한 기원이 될 수 있을까?" "역시 그런가요." 조금 있다가 이솔렛은 위로하려는 것처럼 말했다. "너도 그리 노래를 못하진 않아. 좀더 노력하면 좋은 목소리를 갖게 될 거야." 다프넨은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벌써 틀렸는지도 몰라요." "왜?" "변성기가 오고 있거든요." 변성기라는 말은 나우플리온이 가르쳐 주었다. 엔디미온을 만난 후로 약간 쉰 듯하던 목소리가 쉽게 가라앉지 않자 추운 데서 잠 들어 감기라도 걸린 건가 했는데, 그게 아닐 지도 모른다고 하며 말해 주었던 것이다. "더 멋있는 목소리로 바뀔 지도 모르지. 내게 찬트를 가르친 것도 내 아버지이시잖아." "어쨌든 한동안은 목소리가 엉망이 되어 있겠죠. 아아, 역시 날 가르치려면 지겨우실 거예요." "내가 말 없이 할 수 있는 기원을 알려줄까?" 이솔렛이 다시 일어나 앉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은 흘러 자정 후로도 두 시간은 지났을 텐데, 자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자꾸 의식이 또력해지기만 했다. "보이지 않겠지만 천천히 따라해 봐. 내가 말하는 대로." 고개를 끄덕,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어 말했다. "네." "두 손을 올려서 머리 위에서 맞잡아 봐. 팔을 둥글게 하고." "했어요." "그동작의 의미는 '여길 보세요.' " 다프넨은 팔을 올려 머리 위에서 항아리 모양을 만들며 싱긋 웃었다. "'여길 보세요'. 외웠어요." "그 다음은 오른팔을 앞으로 죽 펴고 내밀고, 왼팔을 구부려서 오른팔 팔꿈치 안쪽에 대는 거야." "손바닥을 펴고요?" "응." "했어요." "그 동작의 의미는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 '곁에 있고 싶어요'......." "이번엔 오른손만 펴서 옆으로 들어 봐. 팔꿈치를 직각으로 구부리고, 사람들한테 잘 가라고 인사할 때처럼 말이야. 그렇다고 손은 흔들지 말고." "이렇게요?" 말해 놓고 다프넨은 웃어버렸고, 이솔렛도 웃었다. 보일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둘 다 벽을 넘어가 서로 마주보며 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맞았다고 치자. 그건 '잘 있어요' 라는 뜻이야." "뜻을 들으니까 어쩐지 맞았을 것 같아요." "그 다음은......." 이솔렛은 차례로 '약속할게요', '이리로 와요', '가져와요', '기다려요' 와 같은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 한참 재미있게 따라하던 다프넨 이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그런데 말이죠 이솔렛, 내용이 어쩐지 기원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 같은데요?" "응......." 이솔렛은 잠시 말이 없었다. 한참 만에야 대답이 들려왔다. "그건 아버지와 나의 신호였어. 내가 볼거리를 몹시 앓았던 일이 있었는데 거의 말을 할 수가 없었지. 너무 아파서 짜증도 나고 말이야. 당시에 아버지는 내게 찬트를 가르치고 계셨는데, 내가 스스로 노래해서 병을 내보낼 수가 없으니 대신 손으로 노래하자고 하셨지. 하루만에 고안해서 다 가르쳐 주신 거야. 본래는 더 복잡하고 어휘도 많았는데 나도 거의 잊어버렸어......." 다프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천천히 생각해 내서 다 가르쳐 줘요. 재미있는 것 같아요." 이솔렛이 안에서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단지 이렇게만 말했다. "생각난다면. 너와 이야기하다 보면 더 생각날지도 모르지." 밤이 깊어가고, 드디어 얕아져 갔다.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도 점차 피곤해졌다. 해가 뜨려면 한 시간이나 남았나 싶은 무렵, 이솔렛이 드디어 말했다. "이제야 졸음이 약간 오는구나.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 두는 게 좋겠지." "그래야 내일은 발 헛디디지 않고 잘 돌아가죠." 둘은 동시에 친근한 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더 서로를 스스럼없이 대하게 했다. "잘 자." "당신도요. 잘 자요." 조용해졌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소년의 입가에서 조그마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이상한 밤이었어요. 당신과 나, 둘 다." 잠든 소녀는 대답이 없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꿈속 조개 안에는 미로가 있었다. 2장 . Rage of the Winter 1. 함정이 예고되다. 오후였다. 늦은 아침까지 실컷 잤던 탓인지 돌아오는 길은 생각만큼 힘들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가벼운 걸음걸이로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산 어귀에 있는 이솔렛의 집으로 먼저 갔다. "밤새 돌아오지 않아서 사제님이 걱정했을 것 같아요." "응, 아마도......." 이솔렛은 약간 말꼬리를 흐렸다. 자꾸만 뭔가 마음에 걸렸다. 좋은 꿈을 꾸었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문을 열어주고, 이솔렛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 다프넨은 혼자 비탈을 내려왔다. 해의 위치를 확인해 보니 스콜리는 벌써 끝났을 시간이었다. 확실히 안 하던 행동을 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그는 조그맣게 입맛을 다셨다. 나우플리온의 얼굴을 떠올리니 약간 죄책감이 들었다. 화를 내면, 잘못했다고 해야지.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모퉁이를 도는 순간, 눈앞에 뜻밖의 인물이 나타났다. 마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새침하게 서 있는 것은 리리오페였다. "아... 어떻게?" 자기 집 문 앞에서, 그것도 꽤 오래 기다렸던 듯한 자세로 서 있으니 누굴 찾아온 건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바로 어제 스콜리에서 봤던 그녀인데 이상스럽게도 낯설어 보였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를 보는 자신의 눈이 전과 달라진 것 같았다. 희게 햇살이 내리는 맑은 오후의 골목이었다. "어디 갔다 오니?" 리리오페는 발끈하기 직전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침착했다. 다프넨은 자기가 스콜리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묻는 거라고 짐작하고서 간단히 대답했다. "그냥... 산책." "밤새도록?" 어젯밤에 돌아오지 않은 걸 어떻게 아는 걸까? 아니, 설마 섬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건가? "......."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자신이 리리오페에게 변명을 해야 되는 입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려니 이상스럽게도 걸리는 뭔가가 있었다. "왜 대답 못해?" "대답해야만 되는 건가?" "그렇지. 잘못한 게 있는 사람이 흔히 그렇게 대답하더라." 리리오페는 더 눈길 주기 싫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더니 다프넨이 방금 걸어왔던 골목 쪽으로 종종걸음쳐 달려가 버렸다. 점점 기분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다프넨은 집으로 다가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우플리온은 이런 낮에 집안에 할 일 없이 앉아 있을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의자에 앉아 익숙한 집 안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자꾸만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집에 들어온 후로 더 심해진 것 같았다. 마치 집 안에 그를 불편하게 하는 기운이 감돌고 있는 듯했다. 도저히 편히 쉴 수 없는 상태가 되자 그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잠시 궁리하다가 공회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데스포이나 사제를 만나 원터러에 대한 것이나 물어보자고 생각했다. 공회당 앞마당에 유난히 사람이 많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야아, 이보라고, 다프넨이 왔잖아!" 저런 말투로 그를 반길 또래 소년은 섬에 없었다. 오이지스라면 저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 것이었다. "호오, 드디어 왔네? 재미는 이제 실컷 봤나 보지?" 재미? 앞마당에는 대여섯 명 가량의 소년들이 모여 쑥덕이고 있었다. 먼저 소리친 것은 피쿠스라는 이름을 가진 에키온 패거리 가운데 한 명이었고, 두 번째로 입을 연 것은 에키온 자신이었다. 헥토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프넨은 그들 앞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무슨 소리지?" "뭐야, 우린 격려해 주려는 것뿐이라고, 그런 표정이라니 어디 무서워서 말이나 하겠어?" 에키온은 헐렁한 튜닉의 긴 소맷자락을 걷으면서 씨익 미소지었다. 얌전하게 난 이빨 가운데 송곳니 두 개만이 유난히 도드라진 것이 보였다. 다프넨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나 지껄일 거라면 가겠어." "아, 가거나 말거나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말이지. 하여간 역시 놀라운데? 아마 대륙에서 온 녀석만이 그런 수작을 생각해 낼 수 있을거야. 우리 같은 섬 토박이들이야 어디 상상이나 해본 일이겠어?" "맞아,맞아." 다프넨은 저도 모르게 허리로 손을 가져가다가 멈췄다. 저들이 그를 모욕하려 하는 것은 분명한데 무얼 가지고 그러는 것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한 검도 없었다. 리코스라는 소년이 불쑥 나서며 내뱉듯 말했다. "너, 전무후무한 일을 벌이고 있다지? 다프넨은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한 번 더 말하지만, 똑바로 설명해라." 리코스는 다른 소년들과는 달리 다프넨이 미워 죽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드디어 한 마디가 터졌다. "소문이 쫙 퍼졌지. 직접 가르침을 받는 중인 스승과 수작이 붙었다고 말이야." 퍼억! 눈 깜짝할 사이에 리코스의 몸이 돌 바닥에 나뒹굴었다. 다프넨은 자신이 언제 주먹을 휘둘렀는지 느낄 겨를도 없었다.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다프넨의 어깨를 누군가의 억센 손이 움켜잡아 당겼다. 몸이 돌려지는 것과 동시에 그의 얼굴로 난데없는 주먹이 날아들었다. 터억! 왼쪽 턱을 정면으로 얻어맞고 휘청, 꺾이려는 몸을 다잡는 순간 다시 한 번의 주먹이 이번에는 하복부를 치고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몸을 빼며 그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러나 자세가 좋지 않아 절반은 놓쳐 버렸다. "......건방진 놈."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헥토르였다. 다프넨은 몸을 빼어 한 걸음 물러서며 그를 노려보았다. 어느새 다른 소년들이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주먹을 내린 헥토르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정말로 화가 난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그 눈으로 다프넨 뿐 아니라 주위의 다른 소년들까지 훑어보아 일시에 침묵하게 만들어 버렸다. 다프넨은 오른손 손바닥을 펴 내밀었다가 천천히 쥐어 보이며 나직이 말했다. "무슨 볼일인지 말하지 않는다면 방금 것, 돌려주겠다." "네가 모른다고?" 헥토르의 입에서 곧장 노성이 터져 나왔다. "감히 범접해선 안 될 사람의 이름을 더럽힌 주제에!" 갑자기 뒤통수 아래, 목덜미에서 머리에 이르기까지 서늘하고도 뜨거운 기운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드디어 모든 상황이 짐작이 갔다. 그러나 동시에 용납할 수 없는 전개였다. 다프넨은 간신히 숨을 억누르면서 말했다. "......말 함부로 하지 마라.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그러나 쉽게 끝날 일이 아니었다. 헥토르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냅다 소리쳤다. "네가 지금 어떤 사람을 네 지저분한 소문에 끌어들였는지 알고나 있나? '그녀'는 우리 섬사람 모두에게 신성한 공주와도 같은 존재야. 사제님들조차 함부로 대하지 않는 그녀의 모든 천분과 모든 이름과 모든 고귀함은, 너처럼 비천한 놈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아무도 그녀에게 손대어선 안 돼! 멋대로 지저분하게 놀고 싶거든 혼자서나 실컷 그렇게 하고, 그녀한테는 손끝 하나 대지 말란 말이다, 이 대륙에서 온 더러운 놈아!" "......!" 더 대화가 오갈 필요도 없었다. 둘은 거의 동시에 덤벼들어 서로를 쓰러뜨리고는 땅바닥에서 뒹굴었다. 난폭한 주먹질이 오가고 옷깃이 뜯겨 나갔다. 둘을 둘러쌌던 소년들이 부산하게 뒤로 물러섰다. 다프넨보다 두 살이 많은 헥토르는 몸집도 컸지만 완력도 더 셌기에 금세 다프넨을 깔아 누르고 다리에 올라탔다. 그러나 힘은 약해도 탄력적인 몸을 가지고 있는 다프넨은 단숨에 상체를 일으키며 헥토르의 어깨를 밀쳐 눌렀다. 그러나 다리가 깔린 까닭에 그도 마음대로 상대를 유린할 수는 없었다. 에키온이 안절부절못하며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형을 돕고 싶지만, 자존심 강한 형이 그걸 용납할 리가 없었다. 다른 소년들도 마찬가지였다. "때려! 눌러 버려!" "대륙에서 온 악마 녀석 따위, 박살을 내 버려!" 다프넨은 다시 한 번 힘에서 밀려 바닥에 내던져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대의 주먹을 한 대 맞아 주면서까지 왼쪽 다리를 틀어 헥토르의 다리를 바깥쪽으로 걸어 당겼다. 동시에 오른쪽 무릎을 세우며 상대를 힘껏 밀쳤다. "큭!" 헥토르의 주먹은 과연 보통이 아니었지만 맞은 만큼의 성과는 있었다. 단숨에 전세는 뒤집어져 다프넨 쪽에서 헥토르를 타고 누르게 되었다. 다프넨은 상대방과 같은 실수는 되풀이하지 않고자 다리가 아닌 그의 배를 타고 누른 뒤 주먹을 두 대 먹였다. 헥토르의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건 한참 전부터 다프넨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한 번 그런 소리를 한다면......." 헥토르는 손을 내저으며 다프넨의 멱살을 잡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 때 다프넨의 손이 다가와 헥토르의 목을 움켜쥐더니 힘주어 눌렀다. "컥......." 장난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금방 눈앞이 아찔해졌다. 도저히 숨을 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상대의 얼굴이 언뜻 보였다. 그리고 놀랐다. 돌처럼 싸늘히 굳어진 얼굴이었다. 이어 들려온 목소리도 좀 전에 열에 들떴던 어조와는 전혀 다른, 지독히 차가운 목소리였다. "너하고 정식으로 결투하겠다." 자신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옴과 동시에 다프넨의 머릿속에는 예프넨의 모습이 선명히 떠올라왔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번뜩이며 지 나갔다. 작은 마을, 벌레가 담긴 수프를 먹이며 그를 모욕한 상대들, 그 모든 것을 다 받아주고서 마침내 일어나 했던 한 마디. 네게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한다. 손이 풀렸다. 눈앞이 아득해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억센 손이 다가와 그의 뒷덜미를 잡아 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등 뒤에서 익숙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우 조용한 어조였다. "공회당 앞에서 싸움질이라니, 둘 다 예외라곤 글렀구나." 나우플리온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소년은 갑작스런 혼란을 느꼈다. 예프넨의 모습이 떠올랐었고, 그 위에 갑자기 나우플리온의 그림자가 겹쳐졌던 탓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각각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이 이상할 정도로 낯설었다. 나우플리온은 다프넨을 내려놓고 이어 헥토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헥토르는 약간 망설이다가 그 손을 잡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목에서 밭은 기침이 터져 나왔다. "난 소년들이 싸워선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싸움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 가서 해라." 그렇게 말한 뒤 나우플리온은 다프넨의 어깨를 툭 쳤다. "꼴이 이게 뭐냐. 약 꽤나 발라야겠구나. 생각난 김에 모르페 사제나 보러 가자. 그 양반이 널 보고 싶다고 그러더라." 평소와 같은 농담조였는데 어딘가 모르게 달랐다. 다프넨은 약간 망설이다가 돌아서서 나우플리온의 눈을 보았다. 그의 눈이 약 간 슬픈 듯해 보이는 것이 착각일까 생각해 보았다. "형, 식사해!" 헥토르는 손수 몸 곳곳에 약을 바른 뒤 따끔거리는 것을 참으려고 눈을 감고 있다가 동생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돌아보았다. "그래." 저녁 식사를 차린 것은 에키온이었다. 부모님은 섭정 각하를 만나 뵈러 가서 밤늦게 돌아올 예정이었다. 마을 안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잘 지어진 집이고 먹는 음식도 훌륭한 편이었지만 대륙의 귀족들과는 달리 시종은 한 명도 없었다. 섬사람의 누군가의 시중을 드는 것은 상대를 스승으로 모실 때 말고는 없었다. 힘세고, 모든 점에서 뛰어나며, 심지어 잘생기기까지 한 형 헥토르의 존재는 에키온에게 있어 자랑이자 즐거움이었다. 에키온은 가끔 떠오르는 교활한 꾀를 제외하면 어떤 것도 잘하는 것이 없었고 겉모양도 왜소하여 볼품이 없는 소년이었다. 형을 질투할 법도 한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래 보았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으며 심지어 불편할 뿐이라는 것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그리하여 에키온은 형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가 되는 것으로 재빨리 자신의 인생을 정해버렸다. 그의 생각이 닿는 범위 안에서 그것은 지극히 현명한 결정이었다. 잘난 형만을 사랑했어야 마땅할 부모님은 자신보다 형을 더 좋아하는 듯한 못난 동생에게도 관대함을 베풀어주었다. 그것 그 나름의 생존 전략이었다. "나우플리온 사제님이 말리지만 않았으면 형이 금방 녀석을 눌러서 곤죽으로 만들어 줬을 텐데. 사제님은 다프넨 자식이 질 것 같으니까 괜히 끼여들어서." 이럴 때면 반쯤 자기 도취에 빠지다시피 하는 에키온이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지껄이고 있었다. 헥토르는 별 대답 없이 스프를 떠 마셨다. "다프넨 녀석은 약삭빠르기만 하지 실력은 형편없다라고, 기운도 없고, 다음에 만나면 꼭녀석을 다시 패 줘야지." "쉽진 않을 거야." 그제야 헥토르가 입을 열었다. 에키온은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헥토르를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야. 형이 그 자식한테 질 리가 없잖아." "진다는 얘기가 아냐. 아까 나우플리온 사제님이 한 말 들었지? 모르페우스 사제님을 보러 가자고, 그 분이 녀석을 보고 싶어한 다고 말했지 않느냔 말이다. 은근히 사제들의 권위를 내세워 우릴 누르려고 하더군. 그런 식이니 다시 싸울 기회를 잡기가 힘들 거란 말이다." "쳇, 비겁하게.... 그 자식이 먼저 결투하자고 말했었지? 까짓 거, 이번엔 검으로 눌러버리면 되지!" 헥토르는 대답이라기보다는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겠지......." 에키온이 혼자 흥분해서 식식거리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탁자를 두드렸다. "그런데 형, 형도 이솔렛 님을 좋아했던 거야? 리리오페를 좋아한 것이 아니었어?" 헥토르는 주먹질을 해서 아픈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빵을 집어먹으며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난 리리오페 쪽이 더 좋아." "그런데 왜 그렇게 이솔렛 님을 열심히 찬양했어?" "그게 좋은 방법이니까 그렇지." 에키온은 머리를 굴려 보았다. 그래도 이런 점에서는 종종 형보다 나았었는데, 지금은 마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쉽게 표기하고 형에게 물었다. "잘 모르겠어. 이솔렛 님한테 관심이 없으면 다프넨 녀석이 뭘 어쩌든 무슨 상관이야? 그냥 놀려대는 걸로도 충분하잖아." 헥토르는 입을 벌리다가 입술 찢어진 곳이 아파서 얼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갑자기 바보가 됐니? 이솔렛은 돌아가신 일리오스 사제님의 딸이야. 그 분의 재능이며 지식을 모두 물려받았어. 그런 그녀에게 사귀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 여자의 지위가 갖는 장점들이 다 누구한테 갈 것 같냐?" "아......." 에키온이 놀라서 입을 벌리고 있는 동안 헥토르는 빵을 마저 삼킨 다음 바구니에 든 사과를 하나 집어들어 반으로 쪼갰다. 입을 크게 벌리지 않고 한 입 베어 문 그가 이어 말했다. "사람들은 나우플리온 사제님의 제자가 다음 번 검의 사제가 될 거라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틀려. 나우플리온 사제님은 오랫동안 섬을 비운 문제도 있고, 또 주위에 자기편이라고 데시 사제님하고 모르페 사제님을 빼면 전혀 없다시피 하지. 데시 사제님은 다 늙어서 은퇴할 때가 됐고, 모르페 사제님은 괴짜라 섬의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거기다가 소문대로 나우플리온 사제님의 몸 이 아프다면 길게 갈 게임도 아닌 거라고. 섬사람들은 모두 일리오스 사제님을 그리워해. 그분이 가장 훌륭한 사제님이었다고 다 들 말하지. 그리고 사람들의 그런 향수는 모두 이솔렛에게 집중되어 있어. 그래서 그녀가 지금처럼 성녀, 공주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거야. 그러니 다음 검의 사제가 궁금하다면 이솔렛의 곁을 잘 살펴보면 되는 거야. 즉, 이솔렛을 차지하는 사내 말이지." 실로 놀라운 시각이었다. 에키온은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그렇다면 형도 이솔렛 님을 놓쳐선 안 되잖아?" 헥토르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솔렛 같은 여자는 감당하기 힘들지. 너무 영리하고 잘난 여자를 말 듣게 길들이려면 피곤한 노릇이거든. 난 그런 번거로운 일은 하기 싫어. 리리오페야말로 지위로 보나 다른 조건들로 보나 나하고 딱 맞는 짝이야." "그러면?" "이솔렛은 평생 처녀로 있어 줘야겠지. 아니면... 그 후광을 벗겨버리거나." 잔인한 시각이었다. 에키온조차도 물컵을 든 채 말이 없었다. 고요한 밤이었다. 잠든 나우플리온의 숨소리말고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프넨은 혼자 잠들지 못한 채 깨어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잇었으나 나우플리온의 숨소리를 들을 때마다 생각은 한 가지로 돌아갔다. 자신이 그를 슬프게 한 것일까. 모르페우스 사제를 찾아갔을 때 나우플리온의 태도는 전과 같지 않고 어딘가 서먹해 보였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둘은 저녁을 먹었어야 정상이었지만, 나우플리온은 피곤하다며 식사도 거르고 그냥 잠자리에 들었다. 혼자 식사를 끝낸 뒤 잠시 귀를 기울여 본 다프넨은 나우플리온이 그 때까지 잠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말을 걸지는 못했다. 잠을 자려 애써 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나우플리온이 결국 잠들었다고 생각될 무렵, 그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힘들어하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어젯밤 생각도 났다. 꿈을 꾼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아름다운 밤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기억이 오히려 그를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과연 잘한 일이었을까. 이 모든 불편한 심정의 원인은 뭘까. 눈앞에서 흰 옷자락이 흔들리는 것을 본 듯했던 것은 그쯤이었다. 사륵. 반투명한 옷자락이었다. 곁으로 다가와 내려앉았다. [왜 힘들어하니.] 다프넨은 그 자리에 못박혔다. 처음이 아니라고 해서 두 번째에 익숙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른쪽 귓가에서 얕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프넨은 가까스로 중얼거렸다. "웃지 마......." [네가 겁내는 걸 보니까 재미있다. 웃지 않을 수가 없는걸.] 이번에는 똑똑히 말했다. "웃지 말라니까." 형체는 점차 뚜렷해졌다. 희고 치렁한 웃옷을 걸친 연한 금발의 소년이 그의 눈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쳐들고 있었다. 투명한 손가락 너머로 그의 흰 뺨이, 그 뒤로는 어두컴컴한 곳에 놓인 탁자까지 다 보였다. [안 웃을게. 그런데 내가 반갑지 않은 거야?] 몇 번이나 봤다고 이렇게 친근한 체 하는 거지? 요령부득의 상황에 처해 다프넨은 대답 없이 입술만 약간 움직이고 있었다. [얼른 반갑다고 말하라고, 유령은 잘 토라져.] 이거야말로 반 협박이 아닌가? "바... 반갑구나. 그렇지만 오기 전에 예고라도 좀 해줘. 등에 식은 땀이 흘렀다고." [어떤 식으로? 네가 정하면 앞으로는 그대로 해 줄게.] "그러니까...아니, 앞으로도 계속 나타나겠다는 소리야?" 엔디미온이 갑자기 팔짱을 끼며 고개를 홱 돌리더니 말했다. [흥, 유령 토라져 버렸어.] 절반은 농담, 절반은 진담. 귀여운 친구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상대는 유령인지라 다프넨은 긴장을 풀려고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아, 아냐, 자주 와 줘. 넌 재미있는 친구야. 네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어. 저번에 내게 보여준... 그 영상은 뭐였니?" 아무 얘기라도 꺼내 관심을 돌리려 한 건데, 말하고 보니 스스로 가장 묻고 싶었던 핵심을 찌른 셈이 되었다. 엔디미온은 토라진 체 하던 도중에도 상대방의 표정이 변하는 것만은 놓치지 않았다. [너, 이 세상에 돌아와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었지?] 확실히 그랬었다. 다프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닷새도 넘게 지났었다고 하더라고. 내가 실종된 후로." [넌 그 동안 속에서 잠을 잤잖니? 그곳은 '알의 동굴'이라고 하는 곳인데 본래 금방 죽은 혼들을 오래오래 재우는 곳이야. 그렇게 하면 그들이 살아 생전 갖고 있던 강렬한 기억들이 서서히 응어리져 작은 알, 즉 구슬들로 변하게 돼. 그렇게 함으로서 혼들은 자신의 사념을 빛 바랜 형태로 간직하게 되고, 현실 세상에 개입할 의지를 잃게 되는 거지. 그들의 구슬은 잘 보관해야 돼. 초반에 자칫 깨뜨렸다가는 그 안에 든 기억이 무엇이냐에 따라 큰 재앙을 부를 수도 있어. 왜냐면.......] 엔디미온은 무표정한 상태로 눈을 크게 떠 보였다. [혼의 세상에서는 기억이 곧 실재거든. 기억의 주인이 어떻게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리냐에 따라 그 안의 악이, 고통이, 사고가, 다시 한 번 일어나 버릴 수도 있어.] "그럼 내 발치에 있던 구슬들은......?" [네 구슬들은 불투명했지? 넌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거야. 또 그래서 그 구슬들이 도리어 네게 여러 가지 예지몽을 보여주기도 했지.... 어쨌든 망자의 세상 속에서 산 자가 머물기에 가장 안전한 곳이 그곳이기 때문에 널 거기에서 자게 했지만, 동굴 자체의 힘은 어쩌는 수가 없었어. 그래서 네 기억의 알들이 만들어졌어. 정확히는 동굴 곳곳에 동그랗게 맺힌 것을 내가 모아다 놓았어.] "그러면... 나도 내 기억을 잃게 되는 거야?" 다프넨은 심한 당혹감과 혼란을 느끼며 그 말을 해싿. 그러나 엔디미온은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넌 살아 있기 때문에 알의 동굴에서 잔다고 해도 기억을 잃을 수는 없어. 하지만 네가 그 기억에 대해 갖고 잇는 감정은 약간 바뀌었을 지도 몰라. 아주 약간, 그리 큰 영향은 없을 거야. 그러니까 네가 그 때 보았던 영상은.......] 다프넨은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로 낮게 외쳤다. "난 그 기억을 바꾸고 싶지 않아! 조금도!" 니들그래스의 벌판과 그를 부르던 형의 모습....... 엔디미온은 가만히 다프넨의 눈을 보고 있더니 약간 슬픈 듯한 어조로 말했다. [네가 가진 기억이 영원히 변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니? 그것은 이미 변했어. 네가 알의 동굴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오래 전부터, 그리고 지금도 계속 변하고 있어.] 엔디미온의 빛깔 없는 눈동자 속에 든 작은 빛이 좌우로 살짝 움지였다. [그때 본 네 기억...아마도 네 형제였지? 네 끈질긴 집착이 이미 죽은 그를 쉬지 못하게 붙들고 있는 것 같았어. 그가, 죽은 후에도 망자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동생을 끊임없이 돌보려 애쓰고 있다고 생각해 봐. 그래, 다시 말할게. 그 기억을 가진 건 너지만, 그때 새삼 다시 본 옛 모습은 네게 뭔가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그것이 지난 일이기 때문에, 돌이킨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안타깝고, 고통스럽고, 더욱 간절하면서도, 절망적이지 않았니?] "......." [그게 네 기억이긴 해도 넌 그 안에서 단지 구경꾼이었을 뿐이고 그 안에 속해 있을 수는 없었을 거야. 그리고 또한 네 스스로 거의 잊고 있던 기억이기도 했을 거야. 난 네게 기억을 보여주기 위해 구슬을 깨드렸지만 살아 있는 너의 기억이 사라진 것도, 네 삶 어딘가가 달아진 것도 아니야. 그러나 네가 거의 잊었던 그 기억, 그걸 다시 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무언가가 변했지. 넌 살아 있어. 살아 있는 자는 언제나 변해. 죽은 자는 다시는 변할 수 없지만.] 다프넨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수긍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그가 예프넨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이 몇 년 전, 그와 헤어졌던 당시의 그것과 같은가? 또는 그 이전에 함께 살던 때와 같은가? 인정하기 싫었다. 그러나 기억은 점차 바래가고 있었다. 그 자리를 새로운 기억들이 채우고 있었다. 이를테면 어제 본 별밤과 같은....... [그 이야기는 그만두자.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힘들게 널 찾아온 것이 아니야. 네가 특별한 검의 힘을 빌려서야 공간을 넘어올 수 있었던 것처럼, 나 역시 이곳에 머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야.] 그제야 설핏 정신이 들었다. "넌 어떻게... 온 건데?" [우울하게도... 이 일에 내가 가진 능력은 하나도 소용이 없었지. 내가 공간을 넘어와 여기 있을 수 있는 건 전적으로 네가 남기고 간 기억의 알들 때문이야.]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 구슬들, 기억의 알들에는 네가 남기고 간 이 세상의 고리들이 들어있거든. 방금 전 내가 나타났을 때 네가 하고 있던 생각이 뭐였니? 죽은 자의 세상에 남겨진 구슬들 가운데 하나가 그런 너와 반응을 일으키면서 문을 열어 주었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나." [어쨌든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지. 일단 말할게. 지금 멀지 않은 곳에 네게 아주 위험한 존재가 있어.] 너무 갑작스런 말이라 다프넨은 당황하는 것조차 깜빡 잊고서 되물었다. "응, 뭐라고?" [너를 집어삼키고도 남을 거대한 증오의 입을 가지고 있으니 조심해. 하지만 아무리 피하려 해도 그건 결국 너를 찾아낼 거야. 왜냐면 너는 검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더라도 조심해. 넌 아직 죽을 때가 안 됐지만, 산 자가 잃을 수 있는 것은 생명말고도 많지.] 잠시 잊었던 모양이었다. 엔디미온이 '죽을 때가 아니지만...'이라고 말하는 순가, 그가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이 다시금 떠올랐다. 이미 죽은 자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만큼 실감나는, 그리고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가 또 있을까? 양 뺨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느낌이 들었다. "너... 그런 것을 미리 알고 느끼는 것도 유령의 특권이니? 그렇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도와줄 수는 없는 거니?" [일어날 일을 막는다고? 난 그것이 언제, 어떤 식으로 일어날지도 몰라. 다만 그런 사건이 너의 시간 주위를 떠돌고 있다는 것만을 느낄 뿐이야. 더구나 앞으로 또 너를 이렇듯 찾아올 수 있을지도 나도 장담 못해. 어떤 때, 내가 네가 남기고 간 기억의 알들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그 순간 네가 그 기억과 연결되는 생각을 떠올린다면 다시 한 번 네게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지도 모르지. 그렇다 해도 나는 너를 만질 수조차 없어.] 그러면서 엔디미온은 마룻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반투명한 흰 옷자락이 날개처럼 끌려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잠시 시선을 거두고 있던 주위의 익숙한 사물들을 문득 느끼기 시작하면서, 그런 엔디미온의 모습이 더없이 낯설어 보였다. "벌써, 가는 거야? 난......." 많은 이야기를 하지도, 많은 것을 묻지도 못했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들 둘은 분명, 아직 친구는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자신은 지나치게 우호적인 역할만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엔디미온은 다프넨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양 말했다. [내가 다시 오지 않을까 봐 두렵니? 네가 네 힘으로 날 부를 수 있는 방법도 있어.] "뭐지? 그게 뭔데?" [가끔 처음 접한 상황에서 과거의 그림자를 느낄 때가 있지 않나? 한대 본 일이 있는 양, 들은 일이 있는 양, 그렇게 기억의 충돌을 느낄 때가 있지 않니?] 가끔 그런 것을 느낀 일은 있었지만, 그냥 착각일 거라고 생각하고 말았었다. 그보다 다프넨이 더 낯설게, 그리고 이상하게 느꼈던 것은 어느 순간 갑작스레 멋대로 찾아오는 예지였다. 과거가 현재에 겹쳐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이미 겪은 양 느끼게 되는 예지. 그러나 다프넨은 복잡한 설명을 생략한 채 말했다. "있어." [네 안에 잠들어 있는 기억의 알들 중에는 아주 오래된 시절의 것들도 있지. 네가 태어나기 전의 것들조차도. 그런 것이 갑자기 인지되는 것은 현실의 무엇이 과거의 기억을 강렬하게 건드리기 때문인 거야. 즉, 기억의 알들이 요동치는 거지. 만일, 네가 앞으로 겪게 될 현실이 과거의 어떤 기억을 아주 세게 내리치거나, 찌른다면, 그래서 그 구슬이 깨져버린다면, 그리고 그 구슬이 내게도 있는 것이라면.] 엔디미온은 천천히 뒷걸음질치다가 문을 등진 채 잠시 멈추어 섰다. [그 순간 나도 너를 찾아올 수 있을 거야.] 한 걸음. 제멋대로 찾아왔던 유령 소년은 문 뒤로 사라져 버렸다. 2. 함정에 빠지다 "각하, 제가 왔어요." 섬의 남쪽, 볕 바른 곳에 지어진 야트막한 집에는 드나드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 달에 두 번씩 여섯 명의 사제들이 정기적으로 방문하게 되어 있었고, 가끔 특별한 일이 생기면 평소에도 이곳에서 모이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외에는 하루 한 명의 방문객도 없는 집이었다.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곳이긴 했지만 마을 밖이라 할 만한 위치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간을 들여 멀찍이 이곳을 비켜갔다. "들어오너라." 집 안에 들어가자마자 볼 수 있는 건 신발을 벗어놓는 곳뿐이었다. 그 너머에 다시 한 겹 둘러쳐진 문이 있었고 그 안쪽에서 대답이 들렸다. 리리오페는 신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세로로 길쭉한 방의 안쪽에는 이마 꼭대기에 새치가 희끗거리는 마흔 줄의 남자가 있었다. 의자가 아니라 방의 바닥에, 짐승 가죽으로 된 깔개를 깔고 앉아 있었다. 리리오페는 대뜸 상대방을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아빠!" 남자의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천천히 팔을 벌려 보였다. "어서 이리 오렴." 리리오페는 다람쥐처럼 잰걸음으로 다가가더니 아버지의 품에 푹 안겼다. 깔개 위에 무릎을 꿇은 자세였고 남자도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였다. 둘 다 그리 편할 듯 보이지는 않는 자세였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포옹을 마친 부녀는 다시 물러앉았다. "아빠, 오늘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 "그래. 하지만 이렇게 자주 오면 안 되는 것 알고 있지?" "아아, 빨리 스콜리를 졸업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아빠가 보고 싶을 때마다 실컷 보러 오죠." 딸은 아버지에게 또 아버지는 딸에게 전폭적인 애정과 신뢰를 보이는 듯했지만 부녀는 전혀 닮은꼴이 아니었다. 딸이 가진 영롱한 눈동자며 예쁘장한 입매, 그림 속의 천사처럼 귀여운 고수머리 같은 것을 아버지의 모습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창백한 잿빛의 길쭉한 얼굴과 처진 뺨,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검은 눈동자가 있을 따름이었다. "서두르지 말아라. 너는 귀한 아이니까." 귀한 아이. 그 말의 어감에 어울리지 않게 리리오페는 가볍게 눈짓하며 씩 웃어버렸다. 그러더니 곧 말했다. "아빠, 내가 아빠 말대로 귀한 아이라면 진심으로, 정말정말 갖고 싶은 것은 결국 가질 수 있는 거겠죠?" "조금만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있지. 무엇이 갖고 싶은데 그러느냐?" "응, 글쎄요. 하지만 만일을 대비해서 물어봐요. 제가 어떤 사람을 아주 많이 원한다면, 그 사람은 제 것이 되나요?" 아버지는 잠시 침묵을 지키며 딸의 고수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그러더니 생각에 잠긴 듯 양쪽 입끝을 번갈아 올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빠가 듣기에... 그 말은 혼인에 대한 얘기 같구나. 그렇지?" 리리오페는 싫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 고개를 홰홰 내저었다. "아직은 이르다고요! 그냥 물어보는 것뿐이에요. 나는 아빠, 아니 각하의 귀한 아이잖아요. 어디까지 마음가는 대로 해도 좋은지 궁금해서 물은 거라고요. 지금은 하면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지만, 스콜리를 졸업해서 열 다섯 살의 정화 의식을 받는 다음이라면 절 막을 사람은 아빠밖에 없잖아요?" "물론 그렇기는 하다만, 너무 다른 사람의 의사를 무시하고 억지를 부려서는 안 된다. 그러면......." "아빠처럼 존경받는 섭정이 못 되겠죠. 그렇죠?" "......." 리리오페의 눈에는 이제 장난기가 없었다. 섭정 스카이볼라는 그런 딸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작은 소녀는 분명히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고 '섭정'이라는 단어를 발음했다. 섬사람들에게는 의문이 대상이자 두려움의 대상, 그리고 존경의 대상이기도 한 최고 결정자 섭정 각하는 사라진 왕을 대신해서 섬의 미래를 결정하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섬사람들이 전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일, 섭정의 아이는 섭정이 된다....... 그러나 그 아이가 열 다섯 살이 될 때까지는 누구도 그 아이를 특별히 취급해서는 안 되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리리오페는 섭정 스카이볼라이 하나뿐인 자식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는 리리오페도 그런 저런 사정들을 잘 몰랐고, 그래서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도 명확한 인식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섬에서 요구되다시피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평범하고 천진하게 자라났다. 그러나 대략 작년부터 그녀는 서서히 스스로의 입지를 깨닫고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책임감보다 자부심이 먼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리리. 아빠한테 솔직히 말해라. 헥토르가 싫은 거냐?" 리리오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그가 싫진 않아요." "그러면?" "하지만 말이죠, 헥토르 오빠와 저는 어려서부터 어울려 자랐고, 언제부턴가 서로 좋은 짝이 될 거란 식으로 누구나 다 말하고 있잖아요. 모든 사람들이 다들 입모아 떠드는 그런 얘기, 그런 거야말로 말할 나위 없이 시시한 결론이잖아요? 진부하다고요, 그런 혼인 따위." "얘야......." 아버지가 자기 말을 이해할 리 없다고 생각한 소녀는 얼른 고개를 흔들며 이어 말했다. "다른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해보고 싶어요. 그런 식으로 하니 기분도 좀 신선해지는 것 같고요. 그러고 나서 진부 한 결론을 따를지 어쩔지 생각해 보겠어요." 섭정 스카이볼라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 '옛 심정의 원칙'을 따를 참이라면 아버지는 반대다." 리리오페는 약간 움찔하는 표정이더니 더 대꾸하지 않았다. '옛 섭정의 원칙'이란 가장 고귀한 위치에 있는 섭정이 가장 비천한 위 치에 있는 섬사람과 결혼함으로서 섬 전체의 균형을 바로 한다는 오래된 관습이었다. 그러나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된 이야기였다. 그날은 운 나쁜 아침으로 시작되었다. 늦게 일어난 다프넨은 나우플리온이 차려 놓은 아침을 먹다가 무심결에 팔로 오트밀 컵을 쳐 엎지르고 말았다. 바지 위로 흘러내리는 오트밀을 내려다보며 당황해 있는 동안 맞은편에 앉은 나우플리온이 잠이 부족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일어섰다. 수건을 가져다 줄 요량이었는데 어찌된 셈인지 그의 옷자락이 테이블에 걸렸고, 허술한 테이블이 삐걱거리면서 나머지 한 잔마저 엎어져 버렸다. 반 이상 남아 있던 오트밀이 다 쏟아졌다. "허, 이것 참." 두 잔의 오트밀이 나란히 줄줄 흘러내리는 꼴을 보고 나우플리온이 혀를 차며 한 말이었다. 수건을 가져오긴 했지만 몇 번은 빨아서 다시 닦아야 할 듯했다. 다프넨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속에서 무언가 이상한 것이 꿈틀거리며 올라오려 하고 있었다. 불길함, 이상한 예감. "너나 나나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오늘 같은 날은 쓸데없는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라." 나우플리온에게도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는 것일까. 집을 나온 다프넨은 스콜리로 갔고, 오전 내내 별다른 일 없이 수업을 받았다. 점심 시간에도 별 일은 없엇다. 오이지스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리리오페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수업이 끝나자 이솔렛과 늘 만나는 산 위로 올라갔다. 비탈 위의 풀밭에 이르렀을 때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자리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다프넨은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후 생각나는 것이 있어 절벽 위의 마법 계단으로 가 보았다. 오랜만에 계단을 밟고 올라가 샘이 있는 꼭대기까지 갔다. 그러나 거기에도 이솔렛은 없었다. "네 주인은 어디에 있니?" 물을 쪼아먹고 있는 흰 새 한 마리를 보고 다프넨은 별 기대 없이 물어 보았다. 하긴 사실을 말하자면 이솔렛은 새들의 주인도 아니었다. 푸드덕. 새는 날개를 펴고 아래로 날아갔다. 그리고 풀밭을 지나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다프넨은 일어섰다. 천천히 풀밭으로 내려와 새가 날아간 방향을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이솔렛의 집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로 새가 날아간 그 쪽이었다. 산기슭에 있는 이솔렛의 집이 가까워질 무렵, 그는 예상치 못한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 자들은 비킬 아래에서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마치 이솔렛을 찾아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들은 헥토르와 에키온을 비롯한 일단의 소년들이었다. 다프넨과 그들은 이솔렛의 집 앞에서 딱 마주쳤다. "마침 당사자가 잘 와 주었군." 헥토르가 소리 높여 입을 열었다. 뭔가 단단히 마음먹은 듯한 목소리였다. 다프네은 전날 일을 떠올리며 딱딱하게 대꾸했다. "무슨 볼일이지." "마침 이솔렛 님한테 물어 보려던 참이었어. 너도 같이 사실을 확인 gon 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고 말이야." "뭔 알기를 원하는지 모르지만, 네게 해줄 답 따위는 없어." "아, 그럴까? 그러면 역시......." 헥토르는 이솔렛의 집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갑자기 외쳤다. "이솔렛 누님! 제 아버지께서 누님이 곧 시집을 가게 되는 거냐고 물으시던데요! 사실인가요?" 갑자기 석상이 되기라도 한 듯한 느낌이었다. 동시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사실이라면 축하할 일이겠죠! 누님은 부모님을 다 잃으셨으니 저희 아버지께서 대신 보호자 역할을 해주시겠다고 그러시네요!" 지금 그가, 무슨 행동을 해야 옳은 것일까. 회오리치는 뜨거운 덩어리가 가슴과 목을 꽉 메웠다. 언젠가 한 번 느껴본 감정이었다. 에키온을 비롯한 다른 소년들은 모조리 침묵하고 있었다. 오직 헥토르만이 냉소적인 표정으로 계속해서 외쳐댔다. "솔직히 전 누님이 이런 식으로 혼처를 찾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누님답게 좀더 점잖은 방식이 아닐까 생각했었죠! 게다가 저런 어린 녀석일 거라고는 더더욱 상상도 못했고요! 어째 꼴이 좀 우습지 않습니까?" "너......."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헥토르의 멱살을 잡으려는 다프넨을 다른 소년 전부가 달려들어 가두어 버렸다. 몸부림쳐도 소용이 없었다. 대여섯 명이나 되는 소년들이 그물에 걸린 사냥감을 다루듯 그의 몸을 움켜쥐고 있었다. 세 개나 되는 손이 그의 입을 막아 버렸다. 헥토르는 그런 꼴을 흘끗 쳐다보고 미묘한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일부러 그의 분노를 돋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더한 입에서 더한 목소리가, 더한 내용이 쏟아져 나왔다. "뭐, 오랫동안 혼자 지내시긴 했지만 아직 혼기라고 하기엔 이른 나이잖습니까! 아무리 좋은 사내가 나타났다 해도 그렇게 몸을 함부로 다루시면 안되죠! 마을 사람들의 눈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다가 혼인도 하기 전에 몸에 표시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이솔렛이 아니라 다른 어떤 여자도 용납할 수 없을 폭언이었다. 미칠듯한 분노와 그를 얽어 맨 손들 속에서 싸우고 있는 다프넨의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한 가지 말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용서하지 않아... 결코 용서하지 않아, 죽일 테다, 네놈을 죽여버릴 테다! "하긴 섬에서 그런 경우가 처음도 아니죠. 하지만 돌아가신......." 거기까지 말한 순간이었다. 다프넨은 잡았던 소년들은 갑자기 엄청난 힘이 그들의 팔을 밀치고 잡아 꺾는 것을 느꼈다, 실제로 다프넨의 오른손을 잡았던 한 소년은 손목뼈가 부러져나갔다. 믿을 수 없는 기세로 움켜잡은 손들을 펼쳐 버린 다프넨은 헥토르의 턱을 향해 곧장 주먹을 내질렀다. "!" 그 순간 헥토르가 빠르게 피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턱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헥토르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듯 재빠르게 몸을 숙였고 다프넨의 주먹은 그의 이마를 스치는 데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곧 헥토르는 흠칫 하며 놀랐다. 살짝 스친 것뿐인데 이마의 살갗이 세게 긁힌 것처럼 벗겨져 있었다. 조금 전, 다프넨은 헥토르의 입에서 결코 나와서는 안될 말을 막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만일 이솔렛이 어떤 모욕도 참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그녀가 결코 견뎌낼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함께 지낸 그 날 밤에 충분할 정도로 느낀 바였다. 그녀가 어떤 상황에서도 간과하지 않을 한 마디, 그 말이 그녀의 귀에 들어가는 순가 누구도 그녀를 막을 수 없을 터였다. 죽은 일리오스 사제를 모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을 막은 것만으로 끝날 일은 이제 아니었다. 죽기 전에 반드시 되갚아야 할 말들, 한때 어리고 약해 돌려보내지 못했던 그 모든 원한들이 갑자기 모조리 폭발한 것처럼 그의 머릿속을 세차게 올리고 있었다.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 이 상황을 참는다면 진네만 가문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가 불타는 저택을 바라보며 했던 그 말처럼....... 잊혀진 줄로만 알았던 이름이 그에게 권리를 부여했다. 섬의 순례자가 되고자 몇 달간 애써왔던 그는 이 순간 다시금 투쟁의 나라 트라바체스의 사내로 돌아와 있었다. 이미 손을 놓은 채 멍청해져 버린 소년들, 이마의 상처로 당황해 있는 헥토르, 그리고 집 안에서 말이 없는 이솔렛, 그들 모두가 듣는 가운데 그는 목이 터져라 소리질렀다. 한때, 같은 트라바체스 사내인 예프넨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옛 이름을 당당히 외쳤다. "나는 보리스 진네만이다! 너에게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한다." 그곳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다른 사람은 그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헥토르는 에키온을 비롯한 다른 소년들도 모두 물러가게 했다. 이 순간을 기다렸던 것처럼 그는 검을 준비해 왔다. 다프넨의 것도. 여름 치고 차가운 바람이 부는 산 위의 빈터였다. 둘에겐 신호가 필요 없었다. 입회인도, 구경꾼도 필요 없었다. 최초의 격돌, 날카로운 소음이 산중턱에 울려 퍼졌다. 챙! 챙! "후......." 둘의 위치가 반대가 되어 있었다. 두 검이 상대의 안과 밖을 연달아 두 번 내리친 뒤 똑 같은 동작으로 자세를 돌린 탓이었다. 이는 초반 연무의 자세였으나 이어서 계속되지는 않았다. 두 검 모두 다음 순간에는 상대의 급소를 노리고 있었다. 츠캉! 이미 소년 대결이라고 보기엔 무서운 살기가 감도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의심할 바 없이 서로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짓밟힌 풀들이 아릿한 냄새와 함께 쓰러져갔다. 헥토르의 검은 심장을 겨냥했으며, 다프넨의 검은 목을 노렸다. 한쪽이 방어하지 않으니 둘 다 다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옷이 긁혀 나가고 가느다란 상처 끝에 피가 흩날렸다. 계속적으로 두 검이 읽히고, 밀어내고, 다시 마주치며 힘 대결로 들어갔다. 불리한 것을 아는 다프넨은 재빨리 검을 미끄러뜨리며 한 박자 물러났다가 손목을 찌르려 했다. 그러나 빗나갔다. 헥토르의 검이 기세를 잡아 다프넨의 왼쪽 어깨를 베어버렸다. 투둑, 핏방울이 풀잎을 적셨다. 그러나 그 정도 상처로는 아픈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다프넨이 팔을 꺾으며 뒤로 휘두른 검이 헥토르의 턱을 그으며 뺨까지 이르는 상처를 냈다. 둘은 급히 뒤로 물러났고, 망설임 없이 다시 달려들려 했다. 검이 부딪치고....... "그만두지 못해!" 둘 다 그 목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헥토르가 펄쩍 뛰어 달려들며 검을 두 번 내리쳤고, 그 검을 두 번 다 ark은 다프넨은 바로 아래를 휩쓸 듯 공격해 들어갔다. 당장 결판이 날지도 모를 중대한 순간이었다. 켄 레 아사 나이드! 갑자기 팔이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버티려 했지만 견디지 못하고 다프넨은 검을 떨어뜨렸다. 앞을 보니 헥토르의 상태도 마찬가지였다. 이어 다리가 후들거리더니 둘 모두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이런 겁도 없는 놈들을 봤나!" 달려와 주문을 외친 것은 메달의 사제 테스모풀로스였다. 그 뒤에는 에키온 패거리인 몇 명의 소년들과 더불어 리리오페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파랗게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얼굴이었다. 대강 짐작이 갔다. 스콜리가 끝난 후 헥토르 일행의 움직임을 알게 된 리리오페가 테스모 사제를 불러오는 데 걸린 시간이 방금까지였을 것이다. "리코스! 가서 두 녀석의 검을 이리로 가져와라!" 리코스는 머뭇거리다가 달려가 바닥에 떨어진 두 자루의 검을 잡았다. 다프넨은 헥토르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리코스를 올려다보며 화가 난 기색이 역력했다. 다프넨은 화가 나지 않았다. 어느 정도 머리가 맑아지고 있었다. 절반 정도, 평소의 자신으로 돌아온 그는 조금 전 자신의 분노를 좀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날의 일을 반드시 결론짓고야 말겠다는 결심도 확고히 섰다. 순간적인 울분으로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냉정하게 바라볼수록 더욱 간과할 수 없는 일이고, 갚아야 할 빚이었다. 타고난 핏줄의 본성이 서서히 눈뜨고 있었다. 트라바체스 사람은 대가 없이 화해하지 않는다. 명백한 적은 오래 걸리더라도 반드시 친다. 지금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다음과 그 다음을 노린다. 그리고 결코 잊지 않는다. 그가 묻어두려 했던 진네만의 이름은 내킨다고 멋대로 내던져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년 시절의 그는 어느 이름이나 취할 수 있고 어느 땅에서나 비슷한 모습으로 자라지만, 성장하면 결국 트라바체스의 진네만이 되는 것이다. "후후, 그랬단 말이지?" 씩씩대며 한바탕 말을 마친 에키온은 스콜리의 막대호신술 선생을 올려다보며 크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에키온은 왜 자신이 이날 밤 여기까지 와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다 늘어놓고 있는지 몰랐지만 질 선생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따. 그는 에키온이 걸려들 수 있는 모든 길목에서 기다린 셈이었다. 낮에 벌어졌던 일은 이미 빠짐없이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인내심 깊게 전부 다 들어 주었다. 에키온이 교묘하게 왜곡하는 부분도 다 눈치채면서. 다만 질 선생도 헥토르가 어떤 말로 이솔렛을 모욕했는지는 몰랐다. 그에 대해서는 모든 소년이 다 함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프넨조차도 차마 입에 담지 못했다. "그게 정식 결투란 것을 사제들은 모르더란 말이냐?" "일부러 말 안 했죠. 아마도 홧김에 칼을 휘두른 정도로만 알고 있을 거예요. 왜냐면, 그걸 말해버리면, 다시는 못하게 할 것이 아니겠어요?" 어눌한 말투 속에 든 핵심을 눈치채지 못할 질이 아니었다. 그는 짐짓 사제들을 탓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네 말대로야. 정식 결투란 것은 그런 식으로 멈추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지. 결투란 언제고 끝이 나야 해. 그게 소년들끼리의 것이라 해도 말이다." "그렇죠! 리리오페 그것이 주제넘게 끼여들지만 않았으면 우리 형이 그 자식을 죽여버렸을 건데!" 에키온이 헥토르에 대해 갖고 있는 신념은 반쯤은 일불 만들어진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어린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신념과 진짜 신념을 구별해 낼 능력이 없었다. "아마도 그랬겠지. 헥토르의 실력은 섬 안의 소년들 중 제일이니 말이다." 질 선생은 적당히 에키온을 부추기며 잠시 뜸을 들였다. 아니나다를까, 에키온은 약간 말성이는 얼굴을 하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선생님은 스콜리의 막대호신술 선생님이시고, 막대호신술 실력은 섬에서 제일이잖아요." "그렇지." "그러면 무예에 대해서도 검의 사제님 다음가는 권위자시죠?" "아마도......." "검술을 비롯해서, 무예를 수호하는 입장에 있으시죠?" "그럴지도." "그렇다면 정식 결투가 이런 식으로 억울하게 멈춰졌는데 그냥 두고 보실 거예요?" "흐음." "선생님께서 주선하신다면 아무도 뭐라 못할 텐데... 아, 물론 검의 사제님은 빼고요." "......." 에키온은 눈치를 살짝 본 다음 말했다. "하지만 검의 사제님은 전적으로 다프넨 그 자식 편이니까 공정한 입장이 아니죠. 그 분의 의견은 무시해도 될 거예요.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그 분이 모르실 때 하면 된다는 거죠." "흐으음......." 질 선생은 의도대로 일이 착착 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억지로 중립적인 체 하며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나 철없는 에키온이 결국 그의 불편한 곳을 건드리고 말았다. 게다가 자신이 방금 전 한 말에 완전히 모순되는 내용이기까지 했다. "선생님도 다프넨 녀석이 보기 싫으시죠? 그 자식이 죽어 없어졌으면 좋겠죠? 그 자식이랑 검의 사제님이 한패거리가 되어서 잘난 체 하고 다니는 게 옳다고 생각 안 하시죠?" 너무 정곡을 찌르는 바람에 질 선생은 하마터면 화가 치밀어 이 소년을 밖으로 내쫓을 뻔했다. 그러나 가까스로 울화를 눌러 참으면서 대꾸했다. "난 결투를 수호할 임무가 있지만 너희들 사이의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 결정할 입장에 있지는 않다. 난 누구처럼 내 영역이 아닌 곳에 주제넘게 끼여들지 않으니까. 그런 것은 메달의 사제나 궤의 사제에게 가서 묻든지 해라." 에키온은 첫 번째 말만 딱 알아듣고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얼굴이 밝아지면 미간을 보기 싫게 일그러뜨리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도 바로 그랬다. "역시 그래요!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다른 사제님들 모르게 장소를 정해 주세요. 그리고 입회도 해 주시고요. 다프넨을 감싸는 건 검의 사제님 밖에 없으니깐 그 애가 죽는다고 해 봤자 그리 귀찮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게다가 결투는 걔가 먼저 하자고 그랬다고요!" 이것이 섬의 소년들과 대륙의 소년들을 비교했을 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었다. 에키온은 그들 손으로 다프넨을 죽인다는 것에 대해 아주 실제적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단순히 싫은 마음에 홧김에 '죽여버리겠다'고 외치는 것과는 이야기가 달랐다. 섬의 아이들은 비록 어리다 해도 불쾌한 자는 죽여 없앤다는 생각을 아주 손쉽게 했으며, 실천하려 덤벼들기도 했다. 사제들의 율법이 막고 있으니 그리 쉽게 실천할 수 없긴 했지만, 마음만은 대륙의 전쟁터에게 죽고 죽이는 어른들과 다를 바 없었다. 이는 옳고 그름을 과격하게 판별하고, 사납게 처벌하는 달여왕 신앙의 부작용이기도 했다. "네 말을 잘 알겠다." 질 선생은 드디어 자신의 계획을 입밖에 낼 수 있는 때가 왔음을 알았다. 그러나 자꾸만 떠오르는 미소는 애써 참았다. 다프넨이 벌인 일을 이미 전해들은 나우플리온은 말없이 한참 동안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다친 데는 괜찮으냐?" 끄덕, 고개만 움직여 한 대답이었다. "또 할 테냐?" 그것은 '이 녀석, 또 그럴 테냐!"하고 다그치는 아버지의 말투와는 달랐다. 다프넨은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다. 트라바채스 사람의 본성이 그에게 거짓말을 권하고 있었다. "네." 이번에는 그런 목소리에 굴하지 않았다. 나우플리온에 대한 신뢰는 이제 갓 눈뜨기 시작한 본성을 누를 정도로 아직은 강했다. "이길 자신이 있어?" "모르겠어요." 그건 확실히 모를 일이었다. 그의 손에 윈터러가 있다면 좀더 쉽겠지만 그것은 아직도 데스포이나 사재의 손에 있었다. 그리고 있다 해도 사용하는 것은 여전히 좀 꺼려졌다. 상대보다 유리하니까 불공평한 결투가 된다거나 하는 문제 탓이 아니라, 나우플리온이 그것 의 사용을 금했던 것 때문이었다. "우울하군." 나우플리온은 그 작던 소년이 섬에 들어온 뒤로도 계속해서 달라지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소년이란 본래 변하기 마련인 것이라 별달리 마음쓰지 않으려 했었다. 본래 섬에 들어올 때 그가 우려한 것은 소년의 삶이 자신화 너무 밀착되어 버리는 문제였다. 그렇 게 된 후 자신의 결정이 소년의 인생을 함부로 좌우해 버릴까봐 그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사정은 달라져 있었다. 섬에서 소년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람은 이미 여럿으로 늘어났고 그 가운데는 자신보다 오히려 상하지 않을까 생각되는 인물까지 있었다. 그 인물의 존재가 그에게 주는 이중적인 씁쓸함은 최근 그를 매우 힘들게 했다. 극복하려 했지만 아직도 완전히 극복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소년은 다시금 달라지고 있었다. 아버지라 해도 한 소년의 삶을 완전히 주재할 수는 없는 법이라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 소년은 본래 그와는 아주 먼 별개의 존재, 태생이 다르고, 민족이 다르고, 살아왔던 시대와 생애가 달랐다. 또래의 친구였다면 다른 것을 다름 그 자체로 받아들였을 텐데, 이 소년은 계속해서 그에게 새로운 모습을 보인다....... "우린 본래 친구였지?" 갑작스런 이야기를 꺼냈다. 다프넨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를 보았다. "지금은 아닌가요?" "아니. 지금도 친구지. 우리가 본래 친구에게 시작했다는 것을 다시 기억해 내려고 그래." 잠시 사이를 두고 한숨을 내쉰 나우플리온이 말했다. "친구가 친구의 삶에 개입하여 물줄기 자체를 바꿔놓으려 한다는 건 안 될 말이겠지. 그래, 지금의 난 네 결정을 알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겠구나. 하지만 이곳이 섬이라는 사실만은 잊지 말아라. 이곳의 아이들은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위험하거든. 우리를 다스리는 밤하늘의 여왕께서 그것을 원하셨으니 어쩔 수 없는 결과겠지." 다프넨은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대답했다. "알고 있어요." "더 위험한 건, 내가 네 위험을 간과하진 않을 거란 사실이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너와 나의 운명이 같은 닻에 묶여있다는 것은 언제고 잊지 마라." 다음날 스콜리의 점심 시간에 다프넨은 에키온으로부터 한 장의 쪽지를 건네 받았다. 일부러 건물 밖까지 돌아 나와 펼쳐 보니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너도 물론 결투를 계속하길 원하겠지? 서로 상처가 나은 뒤 다시 결판을 짓자. 닷새 뒤, 스콜리가 끝나고 우리가 싸웠던 곳으로 혼자 와라. 새로운 장소로 안내할 테니까. 판정은, 둘 중 하나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다. 3. 그 정체 "예, 돌려주십시오." 공회당 안의 일곱 원 위에 앉아 있던 데스포이나 사제는 앉은 채로 다프넨을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잠시 다프넨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돌려주는 것은 어렵지 않단다. 하지만 갑자기 그게 필요하게 된 이유를 말해주지 않으련?" "별 이유는 없습니다." 다프넨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짧게 말했다. 그러나 데스포이나의 얼굴이 설명을 요구하는 것을 알고 덧붙여 말했다. "저는 그 물건을 검으로 느끼지도 않습니다. 다만 오랫동안 가지고 있으면서 옛 가족의 분신인 양 생각하던 터라 얼마간 없으니 생각 외로 불안하더군요. 별다른 이유가 없다면 다시 제가 가지고 있고 싶습니다." 데스포이나는 다프넨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며, 그러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위험한 일에 사용하려는 것은 아니지?" 이런 때 필요한 것이 그가 타고난 핏줄의 힘이었다. 약간의 유혹을 물리쳐 버린 다프넨은 가볍게 미소까지 지으며 말했다. "위험한 일이 있을 까닭이 없지요. 사제님은 그게 아직 검처럼 보이시나요?" 윈터러의 모습은 여전히 손잡이도 없는 얇은 날 하나, 그대로였다. 데스포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러자." 윈터러는 다시 다프넨의 손으로 돌아왔다. 다프넨은 고개를 한 번 깊이 숙여 보인 다음 공회당을 나왔다. 탁, 테이블 위에 천 꾸러미가 내려놓아졌다. 재빠른 손이 매듭을 풀어냈다. 안에는 천의 흰 빛깔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흰 칼날이 가만히 놓여 있었다. 손가락을 들어 검의 표면에 갖다댔다. 이 검의 차가운 기운은 흔한 금속 물건에서 느껴져 오는 것과는 달랐다. 많은 비밀을 감춘 겨울의 검, 그러나 그의 물건인 만큼 이번에는 그의 의도대로 쓰이고 말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 상대를 완벽한 준비 없이 어찌 칠 것인가. 집 안에는 다프넨 혼자였다. 다프넨은 윈터러를 한쪽에 내려놓고 단도를 꺼냈다. 천 모서리를 약간 찢은 뒤, 두 손으로 움켜 쥐고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너비로 찢어내기 시작했다. 찌익, 찍, 찌익. 고요한 방안에서 연달아 날카롭게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다프넨은 무표정하게 입술을 약간 핥았다. 비명과도 비슷할 그 소음은 이상스럽게도 그의 마음을 즐겁게 했다. 천은 곧 그의 손에서 갈기갈기 찢겨 몇 십 개의 끈으로 변했다. 끈을 하나 집어든 그는 윈터러의 손잡이가 있던 자리, 지금은 날 없는 얇은 금속으로 변한 위치에 그것을 단단히 감기 시작했다. 한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모든 끈이 다 감겼다. 끝을 잘 마무리한 뒤 손으로 꽉 쥐어 보았다. 아직은 진짜 힐트(hilt)에 비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임시 손잡이지만 손의 통증을 무릅쓰고라도 택할 수 잇는 이점은 분명히 있었다. 이 검은, 그를 피로 이끌어 줄 것이다. 아버지와 형이 비웃을 어설픈 보복은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이것은 그의 적을 성공적으로 응징하게 해줄 검이었다. 헥토르는 정당한 대결을 원할 것인가? 겉으로는 그런 듯 행동하고 잇지만 그 속을 누가 보장할 것인가. 한 핏줄을 타고난 형제조차 끝내 믿지 않는 것이 트라바체스의 정치적 인간이었다. 상대가 교활한 술수를 쓸 껏을 짐작하고도 속는 것은 그들의 행동 양식 가운데 없었다. 오히려 아무 조짐이 없더라도 모든 것을 준비해야 했다. 아니, 압도해야 했다. 더구나 헥토르는 반칙을 획책하자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더러운 손에 곱게 죽어줄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설사 자신이 헥토르 대신 반칙을 저지르게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지지 않으면 저절로 옳아지는 것, 죽으면서 상대한테 비겁자라고 외쳐 봤자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뿐일 것이다. 한때 첫 살해를 저지르고 눈물을 뿌리며 떨던 소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정식 살인을 준비하면서 조금의 흔들림도 느끼지 않았다. 가문과 가족을 수호하기 위해 친동생조차 용서하지 않을 정도로 냉정해졌던 아버지가 있었다. 어린 동생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심장을 찌를 정도로 강해진 형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그의 가족이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영역 안에서 벌어진 모욕을 갚기 위해 강해지려는 자신이 있었다. 정글에 던져진 어린 짐승은 자라났고,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과거 속에서 받아들일 점을 찾아낼 정도로 영리해져 있었다. 이제 뒤따라올 대가 따위는 두렵지도 않았다. 나우플리온은 공회당 안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오랜만의 호출에 대해 별다른 감상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데스포이나 사제에게 윈터러를 넘긴 뒤로는 이곳에 한동안 오지 않고 있었다. 왜 그랬는지는 스스로도 몰랐다. "오셨군요, 나우플리온 사제, 이리 와서 앉으세요." 일곱 원 가운데 지팡이의 사제의 자리에 데스포이나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모르페우스 사제도 와 있었다. 나우플리온은 그와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의 얼굴을 보면 부러진 이빨에 대한 일이 자꾸만 떠올랐다. 분명 갚겠다고 했는데 오히려 딱잘라 거절한 것은 모르페우스 쪽이었다. 그런 후로 둘은 지금껏 변변한 대화조차 나누지 않은 채 지냈다. 한때 나이를 넘어 허물없는 친구처럼 지냈던 두 사람이었다. 두 사제도 데스포이나처럼 자신의 원으로 가 앉았다. 데스포이나가 입을 열었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서 두 사람을 불렀어요. 나우플리온 사제, 당신은 내게 진실을 좀 말해줘야겠군요." "진실이라고요?"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처음에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어진 말을 듣는 순간 바로 알아차렸다. "일리오스 사제님께서 돌아가시던 그 때에 대해서 말입니다." 나우플리온은 일부러 고개를 돌리지 않고 데스포이나만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되물었다. "더 아실 것이라도 있단 말씀입니까?" "그렇지요. 나우플리온 사제, 당신은 현재 그 괴물의 최후를 보았던 유일한 인물입니다." 모르페우스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나우플리온은 다시 항변하듯 말했다. "궁금한 것이 있으시면 직접 물어보시지요. 제가 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런 말은 안 했어요. 그런데 검의 사제님은 그때 이야기에 유난히 민감하시군요." "전......!" 나우플리온은 뭔가 말하려 하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자 모르페우스가 입을 열었다. "데시 사제님, 저를 부르신 것에도 무슨 이유가 있으실 텐데요." 마치 다 짐작하면서 물어보는 듯한 말투였다. "그래요. 두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다프넨의 검을 맡았고, 그것의 정체를 연구해 보겠다고 했지요. 그래서 제가 얻은 결론에 대해 말씀 드리고자 두 분을 뵙고자 한 것입니다." "결론을 얻으셨습니까? 그게 뭡니까?" 모르페우스가 강한 호기심을 드러내며 질문했다. 반대로 나우플리온은 계속 침묵을 지키고만 있었다. "자, 일단 봅시다. 우리가 그 검으로 인해 겪은 가장 큰 일은 잠시동안 섬 전체에 닥쳤던 어둠이었지요. 그것이 섬에만 국한된 일이었는지 혹은 대륙에서도 같은 현상이 있었는지 알아보았어요. 소식이 오기로는 대륙에선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어둠이 미친 것은 대략 썰물섬까지인 모양이에요." "으음......." 나우플리온은 조금 전에 자신이 들어왔던 입구를 돌아보았다. 대낮에 공회당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은 드문 일이었지만, 지금 그 문에는 빗장까지 단단히 질러져 있었다. "이건 한 가지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그 검이 가져온 어둠은 우리 순례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에만 미쳤어요. 즉, 다시 말해 이는 검의 힘이 옛 왕국의 후예인 우리들, 또는 달여왕의 지배와 반응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요? 옛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때 단 한 가지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설마... 왕국을 멸망시킨 힘을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데스포이나는 그렇게 말한 모르페우스를 보며 단호히 끊어 말했다. "바로 그래요. 옛 왕국을 멸망시킨 힘은 정확히 우리 조상들이 살던 그 지역만을 파괴해 버렸지요. 대륙의 다른 땅은 무사하게 내버려두고서." 나우플리온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혹시라도 나오게 될 지도 모르는 결론에 대비하여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려 했다. 그러나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아시다시피 옛 왕국은 저 늙은이의 우물에서 나온 악한 물건들로 인해 멸망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피 흘리는 창, 녹청의 장갑, 황동빛 방패, 그리고 은빛 투구였지요. 모두 잘 아시는 일일 겁니다. 그 악한 물건들이 바로 우리의 왕, 위대한 마법사를 장악했지요. 악한 물건들에 잠식당한 폐하는 수천, 수만의 악귀와 괴물들을 우물 너머의 세상에서 불러들였고, 그들은 위대한 왕국을 뿌리까지 멸망시키고 말았지요." "예, 그래서 우리는 배를 띄워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다프넨의 검이 그 악한 물건들과 같다고 말하고 싶으십니까? 그래서 다시금 재앙을 불러들일 거라고요? 다짜고짜 튀어나온 목소리에 다른 두 사람의 눈이 나우플리온에게 쏠렸다. 데스포이나는 회색의 눈으로 나우플리온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과정은 같지만 결과는 같지 못하군요. 나우플리온 사제, 당신이 그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어요. 아주 오래 전에 내게로 바로 그런 소년이 있었으니까요. 그는 모진 풍파를 뚫고 잘 자라나 주었고, 지금은 섬에서 중책을 떠맡아 또한 잘 해주고 있지요. 당신의 마음을 내가 모를 것 같습니까? 다름 아닌 나우플리온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나우플리온은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쉰 뒤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그 검의 힘에 대해서는 아직 섣불리 속단할 바 아니나, 그 존재가 이 세상이 아닌 곳에서 온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고 말이지요." 어찌 보면 추론 과정에 비해 형편없는 억지로 보이는 결론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당장에 그 검은 당시 왕국을 멸망시킨 악이 무 구들과 똑 같은 것이고, 따라서 없애버리거나 추방해야만 한다고 말했을 터였다. 그러나 데스포이나는 구체적인 결론은 생략해 버린 채 단지 피상적인 말만을 했다. 동정심만으로 그럴 사람은 아니었다.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일까. 그때 모르페우스가 문득 질문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일리오스 사제의 죽음과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다프넨은 수풀을 헤치며 걷고 있었다. 그에게는 두 자루의 검이 있었다. 하나는 평소처럼 허리에 차고 있었고, 또 하나의 검은 잘 맞지 않는 검집과 함께 등 뒤에 꼭 매어져 있었다. 검집에 다 들어가지 못한 칼날이 오후 햇살을 받아 백색 생선의 등처럼 희번덕거 렸다. 그는 홀로였다. 스콜리가 파한 후 헥토르를 비롯한 소년들과 만났었지만 곧 헤어졌고, 지금도 따로따로 산을 오르고 있었다. 시간대도 달랐다. 그가 먼저 도착할 것이고, 헥토르가 나중에 올 예정이었다. 모두 다른 사람들의 눈을 따돌리기 위한 방법들이었다. 폐허의 마을은 봉우리 두 개를 넘어가 움푹 패인 분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득히 먼 것만 같았는데 어느새 도착해 버렸다. 위에서 내려다볼 때는 영락없이 그들의 마을과 똑 같은 닮은 꼴이었다. 한 가운데 새워진 공화당과 공회당을 둘러싸고 둥글게 퍼져나가며 자리잡은 집들이 바로 그랬다. 그러나 아래로 내려갔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풍경은 같지 않았다. 확실히, 그가 살아오던 마을과는 이미 달랐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다른 기억을 닮아 있었다. 잠시 다프넨은 기억을 더듬었다. 아득한 옛 일인 것만 같았으나 곧 분명해졌다. 본 일이 있었다. 부서진 문과 무너진 벽, 구르는 돌, 멈춘 돌. 깨진 포석길 주위로 둥근 기둥들이 서 있었다. 기둥을 따라 천천히 걸어 보았다. 발끝에 거무스레한 식물 죽기가 거렸다. 그가 보았던 것처럼 많지는 않았다. 기둥들의 규모도 비교할 바가 아니었고, 집이나 돌의 배치 따위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이 버려진 공간 안을 온전히 흐르고 있는 분위기만은 틀림없이 같았다. 그가 섬에 이르러 처음으로 보았던 환각과. "마치... 작게 축소해 놓은 것 같아......." 그가 살아오던 마을도 그때의 환각과 닮았던가? 생각해 보니 그랬다. 분명 비슷했다. 그러나 마을은 폐허가 아니었던 까닭에 쉽사리 깨닫지 못했었다. 지금 이 작은 폐허의 마을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무심코 내딛던 걸음이 어느새 공회당 앞마당까지 들어가 있었다. 이곳의 공회당은 여러 단의 계단 위에 세워져 있었다. "후......." 공회당의 모습은 마을의 그것과 참으로 비슷했다. 그런데 무언가 자꾸만 눈에 거슬렸다. 두리번거리다가 사실을 알았다. 공회당 주위에 빼곡이 새겨져 있던 부조의 모양이었다. 이곳도 부조가 있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 내용이 판이하게 달랐다. 아랫마을의 공회당에 새겨진 것은 대부분 달여왕의 모습과 그녀의 단호한 결정을 기리는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이곳에는 그 비슷한 것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곳 부조에 새겨진 인물들은 대부분 마법사로 보였고, 그들의 강대한 마법이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고 있었다.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 역시 넓은 벌판이거나 대형 구조물, 큰 도시의 건물들이었다 그러나 아랫마을의 것은 험준한 산이 너머에 그려진 경우가 많았고 바다와 섬 또한 자주 등장하고 있었다. 이 무슨 차이일까. "오래 기다렸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 그는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 저만치 기둥 사이에 깨진 포석을 밟으며 서 있는 헥토르를 보았다. 주위에 다른 소년들은 없었다. 팔짱을 끼고 있던 헥토르는 몇 걸음 더 다가오며 다시 말했다. "그 자리를 택한 건가? 괜찮아 보이는군." 마을 곳곳에는 부서진 돌들이 굴러 있어 결투장으로 쓸만한 널찍한 공간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나은 곳이 공회당 앞마당이었다. 다프넨은 아무 대꾸도 않은 채 계단을 내려와 마당 한쪽에 섰다. "말이 없군 그래." 헥토르는 성큼 다가와 다프넨의 맞은편에 섰다. 손이 검손잡이로 갔다. 검을 뽑기 직전, 그는 갑자기 피식 미소지었다. "내 이름의 뜻을 알고 있나?" 다프넨은 등 뒤에 매었던 검을 풀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상대를 기다리지 않고 허리의 검을 뽑아들었다. 무표정한 눈이 그를 쏘아보았다. 헥토르도 서서히 검을 뽑았다. 동시에 그의 입이 말했다. "헥토르, 내 이름은 바로 '대적자'라는 의미다." 대적자란, 그 생애 속에서 상대해야 할 강대한 적이 반드시 존재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일까. "내가 과연 누구와 대적하게 될 것인지 오랫동안 궁금했었지. 이제 그가 드러났으니, 가려진 적을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되어 좋아." 헥토르가 든 검은 평소 쓰던, 그리고 일전에 잠깐 결투하던 때도 사용했던 연습용 검이 아니었다.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곧고 매서운 검이 그의 손에 꽉 쥐어져 있었다. 칼자루 끝의 폼멜이 마름모꼴 팽이 모양이었는데 그 끝에 금빛 술이 달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헥토르는 검을 똑바로 쳐들며 벽력같이 소리질렀다. "보이지 않는 적은 두렵지만, 보이는 적은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니지!" 두 소년이 달려든 것은 거의 동시였다. 햇살이 두 칼날을 비껴 흘렀다. 닿았더라면 단숨에 목이라도 베었을 날들이 공기를 가르고, 바람을 자르고, 서로에게 충돌했다. 타탕!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 다프넨은 그가 든 검의 날이 크게 갈라지며 한 조각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검이 꺾어지지는 않았다. 헥토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상대의 득의 만만해하는 틈을 놓칠 수 없었다. 다프넨의 검이 기세를 타고 세 번이나 상대를 내리쳐 갔다. 좌측으로, 우측으로, 다시 좌측으로 달려들어 폭풍 같은 기세로 쳐 나갔다. 헥토르는 저도 모르게 되로 몇 걸음 물러서며 수세에 밀렸다. 헥토르는 상대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귓가에서 펄럭이는 청동빛 머리카락, 그리고 같은 빛깔 눈에는 표정이 없었다. 이토록 위압적인 공격을 펼치면서도 일말의 분노도, 자만의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그것뿐인가. 순수한 살의, 가로막는 것을 뚫어버리겠다는 의지, 그 한 가지뿐인가. "질 것 같은가!" 다섯 걸음 뒤로 밀린 헥토르는 발에 걸린 부서진 돌을 냅다 걷어차며 다시금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팔을 당겨 몸을 보호하며 좌측으로 미끄러져 갔다. 그가 계단 위로 뛰어오르자 다프넨은 검을 두 번 휘두르며 계단을 밟았다. 키가 큰데다 높은 위치를 차지한 헥토르가 어느 모로 보나 우세해 보였다. 그러나 아직도 대결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밑에서 치고 올라가는 다프넨 쪽이었다. 두 사람은 검을 주고받으며 서서히 계단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틀림없이 말해 뒀겠지?" 에키온은 당장 결투 장소로 가지 않고 일부러 마을에 남아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역할을 맡았다. 형이 시킨 대로 한 것이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불안감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그는 왜 자신이 불안한지 알 수가 없었다. 형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뭘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결국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질 선생에게 달려오고 말았다. 질 선생은 에키온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다짜고짜 그렇게 물었다. 에키온은 짜증스러운 듯 소리쳤다. "그럼요! 싸우다가 공회당 안으로 유인해 들어가라고 다 말해 뒀다고요! 하지만 그럴 필요나 있을까요? 공회당 안까지 들어가기도 전에 형이 그 자식을 죽여 버릴까봐 걱정이에요!" 오히려 반대 경우를 걱정해라, 이 멍청한 놈아....... 질 선생은 속으로 뇌까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그리고는 아무 감상도 없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된 거지 왜 자꾸 가보자고 안달을 부리는 게냐? 괜스레 의심만 사게 될 테고, 그게 아니라면 자존심 강한 네 형이 불쾌해 할 거다." "하지만......." 에키온은 머뭇거렸다. 방금 전에 외친 말도 그의 불안감을 누르기 위한 한 방책에 불과했다. 무언가 이유가 필요했다. 나름대로 교활한 그는 곧 구실을 찾아냈다. "말씀하신 대로 형은 자존심이 강해요. 만일 그 자존심 때문에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질 것 같이 되어도, 그래도 선생님이 말해준 일을 하지 않으면 어쩌죠? 형이 안 하려고 마음먹어 버리면 애써 준비해 두신 것도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말하다 보니 자신조차 설득되는 느낌이었다. 질 선생은 한쪽 눈을 찌그러뜨리며 불쾌한 표정이 되었다. 확실히 배제할 수 없는 우려였다. 그렇다면 역시 직접 가는 것이 가장 낫단 말인가? "좋아. 넌 여기서 기다려라. 모두 사라지면 의심을 받을 테니까. 헥토르가 없는 이상 넌 여기 있어 줘야지." "하지만......." 에키온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그러나 질 선생은 결정을 내린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무서운 눈으로 에키온을 내려다보더니 그의 손목을 세게 낚아채어 쥐었다. "멋대로 따라왔다가는 너희 녀석들과 약속한 것을 모조리 뒤집어 버리고 말겠다. 그런다면 시체가 되어 돌아오는 것은 네 형 쪽이겠지. 안 그러냐?" 눈을 크게 뜬 에키온의 손목을 테이블에 탁, 내리치듯 놓은 그는 벽에서 겉옷을 떼어 들고는 빠른 걸음으로 집을 나갔다. 혼자 남은 에키온은 빨갛게 된 손목을 잡아 문지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저 선생도 무작정 믿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닌 것 같았다. 역시 형 곁에는 자신이 있어 줘야 되는 것 아닐까.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르겠다. 자신이 끔찍한 일을 저질러 저린 것은 아닐까. 궁리해보아도 좋은 답이 나오지 않는 그는 스스로에게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몸을 돌리는 순간, 반쯤 열린 창문 너머에서 겁에 질린 얼굴 하나가 재빨리 사라지는 것을 보고 말았다. "누구야!" 문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겁쟁이 놈은 멀리 달아나지 못하고 있었다. 오이지스였다. 그가 본 대로, 그 놈이었다. 그 놈이 어떻게 여길!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어디까지 들은 거야! 오이지스는 평소 더듬거리던 모습과는 달리 죽을힘을 다해 달아났다. 에키온도 마찬가지로 죽을 각오로 뒤쫓았다. 헥토르가 있었더라면 스무 걸음도 가기 전에 잡았을 텐데, 에키온의 달리기는 그리 빠르지 못했다. 그래도 오이지스보다는 약간 나은 수준이었다. 마을 외곽을 둘러싼 골목을 질러 달려갔다.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이 즈음은 귀리 수확철이었고, 에키온네 집처럼 풍족하지 못한 집들에서는 아이들까지 모두 들판으로 내보냈다. 오이지스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도중에 우왕좌왕했으므로 서서히 에키온에게 따라잡혔다. 이미 마을로 돌아서기엔 늦어버린 터라 그는 제로 아저씨의 장사관으로 가려고 마음먹고 방향을 돌렸다. 그러나 그 길을 온통 비탈이었고 이미 한참 달린 오이지스는 숨이 턱에 차서 허덕이고 있었다. 절반도 채 오르기 전에 등 뒤로 다가온 에키온이 그의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이 빌어먹을... 자식!" 에키온도 마찬가지로 헉헉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겁에 질린 오이지스는 상대가 한 명뿐임에도 불구하고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움츠러들었다. 평소 에키온의 폭언에 너무 길들여진 나머지 에키온 한 명의 힘은 자신과 별다를 것 없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에키온은 오이지스의 다리를 걷어차 바닥에 쓰러뜨리고자 했지만 자기도 다리에 힘이 빠져 헛발질을 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는 결국 무릎으로 오이지스의 배를 쳐서 고꾸라뜨릴 수 있었다. "너 같은 놈은......." 에키온이 쓰러진 녀석을 향해 발을 들어올리는 순간 오이지스는 갑자기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한 바퀴 옆으로 굴렀다. 그리고 다시 달아나려고 바닥을 기며 버르적거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에키온이 녀석을 도로 잡으려고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그 정도로 해둬." 뜻밖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리고, 에키온은 흡사 유령이라도 본 양 그 자리에서 굳어져 버렸다. 오이지스도 놀라 고개를 들고 앞을 보았다. 그들 앞에 선 것은 이솔렛이었다. 그것도 어깨 뒤오 교차되게 잡아맨 검집에 예의 쌍검을 꽂고, 사냥꾼의 복장을 한 싸늘한 표정의 그녀였다. "그래서 내가 나우플리온 사제를 부른 거지요." 데스포이나는 이제 서늘할 정도의 진지한 눈동자로 나우플리온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올 질문이 두려울 정도로. 아니, 두려운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숨겨진 것이 영원히 숨겨지기를 바라기 때문에. "자, 모르페우스 사제. 그대는 일리오스 사제의 기록을 연구했지요? 거기에 그대가 원하는 답이 있던가요?" "제가 얻은 대답은 한 가집니다. 섬의 재앙이었던 그 괴물, 놈은 본래 이 섬에서 살던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 아마도... 다른 세계에서 왔을 거란 것 말입니다." "다른 세계란?" "말하자면 늙은이의 우물 너머에 있던 것과 비슷한 그런 것이겠지요. 한때 위대했으나 타락해 버린 마법사 왕의 손으로, 우물 속에서 해방되어 옛 왕국을 뒤덮었다던 그 악한 생명들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그 검과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모르페우스는 나우플리온을 한 번 바라보더니 거기에 답했다. "저 역시, 일전에 그 검을 가지고 있는 동안 데시 사제님과 비슷한 결론을 얻었다는 사실을 말해야겠군요. 제 연구실에는 낡아빠진 물건들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는 옛 왕국에서 가져온 것들도 있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 특별히 우물 속의 이계로부터 온 물건들을 실험했으며 그것들이 저 검과 어떤 반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오직, 그것들만이. 섬에 어둠이 일어났을 때도 바로 그 접촉을 시험해 보고 있었지요." "사제들, 그대들은 두 세계, 즉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이 접촉을 일으킬 때 그 경계가 잠시 어둠으로 덮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 나우플리온은 이제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결심을 하고 입을 열려 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잠깐. 내 말을 마저 들으세요." 데스포이나가 손을 펴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우플리온의 눈이 문득, 그녀 곁의 빈 원에 가 닿았다. 그들이 둘러앉은 일곱 개의 원 가운데 여섯은 여섯 사제들을 위한 자리였다. 모두의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한 원이 비어 있었다. 그것은 '희생자의 자리'라고 불렸다. 달여왕은 때로 산 제물을 원하는 욕심 많은 지배자였다. 그리하여 한 재 중에 '7원례'라고 불리는 큰 제사를 올릴 때 그 자리에는 희생될 자가 와 앉게 되었고, 그는 하루가 지나 달여왕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피를 흘리게 될 때까지 사제들과 같은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라진 풍습이었다. 일곱 번째 원은 언제나 비어 있게 되었고, 옛 일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오직 빈 원의 존재 자체뿐이었다. 7원래의 제물은 짐승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언제 시작되었고, 그리고 언제 끝났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희생자를 위한 자리... 그들처럼 닫힌 사회는 산 제물을 원하기는 마련인지도 모른다. 사회를 지탱하기 위한 연료로 순결한 소년을 원할는지도 모른다. "모두 짐작하다시피 다프넨의 검은 옛 왕국을 파멸시킨 외부 세계의 존재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 검이 파괴적인 힘을 가졌다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세계가 전적으로 악한 경우란 있을 수 없고, 우리의 왕국으로 밀려들어온 것은 그 세계의 가장 악한 무리들이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 검이 오히려 좋은 일에 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해낼 수 없는 일을 성취하게 해 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껏 입었던 손실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이계로부너 받은 가장 큰 피해는 바로 당시에 일어난 학살과, 일리오스 사제를 잃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일들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죠. 그러나 아직 우리 곁에 지속되고 있는 손실도 있습니다." "나우플리온, 바로 자네다." 모르페우스가 갑자기 말했다. 그는 열렬한 눈동자로 데스포이나를 한 번 돌아본 뒤 나우플리온을 보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네 몸에는 치유되지 않는 상처가 있지 않느냔 말이다. 그리고 그걸 고칠 방법, 그걸 너 역시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나우플리온은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안다면 왜 지금까지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그건 그대가 옛 사제와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것 없습니다." "나우플리온 사제, 일리오스 사제의 최후에 대해 숨기는 것이 있지요? 독은 독으로 말미암아 고칠 수 있는 것, 이계의 괴물로부 입은 당신의 상처를 고칠 수 있는 것은 똑같이 이계로부터 온 물건뿐일 것입니다." 모르페우스가 견디다 못해 소리쳤다. "난 이미 일리오스 사제의 기록에서 사실을 보았어. 일리로스 사제는 자네 상처를 고칠 방법을 알고 있었지! 그걸 다 알고도 자네한 테 말해주지 않았단 말이야!" "다 그만두십시오!" 드디어 나우플리온의 입에서 격한 목소리가 터졌다. "이미 다 지난 일입니다! 이미 제 손을 떠났다고요! 그 일을... 이제 와서 밝힌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건, 그 '붉은 심장'은 이미 괴물의 시체와 함께 다 녹아버렸는데......." 나우플리온은 말을 멈췄다. 눈에 약한 핏발이 서 있었다. 견디기 힘든 기억을 애써 누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그만하십시오. 5년 전 제멋대로 섬을 떠날 때 전 이미 생사의 문제를 잊기로 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같습니다. 전, 전 지금 오직... 단 한 가지 생각뿐이지요. 다프넨 그 녀석을 지켜 주고 훌륭하게 자라도록 돕는 것뿐, 그것 외에 제가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아니란다." 아끼던 소년에게 하던 말투로 돌아온 데스포이나는 바닥에 짚었던 손을 펴 보였다. 그 손바닥에 붉은 글자가 선명하게 찍힌 것이 보였다. 거의 지워져 읽기 어려웠으나, 분명 '겨울의 장미꽃'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이 글자를 얻은 것은 그 검을 가지고 실험하는 과정에서였단다. 나는 완전히 다른 세상인 이계로의 문을 열 수는 없으나, 이 세상 위에 덧씌워진 이공간과 소통하는 방법은 어느 정도 알고 있지. 그래서 그 검을 두 공간 사이에 걸어놓고 반응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그 경계에 옅은 어둠이 서리는 것을 볼 수 있었지. 다시 검을 꺼내려 거기에 손을 넣는 순간 타오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고, 검을 잡아 가져온 뒤에 보니 손에 이런 글씨가 남아 있었다. 이 현상으로 내가 무슨 결론을 얻었겠느냐? 이 글씨는 분명 이공간, 또는 이계에서 온 것이다. 그 검은... 이계의 존재를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지." 모르페우스가 흠칫하며 소리쳤다. "사제님, 설마... 그 검으로 또 다시......." "바로 맞췄습니다. 나는 이계의 생물을 다시 한 번 불러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생물의 몸에 있을, 나우플리온의 말 대로 '붉은 심장'을 꺼내어 그의 상처를 치료할 마음이에요. 일리오스 사제의 연구 기록이 옳다면 그 붉은 돌은 이계 생물들을 움직이는 심장과도 같은 것이니, 아무리 다른 생물이라 해도 심장이 없지는 않겠죠?" 나우플리온은 격렬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말도 안됩니다! 그때 그 괴물 하나를 죽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했는지 잊으셨단 말입니까? 무엇이 나올지 어떻게 장담합니까? 성공할지 실패할지도 모르는 일, 저 하나를 위해 그런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습니다!" 잠시 어떤 감정을 억누르는 듯, 두 손을 맞잡아 움켜쥐던 나우플리온은 곧이어 말했다. "검은 어디 있지요? 제가 갖고 있겠습니다." "검은 벌써 다프넨이 가져갔단다." "뭐... 라고요?"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어져 나왔다. 그때 데스포이나는 조용히, 모든 것을 들여다보는 듯한 눈으로 나우플리온을 보며 말하고 있었다. ?넌 이미 그 괴물을 죽이는 방법을 알고 있지 않니?" 4. 반전 익숙한 냄새가 났다. 분명 어딘가에서 맡아본 냄새였다. 계속해서 아릿하게, 비릿하게 그의 후각을 자극해 왔다. 처음에는 쓴 약에서 나는 냄새 같았다. 그러나 곧 물비린내가 거기에 섞여들었다. 뭍에 버려져 서서히 말라죽어 가는 축축한 생선의 가라진 비늘. 무슨 냄새였더라....... 헥토르는 공회당 입구까지 올랐고, 다프넨 또한 마지막 계단을 딛고 입구가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 섰다. 잠시간 둘은 검을 맞부딪치지 않고 있었다. 헥토르의 등 뒤로 두 개의 기둥과 반쯤 부서진 문이 보였다. 공회당의 지붕은 아직 멀쩡했다. 문은 이상하게도 위쪽이 부서져 있어서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 걸음, 헥토르는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뒷발질로 삭은 문을 걷어찼다. 덜컬거리며 한쪽 문짝이 부서져 나갔다. 헥토르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정면을 보고 있는 다프넨의 눈에는 상황이 잘 보였다. 동시에 그는 의아해졌다. 왜 넓은 장소를 내버려두고 공회당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 거지? 그 안에는 수많은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다프넨은 묻혀진 기억이 어렴풋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썩은 시체의 냄새다. 삶의 종말이 내뿜는 선연한 악취가 점차 더 강해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냄새를 단 한 번 맡은 일이 있었다. 이 쉽게 잊을 수 없는 냄새를. 헥토르는 뒤로 펄쩍 뛰어 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검을 잡은 채 도사리고 있던 다프넨도 이윽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신 없이 달려오느라 이솔렛의 집이 있는 산기슭에 이르러 있음을 잊고 있었다. 두 소년 다 마찬가지였다. 에키온은 이솔렛이 두려웠다. 며칠 전, 헥토르가 이솔렛의 집 문밖에서 대담하게 소리지를 때 그도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가? 아니, 있지 않았다 해도 자신은 헥토르의 동생이 아닌가? 그때 집 안에 있을 것이 틀림없는 그녀가 그런 모욕을 당하면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겁을 먹거나, 아니면 심지어 보통 소녀들처럼 마음이 약해졌나 하고 생각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다시금 눈앞에서 보는 순간 공포가 되살아났다. 그녀는 용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모욕이었든, 죄였든, 원념이었든. 참고 견디는 것은 그녀의 미덕이 아니었다. 대가를 치르더라도 벨 것은 베어버리는, 저 검의 사제의 딸이 아니던가. "일어서." 에키온 못지 않게 겁내고 있던 오이지스는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이솔렛이었다. 이솔렛이라면 다프넨의 신성 찬트 선생이었다. 자신에게는 두려운 상대이지만 다프넨의 일이라면 외면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저, 하, 할 말이 있어요!" 에키온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눈알을 부라리고 싶어도 오이지스는 이미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엉거주춤 일어서면서도 오직 이솔렛에게만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말해."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것 같다고 느껴졌던 이솔렛은 단지 짧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흩날리고 있을 뿐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았다. 흰 손은 그대로 내려져 있었다. "저, 그게... 그게...... 다프넨이 지금 위험해요!" '뭐라고!'와 같은 반응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솔렛은 다만 왼쪽 눈썹을 살짝 움직였을 따름이었다. 무표정한 입에서 다시 한 마디가 떨어졌다. "구체적으로 말해." 에키온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깨닫고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먼저 간 질 선생을 따라가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가능한 한 빨리 가서 이 일을 알리고 대책을 세우게 해야 했다. 이솔렛은 에키온이 슬금슬금 달아나든 말든 눈길도 주지 않았다. 본래 그녀는 아이들의 분쟁 따위에 끼여드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들이 서로 미워하고 따돌리고 구타하는 일쯤이야 오래 전부터 흔했던 풍경이 아닌가. 오히려 지금처럼 그런 일을 제지한 것이야말로 여러 가지 우연이 겹친 결과라 할 수 있었다. "지금 다프넨하고... 헥토르가 전에 하던 결투를 마저 마무리지으러 갔어요....... 아마 둘 중에 하나가 죽기 전에는 끝내지 않을 거라고....... 그런데 아까 제가 들으니까 질레보 선생님하고 에키온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어서......." "......." 섬에서는 어른들은 물론, 어린 소년들까지도 서로의 뜻이 달라 결투로 끝을 마무리지으려 하는 일이 한 해에 한 번씩은 일어났다. 아이들이 싸울 경우엔 대부분 어른들이 뜯어말리지만 자칫 방치된 경우 죽고 죽이는 일까지 간 경우도 가끔 있었다. 이솔렛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그런 분쟁을 검으로 결말짓는다는 방식에 크게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모욕을 당했다면 참는 쪽이 어리석은 거고, 원한이 있다면 갚아야만 끝나는 법이었다. 그녀 역시 달 여왕 신앙의 땅에서 자란 소녀였다. 또한 걸음마를 뗄 무렵부터 검을 잡았던 전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일에 자신의 존재가 연루되어 있음을 그녀는 부인할 수 없었다. 왜 그때 침묵하고 있었던가. 그녀는 분명 집 안에서 헥토르의 야비한 목소리를 모조리 다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문을 나서 큰 소리로 반박하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다고 느꼈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소문의 원인을 제공한 쪽이 갈 데 없는 약자였다. 차라리, 그녀는 다른 해결책 쪽을 좀더 믿었다. 무엇을? "......그래서?" 다프넨이 자기 대신 놈을 후려쳐 줄 것이라고, 그걸 믿고 있었던 것일까? 다시 말해 이런 문제에 있어서 그의 변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나? 그렇다면 그것은... 자신이 다프넨에게 의지하려고 했다는 것일까? 어떤 상대로? 그녀에게서 신성 찬트를 배우는 한 소년으로서? 아니었겠지....... "헥토르가 이긴다면, 다프넨은 살아 돌아오지 못해요! 그리고 다프넨이 이긴다 해도... 그래도... 아무래도... 그들이 다프넨을 이참에 죽여버리려고 마음먹었나봐요!" "잘 알았어." 이솔렛은 갑자기 오이지스로부터 홱 돌아섰다. 두 갈래로 늘어진 흰 상의 자락이 펄럭이며 선을 그었다. 넌... 네 불안감을 해소할 다른 상대들을 찾아보든지 해." 오이지스는 이솔렛이 이 상황을 외면하겠다는 것인 줄 알고서 놀라 멍한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나 이솔렛은 집으로 가는 대신 빠른 걸음으로 산을 올라갔다. 그제야 그녀가 한 말이 '가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해라'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오이지스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해야 했다. 그러나 그가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쾅쾅, 쾅쾅, 쾅, 쾅, 쾅.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열성적으로. 데스포이나 사제는 문 쪽을 건너다보며 어떻게 할까, 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하는 이야기가 새어나가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러나 방문자는 중요한 소식을 전하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여기는 섬의 중대한 일들이 결정되는 공회당이었다. "제가 내다보지요." 모르페우스가 일어서서 문 쪽으로 갔다. 본래 먼저 그렇게 했어야 할 나우플리온은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슨 일이냐. 어라, 오이지스 아니냐?" 상대가 꼬마 소년인 것을 보고 모르페우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중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시시한 일로 방해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였다. "무슨 일이냐?" "헉, 헉, 후... 지금 여기... 나우플리온 사제님이... 계신가요?" 오이지스는 제대로 찾아왔다. 다프넨의 일이라면 가장 먼저 나서 해결하려 할 사람이 바로 그인 것이다. 물론 흐니 마을 밖을 돌아다니며 일을 보는 검의 사제를 찾아내는 일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괜스레 다른 곳만 빙빙 돌다가 시간이 많이 허비했다. 이솔렛과 헤어진 후로 최소한 반시간을 흘러 있었다. "있다. 무슨 볼일 때문에 그러느냐." "꼭... 중요한... 다프넨한테... 다프텐에 대해서...... 위험이......." 오이지스는 이날 지나치게 많이 뛰었다. 사라진 에키온에게 붙잡힐까 싶어 조금도 쉬지 못했던 것이다. 다프넨이라는 이름을 듣고 나우플리온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벌떡 일어서 성큼성큼 문 쪽으로 왔다. "오이지스구나. 다프넨에게 무슨 일이 생겼지?" "그를 죽이려고 해요!" "뭐라고?" 이제야 그가 기다렸던 반응이었다. 나우플리온은 허리를 굽혀 오이지스의 두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열성적으로 다그쳐 물었다. "그 애한테 무슨 일이 생겼지? 누가 그를 해치려 한다는 거냐?" "하......."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다프넨을 할 말을 잃었다. 동시에 귓가에서 굉음처럼 울리는 소리가 있었다. 기억 속의 오래된 목소리들이 마구 뒤죽박죽 되어 들렸다. 내용은 중요치 않았다. 목소리가 그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 가지였다. 에메라 호수. 썩은 시체와 괴물의 늪. 그의 가족을 몰살시킨 그 악령의 호수.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공회당 가운데, 다시금 그의 눈앞에 재현되어 있었다. 좀더 작은 규모였지만 더러운 녹색으로 썩어가고 있는 물은 기억 속의 에메라 호수와 거의 같았다. 물이 너무 탁해서 얼마나 깊은지는 알아볼 길이 없었다. 저 아랫마을과 거의 비슷한 규모의 공회당이었다. 그것도 이곳의 공회당은 십여 단이나 되는 계단 위에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런 것이, 저 자리에 생겨날 수가 있는 거지? 늪이... 땅이 아닌 단단한 돌 위에서, 그것도 지붕이 남아 있는 곳에서 생겨날 수도 있단 말인가? "이건... 뭐지?" "나도 몰라. 내가 알 바 아니니까." 그들은 늪을 사이에 둔 채 빙글빙글 돌았다. 이윽고 다프넨이 건물 안쪽, 그리고 헥토르가 들어온 문 쪽에 서게 되었다. 낡은 돌 위에서 솟아난 썩은 물 너머로 적의 얼굴을 보며 그들은 계속해서 도사렸다. 호수에서 뻗어 나온 더러운 수초들이 흡사 덩굴식물처럼 벽돌 틈새를 타고 오르는 것이 보였다. 지금은 대낮이었다. 밤에 본 검은 늪과는 달라야 했다. 그러나 후각으로 느껴지는 냄새는 그의 기억을 모조리 장악해 버렸다. 따라서 이 곳은 낯선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해도 기억 속의 그 호수였다. "왜 이리로 들어온 거지?" "이제야 말을 좀 하는군. 뭐,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군 그래. 하지만 목적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헥토르는 검을 쥐지 않은 왼손을 조끼 안쪽에 넣더니 무엇인지 모를 물건을 꺼냈다. 흡사 봉투를 봉하는 붉은 밀랍처럼 보이는 둥그런 덩어리였다. 다프넨은 표정 없이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나를 이길 다른 비방이라도 가져온 건가." "아니, 넌 내가 지게 되어 있어." 헥토르는 왼손을 앞으로 내민 채 손바닥 위에서 붉은 덩어리를 굴렸다. 그것은 단순한 밀랍덩어리 같은 것이 아니었다. 늪에서 나오는 썩은 가스에 닿자 중심부가 환한 주홍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뜨거워 보이는 기색은 없었다. "이기는 길은 가지가지인데, 넌 한 가지 길밖에 모르고 난 많은 길을 알거든." 헥토르의 손이 높이 올라갔다. 휙, 덩어리가 늪 속으로 내던져졌다. 번쩍이며 솟구쳐 오르는 무언가를 본 것 같았다.... 그러나 곧 지워져 버렸다. 눈앞에 남은 것은 늪 가운데서 타오르고 있는 오렌지빛 불덩이뿐이었다. 잠시 후, 그것은 갑작스레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앞이 안 보였다. "하아... 하......." 자욱한 녹색 안개가 시야를 가렸다. 그보다 더한 것은 찌를 정도로 지독한 향이었다. 아마도, 독성이 깃들여 있을. "잘 있어. 나는 나중에 환기나 시키러 돌아오도록 하지......." 목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끝이 아득하게 들렸다. 취한 듯, 다리가 비틀거렸다. 무릎이 후들거렸다. 정말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정말로....... 왜 주저앉는 거지...?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 다 내던지지 않았어? 남김 없이 모든 것을 바꿨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그 피와, 그 눈물과, 그런데 아직도 환산되지 않은 것이 남았나? 무엇이 부족한 거지....... '너의 피.' 귓가에서 재재거리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윙윙거리는 벌떼에서 점차 진짜 목소리로 변했다. 그림자들이 속삭여 왔다. 그의 주위로 그림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다프넨은 벽에 기댄 채 맥없이 다리를 뻗고 있었다. 발치에는 썩은 녹색의 물이 닿을 듯 말 듯 출렁거렸다. 흡사 뜨거운 열기탕에 들어온 것처럼 머리는 몽롱하고 시각은 마비되었으며, 사지가 굳어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무뎌져 가는 가운데 이상스럽게도 미세한 감각들만이 온통 살아나 그의 몸을 장악해 버렸다. 신발 바닥을 건드리는 물결조차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온 몸의 촉각이 바늘 끝처럼 곤두섰다. '너의 피... 나와 함께 살아온 너의 피와 살.' 목소리는 점차 커졌다. '내가 이미 선택해버린 너는 죽을 수 없어.' '너는 죽을 수 없어.' '너는 죽을 수 없어.' 절그렁. 검을 놓친 그의 오른손이 느리게 귓가로 움직여 갔다. 그리고 맥없이 귀를 막았다. 그러나 목소리는 계속해서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다시는 죽지 않는 삶을... 택하지 않겠어?' '택하지 않겠어?' '택하지 않겠어?' 뭐라 입을 움직여 말하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그를 죽이고 싶지? 그에게 복수하고 싶지?' '그에게 복수하고 싶지?' '그에게 복수하고 싶지?' 입가에 비릿한 액체가 느껴졌다. 자기 귀로는 듣지도 못하면서 다프넨은 입술을 달싹였다. "참견은... 필요... 없어......." '나를 봐. 내가 그를 죽이는 것을 똑똑히 봐. 내가 그를 죽이면 넌 내 것이 되는 것야. 영원히 죽지 않고 내 종으로 살게 되는 거야.' '내 종으로 살게 되는 거야.' '내 종으로 살게 되는 거야.' "싫... 어......." 다프넨은 다시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벽에서 허리를 떼는 순간 앞으로 고꾸라져 처박힐 뻔했다. 간신히 두 손을 바닥에 짚고, 짐승처럼 비척거리며 다리를 세웠다. "아니......." 재게 놀리던 다리를 멈춘 헥토르는 놀란 듯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공회당을 돌아 막 마을 어귀로 향하려던 참인데 무너진 기둥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던 것이다. 다름 아닌 질 선생이었다. "뭘 놀라?" 헥토르는 당황해서 머리를 굴려 보았다. 에키온이 둘 사이를 중재했기에 그들은 서로 마주하고 이야기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질 선생으로부터 건네져 온 붉은 덩어리는 반신반의하던 것과는 달리 충분히 효과를 발휘해 주었다. 다프넨이 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 나왔으니 이제 모든 것은 잘 끝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 자가 여길 찾아온 거지? "일이 잘 처리되었나 보군." 질 선생은 헥토르가 혼자인 것을 보고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올렸다. 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고, 곧 새로운 음모가 구체화되었다. "......." 분명 잘 되긴 했다. 그러나 헥토르에게는 아직도 일말의 자존심이 남아 있어 비겁한 술수로 이긴 것을 타인과 함께 기뻐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는 잘 한 거라고 생각할지라도 그런 모습을 상대방이 보는 것은 싫었다. "하나 덜 전달된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이렇게 몸소 오게 됐지." "...뭡니까?" 애써 자존심을 세우려 해도 소용없었다. 뻔한 사정, 뻔한 꼴이 아닌가. 질 선생은 소리내지 않고 입술만으로 킬킬거리더니 앉아 있던 곳에서 뛰어내렸다. "그거, 내가 준 그거 말이야. 그게 확실한 독이긴 한데, 한 번 사람을 집어삼키고 나면 좀체 가라앉질 않아. 본래 시체가 썩어간 물과 반응하는 것이니 만큼 피와 살에 민감하지. 문 앞에 룬(Rune)을 하나 새기고 와야 해. 그래야 그게 밖으로 나오지 않고 안에서 잠잠해져." "왜 그런 이야기를 이제 합니까?" "그래서 지금 급히 달려왔잖아." 질 선생은 성큼 걸음을 옮겨 헥토르의 곁을 지나쳤다. 그러더니 우뚝 멈춰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같이 안 갈 거야? 마무리는 짓고 와야지?" "......." 아무래도 앞뒤가 안 맞는 것 같긴 했지만 거절할 명분이 부족했다. 게다가 무너진 기둥 위에 느긋하게 앉아 있던 모습은 급히 달려온 사람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결국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이미 한 배를 탔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한쪽이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다른 하나를 파멸시킬 수도 있었다. 파멸은 아니라 해도 평생 가는 큰 오점을 남기게 될 것이 자명했다. 공회당 입구에 다시 이르러 헥토르는 조금 멈칫거렸다.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앞서 가고 있는 질 선생의 뒤통수를 향해 그는 입을 열었다. "이 정도 온 거면 된 것 아닙니까. 룬은 어느 지점쯤에 써야 되는 거죠?" "좀더 올라오라고." 질 선생의 눈이 아까 헥토르의 발길질로 부서진 문으로 갔다. 안쪽에서 희미한 안개의 기운이 느껴졌다. 마음에 들었다. 그는 미소지으며 돌아섰다. 그의 손에는 좀 전에 헥토르가 갖고 있던 것과 거의 비슷한, 그러나 크기는 훨씬 작은 덩어리가 꼭 쥐어져 있었다. 모든 것은 잘 끝날 것이다.... 두 놈은 죽고, 그는 살아남아 오랜 욕망을 이룰 것이다. 심판하시는 달여왕이 굽어볼지라도 두렵지 않다. 그는 이미 너무 오랫동안 차별 대우를 받아왔으므로. "얼른 올라와서 좀 도와달라고!" 헥토르가 못내 찜찜한 마음을 거두지 못한 채 계단을 세 개째 오르는 순간이었다. 콰앙! 엄청난 기세를 가진 무언가가 반쯤 망가진 문을 산산히 부수며 밖으로 튀어나왔다. 문 앞에 서 있던 질 선생은 말할 것도 없고 헥토르마저 충격에 퉁겨져 나가 계단 아래로 굴렀다. 아픈 것도 다 잊고 허겁지겁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순간 두 사람의 얼굴은 경악으로 굳어져 버렸다. "저, 저게... 뭐... 지......." 그것은, 대낮에 제정신인 사람의 눈으로 볼 만한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검은 안개가 점차 번뜩이는 칠흑 빛 덩어리로 변하고 있었다. 서서히 구체화되어 갔다. 머리까지 대략 2미터, 그러나 높이 솟은 검은 날갯죽지가 몸을 감추며 접혀 있어 생김새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곧 날개는 펼쳐졌다. 눈 깜짝할 사이, 그것은 하늘을 뒤덮을 듯한 거대한 천막으로 변해 있었다. 시야가 묻혀 버리는 듯한 착각을 느끼는 순간, 날개를 빙 둘러싸며 달린 야수의 이빨 같은 발톱들이 허옇게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날개가 한 번 펼쳐지자 그 존재는 이미 계단 아래에 내려와 있었다. 산자의 사지를 굳게 하는 사나운 눈빛은 진홍의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러나 진짜 공포는 그것이 입을 벌렸을 때 왔다. ............... ...... .........! 귀를 틀어막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은데도 고막이 터져 나갈 듯한 진동이 계속되어 귀를 막은 손마저도 덜덜 떨렸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귓구멍으로 뇌수가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몸 안의 압력이 증가하고,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미칠 듯한 고통 그 자체였다. "가... 으...... 세서......."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음을 내뱉으며 질 선생, 질레보는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폐허의 먼지와 날카로운 돌조각들이 무릎을 긁고 팔다리를 찌르는데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미 앞도 보이지 않는 듯 했다. 괴물이 있는 쪽으로 기어가고 있는데도 스스로는 알지 못했다. 시잇! 계단 아래쪽에 있었던 탓에 괴물로부터 좀더 먼 곳에 내던져져서 질 선생보다는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었던 헥토르는, 일어난 모든 일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괴물의 날갯죽지에 박힌 가장 거대한 송곳발톨 두 개가 흡사 로프가 달린 것처럼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 중 하나가 곧장 질 선생의 등을 뚫고 들어가 몸을 관통한 채 바닥의 포석을 부수며 박혔다. 기어가던 질 선생의 몸이 멈췄다. 눈과 귀, 코... 모든 구멍에서 피가 솟구쳤다. 그러나 가장 많은 피는 포석으로 쏟아져 내렸다. 말라붙은 혈관처럼 갈라진 돌 틈새로 붉은 핏줄기가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폐허의 땅에 샘이 솟아난 양....... 그리고 다른 하나는 보나 낮게, 얼굴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퍽! 그 직전, 무슨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그러나 눈앞까지 다가온 종말이 더 빨랐다. 흡사 폭죽처럼 터져 버린 두개골에서 흰 덩어리 붉은 덩어리가 반죽처럼 튀어나와 사방에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미 바닥에 남은 것은 인간의 시체가 아니었다. "아아......." 헥토르는 몸을 떨었다. 아니, 그가 떨 수 있는 모든 것, 심지어 영혼조차도 떨고 있었다. 모든 것이 최악이라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온통 휩쌌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고 이제부터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떠올릴 정신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한 소년을 살해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상상했던 죽음은 지금 본 것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제야 느끼고 있었다. 죽음이 깔끔하게, 단순하게 끝날 수 있는 것이었던가. 저 푸줏간의 피반죽으로 변해버린 자도 죽은 것이요, 그가 저 안에 남겨두고 온 소년도 죽은 것일지니.......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입술에서 어린 시절 이후로 한 번도 불러보지 않은 이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왕이시여......." 다프넨은 눈을 떴다. 언제부터 눈을 감고 있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많은 것을 보았고, 많은 시간이 흘러갔음은 틀림없는데... 어둠과, 늪과, 불타는 저택을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계속해서 그의 머리와 시야를 몽롱하게 하던 녹색 안게도 어느 정도 걷혀 있었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왜 자신은 아직 죽지 않고 있는 거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그의 몸이 이제는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옆에 검이 떨어진 것이 보였다. 당장 그걸 집으려다가 갑자기 손을 움찔했다. 그는 흠칫 놀라 그의 손을 보았다. 멈추려 한 일이 없었는데 손이 저절로 멈춘 것이다. 다시 천천히 검을 향해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손끝이 검자루에 닿으려 하는 순간 다시금 저절로 움찔, 하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가슴이 크게 한 번 요동치면서 무언가 모를 부정이 마음 속에 또렷하게 떠올랐다. 잡아선 안 돼. 다프넨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무엇 때문에 검을 가져가지 않는다는 거지? 밖에는 헥토르가 있을 지도 모르고 다른 무슨 일이 벌어졌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그래도 잡아선 안 돼. 하지만....... 안 돼. 다프넨은 결굴 검을 잡지 않은 채 늪을 천천히 우회하여 문을 향해 갔다. 늪이 서서히 요동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흡사 저 아래 큰 구멍이 있어 새로운 물이 솟아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윽고 문이 가까워졌을 때... 아니, 이미 존재하지 않는 문이 있던 자리를 보고 그는 우뚝 멈추어 섰다. 문뿐 아니라 벽까지 뜯겨나간 채였다. 무언가 커다란 것이 통과해 지나간 것 같았다. 또 하나, 늪에서 나온 더러운 덩어리와 물자국들이 사방에 얼룩져 있었다. 늪에 빠진 누군가가 몸을 일으켜 단숨에 뛰어나간 것처럼. "......!" 꼭 한 번 이와 같은 것을 본 일이 있다.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한 번 부르르 떤 그는 밖으로 뛰어나 왔다. 그리고 두 가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하나는, 바로 문 앞 왼쪽에 가만히 놓여 있는 윈터러였다. 그는 검을 그 자리에 놓은 일이 없었다. 다른 하나는 계단 아래... 가증스럽게도, 낮의 태양이 뿜는 빛에도 아랑곳 않고 우뚝 서 있는 자... 기억 속의 대적. "으아아아아아!" 거의 목전까지 다가온 죽음에서 달아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던 헥토르는 귀를 찌르는 외침을 들으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 순간, 이 자리에서, 공포가 아닌 외침이 그의 귀에 들릴 수 있는 것일까? 움직이지 않는 괴물의 어깨 너머 솟은 계단, 그 위에 죽었다고 생각한 소년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소년은 빈손이었으나 바로 곁에서 서서히 희한한 광채를 내뿜기 시작하는 검이 있었다. 분명 그가 저 소년을 공회당 안에 내버려두고 나올 때는 보지 못했던 검, 스스로 움직여 원하는 곳으로 간 듯한 그것이 거기에 있었다. "죽음... 죽음... 그 많은 죽음! 네겐 아직도 빼앗아 갈 삶이 남았단 말이냐!" 주위의 모든 것이 지워지며 오직 한 존재만이 보였다. 다프넨은 몸을 수그리며 단숨에 윈터러를 집어들었다. 동시에 그의 발은 달리고 있었다. 이 순간의 행동은 용기도, 만용도, 그 뭣도 아니었다. 반각성 상태에서 현실과 꿈이 뒤섞여 버렸다. 지금의 그는 옛날 에메라 호수 앞에서 형을 내버려두고 달아난 어린아이였으며, 동시에 그것을 갚고자 하는 또 다른 소년이었다. 희게 빛나는 날이 높이 쳐들어졌다. 계단 몇 단을 남겨둔 상태에서 그는 몸을 날리며 힘껏 적의 날개를 베었다. 아니, 메었다고 생각했다. 스아아아아....... 쓰러져 있던 헥토르는 그 순간이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임을 알았다. 놀랍게도 괴물이 다프넨의 검을 피해 한쪽 날개를 접으며 반대쪽으로 뛰어올랐던 것이다. 재빨리 몸을 일으킨 헥토르는 죽을 힘을 다해 달려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야릇한 죄책감이 그의 발목을 잡아 멈추게 했다. 방금 전, 질 선생의 죽음을 보며 느낀 최악의 공포가 다시금 되살아났다. 그것을 보며 그는 살인이람 행동이 가볍지 않음을 처음으로 느꼈다. 달여왕의 가르침대로 죄 있는 자와 죄 없는 자, 누구나 그렇게 아무 때나 순식간에 죽을 수 있고, 또 죽어 마땅한 거라면 왜, 왜 자신의 삶에는 남은 가치가 있다고 믿는단 말인가? 한 번 어긋나면 쉽게 죽인다고 말하고, 또 죽여버리곤 하는 섬의 모든 인간들은 과연 자신의 죽음에 대해 실감나게 느껴본 일이 한 번이라도 있을까? 없겠지, 그들은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까. 손가락 한 번 올리는 순간 목이 끊어져 날아갈 수도 있음을 똑똑히 느껴본 자만이 다른 자의 삶에 끝을 선고할 자격이 있겠지, 아니, 어쩌면 실제로 죽어본 자만이 다른 누군가를 죽여도 좋을 것이다! 그는 돌아섰다. "다프넨!" 다프넨은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 큰 몸집에도 불구하고 놀랄만한 속도로 움직여 피하는 괴물을 쫓아 몇 번이고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고 있었다. 다프넨의 과거를 알 길이 없는 헥토르는 그가 한 때 죽이려고 생각한 저 소년의 용기가 경이롭게 생각되었다. 자신이라면 무슨 보상이 주어진다 해도 저렇게 하지 못할 것 같았다. 검을 고쳐 쥐었다.상대에게 감사하거나, 또는 사죄하고자 하는 마의 백성... 그 가르침을 받들며 살아온 생애만큼 보상할 것도 남아 있을 것이다. "이것도... 받아라!" 떨리는 검끝이 괴물의 등이 있는 쪽을 찔렀다고 생각했을 때, 그의 몸은 이미 허공을 날고 있었다. 무엇에 얻어맞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눈앞이 캄캄해져 갔다. 그러나 가슴에서 솟구쳐 오르는 뜨뜻한 핏줄기에 한 손을 대어 적시며 마음이 아득히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5. 겨울의 핵 그것은 대등한 싸움이 아니었다. 비록 쫓는 입장에 있긴 했으나 적에게 아무런 위기감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적은 다프넨을 피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검을 피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만일 저 괴물이 에메라 호수의 그 놈과 같은 종류라면 어째서 윈터러를 피하느가? 그거조차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당시의 예프넨도 분명 윈터러를 잡았었는데, 지금과 같은 식이라면 어째서 안전하지 못했단 말인가? 그러나 깊이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멈칫거리면 바로 상황이 달라졌다. 괴물은 결코 다프넨이 좋아서 봐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회만 난다면 윈터러를 피해 재빠르게 소년의 목을 따버릴 것이었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힘을 가지고 있었다. 저 안개 불빛 같은 눈동자와 뼈가 드러나 보이는 날개는 낮의 햇빛 아래서 보았을 때 더욱 더 혐오스러웠다. 그것이 늪의 어둠에 숨어서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대낮에도 활보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그의 증오심을 부채질했다. 그는 어둠 속에서 가족을 잃었다. 그러니 괴물도 어둠에서 나와서는 안 되었다. 기억 속의 고향은 황량하고 습한 땅이었으며, 그의 어린 시절을 장악한 암흑도 모두 거기에는 나왔다. 괴물은 거기에 머물러야 했다. 그가 되돌아가기 다시 쳐죽일 때까지, 그 땅에 저주 받은 생명인 양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잊었던 것인가. 아니었다, 결코, 그의 본능만은 잊지 않고 있었다. 그에게 단 하나 남은 복수의 대상이 있다면 바로 그 놈이었다. 형은 삼촌에게 복수하지 말라고 했지, 괴물을 죽이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이제야 깨달았다. 이것만은 약속 밖의 일인 것이다. "넌... 넌...... 내 금기의 대상이 아니야!" 죽어 가는 형과 마지막으로 한 약속들이 얼마나 무거웠던가. 잊을 수도 저버릴 수도 없는 그 약속들이야말로 무언가를 추구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앗아가고 도피를 원하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지금껏 스스로 깨닫지 못했으나 지금만은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의 삶을 억눌러 온 것, 그의 마음을 닫아걸어 버린 것, 무기력하게 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게 만든 것, 그것은 그의 삶 전체에 암시처럼 걸린 금기였다. 죽도록 하고 싶은데도, 해서는 안 되는 복수. 본래는 결코 소심하지 않은, 그의 본성과 맞지 않았던 주문. 검이 언뜻 빨라졌다고 생각한 것은 순간이었다. 희게 번뜩이기 사작한 윈터러가 어느새 뻗어나가 괴물의 왼쪽 날개를 쭉 찢고 있었다. 내려오던 검에 발톱 두 개가 걸려 그대로 잘라졌다. 피가 아니, 회색 안개 비슷한 것이 뭉클뭉클 솟아 나오는 것이 보였다. 오히려 당황한 것일까, 그는 잠시 멍해졌다. 괴물의 눈에 박힌 불덩어리가 맹렬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찢긴 날개는 흡사 연기를 내뿜으며 불타는 듯했다. 무언가 그 생명에 속한 것이 새어나가고 있었다. 싸아악! 다른 쪽 날개가 순식간에 그의 머리를 덮쳐왔다. 한쪽 날개에서만 송곳발톱 세 개가 동시에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예외적인 공격을 해버린 그는 무방비 상태였다. 팔은 뻗어진 채로 거두지 못했고, 검은 먼 곳을 찌르고 있었다. 끝을 예감한 겨를조차 없었다. "......." 끝나는 대신, 낯선 소음이 바로 오른쪽에서 들려왔다. 날카로운 금속이 서로 부딪는 소리였다. 쨍! 돌아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럴 수 있었다. 날카로운 쌍검이 괴물의 오른쪽 날개를 한 번, 또 한 번 십자형으로 긋는 것이 보였다. 윈터러가 한 것처럼 찢어버려진 못했으나 충분히 위력적인 상처였다. 공격이 성공하자마자 가뿐히 몸을 솟구치며 뒤로 한 바퀴 돌아 내려섰다. 모든 것이 수초 안에 이루어졌다. 두 개의 검을 교차시켰다가 한쪽만 올리며 재방어 태세를 갖추는 것까지,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이솔렛이었다. 그녀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날렵하고 빠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전체적 움직임만 보일 뿐 개개의 동작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신속했다. "당신이... 어떻게 여길?" 갑자기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세 걸음 멀찍이 뒤로 물러서면서 오른쪽에 선 그녀를 보았다. 이솔렛은 왼쪽 검을 가로로 꺾어든 채 눈높이까지 올리고, 오른쪽 검은 금방이라도 공격할 수 있도록 도사려 잡고 있었다. 쌍검을 쓰는 사람을 본 일이 없기 때문인가, 대단히 낯설고 특별해 보이는 자세였다.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옆을 돌아볼 여유도 있다니 좋겠구나." 흠칫, 하는 순간 이솔렛의 발이 다시 바닥을 박찼다. 두 걸음 내닫자마자 곧장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할 듯한 도약, 그리고 변칙적인 비틀기와 내리찍기, 왼쪽 검이 달려드는 송곳발톱의 공격을 퉁겨 미끄어뜨리고 오른쪽 검은 등 뒤를 쓸며 내려갔다. 다시 말해 그녀는 2미터에 달하는 괴물의 키를 넉넉하게 뛰어넘어 버렸다. 도무지 몸을 아끼지 않는 공격 방법이었다. 즈즈즈즈즈....... 괴물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지금껏 거의 소리를 내지 않던 괴물이 흡사 신음소리 비슷한 괴성을 지르며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다프넨은 반쯤 얼이 빠져 있었다. 자신이 지금 본 것은 마법이 아니면 착각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분명 착각은 아니다! "위험해요!" 저도 모르게 소리질렀다. 돌아선 괴물의 양 날개에서 여섯 개나 되는 송곳발톱이 바닥에 착지한 이솔렛을 덮쳐 가는 것이 보였다. 다프넨은 앞 뒤 볼 것도 없이 달려들어 괴물의 등을 찔러갔다. 피직! 검은 정확히 괴물의 등 한가운데를 찔렀지만 그의 손에 느껴진 것은 허공을 뚫는 듯한 맥빠진 감각이었다. 놀라 검을 빼는데 윈터러가 찌른 위치에 뚫린 구멍이 마치 안개로 만들어진 양 흩어지다가 다시 메워지는 것이 보였다. 이 괴물은 몸이 없단 말인가? 그러는 동안 이솔렛은 상하좌우에서 날아드는 발톱 가운데 첫 번째를 피하고 두 번째를 쳐내며 세 번째, 네 번째의 격돌 지점보다 더 먼 곳으로 펄쩍 뛰어 물러났다. 그녀의 순간적인 도약력은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것이라 순식간에 그녀는 계단 중간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것도, 뒤로 뛰어서. 이제 괴물은 멈칫하며 새로 나타난 적을 경계하고 있었다. 다프넨은 새삼 이솔렛, 그리고 이솔렛을 가르쳤다는 일리오스 사제의 능력이 달리 보였다. 저 엄청난 도약은 분명 마법의 힘이 가미된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매번의 정확한 착지, 그리고 허공에서의 자세 전환과 같은 것은 도약이 가능하다 해서 결코 누구나 손쉽게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위기는 이제부터였다. "물러나요, 이솔렛!"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다급한 예감이 그를 그렇게 외치게 했다. 제발, 제발... 이솔렛이 펄쩍 뛰어 계단 위 공회당 입구까지 오르는 순간, 다시 한 번 거대한 공기의 파동이 터져 나와 전면을 뒤덮었다. 벽의 절반이 부서지고, 남은 문이 산산이 날아가고, 그 안의 늪이 요동쳐 솟아올라 맞은편 벽에 맥질 되는 가운데 이솔렛은 이미 옆으로 몸을 솟구쳐 계단 아래에 착지해 있었다. 그리고 머뭇거리지 않고 다시 괴물의 옆구리를 공격해 갔다. 왼쪽 검이 방어를, 오른쪽 검이 공격을 맡는 자세는 그대로였으나 이번에는 낮은 베기였다. 협공이 필요함을 느끼고 다프넨 역시 왼쪽 날개를 향해 검을 겨누어 달려들었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마음 속에서 어렴풋한 공포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 괴물은 에메라 호수의 그놈보다는 훨씬 체구가 작았다. 똑같이 사악하고, 똑같이 위협적인데도 그 점이 적지않게 마음을 안정시켜 주고 있었다. 그러나 우세를 잡았다고 생각한 것은 짧은 착각에 불과했다. 갑자기 괴물의 날개가 쫙 펼쳐지더니 놈은 한 순간에 수십 미터 위로 비상했다. 날개가 있다면 용도도 뻔한 것인데 잠시 잊었더란 말인가. 태양을 등진 거대한 그림자가 두 사람을 휩쌌다. 가로막힌 하늘에 역광이 타올랐다. "다프넨, 비켜!" 이솔렛은 그녀가 스승 역할을 해 온 탓인지, 또는 검술이 보다 낫다고 생각했음인지 조금이라도 다프넨을 보호하려 했다. 아직까지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조차 알지 못하는 다프넨은 자신의 일에 그녀를 희생시킬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검을 허공으로 쳐 올렸다. 곧 다시 있을 하강을 기다리면서. 위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다. 오직 위에 있는 자만이 화살을 어느 쪽으로 쏠 지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상공에서 멈춘 괴물은, 다프넨이 아니 이솔렛을 향해 쇄도해 내렸다. 타탁! 이솔렛이 다시금 땅을 박차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등지고 있어 직접 보지 못했지만, 충분히 피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다른 쪽을 공격하느라 허점을 보인 괴물을 사냥하려 마음먹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는 다시 한 번 그의 머릿속을 파고드는 이상한 목소리를 들었다. '구하고 싶나? 그러면 내 노예가 되겠다고 말해!' '내 노예가 되겠다고 말해!' '내 노예가 되겠다고 말해!' 뭐라고? 판단이 가능할 정도의 시간이 아니었다. 순간, 또는 영원히 흐르고 귀가 다시 열리는 순간, 짧은 비명이 그의 귀를 찌르고 들어왔다. "아!" 몸을 돌렸다... 그러나 늦어 있었다. 괴물의 몸에서 스무 개에 달하는 송곳발톱이 단번에 튀어나온 모습을 보았다. 심지어 빈 공간이라고 생각되었던 몸에서조차 날카로운 뼛조각들이 튀어나와 동일한 공격에 가담해 있었다. 빈틈이라고는 없었다. 검 두 개가 모두 방어로 전환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도약을 미리 의식한 듯한 한 개의 발톱이 멀찍이 포물선을 그리며 돌아와 그녀의 왼쪽 어깨를 뚫어버렸다. 갑자기 오래된 악몽이 번쩍이며 그의 정신을 지배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검게 변해버린 기억의 알이 껍질을 깨고 다시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예쁜 아이로구나. 내 너를 삼킬 수 있게 이리 가까이 오렴.' '죽음을 줄까? 아니면 죽음보다 더한 상처를 줄까?' '그 검이로구나. 그걸 지닌 자는 반드시 길고 긴 살인자의 밤을 지새게 된다는 것을 모르니?' 이 선명한 목소리들이 언제 그의 기억 속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지? 눈앞은 암흑 속의 에메라 호수였다. 거대한 괴물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었다. 어째서 그와 예프넨이 괴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인가. 그때의 괴물은 지금 놈의 세 배에 달하게 크고, 그와 예프넨에게는 이솔렛과 같은 마법도, 다른 무엇도 없었는데, 윈터러는 지금과 같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괴물은 전면전 따위는 필요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지 않은가. 오히려 그에게 저렇듯 침착한 목소리를 들려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왜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할까. 예프넨과 함께 황야에서 지낼 때 모든 기억이 되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단 말인가. 그러나....... "용서 안 해!" 자신은 달려가고 있었다. 한결 차가운 빛을 내뿜는 윈터러를 두 손으로 쥐고, 날카로운 모서리 때문에 손이 아픈 것조차 느끼지 못한 채 달려들어 베고 있었다. 다시금 날아드는 송곳발톱들을 피해 구르고, 뛰고, 미치도록 분노하여 날뛰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낯선 자신이 있었다. 그 자신은 분노하고 있는 자신을 보며 말하고 있었다. '한 번 당했던 일을 또다시 되풀이하는 어리석은 자, 그런 자에게도 용서란 있을까?' 아아... 아니라고 하고 싶다. 그러나 지금 그는 예프넨을 잃은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또 다른 사람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지 않은가. 무능력과 방심, 동일한 패턴의 되풀이. "넌......." 이솔렛은 바닥에 무릎만을 절반 꿇은 채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공격당한 어꺠는 흡사 검은 물이 든 것처럼 시커멓게 변했고, 팔 쪽으로 느리게 상처 부위를 넓혀갔다. 아프지는 않았다. 그러나 팔 전체에 오한이 일어 도저히 검을 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버티려 했으나 결국 왼쪽 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치욕적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보았다면 무어라고 했을까. 돕겠다고 나선 주제에 이렇게 속수무책이 되어버린 꼴을 보았더라면 분명 통렬하게 한 마디 던지셨겠지. 그런 다음 어리석은 딸을 도와주러 뛰어드렸을 것이다. 아... 이 무슨 쓸모 없는 생각인가. 자신이 왜 이렇게 나약해져 있는지 몰랐다. 다치더라도 그것으로 그만, 죽더라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고 따라서 전투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없었던 자신이었다. 아니다, 지금의 그녀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았다. 썩은 팔쯤이야 잘라내면 된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 몇 배로 무책임, 패배감, 타인에 대한 의존과 같은 것이 두려웠다. 심지어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이곳까지 단숨에 온 것은 다프넨에게 본의 아니게 지고 만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빚을 갚지 못하고 있느니 당연히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마음이 흔들려 견딜 수가 없었다. 다프넨이 혼자서 벅찬 적을 상대로 고전하는 것을 보니 미칠 듯 불편하고 심기가 어지러웠다. 이것이 단순히 죄책감이나 무력감때문이란 말인가? 다프넨의 윈터러는 이솔렛의 검과는 달리 송곳발톱들을 부숴 버릴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이솔렛이 하듯 속검으로 사용할만한 검은 아니었다. 몇 번이나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넘겼지만 내내 위태로웠다. 오래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솔렛은 억지로 일어섰다. 그리고 남은 오른쪽 검을 힘주어 잡았다. 왼쪽 팔은 여전히 축 늘어뜨린 채였지만 팔 하나쯤 없는 걸로 생각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싸움이 끝나고 모르페우스 사제에게 말해서 잘라 버리면 될 거다. 그나마 오른팔이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오른팔이었다면 그 불편함 때문에라도 귀찮아서 죽어버렸을 지 모르는 일 아닌가. "비켜!" 양 가죽 신을 신은 두 발이 바닥을 차고, 용수철 같은 무릎이 탄력을 위로 전달했다. 뛰어올랐다. 다프넨의 앞을 가로막는 것과 동시에 오른쪽 검이 정면을 찔러갔다. 달려드는 괴물의 송곳발톱을 비스듬히 비껴 내어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발톱은 아래로 꺾이며 괴물의 하체에 명중했다. 소리 없는 비명이 고막을 울렸다. 사방이 윙윙거렸다. 다프넨은 한 손으로만 검을 쥔 채 돌아선 이솔렛의 뒷모습을 보았다. 갑자기 심장을 송곳으로 후비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뒷모습...... 뒷모습 따위는 싫은 거다. 왜 그들은 모든 위험을 무릅쓸 듯 막아선 채 뒷모습을 보이는 건가. 그가 예프넨을 회상할 때마다 떠올린 세 가지 모습 가운데 하나는 한 손에 검을 쥐고 동생을 막아선 뒷모습이 아니었던가. 다시 보서지는 기억의 알들... 이제는 폭죽처럼 터지고 있다. 올올이 되살아나서는 먼 곳에 있는 다른 알들을 향해 뻗어가고 있다. 돌아와 줘, 기억이여, 내 것인 만큼 내 손으로 부수도록. 예프넨의 뒷모습 너머로 타오르던 모닥불 대신 태양의 역광이 검은 실루엣을 이루었다. 윈터러를 빼앗으려 했던 좀도둑들 대신 거대하게 도사린 괴물이 있었다. 이윽고 두 영상이 겹쳐지며 완전히 같은 것으로 변했다. "결코... 이번엔 그렇게 안 하겠어." 강하게 되뇌었다. 되풀이해서, 기원이 자라나 마법의 주문이 될 정도로 아프게 되뇌었다. 죽지 않겠다고 했지만 결국 다른 한 사람의 죽음을 밟고 올라가 살아났을 뿐이었다. 이번에는 누구의 죽음이 디딤돌이 되지? 아직도 어린아이인가? 어쩌면.... 그렇지만 어리다고 해서 다인가? 잃은 후에 후회하는 체 괴로워하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이지? 죽은 자를 위해 흘리는 눈물인가, 산 자를 위한 안도의 한숨인가. 아니야... 아니야! 언제까지나 다른 누군가의 등을 바라보가 있을 수는 없어, 턱없이 부족한 실력이라 해도 이번에는 그 진실을 뒤집겠어....... 내게 날아오는 화살은 내 몸으로 받아내고야 말겠어! "네 상대는 이쪽이야!" [네 의지가 네 손이 되도록.] 비껴 들린 윈터러의 끝에서 바람깃 같은 빛이 흩날리고 있었다. 이솔렛은 분명 그것을 보았다. 그녀의 옆을 지나쳐 단숨에 괴물을 향해 뿌려지는 검에서 번뜩이는 광채가 뻗어나가는 것, 흡사 검을 적신 물줄기처럼 뿌려지는 그 빛을. [네 안에서.] 검 끝이 닿은 것일까, 검에서 솟아난 빛이 가 닿은 것일까. 밤하늘을 가르는 은하수처럼 암흑의 육체를 가르는 눈의 빛. 날개를 자르고 몸을 뚫고 다시 다음 날개 끝까지, 완전한 사선의 단면이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어째서... 그 베인 단면과 괴물의 모습이 두 장의 그림처럼 따로 분리되어 보이는 것일까. 자르르르륵. 검날에 방울져 맺혔다가 떨어져 나온 빛들이 이솔렛의 발치까지 굴러왔다. 그것은 얼음이었다. 햇빛 아래 쉽게 녹지도 않는 단단한 얼음 조각들이었다. [함께... 있어.] 파바바바밧! 바람이 일어나 사방을 휩쓸어갔다. 날아오를 수 있는 가벼운 것들이 모조리 솟아 맹렬히 허공을 맴돌았다. 흐름의 근원은 윈터러가 베어낸 상처의 틈새였다. 그 안에는 암흑이 흐르고 있었다. 이 세상의 것을 빨아들이려 했으나 어떤 힘에 가로막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이계의 힘이었다. 다프넨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 역시 이솔렛만큼이나 높이 뛰어오를 수 있었으며, 또한 그만큼이나 빠르게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그에게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인지 이솔렛은 몰랐다. 그러나 다프넨은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친구가 그의 몸 안에 들어와 힘을 빌려주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육체가 지닌 능력을 몇 배로 증폭시켜 발휘하게 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의 힘, 그의 속도, 심지어 그의 눈이 볼 수 있는 시야조차도 몇 배로 늘어나 있었다. 그야말로 인간 이상의 단계, 다름아닌 강령의 상태였다. 두 영혼이 함께 내찌른 검이 다시 한 번 괴물의 가슴을, 인간이라면 심장이 있을 그곳을 깊숙이 찔렀다. 찌른 자리에서 갑자기 하얗게 언 눈이 솟아나는 것이 보였다. 눈과 얼음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거대한 결정체를 형성해갔다. 흡사 여섯 방향으로 자라나는 나뭇가지들 같았다. 그것은 이윽고 얼음의 감옥으로 변했다. 윈터러 역시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검날에 씌워진 살얼음이 서서히 올라가 검을 쥔 다프넨의 손까지 뒤덮었다. 아예 그의 손을 검과 하나로 만들어버리려는 듯했다. "아아......." 이솔렛은 한 발작 물러나며 주워들었던 얼음 조각을 툭 떨궜다. 괴물은 이제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괴물을 가둔 눈 성채가 서서히 주위의 땅을 삼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대지가 겨울로 변하고 있었다. 겨울의 검이 꽂혔던 곳은 중심으로 거대한 얼음의 꽃이 피고 있었다. 다프넨이 선 곳은 물론, 이솔렛의 자리를 넘어 사방의 폐허들에 이르기까지. 이계로부터 온 멸망의 힘. 겨울의 핵이었다. 3장. Maze of the Windward 1. 희생, 또는 갚을 수 없는 빚 "큰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산 위의 마을로 오르는 오솔길에서 발을 멈춘 데스포이나가 이윽고 긴 한숨을 토해냈다. 모르페우스가 우려 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우플리온 역시 멈춰선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무언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니,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마음 속 예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서 가자.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가야 돼." "......." 애써 손을 뒤덮은 얼음을 밀어내려 애썼다. 그러나 쉽게 되지 않았다. 분명히 방금 생겨난 얼음이었는데 순식간에 수백 년 묵은 얼음으로 변한 양, 손바닥이나 입김이 닿는 정도로는 물기조차 생기지 않았다. 머리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고드름으로 만들어진 감옥 안에서 이미 괴물의 형체는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흡사 검은 얼룩처럼 반쯤 녹아 내린 채 잔해로 변해 달라붙어 있었다. 자신이 한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 몹시 두려웠다.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검 역시 섬뜩한 존재였다. 이미 시야를 벗어나 버린 얼음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 갑작스러운 겨울은 섬 전체를 얼음으로 뒤덮어 버릴 지도 몰랐다. 결국 손에 달라붙어 버린 윈터러를 내려놓지 못한 채 다프넨은 몸을 돌렸다. 한 걸음 옮겨놓으려다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검을 바닥에 짚었다. 검이 닿자 그토록 까딱도 않던 얼음이 쩡, 소리를 내며 깨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이솔렛... 당......." 다프넨은 갑자기 입을 벌린 채 말을 멈추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두 가지로 울려나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마음속에서 조그맣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에게로 가.] 당황해 있는 다프넨을 보며 이솔렛이 입을 열었다. "네 몸 안에 낯선 존재가 들어와 있구나. 우호적인 혼이니?" 갑자기 이솔렛은 흠칫했다. 다프넨의 입을 빌려 다른 목소리가 해답해 왔기 때문이었다. 소년의 맑은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너는 참 아름답구나.] "아......." 다프넨은 어쩔 줄 몰라하며 고개를 저은 뒤 단숨에 이솔렛 앞으로 달려왔다. 그 앞에 앉으면서 그녀의 왼쪽 어깨와 팔 절반을 삼켜버린 검은 얼룩을 보고는 다시 한 번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저 괴물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괴물로부터 입은 상처가 가져오는 결과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솔렛... 이건... 안 돼요......." 이번에는 그 자신만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었다. 이솔렛은 침착한 눈으로 다프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오른쪽 어깨를 살짝 움직여 보였다. "이 팔 때문에 그러니? 잘라버리면 되는데 뭘 걱정해." "자, 자르다니요!" 그 말도 충격이었다. 팔을 자르다니? 그게 그리 쉽게 할 수 있는 말인가? 그보다도 팔 하나가 없는 그녀의 모습이... 감히 상상되지도 않았다. 이조차도 그의 이기적인 시각인가. 그러나 팔을 잃으면 그녀는 쌍검을 들 수조차 없게 된다. "그러니까 넌 달 여왕의 아들이 아닌 거야. 난 처음부터 네가 달 여왕의 자손이 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이솔렛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러나 그녀는 진실을 모르고 있었다. 팔을 자르는 것도 안되지만... 팔을 자른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다프넨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이솔렛은 오히려 자신이 그을 위로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성한 오른팔을 들어 그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왜 그래. 스승이 제자를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물론 난 제대로 해내지도 못했지만 말이야. 네 탓이 아니야." 다프넨은 마구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왜, 왜 여길 온 거죠? 이 싸움은 내가 끝장내야 할 문제였어요. 당신을 끌어들이는 것은 바라지 않았는데......." "내 문제를 내가 해결하기 위해서 온 거야. 모욕당한 것은 나니까. 그건 내 문제였어." 그 말을 하면서 이솔렛은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자기 일은 자기가 책임지면 되는 것이다. 다프넨에게 다시 빚지지 않게 되어서 너무 잘됐어. 다시는 그런 마음의 빚 따위, 지지 않겠어. 그때 갑자기 다른 목소리가 불쑥 끼여들어 말했다. [정말 당신은, 그가 반해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구나.] "누구지, 넌? 다프넨의 몸 속에 있어?" 이솔렛은 강령술에 대해 무지하지 않았다. 다프넨이 그런 일을 할 줄 안다는 것은 몰랐지만 아버지로부터 들은 것도 있었고 실제로 본 일도 있었다. "이건, 그러니까......." 완전히 혼란 속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이솔렛의 목숨이 위험한데도 할 수 있는 일 하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팔을 자르겠다는 결정에 반대하려 했고,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원인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밝히고자 애쓰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이번에는 엔디미온의 존재조차 설명해야 되는 상황에 처해버렸다. 그런 저런 복잡한 문제를 모르는 이솔렛은 다시 한 번 되풀이해서 묻고 있었다. "다프넨 네게 물은 것이 아니야. 방금 내게 뭐라고 말했지? 누가 누구에게 반해 있다는 거야?" 이건 또 새로운 문제였다. 그가 뭐라 해명을 시도해보기도 전에 엔디미온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네 생각대로야. 그가 네게 반해 있다고.] 놀랍게도 이솔렛은 이렇게 대꾸했다. "그건 네 생각일 뿐이겠지. 만일 네가 죽은 자의 혼이라면 어서 다프넨의 몸 밖으로 나가도록 해. 갑작스러운 강령은 익숙하지 않은 자에겐 피해만 가져올 뿐이니까." [너도 그를 걱정하는구나. 그럼, 다프넨.] 자기 입이 한 질문에 자기 입으로 대답해야 하는 느낌은 참 어색했다. "고마워, 엔디미온... 뭐라 말해야 될지 모르겠다. 아까 네 도움은 내게 있어 정말로 절실한 것이었어." 엔디미온은 잠시 침묵하더니 뭔가 알아낸 것처럼 입을 열었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겠어. 그걸 해결하기 위해선 어떤 한 사람의 선택이 중요할 것 같구나. 아가씨 말대로 난 그만 가는 편이 낫겠어. 저 갑작스러운 겨울에 대해 궁금해하실 우리 어른들도 있고.] 절박한 심정이 그를 사로잡았다. 다프넨은 다급히 외쳤다. "너... 한 번만 더 날 도와줄 순 없니? 이솔렛을 도와줄 순 없는 거니? 그녀는......." [내 힘 밖이구나. 나는 이공간의 존재, 그녀의 상처는 이계의 것. 난 단지 예지만 가질 뿐.] 몸에서 그림자 하나가 슥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전과는 달리 엔디미온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무언가 허공을 움직여 간다는 것만은 어렴풋이 느껴졌다. 단지 착각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아가씨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다프넨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소리쳐 버렸다. "이솔렛, 당신 알아요? 당신 죽을 지도 모른다는 것 알아요? 팔을 자른다고... 치료되는 상처가 아니란 말이에요! 나, 나는 이 상처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죠......." "무슨 소리야?" 겨울 벌판이었다. 심지어 입김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검과 함께 얼어붙은 손은 풀려나지 않았고, 두 사람의 발치에도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아 있었다. "난 저 괴물을 알아요. 고향에서......." "나도 알아." 잠시 후 놀라운 대답이 뒤따랐다. "내 아버지를 죽인 놈과 같은 종류지." "그렇다면, 그런데도 어떻게 이렇게 침착할 수가 있어요!" 이솔렛은 어깨의 검은 얼룩을 한 번 건너다본 뒤 무표정하게 말했다. "침착하진 않아. 연약해지고 싶지 않기 때문에 최선을 대해 버릴 뿐인 거지." "......." 둘은 서로의 눈을 마주보고 있었다. 연분홍빛, 연꽃 같은 눈동자 안에는 아득히 먼 흔들림이 담겨 있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생명도 있을까. 지기에 아깝지 않은 꽃도 있을까. 누구나 자신의 것이 더 소중한 법인데, 그럼에도 그를 마지막까지 초연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당신을 보내고 싶진 않아요......." 그것은 2년 전, 죽음을 택하려 하는 예프넨을 붙들고 해야 했을 이야기였는지도 몰랐다. 아니, 언제고 해야만 하는 이야기였을까....... 왜 이렇게 뒤늦기만 하는 것일까. 그들이 가려 하기 전에 날마다 마주 보며 목청 터져라 실컷 외칠 수도 있는 말이었는데. 떠나지 말라고... 혼자 두지 말라고. 남은 자의 짐은 너무도 무겁다고. "아직 8월인데, 겨울이 되어버렸구나......." 얼어붙은 나뭇가지로 가려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중얼거리는 이솔렛을 보며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와락. "......." 한쪽 손뿐이었지만 가능한 한 가까이, 꽉 끌어안았다. 왜 이렇게 되기 전엔 따뜻하게 해주지 못하고서 이제야 왼쪽뿐인 손으로 오른팔만 남게 된 사람을 어설프게 감싸려 몸부림치는 것일까. 이솔렛은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히 낮은 숨만 내쉬고 있었다. 차가운 얼음 위에 앉은 채 어색한 포옹을 받으며 파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죽음의 확인과 동시에 찾아온 애정의 확인, 어느 쪽을 먼저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르는 것처럼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 나지막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긴 밤 뒤에는 짧은 낮, 짧은 밤 뒤에는 긴 낮. 하루의 길이는 하루같이 같고 세상은 그렇게 이루어져 있다. 나우플리온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고드름을 만져 보았다. 쉽게 부러지지도 않는 얼음이었다. 데스포이나는 허리를 굽혀 바닥을 살피고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한여름에 겨울이라니요." "뒤틀린 의도는 뒤틀린 결과를 부르는 법이지. 한낮에 잠시 찾아온 밤처럼, 똑 같은 뒤틀림일 게다." 사각거리는 얼음을 밟으며 그들은 폐허의 마을로 들어섰다. 다행히도 눈과 얼음은 마을의 경계에서 멈춰 있었다. 그러나 마을 중앙으로 다가갈수록 얼음은 두꺼워졌고, 눈은 새파랗게 될 정도로 얼어 있었다. 공기 역시 겨울이나 다름없어 여름옷 차림이 세 사람은 추위를 느끼고 어깨를 움츠렸다. "조용하군요." 팽팽한 긴장감도 아닌, 그냥 침묵이었다. 서리를 밟아 부수는 신발 소리만이 크게 울렸다. 저만치 공회당이 보였다. 아니, 다시 말해 공회당이었던 흔적이 보였다. 네 벽 가운데 하나는 완전히 무너졌고, 그 옆의 두 벽도 날아간 상태였다. 공회당 앞 마당은 거대한 눈더미로 가로막혀 있었다. 눈더미를 넘어가기 전에 그들이 먼저 발견한 것은 쓰러진 소년이었다. 다름 아닌 헥토르였다. "이봐, 정신 차려!" 나우플리온이 당장 무릎을 꿇고 소년을 눈 속에서 끌어냈다. 옷이며 피부가 얼음에 달라붙어 있어서 당장 데스포이나의 마법이 필요했다. 온기가 주위에 퍼지자 따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얼음이 부서졌다. 그러나 녹은 것은 극히 일부였다. 손목을 끌어당겨 잡아보니 약하지만 아직 뛰고 있는 맥박이 느껴졌다. 상처는 가슴에 박힌 검 반 조각이었다. 심장을 비켜갔으나 출혈이 많아 쉽게 회복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이번에는 모르페우스의 차례였다. 나우플리온이 조심스레 검 조각을 뽑아내자 모르페우스의 한쪽 손에서 강한 치료의 빛이 쏟아져 나와 상처를 쪼였다. 외상은 어느 정도 아물었으나 의식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헥토르를 모르페우스에게 맡기고 나우플리온은 눈 더미 쪽으로 다가갔다. 데스포이나가 몇 걸음 뒤에서 따라오는 동안 그는 먼저 눈 더미를 넘어섰고, 그 안의 광경을 보았다. "......." 그는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한 발 물러섰다. 마치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양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데스포이나가 다가왔다. 두 사람을 발견한 그녀는 나우플리온의 얼굴을 먼저 쳐다보았다. 그리고 눈 더미를 헤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다프넨과 이솔렛은 서로 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또는 정신을 잃고 있었다. 바닥으로부터 올라온 얼음이 둘의 무릎과 다리를 나무뿌리처럼 움켜잡고 있었다. 팔이며 손, 목과 머리에도 하얗게 서리가 내려 마치 눈 덮인 조각상 같았다. 데스포이나는 둘의 목에 손가락을 대어 보아 아직 살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손을 내밀어 어깨를 쓸어 내려다가 다프넨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는 윈터러를 발견했다. 그 검은 소년의 손에 단단히 얼어붙어 있었다. 온기를 쪼인다 해도 쉽게 떨어지진 않을 듯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엇다. 검 자체의 표면에는 서리가 내렸던 흔적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심지어 검 끝이 닿은 바닥에 조차 얼음이나 눈이 녹아 사라져 있었다. 사방에 쌓인 눈조차도 감히 당하지 못할 정도로 희고 싸늘하게 번쩍이는 검을 보며 그녀는 참기 힘든 오한을 느꼈다. 문득 멀리 향한 데스포이나의 눈이 다른 것을 발견했다. 서리로 쌓은 작은 성채 속에 검은 얼룩과 껍질 같은 것이 걸려 있었다. 그 너머에는 또 다른 것이 있었다. 무엇일까... 인간의 시체처럼 보이는데. 나우플리온이 다가와 다프넨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의 입에서 약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그는 곧 끔찍한 사실을 발견하고 말았다. "......!" 데스포이나가 절망적인 예감으로 경직되어 있는 동안 나우플리온이 나직이, 그러나 침통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끝내... 예상하신 일이 벌어져 버렸군요......." 이솔렛의 어깨에 생겨난 검은 얼룩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나우플리온은 특히 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몸에 똑같은 상처가 있으며, 지금까지도 결코 사라지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가 지금까지 겉으로는 멀쩡한 양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일리오스 사제가 반쪽짜리 선물로 만들어 준 유예에 불과했다. 준비된 응보인 양, 그 일리오스 사제의 딸에게 또다시 생겨난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을 돌이킬 수 있는 것은 한때 배신 당했던 자기 자신밖에 없었다. 나우플리온은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결정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얼음 감옥으로 다가가더니 검을 뽑아 얼음을 후려쳤다. 처음엔 얼음 조각이 사방으로 튈 뿐이었으나 곧 그가 실력을 발휘하자 맨 앞을 가린 얼음이 모두 부서져 나갔다. 안에는 혼이 빠져나간 거죽 비슷한 것이 널브러져 있었다. 나우플리은은 이미 죽은 적의 가슴에 힘껏 검을 꽂았다. 언뜻 보아 맺힌 원한을 풀려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데스포이나가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는 가운데 나우플리온은 괴물의 가슴 아래부분을 헤쳐 하나의 붉은 보석을 뽑아내었다. 메추리알보다 조금 더 큰, 작은 불꽃처럼 타오르는 보석이었다. 이솔렛은 아주 오래오래 잠들어 있었다. 이미 열흘째였다. 데스포이나 사제의 집에서 한 번 깨지도 않고, 무엇을 먹지도 않고 그렇게 죽 잠을 잤다. 그러는 동안 어깨의 얼룩은 서서히 지워지고 있었다. 면회는 금지였다. 데스포니나가 그렇게 정했다. 다프넨 역시 한 번도 그녀를 보러 오지 못했다. 그러나 열흘 때 밝았던 날이 저물었을 때, 한 명의 방문객이 찾아왔다. 나우플리온은 빙긋 웃으며 데스포이나를 바라보았다. 둘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데스포이나였다. ?굳이 만날 필요가 없을 터인데." 나우플리온은 다시 한 번, 이번엔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깨어나면 영영 하지 못할 이야기가 있으니 이 기회에 해야지요." 잠시 후 데스포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쪽 방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침실 안은 조용했다. 환자를 위해 일부러 피워 놓은 벽난로 안에 걸어놓은 무쇠 단지만 가끔 달각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는 침대 머리에 다가앉더니 잠시 이솔렛의 얼굴을 보았다. 창백해진 이마에 흩어진 머리카락들을 보았지만 굳이 넘겨주지는 않았다. 그렇게 소녀를 내려다보는 그는 지친 눈빛이었다. "많이 힘들구나." 아무도 듣지 못할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냥 나직이 지껄였다. "너는 이제 곧 낫겠지.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좀 더 늦었더라면 분명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왔겠지." "난 많은 생각을 했어." 조금 후 그는 자세를 약간 고쳤다. 말하는 것이 힘겨운 모양이었다. "일리오스 사제님에 대해서 가끔 생각하곤 해. 그분은 왜 그렇게 매정하셨을까. 난 진심으로 그 분을 존경했지만 끝내 사랑할 수는 없었어. 그래서 널 보면 더 신기했지. 넌 어떻게 그런 사람을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로 대할 수 있었을까." "나만의 생각일 뿐이겠지. 그 분도 네게는 다정하고 좋은 분이셨을 테니까. 하지만 난 오랫동안 그 분을 원망해 왔었어.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해." "넌 아마도... 아니었겠지. 네겐 그런 기색이 없었어. 나와 똑 같은 일을 당했지만 나처럼 받아들이지는 않았어. 역시 부녀간이기 때문에 다른 걸까. 하지만 난 생각이... 그렇게 가지만은 않았지." 그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쉬었다. 가슴이 답답한 모양이었다. "역시 넌... 그 일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이야. 금방 잊어버린 거겠지?" "그래, 그래, 넌 열 살에 불과했으니까." 방이 더워서인지 나우플리온의 얼굴은 좀 달아올라 있었다. "너희 부녀에 대한 애증이 내 삶을 이토록 망가뜨렸는데도... 난 아무 것도 끝내지 못했지. 때로 난 유쾌하기만 한 인간이고 싶었 다. 또는 무엇에도 구애 받지 않은 자유로운 괴짜로 살고 싶었지. 하지만 아무 것도, 처음의 잘못된 매듭을 풀지 못하고, 매번 이 렇듯 되돌아와 보면......." 잠든 소녀의 평온하고 나직한 숨소리는 끝없이 이어질 듯했다. 그 가운데 짧고 거친 숨소리가 몇 번 간혈적으로 되풀이되고 있었 다. "섬으로 돌아와 너를 다시 보는 순간, 많이 풀었다고 생각한 매듭이 아직도 그대로라는 걸 알았어. 오히려 더 심하게 얽혀들어 있었지. 하지만 이번에는... 이번에는 풀 수 있을 것만 같아. 그 길을 알 것 같아졌어." "미안하지만 네게 '소통'을 좀 사용해야겠구나." 나우플리온은 두 손을 삼각형으로 모으더니 몇 개의 룬을 외우며 수인을 맺었다. 오래 전에 란즈미의 침실에서 말을 잃은 란즈미 의 마음과 대화할 때 쓰던 것과 같은 방법이었다. 이는 섬사람들 중 일부가 지니고 태어나는 특별한 마법적 천분 가운데 하나였다. 이를테면 에니오스(단센)가 거친 파도를 가라앉히는 '기원'을 드릴 수 있는 것처럼. 근원으로 돌아가는 잠 속에서 꿈인 양 들려오리라. 어머니 달빛이 그 마음을 두드려, 마음 깊은 곳에 새기리라. 나우플리온의 손이 다시금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그는 손을 이솔렛의 이마에 올려놓았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빛은 사라졌다. 그는 미소 지었다. "내가 아끼는 소년이 결국 내게 답을 주는구나. 난 정말 진심으로 그 애를 사랑하지. 친아들인 양 느낄 때도 있어. 하지만 친구 일 때 더 배울 점이 많은 아이지." "어서 일어나 가거라. 그리고 내가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 줘. 그렇게라도 네 생명과 내 생명을 바꿀 수 있어서 다 행이었어. 내가 너와 일리오스 사제에게 갚을 수 있는 마지막 빚이었겠지." "자, 이제 모두 끝났다. 네게도, 그리고 내게도 행운이 필요한 것 같구나. 하지만 네 행운을 더 빌어주마." "그러니 칭찬해 주렴." 그러나 그것은 슬픈 어감이었다 예전에 월넛 선생으로 불렸던 당시, 란즈미와의 소통을 끝낸 뒤 보리스를 쿡쿡 찌르며 장난스럽게 말하던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2. 미로를 들여다보며 그 해 여름에 벌어진 사건은 이후에도 다른 섬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폐허가 된 옛 마을은 역병과 괴물에 대한 기억 때문에 누구나 꺼리는 곳이었고, 따라서 그곳에 생겨난 거대한 겨울의 흔적에 대해서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눈과 얼음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데스포이나 사제는 윈터러를 가져오게 해서 조금 위험한 주문을 걸어 놓았다. 그 안에 든 힘이 무엇이든 일단 발현되지 못하도록 제어하기 위해 더 강하게 폭주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스포이나는 그 주문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다프넨 은 자신이 지닌 검으로부터 보호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주문 때문이든 다른 이유로든 검의 힘은 다시 잠든 듯 보였다. 질 선생의 사인은 어쩔 수 없이 은폐되었다. 세 사제들은 헥토르의 입을 통해 질 선생의 음모를 대강 짐작하였고, 에키온을 통해 서는 거의 확실한 전모를 듣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보호해야 할 존재는 둘이었다. 저 무서운 힘을 가진 검의 주인인 다프넨, 그 리고 살인의 음모를 꾸몄던 고귀한 지위의 두 소년.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죽은 자의 진실을 희생해서라도 일을 축소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긴 그건 죽은 자의 명예를 위해서 잘된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질 선생은 산에 올라갔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다. 엉망이 된 시체는 모르페우스 사제 가 대강 조작해서 그럴듯하게 고쳤다. 가족도 없었고, 외곬 성격 탓에 친하게 교류하며 지낸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달리 의구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헥토르와 다프넨이 결투를 벌인 사실은 숨기지 않았지만 장소는 다른 곳으로 바뀌었고, 그들은 다시 화해했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다프넨은 비교적 멀쩡한데 헥토르는 심하게 다친 터라 섬사람들은 이때부터 확실히 다프넨의 실력이 헥토르를 눌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헥토르는 이솔렛보다 더 늦게 회복되었다. 그의 가슴에 박힌 검은 사실 그 자신의 것이었다. 괴물의 발톱에 부딪치는 순간 검이 부러지면서 자신을 찌른 것이었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솔렛과 같은 방식으로 입은 상처였다면 그냥 죽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솔렛은 보름째 되는 날 깨어나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비밀을 아는 사람들 가운데 에키온과 오이지스에게는 사제들이 특별히 함구령을 내렸다. 하긴 에키온은 이번 일이 밝혀져 봤자 전혀 좋을 일이 없었다. 오이지스는 다프넨을 위로해서라고 하니 금방 수긍했다. 헥토르와 에키온의 부모와도 어느 정도 선에서 협상이 오갔다. 저들 자식들이 잘못한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라 달리 불만이 있을 수 없었다. 헥토르는 그 사건을 겪은 뒤로 이상할 정도로 과묵해져 버렸거니와 사람도 좀 바뀐 것 같았다. 전처럼 소년들을 이끌고 다니는 일 도 없어졌고 에키온과 함께 있는 모습도 좀처럼 볼 수 없었다. 스콜리의 수업에는 죽 나왔지만 파하고 나면 곧장 자기 집으로 가 버렸다. 단 한 번, 다프넨과 마주친 일이 있었다. 식당 입구에서였다. 다르넨이 걸음을 멈췄지만 헥토르는 어깨를 부딪치는 것도 느끼지 못한 듯 지나쳐 나가 버렸다. 몇 명인가의 사람들은 숨겨진 사건이 있다는 것을 짐작했다. 그러나 세 명의 사제들이 진실을 틀어쥐고 있는 데다 섭정의 동생 집 안이 연루된 일이라 직접 나서 진상을 알아내려는 사람은 없었다. 여름이 끝났다. 가을은 8월말부터 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나날이 흐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워 있는데 잠든 줄 알았던 나우플리온이 불쑥 입을 열었다. "보리스, 내일부터 다시 검을 연마하자." "네?" 되물을 말은 아니었을 지 모르나 약간은 놀랐다. 확실히 섬에 들어와 두 계절을 보내는 동안 나우플리온 앞에서 제대로 검을 잡은 것은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나우플리온이 워낙 바빴던 탓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섬의 아이들로부터 질시 어린 눈초리를 받고 있던 터라 더한 미움을 살 일은 삼가는 편이 나았던 탓도 있었다. 검의 사제로부터 따로 교육을 받는 모습은 아이들의 악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 뻔했다. 그리하여 나우플리온이 다프넨을 첫 제자로 선언하긴 했지만 그 동안의 교육은 렘므에서 방랑하던 시절이 무색할 정도로 전무하다시피 했다. "내년에는 열 다섯이 되는 거지?" 나우플리온은 이불에 푹 파묻힌 채 말했지만 졸린 목소리는 아니었다. "우리에게 언제까지나 계속될 시간이 주어진 것은 아니겠지." 다프넨은 그 말을 어린 시절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배움을 얻어야 한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즉, 다프넨 자신에게 남은 시간에 대한 것으로. 그러나 그것은 나우플리온에게 남은 시간을 말한 것이었다. "다음!" 열 걸음 밖에서 힘껏 달려가 나무에 매달아 놓은 나무토막을 후려갈겼지만, 뱅그르르 돌아갔을 뿐이었다. 몇 번 더 되풀이했으나 허사였다. 손에 들린 것이 연습용 검도 아니 목검인 까닭에 끈조차도 베어지지 않았다. "다시!" 뒤로 뛰어가 처음의 자리에 섰다가 다시 나무토막을 향해 달려갔다. 또 다시 쳤다. 냅다 얻어맞은 나무토막이 크게 원을 그리며 달려들어 하마터면 다프넨의 얼굴을 칠 뻔했다. 그는 요령 좋게 그것을 멀찍이 쳐냈다. "다음!" 같은 일의 되풀이였다. 손에 들린 목검은 가볍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진짜 검을 휘두른 소년에게는 도무지 무기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나우플리온은 일부러 그에게 목검을 잡게 했다. 그리고 진검을 잡은 것처럼 똑 같은 마음으로 하라고 말했다. 목검에 살기을 불어넣은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집중하려고 애써봤지만 아무리 궁극적으로 긴장해 봐도 진검을 든 느낌과는 너무 달랐다. 한달 여를 그렇게 하다가 정신이 다 지쳐버렸다. 그런 기색을 알아보지 못할 나우플리온이 아니었다. 그는 다프넨에게 '네 목검이 날카로움을 잃었다' 라고 말했고 다프넨은 '목검은 본래 날카롭지 않다'고 대꾸해 버렸다. "그래, 네 말대로 목검은 '진검보다' 날카롭지 않지. 그러나 둥근 바위와 비교하면 어떠냐? 하늘거리는 천과 마주 대한다면 어떨가?" "하지만 바위나 천을 갖고 싸우게 되진 않잖아요." "상대적인 날카로움이라는 점에서는 하등 다를 것 없다." 나우플리온은 자기 허리에 차고 있던 목검을 뽑아 들더니 바로 옆에 있는 바위를 빠르게 찔렀다. 다프넨이 놀라서 아, 하고 외치는 순간 목검은 바위 표면을 일부 부수고 들어가며 멈췄다. 깨진 돌조각이 바닥에 떨어졌다. ?마법은 기원이다. 검을 날카롭게 하는 건 네 마음의 힘이고." 다프넨이 입을 벌린 채 말문이 막혀 있는 동안 그는 목검을 팽개치더니 품에서 단도, 루네트를 꺼냈다. 폭이 넓은 칼날이 그의 손바닥에 놓였다. "자연 속에서 쇠는 나무보다 날카롭지.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마음의 힘을 버리고 쇠의 날카로움에 의존하기 쉽다. 너의 경우는 그것이 휠씬 더 심각하지. 네가 가진 검은 쇠로 된 검도 아닌, 순간적으로 무시무시한 살기를 발휘하는 겨울검... 윈터러다. 네가 몇 번이고 그 검의 살기에 휩쓸리거나, 심지어 그것을 이용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있느냐?" "......." "그렇게 되어버리면 넌 그 검의 노예다. 그 검이 원하는 피를 위해 움직이는 인형으로 전락하는 거지. 그리고 서서히 그 검이 내뿜는 살기에 너 자신을 팔아 넘기게 될 거다." 아직까지도 생생한, 그가 들었던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면 내 노예가 되겠다고 말해!' 그리하여 노예가 되는 것을 택하면 죽이고 싶은 자를 얼마든지 죽일 수 있겠지만... 결국 자신은 자신이 아니게 되어버릴 뿐이었다. 다프넨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네게 진검을 주지 않는 이유를 알겠나? 겨울이 가고 내년 봄이 되어도 넌, 윈터러의 살기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한 목검보다 날카로운 무기를 가질 수 없다. 내가 결코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겨울이 깊어 갔다. 깊어지고, 깊어지고, 또 깊어지자 새해가 되었다. 겨울의 한가운데에 기둥처럼 세워진 1월이었다. 스콜리는 현재 방학 중이었다. 섬은 여름이 서늘한 대신 겨울이 지독하게 추었으므로 한 해 가운데 방학은 이때밖에 없었다. 11월부터 3월 초까지였고 그 사이 2월 중에 신입생이 될 아이들을 데려다가 간단한 평가 시험을 치렀다. 이렇게 모든 준비를 끝내두었다가 학기가 시작되면 곧장 수업에 들어가는 것이 상례였다. 2월에는 졸업식도 있었다. 작년에 15세가 된 아이들은 이때 스콜리를 졸업하면서 자신의 직분을 정했다. 그런 다음 늦봄의 정화 의식이 있을 때까지는 일종의 견습 역할을 하며 어른들로부터 일을 배웠다. 정화 의식을 거쳐 진짜 순례자로 거듭나게 되면 그 후로는 하나의 어른으로 취급 받았다. 그러나 날짜가 꼬이는 아이들도 있었다. 즉, 졸업 적정 년수를 다 채우지 못했는데 미리 15세가 되어버려서 15세의 정화 의식을 먼저 받고, 다음 해가 되어야 졸업하게 되는 경우가 생겼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늦게 입학한 아이들도 그랬지만 두 해 사이에 생일이 걸려 있는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면 1월 태생인 헥토르가 그랬다. 올해 2월에 헥토르는 졸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의 나이는 16세가 되어 있었다. 다프넨은 겨울 내내 거의 이솔렛을 만나지 못했다. 물론 스콜리가 방학이라고 그들도 방학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그러나 큰 눈이 한 번 내리면서 기온이 떨어져 늘 수업을 받던 산 위의 빈터가 꽁꽁 얼어붙어 버리자 이솔렛이 방학을 제안했고, 그들은 헤어졌다. 산 위의 교실이 아니라 직접 집으로 찾아가려니 아무래도 좀 부담스러웠다. 산비탈에 있는 이솔렛의 집은 겨울이 되자 눈으로 완전히 뒤덮여 버렸다. 그녀는 그 안에서 거의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식료품이며, 땔감 따위가 충분한지도 알 수 없었다. 다프넨이 문득 우려를 나타냈을 때 나우플리온은 흔쾌히 웃으며 대꾸했다. "한 번 찾아가 보지 그래? 그녀도 반가워 할 텐데." 그래서 1월도 거의 끝나 갈 무렵, 다프넨은 나우플리온과 함께 만들어 둔 소시지를 가지고 이솔렛을 찾아갔다. 겨울 내내 하루도 쉬지 않았던 검술 수업은 나우플리온이 선심 쓰듯 하루 빼 주었다. 게다가 점잔까지 빼면서 이렇게 말했다. "가서 내 안부도 전하고, 그 소시지를 만들 때 손재주 없는 제자 녀석은 아무 도움도 안 됐다고 반드시 얘기하거라." 소시지라니, 도무지 낭만적이지 않은 물품이긴 했지만 혹독한 겨울을 견디지 못해 초봄 무렵 죽어나가는 사람이 꽤 되는 섬에서는 겨우내 식량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선물이었다. 코가 맵도록 춥긴 해도 날은 맑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솔렛의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눈이 쌓여 무릎이 푹푹 빠졌다. 달의 섬에는 유난히 눈이 많아서 각반 없이 겨울을 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문을 쾅쾅 두드리자 문틀에 쌓였던 눈이 우수수 떨어졌다. 한참 동안 밖에 나온 일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솔렛, 저예요!"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몇 발짝 물러나서 굴뚝을 올려다보았다. 분명히 연기는 나고 있었다. "이솔렛, 안에 있어요?" 다시 문을 두드리자 갑자기 문이 덜컥 열렸다. 그런데 문 앞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누가 문을 열었지? 멈칫거리다가 우선 발의 눈을 털었다. 다리와 머리에 떨어진 것들도 털고 있는데 말소리가 들렸다. "그런 건 문이 열리기 전에 다 터는 거야. 찬바람 들어오니까 어서 들어와. 문 닫게."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으려고 돌아서니 저절로 닫혀 있는 문이 보였다. 어이가 없어서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난롯가에 놓인 커다란 의자가 보였다. 등받이가 너무 커서 앉은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 옆에 등받이가 없는 작은 의자가 하나 놓인 것이 보였다. 다가가 보니 이솔렛은 손에 책 비슷한 것을 들고 있었다. 어떻게 문을 열고 닫았는지 궁금했는데 그녀의 의자 아래쪽에 희한한 장치가 달린 것이 보였다. 나무로 된 막대가 튀어나와 있는데 발로 당기고 미는 것만으로 문을 여닫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겨울은 독서로 보내나 보죠?" 이솔렛은 책을 접고 일어나서니 큰 의자를 뒤로 물렸다. 그리고 난롯가에 두터운 짐승 가죽 깔개를 가져다 깔았다. 언뜻 다프넨을 돌아본 그녀가 말했다. "뭘 가지고 왔구나." "소시지죠. 나우플리온 사제님하고 겨울 오기 전에 만들어 둔 거예요." 나우플리온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이솔렛은 약간 멈칫하는 것 같더니 곧 평온해졌다. 다프넨은 난롯가의 깔개에 앉았고, 이솔렛은 소시지를 저장고로 가지고 갔다. 다프넨은 이솔렛이 보던 책을 흘끔 보았다. 책이라기보다는 종이를 묶어 만든 공책 같은 느낌이었다. "잘 먹을게." 돌아와 깔개 위에 앉은 그녀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다프넨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그녀기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고, 그의 방문을 불편해 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기뻤다. 늦여름과 가을, 그리고 초겨울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계속해서 신성 찬트 수업을 했지만 전과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전처럼 친근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서로를 경원하게 된 것도 아니었다. 당시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는 서로 말을 꺼내기를 주저했다. 그래서 한 번도 그 일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한 일이 없었다. 그리고 수업도 별 진전이 없었다. "건강해 보이네요." 섬사람들은 이솔렛이 데스포이나 사제의 집에서 잠들어 있었던 것이 상처 때문이 아니라 마법의 연구와 관계된 일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이솔렛은 일리오스 사제처럼 다양한 마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뭘 연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짐작할 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시 아플 이유가 없잖아." 다프넨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참 다행이예요, 섬에 모르페우스 사제님 같은 분이 있어서." 다프넨은 이솔렛의 상처를 치료한 것이 모르페우스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마을로 옮겨져 눈을 떴을 때 곁에 있던 나우플리온에게 물으니 그렇게 대답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살아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물론 말할 수 없기 기뻤다. 그러나 동시에 어쩔 수 없는 고통이 그를 괴롭게 했다. 지금까지도 도저히 쉽게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그게 고칠 수 있는 상처라는 것을 예전에도 알았더라면....... 아니, 물론 그것은 이 섬에만 있는 특별한 치유의 힘이었겠지. 대륙의 의사들 가운데는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모르페우스 사제도 말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이 그의 어린 시절에도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그의 집안에 지금과 같은 비극도 없었을 텐데. 예니치카 고모를 구할 수 있었다면 아버지와 삼촌이 그렇게 반목하게 되진 않았을까. 그리고 예프넨도 죽지 않을 수 있었을까....... "무얼 생각해?" 퍼뜩 생각에서 깨어난 다프넨은 억지로 표정을 펴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수백 번도 더 해본 생각인 것이다. 그걸 굳이 이솔렛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안다면 그녀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을 테니까. 그는 얼른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실은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혼자서만 지내는 것 같아서 좀 걱정했어요." "난 본래 혼자인걸.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매년 겨울이 똑같았어." "무슨 책 봐요?" "아버지의 일지야. 장서관에 가 있던 것들을 겨울나기에 쓰려고 몇 권 가져왔지." 이솔렛은 책을 건넸다. 다프넨은 중간쯤을 펼쳐서 들여다보았다. 그리 체계적인 기록은 아니었다. 날짜가 휘갈겨 쓰인 아래에 연구 과정에 대한 것도, 갑자기 떠오른 단상에 대한 것도, 마을의 일이나 딸에 대한 걱정도 모두 한꺼번에 쓰여 있었다. 몇 장 더 넘기다가 그는 손을 멈췄다. 중간 이후는 백지였다. 이솔렛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 일지거든." 약간 머뭇거리다가 다시 책장을 되넘기기 시작했다. 일리오스 사제는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맨 마지막 날의 일지는 장식문자가 아닌가 싶을 정도의 아름다운 글자들로 되어 있었다. 일부러 천천히 정성 들여 쓴 듯했다. ......태양의 이름을 가져 달여왕의 백성이 될 수 없었던 나는 내 뒤에 남겨질 '고귀한 고독'을 이렇듯 걱정하고 있다. 나는 그 아이가 살아가는 법을 제 이름에서 얻기를 바란다. 그것만이 나의 마지막 희망이자 가르침이다. 이제 내가 간 뒤의 시산들을 옛 마법사들의 손에 맡기고 금은의 나라여, 그대가 간 길로 가련다. 영원이 없는 세상에는 단지 되풀이되는 낮과 밤이 있을 뿐이다. 낮이 긴 날의 밤은 짧고, 밤이 긴 날의 낮은 짧다. 오랜 행복을 누린 자에겐 짧은 불행이, 긴 불행을 견딘 자에겐 짧은 행복만이, 낮과 밤이 공평해지기 위해 365개의 하루가 필요하듯 인간 세상의 공평함은 억만 년 뒤에나 있으리. "이건......." 마지막에 쓰여진 몇 마디 문장은 분명 들은 기억이 있었다. 이솔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일지를 보고 내가 만든 찬티카(짧은 찬트)였어, 그건." 고개를 끄덕이며 그는 다시 물었다. "태양의 이름이란 뭐지요?" "아버지의 이름이 가진 뜻이지. 일리오스는 태양이라는 뜻이야. 어찌 보면 달의 섬에서는 흉흉한 이름인 거지." "묘하군요......." 다프넨은 책을 덮은 채 상상해 보았다. 섬 안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자 독보적인 천재였고 어린 딸을 지극히 사랑한 사람, 그는 결코 죽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그가 촛불 앞에 앉아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며 마지막 글귀를 남기고 있었다. 가능한 한 침착하게, 고운 글씨로. "당신은 이때 어디에 있었죠?" 말하고 나서 실수했다 싶었다. 그러나 이솔렛은 별다른 표정 없이 답했다. "데스포이나 사제의 집에. 갇혀 있었지. 그 날 이후로 다시는 그 집에 가지 않았는데. 여름의 일로 본의 아니게 그녀의 집에서 머물렀다가 깨어나 보니 문 한쪽에 7년 전에 내가 쳐서 망가뜨려 놓은 자국이 보이더라." "......."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난롯불만이 타닥거리며 타고 있었다. "내게 묻고 싶은 것 없어요?" 한참만에 다프넨이 그렇게 말하자 이솔렛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웃는 그녀의 눈동자가 맑아 보였다. "왜,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아, 아뇨... 하지만 그 때 당신은 이상한 걸 많이 봤으니까요." "음......." 이솔렛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그랬지. 네 검이 위험한 물건인 것이냐고, 그것의 힘은 과연 무엇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궁금할 정도면 이미 사제님들이 다 알아서 처리하시지 않았을까?" "그분들이라 해도 모르는 것은 있고, 이솔렛 당신이 훨씬 잘 알 수도 있지 않나요." "하지만 그분들은 나보다 더 섬의 안전에 대해 민감하시지." 다프넨이 입을 다물었다가 갑자기 말했다. "그 검은 우리 집안의 보물이었어요. 내가 대륙에서 살 때 속해 있던 집안 말이에요. 형에게 물려졌고, 형이 다시 내게 준 것이지요." "진네만 집안 말이니?" "아, 어떻게 알았어요?" "네가 예전에 이 집 앞에서 외쳤잖아. '나는 보리스 진네만이다!'라고 말이야." "아... 내가 그랬었군요." 다프넨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이솔렛이 미소짓더니 말했다. "그건 꽤 멋있는 외침이었지." "......." 말문이 막혀서 뭐라 답해야 할 지 몰랐다. 이솔렛은 난롯불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난 그때 일이 아주 잘 기억나. 오랫동안 생각했거든. 왜 그때 내가 당장 밖으로 나가지 않았을까, 그런 모욕을 들으면서 어찌 침묵했을까 하고 말이야. 답은 너를 따라 폐허의 마을로 갔을 때 얻었어. 말하자면 그때 난 네가 내 대신 그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라고 느꼈던 거야. 나 자신이 아니라 네가." 당시 헥토르는 몰랐을지 몰라도 다프넨은 알고 있었다. 그때 헥토르가 입을 열어 일리오스 사제를 모욕했더라면, 그가 당장 그 자 리에서 일리오스 사제가 가르친 이솔렛의 쌍검과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 한 마디에 대한 대가로 상대를 죽이고도 남을 사람, 그것이 그가 아는 이솔렛이었다. 다음 순간 그는 스스로 놀랐다. 왜 다행이라고 생각될까. 이솔렛의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바라지 않아서? "내 문제이기도 했어요. 내 잘못이기도 했고......." "알아. 공동의 실수였지. 굳이 따지자면 함께 바다로 가자고 말했던 내 잘못이 크고 말이야. 그런데도 난 네가 그들에게 내 대신 항변할 거라고 생각했어. 왜였을 것 같니?" "모르겠어요......." 이솔렛은 고개를 돌려 다프넨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난롯불 때문에 뺨이 발그레했으나 표정은 침착했다. "그때 난 네가 내 약혼자라도 되는 것처럼 느꼈던 거지." "......." 집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지붕과 처마를 감싸고 내려 그들과 세상을 격리시키고 있었다. "괜찮아. 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젠 본래의 나로 돌아왔으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간접적으로 하신 유언이 있었지. '네 이름의 뜻대로 살라'고 말이야." 고귀한 고독. 왜 일리오스 사제는 하나뿐인 딸에게 그런 것을 주문했을까. 그녀가 이렇듯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고 마을과 격리되어 혼자 사는 모습이 그가 바란 결과란 말인가. "당신은... 지금의 삶이 마음에 들어요?" "좋다기보다는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왜요? 당신처럼 재능 있고 아름다운 사람도 흔치 않은데 왜 외따로 이렇게......." 이솔렛이 단호하게 끊어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처럼 되어선 안 되니까." 다프넨은 무슨 뜻인지 깨달아 보려 애썼다. 그러나 그의 경험으로는 무리였다. 이솔렛이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섬은 아주 작고 또 닫혀 있는 사회지. 바깥 대륙에는 왕이 있고 귀족이 있는데 여기엔 겨우 섭정과 사제가 있을 뿐이야. 그리고 그들조차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부귀를 누리고 있진 않고. 크게 가난한 사람도, 크게 부자인 사람도 없어. 약간의 존경과 결정 권, 그런 정도가 그들에게 주어진 전부니까." 이솔렛은 일리오스 사제의 일지를 천천히 손으로 쓸어 내렸다. "작은 사회에서는 평등이 실현되기도 쉽지만, 한 번 깨어지면 걷잡을 수 없게 되어버리지. 그래서 섬은 빼어난 사람을 원하지 않 아. 내 아버지가 여러 가지 면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며 사람들을 압도했을 때 섬사람들은 환호했지만, 동시에 두려워하고 있 었어. 저 자 한 명이 우리 여럿보다 낫다면? 그가 내놓는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반박할 사람이 없다면? 옛 왕국의 권위에 의존해 서 근근히 이어나가고 있는 질서와 신앙을 그가 조목조목 따져 뒤엎어 버린다면?" 서서히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가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정치적 문제였다. "그런 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큰 위협을 느낀 것은 바로 네가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을 섬의 지도자, 섭정 각하지." 들창이 덜컹거렸다. 창을 때리는 바람의 소리가 났다. 이솔렛의 목소리가 겨울밤에 끓인 초콜릿처럼 진해져 있었다. "내 아버지에게 죽음을 강요한 것이 바로 그 자였어. 검의 사제가 마을의 안전을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고 말했지. 그것도 내가 듣는 앞에서." 이솔렛은 섭정을 전혀 높여 말하지 않고 있었다. 다프넨은 깍지낀 채 무릎에 올려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인간과 인간 사이 에서 벌어지는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는 여기에도 있었다. 그가 해답을 얻지 못했듯, 이곳에도 해답은 없었다. "섭정 각하가 어떤 사람인지 저는 모릅니다. 어째서 섬의 지도자인데도 직접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으시는 건가요? 본래 섬의 섭 정은 다 그런가요?" "아니, 그만이 그래. 그도 처음 섭정이 되었을 때는 그렇지 않았지. 하지만 그는 이제 하반신을 쓸 수 없는 불구자야. 속된말로 앉은뱅이라고 하지." "어떻게 그런 일이?" "본래 섭정들은 지금은 폐허가 된 옛 마을에서 살았어. 그곳은 여기보다 지대가 높고, 주변의 산세도 험하지. 그는 독수리를 사냥 하려 하다가 그만 발 밑을 보지 못해 얼음 크레바스에 빠졌어. 불행 중 다행으로 크레바스가 작아서 까마득한 바닥으로 떨어지게 되진 않았지. 그러나 그는 하체가 크레바스의 틈새에 끼인 채 사흘이나 고립되어 있었어. 사람들이 그를 찾아냈을 때는 도저히 손쓸 수가 없게 된 후였지." "불쌍한 사람이군요." "그래. 불쌍했지. 서클렛의 사제님이 애썼지만 다리를 자르지 않는데 그쳤을 뿐, 기능을 되돌리진 못했어. 그가 그렇게 되고 나서 채 1년이 되기 전에 그의 아내는 섬 밖으로 달아나 버렸지. 아마 하반신을 쓸 수 없는 남편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거나, 뒷수발을 들며 남은 평생을 보낼 순 없다고 마음먹었나 봐. 아내가 사라지고 나자 그 사람은 독해졌어. 집 안에 꼼짝 않고 틀어박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무시하거나 위협하는 모든 문제를 미연에 없애버리려 궁리했지. 그는 곧 수발 을 들어 줄 만한 여자를 골라 재혼했지만, 그가 마음 속 깊이 진심으로 아끼는 것은 오직 딸 하나뿐이었어. 마치 우리 아버지처럼 말이야. 물론 아버지는 다시 결혼하지 않았지만." 말하다 말고 이솔렛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참, 너는 모르던가? 이후 섭정의 자리를 물려받게 될 그 애 말이야, 너도 잘 아는 사이일텐데?" "그게 누구죠?" 어리둥절해하는 다프넨에게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리리오페 아니니." 그야말로 금시초문인 소리였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는데 사실이 아닐 리는 없었다. "저...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글쎄,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나." 이솔렛은 혼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섭정이 될 아이는 스콜리를 졸업할 때까지 부모와 떨어져서 살게 되어 있어. 어렸을 때는 보통 아이들처럼 자라야만 하거든. 그 렇지 않으면 자신이 특권 계층인 양 생각하게 되어버리지." 다프넨은 잠시 후 말했다. "그럼 당신은 리리오페가 싫겠군요. 두 아버지들이 서로 원수나 다름없으니." "아니, 난 그들이 측은해. 육체적 능력을 잃고 나자 쓸모없는 망상에 사로잡혀서 아무도 노리지 않는 자신의 권한을 빼앗길까 두 려워하는 사람, 그리고 그 때문에 어떤 일도 서슴지 않게 되어버린 섭정 각하는 특히 더." 그렇게 말하는 이솔렛의 목소리는 농담이나 비꼬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내가 왜 이러는지 알겠니?" 다프넨은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가 드디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이솔렛을 보았다. "그렇군요.... 당신이야말로 다음 대검의 사제가 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사람이었군요. 당신이 이렇듯 은둔하고 있지만 않는다 면 틀림없이." "그래. 난 검의 사제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아버지들의 일을 리리오페와 함께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아. 그 애는 자기 아버지를 많 이 닮았거든. 그리고 나는 내 아버지와 거의 똑같고. 사람들이 나를 은둔하는 공주니 뭐니 하며 떠받드는 것도 다 계획적인 일이야. 내가 이 상황에서 벗어나 무언가 다른 일을 하는 것은 아무도 원치 않아." 아버지의 죽음을 방관한 사람들에게 실망하여 마음을 닫아버린 소녀가 아니었다. 함께 죽지 못한 것이 괴로워 자포자기 상태로 살아 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직 이것뿐,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바로 이 상태인 것이다. 눈을 품고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문득 여름에 보았던 겨울 풍경이 떠올랐다. 다친 팔을 늘어뜨린 채 먼 곳을 보던 이솔렛과 그녀를 감싸안았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말로 확인하지 않았으나 같은 심정일 거라고 순간적으로 믿고 있었던 그때.... ... "그렇다고 해서 당신은 누군가를 사랑하지도 않을 셈인가요? 돌아가신 아버지 외엔 그 누구도 필요 없나요?" 상체를 곧게 세운 채 옆얼굴만을 보이는 그녀에게 시선을 보냈다. 대답을 기다리며 열렬히 바라보았다. 모든 상황이 그녀를 혼자이 도록 몰아간다 해도 그런 삶은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일리오스 사제가 쓴 일지의 마지막 글귀처럼, 인간들 사이의 공평함은 억 만년 뒤에나 계산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짧은 대답이 울렸다. "난 이미 누군가를 사랑했어." "......." 세 번째로 그는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싸늘한 기운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이제는 그를 사랑하지 않지. 그를 사랑하는 동안 내 감정은 뒤틀리다 못해 피투성이가 되었고, 나중에는 고문에 가까워질 정도로 변했어. 그래서 난 그것을 땅 밑에 깊숙이 묻었지. 그건 옳은 선택이었어. 이제 내 감정은 묻힌 채 썩다못해 녹아버렸고, 그런 마음으로 누군가를 다시 사랑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겠지." 불타는 장작 아래 이제 다 타서 재가 되어 가는 장작이 보였다. 그것은 서서히 부서져 가루로 변하고 있었다. 다프넨은 바닥을 내려다보고, 다시 어색하게 몇 곳을 두리번거리다가 갑자기 일어섰다. 그리고 많이 늦었으니 그만 가야겠다고 말 했다. 이솔렛은 약간 걱정스러운 것처럼 말했다. "눈을 헤치고 가기엔 위험한 날씨 같은데." 다프넨은 고개를 젓더니 붉어진 뺨을 한 손으로 비비며 씩 웃었다. "저번 같은 실수를 해서 안되잖아요." 문을 여니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다프넨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돌아서서 재빨리 손을 흔들고는 문을 닫았다.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혼자 남은 이솔렛은 그가 앉았던 깔개 위의 자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불티가 날려와 아버지의 일지에 떨어지자 손으로 쳐서 껐다. 그리고 일어나 깔개를 치우고 큰 의자를 도로 가지고 왔다. 아버지가 살아 생전에 애용하던 의자에 몸을 묻고 앉았다. 그러나 이번엔 손에 책이 들려 있지 않았다. 3. 대륙에서 불어오는 바람 3월이 되자 스콜리는 개학했다. 학생들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헥토르의 부재였다. 헥토르를 따라다니던 아이들은 중심을 잃고 우 왕좌왕하고 있었다. 에키온 혼자의 카리스마로는 도저히 그들을 다시 규합할 수가 없었다. 헥토르는 예상대로 검의 길을 자원했다. 3월 초에 검의 사제 아래에 있는 전사들과 함께 침묵섬으로 떠난 그는 다음 달이나 되어 야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런 식이니 에키온은 한층 더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삶의 목적을 형의 존재 에 두었는데 그 형은 자신의 인생에서 발을 빼어 나가 버렸다. 그에게도 변화가 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변화의 수용을 거부했다. 새학기가 시작된 스콜리에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이 있었다. 다프넨은 언젠가 그에 대한 얘기를 월넛 선생이었던 당시의 나우플리온으로부터 들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바로 실버스컬(Silver Skull)이었다. "올해라고, 올해는 반드시 나갈 수 있다니까." "검의 사제님이 허가를 해 주셔야 되잖아. 아직은 모른다고." "무슨 소리야! 5년에 한 번 참가라는 건 옛날부터 죽 전통이었다고!" "이번엔 몇 명이나 가게 될까? 나도 갈 수 있을까?" 쉬는 시간마다 몰려 앉아 떠들어대는 통에 별 관심이 없던 다프넨 조차도 대강의 상황을 알게 될 정도였다. 대륙에서 벌어지는 실버스컬은 매년 있는 행사지만 섬에서는 5년에 한 번씩만 참가하도록 되어 있었다. 실버스컬은 대륙에서도 아이들을 지나치게 검술이나 격투 따위 무예 수련에 집착하도록 몰아간다는 비판이 있을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는 대회였다. 섬은 대륙보다 작으니만큼 함부로 직업의 균형이 무너지면 큰 일이 벌어졌다. 그러니 참여에 어느 정도 제약을 둘 필요가 있었다. 실버스컬에 참가할 수 있는 나이는 15세부터 20세까지고, 섬에서는 5년에 한 번 원정대를 보내니까 어쨌든 모든 아이들에게 일생에 한 번은 기회가 왔다. 물론 나이가 된다고 다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의 실력이 요구되기에 섬에서 미리 시험을 치른다고 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대륙을 여행한다는 것이 만만찮게 위험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가서 망신스러운 성적을 낼 녀석을 굳이 보낼 필요가 없으니 그랬다. 20세에 참가할 기회가 오는 아이들이 제일 운이 좋았고, 15세가 갓 되자마자 실버스컬 참가년이 돌아오는 아이들이 가장 운이 나빴다. 그리고 다프넨이 바로 그런 경우가 될 듯했다. 올해 실버스컬은 7월말, 아노마라드 중부의 폰티나 지방에서 열리게 되어 있었다. 바로 다프넨이 15세가 된 직후인 셈이었다. 폰티나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운이 좋은 건지도 몰라." 섬에서 검술과는 제일 거리가 멀다 해도 과언이 아닌 오이지스조차 요즈음은 아이들의 분위기에 물들어 연일 그 이야기였다. 다프넨을 바라보는 오이지스는 희망적인 눈빛이었다. 최근 그는 다프넨이 실버스컬에 나가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고, 심지어 우승도 할 수 있다고 제멋대로 믿어버린 터라 다프넨도 대화 중에 여간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5년에 한 번이잖아. 그런데 개최 날짜는 조금씩 바뀌거든? 그러니까 5년 뒤의 실버스컬은 네가 스무 살을 넘기기 전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면 전무후무한 2회 참가자가 되는 거지. 후후후. 두 번 다 우승해 버리면 정말로 멋지겠다. 넌 지금도 최고니까 스무 살 때는 더 대단하겠지?" 스무 살이라, 도무지 실감나지 않는 나이였다. 그의 시간은 언제나 매우 느리게 흘러갔다. 도대체 언제 스무 살이 될 수 있는 걸까? "자꾸 우승, 우승, 그리지 마, 오이지스. 내 실력은 대륙에 나가면 보잘것없어. 훨씬 강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아냐. 본래 섬 아이들의 평균적인 실력이 대륙 애들보다 낫대. 게다가 겨울 내내 검의 사제님이랑 연습했잖아. 분명히 엄청 강해졌겠지. 그거 실버스컬 준비하느라 그런 거 아냐?" 어라, 그랬던 건가? 생각해 본 일이 없는 문제라 다프넨은 잠시 혼란을 일으켰다. 나우플리온이 갑자기 그에게 검을 연마하자고 한 게 설마 실버스컬에 나가라고 그런 거였나? 물론 실버스컬 얘기를 처음 해준 것도 나우플리온이었고 이번에 참가를 결정하는 것도 나우플리온... 이었구나. 그래도 겨울 내내 한 번도 그런 얘기 한 적 없잖아. 분위기도 절대 그런 식은 아니었고....... 쉽게 결정이 나지 않아 다프넨은 말을 돌렸다. "그럼 섬에서 우승했던 사람이 많았니?" 뜻밖으로 오이지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한 명밖에 없었어. 준우승까지 한 사람은 두엇 더 있었다고 해." "누가 우승했는데?" "한 명밖에 없잖아. 그 분 외에 누가 또 우승했겠어?" 혹시나 싶긴 했지만 되물어 봤다. "나우플리온... 사제님?" "틀렸어. 그 분은 실버스컬에 나가지도 않으셨다고. 이유는 잘 모르지만 하여튼 그랬대."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도 한 사람이 떠올랐다. "일리오스 사제님인가?" "일리오스......? 아, 그래! 맞아. 이솔렛 누나의 아버지인 그 분이야. 그 분이 우리 섬의 유일한 우승자야." 하긴, 나우플리온에게서 들은 그대로라면 그 말고 누가 달리 우승을 하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그의 마음 속에서 전에 없던 감정이 솟아올랐다. 우승은 좋을까, 할 만한 것일까. 누구를 위해서? 오이지스가 계속 말하고 있었다. "어른들도 다들 말하길 이번 실버스컬에 나가서 우승할 사람이 있다면 너하고 헥토르, 그리고 이솔렛 누나래. 그렇지만 이솔렛 누나는 그런 데 나가지 않을 거 같아. 아버지에 이어서 누나도 해낸다면 멋지긴 하겠지만... 아참, 그러면 너하고 싸워야 되는구나." 이솔렛과 그의 수업도 다시 시작되어 있었다. 다프넨은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약간 서먹했으나 이솔렛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쾌활하기까지 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다프넨도 분위기에 휩쓸려 편안히 말하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마음 속에 가라앉은 어둠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덜 녹은 눈이 아직 곳곳에 남아 있었으나 이제는 봄이었다. 그들은 잠시 바위 위에 앉아 얘기를 나누었다. "나우플리온 사제님하고 겨울 내내 검술 수련을 해 왔다면서?" 섬 안에서 그 얘기를 가장 마지막으로 물은 사람이 이솔렛일 거라고 생각하며 다프넨은 피식 미소지었다. "네." "너무 그에게 의지하진 마." "네?" 무슨 소린지 몰라 어리벙벙해 있는데 이솔렛이 흰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았다 풀었다 하며 말했다. "그 사람은 이를테면, 자력갱생형이야. 거의 모든 것을 혼자 터득해서 익혔다는 거지. 물론 처음엔 선생님이 있었어. 그렇지만 그 분의 실력은 형편없어서 나우플리온 사제님한테는 겨우 기초나 가르쳐 준 정도지. 그렇게 수련한 사람은 자신의 제자도 자기 처럼 스스로 깨닫기를 기대할걸. 하긴, 네가 주는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받아먹기만 하는 제자였다면 지금까지 가르치지도 않았겠 지만 말야." "그 말은 맞는 것 같네요. 그 분은 예전부터 저하고 투닥거리면서 싸우기만 했지, 뭘 체계적으로 가르쳐 준 적은 없거든요." 벨노어 저택에서 검을 배우던 시절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그 무식한 달리기며 지루한 팔연습이며... 그래 놓고 밤에는 죽 을 때까지 덤벼 보라고 그랬었지. 위험스러운 검 윈터러를 그에게서 떼어놓으려 그렇게나 애썼던 것도 생각났다. 결국 이런 결과가 되어버린 것은 나우플리온의 말을 듣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네 검은 어떻게 했니?" 이솔렛이 갑자기 묻는 바람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이번엔 나우플리온 사제님이 맡았어요. 어딘가에 감추고는 보여주지도 않으시죠. 정말이지 주인이 여러 번 바뀌는 검이란 말이 에요." "그에게 준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죠." "실버스컬에 나갈 때면 돌려주는 건가?" 다프넨은 갑자기 물어볼 것이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당신은 실버스컬에 안 나가요?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안 나가." "왜요?" "그냥, 눈에 띄고 싶지 않으니까." 이젠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다. 겨울밤에 들었던 이야기가 다시금 상기되었다. "그렇군요......." 금방 질문이 되돌아왔다. "넌 나가니?" 조금 망설였다. 아직 결정된 것은 없었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닐지도 모르죠." 이솔렛은 금방 눈치를 채고 말했다. "네가 시험을 통과 못할 거라고는 생각 안 해. 나우플리온 사제님이 반대할 거라고도 생각 안 하고." "나우플리온 사제님도 안 나갔다면서요. 좋아하지 않으실지도 모르지요. 그 분이 말리시면 갈 생각 없어요." "그때 나우플리온 사제님이 실버스컬에 안 나간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야." 이솔렛은 바위에서 일어나더니 갑자기 절벽 쪽을 손가락질했다. "오랜만에 올라가지 않을래?" 바스락. 숨어서 보고 있는 눈이 있었다. 두 사람이 절벽 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고약한 시선이 따라갔다. 아직은 짤막한 풀 뿐이라 몸을 숨기는 일은 좀 불안했지만 그는 조금씩 접근해서 풀밭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좀더 기다렸다가 다 시 뒤따랐다. 절벽 앞의 입구를 발견한 그는 놀라 멈추어 섰다. 이미 두 사람의 이야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안에는 깊은 동굴이 있는 건지 도 몰랐다. 흥, 그는 비웃었다. 그런 식으로 도망 다녀 봤자 맘먹고 소문 퍼뜨리면 망신당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그는 절벽 구멍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리고 예상외로 빨리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을 깨닫고 또다시 놀랐다. 그 아래가 천길 벼랑 인 것을 보고는 더욱 더 당황했다. 절벽 주위를 돌며 이어지는 좁은 길을 보고는 따라가는 것을 거의 포기하려는 찰나였다. "!" 무심코 고개를 들어 본 그는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절벽 꼭대기 언저리를 두 사람이 날아서 걷고 있지 않은가! 마...마법인가....... 언제 저런 걸 다....... 그도 스콜리에서 마법 수업을 받는 입장이었고 몸을 허공에 떠오르게 하는 마법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저런 천길 낭떠러지 위를 여유롭게 걸어갈 정도로 안전한 주문은 없었다. 자칫 정신 집중을 잘못했다가는 그대로 곤두박질칠텐데 누가 함부 로 그런 시도를 하겠는가. 질투심과 두려움이 범벅이 된 상태로 그는 다시 한 번 하늘을 우러렀다. 그들은 이제 절벽 꼭대기에 거의 다 도달해 있었다. 그 런데 가만히 보니 발의 움직임이 조금 이상했다. 앞서가는 이솔렛이 디딘 위치를, 그 뒤의 다프넨이 똑같이 다시 디뎠다. 그 다음도 마찬가지였다. 일정한 보폭과 일정한 높이가 계속되었다. 흡사 보이지 않는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아! 투명화 마법이 좀더 쉽지 않나! 이런! 하지만... 그렇다면 그 주위의 절벽 전체를 없애버릴 정도로 대단한 투명화 마법도 있단 말인가? 이윽고 두 사람은 꼭대기에 올라섰고, 더 이상 관찰할 것은 없어졌다. 이젠 돌아가서 생각하는 것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헥토르 없이 혼자뿐인 식당은 휑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곳에서 혼자 식사를 하며 에키온은 계속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아무래도 딱 맞아떨어지지가 않았다. 투명화라면 너무 규모가 컸고, 비행이라면 걸음걸이가 아무래도 수상했다. 이솔렛이 가진 지식의 한도에 대해서는 죽은 일리오스 사제라면 모를까, 섬 안에서 누구도 짐작할 사람이 없긴 했다. 그렇다 해도 스콜리의 마 법 선생보다 몇 배나 더 훌륭하단 말인가? 갑자기 그는 다른 생각을 해냈다. 인간을 허공에 띄우는 것이 가능하다면 다른 물건을 띄우는 것은 왜 안되겠는가. 하지만, 한두 개가 아닌데? 예를 들어 징검다리가 될 만한 돌들이라 해도 십여 개 이상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 생각은 쉽게 양보되지 않았다.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얼결에 식탁을 내려다보니 벌써 자신은 식사 를 마치고 그릇까지 포개어 놓는 중이었다. 버릇이 무섭다더니. 식탁을 치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같이 궁리하며 머리를 굴려 볼 형이 여기 없다는 것이 대단히 우울하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에키온에게는 아무에게도 말 못할 비밀이 있었다. 바로 여름에 폐허의 마을에서 그 일이 벌어졌을 때, 그도 그곳에 있었다는 사 실이었다. 사제들은 물론이고 형조차도 알지 못했다. 아니, 알아서는 안 되었다. 그는 질 선생 다음으로 그곳에 도착했고, 먼발치에서 이미 무시무시한 싸움이 벌어지고 잇다는 걸 깨달았다. 다음 순간, 그는 다른 사람의 안전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오던 걸로 되돌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형의 생사를 확인하는 일 따위는 중요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마을로 돌아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방에 틀어박혔다. 그때는 괴물이 섬 전체를 멸망시키더라도 자기 혼자만 살아남으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는 책임을 회피한 대신 다시금 형의 존재에 열정적으로 달라붙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보상 심리가 한층 더 형의 승리를 갈구하게 했다. 본래 그가 다프넨을 뒤쫓은 것은 혹시라도 이솔렛이 다프넨에게 검을 가르치는 건 아닌가 염려해서였다. 그는 형이 이번 실버스 컬에서 반드시 우승하기를 바랬다. 그걸 막는 가장 가까운 경쟁자는 다프넨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실버스컬에 나가지 못하게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관찰하다 보면 무슨 수든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다 못해 검의 사제의 제자이면서 다른 사람에게 검을 배웠다고, 불경죄에 해 당한다고 우긴다거나, 그런 식으로라도 벌여 볼 생각이었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는 별로 가망이 없었지만. 형은 내일 모레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때까지 궁리하는 것을 뒤로 미룰까 생각하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본래 이런 추리를 하 는 데는 형보다 자신이 더 우수하기도 했거니와 형이 돌아왔을 때 뭔가 하나 이루어 놓고 있다면 자랑스러울 것 같기도 해서였다. 그러나 결국 마직막에는 형이 필요했다. 그의 계획을 칭찬해 주고, 직접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은 형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는 그런 행동력이 없었다. 요즘에는 따라주던 아이들마저도 다 떨어져나가 저들끼리 행동하기 시작했고, 형이라는 든든한 기둥의 존재에 의존해 오던 자신감은 더더욱 위축된 상태였다. 한 마디로 그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 무슨 일이든 벌이려면 어서 형이 돌아와 줘야 했다. 그러나 형은 침묵섬으로 가기 전부터 에키온과ㅢ 대황에 흥미를 잃은 것 같았다. 어른이 되어 아이 시절의 장난감을 내버리듯, 그렇게 동생을 버리려는 건가? 안 돼, 절대 그렇게는! 이런 상태가 몇 달 가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끔찍한데, 평생 그러리라는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았다. 반드시 되돌려야 했다. 형 의 관심을 되찾아 전처럼 살아가는 것만이 그의 목표이자 희망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문제를 풀어내야 했다. 드디어 결심이 섰다. 밤을 새우고 새벽이 밝기 전이라면 이솔렛도 나와 있지 않을 것이었다. 직접 가서 눈으로 조사해보는 것밖 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아, 자, 그 정도 빠르기로 되겠어? 얼른, 옳지, 그렇게 피하면 이렇게......." 나우플리온이 든 목검이 다프넨의 등을 냅다 때렸다. 너무 세게 맞는 바람에 하마터면 앞으로 엎어질 뻔했다. "......등짝을 얻어맞는단 말이다, 이 녀석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우플리온은 속으로 흐뭇하게 느끼고 있었다. 오래 전 벨노어 저택에서는 한 손으로도 충분히 요리할 수 있었던 녀석이었는데, 이젠 제법 신경 쓰지 않으면 막을 수 없을 지경이란 말이야. 갑자기 말대꾸가 들렸다. "정말이지, 차라리 당신이라도 진검을 드는 게 어때요? 내가 목검을 드는 거야 좋지만 상대방까지 목검이니 도무지 긴장이 안 되잖아요. 이럴 때도 그냥 한 대 맞고 말지 싶기도 하고." 나우플리온은 어이가 없다는 듯 팔짱을 끼더니 소리쳤다. "한 대 맞고 만다고? 내가 널 때리면 뭐 나오는 거라도 있는 줄 아냐? 내가 늘 연습도 실전처럼 하라고 안 했어?" "말처럼 모든 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게다가......." 다프넨은 목검을 든 채 두 팔을 활짝 펴 보였다. "겨울 내내 맞다보니 맷집이 늘어버렸단 말이에요. 쳇." 나우플리온은 눈을 가늘게 뜨며 소년을 째려보았다. "그래, 더 세게 때려달라 이거구나. 안 그래도 요즘 몸이 뻐근한 것 같았는데 몸도 풀 겸 잘됐......." "저런, 드디어 나이는 어쩔 수 없다는 거로군요? 역시 30대라서 그런가." "너는 뭐 영영 30대 안될 줄 알아?" 목거은 집어던지고 쫓고 쫓기기가 시작되어버렸다. 다프넨은 달아나면서도 짓궂게 소리질렀다. "제가 30대가 된다고 해 봤자 그때 당신은 40대, 그것도 40대 후반일텐데 제가 뭐가 걱정이겠어요! 안 그래요?" 그러나 결국은 잡히고 말았다. 30대에게 잡힌 주제에 10대 소년은 바닥에 깔린 채 팔다리를 비틀면서도 끝내 자기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아, 정말 어른 공경은 힘들어요! 쫓아온다고 잡혀주기도 해야 되고......." "공경은 입으로도 좀 해보란 말이다. 친구는 때려치우고 확 양자로 삼아버릴까 보다." 초봄의 누런 풀이 머리며 옷에 온통 달라붙은 채로 한 바퀴 더 굴렀다. 옷 버리고 어머니한테 혼날 것을 망각한 두 명의 어린 개구쟁이들 같았다. 구르다가 실수로 목검을 깔아뭉개는 바람에 둘은 거의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아얏!" 나우플리온이 다프넨을 번쩍 안아 일으켰다. 그러더니 갑자기 심각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그만 하자. 누가 보면 검의 사제가 애들하고 똑같이 논다고 욕하겠다." "이미 실컷 같이 놀아 놓고서 괜히 아닌 체 하니까 웃겨요." "......넌 왜 내 옆에 있을 때만 그렇게 말재주가 느는 거냐?" 일어나서 둘 다 펄쩍펄쩍 뛰며 먼지와 잔디를 털어 냈다. 나우플리온이 투덜거렸다. "사실은 30대라는 것에 별 불만이 없는 나지만 네 녀석이 자꾸 그러니까 은근히 약이 오르잖냐. 나도 10대였던 때가 있었다고." "알죠. 그런데 말예요. 제가 실버스컬에 나가면 좋을 것 같으세요?" 고개를 휙 돌려 쳐다보니 갑작스런 화제 전환에 어이없어하는 표정이 보였다. "갑자기 실버스컬은 왜?" "왜, 싫어요? 싫으면 안 나가고요." "......." "꼭 나가고 싶은 건 아니에요. 사실 예전엔 그런 게 있다는 것도 몰랐잖아요? 존재 자체도 당신이 말해줘서 안 거고....... 어쨌든간 그다지 의미를 두고 있지는 않......." 바닥에 떨어진 목검들을 집어들던 나우플리온이 말을 가로막았다. "나가보는 것도 좋겠지." "저, 사제님?" 갑자기 안 부르던 호칭을 불렀다. 나우플리온은 멀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왜 불러?" "제가 나가서 이가는 것이 혹시... 사제님한테는 도움이 안 됩니까? 다프넨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둘은 잠시 얼굴을 마주봤다. 꽤나 심각하게. 무슨 말이든 나올 때가 되었다 싶을 무렵, 나우플리온이 손을 내밀더니니 다프넨의 턱에 붙은 풀 하 가닥을 떼어냈다. "......." 다시 마주보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뭔가 말할 것 같은 분위기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우플리온은 다시 손을 내밀었고 이번엔 머리에 붙은 풀을 떼어갔다. "뭐예요! 지금 풀 찾고 있어요?" "아니, 그냥 눈에 띄더라고." "제가 물은 말에 대답 안 하세요?" 나우플리온은 다시 다프넨의 얼굴을 열심히 쳐다봤다. 이번에 다프넨은 아예 머리나 얼굴에 붙은 풀이 있다면 얼른 떨어지라고 두 손으로 열심히 쓸어댔다. "응, 그래. 이젠 없다." "그게 아니라......." "좋아." 어, 방금 대답을 들은 것 같았다. "다시 한 번만 말씀해 주실래요, 사제님?" "좋다고. 실버스컬에 나가라. 나가는 김에 우승도 해버리면 좋고. 아참, 물론 지금 네 실력이 우승할 실력이라고 말한 건 아니야. 넌 아직 한참 멀었어." 다프넨은 고개를 숙이더니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우플리온을 와락 껴안았다. "뭐야! 씨름이라도 하잔 거냐?" "푸핫, 아뇨!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다고요!" 손을 풀더니 다프넨은 바닥의 목검을 집어들었다. 이솔렛에게 가기로 한 시간이 되어 있었다. "그럼 그만 갈게요! 신성 찬트도 배워두면 우승하는데 도움이 될 지 아나요?" 비탈길을 달려 내려가는 다프넨을 내려다보며 나우플리온은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내가 뭘 잘못 말한 건가?" 잠시 후 그는 뭔가 깨달은 듯 다시 중얼거렸다. "쟤가 지금, 진검을 갖고 다녀도 좋다고 허락한 걸로 받아들인 건가?" 4. 부서진 돌 "아, 물론 전 언제나 당신의 실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지요. 제 평생 살아오면서 그렇게 빠른 주먹은 다시 보지 못했거니와...... 하여튼 간에 어쩌고저쩌고 닭 잡아먹고 오리발도 내밀고 도랑 치고 가재도 잡고 마당 쓸고 돈도 줍고...... 그러니 당신께서 저희를 떠나시면 연약한 우리가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헤치고 살아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다른 말씀은 마시고 제발......." 아무 소리나 나오는 대로 지껄이다가 스스로도 역겨운 나머지 유리히 프레단은 고개를 돌리며 잠시 입을 막았다. 그러나 다시 앞을 봤을 때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었다. 연출 의도는 '귀여운 막내 동생'. "예전에 제 친구들 중에도 강한 녀석들이 있었지만, 걔들이 한꺼번에 덤빈다 해도 당신한테는 한 주먹거리도 안될 겁니다. 당신처럼 강한 사람은 아직껏 한 번도 본 일이 없어요." 이 얘기를 마리노프가 들었다면 단숨에 도끼를 꼬나들고 사생결단을 내자고 달려들었겠지. 음, 그녀가 자신한테 달려들까, 저 야만인한데 달려들까? "아, 그게 뭐...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당신의 말을 들으니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걸 나는 알았소." "그렇지요? 역시 그렇지요? 아아, 정말 잘됐습니다. 우리 형님 얼굴이 저렇게 하얗게 질린 것 좀 봐요. 앞으로는 떠나니 어쩌니 하시면서 저희를 놀리지 마시란 말이에요. 심장 약한 우리 형님 기절하십니다." 그 말은 이 계획을 처음 생각해 내서 그에게 이 고생을 시키고 있는 류스노에게 복수의 의미로 날린 이야기였다. 그러나 정말로 창백한 얼굴을 하고 서 있는 류스노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럼 어서 갑시다. 내가 말을 잘못해서 두 분한테 미안하니까 내가 저녁밥을 살게요. 그러면 되죠?" '밥'이라는 것은 쌀을 가지고 요리하는 무슨 음식인 모양인데 유리하는 그게 뭔지도 몰랐다. 어쨌든 이 순진한 야만인이 '식사하러 가자'는 말을 주로 '밥 먹으로 가자'라고 말한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그 이상은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요! '밥'을 먹으면 우리 형님도 다시 기운이 나겠죠. 형님, 갑시다!" 그제야 류스노는 야만인 앞으로 다가오더니 허리를 잔뜩 굽혀 보이며 놀랄 만큼 정중하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럼 저희는 당신만 믿겠습니다." 이럴 때마다 유리하는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벌써 몇 달째이니 이제 익술해질 때도 됐으련만 아직도 저 냉정 침착한 류스노가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면 머릿속에서 심각한 위화감이 일어났다. 하긴 뭐, 류스노보다 더 비굴하게 놀고 있는 자기 자신도 있는데. 야만인이 앞장서서 걷고 둘은 뒤를 따랐다. 칸 통령의 무시무시한 네 개의 날개 중 1익과 4익이 이렇듯 갖은 아양을 다 떨어가며 따라다니고 있는 사내의 이름은 이자크, 이자크 듀카스텔이라고 했다. 본명은 아닌 모양이지만 어쨌든 다들 그렇게 불렀다. 황금 전갈 요리집 '칸타 쿨구'에서 만난 이래로 몇십 일이나 공들인 끝에 결국 성공하여 동행인이 되었고, 벌써 반년 넘게 함께 다니고 있는 처지였다. 언뜻 보아도 높은 사람이겠거니 했던 이 자는 외국인이면서도 놀랍게도 산스루리아의 여왕, 티알리마르 위나- 산스루 메르제베드의 부군이었으며 그녀가 여왕의 자리에 오르는 데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공신이기도 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이 나라에 있고 싶어하지 않는 상태였다. 예리한 류스노는 금방 그의 심리를 알아보았다. 그는 렘므의 야만족 출신이라고 했다. 예의나 사교 따위는 전혀 모르고 자랐고, 전투에는 능하지만 그 외의 것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런 그가 모험심 하나로 렘므식 이름을 얻은 후 산스루리아까지 흘러 들어왔고, 거기에서 우연히 젊은 공주 메르제베드를 만나게 되었다. 산스루리아는 저들의 신 산스루를 모시는 신정일치의 나라이면서 대대로 무녀인 여왕만이 왕위를 계승해 왔다. 저 여왕인 티알리마르가 급병으로 갑작스레 서거했을 때 남은 세 공주 가운데 가장 세력이 큰 것은 첫째 공주, 그 다음은 둘째 공주였다. 셋째 공주인 메르제베드는 나이도 언니들에 비해 어리거니와 정치적 수완도 부족했고, 지지하는 세력도 별로 없었다. 그녀가 단 하나 언니들보다 나은 부분이 있다면 산스루 무녀로서의 신성력이 월등하다는 점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르제베드는 여왕 자리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산스루리아에서는 여왕이 낳은 딸들 가운데 그 다음 왕위를 잇는 공주 하나를 제외하고 다른 공주들은 결혼을 할 수 없도록 금지되어 있었다. 즉, 여왕 자리를 차지해야만 결혼을 할 수 있고 아이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다른 공주들은 대무녀 자리를 받았지만 평생 처녀인 채 늙어 죽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내전이 벌어졌을 때 메르제베드를 도운 것은 두 사람이었다. 하나는 두 언니를 차례로 배신한 뒤 메르제베드의 진영을 택한 교활한 책략가인 현 재상, 다른 하나는 그녀와 사랑에 빠진 무시무시한 야만인이었다. 야만인은 놀라운 전투력으로 평소 싸움에 능하지 않은 연약한 산스루리아 인들을 모조리 평정해 버렸다. 개인 전투력뿐 아니라 지휘력도 발군이었다. 더구나 일단 적이 된 자는 사냥 당하는 짐승들에게 가질 법한 연민조차도 없이 속시원하게 베어버리는 잔인함마저도 갖춘 자였다. 그러나 메르제베드가 승리하여 여왕이 되고 나니 상황이 바뀌었다. 메르제베드 여왕이 이자크를 저버린 것은 아니었다. 본래 그리 정치적이지 못했던 그녀는 내전을 겪으며 많이 성장했고, 남편에 대한 애정도 매우 깊었다. 그러나 내전이 끝나고 나니 예절이고 절차고 모조리 무시하는 야만인의 거친 태도가 왕궁의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아내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은 뒤 태도는 어느 정도 고쳐졌지만 다음에는 그 자신이 궁정 생활을 지겹게 느끼기 시작했다. 아내를 위해 이것도 조심, 저것도 조심하다 보니 즐거운 것도 없었고 소화조차도 잘 되지 않았다. 최고급 천으로 만든 훌륭한 침대보다 길바닥에 누워 잘 때가 훨씬 좋았던 것 같았다. 그리하여 바람이나 쐴 겸 칸타 파르스 항구에 왔다가 그는 류스노와 유리히를 만났다. 두 외국인 사내는 처음부터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작정이라도 한 것 같았다. 차츰차츰 접근해서 친절한 술친구인 체 하더니 갑자기 기분 전환할 겸 나라를 한 바퀴 도는 여행을 하자고 제안해 왔다. 그들이 유도한 대로 잘 됐다, 국내 시찰 핑계 대고 멀리 한 번 나가보자, 귀찮은 신관들을 떨궈 놓을 수 있다면 두말할 나위 없이 좋고, 라고 생각한 그가 응낙함으로서 동행이 시작되었다. 저들끼리는 산스루리아를 돌아다닐 수 없는 류스노와 유리히가 접근해 온 의도는 뻔했다. 이자크를 따라 다니는 것은 확실히 편한 여행이었고 산스루리아 곳곳을 샅샅이 살펴볼 수 있었던 것 역시 물론이었다. 그러나 여기저기 참견하기 좋아하는 이자크의 여행 방식에 맞춰주느라 시간이 낭비되는 것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처음엔 조바심을 냈지만 나중엔 아예 지쳐버려 그들도 적당히 여행을 즐기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어쨌든 결론은 났다. 산스루리아에는 보리스 진네만이라는 검을 가진 꼬마가 온 일이 없으며, 렘므로부터 산스루 반도에 이르는 해안가에는 난파해 온 작은 배 따위도 없었다. 녀석들은 정말 바다 너머로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놀랄 만한 수확도 하나 얻었다. "바다 너머라고? 거기에 사람들이 사는 섬이 하나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뱃사람들의 소문이라 잘 모르겠구만?" 좀 더 다그쳐 묻자 이런 대꾸가 나왔다. "허허, 원래 뱃놈들이란 것들이 제멋대로 상상을 잘해. 환상의 섬도 종종 보고 말이야." ...... 이래서야 도무지 소용이 없었다. 어쨌거나 이들은 이미 산스루리아를 빠져나와 님 반도 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곳에 가면 이자크의 야만인 친구들이 있다고 하니까 또 한 번 도움을 받아볼 수 있겠지 싶었다. 엘베 전투 이후로 야만인들이 엘베 섬에서 거의 쫓겨나긴 했지만, 렘므 북해의 원거리 항해를 사실상 꽉 잡고 잇는 것은 아직도 이들이었다. 화이트 크리스탈 제도와 물방울 열도, 그리고 그 위쪽에 펼쳐진 미지의 바다에 이르기까지 돛 하나 달린 작은 배만 있으면 어디든지 갔다. 그러니 그들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이 자와 절대 헤어져서는 안 되었다. 갖은 아양과 약한 채 빌빌대는 태도는 이젠 몸에 붙을 지경이었다. 완벽한 임무 완수를 추구하다가 조만간 성격이 개조될 위기에 처한 두 사람은 밥먹으러 가자며 콧노래를 불러대는 야만인의 노랫가락을 저도 모르게 따라 흥얼거리며 뒤따라가고 있었다. 헥토르가 돌아왔다. 돌아왔다는 소식은 금방 들었지만 직접 만난 것은 다음날이나 되어서였다. 그것도 우연히, 산비탈을 내려가다가 맞닥뜨렸던 것이다. 헥토르는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었고, 다프넨은 내려가는 중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금방 알아봤다. 다프넨은 일전에 스콜리의 식당에서 헥토르가 그를 못 본 체 하던 것을 생각해 냈고, 이번에도 그렇게 할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곁을 지나치는 순간 익숙한 어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게 감사할 것이 있는 것 같군." 여전히 오만한 목소리였는데 내용은 전혀 달랐다. 다프넨도 걸음을 멈췄다. "무슨 소리지?" "여러 가지지. 일간은 생명을 구해 준 셈도 되고 말이다." 아마도 괴물을 처치한 일을 두고 하는 말인 듯했다. 그러나 괴물을 죽인 것은 헥토르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널 살리려 한 게 아니야." "상관없어. 어쨌든 네가 그때 안에서 나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죽은 목숨이었겠지. 게다가 난 이미 부끄러운 짓을 했었고 말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오래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목소리가 약간 격앙되었다. "그래, 이제 와서 내게 면죄부라도 받아가고 싶은 거냐?" 갑자기 헥토르는 몸을 돌려 다프넨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다프넨은 순간적으로 흠칫 놀랐다. 그의 이마에 칼로 그은 듯한 날카로운 흉터가 생겨나 있었다. 괴물에게 당한 직후만 해도 없던 상처였다. "아냐, 용서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 용서해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말이다. 하지만 분명히 할 건 분명히 해야지. 난 네게 빚을 졌다. 첫째로 생명을 구원받았고, 둘째로 내 죄를 덮어주었다. 날 위해서는 아닐 테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서였겠지만, 결론은 같게 났으니 없는 말을 한 건 아니지." 그것말고도 많을지 몰랐다. 모든 싸움이 끝났을 무렵에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헥토르를 손쉽게 죽일 수도 있었고, 싸움 후에는 그가 비겁했다고 소문을 퍼뜨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의 다프넨은 아무 생각도 해낼 수 없는 상태였으며, 이후에 할 수 있었을 일도 무의미한 장난에 불과했다. 그가 적이라면 언제고 다시 죽어야 할 테고, 그때 가서 지난 일이 어찌 되었는가 따위는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그와 얽힌 과거도 말끔히 베어버리겠다는 의도일 테니까. "내가 더 들어야 할 필요는 없겠지?" 다프넨은 그대로 지나쳐 가려 했다. 그러나 헥토르가 빠르게 이어 말했다. "그리고 내게 한 가지 가르침을 줬지. 그것조차도 감사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네 덕택에 난 다시 한 번 살았지. 침묵섬에서 전사들과 다툼이 있었지만 너와 있었던 일을 떠올렸던 탓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 "그러나 네가 그 모든 일에 의미를 두지 않듯, 나도 그러지 않을 생각이다." 다프넨은 돌아선 채 우뚝 서 있었다. 비겁한 자의 말을 더 들어볼 마음이 생겼다. 동시에 끓어오르는 불쾌감이 입 안 가득 고였다. "어차피 다시 싸우게 되겠지? 실버스컬에서였든, 다른 어떤 곳에서 였든 말이다. 그 때가 되면 난 망설임 없이 너를 벨 거다. 하지만 만일, 만일에라도 네가 제 3자로부터 공격을 받는 것을 본다면, 모든 것을 내던져 세 번은 너를 돕겠다." 다프넨은 다시 돌아섰다. 그의 얌전한 청동빛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네가... 내게 증오를 가르쳤지. 그래서 내 안에 좀도 오랫동안 잠들뻔했던 본성을 되살아나게 만들었어.그런 주제에 잘도 말 하는 구나. 네 좋을 대로, 뭐든지 맘대로 해봐라. 나야말로 개의치 않아.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언젠가 너를 죽일 것이다. 그 때는 정당한 대결이 아니라 해도 관계치 않겠다." 두 소년은 등을 돌리고 다시 헤어졌다. 드디어 모든 것을 알아냈다. 기뻐 날뛰고 싶은 기분을 억지로 누른 채 에키온은 밤길을 걷고 있었다. 이 일에 너무 정신을 집중한 나머지 오랜만에 돌아온 형을 제대로 반기지도 못했다. 그러나 성공하기만 하면 형에게 할 말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성공하기만 하면. 역시 그의 생각 대로였다. 전날 밤에 가서 면밀히 살핀 결과 절벽에 놓인 것은 허공에 떠 있는 투명한 징검다리였다.그걸 계단 삼아 두 사람은 절벽 꼭대기를 오르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길가는 사람들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걷던 것을 떠올려 보면 한두 번 오르내린 길이 아닌 모양이었다. 에키온이 사용한 방법은 마법으로 만든 빛의 구슬들을 뭔가 있을 법한 허공에 잔뜩 부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자 계단의 윤곽 이 대략 드러났다. 틀림없는 마법의 돌들이어싿. 그날은 오르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무서움을 꾹 참고 계단 끝까지 올라갔다. 다시 올라오지 못할 테니 구경이라도 해보자는 마음 도 있었고, 뭔가 정보 얻을 것이 없을까 궁금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절벽 꼭대기에 이를 무렵에는 등 전체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절벽 꼭대기는 텅 빈 돌바닥이 아니었다. 맨 먼저 작은 샘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책이 한 권 돌로 눌러진 채 놓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책을 펼쳤다. 안에서는 종이쪽지가 한 장 나왔다. 쓰인 내용은 간단했다 두 가지 노랫말로 만들 것. 조금 생각해 보니 금방 이해가 갔다. 책은 송시와 서사시를 모은 것이었다. 이걸 보고 노랫말 만드는 연습을 하라고 이솔렛이 남겨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다음날 다프넨이 가지러 오겠지? 이보다 계획이 잘 맞아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는 책을 있었던 모양대로 내려놓고 벌떡 일어서서 다시 마법의 계단으로 내려갔다. 다섯 단쯤 내려가서 뒤로 돌아선 그는 주머니에서 룬이 잔뜩 쓰여진 종이를 꺼냈다. 물론 그가 직접 쓴 룬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책장에서 몰래 훔쳐내어 가져온 것이고 엄청나게 귀한 물건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에키온은 그 안에 쓰여진 룬을 다 연결해서 해석할 줄도 몰랐다. 그러나 사용법과 더불어 그 효과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는 종이 뒷면에 미리 가져온 봉랍을 단단히 붙이고 네 번째 돌 위에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다시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어느 정도 거리가 확보되자 그는 땀을 흘리면서, 동시에 미소 띤 얼굴로 룬을 외웠다. 데모 라이 주스크 탄-디어....... 룬이 쓰여진 종이가 불타기 시작했다. 광채는 둥근 돌 전체를 휩쌌다. 이윽고 주문이 완료되었다. 슈우우우우......콰콰쾅! 돌에 걸렸던 마법은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그 종이에 쓴 룬 주문은 물건에 걸려 있는 마법을 해제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절벽 아래로 떨어진 돌의 울림이 한동안 메아리가 되어 사방을 울렸다. 거기에 귀를 기울이며 에키온은 이곳이 얼마나 깊은 골짜기인지 새삼 느끼고, 자신이 세운 계획의 완벽함에 다시 한 번 경탄하고 있었다. 그건 절벽 꼭대기에 올라갔던 날 이솔렛이 제안한 방식이었다. 반은 놀이였고 반은 공부였다. 이솔렛이 내킬 때 숙제를 가져다 놓고, 다프넨도 내킬 때 가서 숙제를 해결해 놓는 것이었다. 신성 찬트는 계속 누군가로부터 배우기만 해선 안되고, 혼자 묵상하며 스스로의 내부에서 노래를 끌어내는 시간이 필요했다. 며칠 동안 다프넨은 매우 몸이 피곤했기 때문에 숙제를 찾으러 절벽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나우플리온과 하는 수업의 강도가 훨씬 세어졌던 것이다. 몇 마디 항의하려니까 어느새 '실버스컬에 간다면서?' 라는 말로 다프넨의 입을 막아버렸다. 확실히 이럴 땐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우플리온은 실버스컬에 가기 전에 다프넨이 진검을 쥘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더욱 마음이 급해진 상태였던 것이다. 겨울 내내 휘두른 목검의 부드러움이 그의 마음에 세워진 날을 많이 무디게 해 주긴 했다. 그러나 짐검, 특히 윈터러를 다시 쥐는 순간 살기가 금방 돌아와 버린다면 긴 노력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완전히 가시게 하기 위해 그는 목검으로도 진검과 같은 효과를 내게 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우플리온도 결국에는 지쳤다. 스콜리가 쉬는 날 행한 열 시간이 넘는 연속 훈련 끝에 둘 다 뻗어 한나절 넘게 잠들어 버렸다. 그래도 먼저 깨어난 것은 다프넨 쪽이었다. 그는 잠들어 있는 나우플리온을 흘끗 보며 친근하게 미소했다. "역시 이런 게 십대의 저력이란 말이에요." 혼잣말도 이럴 때 재미있었다. 일어나 대강 식사를 마친 다프넨은 잠시 무얼 할까 궁리하다가 '그래, 숙제를 찾으러 가면 되겠구나'하고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나가려다가 그는 무언가가 자신의 발목을 잡는 것을 느꼈다. 왜인지 몰라 잠시 의자에 앉았지만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방 안에 있는 무언가가 자꾸만 그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잠시 가슴에 손을 얹어 본 끝에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윈터러였다. 어디 있을까. 금기를 지키려 하던 마음은 갑자기 숨바꼭질하는 소년의 그것으로 변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스스로도 몰랐다. 아니, 모른다기보다는 이상한 상태 자체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일어나 천천히 한 바퀴 돈 끝에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손을 움직여 보았다. 부름이 더 강해졌다. 손을 침대 아래에 넣었다. 아무 것도 없었지만 그 아래 뚜껑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달칵. 세로로 길쭉한 비밀 장소였다. 사실 비밀 장소라기엔 자물쇠도 없었고 너무 눈에 띄기 쉬운 장소이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이 부름은 실로 무서운 데가 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다른 쪽으로 헛손질하지 않았다. 뚜껑 아래에 검이 들어 있었다. "......." 그는 검을 잡기 전에 잠시 지체했다. 그러나 잠시일 뿐이었다. 그의 손을 곧 너덜거리는 천조각으로 덮인 손잡이를 찾아내어 쥐었고,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윈터러였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지만 마음에 별다른 기운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를 한 번 휘둘러보니 겉옷이 보였다. 거기에 검을 싸서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때까지도 자신의 행동에서 전혀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상쾌한 저녁 바람이었다. 그날따라 걸음도 가벼웠다. 올라가다가 이솔렛의 집 굴뚝에 연기가 오르고 있는 것을 보고 다시 미소지었다. 자신이 좀 일찍 저녁을 먹을 셈이었다. 풀밭으로 올라가서 곧장 절벽으로 통하는 입구로 향했다. 얼마 안가 마법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니다, 그는 갑자기 멈춰 섰다. 이상한 목소리가 귀를 간질이고 있었다. 떨쳐버리려고 몇 번 고개를 흔들다가 그는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 자신의 손에 든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멍해져 버렸다. 무엇에 홀렸다가 깨어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왜 이걸 가지고 나온 걸까. 어떻게 찾아낸 걸까. 어째서 아무 죄책감도 느끼지 없었던 것일까. 이제 어떻게 해야 좋을까. 가슴이 쿵쿵 뛰었다. 당장이라도 도로 달려가서 검을 넣어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체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먼 곳까지 와있었다. 여기 왜 왔더라, 아 그래, 이솔렛의 숙제를 가지러 왔었지. 숙제만 가지고 얼른 되돌아가야겠다. 그는 급히 다음 계단을 디뎠다. 그러나 계단이 없었다. "......!" 저녁 식사를 하던 이솔렛은 갑자기 손에 들었던 숟가락을 툭 떨어뜨렸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랐다. 그러나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 그리고 높은 곳에서 아래로 덜컥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온 몸을 휘감고 있었다. 흡사 꿈을 꾸다가 놀라 깨어난 것만 같았다. 그러나 곧 사라져버렸다.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크게 뛰어올랐던 심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계속해서 쿵쾅거렸다.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개의 검집을 맨 검띠를 꺼내 어깨와 팔에 단단히 돌렸다. 그러나 그런 다음에도 어디로 가야 할 지를 몰랐다. 다프넨의 실종이 알려진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그가 실종된 일은 저번에도 있었지만, 섬사람들 전부가 알게 된 것은 이번에 처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지만 그를 찾은 사람은 없었다.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저녁 시간이라 모든 사람들이 식사 중이었고, 마을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 다프넨이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 사람도 없었다. 나우플리온은 아무 것도 믿고 싶지 않았으나, 결국 데스포이나에게 다프넨이 윈터러를 가지고 사라졌다는 절망적인 소 식을 전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하는 나우플리온의 입술도 떨리고 있었다. 이제 오해하기에 충분한 상황이 되어 있었다. 그토록 금지했던 검을 가지고 사라져 버렸다는 것, 그건 소년이 결국 유혹 을 이기지 못하고 검을 찾아냈다가 이계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는 뜻이 아닐까?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데스포이나와 나우플리온, 그리고 모르페우스의 세 사제들뿐이었다. 그러나 곧 다른 한 사 람이 추가되게 되었다. 이솔렛은 공회당 문을 비틀어 열고 달려와 세 사람 앞에 섰다. 감정을 애써 누르려 했으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애가 아무래도 어딘가에서 떨어진 것 같아요. 시간은 어제 저녁 때가 틀림없고요. 여기 앉아서 의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에 요....... 당장 절벽 아래를 수색해 봐요, 지금 당장." 헥토르는 창가에서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등뒤에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형!" 대답이 없자 다시 불렀다. "형!나야!" 갑자기 헥토르는 뒤로 홱 돌려 일어섰다. 그리고 에키온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놀란 에키온이 가냘픈 신음소리를 내며 비척거렸다. "너... 다프넨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빨리 모조리 말해, 무슨 짓을 했는지 모조리 털어놔 보라고!" 나우플리온은 이솔렛이 한 말에 확신을 가졌다. 아니, 오히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의 마음 속에 '소통'의 능력을 이용해 쉽게 지워지지 않을 말들을 박아 넣은 것은 그 자신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녀가 다프넨의 위기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들은 찬트를 가르치고 배우는 사이였다. 찬트는 마법만큼이나 두 사람의 정신을 연결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암암리에 연결되어 어느 순간 동일시를 느끼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처 삼키기 힘든 씁쓸함을 맛보았다. "함께 찾아봅시다." 그러나 그러고도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소년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사실 어찌 보면 우스운 노릇이었다. 절벽이라 부를 만한 곳에서 떨어졌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 있을 수가 있겠는가. 시체를 찾는 데 촌각을 다툴 필요는 없는 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명의 사람들은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이솔렛은 의자를 끌어당겨 탁자 앞에 앉아 팔꿈치를 올려놓고 오랫동안 기도했다. 그러나 기도의 대상은 달 여왕이 아니었다. 아버지 일리오스 사제도 신봉하지 않았던 달 여왕을 그녀 역시 신뢰하지 않았다.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는 않아도 달 여왕은 원시적 신앙의 대상답게 이유 없이 사납기도 했고, 태도가 불분명한 데도 있었다. 달 여왕 신앙이 섬을 장악한 데는 분명 무슨 비밀이 있었다. 그녀가 기원을 드리는 대상은 일리오스 사제가 '옛 마법사들'이라고 불렀던 불특정 다수의 죽은 사람들이었다. 옛 왕국이 지녔던 문명의 기틀을 지탱한 자들이었고, 자신의 영혼조차 조종할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능력과 더불어 반신에 가까운 고귀함을 지닌 자들이 그들이었다. 비록 달 여왕에게 밀려났을 뿐이지, 그들의 혼은 아직도 소멸되지 않았다. 돌아와....... 반드시 돌아와야 해. 네겐 아직 해내야 할 일이 있어. 넌 대륙으로 가야하고, 반드시 그들을 물리쳐 승리해야만 해. 너를 위해, 네 스승을 위해, 그리고 내 아버지를 위해. 아직까지 말하지 못했던 비밀들이 한꺼번에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 끝날 때가 아니었다. 아직은 아니었다. 억눌렀던 욕망들과 행복해지고 싶다는 미칠 듯한 충동,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분출될 듯했다. 나우플리온은 어둠 속에서 혼자 앉은 채 캄캄한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절대 네 녀석을 양자로 삼진 않을 거다... 그랬다간 마흔 살이 되어 보기도 전에 내 머리가 다 하얗게 세고 말걸." 독약이 심장에 고인 듯한 기분으로 그는 앉아 있었다. 온 몸이 아팠고, 특히 눈이 피로했다. 심한 두통과 더불어 오한까지 느 꼈다. "난 그냥 단지, 네가 서른 살이 되는 걸 보고 싶었을 뿐인데...... 왜 모든 것은 이리도 단순하지 않을까."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랬다가 다시 두 눈을 감쌌다. 손 틈으로 엉망으로 뒤엉킨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넌 돌아와도... 이젠 용서 받지 못할 거야, 이 자식아....... 이미 한계를 넘었단 말이다......." 제목 : 룬의 아이들 5 지은이 : 전민희 펴낸이 : 서인석 출판사 : 제우미디어 출판년도 : 2002년 저자소개 : 전민희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역사와 문학. 신화 등을 비롯하여 최근 철학의 신조류까지 섭렵한 지식광이며, 판타지 동화에서 남미 환상문학에 이르는 다양한 판타지에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연구원을 거쳐 1999년 출간한 장편 판타지 소설 ‘세월의 돌’은 통신 연재사상 전설적인 400만회의 조회수와 더불어 전국 판타지 독자들의 입문필독서로 자리잡았다. 4대 통신망과 유명한 인터넷 커뮤니티들마다 작가의 팬클럽이 빠짐없이 결성되어 있으며, 현재 (주)이삭커뮤니케이션에서 <아룬드 온라인>이라는 이름의 3D 온라인 게임으로 제작중이다. 또한 ‘세월의 돌’은 총 5부작으로 예정된 <아룬드 연대기Arund Chronicles>의 3부로서, 1부격인 ‘태양의 탑’이 이듬해 출간되었다. Contents 1장 . Bloody History 1. 피의 짐승 . 2. 얼음 거미의 집 . 3. 계승자 . 4. 각자의 전쟁터 . 5. 다시 대륙으로 . 2장 . Risky Party 1. 이름들을 위하여 . 2. 실버스컬 개막 . 3. 뜻밖의 적, 뜻밖의 조우 . 4. 폰티나 성의 위협한 밤 . 5. 불가능한 것에 삶을 걸고 . 6. 파티의 끝 . 3장 . Blindly Verity 1. 마침내 따라잡히다 . 2. 원하는 것, 원할 수 없는 것, 원해선 안되는 것 . 3. 시골 마을 공방전 . 4. 긴 죄의 대가 . 1장 . Bloody History 1. 피의 짐승 절벽, 구부러진 나무의 뿌리, 소리내어 흐르는 물, 새 소리없는 침묵의 산에 낯선 겨울이 한 구석 자리했다. 부러진 칼끝 같은 얼음 박편이 천만 개도 넘게 모인 결정이었다. 바삭. 설탕입힌 과자처럼 새하얀 서리 고치 안에 흑청빛 머리카락이 묽게 비쳐났다.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손에 하나의 검이 있었고, 이윽고 빛을 냈다. 윈터러(Winterer) 안의 수많은 짐승들이 드디어 제 목소리를 내려 하고 있었다. 빛은 검을 쥔 소년의 눈꺼풀을 뒤엎었고, 곧 각각의 기억으로 변했다. 사나운 짐승이 달려가고 있었다. 여섯 개 발굽이 걷어찬 검붉은 흙이 폭죽처럼 흩날리는 거친 땅, 핏빛 갈기 사이로 솟은 굽은 뿔은 닿아선 안될 높은 곳을 가리키는 듯했다. 대지가 끊어오른다. 하늘이 불탄다. 너울거리는 지평선을 손가락인 양 가리키며 우뚝 선 뾰족한 낭떠러지, 그 끝에는 바로 그 검이 꽂혀 있었다. 이 역동하는 뜨거운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지된 존재였다. 뭉쳐진, 집약된, 함몰된, 단 하나의 존재였다.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순백의 날 위로 하얀 장식술이 춤추었다. 얼어붙은 바람...... “내 너를 가지리라!” 낭떠러지로 달려 오르는 발소리에 이어 하나의 손이 덤벼들었다. 순식간에 검자루를 움켜쥐고는 긴 호를 그으며 뒤돌아 내질렀다. 하얀 칼날이 떨어지는 별처럼 광채를 뿌렸다. 푸욱! 산발한 머리칼같은 핏발이 치솟아 허공에 번졌다. 검은 땅이 피를 삼키고, 둘로 갈라진 짐승의 속내에선 덜 끊어진 생명이 내는 김이 무럭무럭 났다. 잠시 단말마의 버르적거림 같은 것이 이어졌다. 쿨럭, 쿨럭. 그러나 곧 고요해졌다. 낭떠러지 위에 우뚝 선 자는 손에 쥔 검을 들어 허공을 가리켰다. 아니, 팔을 뻗어 지배하는 자의 모습이 되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조각처럼 다듬어진 단단한 몸, 그리고 금빛 갈기 같은 머리털을 지닌 자였다. 들끓는 땅을 내려다보고 선 가장 강한 자였다. 검끝이 한 번 바르르 떨렸다. 이윽고 허공을 향해 힘껏 휘둘러졌다. 순간, 주위로 눈보라 같은 것이 흩뿌려지는 듯하더니 흰 얼음이 대지를 뒤덮으며 뻗어나가는 것이 보였다. 곧 세계는 겨울로 변해 버렸다. 다시 그 검을 쥔 것은 소녀였다. 탐스러운 금빛 머리칼과 짙은 흑색눈썹을 가진 열 여섯 가량의 소녀였다. 소녀는 양손으로 검을 단단히 쥔 채 한 치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정면을 쏘아보았다. 꼭 다물린 입술에는 긴장과 오만이 함께 서린 듯했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갈색 망토를 두른 삼십대 중반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금발은 소녀의 것과 매우 비슷했다. 남자는 손을 내밀었다. 아무 무기도 들려 있지 않은 빈손이었다. “네 것이 아니지 않니, 엘비라.” 소녀는 대답하지도, 어떤 몸짓을 하지도 않았다. 다만 도사려 내민 검을 쥔 손에 한층 힘을 주었을 따름이었다. “지금, 네 손에 너 자신을 뼛속까지 파멸시킬 물건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니?” “난 단지 당신한테 갚아줄 빚을 알 뿐이야.”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아다오. 내가 한 모든 일은 오직 너 하나 를 위해서였으니까.” “내가 왜 그런 것까지 생각해야 되지? 난 요청한 일이 없어.”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우울한 미소를 머금었다. 도저히 더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없어, 결국 최악의 선택을 하려는 사람의 눈이었다. “이리 다오,” 대답 없이, 소녀는 두 걸음 뒤로 물러서며 검을 휘둘렀다. 검끝은 남자에게 닿지 않았으나 흰 날이 가른 공기가 얼어붙더니 흡사 금 간유리가 부서진 것처럼 날카롭게 조각나 날아갔다. 소녀의 눈동자에 서린 것은 일말의 동정심조차 없는 싸늘한 악의였다. 남자는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그러나 이윽고 그의 온 몸에 생겨난 수백 개의 상처에서 한꺼번에 피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피 흘리는 순례자의 눈... ... 검은 또다시 한쪽 눈이 없는 사내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배에서 샘물처럼 흘러나오는 피를 내려다보며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넓은 홀이었다. 몇 개인가, 헤아릴 수도 없는 원들이 서서히 좁아지며 둥근 천장의 정점까지 올라갔다. 호수의 파문처럼, 그들은 다시 넓어지며 또한 홀의 벽을 이루었다. 차가운 회색의 돌에 새겨진 잎새와 덩굴들, 석화된 요정들의 파리한 뺨, 빛 잃은 날개, 암적색으로 한없이 가라앉아 가는 젖은 융단의 그림자 무늬들. 이 홀의 모양을 처음으로 구상했고, 현실화하도록 지시한 당사자인 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걸 인간이 만들었던가... ... 믿지 못해 결국 죽이고, 품지 못해 끝내 부수고 마는 인간이, 어찌하여 장엄한 것을 아는 것일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영광을 덧없이 담으려 했던 크디큰 태피스트리가 그의 자리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홀 양쪽 벽에 걸려 있었다. 기사의 은빛, 왕관의 금빛, 자줏빛 망토로 덮인 순백의 갈등, 대지의 녹색은 한때 보았던 것이며 성녀의 손은 아직 젊디젊은 그 자신을 축복하고 있다. 너무도 생생한 기억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누구도 기억해 주지 않으리라고 말하는 것처럼, 태피스트리는 반쯤 찢겨 늘어진 채 붉은 얼룩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그러하니 태피스트리 안의 황금, 성녀의 머리카락은 이제 핏빛, 거대한 얼룩으로 뒤덮여 소리 없는 핏방울만을 대리석 바닥에 떨군다. 찢긴 태피스트리 아래는 웅크린 남자가, 그가 그의 검을 마지막으로 쥐고 꿰뚫었던 자의 몸이 무생물로 화해 있었다. 죽은 자가 마지막순간까지 움켜잡았던 태피스트리, 그 안의 그림은 끝내 일그러지고 무너지고... 그의 피가 죄의 증거처럼 남아 흐른다. 뚝, 뚝. 텅 빈 홀을 울리는 핏방울 소리와 함께 자신의 심장이 간헐적으로 떨다가 뛰곤 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혈육의 시체로부터 눈을 돌려 높은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본능적으로 늘 기다리곤 하던 시각이었다. 지금이었다. 정면 꼭대기에 만들어진 장미창(rose window)과, 돔 주위에 빙 돌아가며 뚫린 열 세 개의 창이 서서히 빛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축복의 증표인 양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빛이 내리고 있었다. 가장 높은 창 열 네 개가 이제 막 밝는 새벽빛을 꽃잎처럼 흩뿌리는 이 순간, 피투성이 인간이 지은 홀이 가장 거룩하며 찬연한 자태를 드러내는 그 순간, 밤새 벌어진 살육으로 피의 강을 이룬 바닥과 석벽은 어떤 참작도, 면죄도, 사면도 있을 수 없을, 종말의 그 순간까지도 씻어질 수 없을, 오직 죄만을 드러내 보였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신성해 보인다. 그 모두가 천년 전에 저질러진 죄악인 양, 괴로움 속에서 서서히 극상의 희열이 피어올랐다. 이제 남은 것은 긴 전투 끝에 상금처럼 주어질 끝없는 안식 뿐이며, 그것을 기대하고 있는 자신은 죄인의 천분에 맞는 또 하나의 죄를 더하고 있음이며... ... 색 바랜 죄악, 빛 아래 이리도 무력해지는 죽음이여, 눈앞에 번뜩이는 현실임과 동시에 누런 양피지에 쓴 선고장처럼 메마른 것들. 무엇을 바라 힘을 원하고 피를 흘렸는가, 무언가를 원한 것이라면 어찌하여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왜 모두 부수어 버렸나. 죄는 끝내 피로서만 갚아진다. 절그럭, 그는 팔을 움직여 검을 당겼다. 한 조각 혈흔조차 묻지 않은, 얼음처럼 깨끗하고 차디찬 검을 향해 무미건조한 눈길을 보냈다. 끝내 자신은 승리하지 못했다. 검은 다른 자의 손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감당하기 어려우며 거부하기는 더욱 불가능한 힘을 내보여 그를 시험할 것이다. 그 역시 지리라. 진 자는 다시 검을 떨구고 핏발선 눈을 감지도 못한 채 지하로 들어갈 것이다. 파괴의 흔적, 또는 한때 존재했던 거대한 문명의 주춧돌만을 남긴 채. 피 흘리는 태피스트리는 차라리 인간적이다. 후세의 인간들이여, 인간의 것이 아닌 힘은 오직 자연에게 맡겨 영원히, 그대로, 화석처럼, 멈춰 있도록 하라. 즈르르륵. 검은 이제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다시 곧게 세워졌다.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위대한 왕이었던 자, 그는 천천히 입 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내손에 피 흘린 자들이여, 지하에서 울지 마라. 나또한 그대들 뒤를 곧 따라갈 것이며 그때에는 내 남은 살점 한 조각까지 너희 손에 붙이리니 내가 흘릴 피로 광란 카니발을 벌인다 해도 주저 없이 따르리라. 어떤 곳에서든 검은 늘 존재했다. 검은, 어느 순간 풀꽃 핀 동산에서 시골여인의 손을 잡은 젊은이의 허리에 있었다. 다른 순간 검은, 거대한 악의 세력과 벌일 첫 전투를 앞둔 야전 천막을 등지고 서서 캄캄한 허공에 휘날리는 수백 개의 깃발을 쏘아보는 흑발 여인의 손에 있었다. 또한 황무지 가운데 미이라처럼 말라붙어 해진 시체와 함께 놓여있었다. 한 사내가 다가와 시체의 몸을 뒤진 다음 검을 잡았고, 북쪽을 향해 떠나갔다. 또 다른 영상들이 스쳐갔다... ... 이제 그 검은, 원뿔형으로 높이 솟은 얼음 동굴 속에 들어와 있었다. 파르스름하게 언 바닥에는 징검다리처럼 돌이 박혀 있었고 그 위로 긴 망토를 끌며 걸어가는 한 사람이 있었다. 얼음 바닥 저 아래에는 무엇이라 명확히 말하기 어려운 얼굴들이 흐릿하게 보였다. 호소하는 듯도, 절규하는 듯도 한 안타까운 표정들이 미동조차 없이 굳어져 있었다. 여자도 있었고 남자도, 어린아이도 있었다.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혼들, 단지 패배했기 때문에 얼음 속에서 영어의 세월을 보내야 하는 종족의 정령들이었다. 징검다리는 동굴 중앙에 솟은 흰 제단 비슷한 것까지 이어졌다. 가까이에서 보니 그것 역시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희게 언 공기가 천장 꼭대기로 올라가며 입김처럼 아른거렸다. 제단 앞까지 간 그 사람은 미리 도착한 다른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두 늙은이였고, 한 명은 여자였다. 각자 다른 빛깔의 망토를 걸쳤으며 머리에는 관 비슷한 것을 쓰고 있었다. 푸른 망토를 걸치고 북쪽에 선 자는 얼음처럼 흰 관을 쓰고 있었다. 관의 각 가지들은 산사나무 울타리처럼 마디마디 구부러지며 손을 뻗어 올렸으며 그 끝에는 얼어붙은 물방울 같은 것들이 맺혀 있었다. 자줏빛 망토를 걸치고 서남쪽에 선 자는 이끼 낀 나뭇가지처럼 보이는 관을 쓰고 있었다. 세 번째로 동남쪽에 선 자는 오렌지빛 망토와 손이 베일 듯 날카로운, 얇은 금박으로 만든 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제단에 검이 놓여 있었다. “우리가 또 다른 크나큰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어찌 확신합니까?” “우리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눈앞에 열린 재앙의 문을 보아 지나치는 것이 분명코 죄악이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세계의 삶들을 지켜야만 합니다.” “더 연약하고, 더 평화로운 세계로 보내어질 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그 땅의 존재들에게 저항해 볼 겨를조차 주지 않고 순식간에 모든 것을 멸망시킬 지도 모릅니다. 아직도 그 안에 든 힘을 우리는 다 모릅니다. 종내, 그것이 한 개인의 소유로서만 기능하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를 갖고 움직이게 될 지, 그 누가 알겠습니까.” “그것은 이미 의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입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지만, 결국은 원하는 모든 소원을 끝없이 들어줍니다. 인간은 그런 존재를 감당할 힘이 없습니다. 이 검 자체가 악도 아니고 선도 아닐진대, 우리 인간의 연약한 마음이 그 것을 무해한 존재로 내버려두지 못합니다. 또는 그것만이 아닐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은 나뿐 아니라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존재 모두입니다. 나는 그런 무섭고도 강력한 불가지의 존재를 이 세계에 두지 않겠습니다. ” “심지어 이 안에는 이미 뿌리 깊이 타락해버린 몇 명의 악한 혼조차 섞여 들어가 있습니다. 차라리 나는 이 검이 한 세상을 완전히 멸망시키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세상의 누구도 그 검을 다른 곳으로 보내거나, 직접 들고 나오지 않게 되길 바라겠습니다.” 그리하여 말을 멈춘 세 사람은 각자의 손을 앞으로 내밀어 검을 향해 펼쳤다. 그들의 손이 서서히 빛나기 시작하고 그 빛이 손과 손을 잇고, 소용돌이치고, 또한 용솟음치는 빛의 고리로 변했을 때, 갑자기 저 높은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은... 그곳은 어디지요? 당신들은 누구죠?” 세 사람의 늙은 현자는 흠칫 놀라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신이나 초자연적 존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단순히 놀라고, 또한 두려워하며 입을 연 한 소년의 목소리에 불과했다. “아이야, 너는 누구냐? 어디에 있느냐?” 마치 같은 질문을 서로 교환한 것과도 같은 모양새였다. 소년의 목소리는 잠시 주춤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저는... 제가 알 수 없는 세계에 있어요. 그냥 세 분을 아까 전부터 보고 있었어요. 아니... 세 분 뿐 아니라 다른 것들도 많이 보고 있었어요... ...“ 보리스, 한동안 다프넨이라 불렸지만 본래는 보리스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말을 한 뒤에도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한 건지 쉽게 이해할 수 가 없었다. 꿈을 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은데, 그런데 왜 자신은 아직도 정체 모를 장소에서 그 '꿈'들을 보고 있으며, 심지어 그들과 대화조차 가능한 것인가? 자신이야말로 묻고 싶은 이야기였다. 여기는 어딘가? 저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세 사람의 노인들과 같은 곳에 있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들과 자신 사이에는 마치 휘몰아치는 구름 사이에 뚫어 놓은 듯한 원형의 입구가 존재할 뿐이었다. 그 전에 본 것들은 정말로 꿈인가? 저 짐승을 찔러 죽인 자와 그가 만들어낸 겨울, 자신이 수십 년에 걸쳐 이룩한 모든 것을 스스로 파괴해 버린 채 새벽을 맞는 지배자, 어둠 속 깃발 너머 밀집한 악과 대결하려 '그 검‘을 택할 것인가 고민하는 흑발 왕녀의 눈동자... ... 그들은 모두 검, 윈터러(Winterer)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은 모두 자신보다 강했다. 모두 굳은 의지, 또는 고귀한 이상을 지녔던 자들이었다. 어떤 모습은 단지 시작이었으며, 어떤 것은 끝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윈터러가 거쳐온 자들의 손, 끝내는 피로 물들고 만 손들의 역사였다. “ ‘밖'에 있는 자로구나.” 맹렬히 회전하던 광채가 서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동시에 제단에 놓여 있던 검도 함께 떠올랐다. 고리의 중심은 안개의 회오리와 같은 것으로 변했고, 그 틈새로 언뜻 다른 세상인 듯한 영상의 잔해가 번뜩였다. 세 사람의 늙은 현자는 손을 풀고 제단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저들끼리 몇 마디를 나누었다. 잠시 후 보리스에게 말을 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와 우리를 잇고 있는 매개가 무엇이냐? 네가 이곳에서 익숙한 물건이 무엇이냐?” 보리스는 사실대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꿈을 꾸는 듯 머리가 어지러웠다. “당신들의 검, 저는 그것과 똑같은 것을 가지고 있어요. 두 검은 쌍둥이인가요?” 흠칫, 고개를 든 푸른 망토의 노인의 얼굴이 섬뜩한 것이라도 본 양 굳어져 있었다. “무엇이라고? 네가 저 검을 알고 있다고?” 보리스는 혼돈을 느꼈다. 그러나 마음 속의 상태와는 달리 입술은 단호히 답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흔히 자신의 조각난 꿈속에서 맥락조차 알지 못하면서도, 자신만만하게 행동할 수 있는 것과도 같았다. "윈터러, 그것의 이름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당신들의 검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노인들은 명백히 당혹해 있었다. 잠시 후 오렌지빛 망토의 노파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은... 겨울의 검이라고 한다. 월동자라고도 불리며, 다른 이름으로는... 윈터러... 라고도 한다......” 이번에는 보리스 쪽에서 충격을 받았다. 같은 검이 두 개라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건가? 그토록 특별하다고 느껴 온 물건, 또한 두렵고도 강렬했던 검은 두 개 ... 가 아니라 세 개, 네 개, 그보다 더 많을 수도 있는 것일까? 어느 세계에나 그와 같은 검이 존재한다는 걸까? 그가 본 영상들 속의 수많은 윈터러는? 아니라면... 그는 검의 과거, 혹은 미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가? 보리스는 눈을 돌려 자기 옆에 떨어져 있는 윈터러를 발견하고 그것을 주워 올렸다. 자루 대신 천을 감아 놓은 곳을 쥐고, 날을 아래로 한 채 앞으로 내밀었다. 그 순간, 흰 날에서 무지개 빛 같은 영롱한 광채가 실체를 뒤덮으며 번쩍거리는 것이 보였다. "좀더 정확히는... 제 검이 과거에 가졌던 모습과 비슷합니다. 지금 제 검은 단순한 은빛 날로 변해버렸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저들의 검이 그 의 윈터러와 같은 것이든, 다른 것이든, 과거였든, 미래였든, 적어도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면 힘 또한 비슷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실제로 어느 세계에나 같은 검이 존재한다면... 저들에게 물어볼 수도 있잖은가! 그가 오랫동안 궁금해하던 것들을, 도대체 이 검은 무엇이며, 어떤 힘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다루어야만 하는 것인가를......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방금 자신이 보던 광경이 무엇을 하려던 것이었는지 새삼 떠올렸다. 그들은 '그들 세계의 윈터러'를 다른 세계로 보내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자줏빛 망토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짐작컨대 너는 '겨울의 검'의 옛 주인이거나 또는 나중 주인인 모양이다. 내 맹세코 확언하건대 이와 같은 검이 하나 더 존재했다면 그물눈처럼 얽혀있되 서로와 연관 맺지 않고 살아가는 다양한 세계들, 그 어느 곳도 온전치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 세계들을 다 모른다... 그러나 어딘가에 틀림없이, 수천, 수만, 수억의 가능성으로 존재함을 안다. 그 가운데 우리들의 세계는 저울축이 지나치게 기울 정도로 힘과 마력이 비대하게 발달된 세계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이유에선가 다른 세계로의 문을 열었을 때, 언제고 우리의 힘이 반대편 세계로 흘러나가 균형을 이루려 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런 우리의 세계가 저 검 하나를 용납하지 못했을진대 다른 어떤 세계가 그 검을 품고서 지금껏 침묵하였으랴? 아이야, 너의 세계에서 그 검은 얼마나 오래 존재하였느냐? 얼마나 많은 재앙을 불러일으켰느냐?” 보리스의 손에서 윈터러는 더욱 화려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흡사 수백 조각의 색유리로 만든 스테인드 글라스(stained glass)처럼 빛났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넌 나를 놓치고 싶지 않을 거야... 영원히, 언제까지나......‘ "모르겠습니다. 이 검은 아버지가 형에게, 그리고 형이 제게 물려주었고 과거에 검을 가지려던 사람들 사이에 많은 싸움이 벌어졌다고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재앙이라 부를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아니, 저는 잘 모릅니다. 전 겨우 올해로4년째 이 검을 지녔을 따름이고......“ “잠깐, 4년, 4년이라고? 아이야.... 네 나이가 몇이지? "올해 7월에 15세가 됩니다만......“ 말하고 나서야 저들의 시간이 여기와 같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문제에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세 명의 현자는, 그런 것에 마음쓰기에는 이미 다른 문제로 너무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믿을 수가 없다. 겨우 열 몇 살의 어린아이가 어찌 '겨울의 검'을 4년 동안이나 지니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과연 저 아이의 검이 이 '겨울의 검'과 같은 물건일까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아니, 검의 힘이 아니라면 어떻게 저 아이와 우리가 이렇듯 대화하겠습니까? 이건 틀림없이 다른 시간대의 검이 경계와 맞물려......오오!” 갑자기 푸른 망토의 현자가 무언가 깨달은 듯 탄성을 질렀다. 그는 이제 손까지 약하게 떨고 있었다. “지금 우리는 '겨울의 검'의 또 다른 힘을 보고 있군요! 저 아이의 존재는 필시 이 검 안에 깃들인 과거의 기억입니다! 검에서 솟아오른 옛 기억이 심지어 스스로를 실체로 느끼면서 우리에게 말을 걸다니! 이 검 안에 몇 명의 악인의 혼이 깃들여 있다고 했는데, 그것들말고 저러한 어린아이의 혼조차 깃들여 있었군요!” 그러나 그 말을 듣던 보리스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멀쩡히 살아 있는 자신이 검 안에 깃들인 기억의 일부라니? 자신이 검 속에 갇힌 혼이라고? 그렇다면 그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온갖 감정들과 추억들이, 바로 얼마 전까지 그가 살아가고 있던 세계가, 전부 까마득한 예전에 지나가 버린, 지금은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이란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시죠! 어째서 현재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멋대로 옛날에 죽은 그림자로 바꿔버리는 겁니까? 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갖가지 일들을 겪고 있었고, 방금 전에는 당신들말고 수많은 사람들의 손에 쥐어진 서로 다른 윈터러들을 보고 있었죠! 그걸 보며 난 모든 것이 내 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럼 제 의견을 말해 볼까요? 전 오히려 당신 자신들이 윈터러의 과거이고 검 속에 든 혼들이라고 생각되는군요! 적어도 제가 보기엔 말이죠!" 제단 위에 떠오른 직경 1미터 가량의 빛의 회오리를 향해, 함께 떠오른 검의 끝이 서서히 들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걸리게 될 지는 알 수 없어도 분명히 다른 세계를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이런...믿을 수 없는 일이 ......” 그러나 잠시 후 오렌지빛 망토의 현자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의 말이 맞습니다...... 저 아이, 그리고 우리가 똑같이 스스로를 현실 속에 살아 있는 존재로 간주하고 있다면, 어느 쪽이 옳은지 그 누가 판단하겠습니까? 어느 쪽이 허상이고 그림자인지, 또는 둘 다 아닌지 확신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는 보리스도 순간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정말로 저들 말대로라면 자신이 착각하고 있을 가능성도 결코 배제할 수 없지 않은가? 그가 사랑하고 집착한 모든 존재들... 아버지와 고향, 형 예프넨, 나우플리온, 그리고 이솔렛...... 그들 모두가 까마득한 옛날에 죽었고, 이미 흔적도 기억도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오직 기이한 검 속에 남아 끝없이 되풀이되는, 자신의 조각난 기억 속에서만 살아가 고 있을 지도 모르는...... 현실이란 어디지? 현재란 언제지? 진짜와 가짜, 실체와 그림자는 어떻게, 누가 구분하는 거지? 2. 얼음 거미의 집 그 날 오후 공회당에서는 오랜만에 여섯 사제들을 비롯해서 열 일곱 명의 수도사들, 그리고 스콜리의 선생들까지 모두 소집된 회의가 열렸다. 다른 사람들의 출입은 금지되었지만 이미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섬 전체에 화제가 되고도 남을 모임이었다. 사제들의 자리인 일곱 원을 중심으로 둥글게 의자가 늘어놓아졌다. 의자의 숫자는 여기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의 숫자와 꼭 같았다. 이윽고 사람들이 서서히 들어와 자리를 채웠다. 그리고 이솔렛이 있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도착하기도 전부터 들어와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지만 아무도 왜 왔느냐고 묻거나, 심지어 나가라거나 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 실제로 잠시 후 와야 할 사람이 모두 들어와 자리에 앉았지만 의자가 모자라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와 주셨군요. 이제 그러면 공회당의 문을 닫겠습니다." 문이 닫히고 이어 철컹, 하고 빗장이 내려놓아졌다. 데스포이나 사제를 돕는 수도사들이 사방에 열린 창문들을 모두 닫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주위가 어두워지는가 싶을 무렵 갑자기 일곱 원의 중앙에 불이 밝혀졌다. 데스포이나 사제가 그 자리에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고, 빛은 지팡이 머리에 장식된 커다란 초승달 모양 크리스털에서 솟아나고 있었다. "회의를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의 말과 행동은 달여왕께서 눈 떼지 아니하고 굽어볼 것이며, 오늘 우리가 내릴 결론을 저울에 달아 취하고 버리시는 이 역시 그 분이십니다. 옳고 그름은 오직 그 분의 손에만 달려 있음이니 우리는 모두 참의 세상에선 장님이자 귀머거리요, 단지 암중에서도 사심 없는 발자국을 남기는 것만이 우리를 열린 문으로 이끌 것입니다. 찬양하라." "찬양하라," "찬양하라." 뒤따르는 되풀이는 나지막했지만 한 입으로 내는 목소리처럼 같은 어조를 지니고 있었다. "섭정께서는 오늘 이 자리에 안 계십니다. 대신 한 소녀가 그 분의 귀를 대신하고, 또한 입을 대신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 데스포이나 바로 뒤쪽에 약간 높직 한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리리오페가 앉아 있었다. 아직 섭정의 정식 후계자로 선포될 나이가 아닌 까닭에 그냥 ‘한 소녀' 였다. 그 러나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조차 까딱해 보이지 않는 리리오페를 보는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위상을 충분히 자각한 '섭정의 딸'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오늘 우리가 모인 것은 한 소년의 불행한 실종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그 원인을 밝혀 옳은 대안을 내고자 함입니다. 현재의 상황은 이미 모든 분들이 아시고 계실 테니 굳이 재론하지 않겠습니다. 우선은 수색을 계속할 것인지, 한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지 이야기를 모아보도록 합시다." 섬 안에서 사제들 다음가는 권위를 지니는 열 일곱 명의 수도사들 가운데는 섬의 산맥 곳곳에 움막을 짓고 천지간의 변화를 살피며 은둔하는 자들이 아홉이었다. 그들 가운데 대표격인 자가 입을 열었다. "일단 섬 전체를 샅샅이 수색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다시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지팡이의 사제께서는 마법으로 섬 전체를 구석구석 보실 수 있으실 텐데 어찌하여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까?“ 데스포이나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알 수 없는 힘, 또는 물질이 그의 존재를 가로막고 있어서 그것을 꿰뚫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지팡이의 사제께서 알지 못하는 힘이 지금까지 이 섬 안에 있었습니까? 저는 금시초문입니다." 그 때 옆에서 한 목소리가 끼여들었다. "왜 없겠습니까? 그 아이가 이 섬에 들어올 때 가져온 그 이상한 검은 무언가 색다른 힘을 가진 것 같던데요." 데스포이나는 고개를 돌렸다. 수도사 중에서 난 소리였다. 억지 웃음 비슷한 것을 입가에 머금은 채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그 자를 보며 데스포이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펠로로스 수도사께서는 어디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셨지요?” 펠로로스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맏아들과 꼭 같은 빛깔의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매우 키가 큰 사내였다. 하반신 마비로 서서히 시들어가고 있는 친형과는 대조적으로 비대한 몸집이었다. 그 의 이름이 가진 뜻은 '거인' 이었다. "그 애와 제 아들 녀석이 몇 번 싸웠지요. 그 애의 검이 아주 희한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이길 수 없었다고 합디다. " 몸을 앞으로 조금 숙인 채 앉아 있던 나우플리온이 고개를 번쩍 들며 그 자에게 시선을 보냈다. 헥토르와 다프넨 사이엔 있었던 일은 이미 작년 여름에 함구하기로 다 합의한 터였다. 그 자리에는 당연히 헥토르의 아버지인 펠로로스도 있었다. 게다가... 다프넨은 한 번도 윈터러를 사용한 일이 없었다. 이제 와서 다프넨에게 불리한 상황이 닥쳤다고 해서 보란 듯 약속을 어기고 여론을 모아 어떻게 해볼 생각인가? 그렇게는 안 될 것이다. "본 사제로서는 풍문으로도 전해듣지 못한 이야기로군요. 펠로로스 수도사, 아이들끼리 싸우다가 홧김에 한 이야기들을 그대로 믿으십니까?' 데스포이나의 목소리는 흡사 대리석 바닥처럼 차고 단단했는데, 몇몇 사람들은 그녀가 그런 목소리로 흔히 상대방을 비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예상대로 펠로로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허, 무슨! 제 아들이지만 헥토르는 제 잘못을 감추려 히튼 소리 따위를 하는 녀석이 아닙니다. 제가 언뜻 듣기로는 그 검에서 얼음 같은 기운이 쏟아져 주위 사방을 겨울로 만들어 버린다고 하던데... 게다가 그 검은 스스로 자기 모양을 바꾸기도 한다지요?“ 데스포이나는 입술만움직여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도사님은 아드님한테서 별난 이야기를 많이 듣고 계시나 봅니다. 본 사제는 헥토르가 검에만 자질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만." 주위 사람들이 어이없어하며 약간 웅성거렸다. 지금껏 일어난 일들이 모두 비밀에 붙여졌던 만큼, 그들로서는 펠로로스 수도사의 이야기가 아들이 꿈에서 봤을 법한 이야기들을 옳긴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흥, 믿지 않으신다 그 말씀입니까? 그러면 지금 일어난 일은 뭘로 설명하시렵니까? 그 다프넨 녀석이 검을 들고 나가 사라졌고, 지팡이 의 사제님이 쓰신 마법에도 잡히지 않고 있잖습니까? 그 녀석이 숲을 지키는 자들의 눈에도 띄지 않고 숲 경계를 넘어 선착장까지 가서, 배를 조종하는 법도 배우지 않은 주제에 섬 밖으로 달아나 버렸을까요? 아니면 저번처럼 저 절벽뿐인 북쪽 바다에 갔다가 물에 빠져버렸을까요?“ 마지막 말은 명백히 이솔렛을 끌어들여 비아냥댄 것이었다. 그러나 이솔렛은 무표정하게 앉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펠로로스의 커다란 목소리만이 계속해서 울렸다. "그러니 저야말로 묻겠습니다. 어째서 제 귀에까지 들어온 일을 섬의 모든 일을 보고 듣고 하셔야 할 지팡이의 사제께서 모르고 계십니까? 최근 나이가 드셔서 사제직에 소홀해지신 것 아닙니까? 아니면 사사로운 정에 눈이 멀어지셔서...... "섣부른 말씀은 삼가세요!" 그 말을 한 것은 한쪽에서 왼손을 번쩍 들어올린 소매의 사제 페트라였다. 그녀의 손목에 감긴 폭넓은 브레이서(bracer)에서 커다란 은장식 보석이 번쩍, 빛을 냈다. "사제를 모욕하는 죄가 큰 것을 모르실 분이 아닌데 어찌 그러십니까? 쓸모 없는 이야기로 이야기의 줄기를 흐리게 하지 마세요. 우리는 순례자의 아이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아이에게 어떠한 죄가 있다면 살아 돌아온 뒤에야 추궁할 일이에요." 소매의 사제는 섬의 순례자들이 먹고, 자고, 일하고, 즐기는 생활 전반을 돌보았으며 출산이나 혼인, 장례 등의 생활 의례들을 관장하는 직분을 맡고 있었다. 따라서 다프넨과 별 친분이 없다 해도 그에게 닥친 불행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하, 만일 돌아오지 않으면 어쩔 건데요? 그 녀석이 실종되었다는 것도 간단히 믿을 수만은 없습니다. 자신이 가진 검에서 이상한 힘을 발견하고는, 그걸 가지고 섬에 위해를 끼치려고 어딘가에 숨은 것일지도 모르잖습니까? 그 이상한 능력으로 자기가 있는 곳을 일부러 은 폐했겠죠!" "근거 없는 일을 확신조로 말하지 마세요! 그 소년이 왜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그 애가 섬에 피해를 끼쳐서 무슨 득을 얻는다는 건가요? 갑자기 그런 의심을 늘어놓는 이유가 무엇이지요?“ "그 녀석은 대륙에서 왔잖습니까! 그 녀석의 과거를 조금이라도 아는 것은 검의 사제님 뿐이고 우리가 아는 것은 없습니다. 그 녀석을 의심할 근거가 없다면, 믿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판단 을 내립니까?“ 그렇게 말하고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돌린 펠로로스의 눈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우플리온의 모습이 들어왔다. "간단합니다. 당신이 나를 믿느냐, 또는 아니냐." 짧은 말이었지만 그 순간 검의 사제의 권위의 상징인 '우레의 룬‘이 그의 다리에 부딪쳐 덜컥, 소리를 냈다. 의도적인 행동이 아니었으나 이상스럽게도 그 소리는 공회당에 들어와 앉은 사람들 모두의 귀에 아주 생생하게 들려왔다. "흠, 으흠, 거, 검의 사제님...... 다프넨이라는 소년을 당신이 데려왔다고 해서 억지로 감쌀 필요는 없어요. 사제님은 그 애를 선택한 사제님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려고 너무 애쓰시는 것 같군요. 사제님도 때로 사람을 잘못 볼 수 있는 거고, 저 역시 사제님까지 이 일에 끌고 들어갈 생각은 없......“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 나우플리온은 차가운 눈동자로 상대방을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전 다프넨을 잘 알고 있습니다. 펠로로스 수도사, 당신의 기준에 그 아이가 악한 자라면, 그 울타리에는 본인 역시 빠지지 않고 포함될 것입니다. 그 말을 한 번 반대로 돌려볼까요?“ 나우플리온은 그 정도에서 적절히 말을 그쳤다. 생략된 말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 펠로로스가 뭐라 더 반박하기 전에 데스포이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익한 논쟁은 그만두십시다. 달여왕께서는 결론에서 벗어나 맴도는 토론을 참아주지 않으십니다. 좀더 논지를 좁히기 위해 제 의견을 먼저 말할까요." 그녀는 짚고 있던 지팡이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지팡이는 바닥에 그려진 원들의 중앙에 그대로 우뚝 서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여러 산줄기를 돌아다니며 다프넨을 찾으려 한 것은 다프넨이 실종되었을 당시, 다프넨에게 신성 찬트(Holy Chant)를 가르치던 이솔렛이 순간적으로 감각의 동일시를 겪으면서, 발을 헛디뎌 까마득히 깊은 곳으로 떨어지는 듯한 감각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신성 찬트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스승과 제자간에 감각의 공유가 일어나는 것은 과거에도 종종 있었던 일이니 우리에게 이보다 믿을만한 정보는 달리 없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근방의 산 밑바닥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지 못했습니다. 마법으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요? 저는 이 문제에 대한 열쇠로 그가 가지고 있던 검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서 있던 나우플리온이 고개를 홱 돌려 데스포이나를 보았다. 펠로로스 수도사는 ‘그러면 그렇지'하는 듯한 표정이었고, 다른 사람들도 놀란 듯 술렁였다. 나우플리온 옆에 앉아 있던 서클렛의 사제 모르페우스의 얼굴에도 당황한 빛이 떠올랐다. “검은 다프넨이 섬으로 오기 전부터 이미 그의 것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나는 그 검의 내부에 강한 힘이 잠재되어 있다고 느꼈습니다. 힘의 성격은 알지 못했으나 그것이 밖으로 나을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다프넨은 그러한 검을 꽤 오랫동안 별다른 문제없이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의 검에 관해서는 제가 더 잘 압니다! 그것은 그 아이가 대륙에서 속해 있던 집안에서 대대로 물려진 가보일 뿐이니까요!" 데스포이나는 대답 없이 약간 눈을 내리깔았다. 소리친 당사자인 나우플리온은 목이 타는 것을 느끼며 데스포이나를 향해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윈터러와 스노우가드(Snowguard), 즉 윈터바텀 킷(WinterbottomKit)에 대한 이야기는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던 섬에는 잘 알려져 있지않았다. 대륙에서 몇 년간 지낸 나우플리온이 전해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도 단편적인 것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직접 보게 된 윈터러는 결코 단순한 보검은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난 특이한 성질들로 파악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위협이 느껴지는 존재였다. 검의 사제인 자신조차도 검 안에 깃들인 위험한 힘을 느낄 수 있었는데 마법과 예언을 다루는 지팡이의 사제가 어찌 그것을 몰랐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스포이나는 지금까지 그것을 문제삼지 않았으며, 심지어 잘 숨겨주기까지 했다. 이제 더 이상은 안 된다는 것일까. "검의 사제께서 하신 말씀도 맞습니다. 어쨌든 그것은 대륙의 옛 물건으로서 우리 순례자들로서는 잘 알지 못하는 미지의 대상입니다. 단 하나, 제가 알 수 있었던 것은 그 검에게 우리 세계 위에 겹쳐진 이 공간으로 뚫고 들어갈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것만 가지고 일단 이야기합시다. 그 아이는 이공간으로 들어갔을까요? 단순히 그러기만 했다면 저의 힘이 그를 발견하지 못했을 까닭이 없습니다. 심지어 이공간에 갇힌 그를 부를 수도 있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의 존재는 이공간 속에서도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은 무엇일까요. 바로 이세계입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일단 이공간과 이세계의 차이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너머에 가본 사람도,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자세히 아는 사람도 없었다. 잠시 후 스콜리의 제네시 선생이 입을 열었다. "이세계란 저... 옛 왕국에서 우물 너머의 세계와 같은... 그런 것입니까? 그것과 같은 통로가 다시 생겨났다는 말씀이십니까?“ 데스포이나가 답했다. "하나의 가능성입니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히지요. 저는 검의 사제와는 달리 다프넨이 가진 그 검 속에 위험한 힘이 잠재되어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효과적으로 누르고 있는 것 역시 그 소년의 힘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오랫동안 궁금해하며 저는 그 아이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는가 살펴 왔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없더군요. 그가 타고난 핏줄은 마법적인 전통과는 무관했으며 그가 가진 자질들도 보통의 아이보다 좀더 나은 정도에 불과합니다." 나우플리온은 데스포이나의 목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듣고 있었다. 문득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알았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다프넨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미숙한 소년이 막대한 힘을 지닌 마법 무기를 지니게 되면 순식간에 그 마법에 먹혀 버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다프넨은 그 검을 몇 년째 아무렇지도 않게 지녀 왔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의 전통 속에서 내려지는 판단은 한 가지입니다. '그에게 그 검을 주라, 그리고 자신의 재생과 파멸을 모두 책임지게 하라'." 그때였다. 공회당의 문을 누군가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데스포이나는 무시했다. 그녀의 주름진 얼굴이 미세하게 떨리고, 늘어진 눈꺼풀 안쪽의 눈동자가 힘겹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그 검을 그에게 맡겼습니다. 그가 검의 힘에 맞는 자로 새로이 태어날 것인가, 아니면 힘에 이끌려 스스로를 망칠 것인가, 그것을 지켜보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그가 후자를 택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검은 저 자신을 탄생시킨 이세계로 돌아가 더 자유로이 힘을 방출하게 되길 원했고, 그 문이 열리자 다프넨은 유혹에 못 이겨 거기에 발을 내딛은 거지요." 싸늘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대여섯 명이 저마다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제님! 흰 새들이... 가져 왔... 들어가려... 창으로... 문을......" 공회당 밖에서 수십 개의 날개들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모두가 들었다. 소리는 길게 끌리며 공회당을 우회했고, 이윽고 한 개의 창을 향해 거칠게 날아들어 왔다. 덜컹! 탕! 닫았던 창의 덧문이 걸쇠까지 떨어진 채 바닥에 나굴었다. 뚫린 창으로 스무 마리는 되어 보이는 흰 새들이 줄지어 날아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펼친 날개는 창문보다 컸기에 새들은 모두 날개를 살짝 접으며 들어왔다가 천장 쪽으로 높이 날아오르며 양 날개를 쫙 폈다. 잠깐만에 그들의 머리 위에 흰 새들이 큰 원을 그리며 나는 장관이 펼쳐졌다. 같은 순간, 사람들은 저들 가운데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몇 걸음 앞으로 나오는 것을 알았다. 두 팔이 들어올려지자 길게 늘어진 흰 소매가 또 하나의 날개인 양 흔들렸다. 네 깃, 내릴 곳으로 돌아오노라 절벽 끝에 솟은 강철의 나뭇가지 천 년을 기다린 굽어진 홰 끝에 이제, 날개 접고 앉아 굽어보노라 그들이 이솔렛의 신성 찬트를 들은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사실 그들은 찬트가 무엇인지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스콜리에서 마법 주문과 주가를 가르치는 필로멜라 선생은 충격을 받은 나머지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부르르 떨었다. 신성 찬트는 모든 마법적인 노래 위에 군림하는 노래 중의 노래였다 이솔렛의 찬트가 봄에 한껏 물이 올라 초록으로 뒤덮인 나뭇가지와 같다면, 자신이 아이들에게 가르치던 것은 한겨울의 말라비틀어진 가지였다. 찬트가 영창 되자마자 새들은 회오리 같은 곡선을 그으며 하강하여 이솔렛이 있는 쪽으로 모여들었다. 맨 앞에 루비 목걸이를 한 흰 새의 공주, 요즈렐이 있었다. 다른 새들은 느리게 날갯짓하며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이솔렛의 손끝에 요즈렐이 살짝 내려앉았다. “......“ 이솔렛은 입을 다물더니 요즈렐의 입에 물려 있는 깨진 유리 비슷한 투명하고 날카로운 조각을 받아들었다. 요즈렐은 한 번 더 퍼덕이더니 이솔렛의 왼쪽 어깨로 옮겨갔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는 것처럼 고개를 몇 번 움직였다. 빨간 눈동자는 그지없이 침착하게 몇 명의 얼굴을 주시했다. 이솔렛의 손 안에서 그 조각은 파랗게 빛을 냈다. 그것은 실제로 깨어진 물건의 일부였으며 매우차가웠다. 얼음 같았으나 결코손에서 녹아 내리지는 않았다. 이솔렛은 요즈렐을 어깨에 앉힌 채로 데스포이나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투명한 조각을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데스포이나의 얼굴이 변했다. "이것은......“ 같은 것을 단 한 번 본 일이 있었다. 바로 작년 여름, 폐허의 마을을 뒤덮었던 윈터러의 얼음들 속에서. 허공을 돌던 새들이 갑작스런 기류를 탄 것처럼 입구를 향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잠시 후 데스포이나가 손을 들어올렸다.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가 명령을 내렸다. "문을 여시오! 사제들은 모두 저 새들을 따라갈 것이오! 따를 자는 따르시오!" 쉬운 길이 아니었으나 여섯 사제가 모두 앞장선 까닭에 뒤따르는 자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었다. 이어지지 않는 길은 데스포이 나의 주문으로 날아오른 돌들이 채웠으며, 가로막는 나뭇가지와 잡목들은 나우플리온이 잡은 '우레의 룬‘이 짧은 불길을 일으키며 흔적 없이 잘라냈다. 모르페우스의 '감지의 지팡이' 가 있으면 잠깐씩 사라 지곤 하는 새들의 뒤를 따르는 것도 간단했다. 사제들이 이렇듯 자신들의 능력을 주저 없이 보이는 것도 유례가 드문 일이었다. 가파른 절벽으로 이어지는 협곡을 절반 정도 내려갔을 때, 앞 뒤 좌우의 석벽에 하얀 자국 같은 것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좀더 다가가 보니 그것은 눈 섞인 얼음이었는데, 지난 겨울에 아무리 눈이 많이 내렸다 해도 그 자국이 이런 계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불가능했다. 바닥에 가까워질수록 눈 자국들은 한층 늘어났다. 사람들은 저마다 궁금해하며 아래를 내려다봤지만 그날따라 협곡에는 안개가 제법 끼어 있어 2, 3미터 아래는 알아볼 길이 없었다. "점점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무언가 뜻밖의 것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단 말이에요." 곁에서 속삭이는 여자 수도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펠로로스는 새삼 목을 가다듬었다. 차근차근 자신이 할 말들을 골라 보았다. 그는 특별한 권한을 지닐 수 없는 섭정의 동생에 불과했지만, 신체적 약점 때문에 종종 무기력해지는 섭정 스카이볼라의 가장 가까운 상담역이라는 좋은 위치를 갖고 있었다. 리리오페와 헥토르의 혼약을 오랫동안 추진하고 헥토르가 차기 검의 사제에 가장 적당한 인물인 양 주위의 분위기를 조성해 온 것도 그였다. 그런 가운데 뜻밖의 소년이 나타나 검의 사제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으며, 섭정의 말에 따르면 리리오페의 관심도 끌고 있다고 했다. 그가 추구해 온 두 가지 목적이 모두 어그러지는 꼴이었다. 그런 마당이니 그게 모함이든 사실 규명이든, 다프넨을 추방하는 일에 앞장설 수 밖에 없었다. 다프넨에게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사실 다프넨이 어떤 소년인지 잘 알지도 못했다. 그러나 아들들의 앞을 가로막는 존재를 없애는 일에만은 소홀할 수도, 너그러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윽고 사방은 온통 빙벽으로 변해 버렸다. 더 놀라운 것은 처음에는 손을 대면 녹던 얼음이 이제는 칼로 찔러도 끄떡도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데스포이나는 모두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이솔렛을 앞으로 불렀다. 이솔렛은 데스포이나와 굳이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자신이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요즈렐의 귀에 몇 마디 속삭인 다음 새를 날려보냈다. 새는 아래로 내려가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곧 멀지 않은 곳에서 특유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솔렛은 입 속으로 무언가 몇 마디 외우는 것 같더니 단숨에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아니!" 외마디 외침들은 곧 의아한 웅성거림으로 변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바닥을 딛는 소리가 울린 까닭이었다. 잠시 후 데스포이나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몇 개의 룬을 외우자 몇 미터 가량의 안개가 사방으로 갈라졌다. 구름덩어리 같은 안개들이 골짜기 양쪽으로 밀려나는 가운데 보이는 것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이솔렛, 그리고...... "저, 저건 무엇이란 말인가......“ 이솔렛이 발 딛고 있는 곳, 아래쪽 협곡을 막고 있는 것의 실체는 거대한 얼음 덩어리였다. 모양새만으로는 누군가가 절벽 꼭대기에서 굴려 떨어뜨린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 컸으며, 절벽 사이에 끼여 멈춘 것도 아니었다. 얼음 덩어리에서 수백 개는 될 법한 얼음 가지들이 뻗어 나와 절벽을 붙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살아 생전 이런 것을 보게 될 줄이야......“ "실로 조화로다... 여왕께서 잉하심이 아닌가?“ “달여왕이시여, 당신의 뜻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뜻을 거스름입니까” 수도사들이 충격으로 몇 마디씩 내뱉는 가운데 데스포이나는 허공에 자신의 몸을 띄웠다. 그리고 이솔렛과 마찬가지로 얼음 위로 내려갔다. 직경 9미터는 되어 보이는 얼음의 구체였는데 표면은 몹시 울퉁불퉁했다. 수많은 얼음 조각들이 급작스레 하나의 결정을 향해 모여들어 달라붙은 것 같았다. 굳이 비유하자면 거대한 거미집, 얼음 거미의 집이라고 할까. 또는 대지의 가장 깊은 곳에서 거인의 손으로 뽑아낸 거대한 덩이식물 같기도 했다. 사방으로 수백, 수천의 미세하거나 굵은 뿌리들이 뻗어나가 절벽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것은 모두 얼음, 희다 못해 푸르게 빛나는, 날 돋은 얼음이었다. 흰 새의 공주는 다시 날아오르더니 절벽으로 이어진 얼음 가지 하나에 날개를 접고 앉았다. 새의 발이 닿자 비죽비죽 돋은 서리가 몇 조각 부서지더니 얼음 위로 떨어져 잘그랑대는 소리를 냈다. 눈이 아플 정도로 희었다. 모두. 다. 데스포이나는 이솔렛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알 수 있는 거로구나. 그렇지?“ 이솔렛은 고개를 들고 데스포이나를 올려다보더니 말했다. "저들을 물러가게 해주세요." 무표정한 얼굴에 몇 가닥 흘러내린 머리칼도 흰빛이었다. 3. 계승자 “겨울의 검은 우리 세계에서 최소한 2백 년간 존재해 왔다. 그 이전에는 이곳에서 잠들어 있었는지, 또는 다른 세계에서 존재하고 있었는지 그런 것은 모른다. 그러나 검은 그 9백 년 동안 세 명의 남녀에게 힘을 주고, 전능하게 만들어, 끝내 스스로를 쓰러뜨리도록 만들었다. 힘이란, 그 자체로 악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산 자 가운데는 아직껏 그 힘을 담을 정도로 큰 그릇을 지닌 자가 없었다.” “어쩌면 인간이 가눌 수 있는 힘이 아닐 지도 모른다. 힘은 필연적으로 존재를 이끈다. 그것은 선악의 문제도 아니요, 고귀함과 천함의 문제도 아니요, 먼저 됨과 나중 됨의 문제도 아니다. 그리고 힘은 먹이를 필요로 한다..... 힘을 가진 자들은 처음에는 힘을 인정받기 위해 대항하는 것들을 부수고 세상을 원하는 모양대로 깎는다. 그러나 깎아낼수록 흉한 것밖에 보이지 않고, 흉한 것을 가리기 위해 더욱 더 깎아낸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을 가로막는 것들은 물론, 아끼던 것들까지 모조리 부수고 나면, 남는 것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일뿐이다.” 파괴된 자들...... 세 명의 현자들은 두려운 눈으로 아직도 허공에 떠 있는 검을 올려다보았다. 의식이 끝나기까지는 여전히 얼마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만 그들은 이 낯선 소년, 그들의 과거인지 미래인지 모를 소년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아이야, 네 말 대로구나. 우리는 서로 누가 진짜이고 가짜인지 구별할 수가 없다. 또는 둘 다 진짜일는지도 모른다. 천만 가운데 하나의 우연으로 너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가 이상한 접점을 가지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또는, 우리와 너의 세계가 다를진대 어느 쪽이 과거이거나, 또는 현재이거나 미래이거나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나? 무용함을 떠나 둘 사이에 진짜와 가짜 따위는 처음부터 없는 것일지도 모르는 것을.” “오직 상대에 비교하여 자신이 진짜일 뿐, 그 이상의 진실은 누구도 알지 못하니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지 않으냐7또는 본래부터 그런 정도의 약한 진실밖에 없을 지도 모르지 강한 진실을 규명해 줄 유일한 신은 우리 세계엔 존재하지 않는단다. 그는 우리 세계를 만들어 놓고 저 먼 곳으로 숨어버린 채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얼떨결에 아이를 낳아 놓고 겁에 질려 내버린 채 달아난 어린 부모와 다르지 않을 지도 모른다. ” 보리스는 그들의 말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다. 간밤의 꿈을 모두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러나 이어서 그들이 하는 경고만은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제 우리의 의식이 끝나면 너와 우리는 두 번 다시 마주칠 일이 없을 것이다. 천만 가운데 하나의 우연이 다시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단다. 얘야, 하지만 네게도 우리와 같은 굴레, 즉 그 검의 운명이 주어져 있다면, 결국 소용없게 될지도 모르지만 너에게 충고하고 싶구나, 진심으로 네게 말한다. 최선은 그 검을 버리는 것이나, 버리지 못한다면 매번 자신을 돌아보아 네가 차츰 갖게 되는 힘이 진실로 네 것인가 반성하거라.” “네가 4년 간 무사히 검을 지닐 수 있었다고 하기에 우리도 일말의 희망을 갖고 네게 말하고 있는 것이란다. 검의 목소리를 따르지 말아라. 겨울의 검은 본래 무생물로서 목소리를 갖고 있지 않지만, 오랫동안 그에게 사로잡혀 자신을 파멸시킨 자들의 정신을 삼켰기에 그 안에는 부서진 영혼들이 수없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런 목소리에 절대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다. 검 자 신은 단지 네가 한없이 많은 힘을 쥐도록 모든 선물을 내려주는, 지나치게 자비로운 왕과도 같단다. 이 말의 무서움을 네가 진실로 깨달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목소리들은 단지 악으로 손짓할 뿐이지만, 검 자신은 네가 악과 선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부수고, 너 자신까지 폐허로 만들어버릴 힘을 아무 조건 없이 내어주느니라. 우리 살아 있는 자들은 검의 힘 앞에선 횃불을 들고 잘 마른 짚단 앞에 선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다. 대부분은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짚단에 불을 붙여, 온 세상을 태워버렸던 것이다.” 또 하나의 윈터러는 이제 빛의 고리를 거의 다 통과했다. 남은 것은 자루 끝의 폼멜에 붙은 동그란 쇠고리뿐이었다. 마지막으로 푸른 옷의 현자가 두 손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그러나 외침의 끝은 이미 흐려져 약하게 들렸다. “검은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무한히 자라난다! 이것만은 절대로 잊지말......”. 검이 완전히 통과하여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보리스의 눈앞에 펼쳐졌던 안개의 회오리가 소용돌이치며 눈앞의 장면을 닫아버렸다. 이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다시 텅 빈 곳에 홀로 남겨졌다. 바로 곁에 놓인,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겨울의 검만을 함께 한 채. 또 무엇을 보게 되는 것일까 두려워하고 있을 때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수도사들과 스콜리 선생들은 대부분 의식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다. 단지 멀리 떨어진 곳에 모여 앉은 채, 데스포이나의 힘으로 증폭되어 이솔렛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오는 가히 마술적인 찬트를 어렴풋이 들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거의 잊고 있었던 고대의 힘, 신성 찬트의 위력을 느끼기에는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실제로 잊고 있었다. 일리오스 사제가 죽고 이솔렛이 오랫동안 홀로 지내며 침묵함에 따라 그녀가 물려받은 아버지의 능력들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드물어졌고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서서히 흐려졌다. 또 한 곧 열 여덟이 되는 이솔렛은 아직 성인보다는 소녀에 가까운 나이였고 따라서 그녀의 능력에 대한 인식 역시 나이에 구애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멀리서 들려오는 찬트를 듣고 있던 그들은 한결같이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솔렛은 그 목소리로 자신에게 얼마나 강력한 마법이 깃들여 있는지 확고히 체현해 보였다. 소녀는 진실한 신성 바드(Holy Bard)였다. 옛 왕국 시절부터 마법사들 가운데 서도 가장 고귀한 존재 중 하나였던 신성 바드가 긴 세월이 흐른 지금 그들 곁에 있는 것이다. "신성 바드... 천상의 목소리.....". 모르페우스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곁에 선 나우플리온을 흘끗 곁눈질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과는 달리 나우플리온은 고개를 들어 절벽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얼 보는 건가?" 나우플리온은 잠시 후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프넨이 일부러 절벽에서 몸을 던졌을 리 없는데, 어째서 저 위가 텅 빈 허공뿐인지 모르겠군요. 발을 헛디뎟다면 위쪽이 낭떠러지여야 맞는 것 아닙니까?" 그 말을 들은 모르페우스도 위를 올려다봤다. 나우플리온의 말대로 양쪽 절벽은 몇 미터 올라가지 않아 능선을 이루며 흩어져 버렸고, 위는 탁 트인 하늘뿐이었다. 가장 가까운 산봉우리라 해도 오른쪽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인간의 힘으로 그만큼의 거리를 뛰어 건너 떨어진다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았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했다는 건가. 그들 둘을 비롯한 사제들은 수도사들과는 달리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주위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거대한 얼음이 석류 열매처럼 조깨지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느린 금이 이솔렛이 선 곳에서부터 앞뒤로 뻗어나가기 시작했고, 조금 후에는 갈라진 곳을 중심으로 투명하던 곳이 반투명해지다가 이윽고 눈과 같은 미세한 가루로 변했다. 깨어진 조각 같은 것들이 곳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그렇게 파헤쳐지고 깊은 곳이 열리자 중심에 하얀 고치와 같은 덩어리가 놓인 것이 보였다. 거기까지 해냈을 때 이솔렛은 노래하기를 힘겹게 멈췄고, 이솔렛에게 마력을 빌려주고 있던 데스포이나가 위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내려와서 도와주시지요!" 그리하여 사제들 모두가 아래로 내려갔고, 그들의 힘으로 마지막 장애물들이 치워져 고치는 햇빛 아래로 꺼내어졌다. 나우플리온은 얼음들을 베어 치운 뒤 검을 도로 꽂고, 고치에 가득 핀 서리꽃들을 두 손으로 걷어냈다. 희미하게 들여다보이는 얼굴을 본 그는 마침내 긴 한숨을 뱉어냈다 "여왕이시여 ...고맙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운은 첫 번째만으로 그친 듯했다. 고치는 느리게 녹아 내렸고, 그 안의 소년은 분명 살아 있었다. 절벽 가운데 남은 거대한 얼음의 흔적도 그때부터 서서히 녹기 시작하더니 반나절이 다 가기 전에 완전히 녹아 절벽 아래의 강에 흡수되어 버렸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야 옳았다. 그러나 다프넨은 잠든 채 깨어날 줄을 몰랐다. 소년은 데스포이나 사제의 집으로 옮겨졌는데 모르페우스 사제의 집으로 가지 않은 것은 신체적인 상해를 입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숨도 고르게 쉬었고 눈도 가볍게 감고 있을 뿐, 어느 모로 보나 환자는 아니었다. 얼음 속에서 며칠만에 나왔지만 동상의 흔적도 없었다. 그러나 끝없이 잠을 잘 뿐이었다. 데스포이나는 주의 깊게 살펴본 끝에 그의 혼이 어딘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다프넨의 손에는 윈터러가 쥐어져 있었고, 데스포이나는 그것을 손에서 빼내 그의 침대 밑에 넣어 두었다. 나날이 자꾸 흘러갔다. 실버스컬에 갈 아이들을 뽑는 시험이 치러졌고, 끝났고, 그리고 출발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실로 무서운 일이오. 그 검에 정말로 이세계와의 통로를 열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지체 없이 파괴해버리는 것이 옳소!" 한 사내가 무릎을 치며 외치자 몇 군데에서 동조하는 외침이 일어났다. 섬에서는 곡물이 부족해서 술을 아주 조금밖에 빚지 않았기 때문에 술집 같은 것이 없었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들은 주로 낮에 공회당 앞 광장에 모였다. 밤에는 귀한 기름을 아끼기 위해 일찍 잠드는 것이 보통이었다. 사람들은 공회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주로 앉았고 앞마당에는 의자 대신 쓰일 수 있는 돌들이 여러 개 있었다. 지금 그 광장에는 열 일곱 명의 수도사 중 열 한 명이 모여 있었는데 이런 모습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수도사가 아닌 다른 사람들도 흥미 있는 얼굴로 주위에 둘러 서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중심에 선 것은 헥토르의 아버지인 펠로로스 수도사였다 "지금 그 검을 가져온 다프넨이라는 소년이 잠든 채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제일 좋은 기회요. 그 아이가 깨어나서 검을 되찾게 되면 이보다 더 큰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거요. 그 절벽 사이에 생겨났던 끔찍한 걸 다들 보셨지 않소? 이미 봄이 된 지 오랜데 그렇게 많은 얼음이 어디서 왔겠소? 이 사람은 소름이 쫙 끼쳤소이다." 다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세계와의 통로가 열리는 바람에 파멸한 옛 왕국의 후손이었다. 이세계라는 말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 눈으로 보았던 광경 역시 두려움을 크게 자극했다. 얼음은 이세계에서 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거대한 얼음이 올 수 있다면 그 말고 다른 어떤 것도 올 수 있지 않겠는가? 그때처럼... 온갖 악한 생물들이 뛰어나와 섬을 완전히 쓸어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일리오스 사제가 희생되었던 윗마을에서의 사건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 섬 인구의 3분의 2가 죽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그 검을 파괴하자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어떻게 파괴할 수 있죠?“ “파괴할 수 있다면 그리 무서운 물건이 아닐 수도 있는데......” “만일 안 된다면 대륙으로 도로 추방해 버리면 되잖소? 대륙 사람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었는데, 도대체 이게 어찌된 노릇인지 ......” 일리오스 사제 시절의 비극을 기억하는 나이든 수도사들일수록 펠로로스의 의견에 쉽게 찬성을 표시했다. 젊은 수도사들은 조금 생각하는 눈치들이었다. 그들은 다프넨이 나우플리온의 하나뿐인 제자이며 차기 검의 사제로 가장 유력한 후보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문제만 아니라면 함부로 적대시할 상대가 아니었다. "증명되지 않은 위협을 너무 과장하는 것 아닙니까? 아직 정확한 증거는 전혀 없지 않아요? 다프넨이 저지른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 수도사가 그렇게 말하자 펠로로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모르시는 말씀! 위험이 눈앞에 닥친 뒤에 아무리 후회해 봤자 쓸모 없는 헛 타령이 될 뿐이오. 그래, 우리의 우려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오. 하지만 만에 하나 사실이 되어버린다면? 막말로 대륙에서 받아들인 어린 녀석 하나가 뭐 그리 중요하오? 순례자들 전체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오히려 기꺼이 희생되겠다고 나서야되는 것 아니오? 과거 윗마을에서 참사가 벌어졌을 때는 어떠했소? 우리 가운데 가장 훌륭한 사제님이 스스로 희생을 택하시지 않았소?“ 펠로로스가 자신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은 암암리에 검의 사제로 내정된 듯 말해지는 다프넨이 일리오스와 같은 희생을 하지 못한다면 자질 부족이 아니냐는 논리를 만들어낸 셈이 되었다. 아직 모두의 의견이 모아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꾸만 여론은 펠로로스 수도사의 달변에 뒤따라가는 형국이 되었다. 그리고 다프넨은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다. 천천히, 능숙한 움직임으로 절벽을 오르고 있었다. 거머잡을 곳을 찾아내고 디딜 곳을 정확히 밟으며 머뭇거림 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눈은 주위 경관의 특징을 놓치지 않고 살폈다. 잠시 올라가기를 멈춘 나우플리온은 아래를 한 번 내려다보고 다시 위를 올려다본 다음 생각했다. 직접 몸을 혹사하여 확인하는 일, 이것만큼은 그의 능력으로 충분히 잘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결국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건 아닌 거다. 절벽에 남아 있던 눈의 흔적을 떠올렸다. 물론 지금은 다 녹아서 사라지고 없는 눈이었다. 그런데도 기억 속의 얼음은 문득 오한을 가져다 줄 정도로 차고 단단했다. 이마에 살짝 배어났던 땀이 금세 다 식었다. 이제는 정말로 높아졌다. 자칫 발을 헛디딘다면 다프넨에게 일어났던 기적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또한 그는 다프넨과는 달라서 발을 헛디딜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이대로 오른다면 곧 쉴 수 있는 곳에 도착할 거란 느낌이 들었다. 아이 때부터 눈 덮인 능선을 달리며 자란 그였고 이곳 역시 고향 땅에 솟은 산이었다. 이 지점에 직접 와본 일이 없다해도 주변은 손바닥 보듯 훤한 지형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드디어 손을 놓고 설 수 있는 곳에 도달했다. 겨우 사방 1미터도 되지 않은 좁은 공간이었다. 잠시 쉬며 하늘을 올려다볼 참이었다. 익숙하다 해도 천길 낭떠러지였으니 긴장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 들어왔다. "이솔렛......?“ 저 멀리 한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고, 그이는 이마에 손을 댄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발 아래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몸을 떠오르게 하는 마법 정도였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자연스러운 자세였다 몇 백 미터는 될 협곡의 머리였다. 거기에서 그런 마법에 의지해 떠있을 정도로 그녀가 무모한가?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소리쳐 불렀다 "이솔렛!" 그녀가 돌아보았다. 멀어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으나 그녀는 생각에 잡긴 사람처럼 한참 동안이나 나우플리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훌쩍... 발을 움직여 아래로 내려왔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계단을 밟듯 내려오고, 또 내려와서...... 그가 있는 곳 바로 앞까지 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제야 나우플리온도 상황을 대강 깨달았다. 이솔렛은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떠 보이더니 뒷걸음만으로 간단하게 위쪽 돌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더니 다리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너무도 자연스럽고 익숙해 보였다. ......그런 거군." 나우플리온은 약간 입술을 매만지고는 방금 이솔렛이 있던 돌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가 약간 한숨을 내쉬었다. 등이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다프넨보다는 대담하시네요." 이솔렛은 예의 매끄럽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조각상 같은 목소리였다. “다프넨도 여길 안다는 거군." 둘이 공유하는 비밀 같은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약간 씁쓸할 뿐 그 이상의 감정은 들지 않았다.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익숙해 있었던 거죠." "여기서 발을 헛디딘 건가?“ 이솔렛은 보이지 않는 돌 아래로 내린 다리를 약간 흔들었다. 각반 리본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그대로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나우플리온은 이솔렛의 옆얼굴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생각을 거듭했다. 그리하여 끝내 그녀가 한 손을 들어 두 눈을 가릴 때까지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죄책감.... 인가요, 이런 것이?“ “......“ 가벼운 돌풍이 절벽을 맴돌고, 보이지 않는 돌 위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머리카락은 뺨과 눈을 가리고, 옷자락은 바람을 따라가려 했다. “헛디디지 않았어요. 헛디디려 해도 디딜 계단이 먼저 사라지고 없었던 거죠. 너무 익숙해져버려서 보이지 않는 계단을 마음속으로는 이미 믿어버린 거죠. 그래서 무턱대고 그렇게......” “하지만 깨어나 주겠지." 바람 때문에 덜겨거리는 검 손잡이를 잡아 소리를 멎게 했다. 나우플리온의 눈은 차분했다. "어딘가에서 즐겁게 지내고 있는 게지. 돌아오고 싶지 않을 정도로 즐거운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돌아을 거야. 잊을 녀석이 아니야. 잊을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은 녀석이야." 단지 이솔렛을 위로하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으며 말하고 있었다. 이솔렛이 늘어뜨린 다리를 접어 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다시 꼿꼿이 선 채로 나우플리온 쪽을 보았다. “하지만, 돌아오기 전에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있어요." 나우플리온은 무엇이냐고 묻는 대신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특유의 단호한 목소리가 울렸다. "계단을 파괴한 자를 찾겠어요." 나우플리온은 입을 다물었다가 힘주어 떼며 탁한 숨을 내뱉었다. 그가 짐작한 것을 이솔렛 역시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사실. 이솔렛이 몸을 돌리더니 품에서 가죽 주머니를 내어 그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윽고 손을 빼어 허공에 흩뿌렸다. 내둘러지는 손과 함께 잘 보이지 않는 미세한 가루가 사방으로 날았다. 나우플리온은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어딘가에 달라붙으면 스스로 빛을 내는, 금색 반디충의 가루였다. 반디충을 말려 빻아 가루로 만든 다음 거기에 약간의 마법을 불어넣은 것으로 흔히 길을 표시할 때 쓰는 것이었다. 가루가 서서히 내려앉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던, 허공에 뜬 징검다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방에 세 개의 돌이 윤곽을 드러냈다. 이솔렛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우플리온 역시 천천히 돌을 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가루가 다시 내어지고, 뿌려지고, 빛났다. 마법 물건 가운데서도 제조법이 비교적 간단하지 않아서 귀하게 여겨지는 것인데도 이솔렛은 조금도 아까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조금 지나자 몇십 개에 달하는 둥근 윤곽이 천길 절벽 위에 떠 있는 형상이 되었다. 그 돌들의 수는 그전에 다프넨에게 알려주었던 것보다 훨씬 많았으며, 여러 개의 교차점과 시작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놀랍게도 주위의 봉우리와 낭떠러지들이 거의 다 이러한 징검다리로 이어져 있었다. 나우플리온이 서 있던 위치로 이어진 것도 그런 경로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 돌들 위를 이솔렛은 한 걸음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가볍게 돌아다니고 있으니, 보는 사람의 심장이 다 조여들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멈췄고, 돌아서서 나우플리온을 보았다. 광채 두른 커다란 물방울들처럼 투명한 원들이 노르스름한 빛을 냈고, 그 가운데 선 소녀의 금빛 머리칼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우플리온 은 마음이 조금 아픈 것을 느꼈지만 쉽사리 누를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이솔렛이 멈춘 곳으로 다가가 그 곁을 들여다보았다. 이가 빠진 것처림 뚝 끊긴 간격이 눈에 들어왔다. “......” 높이 올려 묶은 나우플리온의 머리카락이 바람과 함께 긴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절벽 가운데 흔히 지나가는 돌풍이었다. 이솔렛의 짧은 머리가 흐트러지고 각반을 묶은 리본, 허리를 넘는 흰 웃옷자락, 검자루 끝에 매달린 술이 날렸다. 상체를 똑바로 세운 가운데 고개만 돌려 바람을 피하자 상대방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턱을 약간들자목선을 타고 옷 안쪽까지 바람이 스며들었다. "이 돌들은.... 일리오스 사제님의 작품인가?' 그 이름이 입밖에 나을 때 좀더 센 바람이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솔렛은 고개를 젓더니 달리 말했다. "상당한 규모의 마력장이 이 봉우리와 저 아래 절벽 주위를 감싸고 있어요. 아주오래 전부터, 어쩌면 우리 순례자들이 이 섬에 오기 전부터 있었을 법한 것이죠. 그 가운데 한 군데 균형이 깨져나갔어요. 충분히 느낄 수 있군요. 어떤 새로운 주문이 그 사이에 끼여들어서 돌 들 전체가 떨리는 것이 느껴져요, 지금 이렇게 서 있는 것도 그리 안전하지 못한 걸지도 모르죠." 나우플리온은 움찔하는 대신 피식 미소지었다. “자칫하다간 동반자살로 오인 받겠군 그래." 이솔렛은 웃지 않았다 그녀 역시 나우플리온이 무슨 의미에서 한 농담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지난 시간들을 한 발 떨어져 바라볼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이윽고 나우플리온은 표정을 바꾸어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런 거대한 마법장을 뚫을 정도라면 그건 아마도 상당한 수준의 마법이겠지. 안 그런가? 섬 안에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테지. 혐의를 간단히 좁힐 수 있겠군, 오늘 일은 일단 비밀에 붙이자." 이솔렛은 한쪽 손을 허리에 짚은 채 나우플리온을 빤히 쳐다보았다. 뭔가 묻고 싶은 듯했으나 일부러 입밖에 내는 것이 불편한 듯했다. 나우플리온은 입끝만으로 미소지으며 들리지 않는 질문에 짧게 대꾸했다. "사냥감을 방심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사냥의 첫째 단계." “응?” 다프넨은 고개를 돌렸다. 자기 곁에서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것도 자신과 아주 친근한 두 사람이. "뭐하니? 이리 와! 금방 녀석들이 공격해 올 거야!"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대로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곧 다른 아이들과 함께 숲 속으로 달려갔다. 날아갈 듯 몹시도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두 패로 나뉘어 병정놀이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자신은 그 가운데 한 패의 우두머리였다. 다른 패거리를 맡은 것은 엔디미온이었다. “자, 이 통나무 더미 뒤를 진지로 삼자. 조금만 수그리면 요 아래로 내다볼 수도 있거든. 어때? 근사하지?” 다프넨의 참모 역할을 맡은 소년은 그가 오벨리스크 밑에서 처음 만났던 그 꼬마였고 이름은 니키티스라고 했다. 그는 자기 이름이 '이기는 사람' 이라는 의미라고 가르쳐 준 뒤 그런 자기가 안 이길 수 있겠냐며 키득키득 웃었다. "엔디미온은 워낙 정석대로 나가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거든. 조금만 더 기다려 봐. 분명 정면 공격을 해 올 거야." 꼬마 니키티스의 입가에 짓궂은, 일견 교활하게까지도 보이는 미소가 어렸다. 그걸 보자니 문득 오래 전의 누군가가 생각났다. 그게 누구였더라, 자신을 대단히 번거롭게 한 녀석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은데. 그러나 얼굴 없는 사람처럼 안개 너머에 가려져 있을 뿐이었다. 옛날 일이야 아무려면 어떠랴. 지금은 즐거운 놀이 중인데. "왔다!" 니키티스가 낮게 부르짖자 다프넨은 재빠르게 빗자루 같은 노간주나무 가지를 두 번 흔들어 신호했고, 그러자 양쪽에 숨어 매복하고 있던 두 무리의 소년 소녀들이 일시에 몰려나와 적의 세력을 둘로 갈라 버렸다. 곧장 신나게 막대기질이 시작되었다. "찔러라, 찔러" "아얏! 눈 찔렸단 말이야! 살살해!" "야, 싸움에 살살이 어디 있냐? 졌으면 손들고 항복이나 해!" 싸움이 다프넨 편에 유리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엔디미온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프넨은 나뭇가지를 버리고 직접 통나무 더미 뒤에서 뛰어나와 소리쳤다. "엔디미온! 어디냐! 숨어 있지 말고 나랑 결판을 내자!" 답은 금방 들려왔다. "색시처럼 얌전히 기다리고나 있으라고. 금방 가니까." 갑자기 머리 위에서 펄쩍 뛰어내리는 소년이 있었다. 솜씨 좋게 목을 타고 앉은 엔디미온이 두 손으로 다프넨의 눈을 가려버렸고, 다프넨은 어깨를 흔들어 떨어뜨리려고 안간힘을 쓰며 소리쳤다. "이런 법이 어디 있어!" “너도 매복했잖아! 다양한 방법을 알아야 이길 수 있는 법이지! 나라고 적장을 노려 매복하지 말라는 법 있니?” 물론 그런 법은 없었다. 그런데 그 말, 정확히는 ‘다양한 방법을 알아야 이길 수 있다'는 말을듣는 순간, 그에게 그런 말을 한 사람이 또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프넨은 순간적으로 손을 멈춘 채 어떤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러자 엔디미온의 움직임도 멈췄다. "아아......“ 머리가 약간 아픈 것도 같았다. 기분 탓인지 주위의 모든 친구들이 멈춰선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는 애써 혼란을 떨쳐내고 엔디미온의 풀린 손을 잡아챘다. “내려 와, 녀석아!" 훌쩍, 엔디미온의 몸은 몹시 가벼웠다. 다프넨이 손을 잡아끄는 대로 그는 한 바퀴 뒤돌기를 하며 가뿐하게 바닥에 착지했다. 그러나 마주본 얼굴에는 방금 전의 밝은 웃음이 없었다. 웃는 대신 그는 말했다. “기억이 돌아오는 거구나?”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실체가 없는 떨림처럼 느껴진 것은 단지 착각이었을까? 그는 이렇듯 눈앞에 있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천천히 생각해 봐. 서두를 건 없으니까.” 그렇게 말한 엔디미온은 다프넨이 내던진 나뭇가지를 집어 흔들며 아이들 틈으로 달려갔다. 그의 목소리는 다시 일상적인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리 와! 내가 전부 상대해 줄 테니까! 니키티스! 엔디미온은 고지식한 녀석이니 매복을 하면 틀림없이 이길 수 있다고 다프넨을 꼬드긴 건 너지?“ 다프넨은 돌아섰다. 자기 나뭇가지를 빼앗아 가 버린 엔디미온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문득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 무언가 있어야만 할 것 같은데 없었다. 아이들이 대륙으로 떠나는 날이 왔다. 시험을 통과한 아이는 일곱 명이었고, 그들을 보호할 어른 넷이 동행하여 모두 열 한 명이 떠나게 되었다. 출발은 함께 하지만 대륙에 상륙하게 되면 세 무리로 갈라져 각각 다른 길을 택하고, 실버스컬에서도 서로 모르는 패인 양 행동하게 되어 있었다. 어른들은 대륙에 다녀온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었지만 아이들은 모두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열 몇 명이 우르르 몰려다니면 분명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기 때문이었다. 섬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의 행동거지며 말씨는 어딘가 모르게 대륙 출신 소년 소녀들과는 달랐다. 실버스컬 출전자 중에는 당연히 헥토르도 있었다. 그들 패거리였던 소년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리코스가 헥토르와 함께 갔다. 에키온이나 그 밖의 아이들은 갈 자격을 따내지 못했다. 여자아이는 둘이었고, 그들을 위해 여자 수도사 한 명이 원정대에 참여하게 되었다. 다프넨이 잠든 채 깨어나지 못하는 동안 섬사람들의 기대는 모두 헥토르에게로 돌아가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새로운 우승자가 나을 거라며 4월 초부터 마을 전체가 떠들썩할 정도였다. 어느 정도는 헥토르의 아버지인 펠로로스 수도사가 일부러 조장한 감도 없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섬 출신 소년의 우승을 바라는 사람들도 많았다. 섬의 아이들이 실버스컬에서 일반적으로 높은 성적을 올리긴 했지만, 어쨌거나 진짜 우승자는 빗날 일리오스 사제 한 명뿐이었던 것이다. 성대한 환송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어쨌든 꽤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온 가운데 세 척의 배가 띄워졌다. 그들은 다프넨이 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썰물섬을 거쳐 렘므의 화이트 크리스탈 제도에 상륙하게 되어 있었다. 상륙하는 섬은 각자 정할 일이었으나 유물 찾기 배가 많이 돌아다니는 엘베 섬 근처에 상륙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가장 눈에 덜 띄는 방법이었다. 이솔렛은 무엇에 이끌렸는지 그 날 환송 장소에 나타났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멀어지는 배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는 것이 여러 사람 눈에 띄었다. 언제나처럼 감정을 알아보기 힘든 얼굴이었다. 바닷바람이 불어오자 한 줌의 하얀 머리칼이 오른쪽 눈가를 언뜻 스쳤다. 그녀는 말없이 이 머리카락에 대해서 물었던 한 소년을 생각했다. "어라, 너 이솔렛이 아니냐?' 눈앞에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에니오스, 과거 단센이라는 이름으로 렘므에 있는 나우플리온을 찾아왔던 백발의 그 남자였다. 그는 섬으로 돌아온 후 죽 선착장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기에 마을에 있는 사람들을 만날 일은 거의 없었다. "아.... 오랜만이에요." 어려서부터 나우플리온과 형제처럼 친했던 에니오스는 어린 이솔렛의 모습도 잘 기억하고 있는 편이었다. "보리스.... 아니, 다프넨을 데려오고 나서는 처음 보는 게 아닌가 싶구나. 실버스컬 나가는 애들을 보러 왔니? 아니, 참, 왜 너는 실버스컬에 나가지 않고?' 이솔렛은 그냥 말없이 웃을 따름이었다. 에니오스는 그녀의 등 뒤에 엇갈리게 매어진 두 자루 검을 보며 아쉬운 듯 미소했다. “너라면 일리오스 사제님에 이어서 두 번째 실버스컬을 섬으로 가져올 수도 있을 터인데." 선착장에서 먹고 자고 하지만 마을의 소문은 대략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른 아이들도 잘 해내겠죠." 그렇게 말하는 이솔렛의 머릿속에 어제 저녁의 일이 다시금 떠올라왔다. 어쩌면 그 일 때문에 여기까지 나오게 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저녁, 헥토르가 그녀를 찾아왔다. 벌써 세 번째 방문이었다. 처음 왔을 때 그는 과거의 무례를 먼저 사과했다. 사과하든 말든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이솔렛이었지만 그가 사과가 아닌 뭔가 다른 것을 말하고 싶어한다는 것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망설이다가 끝내 말하지 못한 채 돌아가곤 했다. 그런 식으로 그는 별 용 건도 없이 두 번이나 찾아왔다. 세 번째로 찾아왔을 때, 노골적으로 불쾌해하는 이솔렛 앞에서 헥토르는 다짜고짜 일리오스 사제가 쓰던 쌍검을 잡아볼 수 없겠느냐고 물어왔다.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아버지가 쓰던 물건은 모두 그녀에게 신성하거니와, 그 가운데서도 특히 검은 아버지가 어린 시절부터 한 번도 바꾸지 않고 써온 것으로 지금은 그녀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소중한 유품이었다. 검을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 것도 그 안에 아버지의 혼이 깃들인 양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이라 해도 허락하지 않을 텐데, 뻔뻔스러운 것도 정도가 있었다. 이솔렛은 처음엔 대꾸를 않다가 몇 번 상대의 말이 되풀이되자 입을 열어 간단히 말했다. "넌 지금 나를 다시 한 번 모욕했어. 나 대신 내 검이 대답하고 싶어하는군." 헥토르의 얼굴은 진지하다 못해 아예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단 한 번이면 됩니다. " 이솔렛은 오른손을 뒤로 돌려 검자루를 쥐었다. 미동 없는 얼굴에서 차가운 말이 떨어졌다. “내가 너를 못 죽일 것 같은가?” 그대로 한 번만 더 말한다면 정말로 검을 뽑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헥토르는 맥없이 이솔렛의 얼굴을 흘끗 본 다음 밖으로 나갔다. 그 날 낮의 일도 생각났다. 데스포이나 사제의 집에 다녀오던 도중 사람들이 많은 공회당 앞마당에서 헥토르가 그녀를 붙들었다. 그리고 다들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실버스컬에 가게 되면 누님을 대신해서, 돌아가신 일리오스 사제님의 명예를 드높이겠노라고. 솔직히 말해 어이가 없다못해 기가 찰 노릇이었다. 헥토르가 스스로 이솔렛에게 저지른 일을 기억하고 있다면 어떻게 저런 말을 감히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그가 까닭 없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잖은가. 그가 원하는 것이 무얼까. 헥토르가 실버스컬에서 우승한다 해도 아버지의 명예를 높이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티엘라' 라고 불리는 아버지의 특별한 검술을 물려받은 계승자는 그녀 혼자였고, 그녀가 직접 나가 우승하지 않는 한 다른 영광은 없었다. 그러나 이솔렛은 스스로 택한 위치가 머물기에 가장 좋음을 알고 있었다. 다프넨이 사라진 일로 회의가 열렸을 때, 회의장 가운데 앉아 있던 리리오페의 표정을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소녀는.. 정말로 소유욕이 강했다. "이솔렛?“ 생각에 잠긴 그녀를 에니오스가 다시 깨웠다. 이미 배들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중이었다. 이솔렛은 아픈 사람처럼 미소지은 다음 그 자리를 벗어났다. 사라진 계단 돌을 발견한 후로 이솔렛은 매일같이 데스포이나 사제의 집을 찾아왔다. 그리고 다프넨의 침대 앞에서 한두 시간을 말없이 보내곤 했다. 소일거리를 가져오지도 않았다. 그냥 가만히 앉아 소년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초반에는 말동무를 해주려 했던 데스포이나도 이제는 혼자 내버려 두는 편이 좋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 날도 찾아왔던 이솔렛은 공회당으로 나갈 준비를 하던 데스포이나와 짧은 이야기를 나눴다. "여전히.... 깨어날 기미는 없구나. 몸에는 상처 하나 없는데, 어떤 깊은 꿈이 그를 붙들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마치 절반의 죽음과도 같달까." 조금 후 데스포이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보통 혼이 육체를 나가 떠돌게 되면 수일 내로 그는 본래의 세계를 잊고 죽음에 동화되어 버리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남은 몸은 점점 식어가다가 이윽고 시체로 변하게 되는 거야. 그런데 이 애의 몸은 조금의 변화도 없구나. 아무런 음식물도 섭취하지 않는데 어찌 한 달이 가도록 이렇듯 편안해 보일 수가 있을까. 내가 알지 못하는 무슨 불가사의가 깃들인 것일까" 데스포이나가 공회당으로 나간 뒤 혼자 남은 이솔렛은 소년의 창백한 눈꺼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혼은 어느 곳을 떠돌고 있을까 생각했다. 섬 안에 있기는 한건가. 아니면 그 끈질긴 기억을 좇아 대륙으로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소년이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사랑하는 그의 죽은 형을 찾아서. 그렇다면 돌아오지 않아야 옳을 터인데 왜 그의 몸은 아직도 이렇게 따뜻할까. 무엇을 기다려서? 어디로 돌아오고 싶어서? 섬이 그에게 줄 수 있었던 것, 그가 섬에 남긴 것,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일 년이 흐르는 동안 어느 땐가 시작된 봄을, 금빛 화살 같던 여름을, 말없는 가을과 희고 긴 겨울을, 잃으려고도 가지려고도 하지 않았는데 어떤 것은 엷어지고, 어떤 것은 두터워지고, 모르는 사이에 다가든 새로운 추억이 울타리를 넘고 여울을 건너뛰고 성벽을 타고 올라 숨겨진 방을 향해 멈추지 않고 걸어서...... 마음 속에 세워진 흰 얼음성으로, 어떤 4월은 예고 없이 다가와 버리는 것이다. 세운 채 껴안고 있던 한쪽 무릎을 내리고 의자를 당겨 침대로 다가갔다. 잠든 소년의 입가로 손가락을 가져가자 약한 숨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손가락 끝에 닿는 습기와 이어지는 차가움, 다시 따뜻함...... 그녀의 입술이 소리 없이 약하게 달싹거렸다. 지워버린 줄로만 알았던 수많은 욕망들이 차례로 돌아와 머릿속을 관통했다. 평화와, 고립과, 잃지 않고자 간절히 기도했던 것과, 상처를 보상받고자 하는 마음과, 승리하고픈 충동과 명예.... 그리고 끝내 갖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살아 있는 이상 어찌 무욕의 존재가 되랴. 흰 시트 위에 흩어진 검푸른 머리카락에 손을 댔다. 1년 동안 자라 다시 어깨를 넘게 된 머리였다. 그렇게 외딴 수풀처럼 홀로 자란 소년이었다. 그 귓가에 힘주어 속삭였다. 산 자의 욕망이 그를 불러낼 수 있다면 어떤 것이든 관계없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가장 오래된, 그러나 한시도 잊지 못한 소망을 온 정신을 다해 전달하려 했다. '넌 아직 떠날 수 없어.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이 땅에 남아 있으니까. 돌아와야 해. 결단코 돌아와야 해,' 네 운명은 너만의 것이 아냐. 네 승리는 널 위한 것만이 아냐.' 내 아버지의 이름을 빌리려는 저 무례한 자들에게 그 이름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증명해 줘.' '그리하여 네가 물려받을 자리가 네게 가장 합당하다는 걸 보여줘, 내 아버지의 자리였던 검의 사제, 오직 너에게만 그것을 허락할 수 있으니까.' 나를 대신할 단 한 명의 계승자. 그것이 너이길 원해. 4. 각자의 전쟁처 꺼져 가는 불 앞에 모여 앉은 소년들이 저마다 나뭇가지를 하나씩 들고는 아직 덜 식은 재 속을 들쑤셨다. 한 녀석의 나뭇가지가 드디어 한 개를 찾아내자 시시덕대는 웃음이 퍼져나갔다. “다 익은 거 같은데?” 다프넨은 그게 무엇인지 몰랐지만 어쨌든 달콤하다는 것만은 알았다. 길쭉한 뿌리 비슷한 것이었는데 불에 구우면 노르스름한 속을 먹을수 있었다. 입술이 데일세라 호호 불면서 하나씩 까먹다 보니 어느새 손이며 입가가 모두 까맣게 되어버렸다. 밤하늘 위로 연기가 한 줄기 피어올랐다. 어스름 숲 속에서 작은 새들이 울고 있었다. 다프넨은 문득 옛날 생각을 떠올리고는 말했다. "불 피우는 건 참 어렵더군. 옆에서 보기엔 쉬울 것 같았는데 혼자해보려 하니까 도저히 안되더라고." 그 말을 하고 나서 사방을 둘러보는데 문득 친구들의 얼굴이 투명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아주 잠시였지만. 그러나 다프넨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불을 잘 피울 수 있게 된 건 아주 나중이었지. 그래도 렘므까진 가기 전이었을 거야." 말하고 나니 '렘크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혀끝에 남아 맴돌았다. 이곳에서는 쓰이지 않는 단어인 양. "국경을 넘어가서 그 사람을 만난 후로는........“ 이상하다. 말을 이을수록 실제로는 없었던 일을 꾸며대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버렸다. 또는 까마득한 옛날에 일어난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했다. 애써 말을 이으려 할수록 귓가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어와 맴돌며 커졌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누구였더라, 그래,그녀였지. 돌아오라고? 그 때 소년들은 저들끼리 얼굴을 마주보며 눈짓으로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잠시 후 곁에 앉았던 니키티스가 다프넨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오랜만에 네 덕택에 재미있었어." 열 두 살 가량의 꼬마 모습인 니키티스는 코에 주름을 잡으면서 씨익 웃어 보였다. 그의 뺨과 콧잔등에는 검댕 스친 자국이 있었는데 어느새 희미해지더니 사라져버렸다. 다프넨이 눈을 크게 뜨는 순간, 그의 얼굴이 다시 한 번 투명하게 변했다. "그래, 이제 너 돌아갈 때가 된 거지? 너랑 노는 동안 정말 재미있었다. 다음에도 또.... 라고 말할 순 없겠지만 말이야." 다른 소년이 말하고, 또 다른 소녀도 다가와 다프넨의 어깨를 툭툭쳤다. 잠깐만에 친구들에게 빙 둘러싸인 모양이 되어버렸다. 그는 고개를 빼고 그들 밖에 선 한 소년을 보았다. 엔디미온은 조용히 미소짓고 있었다. "잊지 못할 만큼 실컷 놀았니? 행복했어?' 기억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가 돌아오는 듯한 느낌이 들얼다. 텅비고, 다시 새로운 것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행복.......” 생각보다 긴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그 순간이었다. 이제 친구들은 방금 전의 생기 있는 얼굴이 아니라, 예전처럼 뼈와 살이 없는 창백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동시에 손에 없는 검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윈터러는 그를 부르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분명히 느껴졌다. 거기엔 물론 다른 목소리들도 많이 섞여 있었다. 어느 것은 악했고, 어느 것은 중립적이었다. 또한 그 모두가 위험했다. 천천히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혼돈의 존재인 겨울의 검, 왜 그 절벽에서 나를 살려줬지? 한 번 싸워 볼 마음이 있다는 건가 또는 이쪽의 혼이 삼킬 만해 보인다는 건가. 아니면.... 이번에야말로 진짜 지배자가 되어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건가. 갑자기 한 소녀가 말했다. “난 누가 널 부르는지 알아 그 예쁜 아가씨지?J 말의 내용보다 그 울림에 놀랐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기억해 냈다. 그가 처음 그들을 따라 이곳, 숲의 땅으로 왔을 때 그들의 목소리가 바로 저러했다. 그런데 어느새 방금 전의 실재감 있는 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젠 모두가 처음의 목소리로 되돌아와 말하고 있었다. 나 는 낯선 사람이야, 나는 너와 다른 존재야.... 하고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인 거리감을 순식간에 만들어내면서. “응, 나도 그 아가씨 보았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봤잖아.” “어렸을 때는 좀더 사랑스럽지 않았니? 아가씨 아빠가 살아 있던 때는 정말 천진한 고집쟁이였다고.” "지금 너희 이솔렛. 그러니까 이솔렛의 모습을 어렸을 때부터 봐 왔다는 거야?“ 한 꺼풀의 기억이 다시 씌워졌다. 이솔렛, 그녀가 그의 곁에 앉아 있었다. 오래 전부터 매일같이 찾아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을 걸고 있었다. 늘 듣고 있었는데 왜 지금에야 깨달았을까? 그와 어울렸던 친구들, 작은 유령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이윽고 엔디미온을 쳐다봤다. 다프넨도 엔디미온을 보았다. “말해 줘, 그녀의 옛날 일들........ 아냐, 그래, 난 정말로 알고 싶은 것이 있었어. 이솔렛과나우플리온.... 두 사람은 무슨 관계이며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거지? 너희는 봐서 알고 있니? 전부 다?” 숲이 어두워졌다. 모닥불은 꺼지고 빛은 사라졌다. 그들이 떠들고 놀던 친밀한 숲은 어두컴컴한 그림자의 숲으로 변해 있었다. 엔디미온이 손을 쳐들자 그 끝에서 파랗게 빛나는 동그라미가 생겨나 단 하나의 빛이 되었다. “본인들 사이의 일은 본인들에게 직접 묻는 거야.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어. 네가 오늘 돌아간다면 그녀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하는 셈이 될 거란 사실.” 선물......? 동그라미가 점점 커졌다. 그와 동시에 다프넨의 머릿속은 밝아졌고, 눈앞은 아득해졌다. “잊지 마, 잊지 않으면 다시 만날 수 있어. 그 누구라 해도, 네가 그토록 다시 보기를 원하는.... 그 사람이라 해도.” “부르는 거야. 부름이 모든 영혼을 묶어 놓는 거야.” “그리하여 우리는 이 땅을 떠나지 못하고........” 빛이 시각을 장악해버렸다. 발 딛고 있던 곳이 사라졌고, 그러나 여전히 무언가를 딛고 있었고, 아름다운 숲이 재처럼 사그라지고, 친구들의 손짓이 나비 가루처럼 날려갔다. 잃어버렸다. 그러나 다시 되찾고 있었다. 또 다른 것, 그가 원하던 것, 산 자의 혼만이 원할수 있는 것. 돌아와 있었다. “.......?”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본 것은 흰 수건으로 반쯤 가려진 천장이었다. 수건은 실제의 물건이 아닌 양 느리게 펄럭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눈동자를 차츰 움직여 옆을 볼 때까지 자신이 어디로 돌아왔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등받이 없는 의자에 단정히 앉은 이솔렛이 보였다. 희고 긴 무명치마 끝자락에 갈색 물방울무의가 점점이 박혀 있었다. 벌어진 여밈 아래 미끈한 발목에 비스듬한 그늘이 가로 겹쳐져 흔들거렸다. 십자로 포개진 손목에 걸쳐진 긴 끈은 치마 주름 사이로 늘어졌고, 그 끝에는 조그마한 열쇠가 숨겨진 약속인 양 달려 있었다. 현실의 일들이었다. 그리고 시선의 기척을 느낀 것처럼 이솔렛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 푹 자고 일어난 듯한 기분이거니와 동시에 아름다운 꿈이 순식간에 지워지는 느낌에 안타깝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모든 것이 너무도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긴 항해를 끝내고, 오랜 방랑을 끝내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양. 둘의 눈이 마주쳤을 때 다프넨은 입을 열어 느리게 첫 마디를 뗐다. 목소리가 울림 없이 나오는 것이 그렇게 신기할수가 없었다. "생일 축하해요, 이솔렛," 마법 같은 한 마디로 그렇게 모든 일이 다시 시작되었다. 조금 늦잠을 자버린 아이처럼 약간 무안한 기분을 느끼며 마을을 걸었다. 사람들은 그들 곁을 지나가는 다프넨을 흘끔거렸지만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가 유령들과 꿈처럼 노는 동안 한 달이 넘는 시간이 지나 버렸다. 사나흘 정도, 숲을 헤매며 병정 놀이를 하고, 동굴과 통나무집을 찾아내고, 조약돌을 주워 빈터에 늘어놓고, 모닥불 가에서 웃으며 잠들었을 뿐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옛 이야기 속에서 잠시 다른 세계에 다녀오는 동안 몇십 년씩, 혹은 몇백 년씩 흐른다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에 다녀온 것이 아니라 단지 잠들어 있었을 따름이었다. 데스포이나 사제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몸은 남겨두고 영혼만이 나가서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그렇게 생각하면 그와 어울렸던 유령소년들이 자신과 똑같은 보통 아이들로 보였던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러나 한 달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또 깨어나지도 않고 지냈는데 이렇듯 일어나자마자 멀쩡히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이상했다. 조금 기운이 없을 뿐이고 아픈 곳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마음 속 깊이 설명하기 힘든 불편함이 밀려왔다. 그는 있어야만 할 계단을 디텄고, 그리고 아래로 떨어졌다. 몸이 산산조각이 났어야 마땅할 텐데 그는 살아남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마도 윈터러의 힘...... 생각이 멎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코를 문에 부딪치기 직전이었다. "산책은 잘 했냐?' 한 발짝 물러났다가 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갑자기 새로운 만족감이 들어와 조금 전의 혼란을 밀어냈다. 다프넨은 다짜고짜 나우플리온의 등 뒤로 다가가 목을 와락 껴안았다. "손 벨 뻔했다, 이 녀석아." 나우플리온은 소일거리 삼아 짧은 단도를 숫돌에 갈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다프넨이 들어오자 일을 놓았다. "산책 잘 했네요. 벌써 완전히 봄이던데요." 그가 잠들어 있던 동안에 슬그머니 봄이 와버렸던 것이다. 나우플리온은 숫돌을 수건에 감아 놓으면서 대꾸했다. "인간을 기다려주는 건 같은 인간밖에 없지." "인간이라고 시간을 거스르는 건 아니잖아요?' "예외 없이 늙은 얼굴을 보여줘서 안도감과 만족감을 조성하지." "그게 기다리는 거예요? 기다린다는 건 그런 뜻이 아닌 것 같은데." 나우플리온은 다프넨의 팔을 풀게 하고는 몸을 돌렸다. 나우플리온의 얼굴을 이렇듯 가까이에서 본 것도 참으로 오래간만이었다. 그러나 시선이 닿는 순간 다프넨은 순간적으로 말을 삼키고 말았다. 새파랗게 젊은 청년은 아니라 해도 나이에 비해 비교적 말끔한 얼굴을 갖고 있었던 나우플리온이었다. 벨노어 저택에서 훈련을 받으며 지낼 때 긴 머리를 올려 묶은 채 쾌활하게 웃던 그의 모습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런 나우플리온의 얼굴에 잔주름들이 순식간에 생겨나 곳곳에 퍼진 것이 보였다. 이마와 미간에는 굵은 주름의 전조마저 느껴졌다. 다프넨이 뭐라 말하기 전에 나우플리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기다리지 않는 녀석들도 있지. 실버스컬 원정단은 이미 꽤 오래 전에 출발했거든." “.......” 실버스컬 같은 것은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그제야 자신이 섬에 따라와 지내며 나우플리온에게 얼마나 많은 여정을 끼쳐 왔는지 실감이 났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혈육도 아니며, 그런 그에게 이런 짐을 지운 자신이 공정하지 못했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버지와 아들도, 스승과 제자도, 동등한 친구도, 단순한 동거인도 아닌.... 그들 두 사람. 차라리 엄격한 보호자와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년이었다면 더 좋았을까. 자기 갈 길을 가는 위대한 인물과 그를 동경하는 아이였다면 모든 것은 단순했을까. 그러나 그들 둘은 똑같이 결점을 안고 자갈밭에서 상처투성이가 되어 구르는 자들이었으며, 서로 다른 구원이 필요한 맨몸의 망명자였다. "왜, 전 당신의 말을 무작정 따라도 좋은.... 착한 어린아이가 아닐까요?“ 때로는 나우플리온이 그의 앞에 길을 열어 주기를 바랐다. 탁 트인 길을 보이고 이곳으로 가라고, 이렇게만 하면 모든 일이 잘 될 거라고 말해 주는 것을상상하곤 했다. 검을 버리라고 하면 버리고, 대륙의 일들을 잊으라고 하면 잊고, 누군가와 다투지 말라면 바로 화해하고, 그가 사랑하라는 사람만을 사랑하고, 미숙한 소년답게 그의 손에서 건네지는 과일만을 받아들고 싶었다. 가장 추웠을 때는 특히, 갈 곳을 알수 없었을 때는 더더욱...... 그러나 자신은 그럴 수 없었다. 나우플리온은 그런 길을 보여주지도 않았고, 그는 따를 수도 없었다. 둘 중 누구의 판단이 먼저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두 가지 다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타인의 조언이 있든 없든 그는 검을 버릴 수 없었고, 형의 기억을 버리거나 삼촌의 일을 잊을 수도 없으며, 헥토르를 용서할 수도 없었다.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주는 이솔렛에 대한 감정 역시 포기할 수 없었다. 그 모두는 그의 전쟁들이었다. 어느 것 하나 그만둘 수 없었다. “모두 네 삶이니까... 그것은 스스로 물러나거나 또는 승리, 또는 패배, 어느쪽으로든 해결되는 수밖에 없으니까. 나 역시 내 삶의 전투들을 다른 사람에게 대신하게 할 수 없으니까. 다른 사람의 짐을 대신 져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나우플리온은 오른손으로 자기 뺨을 한 번 쓰다듬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이 멀어지며 높아졌다. 동시에 어두워졌다. 다프넨은 따라 일어나기 전에 나우플리온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예지를 느꼈다. 멀어지는 그의 얼굴. 그것과 똑같이, 그의 존재 역시 멀지 않은 미래에 자신의 삶에서 퇴장하게 되리라고. 다프넨의 몸은 빠르게 회복되었다. 닷새 정도 지나자 평소 하던 일을 모두 할 수 있게 되었다. 스콜리에도 나갔고, 이솔렛과의 수업도 재개했다. 나우플리온과 목검을 부딪치는 일도 다시 시작되었다. 다프넨은 실버스컬에 못 가게 되었다고 해서 나태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일부러 검 수련에 열심히 덤벼들었다. 윈터러는 다시 나우플리온이 맡았다. 그러나 다프넨은 이제 윈터러에 대한 생각이 달라져 있었다. 피할수 없는 거라면 즐기라고 했던가. 그것이 버릴 수 없는 검이라면 이상한 것은 한 달 동안 잠들어 있었을 뿐인데 그의 움직임이 상당히 가벼워졌다는 사실이었다. 확실히 엔디미온을 비롯한 유령 소년들과 놀 때 그는 육체 없이 혼뿐인 상태였으므로 엔디미온이 그렇듯 날렵하고 교묘한 몸놀림을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본래대로 돌아온 지금까지도 그 때의 능력이 영향을 끼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확실히 그때만큼은 아니라 해도 바닥을 딛고 뛰어오르는 발은 빨랐고, 목표물이 나타나면 반사적으로 목검을 쥔 손목에 탄력이 붙었다. 비록 스승의 검에 비해 정확도는 현저히 떨어졌지만 나우플리온이 그의 속도를 앞질러 막는 데 애를 먹을 지경이 되었다. 갑작스런 실력 향상의 원인에 대해 갸웃거리는 다프넨과는 달리 나우플리온은 꽤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동시에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프넨은 목검을 치고 막고 그으며 생각했다. 이로서 헥토르와의 재대결도, 어려서 실버스컬에 나가지 못했던 나우플리온의 명예를 새로 증명하려던 일도, 모두 물거품이 되었구나. 실버스컬을 위해 겨우 열 한 명이 떠났을 뿐인데도 섬의 분위기는 이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마도 떠난 자들이 섬에서 목소리가 높은 자들이 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남은 사람들 중에서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잊지 않은 자들이 있었다. "그 녀석이 돌아온 것뿐입니다. 잠재적 위험이 조금이라도 줄어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끔찍한 물건은 여전히 섬 안에 있고, 우리들은 멸망의 위험을 떠 안고 하루 하루를 연명하는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나날을 조바심 치며 보낸 것은 사실 펠로로스 수도사 자신이었다. 맏아들을 대륙으로 보내느라 잠시 지체했던 기간을 만회하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들을 만났다. 다프넨이 깨어난 뒤로는 아예 하루에도 서너 명씩 사람들을 만나 윈터러를 가진 소년을 대륙으로 쫓아 보내거나, 심지어 죽여 없애야 한다고까지 역설했다. 섭정을 찾는 횟수도 눈에 띄게 잦아졌다. 차라리 다프넨이 영영 깨어나지 않았다면 그도 소년을 처벌하자고 까지는 주장하지 않았을지 몰랐다. 그러나 이제는 검과 검의 주인을 구별하는 것이 오히려 소모적이었다. 둘은 똑같은 악이었고, 마찬가지로 파괴되어야 했다. 데스포이나 사제는 세 번째로 방문한 펠로로스가 전과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동안 피곤한 표정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실제로 질려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옳은 판단을 내리는 일 역시 간단하지 않은 까닭이었다.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은 이미 충분히 알겠어요. 그래서 다프넨에 대해 공개 재판을 요청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궤의 사제이신 페이스마 님께서도 재판에 붙이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사제님께서 제 발의에 재청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 "재청이라고요?“ 페이스마 사제가 얼마나 이 자에게 시달렸을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또한 펠로로스의 속셈 역시 짐작하고도 남았다. 본래 섬에서는 무분별한 재판을 막기 위해 재판을 발의할 수 있는 자격이 수도사 이상에게만 주어져 있었다. 보통 사람이 억울한 일이 있거나 해서 재판을 열고 싶으면 수도사나 사제를 찾아가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재판 발의를 부탁하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수도사는 열 일곱이고 수도사가 아닌 스콜리 선생은 다섯, 사제는 여섯이었으므로 이 가운데 한 명만 설득하면 재판은 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재판이 열리면 발의를 한 수도사나 사제, 선생이 고발자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에 섣불리 발의 요청을 응낙할 수는 없었다. 펠로로스는 일단 수도사였으므로 직접 발의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독단을 막기 위해 다른 수도사나 사제의 재청이 필요했다. 재청하는 사람이 사제라면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었다. 그것도 섬 안에서 가장 지혜로운 지팡이의 사제라면 재판은 시작되기도 전에 절반은 이긴 거나 마찬가지였다. "뭐, 굳이 이런 말씀은 안 드려도 될 것 같지만... 이미 수도사들은 열 명 넘게 저한테 찬동 의사를 표시한 상탭니다. 페이스마 사제님께서 판결을 내리시긴 하겠지만 이 정도의 여론을 무시하진 못하시겠죠. 한 마디로 죄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 애한테 구체적으로 어떤 처분을 내리느냐, 그것만이 문제란 말씀입니다. 개인적으로 대륙 추방령이 가장 관대한 것이라고 봅니다만.... 그 이상의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만하면 사제님께서도 의견을 정리할 수 있으시겠지요?" 데스포이나가 다프넨에게 호의적이라는 것을 모를 펠로로스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개인적 감정으로 처리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고, 데스포이나가 재청을 거절한다면 이후 벌어진 재판에서 펠로로스가 이길 경우 데스포이나는 객관성을 잃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될 터였다. 펠로로스가 이렇게까지 말하지 않아도 데스포이나는 재판이 벌어질 경우 다프넨의 입장이 압도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프넨이 져서 추방령이라도 받게 된다면 나우플리온이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는 것도 짐작했다. 어쩌면 같이 나가겠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안될 일이었다. 데스포이나는 나우플리온의 상처가 섬 밖에서는 치료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대륙을 떠돌던 나우플리온에게 에니오스를 보내 돌아오도록 설득하게 한 것도 그녀 자신이었다.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고, 결말은 멀리 있지 않았다. 죽게 내버려둘수는 없었다 실제로 데스포이나는 다프넨보다 나우플리온을 더 아꼈다. "재청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일까지 확답을 드리지요. 대신, 내일까지는 다른 사제들에게 같은 요청을 하지 말도록 하십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런 예의도 모를 제가 아닙니다." 펠로로스는 기분 좋게 데스포이나의 집을 나섰다. 그리고 세 걸음도 못 가 나우플리온과 마주치고 말았다. 나우플리온은 마침 데스포이나를 찾아오는 길이었다. 둘은 모두 걸음을 멈췄다. 펠로로스는 나우플리온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으나 무표정하게 쏘아보는 검의 사제 앞에서 지도 모르게 제 발저린 도둑처럼 뺨을 움찔거렸다. “요즘 바쁘신 모양이더군요." 한 마디를 남기고 나우플리온은 데스포이나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 남은 펠로로스는 불쾌한 얼굴로 닫힌 문을 쳐다보다가 땅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데스포이나는 펠로로스가 나가자마자 곧장 들어오는 나우플리온을 보며 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가 의자를 끌어당겨 앉음과 동시에 손을 내저으며 말을 막았다. "무슨 말을 하러 왔는지 다 안단다. 나로서는 이제 네 소년을 돕기가 힘들게 됐구나."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나우플리온이 다프넨과 자기 자신의 운명을 분리해서 생각해 주길 빌었다. 다프넨은 강인한 아이였다. 홀로 대륙으로 돌려 보내지더라도 쉽사리 꺾이지 않고 살아갈 아이였다. 물론 그렇다 해도 아직은 어린 아이였기에 그런 처분이 잔인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래 살지도 못할 나우플리온의 문제가 더 중했다. 절대 같이 보낼 수는 없었다. "사제님, 아니, 누님." 일시 긴장하고 있는 듯했던 데스포이나의 얼굴이 약간 밝아졌다가, 다시 처연해졌다. 그녀는 이제 늙었고, 그녀가 막내 동생처럼 돌봤던 작은 소년의 얼굴에는 주름이 생겨나고 있었다. “네가 수염이 나기 시작했을 때 왠지 모르게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기억이 나는구나." 평소에도 수염을 잘 정리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까칠해 보이는 뺨이었다. 나우플리온은 턱을 한 번 매만진 다음 미소를 지었다. "누님이 첫 아기를 낳았을 때 전 은근히 그 녀석을 질투했었지요. 알고 계셨나요?“ 잠시 동안 둘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우플리온이 입을 약간 열고, 천천히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요즘 전, 저 자신의 혼과 육체가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갑자기 밝게 타오르기 시작하는 걸 느낍니다." 데스포이나는 말문이 탁 막히는 것을 느꼈다. “...너......” “말씀하시지 않아도 압니다. 저 자신이 느낍니다. 그래서 제가 더더욱 그 녀석에게 집착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데스포이나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러지 않으려 했는데도 목소리가 툭툭 끊기며 흘러나왔다. “나우플리온, 안 돼. 아무 것도, 포기해서는 안 돼. 네 생애는 네 것이고, 그 아이의 삶과는 달라. 별개야."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줄 수만 있다면 전부 그 애한테 주고 싶군요. 지금 제 삶에 남은 미련이 있다면 그 녀석을 좀더 오래 보아주지 못하는 것뿐인 것 같습니다. 아직 더 가르치고 싶은 것이 있는데...... 하지만 어차피 다 끝나는 거겠지요? 누구나, 다? 그렇게 오랜 유예가 있었지만 이제 1, 2년 정도면 모두 결말이 나겠지요? 어쩌면 올해일지도 모르겠지요?“ “나우플리온!" 미소가 사라졌다. 나우플리온은 두 손을 모아 턱을 짚었다가,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주 오래된 옛집이었다. 어린 시절에 그토록 높아 보이던 천장도 똑똑히 기억할 수 있었다. "그 녀석과 이솔렛도....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둘은 잘 어울려요" “......” 데스포이나의 눈앞에도 옛날의 일들이 펼쳐졌다. 고집 센 사람들, 일리오스 사제도 나우플리온도 한 발짝 양보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그 때의 기억을 되새겼다. 원만하게 해결되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 그러나 끝내 부술 수 없는 두터운 벽이 세워지고...... 그리고 잃어버린 사랑...... 데스포이나는 손을 내밀어 나우플리온의 손등에 얹었다. 그녀의 주름진 손등에 돋은 파란 핏줄이 가볍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무엇을, 원하니?“ 나우플리온의 입가에 아이 같은 웃음이 떠올랐다. 옛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웃음이었다. "누님은 항상 제 소원을 잘 들어주셨죠." 데스포이나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우플리온의 말이 이어졌다. "펠로로스 수도사가 재판 발의를 하겠다고 했지요? 제 목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재판을 막는 것입니다. 그걸 위해서라면 어떤 협상이나 협박도 불사할 생각이죠. 증거도 이미 다 준비되었습니다. 누님께서 한 번 판단해 보세요." “......그게 무슨 말이냐?” “다프넨, 그 아이는 절벽에서 제 실수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음모가 개재되어 있죠. 섬 안의 어떤 사람, 그를 죽이고 싶어하는 녀석 말입니다." 데스포이나는 눈을 몇 번 깜박인 후 말했다. “헥토르를 말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하지만 명백한 증거 없이 그를 의심할 수는 없는 일이다." “헥토르는 아마 아닐 겁니다. 다프넨을 죽이고 싶어하는 마음은 가장 크겠지만 웬만해서 그런 뒷손을 쓸 성격은 아니니까요." “그럼 누가 그런 일을 한단 말이냐?” "제 추리의 결과를 보여드릴까요?“ 그때 방 밖에서, 새로운 손님이 왔다고 알리는 시중드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스포이나가 손님을 물리치려 하자 나우플리온이 손을 저어 막은 뒤 직접 아이에게 물었다. "장서관의 제로 씨가 오셨나?“ "예, 꼭 뵙겠다고 하세요." "잠시만 기다리라고, 금방 부르겠다고 하십시오. 그 분은 저를 위한 자료를 가져오신 겁니다." 데스포이나는 아이에게 나우플리온이 부탁한 대로 말한 후 나우플리온의 얼굴을 한참 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모두 삼킨 채 그녀는 한 마디만을 했다. “네게...정녕 다른 길은 없는 것이냐? 좀더 행복해질 수 있는...그런 방법은 없는 것이니?” "제게 남은 행복은 모두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 말고 무엇이 달리 있겠습니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 자신을 위해 싸울 시간은 많아. 삶은 그렇게 간단히 끝나는 게 아니란다. 왜 네게 남겨진 삶의 다른 면을 보지 못하는 것이냐?“ "아뇨." 나우플리온은 고개를 저으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제 삶의 전투는 제가 선택한 전쟁터에서 치르겠습니다." 5, 다시 대륙으로 “헥토르가 와서 사과하더란 말인가요? 진심으로요?” 이솔렛은 회의적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게 진심인가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지. 어차피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다프넨은 바위에 걸터앉아 목검을 바닥에 짚은 채 생각에 잠겼다. 그 즈음 다프넨은 변성기의 증상이 심해지고 있어서 직접 노래하는 것은 무리였다. 대신 이솔렛은 그에게 창작 숙제를 종종 냈다. 만났을때는 새 노래를 이솔렛이 몇 번 불러 본 뒤 평가했고, 그 다음엔 금세 수많은 화제가 만들어져서 끝도 없이 이야기가 계속되곤 했다. "그건 저도 그렇지요." 헥토르가 대륙으로 떠나기 전에 이솔렛에게 일리오스 사제의 검을 보여달라고 한 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일리오스 사제의 명예를 높인다고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 처음부터 이솔렛의 환심을 사고 싶어했던 거라면 그 전에 저지른 수많은 무례가 설명되지 않았다. 갑자기 생각이 바꿔 듯한 태도를 보이기는 했다. 다프넨이 절벽에서 떨어지기 전에 우연히 마주쳤을 때 '세 번 너를 돕겠다'고도 말했고, 그 후의 태도도 예전과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솔렛하고 관계될 이유는 없었다. 문득 떠오른 것은 실버스컬 우승 문제였다. "순례자들 중에 실버스컬에 나가서 우승한 사람은 이솔렛의 아버님이 유일하다고 하던데 정말인가요?“ "응." 짧은 대답이었다. 다프넨은 이어 물었다. "그럼 섬사람들은 새로운 우승자가 나오길 대단히 바라겠군요? 아니, 우승자가 나오게 된다면 옛날 아버님이 살아 돌아오시기라도 한 양 기뻐하겠군요?' "그럴지도." "그러면 그 우승자는 그 분처럼 검의 사제가 될 자격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겠군요?“ "조금쯤은." "그러면 나우플리온 사제님의 제자인 저는 그의 유력한 경쟁자가 되는 셈이군요?“ "그렇겠지." "혹시 이솔렛의 아버님은 이솔렛처럼 쌍검을 쓰셨나요?“ “물론이야." "역대 검의 사제들 중에는 쌍검을 쓰는 사람이 많았나요?“ “......” 이솔렛은 다프넨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들은 것도 없는데 잘도 아는구나. 네 짐작이 맞아. 옛날부터 섬에는 두 자루 소검을 쓰는 검술과 한 자루 장검을 쓰는 검술이 각각 계승되어 왔어. 첫 번째 것은 ‘티엘라'라고 불러.'폭풍'이라는 의미지. 두 번째 것은 '티그리스’, 그러니까 '호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티엘라, 티그리스, 둘 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기껏 천 명도 살지 않는 이 섬에는 신기할 정도로 특별한 전통이 많았다.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구가 모두 이룩했다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다프넨은 이솔렛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가 지금 물어보면 그녀가 자세히 대답해 줄 거란 확신이 섰다. "좀더 정확히 알고 싶어요. 두 검술은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죠? 그걸 이어받은 사람들은 어디에 있어요?“ 이솔렛은 일어서서 등 뒤에 꽂힌 두 자루 검을 잡아 보였다. 그러나 뽑지는 않았다. "아마도 처음 들어보겠지. 왜냐면 저 윗마을에서 너도 알고 있는 그 사건이 벌어졌을 때 제대로 검을 쓰던 사람은 거의 다 죽어버렸고, 지금 섬에는 그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검술만 남았으니까, 흔히들 검 하나를 쓰니까 굳이 말한다면 티그리스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보다시피 현재 티엘라의 정통을 물려받은 사람은 나 하나야." 그 말대로 섬 안에서 쌍검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이솔렛 혼자밖에 없었다. 동시에 서서히 머릿속에서 한 가지 추리가 떠올라 구체적으로 변해갔다. 다프넨은 다그치듯 이어 질문했다. "게다가 당신은 아무한테도 그걸 가르치지 않았고 말이지요. 그럼 티그리스는요?'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던 때도 어쩐 일인지 티그리스의 전통은 상당히 퇴색되어 있었어. 한 노인이 계셨는데, 티그리스의 유일한 계승자였는데도 실력이 그저 그래서 아무도 그 분의 제자가 되고 싶어하지 않았지. 그 때 아버지의 제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았는데 아버진 그 가운데서 딱 몇 명만을 받아들이시고 그 이상의 제자를 거둘 생각은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거든. 그런데도 사람들은 언젠가 자리가 날 것을 기다리며 티그리스 쪽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어." "왜 그랬죠?“ “대략 백여 년 간, 티엘라의 계승자만이 검의 사제가 되어 왔기 때문이지." 다프넨은 바위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손에 쥔 목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얼마 전 나우플리온이 그에게 새로이 가르치기 시작한 몇 가지 자세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건 쌍검의 티엘라가.... 티그리스보다 우월하기 때문인가요?“ "아니." 이솔렛은 짧게 말하며 몇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빠르게 검을 뽑아 기본 자세를 취해 보였다. 다프넨은 약간 놀랐다. 지금까지 이솔렛은 자신의 검술을 그 누구에게도 가르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심지어 보여주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타엘라는 초반에는 좋아 보이지만 갈수록 배우기가 힘들어져. 티그리스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지만, 일반적인 대륙 검술과는 달리 특이한 속검을 요구하는 기술들을 초반에 익혀야 되기 때문에 중반까지가 상당히 힘들다고 해. 그 속검기들을 배우기 위해선 단순한 연습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고 하던데.... 나로선 알 수 없는 노릇이지." 이솔렛의 검이 짧게 허공을 그었다가 다시 거두어졌다. 그녀가 검을 도로 꽂는 동작 역시 정확히 포착하기 힘든 한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후반에 가면 티그리스 쪽이 쉬워지나요?“ "쉬워진다고 말할 순 없겠지, 어쨌든 초보 단계에서는 티그리스로 티엘라를 이기는 것이 몹시 힘들어. 하지만 어느 정도 수준을 넘고 나면... 티그리스를 세 단계 올릴 노력을 해야 티엘라를 한 단계 올릴 수 있다고 말하곤 하지. 높은 단계로 갈수록 그 차이는 점점 더 벌어지게 되고, 최고에 오를 즈음이 되면 이제 티엘라는 노력 외에 특별한 신체적 조건이나 정신적 상태까지 요구해. 그 중 한 가지만 말하자면 무아지경에서 양손을 완전히 따로 쓸 수 있게 되어야 하지. 티엘라의 쌍검은 길이 차이가 없기 때문에 실전의 한 순간, 어느 검을 내밀 것인가, 그리고 그 선택이 옳은가는 순전히 소질이 결정할 정도야, 그만큼 정밀한 차이가 승패를 가르지," “만일 그 소질이 없으면요?” “그러면 티엘라를 궁극적으로 완성하는 건 불가능해. 연습으로 되는 일이 아니야. 그냥 티엘라에 맞는 인간이 되어주어야 하는 거지. 하지만 불행하게도 처음 입문할 때는 자신이 그런 인간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 하지만 벽에 부딪쳤을 때, 다른 사람은 문을 열고 나가 는데 자신한테는 그 문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오지. 그러면 그는 낙오자가 되어 2류 검사로 남을 수밖에 없게 돼. 그건 의지로도, 기적으로도 넘을수 없는 경지야. 어차피 티엘라에 맞는 인간이 아니라면 그런 순간은 좀더 빨리 오는 편이 본인을 위해 나을 정도지." 도저히 수긍하기 힘들었지만 이솔렛의 목소리가 워낙 진지했기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슬픈 일이군요.... 그럼 당신은 어때요?“ "아직까지는 더듬다 보면 문고리가 잡히더군. 하지만 앞으로 어찌될지는 모르지." 이솔렛은 씁쓸한 기색도 없이 단순한 어조로 대답했다. 정말로 길이 막힌다면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쉽게 포기할 수 있다는 의미일까. “그렇다면 티그리스는 뒤로 갈수록 쉽단 말인가요?” "그럴 리야 없겠지만.... 티그리스에는 사람을 한없이 계속 달려나가게 하는 힘이 있다고 해. 언뜻 들은 바로는, 어느 단계를 넘는 순간 티그리스의 발전은 마치 마른 들판에 불을 놓는 것과 비슷해서 앞도 없고, 뒤도 없고, 어느 방향을 먼저 택해야 할 지 모를 정도로 사방 팔방으로, 불길처럼 재능이 뻗어나가기 시작한대. 스스로의 속력과 그에 따른 빠른 숙련을 감당하지 못해 매일같이 지쳐 떨어질 때까지 검을 휘두르게 된다는 거야. 나도 배워보지 않은 터라 그 말이 뭘 의미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말을 듣고 있는데 조금 전 티엘라를 설명할 때와는 달리 이상하게도 이해가 잘 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된달까, 어쩌면 오히려 더 납득이 안 되는 말일 수도 있는데 겪어본 일처럼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것이다. “그러면 그 노인에게 제자가 없었기 때문에 티그리스의 맥은 끊겼나요?” 이솔렛은 갑자기 웃을 듯 말 듯 하는 표정이 되어 다프넨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몰라서 묻니? 티그리스를 지금 계승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몰라서?“ “네?” “너 자신, 아니야?” “네에?” 다프넨은 의혹 섞인 눈길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 배운 일이 없어요. 그 말은 다시 말해 나우플리온 사제님이 티그리스의 계승자라는 말씀인가요?“ "그래, 그 노인의 하나뿐인 제자가 바로 그야." 이솔렛의 목소리는 살짝 신랄하게 변해 있었지만 다프넨은 금방 눈치채지 못했다. 나우플리온이 정말로 자신에게 티그리스를, 또는 그 비슷한 것이라도 가르친 적이 있는가에 마음을 팔고 있어서 깨달을 겨를이 없었다. “내가 전에 말한 일이 있지, 아마도. 나우플리온 사제님은 자수성가형이라고 말이야. 당시 나우플리온 사제님이 그 노인의 실력을 뛰어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 노인이 말로만 떠들던 것들을 사제님은 전부 스스로 해냈어. 그런 사람이니 아버지가 부르려 한 것도 무리는 아니.....” 이솔렛은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는 다프넨을 불렀다. “다프넨, 너 실버스컬에 나가고 싶었지 않아?” “네? 아.... 물론 나가고 싶었죠." 그제야 현실로 되돌아왔다. 이솔렛이 그 전에 무슨 말을 한 것 같긴한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간상으로는 지금도 늦지 않았어." "벌써 다들 떠났는데요?“ "어차피 대륙에서는 함께 행동하지 않아. 흩어져서 여행하다가 오직 제 날짜에 대회장에 도착하기만 하면 되지." “하지만 저 혼자서는 아무 데도 안 보내줄 거예요. 전에 데스포이나 사제님께서 말씀하시길 저는 정식 순례자가 되기 전엔 혼자서 대륙에 나갈 수 없다고 했거든요." "동행이 있으면 가능하지." “하지만 누가 저를 위해 만사를 제쳐놓고 대륙까지 가주겠어요? 나우플리온 사제님은 너무 바쁜걸요." "도와줄까?“ 다프넨은 순간적으로 잘못 들었나 했다. 그러나 그가 들은 목소리는 또렷했고, 착각할 여지는 전혀 없었다. "진심.... 이에요?“ “네가 원한다면, 진심이야. 아니라면 그냥 농담." 이솔렛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지만 새로운 표정은 찾아낼 수 없었다. "아.. 생각 좀 해봐야겠어요. 아니, 그것보다.... 이솔렛 당신도 실버스컬에 나갈 마음이 있는 건가요?“ "전혀 없는데." "그럼 도대체........“ 이솔렛은 천천히 풀밭을 걷다가 몇 걸음 훌쩍 뛰어오르며 보이지 않는 상대방의 검을 피하는 것 같은 동작을 취했다. 그러나 그녀가 한 바퀴 도는 순간 다프넨은 그 움직임이 검술의 스텝보다는 춤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너무도 가벼웠다. “모든 것이 어렵지.... 나도 대륙에 나가본 일은 없어." 숙제가 주어진 셈이었다. 그러나 다프넨은 고민하기에 앞서 무언가 새로운 길이 열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스스로를 향해 피식 미소지었다. 정말로 실버스컬에 가지 못한 게 아쉬웠던 건가, 꽤나 가고 싶었던 건가. "좋겠지." 나우플리온이 너무 간단하게 허락해서 다프넨은 뒤이을 말을 찾지 못한 채 잠시 멍해 있었다. “내일 시험 볼까? 단독 시험이 되겠지만 말이야." "아.... 네. 자, 잠깐, 정말인가요?“ "어려운 일 아냐, 이솔렛이 같이 가준다고 했다면서? 그녀라면 원정대의 보호자 역할을 할 자격이 충분하거든. 뭐, 솔직히 말해 대륙에서라면 이솔렛보다 네 쪽이 더 쓸만한 여행자이겠지만 말이다. " 나우플리온은 약간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이어서 말했다. “만일 이솔렛이 직접 출전할 생각이 있다면 스콜리 졸업을 하지 않은 것이 약간 문제가 되긴 하겠군. 하지만 간단한 시험으로 해결할 수도 있지. 그런데 출전할 생각이 있긴 한 건가?” "이솔렛이 스콜리 졸업을 하지 않았나요?' "음, 그녀는 신성 찬트의 유일한 전승자이고 또 섬 안에서 실전된 몇 가지 전승들의 하나 뿐인 계승자이거든. 그것들은 모두 스콜리에서 하나의 과목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들이라서 그 아가씬 처음부터 입학도 하지 않았어." "좀 특권 같네요." "섬 안에서 첫째가는 석학의 딸이었으니까, 그런 특혜도 생겨나는 거 아니겠어?“ 그렇게 말하며 나우플리온은 싱긋 미소했다. 그 미소를 보니 생각나는 질문이 있었다. "이솔렛의 검술, 그것도 그녀 혼자만 이어받고 있는 거죠?' "직접 말해주든? '티엘라' 라고 하지. 일리오스 사제는 역대 티엘라의 계승자들 가운데 최고 수준에 오른 사람이었어. 이솔렛도 이미 상당한 수준이지." “그리고.... 티그리스라는 것도 있다면서요?“ "있지 ." “그러니까 그게........ 나우플리온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티그리스의 계승자는 나지. 하지만 쓰지 않은 지 오래되었어." “그런가요.....”. 그렇다면 자신에게 가르친 일도 없다는 얘기였다. 역시 이 이야기는 잊어버리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난 네게 진검을 허락해도 좋을지 잘 모르겠구나. 네 생각은 어떠냐?“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오랫동안 생각한 것이 있었다. "제 생각엔 문제없을 것 같네요." "어떻게 확신하지?“ “확신이 아니면, 언제까지나 불신뿐일 테니까요." 나우플리온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다프넨과 눈을 맞췄다. 잠시후 다프넨이 손가락을 쳐들며 말했다. "눈에 힘주지 말아요! 주름이 자꾸 뚜렷해지잖아요." "그러거나 말거나 내 얼굴이야. 주름 좀 편다고 나이를 안 먹는 것도 아니고. 하던 얘기나 마저 해봐. 그러니까 되든 안 되든 덤벼 보고, 잘못되어 끝장나도 그만이다 그거야?“ "그럴 리가요. 전 머리가 나쁜 것인지 언제나 서서히 깨닫는 편이기도 하고, 스스로를 과신할 만큼 대단하지도 못해요. 하지만 이 일만은 정면대결을 벌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대결이니까, 단숨에 끝장낼 수 없는 일이니까, 언제까지라도 끈질기게 버티는 법을 배워두는 편이 좋겠죠. 실패하면 돌아와서 다시 십 년 동안 목검만 잡게 되더라도 말이에요. 숨어 있다가 한 번 제대로 덤벼보지도 못한 채 잡혀먹히고 싶진 않거든요." "돌아와 숨어 있을 기회라도 있다면 운이 좋은 거지. 대결은 종종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버려. 승산 없는 싸움을 시작하는 주제에 '여기서 지면 십 년 동안 열심히 연습해야지' 하고 생각한다 해서 그 싸움이 조금이라도 유리해질 것 같으냐?“ "전 승산 없는 싸움을 시작하려는 게 아닌데요." 다프넨은 일어나더니 한쪽 어깨로 윈터러를 넣어둔 바닥 구멍을 가리켜 보였다. "알고 계시겠지만, 절벽에서 떨어지는 저를 살려낸 건 바로 저 녀석이었어요. 그 때 전 그냥 이솔렛의 숙제를 가지러 가려 했을 뿐인데 갑자기 검이 나를 불렀고, 다음 순간 저는 홀린 것처럼 단숨에 저장소에서 검을 찾아내어 쥐고 나갔던 걸로 기억해요. 내가 무얼 가지고 나온 건가를 깨닫고 놀란 건, 이미 저 절벽 위의 계단까지 간 후였죠. 뭐랄까... 그러니까 검은 나를 보호하려고 했던 거예요. 틀림없이 그래요." 나우플리온은 팔짱을 낀 채 다프넨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왜일까 오랫동안 생각해 봤어요. 단순한 보호가 아니었다는 것쯤이야 저도 알죠. 저 검에게 인격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무생물에게 주어질 법한 자연적 본능이 정교하게 발달된 상태랄까요. 그렇다면, 저를 도우려는 게 아니라면 제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혹시 그냥 허무하게 죽어버리지 말고 제 녀석 손에 죽어달라는 것일까요? 저와 한바탕 싸움을 벌여 보고 싶다는 도전이었던 건 아닐까요?“ "걸어 온 싸움은 거절하지 않는다는 거냐?“ 다프넨은 계속해서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전 말이죠.... 저 검이 아주 진지한 상대라고 생각해요. 저, 잠들어 있는 동안 많은 걸 봤었죠. 과거에 수많은 사람들이 저 검을 잡았다가 끝내 스스로를 파멸시킨 장면들이 보였어요. 왜 제게 그런 것을 보여줬을까 궁금했죠. 자신이 없으면 얼른 달아나라는 얘기였을까요? 아니면 결투가 벌어지기 전에 전적을 죽 읊는 식으로 제게 자신을 소개한 거였을까요?“ 나우플리온은 어이가 없는 표정이 되어 있었다. "아예 검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옛날 얘기를 하나 만들지 그러냐, 아니, 네 얘기를 듣다보니 나도 하나 쓸 거 같다. " 다프넨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말을 이을 때 그의 눈은 열의로 반짝이고 있었다. "지배자가 필요한 검이죠. 겁을 내는 상대는 단숨에 달려들어 잡아먹지만, 지배할 힘이 있는 자에게는 복종하는, 그런 거요. 물론 앞으로도 기회를 보아날 집어삼키려 하겠죠. 절벽에서 떨어지던 날처럼 일시적으로 제 마음을 강력하게 지배할 수 있다고 할 때, 만일 제가 검을 잡지 않으려 한다 해도 같은 일은 또 벌어질 거예요. 차라리 정면대결이 나아요." "전투에는 당위가 필요해. 네게는 무슨 대명제가 있지?“ "물론 저도... 이 검을 가졌던 사람들 중 숱한 영웅들이 실패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그들도 승리를 바라며 뛰어든 거였겠죠. 그런데 문제는 제게 검을 내버릴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 지든 이기든 도전할 자격은 저 자신에게 있어요. 물론 이 검은 강하고 저는 아직 약하지만....저는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강해지고 있을 테니까요. 끝없이, 멈추지 않고 계속 커나갈 거니까요." "궤변이야. 네겐 아직 시간이 많아. 벌써부터 그걸 시작할 필요가 없어. 적과 싸우면서 강해지는 법도 있지만, 그것도 적의 공격을 받아 넘길 정도로 강해진 다음이야." "그 말이 맞아요. 그래서 윈터러를 쓰는 것은 좀더 뒤로 미룰 생각이에요." "그 말은 언젠가는 윈터러를 사용하겠다는 뜻이냐?' "제 검인데, 당연한 것 아닌가요?“ "누구나 자신만은 이길 줄 알기 마련이야. 백 명이 지는 것을 보고도 자신이 백 한 명 째가 될 거란 생각은 안 하는 거지." "물론 저도 파멸될 수 있어요. 하지만 파멸되더라도 적극적으로, 직접 스스로를 파멸시킬 겁니다 손발이 붙어 있는 한 파멸을 찾아 움켜 쥐고, 파멸로 걸어 들어갈 권리 정도는 있으니까요. 피할 수도 없어요. 이제 피하는 순간 저는 순식간에 녀석한테 먹힐 거예요." 나우플리온은 소년의 목소리가 자신이 과거에 한 말의 메아리인 양 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시험도 치러졌고, 출발도 결정되었다. 섬이 다시 한 번 술렁거렸다.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소년, 뒤늦게 참여를 결정한 사실, 은둔자에 가까웠던 이솔렛의 파격적인 제안, 단 둘이서 떠난다는 문제, 그리고 이솔렛은 단지 보호자 역할만을 하게 된다는 것까지. 데스포이나는 펠로로스 수도사가 요청한 재청을 거절했다. 불쾌하게 혀를 찬 그가 며칠에 걸쳐 다른 사제들에게 각각 부탁해 봤지만 무슨 묵계라도 있는 것처럼 수락한 자가 아무도 없었다. 이런 까닭에 재판은 지연되고 있었고, 다프넨의 실버스컬 참여가 결정되는 바람에 시기를 놓친 펠로로스는 소년이 돌아오기 전까지 여론을 일으켜 대륙에서 돌아을 때 아예 추방시킬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리고 나우플리온은 다프넨이 떠나는 전날 밤, 펠로로스 수도사를 찾아갔다. 내일은 날이 맑을 거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캄캄한 밤이었다. "사....사제님?“ 문을 열어준 것은 에키온이었다 눈에 띄게 겁에 질린 표정을 한 채 저도 모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나우플리온은 싸늘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버지께 검의 사제가 뵙자고 한다고 일러라" 나우플리온이 거실로 들어가니 에키온은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있다는 기척조차 내지 않았다 둥근 방패를 매만지고 있던 펠로로스 수도사가 헛기침 소리를 내며 일어나 그를 맞았다. "어쩐 일로 이런 곳까지 오셨습니까. 밤이 늦어 그만 자려던 참이었습니다. " 나우플리온은 자리에 앉으며 단숨에 말했다. "잠이라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조금 있으면 밤새 잠들지 못하고 생각할 거리가 생기실 테니까요." 펠로로스는 얼굴을 묘하게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로선 통......“ 이날 나우플리온의 얼굴은 전에 없이 냉정하면서도 오만했고, 무릎에 얹어 깍지낀 채 내민 손은 사냥감을 앞에 두고 도사린 듯한 인상마저 주었다. 펠로로스는 무심코 몸을 뒤로 젖히며 그로부터 멀어지려는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다프넨은 곧 대륙으로 떠납니다. 실버스컬에 출전하려는 거지요. 보호자 자격으로 이솔렛이 따라가게 됩니다. " "그거라면 섬사람 전부가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f' "그리고 돌아올 겁니다. 틀림없이." 펠로로스는 버릇처럼 한쪽 뺨을 움찔거리며 나우플리온을 쳐다봤다. 나우플리온은 '거인' 이라는 이름을 가진 펠로로스를 올려다보지 않아도 되는 몇 안 되는 섬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물론 돌아온다는 것은.......“ "돌아오지 못하게 하려고 획책하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게 헛된 행동이라는 걸 알려드리려고 온 겁니다." 자신의 말을 대뜸 끊어버리는 나우플리온을 보며 펠로로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말의 내용은 직설적이기도 하거니와, 심지어 훈계에 가깝기까지 했다. “당신......! 그, 검의 사제가 할 말입니까, 지금 그게? 다프넨 소년이 갖고 있는 검이 위험하다는 것은 지팡이의 사제께서도 인정한 일이고 다른 사람들도 이미 충분히 느끼.....” “물론입니다." 나우플리온은 무표정하게 입술만 움직여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조소보다도 한층 더한 공격성이 담긴 표현이었다. "물론이라니?“ “다 안다는 말씀입니다. 굳이 되풀이하지 마십시오. 그래보았자 제 기분만 더 나쁘게 만들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제 기분을 나쁘게 만들어 보았자 그리 좋은 일이 없을 거라는 것만은 확실히 말씀드리지요." "도대체 무슨 소리요!" "이해를 못하십니까? 당신이 지금까지 해온 일들, 다프넨에게 해를 끼치려 하는 행동을 모조리 그만두십시오. 다시는 시도하지 마십시오. 혹시 이미 약간의 피해라도 준 바가 있다면, 스스로 깨끗하게 수습해서 본래대로 되돌리십시오. 이후로 다시 그런 의견을 내는 자가 있다면 당신이 지금까지 해 온 행동의 결과라는 것을 알고 몸소 나서서 철저히 막으십시오." 나우플리온은 가볍게 깍지끼고 있던 두 손을 꽉 움컥쥐며 마지막 말을 맺었다. "완벽히, 제가 일말의 기미도 느끼지 못하게끔." 펠로로스는 나우플리온의 강압적인 말투에 크게 당황한 듯했다. 또한 그런 말을 하면서도 조금의 웃음도 보이지 않는 그의 차가운 얼굴에도 약간 질렸다. 평소 보통 사람들과 어울려 지낸다고는 하나 검의 사제란 순례자들에게 지극히 두려운 존재였다. 섬에서 죄가 있어 벌을 받아야 할 자가 있다면, 검의 사제가 형을 집행했다. 태형도, 사형도, 참수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섬 안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죽여본 인물은 언제나 검의 사제일 수밖에 없었다. 검의 사제의 상징인 '우레의 룬‘ 은 먼저 즉결 처분을 한 후에 사후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유일한 검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의 내용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해야 한단 말인가? “무슨 소리! 내가 왜 그래야 한다는 거요! 그런 식으로 협박한다고 해서 내가 조금이라도 물러설 성싶소? 나, 나는 신.... 신념을 가지고 있소이다! 다프넨 소년이 가진 그 검은 섬에 재앙을 불러올 것이고 나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걸 막을 것이오!" 말을 하는 동안 결심이 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왜 물러선단 말인가? 이만큼이나 유리하고, 이만큼이나 잘 해 왔는데. 그러나 나우플리온의 다음 말은 펠로로스의 혼을 빼놓고 말았다. “대가라.... 당신 아들을 대가로 치르고도?” 나우플리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천천히 방을 반바퀴 돌았다. 그리고 경악해 있는 펠로로스의 등 뒤에 멈춰 서며 말했다. “대답하시오. 아니, 선택해도 좋소." 펠로로스는 한 번 부르르 떤 다음 돌아섰다. 분노로 눈까지 충혈된 얼굴이 보였다. "무슨... 말... 도 안되는 소리요! 당신이 무슨 수로, 아니 무슨 근거로 내 아들을 죽이.... 아니, 해를 가한단 말이오! 내 당장 섭정 각하를 찾아가서 이 일을 고하고 당신을.... 아니, 그래, 당신까지 내어쫓고야 말 것이오! 감히, 감히, 당신이 감히 협박을 해? 내 아들을 놓고 뭘 어쩐다고? 손끝 하나라도 댔다 하면......“ 화가 나자 반말이 마구 튀어나오는 펠로로스를 보며 나우플리온은 조용히, 그러나 차갑게 말했다. “당신이 사제에 대한 예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기억해 두겠소. 그리고 그렇게 당황할 것 없소이다. 펠로로스 수도사, 당신이 목숨처럼 아끼는 맏아들이 아니라 둘째 아들에 대한 이야기니까. 어떻소? 조금 충격이 줄어드시오?” 에키온? 펠로로스는 다시 한 번 멍해졌다. 상황이 정리되지가 않았다. 그런 그를 보며 나우플리온이 명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간단하게 말하지요. 내 소년, 다프넨이 절벽에서 떨어진 것은 단순한 실수도, 가지고 있던 검의 영향도 아니며, 단지 한 소년의 치졸한 술수 때문이었소.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당신 아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도 좋을 거요. 어쨌든 나는 이를 밝힐 수 있는 충분한 증거 를 가지고 있으며, 무엇하다면 사제 회의에 붙여 긴급 재판을 열 수도 있소. 잘 알고 있겠지만 사제는 재판을 여는 데 있어 다른 사람의 동의가 필요하지 않으며, 필요하기만 하다면 그 즉석에서도, 심지어 한밤중에도 열 수가 있소." 의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선 두 사람 사이에서 침묵이 흘렀다. 펠로로스는 나우플리온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고, 나우플리온은 침착한 시선을 그에게서 떼지 않았다. "에키온이.... 다프넨을 죽이려 했다고? 그리고 그 증거를 당신이 가지고 있고? 이해가....가지 않는군. 넘겨짚지 말라고. 직접 보기라도 했단 말인가...? 만일 직접 보았다면 왜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던 거요?“ "안타깝게도 직접 보진 못했소. 그러나 에키온이 이 집의 서재에서 마법 무효화의 룬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꺼냈고, 그것으로 다프넨과 이솔렛이 신성 찬트를 수련하던 절벽 위의 마법 걸린 돌을 없앰으로서 그를 죽이고자 획책했음을 명백히 증명할 수 있소." "어떻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있었다 한들 그게 그를 죽이려 한 행동이란 걸 어떻게 안단 말이오?“ “다프넨이 아니었으면 이솔렛을 죽이려 한 것이라 봐야겠군요? 그곳은 일리오스 사제께서 이솔렛에게만 물려준 비밀스러운 수련 장소였고 다프넨은 그녀의 제자가 되었기에 그 곳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시겠지만 다프넨보다 이솔렛을 해치려 했다는 고발 쪽이 훨씬 사람들에게 안 좋은 인상을 줄 텐데, 그 쪽을 택하시겠소?”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럼 그렇게 비밀스러운 곳을.... 우리 에키온이 어떻게 알고 있었단 말이오?“ "어떻게 알았는지, 미행을 했는지, 잠복을 했는지, 그런 것까지 내가 알 수는 없소. 하지만 그런 마법을 해제할 수 있는 룬이 쓰여진 두루마리는 단 한 가지 종류뿐이고, 섬 안에는 오직 다섯 장이 있으며, 그 가운데 한 장이 바로 당신의 서재에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순 없을거요. 마법의 흔적을 직접 감식한 이솔렛은 섬 안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마법적 지식의 소유자라는 것을 당신도 모르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오." 펠로로스도 알고 있었다. 본래 마법사도 아닌 펠로로스의 집에 마법 룬의 두루마리 따위가 있을 까닭은 없었다. 그러나 전 섭정의 세자식 가운데 막내딸이었던 그의 누이동생은 마법 교육을 받은 마법사였고, 살아 생전에 연구 목적으로 장서관과 공회당에 보관된 마법 물 품들을 자주 꺼내 자기 것으로 삼았다. 섭정의 딸이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은 대부분 눈감아졌고, 그녀가 죽고 나서 남은 물건들은 오빠인 펠로로스의 집으로 옮겨져 보관되었다. 그러나 눈감아주었다고 해서 마법 물품의 행방에 대한 기록이 생략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마법적 힘을 가진 물건들은 대부분 옛 장부에 적혀 있었고 그것을 보관하는 것은 장서관을 지키는 제로의 소관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에 서재를 정리하던 펠로로스는 두루마리 가운데 하나가 없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본래 전사 체질로 태어난 터라 그 자신도 검의 사제 자리를 노렸지만, 희대의 천재인 일리오스 사제와 동시대에 태어난 죄로 완벽히 좌절당한 일이 있는 그였기에 헥토르를 검의 사제로 만들려고 그토록 노력해 왔다. 그런 사람답게 그는 마법에 흥미도 없고 마법 물품 따위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한 일도 없었다. 따라서 없어진 두루마리가 무엇에 쓰이는 것인지도 몰랐고, 없어지거나 말거나 그냥 잊어버리자고 생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그런 두루마리가 다섯 개라면 하필 우리 집의 것을 사용했다는 증거는 어디 있소?“ "그건 당신이 직접 증명할수 있소. 있어야할 두루마리를 가져와 보시오. 지금, 당장." 펠로로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그는 겨우겨우 침착해지려 애쓰며 마지막 항변을 시도했다. “다른 데 이미 사용되었을 수도.... 있지 않소? 내가 왜 그것의 행방을 당신에게 증명해야 하오?” "첫째로, 당신은 섬의 순례자로서 사제의 조사에 응할 의무가 있소. 둘째로, 그런 마법 물품은 개인의 것이 될 수 없으며 당신이 그런 물건을 임의로 사용했다면 당연히 지팡이의 사제에게 보고했어야 마땅하오. 셋째로, 당신 집에는 마법 물품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에키온 한 명밖에 없소. 넷째로, 나머지 네 장의 두루마리는 현재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으며 아무도 손대지 않았소. 장서관의 제로 씨가 이 사실을 보증할 것이오." 이제 빠져나갈 구멍 따위는 없었다. 펠로로스의 숨이 거칠어졌다. 다프넨을 내쫓으려면 자기 아들의 죄가 밝혀질 판인 것이다. 그리고 나우플리온의 표정으로 보아 모든 일이 간단히 끝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헥토르를 위해 다프넨을 없애고 싶어하는 것은 그의 아버지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둘째 아들은 모든 것을 망쳐놓고 말았다. 헥토르를 위해 에키온을 희생시킬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쉽게 분리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에키온의 죄는 곧 집안의 자질과 연결되기 마련인 것이다. 더구나 펠로로스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여기서 버티다가는 음모의 동조자로 헥토르까지 끌려 들어갈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섬사람들은 다프넨이 온 후로 헥토르와 에키온이 함께 그를 미워했으며 그들 둘이 언제나 같이 행동해온 것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에키온은 늘 헥토르의 명령을 받는 입장에 있었고, 사람들 앞에서 형의 말에 절대 복종해왔다. 그것도 어느 정도는 아버지인 그 자신이 시킨 대로 였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갑자기 등골이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헥토르도 여기에 관여했던 것은 아닐까? "알겠어.... 아, 아니, 알겠소이다. 그러면.... 내가 이제부터 다프넨에 대해서 아무 말도 꺼내지 않으면 되는... 것이오“' "앞서 한 말을 다시 되풀이하게 하지 마시오. 당신은 이제부터 사람들이 다프넨과 그의 검에 대해 말할 때 그에 대한 가장 열렬한 변호자가 되어야 할 거요. 나는 이제 사실 여부는 관계치 않소. 우리는 서로 비밀을 지켜주는 입장이 될 것이오. 그러나 당신의 음해는 이미 꽤 많은 사람의 머릿속에 파고들었고 당신이 입을 다무는 것만으로는 간단히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소. 당신은 노력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만일 누구의 탓으로든 다프넨과 그의 검을 추방하자는 의견이 다시 한 번 여론화되어 실행에 옮겨질 경우, 오늘 서로 지키기로 한 비밀에 대한 협약은 바로 끝장날 것이오. 당신은 한 소년의 추방에 대한 대가로 두 아들을 잃게 될 거요." 검의 사제의 목소리는 냉혹했다 평소 소탈한 모습으로 기억되던 나우플리온은 그 자리에 없었다. 자칫 말을 잘못했다가는 단숨에 검을 쁩을 듯 무시무시한 눈빛을 한 사내만이 있었다. “하나 더, 이 외에도 다시는 다프넨을 견제하려 노력하지 마시오. 아들들에게도 분명히 일러두시오. 앞으로 당신 집안의 누군가가 그 아이를 다치게 한다면, 단지 시도만이라도 내 눈에 보인다면, 검의 사제가 바로 모든 것을 바쳐 반격할 거라는 사실을 확실히 염두에 두시오." 이제 다른 것을 생각할 여지는 없었다. 거한인 펠로로스는 볼썽사납게 허리를 굽혀가며 사정했다. “잘못했소! 내가 다 잘못했소! 용서하고 빌겠소.... 하지만 뿌린 말을 거두는 것은 간단하지 않아요. 나우플리온 사제.... 나와 관계없는 모함에 내 아들들을 끌어들이지는 말아 주시오. 난들 어쩌겠소? 최대한 노력하겠지만 난 내 아들들 없이 살 수 없소.....” "잘못을 거두는 것이 그리 쉬울 리 있겠소? 노력하겠다는 말은 높이 사지만 만에 하나 일이 벌어진다면, 나 자신이 파멸되는 한이 있더라도, 두 녀석의 목이 매달리는 꼴을 보고야말거요. 내 검, '우레의 룬'에 두고 맹세하는 바요." "그건 사적인 복수요! 나우플리온 사제, 그런 말은 제발 .....“ "복수?“ 나우플리온은 나머지 반 바퀴를 돌아 다시 처음에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그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검의 사제는 달여왕의 가장 강한 복수자요. 잊으셨소?“ 출발하는 날의 아침은 밝은 보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선착장에 나온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프넨이 보고 싶은 사람은 모두 나와 있었다. 데스포이나 사제와 모르페우스 사제, 오이지스와 제로 아저씨, 그리고 나우플리온이 있었다. 에니오스가 배를 끌어내는 동안 다가온 나우플리온은 다프넨과 이솔렛에게 각각 가벼운 악수를 청했다. 이솔렛은 잠깐 망설이다가 이에 응했다. 약간 미소지은 나우플리온은 이어 다프넨을 보며 말했다. "이솔렛이 찬트로 배를 잘 인도해 줄 테니 그녀를 도와줘라, 엘베섬을 통해서 렘므로 들어간 다음에는 내가 말해준 대로 하면 편히 여행할 수 있을 거다. " 어젯밤 어딘가 갔다가 늦게 돌아왔던 나우플리온은 다프넨에게 두 사람이 대륙에서 함께 지내던 시절에 쓰던 검을 내주었다. 드디어 진검을 허락한 것이었다. 또한 그 검을 보이고 ‘이실더 관’ 이라는 이름을 대면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곳을 몇 군데 알려 주었다. 윈터러 역시 다프넨의 등에 매달려 있었다. 다프넨은 이제 그 검을 몸에서 떼어놓을 생각이 없었다. 다만 실버스컬에서는 나우플리온이 준 검을 쓸 생각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서 과거 실버스컬에 나가지 못했던 나우플리온을 대신하여 그의 명예를 높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선착장에 나온 사람들 중에는 리리오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프넨에게 다가와 말을 걸지 않았고 숲으로 올라가는 언덕바지에 멀찍이 서서 내려다보기만 했다. 다프넨은 그녀의 표정이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음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전처럼 쾌활한 친절을 베풀지도 않았고 짓궂게 까부는 일도 없어졌다. 그러나 스콜리에서 문득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면 그녀가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었다. 말을 걸지도 않고 그렇게 무표정하게, 해석하기 힘든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놀라운 환송객이 두 사람 더 있었다. 바로 에키온과 그의 아버지였다. 그냥 구경하러 나온 건가 했는데 다가와서 잘 다녀오라는 인사까지 하는 것이었다. 좀 어색하긴 해도 어쨌든 불쾌감을 주지 않을 정도의 예절을 갖추려 애쓰는 듯했다. 그게 더 괴상하게 보이긴 했지만, 나우플리온은 에키온과 다프넨의 인사가 끝나자 쾌활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조심해서 잘 다녀와라! 이솔렛이 내 대신이라고 생각하고 시키는 대로 말 잘 들어야 된다! 험한 일은 다 네가 해야 되는 거야!" 다프넨도 씩 웃으며 대답했다. "늙은 어머니와 여행한다고 생각하도록 하죠." 곁에서 이솔렛이 어이가 없어 하, 하는 소리를 내는 것이 들렸다. 이윽고 두 사람을 태운 배는 서서히 바다로 미끄러져 나갔다. 외부로 흐르는 해류를 타자 섬 기슭에 선 사람들의 모습은 순식간에 멀어졌다. 2장. Risky Part 1. 이름들을 위하여 “오늘, 트레비조 땅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다음 달 중으로 드라켄즈 산맥(Drakens Mts.)을 따라 올라가 로젠버그 관문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는군요." 트라바체스의 수도 론의 통령 관저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방이었다. 칸 통령은 팔걸이 의자에 앉은 채 반쯤 졸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오랜 경험을 통해 졸기는커녕, 가장 기민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저런 모습이 된다는 것을 통령의 마법사인 종그날은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연락이 좀 늦었습니다. 각하의 1익답지 않게요." "그렇지. 그럴지도 모르지.“ "렘므에서 소년의 흔적을 놓친 후로 벌써 상당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물론 그들이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 그럴지도 몰라." 종그랄의 말대로 실로 ‘류스노답지’ 않았다. 칸 통령이 류스노 덴에게 일을 맡겨 이토록 오래 걸린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전적들을 생각한다면 이미 소년의 목을 세 번은 가져오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2익과 3익을 부른 것을 보면 무언가 냄새를 맡긴했나 봅니다. 이번에는 성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산스루리아에서 다시 렘므 북부까지, 그리고 이제는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는 모양이더군요." 칸 통령의 ‘네 날개'는 론 밖으로 나갈 경우 대마법사 종그날과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도록 정신 감응 마법이 깃들인 물품들을 지니고 다녔다. 떠난 지 열흘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카투나 산맥의 험로를 넘어 트레비조에 도착한 마리노프와 톤다로부터 1차 연락이 온것이 그 날 저녁이었다. 그러나 종그날은 보고가 끝났는데도 나가지 않고 잠시 칸 통령의 눈치를 살폈다. 예상대로 곧 통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군. 윈터러의 힘에 대한 연구에 새로운 진척이라도 있나?” "별 진척이랄 것은 없지만, 이런 기록이 입수되었습니다." 종그날은 칸 통령 앞에서 보고할 때 별 것 아닌 것처럼 말을 꺼내는 버릇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주인이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걸 극히 싫어하는 성격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통령의 손으로 양피지 조각 비슷한 것이 넘겨졌다. 귀퉁이가 심하게 훼손된 그것은 어느 책에서 찢어낸 책장처럼 보였다. 칸 통령은 한참 동안 그것을 되풀이해서 읽었다. 종그날은 완연한 봄이 된 5월의 창 밖을 내다보며 블라도 진네만의 어린 딸에 대한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요즈음 그는 그 꼬마 때문에 별 용건도 없이 진네만 저택을 종종 드나들고 있었다. 놀랍게도 어린 예니 진네만은 평생 연애도 결혼도 해본 일이 없는 늙은 마법사의 마음을 첫눈에 사로잡아 버렸던 것이다. 진네만 저택의 뒤뜰에서 갸우뚱거리며 걷다가 뛰다가 하는 노란 치마의 꼬마 아가씨는 우중충한 저택 머리에 내린 햇빛 같은 존재였다. 그것도 초봄의 어리고 노란 햇빛. 예니는 사람을 잘 따랐다. 처음 보는 음침한 마법사 노인한테 까르륵 웃으며 달려와 안긴 것이 첫 시작이었다. 낯선 사람이 준 과자도 오물오물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유괴 당하기 딱 좋은 꼬마'라고 말하긴 했지만 실제로는 꼬마의 애정 깊음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그게 애정 깊음이 아니라 단순히 낯을 가리지 않는 것뿐일지 모르지만 이미 그런 것은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음울한 집 주인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천사 같은 예니를 보려고 진네만 저택을 종종 드나들고 있다는 것은 이미 론의 상류층 사이에 잘 알려진 이야기였다. 그 가운데 통령의 대마법사 종그날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이미 한참 전에 화제가 된 후였다. 통령이 드디어 양피지 조각에서 고개를 들어 종그날을 불렀을 때, 그는 일말의 아쉬움까지 느끼며 창가에서 시선을 거뒀다. "이 이야기가 맞는다면 윈터바텀 킷(Winterbottom Kit)은 가나폴의 물건이라는 건가?“ "조금 다릅니다. 필멸의 땅(Mortal land)의 물건은 맞겠지만 가나폴리의 물건이라는 것은 확신할 수 없는 문제겠지요. 그렇게 보기에는 현존하는 문헌 가운데 윈터바텀 킷이 등장하는 연대가 너무 늦습니다. 그 동안 다른 곳에 감춰져 있었다고 보기도 힘들고요. 짐작컨대 윈터바텀 킷의 첫 주인이었던 자는 필멸의 땅에 직접 뛰어들어 모험을 겪은 끝에 이 무구를 손에 넣은 것 같습니다. " "놀랄 만한 일이로군. 그러면 가나폴리가 멸망한 후에도 그곳에서 무언가가 활동하고 있었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가나폴리가 멸망한 후 그곳에서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고 말하는 방법밖엔 없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보러면 가나폴리 사람들도 그 무구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할 텐데, 이 또한 그렇지가 못합니다. 가나폴리의 옛 문서가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위대한 무구들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는 페이지는 많습니다. 그러나 어느 행간에서도 윈터바텀 킷이라는 이름, 또는 그 비슷한 무구의 존재조차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혹시 가나폴리에는 그보다 훌륭한 무구가 많이 있어서 이 정도는 기록에 남지도 않은 것 아닌가?“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록에 남은 무구들에 대해 살펴보았을 때 이 정도의 물건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윈터바텀 킷은 가나폴리가 멸망한 후 긴 세월이 흐른 끝에 갑작스레 필멸의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했단 말인가? 현재 대륙의 인간 가운데 필멸의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누구도 만들지 않았고, 누구도 가져온 일이 없는 무구가 어째서 그 땅에 놓여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바로 저의 의문입니다. 정말로 땅에서 솟아나거나,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게 아닌가 싶은 기분입니다." 창 밖에서 5월의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가 그칠 생각을 안 하네요." 대륙에서는 섬의 이름을 쓸 수 없기에 상륙하고부터 '보리스 산‘ 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소년은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곧 눈을 비비며 빗물을 떨어냈다. 늦은 봄비는 따뜻했지만 오래 맞고 있으니 체온이 서서히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멀지 않은 곳에 있을 텐데......“ 본명이 아니라는, 억지에 가까운 이유로 이솔렛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는 소녀는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계속 쓸어 올리며 걸음을 빨리 했다. 그러나 발목 언저리에서 거치적거리는 풀들이 자꾸만 거슬렸다. 누군가가 긴 여행에는 부츠를 신는 편이 좋다고 말해 주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터라 거절했던 것이다. 잡목이 적은 섬의 산지에서는 불편한 줄 몰랐던 짤막한 양가죽 신이 었다. "일단 숲부터 벗어나고 보지요. 이 일대에 워락 마을이 드문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 크기의 숲 근처에는 하나씩 있는 편이거든요." 하긴, 오랫동안 여행했던 그 나라였다. 가보지 않은 길이라 해도 처음 대륙에 발 딛는 사람보다는 여러 모로 나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나라가 아니라 해도 낯선 땅을 방랑한 경험이 많은 보리스는 돌발 상황에서 판단이 빨랐다. 다만 렘므에서 봄을 맞는 것만은 그도 처음이었다. "저기서 잠시 비를 피할까?“ 기울어진 바위가 얕은 동굴을 만들고 있는 곳이 있었다. 둘은 그곳으로 가서 겨우 비를 피할 정도로만 들어가 앉았다. 사실 더 깊이 들어갈수도 없었다. 흡사 남의 집 처마 밑에 앉은 기분이었다. "저기, 신발 좀 벗어도 돼요?“ 보리스의 난데없는 질문에 이솔렛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무심코 끄덕였다. 그러나 곧 이유를 알게 되었다. 쾌 오랫동안 걸었고 한참 전부터 비까지 맞은 터라 벗은 발에서 좋은 냄새가 날 리 없었다. “당신도 벗어요. 발이 오래 젖어 있으면 안 좋아." “우리 서로를 위해 등을 돌리고 앉는 게 어때?” “그럴까요?” 돌아앉아 신발을 벗은 다음 거꾸로 들어올리니 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보리스는 부츠목을 수건 짜듯 비틀며 물을 빼고 있었다. 갑자기 이솔렛이 푸훗,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재미있어요?“ "아니, 재미없어서 웃었어." “재미없는데 왜 웃어요?” "그럼 넌 이 재미없는 상황이 안웃기니?“ 이솔렛은 젖은 신발을 내려놓고 발을 빗속으로 죽 뻗었다. 살갗보다 더 흰 맨발 위로 빗방울이 퉁겨 오르며 부서지는 게 보였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빗소리는 때로 사각거리고, 재재거리고, 종종거리며 사방을 둘러쌌다. 풀잎들이 쉴 새 없이 흔들렸고, 빗대 사이로 바람이 불어왔다. 젖은 옷 때문에 신경 쓰이지만 않았더라면 좀더 시원한 기분을 느꼈을 터였다. 게다가 얼굴이 마르기 시작하면서 여기저기 당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리스는 편안한 기분이었다. 섬으로 가기 전 '이실더 산’과 함께 다니던 시절의 행복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문득 돌아보니 이솔렛의 턱에 빗물 한 방울이 맺혀 떨어지려 하는 것이 보였다. 잎새에 맺힌 이슬처럼 맑은 물빛이었다. 그 안에는 자신 의 눈동자가 있었고, 비에 젖은 숲이 있었고, 더 먼 한 조각 하늘이 비쳐...... 아, 떨어졌다. “7월까지는 두 달 정도 남았으니까 아직 시간은 충분하겠지?” 혼자 중얼거린 이솔렛이 뒤쪽의 바위를 더듬어 본 다음 조심스레 등을 기대는 것이 보였다. 함께 다녀 보니 그녀는 보기보다 상당히 신중한 성격이었다. 나이에 비해 지식의 수준이 헤아릴 수 없이 깊은데도, 필요한 때가 아니라면 괜스레 말을 꺼내는 법이 없었다. 대륙에 대해서 읽고 들은 것이 많았지만 직접 경험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어서 곤란한 상황이 닥쳤을 때 먼저 의견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보리스가 상황을 설명하고 의견을 물으면 좀 생각한 끝에 입을 열었고, 그럴 때마다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면서도 또한 섣불리 자신을 낮추지 않았다. 그녀 자신은 스스로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의 딸이었다. 예의를 지키는 것과 긍지를 버리는 것은 이야기가 달랐다. 여행은, 당연한 일이지만 서로가 알지 못했던 모습들을 많이 보여주었다. 보리스는 자신이 그녀에게 조언하고 도울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섬에서는 늘 스승이었던 이솔렛도 그것을 불쾌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모르는 것을 접하면 즉시 배우려는 자세가 되었다. 함께 있어 보니 그녀가 어린 나이에 왜 그렇게 많은 지식들을 흡수할 수 있었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너무 일찍 도착해도 문제예요. 가서 그들과 마주치면 뭐라고 말하죠?” “맞춰서 간다 해도 어차피 마주치겠지. 말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말했지만 절벽에서 마법의 흔적을 찾아냈던 이솔렛은 이미 에키온이 한 짓에 대해 모두 알고 있었다. 다만 나우플리온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모든 일을 불문에 붙이기로 합의한 것이었다. 헥토르가 거기에 얼마나 연관되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만난다 면 확실히 서먹하긴 할 것이다. 그 모든 일은 보리스를 실버스컬에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벌인 것임에 틀림없으니까. "간다 해도 잘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여기까지 같이 와준 당신이나 이실더 님을 실망시켜서는 안될 텐데 말이죠." 일단 섬을 나온 후에는 주위에 낯선 사람이 없다 해도 나우플리온이라는 이름 대신 대륙에서 쓰는 이름을 말해야 했다. "부담 가질 것 없어. 어차피 쉬운 일은 아니야. 최선을 다하지 못할까봐 걱정할 뿐, 그 밖의 문제는 논외의 것이지." 이솔렛이 말하는 방식을 알고 있는 보리스는 그냥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곧 말했다. "이솔렛의 아버지는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었나 봐요. 나 말이죠, 가끔은 그 분을 위해서 이기고 싶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한다면 당신이 기뻐하지 않겠어요?“ “.......” 이솔렛은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문득 지난 겨울밤에 찾아온 소년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그녀는분명 거절했던 것이다. 거절한 채로, 그의 곁을 떠나지도 않고 있는 것이다. 자신도 자신의 마음을 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생각해 봤지만 받아들이는 것도, 떠나 는 것도 선택할 수가 없었다. 조금 있자니 보리스가 다시 말했다. "부담 가질 거 없어요. 헥토르가 검의 사제가 되려고 그 분의 명성에 어떻게든 기대보려 애쓰는 것은 당신에게 정말로 불쾌한 일이겠죠. 나는 그런 짓을 막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족해요. 물론 열심히 해야겠지만......“ 말끝을 흐리는데 갑자기 이솔렛이 분명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보리스, 네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겠어?” 둘은 얼굴을 마주보았다. 길쭉하게 튀어나온 암반 아래, 비를 피해 앉은 소년과 소녀가 서로를 보고 있었다. 입김이 하얗게 서렸다가 스러졌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것이길 바래요. 진심으로." 이솔렛은 짧게 미소했다. "아버지가 실버스컬에 나갔을 때 사용했던 가명이 있어. 대회에서 그 이름을, 아니 성만이라도 사용해 줄 수 있겠어?“ “아......” 보리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동시에 나우플리온의 일도 떠올랐던 것이다. 그가 대륙에 나와 굳이 ‘산’ 이라는 성을 사용한 것도 그의 뒤를 잇고 있음을 스스로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산’ 이라는 성을 사용한다면 누가 보아도 렘므 사람이라고 생각할 터이니 그것도 약간은 문제였다. 국적이 불분명한 이름을 사용해야 같은 국적인 사람의 눈길을 끌어 의심받는 것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분은 무슨 이름을 사용하셨지요?“ “카민 미스트리에." 확실히 국적 불명의 이름이었다. 이름은 아노마라드 북부 사람 같은데 성은 오를란느(Orlanne) 사람 같고, 억지로 끌어다 붙인다면 렘므 사람이라고 우길 수도 있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제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 이름에 누가 될지도 몰라요. 옛 일이지만 혹시라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실버스컬이 최초로 시작된 루그란 성에 가면 실버스컬 우승자들의 이름이 중앙 홀의 동판에 새겨져 있다고 하지. 하지만 이번 개최지는 아노마라드야. 그리고 난 네가 모든 이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믿어. 그게 내 아버지의 이름이었든, 네 스승의 이름이었든, 또는 너 자신의 이름이었든. 우승은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우승은 중요해요. 아니, 적어도 결승까지는 가야 해요. 만일 운이 없다면. 그때까지 헥토르 녀석과 한 번도 만나지 못할 수도 있잖아요. 내가 만일 이솔렛 아버지의 이름을 빌린다면 그 녀석을 반드시 이겨야 되는 거죠. 그래야 빌린 값을 하게 되니까" 비가 서서히 멎는 것이 느껴졌다. 똑, 똑, 빗방울 소리가 하나하나 선명하게 들렸다. "이름이란.... 내킨다고 멋대로 빌릴 수 있는 것은 아닌 거죠. 헥토르가 그 이름을 빌릴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그보다 좋은 방법은 달리 없잖겠어요?“ 이솔렛은 맨발로 일어서서 비 그친 숲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보리스가 말했다. “보리스, 미스트리에라는 이름을 쓰도록 하죠." 그리고 그 이름에 맞는 승리를 이루는 것은 나우플리온의 검이 될 것이었다. “......” 그 말을 들은 듯 했으나 이솔렛은 무언가 기척을 느낀 듯 두 손을 등 뒤로 가져갔다. 검자루를 쥐었다. 그녀의 민감한 귀를 아는 보리스도 벌떡 일어났다. “너희들은 누구냐! 여기는 디캄 영주의 땅이다!" 수풀 뒤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더니 곧 십여 명의 병사가 그들을 보며 분분히 검을 뽑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보리스는 검을 뽑기 전에 잠시 기다렸다. "좋은 나무군요. 여기서 기다릴까요?“ 칸 통령의 4익, 유리히 프레단은 유쾌한 어조로 말하며 가지를 잡고 나무 위로 몸을 솟구쳐 올렸다. 순식간에 5미터 높이로 올라가서는 굵은 가지 위에 편안히 자리를 잡았다. “형님은 거기 계실 거요?” 류스노 덴은 나무를 올려다본 다음 손을 내저으며 그대로 나무 둥치에 몸을 기댔다.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었고, 매복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점잖게 기다릴 심산이었다. 어찌된 셈인지 동행하던 야만족 사내는 사라지고 없었다. 유리히는 마침 그 일을 생각해 낸 듯 짧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렇게 속이 시원할 수가 없네." 정말로 긴 시간이었다. 산스루리아에서 렘므 꼭대기 님 반도까지, 지겹고도 고통스런 여행이었다. 그들이 드디어 이자크 듀카스텔과 헤어질 수 있었던 것은 렘므의 야만족인 캄자크 부락까지 가서 마지막 정보를 손에 넣은 후였다. 고생한 값은 하는 정보였다. 렘므의 북해 건너에 인간이 사는 섬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야만족들은 그 섬이 아주 멀며, 그 섬에서 온 사람이 아니면 물길을 몰라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포기라고는 모르는 이들은 보리스와 그의 보호자가 배를 사서 출발했으리라고 생각되는 엘베 섬과 화이트 크리스탈제도 전체에 첩자들을 사서 연락망을 이어 놓았다. 또한 해안 마을들을 돌며 낯선 소년이 바다 건너에서 배를 타고 돌아올 경우 즉각 알려달라고 요청한 뒤 상당액의 금화를 뿌려 놓았다. 그런 후에는 지루한 기다림이었다. 낚싯줄을 드리워 놓고 몇 시간이고 기다리는 낚시꾼의 자세로 그렇게 꾸준히 기다리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너무 돈을 많이 뿌렸는지 가끔 관계도 없는 정보를 가져와 귀찮게 구는 사람들만 빼면 문제없이 흘러간 나날이었다. 사실, 잘 기다린 것은 인내심 깊은 류스노뿐이었다. 유리히는 한 달도 가기 전에 짜증을 냈으며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아내려고 좌충우돌했고, 결국 실패했다. 그리하여 드디어 학수고대하던 정보가 들어오자마자 류스노에게 말도 않고 당장 튀어나간 것도 그였다. 한 척의 배에 어른 둘과 소년 셋이 타고 있다는 정보였다. 혼자서 어떻게 하기에는 많은 숫자였지만 유리히는 자신만만했다. 이자크가 영문도 모르고 도와주겠다고 자청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혼자갔던 그는 결국 엉뚱한 낭꽤를 당했다. 단숨에 두 어른을 제압하고 소 년 하나를 잡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멋대로 따라온 이자크가 갑자기 죄 없는 사람들 같은데 놓아주자고 나섰던 것이다. 생각하면 울화가 치미는 일이었지만, 유리히는 혼자 이자크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유리히가 지닌 기술은 대부분 뜻밖의 기습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정면 대결을 하면 언제나 불리했다. 그동안 이자크의 비위를 맞추는 체 해왔기 때문에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몰랐다. 일전에 이자크를 따라 캄자크 족 부락에 갔을때 이자크라는 이름보다 훨씬 유명한 다른 이름을 알게 되었거니와, 캄자크 족의 무서움에 대해서도 질릴 만큼 봤던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정말문 명화된 인간이 대적할수 없는 강적들이었다. 그래서 유리히는 울며 겨자먹기로 그들을 붙잡고, 이자크와 다니는 동안 익숙해져 버린 억지 웃음을 지으며 보리스라는 소년에 대해 아느냐고 물어봤다. 그리고...... 아무 정보도 못 얻고 그냥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다음 정보가 오기 전에 이자크를 먼저 떼어낼 방책을 짰다. 이제 원하는 정보를 다 얻은 만큼 이자크와 함께 다닐 필요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산스루리아로 돌려보내든지, 캄자크 족 부락으로 가게 하든지, 그게 아니면 아예 혼자 여행을 떠나게 하든지........ 그러나 눈치 없는 이자크는 그들이 매우 친절한 신사들이라고 생각해버렸는지 무슨 말을 해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리히가 안절부절못하다 못해 아예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하던 류스노가 대안을 세워 주었다. 너무 깔끔한 대책이라 듣는 순간 죽어가던 정신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다음 정보가 들어을 때까지 일단 기다린 그들은, 보고를 받자마자 즉시 대책 본부로 쓰던 여관을 떠나면서 이자크에게 ‘급한 일로 아주 잠깐 동안 자리를 비우게 됐는데 계속해서 정보가 들어을 것이 걱정된다, 그러니까 친절한 당신이 이곳에서 기다리며 자기들 대신 보고를 받아 달라, 잠깐이면 된다, 그러나 자기들이 돌아을 때까진 절대로 자리를 비워선 안 된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이자크는 그동안 친절을 베풀어 준 두 신사를 위해 기꺼이 그 일을 맡겠다고 나서 주었다. 특유의 순진무구한 미소를 띤 채 말이다. "아직도 그 여관에 박혀 있으려나....“ "상대를 떠나 보낼 수 없으면, 자신이 떠나야 되는 법이지." 나무 아래에서 목소리를 알아들은 류스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나 유리히한테까진 안 들렸다. 확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이 이자크를 내버려두고 여관을 떠난 지 보름도 넘게 지났으니까. 그리고 겨우겨우 적당한 곳에서 새로운 일행을 따라잡은 참이었으니까. "여어!" 나무 위의 유리히가 먼저 사냥감을 발견하고 가볍게 신호를 보냈다. 저만치에서 두 명의 소년과 한 명의 어른이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두 번째로 엘베 섬에 도착한 낯신 배에 탔던 자들이었다. 나무에 기댄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류스노가 천천히 등을 뗐다. 그리고 허리에 찬 검을 반쯤 뽑으며 예의 우울한 눈동자로 상대를 포착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 극구 사양해 봤자 소용이 없었다. 다짜고짜 떠밀려 간 곳은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고급스런 거실 그리고 거실 양쪽으로 난 두 개의 침실이었다. 고급스럽다고는 해도 그 취향이란 것은 보리스가 본 일 있는 아노마라드의 귀족 저택, 벨노어 성의 화려함과는 크게 거리가 있어 오히려 고향 트라바체스의 집 쪽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이곳도 분명 대 영주의 성이었지만 안락함보다는 방어 목적에 좀더 충실한 구조였고, 내부도 섬세한 꾸밈 같은 것과는 관계가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편안해 보이는 안락의자와 차 테이블, 잘 달인 금제 램프와 은식기 같은 것이 존재하는 성이었다. 그리고 그 성에서 그들은 매우 귀한 손김이 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병사들에게 이끌려 디캄 영주의 성으로 간 보리스가 나우플리온이 준 검을 보이며 '이실더 관‘ 이라는 이름을 말하자마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갑작스런 대접에 이쪽도 정신이 없었지만, 저쪽은 아예 혼비백산해서 그들을 맞아들이고는 만찬을 준비시키랴, 제일 좋은 방을 청소하랴, 갈아입을 옷을 내오랴, 각종 소동을 벌였다. 나우플리온이 렘므에서 쓰던 가명인 '이실더' 라는 이름을 아는 것은 영주와 그의 가족뿐만이 아니었다. 일개 병사에서 하인에 이르기까지 왜 이들을 대접해야 하는지 너무도 잘 느끼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옷이 다 젖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준 고급 옷으로 갈아입은 두 사람은 식사가 준비될 동안 잠시 쉬시라고 안내한 그 곳에서 약간 머쓱해 있었다. 결국 안락의자로 가 앉은 이솔렛이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뭔가 엄청난 은혜를 입긴 한 모양이구나." 보리스는 문간에 선 채 방을 내려다보며 말이 없었다. 이솔렛이 그의 얼굴을 보고 잠시 눈을 내리깔더니 입을 열었다. "옛 일이 떠오르나보구나. 그와 함께 다니던 때를 생각하는 거지?“ "아니... 혼자, 그 분 혼자 다니던 때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나우플리온이 벨노어 백작의 성으로 흘러 들어와 보리스를 만날 때까지 홀로 떠돈 기간은 약 2년, 그동안 대륙 곳곳에서 수많은 일들을 겪었을 것이다. 어쩐지 쓸쓸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처음 만난 나우플리온은 낙천적인 괴짜였고, 한없이 어둡기만 했던 자신은 그의 밝음을 좋아했다. 그러나 결국 그의 기대를 꺾어버린 자신, 끝내 떠나버린 사람, 그 후의 만남, 그리고.... 홀로 떠돌았던 그는 과연 무엇 때문에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것일까? 처음으로 가진 의문은 아니었다. 나우플리온이 그에게도,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비밀이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굳이 알아내려 하지 않은 것은 존중하고자 하는 마음 탓이었다. 그런 것이 그의 성격이었다. "아무도 그 사람을 추방하지 않았어. 그를 섬에서 추방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지." 흡사 마음 속을 들여다 본 듯한 대답이었다. 보리스가 다시 무언가 물으려 하는 순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하녀가 들어와 식사가 준비되었으니 내려오시라고 알렸다. 준비된 음식은 두 사람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식사할 사람이라고 해 봤자 그들 둘, 주인인 디캄 영주와 그의 아내, 그리고 젊은 아들의 다섯 사람뿐이었는데 몇 미터는 되어 보이는 기나긴 식탁에 각종 요리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음식들 중 상당수는 보리스조차도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그 긴 식탁 주위에는 의자가 없었다. 앉을 수 있는 곳은 곁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식탁보 위에 작은 꽃바구니, 그리고 은촛대와 하얀 식기가 반들거리고 있는 둥근 식탁이었다. “마음껏 덜어다 드시면 됩니다. 이곳 식사법에는 익숙하지 못하실 것 같으니 제 아들녀석이 차례대로 시범을 보여드릴 겁니다. 자, 접시를 들고 이쪽으로 오시지요." 디캄 영주의 아들은 스물 서넛 정도 되어 보이는 얌전해 보이는 젊은이였다. 다들 접시를 가지고 긴 식탁 쪽으로 가자 그가 두 사람 곁에서 친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 왔다. "찬 접시에는 먼저 생선부터 드시지요. 이쪽에 절인 청어가 있고, 저쪽에는 겨자를 곁들인 연어가 있습니다. 뱀장어는 드셔보셨습니까? 생선이 싫으시면 저쪽에 훈제 햄이 있습니다." 음식을 조금씩 덜어서 테이블로 가져오니 영주와 영주 부인도 비슷한 음식을 덜어온 것이 보였다. 그걸 먹고 나니 하인들이 접시를 치워갔고, 이번엔 따뜻한 접시에 따뜻한 육류 요리들을 담아오라고 젊은이가 말해 주었다. 부드럽게 삶은 소 허벅지 살에 볶은 감자, 무와 사과를 갈아 만든 소스를 곁들인 요리는 렘므의 수도인 엘티보에서 유래된 것이라 했고, 야채와 치즈가 듬뿍 든 소시지 구이, 달짝지근한 완자를 곁들인 송아지 가슴살 등을 가져오자 하인들이 작은 접시에 신선한 샐러드를 담아다 주었다. 작은 생선처럼 보이는 것이 잔뜩 담긴 절임을 들여다보고 있는 보리스에게 젊은이가 다가와 '앤초비' 라고 말해 주었다. 맞은편을 보니 맥주를 권하는 영주 부인에게 고개를 젓고 있는 이솔렛의 모습이 보였다. 척박한 땅을 가진 섬에서 술을 만들 곡류 따위를 키울 여유는 없었기 때문에 섬사람들은 거의 술을 마시지 않았고, 술에 익숙하지 않은 이솔렛은 가볍게 마시는 한두 잔으로도 충분히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나자 달콤한 후식이 연달아 나왔다. 동그랗게 말아 구운 사과파이와 과일, 치즈, 녹인 초콜릿으로 가득 채운 두툼한 팬케이크, 아몬드와 산딸기와 라즈베리 잼으로 속을 넣은 페스츄리 같은 것들은 몇 조각만 입에 넣어도 금방 우유라도 마시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단것들이었다. "시간이 없어 제대로 된 요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은인께서 아신다면 저희의 소홀함을 탓하실 지도 모르겠어요." 영주 부인의 말을 듣고서야 물어 볼 정신이 들었다. "그럴리가요. 그 분께서는 제게 검을 빌려주시며 렘므를 여행할 때 도움 받으라고 하셨을 뿐이라, 이런 과분한 대접을 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그 분과 어떤 관계이신지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아아.... 죄송합니다만......“. 영주 부인이 말꼬리를 흐리자 몸집 좋은 호인인 디캄 영주가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예, 정말 죄송합니다만 그것만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은인께서 금지하신 일이라 저희로선 어쩔 도리가 없군요. 다만 이렇듯 은인을 아시는 분을 만나 천분의 일의 은혜라도 갚게 된 것이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 옆에서 젊은 아들이 말을 이었다. "저도 실은 두 분을 뵙게 된 것이 꽤 놀랍습니다. 물론 저희는 언제라도 그 큰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게 되길 고대해 왔습니다만, 솔직히 그런 기회는 오지 않을 거라고 거의 체념하고 있었거든요. 은인의 성격으로 볼 때...... 아, 정말로 두 분은 은인에게 아주 귀중한 사람들인 모양입니다." '이실더 산‘ 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이들이 너무나 감격해 하는 바람에, 보리스는 감히 ’산‘이라는 성을 사용하지 못하고 '보리스 미스트리에' 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만일 '보리스 산’ 이라고 말했더라면 이곳에 며칠쯤 붙잡혀 빠져나가지 못하게 될 지도 몰랐을 노릇 이었다. 이솔렛도 마찬가지로 ‘미스트리에'라는 성을 사용하고 있어서 이들은 둘을 당연히 남매로 여겼다. "오히려 저희는 두 분께서 어찌 은인과 이토록 친밀하신 것인지 궁금하고 또 부럽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설명할 것은 전혀 없었다.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보리스는 재빨리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저희 역시도 그 일만은.....“ 그런 다음 이들은 서로 비밀을 밝히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해 사과하며 꾸벅꾸벅 절을 나누었다. 2. 실버스컬 개막 적갈색 머리칼을 헐렁하게 땋아 늘인 소녀가 풀밭에 앉아 있었다. 잘 땋아지지 않은 자신의 머리를 자꾸만 만지작거리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리리오페,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은 장소였다. 섬 안이라 해도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곳이었다. "여기가.... 늘 노래하곤 하던 그곳이고.....“. 바닥에 박힌 하얀바위가 빛을 내고 있었다. 여기도, 저기도, 빈자리뿐이었다. 함께 떠나버린 두 사람은 여기에 없었다. 소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은 돌아을 것이었다. 그리고 죽 이곳에, 이 섬에서 살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의 지배를 받으며, 그리고 곧 그녀의 지배를 받으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약간 무거웠다. 리리오페는 발딱 일어나 풀밭을 몇 걸음 거닐었다. 그리고 예전에 자주 그랬듯 가볍게 발끝을 퉁기며 춤을 추어 보았다. 약한 흥얼거림에 맞춰, 다리를 뻗고, 빙그르르 돌고, 원을 그리며 날리는 머리카락...... 이곳은 그녀의 장소가 아니었지만 관계없었다. 본래 섬 전체가 그녀의 장소였다. 두려워할 것은 없었다. 꺼릴 것도 없었다. 그리고 따뜻한 마음이 되어 그를 생각해 보았다. 사랑하는가? 그런 질문에는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단호히 단정짓기에는 너무 부드러운 감정이었다.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는 그리 다정한 사람이 아니며, 교활한 사람도 아니고, 야망 넘치는 사람도 아니었다. 다시 말해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섭정의 딸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었다. 더한 사치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더한 편안함을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뭔가 줄 수 있다는 것은 그리 매력적인 요소가 못 되었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이 뭔가 줄 수 있는 상대가 좋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그는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힘으로 그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세상 누구보다도 불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진심으로 그가 마음놓고 쉴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이 섬에서, 그녀의 땅에서. 어떻게? 소녀는 땅에서, 하늘에서 춤추네 해날 빛 아래서 행복하게 춤추네 세상모든 이야기에는 기쁜 결말 이 땅 모든 사람에게도 좋은 봄날 그이는 행복한 소녀였다. 어떤 선물도 줄 수 있는 소녀였다. 그러니 복은 간단한 거였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고,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고, 불안한 미래도 슬픈 과거도 없는 사람인-그녀의 것이 되면 행복해질 것이다. 춤동무 부르네 밤종다리 우는 숲 은달 빛 아래서 밤새도록 춤추네 작약 꽃망울 고개 숙인 하얀 언덕 옛 친구와 함께 부는 초록 휘파람 보리스와 이솔렛이 아노마라드 땅 폰티나 영지의 성 앞에 도착한 때는 점심 무렵이었다. 섬을 떠나고부터 약 석 달이 걸린 긴 여행이었다. 렌므를 여행하는 동안 그들은 몇 번이나 나우플리온의 검을 알아보는 사람들로부터 친절한 대접을 받았다. 보리스가 이렇게 여행하게 될 것을 나우플리온이 미리 알고 일부러 세심하게 준비해 놓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로젠버그 관문보다 남쪽에 있는 로마리온 관문을 넘어 아노마라드로 들어온 후부터는 길이 잘 닦여 있어서 다른 의미로 쾌적한 여행이 되었다. 드디어 날씨는 한여름의 그것으로 바뀌 어 있었다. 아노마라드의 7월. 보리스가 기억하고 있는 아노마라드는 도저히 자신과 가까워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지독히 아름다운 연록빛의 나라였다.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현실이 아니라 액자 너머의 그림처럼 보였던 마르그리트 꽃의 정원과 향긋한 나뭇잎들이 살랑대던 작은 숲, 은빛 내 위에 드리워진 무지개 다리가 있는 그곳에서 반 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렇게 불안한 행복으로 시작해서 결국 잔인한 배신으로 끝나버렸던 열 두 살 의 겨울과 봄. 그 땅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제 열 다섯 살이 된 소년은. 비록 당시 지내던 벨크루즈 지방보다는 북쪽이었으나 그곳에 돌아왔다는 사실만은 느끼지 않으려 해도 분명하게 다가왔다. 벨노어 성보다 훨씬 높고, 탑이 많은 화강암 성이 저만치 솟아 있었다. 그 주위로 높이 솟은 성벽이 상당한 넓이의 땅을 둘러쌌다. 도개교가 내려져 있었고, 그 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말과 수레를 끌며 들어가고 있었다. 성벽 주위에 깊은 해자가 파인 것이 보였다. "전쟁이 많은 땅인 모양이구나." 말이 없던 이솔렛이 폰티나 성을 올려다 본 다음 한 말이었다. 사실 그 성에는 '기사의 기쁨' 이라는 시적인 이름이 붙여져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잊어버린 채 그냥 폰티나 성이라고 불렀다. "폰티나 공작은 아노마라드 최고의 권력자 가운데 한 사람일 겁니다. 아노마라드에 새 왕정이 세워질 때 남부 영토를 국왕과 함께 평정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어요. 현 왕비의 친오빠이기도 하고요." 벨노어 성에서 로즈니스의 가정교사로부터 몇 마디 들었던 말이 새삼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이 신기했다. 동시에 '월넛 선생' 이 한 말도 생각이 났다. 폰티나 공작에게 아름다운 딸이 있다고 하니 로즈니스가 샘이 나서 어쩔 줄 몰라했고...... 로즈니스, 그러고 보니 참으로 오랜만에 떠올려 본 이름이었다. 아예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녀가 준 선물만은 아직도 지니고 있다는데도 생각이 미쳤다. 네 잎 클로버가 수놓아진 작은 주머니. 실은 그걸 로즈니스가 줬다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마도 저 가짜 결투를 위해 떠나던 날 아침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때의 그는 란지에가 안내해 준 비밀 전시실에 들어갔다 나와서 완전히 혼란에 빠진 상태였고, 따라서 로즈니스가 하던 말은 거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그가 지닌 네 잎 클로버 주머니에는 섬에 처음 들어갈 때 머플러를 한 숲지기들 중 한 사람이 주었던 은제 메달이 들어 있었다. 그걸 가지고 있어야 섬 주변에 걸려 있는 몇 개의 마법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넓은 숲을 순식간에 통과하거나 마을 주변 벽에 만들어진 문을 볼 수 있는 것도 이 메달의 힘이었다 따라서 몸에서 떼어놓아선 안되었고, 그래서 이 주머니 안에 넣어 늘 지니고 있었다. 도개교를 통과해 들어가자 놀랄 만한 장관이 펼쳐졌다. 도개교에서 본성에 이르는 넓은 빈터에 형형색색의 천막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대략 봐도 몇 백 개는 되어 보였고, 천막과 천막 사이로 수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돌아다니는 것 또한 보였다. 이 천막들에 가려져 정작 본 경기가 이루어질 장소는 어딘지 알아볼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보리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여기서 누군가와 마주치리라고 생각한 건 괜한 기우였네요." 이솔렛이 손차양을 만들어 주위를 둘러보며 답했다. "숨고 싶으면 예선에서 지면 돼." 보리스가 묘하게 미소지으며 대꾸했다. "진심 아니죠?“ 그때 이솔렛은 뭔가 발견한듯 손가락질하며 보리스를 돌아보았다. "저기로 가자. 출전을 접수하는 곳 같으니까. 그리고 진심은 아닌데, 진실이긴 해." 다음 날, 그리고 오후가 되자 보리스는 이곳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들을 대부분 접할 수 있었다. 화제가 되는 것은 단연 우승 후보들, 그들의 훌륭한 집안과 화려한 천막이며 마차 같은 것들, 그 다음으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여 성황을 이루고 있는가 하는 것, 다크호스라고 여겨지는 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폰티나 공작 영애가 지녔다는 대단한 미모였다. 클로에다 폰티나라고 하는 그 소녀는 보리스와 동갑내기라고 했는데 보리스가 벨노어 성에서 지내던 몇 년 전보다 한층 더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듯했다.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말에 따르면 그 소녀가 발코니에 나타나면 태양보다 밝은 별이 뜨는 느낌이라고 했고, 드레스자락에서 꽃잎이 떨어져 흩날리는 듯한 환각이 보일 지경이라고도 했다. 소녀가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면 그녀를 쳐다보던 남자들은 다들 멍해져서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심지어 연습조차 할 마음이 나지 않는다는 그런 얘기였다. 놀랍게도 그런 이야기를 듣고 와서 보리스에게 전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이솔렛이었다. 그녀는 이 이야기가 몹시 재미있다는 듯 시종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난 못 믿겠어요. 이런 곳에 모인 사람들은 쉽사리 소문에 휩쓸리기 마련이라고요." "못 믿겠으면 직접 가서 봐, 매일 저녁 똑같은 시각에 발코니로 나온다고 하니까. 아, 나도 궁금한걸. 같이 가서 볼래?' "이솔렛, 당신은 참......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결국 못하고 말았다. 이솔렛 같은 사람을 매일같이 보며 지낸 자신의 눈에 다른 미인이 쉽사리 들어을 리가 없잖은가. 그러나 이솔렛은 사내아이보다 더 짧은 머리에 옷도 여행하기 좋은 각반 친 바지 차림이었고, 등에는 두 자루나 되는 검까지 메고 있는 터라 언뜻 보아선 아름다운 소녀라기보다 잘생긴 소년처럼 보일 따름이었다. 그녀는 그런 모습으로 경쾌하게 천막사이를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듣고 왔다. 실버스컬의 규칙이 작년과 변한 데가 없다는 것, 오랜만의 대목을 놓칠세라 각지에서 원정 온 대장장이들 중에 누가 솜씨가 좋은가, 지금까지 예선 출전을 신청한 사람이 총 몇 명이며, 그 가운데 귀족은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들. 그리고 강력하게 거론되는 우승후보들도. 날이 저물고 있었다. 내일은 드디어 무지막지하기로 소문난 예선전이 치러지는 날이라서 출전자들은 대부분 일찍 천막으로 들어갔다. 귀족 소년들을 수행하고 온 종자들만이 소문이나 재미거리를 찾아 밤늦게 어슬렁댔다. 몇 군데에서는 은밀하게 도박판이 벌어져 있었다. 그러나 흔한 주사위놀이를 하는 하인들 말고, 한쪽 구역에서는 본격적으로 우승 후보를 놓고 벌이는 비싼 도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보리스를 일찍 잠자리에 들도록 한 뒤 이솔렛이 간 곳이 바로 여기였다. 사나운 사내들과 술꾼, 사기꾼들이 판치는 곳이었지만 자기 몸 하나 지키는 것쯤이야 겨정하지 않는 그녀는 몰려선 사람들 사이로 대담하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생전에 말해주던 모습과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대륙 사람들에 비하면 섬사람들의 일상은 마치 성직자들과 같다고 했었다. 질펀한 술 냄새와 무절제한 요리 냄새, 아까운 줄 모르고 태우는 램프 기름과 지쳐 쓰러질 때까지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듯 질러대는 고함소리. 무시무시한 소음, 예의라고는 없는 거친 움직임들. 그러나 섬사람들이 고립된 자들답게 기회만 있으면 내보이는 저 잔인한 적개심과 비교하면 어떨까. "여기 5백 고블룬! 오를란느 아가씨한테!" "어허, 저 큰일날 짓을 하는구먼? 고블룬 금화 두 개면 1백 엘소라는 걸 알아야지? 어디 걸 데가 없어 빼빼 마른 아가씨한테 거나 글쎄!" “남의 일에 참견 마쇼! 그 아가씨는 확실한 우승 후보야! 늙은 나귀새끼 판 돈을 사기꾼 같은 술장사 여편네가 다 처먹어서 그렇지 더 있으면 더 걸었을걸?” "승률이 낮은 데 걸어야 한몫 보는 법이지, 암!" “난 역시 자작 아드님한테 걸겠소! 윗대부터 확실한 핏줄에다 걸어야 피 같은 돈을 안 날리지. 여기 1백 엘소, 옛다!" "어허, 거 조금씩만 겁시다! 백 엘소 금화가 왔다갔다하니 무서워서 어디 끼겠나......“ "돈 없는 놈은 잔소리말고 꺼져!" "뭐야? 돈푼 좀 없다고 트레비조 삵괭이를 무시해? 한 번 되게 데어볼 테냐?“ “하이아칸 왕족한테 1백 고블룬!" "식민령 놈들이야 죄다 반편이 아닌가? 오죽 못났으면 남의 나라에 기대어 그 꼴을 하고 있나 그래.....“. "어허, 여기 티아(Tia) 사람도 있네! 조용히들 하라고!" "저쪽으로 나와, 이 풋내 나는 애송아! 내가 오늘 삵괭이 발톱 맛을 단단히 보여주마!" "여기 자작 아드님한테 8백 고블룬.....“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판돈이 자꾸 쌓이자 흑판에 석필로 그려놓은 숫자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자작 아들 이라는 사람이 최고의 승률, 즉 최저 배당을 기록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에 대해서는 누구나 잘 알고 있는지 아무도 본명을 말하지 않아서 이름을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지지도만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그 다음으로 많이 불리는 이름은 '오를란느 아가씨' 였는데 이 아가씨의 이름은 간신히 샤를로트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이 아가씨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많아서 누구냐는 질문이 종종 오갔고, 귀 기울여 보니 아노마라드 북부에 위치한 공국 오를란느의 공녀인 모양이었다. 그 다음으로 ‘하이아칸 왕족', '아라종 키다리', 나르비크 뱃꾼' 같은 이름들이 수시로 불렸다. 여기의 배당 방식은 1등에게 총액의 절반을 몰아주고 준결승 진출자들에게 건 사람들에게 조금씩 분배가 되는 방식이기 때문인지 그 외에도 낯선 이름들이 종종 불리곤 했다. 준결승 진출자의 숫자는 본선에 몇 명이 진출하느냐에 달려 있어서 지금 상태로는 몇 명이 될 지 알 수 없었다. 돈을 건 사람들은 1백 고블룬당 한 개씩, 인두로 지진 낙인이 찍힌 나무 조각을 가져갔다. 나중에 이것으로 판돈을 받게 되는 모양이었다. 모든 풍경은 섬에서 태어나 처음 대륙에 나와 본 이솔렛에게 생소하고도 흥미진진했다. 처음에 그녀는 자신도 몇 푼 정도 걸어볼까 했으나 곧 생각을 바꿔다. 일단 그녀의 평소 목소리는 그리 큰 편이 아니었고, 돈을 걸려면 적어도 도박판을 관리하는 사람의 주목은 끌어야 하는데 자신의 모습이 필요 이상의 이목을 끌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는 대부분 나이든 사내들뿐이었고, 자신이 입을 연다면 누구나 그 목소리를 듣고 소녀라는 것을 알아차릴 터였다. 그런데 곁에서 뜻밖으로 생기있는 소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 온 대부분의 소년들은 내일의 예선전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을 터인데? "아, 음, 여기까지 왔으니 우리 아버지의 재산을 좀 불려 갖고 가야겠는데 말이야, 네가보기엔 어디에 거는 게 좋을 것 같으냐, 바나나?“ "그거야 당연히 강피르 자작댁 아드님한테 거는 것이 제일 안전합죠. 그렇지만 도련님이 이런 일을 안 하셔도 주인님의 재산은 나날이 얌전히 불어나고 있다굽쇼. 도련닝까지 이런 판에 끼여드실 거 없어요. 그리고 제발 그 괴상한 과일 이름으로 부르지 마시란 말씀입니다 요. 저는 그 길쭉하고 미끈거리는 과일이 싫어요." "이봐, 아무리 그래도 아버진 훌륭한 상인이야. 동전 한 개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지. 그러니까 내가 돈을 벌어 가면 틀림없이 기뻐하신다고. 그리고 바나나가 얼마나 맛있는 과일인지 네가 먹어보고도 모른단 말이야? 저기 하이아칸 남쪽 섬에서만 나는 비싸디 비싼 과일인데! 하인 치고 바나나 먹처본 사람은 아마 너밖에 없을거다. " “그래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렇게 부르시지 마시라굽쇼!" "걱정 마, 우린 다른 사람들 뒤에 있어. 도박판을 보느라 전부 우리한테 등을 돌리고 있잖아," "크으.... 도련님 제발......“ 이솔렛은 고개를 조금만 돌려 하인과 대화를 나누는 소년을 훑어보았다. 그녀보다 더 길게 기른 금발이 사방으로 멋대로 치뻗은 모양새가 나름대로 귀여워 보이기도 하는 보리스 또래의 소년이 열심히 사람들 틈새로 고개를 내밀려고 애쓰고 있었다. 푸른 단이 곳곳에 대어진 고급스런 흰 옷차림에 허리에는 얇은 검까지 매어져 있어 분명 실버스컬에 참가하러 온 듯한 모습이었는데 어째서 밤늦게까지 여기에 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에이 참, 자작 아드님이란 사람은 너무 배당이 낮잖아! 저런 데 걸어봤자 이겨도 본전밖에 안 된다고. 위험 부담이 있어야 이익도 있는 건데, 우음...... 저 아래 하위 승률들 중에서 하나 찍어볼까...... 저기 왕족이라는 애는 실력이 괜찮으려나? 야, 바나나! 한눈팔지 말고 좀 잘 봐! 이거 빨리 끝내고 일찍 자야 내일 대망의 예선전을 최상의 컨디션으로 '구경'한단 말이야." "지금 그냥 가서 조용히 주무시면 되는데요." "치이, 너 아까 한 말 때문에 토라졌구나? 에이, 난 좋은 뜻에서 한 말이라고. 응?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거 다 알잖아. 그러면.... 맞다! 너도 한 명 찍어봐, 내가 돈은 대줄 테니까 말이야. 응, 재밌겠지? 어때?“ 자기보다 덩치도 훨씬 크고 나이도 많아 보이는 하인을 어르고 다그치고 달래고 하는 솜씨가 보통은 넘어 보였다. 귀족 도련님이라면 하인의 기분쯤이야 어찌 되든 강압적으로 누르려고만 할 텐데 이 소년은 상인의 아들이라서 그런지 기본적으로 협상을 하려는 자세를 갖고 있었다. 물론 그게 권위를 세우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워낙 자신이 장난스런 성격일 때는 이런 방식이 최선일지도 모른다. 아니나다를까, 나이든 하인은 도박을 해서 돈을 딸지도 모른다는 것에 걸려들어 도련님과 함께 열심히 승률판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둘이 누구한테 걸 것인가를 놓고 계속 가볍게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고 있던 이솔렛이 슬쩍 말을 붙였다. “도련님, 정말로 모험을 해 볼 마음이 있어요?” 이솔렛이 목소리에 찬트의 마력을 살짝 담았기 때문에 소년은 금방 알아듣고 고개를 돌렸다. 이런 시끄러운 곳에서 다른 사람들은 귀도 못 기울일 낮은 목소리지만 목표가 되는 사람만은 확실히 알아듣게 되어 있었다. 하인 역시 눈치채지 못하고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만 정신을 팔고 있었다. “네? 어, 당신 여자였군요? 좀 전에 볼 때는......” “네. 그건 중요하지 않고요. 정말로 위험 부담을 안고 크게 따 볼 마음이 있으면 내가 좋은 사람 하나 소개해 주죠." 귀여운 도련님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나름대로 심각한 고민을 하는 것 같더니 이윽고 이솔렛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솔렛이 싱긋 미소짓자 소년의 눈이 동그래졌다. "와아, 누나는 대단한 미인이군요? 그런데 아까 그 얘긴 누나한테 걸라는 말인가요?“ 이솔렛의 등 뒤에 있는 검을 놓치지 않고 본 모양이었다. 이솔렛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다른 사람이에요. 부담스러우면 그만두세요. 하지만 난 그가 반드시 우승을 할거라고 믿어요." "우승이라고요?“ “네, 우승." 아직도 하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였다. 소년은 서서히 이 아름다운 누나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신의 귀에는 너무나 선명하게 잘 들어왔고, 심지어 고개를 끄덕이고 싶게 만드는 힘까지 지니고 있지 않은가? 다음 순간 소년은 정말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고 있었다. "알았어요. 아버진 늘 내게 기회는 위기와 함께 온다고 말했죠. 당신 목소리가 아주 특이한 것 같은데 그게 바로 위기이자 기회라는 거겠죠? 걸죠. 어떤 이름인가요?“ "보리스, 미스트리에. 이 이름에 걸고 싶은 만큼 걸어요. 그리고 당신이 걸 때 여기 내 돈도 좀 대신 걸어 줘요." 이솔렛은 1백 엘소 금화 하나를 소년의 손에 놓았다. 소년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은 루시안 칼츠예요. 누나는?” "이솔렛이에요. 그럼 내일 예선 경기 잘 봐요." 이솔렛이 돌아서는데 등 뒤에서 루시안이라는 소년이 기세 좋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5만 엘소! 내 목소리 똑똑히 들어요! 보리스 미스트리에라는 이름에 5만 엘소 걸겠어! 거기에 다시 1백 엘소 추가!" 그 옆에서는 하인이 놀라자빠지다 못해 반쯤 턱이 빠진 표정으로 도련님의 팔을 붙들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입밖에 나와 버린 말이었다. 그리하여 승률판에는 아무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이름이 하나 추가되게 되었다. 예선전이 개막되었다. 실버스컬은 사흘에 걸쳐 벌어지게 되어 있었다. 첫날 예선에서는 출전자 전원을 네 무리로 나눈 다음 두 번에 걸쳐 대규모 단체전투를 치렀다. 제한 시간 안에 실수로 자기편을 공격하거나, 바닥에 쓰러지거나, 무기를 떨어뜨리거나, 상대에게 무기를 빼앗기거나 하면 예선에서 탈락이었다. 각 무리에게는 색깔이 다른 머리띠가 주어졌는데, 생명이 위험할 경우 이것을 풀어 내던지면 기권한다는 의미가 되어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기권한 상대를 치는 것도 탈락의 요인이 되었다. 예전에는 보다 정교하게 예선이 치러졌다고 했는데, 최근 들어 점점 많은 참가자가 몰려들다 보니 부득이하게 이런 식으로 본선 참가자를 결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한 무리에 대략 7,80여 명이나 들어갈 정도였다. 보리스는 맨 마지막 팀에 소속되어 2차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소속팀을 표시하기 위해 황색 머리띠가 하나씩 주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가죽 갑옷 등으로 경장을 한 아이들도 있었고, 투구까지 쓰고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춘 소년들도 보였다. 보리스 자신에게는 나우플리온이 준 검 한 자루와 가죽 건틀릿(gauntlet), 섬에서 실버스컬에 나가는 아이들을 위해 지급한 간단한 브리간딘(brigandine) 갑옷이 전부였다. 브리간딘 갑옷은 어린 시절에 진네만 저택이 삼촌에게 공격받았을 때 입었던 갑옷을 연상하게 했지만 질은 훨씬 떨어졌다. 일렬로 선 채 저만치 마찬가지로 횡대열을 이루고 선 소년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서서히 긴장감이 몸을 데우는 것이 느껴졌다. 신호기를 든 사내가 중앙 단상 앞에 있었다. 구경이 목적일 경우 본선부터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사방의 군중은 엄청나다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모두의 눈이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중압감은 작지 않았다. 조금 전 1차 전투가 끝났을 때 예선 통과자를 발표하면서 '희생된 자가 없어 다행' 이라는 의미의 말을 하는 것도 들었다. 이것은 실제로 죽거나, 죽일 수도 있는 경기였다 목검을 들고 하는 연습과는 달랐다. 가벼운 상처 정도 입는다고 해서 끝나는 경기도 아니었다. 고개를 들자 목책 너머에 무리 지은 군중이 보였다. 폰티나 공작을 비롯한 귀족들을 위해 마련된 높은 자리가 왼편에 있었고, 나머지는 온통 각양각색의 옷을 입은 전 대륙의 인간들이었다. 이솔렛은 저들 중 어디쯤 있을까. "........하게되니, 모두는 자신과 가문의 영광을 위해 분투하라!" 녹색 깃발이 올려지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시작이었다. 처음 부딪쳤을 때, 검보다 열기가 먼저 와 닿는 것에 놀랐다. 보이는 얼굴, 보이지 않는 얼굴, 모두가 한목적을 가지고 부딪쳐 뒤얽혔다. 첫 충돌에서 단숨에 기권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기권한 자들은 무기를 버리고 기어서 목책 밖으로 나갔다. 버려진 무기들은 살아남은 자들의 전리품이었다. 떨어진 머리띠들이 흙바닥에서 어지러이 밟혔다. 그럴수록 남은 자들의 기세는 더욱 끓어올랐다. 군중들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각 자기가 응원하는 출전자의 이름, 또는 자기 고향의 이름을 외치며 머플러나 모자 따위를 흔들어댔다. "아노마라드 최고의 소년 검객에게 우승을!" “하이아칸의 영광은 죽지 않았다!" "5년 연속 우승이 눈앞에 있다! 누가 강피르를 당할 소냐!" “잔포드 영지 출신들! 시드머! 갈자르! 도렌델프! 힘내요!" "실버스컬은 루그란이 본토다! 이번에는 우리가 가져간다!" 언뜻 자기 곁에서 눈부시게 빠른 검이 지나간다 싶었다. 보리스는 고개를 돌려 황색 머리띠를 확인한 다음 그 뒤를 치는 적의 공격을 끊었다. 빠른 검의 정체는 끝이 살짝 휘어진 묵직한 세이버(saber)였다. 그리고 그걸 든 사람은 까만 단발을 한 예쁜 소녀였다! 순식간에 다시 쉽쓸리는 바람에 더 이상 살필 겨를은 없었다. 어느새 보리스는 청색 띠를 맨 상대방 여럿의 표적이 되어 있었다. 차근차근 치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자신의 생각보다 더 빠르게 검이 찔러져 나갔다. 스스로도 춤추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잠깐 사이에 세명의 손목을 차례로 찔러 버렸던 것이다. 흐름을 탄다고 느끼는 순간 단숨에 벌어진 일이었다. "으윽!" 두 명은 검을 떨어뜨렸고, 한 명은 몸으로 부딪쳐 왔다. 그러나 이쪽에서는 검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무릎을 걷어차며 검자루로 손가락을 찧자 적의 검이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홱 돌아서는순간 다시 다가드는 다른 검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유연하게 피했다. 머릿속에서 의문이 떠올랐다. 단체 전투상황에서 대단히 입체적인 시각을 갖게 된 것 같은데, 그게 언제부터의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정면에서 치고 들어오는 청색 띠의 소년이 있었다. 은빛 가슴가리개에 문장이 새겨진 걸로 보아 아마도 귀족...... "건방지게!" 노성이 터지며 동시에 찔러 들어온 검을 이번에는 가까스로 피했다. 대단히 위력 있는 검이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적이 자신에게 화를 먼저 내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물을 필요는 없으니, 검으로 답했다. 츠컹! 검날이 서로 날카롭게 비껴 스치는 순간 보리스는 상대의 눈을 보았다. 귀족적인 새파란 눈동자 아래로 가느다란 직선 흉터가 가로지르는 얼굴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실력뿐 아니라 위압적인 기세로도 상대를 제압하는 자임을 즉시 알 수 있었다. 다시 두 번의 검격이 교환되고 드디어 두 사람 다 상대가 만만치 않은 자임을 알아차리는 순간이었다. 뎅! 뎅! 뎅! 사방을 진동시키는 종소리가 세 번 울리며 진행을 맡은 의전관이 큰 소리로 외쳤다. "2차 예선전을 마치노라! 모두 각자의 진영으로 물러서라!" 둘은 검을 멈춘 채 물러났다. 종료가 선언되었을 때 계속해서 싸우는 것 역시 실격 사유 가운데 하나였다. 실제로 그런 이유로 몇 명에게 실격이 선언되었다. 뒤로 물러나는 동안 상대의 눈이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목책 앞까지 물러나고 나자 전투를 벌인 장소에 흩어진 수많은 검과 방패, 머리띠들, 그리고 치명상을 입어 물러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저도 모르게 회의적인 기분이 들었으나 애써 억눌렀다. 기록을 맡은 자들이 달려와 각 목책 앞에 서 있는 소년 소녀들의 이름을 확인해 갔다. 자신이 돈을 건 자가 탈락한 것을 본 사람들은 실망해서 나뭇조각을 땅바닥에 내던지거나 한숨을 내쉬었다. 목책 바깥쪽에서는 예선 9차전에서 생명을 잃은 두 소년을 위해 관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9차 예선 통과자 열 여덟 명의 이름이 하나하나 발표되었다. 당연히 귀족들이 먼저였고, 평민이나 소속이 불분명한 자들의 이름은 뒤로 밀렸다. 이솔렛은 이미 보리스의 모습을 발견했지만 무언가 모를 기대를 가지고 의전관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보리스 미스트리에!" 관중석 쪽에서 하인들에게 둘러싸인 금발 머리 소년 하나가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치고 있었다. “거봐! 예선쯤이야 가볍게 통과할줄 알았어! 내 감은 정확하다니까!" 그러나 그 날 저녁이 되었을 때, 보리스 미스트리에라는 이름은 루시안이 아닌 다른 자들의 입에서도 오르내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도박판에서 뜻밖의 큰 돈이 걸린 소년의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예선이 끝나고 나자 눈 좋은 자들에 의해 실력에 대한 이야기도, 그리고 그 이름에 대한 추측도 서서히 퍼져나갔다. "2차전 종료가 선언되기 직전에 말야, 강피르 자작 아드님과 붙었던 게 바로 그 녀석이라던데?“ "에엣, 그 소년이란 말이야? 나도 봤지, 확실히... 전혀 밀리지 않는 실력인 것 같던데....“ "에이, 잠깐 싸운 것 보고 알 수야 있나! 끝이 안 난 싸움 갖고는 아무 것도 모르는 법이란 말씀이지!" "그럼! 강피르 자작 댁이 보통 가문인가? 자작님이 이루지 못한 5회 연속 우승을 드디어 아들 대에서 이룰 것 같다고 소문이 자자하잖나." "그나저나 그 얘기 들었어? 강피르 자작댁 하인들한테서 새어나온 얘긴데, 그 ‘미스트리에' 라는 성을 듣고 자작께서 크게 놀라시더라는 거야! 지금 그 댁 천막에서는 내내 그 이야기래!" “미스트리에? 미스트리에가 어디 가문인데 그래?”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말야, 하여간.... 그 뭐라나, 옛날 우승자 중에 미스트리에라는 사람이 있다나 봐." "옛날 우승자? 언제?' "그거야 루그란 성에 가서 동판이라도 보기 전엔 낸들 아나." 같은 시각, 폰티나 성 앞마당에서 가장 훌륭한 천막 가운데 한 곳에 들어간 소년 루이잔 폰 강피르는 아버지와 네 명의 삼촌들이 모두 모여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잘 왔다, 루이잔. 이리 와서 좀 앉거라." 실버스컬에 5년째 출전하는 열 아홉 살, 이제 스물을 앞두고 있는 젊은이는 훤칠한 키와 각진 턱 때문에 단호하고 강인한 인상이었고, 따라서 나이보다 한층 성숙해 보였다. 연갈색 블론드 웨이브의 머리카락만이 유일하게 소년답게 이마 위에 흐트러져 있었다. 루이잔이 의자에 앉자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 중 가장 다혈질의 성격을 지닌 막내 삼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예선전에서 마지막에 너와 검을 맞대고 있던 소년을 기억하느냐?” 루이잔의 진한 눈썹이 가볍게 꿈틀거렸다. 그러나 곧 평정을 되찾고 말했다. “네, 기억납니다. 그 소년에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네 눈에 그 아이가 몇 살 정도로 보이더냐?” "잘 모르겠습니다만, 많이 잡아도 열 일곱 살은 안 넘었겠더군요." "그 아이 실력이 어떻더냐?“ 루이잔은 고개를 들어 삼촌의 얼굴을 보고, 이번에는 아버지 쪽을 쳐다보았다. 수도 켈티카의 궁정뿐 아니라 아노마라드 최고의 검사이기도 했고 대륙 전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전사로 이름을 날리는 아버지, 국왕의 수족 같은 심복으로서 때로 ‘폐하의 검' 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으로도 불리는 충직한 인물, 루이잔의 아버지 강피르 자작은 말없이 턱을 괸 채 빈 테이블 위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물으십니까, 아니, 잠깐이었기 때문에 실력이 어떻다 말할 입장이 못됩니다. 그런데 그 아이를 아시는 겁니까? 그 아이가 도대체 누굽니까?“ 루이잔은 신중한 젊은이였다. 나이 어린 소년과 겨우 몇 초간 검을 부딪쳐 놓고 함부로 상대를 깔아뭉개며 말할 성품은 아니었다. 그러나 얼굴에는 못내 불만스러운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아버지와 네 삼촌들은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들이었고 나이에 따라 서열이 분명한 이들의 검 실력 역시 여타 가문의 귀족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 그들이 처음 본 시골뜨기 소년에 대해 이토록 진지하게 물을 이유는 무엇이며, 왜 그와 자신을 동격인 양 말하고 있는가. "그 아이의 이름은 보리스 ‘미스트리에' 라고 한다. 너도 알고 있었느냐?“ 루이잔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잘 몰랐습니다. " "그럼 이제부터라도 알아두거라. 그 아이는 미스트리에다. 짐작컨대 네 우승의 가장 큰 걸림돌, 이 대회 최대의 강적은 바로 그다." “네.....?” 루이잔이 의아한 눈을 쳐드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래, 미스트리에다. 이것 참 우연 치고도 희한한 우연이지 않나. 훗훗, 정말 재미있구나." "아버지께서 그 아이를 아십니까?“ "그 아이를 모를지언정 내 어찌 미스트리에라는 이름을 잊을 수 있겠느냐. 너도 오래 전 이 아버지가 실버스컬에 출전하여 네 번 연속 우승을 거머쥐었음은 알고 있을 것이다. " 루이잔은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하며 대답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 “내 생애 다섯 번째 실버스컬에서 당시 너처럼 열 아홉이었던 나는, 갓 열 다섯이 된 한 소년을 결승에서 만났고, 그에게 패했다. 그건 운이나 컨디션 따위로 말할 수 있는 승패가 아니었다. 그와 나의 실력 차이는 늑대와 고랑이의 그것만큼이나 확연했던 것이다. " 루이잔은 입술을 꽉 다물며 주위의 삼촌들을 둘러보았다. 아버지의 뼈아픈 패배, 실버스컬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 되었을 5연승 달성이 깨어졌던 그 날의 사건을 말하는 것은 그의 집안에서 오랜 금기였다. 아버지가 그 일에 대해 직접 말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루이잔이 자라면서 주위 사람들이 한두 번 그 일을 언급한 일이 있었으나 역시 자세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드디어 실버스컬에 나갈 수 있는 나이가 된 루이잔이 한 번, 또 한번 우승을 거머쥘 때마다 집안에서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기대가 자라나는 것을 그도 느끼고 있었다. 드디어 4연승을 달성했을 때, 아버지의 표정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고 그는 5연승을 반드시 이룩하고야 말리라고 굳게 결심했던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도 내 일생에서 그 소년을 능가하는 천재를 만난 일이 없다. 그가 어떻게 성장했을지, 지금은 얼마나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있을지 늘 궁금했다. 그러나 그는 그 한 번 외에는 다시는 실버스컬에 나오지도 않았고, 어디에서도 그와 같은 인물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기에 난 그가 혹시 어려서 죽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탁월한 실력자의 존재를 숨길 수 있을 만큼 대륙은 넓지 않으니까 말이다. " 루이잔은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서서히 알아챘다. 아버지가 말을 멈추자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과 똑같은 빛깔을 한 아버지의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그 사람이 미스트리에인가요." "그래, 바로 그다. 그의 후계자인 것이다. " 침묵이 흘렀다. 고개를 숙인 루이잔은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집안의 치욕, 아버지의 상처, 그것을 깨끗이 치유할 수 있는 기회가 이런 식으로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같은 위대한 인물의 과거에 흠집을 남긴 자를 그의 손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되다니, 이것이 꿈인가? 오랜 기도의 결과라도 된단 말인가? 기이한 우연이 다시 한 번 무대를 마련해 주었으니, 한바탕 춤추는 일이 남았을 뿐이다. 그의 실력은 어느 정도일...... 매우 진중한 성품이라 필요한 말밖에는 하지 않는 둘째 삼촌이 루이잔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루이잔, 아직 모든 것을 확신할 수는 없다. 일단 그 소년의 외모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때 그 미스트리에의 모습과는 현저히 다르다. 또한 그 자는 쌍검을 썼는데, 이번의 소년은 장검 한 자루뿐이다. 그의 후계자라면 같은 검술을 지녔어야 옳을 터라, 나는 이 일이 단순한 착각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루이잔이 고개를 드니 아버지가 고개를 젓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모든 우연이 너무나도 절묘해. 왜 하필 그는 루이잔이 5연승을 눈앞에 둔 올해에 나타났을까? 게다가 출전자 명부에 적힌 그의 나이는 열 다섯, 그게 사실이든 거짓말이든 열 다섯이란 말이다. 또한 겉모습은 다르지만 의전관에게 제출할 가문의 문장 하나 없는 평민이라는 것, 출신지나 경력은 물론 부모의 이름조차도 밝히지 않은 간단한 접수였다는 것, 이곳의 그 누구와도 아는 사이가 아니 라는 점 ...... "형님, 그건 좀 다릅니다. 어젯밤 도박판에서 그 소년에게 무려 5만엘소나 되는 거액의 돈을 건 소년이 있다고 하더군요. 됫조사를 해 보니 남부의 대상인 드메린 칼츠의 외아들이라고 합디다. 무언가 됫배를 보아주고 있는지도 모르잖습니까?' "궁금한 일이긴 하군. 하지만 중요한 건 아니야. 루이잔, 중요한 건 한 가지뿐이다. 내 말 알겠느냐?" 질세라 단호한 어조로 루이잔이 답했다.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 내일의 시합을 위해 루이잔을 쉬게 해야 했기에 간단한 가족 회의는 끝이 났다. 그러나천막을 나온 뒤 삼촌들 사이에서 몇 마디 비밀스런 대화가 오갔고, 막내 삼촌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 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3. 뜻밖의 적, 뜻밖의 조우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 보리스는 항상 먼저 깨어나 있던 이솔렛이 피곤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깨울까 하다가 좀더 쉬게 하자는 생각에 먼저 옷을 갈아입고 천천히 몸을 풀었다. 식사할 준비를 대강 해놓으니 주최측에서 제공하는 아침 식사를 가져온 심부름꾼이 천막 밖에서 기척을 냈다. 따뜻한 수프 두 그릇과 신선한 빵, 치즈, 얇게 저며 구운 햄, 베이컨 두 조각, 사과, 우유를 당은 큰 컵이 들여보내졌다. 오늘부터는 본선에 나가는 사람에게만 음식이 지급되는 탓인지 어제보다 훨씬 괜찮은 식사였다. "이솔렛, 일어나서 식사해요." 그녀가 눈을 떴다. 눈가에 피로한 기색이 남은 것을 보고 보리스가 농담 겸 아침 인사를 던졌다. “나만 아기처럼 얼러서 재우고, 당신 자신을 위해 자장가를 부를 수는 없었나 봐요?” 이솔렛은 어젯밤 가벼운 찬트를 불러 보리스를 푹 잠들게 했다. 그래서인지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으응.... 넌 자장가가 효과가 있었나봐?“ 일어난 이솔렛이 눈을 한 번 비빈 다음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잠에서 금방 깨어 아직 날카롭게 날이 세워지지 않은 그녀의 모습은 생각지도 못한 귀여움을 가지고 있었다. 함께 여행하기 전에는 짐작도 못해 본 모습이 었다. 식사 끝나기가 무섭게 곧장 예비 집합 나팔이 울렸다. 총 서른 다섯명의 본선 진출자가 군중들 앞에서 토너먼트(tournament) 패를 뽑는 행사가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보리스는 헥토르와 마주쳤다 “.......” “.......”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대륙에서 섬사람들끼리 아는 체 해선 안 된다고 꾸준히 주의를 들은 까닭도 있었지만, 보리스는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이제 곧 검으로 대답하게 될 텐데 무엇 때문에 구차한 말로 증오를 나타낸단 말인가. 보리스의 출발이 결정되기 전에 떠났던 헥토르로서는 이 만남이 뜻밖이었을 텐데, 그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리스는 그가 다른 소년들 틈으로 사라질 때 약간의 미소를 남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솔렛은 어제처럼 군중들 틈에 섞여 대진표 작성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 뒤쪽에서 몇 사람이 그녀를 가리키며 당혹한 음성을 내고 있었다. "어르신, 저기, 저 계집앱니다! 저 짧은 금발......“ 귀가 예민한 이솔렛은 무언가를 감지했으나 뒤를 돌아보는 멍청한 일은 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사람들 틈으로 숨어 들어갔다. "저 쌍짐을 지닌 소녀란 말이지? 정말로 저 여자아이가 어제 네 명의 사내를 모조리 처치했단 말인가?“ "언뜻 보아 연약해 보이지만 여간한 고수가 아닙니다. 쫓겨 돌아온 녀석들 말로는 손도 한 번 제대로 못 내밀어 보았다더군요. 그 놈들도 밤의 습격에는 익숙한 자들인데.....“ "저 쌍검을 쓰고?“ "물론입죠! 얼마나 빠른지 눈에 보이지가 않을 지경이라는 데 어디까지 믿어야 할 지는.....? "그런 실력이 있는데 왜 실버스컬에는 나가지 않은 거지?“ "전들 압니까요?“ 팔짱을 낀 채 보고를 듣고 있던 사내는 이윽고 계속 살피라고 이른뒤 사람들 틈에서 빠져나가 천막들 쪽으로 사라졌다. 사내와 대화를 주고받던 자는 다시 이솔렛을 눈으로 쫓으려 했으나 어느새 사라졌음을 깨닫고 당혹해했다. "이게 또 어디로 숨은 거야?“ 어제의 넓은 경기장은 이제 세 영역으로 나뉘어졌고 오전 열 시 경부터 본선 토너먼트전이 벌어졌다. 보리스의 첫 상대는 스물은 예전에 넘지 않았겠나 싶을 정도로 몸집이 큰 젊은이였다. 그 자는 보리스를 내려다보고는 시시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나 승패는 순식간에 결정지어졌다. 보리스의 검이 상대의 목을 똑바로 겨누기까지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보리스 미스트리에, 승리!" 환호성 대신 실망한 듯한 소리가 일어났다. 훌륭한 부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쌓은 명성이 있는 것도 아닌 낯선 소년 보리스에게 돈을 건 사람은 루시안 혼자밖에 없었으니 구경꾼들이 맥빠져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일찌감치 이기는 바람에 조금 시간이 난 그는 다른 경기장의 경기를 잠시 둘러보았다. 그런데 익숙한듯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어제 황팀에 함께 소속되었던 까만 머리의 소녀였다. 흡사 군인처럼 절도 있는 동작을 지닌 그녀는 예의 세이버를 획획 휘두르며 상대를 접근도 하지 못하게 만든 다음, 순식간에 엄청난 속도로 베어 들어갔다. 가슴 아래 찢긴 상처를 입고 곧 이어 심장이 꿰뚫어질 위기에 처한 상대는 패배를 인정하고 검을 떨어뜨렸다. "오를란느 공작가의 샤를로트 비에트리스 드 오를란느, 승리!" 이번에는 커다란 환성이 일어나 목책 바깥의 관객석을 뒤흔들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소녀가 기뻐하는 기색조차 없이 발끈한 얼굴로 의전관을 돌아보며 한 마디 쏘아붙였다. “내 어제 그토록 말했건만 끝내 그냥 '공작' 이로군요! 새 아노마라드 왕실 주위에는 치사한 술수를 조언하는 자들뿐인 모양이네요!" 가까이에서 그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놀라 술렁댔다. 비록 소녀가 외국인 오를란느의 공주, 즉 공녀라고 하지만 이곳은 엄연히 아노마라드였다. 여간 대담하고 자부심이 강하지 않고서는, 또는 외교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지 않고서는 입밖에 낼 수 없는 말이었다. 본래 오를란느는 대공국이었다. 아노마라드 구왕국 시절부터 그랬고, 잠시 아노마라드 공화국이 세워졌을 때에도 변한 일은 없었다. 따라서 그곳의 지배자는 당연히 대공작(Grand Duke)이 되어야 옳았다. 오를란느 공녀가 틀린 지적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노마라드에 체첼 국왕의 신왕조가 들어섰을 때 오를란 대공이 직접 다시 와서 충성 맹세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노마라드 국왕은 대공의 작위를 잠정적으로 유보시키도록 지시했다. 비록 주종 관계에 있지만 오랜 내정 독립으로 콧대가 높은 오를란느 대공은 여전히 친서를 보내는 이상의 일은 하지 않고 있었다. 실버스컬이 대륙 전체의 평화를 상징하는 전통 있는 경기가 아니었다면 아노마라드에서 열리는 경기에 오를란느의 공녀가 참가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주위 사람들이 꿀 먹은 벙어리들처럼 대꾸를 못 하고 있자, 눈썹을 찌푸린 샤를로트는 신속하게 검을 꽂아 넣고 홱 돌아서서 출전자 대 기석으로 가 버렸다. 이솔렛은 잠시 보리스에게서 눈길을 떼고 샤를로트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그 소녀에게서 한 나라의 왕위 계승자와도 같은 기개가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솔렛이 예전에 대륙의 소식을 전해들은 것에 따르면 오를란느에는 저 소녀보다 나이 많은 왕자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물러설 데가 없는 지점에서 돌아서 드디어 공세를 취하는 장군의 날선 검처럼, 긴장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세 번째 승부가 끝나자 다시 한 번 실망한 자들과 기뻐하는 자들의 교차된 목소리가 경기장을 뒤덮었다. 본선 1차전이 끝나자 서른 다섯 명은 부전승으로 올라온 한 명을 포함해 열 여덟 명으로 좁혀졌다. 이들은 다시 아홉 명으로 줄어들어야 했고, 최후의 다섯 명이 남으면 오늘의 본선 경기는 끝이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마지막 준결승과 결승이 치러질 예정이었다. 이 준결승과 결승이야말로 실버스컬 최고의 볼거리로서 보통 두세명은 죽거나 불구가 된다고 할 정도로 치열한 접전이었다. 심판을 보는 사람도 관객들의 기대를 생각해서 웬만큼 다친 걸로는 경기 종료를 선언하지 않았다. 한쪽이 스스로 졌다고 인정하거나, 쓰러져 정신 을 잃거나, 목숨을 잃거나 하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 혈전이었다. 이 마지막 날 경기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인파는 종종 한 영지를 모조리 메울 정도였고, 이 사람들이 돌아가고 나면 개최 영지가 반쯤 초토화되어 있는 일쯤은 예사였다. 그런데 이 손해는 아주 소액에 불과한 관람료의 총합과, 비공식적 묵인 하에 도박장을 여는 자들이 갖다 바치는 상납금으로 또 메워지고도 남았다. 그리고 승리자의 이름은 빠르게 전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보통 올해처럼 강력한 우승 후보가 있는 경우 도박으로 한 몫 잡아 보려는 자들의 열기는 좀 줄어드는 편이었지만, 대신 이번에는 루이잔 폰 강피르가 과연 실버스컬 역사상 전무후무한 5연승 기록을 달성할 것인가라는 엄청난 이슈가 있었다. 따라서 이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몰려든 인파의 수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번 실버스컬이 아노마라드 내 영지들 가운데 가장 넓은 폰티나 공작령에서 열렸기에 망정이지, 이 정도 인원을 며칠 동안 먹여 살릴 수 있는 규모의 생산이 가능한 영지는 대륙 전체에서도 몇 없었다. 점심 식사가 끝난 뒤 본선 3차전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점심을 먹는 동안 공작이 고용한 일꾼들이 곧 벌어질 2차전을 위해 경기장을 두 군데로 줄여 놓았다. 이제 돈을 건 관객들의 열기는 더욱 거세어져 자칫하다간 저들끼리의 몸싸움 때문에 목책이 무너질 지경이었다. 보리스의 차례는 맨 끝이었다. 언뜻 살펴보니 그의 상대는 작지만 다부진 체격을 가진 갈색 피부의 소년이었다. 사람들이 보통 ‘나르비크 뱃놈’ 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그는 작년 대회에서 준결승까지 올랐던 실력자라고 했다 "아노마라드 출신 클란치 알리스테어! 루그란 골쿰버 언덕 출신 타이티투스!" 두 소년이 걸어나오는 것을 보고서야 보리스는 헥토르의 가명이 클란치 알리스테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다음에는 상대가 되는 소년의 이름이 어쩐지 섬사람의 이름과 비슷한 어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섬사람과 마찬가지로 성이 없었다. "루그란의 명예다!" “타이티투스, 승리의 실버스컬이 기다리고 있다!" "이번에야말로 종주국의 진면목을 보여줘라!" 그러나 루그란 사람들의 열띤 응원에도 불구하고 둘의 대결은 싱거웠다. 잠시 서로 탐색전을 펴는듯하더니 이내 클란치, 즉 헥토르가 상대의 양쪽 손목을 번갈아 찔러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타이티투스라는 소년은 머뭇거리며 즉시 항복을 선언하지 않았고, 보리스와 성격 이 다른 헥토르는 확실한 승리를 위해 상대의 어깻죽지를 검으로 꿰뚫어 버렸다. "으윽!" 적이 쓰러지며 검을 놓치자 헥토르의 발이 다가와 그것을 밟았다. 경기가 끝났는데도 구경꾼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침묵하는 모습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헥토르에게 돈을 건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대신 루그란의 대표 선수라 할 만한 타이티투스를 지지한 자들은 멍청 하게 입을 벌린 채 경기장을 떠날 줄을 몰랐다. “으음, 저 소년은 쓸만한 전사가 될 자질을 보이는군." 전면 중앙의 특별석에서 가족들과 가신들을 거느리고 앉은 폰티나 공작은 웬만해선 자리를 뜨지 않은 채 본선 경기를 자세히 지켜보는 모습이었다. 그가 한 마디 말하자 지키고 서 있던 남자가 즉시 경기장 아래로 내려갔다. 공작은 고개를 끄덕인 후 이어지는 경기를 기다렸다. 사람들의 화제가 되고 있는 작은 미녀는 이 특별석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으나, 대신 폰티나 공작 부인 루크레치아의 가냘픈 미모가 ‘딸이 왜 예쁜지 알겠다'는 말과 함께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녀는 백발이 듬성듬성한 공작보다 훨씬 젊은 편이었는데 들리는 바로는 두 번째로 맞아들인 부인이라고 했다. 폰티나 공작의 손님이 되는 각지의 귀족들, 특히 아노마라드의 세력가들을 위한 자리는 전면 좌측과 우측의 가장 전망 좋은 위치에 마련되어 있었다. 이 자리에 초대받기 위해 올해 초부터 폰티나 성으로 몰려든 선물도 상당했다고 했다. 그 가운데 한 명의 귀족이 아름다운 딸과 함께 경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아버지, 저도 계속 검술을 배웠더라면 저 자리에 서서 겨룰 수 있었을까요?“ "그야 물론 그랬을 게다. 하지만 아버지는 네가 저런 위험한 대회에 나가길 바라지 않는단다. 방금 피 흘리는 소년을 봤지 않니? 소년들에게도 위험천만한 일이야." “하지만 저기에도 소녀들이 있는걸요. 아까 오를란느에서 오신 공녀님이 보인 실력은 정말 대단했어요! 나도 금방 그만두지 않고 열심히 했더라면 그 분처럼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만 역시 사내아이처럼 보이지 않더냐? 그래서는 좋은 남자의 청혼을 받기가 힘들단다." “그래도 그 분은 오를란느에서 공주님이니까 좋은 청혼을 많이 받을 거예요." “너도 마찬가지란다, 로즈. 왜냐면 너는 사랑스럽고 예쁘지 않니." 로즈니스 다 벨노어는 아버지의 말에 생긋 미소지어 보였으나 그말을 다 믿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녀도 물론 예뻤지만 이곳에서 현재 가장 주목받는 소녀는 자신이 아닌 폰티나 공작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폰티나 공작가의 자리를 곁눈질한 로즈니스는 화제의 작은 미녀가 오랜만에 나와 앉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린 시절에 잠시 동안 그녀에게 검을 가르쳤던 선생의 입에서 처음 들어보았던 이름이었다. 클로에 다 폰티나. 그때는 어린 마음에 발끈해서 화를 냈지만 지금 와서 직접 보니 감히 그 말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장밋빛이 감도는 화사한 피부와 새파란 눈동자, 진짜 황금보다 더 빛나는 금발, 한 번도 햇빛에 내놓지 않은 듯한 우윳빛 목덜미, 그리고 작은 실수조차 없는 세련된 몸가짐까지. 어쩌면 저렇게 상류 사회의 취향에 꼭 맞게 생길 수가 있을까. 켈티카의 번화가 상점에서 봤던 최고급 밀랍인형이 꼭 저런 모습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붓으로 그려 놓기라도 한 듯 리본 하나 흐트러지는 일 없는 정교한 미녀 말이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로즈니스도 이제 과거의 철부지 소녀가 아니었다. 이젠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녀도 아니며,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작년에 처음으로 가본 수도 켈티카의 사교계는 그녀에게 실망만을 안겨 주었다. 물론 기 대했던 것보다 훨씬 화려하고 멋졌으나 결코 친절한 곳도, 만만한 곳도 아니었다. 시골 영지에서 올라온 미모의 귀족 소녀로 주목받을 때는 좋았지만, 한 발 물러나 귀부인들의 살롱으로 들어서 보니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 작은 결점까지 여지없이 부풀려졌고, 예 절도 유행도 모르는 형편없는 아이로 치부되는 것은 일순간이었다. 클로에라면 그런 여자들에게 조금도 약점 잡히지 않고 지낼 수 있겠지 싶었다. 그녀는 국왕 다음가는 세력가의 딸이고, 그리고 또 정말로 완벽하니까. 차라리 처음부터 아버지가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공주인 양 키우지 않았더라면 실망도 적었을 테고, 남의 비위를 맞추려 노력이라도 해보았을 텐데. 제멋대로 하는 것에 익숙해 온 성격은 상황이 달라졌다고 쉽게 바꾸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와서 수도의 쌀쌀맞은 여자들 앞에서 몸을 낮추고 아양을 떨기엔, 벨노어 성의 작은 폭군으로 지낸 세월이 너무 길었다. 로즈니스는 우울한 심사를 누르며 경기장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차라리 오를란느 공녀처럼 검술이라도 배더라면 사교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요즈음 들어 반년 가량 함께 지냈던 양오빠가 자주 생각나곤 했다. 그녀가 잠깐이나마 검술을 배웠던 것은 그 시절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돌아보니 보리스가 당시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곁에서 재미 삼아 장난만 치고 있던 어린 자신의 존재도 너무 잘 보였다. 하긴, 자신이 지금껏 뭐 하나라도 열심히 한 적이 있었나. 본선 2차전의 마지막 경기들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그녀는 강피르 자작의 아들 루이잔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버지도 그를 보고 있었는데 그건 아버지가 그에게 많은 돈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켈티카 궁정의 무도회에 초대받아 갔을 때 가장 멋있는 소년이라고 생각된 것이 바로 루이잔이었다. '폐하의 검'으로 불리는 강피르 자작이 매너 있고 우아한 인물이라면 그 아들인 루이잔은 강인하면서도 진지해 보이는 젊은이였다. 하긴 사실을 말하자면 무도회 에서 남자들은 다 친절했다. 로즈니스는 그와 함께 딱 한 번 춤을 추었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잘생긴 소년 검사인데다 국왕에게 총애 받는 아버지를 둔 루이잔을 노리는 귀족 소녀들은 너무나 많았다. '그런 사람이니 나한테까지 차례가 돌아올 리 없잖아.' 씁쓸하지만 사실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려는데 바로 옆 경기장에서 장검을 들고 상대와 대치중인 소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잘못 보았겠지 했다. 일단 거리가 멀었고, 또 몇 년이나 흘렀고.... 그러나 소년이 검을 빠르게 그으며 몸을 돌리고, 돌려 묶은 머리채에서 빠져나온 감청색의 머리카락이 흩날려 입가를 가리는 것을 본 순간, 로즈니스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오빠였다. 한때 그녀와 함께 지낸 양오빠, 보리스 다 벨노어였다. 이런 곳에서 볼 줄이야,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아, 아버.......“ 급히 아버지에게 알리려고 고개를 돌리던 그녀는 다시 새로운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당시에 아버지는 오빠를 내쫓다시피 했고, 다시는 그 일을 거론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고집쟁이였던 그녀가 울며 떼를 써도 화를 내거나 침묵할 뿐, 그 이상의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지 않았나? 그래서.... 그녀는 서서히 이 오빠가 아버지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진 것은 아닌가 의심하게 되지 않았나? "흡!"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로즈니스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막았다. 예전 같았으면 여기까지 생각해 내지도 못했을 텐데, 사람들과 부대끼는 일의 어려움을 알게 된 로즈니스는 이제 진실을 말한다고 전부가 아니 라는 것을 아는 소녀로 자라 있었다. "왜 그러느냐 로즈? 너무 당황하지 말거라, 소자작은 잘 해낼 거다." 아마도 방금 루이잔이 가벼운 위기를 맞았던 모양이었다. 물론 로즈니스는 그걸 보지 못했지만 벨노어 백작은 지레짐작으로 그렇게 생각해 버렸다. 그는 딸이 루이잔에게 조금 관심이 있다는 것을 예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건 돈 문제도 있고 해서 줄곧 루이잔만을 지켜보느라 다른 경기장은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아.... 네에." 머리가 정신 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루이잔이 건방지게 자신을 몰아붙인 상대를 일격에 찔러 쓰러뜨리는 장면이 보였지만, 그녀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오빠와 다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버지의 눈에 띄지 않고 빠져나가 그와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본선3차전이 끝나고 준결승에 오른 다섯 명의 이름이 발표되었다. 국가명, 출신지 또는 영지, 그리고 이름 순으로 불렸다. "아노마라드, 켈티카, 루이잔 폰 강피르!" “하이아칸, 소드-라-샤펠, 볼프렌 지크룬트 아우스 소드-라-샤펠!" “오를란느, 오를리, 샤를로트 비에트리스 드 오를란느!" "아노마라드, 클란치 알리스테어!" “마지막으로 출신지 불명, 보리스 미스트리에!" 보리스는 곁에 선 헥토르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이 싸움 최대의 적수이자 그가 꺾어야만 할 상대는 헥토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군중들의 함성이 잦아들기를 기다려 눈을 가늘게 뜬 의전관은 다음과 같은 새로운 사실을 발표했다. “폰티나 공작께서는 내일 결선 경기에 출전할 다섯 분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성의를베푸시어 '기사의 기쁨‘ 안에 안락한 숙소를 제공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다섯 출전자 분들은 동행인들과 함께 짐을 정리하셔서 이곳 성문 앞에 다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기 있는 아스그힌드 집사가 각각 쉬실 곳으로 안내해 드릴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들은 모두 오늘 밤 성의 만찬에 초대되셨음을 알려드립니다.” 이것은 상당한 호의였다. 평민 출신이라 귀족들에게 견제당할 위험이 있는 사람들에게는특히 유리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만찬 이야기가 나오자 본선에서 떨어진 사람들로부터 부러워하는 듯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체첼 국왕의 처남인 폰티나 공작은 국왕 다음가는 아노마 라드의 2인자로서 그의 만찬은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뜻밖의 제안이었지만 보리스로서는 꽤 마음에 드는 제안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어젯밤 이솔렛이 그의 천막을 대신 지키며 잠을 자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보리스에게 챙길 짐은 별로 없었다. 이윽고 이솔렛과 함께 성 안으로 들어갈 때 그는 헥토르의 곁에 그가 아는 얼굴 몇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당연히 그들은 전혀 아는 체하지 않았다. 안내된 곳은 깨끗하지만 화려하지 않은 방이었다. 천장이 높았고 그 꼭대기에는 고풍스러운 촛대들이 일곱 개 달린 놋쇠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다. 귀족인 루이잔이나 샤를로트, 볼프렌에게 제공된 방과 보리스와 헥토르에게 제공된 방은 엄연히 달랐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오래된 석조 건물인 성 안에는 묵은 냉기가 남아 있었으나 방 안에는 몇 시간전부터 피워둔 듯한 벽난로의 불이 있었다. 오랫동안 비워 둔 방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두사람이 사용할 세숫물도 들여 놓아져 있었다. 바닥에 덩굴풀과 장식문자가 돋을 새김으로 새겨진 놋대야 속의 물에서는 향긋한 라벤더(lavender)꽃 냄새가 났다. “내일 우승자가 결정되고 나면, 본선 3차전까지 올랐던 사람은 공작이 여는 파티에 참여할 '의무'가 있다고 들었어. 소문으로는 폰티나 공작이 그 가운데에서 수행 기사를 몇 명 뽑으려고 한다는 거야." 세수를 마친 이솔렛이 얼굴을 닦은 수건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보리스는 침대 위에 앉아 무표정하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답했다. "좋은 방법이군요. 은혜와 실리라." "영리한 사람인 게지. 그리고 평민 출신 소년들한테는 나쁘지 않은 기회이기도 하고." "혹시 제게도 그런 요청이 오는 건 아니겠죠?“ "적절히 거절할 말이나 미리 만들어두는 것이 어때?“ 베개가 참으로 푹신했다. 몇 년만에 만져보는 진찌 새털 베개와 이불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부츠를 벗고 침대에 드러누우니 몸이 나른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솔렛.... 당신이 나빴어요.....“ 중얼거리다가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솔렛이 다가와 의자에 기대며 물었다. “내가 뭘?” “미스트리에라는 성을 쓰게 한 것 말이에요." 이솔렛의 아버지, 일리오스 사제의 이야기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드디어 준결승 진출자가 발표되고 나자 사람들은 떠들어댔다. 미스트리에, 저 전설적인 우승자인 카민 미스트리에의 아들이 다시 한 번 강피르 자작의 아들을 패배시키기 위해 돌아왔노라고. 아들이라고? 우스운 노릇이었다. 이솔렛과 함께 있으면서 말거리가 되고 싶지 않아 남매인 체 한 것이 엉뚱하게 번져버렸다. 나이든 귀족들 가운데 몇 명은 이솔렛의 얼굴을 보자마자 일리오스 사제의 소년 시절 모습을 딱 떠올리며 당황해했다. 짧은 금발과 등에 잡아맨 쌍검, 가벼운 몸놀림, 고상하고 자존심 높은 얼굴 생김, 심지어 빼어난 미모까지도 똑같이 닳아 있는 것이다. 루이잔 폰 강피르에게 돈을 걸었던 사람들이 은근히 후회하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배당이 낮지만 확실한 곳이라 해서 걸었던 건데, 배당높은 다크호스가 우승한다면 잃은 돈은 고사하고 체면조차 구겨지는 꼴인 것이다. 덕택에 루시안 칼츠의 이름까지 곳곳에서 돌아다녔다. 선견지명이다, 그게 아니고 정보가 샌 거다, 둘은 본래 친구라더라, 모종의 됫거래가 있다..... "눈에 안 띄고 지내긴 다 틀렸네요. 섬의 아이들도 소문쯤이야 다들 들었을 테고 섬에 돌아가면 무슨 소릴 들을지 궁금한걸요. 당신 아버지의 이름이 이렇게 무거운 것일 줄이야."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이미 생각하고 있었어." "짐작하면서도 일부러 제게 그 이름을 쓰게 했다고요?“ "이상할 거 있겠어? 어차피 우승하면 눈에 띄어." "우승은...... 이젠 함부로 패할수도 없게 되었다. 졌다가는 여지없이 일리오스 사제의 이름까지 더럽힐 입장에 처해버렸으니까. 그러나 이솔렛은 잠시 후 미소를 보였다. “무겁다고 했지? 하지만 넌 이미 수많은 이름들을 짊어지고 있잖아? 너를 낳은 집안, 잃어버린 형제, 섬이 준 이름, 이실더, 아니 나우플리온 사제님의 이름........ 너는 이름을 벗어놓고 가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야. 사람은 다른 누군가로부터 삶의 자세를 강요받을 수 없어. 난 오히려 이 이름들이 네게 타고난 본성 이상의 힘을 주고 있다고 생각해. 지난 이름들은 서서히 새로운 이름들과 교체되지. 난 네게 잠깐 동안 사용할 이름을 빌려주었을 뿐이야. 그 이름의 의미는 '명예'이고, 넌 정면 돌파하여 그것을 움켜쥘 거야."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이솔렛은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좀더 심한 것을 말해줄까? 이젠 네 이름에 돈을 건 사람들까지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돼." 보리스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들며 말했다. "그 루시안이라는 아이, 만난 일이 있는 사람이에요." 이솔렛이 눈을 약간 크게 떴다. "아는 사이라고? 섬에 오기 전에?“ "그냥 잠깐 스쳐갔을 뿐이에요. 그는 내 이름을 듣지 못했으니 날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죠. 그가 내가 본 것과 같은 성격이라면 날 보고 모르는 체 할 리가 없거든요. 어쨌거나 그가 왜 내게 돈을 걸었는지는 전혀 모르겠어요." 이솔렛은 도박판의 열기가 최고조에 이른 예선전 전날 밤에 루시안과 나누었던 대화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네가 누군가의 본성에 확신을 갖다니 놀랍구나." "완전한 확신은 아니 에요." "스쳐지나간 사람의 성격일 뿐인데, 그의 모습이 네게 인상깊었나 보구나." "글쎄요,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루시안과 스쳐간 일을 떠올리는 보리스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그의 거리낌없는 밝은 성격이 부러웠는데,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된 것이 그리 탐탁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때 만난 일을 말하며 자신을 밝힐 생각도 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네가 싸우는 것을 죽 지켜보았어. 다른 사람의 모습도. 네게 승산은 충분해. 하지만 묘하게도 넌 경기 도중에 가끔씩 당황하는 것 같았고, 그로 인해 종종 타이밍을 놓쳤어. 무슨 이유지?“ 보리스는 고개를 흔들다가 대꾸했다 "뭐라 말하면 좋을까, 내 것이 아닌 실력이 내 몸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에요. 언제 익혔는지 잘 알 수 없는 것들이 순식간에 발휘되고, 그리고 사라져버리곤 해요. 위기의 순간에 갑자기 나를 도와주고 다시 꼬리를 감춰버리는 듯한 느낌이죠. 그게 도대체 뭘까요." 이솔렛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단아한 옆얼굴이 살짝 기울어져 있었다. '내 생각엔 말이야.... 혹시 네가 티그리스의 어떤 단계를 넘은 것이 아닐까 싶구나." "티그리스라고요? 난 배운 적이 없어요." "글쎄, 잘은 모르지만 티그리스는 초반에 연습의 절대량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선이 있고, 그 선을 넘기까지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잘 알 수 없다고 하던데." 보리스가 의아한 눈동자를 하고 있자 이솔렛이 일어나 벽난로의 열기를 조절했다. 아무리 오래 쓰지 않던 방이라 해도 지금은 7월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물이 든 주전자 하나를 찾아내더니 흔들어 보고 벽난로 위의 걸쇠에 걸어 놓았다. "진실은 이실더 님한테 여쭤보아야 알 수 있겠지만, 우리의 고유한 두 가지 검술은 모두 옛 왕국에서 내려온 것들이기 때문에 이상한 점들을 많이 갖고 있어. 예를 들면 티엘라. .. 매우 높은 단계에 이르러야 사용 가능한 것이지만, 티엘라에는 자신을 죽이면서 동시에 상대를 죽이는 희한한 기술이 있지." "상대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면서, 동시에 상대의 급소를 찌른다는 말인가요?“ "아니, 그런 게 아냐." 고개를 흔들며 이솔렛이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 자신의 기력과 적의 기력을 연결시켜 동시에 다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해. 이 말이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마지막 한 방울의 힘이라도 더 남아있는 쪽이 이기고, 그리고 결론적으로 둘 다 죽게 되는 거야. 이 기술로 대략 3분의 1 이상의 기력을 쏟아내고 나면 승패에 관계없이 어떤 사람도 살아날 수 없다고 하니까, 그야말로 죽음의 기술이라 할 수 있겠지." 말을 맺으며 이솔렛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되었다. 보리스는 그 말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을 그만두고 자신의 변화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움직임이 가벼워진 것은 섬에서부터 있었던 일이지만, 자신의 몸이 생각지도 않은 반사적 반격을 해내는 것은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잃었던 기억을 되찾은 것처럼 위기의 순간마다 순식간에 떠오르는 동작들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란 말인가. "티그리스는, 본능대로 행동하는 호랑이의 공격처럼 자연스럽게 몸과 일체화가 되는 검술이야. 이실더 님은 너를 하나뿐인 제자로 인정하고 있어, 네게 달리 무엇을 가르치겠어?“ 드디어 보리스는 수긍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면 물어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따르는 수밖에 없군요. 사실 전 이 모든 것이 윈터러의 영향이 아닐까 겨정하고 있었어요." "윈터러의 영향이라고?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봐." "예전에도 느낀 일이 있죠. 윈터러는 빠른 승부와, 피를 좋아해요. 그렇기 때문에 원하지 않는데도 자꾸만 더, 한층 사나운 공격으로 이끌고 가죠. 내 손이 의도한 범위 이상으로 검이 뻗어나가 단지 위협만 하려고 했던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히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도.... 상대의 목을 찌르려 하는 손을 가까스로 멈춘 일이 있어요. 단지 검만 겨누면 끝나는 승부였는데, 더 나아가려는 제 손을 멈추기가 몹시 힘들었죠." "섬을 떠란 후로 윈터러는 한 번 뽑은 일도 없지 않니?“ "뽑든 안 뽑든 관계없어요. 난 이미 윈터러의 인지 범위 안에 들어가 있고, 그것이 언젠가 내게 무엇을 요구할 거라고 생각해 왔어요. 모르죠, 이것이 그것일지." “만일 그렇다고 하면 어쩔 테야?” 섬에서 가져온 냄새 없는 차를 꺼내 두 찻잔에 조금씩 나누던 이솔렛이 손을 놓고 침대에 반쯤 누운 그를 내려다보았다. "너의 검이고, 너의 물건이지. 너 스스로 거기에 맞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야. 그런들 어쩌겠어? 그것이 너를 가고 싶지 않은 길로 이끌려 한다면, 네 힘껏 잡아 당겨서 반대쪽으로 내팽개쳐 버려. 말을 듣지 않으면 짓밟고, 네 피를 그의 피로 갚도록 만들어." 단어 하나하나에 깃들인 선명한 어조가 새삼스레 강한 각인을 남겼다. 이솔렛은 늘 그렇게 말했다. 새롭고 특별한 의견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삶에서 해온 그대로 말했다. 굴복도 용서도 화해도 없다면, 싸움뿐이라고. .보리스도 알고 있었다. 이솔렛은 상처 입은 사람을 감싸주며 쉬도록 하는 자애로운 여성이 아니라 네게 상처 입힌 자에게 값을 치르게 하라고 말하는 전사의 연인이었다. 베어진 목을 껴안고 애통해하기보다는 검을 비껴 차고 복수에 나서는 전사들의 누이였다. 그녀 자신 또한 전사이며 달여왕의 숙녀, 검의 딸이 아닌가. 참고 견뎌 흘려보내는 것을 자신의 미덕으로 갖지 않으며, 죄를 응징하기 위해 자신의 손을 더럽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백지와 불꽃처럼 선명한 존재다. 그녀는 누군가의 안식처가 아니었다. 보리스 역시 그녀와 함께 황야를 달릴지언정, 안전한 곳에 남겨두고 기다리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녀보다는 자신의 내면이 더 약하다. 자신의 삶은 이토록 상처투성이지만, 상처가 많다는 것은 부드럽다는 말도 된다. 그는 갑옷 없이 분투하는 전사였다. 그리고 상처로 강해졌다. 표면이 찬란한 방패가 그렇듯 이솔렛에게는 오히려 쉽게 지워지지 않는 상흔이 있었고, 그것을 지우는 방법은 함께 달리며, 서로에게 등을 맡긴 채 싸워나가는 것뿐이었다. 그렇기에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가 책임지려 한 수많은 이름, 그 안에 그녀의 이름 역시 있음을 알기에..... 강철 칼날의 표면처럼 아름다운 그녀의 이름을 위하여, 자신이 이 자리에서 검을 잡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4. 폰티나 성의 위험한 밤 보리스를 비롯한 다섯 사람은 성의 1층과 2층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날 저녁 내내 지하에 마련된 넓은 연습실을 자유롭게 사용해도 좋다고 허락 받았다. 보리스는 굳이 연습실을 찾을 생각은 없었으나 오랜만에 들어온 귀족의 성이 묘한 불편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에 일부러 주변도 둘러볼 겸 거처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걷는 동안 여러 개의 초상화를 지나쳤다. 그들은 하나같이 엄숙한 표정에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반신상인 경우 검을 허리에 찬 사람이 유난히 많았다. 여인들 가운데서도 성장이 아닌 활달한 사냥복 차림인 인물이 여럿이었다. 그녀들 가운데 특출하게 빼어난 미인은 드물었다. 폰티나 성 '기사의 기쁨'은 주로 아름답다는 느낌이 강한 벨노어 성과는 많이 달랐다. 오래되었고, 견고했으며, 강인한 인상이었다. 그런데 가끔씩 성 전체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아기자기한 장식들로 꾸며진 장소와 마주치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9층에 마주친 작은 테라스와 세 개의 화려한 의자가 특히 그랬다. 등나무 덩굴이 곱게 늘어진 대리석 난간 안쪽에는 실내장식이 발달한 하이아칸에서 수입한 듯한 값비싼 오색 타일이 깔려 있었다. 영주 가족들을 위해 마련된 것처럼 그곳을 보며 보리스는 약간 의아한 것을 느꼈다. 폰티나 공작에게는 자식이 두 명 그러니까 가족은 넷 아니었던가? 그런 문제야 어찌쐈든, 보리스는 천천히 1층으로 내려오고 결국 지하까지 왔다. 지하에서 갈 수 있는 곳은 연습실 한 군데밖에 없었다. 다른 곳들은 군사적인 용도로 쓰이는 듯 손님들이 출입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연습실 입구까지 왔을 때, 안쪽에서 사람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걸음을 멈췄다. 처음에는 이곳에 올 수 있는 다섯 명 중에서 누가 저렇게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나 했다. 그러나 곧 그들이 형제간이라는 사실을 알수 있었다. "자, 형이 하는 걸 다시 봐. 검을 뻗을 때 신경을 집중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라.....“ 공기 가르는 소리가 시원스레 울렸다. 연습장은 꽤 넓은 모양이었다. "봤지? 팔에 힘을 잔뜩 줘선 안 돼. 빠르게 대처할 수도 없고, 적이 너의 방향을 다 간파해 버리거든." "그렇지만 손에 힘을 주지 않으면 난 검을 들 수가 없어!" 마주 보고 웃는 듯한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한쪽은 천진한 목소리를 가진 어린 소년이었다. 기껏해야 열 둘에서 열 셋 정도나 되었을까 싶은. "우리 미르히가 언제 형하고 정식으로 싸울 수 있게 될까!" 형이 동생의 몸을 덥석 들어올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꼬마의 웃음섞인 대답도 들렸다. “난 형하고 안 싸울래. 형하고 이렇게 노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거든!" "안 돼. 너도 네 몸을 스스로 지킬 수 있게 돼야지. 아버지께서는 너와 내가 둘 다 훌륭한 검사가 되길 바라시거든. 아버지와 삼촌들처럼 말이야." "그렇지만 형이 두 사람 몫만큼 잘하니까, 난 안 해도 될 것 같아. 그 대신 형이 나를 지켜주면 되지 않아?“ 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형이 또 내 머리 흐트러뜨렸어!" 다시 한 번 웃음소리, 보리스는 왜 자신이 여기 서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의혹에 사로잡혔다. 들어가도 좋고, 떠나도 좋았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르히, 이제 그만 돌아가 여긴 나 혼자 사용하는 곳이 아니야. 다른 출전자들이 왔을 때 우리들이 웃고 떠들면서 전부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예의가 아닐 거야." "싫어.... 형하고 좀더 있고 싶은데........ 집에 가면 형은 아버지하고 연습하느라 나하고 놀아줄 시간도 없잖아." "놀아 줄게. 약속해." 마치 환청 같았다.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 연극처럼 되풀이되는 느낌이었다. "정말이지? 그럼 미르히는 형만 믿을 거야. 그리고 내일은 당연히 형이 우승하겠지?“ "그러도록 해야겠지." 잊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들은 누구. 큰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폰티나 집안의 아이들이 아니라면 다섯 출전자들밖에 없지 않은가? “형은 내일 이기기 위해서 좀더 연습해야겠다. 내일 어려운 상대가 있을 것 같거든." "그래도 형이 이길 거야! 왜냐면 형은 무지 강하고, 또 벌써 네 번이나 우승했잖아, 안 그래?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우리나라에서 최고잖아! 그러니까 형이 이길 가능성이 제일 높지." "모든 일은 닥쳐 봐야 아는 법이야. 지나치게 자신을 과신해선 안돼. 아버지는 훌륭하시지만 난 아직 멀었거든." 그 때 보리스는 마음을 결정했다. 몸을 돌려, 다시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심하게 고동치는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켰을 때는 이미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주문을 외우듯 되풀이해서 생각했다. 저들은 그냥 저들일 뿐이다. 그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단지 형제라는 것뿐, 그것말고 무슨 공통점이 있겠는가. 그와는 다르다. 그냥 몇 마디.... 비슷했을 따름이다, 그건.... 어느 형제에게나 있을 수 있는 대화니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 이솔렛 말고도 낯선 시종 한 사람이 들어와 있는 것이 보였다. 시종은 두 벌의 옷을 가져왔고, 만찬에 참석할 때 입을 것들이라고 했다. 이솔렛은 그녀를 위해 가져온 옷을 제대로 펼쳐보기도 전에 잘라 말했다. "이렇게 낭비가 심한 옷은 처음 보겠군요." 보리스는 마음을 가다듬느라 일부러 입을 꾹 다물고 옷을 집어들어 펼쳐 보았다. 벨노어 성에서 입던 것들보다는 간소하고 좋았다. 그들이 평민이라는 것을 감안해서 그렇게 화려한 옷을 보내지는 않은 듯했다. 그러나 섬에서만 자란 이솔렛의 눈으로 보기엔 충분히 사치스 러운 옷이었다. "그냥 입던 옷을 입을 테니 도로 가져가요." "그건 안됩니다. 공작림의 만찬에 그런 복장으로 참석하실 수는 없습니다." 시종은 차갑게 대꾸한 뒤 옷을 흘끗 본 다음 말했다. "아가씨한테 잘 어울리겠는데 왜 그러시죠? 아무리 평민이라지만 공작님의 성 안에 들어온 이상 불손함에도 정도가 있는 거예요. 끝내 이 옷을 입지 않겠다면 만찬에는 불참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 예상대로 대뜸 대답이 나왔다. "좋을 대로 해요. 만찬에 부른 것은 그쪽이지, 이쪽에서 가겠다고 부탁한 것은 아니니까" "알았어요. 도로 가져가죠. 한 분 몫의 식사는 방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 그 때 보리스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잠깐, 그냥 두고 가세요. 조금 더 이야기해 볼 테니까." 시종은 보리스를 흘끗 쳐다보고 다시 이솔렛의 얼굴을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만찬은 정각 7시에 시작됩니다. 조금 일찍 모시러 올 테니 미리 준비하고 계시지요." 예의바르긴 해도 딱딱한 목소리였다. 시종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마자 이솔렛이 눈을 감았다가 뜨며 조용히 말했다. "그래, 이야기해 봐." 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솔렛의 옷을 집어들어 앞뒤로 돌려 보았다. 이솔렛이 흔히 입는 흰색 옷이 아니어서 조금 낯설긴 했다. 그러나 산뜻하게 주름이 잡힌 파란 새틴(satin) 치마 뒤쪽에 은회색 띠가 달린 우아한 드레스 역시 상상 외로 잘 어울릴 듯 생각되었다. 게다가 귀족들이 저녁 만찬에서 흔히 입는 옷들에 비하면 훨씬 점잖은 디자인이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그런 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솔렛은 대륙 사람이 아니었고, 그녀가 사치스럽다고 느낀다면 그건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난. 당신 의견을 존중해요. 억지로 뭔가 권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당신을 여기서 혼자 식사하게 내버려두고 나만 만찬장소에 가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군요." 이솔렛은 앉은 채로 보리스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리더니 조금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리고 입을 열어 말했다. “너마저 가지 않는 것은 문제가 되겠지만, 사실 너 혼자 보내는 것도 탐탁지 않아. 지금껏 많은 일을 겪어온 넌 어떤 상황에서도 혼자 잘 대처할 수 있을 만큼 노련할까?” 보리스는 미소지었다. “그렇지 않아요.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은 너무 많았고, 그 중 절반은 도망치는 것으로 해결한걸요. 당신이 함께 있어 준다면 도움이 될 거예요." 둘은 아직 스물도 넘지 않은 소년과 소녀였다. 어른들의 세계 가운데서도 가장 교묘한 술수들이 존재하는 귀족들의 모임에서 무슨 일을 겪게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좋지 않은 예감이 찾아왔다. 만찬장소에 들어서기 직전, 이솔렛이 조그맣게 미소지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어떻게 보면 나도 어린아이 같은 고집이 있단 말이야." 보리스는 고개를 숙였다. 실은 표정을 숨기려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불편해하고 있는 이솔렛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나오는 미소를 누를 수가 없어 곤란을 겪고 있었다. 우스워서가 아니라 마음이 설레는 것이다. 그녀가 아름다워서 마음 끌린 것만 은 아닌데도, 지금처럼 예상 못한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 기쁘기도 하고 자꾸만 쳐다보고 싶은 기분이었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정해진 자리에 앉고 나니, 그녀를 바라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자신 혼자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날 만찬 장소에는 내일 경기에 임할 다섯 명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일행들을 비롯하여 폰티나 공작의 손님인 여러 귀족들까지 참석해 있었고, 따라서 주위에는 멋지게 차려입은 귀부인이나 귀족 소녀들이 여럿이었다. 그런데도 목걸이 하나, 보석반지 하나 갖지 않아 마치 낯선 곳에 잘못 방문한 그림책 속의 소녀 같은 이솔렛에게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쏠려 있었다. 그림책에서 나온 소녀는 자리에 앉았다. 그들을 안내해 온 시종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는 가운데 반짝이는 은제 식기들이 서로의 얼굴을 비추었다. 나란히 앉은 그들의 맞은편은 아직 비어 있었고, 그 너머에는 원형 기둥으로 가려진 회랑이 내다보였다. 보리스는 혹시라도 그를 알아볼 사람이 있을까 싶어 일부러 고개를 높이 들지 않고 테이블 위를 주로 바라보고 있었다. 고향 트라바체스에서 살 때에도 찾아오는 외국 손님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 벨노어 백작 저택에 살 때는 몇 번인가 열린 파티, 특히 벨노어 백작 부인의 생일 파티 때 수많은 아노마라드 귀족들이 와서 그의 얼굴을 보았던 것이다. 물론 당시와는 얼굴이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전혀 가능성 없는 짐작만은 아니었다. 그러고 있자니 음식 시중을 드는 하녀들이 다가와 각 사람 앞에 새콤한 냄새가 나는 살구빛 음료를 따라 주었다. 호인다운 인상을 지닌 폰티나 공작과 그의 아름다운 아내, 그리고 그들의 딸인 작은 미녀가 들어서자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벼운 감사를 표했다. "오오, 모두들 와 주어서 고맙소. 다들 편히 즐겨 주시길 바라오. 특히 오늘의 주인공인 네 신사분과 한 분의 숙녀께는 긴장을 풀 수 있는 좋은 자리가 되길 바라오이다. " 이윽고 음식이 나오기 시작하자 폰티나 공작 부인이 엷은 미소와 함께 오늘은 먼 곳에서 온 손님들이 많아 하이아칸 식 음식을 준비했노라고 말했다. 귀족들은 거의 다 하이아칸 별장을 갖고 있었음으로 하이아칸음식이라는 말에 대부분 환영하는 눈치였다. "이런, 제 고향의 음식을 이 먼 곳에서 맛보게 되다니 깊으신 배려에 황송함을 금치 못하겠군요. 이건 마치 제가 만찬을 베푼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정말로 멋진 식탁이에요. 하이아칸 궁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우아하고 정교한......“ 누구보다도 먼저 입을 열어 치하를 시작했으나 내용은 어쩐지 잘난 체하는 듯한 목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의 시선이 약간 쏠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내일 5강전에 나갈 다섯 사람 가운데 한 명인 하이아칸출신의 소년, 아니 왕족이었다. 볼프렌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하이아칸 여왕의 사촌이라고 했는데 예술적으로 살짝 들린 콧날과 어깨에 닿는 갈색 고수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긴 옆얼굴이 꽤 준수해 보이는 젊은이였다. 여자들보다 더 화려한 유색 보석들로 옷 전체를 번쩍거리게 만들고 목에는 여러 겹으로 된 금목걸이까지 걸고 있는 걸로보아 하이아칸 왕궁이 대륙 최고의 알짜 부자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헛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게 했다. 남부의 더위가 물씬 느껴지는 음식들이 식탁을 점령하고 있었다. 올리브 기름에 절여 구운 닭고기에서는 무언지 모를 향신료 냄새가 물씬 풍기고, 볶은 쌀을 포도잎에 싸 놓은 것을 하나 집어먹어 보니 특이한 신맛이 섞여 났다. 돼지고기를 즐기지 않는 하이아칸의 풍습 에 따라 돼지고기가 아닌 양고기로 만든 햄이 두툼하게 썰려 나왔고, 토마토와 고추가 듬뿍 곁들여진 쇠고기 양념 구이 곁에는 얇게 펼쳐 구운 밀가루 빵이 있었다. 하이아칸 식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 밀가루 빵에 붉게 양념된 쇠고기를 싸서 입에 넣었다. 토마토 맛이 나는 새콤한 양념맛과 잘 어우러지는 요리였다. "역시! 이 요리는 향신료 맛이 제대로 나야 되는데 성의 여주인께서는 훌륭한 취향을 갖고 계신 듯하군요. 그렇지만.... 이 빵은 조금 덜 익히는 편이 좋았을 텐데, 뭐, 여긴 하이아칸이 아니니 모든 것이 똑같을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안 그런가요?“ 하이아칸 녀석은 말이 많았다. 조금 후에는 아노마라드 귀족들조차도 약간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북부의 풍습에서는 여주인이 내놓은 음식을 함부로 품평하는 것은 상당히 무례한 짓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화제들은 귀족들 사이에서만 은밀히 오갔을 뿐, 평민인 보리스와 이솔렛, 그리고 헥토르 일행에게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명목상 주인공이 어쩌고 했지만 어디까지나 이것은 귀족들의 파티였고, 평민들은 어쩌다 끼여든 들러리에 불과했다. 만찬에 참여한 손님은 모두 스무 명 가량.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이솔렛만을 가끔 쳐다보고 있던 보리스는 문득 귀를 찌르고 들어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낯선 목소리 같았다. 왜 이렇게 다른 목소리들과 선명하게 구분되어 들려오는지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정말입니다. 제 딸아이가 얼른 커서 공작부인처럼 훌륭한 안주인이 되어 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주인이 없는 성이라는 것은 황량한 무덤이나 다름없는 것이지요." 거기에 대답하는 목소리. “우리 클로에도 부족한 점이 많답니다. 특히 남부 관습에는 그리 익숙하지 못하지요. 아시다시피 어려서부터 너무 오랫동안 켈티카 생활을 해 온 탓입니다. 그리고 백작께서는 따님을 위해서라도 어서 새 안 주인을 들이셔야지요." 다시 남자의 목소리, 귀를 뚫고 들어오다 못해 뇌리에 와 박히는 목소리, 일거에 되찾은 기억을 그릇에 든 유리알처럼 바닥에 흩어버리는 목소리가 그의 온 몸을 꼼짝못하게 움켜잡아 버렸다. “오오, 영애께서는 흠잡을 데 없는 아노마라드 최고의 아가씨로 소문이 자자한데 어찌 그런 겸양을 하십니까? 두 소녀가 친구가 된다면 참으로 배울 것이 많을 터인데요. 그렇지 아니하냐, 로즈?" "네, 아버지."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이 유령처럼 튀어나와 이성을 마비시켰다. 보리스는 고개를 홱 쳐들고 똑바로 그 쪽을 쏘아보았다. 보였다. 그가 잊을 수 없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거기에서 웃으며 여주인과 대화를 나누다가, 동시에 이상한 이끌림에 사로잡혀 그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보였다. 짧은 시선의 교환이 긴 식탁 사이를 꿰뚫었다. “!” "......!" 사람들이 식탁으로 내민 팔꿈치와 손에 의해 서로의 얼굴은 곧 가려졌고, 다시 드러나고 또 가려졌다. 하인들이 꼬챙이에 펜 거대한 고깃덩어리들을 가지고 다니면서 조금씩 베어 주고 있었다. 보인다, 다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상황은 이미 머릿속을 꿰뚫고 지 나간 후였다. 가니미드 다 벨노어, 벨노어 백작이다. 이솔렛은 각자의 앞에 놓인 걸쭉한 살구빛 소스-고기를 찍어 먹는-를 보며 이 맛에만은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음식을 가리지 않는 보리스도 처음에 내준 음료를 한 모금 마신 다음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던 것이 기억났다. 처음에 준 신맛 나는 음 료와 비슷한 재료로 만든 이것을 놓고 귀족들은 '요구르르‘ 라고 불렀는데 그녀가 느끼기에는 흡사 상한 것 같은 맛이었다. 그녀가 결국 '먹지 않으면 그만’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 보리스는 단순히 소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식사를 멈춘 것이 아니었다.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온 몸이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눈을 내리깔고 있었지만 바라보는 초점이 없었다. 말을 거는 대신, 이솔렛은 식탁 아래로 손을 내려 그의 무릎에 살짝 얹었다. 그런 상태로 조금 지나자, 보리스가 흠칫 놀라며 이솔렛을 쳐다보았다. 이솔렛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을 뿐이었다.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보리스가 정신을 차린 것도 무릎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뿐, 어떤 질문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시 식사로 주의를 돌렸다. 그러나 입가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닙니다. 자꾸 그런 말씀만 하시니 부담스러워서 이 좋은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는군요." "저런! 소자작께서도 내일의 경기를 두고 긴장하고 계세요? 어려운 적수는 전혀 없어 보이는데.......“ "적수란 서로 검을 맞대기 전엔 그 깊이를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루이잔 폰 강피르는 양쪽의 소녀들로부터 줄곧 질문을 받으면서도 침착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몇 번인가 보리스의 얼굴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식사가 끝나자 모두가 일어나 대형 살롱에 마련된 후식을 들러 갔다. 살롱에는 십여 개 이상의 2인용 소파와 1인용 소파, 그리고 여러 개의 안락의자 등이 놓여 있었고, 카드 게임 등을 할 때 쓰는 것인 듯한 작은 테이블들도 있었다. 거기에서 보리스는 너무나 뻔뻔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헥토르 때문에 다시 한 번 긴장해야 했다. 아노마라드 출신의 평민 클란치 알리스 테어가 되어 있는 헥토르는 흡사 자신의 연기 실력을 과시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에게 과장되게 인사하며 실력을 치하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미 벨노어 백작의 존재 때문에 신경이 곤두설 대로 곤두서 있는 보리스로서는 그와 장단맞춰 놀아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언뜻 로즈니스의 모습도 보였지만 아는 체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향기로운 차와 더불어 꿀을 바른 호두와 우유치즈를 넣은 일종의 크레페가 나오고, 잠시 후 두텁게 바른 초콜릿 위에 살구 잼을 겹쳐 바른 켈티카 고유의 초콜렛 케이크가 나오자 귀족들 사이에서 감탄성이 잇따랐지만 한 입 먹어볼 마음도 들지 않았다. 이미 보리스는 오늘밤 성을 빠져나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빨리 만찬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 홀로 생각할 수 있게 되기만을 빌었다. 이솔렛이 앞에 놓인 후식 접시를 바라보다가 나직이 말했다. "아는 사람을 만났지?“ “네." "좋지 않은?“ “네." "그래. 이따가 이야기하자." 그것이 전부였다. 보리스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이솔렛이 차를 더 가져오려고 일어나서 몇 걸음 걸어가는데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앞을 가로막았다. "아, 오늘 수많은 귀족 젊은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아가씨로군. 본인에게 그대의 사랑스런 이름을 들을 수 있는 행복을 주지 않겠나?“ 그 목소리가 왜 익숙한지 곧 깨달았다. 오늘 만찬을 드는 내내 그의 말소리가 흡사 배경 음악처럼 깔리고 있었던 것이다. 식사는 어디 다른 입으로 했나 싶을 정도로 끊임없이 떠들어대고 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눈앞에서 하이아칸 왕족 볼프렌이 최대한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이솔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솔렛은 그런 질문에 적당히 대꾸할 만큼 부드러운 성품이 아니었다. 그대로 다시 걸음을 옮기는데 볼프렌이 과장된 손짓으로 다시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아니, 어이!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렇게 무시를 하나, 글쎄! 이 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대륙에서 가장 고귀한 왕가 중 하나의 후손인데, 그런 내 말이 들을 가치가 없다는 건가?“ 다른 데서 마주친 평민이 이랬을 것 같으면 '어디 감히!'를 외치며 노발대발했을 터인데 타국 공작의 만찬이고, 또 상대가 예쁜 소녀인지라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제야 이솔렛은 고개를 들며 이 자를 화나게 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끌 필요는 없다고 생각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이랬다. “용건이라도?” 볼프렌의 얼굴이 심하게 붉어졌지만 화가 났다기보다는 당황해 있는 것 같았다. 미모의 평민 소녀한테 점잖은 체 수작을 걸면 금방 넘어오리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예상 밖의 상황이었다. "이.... 이름을 물었네." "이솔렛. 미천한 평민이라 그 밖의 이름은 없군요." 겨우 이성을 되찾은 볼프렌이 그 이름을 입안에서 굴려 보더니 만족스런 미소를 떠올렸다. 변화가 참 빠른 인간이었다. "이솔렛, 그래, 이솔렛. 참 멋있는 이름이군. 평민 중에서도 이렇게 이름을 잘 짓는 자가 있다니.... 내가 일전에 새로 사들인 종마의 이름도 붙여 보라고 하고 싶은데." 볼프렌은 본래 귀족들 중에서도 경우 없는 말을 잘 내뱉는 편이었다. 종마와 소녀를 똑같은 걸로 취급해 놓고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솔렛은 오히려 다른 문제로 기분이 상해서 대뜸 쏘아붙였다. "저의 아버지는 말의 이름 따위는 짓지 않습니다. " 한 바퀴 돈 셈이었지만 어쨌든 상대의 불쾌감을 알아챈 볼프렌은 사과하는 체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응답했다. "아아, 내 사과하지, 사과해. 평민에게도 나름대로 명예란 것은 있군, 그대처럼 오만한 얼굴을 가진 소녀에게는 어울리는 장식품이지. 내 그러한 그대의 명예를 조금 더 높여 주고 싶은데, 내일 경기에서 내게 그럴 기회를 주겠나?“ 이솔렛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갑게 대꾸했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의 명예란 자신의 검으로 얻는 것일 뿐인데, 어찌하여 남이 대신 명예를 가져다 줄 수 있겠습니까?“ 검을 든 용사나 할 법한 대답을 들은 볼프렌이 약간 움찔하여 이솔렛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잠시 후, 주워들은 말을 인용한 것일 거라고 멋대로 해석해버린 그는 다시 한 번 수작을 걸려 했다. "무슨 뜻인지 모른다니 내 친히 말해 주어야겠군. 그대의 향기로운 손수건, 또는 고운 소맷자락과 같은 것을 내게 준다면 그것은 내게 행운의 표지가 되고, 또한 내 그것을 검에 감고 경기에 임해 승리하여 그대의 명예를 드높일 거라는 말이었어, 역시 평민이라 이런 것은 잘 모르는군, 안 그런가? 다시 말하지만 나처럼 고귀한 왕족에게서 이런 제의를 받는다는 것은 그대와 같은 아름다운 사람이 평생토록 내 곁에서 봉사하여도 감히 갚을 수 없는 크나큰 은혜이지. 하지만 원한다면 그런 기회를 줄 수도 있어. 그것 또한 명예로운 일이 될 수도.......“ 이솔렛은 이해가 느린 사람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파악하고, 볼프렌의 등 너머로 이 사태를 눈치채고 걸어오는 보리스의 얼굴을 발견하고,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찾아냈다. 그녀는 한 걸음 물러나며 귀족 못지 않은 오만한 말투, 타고난 자부심에서 우러난 말투로 잘라 말했다. “당신의 행운의 표지는 곧 제 동생 보리스의 검 끝에 달려 제게 되돌아을 터인데, 굳이 수고할 필요가 있을까요?” 볼프렌이 그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잠깐의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그보다 더 빨리 그 말을 이해한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이 한 번 쳐다보지도 않은 의자 쪽에서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하하하하하.....“ 볼프렌이 황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웃음소리의 주인공은 이 성의 작은 여주인, 클로에 다 폰티나였다. 긴 금발로 살짝 가려진 입가에서는 지금껏 보여주던 모습과는 달리 경쾌하고 빠른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보리스가 다가와 걸음을 딱 멈추는 순간 웃음소리가 그쳤고, 다른 목소리가 곁에서 들렸다. “마침 다들 여기에 있군. 잠시 재미있는 이야기나 나누어 볼까 싶은데 모두들 앉지." 폰티나 공작이 그곳에 서 있었다. 클로에는 재빨리 새침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주위에는 루이잔과 샤를로트 공녀도 있었다. 공작을 따라온 시종 하나가 눈치를 보더니 재빨리 가서 헥토르를 데리고 왔다. 그리하여 다섯 사람은 폰티나 공작과 함께 살롱 한쪽의 구역을 차지하고 앉았다. 이들 외에 함께 앉은 것은 본래부터 거기에 있던 클로에와 이솔렛뿐이었다. “매년 빠짐없이 실버스컬을 관람해 왔지만 올해처럼 전체적 수준이 높은 때도 드물었던 듯하오. 또한 이번 실버스컬에서는 참 개성있는 분들이 두각을 드러내었소. 출신지도 다양하고, 신분도 다양하오. 더구나 3일째 경기에 여성 출전자가 참가하게 된 것은 실로 몇 년만의 일인 것 같소." 몇 사람의 눈이 샤를로트 드 오를란느 공녀에게 쏠렸다. 이윽고 폰티나 공작은 여성의 몸으로 어떻게 그런 실력을 쌓을 수 있었는지를 물었고, 마치 미소년처럼 보이는 검은 단발머리의 샤를로트는 짧게 대답했다. "오를란느에서는 소녀들이라 하여 낮은 실력을 가져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작은 나라이고 인구도 적으니까요." “단순히 오를란느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 해도 놀라울 터인데, 말한 이가 그 땅의 공녀이니 실로 두려운 마음까지 드는구려, 하하하... " 보리스는 문득 느쪘다. 샤를로트는 영리하지만 아직 아노마라드에 대한 반감을 능숙하게 숨길 정도로 세상 경험이 풍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폰티나 공작 역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다음은 역시 두 명이나 되는 평민 출신 소년들이군. 그대들은 훌륭한 교사를 만나기 힘들었을 터인데 어떻게 지금과 같은 실력을 갖출수 있게 되었는가?“ 공작은 평민인 이들에게도 실버스컬 출전자로서 적당한 정도의 격식을 갖춰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헥토르가 잠시 생각하더니 먼저 대답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겠지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귀족들 앞에서 잘난 체 해보았자 역효과만 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택한 요령 좋은 대답이었다. 폰티나 공작이 보리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한가. 그러면 그대는?” 보리스도 헥토르처럼 대답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보리스에게는 헥토르와 다른 점이 있었으니 그는 대륙의 영주 아들로 태어났고, 그의 명예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이 함께 걸려 있었다. 그 이름들은 아기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앉아 있는 저 귀족들의 자부심과 비교해도 결코 가볍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보리스는 짧게 대답했다. "연습보다는 실전이고, 노력보다는 생존이라고 생각합니다. " 폰티나 공작이 고개를 약간 갸웃거리더니 갑자기 자기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 "클로에, 네가듣기에는 이 소년의 말이 무슨뜻이라고 생각되느냐?“ 클로에는 보리스의 얼굴을 잠깐 쳐다보더니 새침한 표정 그대로 대답했다. “가장 좋은 선생의 가르침도 진짜 적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며, 가장 열심히 연습하는 자도 생명의 위협에 쫓기는 자보다 절박할 수는 없다는 뜻이라고 생각됩니다. " 폰티나 공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보리스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러나 클로에의 말이 맺어지는 것과 동시에 루이잔의 시선이 보리스의 얼굴에 가 꽃혔고, 그는 대뜸 입을 열어 말했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저도 저 소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보리스 미스트리에씨, 저는 아버지로부터 '카민 미스트리에'라는 옛 출전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는데 실례가 안 된다면 그 이름과의 관계를 물어보아도 될까요?” 그때 입을 다물고 있던 이솔렛이 루이잔을 보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 분은 제 아버지이십니다. " 루이잔은 물론이고 폰티나 공작의 눈까지 커졌다. 루이잔은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몇 번 깜빡인 다음 재차 확인하려는 것처럼 물었다. "그 말이 정말이라면.... 그 분, 당신의 아버지께서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내고 계십니까?'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 “돌아가셨다고요? 그렇다면 그 전에는....” "아버지께선 사제이셨습니다. 그 이상은 말씀드리기 힘들군요." 일리오스는 엄연히 섬의 사제였으므로 거짓말을 한 것은 없었으나 그냥 한 말 치고는 교묘했다. 대륙에는 크고 작은 사원과 교단이 매우 많았으며 그런 곳에는 과거를 밝히지 않고 종교적 이상에 몰두하는 신관들이 흔했다. 따라서 그런 경우 신분이나 실력이 널리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고, 그 종교가 신봉되지 않는 지역에서 부모의 신분을 숨기려 한다는 것도 그리 드문 일만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두 분은 아직도 그 신전에 계신 겁니까?” "최근에는 의지할 곳이 없어 대륙을 이리저리 떠돌고 있습니다." 이때 폰티나 공작이 입을 열어 말했다. "그것 참 놀라운 일이로군 '카민 미스트리에' 라면 나 역시 기억하고 있다. 옛날 실버스컬에서 불패의 강피르 자작을 꺾었던 정체 불명의 떠돌이 소년이 아닌가, 오.... 그러고 보니 아가씨는 그의 얼굴을 매우 닮았군. 정말로 부녀지간이 맞는 것 같군 그래. 그때 그 소년, 아니 아가씨 아버지의 실력은 참으로 대단했지. 그 날 대회가 끝나고서 그 소년을 찾으려 했던 귀족이 얼마나 많았는지 자네들은 짐작할 수 없을 거야." 자기 집안의 금기가 폰티나 공작의 입에서 멋대로 흘러나오자 루이잔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사람이 이미 죽었다니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군. 훌륭한 분의 유지를 이어받았으니 내일 경기에서도 마음껏 실력을 보이길 바라네." 이번에는 보리스도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대답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후식 시간도 끝이 났다. 귀족들은 더 남아 환담을 나눌 모양이었지만, 내일의 출전자들은 그만 물러가 쉬어도 좋다는 말이 떨어지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이아칸 왕족 볼프렌은 줄곧 이솔렛을 바라보며 의혹 섞인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역시 검술을 수련하는 사람인 만큼 '카민 미스트리에'라는 이름에 대해 들어본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이솔렛이 단지 예쁘기만 한 소녀가 아니라 검을 다루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싸늘한 눈빛 역시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입구를 나가려 할 때, 보리스는 곁에서 나직이 말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내일, 좋은 승부를 기대하지." 루이잔이었다. 그는 가지 말라고 따라나와 칭얼대는 어린 동생에게 좀더 놀고 있으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먼저 밖으로 나갔다. 5. 불가능한 것에 삶을 걸고 작은 램프의 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샹들리에의 촛불을 모두 끈뒤 야외 천막에서 쓰던 램프를 밝혀 침대 옆에 놓아두었다. 창 덧문을 닫고 커튼까지 단단히 쳐서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했다. 누가 보아도 이미 잠든 것처럼 보이도록. “원수란 말인가? 그가 노리는 것은 너의 검, 윈터러이고?” 의자에 앉은 이솔렛은 이미 평소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검까지 등 뒤에 매어 놓고 있었다. 보리스 역시 금방이라도 여행할 수 있는 차림으로 침대 위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직 깊은 밤은 아니었다. "그는 나를 죽이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 속에 한조각 남아 있던 순진한 신뢰마저 철저히 밟아 없애버렸으니 무언가 한 가지를 죽인 셈은 되는군요." “그는 여전히 너를 노리겠군, 안 그래?”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윈터러를 얻기 위해 가면을 쓴 채 저를 양자로 삼아 반년간이나 기다렸던 잡니다. 원하는 것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집요한 인간입니다. " “그래서, 달아날 건가? 내일의 경기를 포기하고서?” 실은 달아나는 것도 간단치 않았다. 여기는 폰티나 공작의 성이었고, 주위가 삼엄하게 경비되고 있을 것은 뻔했다. 오히려 어젯밤처럼 천막에서 지내고 있었다면 남의 눈을 피해 손쉽게 도망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그렇지도 않았다. 그랬다면 오늘처럼 벨노어 백작과 미리 마주치지 못했을 테고, 내일 결승에 이르러 일방적으로 발각되어 결국은 손쓸 틈도 없이 당하게 되었을 터였다. 그렇다면 역시 공작에게 감사해야 되는 것인가? "솔직히....잘모르겠습니다. 내일의 경기를그런 식으로 포기해도 좋은 것인지, 아니면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이 옳을지, 심지어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그가 나의 진정한 원수라면 경기의 문제를 떠나 내 쪽에서 먼저 그를 죽여버려야 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그런 생각." "그를 조금이라도 동정해?“ "천만에요. 당시 내게 실력과 기회가 주어졌다면 즉시 그를 죽였을 겁니다. 그는 내 손에 처음으로 피를 묻히게 만든 자였죠. 내가 죽인 것이 벨노어 백작 본인이었다면, 그 때 나는 그 정도로 괴로워하지 않았을 겁니다. " 보리스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진 것을 느끼고 이솔렛의 미간에도 힘이 들어갔다. 방금 그녀는 보리스와 벨노어 백작 사이에 얽힌 사연들을 대략 들었고, 그들이 어떤 상황에 놓인 것인지 금방 파악했다. 달아날 수도, 머무를 수도 있었다. 달아나기로 결정한다면 섬에서부터 여기까지 오기 위해 다져온 결심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것은 물론, 당장 빠져나갈 방법부터 강구해야 했다. 머무르기 위해서는 오늘밤이라도 있을지 모르는 습격에 대비할 방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단 오늘밤을 견뎌내더라도 내일이 있었다. 이곳에서, 아니 아노마라드 땅 전체에서 그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두 사람은 동시에 문 밖에 인기척이 있음을 감지했다. “.......!" "쉿." 인기척은 서서히 문 앞까지 다가왔다. 지나칠 것인가, 다른 행동을 할 것인가.... 긴장이 고조될 무렵, 이번엔 조그맣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둘은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 시간에 그들을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보리스는 소리 없이 몸을 일으키며 침대 위에 올려놓았던 검을 잡았다. 맨발로 문 앞까지 다가갔다. 이솔렛 역시 조용히 일어나 문 뒤로 갔다. 똑, 똑. 다시 한 번 들렸다. 행여나 다른 곳에 들릴세라 너무나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소리였다. 일단 빗장은 질러져 있었다. 상대는 문을 부수고라도 들어을 것인가? 이윽고 문고리를 만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달칵, 달칵, 문을 미는 것 같았지만 열리지 않자 뜻밖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보리스 오빠........ 나.... 로즈니스야." 로즈니스가 이곳에? 두 사람이 다시 한 번 얼굴을 마주보며 의혹 섞인 시선을 주고받는 가운데 애써 짜내는 듯 겁먹은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문 좀 열어 줘 . 꼭해야 될 얘기가있어. 제발... 빨리..“ 이솔렛도 이미 로즈니스가 누군지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백작은 딸을 내세워 경계심을 풀게 하고 갑자기 습격할 심산인가? 그때 이솔렛이 갑자기 두 손을 움직이더니 특이한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잠깐만에 보리스는 그것이 오래 전에 가르쳐 준 일이 있는 일리오스 사제의 손 신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멀리서도 볼 수 있는 큰 동작의 신호도 있었지만, 가까이에서 말을 주고받기 위한 수화)도 있었다. 정신을 집중해서 보니 하나하나 생각났다. 신호는 띄엄띄엄 이어지며 완전한 문장이 되었다. 내가 문을 열 거야, 넌 윈터러를 갖고, 창을 열고, 위험하다면, 뛰어내려, 내가 오지 않더라도, 달아나. 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신호는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당신을 두고 갈 생각은 없다는 의사를 표현하려 했다. 그러나 이솔렛은 완강한 눈빛으로 보리스를 밀쳐내고는 자신이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짧게 신호했다. 가, 내 손으로 죽여버리기 전에. 그러면서 이솔렛은 검을 잡아 뽑았다. 더 이상 신호는 할 수 없게 되었다. 보리스가 세 발짝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문이 홱 잡아당겨졌다. 그와 함께 문고리에 매달려있다시피 하고 있던 소녀가 와락 방 안으로 끌려들어왔다 "아!" 로즈니스가 짧은 비명을 울렸다. 순식간에 팔이 틀어 잡히고 목에는 칼이 들이대어져 있었다. 소녀를 끌어당기며 발로 문을 차 활짝 열어 제쳤다. 그러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보리스는 이솔렛이 한 말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젓처럼 한달음에 문을 닫고 빗장을 채운 다음 로즈니스의 어깨를 잡았다. “너 혼자야?” 불쌍한 로즈니스는 완전히 겁에 질려 말까지 더듬거렸다. "으.... 으응....“. "풀어 주세요, 이솔렛. 이 아이는 싸움은 몰라요." 로즈니스의 성격상 그 동안 달라졌을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또래 소녀로서 이솔렛을 당할 수 있는 아가씨는 거의 없을 터였다. 이솔렛은 팔을 풀고 물러났지만 검을 도로 꽃으려 하지는 않았다. 로즈니스도 이솔렛을 만찬장에서 보았지만, 그 때 푸른 드레스를 입고 있던 아가씨와 지금 검을 든 소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에 가까웠다. “오랜만이야, 로즈니스. 무슨 일로 온 거지?' 겨우 찬찬히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 조금 더 자란 듯한 모습 위에 키 작고 짓궂은 얼굴을 하고 있던 꼬마 소녀의 모습이 겹쳐졌다. 레몬빛 머리카락은 좀더 풍성하게 자라고, 초록빛 눈은 약간 작아진 듯한, 여전히 예쁘지만 어딘가 달라진 것처럼 보이는 로즈니스, 자신의 옛 동생이었다. 전혀 반갑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은 느긋하게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내가 반갑지 않은 거구나.... 나.... 하지만. 여기까지 큰맘 먹고 와야 했어." 겨우 놀란 숨이 가라앉았는지 로즈니스는 두 손을 가슴에 모으며 조그맣게 한숨을 토해 냈다. "어제 경기장에서 바로 알아보았어. 오빠란 거.... 아버지보다 훨씬 먼저 알았어." 보리스는 로즈니스의 손을 끌어 의자에 앉게 하고는 말했다. “네게 나쁜 의도가 없었다면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내겐 그럴 이유가 있었어." "알아" "안다고?“ 보리스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로즈니스가 갑자기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 오빠가 위험한 거. 나.... 그 말 해주러 온 거야.... 도망치라고! 그래, 잠깐이나마 남매였던 것 때문에 . 그냥.... 지나치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어. 난 아버지의 속셈은 하나도 몰라, 오빠하고 아버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할 수만 있다면 말리고 싶지만 내겐 그런 힘이 없어, 모두 영문모를 일들뿐이야...... 그렇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어. 오늘밤에.... 누군가가 오빠를 죽이러 올지도 몰라!" 그때 이솔렛이 입을 열었다. "아가씨의 아버지가 보리스를 죽이려고 하는데, 아가씨가 그 계획을 엿듣고 알려주러 왔다, 그런 말이군요. 그것도 왜 죽이려고 하는지는 전혀 모른다는 거고.... 그 말을 우리가 어떻게 믿죠? 우릴 달아나게 해 놓고 내일의 승리를 다른 사람이 가져가게 하고 싶은 것일지 도 모르잖아요?“ 로즈니스의 눈이 커지더니 눈동자에 분노가 어렸다. “그런 말이 어딨어요! 난 단지 도와주려고.....” "도와주려는 것이라면 확실한 이유를 대요. 당신이 친아버지의 계획을 일부러 망쳐가며 별 인연도 없는 가짜 오빠를 도와주려 하는 까닭을 모르겠군요. 우리가 믿기를 원한다면 좀더 구체적인 상황을 이야기해 봐요." 로즈니스가 의자에서 발딱 일어났다. 예전 성격이 완전히 죽은 것만은 아니었다.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검을 들었다고 날 멋대로 몰아붙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난 이미 오해에는 질릴 대로 질린 사람이에요. 좀더 듣고 싶다고요? 그래요, 말해주죠. 아버진 아까 만찬이 끝난 후 강피르 자작을 만나서 협상을 했어요. 그 사람은 자기 아들의 우승을 원하고, 아버진 그걸 도와주기로 한 거죠. 자작 집안에선 오빠만 없어지면 우승은 소자작이 가져가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니까요. 그런데 그런 생각이 근거가 있나요? 하여튼 아버지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는 나도 몰라요. 하지만 도와주기로 했다는 거, 그것만은 틀림없이 정말이란 거죠. 이 이상 중요한 이야기가 있나요?” "설마. 오해라면 미안하게 되겠지만, 우린 아가씨의 아버지가 뭘 원하는지 이미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걸 아가씨가 모른다고 한다면, 아예 모르는 것이 아니라 뭔가 다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말을 꺼내기가 싫은 거겠죠. 내 말이 틀린가요?“ 그렇게 말하면서 이솔렛은 능숙하게 칼을 꽃고 한 발 물러섰다. 예나 지금이나 솔직한 로즈니스는 그 동작의 우아함에 잠시 감탄해서 입을 약간 벌렸다. 그런 다음에는 불쾌한 듯 도로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이미 짐작이 가니까, 어쨌든 이제 당신이 솔직하다는 것은 알겠어요. 그 대가로 당신 아버지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뭔지 보여주죠. 보리스, 괜찮겠지?” 보리스는 로즈니스의 초록빛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로즈니스는 어딘가 모르게 예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비록 방금 발끈하긴 했어도 전처럼 자신만만하지도, 자기 중심적이지도 않았다. 단순히 그녀가 성장했다는 의미인 것일까. 몇 년간 자신이 변화했듯, 그녀도 변화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보리스는 침대 매트리스 안에 넣어 두었던 천꾸러미를 꺼냈다. 그리고 로즈니스 앞에서 매듭을 풀고 안에 든 것을 보였다. "그게.... 뭐지?“ 로즈니스가 보기에 그것은 검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다른 무엇도 아닌 요상한 물건이었다. 보리스는 길게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 간단히 말했다. “내가 오래 전에 갖고 있던 검이야. 네가 나와의 첫 만남을 기억한다면 그때 당시에도 내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 네 아버진 이것을 원해. 그래서 나를 죽이려고까지 했지. 날 너의 집에 받아들였던 것도 모두 이것 때문이었어.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이것을 원하는 거지."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야?” "글쎄, 내게는 소중한 사람의 유품이라 중요한 것이지만, 네 아버지에겐 다른 의미를 갖는 건지도 모르지. 일단 네가 이렇게까지 나를 생각해 줄 줄은 몰랐다는 걸 말해야겠구나. 고맙다는 말도 함께 말이야. 이솔렛이 한 말에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말길 바래.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아둬. 벨노어 백작만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야. 나 역시 1 대 1의 상황이 된다면 결코 그를 그냥 지나치지 않아. 그러니 이솔렛이 너를 경계하는 것이고, 나 역시 네가 영영 내 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거지." “.......” 모두 다 로즈니스에게는 너무 섬뜩하게 들릴 법한 말들이었다. 보리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로즈니스가 보여 준 성의에 최소한이라도 보답하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몇 발짝 방안을 오가던 이솔렛이 입을 열었다. "어쨌든 이제 확실해졌구나. 오늘밤에는 습격이 있을 거고, 그 다음은 탈출하는 방법의 연구인가? 2층이니 어떻게 밖으로 나갈 수는 있을 것 같지만......“ "아니, 가지 않아요." "오빠!" 보리스는 윈터러를 도로 싸서 본래 있던 장소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위에 걸터앉으며 허리에 찬 검자루를 쥐었다. 두 사람 중 누구도 바라보지 않는 투명한 시선이 문득 너울거리는 램프로 향했다. "여기까지 와서 허무하게 달아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당신과 약속한 것이 있고, 그리고 나 자신과 약속한 것이 있어요." “만용을 부릴 문제가 아니야. 로즈니스 아가씨, 습격 인원이 몇 명 정도 될 지 혹시 알고 있어요?” "아버지가 거느린 기사들만이라면 대략 열 다섯은 될 거예요." "무리야, 보리스. 이번엔 달아나야 해. 다른 대안이 없어." "그래요. 지금껏 전 늘 달아나기만 했죠." 기억이 났다. 횃불에 쉽싸인 진네만 저택을 뒤로하고, 에메라 호수를 뒤로하고, 저 아픈 기억의 벌판과 낯선 도시의 여관과.... 배신자의 성을 떠나 달렸던 남부의 들, 산을 뚫는 관문을 넘고 렘므 땅에 들어가 드디어 나우플리온을 만나기까지........ 도망치고, 도망치고, 또 도망쳤던 자신이다. 어떤 것에도 맞서 대결하지 못하고, 내일을 위한 증오조차도 남기지 못한 채 오직 생존만을 위해 허겁지겁 달아났다. 섬에 들어간 후에야 처음으로 단 하나의 적과 당당히 맞설 수 있었다. 자신 안에 잠들어 있던 묵은 증오를 깨달은 것도 그곳에서의 일이었다. 자신을 알게 해 준 섬이었다. 결코 안온한 곳은 아니었으나, 그곳에서 사람답게 도전하고 분노하는 법을 배웠다. 그 섬에서 그를 자신답게 해 주는 사람들의 기대를 가지고, 이번에는 이곳까지 떠나왔다. 이번에는, 이번에야말로, 아니, 이번조차도 달아나고 싶진 않았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만 살아온 삶은 그를 무기력한 그림자로 만들어 놓았다. 생존이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할진대, 적어도 사람인 상태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다. "왜 지금까지 제가 벨노어 백작에게 분노하지 못했는지, 그런 배신을 당하고도 어째서 증오로 미쳐버리지 않았는지, 의아하기도 하고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합니다. 분노도, 증오도, 산 인간이 갖는 거죠. 살아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단지 살아 있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는... 그런 기분이 듭니다. 아, 그건 오래 전에 그 분께서 해 주신 말이기도 하죠. 로즈니스, 너도 기억하겠지? 월넛 선생님 말이야." 보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다시 한 번 검을 꽉 쥐었다. 그리고 당황한 표정을 하고 있는 로즈니스를 보았다. “넌 그만 돌아가. 네 친절은 잊지 않을게." "잠깐." 물러나 있던 이솔렛의 얼굴이 다시 램프빛에 드러났다. 표정이 결연하게 굳어져 있었다. “보리스,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한 가지 운을 시험해 보고 싶은 일이 있구나. 네가 수긍하든 하지 않든, 이 일만은 반드시 해보아야겠어. 로즈니스 아가씨." 로즈니스는 문을 등지고 선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솔렛이 다가서더니 한 손을 내밀어 로즈니스의 손을 꽉 잡았다. "원한다면, 아가씨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단 하나 있어요. 그걸 하고 안하고는 전적으로 아가씨의 결정이지만." 이솔렛의 계획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아니, 엄청나다 못해 도저히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반대하지도, 어떤 의견을 말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무모하다못해 자살행에 가까운 결정을 했듯, 그녀에게도 자신의 앞날을 위해 노력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그게 무엇이든 전적으로 도울 생각이었다. 또한 이솔렛이 지닌 수완을 믿고 있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에겐 결코 없는 수많은 재능을 지닌 사람이었다. 이 일을 위한 첫 단계는 바로 로즈니스의 몫이었다. 처음에는 망설이던 로즈니스를 결정적으로 설득한 것은 우연찮게 아직까지 가지고 있던 클로버 무늬 주머니였다. 그걸 본 로즈니스가 한순간 태도를 바꾸어주었기에 세 사람은 빠르게 방을 빠져나와 3층으로 올라갔다. 소지품은 각자의 무기, 그리고 천에 싼 윈터러밖에 없었다. "솔직히 자신 없어요. 난 그녀와 전혀 친하지 않거든요. 그들이 멈춰선 곳은 클로에, 즉 폰티나 공작 영애의 방이었다. 두 사람은 그늘에 숨고 로즈니스가문을 살짝 두드리자 젊은 하녀가 내다보았다. "클로에 아가씨는 잠자리에 드셨느냐? 아니시라면 로즈니스 다 벨노어가 긴한 일로 잠시 뵙자 한다고 말씀드려라," 당당한 태도 때문에 뭔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하녀는 얌전히 대답하고 안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문이 닫히자마자 로즈니스는 호르르 한숨을 내쉬었다. 성미 까다롭기로 정평이 난 클로에가 이런 시각의 방문을 환영해 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안리체 왕비의 조카딸인 클 로에는 왕자 한 명뿐인 켈티카 왕궁에서 공주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나마 왕비의 옛 동무인 어머니라도 계셨다면 좋았겠지만, 켈티카 궁정 귀족들 사이에서 막강한 인맥을 자랑하던 벨노어 백작부인은 로즈니스가 그걸 필요로 하게 되기도 전에 덜컥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러나 어쨌든 귀족 소녀인 자신이어야만 이런 밤에 클로에가 만나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다. 지금은 평민 신분을 가지고 있는 오빠, 더구나 소년인 그가 밤에 공작 영애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왜 자신이 보리스를 도우려고 하는지, 그 옛날의 장난 같은 선물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녀 자신도 몰랐다. 그냥 대리 만족인지도 모른다.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자신과,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끊임없이 살길을 찾아내고 있는 오빠가, 가짜 핏줄이라도 이어져 있는 사이라고 믿고 싶은 기분이었을까. 실은 모든 것이 힘겹지만........ “들어오시랍니다." 일단 성공이었다. 로즈니스가 안으로 사라지자 복도는 다시 어두워졌다. 그녀가 다시 나오기까지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듯 생각되었다. 지금 그들은 도박을 하고 있었다. 결과를 짐작할수 없는 까닭은 폰티나 공작의 딸 클로에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솔렛,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로즈니스를 믿겠다고 말한 것이 나 때문이라면......“ 아까부터 생각하고 있던 문제였다. 그가 아는 이솔렛은 이렇듯 손쉽게 다른 사람의 손에 자신의 운명을 거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그럴 만한 근거가 충분했어." "근거라고요?' "그녀가 아버지의 속셈, 즉 강피르 자작과의 협상 조건을 차마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으니까." “그녀가 모른다고 했잖아요?” “내가 아닐 거라고 말했지 않니?” 그 때 문이 다시 열리는 것이 보였다. 나온 것은 하녀였다. 하녀는 몇 걸음 걸어와 보리스와 이솔렛 앞에 서더니 이미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 나직이 속삭이며 손짓했다. 이윽고 그들도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작지만 우아하게 꾸며진 거실이었다.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벨노어 성에서 자신이 살던 방, 문샤인 탑 2층의 그곳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곳처럼 고급스런 등나무 의자가 놓였고, 흰 꽃이 수놓아진 창가의 커튼머리에는 황금빛 술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 옆에 로즈니스가 서 있는 것도 보였다. 살짝 열린 창으로 시원한 바람이 한 줄기 들어오는 가운데 장미 덩굴을 새긴 긴 의자가 있었고, 거기에 비취색 이브닝 가운을 입은 금발 소녀가 비스듬히 기대앉아 그들을 보고 있었다. 만찬장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파리해 보이는 새하얀 얼굴에 붓으로 그려 넣은 듯 짙푸른 눈동자가 이질적으로 화려했다. 분명 비슷한 나이라고 들었는데, 도톰한 입술과 서늘한 눈초리에서 성숙한 여인 못지 않은 매혹이 묻어 나는 것을 보고 보리스는 약간 흠칫했다. 경기장에서 떠돌던 소문은 절반만 맞고 절반은 틀렸다. 장미는 장미이되 눈빛처럼 푸른, 그러나 덜 피어난 장미였다. 라임오렌지의 시고 달콤한 향, 박하의 차고 싸늘한 향, 그 모든 것 위에 살얼음처럼 한 겹 덮인 오만함-실로 진기하고 독특한 매력이다. "아가씨께서는 용건을 듣고 싶어하십니다. 그리고 숨김없이 모든 것을 설명해야만 도와주실 것을 고려하실 것입니다." 클로에가 입을 열지 않고 보리스를 올려다보는 가운데 하녀가 대신 말했다. 보리스는 한 걸음 나서서 정면으로 클로에를 내려다보았다. 몇 시간 전에 만찬장에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서로였다. 마치 보리스는 밤새 황야를 헤치며 걷다가 대리석홀에 들어선 젊은 전사 같았고, 클로에는 백년만에 찾아온 방문자의 소원을 들어주는 고대 왕국의 공주처럼 보였다. "아가씨의 아버지, 폰티나 공작님을 뵙고 싶습니다. 아가씨께서 친히 한 마디만 전해 주신다면 공작님은 반드시 우리를 보고파 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 복도는 길었다. 그러나 기다리는 시간은 더욱 길었다. 폰티나 공작의 서재로 이어지는 둥근 층계참의 마지막 계단 앞에서 그들은 클로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즈니스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모든 용건을 설명한 후에도 아무 말이 없던 클로에가 이솔렛이 귀에 속삭인 비밀의 말 한 마디에 두말 없이 일어나 공작의 서재로 가 준 것이다. "오빠는 많이 변한 것 같구나." 로즈니스는 불안한 듯 발끝으로 양탄자를 비비고 있었다. 예전에도 가끔 하곤 하던 버릇이었다. "옛날에 우리 집에서 오빠가 쓰던 그 방 말이야, 아직도 비어 있어.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부터 난 어머니 방을 보살피려고 그 곁의 방으로 옮겼거든. 아참, 어머니 돌아가신 거 모르겠구나." "돌아가셨다고?“ 별 감정은 없었다. 이제는 얼굴조차 희미한 백작부인이었다. 다만 로즈니스의 변화가 백작부인의 죽음과 좀 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긴 했다. 다시 만난 그녀는 어느 모로 보나 그가 기억하는 벨노어 성의 작은 독재자 로즈니스 아가씨가 아니었다. 몇 년의 시간은 그녀에게 신중함과 배려하는 마음을 준 대신 활기와 자신감을 앗아간 것 같았다. "그 동안 어디서 어떻게 지냈어? 본래 오빠의 고향으로 돌아갔던 거야?“ “미안하지만 그런 건 말할 수 없어. 그렇지만 내가 보기엔 너야말로 많이 변했구나. 나와 함께 지내던 시절에는.... 아, 란지에! 그 아이는 어떻게 지내지? 아직도 네 집에 있니? 란즈미는?” 이제야 떠오른 이유가 무엇일까. 란지에를 떠올리는 순간 가슴이 한 번 세차게 뛰는 것을 느끼며 말이 빨라졌다. 로즈니스는 보리스의 변화를 가만히 올려다보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란지에는 이제 저택에 없어. 벌써 오래됐어. 란즈미도 물론 없고. 갑자기 떠나버렸기 때문에 난 한동안 그 애가 떠났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지. 오빠가 떠났을 때와 똑같아. 물어봐도 아버지는 전혀 설명해 주지 않으셔. 하긴, 그것뿐 아니라 아버진 본래 내게 아무 말도 해주시지 않아. 딸이라고 해도 난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 정말로." "그 후로 어떻게 됐는지 소식 들은 것도 없어?“ "없어........ 음, 켈티카에 갔을 때.... 아니, 그거야 뭐....“ "켈티카?“ 로즈니스는 약간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윽고 말을 이었다. "작년에 켈티카에 갔을 때 그 비슷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하지만 이름도 달랐고.... 같은 건 나이와 외모밖에 없으니 아마 다른 사람일거야." "무엇 하는 사람이었지?“ 그걸 듣는다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로즈니스가 말했다. "켈티카 사립 그로메 학원 학생. 평민인데 귀족 소년들과 친하게 지내는 그런 사람이고.... 파티에도 가끔 온다고 하더라고.“ 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사람이 란지에일 리가 없었다. "오빠는 란지에가 어떻게 됐는지만 궁금해하고.... 내가 어떻게 지냈지는 별로 관심 없구나?“ 문득 옛 어조가 되살아났다. 로즈니스는 한 발짝 물러서더니 예전처럼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결코 예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로즈니스는 그 말을 한 뒤 이솔렛을 흘끗 쳐다보았고, 다시 처음처럼 삼가는 표정으로 돌아갔다. 이솔렛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을 텐데도 아무 감정도 없는 것처럼 무표정하게 계단 위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늦은 시각에도 공작의 서재나 침실에 예고 없이 드나들 수 있는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작이 호의를 갖고 그 이야기를 들어줄 만한 사람은 이 성 안에 단 세 사람뿐이었다. 그 가운데 클로에를 통하는 것이 가장 낫다고 결정한 사람은 이솔렛이었다. 이럴 때는 보리스도 이솔렛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섬에서만 나고 자란 그녀가 어떻게 대륙의 귀족들의 생각을 그렇게 쉽게 읽을 수 있는지 의아했다. 그러나 공작이 이미 잠들어 있을 수도 있고, 또는 클로에의 이야기를 듣고도 그들을 만나는 것을 거절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솔렛은 확신이 있는 사람처럼 그리 불안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로즈니스에게 클로에를 만나 달라고 부탁했을 때보다 더 승산이 있다는 표정이었다. 계단머리에 빛이 나타났다. 클로에의 금발이 높이 들어올려진 램프의 빛을 받아 발갛게 빛나고 있었다. 이번에는 직접 입을 연 그녀가 짧게 말했다. "올라와요." 로즈니스가 불쑥 말했다. “난 그만 가보는 것이 좋겠어. 너무 오래 안 오면 아버지가 이상하게 생각하실 테니까. 내 방에 가 있는 편이 오빠를 위해서 나을 거야. 행운을 빌어. 그리고...다시 만날 수 있길." 높디높은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은 이 성에서 가장 두렵고 강대한 사람, 국왕 가문 다음가는 아노마라드 최고 권력가의 서재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가까이." 보리스를 뒤에 남겨둔 채 이솔렛은 서재 중앙을 가로질러 정면의 탁자 앞에 가 섰다. 폰티나 공작은 붉은 자줏빛 가운 차림으로 손에는 크리스털 잔을 든 채 창가에 서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지금의 이 모습이 만찬장에서 화려한 옷을 갖춰 입고 있던 때보다 더한 위엄을 풍겼다. 그 때는 손님에게 사려 깊게 베푸는 주인의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성 전체를 지배하는 왕과도 같은 풍채였다. 그의 몸은 실제로 육중했으며, 가운은 발 아래까지 끌렸다. "정말로 은인의 딸이로군. 정말로." 은인이라는 말은 렘므를 여행하는 동안 나우플리온의 검 때문에 줄곧 들어오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은인'은, 공작의 말이 맞는다면 바로 일리오스 사제였다. 그가 무슨 은혜를 베풀었기에? "기억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 공작은 빈 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한쪽 어깨를 으쓱했다. "그 말은 마치 은혜를 잊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처럼 들리는군. 이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인단 말인가. 만찬장에서는 근거라고 해 봐야 얼굴과 이름뿐인지라 너희의 말을 모두 믿지 않았지만, 클로에로부터 그 말을 전해들은 이상 이제는 확실하다고 할 수 있겠지 그래, 내가 어떤 식으로 도와주기를 원하는가?“ 이 이상 일이 잘 풀릴 수는 없었다.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이솔렛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여전히 침착한 표정 그대로 공작을 보며 말하고 있었다. "저와 제 동생이 내일 실버스컬 결승이 치러지는 동안 외부의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배려해 주십시오. 더불어 공작님의 영지를 완전히 떠날 때까지의 안전 역시 보장해 주십시오." “너희는 이미 안전하다. 여기가 폰티나 공작의 성이라는 것을 잊었는가" 공작의 목소리에는 어린아이들을 대하는 어른의 자애로움도, 가벼움도, 소홀함도 없었다. 무심한듯 하면서도 뼈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저희는 위협받고 있습니다." "누구인가." "성 안에 있는 두 귀족들입니다." "왜 그들이 너희를 노린단 말이냐. 개인적인 원한인가?“ "그렇습니다." 폰티나 공작의 눈이 이솔렛을 떠나 보리스에게 향했다.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시 나온 터라 불그레해진 얼굴이었으나 눈만은 흔히 찾아보기 힘든 광채로 번쩍거렸다. “내 너희가 친남매가 아니라는 것을 일찍이 알아보았다. 이것은 은인의 딸, 너의 원한이냐, 아니면 저 소년의 원한이냐? 폰티나 공작이 은혜를 갚겠다고 할 때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너의 일이 아닌 것으로 섣불리 써 버릴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솔렛이 보리스를 흘끗 보며 대답했다. "저희는 친남매가 아니지만 종교적인 범주 안에서는 그보다 더한 책임을 지닌 관계입니다. 저는 그의 문제를 방관할 마음이 조금도 없으며, 그런고로 그의 위험은 곧 저의 위험입니다" "그렇다면 좋다. 너희를 위협하는 자들이 누구냐. 날이 밝는 즉시 그들을 영지에서 내보낼 것이다. " "그것은 어렵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내일의 경기에 출전하는 소년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공작의 살집 좋은 턱이 한 차례 떨렸다. 준결승에 진출한 다섯 명중 이곳에 부모가 함께 와 있는 출전자는 한 명밖에 없었다. “네가 지금 강피르 자작을 말하고 있는 것이냐?” "정확히는 다른 한쪽이 그를 부추긴 것입니다. 다른 한사람은 바로 벨노어 백작입니다. 그들은 오늘밤 저희를 습격하여 죽이려 마음먹고 있습니다. " 공작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것은 그에게도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임이 분명했다. 한쪽의 의자에 앉아 있던 클로에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본 뒤 무표정하게 시선을 돌렸다. “내 놀랍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하군. 그들은 모두 유력자들이지만 내 영지 안에서 그런 무례한 일을 저질러 발각되고도 무사할 정도로 강대한 귀족은 이 아노마라드 안에 없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대담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군. 도대체 너희는 일을 저지른 것이냐? 그들이 왜 너희를 치려 하느냐?” 이때 보리스가 한 발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공작은 입꼬리를 한 번 말아 올렸다가 내리며 그를 냉랭히 주시했다. “벨노어 백작과 저는 한 하늘 아래 있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지금의 신전에 몸을 담기 전에 저는 트라바체스 영주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사소한 원한에 사로잡혀 저의 아버지와제 집안을 멸망시켰고, 저는 그 사실을 모른 채 그에게 속아 잠시 동안 그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복수를 다짐하며 도망쳐 나와 실력을 키웠습니다 아직은 실력이 일천하여 대적할 바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의 손에 죽느니, 다른 자의 손에 백 번 죽는 편을 택할 것입니다. " 이솔렛이 문득 보리스를 쳐다보았다. 물론 방금 한 말은 윈터러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꾸며낸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말의 첫머리와 마지막에만은 진심이 담겨 있었던 까닭에 목소리가 격해졌고, 그것은 그가 한 말을 곧 진실로 만들어버렸다. 갑자기 클로에가 입을 열었다. "아까 만찬장에서 한 말을 이제야 이해하겠어. 하필 오늘 그 적과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쳤군." 공작은 딸의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의 눈이 이윽고 형형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네 이름은 본명이 아니군. 진짜 가문의 이름은 무엇이냐?“ 일종의 확인이었다. 공작이 여기서 진네만 가문의 일을 알고 있다면 방금 한 거짓말에 완전히 발목이 잡히는 꼴이 될 판이었다. "그 집안은 이미 존재하지 않습니다. 트라바체스에서는 사라진 집안의 이름을 입에 담는 자는 다시 한 번의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저는 금기를 범하고 싶지 않습니다. " "그러한가? 그러면 어째서 네 원수인 벨노어 백작의 딸이 너를 도와 클로에를 설득하러 온 것이냐?“ "제가 잠시 양자로 지내는 동안 그 아가씨와 남매의 정을 쌓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그녀가 도와줄 거라고는 저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네게 원한을 갖는 것은 벨노어 백작 한 사람인데 어찌하여 거기에 강피르 자작이 연루된단 말이냐?“ “당연한 일이지만 강피르 자작은 그 분 아드님의 우승을 원하고 있습니다. 미스트리에의 성을 가진 옛 분이 과거 그 분을 꺾었던 것 때문에 제가 루이잔 폰 강피르 도련님의 강력한 걸림돌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미리 제거하려고 마음먹었다고 생각합니다." “네 말은 신빙성이 없다. 강피르 자작은 강직하고 청렴한 성품으로 유명한 자다. 또한 내일 경기에는 오를란느의 사를로트나 하이아칸의 볼프렌 등 강력한 라이벌이 많이 있다. 너 하나를 없이한다 하여 우승이 확정되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런 수고를 무릅쓸 까닭이 있겠는가?” "그 두 분은 귀한 분들이니 함부로 해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평민인 제가 죽는다면 단지 주최자인 공작님의 명예에 누가 될 뿐, 누구도 따지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제가 유난히 견제 받고 있는 것은 제가 분수 넘치게 빌린 이름 ‘미스트리에' 때문입니다. 제가 듣기로 강피르 자작께서도 5연승을 앞둔 때에 이 이름을 가지셨던 분께 패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순식간에 오간 대화의 대부분은 추궁이었고, 보리스는 한 번도 망설이지 않고 정확히 대답해 왔다. 공작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가 다시 본래대로 돌아왔다. 아노마라드에 구왕국이 있던 시절, 대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잠시의 공화정, 다시 지금의 신왕정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몰락하지 않고 오히려 지금과 같은 위치를 일구어 낸 공작이었다. 대륙에 다섯 용사가 있다고 일컬어지듯, 정치적 감각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아노마라드 전역에서 그 정도의 인물은 누이동생 안리체 왕비가 유일하다 말해질 정도로 탁월한 인물이었다. 열 다섯 먹은 소년의 속쯤 들여다보는 것은 일도 아니어야 했다. 그런데 가만히 대답하는 것을 듣고 있자니 속내 문제를 떠나 이 녀석이 보통 소년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계산 끝에 나온 것이었고, 더듬거리거나 당황하는 기색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귀족 가문 젊은이라 해도 폰티나 공작의 위엄을 접하면 저절로 떨기 마련인데, 평민으로 살아왔다는 이 자에게서 두려워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 것도 놀라웠다. 마지막으로 공작은 마치 상대를 떠보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러나 모두 추측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내가 강피르 자작을 달리 볼 수 있는 실질적인 근거를 대 보아라. 다른 근거도 없이 내가 네 말을 믿을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그 때 이솔렛이 한 발짝 나서더니 소맷자락 속에서 납작한 강철 원반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갑옷이나 그 밖의 것에서 떼어낸 듯 보이는 그것에는 말의 머리처럼 보이는 무늬가 정교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습격은 이미 첫째 날 밤부터였습니다. 저는 그 자들 가운데 한 명의 손목보호대에서 이것을 떼어내었습니다. 이 문장에 대해서는 공작님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당연히 그것은 강피르 자작 가문의 문장이었다. 보리스는 이솔렛이 이런 것을 가지고 있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습격이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다. 이솔렛의 찬트를 들으며 잠든 까닭에 아침이 되기 전에는 천둥 벼락이 쳐도 깨어나지 않을 상태였던 것이다. 공작은 잠시 후 짧게 혀를 차며 비웃듯 말했다. "흥, 신사인 체 하던 그 자도 어쩔 수 없는 건가. 아닌 체 했지만 궁정 모리배들과 다를 것도 없는 자였군 그래. 하지만 이런 것을 일부러 모아 두다니 너도 교활한 계집아이로군. 네 행동은 마치 오늘 나를 만날 것을 미리 짐작한 것과 같지 않은가?“ 이솔렛은 대답하지 않았고, 공작은 드디어 보리스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좋다. 네 말이 모두 옳다고 일단 믿어보겠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도와주길 바라느냐? 오늘 밤 숙소를 은밀히 다른 곳으로 옮기고, 내일 경기를 안전하게 치를 수 있도록 병사들을 붙이면 되겠느냐?“ 이솔렛이 대답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두 사람은 아노마라드 귀족이니 저희가 이 나라를 떠나기 전까지는 어느 곳도 안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공작께서 그 모든 것을 책임져주실 수는 없으니, 다만 폰티나 영지를 습격 없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공작님의 마차를 빌려주십시오. 영지 안에서는 비록 빈 마차라 하더라도 거기에 손대는 자는 공작님을 해치려 한 것과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 들었습니다. " 너무 대담한 제안이라 클로에의 눈썹이 약간 올라갔을 정도였다. 공작의 마차를 탈 수 있도록 허락된 사람은 오직 공작의 가족들밖에 없었다. “너의 주장은 무리한 것이다. 단지 호위 병사들을 붙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단 말이냐?” “만일 그렇게 하신다면 공작께선 몇 명의 병사들과 함께 은인에게 새로운 은혜를 베풀 기회를 영영 잃게 될 것입니다." 이솔렛이 말하는 방식은 때로 이렇듯 우회적인 싸늘함을 품고 있었다. 폰티나 공작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일갈했다. “네, 감히 내게 명령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좋게 들어주니 못하는 말이 없구나!" 그러나 이솔렛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잘라 말했다. "전 공작님의 아량을 기대하고 있을 뿐, 그것을 구걸하러 온 것은 아닙니다. 만일 제가 그래야 할 입장이었다면 처음부터 무릎을 꿇고 엎드려 양탄자의 먼지라도 핥았을 것입니다. " “오래된 은혜를 갚지 아니한다 해서 날 탓할 자는 어디에도 없다. 달리 보면 내가 지금 너의 말을 들어주고 있는 것만 해도 사소한 은혜는 아닐 터. 너의 혀가 날카로우니 어디 한 번 시험해 보자. 옛 은혜의 문제를 떠나면 내가 너희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할 어떤 작은 이유라도 있느냐?” "있습니다 " 이솔렛의 분홍빛 눈동자가 공작의 안광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또한 그렇게 말하긴 했어도 공작은 은인의 딸이라는 이솔렛을 당장 내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말해 보라." "첫째로, 공작님의 성 안에서 실버스컬 준결승 출전자가 밤새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경기 자체의 명성을 실추시킴과 동시에 공작님의 명예에도 큰 흠집이 될 것입니다. 둘째로, 오늘밤을 지내고 내일이 되면 사정이 더 나빠질 것입니다. 왜냐면 내일 오후에 저희가 피살된다면 이번 실버스컬은 우승자가 사라지는 꼴이 될 테니까요." "허! 정녕 우승이라 말했느냐? 갈수록 이만저만 오만한 것이 아니구나." "우승은 할 것이니 그런 염려는 놓으십시오. 그럼 셋째를 말씀드릴까요?“ 여기까지는 보리스도 다 짐작할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세번째가 무엇인지는 쉽게 알 수가 없었다. "세 번째는 좀더 쓸모 있는 이야기이기를 기대하지." 이솔렛의 목소리는 차가웠으나 어조는 점차 열띠어졌다. "본래 국왕 폐하의 근위대를 맡고 있는 강피르 자작댁은 최근 국왕폐하의 신임을 매우 두텁게 받고 있다 들었습니다. 물론 아직은 공작님께 비할 바가 아니겠지요. 하지만 이번 실버스컬에서 역대 최초의 5회 연속 우승자가 나온다면 어떨까요? 새로 떠오르는 기사 가문에서난 나라 최고의 소년 전사입니다. 그런 자의 존재가 공작님께 하등 도움이 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 "그것을 막는 방법은 보시다시피 한 가지뿐입니다. " 그때 클로에가 입을 열었다. "저 여자의 말이 맞겠군요. 폐하께서 올해도 루이잔이 우승한다면 강피르 자작 댁에 영지를 내리겠다고 하시지 않으셨던가요?“ 강피르 자작은 본래 궁정 무인 출신이라 자신의 영지가 없었다. 자작이라는 작위도 체첼 국왕이 그의 충성심을 높이 사서 내려준 것이었다. 그런 만큼 켈티카의 저택 외에 외부 영지를 갖게 되는 것은 자작이 오래 전부터 몹시 고대하는 바였다. 공작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솔렛이 한 말이 공작이 암암리에 품고 있던 생각을 제대로 찌른 것만은 분명했다. 물론 강피르 자작이 영지 정도 갖게 된다고 해서 폰티나 공작에 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국왕의 총애가 두터운 자이기에 소홀히 생각할 수만은 없었다. 어쨌든 폰티나 공작은 국왕의 처남이고 국왕의 신임이 가장 큰 힘의 원천인 것이다. 다른 경쟁자가 나타나는 것은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좋다. 클로에, 가서 포도주와 잔을 가져오너라." 서재 안에는 포도주를 즐기는 공작을 위해 두세 병 정도 보관되는 술이 있었다. 그 술과 잔을 내오는 클로에의 모습은 저택의 여주인처럼 침착하고 자연스러웠다. 공작이 술을 두 잔 따라 탁자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 “너희의 요구는 분명 지나친 것이기에 나 역시 마찬가지로 너희에게 내키는 것을 받고자 한다. 받아들이겠다면 이 술을 마셔라. 은인의 딸 이솔렛, 방금 전 분명 너는 저 소년이 우승할 것이라고 내게 확언했다. 그렇다면 보리스 미스트리에, 너는 아마도 루이잔과 결승에서 붙게 될 터, 그 때....“. 공작과 보리스의 시선이 부딪쳤다. 잔 속의 핏빛 포도주가 서서히 일렁임을 멈췄다. "루이잔이 다시는 검을 잡지 못하도록, 오른손을 베어내라." 다시 한 번 말하고 있었다. "그의 미래를 부숴라." 6. 파티의 끝 3일째 경기 개막의 아침이 밝았다. 새벽 일찍부터 관객석을 넓히느라 분주했다. 어젯밤에 엄청난 인파가 다시 모여들었던 것이다. 출전자들이 성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이미 열기는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곳곳에서 우승 예상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고, 종종 주먹질로까지 번졌다. 이윽고 다섯 명의 준결승 진출자는 경기장의 흙을 밟으며 정면 단상을 바라보고 섰다. 주최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식은 없었다. 이곳에는 한 나라의 왕자나 공주도 나올수 있는 것이다. 대진표 추첨이 끝났다. 준결승 진출자가 다섯 명이 되는 바람에 초반에 한 명은 부전승으로 올라가고, 마지막 세 명이 각각 돌아가며 상대방과 싸워서 승률이 높은 쪽이 이기는 원탁 토너먼트 형식의 결선이 치러질 예정이었다. 보리스는 놀랍게도 부전승 제비를 뽑았고, 스 스로도 자신에게 이런 운이 오다니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특별석의 폰티나 공작이 일어나 정정당당하게 경기에 임하라는 내용의 짧은 연설을 마쳤다. 의전관이 종이를 펼쳐 들고 처음 대전할 사람의 이름을 발표했다. “준결승을 시작하겠소! 하이아칸의 볼프렌 지크룬트 아우스 소드-라-샤펠 대 오를란느의 샤를로트 비에트리스 드 오를란느! 앞으로 나오시오!" 한 명이 오를란느 공녀라면 다른 한쪽은 하이아칸의 왕족이었다. 나이는 샤를로트가 15세, 볼프렌이 19세였다. 경기 시작이 선언되기 직전, 샤를로트는 머리에 쓰고 있던 붉은 모자를 벗어 바닥에 내던졌다. 가슴 쪽에 흰 천을 대고 금빛 단추를 단 검은 웃옷과 몸에 착 달라붙는 바지, 반짝이는 검은 부츠 차림인 그녀는 사뿐히 검을 뽑아들며 한 발짝 물러나 도사렸다. 볼프렌은 현 하이아칸 여왕의 사촌이었는데, 화려한 것을 좋아한다는 소문답게 위아래 모두 금색과 푸른색 라인이 들어간 흰 사냥복 차림이었다. 그는 싱글싱글 웃으며 눈앞의 소녀를 향해 건방지게 검끝을 흔들어 보였다. 그때였다. "잠깐, 두 사람은 경기를 중단하시오! 오를란느 공녀께서는 잠시 이쪽으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군중들이 웅성대는 가운데 샤를로트가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달려나갔다. 경기장에는 붉은 모자만이 남겨졌고, 볼프렌은 기세 좋게 뽑은 검을 무색하게 도로 집어넣으며 중얼중얼 불평을 토했다.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샤를로트는 이미 경기장에서 모습을 감추었는데 경기를 관장하는 천막에 들어간 듯했다. 이윽고 몇 사람이 급한 걸음으로 천막에서 나오더니 서둘러 폰티나 성으로 달려갔다. 샤를로트는 맨 마지막에 나와 의전관에게 한 마디 짧게 한 후 목책 밖으로 나가 버렸다. 멀어서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천막 곁에서 의전관을 비롯한 몇 사람이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길게 기다릴 것 없이 다시 올라온 의전관이 큰 소리로 외쳤다. "샤를로트 비에트리스 드 오를란느, 기권패! 오를란느 공녀께서는 본국에 급한 일이 생겨 돌아가시게 되었으며 이번 실버스컬에서 5위로 확정 되었습니다!" 관중석 절반에서 엄청난 난동이 벌어졌다. 샤를로트에게 돈을 걸었던 사람들이 격노하여 날뛰는 가운데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중 하나가 빠져나간 것을 기뻐하는 자들까지 합세해서 대혼란이 빚어졌다. 항의하는 자들과 몸싸움을 벌여 대는 자들 때문에 목책 일부가 부서지고 몇 명은 경기장 안쪽으로 떨어지기까지 했다. 볼프렌이 혼자서 싱겁잖아,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리는 가운데 관중들과 마찬가지로 흥분한 의전관이 다시 소리쳤다. “그런고로 새로운 대전 상대를 발표합니다! 출신지 불명의 보리스 미스트리에! 경기장으로 나와 경기에 임하시오!" “후...... 콕, 쿨룩!" 깊게 몰아쉰 숨이 곧장 기침으로 이어졌다. 졸렬한 경기를 비난하는 관중들의 우우, 하는 소리가 하이아칸 왕족 볼프렌의 귓가를 윙윙 울렸다. 그러나 어쩌는 도리가 없었다. 도저히 있을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까짓 남의 반응 따위가 문제이랴. 상대, 보리스 미스트리에는 별다른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냉정한 것도 아니고 그냥 최선을 다할 뿐, 적의 감정 상태 같은 것에는 그리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러나 볼프렌은 조금 전에 벌어진 격투의 결과로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건 정말로 반분간의 격전이었다. 그 빠른 공격을 자신이 거의 다 막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마지막 한 번 놓친 검은 볼프렌의 배와 허벅지 사이를 푹 찔러 피투성이로 만들어 놓았다. 치명상이었다. 그 피묻은 검을 든 자가 저기 서 있었다. 다시 덤벼들도록 기다려주겠다는 것처럼 공격 자세도 취하지 않고 자신의 꼴을 보고 있었다. 미스트리에라는 이름이 흡사 악몽처럼 그를 짓눌러왔다. 지 자가 강피르의 아들에게 가기 위해 택한 제물이 자신이며, 자신은 길을 얌전 히 내버줄 운명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해야 가장 덜 창피하게 항복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한 번의 공격도 제대로 해보지 못했는데, 이대로 주저앉는다면 그동안 잘난 체 한 꼴이 뭐가 된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보리스 미스트리에의 검이 획 들어올려지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 그랬듯 허공을 대각선으로 가르는 경쾌한 소음이 귀를 울렸다. "와라!"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인 것도 모른 채, 볼프렌은 피가 줄줄 흐르는 다리를 끌며 옆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보리스는 기다리고 있었다. 볼프렌이 반 바퀴를 돌아 자신의 오른쪽으로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단숨에 움직여 왔다. 츠즈즉...챙! 다시 한 번 눈으로 보기조차 힘든 신속한 검이 볼프렌의 오른쪽 팔을 노렸다. 보리스가 처음부터 오른쪽 손만을 자꾸 노린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른 대안은 없었다. 볼프렌은 뒤로 벌렁 자빠졌다. 흙먼지가 얼굴 곁에서 풀썩 일어났다가 내려앉았다. 검이 바로 코앞으로 쇄도해오기 직전, 그는 마지막 힘을 다 짜내어 소리쳤다. "그만! 그만둬! 항복하겠단 말이다! 검을 치워!" 보리스는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볼프렌을 겨누었던 검을 거두어 꽂던 순간 느낀 오한은 아직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어제 볼프렌의 경기를 본 일이 있었다. 이렇듯 형편없이 당할 상대라고 생각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가 기억하는 스스로의 실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방금 벌어진 것은 경기라고 부르기도 우스울 정도였다. 아니, 웃을 일은 절대로 아니야. 허리에 조용히 매달려 있는 검자루를 내려다보았다. 분명히 이건 윈터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눈가를 스친 것은 다름 아닌 윈터러의 환각이었다. 오랫동안 그에게 끊임없는 죽음을, 또한 삶을 가져다 주었던 흰 날의 검이 그의 머릿속을 하dig게 불태우는 듯했다. 사로잡혀 있어. 손에 그 검이 없는데도. "두 번째 경기! 루이잔 폰 강피르 대 클란치 알리스테어!" 샤를로트 공녀가 빠지는 바람에 부전승이 없어졌고, 결승도 두 사람이 치르게 되어 원탁 토너먼트는 필요 없게 되었다. 따라서 경기의 숫자가 대폭 줄어들게 되었고, 단순히 구경거리를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실망스런 소식이 되었다. 첫 번째 경기가 싱겁긴 했지만 적어도 한쪽의 실력은 충분히 입증해 준 까닭에 그나마 결승전은 볼만하겠다는 분위기였다. 두 번째 경기야말로 처음보다 훨씬 맥없이 끝날 것이 자명했기에 더욱 그랬다. 사람들은 모두 루이잔의 일방적인 승리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름도 성도 못 들어본 시골 소견인 클란치 알리스테어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보리스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클란치 알리스테어는 아노마라드의 시골 소년이 아니라 랄의 섬 의 최고 지배자인 섭정의 조카이자 어려서부터 지금껏 죽 검을 잡아온 끈질긴 소년 전사 헥토르였다. 자신조차도 윈터러 없이 그를 간단히 제압할 자신이 없는데, 귀족의 아들인 루이잔은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보여줄까. "소자작께서 미천한 자에게 한 수 가르쳐 주시지요." 헥토르의 입가에는 놀랍게도 배짱 좋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런 연기를 흡사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등 뒤에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두고도 무뚝뚝한 표정을 하고 있던 루이잔이 짤막하게 대답해 왔다. "너도 최선을 다해라." 루이잔은 상대를 빨리 제압할 생각이었다. 방금 전에 보리스 미스트리에의 일방적인 승리를 본 터라 더욱 마음이 급했다. 여기서 힘을 낭비하거나, 만에 하나 상처라도 입으면 다음 경기에 지장이 온다. 속전속결만이 최선이다. 둘의 검이 동시에 반대쪽으로 반완을 그었다. 그것을 본 보리스는 헥토르가 루이잔의 경기를 지금까지 주의 깊게 관찰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릉! 두 자루의 검이 처음부터 계획된 것처럼 미세한 오차를 두고 비껴 갔다. 다시 한 번 두 검이 허공에서 웅, 소리를 내며 울었다. 헥토르는 루이잔의 검을 시간차를 두고 칼등으로 받아넘기는 여유를 보였다. 빠른 찌르기에 이르러 헥토르가 어깨를 뺏지만, 루이잔은 완전히 헛손질을 하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보폭을 좁혀 목과 턱 사이로 검을 밀어 넣었다. 동시에 과격하게 자세를 튼 헥토르의 오른쪽 어깨가 루이잔에게 부딪쳤다. 희한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장검을 쥐고 싸우는 자들이 이렇듯 가까이에서 싸우다가 심지어 몸이 부딪치는 것은 웬만한 경우 일어날 일이 아니었다. 두 소년 모두 변칙적으로 서두르고 있다는 의미밖에는 되지 않았다. 결국 둘은 쓰러질 듯 비척거리며 서로의 몸으로부터 급히 떨어졌다. "이번엔 접니다!" 헥토르가 공세로 돌아섰다. 획, 획, 소리나게 그은 검이 루이잔을 두 걸음 물러나게 만들었다. 다시 한 번 같은 공격이 되풀이되자 루이잔은 바로 뒤에 목책을 두고 서게 되었다. 목책 뒤에서 구경꾼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격려도, 환호도, 저들끼리 한 욕설도, 모두 원색적인 소음으로 변해 와락 귀를 자극했다. "뭐야! 금방 승부가 날 줄 알았는데 도리어 밀리잖아!" 그 한 마디가 결정타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쫓기는 듯했던 머릿속이 확 달아오르며 혼미해졌고, 순간을 놓치지 않은 헥토르의 검이 루이잔의 귓불을 베며 목책에 푹 박혔다. 루이잔도 노성을 지르며 검을 후려쳤다. 고개를 홱 돌리는 순간 갈라진 귀에서 흐른 핏줄기가 허공에 가늘게 그어졌다. 헥토르는 놀랍게도 목책에 박힌 검을 놓고 한 바퀴 반대로 돌아 다시 검을 낚아채는 묘기를 보였다. 금세 목책에서 뽑혀 나온 검이 다시금 상대를 노리며 작은 원을 그렸다. "와아아아아!" "평민 소년도 꽤나 하는군 그래!" 루이잔이 반대쪽 목책 쪽으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헥토르는 절반 이겼다는 생각으로 다시 한 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럼,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진짜 상대는 저기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데 대륙의 풋내기 따위가 그의 앞을 가로막을 능력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이 승부를 확실히 하고 결승에 올라 드디어 다프넨 녀석을 끝장내고 나면, 사제 자리는 그의 손에 쥐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어떤 조건이 실버스컬 우승자라는 자격에 앞서겠는가. 나우플리온의 제자? 사제들의지지? 모두 소용없었다. 더구나 큰아버지인 섭정이 그를 도울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넘치는 자신감이 그의 공격성에 불을 지폈다. 잠시의 도사림조차 생략된 검이 얼굴 정면으로 찔러져 들어갔고, 그 순간 상상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구경꾼들이 한꺼번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비명을 질렀다. "저, 저런!" 루이잔은 흡사 상대의 검으로 뛰어드는 듯한 자세로 달려들다가 갑자기 자세를 확 낮추며 곧장 검을 내찔렀다. 그리하여 헥토르의 검은 수그린 이마와 정수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잘랐을 뿐이고, 루이잔의 검은 정확히 헥토르의 손등에 명중하여 핀뚫고 나갔다. 사람들의 눈에 그것은 두 개의 검이 수평으로 지나가는 모습으로 비쳤다. 뒤에서 본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찌르는듯 보였을 것이었다. "오오.... 저게 진짜 강피르 자작의 기술이다!" "봤나? 봤어? 자기의 중한 것을 내주어 가면서 일부러 상대의 작은 것을 노린다는 거라고! 상대가 짐작을 하기 힘든 공격이지!" 루이잔의 이마에서 흐른 핏방울이 콧등을 타고 내려오며 얼굴 가운데 경계선을 그어 묘한 인상을 만들었다. 헥토르는 가까스로 왼손으로 검을 옮겨 쥐었으나 오른손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그 자세 그대로 다시 방어 자세를 취했다. "소자작의 훌릉한 공격, 잘 보았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저는 왼손도 오른손처럼 쓸 수 있습니다. "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이솔렛으로부터 티엘라를 배우고 싶은 생각에 양손을 쓸 수 있도록 연습해 둔 것이 다행이었다. 피가 철철 흐르는 오른손을 일부러 등 뒤로 감추었다. 그리고 오히려 먼저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루이잔도 이제는 완전히 흐름을 파악하고 있었다. 감자기 검의 위치를 바꾼 상대방이 적응하지 못했을 것을 고려하여 재빨리 반대 방향의 공격을 감행했다. 아니나다를까, 헥토르의 왼손은 정교하게 움직이기는 했지만 무의식적으로 오른손과 거울상을 그리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텅 빈 거나 다름없는 어깻죽지를 찔러 들어가며 루이잔은 승리를 예감했다. 생각보다 오래 끌었지만...... "..... 대가는 치르셔야죠." 터억! 어깨를 찌른 검이 꽃혀 나오지 못하고 있는 동안 헥토르의 왼손검이 루이잔의 옆구리를 내리쳤다. 그러나 상당한 충격이 오긴 했지만 루이잔이 입은 흉갑은 튼튼했다. 이어 다음 공격이 오기 전에 루이잔은 상대의 몸을 밀어 바닥에 넘어뜨리며 그 위에 함께 엎어져 버렸다. 그러면서 헥토르의 어깨를 찌른 검이 더욱 깊게 박히고 말았다. “으윽!" 둘은 몸싸움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한 차례 굴었고, 결국 루이잔이 헥토르의 왼손에서 검을 낚아채어 멀리 내던졌다. 그러나 헥토르 역시 자기 어깨에 꽂힌 겁을 직접 봅아 내던져 버렸다. 의전관도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둘 다 검을 잃었으니 이제 무슨 수로 승부를 낸단 말인가. 루이잔은 귀족 체면 따위에 연연해서 승부를 포기할 성격이 아니었다. 동네 소년들이 싸울 때처럼 다짜고짜 배 위에 올라타자마자 단숨에 주먹을 한 대 먹였고, 어깨에 심한 상처를 입은 헥토르는 신음을 토하면서도 한쪽 손으로 루이잔의 다친 귀를 움켜쥐려고 했다. 둘 다 키도 크고 건장한 소년들이어서 정말로 볼만한 동네 싸움이 될 판이었다. 의전관은 폰티나 공작을 올려다본 다음 급히 소리쳤다. "멈추시오! 두 사람 모두 싸움을 그만두시오!" 결국은 둘을 떼어놓기 위해 네 사람이나 되는 사내들이 뛰어와야 했다. 헥토르는 상당한 상처를 입었는데도 졌다는 표정이 전혀 아니었다. 루이잔도 얼굴 곳곳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더 싸우려면 얼마든지 해봐라, 하는 표정으로 상대를 쏘아보는 눈빛이 대단했다. 사내들이 둘의 몸에서 손을 떼자마자 일이 벌어졌다. 루이잔이 갑자기 발을 올려 헥토르의 다친 팔을 냅다 걷어차 버렸다. 그리고 곧장 뒤로 물러나며 떨어진 검을 탁 차서 집어 올렸다. 이때 헥토르도 이미검을 되찾았는데 보니까 검이 서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상관없이 둘은 다시 한 번 부딪쳤다. “하아아압!" "차아아!" 단숨에 상대를 죽이고도 남을 기세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확실히 부상이 거의 없는 루이잔이 빨랐다. 루이잔의 검은 헥토르의 검을 쳐서 미끄러뜨리며 곧장 왼손 손가락을 베어 들어갔다. 세 개나 되는 손가락이 잘려나가기 직전 헥토르가 간신히 손을 뺏으나, 비껴나간 루 이잔의 검은 헥토르의 어깨 살점을 베어 날려버렸다. 그리고 연속된 동작으로 목을 정확히 겨누며 동작을 멈췄다. 확실히 정식 기본기가 훌륭한 그다운 마무리 였다. "수고했다." 차가운 목소리로 말한 루이잔은 겨눈 검을 빼는 듯하더니 헥토르의 턱을 살짝 그어 상처를 만들었다. 확실한 실력 차이를 드러내어 표시 하려는 행동이 었다. 조마조마해하던 의전관이 재빨리 소리쳤다. "루이잔 폰 강피르, 승리!" 그 목소리가 울리는 순간 헥토르의 몸이 비척, 흔들리는 것 같았다. 루이잔은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결승전이 시작되기 전에 점심 식사시간과 두 시간의 휴식이 주어질 예정이었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몸을 쉬게 하고 싶었다. 피로해진 몸 때문에 기대해마지 않던 다음 경기를 망칠 수는 없었다. 마법 치유사들의 도움으로 응급 처치를 마치고 나와서 경기를 관전하던 하이아칸의 볼프렌이 빈정대는 건지, 충고하는 건지 모를 어조로 나직이 한 마디 던졌다. "잘 싸웠군, 소자작, 그렇지만 나와 싸운 저 녀석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간단히 제압되진 않을 거야" 그리고 보리스는 말문이 막힌 채 경기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혹스러웠고, 믿을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벼르던 복수를 위해 드디어 찾아갔는데 문전에서 이미 시체로 변한 적을 발견한 기분이 이런 것일까 싶었다. 늘 자신의 상대라고 생각해 온 자가 다른 자에게 패해버리는 것을 보고서야 자기가 품고 있던 생각의 이중적인 면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분명 폰티나 공작이 그에게 요구한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마지막 상대로 루이잔보다 헥토르가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섬사람끼리의 대회가 분명 아닌데도, 다른 사람들을 배제한 채 저들의 관계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자신은 틀렸다. 그게 지금 눈앞에서 증명되었다. 헥토르는 루이잔이 경기장 밖으로 나간 뒤에도 한참 동안 서 있다가 눈을 돌려 누군가를 찾았다. 사람들 사이, 대기자들이 있는 곳, 그곳에 앉아 있는 보리스를 찾아냈다. 둘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둘의 머릿속에서 똑같은 생각이 흘러갔다. 넓은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조건들, 그것들이 경쟁하여 마침내 벌어진 일들에 두 사람의 관계를 위한 당연함 따위가 남아 있을 리 없는 것이라고. 결승전 개막이 선언되었을 때, 흥분한 군중은 준결승보다 더욱 길고 잔인한 경기를 기대하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뜻밖의 시골 소년이 준결승에서 그들에게 상당한 재미를 선사해 주었듯, 저 마지막 복병도 루이잔을 능력껏 몰아붙여 구경거리를 만들어 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루이잔이 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조금 전의 여러 가지 결과로 인해 루이잔이 질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사람이 좀 늘어나긴 한 모양이었다. 폰티나 공작이 입장하여 가족들과 함께 앉자 다른 귀족들도 그 주위에 자리를 잡았다. 폰티나 공작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한 명을 발견하고는 점잖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오, 벨노어 백작. 간밤에는 편안하셨는지 모르겠구료. 밤새 성 안에 도둑 고양이들이 들어와 설치는 바람에 조금 시끄러웠다고 나중에야 들었소이다. 오랜만의 손님들에게 이런 폐를 끼치다니 송구하오." 벨노어 백작은 오전부터 누군가와 한바탕 한 사람처럼 표정이 좋지 않았는데 폰티나 공작의 말을 듣고 깜짝놀란 듯 대꾸했다. "아니, 저, 그런 것은 별로.......“ "뭐, 괜찮으셨다면 다행이겠소. 그건 그렇고, 대회가 끝나고 나서 바삐 돌아갈 일이 없으시면 며칠 더 성에 머무르며 본인과 정담이나 나누시는 게 어떻겠소? 몇 가지 할 이야기도 있고 말이오." 본래 폰티나 공작으로부터 이런 초대를 받는다는 것은 상당한 행운이었지만, 벨노어 백작은 이상하게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공작은 대답이 없으니 수긍하는 걸로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잠시 머리를 굴리며 이 상황을 해석해보려 애쓰던 벨노어 백작에게 특별석 아래쪽에 앉은 낯선 소년 하나가 눈에 띄었다. 흰무명옷에 두 자루 검을 등에 멘 짧은 금발의 소녀였다. “ 위엄 있고 자비로우신 아노마라드의 체첼 국왕 폐하와 관대한 폰티나 공작께서는 언제나 정당한 실력으로 훌륭한 승부를 내는 자의 편이니라. 루그란의 옛 국왕 타라크시포스가 만들게 한 순은의 두개골은 진정한 용기와 고된 노력의 상징이니 이를 가지는 자, 늘 그 의미를 경계로 삼아 나아가고 또 나아갈지니라." 결승전 시작의 선포는 축시처럼 가락이 느껴지는 기나긴 선언문의 낭독으로 시작되었다. 보통 사람들이 지루하게 느낄 법한 내용인데도 경기장 전체에 떠도는 엷은 흥분이 낭랑하게 낭독되는 한 마디 한 마디에조차 열중하게 했다. "이제 하늘 아래 두 소년 전사가 있어 그가 은혜로이 받은 실력과 운을 겨루고 스스로 섬기는 자에게 영광을 돌리고자 하니, 듣는 자여, 굽어 보라, 보는 자여, 널리 전하라!" 수십 개의 나팔이 동시에 외마디 외침을 토했고, 사람들은 일어서 함성을 올렸다. 의전관이 두 소년의 입장을 알렸다. "아노마라드 출신, 체첼 국왕 폐하의 근위 대장 강피르 자작의 장자이자 네 번 연속 실버스컬을 손에 쥔 자, 열 아홉살의 루이잔폰 강피르!" "출신지 불명, 열 다섯 살의 보리스 미스트리에!" 두 이름이 말해지는 순간 억누르던 관중들의 흥분이 격발되어 노도같은 함성으로 변했다. 중앙까지 두 소년이 걸어나오는 동안 모든 사람의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경기장이 들끓었다. 둘이 마주서서 말없이 각자의 검을 뽑아들었을 때, 구경꾼들의 관자놀이가 더 먼저 땀으로 번들거렸다. 군중들의 환호성을 그와 무관한 먼 천둥소리처럼 느끼면서 보리스는 느리게 검을 움직였다. 햇빛에 반짝거리는 검날을 바라보며 전날 밤부터 끊임없이 마음을 괴롭히던 질문이 이제 당면한 문제가 되어 답을 요구하고 있음을 느꼈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물었으나, 곧 그것은 이 검을 준 사람에게 던지는 물음으로 변했다. 자신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옳을지 그가 대답해 주기를 바랐다. 그가 곁에 있었더라면 명쾌한 해답을 줄 수 있었을 것만 같았다. 나우플리온,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더위, 7월이 끝나 가는 아노마라드의 여름이 기함을 토하며 화덕처럼 달아올랐다. 검을 비껴든 채 서로를 쏘아보는 두 소년 사이에 흐르는 침묵도 일종의 더위였다. 짧다고는 할 수 없는 시간 동안, 오간 것은 오직 시선뿐이 었다. "해라." 루이잔이 나직이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직 보리스에게만 들렸을 터였다. 보리스는 대답 없이 시선을 약간 움직였다. 헥토르의 검끝에 갈라진 귓불이 치유술사들의 솜씨로 금세 아물어 붙은 것이 보였다. "...않을 테냐?“ 루이잔의 검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짧은 호, 이어지는 견제의 찌르기를 보며 기다리던 군중들이 이유 없이 소리를 질러댔다. 그런데 놀랍게도 보리스를 응원하는 목소리도 상당했다. 그런 자들은 대부분 도박과 관계없이 순수하게 경기를 구경하러 온 축들이었다. 또한 4년 간 이어져 온 권위가 누구한테든 도전 받기를 바라는 젊은이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보리스의 머릿속에 든 고민은 알지 못했다. 스슥, 챙! 검이 한 번 부딪치고 다시 떨어졌다. 루이잔은 상대의 검에서 완강히 버티는 힘을 느꼈지만, 이상하게 반격의 기미는 찾지 못했다. 그는 보폭을 넓혀 서서히 왼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흡사 먹이감을 놓고 일부러 우회하는 표범과 같은 동작이었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또 다시 한 번, 검이 부딪쳤다. 두 검 모두 상당한 명검인지 맞닿아 울리는 소리도 남달랐다. 루이잔은 세 번 연속 같은 자세로 찌르면서 각각 손목, 어깨, 목을 노렸다. 모두 다 거의 성공할 뻔했다 그러나 음험한 미스트리에는 실력을 다 보일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그런가?“ 혼잣말처럼 남긴 외침에 이어 루이잔의 검이 갑옷을 입지 않은 하체를 노렸다. 다가서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보리스의 손목이 희한하게 세로로 꺾이며 그의 검을 올려 쳐내고, 견제할 틈도 없이 직격으로 들어오고, 찌르는가 했는데 어느새 쇄골 언저리를 긋듯이 스쳐갔다. 눈이 혼란 되는 순간이었다. 검끝은 쓸모 없는 경로만 잔뜩 그리는 것 같은데 어느새 예상치 못한 곳곳에서 번개처럼 공격이 터져 나왔다. 이 박자를 되잡지 못하면 순식간에 패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검이 순식간에 거두어져갔다. 어느새 청동빛 머리의 소년은 멀찍이 물러나 있었다. "왜지?“ 가장좋은 기회였는데 왜 그걸 차버린 건지 알 길이 없었다. 다시 그런 기회를 허락할 거라고 멋대로 얕본 건가? 음험한 미스트리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고, 그럴 수록 더욱 심한 불안감이 불붙었다. 빨리 끝내야 한다! 가다듬고 어쩌고 할 것도 없이 다시 뛰어들어 쳤다. 이번에는 제대로였다. 다시 한 번 방금 전과 같은 반격이 시작되려는 순간, 루이잔은 재빨리 물러나며 몸을 틀어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똑같이 보리스의 검이 흡사 머리 여러 개 달린 뱀처럼 빠른 선을 그리며 공세를 뻗었다. 그나마 이 빠르고 포괄적인 공격을 제대로 눈으로 본것조차 루이잔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펼치는 본인조차도 잘 의식하지 못하는 공격이었다 “......!" 다시 한 번 검이 멈추는 순간, 루이잔은 뭔가를 깨달았다. 지금 저 미스트리에는 마치 스스로의 검술을 두려워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게 가장 훌륭하게 구현되는 순간마다 움찔하며 검을 거두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랬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 다. 단지 그 타이밍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계산이 섰다. 루이잔은 재빨리 검날을 대어 미끄러뜨리며 상대의 손을 노렸다. 동시에 발을 들어 무릎을 걷어찼다. 츠릿! 보리스는 검날을 뗐으나, 이미 루이잔의 검끝이 손목 일부를 벤 뒤었다. 무릎은 어떻게 피했지만 지금의 일이 왜 일어났는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주춤거렸기 때문이다. 주춤거린 것은.... 자신속의 정체 모를 힘을 절제하고 싶어서였다. 이 시합에 임하는 보리스의 착잡한 심정을 루이잔은 몰랐다. 어젯밤 폰티나 공작이 내준 포도주 잔을 잡았던 보리스였지만 자기 앞에서 이렇듯 열심히 덤벼드는 상대를 보니 다시금마음이 약해졌다. 이기는 것은 좋지만, 이겨야만 그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지만, 그걸 위해 그는 지금 누군가가 의지하고 따르는 사람을 파괴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형이라는 존재. 그 절망, 그 번민과 고통, 그것을 보리스가 모른단 말인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고 수십 번, 수백 번 되풀이해서 생각하던 어린 자신이 눈에 선했다. 눈뜨고 깨어날 때마다 모든 것이 꿈이기를 바랬던 들판에서의 며칠 간, 붙잡으려 해도 되지 않고 도울 방법도 없이, 그의 앞에서 서서히 무너져가던 형. “하압!" 루이잔은 상대의 약점을 안 이상 그걸 간과하지 않고 그대로 이용했다. 멈칫거리는 검을 느끼자마자 역공세로 돌아서서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둘이 다시 멀찍이 떨어졌을 때 보리스는 손목, 왼쪽 상박, 그리고 허벅지 일부에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곳곳에서 흐르는 피가 자꾸만 신경을 자극했다. 그리고 관중들의 환호인지 우려인지 모를 소리들도 귀에 거슬렸다. 다시 공격해 오는 루이잔을 보고 빨 리 방어로 돌아서지 못한 것도 일부는 그 때문이었다. "아!" 간신히 머리를 틀었지만 뺨이 길게 찢겼고,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졌다. 피하지 못했다면 생명까지 위험할 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반격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눌러 평범한 방어 동작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러나 뺨을 훔친 소매가 벌겋게 물든 것을 보니 가슴이답답해오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대로라면 약속한 일을 성공시킬 수 있을까. 특별석에 앉아서 눈을 떼지 않던 폰티나 공작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한 소녀더러 들으라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전날 밤에는 고양이들의 소란이 심했다지 오늘밤은 어떨까." 공작의 발치에 마련된 작은 의자에 이솔렛이 앉아 있었다. 일단 자신에게 보호를 요청한 이상, 시야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공작의 지시때문이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앉은 클로에는 몇 번인가 이솔렛의 등에 매달린 두 자루 검에 눈길을 주었다. 이솔렛이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는 그곳에 저 고집 센 청동빛 머리칼의 소년이 있었다. 그가 무슨 고집을 부리는지 이솔렛은 다 알고 있었다. 안타깝지만, 그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그의 일부분이었다. 저렇듯 쉼사리 떨치지 못하는 것들이 있기에 지금과 같은 그가 있는 것이다. 사로잡힌 자, 온갖 기억과 이름의 무게에 사로잡힌 자. 검끝이 얽히고, 막고, 내리치고, 부딪친다. 보리스가 갑갑해하고 있다면, 루이잔은 초조해 있었다. 몇 번이나 공격에 성공하고 자신은 아무 상처도 입지 않았는데 승부는 금방 끝날 기미가 없었다 흡사 바위 벽을 짓찧고 있는 것처럼 손이 아파 왔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심리적인 문제인지도 몰랐다. 검을 다시 고쳐 쥐었다. 불안감을 못내 감추지 못한 검이 횡선을 그었다. "뭘 망설이지!" 보리스는 불쾌해하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었다. 우세해 있지만 조금도 기뻐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왜 그렇게 주춤거려! 날 무시하는 거야? 제 실력을 발휘하면 내가 죽기라도 할까봐?“ 획, 검이 어깨 안쪽을 스치고 지나갔다. 위험한 순간이었는데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우습게 보지 마라! 난 언제나 명예롭게 이겨왔어!" “패배를 해도 명예로울까?” 보리스의 검이 내밀어져 허공에 빠른 선을 긋고 지나갔다. 루이잔의 목에 짧은 경련이 일었다. “넌......” “넌 아무 것도 몰라." 자신이 무엇을 망설이는지, 왜 이렇듯 경기를 질질 끌고 있는지, 피하려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를 것이다. 고작 놀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기껏 명예로운 경기 따위를 위해서 저 정체 모를 불길한 힘을 억누르려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챙! 츠챙! 창! 청! "아는 체 하지 마라!" 루이잔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검에 너무 힘이 들어가 있었다. 오후 3시가 넘어가면서 땅에서 서서히 오르기 시작한 지열이 부츠 속의 발을 뜨겁게 데웠다. 온 몸이 땀투성이였다. 둘은 분명 모르는 사이였다. '좋은 승부를 기대하지' 라는 말이 처음 꺼낸 말이었는지도 몰랐다. 왜 집착했느냐면 아마도 처음에는 미스트리에라는 이름 때문, 그리고 이제는 실력을 억지로 감추려고 하는 상대에 대한 역한 불쾌감 때문에, 이겨야한다고 생각했다. 이 가로막힌 듯한 답답함을 자신의 실력으로 확 뚫어버리고 싶었다. “너.....” 보리스의 뺨에서도 피와 땀이 섞여 흐르고 있었다. 몇 번이나 땀 맺힌 눈을 씻어냈지만 또다시 눈앞이 흐려졌다. 다시 한 번, 순식간에 펼쳐지려는 속검을 자제했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도 똑같이 이 답답한 상황을 자신의 실력으로 부수고 싶었다. 폰티나 공작의 음험한 계획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래서다. 증오하지 않는 상대의 미래를 빼앗아야만 하기 때문에, 그래서다. 그런 엄청난 일을 하면서.... 자신의 것이 아닌 실력 따위, 쓸 수는 없는 것이니까, 스스로의 힘으로 하더라도 그 부끄러움은 평생 씻을 수 없을 테니까,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 정당한 승부를 벌여, 그에게 기회를 주려 했다. 루이잔이 자신을 패퇴시켜, 그의 오른손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다. 그와 같은 자의 미래는 오직 누군가의 정당한 실력을 통해서만 부서져도 좋은 거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저 자에게는...... “ 네 마음이 가는 대로." 이솔렛은 들리지 않을 속삭임을 보내며 잠시 눈을 감았다. 검 부딪는 소리가 까마득한 먼 곳의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덤벼, 덤벼들란 말이다!" 루이잔이 다시 보리스의 어깨를 노린 검으로 목에 가느다란 상처를 냈다. 팔꿈치를 베면서 허리에 충격을 가했다. 주춤거리는 것을 볼 때마다 분노가 더해졌고, 그럴 때마다 보리스는 자꾸 뒤로 물러날 뿐이었다. 그러나 적의 얼굴에서도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긴장해 집중하고 있는데, 그 집중의 대상이 자신이 아닌 것만 같은 기분이 었다. “나를 봐!" 갑자기 루이잔은 검을 휘둘러 보리스의 검을 걷어올리고는 바짝 밀어붙였다. 그리고 갑자기 검을 빼는 듯 하더니 엄청난 힘으로 보리스의 무릎을 걷어찼다. 다리가 꺾이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또다시 발길질, 그리고 왼손으로 상대의 어깨를 밀쳐 넘어뜨렸다. "끝내잔 말이다!" 그러나 쓰러진 보리스는 당장 일어나려 하는 대신 곧장 내리꽂혀오는 검을 후려쳐 막았고, 비스듬한 자세 그대로 루이잔에게 검을 겨눴다. ".......“ 열에 들뜬 루이잔의 눈동자가 보였다. 저 멀리, 아니,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팔꿈치만 조금 밀면 닿을수 있을 위치에 서로의 목을 노리는 칼날이 있었다. 둘은 그런 자세로잠시 멈추어 있었다. 그건 균형도 아니었고, 위험도 아니었고, 그냥 둘 다 멈추고 싶어 멈춘 것뿐이었다. “ 너.... 뭘 꺼리는 거지?” 루이잔은 바보가 아니었다. " 왜 날 놀리는 거지? 난 패배가 두렵지 않아. 네 실력을 보여." “ 내가 실력을 보여서 네 미래를 완전히 부순다면., 어쩔 테냐?” " 뭐라고?“ 그건 보리스에게도 간단하지 않은 일이었다. 본래의 실력과 어딘가에서 나타난 낯선 실력을 구분하는 것이 서서히 불가능해지고 있었다. 하나를 멈추려 하면 다른 하나도 멈춰져버렸다. “난 너를 정당하게 대하려 할 뿐이다. 더 이상의 모욕은 마라," 보리스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검끝이 약간 흔들렸으나 둘 다 내찌르지 못했다. 군중들조차도 숨을 삼키며 침묵하고 있었다. 폰티나 공작은 전날 자정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합의가 이루어 졌을 때 그는 고개를 끄덕여 둘을 내보낸 뒤 나직이 중얼거렸던 것이다. '성공해라, 아니면 철저히 실패해라. 네가 이 일을 훌륭히 해낸다면 내 너를 충실한 개로 삼으리라. 그리고 실패하면......‘ 이때 루이잔은 마치 보리스의 마음을 눈치챈 것처럼 소리치고 있었다. “나 자신만봐라! 그 이상의 정당함 따위는 요구하지도 않는다!" “.......” 겨눈 검끝 둘 사이로 더위를 품은 바람이 지나갔다. 보리스가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은 한순간이었다. 치기와 관대함, 동정심과 아량을 구분하지 못하는 자신이 결국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지금 그는 자신의 목숨만 책임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믿고 있는 이솔렛, 그가 승리하기를 바라는 나우플리온, 많은 명예, 그것과도 바꿀 수 없는 과거였나? 아아....그러나 지우기 힘든 과거였다. 기억 속의 트라바체스였다. 형을 아끼고 따르는 동생의 존재란 것, 그런 동생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감당할 줄도 모르는 어리석은 감상주의! 치륵! 그리하여 다시 검이 얽혔을 때, 루이잔은 원하던 것을 보고 겪을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그물처럼 곳곳에 매듭을 가진 검의 춤을 보았다. 깨닫기도 전에 손목이 찔리고, 팔꿈치에서 솟아난 피가 꽃잎처럼 점점이 흙바닥에 박혔다. 목을, 그리고 머리를 위협 당했다. 다시 빠지는가 싶던 검이 오른쪽 팔목뼈를 사납게 내리쳤다. 흡사 호랑이에게 물린 것처럼.... 그리고 검이 떨어졌다.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루이잔은 눈을 감으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멀리서 사람들이 외치고 있었다. 의전관이, 그의 지지자들이, 아버지와 가족들이 외치고 있었다. 그는 보리스의 검이 다시 자신의 오른팔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비명에 가까운 함성이 귓가에 메아리친다. 밤이 되기 전에 폰티나 성의 도개교가 내려졌다. 주인이 집을 나설 때처럼 문이 완전히 올려지고 위병들이 최대한의 경의를 표했다. 썰물처럼 빠져나간 구경꾼들의 잔해가 아직 치워지지 않은 그곳을 화려한 마차 한 대가 달려 지나갔다. 3장. Blindly Verity 1. 마침내 따라잡히다 "그 애가 네게 특별한 감정이 있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야." "무슨 소리예요? 로즈니스는 한 번도 저를 오빠, 그것도 잠시 스쳐지나가는 가짜 오빠 이상으로 대한 일이 없어요." "그랬겠지. 내가 말한 것도 그것과 비슷한 거야. 일단은 오빠이지만 잠깐 뿐이고 결국 진짜 오빠가 되지는 않을 존재, 어린 시절의 가까운 타인이랄까." "그게 무슨 의미죠?“ 서늘해진 마른 땅 위를 두 사람이 걷고 있었다. 9월이 다 되어 로젠버그 관문을 넘었기 때문에 산맥을 빠져나오자마자 갑자기 달라진 날씨를 느낄 수 있었다. "소녀들의 환상 같은 거야. 아예 가까운 가족이 됐을 때는 오히려 별로 관심을 안 보이지 아니면 자기 위치를 위협한다고 생각해서 질투하게 될 수도 있고. 하지만 그런 애매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경쟁자도 아니고 그냥 흥미 있는 존재거든. 관심도 끌어보고 싶고, 마음도 떠보고 싶고." "경험담같이 말하네요?“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이솔렛의 얼굴이 약간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곧 그녀는 얼굴을 풀고 말했다. "어쨌든 그래서 그녀가 숨기고 싶어할 화제가 뭔지 짐작한 거야. 그 아가씨가 습격 사실을 확신하고 찾아온 걸 보면 아버지와 강피르 자작의 이야기를 대강 다 엿들은 거고, 그 백작이라는 자의 성격상 자작에게 아무 제안도 안 했을 리가 없는데 그게 뭔지 끝끝내 말을 안 하더란 말이지. 그게 뭐겠니? 하나뿐이잖아" "뭔데요?“ "혼사 문제지." 보리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어째서 그렇게 쉽사리 추리할 수 있는지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아마도 그 벨노어 백작이라는 사람은 윈터러를 갖고는 싶은데, 혼자서 갑자기 습격했을 경우 이후에 자기의 행동이 드러나 추궁당할 것을 염려한 것 같아. 어쨌든 거기는 들판 한가운데가 아니고 폰티나 공작의 성 안이었으니까 모든 일이 잘 숨겨진다는 보장은 없거든. 점잖은 귀족인 백작이 아무 원한도 없어 보이는 멀정한 소년을 습격했다, 그러면 사람들 사이에서 의문이 제기될 거고 그러다 보면 윈터러의 존재가 드러나게 되지 않겠어? 그는 경쟁자 따위는 갖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엉뚱한 강피르 자작을 끌어들여서 그럴듯한 구실을 만들었어. 강피르 자작을 도와주기 위해서 평민 소년을 습격했다, 뭔가 말이 되고 또 시시한 일이니 크게 죄도 안 되는 것 같잖아? 물론 폰티나 공작은 화를 내겠지만 그것만 적당히 무마하면 일이 괜찮게 되는 거지. 그런데 강피르 자작 역시 바보는 아닐 것이고, 따라서 왜 백작이 갑자기 나서서 자기 일을 도와주려 하는지 의아해할 것이 뻔해. 그걸 위해서 백작은 당연히 자신의 요구 사항을, 하나 적당히 만들어 내어서라도 제시할 필요가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당신을 도와줄 테니 당신 아들과 우리 딸을 결혼시키것이 어떠냐, 이런 거란 말인가요?“ "그렇지. 네 얘기를 들어보면 백작이라는 자는 예전부터 자기 딸을 잘 팔아먹는 인간인 것 같으니 말이야." 확실히 맨 처음부터 백작은 자신의 내기 실수로 로즈니스와 백치소년이 결혼하게 생겼다며 그걸 해결해 달라고 그를 끌어들였던 것이다. 이번에도 로즈니스의 혼사가 어쩌고 하면서 윈터러의 존재를 교묘히 숨기려 하는 것을 보면 정말로 보통 교활한 인간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런 걸 다 알게 된 거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 “벨노어 백작이 하기 좋은 최적의 거짓말에서부터 거꾸로 추리해 봐. 그러면 상황이 간단하지." “하지만 강피르 자작은 왜 직접 습격하지 못하고 복잡하게 벨노어 백작의 요구를 받아들인 거죠?” "일단은 두 귀족이 연루되면 폰티나 공작에게도 좀 더 말발이 설 테고, 그것보다도.... 실은 그가 데려온 사람들은 이미 전날 밤에 1차 습격을 했다가 적지 않게 다쳤기 때문에 새로운습격 인원이 필요했겠지. 폰티나 공작의 성 안에 병사를 수십 명씩 데리고 들어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 겠어?“ "그 1차 습격자들을 다치게 한 것은 이솔렛 당신이고요?“ 이솔렛은 그냥 미소지을 따름이었다. 그들의 어깨 너머로 회색 산들이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이런 얘기를 들을수록 이솔렛의 머릿속에 든 괴이쩍은 지식들이 얼마나 많은 건지 궁금해졌다. 어떻게 한 번 살아본 일도 없는 대륙의 일을 그렇게 손바닥 보듯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영주 아들로 태어나 귀족처럼 자란 자신보다도 훨씬 빠르게. 대륙에서 지내다 온 순례자들이 가끔씩 전해주는 것말고는 다른 정보라고는 없을 텐데. "어쨌든 대담한 도박이었어요. 만일 로즈니스가 우리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또는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클로에 아가씨가 외면했더라면 어쩔 생각이었죠?“ "로즈니스 아가씨 문제는 정말로 운에 맡겼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만찬장에서 보아하니 공작은 자신의 딸을 매우 아끼고 신뢰하더군. 공작에게는 전처 자식인 아들도 한 명 있다고 했지? 나이든 아들을 제쳐놓고 곁에 둘 정도의 영리함은 된다는 거야. 그 딸이 아버지를 어렵게 생각하는 편도 아닌 것 같았고, 그리고 내게 카드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고." "아, 그 말을 들으니 생각나네요. 정말로 궁금한 건데, 도대체 당신의 아버지께서 폰티나 공작님한테 베푼 은혜라는 게 뭐예요?“ 이솔렛은 생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런 건 비밀이야, 아버지의 일이니까." 9월 햇살 아래 몇 가닥 하얀 머리카락이 유난히 희게 빛을 냈다. 죽 동행이 있다가 둘이서만 여행하게 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은 까닭인지 두 사람은 너무나 할 이야기가 많았다. 실버스컬 결승이 끝난 바로 그 날 저녁, 시상식이 끝나자마자 파티조차 마다한 채 부랴부랴 폰티나 공작이 내준 마차를 타고 떠난 후로 꼬박 한 달이 흘렀다. 폰티나 공작의 이해할 수 없는 관대함은 아직까지도 미스테리였다. 폰티나 영지를 안전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마차를 빌려준 것까지는 약속한대로 였지만 영지 경계에 이르렀을 때 다른 마차가 기다리고 있는 걸 보고는 정말로 당황했다. 사람을 잘 믿지 않는 보리스가 마차를 가져온 자들의 정체를 의심하자 놀랍게도 그 안에서 나온 것은 한 번도 모습을 보인 일이 없었던 공작의 아들, 조르지오 다 폰티나였다. 조르지오는 보리스가 어렴풋이 상상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일단 겉모습이나 말씨부터가 클로에의 고상함이나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검은 곱슬머리를 됫목을 덮을 정도로만 기르고 재미 삼아 턱수염까지 기르고 있는 이 호리호리한 젊은이 는 농담을 잘했고, 예의를 따지기 싫어했으며, 상당한 기분파였다. 어쨌든 공작이 마차와 함제 딸려보낸 하인들이 모두 그 앞에서 허둥지둥 고개를 숙이는 걸로 보아 거짓 신분은 아니 었다. 그리고 조르지오는 로젠버그 관문까지 자기와 함께 가자고 말했다. 본래 그곳에 볼일이 있어 가는 것인데 그를 태워주겠다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공작의 지시인가 물으려 했지만 조르지오는 그런 화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자유분방하고 쾌활한 듯이 보였지만 여행하면 서 보리스가 느낀 바로는 상당한 외골 고집이 숨어 있는 자였다.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듯 보이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일부러 과장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혀 귀족답지 않은 그는 함께 여행하기에 즐거운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조르지오와 그의 하인 몇과 함께 로젠버그 관문까지 갔고, 관문 앞에서 아쉬운 이별을 고했다. 그런 다음 몇 개월 전처럼 실버스컬 핑계를 대며 적당히 렘므 땅으로 들어서니 낯선 일행이 또다시 기다리고 있었다. 이 자들은 엘티보 서쪽 맞은편에 위치한 쌍둥이 도시 그란티보까지 간다고 말하며 역시 동행을 요청했다. 이번에야말로 부득부득 버티며 캐물어 보니 이들 또한 폰티나 공작, 또는 조르지오가 수배해 놓은 상단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이 모든 일의 까닭을 들을 수 있었다. 벨노어 백작이 보냈다고 생각되는 자들이 오래 전부터 그들을 추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르지오도 떠난 마당에 수십 명이나 되는 상단 틈에 끼여들어 동행하는 것만큼 추적을 피하기에 좋은 방법은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과 동행하여 그란티보까지 갔다. 그들과 헤어진 것이 바로 이틀 전이었다. "참, 그런데 이솔렛, 그 때 실버스컬 수상식 끝나고 나서 볼일이 있다고 잠깐 혼자 어디 갔다왔잖아요. 그 때 뭐했어요?“ 우승 상품으로 받은 순은 두개골은 보리스의 배낭 안에 다른 여행 도구들과 함께 들어 있었다. 이솔렛은 주머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집게손가락 사이에 끼워 보이더니 생긋 웃었다. “그때 너한테 돈 걸었던 부잣집 소년 생각나? 너 그 애 안다고 했잖아, " "칼츠 집안 아들 말인가요“ "응, 그래. 루시안 칼츠." "루시안 칼츠라, 아마 돈 좀 벌었겠죠? 어떻게 저 같은 애한테 돈을 걸 생각을 했나 모르겠어요. 그런 것도 운인가?“ 그렇게 말하며 보리스도 씩 웃었다. 직접 보진 못했지만 올해 실버스컬에서 최근 몇 년 내 최대의 이변이 벌어진 만큼 결승전이 끝났을 때 도박판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다. 당연히 최고액을 따간 것은 이솔렛의 충고로 진짜 '도박‘ 을 한 루시안이었다. 올 실버스컬의 장내 우승자가 보리스라면 장외 우승자는 루시안인 셈이었다. 그 얘기로 온통 떠들썩하던 것을 보리스도 모르지 않았다. “응, 실은 말이지. 나도 너한테 돈을 좀 걸었거든. 이건 동업자를 위한 배당." 이솔렛이 금화를 손가락으로 퉁기자 보리스가 가볍게 낚아챘다. 이윽고 한 개 더, 또 한 개가 더 날아왔다. 보리스가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말했다. "얼마나 번 거예요?“ "어디 보자.... 아직 한줌은 더 남았어." "헤에, 이솔렛한테 이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네가 벌써부터 나를 다 안다고 생각한다면 곤란한데." 그때 보리스가 문득 눈을 가늘게 뜨더니 불쑥 물었다. "이거 아무래도 루시안 칼츠에게 정보를 흘린 게 이솔렛 당신 아닌가 싶은데.... 맞죠?“ "아아, 난 모르겠어. 내가 돈을 거는 걸 보고 따라 건 것이 아닐까?“ 이솔렛은 딴전 피우듯 말하며 금화 두 개를 더 날렸다. 보리스가 두 손을 내밀어 각각 잡아내고는 싱긋 미소했다. 대강 짐작이 갔다. 그때 이솔렛은 새로운 생각을 해낸 듯 다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폰티나 성을 허둥지둥 떠나게 되어서 좀 아쉽지는 않아?“ 금화를 주머니에 넣던 보리스가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아쉽다니요? 아쉬울 게 뭐가 있어요?“ "실버스컬 우승자를 위한 성대한 연회가 준비되어 있었잖아. 주인공이 빠진 셈이 됐으니 별로 멋진 연회는 못되었겠지." "그렇지 않을 거예요. 소자작이 저 대신 주인공이 되었겠죠," 두 사람 모두 같은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연회가 열리기 전에 떠나려고 폰티나 공작을 만나 급히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허락을 받아 마차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니 뜻밖의 인물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름 아닌 루이잔이었다. 흠칫 놀라는 두 사람 앞에서 루이잔은 엷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좋은 승부 해줘서 고맙다. 난 이제 더 이상 실버스컬에 나오지 못하니 언제고 켈티카에 오거든 한 번 찾아와라, 너와 다시 한번 승부를 가리고, 그리고 오늘 연회의 네 몫을 대신 대접하고 싶다” "하지만 소자작이 나중에 널 초대해도 아노마라드 최고의 미녀라는 아가씨는 불러오지 못하잖아. 그 때 연회에 갔다면 반드시 그 아가씨와 한 곡 추었을 텐데. 안 그래?“ 이솔렛의 얼굴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보리스는 약간당황해서 코를 찡그렸다. “미인이라는 건..... 개인의 취향이라고요. 그쪽은 취향 밖이에요." "취향 이상의 미인이라는 것도 있는 거잖아? 그쯤은 되겠던데." 이쯤 되자 보리스도 반격할 말을 찾아내어 짓궂게 웃었다. "그렇겠죠. 그런데 먼저 만난 아가씨 때문에 눈이 나빠져 버려서 다른 미인은 도무지 못 알아보겠어요." 말을 꺼낼 때까지는 좋았는데 맺고 나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물론 그 말은 사실이었다. 한 사람에게 이미 눈멀었으니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올 리 없잖은가.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입밖에 낼 마음은 본래 아니었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이솔렛의 표정을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보니까 이솔렛은 일부러 고개를 돌려 멀리 있는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행복한 심정이 솟아올라 나오는 웃음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이런 행복을 전에도 느껴보았던가? 그러나 이런 감정을 되새길 때마다 저도 모르게 떠오르는 것은 나우플리온의 모습이었다. 그는 보리스에게 처음으로 신뢰가 무엇인지, 마음놓고 웃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 사람이었다. 예프넨이 없는 세상에서 유일한 의지처가 되어 주었고, 그러면서도 소년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공백을 인정해 주었다. 렘므에서 둘이 여행할 때는 그에 대한 애정을 다른 무엇과 비길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한 일도 없었다. 그만큼 나우플리온에 대한 보리스의 애정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우플리온이 곁에 없는데도 이토록 행복한 자신과 마주할 때면 마음 속에서 쉽사리 용납할 수 없는 감정이 비집고 올라와 그를 괴롭히곤 했다. 심할때 그것은 자기 혐오에 가까웠다. 그러나 때때로 잊고 있었고, 두 사람에 대한 감정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때도 있었다. 지금 같은 때가 바로 그랬다.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기분은 이솔렛만이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때 이솔렛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네가 클란치 알리스테어와 싸울 기회가 없었던 것이 잘된 일일까?” "저한테 지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실망한 것처럼 보였는걸요." "글쎄. 그의 집안은 절망 같은 것에 익숙하지 못하지. 절망을 겪은 일이 별로 없거든. 그런 경우 보통은 나쁜 상황을 만나는 순간 쉽사리 무너지게 되는데, 그 애 같은 경우는 좀 달라. 말하자면 자기에게 닥친 절망을 절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랄까. 자신 역시 절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인정하지도 않는 거야. 그런 사람은 어디에서든 자기가 빠져나갈 길을 찾아내기 마련이지," "적어도 검의 사제가 되기 위해 당신 아버지의 이름을 빌리진 못하게 되겠죠." 그 말을 들은 이솔렛이 비꼬듯 한 마디 던졌다. "그가 뭘 또 생각해내서 절망을 딛고 일어날지 기대되는걸." "전 그가 우리의 일을 섬에다 뭐라고 말할지 약간 걱정스럽네요. 폰티나 공작 일만 해도 그렇고.... 음, 말이 나왔으니 얘긴데 폰티나 공작이 나중에 제게 어떤 걸 요구할까요?“ 보리스는 당연히 대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듯 우연히 만난 사람이 전적인 호의를 갖고 그를 도와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솔렛은 판단을 보류하는 눈치였다. "그것보다 말이야, 네가 소자작의 오른손을 자르지 않은 것은 어떤 심경 변화의 결과였는지 그것부터 묻고 싶은데 " 보리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걸 말하려면 옛날 이야기를 해야겠는데요." 보리스는 실버스컬 결승에서 루이잔의 오른팔을 향해 검을 내리쳤지만. 마지막 순간 검을 옆면 쪽으로 꺾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폰티나 공작의 도움을 처음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뜻밖으로 공작은 그 일에 대해 아무 것도 묻지 않았고, 약속한 것보다 더한 친절 을 베풀어주었다. 그들은 그 까닭을 물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길게 하진 마." 보리스가 옛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상처를 헤집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렇게 말했다. 보리스도 그냥 가벼운 한숨을 내쉰 뒤 짧게 말했다. "소자작에게도 어린 동생이 있더군요. 그뿐이에요." 더 긴 이야기는 필요 없었다. 오전 내내 실버스컬 당시의 일을 쉬지 않고 얘기하던 둘은 잠시 말없이 걸어갔다. 잡목이 흩어진 땅이 서서히 낮아지면서 강이 나타났다. 강은 꽤 폭이 넓었고 건너편 기슭에는 갈대가 숲을 이루며 우거져 있었다. 보리스는 문득 떠오르는 추억을 생각하며 미소지었다. 이솔렛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끼고는 입을 열었다. "처음 보는 강이 아닌걸요. 예전에 이실더 님하고 여행할 때.... 여기에서 아주 우스운 사고를 당한 일이 있어요." 엉뚱한 내기를 하다가 얼음물에 빠져서, 얕은 줄도 모르고 허우적거리며 죽는 줄로만 알았다가, 근처 마을 사람들에게 구원받았던 그때의 일이 낱낱이 떠올랐다. 이솔렛은 굳이 내용을 묻지 않고 이해한다는 듯한 미소만을 보였다. 잠시 후 이솔렛은 강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깊을까?“ 이곳은 그 때 소동을 벌인 곳보다 하류인지라 건널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강 저쪽 편에 두 사람이 앉아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강기슭에 바짝 다가선 보리스는 손나팔을 만들어 상대방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만, 이 강을 건널 만한 곳을 아십니까!" 시골사람 차림인 그들 중 한 명은 여자였고, 다른 하나는 거친 옷 안쪽으로도 상당히 건장한 몸집을 지닌 듯한 사내였다. 처음에 그들은 지나치게 낚시에 골몰한 사람처럼 대꾸를 하지 않았는데, 한 번 더 부르자 여자 쪽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장대가 하나 들려 있었다. 햇빛이 가려지는 널찍한 짚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까 떠올렸던 사건과 더불어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왠지 모를 향수가 스며 올랐다. 그러고 보면 그 때 머물렀던 헤베브로 마을도 기껏해야 여기서 몇 시간 거리에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대꾸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을 건너려면 저쪽에 바위 몇 개 있는 걸 딛고 뛰라고! 물론 능력이 된다면 말이야!" 가만히 살펴보니 10미터쯤 올라간 상류에 뽀족한 바위 몇 개가 징검다리처럼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런 차림을 하고 있는 걸로 봐서 렘므 토박이들이어야 하는데 저건 전형적인 남부 말씨 아닌가? 하긴, 예전에 어떤 사람도 그랬었다는 생각에 보리스와 이솔렛은 그쪽으로 갔고, 별로 어렵지 않게 강을 건넜다. 특히 이솔렛은 거의 한 발로 한 개의 바위만 디딜 정도로 가볍게 건너뛰어서 반대편 기슭에 내려섰다. 그런 다음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그 여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낚시를 하던 두 사람이 일어나 있었다. 일어선 것뿐만 아니라 둘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몇 걸음 다가가니 여자가 씩 미소지었다. 물론 그녀는 헤베티카가 아니었다. 대략 스물 후반에서 서른 초반은 되었겠다 싶은 여자였다. "솜씨 좋은데. 특히 아가씨, 등 뒤에 그런 걸 매달고 다니는 거 보니 검사인가 보지? 몸이 대단히 가볍던데." "고마워요." 이솔렛은 낯선 사람은 딱 적당한 예의로만 대하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그 여자가 이솔렛 쪽으로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어 덥석 손목을 잡는 게 아닌가? "!" 잠깐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솔렛은 반사적으로 팔을 꺾어 상대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놀랍게도 그 여자의 손은 마치 갈고리처럼 붙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손을 쓰려 했는데 이번에는 그쪽 손도 붙잡혀 버렸다. 이솔렛의 표정이 달라졌다. 이솔렛도 여자 치고 약한 팔 힘을 가진 것이 아닌데, 이 여자의 악력은 건장한 사내들과도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두 손이 금방 빨갛게 물들었다. 이솔렛이 차갑게 바꿔 목소리로 대뜸 물었다. “무슨 짓이지?” "검은 속도만 갖고 휘두르는 것이 아니지, 안 그래?“ 그렇게 말하며 여자는 고개를 뒤로 홱 젖혀 짚모자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여러 개의 핀으로 정교하게 꽃아 올린 머리모양과 얼굴이 드러났다. 시골 아낙네라니,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정성스레 다듬은 것이 틀림없는 꽤 예쁜 얼굴과 흰 피부, 그리고 비웃는 듯한 눈동자를 보자마자 이 여자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들은 누구지?" 보리스가 덤벼들려는 순간, 뒤에서 말없이 서 있던 사내가 갑자기 끼여들며 보리스의 어깨를 밀쳤다. 그의 손이 닿는 순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힘이 밀려들며 중심이 어긋났다. 보리스는 바닥에 넝어지고도 한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정도의 힘은 아직까지 경험한 일조차 없었다. "널 잡으러 온 지옥 사자란다, 꼬마야." 귀에 거슬리는 묘한 억양이었다. 이어 여자는 자기 동료를 돌아보며 완전히 달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톤다! 계집애를 묶어버려!" 톤다라는 자의 손목 안쪽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밧줄이 이솔렛의 발목을 휘감았다. 밧줄은 흡사 살아 있는 것처럼 단단히 감겼고, 이솔렛의 무릎이 꺾이자 여자가 잡고 있는 팔을 잡아당겨 일으켜 세웠다. 이솔렛은 팔을 빼내려 애썼지만 여자의 손은 여전히 까딱도 하지 않았다. 이솔렛이 소리쳤다. "물러서, 보리스!" “호, 보리스라.... 친절하게 확인까지 해 주는군. 뭐, 얼굴 보고 이미 짐작했지만 말야." 이솔렛이 고개를 돌려 보리스를 쏘아보며 다시 한 번 소리질렀다“' "물러서라니까! 검을 뽑아!" 보리스는 벌떡 일어나며 몇 걸음 물러서 검을 뽑았다. 이솔렛을 두고 달아날 생각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러자 말이 없는 사내가 다시 한 번 손을 뻗었고, 이번에는 올가미가 날아왔다. 올가미에는 작은 쇠발톱과 같은 것들이 빙 둘러 박혀 있었다. "에잇!" 날렵하게 휘두른 검이 올가미를 쳤지만 쇠발톱과 부딪쳐 퉁겨났다. 이어 올가미 외에 두 가닥의 밧줄이 동시에 교묘하게 날아들었다. 밧줄 끝에도 날카로운 쇠날이 달려 있었다. 이상하게도 이 밧줄들은 이솔렛을 묶은 것과는 달리 밧줄 안에 특별한 재질이 들어 있는 듯 탄력이 강하고 손쓰는 사람의 의도대로 확실히 움직였다. 그러나 긴장하는 순간, 손목에 탄력이 붙었다. 진로를 짐작하기 힘든 밧줄과 올가미가 다가오기를 기다려 모조리 쳐내 버렸다. 그러자 여자가 놀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쪽도 괜찮은데? 이쪽 여자만 빠른 줄 알고 견제했더니. 그 정도 실력이면 예의 삼아 이름을 밝혀 줘도 되겠군. 난 마리노프 캄브! 적당히 대할 생각은 말아. 우리가 너희를 죽여도 될 것 같았으면 벌써 죽였을 테니까." 그 이름의 어감이 익숙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바로 알아차렸다. 바로 트라바체스 출신의 이름이었다. 그렇다면 블라도 삼촌이 보낸 자들인가? "너희는 누구냐! 삼촌이 보낸 거냐!" "좋은 추리력이지만 조금 더 멀리 생각해 봐." 다시 현란한 움직임으로 밧줄들이 다가왔다. 신경을 최대한 집중해서 하나를 쳐내고, 하나를 뛰어넘고, 하나를 끊어냈다. 자르며 느낀 거지만 밧줄의 재질은 쇠가죽 채찍보다도 튼튼했다. 보리스의 무기는 검이므로 접근을 해야 적을 칠 수 있는데, 그게 간단하지 않았다. 억지로 두 걸음 정도 다가가는데 밧줄 머리가 홱 고개를 돌리는 것 같더니 재빨리 그의 등에 쿡 박혔다. 얇긴 해도 갑옷을 입고 있는데 그것조차 간단히 뚫어 버렸다. "아!" 온 몸에 경련이 일었지만 당장 검부터 돌려 쳐내고 다시 물러났다. 등 뒤의 상처를 살필 겨를도 없었다. 다시 올가미를 피해 뛰어올랐다. 밧줄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무릎을 스치고 지나갔다. 곁눈으로 흘끗 이솔렛을 보았다. 마리노프라는 여자는 이제 발이 묶인 이솔렛을 질질 끌어당겨 물가로 데려가고 있었다. 그제야 보니 마리노프의 팔은 남자들 중에서도 보기 힘든 엄청난 근육질이었다. 힘으로는 도저히 이솔렛이 당할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다시 덤벼들었다. 등이 욱신거렸으나 그 정도로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이 아닌 밧줄들과 싸우는 걸로는 적에게 어떤 타격도 줄 수가 없었다. 이솔렛이 있는쪽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이 살아 있는 것 같은 밧줄들이 또 다시 진로를 막아버렸다. 검술에 자신이 붙은 후로 이렇게 수습할 수 없는 적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몇 개인가 밧줄 끝을 잘랐지만 곧장 새로운 밧줄들이 튀어나와 수는 점점 늘어났다 한 가닥이 아래쪽으로 파고들어 보리스의 발목을 감으며 살갗을 찢어냈다. 겨우 그걸 끊고 나니 풀밭 곳곳에 점점이 피가 뿌려져 있었다. 장거리용 무기가 없다는 것이 이토록 치명적일 줄은 몰랐다. 실버스컬에서 싸우던 때처럼 자기 것이 아닌 실력을 자제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있는 실력을 다해 검을 움직여야 겨우 네 가닥 밧줄을 모두 차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이 없었다. “자, 자, 들어가라고. 아아, 목욕하기엔 좀 추운 날씨라는 거야?” 마리노프는 이솔렛의 묶인 발을 걷어차 강물에 들어가게 하더니 아예 자기가 먼저 들어가서 홱 끌어당긴 다음 더 깊은 쪽으로 자꾸 밀어 넣었다. 이솔렛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리노프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사력을 다했다. 그러나 너무나 상황이 나빴다. 무엇보다도 빠른 이솔렛의 검이 있었더라면 저런 밧줄들을 잘라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단 하나 다행인 점이 있다면 이솔렛을 잡느라고 이 괴력을 가진 여자 역시 공격을 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거였다. 사정은 모르지만 이들은 보리스와 이솔렛을 죽이지 말고 사로잡아 오라는 명령을 받은 듯했다. "죽이지 못하는 임무 따위, 정말 짜증스러운데!" 그렇게 외치며 마리노프는 사정없이 이솔렛의 몸을 물 속으로 집어 넣었다. 몸싸움을 벌이다 보니 물이 이리저리 튀는 바람에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젖혔는데 그 순간 상황이 바뀌었다. 보리스는 잘 보지 못했지만 그 때 이솔렛은 손목을 잡힌 상태 그대로 두 다리를 오므려 팔 사이로 솟구치더니 무릎으로 상대의 가슴을 걷어찬 뒤 다리로 목을 휘감아버렸다.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하지 못할 곡예였다. "으윽, 무슨 짓이야!" 중심을 잃은 마리노프가 물 속에 자빠졌고, 목에 올라탄 이솔렛도 같이 물에 빠지는 가운데 자세가 엉키며 드디어 손목이 풀렸다. "이, 이런!" 마리노프는 물에 젖어 거추장스러워진 옷 때문에 빠른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벌떡 일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눈앞에 물보라가 일었고, 섬광 같은 검날이 바로 찔러져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마리노프는 당장 도로 물에 주저앉아 몸을 뒤채며 재빨리 손을 뻗어 아까 물가에 놓여 있던 장대를 집어 당겼다. 그러나 곧장 심장을 노렸던 이솔렛의 검이 어깻죽지를 푹 꿰뚫고 말았다. "아악!" 마리노프는 갑옷같은 것을 전혀 입고 있지 않았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나와 강물을 적셨지만 이솔렛은 망설임 없이 두 번째로 여자의 드러난 팔을 후려쳤다. "이.... 이 빌어먹을 계집애가 감히!" 마리노프의 장대가 물에서 나오는 순간 이솔렛도 보았다. 그것은 장대가 아니었다 본래 끝에는 거대한 도끼날이 달려 있었는데 물에 담가 놓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이솔렛도 의심할 바가 없었다. 이들은 노상강도 따위가 아닌 진짜 살인자들이었다. 그렇게 날아온 도끼날이 이솔렛의 두 번째 검을 막아냈다. 그러나 마리노프는 한 번 입은 상처 때문에 버거워하며 간신히 일어나 핏발선 눈으로 이솔렛을 쏘아봤다. 부상 자체보다 부상당했다는 사실이 그녀를 견딜 수 없이 화나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내 몸에.... 이런 상처를 내? 명령 따위.... 필요 없어! 단숨에 죽여버릴 테다!" 그 말에 이솔렛의 두 자루 검이 응답해왔다. 본격적인 싸움이 벌어졌다. 전형적인 속도와 힘의 싸움이었으나 한쪽은 이미 부상당한 상태, 그러나 놀랍게도 마리노프는 그 무거운 도끼를 한 손으로 들고 휘둘러대며 이솔렛의 빠른 검을 여러 차례 막아냈다. 상대의 무기가 워낙 무거운 것인지라 한 번 부딪치면 검이 박살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솔렛도 섣불리 접근할 수는 없었다. 이렇듯 준비 없이 벌어진 싸움에서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정신을 집중시컥야 하는 찬트는 불행히도 도움이 안 되었다. "톤다! 젠장, 너도 아직이야? 지금껏 애송이녀석 하나 요리 못하고, 그러고도 네가 세 번째 날개야?“ “......” 톤다는 말이 없는 사내였으나 마리노프가 악을 쓰자 속도가 빨라졌다. 보리스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미 다친 곳이 여러 군데였다. 이솔렛이 마리노프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오래 끌다가는 결국 둘 다 사로잡힐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이솔렛은 무섭게 휘둘러지는 도끼를 뚫고 다시 한 번 옆구리에 상처를 입혔다. "뭐야! 왜 이렇게 귀찮게 됐지? 이거 얘기하고 다르잖아!" 마리노프는 마법사 종그날을 통해 류스노와 유리히로부터 받았던 전갈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 얘기로는 그냥 '평범한 소년들'이며, 잡아 족치는 것 역시 식은 죽 먹기라고 했던 것이다. 그 평범한 소년들이 이들이라고? 농담이 지나치잖아! 그러나 전세는 점차 마리노프와 톤다에게로 기울어갔다. 부상당한 마리노프와 찬트로 강화되지 않은 이솔렛의 실력은 호각이었지만, 보리스는 낯선 무기를 가진 적에게 익숙해지지 못하고 연속적으로 상처가 늘어갔다. 지금껏 배운 것이 검 든 상대에게 대적하는 방법뿐이었다는 사실이 이제야 실감이 났다. 본래 대륙 사람이었던 그가 인구가 적고 좁은 섬에서 살면서 그곳의 질서에 안주해버렸던 것이다. 섬에서는 검은 검끼리 싸우면 되었지만 대륙의 적들은 아무 것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어느새 잊고 있었다. 철벅, 발치에 물이 닿았다. 밀리다 보니 이미 강기슭이었다. 보리스는 정신을 집중해서 눈을 혼란시키는 밧줄들에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자꾸만 시야가 혼미해질 뿐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 이 시야의 혼미가 단지 힘겨워서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코 끝에 감각되는 새로운 냄새가 있었다 뭔가를 태우는 듯한 탁한 냄새였다. 그걸 눈치챈 것은 보리스 혼자만이 아니었다 "뭐야, 불이 났네?“ 마리노프가 새된 목소리로 소리질러 이솔렛의 주의를 흐트러뜨리려 하면서 재빨리 도끼를 휘둘러 팔을 찍으려 했다. 그러나 이솔렛은 놀라기는 커녕 오히려 더 날카로운 동작으로 상대의 손목을 노려 정확히 찔렀다. "아앗!" 등 뒤의 갈대밭에서 불이 일어나 있었다. 갈대밭이 워낙 넓게 펼쳐진 터라 어디서부터, 왜 불이 났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불은 서서히 사납게 번지기 시작하여 이윽고등을 뜨겁게 데우기 시작했다. 온 몸이 젖은 이솔렛은 그나마 나았지만 보리스는 앞에는 밧줄, 뒤에는 불을 놓고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그때였다. "이쪽으로!" 낯선 목소리가 들리더니 싸우고 있는 그들 앞으로 짚단처럼 묶은 불붙은 갈대 뭉치가 몇 개나 떨어졌다. 그 바람에 밧줄에 불이 붙었다. 특별한 재질 탓인지 금방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톤다라는 사내는 흠칫하며 밧줄을 거두어들이려 했다. "보리스! 어서 오라니까!" 그 목소리는 보리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톤다가 밧줄을 거두는 새 틈이 난 보리스가 흘끗 보니 몇 명의 사내들과 여자들이 불붙은 갈대밭 안쪽에서 손짓하고 있었다. 저리로 오라고? 그때 이솔렛이 먼저 상황을 알아챘다. "보리스, 저들을 따라가!" 그러면서 자신이 먼저 갈대밭으로 뛰어들어 불길을 뚫고 들어갔다. 예상대로였다. 불은 그들이 싸우던 빈터를 둘러싼 갈대들에만 붙어 있었고, 그 안쪽은 이미 물로 적셔져서 불이 번지지 않는 상태였다. 이윽고 보리스도 따라 들어왔는데 옷이 말라 있어서 불똥을 털어 내 어야 했다. 한 사람이 소리쳤다. “자, 지체 없이 달리자고!" 상대의 얼굴을 확인할 틈도 없이 갈대를 뚫고 달렸다. 갈대가 얼마나 높이 자라 있는지 조금만 몸을 수그려도 머리까지 다 가려졌다. 등 뒤는 불길로 가려져 있어서 움직임이 금방눈에 띌 염려도 없었다. 다만 보리스는 여기저기 당한 부상들 때문에 움직임이 몹시 고통스러웠다. "여기야!" 겨우 갈대를 뚫고 튀어나오니 열 명이 넘는 남자들이 땅을 개간하려는 것처럼 곡괭이와 쟁기, 삽 같은 것을 들고 서 있었다. 그제야 그들을 안내해 달려온 사람의 얼굴을 쳐다볼 여유가 생겼다. 긴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장대를 하나 든 그 여자가 싱긋 웃으며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남부 말씨를 쓰는 익숙한 얼굴의 뱃사공 아가씨, 헤베티카였다. "오랜만이야. 많이 컸네?“ 헤베티카를 따라 마을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 무렵이었다. 전과 마찬가지로 마을 한가운데에 모닥불이 타올랐고, 불을 둘러싸고 사내들 몇이 술을 마시며 떠들어대고 있는 것도 낯익은 풍경이었다. 일단은 부상을 먼저 치료하러 갔다. 말린 약초를 잔뜩 걸어놓은 집에 들어가니 약을 달이던 할머니가 상처를 씻기고 찧은 약초를 둥글게 뭉쳐서 붙여 주었다. 보리스는 잘 몰랐지만 등에 입은 상처가 생각보다 심각했는지 들여다보던 이솔렛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급박한 상황이었을 때는 잘 몰랐지만, 등에 입은 상처는 팔을 조금만 움직여도 매우 쓰라렸다. 겨우겨우 웃옷을 다시 입을 수 있었다. 다시 밖으로 나오니 기다리고 있던 헤베티카가 모닥불 앞으로 가자며 손짓했다. 거기에는 또 한 가지 친근한 물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 먹어. 너와 그 짓궂은 아저씨가 같이 지켜준 그 옥수수밭에서 거둔 옥수수야." 불에 구운 옥수수를 먹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한참 고생하던 보리스와 이솔렛이 잠시 후 서로의 얼굴을 보니 똑같이 입가가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둘은 거의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사내들은 술을 권했다. 대륙에 온 이래 내내 술은 건드리지도 않던 이솔렛이 놀랍게도 한 잔 달라고 해서 받아 마신 다음 약간 발그레해진 얼굴로 보리스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 미소를 보는 사람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좋은 곳이구나." 옥수수 때문에 살짝 덴 손가락 끝에 침을 바르면서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리 오래 머물렀던 마을은 아니었다. 망신스러운 얼음 강물 사건으로 시작해서, 우스꽝스러운 옥수수 재배지 쟁탈전으로 끝났던 체류 동안 달리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나우플리온이 엄청나게 마셔댔던 묵은 포도주의 냄새뿐이었다. 포도가 나지 않는 이곳 추운 땅에서 포도주라는 것이 꽤 귀한 물품이었다는 깨달은 것은 마을을 떠나고도 한참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래, 멋대가리 없는 아저씨 대신 예쁜 아가씨랑 같이 다니게 된건 축하할 만한 일이긴 한데 말야, 도대체 아저씨는 어디다 갖다 버린 거야?“ 별로 변한 것이 없어 보이는 헤베티카의 남부 말씨에서 나우플리온에 대한 친근감을 눈치챈 보리스는 옛 일을 생각하는 사람의 눈빛으로 웃음 지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나우플리온에게 했듯 불쑥 농담으로 말했다. “너무 잔소리가 많아서 내다 버렸어요. 혹시 소식은 못 들었고요?” "소식은 너나 알면 좀 전해 주지 그래. 그 사람 소식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나 하나뿐은 아니니까 말이야." "누가 또요?“ "그때 내가 말하지 않았어?“ 헤베티카는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되는 듯 잠깐 주위를 둘러보더니 보리스와 이솔렛을 일으켜서 자기 집으로 가자고 끌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서 돌과 흙을 싸 발라 지은 납작한 집에 들어가자 한 남자가 이불 속에서 돌아누워 코를 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헤베티카는 다짜고짜 다가가더니 남자의 등을 발로 걷어찼다. "그만 일어나라고요! 도대체 몇 시간을 자는 거야?“ 남편인가, 쾌나 난폭한 부부구나, 하고 생각하며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남자가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보리스는 그가 일어나 앉는 모습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남편인지 뭔지 알 수 없어도 이 자는 대단한 싸움꾼임에 틀림없었다. 잠에서 덜 깬 멍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도 일어나는 움직임이 달랐고, 앉은 자세가 달랐다. 더구나 요즈음의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소매없는 웃옷 옆으로 드러난 어깨와 팔은 결코 가볍게 단련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절로 졸음이 쏟아지게 하는 좋은 마을이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럼 우리가 야만족들처럼 천막이나 치고 살아야겠어요?“ "휴, 그것 참. 나도 벌써 지붕 있는 집에 익숙해져버린 건가." 헤베티카는 두 사람을 돌아보며 앉으라고 손짓했다. 앉자마자 가장 먼저 말문을 연 것은 뜻밖에도 이솔렛이었다. “당신은, 님 반도의 야만족이군요?” "야만족? 나는 캄자크야. 너희들이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우리들은 스스로를 원종족이라고 부르지. 캄자크는 그 중에서 가장 위대한 부족이고 나는 그들의 아들이다. " 헤베티카가 두 손을 좌우로 들어올리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어쨌든 같은 얘기라고요." 그러나 이솔렛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캄자크 족이었군요. 정확히 모르고 있어서 미안해요. 난 이솔렛이에요. 그냥 떠도는 사람이죠." 보리스는 이솔렛이 이렇듯 먼저 자신을 소개하며 상대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을 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어쨌거나 자신도 소개해야 할 것 같아 입을 열었다. “보리스 산입니다." 그새 부담스러워진 미스트리에라는 이름은 묻어놓고 다시 ‘산’ 이라는 성을 쓰게 된 보리스였다. “난 이자크.... 그런데 헤베, 내 성이 뭐였더라?” "듀카스텔이었죠. 하지만 있으나 없으나 그게 그거 아닌가요? 직접 만들어 붙인 성이 뭐 대수라고." 보리스가 픽 웃고 말았다. 나우플리온이 헤베티카의 성을 멋대로 만들어 붙이던 생각이 떠올라서였다. "아니, 이젠 중요해. 산스루에 돌아가면 다들 날 그 이름으로 알고 있거든. 내가 내 이름조차 못 알아들어서는 곤란하지." "아아, 다시 돌아가긴 할 생각인가 보네요?“ "글쎄, 그건 잘 모르겠네," "거기 아름다운 부인이 기다리고 있다고 안 했어요?“ "아름다운 부인도 있고, 아름다운 집과 제단과 그릇들도 있지. 밤낮으로 그것들을 보고 절해야 해. 정말 지겨운 거라고. 그걸 다시 해도 좋을지 요즘 생각중이야." 헤베티카는 이자크의 말이 허풍으로 느껴지는 듯 별로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두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보리스, 예전에 들은 기억이 날지 모르겠지만 내 오빠예요. 아아, 물론 난 야만족이 아니라고요. 우린 배가 다르니까. 단지 아버지만 같지요." 그제야 보리스도 생각이 났다. 나우플리온이 이곳에 왔을 때 헤베티카에게 ‘당신 이복오빠가..'라고 말을 꺼낸 일이 분명 있었다. 그때 헤베티카는 발끈하며 오빠의 행방을 물었고 나우플리온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 사람이 아마도 이 자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 이자크라는 자는 이솔렛을 잠시 쳐다보더니 말했다. "아가씨는 싸우는 사람이군. 또는 싸우는 사람의 딸이군. 렘므 놈들중에서 이런 사람을 보기는 힘든데." "전 렘므 사람은 아니에요. 그냥 떠돌아다닐 뿐이죠. 그러나 그 말이 옳고, 또한 같은 말을 되돌려 드릴 수 있겠네요. 당신은 싸우는 사람이거나, 또는 싸우는 사람의 아들이로군요." "그래 그래. 하지만 하나는 틀려. 내 아버진 대장장이야." 헤베티카가 무슨 소리냐는 듯 입을 열었다. "오빠, 아버지는 캄자크의 족장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어째서 대장장이라는 거죠?“ "족장이지만 대장장이야. 그 두 가지가 모두 아버지야." 이자크라는 사내의 말투는 단순하지만 담백했고, 상대방의 반응을 계산한 흔적이 전혀 없어 보리스의 마음에 들었다. "오빠, 이실더 산이라는사람이 여길 거쳐갔다고 말한 일이 있죠? 그때 같이 있던 소년이 바로 여기 이 사람이에요. 뭐, 지금은 소년이라기보다는 젊은이가 됐군요. 소식 물어볼 거라도 있으면 물어봐요." 이자크는 입을 벌려 웃으며 말했다. "오, 자네들이 이실더를 알아? 그는 좋은 친구였지. 난 그와 같이 볼민가 강의 붉은 물고기를 전부 잡았어. 물론 물고기는 내년에 또 왔지만 말이야. 우린 붉은 물고기가 알을 낳을 때까지 기다렸거든. 그래야 내년에 또 잡을 수 있으니까, 그는 나보다 더 작살질을 잘 했지. 나는 그보다 주먹질을 더 잘 했고 말이야. 우린 좋은 친구가 될 뻔했는데 그는 너무 바빠서 다른 곳으로 가고 말았어. 그가 보고 싶군. 그는 어디에 있나? 죽지는 않았나?“ 보리스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가 이솔렛을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나우플리온이 어디에 있는지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자 이솔렛이 보리스 대신 입을 열었다. “그 분은 지금 혼자서 여러 곳을 떠돌고 계십니다. 저희는 곧 그 분께 돌아갈 것이며 그 때에는 그 분도 조금쯤 웃을 수 있겠지요." 2. 원하는 것, 원할 수 없는 것, 원해선 안 되는 것 "그 사람, 평생을 전투로 산사람이었어, 그러면서도 저토록 고뇌한 점 없는 얼굴이라는 것이 놀라웠어." 밤 공기 속으로 퍼져나가는 입김은 담배 연기 같기도 했다. 잠들기전 잠시 나온 산책이었다. 마을 아래로 내려가는 비탈길이 어렴풋이 보이는 곳에서 보리스와 이솔렛은 나란히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보리스는 등의 상처가 점점 더 쑤시기 시작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솔렛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당신이 그에게 먼저 자신을 소개했군요? 일종의.... 동족을 알아본다는, 그런 것인가요?“ "글쎄, 그보다도 그가 조금 부럽구나. 30년도 넘게 산 그 사람보다 20년도 못 산 내가 더 번뇌가 많은 것 같으니. 같은 전사의 길을 걷는 사람으로서 부끄럽다고 할까." "번뇌라, 당신의 번뇌는 도대체 뭐죠?“ 이솔렛은 대답 없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 몇 개만이 박힌 흐린 하늘이었다. 보리스는 이솔렛의 옆얼굴을 보며 이번만은 대답을 듣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조금씩 생각해오던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쪽에게도 물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솔렛, 당신은 나우.... 이실더 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죠?“ 이솔렛은 조금 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이야." “나의 몰이해가 당신에게는 중요하지 않나요?” 말하고 나서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것이 그녀에게 중요한지 안 중요한지,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녀가 자신에게 이해 받고 싶어할까? 다행히 밤이라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너의 몰이해......” 그렇게 뇌까린 후 다시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솔렛이 입을 열었을 때, 보리스는 자신의 뺨을 감싸쥔 채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의 몰이해, 너의 오해를 말해 봐" "예전에 이실더 님은 당신이 그 분을 싫어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내게 말해준 일이 있었죠. 그 이야기 속에는 약간 이해가 가지 않는 점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당신도 똑같은 사건에 대해 말한 일이 있죠..... 그때 당신이 한 말을 기억하고 있어요. ‘그런 어이없는 소리 가 믿어지느냐‘ 라고 했죠." 보리스는 숙였던 고개를 들며 손을 뺨에서 뗐다. 밤 공기가 뺨에 시원하게 와 닿았다. "그리고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진 두 사람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고도 말했죠. 일단은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런 일, 쉽게 잊혀지는 것은 아닐 테니까, 그렇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건.....“ 보리스는 이솔렛에게 고개를 돌렸다. “바로 당신의 혼란스러운 태도예요. 오늘 일도 그랬고, 그 전에도 죽.... 난 아무래도 당신이 그를 미워한다고는 못 믿겠어요. 그러나 용서했다고도 생각되지 않죠. 당신과 그 분 사이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내가 짐작할 수 없는 특별한 비밀이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것만 같아요." 이솔렛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보리스는 짤막한 한숨을 내쉬며 말을 맺었다. "그리고 당신한테 이런 질문을 할 자격이 내게 있기나 한 건지, 그 것도 모르겠군요." 밤이 깊어지자 별들이 비로소 깨끗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하늘은 점차 개이고 있었다. “자격 같은 말은 그만둬. 그런 문제 때문에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야." 늘 듣던 단정한 목소리와는 어딘가 달랐다. 어딘가 모르게 살짝 젖은 듯한 음성이었다. "일부러 숨기려 애쓴 것도 아니었어. 그 화제가 싫었던 것뿐이지. 아니, 실은 그런 화제를 입에 올리는 나 자신을 상상하기 싫었어. 왜냐하면.... 그건 너무 어리석은 이야기니까. 다시는 고칠 수 없는 망가진 집처럼, 그냥 내버려 둔 거야. 비바람에 깎이고 쓸려 언젠가는 먼 지로 변해버리길 바라면서. 하지만 그렇게 되기엔 내가 살아온 생애가 너무 짧았지 ." 보리스는 말없이 기다렸다. 끼여들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을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것,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네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이솔렛의 목소리가 차갑고 분명해졌다. 일부러 그렇게 말하려 애쓰는 것 같았다. "그게 너라서, 더 이야기하기 싫었어." 갑자기 자신이 이솔렛에게 무슨 고통을 주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리스는 이솔렛의 팔을 잡으며 머리를 저었다. “하고 싶지 않은 말이라면 듣지 않겠어요. 듣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아냐. 우스운 거지. 이젠 그게 너이기에 꼭 해야겠어." 이솔렛이 고개를 돌려 보리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둠속이었지만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나는 것이 느껴졌다. "이실더 님, 아니 나우플리온 님과 나는, 오래 전에, 내가 열 살이었을 때," 짧은 침묵이 한없이 길게 느껴지고, 드디어 대답이 울렸다. "약혼했었고, 파혼했어." “......” 이런 기분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갑자기 목구멍 속에서 뭔가 솟아오르는 듯하더니 다시 서서히 가라앉았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더 생각해 봐야 할까? 그랬다면, 지금은? “보리스. 나를 봐." 정신을 차려보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떨구었던 모양이었다. 이솔렛은 조금의 변화도 없는 진지한 표정 그대로 그를 보고 있었다. “네가 나를 존중한다면, 이미 시작한 이 이야기를 끝까지 진지하게 들어 줘. 아무 것도 모르든지 모조리 다 알든지 둘 중의 하나야. 이미 너는 알기 시작했으니까 여기서 고개 돌리지 마. 제발." 그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고 조용했음에도 보리스는 그 너머의 감정을 조금 엿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보리스는 다시 이솔렛을 바라보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약혼은 단 하루뿐이었어. 그러니까 이렇게 시작된거지.... " 이솔렛이 열 살, 나우플리온이 스물세 살일 때의 일이라 했다. 당시 두사람은 오누이처럼 친한 사이였고, 이 일을 처음 생각해 낸 것은 이솔렛의 아버지인 일리오스 사제였다. 보리스가 알고 있다시피 나우플리온은 고아였고 데스포이나 사제의 부모가 거두어 길렀다. 어려서 많이 고생한 까닭에 오랫동안 말 안듣는 망나니였던 그는 이솔렛이 전에 말한 일이 있는 늙은 선생으로부터 티그리스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음을 잡았고, 덕택에 선량하고 솔직한 성품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스승이 잘 가르친 것은 심성뿐이었고, 늙은 선생 자신이 별 실력이 없는 터라 검술에 진전이 많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눈 좋은 일리오스 사제는 처음부터 소년 나우플리온의 실력을 꿰뚫어보고 있었지만 그가 멋대로 티그리스에 뛰어들어 버린 터라 오랫동안 모르는 체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일리오스는 나우플리온의 재능을 탐낼 수 밖에 없었는데, 그가 미리 거둔 제자 두 명이 티엘라의 벽에 부딪쳐 더 발전이 없게된 후에는 도저히 돌파구를 찾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일리오스는 어린 시절 악랄한 스승 아래에서 오랫동안 고생만 하고 덕은 전혀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만은 소질 있는 제자를 거둬 정성스럽게 가르치겠다는 의지도 매우 강했다. 이미 티그리스를 배우기 시작한 사람을 빼내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티그리스를 가르치는 스승이 형편 없었고, 또 너무 늙은 데다 정신마저 오락가락하기 시작한 터라 그 아래 있는 것이 장래성이 없다는 것만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일리오스는 이 문제를 데스포이나와 상의했고, 늘 나우플리온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던 데스포이나는 어느 모로 보나 그 늙은 선생보다는 일리오스가 훨씬 낫다고 생각해서 그의 계획에 찬성했다. 일단은 약혼이었다. 정식 혼례는 이솔렛이 열 다섯쯤 된 후에 치르자고 했다. 나이 차가 지나치게 컸기에 부담스러운 약혼이었지만 놓치기에는 자리가 너무 좋았고, 더구나 나우플리온이 달리 혼처를 얻기엔 여의치 않은 입장이었기에 데스포이나는 매우 열심이었던 모양 이었다. 그리고 섬에서는 이런 식으로 나이 차이가 큰 결혼도 비교적 빈번히 행해지는 편이었다. 다만 이 정도로 차이가 큰 결혼은 전례가 드물었고, 또 결혼 당사자가 검의 사제의 어린 딸이었기에 이 소식은 꽤 섬을 떠들썩하게 했다. 문제는 당사자들의 마음이었는데, 이솔렛은 너무 어린데다 나우플리온을 오빠처럼 따랐기에 약혼이 뭔지도 모르고 수긍해버렸고, 나우플리온은 처음엔 매우 당황했으나 데스포이나가 오랫동안 설득한 끝에 결국에는 동의하게 되었다. 그때 그가 무슨 마음으로 이런 약혼에 동의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결정적으로 나우플리온 역시 이솔렛을 싫어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이후에라도 사랑인 일이 있었는지 이솔렛은 아직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약혼식이 행해졌고, 문제는 다음날 아침에 벌어졌다. 일리오스 사제는 나우플리온이 이솔렛과 약혼을 하게 되면 당연히 자신의 문하로 들어오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우플리온은 순진하게도 이 일과 그 일은 완전히 별개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약혼이 끝날 때까지 이 문제는 서로의 입으로 확인되지 못하다가 공교롭게도 다음날 아침에 터져 나오게 되었다. 나우플리온이 완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선생을 버릴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데스포이나가 붙들고 사정을 해도, 심지어 그 티그리스 선생조차 그 쪽이 더 나으니 가라고 말했는데도 통하지 않았다. 일리오스 사제와 이솔렛을 위해 뭐든 할 수 있지만 늙고 병든 스승을 버리는 일만은 할 수 없다고, 그리고 스승이 죽은 후에도 그가 가르친 티그리스를 버릴 수는 없다고 말하는 데서야 타협의 여지가 있을 수 없었다. 진퇴양난에 빠진 일리오스가 높은 자존심을 꺾고 몇 번이나 설득하려 애썼지만 소용이 없자, 결국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전날 있었던 약혼식을 모조리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고 선언해 버린 뒤, 나우플리온에게 자신은 물론 이솔렛 앞에도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잘라 말하고서 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일리오스의 분노와 실망이 얼마나 심했는지 그는 며칠만에 산기슭에 새 집을 지어 거처조차도 옮겨버렸고, 데스포이나도 그 해가 가기 전까지는 일리오스를 찾아갈 엄두를 못 냈을 정도였다. 그 산기슭의 집이 지금 이솔렛이 살고 있는 집이었다. "아버진 그 일이 대단한 모욕이고, 큰 수모를 당했다고 느끼셨던 것 같아, 그리고 공개적으로 약혼을 했다가 하루만에 파혼을 했으니 내 장래에도 오점을 남기게 뒀다고 생각해서 몹시 상심하셨지. 난 아버지가 측은한 나머지 그 분의 말씀을 어기고 나우플리온을 만나볼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그가 그때 어떤 상태였는지는 모르겠어." 지금 이솔렛은 나우플리온을 존칭 없이 이름만으로 불렀고,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보리스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지금까지 늘 '사제님' 이라고 높여 부른 것은 일부러 거리를 두기 위해 그런 것이고 지금이야말로 본래의 감정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 후로 우린 언제 친하게 지냈었냐는 듯 지독히 불편한 관계가 되어버렸어. 그리고 그 해 여름, 너도 아는 그 사건 . 그 일로 난 아버지를 잃었고, 그로부터 그와 나 사이엔 도저히 허물 수 없는 벽이 세워졌어. 그대로 지금까지야." 이솔렛은 입을 오므렸다가 자신이 무슨 얼굴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하는 사람처럼 시선을 불안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녀는 곧 평정을 되찾고 나지막이 말했다. “자, 그게 내 이야기야. 내 관점으로 본,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의 전부야. 그 때 내가그를 믿지 않는다고 한 말은 다분히 감정적인 것이었지만, 너 역시 느꼈다고 말했듯 당시의 비극에는 확실히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 아버지의 죽음을 본 유일한 사람인 나우플리온이 그 일에 대해 뭔가 숨기는 것이 있다고 오랫동안 생각했지. 그렇지만 그가 끝내 그것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때로 분노하기도 했고, 안타까워하기도 했고, 좋지 않은 생각들도 많이 했어. 아직도 난 그것이 뭔지 몰라.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가장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을 때, 그래서 마음이 몹시 흔들려 있을 때를 빼고는 나우플리온이 아버지를 잘못되게 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어떻게 보면 그는 아버지를 미워했어야 옳겠지.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어.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내가 가장 잘 알아. 그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도." 비록 나우플리온이 무언가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긴 해도 그를 의심하진 않는다는 말은, 한때 보리스가 몹시 바랐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 때 보리스는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오해가 있다고 믿었고, 어떻게든 그게 풀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 말을 듣고 있는데도 전혀 기쁨을 느낄 수 없는 자신이 이상했다. 그것 이상으로 강한 다른 실망감, 또는 상실감 때문에 땅 밑으로 서서히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가 겨우 입을 열기까지는 매우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이솔렛....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이솔렛은 고개를 조금 끄덕여 보였다. 그녀의 표정 역시 밝지 못했는데 그게 어떤 감정 때문인지 보리스는 쉽사리 깨달을 수가 없었다. "그 때.... 눈 내리던 날에.... 제가 찾아간 일이.... 있었.... 죠?“ 거기까지만 말했는데도 이솔렛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짧게 대답했다. "맞아." 그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긴 침묵이 흘렀다. 하늘에는 별이 흘렀다. 흔들어 깨우는 것을 느끼고 눈을 떴을 때, 밖은 이미 환해져 있었다. 보리스는 순간적으로 상대방의 얼굴을 못 알아보았다. 자신이 어젯밤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잠들었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일어나라고! 밖엔 난리가 났는데 자고만 있을 거야?“ 헤베티카였다. 난리라는 말에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등의 상처를 쇠꼬챙이로 쑤시는 듯한 아픔을 느끼고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헤베티카가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더니 물었다. “많이 아픈 거야” 한동안 숨을 쉬기도 힘들 정도의 통증이 지나간 후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것도 정신을 차렸다 뿐이지 엄습해온 통증이 완전히 사라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방금 화살이 꽃혔다 해도 이렇게 아플 수 있을까? 어느 정도의 통증쯤은 견딜 수 있게 단련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치료한 상처 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하다니, 다시 약해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반쯤 몸을 일으킨 그대로 보리스가 한동안 몸을 가누지 못하자 헤베티카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뒤로 돌아가 등을 덮은 옷을 위로 올렸다. "아니 ......“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대담한 그녀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가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밀며 보리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헤베티카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애가... 이런 상태로 밤새 잠이 오든? 이대로 잠깐 있어. 절대 움직이지 말고. 사람을 불러와야겠다 " 이솔렛이 모습을 나타냈을 때, 보리스는 사람들에 의해 다시 그 약초를 다루는 할머니의 집으로 옮겨져 있었다. 웃옷을 벗고 엎드리게 해서 상처를 씻어내는데 할머니를 돕기 위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헤베티카 말대로 이 상태로 밥새 잠을 잘 수 있었던 것 또한 그렇거니와, 이렇게 끔찍한 상처를 소독하는데 비명 한 번 지르지 않는 지독한 소년에게 다들 두손들었다는 듯한 얼굴들이었다. 이솔렛도 보았다. 어제 보았을 때 손가락 두 마디 길이 정도로 찢어져 있던 상처가 밤새 손바닥 전체로도 덮을 수 없는 시커먼 상처로 변해 있었다. 아무도 몰랐지만, 어제 보리스를상처 입힌 밧줄끝의 칼날에 독이 묻어 있었음이 분명했다. 할머니의 약초 다루는 솜씨는 주 변 몇 마을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이었지만 어제 일찍 독을 중화시키지 못한 터라 사태가 심각했다. 보리스는 의식을 잃지 않았다. 이솔렛이 온 것을 보고는 약하게 미소를 지으려 했으나 지독한 통증 때문에 얼굴 근육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겨우 얼굴을 일그러뜨리지 않은 것 정도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솔렛이 다가와 앉자, 보리스가 입을 열어 조그맣게 말했다. "괜찮.... 은데요. 참을만해요." 사람들은 이솔렛이 울먹거리거나, 어쩔 줄 몰라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않는 것 때문에 또다시 놀랐다. 이솔렛은 그들이 상상한 반응 가운데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침착한 표정 그대로 보리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 조금 더 참아. 내가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까." 상처 소독이 끝나고 중화 작용을 하는 약초들을 덕지덕지 붙이는 일이 끝나자 이솔렛이 할머니를 보며 말했다. "잠시 모두 자리를 비워줄 수 있을까요. 잠깐 동안 둘이서 있고 싶습니다." 여긴 할머니의 집이었지만, 상처가 워낙 위중한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부담감 때문인지 그들은 모두 응하고 밖으로 나갔다. 이솔렛은 잠시 마음을 가다듬더니 보리스의 손을 끌어 잡고서 나직이 노래를 불렀다. 네, 가지 못한 곳까지 바람은 가 닿는다. 네, 보지 못한 곳까지 물길은 또 이어진다. 바람 숨 불어넣어 만든 불볕의 인간아 물 핏줄 흘러 보등어진 진흙의 사람아 먼 눈 찾는 바람 기다려 혼을 불어 나부끼게 하라 못 본 뭍 찾는 파도처럼 젖은 심장을 달리게 하라 보리스는 이솔렛이 섬의 금기를 어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성 찬트와 같이 옛 왕국으로부터 내려오는 섬의 전통적인 재능들은 대륙 사람들 앞에서 함부로 발휘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갔고 이솔렛의 목소리가 낮긴 했지만 바깥까지 찬트가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온 몸을 태우는 듯했던 고통이 서서히 무뎌지면서 느린 잠이 쏟아져 내렸다. 잠에 저항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잠들면서 그는 이솔렛의 손을 꼭 쥐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쥐어 본다고 생각했다. 밤새 무슨 꿈을 꾸며 상처가 썩어 가는데도 깨어나지 못했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간절히 원했건만 끝내 놓을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눈물을 보이고, 갈 수 없다고 붙들고, 다른 사람은 상관없다고 외치고, 오직, 오직 한 사람만을 생각하고 싶다고 결심하고, 고백하 고, 선언하고, 놓지 않았던 것은 오직 꿈속의 일........ 이제는 더 다가갈 수 없는 사람의 따뜻한 손을 쥔 채 그는 서서히 정신을 잃었다. “......” 이솔렛은 잠든 보리스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 손이 이윽고 그녀의 손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소녀의 표정 없는 얼굴에 감춰진 감정을 알아볼 수 있는 단 한사람의 눈이 감긴 것을 보았다.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순간의 이솔렛은 아주 오래 전 보리스가 렘므의 호숫가에서 나우플리온의 루네트(Lunette) 단검을 이용해 들여다보았던 영상 속의 그녀, 갸름한 창날같은 얼굴에 슬픔 깃들인 눈을 한 그녀였다. 또다시 상실, 그녀의 삶속에 찾아든 소중한 것들은 끝내 잃게 될 운명을 지닌 것들뿐인가. 이솔렛이 집 밖으로 나오자 헤베티카를 비롯한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헤베티카는 가만히 있고 다른 남자가 이솔렛에게 다가와 말했다. "큰 일이 벌어졌소. 마을 밖에 백여 명이나 되는 야만인 용병들이 진을 치고 있는데 그들의 요구는 바로 당신들 두 사람을 내놓으라는 거요." 3. 시골 마을 공방전 마을 전체가 술렁이고 있었다. 총 30여 호도 안 되는 작은 마을에서 전투 가능한 사람의 숫자는 남녀 합해 50명도 되지 않았다. 더구나 상대는 오랫동안 전투에 숙련된 야만인 용병들이니 싸움을 벌인다는 것은 사실상의 자살행위였다. 여론은 크게 엇갈렸다. 절반은 뱃사람, 절반은 산사람들인 렘므 인들의 독립적인 기질 때문에, 이런 식으로 렘므 곳곳에 흩어져 존재하는 작은 마을들은 단결심이 강하고 의리를 잘 지키는 것으로 유명한 소사회들이었다. 웬만해서는 자신들이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손님을 그들의 적에게 내주는 법도 없고, 마을을 위협한 자들은 끝끝내 철저히 응징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정이 좀 달랐다. 일단 적들이 마음만 먹으면 마을 전체를 단숨에 멸망시킬 정도로 강력한데다, 받아들인 손님 역시 마을 전체의 손님이라기보다는 헤베티카의 손님에 가까웠던 것이다. 처음에 그들이 보리스와 이솔렛을 도와준 것은 전적으로 과거 나우플리온이 그들에게 준 도움, 그리고 그때 그 자리에 보리스가 있었다는 사실 한 가지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 점을 헤베티카가 역설하자 토박이 기질이 강한 자들은 이들 소년 소녀를 보호해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협상의 여지가 없을까 하여 마을을 둘러싼 나무 방책위에 몇 사람이 올라가 큰 소리로 대화를 걸어 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용병들을 이끌고 온 자들은 다름 아닌 어제 보리스와 이솔렛을 공격했던 그 두 사람, 마리노프와 톤다였다. 마리노프와 톤다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그들은 이 두 사람이 어떻게 하룻밤만에 이렇게 많은 용병을 모아을 수 있었는지 어안이 벙벙해질 지경이었지만 단 하나,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마리노프는 배짱 좋게 맨 앞으로 나서서 어제의 그 두 젊은이들을 내놓지 않는다면 오늘 밤 안으로 마을을 모조리 부숴 놓는 것은 물론, 어린애까지 단 한 명도 살려두지 않겠다고 장담했다. 그 본보기로 마을 밖에서 생포한 마을 사람 하나를 끌고 나오더니 단숨에 도끼를 휘둘러 목을 베어 버렸다. 그런 다음 피묻은 도끼를 휘둘러 보이면서 아직 포로가 세 명 더 남아 있으며, 밤이 올 때까지 두 시간에 한 명씩 다양한 방법으로 죽여줄 테니 일찍 항복할수록 좋을 거라고 을러댔다. 이리하여 여론은 보리스와 이솔렛에게 크게 불리해졌다. “나도 계속 애쓰고 있긴 하지만 간단한 일이 아니네. 그것 참, 렘므 사람이 언제부터 이렇게 야만인 나부랭이들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들로 변했는지 답답한 노릇이야. 이렇게 된 이상 몰래 탈출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는 수밖에 없겠다. 너희들이 도망쳐버렸다고 하는 바에야 저들이 설마 우릴 어쩌기야 하겠어. 아픈 아이를 저런 잔인한 것들에게 내줄 정도로 타락한 우리들이 아니야." 헤베티카의 집으로 불려왔던 이솔렛은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헤베티카가 일부러 안심시키려고 저렇게 말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보리스는 몰라도 이솔렛은 이번에 처음 만난 사이일 뿐인데, 마을 사람들의 목숨이 위협받고 있는 마당에 남에게 베풀 친절이 남아 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터였다. 섬사람들은 같은 섬사람을 위해서라면 지금보다 더한 일도 당연히 감수할 테지만, 타지 사람의 일에는 눈도 하나 까딱 않는 자들이었다. 이솔렛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섬에서 태어났고, 섬사람의 잔인함과 선민적 이기심을 조금쯤 물려받은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섬사람의 선조는 옛 왕국의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의 아집과 독선은 바로 그들의 고귀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던가. 선택받은 자의 고귀함이란 선택받지 아니한 자들의 희생을 용납하지 않는 오만한 자부심도 함께 갖는 것이 아닌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나가겠어요." "이것 봐요, 아가씨......“ 이솔렛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여러분들을 두고 도망쳐서도 안 되고, 또 도망친다고 한들 그들이 가만히 있진 않을 겁니다. 용병이란 보통 고용할 때 돈을 지불하기 마련이지요. 이미 돈을 주고 모아놓은 용병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손해, 우리들이 떠난다 해도 보복 삼아 마을을 짓밟을 것이 뻔합니다. 그들이 잔인하긴 하지만 우리를 죽이지는 않는다고 말했으니 그 말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겠군요.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지만 어쨌든 생포를 원하는 것 같으니까요. 그들이 언젠가 우리를 해치려 하긴 하겠지만, 그때 가서 그들에게 대적하는 것은 온전히 저와 보리스의 몫입니다. " “하지만 보리스는 지금!" “알아요. 하지만 부상을 당한 것도, 그래서 지거나 죽는 것도 결국은 자기의 책임이 아니던가요. 저는 그가 그런 것을 모를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는 싸울 것이고, 지면 죽을 것입니다. 저의 명예를 다해 그를 지킬 것이고, 죽으면 복수할 것입니다. 다른 분들의 희생은 제가 받아들일 수 없어요. 아마, 보리스도 받아들이지 못하겠지요." 헤베티카의 눈빛에 이상한 빛이 어렸다. 그녀는 이솔렛의 말을 절반은 이해했고, 절반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솔렛의 전사다운 강인함을 수긍하면서도, 아끼는 사람의 생명조차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침착함을 또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좋은 말이야. 우리 아버지가 굴론 족에게 포위 당했을 때 했을 법한 얘기다. " 갑자기 구석에 웅크린 채 누워 있던 사내, 이자크가 그렇게 말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두 여자는 약간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듣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고, 듣는다 해도 참견할 거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헤베, 의견이 갈라져 있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렘므놈들도 조금쯤 명예를 안다는 얘기구나. 좋지. 하지만 우리 캄자크의 명예에는 당할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해. 그리고 여자 전사, 당신은 정말로 렘므 사람은 아니군. 렘므 놈들은 그런 말을 할 줄 몰라. 안 해. 하지만 당신은 할 줄 알아. 전사들의 방식을 알고 있어. 당신에게는 우리 원종족의 피가 흐르는가?“ 그러더니 그는 벌떡 일어나 섰다. 일어선 것을 보니 180센티미터를 넘는 키는 물론이고 오랫동안 단련된 몸이 마치 살아 있는 무기와도 같은 사내였다. 이자크는 약간 작은 편인 눈을 찡그리며 씩 웃었는데 조금 후에 이솔렛은 그가 윙크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리고 이자크는 휘적휘적 밖으로 나섰다. 헤베티카가 후닥닥 따라 나가며 소리쳤다. “오빠! 나가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그러나 이미 늦었다. 이자크는 마을 한복판을 가로질러 방책이 있는 곳까지 갔고, 낯선 거한의 출현에 놀란 마을 여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남편을 찾는 소동이 벌어졌다. 마을 밖에 야만인 용병들이 진을 친터라 낯선 사람에 대해 신경이 곤두선 터에,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걸어가니 사람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헤베티카가 멋대로 방문한 이복오빠를 집안에만 숨어 있게 하려고 애썼던 것은 그가 야만인이라는 걸 들키면 귀찮아질 것 같아서였지만 이젠 다 소용 없게 되었다. “방책 하나는 잘 만들었군," 뒤따라 나온 이솔렛이 보니 이자크는 장갑 비슷한 것을 꺼내 두 손에 끼는 중이었다. 건틀렛(gauntlet) 치고는 목이 짧았지만 손가락 마디가 위치하는 곳에 투박한 리벳(rivet)이 죽 붙은 것을 보니 분명 전투용 무기의 일종이었다. 다음 순간 그는 방책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아니, 손을 내밀어 한두 군데 잡으니 저절로 몸이 퉁겨 올라갔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정말로 고양이처럼 유연한 몸놀림과 이리처럼 억센 몸을 지닌 자였다. 이솔렛은 잠깐 생각하더니 뒤따라 방책 위에 올라갔다. 어느새 그들 주위에는 여러 명의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어 있었고, 두 사람이 무슨 짓을 할지 궁금해하는 듯한 표정으로 웅성거렸다. 그들 가운데 선 헤베티카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잠자코 이자크와 이솔렛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자크는 팔짱을 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별로 멀리 둘러볼 필요도 없었다. 정말로 백여 명은 되어 보이는 야만인 용병들이 약간 무질서하게 모여 주저앉아 있었고, 들은 일 있는 사나운 여자가 한쪽 나무에 기대선 것이 보였다. 그 옆에 예의 도끼도 보였다. 그 정도로 가까웠다 이자크가 약간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이솔렛에게도 들렸다. 당황하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하늘이라도 찢을 듯 벽력같은 음성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너희는 우리 땅의 원종족이면서 이 나를 몰라보느냐!" 그것은 보통 인간이 낼 수 있는 목소리의 수십 배에 달하는 굉음이었다. 단순히 목소리 큰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능력에 해당하는 고성이었다. 이솔렛이 찬트를 부를 때 갑자기 목소리를 증폭시킬 수 있는 것과 비슷한 계열의 능력이었다. “나를 모르는 자는 앞으로 나서라! 나서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맛보고, 뒤늦은 깨달음을 얻어라!" 다시 한 번, 목소리가 퍼져나가자 방책 아래에 있던 마을사람들은 귀를 막았고, 멋대로 주저앉아 있던 야만족 용병들이 벌떡 벌떡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떤 이름이 메뚜기 날개 부딪는 소리 같은 작은 속삭임으로부터 곧 어두운 구름떼처럼 순식간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한 명이, 곧 수십 명이 말했고, 잠시 후에는 모두가 외치고 있었다. 그 목소리에 깃들인 것은 원초적인 공포였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과 맞닥뜨린 자의 경악이었다. "시고누다!" "시고누다!" "시고누가 저기에 있다!" "오오.... 시고누가 저기에 있다!" “시고누‘ 라는 이름이 방책 안쪽까지 전해지는 순간 마을 사람들도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솔렛은 시고누가 누구인지 몰랐고, 따라서 사람들이 놀라는 까닭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짐작할 수는 있었다. 시고누라는 자는 이름만으로도 모두가 공포에 떨 정도로 무시무시한 전사라는 것, 그 위명을 아는 것은 야만인들만이 아니라는 것, 그 자가 지금 곁에 서 있는 사내와 아마도 동일인이라는 것. "저 목소리는 틀림없는 캄자크의 시고누다! 난 저 목소리를 들은 일이 있어! 분명히 그 자야!" "엘베 전투에 참여한 자 일나? 없어? 하지만 난 보았단 말이다, 그때.... 분명히 봤단 말이다! 시, 시고누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어! 렘므의 새비지 이터(Savage Eater)도 이기지 못했어!" "하지만 우린 이렇게 많고 저 자는 한 명인데“' “한 명이고 열 명이고 간에 난 원종족의 영웅과 싸우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그는 엘베 전투의 자랑이 아닌가!" 새로운 동요가 일 무렵 이자크, 또는 시고누는 다시 한 번 노성을 내질렀다.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훨씬 더 크고 사나운 목소리여서 실로 산천초목이 떤다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였다. 평소 순진해 보이는 얼굴에서 어떻게 저런 목소리가 나오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몇 푼의 돈에 팔린 원종족의 전사들아! 옛 원한을 잊었느냐! 외지인에게 제 몸뚱아리를 파는 자들은 같은 핏줄이라 해도 똑같이 대가리를 부숴 줄 것이다! 너희의 짓거리는 긍지 있는 전사를 화나게 했다! 대가를 치르고 싶으냐? 아직도 망설이느냐? 망설이는 자는 개처 럼 죽여 줄 것이다! 한 명이고 백 명이고 남김 없이 죽여 줄 것이다!" 말을 맺은 이자크는 저들이 저절로 물러나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단숨에 방벽 바깥쪽으로 뛰어내리더니 혼자 몸이면서 1백 명이 두렵지 않다는 듯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단 한 명의 기세에 눌리기라도 한 것처럼 야만족 용병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조금 후에는 대략 서른명 가량이 그와싸우기 싫다는 듯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이 아닌가? 그 때 이자크를 내려다보던 이솔렛이 한 발 나서며 똑같이 방벽 밖으로 뛰어내렸다. 누가 보아도 보통 인간의 두 배에 달하는 도약으로, 가볍게 무릎을 꿇으며 착지했다. 이자크가 흘끗 돌아보더니 낮게 말했다 “너는 표적이 돼." 그러나 이솔렛은 빠르게 쌍검을 뽑아들더니 망설임 없이 대꾸했다. “내 일을 다른 사람에게 전적으로 맡겨 둘 생각은 없어요." 이자크는 잠시 침묵하더니 짧게 대꾸했다. "전사답군" 이솔렛은 섬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헥토르가 그녀를 부당하게 모욕했을 때 그녀 대신 싸운 것은 보리스였다. 이제 보리스를 해치려는 자들이 있는데 그 대신 자신이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하고 싶었지 않았나. 그리하여 두 사람은 70여 명의 용병들과 대치했고, 그들을 수 미터나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방책에 난 문이 활짝 열렸다. 헤베티카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스무명 가량 무기를 들고 달려나와 그들 뒤에 섰고 한 사내가 소리질렀다. "우리에겐 캄자크의 '꺾이지 않는 시고누' 가 있을 뿐 아니라 너희보다 더 많은 사람들도 있다! 양쪽 다 몰살당할 때까지 해보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라!" 그 말을 신호삼아 이자크가 용병들 사이로 달려들어갔다. 당황한 용병들이 저들이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이리저리 흩어지는 가운데 어설프게 나선 자의 목이 우드득, 하고 단숨에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몇 번 뻗어나간 손이 또 한 명의 목을 잡아 꺾고, 다른 자의 팔을 부러뜨리고, 어깨를 뽑아 놓고, 코뼈를 으스러뜨렸다. 모두 잠깐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자신은 작은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이솔렛은 금방 그 까닭을 알아차렸다. 적들이 무기를 들이대는 순간,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르기로 손발이 퉁겨났다가 다시 용수철처럼 튀어나오고 있었다. 이솔렛 역시 속검을 썼기에 눈이 빨라 발견할 수 있었을 뿐, 한 번 본 일도 없고 흉내낼 수도 없는 체술이었다. 찔러 들어오는 창칼의 틈과 틈 사이로 교모하게 짧은 리듬을 타고 움직여갔다. 이 사내야말로 진심으로 일당백의 실력을 가진 자임이 틀림없었다. 그에게는 무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갑옷도 필요없었다. 리벳 박힌 장갑 하나로 수십 명이 달려드는 싸움터를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는 모습은 같은 편에 서 있는 사람에게조차 두려움을 가져다 줄 정도였다. 이솔렛도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적들 사이로 뛰어들기 전에 먼저 앞을 가로막는 존재가 있었다. 다름 아닌 마리노프였다. "실력으로 안 되니까 어디서 괴물을 고용했구나, 건방진 계집애야!" 이솔렛은 그녀의 말 때문이 아니라 보리스의 상처에 대한 원한 때문에 순식간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화가 날수록 차가워지는 얼굴이 얼음조각처럼 빛났다. 더 지체할 것도 없이 왼손 검을 가로로 눕히며 오른손 검으로 찌르고, 다시 왼손 검을 대각선으로 올려쳤다. 마리노프가 반격을 하기도 전에 단숨에 상대의 머리까지 뛰어오르며 두 발로 얼굴을 걷어찼다. 등 뒤로 뛰어내리자마자 홱 돌아 허리를 돌려 베었다. 이 역시 마을 사람들이나 용병들로서는 본 적도 없는 공격법이었다. 이미 이 싸움에 뛰어들기 전에 찬트로 스스로를 강화시킨 이솔렛의 도약력과 속도는 보통 사람의 눈으로 따라갈 경지가 아니었다. 보리스의 일이 아니었다면 이솔렛도 대륙 사람들 앞에서 신성 찬트의 힘을 함부로 보이지는 않았을 터였다. 실제로 실버스컬에 참가하러 가는 동안에 몇 가지 어려움이 있었어도 한 번도 그런 능력을 사용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잠들어 있는 소년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생각이었고, 피해를 입힌 자들에게 검의 사제의 딸답게 보복할 생각이었다. 마리노프는 전날 낮보다 너무나 빨라진 검에 놀랐고,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한 몸놀림에 놀랐다. 도저히 상대할 상황이 아니라고 느끼자 마리노프는 재빨리 물러나며 톤다를 불렀다. 협공을 할 생각이었다. "좀 도와 줘!" 이미 이 때 이자크의 위력적인 공격에 눌린 용병들은 일부 달아나고, 일부는 저들을 고용한 자들이 이솔렛의 손에 죽기를 바라면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십여 명이 넘는 자들이 이자크의 손에 죽거나 부상당해 쓰러졌다. 마을 사람들이 달려들자 이기는 것이 당연한 그들조차 상대하기 싫었던지 그냥 뒷걸음질로 달아나는 용병들이 숱했다. 맨 처음에 시고누의 이름을 듣자마자 그와 적이 되기 싫다며 줄행랑을 놓은 자들까지 합하면 적다운 적은 겨우 서른 명이 될까 말까했다. 이때 이자크는 이솔렛 쪽으로 몸을 돌렸고, 그녀가 마리노프와 톤다, 즉 2익과 3익에게 협공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먼 땅에는 명예도 모르는 자들밖에 없는가!" 징을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 퍼지자 남은 용병들도 거의 싸울 의욕을 잃었다. 그리고 공격 목표를 수정한 이자크는 밧줄을 쓰는 톤다에게 접근하려 했다. 이솔렛이 소리쳤다. "저 자의 밧줄 끝에는 독이 묻어 있으니 주의해요!" 그러자 이자크는 현란하게 움직이는 밧줄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마치 줄넘기 곡예라도 하듯 몇 개를 뛰어넘고, 몇 개를 장갑 낀 손으로 움켜잡았다. 올가미에 박힌 톱니 같은 쇳조각들도 재질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의 장갑을 뚫지는 못했다. 이자크가 밧줄을 앞으로 힘껏 잡아당기자 톤다의 오른손이 잠시 균형을 잃었다. 그 때를 노린 이솔렛이 검을 휘둘러 밧줄 두 개를 끊어버렸다. 톤다의 무표정한 얼굴에 처음으로 분노가 어렸다. 그는 남은 밧줄 두 가닥을 한 손에 쥔 채 등 뒤에서 세 갈래 창을 뽑았다. 이윽고 밧줄을 놓은 그 자와 이자크 사이에 대결이 벌어졌다. 삼지창은 놀랄 만큼 빨랐다. 톤다와 같은 몸집을 가진 자가 휘두르는 것으로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면서도 변화가 많은 창이었다. 본래 창은 길이 때문에 단거리에서 느리기 마련인데 그런 약점조차도 거의 가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자크는 상대의 공격을 잠시 보고 있더니 대강 눈치챘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은 미끼였고, 찔러져 오는 창을 피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몸을 수그리며 이리처럼 달려들어 상대의 하체를 거머잡았다. 그 다음 보인 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힘이었다. 그는 그 몸집 큰 사내의 몸을 움컥쥐고 번쩍 들어 머리 뒤로 던져버렸다. 무시무시한 공격에 다들 모골이 송연해졌다. 거꾸로 처박힌 자가 일어나기 전에 몸을 돌린 이자크는 다시 한 번 달려들어 그를 거꾸로 잡고 바닥에 메어꽃았다. 다음 순간, 적은 목뼈가 부러진 듯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다음 이자크는 마리노프 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이미 마리노프는 이솔렛의 검에 몇 번이나 상처를 입어 움직임이 느려지고, 피를 많이 흘려 어지러운 가운데 독기만 남은 상태였다. 이자크가 다가가려 하자 그녀는 억지로 도끼를 휘두르며 악을 썼다. "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말란 말이야! 이 괴물아! 이 끔찍한 살인마야!" “많이 죽이나, 적게 죽이나, 살인자라는 건 똑같잖나?” 마리노프의 도끼가 이자크의 팔을 스쳤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이자크는 느려진 도끼의 두 번째 공격을 피해 미끄러져 들어갔다. 여자의 허리를 감아 꺾어버리려 하는 순간 이솔렛이 외쳤다. "그만! 그 여자는 살려둬요!" 이자크는 말 잘 듣는 소년처럼 손을 멈추더니 마리노프의 목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이솔렛은 검을 내렸다. 찬트의 힘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동시에 지독한 피로가 몰려왔다. 작년 여름, 섬의 괴물과 싸우고 나서 잠들어버렸던 것처럼 눈앞이 어지러웠다. 그러나 시야를 가다듬고 검을 꽃은 다음 말했다. "그녀에게 들어야 할 말이 있어요." 4. 긴 죄의 대가 마리노프는 손발을 단단히 묶인 채 모닥불 앞에 꿇어 앉혀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 여럿이 그녀를 둘러싸고 쑥덕거렸고, 그 옆에 선 이자크는 싸움이 끝난 이상 별 관심이 가지 않는다는듯 하품을 길게 했다. 사실 마을 안에서 쑥덕거림의 대상은 마리노프보다는 이자크 쪽이었다. 그렇지만 이자크가 옆에 멀정히 서 있는 터라 감히 이러쿵저러쿵 하지는 못하고 저들끼리 눈짓만 주고받았다. 평소 상상도 해보지 못한 모욕적인 꼴을 당하고 있는 마리노프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그녀가 잘못했다기보다는 상대가 너무 강했던 것이다. 갑자기 실력이 일취월장한 저 계집애도 그렇지만, 저 끔찍한 사내는 그녀의 짐작을 완전히 벗어나는 진짜 괴물이 었다. 그녀도 전투 기술을 연마하는 사람인 만큼 평소 캄자크 족의 시고누에 대한 이야기를들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엘베 전투에서 렘므 공주 지나파와 벌인 결투에 대해서도 대략 듣긴 했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과장이겠거니 생각했고, 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은 실력에 미리 겁먹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래서 야만인 용병들이 놀라 술렁거릴 때도 수그러들지 않고 덤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췄든, 지금은 이렇게 치욕스런 구경거리가 되어 무슨 처분이 내려질지 두려워해야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녀가 처음에 마을 사람 한 명을 처형한 것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매우 적대적이었지만 이자크의 눈치를 보느라 함부로 어쩌지는 못하고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저들 여러 사람들의 손에 맡겨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장 컸다. 그녀 같은 사람으로서 저런 힘도 없는 민간인들의 손에 죽는 것보다 더한 굴욕은 없었다. 하지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니 반드시 죽일 거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어쨌든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며칠 정도만 살아 남는다면 반드시 류스노나 유리히가 구해 주러 올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냄새를 맡지 못할 위인들이 아니니까. 더구나 그녀와 톤다를 이리로 부른 것이 그들이었으니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와 있을 것 아닌가? 겨우 어린애 둘이니 공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아 임의로 행동하긴 했지만 저런 괴물이 버티고 있을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동시에 마리노프는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보다 머리가 나쁠 것이고, 민간인들의 특징상 동정심이 많을 거라고 제멋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저쪽에서 마리노프가 마음속으로 말 많은 여자' 라고 이름 붙인 헤베티카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다가와 마리노프를 한 번 쏘아본 다음 사람들에게 조금 물러나 모닥불을 중심으로 원을 만들라고 일렀다. 잠시 후 이솔렛, 그리고 보리스가 맞은편 집에서 나와 느린 걸음으로 다가왔다. 보리스는 상처 때문에 웃옷을 벗은 채 그 위에 커다란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그 상처로는 일어나기는커녕 팔 하나 움직이는 것도 힘들텐데, 얼굴을 약간 찌푸렸을 뿐 그 이상의 아픈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본래 헤베티카를 비롯한 사람들이 사로잡은 여자를 그곳으로 끌고 갈 테니 일어나지 말라고 말렸지만, 보리스는 말을 듣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안전해진 터인데 끝까지 약한 모습으로 있고 싶지 않았고, 스스로 사로잡지 못한 적을 심문하는 데는 최소한의 예의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보리스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런 행동은 아버지 율켄의 엄숙함을 닮아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놀라운 인내심이라며 혀를 내두르기만 했다. 상황에 대해서는 이솔렛으로부터 대략 들었기에 우선 이자코에게 감사를 표했지만, 이자크는 자기가 무슨 대단한 은혜를 베풀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멀뚱하게 인사를 받아들였다. 그런 다음 보리스는 선 채로 마리노프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의자라도 가져 다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한 것도 보리스 자신이었다. 망토가 바람에 흩날리자 맨 가슴이 조금 드러났다. 보리스는 검을 지팡이 대신 짚은 채 숨을 고르며 입을 뗐다. “아리노프, 캄브. 당신의 이름은 익숙하군요. 바로 고향 땅의 이름이죠. 삼촌이 당신을 보냈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부인했으니 묻죠. 누가 당신을 내게 보냈습니까?' 마리노프는 조금 망설였지만 곧 내뱉듯 말했다. "그런 걸 순순히 말할줄 알아?“ "순순히 말하지 않으면, 손가락이라도 하나씩 잘라야할까요? 마리노프는 흠칫했다. 상대가 소년이고 해서 이런 수단을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태도를 바꿔야할까 싶었지만 일단은 침묵으로 대신했다. “방법은 잠시 후 좀더 생각해보기로 하고.... 그러면 당신의 목적은 뭡니까? 왜 나를 공격했죠?” 이번에는 굳이 숨길 것도 없었다. “널 사로잡을 생각이었지. 대신 내가 사로잡히고 말았지만.” "왜죠?“ "널 원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게 삼촌이 아니란 말입니까?“ 갑자기 마리노프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네 삼촌, 블라도를 말하는 거지? 후훗, 푸후후흣... 그 자가 나 같은 사람을 고용할 능력이 있을 것 같아? 돈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쓰는 능력을 말하는 거지. 그 자에겐 인덕이 없어. 부하들은 물론이고 자기 부인조차도 남편을 믿지 않지. 아, 그 자를 믿어줄 사람이 한 명 있긴 하군. 그 꼬마 딸내미 말이야. 올해 두 살 먹었던가? 그런데 문제는 그 딸이 트라바체스 안에서 안 믿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거야! 하하핫......” 블라도 삼촌이 결혼을 했고 자식까지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고 상상도 잘 가지 않았지만, 아버지와 보리스 형제를 내쫓고 진네만 가문의 이름을 대신 이으려 한다면 그 정도 일쯤이야 능사로 해치울 사람이라는 생각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리노프의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 기분이 상했다. 왠지는 몰랐다. "인덕만 없는 게 아니라 능력도 형편없지. 게다가 이젠 게으르기까지 하니 원..... 아주 보잘것없는 인간이라고. 지금 네가 어디쯤 떠돌고 있는지도 잘 모를걸? 요샌 집에 틀어박혀서 꿈지럭거리는 것도 귀찮아하는 것 같으니 말이야. 모르긴 해도 너에 대해선 예전에 잊어버 렸을 거야! 너도 그 자에 대한 거라면 그만 생각해도 돼. 대신 사흘 정도 말미를 준다면 그 자에 대해서나 네가 고향을 떠난 뒤의 사정에 대해서 전부 다 말해주지. 아마 궁금했던 이야기들을 잔뜩 듣게 될걸." "어쨌든 당신은 삼촌을 알고 있다는 말이군요. 그리고 당신." 보리스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지며 갑자기 싸늘해졌다. 마리노프는 물론 주위 사람들까지도 이 소년의 입에서 나오는 예상 밖의 위협적인 말투에 놀랐다. “당신은 이곳 사람들에게 사로잡혔고, 당신의 처분은 내게 맡겨졌습니다. 스스로의 처지를 잘 파악하시죠. 끝내 그런 식으로 내게 반말로 일관한다면 나 역시 똑같이 대해줄 테니 똑똑히 들어," 딱 끊기는 반말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반드시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을 때 본성을 이기고 잔혹하게 변하는 것은 형 예프넨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와의 유대감이 강했던 예프넨과는 달리, 보리스는 두려워하면서도 늘 보고 자란 아버지 율켄 진네만을 좀더 닮아 있었다. 다시 말해, 보리스에게는 이것이 본성과 완전히 어긋나는 행동이 아니었다. “하지만 당신은 실패했어. 당신 일행은 죽었지만 당신의 태도를 보니 달리 믿는 구석이 있어 보이는군. 누구지? 근처에 있나? 사흘 정도면 올 수 있을 정도로?” "그런 거 없어!" "없다고?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나?“ “.......” 이제 마리노프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기로 마음을 정한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보리스는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열 다섯 살의 소년이 어른을 꿇어앉혀 놓고 하는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겠지. 내가 움직인다면 그들은 나를 뒤쫓을 테니까 마을에는 피해줄 것이 없어. 그러니 네게는 기회가 없을 거야. 배후를 말하지 않겠다고? 상관없어. 나를 사로잡아가려는 이유? 말하지 않아도 이미 다 짐작해. 오히려 내가 당신한테 말해줄 것이 있겠군. 자신의 운명이 궁긍하지 않아? 난 너처럼 말을 빙빙 돌리는 취미는 없으니 바로 말해주지." 보리스는 아픔을 참는 듯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가 똑똑히 잘라 말했다. “난, 지금 너를 죽일 거다. " 마리노프의 동공이 무한정 커지려는 듯 열리고, 주위 사람들 사이로 당황한 술렁임이 잔물결이 되어 퍼져나갔다. 이솔렛은 약간 고개를 숙인 채 보리스의 목소리만을 듣고 있었다. 그녀 역시 또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나, 난! 왜 벌써 나를 죽이려는.... 그런, 그럴 필요는.... 없.... 잖아? 죽는 게 무서워서 이러는 게 아냐! 내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아, 아직도 많이 있단 말이야! 네가 물은 것뿐 아니라 다른 것도 많이, 전부 다 말해줄 수 있어! 조금, 조금만 기다려서.....”. "죽는 게 무섭지 않다면 말이나 더듬지 마. 곧 죽는 마당에 허세는 부려서 무엇하지?“ 보리스는 그때까지 짚고 있던 검을 두 손으로 쥐더니 홱 검을 뽑아들었다. 그 몸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할 듯한 동작이었으나 조금의 더듬거림도 없었다. 방금 전까지 할머니의 집에서 그의 상처를보았던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아, 아냐........ 나, 난 단지.... 내가 한 말은 단지......“ 아닌 척, 억지로 침착한 척 하려 했지만 마리노프는 이미 턱을 심하게 떨고 있었고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어 눈시울이 붉어진 상태였다. 암살자로 살아오면서 죽음을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한 번도 이렇게 무기력한 상태로 일방적인 살해를 당하리라고는 생각한 일이 없었다. 늘 죽음을 두려워했더라면 매번 싸움의 마당에 그렇듯 쉽게 뛰어들진 못했을 것이고, 시체의 머리카락을 수집할 만큼 남의 죽음을 가볍게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 먹었던 마음들은 단지 중독과 같은 것이었을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까이 있는 죽음의 향기에 취해서,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두려움도 없는 아이처럼, 아무 것도 아닌 양 착각하고 다녔던 것일까. 그런 만용과 진짜 죽음은 엄연히 달랐다. 지난 밤 꿈과 현실만큼, 그림 속 붉은 물감과 진짜 피비린내만큼. "죽고 싶지 않아.....“. 드디어 솔직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보리스는 아무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저항하지 못하는 무고한 마을 사람 한 명을 아무 죄책감 없이 죽였어. 또한, 네가 데려온 용병들을 개죽음시켰어. 그리고 곧 와서 너를 구해줄 동료들을 기다리기 위해 나를 속이려 했어. 그들이 와서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이길 원하지? 미안하지만 난 그런 때를 기다려 줄만큼 어리석지도 한가하지도 않아. 이 모든 것이 당신의 죄야. 죽을 이유로는 합당하고도 모자람이 없지." 보리스가 검을 쳐들었다. 사람들의 눈이 모두 보리스의 얼굴, 그리고 검 끝에 쏠렸다. "왜, 왜 나한테서 정보를 얻으려고 하지 않지? 너, 너를 노리는 사람이 누군지 모두 말해줄게! 누구를 피하면 되는지, 그들이 원하는 게 뭔지 전부 다 말해줄게!" 보리스의 머리카락이 망토와 함께 흩날렸다. 무표정한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저것이 열 다섯소년이 가질 수 있는 눈인가? 세상의 악을 수없이 보고 겪은 자, 마지막 결정에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처형자의 눈이 아닌가? "알고 있는 걸 털어놓는다 해도 어차피 너는 용서받지 못할 텐데, 배신은 해서 무엇하겠어? 괜히 마음만 더럽히지. 안 그런가? 그리고." 보리스는 배후를 듣지 않기로 벌써부터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어차피 그는 섬으로 돌아갈 몸이었다. 그리고 어른이 되기까지는 다시 나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럴진대 대륙에서 그에게 원한을 가진 인간을 또 하나 더 알아내어 얻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블라도 삼촌과 벨노어 백작의 존재가 순례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는데 거기에 새로운 적을 더할 필요가 있나? 알 필요가 없다. 그게 누구였든. "그런 말은! 도대체, 어째서.....“ 우득, 푹! 단숨에 갈비뼈와 심장을 제뚫고 박힌 검이 약간 떨리고, 다시 뽑는 순간 냇물 같은 피가 앞뒤로 쏟아져 내렸다. 보리스의 팔이 조금 경련을 일으키다가 멈췄다. 단숨에 관통시키려고 팔에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등의 상처가 터져 피고름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이것이 나우플리온이 빌려준 검으로한 첫 번째 살해였다. 비릿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가운데 마리노프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보리스의 얼굴에 가 멎었다. 붉게 변한 검을 타고 흐르는 피를 내려다보며 보리스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내 앞에서 진네만 이름을 가진 자를 욕한 게 네 마지막 죄다. " 부들부들 떨던 몸이 드디어 허물어졌다. 샘처럼 고인 피가 모닥불까지 흘러가 치직거리며 연기로 변했다. 그리고 아직도 우뚝 서 있는 보리스를 바라보며 이솔렛은 자신이 하던 생각의 끝을 찾아냈다. 섬의 순례자, 옛 왕국의 후예, 달여왕의 자식과는 다른, 대륙의 피투성이 인간. 그는 순례자 다프넨이 아니었다. 결단코, 그녀가 알지 못하는 땅 트라바체스의 멸망한 가문, 진네만이 그의 이름이었다. 현실의 대륙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인간은 옛 왕국을 추억하며 고립을 자처하는 그들 순례자와 같아질 수 없으며, 보리스 진네만은 죽을 때까지 보리스 진네만일 뿐이었다. 그 이름을 버리지 못하리라. 그는...... 끝내 대륙으로 돌아가리라. “.......” 그것이 상처의 고통 때문인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정신적 후유증 때문인지 몰라도 보리스는 검을 도로 바닥에 짚으며 약간 비틀거렸다. 이솔렛이 한 걸음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았다. 문득 시선이 검날로 떨어졌다. 그 때 보리스도 그것을 보고 있었다. 피가 흠뻑 묻은 검날에는 평소 보지 못했던 낯선 글씨들이 드러나 있었다. 가드(guard)가 닿는 블레이드 맨 아래쪽에 피 속에서 하얗게 드러나는 짧은 글귀가 보였다. 이런 것이 있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솔렛의 표정이 변했다. "이건.......“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은 11월의 하늘이었다. 낡은 마차 두 대와 말을 탄 사내들 여럿이 어느 여관 앞에 멈추었다. 그 중 나은 마차쪽에서 검은 외투로 몸을 감싼 중년의 남자와 비서인 듯한 또 한 남자가 내렸고, 다른 마차에서는 용병들로 보이는 두 사람과 더불어 시골 사람 하나가 내렸다. 일행이 여관으로 들어가자 여관 주인은 이미 이야기가 된 듯 말없이 고개만 숙여 보였다. 그들은 한 마디 이야기도 나누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갔다. 여관 안에서 가장 좋은 방에 저녁식사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벽난로에서 장작불이 타올랐다. 중년 남자가 식탁 가운데 앉자 용병인 듯한 여자와 남자가 함께 앉고, 다른 사람들은 가볍게 인사한 뒤 모두 옆방으로 갔다. "일단, 성공을 치하한다. 잔을 들지." 비서가 세 사람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들은 잔을 부딪쳤다. "감사합니다. 오래 걸리긴 했네요.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지 뭐예요. 저희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니 이제 가보시는 일만 남았네요." 여자 용병이 생글거리며 몇 마디 말하고 술을 홀짝거리더니 자꾸만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이들을 고용한 것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는 그냥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 그들과는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잠시 후 그는 생각에서 깨어나서 말했다. "식사들 들지." 차린 음식이 아주 고급이라고는 볼 수 없었지만 포도주만은 아라종에서 가져온 고급으로써 이런 트라바체스 시골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것이었다. 별 대화 없이 식사가 끝나고 나자 중년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밤은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모든 것을 확인한 후 나머지 돈을 지불하겠다. " "저희는 같이 안 가나요?“ "그럴 필요는 없겠지. 내일 내가 돌아을 때까지 여관에서 쉬면서 기다려라." "아아.. 네, 알겠습니다." 두 용병은 분위기를 눈치채고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인사를 하고 문을 닫고 나가자 비서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믿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제 다 끝난 일이니 됐다." "그래도 내일 여기에 기사 몇 명을 남겨두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백작님." 그리고 중년 남자, 벨노어 백작은 씁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내가 요즈음 실패가 많아서 자네까지 날불신하는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 때는. . 백작님께서 어쩌실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 폰티나 공작, 그 자가 그런 간계를 갖고 있을 것을 미처 짐작하지 못한 내 실수였지" 벨노어 백작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눈을 비볐다. 여름의 실버스컬에서 우연히 만난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고 나서 그도 많이 실망해 있었다. 그는 폰티나 공작이 왜 보리스를 도와줬는지 알 수 없었고, 따라서 보리스가 공작에게 이미 윈터러를 바친 것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확인을 할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는 없었다. 폰티나 공작의 수중에 들어갔다면 그의 능력으로 이미 어쩔 수 없는 곳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뒤쫓아 왔는데...... 겨울의 문턱에 와서야 드디어 좋은 소식이 왔고, 그래서 실의에 빠졌던 그도 어느 정도 기운을 차렸다. 그때 고용해서 윈터러처럼 특별한 금속을 감지하는 마법사를 붙여 줬던 야니카라는 용병이 오랫동안 들판을 헤매고 다닌 끝에 저 스노우가드가 묻힌 곳을 드디어 찾아낸 것이다. 감시역으로 붙였던 기사로부터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마차를 출발시켜서 국경에서 낡은 마차로 바꿔 타고 이곳까지 줄곧 달려왔다. 지금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겨울의 갑옷을 찾기에 어울리는 날씨이긴 하지만 한밤중에 눈발을 헤치고 일을 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여의치 않아 발굴은 내일 아침으로 미루기로 했다. 확실히 악천후였다. 날씨 좋은 벨크루즈 지방 출신인 벨노어 백작은 트라바체스의 우중충한 날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 일이 끝나면 한동안 오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다소 놓였다. “그럼 자네도 가서 쉬게." "알겠습니다. " 이윽고 백작이 잠자리에 들어 불이 꺼진 후에도 옆방에는 자지 않고 깨어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러고도 두 시간 정도를 더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새벽 2시경이 되었을 때 행동을 개시했다. 창문이 열렸고, 두 명의 그림자가 눈밭으로 뛰어내렸다. 눈은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발목까지 파묻히는 눈이었다. “빨리, 서둘러." 야니카와 로마바크는 재빨리 여관 뒷마당을 빠져나가 인가의 처마들 틈을 뚫고 마을 어귀 나무 앞까지 갔다. 눈이 워낙 많이 내리고 있어서 발자국에는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그곳에는 이미 십여 명의 용병들이 말을 준비해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야니카는 그들을 보자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여어! 오랜만이야!" "야니카, 한 몫 보게 해준다더니 하필 이런 궂은 날이야?“ “한 몫 보려면 감수할 것도 있는 법이야. 다들 준비됐어?” 모두 말을 타자 순식간에 출발이 이루어졌다. 눈 덮인 벌판을 꽤 오랫동안 달렸다. 이윽고 중간 지점에서 다시 몇 명의 사내들과 합류했다. 그리고 몇 백 미터정도 더 가서 드디어 그들은 말달리기를 멈췄다. "램프 꺼. 조심조심 가는 거야." 목적지에는 백작의 부하들이 여럿 지키고 있을 터였다. 그들을 단숨에 제압해야 했다. 눈발은 차츰 성기어졌으나 바람은 더 강해졌다. 캄캄한 밤중이라 목적지를 제대로 찾을까 싶었지만 야니카는 자신만만했다. 이 일대는 최근 몇 달간 이 잡듯 훑고 다녔던 곳이었다. 눈이 좀 덮였다 해서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멀리 반짝거리는 불빛이 보였다. 습격에는 익숙한 자들이었다. 제압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비명을 질러도 와줄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백작이 세워 놓은 보초들과 두 명의 기사는 깨끗이 살해당했다. 눈밭에 서서히 젖어드는 붉은 피가 램프빛 아래에서 유난히 고와 보이는 밤이었다. 시체들을 치울 생각도 않고 그들은 삽과 곡괭이를 잡았다. 단단히 굳은 땅이라 불을 피웠다가 파는 것이 좋았을 테지만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여관에서 야니카와 로마바크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면 지체 없이 기사들이 뒤따라올 테고 일은 번거로워지게 되는 거였다. 한 시간이나 걸려서 겨우 작은 구덩이가 파졌다. 아직도 한참 남았을 것 같았는데 갑자기 풀썩, 하고 흙이 꺼지며 무언가가 드러났다. 램프를 들이대고 보니 흙 아래에 마치 납골당처럼 텅 빈 공간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몰라, 그냥 파 봐 주위에 다른 곳도 다 그래?“ “대략 .... 직경 9미터는 되겠는데?” "직사각형이야. 아니, 타원형인가?“ 주위의 흙을 두드려 부수고 나자 정말로 세로 9미터 가량 되는 텅빈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아래에. "봐, 저길 봐, 저기 있다!" "아, 아니, 저게 도대체 뭐야?“ "야, 야니카.... 시체라고 말하지 않았어? 그런데 저게 시체야?“ “나도 몰라! 시체가 아니면 뭐란 말이야!“ 모두 손을 멈췄다. 램프를 든 자가 고리에 끈을 달아 아래로 죽 내렸고, 모두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안에 눕혀져 있는 것을. 그것은 잠든 젊은이였다. 아니, 잠든 채로 묻힌 젊은이 같았다. 그가 잠들었는지, 죽었는지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했다. 백랍처럼 창백한 뺨과 감긴 눈꺼풀, 흙 묻은 갈색 머리카락과 가볍게 모아 쥔 두 손.... 꼼짝도 하지 않은 채 흙바닥 아래 누워 있는 그의 옷은 색깔이 바랬고, 부츠는 거의 다 해져 있었는데 그의 몸만은 그대로였다. 어제 잠든 듯, 아니면 천년 전에 잠든 듯, 조금의 손상도 없는 피부와 육체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몇 년 전에 죽은 시체인데! “나, 난.... 이거 뭔가 잘못 안 거 아냐?” “손떼고 싶은데, 야니카........ 뭔가 무서운 마법이 있는 거라고. 분명 옛날에 죽은 사람이라고 했잖아. 사흘만 지나도 썩는데 저게 다 뭐야?” "혹시 살아 있는 거 아냐?“ 야니카는 얇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가 파르르 떨었다. 그녀도 분명히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이런 꼴을 당하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잖은가? 이게 얼마나 애썼던 일인데, 얼마나 고심해서 여기까지 꾸몄는데! 로마바크가 야니카의 손목을 슬슬 잡아당기며 말했다 "야니.... 가자. 도로 돌아가자고. 아무래도 기분이 나빠. 예감이 안좋아." 야니카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라 소리를 빽 질렀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지금 억지로 도로 묻어놓는다 해도 이미 저들을 죽였는데 돌아가서 한 푼인들 받을 수 있을 거 같아! 여기서 물러서면 빈손이란 말이야!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고생해서 여길 찾아냈는데! 난 그럴 수 없어.... 그렇게는 못 하겠어!" 젊은이의 상체에 입혀진 흰 갑옷, 저걸 노리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몇 년 전 윈터러를 가진 녀석들을 놓치고 나서 백작을 만나고, 곳곳에서 정보를 수집해본 결과, 저거 하나면 평생 먹고 놀아도 되는 돈이 생긴다는 것을 알아내고 나서부터 이 한 번의 모험에 모든 것을 걸어 온 그녀였다. 게다가 저 젊은 녀석은 그 때 레코르다블의 용병 대장 앞에서 그녀에게 치욕을 준 그 녀석이 아닌가! 그래, 살아 있든 죽어 있든 망설일 건 뭔가! 살아 있으면 도로 죽이면 되고, 죽었다면 내팽개치면 그만 아닌가! 야니카는 몸을 일으키더니 냉큼 무덤 안으로 뛰어내렸다. 흡사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납골당 같은 그곳이 기분 나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용병들이 겁에 질려 수군거리면서도 눈을 떼지 않는 가운데 야니카는 무릎을 꿇고, 예프넨의 몸에 입 혀진 갑옷을 벗기려 했다. 그 순간,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아!" 야니카가 손을 대는 순간, 흡사 살아 있는 듯했던 젊은이의 몸이 파스슥, 가루로 변해버렸다. “어.......” 정확히는 가루로 만들어진 껍질이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흘러내려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채. 야니카의 얼굴이 다른 의미로 새파랗게 질렸다. 사라진 것은 시체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그토록 찾아 온 흰 갑옷도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야니카는 잠시 멍하니 눈만 크게 뜨고 있다가 갑자기 두 손을 뻗어 미친 듯 바닥을 더듬었다. 몇 번 그렇게 하고 나서 벌떡 일어선 그녀가 허공을 향해 악에 받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 이런 빌어먹을, 썩을 경우가.... 말도 안 되는.....“ 그러나 무덤 밖에 있던 용병들은 이미 다른 것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웅웅거리는 소음이 사방을 둘러쌌고, 눈발 섞인 바람이 미친 폭풍으로 변해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훅, 램프가 꺼져버렸다. 빛에 익숙해 있던 시야가 끊기고 모든 것이 캄캄한 암흑덩어리로 변해버렸다. 서로의 얼굴은 물론이고 입을 쩍 벌린 무덤 구멍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볼 수 없게 되었다. 바람 소리가 굉음으로 변했다. 말들이 광기에 찬 울음소리를 내지르는 가운데 무언가 부서지고, 부러지고,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뚝 선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심장이 굳어지고 발이 땅에 달라붙은 듯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무 것도 모른 채 무지한 상태로 죽을 운명이었다. 이윽고, 첫 번째 비명이 귀를 찢었다. 제목 : 룬의 아이들 6 지은이 : 전민희 펴낸이 : 서인석 출판사 : 제우미디어 출판년도 : 2002년 저자소개 : 전민희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역사와 문학. 신 화 등을 비롯하여 최근 철학의 신조류까지 섭렵한 지식광이며, 판타지 동화에서 남미 환상문학에 이르는 다양한 판타지에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연구원을 거쳐 1999년 출간한 장편 판타지 소설 ‘세월의 돌’은 통신 연재사상 전설적인 400만회의 조회수와 더불어 전국 판타지 독자들의 입문필독서로 자리잡았다. 4대 통신망과 유명한 인터넷 커뮤니티들마 다 작가의 팬클럽이 빠짐없이 결성되어 있으며, 현재 (주)이삭커뮤니케이션에서 <아룬드 온라인>이라는 이름의 3D 온라인 게임으로 제작중이다. 또한 ‘세월의 돌’은 총 5부작으로 예정된 <아룬드 연대기Arund Chronicles>의 3부로서, 1부 격인 ‘태양의 탑’이 이듬해 출간되었다. (주)소프트맥스의 온라인 커뮤니티 서비스 <4Leaf>의 제작에 참여, 배경세계와 스토리, 캐릭터 설정을 담당하였으며, 곧 출시될 온라인 게임 <테일즈 위버>에 서도 동일한 설정을 사용하게 된다. 현재 100만 명에 육박하는 회원들이 이용하 고 있는 <4Leaf>의 아바타 캐릭터들이 직접 등장하여 지금까지 감춰졌던 이야 기들을 펼치게 될 연작 소설 시리즈가 바로 ‘룬의 아이들’이며, 그 가운데 ‘룬의 아이들-윈터러’는 첫 번째로 공개되는 매력적인 비밀이 될 것이다. Contents 1장 . Withered Land 1. 후라칸 - 8 2. 세 순례자의 비밀 - 3 3. 마법 왕국의 그림자 - 56 4. 세 번째 눈에 보이는 것 - 85 5. 타 버린 것들 - 105 2장. Haunted Land 1. 진실을 찾아서 - 122 2. 첫 번째 진실 -148 3. 두 번째 진실 - 166 4. 주사위 - 194 5. Mental Forest - 225 3장. Gaunted Land 1. 심판 - 240 2. 막다른 벽을 돌파하다 - 264 3. Forevermore -290 1장. Withered Land 1. 후라칸 아직도 눈은 내리고 있었다. 공회당으로 이어지는 길은 수많은 사 람들의 발자국을 묻어 버린 채 갓 잡은 담비가죽처럼 여전히 반짝거 렸다. 다프넨은 대륙에서 살던 시절 단 한 번 담비를 본 일이 있었다. 물 론 그것은 죽은 담비였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진네만 저택에 찾아 온 어느 고관의 부인이 몹시 뽐내며 두르고 있던, 은회색 담비가죽 스 톨(stole)에 매달린 자그마한 머리였다. 그나마 머리가 있었으니 죽은 담비를 만났다고 할 수도 있겠지, 라 고 그는 생각했다. 그것의 이름이 담비라는 것이나 가격이 어마어마 하다는 사실 등은 고관과 부인이 떠난 뒤 유모의 입을 통해 알았다. '실제로 구할 수 있는 담비 가죽들 중에서 가장 값비싼 것이 그 부인 이 갖고 있던 은회색 담비라 했다. 실제로라고? 그렇게 묻자 유모는 약간 투덜대듯이 말했다. "저 먼 북쪽 땅에는 털가죽이 하얀 담비라는 것도 있다고들 해요. 그것도 다른 철에는 털이 황갈색이고 겨울에만 하얗게 되기 때문에 반드시 겨울에 사냥해야 된다는 거예요. 귀부인들은 물론이고 여왕님 이나 공주님들까지도 갖고 싶어하는 털가죽이라서 정말이지 황금보 다도 비싸다지 뭐예요. 한 마리만 잡아도 사냥꾼 팔자 고치는 물건이 라는데, 뭐,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상인들이 부인네들을 만나면 신 기한 얘기랍시고 꺼내 놓는 그런 거죠. 물론 이 유모는 실제로 보지 않은 건 믿지 않지만요. 그러니 역시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담비는 은회색 담비가 아니겠어요? 하지만 그 백담비 가죽은 아무도 밟지 않 은 첫 눈 깔린 새벽 들판처럼 완벽하게 아름답다고 그러더랍니다." 이 말이 기억나고서야 왜 눈밭을 보다가 갑자기 담비 같은 엉뚱한 것을 떠올렸는지 깨닫게 되었다. 다프넨은 피식 웃다말고 문득 생각 했다. 실제로 보지 않은 건 믿지 않는다는 그 유모는, 에메라 호수의 망령, 아니 괴물을 실제로 보았던 것일까. 이젠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유모다. "지금이야." 어깨를 툭 치는 손길을 느끼며 다프넨은 앞으로 나아가 공회당의 계단을 올랐다. 일전에 섬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던 때 올라섰던 곳 을 지나쳐, 공회당을 둘러싼 네모진 회랑을 따라 걸어갔다. 수많은 섬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느린 걸음으로 뒤따라오는 가운데 발걸음은 모 퉁이를 돌았고, 공회당의 동쪽 사면에 만들어진 문짝 없는 아치형 입 구 앞에서 멈추었다. 그것은 다프넨이 처음 섬에 도착해서 공회당을 보았을 때 본 바 있 는 ‘뚫린 입구'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곧 그 입구는 평소 사용되지 않는 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입구는 마을 바깥벽의 것과 마 찬가지로 마냥 뚫린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열쇠가 되는 주문이나 동 작 없이는 지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보통 때에는 누구나 맞은편 벽에 있는 빗장 달린 평범한 문을 사용했기에 이 문의 존재는 거의 잊혀져 있었다. 지금 그 입구 앞에는 데스포이나 사제가 서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초승달 수정이 달린 지팡이 '듣는 자의 룬'을 한 번 휘두른 뒤 알 수 없는 언어로 주문을 외웠다. "보나 데아, 트니토스 테오스, 텔로 엑소우시아." 초승달 수정이 희미한 빛을 흩뿌리는 가운데 데스포이나가 입구를 향해 지팡이를 내밀었다. 그러자 투명한 막 같은 것이 수정과 닿아 너 울거리다가 녹아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데스포이나가 물러서자 입구 를 통과해 들어간 다프넨은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제들 앞에서 멈춰 섰다. 두 줄로 늘어선 사제들 중에는 나우플리온의 모습도 보였다. 다프 넨이 오자 좌우로 물러난 사제들이 길쭉한 원을 그리며 둘러섰고, 모 두 자신들의 신물에 손을 얹은 채 잠시 눈을 감았다. 이윽고 그들 가운데 반투명한 너울거림 같은 것이 서리더니 곧 높 이 솟은 제단의 영상으로 변했다. 평평한 원형 상단 아래로 모래시계 모양의 다리가 세워진 제단이었다. 희미하게 나타났던 제단이 점차 구체적인 빛을 띠는 가운데 그 위쪽으로 길쭉한 선 같은 것이 죽죽 그 어지고, 그것은 잠깐만에 덩굴손을 가진 나뭇가지로 변해 늘어졌다. 가지 끝, 맺힌 이음매마다 순식간에 잎새가 그려져 나갔다. 주위는 숲 이 되었다. 서서히, 더욱더 실제적인 자연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회당 밖에 내리고 있는 것과 꼭 같은 흰 눈이 그 위로 내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더할 나위 없이 생생했다. 하나같이 반투명하다는 사실만을 제하면. 눈송이들은 공회당 바닥에 닿으려는 순간 지워지곤 하여, 이 모든 것이 먼 곳에 있는 어느 장소의 모습을 일시적으로 이곳에 옳겨온 것 뿐이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시켰다. 다프넨과 사제들을 비롯하여 이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저것은 선착장이 있는 섬 의 해안과 사람들이 사는 마을 사이에 펼쳐진, 금지된 '숲' 가운데 존 재하는 옛 유적들 가운데 하나였다. 보통 섬사람들이 선착장을 떠나 숲 머리에 들어서면, 보이지 않는 전이문을 통해 곧장 마을이 시작되는 숲의 끝까지 이동되어 버렸다. 따라서 숲 안에 산재한 유적들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것은 사 제들과 일부 선택받은 사람들 뿐이었다. 오늘과 같은 일도 아주 특별 한 경우였다. "이리로 오너라." 다프넨은 여전히 반투명한 숲의 제단으로 다가갔다. 사제들이 길을 열어 주었다. 더 가까워졌다. 제단 위에 놓인 것이 보였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표지들, 장식품들, 그리고 확연히 알아볼 수 있는 또 하나 의 물건. 그가 손에 쥐고 있는 것과 같은 그것을 보았다. 눈발 속에서도 고스란히 남아 빛나는 은빛 광채 아래 약간은 섬뜩 한 세공으로 뚫어 놓은 눈구멍, 치아의 흔적과 같은 것들이 자신이 지 금 손에 쥔 것과 어쩌면 그렇게 닮아 있는지. 한 세대 앞서 섬으로 온 은해골, 실버스컬(Silver Skull)이 과거 그를 획득했던 주인 따위는 관 심 밖이라는 듯 오연한 눈길로 그를 쏘아보았다. 아니, 단지 퀭한 두 눈구멍일 따름이다. “.......” 다프넨은 자신의 손에 들린 그것을 한 차례 높이 쳐들었다. 그러자 데스포이나 사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달의 섬에 두 번째로 실버스컬을 가져온 작은 견습 순례자, 네 행 동의 가치는 보물을 간직하는 숲의 제단과 함께 오래도록 남으리라. 또한 어느 날인가 사라지리라." 거창한 치하의 말이나 과장된 수식어 따위는 없었다. 그 담백한 어 구가 폰티나 영지 의전관이 능란하게 쏟아놓던 미사여구를 문득 생각나게 했다. 새삼 다시 가보았던 아노마라드는 어린 시절 했 던 그의 짐작, 그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여전히 무신경한 부자와 같 은 모습으로 그를 맞았을 따름이었다. " 여왕이시여, 굽어보소서. 우리 대신 지니소서. 우리를 지키소서. " 다프넨이 다가가자 그의 몸도 점차 반투명해지더니 제단과 같은 빛 깔로 바뀌었다. 구경꾼들이 술렁대는 가운데 그는 침착하게 다가가 두 번째 실버스컬을 첫 번째 것 곁에 나란히 내려놓았다. 그 순간 다 프넨의 몸은 이곳 아닌 먼 숲에 가 있었고, 진짜 눈이 그의 어깨 위에 엷게 쌓였다. 귓가에선 숲의 소리가 났다. " 여왕께서는 겸손한 봉헌물을 기꺼워하시어 그대에게 한 가지 이름 을 하사하고자 하시니라. 그대는 이제부터 달여왕이 친히 눈여겨보신 자로서 '예비하는 자, 후라칸‘ 이라 일러질지니 그대의 순례자 이름과 함께 명예로운 자리에서 두 번 일컬어지리라." 작은 속삭임이 퍼져나갔다. 다프넨에게 '후라칸‘ 이라는 칭호의 어 감이 낯선 것과 마찬가지로 섬사람들 역시 그 단어를 편하게 느끼지 는 않는 듯했다. 누군가 나타나 오랫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의무를 다 시 강요하기 시작한 것과 같았다. 처음 섬으로 올 때 다프넨은 에니오스(단센)로부터 순례자들의 3대 의무라는 것을 들은 일이 있었다. 오래 전 이 의무들이 정해질 때는 '구속자' 라고 불리는 지휘자들도 함께 선출되어 그들에게 특별한 칭 호가 주어졌는데 그 중 세 번째 의무, '돌아올 고대 왕국을 위해 예비 함‘ 과 맞물려 존재하는 것이 바로 '예비하는 자, 후라칸’ 이라는 이름 이었다. 유래는 옛 왕국의 작위명들에 있었는데 '후라칸' 이라는 단어 가 본래 갖는 의미는 ‘때를 기다리는 바람' 이었다 비록 의무들이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섬에 정착하던 초기와는 달리 구속력이 상당히 약화된 지금은 그 칭호들을 마지막으로 가졌던 사람 이 누구인지조차도 불분명해진 상태였다. 그러다가 오래 전 소년 시 절의 일리오스 사제가 첫 번째 실버스컬을 가져왔을 때, 섬사람들은 만장일치로 그에게 첫 번째 구속자의 칭호, '복원하는 자, 벨칸다르‘ 를 선사했다. 일리오스의 행동이 고대 왕국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복 원한 것과 같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프넨은 일리오스와는 달리 아직 견습 순례자였고, 심지어 그들과 핏줄조차 달랐다. 그런 다프넨에게 그렇게 큰 칭호를 내려도 좋은 것인지, 첫 실버스컬을 가져온 일리오스와 동일한 예우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두 번째 구속자의 칭호를 건너뛰고 하필 세 번째 것 을 내린 까닭은 무엇인지, 그런 것들은 사제들만이 알 수 있을 터였 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데스포이나 사제 혼자만이 알고 있을 따름이 었다. 섬사람들은 대륙 사람들과는 달리 가문의 성 같은 것이 없었다. 따 라서 대륙에 나갈 경우 사용하는 가명을 제외하고 평생 한 개의 이름 만을 지닌 채 죽게 되므로, 두 개 이상의 이름을 갖는 것은 큰 명예에 속했다. 살아 생전 모두의 칭송을 받을 만한 특별한 업적에 내려지는 가장 큰 선물이 두 번째 이름이라 했다. 현재 여섯 사제들 가운데서도 두 개의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돌아선 다프넨은 멀찍이 떨어져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 쪽으로 언뜻 눈길을 주었다. 무리 지어 선 그들의 모습이 마치 빙벽에 새겨진 군상 같다고 생각했다. 의식이 끝난 날 밤, 다프넨과 나우플리온은 오랜만에 조용히 마주 앉을 수 있었다. 섬으로 돌아오자마자 성과를 보고하고 의식을 준비 하는 등의 일들로 해서 사제인 나우플리온이나 의식의 당사자인 다프 넨이나 대륙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회포를 풀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것이다. 다프넨과 이솔렛은 섬에 겨울이 시작될 무렵, 다른 아이들보다 훨 씬 늦게 섬에 돌아왔다. 두 암살자들과 싸울 때 독에 당했던 등의 상 처가 생각보다 쉽게 낫지 않아 한 달 가까이 마을에서 요양하지 않으 면 안되었던 것이다. 섬사람들은 이미 다프넨이 실버스컬에서 올린 성과에 대해 미리 돌아온 아이들에게 다 들어 알고 있었고, 따라서 모 두들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 날 두 사람이 느낀 기쁨은 각별했다. '후라칸' 이라는 칭호를 받 은 일에 대해서는 다프넨보다 그 이름의 가치를 잘 아는 나우플리온 이 훨씬 더 기뻐했다. 다프넨은 나우플리온의 검으로 나우플리온 대 신 그의 명예를 높였다는 것에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둘은 말하지 않 아도 서로의 감정을 잘 알고 있었다. 밖에는 조용히 눈이 내렸다. 섬의 겨울은 늘 오늘처럼 갑작스레 퍼 붓는 눈과 함께 시작된다. " 해쓱해졌구나, 역시 대륙은 살 만한 곳이 못 되지?“ “ 대륙에 나가 있자니 내가 없으면 우리 사제님이 식사는 제 때 챙겨 드실까, 청소는 누가 하며 세탁은 누가 할까, 참 걱정되더라고요. 밤 낮으로 걱정하다보니 이렇게 살이 빠졌죠." " 네가 늘 모든 걸 다 한 것처럼 떠벌리지 마. 네가 없을 때도 혼자서 잘 해나갔었다고." " 그런 분이 지금 걸치신 그 후줄근한 옷은 다 뭐예요? 겨울 오기 전 에 침대 시트 같은 건 한 번 빨아서 햇빛에 말려야 되는데 눈이 오기 시작하니까 이미 날 샜잖아요. 그리고 또 .....“ 그건 두 사람만의 대화하는 방법일지도 몰랐다. 둘은 잠시 후 마주 보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 무사히 잘 왔구나." " 무사히 잘 계셨네요." 두 사람 앞에는 겨울밤을 새우는 사람들의 애호품인 구운 개암이 한 접시 놓여 있었다. 섬 안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간식 중 하나인 말 린 대구포도 조금 있었다. 그걸보던 다프넨은 문득 생각난 듯 일어나 더니 대륙에서 돌아와 내던진 후 방치해두었던 배낭을 끌어당겼다. 배낭은 굉장히 불룩했다. 나우플리온이 농담조로 말했다. “ 너도 대륙에 가서 이것저것 잡다한 거 사 갖고 왔냐? 대륙에서 살 던 녀석이 섬 촌놈들하고 똑같은 짓을 하면 쓰나" 다프넨은 배낭을 열다말고 고개를 돌려 씩 웃었다. " 대륙에서 살던 사람만이 그리워할 것을 구해 왔는데요. 뭐, 달갑지 않으시다면 그냥 저 혼자 먹겠습니다." "그거 참, 사사건건 이기려고만 하는 제자 녀석 때문에 인생이 번거 롭도다. 얼른 뭔지 꺼내 놔 봐." 다프넨이 꺼낸 것은 커다란 참나무 통이었다. 나우플리온은 단박에 그게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데 통 안에서 무언 가 쿨렁, 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다프넨이 멋쩍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자아, 헤베브로의 묵은 포도주보다 좋은 술이니 실컷 드시지요," 나우플리온은 벨노어 성에서 브랜디 병을 주방에 숨겨 놓고 몰래 마실 정도로 술을 즐기던 사람이었으나 섬에 온 후로는 한 방울도 입 에 대지 못했다. 물론 그는 섬의 규범을 앞장서서 지켜야 할 사제였으 니 제사용으로 비싸게 대륙에서 들여온 술을 몰래 훔쳐 마실 수야 없 는 노릇이긴 했다. 물론 겉보기와는 달리 한 번 마음먹은 이상 놀랄 만큼 자신의 의무에 철저한 나우플리온이 그런 일을 시도할 사람도 아니었다. 나우플리온은 술통을 내려다보며 잠시 말을 잊은 듯한 얼굴이었다. 오랜만에 맡는 좋은 술 냄새는 흡족했지만. 그것을 가져온 소년의 마 음은 술 없이도 그를 취하게 했다. 눈 내리는 밤에 오랜만에 돌아온 제자, 좋은 술, 구운 개암, 그 이상 필요한 것이 있겠는가? 다프넨은 나무잔 두 개를 가져와 놓으며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때는 한 방울도 안 주셨지만, 이제는 한 잔 정도 주시겠죠?“ 벨노어 저택에서 떠나기 전날 밤, 한 모금 맛보겠다고 졸랐지만 기 껏 물만 한 잔 얻어 마셨던 것이 기억났다. 그래, 그건 정말로 오래 전 의 일이다. 그렇게 헤어진 나우플리온과 다시 만났고 이제는 이렇게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으니 세월이란 묘하달 밖에. 나우플리온이 손수 참나무 통의 마개를 땄다. 한 잔을 부은 뒤 그가 앞의 질문에 대꾸했다. "키만 크지 아직도 조그마한 꼬마 같은 네 녀석한테 이런 독한 술을 줄 수는 없는 일이나......“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두 번째 잔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가져온 정성을 봐서 오늘은 특별히 한 잔 주도록 하겠다. " 잔을 들어 부딪쳤다. 아까운 술, 한방울도 흐르지 않도록 조심했다. "실버스컬의 주인인 '위대한' 후라칸을 위해." 다프넨이 키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 '위대한‘ 분의 스승님인 우리 사제님을 위해." 물론 다프넨은 한 모금 마시는 즉시 큰 숨을 들이쉬어야 했고, 그런 모습을 보며 나우플리온이 킬킬거리자 오기로 단숨에 마셔버리는 객 기도 부렸다. 얼굴이 금방 빨개지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나우플리온 이 다시 술을 따라주지 않자 다프넨은 투정하듯 중얼거렸다. "가져온 정성으로 한 잔이었으니까, 무겁게 짊어지고 온 수고로 한 잔 더, 그런 것을 고스란히 내어드리는 선량함에 또 한 잔 더, 그 술의 맛이 좋은 기분으로 다시 한 잔 더, 안될까요?“ "긴 질문에 간단히 답해주마. 안 돼." 나우플리온은 술을 마시고, 다프넨은 개암을 까먹었다. 술 한 잔 마 시니 추위도 느껴지지 않아서 다프넨은 이것저것 지껄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나온 것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는 인물들인 로즈니스와 벨 노어 백작의 이야기였다. 술을 마시면 이야기가 과장되기 마련이라, 그는 평소의 이야기 실력보다 훨씬 더 극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설명 해 주었다. 나우플리온은 로즈니스가 많이 달라졌더라는 대목에서 싱긋 웃으 며 말했다. "그 꼬마 아가씨도 세상맛을 좀 알게 됐나 보구나. 오랜만에 얘길 들으니 이거 다시 보고 싶어지는걸." "아쉬움을 두 배로 증폭시키기 위해 심지어 한결 예뻐지기도 했다 소식을 덤으로 전해드리죠." 나우플리온도 즉시 받아쳤다. “매우 효과적으로 증폭되는구나. 한 번 선택이 미래를 좌우한다고, 그 때 내가 왜 칙칙한 사내녀석을 붙들고 이것저것 가르쳤담. 반대로 했으면 지금쯤 귀여운 여자애와 술을 마시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다프넨이 혀를 내밀어 보이며 대꾸했다.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이어 벨노어 백작이 꾸민 일에 대해 이야기하자 나우플리온은 '그 자는 딸보다도 더 발전이 없군'하고 중얼거렸다. 곧 폰티나 공작의 뜻 모를 호의, 실버스컬의 결과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결과는 두 사 람 모두 다 알고 있었지만 나우플리온은 술 한 잔 마신 다프넨이 평소 보다 열띤 태도로 떠들어대는 모양을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기에 다시 한 번 듣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프넨은 끝을 이렇게 맺었다. "그리하여 저는 우리 스승님이 빌려주신 검이 이렇게나 훌륭하다는 것을 증명했답니다."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당신의 명예가 되고 싶었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다 느낄 수 있었다. 조금 후에 짤막하게 폰티나 공작의 배려로 아노마라드와 렘므 일부 를 지나왔던 이야기를 했다. 그 다음이 바로 암살자들과 헤베티카의 마을, 헤베브로의 이야기였다. 다프넨은 이야기를 짧게 줄이려 했지 만 잘 되지 않았다. 그래도 자신이 사람을 죽인 일에 대한 고백은 하 지 않을 수 없었다. 나우플리온은 이마에 살짝 주름을 잡았으나 무어 라 달리 말하지는 않았다. 그런 문제는 다프넨 자신이 충분히 생각하 여 결정할 수 있다고 그는 믿고 있었다. "빌려주신 검으로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은 사죄 드리겠습니다. 그런 데 꼭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말해 봐." "그 검, 표면에 피가 묻으니 이상한 글자가 나타나더군요." 나우플리온은 이미 술을 반 통 가량 비우고 있었다. 다프넨은 말을 끊 이제 그만 마시라고 만류했다. "그래, 나머지는 다른 날 마셔도 좋겠지. 아아, 하지만 검의 사제가 집에 술이나 숨겨두고 있다는 소문은 확실히 좋지 않아. 역시 다 마셔 버려야겠어." "편리한 논리네요." 나우플리온은 컵에 남은 술을 비우고서 말해 주었다. "그 검은 내 스승께서 만들어주신 거야. 얘기한적 있던가? 아, 네 가 나한테 물은 적이 있구나. 그 ‘티그리스’ 말이다. 내게 그걸 가르쳐 주신 그 분." "기억나요. 그런데 그 분은 검술뿐 아니라 검도 만드셨군요?“ "그냥 취미였어. 대장장이는 아니고, 그 때 대장간을 맡고 있던 분 하고 친해서 가끔 화덕을 빌려 한두 자루 정도 만들곤 하셨지. 두 분 은 서로에게 필요 불가결한 존재, 다시 말해 술친구였거든." "술이라고요? 섬에는 술이 없지 않아요?“ "이른바 밀주라는 거지. 자기 곡식 갖고 밥 굶어가며 술을 빛 을 사람이 섬에는 그리 흔치 않은데, 그 두 분은 그런 점에서 마음이 잘 맞았거든. 내가 아까 필요 불가결한 사이였다고 했잖아. 그런 짓도 친구가 있으면 용기가 나게 되기 마련이라서. 그것 참, 마음이 지나치 게 잘 맞은 나머지 때때로 사람들 앞에서 술에 취한 채 어깨동무를 하 고 돌아다니셨더란 말이야. 술이라고는 평생 한 방울도 안 먹어본 이 곳 사람들 앞에서 말이지. 그 때 사람들이 눈살 찌푸리던 걸 생각하 면.....“ 나우플리온이 자신의 스승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다프넨이 나우플 리온을 두고 농담 삼아 한탄조로 하는 이야기와 어쩐지 느낌이 비슷 했다. 다프넨은 그냥 미소지었다. 나우플리온도 오랜만에 술을 마셔 서인지 술기운이 돌아 말이 좀 많아진 듯했다. “그래, 그런데 참 묘하게도..... 이런 얘기 좀 그렇지만 그 분의 검술 은 그리 빼어난 편이 아니었거든. 그런데 오히려 야금술에는 비상한 재능을 갖고 계셨더란 말이야. 그래서 그 분이 만든 몇 자루 안 되는 검은 전부 대단히 훌륭한 것들이었어. 지금은 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 지만 말야. 사람들한테 무심코 선물로 줘버리곤 하셨거든 하긴, 그 분이 평생 남에게 주지 않고 혼자 지킨 건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아 참, 그 글자에 대해서 물었지. 그건 말이야......“ 이름이 오이노피온(나우플리온은 그 이름이 심지어 '포도주를 마시 는 사람' 이라는 의미라고 말해서 다프넨을 놀라게 했다)이라고 했던 그 스승은 정말로 검술보다는 검 제작에 더 일가견이 있었던 모양이 었다. 그는 평생동안 대략 열 자루 가량의 검만을 만들었는데 그 검들 에는 모두 특별한 문자가 새겨져 있어서 피가 묻어야만 보이도록 되 어 있었다. 그 기술은 대장장이는 물론이고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비밀스러운 기술이었고, 그의 죽음과 동시에 사라져버렸다. "그런 문자를 나타나게 하신 이유가 뭘까요?“ "경고지. 검에 피를 함부로 묻히지 말라는 경고." 다프넨은 섬뜩한 기분이 들어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아직까지도 자신이 한 살인이 정당한 것이었던가, 정말로 그 방법밖에 없었던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런 거다. 참, 내가 빌려준 그 검은 네가 한동안 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아직은 윈터러를 쓸 때가 아니고, 내게는 '우레의 룬‘ 이 있으니까 섬 밖으로 나가지 않는 한 그 검을 쓸 일은 없거든. 네가 그 검으로 대륙에서 해낸 일들을 볼 때 너에게 꽤 어울리는 검 같기도 하 고 말이야." 눈과 술, 그리고 이야기와 함께 밤이 깊어갔다. 명예로운 칭호가 주어졌다 해서 다프넨의 생활에 직접적인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륙에서 들은 이야기가 그에게 준 변 과는 컸다. 어느 날, 데스포이나 사제를 찾아간 다프넨은 이솔렛으로부터 신성 찬트(Holy Chant) 배우는 것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다. 졸업 문제 때문이라면 이제 질레보 선생도 없으니 차라리 막대 호신술을 다시 배우겠다고 이야기했다. "교장 선생님과 잘 상의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만.....“ 말끝을 흐리며 데스포이나는 다프넨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이제 나이에 비해 감정을 쉽게 숨길 줄 알게 된 다프넨의 얼굴에서는 어떤 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려는 이유가 궁금하구나. 대륙에 나가 있을 때 두 사람이 잘 지내며 협력한 것으로 들었는데 다른 문제라도 있었던 것이냐?“ "아닙니다. 다만 훌륭한 선생님에 비해 제가 너무 진전이 없고, 또 저는 최근 목소리가 변하는 중이라 노래하는 것이 힘들기도 하고요. 그런 중요한 전통은 저보다 더 자질 있는 아이가 배우는 것이 섬 전체 를 위해서도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솔렛이 너 아닌 다른 아이를 가르치려고 할까?“ 이 부분에서 다프넨은 마음먹은 바가 있어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는 이미 검의 사제님의 제자로서 한 가지 중요한 전통을 잇고 있 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또한 그 자질로서 대륙까지 다녀오기도 했고 요. 아직 견습 순례자에 불과한 저에게 이번에 주어진 칭호는 무거운 것이고, 그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도 간단하지 않습니다. 사 람들의 의혹이 실망으로 바뀌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라도 한 가지 에 매진하여 거기에 맞는 성과를 보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 니다. 막대 호신술은 새로 배운다고 해도 일단 검술과 비슷한 자질을 요구하니까 저로서도 좀더 하기 쉽겠지요." 다프넨의 지적은 실질적으로도 옳은 것이었다. 나우플리온의 제자 가 됨으로서 향후 사제직이 약속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인 그가 신 성 찬트의 유일한 계승자인 이솔렛의 학생이기도 하다는 것은 특혜도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냐는 뒷말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다프넨이 실 버스컬을 가져와 후라칸의 칭호를 받은 뒤로 그런 이야기는 한층 자 주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변성기라는 것 역시 사실이기도 했다. 변성기의 소년이 노 래를 쉬겠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까닭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데스포이나는 오랜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직감으로 보리스의 마음 을 곧 짐작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쉰 뒤 나지막이 말했다. "일부러 피할 필요는 없단다, 다프넨. 이제 막 인생의 빛을 잡아야 할 소년이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들을 애써 뿌리치는 것만큼 슬픈 일 은 없으니 말이다." 이제 남은 삶에 더 이상의 미련은 없다는 것처럼, 미소지으며 두 손 을 훌훌 털어 버린 또 다른 소년의 모습이 다프넨의 모습과 어렴풋이 겹쳐졌다. 그 소년은 데스포이나의 친아들들과는 달리 부러 험한 항 해를 택했고, 이제 지쳐 돌아온 늙은 수부처럼 자신의 작은 오두막에 눕고 싶어했다. 나이에 비해 너무 많은 바닷길을 달렸던 것일까. 그리고 그 소년만큼이나 고집 센 다프넨이 그녀 앞에서 역시 고개 를 젓고 있었다. "아뇨. 처음부터 저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제겐 벅찼죠. 아직도 남 은 것은 많고 해야 할 일도 많기에 아쉬워하지 않을 겁니다. " 두 사람은 신성 찬트를 포기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듯했지만 실제 로 말하고자 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데스포이나는 나우플리온이 찾 아왔던 그 날처럼 다시 한 번 슬픈 눈이 되었다. 미간에서 이마로 뻗 어나가는 주름살은 이제 고목의 그것처럼 펴지지 않고, 그녀에게 새 로운 삶이 열릴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다프넨의 이름을 지을 때 보았 던 환상은 섬보다 넓고 바닷길조차 넘어가야 할 미래를 암시하는 듯 했고, 그렇기에 서서히 그에 맞는 짝으로서 새 삶이 필요한 이솔렛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으니, 이제 섬 안에는 이솔렛에게 달리 남은 행복 이 없다고 느낀 지 오래었기 때문이었다. 섬 밖의 땅을 개척해야만 할 운명이라면, 먼 땅에서 그들의 신성한 소녀와 함께 행복해지기를, 섬 안에 남은 자들이 숙명의 삶을 사는 동 안 진심의 자유를 찾게 되길, 그렇게 바랐는데. "두 사람은 서로에게 행복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네 생각은 달랐느냐?“ 다프넨은 약간 이상한 눈빛으로 데스포이나를 바라보았다. 모든 비 밀을 알고 있을 그녀가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는 듯한 시선이 었다. 그러나 데스포이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지 말아라, 그것은 너 하나의 삶만을 깎아 내는 것이 아니란 다. 차라리 네 마음이 변하게 된 까닭을 말해 주면 어떻겠니? 대륙에 서 이솔렛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이냐?“ 나온 대답은 딱딱했다. "누구보다도 잘 아실 사제님이 아닌가요." "그래,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하지만 네가 나처럼 정확히 알고 있는지, 그것만은 모르겠구나." “.......” 작은 집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곧 나우플리온이 돌아올 집으로 가 있어야 할 시각이었다. 데스포이나는 잠깐 일어나더니 아궁이의 불씨를 등잔에 옮겨 붙이고 심지를 돋웠다. 밝은 빛이 잠시 확 일어나 며 요 며칠 파리해진 다프넨의 뺨을 붉게 비췄다. “다프넨, 그 이름은 내가 지었던 것이지 그렇구나. 그 때 나는 나우 플리온 사제를 생각하고 있었어. 그의 이름을 지은 것은 내 아버지였 고 그래서 그 아이가 내 동생이 된 것처럼 나 역시 네 이름을 직접 짓 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지. 너도 알다시피 섬에는 가문의 성이 없고 몇 대만 지나면 핏줄은 얼마든지 흐려질 수 있단다. 그런 까닭에 서로 에게 이름을 준 관계는 종종 핏줄만큼이나 강한 그 무엇이 되곤 하지. 자신이 이름을 준 아이에게는 평생토록 책임을 느끼게 되고, 그 아이 의 삶을 바르게 이끌 의무 역시 이름지은 자에게 있는 것이야. 나는 나우플리온을 친동생처럼 여기듯, 너를 조카처럼 생각해 왔다. 다프 넨, 네 이름의 의미를 아느냐?“ 지금까지 데스포이나가 그에게 여러 번 특혜를 베풀었음을 느끼고 있긴 했지만 그것에 이토록 구체적인 이유가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 했다. 다프넨은 약간 당혹스러워하며 답했다. "월계수.... 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뭘 뜻하는지는 모 겠어요." "이름을 지으려는 자는 그 아이의 미래를 위한 환각을 보게 된단다. 너를 위한 환각.... 거기에는 물론 월계수가 있었고, 그것은.... 옛 문헌에도 나 오는.... 나로서는 도저히 못 알아볼 수가 없는 나무였어. 바로 우리 순례 자가 떠나온 옛 왕국, 그곳의 입구를 지켰다던 불사의 월계수다." '불사' 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우플리온이 해 주었던 이야기가 퍼뜩 떠올랐다. 본래 처음 지어졌던 그의 이름은 아타나토스, 즉 '불멸, 불 사' 라는 뜻이라 하지 않았던가? "옛 땅에서 승리자의 나무였던 월계수는 때때로 성의 입구, 또는 왕 국의 입구에 심어지곤 했는데 일반적으로는 친교의 의미라고 받아들여 졌지만 정확한 의미는 이렇다. ‘나는 승리자이고 너는 패배할 것이니 네가 나를 승리자답게 예우한다면 나도 온화한 처분을 내릴 것이다.'" 다프넨은 문득 놀라며 그 말을 들었다. 나우플리온은 성 어귀의 월 계수가 방문객을 환영한다는 의미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실 제로는 내 땅에 들어온 이상 평화를 지키라고 위협하는 느낌이 더 강 하지 않은가? 평화를 원치 않는다면 돌아갈 것은 패배뿐이라고. "이렇듯 월계수는 영광의 나무이기 이전에 전쟁의 나무였다. 사람 들의 투쟁욕을 불러일으키는 자부심 높은 자태의 적장처럼 끊임없는 도전자들을 불러들이는 것이지. 그리하여 섬에서의 네 삶 역시 네 위 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싸움을 걸고 또 걸 수밖에 없는 운명이 었던 것이야. 헥토르가, 에키온이, 질레보가 그랬으며 그밖에 너를 미 워한 모든 사람들이 너의 승리를 인정할 마음이 없었던 자들이다. 더 불어 헥토르의 이름은 ‘대적자', 에키온의 이름은 '큰뱀의 아들'이며 마지막으로 질레보의 이름은 '질투' 에서 유래했느니라" "그렇다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란 말씀이신가요? 제가 섬에 사 는한 싸움을 피할 수 없다는, 그런 말씀이신가요?“ 데스포이나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인 채 다프넨을 보다가 말했다. “네 삶은 섬 안에만 있지 아니하잖느냐. 네 이름은 다프넨, 한 가지 만은 아니잖느냐." 데스포이나는 '후라칸‘ 이라는 새 칭호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 프넨이 직접 말한 일이 없건만 데스포이나는 다프넨의 옛 이름, '보리 스‘ 를 알고 있었으며 그것의 의미 역시 알았다. 다프넨이 답하지 못하 는 사이 데스포이나는 이어 굳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너와 나우플리온의 삶은 겹쳐질 수 없는 별개의 선 인 것이야. 한 번의 접점이 너희를 이끌리게 하여 이곳까지 오게 했으 나 이제 그 선은 다시 겹칠 수 없는 곳으로 각각 뻗어가고 있으니, 네 가 언젠가 나우플리온을 영원히 잃게 될 때 네 곁에 아무도 남지 않 는, 그런 상태를 바라느냐?“ 다프넨은 더 견디지 못해 울컥 외침을 뱉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실 수 있습니까....... 사제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 제게 그들 사이에 끼여들라고 어떻게... 말할 수가 있죠? 저 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래선 안 돼요. 저 역시 과거의 기억을 지우 지 못한 채 사는 사람으로서 남의 추억을 부술 수는 없으니까..... 마 음을 가진 건 저뿐이 아니니까요. 이제는 주위 모든 사람이 제 적이 된다 해도, 나우플리온 사제님만은 잃을 수 없어요. 영원히.... 언젠가 는 잃게 되겠지만 그렇더라도..... 그 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은 저 자신이 용납할 수 없습니다." 다프넨이 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목소리 가운데 생생하게 배어났다. 데스포이나는 문득 손을 내밀어 다프넨이 그 위에 손을 얹게 했다. 주름투성이 손이 자신의 손을 감싸쥐는 순간 다프넨은 알 수 없는 따뜻함을 느끼고 안타까워졌다. 왜 자신은 저러한 따뜻함 속에 마음 을 맡기고 편히 쉴 수 없을까. “내 이야기를 잘 듣거라. 이미 들었겠지만 다시 한 번, 무엇이 다른 지 생각하면서 들어보거라." 데스포이나는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옛날의 일, 오누이 같았던 나우플리온과 이솔렛을 영영 갈라놓은 그 날의 약혼 사건과 고집 센 두 남자들의 대립, 그리고 일리오스의 죽음에 이르러 완전히 돌이킬 수 없게 된 관계에 대해서. 그것은 이솔렛이 해 준 이야기와 크게 다 르지 않았으나 당시 어렸던 이솔렛으로서는 알 수 없었을 복잡한 감 정의 얽힘이 존재했다. 이를테면 나우플리온과 그를 가르친 늙은 선 생, 오이노피온의 관계가 그랬다. 우연히 시작된 그들의 인연은 이후 스승과 제자를 넘어 할아버지와 친손자, 아니 아버지와 아들 이상으로 애정 깊은 사이가 되었다 했다. 달리 말하자면 누구에게도 이해 받지 못하고 있던 두 사람이 처음으 로 한 사람을, 즉 서로를 이해하였다. 티그리스 검술의 계승자이면서 도 술과 허풍으로 세월을 보내던 오이노피온 노인, 누구에게도 애착 을 느끼지 못하고 홀로 좌충우돌하던 고아 소년 나우플리온. 그랬기에 더욱 끊기 어려운 관계였다. “마치 지금 네가 나우플리온을 저버릴 수 없는 것처럼, 그 때의 나 우플리온도 그랬지." 두 사람은 서로에게 깊이 의지하고 있었다 검을 연습하기보다는 옛날 얘기, 세상 얘기, 술 얘기를 하며 보내는 나날이 더 많았고, 옛 친구처럼 마음이 잘 통했다. 그러나 데스포이나는 나우플리온이 발전 없이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답답하고 안타깝게 여겨 차라리 두 사람 을 갈라놓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데스포이나 또한 지금 처럼 인자하고 온화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세월은 역시 모든 것 을 바꿔 놓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내 잘못이란다. 일리오스 사제가 먼저 제안하 긴 했지만 둘의 약혼을 구체적으로 추진한 것은 나였으니까. 이후 일 리오스 사제가 돌아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을 때 나우플리온이 그의 뒤를 이어 검의 사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도 나였어. 그것 때 문에 이솔렛은 오래 전 약혼을 깨면서까지 아버지의 제자가 되는 것 을 거절한 터에 심지어 아버지의 자리를 빼앗은 셈이 된 나우플리온 을 용서할 수 없게, 아니, 용서해선 안되게 된 거지. 그래, 한 가지 묻 자꾸나. 이솔렛이 아직도 그 윗마을에서의 마지막 전투 때 나우플리 온이 일리오스 사제를 잘못되게 했을 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더냐?“ 다프넨은 그냥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데스포이나는 탄식하듯 천장 을 올려다보았다. "그랬구나. 그들의 가장 큰 오해가 풀렸으니 네가 너 자신을 불청객 처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구나. 하지만 세상의 진실 가운데는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이 더욱 많은 법. 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 만 네 눈 밖에서도 엄연히 시간이 흘러갔음을 생각하거라." 여전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찬트 배우는 것을 그만두기로 결정 한 다프넨이 이솔렛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늘 만나던 장소로 을 라갔을 때 이솔렛은 자리에 없었다. 이솔렛을 따르는 흰 새들 역시 한 마리도 찾을 수 없었다. 두 번 더 찾아갔지만, 왔다 갔다는 흔적조차 없는 고요한 바위들 사 이에서 혼자 두 시간 가량 앉아 있다가 내려왔을 뿐이었다. 2. 세 순례자의 비밀 겨울이 서서히 걷혀 갔다. 봄이 오면 스콜리를 졸업한 열 다섯 살의 아이들을 위해 정화 의식 이 치러질 예정이었다. 다프넨은 늦게 입학했기 때문에 올해 초에 졸 업하지 못하지만 나이가 찼기에 역시 정화의식의 대상자가 되었다. 이제 정화 의식을 거치면 그도 정식 순례자가 되는 것이다. 진짜 섬사 람이 될 것이고, 가끔씩 데스포이나 같은 사람이 넌지시 말하곤 하는 대륙으로의 복귀 또한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다프넨은 차분한 마음으로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륙이든 섬이 든 번뇌 없는 곳은 없었고, 이곳에서 맞닥뜨리는 고민이 크다면 대륙 에 내버려두고 온 고통 또한 큰 것이기에 두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순례자가 된 후 어떤 식으로 살아갈 것인가는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정말로 나우플리온의 뒤를 이어 검의 사제가 될 것인가? 마음 깊은 곳에서 그것을 부정하는 목소리가 종종 들리곤 했다. 그건 본래 이솔렛의 자리였으며, 그런 자리에 앉는다는 것 자체 가 앞으로 수많은 고뇌를 가져다 주리란 사실을 자꾸만 느끼고 있었다. 나우플리온의 일이 많아 다프넨 혼자 밤늦게까지 집에 있게 되는 날에는 생각이 더 많아졌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눌러버리려 의식적 으로 다른 일에 몰두했다. 그 날도 그런 까닭으로 책을 잡았을 것이 다. 오래 전 장서관의 제로 아저씨에게 받아 온 책이었다. <가나폴리 이주의 역사> 책 표지를 보는 순간, 처음 섬에 도착했을 때의 일들이 환하게 떠올 랐다. 이솔렛과의 불편한 관계를 견디기 힘들었을 때 잡았던 책이었 다. 읽다가 뒷부분이 찢겨나간 걸 보고 장서관에 가서 새 것으로 바꿔 오기까지 했는데, 그래 놓고도 무심코 다 읽은 책이라 여겼는지 그 후 몇 권의 책을 더 빌려 읽으면서도 이 책에는 손대지 않고 있었다. 제로 아저씨의 장서관에서 아저씨와 오이지스와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던 것도 이미 오래 전의 일이 되어 있었다. 책을 마지막으로 빌려 읽은 지 1년은 훌쩍 지났다. 대륙에서 돌아온 뒤로 몇 달이 흘렀건만 그의 마음을 온통 지배해버린 고뇌 때문에 전처럼 편안한 휴식을 즐기는 것이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책을 보지 않았던 탓인지 선반 한구석에 박혀 있던 이 책을 보는 순간 끄집어내 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앞을 대강 훑다가 뒷부분을 펼쳤다 조금 읽다가 그는 묘한 것을 깨 달았다. 전에 읽었던 앞부분과 지금 새로 보는 뒷페이지들 사이에 몇 십 년 이상의 간격이 있는 듯 보였던 것이다. 마치 이미 완성된 책이 수년간 존재하다가 후세 사람이 몇 십 페이지를 덧붙이고, 그것을 다 시 누군가가 지금의 언어로 옮긴 듯한 느낌이었다. 대략 보건대 이미 긴 여행을 끝내고 정착한 가나폴리 사람이 자신 들이 도착한 땅에 대해 주관을 섞어 기술한 내용으로 보였다. 문체나 말하는 방식부터가 앞의 페이지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 재앙의 날을 피한 우리가 오늘 이 척박한 땅에 정착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은 독수리의 날에 내린 신탁을 충실히 따르지 아니한 우리 자신의 과오에 있도다. 만년설 덮인 절벽으로 메워진 이곳 네 개의 섬 은 분명코 신탁이 가리킨 너른 대지가 아닐진대, 선대의 그라디우스 (진군자) 선단은 이 땅에 이르러 더 나아가기를 그치고 말았나니, 그 리하여 후손인 우리에게는 단지 5백 명만을 먹일 수 있는 좁은 섬이 마지막 피난처로 남고 말았음이라. 실제로 수많은 자손이 재양을 피 해 대륙을 퍼났으되 끝내 한 척의 배만이 풍파를 무사히 피하여 이 섬 의 뭍에 이르렀음도 다름 아닌 신탁의 말이 성취되려 함일러라. 느리게 읽어나가던 다프넨은 한 부분에 이르러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며 읽는 것을 멈추고 말았다. .... 그리하여 선대의 과오를 잊지 아니하고자 우리는 네 섬의 이름 을 각각 '영광의 기억', '신탁의 침묵', 대지의 상실', '귀환의 기원' 으로 이름하였다. 왜 놀랐던가. 다시 한 번 천천히 곱씹어 보고서야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네 가지 이름을 끝만 잘라 놓으니 바로 현재 그들이 살고 있 는 네 섬의 이름이 되지 않는가! “........” 손끝에 가느다란 떨림이 일다가 멎었다. 이 책의 내용대로라면 순 례자들의 옛 왕국은 다름 아닌 저 필멸의 땅에 있었다던 가나폴리이 며, 섬사람들은 가나폴리의 후예라는 뜻이 아닌가? 이 사실을 몰랐던 것이 다프넨 자신뿐인가? 그럴 리가 없다. 옛 왕국..... 누구의 입에서든 한 번은 들어본 이름이 지만 그것이 가나폴리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으며 심지어 나우플리온 조차도 옛 왕국이 어디에 있었는지 모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옛 왕국, 옛 왕국...... 그러자 갑자기 또 한 가지 생각이 났다. 나우플리온은 저 섭정 각하 나 ‘나무탑의 현자’ 제로라면 옛 왕국의 위치에 대해서 알지도 모른 다고 말한 일이 있었다. 다프넨이라는 이름을 받았던 날, 산비탈에 앉 아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분명 그렇게 말했다. 다프넨은 벌떡 일어났다. 처음 그 책을 다 읽던 날과 마찬가지로, 그는 책을 옆구리에 낀 채 다시 한 번 장서관으로 달려가게 되었다. 제로는 막 저녁 식사를 마치고 데운 염소젖을 담은 손때 탄 나무잔 을 한 손에 든 채 다프넨을 맞았다. 나무탑의 현자라는 별칭에 어울리 는 모습이었다. 다프넨이 옆구리에 낀 책을 흘끗 보자마자 제로는 웃었다. "이제야 읽었나 보구나." 다프넨은 다시 한 번 흠칫 놀랐다. 마치 그 책을 마저 읽은 뒤 다프 , 넨이 다시 한 번 이곳으로 달려올 것을 알았다는 듯한 말투였기 때문 이었다. 물론 그 사이에는 몇 번의 계절이 가로놓이고 말았지만. 다프넨은 가까스로 이렇게 입을 뗐다. "알고..... 계셨던가요?“ "그 책이라면 예전에 읽었는걸. 여기의 책들 중에 내가 읽지 않은 책은 몇 권 없어."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새로운 심증이 다가왔다. 제로가 다프넨에게 하필 이 책을 준 것은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나? "왜 이 책을 제게 주신 건가요? 일부러 그러셨나요?“ 제로는 대답 없이 갑자기 소리내어 웃었다. 머쓱한 것을 감추려는 듯 됫머리를 긁적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안하구나. 내 생각보다 네 판단이 빨랐던 모양이야. 그래, 솔직 히 인정하마. 섬사람들이 일부는 숨기고, 일부는 알지 못하는 사실 그 대로가 그 책에 적혀 있단다. 그리고 비록 적은 가능성이긴 해도, 네 가 그걸 읽고 이렇듯 내게 달려오길 기대했지." "어째서인가요? 아니, 왜 그런 사실을 알고 계시면서 섬사람들에게 는 숨기시고, 그리고 제게는 알려주시지요? 다른 사람들이 알아선 안 될 이유는 뭐고 제가 알아야 될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로는 이제 웃음을 거두었다. 그의 말이 짧게 울렸다. "알아선 안될 이유는 매우 간단해. 다름 아닌, 섭정 각하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다프넨의 인지 속에서 섭정은 외딴 저택에 홀로 앉아 섬 의 일을 조종하려 하는 음험한 인물이었다. 신체가 부자유스럽고 특 별한 능력이 없는데도 여전히 권위를 갖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옛 왕 국으로부터 내려온 전통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권위를 가져 다준 옛 왕국의 실체를 숨기려 한다? 그것은 옛 왕국의 모습이 현재 섬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뭔가 다르기 때문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알려질 경우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 일 것이다. "옛 왕국의 정체가 정말로 가나폴리라면..... 가나폴리의 일을 다룬 책은 대륙에서도 얼마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가나폴리 에 대한 정보가 어느 정도는 남겨져 있다는 이야기고..... 그것이 알려 지게 될 때 섭정 각하의 신변에 안 좋은 일이 생기나요?“ 제로는 주위를 둘러본 뒤 2층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손가락질했 다. 두 사람은 차례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전처럼 수많은 책들이 위 태하게 쌓아 올려진 둥근 방에 이르렀다. 방 중앙에 등잔이 하나 놓여 있을 뿐이라 몇 미터 위로는 까마득한 암흑이었다. 두 사람은 등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어둠 속에서 상대방의 불그레한 얼굴이 어른거렸다. “네 말대로야. 그렇다면 너는 대륙에서 가나폴리에 대한 책을 읽은 일이 있니?“ 너무도 오래된 기억이었다 벨노어 백작의 서재에서 란지에가 제일 먼저 권해 주었던 책 <마법 왕국의 역사>, 거기에서 읽었던 내용이 전 부는 아니라 해도 일부 확실히 기억났다. 그 책에 따르면 가나폴리는 어린 아이들까지도 모두 마법을 쓸 줄 알았던 마법 지상주의의 나라 였으며 그곳의 지배자인 왕도 역시 마법사이고 나라의 모든 질서가 오직 마법의 권위에 의지하여 이루어지는...... 그 순간, 다프넨은 그 이야기가 그가 알고 있던 섬의 옛 왕국에 대 한 이야기와 크게 어긋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 중대한 요소가 빠 지고 없었다. 달여왕은, 달여왕은 어디 있는가? “제가 읽은 책에는..... 가나폴리는 마법사들의 왕국으로서..... 그곳에 서 가장 숭배된 가치는 마법이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섬에 서 마법은 거의 사라지고.......“ 제로는 어두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들은 본래 달여왕을 섬기지 않았어." "그럼 달여왕 신앙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타난.....“ "모르겠니? 아니, 이미 짐작하겠지?“ 그렇게 말하는 제로의 모습은 그가 평소 알던 모습 이상의 어떤 차 가운 위엄을 획득한 듯 보였다. 다시 말해 이 문제야말로 그가 오랫동 안 신명을 바쳐 추구해 온 가치임에 틀림없었다. "역대 섭정들의 창작물입니까?“ 섬의 순례자들이 듣는다면 큰 충격과 분노에 휩싸일 만한 말이었 다. 그러나 이 정도로 중대한 문제가 지금껏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 았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가나폴리와 관련된 기록들은 대륙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다프넨이 읽은 책이 그렇듯 섬에도 남아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런 것을 한 권만 보았더라도, 하지만 지금 의 섬사람들은 누구도 책을 읽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아! "누구도 책을 읽지 않으니 그런 조작도 가능했던 것이고, 그러면 혹 시..... 그렇듯 사람들이 책을 멀리하게 된 것도 섭정들이 일부러, 서서 히 조장한 결과입니까?“ 오래 전, 섬사람들이 마법이며 문학, 음률 등을 멀리하고 오직 검만 을 추구하게 된 것이 '명백한 퇴보‘ 라고 말하던 제로의 모습이 떠올 랐다. 지금을 제외하고 그의 표정이 가장 진지하고 단호했던 때가 바 로 그때었다. "모든 것을 확신하기엔 아직 일러. 다프넨, 내가 이제부터 해 주는 이야기를 듣고 비밀을 지켜 줄거라 믿는다. 본래 옛 왕국, 그러니까 가나폴리에도 달여왕의 존재가 없었던 것은 아니야." 다프넨이 비밀을 지키겠다고 서약하지도 않았는데 제로는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프넨은 새로운 눈이 하나 더 뜨이는 듯한 기분으로 그 이야기를 들었다. 본래 가나폴리에서 달여왕은 신앙이 아니라 일종의 원시적 철학으 로서 왕국에 존재한 여러 철학조류들 가운데 한 가지에 불과했다. 현 재 달여왕 신앙의 내용이 신격에 대한 것은 적고 오히려 윤리학이나 정의론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가나폴 리는 마법은 물론 학문도 크게 발달한 나라로서 이런 식으로 철학적 입장을 달리하는 지파들이 서로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자신들만의 전 당을 세워 제자들을 모으기도 하는 일이 흔했다고 했다. 그런 가운데 재앙의 날이 닥쳤고, 재앙을 수습하기 위해 가장 위대 한 마법사들 중 대부분이 그 땅에 남았으나 후손의 보존과 마법, 학문 의 전승을 위해 새로운 곳에 식민지를 개척할 1만여 명의 사람들을 선 발하게 되었다. 그들은 왕위 계승자의 지휘 아래 하늘을 나는 배를 타 고 바다 건너의 땅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들이 가고자 한 땅은 달의 섬보다 훨씬 먼 곳에 있는 미지의 대륙으로서, 한때 그 존재가 신탁에 의해 예언된 일이 있었다. 다프넨은 하늘을 나는 배라는 말에 <마법 왕국의 역사>에서 읽었던 것을 생각하고 온 몸에 오한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런 배가 실제로 존재했었단 말인가? "...그렇지만 그 배들 가운데 이 섬에 도착한 것은 오직 한 척뿐이었 어. 거기에는 불과 백여 명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을 뿐이지. 다른 배 들은 대부분 지금의 렘므 땅, 북쪽 해안의 화이트 크리스탈 제도 까지는 왔지만 그곳에서 알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여 왕위 계승자 가 탔던 가장 큰 배가 떨어져 침몰하고 말았다고 해. 그 배에는 다른 배들을 위한 연료하늘을 날 수 있는 - 연료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 지만 - 가 대부분 실려 있었고, 따라서 그 배가 침몰하자 다른 배들도 더 이상 날아가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말았지. 조금 남은 연료가 다 떨 어지자 남은 배들은 이제 진짜로 항해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렇 게 뿔뿔이 흩어진 거야." "그런데 어째서 한 척만....? 그들은 모두 마법사들이었는데 어째 서 안전한 항해를 하지 못한 거죠?“ "그것이 가장 큰 의문 가운데 하나인데, 그들은 북쪽으로 항해해 갈 수록 점차 마법적인 능력을 잃어간 듯해. 이 섬 주변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의 장이 존재하여 가나폴리의 강력한 마법을 서서히 약 화시켰고 특정한 물건이나 대상에 깃들인 마법만이 겨우 힘을 유지하 게 되었지. 그런데 뜻밖에도 일부 사람들은 오히려 전보다 더 큰 힘을 획득하게 되었어. 바로 달여왕 지파의 사람들이었지." 본래 이곳 네 개의 섬은 다프넨이 읽은 책에 나온 대로 각 섬의 이 름만이 있었을 뿐 전체를 이르는 이름은 없었다. 그러나 이 섬에 도착 했던 사람들은 곧 이곳에 유난히 달, 즉 달여왕의 힘이 강력하다는 것 을 알았고, 그랬기에 달여왕을 추종했던 그들이 온전히 이곳 해안에 다다를 수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긴 항해로 지친 데다 비행을 예상하고 준비한 비축 식량도 다 떨어 진 그들은 더 먼 대륙으로 가는 것을 포기했다. 아니, 달여왕의 힘이 강력한 섬이라는 것을 알고 일부러 정착하려 마음먹은 것일 지도 몰 랐다. 그것을 결정한 것은 그 한 척의 배를 지휘한 선장이었으며 그가 현재 섭정을 배출하는 집안의 시조였다. 그들에게 남은 마법은 달의 기운에 의지하는 것들뿐이었고, 두어 세대가 지나는 동안 그들은 어 느새 달여왕의 자식들이 되어 있었다. 섬은 달의 섬이 되었다. 달여왕의 특별한 영향력이 미치는 곳은 저 썰물섬까지였고, 그 해 역은 현재까지도 순례자들이 지키는 영역이 되었다. 왜 이 섬 주변 해 역에서 달의 힘이 강해지는지는 가나폴리의 후예들조차 밝혀내지 못 했다. 다만 과거 가나폴리 땅에도 특정한 별의 영향력을 받는 지역이 있었다는 것만이 가능한 짐작에 대한 뒷받침이 되어줄 따름이었다. “다프넨 너, 공회당에 새겨진 부조들을 자세히 본 일이 있니?” “예?” 매일 보는 공회당이었지만 부조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살펴본 일은 없었다. 달을 의인화한 여인의 모습이 많았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었 다. 그런데 그 때 다른 것이 생각났다. 공회당은 이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헥토르와의 결투 때 페허가 된 윗마을에 가서 본 무너진 공 회당, 그것도 공회당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새겨진 부조들은 이곳 공회당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거기에는 모두 마법사와 마 법을 찬양하는 내용들뿐이었다. "두 공회당..... 전혀 달랐던 기억이 납니다. " "그래, 나도 네가 저 버려진 마을에 갔던 걸 알고 있었어. 그래, 거 기엔 달여왕 같은 건 새겨져 있지 않았지? 그리고 배경도 좀 다르지 않았니? 거기에 새겨진 풍경이 바로 가나폴리야. 상대적으로 몇 세대 지난 후 세워진 이곳 마을의 공회당 벽에는 어느새 이곳 섬의 모습만 이 새겨져 있지 않든?“ 제로의 설명이 이어졌다. 섭정의 조상이라는 그 배의 선장은 사람 들을 새로운 땅으로 데려갈 임무를 띠고 있긴 했지만 그리 대단한 마 법사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작은 관직을 내리는 데도 그 사람의 마 법 능력을 따지는 가나폴리의 관습을 생각할 때, 이런 이례적인 인사 는 어쩌면 처음부터 결정된 것이 아니라, 중도에 비행 대신 항해가 시 작되고 점차 마법의 힘이 약해졌을 즈음 다른 능력이 더 중시되어 뒤 바뀌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제로는 말했다. 어쩌면 본래의 지휘 자를 죽였을지도 모르고. 그리고 그런 식으로 얻은 지위를 도로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섭정이 된 그는 이곳에서 가나폴리의 전통과는 동떨어진 새로운 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다. 달여왕의 지배를 받는 순례자라는 개념, 본래 일곱 마법사의 의회였던 것이 여섯 사제 제도로 바꿔 것(공회당 바닥에 그려진 원은 지금도 일곱 개였다), 한때 산 제물까지도 바쳤다 는 잔인성, 학문과 마법보다 검을 숭앙하는 분위기, 책이며 기록 따위 를 멀리하고 찬트를 비롯한 마법적 전통들을 사장시킨 일, 그 모든 것 이 이러한 정치적 이해와 맞물려 조장되고 방조되었다. 위대한 마법 사들의 지배에 익숙하던 자들에게 서툰 마법을 보여 불신을 사기보다 는 정체 불명의 달여왕이라는 새로운 숭배 대상을 주고 그녀의 의지 를 불분명한 것으로 만든 일이야말로 그러한 계략의 핵심이었다. 가 나폴리의 이름은 '옛 왕국‘ 이 되고, 마법 왕국은 신성 왕국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현재 섬에서 쓰이는 마법은 몇 가지를 제외하면 대륙 에서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했다. 대륙에서도 약화되지 않는 것은 몇몇 섬사람들이 가나폴리의 자손답게 태생적으로 타고나는 몇 가지 신비한 능력들, 그리고 이솔렛의 찬트처럼 본래 가나폴리로부터 옮겨왔으되 '노래'와 같은 매개체가 있어 사라지지 않은 마법 전통들 뿐이었다. "이런 사실들을 언제부터 알고 계셨던 거죠? 왜 그걸 다른 사람들 에게 알리지 않는 겁니까? 아저씨의 말이 맞다면 섬사람들 모두는 섭 정들에게 대대로 속고 있는 것이잖아요? 이런 일들을 사제님들도 모 릅니까?“ 제로는 더러운 방석을 천천히 끌어당기며 낮고 어눌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제, 그래, 사제. 이 모든 것을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내가 아니 야. 사제였지. 누구보다도 많은 기록을 빠르게 독파하고,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검의 사제, 이제는 죽고 없는......“ 다프넨은 바로 깨달았다. 달리 누구를 생각할수 있겠는가. "일리오스 사제님..... 이란 말인가요?“ “그래, 일리오스.... 내 친구였지, 둘도 없는 죽마고우였지만 끝내는 갈라서고 말았고, 미처 화해하기도 전에 저 세상으로 가버린 그 몹쓸 친구가 맨 처음 내게 이 이야기를 했어." 제로가 일리오스의 절친한 친구였다는 이야기는 나우플리온으로부 터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둘이 반목하여 갈라섰다는 이 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심지어 다프넨은 제로 같은 사람이 누군가와 싸울 수 있다는 것조차 잘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혹시 지금 말하는 것과 같은 문제라면 자신의 의견을 끝내 굽히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끝내 그 때문에 죽었지." "뭐라고요?“ 당황하여 제로의 얼굴을 바라본 다프넨은 그의 얼굴에서 진실을 읽 고 움찔했다. 지금껏 일리오스는 저 괴물, 골모답이라는 이름을 가진 듯한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살해당한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물론 일리오스를 죽인 것은 저주스런 괴물이었다. 하지만 그 괴물 을 처치하기 위해 목숨을 버릴 것을 종용받게 된 것은 섭정이 일리오 스를 질시함과 동시에 그가 가나폴리의 옛 역사를 너무 많이 알게 된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지. 그래, 일리오스는 영리했지만, 영리한이 상으로 오만한 사람이었어.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숨 길 생각도 하지 않았지. 또한 자기 자신이 잘못된 지식에서 벗어난 이 상, 다른 사람들이 그런 족쇄를 깨닫거나 말거나 하는 것은 그에게 별 가치가 없는 일이었어. 그래, 차라리 그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를 기반 으로 해서 은밀히 차근차근 전파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결과는 아니었 을 텐데. 그는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섭정 앞에서 내킬 때마다 비아냥 대는 도구로 삼고 말았던 거야. 일리오스가 그랬던 것은 당시 최강의 검술과 학식을 가진 자로서 '그 누가 내게 대적하랴‘ 라는 방약무인한 자세의 탓도 있었지만, 이미 몇 번이나 보아온 섭정의 얕은 계략을 지독하게 싫어하고 일었기에 오히려 그런 식으로 대놓고 비웃지 않고 는 못 견뎠던 거지. 남보다 앞서 진실을 아는 능력이 있은들 무엇하겠 어. 스스로 일을 그르치는 걸 알면서도 결국 보기 싫은 건 한 순간도 참아 주지 못하고, 끝내 파국으로 달려가는 자신조차 멈추지 못하는 성격인 것을, 그 똑똑했던 자도 결국 현자는 아니었던 것이야." 일리오스 사제에 대한 오해가 한 겹씩 벗겨지면서 차츰 접한 그의 실제 모습은 실로 다면적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천재이자 자신을 희생한 사람이었으나 얼마 후에는 어린 딸과 함께 바닷가를 산책하고 솔방울을 선물하는 낭만적인 아버지, 그 다음엔 자신의 부탁을 거절 한 나우플리온에게 모욕당했다고 생각해 불같이 화를 내는 자존심 강 한 사람, 어린 나이에 실버스컬을 가져오고 아직껏 대륙 사람들까지 기억하는 실력을 보인 놀라운 사람,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감정을 억지로 감출 수 없는 사람이며 결국 현자는 아니었 던 자부심 강하고 냉소적인 성정의 인물이 그였다. 천재나 대학 자, 강한 검사이기 전에 자기 자신을 어쩌지 못하는 한 인간인 그의 일생은 왜 이렇게 안타까우며 착잡한가. 그가 전에 알았듯 완벽한 인간이었더라면 오히려 묵은 초상화처럼 아무 감동도 주지 못했을 터인데. "왜 그 분은 거절하지 않은 건가요? 섭정 각하가 죽으라 한다고 꼭 죽어야 되는 건 아니잖아요?괴 물을 꼭 해치워야만 했다면 왜 섭정 본 인은 나서지 않는 거죠? 왕이라면, 자기 백성들에게 닥친 위험을 막기 위해 스스로를 내던질 수도 있어야 된다고, 대륙의 책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 말에서 한 가지가 틀리지. 그는 왕이 아니야. 섭정일 뿐이지. 섭 정은 통치하지만, 왕국을 위해 죽을 책임까지는 없는 거야. 허허, 허 허허......“ 잠시 후 제로는 차분한 얼굴로 다프넨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얕은 계략을 잘 쓰는 섭정이 일리오스의 자존심을 일부러 건드렸 으리란 건 능히 짐작가지 않니? 일리오스는 모든 것을 알면서도 끝내 특유의 냉소적인 태도로 죽음을 자청하고 말았어. 그 때 섭정을 바라 보며 '좋습니다, 그럼 죽어드릴까요‘ 라고 말하던 녀석의 차가운 눈 빛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제로의 눈동자에 향수 비슷한 것이 어리는가 싶더니 어둠 속에서 짧은 탄식이 흘렀다. “태양, 태양이 끝내 달의 땅에서 버티지 못한 것이다. 어쩌면 처음 태어나 그런 이름이 붙여진 순간부터 그는 죽을 때까지 달여왕과 화 해하지 못할 운명이었던 것일지도 몰라. 달이 태양을 집어삼켰어. 옛 왕국, 가나폴리는 황금과 태양의 땅이었거늘, 그곳에서 태어났더라면 진실로 태양 같은 존재가 되었을 그인데... 이처럼 작은 땅은 천재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인지.....“ 다프넨은 가만히 등잔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창이 남김없이 닫힌 그곳에서 불꽃은 미동도 없이 천장을 향해 곧바르게 타오를 따 름이었다. 문득, 손을 휘둘러 그 불을 끄는 상상을 했다. 저렇듯 작은 불이니 견디지 못하겠지. 어떤 거대한, 이를테면 정말로 달여왕과 같 은 존재가 있어 인간의 생명을 끄고자 한다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라 한들 순식간이겠지. 달여왕은 존재하는 건가. 달은 분명 밤마다 둥글게 타오르고 이 섬 과 주변 해역에 영향을 미치기까지 한다. 우유부단한 자를 싫어하고 때로는 직설적으로, 때로는 은근한 방법으로 자신의 백성들을 다스린 다는 그녀는, 그녀 역시 저 대륙에 흩어진 여러 종교의 신들처럼 모습 을 드러내지 않는 숨은 신인가, "뒷일은 짐작이 가겠지? 일리오스가 죽고 나자 섭정은 자료를 보존 하겠다며 어린 이솔렛의 손에서 아버지의 유품들을 강제로 빼앗아 갔 어. 그런 다음 그것들을 샅샅이 뒤져서 자신의 통치에 불리할 만한 것 이 있으면 모조리 없애버리고 남은 것은 이 장서관에 대강 처박은 거 야. 맨 처음 네 손에 들어간 책의 뒷부분이 찢겨 있었던 건 그 책이 본 래 일리오스의 서재에 있었다는 의미일 거다. 네게 준 새 책은..... 실은 내가 일리오스와 갈라서기 전에 이미 필사해 둔 책이었지. 그건 분명 중요한 자료였으니까. " 다프넨은 시선을 돌려 제로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일리오스 사제님이 하시지 못한 일을 제로 아저씨께서 하세요. 사람들에게 천천히 진실을 전파시켜서 잘못을 하나씩 바로잡 는 겁니다. 아저씨는 돌아가신 그 분처럼 나만 잘 알고 있으면 그말 이라는 사람은 아니시잖아요. 아니,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신 건가요? 저한테 알려주신 것도.....“ "아니, 그렇지 않아. 내가 말한 건 너뿐이다. " "도대체 왜죠? 어째서 접니까? 왜 저뿐입니까?“ “너에게라도 말하는 것은 내가 일리오스가 아니기 때문, 너에게만 말하는 것 역시 내가 일리오스가 아니기 때문인 거겠지." "무슨 뜻이죠?“ 제로는 등잔 앞에서 두 손을 모아 오므리는 시늉을 했다. 마치 작은 불씨를 지키려는 사람처럼. "섬에서 나고 자란 자라면 이 이야기를 받아들이면서 세상이 두 조 각 나는 듯한 충격을 느낀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거야. 채 열 살도 되지 않은 이솔렛에게 무엇이든 읽게 내버려뒀던 일리오스조차도, 자 신이 알아낸 비밀이 담긴 몇 권의 책만은 내게 맡기고 그 애에게 주지 말라고 당부했지. 나 역시 처음에는 자꾸만 드러나는 거짓과 진실을 보며 갈피를 잡지 못했어. 그러나 대륙 출신인 너는 달라. 내가 아는 한, 섬에서 태어나 자라지 않은 순례자는 현재 너 하나뿐이다. 너만은 진실을 접했을 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 심리적인 저 항감으로 진실까지 가기도 전에 귀를 막아버릴 대부분의 순례자들과 는 달리. 그리고." 다프넨은 제로의 입에서 그가 최근 가장 피하고 싶은 이야기가 나 오는 것을 들었다. “너는 장차 이 섬의 사제, 검의 사제가 될 테니까." 다프넨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제로는 보지 못한 것처럼 말을 이었다. "들었으니 알겠지만 섬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음모나 범죄로 인식 되기보다는 궤변이나 헛소리로 들릴 거야. 이미 그들에게는 현재의 모습이 너무도 익숙하기에 마법 대신에 달여왕을 숭상하는 게 뭐 어 떠며, 학문 대신에 검을 추구하는 것이 뭐가 잘못췄느냐고, 그렇게 말 하겠지. 실은 나도 가끔은 혼란을 느낄 정도니까. 이게 뭐가 잘못되었 단 말인가, 시작이야 어찌됐든 지금 달여왕 아래에서 잘 살아가면 그 만이 아닌가, 하고 말이지. 물론 모두들 검만 휘두르려 하는 것에는 절대 찬성할 수 없지만 말야." 제로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나 다프넨은 제로가 하고자 하는 말 을 충분히 알 수가 있었다. 그것은 두려운 책임이었다. “너라면..... 일리오스가 하지 못한, 아니 하지 않은 일을 해낼 수 있 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내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을 사람도 사제, 그 가운데서도 검의 사제의 말이라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 이게 되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네가 일리오스처럼 실버스컬의 우승 자가 되는 것을 보았을 때는 더더욱.....“ 갖가지 생각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그는 오래 전 이솔렛이 일리오 스 사제와 섭정의 대립, 이솔렛 자신과 리리오페의 잠재적 대립에 대 해 말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이솔렛이 은둔하는 이유는 아버지 세대 의 전쟁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본래 싸움을 두려워하 지 않는 그녀가, 검의 사제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오히려 부딪치지 않는 것을 택했다. 그런데 제로는 지금 이솔렛이 가지 않은 길을 다프 넨에게 가라고 하는 것인가. 문득, 이솔렛은 정말로 이런 문제를 전혀 모르는 것일까 하는 생각 이 들었다. 알았다면 지금껏 가만히 있었을까.... 하지만 일리오스 사 제를 닮은 냉소적 성격을 생각하면 혹 그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할 이유만 충분하다면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것조차 서슴지 않을 그녀가, 고작 리리오페와 싸우고 싶지 않아서 은둔자를 자처할 리 없었다. 이솔렛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자신이 검의 사제가 되고 전면에 나서서 리리오페와 대립할 경우 섬사람들이 누구를 지지할 것 인지, 섬은 작고 닫힌 사회, 사람들에게 버림받으면 남는 것은 아버지 와 같은 강요된 희생뿐이리라. 만일 이솔렛이 지금 제로가 말한 것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해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위대했던 가나폴리의 후예들이 달의 섬에 정착 한 후 태어난 사람들 중 가장 빼어난 천재였다는 일리오스 사제에 대 한 기억 때문에 사람들은 이솔렛을 사랑했지만, 동시에 경계했다. 그 녀의 비범함은 섬사람들에게 주어진 축복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큰 위협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다프넨이 일리오스에 이어 두 번째 실버스컬을 섬으로 가져왔다 해 도 그를 일리오스와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천재라기보다는 정체 모를 능력을 지닌 이방인, 그 정도가 섬사람들이 다프넨을 보는 시각이었다. 따라서 이솔렛처럼 핏줄 때문이 아니라, 이번엔 외부로부 터 온 침입자라는 사실이 또 다른 불안감으로 이어질 것임에 틀림없었 다. 지금의 나우플리온은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음에도 불구하고 오히 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고 신뢰했다. 그것은 나우플리온이 다른 일에는 참견하지 않고 오직 검의 길만을 걷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다프넨은 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저는.... 그래요, 엄밀히 말해 아 직은 이방인입니다. 제가 그러고 싶어서라기보다는 그들이 저를 그렇 게 느끼고 있고, 저 역시 아직 완전히 융화되지는 못했다고 해야겠죠. 그래서일까요, 아직은 섬에 대해 그만큼의 책임감을 갖고 있지 못하 다는 것이 솔직한 말이 될 것 같습니다. 아직은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아요. 검의 사제 그것이 제게 예정된 자리인가, 하고 언젠가 혼란 스럽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그만한 명예를 짊어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 답이었습니다." “ 네가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라고 느끼는 거니?” 제로의 말씨는 나우플리온과도 다르고 데스포이나와도 달라서 꼭 또래 친구 같은 데가 있었다. 그런 말투가 오늘만은 이상하게도 불편 하게 들렸다. 결국은 생각하던 것을 입밖에 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떨쳐버릴 수가 없군요. 이 생각, 아저씨 당신께서는 자신 이 짚어질 수도 있는 책임의 범위를 최소한도로 축소해 버렸다는, 그 런 생각. 그게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실은 하고 싶지 않아서라고요. 무 엇이 답입니까?“ 제로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것은 힘든 질문이었기에 다프넨도 말없이 기다렸다. "그래, 아까 말한 대로야. 난 결국 일리오스가 아니기에 여기까지였 다고, 그렇게 생각해 왔지만 그것이야말로 자신에게 준 비겁한 면죄 부였을까? 나는 일리오스처럼 아예 무관심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불만스런 일을 직접 나서서 바꿀 만큼 대담하지도 못해." 제로는 고개를 들어 암흑 속에 쌓인 책들을 향해 눈길을 보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이런 부류일 뿐이야. 사실, 이 장서관도 나 혼자 만든 것이 아냐. 가나폴리의 장서관에 대한 기록을 발견하고 나서 일리오스와 의논했고,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같이 설계를 했지. 사실 설계 같은 것에는 일리오스가 훨씬 뛰어났고 나는 책을 분류하 거나 모으는 일을 주로 했어, 그러나 이곳이 반쯤 지어졌을 즈음 그와 나는 사이가 틀어졌고, 그는 자신이 이곳에 손대지 않은 걸로 하겠다 고 매정하게 말하더군. 자기가 도왔다는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도 말 라고 말이야. 그의 고집을 누가 꺾을 수 있겠어.... 내가 응하지 않는 다면 오히려 자신의 의견을 무시했다고 더 불같이 화를 낼 친구니까. 그 후로 나 혼자서 남은 일을 하는 데는 몇 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지. 장서관이 완성된 다음에도 많이 노력했기 때문에 책은 처음의 열 배 정도로 불어났고. 그렇게 만들어진 이런 곳... . 나는 여기를 지키고 돌 보고, 그런 다음 아마도 물려주겠지. 누군가한테 .... 누구에게 물려주 면 좋을까." 당연히 오이지스를 말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제로는 그에 대한 언급 없이 말을 이었다. “나 자신의 문제에 대해 생각한 지 이미 오래되었어. 일리오스가 살 아 있을 때 나는 그의 여러 가지 계획을 도우며 편안하고 즐거웠어. 이제 다시 그와 같은 누군가가 있다면 전처럼 힘을 다해 그를 돕고 싶 다고 늘 생각했지. 내가 원하는 진실의 전파.... 그런 건 나우플리온의 담백한 성미로는 도저히 하기 힘든 일이었기에, 아버지의 일로 마음 을 닫아버린 이솔렛은 많은 사람들의 견제를 피할 수 없었기에, 이방 인인 너를 보았을 때 일말의 희망을 걸어 보았어. 미안하구나, 미안 해. 하지만 내 희망은 여전히 너를 도와 진실을 알리는 거야. 네가 거 절한다고 하면 물론 그것으로 그만이겠지. 한 가지만 묻자. 다프넨 너 에게 부담스러운 것은 검의 사제라는 자리인 거니, 아니면 나와 함께 섭정들의 거짓말을 뒤엎는 거니? 전자였든 후자였든, 나는 널 이해할 거야. 말해 봐라." “......”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라 괴로웠다. 지금의 다프넨을 가장 괴롭히는 문제는 그러한 진실이나 책임이 아니라 다름 아닌 이솔렛, 그녀 한 사 람의 존재를 지우기 위한 노력, 그리고 매일같이 그것이 옳은 판단이 었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것이었다. 거기에 그가 가진 판단력을 다 소진해 버렸다. 미치도록 노력했지만 그도 남자였기에, 끝내 서글 플 정도로 이 고통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이해해 주시는 것은 고맙습니다만 이해하지 못하셔도 어쩔 수 없 다는 것을 저 자신이 더 잘 압니다. 왜냐면 저 역시 아저씨를 다 이해 하지 못하니까요. 오늘 듣게 된 이야기들은 대륙에서 나고 자란 저에 게도 정도가 약할지언정 작지 않은 충격이었죠. 그러나 또한 말씀하 신 대로 이방인으로 시작한 저이기에, 진실을 위해 이제부터 제 일생 을 바쳐야 하는지에 대해서 판단이 잘 서지 않습니다. 제가 버거워하 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저 아닌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 입니다. 지금으로선 자신 하나조차 추스르지 못하는 저이기에.... 정말 로, 저는 정말로 그런 모든 거짓이 타파된 뒤 이번엔 저의 주장이 저 과거의 섭정들이 꾸민 일처럼 사람들을 호도할까 무서우니까요. 제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제게 가장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스스 로 결정하기 전에는, 그 어떤 주장을 위해서든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렇게 말씀드립니다." 등잔이 꺼져가고 있었다. 기름이 다 떨어진 모양이었다 "알겠다." 꽤 무거운 침묵 끝에 제로가 입을 열었다. "음....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내일 스콜리 끝나고 나서 윗마을 가는 길목으로 잠시 오려무나. 이솔렛의 집 조금 지나서 눈측백나무 숲이 시작되는 그 입구의 바위 말이다. 그래 줄 수 있겠지?“ 장서관을 떠나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다프넨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쉽게 누를 수가 없었다. 밤늦게 나우플리온이 돌아왔을 때도 두 사람 은 대화 없이 눈인사만 주고받은 후 잠자리에 들었다. 캄캄한 천장을 올려다보며 소리 없이, 입술만으로 중얼거려보았다. 섬사람들이 그에게 원하는 것, 스스로가 원하는 것, 그리고 원해서는 안 되는 것. 그 가운데 서서 어떤 것도 택할 수 없는 자신. 원치 않아 달아날 것이라면, 이번에는 어디로 갈 것인가. 3. 마법 왕국의 그림자 "아아, 다프넨, 오랜만인데." 스콜리로 올라가던 도중 누군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멈춰 돌아보았 다. 뜻밖에도 근처 바위 위에 검을 짚은 채로 혼자 걸터앉아 있는 사 람은 헥토르였다. 침묵섬에 배치되는 수비대에 자원했다는 이야기만 들었는데 어느새 돌아와 있는 것인지 몰랐다. "볼일이라도?“ "아니, 없어. 그냥 반가워서 불러본 것뿐이야. 가보라고." 흙빛 리벳(Rivet)이 박힌 가죽 조끼와 단검이 꽂힌 두툼한 벨트, 낡 은 장갑을 낀 채 손질되지 않은 머리를 대강 넘기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는데 문득 이상스런 기분이 들었다. 헥토르와 자신 사이에 있었던 사건들은 모두 몇 백 년 전에 일어나 이미 다 잊혀져버린 일이며 그와 자신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서로를 대하고 있다는.... 출처 모 를 감정이 그것이었다. 헥토르는 섬의 소년답게 자랐고 당연한 듯 섬의 어른들을 닮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은 뚝 떨어진 곳에 잘못 심어진 풀처럼 영영 분리 된 존재이리라는 생각이 머리를 사로잡았다. 실버스컬에서 그들은 대결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대결하지 못할 것이었다. 둘의 길은 이미 한 번 교차되었고 이제 더 이상 부딪 치지 않는 방향으로 각각 흐르기 시작했다. .....이 또한 그가 지닌 예지의 일부인가. "그럼 이만." 고개를 돌렸다. 등뒤에서 헥토르가 가볍게 미소지었으리라는 기분 이 들었다. 예지력이 극도로 민감해진 이 순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 었다. 그는 왜 미소짓는가. 정말로 모든 것이 끝났단 말인가. 어떤 결말도 없었는데, 또는 다프넨이 알지 못하는 사건이 일어나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단 말인가. 다프넨은 스콜리로 올라갔다. 얼마 전부터 자신을 대하는 아이들의 태도가 묘하다는 것을 눈치채 고 있었다. 맨 처음 스콜리에 입학했을 때 멸시와 따돌림의 대상이었 던 다프넨은 몇 가지 사건이 일어난 뒤로 단순한 고립자가 되었고, 대륙에서 실버스컬을 가져온 후로는 명백한 두려움의 대상으로 변했 다. 그 정도는 어느 정도 짐작했던 일이기도 했다. 남자아이들은 확실 히 다프넨을 피했고, 만약 말을 걸 일이라도 있으면 몹시 조심스럽게 대했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소녀들의 태도였다. 예전에 스콜리의 소녀들과 그는 소 닭 보듯 하는 사이로서 서로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지내 왔었다. 그런데 그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것이 실버스컬을 획득한 소년에 대한 일종의 동경이나 호기심이 라면 그냥 그럴 수도 있다고 느끼겠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다프넨은 며칠 동안 생각한 끝에 그 태도의 정체를 알아냈다. 그것은 다름 아 닌, 벨노어 저택의 하인들이 보여주던 바로 그 태도였다. 다프넨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벨노어 저택에 있던 당시 그는 난 데없이 백작의 양자랍시고 나타나 최고의 대접을 받는 낯선 소년으로 서 하인이나 하녀들의 입장에서는 소홀히 대할 수도 없되 아첨하며 달라붙기에는 좀 애매한 존재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들과 다를 바 없는 학생일 뿐인 것이다. 그 날 점심 식사가 끝난 후 어쩌다 보니 조금 늦게 교실에 돌아갔던 그는 기묘한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가 교실 안으로 들어서니, 모든 아이들이 자리에 앉지 않고 벌이라도 서는 것처럼 테이블 주위 에 빙 둘러서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침 제네시 선생도 조금 늦고 있었다. 다프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그들처럼 그러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적당 한 자리를 잡아 앉았다. 그와 동시에 슬금슬금 앉기 시작한 아이들은 모두 그로부터 일정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자리를 잡는 것이 아닌가? 이 정도로 피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 조금 불쾌해졌을 즈음, 누군가 가 그의 옆에 놓인 의자를 끌어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다름 아닌 리리 오페였다. "좀 늦었네?“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목소리였지만, 그 순간 다프넨은 교실 안의 다른 누구도 그녀보다 먼저 입을 열 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 금씩, 아이들이 저들끼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제네시 선생이 들어오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기분이 이상해진 다프넨은 약간 멍해진 상태로 강의를 듣고 있었 다. 제네시 선생은 옛 왕국으로부터 내려온 어떤 서사시에 대해서 말 하기 시작했는데 아이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을 우려해서 쉬운 옛이야 기로 풀어서 얘기해주었다. ‘바느질하는 엘비라' 라는 제목의 그것은 어떤 아름다운 아가씨를 사랑한 젊은이의 이야기였다. 몇 년 동안 여러 지역을 여행하던 젊은 이는 어느 날 시골 마을 어귀에 이르러 작은 집의 창을 들여다보았다 가 그 안에 앉은 아가씨의 바느질하는 모습에 반하고 말았다. 그 후로 그는 마을을 떠나지 못한 채 날마다 같은 시각에 같은 자리로 와서 그 녀를 지켜보게 되었다. 아가씨는 늘 그 시간에 창가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지만 곧 가까이 가서 말을 걸 어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젊은이는 용기를 내어 그녀의 집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부름에 응하여 나온 것은 한 추한 사내였다. 그가 아가씨의 남편이라고 생각한 젊은이는 한 마디 말도 못한 채 도 망쳐 마을을 떠났다. 그러나 석 달만에 도저히 자신의 감정을 누르지 못해 다시 한 번 마을로 돌아왔고 그 집을 찾아갔다. "젊은이는 여러 번 심호흡을 하고서 용기를 내어 문을 두드렸어. 만 일 이번에라도 아가씨가 나와 준다면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뒤 미련 없이 먼 곳으로 떠나겠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젊은이의 그런 바람도 헛되어 집에서 나온 것은 또다시 추한 사내였던 거야." “너무하다.... 정말로 아가씨는 그 남자의 아내였어요?” "아니, 그렇지 않았어." "잘됐다! 그럼 여동생이었나요?“ 제네시 선생은 한 소녀의 질문에 그냥 미소지어 보인 뒤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번에야말로 돌아설 수 없었던 젊은이는 그 남자의 손에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아가씨에 대한 감정을 밝히고 그녀로부터 단 한 마 디 말만 들을 수 있으면 다시는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사정했 어. 그런데 놀랍게도 추한 남자는 젊은이를 때리거나 내쫓지 않고 그 냥 서글픈 듯한 웃음만을 지었던 거야. 그리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 했지 ." 다프넨은 머릿속에서 어떤 인상이 서서히 구체화되는 것을 느꼈다. 건성으로 듣고 있던 이야기가 그의 기억과 겹쳐지고 있었다. "젊은이는 집 안에서 여전히 바느질하고 있는 아가씨를 보고 그녀 앞으로 다가갔어. 가까이서 보니 멀리서 보던 것보다 더 아름다웠기 에 젊은이는 거의 숨이 멎을 지경이었지. 그래서 그녀 앞에 무릎을 꿇 고 자신의 감정을 몇 마디 말했어." 당신의 하얀 손가락이 붉은 실로 겉단과 안단을 붙여 잇는 동안 내 마음조차 그대에게 이어버린 걸 아오? 신의 고운 손가락이 은빛 바늘을 솔기와 시접에 찔러 넣는 동안 내 마음조차 잔인하게 찔러버린 걸 아오? “와아......” 한 소녀가 감동하여 두 손을 꼭 겹쳐 쥐었다. 섬사람이라 해서 날 때부터 시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옆에서 리리오페가 가소 롭다는 듯 나지막이 코웃음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아가씨는 아무 대답도 없었지. 그녀는 고개도 들지 않고 계 속해서 바느질만 할 뿐이었어. 젊은이가 몇 번이고 다시 그녀를 불러 도 소용이 없었고 말이야. 끝내 젊은이는 눈물이 글썽해져서 추한 남 자를 바라보았지. 그런데 그 남자 역시 단지 한숨을 내쉴 따름이었어. 그녀가 귀머거리인가, 또는 벙어리인가? 추한 남자는 고개를 젓고 아 가씨를 향해 이렇게 말했어. '엘비라, 이제 그만‘, 그러자 아가씨가 바 느질하던 손을 딱 멈추는 것이 아니겠어?“ 그 순간 다프넨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그녀는 인형이었군요. 평생 바느질만 하도록 설계된 마법 인형.....“ 제네시 선생은 깜짝 놀라 다프넨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았지? 책을 읽은 건가?“ 책을 읽은 것은 사실이었다. 벨노어 백작의 성에 있을 때 읽은 책에 나온 가나폴리의 인형들에 대한 이야기, 그 가운데 바느질하는 인형 을 사랑한 젊은이의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사람과 똑같게 생 겼으나 처음 만들어질 때 마법사가 준 임무만을 부서질 때까지 되풀 이한다는 마법의 인형들. 다프넨은 저도 모르게 대륙에 있을 때 읽었다고 말할 뻔했다가 아 슬아슬하게 말을 삼켰다. 섬사람들에게 옛 왕국은 대륙이 아닌 어딘 지 모를 곳에 존재했던 곳인데 대륙에 그에 대한 책이 존재할 리가 없 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주저하는 동안 스스로의 태도에 대해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예, 장서관에서.... 읽었어요." 잠시 후 수업은 끝이 났다. 숙였던 고개를 들고 보니 다른 수업을 들었던 오이지스가 어느새 들어와 앉아 있었다. "뭐 생각해? 스콜리 파한 다음에 나랑 장서관에 같이 안 갈래?“ 다프넨은 오이지스를 보며 이 아이만은 다른 아이들처럼 자신을 어 려워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 리리오페는 이미 자리를 뜬 후 였다. 그러나 그녀가 예전에 헥토르가 그랬듯 스콜리의 분위기를 한 손에 휘어잡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그것은 헥토르와는 좀 다른 종류의 권위였다. 헥토르가 그를 따르 는 소년들을 중심으로 한 폭력적 힘의 구심점었다면, 리리오페는 마 치 여왕인 양 주로 여자아이들에게 군림했다. 헥토르가 있을 당시 그 의 표정을 살피다가 오이지스와 같은 아이를 때릴 때 손쉽게 분위기 에 편승하여 난투극을 벌이던 아이들은, 이제 리리오페의 변덕스런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최대한 얌전한 아이들로 변모해 있었다. 그들이 심지어 리리오페와 다프넨 자신을 묶어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순간, 그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아이들 이었든 리리오페였든 한꺼번에 무시해버려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 다. 이런 웃기는 꼭두각시놀음에서 심지어 신랑 노릇을 하라는 것인가. 복잡한 생각에 잠긴 다프넨이 선뜻 대답하지 않자 오이지스는 약간 조르듯이 말했다. "으응, 오랫동안 가지 않았잖아. 아저씨도 다프넨을 보면 기뻐할 거 라고. 응? 같이 가자. 나 빌린 책도 돌려드려야 돼." 그제야 어제 제로 아저씨와 한 약속이 생각났다. 다프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같이 가긴 가겠는데, 나 스콜리 끝나고 잠시 가볼 데가 있으니까 한 시간쯤 있다가 어떨까? 먼저 가서 기다리고 일어도 좋고." "먼저 가면.... 응, 그래. 먼저 가서 책 읽고 있을 테니까 금방 오면 되겠다. 거기에서라면 몇 시간쯤 기다려도 지루하지 않거든. 걱정말 고 갔다와" 다프넨이 처음 섬에 들어온 후로 벌써 2년여의 시간이 흘러갔다. 그 사이 어느새 작은 어른이 된 헥토르, 섭정의 딸이라는 지위를 교활 하게 이용할 줄 알게 된 리리오페와는 달리 오이지스는 시간이 지나 도 도무지 자라지 않는 것 같은 아이였다. 그렇게 말하며 씩 웃는 오 이지스를 보던 다프넨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져서 불쑥 이렇게 말했다. "오이지스, 언젠가 너는 제로 아저씨의 일을 이어받게 되겠지? 그 때 가 되어서 네가 나한테 책을 골라줄 생각을 하니까 어쩐지 재미있다." 그런데 오이지스는 약간 당황한 것 같았다. "아니.... 뭐 그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거야....... 나는 아직도 제 로 아저씨에 비하면 읽은 책도 턱없이 적고..... 그냥...... 책은 좋아하지 만 그것만으로는......“ “무슨 소리야. 섬 안에서 너말고 누가 제로 아저씨의 일을 대신할 수 있겠어. 아저씨도 너를 가장 좋아하시잖아." 한참만에 오이지스는 조그맣게 대꾸해 왔다. "그렇게 된다면 물론 좋겠지만 ......“ 그게 전부였다. 다프넨은 미소지었다. 오이지스는 단지 자신감이 부족한 것뿐이었다. 그것뿐이라면 나이가 드는 동안 서서히 고쳐질 수 있을 테니까, 자신 역시 도와줄 수 있다면 도와줄 것이고..... 오이지스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 왔지만, 지금처럼 진지하게 돌봐주 고 싶다는 기분이 든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아니, 오이지스뿐 아 니라 다프넨이 누군가를 그런 눈으로 바라본 일은 지금껏 한 번도 없 었다. 자신조차도 추스르지 못해, 자신에게 닥친 싸움에서 수십 번 패 해 쓰러지는 동안 그를 먼저 사랑해 주었던 사람들을 사랑할망정, 그 에게 준 것이 없는 사람들을 먼저 보듬어 주려 한 일은 없었다. 그가 사랑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는 항상 동생이었다. 그러나 예프넨, 또는 나우플리온이 그를 보며 느꼈을 법한 감정은 그에게도 있었다. 이젠 그런 것이 찾아올 나이가 되었다. 그런 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감정인 것일까. 이솔렛을 잊기로 결 심하면서부터 시작된 마음 속의 담금질, 그의 곁에서 스러졌고, 또 스 러져 갈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 벗을 수 없는 무거운 짐, 그 모든 것 에 시달리는 가운데에서도 일어나는 또 다른 변화. 스콜리를 나와 오이지스와 헤어진 다프넨은 눈측백나무 숲이 있는 산비탈까지 천천히 올라갔다. 싸한향이 벌써부터 풍기기 시작했다. 눈측백 숲은 능선 입구에서 부터 드문드문 무리를 이루다가 북쪽으로 꺾인 골짜기를 가득 메우며 자랐다. 그 골짜기를 따라 죽 내려가다 보면 윗마을로 가는 비탈길이 다시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은 그곳까지 갈 필요가 없었 다. 골짜기의 윤곽이 다 드러나기도 전에 먼저 온 제로가 기다리고 있 는 모습이 보였다. "왔구나. 이리로 오렴." 늘 장서관에서만 만났기에 오늘처럼 밖에서 보는 제로의 모습은 약 간 낯선 느낌이었다. 그를 따라 골짜기 안쪽으로 들어가다가 다시 윗 길로 이어지는 비탈로 오르지 않고 비죽비죽한 바위들로 메워진 바닥 까지 내려갔다. 바위 그늘 으슥한 곳에는 아직도 눈 자국이 조금 남아 있었다. 잡목 들을 헤치고 더 깊이 들어갔다. 여러 가지 모양을 하고 있는 둥글거나 모진 회색 돌의 뜰을 지나자 산의 일부인 화강암 절벽 아래에 납작한 돌들이 눕혀 놓은 책처럼 차곡차곡 쌓인 곳이 있었다. 그 곁에 문설주 인 양 우뚝 선 두 개의 돌이 보이고, 더 안쪽으로 누군가가 다듬어 놓 은 듯한 반질반질한 돌벽이 있고, 돌벽 오른쪽으로 어둠침침한 좁은 샛길이 비밀스런 입구인 양 두 번 굽어지며 뻗은 것이 보인다..... 오이지스는 제로에게 돌려줄 책을 옆구리에 낀 채 장서관으로 이르 는 비탈길을 오르고 있었다. 어제 밤늦게까지 읽었던 책 내용을 생각 하다가 제풀에 즐거워져서 싱글거리기도 하고, 제로 아저씨가 전에 권해준 책들 중에서 이번엔 어떤 것을 빌릴까 고민해보기도 하고, 그 렇게 느긋한 기분으로 걷고 있었다. 어제 읽은 책은 옛 왕국의 영웅에 관한 이야기였다. 오늘 제네시 선 생이 얘기해 준 바느질하는 ‘엘비라'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서사시였 는데 오이지스는 이런 종류의 책을 유난히 좋아했다. 제로에게 '시로 된 책 또 없어요?‘ 라고 물을 정도로, 그리고 그렇게 읽은 시들의 일부 분을 종종 외우고 다닐 정도로 그렇게 좋아했다. 실은 다른 사람들 몰래 자기도 그런 것을 써 보기도 했지만 아직 마 음에 들지 않아서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못했다. 오이지스는 옛 왕국 에 '음유시인' 이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걸 제로에게 들어 알고 있었고 자신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꽤 자주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실 제로 자질이 전혀 없지도 않았다. 풀잎 노닐어 푸른 그늘 물길 노을져 그린 그림 닳은 장화 끌며 다가간 샘터 흑발 처녀 앉아 뿔피리 부네 마음에 들었던 곳인데 뒷분이 잘 생각나지 않자 오이지스는 걸으 면서 책을 펼쳐 들었다. 책은 크고 무거웠으므로 조심스레 두 손으로 받쳐들었다. 뒤적거리다 보니 또 마음에 들었던 곳이 보였고, 저도 모 르게 그곳부터 읽어나가며 책장을 히 넘기다가 그만 비틀비틀, 발 이 꼬이고 말았다. 쿵! 엉덩방아를 찧는 순간 손에서 놓친 책이 데굴데굴, 언덕 아래로 굴 러가고 말았다. 크게 당황한 오이지스는 아픈 것도 모르고 벌떡 일어 나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우뚝 멈추어 섰다. "길에서 책조가리나 읽다가 자빠지고 여전히 웃긴 놈이라니까." "어이, 땅다람쥐. 도토리 가지러 왔니?“ 오이지스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에키온은 보이지 않았지만 다섯 명 이나 되는 소년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떨어진 책을 둘러싸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헥토르가 졸업하고 나서 아이들의 괴롭힘은 많이 줄어들었고, 더구 나 다프넨의 존재가 부각된 후로는 비교적 걱정 없이 지낼 수 있게 된 터라 방심하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갑자기 늑대굴로 떨어진 형국이었 다. 그들은 웃지도 않고 어깨만 으쓱댔고, 그 중 몇 명이 발을 내밀어 책 모서리를 툭툭 걷어찼다 예전이었다면 당장 무릎이라도 꿇고 빌었겠지만 다프넨과 함께 다 니는 동안 조금은 달라진 오이지스였다. 그는 주춤거리면서도 입을 열어 똑똑히 말했다. “내 책 돌려줘." "가져가," 간단한 답이었다. 그들 가운데 예전에 에키온과 함께 다니던 아이 들의 얼굴이 여럿 보였다. 헥토르와 함께 실버스컬 대회에도 나갔던 리코스, 다리가 길어 발길질이 사나운 피쿠스, 별 힘은 없지만 잔인한 일을 잘 생각해 내는 갈레. "알았...... 어." “네 책이잖아? 책 따위 우리가 알 바 아니라고." 오이지스는 그들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다섯 명의 소년들은 발 끝만 땅에 대고 돌리거나 양손을 비비거나 하며 오이지스가 다가오기 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걸음을 떼어놓는 동안 이상할 정도로 강한 불안감이 자꾸만 발뒤꿈치를 붙들었다. 그러나 오이지스는 마음을 다잡았다. 나쁜 일 이라고 해봐야 기껏해야 몇 대 얻어맞는 정도밖에는 없을 거라고, 또 이번에도 무서워 빌거나 도망친다면 다시는 자존심을 되찾을 수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 걸음을 옮겨놓았다. 그들 앞으로 가 멈춰 설 때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오이지 스는 허리를 굽혔고, 책을 손에 집었다. 땅바닥에 구른 데다 소년들의 발에 채여 상한 표지를 안타깝게 생각하며 가능한 한 깨끗하게 손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잠시 그는 조금 전에 느낀 불안감을 잊 고 있었다. 퍼억! 옆구리의 통증을 제대로 느낄 사이도 없었다. 다른 발이 그의 관자 놀이를 강타했고,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과 동시에 뺨을 타고 뭔가 주 르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퍽! 턱! 퍼퍽! 아무 말도 없었다. 때리는 소년도, 맞는 소년도, 모두 입을 꾹 다문 채였다. 다섯 소년들의 얼굴에 조롱이나 장난기 같은 것은 없었다. 리 코스는 흡사 분노를 참는 것처럼 입술을 짓씹었고, 갈레의 얼굴에서 도 평소의 비꼬는 듯한 미소는 나타나 있지 않았다. 오랫동안 오이지 스를 괴롭혀 왔지만 이 정도로 잔인하게 때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두 팔로 책을 꼭 감싸안은 채, 쥐어뜯긴 풀조각과 흙덩 이 사이로 온 몸이 짓이겨지는 동안 오이지스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 은 정체 불명의 빛 같은 것이었다. 아픈 것보다도 그 빛이 서서히 사 그라져 간다는 것이 더 두려웠다. 저 빛은 뭐지? 저항하지 못하는 몸 에 전류처럼 아프게 흐르는 이것들은 다 뭐지? 모든 것이 폭죽처럼 터지고 있어..... 갑자기 발길질이 느려졌다. 한 명이 머리 위에서 말했다. "친구 대신 맞으니까 기분 째지지? 아주 달콤하지?“ 갑자기 모든 소년이 저마다 한 마디씩 외치기 시작했다. "실버스컬 우승이 무슨 말라비틀어진 거냐! 놈은 대륙에서 온 쓰레 기일 뿐이야!" “뜨내기 외지인 따위를 믿을 수는 없어..... 그런 놈한테는 아무 것도 못 줘. 절대로." "검 없이도 녀석이 우리한테 당할 것 같냐고, 꼭 그렇게 전해줘라, 알았어?“ "돌아가서 네 몸의 상처를 자세히 보여주는 거야..... 어떻게 맞았는 지 남김없이 얘기하라고. 우리는 아무 것도 겁나지 않으니까 열 받으 면 당장 덤벼보라고 그래!" 그들의 목소리에 승리감 따위는 없었다. 그동안 억눌렸던 감정을 토하듯 그렇게 사납게 소리쳤을 따름이었다. 오이지스는 서서히 정신 을 차렸다. 머릿속에서 깜빡거리며 꺼질 듯하던 빛이 다시 확 밝아졌 다. 단말마의 외침처럼, 그렇게 환해졌다. “너희는.... 너희는.... 직접 나설 줄 모르는 겁쟁이들이고.....” 오이지스가 비척거리며 더듬더듬 단어를 뱉는 동안 소년들은 어이 가 없다는 듯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뭐라고?“ "지금 저 자식이 뭐랬냐?“ 드디어 똑바로 일어섰다.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됐지만 가슴에는 여 전히 책을 껴안은 채였다. "너희가 나를 때릴 수는 있지만.... 그, 그래, 맘껏 때릴 수는 있지 만.... 하지만 절대로, 나, 나를, 굴복시킬 수는 없어......“ 오이지스는 언젠가 다프넨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생각해 내고 있었 다. 대륙에서 다프넨의 친구였던 어떤 소년이 했다던 말, 이제야 겨우 생각이 났다. 언제고 이런 때, 꼭 해주고 싶었던 그 말이었다. "왜냐면.... 왜냐면 난 자유로운 마음을 갖고 있으니까!" 그 말과 동시에 오이지스는 몸을 수그리며 정면에 서 있던 피쿠스 의 배를 향해 힘껏 박치기를 했다. 그리고 피쿠스가 넘어지는 순간 남 은 힘을 모아 단숨에 앞으로 달려나갔다. 소년들은 순간적으로 넋 나간 듯 눈을 깜빡거렸다. 오이지스가 자 기들의 손에서 달아나리라고는, 그것도 심지어 저링듯 누군가를 공격 하며 뛰어나가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한 대만 때려도 떨면서 주저앉아 방어조차 할 줄 모르던 녀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년들이 마음을 다잡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야, 쫓아가!" “가서 죽여버려!" 그들은 너무 오랫동안 오이지스를 무시하고 얕보아 왔기에 오이지 스가 무슨 옳은 말을 한다 해도 쉽사리 수긍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니지 못했다. 다쳐서 비틀거리는 녀석 정도 붙잡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 고 생각한 그들은 대뜸 뛰어 뒤쫓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이지스는 뛰었다. 자신이 평생 이보다 더 죽을힘을 다해 뛴 일이 있었던가 생각될 정 도로, 그렇게 달려나갔다. 오래 전에 다프넨이 헥토르와 결투하기 위 해 윗마을로 갔다는 사실을 엿듣고서 에키온에게 쫓길 때는 단지 공 포에 사로잡혀 있었을뿐, 지금처럼 무엇이 어떻게 되어야만 한다는 확고한 의지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얼마나 빨리 달리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한 번도 지금처럼 자신감에 사로잡혀 달린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한 오이지스의 다리는 꽤 빨 랐다. 예전의 에키온 같았으면 벌써 따돌리고도 남았을 정도로. 그러나 뒤따라오는 것은 다리도 길고 체력도 튼튼한 소년들이었다. 다만 그런 그들도 오이지스를 생각보다 빨리 잡지 못해 당황하고 있었다.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의 의지에 반하여 달아나는 것이 이토록 상쾌 할 줄은 몰랐다. 자신은 저들의 장난감도 아니었고, 심지어 그들을 곯 려줄 수도 있는 똑같은 한 소년이었다. 온 몸의 타박상이 주는 고통조 차 잠시 동안 느껴지지 않았다. 오이지스는 달리고 달려서 장서관이 있는 곳까지 갔다. 본래 목적지이기도 했지만 그곳에 가면 제로 아저씨가 있을 터였 다. 이런 시간에 장서관을 비울 리가 없으니까, 아저씨라면 충분히 저 녀석들을 쫓아 주고도 남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이지스 자신은 저 들의 계획을 어그러뜨린 셈이 되는 거였다. 앞으로도, 할 수 있는 한 늘 그렇게 할 것이었다. 문을 두드릴 새도 없었다. 와락 밀치고 들어가려 하는데 문이 열리 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밀었지만 단지 덜컹거릴 뿐이었다. 잠겼나? "아저씨! 제로 아저씨!" 시간이 별로 없었다. 소년들은 바로 언덕바지 아래까지 쫓아와 있 었다. 다급해진 오이지스는 두 손으로 문을 쾅쾅 두드렸다. "아저씨! 저예요! 오이지스예요! 문 좀 열어 주세요! 빨리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바위틈 사잇길을 따라, 부서진 돌쩌귀를 지나쳐 다다른 그곳은 어 둡지도 않았고 습하지도 않았다. 갑자기 눈이 아플 정도로 밝은 햇살 이 쏟아져 내렸고, 눈앞에 신기루처럼 나타난 곳은 푸른 이끼와 키 큰 풀로 뒤덮인 둥그스름한 공터였다. 사방을 가로막은 절벽들은 묵은 나무의 줄기처럼 메마른 껍질로 뒤 덮여 있었다. 초록빛 지의류 풀들이 오밀조밀 절벽을 채색했고, 하늘 을 향해 몇 백 미터나 뻗어 오른 절벽의 주름이 꼭대기에 이르러 텅 빈 통나무의 끝처럼 불규칙한 균열을 일으킨 그곳, 새파랗게 드러난 천장 한쪽에 남중하는 태양이 하얗게 번쩍거리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곳에 백여 개나 늘어선 것은 낡은 비석들이었다. 허물어진 것도 있었고, 변색된 것도 있었으며, 여러 사람을 합장한 듯 많은 글 자가 새겨진 큰 비석도 있었다. 녹색 풀들이 제멋대로 자라 작고 흰 꽃을 피우는 시간.... 인간이 방 문하지 않는 동안에도 이곳의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숨겨진 정원, 섬 의 비밀, 저 절벽 모퉁이마다 피어오른 익숙한 꽃대는 그들에게 주어 진 시간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같았음을 말했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것은 데스포이나 사제의 목소리였다. 네 눈 밖에서도 엄연히 시간이 흘러갔음을 생각하거라. 그의 세계 밖에서 흐른 시간이었다. 그가 보지 못한 섬의 모습이었 다. 산이 감췄던 과거의 땅이었다. 절벽 귀퉁이마다 깨끗하게 빛나는 부서진 돌들처럼 이 시대에 남은 옛 땅의 파편이었다. 다프넨은 조금 후 나직이 물었다. "누구의.... 어떤 사람들의 무덤인가요?“ 제로는 먼저 비석들 사이로 걸어가 한 곳에 멈추더니 다프넨을 향 해 손짓했다. 다프넨은 다가가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들여다보았다. 가나폴리의 문자로 새겨진 글귀는 읽을 수 없었지만 작대기 모양으로 그어져 표시된 숫자들만은 읽을 수 있었다. "엑소더스(Exodus) 32년.... 12월.....“ 다프넨도 알 수 있었다. 여기에 묻힌 사람들은 가나폴리를 떠나 섬 에 도착할 수 있었던 단 한 척의 배에 탔던 사람들이리라. 그리고 그 들은 자신들이 도착한 때로부터 새로이 날짜를 세기 시작했겠지. 그러나 어느새 섬사람들은 스스로 만든 새 연도를 망각했으며, 그 렇다고 가나폴리로부터 쌓인 몇 천 년의 세월을 기록하지도 않은 채 지금은 대륙과 다를 바 없는 달력을 쓰고 있었다. 제로가 입을 열어 비석에 새겨진 글을 조금 해석해 주었다. "모든 꽃이 땅 속에 묻힌.... 겨울의 그림자 거울.... 먼저 떠나 옛 선 조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미안할 따름.....“ 제로는 다프넨을 향해 몸을 돌렸다. "오래 전에 비석에 쓰인 글들을 전부 읽어보았지, 그들은 죽음 뒤에 는 위대한 선조들과 함께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기뻐했고, 도리 어 남겨두고 가는 사람들을 걱정하고 있었어. 이들은 정말로 가나폴 리의 혼들과 함께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까?“ 다프넨은 수많은 크고 작은 비석들을 내려다보며 설명하기 힘든 기 분에 사로잡혔다. 당연히 그는 엔디미온을 비롯한 유령 소년들을 떠 올리고 있었다. 아직도 자신은 그들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혹시 이 가운데 그들의 무덤이 있는 것은 아닐까? “비석들에는 죽은 사람의 이름도 쓰여져 있나요?” "알아볼 수 없게 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쓰여 있지. 여기 쓰여진 것은.... 라브도스라는 이름이군. '지팡이‘ 라는 뜻이지." "예전에 다 읽어보셨다고 하셨죠? 혹시... '엔디미온‘이라는 이름 은 없었습니까?“ "엔디미온....이라고?“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무덤들 사이를 죽 돌아다녔지만 글자를 알아볼 수 있는 비석들 중 엔디미온이라고 쓰여 진 것은 없었다. 마지막 비석까지 다 살펴본 뒤 제로는 다프넨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왜 그런 이름을 찾는 거니?“ 다프넨은 고개를 저었다. 몇 마디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도 복잡한 문제였다. 또한 상대방이 믿어줄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보다.... 왜 저를 이곳으로 데려오신 건가요?“ "글쎄, 그것보다 여기를 보니까 무슨 기분이 드니?“ 다프넨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누군가가 숨겨둔 옛날 일기장을 보는 기분이랄까요." 제로는 고개를 숙여 땅을 내려다보며 웃음소리를 냈다. 기분 탓인 지 허탈한 웃음처럼 들리기도 했다. “네 말이 맞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도 그거였어. 죽어버린 가나 폴리의, 석화 되어버린 시체랄까. 사람이 아니라 문명이 묻혔어. 이 모든 것이 이제는 우리 손에는 있지 아니한 아름다움이나 위대함의 파편들이야. 이곳에 일리오스와 함께 왔었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 라온 우리가 아직 친구였을 때, 그는 나보다 먼저 비문들을 읽었고 섬 의 미래에 대해 젊은이다운 대화를 나누곤 했지. 그러나 이제 친구는 없고 남은 것은 과거의 묘지뿐.... 다프넨, 네가 믿지 않을 지 모르겠 지만 이곳에는 가끔 유령들이 떠돈단다. " 다프넨은 가슴 속에서 뭔가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되물었다. "유령 이라고요?“ "믿고 싶지 않다면 그냥 내 꿈 이야기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어. 하지 만 난.... 너도 알다시피 나는 낮 동안 보통 장서관을 지키고 있지. 그 러다가 밤이 되면 가끔 이곳으로 와서 죽은 문명의 향기를 조금이라 도 느껴보려고 미친 사람처럼 거닐곤 했어. 어떤 날은 밤새워 비석들 을 붙들고 하고 싶던 말을 털어놓기도 하고, 부서진 돌 한 개를 들고 몇 시간이나 생각에 잠기기도 했지. 왜 내가 이제야 태어나 문명이 사 그라져버린 시든 땅에 갇혀 괴로워하는지, 이미 죽은자들을 부러워 하면서 동시에 원망하고, 그들의 혼이 마법 왕국의 위대한 영혼과 같 이 지내고 있는지 알고 싶어하고, 정말로 그렇다면 목숨을 끊는 한이 있어도 그리로 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열에 들떠 새벽을 맞기도 하 고....“ 이 세상에 겉모습이 전부인 사람은 없었다. 만사에 초탈한 듯, 온화 하고 침착하게만 보였던 제로 역시 잡을 수 없는 헛된 희망에 마음을 빼앗겨 방황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도 좋다고 생각 하는 미친 열망을 품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다르겠는가. 완벽한 천재 인 줄로만 알았던 일리오스는 스스로의 자존심이 세운 칼날로 끝내 자신을 찔러버린 어긋난 성품의 소유자였고,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감싸주기만 할 것 같던 데스포이나 역시 젊은 시절에는 자신이 아끼 는 동생의 미래를 위해 다른 사람의 희생을 모른 체 하는 이기심을 지 녔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다프넨은 아직 정확히 몰랐지만,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괴짜이고 싶어하던 나우플리온 또한 자신의 희망과는 달리 한 조각의 과거도 끊어 내버리지 못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렇게 수십 번의 밤을 보내고도 이곳에 오는 것을 멈추지 못했어. 그러던 어느 여름 밤, 나는 비문들을 읽다가 저곳, 저 가장 큰 무덤 앞 에서 잠시 잠이 들었지.....“ 큰 무덤 앞에는 한쪽 귀퉁이가 허물어진 길쭉한 오각형의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그곳에 새겨진 수백 개의 잔글씨들을 하나하나 램프 로 비추어가며 읽고 있었을 제로의 모습이 문득 낮의 햇빛 아래 환영 처럼 스쳐갔다. "설핏 잠에서 깼을 때, 나는 눈을 뜨지 않고도 내 주위에 수십 명의 인기척이 있음을 알았어. 지금은 책만 읽어 이렇게 느린 몸이 됐지만 젊었을 때는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막대 호신술과 같은 것을 강 요당해 배워야 했기에, 한 번 깨워져 있던 내 몸의 감각이 그 순간 저 도 모르게 반응한 거지. 나는 잠든 척 눈을 조금만 뜨고 주위를 훑어 봤지. 과연, 거기엔 치렁치렁한 옷을 걸친 남자와 여자들이 유령처 럼.... 아니, 실제로 유령인 그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더 놀라운 건.... 지금 나도 도저히 믿기 힘들지만.... 내 주위의 비석들이 며 부서진 돌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아주 깨끗한 청색 돌로 지어진 높 은 건물이 서 있었다는 거지" 한 사람의 입에서 밤의 환상이 흘러나오는 중에도 주위는 여전히 흰 햇살 아래 환했다. 그러나 다프넨은 제로가 하는 말이 어떤 상황을 표현하고 있는지 너무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래 전 처음으로 유령 소년들과 마주쳤을 때, 마을의 모습이 바뀌며 사자들이 이름이 새겨진 오벨리스크가 나타나지 않았던가. 또한, 맨 처음 섬에 도착했을 때도 섬의 풍경이 갑자기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꿔는 광경을 목격한 바 있는 자신이었다. “'나는 꼼짝할 수 없었어. 내 주위의 투명한 인간들은 그 청석 의 집을 드나들면서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미소짓기도 했는데, 그 자태와 몸가짐이 너무도 엄숙하고 거룩해 보여서 나 같은 인간이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크나큰 불경인 양 느껴졌으니까. 그들 을 보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지른 것은 아 닐까,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 채 그저 잠든 체 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 던 거지." "그러면 그들은 .... 어떻게 사라졌죠?“ "글쎄, 이렇게 말하면 웃겠지만 난 정말로 다시 잠이 들고 말았어. 긴장해 있었는데도 동시에 알 수 없는 편안함에 사로잡혀서, 그리고 잠의 세계 속에서라도 그들에게 동화되고 싶은 마음이 그렇게 하도록 만든 걸까.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늦은 아침이었고 주위에는 평소 와 마찬가지로 부서진 비석들뿐이었지. 그 후로 다시는 보지 못했어. 고귀한 영혼들.... 그들은 이 비석의 주인들이었을까, 아니면.... 저 마 법 왕국으로부터 이곳까지 옮겨온, 다름 아닌 가나폴리의 조상들이었 을까.....“ 다프넨은 고개를 몇 번 젓다가, 다시 망설이다가, 결국은 말하지 않 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고 말았다. "아저씨, 아저씨가 본 것은 꿈이나 환각이 아니라 실제였습니다. 다 른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않더라도 저는 아니에요. 그 사람들, 그들은 이미 몇 백 년 동안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는 이 땅의 또 다른 무리들 이에요. 심지어 그들은 우리들 가운데 일어난 중대한 일들을 기록하 기까지 하죠. 거기엔 섬에서 죽은 모든 사람의 이름들이 다 적혀 있어 요. 그 오벨리스크.....“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다프넨?“ 제로는 당황한 표정으로 다프넨을 쏘아보고 있었다. 너무 한꺼번에 많은 말이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오히려 농담이나 거짓말처럼 보이고 말았다. 다프넨은 잠시 쉬었다가 다시 분명하게 말했다. "아저씨가 본 그 유령들, 저도 본 일이 있습니다. 제가 본 것은 아이 들이었고, 그들은 저와 어울려 놀기도 했죠. 그러니까 저번에 제가 절 벽에서 떨어져 오랫동안 깨어나지 않았던 때 기억나시죠? 그 때 제 혼은 그들과 함께 지내고 있었어요." "그게..... 정말이야?“ 제로의 목소리는 약간 떨고 있는 듯 들렸다. 실은 다프넨도 긴장하 고 흥분해 있었다. 유령들에 대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구체적으로 한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렇다면 너는.... 그들로부터 무슨 이야기를 들었지? 그들의 정체 가 무엇인지.... 넌 알고 있니?“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모르겠어요. 그런 말은 해주지 않았어요. 그 때 저는 저 자신을 잊 고 그들과 노는 데 열중해 있었으니까요.육체와 분리되어 있었기에 현실 감각은 사라진 상태였고.... 다시 말해 저 역시 혼뿐인 상태였던 거죠. 생령이 나가 돌아다닌 것이랄까요." 사실 엔디미온 등을 처음 만난 것이 그 때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최초로 유령들을 만나 마을에서 사라졌던 일은 나우플리온을 비롯한 몇 사람만이 아는 비밀로 되어 있었다. 갑자기 제로는 손을 내밀어 다프넨의 어깨를 꽉 잡았다. “다 말해 줘. 그들이 한 이야기들.... 정체는 비록 모르더라도 아무 이야기든 다 듣고 싶구나. 우리 가운데 죽은 사람들을 기록한다는 것 은 무슨 얘기지? 그들은 섬의 일을 모두 다 알고 있니?“ 처음에 제로는 자신이 본 것이 꿈이 아니었다고 분명하게 말했지만 실은 마음 속으로 조금쯤 의심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다 프넨이 자신이 본 것을 다시 확인해 주니 반가운 것을 넘어 감격스럽 기까지 한 듯했다. 그러나 다프넨이 말해줄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겨우 띄엄 띄엄 엔디미온이 ‘자신은 이미 몇 백 년 전에 죽었다' 라고 말한 것, 죽 은 자의 이름이 새겨진 오벨리스크를 비롯하여 섬 안의 풍경이 바뀌 던 기억, 알의 동굴에서 잠든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이 소위 '어른 유령들' 이라고 지칭하던 다른 유령들이 존재하며 자신이 그 세 계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알려져선 안 된다고 했다는 것 등을 말해 주었다. 제로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데스포이나 사제님께서 너의 특별한 검이 이 세계나 이 공간을 뚫고 다닐 수 있는 힘을 지녔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난다. 널 잃어버렸을 때 공회당에서 열린 회의에서 그렇게 말하셨지. 그렇다면 네가 간 곳은 아마도 이 세계 위에 덧씌워진 이 공간이었던 모양이야. 유령들은 그 곳에 살고 있고.... 그리고 나도 잠시 동안 그들의 세계에 갔던 것이겠 지. 네 말대로라면 그건 내가 그들의 세계를 간절히 염원하다가 언뜻 그들 가운데 누군가의 기억과 맞물렸기 때문일 지도 모르고." 둘은 큰 무덤 앞에 나란히 주저앉았다. 제로는 잠시 더 생각한 끝에 말했다. "몇 백 년이라는 말만으로는 그들이 가나폴리에서 왔는지, 아니면 이 곳에서 오래 전에 죽은 것인지 확인하기가 어렵구나. 하지만 그렇 게 많은 어린 유령들이, 그렇게 상당한 힘을 갖고 있었다는 것으로 보 아 아마도.... 이 땅에서 죽은 자들은 아닐 것 같다. 이 땅에 온 자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마법적 힘을 잃었으니까. 그렇다면 그들은 왜 가나 폴리를 떠나 이곳까지 왔을까? 그 땅의 오염은 이미 죽은 자들조차 견 디지 못할 정도였단 말인가?“ 바람이 불어 누르스름한 풀잎 조각들을 날려보냈다 둘은 각자 자 신의 생각에 잠겨 말이 없었다. “다프넨." 둘은 여전히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너에게 그 모든 일이 일어났을까," "모르겠어요.....“ "그것이 단순히 네가 지닌 특별한 검의 힘이었을까? 난 네 이야기 를 듣는 동안 네가 내게 말하지 않은 것들이 많이 있다는 걸 이미 짐 작했어." “너에게 가나폴리의 그림자들이 신호를 보내고 있어. 섬 안의 수많 은 자손들을 버려 두고 하필 이방인 출신인 너에게, 그들은 자꾸만 말 을 걸려고 해. 왜일까. 그건 어쩌면 너만이 어긋나버린 섬의 역사와 무관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은 그런 가짜 역사를 견디지 못 할 테니까." 제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절벽 꼭대기들로 둘러싸인 파란 하늘 에 이제 해는 없었다. “달여왕과 검, 나는 그 두 가지를 모두 증오해." 제로가 말하는 검은 추상적인 대상으로서의 검이었다. 다프넨이 가 진 윈터러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 "철이 들면서부터 죽 가나폴리의 역사를 동경해 온 나지만 이 땅에 서 나고 자랐다는 것만은 어쩔 수 없는 굴레인 모양이야. 하지만 넌 달라. 그들이 보기에 넌 달여왕의 자식이 아닌 거지. 가나폴리의 마법 은 태양에 가까운 힘이었어. 그리고 달여왕의 땅에 와서 그것은 약해 졌어. 가나폴리의 기억을 가진 유령들이라면 그런 상황을 달갑게 여 길리가 없지. 그래서 알게 모르게 달여왕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 온 우 리들 대신 오히려 너와 이야기하기를 원하는 것일지도 몰라. 달여왕 의 독점욕은 태양의 기운을 갖고 태어간 가장 위대한 천재조차도 끝 내 죽여버렸지...... 난 용서할 수 없었어. 비록 일순간의 오해로 등을 돌렸다 해도 나는 여전히 그를 미치도록 아꼈기에 그를 밀어낸 섭정, 그리고 그걸 방관할 수밖에 없었던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어 " 제로는 일어섰다. 그리고 여전히 말이 없는 다프넨을 내려다보았다. “가자, 다프넨.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해 줘서 고마워. 네가 원하지 않 는다 해도, 끝내 거부한다 해도, 난 너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지워버라 지는 못할 거야. 조상에게조차 허락되지 않는 우리들, 위대한 전통으 로부터 분리된 채 버려지고 만 이 섬에.... 난 다시 한 번 저 마법의 왕 국, 가나폴리를 몇천 년간 지켰던 ‘태양의 문명' 이 건설되기를 원해." 단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누군가에게 기대를 주기도 하 고 실망을 주기도 하며.... 자신은 깨닫지도 못하는 동안 타인에게 희 망을 보여주기도 하고.... 그리고 그렇게 지워진 짐을 함부로 떨쳐버리 지도 못하는.... 그것은 어디에서든 일어나는 일. 대륙에서 도망칠 때 다프넨은 어떤 새로운 관계도 원하지 않았고, 단지 마음의 평화를 찾아 섬으로 왔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나우플리온 에게, 이솔렛에게, 데스포이나에게, 헥토르와 에키온에게, 오이지스 에게, 그리고 제로에게 무언가를 주고 말았다. 제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기에 더욱 괴로웠다. 제로가 다프넨에게서 일리 오스의 모습을 애써 찾으려 하는 것은, 그 역시 상처받았기에 스스로 도 어쩌지 못하는 행동인 것이다. 기쁨과 애정과 희망과 분노와 그 모든 것으로 점철된 이 섬의 기억 을, 그 자신은 떨칠 수 있을까. 4. 세 번째 눈에 보이는 것 오이지스는 입을 막고 견뎌내려 했지만 결국 거친 숨과 함께 점심 때 먹은 것을 모조리 바닥에 토해내고 말았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그는 괴롭게 생각하고 있었다. 장서관의 바닥을 이렇게 더럽히다니, 제로 아저씨에게 죄송한 것을 떠나 스스로 용납되지 않아.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는 아직 밖에 있었다. 제로 아저씨가 비우고 떠난 장서관의 문은 잠겨 있었지만 워낙 제로와 친하게 지낸 오이지 스는 여벌의 열쇠가 어디에 감춰져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보통 때라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열쇠가 숨겨진 곳을 보이는 일 따위는 결 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사정이 급했던 그는 장서관 주 위를 몇 번 빙빙 돈 끝에 결국 뒤쫓아오는 소년들이 보는 앞에서 장서 관 입구의 움직이는 주춧돌을 들치고 열쇠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그 들의 손에 잡히기 직전에 문을 따고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데 성 공했던 것이다. 평소 가벼운 뜀박질조차 거의 하지 않던 그가 세상 빛을 본 이래 한 번도 그래 본 일 없는 속력으로 달렸기에 멈추고 나서 탈진 상태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릎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을 듯 휘청거리는 것을 간신히 다잡았지만 목 안쪽에서는 계속해서 헛구역질이 밀려나 왔다. 이제 더 나을 것도 없는데도 찐득거리는 침과 위액만은 끊이지 않고 입 안에 고였다. 이젠 안전해졌다고 믿고 싶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가 가 장 잘 알고 있었다. “나와! 나오지 못해!" "설마 그 안에 숨는 걸로 우리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 “당장 나오지 않으면 문짝을 부숴 버릴 거다!" 그 순간 오이지스는 겁먹은 목소리로 비명 비슷한 외침을 울렸다. "아‥‥ 안 돼!" 장서관은 오이지스에게 가장 소중한 장소였다. 그런 곳의 문짝 하 나라도 흠집 나는 것을 용납할 그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걸 막을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있는가? "안 돼? 그럼 당장 그놈의 장서관인지 쓰레기통인지에서 뛰어나오 라고!" “다람쥐 새끼처럼 쫓기니까 쥐구멍 속으로 쏙 들어가는 비겁한 자 식아!" "셋 셀 동안 나오지 않으면 끝장인 줄 알아!" 피쿠스가 위협하려는 것처럼 문짝을 탕탕 걷어찼다. 그들이 아는 오이지스는 이 정도 하면 제풀에 최악의 상창만 생각해 내다가 결국 굴복해버리는 아이였다. 더구나 그들은 화가 나 있었다. 그 가운데 오 이지스에게 배를 얻어맞은 셈이 된 피쿠스는 가장 분노한 상태였다. 그는 실상 오이지스가 굴복을 하든 용서를 빌든 관계없이 자기의 분 이 풀릴 때까지 녀석을 밟을 마음이었다. 그들이 잠시 발길질을 멈췄을 때, 문 안쪽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긴.... 쓰레기통도 아니고 쥐구멍도 아냐." "뭐..... 라고?“ 흥분해서 소리질렀던 말을 다 기억하는 그들이 아니었기에 처음에 는 오이지스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너희가 나를 욕하는 것은 상관없어. 하지만 여기는 섬의 모든 기억 이 다 들어있는 곳이야, 너희 부모님이나 그 위의 부모님들에 대한 것 들도 전부 다 너희는 그런 곳을 함부로 말할수 있어?“ 처음엔 떨렸던 오이지스의 목소리가 서서히 침착하게 변했다. 흥분 한 소년들이 도리어 어리둥절해질 정도로. "차라리 나를 때려. 그런 말을 입에 담을 바에는." 오이지스는 위쪽 방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곳에서 사람들의 손길을 기다리며 잠든 수백, 수천의 책들...... 그러나 찾아오는 것은 자신처럼 모자라고 어리석은 꼬마밖에 없다. 저런 아 이들에게 대항할 힘조차 없는 나약한 겁쟁이가 저 책을 다 읽은들 무 슨 소용이 있을까. 기침이 다시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이미 결심을 했다. 저 소년들에 게 죽도록 맞는 한이 있더라도 이 안에 숨어서 저런 모욕을 들을 수는 없다고. 자신의 존재가 책의 탑의 고귀함을 조금이라도 깎아 내릴 수 는 없었다. 이 순간 오이지스는 책들을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달여왕과 같은 신격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일부러 그렇게 하려 한 것이 아니라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버렸다. 그것도 어쩌면, 그가 지금 껏 너무도 기댈 곳 없는 소년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나갈 테니까 기다려." 달칵거리며 문이 움직이더니 이윽고 활짝 열렸다. 오이지스는 머뭇 거리지도 않고 걸어나와 문을 닫은 뒤 열쇠로 다시 잠갔다. 그리고 조 금 벌어진 문틈으로 열쇠를 도로 넣어버리려 했다. 마음이 바뀐다 해 도 다시 들어가지는 않겠다는 결심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갈레가 영악한 머리를 굴려 저항 없는 오이지스를 때리는 것보다 더 흥미로운 일을 생각해 내고 말았다. 그는 다짜고짜 오이지스의 팔을 잡아 비틀더니 다른 소년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야, 안 들어갈래?“ 모든 일은 순식간이었다. 오이지스가 떨어뜨린 열쇠를 낚아채는 것 과 동시에 소년들은 문을 열어제치며 장서관 안으로 들어갔고, 그 기 세에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촛대가 넘어지며 불 꺼진 초가 바닥에 떨 어져 굴렀다. 소년들에게 밀쳐진 오이지스가 의자에 심하게 부딪치며 쓰러지는 사이 다른 소년들은 신경질적으로 주위의 잡동사니들을 걷 어찼다. "왜 이렇게 어두워?“ "이 창문은 어떻게 여는 거야?“ 그들은 평생 장서관에 한 번도 와본 일이 없었으므로 이곳의 구조 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장서관에는 오래 전 다프넨이 보고 감탄한 바 있는 자동 장치가 있어서 창문을 단번에 여닫을 수 있게 되어 있었 다. 그것은 일리오스 사제가 최초로 이 장서관을 설계했다는 증거이 기도 했다. 다프넨이 지난 겨울에 이솔렛의 집에서 본 적이 있는, 의 자에 앉은 채로 멀리 있는 문을 여닫던 장치도 똑같은 원리를 가진 것 이었으니까. "장서관이라더니 책은 어디 있는 거야?“ "여기 한 권 있군," 한 소년이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던 책의 귀퉁이를 쥐고 들어올리 더니 생쥐 꼬리를 잡고 흔드는 것처럼 빙빙 돌렸다. 순식간에 페이지 하나가 북 찢겨나갔다. "그만둬!" 그건 제로가 나가기 전에 읽고 있던 책이었다. 오이지스는 필사적 으로 일어나 막으려 했지만 금방 다른 소년들에게 가로막혔다. 피쿠 스가 질겅질겅 씹어 뱉는 듯한 어조로 한 마디 던졌다. "이리 와, 넌 네 몫이야." 그 다음은 정확히 기억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오이지스가 피쿠스에게 얻어맞는 동안 다른 소년들은 본래부터 어수선한 장서관 안을 반쯤 뒤집어 놓다시피 했다. 그들은 나중에 제로가 돌아와 이 꼴 을 보게 될 것에 대해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이런 경우 빠져나가는 방법은 늘 간단했다. 모든 것을 오이지스의 잘못으로 덮어씌우면 되 는 것이다. 제로라면 오이지스가 이런 행동을 하지 않으리란 걸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겠지만, 소년들이 윽박지른다면 오이지스는 얼마든 지 거짓 증언을 할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지금껏 늘 쉽사리 굴 복하여 그들이 시키는 대로 입을 놀려 온 대가는 이런 식으로 돌아오 기 마련이었다. 뭣하다면, 오이지스가 장서관 안에 숨어서 그들을 놀려대었기에 화가 난 나머지 들어가 싸움을 벌이다 이렇게 됐다고 말하면 된다. 더 구나 지금 그들에게는 든든한 뒷배경이 있었다. 그들에게 오이지스를 괴롭혀 다프넨을 자극하라고 시킨 것은 다름 아닌 에키온이었고, 이 번에는 에키온이 그의 아버지인 펠로로스 수도사의 허락에 가까운 묵 인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 부자는 이번 일을 통해 다프넨에 대해 무언가 일을 꾸밀 작정임에 틀림없었 고, 그들은 시킨 일을 착실히 하는 것으로 쌓인 분도 풀고 재미있는 구경도 하게 되는 것이니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었다. "야, 여기 사다리다. 책은 아마 이 위쪽에 있나본데......“ 그 말을 들은 갈레가 이죽이죽 웃었다. “땅다람쥐 자식이 천국 올라가는 계단이로구나." 그 말을 들은 리코스가 오이지스를 흘끔 보았다. 오이지스는 피쿠 스의 발 밑에서 반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그 모양을 보니 그 책이란 것을 몇 권쯤 집어내어 얼굴 위에 뿌려주고 싶은 욕구가 불쑥 났다. "올라가 보자." 잊혀진 묘지를 빠져나와 스무 걸음 남짓 걸었을까, 갑자기 제로가 발을 멈추며 움찔하더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묘한 말을 중얼거렸다. "역시 지나치게 밝은 날씨인 거지." “네?” 해가 서서히 지고 있어 밝다기보다는 서늘한 날씨였다. 다프넨은 나란히 하늘을 우러른 후 제로의 발이 다시 옮겨지기 시작한 것을 보 고 곧 뒤따랐다. 아무 뜻 없는 말인 것도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그 한 마디가 정체 모를 불안감의 불씨인 양 가슴 속에 박혀 이글거리는 걸 느끼고 다프 넨은 의아해졌다. 그에 맞추어 그의 걸음도 차츰 빨라졌다. 다프넨이 자꾸만 제로를 앞질렀다가 멈추곤 할 즈음 제로는 다시 한 번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이상한 기분이군." 그 때 다프넨은 문득 생각이 났다. 어떤 중대한 일이 닥치기 전, 자 신에게 가끔 다가오곤 하는 예지처럼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것이 없 으란 법은 없지 않은가. “혹시 무슨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그런 기분이라도 드시나요?” 제로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다프넨을 보았다. “너도 뭔가 느끼는 게 있니?” "아뇨, 전..... 그냥 예전에 종종 무슨 일이 닥치기 전에 미리 그것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죠. 아저씨도 그런 걸 느끼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요." 제로는 다프넨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꼼짝 않는 그의 모습 이 햇빛을 등지고 선 붉은 석상인 양 느껴질 정도로. 이윽고 그는 짧은 한숨과 함께 굳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최근 몇 년간, 아니 그 때의 그 사건 이후로..... 이런 기분은 내게 처 음이다. 네가 말한 그런 것을 섬에서는 흔히 '세 번째 눈으로 보았다' 라고 한다. 그런 능력이 특별히 강한 사람을 두고 '제 3안의 소유 자' 라고도 하지. 그렇게 부를 만한 사람이 현재 섬 안에 있는 사람으 로는 페트라 사제가 유일하다만, 그녀도 미래의 모든 것을 느끼는 것 은 아니야. 그리고 마찬가지로..... 보통 사람이라고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지. 자신의 일생과 강력히 관계된 불운이 앞에 있을 때 는, 누구든 아주 흐릿한 눈이라도 뜨이는 법이라 한다. 나는 그런 것 에 무딘 편이라 딱 한 번, 일리오스가 죽을 때 이후로는 한 번도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에 와서 이게 다 무엇인지." 제로는 다시 걸음을 옳겨놓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다프넨보다도 좀 더 빨랐다. 그는 걸으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세 번째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불행 뿐이라 했거늘.......“ 북쪽 비탈을 거의 내려왔을 즈음, 두 사람은 거의 달리다시피 하고 있었다. 익숙한 풍경들이 휙휙 스쳐지나갔다. 저 앞에서 어떤 사람이 마주 달려오다가 우뚝 멈추어 서는 것이 보였다. 그런 사람은 곧 두 사람, 세 사람으로 불어났다. 한 사람이 그들이 향해 다급하게 뛰어왔다. 가 까이 왔을 때 숨이 턱에 찬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있다가 이제야 오오! 어서 장서관으로 가시오!" 제로가 마주 고함을 내지르는 바라에 다프넨은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요!" 그 사람은 대꾸할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비 탈을 내려갔다. 더 이야기를 주고받을 것도 없었다. 제로와 다프넨은 한달음에 북 쪽 비탈을 다 내려가 동쪽으로 이어진 사면을 내달려 올랐다. 조금 더 가까워지자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냄새를 맡았다. 타는 냄새였다. 그리 날렵하다고는 할 수 없는 제로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 로 달리는 것도 보았다. 검은 연기가 녹색 물이 드는 나뭇가지들 사이 로 돌이킬 수 없는 죄악처럼 뻗어나가는 것도 보았다. 연기는 흩어져 흐려지기는커녕 점점 더 짙은 검은빛으로 변했다. 이윽고 둘의 눈앞 에 십여 명의 사람들이 나타나고, 그리고 그 검은 연기를 뿜고 있는..... 장서관이 보였다. “아아......!” 그것은 이상한 탄성이었다.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그냥 바람 소 리인지도 모를, 끝의 외침...... 그들 앞에서 장서관이 타고 있었다. 아래쪽 벽은 이미 새카맣고, 3층 창문 언저리부터 주홍 불꽃이 서서 히 귀퉁이를 집어삼키는 것이 보였다. 어쩔 수 없어 나무로 지었지만, 한 사람의 힘으로 오랫동안 손때 반들반들하게 가꾸어져 온 책의 탑 이 무력하게 허물어지고 있었다. 저 안에 들어 있을 잊혀진 섬의 역사, 대륙에서는 구할 수도 없을 희귀본들이 남김 없이 차례로 재로 변해가고 있으리라. 불길이 뚫은 벽으로부터 떨어져 나구는 것은 검게 변한 가죽 표지들이었다. 그 안에 들어 있어야 할 페이지들은 재로 변해버린 채 남은 것은 무용 한 껍질뿐, 저 안에서는 얼마나 많은 책들이 아직도 고통스럽게 타 고 있을 것인가. 제로의 눈에 그들이 비명 지르는 아이들처럼 보였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프넨은 바로 상황을 깨닫고 제로의 팔을 붙들었다. 사람들이 가진 소화수단이라고는 양동이의 물이나 모래뿐이었고, 아 직 사제들은 한 명도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미 물 몇 통 정도로 잡힐 불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모두 사제 가운데 누군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손놓고 지켜보고 있다시피 했다. 이런 와중에 제로가 책을 꺼내겠다고 저 안으로 뛰어들기라도 한다면 그의 생명을 보장할 사람 은 아무도 없었다. “.......” 다프넨이 움켜잡은 제로의 팔이 덜덜 떨렸다. 다프넨은 제로의 앞 으로 돌아가 얼굴을 마주보며 계속해서 고개를 크게 저었다. 이 상황 에서 이솔렛이라도 있다면! 사제들은 어째서 아무도 오지 않는단 말 인가! 제로는 다프넨의 손을 뿌리치려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은 듯 팔을 잡힌 채로 장서관을 향해 걸어갔다. 그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몇 걸음씩 비켜났다. 다프넨은 대략 10미터 가량 남은 위치에서부터 가 능한 한 예의바르게 그를 저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제로는 몇 걸음 더 가다가 그 자리에 멈췄다. 그도 자신을 자제하려 무진 애 를 쓰는 중이었다. 불꽃은 계속해서 날름대며 아깝고 귀한 책들을 삼 키고, 또 삼켰다. 제로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했던 섬의 비밀들도 함께 스러져 갔다. 다프넨은 어떻게든 제로를 막을 수만 있다면 된다고 생각하며 무슨 말이든 하려고 했다. “제로 아저씨, 사제님들이 오시면 불은 금방 꺼질 거예요. 그러니 제발......“ 그러나 그 순간, 제로가 들어서는 안 될 말이 사람들 중 한 명의 입 에서 나오고 말았다. "저 안에 어린애가 있는 모양이더구려! 확실히 있어! 저기로 책 읽 으러 가는 아이는 한 명뿐이지 않던가?“ “!” 다프넨은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이지스! 그와 약속했던 것을 왜 잊고 있었지? 다프넨은 자신이 제로를 말리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저도 모르게 장서관 쪽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로가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다프넨, 그게 사실이냐?” “......” 다프넨은 차마 입을 열어 대답할 수 없었으나 이미 눈빛으로 모든 것을 실토해버 린 후였다. "오이지스가 저 안에 있어?‘ “......” "그렇구나." 제로는 갑자기 다프넨의 팔을 놓았다. 그리고 성큼성큼 장서관 쪽 으로 걸어가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명령 과도 같았다. “아무도, 나를 따라오지 못하게 하시오. 모두들 듣고 있소? 아무도 나를 따라오지 못하게 하시오!" 겨우 예닐곱 걸음, 제로는 다프넨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 다. 보이는 것은 검게 타오르는 잿더미뿐이었다. 정신을 차린 사람들 이 서넛이나 다가와 뒤따라가려는 다프넨의 팔다리를 단단히 움켜쥐 었고, 그는 고작 장서관을 향해 소리지르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돌아오세요! 제로 아저씨! 제발돌아오세요!" 동시에 머릿속에서는 다른 말이 울리고 있었다. 오이지스가 혼자 있도록 버려 두고 잊어버린 내 잘못이야! 그와 약속을 했지만 반나절 동안 완전히 망각해버렸지! 갑자기 왈칵 눈물이 솟았다. 얼굴에 붙은 검댕 때문에 검게 변한 눈 물이 흘러내리는 동안 그는 몸부림치며 맥없이 계속해서 소리지르고 있었다. 돌아오라고, 그만 돌아와 달라고, 그 대신 자신이 가게 해 달 라고. 데스포이나 사제와 모르페우스 사제, 그리고 테스모폴로스 사제가 급히 도착했을 때, 장서관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은 다섯 배로 불어나 있었다. 데스포이나는 심각한 상황을 전해듣고 이미 가장 강력한 주 문을 준비해 왔다. 다른 사제 두 명이 그녀에게 힘을 보태주는 가운데 십여 분에 걸친 주문이 외워지고, 거대한 물줄기가 장서관에 내리부 어지자 화재는 이윽고 끝났다. 그러나 남은 몰골은 참혹했다. 데스포이나를 비롯한 사제들도 절반 가량은 검은 잿더미로 변해버린 장서관을 바라보며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남은 부분도 언제 무너질 지 모르는 불안한 모양으로 간신히 서 있었기에 제로와 오이지스의 생사를 확인하겠다고 쉽사리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데스포이나는 다프넨에게 다가왔다.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바라보 며 한동안 서 있었던 터라 다프넨의 얼굴은 검은 먼지로 범벅이 되어 말이 아니었다. 이제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눈물이 흘렀던 자국만 은 생생히 남아 있었다. 데스포이나가 입을 열기 전에 다프넨이 먼저 말했다. "제가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데스포이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손에서 놓여 난 다프넨은 데스포이나를 향해 다시 한 번 분명히 말했다. "잘못은 용서될 수 있을망정, 달여왕께서도 없던 것으로 하지는 못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제가 들어가겠어요. 꼭 그래야 되겠습니다. " 다프넨은 데스포이나를 지나쳐 걸었다. 데스포이나와 눈짓을 주고 받은 모르페우스가 다가오더니 놀랍게도 손에 쥐고 있던 '감지 의 지팡이'를 넘겨주었다. 다프넨은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인 다음 장 서관의 검게 그을린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문짝은 절반 정도 탄 채 벽 틈에 끼여 있었다. 다프넨은 검을 뽑아 들었다. 윈터러가 아닌 나우플리온이 빌려준 검이었지만 몇 번 휘두 를 것도 없이 문은 금세 바스러졌다. 문이 넘어지면서 다시 한 번 검 은 먼지가 온 몸에 씌워졌다.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아랫방의 천장은 절반 이상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고개를 들어보 니 책이 쌓여 있던 높은 원통형 벽이 드문드문 타서 구멍이 뚫린 차 꼭대기를 향해 솟아 있었다. 첨탑 천장은 완전히 뚫려 흐린 하늘 한 조각이 보였다. 안은 어두웠으나 감지의 지팡이는 자신이 찾아야 할 것을 아는 듯 환한 빛을 냈다. 본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지팡이가 찾아내도록 마음 을 맞추는 데는 조금 시간이 필요한 법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의 다프 넨에게는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다. 지팡이의 빛이 점차 강해지는 곳 으로 걸음을 옮겼고, 이윽고 타서 흔적만 남은 책 더미를 발견해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거기에 없었다. 지팡이를 허공으로 높이 들어올렸다. 다시 빛이 강해졌다. 옆을 돌 아보니 사다리 일부가 검게 그을린 채 여전히 윗방과 아랫방을 잇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안전한 상태인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 다. 그러나 다프넨은 올라가야 했다. 다가가서 사다리를 만져 보니 생 각보다 훨씬 위험한 듯 생각되었다. 한 단 올라서니 약간 삐걱거렸고, 두 단, 세 단을 올라섰을 때는 우수수 먼지가 부서져 내렸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갔다. 위로 올라갈수록 타버린 담요와 방석이 내는 매캐한 내가 코를 찔 렀다. 절반 밖에 남지 않은 윗방 바닥 한쪽에 겨우 사다리 끝이 걸려 있었다. 기적적으로 윗방에 다다른 그는 한쪽에 담요 더미가 수북하 게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두 손으로 쿠션을 집어들자 한 귀퉁이가 으스러져 떨어졌다. 그런 식으로 담요를 헤쳐내고, 그는 두 사람을 찾아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인 줄로 알았다. 그러나 틀림없는 두 사람이었다. 아직 덜 타오른 담요를 뒤집어 쓴 제로는 오이지스를 품안에 꼭 껴안 고 있었다. 그리고 다프넨이 어깨에 손을 대자 놀랍게도 몸을 움직였 다. "누군가..... 왔군." 제로가 들어갔을 즈음에는 사방의 벽이 많이 무너져 뚫려 있었던 탓에 질식사는 면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제로의 품에 안긴 오이지스 는 화상이나 먼지 뿐 아니라 온 몸이 엉망진창이었다. 얼굴도 무언가 에 얻어맞은 듯 상처투성이였다. 다프넨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불 속 에 고립된 사람에게 어떻게 저런 구체적인 상처가 나며, 더구나 피를 저토록 흘릴 수가 있는지. "살아 계셨군요‥‥ 다행이에요." "아아, 다프넨."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다프넨은 오이지스가 살아 있는가 묻고 싶었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때 제로가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 둘 다 몸을 가누기가 힘든데 어떻게 내려갈 수 있을지 모르겠 는걸." 다프넨은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타고 올라온 불안정한 사다리는 두 사람에게 소용이 없었다. 아마 오이지스는 살아있다 해도 자기 발 로 걸을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등에 업거나 해서 두 사람의 몸무게로 내리눌렀다가는 당장 사다리가 무너져버릴 것이 뻔했다. 다 친 사람들에게 아래로 뛰어내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건강한 사람이 뛰어내리기에도 쾌 높은 위치였다. "제가 내려가서 이쪽 벽을 뚫으라고 얘기하겠어요." "그건 안 돼.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곳은 장서관 전체의 내력벽에 기대어 있거든. 그래서 이렇게 남아 있는 건데 저쪽을 뚫으면 남은 벽 들이 한꺼번에 무너질 수가 있어. 이곳의 구조가 좀..... 이상하긴 하지. 하긴 이상한 자가 설계했으니 오죽하겠어." 제로는 갑자기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목소리에서는 전혀 탈진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웃음소리 때문에 다프넨은 오히려 긴장했 다. 혹시라도..... 무언가 잘못되어서...... "그러니까 넌 돌아가서 데스포이나 사제님한테 마법을 좀 써 달라 고 말씀드려. 사방에 방해거리가 많아서 좀 힘들긴 하겠지만..... 그 분 이라면 공중 부양으로 우리를 저 아래로 내려주실 수 있을 거다." 다프넨도 이솔렛에게 들어서 공중 부양 도중 뜻하지 않은 장애물에 부딪치면 갑자기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로 라고 해서 모를 리 없었다. 방금 진화작업에 막대한 힘을 썼던 데스포 이나가 또다시 그 정도로 정확한 마법을 쓰는 것은 간단치 않았다. 그 순간, 다프넨은 이솔렛의 찬트가 떠올랐다. 그녀의 찬트는 절벽 아래 로 떨어지던 자신을 다시 날아오르게 할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부탁해서..... 그러나 그는 다시 마음 속으로 고개를 젓고 말았다. 지금은 아슬아 슬하게 버티고 있지만 언제 다시 무너질 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이곳 에 그녀를 들어오게 할 수는 없었다. 제 아무리 자신의 책임과 두 사 람의 생명에 대해 돌이켜 생각해봐도..... 어쩔 수 없이 그녀에 대한 마 음을 이기지는 못했기에, 도저히 그 말을 입밖에 낼 수가 없었다. 죄 인이면서, 동시에 이기적이기까지 한 자신이었다. 그 때 다프넨은 자신 역시 찬트를 배웠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비록 부족하긴 하겠지만...... 시도해 볼 수는 있지 않은가. 진실한 기 원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찬트의 가장 큰 힘이라고 이솔렛이 늘 말하 지 않았던가?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지금은 불가능해 보이는 한 가닥의 희망조차 잡고 싶을 때였다. 찬 트는 제대로 쓰기만 한다면 마법조차 뛰어넘는 강한 힘이었다. 그리 고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다프넨은 마음을 최대한 가다듬었다. 이솔렛이 가르쳐 주었던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떠올리려 애쓰고, 한동안 아예 잊어버리려 애썼던 것 들을 수백 번의 부름으로 되새겨냈다. '천만 번 기원할 힘을 모두 여기에 담아서라도 이 순간 이루어내기 를. 이솔렛, 당신이 내 마음을 안다면..... 이 순간 나를 위해 기도해주 기를.' 모든 것이 준비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시작하는 것말고 다른 길은 없었다. 내 이름 부른 분 매의 혼 푸른 눈 나가고자 닿고자 먼 바닷길 내달아 이르렀건만 다다랐건만 그림자 간 곳 없어 내 눈이 닿는 곳 그 너머 푸른 곶 긴 사래 끄는 파도 새 나래 쳐 거닐리라 돌이켜 돌아올 제 물 그림자 굽이 서려 그이련다 마중하매 다 흘려 잊은듯 푸른눈 아득히 머니 어찌 아니 울음하리요 내 눈이 닿는 곳 그 너머 푸른 곶 긴 사래 끄는 파도 새 나래 쳐 거닐리라 그 순간의 찬트를 고르는 것은 의지가 아닌 마음이었다. 그의 마음 은 이솔렛에게 기대 있었고, 그리하여 그의 입에서 나온 것 역시 그녀 가 오래 전 불렀던 그리운 찬트였다. 그가 이 찬트를 처음 들은 곳은 그들이 공유하는 기억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 중 하나인 저 북쪽 바닷가였다. 그리고 그의 찬트는 일생 처음으로 효과를 발휘했다. 그들 모두의 몸은 공중으로 느리게 떠올랐고, 헤엄치듯 공기를 타고 이윽고 원하 던 바닥에 내려앉았다. 제로는 그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말을 잊은 듯 다프넨을 바라보 고 있었다. 다프넨은 찬트의 되풀이되는 후렴을 끝내면서 제로가 말 한 바 있는 '세 번째 눈‘ 으로 자신의 미래를 언뜻 보았다. 이제 그에게 이렇듯 찬트의 힘을 발휘할 기회는 결코 쉽게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허전하고 슬프면서도 담담한 기분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5. 타 버린 것들 오이지스는 중태였다. 모르페우스 사제의 집으로 옮겨진 후 며칠이 지났는데도 내내 혼수 상태였다. 예전에 이솔렛이나 다프넨이 며칠 동안 깨어나지 못했던 것 과는 달랐다. 오이지스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약한 숨을 띄엄띄엄 쉬고 있었고 모르페우스 사제조차도 그의 소생을 장담하지 못했다. 가장 이상했던 것은 그 원인이었다. 분명 불길에 쫓긴 흔적도 보이 고 마지막으로 질식하여 쓰러졌던 것은 사실인 것 같았지만, 그것만 으로는 온 몸에 가득한 수많은 상처들이 설명되지 않았다. 흡사 장서 관 안에서 유령들과 싸우기라도 한 듯, 곳곳에 피멍과 찢긴 자국투성 이였다. 특히 얼굴은 누가 보아도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결과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심했다. 약하기 이를 데 없는 조그마한 소년의 코뼈가 내 려앉고, 입술이 짓이겨지고, 눈꺼풀이 찢어져 눈동자 안쪽까지 상한 몰골은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것이었다. 모르페우스가 내뱉듯 말하 길, 이런 짓을 살아있는 인간이 했다면 그런 놈은 섬의 재판에 회부시 켜 사형에 처해버려야 된다고 할 정도였다. 제로의 상태는 다행히 심각하지 않은 것 같았지만 다프넨은 묘한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다프넨이 무너져 가는 장서관에 들 어가 두 사람을 발견했던 때부터 제로는 이상할 정도로 침착하면서도 어딘가 사람이 달라진 듯했던 것이다. 평생에 걸쳐 아끼고 돌봐 온 장 서관이 끝장난 데서 온 충격일 거라고 생각하려 애썼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는 추측을 온전히 누르기가 힘들었다. 아직도 수습되지 않고 있는 장서관은 점점 푸르러지는 봄빛 숲 속 에서 시커멓고 황량한 몰골로 서 있었다. 건물은 3분의 1 가량 남은 내력벽에 아슬아슬하게 기대어 서 있었고, 안에는 아직 일부 책이 남 아 있는 듯했지만 언제 무너질 지 모르는 모양이라 그걸 수습하러 갈 사람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이제 소용도 없게 됐는데 그냥 무너뜨려 버리자고 제안했지만 사제들이 거절했고, 다프넨은 하마터면 그런 말 을 하는 사람의 얼굴을 대뜸 쳐버릴 뻔했다. 섬사람의 대부분은 평생 장서관 문턱에 발 한 번 들여본 일이 없었으니 그들이 아쉬움을 느끼 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닐 거라고 가까스로 자신을 달랬다. 사흘이 지난 오후, 다프넨은 화재가 일어났던 언덕을 천천히 오르 고 있었다. 제로와 함께 비밀스런 묘지에 갔다가 돌아오던 걸음이 떠 올라 한층 더 침울해진 그가 장서관 전체가 보이는 위치에 이르러 보 니, 먼저 와 있는 사람이 있었다. “너도 왔구나," 나우플리온이었다. 그는 언덕바지 아래에 혼자 앉은 채 시커먼 폐 허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프넨은 말없이 그 곁에 주저앉았다. “매일 여기 오지?” 다프넨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나우플리온은 손을 내밀어 다프넨 의 머리에 날아와 붙은 검댕을 떼어 주었다. 두 사람이 이렇듯 밖에 나와 같이 앉은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특별히 다정스런 목소리를 낼 줄은 모르는 나우플리온이 풀줄기를 조금 씹다가 뱉으며 조용히 물었다. “네 책임이 좀 있다고 느끼는 것 같던데. 내게 못할 이야기냐?” 다프넨은 이번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근처 풀밭에 여전히 점점 이 흩어진 회갈색 재들을 바라보았다. 그 중 하나는 명백히 타다 남은 책 조각이었다. "오이지스가 장서관에 혼자 있었던 것은 저와 거기서 만나기로 약 속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전 그걸 잊어버렸죠." "왜 잊어버렸지?“ "제로 아저씨하고..... 섬 안의 묘지에 갔었어요." 묘지에 대해서는 그냥 간단하게만 설명했다. 나우플리온은 그 묘지 의 존재를 몰랐던 것 같았다. 유령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지 금은 그런 문제를 놓고 나우플리온을 설득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고 해하듯 자신의 일을 털어놓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돌아와 보니 장서관에 불이 났더란 말이지? 오이지스는 안 에 갇혀 있고?“ "문이 잠겨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장서관 안으로 들어가던 제로의 뒷모습을 생각하며 그렇게 대답하 다 보니 저도 모르게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 입을 세게 다물었다. 나우 플리온은 무언가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그래.... 그것 참 이상하구나. 만일 잠겨 있지 않았다면 어째서 그랬 , 던 것일까? 제로 씨는 장서관을 비울 땐 항상 문을 잠그시는데. 오이 지스는 어떻게 안으로 들어간 거지?“ "오이지스는 열쇠를 숨겨 두는 곳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예전에 알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렇다면 더욱 이상한데. 자기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실수 로 화재를 일으켰다면, 왜 밖으로 뛰어나오지 않은 거지? 아무도 막는 사람이 없고 또 처음에는 저렇게 큰 화재가 아니었을 텐데?“ “만일 자기가 불을 냈다면, 혼자 도망칠 애는 아니에요. 그 애는 장 서관을 자기 몸처럼 사랑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데 갑자기 오이지스의 온 몸에 난 의문의 상처들이 떠올랐다. 그 때 나우플리온도 같은 점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난 오히려 오이지스가 나올 힘이 없었던 거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 애는 불이 나기 전에 이미 심하게 다쳐 있었어. 누가 봐도 그건 불 에 덴 상처는 아니야." 다프넨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누군가 그 애를 때렸다면 그건..... 스콜리에 같이 다니는 아이들일 거예요. 하지만 최근 그렇게까지 심하게 때릴 이유도 모르겠고..... 어 쨌든 그렇다면 오이지스는 다친 다음에 혼자서 장서관에 들어가 잠들 기라도 했던 걸까요?“ “그럼 화재는 누가 내고?” 다프넨이 말문이 막혀 있는 동안 나우플리온은 풀숲 한쪽에 놓아두 었던 어떤 물건을 집어 올려 다프넨에게 건네 주었다 다프넨이 보니 그것은 시커멓게 그을린 자물통이 붙은 뻗침쇠였다. 장서관에서 주워 온 것이 분명했다. 다프넨은 그걸 집어서 살펴보다가 미간을 찡그리며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나우플리온이 말했다. “너도 알겠지?” “자물쇠가 잠겨 있네요? 오이지스가 이걸 다시 잠갔을까요?” "글쎄, 그건 별로 좋은 추측이 못되는 거 같은데. 자물쇠는 문 밖에 달려 있잖아. 안에서 잠그는 건 빗장이고." 다프넨은 고개를 푹 숙였다가 확 막힌 목소리로 한 마디 한 마디 힘 주어 내뱉었다. "그렇다면.... 그 앨 두고 누군가가 밖에서 문을 잠갔단 말인가요?“ 나우플리온은 담담하게, 그러나 차가운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그리고 그 자는 화재를 알리러 마을에 오지도 않았어." 다프넨은 벌떡 일어섰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뺨을 달아오르게 했 다. 나우플리온은 그를 잡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서두르지 마라. 이건 얼떨결에 저지른 실수가 아니야. 처음부터 누 군가가 계획적으로 그 애를 때렸고, 화재까지 고려에 있었는지는 모 르겠지만 어쨌든 죄를 은폐하고 안전하게 도망쳐서 다시 누군가의 비 호를 받고 있어, 더구나 그건 한 명 이상이다. 확실한 증거를 잡을 때 까지 함부로 움직이지 마," 다프넨은 나우플리온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그 모든 것을 확신하죠?“ "그 애의 상처를 봤으니까." 나우플리온은 문득 자조적으로 웃었다. "어려서 나 역시 여러 아이들에게 따돌림당한 일이 있었지, 나는 오 이지스처럼 얻어맞기보다는 도리어 녀석들을 두드려 패고 다녔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 나이 소년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구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오이지스의 얼굴..... 그건 조직적이고 잔인 한 상처였지. 아이들끼리 홧김에 치고 받고 하다가 생길 수 있는 상처 가 아니고, 비슷한 또래라면 한 명의 힘으로 그만큼 때리는 것도 무리 야. 만일 한 명이라면 그건 어른일 거고, 아이들이라면 확실히 여러 명이다. 장서관에 간 것은 녀석들의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오이지스 가 달아나다가 쫓겨 들어간 것일까? 네 말대로라면 맨 처음 문을 딴 것은 확실히 오이지스이겠지.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열쇠를 빼앗겨서 안에 갇혔고, 그대로 화재 속에 방치된 거야. 불을 일부러 질렀을까? 그게 가장 궁금한 점이야. 만일 불이 난 것이 오이지스의 실수가 아니 라 누군가 다른 녀석의 행동이라면.....“ 나우플리온은 몸을 일으키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녀석은 틀림없이 사형감이다. " 그 말은 모르페우스가 했던 때와는 달리 훨씬 강렬한 섬뜩함을 지 니고 있었다. 바로 나우플리온 자신이, 그 사형을 직접 집행하는 사제 인 것이다. 오이지스가 깨어나 주기만 한다면 모든 증언을 직접 들을 수 있을 테고 복잡한 추리도 필요 없을 터였다. 그러나 오이지스는 점점 더 상 태가 나빠져 갔다. 그로부터 다시 사흘 뒤, 다프넨은 오이지스를 보러 갔다가 모르페 우스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장서관이 타 버린 후로 사람들 이 버린 낡은 집에서 임시로 생활하고 있는 제로가 그간 한 번도 오이 지스를 보러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게 정말인가요?” "여기 오지 않는 것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찾아오는 것도 거절하고 있어. 밖에 나오기나 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다프넨도 제로를 찾아갔다가 방문을 사절한다는 푯말을 보고 돌아 나온 일이 이미 몇 번이었다. 그러나 오이지스는 그가 자신의 몸을 돌 보지 않고 불 속으로 들어가 구해올 정도로 아끼는 아이가 아닌가, 그 런 아이가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는데 보러 올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프넨은 제로가 방문을 거절하더라도 반드시 들어가 보 아야겠다고 마음먹고 그 날 오후 제로가 살고 있는 집으로 갔다. 집은 몇 년 간 아무도 돌보지 않던 폐가인지라 섬사람들이 대략 수 리해 주었는데도 안쓰러울 정도로 초라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문 앞 에는 여전히 예의 푯말이 달려 있었지만 다프넨은 상관 않고 문을 두 드렸다. 그의 손에는 장서관의 폐허 속으로 목숨 걸고 들어가 건져 온 몇 권의 책이 들려 있었다. 답이 없자, 다시 두드렸다. “아저씨, 다프넨이에요! 꼭 좀 뵈어야되겠으니 이 문 좀 열어 주세요?" 한참만에 안에서 낯익은, 그러나 동시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려 있다." 문을 연 다프넨은 들어가려다가 잠시 주춤했다. 바닥에 갖은 물건 이며 쓰레기들이 구분 없이 흩어져 있어 어딜 밟아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정면을 보니 안쪽에 칸막이 하나도 없이 그냥 놓인 낡은 침대 에 제로가 앉아 있었다. 제로는 다프넨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 니 미소도 없이 단지 말했다. "지저분하지. 그냥 들어와라." 문을 닫고 바닥의 물건들을 피해 침대 앞까지 갔지만 걸터앉을 만 한 의자도 없었다. 겨우 상자 하나늘 끌어당겨 앉은 그는 제로의 얼굴 이 몹시 거칠하다는 것을 느끼고 물었다. “어디 몸이 안 좋으신 것 아닌가요?” 머리며 수염 따위는 물론이고 옷매무새도 전혀 정돈되어 있지 않았 다. 예전에 장서관은 여러 가지 잡동사니들이 많아서 어수선하게 보 이긴 했어도 모든 물건이 집주인을 위해 편리하게 배열되어 있는 안 락한 장소였다. 그러나 이곳은 아니었다. 폭풍이 한 차례 지나가고 난 것처럼 그리 많지도 않은 물건들이 모조리 멋대로 뒤섞여 있었다. "괜찮아." 그의 말투는 예전과 비슷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무미건조하게 들렸 다. 다프넨은 마음 속에 부쩍 불안감이 커지는 것을 느끼며 제로의 얼 굴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제로는 그런 다프넨의 눈길을 피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시선이 자꾸 다른 방향으로 향하며 흔들렸다. "이렇게 왔는데 아무 것도 줄 게 없어서 미안하구나. 그래, 무슨 일 로 온 거니?“ 그 말에 다프넨은 더 어이가 없었다. 다프넨의 손에는 지금 폐허 속 에서 건져온 서너 권의 책이 들려 있었다. 그런데 제로는 그걸 보지도 못한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아저씨, 이것.....“ 다프넨은 제로의 무릎 위에 책들을 놓았다. 제로는 그걸 잡더니 그 제야 알았다는 것처럼 말했다. "아..... 어디서 가져온 거지?“ "장서관 안에는 생각보다 책이 많이 남아 있더라고요. 잘 살펴보면 대략 4분의 1 정도는 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아, 그래......“ 제로는 한참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이제 와서 뭐...... 고맙긴 하다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도무지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더 이상 뭐라 붙일 말이 없어서 다프넨은 오이지스 이야기를 꺼냈다 "오이지스가 계속 상태가 안 좋은 모양이에요. 모르페우스 사제님 께서도 상태 호전에는 비관적이시고......“ 왜 문병하러 오지 않았느냐고 직접적으로 따져 물을 입장은 아니라 서 약간 돌려서 말했는데 대답을 들으며 다프넨은 더욱 당황했다. "죽고 사는 문제가 어디 사람의 몫이겠어. 다 그 애 운에 달려 있는 것이고. 가서 본다고 죽을 애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겠지." 제로는 이렇게 시니컬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죽은 일리오스 사제가 저런 식으로 말했다면 놀라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이제 말문 이 막혀버린 다프넨이 머쓱하게 눈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는데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약병처럼 보이는 것들이 네댓 개 테이블이며 창 틀 위에 놓여 있는데 하나같이 뚜껑이 열린 채로 그냥 방치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제 확실히 뭔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낀 다프넨이 집안을 차근차근 살펴보니 이상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음식 먹은 그릇이 아무 데나 놓인 채 잊혀진 것 같다거나, 옷을 뒤집힌 채로 걸어 놓았다거 나, 나름대로 차곡차곡 쌓은 듯 보이는 것이 실은 불규칙하게 이리 뒤 집히고 저리 뒤집힌 상태로 올려져 있다거나..... 그 모든 것이 가리키는 사실은 단 한 가지였다. 다프넨은 제로를 바 라보다가 가만히 손끝을 뻗어 제로의 뒷덜미를 가볍게 찔렀다. 예상 대로 제로는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뻗어오던 다프넨의 팔 은 전혀 보지 못한 것처럼. "어, 네가 그랬니." 다프넨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제 얼굴 지금 보이세요? 아저씨, 제가 지금 무슨 표정 하고 있는지 보이세요?“ “.......” 다프넨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최악이었다.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나 쁜 상황이었다. 그렇게 책을 좋아하고 평생 책과 함께 해 온 제로가 이제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어째서..... 왜 그렇게......“ 무슨 말을 이어가야 할 지도 모르면서 다프넨은 너무도 안타까워 몇 번이고 입을 열었다가 다물기를 되풀이했다. 그러자 제로가 무미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본래부터 눈이 별로 좋지 않았어. 어두운 곳에서 책을 많이 봤기 때문이겠지. 일리오스는 내가 움직이기 싫어하는 걸 알고 손잡이 하 나로 한꺼번에 창을 열 수 있는 장치까지 만들어줬는데 난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어오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해서......“ “그런.... 그런 것이 아니잖아요...... 저번의 그 일 때문이죠? 그 불.....“ "영향이 있겠지. 뭐.... 그래도 왼쪽 눈은 아직 조금 보여." 제로는 화재 속에서 자신이 실명하게 된 상황에 대해서는 설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그쳐 물을 수도 없고, 다프넨은 애가 타서 어 쩔 줄을 몰랐다. 제로가 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가슴을 너무도 아프게 찔렀다. "시력이 없어지면서 읽을 책도 같이 없어져버렸으니 여러 모로 아 귀가 잘 맞는 사건이랄 밖에." "아저씨!" 다프넨은 제로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부둥켜 잡았다. 자신이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은 돌이 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엉망이 된 집, 뚜껑을 찾 지 못한 약병, 잊혀져버린 그릇, 정리하려 애써도 이미 불가능한 그 모든 것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다프 넨을 슬프게 했다. 왜, 왜 세상엔 이런 일 따위가 벌어지는 것인지, 도 대체 왜! 다프넨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낀 듯, 제로가 왼손을 뻗어 그의 두 손을 밀어냈다. 애써 담담해지려 애쓰고 있었지만, 처음으로 감정이 드러난 목소리로 제로가 말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누구에게도 피해 주고 싶지 않거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저씨를 이런 상태로 계속 사시도록 둘 수 는 없어요!" "아니, 그냥 내버려 둬 " 제로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손을 들어 두 눈을 가렸 다가 뗐다.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세상이 어떠할지 두 눈이 잘 보이 는 다프넨으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제로는 나직이 말했다. "아직은 조금 보이는 것이 있어. 점점 나빠지고 있긴 하지만. 곧 때 가 오겠지. 그 때까지만이라도 혼자서 해나갈 수 있게 해 줘. 모르페 우스 사제가 와도 안 보이는 눈을 보이게 할 수는 없어. 전부터 눈이 자꾸 침침해지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시력에 대한 건 예전에 거의 다 알아봤어. 결국 나는 사람들의 짐이 될 거야. 잘 알고 있어. 그렇게 되기 전에 마음의 준비는 좀 해둬야 될 것 아니니. 오이지스를 찾아가 지 못하는 것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그런 식으로 발각 당 하고 싶지 않아. 사람들이 놀라서 호들갑 떠는 것도 그다지 보고 싶지 않으니까. 좀더 준비를 한 다음에......“ 사람은 누구든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이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 리기 마련이었다. 끝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분노를 엉뚱한 방향으로 표출해 버린 섭정과 같은 사람도 있지만. "알겠습니다......“ 이제 책에 대해 미련을 갖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을 터인데 굳이 책 을 가져온 자신이 어리석게 생각되었다. 왜 이런 상황을 한 번도 예상 하지 못했단 말인가. 초점이 맞았다 안 맞았다 하는 제로의 눈을 보고 있노라니 세상의 돌이킬 수 없는 모든 것들이 원망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자신의 두 손이 사라져 더 이상 검을 휘두를 수 없게 된다면 이것과 비슷한 기분 일 것인가. "용서하세요.....“ 두 사람은 말없이 오랫동안 마주앉아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흐르 다 고리처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얼마든지 가만히 기다릴 터인데. 다프넨은 일어섰다. 무어라 작별 인사를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저 고개를 꾸벅 숙이다가 다시 보이지 않을 거란 걸 깨닫고 입을 열어 그 만 가겠다고 말했다. 안녕히 계시라는 말은 차마 입에서 떨어지질 않 았다. 제로는 고개만 끄덕였다. 문을 나서려는데 제로의 나지막한 목소리 가 귓가에 들려왔다. “내 꿈에 불이 질러졌어.... 모조리." 문을 닫은 후 다프넨은 그 문에 잠시 기대섰다. 자신이 나우플리온의 제자만 아니었어도 제로의 곁에서 평생 그를 도와주고 싶다고 말해버렸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건 어쩌면 순간 적인 기분일 것이고, 이후 후회할 지도 모르는 결정이었을 것이다. 분 명 그는 지금 책임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런 식의 희생은 그 누구라 해도 쉽게 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런 희생을 당연한 듯 말하 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위선자였다. 화재가 나기 전 묘지에서, 또 그 이전에 장서관에서 섬의 과거와 미 래에 대해 말하던 제로를 떠올려 보았다. 그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었 고, 본인의 한계 너머에 있다고 생각되는 다프넨에게 자신이 버리지 못한 희망을 말했다. 그것에 대해 확실히 약속하지도 못한 자신이었 다. 그리고 지금이라 해서, 역시 확답할 수도 없는 자신이었다. 오이지스의 이름이 '아픔' 이라는 뜻이라 했을 때 다프넨은 그가 평 소 당하던 일들을 떠올리며 이름의 의미가 안타까울 정도로 잘 맞는 다고 생각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이름에 담긴 의미는 훨씬 더 참 혹했다. 짧은 일생 내내 남에게 짓눌리고 쫓기며 비굴하게 살다가 평 소 품어왔던 꿈조차 펴보지 못하고 저렇게 되어버린단 말인가? 달아나고 싶을 정도로 우울한 오후였다. 섬에서 살게 된 후 수많은 일을 겪었지만 한 번 대륙을 등진 이상 돌아서지 않고 자리를 지키겠 다는 마음이 그를 지탱해 왔다. 그러나 지금만은 대륙에서 그랬듯이 땅의 현실로부터 달아나고 싶은 심정이 그를 사로잡아 짓눌렀다. 달아나면, 새로운 곳에는 행복이나 희망이 있나? 자신이 누구보다 도 잘 안다.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을. 희망은 내버리고 새로 쥔 것이 아 니라, 끝내 버리지 않는 것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만은 너무도 피곤하다. 소용없는 짓이란 걸 알면서도, 죽은 자처럼 쓰러져 쉬고 싶을 정도로. 2장 Haunted Land 1. 진실을 찾아서 “각하, 아가씨가 오셨네요." 섭정의 집에 오면 문 밖에 내놓은 평상에 앉아 나물을 다듬거나 생 선을 손질하거나 하고 있는 절은 부인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섭정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보통 그녀에게 가볍게 예를 표하고, 그러면 그녀 는 손을 닦고 일어나 집 안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방까지 가서 방문자 가 왔음을 알리기 마련이었다. 때때로 그녀가 자리를 비우고 없으면 사람들은 그 평상에 앉아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아니면 다음에 찾아오거나 하는 것말고 다른 방법이 없었다. 몇 가지 드문 예 외를 제외하면 그녀를 거치지 않고 섭정을 직접 찾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오늘 찾아온 것은 그 몇 안 되는 예외에 속하는 한 명이자 유일하게 그녀에게 예를 표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오히려 그 부인이 없는 시간에 찾아와 다짜고짜 섭정의 방으로 달려들어가는 것을 더 좋아하 는데다 만일 있다 해도 심지어 무시해버리고 지나치는 일도 있었다. 어찌 됐든 명목상 자신의 어머니인데도 말이다. "들어오래라." 턱끝을 까딱까딱 하며 기다리고 있던 리리오페는 방 안에 있는 섭 정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재빨리 문을 밀고 들어가 냉큼 닫았다. 양 어머니의 얼굴을 보기 싫다는 무언의 표현이었다. "그렇게 싫으면 아침나절에 오려무나." 섭정도 리리오페가 부인을 싫어하는 걸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묵 인하는 것은 자신 역시 그녀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존중하는 것은 섬사람들로 족하며, 자신들 부녀는 그럴 필요 가 없다는 이상야릇한 생각이 그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아침엔 스콜리에 가야 되잖아요. 아아 지겨워, 언제나 끝날까." “한 해밖에 남지 않은 걸 뭘 그리 신경 쓰느냐." "올 봄엔 정화 의식도 할 텐데, 내친김에 확 졸업해버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아무리 섭정의 딸인 리리오페라 해도 섬의 오랜 규칙을 멋 대로 깰 수는 없었다. 리리오페는 헥토르와 마찬가지로 1월 태생인지 라 올해 초에 I5세가 되었다. 따라서 헥토르가 그랬듯 정화 의식을 먼 저 하고 그 다음 해에 졸업할 예정이었다. 리리오페가 그토록 졸업을 바라는 것은 단지 귀찮은 일을 덜고 싶 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화의식과 스콜리 졸업, 그 두 가지 조건이 갖춰지는 순간 그녀는 명실공히 섭정의 뒤를 이을 소녀로서 사람들 앞에서 확고한 권위를 보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평범한 소녀처 럼 행동하는 일은 지겨워졌고, 사제들과 같은 특권 계층이 될 수 있다 는 희망만이 그녀의 의식을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요, 아빠, 이번에 저기 장서관에 불났던 일 말이예요. 그게 정말로 그냥 실수로 일어난 화재였을까요?“ 섭정은 반쯤 감고 있던 눈을 조금 뜨더니 리리오페의 얼굴을 살펴 봤다. 그리고 별 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실수가 아닌들, 뭐 별 일이겠느냐. 그런 걸 파헤쳐서 네게 득 될 것 이 없느니라." "장서관이 탄 것 자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거기에 있던 책들은 아무 쓸모가 없었을까요?“ 섭정은 가만히 있다가 나직이 말했다. "그곳이라면 내 언제고 한 번 손을 보아주려 했거늘. 이런 일을 두 어 손대지 않아도 일이 풀려간다고 하지," 리리오페는 장서관에 무엇이 있는지, 섭정과 일리오스 사제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몰랐으므로 섭정이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까닭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본래부터 장서관에 관심이 없었기에 그 런 것쯤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뭐 그럴 지도 모르지만요. 하지만 좀 궁금한 것이 그 땅꼬마 녀석 을 확실히 누가 때렸던 것 같은데 때릴 사람이라면 뻔하거든요? 아빠 도 아실 테지만요. 그 애들이 혹시라도 화재랑 관련이 있다면 그걸 알 아두는 것이 아빠한테 도움되지 않겠어요?“ 리리오페나 섭정 역시 나우플리온과 다프넨이 가진 것과 비슷한 심 증으로 에키온 일당을 지목하고 있었다. 다만 다프넨이 모두가 무죄 라는 최초의 생각에서부터 이상한 점을 찾아 혐의를 차근차근 밟아나 갔다면, 리리오페는 증거가 뭐 어찌됐건 평소 생각하던 대로 대뜸 혐 의자를 찍은 셈이었다. "에키온은 네 사촌인데 굳이 그들과의 관계에 골을 팔 필요는 없을 것이야. 리리, 너는 아직도 헥토르가 못마땅한 것이냐?“ 리리오페는 입술을 조그맣게 비죽이다가 입을 다물었다. 섭정의 말 이 옳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헥토르와 인연을 맺지 않아도 될 핑계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리리오페가 자신의 불만을 감히 입으로 말하지 못하고 있는데 뜻밖 으로 섭정이 먼저 말했다. “헥토르와 너는 둘 다 청동 표범 지파에 속하니 전통적 관례에 맞는 혼인이랄 수는 없겠지. 정히 그가 싫다면, 그보다 나은 상대자로 적당 한 이가 있느냐?“ "아빠!" 리리오페는 예쁜 눈썹을 찡그렸을 뿐, 이어서 말하지는 않았다. 섭 정의 입가에 미소가 조금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입에서 리리오페가 바라마지않던 말이 흘러나왔다. “네가 택하고자 하는 것이 혹 검의 사제가 될 소년이라면, 그걸로도 좋을 것이야." 리리오페의 얼굴이 순간 살짝 달아올랐다가 금세 가라앉았다. 섭정 의 말이 예전의 반대를 철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달리 보면 그가 반드시 검의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전제 속에서만 허락하고 있 는 셈이었다.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리리오페는 조금 후 눈을 살짝 치뜨며 대꾸했다. “잘못된 말씀은 아니에요. 어쨌든 전 패배자는 원치 않으니까요. 내 게 어울리는 상대는 승리자가 아니면 안 돼요." 그것이 결투의 패배자였든, 실버스컬의 패배자였든, 검의 사제가 되지 못한 패배자였든, 그녀가 원치 않는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손쓸 수 없는 나날이 흘러갔다. 모르페우스 사제가 오이지스를 이제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소생 은 불가능하다고 말한 후로 이미 이틀이 흘렀다. 그 동안 다프넨은 한 가지 가능성에 대해서 몇 번인가 생각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역시 무 리라고 생각하며 생각을 접곤 했다. 스콜리가 파하면 모르페우스 사제의 집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오 는 것이 요즘 그의 일과가 되었다. 그 날도 그런 식으로 모르페우스의 집을 거쳐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아직 낮인데 나우플리온이 먼저 와 있 었다. 보아하니 나우플리온은 다프넨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모 양이었다. "이리 와서 앉아 봐. 소식이 좀 있어." 첫 번째 의혹이 제기된 후로 나우플리온은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서 약간의 조사를 했다. 화재가 났던 날 다프넨 또래 소년들의 행적을 알 아본 결과, 그 날 마을 사람들이 장서관으로 달려가기 전에 얼굴이 창 백해진 한 소년이 좀 이상한 태도로 마을 어귀에 서 있었던 것을 기억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스콜리의 교장과 이야기해 보니 전날까 지는 멀정하다가 화재 다음 날 갑자기 몸이 아프다며 스콜리에 나오 지 않은 아이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 중 둘은 그 다음 날도 나오지 않 았다고 했다. 다만 그들 가운데 에키온은 끼여 있지 않았다. “하지만 너와 나의 심증으로 그들이 누구인지 확실히 지목할 수 있 게 된다 해도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한 아무 소용이 없어. 기적이 일 어나서 오이지스가 깨어나 모든 상황을 말해주거나, 그들이 스스로 자백해 오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 되겠지. 답답한 상황이야." 나우플리온은 깍지낀 손을 머리 뒤로 올리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 다. 다프넨은 그가 굳이 직접 나서서 이런 조사까지 하는 이유가 다프 넨 자신의 죄책감 때문일 것이라 생각되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녀석들을 은밀히 겁주는 것 정도랄까. 예를 들 어 네가 장서관에 들어갔을 때 실은 오이지스가 약간 의식이 있어서 뭔가 말을 남겼다던가, 그런 식이지." "저, 나우플리온. 전에 벨노어 저택에 있을 때 말이에요..... 그 때 란 지에 동생 란즈미 기억나시죠?“ 나우플리온은 다프넨이 하려는 말을 바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소통“ 이라는 것이지 오이지스에게 그걸 쓸 수는 없냐고 묻고 있 는 거냐? 물론 써볼 수는 있겠지만....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그 건 어느 정도 기력이 있는 상대일 경우에만 안전해. 란즈미와는 달리 오이지스는 지금 몸의 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사 람의 영혼과 직접 맞부딪쳤다가는 그 충격으로 약하게 붙어 있는 숨 이 끊어져버릴지도 모른다. " 다프넨은 불쑥 이렇게 말했다. “만일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있어서 그 때의 상황을 모두 목격하고 있었거나.... 그렇다면 좋을 텐데요." “달여왕을 말하는 거냐? 하지만 달여왕은 모든 것을 보았다 해도 이런 경우 흔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달여왕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프넨은 우물쭈물하다가 다 시 말했다. “달여왕 말고..... 예를 들면 죽은 사람의 영혼 같은 것이 남아서 떠돌 고 있었다거나.....“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우플리온은 의아한 듯 눈동자를 굴리더니 다프넨의 얼굴을 정면 으로 바라보았다. “너, 그 날 장서관에서 오이지스 말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죽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냐?“ “네에? 그럴 리가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잠깐, 너 만일에 정말로 그런 혼 같은 게 떠돌 고 있다고 한들 그들이 우리와 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다프넨은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말을 한들 나우플리온이 그 말을 믿어줄 지 쉽게 확신할 수가 없었다. 제로 아저씨가 곁에 있었더라면 좀더 이야기가 쉬웠을 터인데. 그런데 놀랍게도 나우플리온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너, 직접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있는 거구나? 적어도 그렇 게 믿고 있는 거지? 내 말이 맞냐?“ "아니, 그런 일이 정말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야, 임마. 네가 지금 방금 그렇다고 먼저 말했잖아. 네가 그렇게 말 하니까 혹시나 싶어 묻고 있는 거 아냐." "그게.......“ 나우플리온은 피식 웃더니 말했다. “너, 지금까지 내가 네 얘기를 무작정 거짓말이라고 몰아붙인 적도 없는데, 방금 내가 네 말을 무조건 안 믿을 거라고 생각한 거냐? 거 참 도무지 신뢰라곤 말라버린 녀석이군." “........” 왜 이렇게 자신은 부정적인 결과만 미리 짐작하는지 몰랐다. 무안 해져 얼굴까지 약간 붉힌 다프넨은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실은 오래 전부터의 이야긴데요.....“ 맨 처음 섬에 도착해서 보았던 환각만은 나우플리온도 알고 있는 터였다. 그 때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발소리 같은 것이 들렸는데, 지 금 생각해 보면 엔디미온을 비롯한 유령 아이들이 바로 그 발자국 소 리의 주인공이 아니었나 싶었다. 그 이후로 모르페우스 사제와 윈터 러를 실험하던 도중 실종되었을 때 보았던 첫 번째 유령들, 그리고 두 번째로 절벽에서 떨어졌던 때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윗마을 에서 벌어진 괴물과의 전투에서 자신에게 빙의된 엔디미온의 힘에 대 해서 설명할 때 나우플리온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그렇다면 그는 정말로 대단한 힘을 가진 유령이로군, 안 그래? 소 년 모습을 하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 존재일지 쉽사리 짐작하 기 힘들겠는데. 게다가 그런 유령들이 한 명도 아니고, 더구나 그들보 다 나이 많은 '어른 유령'들도 있다 그 말이지.....“ 갑자기 다프넨은 꿀밤을 한 대 얻어맞았다. "이 녀석아, 왜 지금까지 그런 중대한 걸 숨긴 거야? 이거 영 못 믿 을 녀석이로세." "그런 얘길 믿어줄 거라곤 생각도 안 한걸요." “다시 한 번 말해주마. 이 '신뢰라곤 완전히 말라버린 녀석'아." “한 번 더 말해주니 충격이 무지 크군요.......” 나우플리온은 생각에 잠겨 한참동안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탁탁 두 드렸다. 다프넨은 조금 생각하다가 화재가 나던 날 제로와 함께 갔던 묘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제로 역시 그런 유령들의 존재를 본 일 이 있다는 이야기에 나우플리온의 눈이 좀 커졌다. “내가 아는 한 제로 씨는 마법적 힘과 접촉하는 재능이 보통 사람들 에 비해서도 한참 떨어지는 편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정말 이지, 그 분은 과거 문명에 대한 향수가 대단했나 보다. 그래, 그렇다 면 그들 유령을 혹 그 묘지에 가면 다시 만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렇 지, 다프넨 너, 그들을 다시 만나서 이번 일에 대해 물어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그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다프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성사될 수만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겠지. 하지만 그들을 완전히 믿어도 좋은 걸까? 지금까지는 네게 친절했다만 그게 그들을 신뢰해도 좋다는 어떤 척도가 되는 건 아니지. 무엇보다도 그들은 우 리 세계 밖의 존재들이고 그런 자들의 친절은 아무도 쉽사리 확신할 수 없는 거니까." 신뢰의 문제에 대해서만은 다프넨 자신이 반복해서 많은 사람들에 게 당한 터라 마땅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엔디미온을 믿고 싶 은 마음이 더 크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나우플리온은 다프넨의 눈 을 보고 그의 속마음을 눈치챘으나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설사 그들이 너를 위해 모든 것을 말해 준다고 치자. 그렇지만 그 건 여전히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없어. 유령들의 말을 증거로 채택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역시 오이지스가 깨어나는 것말고는 다른 방법 이 없어," “만일..... 그들에게 오이지스를 깨어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요?” "으응?“ 나우플리온은 조금 후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이것만은 그로서도 확실히 반박하기 힘든 가정이었던 모양이었다. "역시 가능성은 적겠지.... 하지만 적더라도 시도는 해 보고 싶다, 그런 이야기냐? 깨어나게 해 주기만 한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 만.... 아니, 실제로 유령이라는 존재들은 여러 사람의 의식 속을 돌아 다닐 수 있으니 만큼 아예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거야. 하 지만.....“ 말을 끌며 나우플리온은 오래 망설였다. 그러나 결국 이렇게 말하 고 말았다. "그래..... 좋아, 보내 주겠지만 너 혼자서는 안 된다. " "같이 가시겠다고요?“ “내게는 다른 누구의 사정보다도 너의 안전이 중요하니까," 나우플리온이 같이 있는 가운데 엔디미온이 모습을 드러내 줄 지는 그야말로 미지수였다. 오래 전에 이솔렛과 함께 있을 때도 엔디미온 은 다프넨의 몸 안에 숨어 있었을 뿐 그녀 앞에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 타나려 하지는 않았다. 나우플리온은 다프넨의 얼굴을 보고는 벨노어 성에서 그에게 검술 을 가르치던 때처럼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들이 어떤 존재들인지 불확실한 지금, 내가 어떤 도움이 된다고 확신할 수야 없겠지. 하지만 너를 혼자 보내는 것만은 나 자신이 용납 못 해. 이래봬도 네 보호자니까 내 의무를 다할 거다. " 다프넨은 망설였지만 나우플리온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가 장 큰 이유는 그의 마음을 이해했고 그의 결정을 존중했기 때문이었 다. 만일 실패하더라도 그 뒤 일은 그 때 다시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그 날 저녁 제로가 알려 준 은밀한 묘지를 찾아 가 밤이 오기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다프넨은 자신의 의지로 윈터러 를 꺼내 가지고 왔다. 물론 큰 천에 둘둘 말아놓은 상태였지만. 처음 묘지를 보았을 때, 나우플리온은 인상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런, 처음에 섬에 도착한 사람이 내 생각보다 많았나보군? 그 동 안 기껏 불린 인구가 요것뿐이라니 우리들은 결정적인 임무에 상당히 게을렀다고 볼 수 있겠는데." 해가 서서히 떨어지는 중이었다. 나우플리온은 주위가 어두워지기 전에 비석들을 몇 개 살펴보려 했다. 그러나 비석에 씌어진 옛 글자에 대해 영 까막눈이라는 점에서는 나우플리온이나 다프넨이나 다를 것 이 없었다. 나우플리온은 크흠, 하고 기침하며 이런 건 자신의 소명이 아니라고 변명했다. 다프넨은 나우플리온을 흘끔 보며 이죽거렸다. "사제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능력을 가지는 건 아니군요." "그럼, 당연하지. 사제들마다 고유 영역이 있는 거야. 예를들면..... 모르페우스 사제님처럼 심각하게 방을 어지를 수 있는 사제도 없을걸." “그런 사람은 보통 사람 중에도 없는데요." 대충 넘어가려고 점잖게 비석의 모양을 감상하는 체 하는 나우플리 온을 향해 피식 미소지은 다프넨은 가장 큰 비석 곁으로 가서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조금 있자니 해가 완전히 졌고, 나우플리온이 곁에 와 앉 는 것이 느껴졌다. 램프나 관솔불 같은 것은 일부러 가져오지 않았다. "예전에, 엔디미온이 자기와 다시 만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어요.....“ 윗마을에서 괴물과 혈전을 벌이기 전, 밤중에 갑자기 찾아왔던 엔 디미온은 다프넨이 알의 동굴에 남기고 간 기억의 알들을 매개로 해 서 자신과 다프넨의 의식이 맞닿는다면 두 사람 사이에 통로가 생겨 나게 된다고 말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기억의 알을 깨뜨릴 정도로 강렬한 사건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절벽에서 떨어지다가 윈터러의 힘으로 얼음 고치 속 에 갇혔을 때, 그의 혼이 다시 엔디미온과 조우할 수 있었던 것도 윈 터러의 역사가 그의 의식 어딘가에 강한 자극을 가했기 때문일 것이 다. 그러나 지금 나우플리온의 곁에서 안전하다고 느끼고 있는 자신 에게 그런 의식의 격변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하 면 좋을까. 나우플리온은 다프넨의 설명을 듣고 나서 우울한 생각에 빠진 것처 럼 말이 없었다. 다프넨은 캄캄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이제 어둠이 눈 에 익어 윤곽이라도 보이기 시작하는 비석 꼭대기들을 바라보았다. 문득, 제로가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때 잠시 잠에서 깼을 때, 제로 아저씨는 여기에서 푸른 돌로 지 어진 거대한 집을 보았다고 했어요. 아저씨가 본 유령들은 그 집을 드 나들기도 하고 또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고 하셨죠.....“ 거대한 성전인 양, 또는 사라져버린 마법의 전당인 양 위엄 있는 건물의 즐비한 기둥들이며 기둥 윗머리에 새겨진 덩굴 잎새 조 각 같은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대리석 주춧돌은 다섯 겹으로 올려지 고 긴 회랑이 남쪽과 북쪽 사면을 감싸고 있는, 세모진 박공의 아름다 운 단층 건물 안에는 예언자들의 성스러운 물이 담긴 돌그릇이 모셔 져 있고...... 거기까지 떠올렸을 때 다프넨은 저도 모르게 상상을 멈추고 말았다. 제로는 그가 본 건물의 자세한 모양에 대해 다프넨에게 설명한 일이 없었다. 어째서 이렇듯 구체적인 풍경이 떠오르는지 알수가 없었다. “'나우플리온, 기분이 이상해요......” 방금 있었던 일을 말하니 나우플리온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생각하 다가 말했다. "여기 오기 전에 얘기한 것처럼, 넌 맨 처음 섬에 왔을 때 마을 입구 에서 이상한 환각을 본 일이 있잖아. 네가 그 이후에 보았다는 죽은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오벨리스크, 그 유령 아이들과 뛰놀았다는 숲 같은 것들.... 그 모든 것이 나는 우리 세계 위에 덧씌워진 이 공간의 풍경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지금 네가 무심결에 단박에 떠올리고 만 그 건물의 모양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어. 너는 처음부 터 이 섬의 이공간을 목격할 수 있는 힘을 가졌고, 네 의지와는 관계 없이 그 안을 드나들기까지 했지. 의심할 바 없이 그건 윈터러의 영향 일 거다. 너는 지금 그 검의 눈을 대신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몰라." 그 말에 다프넨은 상당히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렇더라도 지금은 상관없어요. 만일 그렇다 해도 저와 이 검이 서 로 공생하고 있는 것인지 누가 알겠어요? 그 검은 저를 이용하고, 저 는 검을 이용해서 각자 갖고 싶은 걸 갖겠죠." 상당히 위험스런 발언이었으나 나우플리온은 다프넨의 얼굴을 잠 시 보기만 했을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프넨은 눈을 강았다. 윈터러가 그에게 특별한 것을 볼 수 있는 눈 을 빌려주고 있다면, 사양하지 않고 마음껏 이용할 것이다. 오늘과 같 은 상황에 처하여 가질 수 없는 힘조차도 간절히 원할 터인데, 가질 수 있는 것을 왜 마다하겠는가. 너의 힘은, 곧 나의 힘이다. 어둠이 반투명한 베일을 쓰고 있는 것처럼 묽게 번들거렸다. 하늘 아래 땅 위, 높은 절벽은 드레스 자락처럼, 산 흙 위에 죽은 자의 이름 을 갖고 우뚝 늘어선 묘석들, 검은 덩굴과 밤의 이끼, 무너졌다가 다 시 세워진 포석의 도시 위를 나는 은청의 나비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청색 밤과 달의 은으로 벽을 바른 키 큰 성전이 천 년 전에도 있었 고, 지금도 있다. 지금 그것은 그림자로 지어졌다. 밤 가운데 걷는 반 투명한 자들은 살아 있는 인간의 그림자이다. 그들의 옷자락은 안개 로 이루어졌다. 은빛 머리채를 지닌 한 사람이 천천히 걷다가 고개 돌려 그를 보았 다. 그리고 입술만 움직여 무어라 말했다. 들리지 않았다. 들으려 애 써 보았지만 사방이 고요한데도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 프넨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귀를 기울이면서 자신도 무어라 힘주 어 말하려 했다. 그러나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다프넨은 상대의 입술을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이윽고, 소리가 들 리지 않는 데도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손을 놓아, 그 사람의 손을 놓아.' 무슨 손을 잡고 있다는 걸까? 다프넨은 의아해하다가 문득 자신의 손에 무언가 잡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나우플리온의 손이었 다 눈 감기 전에 그의 손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우플리 온 역시 다프넨의 손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안개옷을 입은 은색의 사람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 손을 놔. 그의 손을 놔. 다프넨은 잠깐 손을 놓아보려 했지만 나우플리온 쪽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잠깐 동안 몸부림치다가 갑자기 어깨가 마구 뒤흔들리는 느 낌이 들었다. 무슨 소리가 그의 귀에 닿으려 수없이 부딪쳐 왔으나 보 이지 않는 휘장에 막혀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한 단 어가 막을 뚫고 그의 귀에 도달했고, 동시에 눈이 번쩍 뜨였다. "보리스!" 그의 어깨를 움켜쥐고 흔든 것은 물론 나우플리온이었다. 그의 이 름을 부른 것도 그였다. "아.... 왜 그래요?“ "옛 이름을 불러야만 정신이 드는 거냐? 잠들었던 거야, 아니면.....“ 나우플리온은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다프넨이 갑자기 손을 꿈틀거 리며 그의 손을 뿌리치려 하는 걸 느끼고 불안한 마음에 황급히 그를 깨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수 번이나 불렀던 ‘다프넨'이라는 이름은 그의 의식에 가 닿지 못했다. 그를 깨운 것은 옛 이름, 보리스였다. 다프넨은 흐려진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새벽 안개처럼 빛 나는 몸을 갖고 있던 사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 봤어요." “그들을?” 다프넨은 잠시 자신이 보았던 것을 눈앞에 떠올려 본 뒤 말을 이었다. "어떤 사람이 저를 불렀어요. 그런데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어요. 그 는 내게 당신의 손을 놓으라고 했죠. 나는 손을 놓으면 그의 목소리가 들릴까 싶어서......“ "그래서 손을 놓으려고 했어? 이것 참, 너란 녀석은 도대체.....“ 나우플리온은 약간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그는 놓았던 다프넨의 손을 다시 아플 정도로 꽉 움켜쥐더니 말했다. “내 손을 놓고 갈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라. 예전처럼 며칠씩 깨어 나지 않게 되거나, 심지어 영영 깨어나지 못하게 되도록 내버려 둘 생 각은 전혀 없으니까." 어떻게 하면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다프넨은 그냥 하늘을 을 려다보았다. 머리 위의 하늘은 조금 전과 같았고, 불확실한 것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본래 죽은 사람은 얼마동안 자신을 잊고 욕망뿐인 상태가 된대요. 그들이 아무런 욕망 없는 상태로 산사람을 바라볼 수 있게 되려면 아 주 오랜 시간이 필요한가봐요. 물론 제가 만난 그들은 그렇게 될 만큼 아주 오래 살아왔고요." "그것 역시 유령들이 이야기한 거겠지? 그들이 네게 아무 욕망을 안 갖고 있는지 너 역시 확신할수 없잖아?“ “믿고 싶다는 말만으로는 항상 충분하지 않으니까... 아마도 그렇겠지요." 밤바람이 찼다. 아직은 5월도 안 된 초봄이었다. 나우플리온은 가 져온 담요를 다프넨의 어깨에 둘러 주고 쭉 기지개를 켰다. 그러더니 농담처럼 한 마디 던졌다. "이제 네가 없으면 난 어떻게 살까 모르겠네." 다프넨은 아무 대답도 못 하고 그냥 잡고 있던 나우플리온의 손을 조금 더 꼭 쥐었을 따름이었다. 이솔렛과 함께 할 수 있다해도 그게 나우플리온의 마음을 조금이라 도 상하게 한다면 결국 자신은 견디지 못할 것이다 이럴 수밖에 없었 던 거다. 모두 처음 알았던 그 때 그대로, 누구의 마음도 상하지 않도 록 그냥 그대로. 이미 자신은 변했고 '예전처럼' 이라는 것이 더 이상 진실한 행복이 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다프넨은 되풀이해서 그렇게 생각했다. 돌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려 했다. 자신만 견뎌내면 되는 것이다. 이솔렛 도, 나우플리온도, 지금 그대로 좋을 테니까. “나우플리온, 그러면 이번엔 이렇게 해요. 제가 당신의 손을 끌어당 기거든 그냥 나를 따라오는 거예요. 서로 손은 놓지 말고, 제가 무슨 짓을 하든 같이 가 주시는 거죠.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해도 뭔가 볼 수는 있지 않겠어요?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걸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해 요." 다시 한 번 눈을 감고, 등에 매어 놓은 윈터러의 감촉을 느끼며 비 석에 기댔다. 왼손은 나우플리온의 오른손에 확 잡혀 있었다. 그런 상 태로 그는 인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아까 그 사람은 바로 그의 눈앞에서 기 다리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손짓하며 뭐라고 말했다. 다프넨은 손을 놓지 않고 일어섰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가니 그는 조금 멀어지면서 다시 뭐라고 말했다. 그런 식으 로 둘은 천천히 이공간의 땅에 세워진 청석의 성전 앞까지 갔다. 가끔 정신이 아득해져 나우플리온의 손을 놓을 뻔할 때에도 나우플 리온 쪽에서 그의 손을 놓지 않았기에 계속 같이 갈 수 있었다. 아마 도 나우플리온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리라. 그러나 그는 자 신의 앞에 흡사 절벽과 같은 높이로 솟은 육각의 기둥들을 보고 있었 다. 달빛 가루를 바른 것처럼 반짝거리는 푸른 돌의 집이었다. 좌우로 십 미터나 뻗어 있는 계단의 한가운데를 올랐다. 발에 닿는 바닥의 감촉이 단단하면서도 미끄러웠다. 다섯 겹의 주춧돌을 모두 올라 정면의 홀에 이르니 수많은 그림자 인간들이 그 안에서 이리저 리 돌아다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질서는 없었지만 그들의 걸음은 느리고 몸짓은 부드러웠기에 서로 부딪치거나 뒤엉키는 일은 일어나 지 않았다. 다프넨은 한참동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를 돌아보 지 않았기에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다.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말을 걸 수도 없었고, 맨 처음 그를 이곳으로 인도한 자 역시 그들 사 이에 섞여 들어가 버려서 다시 찾을 길도 없었다. 마치 느린 윤무 를 구경하러 온 철모르는 소년이 된 기분이었다. 그 때, 그렇게 미끄러지며 떠도는 혼들 사이에서 갑자기 한 명이 빠 져나와 곧바로 그의 앞으로 달리다시피 다가왔다. 그의 얼굴을 보고 다프넨은 크게 놀랐다. 다름 아닌 엔디미온이었던 것이다. 기대는 했 지만 이런 식으로 만날 줄은 몰랐다. “......” 그러나 여전히 아무 말도 통하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매우 놀란 듯 한 얼굴이었고 계속해서 빠른 말로 그에게 뭐라 지껄였지만 한 마디 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프넨 역시 질문을 퍼붓고 있었지만 어느 것 하나 가 닿는 것 같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금방 이유를 눈치챘다. 그는 손을 내밀어 다프넨의 손 을 가리키더니 또렷한 입술 모양으로 ‘손을 놓아' 라고 말했다 다프넨은 고개를 저었다. 엔디미온을 믿거나 안 믿는 것을 떠나 나 우플리온의 뜻을 어길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엔디미온은 더욱 의아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잠시 후 마음을 고쳐먹고 입술 모양과 손짓으로 그에게 말했다. 몇 마디는 몇 번 되풀 이하고서야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들어오지 마. 저들 가운데 대부분은 그냥 과거의 그림자일 뿐, 실제 로 인간의 혼이었던 나 같은 유령은 고작 몇 명 뿐이야. 지금은 저들 의 생각에 잠겨 너를 보지 못하고 있지만, 만일 보게 된다면 결코 간 단히 보내주지 않아, 널 여기로 데려온 건 '유혹하는 그림자'였지? 그 는 실체가 없는 자야. 그를 따라온 건 안전하지 못했어. 어서 밖으로 나가. 네 손을 잡은 사람 때문에 너는 어느 쪽 공간도 아닌 경계에 걸 려 있구나. 다프넨도 엔디미온과 비슷한 방법으로 의사를 전달하려 했지만 한 쪽 손이 묶인 꼴이라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나 엔디미온은 대강 알아 들은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둘러 나가라며 입구 쪽을 가리 켰다. 다프넨은 고개를 저으며 입술만으로 말했다. ‘난 너를 만나러 온 거야,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 엔디미온은 잠시 생각하더니 앞장서서 나가며 따라오라고 손짓했 다. 다프넨은 방향을 바꾸어 그의 뒤를 따라갔다. 주춧돌을 다 내려오 니 긴 포석길이 아주 먼 곳까지 깔려 있었다. 끝은 안개에 가려져 보 이지 않았다. 그들 둘은 포석길에 들어섰다. 걷다가 문득 보니 엔디미온의 옷차림이 예전에 보던 것과 많이 달 랐다. 치렁치렁한 옷자락 곳곳에 흰 보석가루 같은 것이 희미하게 뿌 려졌고, 소매에는 은빛 매가 수놓아진 것이 눈에 띄었다. 머리카락 사 이로 단순하게 생긴 금빛 관도 언뜻 보였다. 잠시 후 엔디미온은 포석길을 벗어났다 언제부터였을지, 걷던 길 왼쪽으로 비탈진 골짜기가 따라오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골짜기 자락 안쪽에 뚫린 동굴 입구로 들어갔다. 동굴 내부에는 네모진 벽돌로 허리 높이 정도의 벽을 둥그렇게 돌 려 쌓아 흡사 물 마른 우물 같기도 하고 욕탕 같기도 한 장소가 있었 다. 머리 위가 뚫려 검푸른 하늘이 엿보였고, 흡사 어둠속에서 나타 난 듯한 녹색 덩굴손들이 죽죽 늘어져 어깨까지 닿았다. 엔디미온은 벽 가장자리에 가볍게 올라앉아 발을 내리고는 다프넨 을 돌아보았다. 그의 입술이 ‘할 말이 있으면 해' 라고 말했다. 다프넨 역시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그보다 먼저, 내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이 함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없겠니?‘ 엔디미온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 . 다프넨은 다시 물었다 '어째서지?‘ 엔디미온의 입술이 대답했다. '그 사람은 네가 아니니까. 네 검의 힘은 너만을 허락할 뿐이야. 차라리 그 손을 놔, 나와 이야기한 다음 그에게로 돌아가면 되잖아.' 이번엔 다프넨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나는 그와 약속했어. 미안해.' 다프넨은 엔디미온처럼 욕탕 비슷한 곳의 가장자리로 가 걸터앉은 다음 말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얼마 전 우리 세계에서 일어난 큰 화재에 대한 거야. 너도 그걸 보았니?‘ 엔디미온은 ‘못 보았을 리 있겠어. 그건 큰 사고였어' 라고 대꾸했다. 다프넨은 다시 '그 사고로 한 아이가 거의 죽어가고 있어. 그 때 본 것이 있다면 뭐든 정확히 얘기해 줄 수 없을까?‘ 라고 말했다. 엔디미온은 잠시 다프넨의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더니 이렇게 말했 다. 미안하지만, 이대로 대화하기가 너무 어렵구나. 잠깐만 양해해 줘. 내가 네 의식과 직접 접촉하는 편이 낫겠다.' 엔디미온은 앉았던 곳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다프넨 앞으로 다가와 두 손을 뻗어 뺨을 감싸쥐었다. 동시에 눈을 감으며 이마를 맞 댔다. 순간적으로 눈앞에 아무 것도 안 보였다. 썰물이 쓸어간 모래밭처 럼 휑해진 의식 속에 한 사람의 목소리가 줄기차게 그를 부르더니 드 디어 도달했다. 다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고, 오직 둘의 목소리만이 크게 울리며 번갈아 되풀이되었다. “말해. 평소 말하던 것처럼 하면 너와 나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거쳐 서 서로에게 닿을 거야. 화재에 대해서 묻고 싶댔지?“ “응. 그 화재가 일어나기 전에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 그리고 불을 낸 것이 누구인지도 궁금해.“ “확실한 것은 몰라. 하지만 그 아이는 불을 지르지 않았어. 불이 났 을 때 그 아이는 이미 의식이 없었으니까.“ 갑자기 머릿속에 화재의 현장이 눈으로 보는 듯 생생하게 떠오르더 니 엔디미온이 방금 말해 준 상황이 빠르게 펼쳐졌다. 엔디미온이 자 신의 기억을 다프넨의 머릿속에 부어 주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엔디미온은 장서관 안에 들어가서 그들을 보지는 않았던 듯 했다. 불타는 장서관으로부터 몇 명의 아이들이 뛰쳐나와 십여 걸음 쯤 뛰더니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보였다. 한 명은 확실히 나우플리온 의 예상대로 문에 자물쇠를 채우고 뒤따라왔다. 소년들은 서로 무어 라 이야기를 나누었고, 마을이 아닌 다른 쪽으로 사라져 갔다. “내가 본 것은 이게 전부야. 하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너는 알아볼 있겠지.“ “물론이야. 그래....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 그 아이는 이제 정말로 죽어가고 있어. 그리고 그 일 때문에 한 사람이 시력을 잃었어. 그들 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혹시 너는.... 그들을 도와줄 방법을 알고 있니?“ “글쎄.....” 쉴새없이 흘러 들어오던 엔디미온의 의식이 잠시 멎었다. 그가 흐 름을 끊고 생각에 잠긴 것이 틀림없었다. 조금 후 다시 새로운 목소리 가 흘러 들어왔다. “시력을 잃은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의식을 잃은 아이는 도와줄 수 있어. 그가 깨어나지 못하는 것은 영혼의 문제니까. 그렇지만 내가 그런 일을 한다면 우리 어른들이 금세 내가 한 일을 알아차리실 거야. 그건 작은 힘이 아니니까 말이지.... 네가 정 그 아이를 되살리길 원 한다면 단 한 가지 방법이 있어.“ “그게 뭐지? 뭐라도 좋으니까 말해 줘.” “너,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장담할 수 없는데도, 우리 어른들을 만나 러 갈 수 있겠어?“ “뭐라고.....?” 다프넨은 순간 당황했으나 조금 후 마음을 다잡았다. “일이 벌어질 지 장담할 수 없다는 건, 아무 일 없을 수도 있다 는 말이겠지. 지금 난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해서 안전한 걸 찾아 도망 칠 입장이 아니야. 불확실한 것에 걸겠어. 그 아이를 살려 달라고 네 가 말한 그 분들에게 직접 부탁하겠어.“ “넌 왜 네가 직접 그 분들에게 가야 하는지 알고 있니?” “아니. 무슨 다른 이유라도 있어?” “그래.” 그 순간, 엔디미온은 손을 놓고 이마를 뗐다. 목소리는 사라지고 그 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입술을 움직여 대답했다. '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너를 지켜보아 왔어. 그들은 이제 네 존재가 위협인지 아닌지 알고 싶어해. 가서 너 자신을 증명하고, 그들로부터 네가 원하는 선물 을 받게 되길 기원하겠다.' 엔디미온은 몸을 돌려 입구 쪽으로 가더니 마지막으로 다프넨을 돌 아보며 짧게 말했다. '곧 다시 보게 될 거야' 그는 밖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다프넨은 눈을 떴다. 주위가 갑자기 캄캄해지는 바람에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러 면서도 동시에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다프넨은 더듬거리다가 문득 나우플리온을 불렀다. "여기가 어디죠?“ 갑자기 두 개의 팔이 그의 몸을 와락 끌어안는 것과 동시에 다프넨 은 자신이 다시 본래의 세계로 돌아왔음을 느꼈다. 나우플리온의 손에 이끌려 몇 걸음 걸어나오고 보니 방금까지 그가 엔디미온과 앉아 있던 곳은 현실에서는 거대한 나무 뿌리 속이었다. 온 몸과 머리에 나뭇진과 썩은 잎새가 묻어 있었고 발은 무엇을 밟았 는지 발목까지 흠뻑 젖어 있었다. 2. 첫 번째 진실 사흘 동안 비가 내렸다. 비를 맞으며 스콜리에서 돌아온 다프넨은 옷을 갈아입으려다가 마 음을 고쳐먹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어차피 집안에서 목욕할 방법도 없었고, 이왕 젖은 강에 아예 강으로 가서 흠뻑 젖으리라 생각했다. 강이라기보다는 시내에 가까운 작은 샛강이 마을 바깥쪽에 자리한 숲 가장자리를 감싸며 흘렀다. 섬사람들의 생활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가까운 강은 여기뿐이었기에 사람들은 별다른 이름도 붙이지 않 고 그냥 ‘강'이라고 불렀다. 강가에 다다라 다프넨은 웃옷을 벗어 내던져 놓고 짧은 바지 차림 인 채로 물 속에 들어갔다. 폭우는 아니라 해도 사흘 간 꾸준히 내린 비로 물은 많이 불어나 있 었다. 전에는 무릎까지밖에 오지 않던 곳에 들어갔는데 허벅지가 다 잠겼다. 그곳에 서서 다프넨은 고개를 들고 비를 맞았다. 비는 어쩐지 따뜻했다. 조금 후에는 몸을 물에 잠그고 천천히 팔을 저어 좀더 깊은 곳으로 갔다. 가장 메마른 계절에도 그의 키를 넘는 곳을 지나면 강 가운데 솟아 있는 조그마한 바위가 있었다. 낚시에 제격인 자리였기에 날이 맑을 때는 아이들의 쟁탈전이 심한 곳이지만 지금은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다프렌은 섬에 온 후에 수영을 제대로 배웠다 섬사람 치고 수영을 못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빨리 배우려고 상당히 노력했 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 때 그는 섬을 택한 이상 어떻게든 적응하 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천천히 강을 따라 내려갔다. 이제는 섬의 웬만한 아이들보다 나은 수영 솜씨였다. 그에게 수영의 기초를 가르쳐 줬던 아이보다 나아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그 아이는 그리 좋은 실력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당시 그에게 마음써서 뭔가 가르쳐 줄 수 있는 소년은 한 명밖에 없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오이지스 단 한 명밖에는. 발이 닿지 않는 곳에서 고개를 내밀어 보니 조금 세어진 빗발이 싫 증도 내지 않고 수면을 때리는 모양이 보였다. 고개를 저으며 다시 물 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조금 더 깊이, 강바닥에는 생명의 찌꺼기들 이 흙과 섞여 흘렀다. 의식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기억의 찌꺼기들처 럼 결코 사라지지는 않고 흐르고만 있었다. 자신 또한 그 흐름에 실려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고 싶지 않아. 방향을 바꾼 그는 물의 흐름을 거슬러 올랐다. 숨이 모자랐지만 눌 러 참으며 저 흐르는 찌꺼기들과 반대로 헤엄쳐 갔다. 갈 수 있는 한 먼 곳까지, 더 참을 수 없게 된 후에야 그는 몸을 뒤집으며 빛 없는 수 면을 향해 올라갔다. "후우.......“ 회색 하늘 아래 회색 강이 흘러갔다. 그는 어느새 처음 물에 들어섰 던 기슭 근처, 바위섬 앞에 도착해 있었다. 미끈거리는 바위 위로 을 라간 그는 고개를 젖히고 다시금 비를 맞았다. 퐁. 갑자기 낯선 소리가 귀를 뚫고 들어왔다. 다시 한 번, 퐁. 속눈썹의 물을 씻어내고 강변을 바라보았다. 한 소년이 그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고 있었다. 일부러 맞히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를 부 르려 한 듯했다. 빗줄기 때문에 상대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디딘넨!" 그 목소리는 익숙했다. 그 순간, 비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비를 맞고 있는 키 큰 소년은 다름 아닌 헥토르였다. 이제 는 얼굴이 확실히 보였다. 묘하게도 그는 다프넨을 만난 것을 반가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 프넨은 대답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조금 망설였다. "좋은 자리를 잡았구나," 헥토르가 이번에는 돌이 아닌 뭔가 다른 것을, 그의 손에 닿도록 던 졌다.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탁 받아내고 보니 그것은 반질반질하 게 닦은 사과였다. 다프넨이 사과를 손에 든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 자 헥토르는 물 속으로 몇 걸음 들어와 서더니 빙긋 웃으며 말했다. "독은 안 들었으니 안심해." “내게 하고 싶은 얘기라도 있나?” 다프넨의 목소리가 친절하지 않은데도 헥토르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또 하나의 사과를 꺼내 한 입 베어 물었다. 와 삭와삭 씹어 삼킨 다음 그는 다시 말했다. “네가 날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아까부터 너를 보고 있자 니 그냥 말을 걸고 싶었다. 너무 불쾌하게 생각 마라. 네가 날 싫어하 는 것에 난 아무 불만 없다. 그렇긴 해도 너와 나는 같이 할 이야기가 많을 거 라고 생각하는데" 다프넨은 헥토르가 정말로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라 는 인상을 받았다. 동시에 장서관 사건의 배후에 에키온, 또는 헥토르 본인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을 기억해 냈다. 지금 그와 이야 기하는 것은 다프넨에게도 나쁠 것이 없었다. 혹시라도 그가 말을 실 수하거나 유도 심문에 걸려들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다프넨은 자신도 사과를 깨물어 먹는 것으로 대화에 응하겠다는 뜻 을 보였다. 헥토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강가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열 두세 걸음 정도 되었지만 빗발이 가늘어져 있어 대화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이렇게 비 내리는 날 강가까지 나와 그들의 이 야기를 엿들을 사람도 없었다. "실버스컬에서 말이야, 너도, 나도, 실제로는 서로에 대한 결판을 내려고 했던 것 같은데 멋지게 무산되고 말았지. 솔직하게 말하는 거 지만, 그 때 내가 너와 싸웠다 해도 별로 승산은 없었을 거다. 그게 너 자신의 능력이든, 너의 검이나 기타 다른 곳에서 나온 능력이든, 어쨌 든 내 실력 이상인 것만은 확실했지. 그 자작의 아들은 처음부터 네 상대가 되지 못했어." "그 말은, 내가 다시 싸우자고 한다 해도 이젠 거절하겠다는 뜻인가?“ "훗, 글쎄. 그런 건 네가 정말로 그런 요청을 했을 때 진지하게 생각 해보기로 하지." 뺨에서 쉴새없이 흐르는 물을 훔치고 있자니 마치 눈물을 닦는 것 같아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헥토르는 최근 머리를 조금 길러서 뒤 로 묶고 있었는데 말을 하면서 버릇처럼 머리꼬리를 비틀어 물기를 짜곤 했다. "그리고 그 다음 이야긴데 말이지. 대륙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 너 를 찾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나를 찾는 사람이라고?” 전혀 예상 못한 이야기였다. 확실히 대륙에 그를 찾는 사람들이 있 긴 했다. 그러나 그 자들을 헥토르가 어떻게 만난단 말인가?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 그 땐 나도 놀랐으니까. 아, 어떻게 그들을 만났는지 알고 싶겠지? 희한한 일이지만, 그들은 꽤 일찍부터 나를 추격하고 있었어. 어이없게도 그들은 내가 너인 줄 알았나 보더 군." 다프넨과 헥토르는 전혀 닮은꼴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헥토르를 쏘아보는 순간 다음 말이 들렸다. "물론 얼굴을 보고 너로 착각한 것은 아니야. 그들이 찾은 건 렘므 의 엘베 섬 일대에 상륙한 우리 또래의 낯선 소년이었어. 아마도 엘베 섬 전체에 감시망을 펼쳐 놨던 것 같다. 엘베 섬의 원주민들은 외지인 을 금방 알아보니까 말이지. 어쨌든 내가 탄 배는 실버스컬에 참가하 려고 떠났던 배 가운데 두 번째로 렘므에 상륙한 배였는데, 너는 모르 고 있겠지만 첫 번째 배에 탔던 아이들도 똑같은 추격을 받았다고 들 었다. 그들은 아예 엘베 섬에 상륙하자마자 그들에게 붙들렸지만 어 떤 렘므 야만인의 도움을 받아서 간신히 벗어났나 보더군. 그 다음으 로 내가 속했던 무리가 걸렸는데, 그 때 이미 우린 실버스컬에 참가했 다가 다시 렘므를 거쳐 돌아오던 도중이었어. 얼마나 집요한 자들이 었는지, 내가 아노마라드에 들어갔다가 돌아온 것까지 다 알더군." 다프넨이 그들과 함께 실버스컬 원정단이 되어 대륙에 나갔더라면 영락없이 붙들렸으리란 것을능히 짐작할수 있었다. 에키온의 음모 때문에 대륙으로 나가는 날짜가 늦어진 것이 오히려 추적자들을 속이 는 계책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그들이 먼저 상륙한 원정단을 잡으려 고 아노마라드까지 떠난 사이에 그와 이솔렛이 렘므를 통과한 셈이 아닌가. ".... 계속 이야기해 봐." “나는 그 자들이 우리 섬의 존재까지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긴장했 지만 다행히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붙잡은 다음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우리 중에 네가 없다는 걸 알았던 모양이 야. 그 다음에 그들은 ‘보리스 진네만’ 이라는 소년을 아느냐고 묻더군." 헥토르는 두 손을 비비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래 전에 내가 너를 화나게 했을 때, 네가 저 이름을 말한 일이 있 었지. 그래서 그들이 너를 찾는다는 걸 알 수 있었던 거야. 다행히 다 른 녀석들은 아무도 그 이름을 몰랐기 때문에 연기력이 필요한 건 나 뿐이었다." 그제야 다프넨은 해야 할 질문을 찾을 수 있었다. “혹시, 서른 초반의 여자 하나와 몸집이 크고 피부가 검은 남자 한 명의 일행이 아니었나?“ "아니, 그렇지 않았어. 둘 다 남자였고, 둘 다 호리호리하게 말랐지. 성격은 정반대인 것 같았지만 잠깐, 너도 그럼 누군가를 만나긴 한 모양이군?“ 이제 짐작할 수 있었다. 마리노프가 붙잡혔을 때, 근처에 동료가 있 기라도 한 듯 시간을 끌려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 동료들이 따로 떨어져 있던 이유가 바로 헥토르 일행 때문이었던 모양이었다. “만일 그들을 만났더라면 너도 살아나기 힘들었을 거다. 내가 만난 두 남자는 정말로 신속한 자들이었지. 넌 어떻게 달아났지? 그들이 너 를 알아보았을 텐데." 다프넨은 말할까 말까 하다가 그냥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알던 사람들의 도움을 좀 받았어." “하긴, 대륙에서 10년도 넘게 산 너니까." 조금 불편했지만 하지 않으면 안될 말이 있었다. 다프넨은 망설이 다가 불쑥 말했다. “날 숨겨 준 셈이 됐군." "고맙다는 말은 일러. 아직 두 번이나 남았으니까." 헥토르가 마음만 먹었다면 추적자들이 다프넨을 따라잡을 수 있도 록 도와줄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헥토르는 자신이 다프넨 을 세 번 돕겠다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 첫 번째를 지키려 한 듯했다. 두 사람은 사과를 다 먹었다. 다프넨은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면 좋 을까 궁리하다가 그가 에키온의 계략에 걸려 절벽에서 떨어졌던 사건 도 지금과 비슷하다는 것을 생각했다. 나우플리온이 펠로로스 수도사 와 단독으로 협상한 결과 그 일은 묻어두기로 했지만, 다프넨은 나우 플리온에게 사건의 전모를 들어 알고 있었다. “네 동생이 내게 갖고 있는 악의는 지난 봄의 사건으로부터 지금까 지도 여전하다고 알고 있어. 내가 그를 이번 사건과 연관지어 생각하 는 것이 부당한가?“ 단도직입적으로 해 버린 말이었다. 그런데 헥토르는 뜻밖으로 냉소 하며 대꾸했다. "부당하지 않지." “내가 무슨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알고 말하는 거냐?” "물론 장서관의 화재 이야기겠지. 죽어 가는 오이지스 이야기일 거고" 헥토르가 무슨 의도로 저렇게 술술 말하고 있는지 쉽사리 짐작할 수 가 없었다. 그러나 이왕 꺼낸 이야기, 끝까지 밀어붙이자고 생각했다. "쉽게 답해 주니 나도 편하군. 그렇다면 그런 의심이 사실인지도 말 해 줄수 있나?“ "아, 물론 어떤 사실이 존재하긴 하지. 네가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 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비가 멎으려 하고 있었다. 젖은 채 몸에 달라붙은 옷이 비를 맞고 있을 때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그러나 얼굴에서는 열이 피어올랐 다. "좋아, 정확하게 묻지. 에키온과 그 밖의 일당들이 장서관에 불을 질렀고, 심지어 오이지스를 안에 가둔 채 달아난 거냐?“ 헥토르는 천천히 물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조금 깊어지자 헤엄을 쳐서 가까이 왔다. 그는 물론 매우 능숙하게 헤엄쳤다. 다프넨이 있는 바위 근처에 물 속에 잠겨 있는 야트막한 바위가 있었다. 그 위에 올 라서면 물이 무릎 정도까지밖에 닿지 않았다. 헥토르는 예상대로 그 곳으로 와서 일어서더니 다프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찾아내려는 것처럼 “..... 역시 그런가." 오랜만에 가까이에서 본 헥토르는 이제 소년이라기보다는 청년에 가까웠다. 얼굴이며 몸 전부가 애티를 완전히 벗고 있었다. 그렇게 보 아서일까, 눈동자에 서린 빛 역시 과거의 오만함보다는 자부심에 가 까운 것으로 변한 듯 싶었다. "뭐가 그렇다는 거지?“ "아니, 솔직하게 말하겠다. 내 동생 에키온은 그 일과 관계가 있어.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직접 불을 지르거나, 오이지스를 일부 러 안에 가둔 것은 아니야." "잘못은 모두 다른 녀석들에게 떠넘길 셈인가?“ 헥토르는 웃었다. “내가 이 자리에서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하겠어? 지금 얘기를 듣 는 사람은 너와 나 둘뿐인데." "그게 무슨 뜻이지?“ 그러나 다프넨도 곧 헥토르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헥토르는 지금 솔직하게 말하긴 하되, 마을로 돌아가서는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작정이었다. 어찌 보면 다프넨을 놀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소년이 정 반대의 이야기를 한다면 사람들이 다프 넨을 딱히 더 신뢰할 까닭은 없었다 오히려 나이도 들었고 섬의 좋은 가문 출신인 헥토르를 더 믿어줄 것이다. "예나 다름없이 교활한 수단이로군. 나를 조롱해서 네가 얻는 것이 뭐지?“ "오해하지 마. 내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내가 모든 진실을 안다 한들 너에게 그걸 말할 입장인가 말이다. 오히려 이런 편법으로 라도 네게 진실을 들려주는 걸 고맙게 생각하는 게 나을 거다. 이것도 일종의 호의라는 걸 모르나?“ 그렇게 말하고 헥토르는 입을 다물었다. 다프넨은 그의 윤곽 뚜렷 한 입술이 꽉 닫힌 것을 보며 그가 진심을 말했다는 걸 깨달았다. 비 록 돌아서는 순간 부정 당한다 한들,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은 모르는 것보다 나았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꾸준히 알고자 갈구하지 않았던 가? "에키온은 화재가 일어났을 때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 녀석은 아이들에게 오이지스를 때려서 너의 화를 돋우고, 결국 그들 앞에 직 접 나서도록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을 뿐이야.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그 아이들은 오이지스를 너무 심하게 때렸고, 심지어 장서관에 불까 지 내고 말았지. 그건 확실히 의도적인 방화는 아니었어. 그런 상황에 서 그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뭐였겠나? 당연히, 유일한 목격자인 오이지스를 안에 가두고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겠지." 다프넨은 목에서 뜨거운 것이 치미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지금 네가 말한 것은 전부 확인된 거냐? 너 자신의 추측이 아니고?“ "뭐, 그 녀석들이 내게 거짓말을 하지 않은 이상에는. 만일 모든 일 이 밝혀진다면 녀석들의 처벌은 간단하게 끝나지 않을 거고, 그렇게 된다면 최초에 그들에게 이 일을 시킨 에키온 역시 끌려 들어가지 않 을 수 없게 될 거다. 따라서 에키온과 녀석들은 서로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했고, 만일 조금 소문이 나게 된다 해도 나의 아버지나 몇 명의 유력자들이 여론을 잠재우게 되겠지. 그 보호를 받기 위해 녀석들은 나와 아버지에게 모든 일을 다 털어놓았다. " 너무 화가 치민 나머지 귓속까지 윙윙거렸다. 무엇보다도, 그런 일 을 저지르고도 자기들만 살아나면 된다고 생각하는 녀석들의 뻔뻔함 에 치가 떨렸다. 심지어 그들은 오이지스를 죽여서 증거를 은폐하려 고까지 했다! 어떻게 그 또래의 소년들이 이렇게까지 이기적이고 악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끝까지 숨기겠다는 거냐? 너도 그것밖에 안 되는 더러운 인간이었나? 그런 죄는 아무도 모른다 해도 평생토록.... 아마 달여왕께서도 잊지 않으실 거다!" 저도 모르게 달여왕을 들먹이는 자신에게 놀랄 정신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헥토르는 무표정하게 서 있다가 고개를 약간 떨어뜨렸다. 그 러다가 고개를 젓고, 다시 눈을 들어 다프넨을 보았다. "어쩔 수 없다. 난 이 자리를 떠나는 순간 내가 방금 한 말을 부정할 거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야. 날 원망 마라." 다프넨은 더 이상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 파렴치한 녀석 들을 자기 손으로 죽여버리고 싶은 욕구가 솟아올랐다. 한 소년의 미 래를 부수고, 한 사회의 과거를 태우고, 한 남자의 희망을 파괴한 자 들이 저들만 아무 탈 없이 살아남으려 하고 있다니! “너도.... 똑같이 더러워, 이렇게 말한다 해도 달라지는 건 전혀 없 어, 처음부터 그들과 한패거리지. 네가 제대로 된 전사라면 네 손으로 그들을 벌할 마음을 지닌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헥토르는 우울한, 그러나 여전히 동요 없는 눈동자로 다프넨을 바 라보았다. 그리고 나직이 이렇게 말했다. “내 한계는 내가 잘 알고 있어. 에키온은 지금껏 지은 잘못만으로도 이미 죽어 마땅할지 모른다.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어. 아니, 그래서는 안 돼. 나 역시도 한 동생의 형이니까. 동생이 못났다 해도 어쩔 수 없 다. 그를 보호하는 수밖에. 형은 결국 그런 거야." “.......” “네게 동생이 있다면 너도 내 입장을 이해할거다." 갑자기 다프넨은 말문이 막혔다. 조금 후 그는 천천히, 강하게 고개 를 저었다. 헥토르의 말을 부정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한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예프넨의 그림자, 헥토르의 말에서 그 그림 자가 느껴졌고, 그것을 부정하려 한 것이다. 아니었다. 예프넨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만일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할 때, 예 프넨이 살아 있었더라면 그에게 대가를 치르라고 등을 떠밀었을가? 동생의 안전보다 다른 사람의 권리나 억울함을 더 중시했을까? 고통스러웠지만 다프넨은 대답할 수 없었다. 정이 많았던 예프넨, 그는 동생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벌레가 든 음식을 먹게 하고 적의 손등을 칼로 꿰뚫어 놓았다. 다른 상황이 닥친다면 그보다 더 잔 인한 일도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한 사람을 사랑하고 지킨다는 것 은 그만큼 타인에게 배타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게 된다는 의미인가. 그 자신 또한 이솔렛이나 나우플리온을 위협하는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지. 그러나 자신은.... 이솔렛과 자신의 생명이 달려 있는 문제인 데도 실버스컬에서 소자작 루이잔 폰 강피르의 오른손을 자르지 않았 던 것이다. 다프넨이 그런 예프넨을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헥토르의 말에 대답할 수 없다 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 때 헥토르가 나직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에키온과 친형제가 아냐." "뭐라고?“ 천만뜻밖의 이야기였다. 다프넨의 미간에 의혹이 떠올랐다. 펠로로 스 수도사와 헥토르의 모습이 꽤 닮았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그렇다면 에키온이 입양된 자식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짐작과 반대되는 대답이 들려왔다. “너는 처음 듣는 이야기겠지. 정확히 말하면 그 애와 난 사촌 형제 다. 지금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에키온의 친부모님이고, 내게는 외삼 촌과 외숙모가 되시지. 마법을 공부하셨던 내 어머니는 윗대 섭정 각 하의 막내딸이었는데 마법 연구 중에 사고가 일어나서 아버지와 함께 돌아가셨다. 혼자 남은 나는 그때까지 자식이 없던 펠로로스 외삼촌 에게 입양되었지. 그 분은 나를 친아들인 에키온보다 더 아껴 주셨다. 어머니도, 에키온도, 내가 친자식이나 친형제가 아니라고 따돌리거나 멀리한 일은 한 번도 없었지. 소외감 같은 것은 내 상상 속에서나 존 재하는 것이었다." 헥토르는 입술에 조금 힘을 주더니 말했다. "그러니 내가 그들을 지키는 것은 무엇보다도 당연한 일이지." 말을 맺은 헥토르는 몸을 날려 강물 속으로 들어가더니 금방 물가 까지 헤엄쳐 갔다. 다프넨은 그가 혹시라도 누군가가 들을 것을 우려 하여 일부러 가까이 왔다가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강변에 도착한 헥토르는 발을 물에 담근 채 일어나서 말했다. “난 너를 볼 때마다 아버지에게서 들은 일리오스 사제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실버스컬을 가져온 일 때문에 그와 일리오스 사제를 비교하는 사람 들은 이미 많았다. 그러나 헥토르의 관점은 달랐다. "지금까지 해 온 일들 때문에 두 사람을 연관짓는 것이 아니고, 앞 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일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거다. 분명 그 분 은 뛰어났어. 그리고 지금의 너도 종류는 다르지만 어떤 종류의 빼어 남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너에게 누가 있지? 나우플리온 사제님이나 다른 몇 분 사제님들이 늙고 나면 네 편을 들어줄 사람은 이솔렛 한 명 정도가 고작이지 않나?“ 헥토르는 팔을 천천히 돌리며 다프넨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일리오스 사제님은 그 분의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혼자였기 때문에 이곳에서 버티지 못한 거다. 기본적으로 적을 만드는 성격이기도 했 지만,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믿었기에 자신을 편들어 줄 사람을 만들 지 않았지. 그래, 우리 섬은 그 정도로 뛰어난 사람조차 고립된 자는 밀어내어 버렸어. 등을 떠밀어 버렸다고." “.......” 헥토르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다시 비가 몇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너도 네 뒤를 항상 돌아보지 않는다면 같은 신세가 될 거다” 쏴아, 비가 다시 쏟아졌다. 돌아서서 걸어가는 헥토르의 모습은 빗 발 속에서 곧 지워져 버렸다. 헥토르가 그런 말을 한 저의는 무엇이었을까. 비 내리는 검은 밤 가운데 촛불이 타올랐다. 젖은 머리는 아직도 다 마르지 않았다. 다프넨은 그 날도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나우플리 온을 기다리며 흔들거리는 촛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프넨은 헥토르의 친절을 믿지 않았다. 그는 한 번 믿지 않기로 한 상대에게는 철저하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헥토르가 어떤 태도의 변 화를 보이든, 사람의 본성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지금 그는 마치 다프넨을 걱정해 주는 듯한, 그리고 심지어 진실을 알고 싶으면 마음껏 알아보라는 태도로 망설임 없이 아는 것을 다 말해 주었다. 그 리고 다프넨도 헥토르가 다른 자리에서는 스스로의 말을 부정하겠다 는 것이 한 동생의 형으로서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비 록 인정하지 않을지언정 이해하고 있었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지금은 더욱 괴로웠다. 그는 심지어 헥토르가 자신을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들려고 진실을 말해준 것은 아닌가 생각 하기까지 했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에키 온, 또는 다른 혐의자들을 붙들어 협박해 가며 자백을 받아내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아무래도 답이 아니었다. 다프넨은 엔디미온을 떠올렸다. 그는 곧 만나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가 오이지스를 살려낼 방법 을 알려주기만 한다면, 오이지스로부터 모든 사실을 확인 받을 수 있 , 을 것이다. 그렇다면 확실히 헥토르로부터 모든 사실을 들어둔 것은 쓸모가 있었다. 어쨌든 오이지스가 다른 협박을 당하더라도 그에게 거짓을 말하지는 못할 테니까. 그때였다. 톡, 톡톡. 어쩌면 조금 전부터 계속 울리고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다프넨의 귀에는 이제야 들렸다. 누군가가 창을 두드리는 소리, 똑똑, 똑똑. 다프넨은 벌떡 일어나 창문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 소리가 들려 왔을 때 그는 망설이지 않고 다가가 창문을 열어제쳤다.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다. 캄캄한 가운데 보이지 않는 빗방울이 자욱하게 소리를 뿌렸다. 다 프넨은 잠시 기다렸다. 그리고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 윤곽을 지 켜보았다. 다프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왔구나." 창 밖의 그림자는 단지 손짓만 할 뿐이었다. 다프넨은 잠시 기다리 라는 듯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그리고 테이블로 뛰어가 이럴 때를 대 비하여 준비해 두었던 나뭇조각을 꺼내 그 위에 검은 숯조각으로 무 어라 써넣었다. 나뭇조각은 테이블 가운데 놓여졌다. 마지막으로 그 는 윈터러를 꺼내 손에 쥐었다. 그리고 다프넨은 다시 창가로 다가왔다. "이제 됐어." 다시 한 번의 손짓. 다프넨은 벽을 통과하려는 것처럼 손을 내밀었 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이곳과 다른 곳으로, 이번에는 자신의 의지 로, 단숨에 발을 들여놓았다. 귓가에서 곧 빗소리가 지워져버렸다. 3. 두 번째 진실 혹시 이 세계에도 비가 왔던 것은 아닐까. 푸르스름한 안개 속을 한참 동안 걸으며 다프넨이 했던 생각이었 다. 뺨에 와 닿는 공기는 젖었으며, 차갑게 식어 있었다. 저만치 앞에 키 큰 나무들이 서로 가지를 섞고 얽으며 늘어서서 아 치형의 터널을 만들고 있는 곳이 보였다. 그는 좌우도 보았다. 오른 쪽, 왼쪽 모두 황량할 정도로 넓기만 한 평지였다. 드문드문 바위인지 기울어진 비석인지 모를 것들이 수면 위의 암초처럼 비죽이 솟은 채 물끄러미 그들을 보았다. 하늘과 땅이 닿는 곳에는 회색 구름이 두텁 게 깔려 경계를 지워버렸고, 그래서 이 세계는 한없이 넓어 보였다. 다프넨을 인도하는 것은 엔디미온이 아니라 그가 최초로 보았던 유 령인 꼬마 니키티스였다. 다프넨이 절벽에서 떨어져 몸에서 생령이 분리된 상태로 그들과 어울렸을 때 매우 쾌활하고 재치 있는 말을 할 줄 알던 그가 오늘은 거의 말이 없었다. 그 역시 보이지 않는 부담을 느끼는 것이리라. 지금 다프넨이 찾아가고 있는 자들은 소년 유령들 에게도 어려운 상대임에 분명했다. 밤과 낮의 구별도 없는 청색 안개의 세계를 바라보다가 다프넨은 문득 눈물을 쏟을 뻔했다. 죽은 예프넨도 이렇게 추워 보이는 푸른 황 무지에서 외롭게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같이 지낼 친구는 있을까. 또는 자신이 죽어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헤매고 있는 것은 아 닐까. 숲의 터널에 들어섰다. 사방이 바삭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길쭉 하고 뽀족한 잎사귀들이 결코 멎지 않는 바람 가운데 부대끼며 저들 끼리 속살거렸다. 조금 더 오래 듣자니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기 산 사람이 걸어가고 있어. 이 길은 죽은 자의 길인데 어째서 들어왔을까. 왜 자기 세계로 돌아가지 않지? 우리들은 모두 죽어 있기에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그 때 강한 바람이 획 불어오며 그들의 속삭임을 멀리 날려보냈다. 주위는 다시금 조용해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그것은 차츰 무슨 노래처럼 들렸다. 아주 오래 전에 들었던 자장가처럼 나직했다. 그러나 내용은 달랐다. 잠들지 마, 절대로. 잠든 후에도 휴식 같은 건 없으니까. 장들지 마, 영원히. 잠드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버릴 거야. 잠들지 마, 네 숨 끊어질 때까지. 잠은 너를 삼키러 오는 괴물이니까. 지금도 너를 잡으로 오는 잠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니? 다프넨은 고개를 젓지도 않고 그 노래를 다 들었다. 노래 속의 잠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가 영원히 편히 잠들길 바랐던 그 사랑은, 다 시 한 번 시작된 고통스러운 여행에서 나란히 잡고 갈 동생의 작은 손 을 찾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노래의 가락이 바뀌었다. 힘든 하루가 지나가도 잠잘 시간은 오지 않지. 방금 떨어진 그 별, 별은 죽어서 떨어진 저란다. 아무도 잠든 너를 지컥주지 않을 거야. 너를 깨울 것은 잔인한 발톱뿐, 오직 그뿐. 캄캄한 밤은 계속되고 아침은 결코 오지 않지. 너는 안무 것도 잊어버릴 수 없을 거야. 네 이마에 키스하는 잠을 받아들이는 순간 너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악몽을 꾸게 되겠지. 다프넨은 갑자기 소리내어 대꾸했다. "그래, 너희들의 말이 맞아. 휴식 같은 건 아무 데도 없지." 노랫소리가 멈추었다. 다프넨은 다시 한 번 말했다. "최후까지 혼자 있을 수 있는 은신처 같은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 이제 노래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다프넨은 저도 모르게 눈물 을 흘리고 있었다. 왜 그런 노래가 들려왔는지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 장 잘 알고 있었다. 터널이 끝났다. 앞에는 밤이슬에 젖은 풀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 너 머에 솟은 것은 거대한 반구형 천장이 여러 개 이어진 보랏빛 건물이 었다. 그곳까지 이어지는 흰 조약돌 깔린 길이 여기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 동안 다프넨이 뭐라고 말을 하든 돌아보지 않고 앞서 걷기만 하 던 니키티스가 몸을 돌리더니 그에게 말했다. “우리가 전당이라고 부르는 곳이야. 저기에 들어가면 엔디미 온과 그의 아버지를 볼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엔디미온에게 친근감을 보이지 않는 편이 좋아. 그리고 엔디미온이 네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 처럼 보여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탓해선 안 돼. 그곳엔 또 많은 어른들이 계실 텐데 그들이 뭔가를 물을 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돼. 그들은 바로 알아보니까. 그들이 질문하는 건 네가 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알고 싶기 때문이지, 진실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야.“ 다프넨은 니키티스를 내려다보았다. 열 살이나 먹었을까 싶은 꼬마 의 얼굴이지만 수백 년을 살아온 유령이었다. 다프넨은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 난 너희들의 우정을 잊지 않을 거야." 니키티스도 약간 얼굴을 펴더니 말했다. “나도 너와 함께 보낸 즐거운 때를 잊지 않아.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겠어.“ 니키티스는 오던 길로 되돌아 걸어갔고, 이윽고 숲의 아치 아래 안 개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다프넨은 조약돌 위를 홀로 걸어서 그 보랏빛 전당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오르자 5미터도 넘어 보이는 육중한 문이 저절로 열렸고, 그 가 들어가자 다시 닫혔다. 처음에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안쪽의 벽이 거울처럼 미끄럽게 반짝거려서 반투명한 몸을 지닌 유령들이 얼른 눈에 띄지 않았던 거였다. 그렇게 반짝이는 벽이 입구 쪽의 절반을 차지했고, 그 보다 안쪽에는 좀더 편안한 빛깔의 돌이 여러 개의 아치를 만들며 멀 어졌다. 건물의 맞은편 벽은 안개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에 가려져 보 이지 않았다. 중앙에는 원형 계단으로 둘러싸인 움푹 패인 장소가 있어서 여러 가지 빛깔의 큰 쿠션과 수놓인 천으로 만든 방석들이 많이 놓여 있었 다. 그곳에 여러 명의 유령들이 자유로운 자세로 기대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다프넨은 잠시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냥 들어가 자신의 존 재를 알려야 할까? 그러기에는 그들이 자신들의 이야기에 너무 열중 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곧 한 명이 그를 발견했다. “보리스- 진네만인가?” 이상한 일이지만 그들은 다프넨의 트라바체스 이름을 불렀다. 다프 넨은 그들의 질문이 상대의 태도를 알아보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니키티스의 말을 기억해 내고 곧 대답했다. "그것은 제 옛 이름입니다. 저는 다프넨이라고 합니다. " “그리고 후라칸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겠지 이곳으로 내려와 앉게.” 그곳에는 십여 명이 넘는 유령들이 너무도 편한 자세로 앉거나 심 지어 누워 있었기에 도무지 어디에 끼여 앉아야 할 지 혼란스러웠다. 이런 곳일 거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오히려 처음 우려한 것처럼 혼자 심문석에 앉은 채 빙 둘러싸이는 것이 나을 성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어쨌든 다프넨은 그곳으로 갔고, 한 개와 작은 방석을 차지 하여 그 위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런 다음에야 유령들의 면면을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 그들 가운데 다프넨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다섯 명 정도였고 다 른 자들은 그냥 듣기만 하려는 듯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 다. 그들의 대화는 다프넨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이기도 했고, 이 원형의 자리가 꽤 넓기도 해서 서로의 이야기가 뒤섞일 까닭은 없었 다. 마치 곳곳에서 무리 지어 담소를 나누는 티 파티의 손님이 된 기 분이었다. 심지어 그들 중 한 명이 그에게 음료를 권했다. 그는 다프넨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로 고쳐 말했다. “마시게. 살아 있는 자에게도 그리 이상한 맛은 아닐 것이야.” 다프넨은 잔을 받으려다가 손을 움츠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의심이 많은 자라서 아직은 못 마시겠습니다." 갑자기 다른 쪽을 보고 있던 유령이 웃음을 터뜨렸다. 높은 천장 때 문인지, 그 소리는 웅웅거리는 긴 울림으로 변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좋도다. 살아 있는 자는 당연히 의심이 많은 것이다. 인간이 잃을 수 있는 것 중 가장 좋은 것-바로 육체-를 아직 갖고 있으니 그걸 잃을까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내가 살아있었다 해도 역시 두려 워했을 것이다.“ 그 자는 몸집이 크고 자세히 보니 꽤 호인형으로 생긴 자였 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역시 그림자처럼 너울거리는 윤곽을 가졌을 따름이었다.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 다음 잠시 동안 그에게 말을 거는 자가 없었다. 다프넨은 주위 를 둘러보다가 엔디미온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 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은 채 대담하게 입을 열었다. 확실히 그가 엔 디미온 때문에 유령에 조금쯤 익숙해지긴 한 모양이었다. "저는 제가 지금 뵙는 분들이 굉장히 두려운 분들인 줄로 알고 있습 니다. 그래서 지금도 긴장하여 식은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한 가지뿐이지만 여러분들께서 제게 하실 이야기는 많다고 들 었습니다. 두려움에 떨기보다는 차라리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유령들 몇이 약간 고개를 돌리더니 저들끼리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하고 있었기에 무슨 얘기를 하는 건 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이야기한끝에 한 명이 다프넨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네, 이리 와서 우리와 주사위 놀이나 하세.” 다프넨은 어리둥절해졌다 갑자기 주사위 놀이라니, 할 말이 있어서 부른 게 아니란 말인가? 마치 흰 침대 시트에 여기저기 주름을 잡아 만든 듯한 토가를 걸치고 굽슬굽슬한 백발을 늘어뜨린 자가 어느새 주사위가 든 가죽 통을 끄집어내어 쏟아 놓았다. 반들반들한 젖 대리석 바닥에 상아 주사위 다섯 개가 구르는 소리가 자르르 울렸다. “하나를 집어 던져 보게. 순서를 정해야 하니.” 규칙도 몰랐지만 거부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느끼고 다프넨은 주사 위 하나를 집어 들었다. 모서리를 살짝 둥글게 깎아서 도톰하게 느껴 지는 육각주사위는 몹시 차가웠다. 짤깍, 던지니 2가 나왔다. “좋아, 그럼 이리로 오게.” 유령들이 차례로 주사위를 던졌다. 참가자는 다프넨을 합쳐서 모두 다섯이었다. 다프넨은 유령이나 자신이나 똑같이 집을 수 있는 그 주 사위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하긴 이 곳에 있는 모든 물건이 그러했 지만 서로의 손에서 손으로 옮겨지고 있는 주사위가 유난히 더 그렇 게 느껴졌다. 다른 자들이 던진 주사위는 각각 3, 6, 3, 4, 1이 나왔다. 1을 던진 이가 가장 먼저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다섯이 널찍하게 둘러앉자 그 자가 주사위 다섯 개를 모두 모아 가죽통 속에 넣고 흔들었다. 옆에서 한 유령이 핀잔을 던졌다. “ 아직도 그 통을 버리지 못하는군. 숙련된 자라면 능히 손바닥 하나 로도 할 수 있는 것을.“ “ 혼자 가죽통을 쓰는 자한테 행운이 따른다는 얘기도 모르나. 남의 행운을 탐내면 주사위가 노하네. 자.“ 그는 뚜껑을 열고 주사위를 쏟았다. 나온 것은 [2, 2, 3, 4, 6]이었 다. 그는 조금 투덜대더니 2, 3, 4가 나온 주사위를 남겨두고 나머지 주사위를 다시 굴렸다. 그러자 2, 5가 나왔다. 그는 몹시 고심한 끝에 2가 나온 것 하나만 다시 굴렸다. 나온 눈은 5였다. “망쳤군.” 그는 옷 안쪽에서 하얗게 빛나는 석필을 하나 꺼내더니 서슴없이 대리석 바닥에 [2, 3, 4, 5, 5]=10이라고 적었다. 그러자 다음 유령이 주사위를 모아 들고 다시 던졌다. 앞에서 한 것과 똑같이 세 번 고쳐 던진 끝에 그는 [1, 3, 3, 4, 4]=15를 얻었다. 다음은 다프넨의 차례였 다. 대륙에 있을 때도 도박 같은 것을 해볼 기회가 없었던 다프넨은 앞 의 두 명이 하는 것을 보고도 무슨 기준으로 주사위를 남겨두거나 던 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땅히 물어보기가 애매했 으므로 그는 눈을 딱 감고 그냥 주사위를 던졌다. 나온 눈은 [1, 1, 2, 4,51였다. 옆에서 놀이에 참여하지 않고 있던 한 유령이 참견했다 “그것 참 안 좋은 눈이군.” 다프넨이 망설이고 있는데 등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나직이 속삭 였다. “1이 나온 것 하나만 다시 던져.” 어느새 다가온 엔디미온이 그의 어깨 너머로 다프넨이 던진 주사위 를 바라보고 있었다. 같이 놀이를 하던 늙은 유령들이 엔디미온을 보 더니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자 엔디미온도 마주 고개를 숙 였다가 들었다. 그가 왔다는 것을 안 다프렌은 겨우 마음이 좀 놓였다. 시키는 대로 던지자 1은 3으로 변했다. 옆에서 한 유령이 '오!'하고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스트레이트(Straight)로군. 주사위는 규칙을 모르는 자의 손을 총 애한다고 하더니 그 말이 참말이야. 물론 세 번째는 던지지 않겠지?“ 옆에서 엔디미온이 조그마한 석필을 꺼내더니 다프넨이 앉은 곳 앞 의 바닥에 [1, 2, 3, 4, 5]=40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다프넨은 아직도 이 놀이의 점수 계산법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나머지 둘이 던져서 나온 최종 눈은 각각 [2, 3, 3, 3, 4]=9, [1, 2, 2, 3, 3]=11이었다. 이리하여 40점을 얻은 다프넨이 첫 판은 이긴 셈이 되었다. 다프넨이 아직도 얼떨떨해하고 있는 동안 함께 주사위를 했 던 이들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 자, 첫 판은 자네가 이겼네, 조금 의아할 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상대의 요구를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고자 할 때 이 주사위의 힘 을 가장 신뢰한다네. 이 상아 주사위는 자네가 자네 세상에서 본 적이 있을 지도 모를 보통의 주사위와는 조금 다른 물건이지. 그러하니 자 네 질문을 먼저 들어볼까. 우선, 자네가 묻는 그 어떤 질문에도 우리 는 대답해 줄 능력이 있다는 점, 그리고 자네가 지금처럼 이기기는 쉽 지 않다는 점을 신중하게 기억하게. 일단 한 가지 이야기를 들어본 후 에 다음 주사위를 계속 던지도록 하자고.“ 이제 게임은 시작되었다. 다프넨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해야 할 질문을 천천히 정리해 보았다. 한 번 이길 때마다 한 가지씩. 그렇게 들을 수 있는 비밀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기에 다프넨은 매우 긴장한 상태로 게임을 해나 갔다 초보에 불과한 다프넨이었지만 유령이 한 말대로 묘한 운이 따 라서 첫 판을 포함하여 열 네 판이 거듭된 후 다프넨은 총 네 번을 이 길 수 있었다. 물론 그가 첫 판이 끝나자마자 물었던 것은 장서관 사 건의 진실에 대한 것이었고, 거기에서 그는 헥토르가 말해 준 것보다 훨씬 정확한 사건의 전모를 들을 수 있었다. 연루된 아이들의 이름과 그들의 세세한 행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판이 끝난 뒤 다프넨은 두 번째로 어떻게 하면 그 자들에게 합 당한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 그들은 '죽어가고 있는 작은 아이가 소생해야한다' 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그렇다면 그 아이를 어떻게 해야 살릴 수 있습니까? 살아 있는 자 들의 의술로는 이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 아이를 살려 줄 힘 이 있다면 제발 도와주십시오." “죽어 가는 자를 되살리는 것은 쉽지도 않고, 옳지도 않네.” 다프넨은 엔디미온이 가능하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쉽 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그 목적을 위해서 윈터러의 일로 심문 받을 것 을 각오하고 여기까지 은 터였다. "쉽지 않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과는 다르지 않은가요? 그 애는 억울하게 자신의 미래를 희생당했습니다. 정말로 여러분들이 섬사람 의 조상이라면.....“ 거기까지 말하다가 다프넨은 자신의 추측에 불과한 말을 입밖에 내 고 말았음을 깨닫고 말을 멈추었다. 유령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 중 녹색 겉옷을 입은 한 명이 말했다. “자네가 한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볼 수 없다. 계속 해보게나.” "그러니까..... 제 말은.....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불운한 소년을 위해 제가 기적을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들께는 불가능한 일도,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자신의 말이 왜 이렇게 딱딱하게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 이 곳에 올 때 했던 결심은 이 '전당‘ 에 들어오는 순간 오래된 옛 일처럼 빛이 바래버렸고, 눈과 귀는 꿈에 홀린 듯 때로 혼란 되고, 때로 흐려 지고, 때로 보이지 않는 것까지 꿰뚫어 보는 듯했다. 다프넨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처음의 단호한 마음을 되살리려 애쓰며 잘라 말 했다. "저는 심지어 그들의 생명을 빼앗아 오이지스에게 줄 수 있다면 그 래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확실히 진심이었다. 그렇게 힘주어 말하는 순간 그를 둘러 싼 유령들의 모습이 일순 좀더 투명해지는 듯 느껴졌다. “인간의 삶이 지닌 무게는 죽은 자의 눈으로 보기엔 하나 하나가 그 리 큰 차이가 없다네. 최악의 악당과 최고의 영웅도 찻숟가락 한 개 정도의 자질이 가를 뿐이지.“ "그러나 세상 모든 인간의 가치가 같지는 않을 겁니다. 찻숟가락 한 개도 찻잔의 입장에서는 그리 비중이 작지 않습니다. " “그렇다. 그 말 그대로 자네의 소원은, 자네들 산 자의 세계에서는 자네 표현대로 '기적‘이라고 불리는 종류의 것이야. 비록 죽은 자의 입장에서 가볍다 해도 산 자의 세계에서 일어날 일이니 역시 자네 세 상을 기준으로 행동의 경중을 재어야 할 터이지? 그렇다면 역시 그토 록 큰 일을 어찌 가볍게 이루겠는가.“ 자신의 논리에 자신이 말려든 꼴이 되었다. 다프넨이 대답하지 못 하는 가운데 다른 자들도 모두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때 지금껏 거의 말을 하지 않던 엔디미온이 입을 열었다. “말을 돌리지 말아요. 살아 있는 사람을 이곳까지 부른 것이 겨우 말장난이나 하자는 것은 아닐 테지요. 어른들께서는 모두 합해 열 번 을 이기셨으니 이번엔 그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를 듣도록 하세요. 우 리가 이 섬에서 존재한 이래 이렇듯 손쉽게 우리 세계로 들어올 수 있 는 자는 한 번도 없었지요. 저는 모르지만, 어른들께서는 그가 가진 저 '검'의 정체를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들어오기 전에 니키티스가 해 준 말이 떠올랐다. 일단은 엔디미온 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 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도 무슨 생각이 있을 것이다. 유령들은 엔디미온이 갖고 있는 어떤 권위를 인정하는 듯했다. 곧 그들은 수긍하여 말했다. “좋네. 우리 전하의 말씀대로 열 개의 질문을 하도록 하자. 누가 먼 저 하겠는가?“ 다프넨은 '전하' 라는 호칭을 듣고 순간 아연했지만 그에 대해 무언 가 묻기도 전에 첫 번째 질문이 들려왔다. “첫째로, 자네는 어찌하여 그 검을 손에 넣게 되었는지?” 일단은 정확하게 대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니키티스가 해 준 이 야기를 떠올리며 다프넨은 최대한 간략하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는 본래 대륙 출신입니다. 그곳에서 제가 태어났던 가문의 조상 이 많은 투쟁 끝에 입수하여 대대로 물려온 것을 마지막으로 제가 갖 게 되었습니다." 이어 그 옆의 유령이 입을 열었다. “둘째로, 자네가 대륙 출신이라면 어찌하여 이곳에 들어와 살아가 려 마음을 정했는가?“ “저의 가문은 내분으로 인하여 멸망했습니다. 저는 홀로 살아남아 힘겹게 살아가던 중 이 섬에 계시는 검의 사제김을 만나 그 분을 신뢰 하게 되었고, 그 분과 함께 살기 위해 섬으로 들어왔습니다" 질문은 다시 옆의 유령으로 이어졌다. “셋째로, 자네는 그 검으로 인해 여러 번 위험에 처했다. 어찌하여 그 검을 멀리하지 않는가?“ 다프넨은 약간 미소지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나우플리온이나 섬의 다른 사제들, 심지어 이솔렛조차도 그의 뜻을 꺾게 할 수 없었다. “이 검은 가문의 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저를 위해 죽음을 택했 던 제 형제가 마지막으로 부탁한 검이기도 합니다. 당시 저는 나이가 어리고 능력이 없어서 형제를 위해 아무 것도 해주지 못했습니다. 그 렇기에 그에 대한 기억이 담긴 마지막 유품인 이 검을 어떤 일이 있어 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고집으로 인해 목숨이 위험하게 되는 것도 관계없는가? 너 의 형제는 단지 죽은 자에 불과하다. 산 자인 자네가 그의 그림자에 너무 얽매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지는 않는가?“ 이번에야말로 그의 진심을 최대한 담아 다프넨은 답했다. “때로는 목숨보다 중한 것도 있습니다. 때로는, 죽어도 죽지 않는 자도 있습니다." “이제 다섯 번째 질문이 되는가. 그렇다면 자네는 방금 말한 그 형 제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직도 떠돌고 있음을 아는가? 그것도, 자 네가 그에게 남기고 온 흰 갑옷 때문에?“ 다프넨의 눈이 약간 크게 떠지면서 흔들렸다. 자신이 '죽어도 죽지 않는 자' 라고 말한 것은 예프넨이 비록 죽었다 해도 자신의 가슴속에 서는 죽지 않았다는 뜻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대뜸 이어 나온 이야기 는 너무나도 뜻밖이었다. "모, 모릅니다. 그건 무슨 이야기입니까? 삶과 죽음의 경계라는 것 은..... 그가 죽지 못했다는 뜻인가요? 그럼 형은, 그는 지금 어디에 있 습니까? 어떤 상태라는 겁니까!" “자네의 질문은 조금 뒤에 하게나.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알았으니 다음 질문을 하겠네.“ 그렇게 말했지만 그들은 다프넨이 흥분을 가라앉히도록 잠시 기다 려 주었다. 다프넨은 고개를 숙인 채 자꾸만 내저으며 어쩔 줄 몰라하 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다프넨은 유령들이 산 사 람의 고뇌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그들 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았을 때 다시 한 번, 그들의 몸이 한층 투명 하게 나부꼈다. “여섯 번째로 묻겠네. 자네는 밖에서 온 자로서 이곳 섬에 사는 자 들의 뿌리를 알고 있는가?“ "얼마 전에..... 섬사람의 조상이 필멸의 땅(Mortal Land)에 존재했 던 마법 왕국 가나폴리에서 이주해 왔다는 사실을 들어 알았습니다. 그 전에는 단지 어딘지 모를 먼 곳에서 왔을 거라고 막연히 추측했을 뿐입니다." “그렇다. 그러나 가나폴리는 오래 전에 멸망하여 사라졌다. 자네는 이 섬의 사람들이 옛 왕국의 영광을 다시 되찾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보는가? 또는 그럴 마음이 있다고 보는가?“ 다프넨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극소수를 제외하면 그렇지 못하지요. 섬사람들은 스스로를 순례자 라고 부를 뿐, 옛 왕국에 대한 것은 거의 다 잊은 것 같습니다. " “그렇다면 자네 자신이 그런 일을 할 마음은 없는가? 자네 역시 섬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고 들어온 터이니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는 없 지 않은가?“ 다프넨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 질문은 제로가 그에 게 하고자 한 말과 거의 같았다. 그때 그가 제로의 희망을 받아들여 섬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한 사제가 되겠다고 말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이었던가. 수많은 변명을 할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그런 큰 부담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 다.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은둔자가 되고 싶어하던 자신이, 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투사가 된다고? 아노마라드에서 만났던 란지에 로젠크란츠라면 이런 일이 잘 어울 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프넨은 란지에와는 달리 스스로의 개인사 속에서 마음의 빛을 많이 만들어 내고, 그걸 줄이거나 내버릴 줄도 모 사람이었다. 마찬가지로 지독한 비극을 겪었지만, 란지에는 그 런 비극을 근본적으로 막을 새로운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옛 감 정을 흔적만 남도록 눌러버릴 수 있는 사람인 반면, 다프넨은 한 번 깊게 지녔던 애정을 죽을 때까지 지우지도, 누르지도, 버리지도 못하 는 사람이었다. 다프넨에게는 어떤 중대한 이상도 소중한 한두 사람 에 대한 감정 이상의 것이 되지 못했다. “확언할 수 없지만 아마도....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 번에 두 가지 가치를 위해서 살기에는 저 자신의 의지와 능력이 너무 부족 한 모양입니다. 그걸 바라는 사람에게는.... 개인적으로 매우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눈도 보이지 않게 된 제로, 그의 미래는 캄캄한 밤처럼 어두울 것이다. 그런 그를 위해, 그가 평생 바라는 소원조차 이루도록 도와주 지 못하는 자신의 모자람이 정말로 안타까웠다. “그러한가. 그러면 아홉 번째로 다시 검에 대해 묻겠네. 자네는 지 난 해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그 검의 역사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검이 두렵지 않은가? 그 검에 사로잡힌 채 죽지도 살지도 못하며 영원히 고통 받고 있는 혼들처럼 될까 우려하지 않는가? 그렇 지 않다면 자네가 그토록 스스로를 믿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다프넨은 씁쓸한 표정으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사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저는 저 자신을 그다지 신뢰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곧잘 속기도 하고 잘못도 자주 저지릅니다. 특별히 강한 의지나 힘은 물론 없고 현명하거나 지식이 많지도 않습 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검에 대해 자신감을 내보이는 것은.... 그 렇지요, 만용입니다. 다시 말해 제 주변의 사람들이 저를 걱정하는 것 때문입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인가. 좀더 설명해 보게.” 다프넨은 머뭇거 리다가 대답했다. "누가 무어라 한들 저는 이 검을 버리지 않을 것이기에 저를 걱정하 는 사람들의 말이 소용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어차 픽 바뀌지 않는 결과라면 그들이 조금이라도 안심하게 되는 편이 좋 겠지요. 제가 바랄 수 있는 최소한은, 만일 비극적인 결과가 오게 된 다 해도 그 영향이 저 한 사람에게 미치는 것으로 끝나는 것뿐입니다. 제가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저의 일에 개입하다가 조금이라도 피 해를 입게 되는 건 싫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저 혼자서 모두 책임질 수 있다고, 겁나지도 않고 그 방법도 다 알 것 같다고.... 그렇게 거짓 말한 겁니다." 말을 맺는 다프넨의 얼굴에 멋쩍은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 다. 윈터러에 대한 마음을 결정한 후로 처음 털어놓는 진심이었다. 그 는 여전히 윈터러의 힘이 두려웠고, 그 검이 나우플리온이나 이솔렛, 또는 섬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칠까봐 우려하고 있었다. 나우플리 온에게 보여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나우플지온을 조금이라도 안심시 켰길 바랄 따름이었다. 유령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고, 그 중 한 두 명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마지막 질문이 되겠군. 자네 말대로라면 그 검은 여전히 자네 주위 의 사람들에게 잠재적인 위협이 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런 위 협을 없애기 위해 자네 자신이 떠날 마음은 없는가?“ 다프넨은 질문을 한 유령의 눈을 가만히 쏘아보더니 말했다. "그 말은 저더러 순례자의 길을 포기하고 대륙으로 돌아가란 말씀 이십니까?“ “조금 다르지. 만일 그 검의 힘을 정확히 알아낼 수 있는 곳, 검의 힘을 제어할 방법에 대해 혹시라도 알 수 있을 법한 곳, 다시 말해 그 검을 만든 분이 계신 곳으로 갈 수 있다면 힘들더라도 그러한 모험을 택하겠는가, 그런 말이다.“ 다프넨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졌다. "그 검을.... 만든 사람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이게.... 인간이 만든 검이었습니까?“ 유령은 어깨를 약간 들썩이더니 대꾸했다. “또 조금 다르지. 그 분을 인간이나 또는 살아 있는 일반적 생명으 로 보아야 할 지는 조금 생각해 볼 문제니까. 어쨌든 질문에 답하거 라“ “물론..... 가겠습니다. 거절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무슨 위험이 있더 라도 기꺼이 갈 것입니다. 알고 계시다면 제발 알려 주십시오." 모든 질문이 끝났다. 다프넨이 지금 들은 이야기들 때문에 혼란에 빠져 있는 동안 유령들은 흩어져 있던 주사위를 모았다. 처음에 가죽 통을 쥐고 있던 자가 말했다. “지금의 문답으로 우리는 자네라는 사람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 네. 아직도 자네가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질문은 두 가지가 남았네. 신 중하게 생각해서 말하게나“ 한 가지는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프넨은 가슴속에 서 열이 끓어오르는 것을 억지로 누르며 질문했다. "아까 저의 형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지금 어떤 상태 에 있는 것입니까? 그는 분명히 죽었습니다, 제가 직접 보아 너무도 잘 압니다. 그런 그가 지금 유령이 된 것입니까, 아니면 되살아난 것 입니까?“ “어느 쪽도 아니네. 그는 흰 갑옷의 힘과 자신의 상념에 사로잡힌 바, 완전한 유령이 되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산 몸을 도로 지니게 된 것은 아니네. 그는 말 그대로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에 있네. 자네가 일전에 자네 세계와 우리 세계에 중간에 머물렀듯이. 그의 상념은 다 름 아닌 자네에 대한 집착이라네. 그리고 자네가 그를 떠난 후 일어난 사건도 있었지.“ 유령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앉자 다프넨과 그들 사이에 넓은 공간이 비워졌다. 텅 빈 바닥 가운데 은빛 점이 생각나더니 서서히 너울거리 며 커지기 시작했다. 흡사 녹인 수은처럼 번쩍거리면서 순식간에 번 진 그것은 곧 커다란 거울과 같은 모양으로 변했다. 그러나 그것은 멈 춰 있는 거울이 아니었다. 샘처럼 내부에서 끊임없이 잔물결이 만들 어져 올라왔다. “들여다보게나.” 다프넨은 안을 들여다보았다. 갑자기 돌멩이라도 던져 넣어진 것처 럼 한 가운데에서 둥근 파문이 확 일어 번지면서 걸쭉한 수은이 흐르 는 듯했던 샘은 맑은 물로 변했다. 표면이 거울처럼 반들반들해지면서 동시에 뚜렷한 풍경을 비췄을 때, 다프넨은 넋을 놓고 그것을 들여다보며 목이 메었다. 그곳은 트라 바체스였고, 가을바람의 황무지였고, 예프넨과 영원히 헤어진 눈익 은 벌판이었다. 그곳은 가끔 꿈에서 보곤 하던 것과는 좀 달랐다. 하긴 그만큼 세월 이 흘렀으니 변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곳에 낯선 마차와 말들이 와서 멈추는 것을 보고 그의 가슴이 미치도록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마차 안에서 그가 아는 자가 얼굴을 드러냈을 때, 다 프넨의 얼굴은 아예 경악으로 새파래졌다. 다름 아닌 벨노어 백작이 아닌가!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잠시 후 들판은 밤의 풍경으로 변했다. 정체 모를 그림자들이 들판 을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예프넨이 묻혔던 자리에 이 르러 삽 따위를 가지고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 엔디미온은 다프넨이 너무나 분노하여 말조차 잊고 있는 것을 보았 다. 오래 전 기억의 알을 깨뜨려 예프넨과의 잊혀진 추억을 보여준 적 이 있는 엔디미온이었다. 오랫동안 평정을 지켜 온 유령인 그가 이 순 간 다프넨의 분노에 감전되는 느낌을 받고 스스로 아연해하고 있었다. 이윽고 영상 속의 파렴치한 자들은 무덤을 거의 다 파냈다. 그 중 여자로 보이는 한 명이 무덤 속으로 뛰어드는 것도 보았다. 다프넨은 자신의 뺨에 두 줄기 눈물이 흐르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너무 주먹 을 꽉 쥐어 손톱이 손바닥을 찢을 지경이었다. 무덤 안이 비쳤다. 다프넨은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숙이며 좀더 자세히 보려고 했다. 그 안에는.... 있었다. 그가 꿈에서도 잊지 못하던 사람이 흡사 산 사람처럼 가볍게 눈을 감은 채로.... 그러나 그것은 곧 꿈처럼 부서졌다. 환각.... 인가? 여자가 고래고래 고함치는 소리가 그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그제야 다프넨은 그 여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오래 전 예프넨과 그에게 두 번째로 세상의 쓴맛을 가르쳐 주었던 여자 용병, 야니카 고스였다. 그 여자가 벨노어 백작의 인도자 역할을 했을 거란 추측을 어렴풋이 하는 순간, 영상 속의 밤이 갑자기 폭풍 직전처럼 떨기 시작했다. 다프넨에게 그것은 차라리 보지 않느니만 못한 비극이었다. 무덤을 파헤쳤던 자들은 하나하나 쓰러져 갔다. 야니카는 물론이고 다른 남 자들도 정신 없이 달아났지만 모두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남김없이 살해되었다. 밤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살해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 기에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답은 이미 그의 마음 속에 있었다. 영원한 휴식을 택한 줄 알았던 형은, 그가 결코 보고 싶지 않았을 처참한 몰골로 저 땅에 홀로 남걱져 있었다. 그가 준 갑옷, 그가 준 고 뇌 때문에 저렇듯 원념에 사로잡혀서.... 그가 다프넨을 본다면 저들과 달리 대할 것인가. 엔디미온이 예전에 말했듯 뒤죽박죽 섞인 원망에 사로잡혀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영상은 흐려졌다. 더 이상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다프넨 은 오히려 놀랄 만큼 침착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해야 제 형제를 편히 쉬게 해 줄 수 있습니까. 그 어떤 어려 운 조건이라 해도 관계없으니 말해 주십시오." 그렇듯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면서 다프넨은 자신을 꾸짖고 있었다. 형이 그토록 괴로운 상태에 있는데도 어째서 자신은 단 한 번의 꿈에 서조차 그를 보지 못한 것인가. “ 그것의 답은 앞서 한 답과 같네. 그 검을 만든 이를 찾아가게. 거기 에 모든 답이 있네. 자네의 형제는 검과 갑옷의 비밀이 풀리는 순간 휴식할 수 있을 것이네.“ 이제 그곳에 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다프넨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한 유령이 말 했다. “그러면 가야 할 그곳이 어디인지 이제부터 가르쳐주겠네. 자네가 진실로 그곳에 가겠다면 잘 보도록 하게나.“ 다프넨은 다시 무언가가 떠오르기 시작한 수은의 샘 속을 들여다보 았다. 4. 주사위 맨 처음 나타난 것은 어떤 높은 성의 꼭대기였다. 첨탑 끝에 검은 바탕의 깃발이 꽃혀 휘날렸다. 깃발 중앙에는 다프 넨이 어떤 나라에서도 본 일이 없는 표지가 새겨져 있었다. 네 장의 날개를 펄럭이는 맹수, 검은 얼룩 외의 털은 온통 황금빛인 호랑이의 모습이었다. 서서히 다른 것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곧 그 첨탑이 어떤 성의 일부 이며, 그 성은 지금 다프넨이 들어와 있는 장소처럼 둥근 천장을 여러 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건물을 지은 돌은 흰색이었고 하나하나가 매우 컸다.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옮겼을까 싶을 정도로. 시야가 넓어지자, 그가 보던 성이 빠르게 멀어져갔다. 성은 곧 수많 은 다른 건물들 사이로 숨어 버렸다. 광채 가득한 청색 하늘 아래 10 층을 넘는 탑과 집들이 즐비한, 실로 장려한 도시가 그의 눈앞에 있었 다. 대부분 돔(dome)형이거나 삼각향 박공을 지닌 지붕들 아래 기둥 과 벽감에는 아름다운 무늬와 회화, 조각들이 가득했고, 주춧돌이며 계단 등은 큼직한 돌로 시원스럽게 지어졌다는 인상을 주었다. 주종 을 이루는 건축재는 석재였는데, 그 중에서도 흰 돌과 푸른 돌이 가장 많았다. 드물게 은빛 가루가 뿌려진 듯 반짝거리는 검푸른 돌도 보였다. 특이한 것은 저렇듯 높은 건물의 꼭대기나 첨탑 중간에 새들이나 와서 쉴 수 있을 법한 원형 테라스가 종종 만들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또 어떤 건물들은 사람에게는 쓸모 없을 법한 매우 높은 위치에 큰 아 치형 입구가 존재하기도 했다. 무언가 아주 큰 생물이 날아서 나갈 때 나 사용할 수 있을듯 싶었다. 서쪽에 솟은 방형 탑에는 옥상 정원이 꾸며져 있었는데 내부에 버 섯처럼 솟아오른 여러 개의 소정원이 딸려 있는 것이 독특하면서도 불안정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다른 건물 꼭대기에는 일정한 모양과 크기를 가진 푸른 불이 타올랐다. 불 위로 가끔씩 무엇인지 모를 생물 의 영상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돌, 또는 나무와 흰 밧줄을 이용해 만든 다리가 여러 건물들 사이를 연결하며 거리에 그림자를 떨어뜨렸다. 놀랍게도 돌로 된 다리 중에서 도 복잡한 곡선으로 빙글빙글 돌거나 휘어지고, 여러 번 꺾여 오르내 리는 것들이 있었다. 몇 십 미터 상공의 건물들을 연결하는 허공다리 들의 교묘함은 어떤 정신적 가치를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었다. 흰 새 몇 마리가 장식 조각인 양 교각에 드문드문 앉아 거리를 굽어보았다. 건물들 사이로 정교하게 뻗어나간 방사형의 넓은 거리도 매우 인상 적이었다. 현재 대륙에 존재하는 어떤 도시도 지니지 못한 완벽한 도 로망이 도시 밖까지 계속 이어지다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그런 도 시를 둘러싼 청석 성벽은 높이나 규모 면에서도 훌륭했지만, 보초들 이 걸을 수 있는 성벽길 좌우에 자리잡은 맹수의 머리조각들이 가장 놀라웠다. 그 자체로 거대한 예술작품들이기도 한 그것들은 때로 움 직이거나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기도 했으며, 무료하면 하품도 했다. 조금 후 다프넨은 어떤 건물 뒤쪽에서 흡사 거대한 분수 같은 물줄 기가 솟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저것이 정말로 분수라면 그 높이 는 최소한 30미터 이상이었다. 마지막으로 다프넨이 좀더 먼 곳에서 둥글게 반짝이는 거대한 거울 같은 것을 발견했을 즈음 영상은 다시 어두워졌다. 곁에서 유령이 말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옛 가나폴리의 수도, 아르카디아. 한 때는 10만 명의 사람들이 살 았던 도시이네.“ “마법처럼 사라져 버린 마법의 도시.... 그곳의 집과 거리는 모두 마 법이 돌보고 있었지.“ 다시 샘 안이 밝아졌다. 이번에 다프넨은 달려가는 작은 짐승의 시 선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모래빛 복도를 보았다. 좌우에 선 기둥들이 귓가를 스치는 바람 같은 소리를 내고.... 복도의 끝은 아늑한 녹색 정 원으로 이어져 있었다. 정원 가운데 작고 낡은 우물이 보였다. 그러나 시선은 우물 앞까지 이르지 못했다. 우물에서 빛이 폭발하 며 하늘 꼭대기까지 솟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깨닫기도 전에 주위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백색으로 변해 버렸다. “접촉이었네, 현자들조차 들여다보아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힘들 다는 '늙은이의 우물' 너머에는 정체 모를 세계로 이어지는 길이 있 었어. 기본적으로 마법사들은 호기심이 많지, 한때 왕이었고, 왕위에 서 물러난 뒤 새 왕의 수석 자문역이면서 마법사 회의의 수장까지 겸 하고 있던 아카데미의 가장 훌륭한 현자 지티시는 그 이름의 의미 그 대로 '부름'을 받았네. 우물 너머의 세상이 그에게 손짓한 것이야. 그 는 그 세계의 역동적으로 끓어 넘치는 힘에 빠져들었고, 몇 년간 홀린 듯 그곳 세계의 일에 개입한 끝에 결국 그들에게 자신의 영혼을 빌려 주는 실수를 범했네. 그 세계의 무구를 자신의 몸에 입히자 그는 더 이상 마법사 지티시가 아닌 이계의 괴물에 지나지 않게 되었지.“ “결과는 파멸뿐. 그 안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괴물들이 뛰쳐나왔네. 그들의 세계는 힘, 오직 힘뿐인 세계였던 거야. 그 넘치는 힘이 평온 하고 아름다웠던 가나폴리를 재앙으로 뒤덮었네.“ 샘이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프넨은 그게 무엇인 지 좀처럼 알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이곳의 대리석처럼 젖빛을 띤 광 채의 막 같은 것이 모든 것을 가리고 있었다. 더 높이 오르자 푸른 하 늘이 다시 나타났고, 거기에는 수백 척의 배가 떠 있었다! “지티시의 조카딸이자 왕의 맏딸이기도 했던 푸른 눈의 에브제니스 가 자신의 이름대로 '고귀한‘ 희생을 치렀지. 그녀뿐이 아니었어. 에 브제니스가 이미 괴물로 변해 버린 지티시를 직접 죽인 뒤, 그녀를 따 르는 '진리의 원탁'에 속한 마법사들은 자신들의 힘을 모아 오염된 힘으로 뒤덮여버린 아르카디아를 고립시켜 파괴하려 했지. 그 때 가 나폴리의 각지에서 강하거나, 또는 보잘것없는 마법사들이 줄을 이어 아르카디아로 찾아왔네. 그들 중에는 일곱 살 때부터 천재 마법사로 이름을 날렸던 젊은 에피비오노-그의 이름은 '살아남는다'는 뜻인 데 그는 살아남았는가? - 에서부터 죽을 날만 바라보고 있는 은퇴한 현자 카트레프티스도 있었지. 그들은 모두 자신을 희생하여 남은 사 람들을 지키길 원했네.“ “그들의 희망은 받아들여졌는가? 현명하기로 이름난 에브제니스였 지만 거대한 참화를 눈앞에 두고 마음이 흔들린 탓이었는지, 모여든 자들의 의지가 열렬할수록 그녀가 계획한 마법이 성공하기 쉬우리라 는 크나큰 착각을 하고 말았네. 그리하여 모여든 모든 마법사들은 아 르카디아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새벽탑' 시메로노에 모여 자신들 의 힘을 모았네“ “ 그들은 마법이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여하간에 이미 죽을 운명이 었기에 다른 욕망은 없었네. 그러나 그런 상황에 이르러서도 마법사 는 마법사였기에 가장 좋은 방법에 대해서는 절대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지. 마법사란 본시 이해관계보다는 자존심을 더 중히 여기는 법 이니까. 논쟁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이계의 힘이 아르카디아 밖 의 대지까지 오염시키는 최악의 순간이 다가오기 전에 에브제니스는 그대로 마력의 개방을 강행하기로 마음먹었네. 그리하여 가나폴리의 위대한 마법들 가운데서도 가장 성스러운 마법인 '소멸의 기원'이 시 전되었지.“ “누구의 잘못인지는 모른다.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인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법은 실패하였네, 에브제니스를 비롯한 수많은 마법사들이 목숨을 잃은 것은 물론이고, 아르카디아에 충만해 있던 악령 깃들인 힘이 전 가나폴리를 향해 맹렬히 퍼져나갔지.“ “그러나 또한 마법은 성공하였다. 검은 힘은 가나폴리에 속한 마지 막 땅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파멸시켰지만, 그 경계를 넘어서려는 순 간 갑자기 정체 모를 힘에 의해 억눌려 무릎을 꿇었네. 비록 전 가나 폴리를 희생시켰지만 이계의 힘을 소멸시킨다는 그들의 기원은 이루 어진 것이지“ 샘 속에 비친 배들이 푸른 하늘을 바다 삼아 미끄러져 나아가는 모 습이 보였다. 구름과 바람이 접힌 돛을 스쳐가고, 배들은 먼 하늘을 향해 날아가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 '소멸의 기원' 이 실패할 가능성이 없지 않았기에 그들은 처음부터 이주단을 조직해 놓았네. 당시 존재하던 모든 비행선을 동원하고, 사 람들을 선발해서 그 안에 태웠지. 에브제니스의 동생인 티시아조는, 왕위 계승자로서 이주자들을 이끌고 먼 곳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진 대륙으로 갈 책임을 갖고 있었네. 그러나 가나폴리를 벗어나 북쪽의 바다가 최초로 보이던 날, 그는 그 이름의 뜻대로 '제물‘이 되어 바다 에 떨어졌네. 그것은 어쩌면 누이와 부모를 재앙 가운데 두고도 혼자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하며 떠나간, 티시아조에게 내려진 합 당한 대가였을 지도 모르지.“ 다프넨은 문득 이상한 것을 깨닫고 저도 모르게 질문했다. "어째서 왕이 아닌 왕위 계승자가 떠났을까요?“ 대답은 너무도 간단했다. “왕이라는 것은, 자신의 백성들이 유사이래 최대의 위기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혼자 삶을 택해 그 땅을 떠날 수는 없는 것이라네. 왕 이란, 본래부터 백성들 대신 죽어야 할 임무를 갖고 태어나는 것이지. 그렇게 보면 티시아조도 결국은 죽음으로서 자신의 책무를 다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 백성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왕..... 아니다, 본래부터 대표자라는 것 은 그런 존재일지도 모른다. 혈통이 아니라 백성들의 열망으로 추대 되는 왕이 있다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란지에가 추구하던 공화국은 그런 것을 말함인가..... “티시아조가 탔던 가장 큰 배가 가라앉자 다른 배들도 연료를 공급 받지 못해 연쇄적으로 바다에 떨어졌지. 그럴 때를 대비하여 항해도 가능한 구조로 만든 배들이었지만 내륙 국가인데다 비행선이라는 탁 월한 이동 수단을 갖고 있었던 가나폴리에 바다 항해에 익숙한 자는 거의 없었네. 본래 가고자 계획한 외지의 대륙은 고사하고 이 섬에 도 착할 수 있었던 것도 단 한 척의 배에 불과했지. 바로 그 배에 섬사람 들의 조상들이 탔던 것이고.... 그리고 이미 유령이었던 우리가 타고 있었네.“ 다프넨은 당황하여 그들을 쳐다보았다. 유령이 배를 타고 이주를 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일도 없었다. "그 땅의 오염이란 것은..... 죽은 영혼들조차 견딜 수 없는, 그런 것 입니까?“ “아니, 그곳에는 지금도 여전히 유령들이 있네. 이미 재앙 이전부터 죽은 상태였던 우리와는 달리, 재앙 당시 목숨을 잃은 자들이지. 그들 은 아직도 혼이 정화되지 못해 뜻 없는 살육을 거듭하고 있다고 알고 있네..... 아마도 '소멸의 기원'이 완전하지 못해 그렇게 된 것이겠지.“ “자네가 가나폴리의 삶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힘들 터. 가나폴리 에는 본래부터 수많은 유령들이 살아 있는 인간들과 함께 존재해 왔 네. 새로이 죽은 자들 가운데 대부분은 긴 휴식을 취하게 되지만 드물 게 몇 명은 우리처럼 유령으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되네. 가나 폴리의 살아 있는 자들은 우리들의 존재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아서 때때로 조언을 청하기도 하고, 드물지만 같이 어울리기도 했네. 그 당 시부터 유령들은 이렇듯 이공간에 본래의 땅을 닮은 거주지를 건설하 고 끝나지 않는 삶을 살게 되었지. 더 이상하게 느껴지겠지만, 유령은 인간이 전혀 없는 곳에서는 살 수 없다네. 유령들이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위에 있는 인간의 거주지와 그들의 생활을 끊임없이 바라 보며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네. 유령이 만일 인간의 거주지가 없는 곳 에 고립된다면 오래 가지 못해 자신의 살아 생전 기억이나 자아를 잃 어버리고 괴물, 또는 에너지 덩어리와 다름없는 존재로 변하게 될 것 이네. 그렇기에 우리는 이곳에 왔으며, 이 섬의 역사에 대해 그토록 잘 알고 있게 된 것이지.“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아니, 그렇다면 영원히 이렇게 살아가야 된다는 말입니까?“ “유령으로서의 생활을 버리고 휴식을 택한 자들은 어떤 신비로운 기준에 의해 선별되어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극소수를 제외하고 그 동안 쌓아온 기억과 지식, 지혜는 모조리 다 잃게 되지. 그것이 두려 워 한 번 유령이 된 자들은 쉽게 휴식을 택하지 못하네. 우리 가운데 국왕 폐하께서는 이미 몇 천여 년 동안 지금의 신비로운 상태로 존재 하셨네. 그 분께서는 살아 생전에도 왕이셨지. 죽어서야 그 분을 뵌 우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가나폴리의 첫 왕이셨을 지도 모르 네. 어쨌든, 그렇듯 오래 살았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를 잃는 것을 두 려워하네. 겨우 몇 십 해를 산 인간도 기억을 상실하는 것을 극히 꺼 리며 그런 일을 당한다면 몹시 괴로워하는데, 천 년도 넘는 과거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억들을 갖고 있는 우리가 그것을 잃고 백지 상태의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것을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다프넨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이들은 살아 생전 에도 대단한 마법사이거나 현자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훌륭한 자일수록 자신의 삶에 대해 애착이 강하기 마련이었다. 그들이 죽은 후에도 휴식을 택하여 새로이 시작하지 않은 것 역시 자신이 그동안 가꾸어 온 삶에 집착했기 때문이리라. 유령들이 이야기를 멈췄다. 눈앞의 샘은 보통의 샘처럼 둥근 파문 만을 연속해서 그리고 있었다. 다프넨은 자신이 방금 들은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생각하며 그들이 왜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는가 의아하게 여겼다. 이야기를 들은 덕분에 가나폴리의 숨겨진 역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말고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다프넨 자신과 관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고, 그것은 아마도.... 윈터러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유령들은 자신들을 위해서라도 이 섬이 멸망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렇다면 윈터러의 존재에 대해 서도 민감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더구나 그들은 조금 전에 윈터러를 만든 자를 찾아갈 마음이 있느 냐고 물었다. 그렇다면..... “많은 것을 보여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왜 하필 제게 그런 것을 보여주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이 윈터러를 만든 것이 가나 폴리의 장인들입니까?“ “그럴 리가 없지. 가나폴리의 물건이라면 우리가 그것의 힘과 용도 를 모를 리 있겠는가. 자네의 검은 가나폴 리가 아닌 '필멸의 땅‘의 물 건이네.“ “가나폴리가 있던 곳이 바로 필멸의 땅이 아닙니까?” “그 말 그대로이네. 필멸의 땅은 가나폴리가 '존재하였던' 곳이지. 자네의 검은 가나폴리가 필멸의 땅으로 변한 뒤 뒤늦게 그 땅에 당도 하였네. 놀랍게도, 비록 불완전하다고는 하나 가나폴리 전역을 정화 시키는 데 성공한 에브제니스의 기원 봉인을 뚫고, 맨 처음의 우물로 부터 나왔던 것이지.“ 다프넨은 있을 수 없는 일을 접하고 크게 흥분하여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렇다면... 정말로 이 검이, 윈터러가, 가나폴리를 멸망시킨 힘과 동일한 근원을 가졌단 말씀이십니까?“ 유령들은 모두 희미하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 모습이 꿈속의 예 언자들인 양 섬뜩했다. “우리는 그 검의 근원을 모르며, 용도를 두려워하고 의심하네. '늙 은이의 우물'은 하나의 세계로만 연결되는 통로가 아니네. 지티시가 들여다보았던 그 세상으로부터 온 것일지도 모르고, 다른 세상으로부 터 온 것일지도 모르네. 그러나 어디서 왔는가,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네. 오히려 그 검은 저 옛 가나폴리를 멸망시킨 힘보다 훨씬 더 두 려운 것일 수도 있다네. 진실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여러 세계의 경계에는 그 검을 만드신 이가 계시니 그 분을 찾아가 모든 것을 물어 보게나.“ "그렇다면 이 검을 만든 자는 도대체 누구이며 어디 계신 겁니까! 그가 누구인지 여러분들은 알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그 때 오랜만에 엔디미온이 입을 열어 말했다. “단지 짐작일 뿐이야. '늙은이의 우물‘ 은 자신과 연결되었던 세계 를 모두 기억하고 있어. 그러니 네가 검을 지니고 우물로 간다면 그 검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그걸 만든 분은 어디에 계시는지 다 알게 될 거야. 그 검이 있던 세계가 어떤 곳인지, 너는 알게 될 거야.“ 다프넨은 엔디미온을 돌아보며 답했다. “난 이 검이 어떤 세계를 거쳐왔는지 이미 충분히 알아. 윈터러를 가졌던 자들은 남김없이 자기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파멸했지. 그토 록 많은 파멸이 있은 후에 한 세계의 현자들이 이 검을 일부러 이곳으 로 보내버렸어. 난 그들을 이 검의 기억 속에서 보았고, 심지어 그 현 자들과 이야기까지 나눈 일이 있어." “그렇다면 더더욱 그곳으로 가야 해. 모든 물건에는 최초의 근원이 있고, 그것을 찾아가야만 네가 그 검의 옛 주인들처럼 파멸하는 것을 피할수 있는 거니까.“ 다프넨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섬의 규 칙대로라면 정식 순례자가 된 후에도 함부로 대륙에 나갈 수는 없었 다. 그러나 이 모든 사정을 데스포이나 사제에게 말하고 도움을 청한 다면 최소한 그를 위해 편의를 보아주지 않을까? 그녀 역시 이 검의 힘에 대해 오랫동안 우려해 왔으니 충분히 그래 줄 성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다시 대륙에 나가서 저 추적자들을 모두 피하고, 마 음의 평정을 지키는 것이 가능할까. “자네의 선택이네. 자네가 자신과 섬의 미래를 위해 바른 선택을 할 것을 믿네.“ 그 때 다른 유령이 불쑥 말했다.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그리 될 것이지만......” 마음을 결정한 다프넨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가 필멸 의 땅으로 가게 된다면 이곳과 닮은 풍경을 보게 되는 것일까 생각했 다. 좌우 기둥사이에 흔들리는 우윳 휘장, 끝이 없는 양 겹쳐지며 멀어져 가는 아치의 숲, 청색 감도는 진줏빛 대리석 위에 흩어진 제비 꽃, 오렌지, 산딸기, 나무껍질 빛깔의 방석들과 금빛 술, 은실 자수로 장식된 양탄자들, 다프넨이 그 어떤 땅에서 본 것보다 인상깊은 모습 을 지닌 이런 건물이 가나폴리에는 있었던 것일까. 물론 여기에서 수염을 기르고 치렁한 옷을 걸친 채 반신들처 럼 앉아 있는 자들은 젤리로 만든 것처럼 반투명한 몸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이 옛 가나폴리 인들의 그림자라면, 이곳은 그 땅에 존 재했을 우아한 문명의 그림자이겠지. 다프넨은 일어나더니 유령들을 향해 깊이 허리를 굽혀 보였다. 그 리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방금 해 주신 귀중한 조언은 반드시 마음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들을 지니고 떠나기 전에, 처음으로 돌아 가 정말로 저 작은 소년을 살려주실 수는 없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 그 순간, 엔디미온이 살며시 일어서더니 유령들과 다프넨을 향해 말했다. “아버님께서 오고 계세요.” 유령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고 다프넨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뜻밖으로 고작 40세 가량의 모습을 한 유령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아니, 엔디미온의 아버지라면 그 정도 나이인 것이 오히려 타당할 지 도 모르지만, 그가 이곳에서 만난 어른 유령들은 모두 6, 70세 정도로 보이는 늙은이들이었던 것이다. 자줏빛 옷을 걸치고 머리에 가느다란 관을 쓴 그는 주위의 모두에 게 일일이 답례하며 말했다. “앉게들. 그리고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 소년도 앉게.” 그의 목소리는 저음임에도 불구하고 아이처럼 또렷했는데, 그럼에 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현자의 음성이었고, 동시에 어떤 것 도 솔직하게 말해줄 것처럼 친근했다. 대체 이처럼 모순되는 특징이 한 사람의 목소리 안에 있을 수 있다는 것부터가 묘했다. 이 자가 앞서 유령들이 말한 그들의 왕이라고 짐작한 다프넨은 몇 천 년의 시간을 바라보며 지내다 보면 저렇게 될 지도 모른다고 스스 로를 납득시키면서도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비로운 목소리가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자네의 부탁을 들어 주는 것은 참 어렵네. 나는 보통 자기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무언가를 부탁한 자의 청은 잘 거절하지 않는데, 자네 의 청만은 곤란한 문제가 걸려 있네. 아픈 자, 잠든 자를 일으키는 것 은 어렵지 않네. 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도 가능하긴 하네. 하지만 후 자의 경우는 전능한 '죽음‘ 의 비위를 크게 거스르게 되는 바, 그 해가 돌고 돌아 누구에게 돌아오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다른 유령들에게 이야기할 때와는 달리 묘한 위압감을 느끼며 다프 넨은 입을 열었다. "오이지스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 “그렇지 않네. 자네가 살리고 싶어하는 작은 아이는 이미 죽을 운명 에 들어 있네. 내게는 그것이 보인다네.“ 다프넨은 유령의 입에서 절망적인 이야기가 나오자 가슴이 철렁했 으나 어떻게 되든 끝까지 버터보겠다고 마음을 다져먹으며 말했다. "이곳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지신 폐하께서도 그 작은 아이 하나를 깨 어나게 할 수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그 유령은 표정을 풀며 약간 소리내어 웃었다. 곁에서 엔디 미온이 투명한 뺨을 붉히며 속삭였다. “이 분은 폐하가 아니셔. 폐하는 우리들도 쉽게 뵐 수가 없는걸. 이 분은 나의 아버지이시고, 단지 '섭정왕‘ 이라고 불리실 뿐이야. 그러 니까 '전하' 라고 불러야 옳아“ 다프넨은 마찬가지로 얼굴을 붉히며 섭정왕에게 말했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하지만 저는 제 목적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는 못합니다. 그 대가를 제게 오도록 해서 치를 수는 없을까요?“ 엔디미온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유령들은 여전히 말없이 선 채로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다프넨은 계속 머리를 짜냈다. 그리고 드디어 한 가지 생각이 떠올 랐을 때 이 한 방법에 모든 것을 걸어보겠다는 결심이 섰다. 어차피 애원이나 거래로 가능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프넨은 섭정왕을 보며 대담하게 말했다. "조금 전, 이곳에서는 상대의 요구를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할 때 저 주사위의 힘을 가장 신뢰한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전하께 주사위 게 임을 제의하겠습니다. 제가 이긴다면 그 아이의 생명을 돌려주십시 오. 진다면 뭐든 전하께서 시키시는 일을 하겠습니다. " 등 뒤의 유령들이 나직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다프넨은 흔들리지 않 고 섭정왕의 눈을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섭정왕 역시 다프넨의 눈 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섭정왕은 갑자기 가벼 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그것을 원하는가. 그래, 나쁘지 않은 생각이긴 해, 사실 죽 음 자신도 주사위 놀이를 매우 즐긴다네. 그러니 내가 자네의 주사위 에 져서 소원을 들어주게 되었다 해도 그리 크게 화를 내지는 않을 지 도 모르겠군. 그러나 이번에는 간단한 게임이 아니네. 그래도 해보겠 는가?“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다프넨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다프넨과 섭정왕 각자에게 남은 칸 두 개에 불과했다. 유령들이 '추격자(Chaser)' 라고 부른다는 이 주사위 놀이는 가나 폴리에서 매우 인기 있었던 게임인 모양이었다. 규칙은 상당히 흥미 로웠다. 일단 주사위를 던져 점수를 확정하는 방법은 앞서와 같았지 만 다프넨이 잘 몰랐기 때문에 유령들이 자세히 써서 가르쳐 주었다. 1. 체이스 오프(Chase off) : 다섯 주사위 모두 동일한 눈(50점) 2. 스트레이트(Straight) : 1,2,3,4,5로 배열된 눈(40점). 3. 이븐 스트레이트(Even Straight) : 2,3,4,5,6으로 배열된 눈(30점). 4. 포 다이스(Four Dice):네 주사위가 같은 눈(모든 눈을 합산한 점수). 5. 풀 하우스(full House) : 세 주사위가 같고, 나머지 두 주사위가 또 같은 눈(모든 눈을 합산한 점수). 6. 초이스(Choice) : 두 주사위가 같고, 또 두 주사위가 같은눈 (모든 눈을 합산한 점수), 7. 식스 빈즈(Six Beans) : 6이 나온 눈만 합산 (최저 0점, 최고 30점). 8. 파이브 빈즈(Five Beans) : 5가 나온 눈만 합산 (최저 0점, 최고 25점). 9. 포 빈즈(Four Beans) : 4가 나온 눈만 합산 (최저 0점, 최고 20점). 10, 쓰리 빈즈(Three Beans) : 3이 나온 눈만 합산 (최저 0점, 최고 IS점). 11. 투 빈즈(Two Beans) : 2가 나온 눈만 합산 (최저 0점, 최고 10점). I2. 에이시즈(Aces) : 1이 나온 눈만 합산 (최저 0점, 최고 5점). 게임 참여자는 돌아가며 주사위를 열 두 번씩 던지는데, 총점을 합 산하여 많은 점수를 얻은 쪽이 이긴다. 그러므로 다들 바닥에 열 두 개의 칸이 있는 표를 그려놓고 각각의 칸에 자신이 매 회 던진 주사위 의 점수를 적어 넣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점수는 차례대로 적는 것 이 아니라 체이스 오프가 나오면 첫 번째 칸에, 스트레이트가 나와야 만 두 번째 칸에 점수를 적을 수 있었다. 한 번 점수를 적어 넣은 칸에 는 이후 다시 더 좋은 점수로 배열이 나와도 바꿀 수는 없으므로 매번 점수를 적어 넣을 때는 신중해야만 했다. 그런데 한 회의 주사위 눈이 결정되었을 때 그것을 적어 넣을 수 있 는 칸이 여러 군데인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어 1, 1, 1, 2, 2가 나왔을 때 다섯 번째인 풀 하우스 칸에 점수를 적을 수도 있지만 그래보았자 1+1+1+2+2=7점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이후 큰 점수로 풀 하우스가 나을 경우를 생각한다면 칸을 사용하기가 아깝게 된다. 그럴 때 이것 을 1두 개와 2 두 개로 생각해서 초이스 칸에 적을 수도 있고, 심지어 1 세 개로 계산해서 에이시즈 칸에 3점만 적어 넣을 수도 있었다. 그 러나 잘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나중에 원하는 배열이 나오지 않아 큰 점수가 날 수 있는 칸에 0점을 적어넣는 안타까운 경우를 당하게 되 었다. 빈즈와 에이시즈에 0정이 존재하는 것은 해당 눈이 전혀 나오지 않 은 배열도 그 칸에 적어 넣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에이시즈 같은 경 우 최고점도 기껏 5점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이후 더 나은 점수를 기 약하기 위해 다른 칸을 아끼려면 1이 한 개도 없다 해도 이번 배열은 버린 셈치고 이곳에 0점을 적어 넣으면 되는 것이다. 이런 식이므로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감은 칸이 얼마 되지 않을 음에는 그야말로 피 말리는 접전이 벌어지기 마련이었다. 현재 다프 넨에게 남은 칸은 체이스 오프와 포 다이스로서 아까 5가 다섯 개 나 왔을 때 체이스 오프로 하기에는 25점이라는 점수가 아까워서 과감하 게 파이브 빈즈 칸에 넣은 것이 뼈아픈 실책이었다. 다프넨의 점수는 지금까지 합계 151점. 초보 치고 아주 나쁘지는 않은 점수라 할 수 있 었다. 그에 반해 섭정왕은 비교적 쉽게 만들 수 있는 초이스와 쓰리 빈즈 를 남기고 있었다. 게다가 점수는 현재 202점. 마지막 두 번의 기회 동안 비어 있는 칸에 맞는 배열을 만들지 못하 면 그 칸은 그냥 0점이 되기 때문에 다프넨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셈 이었다. 섭정왕이 말했다. “내가 이제부터 1점도 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자네는 최소한 한 번 은 체이스 오프를 성공시켜야만 하겠군.“ 다프넨은 쓰게 웃으며 대꾸했다. "체이스 오프를 해내더라도 포 다이스가 0점이 된다면 1점 차이로 결국 지겠지요." 섭정왕이 먼저 주사위를 던졌다. 딱 한 번만 고쳐서 그는 가볍게[1, 2, 2, 4, 4]=13의 초이스를 만들어 냈다. 이제 섭정왕의 점수는 215점 이 되었다. 다프넨이 주사위를 던졌다. [1, 2, 3, 3, 6]. 다프넨은 과감하게 6한 개만 남기고 네 개의 주사위를 되던져 놀랍게도 [3, 3, 3, 3, 6]을 만들 어냈다. 곁에서 다른 유령이 호오, 하고 감탄하더니 '포 다이스가 저 렇게 쉽게 나오는군'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다프넨은 주사위를 쏘아보며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 다. 그러더니 입 속으로 조그맣게 기원 같은 것을 중얼거리며 3이 나 온 네 개의 주사위를 다시 던지는 것이 아닌가? 차르륵. 대리석 바닥에 흩어진 주사위는 놀랍게도 모두 6을 나타내고 있었 다. 엔디미온조차도 놀라서 '아' 하고 소리를 질렀을 정도였다. 섭정 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허어, 이거 놀랍군. 나도 애쓰지 않으면 안되겠는데.”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모든 유령들이 어이없어하는 가 운데 다프넨은 그 배열을 체이스 오프 칸에 0점으로 계산해 적지 않 고 포 다이스 칸에 30점으로 적어 넣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다프넨의 점수는 181점이 되었다. 잠시 후 섭정왕은 주사위를 모아들며 말했다. “그렇겠지. 만일 자네가 이번에 체이스 오프를 노렸다면 왜 3이 나 온 것을 모두 다시 되던졌겠나.“ 섭정왕의 주사위가 다시 던져졌다. 두 번을 고치자 주사위들은 마 치 당연한 것처럼 [3, 3, 3, 3, 3]=15가 되어 있었다. 섭정왕의 쓰리 빈 즈 칸에 I5점이 적어 넣어지고 최종 점수는 230점이 되었다. 다프넨의 마지막 차례였다. 절대적으로 체이스 오프가 나와야만 하 는 상황에서 그는 [4, 4, 5, 5, 5]를 던졌고, 4가 나온 두 개를 되던지 자 1, 5가 나와서 [1, 5, 5, 5, 5]가 되었다.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유 령들도 어떻게 이리도 좋은 배열이 연이어 나을 수 있는지 이해가 가 지 않는다는 눈빛들이었다. 1이 나온 마지막 한 개의 주사위를 집어 들었다. 반드시 5가 나와야 했다 이 한 번에 모든 것이 다 걸려 있었다. 다 프넨은 주사위를 쥐고 눈을 감은 채 다시 한 번 무언가를 나지막이 중 얼거렸는데 언뜻 그것은 노랫가락 같기도 했다. 그리고 주사위가 던져졌다. 떨어진 주사위는 바로 눈을 보이지 않고 드물게도 뽀족한 모퉁이가 먼저 부딪치며 바닥에서 팽그르르 돌았다. 다프넨과 섭정왕은 물론이 고 모두의 눈이 주사위의 움직임에 박혀 있었다. 그런데, 주사위는 얼 른 회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수십 번이나 계속해서 팽글팽글 돌기만 할 따름이었다. “으음.......” 섭정왕이 신음 소리를 내며 다프넨의 얼굴을 흘끗 보았다. 다프넨 은 주사위를 지켜보며 계속해서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는 동안 그의 곁에 놓인 윈터러가 약한 빛을 내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무려 5분이 넘도록 멈추지 않고 회전하는 주사위를 보며 모 두가 당황하는 동안 엔디미온은 무언가 눈치챈 모양이었다. “두 분 모두 그만둬요. 이런다고 결론이 나는 게 아닌걸.” 섭정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약간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섭정왕이 점점 더 심각한 표정으로 주사위를 쏘아보는데도 주사위의 회전은 멈 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령들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번져갔다. “이런... 지금 저 소년이 섭정왕 전하와 힘을 겨루고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전혀 밀리지 않고 대등한 대결이 된단 말인가? 이 무슨 해괴한 변고인지......“ 온 정신을 한 점에 집중한 다프넨은 그들의 말소리도 들을 수 없었 다. 오직 회전하는 주사위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 은 그의 예상 대로였다. 이 상황에서 져버리면 상대는 오이지스를 살 려주지 않을 것이고 모든 수고는 헛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았다. 다프넨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주사위의 회전은 서서히 느려졌고, 이윽고 완전히 멈추었 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주사위는 어떤 면을 보이지 않고 뽀족한 끝으 로 선 채 멈춰 있었다. “자네는 모험을 좋아하는군.” 다프넨은 더 이상 그의 기원이 먹히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정신을 차려 대답했다. "모험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자세히 설명해 보게나.” "섭정왕 전하께서는 필요할 때 언제든 원하는 주사위 눈을 만들 수 있는 힘을 갖고 계십니다. 매번 조금씩 고쳐서 적당한 정도의 숫자만 만드셨지만 언제나 저와 50점 이상의 격차를 두고 나아가셨죠. 저는 게임을 하는 도중에 그런 것을 눈치채고 그게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 라고 생각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되었든 죽음에 속하게 된 아이 를 되살리는 일이 껄끄러우셨을 것이고, 제가 무례하게 게임을 제안 했을 때 거절하기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오히려 쉽게 들어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금 무례하다고 볼 수도 있는 직설적인 말을 들은 유령들의 얼굴 에 불편한 빛이 흘렀다. 그러나 당사자인 섭정왕은 아무 말 없이 계속 하라는 듯 눈짓했다. "그러나 저에게는 비록 불완전하지만 기원의 힘인 신성 찬트가 있 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할 수 있는 한 해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저는 모험이 아니고서는 전하에 이길 수 없었으니까요. 알고 계시겠지만, 마지막 두 번의 기회가 남았을 때 저는 전하에 비해 51점 이나 뒤져 있었습니다. 정말로 전하께서 1점도 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저는 일단 체이스 오프로 50점을 내고, 또 최소한의 점수로라도 포 다 이스를 내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전하께서는 주사위를 던지셔서 다시 13점을 얻으셨습니다. 그 상황에서 저는 전 하제서 원하시기만 한다면. 그 다음에 파이브 빈즈의 최고 점수인 15 점을 손쉽게 얻으실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죠. 그렇다면 전하의 최종 점수는 230점이 될 거란 것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남은 두 번을 던져서 별다른 점수를 내지 못한다면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 으시겠지만, 제가 바짝 따라온다면 당연히 그렇게 하실 것이 뻔했지 요. 그런 상황에서 제가 전하를 이기기 위해서는 제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점수, 즉 체이스 오프로 50점을 얻고, 6을 다섯 개 던져서 그 것을 포 다이스 칸에 넣음으로서 30점을 얻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일부러 6 다섯 개를 먼저 노린 것은 어차피 질 가능성이 높다면 저 자 신의 찬트가 얼마나 소용이 있는지 실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죠. 소 용이 된다면 이기고, 아니면 질 테니까요. 어쨌든 그렇게만 된다면 저 다프넨은 약간 미소짓더니 말했다. "그것은 거의 성공할 뻔했지요." “그래서 3 다섯 개로 체이스 오프를 택하지 않고 모두 6이 나오는 것에 운을 걸었던 것이군. 알겠다. 그러나 자네도 아직 모르는 것이 있군. 자네가 지금 나와 힘을 겨루어 주사위를 회전하게 한 능력은 찬 트의 힘이 아니네. 자네의 찬트는 그런 일까지 하기엔 아직 불완전해. 하지만 그래도 외부로부터 온 힘이 자네의 희망에 직접 작용하도록 하는 통로 역할은 훌륭히 해냈지. 자네가 사용한 힘의 출처는 다름 아 닌 저 검이었네.“ 당황한 다프넨이 입을 다물고 곁에 있는 윈터러를 보았다. 물론 검 에 떠올랐던 빛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그러나 섭정왕은 불쾌한 기색 없이 말했다. “그 검이 자네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것을 잊었나 보군. 좋은 승부였 네. 그러나 자네와 내가 둘 다 반칙을 한 셈이 되었으니 이 마지막 주 사위로 우리의 승부를 결정지어야겠군. 5가 나온다면 자네 말대로 자 네가 이긴다. 그러나 다른 숫자가 나온다면 내 승리겠지. 자네나 내가 던지는 것은 아무래도 바른 승부가 아닐 것 같으니 엔디미온이 대신 던지는 것이 어떨까.“ 다프넨은 고개를 끄덕였다. 엔디미온이라면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는 결론을 내려줄 거라고 생각되었다. 엔디미온은 망설이는 기색 없이 뽀족한 끝으로 서 있는 주사위를 냉큼 집어들어 가볍게 내던졌다. 딸깍, 떨어진 주사위는 5를 나타내 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입끝을 슬쩍 치컥올리며 말했다. “자, 결론이 났군요. 아버지께서 지셨고, 다프넨이 이겼어요. 아버 지께선 약속대로 소원을 들어주실 거예요. 다프넨, 넌 이곳에 너무 오 래 머물렀어. 이제 그만 돌아가는 편이 좋아.“ 섭정왕은 빙긋 웃었다. 그가 웃자 주위의 유령들도 겨우 얼굴을 풀 었다. 유령들은 딱히 누구의 편을 들고 있지는 않았으나 그들의 섭정 왕이 기분 상하게 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래, 자네가 이겼네. 약속은 지킬 것이야. 그 아이는 내일 다시 깨 어나 전처럼 건강해질 것이네. 하지만 자네를 위해 말하건대, 그 검을 만드신 분을 찾아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되기 전에는 지금처럼 그 힘을 남용하지 말게나.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순간, 그 검은 자네 도 모르는 사이에 그 소원을 이루려고 뜻밖의 재앙을 불러일으킬 지 도 모르네. 그리하여 자네의 손에 원하지 않는 피를 묻히겠지. 자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에게 비극이 벌어지는 걸 진정으로 원치 않는다면, 때가 올 때까지는 마음을 평온하게 먹고 누군가를 열 렬히 미워하거나 어떤 힘을 강렬히 바라지 말게나. 살아 있는 인간에 게 가장 어려운 길인 것을 아네만, 자네는 마치 우리 죽은 자와 같은 길, 다시 말해 '소원 없는 인간‘ 의 길을 걸어야만 하네.“ 그것은 매우 어려운 요구였지만, 현재 다프넨의 상황에 가장 정확 한 충고이기도 했다. 다프넨은 고개를 끄덕여 그것을 받아들였다. 자 신이 어렴풋하게만 느끼고 있던 길을 섭정왕이 확실히 정해주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검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것을 해낼 수만 있다면..... 자신 은 검이 보여 준 과거의 사람들처럼 검의 힘에 삼켜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살아 있는 인간답게 아직도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 들이 많았다. 복수하고 싶은 자, 지키고 싶은 것, 잊고 싶지 않은 일, 그 모든 것이 뒤범벅되어 존재하는 지금의 자신이 그것을 해낼 수 있 을까. '소원 없는 인간‘ 이 될 수 있을까. “이제 떠나게나. 우리와 헤어져 저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자네가 통과해 왔을 마음의 숲, 멘탈 포레스트(Mental Forest)가 보일 테고, 그곳을 넘어가면 다시 자네의 세계가 보일 거야. 똑바로 가는 것이 좋 을 걸세. 이번에는 인도자가 없으니 만일 자네 마음 속에 상념이 많다 면 주위에서 이상한 그림자들을 많이 보게 될 것이네. 무엇이 보일지 는 나도 다 알 수가 없군. 어쩌면 과거의 고통이 보일 수도 있고, 또는 평소 궁금했던 비밀을 볼 수 있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들을 너무 멀리까지 따라가지는 말게. 멘탈 포레스트에서 길을 잃어버리면 다시 는 본래의 길로 되돌아올 수 없으니 말이지.“ 엔디미온이 일어나면서 다프넨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입구까지 데려다 줄게.” 다프넨은 일어서서 그 말에 따랐다. 유령들과 섭정왕에게 인사를 남기고 푸르게 번쩍이는 기둥들 사이로 걸어 맨 처음의 문 앞까지 갔 다. 그곳에서 뒤를 한 번 돌아보니 유령들은 다프넨의 일은 잊어버린 것처럼 저들끼리 대화에 몰두해 있어 아무도 이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엔디미온은 갑자기 옷 안쪽에 손을 넣더니 무언가를 재빨리 꺼내 다프넨의 손에 쥐어 주었다. “안녕. 이젠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걸. 네 삶의 갈림 길에서 네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물건이 되길 바랄게. 네가 알의 동굴 에 남기고 간 기억의 알들을 보면서 난 널 기억하겠지.“ 다프넨은 불쑥 물었다. “좀전에 마지막 주사위가 5가 된 것은 역시 너의 힘이었지?” 엔디미온은 코를 찡그리며 짓궂게 미소지을 따름이었다. “너의 상상에 맡길게. 먼 땅에서도 언제나 행복하길. 난 네가 행복 해질 수 있다고 믿어. 너 자신만의 힘으로도.“ 문이 닫혔다. 손을 펴 보니 거기엔 조금 전에 던졌던 상아 주사위 한 개가 놓여 있었다. 5. Mental Forest 니키티스와 함께 통과해 왔던 마음의 숲에는 여전히 안개가 자욱히 깔려 있었다. 다프넨은 자신이 무엇을 보게 될 지 몰랐기에 길을 잃지 않으려고 잰걸음으로 숲을 빠져나가려 했다. 처음에는 섭정왕의 예고와는 달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 다. 그러나 혹시 무언가 보이지 않을까 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순간, 몇 개의 그림자가 곁을 스치는 걸 목격하고 말았다. 맨 처음 보인 것은 대장장이인 듯한 한 늙은이였다. 그는 주위에 몰 려선 사람들은 아랑곳 않고 계속 망치를 두드리고 있었는데 옆벽에 하얗게 반짝이는, 눈에 익은 검집이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다프넨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으나 고개를 흔들며 재빨리 지나쳤다. 조금 더 가자니 길 오른쪽 수풀 앞에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의 소녀가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처음엔 누구인지 깨닫지 못했지만 잠시 후 그녀가 실버스컬에서 만난 적이 있는 오를란느 공주 샤를로 트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때보다 더 어려 보이는 샤를로트는 크고 화려한 석조 관 앞에 망 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누가 죽은 것인지 다프넨으로서는 짐 작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궁금해서 몇 걸음 다가가는 순간 주위의 숲이 순식간에 화려한 복도로 바뀌는 것을 본 다프넨은 흠칫하여 도 로 뒷걸음질쳤다. 주위는 다시 숲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왼쪽이었다. 사랑스러운 금빛 고수머리를 한 아기가 까르 륵 웃으며 저쪽으로 달아났다. 딸로 보이는 아기 주위에는 많은 사람 들이 팔을 벌리고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는 얼굴은 한 명도 없 었다. 그들 중 한사람이 트라바체스의 군사 관리들이 흔히 다는 견장 을 어깨에 붙이고 있는 걸 발견하고서야 겨우 어디쯤인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다. 다프넨은 아기의 귀여운 얼굴이 묘하게 낯익다고 생각 했지만 이번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시 좀더 걷다가 그는 저만치 정면에 두 명의 사내가 앉아 있는 것 을 발견했다. 그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기에 쉽게 지나치지 못하고 조금 걸음을 늦추는 순간, 놀랍게도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면 이제..... 살아나실 수는 없는 것이군요. 이제는 결코.....” “죽는 것은 너나 나나 모두 똑같아. 다만 나는 일찍 죽고, 너는 늦게 죽을뿐이야.“ 첫 번째 목소리가 어쩐지 귀에 익었다. 그러나 당장 누구의 목소리 라고 딱 집어 말하기는 힘들었다. 두 번째 목소리는 기운이 없긴 했지 만 상당히 날카롭기도 하고, 노래를 잘 하는 사람처럼 굉장히 울림이 좋았다.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에게 대뜸 던지는 저 시니컬한 말투로 보아 상당히 자존심이 강한 사람일 듯했다. “죽는 것은 별로 괴롭지 않습니다. 아니, 그냥 그럴 것만 같습니다. 저의 귀환을 기다리는 사람은 거의 없고.... 지금은 아무 것도 생각나 지 않는군요. 그렇지만 사제님 같은 분이 살아서 되돌아가시지 못한 다는 것을 알면 모두들 슬퍼하겠지요. 그리고.... 그냥 그런 것이.... 떠 오릅니다.“ “모두라고? 적어도 섭정은 내가 돌아갈 수 없게 된 걸 알면 매우 기 뻐할 것이다. 그 외에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너무 많아. 흥..... 만일 네가 살아날 수 있다 해도 내가 없어지는 편이 너한테는 득 이 될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한 번도 사제님을 미워한 일이 없 습니다.“ 저도 모르게 무언가를 느낀 다프넨이 몇 걸음 다가가자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잔 물방울들이 베일처럼 서린 숲 가운데 기진맥진한 모습의 두 사내가 하나는 나무에 기댄 채로, 다른 하나는 애써 바른 자세로 앉은 것이 보였다. 나무에 기댄 자는 서른 후반 정도의 외모로 키가 매우 크고 체격도 당당한 남자였다. 뚜렷한 얼굴을 보기 위해선 조금 더 다가가야 했다. 다프렌은 무심코 그들이 자신을 발견하지 않을까 하는 기분에 사로잡 힌 채 몇 걸음 앞으로 걸었다. 그러나 다프넨이 바른 자세로 앉은 남자 의 바로 등 뒤에 설 때까지도 그들이 다프넨을 발견한 기색은 없었다. “거짓말이다. 내가 너를 그토록 미워했는데, 네가 그렇지 않았리을 없으니.“ “이제 와서 굳이 설득할 필요는 없겠지요. 단순한 진실만을 말한다 면 저는 사제님의 마음을 줄곧 이해해 왔습니다. 이해하면서도 따를 수 없었기에 제 죄가 클 뿐입니다.“ 나무에 기댄 남자는 코웃음을 날리고는 대답이 없었다. 도드라진 눈썹뼈 아래 칼자국처럼 움푹 패인 오각의 눈매, 짙은 청남색 눈빛 단단한 턱과 윤곽이 또렷한 인중..... 선이 고운 미남자는 아니지만 남 자들이라면 저도 모르게 위축될 정도로, 아니 감명을 받을 정도로 확 고하고 강인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그런 사람이 부상이라도 당한 듯 안색이 창백하고 힘겨운 기색인 것을 보니 어쩐지 착잡한 기분까지 들었다. 몇 백 년을 살아온 아름드리 거목이 벼락에 쓰러지거나, 숲의 왕이었던 사나운 매가 화살에 꿰어진 것을 볼 때 누구나 느낄 법한 그 런 안타까움이었다. 땀에 흠뻑 젖어 흐트러진 금빛 머리칼 사이로 창날처럼 갸름하고 날카로운 턱끝을 보았을 때 다프넨의 머릿속에 어렴풋이 겹쳐지는 모 습이 있었다. 잠시 후 그가 애써 손을 들어올리더니 얼굴을 가린 머리 카락들을 치우며 고개를 젖혔다. 그제야 다프넨은 그가 누구인지 확 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어깨 너머에 꽂힌 것은 다프넨의 눈에 너무도 익숙한 쌍검이었다. 이솔렛의 검..... 지금처럼 손잡이가 낡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녀가 지 닌 그 검이었다. 그녀 외에 그 검의 주인이었던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일 수가 없었다. 이솔렛의 아버지, 일리오스 사제였다. 그렇다면 그가 보고 있는 이 순간은...... 일리오스가 죽음을 맞을 때 의 모습이란 말인가? 그러면 그의 곁에 있는 사람은? “여전히 저를 용서하지 못하시겠지요. 말씀대로 얼마 안 가 죽어갈 목숨이라면 조금 더 일찍 죽는다 하여 달라질 짓은 없겠지요. 어차피 한 번 사제님께서 살려주신 목숨이니 지금, 이 앞에서 목숨을 끊어서 사제님의 오랜 분노를 조금이라도 가라앉힐 수 있다면 그리 하겠습니 다.“ 젊은 시절의 나우플리온은 지금처럼 닳아 다듬어지지 않아서인지 훨씬 서슬 푸른 성격인데다 일리오스 못지 않은 외골이기도 했다. 심 지어 그는 말이 끝나자마자 자신의 검을 민첩하게 집어들어 바닥에 세웠다. 그러나 일리오스는 오히려 소리내어 웃더니 말했다. “네 발상이 우습구나. 그런 식으로 갚아질 것이라면 벌써 예전에 네, 목숨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다른 문제지. 차라리 그냥 너도 나를 미워하려무나. 그 편이 서로의 계산도 맞고 내 마음도 편할 테니 까. 하긴, 너는 마을로 돌아간다 해도 며칠 가지 않아 광기에 사로잡 힐 몸이니 내려가지 않고 여기서 죽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닐 것 이다. 하지만 지금 그 검은.......“ 그 순간 일리오스의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그는 눈을 크게 뜨 고 약간 경련하더니, 갑자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외침을 내질렀다. “그 검! 너는 그 검을 어디에서 얻은 것이냐!” 나우플리온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자세히 보니 젊은 날 그의 얼굴은 지금보다 선이 가늘어 미남자에 가까웠고, 특히 눈매가 매서웠다. “당연히 이것은 제 스승께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입니까?“ 그 순간 일리오스는 말을 뚝 그치고 괴로운 듯 신음하다가 물었다. “그걸 정말로.... 네 스승이라면.... 오이노피온 그 노인이 만들었단 말이냐? 그게 사실이라면...., 오, 이런.......“ 다프넨은 대략 10여 년 전에 일어난 이 사건의 새로운 목격자가 된 자신을 경이롭게 느끼며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 은 저절로 나우플리온이 땅에 짚은 검으로 향했다. 검은 무언가를 베 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쏟아지는 피가 흠뻑 씌워진 것처럼 온통 피투성 이였으며 거기에는 놀랍게도 그가 이미 한 번 본 일이 있는 글자가 새 겨져 있었다. ‘너의 피도 예비되었는가' . 나우플리온에게 빌려 실버스컬에서 우승한 검에도 똑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던 것을 다프넨은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리노프의 목 을 친 뒤 피로 젖었을 때에야 나타나던 글씨..... 아, 역시 그랬다. 나우플리온이 대륙에서 가지고 다니기도 했고, 다 프넨에게 빌려주기도 했던 그 검은 나우플리온이 어린 시절 오이노피 온 스승에게 배울 때부터 쓰던 손때 묻은 검이었다. 그 검은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젊은 나우플리온이 쥔 검과 똑같은 물건일 것이다. 그러나 일리오스가 놀라는 까닭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오이노피온 노인은 자신이 만든 모든 검에.... 그런 글자를 새기는가?” “무언가 글자를 항상 새기긴 하셨지만, 이 글귀는 아이들에게 주실 검에만 있습니다. 첫 살해를 저지른 아이에게 살인에 대한 경계심을 심어주고자 그런다고 하셨지요. 저도 어린 시절에 이 검을 받았습니 다. 그런데 혹시.....“ 나우플리온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일리오스는 갑자기 등 뒤에 꽃 힌 자신의 쌍검 가운데 하나를 획 뽑아들어 스스로의 팔을 그었다. 검 이 얼마나 예리한지 베고도 조금 후에야 가느다란 금이 생겨나며 피 가 주르륵 흘렀다. 나우플리온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며 일리오스 의 손을 붙들었지만 일리오스는 남은 힘을 다해 거칠게 뿌리쳤다. 그 리고 자신의 검 표면을 흘러나오는 피에 문질렀다. 다프넨의 예상대로였다. 나우플리온의 검에 새겨져 있던 것과 똑같 은 글귀가 검의 표면에 희미하게 드러났다. 현재 이솔렛이 갖고 있는 검은 일리오스로부터 물려받은 검이고 이미 다프넨은 그녀의 검에 자 신의 검과 똑같은 글자가 새겨져 있음을 대륙에서 확인한 터였다. 일리오스의 입가에 희미한 조소가 흘렀다. 씹어 뱉듯 하는 어조로 나직이 시작한 말은 결국 상처 입은 자존심을 견디지 못한 자의 고함 으로 변했다. “그래, 그 늙은이가 나를 얼마나 철저히 우롱했는지 알겠구나. 처음 부터 끝까지, 나를 놀릴 작정이었던 거야. 그 알량한 동정심...... 그게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말하고 싶었나? 제 놈의 제자한테 언젠가 무 릎 꿇고 사죄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태평하게 한 세상 살 다 갈 수 있었던 건가? 왜 아무 말도 안 한 거지? 내가 수많은 오류를 저지르고 이제 최후의 횡포까지 부린 끝에 죄책감으로 비참해지는 꼴 을 보려고? 그런 식으로 지금 이 순간,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 심지어 죽어 없어지기까지 해서 내 손으로 어떤 보답도 할 수 없게 했지! 더러운 노인네! 지옥에나 떨어질 빌어먹을 늙은이!“ 격분을 못 이겨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에게서 조금 전의 냉소적인 태도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다. 차츰 흥분한 나머지 저주에 가까운 울림으로까지 커진 그 목소리를 들으며 다프넨은 거기에 담긴 이율배 반적인 감정을 읽었다. 겉으로 쏟아지는 분노와 악담 속에는 깊은 회 한과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고, 그의 자존심 이 그런 감정을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게 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 다. 다프넨이 그의 옛 행적에서 느꼈듯 일리오스는 현명한 사람도 아 니었고 완벽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신조차 망설임 없이 부숴 버릴 이 사람에게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리고 이 순간의 나우플리온도 오늘날의 그가 그렇듯 상대를 잘 이해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제 스승을 왜 모욕하십니까? 이유를 말하십시오. 자꾸 그러신다면 저 역시 참을 수 없습니다.“ 그 순간 금빛 눈썹을 치켜올리며 나우플리온을 쏘아보는 일리오스 의 표정은 다프넨이 흠칫 놀랄 정도로 이솔렛과 닮아 있었다. “참을 수 없으면 나를 쳐라!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과 직접 치는 것 은 분명히 다를 테니까 내가 저절로 죽기 전에 서둘러 죽이는 것이 좋 을 것이야. 그렇게 하면 죽기 전에 내 마음도 편해지겠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십니 까? 제 스승님이 무얼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사제님의 그 검... 그 검은 제 스승께서 만들어 주신 것입니까?“ 일리오스는 대답없이 욕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검을 짚고도 겨우 일어설 정도로 악화된 몸이었지만 간신히 걸을 수는 있 었다. 그는 그렇게 안개 속으로 걷더니 잠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조 금 후, 다시 나타난 그의 손에는 산산이 부서진 붉은 돌조각 같은 것 들이 한 움큼 들려 있었다. 일리오스는 나우플리온 앞까지 다가가더니 가쁜 숨을 내쉬며 자리 에 앉았다. 그가 손가락에 마법력을 가해 바닥에 긋자 마치 조각칼로 파낸 듯한 선이 그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런 식으로 동심원을 세 개 그린 그는 주변에 다섯 개의 룬(Rune)을 써넣고 한가운데에 붉은 돌 조각들을 놓았다. 매우 간단한 마법진이었다. 주문을 외우거나 하지도 않았는데 동심원 전체에서 저절로 붉은 빛 의 원기둥이 생겨나 허공으로 솟는 것이 보였다. 그 즈음 일리오스는 곧 마지막 숨을 몰아쉴 사람처럼 지쳐 있었다. 빛은 이윽고 부채꼴로 퍼지며 두 사람의 모습을 지워 버렸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다프넨이 다시 두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때 일리오스는 바닥 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고 나우플리온은 믿을 수 없는 일을 본 듯 당황 해 있었다. 그러나 곧 그는 약간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알 것 같습니다. 사제님께서는 안테모에사와 저 가운데 무심코 저 를 구하시고서 스스로 불쾌하셨던 것이겠지요. 이유야 어찌 되었든 오랫동안 곁에 두신 제자 대신 저처럼 무례한 자를 구했다는 것에 대 해서 말입니다. 원망.....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겠습니다. 지금 만 들어 주신 제 삶의 유예에 만족합니다. 그것으로 할 수 있는 중대한 일이 분명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일리오스는 마지막 순간, 더듬거리지 않고 바르게 말하는 것에 남 은 기력을 모두 쏟아 붓고 있었다.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띄엄띄엄 이어졌다. “어차피 완전히 살아난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10년 정도면 꽤 성 공적인 거겠지. 하지만 내가 널 용서해서 이런 일을 했다고는 생각하 지 마라. 오이노피온이 내게 제멋대로 지운 짐이 이 늦은 시각까지 라 를 부당하게 짓누르는 느낌이 든다.... 아...... 하지만 나는 빚지고는 살 수 없는 인간이야. 아니, 이젠 빚지고 죽을 수 없는 인간이라고 말 해야겠군. 그 노인네가 나한테 끝내 이런 꼴을 당하게 하니.... 죽은 뒤 에는 반드시 한바탕 따지러 가야겠다....... 다른 것 필요 없고 하나만 부탁하지. 내 시체를 깨끗하게 없애 버려. 아무도 찾을 수 없도 록...... 죽은 모습 따위 누가 보는 건...... 몇 번 생각해 봐도 역시 내 키지 않아.“ 나우플리온은 그 순간 울컥하는 심정을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사제님은 왜 그렇게 고집이 세신 겁니까! 혼자 남을 이솔렛에게 무 덤조차 남기지 않으시겠다고요...? 그 아이가 사제님 없는 세상을 어 떻게 살아갈지 누구보다도 잘 아시면서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습니 까! 그 앨 두고 끝내 이곳으로 오셔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시고.... 사 제님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섭정 각하 따위 가 다 무엇입니까? 진실은 뭐고 정의는 뭡니까? 이솔렛이 행복해진다 면 그것 하나로도 다른 것은 다 필요 없을 텐데, 왜 사제님은 그 애 곁 에 있어주지 못하셨지요? 죽는 건 저 같은 사람으로도 족하단 말입니다!“ 그러나 일리오스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나우플리온의 목소리 만이 귓가에 쟁쟁하게 울리며 다프넨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사제님 없는 섬이 어떤 곳일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사 제님 아닌 다른 사람을 검의 사제로 받아들이기나 할까요? 저는 스스 로 맹세했건만, 결국 사제님 대신 죽지 못했습니다. 한 번 어긋난 것 은 영원히 어긋난 것이로군요...... 용서받지 못한 자로서 살아갈 생애 도, 기껏 10년이면 다시 찾아올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 쯤, 희망 없는 자에겐 아무 것도 아립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혼자서 내려가야 합니다.... 돌아가서..... 이솔렛에게 사제님이 이젠 돌아오지 않으신다고 말해야 합니다...... 차라리 제가 여기 남고 사제님이 마 을로 돌아가실 수 있다면..... 좋을 터인데...... 저는 이솔렛의 눈물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그 어떤 것보다도 보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이솔렛의 눈물...... 다프넨의 심정도 다르지 않았다. 이제는 눈물 없는 소녀가 되어버 린 이솔렛이 그 때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 들으며 어떤 반응을 보였을 지 짐작가지 않았으나, 지금 그녀가 운다면 그 역시 견디지 못할 것은 자명했다..... 숲이 흐려졌다. 다프넨은 두 사람의 영상 위로 문득 새로운 잎사귀 의 윤곽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들 두 사람이 있던 곳도 숲이었기에, 다프넨이 걷던 숲과 풍경이 다르다 는 것을 얼른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돌아갈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다프넨은 뒷걸음질 쳐 멀어졌다. 사방이 다시 처음의 숲으로 바뀌기를 기원하며, 급히 돌아 서 입구를 향해 내달렸다. 그러나 싸늘한 두려움과 아픔이 가슴을 후벼팠다. 나우플리온은 일 리오스가 죽인 괴물과 함께 싸웠으며, 그 때 예프넨과 같은 광기의 상 처를 얻었던 것이다. 일리오스 사제가 행한 무엇인지 모를 특별한 의 식이 그의 생명을 연장해 주었고, 그것은 대략 10년이라 했던가? 이솔렛의 당시 나이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이제 그 기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3장. Gaunts Lans 1. 심판 재판이 있었다. 최근 몇 년간은 큰 죄를 지은 사람이 없어 기껏 약식 재판으로 중재 하는 정도가 전부였기에, 오늘처럼 정식 재판이 열린 것은 매우 오랜 만이었다. 재판이란 본래 구경거리이기 마련이라 많은 사람들이 호기 심을 갖고 재판정으로 모여들었다. 재판 발의는 재청자가 필요 없는 검의 사제인 나우플리온이 직접 맡았다. 나우플리온은 사제들이 모두 모이는 회의에 일부러 오이지스 를 데려가 해당자들의 죄목을 말하게 하고 스스로 고발자의 역할을 떠 맡았다. 워낙 사안이 중대한지라 재판정은 하루만에 즉시 준비되었다. 재판관으로서 판결을 내리는 것은 검의 사제인 페이스마의 직분이 었다. 재판에서만은 그의 권위가 다른 사제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섭 정보다도 높았다. 고발당한 소년들은 모두 다섯 명이고 바로 오이지 를 사주했던 에키온은 빠져 있었다. 별로 심문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고발당하여 끌려나온 즉시 자 신들의 죄가 밝혀졌음을 깨닫고 부들부들 떨며 변명할 거리도 찾지 못했다. 구원해 줄 것으로 믿었던 헥토르의 집안이 철저히 모르는 체 함에 따라 밝혀진 죄를 피할 방법은 이제 없게 되었다. 다프넨은 구경꾼들 사이에서 재판을 지켜보고 있었다. 고발자의 자 리에 선 나우플리온이 오이지스를 옆에 세우고 조목조목 그의 말을 옮기며 소년들에게 죄를 자백하게 했다. "이미 뒤쫓을 필요가 없어졌는데도 장서관까지 따라 들어간 까닭은 무엇이냐?“ 소년들은 매번 누가 대답해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거짓말을 준비 하지 못한 터라 그들의 대답에는 체계가 없었다. "그냥..... 장난을 치고 싶었던 것뿐이고......“ “따라간 게 아니라 그냥 들어가 보려고......” "오이지스가 장서관에서 스스로 나왔는데도 너희는 그를 끌고 안으 로 들어갔지. 그건 다시 말해 장서관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오이지스 의 마음을 조롱하고 싶었기 때문아닌가?“ "그냥 싸우며 굴다 보니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서.....“ "실은 장서관에 한 번도 못 들어가 보았기 때문에 궁금해서.....“ 나우플리온은 사실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거짓말에는 대꾸할 필 요가 없었다. "장서관의 제로 씨는 한 번도 너희 같은 아이들의 출입을 막은 일이 없다. 너희는 평소 장서관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껏 가지 않은 것뿐이야. 그런데 굳이 오이지스가 들어가는 것을 보니 너희도 들어 가 보고 싶어졌단 말이냐? 너희의 상충되는 말은 결국 오이지스를 괴 롭히기 위해 일부러 장서관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밖에 되 지 않는다. 다음. 오이지스를 구타한 것이 장서관 안이었다는데 너희 다섯이 모두 가담했나?“ 갑자기 갈레가 소리질렀다. "아, 아니에요! 오이지스를 때린 건 피쿠스였어요! 그 애가 혼자서 때렸어요!" 그러자 피쿠스도 얼굴이 파래지더니 지지 않고 외쳤다. "어차피 들어가기 전부터 모두 때린 것은 똑같잖아! 난 장서관에서 그냥 몇 대 더 때렸던 것뿐이야!" "무슨 소리야! 그 애는 우리한테 맞은 다음에도 장서관까지 도망갈 기운이 있었잖아! 하지만 너한테 맞은 다음에는 일어나지도 못했어!" 궁지에 몰린 피쿠스가 미워 죽겠다는 듯 갈레를 쏘아보며 다시 맞 받아 쳤다. "그렇게 말할 것 같으면 장서관 안에 들어가자고 먼저 제안한 건 갈 레 너였어." 갈레도 혼자 죄를 뒤집어쓰려 하지 않았다. "그, 그래, 내가 들어가자고 했지만 1층에는 아무 것도 없었어! 사 다리를 보고 위로 올라가자고 한 건 리코스였지. 내가 아니라고!" 리코스도 눈을 크게 뜨며 도리질하더니 소리쳤다. “내가 언제 그랬어?” “네가 그랬잖아! 올라가 보자고 말했잖아!" "아냐! 사다리를 발견한 건 내가 아니란 말이야!" "누가 발견했든 올라가자고 한 건 너야!" "그래서 나 혼자 올라갔어? 결국 전부 올라갔으면서 왜 나한테만 그래!" 나우플리온은 소년들의 언쟁을 일부러 막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페 이스마 사제도 그들의 말을 들으며 대략의 상황을 눈치채는 듯했다. 결국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여 마지막 죄상까지 모조리 밝혀버 리는 꼴이 되었다. "그래서? 그 책을 꺼낸 건 네가 아니야?" "난 딱 한장만 태웠을 뿐이야!" “난 나무로 된 탑이니까 불이 나기 쉬울 거라고 분명 말했어!" "램프를 들고 불안정한 계단 위로 올라간 게 누군데 그래! 포티아 너 아니었어? 네가 곡예를 보여준다고 멋대로 올라갔잖아!" "그렇지만 네가 계단을 발로 찼잖아! 그래서 손이 미끄러진 거라고! 안 그랬으면 내가 왜 램프를 떨어뜨린단 말이야!" 그 즈음에서 나우플리온은 소년들의 말을 멈추게 하고는 한 명을 찍어서 물었다. "포티아, 네가 램프를 떨어뜨렸으니 불을 탠 당사자가 틀림없군. 하 지만 불을 냈다 해도 얼른 마을로 돌아가 어른들을 불렀더라면 이 정 도로 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 일을 숨 기자고 제안했을 거야. 그 녀석이 가장 죄질이 나쁘다고 할 수 있겠 지. 그게 누구였지?“ 포티아는 기다렸다는 듯 소리질렀다. "갈레였죠! 갈레가 어차피 돌아가도 크게 혼날 것이 틀림없으니까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했어요!" 나우플리온은 냉소를 띠며 오이지스를 한 번 내려다보더니 다시 한 번 물었다. "오이지스는 너희의 대화를 모두 기억하고 있어. 자, 말해봐라, 그 러면 너희 가운데 누가 가장 먼저 오이지스를 장서관에 내버려두고 나가자고 말했나?“ 이번에는 세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피쿠스였어요!" 피쿠스는 항변했다. “내가 그렇게 하는게 어떨까 하고 말하자마자 모두 찬했잖아! 녀 석이 죽어야 증거가 없어진다고 말한 건 파이디 너였잖아!" 이제 충분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돌린 채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고 있었다. 사실 나우플리온이 맨 처음 제출한 고발 내용에는 이들이 고의로 오이지스를 내버려두고 달아났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또한 재판이 의결된 회의 당시 사제들의 여론 중에서도 아무 것도 모 르는 아이들이 실수로 불을 내고 놀라 도망친 것일지도 모른다는 온 화한 해석도 있었다. 오이지스가 심하게 다친 것도 모두 어울려 싸우 다가 그렇게 된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년들은 서로에 게 책임을 미루다가 중요한 부분을 모두 발설하고 말았다. 아직 아이 들이라서 나우플리온의 간단한 유도심문에 너무도 쉽게 걸려들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우플리온은 소년들을 진정시킨 뒤 질문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묻자, 너희들이 맨 처음 오이지스를 때리기 시작 한 이유는 무엇이었지? 누군가 그걸 시키기라도 한 것이었다면 너희 의 죄는 가벼워질 것이야." 한 소년이 불쑥 뭔가 말하려 했는데 다른 소년이 다리를 탁 걷어차 며 말하지 못하게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다섯 소년들 모두 약속 이나 한 듯 입을 다물게 되었다. 몇 번 되풀이해서 물었지만 끝내 그 들은 자기들끼리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 뿐, 아무도 시킨 사람은 없었다고 말했다. 심문은 끝났다. 소년들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지켜보고 있던 어른들은 이미 이들이 무슨 판결을 받게 될 지 짐작하고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페이스마 사제가 일어섰다. 그는 관습법을 수호 하는 궤의 사제답게 자신의 정의를 매우 고집 세게 지키는 사람이었 다. “다섯 사람에게 해당되는 죄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죄, 여러 명이 힘을 합쳐 한 소년을 특별한 이유 없이 구타한 일. 이는 또래 아이들 사이에 흔히 일어나는 일로서 특별히 재판정에서 다뤄질 정도의 죄가 된다 할 것은 없다." 섬사람의 관점이 그러하기에 예전에 오이지스가 무수히 많은 괴롭 힘을 당했는데도 아무도 나서서 제지하지 않은 것이리라. 더구나 체 력과 힘이 약한 자를 경시하는 풍조 때문에 자신의 몸을 지키지 못한 것은 스스로의 잘못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둘째 죄, 섬의 옛 기록을 보전해 온 장서관에 불을 지른 일. 비록 고의가 아니라 하나 그 시작 의도가 불순하므로 이는 큰 죄이다. 수많 은 책들과 마법에 대한 기록들이 타 없어져 섬에 크나큰 손실을 입혔 으며 간접적으로 장서관을 지키는 제로의 실명에 대한 책임 역시 피 할 수 없다할 것이다." 이제 상황을 모르는 것은 명백히 피고인 소년들뿐이었다. 그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페이스마 사제와 그들 주위의 부모 형제들을 번 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셋째 죄, 특별한 죄를 짓지 않은 자를 구타하여 운신 능력이 없게 하여 놓고 그를 화재 속에 고의적으로 방치한 일, 이는 의심할 바 없 이 살인을 획책한 것이다." ‘살인' 이라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 소년들은 얼어붙었다. 소년들의 부모는 감히 입을 열지 못했으나 그들과 똑같이 얼굴이 납빛으로 변 해 있었다. 페이스마 사제는 마지막으로 소년들을 직접 보며 말했다. “마지막 죄, 셋째 죄가 단순한 과실이 아니라 저들이 지은 죄를 은 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행한 일이라는 점. 이 모든 점을 고려하고 성 의 옛 전통을 살피어 마지막으로 판결하노니 리코스, 피쿠스, 갈레, 포티아, 파이디, 다섯 사람에게는 익사형이 내려질 것이다. 달여왕이시여 저희의 결정을 굽어보소서." 가벼운 소란이 일어났다. 섬에서는 전통적으로 판결이 내려진 직후 에 주위 사람들이 자비를 호소할 수 있었으므로 소년들의 부모며 형 제들이 한꺼번에 뛰어나와 페이스마사제 앞에 엎드렸던 것이다. 익 사형 판결을 받은 소년들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한 덩어리가 되어 떨고 있었다. 그들은 살아 생전 섬의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 사람을 처음으로 보았다. 더구나 그 대상은 바로 자신들이었던 것이다. 그 즈음 다프넨은 사람들 틈에서 몸을 돌려 빠져나왔다. 어쩐지 마 음이 개운치 못했다. 섬의 판결과 형 집행은 참으로 단순하고도 신속했다. 그것이 가나 폴리로부터의 전통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섬에는 감옥 같은 것이 없었 고, 형은 판결을 받은날 오후에 바로 집행되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 에 대해서만은 다프넨도 좀 잔인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부모들의 호소가 거절되자마자, 검의 사제 아래에서 검의 길을 걷 는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달여왕의 군대' 가 당장 소년들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포위한 뒤 손을 묶었고, 주위 사람들과 대화도 나누지 못하 게 했다.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없는 것은 물론이었고, 부모나 형제와 의 이별을 위해 주어지는 시간 같은 것도 없었다. 심지어 마지막 식사 한 끼조차도 주지 않았다. 익사형이 집행되는 장소는 다프넨이 한 번도 가본 일이 없는 남쪽 해안의 낭떠러지였다. 손을 묶인 소년들은 검의 길을 걷는 젊은이들 에 의해 떠밀리듯 하여 정신 없이 그곳까지 갔고, 그 뒤로 구경꾼들이 줄줄이 따라붙었다. 다프넨 역시 구경꾼들에 섞여 그 길을 걷고 있었다. 여전히 마음은 편치 못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싶었다. 그들의 처벌을 누구보다도 바랐던 자신이 아닌가. 그리하여 끝내 그렇게 되도록 만든 것도 자신 이 아닌가. 낭떠러지에 도착하자 다프넨은 아예 가슴이 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그곳은 바다 쪽으로 길게 내밀어진 일종의 곶이었고, 죄인들 은 그 좁은 길을 한 명씩 걸어가 스스로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이다. 아래로 1백여 미터에서 좀 모자랄까 싶은 높은 절벽과 날카로운 암초투성이의 거친 바다가 보였다. 섬 출신인 사람들은 모두 헤엄을 잘 치기 때문에 떨어지는 순간 죽이는 것이 목적일지도 몰랐다. 바다는 소용돌이쳤다. 아니, 포효하며 맴돌았다. 희생물을 기다리 는 맹수 같기도 했고, 크게 벌려 들쭉날쭉한 어금니를 드러낸 살아있 는 입 같기도 했다. 그런 바다가 바라보이도록 다섯 명의 '죄인'은 일 렬로 세워졌다. 다프넨은 그들 곁에 조금 떨어져 선 나우플리온의 얼 굴을 건너다보았다. 그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는 곧 ‘달여왕의 군대' 중 한 젊은이에게 명령했다. "그들의 눈과 입을 가려라." 흰 천으로 눈이 가려지고, 이어 재갈이 물려지려 하자 소년들은 온 몸을 뒤틀며 몸부림쳤다. 그 중 한 명이 얼른 알아듣기 힘든 외침을 쏟아냈지만 구경꾼들에게까지 정확한 내용이 들리지는 않았다. 이윽 고 재갈은 모두 물려졌다. 말을 못하게 하는 것은 죽음에 이른 자가 누군가에게 악에 받친 저주를 퍼붓게 되면 실제로 그 효과가 나타나 게 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첫 번째가 된 리코스는 걷지 않으려 했다. 바닥에 주저앉았고, 일으 키려 하자 묶인 손을 비틀고 매달려 늘어지며 신음인지 울음인지 모 를 소리를 토해냈다. 그러나 그의 반항은 오래 가지 못했다. 두 명의 젊은이가 팔을 하나씩 움켜잡아 번쩍 들어올리고는 이렇게 말했던 것 이다. "계속 이렇게 한다면 너는 절벽 끝까지 직접 걸어갈 기회조차 잃게 될 거다." 낭떠러지까지 겨우 다섯 걸음 가량 남은 위치에서 리코스의 팔이 놓여졌다. 눈이 가려진 소년은 다시금 입 속으로 윽윽대는 소리를 내 며 급히 몸을 돌려 사람들 쪽으로 뛰어가려 했다. 그들에게 자유로운 것은 발뿐이었다. 그러나 눈이 가려진 사람에게 낭떠러지의 끝은 너 무도 좁았다. 리코스는 발을 돌리는 순간 허공을 디던 중심을 잃었고, 그대로 물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파도 소리에 묻혀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는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온 듯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 소리를 가장 예민하게 들은 것은 남은 네 소년들이었다. 네 명이 한꺼번에 몸부림치며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했 다. 재갈 밖으로 침이 흘렀고, 눈가리개는 눈물로 흥건히 젖었다. 그 러나 아무 소용없었다. 처음처럼 검의 길을 걷는 젊은이들이 소년들 을 하나하나 일으켜 세웠고, 모조리 낭떠러지 끝으로 보냈다. 갈레는 리코스처럼 되돌아 뛰다가 방향을 잘못 잡아 떨어졌고, 또 한 명은 끝 내 젊은이들의 손으로 바다에 던져졌다. 한 번은 물 속에 떨어지는 소 리 대신 무언가 딱딱한 것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렇게 마지막 소년까지, 용서 없이 모두에게 형이 집행되었다. 구경꾼들 중에는 울거나 하는 사람이 없었다. 판결 이후 죄인들을 위해 선처를 호소했던 자들은 처형 장면을 보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 서 이곳에 오지 못했다. 역시 원한을 품는 일을 막으려 하기 때문이었 다. 그렇다 해도 저렇듯 어린 소년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죽어 가는 것 을 보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며 다프넨은 가슴 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섬사람들은 다만 나직이 탄식할 뿐이었 다. 달여왕의 보복은 실로 두려우며, 자신들은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 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할 따름이었다. 이 자리에는 오이지스도 오지 않았다. 다프넨은 오이지스가 마음이 약해 이런 광경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일 거라고 추측해 보았다. 하지만 사실은 모를 일이었다. 실은 오이지스도 저주를 받는 것이 두려워서, 또는 사람들의 눈총을 받게 될 것이 싫어서 오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이상하게 맥이 탁 풀렸다. 이 사건의 주모자인 주제에 혼자 빠져나 간 에키온을 끌어내어 저들과 똑같은 형벌을 받게 할 마음도 나지 않 았다. 아니, 이젠 그런 일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조차도 혼란스러웠다. 메마른 땅이었다. 동시에 차가운 땅이었다. 그러나 다프넨은 집행을 마치고 구경꾼들 사이로 돌아와 그의 곁에 선 나우플리온의 눈가에서 마른 눈물의 흔적을 똑똑히 읽었다. 다프 넨은 나우플리온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사람들에 섞여 함께 마을로 돌아갔다. 5월이 밝고 얼마 되지 않아 축제의 날이 왔다. 즐겁게 떠들며 노는 일이 별로 없는 섬에서 아이들의 정화 의식이 치러지는 5월 초의 축제만은 몇 안 되는 예외였다. 정화 의식은 축제 의 마지막 날 행사였고, 그 전에는 주로 음식을 많이 장만하여 내놓고 너나없이 먹고 마시는 일이 이틀 간 계속되었다. 사실상 섬에는 농작물이나 가축이 늘 부족했기 때문에 낭비가 될 정도로 많은 음식을 만드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 때만은 조금 쯤 예외가 되어 사람들도 어느 정도 인심이 좋아졌다. 물론 그리 성대 하다고 할 수는 없었고 기간도 대륙의 축제들에 비해 몹시 짧았지만, 대륙에서 살아본 일이 없는 이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때도 별로 없 었다. 그러나 다프넨은 1년 만에 돌아온 축제를 즐길 마음이 나지 않았다. 작년도, 저 작년도 사실 그리 즐거운 축제 기간을 보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아예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 다는 기분이었다. 다섯 명의 아이들이 사라진 지 열흘이나 채 되었을까. 그런데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거나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 정 도는 일부러 그러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심지어 스콜리에서도 그들이 사라진 자리가 전혀 느껴지지 않도록 잘도 배려해 놓았다. 책 상의 위치가 옳겨지는 등 교실의 배치가 일신되었고, 선생들은 그들 이 쓰던 물건이나 심지어 그들의 이름이 거론된 낙서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없애버렸다. 이 즈음처럼 다프넨이 섬사람들을 낯선 자들로 느낀 때가 없었다. 그들은 거의 다 동정심이라고는 모르는 냉정한 인간들이며 대륙에 나가서는 절대 받아들여지지 못할 끔찍한 이방인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이번 축제의 정화 의식에서 정식 순례자가 될 자신조 차 때때로 매우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순례자가 되다니, 누가, 그 자신이?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던 까닭에 그는 축제 거리에서 우연히 이솔 렛과 마주치고도 말하는 것조차 잊은 양 그냥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솔렛은 섬사람들이 쓰던 물건을 내놓고 서로 교환하는 작은 시장에 나와 있었는데 그녀의 성품으로 그런 곳을 혼자 배회하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사실 뜻밖이었다. 이솔렛은 다프넨을 발견하고 자신이 무슨 말이든 꺼내거나, 또는 말을 걸어줄 거라 생각한 것처럼 멈추어 섰다. 그러나 다프넨이 입을 열지 않는 것을 보고는 눈을 내리깐 채 그냥 스쳐가고 말았다. 그 때 이후 축제 기간 내내 다시는 그녀와 마주치지 못했다. 정화 의식이 행해질 날이 밝았을 때, 다프넨은 침대 속에서 눈을 뜨고 생각했다. 이솔렛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이대로 지내는 것은 옳지 않았다. 대륙에서 함께 여행할 때 그는 분명 이솔렛을 좋 아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 번 간접적으로 표현했고, 그녀도 충분히 느 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 입장에서 보면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다프넨이 당혹스럽게 느껴질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자신이 말을 한다 해도 그녀가 이해해 줄까. 아니, 아마 그 렇지 않을 것이다. 최근 그가 뼈저리게 느낀 섬사람의 근성을 그녀라 해서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솔렛의 문제에 이르면 그 모든 혐오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런 혐오감이 좀더 유용하게 쓰여서, 그녀를 멀리하고픈 마음이 들게 해 준다면 얼 마나 좋을까. 아침을 먹으며 다프넨은 나우플리온의 부스스한 머리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었다. "왜 쳐다봐." 숟가락을 움직이면서도 눈은 떨어지지 않았다. 대륙에서 오래 살았 던 나우플리온은 섬사람들과 달랐다. 그의 사람됨에 반해 이곳까지 온 자신이 아니었던가. "몸은 좀 어떠세요?“ 난데없는 질문을 받은 나우플리온은 한쪽 어깨를 올리며 대꾸했다. "보다시피 멀정하다." "아프신 데 없고요?“ "벌써부터 노화 현상을 기대하는 건 무리야."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말투였기 때문에 다프넨은 좀 헷갈리 기도 했다. 정말로 아픈 데가 전혀 없는 건 아닐까. 그 멘탈 포레스트, 마음의 숲에서 본 영상은 그의 환각에 불과한 것 아닐까. 그러나 곧이어 튀어나온 것은 어이없는 덕담이었다. "오래오래 사세요." 나우플리온은 숟가락을 입에 문 채 어이가 없다는 듯 대꾸했다. "오늘 새해 첫날 아니야." "누가 그렇댔나요. 말도 못하나." “말도 마. 요즘 어찌나 건강한지, 이런 몸으로 할 일 없이 놀자니 좀 이 쑤셔 죽겠어. 이거 얼른 축제가 끝나야지, 원." 식사가 끝나자 나우플리온은 다프넨을 가까이 오게 해서 머리도 좀 쓰다듬고, 옷매무새도 바로잡아 주었다. 다프넨은 자기 주변은 잘 정 리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용의도 일반적으로 단정해서 사실상 별로 고 쳐줄 것은 없었다. 정화 의식의 날이라고 해도 특별히 입을 새 옷이 있는 것도 아니고(두 남자 모두 옷을 지을 줄 몰랐다), 있던 옷 가운데 비교적 깨끗한 것을 잘 빨아서 입었을 뿐이었다. 준비가 끝나자 나우 플리온은 다프넨의 어깨를 툭툭 쳐주며 말했다. "그럼 이따가 공회당에서 보자." 다프넨이 공회당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 소란스러웠다. 오늘 정화 의식에 참여하는 15세의 아이는 모두 여섯 명이었다. 그러나 익사형을 받은 다섯 소년들 중 두 명도 실은 오늘 이 자리에 와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그들은 물 론, 그들의 부모 형제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의식이 끝나면 다프넨은 정식 순례자가 될 것이고, 다시는 예 전처럼 대륙 사람, 트라바체스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섬사람들 가운데 대륙에 나가 사는 사람은 특별한 임무를 받은 몇 명에 불과했 다. 보통은 평생 섬 안에서만 살다가 섬에서 죽음을 맞았다. 공회당 뜰에는 평소 보지 못했던 커다란 돌 탁자가 놓여 있었다. 아 마도 남자들 열 명은 달라붙어야 간신히 옮겨지지 않을까 싶은 묵직 한 물건이었다. 약간 누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돌 탁자 중앙에는 커다 란 그릇 모양으로 둥그렇게 패인 자리가 있어서 안에는 물이 담겨 있 었다. 물에는 노랑과 자줏빛 꽃잎이 띄워져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주위의 나뭇가지에는 여러 개의 노란 리본들이 매어졌고 의식을 치 를 아이들을 위해 꺾어 온 노란 수선화가 한 아름이나 물통에 꽃혀 준 비되었다. 노란색은 옛 왕국의 빛깔이라고 했는데, 유령들이 보여 준 가나폴리의 모습을 기억하는 다프넨은 노란색에서 그곳의 금빛 깃발 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의식은 단순하면서도 인상적인 것이었다. 여섯 명의 아이들이 차례 로 돌 탁자 앞에 가서 서면, 섭정이나 사제 가운데 한 사람이 기다리 고 있다가 그의 머리에 꽃잎 섞인 물을 뿌려주고 간단한 질답을 했다. 질답이 끝나면 작년에 정화 의식을 치른 아이가 한 명씩 곁에서 기다 리고 있다가 물통 속에 있던 수선화를 한 다발 안겨 주었다. 그러면 주인공인 아이는 그 수선화를 주위의 사람들에게 다시 나누어주는 것 이다. 다프넨은 그들 중 맨 마지막이었다. 이 날은 이례적으로 섭정이 직 접 나와 의식을 주재했는데, 다리를 쓰지 못하는 섭정 때문에 탁자 앞 에는 큰 방석이 깔린 높다란 의자가 놓여졌다. 다프넨이 섬에 온 이래 로 섭정이 정화 의식을 주재하는 것을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사람 들은 오늘 정화 의식을 받는 아이들 중에 리리오페가 있기 때문일 거 라고 수군거렸다. 리리오페는 최근 스콜리를 자주 빠졌기 때문에 다프넨은 꽤 오랜만 에 그녀를 보았다. 하긴 일전에 그녀를 아예 무시하기로 마음먹은 혼 로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기억도 없었다. 이날 리리오페는 정화 의식을 받는 여섯 명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 무릎을 조금 넘는 하얀 린넨 원피스 차림인 그녀는 손목 에 긴 리본을 묶어 늘어뜨리고, 백합꽃을 엎어놓은 듯한 특이한 모양 의 볼록한 고깔을 썼다. 정말로 백합꽃잎처럼 바깥쪽으로 말린 뽀족 뽀족한 고깔 테두리 아래로 살짝 눈을 내리깐 자그마한 얼굴은 더없 이 순결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곁에 서 있던 다프넨도 리리오페가 저렇게 예뻤었나 하고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을 정도였다. "스미크로스, 앞으로 나오너라." 첫 번째 소년이 돌 탁자 앞으로 걸어가는 것과 함께 의식이 시작되 었다. 빙 둘러선 사람들의 눈은 절반은 스미크로스라는 소년에게, 그 리고 나머지 절반은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섭정의 얼굴로 향했다. 섭 정은 최근 몇 년간 무서울 정도로 말라서 툭툭 튀어나온 뼈들은 흡사 해골을 연상케 했다. 몇 가지 축복의 말이 떨어지고 스미크로스는 자신의 소명이 숲을 돌보는 일임을 밝혔다. 소년이 고개를 숙이자 섭정이 두 손으로 물을 떠내어 그의 머리에 부었다. 그러나 손이 워낙 앙상해서 물은 얼마 뿌 려지지도 않았다. “너는 순례자의 세 가지 임무를 기억하고, 일생에 걸쳐 추구하며, 너의 후손에게 가르치겠느냐?" "그리 하겠습니다." "너는 달여왕의 법에 순종하며, 네게 부과되는 의무를 충실히 함으 로서 너의 권리들을 지키겠느냐?" "예, 그리 하겠습니다." "너는 달의 섬에 가해지는 모든 형태의 위협에 저항하고, 섬의 안전 을 수호하는 데 신명을 바치겠느냐?" "예, 그리 하겠습니다." "되었다. 이제부터 너는 옛 왕국의 후예인 순례자로서 너의 축복 받 은 생애를 살아나가거라." 스미크로스는 머리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곁의 소년이 넘겨주는 수 선화 꽃을 받아들었다. 돌아서서 사람들 쪽으로 다가온 그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제일 먼저 꽃을 건넸다. 그런 식으로 자신과 친밀한 사람 들에게 먼저 꽃을 주었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몇 송이 가량이 돌아 갔다. 두 번째와 세 번째도 비슷했다. 네 번째는 리리오페였고, 그녀는 앞 으로 나아가 자신의 아버지와 좀 전과 비슷한 문답을 주고받았다. 그 런데 마지막 말이 조금 달랐다. "이제 너는 옛 왕국의 후예인 순례자로서, 그들을 다스리시는 언젠 가 돌아오실 왕, 그 분의 직분을 대신하는 섭정의 후계자로서. 너의 축복 받은 생애를 살아나가거라," 그렇게 말한 섭정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휘둘러보며 말했다. "이제부터 리리오페는 전통적으로 계승자에게 주어지는 '소시폴리 스‘ 칭호를 획득했음을 선포하노라. 이제부터 섬의 모든 순례자들온 그녀를 '리리오페 소시폴리스‘ 라고 불러야 할 것이며, 그녀의 의견은 달여왕의 법에 어긋나지 않는 한 나와 사제들 다음으로 존중될 것이 니 라." 이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폭탄선언이었다. 사제들 가운데 이 점에 대해 미리 귀띔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리리오페는 아 직 스콜리를 졸업하지 못했으니 사람들이 존댓말과 함께 불러야만 하 는 칭호를 받기에는 일렀고, 내년에 스콜리를 졸업한다 해도 저렇듯 중대한 특권을 지니게 되려면 최소한 스무 살은 넘어야 했다. 그러나 섭정이 기습적으로 그 모든 권리를 선포해 버린 터라 아무도 쉽사리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 채 서로 얼굴만 마주볼 뿐이었다. 비록 모든 일 이 관례에 비해 크게 서두른 것이었지만, 언젠가는 결국 리리오페가 갖게 될 특권인 까닭에 섭정의 권위에 대항하여 무어라 따지는 것이 용이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였다. 사람들을 헤치고 다프넨이 아까부터 찾고 있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섭정 앞에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도로 꼿꼿이 들면 서 입을 연 것은 다름 아닌 이솔렛이었다. "섭정 각하. 의식 가운데 무단히 발언함이 비록 예는 아니지만 중대 한 오류가 있는 바 한 말씀 드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옛 왕국의 언어 로 '국가의 안녕'을 뜻하는 '소시폴리스‘ 칭호는 예로부터 국왕 폐하 의 후계자에게만 인정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섭정 각하께서도 당 연히 그런 칭호는 갖지 않으셨지요. 아니, 실은 섭정의 후계자에게 칭 호를 내리는 일 자체가 섭정 각하 이전의 치세에는 물론이고 이미 오 랫동안 잊혀져 있던 바입니다. 그러니 섭정 각하께서 굳이 리리오페 에게 칭호를 내리고자 한다면 섭정의 후계자에게 전례대로 내려지는 '시오피', 즉 '침묵‘ 이라는 칭호가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점을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섬 안에서도 제로나 이솔렛 정 도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야 옛 왕국에서 왕의 후계자에게 무슨 칭호를 내리고 섭정의 후계자에게 무슨 칭호를 내렸는지 알 턱이 없 었다. 자신들의 이름을 짓는 옛 왕국의 언어조차 거의 모르는 그들인 것이다. 그러나 다프넨은 주위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심정으로 그렇게 말하 는 이솔렛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그녀를 다시 보는 순간 가슴이 아 플 정도로 세차게 뛰었지만, 그녀가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불길한 짐 작이 사실로 굳어지는 것을 느끼고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이솔렛은 지금 섭정에게 직접 맞서고 있었다. 오래 전 일리오스가 그 랬듯, 섭정의 말에 토를 달고 자신의 지식으로 당당하게 반박하고 있 었다. 분명 그녀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그들과 투쟁하지 않겠노라고 스스로의 입으로 말한 일이 있는데 저렇게 달라진 것은 어찌된 일일 까. 그녀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인가. 그것이 혹, 자신이 그녀의 삶에서 빠져나가려 한 것 때문은 아닌 가...... 사람들 가운데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대부분은 작은 속삭임으로 이솔렛의 말을 긍정했다. 그들은 섭정이 리리오페에게 전례 없는 특 권을 주려 하는 것을 보고 흠칫 두려움을 느꼈기에 내심 이솔렛의 말 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며 사제들을 쳐다봤다. 이솔렛은 한 걸음 물러나더니 다시 말했다. " '시오피' 라는 칭호는 왕의 대리자인 섭정, 그 섭정을 이어갈 후계 자가 자신의 입장을 자각하고,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스스로 침묵하여 미덕을 보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녀가 그런 것을 알 나이 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만일 칭호를 받게 된다면 그 의미를 스스로 에 대한 경계로 삼는 것이 옳겠지요." 이솔렛이 말을 맺고 물러나는 가운데 리리오페의 싸늘한 눈동자가 그녀의 모습을 뒤쫓았다. 다프넨은 바로 그 시선을 보고 있었다. 이솔렛의 걸음과 움직임은 예나 다름없이 빠르고 흔들림 없이 정확 했으나 다프넨의 눈에는 그것이 전투를 준비하는 자가 지닐 법한 절 도 있는 동작으로 느껴졌다. 만일 그녀가 무언가를 확고히 결심했다 면, 다프넨은 그걸 바꾸게 할 자신이 없었다. 그랬기에 그녀가 결심하 지 않았기를 바랐다. 이솔렛이 비록 개인으로는 누구보다도 빼어난 사람이지만, 일리오스는 빼어나지 않아서 결국 그렇게 되었단 말인 가? 적어도 섬 안에서 자신의 지지세력도 없이 섭정의 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은 시작부터 패배가 예상된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그런 싸움을 시작한다면 다프넨 자신도 결코 손놓 고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기에.... 섭정이 쉽사리 대답을 않고 있는 가운데 먼저 입을 연 것은 리리오 페였다. 그녀는 작년부터 서서히 획득해 온 자부심 강한 말투로 이솔 렛을 향해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충분히 알겠네요. 물론 이 리리오페는 '시오피‘ 칭호로도 충분해요. 아니, 그런 칭호가 없다 해도 상관없지만 각하께 서 친히 내려주시는 것이니 거절할 마음은 전혀 없거든요. 하긴 저로 서는 '소시폴리스‘가 맞는지 '시오피'가 맞는지 비교할 지식조차도 없네요. 하지만 그런 건 조금 별난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누구나 모르는 일 아닌가요? 그러니 제가 모른다고 잘 못이라 할 건 아니죠. 어쨌거나 그 칭호가 '소시폴리스‘ 였든 '시오피’ 였든 내가 본질적으로 갖는 권위는 변치 않아요. 그렇지 않나요?“ 이솔렛은 미소도 없이 바로 대꾸했다. "역시 맞는 말씀이군요. 섭정의 권위란 칭호나 출생에서 나오는 것 이 아니라 주위 사람의 진실한 지지로 획득되는 것이니까요. 그런 지 지가 있기만 하다면 그 권위에 변화가 있을 리 없지요." 리리오페는 영리하게도 이솔렛을 '별난 사람‘으로 몰아세워 주위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쓸모 없는 칭호 논란으로 자신의 격을 깎는 대신 본래부터 지닌 특권을 내세우려 했다. 그러자 이솔렛 이 곧장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네게 특권이 있을 줄 아느냐‘ 라 고 반박해 버리고 말았다. 조금만 신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치챌 수 있는 공박이었다. 그 즈음 섭정이 입을 열었다. "모두의 말은 잘 알겠노라. 칭호의 문제는 일단 사제들과 좀더 논의 한 뒤에 결정할 것이니 더 이상 논하지 말 것이며, 태어나면서부터 리 리오페가 지닌 권위에 대해서는 이곳에 모인 자 가운데 모르는 이 없 으니 마찬가지로 더 이상 논할 바 없다고 하겠다." 원론적인 이야기를 되풀이해 논쟁을 막아버린 섭정은 수선화 꽃다 발을 든 채 엉거주춤하고 있던 소녀에게 꽃을 건네주라고 눈짓했다. 수선화 한 아름을 받아든 리리오페는 이제야 자신이 원하던 순간이 왔다는 것처럼 눈을 빛냈다. 그녀는 사람들을 향해 걸어갔고, 한 순간 다프넨은 그녀가 자신을 향해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사로잡 혔다. 아니,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그녀는 대열 바깥쪽으로 조금 떨어져 선 다프넨의 눈앞에 와서 멈추더니 첫 번째 수선화를 선뜻 내 밀었다. “받아 줘." 몇 년 전부터 정화 의식을 보아 왔지만 의식에 참여한 당사자가 내 민 꽃을 거절한 사람은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물론 그들은 대부분 자기 가족에게 꽃을 건넸다. 다프넨은 무언가 기분이 이상했지만 중요한 의식을 마무리하고 있 는 그녀의 입장을 생각해서 일단 꽃을 받아들었다. 그러자 리리오페 가 사람들 쪽으로 몸을 홱 돌리더니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셨죠? 정화 의식의 첫 번째 꽃이 무슨 의미인지 다들 아실 거라 고 생각해요. 보시다시피 그는 받아들였어요. 그러므로 그는...... 이 순간부터 그가 내 약혼자임을 선언하겠어요." 2. 막다른 벽을 돌파하다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다프넨 자신이었다. 처음에는 농담을 들었는 가 했다. 그러나 웃지 않는 리리오페와 주위 사람들의 반응, 그리고 무엇보다도 침묵하는 섭정을 보며 이것이 장난도 아니고 쉽게 철회될 성질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생각이 떠올라 잠시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할 지경이었다. 잠시 후 그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려 한 사람의 그림자를 찾았다. 이솔렛의 무표정한 눈동자를 발견했을 때 묘하게 마음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눈은 아무 것도 말 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 눈동자로부터 필요한 모든 것을 얻었다. 이윽고 다프넨은 대담하게 섭정을 향해 입을 열었다. "섭정 각하, 제가 방금 들은 이야기를 어찌 해석해야 합니까? 제가 본디 대륙에서 온 까닭에 정화 의식의 첫 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 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그리고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방금 전 의 선언에 전혀 동의하고 있지 않습니다." 상대가 섭정이었고 말도 안 되는 일을 한 당사자도 섭정의 딸이었 기에 최대한 자신을 낮추어 한 말이었다. 술렁대던 사람들도 모두 섭 정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섭정이 입을 열어 한 말은 더더욱 뜻밖이었다. "정화 의식의 꽃이 갖는 의미는 관습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것이 어 찌 되었든, 섭정의 후계자는 자신이 원하는 상대를 언제고 내키는 대 로 고를 수 있다. 너희 둘은 한 살 차이이니 나이가 적당하고, 은빛 매 와 청동 표범으로 지파가 다르니 또한 적당하다. 너는 받아들이는 것 이 좋을 것이다" 기가 막히는 소리였다. 한 대 얻어맞은 듯했던 충격이 가라앉으면 서 서서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게 리리오페였든, 다른 누구였든 다프넨 자신과 관련된 문제를 저들끼리 제멋대로 처리할 수는 없었 다. 어린 시절부터 홀로 버터 온 자신이었고, 스스로를 얽매는 것은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뿐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런 자신을 저렇 듯 몰염치한 방식으로 다뤄도 좋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그가 알지 못 하는 엉뚱한 관습은 다 무엇이며, 겨우 열 다섯에 약혼 운운은 무슨 되지 않은 소리란 말인가! "싫습니다. 제 삶에 멋대로 끼여들지 마시지요. 그런 것 허락한 기 억 없습니다." 이 순간 섬사람과 자신은 무리가 다른 두 맹수만큼이나 거리가 먼 존재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이 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섬사람들은 오히려 다프넨이 한 말에 놀라는 것이 아닌가? 섭정의 말보다 그의 말에 더욱 당황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바로 옆의 사람이 그더러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섭정의 권위에 누가 대적할 수 있단 거지? 그의 권위가 미치는 땅 에 살면서 어떻게 그의 말을 거절할 수가 있지?“ 곧 섭정도 깡마른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순례자로서 너의 삶은 오직 나의 권위 아래 있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는 그만 지껄이고 좀더 순종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좋을 것이야. 너의 보호자가 네게 지금껏 그렇게 가르치던가?“ 다프넨은 기가 막힌 나머지 대뜸 소리지르고 말았다. “순종이라고요? 그럼, 그 상대자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단 말입니까!" 누구도 그의 무례를 지적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제 다프넨이 저들 과 완전히 다른 사람인 양 느끼고 있었다. 대륙 사람이니까, 대륙에서 온 인간이라서 그렇다..... 라는 소리가 잔물결처럼 퍼지고, 섭정의 분 노가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두려워하며 다들 그를 곁눈질했다. 비록 처음 리리오페의 발언을 듣고 놀라긴 했지만, 그들은 섭정이 명령한 이상 결국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섭정은 어이없을 정도로 짧게 대답했다. “당연히 그렇다." 그 때 데스포이나가 황망히 나섰다. "각하, 지팡이의 사제인 저로서도 그런 관례는 아직껏 들은 일이 없 습니다. 젊은 남녀간의 문제는 그들 두 사람이 알아서 해결할 일이라 고 생각되며 거기까지 각하의 권위가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리리오페 와 다프넨은 아직 둘 다 어립니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데스포이나라 하더라도 섭정에게 대놓고 말도 안 되는 짓거리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지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만은 분명했다. 그녀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놀랄 정도로 섭정의 입장은 확고했다. "후계자로 인정받은 리리오페의 권위는 나와 사제들 다음이다. 예 로부터 '옛 섭정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어 가장 고귀한 자가 공동체 의 균형을 위해 비천한 지위의 배우자를 택할 때에는 그 선택을 자유 로이 할 수 있었다. 다프넨은 본디 우리의 핏줄이 아니라 대륙에서 온 자이니 당연히 이방인으로서 어느 순례자보다도 낮은 지위에 있다 할 것이다. 따라서 이 결합은 옳으며 그에게 그것을 거부할 권리는 없다." 이제 사제들은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발끈한 나우플리온이 몇 번 이고 발언하려 하는 것을 데스포이나와 모르페우스가 온 힘을 다해 겨우겨우 막고 있었다. 나우플리온의 성격상 지금의 다프넨보다 심하 게 말하면 말했지 결코 회유적으로 말할 리 없었고, 그렇게 된다면 한 소년의 일로 끝날 것이 섬 전체의 일로 번지게 되는 것이다. 다프넨이 라면 무슨 말을 해도 일단은 철모르는 행동이라고 감쌀 수 있고 무엇 보다도 리리오페가 막아 줄 테니 최악의 결과는 오지 않을 테지만, 사 제인 나우플리온이 섭정과 대립하는 것을 섬사람들에게 간단히 보일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옛 왕국의 전통이 희미해져 사회적 유대 를 보존하는 것이 어려운데, 자칫하다가는 섬의 통치 기반을 흔드는 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작은 사회인 섬에서 통치의 근간이 되는 권위가 사라지면 오는 것은 대혼란과 자멸뿐이었다. 그런 까닭에 일 리오스와 섭정의 대립이나 그 결말도 섬사람들에게는 철저히 숨겨졌 던 것이다. 다프넨은 사람들의 말속에서만 존재하는 듯했던 섭정의 권위가 어 떤 것인지 몸소 느끼는 중이었다. 온 몸이 서서히 싸늘해졌다. 그는 다시 이솔렛을 보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람들 틈으로 사라져 보이 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프넨은 리리오페를 정면으로 보았다. 나지막이, 그러나 감정을 숨기지 못한 말투로 그가 말했다. "이게 다 무슨 짓이지?“ 그러나 놀랍게도 리리오페는 망설이지도 않고 잘라 말했다. "보다시피 그대로야. 난 너를 가질 것이고 너는 거절할수 없어." “난 널 거절해. 가진다고? 난 오직 나 자신의 소유야. 이따위 우스 운 연극은 이제 그만 집어치워." "이건 연극 나부랭이가 아니야. 그만 현실을 받아들여. 네가 뭐라 한들 그건 고작 투정에 불과할뿐이야." 리리오페는 놀랄 만큼 자신만만했다. 작고 귀여운 얼굴에 대륙의 귀족들이 흔히 보일 법한 폭력적 오만이 서렸다. 그녀는 다짜고짜 이 어서 말했다. “나와 있으면 네가 행복해진다는 것을 왜 모르지? 거절할 걸 거절 하라고 말해 주고 싶어. 다른 사람은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것이 야. 날 좀 그만 웃겨.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여전히 너와 어울 려 놀던 또래 소녀로 보여? 다시 말하지만 네겐 거부권이 없어. 전혀 없어. 네가 이 섬에 있는 한, 네가 순례자로 살아가는 한." 그러나 다프넨은 진짜 귀족을 보고 그들의 불쾌함을 몸소 체험해 보았던 사람이었다. 그녀가 강제로 자신을 억누르려 하면 할수록 혐 오감만 더해졌다. 용서하지 않는 차가운 자아가 서서히 되돌아오고 있었다. “네 뜻대로 된다 해도 행복해지는 일 따위는 없어. 본래 행복해질 수 없는 인간인 나는 물론이고, 그 순간부터는 너도 마찬가지야. 아 니, 걱정할 것은 없어. 넌 네가 원하는 것을 뭐든 가질 수 있겠지만, 살아 있는 인간만은 아니지. 네가 날 가질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을 가르쳐 줄까." 다프넨은 무표정한 눈으로 손가락을 들어 탁 꺽으며 말했다. “날 죽인 다음, 내 시체를 가지라고." 그 순간 리리오페는 다프넨의 뺨을 때렸다. 별 위력 없이 그냥 툭, 소리가 날 정도에 불과했기에 다프넨은 고개 도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이 붉어진 것은 리리오페였다. 자신을 주체하지 못해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런 말을.... 잘도 하는구나. 나와는 행복해질 수 없다면서..... 난 다 알고 있어...... 깨끗한 척 하지마. 그런 식으로 말해도, 애정 따위 모르는 것처럼 말해도..... 넌 결국, 결국...... 그 여자를 원하고 있으면서, 난 다 알아! 네가 행복해질 수 없는 건 그 여자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지?“ 사람들 사이에서 한꺼번에 비명이 솟았다. 다프넨은 그렇게 말하는 리리오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더니 똑같이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던 것이다. 그것은 조금 전과는 위력부터 다른 손찌검 이었다. "아악!" 고개가 꺾이다 못해 몸을 가누지 못한 리리오페는 숫제 바닥에 넘 어지고 말았다. 입술을 깨물고 있었던 것 때문에 살갗이 찢겨 핏방울 까지 흘러내렸다. 사람들이 당황하여 비명을 올린 것은 물론이고, 섭 정조차 놀란 나머지 자신을 잊고 벌떡 일어나려다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섭정 앞에서 섭정의 딸을 때리다니, 지금껏 이렇게 대담한 일 을 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가장 놀란 것은 리리오페 자신이었다. 평생 살아오며 손찌검 은 커녕 남의 손으로 멍자국 하나 생겨 본 일이 없는 그녀였기에 뺨을 맞았다는 충격은 더욱 컸다. 그러나 땅바닥에서 고개를 들어 다프넨 을 쏘아보려 했을 때, 그녀는 놀라 하려던 말을 삼키고 말았다. 그리 고 자신이 아직껏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는 상대를 본 것은 아닌가 스 스로를 의심했다. “....... 네가 뭘 안다고 착각하지 마. 멋대로 생각하고 떠들어대는 건 네 아버지 앞에서나 하면 족하지. 넌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몰라. 물 론 알았다면 이따위 시시한 일을 꾸미지도 않았겠지." 차가운 말투는 물론이고, 눈빛조차도 평소 보던 것과는 전혀 달랐 다. 누군가처럼 얼마간 연습하여 꾸며 낸 태도가 아니라 생래적으로 갖고 있던 잔인함이 일순 드러난 듯한 모습이었다. 다프넨은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그러더니 의식을 위해 긴 머리를 잡아맸던 끈을 풀어 바 닥에 내던졌다. 청동빛 머리채가 천천히 너울져 가라앉았다. “모든 것은 간단해." 다프넨은 리리오페로부터 눈을 떼어 주위의 모든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섭정을 바라보았다. 그를 향해 잘라 말했다. "정화 의식을 아직 받지 않았으니, 저는 순례자가 아닙니다. 순례자 도 아닌 자에게 무슨 순종 따위가 있겠습니까. 지나친 기대죠." 다프넨은 왼손을 높이 들어올리더니 아직껏 쥐고 있던 수선화 꽃을 흡사 조롱하듯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홱 돌아서 사 람들을 헤치고 떠나 버렸다. 잠도 아니고 꿈도 아닌 상태가 몇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목이 졸리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벌떡 일어났을 때 주위는 이미 어 두워져 있었다.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입안이 쓰 고 목이 탔다. 일어나 물을 찾아 마시고 나니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 났는지 서서히 기억이 났다. 다프넨은 침대로 돌아가는 대신 창가로 의자를 끌어당기고 창 덧문 을 열었다. 밤은 평소처럼 익숙한 작은 소음들과 함께 돌아오는 중이 었다. 바람이 와 닿자 얼굴에 열이 무척 올랐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오늘 낮, 공회당에서 흘로 돌아온 그는 무언가 가누기 힘든 심정 때 문에 혼란스러워하다가 도피하듯 잠을 청했고, 그 후로 몇 시간 동안 땀과 눈물로 범벅된 꿈, 또는 백일몽에 시달렸다. 여러 개의 선택지가 보였지만 한 가지도 선택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선택하지 않은 채로 그냥 머무를 수도 없는 가운데 속수무책으로 상황은 악화되고만 있었 다. 모든 것이 나빠졌다. 그는 달려나갈수도, 돌아설 수도,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이솔렛. 그 이름을 천천히 발음했다. 그의 무의식이 맨 처음 불러낸 이름이 었다. 그의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것을 그녀가 쥐고 있었다. 그녀를 떠 날 수도 없었고, 함께 할 수도 없어서 그냥 지금 그대로 유지하기만 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그것조차 너무도 힘들었는데, 이젠 그나마도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리리오페가 이솔렛을 '그 여자'라고 지칭했을 때 왜 그렇게 화가 치밀었던 것일까.'그 여자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을 듣는 순 간에는 거의 이성을 잃다시피 했다. 대륙에서 돌아온 뒤 다프넨이 이 솔렛을 보지 않기로 결심한 것은 자기 몸을 찔러 상처를 내는 것과 다 름없는 행동이었다. 거의 미칠 듯한 심정을 가까스로 눌러가며 그녀 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않고, 그녀를 보 는 것을 삼갔다. 그렇게 함으로서 언젠가는 자신의 마음에도 평화가 오리라 애써 믿었다. 그런 자신의 노력을 단 한 마디로, 심지어 ‘가진다' 라는 단어로 그 의 감정을 단순한 욕구로 단정지어 리리오페 자신의 소유욕과 똑같은 것인 양 일축하는 순간 그는 거의 죽이고 싶다는 기분으로 상대를 쳤 다...... 그 말이 자신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고 흙탕물에 내던졌기에 지금까지도 감정의 찌꺼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다프넨이 이솔렛을 떠나고자 한 것은 그녀 대신 다른 누군가를 택 하거나 하는 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었다. 그는 본래 어떤 사람이든 쉽 게 사랑하지 않았지만, 반대로 한 번 마음을 준 상대에 대한 집착은 놀랄 만큼 강했다. 어린 시절을 함께 한 예프넨의 존재가 아직까지도 그의 삶을 지배하듯, 이솔렛의 그림자는 이성을 느낄 줄 아는 소년이 된 지금의 그를 휘어잡고 있었다. 비록 가까이 할 수 없다 해 도 마음 속 깊이 하나뿐인 연인으로 느껴 온 이솔렛의 모습을 이제 와 서 부술 수는 없었다. 다만 함께 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이곳에 있고 싶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는 섬의 최고 권위자인 섭정을 향해 순 례자가 되는 것을 거절하겠다는 뜻의 말을 남기고 돌아오고 말았다. 정식 순례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즉시 섬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방법은 확실히 맞았다. 리리오페가 직접 고집을 꺽지 않는 한 그 가 이 뜻밖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확실한 방법은 오직 그것뿐이었 다. 섭정의 권위가 미치지 않는 곳, 다시 대륙의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도 정화 의식을 아직 치르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방법이 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또 하나의 커다란 부담이 존재하고 있었다. 나우플리온을 두고 그가 섬을 떠나도 좋은 것인가? 처음 섬에 들어오던 때를 생각하니 불안정하게 파도를 헤치고 나아 가던 작은 돛배에서 파도를 잠재우던 항해자, 상처투성이 소년인 그가 신뢰한 단 한 사람이었던 나우플리온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그 한 사람을 믿고 고향과 대륙을 모두 버린 채 낯선 땅에 들어와 살기를 자청하던 자신의 목소리도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못 견디도록 가슴이 답답했다. 이제 다프넨이 섬을 나간다면 다시 나우플리온을 만날 방법은 전혀 없었다. 오럿동안 비워두었던 사제직 에 복귀한 나우플리온이 전처럼 대륙으로 나을 가능성은 전무하다시 피 했고, 한 번 섬을 나간 자신은 다시는 순례자의 영역에 발을 들이 지 못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나우플리온의 유예된 생명은 이제 최대 시한인 10년을 거의 다 채우고 있었다. 다프넨은 고개를 젓고, 끝내 떨어뜨렸다. 지금 나 우플리온과 헤어진다는 건 영영 다시 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임종 의 순간조차 지킬 수 없게 된다는 걸 의미했다. 한때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들 중 가장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그인데, 남은 생애를 모두 그에게 걸겠다고 결심했고 언제까지나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하여 이 곳까지 따라왔던, 그를 영원히 떠난다고? 수많은 사람들의 질시며 반대에도 아랑곳 않고 하나 뿐인 제자로 삼았던 일, 그 후로도 잘못이며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가장 먼저 나서 서 감싸고 막아주었던 모습이 하나 둘씩 떠오르며 그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나우플리온의 얼굴에서 나이의 흔적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 던 일도 기억났다. 그의 주름살은 거의 다 다프넨이 만든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다프넨이 검의 사제가 되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섬사람들을 가나폴리의 영광으로 이끌어 주길 바랐던 제로, 기적적으 로 몸은 회복되었으나 이제 다프넨이 없으면 살지 못할 것처럼 행동 하고 있는 오이지스, 그 동안 갖가지 일에 연루된 다프넨을 변호하느 라 몹시 힘들었을 데스포이나 등 그 모든 사람들의 존재가 저마다의 이유로 다프넨의 발을 붙들었다. 덜컥,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을 사람은 한 명밖 에 없었다. 나우플리온은 얼른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문을 등지고 선 채 한참 동안 다프넨을 내려다보았다. 주위가 어두워서 표정은 알아볼 수 없 었다. 다프넨도 창가에 앉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표정도 보 이지 않았으리란 생각을 했다. 잠시 후, 그의 숨소리가 약간 거칠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정말 쓸모 없지요." 혼잣말처럼 말이 나왔다.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기 온 후로 늘 문제만 일으켰지요. 열 명의 자식이 있었다 해도 이보다 당신을 괴롭히지는 않았을 텐데. 왜 당신을 따라 이곳에 온다 고 했을까요. 이렇게 짐이 될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오지 않았을 것 인데." “.......아니” 어둠에 잠긴 얼굴만큼이나 어두운 목소리였다. 다프넨은 갑자기 목 에서 울컥 솟아오르는 것을 누르느라 힘이 들었다. "차라리..... 그냥 화를 냈으면..... 내 마음도 편할 텐데....... 아무 것 도....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처음부터 당신을 몰라서..... 대륙에 있었 더라면 지금까지 살아남았을까.......“ 숨을 삼켜야 했기에 말이 끊어졌다. 온갖 생각이, 모든 기억이, 한 꺼번에 머릿속을 사로잡으며 무겁게 쏟아져 내렸다. 행복했던 추억조 차 이제는 모두 힘겨운 짐이었다. 그는 내려놓을 수 없었다. “네가 있어서 좋았어." 후, 하는 한숨이 나직이 흘렀다. "정말이야. 네가 없었다면 내게 행복이 있었을까. 대륙에서 목적도 없이 헤매고 있을 때 네가 내 앞에 나타나 주었지. 도움을 받은 건 나 였어. 너 때문에 삶의 목적도 생겨났으니까, 이상한 일이야. 그 때 넌 누구보다도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는데, 난 너를 보며 희망이 무엇인 지 느끼게 되었으니까." 나우플리온이 이렇듯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다프넨이나 다른 사람의 문제에 대해 직설적으 로 말할 줄 알았지만 자신의 마음에 대한 문제만은 언제나 서툴렀다. 아니, 표현하지 않으려 했다. 간접적으로 한두 마디 하기만 해도 다프 넨은 금방 느낄 수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지금처럼 직접 털어놓는 것 을 듣는 것과 같을 수 없었다. “난, 나 자신과 내 생애에 대해서만은 언제나 위선자였지. 그래서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정당하게 대하려고 오히려 애쓴 것 같아. 나는 한 번도 내가 원하는 인간이 되지 못했어. 흉내는 냈지만 결국은 이렇 게 되돌아왔어. 너를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겠지? 내가 무척이나 태 평하고 쾌활하게 보였겠지만, 그때 내가 지닌 기억 가운데 '후회'라 는 낙인이 찍히지 않은 건 한 가지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 나우플리온의 손이 움직여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렸 다. 담담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 손끝이 조금 떨리는 것이 보였다. “너를 만난 것에 감사한다. 네가 무슨 짓을 한다 해도 네게 실망하 거나 널 미워하지 않을 거다. 넌 바로 내 두 번째 삶이었으니까. 그러 니까.... 이제 대륙으로 돌아가도 좋아," 가슴속에 얼음이 들어와 박히는 기분이었다. 이미 그렇게 되리라 고 생각했는데, 그걸 나우플리온의 입으로 들으니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지 몰랐다. 아파서,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내가 어디로 갈 수 있을까요...... 당신을 만나기 전에 그랬듯 다시 혼자가 되는 거겠죠? 다시 모든 사람을 경계하고, 누구와도 솔직하게 얘기하지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 따위는 없는 그 땅으로 가서 지난 일 들을 어떻게 잊지요?“ 나우플리온은 고개를 세게 저으며 말했다. “달라. 넌 이제 달라졌어. 넌 한층 더 강해졌고 모든 것이 좋아졌지.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아아, 하지만 나도 할 수만 있다 면 너와 함께 가고 싶구나. 둘이서 여행하던 그 때로 돌아갈 수 있다 면..... 정말 좋겠지." 두 사람 모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한 시절의 기억 에 불이 밝혀지고 그 때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그 때는 나우플리온 한 사람만 곁에 있다면 다른 일은 어찌되든 상관없었고, 미워하여 일을 꾸미는 적과 그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강한 마음으로 맞서야 하는 자 신도 없었고, 그리고.... 이솔렛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왜 그 시절에 계속 머무르지 못하고서...... 그러나 나우플리온은 곧 자신을 추슬러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의 눈에 쓸쓸한 빛이 어렸다 "삶에서 가장 좋은 순간은 언제나 덧없어. 너무도 빨리 가버려, 여 름 오후의 좋은 빛을 잡아둘 수 없는 것과 같지. 이제 또다시 그런 때 가 온 것뿐이야. 넌 자신을 원망할 필요가 없어. 난 오늘과 같은 때가 올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단 말이지. 언젠가는 갈 것이라고, 그 때는 붙들지 않겠다고 죽 결심해 왔어. 나를 위해서 너를 내 곁에 주 저앉히지 않겠다고 말이다. 내가 처음에 섬에 오겠다는 네 결정을 반 대했던 것, 기억하고 있겠지?“ 다프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어떤 말도 할수가 없었다. "그 때부터 생각해 온 일이었어. 때로는 기회가 오지 않는 건가 생 각하기도 했었지. 하지만 리리오페가 무뎌져 있던 나를 다시 일깨워 주었어. 널 돌려보내야 되는데, 내 행복 때문에 저도 모르게 잊고 있 었지......“ "절..... 처음부터 대륙에 돌려보낼 작정이셨다고요? 어째서죠?“ 다프넨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나우플리온이 고개를 조금 흔들더 니 말했다. "아마 어떤 순간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네가 내 옆에 있는 것이 너무도 좋았으니까. 그러나 결국 최초의 생각이 옳다는 걸 이제 느끼게 되는구나.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네가 뺏속까지 대륙의 인 간이란 걸 알고 있었지. 대륙의 바람을 동굴에 가둘 수 없듯, 이 닫힌 사회가 네게 줄 수 있는 것은 이제 없어. 자......“ 나우플리온은 한 걸음 다가와섰다. 다프넨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달빛 때문에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얼굴은 흡사 묘지에 세워진 조상 같았다. “나가거든, 렘므에서 날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로 가거라. 실버스컬 때문에 네가 대륙에 나갈때 말해 준 적이 있는 그들 말이야. 그 사람 들이라면 네게 일자리를 쉽게 주겠지. 그만하면 기본은 충분히 가르 쳤으니까 조금 더 노력한다면 검 한 자루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게 될 거야. 좀더 많이 기대한다면 더 이상 방랑할 필요가 없는 땅도 갖 게 되겠지. 아마 고향에는 돌아갈 수 없을 테니까.... 알겠어? 다시 한 번 소개장을 써 줄 테니까." 나우플리온의 검만 보고도 다프넨을 환대하던 사람들은 물론 그를 받아들여 줄 것이다. 혹시라도 있을 지 모르는 트라바체스의 추적자 들만 피할 수 있다면 오랫동안 평화롭게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보람이 있을까? 누구를 사랑하며, 누구에게 진심을 털어놓으며 살아간단 말인가? "이솔렛을 좋아하지?“ 갑자기 나우플리온이 불쑥 꺼낸 말에 다프넨은 말문이 막혀 어쩔 줄 몰랐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전부 터 생각해 온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라고, 그녀는 단순한 스승에 불과했다고 말해야 했는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그래. 나쁜 일이 아니야. 넌 이미 열 다섯 살인데 소녀를 좋아하 는 것이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전부터 죽 알고 있었어. 그렇기 때문 에 네 결정을 지지하는 거야. 아니었다면 리리오페에 대해서 좀더 시 간을 두고 생각해 보라고 말했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만약 오늘 네 가 리리오페의 요구를 쉽게 받아들였더라면 내가 네게 화를 냈을 지 도 모른다. 마음을 쉽게 뒤집는 인간이야말로 아주 쓸모 없어. 어쨌든 네가 정화 의식을 거부하고 공회당을 떠난 다음 긴급 회의가 있었어. 섭정 각하와 사제들 전부가 모여 이야기했지만 끝내 너를 위해 좋은 결론은 나지 않았지." 말을 할 수조차 없었다. 나우플리온이 왜 그렇게 지친 모습이 었는지 이제 알 수 있었다. 그는 이 밤까지 다프넨의 권리를 위해 여 러 사람들과 논쟁하고 싸웠을 것이다. 그리고 끝내 성공하지 못했기 에 돌아와 그에게 떠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룻밤의 유예가 주어졌을 뿐이야. 섭정 각하는 네가 마음을 바꾸 기만 한다면 리리오페와 약혼하는 날 정화 의식을 다시 거행하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셨어. 네가 섬에 남는 것을 택한다면 수일 내에 리리 오페와 약혼하게 되고 그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깨지 못해. 다른 약혼 도 쉽사리 깰 수 없는 것이지만, 더구나 그것은 섭정 후계자의 배우자 를 결정하는 문제니까. 그렇기에 심지어 리리오페의 마음이 바뀐다 해도 무효로 하진 못한다. 섭정 각하께선 리리오페가 열 일곱이 되면 결혼시키겠다고 말씀하시더군. 섭정 각하는 오래 전 부인께서 대륙으 로 떠나 버리신 후로 여자들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자신의 딸 이라 해도 섬을 다스리기에 완전히 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 아. 그러니 네가 그 분의 사위가 된다면 이후 실질적인 섬의 지배자 역할을 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제로의 희망을 원 없이 이뤄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다프넨과 이솔렛, 그리고 리리오페까지 도 다시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끝내 정화 의식 받기를 거절한다면, 리리오페와 약혼 할 필요는 없게 되지만 수일 내에 섬을 떠나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 시는 이곳으로 돌아을 수 없게 되지, 만일 우연히 대륙에서 섬사람과 마주친다 해도 그는 너를 아는 체 하지 않을 것이고. 그리고 너도 알 다시피 섬을 떠나는 자는 청석 그릇에 머리카락을 남기게 되는데 그 것은 섬의 비밀을 대륙 사람들에게 발설하지 못하게 하는 마법적인 장치야, 그러므로 평생토록 섬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고 살지 않으면 안 돼. 나에 대해 말하자면..... 아마 다시 대륙에 나가는 일은 없을 테 니까 재회는 무리가 되겠지." 그 순간 다프넨은 감정이 북받쳐 소리쳤다. “'나, 떠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지 않아요! 정 말로, 당신 때문에 그동안 행복했는데.... 차라리 내게 여기 남으라고 말해주지 않고서......“ “만일 남으면, 너는 다시는 이솔렛을 생각할 수 없게 될 텐데?” 다프넨은 입술을 떨면서도 대답하지 못했다. 나우플리온은 타이르 듯 차근차근 말했다. “만일 그렇게 되면 그때부터는 그녀의 그림자조차도 네 것이 아니 게 돼. 너와 이솔렛, 모두가 불행해져. 그걸 원해? 그건 아니잖아." 다프넨은 갑자기 나우플리온을 와락 껴안았다. 아직은 그보다 키가 작았기에 그의 머리는 꼭 나우플리온의 턱에 닿았다. "오래 살 수 없다는 것..... 알고 있어요." 순간적으로 나우플리온의 어깨가 움찔 흔들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이어 들려온 대답은 너무도 담담한 어조였다. "무슨 소리야? 네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체 하지 말아요! 나우플리온.... 당신, 오래 전에 일리오스 사제가 돌아가실 때 그 괴물한테 상처를 입었잖아요...... 낫지 않는 상처인데 일리오스 사제님께서 치료해 줘서 겨우 10년 가량 더 살 수 있게 된 것, 나 알고 있어요. 이솔렛에게 당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건, 그게 일리오스 사제님의 실수였기 때문이죠? 아니, 실수가 아니라 고 의였던 거죠? 그 때 열 살이었던 이솔렛이 이제 열 아홉 살이고... 남 은 것은......“ 갑자기 나우플리온이 다프넨의 몸을 밀어냈다. 그리고 그의 뺨을 감싸면서 눈을 똑바로 내려다봤다. "그런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지? 아니, 들을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 지. 그 때 그 자리에는 나와 일리오스 사제밖에 없었으니까. 난 누구 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없어. 자, 어떻게 된 거야? 누가 그렇게 추측하 던가?“ “제가 전에 유령들에게 갔다온 것, 기억하시죠?” 그 때 다프넨이 나무 조각에 써 놓고 간 글귀를 본 나우플리온은 그 가 어디에 갔는지 알았고, 그가 돌아올 때까지 이번에는 안전하게 비 밀을 지켜 주었다. 그제야 나우플리온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번졌다. "유령들이 그런 것을 말해 주었단 말이야? 왜지? 넌 오이지스 때문 에 그들에게 갔잖아?“ "유령들이 말해준 것이 아니라.....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이상한 숲이 있어요. 과거의 사람들이 멋대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곳이죠. 심지어 저와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까지도 보여줘요. 유령 들은 그걸 마음의 숲, 멘탈 포레스트라고 불렀어요. 그곳에서 전 일리 오스 사제님과 당신의 모습을 봤어요. 비록 그림자였겠지만.....“ 나우플리온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조금, 아주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에 갑자기 나우플리온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자조적, 또 는 자포자기한 미소 따위가 아니라 정말로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이었 다. “그래, 그런 것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구나. 나로서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걸. 그래, 네 예상대로야. 내가 그 때의 일을 사람들 에게 말하지 않은 건 일리오스 사제님의 잘못을 이솔렛에게 알리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지. 그러나 그 분에게도 이유는 있었어. 나를 오랫 동안 미워하셨지만 그 날 결전 중에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 분은 저도 모르게 그 분의 오랜 제자인 안테모에사 대신 나를 구하고 말았 어. 너도 싸운 일이 있으니 알겠지만 그 괴물은 발톱 같은 것을 멀리 까지 뻗어서 여러 사람을 공격하는데, 내가 일리오스 사제님 덕택에 상처만 입은 대신 안테모에사는 그 자리에서 죽었지. 워낙 자존심이 강한분이라 자신의 속마음을 쉽게 받아들이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에 오히려 충격을 받으셨어. 그 분은 스스로에게 화가 난 나머지 괴물을 죽이면서 그 안에 있는 붉은 심장.... 아, 너도 보았으니 알겠지?“ 다프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보석을 남기지 않고 일부러 부숴 버렸지. 그걸 남겨 뒀더라면 나를 다시 치료할 수 있다는 걸 이미 알고 계셨는데 말이야. 그런 다 음.... 그 뒷 이야기도 알고 있어? 나의 검과 그 분의 검에 대한 이야기 말이야." 다시 고개만 끄덕였다. "정말로 다 아는가 보구나. 일리오스 사제님은 본래 굉장히 가난하 고 고지식한 분들의 아들이었기에 검술을 배우기 위해 필요한 검 한 자루도 구할 수 없었다고 해. 그 분의 부모님은 자신의 아들이 너무 재능이 많은 걸 보고 섬의 높으신 분들이 시기할까 두려워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으려 했거든. 그 때 티엘라 검술의 스승이자 검의 사제였 던 덴트로 사제님이란 분이 계셨는데 솔직히 그리 좋은 분이 아니어 서 종종 돈을 받고 제자를 들이곤 했어. 어린 일리오스 사제님이 티엘 라를 배우려고 그 분한테 갔지만 매정하게 거절당하고 말았지. 덴트 로 사제님은 돈도 없고 비굴하게 빌지도 않는 아이를 가르칠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거든. 그래서 일리오스 사제님에게 연습할 때 쓸 검을 구해오면 제자로 받아주겠다고 하셨던 모양이야. 너도 알다시피 지금 은 열 다섯 살이 안 된 아이들이 검을 가질 수 없지만, 그 때는 그렇지 않았어. 그건 몇 가지 사고가 있은 후에 생겨난 법도거든. 지금 이건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이야기니까. 어쨌든 그 때 자신의 검을 지닐 수 있었던 건 정말로 좋은 집안 출신의 아이들 몇 명에 불과했어. 섬의 대장간 기술이 지금 같지 않아서 제대로 된 검은 거의 못 만들었거든“ 대략 알던 것 이상의 이야기였기에 다프넨도 귀를 기울였다. 당시 마음의 숲에서 본 것만으로는 두 사람의 검을 모두 오이노피온 노인 이 만들었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내 스승이셨던 오이노피온 님께서는 도검 제조에 일가견이 있으셨지만 솔직히 게으르셔서 거의 만들지도 않았던 모양이야. 당연 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분이 검을 만든다는 것도 몰랐지. 결국 나도 전해들은 셈이 되지만.... 일리오스 사제님은 난데없이 누군가 놓고 간 티엘라 쌍검을 얻게 되었고, 그걸로 당당히 덴트로 사제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어. 끝내는 쫓겨나게 되지만 그건 다른 이야기고.... 어쨌든 일리오스 사제님은 그 검을 준 사람에게 보답하고 싶어서 열심히 알 아보셨던 모양이지만 내 스승님의 친구였던 대장장이가 입을 다물었 기 때문에 결국 알아낼 수 없었지."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 당신의 검을 보고 그 검의 정체를 알게 된 거군요? 저도 대륙에서 그 검에 피를 묻혔을 때.... 이솔렛이 자신의 검 에도 똑같은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말해서 무슨 영문인지 궁금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죠." 나우플리온은 계속해서 자꾸만 웃고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우스운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 모든 상황을 알게 된 일리오스 사제님은 굉장 히 화를 냈어. 나도 그 분의 심정을 이해해. 그 분은 처음에 티그리스 를 배우겠느냐는 우리 스승님의 제안을 거절한 적이 있고, 그 후로도 한 검술 유파의 스승인 주제에 검술은 형편없고, 게다가 섬에서 금지 된 술이나 만들어 마시는 스승님을 상당히 보기 싫어했거든. 일리오 스 사제님이야말로 천재인데다 노력가이기까지 했기 때문에 능력 없 고 게으른 사람은 눈뜨고 못 봤지. 그렇게 무시했던 우리 스승님은 이 미 돌아가셨는데, 뒤늦게 그 분이 결정적인 은혜를 베풀었다는 사실 을 알게 된 거야. 그것도 그 분의 유일한 제자인 나를 되살릴 마지막 방법을 일부러 없애버린 직후에 말이지. 완벽주의자인 데다가 빚지고 못사는 성미인 그 분이 어찌 그 상황을 버텄겠어. 아마 돌아가실 때도 못내 마음이 불편하셨을 거야." 일리오스가 자신에게 저지른 일은 생각지도 않는 것처럼, 그렇게 자연스레 말하는 모습을 보자니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는데 나우플리온이 다시 푸훗, 하고 웃더니 말했다. “너 지금 내가 불쌍해서 한숨쉬고 있지?” 농담을 받아칠 기분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우플리온이 고개를 저으 며 이번엔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네가 모르는 것이 한 가지 있는데 말이야..... 영 추론 능력이 부 족하구나. 난 죽지 않아. 뭐 하긴 언젠가 죽긴 하겠지만 어쨌든 올해 나 내년에 죽을 예정은 없다 그 말이야. 내 상처는 이미 치료되었거 든. 자, 왜인지 맞춰봐라." "뭐라고요?“ 기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한 나머지 추리나 하고 있을 계제가 아니 었다. 다프넨은 몇 번이나 다그쳐 물으려 했다. "그게 정말이에요? 정말로 치료되었단 말인가요? 어째서요? 도대 체 어디서.... 그걸 고칠 수 있는 건 괴물의 몸 속에서 나온 그 보석말 고는......“ "그래. 네 말대로야. 그것말고 고칠 방법은 없어." "그러면 그걸 어떻게 구한단 말이에요? 괴물이 다시 나타나지 않은 바에야.....“ 그 순간 다프넨은 말을 멈췄다. 괴물은 나타났었다. 바로 그와 이솔 렛이 저 윗마을에서 싸우지 않았던가? "그럼, 저번에 그.....“ "이제 안 거냐? 그래. 그 괴물도 똑같은 놈인데 같은 심장을 갖지 않았을 리 있겠어. 이솔렛도 그 때 나았잖아? 그걸로 똑같이 치료한 거야. 나와 그 애 모두 다 나았지." “그때는 모르페우스 사제님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럼 사람들 앞에서 괴물이 다시 나타났었다고 말해야겠냐?“ 말문이 막혔다. 동시에 나우플리온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이 섰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다프넨은 너무 기쁜 나머지 다시 한 번 나우플리온을 덥석 끌어안고 말았다. "정말이란 말이죠? 아..... 너무 잘됐어요. 왜 진작 이야기하지 않았 죠? 제가 얼마나 마음고생 했는지 알아요?“ “너야말로 유령들 틈에서 그런 걸 봤으면 빨리 나한테 물어봤어야 되는 것 아니냐?“ “하지만 그런 말은...... 그리 쉽게 꺼낼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한 가지 시름이 덜어졌다고 생각한 순간, 나우플리온이 다시 어조 를 바꾸어 말했다. "그러니까 내 걱정은 더 할 것 없이 여길 떠나란 거야. 너와 이솔렛 은 아직 젊으니까 언제고, 정말 언제고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서로 배신감을 느끼며 고통스럽게 외 면하게 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 난... 네가 대륙에서도 충분히 홀로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난 널 잘 키웠으니까. 그렇지 않냐?“ 나우플리온은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 다시 한 번 미소지었 다. 그리고 손을 들어 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조언을 다 했어. 어차피 어미새 둥지에서 영영 살수 있는 새는 없으니까 네가 대륙에서 이름을 날리게 되어 그 얘 기가 내 귀에까지 들어오게 되길 기다리는 것도 나름대로 괜찮겠지. 그러니 오늘밤은 푹 자 둬 내일은 힘든 결정을 해야 하니까 말이야." 그렇게 말한 그는 버릇대로 신발을 대강 벗어 놓고 침대에 벌렁 드 러누웠다. 다프넨은 망연자실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자신 의 침대로 가 누웠다. 나우플리온이 일부러 가볍게 말하고 있다 해도 그것이 결국은 영원 한 이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 순간 소 원이 있다면, 그가 바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나우플리온은 금새 잠든 듯 조금 후엔 나직이 규칙적인 숨소리를 냈다. 돌아누운 그의 높은 등을 바라보며 다프넨은 작게 속삭였다. “나..... 당신을 정말로 좋아해요........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르도록 이 대로 미쳐버렸으면, 잠들어 영영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어떤 결정도 할 필요가 없도록, 여기서 모든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어요." 3. Forevemore 그러나 날은 어김없이 밝아왔다. 끝내 다프넨은 다른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추방이 결정되었고, 수 많은 사람들이 동요하는 가운데 머리카락을 잘라 청석 그릇에 남기는 의식도 모두 끝이 났다. 차기 검의 사제가 되리라고 생각했던 소년, 일리오스에 이어 두 번 째로 섬에 실버스컬을 가져왔던 소년, 그가 리리오페와 약혼할 경우 약속된 수많은 특권들을 내던지고, 왔던 것처럼 빈손으로 섬을 나가 는 것이다. 사제들의 호의로 추방되기 전에 단 하루의 유예가 주어졌다. 그 날 아침 일찍 다프넨은 혼자서 이솔렛과 찬트를 연습하던 산등성이로 올 라갔다. 비밀의 계단들을 차례로 딛고 샘이 있는 곳까지 갔다. 이솔렛을 잊기로 마음먹은 후로 일부러 한 번도 오지 않은 터라, 에l 키온이 없애버렸던 돌에 대해 깜빡 잊고 다시 발을 헛디딜 뻔하기도 했다. 너무 오랜만이라 전처럼 보이지 않는 돌들을 쉽사리 딛지 못하 고, 작은 돌을 몇 개 가져가 하나씩 던져 놓고 표지로 이용했다. 샘은 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솔렛의 흰 새 두 마리가 물을 쪼고 있다가 다프넨이 오자 뒤로 물러났다. 흰 새들은 이솔렛의 곁에서 찬 트를 노래하던 다프넨을 잘 기억하고 있었기에 멀리 달아나지도 않 았다 다프넨은 그곳에다가 책 한 권을 내려놓았다. 제로가 그에게 주었던 책, <가나폴리 이주의 역사>였다. 전날 밤 잠 못 이루며 이솔렛에게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 싶다고 생각했으나 딱히 좋은 생각을 해내지 못했다. 전날 나우플리온이 아 무렇지도 않은듯 그녀를 좋아하는 걸 안다고 말했지만, 자신은 두 사 람이 예전에 약혼하지 않았느냐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말았다. 새 끼새들이 그렇듯, 자신을 아끼고 지켜준 사람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고 떠나는 자신이 싫었기에, 어제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해서 나 우플리온 앞에서 이솔렛에 대한 감정을 내보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고민 끝에 생각해 낸 것이 이 책이었다. 그는 전날 이솔렛이 마음을 바꾼 듯 리리오페와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 그녀를 지 켜주지 못하고 떠나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아직 까지 가나폴리와 옛 왕국이 동일한 곳임을 모르는 그녀에게 섭정에게 대적할 가장 훌륭한 무기로서 이 책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이다. 물론 그 책의 존재 자체는 사실 부질없었다. 다프넨이 하고 싶었던 건 단지 이솔렛에게 무언가,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무언가 변화를, 존재를 전하고 싶었던 것밖에 없었다. 그게 책이었든 편지였든, 심지어 그냥 돌멩이 한 개에 불과하더라도 그녀에게 무언 가 주고 싶었다. 그녀가 그 무언가를 보며 자신을 기억하길 바랐다. 적어도 떠나는 순간 그가 그녀를 생각했다는 것을, 그게 아니라 해도, 그녀가 그 책을 보며 다프넨의 마음에 대해 한 번이라도 생각하게 된 다면.... 아니, 실은 그 모든 것 가운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지 못했고, 그저 이대로 떠나기엔 너무도 안타까워 어떤 일이든 하지 않 고는 견디지 못했다는 것이 가장 진실에 가까운 답이었다. 그는 책을 내려놓았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 자리를 떠났다. 오후에 그는 제로를 찾아갔다. 제로는 여전히 그 낡은 집에 살고 있 었는데 문을 여는 순간 다프넨은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일전에 난 장판이었던 집을 분명 기억하고 있는데, 모든 물건들이 말끔히 정리 되어 제 자리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서 그는 자신을 향해 미소짓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응.......” 오지지스였다. 그는 손에 전처럼 책을 한 아름 안고 있었다. 곁에 앉아 있던 제로가 물었다. "누가왔지?“ “다프넨이에요." 오이지스는 제로의 눈인 양 그렇게 대답하고는 책을 내려놓고 다프 넨에게 다가갔다. 집 안을 둘러보니 전에 다프넨이 가져왔던 몇 권의 책은 물론이고 이미 수십 권에 달하는 책들이 어느새 한쪽에 생겨난 서가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중이었다. "정말로...... 떠나는 거야?“ 자신을 올려다보는 오이지스의 눈동자는 예전보다 횔씬 침착했다. 그를 알게 된 후 처음으로 나이 한 살을 더 먹은 듯 한눈이었다. “가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오이지스도 정화 의식을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일 의 전말은 다 알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다 오이지스는 여러 번 머 뭇거렸다. 다프넨은 잠시 후 말했다. “너도 알고 있지?” “응........” 오이지스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 동안 또래 아이들 중에선 다프넨 과 가장 가까이 지냈는데 이솔렛의 일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수는 없 었다. 다시 오이지스가 입 속으로 웅얼거렸다. "정말 이상한 일이야.... 나 말이지, 전에 아팠을 때 꿈에서 우리 조상들 을 봤어. 굉장히 목소리가 듣기 좋았던 것만 생각이 나. 그 분이 나한테 .... 어서 돌아가라고, 너를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하셨어." 목소리가 좋다는 말을 듣는 순간 엔디미온의 아버지인 섭정왕이 생 각났다. 그가 약속을 지켰기에 오이지스가 이렇듯 다시 건강해진 것 이다. 그러나 그 때 섭정왕은 이미 다프넨에게 이런 일이 닥칠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나는 혹시 네가 전처럼 위험해지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는데, 이제 생각하니 그게 이런 이야기였구나 싶어. 나 이상하지.... 전 같으면 네 가 없이 어떻게 지낼까 하고 많이 울었을지도 모르는데, 오늘은 너를 봐도 눈물이 나지 않네" 다프넨은 그제야 입가를 약간 움직이며 미소를 보였다. “네가 컸다는 증거야, 꼬마야." 잠시 후 오이지스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대륙에는 찾아갈 사람이 있니?“ 다프넨은 웃으며 그냥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조금 후 오이지스가 자리를 비웠을 때, 제로는 놀랍게도 이런 말을 했다. "이솔렛을 데려가거라." 다프넨은 무슨 표정을 지어야 좋을지 몰라 멈칫했으나, 조금 후 그 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해냈다. 제로가 그와 이솔렛의 일에 이토록 확신을 갖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제 와서 부인하는 것도 소용없겠다 싶어 짧게 말했다. "허락할 그녀가 아니잖습니까." "시도조차 해보지 않을 거니?“ 다프넨이 얼른 대답하지 못하자 제로는 보이지 않는 눈을 다프넨의 눈, 아니 실은 이마와 미간 사이 정도에 맞추었다. "어떤 결정을 했을 때 모든 사람이 그걸 축복하리라 생각해선 안 돼. 미래에 올 가장 좋은 결론을 생각하는 거야. 너희 둘이라면 분명 대륙에서도 행복할거다. 아니, 오히려 이곳보다 거기가 낫지." 제로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한 일이 다시 마음에 걸렸다. 리리오페 의 약혼자가 되었더라면 모든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로는 그런 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조금 후 다프넨은 이윽고 말했다. "그건 아마 최선 이상의 것이겠지요. 그렇기에 더더욱 제 것이 아닌 듯하군요. 제게 그런 행운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압니다. 이솔 렛에게 그녀의 아버지가 살았던 땅을 영영 뜨라는 말 같은 건 도저히 못하겠군요. 본래부터 저 자신의 마음을 배신하지 않으려 이렇게 된 것뿐, 이솔렛이 제 마음을 알아주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이미 논외였 으니까요. 제가 어찌 그 이상의 것을 바라겠습니까. 그녀도 제 행동으 로 상처 입은 여러 사람들 가운데 하나인걸요." 다프넨이 마지막으로 찾아간 사람은 데스포이나였다. 그녀는 시중 드는 아이가 다프넨의 방문을 알리고, 다프넨이 들어와 인사를 할 때 까지도 묵묵히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이 많이 상 했다고 생각한 다프넨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다가 이윽고 이렇게 말했다. "제게 주셨던 이름을 이제 돌려드릴 때가 왔나 봅니다." 데스포이나가 천천히 눈을 돌려 다프넨을 보았다. 별다른 표정 없 이, 그녀가 입을 열었다. “가기로 했으면 어서 가거라. 왜 섬의 곳곳을 다니며 남을 사람들에 게 너의 흔적을 더하는 것이냐," 데스포이나가 다프넨에게 이렇게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다프넨은 고개를 숙였다.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대륙으로 돌아가더라도 충분히 너 혼자서 잘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니 이곳 일은 모두 지워버리고 다시는 떠올리지도 말 거라. 돌아올 수 없는 몸이 된 바에야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한들 아무 소용이 없으니 말이다." 목소리만큼 내용도 가차없게 느껴졌다. 다프넨은 어쩔 줄 몰라하며 데스포이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다프넨은 그녀의 주름진 눈가에 어린 물기를 보았다. “내 너를 조카처럼 생각했거늘......” 얼마 전 다프넨에게 이솔렛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한 일도 있었던 데스포이나였다. 다프넨이 리리오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탓할 그 녀도 아니었다. 물론 근본적으로 그런 일에 찬성하지도 않았다. 이솔 렛에 대해서는 오래 전 어려운 약혼을 가까스로 만들어냈다가 하루만 에 깨어지는 것을 보았고, 그랬기에 스스로 고립되어 있는 그녀가 이 제 그만 다프넨과 행복해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 왔다. 만일 다프넨 이 리리오페와 약혼하겠다고 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싸늘히 냉대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데스포이나는 떠나는 다프넨을 보며 허망해하고 있었 다. 처음 다프넨이 섬에 들어왔을 때는 단지 나우플리온이 함께 돌아 와 주었다는 것 때문에 기뻐했다. 그러나 2년 동안 그들을 지켜보면 서 두 사람의 행복이 별개가 아님을 알았고, 연달아 시련이 닥치는 가 운데서도 쉽사리 꺾이지 않는 다프넨을 보며 어린 나우플리온을 떠을 리게 된 그녀는 마침내 다프넨도 혈육처럼 살갑게 여기게 되었던 것 이다. 그에게 이름을 주고, 윈터러의 일을 덮어주고, 미래를 느끼기까지 했던 일들 모두가 이제는 헛된 것이 되어버렸다. 다프넨이 두 번째 실 버스컬을 섬으로 가져왔을 때 얼마나 기뻐했던가. 그의 장래가 밝다 고 느끼고, 사제가 되도록 힘써 주겠다고 생각한 것이 겨우 올해 초봄 의 일인 것이다. 비록 다프넨이 대륙 사람의 성품이 강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모든 인연이 끝나게 될 줄은 그녀조차도 짐작하지 못했다. 장래 다프넨이 나우플리온의 뒤를 잇고 이솔렛과 행복하게 된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을 거라고 죽 생각해 왔다. 대륙의 일이라면, 사제가 되 기 전에 대륙으로 잠시 보내주는 일쯤이라면, 결코 어렵지 않았을 터 인데..... 다프넨은 서서히 그런 데스포이나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고, 그 것을 위로할 방법 역시 없음을 알았다. 그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이 실망시킨 나이든 사제의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네가 추방되면, 섬에서 배운 것은 모두 잊지 않으면 안 된다. 섬의 문물이며 사람들에 대해 발설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섬의 이름조 차 언급해서는 아니 된다. 너는 신성 찬트를 배웠지만 다시는 그것을 써서는 아니 되느니. 네가 찬트를 완전히 버리게 하기 위해서는 목소 리를 폐함이 가장 나은 방법이나 그는 너무 잔인한 일이라, 네게 권하 노니 다시는 노래하지 않도록 해라. 찬트는 배우는 자의 몸에 체화되 는 힘이므로 저도 모르게 너의 노래 위에 실려 결심을 저버리게 할 수 있으매 그러하다." 어려운 주문이었는데도 다프넨은 짧게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우플리온이 네게 티그리스를 가르쳤느냐?” 다프넨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너의 검술은 여전히 네 것이겠구나. 만일 티그리스를 배 웠더라면 검슬조차 폐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섬의 법도는 본래 잔인하여 ‘폐한다'는 것은 정말로 혀를 잘라 내 거나 또는 손목을 자르는 것까지를 의미했다. 다프넨은 데스포이나가 아직도 은연중에 자신에게 관용을 베풀고 있음을 알았기에 그녀의 말 에 서슴없이 따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고서 둘 다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다프넨은 오랫동안 말을 고 른 끝에 입을 열었다. "사제님께서 하루빨리 저 같은 자를 잊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사제님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어머니 없이 자란 저는 사제님과 같은 분을 대하는 것이 서툴러서 지금까지 실수만 했습니다. 하지만..... 늘 고마워하고 있었습니다." 데스포이나는 말없이 시선을 내리깔고 있다가 이윽고 긴 한숨을 내 쉬며 말했다. "가거라. 내 떠나는 곳에는 나가 보지 않을 것이다. " 다프넨은 일어섰다. 나가기 전에 깊이 허리를 굽혔다. 마음 속에는 안타까움과 연민이 가득 찼다. 그것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자신인지 남는 사람들인지는 불명확했다. 다프넨이 문을 나서려는 순간 데스포이나는 탄식하듯 말했다. "어떤 때에는 영리한 자 하나의 판단보다 수많은 사람들의 근거 없 는 두려움이 더 현명할 때도 있구나. 이제 내가 살아 있는 한 다시는 섬에 외인의 아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리." 일의 결정과 시행에 있어 여유를 거의 두지 않는 섬에서 그의 추방 이 하루 연기된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루는 순식간에 지나갔고, 다음날 오후 3시경에는 이미 마을을 떠나 선착장에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프넨이 섬에서 보낸 마지막 한나절은 슬플 정도로 날씨가 좋았 다. 그러나 떠나야 할 시각이 다가올수록 다프넨은 점차 안절부절못 하며 무언가 빠뜨린 것이 있는 것처럼 허둥댔다. 모든 것이 일단락 된 듯 했는데도 자꾸만 무언가가 부족했다. 결국 다프넨은 자리를 떠나 다시 한 번 비밀의 계단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고 말았다. 무엇을 기대했을까. 샘이 있는 곳까지 올랐을 때 그의 뺨은 극도로 상기되어 바람조차 칼날처럼 아프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책을 놓았던 곳을 보며 그는 몇 번이나 눈을 깜박거렸다. 책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잘게 잘라 말린 약초를 넣을 때처럼 지갑 모양으로 한 바퀴 돌 려 감아진 하얀 무명 천 조각이 눈에 띄었다. 그 천의 재질조차 이솔 렛을 연상시켰기에 그는 저도 모르게 그것을 집어 들었다. 감겨진 천 을 푸는 순간, 주위의 모든 것이 정지했다. 거기에는 한 줌의 머리카락이 들어 있었다. 망연히 건너편 봉우리를 보고, 다시 무명 천 위의 금빛 머리카락을 보았다. 눈앞이 흐려졌다. 견디기 힘든 감정이 북받쳐 올라 무어라 크 게 외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 자 신만의 감정을 되새기고 싶었다.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날리는 순간 그는 다시 천을 감아 주머니에 넣었고, 그 자리를 떠났다. 마을을 떠나기 직전, 이별쯤은 해도 좋았다. 다프넨의 짐이라고 해 보았자 나우플리온이 준 검과 윈터러까지 검 두 자루, 그리고 작은 등 짐이 전부였다. 처음 섬에 올 때와 크게 달라진 것도 없는 단출한 여 장이었다. 그 자리에 리리오페는 나오지 않았다. 다프넨은 차마 나우플리온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마치 다프넨 이 실버스컬이라도 갔다가 돌아올 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너무도 가 벼운 표정을 하고 있었기에 더더욱 바라볼 수가 없었다. 데스포이나는 자신의 말대로 이곳에 나오지 않았다. 대신 난데없이 나와 서 있던 테스모폴로스 사제가 불쑥 말했다. “내, 대륙과의 교류를 책임진 사제로서 말하는 것인데, 대륙으로 나 간 뒤에는 섬의 일을 발설할 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이곳에서 배우 고 익힌 것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 내가 알기로 너는 신성 찬트를 배 웠는데 그것은 옛 왕국으로부터 내려오는 섬의 중요한 전통이지. 따 라서 너는 그것을 결코 사용해서는 안 된다. " 이미 데스포이나에게 다 약속한 일이었지만 다프넨은 알았다는 의 미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사실 이솔렛을 포기했을 때 이미 찬트도 포 기했는데, 그 후로 몇 번인가 쓰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스모폴로스도 다프넨이 섬에 도착하자마자 만났던 사람들 중 하 나였다. 늘 조금쯤 불편했던 상대였지만 떠나려 하니 그런 마음도 들 지 않았다. 그의 경고조차도 좋은 충고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뜻밖으로 헥토르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단지 짧게 말했다. “나도 언젠가는 대륙에 나가 있는 임무를 받을까 한다." 다프넨은 인사 대신 그냥 한 번 고개만 끄덕였다. 그와는 다시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기분이 든 것이 이상했을 뿐이었다. 마을 입구에서 그는 처음 마을에 들어왔을 때 머플러를 한 남자들 이 주었던 은빛 메달을 반환했다. 그러자 그 순간부터 섬의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마을은 언뜻 보호색을 띤 듯했으며, 늘 보던 마을 벽에 는 이끼를 비롯한 작은 식물들이 무수히 자라 거의 폐허를 연상케 했 다. 이 모든 것들이 혹시라도 있을 지 모를 침입자를 막기 위한 환각 마법의 힘이라는 걸 다프넨도 알고 있었다. 왔을 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마을을 둘러싼 숲을 순간적으로 뛰어 넘어 선착장근처로 이어져 있는 전이문의 존재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거기가 마지막이었다. 문으로 들어가는 순간, 이제 그는 순식간에 맞은편 숲으로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는 호송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들과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즈음엔 누구의 얼굴도 보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그는 이제 추방자였기에 예전 실버스컬 원정단 에게 했던 선착장에서의 전송은 허락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다프넨은 나우플리온의 얼굴을 보려 했다. 나우플리 온은 다프넨과 눈이 마주치자 잘 갔다오라는 것처럼 흔쾌히 손을 흔 들어 주었다. 그 모습을 보자 이 모든 것이 꿈인 양, 또는 재미없는 연 극인 양 낯설어지는 느낌이었다. 그가 다시는 나우플리온을 볼 수 없 다는 현실이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수많은 말을 이미 했기에, 오히려 마지막 순간에는 평범한 말뿐이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 나우플리온은 그의 소년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끝끝내 금방 갔다올 사람을 배웅하듯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윽고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되자 그의 손이 멈추고, 이윽고 내려졌다. 주위 사람 누구 도 그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사람들이 그를 남겨두고 모두 돌아갈 때 까지 그는 숲 입구의 보이지 않는 전이문을 그의 소년인 양 망연히 바 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는 '그의 소년' 이 되지 못할 것이다. 분신처럼 여 겼던 소년은 그의 마지막 마음을 가지고 이제 먼 곳으로 떠나갔다. 수 많은 거짓말로 안심시켜 가게 한 것은 자신인데.... 어째서 이렇듯 가 슴이 먹먹해지도록 힘겨운 것인지. 남은 생명은 1년여, 다시 보는 일은 결코 없겠지. 봄빛이 완연히 번져 작년, 재작년과 같은 모양이 되어 가는 숲이 있 었다. 고작 2년을 머물렀다가 간 소년쯤은 섬의 기억 속에서 먼지인 양 스러질 터였다. 보이지 않는데도 보이는 듯 느껴지는 푸른 눈빛 바 다의 긴 선이 한 번 넘실거리며 손짓했다. 아무도 들을 이 없는 독백을 마음 없는 숲이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본래 하늘이 내려준 선물을 인간이 갖기는 쉽지 않아, 끝내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인간에게 내려진 모든 비극의 시작인 모양이야." 제목 : 룬의 아이들 윈터러 새벽을 택하라 7 지은이 : 전민희 출판사 : 제우미디어 출판년도 : 초판 발행한 날 2002년 9월 25일 초판 3쇄 인쇄한 날 2003년 3월 3일 저자소개 : 전민희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민예총) 연구원 역임 장편 판타지 소설 [세월의 돌] 인터넷에 연재 후 [태양의 탑]으로 출간 차례(목차) : 1장, I am the master of my fate, Iam the captain of my soul 1. 다시 만난 소녀 2. 황무지 여행 3. 천 년 전의 생존자 4. 인형전투 5. 늙은이의 우물 6. 강한 것은 반드시 악이 되는가? 7. 소원 없는 인간 2장 , One Meets His Bestiny Often in the Road He takes to avoid it 1. 최초의 평화 2. A Winter Meets a Spring 3. 친구 4. 다시 한 번 그 생명, 내게 맡겨줄 수 없겠어? 5. 그리고 운명은 깨어나고 3장, Nature seals her promise of spring in white 1. 마침내 돌아온 잔 2. 최후의 인사 3. 유년의 겨은 끝나고 4. 살아남은 자들 5. 가장 아름다운 찬트 룬의 아이들-윈터러 제작노트 1장, I am the master of my fate, Iam the captain of my soul 1. 다시 만난 소녀 렘므의 바다는 전과 다름없이 차가웠다. 실은 몇 개월 전에 보고 다시 보는 것이건만, 기억 속의 어떤날처럼 거친 바다는 처음 섬에 들어가던 날의 봄이 오늘로 이어진 듯한 착각을 자아냈다. 호송자들과 헤어지고 홀로 남은 그는 이제 섬사람 다프넨이 아니라 다시금 보리스 진네만이었다. 오늘과 같은 날을 예감하기라도 한 듯, 옛 이름은 잘 맞는 옷처럼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그의 것이 되었다. 또 한 번 살기 위해 돌아온 대륙, 전과 같은 녹청의 바다, 귀에 설기도 하고 익기도 한 렘므 사투리, 바다 없이 걸어서 돌아갈 수 있는 고향, 그 모든 것 중에서도 옛 이름을 순식간에 익숙하게 느끼는 가장 낯설었다. 꿈에서 깨어난 사람이 현실감각을 되찾는 순간 인상적이었던 꿈을 잠깐만에 다 놓쳐버리듯, 그가 투쟁했던 자들, 사랑했던 자들이 모두 다 꿈속의 그림자들에 불과한 존재로 변한 것만 같았다. 이제 다시는 손으로 움켜잡을 수 없는, 이제 다시는 되돌아가 살아갈 수 없는, 한때 당연히 존재한 현실이 란 것을 누구도 확인해주지 않는 그 곳이었다. 어떤 대륙 사람도 모르는섬, 이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걷고 있는 건 그래서인지도 모른 다. 엘베 섬 연안에 이르자 작은 배를 타고 돌아다니는 유물 사냥꾼들의 배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전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그들이 건지려는 유물이 누구의 것이며 왜 거기에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저 심연 아래 가라앉은 가나폴리의 가장 큰 비행선에는 얼마나 많 은 희귀한 보물들이 실려 있었던 걸까. 보리스는 나우플리온이 소개 편지를 써 주었던 사람들을 찾아가지 않았다. 나우플리온은 자기 곁을 떠나 혼자 살게 될 보리스를 염려해서 여러 장의 소개 편지를 써 주었는데 보리스는 한 장도 열어보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나우플리온이 친필로 쓴 편지는 그것을 받아볼 사람들보다 보리스 자신에게 더 큰 의미가 있었다. 내용이야 어찌됐든 나중에, 정말로 그를 간절히 보고 싶어질 때 뜯어볼 생각이었다. 보리스가 정말로 가야 할 곳은 달리 있었다. 트라바체스에서 보낸 추적자들에게 정보가 들어갈 것을 우려하여 일부러 엘베 섬에 상륙하지 않았고, 나우플리온과 여행했기 때문에 익숙한 님(Nym) 반도 쪽으로도 가지 않았다. 보리스가 호송자들에게 부탁해서 상륙한 지점은 엘베 섬 아래로 동 티보 만을 끼고 불쑥 튀어나온 노아미드 반도 안쪽 해안이었다. 노아미드 반명목상으로는 렘므 왕국의 땅이지만 필멸의 땅(Mortal Land)이 서서히 넓어지면서 황무지화가 일어나 실질적으로는 어떤 나라도 관리하지 않는 지역이 되어 있었다. 기껏해야 나라와 나라 사이를 넘나드는 자들의 드문 통로로 이용될 뿐인 이곳이야말로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에는 제격이었다. 실제로 보리스가 대륙에 상륙하여 하루 동안만난 사람은 기껏 다 섯 명에 불과했는데, 그나마 모두들 자기 갈 길 재촉하기에 바빠 길가는 이웃에게 최소한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루 반나절 을 걸은 끝에 쇠락해 가는 변경 항구 노아미드 시착했다. 노아미드 시는 한때 융성했으나 필멸의 땅의 사막화 영향 때문에 유동 인 구가 줄어든 후로, 규모에 비해 사람이 극히 적은 쓸쓸한 도시로 변모해 있었다. 보리스는 이곳에서 하루 동안 머무르며 그가 가고 자 하는 목적지를 위해 몇 가지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여행비용을 마련하라며 나우플리온이 쥐어줬던 금 세공품을 몇 개 팔았다. 필멸의 땅은 너른 황무지라고 알려져 있지만 동쪽과 서쪽은 험준한 산맥이 가로막고 있으므로 접근할 수 있는 지점은 몇 군데로 제 한되어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대륙 사람들은 그곳 근처로 가는 꺼리지만, 예전 보리스가 만난 야니카 일행이 말했던 것처럼 땅 변 두리를 맴돌며 위험한 사냥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아주 않았다. 겁없는 용병이거나 보물을 찾아 한 건 올리는 것이 목표인 이 자들 이 주로 집결하는 장소가 남쪽에 하나, 북쪽에 하나 두 군데 있었다. 남쪽은 이미 필멸의 땅과 자국 국토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져 버린 레코르다블의 변경 도시 마하자파드나였고, 나머지 하나는 노아미드에서 내륙으로 9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시골 마을 율드루 이였다. 율드루이에 도착한 것은 대륙에 도착한지 꼭 닷새 만이었다. 해 그림자가 늙은 미행자처럼 길게 늘어져 흐늘거리는 가운 데 3층 집 꼭대기에 달린 풍향계가 빙글빙글 돌았다. 그 자신이 바람을 몰고 온 듯, 마을 입구로 들어선 보리스는 이윽고 풍향계 달린 바로 그 집으로 다가가 문짝에 달린 쇠고리로 두 차례 문을 두들겼다. “손님은 5시까지야. 알아?” 문짝 머리에 달린 작은 쪽창이 열렸다가 닫히고, 매부리코 주인이 문을 열고 보리스를 들여보냈다. 회색 섞인 금발이 불에 한 차례 탄 것처럼 부숭부숭 들 뜬 쉰 살 가량의 사내였다. 그는 보리스가 들어오고 나자 다시 문을 닫고 빗장을 단단히 질러 놓았다. 안에는 사람이 꽤 됐다. 테 이블 일고여덟 개가 가득 찼고, 칸막이 부엌 앞으로 구획 겸 길쭉하게 만들어 놓은 바(bar) 앞에 대략 열 명 가량의 사내들이 서넛 씩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문소리를 들은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밖이 어둑해지는 시각부터 방문자의 발길이 뚝 끊기는 이곳에 새로 나타난 자가 누구인가 살피는 양인었다.바다 냄새가 덜 가신 소년이 입구에 서서 안쪽을 살피는 것이 보였 다. 어두운 빛깔 망토 자락, 청동빛 도는 긴 머리채, 소년답지 않게 단단해 보이는 턱, 그 모두에서 단지 착각만은 아닌 소금내가 어렴풋이 감돌았다. 본래 내륙의 땅에서 태어나 자란 보리스는 거친 섬에서 2년을 보내고 이제 스물 먹은 젊은이들만큼이나 큰 키, 단단하게 잡힌 몸, 그리고 바닷사람들의 날카로운 눈매를 지니게 됐다. 누구의 눈에도 트라바체스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을 터였지 만, 스스로는 그것을 잘 깨닫지 못했기에 늘 망토에 달린 두건을 깊게 내려 얼굴을 감췄다. 구석 테이블을 택하는 대신 바 앞으로 다가간 보리스는 맨 끝에 앉아 낮은 목소리로 데운 포도주를 주문했다. 몇 십 년 전 이 일대에 근거지를 갖고 있었다는 어느 종교의 교회당을 개조하여 만든 이 여관은 율드루이에서 유일하게 사철 영업을 할 정도로 적지 않은 손님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장사는 꽤 잘 됐다. 필멸의 땅으로 가서 한 몫 잡으려는 자들이 꾸준히 모여들어 매상을 올려주는 탓이다. 이곳 주인 자신도 한때 그의 손님들처럼 필멸의 땅 변경을 드나들며 돈벌이를 하다가 늙어 이곳에 정착한 자였다. 흔히 ‘황무지 사냥꾼'이라고 불리는 이 무리들은 십여 년 이상 이 여관을 본거지로 삼고 있었다. 필요한 물품들도 대부분 이곳에서 팔았다. 평소에는 제각기 대륙 각지에서 일하다가 용병 일이 드문 철이 되면 슬슬 모여들어 지난해의 안부를 주고받곤 하는 곳이라, 대부분의 손님들은 서로의 얼굴을 잘 알았다. 워낙 이런 식으로 모여든 인구의 대부분을 이루는 마을이니 렘므 사투리 쓰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새 얼굴은 해마다 몇 명씩 채워질 뿐인데, 이들 무리의 기억력 탓일지도 모르지만 신참내기의 수는 지난해에 돌아오게 된 자들의 수와 딱 일치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보리스 앉은 자들이 나직이 수군댔다. 그래, 올해엔 오브렌이 돌아오지 않지 않았나, 아냐, 그 자는 하이아칸에서 큰 건을 물었다는 거야, 내년까지는 오지 않을걸, 그러면 역시 율 대신인가, 그 자야말로 작년부터 소식이 없지 않나, 그 패거리는 유령이 잡아갔다던데, 기타 등등. 주인의 의동생이라는 애꾸눈의 사내가 보리스 앞에 포도주 잔을 탁, 소리나게 놓으며 물었다. “님 반도에서 왔나?" “아니오.” “냄새가 그쪽인데." 보리스는 포도주를 반 잔 가량 마셨다. 주위에 가득 찬 자들이 대부분 용병인 까닭에 그는 두건을 내리지 않았다.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하는 이런 자들이 혹 보리스를 잡으려는 자들과 안면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윽고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필멸의 땅에 매우 가까운 이곳은 밤이 되면 혹 유령들의 눈길을 끌까 싶어 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문이며 창문을 단단히 닫아걸었고, 손님도 받지 않았다. 검은 그림자들이 달아나는 사냥꾼들의 뒤를 따라나와 마을에까지 큰 피해를 끼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었다. 보리스도 그 얘기를 들어 알고 있어서 해 떨어지기 전에 도착하려고 걸음을 재촉했던 것이다. 그런데 반시간쯤 지났을까,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에 앉아 있던 손님들 중 몇 명이 기분 나쁜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열지 마쇼 주인장."?해 떨어지고 문 두드리는 건 거의 다 여행자를 가장한 유령야." “아니면 유령을 뒤에 달고 오는 녀석이거나." 다시 한 번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은 좀 망설이다가 무시하려는 듯 주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 조용해졌을까. 잊어버린 체 떠들면서도 ‘황 무지 사냥꾼'들은 자꾸만 문 쪽을 보았다. 이들 대부분은 실제로 필멸의 땅에 떠도는 유령들을 보고 그들에게 쫓겨 보았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의 막연한 공포감보다 구체적인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런 두려움을 견뎌내고 있는 자신에게 대단한 자부심 을 품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그만의 특수한 경험으로 인해 ‘유령'이라는 존재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경우였다. 그래 서인지 유령이 올 것이 겁난다고 해서 밤에 잠자리를 찾아온 사람을 모르는 체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람들의 눈에 띄어가며 굳이 나설 마음까지는 없었다. 그만 가버린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한 번 문 두드리는 소리가 크게 두 번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얼굴에 흠칫 놀란 기색과 더불어 짜증스런 감정이 솟아났다. 테이블을 치우던 애꾸눈 사내가 문 을 향해 냅다 소리쳤다. “율드루이에서는 5시 넘으면 문을 열어주지 않는단 걸 모르나! 늦게 와서 시끄럽게 굴지말고 자기 운명은 자기가 찾아가란 말이야!” 겨우 밖에서 밤새우는 일 정도로 ‘운명' 따위 거창한 단어를 쓰는 것도 이곳이 아니면 보기 힘든 풍경이 었다. 그런데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층 홀의 천장인 줄로만 알았던 지붕 한쪽 구석에서 네모진 문짝이 덜컹 소리를 내며 열려버렸던 것이다. 동시에 몇 년은 쌓인 듯한 먼지와 낙엽 따위가 우수수 쏟아져내렸다. 모두의 눈이 천장에 가 박혀버렸다. 아래로 늘어져 덜렁거리는 문짝 밖으로 보이는 것은 분명 별이 뜬 하늘이었다. 가장 놀란 것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다 말고 냅다 튀어나온 여관주인이었다. 그는 고개를 젖힌 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중얼거렸다. ‘내가 만든 문이지만 예전에 잊 어버린 건데, 그러나 충격을 받기엔 아직 일렀다 입구에서 쿵, 하는 소리가 한번 들리고, 지붕을 타고 오는 가벼운 발소리가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쳐 문짝이 있는 곳까지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들 비켜!" 천장 문 아래에 앉아 있던 자들이 모조리 황급히 일어 나는 가운데 의자가 넘어지고 서로 밀치는 소동이 벌어졌다. 무기를 꺼내 드는 자도 여럿이었다. 보리스는 바 한쪽에 앉은 채로 그냥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느끼기에 지붕을 가로질러 오는 발소리는 굉장히 가벼웠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다람쥐나 작은 짐승이 지나가고 있는 걸로 생각했을 정도로. 발소리가 문짝 앞에서 멈췄다. 획, 무언가가 뛰어내렸다. “!”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허공 을 가르는 은빛의 물체였다. 잔뜩 긴장하여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검을 찔러간 자들은 멈출 겨를도 없이 검을 자신들의 검끝을 낚아 채는 강한 힘을 느끼며 손에 든 것을 놓치고 말았다. 두 자루의 소검, 한 자루의 곡도가 모조리 주인의 손을 떠나 마룻바닥에 꽂혀 흔들렸다. 한 명이 외쳤다. "여자 애잖아!" 보리스는 앉은 채로 모든 것을 다 보았다. 상대의 무기를 낚아채는 빠른 몸놀림은 분명 그의 기억 속에 있었다. 그러나 전보다 더 강하고 정교해졌다. 단숨에 세 자루의 무기를 무력화하고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무기들을 모조리 피해버린 소녀는 이제 똑바로로 자신을 공격한 자들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 눈빛에 분노는 없었다. 사람들은 어이없을 정도로 빠른 사람을 본 나머지 혹 유령과 비슷한 존재가 아닌가 의심한 모양이었다. 다들 여전히 무기를 거두는 가운데 주인이 얼빠진 목소 리로 질문했다. “넌 도대체 뭐냐? 사람이냐, 유령이냐?” 소녀의 손에는 별다른 무기가 없었다. 처음부터 공격 의사가 없었다는 의 미였다. 레코르다블 용병들이 흔히 쓰는 터번 아래로 길아 늘인 은빛 머리카락이 흔들리다 정지했다. 비록 대답은 없었지만 소녀가 손을 쓰지 않자 웅성거리던 사람들도 이윽고 무기를 내렸다. 사람들을 죽 둘러보던 소녀의 무감정한 보랏빛 눈동자가 보리스와 마주 치는 순간, 보리스는 확신했다. 다른 사람일 리가 없었다. 트라바체스에서 그를 도와준 일이 있는 어린 용병 소녀 그 아이였다. 이곳 에 용병이 많이 모인다고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소녀 쪽에서 보리 스를 알아보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냥 고개를 돌려버린 소녀는 가까운 의자에 앉더니 바로 옆의 애꾸눈 사내에게 짧게 말했다.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 소녀를 향해 애꾸눈 사내도 적당한 행동을 취했다. 즉, 물을 한 잔 떠다준 뒤 물었던 것이다. “식사?” 긴 장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짐작을 와장창 깨는 소녀의 행동에 틀림없이 꽤 당황했을 테지만, 그걸 주위에 알리고 싶은 자는 아무도 없었던 듯했다. 그래서 그들은 저마다 얼굴들을 마주본 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내심 이 자그마한 소녀 하나 때문에 그렇게 요란한 행동을 취했던 것이 무안하여, 주위의 동일 업종 종사자들이 자신의 행동을 기억하지 않기만을 바라는 중이었다. 검을 빼앗겼던 자들도 슬금슬금 일어나 바닥에 박힌 자신들의 검을 찾아갔다. 그러나 애꾸눈은 한 가지 궁금한 점을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그릇 몇 개를 가져다 소녀의 테이블에 놓으며 자못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저 문은 도대체 어떻게 연 거지? 문 여는 장치는 숨겨져 있었을 텐데. 저기 저런 문이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고?” “당신이 찾으라고 말했어." 애꾸 눈은 잠시 후 좀 전에 ‘자기 운명은 자기가 찾아가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소녀는 이미 고개를 돌린 채 수프를 젓고 있었다. 겨우 여관이 조용해졌다 싶을 즈음, 보리스는 사다리를 타고 기어올라가는 둥 소동을 벌여 천장의 뚫린 문을 닫고 내려오고 나서 불편한 표정이 되어 있는 여관주인에게 말을 붙였다. “황무지.... 가장 멀리 들어갔던 사람이 누굽니까?” 여기 사람들은, 자 신들을 가리켜 ‘황무지 사냥꾼' 이라고 하듯 필멸의 땅도 그냥 황무지라고 불렀다. ‘필멸의 땅' 이라는 이름은 그곳을 삶의 터전으 로 삼아야 하는 입장에서 왠지 재수가 없게 느껴졌고, 렘므와 fp코르다블 등지에서 공식적으로 부르는 명칭인 ‘케이레스 사막(Kayle ss Desert)'은 기질 사나운 그들에겐 지나치게 점잖게 들렸것이다. “창무지에 가려고?” 어찌 보면 율드루이에 오는 이방인으로서 당연한 목적이었지만 여관 주인은 될 수 있으면 말리고 싶다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여 반문했다. 그러나 보리스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 이고는 대답을 기다리며 입을 다물었다. 조금 있자니 주인이 마뜩찮은 표정으로 대꾸해 왔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라라자비 그 여 자지. 그 여자는 황무지를 반이나 횡단했다는 소문도 있었으니까 금붙이는 하여간 무지하게 많이 가져오는 걸 내가 직접 봤거든. 그 돈으로 어디 하이아칸에 별장이나 짓고 살 일이지, 끝내 사냥꾼 짓거리에 미련을 못 버리는 여자였지."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습니 까?” “뻔한 것 아니야? 혼은 지옥에, 몸은 흙으로 갔지. 그런 식으로 살면서 제 명에 죽길 바랄 수야 없잖아?." 옆에서 한 사내가 참견했다. “이봐, 주인장. 시체도 보지 않고 죽었다고 단정짓긴가. 이러다가 나도 여기 몇 년 안 오면 알아서 무덤에 넣어주겠군 그 래." 그러자 주인도 머리를 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라자비는 항상 여기서 장비를 준비한 다음 황무지로 갔고, 사냥이 끝나면 여기 로 돌아왔어 마지막으로 떠났을 때 내게 맡긴 물건들도 아직 저 구석에 멀쩡히 있지. 그런데 몇 년째 돌아오질 않잖아? 죽은 게 아니 면 유령한테 시집이라도 갔단 소린가?” “혹시 정말로 그런 건지 누가 알겠어? 흐흐흐...” 잡스러운 논쟁으로 번지기 전에 보리스 는 그들의 말을 잘라야 할 필요를 느꼈다. “좋습니다. 어쨌든 그런 사람이 있었다니 좀 안심이 되는군요. 장비를 살 테니 지도를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보리스는 노아미드에서 대강 이야기를 들어서 이곳에 오면 대륙에서 가장 나은 필멸의 땅 지도를 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냥꾼들이 제각기 새로 탐사한 영역을 추가해 넣기 때문에 지도는 해가 갈수록 좋아지고 있었다.“지도 보겠다고? 그럼 5티보 은화 한 개는 주셔야지." 보리스가주머니 안쪽에서 은화한 개를뽑아 테이블에 얹어놓자 애꾸눈 사내가 지도를 가지고 왔 다. 펼쳐 놓고 보니 꽤 큰 지도였다. 다른 나라들은 대충 위치만 표시되어 있었고 필멸의 땅만 크게 그려진 가운데 그 변경의 지리적 특성들이 상세하게 표기된 것이 보였다. 그러나 물론 일정 거리 이상 안쪽으로 들어간 지역은 펜자국 하나 남지 백지였다. 보리스는 대략 훑어보고서 손가락으로 백지 가운데 한 지점을 짚었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여기까지 갈 테니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해 주십 시오." 옆에서 부질없는 논쟁을 계속하고 있던 사내들이 흘끔 지도를 보다가 보리스의 손가락이 가리킨 지점을 보고 경악하는 표정이 다. 잠시 후 주인은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이봐, 늙고 병든 주인-이것은 이 주인의 말버릇이었다-붙들고 장난하자는 거야, 뭐야?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가니 마니 떠들어? 사람이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죽을 자리 찾아 그쯤이나 가나? 죽으면 근방에도 얼마든지 좋은 건수가 많아." “그러면 최소한 무덤에 시체는 넣을 수 있다고." “율드루이에 빈 무덤이 없수로(얼마나)많은지 안다라? 알고 싶수 면 채마밭 뒤에 묘지에 가보그다라!" “라라자비가 황무지를 횡단하겠다고 호언장담했을 때는 이미 그 땅을 열두 번도 더 드나든 뒤 였어! 객기로 내버릴 목숨이라면 나같은 늙은이한테나 적선할 일이지!" 보리스는 그들이 각자 말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똑같은 어조로 다시 한 번 말했다. “여기까지 갈 테니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해 주십시오." 주인이 웃음을 멈추고 보리스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 했다. 그러나 내려진 두건 때문에 보이는 것은 코와 다물린 입 언저리뿐이었다. 주인이 다시 무어라 말하려 하는데 곁에서 애꾸 눈 사내가 참견했다. “로크모드 형님, 그냥 내주시구려. 대신, 얼마 가지도 못하고 돌아와서 장비를 도로 팔려고 할 때는 절대 반값 도 쳐주지 마시구려." 로크모드라는 이름의 주인은 양쪽 입꼬리를 내리며 눈을 내리깔더니 소매 밖으로 반쯤 드러나 테이블에 놓인 보리스의 손을 봤다. 손모양을 보며 조금 생각하는 눈치이더니 짧게 물었다. "왜 거길 가려 하나?” “볼일이 있습니다.” “큰 돈이 필요한 사정이라도 있나? 내가 빌려줄 만한 사람을 소개해 줄 수도 있어." “고마운 말씀이지만 돈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그럼 도대체 무슨 사정인가? 가나폴리 왕국을 연구하겠다고 마법사들이 종종 오긴 하지만, 검 꽤나 잡았을 법한 자네 손을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군 그래. 거기에 뭐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깊이들어간다고 많은 금붙이를 얻으리란 보장은 없어, 남쪽으로 갈수록 모래땅이고, 밤낮으로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유령들이 자네 몸을 차지하려 노릴 걸세. 그래서 자칫 그들에게 몸을 빼앗기게 된다면 우리 손으로 자네를 죽여주는 것말고는 다른 대책이 없어." 보리스는 두건 안에서 조금 고개를 들더니 대답했다. ‘만일 제가 그렇게 된다면, 제발 그래 주십시오." “,” 표정이 굳어진 로크모드는 더 대꾸 없이 바에서 몸을 돌려 부엌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차례로 물건들을 꺼내와 바 위에 쌓기 시작했다. 자루에 든 비스킷과 곡식 가루, 줄로 엮어 놓은 말린 과일들, 죽 물주머니 여러 개, 주목 지팡이, 담요, 수건 몇 장, 작은 삽과 도끼, 돌덩어리 같은 암염 조각 등등. 그리고 새 지도를 한 장 갖고 나오더니 처음의 지도를 접어버리고 그 자리에 펼쳐 놓았다. 이 지도에는 대강의 지형 외에는 별다른 표시가 없었다. 로크모드는 잉크에 펜을 찍어서, 율드루이 마을로부터 필멸의 땅 안쪽으로 약 한 뼘 가량의 휘어지는 선을 그렸다. “여기엔 가나폴리 왕국의 옛 도로가 남아 있다. 헤매다가도 여기를 찾아내면 최소한 돌아올 길을 잃지는 않지." 이번엔 그 선에서 좀 떨어진 곳 두 군데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여기, 그리고 여기에는 여행자들로부터 확인된 샘이 있다. 지금 계절에는 확실히 물이 있을 테니 가려는 길에서 벗어나더라도 반드시 들러서 가도록 해라. 그렇다고 해도 물은 많이 모자랄 거다." 보리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크모드는 물주머니 한 개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 주머니에 하나 가득 채워서 가져가면 하루하고 반나절 정도 견딜 수 있지. 하루에 다섯 번 정도 마신다고 생각하고 양을 조절하는거야. 낮에 걷지 않고 저녁과 밤, 그리고 이른 아침에만 걸으면 그 정도로도 살 수 있어. 갈증이 날 때 작은 돌멩이를 하나 입에 물고 있으면 도움이 되지. 하지만 그보다 더 물을 아끼려고 하면 멀리 가기는 커녕 몸이 먼저 버티지 못한다는 걸 알아라." 그렇게 말한 로크모드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조금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런 식이라면, 마지막 샘에서 양껏 보충했다고 해도 갈 수 있는 곳은기껏해야," 그는 한 군데 손가락을 짚더니 펜으로 가위표를 그렸다. “여기가 한계겠군." 그곳은 보리스가 처음 가겠다고 가리킨 곳보다 훨씬 가까운 지점이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충고는 꼭 기억하겠습니다." 보리스는 돈을 깎거나 하지 않고 주인이 요구하는 그대로 치렀다. 특정 목적에 필요한 것을 한꺼번에 판다는 것 때문인지 다른 곳의 물가에 비해 1.5배 가량 비싼 편이었는데도 그랬다. 17티보의 가치를 갖는 시드 은화 다섯 개와 50티보 금화 한 개, 그리고 엘소노 동전 몇 개를 꺼내 올려놓는 순간, 등 뒤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느낀 보리스는 빠르게 몸을 긴장시켰다. 그러나 다가온 손은 테이블 위에 몇 개의 은화들과 금화, 그리고 동전들을 올려놓았을 뿐이었다. 그 액수는 보리스가 낸 것과 정확히 똑같았다. 목소리가 들렸다. “저것과 같은 것." 보리스는 돌아보았다. 뒤에 선 사람은 바로 조 금 전의 용병 소녀였다. 로크모드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너도 혹시 황무지 가운데로 갈 참이냐?” “아니." “그러면?” 소 녀는 손가락을 들어 아노마라드 남부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리고 말했다. “여기." 로크모드는 도대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 되었 다. “거기라면 로젠버그 관문 쪽으로 가야 될 텐데? 이 젊은이는 황무지 가운데로 들어가려는 거야. 꼬마 아가씨한테는 이런 장비가 필요 없어. 아니, 들고 가는 것부터 무리지." “로젠버그?” 소녀의 눈동자가 조금 움직이더니 손가락으로 렘므와 아노마라드 사이 의 관문, 로젠버그가 있는 곳을 짚었다. “여기?” 로크모드가 손을 내밀어 소녀의 손가락을 잡고는 지도 위를 가로질러 내려가게 했 다. 일단 북쪽의 동 티보 만으로 나가서 배를 타고 서 티보 만 쪽으로 돌아서 렘므의 수도 엘티보에 내렸다가, 다시 서남쪽 로젠버그 관문으로 가고, 거기서부터 남쪽으로 죽 내려가는 경로가 그려졌다. “이런 식으로 가면 된단 말이다." 소녀의 대답은 짤막했다. “ 너무 멀어." 그러더니 로크모드의 손에서 손가락을 빼서 이곳에서 자기가 원하는 지점까지 이어지는 직선 경로를 그려 보였다. 율드 루이에서 필멸의 땅을 가로질러, 아노마라드까지 이어지는. “이쪽이 빨라. 그러니 같은 장비를 줘." 이제 로크모드는 할 말을 잊었 다. 주위 사람들도, 그리고 심지어 보리스조차도 말문이 막혀 소녀를 내려다봤다. 아직도 열 두세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앳된 얼굴과 자그마한 몸집을 가진 소녀였다. 갈색 피부에도 불구하고 뺨은 발그레하고 하얀 속눈썹으로 둘러싸인 투명한눈동자는 인형처럼 예뻤 다. 아니 실제로, 표정 없는 소녀의 얼굴은 귀족소녀들이 간직할 법한 정교한 인형을 닮아 있었다. 그런데 그런 소녀가 혼자서 필멸 의 땅을 몇 십 일 동안 통과해 가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관 주인 로크모드는 조금 전 보리스에게 조언을 한 것과는 달리 아예 말을 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보리스가 보기에도 소녀에게 그 길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계획인 지 일깨워 주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처럼 생각되었다. 소녀는 불안해하거나 망설이지도 않았고, 짧은 지름길을 택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을 들어 주인을 올려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결국 두 손 들어버린 주인이 물품들을 가져을 때까 지 어떤 물음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주인은 금화와 은화들을 챙겨넣은 다음 ‘더 참견해봤자 소용없지'하는 표정으로 두 손바닥을 펼 친 채 어깨를 으쓱했다.“요새 소년 소녀들한테 유행인가 보지?” 소녀의 이름은 나야트레이라고 했다. 확실히 들은 일이 있는 이름이었지만 발음이 낯선 탓에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져버렸던 것이다. 더구나 나야트레이를 만났던 당시의 보리스는 스쳐 가는 사람들을 주의 깊게 보고 기억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 때 그의 마음은 부서져버릴지도 모르는 불안정한 현실에 온통 매달려 있었다. 나야트레이에게는 성이 없었다. 달의 섬에서 보리스 자신이 그랬듯, 그리고 지금도 레코르다블과 루그란 사람들이 그렇듯 말이다. 그나마 루그란 사람들은 이름 뒤에 출신지나 가문의 별명 등을 붙이곤 하지만 레코르다블에는 그런 것도 없었다. 심지어 그곳엔 제대 된 가문조차 몇 개 없었다. 덕택에 보리스 역시 성을 생략하고 이름으로만 자신을 소개해도 좋게 되었다. ‘보리스’는 실버스컬에 출전했을 때도 일부러 바꾸지 않았을 정도로 비교적 흔한 이름이었다. 그리고 둘은 가고자 하는 길이 같았다. 누구나 흔히 가는 그런 길이 아닌 것이다. 지금도 여관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의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보며, 저 많은 장비를 사들인 두 소년 소녀가 과연 정말 로 갈 것인지 궁금해하는 그런 곳이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저들이 내일 오후가 되기 전에 돌아올 거라는 데 10티보를 걸기도 했다 . 그러나 가고자 하는 길이 같다 해서, 둘이 동행자가 되란 법은 없었다. 또한 두 사람이 각자 계획한 경로는 지도상으로 보아도 미 묘하게 어긋났다. 보리스는 로크모드가 말해준 대로 가나폴리의 옛 도로를 따라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가 가려는 곳은 가나폴리의 수도 아르카디아였다. 물론 지금은 누구도 아르카디아의 위치를 정확히 모르지만, 그런 큰 도로는 당연히 수도로 이어지 기 마련인 것이다. 그런 반면, 나야트레이는 필멸의 땅 서쪽 일부를 가로질러 아노마라드 동부의 한 도시로 가려 하고 있었다. 정확 히 말하자면 아노마라드의 식민령인 트레비조 쪽이었다. 필멸의 땅을 통과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쪽 길은 대륙의 등뼈에 해당하는 드 라켄즈 산맥(Drakens Mts.)으로 막혀 있었다.그 산맥의 존재 때문에 아노마라드가 필멸의 땅에서 오는 사막화의 힘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로크모드도 같은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나야트레이는 한 마디로 그의 우려를 막아버렸다. “길을 알고 있어." 나야트 레이의 그 발언은 보리스에게 자못 이채롭게 들렸다. 그러니까 어쩌면 나야트레이는 필멸의 땅에 이미 가보았거나, 또는 그곳에서 살 아남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주위 사람들이 의심쩍은 눈빛으로 한 무리인 양 몰아붙이는 통에 어쩌다 보니 두 사람은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보리스가 제일 먼저 한 말은 이것이었다. “넌 무모해." 나야트레이는 눈을 내리깐 채 의외로 쉽게 대 답했다. “너와 같은 길이지," 보리스는 미소도 없이 곧장 대꾸했다.“난 그곳에 가야만 할 이유가 있어. 하지만 넌 다른 길로 갈 수 도 있지. 내가 네 입장이라면 너처럼 그런 길을 택하지 않아. 일부러 일을 할 사람은 거의 없어." 나야트레이는 잠시 가만히 있더니 말했다. “묘족의 방식은 오직 묘족만의 것." “묘족...?” 그러나 나야트레이는 더 대꾸하지 않았고, 보리스 역시 남의 일에 열렬히 개입하는 성격이 아닌지라 곧 말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묘족이라는 부족에 대해서는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모른다 해 도 그만이었다. 식사를 끝낸 뒤 두 사람은 인사도 없이 헤어져 각자의 방으로 갔다. 다음날 오후 늦게 여관을 떠난 보리스는 주인 로크모드로부터 들은 대로 어떤 특별한 장비를 사러 갔다. 필멸의 땅에 들어가려는 사 람이 모두 사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보리스처럼 오랜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필요한 것이었기에 가격이 꽤 비싼데도 불 구하고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보리스는 50티보 금화를 여섯 개나 내고 그들이 ‘라마(llama)'라고 부르는 짐승을 샀다. 몸집은 작은 노새 정도고 북슬북슬한 흰 털이 온 몸을 덮고 있는 이 짐승은 타고 다닐 수도 있지만 주로 짐을 싣는 용도로 사육된다고 했다 . 특히 황무지나 고원 등에서 물과 사료 없이도 오랫동안 버틸 수 있기 때문에 필멸의 땅과 같은 환경에서는 더없이 적합한 수송 수 단이라 할 수 있었다. 워낙 유순한 탓인지 라마를 처음 보는 보리스도 큰 무리 없이 곧 끌고 나올 수 있었다. 라마를 파는 사람이 라 마 등에 물주머니 여러 개 를 매다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가죽 주머니에 물을 채우려고 강가로 가던 보리스는 또 하나의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그 녀석은 보리스가 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길모퉁이에 점잖게 앉아 앞발로 얼굴을 닦고 있었다. 예나 다름없이 험상궂은 얼굴에 작은 호랑이처럼 억센 어깨와 앞발을 가진 녀석이었다. 보리스가 다가가자 녀석은 일어나 반쪽뿐인 꼬리를 쳐들고 슬금슬금 모퉁이를 돌아 갔다. 걸음을 멈춘 채 놀라고 있는 사이, 녀석은 모퉁이 저쪽에서 고개를슥 내밀더니 보리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왜 따라오지 않 느냐고 묻는 것처럼. 그건 고양이였다. 로젠버그 관문에서 만났던 그 고양이와 너무도 흡사한 나머지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사실 이 도리어 실감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 때 혼자서 관문을 넘어가려 애쓰고 있던 그는 우연히 고양이를 따라갔고, 거기에서 어찌된 셈 인지 나우플리온과 다시 만났던 것이다. 그런데 그 고양이가 또 따라오라고 하고 있지 않은가? 보리스는 혼자 빙그레 웃었다. 섬을 떠난 뒤로 처음 입가에 올린 웃음이었다. 그런 다음 그는 고양이 뒤를 가벼운 걸음으로 따라갔다. 그때처럼 아이다운 기분이 된 것은 아니지만, 옛 추억이 그에게 미소를 가져다주었다. 조금 더 걷다가 그는 멈춰 섰다. 무심코 그 때의 일을 ‘추억' 이라고 정의해버 린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 그 시절의 일이 추억이 된 것일까. 추억이라는 말은 부드럽게 닳은 나무나 가죽처럼 바래 져버린 색채를 갖고 있어서, 돌이켜보는 사람에게 따뜻한 기준을 가져다주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 삶과 죽음의 문제, 고통과 침묵의 문제였던 것들조차도 시간이 흐르면 단지 추억이 되어버린단 말인가? 그리고... 모든 것이 다 그런 것일까. 어느새 고양이는 벽을 타고 뛰어내려 어느 집 처마 밑으로 들어가더니 울타리 틈새로 빠져나가려 애쓰고 있었다. 그동안 고양이의 몸집도 좀 커진 것 인지 쉽사리 구멍을 통과하지 못하고 한동안 낑낑대고 있는 모습이 자못 우습기까지 했다. ‘추억' 이라는 단어에 대해 결벽이랄 정 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지만 그것은 머릿속의 거부감이었지 실제로 존재하는 감정은 아니었다.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다시 한 번 피 식 웃고 말았다. 보리스는 서서히 느끼고 있었다. 힘겨웠던 과거가 그에게 미친 영향은 이제 타고난 본성이었던 것처럼 그의 행동과 생각 속에 깊이 스며들어버렸고, 전처럼 당시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뺨이 달아오르거나 가슴이 서늘해지는 일은 거의 사라졌다 . 단지 나쁜 추억으로 멈췄을 뿐, 더 이상의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는 것이다. 물론 과거의 경험은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그러나 미 래의 그를 바꾸는 것은 새로이 겪게 될 일들일 뿐이다. 현재의 그가 몇 년 전의 일 때문에 당시와 마찬가지로 생생한 고통을 느낀다 면, 그건 마음이 그 시절에 멈추어 있듯,그의 성장 역시 그 시점에서 정지되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만 그런 것과 갚아야 할 마 음의 빚, 다하지 못한 책임, 한 번 가졌던 애정에 대한 신실함은 달랐다. 누구든 세월을 먹으며 또 다른 자신으로 달라지지만 그렇다 고 과거가 완전히 잊혀지는 일은 없는 것처럼. 적어도, 5, 60여 년에 불과한 인간의 삶 속에서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보리스 는 곧 다가올 여름에 열 여섯 살 생일을 앞두고 있었다. 갓 열 두 살이 되어 절망과 공포로 달아나다가 뒤돌아보고, 또 넘어지기를 되풀이하던 그가 4년 동안 세상 속에서 살아남았고 이제 과거를 돌아볼 수도 있게 되었다. 고양이는 울타리 틈에서 해방되었다. 결국 튼튼한 어깨로 한쪽 널빤지를 부쉈던 것이다. 고양이는 뒤를 한 번 슬쩍 돌아보고 걸음을 재촉하여 앞으로 달려갔다. 보리스는 라마 고삐를 잡은 채 고양이를 따라갔다. 얼마 가지 않아 마구간처럼 생긴 긴 판자 건물이 나타났고, 한쪽에 쌓인 말먹이 마른풀 더미 뒤 에 조랑말 같은 짐승의 등이 언뜻 보였다. 고양이는 마른풀더미로 뛰어들었다. 녀석이 다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서 말을 거는 소리가들렸다. “너도 샀군." 그제야 건초 더미 뒤에 서 있던 짐승이 자신이 산 것과 같은 라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다만 그 라마는 털이 갈색이었다. 좀 떨어진 상자 더미 꼭대기에 나야트레이가 앉아 있었다. 보리스는 뭐라고 답할까 궁리하다가 말했다. “다른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나야트레이를 보자니 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상자 위에 편안히 앉아 있는 품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던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나야트레이는 상자 더미에서 뛰어내리며 말했다. “이제 왔으니 갈까." 그 말이 어쩐지 자신을 기다 렸다는 것처럼 들려 보리스는 의아해졌다. 나야트레이는 자신의 라마고삐를잡더니 몇 걸음 걷다가 보리스를 돌아봤다. 고양이가 그랬 던 것처럼. 둘은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빤히 마주보고 있었다. 보리스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같이 가자는 거야?” “응." 되물 을 말은 하나뿐이었다."“왜?” “성지에는 누구도 혼자 가지 못해." 그걸로 설명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나야트레이는 몸을 돌 려 걷기 시작했다. 가나폴리 옛 도로로 이어지는 바로 그 방향이었다. ‘성지' 라는 것이 필멸의 땅을 가리키는 것 같긴 한데 왜 그 렇게 부르는 것인지, 혼자서 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정말로 그것 때문에 같이 하는 것인지, 마지막으로 이 동행에 반론을 제 기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거기에 계속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어쨌든 나야트레이가 가고 있는 길은 보리스가 가려 했던 그 길이었던 것이다. 몇 걸음 걷다가 생각해 보니 고양이는 전과 마찬가지로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마을 입 구에 이르러 보니 이제 방금 율드루이에 도착했거나, 필멸의 땅을 향해 막 떠나려 하는 용병들이 다수 모인 것이 보였다. 저들끼리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요란스레 재회를 반기며 어깨를 두드리거나 하는 모습은 작은 시장거리를 방불케 했다. 말은 물론 마차도 여러 대였고, 라마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그들 사이로 자그마한 라마 두 마리를 끌고 소년과 소녀가 지나갔다. 두건을 푹 눌러써 수도사 처럼 보이는 소년과 레코르다블 용병 특유의 터번으로 환한 은발을 감춘 소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않고 다른 용병들 무리에 섞여 황량한 지평선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용병들 틈에서 어떤 젊은이 하나가 한 용병을 발견하더니 매우 반가운 기색으로 끌어안고 양 뺨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는 언뜻 보기에도 이곳에 몰려드는 용병들과는 좀 다른 외양을 가졌는데 그와 비슷한 낯선 사내 하나가 바로 뒤에서 그가 볼일을 끝내길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 경기 좋나? 그 때 그 시골 귀족은 잘 털어먹었어? 내 손엔 도무지 쓸만한 건수가 걸리지 않아서 말이야... 요번에는 웬 집나간 아들녀석을 찾아 달란 얼빠진 인간이 있어서 그런데, 뭣 좀 물어보자고. 혹시 이렇게 생긴 녀석 본 일 없어? 이건 5년 전의 얼굴인데 말이지," 젊은이가 품속에서 닳아빠진 초상화를 한 장 꺼내서 용병에게 보여 준 직후, 보리스와 나야트레이가 그들 곁을 스쳐 지나갔다. 젊은이도 그들을 언뜻 보긴 했지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자신들이 갖고 있는 초상화 속의 작고 여려 보이는 소년이 저런 모습으로 자랐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초상화를 살펴본 용병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모르겠는데. 이런 곱살하고 약해빠진 녀석이 율드루이 같은 위험천만한 동네에 제 발로 기어 들 올 리가 있겠어? 집을 나갔다면 이런 자식은 필시 어느 도시의 노름판 같은 데 자빠져 있을 게 틀림없어. 그나저나 유리치, 너도 이 딴 짓거리 하지말고 우리 패랑 금붙이나 긁어모으러 가보는 게 어때?” 2. 황무지 여행 사흘 뒤, 그들 주변에 남은 것은 누런 흙과 맞닿은 하늘빛 지평선뿐이었다. 이틀이 채 가기 전에 대부분의 용병들은 자기들의 관심거리를 찾아떠났고, 여전히 가나폴리의 옛 도로를 따라 걷고 있는 사람은 보리스와 나야트레이 둘뿐이었다. 물론 두 마리의 라마도 그들의 뒤를 따라왔다. 둘은 일행이랄 것도 없는 것이, 사흘 동안 함께 걸으면서도 하루에 세 마디 이상한 적이 없었다. 그세 마디란 ‘식사하자', ‘출발하자','야영하자' 였고 그것조차도 한쪽에서 말을 꺼내면 다른 쪽에서는 고개나 끄덕이는 정도였다. 그 한쪽이 꼭 보리스였던 것은 아니었다. 보리스 역시 그리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라서 시시한 이야기를 굳이 꺼낼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그들은 계속 남쪽으로 나아갔다. 필멸의 땅은 널리 알려진 ‘케이레스 사막’ 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못 견디도록 더운 곳은 아니었다. 물론 그건 그들이 렘므 국경에 가까운 북쪽에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그들은 가능한 한 태양을 피해 저녁과 밤, 그리고 아침나절에 걸었고, 식사는 하루 두 번만 했다. 물의 양을 정확하게 조절하는 것이 가장 큰일이었다. 보리스는 닷새 째 되는 날 샘이 있다는 방향으로 진로를 돌릴 생각이었다. 그러면 특별히 헤매지 않는 한 물 한 주머니의 여유를 두고 샘에 도착할 수 있었었다. 그런데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했다. 필멸의 땅에 떠도는 피에 굶주린 유령들에 대해서는 어린 시절부터 익히 들어온 터라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는데, 유령은커녕 신기루도 하나 보지 못했다. 하긴, 아직 몸의 상태가 좋았으므로 신기루를 보기엔 좀 일렀다. 얼마 후 보리스는 그들이 따라 걷고 있는 이 오래된 길로 관심을 돌렸다. 큰 마차 두 대가 나란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한 이 길은 단단한 돌과 모르타르로 꼼꼼하게 포장되었던 듯, 여전히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바스러져 꺼진 곳도 얼마 되지 않았고, 좌우의 가장자리도 드문드문 금이 가 있을 따름이었다. 보리스는 이 도로를 포장한 솜씨가 그가 섬에서 본 환각, 아니 존재하는 이공간속의 포석들과 같다는 것을 느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섬의 유령들은 본래 가나폴리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자신이 살아온 나라 를 본따서 그들의 세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섬의 이공간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푸른 돌들은 모조리 누런 먼지를 뒤집어 쓴 거친 돌로 변해 있었다. 그리하여 다시 떠오른 태양이 천년 묵은 돌들을 서서히 데울 즈음, 두 사람은 야영할 준비를 했다. 준비 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주위에는 햇빛을 가릴 나무나 바위 같은 것이 전혀 없어서 모래땅을 파고 잠자리를 마련해야 했다. 물론 그렇게 마련한 땅속 잠자리는 몹시 더웠다. 그러나 한나절 내내 진흙인형처럼 햇빛에 구워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도로가 있는 곳의 지반은 아직도 비교적 단단한 편이어서 작은 삽으로 팔 수 있는 땅을 찾으려면 대략 백여 미터 가량은 도로에서 벗어나야 했다. 마땅 한 곳을 찾으면 각자 들어가 누울 곳을 파는데 방향을 잊지 않기 위해 꼭 도로가 놓여 있는 방향과 교차되게 굴을 팠다. 그렇게 판 굴 속에 가까스로 몸이 들어가면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다. 조금 있으면 모래가 서서히 흘러내리는데, 몸을 더 이상 뒤채기 힘들게 될 즈음에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라마가 큰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야트레이가 자기 짐 속에서 이상한 재질의 검은 천을 꺼내 크게 펼 치더니 두 마리 라마의 몸에 덮어씌웠다. 이상하게도 라마들은 그 천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천은 뺏뺏했지만 이상한 광택이 있었고, 약냄새 비슷한 것도 났다. 저녁 무렵, 보리스는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은 해가 있었기 때문에 보리스는 수건을 치우지 않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그러나 분명 그의 잠을 깨운 무언가가 있었다. 보리스는 가만히 귀를 기 울이다가 모래 구덩이에 같이 넣어둔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자신을 깨어나게 한 감각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그는 스스로의 직감을 믿었다. 주변에는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 그의 가슴을 옥죄는 것은 모래의 압력이 아니었다. 본래 유령이 돌아다니는 땅이 아니던가. 그때, 귓가에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새된 음색의 짧은 멜로디가 복되고 있었다... 작은 피리의 소리였다. 그러자 주변을 채웠던 압 박감이 풀리면서 흡사 공기와 같은 것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보리스는 조금 기다렸다가 수건을 치우고 몸을 일으켜 이미 일어나 앉아 있는 나야트레이를 보았다. 예상대로 피리는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피리라기보다는 작은 대롱에 가까운 가늘고 짤막한 물건이었다. “뭐지?” 나야트레이는 대꾸 없이 피리를 품속에 갈무리하고는 일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참 동안 주의 깊게 무언가에 감각을 집중하던 그녀가 보리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자." 평소보다 이른 출발이었다. 빠르게 짐을 챙긴 둘은 그 자리를 벗어나 도로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러는 동안 해가 떨어져 주위는 이미 어두웠다. 보리스는 다시 걸으면서 이번에는 확실히 물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피리는 유령을 쫓는 건가?” “...” “그래, 그렇군." 갑자기 나야트레이가 보리스를 바라봤다. “그렇다니?” 보리스는 애매한 눈빛으로 나야트레이를 마주보다가 요령 좋은 대꾸를 찾아냈다. “그렇잖아?” “그래?” “그래.” “그렇군." 실로 기가 막힌 대화가 오고간 뒤 둘은 다시 한참을 묵묵히 걸어갔다. 부츠 바닥에 모래가 끌리는 소리에 무심코 귀를 기울이며 걷고 있는데 이번에는 놀랍게도 나야트레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심해." "뭘?” “네 뒤." 보리스는 더 묻지도 않고 순식간에 검을 빼들더니 홱 뒤로 돌며 허공을 내질렀다. 정말 4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완벽한 동작이었다. 그리고 그 검끝은 무언가를 찔렀다. 소리는 없었다. “!” 접힌 공기를 꿰뚫은 듯한 기묘한 손느낌이 왔다. 그러나 뚫은 뒤로는 다시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이었다. 마치 누가 팽팽하게 펴 들고 있는 시트에 검을 찔러 넣은 기분으로 보리스는 검을 뺐다. 이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야트레이가 바로 등 뒤에 와 있었다. “..."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상대에게 등을 보호받으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건 옳은 판단이었다. 곧 때가 왔다. 보리스는 다시 한 번 공기의 압력을, 그리고 나야트레이는 그것과는 좀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 각자의 감각에 의지하여 둘은 앞을 방어했다. 보리스는 나우플리온이 준 검으로, 나야트레이는 손잡이까지 합쳐 채 40센티미터나 될까 싶은 예리한 단도로.그러나 이번엔 둘 다 아무 것도 찌르지 못했다. 라마들이 불안하게 발을 들썩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마 등에는 물과 식량 등 생존 물품들이 대 부분 실려 있었다. 혹 어둠 속으로 라마가 달아나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큰일이었다. 또한 이 정체 모를 적으로부터 공격당해 라마 가 죽는다면 여행은 극도로 힘들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장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서로의 등이 닿아 있지 않은데도 긴장 이 전해져왔다. 줄곧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되니 불을 켜지 않아서 주위는 캄캄했고, 보이는 것은 별로 없었다. 오직 달빛 뿐. 보리 스는 그가 내버리고 온 달여왕의 땅을 떠올리게 하는 달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불편한 달이 지평선 위에 걸려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그를 비웃는 것처럼. 그러나 보리스는 다시 한 번, 정면으로 밀려드는 압력을 감지해냈다. 좌우로 휘두른 검은 흡사 앞서의 시트를 찢기라도 한 듯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찌익! 다시 사라졌다. 그러나 무언가 있다는 것을 안 이상, 덫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얼마간 아무 기척도 없어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즈음, 갑자기 나야트레이가 입을 열었다. "아노마라드에 가보았어?” 갑자기 왜 그런 것을 묻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지만 보리스는 짧게 답했다. “어떤 데지?” 왜 이런 순간 그런 걸 묻고 있는 거지? “풍요로운 데지." “그리고?” “그리고, 대륙의 다른 곳들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오래 살았어?” “어느 정도 알만큼은." “그곳, 좋아했어?” 긴장을 풀려는 것인지 몰라도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어 신경이 날카 로워졌다. 보리스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이 작은 소녀에게 약간 불쾌하게 답하고 말았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 지금 그런 것을 묻고 있는 너처럼." 그 순간, 나야트레이는 갑자기 앞으로 뛰어나가며 단도로 짧은 금을 그었다. 보리스의 귀에도 들렸다. 찌익, 하 는 파공음이. 그리고 보리스의 왼쪽 뺨에도 낯선 바람이 느껴졌다. 검을 왼쪽으로 끊어 쳤을 때 나야트레이도 그쪽으로 뛰어드는 것 이 보였다 서로의 모습을 알아보기도 힘든 어둠 속, 두 검이 같은 대상을 양쪽으로 흩어버리는 동시에 또 하나의 얇은 막을 찢어 놓 았다. 서로를 보호할 틈이 없었다. 보리스는 그의 시야로 순식간에 다가왔다가 멀어지는 작은 단도날을 보았다. 싸악, 머리칼 한 줌 이 베어지며 검은 밤 속에 흩어져 날았다. 둘의 동작이 멈췄을 때, 나야트레이의 목소리가들려왔다. 더 침착한 음성이었다. “저들을 끝내는 건 틀렸어. 일격에 죽이지 못하면 다음은 없어."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느끼며 보리스가 물었다. “유령과 대적 해 본 일이 있어?” “아니, 하지만." 나야트레이는 두 번 뒷걸음질쳐 재빨리 보리스와 다시 등을 맞댔다. “두 번째 베면 죽은 굴(G houl)도 되살아난다는 건 알지." “굴이라고? 그게 뭐지?” 그러나 더 이상 말을 주고받을 틈이 없었다. 둘은 각자 다시 쇳소리를 내 며 검을 내리그었고, 서로의 동작을 살필 겨를도 없이 자신의 몸을 방어하는 데 열중했다. 이제는 라마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밤은 싸늘했지만 그들은 진땀을 흘리며 보이지 않는 상대의 무언지 모를 몸을 베고 찢었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모 르겠다 싶을 정도로 같은 일만 연속될 뿐이었다. 한 방울의 피도, 상처 입은 기색도, 볼 수 없었다. 견디다 못한 보리스가 다시 등 뒤로 다가온 나야트레이를 향해 소리쳤다. “아까 그 피리를 쓸 수는 없는 건가?” 냉담한 대답이 들려왔다. “말했다시피, 두 번 베 기 시작한 굴은 쫓을 수도, 죽일 수도 없어" 기가 막혔다. 굴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은 그렇다 치고, 그럼 두 사람은 지금 무얼 하 고 있는 거란 말인가. “우리가 지금 아무 쓸모 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거야? 그걸 알면서도 계속하는 이유가 뭔데?” “그냥 죽을 수는 없지." 도저히 그 의도를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스스럼없는 대답이어서 무어라 반박할 수조차 없었다. 나야트레이는 농담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냥 죽을 순 없으니 지쳐 쓰러질 때까지 의미 없는 일이라도 계속하다가 죽잔 말인가. 굴이란 것이 유령의 일종인지 무언지 몰라도 두 번째 베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죽일 수 없는 존재가 된다니, 그런 어이없는 이야기는 평생 들어본 적도 없 었다. 검으로 베어지는 존재라면 당연히 죽일 수도 있어야 했다. 물론 그런 존재라면 반대로 그들을 죽일 수도 있다. 손톱 긴 손가락 들이 어깨를 확 잡아채는 것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왼팔이 찌르르해지며 팔꿈치까지 마비되어버렸다. 왼팔이 잡아주던 균형이 사라지 자 오른손이 흔들리며 움직임이 부정확해졌다. 바로 그 순간, 그 손은 다시 한 번 오른손 손목을 잡아챘다. 무언가 채 느끼기도 전에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빈손이 되었다. 있을 수 없는 실수를 하고 만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손을 돌려 윈터러를 뽑 고 말았다. 흰 칼날이 빠르게 허공을 찔러갈 즈음에야 자신이 저지른 일을 깨달았지만 이미 돌이키기엔 늦어 있었다. “!” 알아들을 수 없는 외침이 울리고, 거무튀튀한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이어 비슷한 외침이 몇 군데에서 울렸는데, 짐승의 울부짖은 것이 아니라 보리스가 모르는 언어로 무어라 외치는 듯 들렸다. 보리스는 무언가에 꽂힌 윈터러를 잡아 뽑으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걸쭉하고 검은 액체가 검날을 타고 그의 손이 있는 쪽까지 흘러내렸다. 소매 끝이 액체에 닿자 파르스름한 불빛을 내며 삭아 버렸다. 보리스는 간신히 검끝을 아래로 낮추었다. 등 뒤에서 나야트레이의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었어." 잠시 후 어둠 속인데도 검은 윤곽이 스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흘러내리던 액체가 그 윤곽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사라져 버렸다. 보리스는 윈터러를 내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마와 뒷목에 땀이 흥건하게 배어나 있었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침착한 나야트레 이 앞에서 당황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야트레이도 단도를 닦아 넣었다. 둘은 서로 돌아보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등을 기대도 좋으련만, 둘 다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았다. “아까는 죽일 수 없을 거 라고 했잖아." “아니, 너는 굴에게 단 한 번의 일격을 가했어." “우리는 죽 그들과 싸우고 있었어. 이미 몇 번은 찔렀을 거야." “너의 새로운 검. 그걸로 단 한 번 찔러 죽였어. 그건 뭐였지?” 나야트레이가 몸을 돌려 보리스가 손에 쥐고 있는 윈터러를 보려했다. 그러나 보리스는 자신도 모를 본능으로 재빨리 검을 검집에 꽂았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어 좋은 일이 일어난 적 없는 검이었다. 그래서 나야트레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윈터러의 손잡이에 친친 감긴 흰 붕대 조각뿐이었다. 잠시 후 보리스가 말했다. “라마들이 사라져 버렸어." “아침이면 돌아올 거야." 밤이 얼마나 깊은 걸까 난데없는 전투를 벌이는 바람에 시간 감각이 흐려져 버렸다. 그대로 주저앉은 채 라마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나야트레이가 윈터러에 대해 더 묻지 않는 것처럼, 보리스 역시 나야트레이가 무엇을 더 알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그러나 침묵만으로 지새기에는 밤이 너무 길었다. 수천 개의 별자리들이 갓 닦아 놓은 유리 목걸이처럼 휘황하게 번쩍거렸다. 흠 없는 검은 하늘엔 푸르스름한 기마저 감돌았다. 모닥불조차도, 먼 곳의 불빛 하나도 없는 텅 빈 땅이 눈 닿는 곳 전부를 메우고 동행이라고는 낯설고 말없는 소녀뿐. 지도에서 보았던 필멸의 땅은 대륙 크기의 4분의 1에 달했는데 그토록 넓은 땅이 누구의 소유도 아니며 인간의 질서 중 어느 것도 통하지 않는다니, 이것처럼 기이한 일이 또 있을까. 이웃나라의 왕들, 또는 트라바체스의 통령처럼 한 나라를 지배하는 자들은 자신이 세운 질서를 백성 전부가 받아들이기를 원하고, 나라에도 강요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밤낮으로 바랄 테지만, 그들이 만일 대륙의 모든 땅을 자기 영토로 한다 해도 이 필멸의 땅만은 인간의 역사를 비웃으며 이대로 존재할 것이다. 마법 왕국은 이제 존재하지 않지만, 그들이 살았던 땅조차도 마치 인격체처럼 ‘보아라, 세상에는 불가능한 것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어쩌면 그래서, 여러 나라의 왕들은 대륙의 통일을 그다지 꿈꾸지 않는 지도 모르고... “귀를 기울여 봐." 갑자기 나야트레이의 목소리가 보리스를 상념에서 깨웠다. 그제야 느낀 것이지만 나야트레이의 목소리는 샘에 떨어지는 이슬 소리처럼 차랑하고 맑았다. 주위가 적막했기에 굉장히 선명하게 들렸다. 그러나 나야트레이가 귀 기울이라는 소리는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보리스는 곧 한 가지를 떠올리고는 말했다. “라마가 돌아온 건가?” “아니 ." 보리스는 문득 이솔렛을 생각했다. 그녀의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는 신성 찬트(Chant)를 부르게 되면 세상의 어떤 소리와도 비할 수 없는 천상의 음(푤)으로 변했었다. 그에 비해 나야트레이의 목소리는 비교적 아이다운 맛이 있었다. “아무 소리도 안 들려." “발소리." 극도로 예민하게 귀를 세웠지만 역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나야트레이가 말했다. “너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 조금 전 아노마라드에 가본 일이 있냐고 물은 것처럼 난데없는 질문이었다. 이 아이와 다니려면 이런 식의 대화에 익숙해져야 되는 것인가 싶었다. “많아." “그 중 누구의 증오심이 가장 강하지?” 보리스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싸우고 싶지 않았으므로 대강 대답하려고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마땅한 사람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고향에서 보내어져 그를 쫓는 자들도 보리스에게 개인적 원한은 없을테고, 섣불리 벨노어 백작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섬사람들 중에서도 굳이 지독한 증오심을 품었다 할 만한 자는 없었다. 질레보 선생은 죽었고, 헥토르는 예전과 좀 달라졌다. 그렇다면 에키온인가? “내가 자기 형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하던 어떤 녀석. 이젠 내가 그곳을 떠났으니 별 관심 없을 지도 모르지." “그는 살아 있겠지?” 문득 보리스는 깨달았다. “그래, 살아 있어. 유령은 아냐." 진짜유령이 다가오고 있는 것인가. 나야트레이가 일어서면서 품에서 피리를 다시 꺼내더니 나직이 었다. 연주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귀에 거슬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곧 피리 불기를 뚝 그치고는 어둠 속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넌 이미 죽어 있어." 유령들은 때때로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광인처럼 행동하곤 한다고 들은 일이 있었다. 보리스는 여전히 어떤 기색도 느끼지 못했지만, 조금 전의 경험으로 나야트레이에게 다른 사람보다 먼저 미지의 존재를 알아채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보리스는 일어나려다가 이번에도 윈터러를 잡을 수는 없다 싶어 떨어뜨렸던 검을 쥐었다. 윈터러를 다시 매달려고 하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대뜸 그의 몸을 덮쳐 넘어뜨렸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어깨며 가슴을 내리누르는 힘만은 분명히 느껴졌다. 보리스는 일어나려고 했으나 이 무게조차 없는 적을 도저히 밀쳐낼 수가 없었다. 분명 힘이 가해지고 있는데도 손에는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머리 위에서 나야트레이의 단도가 휘둘려지는 것이 보였다. 마음속에서 그래도 그녀가 자신을 도우려고 허긴 하는구나, 라는 어이없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야트레이의 검도 소용이 없었다. 보리스 역시 전혀 저항할 수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보리스의 품 속을 마구 헤집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것처럼. 그러나 품속에 든 것은 가죽 칼집에 든 여행용 단도 하나뿐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르르,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파앗!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방 몇 걸음 이내가 갑자기 대낮처럼 환해지면서 벽돌로 둥글게 쌓아올린 우물이 나타났던 것이다. 더 놀랄 수밖에 없었던 건, 그 우물이 보리스의 몸 위에 나타났다는 사실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환각이었다. 주위 풍경도 달라져 있었다. 청색 꽃잎과 흰 꽃술을 지닌 꽃이 우물 주위에 만발했다. 한쪽 방향에는 이상한 벽마저 나타났다. 실제로 있는 풍경을 어딘가에서 가져온 듯 놀랄 만큼 현실적이었다 보리스는 순간적으로 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실버스컬을 헌정하기 위해 마법으로 먼 곳에 있는 숲의 제단을 그대로 끌어와 심지어 만질 수도 있도록 만들지 않았던가. 캬악! 이번에야말로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고, 보리스의 몸을 타고 앉은 듯했던 낯선 힘이 단번에 사라졌다. 보리스는 벌떡 일어나면서 검을 잡아 앞을 방어했다. 그러나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다. 다만, 감자기 나타난 환각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주위는 푸른 꽃이 만발한 정원과 우물이 있는 낮이었다. 그러나 범위가 넓지 않아 그 너머에는 여전히 어둠이 보였다. 도대체 왜 이런 것이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 낯선 환각 속에 잠긴 채 둘은 긴장하여 주위를 경계했다. 삐걱. 우물 속에서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물 앞으로 달려간 둘은 거의 동시에 각자의 무기를 찔러갔다. 우물 안은 캄캄했는데, 그 안에서 계속해서 무언가가 기어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데없이 나타난 환각이며 빛도 두려운데 우물 안에서 올라오는 괴물이라니. 여간해서는 놀라지 않는 그들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덜그럭, 시잇, 자그락. 그 소리가 점차 다가와 바로 코앞에서 들릴 즈음에도 정체 모를 적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갑자기 소리가 멎었다. 그리고 천만뜻밖으로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어." 3. 천 년 전의 생존자 “오, 이거 참 좋은 물건이군." 상아 주사위는 순식간에 ‘그 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아직 ‘그자' 말고 달리 지칭할 말을 발견하지 못했다. ‘한 개뿐이라서 유감인데 혹시 몇 개 더 없나?주사위 놀이를 해본 지 천 년은 된 기분이야. '추격자(Chaser)' 할 줄 알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주사위 놀이인데." 보리스는 애매한 표정으로 망설이다가 어물어물 대꾸했다." ‘추격자' 라면 할 줄 알지만... 주사위는 그것뿐이고... 유령의 땅에서 엔디미온의 아버지인 섭정왕에게 배웠던 주사위 놀이가 바로 ‘추격자'였다. 보리스는 나야트레이를 흘끔 바라봤다. 평소 놀라는 모습을 보인 일이 없는 이 꼬마 아가씨가 무슨 표정일지 궁금해서였다. 그러나 나야트레이는 단지 눈을 좀 크게 뜨고 있을 뿐이었다. ‘하는 수 없지. 세상에 완벽한 건 없다니까. 놀이 상대가 있고, 상대가 놀이 규칙을 알면, 놀이 도구가 없지. 그래도 놀이 도구도 있고 규칙도 잘 아는데 상대가 없는 것보단 나아. 상대가 있으면 다른 놀이를 하면 되니까. 주사위 한 개 갖고 하는 놀이가 뭐가 있더라... 유쾌하게 지껄이던 ‘그 자'는 낡은 두건이 씌워진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곧 실망한 듯 말했다. “너무 오래되어서 생각이 잘 안 나는데." 실망한 듯했다는 것은 ‘그 자' 의 어조와 고개의 움직임 등으로 미루어 판단한 것이었다. 물론 세워진 채 까딱거리는 손가락의 움직임도.... 그러나 그것을 손가락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일까?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손가락 뼈였다. 환각의 우물 속에서 기어 나와 보리스와 나야트레이 앞에 나타난 ‘그 자'는 두건 달린 검은 망토 차림에 키는 중간 정도... 그리고 밖의 것은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자였다. 얼굴 생김새, 머리 빛깔, 몸집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그런 것을 갖고 있지 않았다. 두건 안쪽에 들어 있을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한쪽 밖으로 드러난 것은 살이라고는 조금도 붙어 있지 않은 푸르스름한 뼈였다. 옆에서 나야트레이가 바로 핵심만을 찔러 말했다. “죽은 거야? 아니면 산 거야?” “죽었다면, 이제 와서 해묵은 주사위를 보고 감회 겨워 할 일도 없겠지. 살았다면, 내 몸에 붙어 있던 내장과 살은 어디로 갔는가? 비록 살은 생전에도 별로 붙어 있지 않았지만, 뭐. 작은 묘족 아가씨는 방금 말한 두 가지 범주 외의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어." 그러나 나야트레이의 대답은 간단했다. “모든 인간은 둘 중 하나야. 죽었거나, 살았거나. 아니라면 넌 인간이 아니야." “옳아. 그런데 지금 내 몸을 이루고 있는 건 한때 인간의 뼈였어, 그 인간은 물론 죽었어. 그리고 나는 여기에 있어. 생전에 그 자는... 에피비오노라고 불렸지." 어디선가 들은 듯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섬사람들이 갖는 그런 이름이었다. 그러니 가나폴리의 이름이기도 할 것이다 어디서 들어보았더라, 이공간의 오벨리스크에서 보았던 수많은 이름들, 사람들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던 죽은 자의 이름들, 그 밖의 수많은 기록들... 이름들 속에서 익사하기 직전, 겨우 빠져나온 보리스는 나야트레이와는 좀 다르지만 그의 성격상 핵심에 해당하는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당신의 적입니까?” “그렇지."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뒤로 물러나며 자신들의 무기를 잡았다. 그러나 ‘그 자'는 별 반응 없이 이어 말했다. “본래 난 너희를 죽여야 해. 너희가 처음 이 땅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그럴 작정이었어. 왜 그런지 알아?” 보리스는 더 당황하지도 않고 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당신은 아마 가나폴리의 옛 땅을 지키는 수호자나 뭐 그런 존재겠죠. 아니라면 다른 언데드(Undead)들과는 달리 멀정한 인격을 갖고 있으면서 이곳에서 혼자 지낼 까닭이 없으니까. 당신이 우리를 죽여야 할 불청객이라고 생각하면 이 자리에서 서로의 운을 시험해 볼밖에 다른 방도가 없겠죠." “틀려. 반드시 ‘내가' 죽여야 한다는 말이야. 그래야 다른 시체들이 너희를 죽일 수 없게 되니까” ‘그 자'는 보리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중지 손가락뼈 끝에 엔디미온이 준 주사위가 교묘하게 얹혀 있었다. 그게 바로 보리스의 품에서 떨어졌던 물건이었다. “다른 시체의 손에 죽으면, 그들에게 몸을 뺏긴다. 너희는 혼만 남게 되고, 몸을 되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니까 일반적으로 ’미친 혼’이 된다. 하지만 난 지금의 이 몸에 대 만족...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본래 이 상태를 영원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욕망 없이 너희들의 몸을 깨끗하게 소멸시켜 줄 수 있는 거야." 보리스는 보았다. ‘그 자'의 손가락에 얹혀 있는 주사위를 향해 무언지 모를 빛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처음에는 빛처럼 보였지만 곧 정체를 알게 되었다. 주사위는 주위를 둘러쌌던 처음 보는 풍경을 흡사 연기에 그린 그림인 양 빨아들여 없애 버렸다. 우물도, 꽃도 사라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빛을 한 번 낸 뒤 잠잠해졌다. “좋은 주사위라고 한 이유를 알겠지?” 보리스는 무심결에 주사위를 돌려 받으려 하다가 움찔하며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의혹으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엔디미온의 주사위에 그런 힘이 들어 있었다면 왜 지금까지는 아무 일도 없다가 이 순간 갑자기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리고 대체 그건 무슨 힘이었을까? 그 때 나야트레이가 불쑥 말했다. “본래 죽여야 했다는 건, 이제는 아니란 거야?” 해골손을 지닌 자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해골손을 올려 두건을 내렸다. 날이 서서히 밝아왔다. 어둠 속에서 단지 푸르스름한 손뼈만 볼 수 있었던 상대방의 얼굴도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보리스는 그의 얼굴을 보게 될 일이 약간 두려웠다. 손과 마찬가지라면 그의 얼굴은 아마 반쯤 풍화되어 가는 해골일 것이고, 심지어 턱을 움직이며 말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섬뜩한 광경이 익숙할 리 없었다. 그러나 예상은 어긋났다. 드러난 것은 허연 해골이 아닌 푸른 잿빛의 짤막한 머리카락이었다. 그가 고개를 들고 보리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스물 서넛이나 되었을까 싶은 젊은이의 윤곽 또렷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동녘 하늘이 겨울밤 화로처럼 발갛게 달아오르는 때가 왔다. 이제 다시 더운 낮이 돌아와 누런 황무지를 소금 사막처럼 따갑게 달굴 것이다. 잠자리 준비는 끝났지만, 라마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터라 보리스도 나야트레이도 아직 잠들 수는 없었다. 그들이 기다려야 하는 자는 또 있었다. 보리스는 동쪽 지평선을 바라보며 앉은 ‘그 자' , 다시 말해 에피비오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에피비오노는 검은 망토로 온 몸을 감싼 채 저 뜨거운 태양을 눈 한 번 떼지 않고 꾸준히 주시하는 중이었다. 사람이라면 곧 검은 천 속에서 끓어오를 열기를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심하게, 좋은 바람이 부는 언덕에서 서늘한 풀밭을 내려다보듯 조용히 그 자세 그대로 있었다. 일종의 의식일까. 에피비오노,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던가 다시 한 번 기억해보려 했지만 여전히 실패였다. 하지만 들어보았던 이름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는 기다려달라고 했다. 태양이 뜨는 동안만은 자신에게도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할 말이 있다면 그 후에 하자며 멋대로 저렇게 앉아버렸다. 그리고 거친 황무지가 금빛 품은 굴조개 껍질처럼 빛나는 아침이 다 오도록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처음 얼굴을 보았을 때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에피비오노의 손을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뼈뿐인 그 손과 젊은이다운 깨끗한 얼굴이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필멸의 땅에는 수많은 유령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종류 역시 다양하다고 했는데 에피비오노의 이상한 모습에서 유령말고 달리 무엇을 떠올리겠는가. 그러나 새벽이 끝나고 아침이 열릴 즈음 그는 드디어 일어서서 보리스와 나야트레이에게로 왔다. “소개라도?” “,.” 보리스가 의심쩍은 얼굴로 침묵을 지키는 동안 놀랍게도 나야트레이가 먼저 대답했다. “나야트레이." “그래. 난 에피비오노라고 부르면 될 거야. 내 이름의 뜻은 몹시 저주스런 것이었지. 그런 까닭에 내 의지와 관계없이 남겨져 너희 같은 방문자들을 몸소 벌하거나 또는 이야기를 주고받곤 하게 됐지. 아참, 이야기를 주고받는 건 처음이군 그래." 더 놀랍게도 나야트레이는 보리스를 손으로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보리스." “아. 그렇군." 그가 악수를 청하지 않은 것이 참 다행이었다. 보리스는 에피비오노가 무심결에 악수를 청하려 했던 듯, 해골손을 조금 움직이다가 멈추는 것을 보았다. 잠깐 머뭇거리던 그는 해골손을 소매 속에 감추었다. 해골손을 지녔다 해서 에피비오노는 유령처럼 반투명하지도 않았고, 시체처럼 창백하지도 않았다 흰 이마 아래 크고 선명한 비취빛 눈동자를 가진, 드물게 맑은 인상의 사내일 따름이었다. 짧은 인중과 살짝 치컥 올라간 눈초리는 흔히 약빠른 느낌을 주기 마련인데, 워낙 섬세한 생김새인지라 오히려 요정의 용모를 닮은 듯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물게 고풍스러운 억양은 예전에 만난 유령들을 생각하게 하는 면이 있었다. “왕국의 길을 따라 걷고 있었군? 이 길은 수도 아르카디아로 가는 길이다. 너희는 아르카디아에 볼일이 있는가?” ‘왕국' 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 없이 가나폴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숨길 필요를 느끼지 못한 보리스는 간단히 긍정했다.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이곳에는 생명이 없다고 들었는데 당신은 아직 이성을 잃지 않은 유령인가요?” 젊은 에피비오노는 주위가 밝아질수록 더 말갛게 빛나는 비취빛 눈동자로 보리스를 한참 뜯어보다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내게 일어난 일인데 나조차도 쉽사리 설명할 수가 없구나. 그 설명은 우리가 서로를 좀더 잘 알게 된 후로 미루지. 아르카디아로 간다고 했는데, 누구나 알고 있듯 아르카디아는 이미 오래 전에 흙 속으로 사라졌잖은가. 보물을 얻고자 그곳을 찾는 자들이 많았지만, 어느 누구도 아르카디아의 부서진 첨탑 하나 눈에 담지 못했어. 그러나 너희는 놀랍게도 이곳까지 왔다. 누가 너희를 인도하고 있지? 네가 지닌 그 검인가?” 보리스는 상대가 윈터러를 언급한다는 것을 느끼고 긴장했다. 아직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대 앞에서 모든 걸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제 검의 일로 아르카디아를 찾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은 밝히기 어렵군요." 에피비오노는 다시 한번 보리스를 조용히 바라보더니 낮게 웃었다. “숨기지 않아도 좋아. 너는 왕국에서 탈출하여 살아남은 자들의 후예를 만났겠지? 그들로부터 조언을 듣고, 무언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에 온 것 아닌가?” 에피비오노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게 아닐까? 보리스는 조금 당황하며 대꾸했다. “그 말은 맞지만, 어떻게 아셨습니까?” “너의 주사위. 그건 왕국에서 만들어진 물건이고, 더구나 왕족의 물건이기까지 한데, 그들의 호의가 아니라면 어떻게 손에 넣을 수 있었겠나? 내가 살피건대 네게 왕족을 위협하거나 해칠 힘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니." 그렇게 말하며 에피비오노는 다시 꺼낸 해골손을 움직여 주사위를 건넸다. 보리스는 좀 망설이다가 받아들고는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누굽니까? 정말로 이곳의 위험한 유령들과 다르다면 왜 제 앞에 나타났는지 설명하셔서 제 우려를 좀 덜어주시지요." “재미있는 단어 배열이야. 좋아. 내 입장은 좀 복잡하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금붙이를 손에 넣으려고 이곳에 발을 들여놓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혼을 빼내 산산이 부숴 버리는 것이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일이다. 너희한테 처음 베풀어주려 했던 그 호의 말이야." 호의라니, 듣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말이었지만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왜 우리를 내버려뒀습니까?” “너 자신이 더 잘 알지 않아? 미안하지만 천여 년 동안 오직 홀로 제정신을 갖고 지내오자니 너희 같은 몇 십 년 짜리 생명들의 마음은 쉽사리 들여다보게 되어버렸어. 묘족 아가씨가 여기 온 목적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더 말할 가치를 못 느끼겠고, 소년 네가 목적하는 일은,. 확실히 중대한 것이라 명확한 것을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어쨌든 내가 당장 없애버리지 않고 대화의 필요성을 느낀 방문자가 실로 얼마 만인지 모르겠는데. 어, 혹시 처음일지도 모르겠어." “마음만 먹으면 당장 없애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보리스가 특별한 반감이 있어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말의 불편한 심정은 있었다. 자만할 실력은 없다고 생각하지 그렇다고 처음 만난 상대에게 처음부터 저자세가 될 정도로 초라한 실력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우플리온도, 누군가의 목숨을 끊을 수도 있는 기술을 수련할 때는 최소한의 자신감이란 게 요구된다고 말한 일이 있었다. “글쎄, 그건 알 수 없는 일이겠지. 네가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말하자면, 그 검은 너희의 물건도 우리의 물건도 아니며, 재갈 풀린 맹수와 비슷한 존재이니, 그것이 내게 더 위험할지 네게 더 위험할지 알 수 없는 일이지,"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솔직히 말하죠. 그 재갈을 도로 묶기 위해 갑니다." 둘은 또다시 서로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둘의 키는 비슷했다. 그 때, 귀로 들려야 할 목소리가 보리스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그렇다면... 늙은이의 우물을 찾는가? 퍼뜩 엔디미온이 생각났다. 그 애가 이마를 맞대고, 생각을 곧장 머릿속으로 불어넣어 주던 것과 똑같았다. 눈앞의 에피비오노는 표정 변화도 없이 보리스를 주시하고 있었다. 천여 년을 살아왔다는 자의 스무 살 청년처럼 맑은 눈 속에 흐르는 바람이 보였다. 그 스스로 밝힌 대로 원하지 않았던 생애를 계속 살게 된 자, 죽고자 해도 죽을 수 없는 생존자, 드디어 그의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해 냈다. ‘살아남는다'라는 뜻을 지닌 이름, 에피비오노,. 멸망 속에서도 죽을 수 없게 만든 이름의 힘은 얼마나 강대한 것인가. 아니, 오히려 운명이 예견되었기에 그런 이름을 갖게 된 걸까? 이윽고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제 알겠군요. 당신이 누구인지, 왜 내게 온 것인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푹 자고 일어나니 다시 저녁 무렵이었다. 보리스가 눈을 떴을 때 에피비오노는 또다시 등을 돌린 채 서쪽을 향해 앉아 있었다 이미 지고 난 뒤였지만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천여 년을 혼자 살아오는 동안 세월을 세듯 저절로 지니게 된 버릇인 듯했다. 저녁 빛 속의 잿빛 머리카락이 밤공기 속에서 푸르게 반들거렸다. 오래 전 나우플리온과 대륙을 돌아다니던 시절, 어느 밤엔가 보았던 은회색 늑대의 털빛처럼. 보리스가 깬 것을 알아채고 에피비오노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기 너희의 짐승들이 돌아와 있군." 정말이었다. 라마 두 마리가 얌전히 어스름 가운데 선 것이 보였다. 보리스는 몸을 일으키다가 조금 의아하여 물었다. “당신은 잠을 자지 않습니까?” 에피비오노는 소맷자락 속의 해골손을 슥 내밀어 보였다. “망토로 가려져 있으니 모르겠지만 내 몸은 절반 이상이 이런 상태거든. 인간의 몸에 필요한 휴식이나 영양 같은 것은 전혀 소용없지. 내 몸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건 자아를 위한 정신의 힘 뿐이야." 보리스는 나야트레이를 깨워 간단히 식사를 했다. 그리고 셋은 길을 따라 출발했다. ‘에피비오로’ 라는 이름은 보리스가 유령들을 만나 가나폴리의 멸망에 대해 들었을 때 언뜻 언급되었던 이름이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자면 ‘일곱살 때부터 천재로 이름을 날렸던 젊은 에피비오로’는 벽탑 시메로노에 모여 아르카디아의 재앙을 막으려 한 마법사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랬으니 왕녀 에브제니스의 '소멸의 기원'이 실패했을 때 당연히 죽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곳의 유령들이 가벼운 의문을 제기했던 것처럼 '살아남는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에피비오로는 어찌된 셈인지 살아남았다. 그것도 망토로 가리지 않으면 안 되는 시체의 몸과 죽을 당시의 아름다운 얼굴이 공존하는 기괴한 상태로 천 여 년이나 혼자 살아왔던 것이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에피비오노 자신조차도 설명하지 못했다. 물론 이곳에는 다른 유령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의사 소통이 가능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솔직히 외로울 수밖에 없었던 에피비오노는 그들을 어떻게든 정상적인 정신으로 되돌려 보려 했지만 끝내는 포기하고 지배하는 쪽을 택했다고 말했다. “저 완전히 죽지 못한 자들, 언데드(Undead)들은 어떤 긍정적인 욕망도 갖지 못해. 오직 뭔가 불쾌하고 불만족스럽다는 것만을 느낄 뿐, 자신을 만족시킬 방법을 결코 찾지 못하지. 따라서 그 무엇인지 모를 욕망을 찾아서 파괴와 살해를 저지르는 것이야. 그러므로 그들을 제압하는 것은 오직 두려움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두려워하는 존재인 내 곁에 있으면 너희는 이 땅에서도 안전할 수 있어." 에피비오노가 외로웠다고 말했을 때, 보리스는 그의 얼굴을 새삼 쳐다봤다 인간은 단 며칠 간의 고립으로도 충분히 끔찍한 고통을 받을 수 있는데, 수십 년도 수백 년도 아닌 천 년을 혼자서 살아온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천 년을 혼자 지내는 기분이 어떨지는 짐작하기 힘들군요." “흥, 겪어보기 전엔 나도 몰랐어," 그는 심지어 농담마저 즐겼는데 천 년 전의 인간이 하는 말치고는 놀랍게도 대부분 이해가 가는 농담들이었다. 말투가 고풍스럽긴 해도 어휘력 역시 지금의 인간들과 거의 비슷했다. 보리스는 유령들이 ‘인간의 삶을 곁에서 지켜보지 않으면 자아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했던 말을 기억해 내고는 물었다. ‘당신은 아마 여기에서만 지낸 것은 아니겠군요."“그럼 십 년도 아니고 백 년도 아닌데 종일 황무지만 바라보며 사는 건 ‘편-집-광(그는 이 낯선 단어를 말하며 상당히 만족해하고 있었다)'이나 할 만한 일이 아닌가? 한때 못 견디게 답답해졌던 시절이 있어 대륙 곳곳을 오랫동안 돌아다녔지." “그 모습으로요?” 말하고 나서 약간 실수했나 싶었지만 에피비오노는 망토 속의 정체모를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요새 사람들은 가나폴리의 마법사를 도대체 뭘로 보는 건지, 참. 모습 바꾸는 일쯤이야, 요즘 마법사들도 그쯤은 하겠군. 내가 설마 요령이 부족해서 너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오해는 유감천만이라고." 천 년을 살아왔다고 해도 마법사는 마법사였다. 저 정도 자신만만함은 그들의 필수적 덕목에 가까웠다. 나야트레이의 태도도 나름대로 흥미로웠다. 그는 에피비오노가 해골손을 갖고 있든 천 년을 살아왔든 궁금해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경계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나야트레이가 평소 주위의 기척에 얼마나 예민한지 알고 있는 보리스는 그녀의 동물적인 감각이 이 자가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 내린 거라면 그걸 믿어도 좋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 보았다. 어쨌든 에피비오노는 그들 둘을 늙은이의 우물로 인도해 주겠I다고 약속했는데, 드넓은 땅을 작정도 없이 걷는 것에 비하면 매우 이로운 제안이라 할 수 있었다. 보리스가 그가 베푸는 친절의 이유를 묻자 에피비오노는 ‘너의 위험, 나의 위험, 과거의 위험, 현재와 미래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그렇다' 라고 대답했다. 보리스는 그 말의 뜻을 며칠에 걸쳐 생각하다가 결국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닷새 동안, 에피비오노의 기억력을 믿는다면 ‘보레이오스 가도'를 따라 남으로 또 남으로 내려갔다. 보리스가 중간에 샘이 있다고 들은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지만 에피비오노는 특유의 뭐든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물을 보는 문제라면 자신에게 다 방법이 있다는 투였다. 드디어 물이 다 떨어졌을 때, 에피비오노는 길에서 벗어나 동쪽으로 한참 가더니 땅바닥이 여기저기 갈라진 곳을 발견하고 두 사람을 불렀다. 바짝 말라 물기라고는 이슬 한 방울도 찾아볼 수 없는 그 곳에서 에피비오노는 느긋한어조로 ‘물 보충을 한댔지?’ 라고 말했다. 나야트레이는 아무 의문도 없는 듯 시키는 대로 바로 바닥에 앉았다. 보리스가 의심쩍은 눈초리로 쳐다보자 에피비오노는 소년처럼 나직이 키득거리더니 말했다. “의심 많은 어린 친구, 제발 부탁이니 마법을 좀 믿어." 망토 속에서 팔짱을 낀 채 서 있던 에피비오노가 별다른 주문을 외우거나, 하다 못해 바닥에 룬(Rune)이라도 그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에 앉은 보리스와 나야트레이에게도 서서히 강해져 오는 땅울림이 느껴졌다. 조금 후 눈앞의 갈라진 틈을 메우며 차 오르는 검은 물을 본 보리스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런 황무지 한가운데에서, 바다조차 그토록 먼데, 물이 나오다니? 게다가 그건 진한 포도즙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새카맣고, 또한 반짝거리는 물이었다. 물이 넘칠 지경이 되자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비키려 했다. 그러나 물은 갈라진 틈에서 조금 넘치는 데 그쳤을 뿐 더 이상 올라오지 않았다. 에피비오노가 손짓하는 걸 보고 보리스는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저 물을 마시라고요?” “색깔이 거슬려? 독약도 아니고 오염된 물도 아니니까 걱정 마. 오히려 흔히 보는 맑은 물보다 훨씬 좋은 거지... 흐음, 이봐. 나름대로 친절을 베푼 건데 망설이고 있으면 이쪽에서 머쓱하잖아?” 천 년 전의 인간 주제에 저렇게 요령 좋게 권하는 법은 어디서 배웠는지, 하여간 물이 있는 쪽으로 다가간 보리스는 마시기 전에 손 끝에 묻혀 조금 맛을 보았다. 물은 조금 쓴 듯도 했으나 보통 물맛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보리스는 옆의 나야트레이를 흘끔 보고는 또 한 번 당황했다. 나야트레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몇 번이고 두 손으로 물을 떠,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걸 보니 아무리 말을 나누지 않는 사이라 해도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럴 땐 속 편한 네가 부러운데." 기대하지 않았던 대꾸가 들렸다. “흑요수야, 너무 귀해서 한 해에 두 모금도 마시기 힘들어." 옆에서 에피비오노가 젊은이다운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묘족이 아직 흑요수를 알고 있구나. 황금 고양이가 없는 요즘도 요수를 찾을 줄 알다니 꽤 놀랄 만한 이야기야. 어쨌든 좋은데. 그래 한 해에 두 모금만 마셔도 충분히 도움이 됐겠지.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런 것 없이 황무지란 살아가기 힘든 곳이니까." “잠깐, 천 년 전에는 이곳이 황무지가 아니었을텐데요?” 에피비오노가 한쪽 눈썹을 올리며 말했다. “가나폴리가 본래 사막 위에 세워져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군." 그 때도 사막이었다고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가나폴리를 상상할 때 떠올랐던 것은 유령들의 땅에서 본 푸른 돌로 세워진 건물들, 그리고 멘탈 포레스트(Mental Forest)처럼 젖은 듯한 초록빛 숲의 모습이었다. 더구나 보리스는 유령들의 힘을 빌려 아르카디아의 모습을 직접 본 일이 있었다. 모래 흔적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던, 너무나 깨끗하고 웅장하며 아름다운 도시가 아니었나? 그런데 에피비오노가 이어서 한 말은 보리스를 더욱 놀라게 하고 말았다. “가나폴리뿐 아니라 섬 전체가 본래 사막이었는데?” “섬이라니요?”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 말이야. 아참, 너희는 대륙이라고 부르던가? 하지만 대륙치곤 좀 작기도 하고, 또 우리가 대륙이라고 부르던 땅은 따로 있어서." 보리스는 말문이 막혀 있다가 갑자기 한 가지를 떠올렸다. “아,. 혹시 가나폴리를 떠난 비행선 선단이 가려고 했던.... 그곳이.... 그 대륙인가요? 거긴 어디죠?” 이제야 생각이 났다. 달의 섬은 불시착지였을 뿐, 그들이 가려 했던 대륙은 따로 있었다고 들었는데 지금의 대륙-또는 섬-사람들은 아무도 그런 대륙의 존재에 대해 모르지 않던가? “어차피 너무 멀어서 지금 인간들로서는 찾아내는 게 무리야. 잊어버려. 어쨌거나 사막이었던 이 섬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바꾼 것도 우리 조상들이었어. 다만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북부, 즉 보레이오스 지역만은 황무지인 그대로 내버려두었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설명하기 귀찮으니 넘어가고. 그런데 요즘 다른 지역 말이야.... 아-노-마-라-드(그는 최신 지명에 약했다) 같은 곳은 굉장히 아름다운 땅으로 변모했던데? 난 아직도 그것이 풀려버리는 마법의 힘인지, 또는 실제 자연을 가꾸어 개조한 것인지 잘 모르겠어. 어쨌든 그런 땅 안에서 다들 잘도 살아가고 있더라고. 하긴 뭐, 마법이었다 해도 이제는 그걸 풀어버릴 수 있는 대단한 마법사도 없을 테니 안심해도 상관 없을지도." 천 년 전 인간의 관점으로 세계를 보는 것은 참 낯설고 이상했다. 보리스가 당연하고 익숙하게 속해 있는 세계가 에피비오노에게는 단지 관찰의 대상일 뿐이고, 보리스로서는 짐작할 엄두조차 낸 일이 없는 까마득한 옛 일이 에피비오노에게는 한 때의 일상에 대한 추억에 불과한 것이다. 신비롭고, 뜻밖이고, 심지어 충격적인 이야기들 역시 에피비오노의 입에서는 비밀 폭로하듯 심각하지 않았고, 기껏해야 웃 소문 전하는 정도의 어조로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한 때 사막이었던 이 대륙, 그곳에서 마법 문명이 남긴 은혜조차 잊은 채 자신들의 일에 빠져 살아가는 인간들 가운데는 자신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보리스는 과거의 일들을 무엇이든 물어볼 수 있는 상대와 함께 여행하고 있었다. 그 자는 마법사들의 나라였던 그곳에서조차 천재라고 불렸다는 자가 아닌가. “가나폴리 사람들은 모두 마법사였다고 들었는데, 그 중에서 천재라고 할 정도면 다른 사람들과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 거죠?” 에피비오노는 무심코 주저앉아 검은 물에 손가락뼈를 좀 축이더니 말했다. “너와 나 정도의 차이." “그럼 제가 가나폴리 사람들 수준이란 말인가요?” 물론 농담이었다. 그런데 에피비오노는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나와의 격차에 비하면, 당시 가나폴리 사람들과 너의 차이 정도는 별것도 아닐걸." 마법사들의 자부심이란 것은 ‘적당히 필요한 수준'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검은 물을 물주머니마다 가득 담고 나자 에피비오노가 말했다. “이제부터 보레이오스 가도를 벗어나서 북중부의 가장 큰 도시였던 클라자니냐 쪽으로 가자. 그곳의 ‘거울'이 너희를 받아들여 줄지는 모르겠지만, 성공한다면 아르카디아로 가는 길을 크게 단축할 수 있게 되겠지." 4.인형의 전투 클라자니냐. 그 단어도 어딘가에서 들어보았다고 생각했다. 보리스가 해답을 얻은 것은 나흘 더 여행하여 에피비오노가 말한 ‘클라자니냐의 거울’앞에 이른 후였다. 한때 북중부 최고의 도시였다는 클라자니냐는 이제 남은 주춧돌 하나도 제대로 찾아보기 힘든 곳이 됐지만, 도시 입구로 추정되는 곳을 지날 때부터 단 하나 계속해서 뚜렷하게 보이는 구조물이 있었다. 그것은 커다란 받침대 모양의 돌이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예전엔 가운데 무언가를 끼웠던 것처럼 가늘고 튼튼한 금속이 좌우로 팔을 올리고 있는 모양이 보였다. 에피비오노는 분명 거울이라고 불렀지만 사실 거울 같은 것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소년 하나, 소녀 하나, 라마 두 마리, 그리고 천 년 전의 인간 하나가 그 앞에 섰다. 에피비오노는 자신이 하는 것을 잘 봐 두는 것이 좋을 거라고 말했다. 그는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조금 후 몇 걸음 떨어져 서며 느릿하게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두 번 정도 되풀이되자 거기에는 가사가 더해졌다. 그런데 거기에.... 너무도 익숙한 신비로움이 깃들여 있었다. 물 속의 구슬 그 안의 세계/ 네 안의 마법 그 속의 노래 / 잃은 것을 영원히 버려 성스러워지며 맑아지리라 / 돌 위의 거울 그 맑은 길에 / 네 가진 바람 이끄는 대로 / 품은 뜻을 찾아낼 것이며 다다르리라 / 그 순간, 보리스는 ‘클라자니냐’라는 라는 단어를 어디에서 들었는지 생각해 냈다. 그르르르르,. 보이지 않는 거울이 소리를 냈다 거대한 원반이, 또는 바퀴가 겨우 잠에서 깨어나 돌아가는 듯한 소리였다. 잠깐사이에 직경 5미터 가량의 타원형 원반이 받침대 위에 나타나는 것이 보았다 태양 아래에서 흡사 타버릴 듯 하얗게 번쩍이는 거울이었다. 보리스는 그것을 보자마자 유령들의 땅에서 수은이 흐르는 듯했던 이상한 샘의 모양을 떠올렸다. 그것은 먼 땅의 과거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노래가 무언가를 불러내다니 이상하게 생각될 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건 흔한 노래와는 전혀 달라. 이건...” “신성 찬트(Holy Chant)겠죠." 설명을 뚝 그친 에피비오노가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반문했다. “어떻게 알지?”에피비오노가 놀라는 걸 보니 어쩐지 말한 보람이 있었다. “전에 말했다시피 이곳을 탈출한 사람들의 후손들이 아직 살아있고, 오랜 전승들도 몇 가지는 함께 살아남았거든요. 저는 한 성 찬트의 마지막 전승자로부터 그걸 배우고 있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 그 땅을 떠날 때 다 잊기로 맹세했습니다." “이거 놀라운데. 신성 찬트는 마법 전승들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들 중 하난데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니 아참, 그건 제대로 된 거였어? 직접 배우기까지 했다니 알겠지? 내가 지금 부른 것과 비교하자면 어떻지? 좀 곤란한 비교인가. 게다가 찬트란 겉으로 나오는 아름다움만으로 가치가 결정되는 건 아니지만,.” 그러나 보리스는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그녀의, 찬트는 제게 천상의 음악으로 들렸기에, 그 이상의 것을 다시는, 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조금 후 보니 에피비오노는 약간 토라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클라자니냐의 찬트, 그것 역시 이솔렛이 가르쳐 주었던 것이었다. 보리스가 연습삼아 되풀이해 불러 보고 있던 때, 나우플리온이 ‘클라자니냐의 찬트’ 라고 말했던 것도 기억났다. 모두가 추억의 이야기였다.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좋았던 이야기들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보리스 역시 에피비오노를 달래 줄 만한 기분이 아니게 되고 말았다. 수은으로 만든 듯한 거울은 찬트가 끝난 후로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에피비오노는 보리스를 불러 거울 안을 보라고 했다. 자신이 가고 자 하는 장소를 똑똑히 생각하면서. 잠시 후 흐름을 멈춘 거울이 맑아졌다. 노란 황무지 가운데 번뜩이는 거울 속에서, 보리스는 무너진 탑을 보았다. 외곽이 벗겨지고 허리를 잘린 탑이 하늘로 솟아 오른 나선 계단의 소용돌이에 사로잡힌 듯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다. 하늘은 파랬고 지평선은 아득히 멀었다. 탑 벽에 새겨진 미세한 장식 주름이 쓰러진 고목의 나이테처럼 허망해 보였다. 그 너머로 청색 반구형 지붕 곳곳에 하얀 별들이 새겨진 건물이 눈에 띄었으나 역시 가운데가 푹 꺼져 있었다. 그곳의 건물은 모두 그랬다. 뻗어나가다 뚝 끊긴 까닭에 죽은 뱀 반 토막처럼 보이는 곡선형 허공다리의 흔적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생생했다. 그것은 정말로 생생했다. 눈을 감았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그들이 있는장소는 다른 곳으로 바뀐 뒤였다. 거울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보리스 일행이 선 곳은, 한 때 아름다웠으나 무너져 버린 흔적들만이 가득한 천 년 전의 도시, 아르카디아로 변해 있었다. “미칠 노릇이야,.” 그렇게 중얼거린 것은 보리스도, 나야트레이도 아니었다. 이 도시의 옛 모습을 기억하고 있기에 한층 더 안타까울 에피비오노였다. 위로할 사람도 없이 혼자서, 은총을 잃고 무너져버린 도시를 무한히 보아왔을 테니까. 보리스가 물었다. “천 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그 때의 기분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까?” 에피비오노는 잠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다가 대꾸했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겠어." 보리스가 고개를 들고 휘둘러보니 조금 전 거울을 통해 봤던 무너진 탑은 생각보다 규모가 엄청났다.그 탑 하나만으로도 보리스가 살아생전 보아온 모든 건물의 위용을 능가할 정도였다. 중앙 입구만도 기십 명이 나란히 들어갈 수 있을 크기였고, 탑의 남은 부분 부분만 어림해 봐도 오십여 미터에 달하는 높이였다. 나야트레이가 몇 걸음 다가가더니 무너진 기둥 하나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이 먼지를 쓸어내고 나니 아래 숨겨진 돌의 본 빛은 희었다. 보리스가 다가가 단검을 꺼내 다른 돌의 표면을 긁어냈다. 그가 먼지를 긁어낸 돌의 빛은 푸르렀다. 모래에 묻힌 보석처럼 푸른 돌, 다름 아닌 청석이다. 표면에 미세한 은가루 같은 것이 별빛처럼 박힌 것이 보였다. 뒤에서 에피비오노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법이 스러져도 돌은 여전히 푸르구나. 다시 그 돌 안에 마법을 불어넣을 자는 없으니 이젠 보통 돌과 다를 것이 없겠지." 보리스는 그 돌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완벽한 건물을 이루고 있을 때 얼마나 신비로운지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먼지 속에서 구르고 있는 청석과 백석을 보는 심정이 한층 더 씁쓸했다. 고개를 들어 꺾여 쓰러진 탑을 다시 한 번 올려다보았을 때, 그런 기분은 절정 에 달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장서관이었던 것이다. “장서관,.” 제로가 일리오스와 함께 평생에 걸쳐 흉내내려 했던 건물이었다. 그러나 무너진 폐허에 불과한데도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장려함을 접하고 보니, 그 노력으로 만들어 낸 섬의 장서관이 참 보잘것없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겉모양만은 놀랄 만큼 흡사하게 만들어졌다. 그랬기에 그들의 꿈이 한층 안타까웠다. 물론 그 두 사람은 장서관의 폐허조차 본 일이 없을 터였다. 제로가 이 광경을 본다면 지금 보리스가 느끼는 아쉬움의 몇 배를 느끼고도 남을 텐데. 지상에 세워진 ‘책의 성전' 이라 할 만한 곳이 누구의 걸음도 닿지 않는 황무지에 폐허로 변해 쓰러져 있다니. 그리고 그것을 흉내내려 한 섬의 장서관 역시 불타 없어져 버렸다. “마지막 순간, 내가 알 수 없는 절대자의 의지에 농락 당해 홀로 살아남았을 때,.” 보리스가 돌아보니 에피비오노는 장서관이 아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게는 이상할 정도로 강력한 기억력도 주어졌어. 그래, 내가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천 년 동안 대화 상대도 없이 지내면서 옛 일을 잊지 않는 것은 불가능해. 그런데 놀랍게도 난 기억하고 있거든. 어린 시절로부터 가나폴리의 마지막 날에 이르기까지. 오직 그 마지막, 그 날 내가 가졌던 능력의 모든 면이 고스란히 내 몸에서 영원한 생명을 획득한 것처럼, 그래, 나처럼." ”그 때의 일을, 전부 다 기억한다고요?” “그래. 아직도 그 시점에 살고 있는 것처럼 말야. 그 때 가물거리던 것은 지금도 가물거리고, 그 때 확실하던 건 지금도 확실해. 그 후의 일들은,. 예전처럼 쉽게 기억되지가 않아. 어쩔 수 없겠지. 지금의 인생은 덤일 뿐이니까. 하지만, 그게 좋은 일일까?” “,.” 에피비오노가 다가와 돌멩이를 하나 집어들었다. 보리스가 만질 때와는 달리 돌과 뼈가 부딪쳐 다각거리는 소리가 선명했다. “모두 잊는 것보다는, 좋은 일일 겁니다." “글쎄, 확실히, 다 잊어버리는 편이 좋았을 거라고는 나도 말하지 못해. 나 자신조차 잊어서, 가진 거라곤 악의뿐인 저 떠도는 유령들과 다를 것 없는 존재가 되는 건 싫어. 하지만 이 날까지 홀로, 천년을 삭아온 폐허를 보며, 이 위대한 도시가 무한히 지속될 듯 느껴졌던 가장 아름다운 날을 완벽히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형용 불가의 지독한 고문 아니겠나? 차라리, 조금만 기억이 흐려진다면,.”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렇게 말하고 있는 에피비오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안타까운 것을 말하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런 표정을 하고서, 입에서는 한층 참담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아르카디아와 함께 고귀한 왕녀는 죽었고, 다시는 되살아나지 않아. 천 년 전 내 가슴을 갈가리 찢어 놓던 비극도 이제는 구차한 추억담, 그보다 못한 부재의 노래가 돼버렸지, 누가 내게 이런 운명을 내린 걸까? 누군지 안다면 멱살을 잡고, 아니 무릎을 꿇고 이유라도 물을 텐데 그조차도 내겐 허락되지 않았지. 아니, 허락되지 않은 것 가운데 가장 지독한 건, 내게 미칠 자유조차도 없다는 거다. 내 정신은 이까짓 시체나 다름없는 몸에 거머리처럼 단단히 달라붙어 있고, 아무리 끈을 놓아버리려 발버둥쳐도 하루만 지나면 난 나 자신, 멸망한 왕국의 마지막 마법사, 쓸모 없는 불멸자 에피비오노로 돌아와 있는 거야." 보리스도, 나야트레이도, 폐허 속의 버려진 석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에피비오노의 목소리는 격렬했으나 낮았다. 감히 상상하는 것조차 어려운 고통을 말하고 있는데도, 이젠 분노하고 절망할 신경조차 닳아 없어지고 말았다는 것처럼 오히려 담담한 면이 있었다. 천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생각한 끝에 이제는 그 의문 자체에 오히려 익숙해져 버린 것처럼. “하다 못해 내게 술 한 잔 만이라도 허락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겠어." 심지어 에피비오노는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는 몸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천 년 동안 제정신이라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경험일까. 그것만은 에피비오노가 전에 한 말대로 ‘겪어보기 전엔 모르는' 일이다. 대륙의 여러 종단이 말하는 신이란 자는 이 버림받은 과거의 마법사에게 이유를 말해 줄 수 있을까. “실은 긴 세월 동안 고통도 흐려지고 번뇌도 흩어져 버려 정말로 뼈처럼, 탈색된 뼈처럼 머릿속이 희석된 듯해. 내가 말하고 있는 이 감정은 진짜일까?” 그 순간, 그동안 무표정하던 그의 젊은이다운 얼굴에 처음으로 고뇌의 빛이 서렸다. 지나치게 오래 살아버린 노인의 고뇌가. 나야트레이가 다가와 손을 내밀더니 에피비오노의 해골손을 붙들었다. 그리고 뜻밖으로 손가락을 들어 에피비오노의 뺨을 살짝 스치게 했다. “할 수 있는 말이 없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침묵 끝에 나야트레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에피비오노의 비취빛 이 살짝 흔들리더니 조금 후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모순적으로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방금 전 하던 이야기는 순식간에 다 잊은 것 듯 소년다운 목소리로 맑게 웃는 에피비오노를 보는 보리스는 기분이 이상했다. 정말로 그 모든 고통들이 에피비오노가 단지 ‘기억하고’ 있을 뿐 실재하는 고통은 아니었다는 것인가? “묘족 아가씨는 현명하군,. 아가씨 미래는 매우 좋을 거야. 어려서 힘들었던 것만큼 커서는 좋아질 테지. 내 눈에는 아주 잘 보여.” 딸깍. 보리스는 듣지 못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귀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그 묘족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는데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나야트레이, 네가 속한 소수 부족의 이름인 거야?” 나야트레이의 대답이 울렸다. “묘족은 이제 없어." 달그락. 나야트레이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나 아무데도 움직이는 것은 없었다. “없다고? 그럼 넌?” “부족이 되려면 나 하나가 아니라 사람이 많아야 해." 나야트레이는 에피비오노의 손가락을 놓더니 조그마한 누이동생 처럼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에피비오노는 그때까지도 미소짓고 있었다. 딸그닥. 갑자기 에피비오노가 오른팔을 쭉 뻗어 나야트레이의 작은 몸을 번쩍 들어올렸다. 보리스가 알 수 없는 본능으로 당황하며 뒤로 물러서는 순간, 보리스의 귀에도 드디어 이상한 소음이 들렸다. 딸깍. 무엇이 먼저였을까. 머리 위로 날아든, 아니 덮쳐든 흰 새 비슷한 것들, 부서진 돌 틈에서 움직인 그림자, 순식간에 그 모두를 퉁겨낸 직경 3미터가 넘는 반투명한 마력 방패, 그리고 사라짐. 지잉! 한꺼번에 일어난 일이었다. 마력 방패는 에피비오노가 손을 한 번 내젓자 단숨에 만들어져 뻗어나갔으며, 한 순간 사라졌다가 새로운 적이 접근하자 번뜩, 하고 나타나 그들을 차단했다. 잠깐 틈이 나자 에피비오노가 보리스를 향해 소리쳤다. “이쪽으로!" 보리스가 에피비오노의 곁으로 가는 동안 눈 깜짝할 사이에 같은 공격과 방어가 세 차례 되풀이됐다. 보리스는 그들을 포위한 적들의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건 괴물도 아니고 유령도 아니다. 암살자도, 용병도 아니었다. 그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적도 아니었다. 최초로 눈에 띈 상대는 보리스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놀랄 만 아름다운 단발머리 소녀였다. 푸른 원피스 드레스에 앞치마를 덧입고, 무기도 갖고 있지 않은 연약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그 소녀의 빈손이 에피비오노의 마력 방패에 닿는 순간 애처로운 비명이 울리고, 소녀는 2, 3미터 밖으로 퉁겨 날아가 떨어졌다. 흙먼지가 풀썩 일어났다. 겉모습처럼 보통 소녀라면 저런 충격에서 금방 일어나는 것은 무리일 텐데,. 그러나 조금 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팔짝 뛰어 일어난 소녀가 다시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지 않은가? 보리스가 고개를 돌리니 에피비오노가 한 손으로 간단히 마력 방패를 제어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소녀의 얼굴이 몇 걸음 앞까지 다가왔다 싶을 즈음 뻗어나간 방패가 그녀의 하얀 팔을 찢었고, 곧이어 또다시 멀찍이 나가떨어졌다. 투명한 방패에 묻었던 피는 방패가 사라지자 바닥으로 주르륵 떨어졌다. 보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외치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짓이죠? 저들이 위험한 상대입니까?” “위험하냐고? 그걸 증명하기 위해 시험삼아 죽어볼 마음은 없겠지? 한때 살아 있었던 유령들의 마음 속에는 공포라도 있지만, 저들에게는 그런 것조차 없어. 다시 말해 내 지배 밖이란 거다." 그 순간 보리스는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당황한 나머지 목소리마저 떨렸다. “잠깐, 저들은 무엇인지,? 가나폴리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고,.” “그럼. 사람들은 죽었지. 보면 모르겠어? 저건 모두 인형들이야." “인형이라고요?” “그래, 심지어,. 미친 인형들이지!" 에피비오노는 가까이 다가온 자들을 모두 퉁겨내고 나자 방패 대신 같은 에너지로 만들어진 보호막을 내려 그들 일행을 감쌌다. 그러나 범위가 좁았기 때문에 그들은 순식간에 수십 개의 인형들에게 빼곡이 둘러싸였다. 유리관 속에 갇혀 구경거리가 된 것처럼 푸르고, 검고, 초록빛, 갈빛인 수십 개의 눈동자들이 표정조차 없이 그들을 보고있었다. 보리스는 믿기가 힘들었다. 예전부터 책에서 읽고, 이야기로도 들어 왔지만 이들이 인형이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발그레한 뺨, 섬세한 생김새, 자연스런 몸놀림과 생생한 살갗, 그 모두가 인간의 것이 아니라고?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모습을 본 따 만든 모조품에 불과하다고? 그러나 보리스는 곧 왜 이들이 비인간적인지 알아차렸다. 만일 이들이 가나폴리가 멸망할 당시 살아남은 자들의 후손이라면 이런 황무지 땅에서 살아가며 저렇듯 말끔하고 아름다운 모습일 수 없었다. 찢어진 옷깃도, 더럽혀진 손도 없이 저렇게 혈색 좋은 얼굴로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형이 어떻게 미칠 수 있지?” 나야트레이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보리스에게 현실감을 되찾아 주었다. 에피비오노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미친 인형’ 이라는 건, 자신을 만든 주인이 죽어버려서 영영 명령을 고칠 수 없게 된 인형을 말하는 거다. 인형은 마법사들이 만드는데, 창조자 본인만이 자신의 인형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거둘 수가 있어. 한 번 명령을 내리면 인형들은 완전히 부서져 마력이 사그라지지 않는 한 그 임무만을 끝없이 되풀이하지. 그런 인형이란 다른 사람들에게 위험한 것이었기 때문에 가나폴리의 법이 존재하던 당시 마법사들은 죽기 전에 자신이 만들었던 인형들을 모두 없애도록 되어 있어 인형들은 창조자의 말 한 마디면 서슴없이 자기 자신조차 파괴하니까. 인형은 매우 끈질기게 만들어져 있어서 창조자가 죽어버린 경우 억지로 그걸 부수는 것은 간단하지 않거든. 물론 그런 경우 해결하는 방법이 하나 있긴 했지,. 모두가 싫어하는 방법." 그들을 포위한 인형의 수는 점차 불어났다. 생명이 다 사라져버린 이 땅에서, 자신을 창조한 마법사는 천여 년 전에 죽어버렸는데, 인형들만은 남아 여전히 자신들의 임무를 되풀이하고 있었던 건가. ”그러면 이 인형들은 일종의, 침입자를 없애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던 겁니까?” “아마도. 인형들에겐 명령을 도저히 수행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만 발현되는 ‘본성' 이란 것이 주어지는데, 보통은 자신이 속한 도시의 방어, 자신의 보호, 마법사들의 보호, 셋 중 한 가지로 정해지지. 나 혼자서 여기 왔을 땐 이런 모습을 본 일이 없어. 그러니 이들의 본성은 아마도 첫 번째겠지. 그렇다면,.” 에피비오노는 갑자기 인형들 너머로 고개를 조금 빼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드디어 왔어,. 끔찍한 꼴을 보겠구나." 그들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님을 곧 알 수 있었다. 몰려온 인형들 너머로 다른 인형들 십여 개가 나타나더니 다짜고짜 일행을 둘러싼 인형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인형들은 인간이 아니었기에 동정심이나 동족의식 따위는 없었다. “저들은,. 마법사 보호를 본성으로 갖고 있는 인형들이야. 나 때문에 ,. 온 거지." 그 모습을 보며 보리스는 에피비오노가 말한 ‘모두가 싫어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곁에서 나직한 중얼거림이 보리스의 생각이 옳았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인형의 힘으로 인형을 없애는 것이,. 가장 쉽지. 미친 인형을 없애기 위해서는 다른 인형 둘에게 명령을 내리면 되는 거야. 그럼 셋 모두 부서지고, 문제는 해결되거든." 처참한 광경이었다. 인형들은 신체 공격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보리스 일행을 포위했던 인형들은 순식간에 새로운 인형들을 둘러싸고 대응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구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조금 후, 무리 밖으로 찢겨진 팔다리가 내던져지는 것을 보고 보리스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부서진 인형.... 그건 석고나 점토 조각이 아니었다. 꺾여나가 덜렁거리는 머리에서 초점을 잃고 까뒤집힌 것 역시 색칠한 유리조각 따위가 아니었다. 떨어져 나간 팔은 인간의 몸에 붙어 있던 것처럼 얼마간 꿈틀거리다가 경련을 멈췄다. 학살은 계속되고 있었다. 인간이었더라면 구하러 달려가거나, 비난하거나, 고통스러워하기라도 할 텐데, 저 광경을 보고 어떤 감정을 가져야 옳은 것일까?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인형의 몸에는 인간의 피와 같은 붉은 액체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생명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어째서 하필 붉은 피를! 조금 전까지 그들이 인간과 꼭 닮았지만 그래도 역시 인형이라고 애써 생각하려 하고 있던 보리스에게 그 광경은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안겨 주었다. “도대체 이 무슨 악취미입니까! 인형이 살아 있지 않다면 왜 굳이 붉은 피를 갖도록 한 거죠! 가나폴리 사람들이 모두 정신 이상자가 아니라면 어째서,.!" “그게 가장 바람직하니까. 다른 이유는 없어." “바람직하다고요? 그럼 창조자가 인형을 죽일 때는 살인하는 비슷한 감정을 느끼겠군요! 저라면 피 따위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게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저렇게 인간과 닮게 만들지도 않고요!" 인형들을 보고 있던 에피비오노가 고개를 돌려 보리스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비취빛 눈에 냉소가 스쳐갔다. “인형들을 위해서? 아니면 사람들을 위해서? 네가 오늘에 살면서 천 년 전의 일을 네 생각대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너는 솜뭉치나 석고분으로 만든 인형을 원하는 모양인데, 그런 인형은 없앨 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아서냐? 인간과 닮았지만 인간은 아닌 존재를 어떻게 대해야 될지 모르겠나? 인간뿐인 세상에 살고 있으니 그런 생각은 한번도 해본 일 없겠지. 하나 분명한 건 인형들에게 생명이 없다고 해서 함부로 대하거나 내키는 대로 죽여도 좋은 존재는 결코 아니라는 거다! 너 같은 생각을 하는 자들이 무책임하게 한번 만든 인형을 손쉽게 없애고 또 만들어내고 하는걸 숱하게 봐왔지!" 보리스도 차갑게 말을 받았다. “잘 아시는군요. 인형은 걱정 안 합니다. 단지 사람을 닮은 인형을 없애면서 사람을 죽이는 기분을 느끼고, 그래서 결국 사람도 인형처럼 별 것 아닌 걸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 끔찍할 뿐이죠. 저 인형과 다를 게 뭐 있을까요? 사람도 칼로 베면 잘라지고, 찌르면 피가 튀어나오는데!" 에피비오노의 눈썹이 홱 치켜 올라갔다. 너무 오래 살아 화를 낼 수 없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던 에피비오노는 스물 먹은 젊은이처럼 입술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니까 넌 인형과 함께 살아본 일이 없는 이 세상의 인간인 거야,. 인형은 생명이 없지만 나를 비롯한 가나폴리의 마법사들은, 우리를 닮은 인형을 어딘가 부족한, 몸이 아픈 동생처럼 생각해 왔어. 누가 인형을 쉽게 만들고, 쉽게 죽인단 말인가? 물론 무책임한 자들은 있었어. 만일 인형을 부술 때 석고가루밖에 튀지 않는다면 그들은 열배나 쉽게 인형을 만들고 또 없앴을 테지! 생명도 없는 인형이 처음 눈을 뜨면 몇 달에 걸쳐 말씨와 행동을 가르치고, 인형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가는 자들의 마음을 네가 알수 있다고 생각하나? 내가 ‘니에니즈’를 결국 내 손으로 부수고, 아카디아의 최후를 위해 새벽탑의 마법사들에게 가던 때의 심정을, 네가 어떻게 짐작한단 말이야!" “나는 모릅니다. 당신은 알겠군요? 그렇다면 왜 지금 당장 저들을 구하러 가지 않는 건가요!" 그 때 인형들은 동료들에 대한 학살을 끝냈다. 너덜거리는 몸조각들을 내던진 그들은 다시 일행을 향해 돌아섰다. 어느 귀족의 영애처럼 금발 고수머리를 늘어뜨린 소녀가 손에 묻힌 피를 당연한 듯 치마에 닦는 것이 보였다. 검사 차림을 한 잘생긴 젊은이는 검을 바닥에 짚고는 어떻게 요리할까 생각하는 것처럼 순진한 눈동자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생각은 표정에 반영되지 않는 듯, 얼굴은 가벼운 미소 그대로였다.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둥글게 원을 그리며 둘러선 그들이 일제히 부딪쳐 오기 시작했다. 하나 뒤에 또 하나, 쉴새 없이 충격이 되풀이되자 보호막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에피비오노는 오랜만에 자신을 지배한 격한 감정이 익숙하지 않은 듯 거친 숨을 내쉬다가 갑자기 해골손을 들어올렸다. 놀랍게도 손의 움직임에 따라 보호막이 걷혀버렸고, 인형들은 순간적인 충격을 입은 듯 3,4미터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등뒤에서 에피비오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 인형을 죽여봐라. 그러면 인형이 인간과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게 될 테니까. 인간을 닮은 인형을 죽이고, 인간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는지 스스로 시험해 봐라." ”뭐라고요,.?” 지금까지 그렇게 친절했던 에피비오노는 몸을 돌리더니 갑자기 위로, 놀랍게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에 흡사 계단이라도 존재하는 것처럼 걸어 올라가 버렸다. 대략 5미터 상공으로 올라간 그가 역시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다리를 늘어뜨리고 걸터앉더니 말했다. “죽이지 않으면, 죽게 된다는 건 알고 있겠지?” 따질 여유가 없었다. 인형들이 쇄도해 왔다. 모두 더할 나위 없이 사람다운, 닮은, 심지어 미소짓고 있는 그들이 무기조차 없이 몰려들었다. 보리스가 순간적으로 망설인 반면, 나야트레이의 행동이 훨씬 빨랐다. 정면으로 달려든 여자 인형의 하얀 이마를 향해 왼손을 내질렀고, 무언가가 푹 꽂히는 것이 보였다. 피가 물처럼 주룩, 흘러내리고, 동시에 오른손이 날아들어 목을 턱, 날려버렸다. 나야트레이가 오른손에 쥔 것은 폭이 좁은 단검이었다. 뽑아낸 왼손 손가락 끝에는 세 자루의 작은 단도가 끼워진 것이 보였다. 본래 그런 단검으로 사람의 목을 자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인형의 몸은 사람과 같지 않았다. 아름다운 인형은 목을 잃고 비척거리면서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떨리는 두 손을 내미는 것이 보였다. 잡아주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게,. 그러나 그건 오로지 공격을 위한 것일 따름이었고, 보리스 옆의 피를 두려워하지 않는 소녀 역시 똑같이 반응했다. 단도가 날아가 두 손목을 손쉽게 잘라버렸던 것이다. “나야트레이,. 저들이 인간을 닮은 것 따위는 네게 아무 것도 아닌건가?” 나야트레이의 대답은 간단했다. “저들이 인간이라 해도 적이라면 죽일 텐데, 인간도 아닌 바에야 무얼 망설인다는 것인지 모르겠어." 보리스의 앞에도 금발 고수머리를 지닌 또래 나이의 소년이 다가와 있었다. 그의 손이 보리스의 왼손 손목을 잡았고, 순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센 압박이 가해져 왔다. 생명의 위협이었다. 거의 반사적으로 검을 뽑으면서 상대의 팔을 쳤다. 그 순간에도 잘라지지 않도록 비껴 쳤다고 생각했는데 소년의 팔꿈치가 이상한 모양으로 비틀려 꺾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당황한 것일까, 그래서 그렇게 꺾인 팔조차도 똑같은 힘으로 그를 칠 것이라고는 생각못하고 있었다. 타악! 불시의 타격인 탓인지, 아니면 인형의 힘이 비인간적으로 강했기 때문인지, 한 번 휘청하며 뒤로 물러난 보리스는 인형이 때린 왼쪽 팔꿈치가 거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오른손만으로 검을 세워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극도로 불리했다. 상대는 수십이고, 그들은 둘뿐이었다. 선택이 정해져 있음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길은, 없다. 마음을 결정한 보리스가 드디어 검을 앞으로 뻗었다. 최초의 인형이 목젖 아래를 꿰뚫려 피를 쏟아내는 것을 보며 보리스의 눈이 일순 가늘어졌다. 그러나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끈덕지게 달려드는 상대의 손바닥을 가르고 머리의 절반을 날려버리고 나니 겨우 조용해졌다. 다음 상대가 겁도 내지 않고 다시 뛰어드는 것이 보였다. 살인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 살해였다. 인형을 '부순다'라고 했던가? 그래, 부수고 있지. 목과 머리가 분리되고, 팔다리 관절은 거꾸로 꺾어지고, 피부는 종잇장처럼 쉽게 베어진다. 그러나 결코 쉽게 죽일 수는 없어. 생명을 쉽게 멈추게 할 수 없듯, 생명을 흉내내고 있는 저들은 더욱 끈질기지. 연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한 순간까지, 천 년 전에 주어진 명령을 따라 움직이고 또 움직인다,. 그렇게 보리스의 검은 망설이다가 뻗어나가고, 다시 베어지며 인형들을 무수히 부쉈다,. 시체의 산보다 더했다. 쓰러져도 그들은 끝까지 움직였던 것이다. 심장을 찌르고 목을 베어도 죽지 않았다 부러진 팔도 꿈틀거리고, 머리가 없어도 달려들고, 둘로 갈라진 몸이 각자 움직여갔다. 발목을 붙드는 것이 있어 내려다보면 어김없이 잘라진 손이 달라붙어 있었고, 밟으면 짓이겨졌다. 여러 조각으로 잘라진 몸의 공격은 이미 위협적이지 않았으나 심리적인 저항감 때문에 오히려 고통스러웠다. 십여 개의 인형을 베고 났을 때 눈앞에 맨 처음의 검은 단발머리 소녀가 선 것이 보였다. 이미 나야트레이의 단검이 눈가를 긋고 지나갔는지, 오른쪽 눈을 잃은 그녀는 눈꺼풀을 내린 채였다. 두 팔을 벌리고 우뚝 선 채, 사라진 눈동자로 보리스를 보고 있었다. 눈시울이 찢어진 인형이 흘리는 피가 흡사 피눈물처럼 보인다, 바람에 흔들리는 까만 단발은 비단빛이다, 창백한 얼굴은 마법 깃들인 백석처럼 곱다,. 감긴 눈 안에 압생트(Absinthe) 술의 탁한 암녹색이 들어 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 때 소녀가 잘리지 않은 왼쪽눈을 떴다. 한쪽 눈시울을 끊임없이 피로 적시면서, 다른 한쪽 눈동자로 그를 보던 소녀는 입술을 열고,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말했다. 뭐라고 말한, 거니. 유언이든 저주든, 한 마디도 이해할 수가 없다. 인간과 인형간의 거리보다 더한, 천 년의 장벽이 그들 사이에 가로놓였기에 일껏 시도한 소통조차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 바람소리보다 못한 말이 흩어지고 전할 수 없는 심정만이 마음 속 깊이 가라앉았다. 곁에서 나야트레이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너의 대검이라면 두 쪽으로 가를 수 있어. 그 쪽이 간단히 끝나." 말없이 검을 높이 올렸다. 소녀의 장밋빛 손가락이 그를 향해 뻗어오는 것이 보였다. 내리쳤다. 충분히 날카롭게 갈아놓았어,. 제발 한 번에 끝나 주기를. 바람에 흩어지는, 수만 개의 핏방울. 그 피의 절반을 뒤집어쓰고도 보리스는 잠자코 서 있었다. 반원을 그린 검이 이윽고 발치에 와 닿았을 때, 한쪽 손을 들어 눈가에 묻은 핏물을 닦아냈을 뿐이었다. 인형의 피는 인간의 것보다 점성이 부족한 것인지 맺히지도 않고 그저 뚝뚝 떨어졌다. 잘린 머리카락이 고인 피 속에 검은 무의를 그리며 떨어져 있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던 보리스의 마음이 약하게 경련했다. 자신이 부순 것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서, 자신 쪽이 악이 된 듯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것은 저렇게 쉽사리 부서져선 안 돼. 저렇게 쉽게 부서져 버릴 것을, 아름답게 만들어선 안 돼. 이윽고 수십 구의 인형 시체들이 폐허와 함께 긴 잠을 자게 될 오후가 찾아왔다. 보리스와 나야트레이가 검을 내린 채 이제는 영원히 망가져 버린 인형들을 내려다보는 동안, 이 비극 속에 그들 둘을 내버려두었던 에피비오노가 내려왔다. 그러나 눈이 마주쳤을 때, 그의 얼굴을 본 보리스는 도저히 그를 비난할 수가 없었다. 에피비오노는 몇 번이나 말을 삼킨 끝에 겨우 말했다. “그래, 난, 오래 전부터 누군가가 이 인형들을죽여주길 원해 왔어. 그들을 보며 위안 받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그런 날이 와야 한다고,.” 에피비오노의 힘으로 몇 십 개의 인형들을 단숨에 학살하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형을 혈육처럼 사랑했던 가나폴리의 마법사였다. 위안 받았다는 말 그대로, 그는 인형들의 모습에서 옛 사람들의 그림자를 보며 잠시 자신의 처지를 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의미 없는 일이란 것도, 인형들의 존재가 허망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인형들을 죽이고 나서야 보리스도 에피비오노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보리스는 고개를 숙인 채 단지 짧게 말했다. “그렇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인형은 세월을 몰라. 천 년도 그저 한 해처럼, 또는 하루처럼 느끼지. 주인들이 돌아오지 않아 의아했을 거야. 그렇지만 영영 돌아오지 않을 거란 생각은 할 줄 모르거든. 그래서 그들은 의심 없이 늘 하던 일을 되풀이했어. 빈 그릇으로 주인의 아침을 차리고, 실을 잣고, 망가진 건물의 바닥을 닦으면서. 측은해서 견딜 수가 없었지. 멈추게 해야 했지만 나로선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어. 화를 낼 테면 내라. 형들에 관한 한 나는 한 마디도 변명거리가 없어." “,.” 에피비오노는 땅으로 시선을 돌려 인형들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가가 미세하게 움직이며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냈다. 바닥에 쪼그려 앉은 그는 피 속에서 인형의 잘라진 손을 집어들어 둘로 조개진 가슴 위에 얹어 놓았다. “아일라노레." 그러자 놀랍게도 아일라노레라고 불린 소녀 인형이 잘라진 입술을 열어 알아들을 수 없는 몇 마디를 했다. 에피비오노 역시 가나폴리 언어로 대답했고, 인형은 곧 잠잠해졌다. “잘 자라." 일어선 에피비오노가 해골손을 들어 바닥을 가리키자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나야트레이가 인형들의 잔해 속으로 걸어가더니 손으로 무언지 모를 도형을 만들며 기도하는 것이 보였다. 이럴 때의 그녀는 마치 작은 사제 같았다. 연기는 점차 커져 바람도 흩어 놓지 못했고, 인형 조각들은 불꽃도 없이 느리게 탔다. 혼이 없는 인형들의 몸이 이제야 혼으로 변하고 있는 것처럼 수십 줄기의 매운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이윽고 주위는 고요해졌다. 딸깍대고, 바스락대는 소리 하나 없었다. 천 년 동안 아르카디아를 지켜 온 인형들이 이제 전부 임무를 그만두기로 했기에, 하늘부터 땅까지 모두 조용했다. 5. 늙은미의 우물 맹수의 머리 조각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부서진 것도 있었지만 그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부서지기는커녕 흠집도 거의 나지 않은 깨끗한 조각들도 모조리 마법을 잃고 진짜 조각으로 되돌아가 있었던 것이다 예전에 유령들이 보여줬던 영상 속에서 그 조각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서로 이야기를 나누거나 심지어 논쟁을 벌이던 것을 기억하는 보리스로서는 이들의 침묵이 오히려 생경하게 느껴졌다. 아르카디아는 넓었다. 도시 주변에 쌓아져 있던 성벽은 시가지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강변에도 이어져 있었다. 그것을 넘자 숱하게 늘어선 유령 같은 건물들이 껍데기뿐인 위용을 자랑했다. 태양 빛에 빛나는 허공다리들의 교묘함은 이제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두려워서 올려다봐야 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건물꼭대기에서 불타던 신비로운 불도 사라지고 아름답던 조각들도 먼지에 묻혀 빛을 잃었다.묘지라면,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크고도 장려한 묘지일 것이다. 흔적도 없이 죽어버린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저 많은 정묘함, 미려함, 활달함, 웅대함, 가파름, 조화로움들. 고삐 끌려 따라오는 라마 두 마리의 발소리가 뒤따라오는 그 무엇처럼 느껴져 뒤를 돌아본 것이 수 번이었다. 죽어버린 인형들 탓일까. 피와 압생트의 눈동자, 아일라노레의 마지막 목소리가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아일라노레는 에피비오노의 옛 친구가 갖고 있던 인형이라 했다. ‘소멸의 기원'이 실패하지 않으리라고 믿었던 마법사들은 새벽탑의 의식에 참여하면서도 자신의 인형들을 굳이 없애려 하지 않았다. 그건 그들이 인형에 무심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애착이 강해서였다. 한 번 죽은 인형은 되살아나지 않았고, 굳이 되살린다 해도 처음과 같은 인형으로는 결코 돌아가지 않았기에 그들은 소중한 인형들을 짐작으로 부수고 싶어하지 않았다. 결국은 천 년 동안이나 주인 없이 내버려두는 결과가 되고 말았지만. 인형들은 주인 외의 존재를 중요하게 인지할 줄 모르기 때문에 주위의 다른 인형들과 교류하여 서로를 위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에피비오노는 현명하게도, 또는 어리석게도 새벽탑으로 가기 전 자 인형을 없애버렸다. 결과적으로 새벽탑의 의식이 실패할 지도 모른다는 그의 예상은 옳았지만, 아르카디아를 배회하는 수십 구의 인형과 함께 살아남게 된 그의 곁에는 그가 만들었던 인형이 없었다. “여기다." 앞서 걷던 에피비오노가 멈춘 곳은 잿빛 담으로 둘러싸인 죽은 정원 앞이었다. 무너진 입구를 통해 보이는 정원 너머에 야트막한 성이 있었다. 성이라기보다는 별장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성벽은 장식 없이 거칠었다. 풀 포기 하나 남지 않은 정원을 지나 성으로 들어간 보리스는 익숙한 풍경을 느끼고 드디어 목적하던 곳에 가까이 왔음을 느꼈다. 엷은 햇살이 흩어져 들어오는 소박한 회랑은 모랫빛 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것을 따라 끝까지 걸어서 중앙의 작은 정원에 도달했다. 정원 가운데 눈익은, 그가 도달하려 했던 우물이 솟아 있었다. 너무 오래 버틴 듯한 모양이었다. 둥글게 돌려 쌓은 돌은 이끼조차 말라버린 회색이었고 군데군데 바스러져 흙으로 돌아가고 있어 틈새로 맞은편 벽이 보일 정도였다 보리스는 다가가려다가, 멈칫하며 에피비오노를 돌아보았다. “저 안에 아직도 물이 있습니까?” 팔짱을 끼고 회랑 기둥에 기대 서 있던 에피비오노가 이윽고 대답했다. “네 마음에 달렸지. 그 안에는 잃어버렸던 것도 있고, 이제부터 찾으려는 것도 있고, 지금의 진실도 있고, 그리고 물도 있어,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그게 보이는 건 아니야," 보리스는 엔디미온이 최초로 그 우물에 대해 했던 말을 생각했다. ‘결코 잃어선 안 되는데 잃고 말았던 것들' 이 그 안에 있기에 사람들은 지금의 자신을 잃어버릴 각오를 하고 그 안을 들여다본다 했다. 나야트레이는 회랑 끝에 앉은 채로 은빛 머리를 풀어 다시 땋고 있었다. 표정이 없기에 상념도 없어 보이는 그 얼굴이 그지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그녀가 왜 이곳까지 따라왔을까 궁금해졌다. 아노마라드로 가려했다면 벌써 오래 전에 그들과 헤어져 다른 길을 갔어야 했을 텐데. 단지 필멸의 땅에서 혼자 지낼 수 없기 때문에 따라오고 있는 걸까. 머리를 다 땋은 나야트레이가 리본을 맺으며 고개를 들어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준비가 다 되었어." “무얼 준비했다는 거지?” “여행 준비." 에피비오노가 기대어 있던 기둥에서 몸을 떼어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보리스에게 말했다. “묘족은 이 땅에 가나폴리가 있던 시절부터 여러 땅의 경계를 떠돌던 유목민이야. 이 땅에 대해서는 너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어. 저 ‘늙은이의 우물'을 찾아온 네가 무엇을 하려 하는지 설명 없이도 이미 알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묘족 아가씨가 너와 함께 가려고 작정한 모양이야." 그렇게 말하고 나서 에피비오노는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뭐, 이유를 물어도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것쯤은 너나 나나 잘 알잖아?” “,.그럴 지도요." “그럼, 이제 헤어질 때가 된 것 같군." 에피비오노가 해골손을 들어 보이며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물쪽을 바라보던 보리스가 좀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에피비오노, 가기 전에 한 가지만요. 전부터 묻고 싶었던 것이 있는데, 오래 전 아르카디아의 재앙 때에 죽음을 결심하고도, 무언가 안타까운 것이 있지 않았나요? 그러니까 지금 죽어선 안될 것 같은 간절한 이유랄까,. 그런 문제를 갖고 있지 않았는지,.” “나한테? 왜 그런 걸 묻는 거지?” “저, 당신은, 지금 산 몸을 가졌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중간에 걸려 있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제게 형제가 있는데, 예전에 누군가가 말하길 그 형제가 저에 대한 안타까움과 집착 때문에 삶과 죽음의 경계에 걸려, 그런 모양으로 지내고 있다고 말해 주었거든요. 당신도 혹시 , 꼭 지키고 싶었던 사람이나, 또는 인형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요?” 에피비오노의 비취빛 눈매가 약간 커졌다가 가라앉았다. 눈빛이 워낙 투명해서 머릿속까지 비쳐 보일 듯했다. “있었어." 사뭇 달라진 목소리였다. 일부러 장난치는 것처럼 현대의 말투를 따라하던 그가 아니라 멸망 이전, 그의 잘생긴 얼굴에 맞는 진짜 스물 몇 살이었던 때 가졌을 법한 맑고도 치기 어린 목소리였다. “하, 그것 참. 네게 그런 질문을 받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 물론인형은 아니었어. 하하, 하하,” “혹시 ‘아일라노레' 의 주인이 아니었나요? 친구 분은 아마도, 아가씨였죠?” 자신이 언제부터 사람의 마음을 이 정도로 읽어낼 수 있게 됐는지 스스로도 잘 몰랐다. 에피비오노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에 조금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맞아. 일부러 ‘친구'라고 말했는데 잘도 알아보는군. 좋아. 그럼 한 번만 더 맞춰 봐. 그녀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아?' 보리스는 숨을 들이마셨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 그 분은, 고귀한 왕녀이셨을 것 같습니다." 새 소리도 벌레 소리도 없는 텅 빈 정원에서 바람에 감겨 도는 것은 모래뿐이었다. 입을 다문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가운데 대륙 곳곳 어디든 비추는 태양만이 오후다운 긴 그림자를 그렸다. “너와 헤어지는 것이 좀 아쉬워졌어," 에피비오노가 뼈뿐인 손가락으로 허공에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따라 빛나는 선이 이어지면서 진짜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밀한 그림이 나타났다. 다갈색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머리에는 관 대신 긴 띠를 두른 아리따운 아가씨였다. 그림에 불과한 그녀는 미동조차 없는데도 검은 눈동자가 별빛 하늘처럼 반짝거린다고 생각됐다. 신중하지만 자유롭고, 진지하고도 사랑스러우며, 상냥하면서도 대담한 옛 왕녀였다. 그 얼굴이 묘하게 누구를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곧 보리스는 기억을 더듬어 냈다. 엔디미온과 몹시 비슷한 얼굴이었다. “에브제니스는 이름처럼 고귀한 왕녀였지만.... 아버지를 제 손으로 죽이게 되리란 예언을 타고났지. 그리고 끝내 그 예언의 희생자가 되어버렸고. 어려서 함께 공부했기에 우린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알았어. 미래를 약속했지만, 7년 간 서로 만나지 못했지. 철이 들어 저주스런 예언의 내용을 알게 된 그녀가 그걸 거스르기 위해 그때까지 자신의 친아버지라고 믿고 있었던 국왕 폐하의 곁을 떠났기 때문이야. 그녀는 오랫동안 아르카디아를 떠나 방랑했어. 돌아왔을 때 에브제니스의 곁에는 이미 ‘진리의 원탁’이라는 강대한 마법사 조직이 따르고 있었지. 나는 그동안 고향 클라자니냐에서 재능을 감춘 채 은둔하다시피 했는데 말야. 사람들은 소년 시절 이름을 날렸던 나를 가끔 얘깃거리로 삼았을 뿐, 내 존재를 거의 잊고 있었어," 보리스는 문득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렇다면 왕녀 전하의 생부는,.” “짐작하겠어? 그래. 마법사 회의의 수장이자 아카데미의 현자였던 지티시, 그가 바로 에브제니스의 친아버지였지." 에브제니스는 한때 가나폴리의 왕이었던 지티시의 하나뿐인 자식으로서 당연한 왕위 계승자였다. 그러나 저주스런 예언이 내려지고나서 지티시는 예언을 어그러뜨리기 위해 왕위를 동생에게 물려준 뒤 에브제니스와의 혈연을 끊고 동생에게 입양시켰다. 다만 당부하기를, 이후 동생에게 자식이 있을지라도 왕위 계승권은 에브제니스의 것으로 하라 하여 맹세를 받아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새 왕의 권위가 지티시의 것보다 높아졌고, 국왕은 에브제니스 대신 친자식인 왕자 티시아조를 왕위 계승자로 삼고 말았다. 지티시는 분노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왕국에 대한 애정도 강했지만, 오랫동안 마법사 회의의 수장으로서 선의의 대표자답게 살아온 까닭에 사사로운 원한에 얽매여 평화를 해치는 것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우물 속의 세계에 집착하여 그 안에서 악의 세력을 도우며 즐거워하게 된 것이 그 때부터였다. 보통 사람도 때로는 악인의 가면을 쓰고 연기하기를 즐길 수 있는데, 지티시의 경우에는 억눌린 분노가 남몰래 악해지고픈 욕구를 더욱 부채질했던 것이다. 결과는 보리스가 유령들로부터 들은 것과 같았다. 에브제니스는 자신의 아버지인 것을 모르고 끝내 지티시를 죽였으며, 진상을 알게 되자 모든 죄악의 끈을 끊기 위해 아르카디아를 구할 ‘소멸의 기원’에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말았다. 그 직후, 에브제니스는 7년 만에 아르카디아로 달려온 에피비오노와 재회했다. “7년만인지라, 둘 다 많이 변해 있었지. 에브제니스는 천성적인 쾌활함을 잃고 깊이 패인 어두운 눈을 갖게 되었더군. 나는 은둔자였던 탓에 나름대로 괴팍해져 있었고. 긴 이별 끝에 만난 우리가 먼저 한 것은 어이없게도 말다툼이었어. 둘 다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었지. 아무 것도 아닌 것들로, 다 용서하고 싶은데도 최후가 가까이 있다는 절박함이 오히려 둘 모두를 신경질적으로 만들었어. 그러나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 보니, 에브제니스는 내가 그녀를 따라 새벽탑의 의식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그랬던 것 같아." 난간에 팔을 짚고 서 있던 에피비오노는 갑자기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푸후훗, 그게 될 법이나 한 일이겠어? 내가 죽음을 각오하지 않았더라면, 내 인형을 직접 죽일 수 있었을 것 같아? 그래놓고 난 심지어 비웃기까지 하면서 나 없이 저 ‘진리의 원탁' 인가 뭔가 하는 떨거지들을 이끌 ‘소멸의 기원’ 이 성공할 것 같으냐고 이죽거리기까지 했어. 그녀는 물론 매우 화를 냈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 우스운 일이야. 왜 살아 함께 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을 그런 쓸모 없는 언쟁으로 날려버렸는지 모르겠어. 이렇게 천 년 동안 그녀 없이 힘들어할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안 했을 텐데." 에피비오노는 웃는 건지 슬퍼하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그의 기분을 놀랄 만큼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그 역시 이솔렛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함께 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절을 어째서 하찮게 날려버렸는지 고통스러워하곤 했었다. 허공에 나타났던 그림은 서서히 흐려지더니 반짝거리는 빛가루로 변해 사라졌다. 에피비오노는 그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말했다. “그보다 더 슬픈 건, 이제 내가 점점 에브제니스를 잊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야." “잊는다고요? 당신은 천 년 전의 일을 전혀 잊을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물론. 기억 자체는 사라지지 않아. 하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사라지는 것도 있지, 감정이랄까, 모든 상황을 세세히 기억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때 가졌던 내 느낌은 보관되지 않거든, 그건 마음의 문제여서, 네 말이 옳다면, 나를 이 모양으로 살아남게 만들기까지 한 그 집착과 고통이 이젠 다 생각나지 않아. 그 때의 상황들은 우연이 아닌가봐. 희석되고, 닳아 없어지고, 색깔을 잃어서, 내가 겪은 일이 아니라 책에서 읽은 이야기가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드니 말이야." 보리스는 입을 다문 채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천 년이란 시간이 긴 것도 알고, 그렇게 오랫동안 모든 것이 그대로일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인간을 지배하는 저 가장 간절한 감정조차, 세월이 서서히 지워버린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쉼지 않았다 . 다른 모든 것이 사라져도 영원할 것 같았던 깊은 애정이, 고작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면 흐려져 버리는 그런 건가. “좀더 지나면 안타깝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는 걸까. 어쩌면 그 쪽이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일지도 모르겠구나." 등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야트레이가 다가와 서고,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넌 천 년을 살지 못하잖아." 보리스는 조금 생각하다가 문득 놀랐다. 나야트레이의 말은 보리스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을 정확히 찔렀던 것이다. 천 년을 살아가지 않는 이상 너의 감정을 잃을까봐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에피비오노도 목소리를 달리하여 말했다. “이제 두 사람 모두 가는 게 좋겠어. 아니, 선물을 하나 주지. 나와 망토를 바꾸어 입도록 하자. 아마 도움이 될 거야."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망토를 벗었다. 도움이 되든 안 되든 에피비오노의 제안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보리스의 망토를 받아 든 에피비오노는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잠시 침묵하고 있더니 말했다. “내가 망토를 벗고 입는 동안 돌아보지 말아 줬으면 좋겠군. 그건, 음,.” 보리스는 굳이 이유를 물으려 하지 않고 돌아섰다. 듣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었다. 에피비오노는 본래 왕녀와 사랑에 빠지기까지 했던 자존심 강한 젊은 마법사였다. 모양을 짐작할 수는 없지만, 틀림없이 끔찍하게 반쯤 삭아버렸을 몸을 그 누구에게 보이고 싶겠는가. 에피비오노의 망토는 크게 낡은 물건이 아니었다. 무릎 정도까지 내려오는 길이에 흠 없이 새카맣게 물들인 망토였다. “두 마리 짐승은 풀어 보내는 것이 좋을 거다. 묶어 둬서는 너희가 돌아올 때까지 살아남을 방도가 없으니까. 그리고 너희가 가는 곳에 여행 물품은 필요가 없어. 가면 알겠지만, 너희를 기다리고 있는 누군 가가 있을 거야." 보리스의 망토를 걸친 에피비오노가 싱긋 웃으며 둘을 우물 앞으로 데려갔다. 보리스는 조금 망설이다가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캄캄할 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옆에서 에피비오노가 농담을 했다. “이런, 너무 오래되어서 물이 다 말라버린 모양인데," 보리스와 나야트레이가 우물 안쪽으로 다리를 늘어뜨린 채 걸터앉자 에피비오노가 몇 가지 주의를 주었다. 들어가서 가장 먼저 만난 자를 무조건 따라가라는 것, 혹 여러 사람을 만난다 해도 누가 인도자인지는 금방 알 수 있으리란 것도. 둘 모두에게 위험한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말한 그는 특별히 보리스를 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엔디미온 폐하의 물건도 잘 간수하면 크게 도움이 되겠지.” 보리스는 당황해서 물었다. “엔디미온을, 압니까?” '네 주사위가 소년왕 엔디미온 폐하의 것이라는 건 처음부터 알아보았어. 그땐 너를 좀 의심해서 말하지 않았지만, 이젠 뭐 그 안에는 강력한 환각 마법의 힘이 들어 있거든. 다룰 줄 알게 되기만 하면 대단한 물건이지." “소년왕이라면,?” “가나폴리의 옛 왕이야. 재임 기간이 소년 시절에 그쳤기에 소년왕 이라고 기록됐지. 네 또래에 죽은 셈이니 현명한 왕이었다고 할 것까진 없지만 왕이란 본디 나라 제일의 마법사들이거든. 그 분은 소년다운 마법 장난감을 몇 개 만들어냈는데 네가 가진 주사위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가나폴리의 궁전에 보관되어 오던 거야. 아마도 네가 만났다는 ‘피난 유령'들이 그걸 가져갔었나 보다." 보리스는 엔디미온을 직접 만났다고 이야기하려다가 그냥 말을 삼키고 말았다. 에피비오노에게는 엔디미온이 왕인데, 보리스에게는 친구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서였다. “돌아오거든, 일러줬던 대로 남동쪽 광장 근처에서 클라자니냐에 있던 것과 같은 거울을 찾으면 돼. 그 앞에서 너희가 가야 할 곳을 생각하라고. 내가 없어도 그쯤은 할 수 있을 거야. 그럼 조심해서 여행하길. 요새 사람들은 이런 때 뭐라고 하더라, 음, 그래, 돌아올 때 기념품 부탁해." “잠깐, 다시 만날 수 있는 건가요?” 너무 간단한 대답이 이어졌다. “아니." “아니라고요? 그러면 기념품은 어떻게 갖다주죠?” 에피비오노가 피식 웃었다. “글쎄, 아쉬우니까,. 음, 백 년쯤 지나서 다시 보기로 할까." ”백 년이라니, 농담하지 마세요." “천 년쯤 살다보면 백 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전 백 년이든 천 년이든 그렇게 오래 살 순 없다고요.!” 더 말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에피비오노가 둘의 등을 가볍게 밀었구, 그 가벼운 손짓에 둘의 몸은 거짓말처럼 우물 안으로 밀려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물 속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빛이 솟아올라왔다. 곁에 있을 나야트레이의 모습조차 볼 수 없을 정도로. 그 빛 속에서 에피비오노의 마지막 대답이 우물 벽을 희미하게 울리며 들려왔다. / 네 선택에 따라서는 가능할 수도 있을걸. / 더 강한, 더 찬란한 빛, 광채가 계속되다가 어느 순간 사그라지며 극한의 어둠이 몸을 감쌌다 낙하 속도조차도 느낄 수 없는 적막한 무의 공간이었다. 보리스는 나야트레이를 불렀다. “나야트레이!”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낙하와 어둠이 계속되는 동안 꽤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등허리에 싸늘한 기운을 느끼며 눈을 떴을 때 주위를 둘러싼 것은 낯선 풍경이었다. 얼마 동안 이러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새벽인지 저물녘인지 모를 박명속에 넓디넓은 백색 설원이 펼쳐져 불그레한 지평선을 이루는 광경이 보였다. 왼쪽에는 숲이 활 모양을 그리며 끝나고 있었다. 보리스는 벌떡 일어나며 생각했다. 저렇게 숲이 인위적으로 다뤄진 것을 보면 근처에 사람들이 살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그러나 일어나고서야 깨달았다. 보리스는 조금 놀라며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부른 이름을 되풀이해 외쳤다. “나야트레이! 어디 있지!" 대답은 물론 기척조차 없었다. 주위를 보니 자신이 누웠던 자리만이 눈 속에 자국을 남겼을 뿐 걸어온 흔적도, 걸어나간 흔적도 없었다. 이곳에 있는 자신조차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몹시 추웠다. “후우,.” 입김이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눈바닥에 누워 있던 뼈가 아릴 정도의 강추위였다. 긴 팔 옷차림에 망토까지 둘렀는데도 턱이 부르르 떨렸다. 겨울이 깊은 땅에서 자란 그가 다른 땅에서 이렇게 추워보기는 처음이었다. 쓰러져 있는 동안 눈 속에 파묻혀 있었을 손은 이미 파랗게 얼어 있었다. 조금 후 숲 위로 창백한 흰 달이 걸렸다. 보리스는 이곳이 낯설긴해도 그가 가보지 못한 대륙의 어딘가가 아닐까 추측해 보았다. 다만 머리 위에 펼쳐진 하늘의 강렬한 빛깔만이 그런 판단을 망설이게 했다. 머리 위 하늘은 밤의 흑빛도 낮의 푸른빛도 아니었고 지평선은 주황, 머리 위는 보랏빛으로 물들어 기괴한 혼돈을 이뤘다. 분명 낯선 우물로 들어온 자신이었으니 대륙 어쩌고 하는 건 헛생각인 것 같기도 했지만, 중간의 기억이 끊겨 있는 탓에 자꾸만 별다른 곳이 아닐 거란 쪽으로 생각이 흘렀다. 실은, 그도 조금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낯선 땅을 수없이 방랑했던 그였지만 지금은 온 곳도 갈 곳도 모르는 데다 하나뿐인 일행은 간 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더구나 머리 위에는 사람의 마음을 불길하게 하는 하늘이 끝간 데 없이 펼쳐져 있으니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서는 무언가 확실한 것이 필요했다.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에피비오노의 마지막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르고, 곧 그가 주의를 주었던 일들이 하나하나 생각났다. 그 가운데 ‘맨 처음 만나는 사람이 인도자가 될 것' 이라고 했던 말이 되새겨지면서 겨우 기댈 곳이 하나 생긴 듯한 기분이 되었다. 그랬다, 그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이다. 여기가 사람이 사는 세계든 짐승이 사는 세계든, 그는 인도자를 만나 윈터러를 최초로 만들었다는 그 분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서서히 현실 감각이 되살아났다. 마음을 다시금 다져먹으며 뺏뺏해진 몸을 추슬렀다. 일단 눈밭을 걷기 시작했다. 처음엔 베어낸 숲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 무심코 인가가 나타날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보리스는 걸음을 멈췄다. 오랜 여행으로 다져진 본능적 감각이 주위에 위협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검을 빼들었다. 이곳까지 와서 피부터 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공격해 온다면 인형에게 그랬듯 베어야 했다. 크르르, 크릉! 컹! 컹! 개 짖는 소리 비슷했지만 좀 달랐다. 하지만 만나본 일이 있는 짐승이다 싶었다. 겨울 숲을 배회하는 잿빛 이리들이 틀림없었다. 몇 마리 정도라면 보리스의 실력으로도 충분히 해치울 수 있었다. 다만 수십 마리의 무리라면 사정이 달랐다. 그러나 구릉 아래에서 뛰어오르며 나타난 적의 모습은 보리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캬르르릉! 캬우! 틀림없이 이리를 닮긴 했다. 그러나 맨 처음 나타난 놈의 몸집은 지금껏 본 가장 큰 이리의 두 배, 이리보다는 오히려 말에 가까운 체구를 지닌 거대한 야수였다. 털은 잿빛 섞인 은백이었고, 뒤따라 나타난 놈들 중에는 청흑색 털을 지닌 놈들도 있었다. 다리며 어깨 모두가 한번 얻어맞으면 목이 꺾어질 듯 단단하고 억셌다. 저런 이리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그 순간 보리스는 생각해 냈다 만일 이 세계가 가나폴리의 대마법사 지티시가 들여다보다가 빠져들었다는 그곳이라면, 또는 윈터러의 힘을 받아들이지 못해 다른 세계로 보내고 말았던 바로 그 세계라면, 이곳의 모든 악은 보리스가 살던 곳에 비해 몇 배로 사악하고, 몇 배로 잔인하며, 몇 배로 거대하리라는 것을.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을 듯한 소년을 날쌔게 둘러싸던 놈들은 벌써 승리를 느끼는 듯 킁킁거리며 콧소리를 냈다. 이제 곧 갈기갈기 찢겨 죽을 운명이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공포를 누르며 윈터러의 힘이 저들을 막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없었다. 그러나 어떤 결과가 온다 해도, 여기까지 와서 죽을 순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첫 번째 이리가 달려드는 순간, 보리스는 본래의 검을 내던지고 흰 날의 윈터러를 뽑아들고 있었다. 놈의 앞발보다 먼저 뻗어나간 검끝이 이리의 두 눈 사이를 꿰뚫었다. 새삼 윈터러의 날은 어떤 뼈도 살처럼 잘라낸다는 것을 느끼면서, 보리스는 힘껏 검을 뽑아내어 이번에는 뒤에서 달려든 늑대를 베어나갔다. 거대한 이리들은 놀랄 만큼 민첩하고 강했다. 보리스가 윈터러의 힘을 빌어 무시무시한 속도로 검을 휘두르는데도 결정적인 순간 치명상을 피해 물러나고, 다시 연합하여 공격해왔다. 이리의 앞발이 한 번 그의 어깨를 긁었을 때, 급히 몸을 뺐는데도 불구하고 살점이 뜯겨나가 눈밭에 피가 뿌려졌다. 모든 이리들이 그렇듯, 피 냄새가 풍기자 놈들은 더욱 흉폭하게 변했다. 십여 마리를 베었지만 남은 수십 마리는 조금도 물러설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끝없이 달려드는 이리들의 실루엣 너머로 불그레한 빛이 감돈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서쪽 지평선을 흘끗 본 보리스는 조금 전까지 가득히 끼어 있던 구름 때문에 보지 못한 것을 발견하고는 흠칫했다. 이 상황이 설마 꿈은 아닐 텐데. 분명 조금 전에 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는데, 지평선에는 죽어 가는 자처럼 희미한 태양이 황동빛 피를 흘리며 머물러 있었다. 태양과 달이 동시에 머물러 있는 이 불길한 하늘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윈터러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보리스는 그 와중에도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분명 검의 기술은 자신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 폭풍 같은 속도와 증폭된 날카로움은 윈터러의 것이었다 그리거 이리의 피맛을 보고 흡사 신들린 듯 적진 중앙으로 파고드는 호전성도, 윈터러의 것이었다. 그러나 조금 더 지나면 그 모든 것은 하나가 되어버릴 것이다. 차라리 모든 것이 빨라져 이 학살조차 얼른 끝나주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즐비한 이리의 시체 가운데, 마지막 한 놈의 목덜미를 꿰뚫을 즈음 보리스는 몸보다 정신이 지쳐 자칫 검을 손에서 놓칠 지경이 되어 있었다. 조용해졌다. 낯선 세계로 오자마자 온 눈밭을 피로 물들이고 만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는 데도 잠깐 시간이 걸렸다. 윈터러를 내려다보니 하얗고 귀해 보이는 검날에는 여전히 피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았다. 정말, 감당할 수 없을 만치 강한 무기였다. 그러나 그걸 가진 보리스는 기쁘지도 않았고 다행스럽지도 않았다. 주위의 잘라진 이리 시체들을 보며 저들의 운명이 자신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는 고통스런 혼란이 찾아왔다. 그러나 고요는 오래 가지 않았다. 보리스가 윈터러를 놓고 다시 이리 시체 속에서 피에 물든 나우플리온의 검을 찾아내 쥐었을 즈음, 이 번에는 사방을 울리는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보리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생각했다. 이마와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새로운 적이라면, 이번에는 어쩔 것인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여기는 보리스 자신과 같은 약한 인간은 살지 않는 곳인가. 저 거대한 울림으로 보건대 저것은,.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키 5미터가 넘는 자, 한 마디로 거인이었다. 인간을 닮은 새카만 몸집은 아름드리 나무처럼 육중했고, 굵은 팔다리에는 세로 주름이 잔뜩 잡혀 있었다. 목은 없었고, 머리에 해당하는 융기가 낮게 솟아 있는데 그 중앙에 큼직한 눈이 단 하나 박혀 있었다. 코나 입은 보이지 않았다. 거인은 이리들의 시체 앞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희번덕거리는 눈이 주위를 훑는 동안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머릿속의 모든 생각이 백지로 변해버리는 기분이었다. 도망이고 뭐고 꼼짝하기조차 힘들었다. 거인은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머리 아래에 메기처럼 널찍하게 벌어지는 입이 드러났다. 놈은 이리 시체를 게걸스레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이 거인이 보리스를 노리고 달려온 것은 아닌 듯 싶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사방을 메운 이리 시체들 때문에 최소한의 동작으로 달아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가능한 한 눈을 피해 움직인다고 생각했는데 뼈와 가죽을 가리지 않고 무지막지하게 먹어치우던 거인의 끔찍한 눈이 문득 치떠졌다. “!" 망설일 틈이 없었다. 거인의 큰 주먹이 바로 눈앞에 내리쳐졌다. 쾅! 피와 내장이 튀며 으스러지는 이리 시체를 보니 정신조차 혼미해지는 느낌이었다. 두 번의 주먹을 가까스로 피했다. 거인은 눈앞의 물체가 움직이지 않으면 쉽게 인지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간신히 동작을 멈추고 섰는데 산 너머 산이라고, 이번에는 반대쪽에서 그와 같은 거인이 셋이나 나타났다. 이젠 꼼짝없이 피할 수도 없게 되었다. 아무리 눈이 나쁘다 해도 넷이나 되는 거인의 눈을 모두 속일 방도는 없었다. 그와 더불어 이번에는 하늘을 메우며 무언가 나는 생물들이 나타났다. 이리 시체들의 냄새가 사방 몇 킬로에 순식간에 퍼지기라도 한 것인지, 몰려든 까마귀를 닳은 거대한 새였다. 이 새들 역시 독수리는 고사하고 좀 전의 이리들만큼이나 컸다. 완전히 포위 당한 꼴이었다. 좌우 사방과 하늘까지. 이대로 있다가는 이리 시체들에 섞여 저들의 먹이가 되기 딱 알맞았다. 아니다를까, 큰 까마귀 한 마리가 보리스의 머리 위로 덤벼들었고, 어쩔 수 없이 보리스의 검이 허공을 그었다. 푸득! 까마귀는 상처입지 않고 날아갔다. 그러나 곧 세 마리가 한꺼번에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생지옥이 달리 없었다. 사방에 흥건한 피와 악취, 김이 오르는 내장을 드러낸 고깃덩이, 시체를 먹는 거인들과 피를 노리는 까마귀들, 그 가운데 단신으로 버티고 선 보리스는 숨쉴 틈도 없이 몸을 움직여야했다. 남은 힘을 다해 찌르고 베고 돌리고 쳤다. 여러 번 상대해 봐서 움직임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인간보다 낯선 괴물들을 상대하는 일이 훨씬 어려웠다. 그가 손에 쥔 것은 윈터러가 아닌 나우플리온의 검이었다. 아직도 조금 전의 싸움이 남긴 열기로 뺨이 붉게 달아오른 채였다. 다시 한 번 윈터러를 사용하다간 아예 자신을 잃을까 두려웠다. 에피비오노가 생각났다. 위험할 지도 모르니 몸조심하라고? 이 상황은 당신 같은 천재 마법사나 헤쳐나갈 수 있는 것이잖아! 최악의 상황이 다가올수록 손은 더 빨라지고 검은 더 매서워졌다. 윈터러를 쥐었을 때처럼 신기에 가까운 몸놀림을 보일 순 없었지만, 이미 그의 몸에 깃들인 살기가 팽팽하게 차 올라 검을 통해 뿌려졌다. 보리스는 알고 있었다. 더 깊어질수록, 맹세가 깨질 뿐이라는 것을. 그러나 죽음 전에 택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 이것뿐이란 것도 알고있었다. 촤악! 보랏빛 숨을 뿜는 대기 가운데 까마귀 깃털이 검은 눈발처럼 흩날렸다. 천천히 내려앉았고, 그리고 드디어 거인들이 다가왔다. 윈터러가 아닌 그의 검은 이미 수없이 많은 것을 베어 날이 무뎌졌고, 그런 검으로 거인의 딱딱한 살갗을 벨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보리스는 검신을 내려 맨 먼저 다가온 거인의 발을 내려찍었고, 이어 검을 놓으며 다리 사이로 굴러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선택인 윈터러를 잡았다. 싸늘한 백색 날이 지평선에 걸린 태양빛을 반사하여 오렌지빛으로 타올랐다. 어느 날엔가, 예프넨이 석양 아래서 잡았던 윈터러의 모습도 이랬다. 그 때처럼 해내겠다고 결심하고 첫 번째 공격을 감행하던 순간이었다. 태양이 가려졌다. “아,.” 보리스는 눈앞에서 육중한 팔을 휘두르던 거인이 순식간에 재로 화하는 것을 보았다. 아니, 그것이 재였을까, 희미하던 태양보다 오히려 더 강렬한 빛이 저 높은 곳으로부터 내리쳐졌고, 거인은 단숨에 타올라 검은 목탄 조각처럼 변하더니 와르르 부서져 내렸다. 보리스가 뒤로 몇 걸음 물러나는 순간, 곧 같은 재앙이 다른 적들에게도 내리 닥쳤다. 검은 핵을 지닌 불덩어리가 까마귀 떼를 일시에 흩어 놓았고, 조금 후 무언가 희고 긴 잔상 같은 것이 허공을 수평으로 훑었다. 다음 순간 보리스가 본 것은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떨어진 수백 구의 까마귀 시체들이었다. 타는 냄새가 고약하게 코를 찔렀다. 무언가 낯선 자가 나타나 있었다. 언뜻 그것은 새처럼 보였으나 자세히 보기에는 너무도 빨랐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움직임 자체를 볼 수 없었다. 그것은 보랏빛과 주황빛이 휘몰아치는 하늘 곳곳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또 다른곳에 나타나며 순간순간 자신의 무서운 무기를 휘둘렀다. 흡, 초월자 자신이 나타난 것만 같았다. 쿠오오오! 남은 거인들이 울부짖으며 저항했으나 비슷한 잔상이 획 스치고 나자 금세 목이며 팔을 잃고 허물어졌다. 너무 빨라서 잔상만이 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잔상 자체가 무기인지도 알아볼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 어떤 무기보다도 날카로우며, 저 갑충보다 단단한 피부를 지닌 거인들의 튼튼한 뼈와 살을 단번에 잘라 버린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저토록 압도적인 힘이 있다는 사실도, 그것이 보리스를 위해 나타나기라도 한 듯 저 두려운 적들을 몰살시키고 있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 싸움이 끝난 뒤의 안전도, 믿을 수 없었다. 까마귀들이 지르는 괴성이 귀를 막아야 하는 소음에서 점차 지저귐보다 작은 것으로 변해갔다. 이윽고 들리는 것이라고는 물방울 같은 것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 외엔 없게 되었다. 이미 도망치는 것은 소용없다고 생각한 보리스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무엇인지도 모르는 적에게 당할 수는 없었다. 허공 가운데, 어떤 존재가 떠 있었다. 침이 말라붙었다. 날개, 그것은 에메라 호수의 괴물을 연상하게 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달랐다. 놀랍도록 거대하긴 해도 새와 비슷한 깃으로 이루어진 날개였다. 등허리에서 뻗어나가 하늘을 뒤덮으며 장엄한 교차를 이루는 네 장의 날개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를 향해 다가온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랬다. 단 한순간이 지나자 그 자는 보리스의 바로 눈앞에 이르렀고 길고 우아한 날개를 접어 늘어뜨렸다. 다가오고서야 알았다. 하늘 빛깔에 섞여 깨닫지 못했던 날개의 깃털은 온통 섬뜩한 적포도주 빛이었다. 그러나 신비롭게도 그의 모습은 인간이었다 대리석처럼 차디찬 얼굴이 스스로의 광채를 지닌 듯 빛났다. 목부터 발목까지 붕대처럼 보이는 백색 천을 둘렀지만 몸 곳곳이 드러나 있어 의복 같진 않았다. 그러나 백색 천이라는 것도 지칭하기 위해 임의로 붙인 말일뿐이었다. 실제로는 안개나 연기처럼 끊임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물질이었다. 어쩌면 몸의 일부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그의 얼굴은 아름답다거나, 그 비슷한 말로 표현될 만한 것이 이었다. 보리스가 살던 세계의 인간과 근본적으로 비슷한 윤곽인데도 인간다움은 전혀 느낄 수 없는 탓일까. 관악기의 힘찬 쇳소리와도 비슷한 목소리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겨울검-윈터러의 주인이 드디어 왔군," 상대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가나폴리의 인형들조차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말했다 그런데 이곳, 대륙이 아니고 그가 들은 어떤 곳도 아닌 낯선 세상에서 그와 같은 언어를 말하는 상대를 만나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심지어, 윈터러를 알고 있는 것이다! 상대에게 악의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말이 통하는 이상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아남았습니다." “감사를 하고 싶은가?” 보리스는 조금 망설였으나 곧 강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입니다. 방법을 알려주시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겠습니다." 그 때 보리스는 상대가 무슨 말을 할 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자의 입으로부터 천만뜻밖의 말이 흘러나왔을 때 지 어야 할 표정도, 해야 할 말도 알 수 없었다. “그 검, 내게 주지 않겠나?” 6. 강한 것은 반드시 악이 되는가? 푸른 밤과 금빛 낮 사이로 젖은 안개가 흘러갔다. 바람이 차가운 구름을 먼 곳으로 불어보냈다. 번쩍, 하고 모든 것이 밝아졌다가 다시 캄캄해지고, 젖은 기운이 뺨을 스치는가 싶으면 어느새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듣곤 했다. 천변만화의 세계였다. 기괴한 빛깔의 세계였다. 한동안은 가로지르는 곳도, 그 아래도, 그 위도 구름뿐이었다. 나 조금 후 구름이 흩어지자 탁 트인 하늘이 드러났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너른 들판처럼 펼쳐진 구름이 청보랏빛으로 꿈틀거리며 갖가지 모양으로 변하는 중이었다. 태양도 달도 사라진 하늘은 무엇에 기대어 밝게 빛나는 것일까. 모든 것이 이상스런 그림 같았다. 보라, 녹황, 적자줏빛, 무서울 정도로 선명한 색깔의 세상이 느리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곳의 영웅인가요? 아니면 신인가요?” ‘이곳'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이곳이 어디인지도 몰랐다. 보리스를 껴안은 채 긴 깃의 날개로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는 자가 대답해 왔다. “네가 짐작할 수 없는 자이지." “그렇다면 여기는,.” “네가 영원히 알지 못할 곳이다." 날개를 가진 자는 웃지 않았고,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보리스를 전부터 알고 있는 것처럼 망설임 없이 당연하게 행동했다. 보리스는 그가 에피비오노가 말했던 인도자이리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를 따랐고, 목적지를 묻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손에 이끌려 날아가며 이 기이한 세상을 내려다보자니 수많은 물음이 머릿속에서 되풀이되어 입밖에 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이름조차, 말할 수 없는 겁니까?” 사실 보리스는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 날개 달린 종족에게 남녀 구별이 있는지 그것도 불확실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굳이 짐작한다면 남자에 가깝다고는 생각했다. 보리스의 머리 아래로 늘어져 흔들리는 그 자의 머리카락은 마치 나야트레이의 머리채가 그랬듯 희었다. “난 너의 이름을 묻지 않았지." 냉정하지만 효율적인 대답이었다. 보리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러면 이것만이라도, 제게는 일행이 있었는데 혹시 알지 못하십니까? 당신처럼 은빛 머리를 지닌 어린 여자아이입니다. 분명 함께 들어왔는데 어디로 사라졌는지 몰라 걱정스럽거든요." 긍정적 답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뜻밖의 대답이 들렸다. “소녀는 안전하다." 급히 다시 물었다. “어디 있죠?” “그녀는 그녀의 여행을 하고 있다 너와는 다른 길이지." 문득 바닥의 구름이 걷혔다. 일부가 갈라진 것뿐이지만 그 순간 날개 달린 자가 하강하기 시작했다. 좀더 자세한 것들이 차례로 나타났다. 푸르게 얼어붙은 땅이 보였다. 검은 이끼 같은 것이 숱하게 펼쳐져 바위와 들을 메웠고, 좀더 내려가자 그것이 검게 마른 잡목 숲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굴곡이 심하지 않은 구릉이 첨탑처럼 솟은 바위산 앞까지 이어졌고, 바위산 바닥의 검은 동굴이 입을 벌려 그들을 맞았다. 발이 바닥에 닿는 것과 동시에 보리스는 주위 환경을 겨우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늘을 날고 있는 동안 기이한 색채의 향연에 사로잡혀 취한 듯했던 기분도 가라앉았다. 그러나 적자줏빛 날개를 보게 되자 마음이 또다시 동요했다. 날개 달린 자는 보리스가 아니라 바위산 너머 담황빛으로 번뜩이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한참의 침묵이 흐르고 그가 입을 열어 말했다. “다시 한 번만 묻자. 역시 검은 내줄 수 없는 건가?” 보리스는 일시에 온 몸을 긴장시키며 진지하게 답했다 “그렇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이유 그대로입니다." 빼앗아가려 한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날개 달린 자는 우울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 내용은 보리스에게 대단히 낯설게 들렸다. “내게는 형제들이 있다. 나는 사내 중 셋째로, 형님들의 힘과 능력 에 비하면 아직 보잘것없지. 우리에게는 단 하나의 누이가 있는데 그녀는 우리 중 누구보다도 어리지만 실상 가장 큰 누님으로서, 우리 모두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한 분이다. 나는 그 분을 위해 너의 겨울검을 필요로 한다." 절대자라 믿었던 대상이 ‘내게도 어머니가 있다' 라고 말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상한 기분이었다. 더구나 조금 전 그가 싸우는 모습을 보았던 보리스로서는 그보다 강한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조차 잘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은 보리스의 인지로 깨닫기엔 너무나 넓고, 크며, 강렬한 세계였다. 보리스가 해치울 수 있었던 최저의 적도 본래 살던 세계에서는 끔찍한 재앙이 될 정도로. “그 분이, 왜 필요로 하십니까?” 도저히 형제나 가족 따위가 존재할 것 같지 않던 날개 달린 자가 저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자신의 거절이 큰 실례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양보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보리스는 진심으로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그렇게 물었다. “누님은 우리 형제들과는 달리 유한한 생명을 지니고 있기에, 위대한 어머님께서 오래도록 그 분을 잠들게 하셨다. 그러나 이제 유예의 세월도 끝나 긴 잠에서 깨어날 때가 되었고, 곧 세상에 나아가 짧디짧은 생애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허망할 것인가. 그 분에게 주어질 삶이란, 이미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살아온 우리 형제들에게는 한 철만에 피었다 시드는 꽃처럼 안타깝게 생각된다. 그렇기에 나는 누님께 불멸을 드릴 방법은 없을지 고민해 왔고, 너의 검이 그 답이다." 보리스의 눈동자가 의아함으로 커졌다. “제 검이 불멸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겨울검이, 그 주인을 불멸자로 만들어주는 힘을 갖고 있단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난데없는 충격으로 멍해진 보리스는 그대로 한동안 날개 달린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그의 눈에서 감정을 읽는 것은 가능했으나, 스스로를 ‘불멸자'라 칭하고 있는 그 자가 보리스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심할 정도로 몸을 굽힌 것이란 사실만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한참만에 보리스는 가까스로 짧은 대답을 내뱉었다. “전혀, 몰랐습니다." “모든 주인이 불멸의 힘을 꺼내어 쥘 수 있는 건 아니다. 너와 고작 몇 십 년의 짧은 인생을 사는 종족은 아마 끝내 알기 어려울 터. 그러니 너도 결국 다른자들처럼 겨울검의 손아귀에 붙들려 검이 파괴되는 그 순간까지 고통받는 혼이 되기 쉬우리라. 나는 너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지만, 실은 네게서 검을 빼앗아 가는 것이 너를 위해 더 나은 행동일지도 모른다. 그 검의 거대한 힘을 필멸자의 손으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큰 힘이 약한 자의 손에 있으면 필연적으로 악이 된다." 그 순간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대꾸하고 말았다. “그럼, 강한 자의 손에 있으면 선이 됩니까?”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보리스는 상대의 눈이 뿜는 광채를 오래 견디지 못하고 곧 고개를 돌렸다. “너는 필멸자답게 너 자신을 믿는구나. 그들의 용기는 아름답지만, 매우 덧없지." 보리스는 무어라 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날개 달린 자는 손을 들어 이마에 대고는 긴 한숨을 토했다. 과장될 것 없는 동작인데도 보리스는 그의 감정에 전염된 듯 슬픔으로 오싹해졌다. “당신은 아마도 신이거나, 적어도 그에 필적할 존재로 생각됩니다. 어느 쪽이든 저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말씀대로 저는 과거도 미래도 짧아서 끝내 자신밖에 믿을 것이 없습니다. 겨울검-윈터러를 놓지 못하는 것도 어리석은 집착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불멸자가 되기 전에는 그들의 삶을 짐작할 수 없듯, 저의 한계대로 살아가는 것밖엔 도리가 없습니다." 날개 달린 자는 흰 이마를 젖히며 다시금 바위산을 보았다. 그의 긴 날개가 움직이더니 뒤로 길게 펼쳐졌다. 한쪽 날개의 길이만도 키의 두 배에 달하니 그 움직임도 장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왼손을 들어 바위 동굴을 가리켰다. “저곳으로 들어가라. 그곳에 네가 찾는 이가 있다." 보리스는 깊이 허리를 굽혔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불멸자가 되지 못한 그의 누님을 위해, 필멸자인 자신이 해 줄 위로가 있을 리 있겠는가? 보리스가 망설이자 그는 날개를 더 넓게 펼치며 짧게 말했다. “가라." 돌아서기 직전, 보리스가 말했다. “저는 보리스 진네만입니다." 네 장의 날개를 모두 펼치자 자줏빛 깃털 속 은빛 머리카락이 기괴한 조화를 이루었다. 한 번 날개 쳐 날아오른 그는 보리스를 굽어보며 말했다. “내 누님에게나 너에게나, 주어진 운명이란 쉽사리 꺾을 수 없는 것이군. 윈터러의 주인이여, 나는 요르단스다." 동굴 안은 몹시 어두웠다. 작은 빛조차 없는 그곳을 벽을 더듬으며 나아갔다. 조금 지나자 손이 곱아져 감각이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다. 얼음벽으로 된 동굴인 모양이었다. 다만 손이 닿아도 녹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발끝에 걸려 달그락대는 돌부리와 먼 곳의 물방울 소리만이 그가 잠들어 꿈꾸는 게 아니라 깨어 있다고 알려 주는 듯했다. 굳이 한가지 더 들자면 지독한 추위였다. 바람이 없는 동굴 안으로 들어왔는데 어찌된 일인지 점점 더 추워지는 느낌이었다. 차츰 깊이 들어가자 동굴은 이제 완만한 경사를 그리며 아래로 이어졌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내려갔다. 넓은 장소에 들어섰다는 걸 깨달은 것은 벽을 붙들고 따라가던 자신이 문득 한 바퀴 돌아 같은 장소로 되돌아 왔음을 느낀 때였다. 더 이상의 통로는 없는 건가? 보리스는 보이는 것도 없는 동굴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두리번거리면 무엇이 보인단 말인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목소리는 노인 같았지만 지나칠 정도로 힘찼고 쇠그릇을 울리는 듯한 따가움도 섞여있었다. 유령들과 한동안 교류하는 동안 저도 모르게 이런 일에 대담해진 보리스는 얼마 동안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지 않자, 직접 입을 열어물었다. “누굽니까? 제가 찾는 분이 당신입니까?” 그 때 주위가 확 밝아졌다. 창백한 빛이랄까, 파르스름한 기운까지 도는 광채가 사방의 벽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 보였다. 예상대로 벽은 얼음이었다 손을 대도 녹기는커녕, 오히려 손을 얼려버릴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얼어붙은 것들이었다. 한때 녹아 내렸던 듯한 흔적까지도 모조리 서리가 하얗게 달라붙은 얼음으로 변해 있었다. [밝은데도 여전히 보지 못하는 걸 보니, 빛이 아니라 관찰력의 문제 인 모양이군.] 한동안 발견하지 못하고 두리번대던 보리스의 눈에 드디어 이상한 것이 보였다. 얼음 벽 속, 또는 그 너머라고 생각되는 곳에 희미하게 인간의 그림자 같은 것이 비치고 있었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발견하지 못했을 정도로 흐릿한 윤곽이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나?] 난데없는 질문을 받은 보리스는 상대가 누구인지 물어볼 기회도 잡지 못한 채 어색하게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세계의 끝이야. 아니, 세계의 시작이야. 경계석이야. 무지막지하고 두꺼운 얼음이지. 네가 본 이곳 세계는 얼음 위에 서 있다.] “전 저희 세계의 어떤 우물을 통해 이곳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럼 그 곳이 이 얼음 너머인가요?” [궁금하면 얼음을 뚫고 가보지 그래.] 쿨럭거리는 웃음소리가 퍼졌다. 파랗게 빛나는 얼음의 방에 선 보리스는 모습조차 잘 알 수 없는 자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리는 그곳에서 약한 오한을 느꼈다. 그런 곳에서 기이한 문답이나 되풀이하고 있을 정도로 사정이 좋은 자신이 아니었다. “제가 찾아온 건 제 검, 이곳에서는 ‘겨울검' 이라고도 불리는 윈터러를 만든 분입니다. 당신이 그 분입니까? 맞다면 제발 제 질문에 답을 해주십시오. 오랫동안 누군가가 만들었을 거란 사실조차 잊고 있었던 이 두려운 검을 왜, 어떻게 만드신 건가요. 그 검을 지닌 저는 어떻게 해야 좋은 겁니까." [대답도 듣기 전에 멋대로 질문해버리는구나, 그럼 질문도 듣기 전에 멋대로 대답해볼까. 대장장이가 검 벼리는 방법을 구구히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고, 만든 까닭이라면 그보다 좋은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니 결론적으로 그 검의 존재는 내 죄이자 내 공이다. 네가 무엇보다도 알고 싶은 것은 너희 세계에서 그 검이 일으킨 일들에 대한 수습일 테니, 말하건대 흰 갑옷은 겨울검-윈터러와 함께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내가 만든 것도 아니다. 겨울검이 머물렀던 어느 세계에선가 대안의 한 가지로 만들어진 흰 갑옷의 존재 의미는 본디 검의 힘을 더함이 아니라, 검의 힘을 감함이다 그것이 짝으로 붙여진 결과 겨울검은 지금처럼 침묵하는 기간을 갖게 되었지, 그러나 눈빛 흰 갑옷은 이제 겨울검의 힘을 붙드는 재갈로서 힘을 다하여 떨어져나갔다. 다시는 그의 자물쇠가 되지 못하리라. 이제 네가 내 앞으로 검을 가져왔으나, 너 자신을 위해서는 검을 내버린다는 간단한 선택만이 있을 뿐임을 재차 주지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꺼번에 쏟아진 놀라운 이야기였다. 특히 스노우가드가 윈터러의 본디 짝이 아니라, 나중에 윈터러의 힘을 제어하기 위해 붙여졌던 일종의 ‘자물쇠' 라는 말은 보리스에게 상당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렇다면 두 물건을 분리시켜 놓은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을 저지른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 결과 이제 검과 갑옷은 서로에게 힘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고, 자신은 검의 영향력 아래 홀로 버려진 셈이 된 것이다. 정말로, 그렇다면 정말로 검을 내버리고 도망치는 것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단 말인가? “그것뿐입니까, 이곳까지 온 결과치고는 한심할 정도로군요. 그런데 이곳에 계시면서도 제게 일어난 일을 잘 아시는 것 같으니 확실히 여쭙겠습니다. 흰 갑옷 스노우가드 때문에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니게 되어버린 제 형제를 편히 쉬게 해 줄 방법이 있겠습니까?” [내 앞에 오면 그 검이 겪은 모든 일이 거울 속처럼 환히 들여다보여. 검 안에 갇힌 영혼들의 모양도, 그들의 과거도, 모든 실수와 의도적 타락과 거부하지 못한 유혹들에 대한 것들이 전부 보인다. 그런다고 내가 그걸 어찌할 수 있는 건 아냐. 나는 그저 세상의 경계에 언 두터운 얼음 속에서 무상한 세월만 보내고 있는 늙은 대장장이일 뿐. 너의 형제라고? 그는 검이나 갑옷 따위에 붙들린 것이 아니다. 오직 네게 매여 있을 뿐이지. 그러니 가장 가깝게는 네가 죽어 없어지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크허허허,.] "정말로 그뿐입 니까?” 보리스는 웃지도 않고 진지하게 되물었고, 신랄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있던 대장장이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허어, 정말로 그럴 마음이 있다는 것이냐? 형제를 쉬게 하기 위해 네 목숨을 버릴 수 있어?] 그 순간 눈앞을 흘러간 수많은 장면들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나우플리온, 이솔렛,그 밖의 수많은사람들, 기뻤던 일, 분노했던 일, 소중한 기억들 모두. 그러나 그가 살아남은 4년이 누구의 생애와 맞바꾼 것이었던가. 에메라호수에서 예프넨이 보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혼자 살려고 도망쳤더라면 살아남은 것은 당연히 예프넨 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심지어 마지막 순간까지도 동생에게 미래의 가능성을 남겨주고자 자신의 가능성을 깨끗이 내버린 형이었다. 더구나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나우플리온이나 이솔렛을 이제 다시 만날 수도 없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자 보리스는 가차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그것뿐이라면, 그렇게 할겁니다." 갑자기 얼음 방이 큰 망치로 내리쳐지기라도 한 듯 징징 소리를 내며 울렸다. 보리스는 견디지 못하고 귀를 막았으나 소용없었다. 울림이 얼음벽을 타고 몇 바퀴 돌자 대장장이가 들어 있던 쪽의 얼음이 쩍 갈라졌다. 조각조각 으스러지고, 조약돌처럼 부서져 바닥에 흩어졌다. 일종의 통로가 생겨났다. 대장장이가 있는 곳까지 얼어 있던 얼음은 대략 3, 4미터가 넘었다. “우스운 놈이군. 지금 그 말은 네가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없다는 얘긴데, 살아 있으면서 그런 말하는 놈 치고 진심인 놈을 보지 못했어. 순간의 치기나 허세뿐이지. 그러니 너는 네가 한 말이 진짜라는 걸 내 앞에서 증명해야 돼." 이제는 울림 없이 곁에서 말하듯 들리는 목소리였다. 깨진 얼음 속에서는 얼었다가 녹기 시작한 흙의 축축한 냄새가 났다. 냄새는 점차 가까워졌다. 얼음 속에서 무언가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이윽고 눈앞에 섰을 때 보리스가 본 것은 얼음과 진흙으로 만든 인형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기이한 빛깔의 피부를 가진 키 큰 노인이었다. 얼음속에 얼어 있는 모습으로 보던 것과는달리, 노인은 일종의 거인이었다. 단지 키만 큰 것이 아니라 몸의 모든 부분이 보통 사람의 두 배 가량으로 컸다. “네 얼굴, 좀 바로 보자." 노인의 얼굴은 푸르스름하게 얼어 있었으나 세세한 윤곽은 보통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온화하고 인자한 것과는 거리가 먼 무시무시한 인상을 가진 노인이었다. 자비심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이는 매서운 눈동자와 관자놀이를 넘을 정도로 길게 자란 눈썹에 하얗게 앉은 서리가 특히 그랬다. 눈매도 당연히 친절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조금 후 노인은 갑자기 노성을 내질렀다. “그냥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것이로구나! 고작 I5년을 살아온 녀석이 그래, 남을 위해 목숨을 던지겠다고? 숫제 세 살 먹은 녀석이 사자를 잡아오겠다고 호언장담하는 꼴이 아닌가? 내 앞에서 그런 소리를 지껄인 놈 가운데 자기 말을 책임진 자는 없었지. 어려서 주제를 모른다고 봐줄 줄 아나? 잘봐라! 여기가 어딘가를! 내가 누구인가를!" 얼음이 갈라지던 때와 같은 굉음이 다시 방 전체를 쾅쾅 울렸다 리스는 또다시 귀를 막으려다가 문득 느꼈다. 이 소리, 이건 대장간의 망치가 모루를 치는 듯한 소리가 아닌가 스스로를 대장장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 노인은 분명 자신이 윈터러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어떤 불과 어떤 쇠로? 그것을 만든 무서운 망치와 강대한 모루는 어디에 있는가? “너를 이곳으로 데려다 준 자는 그의 세계에서 매우 강력한 반신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조차 내게 오고 있는 너를 억압하여 겨울검을 가져가진 못하지. 나의 얼음 동굴은 어느 세계에도, 어떤 힘에도 속해 있지 않다. 이곳에 들어온 자들의 목숨은 내 것이다.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 나는 이미 수많은 방문자를 그렇게 만들었다." 말의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노인의 목소리는 실로 악귀처럼 무시무시하여 보통 사람이라면 혼이 빠질 지경이 되고도 남았을 터였다. 보리스도 강침처럼 뇌리에 꽂히는 그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보리스는 몰랐지만, 만일 조금 전 한 말 가운데 거짓말이 섞여 있었더라면 노인의 목소리가 지닌 마력에 눌려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물러날 수도, 돌아설 수 도 없었다. 두 발이 바닥에 달라붙은 것처럼 움쭉달싹 못하게 되어버렸다. 보리스는 두려움을 억지로 참으며 노인의 커다란 눈을 올려다보았다. 눈동자조차 피부처럼 언 듯한 회색이었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보리스의 눈 역시 회색이었다. “앞서 하신 말씀대로라면 제가 여기서 죽는다 해도, 제 형제가 고통스런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은 마찬가지겠지요? 그렇다면 제발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되는 상태만은 참아 주세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전, 여기서 반드시 죽어야만 되겠습니다."그 때, 윈터러의 존재가 갑자기 보리스의 의식을 뚫고 뛰어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냥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인데 머릿속에 떠오른 검이 강렬한 빛을 발하며 정신을 장악해버렸다. 다른 생각을 하려 해도 되지 않았고, 떨쳐버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눈꺼풀이 떨렸다. 시력은 그대로인데도 눈앞의 것을 볼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무언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커졌다. ‘네 생명이 네 것이라 생각하나?’ ‘네 생명은 내 것이 되기로 예비 되어 있어.' 보리스는 눈을 부릅떴다.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섬의 폐허가 된 마을에서 괴물을 만나기 직전, 집요하게 그를 유혹하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할 수 있다면, 네 검을 들고 목을 찔러 봐.' ‘아마 절대로 할 수 없을걸.' 흡사 광기의 손짓 같았다.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쳐 윈터러를 잡았고, 날을 빼들었다. 무엇 때문에? 그가 죽고자 마음먹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저 목소리에 대한 반발심인가? 그 순간, 귓가에 한 때 들은 일이 있는 너무도 익숙한 문장이 명확하게 들려왔다. ‘내가 이미 선택해버린 너는 죽을 수 없어.' ‘죽을 수 없어.' ‘죽을 수 없어.' ‘내 피에 입을 맞추고, 영원한 삶을 살자.' ‘영원한 삶을 살자.' ‘영원한 삶을 살자.' ‘세례 받은 자는 모든 죄로부터 자유롭다.' ‘모든 죄로부터 자유롭다.' ‘모든 죄로부터 자유롭다.' 손에 쥔 윈터러가 덜덜 떨렸다. 손이 떨고 있는 것은 분명 아니었다. 보리스는 애써 눈을 뜨고 앞을 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단지 검 하나였다. 빛나지도 않고 특별한 기운을 내뿜지도 않는 하얀 검 한자루였다. 그 검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오래 전 헥토르의 계략으로 낡은 공회당에 쓰러져 있다가 깨어났을 때처럼 자신도 모르게 잡은 그 검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금 후 보리스는 입술을 짓씹듯 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네 노예 따위는 되지 않아,.” 검날을 아래로 해서 몸 쪽을 향하도록 잡았다. 예프넨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긴 검으로 자신을 찌르는 것은 어려웠고, 형은 검을 바닥에 꽂아 몸을 던지는 것을 택했다. 그러나 지금 윈터러는 손잡이도 없이 천으로 둘둘 말아놓은 상태였고 그렇기에 천조각에 의지하여 좀더 바투 쥘 수가 있었다. 검날이 가까이 다가오자 목에서 무언가 울컥거리며 솟아났다. 동시에 이젠 팔과 어깨까지 떨렸다. 그것이 윈터러의 암시 때문인지, 자신의 두려움 때문인지도 알 수 없번다. 머릿속에서 기억과 판단이 하나씩 지워지고 나자 남은 것은 잉크 몇 방울 정도의 기억뿐인 백지의 의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그는 거의 자신을 찌를 뻔했다. 땅! 땅! 땅,! 쇠와 쇠가 부딪는 굉음이 일어나 모든 소리를 삼켜버렸다. 불길 같은 망치가 그의 의식을 두드려 깨부셨다. 대지가 모루가 되고 천둥이 망치가 된 듯, 바람을 풀무 삼아 지옥불에 달군 쇠가 내리쳐지고 또 내리쳐져 혼돈을 부수고 운명을 부쉈다. 보리스의 눈앞에 얼음 속에서 불타고 있는 화덕이 보였다 환각처럼 흐릿하게 시작하여, 이윽고 손이라도 데일 듯 명확해졌다. 모루에는 희고 이상한 쇳덩어리가 있었다. 그것이 정말로 쇠인가? 한 번 내리칠 때마다 불꽃이 튀어 오르는 세찬 망치질에도 끄떡 않고 제 덩어리 그대로 있는 놀랍도록 새하얀, 물질이 있었다. “저것이 네가 쥔 검, 너를 유혹한 검이다. 여러 세계에서 ‘사악한 흰 뱀' , 또는 ‘피의 짐승’ 이라고 불린 그 놈이기도 하지. 한때 패배하여 약해졌을 때 내가 간신히 거두어 백여 년 간 달구고 두드렸고 그러고서야 겨우 그것을 검 형태의 고정체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파괴력은 10분의 1만을 남기고 억눌려 봉인되었다. 그러나 너도 알지 않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인된 겨울검 역시 어느 세계에서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시무시한 존재란 것을. 그것이 바로 너의 검이다." 보리스는 모루 위의 흰 덩어리가 순식간에 세월을 건너뛰어 검으로 변해 가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보리스가 알고 있는 익숙한 검신과 자루, 그리고 그에 어울리게 만들어진 백색 검집,. 그렇듯 고귀한 자태를 지닌 검으로 변모한 그것이 본래는 재앙의 주재자였단 말인가? ”‘흰 뱀' 의 실체에 대해서는 수많은 세계를 주재하는 현자들, 초월자들, 그리고 나조차도 알지 못한다. 이 어찌 아니 놀라우랴. 그것이야말로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창조주의 대적자, 또는 그의 아들일 지도 모르는 것이야." 겨우 정신을 되찾은 보리스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렇게 사악한 존재라 하셨는데 창조주의 아들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사악하다거나 재앙을 부른다거나 하는 것은, 검의 힘을 가누지 못해 타락하고 만 자들의 변명에 불과한 것이야. 그것이 흰 뱀의 모습을 지녔을 때조차 직접적으로 세계를 파괴하거나 타락시킨 일이 없거늘, 그것의 강함을 보고 두려움과 외경, 탐욕에 사로잡힌 자들이 제 의지로 힘을 빌려 놓고는 종말에 이르러 흰 뱀이 자신을 타락시켰노라, 검이 악의 기운을 내뿜었노라 탓한다. 나는 흰 뱀의 의지도, 그것이 모든 세계에 굳이 나타나는 의미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이렇듯 괴이하게 뭉쳐진 초월적 힘이 존재함은, 창조주가 자신의 절대 의지를 보이기 위해 일부러 세상에 남긴 흠일지도 모르는 것이야. 그렇다면 그야말로 창조주의 의지를 실천하는 아들이라 할법하지." 망치와 모루의 소리가 사라져갔다. 보리스는 이제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귓가에 맴돌던 목소리들도 사라졌다. 그러나 밝혀지고 있는 것은 훨씬 두려운 진실들이었다. 보리스는 문득 이 무시무시한 대장장이가 자신을 시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보리스가 목소리들에 이끌려 미망에 빠지도록 내버려두고, 마지막 순간 그것을 깨뜨려 보여준 것도 일종의 길을 보여주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토록 막대한 힘의 존재인 흰 뱀을 검의 형태로 봉인하신 위대한 분께서도, 그걸 파괴하거나 길들일 방법을 달리 갖고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까?” 노인이 보리스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큰 눈이 심판자처럼 면밀히 보리스를 훑어보고 있었다. “내가 왜 힘들여 너를 이곳까지 오게 했는지 아느냐? 너를 이곳으로 불러 직접 보기 위해선 정말로 복잡한 안배가 필요했단 말이다. 내가 검의 형태로 벼린 뒤 천 년도 넘게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해왔던 겨울검이다. 그런데 바로 네 손에서, 최초로 ‘검' 이라는 외곽을 일부 뚫고 지금의 모습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 모양이 흰 뱀을 닮아 있음은 너도 부인하지 못할 터. 너의 어떤 능력이 이 검의 본질을, 잠들어 있던 흰 뱀의 성질을 불러일으킨 것일까? 혹 네가 흰 뱀의 의지를 대신 실천할 무서운 존재가 될 지도 모른다고 여겼지. 그런데 직접 보니 정말로 열 다섯 살 어린애에 불과하지 않은가? 도대체 무엇인가? 네게는 무엇이 있는가?” 보리스는 이렇게 말할 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저는, 모릅니다. 제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정말로, 적어도 저는 모릅니다." 노인은 조금 화가 난 것처럼 혀를 차더니 냉랭하게 말했다. “조금 전 너를 부른 것은 겨울검이 아니라 그 검에 흡수된 수많은 악령들이었다. 좁은 곳에 갇힌 그들은 세상에 풀려 떠도는 유령들보다 훨씬 더 미쳐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 죽이고 파괴하고 싶어 몸을 떨고 있지. 바로 곁에 있는 너야말로 가장 좋은 사냥감, 네가 자기들 꼴이 되어 혼을 빼앗기기만을 열망하는 놈들의 목소리가 그것인 것이다. 오래 미쳐 있던 만큼 놈들은 교활해서 어린 너의 생각쯤은 훤히 들여다보고 교묘히 말을 돌려가며 파멸로 유혹한다. 거기에 귀를 기울여 자신을 파괴하려 하다니, 네놈도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그런 네게 도대체 무슨 특별한 점이 있는지 모를 일이다. 혹 네가 단지 텅 빈 그릇이라 흰 뱀이 네 안에 담기려고 술수를 부렸는지도 모를 일이군." 기분이 이상했다. 물론 보리스는 자신에게 스스로도 모르는 특별한 힘 따위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보리스의 감정은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왜 좀더 일찍, 더 나은 형태로 발현되지 않았는가’에 가까웠으며, 따라서 그가 필요로 할 때 그를 구원하지 못한 힘 따위는 있다 해도 앞으로도 도움될 리 없다고 여겼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보리스는 낯선 것에 대해 희망을 품지 않았다. 오히려 겪을 것은 다 겪었다고 생각하는 노인들처럼 우선 경계하고 궁극적으로는 부인하려 하는 습성이 있었다. 비록 몸과 마음이 한참 자랄 나이인지라 때때로 자각하게 되긴 해도,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성장, 그리고 더 나아질 거란 ‘호전에의 희망’ 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최악은 단지 최악일 뿐, 미래의 발전을 위한 발판이나 준비 따위가 아니었다. “온통 과거에만 얽매여 있는 자이니, 미래는 무로다. 인간을 이끄는 것은 미래인데, 지금 너의 현재를 이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대장장이 노인의 소리는 처음 만났던 때보다 눈에 띄게 부드러워져 있었지만 자기 생각에 잠긴 보리스는 깨단지 못했다. 보리스가 대답하지 못하자 노인이 다시 물었다. “너는, 너의 형제에 대한 일이 해결된 뒤 무엇을 위해 살 작정이냐." 보리스는 당황하며 되물었다. “저의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제가 죽어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하지, 허나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하진 않았다. 어쨌든 대답하거라. 네 스승의 일도, 네 아가씨의 일도, 이제 너의 손을 떠났고, 예전과는 달라져서 세상에서 그럭저럭 살아남을 만한 자신감도 얻었을 것이다. 형제의 고통이 해결되고 나면 네 삶의 목적은 무엇이 될 것 같으냐," 보리스는 놀라서 노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노인은 보리스가 지금껏 겪어온 삶을 모두 다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마도, 저는, 더 이상 얽매일 문제를 만들지 않고 조용히 사는 것만으로 만족할 것 같습니다. 이보다 나은 답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본디 보잘것없는 자인지라 남은 삶에 대단한 기대 같은 건 없습니다." “그래, 그런 것이로구나." 노인은 고개를 들며 짧게 탄식하더니 말했다. “그런 너의 의식이야말로 겨울검의 힘에 저항하기가 매우 좋구나. 알 것 같아. 하지만 그것뿐이란 말인가." 노인은 잠시 침묵했다. 동굴은 대장장이 노인의 마음 상태에 반응하는 듯 이번에는 지독하게 고요했다. 보리스는 두터운 얼음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모를 동굴에서 마음 속까지 엘 듯한 추위를 느쪘다. 그러나 다시 말이 시작되었을 때 보리스는 얼음 속에 문득 불의 기운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희망 없는 자는 본디 나아지지도 못한다. 그런데 너는 그런 식으로 살면서도 놀랄 만큼 성장했고, 특히 검술에 있어서는 십여 년 수련해도 쉽게 얻지 못할 성과를 얻었느니라. 그게 왜인지 모르겠느냐? 네 스승으로부터 제대로 배우지도 아니한 검술을 벌써 쾌 수련한 듯 쓸 수 있게 된 것도 단 한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임을 모르겠느냐? 지금 너의 성장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겨울검-윈터러의 힘이다.” 조금쯤 짐작했던 일이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참혹한 선고였다. 그렇다면 그간 보리스 자신이 나름대로 노력한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단 말인가? “네가 네 형을 살해한 괴물을 다시 한 번 만나게 된 것이 놀랄만한 우연이라 생각지 않느냐? 겨울검은 본래 여러 세계를 뚫고 다니는 존재이니 그 힘에 다른 세계의 괴물이 이끌려 온 것은 이상하지 않으나 하필 같은 괴물이 네 앞에 나타나 준 것은 단 하나, 네 마음이 복수를 원했기 때문이란 걸 모르겠느냐? 겨울검은 당연히 무신경하게 네 소원을 들어 주었지! 네가 그 싸움에서 죽거나 말거나 하는 건 흰 뱀의 의지에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단 말이다!" 보리스는 대답 없이 입술을 떨었다. 완전히 궁지에 몰린 꼴이었다. 그에게는 윈터러를 제어할만한 힘이 없었다 그가 갈고 닦은 실력이 윈터러의 힘에 기댄 것이라면, 자신 역시 환각 속에서 본 수많은 파멸한 영웅들과 다를 바 없게 되리란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렇다면, 드디어 검을 포기하고 돌아설 것인가? 생명조차 포기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이제 와서 못 버릴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이제 충분히 알았겠지. 그렇다면 겨울검을 내게 되돌리고 돌아가겠느냐?” 노인은 흡사 보리스의 마음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그렇게 물었다. 문득 머릿속에서 맑은 샘과, 거기에 떨어진 한 방울 물이 떠올랐다. 파문, 샘 전체는 파문으로 가득 찼다. 그것이 가라앉은 후 샘에 다시 떠오른 영상은 무엇인가. 고요한 삶,, 침묵을 원하는데도 벗어날 수 없는 맹세의 힘. “아니오.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아닌,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의지가 대답한 것 같았다. 말하고 나서도 보리스는 자신이 무슨 대답을 했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표정 없이 맑은 눈으로 노인을 올려다보았다. 노인이 다시 말했다. “이유를 말하라." “저는 아직 제 가능성을 전부 시험하지 못했습니다. 끝은 제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패배가 그 답이라 하지 않았는가, 영웅들도 가누지 못한 크나큰 힘을 어린 네가 어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끝은, 또 한 영혼의 파멸일 뿐이다." 보리스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으나 분명하게 말했다. “그건 어르신의 눈에 보일 뿐, 제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이번에는 먼 곳에서 울리는 듯 아련한 망치 소리가 들려왔다. 땅, 땅, 땅,.인이 말하고 있었다. “너도 보았을 것이다. 겨울검 안에 든 모든 비극, 그 검을 지녔던 자들이 어떤 식으로 유혹에 지고, 분노에 무릎꿇고, 세상은 물론 자기 자신조차 망쳐버렸는지 말이다. 세상의 악은 근원이 많아서 어떤 자는 너무 약한 자신을 견디지 못해 악해지고 어떤 자는 제가 가진 작은 힘을 휘두르고 싶어 악이 된다. 그러나 그 어떤 악도 단 한 번의 패배조차 불가능한, 순도 높은 강함, 최상의 힘이 성취할 수 있는 악보다 높지 못하니 강한 것은 본디 악이다. 강하기 때문에 악이다! 나름대로 강하여 선을 실천했던 영웅들이 대부분 평화로운 말년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힘이란, 본질적으로 세상과 반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들은 때로는 비참하게, 때로는 쓸쓸하게 쓰러지지. 그러나 그가 만일 쓰러지지 않고 다시 한 번 세상을 이겨 누르는 데 성공한다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결과는 최악, 바야흐로 최고의 악이 그 세상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 순간 보리스의 머릿속에서도 오래 전 얼음 고치 안에서 잠든 채 보았던 파멸의 역사가 다시금 보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끝내 영웅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전후 결과가 모두 그의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떠올라 보였다. 문명이 사라진 폐허의 대지에 다시 한 번 인간의 나라를 일으키고자 한 자, 이방 군주의 패악으로 신음하는 부족을 영원한 강자로 만들고자 일어섰던 사내, 자신의 잘못으로 비참하게 죽어간 연인을 되살리고 싶어한 젊은이, 깊이 사랑해 온 부모 형제가 실은 진짜 가족을 몰살시킨 원수임을 알아차린 소녀, 모국의 수도로 진격해 오는 괴물들 앞에 풍전 등화의 운명에 처한 푸른 대지를 지키려던 공주, 아내와 자식을 죽인 잔악한 원수를 처단하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었던 이,. “그들 모두가,. ‘소원 없는 인간' 이 되는 것이 길이란 것을 몰랐을 거라 생각하는가." 7. 소월 없는 인간 ‘소원 없는 인간’이라는 말에 보리스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았다. 그것이야말로 유령들의 땅에서 섭정왕이 그에게 말했던 단 하나의 방법이 아닌가. “너 자신에게도 얼마나 많은 소원이 있는지 생각해 보아라. 형제를 편히 잠들게 하고 싶다고 했지만, 될 수만 있다면 다시 되살려 곁에 두고 싶을 것이야,.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된 두 사람은 어떠한가? 그들과 재회하여 아무 문제없이 행복해지고 싶다면 방해하는 자를 모두 죽여버리면 될 일이 아닌가? 네가 본 모든 불행을 되돌릴 수도 있는 힘이 거기에 있다. 인간의 소원은 먼 미래를 보지 못하지. 그 순간엔 옳다고 생각한 일들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 지, 결코 보지 못해! 하지만 그 모든 소원은 너의 것이 아닌가? 부인할 수 있는가? ‘소원 없는 인간, 그것은 산 자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야. 강한 힘은 필연적으로,. 피와 살을 가진 존재를 영원한 죽음으로 이끌고 간다." 그 순간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말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 검을 지니고 가눌 자는 죽은 자들입니까? 유령들이라면 되겠군요? 그러나 저는 여러 유령들을 만났고 심지어 죽음이 피해가는 바람에 천 년이나 살아오고 만 위대한 마법사도 보았습니다. 그들 모두 지금 세계의 파멸에는 관여하지 않으려 하더군요. 그렇다면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말씀대로라면 산 자의 손은 어디라도 안전하지 못할 테고, 결국 이 윈터러는 어르신 자신이 부수든 보관하든 해야 할겁니다!" “,.” “앞서 말씀드렸듯, 저를 죽일 테면 죽이십시오. 저는 물론 죽는 것이 두렵지만,. 제 등에 지워진 형제의 빛을 외면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요. 그런 다음 그 검을 잘 다룰 수 있는 자를 찾아내어 주시든 어쩌든 그건 제 소관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 제가 죽지 않고도 형제를 편하게 해 줄 수 있다면, 저는 결코 검을 내놓지 않을 것입니다. 어르신의 예언대로 된다면, 제가 파멸하여 이 검 안에 봉인될 때까지 말입니다!"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보리스는 터질 듯 뛰는 심장과 달아오른 뺨으로 동굴의 차가운 공기를 감각했다. 사는 것과 죽는 것, 이 동굴에 오기 전까지는 그토록 중대하던 일들이 이상하게도 아득히 먼 바다 속에 가라앉아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중요한 것은 오직 이 순간의 대답일까. 그리고 드디어 노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좋다, 그렇다면 불멸자가 되어라." 보리스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들은 말을 단번에 이해할 수 가 없었다. “,.지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불멸자가 되어라. 영원히 죽지 않고, 그 검을 든 채 싸우고 싶다면 네 뜻대로 계속해서 해나가도록 해 주지. 내 너에게 불사의 생명을 선사하마" 대장장이 노인은 크게 열린 채 멍해진 보리스의 눈을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려 자신이 나온 얼음 더미 쪽으로 갔다. 부서진 채 녹지도 않고 있던 얼음조각들이 갑자기 허공으로 날아올라 깨어진 면에 도로 붙더니, 순식간에 쭉쭉 뻗어 오르며 수십 개의 높다란 아치를 세웠다. 노인은 그 아치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제야 보인 것이지만 노인의 진흙으로 만든 듯한 발은 이 얼음의 동굴에 붙어있다시피 했고, 걷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얼음과 결합되어 흡사 종유 동굴의 석순이 움직여 가는 듯한 모양을 만들었다. 아치의 숲 끝에는 청동빛으로 번쩍이는 거대한 모루가 있었다. 망치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고 화덕 역시 없었다. 그러나 노인은 모루 앞에 섰고, 모아 쥔 두 손을 높이 들더니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기도를 경건하게 올렸다. 청동 모루에서 녹색 불꽃이 이는 것이 보였다. 백 배로 빠르게 자라는 덩굴풀처럼 갈퀴 달린 곡선을 그리며 흔들리다가 더 높은 곳으로 훌쩍 뛰어오르며 타올랐다. 그러나 그 불꽃이 더 저지기 전에 보리스는 손을 내밀며 외쳤다. “아니, 안됩니다!"모루가 있는 곳으로 뚫린 얼음 통로로 한 발을 들여놓는 순간, 갑자기 주위의 얼음들이 일제히 기이한 빛을 내뿜으며 눈을 어지럽게 했다. 더 들어가려 했을 때 보리스는 얼굴 전체에 확 끼쳐오는 뜨거운 기운을 느끼고는 당황했다. 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차디찬 얼음처럼보였던 모루의 방은 상상할 수도 없는 고열로 가득 차 있었다. 보리스는 문득 느꼈다. 이곳이야말로 바로 화덕이다. 얼음으로 된 불의 방이다. “무엇이 안 된다는 것인가." 대장장이 노인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보리스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낮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저는, 저는,.불사의 몸이 될 순 없습니다." “될 수 없다?” 모루 위의 녹색 불꽃이 움직임을 멈추고 사그라지는 것이 보였다. 노인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뺨의 근육을 움씰거렸다. 다시 한 번 물었을 때 노인의 목소리는 맨 처음 들었던 무시무시한 음성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될 수 없다고? 원하지 않는단 말인가?” “예, 원치 않습니다." “산 자라면 누구나 다 갖고 싶어하는 영원한 생명을 원하지 않는단 말인가? 네가?” 더 이상의 대답을 요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보리스는 입을 다물고 자신의 마음을 설명할 말을 찾았다. 왜 원하지 않는가. 한때는 살아남겠다는 한 가지 목적만을 가지고 폭풍과 덫 속을 헤쳐 나온 자신이. 수 번의 피를 대가로 치렀던 자신이, 어째서 불멸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있는 건가. 조금 전 만났던 요르단스의 누님이 문득 생각났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불멸이라 하였고, 요르단스는 그것을 선사하고자 보리스에게 검을 달라 청했다. 그리고 검 안에 불멸자가 되는 길이 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건 보리스에게 열리지 않을 비밀의 문이었다. “부득이하게도, 네게 설명을 요구하겠다. 아직껏 필멸자로서 불멸의 생명을 거부한 자는 너 이외에 보지 못했기에, 나 자신의 순수한 호기심이 네 대답을 필요로 한다." “저는,.” 그 순간, 바로 얼마 전 들었던 에피비오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감정만은 그리 오래 보관되는 것이 아닌가봐. 희석되고, 닳아 없어지고, 색깔을 잃어서, 내가 겪은 일이 아니라 책에서 읽은 이야기가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드니 말이야. “너무 오랜 삶은 감정을 잃게 하지요,. 지금의 저를 지배하고 있는 그것들을 잃고서 살아간다면, 그런 자를 더 이상 저 자신이라 칭할 어떤 근거도 찾지 못하겠습니다." 에피비오노는 죽음조차 함께 하려 할 정도로 사랑한 에브제니스 왕녀를 잊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보리스 역시 이솔렛을 잊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겠는가? 그렇게 되고 나면 그녀로 인해 아파한 시절의 기억은, 책에서 읽은 슬픈 이야기처럼 허망한 것이 되어버린단 말인가? 나우플리온은? 그와 있어 행복했던 때의 감정이 사라지고 나면 남는 것은 죽은 자의 묘비명처럼 껍데기인 이름뿐. 몇 백 년이 지나 ‘그런 사람이 있었지' 라고 가볍게 말할 수 있는 자신 따위는 원치 않았다. 그리고 예프넨을 잊는다면, 그는 더 이상 지금과 같은 사람이 아닐 것이었다. 그는 형의 피 위에서 자신의 생애를 만들었다. 행복도 불행도 가능성에서 시작되는 것, 보리스의 그것은 예프넨이 포기한 삶에서 나왔다. 만일 그를 잊는다면,. 그는 더 이상 보리스 진네만이 아닐 것이다! ‘너는 어리석다. 겨울검의 주인에게 필요한 것은 움직이지 않는 마음이며, 검보다 더 서슬 푸른 심장일진대 너는 반대의 것을 원하지 않는가. 지금처럼 애정과 빛과 책임에 얽매인 마음으로 겨울검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네가 말하는 ‘감정'이야말로 너를 검의 힘, 그 유혹에 빠지게 할 것이다."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의 눈동자에 겨울의 서늘한 잿빛이 감돌았다. “저는 ‘소원 없는 인간'을 하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천 년 전에 죽을 장소를 찾았으나 알 수 없는 운명의 장난으로 죽지 않는 몸을 얻게 되고 말았죠. 그의 나라는 멸망했고, 연인은 죽었으며, 남은 것은 무너져 가는 폐허뿐인데도 홀로 남은 그는 미친 유령들에게 둘러싸여 온전한 대화의 기쁨조차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어떤 노력도 그를 죽음 곁으로 데려갈 수 없고, 그 동안 감정은 다 풍화되어 찌꺼기만 남았습니다. 그가 산 자입니까, 죽은 자입니까? 애정도, 존경도 분노도 다 닳아버리고 오직 한때 존재한 감정에 대한 ‘기억'만 갖고 살아가는 그는 아직은 산 자입니다만, 남은 감정을 모두 상실했을 때 드디어 죽은 자가 될 것입니다. 몸은 살아있으되, 마음은 죽어 시체가 된 자, 그건 천 년을 살아도 한 조각 감정조차 얻지 못하는 인형들과 다를 바 없을 테니까요!" 잠시 말을 멈췄던 보리스는 미소를 지으며 이어 말했다. “어르신께서 요구하시는 ‘소원 없는 인간’은 그런 것입니까? 예, 앞서 하셨던 말씀이 맞습니다. 예전에 제가 만난 다른 분도 말했지요. 산 자로서 ‘소원 없는 인간’ 이 되기는 매우 어렵다고요. 그러나 제 생각에 그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어르신께선, 저를 불멸하는 인형으로 만들어 검을 쥐어 주실 생각이셨습니까?” 그 때 갑자기 천둥 같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하, 하, 으하하하하,.” 방 전체가 웃음소리와 함께 진동했다 보리스는 모루의 방을 보며 대장장이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그건 분노나 허탈함을 나타내는 웃음이 아니라, 온전히 흔쾌하여 내는 웃음소리였다. “네가 결단코 나를 놀라게 하고야 마는구나. 필멸자에게는 그가 필멸하기에 얻을 수 있는 지혜가 따로 있다고 하더니 그 말이 진실로 타당하구나. 인형이 된다? 그렇지, 그건 인형이지. 오래 전, 나는 실로 이 검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강하긴 하되 이성을 지니지 못한 ‘인형'이 아닌가 생각한 일이 있었지. 그러나 문제가 있었어. 만일 그런 인형놈이 있다면 그건 어떤 산 자와도 마주치지 못하게 동굴 감옥에 가둬놓지 않으면 안되거든! 으하하하,.” 노인은 모루 뒤에서 돌아 나와 다시 보리스가 있는 얼음 방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가 들어서자 방 안에 새로운 한기가 더해지는 듯했다. “자, 그러면 현명하면서도 어리석은 필멸자야, 네가 방금 한 말이 겨울검의 일일뿐 아니라 바로 너 자신의 생애에 대한 해답이라는 것도 알겠느냐?” “예?” 어리둥절하여 눈을 깜빡이는 보리스를 내려다보던 대장장이 노인은 얼음손을 내밀더니 그의 머리를 매만졌다. 손이 닿자마자 머리카락이 얼어붙으며 고드름 같은 서리 가지가 앞머리를 타고 주룩 자라다가 멈췄다. “너의 형제 ‘예프넨 진네만’이 네게 원한 건 단지 ‘살아남으라'는 것뿐이었지. 그리하여 너는 4년 동안 너도 모르는 사이에 너 스스로의 뜻이 아닌 형제의 주문대로 살아왔던 것이다. 모든 시험을 피해 살아남고, 살아남고, 또 살아남는다면 결국 그건 불멸이 아닌가? 너는 너 자신이 불멸자가 아님을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불멸자인 양, 너의 소원들을 미루고 억누르지 않았느냐?”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보리스는 항변했다. “제가 무슨 소원을 억눌렀단 말입니까?” “하나하나 돌이켜 보아라. 왜 복수하지 못했는가? 형제의 유언 때문이 아닌가? 왜 삼촌을 징벌하여, 또는 용서하여 자신의 과거를 깨끗이 씻지 못하는가? 망설임이 네 욕망을 옥죄고 있다. 왜 사랑하는 그녀를 너의 것으로 하지 못했는가? 필멸자일수록 짧은 생애를 더욱 양보 없이 살아야 하는 법인데, 너는 그녀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위해 포기해버렸다. 너희 인간은 소원의 존재, 욕망의 존재, 그렇기에 ‘한시라도 살아 있을 그 내일을 위해 살아간다’.” 보리스는 깜짝 놀라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말은 오래 전, 벨노어 성에서 월넛 선생이었던 나우플리온이 그에게 했던 말 아닌가? 처음 보았을 때 그렇게 두려워 보였던 노인의 얼굴은 이제 신비로운 인자함마저 띠고 있었다. 마치 손자에게 충고하는 할아버지의 얼굴 같았다. “그런 식으로 하여 끝내 원하는 것을 모두 잃고 나면 그 때도 내 앞에서 네가 ‘소원의 인간’ 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은 소원을 잃을 수 없기에, 그리고 불멸하지 않기에, 마음을 돌궤처럼 닫고 살 수는 없다. 열어버려라! 네 형제가 닫아버린 그 마음을 열고 네 소원을 찾아내어 끝까지 이루어내라! 살아남기 위해 닫았던 욕망을 다시 꺼내놓으란 말이다!" “,.” 문득 뺨을 타고 무언가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목도 막히지 않고 코도 시큰해지지 않았는데, 단지 눈물만이 흘렀다. 어깨에 놓여 있던 무거운 짐을 지금까지 몰랐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손이 번쩍 들어올려 주는 순간 그 동안 자신이 얼마나 힘겨웠던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살아남아야 한다'라는 말이 그에게 가져다주었던 중압감, 이제 제안 받은 ‘영원한 생명', 다른 듯 했으나 본질은 같았던 그것을 이제 내려놓아도 될 듯했다. 살아남는 것보다 더 큰 것. 오래 전 그를 꽉 껴안으며 외친 나우플리온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했다. 그 때 흘렸던 눈물은 쓰디썼으나, 이제는 맑았다. 아니, 이번에는 웃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우플리온의 말대로 삶의 가치는 그것이 길거나 짧은 것에 있지 않았다. 비 오는 날, 로즈니스와 함께 대륙의 용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나우플리온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틀렸어! 넌 네 삶을 스스로 더 빈약하게 만들고 있어. 네게 부족한 건 바로 의지야! 죽은 사람의 삶은 그걸로 끝이라고 말하면서 어째서 네 삶의 가치를 자꾸만 그들의 죽음에 두는 거냐? 정말로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모조리 끝장내어 버리고 넌 너대로 네 욕망을 쫓으며 새롭게 살아라, 아니면! 그들을 위해서라도 더 힘껏, 더 오래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네가 불멸자가 될 수 없는 한, 너는 네 삶의 밀도와 가치를 높임으로서 그들이 잃어버린 삶을 대신할 수밖에 없다, 만일 네가 그러고 싶다면! 여전히 그의 유일한 스승일 사람, 나우플리온이 그에게 해 준 최의 충고대로, 짧든 길든, ‘한시라도 살아 있을 그 내일'을 위해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불멸조차 거부한 그가, 짧은 생애를 최대한 행복하게, 소원을 이루며 살아가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말을 꺼내며 보리스는 노인을 향해 미소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남은 제 삶의 조타는 제 스스로 잡아야겠죠. 복수를 하는 것도, 누군가를 선택하거나 포기하는 것도 제 선택이란 걸 알겠군요. 살아온 삶은 어쩌지 못하더라도, 이제부턴 좀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허허, 이토록 오래 홀로 지낸 끝에 어린아이의 인생 상담역이나 하게 될 줄은 내 미처 몰랐느니. 좋다. 이제 나는 겨울검을 새로이 벼려줄 것이다. 그것을 가져가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지켜가도록 해라." “제가, 가져가도 되는 것입니까?” ‘소원 없는 인간’이 되지 못하겠다고 한 이상 이런 답을 들을 거라곤 짐작하지 못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널 이곳까지 오도록 한 것은 겨울검이 봉인을 깨뜨린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이라면 다른 누군가의 손을 빌려 검만을 가져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말했다시피 내가 보고 싶은 건 검보다도 너였다. 수많은 세계의, 수많은 영웅들을 타락시킨 검이다. 그런데 왜 너만은 지금까지 바른 의식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 말대로 네겐 특별한 능력이 없다. 결단코, 그 영웅들보다 네가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없던 무엇인가가 네게 있었다. 사랑하는 자들을 잃지 않으려고 최고의 선물인 불멸조차 거부해버리는 편협함이 해답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현명하다는 자들이라면 분명 불멸이 가져다주는 크나큰 힘과 윈터러의 힘 모두를 갖고 할 수 있는 어떤 놀라운 일을 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네게 필요한 건 단지 몇 명의 사람들뿐이었다." 갑자기 보리스의 손에서 윈터러가 벗어나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것은 모루의 방으로 들어가 청동빛 모루 위에 놓였다. 이번에는 청색 불길이 일어나 검날을 휘감았다. “내 너의 그 마음을 한 번 믿어보려 한다. 불멸하는 인형도, 필멸하는 자들 가운데 가장 빛나는 영웅들도 이 검 한 자루를 가누지 못해 이성을 잃은 괴물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너는 이미 오래 전부터 첫 봉인이 깨어져 뱀의 본성을 드러낸 검을 갖고도 신비롭게도 자신의 마음을 지켜냈지 않은가? 네게 너의 능력과 재주는 모조리 겨울검의 힘이라고 말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겨울검이 처음엔 네 힘을 부추겼지만, 그 덕택에 너는 새로운 힘을 얻어냈다. 그것과 함께 너의 능력도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너도 곧 깨닫게 될 테지. 이제부터는 그 힘이 너를 도와 겨울검과 싸워 주리라. 그 힘의 순수함은 수 년에 걸쳐 수많은 사람의 손으로 갈고 닦아져 정수를 획득한, 마침내 마법에 가까워진 힘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보리스의 머릿속에 어떤 직감이 떠올랐다. 지금 대장장이는 그 기술을 말하고 있는 건가? “내 이제 검을 새로이 벼릴 것이나, 거기에 또 다른 봉인은 하지 않으리 라." 모루 위에 놓인 겨울검은 눈이 아플 정도로 새파랗게 타올라 쳐다보기도 힘들었다. 이윽고 망치질도 없이 검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익숙한 손잡이의 모양이 나타났다. “알다시피 검은 너의 소원에 반응한다 만약 내가 어떤 강한 봉인을 한다 해도 윈터러의 주인인 너는 곧 그것을 부술 수 있다. 그러니 네 마음을 믿고, 너 스스로 너의 소원을 신중하게 생각하며 짧은 생애를 힘껏 살아라. 네가 너 자신의 소원을 가눌 수 없게 되었을 때, 검은 당장 봉인을 깨고 네 앞에 무한한 힘의 본질을 보이고야 말 것이다. 그런 후에 그걸 네가 다룰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라. 그건 불멸자조차 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니 그 손에서 지켜나가거라. 한 손에 악마를 움컥쥔 채, 필멸자의 인생을 헤쳐나가는 것이다." 보리스는 그 순간 본능에 이끌려 무릎을 꿇고 이 불멸의 대장장이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가 자신을 이토록 신뢰해 주는 것은 보리스 자신이 무슨 잘난 힘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다른 선택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검을 지배할 방법을 찾다가 마음의 자유를 되찾게 되었기에, 망설임 없이 한 판의 싸움을 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단 하나, 지금 이 자리에서 네가 선택할 것이 있다. 네가 맨 처음 원한 소원, 즉 너의 형제에 대한 것이지. 여전히 그가 편히 쉬기를 바랄 테지? 네 형제가 지닌 너에 대한 집착은 바로 흰 갑옷-스노우가드에 깃들어 있다. 원혼만으로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될 수 없건만, 스노우가드가 혼을 담는 힘을 갖고 있었기에 원혼이 거기에 깃들여 무서운 파괴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스노우가드는 윈터러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 것, 내가 지금 겨울검을 새로이 벼릴 때 스노우가드에 남은 힘을 모조리 끊어버리면 스노우가드는 파괴되고, 네 형제의 혼은 그릇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그걸 할 수 있는 건 지금뿐인 것이지. 지금 네 형제는 마주치는 자를 단숨에 살해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지만 스노우가드의 힘을 잃으면 다시 평범한 영혼으로 변할 것이고, 그리한다면, 길어야 2, 3년 안에 영원한 휴식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야." 노인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어 말했다. “그러나 그 결과 너는 죽은 형제를 다시 만날 마지막 가능성을 잃게 된다. 비록 재갈로서의 힘은 잃었다 하나 스노우가드는 윈터러와 반응하는 물건, 만일 마주친다면 두 물건이 서로를 알아봄과 동시에 너희 둘도 서로의 존재를 깨닫게 될 것이야. 그래도 좋은가?” “,.” 예프넨에게 휴식을 주는 것, 예프넨을 다시 만나고픈 욕구, 둘 모두 크나큰 소원이었다. 입술을 깨물던 보리스는 조금 후 처연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영혼은 떠돌기보다는 휴식함이 옳을 것입니다,. 저의 욕망보다,. 그 쪽이 옳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마음이 너무도 쓰라렸지만, 보리스는 분명하게 말을맺고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다시 보리스의 손에 들어온 윈터러는 고귀한 자태로 차디차게 빛났다. 오래 전 예프넨의 손에서 처음 넘겨받았던 때와 똑같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지막으로 보리스는 조심스럽게 대장장이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이름이 없다. 다른 자들이 나를 ‘겨울 대장장이'라고 부를 뿐이다." ‘겨울 대장장이'가 반들반들한 얼음벽을 향해 손을 한 번 젓자, 마치 모루의 방이 나타날 때 그랬던 것처럼 순식간에 통로가 뚫렸다. 통로는 매우 길어 끝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보리스는 다시 한 번 인사하고, 그곳으로 들어갔다. 2장 , One Meets His Bestiny Often in the Road He takes to avoid it 1. 최초의 평화 통로를 감싸고 있던 얼음이 점차 엷어지면서 흙이 드러났다. 통로의 끝에 이르러 보리스는 문고리 같은 것을 만졌고, 그것을 비틀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밝다못해 희게까지 느껴지는 햇빛 아래 서 있는 것을 알았다. 파란 하늘을 가로지르며 솟은 것은, 수없이 많은 나선을 그리며 멀어지고 있는 흰 돌의 허공다리였다. 무너진 잎새 장식 기둥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다시 가나폴리의 수도, 아르카디아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이 아르카디아의 어디쯤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에피비오노를 따라 갔던 눈에 익숙한 건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늙은이의 우물이 있던 곳도 어딘지 찾을 길이 없었다. 보리스는 그가 방금 나온 문을 돌아보았다. 그건 폐허가 된 건물 속에 묻히다시피 한 낡은 문짝이었다. 다가가서 다시 만져보니 어이없게도 떨어져 바닥에 방치된 문이었다. 보리스는 문짝을 번쩍 들어올리고는 당황하여 헛웃음을 흘렸다. 오던 길로 돌아가는 것은 고사하고 문은 아무 데로도 통하지 않았다. 수많은 깨진 돌들과 함께 팽개쳐진 잔해에 불과했다. 보리스는 폐허에서 빠져나와 큰길로 나왔다. 에피비오노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정말로 그는 다시 나타나지 않을 셈인 걸까. 그와 헤어진 후 기껏 하룻밤 정도 여행한 것 같은 기분인데, 이곳의 시간도 마찬가지라면 아직 아르카디아에서 떠나지도 않았을 것 아닌가. 짧은 시간 같이 여행했을 뿐이지만 그의 유쾌한 목소리와 재미있는 관점을 가진 말투가 조금은 그리웠다. “이제 왔구나." 보리스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조금 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허공다리의 한 가지가 빙글빙글 돌며 바닥에 닿아 있는 조금 높은 위치에 익숙한 얼굴의 땋은 머리 소녀가 앉아 있었다. 부서진 난간 사이로 한쪽 발을 늘어뜨리고, 다른 쪽은 무릎을 세워 몸을 기댄 채 한참 전부터 보리스를 보고 있었던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거야?” “아주 오래 전부터," “왜 미리 부르지 않았어?” 힘든 여행을 끝낸-탓인지 어쩐지 반가운 마음이 든 보리스는 전보다 친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러나 나야트레이는 여전히 무감정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가 에피비오노를 찾는 것 같아서." 보리스는 조금 당황했다. 나야트레이는 가끔 사람의 마음을 읽는 듯한 때가 있었다. “물론 그를 찾았지만, 너도 찾고 있었어. 넌 어디에 있다가 온 거니? 그 이상한 곳에서 너를 꽤나 오랫동안 찾았었어." 그 때, 나야트레이가 앉은 허공다리 뒤쪽에서 낯선 짐승이 느리게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보리스가 경고하려는 순간, 나야트레이가 한 손을 내밀더니 짐승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자세히 보니 그건 조금 큰 고양이처럼 생긴, 별로 위협적이지 않은 동물이었다. 새끼 호랑이와 비슷하달까? 햇빛 탓인지 털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것이 보였다. “나도 널 찾았어." 나야트레이는 늘어뜨렸던 다리를 올렸다가 허공다리 아래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5미터는 되어 보이는 높이인데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 호랑이인지 고양이인지 모를 놈도 따라 뛰어내리더니 어슬렁거리며 나야트레이 뒤를 따라왔다. “새로운 친구를 얻었구나." “응." “그럼 갈까?” 에피비오노가 말했던 남동쪽광장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건 광장이라기보다 오래 전엔 잘 꾸며진 정원이 아니었을까 싶은 곳이었다. 중앙에 바짝 말라 갈라진 분수대가 서 있었고 그것을 중심으로 방사형 길이 여러 가닥 뻗은 것이 보였다. 길과 길 사이에는 바랜 돌들이 둘러져 그곳이 화단이었으리란 짐작을 가능케 했다. 물론 식물은 한 줄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클라자니냐에서 본 것과 같은 높다란 받침대는 광장 머리 쪽에 서 있었다. 둘은 광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화단 사잇길을 걸어 분수가 있는 중앙까지 가는 동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가장 먼저 들린 것은 물소리였다. 쏴아,. 한동안 뜨거운 땅을 걸었던 그들에겐 음악보다 아름다운 소리였다. 분수에서 물이 나오고 있었다. 3미터도 넘게 뻗은 가장 높은 물줄기,그걸 중심으로 좀더 낮은 물줄기들이 여섯 개, 나선을 그리며 솟아올랐다. 둘은 걸음을 멈췄다. 이 죽은 도시에서 인형들 외에 움직이는 것을 본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하얀 햇살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수 안에는 다섯 가지 빛깔을 내는 광원이 있어 차례로 빨강, 오렌지, 초록, 보라, 금빛으로 변했다. 분수 앞으로 다가가 들여다보니 깊이 파인 내부에서 수십 개의 작은 물줄기들이 꽃대처럼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꽃이 없는 화단에도 저절로 물이 뿌려지기 시작했다. 주위의 모든 화단이 하얗게 빛나는 물줄기로 가득 찼다. 뜻밖으로 나야트레이가 짧은 감탄사를 냈다. “와아,.” 왜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한 것인지 몰라도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잠시 머물렀을 뿐이라 해도 아르카디아 역시 사막 가운데 세워진 곳인 만큼 덥고 건조했다. 그런 곳에서 보는 물줄기는 감탄을 넘어 일종의 신비로움까지 느끼게 했다. 가장 높이 솟아오르는 물줄기를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보리스가 말했다. “사람이 찾아와야만 움직이는 걸까?” 나야트레이가 말했다. “너와 내 몸에 외부 세계의 마법이 묻어 와서, 마법으로 움직이는 것들이 반응하는 거야." 무슨 근거가 있는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보리스는 굳이 반박하지 않고 오랜만에 만난 시원한 물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 광경을 에피비오노가 보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가 사랑하던 왕국이 잠시라도 옛 모습을 찾은 걸 보았다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그러나 아름다운 유희는 오래 가지 않았다. 둘이 넋을 놓고 분수를 바라보는 가운데 점차 물줄기는 얕아지고, 잦아들고, 소리도 멎었다. 광채도 사라졌다. 보리스와 나야트레이가 볼 수 있었던 유일한 가나폴리의 마법은 다시 사라졌다. 남은 것은 분수대 속에 떨어져 남은 물, 그리고 두 사람의 얼굴과 팔에 튄 물방울들뿐이었다. “가자." 이번에 먼저 말한 것은 보리스였다. 둘은 곧 클라자니냐에서 본 것과 같은 거울 받침 앞으로 가 섰다. 하늘로 솟은 장식침을 말없이 올려다봤지만, 에피비오노가 없으니 찬트를 불러 줄 사람이 없었다. 보리스 역시 섬의 마법 그릇에 남기고 온 머리카락 때문에 함부로 찬트를 사용할 수는 없었다. 정말 생각만으로도 충분한 것일까?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무심코 말을 꺼내는 순간이었다. 가장 높이 솟은 장식침 쪽에서 거울을 녹인 듯 반들거리는 물이 흘러내려 순식간에 거울 모양으로 변했다. 클라자니냐에서 본 것과 꼭 같은 일렁이는 거울이었다. 갑자기 나야트레이가 말했다. “그럼 이제 헤어져야겠네." 가나폴리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는 이 거울들은 본래 가나폴리의 마법사들이 먼 곳으로 급히 여행할 때 사용하던 이동수단이었다고 에피비오노가 말해 준 일이 있었다. 보통은 한 거울에서 다른 거울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게 되어 있는데, 때로는 거울이 없는 곳으로 바로 갈 때도 있었다. 그것이 가능한 거울을 ‘소원 거울'이라고 했다. ‘소원거울’은 이동하고자 하는 사람이 머릿속에 떠올린 장소로 직접 보내주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예전에는 그 사용이 엄격히 통제되었다고 했다. 물론 이제 이곳에 거울을 지키는 사람들은 없었다. “어디로 갈 거니?” 나야트레이는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아노마라드." “아노마라드는 굉장히 넓어. 그 중 어디로 갈 건데?” “언니가 있는 곳." 나야트레이에게는 언니가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나야트레이가 한쪽 손을 가볍게 들어 보이며 거울 앞으로 다가섰다. 순식간이었다. 은발을 땋아 늘인 작은 소녀와 금빛 새끼 호랑이의 모습은 눈 앞에서 지워져버렸다. 이제 보리스의 차례였다.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은 어딘가 생각해 봤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섬으로도, 고향으로도 갈 수 없는 자신이었다. 그렇다고 나우플리온이 소개해 준 렘므 사람들을 이런 기회까지 이용해 가며 굳이 찾아갈 마음도 나지 않았다. 강요도 책임도 없었다.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어디에도 환영할 사람은 없었다. 역시 그가 가야만 하는 곳은 아무 데도 없는 걸까. 그 때 에피비오노가 목적지를 모르는 사람이 가야 할 곳을, 거울이 대신 알고 있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거울이 정말로 그걸 알고 있을까? 보리스는 아무 장소도 생각하지 않은 채 거울 앞으로 다가섰다. 신의 마음이 원하고 있는 장소는 어딜까. “맥주 가져와, 맥주!" “스튜는 도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아가씨? 시킨 지 반 시간은 된 것 같잖아!" “금방 나오니까 조금만요!" 소리가 먼저였다. 여러 사람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음이 귓가에 울렸다. 그리고 눈을 떴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분주한 주점 식당의 풍경이었다. 저녁 식사가 한창일 즈음인 모양이었다. 사내들이 테이블마다 둘러앉아 맥주잔을 기울이고 두어 명의 급사들이 바쁘게 뛰며 음식이며 술을 날랐지만 성질 급한 사람들의 불평은 어디서든 터져 나왔다. 문은 활짝 열려 있고 밖에는 여러 마리의 말들이 투레질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위층으로 오르는 계단참에서는 무언가 별 것 아닌 이야기를 목소리 높여 하는 사람들 때문에 악의 없는 소란이 빚어져 있었다. 그 가운데 자신은 구석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당연히 일행은 없었다. 눈을 몇 번 비벼 보았다. 이렇게 구체적인 장소로 옮겨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꽤 놀라 있었다. 게다가 이곳이 어디인지 단번에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사실은 와본 일이 있는 곳인지조차 애매했다. 어딘가 익숙한 점이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가 여행하면서 가본 여 관 겸 주점은 한두 군데가 아니었던 것이다. 날씨는 여전히 여름, 렘므식 말투는 들리지 않았고,. “자, 무얼 주문하시겠어요? 어머, 손님은 어디서 오셨기에 이렇게 먼지투성이가 되셨어요?” 쾌활한 여급의 목소리가 자신을 향한 것임을 깨달은 보리스는 자신이 망토 두건을 덮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조금 당황했다. 이랬으니 여급은 그의 얼굴을 충분히 잘 보았을 것이다. 이제 와서 새삼 두건을 쓰기도 뭣하여 보리스는 무엇이라도 주문하여 그녀를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여급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흠칫 놀랐다. 분명 어디선가 본 일이 있는 얼굴인데, 누구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에, 저,.” 그런데 여급도 마찬가지 감정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녀가 보리스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바람에 보리스는 허둥지둥 고개를 도로 숙이고는 급히 말했다. “매.... 맥주 주시지요." 주문을 받자 여급은 호기심을 접고 돌아섰다. 여급의 뒷모습 너머로 주방으로 통하는 문이 보였는데, 그 옆에 어디서 본 듯한 작은 문이 딸린 것이 눈에 띄었다. 마침 문이 열리고 손님에게 내주는 방이라기엔 지나치게 작은 그 방에서 열 살 남짓한 어린아이 하나가 나와 주방으로 들어갔다. “토냐?“ 저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이었다. 여급이 몸을 홱 돌려 경이로운 눈동자로 보리스를 보았다. “저, 그러니까, 그 때 부닌 아저씨네 대장간에서 일할 뻔했던 아이?” 토냐는 보리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보리스는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지금까지 ‘토냐’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둘은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토냐가 먼저 탄성을 터뜨렸다. “진짜 많이 자랐구나! 난 정말로 아닌 줄로만 알았어! 키도 커지고, 그새 어른이 다 된 것 같네?” 이럴 때 “누나도 많이 예뻐졌네요’ 같은 말을 생각해 낼 줄 모르는 보리스는 그저 미소만을 보였다. 정말로 그곳이었구나,. 황야를 헤매다 찾아든 그에게 처음으로 친절을 베풀어 준 토냐의 여관, 그러다가 벨노어 백작을 만나 그와 함께 가기로 결정한 후 부닌 아저씨한테 좀 전해 달라고 다시 한 번 찾아왔던 그 곳이었다. “조금만 있어 봐. 저쪽 주문 좀 받고 다시 올게. 아참, 너 저녁 먹었니?” 잘 아는 사이라고 할 순 없는데도 토냐는 몹시 반가운 모양이었다. 손님들 사이를 뚫고 가면서도 뒤돌아보며 ‘가지말고 기다려'하는 듯 한 손짓을 보냈다. 혼자 남은 보리스는 미소를 거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필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가 윌까? 어느새 기억 속에서 흐려져 버렸던 트라바체스, 어쩌면 위험할지도 모르는 이곳으로 그를 보낸 가나폴리의 거울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 무엇을 읽었던 걸까? 그나저나 마치, 시간이 흐르지 않은 듯한 기분이다,. 한참만에 다시 돌아온 토냐의 손에는 널찍한 쟁반이 들려 있었다. 쟁반 위에는 맥주 두 잔, 구운 닭다리, 찐 달걀, 수프, 호밀빵 따위가 올려져 있었다. 음식들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토냐는 의자를 끌어당겨 맞은편에 앉더니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참, 그 때 어느 외국 귀족님을 따라가게 됐다고 하지 않았어? 그 집에선 나온 거야?” 벨노어 백작의 양자가 되기로 했다는 말은 그 때도 안 했으니 이제 와서 새삼 할 필요는 없었다.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랬구나. 어디 보자, 그게 벌써 햇수로 5년이 됐네,. 참, 저녁 나랑 같이 먹어도 되지? 사실 나, 5년 전 그 때도 네가 저녁을 굶은 같아서 걱정했었단다. 오랜만에 보니까 제일 먼저 ‘저녁 먹었을까?’하는 생각이 떠오르지 뭐니. 호호호, 그래서 가져온 거니까 사양말고 먹어 돈은 남아돌면 주고, 아니면 안 줘도 돼."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따뜻하게 대해 주는 것은 예전과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토냐가 보기엔 보리스가 많이 컸다 해도 오래 전에 갈곳도 모른 채 헤매던 아이의 느낌이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도 고향은 역시 고향이구나, 하는 생각에 보리스는 수프를 뜨다가 조금 감상적인 기분이 되고 말았다. “그나저나 여긴 어떻게 다시 왔니?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거야?” 볼일이 있을 턱이 없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나가면 좋을까 궁금해졌다. 이런 곳에서 적당한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보리스는 열 두 살이었던 자신과 지금 자신이 똑같은 문제를 갖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바로 이 여관에 갈 곳 모르고 방황하던 보리스는 일자리를 찾으려 했고 그러다가 벨노어 백작을 만나 고민하다가 대장간 일을 버렸다. 갈림길에서 택한 한쪽 길, 그쪽 길을 충분히 가보았으니 이제 원점으로 돌아와 다시 선택을 해 보라는 것인가. 보리스는 수프를 먹다 말고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재미있는 생각이라도 났니?” 가나폴리의 거울이란 정말로 신기한 물건이었다. 이제 보리스는 그가 왜 이곳으로 왔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조차 모르는 마음을 알아보는 거울의 힘이란 것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후후훗, 아뇨. 저, 토냐 누나 그 때 대장간 하시던 분, 아직도 그 일 하시나요?” “부닌 아저씨 말이니? 물론이지. 그 분 생업인걸," “잘 됐네요. 이따 대장간 가는 길 좀 가르쳐 주시겠어요?” “그러자. 그런데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거야?” 한쪽 길을 택해 지나쳐 갔던 처음의 갈림길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거울은 그곳으로 그를 돌려보냈다. 그 때 택한 길에서 시작되었던 일은 이제 모두 일단락 되었다. 가지 못했던 새로운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좀 늦긴 했지만, 다시 저를 써주실 지 여쭤보려고요." 여름이 다 불탄 자리에 가을이 왔다. 그 사이 보리스는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 그의 생일을 아는 사람 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다른 날처럼 조용히 지나갔지만 그 편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보리스가 안드레아 부닌의 대장간에서 일하게 된 후 그새 넉 달이 흘렀다. 대장간 일은 이제 겨우 좀 익숙해졌다. 힘이나 체력 등에서 또래 소년들보다 월등한 그였지만, 화덕의 열기까지 더해진 한여름 더위와 싸우면서 집중력을 유지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았다. 조금만 흐트러지면 금방 어딘가를 다치게 되는 것이다. 부닌은 그를 꽤 사납게 가르쳤다. 어려운 일이든 쉬운 일이든 가리지 않고 맡겨서 몇 시간이 걸리든 반드시 다 해내게 했다. 그러나 일이 끝난 뒤에는 보람 있는 휴식이 찾아왔다. 저녁 무렵이면 부닌 아저씨와 함께 근처 시냇가로 가서 하루 동안 땀투성이가 된 옷을 빨고 목욕을 했다. 그러다가 흥이 나면 물장난도 쳤고, 잘 차린 것은 없어도 열심히 일했기에 더욱 흡족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바람을 쐬러 나와 별밤 구경도 했다. 사나흘에 한 번씩은 토냐의 여관에 가서 맥주를 들이키며 더위를 달랬다. 토냐가 직접 주방을 보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특별 안주도 나왔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부터 보리스는 부닌 아저씨와 막대를 들고 대결하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 이곳은 트라바체스였으니 혹시라도 자신을 노리는 자가 있을 지 몰라 검술 수련을 규칙적으로 하고 있었지만, 상대가 있는 쪽이 확실히 재미있었다. 부닌의 나이는 보리스의 세 배 이상이었지만 막대 대결에 있어서만은 보리스가 선생이었다. 처음에는 혹시 다치게 할세라 조심조심 했는데 요새는 부닌 쪽도 좀 늘어서 심하다간 한 대 얻어맞는 경우도 생겼다. “실은 젊었을 때 아노마라드 쪽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가한 일도 있었어. 그냥 잡병이었지만, 그래도 몇 해나 따라다녔으니 얻어 건진 요령은 좀 있었더랬지. 보는 눈도 생겼고. 그래서 그런지 네 실력이 범상하게 보이질 않아." 여름이 저물고 밀을 거둘 시기도 지났을 즈음, 그 날도 별을 보며 나와 앉아 있자니 부닌이 불쑥 그렇게 말했다. 대장간은 야트막한 언덕 꼭대기에 있어서 별을 보기에 좋았다. 보리스는 평소 버릇대로 그냥 웃기만 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아노마라드에 가서 검술 학교라도 들어갔었나? 널 처음 보았을 땐 정말 앳된 꼬마였는데 세월이 바꿔놔도 너무 바꿔 놨단 말이야. 그 시절을 모르고 이제 널 봤더라면 지금처럼 지내긴 힘들었을 거야. 아닌게 아니라 여름 초에 토냐가 널 데려와서 그 때 그 애라고 했을 땐 어디 가서 뱃놈질이라도 몇 년 하다 온 게 아닐까 싶었거든." 배를 타다 왔다라, 그것 참 적절한 지적이었다 섬사람은 모두 뱃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보리스가 여전히 미소만 짓자 부닌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참 말이 없어. 열 다섯 먹은 녀석답게 좀 떠드는 것도 괜찮을 텐데. 친구도 좀 사귀고. 열 여섯 되려면 이제 얼마나 남은 거냐?” 올해도 몇 달 남지 않은 터라 문득 생각난 모양이었다. 보리스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미 열 여섯인데요." “뭐야? 이 녀석이, 그럼 생일인데 말도 안하고 넘어갔단 말이구나!" 예상대로 대뜸 한 대 쥐어 박혔다. 부닌은 대장장이답게 손 쓰는 것이 거칠었으나 보리스는 별로 싫게 생각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금과 같은 행동은 나우플리온과 지내던 때를 떠올리게 했다. 씁쓸하기도 하고, 그립기도 해서 보리스는 고개를 흔들며 다른 화제를 꺼냈다. “아저씨 생신은 언제인데요?” “몰라. 가족들이 죽은 후로는 희미해져서, 잘 생각이 안 나." 부닌은 오래 전 트라바체스 남부에 퍼졌던 돌림병으로 부인과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렸다고 토냐가 말해 준 일이 있었다. 아마 그러고서 마음이 허해져 전쟁 같은 곳에 나갔을 것이다. “실은 너도 그 동안 안 좋은 일을 많이 겪었던 것일 테지,. 안 그러냐?그 때 네 녀석도 열 둘 먹은 어린애의 눈은 아니었지만, 지금 역시 열 여섯 짜리의 얼굴은 절대 아니야. 그렇지만 내 굳이 물을 맘씨까진 없다. 훌훌 털기로 했으면 이번에야말로 오래오래 시골에 묻혀서 살아봐." “예. 그럴 생각이에요." 몇 년이 될 지는 몰랐다. 때로는 이대로 영영 숨어 지낼 수 있다면 그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전처럼 도피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지금처럼, 단순하고도 보람 있는 일상을 보내다 보면 상처 많고 거칠어진 그의 마음도 어쩐지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때로는 처음부터 벨노어 백작을 따라가지 않고 대장장이 조수가 되었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 같아서는 그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을 것 같았다. 남은 해가 순식간에 흘러갔다. 짧은 가을을 건너 긴 겨울을 나고 섬을 떠나 처음 맞는 봄이 왔다. (시입니다.) 몇 번이고 바다에 나갔지만 / 동전 몇 개도 남기지 못했네 / 젖은 비스킷 질리도록 먹고 / 굵어진 잔뼈뿐인 늦은 청춘 /(한줄을 띕니다.) 오늘은 낯선 항구를 걸어봤지 / 붉어진 바닷가 모퉁이 선술집 / 누군가가 리라를 타고 있구나 / 냠펀 잃은 늙은 여자인가 / 난 공허한 눈으로 들어갔었네 / 아무런 기대도 없이,.(시끝남) 4월 즈음부터 그와레 성은 크게 활기를 띠었다. 봄 축제를 앞두고 근처 마을들이 돌아가며 대목장을 여는 시기가 돌아온 것이다. 보리스는 토냐네 여관이 바쁠 즈음 종종 가서 바깥일을 도와주곤 했는데 그 날도 그 사내가 와서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노래가사입니다.) 빛나는 여신 앞에서 정신 잃고서 / 평생 처음으로 더듬거리며 말했네 / 시름이 있어 슬픈 곡조를 타오? / 깎다 만 생선뼈뿐인 빈손 청춘이지만 / (한줄을 띕니다.) 못난 선원놈 이야기도 들어보오 / 길곱 바다의 보물과 빛나는 금화 / 집채만한 문어 얘기도 들어보오 / 물론 그 모든 것은 거짓말이지만 / (한줄을 띕니다.) 위로가 된다면 무슨 말이든 하리 / 아무런 사심도 없이,. (노래끝남.) 장작을 옮기고 있던 보리스는 사내에게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돌리며 피식 웃었다. 노래하는 사내는 남쪽 어느 항구 출신이라는 젊은 등짐 상인인데 웬일인지 한 달이 되도록 사들일 것도 없는 작은 성 그레에서 떠날 생각을 않고 있었다. 보리스는 이미 그가 토냐의 관심을 끌려고 사흘이 멀다하고 와서 갖은 노래를 다 불러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은 보리스뿐 아니고 여관에 드나드는 사람들이라면 거의 다 눈치채고 있었다. 사내는 키가 작고 얼굴이 가무잡잡했지만 영리한 눈매에 묘한 순함마저 갖고 있어서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게다가 노래도 꽤 잘 했다. 토냐는 시치미를 떼고 모르는 체 했지만 사내가 그리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며칠 전에 듣자니 부닌 아저씨가 심심해서 여관 주인인 토냐 아버지 의향도 떠본 모양인데 아무래도 곧 경사가 있을 것 같다는 전언이었다. “아, 가져왔니?” 다 팬 장작을 부엌에 가져다주자 토냐가 냉큼 받으면서 뒤꼍 쪽을 흘끗거렸다. 노랫소리가 멈췄으니 갔는가 궁금해서 그러는 것일 터였다. 보리스가 싱긋 웃자 토냐는 자신의 행동을 들킨 것이 무안하여 얼굴을 붉히며 다른 얘기를 꺼냈다. “사흘 뒤에 대목장 열릴 때 큰 경매가 있을 거란 이야기 들었어? 값진 골동품이 몇 개 있어서 그런지 아노마라드에서도 손님들이 여럿 왔다더라. 너도 구경 갈 거니?” “아저씨께서 대장간 낮일만 끝내고 가자고 하시던걸요." 보리스가 대장간 조수가 된 지도 벌써 열 달이 흘렀다. 토냐의 여관이나 부닌의 대장간에 드나드는 그와레 사람들도 이젠 말수 적고 성실한 대장간 조수 소년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오오, 다행이구나. 너희 또래 애들은 누구나 대목장을 기다리지만 요번에는 너 때문에 기다린 애들도 많을걸." 토냐가 눈을 찡긋거렸지만 농담을 눈치채지 못한 보리스는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저를 기다린다는 건가요?” “점잔만 빼는 너 때문에 속 태우는 계집애들이지 누구긴 누구겠어? 대목장쯤 되면 계집애들도 용기를 내서 목석 같은 사내애한테 말도 걸어 보고 그러는 거지." “누가 저 때문에 속을 태운다고 그래요?” “생각보다 꽤 많단다. 오오, 계집애들이 멀리 가지도 못하고 맴돌거든 가능한 한 골고루 기회를 주렴. 잘생겼다고 소문난 대장간 조수님, 네 긴 머리카락을 보면 누나도 마음이 두근두근한단다." ”,.놀리려고 그러는 것 다 알고 있어요." 그 무렵 보리스의 머리카락은 등을 다 덮을 정도로 자라 끈으로 헐렁하게 묶고 다녔다. 토냐는 여관 일을 오래 한 쾌활한 아가씨답게 말씨가 짓궂었고, 보리스를 놀리는 것도 꽤 좋아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토냐 주위를 맴도는 젊은 상인 이야기로 대번에 반격했을 텐데, 보리스는 그냥 그 자리를 피하는 것으로 상창을 해결하려 했다. 뒤꼍으로 가는 문을 밀고 나가는데 등 뒤에서 토냐가 까르르 웃으며 소리쳤다. “그러니까 내가 전에 말했잖아, 귀찮은 일 안 만들려면 머리 좀 짧게 자르라고!" 근처 마을에서 연속으로 열린 대목장 때문인지 확실히 오늘은 새로 들어온 손님이 많았다. 바쁠 듯하니 일을 좀더 보아줄까 싶어 뒤꼍을 가로질러 마구간 쪽으로 갔을 때였다. 바삐 길을 가던 한 남자가 보리스의 모습을 보고 놀란 듯 우뚝 멈추어 섰다. 보리스는 눈치채지 못한 채 건초를 한 아름 안고 마구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남자는 방향을 바꾸어 여관으로 들어왔고, 마침 밖으로 나온 급사 한 사람을 붙들고 보리스 쪽을 손가락질하며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대목장이 다음날로 다가오자 손님은 한층 더 많아졌다. 그 날도 일을 돕다 보니 점심 식사도 여관에서 했고, 대장간으로 돌아온 것은 거의 3시가 다 될 즈음이었다. 토냐가 챙겨준 식료품을 한 아름 안고 언덕을 올라와 보니, 고급스런 마차와 낯선 사람 몇 명이 대장간 앞에서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보였다. 그 중 볼일이 있어 보이는 사람은 한 눈에 봐도 부잣집 마님이 아닌가 생각되는 화려한 복장의 중년 여인이었다. 부닌 아저씨는 잠시 자리를 비웠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제야 누가 오는구나 네가 여기 조수라는 애니? 뭘 좀 고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주인은 어디로 갔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보리스는 이 부인이 부자이긴 해도 귀족은 아니리라고 판단했다. 뒤에 하인들이 있건만 이 부인은 당연한 것처럼 자신이 나서서 말을 걸고 있었다. “주인 아저씨께선 잠시 자리를 비우셨나 봅니다. 고칠 물건은 뭔가요?” “요런 것도 고칠 수 있는가 모르겠다. 좀 작은 거라서,.” 뒤에서 하인이 상자를 가져왔고, 곧 보리스의 손에 건네졌다. 보석따위를 넣는 것인 듯, 세공이 많이 된 상자 안에는 엄지손가락 굵기의 흑진주가 스무 개 가량이나 꿰어진 값진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좀더 자세히 보니 목걸이줄 끝의 걸쇠가 떨어져 나가 걸 수가 없게 된 모양이었다. 이런 것은 세공사에게나 가져가야겠지만, 이곳은 외지이고 해서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저씨가 돌아오셔야 대답을 드릴 수 있겠군요. 혹시 시간이 있으시면 조금 더 기다리시는 게 좋겠어요." “이런, 안 되는데. 지금도 잠깐 빠져나온 건데 이미 늦었어. 게다가 목걸이는 내일 당장 필요한 거란다. 그러지 말고 네가 목걸이를 갖고 있다가 아저씨한테 보여주고, 만일 안 된다면 내게 다시 가져다 줄 수 없을까? 심부름 값은 줄 테니까 말이야." 차림새를 보아 분명 아노마라드에서 온 사람일 거라고 짐작했는데, 귀족들처럼 막무가내로 자기 입장만 강요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비교적 합리적인 방법이라 보리스는 조금 생각하다가 수락했다. “그러시지요." 부인은 자신이 묵고 있는 여관의 이름을 말해 주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부닌은 저녁이 다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이 정도로 오지 않고 있으니 그 부인은 분명 고쳐서 가져다 줄 거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아저씨를 찾으러 가려 해도 이렇게 값비싼 물건을 집 안에 놓아두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잃어버리기라도 했다가는 갚을 길도 없을 것이다. 저녁식사 시간도 훌쩍 지났을 즈음, 보리스는 결국 자신이 도로 가져다주는 수밖에 없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가다가 토냐의 여관에 들러 부닌 아저씨에 대한 것도 물어보자고 생각했다. 언덕을 내려가다가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부인은 무얼 믿고 자신에게 이런 값비싼 물건을 맡겼을까. 분명 외지에서 온 사람이 틀림없는데 오자마자 자신에게 ‘네가 여기 조수라는 애니'라고 물은 것도 이상했다. 그와레에서 열 달 동안 살았지만 가능한 한 조용히 살아온 터인데, 어떻게 외지인이 그의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단 말인가. 토냐의 여관에서는 아저씨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부인이 묵고 있다는 여관으로 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와레에서 가장 비싼 여관 ‘사프란 대문'은 오래 전 벨노어 백작과 로즈니스가 묵었던 곳이기도 했다. 여관 입구를 올려다보니 오랜만에 감회가 새로웠다. “롤리아니 부인께 심부름이 있어서 왔습니다." 여관 주인이 확인하려고 급사를 올려보내자 곧 심부름꾼이 내려와 올라오라고 전해 주었다. 뒤따라올라가니 방조차도 벨노어 백작이 정신을 잃은 그를 데려왔던 바로 그 곳이었다. 묘한 우연이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아니면 이 방이 여관 안에서 제일 좋은 방이고, 그들 모두는 부자이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심부름꾼이 문을 열고 들어간 뒤 막 뒤따라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싸악!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울린 것과 동시에, 보리스의 손은 벌써 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열 달 동안 사람을 상대로 휘둘러 본 일이 없는 검, 그러나 꾸준히 수련하여 감각만은 그대로 살아 있었다. 정면으로 내리쳐져 온 검을 정확히 막으며 밀쳐냈다 곧장 연속 공격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그는 이상한 것을 느끼고 자세를 방어로 바꾸었다. 공격해온 검에 날이 없었다. 연습용 검이었다. 보리스는 검을 내리친 상대가 노련해 보이는 검사인 것을 보고 대뜸 물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해칠 마음은 없었다. 용서해라." 주위에 무기를 빼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검사도 곧 검을 내렸고, 방 안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우승자라 하더니 과연 놀랍습니다. 노련한 용병들 못지 않게 빈틈 없는 솜씹니다." 팔걸이 의자에 기대앉아 그를 보고 있는 사람은 목걸이의 주인인 롤리아니 부인이었다. 그녀는 기쁜 듯 미소를 띠더니 말했다. “우선 너를 시험한 걸 사과해야겠구나, 하지만 다치게 할 마음은 없었다는 걸 알겠지? 지난 실버스컬(Silver Skuii) 우승자인 보리스 미스트리에, 그게 네 이름일 거야.실버스컬을 구경했던 하인 하나가 네 얼굴을 알아봐서 바로 내게 알려 줬단다." 이런 식으로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기에 보리스는 난감해졌다. 부인이 말을 이었다. ”네게 좋은 제안이 있어서 무리인 줄 알면서도 이런 일을 하게 됐구나. 아아, 먼저 내가 누구인지부터 말해야겠지. 나는 롤리아니 칼츠, 칼츠 상단의 안주인이란다." 칼츠 상단? 너무도 유명한 이름이었기에 오히려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잠깐만에 곧 깨달았다. 아노마라드 제일의 상인인 드메린 칼츠라면 그도 직접 본 일이 있는 사람 아닌가? 그렇다면 저 부인은 드메린 칼츠의 부인이란 건가? “,무슨 용건이십니까." 분명 이 부인은 두 가지로 그를 시험했다. 하나는 검술 실력일 테고, 또 하나는 일부러 값비싼 목걸이를 맡긴 일일 것이다. 그런 식의 시험이 간단하고 효과적이긴 할 테지만, 불시에 시험 당한 입장에서는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상대가 무지막지한 부와 권력의 소유자라는 걸 안 이상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버티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최근의 조용한 생활이 마음에 든 보리스는 사소한 일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부인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너를 고용하거나, 또는 후원자가 되고 싶단다. 어느 쪽이든 원하는 방향으로 선택하면 되는 거야, 내게는 바로 네 또래의 아들이 하나 있는데 굉장한 말썽 덩어리지. 그 애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 줄 친구가 되어 주었으면 한단다." 천만뜻밖의 이야기였다.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올렸다. “호위 검사를 고용한다고 생각하면 간단하겠지만, 사실 내가 원하는 건 조금 달라. 그 애는 형제도 없고, 너무 귀하게 자란 탓인지 마음을 터놓을 친구도 없어서 앞으로 어찌될지 참 걱정이란다. 최근엔 안 좋은 버릇도 생겼고, 그러니 네가 친구도 되어 주고 때로는 선생님처럼 혼도 내주고 하면서 지내 줬으면 해. 저택에 와준다면 나와 남편도 너를 고용인이 아니라 아들 친구답게 대할 생각이야. 물론 돈이라면 원하는 대로 줄 것이고, 그 밖의 모든 생활도 우리 쪽에서 책임질테니 너는 몸만 와주면 된단다. 자, 어떻게 생각해?” 롤리아니 칼츠 부인은 막대한 지위에 비해 말씨나 태도가 상냥스럽고 솔직해서 예전 벨노어 백작부인처럼 불쾌한 사람은 아니었다. 시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상황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러나 그녀의 제안은 처음부터 안될 말이었다. “친질한 제안은 고맙습니다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내키지 않습니다." 너무나 빨리, 그것도 딱 잘라 끊는 대답이 나오자 칼츠 부인은 좀 당황했다. 이처럼 좋은 제안을 재고의 여지도 없이 거절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왜지? 무슨 다른 문제라도?” 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그냥 대장장이 일 쪽이 더 마음이 들기 때문이죠." 그렇게 말하며 검을 거둔 보리스는 몇 걸음 다가가 목걸이 상자를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본래부터 이것이 목적은 아니셨던 것 같지만, 어찌됐든 고치지 못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칼츠 부인이 입을 열지 못하는 사이, 보리스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방에서 물러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며 그는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같은 여관의 똑같은 방에서 몇 년 전 받았던 제안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가 한 선택은 그 때와 반대였다. 이젠 그때와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이 묘한 대조를 이루마음 속에 인상을 남겼다. 2. A winter Meets a Spring 대목장은 점심 이후부터 크게 붐볐다. 보리스는 어느새 인파 틈에서 부닌 아저씨를 잃어버렸다. 잃어버렸다고 미아가 될 건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보리스는 그냥 혼자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활기를 구경했다. 과거 화려하고 귀한 것을 많이 봐오기도 했고, 본래 욕심도 없는 터라 장에 나온 물건들에는 별 관심이 가지 않았다. 다만 웃고 떠드는 사람들만이 그의 관심사가 되었다. 모두가 행복해 보인다,. 어머니 손을 잡고 나온 꼬마들도, 한껏 예쁜 드레스로 멋을 낸 소녀들도, 벌써 술이 얼근하게 올라 어깨동무를 하고 돌아다니는 동네 사람들도 근심이라고는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물론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겠지만, 이런 날에는 잠시 잊어도 좋은 것이다. 그런 모습이 얼마나 좋은가,.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한가롭고 단란한 일상을 이젠 전처럼 까마득히 먼 이야기로 생각하지 않고, 그저 주위의 풍경으로 느낄 수 있게 된 자신이 조금은 신기했다. 토냐의 이야기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그녀가 자신에게 말을 건 것도 이것으로 세 번째였다. 아직은 친분 없는 사람 앞에서 짓는 미소가 어색하여 편하게 대답해주지 못한 것이 약간 미안했다. 토냐의 말대로라면 그녀들도 나름대로 용기를 낸 것 일 텐데. 그러나 대목장의 풍경 속에 달의 섬에서 마지막으로 지낸 봄 축제의 모습이 겹쳐지고, 금발 소녀라도 보일라치면 단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만은 어쩌지 못했다. 물론 그 사람처럼 짧은 머리를 한 소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벌써 1년이 흘렀으나 조금도 흐려지지 않는 기억 속의 소녀도 다가오는 21일에는 스무 살 아가씨가 될 거란 생각하자 새삼 모든 것이 아쉬워졌다. 다시 가볼 수 없는 곳에서 그녀는 점점 어른이 되고, 그도 어른이 되겠지. “여기 있었군! 한참이나 찾았다!" 덥석 팔을 잡는 바람에 놀랐지만 부닌 아저씨였다. 예상대로 그는 벌써 어디서 술을 몇 잔 얻어 마신 모습이었다. “얼른 가자! 경매 시작된단다! 벌써 좋은 자리는 다 놓쳤겠는걸!" 굳이 구경할 필요가 없던 야외 경매 장소에 가게 된 것은 순전히 부닌 아저씨의 술기운 탓이었다. 이미 경매는 시작되어 있었다 초반인지라 소박한 물건들이 주로 나왔다. 대목장의 경매는 물건을 팔기보다는 본디 구경거리가 목적이었으므로 방식이 좀 특이했다. 물건을 팔고 싶은 사람이 직접 나와 자기 물건을 경매에 붙이는데, 경매사가 안내를 하면 구경하러 모인 사람들 중 아무나 가격을 불렀다. 물론 최종 가격을 불러 놓고 꽁무니를 뺄 방법은 없었으므로 섣불리 끼여들 수는 없었지만, 덕택에 분위기는 쾌 소란스러웠다. 네 번째로 물건을 갖고 나온 사람은 직업적으로 골동품을 모으는 늙은 상인인 듯했다. 시작 가격 자체가 매우 높은 대신 볼만한 물건도 많아서 저절로 주위가 조용해지며 관심이 쏠렸다. 물론 물건들은 하나 둘 부자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팔려나갔다. 보리스는 칼츠 부인이 왔는가 궁금해져서 경매장 안쪽까지 걸어갔다. 마침 늙은 상인이 새로운물건을 꺼낸 시점이었다. 경매사가손나팔을 하고 외치기 시작했다. “자, 이것은! 고상한 장식이 아주 인상적인, 부인네들의 필수품 되겠습니다! 그야말로 궁정에서나 쓸 법한, 덮개 달린 거울입니다! 엄지손톱보다 큰 사파이어가 박혀 있는데 그야말로 진품이지요, 보석 가격만 해도 1천 엘소가 넘을 물건입니다. 완전히 새 것이나 다름없는 그런 물건을 살 사람은 몇 명 없었기 때문에 경매사의 외침은 구경꾼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었다 보리스는 사람들 틈에서 칼츠 부인을 발견했다. 그녀는 하인들을 다섯 명이나 이끌고 와 있었다. ”,.한 것이니 약소하게 4천 엘소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부인의 모습을 보고 나니 오히려 눈에 띄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되었다. 돌아서려던 보리스는 얼결에 경매사가 하얀 천으로 덮은 테이블에 올려놓은 물건을 보고 말았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저것은 예프넨이 갖고 다니던 어머니의 유품이 아닌가! “4천 1백 " 바로 옆에서 가격을 부르는 어떤 젊은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서 저것이 저기에 있는 거지? 혹시라도 다른 물건인가 싶어 사람들을 혜치고 맨 앞줄까지 가서 보았지만 틀림없는 예프넨의 물건이었다. 그가 잘못 볼 리가 없었다. “여기 4천 1백 50엘소." 물건이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난 보리스는 거의 판단력을 상실할 지경이었다. 저것이 어떤 물건이었던가. 예프넨이 단 하나뿐인 어머니의 추억으로 소중히 간직하다가, 죽기 직전에 동생을 위해 살을 도려내는 심정으로 팔았던 물건이다. 틀림없이, 그 물건이다. 자세히 보면 볼수록 그 시절의 아픈 기억이 송두리째 되살아나 그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몇 달 동안의 작은 행복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흡사 죽은 형이 다시 살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저것을 되찾아야 했다. 또다시 남의 손에 들어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아아, 저것을 되찾는다면 죽은 예프넨이 얼마나 기뻐할 것인가. “4천 5백." 넋을 놓고 바라보는 사이 어느새 가격이 올라 있었다. 4천 5백이 불러지고 나서 한동안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 보리스는 거의 미 칠 듯한 심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단숨에 높은 가격을 부르고 사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돈이 부족했다. 그에게는 단돈 5백 엘소도 없었다. 4천 엘소나 되는 큰 현금은 아마 부닌 아저씨도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볼 때 덮개 거울을 사들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팔때는 고작 3백 엘소였던 물건이 사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값이 올라 있었다. 그 때의 그들이 얼마나 시세를 몰랐던가 하는 것도 실감이 났다. 불가능하다고 생각될수록 고통은 커져갔다. 우연으로라도 다시 못 보겠지 싶었던 물건을 발견했는데 당장 사들일 수 없는 자신이 죽고 싶을 정도로 원망스러웠다. 이 정도로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본 일은 평생 한 번도 없었을 정도였다. 그때였다. “저희 마님께서 얘기하고 싶어하십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칼츠 부인이 보낸 것이 틀림없는 하인이었다. 보리스는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경황이 아니었다. 그러자 하인이 다시 말했다. “마님께서는 혹시 지금 경매되는 저 물건에 관심이 있으신가 궁금해하십니다." 얼른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 때 낯선 사람이 보리스와 이야기하는 것을 이상하게 본 부닌 아저씨가 가까이 왔다. “무슨 일이냐?” 그 때 하인도 다시 한 번 말했다. “관심이 없으십니까?” 그 순간 텅 비어버린 머릿속에서 갑자기 한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다른 문제는 다 잊어버린 보리스가 급히 물었다. “관심 있습니다. 데려가 주세요." 부닌 아저씨에게 상황을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덮개 거울의 가격은 이미 충분히 높아졌고, 이제 낙찰자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조금 후 거의 마지막이리라고 생각되는 가격이 불려졌다. “4천 6백." 보리스는 칼츠 부인 앞으로 갔다. 부인은 소녀처럼 생기 있는 미소로 보리스를 맞았다. “저걸 갖고 싶니? 내가 사줄 수 있어." “그 대신 제가 함께 가기를 원하십니까?” “물론이야." 그 순간의 보리스는 예프넨의 물건을 손에 넣기 위해 영혼이라도 팔아 넘길 지경이었다. 자유를 파는 것쯤, 못할 것도 없었다. 결정이 내려졌다. “그렇게 합시다." 칼츠부인이 경매사를 향해 손을 들었다. 그녀의 입에서 거침없이 가격이 튀어나왔다. “6천. 이걸로 끝이겠죠?” 부닌은 보리스의 갑작스런 얘기가 처음엔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대목장의 기분 좋은 술은 이제 다 깨버렸다. 그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정말로, 간단 말이냐." “,." 보리스에게도 많은 회한이 남았던 결정이었다. 비록 결정하던 순간에는 망설일 정신조차 갖지 못했지만, 그와레에 남겨두고 가는 아쉬움도 컸다. 열 달 동안 익숙해졌던 조용한 생활을 이런 식으로 접게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네가 좀더 오래오래 있어줬으면 했는데,." “저도 그릴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닌은 보리스가 그런 결정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몇 천 엘소라는 돈은 그 역시 대장간이라도 팔지 않는 한 손에 쥐지 못할 거금이었다. 하나뿐인 가족의 유품이라는데, 그걸 가지겠다는 것을 어찌 탓하겠느냐고 말했다. 가족을 잃은 사람으로서 둘은 동병상련의 심정을 느끼고 있었다. 조금 후 부닌은 예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다. 사실 네가 이곳에 이만큼이나 머물렀다는 것이 도리어 특별한 일이었던 건지도 몰라. 처음 봤을 때부터 이런 시골에서 조용히 살아갈 만한 녀석 같지 않았거든. 좋은 곳으로 간다니 내 마음도 좋구나. 가서 안부 전해라. 상창이 달라지거든 언제든지 돌아와도 좋다는 건 알고 있지?” 출발은 당장 내일 아침이었다. 그 날 저녁 보리스는 가진 돈을 대부분 털어 비단 장갑을 한 켤레 사서는 토냐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토냐 역시 갑작스런 결정에 당혹을 금치 못하는 얼굴이었다. 보리스는 선물을 내놓으며 말했다. “혼인 잔치 하시게 되면 꼭 부르세요." 어색한 미소밖에 보일 것이 없었다. 처음 왔던 때처럼 갑작스럽게 그렇게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토냐는 눈물이 나는지 제대로 된 인사말도 해주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5년 전에 그랬듯 보리스는 다시 한 번 아노마라드로 가는 낯선 사람들의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럼 내가 가르쳐 줄까?” "아니. 관심 없어." 하얀 돌로만 지어진 환한 테라스에 늦봄의 햇살이 반짝였다. 바닥에는 청색과 백색의 관상용 돌멩이가 죽 깔렸고 난간 쪽에는 크고 길쭉한 잎을 가진 녹색식물이 심어져 그늘을 이루었다. 일반적 저택의 방 하나에 맞먹을 정도로 넓은 까닭에 하얀 테이블 주위에는 의자가 다섯 개나 나와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라고는 하인 하나와 두 소년이었다. 테이블에는 색색빛깔 과일에 건포도를 넣어 구운 과자며 달콤한 푸딩 따위가 그릇이며 접시마다 가득했다 꽃무의가 든 찻주전자에서 약한 김이 올랐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손댄 기색이 없었다. “파티도 싫고, 시장 구경도 그저 그렇고, 인형극 구경도 시들하고, 맛있는 것도 찾지 않고, 마법에도 관심 없고, 카드놀이도 모르고, 도대체 좋아하는 게 뭐니?” “별로." 루시안 칼츠는 ‘뭐 이런 일이 다 있지'하는 표정으로 양손을 펼쳐 올리며 잔뜩 쳐든 턱을 한 바퀴 돌렸다. 어머니인 칼츠 부인이 보리스를 붙여 준 이유를 모르는 루시안은 어머니가 또래 친구를 데려왔다고 했을 때 어떤 녀석일까 하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이렇게 재미없는 녀석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실버스컬에서 우승하는 걸 봤을 땐 멋있어 보였지만 같이 놀기엔 영,. “아참, 그렇지! 넌 실버스컬 우승자잖아! 검술이라면 분명 좋아하겠지?” 좀 떨어진 곳에서 테라스 난간에 기댄 채 바깥 풍경을 보고 있던 보리스가 루시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야말로 보리스의 관심을 끌었구나 하는 생각에 루시안은 신이 나서 눈을 반짝였다. “나도 옛날에 좀 배웠거든? 그럼 우리 대련할까? 응?” 보리스는 루시안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쪽 입술을 올리며 미소했다. 수락한다는 의미였다. “좋았어! 그럼 좀만 기다려. 야, 바나나! 가서 검술 연습장 치워놨냐고 물어봐, 얼른!" 루시안은 분주히 하인을 떠밀다가 무심코 과자도 한 개 집어먹고, 다시 떠들다가 목에 걸려서 기침도 하고, 과자를 녹이려고 차를 따라 마시다가 뜨겁다고 비명도 지르고, 그러다가 갑자기 검술 연습에 맞는 옷으로 갈아입어야겠다고 생각해 내고는 저택 안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그런 루시안을 보고 있던 보리스는 입끝을 점차 많이 올렸고, 모두가 사라졌을 즈음 드디어 웃음을 터뜨렸다.”하하하하,.” 웃음소리를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뭇가지의 새들만이 푸드덕 날아갈 뿐이었다. 아노마라드 남부의 한 전원에 위치한 드메린 칼츠의 대저택에 온지 어느덧 닷새가 흘렀다. 고풍스런 벨노어 성과는 달리 실용성과 아름다움, 그리고 최신식을 강조하여 지은 이 대저택은 놀랍게도 대부분 1층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위층이 있는 것은 중앙에 쌓은 4층뿐이었고, 그 탑을 중심으로 1층뿐인 건물들이 미로에 가까울 정도로 넓게 이어져 있었다. 보리스도 이 집의 구조에 익숙해지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익숙해지기 힘들었던 것은 루시안 녀석의 성격이었다. 보리스는 이미 루시안을 두 차례에 걸쳐 만난 일이 있었다. 한번은 렘므로 넘어가기 위해 로젠버그 관문으로 가던 길목에서, 또 한번은 물론 실버스컬 대회장에서였다. 대강 무책임할 정도로 발랄하고 생기 넘치는 녀석이란 것은 짐작했는데, 직접 대해보니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 무모함도, 넘쳐흐르는 활기도 보리스의 상상 이상이었다. 상상 이상이란 좋은 의미가 아니고, 감당하기 힘들 지경이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조금 거리를 두며 자신이 말려들지 않도록 조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볼수록 재미있었다. 이곳은 루시안의 집이고 보리스는 일의 고용인이니 권위를 세우려면 그것도 가능하고, 명령조로 자기식에 따라오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루시안은 그런 방법을 몰랐다. 오히려 손님이라도 부른 것처럼 자기 쪽에서 재미있게 해주려고 굉장히 머리를 쓰고 있었다. 예전 보리스와 란지에의 관계와는 전혀 달랐다. 아니, 그런 식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해도 보통 자신과 정반대로 보이는 상대를 만나면 와락 뛰어들기보다는 물러서서 떠보려고 하기 마련인데, 이 녀석은 물이 차가운지 뜨거운지 알아보지도 않고 첨벙 뛰어드는 개구쟁이처럼 모든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구김살 없는 성격이라고는 해도, 실은 조금 지나치다. 나쁜 의미에서 지나친 것이 아니라 이처럼 큰 부자의 집에서 외아들로 귀하게 자란 아이치고는 조금 이상한 성격이라 할만했다. 그렇게 죽 생각하던 보리스는 자신이 왜 저 녀석의 일에 이렇게 마음쓰는거지,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얏, 찾아냈어! 자 보라고. 이건 레이피어(rapier)야. 너도 알지? 나 이거 어렸을 때 꽤 오랫동안 좋아했는데 요샌 잊고 있었거든?.” 옷을 갈아입고 달려온 루시안이 보인 검은 날이 매우 가늘고 끝이 뽀족한 가벼운 검으로 사실 보리스의 검과 맞대련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이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순순히 응하여 함께 검술 연습장이란 곳으로 갔다. 복잡한 복도와 방을 여러 개 지나 남쪽 건물들 쪽으로 가서야 겨우 천장이 환하게 뚫린 널찍한 방에 이를 수 있었다. 한쪽 벽을 보니 연습용 검이 여러 개 걸린 것이 보였다. 그 중에 루시안의 것과 비슷한 것을 하나 골라잡았다. “어라? 네가 쓰던 검은?” “네 검과는 격이 맞지 않으니까 시작할까." 일부러 날이 무딘 것으로 골라잡은 보람이 있었다. 루시안은 오랫동안 검을 잡지 않은 것인지 동작부터 서툴러져있어 금방 실수를 연발했다. 보리스의 검이 루시안의 팔에 가볍게 몇 번 명중했지만 상처는 전혀 나지 않았다. “에이 나도 예전엔 잘했는데! 나도 다시 검술 배운다고 해야겠다. 바나나! 가서 선생님 좀 구해달라고 아버지한테 말씀드려 둘래?” 루시안에게 ‘바나나'라고 불리지만 본명은 ‘바나다'인 하인은 옆에서 하품을 하며 대꾸했다. “주인 어른께선 안 믿으실 게 뻔합니다요. 도련님의 변덕이 어디 한두 번이었어야죠. 그렇게 불렀다가 채 사흘도 안 되어서 다시 내보낸 선생님이 벌써 몇 분입니까? 주인 어른 아니라 저부터도 안 믿겠습 다요." 보통 부잣집 도련님 같으면 대뜸 야단치고도 남을 말이었지만 루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간단히 수긍해버렸다. “그런가? 그럼 조금 더 생각해 보는 편이 좋을까? 그렇지만 목이 말라! 바나나, 가서 음료수 좀 가져다 줘." “그럽죠, 도련님." 바나다가 복도를 통해 멀어지자 갑자기 루시안은 검을 거두고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넌 어디서 그렇게 멋진 검술을 배웠니? 처음부터 잘 했던 건 아니겠지? 몇 살부터 배운 거야?” 루시안이 한꺼번에 여러 가지 물을 때는 전부 대답할 필요가 없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누구나 처음엔 스승이 필요한 거야." “그럼 네가 나 좀 가르쳐 주면 안될까?” 보리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루시안은 실망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 뻔하니까," “잘 들으면 가르쳐 줄 거야?” 보리스는 무표정하게 하인이 한 말을 인용했다. “못 믿겠는데," “뭐야! 넌 우리 집에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나를 못 믿겠다는 거야? 난 말야, 아버지나 어머니가 날 못 믿는 건 이해해. 바나나 녀석이 못 믿는 것도 이해하지. 그럴 만 했거든. 그렇지만 넌 내 방식을 자주 본 것도 아니고 아직은 나를,. 뭐야,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듣고 있던 보리스는 웃지도 못하고 그냥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꼬인 말을 되 다듬으며 궁리하던 루시안이 갑자기 외쳤다. “에잇, 좋아! 말을 잘 듣기로 맹세할 테니까 가르쳐 달라고!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고 그래야 재미있는데 내가 지기만 하니까 너도 재미없고 나도 재미없잖아? 뭘로 맹세할까? 음, 맹세장을 써 줄까?” ‘팽세장'이라는 말은 평소 아버지의 입에서 얻어들은 ‘위임장', ‘임명장, ‘고소장' 등등을 바꿔서 방금 급조한 말이었다. 스스로도 말이 되나 싶어 머리를 긁적거리고 있는데 보리스가 입을 열었다. “종이 같은 건 필요 없고, 약속하고 싶다면 이렇게 하자. 하루에 한 번 한 시간씩 연습, 어길 때는 그 랄 하루 종일 나를 형이라고 부르고 형답게 대하는 거다. 할수 있겠어?” 루시안은 매일 한 시간씩 연습이라는 대목에서 좀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 낙천적 성격답게 곧 외쳤다. “좋아!" 보리스는 잠시 말없이 루시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보리스보다 키가 조금 작은 루시안은 금빛 눈썹을 장난스럽게 번갈아 일그러뜨리고 있다가 자기도 보리스를 올려다봤다. 더 시간이 흐른 뒤 보리스가 말했다. “왜지?” “왜라니? 뭐가 왜야?” 루시안은 보리스의 엄숙한 얼굴을 보자 두손을 들어 ‘얼굴풀어'라고 말하듯 얼굴 앞에서 위아래로 흔들어댔다. 그러나 보리스는 웃지 않고 물었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번거로운 일을 감수하면서 이 검술을 배우려는 이유가 뭐냐는 거지." 그러자 루시안은 당연하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가 검술말고 다른 것은 재미없다면서?” 기분이 묘했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정말로 루시안에게 검을 가르치게 되고 말았다. 지금껏 누구를 가르치려는 마음을 먹어본 일이 없었고, 더구나 이곳에 올 때는 꼭 필요한 일만 하면서 이들과 어울리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아노마라드에 와서 겪었던 달갑지 않은 추억들 때문인지, 그는 아노마라드 사람의 풍요로운 무신경함을 싫어했다. 그리고 루시안은 어찌 보면 그런 성품의 전형이라고 할 정도로 걱정도 없고 모든 행동이 거침없는 소년이었다. 그런 녀석에게 뜻밖의 약속을 해버리게 된 것이다. 혼자 있게 되었을 때 자신의 마음을 몇번이나 돌아보려 했지만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보리스는 마치 나우플리온이 벨노어 저택에서 그를 제대로 가르치기 시작한 후로 한 것과 비슷한 고민을 하며 이틀을 보냈 다. 생각 외로 루시안은 꽤 오랫동안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연습을 했다. 그러나 보름 가량이 지나자 결국 변덕이 재발하고 말았다. “오늘은 가야 될 데가 있어. 오늘만 빠지자, 응? 그 대신! 오늘 하루 형님이라고 불러줄게. 자, 형님!" 판단 착오였다. 유감스럽게도 부잣집 귀한 도련님인 루시안은 쓸데없는 자존심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다. 형이라고 부르는 것쯤, 백 번이라도 해주겠다는 태도로 싱글거리는 것을 보니 할 말이 없었다. 보리스가 온 이후로 떼어놓아도 상관없게 된 하인 바나다에게 손을 흔들며 낮잠이라도 자라고 말해 주는 등 각종 아량을 베풀던 루시안은 이윽고 마구간으로 가서 말 두 필을 끌어내라고 명령했다. 마구간지기는 왠지 모르게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또 어디,. 멀리 가십니까?” “응, 말 타고 이 근처 한 바퀴 돌아보려고." “산책이십니까요,.?” 루시안의 애마는 손질이 잘 되어 털에 윤기가 흐르는 갈색 말이었다. ‘형님'한테는 검은 말이 어울릴 거라며 보리스가 탈 말도 직접 골라 주었다. 마구간지기의 걱정스런 눈길을 뒤로 하고 둘은 저택을 출발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응, 저기 한 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데야. 도시 구경 가." “아까는 근처를 돌아본다고 하지 않았어?” 보리스는 루시안이 거짓말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루시안은 좀 어색하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었다. “그러다가 멀리 가볼 수도 있는 거지 뭐. 안 그래?” 한 시간 가량 달려 도착한 곳은 아모치아라는 소도시였다. 파노자레 산맥에서 채취되는 진귀한 약초들을 파는 장이 한 달에 한 번씩 열리기 때문에 외지에서 모여드는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특히 마법 시약을 만드는 진귀한 약초들을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으로도 이름이 났는데, 그것은 아모치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륙 최고의 마법 학원이라고 불리는 네냐플(Nenyaffle)에서 설치한 시약 제조소가 있어서 안정적인 수요처가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루시안은 익숙한 걸음으로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더니 어느 잡화상 입구에 이르러 멈추었다. 보리스의 눈치를 좀 보는 듯했지만 결국 안으로 들어갔고, 안에는 다섯 명의 젊은 사내들이 모여 앉아 있다. 루시안을 보자 반색을 했다. “아이고 어서 오십쇼, 루시안 도련님. 오늘은 친구분도 데려오셨군요?” 보리스가 죽 둘러보니 사내들은 루시안 앞에서 비굴할 정도로 미소를 짓고 있긴 했지만 그리 질 좋은 사람들로 보이지 않았다. 잡화상처럼 보였던 이 가게도 좀 두리번거리니 일상적으로 쓸 법한 물건들은 별로 없고 골동품처럼 보이는 이상야릇한 물건들이 대부분이었다. 꽤 좁고, 퀴퀴한 냄새까지 났다. 루시안은 씩 웃더니 말했다. "친구가 아니고 ‘형님' 이야. 어쨌든 구경만 할거니까 신경 쓰지 마. 그럼 얼른 가자. 시간이 별로 없어."’‘형님' 이라는 말에 사내들이 의아한 눈초리로 보리스를 보았지만 금방 관심을 거뒀다. 사내들은 가게 안쪽의 쪽문으로 나가더니 다시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 어느 큰 집 처마 아래에 난 작은 문으로 들어갔다. 들어가고 보니 그곳은 십여 개의 테이블이 놓인 널찍하고 고급스런 홀이었다.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와서 테이블마다 붙어 앉아 있었다. 특이한 것은 창문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대낮인데도 방안에는 램프가 여러 개 켜져 있었다. 가까운 테이블 위를 보고 보리스는 이곳이 무엇 하는 곳인지 알아차렸다. 그 위에 놓인 것은 주사위 통이었다. 사내들과 루시안이 한 테이블로 다가가자 기다리고 있던 여자가 말했다. “오셨군요. 시작할까요." 사람들이 앉자 여자는 서 있는 보리스 쪽을 흘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손님께선 하지 않으실 건가요?” 그녀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보리스는 입을 열지도 않았고, 다른 반응을 보이거나 자리에 앉지도 않았다. 무시당한 셈이 되자 여자는 고개를 흔들며 관심을 손님들 쪽으로 돌렸다. “그럼, 오늘도 루시안 도련님부터?” 루시안은 아이처럼 순수하게 흥미에 부푼 표정이었다. 자르륵, 주사위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리스는 오늘이야말로 처음으로 호위 무사답게 팔짱을 끼고 서서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봤다. 놀이 방법은 예전에 보리스가 섬의 섭정왕한테 배운 ‘추격지(Chaser)'보다 훨씬 간단해 보였다. 점수를 적어 넣는 표가 없고, 매번 던진 주사위를 두 번씩 고쳐 던져서 서로의 우위를 비교해 승자를 가리는 방식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시작할 때 얼마간의 돈을 걸고, 주사위를 한 번 고쳐 던질 때마다 돈을 올리게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이긴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건 돈을 모두 가졌다. 한 시간이 지날 때까지 루시안은 그들 중 가장 돈을 많이 딴 사람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부터 형세가 바뀌었다. 루시안은 드문드문 돈을 잃더니 다시 한 시간이 흘렀을 즈음에는 처음에 땄던 돈을 다 잃고 추가로 5백 엘소 가량을 더 잃었다. 돈을 잃자 루시안은 오기가 나는지 한층 더 열렬히 다음 주사위를 굴리라고 재촉했다. 다시 반시간 사이에 3백 엘소 가량을 잃었는데 전혀 멈추려 하지 않았다. 그동안 보리스는 말리지도 않고 가만히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8백 엘소는 큰돈이었지만, 돈이 넘쳐흐르는 루시안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루시안은 돈을 잃어서 불안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졌다는 것 때문에 열을 내고 있었다. 사내들과 여자가 눈짓을 하더니 두사람이 먼저 기지개를 켜며 그만 돌아가야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도련님도 그만 가시지요. 벌써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 저도 그만 돌아가야 할 것 같군요." “너무하잖아! 아직 난 회복을 못했는데,.” “다음 번이 있지 않습니까?” 사내가 싱글거리며 그렇게 말하자 루시안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가 일어서며 보리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만 가자." 밖으로 나와 사내들과 헤어지고 다시 말을 타고 도시를 빠져나올 즈음 보리스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좋은 취미 같진 않군." “재미있어. 네가 온 후로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요새 다시 하고 싶어져서. 난 여러 사람들과 같이 하는 놀이가 좋거든." “그건 놀치가 아냐. 도박이라고 하지." “상관없어. 어차피 난 놀고 있는걸. 돈이라면 얼마든지 있으니 조금 잃는대도 별로 부담되지 않고,. 루시안은 문득 보리스의 기분이 상할까봐 염려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멈칫하다가 말했다. “돈을 좀 쓰더라도, 여러 사람들과 재미있게 노는 게 좋아” “하인들과 놀면 되잖아." “하인들은 재미없어. 져 주기만 한다고. 이겨서 돈을 따 가도 상관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아." 해질 무렵이 되어 불그레해진 태양이 루시안의 머리카락을 적금발로 만들었다. 루시안은 우울해졌는지 눈을 내리깔면서 말했다. “어머니 가 동생이라도 낳아 줬으면 좋겠다,.” 보통 열 살 이전에 떼기 마련인 동생 투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는것을 보며 보리스는 새삼 동갑내기인 이 소년이 자신보다 훨씬 어리다는 것을 느꼈다. 아이답다는 것은, 힘든 일을 별로 겪지 않았다는 말도 된다.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만일 갑작스런 어려움이 닥친다거나 하면 루시안보다 보리스 쪽이 횔씬 생존 확률이 높겠지만, 원만한 귀족들은 비교도 되지 않는 갑부 아버지의 무조건적 보호를 받고 있는 루시안에게 조만간 그런 어려움이 닥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그러니 루시안은 일찍 어른이 될 까닭이 없었다. 그런 노력을 할 필요도 없었다. 아이 시절은 아이답게 보내고, 나이에 맞추어 천천히 어른이 되면 된다. ,왜 이렇게 부러운 것일까, 저택에 도착할 즈음이 되어 보리스는 말 위에서 졸다가 깨다가 하는 루시안에게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내가 다른 주사위 게임을 가르쳐 줄게." “으음, 아앗, 정말이야? 언제? 지금 당장 가르쳐 줄 거야?” “,일단 집에 들어가서." 보리스도 조금 놀라고 말았다. 아무 생각도, 심지어 끈기도 없어 보였던 루시안은 의외로 ‘추격자(Chaser)'게임에 금방 익숙해지더니 며칠 되지 않아 보리스를 상대로 연승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금 더 잘 해봐." 생글생글 웃으면서 보리스의 앞에 놓여 있던 세모난 건포도 과자들을 죽 쓸어가던 루시안이 한 말이었다. 돈을 걸고 하는 것은 보리스가 싫다고 반대해서 판돈 대신으로 도입된 것이 이 삼각형 모양 과자였다. 덕택에 주방의 아주머니들이 랄마다 똑같은 과자를 50여 개씩 새로 구워야 했다. 보리스는 그냥 미소지었지만, 실은 오래 전 섭정왕을 상대로도 이겼던 자신이 이 무사태평의 낙천가 루시안에게 연속 다섯 번이나 지고 말았다는 것이 어이없었다. 방금 딴 과자 중 한 개를 집어 앞니로 갉작거리던 루시안이 불쑥 말했다. “너는 말이지, 너무 칸을 아껴. 그래서 못 이기는 거야." 보리스는 더 설명해보라는 듯 오른손을 펴 보이고는, 자신도 과자 한 개를 집어먹었다. “이런 게임은 과감함이 핵심이야. 아버지가 예전에 말해 줬어. ‘버릴 돈이라면 아예 손이 닿지 않을 곳으로 내팽개쳐 버려라, 미련 남지 않게' 라고 말이지. 이것도 똑같아. 총점을 비교해서 1점이라도 높기만 하면 되는 거 아냐? 너랑 나는 지금 둘이서만 게임하고 있다고. 네가 10점이면, 나는 11점만 되면 이겨. 어느 한 쪽이 굉장히 잘하는 것이 아니니까 굳이 50점이든 100점이든 따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야. 큰 점수가 나는 칸을 굳이 아껴서 뭐하니? 그러다가 한두 번 질 수 도 있겠지만 결국 최종 승률에서는 앞서게 된다고." 나름대로 잘난 체하며 턱을 쳐들고 손가락을 젓고 있는 루시안을 보니 웃음이 나왔지만 그가 한 말 자체는 타당했다. 보리스는 석판에 그려진 좀 전 게임의 표를 지우면서 말했다. “좋은 말이야. 네게는 적당한 방식일거야." “그럼 너한테는 적당하지 않다는 말이야?” 표를 다 지운 보리스는 루시안의 눈을 보면서 말했다. “네가 아버지 이야기를 했으니 나도 하나 할까. 오래 전에 돌아가신 내 아버지는 이렇게 말해 주셨지." 루시안은 의심도 흐림도 없는 청색, 맑은 날 하늘같은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보리스의 청회색 눈은 비 오는 날의 흐린 하늘빛이었다. “판을 뒤집을 최후의 한 수(추)는 반드시 남겨 놔라.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기면 모두 이긴 것이다." 루시안은 눈을 크게 뜬 채 몇 번 그 말을 따라 뇌까려 보더니 대뜸 되물었다. “왜 마지막으로 이기면 모두 이긴 거야? 다음 게임을 해서 상대가 이길 수도 있잖아?” “다음 게임은 없어. 이기는 순간 상대를 죽여버리니까." 크게 열린 청색 눈이 할 말을 잃고 흔들렸다. 지금껏 루시안의 세계 안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조차 듣지 못했다. 최초로, 자신이 살아온 세계 밖에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정말로 존재하는 세계일까 궁금해 하면서도, 섣불리 부인하지는 못한 채. 봄의 세계를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는데 저 까마득히 먼 곳에 솟은 만년설의 산,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을 발견한 것이다. “네 말처럼 버릴 것을 쉽게 버리려면 곧 다시 얻을 것이 있다는 확신이 필요해. 나는 그렇게 살아오질 못했어, 지금 것을 버리면 다음엔 굶어죽을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하나를 버리기 위해서는 무한한 용기가 필요했지. 마지막 한 수, 내일이란 전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아. 아무리 멋진 승리가 유혹한다고 해도 손에 쥔 마지막 빵을 내기에 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어. 나라면 절대 걸지 않아." "넌,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거야?" 보리스는 직접적으로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네게는 든든한 부모님이 계시고 많은 친구들도 있겠지. 한때 내겐 검 한 자루 외에 의지할 곳은 전혀 없던 때가 있었어. 내일 죽음이 닥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 삶은 게임과 달라서 다음 판 같은 것이 없거든. 버릇이 되어서인지, 게임을 하면서도 난 너처럼 쉽게 수를 내버리지 못해." “넌 나와 나이가 비슷하잖아? 도대체 언제 그런 삶을 살았다는 거야?” “열 두 살 때부터 지금까지 죽." “지금도?” 보리스는 미소지었다. “그래, 지금도." 루시안은 눈썹에 힘을 주더니 말했다. “난, 이해하지 못하겠어. 부모님이나 친척들이나 친구들이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단 말이야? 열 두 살 때까지는 누군가와 같이 살았을 거 아냐?” 보리스는 놀랄 만큼 담담하게 대답했다. 보리스는 놀랄 만큼 담담하게 대답했다. 누군가들은 모두 죽었어." “모두 다? 친구나 친척들도?” “루시안." 보리스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친척이나 친구도 이해 관계가 없어졌을 땐 도와주지 않아. 짐을 맡는 건 누구나 싫기 마련이거든."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거야!" 보리스의 마음 속 생각이 루시안의 입에서 바로 튀어나왔다. 나는, 그렇게 좋은 친구가 없지만 아버지나 어머니한테는 친구들이 아주 많단 말이야. 그 사람들은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언제나 찾아오고, 어려운 일도 자기 일처럼 나서서 처리해 줘. 우리 아버지가 빈털터리가 된다고 해서 등을 돌릴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야.” “그럴 지도 모르지. 모든 일은 닥쳐봐야 아는 거니까." “그건 너무 회의적이야. 그런 식으로 살면 좋은 일이 있어도 기뻐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고." “아마, 네 말이 맞을 거야." 조용해졌다. 루시안은 평소 보이지 않던 심각한 표정으로 주사위들을 모아 쥐고 만지작거렸다. 보리스는 그런 루시안을 보며 생각하고 있었다. 너처럼, 그런 것을 알 필요가 없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루시안은 입을 열다가 조금 지체했다. 보리스는 저 정도로 생각에 잠긴 루시안의 얼굴은 처음 본다고 생각했다.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은 없었어. 가난한 사람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거든. 그래서 생일 때면 그 사람들한테 선물을 많이 주려고 했지. 음, 그이상은잘모르겠어, 아마도, 너한테는 삶이 겨울이었는데, 나한테는 봄이었나 봐." 보리스는 루시안과 달리 심각한 얼굴이 아니었다. 평안한 표정이었고, 조금 후에는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그건 네가 받은 선물과 같은 거야. 안타깝지만, 모든 사람들이 같은 선에서 출발하는 건 아니거든. 아까 말했지만 네가 쓴 방식은 네 입장에 잘 맞아. 너처럼 많은 것을 갖고 있을 때 그걸 모두 한꺼번에 잃기란 쉽지 않겠지. 계속해서 괴로움 같은 건 없고, 더 나은 삶만이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몰라. 그런 삶을 사는 데는 네 아버지께서 말했듯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며' 혜택받은 너의 것들을 효과적으로 늘려 나가는 것이 최선일거야." 비꼬는 어조 따위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루시안에게 더욱 기이한 느낌을 주어버리고 말았다 보리스가 이곳에 온 이후로 매일같이 느껴온 한 마디가 처음으로 루시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너는 나와 많이 다르구나,.” 3. 친구 다시 한 달이 흘러갔다. 그 동안 루시안은 대략 나흘에 한 번씩 그 도박장에 갔다. 가면 많은 돈을 잃었고, 돈을 잃는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보리스는 죽 행했지만 처음 같이 갔던 날 이후로 별다른 참견은 하지 않았다. 물론 루시안의 부모에게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가는 날은 늘 검술 연습을 빠졌고, 따라서 어김없이 형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집에 돌아와서 같이 ‘추격자' 놀이를 하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규칙이 바뀌어서 보리스도 쉽게 지지 않게 되었다. 각 판의 총점을 적어 두었다가 마지막에 다시 합산하여 승부를 냈다. 대략 다섯 판 가량 한 다음 총점 가감을 정산해 보면 매 판의 승률은 루시안이 높아도 전체 점수로는 보리스가 이기는 경우가 많았다. 여덟 번째로 도박장에 갔을 때 루시안은 한참 주사위를 굴리다가 문득 보리스를 보며 말했다. “그동안 하는 거 자주 봤으니까 알겠지? 너도 해 볼래? 돈은 내가 줄게." 보리스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 때, 루시안이 보리스를 보려고 고개를 돌린 동안 판 너머에서 무언가 수상한 손짓이 오가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의미였는지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다시 게임이 재개되자 슬슬 짐작이 갔다. 그건 지금부터 이기기 시작하자는 신호였다. 과연 그 후로 루시안은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쾌 많이 가져왔던 돈은 순식간에 다 사라져 버렸다. 테이블에 앉은 지 반 시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루시안이 곤란한 표정으로 보리스를 돌아보며 빈 손을 펼쳐 보였다. “다 잃었네. 벌써 가고 싶진 않은데,.” 그러자 한 남자가 말했다 “빌려드릴까요 도련님?” “아, 정말? 그래 줄래?” “빌려드리고말고요. 얼마나 드릴까요?” “아, 음, 대강 1천 엘소 정도면 될까?” 그때 보리스가 테이블로 다가갔다. 어깨에 손을 얹자 루시안이 돌아봤다. “그만 가자." “싫어! 오늘은 계속 지기만 했단 말이야. 몇 번은 이기고 싶은데,.” 보리스는 한쪽 입끝을 조금 올리며 말했다. “오늘만 그런게 아니잖아. 빚까지 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 “내일 당장 갚을 텐데 뭘!" “내일도 오겠다고?” 최근 간격이 짧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며칠씩 사이를 두고 온 터라 루시안은 조금 우물거렸다. 그러나 곧 고개를 들며 고집스레 항변했다. “어쨌든 오늘은 좀더 놀 거야! 1천 엘소쯤이야 순식간에 딸 수 있다고! 내일도 올 필요는 없어, 따서 오늘 갚고 가면 되니까!" “쓸데 없는 고집을 피우는군." 그러자 루시안은 보리스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힘주어 말했다. “난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그것 뿐이야. 지나치게 참견하지 말라고. 이러다간 화를 낼 것 같아." 보리스도 루시안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오늘 네가 나를 어떻게 부르기로 했는지 기억하지?” “형님? 그게 뭐?” 그 순간 보리스는 오른손을 뻗어 루시안의 뒤통수 아래쪽을 한 대 쳤다. 세게 때린 것이 아닌데도 정확한 위치를 가격당한 루시안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앞으로 휘청 넘어졌다. 테이블에 머리를 박으려는 찰나 보리스가 왼손으로 받쳐 일으켜 세웠다. 사내들이나 여자는 참견할 명분을 찾지 못해 우물쭈물하며 보리스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늘 함께 오지만 게임에 참여하지 않고 말없이 뒤에 서 있기만 하는 보리스에 대해 접근하기 힘든 자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상대로 보리스는 그들에게 한 마디 말도 걸지 않았다. 축 늘어진 루시안을 일으켜 세워 어깨에 들쳐 메던 보리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형이란 그런 거다." 한밤중에 자신의 방 침대에서 깨어난 루시안은 처음에는 몹시 분개하여 다짜고짜 보리스를 찾으러 달려나갔다. 그러나 보리스의 방은 물론이고 늘 같이 놀던 테라스나 거실 등에서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이미 잠들었을 하인들을 깨우는 것도 미안하다고 생각되어 망설이던 루시안은 문득 검술 연습장을 떠올리고는 마음속으로 ‘그렇지!' 하고 외쳤다. 저택은 워낙 조용해서 저도 모르게 조심조심 걷게 되었다. 한참 동안 저택을 가로질러 연습장 입구가 보이는 곳에 이르러 보니 문은 열린 채였고, 불빛은 없었다. 이번에도 잘못 짚었나 싶었지만 그래도 안을 확인하겠다는 생각에 발소리를 죽여 다가갔다. 연습장은 천장이 없으므로 달빛뿐이리라 생각했다. 푸르스름한 빛, 이것이 달빛인가? 입구에서 우뚝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연습장 바닥에 검 한 자루가 놓인 것이 보였고, 거기에서 광채가 나고 있었다. 서늘한 청백색 광채였다. 그 검에서 조금 떨어진 바닥에 보리스가 앉아 있었다. 광채 덕택에 검을 똑바로 쏘아보고 있는 보리스의 눈이 루시안에게도 보였다. 평소 보지 못했던 강한 의지가 깃들인 눈이었다. 그러나 세운 두 무릎을 꽉 움켜쥐고 있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빛은 사그라졌다. 빛이 완전히 사라지고 달빛만이 남았을 때 보리스가 휴, 하고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루시안에게까지 들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평소 그가 본 보리스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어려움을 많이 겪어서인지 웬만한 일에는 동요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명백히 떨었다는 느낌이 왔다. 이윽고 일어난 보리스는 바닥의 검을 집어 검집에 꽂았다. 전에 보았지만 보리스의 검은 두 자루였는데 지금 것은 그 중 결코 뽑지 않는 두 번째 검이었다. 그 검을 검집 째로 들여다보다가 바닥에 내려놓은 보리스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숨을 고르는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잘 동화되는 루시안은 거의 숨을 죽이다시피 하고 보리스를 지켜봤다. 문득 그가 안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자신보다는 강하겠지만, 그보다 더 강한 적들과 숱하게 부딪쳐 온 아이였다. 아직은 소년이니까 저 애에게도 무서운 것이 있을 것이다. 와줄 사람도 없다고 했으니 모든 걸 혼자서 해결해야 할 텐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데도 지금까지 저렇게 잘 해냈다. 자신과는 크게 다르다. 다르기 때문에, 궁금하다. 다시 한참의 시간이 흘렀을 때, 문득 보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까지 와서 들어오지 않고 뭘 해." 이미 화났던 일쯤은 깨끗이 잊어버린 루시안이었다. 조금 쭈뼛거리다가 갑자기 냅다 달려들어가 보리스 옆에 앉았다. 그리고 팔을 잡았다. “너, 뭔가 무서운 것을 본 것 아냐?” “응.” “이젠 갔어?” “응.” 루시안은 바닥에 놓인 좀 전의 검을 흘끔 보았다. 좀 무섭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젠 빛나지도 않았고 별다른 점도 없어서 잘 잊어버리는 루시안은 금세 자신이 뭘 무서워했더라,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보리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밤중에 왜 이런 데 나와 있는 거야?” “너야말로 밤중에 왜 왔지?” “그거야, 아, 맞다! 널 찾으러 왔었어. 왜 찾으러 왔냐 하면,.” 루시안이 갑자기 목적을 상기해 내고 열심히 말하려 하는데 보리스가 심드렁하게 가로채어 말했다. “왜 때렸냐고 따지러 왔겠지, 뭐." “그래! 아까 나 왜 때렸어? 별로 맞아본 적이 없어서 놀랐단 말야." 어느새 따지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져버린 말투였지만 일단 생각난 이상 끝까지 말했다. 보리스가 피식 웃었다. “고집 피우는 동생한테 형이 할 만한 일을 한 거야." “그게 고집 피운 건가? 난 너한테 화도 내지 않았고 ’화가 날 것 같아’라고만 말했잖아? 사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그렇게 말하기 전에 이미 내가 하고 싶은 대로하라고 그랬어. 그런데 넌 좀 이상해. 어제는 형님 역할 하기로 했기 때문에 그런가?” “세상 사람들이 다 네 집의 하인 같다고 생각하지 마." “그렇게 생각 안 했어! 하지만 오늘은 동생이 아니니까 맘대로 해도 되겠지?” “오늘도 가려고?” 루시안은 대뜸 대답하려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체했다. 조금 후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글쎄, 지금 생각하니까 별로 하고 싶지도 않네." “그런 거야. 하지만 이따가 아침이 되면 생각이 달라지겠지." “그럴까? 그럼 오늘은 검술 연습을 해놓고 가면 되는 건가? 그럼 참견 안 하는 거야?” “루시안, 난 본래 남의 일에 잘 참견하지 않아 내가 널 억지로 데리온 건,.” 보리스는 스스로도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 어색한 표정이긴 했지만 어쨌든 끝까지 말했다. “네가 주사위 놀이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는 달라졌다고 느꼈기 때문이야. 처음 그곳에 같이 갔을 때 넌 그저 놀이일 뿐이라고, 여기는 사람들과 같이 노는 것이 좋아서 그런다고 했어. 늘 잃는 돈도 내가 보기엔 큰돈이지만 네게는 아무 것도 아니니까 네 입장에서 생각하고 했지. 하지만 오늘 일을 생각해 봐. 놀이였다면 돈을 빌려서라도 굳이 이기려고 했겠어? 난 도박을해 본 일이 없지만 짐작은 가. 아마 넌 빌린 돈을 다 잃기가 쉬웠을 거고, 그러면 또 돈을 빌리거나 아니면 엉뚱한 것을 내기에 걸려고 하게 됐을 거야. 그러다가 내기에 심하게 빠진 사람은 재산과 집을 모두 내기에 걸어버리고 나중에는 가족들까지 걸어서 잃게 되곤 한다지." 말도 안 돼! 어떻게 내기에 사람을 건단 말이야? 넌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 보리스는 고개를 돌려 루시안의 얼굴을 바로 보았다.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내게 약속해. 더 이상 그곳에 가지 않겠다고.” “약속, 하라고?” 루시안은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그러자 보리스가 쐐기를 박듯 말했다. “너 자신이 자제심 강한 인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야, 오늘 너의 행동을 돌이켜 봐. 자제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건, 손대지 마. 아니라면 너를 믿지 않겠어." 잠시 시간이 흐르고,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알았어. 다시는 가지 않을게. 약속해." “믿겠어." 서로의 숨소리 말고는 들리는 것 없이 조용했다 둥글게 뚫린 밤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보리스가 말했다. “너한테 지나친 참견을 하고 말았어. 내가 왜 그러는 건진 잘 모르겠어." 손가락으로 별자리를 따라 그리고 있던 루시안이 대꾸했다. “나는 너랑 다르잖아. 생각이 다르니까 할 말이 많지."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고?” 오랜만에 소년다운 표정을 한 보리스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기울이며 말했다. “어쩐지 네가 도박에 손을 대게 된 건, 저번 실버스컬에서 나 때문에 큰돈을 따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서,.” “아하하하, ” 갑자기 루시안이 웃음을 터뜨리자 보리스가 의아한 듯 쳐다봤다. “왜 웃어?” “하하하,. 그러니까, 네 생각이 사실 핵심을 찔렀기 때문에, 그리고, 하하하, 그렇다고 그런 걱정까지 하는 네가, 재미있잖아.” 보리스는 한층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그게 뭐가 재밌어?” 루시안은 열흘 동안 약속을 지켰다. 딱 열흘이었다. 열 하루째 되는 날 보리스는 점심 식사 후 루시안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다. 마구간에 가서 물어보니 짐작대로 밖으로 나갔다고 했다. 보리스도 말을 빌렸다. 아모치아까지 가는 길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도박을 하는 건물을 찾는 것은 조금 어려웠다. 사내들을 따라서 갔던 골목은 잡화점 뒷문을 통해야만 들어갈 수 있어서 밖으로 빙빙 돌자니 쉽게 위치가 잡히지 않았다 그럭저럭 시간을 좀 지체한 끝에 목적하던 곳 앞에 설 수 있었다. 문고리를 돌리니 문이 잠겨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퍼뜩 전신에 퍼졌다. 예지까지는 아니었지만 육감만으로도 확실했다. 다른 문을 찾기 위해 벽을 타고 돌았다. 예상대로 정문에 해당하는 큰 입구가 보였다. 그 앞에는 몇 명의 사내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보리스가 들어가려 하자, 두 사내가 막아서며 몸으로 밀치려 했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들어가?” 시작부터 막말이었다. 불안한 기분 탓인지 보리스도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비켜." “건방진 것이,. 저리 꺼지지 못해?” 사내가 한 팔로 밀어내는 순간 보리스는 검을 뽑는 대신 검 손잡이로 사내의 명치를 세게 쳤다. “욱!" 사내가 쓰러지자 다른 사내가 다짜고짜 검을 뽑으며 덤벼들었다. 검을 뽑아준다면 이쪽으로서도 좋았다. 마주 검을 뽑은 보리스가 사내 셋을 몰아붙이는 데 3분도 걸리지 않았다. 주위에 보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사내들을 멀리 쫓아버린 보리스는 곧장 정문으로 들어가 도박장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문이 쉽게 열리는 것부터 수상하다 싶었다. 아니나다를까,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닌가. “빌어먹을!" 서둘러 들어가기 전에 주위를 살폈다. 자칫하다가는 갇힐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까 쫓겨간 사내들이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올 지도 몰랐다. 루시안이 있던 테이블 말고도 많은 테이블이 있었는데 오늘은 어째서 아무도 없는 걸까. 정말로 그 사람들 전부가 한통속이었다는 건가. 아니면, 오늘은 특별히 쉬는 날이라도 된단 말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맞은편 벽 절반을 가린 커튼으로 눈이 갔다. 문짝의 빗장을 뽑아 멀찍이 내던진 다음 커튼이 있는 벽으로 다가가 홱 젖혔다. 예상대로 거기엔 문이 있었다. 그러나 물론 잠겨 있었다. 바깥쪽으로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루시안이 오자마자 사내들이 붙들어 어딘가 가두기라도 한 게 아니라면, 안에는 루시안 외에 다른 사람들도 있어야 했다. 감시자 한 명만 있다고 쳐도 이렇게 바깥쪽으로 잠가 놓으면 안에서 나올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출구가 있을 것이다. 다시 밖으로 나와서 보니 집은 단층이고 내부 복도가 있어 다른 건물과 연결된 형태였다. 아까 그 문은 복도로 통하거나, 또는 복도 아래의 어떤 지하로 통할 거라 생각되었다. 조금 생각하던 보리스는 선뜻 지붕 위로 올라갔다. 있었다. 예상대로 지붕에서 복도로 내려가는 문짝이 있었다. 이번에는 안쪽으로 잠긴. 천장에 달린 문이므로 좀 전과는 달리 부수기가 쉬웠다. 몸무게를 이용해서 대여섯 번 부딪치자 경첩 한쪽이 떨어져 나가며 문짝이 안쪽으로 꺼졌다. 몇 번 더 하자 문짝이 부서지며 복도 안쪽에 착지 할 수 있었다. 커튼 뒤의 문이 있던 쪽을 쳐다보자 예상대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검을 뽑아든 채 계단을 내려가던 보리스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의 말소리였다. 웃음소리도 간간이 섞인 평범한 대화인 듯했다. 조금 더 내려가 귀를 기울이자 뜻밖으로 루시안이라고 생각되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번 판도 또 진 거야? 에이 참, 그들은 아직도 게임 중이라는 건가? 대체 무슨 속임수를 썼기에 루시안이 저렇게 아무 의심도 없이 지하 방으로 들어갔을까? 환한 불빛이 나오고 있는 방 앞에서 멈춰 선 보리스는 흘러나오는 대화를 집중해서 들어보고서 상황을 깨달았다. 이미 루시안은 큰돈을 잃고 있는 중이었고, 서슴없이 몇 번의 돈도 빌린 듯했다. 그렇게 계속해서 빌려주다 보면 루시안도 손을 떼려 할 때가 있을 거고, 유혹에 더 넘어가지 않게 됐을 때가 행동을 시작하는 시점일 것이다. 납치일 수도 있고, 집에서 돈을 더 가져오도록 하는 심부름 편지를 쓰게 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 부잣집 아들로부터 최대한의 돈을 뜯어내는 것이 목적일 것이다. 그런데 그 때, 루시안이 뜻밖의 말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패 많이 잃었네, 당신들,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한가봐? 그 정도로 벌었는데 오늘은 그만 하자고 안 하네? 조금 더 할 테야? 난 아직 당신들보다 돈이 훨씬 많으니까 더 잃어도 되거든." 그 말에 대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 사내들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조금 후 들려온 대답은 이랬다. “하, 하하, 물론 도련님이 원하시는 대로,.” “그럼 좀더 하지 뭐. 1천 엘소 더 빌려줄래?” 그 즈음 보리스는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에 대해 판단이 섰다. 더 기다리진 않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 아니,." 세 명의 사내들이 크게 놀라 보리스를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그 들 가운데 무기를 가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밖에 호위를 세워 둔 것으로 만족했거나, 아니면 루시안을 아직 위협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검을 가진 보리스가 나타났으니 그들로서는 불리해도 이만저만 불리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태연하게 걸어가 루시안 옆에 섰다. 루시안이 보리스를 보고서 겸연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약속을 어기고 말았네, 하지만 좀더 하고 싶어서,.” “내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도록 만들어 줄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한 보리스는 사내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나와 한 판 하겠나?” 지금껏 보리스가 도박판에 관심을 보인 적이 없는 터라 사내들은 물론 루시안까지도 좀 놀라서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보리스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의자를 끌어당겨 테이블 앞에 앉았다. 사내들 가운데 우두머리인 자는 억지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하며 머리를 재빨리 굴려 보았다. 밖에는 분명 호위를 세워 뒀는데 이 녀석이 여기까지 들어왔다는 건 모두 당했다는 것일까, 아니면 녀석이 요령 좋게 피해서 온 것일까. 설마 소년 혼자 그들 모두를 제압하긴 힘들 테니 밖에 다른 일행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아무도 없고, 자신들의 호위들이 곧 달려와줄 가능성도 있었다. 일단 자신들은 맨손이니 여기서 저 소년을 제압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가능하다 해도 쾌 다치게 될 테고, 더구나 루시안에게 자신들의 정체를 폭로하게 되어버릴 것이었다. 그들은 루시안이 한동안 좋은 돈줄이 되어 주었지만 칼츠 상단의 후계자를 언제까지나 벗겨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칼츠 상단은 이 일대 상권의 절반 이상을 직접 간접으로 장악하고 있으니 자칫 잘못 보였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다. 오늘 오랜만에 루시안이 온 것을 보고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도박으로 최대한 빚을 지게 한 다음, 돈을 갖다달라는 편지를 집에 쓰게 할 심산이었다. 그래서 돈이 오면 별 일 아닌 것처럼 좋게 돌려보내면 되었다. 돈이 오지 않을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전부터 지금까지 루시안이 여기 와서 물 쓰듯 써버린 돈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한 몫 단단히 잡으면 다른 도시로 떠버리면 된다. 순진한 루시안이 사기 당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추적을 당할 가능성도 별로 없었다. 다만, 사기당했다고 생각하게 되어버리면 일이 곤란해졌다. 어쨌든 밖에는 대략 열 명 가량의 호위가 있었고, 시간을 끌어볼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기다려 보면 알 일이었다. “이런 덴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뭐, 하고 싶다면 거절할 이유는 없지. 그런데 돈은 있는 건가?” 보리스는 주사위들을 내려다보며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난 본래 도박을 즐기지 않으니 다른 사람은 빼고 너와 나, 단판으로 하지. 네 쪽에서는 내 친구가 진 빚 전부를 걸어라." 우두머리 격인 사내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소리를 냈다. "얼마인지 알고 하는 소리냐? 모두 4천 엘소나 되는데, 그럼 네 쪽에서도 그만한 돈을 걸겠다는 말이겠지?” “돈? 그런 것은 없어. 내가 걸 것은 네 머리야." “내 머리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네 머리를 걸겠다는 것이 아니고?” 보리스는 테이블에 흩어진 주사위들을 모아 쥐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인데, 내가 여기 들어오는 순간 네 머리는 이미 내 수중에 있어. 네가 이기면, 그걸 보존할 수 있는 거고, 내가 이기면 판돈 대신 잘라가겠단 말이야." 맞은편에 앉아 있던 루시안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우두머리 외에 다른 두 사내의 얼굴은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막 무어라 소리치려는 참인데 우두머리가 갑자기 손을 들어 제지하고는 크게 웃기 시작했다. “핫핫핫, 대담한 녀석이군. 너처럼 어이없는 소리를 하는 녀석은 20년 넘게 주사위를 굴리면서도 처음 본다. 좋아! 네 녀석의 무모한 전을 받아들여 주지. 대신 네 쪽에서 질 때도 머리를 내놓을 수 있겠나?.” 그 때 보리스가 고개를 들며 우두머리의 눈을 쏘아보았다. “허세를 부리는군. 그런 입장이 아니란 것을 알 텐데. 그보단 차라리 20년을 갈고 닦았다는 자신의 실력을 믿는 쪽이 어떤가?” 보리스는 우두머리 사내가 말하는 것을 보고 이미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상태였다. 그들은 보리스가 단신으로 왔는지, 아니면 무사들을 끌고 왔는지 그것이 궁금한 것이다. 일단은 보리스가 검을 쥐고 있으니 덤빌 재간은 없고, 시간을 끌어 구원이 오면 어린 소년인 보리스쯤은 쉽게 해치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 터였다. 그러나 보리스 쪽에서는 그 구원이라는 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녀석들의 실력은 이미 밖에서 볼만큼 보았다. 지금 상황을 모르는 것은 루시안뿐인데 어찌된 셈인지 이들은 루시안을 아직 위협하지 않은 것 같았다. 처음부터 납치할 셈이었다면 아직까지 이렇게 한가하게 주사위 놀음을 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면 짐작할 수 있는 이유는 한 가지, 이들은 루시안을 끝까지 속이고 싶어하는 것이다. 어쩌면 칼츠 상단의 복수가 두려워서 오늘 빚을 잔뜩 지게 해서 빼앗을 만큼 빼앗고 점잖은 체 돌려보낼 속셈인 지도 모른다. 보리스가 당장 이들에게 검을 들이대어 제압하지 않은 것은 오직 루시안 때문이었다. 그는 루시안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뭐, 어찌됐든 네가 이길 가능성은 없으니까. 자자, 잔소리는 집어치우고 시작하자. 루시안 도련님과 하던 걸 계속할 테냐?” 우두머리 사내는 어떻게든 체면을 구기는 것만은 면하려는 것인지 억지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보리스는 루시안을 보았다. 아직도 위 험이고 뭐고 모르는 동그란 눈동자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는 것을 보니 한심하다고 여겨야 할 지 순진하다고 생각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난 복잡한 규칙 따윈 몰라. 단판답게 간단하게 가지 가장 높은 눈낸 쪽이 이기는 거다." 그렇게 말하며 모아 쥐었던 주사위를 우두머리 앞에 탁, 내려놓았다. 우두머리는 주사위를 쥐더니 희한한 웃음을 흘렸다. 조금 후, 주사위가 던져졌을 때 모두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6, 6, 6, 6, 6이었다. “헤에,세상에, 말도 안 돼." 루시안이 눈을 크게 뜨며 중얼거렸다. 눈의 합산으로 승리를 결정하기로 한 이상 이것보다 나은 눈이 있을 리 없었다. 가장 잘 해봤자 무승부다. 보리스가 주사위를 주워들어 만지작거리고 있자 우두머리가 신경질적으로 보리스에게 말했다. “자, 대담한 소년도 던져 보실까?” 그 말과 동시에 손을 위로 올린 보리스가 천천히 주사위들을 테이블 위에 떨어뜨렸다. 하나씩, 차례대로 눈이 나타났다. 맨 처음은 다음도 6, 그리고 나머지도 모두 6이었다. “엇,.” 모두가 얼어붙은 표정으로 보리스가 던진 주사위들을 내려다봤I다.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무승부가 나자 우두머리의 낯빛도 창백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둘 다 6이라니 말야." 루시안이 기분이 이상하다는 듯 어깨를 움츠렸다. 보리스는 루시안을 흘끗 보며 주사위들을 모아 쥐더니 말했다. “무승부로군. 이것만으로 결판을 내긴 어렵겠지. 그렇다면 이건 어때." 보리스가 다시 주사위를 던졌다. 주사위들이 차례로 붉은 점 한 개를 보이며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보리스는 다시 한 번 주사위를 모아 쥐더니 이번엔 한꺼번에 던져 모조리 2를 만들어 보였다. 곁에서는 감탄하는 것도 잊고 있었다. “계속 해 볼까?” 3 다섯 개,4 다섯 개,5 다섯 개가 차례대로 나오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얼어붙은 채 꼼짝도 못했다. 요령이나, 행운이라는 것도 정도가 있었다. 세상의 어떤 도박사도 이런 주사위를 던질 수는 없었다. 보리스는 마지막으로 다시 손쉽게 6 다섯 개를 던져들고는 우두머리를 쳐다봤다.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거든, 계속 던져 보던지." 우두머리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마, 말도 안 돼! 이건 뭔가 이상하잖아! 속임수가 있는 것이 틀림없어!" “속임수를 먼저 쓴 것은 네 쪽일 텐데." 딱딱한 대꾸가 끝나자마자 보리스는 갑자기 의자를 박차며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단도 한 자루를 뽑아 테이블 위의 주사위 중 한 개를 콱 내리 찍었다. 박살이 간 주사위에서 이상한 액체가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루시안이 놀란 눈으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세상에는 속임수보다 더 놀라운 수도 많이 있거든." 당황한 사내들이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보리스는 단도를 꽃고 허리에 찬 검을 보았다. 그 순간, 우두머리는 보리스가 내기에 걸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냈다. 결코 질 리가 없다는 생각에 호기롭게 수락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그것만은,. 그건,.” 이걸로 루시안의 빚은 탕감이겠지. 약속대로 내 판돈을 가져가겠어." 보리스의 검이 우두머리의 목을 똑바로 겨누었다. 우두머리 사내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검끝을 내려다봤다. 방금 보리스가 검을 뽑아 겨누는 짧은 순간, 속도는 물론이고 정확한 동작과 안정된 자세가 보통 실력자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 정도 실력이라면 처음부터 무방비인 세 사람을 간단히 없애버리고도 남았을 터 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지금까지 지체했던 것이다. 보리스의 검이 가로로 살짝 그어졌다. 검끝은 우두머리의 턱 끝에 가느다란 상흔을 남기며, 루시안이 있는 쪽으로 돌려졌다. 보리스가 말했다. “하지만 네 목을 가져가 봤자 거름으로도 못 쓸 테지. 대신 내 친구를 데려가겠다. 반대는 없겠지?” “어떻게 한 거야? 응? 좀 가르쳐 주면 안 돼? 궁금해 죽겠단 말야!" 자신이 지금 납치 감금될 지도 모르는 끔찍한 자들의 소굴에서 빠져나왔다는 걸 깨닫지도 못하는 루시안은 도시를 떠날 무렵부터 계속해서 보리스가 주사위를 던진 요령을 가르쳐 달라고 못 견디도록 졸라댔다. “그걸 알면 어쩔 건데? 다시 가서 써먹어 보려고?” 루시안은 할 말이 없는지 혀를 쏙 내밀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냐,.이젠 안 갈 거야, 그 놈들, 나를 속였다고. 방법은 모르겠지만 그냥 주사위는 절대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그것보다 네가 한 법이 백 배나 궁금해! 그 녀석들이 내 돈을 많이 따 가긴 했지만 그것도 네가 감추고 있던 그런 비법을 배울 기회가 생긴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넌 그런 기회가 안 생겼어. 가르쳐주지 않을 거니까." “힝, 정말로 안 가르쳐 줄 거야? 내가 궁금해서 죽어도?” “궁금해서 죽는 사람은 없어." “네가 그런 식으로 계속 안 가르쳐 주면 내가 그 최초가 될 지도 모른다고!" 보리스는 루시안이 황당할 정도로 고집을 피우도록 그냥 내버려두었다. 제풀에 지쳐 좀 잦아들었다 싶을 즈음에야 입을 열었다. “그건 어차피 속임수였어, 너도 그런 일이 실제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쯤은 알잖아? 내가 무리해서 너에게 그런 걸 보여준 건, 세상에는 수많은 속임수가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였어, 네가 눈치채지 못 한 그 자들의 주사위도 속임수였고, 내가 한 것은 더한 속임수였지. 도박이란 건, 보통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마술의 세계 같은 거야. 거기에 들어가면 모두가 잃고 나오게 돼. 그 세계에 진짜 실력 같은 것은 없어. 오직 행운과 속임수뿐이지. 행운이라 해도, 내가 아까 보여준 것 같은 주사위눈을 자유자재로 나오게 할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강운이 없는 한 결국은 잃는 것뿐이라고. 난 네가 성장해 가는 방식을 존중하지만 이번만은 네가 스스로 그걸 깨닫기 전에 더 큰 악영향을 받게 되고 말 것 같아서 끼여들고 말았어. 속임수 같은 것을 알려고 하지 마. 그런 걸 알아봤자 자꾸만 빠져들 뿐이야." “그럼 넌 그런 방법을 알면서 어떻게 도박에 빠지지 않을 수가 있어?” 보리스는 그제야 얼굴을 조금 풀며 말했다. “너도 알잖아. 난 배팅을 못해." “에이! 말도 안 돼! 그렇게 잘 하는데 왜 배팅을 하지 않겠어? 뭘 걸어도 이길 텐데." “루시안. 내가 방금 한 말 잊었어?” 루시안이 말문이 막혀 우물대는 동안 보리스는 고개를 돌리며 말을 재촉했다. 보리스는 주사위를 던지기 직전, 그 안에 엔디미온의 주사위를 섞어 놓았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결과는 한 개의 마법 주사위가 만들어 낸 환각이었다. 아직 그보다 강한 환각은 쓸 줄 모르지만, 열 달 동안 그와레에서 지내면서 연습해 본 결과가 그것이었다. 엔디미온은 가나폴리의 소년왕이었고, 그의 주사위는 긴 세월을 거쳐 온 귀한 물건이었다. 그런 것을 도박판 같은 데서 사용했다는 것이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 가능하다면 다시는 그런 일에 쓰고 싶지 않았다. 루시안은 여전히 투덜거리며 말을 몰고 있었지만 그건 보리스의 주사위 요령에 대한 궁금증일 뿐, 도박에 대한 미련은 이제 거의 내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루시안은 본래 싫증을 잘 내는 성격이었다. 한동안 열렬히 빠져 있던 놀이에 속임수가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곧바로 흥이 깨지고 말았던 것이다. 보리스가 그동안 지켜 본 사람됨 그대로였다. 저렇게 조심성이 없으면서도 끝낼 때는 망설이지 않는 깨끗한 성격(기억력이 별로인 탓도 있겠지만), 그리고 금방 다른 일에 또 빠져들곤 하는 순진함은 보리스의 성격과 너무 달랐다. 솔직히, 닮은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보리스는 과거사를 결코 잊는 법이 없고, 한 번 회의적으로 세상을 보게 된 후 그 시각이 지금껏 변하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신중한 성격이 좋을 지도 모르지만 루시안에게는 보리스에게 주어지지 않은 자연적인 선물이 있었다. 저런 성격을 만들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조성되어야 하는 밝고 긍정적인 환경, 그것이야말로 루시안의 마음에 그늘을 만들지 않는 태양과 같은 존재였다. 심지어 루시안은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혜택이 주어져 있는지도 느낄 줄 몰랐다. 돈을 마구 쓰고 있지만, 그것은 어린 아이가 정원에서 딴 꽃잎을 내키는 대로 주변에 흩뜨리며 돌아다니는 것과 다를 바가없었다. 그 돈으로 누군가를 억누를 줄도 모르고, 남의 것을 뭐든 빼앗을 수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 식이니 도박장의 상대에 게 연패하면서도 용돈 주는 기분일 수가 있는 것이다. 돈 따위는 해변의 조개껍질처럼 흩어 버리고 금방 다른 재미를 찾아 달려가는 꼬마처럼. 정말이지 이상한 녀석이었다. “잠깐, 잠깐, 보리스, 재밌는 생각이 났는데 말야, 들어볼래? 잊고 있었는데 보름 뒤였던가, 한밤중에 하는 파티가 있거든. 아아, 파티 싫어하는 것은 아는데 말야, 이번에는 달라. 이건 아이들끼리만 모이는 파티야! 벌써 초청장 받은 지 열흘은 된 것 같은데 깜빡 잊고 답신을 안 보냈지 뭐야. 오늘 가서 답신을 써야겠어. 너도 꼭 같이 가자 이번에는 재미있을 거야. 내가 보장할게!" 보리스는 대답 없이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다. 루시안은 자신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상대가 감탄하지 않는 것은 못 견디는 성미라 보리스의 말 곁에 자신의 말을 가까이 붙이며 파티에 올 사람들, 그리고 하기로한놀이들에 대해서 신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 하고 싶어하던 것이나 궁금해하던 것, 그런 건 이미 다 잊어버린 것 같았다. “이래도? 이래도 재미없을까? 어른들의 지루한 무도회 따위가 아니라니까. 나도 그런 건 싫어하거든. 다들 점잔만 빼고 앉아 있다가 기껏 느릿느릿 춤이나 추는 건 정말 지걱워. 아이들 파티라고 모두 재미있는 건 아닌데, 이번에는 이엔의 파티라고. 이엔은 확실히 재미있게 노는 방법을 알고 있지. 이엔은, 너도 만나보면 알겠지만 귀족치고는 정말 특이한 아이야!" 저 정도로 맑게 개인 성격 앞에서 사소한 먹구름 따위는 비 한 줄도 뿌리지 못하고 달아나고야 말 것이다. 삶이 남긴 상처, 경험이든 음험함 따위는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좋은 건가, 나쁜 건가, 이런 녀석을 만난 것은. 언젠가, 먼 훗날엔 깨어질 지 몰라도 지금은 잘 닦은 유리 장식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지 않은가. 이 빛을 잃은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열 일곱 살의 빛이 거기에 있다. 타고난 그대로 훼손되지 않은 ‘좋은 성격' 이라는 것은 조개가 진주를 품을 가능성보다 더 적은 확률로 만들어지기에 미숙하더라도 놀라운 빛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4. 다시 한 번 그 생명, 내게 맡겨줄 수 없겠어? ‘이엔’ 이라는 아이는 아마란스 백작가의 후계자라고 했는데 그 이상의 것은 들을 수도 없었고 사실 물어보지도 않았다. 닷새 전부터 파티에 갈 준비를 한다고 법석을 떨며 이것저것 생각해 내고 의견을 묻고 하는 사이에 그런 이야기는 어디론가 묻혀버리고 말았다. 다만 아 마란스 백작의 저택까지 가기 위해서 반나절 가량의 마차 여행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기후 좋고 풍경이 아름다운 이곳 남부 지방에 여름 저택을 지어놓고 늦봄 무렵부터 초가을까지 지내는 아노마라드 부자들은 꽤 여럿이었다. 아노마라드가 왕정이 된 후로는 귀족이 된 자들이 수도로 몰리느라 꽤 줄어들긴 했어도 여전히 인기 있는 곳이었다. 물론 이 일대에 여름 저택들이 모여 있다고는 해도 대부분은 넓은 땅을 갖고 있기 마련이라 반나절 안팔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고했다. 그 중에서도 귀족이 모이는 지역은 따로 있었다. 칼츠 저택은 그쪽에 있었는데, 루시안의 아버지 드메린 칼츠는 주로 귀족들이 모인 저택 사이에 이만한 저택을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무시할 수 없는 부와 세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귀족 아이들끼리 여는 파티에 루시안이 초대받기도 하는 것이었다. 이 소년 소녀들의 파티에는 아노마라드 왕국력으로 971년부터 976년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만 참여할 수 있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주축이 되는 아이들과 너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새 참가자는 필요 없다는 일종의 텃세인 셈이었다 게다가 새로운 참가자는 기존 참가자 가운데 누군가와 반드시 동행해야만 했다. 그들은 이 파티를 남부 아노마라드 들판에 흔히 피는 종모양의 보랏빛 꽃 이름을 따서 ‘블루(Bluebell)'이라고 불렀다. 블루벨 파티는 봄과 여름에 걸쳐 한 해에 많아야 세 번 정도 열렸는데 이런저런 규칙으로 인해 늘 오는 축들은 몇 년째 대강 정해져 있다. 루시안은 작년부터 참가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세 시간이 넘는 길이라 루시안과 보리스, 그리고 두 명의 하인은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일찌감치 출발했다. 마차 안에서 루시안은 내내 무언가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너 말이야, 정말로 이곳에서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거겠지?” 혹시라도 알아보는 사람 있으면 정말로 큰일이라고. 이번엔 꼭 내가 이겨야 되는데. 꼭이라고. 응? 정말 없는 거지?“ 보리스는 마차 구석에서 생각에 잠긴 사람처럼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대꾸했다. “없어." 루시안은 기도라도 하듯 손을 모아 쥐며 마차 천장을 올려다봤다. “제발 없어야 되는데,.” 참가하는 귀족 집안들이 어디 어디인지 대강 들어 뒀지만 그 중에 혹시라도 그를 알아볼 가능성이 있는 폰티나 공작가나 강피르 자작가, 벨노어 백작가 같은 곳은 없었다. 어쩌면 실버스컬 우승자 보리스 미스트리에를 아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지만, 당시에도 파티 따위에 참여하지 않고 일찍 떠났고, 더구나 가면을 쓴 이상 그것도 가능성이 적은 이야기였다. 이엔이라는 아이가 연 이번 블루벨 파티의 주제는 일종의 가면 놀이였다. 사람들이 쉽게 알아볼 수 없는 갖가지 분장을 하고 참여하는 것은 어른들의 가장 무도회와 비슷했지만, 단지 가장을 하고 노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서로 어울리다가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 맞추는것이 놀이의 핵심이었다. 누구인지 짐작이 갈 경우, 그 사람한테 딱 세 번의 질문이 가능했다. 그 안에 상대의 정체를 맞추면 정체가 탄로 난 아이는 가면을 벗어야 했다. 한 번 틀리면, 같은 사람에게 다시 시도할 권리는 없어졌다.맨 마지막까지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아이에게는 상이 있었다. 다음 ‘파티'를 열어 아이들을 부를 수 있는 권리가 그것이었다. 루시안은 오래 전부터 이 파티의 주최자가 되어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루시안은 말하는 방식이 워낙 별난 아이인지라 누구든 입만 열면 금방 맞춰버릴 것이 뻔했다. 그래서 루시안은 이곳에 아는 사람이 없을 보리스에게 잔뜩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보리스는 말한 그대로 아는 사람이 없으니 숨길 것도 없다면서 간단한 가면 하나만을 쓰는 걸로 분장을 마치고 말았다. 루시안의 불만은 바로 그것이었다. 마차가 가는 내내 그는 시시때로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무도 몰라야 해, 아무도 모르겠지, 아무도 모를 거야,. 아마란스 백작의 여름 저택은 산 구릉에 위치한 오래된 성을 개조한 것이어서 칼츠 저택에 비해 예스러운 멋을 풍겼다. 심지어 해자까지 파여 있는 성이었다. 도개교를 넘어 정문 앞에서 하인들에게 마차를 맡기고 안으로 들어가자 비슷한 또래의 하녀들이 열을 지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 명이 얼른 나서더니 그들을 안내했다. 어른은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2층으로 올라가자 여러 개의 테이블에 고급 의자들이 즐비한 널찍한 대기실이 있어서 거기에 소년 소녀들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다채로운분장이 쾌 구경할 만했다. 전설적인 인물들처럼 옛날복식으로 점잖게 차린 아이들이 가장 많았지만 개중에는 평민이나 용병, 동물, 괴물 모양으로 차린 재미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물론 이 더운 여름에 새끼곰이 되어 허덕거리고 있는 루시안도 있었다. 얼굴을 가릴 필요가 없는 분장을 한 아이들은 쉽게 알아보는 것을 막기 위해 종이 가면을 썼다. ‘새끼곰' 옆에 앉아서 위로해주고 싶은 것을 참고 있던 보리스는 자신도 대륙에 떠도는 용병으로 차린 것처럼 보일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들끼리의 밤 파티인데도 성에서 두 번째로 큰 연회장이 준비되어 있었다. 시간이 되자 하녀들이 와서 연회장으로 이동해 주십사 하고 부탁했다. 무슨 까닭이라도 있는지 연회장은 고작 램프 서너 개로 밝혀져 있어서 매우 어두웠다. 모든 아이들이 들어가고 나니 옅은 빛을 내고 있던 램프들이 갑자기 모두 꺼져버렸다. “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낸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때 연회장 앞쪽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와줘서 고마워! 오늘 블루벨을 준비한 이엔이야. 초대장에 써 보냈으니 오늘밤의 규칙은 모두 알지? 먹을 것과 음악과 놀 거리는 모두 준비되어 있으니까 즐겁게 놀다가, 상대가 누구인지 알 것 같다 싶을 즈음 딱 세 번의 질문만 해서 누구인지 알아 맞추어야 해. 질문하는 방식은 무조건 상대가 ‘응’또는 ‘아니'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 유효. 상대가 제대로 맞추면 정체가 드러난 사람은 가면을 벗게 되지만 그래도 계속 다른 사람들의 정체를 밝히러 돌아다녀도 상관없어. 맨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마지막으로 가면을 벗는 한 명이 속한 집안에 다음 블루벨을 열 수 있는 권한을 넘기겠어 그럼, 나도 너희들 틈에 끼여 들어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이따가 하녀들이 하나, 둘, 셋을 세고 불을 켤 테니까!"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고, 잠깐 동안 조용했다. 보리스는 ‘이엔'이라는 아이의 목소리가 사내애치고는 꽤 가늘고 높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녀들이 하나, 둘, 셋을 세는 소리가 들리고, 연회장의 불이 한 번에 켜졌다. 수많은 분장한 아이들이 저마다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곧 삼삼오오 모여 여기저기로 흩어져 갔다. 연회장은 훌륭했다. 나이든 귀족 손님들을 맞는 것 못지 않게 장식이며 모든 것을 주의 깊게 준비했다는 느낌을 주었다. 연회장 주위는 잠시 둘만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작은 방 여러 개 딸려 있었다. 둥근 테이블들이 연회장을 빙 둘러가며 마련되어 있었고, 테이블마다 아이들이 선호하는 요리들이 가득했다. 정면 단은 이제 비어 있었지만 그 양쪽에서 악사들이 경쾌한 음악을 연주했다. 시중을 드는 것은 모두 처음의 하녀들이었다. 그러니까 하녀들도모두 그들 또래였다. 보리스는 ‘새끼곰'을 데리고 한쪽 테이블로 가서 앉는 것을 도와 다음 맞은편에 앉았다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쓰러지다시피 한 ‘새끼곰’이 우는 목소리가 되어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으으아아, 곰들은 여름을 어떻게 나는 걸까. 난 그 녀석들을 동정하게 돼버렸어. 가엾은 곰들, 나처럼 파티 끝나고 털가죽을 벗어버리지도 못할 테고. 녀석들은 겨울잠이 아니고 여름잠을 자야 해." “난 네가 더 가엾어 보이는데 뭣하면 너라도 여름잠을 자라고." 그 때 머리에 귀여운 외뿔을 단 하얀 가면의 여자아이가 다가와 테이블에 앉으며 새끼곰을 향해 빙긋 웃었다. “귀여운 새끼곰, 많이 더운가보다. 내가 얼른 네 정체를 맞춰서 가죽을 확 벗어버릴 수 있게 해 준다면 좋으련만." 새끼곰은 황급히 앞발(?)을 내저었다. “아냐, 아냐. 난 괜찮아. 참을 수 있다고." “덥지? 레모네이드 먹여 줄까?” “그래, 됐다니까! 내 정체를 알아내려고 하지 마!" 여자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무언가 짐작이 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당황한 새끼곰은 의자 위에서 한층 더 버둥거리다가 그만 주스를 엎지르고 말았다. 외뿔의 여자아이가 깜짝 놀라 발딱 일어나며 저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어머, 뮤리에!" 그 순간 새끼곰이 질문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소리쳤다. “너! 수이지 다 페리파노지? 뮤리에는 네가 늘 데리고 다니는 시녀이름이잖아!" 이런 식으로 새끼곰을 사냥하려 하던 외뿔 꼬마 아가씨는 도리어 새끼곰이 무심코 내민 앞발에 걸려 첫 번째 사냥감이 되고 말았다. 수이지라는 아이는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가면을 벗었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다른 일이야 이제 관심 없어졌으니 어떻게든 자기를골탕먹인 새끼곰의 정체를 밝히고야 말겠다는 거였다. 끈덕지게 달라붙어 갈 생각을 안 하는 통에 의외의 수확을 올린 새끼곰도 두 앞발을 다들 지경에 이르렀다. 보다못해 보리스가 말했다. “이봐, 새끼곰. 다른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자." 수이지는 고개를 획 돌려 보리스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혼란스런 표정이 되었다. 거의 확신했던 정체가 있었는데 보리스의 존재 때문에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조금 후 수이지가 드디어 첫 질문을 던졌다. “첫 번째 질문이야. 형제가 있어?” “아니," “그럼, 오늘 데려온 하인이 연회장에 같이 들어와 있어?” “아니." 모두 보리스가 누구인지 떠보는 이야기였다. 둘 다 실패하자 수이지는 굉장히 고민하는 표정이다가 결국 마지막 질문을 하고 말았다. “네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은 삶은 당근이지?” 새끼곰은 갑자기 굉장히 좋아하면서 앞발을 흔들어 보였다. “아-니." “에잇, 모르겠어! 너, 리어폴 폰 도므레트 아냐?” “오오, 아닌데." 수이지가 화가 나서 자리를 뜨자 새끼곰은 즐거워 어쩔 줄 몰라하며 의자 위에서 들썩거렸다. 그리고 수이지가 멀찍이 가자 하고 싶어 못 견뎌하던 말을 꺼냈다. “수이지는 반쯤 눈치 챘던 것 같아. 그런데 난 얼마 전부터 삶은 당근보다 더 싫은 음식이 생겼거든, 그건 북부식으로 계란을 잔뜩 잔뜩 넣은 느끼한 푸딩이야!" 파티가 중반에 이르자 이제 가면을 쓴 사람은 절반 이하로 줄었다. 놀랍게도 이 때까지 정체가 탄로 나지 않았던 ‘새끼곰'은 더위에 지쳐 반쯤 맛이 가 있다가 한 사내애가 바나나 좋아해? 라고 말에 지나친 반응을 보이는 바람에 결국 들키고 말았다. 이 아이들도 루시안이 데리고 다니던 하인의 별명이 ‘바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털가죽분장을 벗은 루시안은 어쩐지 기뻐하면서 연회장을 나갔다가 목욕을 하고 준비해 뒀던 새 옷까지 갈아입고 보리스에게 돌아왔다. 물론 보리스가 누구인지 맞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알아내려 시도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말을 걸어 보았자 대화가 잘 이어지지도 않고, 그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있으니 제대로 맞출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는 다른 데로 가버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다시 반시간 가량이 지나자, 남은 것은 보리스를 비롯하여 세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사람이 적어지자 이곳에 올 사람의 구성이 뻔한지라 아직 밝혀지지 않은사람이 누구인가 대략파악이 되어서 다른 둘의 정체는 순식간에 밝혀져 버렸다. 그리고 보리스가 남았다. 루시안은 좋아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모르는 체 입을 꾹 다물고 다 른 아이들 틈에 려여 있었다. 그러나 수이지와 같은 아이들은 이미 보리스가 루시안의 일행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수군수군 이야기가 돌았지만 아무도 정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빙 둘러싸인 형국이 되었다. “새로 데려온 사람인가 봐." “전혀 짐작이 안 가는데." “어쩐지, 얼굴 봐도 모를 것 같아." “마지막이니까 이제 그만 정체를 밝히는 편이 좋지 않아?” “아무래도 모르겠어. 이엔, 어떻게 할거야?” 그 때였다. 연회장 밖으로 향하는 입구에서 뜻밖으로 분장을 벗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성큼성큼 걸어왔다. 수도사들의 거친 망토에 달린 커다란 두건이 가면 없이도 그의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무언가 중요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빠른 걸음이었다. 저도 모를 기세에 놀란 아이들이 옆으로 비켜났다. 그 자는 보리스 앞까지 걸어오는 동안 이미 첫 번째 질문을 시작했다. 오늘 그에게 세가지 질문을 시작한 사람도 그가 처음이었다. “첫째, 이곳이 아닌 다른 나라출신이지?” 소년의 목소리였다. 보리스는 오늘 그런 복장을 한 자를 보았던가 돌이켜 생각해봤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질문이 정확했기에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확실히, 오래 전에 헤어진 형제가 있지?” 보리스는 퍼뜩 긴장하여 상대를 노려보았다. 누구인가, 이런 목소리를 전에 들어보았던가. 상대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고 의전관들이 그렇듯 말 맺음이 정확했으나, 까닭 모를 흥분이 섞여 조금 쉰 듯한 느낌도 났다. 본래는 매우 침착한 인간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형제 이야기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기껏 헤어졌다는 말만 갖고 모든 것을 안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확실히, 있다." 마지막 질문이 던져졌을 때, 그는 보리스 앞에 와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키는 보리스보다 조금 작고, 체격도 당당한 편은 아니었다. 다시 입을 연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머릿속 기억의 바다에서 최근의 수많은 기억들을 뚫고 과거의 편린 하나가 솟아올랐다. “하얀 검은, 여전히 힘껏 지켜내고 있는 거겠지?” 복숭아꽃이 휘몰아치던 날, 책장에 찍힌 분홍색 손자국, 음모의 땅에서 말고삐를 당기며 돌아서던 순간 남겼던 마지막 인사,. “물론, 이야." “그래. 다시 만날 때를 약속했었지. 너의 이름을 부르겠다고,. 보리스, 다시 만날 줄 알고 있었어." 보리스는 가면을 벗어 떨어뜨렸다. 상대가 맞춘 자신의 정체를 인정하는 행동이었다. 모든 아이들이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보리스는 두건을 쓴 상대를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두건 안쪽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기다리지도, 망설이지도 않고 상대가 손을 올려 두건을 젖혔다. 하늘빛을 닮은 짧은 머리카락이 이제 한결 성숙한 소년이 된 그의 희고 곧은 이마에 흩어진 것이 보였다.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소년의 진홍빛 눈매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빛으로 환했다. 그리고 보리스도 그의 이름을 불렀다. “란지에." “다시 만날 줄 알고 있었다고, 다시 한 번 말한다면 믿지 않을까?” “어쩌면 믿을 지도. 난 오래 전부터 네게 이상한 힘이 있다고 믿어왔거든." 파티장에 딸린 여러 개의 별실들 중 하나에 들어와 있었다. 보리스와 루시안, 그리고 란지에와 이엔이 그곳에 있는 사람의 전부였다. 루시안은 다 이긴 줄 알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나타난 란지에가 보리스의 정체를 밝혀 버린데다가 그 란지에가 이엔의 집안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진 탓에 잔뜩 토라져 있었다. 이엔은 이 별실로 그들을 안내한 장본인이었다. 그리고 보리스는 한 눈에 알아보았다. 아마란스 백작의 후계자라고 했던 이엔은 소년이 아니었다. 호리호리하고 예쁜, 그러나 사내애의 옷을 입고 있는 소녀였다. 머리가 짧은 것 같았지만 등뒤로 한 줌의 머리카락만 길게 길러 남긴 것이 희한했다. 란지에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아직도 놀랍다는 듯 미소지었다. “하지만 네 기대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솔직하게 말해야겠는데, 하필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보리스에게 반말을 하는 란지에는 생소하기도 하고, 더 가깝기도 하고, 그 때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낯설기도 했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나 둘 모두 흥분해 있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었다. 사실 그건 루시안을 더욱 기분 나쁘게 하는 일이었다. 자신만의 친구라고 생각했던 보리스였는데, 옛 친구를 만나서 더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자, 그럼 이제 우리들한테도 뭔가 설명해 줄 때가 됐잖아. 루시안도 나도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고. 두 사람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소녀의 목소리에 소년의 말투를 갖고 있는 이엔이 테이블을 톡톡 치면서 시원스레 말하자 란지에가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미소를 보냈다. “이엔도 잘 알고 있을 B씨의 사건 이전에, 함께 그 집에서 지냈지. 이를테면 같은 적에게서 빠져나온 동병상련이랄까." “그래? 그러면 거의 4년만의 만남이군? 반가운 것도 무리가 아니겠는데. 그런데 둘만의 수수께끼가 많나봐. 구경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소개 정도는 해 줘." 그제야 이엔 쪽으로 고개를 돌린 보리스가 그다지 유연하지 않은 태도로 자기 소개를 했다. “아, 나는 보리스, 미스트리에라고 해." “보리스 미스트리에”? 이엔이 팔짱을 끼며 미간에 주름을 잡더니 갑자기 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렇군! 실버스컬 우승자, 보리스 미스트리에!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다 싶었어. 경기는 못 봤지만 그 뒤로 거기 갔다온 여러 녀석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름이거든. 정말로 동일인인 거야?” 대답한 것은 루시안이었다. “그래. 같은 사람이야. 지금은 우리 집에서 내 친구로 지내고 있어." “비슷하네? 란지에도 우리 집에서 내 친구로 지내."그러나 보리스는 미묘하게 그 관계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보리스와 루시안의 관계와는 달리, 란지에와 이엔 사이에는 단순한 친구 이상의 어떤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서로 스스럼없이 대한다는 정도로는 설명되지 않는 유대감이 그것이었다. 보리스가 란지에에게 물었다. ”이곳에서 오래 지낸 거야?"“아니, 얼마 되지 않았어. 두 달 정도인가." 이엔과 란지에가 서로 안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았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 전에는?” “켈티카에서 학원에 다녔어. 좋은 후원자를 만나게 되어서 말이지. 이엔도 그곳에서 만났고." “잠깐, 그것 혹시,. 사립 그로메 학원이라는 곳인가?” 란지 에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고 있지?” 오래 전, 실버스컬 대회에서 로즈니스를 만났을 때 그녀로부터 란지에와 비슷한 외모를 가졌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 때는 학원에 다니면서 귀족들과 친하게 지내고 파티에 오고 그런 소년이 란지에일 리 없다고 마음속에서 일축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좋은 후원자에, 학원이라, 굉장히 부드러운 일상이다. 보리스가 짐작했던 것과는 좀 다른 길을 걷게 되어버린 걸까.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지금 눈앞의 란지에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날카롭게 도사렸던 예전의 모습은 사라지고 매우 유연한 사람으로 변한 것처럼 보였다. 오래 전 헤어졌던 사람들 중 자라서 어떤 모습이 될 지 가장 궁금했던 사람 중 하나가 그였다. 몇 번인가 떠올려 보기도 했다. 얼마나 더 놀라운 사람이 될지, 또는 그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자라날지, 그러나 어느 쪽도 지금의 모습은 아니었다. 얼굴에는 아직 예전의 느낌이 남아 있었다. 진홍빛 눈동자가 시선을 잃고 흔들릴 때, 그는 이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까마득히 멀고 멀어서 살아 생전 결코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 먼 이상을, 닿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하는 마음조차 없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보리스는 머리를 흔들며 생각을 지워버렸다. 세월은 변하고 사람도 변하기 마련인데 자신이 끼여들어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논할 입장은 아니었다. “아니, 뭐, 그 비슷한 학원에 대해서 들은 일이 있어서." “그렇군. 음, 우린,.” 란지에는 말을 멈추더니 곁에 있는 이엔에게 언뜻 곁눈질을 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짐작해내기도 전에 이엔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루시안에게 말했다. “루시안 두 사람은 굉장히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빗 이야기를 하고 싶을 것 같은데 우리 둘은 잠깐 자리를 피해 주는 것이 어떨까? 밖에서 궁금해하고 있을 애들에게 얘기도 좀 해 줘야 되고." “나가자고? 음, 애들한테 무슨 얘기를 해 줘야 되는데?” 루시안은 그리 내키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는데 이엔이 다음 말을 하자마자 갑자기 표정이 밝아졌다. “모르는 거냐? 애들한테 다음 파티 개최권이 여전히 너한테 있다는 것을 어서 알려줘야 할 것 아냐. 란지에는 본래 파티에 참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처음 참가한 사람들 중 최종적으로 남은 건 보리스니까 말이야." “그게 정말이야? 정말로 다음 파티는 내가 열어도 되는 거야?” “당연하지. 게다가 두 번 연속으로 파티를 열겠다고 했다간 관대하신 우리 아버지께서도 고개를 내저으실 거라고." 루시안은 보리스를 보았다 이엔의 말이 기쁘긴 하지만 그래도 나가는 것이 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 때 보리스가 루시안에게 말한다. “조금 있다가 따라갈게," 보리스가 그렇게 말하자 루시안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먼저 나가 있을게." 둘은 밖으로 나가고 별실에는 보리스와 란지에 두 사람만이 남았다. 그들은 테이블 하나를 마주하고 오랫동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탁해졌다고 생각한 눈이 밝아지는 느낌이다,. 말없이 바라보는 가운데 새로운 빛이 나타나 시선이 맞닿는 곳에서 맴돌다가, 갑자기 커지며 사방을 모두 메워버렸다. 하얗게 변한 주위에 갑자기 연분홍빛 꽃잎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다가 이윽고 잠잠해졌다. “이렇게 다시 만난 것은, 어떤 의미가 있어서일까." 란지에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환각은 사라지고 보리스는 다시 맞은편 의자에 단정하게 앉아있는 란지에를 발견했다. 란지에의 입에 미소가 떠오르는 순간 깨달았다. 키가 커지고, 뺨과 목덜미의 윤곽이 뚜렷해지고, 소녀처럼 가늘던 몸에도 열 일곱 살 사내아이다운 매력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그런 변화만큼이나 내면도 달라졌다. 치명적인, 또한 그만큼이나 불안한 칼날처럼 서늘하게 빛나던 소년은 신의 길을 정하여 돌아서지도, 망설이지도 않는 강인한 젊은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자랐다,. 그 때 란지에도 말했다. “많이 자랐구나. 그 때의 너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다. 몇 번인가 네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해했는데 지난 실버스컬이 끝나고서야 소식을 들을 수 있었어. 금방 너라는 걸 확신했지. 일부러 만나려 하기보다는, 이렇게 우연히 길이 겹치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너는 어떻게 된 거야? 난 네가 나처럼 조용한 삶을 목적으로 하는 녀석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전엔 많이 놀랐다. 하지만 역시,.” “잘 봤어. 네가 너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왔듯,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벨노어 백작의 집에서 나온 것부터 이야기해야겠군, 네가 떠나고 나서 그 해 겨울이 시작될 무렵에 예정된 일이 벌어졌지. 시간이 없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도록 하고, 나는 그가 나를 놓아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어. 그리고 어떤 사람을 만나서 그와 함께 켈티카로 갔지, 그 사람의 도움으로 들어갔던 그로메 학원은 사정이 생겨서 졸업하지 못했어. 켈티카에서는 더 있을 수 없는 입장이 되었는데 학원에서 만난 이엔이 도움을 주었고, 그래서 여기서 숨어 지내고 있어." 보리스는 란지에가 필요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는 적당히 끊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말이 묘한 울림으로 그의 귓전을 때렸다. “숨어 있다고?” 말의 내용과는 달리 란지에는 편안한 얼굴로 웃었다. “그래. 네가 저 루시안이라는 아이와 지내는 것과 비슷하게, 이엔의 말동무가 되어 주는 걸로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함께 지내고 있지. 두달 되었다고 했지? 앞으로 한 달 가량 더 있을지 모르겠군." "잠깐, 그럼 너와 이엔은,.” 갑자기 란지에가 등받이에 기댔던 몸을 일으키며 테이블 쪽으로 바짝 다가왔다.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린 그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어떤 것을 추구할 지 짐작하고 있지 않았어?” “그건,.” 단 한 가지가 떠오를 뿐이다. 그랬다, 그가 살고자 했던 삶. 란지에의 강한 눈동자가 보리스의 마음을 꿰뚫어보려는 것처럼 못박혀 있었다. 그 시선이 닿는곳을 불태우기라도 할 것처럼. 그의 입에서 드디어 비밀이 쏟아졌다. “그래. 난 지금 공화정 실현을 추구하는 비밀 조직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나를 도와준 사람 역시 그곳의 간부였고, 학원에 들어간 것도 이후 켈티카에서 정치적 힘을 지니게 될 귀족 아이들을 조직에 끌어들이기 위해서였어. 활동은 성공적이었지만, 대신 나는 공화주의자 괴멸을 목적으로 하는 국왕 직속 조직의 추적을 받게 됐지. 우리 조직은 발각되기만 하면 즉결 처분이 가능할 정도로 국왕에게는 눈엣가시다. 내 목에는 이미 상금도 걸려 있어. 그리고 이엔은 학원에서 만나 뜻을 같이 하게 된 나를 오래 전부터 도와주고 있다. 다시 말해, 이엔도 나와 같은 조직이지." 이엔과 란지에 사이에 존재하는 듯했던 특이한 유대감의 정체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었다. 루시안처럼 놀기 좋아하고, 아무 것도 부러울 것 없는 귀족 소녀로만 보였던 이엔이 공화주의자 비밀 조직의 일원이라고? 란지에의 동료이고? “조금 뜻밖이 었나." 란지에가 얼굴을 살짝 풀며 탁자에 팔꿈치를 짚은 채 깍지를 꼈다. 그걸 보며 보리스는 란지에가 이제 스스로의 감정, 상대의 반응, 대화의 강약, 이야기의 흐름 모두를 자유롭게 조절할 줄 알게 됐다는 걸 느꼈다. 보리스가 처음 마주쳐서 낯설게 느꼈던 ‘유연함’이 바로 그것이었다. 전부터 힘의 흐름을 느낄 줄 안다'고 말했던 란지에의 재능이 가로막고 있던 덫을 뚫고 나오는 순간부터 거칠 것 없이 뻗어 자라난 결과였다. “짐작은 했지만, 역시 그렇구나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나 같은 사람에게 쉽사리 해도 상관없는 건가? 너도 알다시피 난 본디 공화정에 호감이 없고, 지금은 귀족들과 어울리는 대상인의 집에서 고용인으로 지내고 있는 처지야. 숨어 지내고 있다고 했으면서, 내가 널 고발할 것이 걱정되지 않아?” 란지에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당황도, 자신감도 아닌 그냥 부드러운 미소였다. 그걸 보며 보리스는 란지에가 과거 어느 날처럼 ‘그렇게 할 만한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낼 저도 아니고요’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선택이니 어떻게 되든 내 책임이겠지. 난 네게 말하는 쪽을 택했어. 그것은 얻고 싶은 것이 있머서야. 얻고 싶은 것을 위해서는 무 언가 걸어야 하는 거지." “얻고 싶은 거라고?” “그래. 기억나? 네가 저 음모가 벨노어의 손을 떠날 때 나를 믿고 따라와 줬던 것. 처음엔 의심했지만, 결국 내게 신뢰를 주었지." 벨노어 성의 비밀 전시실 열쇠를 건네주던 란지에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그리고 사냥 도중에 떠날 것을 권유했던 목소리도,.. 그가 준비해 주었던 것은 모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뿐이었지. 란지에의 몰바른 선택이 있었기에 지금의 자신도 있을 수 있었다. 새삼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며 감상적인 기분이 된 보리스의 귀에 란지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때처럼,. 다시 한 번 그 생명, 내게 맡겨줄 수 없겠어?” 긴 침묵이었다.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없었다. 두 사람만의 세상에서, 시간이 느려진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어떤 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이 지닌 회의주의자의 눈에 비하면 저 눈동자는 얼마나 선명하게 불타오르는가. 그가 무엇을 말하든 진지하게 들어주고 싶게 만드는, 심지어 결정할 수밖에 없게끔 밀어붙이는 시선이다. 의심 없이 자신이 택한 길을 달려가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도 겁내지 않는 그런 눈은 도저히 흉내낼 수가 없었다. 보리스라면, 스스로는 아무리 옳다고 생각한다 해도 저런 눈으로 누군가를 보며 자신을 따라와 달라고 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것도 심지어 목숨을, 가치 있는 일로 반드시 이끌어 줄테니 맡겨달라는 것, 그 확신이 보리스를 감탄하게 했다. 그러나,. 루시안이 가진 맑고 파란 눈이 지난 몇 달 동안 놀랄 만큼 자신을 움직였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래 전 란지에와 함께 지냈을 때 그를 보며 놀라워했지만, 그리고 어떤 점에서 닮았다는 것까지도 느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울상처럼 가까이 할 수 없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시 만날 때는, 란지에가 그의 이름을 부르겠다고 했듯, 둘의 관계가 완전히 달라져 있을 거란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동시에 기억이 났다,. 당시 어렸던 두 소년에겐 근본 속에 묘할 정도로 닮은 데가 있었다. 그러나 떠난 후 언젠가 다시 마주칠 때, 그 때의 둘은 태생부터 달리 태어난 종족처럼 다시는 닮게 되지 않으리라고 느꼈던 것, 기억하고 있었다. 둘의 세계가 만났던 접점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가 버렸다. 마음 속 깊이 동의하고 따를 수 없는 대의를, 반쯤 가식으로나마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이 때로는 답답했다. 란지에가 이루고자하는 이상은 저 사려 깊고 강한 소년이 자신의 순수를 모두 바칠 정도로 분명 높고 숭고한 것이겠지. 그러나 따라갈 수가 없었다. 따라가는 척 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을 싫어하고 부정해서가 아니라, 그런 삶 자체가 자신의 근본과 조화되지 않았다. 끝내 먼저 입을 연 것은 란지에였다. “네 대답을 알 것 같다." 보리스는 답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란지에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무 뜻밖이었을 거란 거 알아. 하지만 너를 보는 순간 문득 참을 수 없게 되어버려서, 서부른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후회한다는 말은 아니야. 왜냐면 방금 알았거든. 내가 훗날 어느 때 말했더라도,네 대답은 같았으리란 것을." 보리스는 짧게 말했다. “,. 미안하다." “아니. 이것이 네겐 대의에 대한 믿음의 문제가 아니었을 거란 확신이 들어 넌 나와 삶을 느끼는 방식이 다르고, 난 네 방식의 행복을 존중해. 결국 그런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인 것이겠지. 모두가 투사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조금 전 내가 한 말, 어쩌면 지금의 내게 너란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벌써부터 이런 말을 꺼내진 말았어야겠지. 그런데도, 심지어 대답조차 짐작할 수 있었던 질문을 끝내 하고 만 것은 너와 함께 있던 시절에 대한 향수가 내게도 있어서가 아닐까. 저도 모르게 함께 가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겠지." 예전에 같이 지내던 때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너무도 솔직한 말투였다. 어쩌면 그 때의 란지에는 자신과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최대한 신중하게 마음을 감췄던 것이고, 이제 자신이 원하는 길로 마음껏 나아가고 있는 그는 자신의 감정을 풀어내는 법도 조금쯤 배운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난 혁명을 준비하는 자다.” 조금 전까지 부드럽게 말하고 있던 목소리가 ‘혁명'이라는 한 단어와 함께 확연히 다른 흐름으로 변했다. 란지에의 눈동자가 다시금 그 빛깔에 어울리는 열의를 띠었다. “너에 대한 내 감정은 공화주의자인 나와는 별개다. 자연인인 내가 아무리 너와 친교를 나누고 싶어하더라도, 공화주의자인 나와 양립할 수 없다면 그건 불가능해. 우리가 이렇게 헤어진다면 다음엔 어쩔 수 없이 적으로 만나게 될 가능성이 크겠지. 그 때를 위해서,.” 보리스는 란지에가 이어지는 말을 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있다는 걸 느꼈다. 보리스를 다시 만났을 때 란지에는 숨어 있는 처지이면서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파티장의 사람들 앞에 나섰을 정도로 반가워했다. 그러나 또한, 란지에가 목표를 향해 한 발짝 나아가기 위해 스스로의 마음조차 갈기갈기 찢어버릴 수 있는 인간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힘겹게 준비된 말이 냉정한 울림을 갖고 떨어졌다. “다시 만날 땐, 모르는 사이인 것으로 하는 편이 좋겠다." 그렇게 끝나는 것일까. 한 때 우정보다 강한 교감을 느꼈지만, 서로의 마음 속에 감춰진 힘을 보고 감탄하고 돕고 싶어했지만, 이제 최초 의 추억부터 부정하는 한 마디가 둘 사이에 가로놓여 있었다. 보리스는 시선을 내렸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을 하는 란지에의 심정을 모르지 않았다. 인간인 이상 어찌 미련이 없겠냐마는, 그 미련이 자신과 상대를 동시에 그르칠 선택은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너와 내가 지금 나눈 이야기를 다른 누구에게 하지 않는 것만은, 오래 전의 약속에 기대어 믿어도 되겠지?” 대답을 바라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자신이 란지에의 도움으로 벨노어 백작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때 분명 ‘잊지 않고 꼭 갚겠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란지에가 만약 그걸 내세웠더라면, 보리스는 아무리 스스로의 삶의 방식과 배치되는 선택일지라도 서슴없이 약속을 지켜 그를 돕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란지에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쉬워하면서도 보리스의 진심을 물었고, 예상된 결과에 따라 스스로에게도 아픈 결단을 내리고 말았다. 이야기는 끝났다. 보리스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란즈미는 어떻게, 지내지?” “다행히 아직 살아 있어. 고마운 사람들이 보아주고 있지."그 말과 함께 란지에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보리스에게 마지막 악수를 청했다. 그건 그들이 최초로 나눈 악수였다. 오랫동안을 잡아 단련된 손, 연약한 듯 해도 단단한 뼈대를 가진 손이 처음으로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나 손을 놓고 나서 별실을 나가는 란지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5. 그리고 운명은 깨어나고 “생일 축하해!" 7월 중순경의 어느 날, 잠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온 보리스는 난데없는 한 무리의 악사들과 마주치고는 잠에서 덜 깬 눈을 도로 비빌 수밖에 없었다. 물론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악사들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성과가 전혀 없지는 않아서 악사들 사이에 섞여 큼직한 상자를 들고 있는 루시안이 발견되었다. “자, 시작!" 루시안의 신호에 맞춰 악사들이 처음 들어보는 경쾌한 춤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보리스가 얼떨떨하게 쳐다보는 동안 악사들은 저들끼리 싱긋거리며 연주를 마쳤고, 루시안은 자기 어깨를 다 가릴 정도로 큰 상자를 덥석 보리스의 품에 안겼다. “얼른 풀어봐!" 오늘이 생일이었던가,. 갑자기 물어보는 루시안에게 무심결에 대답한 것이 보름쯤 전인 것 같은데 저 잊어버리기 잘 하는 녀석이잘도 기억하고 있었다 싶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보리스 자신도 어제오늘 사이에는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리본으로 맨 상자라니, 이런 걸 마지막으로 받아본 건 열 살 이전이 아니었던가? 성의가 고맙기도 하고, 자기 주변에서 이런 우스운 축하를 생각해 맬 만한 사람은 루시안밖에 없을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처음에 부피로 보아 쾌 무거울 것 같았던 상자가 의외로 가벼워서 한 번 놀랐는데, 리본을 풀어 뚜껑을 열어본 뒤 또 한 번 놀랐다. 안에는 조금 작은 상자가 한 개 더 들어 있었다. “열어봐!" 보리스는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두 번째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방금 전의 상자보다 또 조금 작은 상자가 한 개 더 들어 있는 걸 발견하고는 대뜸 루시안을 째려봤다. 그러나 루시안은 키득키득 웃으며 이렇게 대꾸할 따름이었다. “인내심을 좀 발휘해 봐 아직 많이 남았단 말야. 벌써부터 그러면 어떻게 해?” 인내심은 많이 필요했다. 보리스는 상자 일곱 개째를 열면서 이 상자들이 생일 선물의 핵심이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열 개를 열었을 무렵부터는 고용주가 맡긴 일을 끝낸 악사들까지 루시안과 함께 이 전대미문의 다중 상자 열기에 도전하고 있는 보리스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열 일곱 개째 상자를 꺼냈을 때 거기에는 ‘열 일곱 살 생일을 축하해!' 라고 쓰여진 쪽지도 붙어 있었다. 보리스는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마지막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손을 딱 멈췄다. “,.” 루시안은 보리스가 숨을 가다듬으며 상자 안에 손을 넣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가, 다시 믿을 수 없다는 듯 내려놓고 물러나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보리스는 다시 손끝으로 한 가닥을 집어 올리더니 살짝 비볐다. 파스스 부서져 떨어지는 마른 풀의 가루,. 이곳까지 가져오느라 바짝 말라 있는 그것은 트라바체스의 풀, 니들그래스(needlegrass)였다. 고향 벌판에 지천으로 깔려 있던 줄기 긴 잡초였다. 본래는 아무 쓸모 없는 풀이지만,. 어두워져 가는 저녁 벌판에서 머릿결처럼 물결치는 그 풀을, 고향을 떠나고서 몇 번이고 꿈속에서 보았다. 고향은 그립지 않건만, 니들그래스가 자라는 들판만은 흐릿해지지도 않고 늘 잊을 만하면 나타났다. 그곳에서 풀과 함께 자라며, 뒹굴어 짓이기기도 하고, 뺨이며 옷자락에 묻혔던 니들그래스의 땅에는 그의 형이 있었다. 한 움큼 들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어렴풋하긴 하지만, 가을 무렵이 되면 자주 맡았던 냄새가 났다. “일부러 트라바체스까지 가서 가져오게 한 거야. 어때? 네가 살던 곳에도 이 풀이 있었어? 트라바체스에는 가장 흔한 잡초라던데." 조금 후 보리스는 고개를 들어 루시안을 보며 미소를 보냈다. “물론. 정말로 좋은 선물이었다." 루시안과 함께 지낸 지도 넉 달 가량이 흘렀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 말에는 하인과 사냥꾼 몇을 데리고 근처 강가로 야영 여행 갔다. 풀벌레한테 팔다리를 물려 울상을 짓는 루시안을 달래느라 나우플리온이 예전에 알려준 대로 작살로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줬는데, 이런 것을 처음 해보는 루시안은 금세 철벅거리고 뛰어 다니다가 옷을 다 적시고도 여전히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했다. 보리스도 야영은 거의 1년만이었다. 바지자락을 걷어올리고 나우플리온처럼 머리를 나우플리온이 그랬듯 위로 올려 묶은 다음, 루시안과 함께 작살 한 개만 갖고도 하루 종일 즐겁게 지냈다. 저녁 무렵 물고기 대여섯 마리를 잡아서 올라오니 하인들이 오두막을 다 지어 놓고 모닥불도 피워 둬서 금방 저녁 식사를 만들 수 있었다. 루시안은 귀하게 자란 아이 치고 입맛이 까다롭지 않아서 나우플리온과 다니던 시절 적당히 배워 둔 솜씨로 끓인 생선 수프도 맛있다고 감탄을 연발하며 몽땅 다 긁어먹어 주었다. “넌 참 할 줄 아는 게 많구나. 난 잘하는 게 별로 없는데," 저녁 식사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어가기 전 잠시 별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두 손으로 턱을 받친 채 고개를 잔뜩 쳐들고 있던 루시안이 그렇게 말하자 같이 하늘을 올려다보던 보리스가 말했다. “뭐든 재미있어 하는 것이 네 재능인걸." 바닷가 바람이 불어오는 8월로 접어들자 더위도 한풀 꺾였다. 그 동안 루시안이 여는 블루벨 파티도 있었지만 물론 란지에는 오지 않았다. 이엔에게 물어볼까 싶기도 했지만 역시 그만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보리스는 파티 장소에도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칼츠 저택에도 쾌 큰 서재가 있어서 서늘해진 뒤로 보리스는 한동안 책을 빌려 읽으며 지냈다. 어느 날 저녁, 검술 연습을 끝낸 루시안은 보리스에게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 학원에 갈까 해." “학원이 라고?” “응. 나 말야, 열 일곱 살이나 됐는데 지금까지 통 배운 게 없는 것 같아서. 너무 재미있는 것만 하려고 했나봐." 루시안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참 뜻밖이었다. 보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끄덕여 보이며 말했다. “뭘 배우는 학원에 갈 건데?” “응, 마법! 여기서 서쪽으로 좀더 가면 아노마라드에서 제일 좋다는 마법 학원이 있거든, 마법만 가르치는데는 아니고 검술이나 역사학, 고문학같은 것도 가르친대, 그런데 입학 시험이 꽤 어려운가 봐. 나, 요번 가을이랑 겨울에 열심히 공부해서 연말에는 거기 시험칠까 하는데, 보리스." “왜?” 루시안이 갑자기 눈을 반짝거리며 보리스의 팔을 와락 움켜잡더니 말했다. “같이 가지 않을래?” “으응?” 하긴 루시안 성격에 같이 가자고 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거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보리스는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시험 공부할 자신도 없었지만 그보다도, 학원이란 자기 또래의 아이들이 잔뜩 모여들어 어울리는 곳인 것이다. 루시안의 경우는 좀 특별했지만, 아직 보리스는 자신이 또래 아이들과 잘 지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들은 보리스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이해하지 못할 테고, 자신은 그 아이들의 평범함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런 곳에 굳이 가서,. 그 때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보리스, 음, 난 말이지, 그동안 너를 보면서 내가 참 내키는 대로만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물론 지금도 재미있는 일이 좋고 장난치는 게 좋지만, 그래도,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고. 넌 어려서부터 굉장히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다고 했잖아? 난 그렇지 않았으니까 너랑 동갑이라고는 해도 역시 너만큼 어른스럽게 되진 못한 거야. 지금까지 여러 가지 건드려서 소질 있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결국은 내 쪽에서 지루해져서 그만두고 말았거든. 처음으로 뭔가 열심히 해보려고 마음먹은 거야. 그런데, 네가 옆에 있지 않으면 계속해서 열심히 하지 못할 것 같아서 걱정돼. 그러니까 같이 가자. 네 학비도 아버지한테 전부 내 달라고 부탁할 테니까, 제발 같이 가자!" 보리스는 쉽게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만일 루시안 혼자 학원에 가게 된다면 보리스는 칼츠 저택에 머무를 필요가 없게 될 테고, 다시 새로운 곳으로 떠나야 할 것이다. 그와레로 돌아가서 부닌 아저씨와 지내는 것도 좋겠지만, 역시, 그래도 좋은 걸까? 보리스가 대답하지 않자 루시안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금방 결정을 못하겠거든 좀더 생각을 해 봐. 아, 그리고 너한테 시험은 별로 어렵지 않을 거 같은데. 거기에는 중요한 아홉 가지 과목이 있는데 그 중에 두 가지만 확실히 잘하면 다른 과목은 아무리 못해도 상관없대. 그 중에 검술이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한 과목은 이미 따놓은 당상이잖아? 그러니까 천천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해 봐! 알았지?” 다음 날은 비가 내렸다. 테라스에 나와 앉은 보리스는 빗줄기 너머로 보이는 흰 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루시안은 공부를 시작하기 위해 책을 사오겠다며 가정교사와 함께 밖으로 나갔고, 오랜만에 혼자 오전을 보내던 보리스는 책을 읽다가 빗소리를 듣고 테라스로 나온 참이었다. 늦여름 비는 꽤 많이 내렸다 이 테라스는 저택의 서쪽 귀퉁이에 위치해 있어서 석양을 보기 좋은 곳이었다. 물론 오늘 같은 날 석양을 보는 것은 무리였지만, 귀퉁이인 덕택에 저택 밖의 들판은 언제나 잘 내다보였다. 보리스는 곧잘 지평선을 내다보러 이곳에 나와 앉아 있곤 했다. 물안개 너머에 숲 그림자가 머물러 있었다. 저곳에 숲이 있는 것은 알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사실 외출이 그리 잦다고는 할 수 없었다. 칼츠 저택만 해도 아직 가보지 못한 방들이 부지기수일 정도니까. 더구나 저택 안의 정원은 웬만한 숲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을 모두 맛보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잘 만들어져 있었다. 숲이 흔들린다. 빗줄기는 한 순간 거세어지다가 잦아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비가 잦아들었을 때, 좀 두드러진 나무처럼 보이던 것이 실은 꽤 가까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똑, 똑, 똑,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빗소리와 구별될 정도가 됐을 즈음 빗속에 선 것이 말을 탄 사람임을 알아봤다. 멀찍이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르스름한 머리카락 정도를 알아보았을까, 그 사람이 보고 있는 것이 자신이란 걸 걱우 깨닫는 순간 다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알아볼 듯했던 얼굴은 빗발로 지워져버렸다. 어딘가에서 본 듯했던 얼굴이었다. “보리스, 이것 봐. 멋지지 않아?” 루시안이 소매를 잡아끌며 보라고 재촉하는 것은 사온 책들의 훌륭함이 아니라, 실은 가죽 냄새가 물씬 풍기는 멋진 표지들이었다. 물론 루시안도 자기 집 안에서 아버지가 갖고 있는 책들을 실컷 보았을 지만, 자기가 보려고 사온 책은 처음이었으므로 뭐든 멋있게 생각되는 모양이었다. 보리스는 책 몇 권을 들쳐보고서 말했다. “네가 정말로 이 책들을 읽을 수 있겠어?” “읽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고. 좋은 점수를 받으려면 외우다시피 해야 한대. 아홉 가지 과목이 무엇 무엇인지도 알아냈어. 마법 교과, 전사 교과, 학문 교과로 나누는데 마법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마스터들이 인정할 정도로 보이면 된다고 하고 전사 교과도 어떤 무기를 택하든 한 가지만 잘하면 된대. 학문 교과에는 연금술, 고문학, 수학, 음률, 역사학, 논리학, 웅변술이 있어. 그리고 또 한가지, 만일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다고 해도 학원의 학장이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학장하고 대화를 해서 ‘룬(Rune)' 이라는 걸 받게 되면 무조건 입학이래. 물론, 마지막으로 룬을 받은 사람이 5년 전에 입학한 사람이라니까 그런 요행을 기대할 순 없을 것 같고." “그래서 어떤 과목을 할 셈인데?” “역시 반년도 안 남았으니 모든 과목을 다 공부하는 건 무리겠지?” 책은 일단 다 사왔지만 뭘 하는 게 좋을까? 두 가지를 아주 잘하든지, 아니면 세 가지를 적당히 잘해야 합격이라고 했으니까. 검술은 너한테 배우고 있으니까 일단 계속 하도록 하고, 마법은 전혀 모르니까 어렵겠지? 수학은 어떨까? 나, 아버지가 계산하는 거 옆에서 많이 봤는데." 옆에서 루시안의 가정 교사가 웃으며 말했다. “루시안 도련님, 수학도 쉬운 과목이 아니랍니다. 계산을 잘 하는 것만으로는 안 돼요. 열심히 하실 자신만 있으시면 모조리 다 외워버리면 되는 역사학이 좋을 겁니다. 절대 하실 수 없다고 생각되는 건 고문학과 웅변술이군요. 고대어라는 건 하루 이틀에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웅변술은 도련님 성품에 잘 맞지 않을 것 같네요." 루시안은 그러고도 한참 동안 이게 좋을까, 저게 좋을까 중얼거리며 과목들을 저울질하는 데 몰두했다. 보리스는 웃으며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라면 무슨 과목을 택할까 생각해 봤다. 검술은 당연한 것이고, 찬트를 배웠으니 음률이 가장 나은 선택이지만, 자신은 더 이상 노래할 수 없는 입장이니 역시 무리였다. 그렇다면,. “,.하니까, 역시 역사학이랑 수학이 좋을까, 아참, 보리스! 깜빡 잊고 있었네." “뭘 잊었는데?” 루시안은 품 속에서 편지를 한 장 꺼내어 건네 주었다. 비에 젖었다가 마른 것처럼 얼룩진 편지였다. 보리스는 얼결에 받고서 봉투를 펴봤지만 발신인의 이름은 없었다. “아까 돌아오다가 집 근처에서 예전에 본 적이 있는 사람을 만났어. 왜 있잖아, 네가 실버스컬에서 우승했을 때 너한테 돈을 걸라고 말해 준 예쁜 누나가 있었거든? 그 누나가 너한테 이걸,.” 루시안은 말을 더 이을 수가 없었다. 보리스가 갑자기 루시안의 어깨를 와락 움켜잡았던 것이다. 평소 들은 일 없는 급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실버스컬에서 봤다고? 어떻게 생긴 사람이지? 나이는?” “왜 그래? 스물 정도 된 누나인데 굉장히 예쁘고, 검을 갖고 있고, 머리가 아주 짧고, 아, 금발 머리에 하얀 머리카락이 요만큼 섞여있고, 보리스?” 보리스는 루시안의 어깨를 놓았다. 함께 살아오는 동안 보리스가 저토록 동요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다시 뺨이 달아올랐다. 이미 루시안을 보고 있지 않은 눈동자가 살짝 초점을 잃었다가 창가 쪽으로 홱 돌려졌다. 있을 리가 없는데, 찾으려는 것 처럼. 그러나 밖은 이미 캄캄했다. 몇 걸음 물러난 그는 편지를 뜯었다. (편지에 적힌 내용이다.) / 잠시, 만날 수 있다면 / 서쪽 테라스 밖으로. / 밤 10시 (내용끝) 익숙한 필적이 문득 눈을 흐리게 했다. 아니,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필요는 없다. 그녀가 찾아왔다면 분명 어떤 용건이 있어서이겠지. “루시안, 잠시 나갔다 오겠어." “만나자고 쓰여 있었어?” 루시안의 눈에 일말의 불안감이 스치는 것을 본 보리스는 조용히 대답했다. “곧 돌아올게." 서쪽 테라스에는 담 밖까지 비출 정도로 큰 램프가 세 개나 놓여 있었다. 보리스는 그걸 누가 갖다 놓았는지 알고 있었다. 담벼락에서 조금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말이 한 필 세워져 있었다. 하루 종일 내린 비로 질척해진 바닥이 걸음마다 끈적거리며 달라붙었다. 젖은 공기가 코끝을 시리게 했다 서늘한 밤이었다. 검은 윤곽이 조금 움직였다. “오랜만." “,.”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감정이 주체되지 않아 잠시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보리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그녀가 가까이 왔다. 살아 생전 다시 만나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사람의 입김이 밤 공기 속으로 하얗게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어둠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고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는 빛의 윤곽만 보인다. 그 금빛.... 그녀가 준 머리카락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긴 해도 애써 한 번도 꺼내 보지 않았는데. 자신의 일생에 이런 일이 일어나도 좋은 걸까. ”또, 자랐구나," 보리스는 그녀의 목소리도 조금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걸 느끼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갑갑해지면서 무언가를, 아니, 실은 어떤 말보다도 하고 싶은 한 마디를,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듯이 가빠져왔다. 해도 좋은지 판단하려 했지만 그저 모든 것이 뒤섞이기만 할 뿐이었다. 미치도록, 그 한 마디가 하고 싶었다. “보고 싶었어요, 이솔렛." 헤어진 것이 백 년인지, 단 하루인지 알 수 없게 돼버렸다. 어둠 속에서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차고 단단한 대리석 같은 목소리가 대답해 왔다. “나 역시도." 후둑, 툭, 툭, 투두둑. 쏴아,. 비가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낮에 내렸던 것보다 한층 세어진 빗발이 순식간에 두 사람의 머리와 옷을 흠뻑 적셨다. 비가 이성을 흩어놓는 느낌이었다. 빗소리가 귀를 마비시키고, 젖은 몸에서는 열기가 하얗게 피어올랐다. 호흡이 불규칙해졌다.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다. 빠른 맥박, 온기가 순식간에 전해지고 전해져왔다. “후,.” 손목을 붙잡힌 채 이솔렛은 말이 없었다. 구멍 뚫린 캄캄한 하늘에 서 비는 쏟아지고, 또 쏟아지고,. 세상 그 어떤 사람도 없는 곳으로 달아나고 싶다고, 함께 가고 싶다고 생각한 시간이 따뜻한 훈향처럼 어둠 속을 흘러 흩어져갔다. 이솔렛의 다른 한 손이 다가와 보리스의 손목을 잡고, 자신의 손목으로부터 떼어냈다. 손이 떨어지자 마음은 온통 소음으로 막혀버렸다. 이기적인 소망들이 머릿속 마지막 이성마저 밀어내기 직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비가 오는데 들어와서 이야기하세요. 방해하지 않을게요." 하인도 없이 직접 우산을 들고 바깥까지 나온 루시안이었다. 그답지 않게 낮고 조심스런 목소리를 들으며 보리스는 점차 평소의 자신으로 되돌아왔다. 벽난로에 불이 지펴진 것은 물론, 따뜻한 차도 준비되어 있었다. 루시안의 손님이 올 때 쓰곤 하는 작은 손님방인데 평소에는 거의 쓸 일이 없어서 닫아두곤 했었다. 하인들이 늘 치운 탓인지 내부는 말끔했다. 다만, 사람이 오랫동안 들어오지 않아 무언가 모르게 서늘한 느낌이었다. 두 사람을 안내한 루시안은 놀랄 만큼 주인다운 모습으로 이솔렛을 향해 잠자리도 봐놓을 테니 걱정말고 편히 지내시라고 이야기했다. 갈아입을 옷도 내주겠다고 했지만 이솔렛 쪽에서 미소지으며 정중히 거절했다. 보피스는 그녀가 하룻밤도 머무를 마음이 없음을 알았다. 루시안이 나가고 나서 한동안 소리를 내는 것은 벽난로의 불티뿐이었다. 한참후 보리스가 어떻게 여길 알고 찾아왔느냐고 물었다. “나우플리온 사제님께서 너란 사람은, 새로운 생활에 뛰어들어 모험을 시작하는 성격이 아니라고 말하셨지, 네가 대륙으로 갔다면, 본래 알던 곳 중 어떤 곳에서 시작하게 될 거라고. 그리고 네가 한 때 그와레라는 성의 대장장이 조수가 될 뻔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시더군. 그 때 그걸 택했더라면 이후의 모든 삶이 바뀌었을 거라고 말한 일이 있다면서." 가나폴리의 거울이 준 자신도 몰랐던 해답을 나우플리온이 이미 꿰뚫어보고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웠다. 나우플리온은. 정말로 보리스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 때 이솔렛이 불쑥 입을 열어 말했다. “사제님께서 많이 편찮으셔." 이솔렛은 보리스의 눈이 점차 커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보리스는 한참만에 목소리를 억누르며 물었다. “나우플리온 사제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어째서, 어디가 편찮으신 거죠? 사고라도 당하셨나요? 결투라도 벌이신 겁니까?” “그럴 리가. 그 분의 오랜 지병이야. 악화되었어.” ‘지병' 이라는 말에 무언가 물으려던 보리스가 움직임을 딱 멈췄다.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흔들고, 무언가 입 속으로 되뇌어 보다가 가늘게 입술을 떨었다. 모든 것이 빠른 책장처럼 머릿속을 스쳐갔다. 스스로에게 알고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랬다. 알고 있었다. 그것이 무슨 병인지를. “많이, 나쁜 건가요." “유감스럽지만, 올해 말이 한계가 될 거라고 해. 모르페우스 사제님의 말씀으로는." 고개를 숙이고 있던 보리스가 갑자기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고개를 든 이솔렛은 보리스의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것을 보았다. 도저히 표정을 가누지 못한 그가 허공을 향해 소리질렀다. “왜, 내게 그런 거짓말을! 왜, 도대체 왜!" 이솔렛은 다시 시선을 천천히 내렸다. 그녀는 보리스가 하는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나우플리온이 섬을 떠나는 보리스에게 한 거짓말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우플리온이 보리스가 섬을 떠나지 못할까봐 그랬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심지어 이솔렛 자신까지 생각해 준 것임도 알고 있었다. “그런 줄 알았더라면.... 죽는 한이 있어도 떠나지 않았어,.” 목이 막혀 갈라진 목소리가 띄엄띄엄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솔렛은 벽난로 한구석에 시선을 둔 채 입을 다물었다. 조금 후 눈을 감았다가 뜬 그녀가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을 알았을 때, 나 역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어. 그래, 나를 미워하는 것이 좋아. 그 분은 자신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마지막 물건을 나를 위해 써버렸고, 단 한 명밖에 고칠 수 없는 그것으로 자신도 치료되었다고 네게 거짓을 말했지. 내가 ‘붉은심장’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얼마 전, 데스포이나 사제님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후부터야. 더 나아가자면 그 분의 일은 온전히 나와 아버지, 우리 부녀 때문인 셈이지." 보리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이어졌다. “내가 ‘붉은 심장’이라는 것의 존재와 그것이 지닌 치유의 힘에 I대해 안 후 가장 먼저 의심했던 것은, 그렇다면 왜, 최초의 괴물이 남긴 심장이 나우플리온 사제님의 치유에 사용되지 못했는가 하는 거였어. 어차피 그전투에서 생존자는 사제님 혼자였지, 아버지께서 살아오실 수 없었다는 건 내가 누구보단도 잘 알아. 아버지와 나의 검술, 티엘라에는 자신의 생명을 뽑아내는 것으로 동시에 적을 죽이는 기술이 있지. 더구나 아버지의 옛 일지 속에는 그 심장의 용도에 대해 분명히 알았다는 기록이 있어, 그렇다면 도대체 왜?” 옷에서 흘러내린 물이 바닥을 적시며 번지는 것이 보였다. “난, 그것이 아버지의 고집 탓이 아니었을까 처음으로 생각해 보았어." 보리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일리오스 사제는 제자의 일로 화가 나서 일부러 그걸 부숴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이솔렛에게 그 이야기를 할 마음은 없었다. “오래 전에, 어렸던 내가 우연히 아버지의 검에 새겨진 글자의 비밀을 알고서 같은 것을 만들어달라고 조른 일이 있었지. 아버지께선 미안하지만 당신께선 만들 줄 모르신다고, 그 검의 출처조차 모르신다고 말씀하셨어. 그 검은 내가 물려받았지만, 아주 나중에야 검의 제작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지. 너도 같은 검을 갖고 있는 걸 본 후에.” 이솔렛의 목소리는 젖은 머리처럼 착 가라앉아 있었다. 이미 수많은 번민을 겪어 더 이상 동요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사람처럼 “너는 그 검이 나우플리온 사제님한테 빌린 것이라고 했지. 난 그런 검을 한 번 더 다른 사람의 손에서 보았는데, 정확히 말하면 죽은 사람의 손이었지, 유품이었으니까. 추측이 모아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어, 오이노피온 노인, 나우플리온 사제님을 가르쳤던 그 어르신이 답이었지 그래, 사실을 말하자. 아버지께서 죽음의 길을 택했던 운명의 새벽에, 나는 사제님을 만났어." 밤이 깊어갔다. 감춰졌던 모든 비밀과 함께. “그 분은 내게 반드시 아버지를 지키겠다고, 그렇게 함으로써 오래된 빛을 갚겠다고 말했어, 약혼 사건 이후로 그와 내가 말한 건 그 때가 처음이었고, 그리고 그 후로 몇 년간 마지막이 되었지. 난 나우플리온 사제님이 아버지가 죽더라도 자신만 살아오려 했으리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어. 그런데도 네게 그렇게 말하고 만 건 남은 증오가 너무 커서였겠지, 남은 자에 대한 증오, 단지 죽은 자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미치도록 아쉬워했기 때문에," 보리스는 고개를 돌렸다. 천장 쪽으로 눈을 돌렸지만 눈물이 멈춰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때로는 다른 일들이 그런 감정들을 부숴 놓고 말지. 이젠 내 쪽이 채무자가 되고 말았어. 그 분에게 생명의 빚을 지고, 그리고. 너를 빚졌어." 이솔렛이 고개를 젖히며 회한 어린 긴 숨을 내뱉었다. 분홍빛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갚을 방법을 찾을 수가 없어서, 나는 맹세를 하고 섬을 나왔어. 올해가 가기까지 힘을 다해서 다시 한 번 치유의 붉은 심장을 찾아내기 위해. 물론 나우플리온 사제님은 헛된 일이라며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 아니, 오히려 웃으면서 차라리 너를 만나고 돌아오는 것이라면 보내주겠다고 말하시더군, 내가 끝내 가겠다고 하자 사제님은 내 맹세를 받아내셨지. 슬픈 일이 일어나면,.” 이솔렛의 목소리가 완연히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껏 억지로 버티며 지켜온 평정이 일시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내게, 뒤를 이어달라고, 내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내게 돌아갔어야 할 그 자리를, 이제 도로 받아달라고, 내게 맹세하게 했어. 그 해쓱해진 얼굴, 너는, 상상할 수 없을 거야,.” 참고 참았던 울음이 터지며 두 손이 얼굴을 가렸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울지 않을 것 같았던 그녀였는데,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일리오스 사제가 죽은 후로는 한 번도 울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 때도 있었다. 유령들의 땅으로 이어지는 멘탈 포레스에서 들었던 젊은 나우플리온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저는 이솔렛의 눈물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그 어떤 것보다 보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나, 돌아가게 해주세요." 대답이 없는 이솔렛에게 보리스는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돌아가서, 그 분 곁에 마지막까지 있도록 해 주기만 한다면, 정말로 그 뒤엔 어떻게 하든 상관없어요. 절벽에서 떨어진 그 아이들처럼, 죽인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제발 저를 데리고 가 주세요. 도저히 이대로 있을 순 없어요. 이대로 있다간 이 자리에서 목이라도 맬 것 같은 기분이군요." “나우플리온 사제님이, 그걸 원할 것 같니?” 고개를 숙인 이솔렛의 입에서 쉰 것처럼 까칠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의 행복을 세상 그 무엇보다도 바라는 분이야, 죽어도 좋다고? 너 혼자만의 목숨이 아닌 것을 함부로 던질 수는 없어. 죽는단 말은 다시는 꺼내지 마." “정말로, 제가 다시 순례자로 돌아갈 방법이 없나요? 전혀 없을까요?” 그러자 이솔렛이 고개를 들며 나직이 말했다. “리리오페와 결혼하면 되지 않을까" 보리스는 얼어붙은 것처럼 이솔렛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이제 와서, 그런 농담은 마세요." “농담이 아니야. 그 애, 네가 떠난 후로 시름시름 한단다. 예전의 그 애가 아니야. 섭정 각하의 큰 걱정거리가 됐지. 네가 돌아와 그 애가 좋아진다면 용서받을 가능성도 조금은 생길 테니까." 얼마나 우스운 딜레마인가. 마치 그들 세 사람을 놀리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진 것 같은 이 지독한 순환고리, 그 안에서 어느 고리를 끊고 벗어나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떤 고리도, 감히 끊을 수 없는 자신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처럼 혐오스러웠다. 인 순간에도, 방금 전까지 진심을 말하던 이 순간에도 망설이고, 대답할 수 없는 것은, 그가 갇힌 이 딜레마의 상자가 너무도 견고하여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는 까닭이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납은 차가 싸늘하게 식었다. 시계가 열두 시를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한 일이지만 갑자기 그 소리만큼이나 모든 생각이 또렷해졌다. 이솔렛이 여기 와 있는 이 유,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단 하나가 남아 있지 않나? 분명히, 있다. “여기 오지 않는 것이 좋았을까, 하지만 네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그 분은 물론 알리길 원하지 않으셨겠지만, 그건 아버지의, 일을 아들에게 알리지 않는 것과 같을 테까." 아버지의 죽음을 겪어 보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녀조차도 ‘죽음’ 과 같은 단어가 입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건 보리스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나우플리온을 대상으로는,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는 단어였다. “또는, 이런 상황에서조차 그보다 다른 이유 때문에 왔는지도 모르고." 이솔렛의 그 말이 보리스를 흠칫 놀라게 했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뜻에서, 한 말이었을까.“그럼, 이만 갈게." 보리스는 자신이 내린 결정을 이솔렛에게 말해줄 것인가 조금 망설였다. 그러나 입을 열었다가는 그녀마저 위험하게 되고 말 거라는 생각을 하자 결코 말할 수 없다는 결심이 섰다. 그것은 혼자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둘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늦은 시각인지라 루시안은 이미 잠들었을 터였다. 그들은 저택 입구에서 짧은 인사만을 두고 헤어졌다. 오랫동안 이솔렛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은 모조리 억눌렀다. 지금은 말할 수 없었다. 멀어지는 이솔렛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 한 구석이 시렸지만, 결심한 그 일을 해낸다면 반드시 재회할 수 있을 거란 확신으로 견뎌냈다. 그 때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장, Nature Seals Her Promise of Spring in White 1. 마침내 돌아온 잔 바람이 많이 부는 8월 초순의 어느 날, 보리스는 넉 달 간의 머무름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솔렛이 찾아왔다가 떠난 지 이틀만의 일이었다. 루시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지 말라고 잡거나 왜냐고 묻지도 않았다. 보리스가 루시안의 아버지 칼츠 씨를 만나 과거의 중대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오겠다고 말할 때 루시안도 그 곁에 서 있었다. 루시안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본 드메린 칼츠 씨는 별 말 않고 가도 좋다고 허락해 주었다. 떠나는 날 아침 일찍, 루시안이 저택 입구의 고풍스런 기둥에 기대 선 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간단한 여행자 복장에 검 두 자루, 검은 망토만을 걸치고 걸어나오던 보리스는 루 안을 향해 다가갔다. 바람에 망토 자락이 나부꼈다. 칼츠 저택의 정원에 선 수많은 나무들이 일제히 나뭇잎을 뿌리고 있었다. 잎새들을 쓸어가고, 녹색 풀들을 쓰다듬던 바람이 이윽고 루시안의 흰 재킷 자락을 부풀게 했다. “나 말이야, 너 처음 왔을 때." 기댄 기둥에 신발 자국을 비벼 남기고 있던 루시안이 보리스가 가까이 오자 입을 열었다. “나랑 다른 것도 다른 것이었지만, 자꾸 보고 있자니까 이렇게 심심하게 살아온 녀석이 있다니, 필히 재미있는 일을 가르쳐 주어야겠다는 사명감이 들더라고." 루시안 앞에 선 보리스는 어이없는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런 것도 사명감인가." 루시안은 고개를 저으며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넌 정말 이상한 애였어! 나한테 지금까지 좋은 친구가 없었던 건 내가 싫증을 잘 냈기 때문이었어. 난 뭐든 싫증을 잘 내거든. 그래서는 친구 같은 거, 금방 다 잃어버리잖아. 그런데 너는 나랑 너무 달랐어. 내가 모르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너를 보면 기분이 이상해지곤 했거든. 나로서는 결코 느낄 수도, 겪을 수도 없는 세계랄까. 내가 고집을 부릴 때, 기절시켜서라도 고집을 꺾은 사람도 너뿐이었어. 넌 말이지, 음,.” 루시안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말을 고르다가 말했다. “아무리 알고 또 알아도, 다 알 수가 없을 것 같았어. 그래서는 절대 싫증을 낼 수 없잖아?” 보리스의 얼굴에 곤란한 듯한, 그러나 따뜻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의 입에서 평소라면 쉽게 하지 않을 말이 흘러나왔다. “나도 네가 나와 너무 달랐기 때문에 좋았어." “그래서, 우리 재미있게 지냈잖아?” 루시안이 다문 입술을 한껏 움직여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양 뺨이 동그랗게 도드라지며 아이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래." 바람이 다시 불었다. 늘 묶고 지냈는데 여행을 떠나며 오랜만에 풀어놓은 긴 머리가 물결치고, 루시안은 바람 속에서 짤막한 금발이 눈을 찌르는지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자꾸만 그러고 있다가 불쑥 말했다. “사실은, 너 가지 말라고 잡고 싶었어." 보리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너무나 여행하기 좋은 날씨였다,. “너한테, 내가 알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있다는 것, 알아. 하지만 이번에는, 나도 모르겠지만, 정말 위험한 일일 것 같다는 생각이, 그런 생각이 들었어. 말릴 수 없다는 것, 알면서도, 그런데도,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지 뭐겠어,.” 말없이 땅을 내려다보고 있던 보리스는 한 걸음 다가가 무언가 참고 있는 루시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확신 어린 어조로 했다. “이번에 돌아오게 되면, 너와 함께 학원에 갈게. 약속해." 이번에는 루시안 쪽에서 아무 말도 못했다. 보리스는 다시 한 번 약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자신이 쉽지 않은 약속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은, 지키지 못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생각했다. 학원에 함께 가기 위해선, 살아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그럼, 꼭 약속이다?” “그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뛰어넘어야 할 수많은 어려움들을 알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만큼은 보리스도 진심이었다. 손을 거두며 물러선 보리스는 짧은 미소만 남긴 채 입구를 나섰다. 루시안이 마구간에 말해서 준비시켜 놓은 말 한 필이 그곳에 서 있었다. 루시안이 늘 타던 가장 좋은 말이었다. 말에 오른 보리스는 더 이상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산과 들이 스쳐갔다. 달리는 말 위에서 아노마라드가 멀어져갔다. 그럴수록 다른 땅은 한층 가까워졌다. 더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 그가 돌아가고자 하는땅의 어둠을 향해 달려갔다. 지체할 여유가 없는 여행이었다. 머뭇거리다가는 모든 것이 돌이킬수 없게 되어버릴 지도 모른다. 8월 하순이 되기 전에 보리스는 아노마라드 식민령 티아(Tia)를 가로질러가 곧장 트라바체스 국경을 넘었다. 루시안의 아버지가 배려해 준 신분 증명이 큰 도움이 되었다. 국경을 넘고 부터는 진로를 북동쪽으로 했다. 닷새 더 달려가 8월이 끝나기 직전, 간신히 그가 가고자 한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트라바체스의 수도, 론(Ron). 그가 최종적으로 목적하는 땅은 이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전에 반드시 찾아가야 할 곳이 있었다. 이제 그가 돌아가려 결심한 곳은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 되는 최후의 승부처였다. 그 전에 그는 한 사람을 만나 과거의 일을 매듭지으려 결심하고 있었다. 론 시내에서 그 저택을 찾아내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 “누구시라고요?” 긴 여행으로 먼지투성이가 된 보리스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중년의 문지기가 의심쩍다는 듯 되물었다. 보리스는 오른손을 들어 이마에 흩어진 머리를 걷어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모아 쥔 다음 든 문지기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게 했다. 조금 후 문지기의 눈이 의혹으로 흐려졌다. “당신도 눈이 있다면, 내가 그의 조카라는 걸 의심할 수 없을 것 아닌가요?” 보리스는 점차 자라면서, 그들 집안의 사람들이 꽤 비슷한 얼굴을 타고난다는 옛 이야기를 스스로의 얼굴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몰랐지만 보리스와 예프넨이 닮은 것은 물론이고, 그들은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 율켄을 닮아 갈 것이며, 율켄은, 친동생 블라도 진네만과 닮아 있었다. 그 파충류처럼 노르스름한 눈빛만은 다르지만. “흐음, 맞는 것 같지만 주인님을 만날 수는 없을 겁니다 이틀부터 아니 계시고, 또 조만간 돌아올 것 같지도 않으십니다." 그 때였다. “마님, 제발!" “이러지 마세요, 마님!" 하녀 몇 명이 애타게 간청하는 소리가 들리고, 조금 후 무언가 깨지고 부서지는 듯한 소음이 들려왔다. 보리스가 불길한 낌새를 채고 대뜸 물었다. “집안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삼촌에게 문제라도?” 자신이 블라도를 ‘삼촌'이라고 다시 부르게 될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나, 어쨌든 그는 그렇게 물었다. 문지기는 좀 망설이다가 보리스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고서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넓은 응집실로 들어갔을 때, 보리스는 예상 밖의 광경에 놀랐다. 겉으로 보았을 때 훌륭하고 깔끔해 보이던 저택이었는데 내부는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때 응접실을 장식했던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곳곳에 부서져 흩어져 있었다. 목 긴 꽃병이 부러진 채 떨어져 있었고 꽃은 이미 시든 채였다. 삐뚤어지고 구겨진 양탄자도 누구도 손대지 않았다. “누구지? 당신, 소식을 갖고 왔어?” 젊은 부인이 응접실 한 구석에 아이처럼 조그맣게 웅크리고 있다가 고개를 번쩍 들고 보리스를 쳐다보았다. 그녀를 내려다본 보리스는 말하는 것을 잠시 지체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 이 집의 안주인이었으리라 생각되는 그녀는 보기에 애처로울 정도로 흐트러진 옷매무새에 다듬어지지 않은 머리를 하고 미친 사람처럼 떨고 있었다. 하녀들이 그녀를 일으키려 했지만 그녀는 막무가내로 기다시피 보리스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어깨에 걸친 숄 자락을 끌어당기며 눈물자국으로 얼룩진 얼굴을 보리스의 눈앞에 갖다댔다. “말해 줘! 어디 있어? 그 애는 어디 있어? 아버지 손으로 돌아온 거야? 그렇지? 그 애는 아무렇지도 않겠지?” “누구를, 말하는 건가요?” 보리스는 직감적으로 이 부인이 자신의 숙모이리란 것을 짐작했으나 그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꺼내 보았자 알아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 부인은 계속 숄 속으로 몸을 움츠리면서, 그러면서도 일그러진 얼굴로 계속 소리를 질렀다. “그 애를 데려와! 우리 아기를 데려와! 우리 아기가 울고 있어! 그 애가 우는 소리 때문에 미칠 것 같아!" 보리스는 갑자기 손을 내밀어 부인의 양쪽 손목을 잡았다. 부인은 흠칫 놀라 손을 빼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게 꽉 움켜쥔 채로 물었다. “그 아이란 것이, 숙모와 삼촌의 아기입니까?” ‘숙모’,‘삼촌'이라는 말이 그녀에게 어떤 충격을 가져다 준 모양이었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던 그녀는 갑자기 온 힘을 다해 보리스의 손을 뿌리치고 뒤로 넘어졌다. 그리고 덜덜 떨면서 하녀들을 불렀다. “루치카! 보로냐! 나, 나를 데려가 줘, 나, 나는,.” 보리스는 뚜벅뚜벅 하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하녀는 보리스가 조금 전 한 말을 듣고 그가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인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며 말했다. “저, 저, 마님께서는, 좀 불편하세요." “아기가 어떻게 된 거지?” “아가씨는 없어졌어요,. 이틀 전에 아가씨 생일 날 사라져 버려서, 주인님은 아가씨를 찾으러 가버리셨어요. 얘기로는 집사님이 데려가셨다고,.” “집사?” “네, 튤크 집사님이,.” 그 순간, 보리스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며 되물었다. “튤크 집사라고?” 그 이름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틀크 집사, 진네만 가문의, 아버지 율켄의 심복이 아니었던가! 아버지와 함께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그가 어째서 이곳에 있었다는 거지? “틀크 집사라는 사람은, 본래부터 이곳에 있던 사람인가?” “주인님께서 오래 전에 데려오신 분이라고만, 알고 있어요." 보리스는 홱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대로 된 설명을 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 때, 저택 안쪽에서 대략 일흔은 되어 보이는 늙은 하인 한 사람이 걸어나오다가 낯선 사람을 보고 멈추어 섰다. 하녀가 얼른 달려가 그 노인에게 속삭였다. “하인장님, 저, 주인님의 조카라고,.”하인장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는 보리스를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어 말했다. “그러면, 돌아가신 율켄 어르신의?” 보리스가 하인장과 말하려고 응접실을 가로지를 때 이 집의 안주인인 젊은 부인은 마치 행려 병자처럼 몸을 끌며 옆으로 피했다. 그녀는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들을 이야기가 있다고 느낀 듯 떠나지는 못했다. 다가간 보리스가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율켄 진네만이 제 아버지입니다.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하인의 눈이 커졌다. “오오, 이럴 수가, 정말로 살아 계셨단 말씀이십니까,. 이런 다행한 일이, 저는 옛날, 예니치카 아가씨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진네만 저택에 있었답니다, 그 땐 사병이었지요. 그러나 두 형제분께 서 의절하시고 나서 블라도 주인님을 따라오게 췄습니다. 통령 각하께서 론의 사병을 모두 거두게 하셨을 때 저는 너무 늙어서 하인이 되었지요. 도련님께서는 기억 안 나십니까? 제가 목마도 자주 태워드렸는데요, 보리스는 이 하인장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문득, 예니치카 고모가 죽을 때 자신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렇다면 이 하인장은 지금 자신을,. “전, 예프넨 진네만이 아닙니다.” “예? 그럼,.” “예프넨 형은 오래 전에 죽었습니다. 저는 동생입니다." “아,." 노인은 너무 늙어서 예프넨의 나이도, 그의 외모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저 그 시절 진네만 저택에 아이라고는 예프넨 한 명밖에 없었으므로 그 아이를 잊지 않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조금 후 보리스를 바라보던 노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 착하던 도련님이 돌아가시다니,.” 보리스도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형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을 보니 새삼 무언가가 울컥 치미는 기분이었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며 노인에게 물었다. “어린아이는 어떻게 된 겁니까?” “틀크 집사를, 기억하시지요?” “그 분이 이곳에 계셨던 겁니까?” “예, 그 사람이 이곳으로 온 걸 보고서 율켄 어르신께서 이미 살아 계시지 않으리란 건 짐작했습니다만, 참으로 뜻밖이었지요. 아시다시피 그 사람은 율켄 어르신의 제일가는 충복이 아니었습니까? 저야 그 사람이 진네만 저택으로 오기 전에 먼저 블라도 주인님께 왔습 니다만, 어쨌든 그리 쉽게 배신할 사람이 아닌지라 마음을 바꿨다는 이야기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지요. 그러나 몇 년 동안 튤크는 블라도 주인님을 잘 섬겼습니다. 그게 블라도 주인님께, 가장 치명적인 복수를 하기 위한 기나긴 준비였음을 이제야 알게 된 겁니다. 그는 정말로, 무서운 자였습니다." “그러면,.” 보리스의 머릿속에서도 상황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도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 본 튤크가 얼마나 음험하고 무시무시한 인물이었는지. “그 사람이, 어린 예니 아가씨를 납치해 갔습니다. 그 날은 예니 아가씨 생일이었지요. 예니 아가씨를 보러 온 손님들이 너무 많아서 잠시 아가씨가 보이지 않아도 다른 손님과 놀고 계시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파티가 끝났을 즈음 두 시간이나 아무도 예니 아가씨를 보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마님도, 주인님도, 유모도, 하녀도, 집안이 발칵 뒤집히고 나서 튤크 집사의 방에서 편지가 나왔습니다. 편지를 보시고 블라도 주인님께서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되어 예니 아가씨를 되찾아오겠다고 저택을 떠나셨지요,.” 아이 이름이 ‘예니'인 건가, 보리스는 블라도 삼촌과 예니치카 고모의 일을 자세히 몰랐으므로 오히려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비참하게 죽고 만 고모의 이름을 딸에게 붙이다니. “그 편지를 볼 수 있습니까?” “주인님께서 가져 가셨습니다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어린아이의 생명이 죽은 사람의 피를 갚게 될 것'이라고요. 어디로 간다는 말은 없었지만 주인님께서는 어디로 가야 할 지 아시는 것 같았지요. 그리고 그 순간, 보리스도 느낄 수 있었다. 튤크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어디로 갔을지, 그리고 블라도가 그것을 어찌 알 수 있었는지, 이 운명에 얽힌 자들만이 깨달을 수 있는 마지막 장소, 그곳뿐이었다. 그곳보다 아버지의 피를 갚기에 더 좋 장소가 달리 있을까? 그리고 그곳은 바로 자신이 가려는 장소이기도 했다. 곁에 있던 숙모가 중얼거리다가 무언가를 외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목소리가 커지고 나서 그 섬뜩한 말을 모두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 흘린 피의 값을 치르게 된 거야! 이런 날이 올 줄 난 알고 있었어, 신의 맷돌은 느리게 돌지만 밀알 하나도 놓치지 않으니,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겠지? 하지만 죽은자는 잊지 않아! 당신의 죄가 예니를 데려간 거야! 당신의 죄가!" 우는건지 웃는건지 알 수 없는 기괴한 소리로 떠들어 대는 숙모를 바라보며 보리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인장에게 고개를 돌린 보리스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몇 년에 걸쳐 쌓아온 블라도에 대한 원한, 그것이 보리스보다 강할 사람이 있을까? “본디 이곳에 올 때 저는 삼촌에게, 과거의 그 모든 일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려 했습니다. 삼촌의 무서운 고집 때문에 아버지와 예프넨 형이 끝내 목숨을 잃었고, 혼자 남겨진 저는 몇 년 동안 수십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살아왔습니다. 진네만 가문을 이루던 사병들도 뿔뿔이 흩어지거나 목숨을 잃었고요. 그만한 결과를 낳는 일을 저지르려 했을 때, 분명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중대한 까닭이 있었으리라고 믿기에.... 그것을 들어야만 제 마음을 정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나 이제는 물을 수가 없게 되었군요. 나중에 삼촌께서 이리로 돌아오시거든 이렇게 전해 주십시오." “무엇이라고,?” 보리스는 한 걸음 물러나며 나직이 말했다. “당신의 죄는, 사람의 손이 아니라 운명의 손으로 거두게 될 것이며, 마침내 독이 든 잔이 당신 앞에 돌아왔을 땐 결코 피할 수도 용서받을 수도 없을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보리스는 몸을 돌렸다. 늙은 하인장과 하녀들, 그리고 반쯤 정신이 나간 젊은 부인은 소년의 검은 망토가 문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종그날 님으로부터의 전언이다." 류스노 덴, 칸 통령의 숨은 무기로서 ‘1익’ 이라 불리는 그가 통령을 만나러 가지 못한 지도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 윈터러를 가진 소년을 찾아내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이미 3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을 맡게 된 후 최초로, 그는 연달아 실패했다. 몇 번인가 가까이 닿을 뻔하긴 했다,. 그러나 완전히 손아귀에 넣지 못하는 한 ‘그럴 뻔했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였다. 최근 그는 자신에게도 조바심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끼는 중이었다. 그렇게 오래 기다리고 다시 모든 조사를 처음부터 시작하기를 몇 번, 그런 끝에 드디어 실마리를 잡아 이곳까지 온 것이다. 그런데 정말 시작 지점으로 되돌아온 느낌이었다. 그들이 찾아온 곳은 다름 아닌 트라바체스, 그와레 성이었다. ‘4익' 유리히 프레단도 오랜만에 함께였다. 몇 번이나보리스의 종적을 놓쳐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두 사람은 한동안 헤어져서 각자 조사를 벌였는데 자신들이 갖고 있는 대륙의 정보망을 완전히 총동원하다시피 하여 노력한 결과 결국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보리스가 필멸의 땅에 들어갔다가 그와레로 간 방식을 생각하면 그들은 거의 불가능한 조사를 해낸 셈이었다. 두 사람은 그와레 성 사람들이 확실히 ‘보리스’ 라는 이름을 가진 한 소년을 기억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끝내, 보리스가 머물렀던 부닌의 대장간도 찾아내고 말았다. 친구인 양 좋게 위장한 결과, 드디어 보리스가 대상인 드메린 칼츠에게 고용되어 아노마라드로 떠났다는 정보까지 손에 쥐었던 순간이었다. 찾고 찾던 목표물이 드디어 발자국을 남겼다는 것을 알았는데, 칸통령의 마법사종그날로부터 전혀 엉뚱한 정보가 전해져 온 것이다. 류스노의 설명을 듣자마자 유리히는 다짜고짜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그 녀석이 론에 나타났다고요? 으악, 젠장!" “그래. 블라도 진네만의 저택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고 한다. 늙은하인이나 하녀의 말을 얼마나 믿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으으, 난 그 놈을 이제 존경하기 시작했단 말입니다! 이번에는 론이라고요? 정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놈이잖아요!" 류스노는 유리히의 반응을 무표정하게 보고 있다가 말했다. “너도 아는지 모르겠지만, 블라도 진네만이 딸을 도둑맞았다는군.” “뭐? 그 딸이 몇 살인데 벌써 도둑맞는단 거죠? 대체 어떤 녀석이?” “그런 얘기가 아니고, 블라도 진네만이 데리고 있던 심복 중 한 명이 배신을 해서 어린아이를 데리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 심복은 블라도가 예전에 멸망시킨 친형제, 즉, 우리가 쫓고 있는 그 소년의 아버지가 데리고 있던 자였지 그자가 복수를 하기 위해 몸을 숙이고 오래 기다렸던 모양이다." “체, 자기 주인을 배신한 놈을 데려다 쓰니까 그렇죠. 배신이나 하는 놈 따위, 아무리 능력 있다고 해도 결국은 화가 된다니까." 전형적인 트라바체스 사람다운 의견을 내뱉은 유리히는 이어서 물었다. “그럼 이제 우리는 론으로 가야 하는 건가요?” “나는 생각 중이야. 일단 소년이 블라도의 저택에 나타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복수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삼촌이니까. 그게 아니면 이제 와서 찾아갈 이유가 없지 않겠어?” “그렇다 치고, 진짜 나타난 것이 아니란 건 뭐죠?” “너도 알다시피 이미 몇 년이나 지났지,. 소년의 모습은 많이 변했을 거야, 이곳에서 물어봐서 너도 알지 않나? 그런 소년의 얼굴을 . 향도 아닌 곳에서 제대로 알아볼 사람이 과연 있을까? 늙은 하인이나 하녀들이 엉뚱한 사람을 잘못 보았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나?” “,있겠죠." “그렇다면 다짜고짜 그쪽으로 갈 일은 아니지. 그런데 또 하나 석연치 않은 것이 바로 블라도의 딸 문제다. 블라도가, 정말로 딸 때문에 저택을 비운 것일까?” “무슨 소리죠? 딸 때문이 아니라면, 혹시 블라도 놈이, 그 녀석을 피해서 달아나기라도 한 거란 말입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이 소년은 우리가 찾지 못하는 동안 상당한 수준의 검사로 성장한 것 같지 않나. 블라도가 딸없어졌다느니 하는 핑계를 대고 일부러 숨었을 가능성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나?” “그것 참, 꽤 복잡하군요. 끄응, 그러면 어떻게 해야한담." “갈라지자." 그것은 당연하고도 효율적인 답이었다. 유리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한 사람은 아노마라드로, 한 사람은 론으로?” “아니, 론은 갈 필요가 없어. 소년이 복수를 위해 사라진 블라도를 추적하고 있다면, 그리고 블라도가 정말로 딸을 데려간 놈을 찾기 위해 나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마지막으로 그 딸을 데려간 자가 바로 소년의 아버지의 심복이었다면, 갈 곳은 론이 아냐." “어디죠?" “롱고르드, 그들의 고향이다." 조금 후 유리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멀지도 않군요." 트라바체스에서 벌어진 수많은 피바람 가운데서 성장해 온 두 암살자에게 그 정도의 상상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주인을 죽인 자에게 복수하려고 몇 년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드디어 딸을 납치한 자가, 주인의 저택으로 가서 딸을 죽인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적당한 각본이 아닌가. 둘은 서로 마주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행동을 결정했다. 2. 최후의 인사 바람 소리가 났다. 깊숙한 구멍을 통과해 가는 듯한 소리였다. 인간이, 코를 거치지 않고 폐로 직접 호흡을 한다면 날 듯한 소리였다. 그런 소리가 눈앞에 선 거대한 폐허에서 나고 있었다. 슈우우우우우,. 보리스는 말에서 내려선 채 변해버린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모습은 항쟁의 불꽃에 휩싸인 어둠 속의 실루엣이었다. 그래서 더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일까. 십여 년간 늘 보았던 기억 속의 저택과 지금의 모습은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었다. 이미 오랫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는 상태로 버텨온 저택이었다. 한 때 독액에 부식된 일도 있었고, 거기에 오랜 비바람과 기온 변화가 겹쳐지자 나무로 된 곳은 거의 다 삭아버렸다. 쌓아올린 돌들은 곳곳이 부서져 떨어지거나 금이 갔다. 천천히 저택을 한 바퀴 도는 동안 검은 이끼가 온통 벽을 뒤덮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치 섬에서 본 환각 속의 포석들처럼. 이곳에서 열 두 해를 보내며 자란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이 집이 버려진 지 고작 10년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 누군가 살긴 한 걸까 궁금해하다가 고개를 젓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마치 거대한 무덤 같았으나, 그 안에는 누구도 잠들어 있지 않았다. 있는 거라고는 내버린 가재도구들뿐일 것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보리스는 저택의 모습에서 단지 스산함을 느꼈을 뿐, 슬픔이나 아쉬움은 그리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남의 집 같았다 그러나 저 안에는 그와 예프넨이 웃고 장난치곤 하던 방이며 복도, 계단, 식당 같은 것이 그대로 있을 것이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블라도의 딸인 예니라는 아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물론 보리스는 그 아이를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예전 렘므에서 여자 암살자를 붙잡았을 때, 블라도에게 딸이 있다고 떠들어대던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믿는다면, 예니는 매우 순진하고 사람을 잘 따르는 아이일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사촌 여동생이었다. 한 번도 동생을 가져본 일이 없는 보리스는 그녀의 존재가 묘하게 신경을 건드린다고 생각했다. 어린 아이이고 아무 죄도 없으니 구할 수 있다면 구해내는 것이 당연한데, 그렇게 생각하려 할수록 블라도에 대한 증오심이 한층 고개를 쳐들었다. 그가 블라도 진네만의 저택에 찾아간 것은 그를 용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우플리온과 예프넨 두 사람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행동을 하려고 결심했을 때, 만일 자신이 실패한다면 블라도를 용서하거나 징벌할 기회조차 사라질 것이었으므로 최후가 될 지도 모르는 대화를 위해 간 것이었다. 형의 유언과 자신의 증오심, 그 모두를 떠나 용서할 수 있는 인간인가, 그것을 알고 싶었다. 그와 자신 사이에는 죽기 전에 청산해야 할 빛이 존재했다. 그러나 블라도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이미 천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라진 어린 딸 때문에 미친 사람처럼 되었다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 측은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그의 손에 쫓겨 나야 했던 어린 자신과 예프넨 형의 모습이 떠올라왔다. 튤크 집사가 예니를 데려간 것은 아버지 율켄 진네만의 피값을 치르게 하기 위해서 일것이다. 집사조차 그러한데 자식인 자신이 그 아이를 구해내야 하는 것인가? 그러나, 아이는 역시 아이에 불과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보리스는 9층 창 하나에서 불빛 같은 것이 언뜻 비치는 것을 보았다. 착각이었나? 금방 사라지긴 했지만 너무도 분명했기에 보리스 떠나지 못하고 조금 망설였다.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을 리가 없었다. 버려졌다고는 하지만 이곳은 아직도 진네만, 다시 말해 블라도 진네만의 영지였다 칸 통령의 측근이 된 진네만 가문의 영지에 함부로 들어와 살 마음을 먹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저렇게 귀신이라도 나올 듯한 삭은 저택에서. 그러나, 분명히 보았다. 전속력은 아니었지만 한나절 내내 쉬지 않고 달려온 보리스는 조금 지쳐 있었다 전투를 벌이기에 앞서 잠깐 휴식이 필요할 지도 몰랐다. 해가 지려면 아직 반 시간 가량 여유가 있을 듯했다. 보리스는 저택 입구로 걸음을 옮걱놓았다. 들어오고서야 보리스는 마지막 날, 지붕이 뚫렸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사람이 돌보지 않는 동안 그 구멍은 점점 커져서 나뭇잎이며 빗방울, 눈, 먼지 같은 것들이 엉겨 구석마다 켜를 이루며 쌓여 있었다. 자신의 방으로 가보려 했는데, 입구에 커다란 판자를 대고 대못을 쳐 놓은 것을 보고 그냥 포기했다. 예프넨의 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 손때 묻은 추억의 물건들이 남아 있을 지 모르지만 보리스는 미련 갖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갔다. 아버지의 서재 문이 조금 열린 걸 보고 잠시 걸음을 멈췄지만, 그대로 지나쳐 연회장이 있던 곳으로 갔다. 그곳이 불빛이 보였던 곳이었다. 문은 닫혀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맛있는 파티 음식을 맛보고 싶어서 빼꼼 들여다보던, 그 때와 비슷한 동작으로 보리스는 문고리를 돌렸다. 최대한 소리없이 열었던 문이 갑자기 나사라도 빠진 듯 헛돌며 휘청 젖혀졌다. 보리스는 간신히 문고리를 부여잡아 당겼다. 그리고 안을 들여다보려 했을 때였다. “어서 오시지요." 조금 예상했지만, 너무나 놀라고 말았다. 이곳만은 이 저택의 것이 아닌 듯한 풍경이었다. 쓰레기는 거의 다 치워지고 바닥의 먼지도 닦아내어 마치 보리스가 살던 시절의 모습으로 잠시 돌아간 듯했다. 게다가, 중앙의 긴 대형 식탁에는 식사가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제가 운이 참 좋은 모양입니다. 이런 날, 이런 곳에서 도련님을 뵙게 되다니요. 어서 이리로 와 앉으십시오." 5년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튤크 집사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본래 이 저택에 살 때도 보리스가 튤크를 볼 기회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튤크는 보리스가 이렇게 많이 자랐는데도 한 눈에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튤크가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오히려 놀랐다. 어쩌면 기억 속의 모습과 저렇게 똑같을 수 있을까? 심지어 옷차림조차도 같지 않은가? 혹시, 일부러 그렇게 한 건가? 튤크 집사는 예전 율켄 진네만이 이 저택의 주인이던 때처럼 어두운 녹색의 긴 재킷 차림이었다. 얼굴은 변함 없이 무표정했다. 빗어 넘긴 머리에 새치가 몇 개 섞여 있는 것만 제외하면, 완벽히 예전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다. 연회장도 비록 치운다고 해서 낡은 모습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지만 식탁에는 새하얀 식탁보가, 의자에도 덮개가 씌워져 있고, 식기며 나이프, 포크 등은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차려진 음식도 준정찬에 가까울 정도로 일정 이상의 격식을 갗추고 있었다. 식탁 아래에 큰 램프가 놓여 있었는데 그것이 보리스가 본 빛의 정체였다. 램프를 다시 꺼낸 튤크 집사는 식탁 위에 놓인 네 개의 촛대에 불을 옮겨 붙이면서 말했다. “왜 그렇게 계속 서 계십니까?” 너무 기이한 광경을 본 터라 잠시 판단력을 잃고 있던 보리스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튤크는, 그래, 블라도 삼촌의 딸을 데리고 사라졌다고 했다 그렇다면 작은 예니는 어디에 있지? “집사님 당신, 어린아이를 데려오지 않았습니까?” “그보다, 보리스 진네만 도련님." 초에 불을 다 켠 튤크가 식탁 왼쪽으로 물러나며 차분히 말했다. “도련님께서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십니다. 또한 주인 어른과 예프넨 도련님께서 돌아가신 이상, 진네만 가문의 주인이 아니십니까? 그런 분께서 어찌 제게 존대를 하십니까. 하대를 하도록 하십시오." 대륙을 방랑하는 길 잃은 어린아이 신세가 되어버린 후로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일이 없었다. 더구나 튤크 집사에게 말을 낮춘다는 것은 굉장히 어색한 일이었다. 그러나 하대를 하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을 기세인지라 보리스는 간신히 다시 말했다. “아이는, 예니라는 아이는 어디 있지?” “아아, 어린 예니 아가씨 말씀이십니까. 천천히 말씀을 드릴 테니 일단 앉아서 저녁을 들도록 하십시오." 튤크 집사의 태도는 연극이라기엔 너무도 엄숙하고 진지하여 함부로 그것을 깨뜨리는 말을 꺼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니를 자신이 구해야 하는지, 또는 아닌지 혼란스러워했음에도 불구하고, 보리스는 일단 튤크로부터 예니의 행방에 대해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그가 하자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식탁 머리 상석에 놓인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런데 가장 먼 곳에 있는 맞은편 자리에도 비슷한 음식이 차려졌던 듯 보였다. 그러나 그곳은 먹은 흔적도 없이 좀 이상하게 어지럽혀져 있었다. 튤크가 곁으로 다가오더니 냅킨을 펴서 무릎에 올려 주었다 잔에 음료수를 따르고, 접시의 덮개를 벗겼다. 안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송아지 고기 스튜가 들어 있었다. 네 자루 촛불이 흰 식탁보 위에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그림자를 던졌다. 도저히 식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판국이었지만, 보리스는 아직 의심을 거두지 못했기에 먹는 것을 삼갔다. 보리스가 무언가 물으려 하는데 튤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옛 이야기를 좀 해드릴까요," “옛 이야기라고? 그보다,.” “도련님의 옛 이야기지요. 주인님의 옛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물론 율켄 진네만 주인님 말씀입니다. 그 분께서 도련님을 미워하셨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이야기가 나오는 바람에 보리스는 무어라 답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말을 끊는 것도 어려웠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그 분은 ‘동생’이라는 존재는 무조건적이라고 생각하셨던 분이니까요. 예프넨 도련님이 어린 아기였을 즈음에는 그 분도 그런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 시절은 가장 좋은 시절이라 율켄 주인님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이 예프넨 도련님을 좋아하고 있었지요. 예니치카 아가씨의 사건이 일어나고서 두분 형제께서 반목하셨고, 그 후에 예프넨 도련님에게 동생이 되는 보리스 도련님께서 태어나셨습니다. 율켄 주인님의 눈에는 도련님의 존재가 집안의 암운처럼 보였을 겁니다. 자라면서도, 도련님은 예프넨 도련님처럼 밝고 상냥하기보다는 늘 아버님을 두려워하고 계셨지요. 물론 그것은 율켄 주인님께서 도련님께 정을 주지 않는다는 걸 본능적으로 도련님이 눈치채신 탓이겠습니다만." “잠깐, 튤크 집사는, 그 때 우리 집에 없었지 않아?” 보리스가 어린 시절을 다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튤크 집사가 들어오던 때만은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튤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말씀은 맞지만, 저는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주인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실은 율켄 주인님께서 도련님 또래였던 시절도 기억하고 있지요. 저는 그 시절에도 롱고르드에 살고 있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도련님께 이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무슨,?” “그 시절의 율켄 주인님은, 지금의 보리스 도련님을 꼭 빼어 닮은 모습을 하고 계셨다는 것을요." 보리스는 조금 놀라서 튤크를 올려다보았다. 스스로 자신이 아버지를 특별히 닮았다는 생각은 해본 일이 없었다. 자신과 같은 모습의 아버지, 어쩐지 너무나 이상한 느낌이다. 아버지라고 해도 율켄은 그에게 너무 어렵고 먼 존재였다. “사실, 지금과 같은 결과는 오래 전부터 잉태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돌아가신 예니치카 아가씨께서 어렸던 때의 모습도 기억합니다. 그 아가씨야말로 이곳 롱고르드의 천사 같은 분이었고, 그런 그 분의 존재가 결국 비극을 부르고 말았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예니치카 아가씨께서 그토록 아름답고 마음 고우신 분이 아니었더라면, 두 형제분들께서 10년이 넘도록 그 분의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합니다. 서로의 존재를 생각할 때마다 예니치카 아가씨의 일이 떠올랐던 것이지요. 그분의 절대적인 고귀함을 처참하게 부수고 만 자신들을 용서하지 못한 두 형제분께서는 자책하다 못해 상대방을 미워하고 또 미워하다가, 끝내 서로를 살해하는 것으로 기억을 지우려 시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율켄 주인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블라도 주인님께서 얼마간이나마 평화를 가질수 있게 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보리스는 튤크 집사가 두 사람을 똑같이 ‘주인님' 이라고 부르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튤크 집사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삼촌의 딸을 빼앗아 온 사람이 아닌가? “그 평화는, 새로운 예니 아가씨가 태어나는 것과 함께 왔지요. 저는 곁에서 죽 지켜보았기에 잘 알고 있습니다. 어린 아가씨의 이름을 ‘예니'라고 짓도록 유도한 것은 저였습니다. 저는, 이 작은 예니 아가씨의 존재가 예니치카 아가씨의 죽음에서 비롯된 이 집안의 비극을 매듭지을 중대한 열쇠가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번 열렸던 문은 반드시 닫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극만이 끊임없이 이어지게 되지요. 그 문을 닫기 위해 태어나고, 자라 오신 작은 예니 아가씨께서는 실로 놀라울 정도로 돌아가신 예니치카 아가씨와 흡사했습니다. 저는 감히 확신하건대, 트라바체스 전체에서 이 작은 예니 아가씨보다 사랑스럽고 예쁜 아기는 다시 볼 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뿐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는 수많은 의원이며 선제후들이 어린 예니 아가씨 한 분을 보려고 론의 진네만 저택을 드나들었을 정도니까요”“...” 예니라는 아이를 본 일도 없는데, 어떤 아이인지는 더더욱 모르는데, 그런데도 튤크의 말을 듣고 있으니 그 아이에 대한 측은함이 솟아나 견딜 수가 없었다. 동시에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한 튤크가 얼마나 무섭고, 또한 가차없는 사람인가를 생각했다.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보리스는 그것을 지적할 수가 없었다. 저렇게까지 해서 죽은 율켄을 끝까지 보필하려 하는 것은 트라바체스 사람이 ‘강인함’ 이라고 부르는 특질과 연결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블라도 주인님은, 예니치카 아가씨에 대한 집착이 율켄 주인님보다 한층 각별했던 분입니다. 예니치카 아가씨의 결혼을 어떻게든 막고 싶어했던 것도 단지 정파 때문이 아니라, 여동생을 다른 사람에게 내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작은 예니 아가씨를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저는 그 분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예전 예니치카 아가씨께서는 율켄 주인님에 비해 능력도 풍채도 형편없는 블라도 주인님을 큰 오라버님과 똑같이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런 아가씨를 잃고서 텅 비어버린 듯 했던 마음을 작은 예니 아가씨가 채워 주었겠지요. 드디어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그 아가씨가 없어지는 것으로 가문의 비극이 깨끗이 끝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보리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그게 해결이 되는 거지? 작은 예니는 예니치카 고모를 좀금 닮은 것 말고는 아무 죄도 없어. 이름이 같다고 해서 같은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왜 그 아이가 대신 죄를 짊어져야 하지? 아니, 그것을 떠나서 누군가 새로운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야말로 비극의 문을 닫기는커녕 새로운 비극을 부르는 것 아닌가?” 그러자 튤크가 보리스의 눈을 정면으로 주시하며 말했다. “도련님께서는 블라도 주인님을 용서하실 마음입니까? 어차피 아무도 죽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이미 예니치카 아가씨와 율켄 주인님께서는 돌아가셨고, 되살아날 수 없으니까요. 그 분들을 기억하는 저같은 사람은 계속해서 흐르는 피를 막기 위해 새로운 희생의 봉인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도련님은 모르시겠다는 것입니까?” “예니가죽으면? 블라도 삼촌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않아? 또 누군가를 죽이면? 그것은 비극이 아닌가?” “블라도 주인님은 더 죽일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대상이라고 해봐도 저뿐인데, 저는 가족도, 친구도,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 너무도 침착하고 당연하게 나온 말을 들으며 말문이 막혀버렸다. 자신이 죽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태도도 섬뜩했지만, 그가 그 정도로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었는가 하는 생각이 두려울 정도로 가슴을 압박해왔다. 자신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오랫동안 특별한 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 대신, 예프넨의 부재가 가져다 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예프넨의 일을 복수한다면 대상은 물론 블라도 삼촌일 것인데 자신이 그렇게 하고 나면? 딸을 잃고 정신을 놓은 듯했던 숙모는? 만일 예니가 살아남는다면 그 아이는? 그들이 자신을 용서할까? 아니, 아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다. 트라바체스에는 대가 없는 용서 따위는 없다. 튤크도 마찬가지다. 예니는 트라바체스에서 가장 사랑스런 작은 아가씨이고, 블라도는 누이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불쌍한 사내일 뿐이라 해도, 튤크에겐 그것이 용서해야 할 이유가 되지 못했다. 먼저 죽은 자, 율켄의 눈이 그의 등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보리스 도련님." 보리스는 튤크의 목소리에서 어떤 힘을 느끼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튤크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침착한 눈으로 보리스를 보며 말을 이었다. “도련님과 율켄 주인님은 단지 외모만 닮은 것이 아닙니다. 저는 어린 시절 율켄 주인님의 성품을 보아 알고 있습니다. 참 이상할 정도입니다. 율켄 주인님은 주인님 본인을 닮으신 보리스 도련림보다 돌아가신 마님을 닮은 예프넨 도련님에게 더 각별한 애착을 가지셨던 것 같으니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부자는 부자, 율켄 주인님과 보리스 도련님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흐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보리스 도련님은 지금 진네만 가문의 주인이십니다." 예전 같았으면 ‘아버지고, 아들이고, 가문의 주인이라고 해도, 그것들이 지금의 내게 무엇을 주었단 말인가' 라고 말했을 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그렇게 철없는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한다면 보리스 역시 그들에게 준 것은 없었다. 그의 집안에 닥친 불운은 누구 한 사람의 책임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른 어떤 땅에 가서 살아간다고 해서, 물려받은 피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저는 율켄 주인님을 가장 먼저 모셨습니다.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두 번째, 세 번째 생명을 얻게 될 수도 있지만 어떤 것도 맨 처음 받은 생명과 비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율켄 주인님을 중심에 두고 모든 행동을 결정합니다. 도련님의 중심에는 누가 있습니까? 도련님 자신이 오랫동안 이름을 떨쳐 온 진네만 가문의 마지막 주인이라는 것을 자각하신다면, 작은 예니 아가씨나 블라도 주인님에 대한 마음은 버리셔야 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그것이 트라바체스에서 가문의 주인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보리스는 튤크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며, 그가 오랫동안 자신에게 이 말을 하고자 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튤크의 관점이었다. 그렇게 살아온 자였다. 배신을 최대의 치욕으로 간주하는 트라바체스에서 튤크의 진정한 주인은 율켄뿐이고, 세상에는 우선 순위란 것이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는? “틀크 집사, 당신이 내 아버지의 일을 그토록 목숨 걸고 해내려 하듯, 나 역시 그런 마음으로 따르는 사람이 있어." “그렇습니까? 뜻밖이군요." “그래, 뜻밖이겠지. 당신의 생각 속에서 진네만 가문에서 가장 주인다웠던 사람은 내 아버지겠지만, 나는 아니야. 알고 있어? 아버지는 그 날 밤 호숫가에서 돌아가셨어. 그리고 두 아들들이 살아남았지,. 내게 가문의 주인 이름을 물려준 사람은 아버지가 아냐. 바로 예프넨 형이다. 예프넨 진네만이야말로 내가 마지막으로 따랐던 가문의 주인이었어." 비록 짧디 짧았던 시간이었지만 예프넨은 보리스를 이끌었다,.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때 예프넨은 비록 아무 것도 없었으나 진네만 가문의 주인이었다. 그랬기에 그토록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동생에 대한 애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책임감이었다. 어머니를 닮아 마음이 여렸던 예프넨도 틀림없는 트라바체스의 사내였다. “예프넨 형은, 내가 복수하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랐지. 그걸 입으로만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직접 보여주었어. 나를 살리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것으로, 형은 내가 복수할 힘이 없을까봐 내 몸 하나만을 지키라고 말한 것이 아니야. 형 역시 집안을 파멸시킨 피 냄새가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고 있었어. 그걸 멈추기 위해서 튤크 집사 당신과 같은 방법도 물론 있을 거야. 하지만 당신이, 당신에게 유지를 남긴 율켄 진네만의 방식을 따르듯, 나는 예프넨 진네만을 따를 거야. 나는 당신과는 달라. 당신은 집사이고 누군가를 위해 죽기만 하면 되지만, 나는 안 돼. 당신이 말했듯 집안의 주인이니까. 나는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만'하는거야. 그것이 내가 택한 가주의 방식이다." 보리스는 냅킨을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튤크 집사는 얼굴빛도 변하지 않고 보리스의 말을 다 들었다. 그리고 허리를 깊이 굽히더니 말했다. “보리스 진네만 주인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석양조차 자취를 감추고, 허물어져 가는 저택의 마지막 연회를 비추는네 개의 촛불, 그 앞에서 보리스는 처음으로 ‘주인님'이라는 말을 들었다. 모두가 죽어버렸고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비극의 역사를 끝내려 했다. 이제 그것은 끝날 것이다. 이 저택이 무너져 사라지듯, 저 에메라 호수 속에 묻히게 될 것이다. 다 식어 약한 김만을 올리는 요리를 내려다 본 보리스는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 빈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우측으로 비스듬하게 나란히 놓는 것은 충분히 다 먹었다는 표시였다. “튤크 집사, 당신이 내 아버지를 따르는 마음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고 있어. 이제 당신의 길을 가도록 해. 오늘들은 말은 잊지 않겠어. 그 말대로, 이제부터는 내가 진네만 가문의 주인이라는 것을 잊을 수 없을 거야." 튤크는 굽혔던 허리를 펴며 보리스의 얼굴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다. 보리스는 그 얼굴에서 오랜 세월이 흘러도 결코 없어지지 않을 상처 같은 것을 읽었다. 이윽고 튤크는 말했다. "작은 예니 아가씨는, 호숫가에 버려 두고 왔습니다. 지금쯤 세상 모르고 잠들어 계실 것입니다. 주인님의 기억 속에 있는 바로 그 장소를 향해 가십시오."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빠른 걸음으로 문을 향해 걸어갔다. 가려 하는 순간 뒤에서 튤크가 말했다. "조심하십시오. 얼마 전까지 저 곳에 앉아 있다가 간 분을 만나실 지도 모르니까요. 이것이 제가 드리는 마지막 말씀입니다. 진네만 가문의 마지막 주인님, 강인함과 자부심을 지켜 살아가십시오." 튤크의 손은 식탁 맞은편을 가리키고 있었다. 보리스는 튤크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바라보고 날 듯이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예니!" 블라도 진네만은 보리스보다 반 시간 가량 앞서 있었다. 에메라 호수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딸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론에서 사정을 알고 이곳으로 달려오는 내내 그는 미쳐 있었다. 진네만 저택에서 드디어 튤크를 만났을 때, 그곳에 예니가 없는 것을 보고 행방을 알아내려고 억지로 마음을 억누르며 이야기를 듣고, 결국 한 마디 ‘에메라 호수변' 이라는 말 때문에 더 듣지 못하고 뛰쳐나와 이곳을 헤매었다. 이 며칠 동안 그의 가슴은 예전 환수 크리갈의 독액으로 한동안 삭아들던 저택의 상태와 다르지 않았다. 에메라 호수. 형 율켄을 밀어내고 차지한 롱고르드였지만 채 한 해도 머무르지 않았다. 그 때 떠난 후로 오늘을 제한다면 단 한 번 돌아왔었다. 에메라 호수는 최후의 싸움이 있던 밤 이래로 처음이었다. 그는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해 왔다. 늪이 된 에메라 호수, 누이와 형을 차례로 삼킨 곳을. 그 둘을 죽인 것이 모두 자신의 손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살아온 그였다. 세월조차 그의 죄를 사하지 못했다. 그걸 스스로 알고 있으면서도 몇 년 동안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어리석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예니치카가 다시 태어난 듯 사랑스런 어린 예니를 보면서 그 아이를 키우는 것으로 죽은 누이를 이곳에 되살릴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예니가 커서 행복해진다면 더 이상 어떤 죄도 없을 것만 같았다. 자신도, 자신이 해친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해치고자 할 모든 사람들도. 그러나 망상이었다. 튤크 놈은 어린 예니를 두고 ‘진네만 가문의 비극을 끝낼 마지막 제물'이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예니가 태어났을 때부터 황금 꽃처럼 곱디고운 그 아이를 희생자로 점찍고, 그 애의 남은 생명을 헤아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을 위해 그의 곁에서 충성스러운 개 노릇을 자청하며 지금까지, 그 가증스런 얼굴로 자신을 속였던 것이다! 블라도는 광인처럼 분노하면서도 동시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예니를 사랑하지 않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이리처럼 그 애를 물어가려고 호시탐탐 노리던 자를 눈치채지 못한 자신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썩은 식물 더미가 붉은 석양을 등지고 불타며 가라앉았다. 검은, 시체가 썩은 물 속에는,. “예니!" 그 날 밤에도 이렇게 그 애의 이름을 불렀었다,. “여니,.!" 율켄과 마지막 전투를 벌였던 늦여름의 질척한 밤, 두 형제는 서로를 노리면서 동시에 예니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천사 같던 예니치카, 이제는 썩어 문드러진 시체도 남지 않았을 예니치카, 이제는 제발 잠들어 줘,. 너의 저주가 진네만 가문의 사람을 하나도 용서하지 않을 셈이라 해도 예니만은, 나의 예니만은 돌려줘,. “예니! 예니! 제발, 대답해 다오,.” 블라도는 알지 못했다 어두운 에메라 호수 속에 소리 없이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오직 흰옷의 예니만을 생각하며 호수변을 따라 달렸다. 어딘가에 쓰러져 있을, 또는 위협 당하고 있을, 예니의 안전에 대한 생각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소리 없는 움직임은 블라도를 따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블라도가 멈추자 따라 멈추었다. 멈춰 선 블라도가 다시 한 번 목청엇 예니를 불렀다. “예니 ! 어디 있니! 대답하거라!" 그 때, 캄캄한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블라도는 그것이 예니의 목소리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들었다 처음에는 실낱같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이번에는 분명하게 들렸다. “예니, 기다려라!" 그러나 나타난 것은 예니만이 아니었다. 3. 유년의 겨울은 끝나고 캄캄한 호수변을 따라 걸어가며 간간이 들리는 블라도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던 유리히는 조금 후 불만스런 목소리로 내뱉었다. “ 계집애 하나를 도대체 얼마동안 찾고 있는 거야?” 유리히는 젊은이였지만 양아들을 두고 있었으므로 예니를 찾는 블라도의 심 정을 전혀 모르지 않았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자꾸 가슴속에서 뭔가가 걸리는 느낌이라 차라리 빨리 찾아주기를 바랐던것 이다. “기다리는 녀석은 오지도 않고. 여기 참, 굉장히 기분 나쁜 곳이네.” 유리히는 에메라 호수에 대한 풍문을 들은 일이 있 었지만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일은 없었다. 망령이라나 뭐라나 하고 떠드는 이야기도 알고 있긴 했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호수는 짐작보다 훨씬 음침하게 끈적거리는 곳이었다. 조심해서 걷고 있었지만 가끔 질척대는 곳을 밟게 되면 흠칫하기 도 했고, 호수 곳곳에 들어찬 썩은 식물들의 모양도 느낌이 나빴다. 큰 달이 뜨는 날이라 밤 치고는 비교적 밝은 편인데도 모든 자연의 느낌이 기괴했다. 아노마라드 쪽으로 갈 것을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공을 세우기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자 신이 롱고르드로 가겠다고 우겨서 이리로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귀신 나올 것 같은 늪에서 딸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외침만 계 속해서 듣고 있자니 점점 정신이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보리스가 복수하기 위해 블라도를 노릴 거라고 믿고 있지 않았더라면 일찌감치 멀리 떨어져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갔을 것이다. 블라도의 목소리가 한동안 들리지 않자 유리히는 멀리 떨어 졌나 싶어 걸음을 빨리 했다. 조금 가다 보니 흙바닥으로 번져 나온 늪이 앞을 가로막았고, 그곳을 돌아가자 트인 곳이 나타났다 . 몸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몇 걸음 물러나 썩은 식물들 뒤에 숨은 유리히는 놀라운 장면을 보고 말았다. 처음에는 단지 대기가 흔들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안개로 이루어진 것 같은 뭉클거리는 팔이 쭉 뻗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팔이라고 생각한 것의 길이만 해도 3미터는 족히 될 듯했다. 유리히가 놀라서 자기 입을 틀어막는 순간, 그 팔은 물풀 속에 있는 무언가를 쳤다 . 비명, 이었던가. 작고 하얀 덩어리가 허공을 날아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사방을 울린 소리는 블라도의 짐승 같은 외침 이었다. 어둠 속에서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던 블라도가 검을 뽑아들고 미친 듯 돌진하여 그 팔을 찔렀다. 유리히는 분명히 보 았다. 검으로 똑바로 찔렀건만 안개덩어리 같은 팔에서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팔이 높이 들어올라졌을 때 , 유리히는 그것이 팔이 아니라 거대한 날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저것은, 적회색인가? 흉사 피에 물든 안개처럼 보이는 덩어리다. 팔인 줄 알았던 날개 뼈 아래로 뭉클거리는 날갯죽지가 커튼처럼 따라 올라갔다. 다른 쪽에, 같은 날개가 하나 더 있 었다. 두 날개를 지닌 이 믿을수 없는 괴물은 양쪽으로 펼쳐진 날개의 길이만 합쳐도 7미터는 될 듯한 거대한 놈이었다. 어둠 때 문에 어떤 모양인지 확실히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가까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암살자로 살아오며 수많은 이상한 것들을 보 아 온 유리히도 이번만큼은 바닥에 주저앉지 않는 것이 고작일 정도로 충격에 사로잡혔다. 이런 공포는 생전 처음이었다. 저것은 , 악마다. 다른 세계에서 온 악마야! 그 괴물을 향해 다시 한 번 검을 찔러 가는 블라도의 모습을 본 유리히는 솔직히 감탄했다 . 블라도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검날이 아무 것도 자르지 못할 지라도 엄청난 기세로 찌르고 베었다. 그렇게 괴물의 날개가 펼쳐진 곳에 놓인 그 하얀 물체 앞으로 다가가려 했다. 괴물의 시잇거리는 소리에 맞서 블라도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수백 년 쌓인 시체들로도 부족했나? 이 피와 살점을 먹는 괴물아! 예니치카를 삼켰으면 충분하지 않나? 네가, 네가 또다시 예니에게 손을 댄다면 호수 밑바닥에 처박아 다시는 나오지 못하게 만들고 말테다!" 인간이 초자연적 존재를 향해 저 정도의 살의를 품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슴 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외침이었다. 그리고 블라도는 달려들었다,. 예니를 되찾기 위해 다시 한 번 흑날의 검을 쥔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괴물은 블라도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듯 상대도 하지 않고 하얀 물체가 있는 쪽으로 날개를 뻗었다. 그리고 유리히는 보았다. 그 날개에서 하얗게 번쩍이는 이빨 같은 것이 튀어나오는것을. 그것은 쏜 살같이 뻗어나가 바닥의 하얀 물체를 찔렀다. “아,. 아, 아, 안 돼!" 쇳소리에 가까운 블라도의 외침도 소용없이 하얀 물체에서 핏줄기가 튀어 올랐다. 어둠 속인데도 어찌 보였던 것일까. 블라도는 이제 아예 미친 사람이 되어 괴성을 울리며 괴물을 향해 몸을 던졌다. 같이 죽으려는 게 아니라면 저럴 수는 없었다. 괴물은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세 개나 되는 이빨 모양의 발톱들을 격출시켰다. 그것들이 블라도를 향해 날아가는 것을 본 유리히는 이제 자신감을 상실했다. 달아나야겠다고 생각하고 한 걸음 뒷 걸음질치는 순간이었다. 어딘가에서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튀어나온 검은 그림자가 송곳발톱들 중 하나를 부쉈다. 이어 다른 발톱 두 개도 깨끗이 잘라져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저 자는,. 그 자의 손에 쥐어진 검에서 하얀 꽃이 이는 것이 보였다. 믿 을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광채를 본 유리히는 순간 다시 정신을 차렸다. 틀림없었다. 의심할 바가 없었다. 저것이야말로 그가 찾아마지 않던 백색의 검, 윈터러다! 발톱들을 잘린 괴물은 잠시 무언가 탐색하는 것처럼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그 앞에서 번쩍 이는 백색 검을 잡은 소년이 나직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랫동안 기다렸어,. 네 앞에서 달아났던 소년이 다시 한 번 돌아 와 여기에 서기까지. 네가 앗아간 목숨들 대신, 네 생명을 받아가겠어. 아마, 공평한 대가가 될 거야." 위험에서 벗어난 블라도 는 자신의 안전은 잊어버린 것처럼 무방비 상태로 바닥의 흰 물체, 이미 움직임이 없는 흰옷의 어린 소녀를 향해 달려가 부둥켜 안았다. 옷깃을 헤치고 무언가를 살피는 것 같더니 잠시 후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비통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예니이이이이이 !" 유리히는 소년의 목소리를 들으며, 떨리는 다리를 멈추기 위해 노력하며 생각했다. 진네만 성을 가진 인간들은 이 호수 변에 살아서 모조리 미쳐버린 것이 틀림없다고. 자신은 미친 인간이 아니므로 이곳에서 기다릴 것이다. 저 싸움이 끝날 때까지, 어느 한쪽이 죽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게 될 때까지. 귓가에 블라도 삼촌의 목소리가 들린다,. 5년 전, 아버지와 형과 자신을 이곳으로 몰아넣었던 자, 그가 희생당한 어린아이를 부둥켜안고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단지 존재한다는 사실밖에 알지 못했던 사촌 누이는, 죽은 것일까. 보리스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굽어보고 있는 괴물을 보았다. 괴물은 섬에서 이솔렛과 함 께 죽였던 그놈보다 세 배는 컸으며 그만큼 더 강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더구나 보리스의 기억 속에서 이 괴물은 목소리마저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맨 처음 괴물 앞에서 말을 했던 것이다. 알아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지체했던 잠시간은 곧 끝이 났다. 괴물은 자기 앞에서 빛나는 검을 적수로 인정한 듯 거대한 날개를 한껏 펴 펄럭였으며, 보리스는 몸을 도사리며 곧 다가 올 공격에 대비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기억 속의 가장 큰 적, 어린 시절의 악몽 속에서 가장 끔찍했던 것을 다시 마 주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심장이 속도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뛴다, 검을 들고 긴장한 손이 가늘게 떨리기까지 한다,. 그러 동시에 흥분해 있었다. 언젠가 치욕을, 죄를, 원한을 씻기 위해 지금껏 수많은 시험에도 굴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보리스가 긴장하는 것과는 달리 윈터러, 백색의 겨울검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보리스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 던 이 검이 지금 얼마나 피를 원하고 있는지를. 그러나 그건 검 안에 사로잡힌 자들의 의지이다,. 윈터러 자체는 아무 의지도 갖고 있지 않다. 자신은 어떤 것에도 휘둘려서는 안 되었다. ‘겨울 대장장이'가 말했듯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바로 보아야 했다. 그는 달려들었다. 트캉! 무시무시한 송곳발톱들이 위로, 아래로, 좌우로, 그리고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가진 것은 검 한 자루뿐이다. 그러나 단 한 번만 저 발톱의 공격에 틈을 준다면, 그러면 자신은 끝장이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면 이미 보아서 알고 있다. 예프넨이 동생도 똑같은 꼴을 당하길 바랄까? 천만의 말씀이다! 부서진 송곳발톱 조각들이 발치에 흩어져 밟혔다. 그것을 밟고, 또 부수고, 물러나고, 달리며 보리스는 이솔렛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곳에 있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가, 라고. 그녀에게 괴물의 존재를 말했더라면 이곳으로 오려 하는 그녀를 결코 말릴 수 없었을 것이다. 나우플리온의 저주받은 상처를 고칠 수 있는 마지막 희망, 그런 것의 존재를 알았더라면 이솔렛이 물러섰을 리가 없었다. 물론 이솔렛의 도움 없이 자신이 이길 수 있다는 확신 같은 건 없었다. 단지 싸울 뿐이었다. 그에게는 반드시 괴물의 심장에 든 붉은 보석이 필요했다. 예프넨이 하지 말라고 했던 복수, 괴물은 그 대상에도 속하지 않았다. 진네만 가문을 부숴 버린. 예니치카 고모에서부터 예프넨에 이르기까지 삼켜버리고 만 괴물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들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츠컥! “하!" 희다 못해 푸른빛인가,. 그와 함께 겨울을 지샌 검, 윈터러는 그를 앞서가려 하는 건가?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예감이 든다. 조금만 발을 헛디디면 금방 잡혀 끌려가 버릴 듯, 죽음이 가까이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연달아 십여 개나 되는 송곳발톱들을 부순 보리스는 온 몸에서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발톱들은 섬에서 죽였던 그 괴물보다 몇 배 강한 힘으로 날아들었고, 쳐내거나 부술 수는 있었지만 도저히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괴물은 아직 일종의 탐색전을 벌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윈터러는 더욱 강하게 불탔다. 검날에 닿는 것은 모조리 베어지고, 심지어 가루로 변해버렸다. 좀더 나은 신에게 좀더 나은 실력이 있어서, 저 망령조차 단숨에 베어버릴 수 있다면! “계속하겠어? 이런 똑같은 짓거리를 얼마나 계속할거지? 나를 죽일 테면 와서 단번에 죽여보란 말이다!" 또 하나의 발톱을 부수며 그렇게 외치는 순간, 보리스는 머릿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울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목소리였는데, 이 순간 그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생생했다. 5년 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마침내 돌아왔구나,.’ ‘마침내 그 검을 쥐고 돌아왔구나,.’ 보리스는 맞서 소리질렀다. “그래, 너를 베어 모든 것을 처음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다!" 그 때 뜻밖의 말이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때 내가 말했지. 너는 이곳으로 돌아오게 될 거라고.' 뭐라고? 보리스는 검을 꽉 쥔 채 부서질 듯 이를 악물고 괴물의 불타는 눈을 쏘아보았다. 분명, 5년 전의 비극 속에서 그가 잃은 채 되찾지 못한 기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섬에서 작은 괴물과 대적했을 때, 단 한 번 약간의 기억이 되돌아와 그에게 ’잃은 기억'이 분명히 있음을 상기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목소리였다. 윈터러에 대해서,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그 검이로구나. 그걸 지닌 자는 반드시 길고 긴 살인자의 밤을 지새게 된다는 것을 모르니?’ “살인자의 밤,.” 윈터러(Winterer)는 겨울을 지새는 자라는 의미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괴물은 ‘살인자의 밤’을 지새게 될 거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괴물은 윈터러에 대해 알고 있고 심지어 그것이 수많은 학살을 일으켰다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는 것인가? ‘살인자의 밤이지. 이미 네게 가까워진 살인자의 밤이야. 어서 내게 와서 네가 살인자라는 것을 증명해 보여라. 수많은 인간들이 그랬듯 너 역시 피묻은 손을 씻지 못할 것이다.’ 그 때였다. 보리스의 귓가에 이번엔 전혀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큭큭, 큭큭큭, 웃기는구나. 타락한 괴물 골모답이여, 나를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나를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나를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카하하하, 그토록 잘 알면서 왜 너는 진짜 살해자가 되어 이 아이를 삼켜버리지 못하지?’ ‘이 아이를 삼켜버리지 못하지?’ ‘이 아이를 삼켜버리지 못하지?’ 그것은 두 개의 서로 다른 목소리였다. 보리스는 그 목소리들이 윈터러 안에 갇힌 영혼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몇 달 전부 수 번이나 있었던 일이었다. 윈터러 속에 갇힌 자들이 저마다 자신의 의지를 내세워 떠들어대기 시작했고, 보리스는 스스로 그걸 견딜 힘을 기르려 노력하고 있었다. 루시안이 한밤중에 검술 연습장에서 보리스의 모습을 보았던 때가 바로 그런 때였다. 이제 수많은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키득거리며 웃거나 말하기 시작 했다. ‘그래, 나도 알고 있을 거야. 나라고. 긴세의 왕오조테르라고. 네 날개가 아직 희었을 때 나를 보지 않았나?’ ‘아직 희었을 때 나를 보지 않았나?’ ‘아직 희었을 때 나를 보지 않았나?’ ‘누구의 악의가 더 강할까? 내기라도 해 볼 텐가? 난 살아 생전 내기의 일인자였어 내가 평생 걸어서 잃은 건 단 하나, 내 목숨밖에 없거든. 크하하하하!' ‘내 목숨밖에 없거든. 크하하하하!' ‘내 목숨밖에 없거든. 크하하하하!' 보리스는 수십 가지 목소리들이 뒤섞여 울리고 있는 검을 꽉 움켜쥐며 소리쳤다. “실체가 없는 자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사라져라! 나의 싸움에 끼여들지 마!" 여전히 목소리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보리스는 개의치 않고 땅을 박차며 베어갔다. 괴물은 십여 개나 되는 송곳발톱들을 격발시켰고, 보리스는 거의 무아지경에 이르러 검을 당기고, 찌르고,올려쳤다. 이럴 때, 잠시 눈을 감아도 될 정도로 윈터러가 자신을 끌어당겨 싸우게 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이긴 후에 패배하는 자가 되어버릴 뿐이었다. 적이 아닌, 스스로에게 패배해버린다. 육중한 발톱들은 보리스의 손목과 팔에 계속해서 충격을 주었다. 얼굴을 찢을 듯 날아오는 것을 피하고, 어깨 아래로 들어오는 것은 되돌아서며 잘랐다. 검이 새로운 발톱에 최초로 닿을 때마다 매번 퍽, 하고 무언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유리히는 윈터러를 든 소년의 전투를 보며 자신이 지금껏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단지 보검을 지녔을 뿐,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린 소년이라고? 웃기는 소리다! 저 모습은 그 아이가 이제 자신이 쥔 검을 누구보다도 잘 쓸 수 있는 전사로 자랐다는 걸 어떤 말보다도 강하게 웅변하고 있지 않은가? 본래 암습이 전문인 유리히는 자신이 괴물을 맞아 저 소년만큼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다. 기다릴 작정이었다. 모든 것이 끝난 후 자신은 검만을 수습해 가면 되니까. 그러나 괴물과 소년의 전투에 정신을 팔다가 자신이 저도 모르게 몸을 드러냈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 “끝일 리가 없어,. 예니, 어린 예니, 지금 어디 있지? 너는 지금 어디 있지?” 움직이지 않는 어린 소녀를 껴안은 블라도가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눈물도 흘리지 않고, 절망하여 소리지르지도 않고, 그저 품 안의 딸을 조용히 어르듯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그는 딸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의 존재는 알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걸어서 그곳을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썩은 나무들이 있는 곳에 이르러 갑자기 멈춰 섰다. 인상이 일그러졌다. 블라도의 노란 눈동자가 쏘아보고 있는 어둠속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이유 없는 악의가 끓어오르는 듯 그는 몇 걸음 물러나며 딸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검을 뽑아들며 짓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흥, 예니를 데려가려고 왔수,?” 그 말이 들려왔을 때, 유리히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세히 보니 블라도 진네만이 바로 자신의 앞에서 검을 뽑아들고 서 있지 않은가? 놈의 얼굴은 이상했다. 웃으려는 것 같기도 하고, 울려는 것 같기도 하고, 증오심으로 가득 차 표정조차 가누기 힘든 듯한 모습이었다. 더구나 그의 눈은 정확히 유리히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말투도 평소와 달랐다. “그렇수? 그렇다면 결판을 내야지 어디, 누가 이기는지 한 번 더 해보잔 말이우." 아무도 대화하는 사람이 없는데, 마치 대꾸하듯 말한 블라도는 대뜸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유리히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자가 지금 망령을 보고 있는 건 아닌가? “언제고 승부를 내고 싶었수,. 어려서부터 죽, 지금까지도,.” 목 안쪽에서 그르렁대는 듯한 목소리가 떨어지고, 블라도는 유리히에게 달려들었다. 피하려 해도, 말을 걸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블라도는 유리히가 하는 말은 알아듣지도 못했다. 오직 들리지 않는 말에 제 멋대로 대답할 뿐이었다. 유리히는 몸이 빨라 처음엔 블라도의 검을 대부분 피할 수 있었다.몇 번이나 자신이 누구라고 해명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자, 그는 화가 치밀어 이 놈을 죽여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장기인 모닝스타로 후려칠까 하다가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저 정도로 허점이 많은 상태라면 간단한 방법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실제로 블라도는 반쯤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검의 속도는 빨랐으나 계속해서 엉뚱한 곳을 베거나 찌르곤 했다. “날 원망 말라고. 네가 자초한 거니까." 유리히는 몸을 도사리고 기다리다가 블라도가 달려드는 순간, 살짝 비키면서 소매 안쪽에서 뽑아낸 단도를 낮게 휘둘러 찔렀다. 그의 계산은 적중하여 블라도는 검을 든 팔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그러자 블라도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소용없는 짓 마쇼! 나는 형처럼 쉽게 죽지 않아! 내 손에 한 번은 상대한테 이제 와서 질 줄 알구!" 노란 눈동자가 이글거리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유리히는 블라도가 팔의 상처는 느끼지도 못하는 것처럼 그대로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아연해졌다. 이럴 줄은 모르고 방심한 터라 손쓸 겨를이 없다. 블라도의 검, 흑날의 하그룬이 유리히의 오른쪽 어깨를 찍었다. 피가 터져 나와 옷을 붉게 물들였다. 보리스는 무언가 변화를 느꼈다. 솨악, 츠컥, 척! 빨라지고 더 빨라져가던 자신의 움직임에 어떤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보리스는 그것이 오래 전 실버스컬 대회에서 느낀 것과 같은 변화라는 걸 알아챘다. 검이 자신의 의지를 넘어 놀라운 속도로 수십가지의 각각 다른 경로를 그렸다. 어떤 경로에서든 기이한 움직임으로 곧장 공세가 뻗어나갔다. 순식간에 그는 주위의 송곳발톱들을 모조리 부숴 버렸다. 실버스컬 때도 이것이 윈터러의 힘인지, 또는 나우플리온이 가르친 티그리스의 힘인지 결론을 쉽게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의 일들로 보아 윈터러의 힘일 거라고 거의 확신하고 말았다. 그렇기에 그 힘을 자제하려고 그토록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바로 그 변화가 일어나자마자 귓가에서 울리던 수많은 목소리들이 일시에 사그라지며 고요해졌다. 지금 자신을 이끌고 있는 움직임이, 사로잡힌 혼들이 윈터러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길을 완전히 차단해 버린 것 같았다. 윈터러의 힘은 오직 이 불가사의한 움직임을 구현하는 데 집중되어버렸다. 자신조차도, 이 움직임에 합일되어 다른 생각을 쉽사리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이것이 무엇일까. 이 새로운 움직임에 힘입어 보리스는 점차 괴물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수많은 송곳발톱을 피해 날갯죽지 한쪽을 스쳐 베는 순간, 눈앞의 광경이 종이조각처럼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가 도로 붙는 듯한 모양을 보았다. 동시에 대략 쉰 개는 되지 않을까 싶은 송곳발톱과 날카로운 뺏조각들이 그를 향해 쇄도해 왔다. 목이 탔다. 뱃속에서 뜨거운 것이 불타고 있는 기분이었다. 자신조차 제어하기 힘든 움직임이 거대한 흐름으로 변해갔다. 그 속에서 보리스는 문득, 자신이 지금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분명 실버스컬에서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어떤 힘에 끌려가는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자신의 의지가 움직임 하나하나를 선명하게 느끼고, 다음 움직임을 예상하고 있었다. 어째서? 이것이 정녕 윈터러의 힘이 아니었단 말인가? “모두, 남김 없이 부숴 줄 테니까, 계속해보란 말이다!” 한 때 달아났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더욱 괴로워해 왔다. 예프넨이 자신의 목숨과 맞바꿔 지켜 준 목숨을 소중히 지켜야 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지킨 후에 오는 의미는 무엇인가. 예프넨이 항쟁의 밤에 튤크 집사에게 말했듯 ‘훌륭한 무구란, 최악의 순간에 함께 하기 위해 그토록 귀하게 지켜지는 것'이다. 목숨을 무엇 때문에 귀하게 지켜 왔단 말인가. 바로 이것 때문에, 자신을 옭아맨 묵은 빛을 청산해야 하기 때문에! 송곳발톱들 중 절반 가량은 부서지고, 절반 가량은 도로 거두어져 날개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최초로, 놈이 전력을 다한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그러나 기력을 너무나 많이 소모했다. 숨을 고르려해도 자꾸 기침만 나을 뿐이었다. 이 상태로 다시 한 번 같은 공격이 온다면 이번에는 막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조금이라도 기운이 많이 남아 있을 때 방어를 공격으로 전환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순간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와 보리스는 흠칫 놀랐다. “가까이 오기만 해 봐라, 블라도 진네만! 이 아이를 괴물에게 던져 버릴 테니까." 이곳에 있는 줄도 몰랐던 어떤 사내가 저만치에서 예니를 끌어안은 채 뒷걸음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보리스를 노렸어야 할 괴물의 송곳발톱이 이번에는 그 자를 향해 뻗어나갔다 위험한 상황이 되는 순간, 그 자는 괴물이 있는 쪽으로 아이를 내던져 버리고는 놀랄만한 몸놀림으로 몸을 솟구쳐 공격을 피했다. 발톱을 부술 검 한 자루도 없으면서 움직임만으로 세 개를 모두 피하고 심지어 멀찍이 뛰어 물러나기까지 했다. 본래 유리히는 블라도가 든 흑날의 하그룬 검에 깊은 상처를 입은 후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그룬에 입은 상처는 회복 마법으로도 쉽게 낫지 않는 것이고, 빠른 몸놀림을 장기로 하는 자신이 이런 상처를 입은 상태로 공격을 능숙하게 피한다는 건 무리였다. 예니를 볼모로 해서 블라도의 모든 공격을 막으려 했는데 오히려 괴물이 먼저 반응했고, 마지막 수단으로 괴물의 시선을 끌기 위해 아이를 내던졌다. 이젠 윈터러를 빼앗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생명이 더 중했다. 괴물의 날개가 예니의 가녀린 몸을 후려치려는 순간,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박차며 앞으로 뛰어들었다. 아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인지 모를 끌림에 의해 그는 나아갔고, 뛰어올랐다. 좀더 더 지치기 전에 치명상을 입혀야 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당장 실행하게 될 줄은 그도 몰랐다. 무모할 정도로 깊이 뛰어드는 바람에, 오히려 그는 괴물의 저항을 거의 받지 않았다. 발톱 두 개만을 부순 뒤, 번쩍이는 백색광의 검을 높이 올려 왼쪽 날개 꼭대기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둘로 갈랐다. 갈라지고 있는 틈에서는 악취를 풍기는 흐린 공기가 밀려나왔고, 너무 독해서 눈을 뜨는 것도 힘들었다. 잘라진 날개는 안개덩어리 같은 것이 스러지자 순식간에 앙상한 뼈대로 변해버렸다 검이 빠져나오는 것과 동시에 보리스는 무릎을 굽히며 바닥에 착지하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본 것은 뜻밖의 광경이었다. 송곳이빨 세 개가 동시에 예니를 향해 달려들면서 꿰뚫는 대신, 아이의 몸을 휘감아 히공으로 높이 쳐올리는 것이 보였다. 흡사 제물을 받쳐 올리듯, 존재하지 않는 신에게 경배하듯 올려진 어린아이, 하얀 옷자락과 금빛 머리카락이 점차 거세어지는 바람에 휩싸여 펄럭이는 것이 보였다. 기이한 광경에 순간적으로 평정심을 잃었던 것일까. 갑자기 등 뒤에서 무시무시한 힘이 달려들어 그를 후려쳤다. 괴물의 나머지 한 날개였다. 아름드리 나무도 꺾을 듯 강한 타격을 무방비 상태로 받은 보리스는 손쓸 틈도 없이 7, 8미터나 날아가 처박혔다. 에메라 호수의 썩은 물이 시작되는 곳에 떨어져 겨우 죽지 않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가 부딪쳤던 썩은 나무는 뿌리째 뽑혀버렸고, 손에 쥐었던 윈터러는 질척한 늪 바닥을 뚫고 박혔다. “,.”한동안 숨도 쉬지 못했다. 피가 역류하여 머리끝까지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귀가 윙윙 울리고 목구멍 안에서 뜨거운 액체가 끓어올랐다. 지체할 틈이 없는데도, 당장 일어나야 하는데도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드디어, 끝난 거군. 이제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어,.” 어딘가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듣고도 처음에는 금방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목소리는 조금 전 예니를 괴물에게 내던졌던 그 사내의 것이었다. 보리스는 유리히의 정체를 몰랐다 그토록 꾸준히 보리스의 뒤를 따라왔지만 아직까지 얼굴을 본 일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리히는 달랐다. 기나긴 추적이 드디어 결실을 보리라는 희열, 그리고 이 지독한 상황에서 어서 빠져나가야겠다는 초조함으로 몸이 달아 죽을 지경이었다. 진흙 속에 박힌 윈터러를 발견했을 때, 그는 한껏 소리를 지르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누르며 검을 뽑아들었다. 검은 여전히 황홀하게 빛났다. 정신을 혼미하게 할 정도로 매혹적인 광채였다 당장 달아나야 한다는 사실조차 잠시 잊었다. 드디어 손에 넣었다, 드디어! 그때였다. 푸욱! 캄캄하던 눈앞이 갑자기 하얗게 변했다. 유리히는 멍한 표정으로 또 하나의 검날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등 뒤에서 자신의 배를 뚫고 나와 그의 눈앞에 있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어디서,? 적은 쓰러진 줄 알았고, 검은 빼앗았는데, 또? 더 이상의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몸이 허물어졌다. 머릿속에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이렇게 많은 피를 흘리는 건 처음이라는 생각이었다. 보리스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너는,. 누구지?” 유리히는 대답하지 못한 채 쓰러졌다. 털썩 쓰러진 자의 손에서 윈터러를 빼앗아 쥔 보리스는 손에 쥔 나우플리온의 검에서 글자가 나타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토록 윈터러를 노리는 이 자의 정체는 누굴까. 혹시 이 검으로 맨 처음 베었던 그 암살자의 일행이 아닐까. 늘 두 자루 검을 지니고 다닌 끝에, 결국 윈러가 아닌 이 검으로 다시 한 번 베게 되다니 기이한 인연이 아닌가. 러나 덕택에 정신이 바로 돌아왔다. 살갗을 뚫고 박힌 부서진 나무 조각들을 뽑아 내던지고 똑바로 섰을 때, 몸 속에서 덩어리 같은 것이 솟아올라 견디지 못하고 기침과 함께 뱉어냈다. 그것은 피였다. 그러나 보리스는 소매를 들어 입가의 피를 닦아버렸다. 이미 그런 것 때문에 멈출 수는 없었다. 고개를 들자 어린 성녀처럼 저 높은 곳에서 희미한 빛을 뿌리고 있는 그의 사촌 누이가 보였다. 그리고, 블라도가 다시 한 번 괴물에게 덤벼드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껏 블라도에게서 보리라고는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기세로 상대가 바위라고 해도 베어 넘길 듯이 달려들고 있었다. 철이 들면서부터 늘 무서워했던 흉칙한 삼촌, 군대를 이끌고 와서 아버지의 파멸을 비웃었던 간악한 사내, 그러나 무슨 짓으로도 잃은 행복을 찾지 못했고, 이제야 누군가의 죽음이 아닌 탄생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을 깨달았을 터인데,. 블라도는 윈터러가 아닌 하그룬을 들고도 예니를 붙들고 있는 발톱들에 이어진 촉수를 잘라버렸다. 도로 바닥으로 떨어지는 예니를 받아들면서, 블라도는 미친 것처럼 나직이 킬킬거렸다. 이미 죽은 자가 산 자를 향해 비웃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 때, 보리스는 갑자기 무언가를 감지하고 저도 모르게 소리질렀다. “피해야 해!" 그러나 블라도가 채 피하기도 전에 곧장 강한 공기의 파동이 밀어닥쳤다. 보리스는 그걸 알고 있었다. 섬의 괴물에게서 본 일이 있었다. 저것에 휘말리면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한 꼴을 당하게 된다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봐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으으으, 으아아,.” 인형 같은 금빛 머리털의 소녀를 끌어안은 블라도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떨기 시작했다. 온 몸이 오그라드는 듯한 진동이 몸 전체를 관통하고 계속해서 밀려들어왔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귀라도 막을 텐데, 블라도는 그러지 않았다. 오직 어린 딸만을, 이미 죽은 것처럼 보이는 아이만을 꽉 안고 자꾸만 품안으로 끌어넣었다. 누구든 정신을 잃고마는 이 상황에서도 딸아이를 지켜내려는 것처럼. 그리고, 보리스는 이제 자신이 해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 느꼈다. 진동이 멈추는 것과 동시에, 괴물의 송곳발톱이 저들 부녀를 덮칠 것이다. 한때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빼앗아간 것이 없었다. 가질 수 없는 장난감을 망가뜨리는 어린아이처럼 단지 모조리 부쉈을 뿐이다,. 자신은 아무 것도 얻어가지 못한 채 다시 홀로 외로워하다가, 저 어린 예니를 얻어 자신의 삶을 되찾은 사내. 그도 큰 비극의 일부일 뿐이며, 이 비극이 끝날 때 그의 역할도 끝날 것이다. 죽음으로, 또는 죽음보다 더한 죄의 대가를 치르며 영원히 막을 내릴 것이다. “너의 상대는 여기에 있다!" 이를 악물고 걸어가는 동안 몸 곳곳에서 피인지 늪가의 물인지 모를 것이 질척하게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계속 걸었다 음파의 폭풍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섬의 괴물이 같은 공격을 했을 때, 보리스는 본 일이 있었다. 저 무시무시한 공기의 파동이 몰아치는 중에는 다른 공격을 할 수 없다는 걸. 송곳발톱도, 날개도, 그 어떤 것도 움직일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두려운 순간이야말로 유일한 기회였다. 이미 최후가 예정된 상황에서 그가 던질 수 있는 마지막 수였다. 그걸 견뎌낼 수만 있다면. 점차 온 몸을 압박하는 기운이 귀를, 눈을, 목을 터질 듯 채우는 것이 느껴졌다. 더 견딜 수 없는 위치에서, 보리스는 땅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유년기로부터 시작된 겨울, 그것을 가져다 준 상대를 영원히 소멸시키기 위해 달려들었다. 죽은자의 이름을 위해, 살아가야 할 자의 생명을 위해! 견딜 수 있을까? 마음속에 의문이 떠오른 순간, 그는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했기 때문일까? 참 이상한 일이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다친 몸은 가벼워지고, 움직임 또한 자유로워졌다. 온 몸에 시원한 기운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따뜻했다,.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몸에 들어온 것처럼, 엔디미온이, 그의 몸 안에 들어와 도와주던 그 때 처럼 이미 말은 할 수 없었다. 몸에서 흐르던 액체가 사방으로 흩날려갔다. 무언가 뜨거운 것이 밀어닥쳤으나 이상하게도 버틸 수가 있었다. 판단도, 다른 것도 없었다. 오직 자신을 이끄는 검의 움직임에 모든것을 맡기고,. 송곳발톱들을 향해 내리쳐지는 윈터러에서 희고 차가운 기운이 뻗어나가는 것이 보였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차디찬 바람이 자신의 뺨까지 얼어붙게 했다. 날이 밝아오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차고 흰 태양이 머리 위에 떠오른 것 같다,. 살아남으려고 했었지, 겨울을 버텨서,. 예프넨은 한사람을 살려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가문의 주인 역할을 해냈다. 이제 자신은 수많은 죽음을 넘어 이곳까지 와서 누군가를 살려내기 위해, 스스로의 역할을 다하려 하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는 눈조차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다가선 최후의 적 앞에서 그를 소멸시킬 검을 쳐들었다. 내리 베었다. 모든 것을 지워버릴 듯한 찬란한 빛,.! ‘겨울을 내리는 아이로구나. 내 살을 뜯어 삼키고 자라서 나의 세계까지 오너라.' ‘그 세계의 힘이 너를 부를 것이다.' ‘힘의 열쇠를 지니고 세계의 경계를 넘어서 오너라,' ‘겨울은 이제 곧 시작될지니.' 4. 살아남은 자들 바스락, 바삭. 발에 밟혀 부서지는 것은 얼음이었다. 다시 모든 것이 보이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발견했던 것이기도 했다. 그리 넓은 범위도 아니었다. 손으로 잡아 보자 쉽게 녹았다. 보리스는 섬에서 윈터러가 만들어 냈던 거대한 겨울을 기억하고 있 었다. 한 마을을 모조리 얼려 버렸던 그 힘은 자신이 하고자 해서 발휘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그가 원하는 대 로, 검이 흩뿌린 겨울은 그 정도의 크기로 멈췄다. 아직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는 폭발해 나오는 윈터러의 힘을 제어하 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것은, 티그리스의 힘이었을 것이다. 겨울 대장장이의 말이 지금도 기억났다. 그와 함께 윈터러를 억눌러 줄 힘이 있다고. 오늘에야 자신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던 그 움직임을 예측하고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 전까지 그것은 자신 의 힘이 아니었다. 실버스컬 대회장에서 이솔렛이 말한 일이 있었다. 티그리스는, 어떤 수준에 이르기 전에는 자신이 무엇을 하 는 지도 모르는 경우가 있 다고. 나우플리온이 티그리스를 가르쳤다는 것을 일부러 숨겼기 때문에, 보리스는 섬의 마법 그릇에 머리카락을 남기는 의식을 행할 때 이 검술을 금기에 넣고 맹세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나우플리온이 보리스에게 준 마지막 선물인 셈이었다 . 처음부터 가르치지 않는 체 했을 때 지금 같은 결과를 예상했을까? 섬사람이 되지도 못하고 끝내 멀리 떨어져 살 수밖에 없게 된 쓸모 없는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넘겨주면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생명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사실도 그런 결정에 영향을 끼쳤을 지도 모른다.갑자기 보리스의 입가에 멈출 수 없는 미소가 픽어났다. 그래, 나우플리온, 하지만 이제 그 분을 살려낼 수 있게 됐다. 예프넨이 마지막 몇 주 동안 그에게 보여준 것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한 싸움이었다,. 보리스도 한 사 람을 살리기 위해 싸웠다. 최후의 전투는 끝내 복수가 아니라, 생명을 위한 것이 되었다. 그의 손에는 이미 괴물의 몸 속에서 뽑아낸 붉은 심장이 쥐어져 있었다. 모든 것이 너무 늦지 않았기만을 바랄 뿐이다. 보리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걷히며 문득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제껏 그의 스승을 위해 아무 것도 해주 지 못한 자신이지만, 오랫동안 그를 닮아가며 자라났다. 그를 이곳까지, 미래로 이끌어준 장본인이었다. “나우플리온, 만약에, 내가 돌아갈 때까지 기다러주지 않는다면, 절대 가만 두지 않는다고요,.” 아직도 온 몸이 욱신거렸지만 걸을 만은 했다. 오랜 악몽이 사라져버린 에메라 호수는 여전히 검은 늪인데도 예전과 다른 인상을 주었다. 귀기랄까, 그런 것이 한 꺼풀 걷힌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괴물의 최후는 보리스의 가슴 속에 일말의 의문을 남겼다. 마지막 순간 괴물은 그에게 말했다. 겨울이 시작 될 것이라고. 보리스가 이 순간 끝냈다고 생각한 겨울을 괴물은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것이 무슨 의미였을까. 자신의 세계로 오 라는 것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겠다는 의미일까? 하지만 자신의 살을 뜯어 삼키라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말이 틀림없 지 않은가? 사실, 음파의 폭풍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 또한 정말로 무모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때의 자신은 이미 살아남는 것 따위는 잊고 있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두 사람의 생명, 그리고 사라질 것 같은 가능성을 잡으려는 마음이 모든 것을 잊게 했다 . 그러나 그것을 견뎌낼 수 있게 한 갑작스런 몸의 변화는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순식간에 와서 힘을 주고, 싸움이 끝나자 도로 사라져버린 그 이상한 기운은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어찌됐든, 윈터러가 둘로 가르는 순간 괴물은 마치 말라비틀어진 뼈와 누더기 같은 것으로 변해버렸고, 오직 그가 찾던 심장만이 폐허 속의 보석처럼 번쩍이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 모양은 섬에서 죽였던 괴물의 모습과도 좀 달랐다. 이 모두가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에메라 호수, 그리고 보리스 의 과거 속에서 악몽으로 자리했던 괴물은 이제 사라졌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란 사실만은, 다른 사람들은 어찌 되었을까. 블라도는 이미 일어나 있었지만 보리스의 존재 자체를 느끼지도 못하는 사람 같았다. 괴물의 소멸에도 관심이 없었다. 오직 어 린 딸의 시체만을 들여다보다가 그 아이를 껴안고 어둠 속으로 걸어가 사라져 버릴 때 보리스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와 나 눌 이야기는 없었다. 그는 이미 최악의 형벌을 받았다. 유리히가 쓰러져 있어야 할 곳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보리스는 그 자리 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조금 놀랐다. 치명상을 입었을 텐데 정말로 도망쳐버린 건가, 아니면 늪에 가라앉기라도 한 것일까 . 어느 쪽이 진실이든 관계없었다. 조금 후 보리스도 다리를 끌며 걷기 시작했다. 다시 진네만 저택 앞에 이르렀을 때, 하늘에는 새벽별이 떠올라 반짝거렸다 푸르스름한 어둠에 쉽싸인 저택을 올려다보는 보리스의 마음에 회한이 어렸다. 이제 이곳을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마음이었다. 악몽과추억, 그 모두를 간직한 채 서서히 무너져가겠지. 떠나던 날 횃불에 휩싸여 있던 저택과 , 돌아와 네 개의 촛불 아래 마지막 만찬을 대접받던 일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튤크 집사가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에 대해 서는 이미 짐작하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모든 것을 직접 보려는 것처럼 저택 안으로 들어가 2층으로 올라갔다. 발치에 쓸리는 낙엽들은 이미 몇 년 전 가을의 것들이지만, 보리스는 새로운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고 느꼈다. 연회장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기 전부터 보리스는 그 안에 사람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긴 식탁 위에 여전히 만찬이 차려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 조금 달랐다. 만찬은 그때 차려진 그대로 식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조금 전에 새로 차린 것처럼 여 전히 김이 오르는 만찬이었다. 마법일까, 아니면 튤크 집사가 새로 차려놓은 것일까. 조금 후 보리스는 미소를 지었다. 어느 쪽 이든, 그것은 이 쓰러져 가는 저택의 주인인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이곳에서 태어나 망령을무서워하던 어린아이는 이제 더 이상 떨 필요가 없는 열 일곱 살의 소년이 되었다. 저택은 먼지가 되고, 소년은 어른이 된다. 보리스는 자리에 앉았다. 앉고 보니 자 신이 식사를 끝냈다는 의미로 접시에 올려놓았던 나이프와 포크도 다시 본래의 위치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는 냅킨을 무릎에 깔 고,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허공을 향해 말했다. “고마워." 먼동이 터 왔다. 무너진 벽 틈으로 새어드는 햇빛이 달아오른 쇠처럼 발갛게 익어있었다. 먼지가 불티처럼 뱅글뱅글 맴돈다. 보리스는 연회장을 나와 아버지의 서재 쪽을 보고 조금 열려 있던 문이 완전히 닫혀 있는 것이 보았다. 다가가 밀어보니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 그는 고개를 잠시 숙여 보이고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 자신과 예프넨이 쓰던 방 앞에는 여전히 널빤지가 못질되어 있었다. 그것을 힘껏 뜯어내고 안으로 들어간 보리스는 방 안의 모 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눈가로 손을 가져갔다. 몇 번이고 둘러봐도 5년 전, 예프넨과 보리스가 급히 갑옷을 챙겨 입고 숨겨 뒀던 가문의 보물을 꺼내던 그 날 밤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이후로 아무도 들어온 적이 없는 것만 같았다. 흩어진 옷가지, 꺼내놓은 서랍, 모든 것이 기억 속의 모습과 똑같았다. 다만 모든 물건 위에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블라도 삼촌이 이 집을 차지하고 서 이 방 두 개는 그냥 못질해 버리도록 명령했던 모양이었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러나 그 명령 때문에 그 날로부터 지금까지 시간이 흐르지 않은 듯, 또는 아득한 시간이 흐른 듯 모순적인 감상이 교차했다. 그 날 밤 예프넨이 벗어 던 져 놓은 옷을 보았을 때는 그야말로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 솟아나 목을 메이게 했다. 보리스는 그 옷을 집어든 채 한참 동안 망 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옆에 이어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보리스는 먼지 쌓인 침대에서 시트를 한 겹 걷어내고 장롱을 뒤져 꺼 내 온 새 시트를 깔았다. 그리고 예프넨의 옷을 머리맡에 놓았다. 오랜만에 망토와 부츠를 벗어놓은 보리스는 그 침대에 누워 잠 이 들었다. 꿈속의 목소리였을까. 보리스는 혼자서 넓은 들판을 달려가고 있었다. 늘 가지고 다니던 여행 물품도, 망토도 없이 홀가분한 몸이었다. 웃자란 풀들이 자꾸만 얼굴을 찔렀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그렇게 편하고 즐거울 수가 없었다. 등 뒤에서 누 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그는 돌아보았다 그리고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왔어?] [응, 이제 왔어. 오래 기다렸지?] [너무 너 무 오래 기다렸지. 보고 싶어서 죽을 뻔했는걸. 하지만 곧 가야 되지? 그 전에 조금만 같이 놀지 않을래?] [그럴까?] 둘은 함께 들판을 달렸다. 달리다 보니 투명한 에메랄드빛 호수가 나타났다. 한참 달려서 더워진 그들은 호숫가에 주저앉아 얼굴과 손을 씻었다. 신발을 벗고 발도 담갔다. 나란히 앉아 맨발을 첨벙거리던 둘은 조금 후 싱긋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같이 노는 것도 참 오랜만이네, 그동안 나, 보고 싶지 않았어?] [왜 안 보고 싶었겠어. 하지만 이제 이렇게 만났으니 됐지. 혼자 내 버려두고 참 걱정 많이 했는데. 이렇게 자랐고, 이제 혼자서도 누구보다도 잘 해나갈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응 . 하지만 난 늘 형이 곁에 있었으면 하고 바랐는걸. 아참, 형! 나 말이야, 어머니의 유품을 도로 찾았어. 우리가 팔 때보다 값이 열 배도 넘게 올라 있더라고. 그렇지만 너무 중요한 거니까 살수밖에 없었어.] [정말 잘 됐구나! 내 대신 잘 간직해 줄래?] [그 럼. 이젠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을 거야.] 호수에 나뭇잎이 떨어져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점차 멀어져갔다. 한 잎, 두 잎,. [보리 스, 나 이제 그만 가야 될 것 같은데.] [벌써 그렇게 됐어?] 연갈색 머리카락이 호수 바람에 부드럽게 날리고 있었다,. 보리스가 늘 좋아했던 맑은 하늘빛 눈동자 속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형은 미소짓고 있었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미소를 지으 며 ‘이제 정말로 가야겠다'라고 말했다. 보리스는 조금 떨면서, 결코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그래, 형. 잘 가.' 라고 말했다. [왜 그래? 우리 꼬마가 울 것 같은데.] 이미 예전의 형만큼이나 키가 커진 보리스였지만 형은 여전히 ‘우리 꼬마 라고 불렀다. 보리스는 입술을 꾹 다물고 버티다가, 조금 더 버다가, 마침내 나지막이 소리쳤다. [왜 내 옆에 계속 있어주지 않았어? 응? 난 지금도, 형이 내 옆에 없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이 모든 것이 악몽이어서 빨리 깨어났으면 하고 생각하곤 해,. ] 형이 손을 내밀어 뺨을 쓰다듬어 줄 때, 이미 축축한 물기가 흘러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넌 악몽에서 이미 깬 걸, 네 힘으로 잘 해냈잖아. 난 알고 있어. 이제 너한테는 내가 필요 없다는 걸. 내가 너를 놓아줬듯, 이제 너도 나를 놓아주게 될 거야,. 내 꼬마 동생은 이제 전사 보리스가 되었으니까.] 형은 마지막으로 보리스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아 주었다. 모든 것은 무,.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아는 가운데서도 온기는 느껴졌고 눈물은 흘러내렸다. 이윽고 다시 눈을 뜬 세상에는 아름다운 호수와 좋은 날씨 , 길게 자란 잡풀들, 그리고 그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보리스는 홀로 호숫가에서 일어났다. 여행자의 짐을 가지고, 검 은 망토를 걸치고, 부츠를 신은 그는 해가 뜨는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9월과 함께 가을이 왔다. 오후에 어디론가 갔다가 론 의 통령 관저로 돌아온 마법사 종그날은 갑작스레 늙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통령이 혼자 기다리고 있는 회의의 방으로 들어가는 동안 그는 병자처럼 발을 질질 끌었다. “왔는가." 통령은 창문쪽으로 돌아앉아 있었다. 한 가지 보고가 날아온 뒤로 통령의 심 기가 몹시 좋지 않다는 것을 관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종그날은 통령 앞에 섰지만 지친 듯한 표정으로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 좋은 광경은 아니었겠지." 칸 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닫힌 창 밖의 나무가 가을빛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계절이 끝나면, 저렇게 결과가 오는 거야."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종그날이 입을 열었다. “아이가, 죽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자는 이미 회생 불능입니다. 종일토록 아이를 돌보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는 군요. 만나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마도 아이가 아픈 것이겠지." “일종의 광증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방에, 가두어 두었답니다." 통령은 종그날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참 무서운 일이군. 그 애 이름이, 예니라고 했던가 ?” 종그날의 얼굴을 본 칸 통령은 더 묻지 않고 말을 돌렸다. “유리히로부터는 여전히 소식이 없는가?” “완전히 행방불명입 니다. 마법 교감도 모두 끊겼습니다. 어쩌면 죽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 참,. 정말 놀라운 일이야. 내가 네 날개 가운데 셋을 잃었지 않은가. 고작 어린아이라고 생각한 소년 하나한테." 생각할수록 기분이 상하는지 통령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조금 후 종그날이 말했다. “류스노는 좀 다르겠지요, 이미 목적지를 알아내어 잠입도 끝냈다고 합니다." “그러기를 바라야겠지. 정 말로 피해가 커. 이거 류스노까지 잃었다가는 나도 블라도처럼 폐인 되겠어." 물론 부하 몇을 잃는다 해서 폐인이 되거나 할 칸 통령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만큼 그는 입맛이 썼던 것이다. 잠시 후 종그날이 물었다. “그러면 어찌 처분하시렵니까 블라도 진 네만에게 내리신 롱고르드 영지나 론의 저택은 거두실 생각입니까?” “아니. 내버려 둬. 그런 자에게서 더 빼앗으려 했다가는 나도 뒤끝이 안 좋을 것 같아. 우스운 일이지만, 그 집안의 일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해진단 말이야. 롱고르드에는 전권 대 리인을 보내고, 블라도는 직위는 해제할 것이지만 녹봉은 그대로 줘. 그리고 그 아프다는 아이한테도 의사를 몇 명 보내 줘." “ 유감이지만, 의사는 소용없을 것 같습니다." 종그날은 오래 전 율켄이 죽던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괴물의 존재나 광기에 대 해서도 블라도에게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 끔찍한 괴물을 그 소년이 죽였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온 몸이 오싹해졌다 ,. 그것이 검의 힘이라 해도 두려웠고, 소년의 힘이라면 더더욱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칸 통령도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모 양이었다. “그 저주스런 집안에서 마침내 혼자 살아남은 소년이지. 그 애 혼자만 끝내 집안의 운명에 말려들지 않았어. 그것이 야말로 다른 무엇보다 대단한 일이지. 앞으로 어떤 식으로 해나갈지 참 궁금해. 이젠 윈터러보다도 그 소년의 미래가 더 궁금할 정도야.” 5. 가장아름다운 찬트 파도가 뱃전을 쳤다. 항해하기에 썩 좋은 날씨였다. 썰물 무렵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자그마한 섬이 감청빛 맑은 물 너머 동쪽에 떠올라 있었다. 이른 아침이 지나자 섬 머리를 물들이던 태양은 머리 위로 떠올라 하얀 원반이 되었다. 물 속에 잠겼다가 드러난 해안선이 물살 사이로 넘실대는 것이 보였다. 하루를 통틀어 고작 몇 시간 드러나는 자연 선착장이 슬슬 개시하는 중이었다. 작은 배가 얕은 물이 찰랑이는 곳에 세워지고 한 사람이 뛰어내려 밧줄을 끌고 가 바위에 묶었다. 이미 겨울 날씨라 발을 물에 적시면 꽤 추울 테지만, 개의치 않고 물 속을 걸어 모래사장을 올라갔다. 곧장 난 바윗길을 걸어 저장고가 있는 쪽으로 가려 하는데 부르는 소리가 났다. “이솔렛 아가씨! 성채 꼭대기에서 사람이 기다리고 있어요." “기다리는 사람이라고요?” 이솔렛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마치 손님이 왔다는 듯한 어조인데 이곳에 섬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올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성채로 이어지는 바위 계단을 올라가 마침내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이솔렛은 걸음을 멈췄다. “너,.” 한 사람이 그녀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아까 전부터 배를 보고 있었어요." 성채 바람을 받아 청동빛 머리카락이 긴 깃발처럼 날렸다. 더구나 그는 미소짓고 있었다. 아직 열 일곱 살인 주제에 마치 사내처럼 보이는 미소였다. “어떻게 여기 있지?” 이런 말부터 하고 싶진 않았는데, 참 어쩔 수 없는 천성이다 싶었다. 보리스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모아 쥐며 말했다. “그런 말, 당신은 여전히 당신다워요. 썰물섬 수비대 대장이 바뀌었더군요. 말이 잘 통하는 사람으로. 안 그랬다면 사람들을 붙잡고 인질극을 벌일 뻔했는데." “너는 도대체,.” 이솔렛은 말을 멈췄다. 지금 하려 했던 말은 실제로 전혀 하고 싶지않은 이야기였다. 아무 쓸모도 없고, 본심과는 어긋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지금 억지로 해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용건이 있어서 온 겁니다. 하지만 벌써 꽤 폐를 끼치고 말았거든요. 당신을 봤으니 이제 곧 가야죠. 다른 방법이 없어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여기 와서 기다려야만 당신을 확실히 만날 수가 있잖아요. 안 그래요?” 달의 섬으로 가기 위해서는 거칠 수밖에 없는 관문,. 한때 이곳에 둘이서 들르고, 저장품을 꺼내어 다시 바다로 나가던 때가 있었다. 이제 그런 날은 다시 오지 않을 테지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눈이 아련해졌다. 이솔렛의 얼굴에 드디어 어설픈 웃음이 어렸다. “오느라 힘들었겠구나. 배는 어떻게 했니?” “배 다루는 법은 그때 당신이 가르쳐 줬잖아요. 물론 조종도 잘 못하는 제가 혼자서 이곳까지 오다가 몇 번 죽을 뻔하긴 했지만요." “무모한 일이었어." “그렇죠. 하지만 꼭 와야 했거든요. 그러니까,.” 보리스는 품 안에서 주머니 한 개를 꺼냈다. 클로버가 수놓아진 작은 주머니였다. 그는 한 걸음 다가와 이솔렛에게 그걸 건네주었다. 주머니의 끈을 끄르자 붉은 광채가 눈을 부시게 했다. 이솔렛은 놀란 눈동자를 크게 뜬 채 말을 잊었다. 언제나 강한 바람이 몰아치는 성채 꼭대기에서 마주선 두 사람의 머리카락도, 망토자락도, 소맷자락도, 휘날렸다. 그들이 하려 한 말들도 바람에 날려갔다. 그건 수많은 말을 품은 침묵이었다. 이것을 얻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이솔렛은 그녀가 칼츠 저택으로 찾아갔을 때 보리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까닭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죽음을 각오한 싸움이었을 것이다. 나우플리온의 일을 이야기할 때 그들 모두가 끝내 견디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었다. 나우플리온의 존재는 어떤 것일까. 그들이 서로를 바랄 수밖에 없도록 연결해 준 것일까, 또는 결코 그 이상 가까워질 수 없도록 가로막는 것일까. 그러나 이 보석의 존재는 보리스가 나우플리온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나타내어 주는 증거였다. 이솔렛이 고개를 들더니 갑자기 말했다. “보리스, 섬으로 돌아가자." 보리스는 이솔렛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것처럼. 곧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지 않겠어요." “아니, 넌 돌아가야 해. 그분 곁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은 너야. 네가 있을 수 있도록 내가 어떻게든 주선해 보겠어. 그러니까 같이 가자." “이솔렛." 가라앉은 눈동자가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 다보았다. 이솔렛은 그의 눈이 섬에서 헤어질 때와는 또 달라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는 초조해하지도 않았고, 과거에 억눌 리지도 않았다. 많은 것을 알고, 할 수 없는 것을 알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는, 성장한 소년의 눈동자였다. “ 난 아직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어요." 그 말을 하면서 보리스는 이솔렛의 하얀 머리가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겨울 햇살에 하얗게 빛나는 그것, 아직은 손댈 수 없지만, 그녀는 사라지지 않고 언제나 그곳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눈물을 흘릴 필요는 없다. 이솔렛은 보리스가 몇 달 전 자신이 ‘리리오페와 결혼하면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한 것에 대해 답을 했다는 걸 느꼈다. 주 머니를 갈무리 해 넣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마주선 소년은 조금 후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 주머니는 옛날에 로즈니스가 행 운의 표지로 준 것이랍니다. 로즈니스는 그 분도 아시는 아이죠. 이제 행운이 필요한 사람은 내 쪽이 아닌 것 같거든요. 그리고 내가 그것을 간직할 필요도 없고요." “전해줄게." “그리고 저, 대륙에 돌아가면 학원에 입학합니다. 제 나이 또래의 아이들답 게 살아가게 될 지 몰라요. 잘 될 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시도해 볼 생각이에요." “아, 축하해,. 그곳이 어디지?” “저도 위치 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네냐플이라고 부르더군요," 보리스는 이솔렛이 어색해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유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는두 걸음 뒤로 물러나면서 말했다. “사실 저 여기 도착한 지 꽤 됐거든요. 한 보름쯤 됐나? 심심했을 것 같지 않나 요?” “그래,. 뭘 하며 지냈니?” “찬트를 만들었죠." 이솔렛은 약간 놀란 눈으로 보리스를 보다가 말했다. “그건,.” “물론 압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 섬이 바로 섬에서 내린 금기의 사각 지대라는 걸 깨달았거든요? 대륙에서는 당연히 찬트를 쓸 수 없 고, 달의 섬에는 들어갈 수가 없는데 이곳은 이도 저도 아니더라고요. 본래는 못 들어오는 곳이지만 일단 들어온 이상은 찬트를 부르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던데요?” 이솔렛은 어이가 없어 그만 웃고 말았다.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은 보리스도 미소를 지으 며 말했다. “들어보고 싶지 않아요?” 이솔렛은 섬사람들처럼 법도에 얽매이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 했다. “해 봐. 검토해 줄게." “어, 지금도 해 줄 건가요? 그런데 문제가 좀 있는데,.” “무슨 문제?” “그게, 들리지가 않는 거라서,.” 이솔렛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한 남자가 성채 꼭대기로 올라왔다. 돌아본 이솔렛은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움직였다. 그는 다름 아닌 헥토르였다. 그는 이솔렛을 보더니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새로 썰물섬의 경비 책임자 가 된 클란치입니다." 섬사람은 썰물섬에서조차도 본명을 쓰지 않기에 처음 대륙에 나갈 때 썼던 가명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이 솔렛은 헥토르가 보리스를 썰물섬에 들여보내 주었는가 생각하다가 또 한 번 의아해졌다. 백 번 양보해서 생각해도 둘이 사이가 좋다고 말할 수는 없을 텐데? 어쨌든 헥토르는 보리스를 보며 말했다. “배를 댈 수 있는 시간이 끝나가고 있어. 이번에 떠날 건가?” 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솔렛이 가는 것을 보고서 다음 썰물에 가겠어." 그러자 헥토르는 이솔렛 쪽으로 고 개를 돌렸다. “지금 출발할 것이라면 어서 내려가시는 게 좋겠습니다만," 이들 모두는 썰물섬의 간조가 얼마나 순식간에 끝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끝나 간다고 할 때 바로 내려가지 않으면 배가 떠내려가 버리는 사고도 생겼다. 그러나 헥토르가 올라오는 바람에 보리스와 이솔렛은 마땅히 이별의 말을 할 시간도 없었다. “아아,. 그럼." “조심해서 가요." 이 정도가 전부였다. 헥 토르가 앞장서 내려가고 이솔렛이 계단으로 두 발짝 정도 내려섰을 때 보리스는 입을 열었다. “그 분께, 이걸 전해 주시겠습니 까?” ‘이것'이 무엇인가 하여 이솔렛이 몸을 돌렸다. 그런데 보리스의 손에는 아무 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무엇인가 생각하는 순간, 소년의 입에서 찬트가 흘러나왔다. (찬트의 가사입니다.) 항해자여, 그대가 연 뱃길을 따라 달리는 나는 / 바로 그대가 낳은 전사 / 그대가 날개를 달아 준 전사 / 머물지 않고 / 늘 새로운 푸른 곶을 가리켜 보이니 / 따를 수밖에 없는 그대 / 함께 나아갈 수밖에 없는 그대 (가사끝). 변성기가 지나간 소년의 목소리는 이제 바다처럼 깊고 푸르러졌다. 항해자는 물론 나우플리 온일 것이다,. 그 찬트 안에 나우플리온에 대한 보리스의 마음이 모두 담겨 있었다. 존경도, 애정도, 감사도. 보리스가 노래를 끊었을 때, 이솔렛은 문득 정신을 차린 것처럼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재주가 없어 이것뿐입니다.” “손대고 싶지 않은 좋은 찬 트로구나,. 그대로 전해 줄게," 그러고 나서 둘은 잠깐 머뭇거렸다. 무언가 말할 것이 있는데 감히 입밖에 못 내는 것처럼, 그러 나 이솔렛이 먼저 고개를 돌렸고, 이윽고 금빛 머리카락은 입구로부터 사라졌다. 보리스는 눈을 떼고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곳 으로 걸어갔다. 보리스가 썰물섬에 들어을 수 있었던 것은 헥토르가 예전에 세 번 도와주겠다고 한 맹세를 아직 지키고 있기 때 문이었다. 달의 섬으로 가는 배가 나아갈 바다에서 잔물결이 철썩이며 노래를 불렀다. 처음 나우플리온과 이곳에 왔던 때처럼 자 신이 딛고 선 좁은 땅을 제하면 사방이 모두 시선 닿지 않는 곳까지 이어져 있는 이곳은, 참으로 이상하다. 이 드넓은 세상에 단 혼자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도, 그리고 단 한 사람만이 보일 수 있다는 것도 모두 가르쳐 준다. 조금 후 그는 하얀 돛을 지닌 배가 나아가는 것을 보았다. 바람은 빠르지 않았으나 서서히 밀어갈 정도는 되었다. 보리스는 절벽 끝까지 가서 아슬아슬하게 발을 딛고 이솔렛의 배를 보았다. 아니, 이솔렛을 보았다. 얼마 후 그녀도 이쪽을 바라보았다. 검은 망토가 휘날리고 있어 눈에 잘 띄었다. 그리 멀지 않았다. 그녀는, 표정을 알수 없는 얼굴로 성채 위의 보리스에게서 눈을 뗄 줄 몰랐다. 보리스도 마찬가 지였다. 한 마디 말도 닿을 수 없는, 새들에게만 의미 있을 거리에서 서로에게 보이지 않을 열렬한 눈길이 오가고 있다,. 그렇게 바라본다 해도 누구 하나 탓 할 사람은 없기에 보리스가 천천히 손을 올렸다. 이솔렛은 보았다. 보리스가 두 팔로 커다란 동그 라미를 만드는 것을. 그녀가 오래 전 가르쳐 준 수신호, 일리오스 사제가 만든 그것이었다. 그것의 의미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 은 이 세상에 이솔렛 한 명밖에 없었다. ‘여길 보세요.' 아아, 바라보고 있다. 이보다 더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바라보있다,. 저 멀리 소년이 오른팔을 펴는 것이 보였다. 거기에 왼팔을 구부려 겹치는 것, 그것은,.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아무도 보 지 않는 바다 위였다. 이솔렛의 뺨을 타고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견딜 수 없게 된 그녀도 손을 올렸다. 그리고 똑같은 모 양을 그렸다. ‘네 곁에, 있고 싶어.' 말로는 감히 하지 못했던 그들도 이 순간만은 너무나 솔직했다. 보리스도 목이 메어오는 걸 느꼈다. 얼마나 곁에 있고 싶었던가. 날마다 그녀의 눈빛과 머리카락을 바라보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시절은 한 계절도 못되는 빛처럼 빠르게 사라져버렸다. 보리스는 다시 두 손목을 교차시키며 팔꿈치를 마름모꼴이 되도록 만들고는 높이 올려 보 였다. 그것의 뜻은,. ‘약속하겠어요.' 무언의 대화는 어떤 말보다도 강했다. 진심보다 더한 진심이었다. 폭풍 같은 바람이 머리 카락을 제멋대로 휘몰아갔지만, 보리스는 말없이 팔을 올리며 입안으로 뇌었다. ‘당신을 위해서, 살아가겠다고.' 이솔렛이 대답 하는 것이 보인다. 눈앞이 흐려져 잘 보이지 않아 급히 눈을 비볐는데 내용을 보고 다시 흐려져 버렸다. ‘잊지 않아.' 바람이 눈물조차 흩날려갔다. 왜, 이제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된 걸까. 보다 일찍 전할 수 있었더라면 이 벅찬 마음으로 무엇이라도 말하고, 무엇이라도 해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이 순간, 그들이 가진 짧은 수신호들만으로 말하기 위해서는 가식도, 망설임 도 섞일 수 없었다. 이솔렛이 처음 가르쳐주며 말했던 것처럼 그것은 무언의 찬트였고, 말할 수 없기에 더욱 간절한 기원이었다 . 배는 멀어지고 있고, 시간은 잡을 수 없고, 그리고, 그리고,.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보고 있다. 들리지 않는 찬트를 보내고 있 다. 미뤄왔던 말들을 이 순간 모두 쏟아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말하고 싶다, 정말로 말하고 싶다,. 그러나 썰물섬의 간조 는 끝이 났고, 이솔렛은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그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 다. 그렇다 해도 좋았다.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이렇게 알아버렸으니까. 눈에 담기조차 힘든 새파란 빛이 하늘과 바다 모두에서 쏟아져 내렸다. 그 사람을 기다려도 좋다는 것 하나 때문에 모든 세상이 달라져 보였다. 바다와 대륙으로 가로막혀 몇 십 년이 고 헤어진다 해도, 심지어 만나지 못하게 된다 해, 다시는 변치 않을 것 같은 마음을 얻었기 때문에 미래가 두렵지 않았다. 드디 어 수신호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배가 멀어졌다. 보리스는 손을 내리고 그녀의 모습을 오래도록 눈에 담아두려는 것처럼 응 시했다. 멀어지고 더 멀어져 작은 점조차 사라져버릴 때까지. 그것은 어쩌면 영원한 이별일 지도 몰랐다. 12월의 어느 아침, 며칠 동안 내린 눈이 너무 쌓였는지 정원의 나뭇가지 하나가 부러져버렸다. 기껏 쓸어 놓은 눈을 다시 치운답시고 하인 하나가 빗자루를 들고 나오는데, 어딘가에서 눈덩이가 연방 날아와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흰눈을 뜨고 두리번거리는 동안 다시 한 개가 날아와 이번엔 벽에 부딪쳐 눈자국을 만들어버렸다. 보아하니 담 너머에서 날아오는 것 같아 얼른 담으로 달려가 내다보았다. 그리고 말문이 막혀 더듬거렸다. “아, 아니, 저,.” 눈을 던진 사람은 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댔다가 떼며 저택 쪽을 손가락질했다. “도련님을 좀 불러 줘. 내 얘기는 하지 말고, 그냥 슬쩍 데리고 나와 줘. 저기 말이야, 저리로." 두터운 책을 맨 끝장까지 넘겨 놓고 열심히 들여다보던 루시안은 조금 후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하며 자기 뺨을 톡톡 두드렸다. 아직 아침 식사도 하기 전인데 이렇게 일찍 일어나 책을 들여다보게 된 건 역시 학원 입학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험 날짜보다 이틀 정도 일찍 도착할 요량으로 닷새 뒤에 출발할 계획을 세워 두었다. 선생들은 다들 이만하면 열심히 했다고, 꼭 합격할 거라고 말해 주긴 했지만 다른 아이들의 실력에 대해서 모르는데 확신할 수 있는 걸까? 워낙 느긋한 성격이긴 해도 시험이란 걸 치러 본 일이 한 번도 없기 때문에 솔직히 걱정이 좀 됐다. 하지만 책이란 걸 이렇게 열심히 본 것은 처음이었다. 루시안은 공부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 것처럼 보였던 보리스가 의외로 곧잘 책을 읽는 것을 보고 좀 놀랐었다. 그러나 이제 녀석이 돌아오면 그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너보다 책을 적게 읽었을 지는 몰라도, 한가지 책을 수십 번 읽은 거라면, 절대 지지 않을 저라고. 그렇지만 녀석은 돌아오지 않았다,. 학원에 같이 가겠다고 굳게 약속해 놓고서, 시험을 코앞에 둔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 늦여름에 떠났는데 이미 겨울이 됐다,.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나쁜 일이라도 일어난 건 아닐까? 일은 잘 됐을까? 친구 덕택에 한결 달라진 자신이 자랑스러운 것만큼, 그 친구가 돌아와 자기 모습을 보아주길 바랐다. 그런 얼굴로, 그런 눈빛으로 약속하고 가서 돌아오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할수록 혹시 위험한 일을 하다가, 하는 생각도 뒤따라 떠오르곤 했다. 아닐거라고 고개를 저어버리고서 공부에 몰두하긴 했지만, 겨울이 깊어질수록 친구에 대한 생각도 깊어져갔다. 참, 겨울을 닮은 녀석이었다. 그 녀석은,. 얼마 전에는 학원에 가기 싫어서 일부러 시험 끝난 다음에 돌아오려는 건 아닐까, 하고 엉뚱한 생각도 해 봤다. 하고 나니 꽤 그럴듯한 생각인 것 같아서 시험 끝날 때까지는 그 생각으로 버텨 보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오늘은 비교적 밝은 기분이었다.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 “도련님! 루시안 도련님!" 하인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거실 입구 앞에 멈추더니 갑자기 표정을 바꾸고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도련님, 저, 테라스로 잠시 나가보세요." “테라스엔 왜? 거기 춥잖아?” “그래도, 잠깐만 나가 보세요.좋은 일이 있다니까요." “나 지금 공부하고 있잖아." 이 대답을 하고서 루시안 스스로 뿌듯해하고 있는데 하인은 고개를 저으며 자꾸만 재촉했다. “잠깐이면 된다니까요. 안 가보시면 후회하실 텐데요." “도대체 뭔데 그래?” 드디어 루시안이 책을 접고 테라스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여름에 보리스와 같이 앉아 주사위 놀이를 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던 그곳이었다. 걱울이 오자 녹색식물은 다 시들었고, 찬바람이 몰아쳐서 문을 닫아 두었다. 하인이 문을 열고서 루시안을 들여보내더니 자신은 들어가지 않으려는 듯 도로 문을 닫으려 했다. “어? 넌 안 들어와?” “도련님 혼자 계세요!" 장난을 하려는 것처럼 하인은 막무가내로 문을 닫아버렸다. 루시안이 어안이 벙벙해져서 머리를 긁적이다가 다시 문을 열려고 하는데 갑자기 뭔가 날아와서 머리를 때렸다. “아얏!" 머리를 문지르며 돌아보려는 순간 다시 한 번 눈덩이가 날아와 이마에 정통으로 맞았다. 두 손으로 눈을 털어 내며 도대체 누군가 싶어 테라스 밖을 내다보았을 때였다. “받아!” 눈덩이 또 하나가 이번엔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걸 보고 엉겁결에 손을 내밀어 받은 루시안은 테라스 아래에서 눈을 던진 사람을 발견하고는 그만 멍해졌다. “뭐해? 눈이 녹고 있잖아." 손에 든 눈덩이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테라스 아래, 영영 달아나 버린 것이 아닐까 생각했던 검은머리의 소년이 선 것을 보았을 때, 이럴 줄은 몰랐는데 눈물이 글썽해졌다. 이렇게, 이런 식으로,. “너,.” 그러나 눈덩이는 또다시 날아왔다. 기다리는 동안 잔뜩 만들어두었던 듯 두세 개가 한꺼번에 날아와 한 개도 어긋나지 않고 얼굴이며 팔, 가슴 등을 때렸다. 그리고 그 때야 정신을 차린 듯한 루시안은 당장 테라스 난간을 넘어 밖으로 뛰어내렸다. “어, 원정 나오는 거군?” 그 말이 맞았다. 루시안은 보리스가 있는 쪽으로 대뜸 달려들자마자 피할 틈도 주지 않고 와락 껴안아버렸다. 허리가 뒤로 휘청 꺾어지면서 긴 머리칼과 망토가 젖혀져 늘어졌다. 그는 조금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지만 밀어내지는 않았다. “다시 만나서, 정말 반갑다, 이 자식아." 그러나 루시안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 말에 이어, 손에 들고 있던 눈덩이를 상대의 목덜미에 꾹 쑤셔 넣었던 것이다. “재회 선물이얏! 게다가 소식 한 번 안 준 것에 대한 벌이기도 해!" 보리스가 몸을 움츠리며 루시안을 밀어내는 것과 동시에, 루시안이 재빠르게 바닥에 몇 개 더 놓여 있던 눈덩이를 위로 차올렸다. 눈조각이 튀었지만 보리스도 지지 않고 물러나며 하인이 쓸어 치워 뒀던 눈더미에 발길질을 했다. 루시안은 아예 그 위로 뛰어올라갔고 보리스는 그 사이를 틈타 남은 눈덩이를 집어 겨냥하면서 말했다. “소식 못 줘서 미안해." “미안하면 항복해." “항복은 안되겠고, 대신." 어제 떠났다가 돌아온 사람같은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약속을 지키러 왔어." 하늘이 맑다. 서부 아노마라드는 2월 말부터 봄이었다. 남서쪽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내려오는 파노자레 산맥 줄기 끝자락에 네냐플 학원이 있었다. 높다란 석조 탑 네 개가 서로 마주보고 솟은 것이 보인다. 묵은 담쟁이덩굴로 메워진 탑의 석벽은 오래되어 닳은 듯 바랜 갈색이었다. 탑과 탑 사이를 연결하는, 마치 다리처럼 보이는 복도는 북탑 하나에만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남쪽 탑 너머에 자리잡은 조그마한 숲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초록빛 토끼가 웅크린 것처럼 보였다. 서쪽 탑 너머 사면에는 골짜기가 있다. 그 아래로 가파른 비탈을 내려가면 쾌 큰 강이 있는데 학원에서 설치한 선착장이 있어서 북부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좋은 운송로가 되어 주었다. 남쪽이나 동쪽에서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야플리아 가도를 따라왔다. 그 길은 학원입구까지 이어진 너른 평원 ‘고양이 등'에서 끝이 났고, 거기서부터는 좁은 소로가 학원 입구로 이어져 있었다. 소로로 접어들기 직전에 갈색 돌로 아치형 입구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기둥에 '여기서부터는 학원의 선생님인 마스터(Master)들의 허락을 받은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요지의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매우 소박해 보이는 안내문인데도 불구하고 그걸 어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양이 등 평원은 네냐플 학원의 땅이었다. 마법 결계가 쳐져 있는 그곳에 섣불리 들어섰다가 강대한 마법사인 학원 마스터들의 분노를 사게 되면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 고양이 등 평원은 각지에서 온 마차와 말들이 가득 들어차서 평소의 고요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종소리가 세 번 울리자 곳곳에 흩어져 있던 아이들이 곧 네 개의 탑으로 둘러싸인 중앙 정원으로 모여들었다. 열을 지어 놓여진 백여 개 가량의 의자들은 곧 아이들로 채워졌다. 아이들의 대열 뒤로는 입학을 축하하기 위해서 온 부모나 가족들이 앉는 자리가 반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시작되나 봐." 곁에 앉은 루시안이 소곤거리다가 금방 자세를 바르게 했다. 정면의 단상에 학원의 아홉 마스터들이 나와 앉기 시작했던 것이다. 보리스도 정면을 보았다. 자리가 정돈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보리스는 그 날 아침, 그와 루시안이 묵고 있던 숙소로 배달된 이상 한 상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안에는 최고급 깃펜 상자와 수정으로 만든 값비싼 잉크병이 들어 있었으나, 보낸 사람의 이름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단지 ‘P’ 라는 머릿글자 하나가 새걱진 네모진 금패를 발견했을 뿐이었다. 도대체 누가 보냈을까? “아, 정말로 나 꼴찌로 입학한 것 아닐까." 루시안은 이른 아침부터 내내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중이었다. 본인 말로는 시험 때 너무 긴장한 나머지 생각이 잘 나지 않아서 끔찍하게 많이 틀렸고, 검술도 영 엉망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입학 허가가 났으니 자기는 꼴찌가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보리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닷새만에 준비해서 시험 본 나는 꼴찌 아래의 어떤 신비로운 등급 아닐까." “꼴찌 아래? 입학 예정자가 중간에 포기할 경우 대기자 입학이란 게 있다고 그러더라고." ”,.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라고 믿겠어." 그 때 단상에서 한 사람이 마법으로 증폭된 목소리를 멀리까지 내보냈다. “모두 조용히 해 주십시오, 입학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맑디맑은 날씨다. 겨울도 다 간 듯한 햇빛 좋은 날의 오전 열 한 시였다. 앞에서 마스터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던 보리스는 무언지 모를 예감으로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곳에 그를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입학 사실을 알린 사람조차 없었다. 루시안의 어머니인 칼츠 부인과 하인들을 제외하면 아는 사람도 전혀 없는 그였다. 그런데도 그는 자꾸만 입학생들의 가족이 앉아 있는 내빈석을 쳐다보았다. 두 번, 세 번,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 있었다. 빛나는 태양을 안고 내려오는 날개, 크고 새하얀 새였다. 보리스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새였다. 그를 이솔렛이 있는 마법의 계단으로 인도했던 섬의 흰 새들, 그 가운데 하나가 파란 하늘을 빙글빙글 맴돌며 날고 있었다. 그 목에 잘 보이지 않는 장식이 달린 것이 보였다. 보리스는 곧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흰 새의 공주, 요즈렐이었다. “보리스,? 뭘 보고 있어?” 루시안이 보리스의 기색을 눈치채고 같이 위를 올려다봤지만, 뭘 보는지 눈치채지 못하고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을 뿐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앞을 보고 있어도 보리스는 아름다운 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유롭게, 한없이 날아서 그 사람이 있는 곳까지 갈 수 있는 새에게서,. 오랜만에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실한 미소가 떠올랐다. <룬의 아이들-윈터러 종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