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ic] a 악마의; 악마와 같은; 마력을 지닌, 천재적인 ……악마란 놈이, 어린애가 태어나는 순간 귓전에 비밀스런 말을 속삭이고는 검은 입김을 훅 불어넣는다는 거야. 그러면 그 조그마한 녀석은 태어나자마자 말을 하고, 한 살도 되기 전에 글을 읽고, 다섯 살이 되면 손에 잡히는 책마다 통째로 외워버리게 된단 거지. 그것뿐이 아니고말고, 손에 잡히는 악기를 단번에 연주하고, 시인들처럼 시를 써대고, 화가들처럼 그림을 그리고, 심지어 천사들도 눈을 내리깔고 지나갈 정도로 잘나빠진 얼굴도 갖게 된다니까. 악마가 맨 처음 귓가에 속삭여 줬던 비밀의 말을 기억해 내지 못하는 이상, 녀석의 운명은 그 새까맣고 꼬리 잘린 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단 말이지. 아, 좋은 것만 잔뜩 줬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냐고? 이봐 악마가 선물만 주고 그냥 가는 존재일리가 있겠냐……. 1막 Another 1. 모든 아이가 천사는 아니다 2. 토미손 3. 체스의 졸 4. 혐오 5. 파란 지붕 집 6. 빵과 물고기 7. 썩은 목장의 여름 8. 풍차간의 악마 9. 남쪽 섬의 루비 2막 Barefoot 1. 누이 2. 재 3. 두 데모닉 4. 그림 속에서 온 남매 5. 사자좌 소녀 Prelude : Longing 조슈아는 단정하게 의자에 앉아 있다. 다른 아홉 살짜리라면 채 십 분도 되지 않아 몸을 비틀고,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이 되어 방 안에 잘못 들어온 날벌레라도 없나 두리번거리느라 선생의 이야기는 뒷전이 되어 있을게 틀림없다. 그러나 조슈아는 그러지 않는다. 얌전하게 내리깐 눈은 분명히 시킨 대로 책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렇지만 그 아이가 책을 읽고 있지 않다는 걸 안다. "자, 다들 읽었겠지? 그러면 약강 5보격 루그란 송시에 대해서 누군가 이야기해 볼까? 조슈아 폰 아르님, 해보겠니?" 조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랄 데 없는 태도로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말했다. "예." 선생들은 대부분 똑똑한 아이를 가르치고 싶어한다. 가르친 것을 잘 알아듣는 것은 물론이고, 굳이 채근하지 않아도 쉽게 암기하며, 때로는 스스로 진도를 앞서가는 아이 말이다. 거기에 선생과 토론도 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이 훌륭할 것이다. 이런 학생을 만나면 성생들은 그 애를 무척 아끼며 자기가 아는 걸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고 싶어 어쩔 줄 몰라한다. 흡사,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조슈아가 기계적으로 루그란 송시에 대해 설명해가는 동안, 미터만 선생은 자기 쪽이 아홉 살짜리가 된 것처럼 자꾸만 창 밖을 내다보았다. 설명이 무척 훌륭했는데도, 흥미로운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미건조한 눈빛을 하고서. 선생만이 아니다. 강의실에 함께 앉은 열 세 명의 학생들 중 조슈아를 바라보거나 그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는 아이는 없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펼쳐진 책장만을 뚫어져라 보는 스물 여섯 개의 눈이 있을 뿐이다. "훌륭해. 그러면 방금 설명한 것에 맞는 시를 예시해 봐라." 지난 수업 시간에 배운 시들 중 하나를 암기하는 정도면 충분할 테지만 조슈아는 그러지 않는다. 잠시 눈을 내리깔고 입 속으로 몇 가지 계산해 보더니 곧 송시 하나를 즉석에서 짓는다. 다른 녀석들은 그런 그가 밉살스러운 듯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다. '적당히 해도 될 텐데.' 그들이 보기엔 조슈아가 그들을 조롱하는 듯 느껴진다. 너희들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내게는 어렵지 않다는 것처럼. "아주 훌륭해." 미터만 선생은 건성으로 친찬하고 있다. 조슈아가 뭘 해내든 한 번도 그가 기뻐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그건 미터만 선생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전에 조슈아를 가르친 선생들 중 조슈아가 똑똑한 아이라고 좋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상한 일일까? 그렇지 않다. 선생들이 바라는 똑똑함에는 정도란 것이 있다. 어쨌든 선생이란 가르쳐주려고 온 것이지, 친구 삼으려고 학생을 만나는 건 아니니까. 학생의 영리함이 선생의 영역을 침범할 정도가 되어서야 호감이 불쾌감으로 변하는 것은 순간이다. "오늘 수업은 이만 마친다. 학생들은 오늘 조슈아가 한 것처럼 약강 5보격 루그란 송시를 하나씩 지어 오도록, 조슈아도 오늘 한 것을 다시 다듬어 보도록 해라." 미터만 선생은 자기가 하는 말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조슈아는 복습 같은 건 하지 않는다. 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미터만 선생은 끈질기게 저 말을 하고야 만다. 조슈아는 여전히 착한 아이 역할이다. "예." 미터만 선생이 책을 집어들고 나가자, 학생들이 일어나 나오기 시작한다. 조슈아보다 대부분 서너 살 많은 그들은 순식간에 강의실을 빠져나와 밖으로 사라져간다. 조슈아는 느지막이 책을 정리해 나온다. 아무도 그를 기다려주지 않고, 그는 혼자 복도를 걷는다. 다리까지 덮이는 검은 튜닉 속에 푹 파묻혀 인형처럼 보이는 아이, 두터운 책 두 권을 껴안은 팔목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품이 넓은 소매 밖으로 살짝 드러난 손등도 파란 핏줄만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그리고 곱고 선명한 눈썹, 별빛 나는 눈, 작약 같은 입술을 갖고 있다. 그 애를 처음 보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친해지고 신다. 도와주고 싶다.'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않는다. 그는 태생적으로 적을 만드는 법을 알고 있다. 존재 자체가 사람들의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뱀처럼. 타고났다는 것이 가장 끔찍하다. 의도적인 것, 부주의한 것, 사로잡힌 것, 그 모두가 고쳐질 수 있는 것이지만 생래적인 것만은 어쩔 도리가 없다. 이윽고 복도를 다 통과했다. 그가 장미 덩굴이 조각된 나무 문짝을 밀고 나서는 순간, 나는 재빨리 그의 앞에 나타난다. "조슈아, 이제 나오니?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어." "아, 테오 형…. 여기까지 왠일이야?" 생각에 잠겼던 듯, 그는 조금 후에야 의례적인 미소를 올린다. 나는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밝은 표정을 유지한다. "아버지께서 네가 잘 지내나 좀 보고 오라고 하셔서 말이야. 혼자 뭘 하니? 우선 점심이나 먹으러 갈까? 보통 어디서 먹니? 학생들의 식당인가?" "생각 없는데……." 조슈아는 말끝을 흐린다. 내 아버지가 아닌 그의 아버지가, 예전에 내 말을 잘 들으라고 한 것을 상기한 모양이다. "조금이라도 먹어둬." 결국 나는 그와 함께 식당으로 가기로 한다. 식당에 들어서는 순간, 또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불쾌한 눈빛을 던질지 상상만 해도 즐거워진다. 그래야 한다. 모두가 나를 싫어한다는 걸 충분히 느끼고, 결국 그 사실을 당연하게 생각해 버리도록 나를 끌고 어디든 다닐 것이다. 데모닉(Demonic) 조슈아를 미워할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1막. Another 1.모든 아이가 천사는 아니다 "아름다운 것, 악의없는 것, 건강한 것, 사랑받는것. 그중 어떤 것도 우리를 천상으로 보내 줄 수 없네." 이브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녀였다. 일단 그녀는 예뻤다. 또래 소녀라면 누구나 부러워 쳐다볼 아름다운 금발이 굽이치며 어깨를 덮었고, 눈은 까만 별처럼 상냥하게 빛났다. 복숭앗빛 도톰한 뺨과 윤기가 흐른다 싶을 정도로 매끈한 목덜미를 갖고 있었다. 자그마한 입술에서조차 빛이 감돌았다. 요정처럼 날씬한 몸매에 어울리게 이브는 춤을 잘 추었다. 무도회장에서든, 정원의 잔디밭에서든, 마음이 내키면 언제나 사람들이 넋을 놓고 바라볼 정도로 우아하고 날렵한 춤을 추곤 했다. 때로 그녀는 맨발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브의 집은 부자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우러러볼 만한 높은 지위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브는 그런 사실을 잘 몰랐다. 실은 이해하지 못했다는 쪽이 맞았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위해준다는 것만은 알았다. 이브에게는 예쁜 드레스며 모자 구두 같은 것들이 언제나 넘쳐났다. 침실은 공주님의 방에 못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이브의 식사와 간식을 준비하는 요리사가 따로 있었고, 이브가 어질러 놓은 물건들은 바로 해놓기 위해 하녀가 늘 뒤를 따라다녔다. 의사도 있었고 간호인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이런 저런 공부를 하라고 이브를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이브는 날마다 즐겁게 놀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브를 극진히 사랑해 주었다. 가진 것은 모두 좋아하는 것 뿐이고, 싫을 만한 것은 몰랐다. 태어나서 한 번도 궁전 밖으로 나가본 일이 없는 공주님처럼, 가난과 아픔, 죽음 같은 것은 물론이고 실패로 인한 좌절, 자기보다 나은 누군가에 대한 질투, 좋아했던 사람들의 배신,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집착,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 모든 것을 알지 못했다.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나가고 싶지 않고, 밖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유리 궁전, 그것이 이브노아 아일첸브리스 폰 아르님이 살고 있는 세계였다. 이브노아의 세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이브노아는 둘중 누구를 더 좋아하는지 몰랐지만, 둘 다 정말로 좋아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 중 한 사람은 약혼자였다. 이브노아는 여섯 살에 이미 악혼을 했다. 약혼자의 이름은 테오스티드 다 모로였지만 그의 아버지의 이름도 테오스티드였기 때문에 혼동을 막기 위해 어려서부터 모든 사람들이 테오라고 불렀다. "이브, 손 이리 줘봐." 이브노아는 생긋 웃었다. 테오가 무언가 재미있는 것, 좋은 것을 줄 거란걸 의심하지 않았다. 이브노아가 왼손을 내밀자 테오가 뭔가 들어 있는 조그마한 종이뭉치를 쥐어 줬다. "뭐야?" 이브노아가 손을 주머니에 넣자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울렸다. 공연이 시작될 모양이었다. 이브노아가 따라서 손뼉을 치며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테오를 쳐다보자 테오의 입가에도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브노아와 테오가 앉은 곳은 공화국 아노마라드의 수도 켈티카에서도 두 번째로 큰 극장이었다. 오늘 이곳에선 모나 시드 학원의 학생들이 합창과 연주 등을 선보일 예정이었다. 모나 시드는 켈티카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훌륭한 학교였고 특히 음악에 있어서는 타 학교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들의 정례 연주회는 왕국 시절 국왕 부터도 종종 관람하곤 하던 유서 깊은 공연이었다. 막이 스르륵 오르자 진한 남빛 케이프에 하얀 가운을 차려입은 소년들이 날개 편 새와 같은 모양으로 늘어선 것이 보였다. 이브노아가 좋아서 손뼉을 치며 말했다. "저기, 저기 중에 있을 거야!" 테오는 애매하게 웃으면서 손가락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브노아는 입을 다물었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소년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다시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너무 멋있어!" 테오는 난감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사람들의 눈빛에 양해를 구했지만 실은 이미 익숙한 일인 듯했다. 이브노아는 테오의 질책 어린 시선에 다시 조용히 했지만 몇 분도 되기 전에 또 단상을 올랐고, 사람들을 가리키며 웃었고, 무릎을 두드리거나 큰 소리로 무언가 말했다. 사람들은 결국 경고하기 위해 돌아보는 것을 포기했고, 그런 이브노아를 인내심 깊게 제지하는 사람은 곁에 앉은 테오 뿐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싫증도 내지 않았고, 화도 내지 않았다. 이윽고 합창단의 스무 명 남짓한 소년들이 모두 노래를 멈췄다. 침묵 속에서 꼬마 솔리스트의 목소리가 둥근 천장에 메아리쳤다. 당신이 따라간 하얀 빛 내게도 그 빛이 보이네 어둠 속에 머무르던 세월 저주 가운데 몸서리친 때 나아갈 내일 없는 줄 알았고 나의 손 잡을 이 없다 여겼네 그러나 보소서 밝은 빛이여 마침내 내게 온 저 빛이여 기도로도 다할 수 없는 환희가 세상 끝날까지 이르라 내 안의 어둠을 몰아내었네 내 눈의 눈물을 거두네 어린 소년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정교한 고음의 소프라노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 사이로 두려운 듯한 속삭임이 흘렀다. 본능처럼 자연스러운 발성에 소름끼치도록 고운 목소리였다. 더구나 발그레한 뺨을 가진 인형처럼 예쁜 아이였기에 더욱 모두의 감탄을 샀다. 이브노아는 흥분했다. 심지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것을 미리 준비하고 있던 테오가 간신히 제지할 수 있었다. 솔리스트를 맡은 소년은 이브노아의 동생 조슈아였기에 이브가 음악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감동할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합창이 마무리되고, 1부 레퍼토리가 끝났다. 휴식시간 후 두 번째 순서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합창단이 질서정연하게 퇴장하고 나자 이브노아는 한시바삐 서두르라고 치맛자락을 발목까지 끌어올리며 말했다. "테오, 분장실 가자! 얼른!" 테오는 얼른 대답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는 채 하며 시간을 지체했다. 이브노아가 몇 번이나 재촉했지만 '잠깐만' 하고 말할 뿐이었다. 지금쯤 분장실에는 수많은 꽃다발이며 꽃바구니들이 밀려들고 있을 것이다. 아르님 부부는 오지 않았지만 그들 가족을 잘 아는 사람들이 몰려와 한바탕 북새통을 이룰 것이 뻔했다. 그 틈바구니에 서 있는 것이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임은 분명했다. 테오는 자기에게 유리한 전장을 찾아낼 줄 아는 젊은이었다. 그는 이브노아에게 공연 전에 주머니에 넣은 것이 뭔지 확인해보자고 말했다. 이브노아는 주머니에서 종이꾸러미를 꺼냈고, 안에서는 새끼손가락에 끼우는 조그마한 반지가 나왔다. 반지 안쪽에는 무어라고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공부를 하지 않아 글자를 잘 읽지 못하는 이브노아는 내용을 무척 궁금해했다. 그것이 기껏해야 반지를 만든 장인이 남긴 표식에 불과할지라도, 테오는 내용을 읽어 주었을 즈음엔 휴식시간이 다 끝나 있었다. 합창단의 소년들은 선생님이 지휘를 끝낼 때 왜 항상 손수건을 꺼내는지 알고 있었다. 자기 말로는 합창단의 노래에 감동해서라지만. 예전엔 결코 그러지 않았다. 조슈아가 합창단에 합류한 후로 생긴 버릇인 것이다. 합창단에 오래 있었던 소년들은 다들 그 사실에 기분 나빠했다. 그룬트는 공평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선생이어서 절대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심 저 꼬마 천재를 합창단의 보물로 여기고 있었다. 물론 그룬트가 내색하지 않는다해도 소년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러나 합창단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직 소년들은 그런 기분을 느낀 입장이 아니었다. 지난달에 입학한 네 명의 신입생은 이날 관객으로서 공연을 보러 왔다. 워낙 고상한 집안이라 연습에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꼬마 솔리스트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신입생들은 다들 매우 흥분해 있었다. 그 중 한 명. 열 두 살의 토미손 구겔호퍼는 흥분 이상의 무언가에 사로잡혀 1부가 어떻게 끝났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토미손은 노래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가난한 시골 소년이었기에 주위에는 그의 재능을 발견해 줄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모나 시드 학원의 주임 선생 눈에 들었고, 그 후로 학비와 숙식을 모조리 학원에서 해결해 준다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학원 입학이 결정되었다. 최근 몇 달간 줄곧 평생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열렬한 칭찬만을 들은 탓에 좀 들뜨기도 했고 은근히 자신감도 붙은 상태였다. 그 유명하다는 모나 시드의 합창단에도 자기보다 노래를 잘 하는 학생은 없지 않을까 하고 꿈 같은 희망도 가져보았다. 토미손은 꿈 같은 의망이 깨져 괴로워하고 있지 않았다. 작디작은 소년의 목소리애서 노래를 알았던 때로부터 늘 그려 오던 신세계를 봤던 것이다.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그런 목소리가 존재하고, 그걸 자신이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격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정식 단원들이 싫어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분장실로 달려가 소년들 틈에서 조슈아를 찾아냈다. 조금 뜻밖이었다. 그 아이는 다른 소년들과 약간 떨어져 놓인 의자에 앉아 말 한 마디 나누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물론 발 밑에는 사람들이 다녀간 흑적, 즉 꽃바구니가 다섯 개 이상 놓여 있었다. "저……." 조슈아와 눈이 마주쳤을 때 토미손은 흠칫 놀랐다. 너무 무표정한 눈동자였다. 무표정한 것이 죄가 되진 않지만 지금만은 아니었다. 오늘 막 음악의 왕국에 초대받은 손님인 토미손은 당연히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 전에 그토록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던 당사자가 저렇듯 무미건조한 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왜?" 상대의 목소리를 듣자 조금 전의 감격이 다시 엷게 되살아나 토미손은 당황한 감정을 잊었다. 그는 열성적으로 말했다. "나, 나 말이야, 네 노래가 너무 좋았다는 거야. 내 평생 제일…… 아참, 나, 난 토미손이야. 새로 들어왔어. 나 처음 보지? 난, 그러니까… 너 같은 목소린 처음이야. 그건, 음……." 감정이 말로 잘 표현되지 않아 토미손의 이야기는 어설펐다. 그런 토미손의 이야기를 조슈아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그러나 인내심 깊게 듣고 있었다. "그, 그래. 난 열 두 살인데, 노랠 잘한다고 해서 선생님이……. 하지만 여기 와선 네 노래를 들은 것만으로도 좋은 거야! 모나 시드에 와서 정말 잘했어. 너무 좋았는데, 너 때문에 더 좋아졌어, 정말이야, 믿어주겠지? 넌 몇 살이니? 언제부터 노래했니? 너희 부모님도 노래를 부르시니? 난 시골 농부의 아들이야, 우리 마을은 굉장히 멀어. 난, 나도 너처럼 노래를 잘하게 되고 싶어. 어떻게 연습하면 될는지……. 넌 정말로 열심히 했겠지? 노래를 얼마나 좋아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거기까지 들은 조슈아가 불쑥 입을 열더니 말했다. "나, 노래하는 거 그다지 안 좋아해." "뭐… 뭐라고?" 토미손이 눈을 크게 떴다.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은 탓에 자신이 잘못 들었으려니 싶었다. "노래하는 거 별로라고, 싫어하진 않지만 너 같은 열정은 없을 거야." 괴상한 이야기가 다시 한 번 되풀이되자 토미손은 말문이 막혔고, 조슈아는 무언가 안타깝다는 듯한 눈으로 토미손을 보았다. 토미손은 조슈아의 눈에 떠오른 간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넌… 어떻게 그렇게 노래를 잘할 수 있어?" "저절로 잘했을 뿐이야. 아무 것도 아니라고, 정말… 아무 것도 아냐." 조금 후, 조슈아는 여전히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토미손에게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미안해." 토미손은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겨우 정신을 차리며 대꾸했다. "그렇다 해도… 네 잘못이 아니니까……." 조슈아는 시선을 떼고 의자에서 뛰어내렸다 그가 가려고 하자 토미손은 자신이 정작 하려던 말을 하지 못했음을 깨닫고 부지불식간에 조슈아의 어깨를 붙들었다. "잠깐만……." 그 순간, 어깨를 붙든 손에 굉장한 거부감이 전해져와 토미손은 당황한 나머지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곁에서 다른 합창단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지만 아무도 끼어들진 않았다. 그러나 조슈아가 다시 그를 올려다보자, 그 얼굴을 보던 토미손은 목 아래까지 치밀어 오른 말을 않고 견딜 수가 업었다. "네가 별로 노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말만은 꼭 할께. 나는 노래를 사랑하니까 네 노래를 들은 것만으로도 만족했어. 평생 만족할꺼야. 이 찬사는 절대로 과장이 아니야. 난 정말이지, 듣고서 천사의 목소리라고 생각했어! 엔젤릭(Angelic)이라고 말해도 좋을까?" '엔젤릭' 이라는 말을 할 때 토미손의 눈빛은 진심이어서 조슈아의 눈동자도 약간 흔들렸다. 조슈아가 손을 내밀어 허공에 떠 있는 토미손의 손목을 잡더니, 내리게 했다. 그리고 웃었지만 그건 꼭 어른들의 쓴웃음처럼 보였다. "방금, 세상에서 나랑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말한 것 같아." "우리 학교엔 천재들이 많지." 성큼성큼 앞서가던 선배는 갑자기 돌아서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게 어쨌단 말이야? 어짜피 이곳은 천재들이 다니는 학교라고, 아닌 놈들은 다 도태돼." 선배는 다시 앞서 걸어갔다. 걸음이 한층 빨라진 것 같아 토미손은 바짓가랑이를 잡아 올리며 쫒아갔다. "합창단은 그 중에서도 최고지. 모나 시드는 본래 음악 학교란 말이야. 모나 시드가 무슨 뜻인지 안ㄹ아? 사람 이름이지. 학교를 세운 사람, 여자, 천재 가수, 중앙 홀에 특대 초상화가 붙어 있는 사람." 선배가 종이 몇 장을 흘리자 토미손은 뒤따라가며 주워들었다. 탕, 탕, 탕,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멀어졌다. 이제 토미손은 뛰어야 했다. "여긴 그런 사람들을 위해 만든 곳이야, 그 자식이 신기해? 두려워? 별것 아니야. 좀더 오래 있다보며 그 정도는 수두룩하다는 것 알게 될걸." 목소리에 열기가 묻어났다. 선배는 문을 꽝 열어젖히며 안으로 들어갔다. 모나 시드 학원에서도 합창단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전용 연습장 겸 공연장인 '모나 홀' 이었다. 토미손은 입구에서 멈춰 섰다. "하지만…….' "하지만, 왜?" 토미손은 모나 홀로 감히 들어가지 못한 채 우물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반구형 천장과 아름다운 의자들이 그를 노려봤다. 너 같은 것이 감히 들어오려 하느냐는 것처럼, 조금 후 토미손은 맨 끝 줄 의자가 있는 곳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있는 선배들을 발견했다. "그 날 제가 들은 목소리는 분명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어요." 선배는 계단 중간에 멈춰 서더니 들고 있던 종이를 말아 쥐고 정면 무대를 가리켰다. "넌 자신이 대단한 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내 말을 못 믿겠고, 네가 들은 것만이 옳단 거냐? 너보다 네가 낫다 그말이겠다?" "그런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전……." "내가 진실을 말해줄까? 똑똑히 알아들어. 그 녀석은, 단지 얼굴이 되는 천재라서 눈에 띄는 것뿐이라고!" 토미손은 인정할 수 없었다. 그 날 극장에서 들었던 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꿈꾸어 오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런 자식은 노래를 계속할 놈도 아니란 걸 알아둬. 잘나디 잘나고 또 잘나서, 음악말고도 할 일이 넘쳐흐른단 말이다. 부자에다가 얼굴 곱고, 손대는 것마다 잘하는데 굳이 음악을 할 까닭이 있어? 감동할 가치도 없어. 잊어버려." 토미손은 고개를 흔들었다. 선배가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토미손은 결심한 것처럼 모나 홀로 들어가 무대 아래에 섰다. 켈티카의 극장에 비하면 소박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지만 이곳은 그가 자신의 미래를 걸고 살아가게 될 자리였다. 그 자리에 서서 그는 말했다. "아뇨, 선배. 다른 무엇이 어떻다 해도 저는 그 애를 존경해요. 그리고 절대 잊지 않고, 저도 언젠가 그런 노래를 할 수 있게 되길 기도하겠어요." 가까이 온 선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자식이라면 네 유치한 희망을 비웃어 주고도 남을 거다. 소문을 피하려면 기도나 하는 것이 좋을걸." 2.토미손 "그와 같은 피조물을 만든 이는 신일지도 모르고, 악마일지도 모르고, 신이 만든 것에 악마의 농간이 끼어든 것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존재하는 이상 신이든 악마이든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오, 불합리한 절대자의 역사여! 그들의 입김과 의지 없이, 그와 같은 피조물이 태어날 순 없으니, 그런 까닭에 그를 만난 이후로 나는 종교를 갖게 되었다." 토미손이 기도를 하지 않은 탓인지 사태는 금방 악화되었다. 그가 자신의 태도를 숨기지 않았기에 열흘도 가기 전에 토미손이 조슈아를 좋아하다 못해 숭배하고 있다는 소문이 학원 전체에 쫙 퍼졌다. 그 얘기는 금방 웃음거리가 되었다. 모나 시드 학생들은 고상하게 삼가는 것을 미덕으로 하고 있어서 대놓고 지분거리지는 않았지만, 토미손이 지나가면 등 뒤에서 낮게 소곤거리곤 했다. 조슈아 본인이 그 소문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토미손이 조슈아의 뒤를 따라 다니는 것도 아니었고, 그 날 분장실에서의 만남 이후로 대화조차 나눈 일이 없어서 사람들은 조슈아가 소문을 알기나 하는 걸까, 하고 궁금해 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때, 특히 합창단 연습 때 조슈아와 토미손이 같이 있으면 쳐다보는 사람이 유난히 많았다. 그러나 기대에 어긋나게도 아무 일도 없었다. 둘은 눈을 내리깔고 서로를 아는 채 하지 않았다. 모나 시드 학원에서는 학생들이 수업이 없을 때 모여 차를 마시며 잡담을 하거나 여흥을 즐기는 장소가 있었다. 오후 수업이 끝날 즈음이 되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한 번씩은 이곳에 들렸다. 여기에 있어야 학원 내의 소문도 접하고 다른 아이들이 만든 재미있는 일에 끼어들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자습실 외의 특별한 이름은 없었지만 학원 내 다른 장소들이 주로 무슨무슨 홀, 이라고 불리는 탓에 이곳도 '쿠키 홀'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쿠키 홀에서는 요즘 체스가 유행이었다. 모나 시드는 975년 켈티카에 공화 정부가 들어선 후 가장 많은 공화당원 아이들이 다니게 된 학교였는데, 체스는 그들이 퍼뜨린 놀이였다. 금세 쿠키 홀에는 체스 판이 몇 개나 놓이게 되었다. 학원 내에서 체스를 가장 잘 두는 학생은 공화 정부 고관의 아들인 티몬 레이놀드였다. 졸업반인 그는 학업에 특별히 뛰어나진 않았다 이런 류의 게임에는 이상할 정도로 능란한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공화당원의 아들답게 정치적 견해가 뚜렷하고 다른 학생들을 쉽게 이끄는 언변도 있었다. 그런 티몬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모나 시드에 다니는 옛 귀족 출신 학생들이었다. 과격파인 그가 보기에 공화 정부는 저런 귀족 나부랭이들을 일찌감치 처형해거나, 감옥으로 보내거나, 최소한 자기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해야 했다. 왜 그렇게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버릇처럼 친구들 앞에서 뇌까리곤 했다. 그러나 켈티카를 방어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번찬 정부는 7년여가 되도록 더 이상 한 조각의 땅도 해방시키지 못했다. 급히 만들어진 시민병 군대만 갖고도 방어선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도 켈티카가 천해의 요새인 덕택이었다. 드넓은 왕국 아노마라드의 곳곳에는 여전히 사병을 거느린 귀족들이 있었고 달아났던 왕당파들도 켈티카를 노리고 있었다. 이들이 손을 잡고 일시에 켈티카를 공격한다면 승산은 전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까닭에 공화 정부는 켈티카 내의 살아남은 귀족들에게 섣불리 손을 대지 않았다. 켈티카 밖에 있는 귀족들의 신경을 일부러 건드릴 시기가 아니었다. "공화 정부가 겁을 먹고 있는 거라니까! 아버지도 그렇게 말씀하셨지. 이런 식으로 주춤거려서는 혁명의 대의가 흐려져서 민중이 우릴 따라 주지 않게 된단 말이야. 민중을 이끌어야 할 책인 있는 자들이 너무 우유부단하다고!" 쿠키 홀 중앙의 둥근 테이블은 공화당원 집안 학생들의 지정석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왠만해선 그쪽에 접근하지 않았다. 체스를 두면서, 식어 가는 차 한 잔씩을 앞에 놓고 그 날도 티몬과 친구들은 격론이었다. 다른 친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켈티카 내에서의 지지는 충분하잖아?" "켈티카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직 해방되지 못한 아노마라드 땅을 생각하면, 켈티카 땅은 테이블 위의 찻잔 하나, 요 정도밖에 안 된다고. 넓은 땅에 흩어진 민중이 일어나 우릴 지지하게 하려면 이런 소극적인 정책으론 절대 안 된단 말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데?" "당연히 켈티카 공화 혁명을 퍼뜨리겠다는 의지를 보여야지! 그래야 민중이 자기들을 억압하고 있는 귀족들의 운명을 깨닫고 신명이 나서 우리에게 붙을 거 아냐?" "이론상으로는 그렇지만… 그것보다 귀족들이 먼저 움직여서 켈티카마저 위험해지는 거 아냐? 귀족들은 일사불란한 군대를 갖고 있잖아, 게다가 현재 국경에서는 총력전 양상이라고, 이런 상태로는 오래 못버텨, 사람들은 지치니까." "지치는 건 의지가 약해서 그런 거야.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긴데 우물쭈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이런 식으로는 아무 것도 안 된다고, 모범을 보여서 아노마라드 전역의 지지를 얻고, 각 도시가 혁명 봉기를 일으키도록 해야 할 중요한 때인데!" "모범을 보인다면?" "당연히 아직도 켈티카 내에서 활개치고 다니는… 귀족 녀석들부터 모조리 잡아넣어야 하는 것 아냐?" "티몬은 자신만만하게 말을 마쳤지만 주위 친구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모나 시드에는 아직도 적지 않은 귀족 출신 학생들이 있었다. 그리고 공화당원이 아닌 보통 학생들도 많았다. 귀족 출신 학생들은 의기소침하여 다른 학생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으므로 평판이 안 좋았지만, 그래도 보통 학생들은 옛날에는 감히 책상을 나란히 할 수도 없었던 귀족 아이들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귀족의 특권이 법적으로는 철폐되었지만 재산의 일부 몰수에 그친 터라 완전히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는 상태였다. 체스는 이미 뒷전이었다. 티몬의 말을 곱씹던 친구들 중 자일즈라는 소년이 개인적인 감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하긴, 나도 학원 안에서 그 놈들을 보면 기분이 나빠지더라고, 눈빛에서부터 다른 애들을 무시하는 것이 딱 느껴지는 데다 말투는 또 얼마나 고귀하시나? 저녁 먹은 것이 넘어올 것 같아서 대답을 못하겠다니까." "글쎄…. 난 특별히 모르겠던데. 그 애들은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다니지 않아?" "그게 대수야? 솔직히 같이 공부하고 있다는 것부터 기분 나빠. 그리고 더 웃긴 것은 아직도 귀족 애들 앞에서 겁먹고 굽실거리는 녀석들이 있다는 거야. 그 놈들은 시대가 바뀐 것도 모르는 모양이지?" 거기까지 말했을 때, 토미손이 쿠키 홀로 들어왔다. 그는 중앙 테이블 곁을 지나쳐 찻잔들이 놓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귀족의 처우에 대해 티몬과 의견이 같던 자일즈가 그를 보았고, 드디어 한 건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저기도 한 명 있군 그래. 입학하자마자 공작 가문의 귀한 도련님을 존경하게 됐다던데?" 토미손은 조슈아가 공작 가문 출신이라는 것도 몰랐다. 그래서 자기 얘길 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그냥 걸어가 찻잔을 집어들었다. 찻잎을 넣고, 따뜻한 물을 얻으려고 난로가로 가는데 등 뒤에서 다시 비아냥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충성을 바치는데 소공작께서 뭐라도 해 주시나 모르겠군? 조만간 기사가 되는 것 아냐?" 자일즈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토미손의 뒤를 따라갔다. 토미손이 찻물을 따라 돌아서는 순간 갑자기 허리를 굽히며 과장스럽게 궁정식 절을 했다. 토미손은 선배의 행동에 깜짝 놀라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이번에 기사 작위를 받게 되셨다면서요? 하사 받은 영지는 어딘가요?" "무슨 소리예요, 선배?" 기사니 작위니 하는 말은 이제 금기어나 다름없었으므로 토미손은 당황해서 얼굴이 붉어졌다. 자일즈는 손가락을 뱅글뱅글 돌려 보이며 농담을 그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고 있는데 소공작께서 작위 하나 내려주지 않는단 말인가요? 그것 참 속 좁은 주군이구만." 오해를 받을까봐 마음이 급해진 토미손은 소리쳤다. "공작이 누, 누구예요? 난 그런 사람 몰라요. 나, 난 시골 촌뜨기여서 귀족 같은 건 전혀 몰라요!" 그 때 티몬이 일어나 자일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쯤 해둬. 주군이니 작위니 그런 말은 장난으로도 듣기 싫다." 그러더니 영문도 모른 채 겁에 질린 토미손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네가 조슈아 폰 아르님을 존경한다고 했다는 그 신입생이군. 세상엔 가문이나 믿고 설치는 녀석들말고도 존경할 사람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나?" "네… 네?" 토미손이 상황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순진하게 되물었다. "조슈아가… 귀족이에요? 고, 공작…이었나요?" 티몬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픽 비웃었다. "이름 가운데 '폰'이 들어가는데도 귀족인지 모를 정도로 한심한 녀석이었다니, 네 ㅁㄹ대로 시골 촌뜨기가 맞구나. 어쨌든 모르고 그랬다는 거니까 오히려 사정은 낫군, 그럼 이제 그 녀석이 공화국에서는 당장 감옥으로 보내야 할 귀족이란 걸 알았으니 존경하니 어쩌니 하는 말은 하지 않겠지?" 토미손은 눈을 크게 떴다가 깜박거리며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그게… 관계가 있나요? 전 단지 그 애가 훌륭한 솔리스트이기 때문에……." 티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상황 판단을 못하는군. 촌뜨기라서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모르나? 그 녀석은 썩어빠진 귀족이라고 말했잖아!" 토미손은 드디어 모든 상황을 눈치챘다. 그러나 그는 물러나는 대신 이렇게 잘라 말했다. "조슈아는 귀족이지만, 노래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데요?" 티몬의 눈썹이 약간 꿈틀거렸다. "그 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 티몬은 토미손을 처음 안 것처럼 행동했지만 실은 일찌감치 그에 대한 소문은 물론 실제로는 조슈아와 잘 아는 사이가 아니란 것까지 알고 있었다. 그가 토미손과 조슈아를 자세히 관찰하게 된 것은 물론 조슈아 때문이었다. 티몬은 일단 귀족 출신이라면 다 싫어했고, 고위 귀족일수록 더 싫어했다. 모나 시드에 많은 귀족 출신 아이들이 있었지만 공작 가문은 조슈아 하나뿐이었다. 그래도 그것만이라면 단지 뒤에서 빈정거리는 것으로 그쳤겠지만 조슈아는 학원 안에서 지나칠 정도로 눈에 띄었다. 무시하고 지나치려해도 도저히 그럴 수 없을 정도로 똑똑하고, 예쁜 얼굴을 했고, 합창단의 가장 뛰어난 솔리스트인 그의 나이는 고작 아홉 살일 것이다! 공화국에서 마땅히 축출되어야 할 존재인 귀족이면서 그렇게 뛰어나다는 것은 이만저만 불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결과 능력조차 같아야 될 것처럼 생각되었다. 귀족이 남들보다 나은 존재인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그들이 절대적 재력과 권력으로 지식을 독점하고, 생계에서 해방되어 예술을 누릴 여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슈아의 존재는 '봐라. 귀족은 본래부터 이렇게 빼어난 존재로 태어나지 않느냐' 라고 역설하는 것과 같았다. 존재 그 자체로 공화국의 이념에 해를 끼치는 녀석이고, 특히 학생들의 가치관을 흐려지게 하는 암종같은 놈이었다. 조슈아에 대한 소문이 들려올 때마다 그는 이를 갈며 귀족들을 하루빨리 감옥에 쳐넣어야 한다고 되씹었다. 그런 티몬에게 농민 출신이면서 그런 자를 아무 생각 없이 추종하는 토미손 같은 녀석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겨웠다. 저런 꼴을 막기 위해서라도 공작의 아들 따위는 하루빨리 학원에서 추방해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 때 토미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족이든 아니든, 음악은 음악으로만 평가해요. 노래는 노래일 뿐이고요. 조슈아는 제 친구도 아니고, 나에 대해 관심도 없죠. 하지만 난 그 애의 노래를 평생 마음 속에 간직할 겁니다." "이런 바보 같으니……. 조슈아 폰 아르님 그 녀석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해를 끼치는 공화국의 적이야!" "공화국엔 아름다운 예술이 필요 없습니까, 선배?" "공화국은…공화국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완벽해!" 토미손은 중앙의 둥근 테이블에 두다 만 체스판이 놓인 것을 흘끔 바라보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공화국엔 선배가 좋아하는 체스 게임도 필요 없겠군요? 아닌가요?" 티몬에게 후배가 말다툼으로 도전하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더구나 갖 입학한 거나 다름없는 까마득한 후배였기에 티몬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체스? 그래, 잘 말했다. 네 녀석의 썩어빠진 노예 근성을 내가 뜯어고쳐 주지. 이리 와서 앉아. 선배의 명령이다." 티몬은 둥근 테이블로 걸어가 뒷전으로 밀려 있던 체스판을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하던 게임을 흩어 체스말을 본래의 자리에 배치하고 토미손이 와서 앉는 것을 지켜보았다. 토미손이 마지못해 그와 마주앉자 티몬은 비웃는 듯한, 그러나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예술에 대해 잘 알거야. 그처럼 훌륭한 취향을 지녔으니까. 그렇지 않아? "……." "체스도 일종의 예술이지. 무척 아름다운 수를 잔뜩 품고 있으니까 말야. 체스를 둘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체스가 예술이라는 걸 부인하지 않을거야. 이봐, 자일즈, 그렇지 않나?" 물론 자일즈는 냉큼 동의했다. "당연하지." 티몬은 다시 토미손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토미손의 표종이 불안으로 굳어진 것을 슥 훑어보고 말을 이었다. "그처럼 예술에 능한 너니까 체스도 잘 하겠지. 네가 날 이긴다면, 예술에 대해 네 안목이 높다는 걸 인정하고 조슈아 폰 아르님을 찬양하든 신으로 섬기든 상관하지 않겠어. 하지만 내가 이긴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서 티몬은 첫 수를 두려는 것처럼 하얀 졸(卒, pawn)을 집어들고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넌 예술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뜻이니까… 앞으로 누구의 노래가 어떻고 하는 애기는 영영 꺼내지 않는 것이 좋을걸." 티몬의 졸이 E4(체스판의 특정 위치를 가리키는 기호)의 자리에 놓이며 딱, 하는 경쾌한 소리를 냈다. "이런 곳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모나 시드 학원의 학장실에는 귀한 손님이 들어 있었다. 가이에르크 부펠트 학장은 아노마라드가 왕국이던 시절부터 학장을 지내 온 사람이었고, 그 자신 또한 귀족 출신인지라 옛날 공작이었던 프란츠 폰 아르님에게 무척 정중하고 조심스러웠다. 학원에 배치된 공화파 선생들의 눈길 때문에 직접 찾아가 뵐 수가 없었노라며 몇 번이나 양해를 구했다. 프란츠 폰 아르님은 의자에 앉은 채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뜨더니 말했다. "아니오. 괜찮소이다. 편지에는 조슈아의 문제라 하셨는데 무슨 일이 있어 보자고 하셨소?" "아시다시피 아드님은……." 학장의 설명을 들으며 아르님은 창 밖으로 지나가는 학생 무리를 바라보았다. 흰 눈밭에서 삼삼오오 모여 걷고 있는 학생들은 법관의 옷을 연상시키는 좁고 검은 튜닉 차림 때문에 소탈하고 학구적인 인상을 주었다. 대부분 열 다섯에서 열 여덟, 가장 나이가 적어 보이는 아이도 열 세 살 정도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아르님은 다시 부펠트 학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므로 조슈아 도련님께 무척 어려움이 많지 않나 생각됩니다." 아르님은 입맛을 한 번 다신 뒤 간단히 물었다. "왜 그렇게 되었다고 보시오?" "저보다 훨씬 더 잘 알고 계실 테지요……." 말끝을 끄는 것이 자기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으나 아르님이 잠자코 있자, 학장은 결국 손을 뻗어 탁자에 붙은 종을 울렸다. 옆방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나와 두 사람에게 허리를 굽혀 보였다. "에른스트 미티만 선생님입니다. 조슈아 도련님에게 고전 문학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미터만이라는 자는 타협할 줄 모르는 사람 특유의 딱딱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곧 말했다. "저만의 판단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다름 수업도 마찬가지일 테죠. 아드님께선 수업 분위기를 크게 해칩니다." "해친다니, 어떤 식으로?" "강의실에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학생들의 냉소를 불러일으키는 존재니까요." 불쾌할 정도로 딱 찌르는 말투에 아르님은 눈썹을 약간 찌푸렸다. "그런 정도는 선생께서 다독거리셔야 할 문제가 아니겠소?" "제가 어찌할 수 있는 단계는 이미 넘었습니다. 그런 적대감은 적대감을 품은 자와 그 대상 모두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솔직히 아드님에게 잘못이 있는 건 아닙니다. 잘못이 있다면 너무나 또래답지 않다는 점 정도 일까요." "말씀대로요. 아들녀석은 고작 아홉 살 먹은 꼬마일 뿐이잖소. 선생은 나라에서 이름난 학자인데 고작 어린애 하나를 다루지 못하겠다고 내게 와서 하소연하는 거요?" 미터만은 능력과 자부심이 동시에 출중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드는 하고 싶은 말을 삼킨 채 무언가를 되새기는 듯 불편한 표정만을 지었다. "자, 말해보시오. 그 애가 무슨 일을 저질렀소? 내가 다 바로잡게 할 수 있소. 선생에게 예의 없게 굴었소? 노느라고 공부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소? 가르치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오? 아니면……." 아르님이 마지막 말을 하는 순간 미터만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얼마나 서글프게 웃었는지 아르님은 하려던 말을 멈추어 버렸다. "가르치는 것을 이해 못하냐고요? 하하하… 저를 놀리십니까? 아드님은 가르치기도 전에 벌써 다 알고 있습니다. 한 마디 운을 떼는 순간, 아드님의 얼굴에서 아는 것이지만 참고 다시 들어보겠다는 기색이 완연히 느껴집니다. 이 나이 되도록 수많은 아이들을 봐 왔으니 그런 것만은 확실히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우스운 것의 무언지 아십니까? 아드님은 그걸 감추려고 합니다. 저한테 처음 배우는 척 하는 거지요! 심지어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천연덕스럽게 연기를 한단 말입니다." 프란츠 폰 아르님은 마른 입술을 한 번 햝을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터만은 스스로가 모욕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훌륭한 아이를 다룰 재간도 없고, 견딜 아량도 없는 선생이라 죄송합니다. 하지만 조롱당하는 기분이 들어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아드님이 악의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니란 걸 알지만, 이건 결과가 뻔한 꼭두각시놀음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너그럽지 못한 선생이라고 생각하셔도 변명은 않겠습니다. 그러니 관대하게 처분하셔서, 아드님이 학원에 그만 나올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내내 참고 있던 아르님은 결국 불쾌한 듯 내뱉고 말았다. "그 애가 선생을 잡아먹기라도 하오? 왜 모두들 그 애를 떠나고 싶어서 안달들인지! 나더러 아들의 교육을 아예 포기하란 말인가!"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미터만이 아니라 부펠트 학장이었다. "오히려 그 말씀이 맞을 지도 모릅니다. 공작님." 공화 정부의 땅이 된 켈티카에서 사라진 작위를 함부로 언급하는 것은 위험했지만, 이런 곳에서는 엿들을 사람도 없었다. 아르님의 옛 측근들, 그리고 한때 후원을 받던 사람들은 아직도 사석에서 아르님에게 예를 갖춰 공작이라고 부르곤 했다. "아드님에게 선생 같은 것은 있으나 없으나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이런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아드님을 그냥 혼자 내버려두십시오. 그걸로도 충분할 겁니다." "아니, 그 애는 학원을 다녀야만 하오. 정말로 내버려두는 것이 좋다면 선생도, 다른 아이들도 조슈아가 무엇을 하든 그냥 두면 되잖소? 굳이 쫓아낼 까닭이 무에 있소?" 미터만이 다시 끼어들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학원에 남아 있어야 할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아드님같은 아이는 도서관에 혼자 있게 하는 편이 훨씬 좋은 공부가 된다는 걸 모릅니까?" "누가 그 애를 공부시키고 싶다고 했소? 공부 같은 건 필요 없소. 내가 원하는 건 그 애가 다른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저 조금 우수한 정도의 아이가 되는 거요. 그걸 위해서는 학원이 제격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소이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 지 정말로 모르겠소?" "……." 학장실 안에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부펠트 학장이 느릿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공작께서는, 아드님께서 '그 오해'를 받을까 염려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그건 오해가 아니지 않습니까? 사실이라는 것을 저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고요…. 그리고 그걸 감추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아드님은 외견상 무척 눈에 띄는 아이인지라 처음에는 모두들 호감을 갖고 접근합니다. 그런 까닭에 더 빨리 모든 걸 알 수 있게 된답니다." 아르님은 학장의 말을 충분히 이해했다. 실은 듣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인정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내 아들은 다른 애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소년일 뿐이오. 천천히 자라도 선생들의 도움을 받아 자연스럽게 현명해질 것이오." 미터만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건 죽은 주장이었다. 조슈아 폰 아르님을 가르치려고 애써 본 자에게 그 말만큼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이야기도 없었다. "'그 오해'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실로 유감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이를 가르치는 채 하면서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부류의 연기에는 소질이 없습니다. 그런 걸 잘 해내는 자가 어딘가에 있을 테니 그런 자를 구해 가정교사로 하시는 게 어떨까 감히 말씀드립니다. 모두가 속아 주지 않을까 싶군요." "……." 미터만은 본래 말투가 신랄하기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하는 말은 조롱처럼 들림에도 불구하고 진심이었다. 아르님도 그것을 아는지 그를 쏘아볼 뿐 입을 열지는 않았다. "확실히 전 일찍이 아드님에 대한 소문을 들어왔고, 처음에는 오히려 관심이 있었습니다. 일말의 자신감도 있었지요. 하지만 그 자신감이란 건 고작 반년이 가기 전에 바닥나는 얄팍한 것에 불과했던 모양입니다. 제가 졌습니다. 남은 소망이 있다면 단 한 가지, 제 평생에 다시는 그런 아이를 보지 않게 되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일어난 미터만은 가벼운 목례만을 남기고 학장실을 떠났다. 학장은 어색한 웃음이나마 지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일단은 모든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순서라 여겨 부득이하게 오시도록 하고 말았습니다. 어짜피 저희에게 강요할 권리는 없습니다. 미터만 선생처럼 딱 잘라 자기 의견을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드님이 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고 신경 쓰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 아드님을 좋아하는 선생님이 한 분 있긴 합니다. 합창단을 맡고 있는 그룬트 선생님이죠." 조슈아가 모나 시드 합창단에서 솔리스트를 맡았다는 건 아르님도 들어 알고 있었다. 그건 조슈아로서 아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일부터 공연을 보러 가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공연조차 막고 싶었지만 조슈아의 기분을 생각해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이 문제는 조금 더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드님의 의견도 물어보시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아, 지금쯤 학생들이 자습실에 있을 것 같습니다. 한 번 둘러보시렵니까?" "자, 이건 어때? 마음에 드나?" 토미손은 대답하지 않고 여전히 진지하게 체스판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이 체스판을 구경하는 사람들 중 토미손이 이길 가능성이 없다는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체스에 문외한인 토미손만이 모를 뿐이었다. 티몬은 토미손의 붉은 졸을 집어내고는 느긋한 표정으로 기지개를 켰다. 어느새 쿠키 홀에 있던 학생 대부분이 티몬과 토미손의 체스 경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건 처음부터 재미있을 수가 없는 경기였다. 가장 잘 두는 사람이 겨우 규칙이나 아는 초보 중의 초보를 상대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끈질기게 그 경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토미손은 자신이 언제, 어떤 식으로 게임을 끝낼 수 있는지도 몰랐다. 체크메이트(checkmate, 체스에서 킹이 도망갈 수 없는 상황)가 무엇인지 겨우 아는 정도이니 판세를 읽을 능력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끈질기게, 자신이 이길 가능성이 없다는 것조차 모른 채 매달렸다. 티몬의 경우는 상황이 반대였는데 네 번째 수가 오기 전에 이미 자신이 이길 수밖에 없는 경기란 걸 알았지만 일부터 체크(check, 킹을 공격하는 수)를 부르지 않고 게임을 계속하고 있었다. 의도는 순전한 놀려대기였다. 빙글빙글 돌면서 상대가 열렬히 달려들 때마다 체스말 하나씩을 잡아 밖으로 내보내는 것으로 자신의 우위를 과시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게임의 승패보다는 토미손이 자기가 상자에 갇힌 쥐 꼴과 똑같이 행동하고 있다는 걸 언제 깨달을까, 그리고 결국 졌을 때 뭐라고 할까 궁금해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토미손이 조슈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과연 토미손이 지고 나서 조슈아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취소할까? 드디어 사람들도 되풀이되는 뻔한 놀음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몇 명이 자리를 뜨자 빽빽이 둘러쌌던 테이블 주위에 틈이 생겼다. 이 때 토미손은 다시 한 번 나름대로 수 읽기에 돌입하여 주위 사람들 모두가 조용히 해주는 중이었다. 티몬은 토미손의 표정을 구경하며 웃느라 주위를 살피지 못했다. "내가 마저 뒤도 될까?" 그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그리고 누구로부터 나온 것인지 모두가 깨닫는 데는 잠시의 시간이 걸렸다. 티몬의 눈썹이 바짝 치켜 올라가고, 웅성거림이 한 차례 퍼졌다. 누가 나타났는지 알아차림 토미손이 놀란 나머지 자기가 방금 놓았던 체스말을 쳐서 쓰러뜨렸다가 겨우 세워 놓았다. 조슈아가 언제 쿠키 홀에 나타났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존재가 금방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몸이 작은 탓이기도 했다. 조슈아는 주위를 의식하지 않는 듯 평온한 표정이었다. 토미손은 조슈아와 눈이 마주치자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라 우물거렸다. 조슈아가 나지막이 다시 말했다. "내가 둘게." "하지만……." 토미손은 티몬을 쳐다보았다. 자기가 물러나는 것이 진 것으로 판단될까봐 우려하는 듯했다. 티몬은 조슈아의 얼굴을 보며 갑자기 뺨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평화로운 얼굴을 보니 저 조그맣고 어린 아이의 명예를 빼앗겠다고 후배와 다툼 것이 일순 부끄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곧 평상심을 되찾았다. 토미손을 이기는 것보다 조슈아를 이기는 것이 백 배나 더 이로웠다. 조슈아의 평가를 크게 떨어뜨리고, 자신의 가치는 엄청나게 오를 것이다. 천재라고 떠들어댔지만 체스만큼은 모나 시드의 챔피언인 자신에게 꼼짝 못한다고 다들 말하게 된다면 그보다 통쾌한 일이 있을까. 게다가 조슈아는 처음부터 두자는 것도 아니고 현 상태를 이어받아 두겠다고 말했다. 지금의 체스판은 티몬이 토미손을 적당히 갖고 놀던, 한 마디로 다 이긴 거나 다름없는 행세였다. 몇 수 안에 체크를 부를 수 있는 방법만 해도 서너 가지였다. 제 아무리 조슈아라고 해도 이런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까 실로 궁금하기까지 했다. "난 누가 두든 상관없어." 티몬이 대답하자마자 토미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특별히 정중하다고 할 것까진 없었지만 토미손은 조심스럽게 조슈아가 자리에 앉기 편하도록 주변 사람들을 밀어냈다. 티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너 체스 둘 줄이나 알아?" "집에서 누나하고 가끔 두었어." 조슈아는 선배에게 존댓말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티몬은 반말에 신경쓰기 전에 웃음부터 터뜨리더니 말했다. "네 누나? 바보라고 소문이 자자한 계집애? 설마 그런 애한테 이기던 실력 갖고 나한테 자신만만하게 덤빈 건 아니지? 규칙이나 정확히 알고 있는지 걱정되는데?" 체스판을 바라보고 있던 조슈아가 고개를 들었다. "무례한 말은 삼가 줘. 누나에게 실력이 있는지는 나와 두어 보면 알게 돼." 티몬은 웃음을 그쳤다. "아, 물론 그렇겠지. 네 누나도 너처럼 '데모닉(Demonic)'이겠지? 데모닉이란 건 그 집안의 혈통이라면서? 실은 바보로 가장하고 있는 매우 특별한 데모닉일지도 모르지! 하하!" 조슈아는 그 말에 응대하지 않고 말했다. "선배 차례지?" 앞에서 자일즈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어 지적했다. "말투가 형편없군. 예의도 형편없어. 아직도 사람들이 네 앞에서 고개 숙이는 게 당연하던 시대인 줄 알아?" 티몬이 두기를 기다리던 조슈아가 짧게 답했다. "난 그 시대를 기억할 수 없는 나이야." "내가 말한 건 너의 건방진 말투야! 선배라는 걸 잊은 거야?" 조슈아의 표정 없는 검은 눈이 자일즈를 보았다. 이곳 아이들이 조슈아를 안 이래 최초로 신랄한 한 마디가 쏟아졌다. "내 존재만으로도 해가 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어찌 예의를 갖춰 존댓말을 쓰겠어? 내 인내심을 너무 높게 평가하지 마." 토미손과 티몬을 둘러싼 학생들이 늦게 온 친구들에게 설명하던 얘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상대가 어린 아홉 살짜리라는 것 때문에 그 말은 주위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안겨 주었다. 자일즈도, 티몬도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티몬이 말을 움직였다. 조슈아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거의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어떻게든 수를 읽으려고 애쓰며 시간을 낭비하던 토미손과 두던 판이었던 까닭에 티몬은 무심코 당황해서 조슈아의 얼굴을 먼저 쳐다봤다. 그러나 아이답게 작고 앳된 얼굴에 고민의 흔적 같은 것은 없었다. "너, 생각이나 하고 두는 거냐?" 조슈아가 대답하지 않자 티몬이 다시 말했다. "네가 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긴 한 거야?" 여전히 대답이 없자 티몬의 목소리에 분노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장난으로 할거라면 일찌감치 그만둬라. 난 체스를 좋아하는 만큼 체스에 대해 진지해. 수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어린애하고 놀아줄 만한 너그러움도 없고." 여전히 티몬이 두길 기다리고 있던 조슈아가 지루한 듯 턱을 괴면서 말했다. "토미손하고 둘 때는 진지한 것 같지 않던데." 그 말은 정곡이었다. 졸지에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티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네가 뭘 안다고 헛소리야! 판을 볼 줄이나 알아? 온갖 고상한 것들을 배우느라 체스 같은 건 배워볼 생각도 안 했을 거 아냐? 왜 체스는 가정 교사를 안 뒀지? 지금 네가 잘하는 것들, 모두 집에 비싼 가정 교사들을 불러다 놓고 집중적으로 배웠을 게 틀림없지. 그런 환경에서 자란다면 못하는 게 있는 쪽이 오히려 이상한 거잖아, 안 그래?" 그 말은 평소 티몬이 조슈아와 같은 귀족 출신 소년들, 특히 조슈아에게 느껴 온 열등감을 모조리 반영한 것이었다. 너희들이 그만큼이라도 잘난 것은 결국 돈과 신분의 힘이 아니냐. 그렇게 외치고 싶은 듯했다. 가정 교사 같은 것을 두어본 일이 없는 조슈아에게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티몬은 자기 분을 참지 못하는 것처럼 지속적으로 말의 폭포를 쏟아 냈다. "왜 대답을 못해? 어쨌든 상관없다 그건가? 내가 뭐라 하든 너의 특권은 지속될 거고, 네 인생은 탄탄대로라고 말하고 싶어? 그게 절대적 오산(誤算)이라는 걸 말해주지! 너희처럼 공화국 안에서, 공화 정부에 한 다리 걸치며 살고 있는 얼치기 귀족들을 일소해버릴 날도 멀지 않았어! 공화 혁명이 아노마라드 전역을 덮게 되면 누가 너희 따위를 살려줄 것 같아? 너희들의 존재가 혁명의 순수성을 해치고 있단 말이다! 밖에서 저들끼리 분열해서 켈티카로 쳐들어올 염도 못 내고 있는 병신 같은 귀족들과 왕당파 쓰레기들은 조금 있으면 자기들끼리 비루하게 싸우다가 소멸할 거다, 그 말이야!" 티몬이 말한 건 현재 켈티카의 공화 정부와 지지자들 모두가 서로에게 최면을 걸어서라도 믿고 싶어하는 이야기로서, 실제로는 현실성이 적은 최선을 희망 같은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믿기에는 켈티카 밖에 있는 귀족들과 왕당파 세력의 힘이 너무나 컸다. 다만 그들이 누구를 새 왕으로 추대할 것인가를 두고 대립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켈티카 대공략이 늦어지고 있는 것 또한 거짓은 아니었다. "혹시 바깥에 있는 귀족들이 와서 켈티카를 구원해줄 것이고, 그 때는 다시 너희 세상이 오리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는데 그것도 착각이란 걸 가르쳐 주지. 만에 하나 어느 왕당파인가가 다시 왕국을 세운다 치자. 그러면 그 놈들이 공화 정부에 협력한 너희들을 살려둘 것 같아? 배신자로 낙인찍혀 지금보다 더 끔찍한 꼴이 되고 말걸? 너희 찌꺼기 귀족들의 말로(末路)는 어떤 미래가 오거나 상관없어. 오로지 완전한 파멸이라는 걸 알아야 해!" 티몬은 늘 하고 싶었던 말을 거의 다 했다. 속이 시원해져서 얼굴에 미소마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 때 조슈아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풀었다. "선배도 귀족이나 다름없구나." "뭐… 뭐라고?" 티몬이 눈을 크게 떴다. "공화 귀족 말이야. 세상 어디든 귀족 없는 곳은 없는 거니까 이상한 일은 아니지." "무슨 되잖은 소리냐!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조슈아는 어깨를 약간 움츠려 보이더니 냉담하게 말했다. "하고 싶은 말 없어. 다만 선배가 얼른 다음 수를 뒀으면 좋겠네."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 얼른!" "선배." 조슈아는 한쪽 손으로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 무심한 눈초리로 티몬을 바라봤다. "내가 한 말은 지금 상황에선 아무런 의미도 없어. 귀족이란 말은 단어 그대로의 뜻일 뿐이지. 다만 다가올 미래가, 선배가 생각하는 것보단 훨씬 많은 가능성들을 품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야. 그 중에는, 내가 속한 아르님집안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오래오래 지속될 수 있는 선택지도 분명히 있지. 당사자인 내가 그 방법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선배는 그런 것 말고, 선배가 속한 공화 귀족들의 미래에 대해서 고민해 보는 편이 나을 거야. 설마 영원히 안전하다고 믿고 있진 않겠지?"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말해서 오히려 허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아홉 살짜리가, 지금처럼 공화국과 외부 세력의 틈바구니에 끼여 멸망의 위기에 처한 집안을 일으켜 세울 방법을 안다고 장담한 것이다. 더구나 무척 교묘하게 말해서 공화 정부에 고발할 만한 단어는 하나도 쓰지 않았다. 공화 귀족이라는 말은 조슈아가 처음 사용한 말이 아니었다. 이미 공화 정부 내에서도 각료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오가는 중요한 주제이기도 했다. "자, 이제 둘 거야?" 조슈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게임을 당장 끝내버리겠다는 것처럼 티몬의 손이 움직였다. 다시 조슈아가 한 수, 그리고 티몬이 한 수를 두었다. 이제 판을 이어받은 이래 세 수째를 둘 차례인 조슈아가 말을 딱 놓고는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 둘 거야?" "뭐라고?" "끝난 것 같은데." 조슈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람들은 듣지 못한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티몬도 마찬가지였다. 조슈아는 물론 '체크(check)'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 한 말은 체크메이트가 됐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무슨 소리야!" 구경하는 학생들 중 티몬보다 체스를 잘 두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들 중에서도 다른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도 왜 끝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의아한 눈으로 조슈아를 쳐다볼 따름이었다. 티몬과 눈이 마주친 조슈아가 눈썹을 살짝 올리더니 말했다. "난 실력이 변변찮아서 가끔 우리 누나에게 지곤 하지." 그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당황해하는 구경꾼들과 상대를 남기고, 그리고 토미손에게조차 말을 건네지 않은 채 사람들을 헤치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제 구경하던 학생들의 시선은 티몬에게 집중되었다. 티몬은 체스판을 필사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진 것이 아닌데 어린애에게 속은 꼴이 되어도 분통할 것이고, 실제로 진 것이면 창피한 건 물론이거니와 체크메이트가 되는 상황을 깨닫지 못한 탓에 더욱 불명예스런 꼴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이 상황에서 끝이라니, 도대체 몇 수 앞을 읽은 건가? 다섯 수? 열 수? 그는 땀을 흘리며 한참 동안, 거의 5분 이상 체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지루해진 학생들이 자리를 뜰 즈음이 되어서야 그는 갑자기 화가 난 것처럼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체스판을 내리치지 못한 채 주먹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열패감이 드러나 있었다. 옆에서 자일즈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때?" 티몬은 대답 없이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체스판을 노려보다가, 갑자기 오른손을 휘둘러 체스판 위를 쓸어버렸다. 흰 말, 붉은 말, 모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흩어졌다. 그의 입술이 비틀리는 듯하더니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저주받을…데모닉……." 사람들은 약간 겁에 질린 것처럼 웅성거렸다. 데모닉, 그것은 조슈아의 별명이자 그의 조상들의 별명이었다. 저도 모르게 조슈아가 나간 쪽 문을 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소년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으나 그곳에 남아있을 지도 모르는 한기를 느끼는 듯, 몇몇은 몸을 움츠리며 떨었다. 그 즈음, 쿠키 홀 바깥의 계단창에 놓인 의자에 앉은 채 쿠키 홀로 통하는 창문을 열어 놓고 있던 아르님이 일어나 도로 밖으로 나갔다. 3. 체스의 졸 "인질도 아니고, 죄수도 아니며, 전리품은 더더욱 아니지, 우리는 뭘까? 실은 체스판의 졸에 불과한 것 아닐까?" "저기, 조슈아……." 조슈아는 햇빛 잘 드는 2층 계단창에 서서 발돋움을 하며 창 밖을 보고 있었다. 정원은 눈이 녹는 중이었다. 토미손이 부르는 소리에 그는 돌아보았다. "왜?" 조슈아의 어조는 특별히 따뜻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티몬을 대하듯 싸늘하게 표백된 목소리도 아니었다. 토미손은 머뭇거리며 생각했다. 고맙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대단하다고 감탄해야 할까, 그도 아니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야 할까. 그 때 조슈아가 말했다. "됐어." "응?" "잘 알아들었다고." 조슈아가 토미손이 하려고 궁리하던 말에 이미 대답한 것임을 깨닫고 토미손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다음 말을 꺼내기까지는 한참이나 걸렸다. "전부터 궁금한 것이 있었는데……." "뭔데?" 토미손은 무척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이름 말이야…. 어째서 요수아가 아니고 조슈아인 거야?" 조슈아가 갑자기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려서 토미손은 더욱 놀랐다. 그런 식으로 웃는 조슈아를 처음 봤던 것이다. '조슈아'와 '요수아'는 철자가 같았지만 지역에 따라 발은 차이가 나는 것으로 '폰 아르님'과 같은 중부식 성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요슈아라고 발음했다. 조슈아는 오래 웃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우리 집안은 본래 남부 출신이야. '폰 아르님'보다 먼저 존재한 집안이라고 해야겠지, 내 이름은 조상의 이름을 딴 거라서 전통대로 조슈아가 됐어." "그럼 본래는 다른 성이었단 말이야?" "아니, 본래는 성이 없었어." "잠깐, 성이 없다면……." 그렇게 말하다가 토미손이 멈칫했다. 성이 없는 것은 평민 중에서도 아주 하층민들뿐이었다. 아니라면 루그란 왕국이나 용병국가 레코르다블 같은 외국의 경우나 그랬다. 하지만 아르님 가문은 왕국 아노마라드가 건국될 당시 일익을 담당했을 정도로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 아닌가? 그 때 조슈아가 끝말을 대신했다. "맞아, 처음엔 귀족이 아니었던 거야." "놀랐어, 그런 줄은 전혀 몰랐어…. 하지만 굉장히 옛날이겠지?" "굉장히 옛날엔, 누구도 귀족이 아니었을 거야." 그렇게 말한 조슈아는 다시 창 밖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토미손은 더 말을 걸고 싶었지만 적당히 말을 찾지 못해 그냥 자기도 같이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 그러자 할 만한 말이 생각났다. "뭘 보고 있어?" 그 때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먼저 돌아본 토미손은 검사들처럼 훤칠한 키에 당당한 체격을 가진 중년 남자를 보았다. 좀더 가까이 다가왔을 때, 남자의 그림자는 토미손을 덮고 창틀에까지 겹쳐졌다. 옷차림이며 태도에서 조용한 기품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토미손은 저도 모르게 인사했고,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그 때 조슈아가 돌아봤다. "아아, 아버지." 토미손은 깜짝 놀라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그러다가 뭔가를 깨닫고 당혹한 얼굴로 급히 고개를 도로 숙였다. 조슈아의 아버지라면 아르님 공작, 아니 예전에 공작이었던…….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번이나 인사할 필요는 없단다." 목소리는, 곱지만 딱딱 끊어지는 조슈아의 것과는 전혀 달랐다. 훨씬 온기가 있는 데다 부드럽게 울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남자의 눈이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심안을 닮은 것이 느껴져 의아해졌다. 몇 번 본 일이 없긴 하지만 선원, 아니 선장들이나 가질 법한 눈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라면 외국을 돌아다니는 모험가들에게 어울릴 눈빛이었다. 지금껏 보아온 귀족들 가운데 그런 눈은 없었다. "조슈아, 친구를 소개시켜 다오." 토미손은 '친구'라는 말에 흠칫 놀랐지만 조슈아는 그 말을 반박하지 않고 말했다. "토미손 구겔호퍼예요." 토미손은 자신이 조슈아에게 성을 말한 일이 없다는 걸 기억해 냈다. "그렇구나. 반갑다. 자, 그럼 달리 인사할 친구가 있니?" 조슈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토미손은 빛으로 둘러싸인 무언가를 보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렴풋이, 이런 것이 티몬이 말한 노예근성일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한때 공작이었던 아르님은 이제 비서 하나 대동하지 않고 혼자 아들을 찾아오는 아버지였다. 그는 미소지으며 조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조슈아가 다가오자 귀한 그릇을 다루듯 곱게 안아 올려 한쪽 어깨에 앉혔다. 조슈아는 너무나 작고, 아버지는 체격이 장대해서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럼, 토미손, 또 만날 기회가 있길 빌겠다." 마지막 말을 한 사람은 아르님이었다. 조슈아는 아버지의 어깨 위에 앉은 채 말끄러미 토미손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부자(父子)는 1층으로 향하는 넓은 계단을 내려갔다. 토미손은 혼자 남겨졌다. 조금 후, 토미손은 무엇인가를 깨닫고 창가로 달려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제야 조슈아가 보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었다. 눈밭에 세워져 있던 흰 마차는 아르님 가문의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곁에서 있는 조슈아는 모나 시드 학장인 부펠트에게 인사하고 있었다. 조슈아와 아버지, 그리고 학장 외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슈아가 인사를 마치자 조슈아의 아버지는 다시 조슈아를 번쩍 안아 올리고는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직접 마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토미손은 조금 전 자신을 바라보던 조슈아의 눈빛을 생각했다. 우정이 되기엔 일렀고, 연민이라 여기기엔 좀더 친근해 보였던 눈빛이었다. 실은 모두가 자신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는 조슈아가 마지막으로 자신을 보아주고, 기억에 넣어줬다고 믿었다. 어쨌든 조슈아는 영리하니까 자기 얼굴을 잊어버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멀어지는 마차를 지켜보았다. "괜찮으냐?" "네." 마차가 느렸다. 눈길이라 조심조심 몰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묻지도 않는구나." "아버지께서 잘 생각하셔서 결정하셨으리라 믿어요." 아르님은 버릇처럼 '내 아들이 아홉 살이 맞을까'하는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좀더 어렸을 때는 무척 천진난만했다는 기억이 났다. 언제부터였을까, 이렇게 달라진 것은. 한참 동안 눈밭에 난 마차 자국만 눈으로 따라가고 있는데 조슈아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공화국을 지지하세요?" 허튼 이야기를 꺼내는 아이가 아닌 것을 알기에 아르님은 약간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되물었다. "갑자기 왜 그런 것을 묻느냐?" "현재 공화국 수반인 당스부르크의 병이 중하다고 들었어요. 그가 죽으면 과격파가 득세해서 조만간 귀족 말살령이 떨어질 테고, 그러면 우리는 죽겠지요?" 어린 아들의 입에서 '죽는다'는 말이 나오자 아르님은 흠칫 놀라며 말했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더냐?" "학원에서 지내니까 좋은 점도 있었어요. 요즘의 정세 같은 것에 대해서는 알기 싫어도 저절로 알게 되던걸요." 마차가 한 차례 크게 덜컹거렸다. 속도가 좀 나기 시작했다. 조슈아는 잠시 마차 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만일 둘로 나뉜 왕당파 중에서 한쪽이 켈티카를 쳐서 왕정을 다시 일으킨다고 해고, 우린 구원받지 못하겠지요. 경국 죽을 테죠, 아버지도 나도, 벼랑 끝을 향해 달려가는 운명이로군요." 덧창 밖에서 눈발이 흩어졌다. 조슈아가 꺼낸 이야기는 지금 아르님 가문의 운명을 걸고 숙고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조슈아의 말이 맞았다. 지금으로서는 어느 쪽이든, 가문의 미래는 없었다. 가만히 있다가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방법을 강구하려 애쓰는 중이건만 쉽사리 속시원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아르님은 아들이 자기보다 훨씬 영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직 어린지라 이런 문제까지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게냐?" "벼랑 끝으로 달리는 마차에 타고 있다면, 위험하더라도 뛰어내려야 한다는, 그런 거예요." 바람이 강해지자 조슈아는 가느다란 팔을 뻗어 자기가 있는 쪽의 덧창을 닫았다. 그 때 아르님은 쿠키 홀의 창문 너머로 들었던 조슈아의 말을 기억해 냈다. '가문이 살아남을 수 있는 선택지에 대해 알고 있다'라고. "네가 정치 문제에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구나." "관심이 없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관심 없는 것이 죄가 되겠지요." 그렇게 말하며 조슈아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아버지는 당혹스런 얼굴로 미소에 답하며 말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방법을 모르겠구나.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고." "전… 체스의 '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요." 조슈아가 쿠키 홀에서 체스를 두고 있던 것이 기억났다. "생각을 좀 해 봤어요." 마차 안이 점점 추워졌다. 아르님은 무릎담요를 꺼내 조슈아에게 덮어 주었다. "왕당파가 둘로 갈라져 있다지요. 죽은 국왕의 동생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맏조카를 추대하려는 사람들로요. 일단 협력해서 켈티카를 치자는 주장이 있긴 하지만 서로간의 알력이 더 심해서 협상이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아버지가 보기에도 두 세력이 협상하기 어려울 것 같나요?" "알 수 없구나. 그들이 켈티카의 공화국 정부를 언제 쳐도 상관없는 약한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협력이 되지 않는 것이니까. 공화국이 위협적이었을 것 같으면 벌써 한 마음이 되어 켈티카로 진격했을 것이다." "그래요. 공화 정부보다 서로를 더 큰 적으로 보기 때문에 이 상황이 오래 지속되고 있는 거겠죠. 그러면 그들은 서로를 먼저 칠까요?" " 두 왕당파는 힘이 비등하기 때문에 어느 쪽이나 단숨에 쳐서 없앨 수 있는 상대가 아니지, 그러니 장기전이 될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은 귀족들을 모아들이는데 역량을 집중할 거라고 생각한다. 일부 귀족들은, 이곳이 만일 루그두넨스와 같은 연방이었다면 하나의 왕국이 되고도 남을 만한 힘을 지니고 있으니 섣불리 대할 상대는 아닌 게지, 왕당파들은 현 상황을 반(反) 공화파 세력이 둘로 갈라진 것으로 보겠지만, 여타 귀족들의 입장에서 보면 무정부 상태에 불과하지 않으냐. 따라서 귀족들 또한 어느쪽을 지지할 것인지 고심하게 될 거야." "그렇게 해서 만일 한쪽이 우위를 점했다고 믿으면, 곧바로 내전에 들어가겠군요. 그건 공화 정부에게는 세력을 키울 좋은 기회가 될 거고요. 사태가 그렇게 발전된다면 아노마라드에는 혼란 상태가 몇 십 년간 지속될 지도 모르겠군요. 그 동안 렘므 왕국에서 가만히 있지 않겠죠. 오를란느 공국이나 식민령 트레비조, 잔, 티아의 독립 욕구도 고려해야 해요. 일단 외국 접경 영지에서는 함부로 내전에 가담하지 못할 거라고 봐요. 식민령들과 협상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장기적으로 한 세력이 승리하여 통일될 것을 고려한다면 독립적인 행보는 자제할 수밖에 없겠지요." 유연하게 하나 하나 짚어나가는 목소리를 들으며 아버지는 미소지었으나 편한 미소만은 아니었다. 심각한 국가 간 정세 이야기인데, 조슈아의 입에 오르니 상자에 모아 놓은 인형들의 이름처럼 간단하게 들리는 것이 묘했다. 이들은 때로 참모들보다 상황 정리에 더 능숙했으나, 그건 아홉 살 아이가 가질 만한 재능은 아니었다. 갑자기 조슈아가 말을 잇지 않고 아버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체스의 '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몰랐지만, 그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졸은… 처음에는 가장 쓸모 없는 말이지만, 게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땐 다른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말이지." 대답하면서 아르님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들이 단지 질문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어떤 입장을 강조하고자 한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게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조슈아는 무릎 담요를 어깨까지 끌어올렸다. 마차 축대의 달칵대는 소음이 있을 뿐 눈발 날리는 벌판을 달리는 마차는 다른 세계처럼 조용했다. "공화국이 벌인 한 판 게임이.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군요." 툭,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옆자리에 놓여 있던 모자였다. 아르님은 허리를 굳혀 모자를 집어들었다. 그렇게 하는 그의 손이 약간 떨렸다. "좋은 마무리(End Game)를 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이냐?" "졸이 결정권을 쥐는 시기죠.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지 않으면 희생양으로 바쳐지거나 파멸될 뿐이에요. 지금 아버지가 택할 수 있는 가장 나은 입장을 바로 졸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하면서 조슈아는 마차 한쪽에 언제나 놓여 있는 상자를 끌어당겨 열었다. 들어있는 것은 쓴 맛 나는 사탕인데, 조슈아의 괴상한 취향이었다. 사탕을 하나 꺼내 입에 넣은 조슈아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천천히 빨아먹었다. 말하는 것과는 달리 천상 어린아이인 아들의 모습에 묘한 괴리감을 느끼며 아르님은 생각에 잠겼다. 아르님 가문을 비롯해서 켈티카에 갇혀 어쩔 수 없이 공화 정부에 순종하는 체 하고 있는 귀족들, 이들은 공화국 입장에서는 활용할 데도 없는 무가치한 포로에 불과하고, 외부의 왕당파들 입장에서는 이미 죽어 있는 사석(死石)이었다. 다시 말해 어디에 붙는다 해도 쓸모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체스의 졸은 상황에 따라 힘이 다르다. 조슈아는 보는 입장에 따라 모호한 정체성을 지닌 아르님의 위치를 이제 판이 끝날 때에 이르러 체스에서의 졸처럼 활용해 보자고 말했다. 지금이 공화 혁명이라는 한 판 게임의 막바지라는 것. 그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동의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마음 속의 목소리가 어린 아들에게 '너는 그런 일에 마음 쓸 것 없다'라고 말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그러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슈아가 종이인형 다루듯 쉽게 말하는 이야기가 실제로 정치에 밝은 어른들조차 파악하기 힘든 안개 속의 정세를 꿰뚫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은 유혹을 참기가 힘들었다. "병사들을 다 빼앗겼으니 우리 집안에 물리적 힘은 없어요. 남은 것은 상징적 권력이랄까요. 첫째는, 공화국 안에서 살아남은 귀족이라는 점이에요. 처음 공화 정부가 들어섰을 때 수많은 귀족들이 처형당하고 남은 것은 일부에 불과했죠. 그렇게 남은 가문 중에서도 아르님 가문 만한 대우를 받는 곳은 없어요. 그건 즉, 켈티카 시민들의 호감을 의미하지요. 공화 정부는 태생적 특징 탓에 절대로 시민들의 호감을 무시할 수 없어요. 그리고 나중에 켈티카를 차지하려 할 여타 세력들에게도 나쁘지 않은 장식품으로 환영 받겠지요." 아르님 가문은 왕국만큼이나 오래된 공작 가문이지만 두 세대 전만 해도 남쪽 바다의 어느 섬에서 살며 대륙의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던 역사가 있었다. 모종의 정치적 협상으로 인해 켈티카로 돌아왔지만 마땅히 영지가 없다보니 켈티카 시민들을 괴롭힐 필요가 없었고, 섬에서도 가문의 일족이나 다름없는 공동체를 다스렸던 탓에 군림하는 귀족의 역할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르님 가문의 사람들은 시민들에게 소탈하고 권위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었다. 공화 혁명이 일어났을 때 켈티카에서 왕궁 다음으로 큰 섬을 가진 아르님 가문이 보전된 것은 아르님 공작의 성품을 아는 많은 시민들의 발명(發明)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이 도움이 된다는 생각은 아직껏 해보지 못했다. "둘째는 정보력이에요. 지금 아노마라드의 귀족들 중, 공화 정부의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구겠어요? 켈티카 안에 있는 귀족들. 그 중에서도 가장 나은 입장에 있는 아버지가 아닐까요? 왕당파나 귀족들이 공화 정부를 공격하기 위해 가장 좋은 시기를 알려고 할 때. 아버지보다 정확히 때를 짚을 수 있는 사람은 없겠죠. 만일 모르는 정보가 있어 조사하려 한다해도 켈티카 밖에 있는 귀족에 비하면 절대적 우위에 있죠." 이쯤 되면 켈티카에 갇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의 심장부에 침투해 있다고 해야 판이었다. 아르님은 점점 아들의 이야기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금지된 상자에서 자꾸만 금화를 꺼내는 동화 속 어리석은 주인공처럼 멈출 수가 없었다. "유리한 점을 갖고 있다는 건 알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택해야 할 길은 무엇이라고 보지?" "물론 가장 높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이에요." 지나치게 합리적인 대답에 아르님은 약간 주저했다. "가장 높은 가치라, 그렇다면 공화국은 아니겠지. 하지만 지금 네가 말한 유리한 점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당장 켈티카를 공략하고자 하는 세력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당장 켈티카를 도모하기보다 다른 왕당파를 견제하는 데 힘을 쏟고 있는 두 왕당파에게는 그리 매력적인 조건이 아니지 않을까?" 한 개 더 집어넣은 쓴 사탕을 입안에서 한 바퀴 굴린 조슈아는 별 수 없이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대답했다. "으큼, 아이 써. 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울리 가문이 줄 수 있는 이점들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건 두 왕당파가 아닌, 제3의 세력이에요." "제 3의 세력이라고? 그건 어디를 말하는 거지?" "무정부 상태를 관망하고 있는 귀족들이죠. 그들 중에는 아버지와 손잡을 자가 분명히 있어요. 조건을 좁힌다면 야심가에, 정세를 볼 줄 아는 눈이 있는 똑똑한 사람이겠죠. 그런 사람이라면 아버지가 가진 유리한 조건들을 대번에 꿰뚫어 보고 연합을 승인할 거예요." "하지만 그들도 결국 누군가를 왕으로 세워야만 한다. 핏줄이 다른 귀족이 왕이 되려 한다면 당장 두 왕당파가 연합하여 그를 저지하려 할 것이 명약관하지. 더구나 다른 귀족들은 왕의 핏줄이 아닌 자가 새로운 왕이 되는 상황을 질투심 때문에라도 용납하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의 즉각적 지지는 더욱 기대하기 힘들지. 그러니 그런 희망을 가진 자가 있다면 어리석은 자라는 결론밖에는 나지 않아." 조슈아는 고개를 저으며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가 정통성이 부족한 자라면, 더더욱 아버지처럼 인망이 높은 사람을 필요로 해요. 그런 자일수록, 켈티카 공략처럼 입지를 단번에 뒤집을 수 있는 전략을 원하죠. 켈티카 공략의 시기를 가장 알고 싶어하는 건 바로 그 자에요." 논리적으로는 분명 맞았지만, 아르님은 아직도 역성혁명(易姓革命)의 가능성만은 인정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르님은 일단 조슈아의 말을 끝까지 들으려고 마음먹었다. "좋다. 그렇다면 그 자는 누구지?" "몇 명으로 좁혀지지 않을까 싶어요. 저더러 짚으라면……." 조슈아는 약간 망설이며 마차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밖에서는 이제 세찬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마부가 말을 다루기 위해 이럇거리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이윽고 조슈아가 결정한 듯 말했다. "폰티나 공작." 폰티나라면 아노마라드 중부에 커다란 성을 가진 대귀족이다. 소출이 풍부한 영지 덕택에 왕국 시절 귀족 가운데서도 몇 손가락에 꼽히는 부를 이뤘고, 많은 사병조차 거느린 강대한 세력이었다. 또한 쉽게 자기 생각을 털어놓지 않는 신중하고 무서운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폰티나 공작은 통솔력은 물론 지략마저 뛰어난 인물이라 두 왕당파에서 서로 끌어들이려 애쓰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양측의 요구를 적당히 거절하면서 자기 자리에 머물 뿐이에요. 그러는 중에 이미 여러 귀족들이 자기들의 입장을 결정해서 어느 쪽이든 붙었고, 이렇게 되니 폰티나 공작은 가장 좋은 합류의 시기를 놓친 셈이 됐어요. 뒤늦게 들어오면 아무래도 미리 합류한 다른 귀족들의 견제가 심할 테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이 영리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렇게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 몇 년이나 꼼짝도 않고 뭘 하고 있는 걸까요?" 아르님은 침묵하고 있다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는 스스로 왕이 되려 할 정도로 야망에 눈이 먼 자는 아니야. 그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모를 사람도 아니고." 그러나 조슈아도 똑같이 고개를 흔들었다. "저도 그가 직접 왕이 되려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지지하려 한다는 말이냐?" "조심스럽긴 한데요. 아까 말했듯 저는 그가 제3의 대안을 가졌다고 봐요." "무슨 뜻이지?" "또 다른, 옛 왕가의 피를 이은 사람.' 아르님은 흠칫 놀란 듯 하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사람에 대해선 아직껏 전혀 알려지지 않았어. 물론 핏줄이야 많겠지만 피를 이었다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으니 말이야. 자기를 지지할 세력이 있어야 하는데 보다시피 그런 세력은 없잖느냐.' "폰티나 공작이 하려는 일이 바로 그거예요. 보다시피 폰티나 공작은 왕당파들과 합세할 좋은 기회를 몇 번이나 차버렸어요. 폰티나 공작의 능력을 올바르게 평가한다면, 그가 갑자기 눈이 흐려져 어리석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판단해선 안 될 일이죠. 그렇다면 결국, 왕으로 키울 씨앗을 직접 품는 방법을 택했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아요. 새 왕가의 핏줄에게 필요한 세력을 자기가 직접 만들어 줄 심산인 거예요. 그럼 그 인물은 누굴까요? 폰티나 가문이 옛 왕가와 혼인을 맺은 일이 있다면, 적어도 스무 살이 넘고 풍채가 훌륭한 자손을 찾아내면 돼요. 그가 답이죠. 지금 상황에서 어린아이를 내새우는 것으로는 기존의 왕당파를 누를 수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런 혼인 관계가 없다면 공화 혁명 이후로 폰티나 가문의 핵심인물과 혼인을 맺은 출신 모를 낯선 사람이 틀림없이 있을 거예요. 주로 처남 정도가 간단하죠. 혹시 폰티나 공작에게 누이동생이 있나요?" 조슈아가 빠른 말투로 가능한 예측들을 모조리 지적하는 동안 아르님의 이마에 엷은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럼 그런 자가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폰티나 곤작은 언제까지 숨기고 있을 작정일까?" "그동안 유난히 움직임이 없는 걸로 보아, 지금 폰티나 공작은 방금 말한 제3의 인물을 데뷔시킬 무대를 짜고 있을 거라고 봐요. 이제 얼마 안 남았지요. 저더러 짐작하라고 한다면 그 무대를… 렘므와 인접한 동쪽 국경 지방으로 하겠어요." "국경? 왜 그렇게 먼 곳에?" 조슈아는 눈썹을 가볍게 올리며 답했다. "명성도 인망도 없는 새로운 인물이 데뷔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곳이라면, 역시 전쟁터 아니겠어요?" "……." 그곳은 공화 혁명 이후로 두 번 가량 렘므 왕국의 침입이 있었던 곳이었다. 당시에 그걸 막아낸 것은 그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제2왕당파, 즉 죽은 왕의 조카를 지지하는 자들이었다. 이제 서서히 추측은 사실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제2왕당파 또한 지금처럼 계속 변경이나 지키고 있을 생각은 없을 테고, 그들이 움직이게 될 시기는 공화국이 눈에 띄게 약해지는 때일 것이다. 켈티카를 순식간에 되찾는 것으로 상대 왕당파보다 우위를 점하고 싶은 마음은 어느 쪽에든 있을 테니까. 즉, 켈티카 공략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면 그들은 켈티카 쪽으로 끌어낼 수 있다. 공화국 수반 당스부르크의 죽음이 절호의 기회이다. 그렇다면 그 시기를 알려줄 수 있는 것은……. "폰티나 공작이 변경에서 새 인물을 데뷔시키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은 적절한 시기, 즉 '때'예요. 그런데 그걸 알고 기회를 만들어줄 힘은 켈티카 안이 귀족들, 그 중에서도 아버지만이 갖고 있죠. 거기에 한 가지 더. '아르님'은 현재는 힘이 없을지언정 상징적 자산이 무척 풍부한 이름이죠. 아시다시피 아르님은 아노마라드 건국을 논할 때 항상 왕가 다음으로 거론되는 이름이 아닌가요? 생각해 보세요.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시기에, 오래 전 건국왕과 손을 잡고 나라를 일으켰던 아르님 가문이 새로이 지지하는 왕의 존재, 사용하기에 따라 무한한 파괴력을 가져올 수 있는 절대적 명분 아닌가요?" 조슈아의 작은 입술에, 체스에서 이겼을 때고 보이지 않던 미소가 떠올랐다. "폰티나 공작이 이 미끼를 물지 않는다면, 모르긴 해도 지략이 뛰어나다는 평가는 수정되어야 할걸요. 그러니 폰티나 공작에게 그쪽의 속내를 알고 있다는 걸 보이고, 함께 킹 메이커(king maker)가 되자고 제안하세요." 큰 모험이었다. 잘못 예측한 거라면 멸망을 자초할 수도 있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수였다. 지금의 자리를 어떻게든 유지해 나가는 방법이 있다면, 큰 이익이 없다 해도 그걸 택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그러나 아르님도 알고 있었다. 현 상태를 유지하거나, 그것보다 못해지거나, 그런 결론밖에 없는 정책을 누가 전략이라고 부르겠는가? 그 때 조슈아가 덧창을 열었다. 어느새 눈은 그쳐 있었고 차가운 바람이 들어와 마차 안을 한 바퀴 돌았다. 열에 들뜬 듯 발그레해진 얼굴을 식히던 조슈아는 아버님의 표정을 보고 미소를 보냈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죠. 의자에 앉아 세운 계획을 현실에서 성공시키는 것이야말로 정말로 어려운 거예요. 그럼 퀴닝(Queening, 체스에서 졸을 퀸으로 승진시키는 것)은 준비되셨나요?" 아르님은 눈을 감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윽고 다시 뜨더니 조슈아를 처음 보는 아이 대하듯 유심히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조슈아조차도 해석하기 힘든 눈빛이 담겨 있었다. "조슈아, 네가 이해할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아이가 아니기를 난 늘 바랐지. 그러니 다시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말아라. 아니, 내가 그러도록 해 주마." 이틑날 오후는 오랜만에 청명한 늦겨울 날씨였다. 아르님은 홀로 서제의 큰 유리창 앞에 선 채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관목(灌木)들이 삽자, 클로버, 하트의 무늬를 그리며 펼쳐진 정원이었다. 반듯한 관복 울타리 위에 오전까지 내리던 눈이 쌓이자 하얀 크림이 얹힌 맛있는 녹색 빵처럼 보였다. 조슈아는 혼자 십자와 초승달 모양이 겹치고 엇갈리는 사잇길을 걷고 있었다. 얼마나 가뜬가뜬 걷고 있는지 눈 위에 틀림없이 남겼을 발자국조차 거의 알아보기 힘들었다. 넘어지기라도 했다간 영영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아이의 모습에서, 저 넓은 정원의 미로 같은 구조가 도면처럼 정확하게 그려진 머릿속을 연상할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까. 조슈아는 걸음을 멈췄다. 드디어 환형으로 깎은 관목 안쪽에 허리를 굽히고 숨어 있던 이브노아를 찾아낸 모양이었다. 그들이 웃으며 무어라 외치는 소리는 이곳까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 밀치느라 관목에 쌓인 눈이 부서져 떨어지고, 잠시 후 신이 난 두 아이가 연못으로 이어지는 수로를 따라 다음 정원으로 달려가는 모습만은 분명하게 보였다. 어제는 어른 못지 않은 전략가였다가 오늘은 누나와 숨바꼭질하는 꼬마가 되는 것이 어렵지는 않은지 궁금했다. 저 아이의 머릿속에는 어떤 식으로 세상일이 받아들여지고, 정리되고, 우선 순위가 결정되는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것을 이해해 줄 사람이 있다면 조슈아도 그렇게 외롭지는 않을 텐데. 하지만 아버지인 자신도, 아내도, 그리고 천진난만하기만 한 누나도 그런 것은 무리였다. 누가 그런 것을 해줄 수 있을까? 그 때 불현듯 마음 속에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 사람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잠시 후 창가를 떠난 그는 서제와 이어진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아르님과 비서 외에 다른 사람은 드나들 수 없는 곳으로 책상 하나와 책 몇 권이 든 책꽂이 외에 별다른 가구조차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가득 찰 정도로 작았다. 두터운 커튼이 대낮에도 걷히지 않는 곳이라 아르님은 램프에 손수 불을 붙였다. 이윽고 오랜지빛 광채가 서서히 책상 위로 드리워졌다. 육중한 느티나무 책상에는 연갈색 감도는 편지지 묶음이 놓여 있었다. 자리에 앉아 편지지를 끌어당긴 아르님은 무언가를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한 시간 이상이나 걸려 신중하게 쓰고 나자, 잉크를 말리기 위해 편지를 펼쳐놓은 채 고개를 젖혀 눈을 감고 있었다. 아르님은 일상사에서 하인의 손을 잘 빌리지 않는 편이었다. 이윽고 눈을 뜬 그는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고, 서랍에서 또 하나의 완성된 편지를 꺼내어 따로 봉투에 담았다. 두 봉투에 직접 봉랍을 붙여 직인까지 찍은 뒤, 벨리 달린 줄을 당기자 비서가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아르님은 두 통의 편지를 손에 쥔 채 다른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고민을 많이 했는지 피로한 얼굴이었다. "이브의 결혼식을 앞당길 생각이다. 5월 정도가 좋겠지. 하루속히 모든 준비가 끝나도록 손을 써 주게. 그리고 하이아칸의 별장에 기별해서 딸아이 부부가 한동안 거기에서 살 거라고 전하도록 해. 만반의 준비를 갖춰두라고 하게나. 참, 그러고 보니 초청장이 가장 급하겠군. 명단을 뽑아서 올려 주겠나?" 비서는 놀란 모양이었다. "무척 촉박합니다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서두르시는 까닭이라도 있으신지요." "곧 알게 될 거네. 그리고 또 하나, 즉시 수도 밖으로 빠져나갈 인편을 구해야겠어. 급히 편지를 전할 곳이 있다. 두 통인데, 일단 하나는 자네도 아는 히스 어르신 앞이네." 비서는 허리를 굽혀 보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어디로 보내십니까?" 아르님은 봉투를 책상 끝으로 밀어 놓으며 대답했다. "폰티나 공작의 영지로." 4. 혐오 "내 오감(五感)이 질투보다, 분노보다, 살의보다 더한 진정한 증오를 배운 것은 오직 그 녀석을 알게 된 후부터다. 그런 점에서 녀석은 나를 가르쳤어. 내 스승이라 부를 만하지." 대륙 동북부의 로젠버그 호수를 발원지로 하는 블루엣 강은 아노마라드 수도 켈티카를 관통하여 흘렀다. 파랗게 빛나는 강을 사이에 두고 수도는 둘로 나뉘어 있었다. 수도의 호화 저택들은 대부분 강의 동남쪽에 몰려 있었는데 그들도 그곳에 집을 갖고 있는 걸 자랑으로 여겼다. 왕국 시절에는 그들끼리만 공유하는 사교 모임들이 밤낮으로 그곳에서 열렸고 상류 사교계에 입문하고자 하는 자들은 모두 그곳에 집을 갖고자 아우성이었다. 그러나 조슈아의 집은 블루엣 강의 서안(西岸), 그것도 한적하다 못해 시골처럼 보이는 지역에 홀로 우뚝 솟아 있었다. 그 저택의 위용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곳 하나로도 강 동안(東岸)의 귀족 무리 모두와 맞바꿀 만하지 않느냐는 자신감 같은 것이 느껴지는 듯했다. 본래는 옛 국왕의 별장이자 직영지였던 곳으로, 저택 주위를 환형으로 둘러싼 정교한 정원 때문에 비취반지 성이라고도 불리는 아름다운 전원 장원(壯園)이었다. 그러나 아르님 가문의 소유가 되면서 주변의 농지는 왕가에 귀속되고 사냥터로 쓰이는 '울새의 숲'만이 겨우 비취반지 성의 소유로 남아 있게 되었다. 아르님 가문은 조슈아의 할아버지 대부터 이곳에 옮겨와 살았다. 블루엣 강변에서 비취반지 성까지 닦인 포플러 길은 마차 두 대가 나란히 다닐 만큼 넓었다. 조슈아가 집으로 돌아온 이듬해 3월 초 어느 날 아침, 녹아 가는 눈을 밟으며 걸어온 젊은이 하나가 문 앞에서 늙은 하인을 만나고 있었다. "테오스티드 다 모르 님을 찾아 오셨다굽쇼?" 늙은 하인은 그 사람이 누군가 잠시 생각하는 얼굴을 하더니 갑자기 손뼉을 딱 쳤다. "아, 테오 도련님!" 시종 쾌활한 미소를 짓고 있던 젊은이가 반색하며 얼른 대답했다. "예! 테오 말이에요. 전 어려서부터 테오와 같이 자란 고향 친구입니다. 오랜만에 만나보려고 멀리서 찾아왔어요." 하인은 상대의 행색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스물 초반의 훤칠한 젊은이, 초라하다고 할 순 없지만 장식 없는 검소한 여행복에 지팡이를 짚고 짤막한 서지(serge) 망토 하나를 달랑 걸친 모습이 확실히 있는 집안 자식의 차림새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가 찾는 사람에 대해 다시금 떠올린 하인은 '하긴'하는 표정이 되었다. 테오 역시 돈 많은 집안 출신은 아니었던 것이다. "누가 왔다고 전할깝쇼?" 젊은이는 여전히 밝은 얼굴로 답했다. "애니가 왔다고 하면 알걸요." 흡사 여자아이 같은 이름을 댄 젊은이는 하인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동안 양 손바닥으로 발갛게 언 뺨을 문질렀다. 그러나 '애니'가 집 안으로 안내된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가량이나 지난 후였다. 명목상으로는 테오가 가정교사와 공부를 하고 있어서 늦었다지만, 실제로는 손님을 집 안에 들여놔도 될 지에 대해 집사와 입씨름이 있었던 것이다. 집사는 노골적으로 가난한 집안에서 데려온 테오가 어디서 식객이라도 끌어온 거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고도 테오가 나타나기까지 다시 반시간 가량이 흘렀다. "테오!" 2층 홀과 연결된 계단 위에서 나타난 테오를 보고 '애니'가 반색을 하며 일어났다. 주위의 하녀나 하인들이 쭈뼛거리며 불편한 눈길을 보내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야아, 이게 얼마만이야? 나야, 옛 친구 애니! 많이 변했는데? 옷도 아주 근사하고 말이야. 우리가 몇 년 만에 만난 건지 기억나니?" "애니스탄 뵐프. 오랜만이다." 테오는 계단을 내려오며 주위의 눈길을 의식했다. 그래서인지 표정이니 테오에게 반가운 기색이 없었다. 친구와 악수를 나누고도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나 애니스탄은 달랐다. "자, 어서 가자! 네 방 구경시켜 줘! 이런 으리으리한 저택에 살고 있으니 분명 화려하고 좋은 것들을 쓰고 있겠지? 내가 너 만나려고 한 시간 반이나 기다린 것 알아? 여긴 정말 오기 힘든 곳이었다니까." "따라와." 짧게 한 마디를 남기고 돌아선 테오가 성큼성큼 2층으로 오르자 애니스탄도 따라갔다. 가면서도 그는 하인들을 향해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마치 부자 삼촌댁에 놀러온 꼬마처럼 흥분된 얼굴로 말이다. 그러나 테오의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자마자 둘의 태도는 돌변했다. "정말 잘 왔어." 그렇게 말하며 테오는 친구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둘은 남부식으로 친숙하게 뺨에 키스를 나누었다. 이곳 북부에서는 오래 전에 쓰지 않게 된 인사법이었다. 애니스탄은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과장된 활기는 사라지고 침착하고 신중한, 심지어 어른스런 얼굴을 한 그가 말했다. "그래, 무슨 일이 있기에 날 여기까지 불렀니? 어려운 일이라도 생겼니?" 어린 동생을 걱정하는 형 같은 목소리였다. 테오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런 걱정은 말고 일단 앉아. 피곤하지? 네가 그렇게 오래 기다린 건 분명 늙어서 심술밖에 안 남은 노친네가 방해를 했기 때문이겠지. 그 자는 내가 이 집의 동전 한 푼이라도 집어 갈까봐 내 뒤통수에서 눈을 떼지 않으니 말이야." 사이가 나쁜 집사의 태도를 신랄하게 일축한 테오는 친구에게 손짓하며 창가로 가 앉았다. 등나무로 짠 의자 두 개가 낮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놓여 있었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지 않니? 그럭저럭 12년이나 말이야." "너도 벌써 스물 셋이야." 애니스탄은 나이를 지적하는 걸로 하고 싶은 말을 우회적으로 대신했다. 테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징징 울던 여섯 살짜리 약혼녀가 몇 달 있으면 열 여덟 살이 되신단 말이야. 세월이 빠른 건지 내가 느린 건지 알 수가 없어. 어쨋든간 서로 속도가 맞지 않는 것만은 확실해." "설마 아직까지도 기약이 없는 건가?" "글쎄, 올핸 성립될 것도 같고." 둘이 말하고 있는 것은 물론 테오와 이브노아의 결혼이었다. 무척이나 미루고 또 미뤄진 결혼식이었다. 어쨌든 처음엔 여섯 살짜리와 결혼할 뻔한 테오였으니까. 그러나 결정적으로 한 녀석이 태어난 뒤로는……. "그래, 애니 넌 어때? 너한테 물을 안부도 마땅히 없다만." 작년에 하나 뿐인 가족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친구가 죽 혼자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테오는 조금 웃으며 덧붙였다. "너야말로 결혼이라도 하지 그래?" 애니스탄은 싱긋 미소했다. "장장 12년 간 약혼 상태인 친구를 보고 있자니 결혼에 대한 환상이 다 사라져 버리고 말았지." 둘은 마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시원스런 웃음소리 뒤로 3월에도 여전히 피우고 있는 장작이 탁탁거리며 탔다. 테오는 연한 금빛 머리에 튼튼한 턱과 쪽 고른 이를 가져서 마치 종마처럼 잘생긴 젊은이였다. 애니스탄은 조금 약한 느낌이었으나 엷은 갈대빛 머리카락으로 덮인 이마가 조각처럼 매끈한데다 속눈썹 긴 눈매도 무척 우아했다. 줄 다 키가 꽤 커서 테이블을 피해 뻗은 다리가 맞닿을 정도였다. 테오는 장난을 걸고 싶은 것처럼 친구의 발끝을 슬쩍 밀고 있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공부는 어때?" 애니스탄은 방금 멀리서 온 것처럼 가장했지만 실은 한 달 가까이 켈티카에 머무르고 있었다. 올해 초에 네냐플 학원을 졸업한 뒤 기숙사에 남아있을 수 없게 되어서 일단 어떤 마법사의 임시 조수가 되어 숙식을 해결하는 중이었다. 다니던 학원에 마법 보조 교사 자리를 신청해 봤는데 잘 되면 다시 돌아가 공부에 전념할 작정이었다. 애니스탄은 가난했고 아버지도 없었기 때문에 언제나 학비나 생활비가 넉넉하지 못했다. 그나마 그 모자라는 돈을 전액 대준 사람은 다름 아닌 테오였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애니스탄이 네냐플과 같은 명문 학원에 들어간 것도 테오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다행히도 애니스탄은 성적이 좋았다. 마법에 있어서는 수재에 가까웠다. 마음만 먹는다면 적당히 어느 귀족의 밑에 들어가 생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 테지만 아직은 공부하고 싶다며 네냐플에 자리가 날 때까지 불안정한 생활을 견디려 한다고 말했다. "졸업 성적이 그럭저럭 나쁘지 않아서 다음 달에 전임자가 나가면 보조교사 자리를 얻는 것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다 네 덕택이지." "뭘. 장학금도 몇 번이나 받았잖아. 친구가 빵값 정도 댄 것 갖고 뭘 그래. 나중에 협력해 나갈 친구에 대한 사소한 투자지." 그렇게 말할 때 테오의 눈빛은 아주 약간 오만했지만 애니스탄은 신경쓰지 않았다. 애니스탄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테오의 곁에 있었기에 그의 학점이나 나쁜 버릇 같은 것에는 일찌감치 익숙해져버렸다. 부드러운 성품 탓인지, 그는 모난 데가 있는 테오에게서 오히려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생활 보조를 받고 있는 것은 자기 쪽인데 자신이 테오를 돌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니 만큼 이렇게 엄청난 집안에 들어와 적응하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테오가 늘 걱정스러웠다. 어려서부터 자손님 강하던 테오가 집사 같은 자의 심술궂은 눈빛을 받으면서도 잘 견뎌내고 있다는 것이 때론 기적처럼 느껴졌다. "오늘 널 오라고 한 건 말이야, 부탁이 있어서야." 테오가 드디어 본론을 꺼내자 애니스탄이 차분한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 애니스탄은 좀 전처럼 일부러 쾌활함을 가장할 때를 빼면 감정이 얼굴에 잘 드러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거 받아." 테오가 테이블 위에 놓은 것은 누르스름한 봉투였다. "편지야?" 애니스탄이 집어들자 테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편지는 아니고, 지금 뜯어보지 말고 네 숙소로 가서 살펴봐. 그런 다음에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음에 만날 때 말해 줘. 그 땐 내가 너를 찾아갈 거야. 잠정적으로 다음 달 정도로 생각해 둬." 봉투는 꽤 두툼했다. 애니스탄은 고개를 끄덕이며 봉투를 품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여기 너무 오래 있지 않는 편이 좋겠지?" 테오는 고개를 그덕였다. "맞아. 이제 그만 나가자." 둘은 일어나 2층 홀로 나갔다. 마침 지나가는 하인이 한 명도 없어서 둘 뿐이었다. 테오는 문득 생각해 내고서 말했다. "맞아. 지금 다들 저녁에 있을 파티를 준비하려고 1층에 갔구나. 잘 됐다. 잠깐 이리로 와 봐. 보여주고 싶은 게 있으니까." 2층 홀 동쪽에는 두 건물을 잇는 커다란 회랑 입구가 있었다. 창이 없어 빛이 잘 들지 않는 그곳을 차지한 것은 커다란 초상화들, 그리고 흉상들이었다. 그런 것들이 회랑 좌우를 메우며 맞은편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자, 이리 와서 이 그림 좀 봐." 애니스탄은 테오가 가리키는 대로 그림 앞에 가 섰다. 서른 중반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의 반신상이었는데 젊은 나이인데도 은회색으로 물든 머리가 특이해 보였다. 검은 눈동자와 광대뼈가 거의 없는 뺨, 조금 긴 턱을 가진, 경쾌한 인상의 사내를 올려다보던 애니스탄이 불쑥 말했다. "콧수염이 멋지네." "그것말고, 누군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그림은 회랑의 맨 첫머리에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알겠다는 듯 애니스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 아르님 공작이구나." "그래. 이카본 폰 아르님 공작이지. 이집안의 첫 공작이자 첫 번째 데모닉." "아." 애니스탄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림 속 남자는 가늘고 또렷한, 심미적인 눈썹의 소유자였다. 눈은 크지 않은 대신 깊게 반짝거렸다. 부드러운 표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확연히 치켜 올라간 눈초리는 그를 영리하게도, 또는 까다롭게도 보이게 만들었다. 아르님 집안에 속칭 '데모닉'이라고 불리는 천재의 혈통이 이어진다는 것은 애니스탄도 들어 알고 있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이니 그가 안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누구인지 알고 보기 때문일까. 애니스탄은 그가 정말 데모닉답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 자신도 천재성이 필요한 학문을 공부하는 까닭에 조금은 동경하는 마음마저 생겼다. 데모닉, 악마가 운명을 갖는 대신 끝없는 능력을 빌려 주었다고 말해지는 천재 말이다. 그가 썼다는 기하학 책이 네냐플 학원에도 있다는 게 기억났다. 그 책은 무척 쉬웠다. 기이할 정도로 쉬워서 갓 입학한 학생들이 가장 일찍 일게 되는 참고 도서이기도 했다. 나중에야 애니스탄은 어려운 기하를 그 정도로 아름답게 설명하는 능력이 보통 사람에겐 주어지지 않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 안의 수식들은 흡사 시(詩) 같았다. 옆에서 테오의 목소리가 들려와 애니스탄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래. 이 분만은 확실히 훌륭했지. 자, 그럼 저기 저 앞에 있는 그림으로 가자." 테오는 대여섯 장의 그림을 지나쳐 어느 초상화 앞에서 다시 멈췄다. 애니스탄이 먼저 물었다. "누구지?" "갈리페르 폰 아르님. 이카본 이후로 네 대만에 나타난 데모닉이지." 애니스탄은 조금 놀라며 말했다. "다음 대까지 간격이 생각보다 길구나. 그런데 갈리페르 폰 아르님이라면 필멸의 땅(Mortal Land)을 개척하겠다고 뛰어들었던 그 사람?" "그래. 그 미친놈 말야. 종내는 졸아보지도 않았지." 테오는 비꼬듯 한 마디 던지고는 다시 여러 장의 그림을 거쳐 새로운 초상화 앞으로 갔다. "자, 이 사람은 조르피 폰 아르님, 데모닉 조프리, 넌 잘 모를 테지만 화성악 책을 쓰고 10현 리라(lyre)를 만든 사람. 그렇지만 이 자는 결국 미쳐 버렸어. 미친 짓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돌아버려서 죽을 때까지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못했단 말이야. 이 그림을 떼자는 얘기도 있긴 하더라만." "……." 테오는 다음 초상화를 찾아내어 앞에 섰다. "이 사람의 존재가 모든 데모닉 조프리의 초상화를 떼지 못하게 하는 이유지. 이 사람은 데모닉 아라벨라. 보다시피 여자인데 열 다섯 살에 발작해서 대략 3년 주기로 광인과 정상인 사이를 오갔어. 해낸 일은 훌륭하지. 여기 있는 그림들 중 절반 정도는 그녀가 그린 것들이야. 다른 그림들은 옛 왕궁에 가면 많이 볼 수 있지. 앞의 초상화를 뗀다면 이것도 떼어야 되겠지? 그런데 떼기엔 너무 미인이지 않아?" 그런 식으로 두어 명을 더 거쳐 그들은 마지막 초상화 앞까지 갔다. 정확히는 마지막에서 세 번째 그림이었다. 뜻밖으로 그것은 열 살이 채 안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의 초상화였다. "데모닉 히스파니에." 애니스탄은 한동안 그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르님 집안에는 검은머리가 많았지만 이 아이만은 이레적인 금발과 벽안의 소유자였다. 금빛 고수머리에 새파란 눈, 백랍 같은 얼굴에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입술까지, 지금껏 보아온 어느 그림보다도 환하디 환한 아이였다. "무척 예쁜 앤데. 아, 네 처남 될 사람이 이 아이야?" 테오의 입가에 시니컬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냐. 그 앤 아직 어려서 이런 데 그림을 걸지 않아. 그리고 개도 아르님 가문의 전통대로 답답한 까만 머리라고." "그럼 이 사람은 몇 살인데 여기 걸린 거야?" "살아 있다면 예순이 넘은 노인네지." "뭐?" 그 얘긴 마치 질 나쁜 거짓말 같았다. 이런 아이가 늙어서 예순 살이 될 수 있다니. 테오는 애니스탄의 마음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웃었다. "하지만 사실인걸. 왜 어른이 된 모습이 없는가 했더니 젊어서 집을 나갈 때 다 불태워버렸다는군. 데모닉 이카본 이후로 그나마 가문에 기여했던 유일한 사람이지만 성격이 무척 까다로웠던 모양이야. 어쨌든 현재는 연락도 되지 않지. 다른 데모닉들이 그렇듯 일찌감치 죽었을지도 모르고, 그런데 어때. 참 우습지 않아? 악마가 준 재능을 타고났다는 자들의 허망한 말로가." 애니스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테오를 바라봤다. 그가 짐작한 것과 같은 말이 테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내가 이걸 왜 보여줬을 것 같아?" 애니스탄은 조금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네 처남 될 사람도 이들과 별다를 것 없는 운명일 거라고 말하고 싶은건가?" 테오는 미소를 지었다. 그림으로 가득 찬 이곳에서, 그림의 일부가 된 양. 그림 같은 미소였다. "데모닉이 생각보다 무척 적지? 그게 말이야, 데모닉의 평균 수명이 몇 살인지 알아? 열 다섯 살이라더군. 이곳에 초상화가 없는 나머지는 다 열 다섯을 못 넘겼지. 일찍 익는 열매는 대부분 낙과(落果)라던가?" 애니스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테오의 얼굴을 조금 안타까운 듯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회랑에서 나와 홀을 가로지르는 동안, 애니스탄은 그가 봤다고 착각한 사람을 정말로 보게 되었다. 가벼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계단 난간 틈새로 조그마한 소년의 모습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윽고 소영은 올라와 계단 머리에 섰다. 그 아이는 테오가 말한 대로 까만 머리에 까만 눈을 갖고 있었지만 답답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림 속 아이만큼이나 하얀 얼굴에 눈이 반짝반짝해서 핏줄이란 게 놀랍구나 생각될 정도였다. 이제 열 살이 됐다고 들었는데, 일곱 살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키도 작고 몸도 갸냘픈 꼬마였다. 그 애는 애니스탄을 흘끗 보더니 테오에게 물었다. "테오 형, 친구가 왔어?" "아… 그래." 테오는 별로 내켜하지 않는 눈치였으나 이쯤 된 이상 서로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애니스탄은 어려워하지 않고 부드럽게 웃었다. "애니스탄 뵐프라고 해. 하지만 네 매형될 사람은 곧잘 '애니'라고 부르지." 조슈아는 생긋 미소지었다. 애니스탄은 그 미소가 예의상 짓는 거라고 믿을 수 없었다. "전 조슈아예요. 저도 애니 형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아, 물론." 가까이에서 보니 조슈아의 눈썹은 첫 번째 공작 데모닉 이카본을 닮아 있었다. 애니스탄은 테오가 이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분명 첫 눈에 호감 가는 아이이긴 했다. 하지만 겉보기와는 다르다. 본질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맘 편히 대할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한참 동안 조슈아를 보고 있던 애니스탄은 문득 이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무척 영리하다고 들었어. 내게 너 같은 재능이 있다면 무엇도 부럽지 않을 텐데." 애니스탄이 보는 가운데 조슈아의 얼굴에서 아이다운 미소가 사르르 지워졌다. "사람을 만드는 창조자가 있다면 그는 공평해요. 전 뭘 해도 즐겁지 않거든요. 재능뿐이고, 열정이 없으니까." "……." "그럼 또 놀러오세요." 조슈아는 손을 흔들어 보인 뒤 그들이 방금 나온 회랑으로 뛰어들어갔다. 가벼운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애니스탄은 어쩐지 눈길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곁에서 테오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겉모양에 속으면 곤란하지. 저 앤 내 생에 가장 큰 걸림돌로 태어난 놈이거든." 5. 파란 지붕 집 "난 그 아이에게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네, 그 애를 실패하게 하고, 화나게 하고 쓴맛을 보게 하고 싶네." 십여 년이나 미뤄졌던 결혼식이 그 해 5월로 확정되었을 깨 이브노아는 결혼이 뭔지도 모르면서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했다. 약혼자 테오도 기뻐하는 것 같았다. 물론 아르님 가문 사람들은 두 달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결혼식은 사치스런 것을 싫어하는 아르님 가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성대하게 치러질 예정이었다. 신부를 위해 값진 드레스들이 잔뜩 만들어졌고 당일에 쓸 신랑의 예복만도 서너 가지나 되었다. 그밖에도 부부를 위한 새 마차와 결혼식에 쓸 꽃이 천여 송이나 주문됐고, 악단 초청은 물론, 하객들에게 줄 선물까지 준비되었다. 이브노아의 행복은 10미터가 넘는 레이스 면사포가 만들어져 왔을 때 절정에 달했다. 몇 번이나 얼굴을 묻어보며 떨어지지 않으려 해서 테오까지 쫓아와 간신히 떼어놨다. 켈티카의 보석 세공인들도 간만에 줄 잇는 최고급 주문에 신이 났다. 켈티카를 공화국 군대가 장악하고부터 내려졌던 사치 금지령이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된 후 가장 많은 보석이 주문된 결혼식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혼식 당일, 초대된 수많은 하객들은 모두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사람들은 아름답고 행복한 신부, 그리고 잘생기고 총명해 보이는 신랑의 모습을 보며 혼주(婚主)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저 신랑도 앞으로 고생길이 훤하구먼." "돈푼이나 보고 온 게 번한데 고생이랄 걸 또 무에 있겠소? 다 제가 자초한 게지." "그게 아니지. 알다시피 사정이 달라졌잖아? 본래 저런 자리에 돈만 보고 온 건 아니었을 텐데. 산통 다 깨진 것 아뇨?" "하지만 아르님 가문도 너무한 거 아닐까요. 저런 딸을 결혼시킨다는 건 순전히 부모욕심이잖아요? 안주인 노릇은 커녕 어린애나 나을 수 있을지 모를 노릇인데. 꽃처럼 예쁘면 뭘 해." "못 낳는 편이 집안을 위해서나 제 동생을 위해서도 좋을걸. 모르긴 해도 ……." "그만두지. 이제 와서 그런 소릴."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듣지 못하고, 듣는다 해도 이해하지 못할 이브노아는 여전히 행복했다. 둘은 어려서부터 남매, 또는 소꿉동무나 다름없이 지냈으니 불만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12년 전, 테오가 처음 아르님 가문에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테오가 데릴사위가 되어 재산은 물론 작위마저 물려받을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브노아의 동생, 일명 '기적의 아이'인 조슈아가 태어난 뒤로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이 보기에 이 결혼식은 빈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래서 더 화려하게 꾸민 거라고들 수군했다. 어쨌든 사람들의 축복인지 눈총인지 모를 배웅 속에서 갓 결혼한 젊은 부부는 대륙 동남부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섬으로 떠났다. 대륙 각국의 유력한 귀족들과 부자들이 별장 하나씩은 갖고 있다는 하이아칸 왕국의 휴양지들을 여행하고, 아르님 가문의 별장이 있는 블루 코럴 섬에서 한동안 지낼 예정이었다. 돌아올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으나 다들 반 년 정도는 먼 곳에서 지내는 편이 나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실제로 아들 부부가 아노마라드의 수도 켈티카로 돌아온 것은 2년 뒤, 그것도 어린아이까지 하나 낳은 후였다. 그 여러 해 동안 공식적으로는 단 한 차례의 방문도 없었다. 딸이라면 죽고는 못살 듯 끼고 돌던 아르님 부인이 있는데도 그랬다. 어쩌면 그들 모두는 '돈밖에 바랄 것이 없는 정신지체 소녀와의 결혼'에 대한 소문을 피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결혼식 다음날, 조슈아는 아노마라드 중부 시골인 코츠볼트로 가는 마차 안에 실려 있었다. 자신이 짐짝 같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다지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무척 간단한 작별이었다고 기억했다. 명목상의 휴가를 떠나는 것이다. 부모님과 한 차례씩의 포옹, 일부러 별 것 아닌 듯한 배웅과 함께 떠나온 집의 모습이 가면서도 한동안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조슈아는 자신이 적어도 한 해 이상 돌아오지 못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겨우내 준비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어렵사리 통행증을 마련하여 누나 부부를 먼 하이아칸으로 보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조슈아도 먼 친척의 집에 여름 휴가를 보내러 가는 걸로 되어 있었지만 여름이 끝나도 돌아갈 가능성은 없었다. 곧 닥칠 위기의 상황에서 인질이 될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먼 곳으로 숨기고자 하는 것이 아버지의 진짜 목적이었다. 그들을 켈티카 밖으로 보내기 위해 적지 않은 액수의 뇌물이 필요했다. 불편한 꼴이 된 것에 대해 누구를 탓할 입장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이번 계획은 결국 조슈아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었으니까. 그 계획을 말할 때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이제부터 갈 코츠볼트의 시골에서는 조슈아의 작은 할아버지가 맞아 주기로 되어 있었다. 동행한 사람도 작은 할아버지의 비서라는 남자였다. 아버지가 그를 신뢰했기에 조슈아로서는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석연치 않은 느낌만은 남았다.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는 작은 할아버지와 함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적어도 1년을 살아야 한다……. "코츠볼트는 양을 많이 키우는 시골이지요. 닭이랑 개도 키우고요. 근사한 목장 저택에서 지내시게 될 겁니다. 근방에선 밀도 좀 심는 모양이에요. 시골 사람들은 마음씨가 좋아요. 텃밭에 야채 키우는 것 보신 일 있으십니까?" "……." 시골 사람이라고 하니까 농부의 아들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토미손이 언뜻 떠올랐다가 지워졌다. "못 보신 모양이군요. 그쪽은 날씨가 좋은 곳이라 뭘 심어도 잘 자라거든요. 하루 종일 풀밭에서 뒹굴며 아무 것도 안 하실 수도 있어요. 도련님은 그동안 공부에 지치셨지요?" 할아버지의 비서인 쇼라는 사람은 조슈아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지만, 그래도 위로하려 애쓴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불안과 신장으로 시신이 피로해진 조슈아는 그의 말에 장단을 맞출 기분이 아니었다. 조슈아가 대답이 없자, 이윽고 쇼도 말을 하지 않게 되고 말았다. 덕택에 여행은 무척 지루해졌다. 그 후로 기껏 한 이야기라고 해봤자 작은 할아버지에 대한 것인데, 쇼는 그 분이 무척 훌륭하고, 훌륭하고, 또 훌륭하다는 이야기밖에 하지 않았다. 나중에 조슈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그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도련님은 할아버지와 닮으셨네요. 특히 눈매가 비슷합니다요." 목적지에 도착하기가지는 사흘 정도 걸렸다. 사흘째 되는 날 마차는 밀바프라는 마을에 들어섰다. 낯선 풍경의 연속이었기에 조슈아는 좀 지쳐서 마차 안에서 졸고 있었다. 밀바프를 지나 좀더 달리다가 이윽고 마차가 멈추었다. 조슈아는 영문을 몰라 가만히 있는데 쇼가 먼저 문을 열고 내리더니 돌아보며 말했다. "자, 다 왔습니다. 여기서 내리십시오." 내리라기에 일단 내렸지만 조슈아는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 댁에 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딜 봐도 집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조슈아가 까닭을 알아내기 위해 생각을 짜내고 있는 동안 쇼는 마차에서 조슈아의 조그마한 손가방을 꺼내어 바닥에 놓더니 말했다. "저는 주인 어른 댁에 허락 없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이만 가겠습니다. 그럼 즐겁게 지내세요." 물론 조슈아는 깜짝 놀랐다. "잠깐만요. 이런 허허벌판에 혼자 남겨두고 가시면 어떡해요?" "허허벌판이라굽쇼?" 쇼는 주위를 휙 둘러보더니 말귀 잘 못 알아듣는 늙은이처럼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말했다. "그런가?" "집은 어디 있죠?" "저기 안보이십니까?" 조슈아는 쇼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뺐다. 뭔가 있기는 있었다. 정말로, 있긴 있었지만 장님이 아닌 이상 그 집은 반쯤 허물어진 농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최대한 관대하게 생각해봐도 문지기 집 정도가 아닐까 싶었다. 그가 찾는 목장 저택일 리가 없었다. "저거말고 할아버지 댁은 어디 있죠? 제가 가야 될 곳 말예요." "도련님 눈엔 할아버지 댁이 안보이십니까요? 저기 멀쩡히 서 있는뎁쇼." "내 눈에 보이는 건 파란 지붕의……." "아, 그 파란 지붕입니다.' "……." 조슈아가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기분으로 파란 지붕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쇼는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깜짝 놀란 조슈아가 돌아봤다. "잠깐 기다려요! 좀더 설명이 필요해요!" 쇼는 싱글싱글 웃으며 모자를 흔들어 보일 뿐이었다. 붙잡을 여유도 주지 않고 마차는 떠났다. "이것 봐요! 기다려요!" 그러나 남은 것은 흙먼지뿐이었다. 조슈아는 손가방을 집어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상황을 판단하려 하자 한 가지 외침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길 잃은 어린애가 된 거잖아! 마차가 조그마한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거기 서 있던 조슈아는 이윽고 꿈에서 깨어나려는 것처럼 몇 번인가 고개를 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기대처럼 땀을 흘리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주위는 푸른 풀이다. 파란 지붕말고 보이는 거라곤 풀빛 벌판과 하늘뿐이었다. 날씨는 좋았다. 근처에서 날벌레가 윙윙대는 소리가 들려와 조슈아가 온 곳이 완전히 낯선 곳이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시켰다. 켈티카는 집들로 빽빽이 들어찬 도시라 이곳처럼 사방천지로 뻗은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아버지는 이렇게 될 줄 알고 계셨던 건가, 아니면 모르고 속으신 건가? 막막한 노릇이지만 일단은 저 파란 지붕 집으로 가보는 것이 순서였다. 조슈아는 손가방을 집어들고, 백여 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길을 터덜터덜 걸어갔다. 가까이 갈수록 이 파란 지붕 농가란 곳은 생각보다 훨씬 가관이었다. 집은 꽤 컸지만 문제의 파란 지붕은 장대비라도 한바탕 오면 바로 폭삭 내려앉을 것처럼 어설펐다. ㄷ자형 단층인데 입구 앞에는 물이 마른 지 오래된, 마치 선사시대의 유적처럼 생긴 우물이 있었다. 긴장 탓에 목이 타서 우물속을 들여다봤지만 나온 것이라고는 날파리 한 떼뿐이었다. 슬슬 마당이 펼쳐졌다. 오랫동안 쓸지 않은 것처럼 잔 돌맹이와 나뭇잎같은 것이 흩어져 있고, 텃밭처럼 보이는 곳에는 한때 채소였을 지도 모르는 말라비틀어진 풀들이 꼬불거렸다. 한쪽에 쌓인 농기구 같은 것은 조슈아의 상식으로 무엇에 쓰는 건지 알기 어려웠다. 새똥 묻은 창턱과 부서진 풍향계, 열린 창문, 열린 문…….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꿈속의 집처럼 낯선데 어째서 깨지 않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문은 열려 있었지만 들어가기가 망설여져서 괜스레 벽을 쓰다듬어 봤다. 노르스름한 석회질 돌을 쌓아 만든 연노랑 벽은 한 번도 만져본 일이 없는 까칠한 촉감이었다. 손끝에 와 닿는 선명한 감각에 조슈아는 자신과 집 사이에 가로놓인 구체적 경계를 느낀 듯 흠칫 놀랐다. 한 번도 머릿속에 그려본 일이 없다 해도, 존재조차 몰랐다 해도, 이 낡은 집은 실재하는 장소였다. 조슈아가 무어라 생각하든 집은 없어지지 않았다. 꿈이 아니니 스스로 경계를 넘는 수밖에 없었다. 조슈아는 입을 열어 불렀다. "할아버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버지나 어머니 모두 작은 할아버지라는 사람에 재해 한 번도 얘기한 일이 없었다. 쇼 아저씨가 할아버지 얼굴이 조슈아와 비슷하다고 했지만 그것만으로 친근감을 느낄 순 없는 일이었다. 또한 최대한 관대하게 평가해도 자신이 사교적인 성격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잘 지낼 수 있을까? 대답이 없자 조슈아는 조심스레 다시 불렀다. "할아버지…. 저 조슈아예요." 할아버지가 조슈아라는 이름은 알까? "아무도 안 계세요?" 여전히 답은 없었다. 결국 조슈아는 예정된 나쁜 결말을 확인하러 가는 사람처럼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벽 곳곳에 난 창 덧문이 다 열려 있어서 내부는 다행히 환했다. 조슈아의 상식으로는 이 위치에 응접실이 있어야 할 것 같았지만 그 자리는 그냥 텅 빈 공간에 불과했다. 그것도 앞 뒤 좌우로 뻥 뚫린. 왼쪽은 엄청나게 큰 부엌과 이어졌다. 부엌 너머로 다시 열린 문이 보였기에 조슈아는 그쪽으로 가 봤다. 그러나 부엌에는 최근에 음식을 만들어 먹은 흔적이 전혀 없었다. 쥐나 새들이 음식 찌꺼기까지 모조리 처리한 모양이었다. 화덕에도 불씨 하나 없었다. 방치된 지 열흘은 넘은 것 같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라는 생각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지만 일단 끝가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다음 방과 그 다음 방 모두 빈 침대나 빈 옷걸이가 있을 뿐, 사람이나 옷은 없었다. 그 뒤는 창고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무엇이 있을지도 모르는 터에 창고 같은 곳으로 내려가고 싶진 않았다. 조슈아는 다시 처음의 용도 모를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번엔 오른쪽으로 가 보기로 했다. 한 개의 방을 거치니 집 뒤뜰 쪽으로 단층 테라스가 달린 방이 나타났다. 언뜻 살펴보고 다음 방도 들여다봤지만 여전히 사람의 그림자는 없었다. 조슈아는 막막한 심정이 되어 눈에 힘을 주고 마지막 방 구석구석을 노려보다시피 했다. 그러나 텅 빈 벽에서 사람이 나올 리 없었다. 정말로 미아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무도 없으나 울고 싶다면 울어도 좋았겠지만 조슈아는 그러지 않았다. 어리석은 어린애처럼 고작 길을 잃고서 울음을 터뜨린다는 것이 유치한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참고 있자니 쓸모 없는 자손심만 무지하게 세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이번엔 우스웠지만, 이런 상황에서 웃어 봤자 머리가 이상한 사람이 될 분이란 생각에 그것도 눌러 참았다. 낯선 사람과 오면서 막연한 불안감이 들긴 했었다. 하긴, 혹시라도 이럴줄 알았다면 여기까지 오는 길을 잘 봐뒀어야 했다. 사흘이나 왔으니 켈티카는 이미 까마득히 먼 곳에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소가방 안에는 기껏해야 그림 도구와 빈 공책 정도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조슈아에게 돈을 전혀 주지 않았다. 결국 조슈아는 집을 나가기로 했다. 그런데 테라스가 있는 방으로 들어 왔을 때, 무언가를 빠뜨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테라스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삐그덕……. 햇빛 때문에 기둥에 매달린 그물 뭉치처럼 보였던 것은 다름 아닌 그물침대였다. 그리고 그제야 사람 같은 윤곽이 드러누워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자세히 보았다. 분명히 사람이었다!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 꼼짝도 않는 걸로 보아 낮잠이라도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이런 이상한 곳에 끌어들여 자신을 놀렸다. 한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이니 대뜸 어떻게 된 거냐고 따져 물을 수는 없었다. 조슈아는 깰 때까지 기다릴까 하다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어 조심조심 다가가 들여다봤다. 그리고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는 한 소년을 발견했던 것이다. "넌 누구야?" 잠든 사람으로부터 대답은 없었다. 살펴보니 정말이지 태평한 모습이었다. 비스듬히 웅크렸지만 편안하게 내뻗은 다리와, 헝클어진 머리와, 특히 입가에 남은 침 자국이 그랬다. 게다가 자기 전에 보던 것인지 아니면 햇빛이라도 막아 보려고 얼굴에 덮었다가 떨어진 것인지 모르지만 책 한 권도 소년과 함께 뒹굴고 있었다. 페이지 모서리가 눌려 찌그러져서 잘 접히지도 않는 너저분한 책이었다. 어쨌든 그 녀석은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되고 싶다해도 50년은 기다려야 할 놈이었다. 다시 말해, 소년은 조슈아와 비슷한 또래였다. 조슈아는 소년의 한가로운 모습에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자신이 화를 낸 것이 굉장히 오랜만이란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조슈아는 소년을 흔들어 깨웠다. "……뭐야." 눈을 뜨지도 않고 소년이 말했다. 무척 귀찮은 듯한 목소리였지만 확실히 잠은 깬 것 같았다. "넌 누구지?" 그런데 실로 어이없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난 귀찮은 놈이야." 그러더니 눈도 떠보지 않고 도로 머리를 어깻죽지에 묻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넌 누구냐니까!" "귀찮아." "뭐가 귀찮다는 거야!" 소년은 한쪽 눈만 떴다. 두 눈 다 뜨기는 너무 귀찮다는 것처럼. "너도 귀찮구나." 그러더니 도로 감아 버렸다. 조슈아가 말문이 막혀 있는 사이 그는 순식간에 코까지 골기 시작했다.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 조슈아는 당황한 나머지 무슨 행동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지금까지 조슈아를 처음 본 사람들은 지나치게 경계하거나, 지나치게 달라붙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런 완벽한 무시는 받아본 기억이 없었다. 다른 때였다면 그냥 무시하고 물러났을 텐데, 지금은 입장이 달랐다. 남을 귀찮게 하는 것은 조금도 적성에 맞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조슈아는 다시 소년의 어깨를 흔들었다. "으음… 잠을 깨운 값은 5엘소로, 뭣하면 후불로……." "뭐?" "후불로 해준다니까… 그것 참, 지금은 내버려두란 말이야!" 소년이 소리를 버럭 지르는 순간, 조슈아도 확실히 발근했다. 여기가 작은 할아버지 댁이 맞다면 저 정체 모를 녀석은 빈집을 점거한 뻔뻔스런 놈임에 틀림없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조슈아는 그물 침대 테두리를 당겨 쥐고는 있는 힘껏 한 바퀴 뒤집는 것으로 녀석을 그물 안에 가둬버렸다. 소년은 눈을 번쩍 뜨더니 고함을 질렀다. "내 안경!" 안경이 어디 있었지? 조슈아가 어찌된 건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그 녀석의 엉덩이 밑에서 찌그러진 안경 비슷한 것이 보였다. 아마 그물 침대 한쪽 끝에 걸려 있었던 모양이었다. 조슈아가 손으로 가리켰다. "저거야?" 소년은 곁눈질로 안경을 보려고 노력했다. 이윽고 뭐가 보이긴 한 모양이었다. "젠장, 또 부러졌네! 이게 다 네 녀석 때문이야! 남의 잠은 왜 깨우고 난리야, 이 말라비틀어진 닭뼈 같은 자식아!" "닭… 뭐?" 평생 욕이라고는 들어보지 못한 조슈아는 당황해서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상대 소년은 신경도 쓰지 않고 그물 안에서 몸을 비틀려고 애쓰면서 소리질렀다. "뭘 해? 얼른 안경 좀 꺼내봐!" 어쨌든 일단 안경을 끄집어냈다. 안경다리가 비틀려 있어서 당장 다시 쓰기는 어려울 듯싶었다. 이건 자기 잘못이었으므로 조슈아는 헷갈리면서도 일단 사과했다. "안경 부서진 건 미안하지만… 그건 내가 새로 사줄 테니까……." "너 같은 꼬마가 무슨 돈이 있어서 안경을 사주냐?" 자기도 꼬마인 주제에 애들 장난 용서해 주는 어른처럼 말한 소년은 곧 그물에 걸린 생선처럼 몸을 한 번 비틀어 보더니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안경이고 뭐고, 일단 풀어달란 말이야!" 말려들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 조슈아도 마주 소리질렀다. "안경 값은 내가 물어준다니까! 그러니까 네가 누군지나 말해! 왜 남의 집에 들어와 있는 거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너야말로 왠 참견이야! 여긴 너희 집이 아니잖아!" 설명하자니 모호했지만, 어쨌든 한 번 소리를 질렀으니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난… 이 집 주인의 손자야!" "손자? 무슨 시덥잖은 수작이야? 부인도 자식도 없는 노인네한테 무슨 손자가 있어!" 조슈아는 이 집 주인이 노인이란 걸 눈치채고 마음 속으로 조금 안도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네가 모르는 사람이라고 세상에 없는 건 아냐. 우겨대지 말고 네가 누군지부터 밝혀." "일단 이것부터 똑바로 돌려놓아야 얘길 하든 뭘 하든 하지! 넌 거꾸로 매달린 놈하고 얘기하는 게 익숙하냐?" 상대가 전혀 수그러들지 않는 것을 본 조슈아는 들은 채도 하지 않고 그 몸을 한 번 더 뒤집어 아예 꽁꽁 묶어버렸다. 그렇게 하면서 자신이 스스로 알던 것과는 좀 다른 행동을 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얘기할 기분 나지?" "으음……." 소년은 그물눈 사이로 조슈아를 노려보려 애쓰다가 생각을 고친 듯 입을 열었다. "그 노인네가 정말로 너희 할아버지란 말이냐? 그런데 그 노인네는 이집 비운 지 오래 됐는데." 짐작하던 일이었지만 조슈아는 눈썹을 찌푸리며 다시 한 번 물었다. "여기 없다고?" "글쎄, 그에 대해 내가 뭔가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네 녀석이 이걸 푼 다음에 말해줄 생각이야." 어쩌면 저렇게 얄미울 정도로 자신만만한지, 조슈아는 한층 더 기분이 상해 쏘아붙였다. "그런 건 됐으니 네가 누군지나 말해." "나? 난 그냥 이 동네 사는 놈이야." "그런데 왜 여기 들어와 있는 거야!" "일단 풀고 얘기하자는 말은 귓등으로 들었냐!" 그물 틈에 낀 입으로 잘도 소리치는 녀석이었다. 조슈아도 나름대로 화가 나서 대답 없이 눈만 크게 뜨고 소년을 노려봤다. 그 상태가 잠시 지속되자 역시 불리한 건 불편한 자세로 묶여 있는 소년 쪽이었다. "네가 편안히 낮잠을 자다가 갑자기 나타난 사람한테 꽁꽁 묶어서 매달린 채 심문을 당하게 됐다고 생각해 봐. 얼마나 억울하고 황당한 일이겠냐? 이대로 있다간 난 온 몸에 쥐가 나서 괴로워할 거야. 그물이 몸에 파고들어 정신을 잃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네 녀석 질문에 대답도 해 주지 못하게 죌걸." 하지만 조슈아라고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럼 너는 처음으로 할아버지 댁에 왔는데 할아버지는 간 곳이 없고, 텅빈 집에 모르는 사람이 와서 잠을 자고 있다면 어떻겠어? 게다가 그 사람은 묻는 말에 대답도 않고 계속 잠이나 자려고 하고 말이야. 도둑인지 아닌지 알게 뭐겠어? 네가 할아버지를 어디에 가둬놓고 능청을 떠는 건지 뭔지 알수 있을 것 같아? 그물에 불을 붙여버리기 전에 빨리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그런데 뜻밖으로 소년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는 한찬 동안이나 킬킬대며 웃더니 말했다. "불을 피운다니까 무척 무서운데 말이지. 이 그물 침대랑 테라스는 네 할아버지의 소유물이란 말야. 그런걸 태워버려서 좋은 일은 없을 거고… 그리고 가둬놨다고? 나 참, 너만 황당한 게 아니야. 내 입장에도 좀 서 보지 그래.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은데. 난 말야, 어제오늘 이 집에 드나든 게 아냐! 노인네하고도 잘 아는 사이고, 그런데 친구 집에서 기분 좋게 낮잠을 자는 중에, 소문으로도 못 들어본 손자 녀석이 나타나서 갑자기 악을 쓰고 권리를 주장하는데 내가 기분이 유쾌할 것 같냐?" 궤변 같기도 한 말을 차근차근 듣던 조슈아의 귀에 '친구'라는 한 단어가 걸렸다. "친구?" "그래. 친구! 난 네 할아버지의 친구란 말야! 이 집에 맘데로 드나들어도 좋다고 허락한 건 그 노인네 본인이야. 그런데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되냐! 미안하다고 사과는 못할 망정. 오해를 풀어주겠다는 사람을 꽁꽁 묶어놓고 협박까지 하는 너 같은 망나니야말로 묶어놓고 엉덩이를 때려야 돼!" "……." 조슈아는 할 말을 잊어버렸다. 자기와 마찬가지로 조그마한 녀석이 할아버지를 친구라고 하는 것도 어이없거니와, 그것보다 온갖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저렇게 끝까지 당당한 것인지, 정말 예측 불허의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껏 만나온 사람들은 다들 조슈아 앞에서 일단 심리적으로 주눅이 들어 공격하기 전에 자기 방어부터 하려고 들었기에, 조슈아는 제대로 된 말다툼을 해본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 소년은 자기 논리가 망가질까 걱정하기는 커녕 자기가 당연히 옳다는 것처럼 모든 말이 거침없었다. 아, 그렇다. 조슈아에 대해 사전 지식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 생각을 해내는 순간 조슈아는 갑자기 지금의 상황을 잊어버릴 정도로 기분이 환해졌다. 저 소년은 조슈아가 데모닉이란 걸 모르는 것이다. 직접 말해주지 않는 한 절대로! 그러고 나니 상대방에 대해서도 말할 나위 없이 너그러워졌다. 조슈아는 미소까지 지으며 말했다. "내가 풀어주면 모두 말하겠다 그거지?" 조슈아가 그렇게 나오자 소년도 다시 말씨가 부드러워졌다. "그러니까 그만 풀어 달란 말이야. 자, 얼른." "알았어. 그러니까……." 조슈아는 정말로 풀어주려 했다. 아까 돌린 쪽의 반대 방향으로 돌린다고 돌렸는데 오히려 꼬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잘못 돌렸나? 다시 반대로 돌렸다. 그러자 아까보다 더 바짝 조인 모양이 됐다. 조슈아가 당황하고 있는데 그물 안에 있는 녀석은 못 살겠다고 비명을 질러댔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날 조여서 기름이라도 짤 참이야?" "그게 아냐. 지금 풀려고 하는데……." 다시 몇 번 빙빙 돌렸지만─안에 있던 소년은 머리가 빙빙 돌 지경이었다─이젠 어느 쪽이 옳은지 판단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꼬임을 살펴보려 해도 워낙 낡아 있던 그물눈들이 혼연일체가 되다시피 엉켜서 눈으로는 식별할 도리가 없었다. 조슈아는 결국 정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엉켰나 봐. 저, 금방 못 풀겠는데 차근차근 하게 좀 기다려 볼래?" 소년은 정말로 태도가 쉽게 바뀌는 사람이었다. "뭐야, 못 풀겠다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얼른 풀어! 아파 죽겠단 말이야, 이 빨다 버린 사탕과자 같은 녀석아!" 6. 빵과 물고기 "마침 비가 오고 있었거든, 그 때 나는 문간에 서 있는 그를 보았는데 너무 침착하고 초연한 눈빛을 하고 있어서 길을 잃은 줄도 몰랐지 뭐겠어." "조슈아 폰 아르님이야." 조금 전 소년은 막시민 리프크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조슈아가 이름을 말해주자 그는 갑자기 분개한 듯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뭐, '폰'? 귀족이었냐? 설마 귀족이라고 내가 너한테 존댓말이라도 해야 한다고 할 셈은 아니겠지? 잠간, 그럼 그 노인네도 귀족이야? 아냐, 내가 그 말을 믿을 거 같냐? 그 영감이 귀족이면, 아니 귀족이었으면 난 아노마라드 수상이라고." 조슈아는 사태를 빨리 해결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폰'이라고 해서… 음, 그러니까 모두 귀족인 건 아니라고." "그러면 그렇지." 다행히도 거짓말 없이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막시민이 말하는 노인이 조슈아가 찾는 작은 할아버지가 맞는지 맞춰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첫째로 조슈아는 작은 할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 막시민이 아무리 설명해봐야 조슈아가 확인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둘째로 막시민이 설명하는 할아버지는 조슈아가 상상한 할아버지의 모습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예를 들면 이랬다. "작은 할아버지라고? 그럼 그 영감이 결혼 한 건 아니란 말이 되는구나. 그건 참 듣던 중 다행이야! 난 또 어느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가 그런 개코같은 늙은이한테 희생당했나 심려가 깊었다고." 하지만 막시민은 안경을 대강 코에 걸치고 조슈아를 자세히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 영감이랑 너랑 좀 닮은 것 같은데? 특히 눈매가 비슷해." 이것만은 할아버지의 비서라는 쇼가 해준 말하고 같았다. 정말 헷갈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여기가 할아버지의 집이 맞단 말이지? 그런데 어딜 가셨는지 몰라?" 막시민은 부러진 양경다리를 맞추려고 애쓰다가 귀찮은지 대강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벌써 만사가 다 귀찮아진 태도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본래 그렇게 잘 돌아다녀, 언제 올지 알 수 없지. 귀중품이라고는 없는 집이니 이렇게 내버려둬도 누가 들어올까 누가 들어올까 걱정할 것도 없고. 나는 저 그물침대가 좋아서 영감이 없어도 가끔 낮잠을 자러 오지. 그리고 이 근처의 땅도 다 영감 거야. 이걸 목장이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양은 한 마리도 안 키우는 데다 있는 거라곤 다 석어 가는 집뿐이니 썩은 목장이라고 하면 적당한 이름이 아닐까 싶은데. 하여튼 풀이 좋아서 주변에 양을 키우는 사람들이 슬금슬금 자기 양들을 몰고 들어오곤 하는데 노인네는 신경도 안 써. 또 뭐 궁금한 것 있냐?" 궁금한 것 있냐고 물은 주제에 이만하면 다 대답했고 생각하는 건지 막시민은 책을 주워 들고 휘적휘적 밖으로 나갔다. 조슈아는 몇 걸음 따라가며 물었다. "어디 가?" "집에 가는데." "……집이 어딘데?" "저기 동네에." 막시민은 다른 건 자세히 대답할 의무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벌써 마당 밖까지 나갔다. 어쩌다 보니 거기까지 쫓아가게 되어버렸다. "다른 집들은 어디에 있는 거지?" "저기 해 지는 똑 보이지? 저리로 한참 가다 보면 나와." "너도 거기로 가?" "왜? 따라오고 싶어?" 막시민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로 피식 미소를 날렸다. 그 얼굴을 보니 그 순간만은 모든 현실적인 계산을 떠나 한 가지 대답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니." "그래? 그럼 잘 있어라." 더 쫓아가기가 머쓱해서 조슈아가 멈춰 서자. 막시민은 순식간에 멀어졌다. 멍하니 쳐다보다 보니 어느새 보이지 않게 되었다. 보이지 않게 된 것은 해가 졌기 때문이었다. 조슈아는 그제야 배고프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나, 먹을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들어갔다. 별 희망은 없지만 그래도 예의상 부엌을 뒤져봤다. 물론 나오는 것은 없었다. 사실 조슈아는 부엌의 어디를 뒤져야 먹을 게 나오는 지도 잘 몰랐다. 곧 지친 그는 의자에 앉아 텅 빈 벽을 멍하니 쳐다봤다. 어디선가 양파 냄새가 나는 것 같다는 상상에 사로잡혀서. 동시에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러고 있는 자신이 다른 길 잃은 아이하고 다를 게 있을까 싶었다. 천재 소리 듣던 주제에 집 밖으로 나오는 순간 저녁 식사 하나 해결할 능력도 없다니. 그가 가진 능력이 두렵다고 하던 사람들을 불러다가 이 꼬락서니를 보여 주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리자 쓴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성과 없이 앉아 있는 동안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주변은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거짓말처럼 몸이 싸늘해졌다. 조슈아는 집 안의 문들을 다 닫았지만 그래도 역시 추웠다. 옆방에 침대가 있다는 생각이 났다. 그것과 동시에, 집 안에 창고가 있었다는 것도 생각났다. 창고에는 먹을 게 있을 지도 몰라. 그러나 초 한 자루도 없는 처지에 주변은 벌써 캄캄했다. 조슈아는 얼른 고개를 흔들어 창고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리고는 침대가 있던 곳으로 갔다. 먼지가 있는지 없는지 이미 보이지도 않았다. 조슈아는 무작정 침대 안으로 기어 들어가 시트를 머리끝까지 썼다. 여러 가지 생각이 났지만 피곤한 나머지 오래 생각하지도 못하고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아침이었다. 조슈아는 깨어나자마자 한바탕 재채기를 해야만 했다. 시트는 예상대로 먼지투성이였다. "에취, 에취, 에에취!" 세수할 곳을 찾아 헤매다가 뒤뜰에서 길어다 놓은 지 무척 오래된 것 같은 커다란 물통을 발견했다. 겨우 얼굴을 씻어내고 물 속을 들여다보니, 가족이나 모나 시드 학원의 학생들이 보았다면 무척 놀랄 만한 꼴을 하고 있는 자신이 보였다. 잘 엉키는 머리여서 아침마다 어머니나 하녀가 다듬어 주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에 물이라도 묻혀 볼까 하다가 오히려 초라해질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물만 발라 까칠한 얼굴에 그냥 입고 자서 구깃구깃해진 옷매무새하며, 도무지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습을 보아 줄 사람은 없었다. 조슈아는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하하하……." 고상한 자리에 어울릴만한 자신이라는 건, 하룻밤만에 망가질 수도 있는 약해빠진 가면이었다. 조슈아는 어설픈 꼴을 하고 있는 자신이 이상하게도 마음에 들었다. 더 이상 신경 쓸 것이 없다고 생각하니 예전에 해선 안 될것 같던 모든 것들을 마음대로 해도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던 것이 뭐였더라? 기지개를 켜면서 집을 등지고 돌아서니 완만한 경사가 먼 골자기로 이어지는 것이 보였다. 시골의 아침 공기를 마시니 기분은 상쾌했지만 동시에 배가 고파 오기 시작했다. 돌아서니, 앞을 막고선 것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터무니없이 낡고 갖춘것 하나 없는 집뿐이었다. 어제 이후로 안에서 뭐든 발견될 거란 기대는 일찌감치 접었는데, 한 군데 뒤져보지 않은 곳이 생각났다. 창고였다. 낮이었으므로 어젯밤처럼 강력한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조슈아는 창고로 다가가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봤다. 안은 어두웠지만 조슈아는 곧 이상한 것을 감지했다. 음식 냄새였다. 갑자기 뱃속이 조여들 정도로 허기가 심했다. 조슈아는 문을 활짝 열어 젖혀 최대한 빛이 들어가게 한 다음 안으로 발을 들여놨다. 십여 개 정도의 계단을 밟고 내려가자 바닥에 내려설 수 있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그럭저럭 둘러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네모난 빈 방일 분이었다. 어디에도 음식 같은 건 없었다. 그리고 괴이한 일이지만 음식 냄새도 흐려져 어디에서 나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착각이었을까? 조슈아는 초조한 심정으로 창고 안을 한 바퀴 빙 돌았다. 삐걱, 삐걱, 빈 물통, 빈 나무 상자, 무언가 걸었던 듯한 갈고리들, 양파나 마늘을 매는 새끼줄, 감자 옴이라도 있었던 듯한 널찍한 흔적, 그뿐이었다.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이번엔 화가 치밀었다. 누구에게 화를 내야 될지 몰랐지만… 그렇다. 할아버지다! 여기에 살았던 것이 틀림없다면 왜 이런 처지에 자신을 내버려두고 자취를 감춰 나타나지 않는 건가? 마지막으로 나무 상자에 걸려 넘어질 뻔한 조슈아는 상자를 대뜸 걷어차 버렸다. 그런 폭력적인 행동을 해본 것도 그 대가 처음이었다. 그 때, 등뒤에서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데 기어 들어와서 뭘 하냐?" 조슈아는 퍼뜩 뒤를 돌아봤다. 계단 머리에 쭈그리고 앉은 막시민은 별 웃기는 녀석을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고 있었다. 옆에서 들려오는 햇빛 때문에 후광이 입혀진 듯 보이는 갈색 머리에서 하얀 가루가 풀풀 날렸다. 다시 볼 것을 기대하지 않았던 탓인지 어제는 불청객이었던 그 얼굴이 반가웠지만, 동시에 화내는 꼴을 들킨 것이 부끄러웠다. 막시민은 조슈아가 무슨 기분으로 화를 내는 건지 다 알고 있을 것이 뻔했다. "어째서 돌아온 거야?" "지나가다 들른 것 뿐이야. 내가 널 찾아온 줄 알았냐?" 조슈아는 상대를 무시하기로 하고 막시민을 지나쳐 창고 밖으로 나갔다. 집으로 돌아 들어가려니 막시민이 등 뒤에서 불렀다. "배고프지 않냐?" 조슈아는 돌아섰다. 잡자기 온순하게 말할 마음이 내켰다. "응. 배고파." "지금 내 손에 너 줄 것이 없긴 한데…. 따라올 마음 있냐?" 막시민이 입구 쪽으로 나가자 조슈아는 몇 걸음 따라가며 물었다. "뭐가 있는데?" "나한텐 없고, 페리아 아줌마네 식구들이 다 나가면 남은 빵 좀 집어올 생각이야." 조슈아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건 도둑이잖아." "도둑질? 그렇게 부르고 싶으면 맘대로 하고." 막시민은 입구에 서서 돌아봤다. 조슈아는 따라오지 않고 서 있었다. "도둑질인 것 같아서 싫으냐? 그럼 그만둬. 난 내 배나 채우러 갈란다." 그 날 저녁. 그리고 다음날 아침까지, 조슈아는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저녁까지는 어떻게 참는다고 참았는데, 이틑날 자고 일어나자 머리가 빙빙 돌 지경이었다. 허기보다는 음식에 대한 갈망 같은 것이 느껴졌다. 뱃속에는 감각이 없는데, 먹는 게 보이면 지칠 때까지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 기분도 점심 즈음에는 끝이 났다. 기운이 없다보니 침대에 늘어져 일어나지도 않게 됐다. 천재고 뭐고 판단 자체가 멈춰버렸다. 창고 생각이 다시 한 번 났을 때, 반시간 가량 망설이던 조슈아는 일어나 기다시피 창고 쪽으로 갔다. 계단을 내려가서 빈 상자나 통을 하나 하나 뒤지기 시작했다. 없는 기운 마저 다 빼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자 조슈아는 바닥에 그냥 앉아버렸다. "이제 다 했냐?" 뒤를 돌아보는 순간, 뭔가가 획 날아왔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조슈아는 떨어뜨릴 뻔하다가 겨우 손을 오므려 받아냈다. 보니까 먹음직해 보이는 옥수수빵이었다. "고작 하루 반나절 굶었다고 다 죽어 가는 얼굴하고는." 먹든 말든 맘대로 하라는 것처럼 막시민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조슈아는 멍청히 앉은 채로 무언가 생각해보려 하다가 만사가 귀찮아져서 그냥 빵 조각을 물어 뜯어봤다. 빵은 신묘할 정도로 맛이 좋았다. "무척 맛있네." 어느새 상고 밖으로 따라나온 조슈아가 그렇게 말하자 막시민은 조금 한심하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럼 훔친 것은 맛이 다를 줄 알았냐?" "……." 조슈아는 더 이상 도둑질이고 뭐고 신경 쓰지 않고 빵 한 덩어리를 모조리 먹어치웠다. 목이 말라서 주위를 돌아보니 막시민이 떠다 놨나 싶은 물이 한 바가지 놓여 있어 단숨에 마셔버렸다. "살만하지?" 비꼬듯 한 마디 던진 막시민은 집 안으로 어슬렁어슬렁 들어갔다. 어느모로 보나 자기 집에 들어가는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걸음걸이였다. 이젠 따라가는 것말고 별다른 생각도 나지 않았다. 부엌으로 간 막시민은 어제 조슈아가 그렇게 뒤지면서도 건드릴 생각도 안 했던 한쪽 구석의 튀어나온 벽돌을 눌렀다. 그러자 벽면 일부가 덜컥 열렸다. "어?" 작은 상자 정도의 빈 공간 안에는 양가죽 주머니가 놓여 있었다. 주머니를 꺼내 열어본 막시민은 실망한 듯 주머니를 휙휙 돌렸다. "고작 몇 닢뿐이네. 언제부터 이 영감이 이렇게 가난해졌담." 원칙대로 따져 보자면 막시민은 남의 집에 들어가 금고를 연 것이나 다름없는데, 워낙 당연하게 행동하다 보니 조슈아도 뭔가 잘못된 걸 느끼지 못했다. "돈이 필요해?" "돈이 있어야 네 녀석한테 '무척 맛있는' 빵 쪼가리라도 먹이지." "응… 으응?" 막시민은 자기가 한 말이 조슈아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로 다시 나가버렸다. 뒤따라 나가면서 조슈아는 점점 기분이 이상해졌다. 돌봐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어린아이 취급을 받다니. "왜 네가 내게 빵을 마련해 줘야 된다는 거야?" "저기 강 보이지?" 조슈아의 항변은 들은 척도 안하고 막시민은 남쪽 들판 너머를 가리켰다. 그쪽을 바라보니 지평선 근처에 희게 반짝이는 띠 같은 것이 보였다. "가면 물고기가 좀 있을 거야. 저녁거리로는 괜찮겠지." "나더러 물고기를 잡으라고?" "왜. 그것도 못해?" 막시민은 조슈아의 얼굴을 건너다보더니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잖아. 이렇게 멍청해서야 노인네가 올 때까지 뭘 구해 먹으면서 기다릴 셈인지 모르겠네. 힌트를 줘도 써먹을 줄 알아야지." 조슈아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멍… 청하다고?" "그럼 똑똑하냐?" 막시민은 다른 생각을 해내려는 것인지 마당을 왔다갔다했다. 하지만 조슈아는 난생 처음 들은 '멍청하다'는 말에 쉽게 적응할 수가 없었다. "멍청하다는 말은 너한테 처음 들어봐." "네 주변에는 사람 보는 눈 없는 녀석들만 가득 찼군 그래." "고작 물고기를 못 잡는다고 해서 멍청하다고 할 수는 없어." "체, 구제불능이구만. 똑똑하다는 걸 증명하고 싶거든 네 힘으로 물고기를 잡아 와봐. 그러면 인정해 줄 테니까. 아니면 '멍청한 꼬마'라고 부르겠어." '멍청한 꼬마'라니, 조슈아의 짧다면 짧은 인생 속에서 이 정도로 새로운 별명은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막시민이 조슈아보다 한 뼘 가까이 크긴 했다. 날이 저물어갔다. 조슈아는 멍청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썼지만 또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집 안을 온통 뒤져봤지만 낚시 바늘이나 낚싯줄, 또는 그 비슷한 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물이라고는 전날 막시민이 누워 자던 그물 침대 뿐인데, 그건 할아버지의 물건이라는 생각에 건드릴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무작정 강가로 가봤지만 물고기가 '날 잡아 잡수쇼'하고 물가로 뛰어나오는 일은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물고기가 쉽사리 눈에 띄는 것도 아니었다. 작살처럼 이용해볼까 싶어 바위 모서리를 이용해 뾰족한 막대기를 깎는 데 반나절이나 걸렸지만, 검술 훈련 한 번 받은 일이 없는 빈약한 순발력으로 성공할 리 만무했다. 헛되게 체력만 낭비하고 말았다. 해질 녘 강변은 아름다웠다. 꽃잎 녹은 듯 향기로워 보이는 다홍빛 강물 114,115 결락 막시민의 오른팔과 한 바퀴 감은 채로 서약을 했다. "잔소리 안 하고, 생존 방식을 배우겠음. 끝." 해가 다 저물었을 무렵, 조슈아는 막시민이 요령 좋게 불을 피우는 모습을 신기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불 옆에는 막시민이 순식간에 어딘가에서 구해온 물고기 두 마리가 놓여 있었다. 작대기에 끼워 물고기를 굽는 모습도 흥미로웠다. 작대기는 물론 낮아 조슈아가 깎아 놓은 것을 사용했다.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찌르며 주위로 퍼져나갔다. 따뜻한 어둠에 잠긴 강둑이었다. "자, 먹어라." 막시민이 건네준 막대기는 뜨거워서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했다. 그러나 곧 익숙해져서 살점을 잘 뜯어먹을 수 있게 되었다. 얼마간 정신 없이 먹은 다음, 조슈아는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물고기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구해온 거야?" 막시민은 생선살을 뜯느라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아까 낮아 저 위쪽에 물굽이가 있는 거 봤지?" "응." "거기 그물이 쳐져 있는데 거기서 꺼내온 거야." 조슈아가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자 막시민은 피식 웃었다. "아니면 어디서 그렇게 빨리 구해 오겠냐." 조금 후 조슈아는 감탄한 듯 말했다. "그물을 일찌감치 쳐놨구나?" "농담 하냐? 그런 명당 자리엔 아무나 그물을 칠 수 없어. 나 같은 어린애한테 자리를 줄 리가 없지." "그러면……." 조슈아는 먹던 손을 멈췄다. "이것도 남의 것을 가져온 거야?" "으흠." 막시민은 갑자기 목을 가다듬었다. "잔소리하고 싶냐? 아까 서약한 거 잊었냐?" "하지만 이건……." 막시민은 생선을 다 먹고 작대기를 멀찍이 팽개치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자, 들어봐. 세상에는 사람이 있고 물고기가 있어. 물고기는 강에 살고 사람은 강변에 살지. 둘 다 갈에게서 도움을 받고 있다고. 그러니까 둘은 공동 운명체지. 서로 돕고 사는 관계라고 할 수 있어. 그러므로 사람은 물고기를 먹을 수 있어. 물고기는 강물을 먹어도 돼." 막시민이 말을 멈추자 조슈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아직 이해가 안 되냐? 다시 잘 들어봐. 사람이 물고기를 먹는 것이 당연하다면 누가 그걸 막을 수가 있어? 같은 사람끼리 남이 먹는 물고기를 못 먹게 할 수 있냐고. 당연히 아니지! 내가 물고기를 다 먹었다고 네 녀석이 먹고 있는 물고기를 뺏어먹어도 될까? 아니라고! 그러니 내가 먹고 있던 물고기도 누군가가 빼앗을 순 없어! 이제 알겠어?" 실로 엄청난 논리였다. 즉,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내 생각엔 무슨 말인지 잘……." 막시민은 신경질을 냈다. "멍청하다고 했더니 정말로 이해력이 떨어지네. 다시 한 번 잘 들어보라고! 물고기는 모두가 먹을 수 있는 거야. 물고기의 수는 엄청나지. 매년 새로 생기고, 바다에 갔던 놈들도 돌아온다고. 물고기의 수는 누구도 셀 수 없어. 내가 저 그물에 있던 물고기를 꺼냈지. 그러면 거기에는 새로운 물고기가 와서 자릴 채우겠지. 물고기는 아무도 셀 수 없기 때문에 두 물고기에게 차이는 없어. 내가 강에서 물고기를 잡고 그물의 물고기를 내버려두든, 그물의 물고기를 꺼내고 새 물고기가 거기 들어가든, 결과는 같단 말이야! 그건 맨 처음에 내가 말했듯 모든 물고기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야. 물고기와 사람은 돕는 관계야! 사람은 강에서 물을 길어다가 농작물에 주고 자기들도 먹지. 사람이 물을 다 가져가면 물고기는 살 수가 없지. 그러니까 사람도 물고기와 협상을 한 셈이야. 그게 물고기 일족의 생활 방식이야. 이해가 가? 그러니까 내게도 권리가 있어. 나도 사람이니까. 다시 말하지만 그물 속의 물고기나 강물 속의 물고기나 모두 물고기야. 그건 서랍 속에 있는 책이나 침대 위에 있는 책이나 모두 집 안에 있는 책이라고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거야. 그래서 나는……." 솔직히 저런 설명 대신 그냥 '물고기, 물고기, 물고기, 물고기. 사람, 사람, 사람, 사람'을 계속 되풀이했어도 별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실제로 조금 후엔 그렇게 들리기까지 했다. 적당히 수근하지 않으면 끝없이 계속할 기세였으므로 조슈아는 킥킥 웃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물고기는 아무나 먹어도 되는 거야. 네 의견을 존중해." 그 날 밤 조슈아는 혼자 있긴 했지만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막시민과는 내일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둘은 함께 할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 올 여름을 즐겁게 보낼 방법들을 찾아낼 작정이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상쾌한 여름 계획이었다.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부모와 헤어지고 낯선 곳에 와서, 의지할 만한 사람은 만나지도 못한 채 굶다시피 하며 이틀을 보냈다. 단지또래 친구가 생겼다는 것 하나만으로 이토록 기분이 나아질 수 있는 것일까. 아르님 가문에서 조슈아는 '기적의 아이'라고 불릴 정도로 어렵게 얻은 자식이었다. 정신지체가 있는 이브노아 때문에 다른 아이들의 몇 배나 되는 정성과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자라났다. 조슈아 자신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데모닉이라는 것이 밝혀진 건 오히려 유감이었다. 지금도 아르님 가문안에서 '데모닉 조슈아'라는 별명은 금기나 마찬가지였다. 초대 아르님 공작 '데모닉 이카본'을 제외한 모든 데모닉이 일찍 죽거나 삶에 실패한 까닭에, 데모닉은 이제 축복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숨길 수 없는 재능 때문에 저절로 아이답지 않게 떠받들어졌고, 특히 모나 시드 학원에서는 모두가 어린 조슈아 앞에서 혹시라도 어설픈 꼴을 보일까 싶어 조심했다. 그러다 보니 조슈아 스스로도 나이에 맞지 않는 생각과 행동에 익숙해져 어느새 자신이 아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것이 답답한 줄도 모르고 살았는데, 돌이켜 보니 자기가 그걸 좋아해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학원에서 이미 아는 것도 모르는 채 얌전히 공부하고, 나이 많은 학생들의 질시에도 어른처럼 의연하게 대처하던 아이는 신비롭고 먼 곳에 있는 존재 같았다. 자신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거리상의 간격만큼이나 심리적인 간격도 벌어진 탓일까, 조슈아는 비취반지 성에는 아직도 자신과 똑같이 생긴 아이가 자신처럼 행동하며 얌전하게 지내고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림자일까, 인형일까, 아니면 먼 곳에 벗어놓고 온 허물일까. 켈티카로 되돌아가면 그 아이와 딱 마주쳐서, 누가 진짜 자신인지 증명해야 하는 건 아닐까. 그 때가 되면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좋을까, 아니……. 꼭 증명해야만 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아이는 그 아이대로 지내고, 자신은 자신대로 이곳에서 행복하게 살면 그만 아닐까. 보통 아이들이라면 부모와 영영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공황 상태에 빠질 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슈아는 이상하게도 세상에 자신을 알았던 모든 사람들이 이제부터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해도, 그때부터 자신은 새로운 사람이 되어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냥 자신은 자신이며, 누구의 인정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다워지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홀로 세상에 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7. 썩은 목장의 여름 "우린 함께 자라났지, 한 켤레의 구두처럼. 언덕과 강둑을 내달렸고, 개울을 헤엄쳐 강까지 갔지. 천둥은 노래였고, 비는 춤이었어. 아, 네가 그 격렬한 연주를 다시 느낄 수 있을까? 너를 위해 불러준 노래를 아직 기억하고 있을까?" 강한 양들이 풀잎 바다를 행군한다. 양을 처음 보는 조슈아는 풀밭에 코를 묻고 숨을 죽인 채 양떼를 지켜봤다. 그들이 눈앞을 가로질러 마침내 질 좋은 목초가 그득한 목장에 멈춰 새로이 무리 짓는 것도 보았다. 고개 수그린 양들은 솜을 뭉쳐 만든 공처럼 보였다. 동글, 동글,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곁에서 막시민이 나지막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이야." 살금, 살금, 둘은 바닥을 기다시피 해서 양들에게 접근해갔다. 양은 신경도 쓰지 않고 풀만 뜯고 있었다. 그 중 미리 눈으로 찍어 둔 새끼양 딸린 어미에게 다가간 막시민은 주머니를 꺼내 슬그머니 양젖을 짜기 시작했다. 조슈아는 옆에서 망을 보면서, 막시민이 양젖을 채운 주머니를 넘겨주자 끈으로 매었다. 잠시 후 두리번대던 조슈아가 막시민 팔을 탁 쳤다. "주인이 와!" "이놈들!" 벌써 막시민의 귀에도 외침이 들려오고 있었다. 둘은 양젖 주머니를 하나씩 품에 안고 걸음아 날 살려라 언덕 아래로 달아났다. "윽, 양젖이 새잖아." 끈을 제대로 안 맸는지 막시민의 양젖 주머니에서 젖 줄기가 튀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주인이 끈질기게 따라온다 싶자 막시민은 크게 호를 그리며 달려 도로 양떼 속으로 뛰어들었다. 매애애! 모집 큰 양들이 우우 몰려다는 통에 주인은 조그마한 꼬마 둘을 쉽사리 찾을 수 없었다. 주춤거리던 주인이 귀찮기도 하고 해서 그냥 욕을 퍼붓고 돌아섰을 때 둘은 다시 살그머니 반대쪽 언덕바지로 내려왔다. 그 다음부터 느긋하게 걸을 수 있었다. "목말라." 둘은 주머니 하나를 열고 번갈아 양젖을 마셨다. 조슈아는 막시민의 안경에 양젖이 튄 것을 보고 킥킥 웃다가 말했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해도 괜찮아?" "그럼! 고작 양젖 조금 갖고 치사하게 굴 거 있겠어? 이걸론 치즈 한 덩어리도 못 만든다고. 부탁한다면 공짜로도 얻었을걸." "그럼 달라고 해보지 그랬어?" "응, 그럴 수도 있었는데 내가 말야. 양들의 자유로운 의사를 존중하려다 보니 이렇게 됐지." "그게 무슨 소리야?" "아까 내가 양젖 짤 때 양이 가만히 있는 거 못 봤어? 그 놈은 벌써 나한테 양젖을 주기로 작정한 거라고, 새끼양한테 줄 것을 나한테 나눠줬잖아. 얼마나 고맙냐? 그런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인간 일족으로서 예절이 없는 거라고. 아마 주인도 지금쯤 양한테 상호 합의 하에 준거냐고 물어보러 갔을 거야, 난 물론 합의했으니까 양의 진술을 들으면 주인도 만족하겠지." 말이 안 되는 얘기를 아무렇게나 잘도 이어 가는 것은 막시민의 특기였다. 그것도 거드름피우듯 손가락까지 허공에 저어 가며, 이젠 조슈아도 픽 웃으며 대꾸하는 데 익숙해졌다. "하지만 넌 양한테 묻기 전에 먼저 짜기 시작했잖아. 양이 주고 싶어서 줬다기보다는 너한테 강요당한 거라고 보는데."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야. 양이 뭘 먹고 젖을 내니? 풀이잖아? 그런데 이 근처 풀밭은 전부 네 할아버지 거라고. 그 할아버지의 손자인 너한테 양젖 돔 나눠주지 않는데서야 그 양도 예절이 코털만큼도 없는 거 아니겠냐? 우리가 경우 있는 양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었어." 처음 시작한 말과 결론은 전혀 달랐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상한 결과지만 조슈아도 수긍해버렸다. "정말 그러네.' 조슈아는 막시민네 집에는 부모가 당연히 있을 줄로 알았지만 예상은 어긋났다. 막시민에게도 집이란 것이 있긴 했지만 그건 게딱지만한 낡은 집인데다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의지할 부모 대신 옹기종기 앉은 동생들뿐이었다. 막시민은 동생들에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막시민 말로는 동생들도 자기들끼리 알아서 다 잘 한다는 거였다. 조슈아는 하루 이틀 이들과 지내면서 '알아서 잘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곧 알아차렸다. 그 애들은 막시민과 똑같은, 때로는 한층 진보된 방법을 갖고 있어서 돈 한 푼 벌어다 주는 사람이 없는데 놀랍게도 거의 굶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막시민도 먹고 남는 것이 있으면 동생한테 갖다 줬다. 그러나 그는 근본적으로 불쌍한 동생들을 뒷바라지해야 한다고 눈물 짜는 부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막시민의 궤변 가까운 주장에 의하면 그 집은 막시민과 동생들의 '어디까지나 독립적인' 공동체였다. 그래도 조슈아는 어린 동생들과 함께 있어주지 않고 하루의 대부분을 자기와 함께 보내는 막시민을 걱정했다. 그러나 막시민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내 동생들은 다 너보다 생활력이 뛰어나서 걱정 없어. 내가 볼 땐 네가 제일 문제 거리라고." 그러나 다행히도 오늘은 양젖 한 주머니를 동생들에게 갖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슈아는 기분이 괜찮았다. 늘 막내 역활만 하다가 누군가에게 형이라고 불리고, 동생들을 돕는다는 것이 썩 괜찮게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막시민의 집에 들어가면 늘 그렇듯 환상은 깨졌다. "어, 형 왔네? 형, 여기 봐. 라하르트가 말린 과일을 잔뜩 구해왔어. 어느 맘 좋은 여행자에게 꾸어 왔대." 꾸어 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지는 이 동네 사람 대부분이 믿는다는 목축신만이 아실 게 틀림없었다. 막시민은 동생에게 양젖 주머니를 건네 줬다. "야, 이거랑 나눠 먹자." 이 집 형제들 사이엔 거래가 기본이었다. "일마 누나! 아까 생강빵 가지고 왔댔지? 막시민 형이 양젖 가지고 왔어. 우리 지금 식사할까?" 이 집안은 늘 아무 때나 식사했다. "잘 됐다. 마침 루돌프가 나가고 없잖아. 빵 한 개 더 먹겠네." 식사 때 빠진 녀석이 있으면 기다려주거나 남겨주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빼고 다 먹어버렸다.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예전부터 그래 왔으므로 빠진 사람도 '앗, 재수가 없었어' 정도가 끝이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우애가 없는 형제라고 할 순 없었다. 서로에 대해 도울 것은 철저히 돕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간 이들을 지켜본 조슈아는 이 형제들이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성격이 이럴 뿐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들은 낯선 사람인 조슈아를 막시민이 데려왔다는 이유만으로 쉽사리 식사 자리에 끼워 줄 정도로, 어떨 땐 인심이 좋았다. 막시민은 대략 네 살 때부터 조슈아의 작은 할아버지와 알고 지냈다고 했다. 그 때는 막시민의 아버지도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으며 어머니도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넷째인 리하르트를 낳은 후 곧 돌아가셨고 그 후로 새어머니는 없었는데 어찌된 셈인지 다섯째 안톤이 있었다. 심지어 리하르트와 안톤은 생일도 얼마 차이나지 않았다. "이상하네? 어떻게 된 거야?" 이 집안에서 이런 화대는 별달리 금기도 아니었다. "이상할 거 뭐 있냐. 인류애에 불타는 아버지가 켈티카에서 주워왔다고, 앙앙 우는 갓난애를 그럼 데리고 살아야지 어떡하냐?" 물론 그 갓난아이를 다섯 살 되도록 키운 건 아버지가 아니라 막시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집안에 군식구를 늘린 아버지는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켈티카로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들리는 소문엔 공화파 소속이라는데 가서 중책이라도 맡아서 오지 않는 건지. 아니면 국왕군 손에 임찌감치 죽어버린 건지 알 방법은 없었다. 아버지가 사라진 후로 할아버지는 막시민과 동생들에게 신경을 많이 써줬다. 특히 막시민을 무척 귀여워한 모양─막시민의 안경을 세 번이나 사줬다고 한다─이었다. 이 모두는 막시민이 아니라 동생들이 해준 이야기였는데, 기이한 소리이긴 하지만 예순이 넘은 할아버지와 열 살도 안 된 막시민은 마치 친구 같았다고 한다! 하긴, 막시민이 나이에 비해 뛰어난 점이 많긴 했다. 청산유수로 쏟아지는 궤변, 교묘하게 돌려서 하는 욕, 잔머리, 임기응변 등등, 게다가 막시민은 할아버지와 자신이 그냥 친구가 아니라 '술친구'였다고 말해서 조슈아를 무척 놀라게 했다. "술이라니? 네가 그런 걸 어떻게 마셔? 너, 나하고 나이 비슷하잖아?" "아, 물론 못 마시겠지만 그게 내가 마시는 것과 직접적 연관이 있다고는 생각 안 해." 조슈아는 못 믿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면서도 저 녀석이라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속으로 뇌까렸다. 막시민도 조슈아가 어쩌다가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인지 대강 듣게 되었다. 처음에 막시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부모님이 있어? 그런데 왜 할아버지한테 온 거냐?" "여름 한 철 휴가 삼아 지내고 오라고 하신 거지." 조슈아는 예전의 자신을 오랜만에 되살려 거기까지만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 노인네는 네가 오는 줄도 모르고 딴 데 가서 헤매고 있냐?" "그것까지는 모르겠어." 그러자 막시민은 갑자기 알았다는 듯 손가락을 딱 울렸다. "아! 내가 보기에 너네 부모는 널 버린 거야! 떼어놓을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다가 할아버지 핑계 대고 보내버린 거라고, 그러니까 서로 연락이 안된 거 아니겠냐? 나중에 돌아가 봤자 그 양반들은 다 도망가고 없을걸. 텅 빈 집만 남아 있거나, 아니면 이미 그 집엔 딴 사람들이 들어와 살고 있는 거지. 나중에 노인네가 돌아오면 널 보고 무척 놀랄 거다. 자기가 집을 떠맡은 걸 알면 펄쩍 뛸 지도 모른다고." 조슈아는 웃으며 듣고 있었지만 마지막에는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너처럼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마말고는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할걸?" "아니라니까!" 조슈아가 약간 신경질을 내자 막시민은 어깨를 으쓱하며 물러났다. "내 말 못 믿겠으면 말고, 하지만 난 경험으로 말한 거야. 부모란 작자들은 그다지 믿을 만한 부류가 못 된다고, 자기 사정만 생각하고 애들은 안중에도 없지." 조슈아가 아는 부모는 막시민의 얘기와 달랐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부모님은 할아버지도 없는 이곳에 조슈아를 보낸 것일까? 아니, 조슈아를 여기로 데려와 내버리다시피 하고 가버린 건 할아버지의 비서였지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이곳에 오랫동안 살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했고, 그런 곳에 떨어지게 된 것에 대해서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부모님이 몰랐을까? 할아버지에게 속았을까? 시간 약속이 잘못되어 엇갈렸을까? 그렇다면 기다리고 있으면 할아버지는 와야 했다. 그러나 이미 열흘이나 기다렸다. 조슈아의 표정 변화를 죽 보고 있던 막시민은 이윽고 다가와 등을 토닥거렸다. 형이라도 되는 것 같은 태도였다. "됐어. 너희 부모가 우리 아버지 같다는 법은 없지. 방금 한 말은 취소할게. 그러니 그런 고민 그만하고 여기서 뭘 하고 지낼지나 생각해 보자. 어쨋든 뭐라도 하면서 기다리다 보면 그 노인네가 돌아오긴 할 거 아냐? 여기가 집인데 영영 안 오진 않겠지, 뭐." 조슈아의 기분이 나아지는 기색이 아니자 막시민은 머리를 굴리더니 다시 말했다. "오늘 저녁은 마을에 가서 먹을까나.' 이곳 코츠볼트에 온 이래로 마을도 처음이었고, 마을 안의 식당은 더더욱 처음이었다. 마치 옛날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음침한 술집처럼 생긴 곳이었다. 물론 그곳에 조슈아와 막시민처럼 어린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더구나 두 소영 옆에 옹기종기 앉아 떠들어대고 있는 막시민의 동생들에 이르면 아주 이상한 풍경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그다지 쳐다보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막시민과 동생들을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그 녀석이 무슨 짓을 하든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사실가지도. "자, 먹자!" 성에서 먹던 것과는 많이 달랐지만, 나름대로 성찬이었다. 조슈아가 신기한 기분으로 주위를 살펴보는 동안 막시민이 멋대로 이것저것 시켜 놓은 음식들이었다. 조금 후 막시민은 조슈아의 어깨를 쳤다. "야, 그러고 있다가는 감자 한 조각까지 내 동생들한테 모조리 뺏기고 말걸." 토마토, 호박, 가지, 버섯 등을 듬뿍 넣고 양고기 스튜가 주 요리였는데 처음 보는 요리에 조금 망설이던 조슈아는 이내 잘 먹게 되었다. 둥근 빵을 양젖에 적셔 먹는 요령도 금방 익혔다. 익숙해지자 무척 즐거운 식사가 됐다. "정말 잘 먹었어. 그런데 막시민, 이 음식은 무슨 돈으로 산 거야?" 막시민은 멀뚱한 표정으로 조슈아를 보다가 말했다. "그 노인네 집에서 내가 돈 꺼낼 때 너도 옆에 있지 않았냐? 뻔히 봐 놓고 왠 딴소리야?" "뭐?" 그 때 옆에서 막시민의 동생들이 조슈아를 향해 '잘 먹었어!'를 합창했다. 막시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 자식들은 자기 역할을 너무 잘 안다니까." 조슈아가 시골에서 지낸 지 보름째 되던 날이었다. 하루 사냥해야 그 날 먹을 걸 구할 수 있는 들짐승들처럼 날마다 먹을 것이 없는 두 아이는, 그 날은 뭘 구해다 먹을까 궁리하다가 갑자기 중대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늘은 고기를 먹어야지 안되겠어. 어제는 콩, 그제도 콩, 그 전날엔 깍지콩이었짆아. 이러다간 우리 모두 콩이 되고 말 거야." 심각한 얼굴로 현 상황을 진단한 막시민은 '여우 놀이'를 하자고 말했다. 맏형 격인 막시민과 조슈아, 그리고 둘째 일마를 넣어 원정대를 짰다. 일마는 여자아이였지만 달리기를 잘했고, 결정적으로 고양이 흉내를 실제와 흡사할 정도로 잘 냈다. 막시민은 고양이 흉내가 무척 중요한 거라고 말했다. 원정대는 저녁이 되기를 기다려 출발했다. 반시간 정도 걸어서 주변이 캄캄해졌을 때 어느 커다란 농가로 접근했다. 조슈아가 접근하면서 귀를 기울여보니 근처에서 꼬꼬댁대는 소리가 요란했다. 막시민이 뒤뜰 울타리 모퉁이에서 모두를 멈추게 하고 말했다. "일마는 여기서 돌을 몇 개 주워 갖고 망을 봐, 누가 우연히 이쪽으로 오는 것 같으면 얌전한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라고, 조금 기다렸다가 그 사람이 더 가까이 오면 돌 한 개를 저 너머 풀숲 쪽으로 던져, 이걸로 대부분은 해결될 거야. 그러다가 누군가 우릴 눈치챘다고 생각되면 화난 고양이 울음소릴 내. 그리고 돌을 여러 개 한꺼번에 던져버려. 그게 신호야. 그 다음에 너는 도망가. 늘 만나는 장소에서 기다리면 돼." 조슈아는 자기한테 하는 말도 아닌데 열심히 들었다. 뭘 하려는 것인지 몰라도 무척 흥미진진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일마는 이런 일에 익숙한지 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 그럼 우리 일을 하러 가자, 조." 막시민은 별명 짓기를 좋아해서 언제부턴가 조슈아를 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슈아는 뭘 해야 좋을지 몰랐으므로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뭘 해야 되는데?" "잠자코 따라오기나 해. 이제부터 내가 가르쳐 줄 테니까." 둘은 살금살금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닭들은 모두 닭장 안에 들어가 잠들어 있었다. 닭장 문은 닫혀 있었는데 한쪽에 보니 닭 한 마리가 드나들 법한 구멍이 나 있었다. 일부러 뚫어 놓은 것인 모양인데 물론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는 아니었다. 막시민이 들을 떠밀었다. "자아." "자아… 라니. 뭘 어쩌란 거야?" "가서 닭을 꺼내와야 될 거 아냐." "내가?" "그럼 저 구멍에 내가 들ㅇ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냐?" 막시민은 못 먹고 자란 아이답지 않게 조슈아보다 키도 크고 그 또래다운 체격이어서 구멍에 들어가는 건 어려울 듯싶었다. 하지만 두 살 이상 어리게 보잉 정도로 깡마르고 빈약한 조슈아는 딱 적격이었다. 그렇지만 조슈아는 자기가 들어가야 될 거란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여우 놀이가 뭘 하는 건지 몰랐던 건 물론이었다. "난 싫어. 닭을 잡을 수도 없을 거야." 132,133결락 막시민은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조슈아를 손짓으로 불렀다. 조슈아는 약간 토라진 채 하며 말했다. "자기들끼리 도망치다니 치사하잖아." "아, 뭐 도망친 건 맞는데, 난 본래부터 널 걱정하진 않았어. 처음 계획이 틀어지긴 했지만 네가 혼자 잘 빠져나올 거라고 확신했다고, 그 영감이 정말로 너네 작은 할아버지라면 너도 꽤 똑똑하겠지, 안 그래?" 지금가지 막시민은 조슈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한 번도 말한 일이 없었다. 할아버지에 대해 칭찬 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슈아를 흠칫하게 한 것은 할아버지가 정말로 자신과 비슷한 사람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렇다고 듣긴 했지만 쉽사리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처럼 괴상한 인간이 정말 세상에 또 있을까. 조슈아는 마음 속으로 약간 떨면서 물렀다. "할아버지께서 머리가 좋으셔?" "글쎄, 좋은 것 같긴 하던데, 그럼 혹시 너도 그 뭐냐…예닐곱 자리 숫자쯤은 순식간에 곱하고 더하고 나누고 그러냐? 그리고 일단 읽은 책은 저절로 다 외우고, 어떼?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막시민은 곁눈으로 안톤이 구멍을 다 팠나 흘금 봤다. 다 된 것 같자 닭 모가지를 움켜쥐었다가 생각을 바꾼 듯 조슈아를 보며 물었다. "네가 해볼래?" "뭘?" "닭 잡는 거 말랴." 조슈아는 질색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시, 싫어. 그런 거." "그러지 말고 한 번 해 보라고. 모처럼 시골에 왔는데 닭 정도는 잡아봐야지." 옆에서 일마가 킬킬 웃었다. "오빠가 언제 닭을 잡아봤어? 닭은커녕 덫에 걸린 참새 목도 못 누르면서. 이리 내놔, 내가 할게." 닭장에서의 소동은 그 날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다음날 막시민의 집에 네명의 소년이 들이닥쳤다. 닭 키우는 농가의 아들들과 사촌으로, 막시민 또래이거나 한두 살 나이가 많고 몸집도 좋은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이런 일을 할 사람은 마을에서 가장 가난뱅이인데다 꼬마들밖에 없는 막시민이 잡아온 닭말고도 서너 마리 가량이 더 없어졌고, 캄캄한 밤에 닭들을 찾느라 가족 모두가 동원되어 새벽녘까지 잠을 설쳐야 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지레짐작은 맞았지만 증거가 있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마침 막시민은 조슈아네 집에 가고 없었고, 사내애들 못지 않게 입이 걸고 성격 드센 일마가 나서서 그 애들을 상대했다. "막시민 어딨어?" "오빠는 나가고 없어." "도망친 거지? 우리가 온다는 걸 미리 안 거지?" 일마는 픽 웃었다. "나도 너네들이 왜 왔는지 모르는데 오빠가 그런 걸 알 리 있겠어?" "시치미떼지 마! 어제 농장에서 닭 다섯 마리를 훔쳐갔지?" " 뭐? 닭 다섯 마리? 지금 장난하니? 우리 집 뒤져봐! 닭 다섯 마리가 어디서 나오나!" "물론 나올 리가 없지! 어젯밤에 싹 다 먹어치웠을 거 아냐?" "그럼 우리들이 1인당 닭을 한 마리씩 먹었단 말이야? 저기 저 작고 약한 안톤이? 삶은 콩 한 접시만 먹으면 배 두드리는 리하르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작작해라, 애." "그… 그런 건 상관없어! 어쨌든 너희들이 가져갔을 게 틀림없으니까! 너네들말고 그런 짓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우겨대지 말고 증거를 대, 대보라구! 우리 집에서 닭 깃털 한 개라도 나오면 내가 너네집에 가서 무릎 꿇고 싹싹 빌게! 알았어? 지금 당장 뒤져봐, 얼른!" 그러면서 일마는 대뜸 부엌에 들어가 부지깽이를 들고 나오더니 애들더러 집 안으로 들어가라고 몰아댔다. 리하르트와 안톤은 자기들한테 주어진 역할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들은 방구석에 나른하게 드러누워 일마가 말한 '닭 한 마리는 절대로 못 먹는' 빈약한 아이들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쳐들어온 아이들은 점점 열이 올라 얼굴이 빨개졌다. 일마가 닦달하는 바람에 형식적으로 집 안을 뒤져보다가 사실상 증거를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아차리고 우르르 몰려 밖으로 나갔다. 그런 다음 저들끼리 쑥덕거리다가 닭 키우는 집 맏아들이 나서서 일마에게 말했다. " 증거 따윈 너네들이 일찌감치 다 감췄을 테니까 없는 게 뻔해. 막시민이나 너나 약삭빠르고 교활하니까 말이야 너네들이 닭을 훔쳐간 건 분명해! 우리 엄마도 그렇게 말했어. 틀림없다고 말이야." 일마는 상대방의 빈약한 논리를 비웃었다. " 너네 엄마가 재판장이니? 수도원장님이니? 어째 너네 엄마가 말하면 그게 분명한 일이야? 그거 참 엄청 궁금한 일이다." "시끄러워! 하여튼 너네는 혼나야 돼. 일마 리프크네, 너는 여자니까 막시민한테 우리랑 싸우자고 전해. 저기 언덕 위에 있는 풍차간으로, 오늘 저녁 먹은 다음에 오라고 말이지, 알았어? 막시민 상대는 내가 할거다!" 얼마간 웃긴다는 듯 피식거리고 있자 다른 녀석이 거들었다. "막시민한테, 겁나면 어제 먹은 닭털을 갖고 와서 빌라고 전해라!" 그들은 순식간에 신이 나서 자기들끼리 손바닥을 마주치며 좋아하더니 우우 가 버렸다. 일마는 어깨를 으쓱하며 동생들에게 말했다. "오빠가 저런 바보들을 상대하러 갈 리가 있겠어?" "누나! 근데 이제 그만 일어나도 되지?" 일마는 키득키득 웃으며 아직까지도 바닥을 구르고 있는 동생들에게 손짓했다. "그래, 기어다니는 건 그만둬, 그런 건 한 살 되기 전에 졸업 했잖니." 그 때 막시민은 조슈아와 함께 강둑에 앉아 있었다. 오늘따라 강에는 물고기들이 많았기에 강둑에 앉아 내려다보면 햇빛을 받은 고기 등이 빛나는 것이 보이곤 했다. 둘은 반짝임을 세었다. 한 마리가 첨벙, 하고 뛰어올랐다가 내려갔다. 조슈아가 중얼거렸다. "쟤들은 어디로 갈까?" "바다로 가지 않을까." 막시민은 헤아리기 위해 옆에 쌓아 놓았던 잔 돌멩이를 강으로 던져 넣 138,139결락 "가자!" 조슈아는 영문도 모른 채 끌려 일어나 강 맞은편 둑으로 내려갔다. 간 곳은 막시민이 아까 말한 꼬마 마스네 집이었다. 막시민은 늘 그렇다시피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약간 떨어져 세워진 작은 저장고 쪽으로 돌았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저장고 문을 열고 슬쩍 들어갔다가 무언가를 손에 들고 나왔다. "자, 저기까지 가서 먹자." 막시민이 꺼내온 것은 불그레하고 딱딱한, 이상스런 음식이었다. 조슈아는 약간 거부감을 느끼며 물었다. "이게 뭐야?" "말린 쇠고기야. 맛있어." 쇠고기라는 말에 마음이 놓여 한 입 뜯어봤다. 질깃질깃하지만 짭짤한 것이 생각보다 맛있는 것 같았다. 둘은 풀밭에 마주앉아 말린 쇠고기 세 조각을 금세 먹어치웠다. 조슈아는 더 먹고 싶다고 했지만 막시민이 고개를 저었다. " 이 정도가 넘어가 주는 한계야. 더 가져오면 마스네 엄마도 눈치채고 싫어한다고." 보호자 없이 아이들끼리 사는 막시민네 형제가 이것저것 '서리'를 하며 끼니를 이을 수 있는 까닭이 그거였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도 살림이 빠듯하다보니 대놓고 도와주진 않았지만, 규모가 지나치지 않는 선에서 이 아이들의 생존 방식을 어느 정도 눈감아주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건 아니었지만, 싫어하는 집에서도 지나치게 야박하게 군다면 이웃의 빈축을 살 것이 뻔했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방식은 뭘 손댔는지 모를 정도로 요령 좋게 조금씩 뜯어내는 거란 걸 막시민과 동생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지나자 목이 몹시 말라 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목은 쇠고기는 소금을 뿌려 말린 것이라 짰던 것이다. "목마르다. 우리 강물 마시러 갈래?" 막시민은 대뜸 고개를 저으며 다른 쪽을 손가락질했다. "그럴 줄 알았지. 따라와. 더 좋은 게 있어." 막시민은 처음부터 조슈아를 데려가고 싶은 곳이 있었던 것 같았다. 망설임 없이 강둑을 따라 걸어서, 먼발치로 조슈아네 집이 보이는 녹지를 지나고, 야트막한 언덕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 조슈아는 목이 바짝 말라 왔지만 일단 가는 곳까지 가고 보자는 심정으로 열심히 뒤를 쫓아갔다. 둘이 도착한 곳은 산기슭에 세워진 큰 수도원이었다. 코츠볼트 지방은 아노마라드 안에서 드물게 종교가 있는 곳이었고, 이 수도원은 그들의 종교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전에 들은 바로 이들의 신은 양때를 키우는 목 축신과 비슷한 존재라 했다. 조슈아는 책에서 읽은 일이 있었으므로 무슨 상황인지 대략 이해할 수 있었다. 입구 양쪽에 늘어선 붉은 지붕의 집들은 지나 앞을 가로막다시피 뻗은 열주(烈株) 회랑(回廊)을 빙 돌았다. 수도원 본당이 나오자 그 뒤쪽으로 들어갔고, 곧 허브밭이 나왔다. "아인트 수도사님!" 막시민의 외침에 허브밭을 돌보고 있던 수도사 가운데 한 명이 돌아보았다. 그는 곧 반색을 하며 손과 옷에 묻은 흙을 털고 밖으로 나왔다. 막시민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목이 말라요." 그러자 수도사가 조슈아를 흘끔 보며 물었다. "쟤도?" 조슈아는 물을 찾으러 여기까지 온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아인트 수도사는 아이들처럼 싱글거리며 둘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수도원 한쪽에 세워진 둥근 탑 뒤쪽으로 간 그는 탑 안으로 들어갔다가 이윽고 두잔의 음료를 갖고 나타났다. "자 마셔라." 목이 마른 나머지 조슈아는 단숨에 서너 모금 들이마시다가 먹던 것을 도로 뱉을 뻔했다. 씁쓸하고 괴상한 맛에, 삼킨 목구멍이 따끔거리는 이산한 음료였다. 그런데 막시민을 보니 녀석은 무척 맛있다는 듯 금방 다 마셔버리는 것이 아닌가. 막시민은 입맛을 다시다가 반쯤 남은 컵을 들고 있는 조슈아를 보더니 큰 소리로 웃어댔다. "왜, 못 마시겠어? 맛이 이상해?" "이게 뭐야? 물은 아니잖아?" "먹다 보면 무척 맛있는 거야. 처음 먹을 때만 맛없지." "이게 맛있다고?" "그럼. 이리 줘봐." 막시민은 조슈아가 남긴 것도 다 마셔버리고는 수도사에게 더 달라고 졸라댔지만 수도사는 고개를 저으며 '그 이상은 안 돼. 어르신과 약속했잖아'라고 잘라 말했다. "뭐, 할 수 없죠. 그럼 그만 갈까." 조금 전에 온 길을 도로 되짚어 나오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주변 환경이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자기 자신이 잘라진 것 같기도 하고……. "저, 막시민." "왜?" "저기 말이야…. 저기 나무가 왜 움직이지? 구불구불 뱀 같은데." "아, 그거?" 막시민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키득 웃고는 대꾸했다. "본래 그런 거야. 이 수도원의 명물이지." "그럼 저기 튀어나온… 흙더미는? 아까 올 때는 길이 평평했던 것 같은데 바닥이 왜 이래?" "아, 그것도 이 길의 특징이야. 뭐랄까, 잘 가라는 인사 정도로 해석하면 돼." "이상항 수도원이네?" "응, 그래. 혹시 저기 빨간 지붕들이 허공을 떠다니거나 하지는 않냐?" "음… 그렇진 않고, 자꾸 자기들끼리 연결되고 있어." "어, 그렇구나. 그건 새로운 현상인데." 그렇게 말한 조수아가 갑자기 막시민의 팔을 홱 잡아당기며 외쳤다. "조심해!" 막시민은 거의 앞으로 자빠질 뻔했기에 겨우 자세를 바로잡으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또 왜 그래?" "저기 바위가 너한테 굴러오는 것 같았어…. 어, 그런데 지금은 괜찮네?" "……괜찮은 게 당연하단 말이다." 수도원을 나와 지평선이 보이는 목양지를 한참 동안 걸어갔다. 조슈아는 점점 눈앞이 돈다고, 도는 흙바닥이 자기에게 덤벼든다고 횡설수설 지껄이더니 결국 풀밭에 누워버렸다. 막시민이 물었다. "기분이 어때?" "좋은 것 같아." "다행이군." 둘 모두 한참 동안 누워 하늘을 보고 있었다. 머리 위로 날벌레들이 흩날려갔다. 머리 흰 풀들이 쌍곡선과 호와 직각을 그리며 엉켜 돌아갔다. 흑갈색 설탕처럼 단내 나는 흙 속에 여기서 반짝, 저기서 반짝 하는 것들은 석영 조각일까, 덜 마른 이슬들일까, 죽은 벌레의 껍질 조각일까. "막시민." "말해." "내가 먹은 그거… 술이지?" "그래. 이제 알았냐?" "그런 거 먹어도 되는 걸까?" "네가 생각하기 나름이지. 솔직히 바람직하다고만은 할 수 없겠지." "그런데 넌 왜 마시는 거야?" "글쎄, 너네 작은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대로라면 '인생이 힘들어서'가 아닐까." 술을 마신 막시민은 평소와 달리 보통 사람(?) 같은 말투로 중얼거렸다. 조슈아는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걸 보고 신기하다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왜 인생이 힘든데?"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어." 막시민과 동생들의 생활이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막시민이 그런 말을 입밖에 낸 적은 없었다. 늘 자신만만했기에 조슈아는 막시민이 자기와 어울려 놀듯 이 생활을 즐기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돈이 좀 많으면 편해질까?" "글쎄. 그것만은 아니겠지. 넌 어때?" "나?" "삶이 평화롭냐고." 구름들이 서로 손을 잡고 윤무를 추기 시작했다. 눈을 감았다 떴다 반복해봤지만 윤무는 점점 더 빨리질 뿐이었다. "별로 어렵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거짓말하지 마. 아니, 뭐,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겠지. 단지 네가 모르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내가 뭘 모르는데?" "결혼했다는 너네 누나, 그 사람에 대해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있잖아. 그 사람한테 빚진 기분인 것 같던데." "내가?" "그리고 부모님의 기대가 큰 거지? 이것저것 잘 해내라고 강요한다거나, 여러 명의 가정교사한테 둘러싸여 공부에 시달렸다거나 그런 거 아니야?" 조슈아는 별 생소한 얘기를 다 듣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혀 그렇지 않아. 우리 부모님의 절대적 희망은 내가 놀기만 하는 거야. 아무 것도 안 외우고, 아무 것도 안 배우고, 내가 너무 많이 알면 일찍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더라고……." 막시민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더니 안경을 고쳐 썼다. 기분이 나빠진 모양이었다. "아니라고? 지금 내 추리가 틀렸다는 거야?" 그 즈음 조슈아는 구름들이 팽글팽글 돈다고 느껴져 도저히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막시민이 옆에서 하난 듯 뭐라고 떠들어댔지만 대답을 할 입장이 아니었다. 겨우 이 한 마디만 했다. "졸음이 오는 것… 같아." 하늘엔 한 번도 빙빙 돈 일이 없을 구름이 흐르고, 두 꼬마가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유쾌한 여름 또한 흐르고 있었다. 8. 풍차간의 악마 "내가 네 친구가 친구가 된 걸 후회하지 않도록 해 줘. 진심으로 후회하고 싶지 않아." "아냐. 넌 틀림없이 후회하게 될 거야. 물론 그 후로도 여전히 내 친구겠지." 결국 막시민이 집에 돌아가 일마의 전언(傳言)을 들은 것은 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였다. 이 즈음 조슈아는 머리가 속에서 뭔가가 굴러다니는 것처럼 아프고 지끈거려 양미간을 싸쥐고 있었다. 생전 처음 마신 서너 모금의 술이 머릿속을 정리 안 한 장롱 속처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렸다. 막시민이라고 상태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도 조슈아 앞에서 잘난 채 하느라 좀 무리했던 것이다. 어쨋든 막시민은 일마의 말을 듣는 순간 둘이 쓸데없는 객기를 부리게 된 책임을 모조리 술, 술 만드는 곳으로 데려간 본인, 그 본인에게 술을 준 수도사에게 돌려야 할 거라고 떠들어대다가 싸움 얘기를 듣더니 낄낄 웃으며 말했다. "뭐, 싸움? 그 자식들이 웃기네. 내가 가서 풍차 날개로 몇 대 때려주고 올게." "그런데 풍차 날개는 어떻게 뽑지?" "응, 일단 풍차간을 번쩍 들어 눕힌 다음, 한 개씩 차례대로 분리해서……." "오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풍차간에 가긴 왜 가? 뭘 그런 것에 일일이 대응하려고 해?" "놈들을 무시하면 뽑아놓은 풍차 날개는 어떡하란 말이냐? 아, 괜스레 풍차 날개는 뽑아 갓고 본의 아니게 싸움질을 하게 되었구나.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오호 통재라. 아까 풍차 날개 뽑자고 한 놈 누구야?" 머리가 아플 뿐 정신은 돌아온 조슈아가 말했다. "너야." 일마는 술 냄새를 맡은 듯 이미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오빠, 왠만하면 정신 좀 차려줄래?" "지금 내가 정신이 없다고 생각 되냐, 사랑하는 동생아?" 남매는 한참 툭탁거렸지만 결국 꼬마 술꾼의 고집이 잔소리 많은 누이동생을 이기고 말았다. 사실 이기고 지고 하는 것은 별 의미도 없었다. 일마는 혀를 차며 잘해보라고 한 마디 던지고는 밖에 널어놓은 이불을 걷으러 가버렸다. 막시민은 실실 웃으며 검지를 허공으로 쳐들더니 외쳤다. "가자, 조!" "…머리가 아파." 막시민이 남은 술기운 때문에 무모한 일에 덤벼든 건 아니었다. 싸움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막시민은 그럭저럭 동네 골목대장 정도는 됐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동생들을 데리고 살아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저녁 바람이 살랑거리며 불어오자 풀들이 일제히 고랑을 그리며 누웠다가 일어났다. 언덕을 오르다 보니 해가 다 떨어졌다. 풍차간의 벽은 석양 아래 진줏빛이 감도는 이 지방 특유의 까칠한 돌, 코츠볼트 석(石)으로 만들어졌다. 듣기로 코츠볼트 석은 이 지방에 많이 나는 석회석의 일종으로 재질이 부드러워 다루기가 좋다고 했다. 알고 보니 조슈아가 살고 있는 파란 지붕 집을 만든 노르스름한 돌도 코츠볼트 석이었다. 풍차의 낡은 날개가 석양에 단 쇠처럼 발갛게 빛나는 것을 마지막으로, 둘이 풍차간 입구에 도착했을 즈음엔 이미 사방이 캄캄해져 있었다. 막시민은 올라오면서 이 풍차간이 밀 수확 철에만 한창 돌아가고 평소엔 멈춰 있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근방에 목양지가 많은 대신 밀 경작지는 적은 탓이었다. 오늘도 풍차간 제분소에는 어른 한 명 없었다. 조슈아는 들어가기 전 무심코 풍차간의 모양새를 살펴봤다. 입구는 두군데였다. 맞은편 뒷벽에 작은 문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좁고 높다란 건물로 주변에는 봄밀을 탈곡하고 남은 밀짚들이 아직도 많이 쌓여 있었다. 풍차간 안에도 마른 밀짚이 쌓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밀가루 푸대도 있었지만 대부분 빈 채로 한쪽에 널려 있었다. 조슈아는 들고 온 등각 램프를 안 쪽 구석에 놓았다. 밀짚에 불이 붙었다간 큰일이었다. "야, 저 자식 왔네." "저기 있다." 풍차 날개와 연결된 몇 개의 가로대에 올라앉아 있던 애들이 슬슬 내려왔다. 닭장 소동을 일으킨 장본인은 조슈아였지만 그건 중요한 문제가 못되었다. 저쪽에서는 어짜피 조슈아가 한 일을 몰랐고, 조슈아는 막시민이 싸운다니까 그냥 그런 줄로만 알고 아무 생각 없이 밀짚 더미 위에 앉아 있었다. 막시민은 겉저고리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특유의 껄렁한 태도로 애들을 맞았다. "오, 넷이나 왔네?" "닭 도둑놈아, 준비는 됐냐?" 성큼성큼 다가온 몸집 큰 녀석은 더 말하지도 않고 멧돼지처럼 들이받는 것으로 선제 공격에 들어갔다. 먼지와 흙이 풀풀 날리는 가운데 두 녀석이 뒤엉켜 몇 바퀴 구르고, 다시 일어났다. 일어난 막시민은 여전히 여유작작하게 손끝을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좀더 나은 걸 보여주라고." 다시 부딪혀왔다. 막시민은 잘 피했지만 자기도 발을 약간 헛디뎌 한쪽 다리를 들며 중심을 잡아야했다. 다시 달려온 녀석에게 나름대로 주먹을 한대 먹이고, 물론 제대로 맞지 않은 녀석은 멱살을 움켜쥐려고 두 손 다 동원해 헛손질을 했다. 이리저리 밀리다 보니 싸움 장소는 어느새 조슈아와 멀찍이 떨어졌다. 그러나 곧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막시민의 목소리였다. "잡아 봐, 얼른." 조슈아는 어려서 아버지가 기사들과 연습 대결을 벌이는 것을 구경하곤 했다. 조슈아의 아버지는 평소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이어서 검이나 창은 물론 백병전에도 뛰어났다. 기사들은 대부분 아버지에게 졌다. 기사들이 일부러 져 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력 차가 확연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조슈아는 전혀 싸움을 할 줄 몰랐다. 배운 적도 없었고, 하고 싶다고 생각한 일도 없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들려 오는 소리와 언뜻언뜻 보이는 움직임들을 보고 있자니 그들의 움직임을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려서 보았던 장면들과 일부 겹쳐지면서 소리와 움직임이 이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슈아는 곧 착각이겠지 싶어 마음 속에서 심상을 지워버리고는 짚더미에 비스듬히 기대 팔베개를 했다. "아, 방금은 제법이었다." 다시 한 번 막시민이 웃으면서 말하는 것과 함께 누군가가 콜록거리며 침을 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조금 후 어둠 속에서 나지막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느껴졌다. 조슈아는 불현듯 깨달았다. 저건 사람의 소리가 아닌데? 한 소년이 씩씩거리며 외쳤다. "자, 가서 물어!" 그르르 … 컹! 어둠 속에서 거무스름한 네 발 짐승이 쏜살같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조슈아는 눈을 크게 떴다. 분명했다. 말리고 말고 할 틈도 없었다. 막시민이 당황해서 소리를 질렀다. "젠장, 이건 무슨 짓이야!" "쉿! 물어! 물어뜯어!" "네 옷으로 훈련시켰으니까 네 냄새라면 환장을 할 걸?" 개였다. 그것도 아이들 몸집만큼이나 크고 사나운 검정개였다. 어느새 막시민으로부터 멀어진 소년들은 저마다 소리지르며 개를 부추기느라 신이 났다. 조슈아는 얼굴이 새파래졌다. 어둠 속에서 개와 한 덩어리 된 막시민의 모습을 알아보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비명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걸로 보아, 위험해도 이만저만 위험한 것이 아니었다. "그만둬! 죽는단 말이야!" 조슈아는 짚단에서 뛰어내렸다. 소년들은 조슈아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런 어둠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르는데, 부주의한 아이들은 단지 개가 막시민을 혼내주기만 할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만두라니까!" 조슈아는 달려들려다가 멈칫했다. 자신의 조건을 판단한 것이다. 막시민보다 훨씬 작고 여린 몸을 가진 자신이 물리적인 공격으로 개를 떼어놓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조슈아는 다시 한 번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울렸다. "당장 멈추란 말이야!" 합창단 솔리스트로 단련된 높은 목소리가 풍차간 전체를 공명시켰다. 모두 놀라 조슈아를 쳐다보고, 개조차도 움직임을 잠시 멈췄다. 짧은 침묵 뒤에 한 명이 말했다. "왜 우리가 네 말을 들어야 해? 그너저나 넌 누구야? 참견말고 썩 꺼져." 조슈아는 숨을 몰아쉬다가 몸을 홱 돌렸다. 한쪽 구석에 두었던 램프가 눈에 띄었다. 당장 달려가 램프를 집어 높이 쳐들며 소리쳤다. "멈추지 않으면 풍차간에 불을 질러버리겠어!" 소년들은 곧이듣지 않고 웃어댔다. "불을 질러? 할 수 있으면 어디 해봐!" "괜히 큰소리 쳐보는 거지? 병신……." 그 때 소리 한 번 지르지 않고 있던 막시민이 몸을 일으키려 했고, 막시민을 잠시 놓았던 개가 펄쩍 뛰어오르며 다시 그를 쓰러뜨렸다. 으르렁거리며 짖는 소리와 함께 개와 소년이 함께 바닥에 뒹굴었다. 소년들은 여전히 조슈아가 불을 지를 리 없다고 생각하는지 웃음소리만을 냈다. 그리고, 조슈아는 짚더미 위에 램프를 내던졌다. 화르륵……. 벽에 부딪쳐 등갓이 깨지면서 기름 묻은 심지 전체로 불이 옮겨갔다. 기름이 쏟아지고, 곧 이어 짚더미는 불덩이로 변해버렸다. "저, 저……." 소년들은 놀라 말을 잃었다. 그들은 조슈아를 무시했던 것이 아니었다. 다른 누가 그런 말을 했다 해도 곧이듣지 않았을 것이다. 짚으로 가득 찬 이곳에서 불을 한 번 질렀다가는 당장 풍차간 전체로 번질 것이고, 그 불길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달려와도 잡기 힘들 것이었다. 불을 지를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다. 불길이 풍차간 내부의 3분의 1가량을 집어삼키면서 입구 쪽을 막아버렸다. 소년들은 반쯤 정신이 나간 표정이 됐고, 개도 막시민을 놓고 빠져나갈 곳을 찾느라 컹컹대며 뛰었다 "야, 이 미친놈아! 우릴 다 죽일 참이야!" 그런데 조슈아만은 이상할 정도로 놀라지 않았다. 조슈아는 너희들은 이럴 줄 몰랐느냐는 것처럼 답답한 얼굴로, 심지어 미소까지 지으면서 물었다. "난 분명 너희하고 협상하려 했잖아? 하지만 너희가 거절했어. 내가 불을 지르지 않았으면 결국 막시민을 놓아주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막시민 한 명이 죽도록 놔두겠니, 아니면 너희까지 죽도록 하겠니?" 소년들은 무슨 의미인지 몰라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 가운데, 조슈아는 불길 때문에 언뜻 무시무시하게 보이는 얼굴로 말을 맺었다. "협상이 결렬됬으니 당연히 다 죽어야겠지?" 소년들은 넋이 나갔다. 저 녀석은 정말로 미친놈이었다. 한 명이 떨면서 소리쳤다. "악마!" 조슈아가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그 말 맞아. 난 악마야 어려서부터 그 말 들었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조슈아는 자신 속에 숨겨뒀던 가면을 하나 꺼내든 듯 너무나 자연스럽게 새로운 배역에 적응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늘 해오던 일이 이것이었던 것처럼, 조슈아는 누워 있는 막시민에게 다가갔다. 막시민은 피를 많이 흘렸지만 아직 정신이 있었다. 물론 그도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지금 이걸 고맙다고 해야 되는 거냐?" 막시민이 올려다 본 조슈아는 괴물처럼 침착한 표정이었다. "조용히 해. 일어날 수 있어?" "글쎄다." 막시민은 한족 다리를 심하게 물렸다. 걸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조슈아의 힘으로 부축하는 것은 간단치 않을 것 같았다. 불이 타오를수록 주위는 아수라장이 됐다. 이제 불길은 나무로 된 집기에까지 옮겨붙었다. 벽이 나무였으면 무너지기라도 했을 텐데, 돌로 된 벽은 내부만 지옥으로 만들었다. 개가 제일 먼저 불길을 뚫고 입구로 탈출했다. 다른 아이들도 겁을 내며 망설이다가 결국 하나 둘 뛰어나갔다. 조슈아는 다시 막시민에게 말했다. "내 어깨 잡고 일어나 봐." "그런 소릴 하려면 일단 어깨부터 낮춰 봐." 어쨋든 둘은 누가 누구에게 기댄 건지 모를 자세로 기다시피 밖으로 나왔다. 큰 화상 없이 질식하지 않고 나온 것만 해도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막시민은 풀밭에 눕더니 기절한 것처럼 눈을 감아버렸다. 검댕이 곳곳에 묻었는데도 불구하고 얼굴빛이 백짓장 같았다. 그 즈음 풍차간은 절반 가까이 불길에 휩싸여 검은 연기를 뿜고 있었고, 십여 명의 마을 사람들이 불을 보고 언덕 위로 뛰어올라오는 중이었다. 곧 풍차 언덕은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러나 이미 풍차간의 불은 사람들의 힘으로 끌 수 있는 상태를 넘었다. 태울 것을 다 태우고 제풀에 꺼질 때가지 기다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먼저 나간 아이들은 얼굴이 새까맣게 된 채로 콜록거리며 어른들에게 기대어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놀라 달려온 아버지 품에 안겨 있다가 조슈아를 보더니 대뜸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쟤예요! 쟤가 불을 질렀어!" 막시민의 상처를 살피고 있던 조슈아는 비척거리는 다리를 세우며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언뜻 보기에 조슈아는 어떤 나쁜 일도 저지를 수 없을 듯 보이는 꼬마였다. 그러나 조금 후 고개를 들고 사람들을 쏘아보는 눈빛은 더 이상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당장 의사를 불러!" 그러나 마을에는 의사가 없었다. 개의 이빨 때문에 막시민이 입은 상처는 너덜너덜했고, 잘 치료하지 않으면 썩을 것처럼 보였다. 더구나 피를 많이 흘려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나마 의술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있는 곳은 수도원이었기에 사람들은 서둘러 막시민을 그곳으로 데려갔다. 수도사들로부터 대략의 처치를 받았지만 잠든 것인지 기절한 것인지 모를 막시민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다음은 조슈아 차례였다. 이미 한밤중인데도 수도원까지 온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조슈아를 심문하려 들었다. 조슈아도 지칠대로 지쳐 막시민 못지 않게 파리한 얼굴이 되어 있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조슈아가 코츠볼트에서 지낸 지도 벌써 보름이 넘었다. 그러나 외따로 떨어진 파란 지붕 집에서만 살며 만나는 사람도 막시민네 가족뿐이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 대부분에게 조슈아는 생소한 아이였다. 누구네 집 아이인지 모른다는 것, 즉 보호해 줄 방패막이가 없다는 점이 사람들을 더 거칠게 만들었다. 수도원 안의 작은 방에서 조슈아는 한가운데 앉혀지고, 십여 명의 어른들이 그를 둘러싼 채 앉거나 또는 서 있거나 했다. 맨 먼저 늙은 수도사가 물었다. "네가 불을 질렀다는 것이 정말이냐?" 부인해봤자 소용도 없거니와 부인할 생각도 없었다.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몇 명이 분대하여 혀를 찼다. 농부나 목동들인 이들은 담백하지만 거친 사람들이었기에, 대부분 치미는 화를 참지 못하는 표정들이었다. 한 남자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소리질렀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기나 해? 너 제정신이야?" 조그맣고 예쁜 꼬마인 조슈아가 겁먹고 떨고 있었더라면, 실수로 큰 일을 저질렀나보다 싶어 동정심이라도 샀을 텐데. 꼬마답지 않게 의연한 태도가 오히려 화를 돋구었다. 그나마 침착한 사람은 늙은 수도사뿐이었다. 그가 다시 물었다. "왜 그런 짓을 했지?" "그 애들이 '친구'를 죽일 것 같아서요." 조슈아는 스스로 '친구'라는 단어를 입밖에 내면서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낯선 단어일 리가 없는데, 입술에 닿는 느낌이 무척 특별했다. 뜻 모르는 단어를 맨 처음 발음해보는 것 같았다. "아니, 어린애들이 무슨 사람을 죽인다고 그래! 듣자하니 못하는 소리가 없구만! 어허, 흠!" 개를 데려온 아이의 아버지가 목소리를 높였다. 마흔 줄의 여자도 화를 누를 수가 없는지 삿대질을 하며 을러댔다. "그런다고 풍차간에 불을 질러? 이 꼬마가 정신이 나갔나? 그 풍차간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알기나 해?" 작은 의자에 앉아 있던 조슈아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사람 목숨이 더 중하다고 생각해서 그랬어요." "죽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무슨 딴소리야!" "하지만 제가 그렇게 안 했더라면……." "뭐야? 그래서 네가 지금 잘했다는 거야? 당연히 할 일을 했다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선택에 대해 잘했고 못했고를 따질 순 없어요." 조슈아가 대답하는 것이 영 마음에 안 들었는지 한 사람이 갑자기 조슈아의 머리를 연달아 쥐어박으며 소리질렀다. "이 꼬마 새끼 좀 봐라. 얼마나 막돼먹은 부모 밑에서 자랐으면 저런 일을 저질러놓고 잘못한 줄도 몰라? 뭘 잘했다고 말대답이야!" "어느 집 자식이야? 넌 어디서 왔어?" "철모르는 애한테 뭘 들을 얘기가 있다고 여기서 이러고들 있소? 얼른 가서 애 부모를 데려옵시다. 너 부모 없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거야?" 부모 이야기가 나오자 조슈아는 눈을 내리깔며 작게 말했다. "제 문제는 부모님과 관계없고요." "저 녀석 말하는 것 좀 보게? 도토리 만한 놈이 겁대가리 없이 어른 하는 말에 꼬박고박 말대답은!" "그거 참, 막시민인가 하는 애는 멀쩡하게 상아 있구만, 뭐가 어쨋다고 불을 지르고 난리를 피우는 게야?" 말을 한 것은 막시민과 싸우던 아이의 삼촌이었다. 그런데 그 때까지 비교적 dia전하게 대답하던 조슈아가 갑자기 눈을 똑바로 치뜨며 그를 쏘아봤다. "멀쩡하게 살아 있다고요? 아저씬 막시민의 다리가 어떻게 됐는지 보셨나요? 그 개가 얼마나 큰 개인지, 얼마나 사납게 물었는지, 아저씨가 보고서 하는 말씀이세요?" 조슈아가 대들자 상대는 당황했지만 곧 더 크게 화를 냈다. "이런 못 배워먹은 놈을 봤나! 지금 그런 말대꾸가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하는 거냐? 풍차간이 없으면 밀농사 짓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나 알기나 해? 네 부모가 집을 팔아서라도 지어 놔야 된다는 걸 알아야지! 그깟 부랑자 같은 애녀석이 뭘 어쨌다고 그 난리를 벌여? 세상에 중요하고 안 중요한 것도 구분 못하나!" 마지막 말에 얼굴이 확 달아오른 조슈아가 발딱 일어났다. "중요하고 안 중요한 걸 잘 구분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고 아저씨예요! 사람 목숨보다 풍차간이 중요하단 말인가요? 막시민은 부랑자 같은 애라서 죽어도 눈물 한 번 짜면 그만이고, 풍차간이 탄 것은 새로 짓는데 돈이 많이 든다 그건가요?" 갑작스런 항변에 상대는 말문이 막힌 듯 더듬거리다가 호통을 쳤다. "아니, 그건 무슨 … 헛소리하지 말고 입 다물어!" "막시민한테는 동생이 넷이나 있어요. 막시민이 없으면 그 애들은 어떡하지요? 다행히 막시민이 살아났지만 만약에 개한테 물린 다리가 잘못되면? 다리 하나를 못 쓰게 되면 그 책임은 개를 데려온 애들이 지나요? 그 애들이 평생 막시민을 업고 다닐 건가요? 왜 이게 시시한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자기 일이 아니니까? 자기 자식이 아니니까? "조용히 하라니까! 뭘 잘했다고 떠들어!" 사람들이 일제히 떠들어대기 시작하자 늙은 수도사가 조용히 시키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한 사람이 '그런 부랑아 녀석을 위해 풍차간을 태우다니, 헛간 하나도 아깝다' 라고 폭언하자 조슈아가 그 쪽을 돌아보며 소리질렀다. "헛간? 풍차간? 이 수도원인들 못 태울 것 같아요? 싹 다 태우는 것쯤 조금도 겁나지 않아!" "뭐야? 조용히 하지 못해!" "저런 천하의 후레자식이 있나!" 늙은 수도사가 앞을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조슈아는 몰매를 맞고도 남았을 것이다. 막 방 안이 벌집처럼 들끓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수도사복 같은 것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다. 흥분한 사람들은 누가 들어왔는지 느끼지도 못했다. "다들 조용히 하게." 둘 중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다름 아닌 이곳의 수도원장이었다. 낮고 점잖은 목소리가 얼른 사람들을 가라앉히지 못하자 다른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조용히 하라는 말이 들리지 않소?" 그는 늙은이였는데 목소리가 무척 창피해했다. 소란이 진정되자 늙은 수도사가 나서서 물었다. "이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저 아이인가?"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수도원장은 조슈아를 가리켰다. 조슈아가 수도원장을 쳐다보니 엄숙한 얼굴이긴 한데 자세히 보니 입가가 우스운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실룩거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수도원장은 늙은 수도사와 귀옛말로 몇 마디 나누더니 조슈아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나를 따라오너라." 사람들이 영문을 몰라 웅성대는 가운데 조슈아는 수도원장을 따라 나갔다. 정체 모를 늙은이도 뒤따라 나가자 뒤에 남은 늙은 수도사가 사람들에게 말했다. "날이 밝고 있소이다. 수도원장님께세 시비를 가려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으니 모두 나를 따라오시오." 수도원장이 마을 사람들을 만날 때 사용하는 응접실은 수도원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장식 하나 없이 소박한 곳이었다. 굳이 지적하자면 빈 벽에 마른 풀꽃을 리스로 엮어 놓은 것이 하나 걸려 있었지만 그것도 어느 시골 처녀가 엮어 보냈을 법한 어설픈 물건이었다. 날이 밝으면서 햇빛 드는 창 너머로 등성이를 오르는 푸른 산비탈이 내다보였다. 창가는 따뜻했지만 연갈색 석조 벽에는 여전히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등받이도 없는 걸상이 여러 개 들여 놓아져서 사람들이 대강 둘러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좀 전의 낯선 늙은이는 창가에 서서 산등성이를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휘파람을 불었다. "자, 그럼 마을 분들부터 먼저 말해 볼까? 일단 들어나 봅시다." 농부보다 더 농부처럼 생긴 예순 살 가량의 수도원장은 의자에 기대앉은 채 벗겨진 머리를 자꾸만 긁고 연신 귀도 후볐다. 그런 모습인데도 사람들은 수도원장을 무척 존경하는 듯 허리를 몇 번이나 굽혀 가며 말했다. " 저 애가 어디서 나타난 애인지는 아무도 모른답니다. 근데 그, 리프크네집안이라고 하시지요? 거시기, 부모 없이 애들끼리 어울려 사는 그 집 말입니다. 그 집 아들들하고 사촌하고 한 번 혼내주고자 모의를 했답니다. 밤중에 풍차간으로 나오라고 한 거지요, 아, 왜, 아시잖습니까? 그냥 애들끼리 몇 대 치고 받고 좀 하려고 한 거죠, 네." 수도원장은 '뭐, 그럴 수도 있지' 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깨만 으쓱했다. 옆에서 다른 사람이 말을 받았다. "그래서 다들 간 건데, 갔더니 처음부터 저 낯선 애가 같이 와있더랍니다. 하여간에 샐믹 씨네 큰애인 디만고하고 막시민이란 애하고 어울려 싸우는데, 아, 싸우다 보면 좀 때리고 그럴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구경하던 저 애가 막시민이 불리한 거 같으니까 싸우지 말라고 글쎄 짚가리에 불을 질러 버렸다는 겁니다요!" "아주 막돼먹은 놈이에요!" "얼른 저 애 부모를 찾아 주십쇼!" "풍차간을 새로 짓게 해야 됩니다! 손해 배상을 해야 돼요!" "풍차간이 없으면 가을밀 농사는 어쩝니까?" 수도원장이 옆에 인형처럼 앉아 있던 조슈아가 갑자기 피식 웃음을 흘려서 사람들은 모두 흠칫했다. "아저씨, 하나만 묻겠는데요. 그럼 막시민 다리에 그 큰 상처는 디만고라는 애가 물어서 난 거군요?" "뭐, 뭐라고?" "그 커다란 이빨 자국 말이에요. 디만고는 입이 이- 따만하군요?" 그러면서 조슈아는 두 손바닥을 붙여 벌렸다가 몇 번 딱딱 다물어 보여줬다. 결국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그 풍차간 안에 개가 있었던가 봅니다. 막시민이란 애는 개한테 물린 게죠. 아, 뭐… 개가 짚가리 속에서 자다가 불을 지르니까 튀어나왔겠죠." 조슈아의 낮은 웃음이 다시 한 차례 높아졌다가 낮아졌다. "요샌 개가 불을 보면 도망가지 않고 엉켜서 싸우고 있는 두 명 중에서 한 명만 골라 끌어내어서 다리를 물고 가나보죠?" "조, 조용히 하지 못해!" 한 사람이 소리지르자 옆에서 늙은 수도사가 주의를 주었다. "수도원장님께서 친히 시비를 가려주시는데 당신이 아이를 윽박질러선 아니 되오." "음. 크흠! 어쨌든 간에 저 애가 불을 지른 건 틀림없어요! 그 개는… 그다지도 큰 개도 아니었소!" 조슈아는 이제 웃지 않고 상대를 쏘아봤다. "그 개는 어른도 물어 죽일 수 있을 정도로 큰 개였어요. 우선 막시민 다리에 난 이빨 자국을 보면 알 수 있고, 둘째로 샐믹 씨네 집에서 키우던 개에 대해 알아보면 더 잘 알 수 있고." "개에 물린다고 사람이 죽진 않아!" 조슈아가 불쾌한 눈빛을 보냈다. "죽는지 안 죽는지 실험해 보고 싶으면 당신 아들한테나 해보시지 그래요?" "뭐, 뭐야! 이런 죽일 놈의 자식이 다 있어!" 얼굴이 시뻘개진 농부 하나가 벌떡 일어나 조슈아가 있는 쪽으로 한 발 짝 내딛는데 또다시 늙은 수도사가 엄한 얼굴로 막으며 도로 앉게 했다. 그러면서 조슈아에게도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러자 조슈아는 태엽인형처럼 귀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았어요." 사람들은 점점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곳에 문제의 아이들은 없었지만, 그 애들은 풍차간 안에서 조슈아가 다 죽여버리겠다고 말하는 표정이 미친 사람처럼 무서웠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미친 것 같다는 애를 데려다 놓고 보니 도토리처럼 작고 귀엽게 생긴 것이 도저히 그런 얘기가 어울릴 것 같지 않은데다, 태도도 빽 소리를 지르다가, 슬슬 화를 돋구다가, 금방 아이답게 굴다가 하는 것이 너무 변화무쌍해서 어느 것이 진짜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결국 한 사람이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여 말했다. "어쨌든간 막시민이란 애가 죽은 것도 아닌데, 풍차간은 다 타버렸잖습니까! 그런데 저 애는 뉘우치는 기색 하나 없으니 이게 미칠 노릇 아닙니까? 얼른 부모를 데려다 주십쇼! 저런 어린애하고 실랑이하자니 지쳐 죽겠습니다!" 그제야 수도원장이 느릿하게 입을 열어 말했다. "얘야, 네가 불을 지른 건 맞단 말이지?! 조슈아는 정말 착한 아이같은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 "네, 그건 맞아요." "왜 그랬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음… 처음에는 아저씨들이 말한 것처럼 정말로 애들끼리 주먹으로 해결하려는 건 줄 알고 가만히 있었어요. 그런데 디만고라는 애가 막시민한테 지니까 미리 데려왔던 개를 불러냈죠, 물린 자국을 보면 아시겠지만 그 개는 막시민보다 더 몸집이 큰 개였고 무척 사나웠어요. 주변이 캄캄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막시민이 개와 뒤엉켜 쓰러지니 저는 무척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두라고 소리질렀어요." "이것 봐! 그 개를 애들이 데려왔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조슈아는 표정을 싹 바꾸며 말한 사람을 노려봤다. "자기 개가 아닌데 '물어!' , '물어뜯어!' 하고 뒤에서 부추기나요? 그것도 애들이 전부 다 합세해서?" 상대 남자가 다시 뭐라고 말하려는 것을 수도사가 가로막았다. 수도원장은 졸릴 정도로 느린 말투로 다시 물었다. "그런데 애들이 그만두지 않았단 말이냐?" "그만두기는커녕 저를 비웃었어요. 저는 마음이 급한 나머지 그만두지 않으면 불을 지르겠다고 했죠…, 애들은 질러보라고 하더군요." 그러더니 조슈아는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렸다. 응접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다 놀랐다. 아까 수도원도 모조리 태워버릴 수 있다고 소리지르던 지독한 아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기 때문이었다. "전 정말 어쩔 수 없었어요…, 친구가 개한테 물려서 죽을 것 같은데, 그 악마 같은 애들은 좋아하면서 물어뜯으라고 외쳐대고 있었죠! 제가 뭘 할 수 있었겠어요…? 친구가 죽게 두고 도망갈 수는 없잖아요?" 악마는 상대 아이들로 뒤바뀌어 버렸다. 사람들 몇이 가증스럽다는 것처럼 혀를 찼다. 그들 눈에도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는 조슈아는 정말 불쌍하고 죄 없는 꼬마처럼 보였던 것이다. 어린애가 저렇게 연기를 잘할 수가 있을까? 어떤 사람은 정말로 조슈아의 말을 믿기 시작해서 한쪽에서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래서 불을 질렀니?" "결국 제가 램프를 집어던져서 불을 냈죠. 제 잘못이에요. 거짓말로 부인 할 생각은 없어요." "저 사람들이 너더러 풍차간 짓는 값을 물어내라고 하면 어쩔 참이지? 돈을 내놓을 부모가 있느냐?" 조슈아는 눈도 깜빡 않고 대꾸했다. "그것에 대한 대답은 막시민의 다리가 문제없이 다 나은 다음에 할 생각이에요. 만약 막시민이 잘못된다며, 그 애들이 어떻게 할 지 무척 궁금하거든요." 이로써 가장 곤란한 대답도 영리하게 빠져나가고 말았다. 여전히 험악한 얼굴로 화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꼬마의 태도가 어이없는지 헛 웃음을 흘리는 사람도 몇 생겨났다. 그 때 창가에 서 있던 낯선 늙은이가 불쑥 말했다. "막시민 녀석이라면 곧 괜찮아져." 조슈아가 고개를 돌리며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아세요?" "그 놈은 괴물처럼 잘 회복돼." 조슈아가 무슨 소릴 하려는 건가 싶어 상대의 얼굴을 쏘아보고 있는데 늙은이가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말했다. "그러니 어쩔 셈이냐? 막시민이 아무 일 없이 나으면 풍차간 새로 짓는 비용을 네가 마련할 셈이냐? 어떤 식으로?" 조슈아는 순간 당황했으나 곧 얼굴빛을 바꾸며 말했다. "그런 문젠 그렇게 된 다음에 얘기해도 늦지 않죠." 곁에서 짜증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한테 무슨 돈이 있소? 어린애 붙들고 이런 소리 하고 있는 것도 우습소이다. 너, 이름이 뭐야?" "조슈아예요." "그것 말고 성을 말해 봐! 부모 이름이 뭐야?" "그건요……." 눈을 한 바퀴 굴리던 조슈아는 낯선 늙은이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상대방이 자기가 뭐라고 대답할 지 기대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조슈아는 입끝을 살짝 올려 보였다. "그것도 막시민이 다 낫고 나서 말하겠어요." 그런데 다시 한 번 늙은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응접실 전체를 울리는 웃음이라 사람들이 놀라 돌아볼 정도였다. "네 수작이 가소롭다. 넌 지금 부모의 명예도 더럽히기 싫고, 그렇다고 너 스스로 풍차간을 다시 세워줄 돈도 없다는 거겠지, 있다면 지금처럼 변명만 하고 있을 까닭이 없잖느냐. 아니 그러하냐? 결국 닥친 상황을 피하려 고 변명만 늘어놓을 뿐 실질적인 해결을 할 방법은 없는 거구나. 그런데 해결책이 하나 있다면, 다름 아닌 네 친구가 다리 병신이 되어주는 것이야! 그러니 넌 그 녀석의 다리가 낫지 않아야만 긍지를 모면할 수가 생기는 셈이로구나! 친구가 나았다간 큰일나겠다. 아니 그러하냐? 허허허!" "그런 게 아니에요!" 조슈아가 항변하려 했지만 노인은 다시 한 번 킬킬거리며 말을 이었다. "조금 전에 사람들한테 듣기로 너는 친구를 위해서라면 수도원도 태워버릴 수 있다라고 큰소리 쳤다는데, 방금 네가 한 말을 생각하면 전부 거짓말 같구나. 친구의 다리가 못쓰게 되길 바라면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 네가. 친구를 위해 풍차간에 불을 질렀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데 어찌 생각하느냐?" 조슈아는 말문이 막혀 얼굴이 창백해졌다. 터무니없는 오해를 받고 있는데 말을 잘못한 탓에 항변할 도리가 없었다. "자, 어쩔 참이냐? 막시민이 다 나으면 네 힘으로 풍차간 짓는 비용을 마련하겠느냐?" "……." 마지막 보루 물론 켈티카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이런 소식을 듣는다면 어떤 얼굴을 할까 생각하자 등허리에 차가운 얼음을 대는 듯한 기분이었다. 여기에서라면 막시민과 더불어 개구쟁이 짓을 하고 유치하게 굴어도 창피하지 않았지만, 비취반지 성의 자신을 떠올리는 순간 자칫 건드렸다가는 부서져버리고 말 유리 인형이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직은 유리 인형을 부술 자격이 없었다. 비취반지 성의 사람들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그 유리 인형은 지금도 자신과 많이 비슷했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무엇일까. 조슈아는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은 노인을 똑바로 올려다봤다. 그 순간, 마음 속에서 이것은 이 노인이 지적하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결국 해결했어야 할 문제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노인의 말이 맞았다. 말재주로 유예한다고 해도 며칠일 뿐이다. 막시민이 회복되어야만 한다고 믿는 자신에게, 그건 아무 의미 없는 말장난에 불과했다. 노인은 왜 그것을 지적해 줬을까. 단지 조슈아를 궁지에 몰기 위해서?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조슈아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반짝 빛났다. 본질이었다. "이 얘기는 처음부터 잘못되었어요. 막시민이 낫는가 아닌가는 이 문제와 아무 관계가 없었던 거군요. 다 제 착각이었어요." 조슈아는 의자에서 뛰어내려 사람들 가운데로 걸어나왔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손대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위치로 가서 섰다.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는 표시였다. "전 풍차간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겠어요." "뭐라고?" 어른들 사이에 둘러싸인 모양이 된 조슈아는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작아 보였다. 그러나 몸에 익은 침착하고 태연한 태도가 되살아났다. 그의 유리 인형이 그렇듯, 그도 그러했다. "처음부터 정당하다고 믿었기에 한 행동이었어요. 잘못한 일이 아니니 보상은 하지 않아요. 당신들이 나를 어떻게 하든. 나는 내 정의에 따라 행동했으니 내게 돈이 있다 해도 한 푼도 내놓지 않아요." "……." 사람들은 당황했고, 술렁였다. 물론 분개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수도원장 앞이었고, 무엇보다도 어린 아이가 폭력의 위협을 겁내지 않고 사람들 한가운데로 나와 똑똑히 말한 것이 그들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조슈아가 덧붙인 한 마디가 사람들의 주저를 한 방에 날려버리고 말았다. "오히려, 막시민의 다리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 애들에게 보상을 받아낼 작정이에요." "뭐가 어쩌고 어째!" "이런 분수 모르는 놈을 봤나!" 한 사람이 조슈아의 어깨를 움켜쥐고, 다른 쪽에서도 반대로 잡아끌었다. 순식간에 뭇매를 맞을 입장에 처했지만 조슈아는 반항하지 않고 바로 서 있으려 노력할 뿐이었다. 그 때 노인이 나서더니 사람들의 손을 밀어내며 조슈아의 작은 몸을 허공으로 번쩍 들어올렸다. "정말 다루기 힘든 녀석이로군." 그렇게 말한 노인은 예전에 아버지가 그랬던 조슈아를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졌다. "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저 어르신은 누구지?" 사람들이 놀라 수군대는 가운데 노인이 입을 열었다. "요 못된 개구쟁이는 내 형님의 손자 되겠소이다. 그런 고로 여러분들의 손해는 벽돌과 밀알 하나에 이르기까지 내가 모두 갚아 주도록 하겠소. 내가 누구인지 궁금하오? 나는 당신들이 가끔 들은 바 있을 파란 지붕 집의 주인이오이다." 파란 지붕 집은 낡은 농가에 불과했지만 사람들은 그 집 주인이 누구인지 늘 궁금하게 여기곤 했다. 그것은 막시민이 조슈아에게 말한 대로 근처의 목초지 전체가 그 집에 속해 있는 까닭이었다. 양을 키우는 사람 치고 막시민이 '썩은 목장'이라고 부르는 그 곳에 들락거리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조슈아." 노인은 고개를 돌리며 어깨에 앉은 조슈아를 올려다보았다. "막시민의 일에 대해 직접적으로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네 정의가 옳을 수 있다. 하지만 하루 아침에 풍차간을 이용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에게는 죄가 없지 않으냐? 그러니 그들이 간접적으로 입은 피해에 대해서는 네가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조슈아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난 이 사람이 처음에 그토록 찾던 작은 할아버지라는 사실이 얼른 실감나지 않았다. "새로 지을 풍차간을 네가 직접 설계하도록 해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린아이에게 뭘 시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집안의 데모닉인 두 사람만은 알고 있었다. 조슈아는 할아버지와 시선을 마주친 채 한동안 생각하더니 이윽고 대답했다. "막시민이 다 낫는다는 조건 하에서예요." 9. 남쪽 섬의 루비 "몇 해에 걸쳐 끈질기게 찾아가도 이루지 못하더니, 그에 이듬해부터는 다시 찾아오지 아니하더군. 찾는 자의 눈에는 찾고자 마음 정한 것만 보이는가? 처음 만난 그 바다에서 아직 기다리고 있는 것을 모르고." 청색이 붉게 변해가더니 이윽고 하늘 전체를 뒤덮었다. 지평선 언저리에 저녁별이 두 개 떠서 깜빡거렸다.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장려하면서도 고요한 저녁이 왔다. "파란 셔츠를 입고 붉은 바지를 입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촌스러울 텐데." 언덕에 팔베개를 하고 누은 조슈아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하늘은 그렇지 않잖아." "그런가." 늘 그렇듯, 당장 손에 쥐어지는 것 없는 화제 갖고 막시민에게서 신통한 대답을 글어내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머리를 마주 댄 채 각각 맞은편으로 다리를 뻗고 누은 두 소년은 2년 전보다 훌쩍 자라 있었다. 조슈아는 열 한 살이 되면서부터 키가 부쩍 컸다. 하지만 체질 탓인지 식사량이나 운동량과는 관계없이 여전히 호리호리했고, 게으른 삶을 모토로 삼고 있는 막시민이 오히려 더 소년다운 체격이었다. 조슈아가 벌떡 일어나 앉자 심드렁하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그림 그리게?" "아, 글쎄." 조슈아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대답했다. "그림 그리기엔 너무 어두워진 것 같다." 누워 있는 막시민으로부터 별다른 대답은 없었다. 조슈아는 소리 없이 웃었다. 지금처럼 막시민이 말이 없는 건 드문 일인데, 그럴 때 평소 역설하는 현실적 사고방식과는 다른 상상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됐던 것이다. 언젠가 조슈아가 뭘 생각하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더니 막시민은 '시시한 상념'에 불과하다며 화를 냈다. 그 후로 조슈아는 혼자 웃을 뿐, 일부러 막시민의 상념을 깨지 않게 되었다. 떼부자가 되어 평생 먹고 노는 것 정도가 평소 희망인 녀석이니, 가끔 덜 실질적인 생각에 빠져 있더라도 해로울 건 없다 싶었다. 처음 만났을 때 잔소리 많은 맏형 같던 막시민은 알고 보니 조슈아보다 나이가 적었다. 그래봤자 고작 한 살이라 조슈아도 곧 잊어버리고 살게 되었다. 어짜피 나이야 어떻든 막시민이 훨씬 어른스럽고 현실적이었던 것이다. 막시민이 다가오는 6월에 한 살 더 먹을 때까지는 조슈아가 막시민보다 두 살이 많다. 요즘 조슈아는 막시민에게 형이라고 부르라며 놀려대는데 재미를 붙였다. 물론 막시민은 무시했고, 궤변을 늘어놓았고, 그러다가 수틀리면 얼굴을 붉히며 신경질을 내곤 했다. 어짜피 이 녀석 입에서 형 소리 듣는 것이 무리한 희망임을 조슈아도 잘 알거니와 굳이 듣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저기 할아버지께서 오시는데."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던 조슈아가 말하자, 풀밭에 안경까지 벗어놓고 눈을 감고 있던 막시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 잠 자볼까 했더니." 조슈아는 물론 막시민이 잠자고 있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언젠가 다시 물어보리라 마음먹었다. "영감. 올라오는 게 아니잖아." 안경을 집어쓴 막시민이 언덕 아래를 자세히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조슈아도 다시 살펴보니 할아버지는 언덕바지에 멈춰 선 채로 그들에게 어떤 손짓을 하고 있었다. "저기로 오라는 것 같은데?" "손으로 저쪽을 가리키잖아…. 강변으로 가라는 건가." 조슈아가 강변 쪽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강변에 모닥불 피워놓은 것이 보이네. 오늘은 밖에서 저녁 먹을 건가봐." "그거 잘 됐군. 집까지 걸어갈 것이 무척 귀찮았어." "넌 귀찮은 게 너무 많아." "삶 전체가 귀찮음투성이지. 너처럼 한 번 본 것을 다시 볼 필요가 없다면 훨씬 덜 번거로울 텐데." "넌 그런 나를 데리고 다녀서 번거로움을 해결하잖아.' "맞아. 넌 메모장 대신으로 아주 제격이야." "주판 대용으로도 쓸 수 있지. 자, 가자." 식사가 끝난 후, 세 사람은 저마다 꺼져 가는 모닥불에 마른 가지를 던져 넣으며 서로에 대한 불평을 주고받았다. "노인네, 요리 좀 잘해요." "그만하면 괜찮았는데?" "아냐, 양고기가 너무 질겼어." "양고기 스튜는 다 그래." "아냐. 영간이 한 것만 그래." "막군 네놈은 다 먹고 나서 불평하는 것이 아주 고질적이야. 일찌감치 말하면 그릇을 뺏어버릴 텐데." '막군'이라는 말은 할아버지가 '막시민 군(君)'을 줄여서 부르는 별칭 같은 것이었는데, 비슷하게 조슈아도 '조군'이라고 부르곤 했다. 할아버지의 영향 대문에 두 소년도 가끔 서로를 그렇게 불렀다. "네놈이 다른 스튜를 먹어 보기나 했어?" "동네 식당에 가면 많이 팔아요." "그럼 가서 배워 와. 다음부터는 네놈이 늙은이를 좀 먹여 살려라." "귀한 양고기를 저 같은 놈 손에 맡기면 죄 받아요."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막시민은 벌떡 일어나 조슈아 뒤로 가서 숨었다. 거의 순간적으로 따라 일어나려 했던 할아버지는 어쩔 수 없는 놈이라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해버렸다. "본데없는 망할 자식이라 어쩔 수가 없다니까." 물론 그 말이 할아버지의 본심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본래 험한 말을 잘 주고받는 편이어서 적당히 말해서는 농담도 되지 않는다. "아시다시피 망할 자식들은 잘해 줘도 기억을 못하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막시민은 슬슬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조슈아는 긴 막대로 재를 흩어 불씨가 잘 살아나게 하면서 혼자 미소지었다. 편한 곳이었다. 곁에서 말다툼을 주고받는 두 사람마저 그렇게 편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해가 흐르자 비취반지 성에 남겨둔 '유리 인형'에 대해서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과 합쳐졌거나, 완전히 분리되었다. 이제는 그 존재가 어떻게 됐거나 마음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것과 관계없이 본질에 가까운 자신이 되었던 것이다. 켈티카에 있던 때는 느끼지 못했던 평화가 있어 그는 그리운 것이 없었다. 부모도, 화려한 생활도, 전략적 긴장도, 그리고 누나도. 이런 말을 하기엔 아직 어리지만, 영혼이 이곳에 정착한 듯한 느낌이었다. "예전에 조군이 설계한 풍차간 말이야. 주위 마을에서 모양을 본따 갔다더군. 비슷한 것이 몇 개 더 생겼다는 소릴 들었다." 조슈아는 할아버지가 자신을 굳이 조군이라고 부르는 까닭을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조슈아는 형님의 손자이지만 막시민과는 핏줄이 닿지 않았다. 그런 차이를 없애고 둘을 동등하게 대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 별나게 생긴 것을요? 경관(景觀)에 문제가 생길 텐데." 다 알면서 막시민이 한 마디 하자 할아버지가 들고 있던 막대를 바닥에 땅땅 두드렸다. "탈곡 해본 사람만이 그 차이를 안다고 하더군. 그러니 네 녀석이 뭐가 좋은지 모르는 것도 당연해." "그러는 영감은 탈곡 해보셨나요?" 두 사람이 몇 마디 더 티격태격하는 것을 듣던 조슈아는 모닥불 빛이 어른거리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예순이 넘는 나이에 비해 젊은이 같은 체력을 가진 노인이지만 얼굴만은 주름이 많아 고생을 많이 했다는 느낌을 주었다. 전체적으로 시원시원하게 생긴 이목구비, 그러나 한 번 흘겨보면 오금이 저릴 정도로 눈매가 매섭다. 갑자기 오래 전에 할아버지의 비서라던 쇼─물론 그는 비서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계획적으로 심부름 보낸 사람에 불과했다─가 두 사람의 눈매가 닮았다고 한 말이 생각났다. 어디가 닮았을까. "할아버지, 저 할아버지 초상화 본 일이 있어요." "초상화?" 할아버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내가 집에서 나올 때 다 태워버렸을 텐데." "한 장 남아서 지금도 비취반지 성에 걸려 있어요. 그런데요, 어린 시절 모습이거든요. 지금의 저보다 어릴 때." 할아버지가 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옆에서 막시민이 불쑥 물었다. "초상화 밑에는 이름 같은 것이 있나? 난 저 영감의 본명이 예전부터 궁금했어. 아, 물론 사실대로 말하자면 방금 궁금해졌어." "응. 있어." "뭔데?" "히스파니에 폰 아르님이라고, 그렇게 새겨져 있던데." "헤에, 이런, 그렇게 우아한 이름이라니. 젠장, 전혀 안 어울려. 그냥 히스 노인이 나아." "요 녀석이!" 불 뒤집던 막대로 등을 한 대 얻어맞았지만 막시민은 여전히 킬킬거릴 따름이었다. 조슈아가 옛 일을 생각해 내느라 허공을 더듬어 보며 말했다. "그런데 그 초상화 속의 아이는… 정말 천사처럼 예뻤거든요. 제가 지금껏 본 어떤 애보다도 더." 그 말을 들은 막시민은 웃다 못해 숫제 뒤로 자빠져 버렸다. 물론 히스 노인한테 세 대나 연속으로 얻어맞았다. "하, 하, 하하… 안 웃을 수가 있어야 말이죠. 저 독수리 같은 눈에, 입가에 자글자글한 주름을 좀 봐요! 아참, 직접 볼 수가 없지. 하여간 저 노인네 얼굴이 예쁜 애라니, 이거 갖고는 양이나 닭도 웃길 수 있겠는데!" "입 다물지 못해!" 그 와중에 조슈아는 또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요, 제가 초상화 속의 아이를 닮았다고 말해 준 사람이 여럿 있었어요." 아까 웃느라 쓰러졌던 막시민이 일어나 조슈아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다시 히스 노인의 얼굴을 보았다. "오, 조금 닮기는 했는데. 둘이 한 핏줄이란 얘기가 헛소리는 아니었군?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조군 너도 늙으면 이런 얼굴이 된다는 얘기잖아. 아니, 그게 아니지, 넌 그 초상화 속의 애가 세상에서 제일 예뻤다고 그랬지? 그러면 그거 결국 자화자찬이네!" 이산한 쪽으로 예리한 막시민이 계속 웃을 거리를 찾아내고 있는 동안 조슈아는 골 아픈 표정을 짓고 있다가 오랜만에 어린 시절의 기호품인 쓴 사탕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런 그림을 찾아내어 걸어 놓은 게냐? 아니, 잠깐만, 설마… 그걸 저 2층 회랑에 걸어 놓은 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어요? 당연히 거기 있죠." "맙소사……." 히스 노인은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쥐었다. "이거야 정말! 프란츠는 내가 한 말은 다 귓등으로 들었구만! 내가 그 회랑에 걸리는 것만은 죽어도 싫다고 누누이 말했는데, 거기다가 지금 얼굴도 아니고 어린애 시절 그림을 떡하니 걸어 놓다니!" "뭣하시면 지금 모습으로 하나 그리시든지요." "미쳤다고 그리냐!" "제가 그려드려요?" "……." 히스 할아버지는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똑같은 놈들뿐이라는 것처럼 조슈아를 향해 불신의 눈길을 보냈다. 그래서 조슈아는 이번엔 막시민과 같은 처지가 되어 웃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애꿏은 모닥불만 몇 번 쑤셔댔다. "돌아가거든, 프란츠한테 그 그림 얼른 내리라고 해." "전하긴 할게요. 그런데 말을 들으실지는 모르겠어요." "난 그 집안에서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사람이야! 그 이카본한테서 시작되는 데모닉의 괴상한 행렬! 거기에 끼기 싫어서 그 집안에 얼씬도 안 했는데!" 조슈아는 갑자기 웃음을 그쳤다. "할아버지가 데모닉인 건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싫으셔서 집을 나오신 거라고요?" "넌 데모닉이 좋아 보이냐? 내 눈엔 비정상으로밖에 안 보인다. 더구나 핏줄 때문에 타고난 비정상 따위, 좋을 리가 있나?" "비정상… 이라고요?" 옆에서 막시민이 키득거리며 끼어들었다. "비정상이라는 데 나도 한 표." "누가 너더러 투표하랬어!" "살아 있는 메모장이자 사전이고 주판인 녀석이 비정상이라고 말하고 싶다는데 영감이 무슨 잔소리가 많아요!" "이게 투표로 결정될 문제냐!" "그런 인간은 살아 생전 한 명 만나기도 힘든 건데. 행복해야 할 어린 시절을 그런 인간 둘한테 둘러싸여 보내는 내 신새를 좀 봐요. 정상이라서 무지 애처롭네, 쳇." "난 막군 네가 정상이라고 생각 안 한다. 절대적 게으름뱅이, 빈대, 입만 열면 궤변, 노인네 앞에서 무경우!" "어, 저도 그 의견에 한 표." 조슈아도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막시민은 말을 돌려야겠다 싶었는지 이마를 짚으며 고민하는 척하다가 말했다. "그래, 이런 천재들한테 둘러싸여 살면 뭐 좋은 일이라도 생겨야 될 거 야냐. 영감, 그 좋은 머리 갖고 떼돈 벌 건수라도 하나 구상해서 불어 봐요. 영감이 싫으면 조군이 하던가, 선택의 폭이 아주 넓구만." "이놈아, 이익은 네가 아니고 내가 봐야 해! 너 같은 놈을 힘들게 거둬 먹이고 있으면 하다못해 경로 혜택이라도 있어야 될 것 아니냐?" "영감이 언제 날 거둬 먹였어요? 우리 집 애들 내버려둬도 다 제 멋대로 잘 사는 거 몰라요?" 조슈아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넌 동생들하고 입장이 다르잖아. 할아버지한테 이것저것 배우고 있는걸. 일전에는 바이올린 배우기 시작했잖아?" "핏줄이라고 편드네. 쳇, 서러워서." 막시민이 삐친 것처럼 손을 휘휘 젓고 있자 히스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보물 얘기 해주랴?" "아니, 그런 얘기가 있으면 진작에 해주실 일이지." 갑자기 막시민은 진지한 표정으로 안경을 고쳐 썼다. "한 말씀 주시지요. 스승님." "막군은 이럴 때만 스승님이래." 조슈아가 슬쩍 놀려도 막시민은 아랑곳 않고 할아버지 얼굴만 열심히 쳐다봤다. 그러나 노인은 막시민이 아니라 조슈아의 얼굴을 건너다보며 첫 마디를 꺼냈다. "초대 아르님 공작, 데모닉 이카본의 이야기야." 조슈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적지 않게 들었지만, 특별한 보물에 대한 얘기는 기억나지 않았다. "당시 아르님 가문은 지금처럼 영락한 꼴이 아니었지. 고작 켈티카에 성 하나가 다 뭐냐? 대륙 최고의 부와 명예를 거머쥔, 왕가와도 같은 가문이었다. 시시한 보물 따윈 이름도 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갖고 있었어." 막시민이 참지 못하고 옆에서 비아냥댔다. "아, 거참. 언제부터 자화자찬이 가문의 전통이 됐죠?" 히스 노인은 막대기로 막시민의 머리를 한 대 때린 다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할 얘긴 이카본이 공작이 되긴 전, 그러니까 대륙에 아노마라드가 없던 시절의 얘기가 되겠다. 알다시피 아르님 공작가는 아노마라드의 건국과 동시에 생긴 가문이니 말이다." 할아버지는 담배가 어디 없나 하고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지다가 실패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조군 너도 아버지로부터 들었겠지만 당시 아르님 가문의 근거지는 켈티카가 아니라 저 남쪽 바다였어. 너도 페리윙클 섬(Periwinkle Island)에 대해서는 들어 보았겠지."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페리윙클 섬이라면 증조할아버지 때까지 모두들 살았다던 그 섬인가요? 얘기로 들었지만… 남쪽 바다에서 유일하게 눈이 내리는 산이 있고, 무척 앎다운 파란 꽃이 핀다고……." "나도 어렸을 땐 그 섬에서 살았어." "할아버지도요?" 조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막시민은 보물 얘기가 얼른 안 나온다 싶은지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페리윙클은 좋은 곳이지, 네 이야기가 맞다. 어려서 떠난 후로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고향처럼 기억되는 곳이지. 그곳은 오랫동안 아르님 가문의 본거지였지만 아노마라드 남쪽의 바다에서 가장 큰 섬이다 보니 그 전에도 다른 지배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어. 그러나 이카본이 나타나 페리윙클을 손에 넣은 뒤 몇 년 안에 주위의 작은 섬들까지 대부분 평정해 버렸던 거야. 그 후로 그 일대의 섬을 이카본 군도(群島)라고 부르게 됐지. 처음 듣는 이름일지도 모르겠군. 이미 그 군도는 아노마라드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는 곳이 됐으니 말이야." "어째서 지워버렸죠?" 히스 노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이젠 아노마라드 땅이 아냐. 옛날부터 독립된 역사를 가진 곳이기도 했고, 아노마라드가 세워지고 이카본이 아르님 공작이 됐을 당시 왕국에 복속되었지만, 왕가와의 사이가 틀어져 후손들이 다시 군도로 돌아오게 됐을 때부터 거의 독립 국가나 다름없는 곳이 되었지. 그 때만 해도 군도 전체는 왕국에 필적할 만한 힘을 갖고 있었다고 해. 하지만 지금은 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 후로 인구가 줄어들고 힘도 약해져서 점차 사람이 사는 곳은 페리윙클 섬 하나로 좁혀졌어. 다른 섬들은 무인도나 다름없는 곳이 되어버렸고, 그렇게 버려진 섬 가운데 노을섬(Red Sky Island)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어." 노을섬은 페리윙클에 비하면 4분의 1이나 될까말까한 작은 섬이었지만 오랫동안 독립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카본이 군도를 통일하던 당시에는 아르님뿐 아니라 남쪽 바다 안에서 여러 섬의 가문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세력 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작고, 가장 함락시키기 어려운 곳이 노을섬의 사람들이었다. "노을섬에는 주술사들이 살았지. 마술사들이라고 해야 할지, 좀 불분명하긴 하지만 어쨋든 그들은 무척 강했어. 더구나 노을섬 주변에는 강력한 마법 폭풍이 몰아치고 있어서 어떤 배도 접근할 수가 없었지. 각 세력들이 침략하려다 잃은 배만도 수십 척이었다고 들었어." 처음엔 '폰 아르님'이라는 성조차 없던 섬 소년 이카본은 스무 살도 되기 전에 페리윙클 섬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이카본이 노을섬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그 때부터 벌써 천재적 전략가라고 불리고 있었기에 다들 이카본이 노을섬을 상대로 해전을 벌일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지. 이카본은 작고 튼튼한 돛배 하나에 친구 한 명만 태우고서 노을섬으로 갔어. 그리고 자신만의 항해술로 마법 폭풍을 이기고 노을섬 안으로 들어갔지. 나중에 알려진 거지만, 이카본은 노을섬의 그치지 않는 마법 폭풍이 전투가 가능한 큰배들만을 부순다고 판단하고 모험을 걸었던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노을섬 사람들은 자기네 섬 밖으로 평생 나올 수 없었지 않겠나?" 시큰둥하던 막시민도 어느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조슈아는 이카본이 아르님 공작이 된 후의 업적들만을 들어 왔기에 이처럼 젊은 시절의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렇게 노을섬으로 들어간 이카본은 무력이 아닌 대화로 노을섬의 주술사들과 강력한 동맹을 맺었어. 그리고 그곳에서, 흠… 지금 막군이 궁금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바로 그걸 받아 나왔지." "보물이요?" 반응이 무척 빨랐다. "그래. 이카본의 손에 들어온 후로 '남쪽 바다의 루비'라고 불렸던 것이지." "루비? 고작 보석 한 개?" "어허, 고작이라니." 막시민은 뒤통수를 때리려는 히스 노인의 손을 잽싸게 피했다. "나라를 세울 정도의 부를 쌓았던 공작이다. 보물이라면 발에 채일 정도로 모았던 사람이야. 그런 이카본이 평생토록 자신이 얻은 것들 중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라고 말했어. 황홀한 노을빛 보석… 이라고 모두들 그렇게 불렀지. 남쪽 바다의 루비라는 이름만으로는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깃들인 것일 게다. 하지만 이카본은 끝내 그 루비를 잃어버리고 말았어." "잃어버려요?" 조슈아가 놀라며 묻자 히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노마라드를 세우고 공작이 된 후의 일이지. 이카본은 그걸 무척 아까워해서 몇 번인가 노을섬 부근에 가서 그 루비를 되찾으려 했다고 해. 하지만 결국 죽을 때까지 다시 손에 넣지 못했지. 그 후로 누구도 그 루비를 보지 못했어." 시들어가던 모닥불이 마침내 불씨 몇 개만을 남기고 꺼져버렸다. 막시민은 아쉬울 것도 없는 재 속을 막대로 몇 번인가 휘저었다. 조슈아는 그가 생각에 잠겨 있다는 것을 알았다. "노을섬에 가면 다시 찾을 수 있을 지도 모은다고, 전설처럼 그렇게 말해지더군. 나도 페리윙클 섬에서 자랄 당시에 들은 이야기지만…. 찾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뭐랄까, 보물을 갖고 싶다는 마음보다 그 루비가 무척 아름답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군." 그렇게 말하는 할아버지는 평소의 고집스러우면서도 온화한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예순 살이 넘었지만 열 살 이정의 꿈을 기억하는 것처럼 눈은 먼 곳의 아름다움을 뒤쫓는 듯했다. 조슈아는 노인의 눈에 감화되어 말했다. "무척 아름다울 것 같아요. 손바닥 안의 노을처럼, 물 속의 붉은 조약돌처럼… 따뜻하고 곱겠지요." "아예 시를 써라." 조슈아의 말에 퉁명스런 반응을 보이는 막시민도 눈빛만은 그렇지 않았다. 조슈아는 막시민이 놓은 막대기를 집어 다시 한 번 재 속을 뒤집었다. 회색 가루 속에서 반딧불 같은 불씨들이 푸르르 날려 검은 허공으로 올라갔다. 불씨들이 날아 별이 되는 밤이었다. 2막. Barefoot 1. 누이 "춤추지마. 그렇게 아름답게 춤추지마, 이브. 네가 꽃처럼 져버리고도 널 기억하게 되고 싶지 않아. 네 하얀 발로 대리석 바닥에서 낙엽정원에 이르기까지, 종탑의 지붕에서 마침내 하늘에 이르기까지, 춤추지마, 이브. 내게 미소짖지마, 이브." 켈티카는 몇 백 년의 역사를 지닌 곳이었다. 나라가 바뀌고, 왕조가 뒤집히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새로운 정의를 외치며 달려왔다가 사라진 뒤에도 그대로 있었다. 수도보다 더 유서 깊은 곳도 있었다. 왕의 관리가 참수형을 집행하거나, 참수형이 없는 날은 포고령을 발표하거나 하던 큰 광장인데, 지난 몇 년간 숨 끊기기 직전의 환자처럼 가까스로 버텨 오던 공화국이 끝내 무너졌던 때는 새 국왕이 데려온 1천 3백명의 군인들이 그 넓은 곳을 가득 메워서 눈길을 끌었다. 빵과 달걀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 지나가다가 무슨 일인가 싶어 걸음을 멈춘 사람들이 어리둥절해져서 구경하는 가운데 무언가 거창한 의식이 치러졌고, 사람들은 최근 몇 년간 버릇이 되어버린 열렬한 갈채를 보낸 뒤 흩어져 갔다. 그 날부터 켈티카에 다시 왕이 존재하게 됐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이튿날이나 되어서였다. 화려하게 꾸민 높직한 단 위에서 얼굴도 보이지 않는 왕의 행렬은 꽃과 동전을 뿌렸고, 피곤한 가장들은 그걸 주워 집으로 돌아가서는 식구들에게 동전에 그려진 옆얼굴이 그들의 새 왕이라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동전을 유심히 ㄷ뜯어본 아낙들이 공동우물에서 '새 왕은 젊고 잘생겼더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아이들은 금세 노인들로부터 '우리 폐하'에 대한 옛 노래를 배워 부르며 골목골목을 누볐다. 노래 가사에 다른 왕들의 치적(治積)이 뒤섞여 있어도 상관없었다. 그래서 즉위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새 왕은 렘므 왕국과 싸워 세 번이나 이기고, 붉은 머리 미녀인 비올리타 공주와 결혼하고, 남쪽 바다의 지배자와 손을 잡아 조개반도 서쪽 바다를 제패한 왕이 되고 말았다(세 왕은 각각 다른 사람이었다). 대륙에서 가장 큰 나라가 잠깐만에 수도를 정복당해 공화국으로 뒤집혔던 것도, 십 년 간 혼란을 겪은 끝에 새 정복자가 공화국을 밀어버리고 스스로 왕임을 칭한 것도 결코 작은 사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그것을 현실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사람은 적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런 일상을 가장하는 것이 그 즈음의 유행이라면 유행이었을 것이다. 열 두 살의 조슈아는 2년 넘게 떠나 있었던 비취반지 성의 높다란 정문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 마차에서 내린 참이었다. 조슈아 도련님이 드디어 오셨군요!" 문지기 노인은 주인댁 도련님만 아니라면 덥석 안아 올리기라도 할 것 같은 태도록 조슈아를 맞았다. 조슈아는 노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할아버지는 예전하고 똑같으시네요." "저야 다 늙었으니 새삼 달라질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도련님은 정말 많이 변하셨군요. 시골이 좋긴 한가 봅니다. 그 작던 도련님이 이만큼이나 자라시다니." 그 말은 정말이었다. 떠날 때의 기억으로 본 집 안 곳곳의 모두가 예전보다 작아지거나, 낮아져 있었다. 조슈아는 그새 십 오 센티미터가 넘게 자랐던 것이다. 조슈아는 이상한 곳에 온 기분으로 천천히 홀을 가로질렀다. 문득 '유리 인형'을 생각해 내자 정말로 그가 자기 대신 이 집에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앞에는 떠나던 날처럼 서 있는 아버지가 있었다. "조슈아, 아니. 우리 소공작." 아버지는 반가움보다 위엄이 앞선 얼굴로 조슈아를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누구의 앞에서도 아르님 씨가 아니다. 모두가 공작이라고 부르는 사람, 초대 공작 이카본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다시 한 번 공작이 된 것이다. "돌아왔어요." 조슈아가 짧게 말하자 아버지의 얼굴에도 서서히 미소가 퍼졌다. 조슈아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잘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대로였을까. 아버지는 전처럼 따뜻하기만 한 얼굴로 웃지 않았다. "어서 오너라. 네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늘 궁금했단다." 예전에 아버지의 커다란 손은 조슈아의 조그마한 손을 남김 없이 덮어버리곤 했다 그러나 이제 잡아보니 손가락이 두마디나 밖으로 드러났다. "모든 것이 이루어졌구나. 그래, 가능한 빨리 우리 소공작이 아르모리크 경이 되도록 할 생각이다. 네게 모든 권리를 되찾아 줄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구나." "……." 조슈아는 움찔하여 한 발짝 물러나는 기분으로 그 말을 들었다. 아르모리크 경. 그 칭호를 처음 안 것은 아니었고, 언젠가 자기 것이 되리란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는데, 어쩐지 그 이야기를 지금 듣는 것이 온당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올라가자." 아버지와 손을 잡은 채 계단을 올라갔다. 예전에 주저앉아 난간의 무늬를 세곤 하던 넓은 계단은 늙은 나무처럼 작아져 있었다. 아르모리크 경이라는 칭호는 아르님 공작의 후계자가 대대로 이어받는 이름으로, 바다에서 왔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카본이 남쪽 바다에서 집안을 일으켰고 오랫동안 페리윙클 섬을 근거지로 삼아 왔기에 그 후로 후계자에게는 죽 그런 이름이 주어져 왔다. 공작 작위를 빼앗겼던 공화국 시절을 제외하면 말이다. "언제가 좋을까. 내년 생일이면 열 셋이 되니 그 해 생일에 의식을 치르는 것도 좋겠지만, 좀더 서두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단다."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겨우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아버지 좋으실 대로 하세요." 서재 입구까지 왔다. 하인이 서재 문을 열어 주었다. 조슈아는 예전보다 집 안에 하인이 많아졌다는 것을 느꼈다. "네 의견도 중요하단다.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어서 그렇지, 너는 우리 집안이 다시 영광을 찾게 된 큰 계획의 입안자였으니까 말이다. 모든 영광의 첫 주인이 될 자격이 있지." 이상하게 머리가 어지러웠다. 눈 내리던 날 아버지와 마차 안에서 하던 정세며 전략이니 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까마득한 옛날에 죽어 버린 그림자처럼 생각되었다. 다시 한 번 '유리 인형'이 어디 있는지 궁금해졌다. 숨어있다면 얼른 나오지 않고 무얼 하는 걸까. "들어오지 않고 뭘 하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버지는 이미 서재 안에 들어가 앉아 있었다. 조슈아가 따라 들어가자 뒤에서 문이 닫혔다. 주위에 보는 사람이 없게 되자 아르님 공작은 조슈아를 가까이 오게 해서 안아 주었다. 아버지의 품 속은 예전과 같다고 생각되어서 조슈아는 조금 안도했다. "네가 쓸 방은 아직 치우고 있을 거야. 그 동안은 예전 방에서 잠시 지내렴." 다시 한 번 낯선 기분을 느끼며 조슈아는 물었다. "제 방이 바뀌게 되나요?" "그럼. 이제는 어린 꼬마가 아닌걸. 아버지 방 옆에 있는 거실 딸린 방을 쓰도록 해라."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었는데. 오래 있을 것도 아닌데요." 아르님 공작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오래 있지 않을 거라니?" "너무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으면 할아버지께서 기다리실 텐데요?"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이 왔다. 조슈아의 대답을 들은 공작의 얼굴에 어이없어하는 미소가 떠올랐다. '저런. 네가 왜 시골로 다시 돌아가겠니? 켈티카는 정복되었고, 공화국은 사라졌어. 이젠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게 된 거야. 그리고 아버지는 네가 말한대로 큰 지위와 권력을 얻었단다. 넌 이곳에서 아버지를 도와 주고, 소공작으로서 위엄을 갖춘 채 살아가게 될 거야. 2년전 헤어질 때를 생각하면 얼마나 행복한 결말이냐?" "저… 하지만… 편지에서는……." 이게 아니었다. 조슈아는 이곳에 살 작정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공화 정부가 무너지고 켈티카를 마음대로 방문할 수 있게 됐으니 그동안 보지 못한 부모님을 보러 온 것일뿐, 자신의 삶은 저 코츠볼트의 시골에 있었다. 비취반지 성은 '유리 인형'의 것이지 그의 집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르님 공작은 조슈아의 심정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기쁘기만 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무언가를 생각해 낸 듯, 공작은 다시 한 번 싱긋 미소를 띠었다. "좋은 소식이 또 있다. 며칠 있으면 이브와 테오가 하이아칸에서 돌아온단다. 어때, 누나 보고 싶어했지? 넌 이브하고 무척 사이가 좋았으니 말이다." 또 한 번의 충격이었다. 조슈아는 정신을 추스르지 못한 채 멍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누나가… 돌아와요?" 여름이 끝나갈 무렵, 코츠볼트에는 바람이 많았다. 양들이 뜯어 흙바닥이 드러난 곳도 있지만, 히스파니에 노인의 썩은 목장은 여전히 긴 머리털 같은 풀이 흔들리고 있었다. 물론 이웃의 양들이 드나들고 있긴 했지만, 주인이 집을 비우지 않고 있다보니 예전보다는 조심하는 사람이 많아진 탓이었다. 비가 올 것 같다. 낡은 그물 침대에 누워 있던 막시민은 하늘과 땅이 맞닿은 부근에 일어나고 있는 불안정한 구름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비가 오면 빨래를 걷어야 할 텐데 늘 그렇듯 만사가 귀찮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조슈아! 빨래 좀 걷어!' 라고 외치려다가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켈티카에서 공화 정부가 무너졌다고 했다. 조슈아의 아버지는… 그렇다. 저 영감이 항상 말하는 대로 무척 훌륭한 가문인 조슈아네 집은 이제 공작이 되었다고 했다. 이제라기보다는 무, "다시"라는 쪽이 좀더 맞겠지만 말이다. 본래부터 가진 것 없는 집 출신인 막시민으로서는 아무 쪽이나 상관 없었다. 하지만 그 소식과 함께 조슈아에게 집으로 돌아오라는 편지가 날아 들었다. "하긴 이제 돌아가서 소공작이 되어야지. 안 그래?"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니 조슈아는 좀 우울한 모양이었다. 그 자식은 본래 별 것 아닌 일로 마음이 잘 상해서 그렇다. "금방 돌아올 거야." "뭐하러 돌아오냐? 대귀족이 되어서, 떵떵거리며 살아야지. 이런 시골 구석에 무슨 영화(榮華)를 볼 게 있다고." 진실이긴 한데, 진심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큰 소리로 말해버렸다. 그러자 조슈아는 고개를 저으며 완강히 부인했다. "아냐. 난 여기가 좋아. 다시 돌아가 전처럼 살라고 하면 도저히 못 그럴 것 같아. 그리고 편지에도 잠시 다녀가라고만 씌어 있었어. 잠깐만 갔다가 올 거야." "나 같으면 좋기만 하겠네. 날마다 저녁 때울 거나 걱정하고, 잔소리 늘어놓는 영감이나 상대해 주는 게 재밌냐?" 그러자 조슈아는 미소지었다. "너는 나와 다르니까…. 난 냄새나는 양고기 스튜만 매일 먹어도 여기 사는 게 좋겠네.: "그러니까 넌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인 거야." 물론 막시민은 조슈아가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애다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기엔 너무나 영리한 녀석인 것이다. 하지만 마음만은 어린애가 맞았다. 시골에 묻혀 평생 살고 싶어하다니. 자신이 같은 입장이라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떠나려고 파란 지붕 집의 마당을 나서던 때, 조슈아는 굳은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금방 돌아올게. 음…길어야 열흘 정도면 다시 올 거야." "뭘 자꾸 온다고 우겨대냐? 오지 말라니까?" "아냐. 올 거야." 녀석의 표정은 단호했다. 그래…정말 올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말았단 말이지. 그 표정을 보고서. 후두둑. 투둑……. 바람이 거세어지고, 빗방울이 툭툭 듣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푸르스름해진 공기가 물기 먹은 듯 빠르게 부풀었다. 흰 빨랫감들이 청색 하늘 귀퉁이에서 깃발처럼 나부끼기 시작했다. 집 안에 물이 새는 곳이 있으니 그릇도 갖다 놔야 하고, 물론 시트를 얼른 걷어 들여놔야 할 것이다. 영감은 어디론가 가고 없으니. 언제나처럼……. "조슈아. 빨래 좀 걷어봐." 대답은 없었다.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자기 입으로 우기던 녀석이 떠난 지 꼭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첫 번째 마차의 마부가 다 모로 님의 마차라고 말하자 하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게 누군가 생각하는 눈치였다. 비취반지 성을 지키는 하인은 예전의 두 배로 불어나 있었고, 경비도 삼엄해졌다. 물론 그만큼 집안 사정을 모르는 하인이 많아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때 두번째 마차의 문이 열리며 눈부시게 아리따운 스물 남짓의 아가씨가 뛰어내렸다. 조심성이라고는 전혀 없어서 치맛자락이 문에 걸렸고, 마차 안 누군가의 손이 얼른 그걸 벗겨냈다. 아가씨는 저택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그것도 매우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외쳤다. "집에 왔어!" 하인들은 이 아가씨를 자세히 보았다. 자세히 보니 틀어 올린 머리 모양이 미혼의 아가씨가 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늙은 하인이 다가와 눈을 비비다가 갑자기 외쳤다. "아니, 이브노아 아가씨!" 비취반지의 성에서 나고 자란, 아르님 공작의 귀한 외동딸 이브노아 폰 아르님을 못 알아보다니 불찰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인들은 이브노아 아가씨와 몇 년 전 결혼하여 떠난 남자의 성이 다 모로였다는 걸 뒤늦게 기억해 내고는 자기들의 이마를 쳤다. 백배 사죄와 더불어 마차는 순식간에 통과되었다. 방문객이 있다고 알리러 가는 절차 따위가 필요할 리 없었으나 이미 몇 명이나 저택으로 달음질쳐갔다. 공작이 요 며칠 내내 고대해마지않던 아가씨의 도착이었기에 다들 그 소식을 자기가 알리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마차를 도로 타고 정원을 가로지르던 이브나아가 밖을 내다보다가 문득 눈을 크게 떴다. "저게 뭐야?" 이브나아와 같이 앉아 있던 서른 중반의 부인도 밖을 내다보고 심상치 않은 얼굴을 했다. 넓은 잔디가 펼쳐진 정원에 기묘한 구조물이 세워져 있었다. 저택과 정원의 화려함을 구경하느라 정신을 놓고 있던 보모 아가씨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하얗고 네모진 상자들이 일견 제멋대로라고 생각될 정도로 혼란스럽게 쌓인 형태였다. 이브노아를 곁에서 늘 돌보는 하이아칸 출신의 브와주 부인은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가졌기에 짐짝을 이상스럽게 부려 놓았나 보다 여겼다. 그러나 공작 가문의 정원에 누가 저렇게 상자를 멋대로 던져 놓을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물론 그건 이브노아의 동생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몰랐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이브노아가 조금 후 외쳤다. "저건 집이잖아?" 곧 이브노아는 킥킥대며 웃기 시작했다. "조슈아가 저래 놨구나! 나 내릴래! 내려 줘! 저기 갈래!" 브와주 부인은 다시 한 번 골똘히 생각하며 상자 더미를 봤지만 역시 집으로 생각되진 않았다. 그러나 살펴보는 동안 저 희한한 구조물에 혼란스런 부분이 많긴 해도, 규칙과 불규칙이 묘하게 뒤섞여 별난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젠가 하나의 작은 궁전으로 자라려는 것처럼, 상자들은 엉망이면서도 조화롭게 쌓아 올려져 미완성인 귀퉁이로 이어져 있었다. 마부가 마차를 멈췄고 이브노아는 또다시 뛰어내려 곧장 하얀 구조물을 향해 달려갔다. 발소리를 들은 것일까. 미완의 궁전 안에서 소년 건축가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짧은 순간 망설임이 스쳐가고 곧 얼굴이 밝아졌다. "누나!" 이브나아가 눈치챈 대로 그것은 조슈아만이 만들 법한 대형 블럭 더미였다. 이브노아가 하얀 상자 아치를 지나 달려들어가자 조슈아도 위험천만한 상자 망루에서 뛰어내려 누나를 얼싸안았다. 꼭 2년만의 재회였다. 조슈아는 한참만에 누나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있었다. 이브노아는 좋은 나머지 눈물이 난다는 걸 이해 못해서 조슈아가 눈물을 글썽이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왜 울어? 아퍼? 나 때문에?" "아니…. 누나를 오랜만에 보내 좋아서." "좋은데 왜 울어?" 아, 조슈아는 갑자기 생각했다. 그랬다. 조슈아를 열 살에서 열 두 살로 키운 두해가 흘러갔지만 누나는 변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리워하던 시적의 모습과 한 치도 달라지지 않았다. 무심코 이브노아가 저절로 정상으로 돌아올 것처럼 기대했던 걸까. 평생토록 고칠 수 없는 선천적 뇌 손상이 감기처럼 나을 줄 알았던 모양이다. 조슈아는 이브노아가 예전이나 다름없이 어린애 같은 질문을 하는 걸 보며 저도 모르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안돼. 자기까지 누나와 똑같이 분별 없이 행동할 수는 없다. 그 순간 가슴을 꽉 채웠던 감격이 순식간에 착 가라앉았다. 자신조차 놀랄 정도로 침착해졌다. 눈물조차 말끔히 말랐다. "오랜만에 보니까, 그동안 못 만났다는 사실이 떠올라서 그 생각을 하고 운 거야. 하지만 이렇게 만났으니까 금방 괜찮아져." "아……." 이브노아는 이해를 했는지 못했는지 모를 얼굴로 눈동자를 굴렸다. 조슈아는 다시 생각해 냈다. 헤어지기 전 그 때도 누나는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대화가 길어지면 절반은 못 알아들었다. 그 때 맨 앞 마차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내려 남매에게 다가왔다. 조슈아는 한 눈에 그가 매형이란 걸 알아보았지만 어쩐지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 나이 젊은이에게 2년은 그리 긴 세월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어려서 테오 형이라고 불렀던 침착한 소년은 이제 스물 다섯 살다운 눈빛의 남자가 돼 있었다. 그는 의례적인 인사로 시작했다. "조슈아, 오랜만이야. 정말 많이 자랐는데?" "테오 현, 아… 반가워요." 조슈아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된 셈인지 달라지지 않은 누나가 불편한 만큼, 달라진 매형도 낯설기 이를 데 없었다. 그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달라지거나, 달라지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자신이 어느 쪽을 원하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자기가 기억하거나 기대한 사람들은 은밀히 사라져버리고, 어디선가 새로 만들어 보낸 짝이 자기 앞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보모가 안고 내린 아기를 보았을 때 최고조에 달했다. 이브노아가 자랑스럽게 외쳤다. "우리 아기야!" 조슈아는 예의도 잊고 눈을 크게 뜬 채로 잠든 아기를 바라봤다. 설명하기 힘들지만, 갑자기 머리가 돌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됐다. 저건 이브노아의 방에 늘 놓여있던 수많은 인형들 중 한 개가 아니었다. 살아 있는, 누나가 낳았다는 아기였다. 설마, 진짜일까? 진짜가 아닐 리 없지 않은가? 누나가 아기를 낳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면 왜 변하지 않은 누나에게 실망했던 것인지, 누나가 달라져서 오길 바랐다면 당연한 저 어린애가 왜 이상하게 생각되는지, 어느 쪽도 앞뒤가 맞지 않아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자신이 뭘 원했던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어느 쪽이든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매형이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 조슈아는 애써 정신을 차리고 아기에게 다가가 얼굴을 들여다봤다. 이브노아를 닮은 걸까, 환한 금빛 머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름은 이브 아버님의 이름을 따서 프란츠라고 지었어. 어짜피 아르님 성을 따르기로 했잖아? 잘 봐, 아버님과 닮지 않았어? 특히 눈썹." 테오의 말을 듣고 있자니 감정은 더욱 뒤죽박죽이 됐다. 조슈아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아기가 예쁘다고 기계적으로 중얼거렸다. 이브노아가 마차에 같이 타고 집까지 가자고 졸라댔지만 조슈아는 단 한 가지 이유로, 그 어린아이의 얼굴을 계속 보기가 어려운 나머지 조금 후에 가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틑날 아침이 밝았을 때 조슈아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동쪽 탑 꼭대기에 마련된 방은 조슈아 혼자 쓰는 연주실이었다. 예전에, 그러니까 모나 시드 학원에 가기 전부터 사용하던 방이었다. 넓지만 가구는 전혀 없고 조슈아가 갖고 노는 악기 몇 가지가 한쪽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 널따란 사면 벽에 별다른 것이라곤 딱 하나. 드나드는 문이 있을 뿐이었다. 대신 천장은 탑 꼭대기로 까마득히 높아졌다. 올려다보면 뾰족하게 솟은 지분 끝가지, 경사면이 서서히 기울어져 마침내 하나로 모이는 관경을 반쯤 압도당하며 감상할 수 있었다. 높이 뚫린 창에서 서서히 햇살이 쏟아졌다. 속삭이듯 내리다가, 어느새 불타오르듯 빛났다. 어렸을 때 조슈아는 연주실 바닥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는 걸 좋아했다. 올려다보다가, 올려다보다가, 마침내 자신의 기분도 그렇게 한 점으로 모이는 것을 느끼면 벌떡 일어나 노래부르곤 했다. 저것은 돌아오는 사람의 배다 돌아오는 사람의 발소리다 긴 세월 떠난 귓가를 울리면 잊지 못할 사람의 목소리다 옛날, 모나 시드 학원에 입학할 때 합창단 지휘 선생은 조슈아의 목소리를 듣고 '신과 악마가 널 위해 손잡았다'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왜 그런 말을 했는가는 뻔한 노릇이었다. 조슈아는 금방 그 뜻을 알아차렸고, 어린애가 자기의 평을 이해했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선생의 얼굴을 향해 은밀한 조소를 날렸다. 그의 학원 생활은 거의가 그런 식이었다. 하지만 학원을 떠나고 켈티카를 떠나, 코츠볼트 시골에서 지낼 때는 달랐다. 그가 노래를 불러 봤자 칭찬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막시민은 시큰둥한 얼굴로 쳐다보거나 듣지도 못한 것처럼 딴 짓을 할 분이고, 할아버지는 그게 뭐 별거냐는 듯 어깨를 으쓱할 따름이었다. 칭찬 없는 노래라…. 처음에는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어느새 남들보다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이 훨씬 즐겁다는 것을 알고 나니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돌아가고 싶다. 비취반지 성에서 지낸 지 벌써 한 달이 됐다. 돌아가기로 한 약속은 점점 밀려나, 나중에는 조슈아가 그 비슷한 말을 꺼내기만 해도 아버지는 말을 막아버렸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조슈아가 부득부득 가겠다고 우기며 문밖까지 나갔던 날─코츠볼트를 떠난 지 열흘째 되던 날─새파래진 얼굴로 달려나온 어머니는 하인들이 보는 것도 아랑곳 않고 눈물을 쏟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래, 조슈아를 낳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이었다. 아이를 가지면 목숨을 보장 못한다는 의사들의 경고를 물리치고 가진 아들이었고, 산모와 아이가 다 죽을 거라는 소리를 무시하고 조슈아를 낳았다. 그래서 조슈아의 어릴 때 별명이 '기적의 아이'였다. 힘들게 태어났기에 조슈아도 건강한 아이가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더 심했다. 세월이 흘러 많이 회복되었는데도 하루의 절반을 잠으로 보내며 집안일은 거의 돌보지 못했다. 그런 어머니를 뿌리치고 가는 것만은 차마 못할 일이었다. 결국 발걸음을 돌려 다시 비취반지 성으로 들어가는데 이번에는 조슈아의 눈이 흐려졌다. 돌아올 수 없을 거란 말에, 금방 돌아갈 수 있다고 우긴 건 자신이었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됐다고 편지라도 써야 할 테지만, 조슈아는 그것조차 하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이 상황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기 싫었던 것이다. 기온이 오르기 시작하자, 관자놀이에 땀이 엷게 서렸다. 노래를 끝내고 바닥에 주저앉았다가 누워버렸을 때 소리 없이 문을 열려고 무척 노력하는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딱 짐작이 됐다. "내 동생!" 예상대로 이브노아가 문을 와락 밀고 들어왔다. 주위가 조용해진 이상 어짜피 어려서부터 예민한 조슈아의 귀를 속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배울 수 없는 그녀는 실패하든 말든 늘 같은 장난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이브노아는 어깨를 드러낸 분홍빛 드레스 차림이었다. 오늘은 이브노아의 스무 번째 생일이었고, 이 날이 되기 전에 돌아오기로 벌써 몇 달 전부터 약속이 되어 있었다. 켈티카의 저택과 하이아칸의 별장 사이를 심부름꾼이 부지런히 오간 결과였다. 아르님 공작은 오늘로서 성인답게 자란 딸 이브노아와 손색없는 사이 테오, 그리고 어린 손자로 이루어진 한 가족을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여 다시 켈티카 사교계 안에 편입시킬 예정이었다. 따라서 오늘 오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초대된 성대한 연회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 날이면 이브노아가 아침부터 드레스를 입고 설치는 것 또한 2년 전에는 결코 낯선 일이 아니었다. 조슈아는 일어나 앉았다. 누나… 그렇지, 누나였다. 어려서 그토록 조슈아에게 일방적인 애정을 퍼붓던, 정원 뒤뜰의 나무처럼 하던 생각을 계속하는 것밖에 모르던…. 그래서 오히려 변치 않았던 누나다. 조슈아는 이브노아를 바라보며 누나 역시 동생의 변화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으리란 걸 깨달았다. 이브노아는 꼬마 아가씨 시절처럼 드레스 자락을 잔뜩 치켜들고 동생 곁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상체만 일으킨 동생을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 "내 귀여운 동생! 네 노래는 정말로 좋았어!" 이브노아가 옛 버릇대로 고개를 숙여 뺨을 맞비비려다가 멈칫하며 의아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브노아는 그제야 동생의 키가 십 오 센티미터나 자란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조슈아는 씁쓸하게 웃었다. 누나는 아직도 작달막한 꼬마 동생을 찾고 있는데 자신은 내년 2월이면 열 세 살이었다. "놀랐어? 누나가 없어도 동생은 자란다구." 그러자 이브노아가 얼굴을 붉히며 정말로 정색한 듯 소리쳤다. "안 돼! 너는 계속 꼬마로 있어야 돼! 안 그러면 너를 안 좋아할 거야." 조슈아는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즐거워서 웃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누나가 떠났던 날은 아직도 기억이 났다. 무척 안타까워서, 다시 보게 된다면 얼마나 기쁠까. 그런 생각으로 혼자 가슴 두근거린 때도 있었는데, 그런데 다시 보게 된 날부터 정체 모를 답답함이 가슴을 옥죄고 드니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러면서도 조슈아는 최대한 누나가 기억하는 그대로의 동생으로 행동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2년 전의 자신이 어떠했더라……. "그 노래, 아주 옛날에 유모가 불러준 노래지? 빨래 널면서, 여름에……."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던 생각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아서일까, 이브노아는 때로 묘하게 정확한 기억력을 발휘할 때가 있었다. 다섯 살에서 지능의 성장이 멈춰버린 그녀가 다른 사람은 다 잊어버린 어느 날 밤의 대화를 시를 외우듯 되풀이해 보이고, 자기 방의 물건 배치가 조금만 바뀌어도 바로 알아챘다. 언뜻 보고 지나친 사람을 몇 년 뒤 단번에 알아본 일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책읽기나 편지 등은 고사하고 '이브노아 아일첸브리스 폰 아르님'이라는 자신의 이름조차 한 번도 써내지 못하는 그녀였다. 조슈아는 이브노아가 그림 한 폭을 보듯 상황을 받아들여 기억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글자나 숫자와 같이 추상 능력이 필요한 것은 전혀 배우지 못하는 그녀다. 이브노아가 그런 기억력을 보일 때면 사람들은 놀랐지만, 가족들은 얼굴이 굳어졌다. 차라리 그런 것 따위 없었더라면 지금의 상황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이겠거니 할 터인데, 어둠 속 불빛처럼 한 번씩 반짝이는 재능이 오히려 그녀의 장애를 더욱 의식하도록 만들어버렸다. 이게 아닌데, 이렇게 될 것이 아니었는데 하고. "노래는 누가 가르쳐 줬어?" "학원 갔잖아. 집에도 오랫동안 안 오구. 생각 안 나?" 이브노아는 잠시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1백년쯤 지난 얘기를 들은 사람처럼 말했다. "그게 노래 배우러 갔던 거구나." "뭐… 그런 셈이지." "그럼 지금은 안 해?" "그만뒀잖아. 그것도 생각 안 나?" "왜 그만했어?" "그냥… 하기 싫어서." "재미없어?" "그건 아니고. 그냥 좀 힘들어서. 사람들도 별로고." 그러나 이브노아는 조슈아의 말은 듣지도 못한 것처럼 불쑥 외쳤다. "사람들은 다 너를 좋아했을 텐데! 너의 노래는 천사 같고 듣고 있으면 행복해져. 얼마나 좋은지 몰라. 정말로 좋아." 조슈아는 그냥 낮게 미소했다. 모나 시드 학원에서 있었던 일을 누나에게 모두 말할 필요는 없었다. 말해 봤자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말하는 자신도 이해 받지 못해 슬플 것이다. "아참, 생일 축하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이브노아는 천진하게 미소지었다. "고마워." 조슈아는 미소짓는 누나의 얼굴을 처음 보기라도 한 듯 한참동안 유심히 바라봤다. 이브노아는 상대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것도 느낄 줄 몰랐다. 그냥 기쁜 대로 동생의 뺨에 키스를 세 번이나 퍼부었다, 그리고 곧장 이어나 노래를 다시 해 달라고 졸라댔다. 조슈아는 어려서 늘 그랬듯 못이기는 체하며 일어났다. 조슈아가 옆에 서자 이브노아는 조슈아의 자란 키에 다시 놀랐다. 조금 전에 놀란 것은 싹 다 잊어버린 것처럼. "체, 이젠 꼬마가 아니잖아. 도로 작아졌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더 커질걸." "얼마나?" "누나보다 더." 그 말을 하며 조슈아는 이브노아가 동생이라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글께, 어떨까. "무슨 노래를 할까?" "뭐든 해. 전부 다." "전부 다 했다간 생일 파티는 구경도 못하게 될걸." "그래? 그럼 조금만 해. 열 개만." 이브노아는 아이처럼 손가락을 쫙 펼쳐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명치를 뭔가에 찔리기라도 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이브노아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왜 그래? 아파?" "아냐." "아프면 노래하지 마. 어디가 아픈 건데?" "안 아프다니까." 조슈아는 마음 속에 무방비 상태로 있던 곳이 찔린 거라고 생각했다. 이브노아가 다섯 살답게 천진하게 펼친 손가락, 그걸 보는 순간 자신이 이미 오래 전에 누나를 잃었다는 것, 아니면 처음부터 가진 일도 없었다는 것, 또한 자신이 그런 누나를 2년 동안 잊으려 애써서 거의 성공할 뻔했다는 사실까지 한꺼번에 명백해졌던 것이다. 무방비 상태로 잠자던 마음이 갑자기 햇빛 아래 끌어내어진 것과 같았다. "그래도 노래하지 마. 또 아프면 어떡해." 조슈아는 순순히 이브노아의 말에 따랐다. 그리고 어려서 자신이 누나의 분별 없는 애정 때문에 거의 질식할 지경이었다는 걸 기억해 냈다. 어쩌면 당시 이브노아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인형을 본 기분이었을지도 몰랐다. 어린 시절의 조슈아는 정말로 천사 꼬마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내려가자. 아침을 먹으면 좋아질 거야. 꼭." 하지만 인형을 두고 저렇게 끈질기게 걱정하는 다섯 살 꼬마는 없다… 라고 생각하며 조슈아는 누나가 원하는 대로 연주실을 나섰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누나가 보이는 애정에 일말의 의문을 가졌다. 지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능력마저 의심했던 것이다. 진심의 존재마저도. 이후 이 날 아침의 일을 기억할 때마다 조슈아는 가슴 한쪽에 지금과 똑같은 통증을 느끼게 되었다. 그건 누나가 가져가 버린 그의 마음 속 동그란 빈자리였다. 그곳은 작ㅇㅆ지만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2. 재 "모두가 춤추고 있어. 이 세상도, 나도, 너도, 운명도. 하지만 음악이 멈췄을 때, 마지막 의자를 차지하는 사람은 나일 거야." 그 날 연회장에서 빙글빙글 돌며 움직이고, 사람에서 사람으로 옮겨가던 작고 검은 것이 있었다. 물 위에 뜬 검은 재처럼 미세하고 눈에 띄지 않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 우연히 고개를 돌렸을 때 무심한 시선에 한 순간 붙잡히는 때도 있었다. 뭔가 싶어 생각하려 하면 순식간에 착시처럼 사라졌다. 잊었다 싶을 때 다시 사람들의 입과 손을 통해 건너고 또 건너갔다. 어느 귀부인의 부풀린 소매 아래에서, 부채와 잔과 입술을 거쳐 한 남자의 눈 속으로 들어갔다. 남자가 이물질을 느끼고 눈을 비비자 그것은 은밀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또 다른 치맛자락이 쓸고 지나가자 다시 살아나 날아 은쟁반 바닥에 붙었다가, 사뿐히 음식 속으로 들어갔다. 누군가가 따뜻하게 김이 오르는 고기 조각을 썰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 식으로 그곳에 모인 백여 명의 사람들을 모두 거쳤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언뜻 무언가 본 듯 하다고 느낀 자들고 어느새 잊었다. 그러나 한 사람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자기에게 다가온 그것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젊고, 미간에서 코를 따라 흘러내려 입매에 이르는 강한 선을 지닌 사내였다. 잘생기고 총명할뿐더러 재산과 지위에 있어 이곳에 모인 누구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자. 그러나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그 자의 눈앞에 그것이 왔다. 바라보는 그의 눈은 흡사 소우주(小宇宙)같았다. 그 자는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것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단숨에 꽉 움켜쥐었다. 그것은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남자는 손을 펴서 확인하지 않았다. 자신의 손에서 사라졌으되 사라지지 않은 그것이 그의 마음에 단단히 달라붙고, 한동안 쉴 것을 알았다. 그러나 영원히 머물지 않을 것도 알았다. 그것이 힘을 주는 동안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이브노아가 아기를 안고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저마다 한숨을 내쉬고, 도는 낮게 탄성을 질렀다. 겉모습만으로는 그림처럼 보기 좋은 젊은 어머니와 예쁜 아기였다, 스무 살이 된 이브노아는 나무랄 데 없이 아름답게 자랐고, 어디에도 문제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이브노아는 아기를 오래 안고 있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 나와 짧게 인사하자마자 뒤에 서 있던 보모가 얼른 받아 안았다. "저 젊은 부인이 그 반 백치라던 딸……?"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는데?" "그새 나은 것 아닐까요?" "그게 무슨 낫는 병인 줄 알아요?' "잠자코 계세요. 어쨋든 알 거 없잖아요? 2년이나 됐는데 차도가 생겼을지도 모르지, 뭘." 사람들은 조슈아가 이브노아를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 날 아르님 공작 가족의 일원 중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숨어 있던 조슈아는 떠도는 속삭임에 냉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아버지의 공들인 연출에 사람들이 조금은 속아 줄 작정인 보양이었다. 이브노아의 곁에 서 있는 매형 테오에게는 그리 시선이 쏠리지 않았다. 손님들은 대부분 아버지와 오랜 친분이 있는 집안들이었고 따라서 어려서부터 보아 온 이브노아의 달라진 모습에 다들 열중해 있었다. 실은 이브노아가 언제 실수를 저지를까 기다리고 있었다는 쪽이 옳았다. 그들이 보기에 매형은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으로서 고작 집안의 돈을 바라고 결혼한 존중하기 힘든 인물이었다. 다만 대놓고 적대시할 수 없기에 그냥 무시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조슈아는 그늘진 곳에서 나와 매형에게 말을 건넸다. "여행 끝이라 이런 자리 힘드시죠? 그래도 좋아 보이니 다행이에요." 테오의 입가에 난처한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조슈아가 기억하는 매형은 보기 드물게 말이 없고 신중한 소년이었다. 그러면서도 늘 누나를 조심스럽게, 그리고 따뜻하게 돌봤다. 함께 지내던 시절에 집안에서 이브노아의 어리석은 변덕을 가장 오래, 가장 능숙하게 참아줄 수 있었던 것은 부모나 동생이 아닌 약혼자 테오였다. 돌이켜 보면 조슈아의 경우엔 오히려 누나가 그를 돌보고 감쌌다. 물론 이브노아가 그런 인내심을 발휘한 상대도 동생뿐이었다. "걱정해주니 고맙군." "아뇨." 조슈아는 가만히 있다가 조그맣게 이어 말했다. "누나를 이렇게 잘 돌봐줘서 제가 고마운걸요." "당연한 일에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순 없지." 그렇게 말하고 있어도 테오의 얼굴에 큰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엷은 미소를 띠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이 이상의 변화를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조슈아가 보기에 테오는 누나의 하나 뿐인 친구였다. 물론 매형 본인으로서도 어린 시절 전체를 이브노아와 함께 보낸 셈이었다. 비록 그 사실 때문만은 아니라 해도 조슈아는 매형이 누나에게 애정을 품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실은 동정심일지도 모른다. 또는 참아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지 견딘다는 것만으로도 조슈아는 매형을 용서할 수 있었다. 조슈아가 매형을 진심으로 좋아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몇 번인가 집안에서 그에 대한 부당한 여론에 맞선 것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고 있는 매형에 대해 그가 표시하고 싶었던 최대한의 감사였다. 파티가 무르익자 아르님 공작은 축하의 의미로 공들여 쌓아 올린 샴페인잔의 탑에 다가서며 유쾌하게 웃었다. 그는 오늘의 파티에 만족했다. 딸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고, 손님들은 모두 감탄한 눈치였다. 그들 중엔 성급하게 이브노아가 이제 정상인으로 돌아왔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맨 위의 잔을 집어 높이 들었다. "자, 국왕 폐하와 모두의 건강을 위해서!" 공화국이 무너진 뒤, 신 아노마라드 왕국은 왕족이 아닌 공작을 둘 두게 됐는데 그 중 하나는 아르님이고 다른 하나는 폰티나였다. 두 사람은 젊은 체첼 다 아노마라드가 전쟁 영웅이 되도록 무대를 꾸미고, 마침내 왕좌로 밀어 올린 장본인들이었다. 최근 아르님 공작 주위에 모여든 귀족들은 공작의 업적이 초대 아르님 공작 이카본의 위엄에 버금가는 것이라고 추어올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잔을 들어올렸다. 가벼운 찰랑임. 즐거운 웅성거림이 퍼져나가고 그들의 입술에 잔이 닿으면서 잠시 말소리가 잦아드는 순간 아르님 공작은 자신이 들었던 잔의 샴페인을 마시지 않고 조슈아에게 건네주었다. 공작 작위를 물려받을 사람을 확실히 하기 위해 일부러 준비한 장면이었다. 오래 전, 조슈아가 없고 공작부인이 병석에 누워있던 때, 아르님 공작은 아내를 위해 이브노아가 결혼하여 낳는 아이로 집안을 잇겠다고 약속한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테오와 이브노아의 약혼이 급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공작부인이 무리하여 조슈아를 낳은 후로 테오와 관련된 약속은 저절로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오늘의 손님들이라 해서 그런 점을 모르지 않았으나, 어찌됐든 가문의 주인이 했던 약속이기도 했고 당사자인 테오 역시 내쳐지거나 한 것이 아니라 한 집안 사람이 되어 있었으니, 공작 작위를 되찾은 것을 기회로 자연스럽게 의지를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요령인 셈이었다. 이날 초대된 사람들은 대부분 오늘 잔을 넘겨주는 장면이 있을 것임을 들어 알고 있었다. 조슈아가 잔을 받자. 모두에게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조슈아도 아버지의 생각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곁의 시종이 받쳐 든 쟁반에서 새 잔을 집는 걸 보며, 그의 관점으로는 좀 과하다 싶은 아버지의 의지를 받아들이려 애써보았다. 그러나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매형 테오의 얼굴을 흘끗 보고 나자 그나마 남아 있던 의지도 맥없이 흐려져 버렸다. 한 때 집안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매형이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해도 자신 때문에 밀려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더구나 오늘의 자리는 이브의 생일과 귀환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작위 계승 문제를 떠나 생각해도 파티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었고, 그리고……. 만약 누나가 정상적인 여성으로 자라 지금 이 자리에 있다면 아마도 이 술, 파티의 주인공을 위한 맨 꼭대기의 잔이 오늘 같은 날조차 동생에게 가는 것을 보고 별로 기뻐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나한테도 줘! 나한테도 그거 줘!" 아기를 안은 보모와 함께 멀찍이 떨어져 있다가 어느새 다가온 이브노아가 아버지가 조슈아에게 뭔가 주는 모습을,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술잔을 든 걸 본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오늘만은 이브노아가 어린애처럼 칭얼거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이브노아는 이미 특유의 고집스런 눈으로 조슈아를 빤히 보고 있었다. 다른 잔을 가져다 줘도 상관없겠지만 자신의 손에는 이미 마시기 껄끄러운 한 잔의 음료가 들려 있었다. 술을 마실 수 없는 이브노아이지만 약한 샴페인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새 잔을 가져다 주는 짧은 시간 동안 이브노아가 소란을 피울 지도 몰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렇게 하면 자신은 마시지 않아도 좋을 테니까, 적어도 이 자리를 피할 수 있으니까, 자기만족일지 몰라도 누나를 위해서 그렇게 하고 싶다, 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누나한테 줄게. 누나가 마셔." 잠시 잦아든 말소리가 다시 번잡한 소음으로 번지기 시작할 무렵이라 조슈아가 자기 잔을 이브노아에게 주는 장면을 본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아르님 공작은 보았지만 조금 이맛살을 찌푸리면서도 이제는 주목하는 사람들이 없고 굳이 말리다가 오히려 이목을 끌 듯 하여 일단 묵인했다. 조슈아가 본 누나는 못내 만족스러운 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저렇게까지 좋을까 싶을 정도로, 또는 조슈아가 모르는 다른 비밀스런 사실을 알고 무척 기쁜 것처럼. "응. 좋아." 매끄러운 유리 표면이 손가락에서 떨어질 때 무언가 놓으면 안 되는 것을 놓는 듯해 기분이 이상해졌고, 이브노아가 잔을 입가로 가져갈 때는 잘못된 분기를 택하는 연극의 주인공을 보듯 일순 가슴이 답답해왔다. 아니,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었다. 심지어 조슈아는 자신이 저 보잘것없는 한낱 유리잔에 이렇게나 집착하고 있었을까 싶어 스스로를 불쾌하게 느끼기까지 했다. "에엑. 맛이 없잖아!" 늘 달콤한 음료만 마셔 왔던 이브노아는 주스 마시듯 샴페인을 한 모금 들이키자마자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이미 절반이나 마신 모양이었다. 곁에 있던 브와주 부인이 이브노아가 입가에 흘린 음료를 닦아주려고 손수건을 꺼내며 다가왔다. 누군가가 사람들을 헤치며 황급히 다가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순식간에 잊혀지고 조슈아는 눈을 크게 떴다. 아까 연극 같다고 느꼈던가, 그건 정말로 연극이었다. 자기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배우가 된 양 연극을 벌이기 시작했다. 어찌된 일일까, 다들 미리 짜고 있었던 것일까? 나를 놀리려고? 재밌게 해주려고? 이브…이브노아까지도? "누…나……?" 툭, 유리잔이 두툼한 융단에 떨어져 깨지지도 않고 조금 구르다 멈췄다. 조슈아는 인지를 벗어난 상황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브노아의 무너지는 어깨를 붙들어 일으키려 했다. 영문 모를 이 연극에 자신도 서둘러 동참하려 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과 팔꿈치 언저리까지 새빨간 액체가 왈칵 쏟아졌고, 조슈아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주위가 고요했다. 그 빨간색은 숨쉬듯 얼마간 떨다가 멈추기를 되풀이했다. 미세한 손금을 따라 번져간 모양이 흡사 붉은 잎사귀에 그려진 잎맥 같았다. 자기 손이 아닌 듯 맥동하는 이상한 손을 넋 나간 듯 바라보는데 머리가 어지럽고, 쓰러질 것처럼 몸과 마음이 다 떨렸다. 이게 무엇일까. 이게 무엇이더라. "……."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조슈아에게 안긴 이브노아의 비틀린 입술이 떨리다가 조금 움직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소음이 귓가에서 지워버렸듯 이브노아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됐다. 누군가가 조슈아의 품에서 이브노아를 빼앗아 갔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바닥에 눕혀진 누나의 치마는 연한 분홍빛이었다. 거기에 누가 어울리는 그림을 그리려 했던 것처럼 빨간 무늬가 도드라져 흩어졌다. 정말 이상하지만 아름답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미칠 듯 그 생각에 자신을 옭아매는 마음속 손이 있었다. 막 꺾은 장미 꽃잎 흩뿌린 듯이. 돌아버릴 것처럼 아름다운 누이. 3. 두 데모닉 그는 가진 것 없이도 강한 자였네. 그는 무기 없이도 이기는 자라네. 그는 날개 없이도 날아갈 것이며 즈믄 다리를 건너 다다를 것이라. 아르님 공작이 세 번 만에 고개를 끄덕였을 때 하인은 손님을 부르러 갔다. 하인이 한숨을 내쉬며 문을 닫자 서재 안에는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아르님 공작은 책상 뒤쪽의 의자에 앉은 채 유리잔 하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져도 왠만해서는 깨어지지 않을 정도로 두툼하고 좋은 유리로 된 잔이었다. 그런 잔이 조금 전 파티장에는 수십 개는 쌓여 있었다. 그리고 하필 이 잔이다. 아르님 공작이 오랫동안 침묵하자 손님은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공작의 의견도 묻지 않고 의자를 하나 당겨 앉았다. "공작." 곤작은 듣지 못한 듯 계속해서 유리잔만을 들여다보았다. 이미 깨끗이 닦아져 얼룩 하나 보이지 않는 유리 속에서, 한때 있었을 비밀을 꿰뚫어보고 싶어하는 눈빛이었다. "이런 일이 아니라면 내, 옛날 약속을 깨도 이런 곳에서 자넬 만나고 있진 않았겠지. 지금가지 그랬듯 밖에서 만나는 쪽이 나는 좋았네." 약속을 깰 수밖에 없게 만든 오늘의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으리라는 의미로, 공작도 그렇게 받아들였다. 공작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르님 가문에서 유일무이하게 푸른 눈을 가진 늙은이, 데모닉 히스파니에를 보았다. "물론 저는 그 약속이 깨어지길 늘 기다렸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습니다." "형님과 한 약속이네. 그 분은 기뻐할 것인가? 하지만 오늘은 산 자들이 결코 기뻐할 수 없는 날이군." 아르님 공작은 한 박자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저는, 죽은 자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기를 바랍니다." "알 테지. 통찰력에 자물쇠를 채운 건 삶이었고, 죽음이 그것을 풀어주었을 테니." 그리고 다시 오랜 침묵이 흘렀다. 유리잔이 테이블 위에 세워지는 소리가 탁, 울리고 공작이 일어났다. 그는 책상을 돌아 늙은이 앞으로 갔다.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젠 됐습니다.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자리도 있는 것입니다. 히스 어르신, 당신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도와주셔야 되겠습니다.' "2년 전에 그랬듯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돕네. 할 수 없는 일은 돕지 않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들어 보자." "이곳에 머물러 주십시오." 노인은 거의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로 짧게 생각한 뒤 고개를 내저었다. "안 된단 말씀이십니까?" 공작은 몸을 돌려 책상 위에 놓은 유리잔을 가리켰다. "저 안에 독이 발라져 있었습니다." 탑 모양으로 쌓아올려졌던 샴페인 잔들은 모조리 조사되었다. 그 중 독이 검출된 잔은 이브노아가 마신 저 한 잔 뿐이었다. 그렇다면 술이 아니라 잔에 독이 발라져 있었다는 말이 된다. "어르신이라면 제가 받은 충격을 이해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의심스런 자는 출입은커녕 접근조차 할 수 없는 비취반지 장원에서, 누군가가 소공작을 독살하려 시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범인이 누구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짙은 눈썹과 굴곡이 뚜렷한 탓에 어떨 때 귀족이라기보다는 서글서글한 바다사나이 같은 인상을 가진 아르님 공작이었다. 대하는 자가 시종이었든, 또는 왕이었든, 늘 같은 얼굴로 대하는 강인하고도 부드러운 사람이기도 했다. 공화국 시절 비취반지의 성 일부를 혁명군의 거처로 내놓아야만 했을 때도 표정에 한 점 흐려짐도 보인 일 없던 남자였다. 그러나 지금 히스 노인 앞에서는 패배감을 굳이 감추려들지도 않았다. 히스 노인이 무슨 말인가를 가만히 입안으로 되씹다가 물었다. "소공작이라면 조슈아를 두고 하는 말인가?" "아니면 달리 누구를 말하겠습니까." 물론 조슈아는 아직 아르님 공작 가문의 후계자에게 내려지는 아르모리크 칭호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조슈아 아닌 누군가가 아르모리크 경이 될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확신하고 있군. 조슈아를 쏜 화살에, 죄 없는 이브노아가 맞았다고 말이야." "이브를 독살하려 획책할 자가 있으리라 보십니까? 그 아이가 없어져도 세상에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공작이 손 안에 든 유리꽃처럼 아끼던 외동딸이었다. 향기가 나지 않아도, 햇빛만 받으면 세상 어느 꽃보다도 찬란한 광채를 입는 듯하던 이브노아, 스무 해만에 져버릴 꽃인 줄 알았더라면, 그러나 공작은 검은 눈썹을 움직이지도 않고 가차없이 딸의 가치를 자기 입으로 일축했다. 누군가가 암살하려 할 가치조차도 없다. 그건 사실이었다. "난 자네가 이브를 얼마나 애틋하게 여겨왔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너무 완강하게 밀어내지는 말게." 공작은 잠시 허공에 눈길을 주고 있다가 말했다. "지금쯤은 이브도 알고 있을 겁니다. 이제는 아비를 이해할 수 있는 달이 되었을 터이니." 이브노아는… 무조건적인 애정으로 감싸던 부모보다 말이 통하지 않는 누나를 귀찮아하곤 하던 동생을 더 사랑한 아이였다. 그 다정스럽던 아이가 지금쯤 그 마음씀다운 통찰력을 얻었다면, 이 순간 조슈아의 안전을 위해 딸에 대한 마음을 추스리는 아버지를 분명히 이해할 것이다. 살아생전 한번도 이브노아에게 이해나 배려를 기대해 본 일이 없지만 지금만은 그래주길 바랐다. "이 정도로 흔적 없이 이 성에 침입하여 독살을 기도할 수 있는 자라면, 분명히 제가 오늘 샴페인 잔 탑의 맨 윗잔으로 건배하고, 그것을 조슈아에게 넘겨준다는 사실 또한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조슈아가 그걸 이브에게 건네줄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요. 그것이야말로 순전한 우연이 빚은 결과였으니, 스무 살 생일을 맞은 이브가 돌아온 것은 고작 며칠 전이었는데……." 공작은 문득 말을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으나 귀족답지 않은 모습과 성품으로도 강하게 버티어 온 새내답게 곧 감정을 감추었다. 이브노아는 이미 되찾을 수 없었다. 아직 잃지 않은 것만은 절대 놓치지 않을 작정이었다. "누가, 어째서 조슈아를 노리는지 전 모릅니다. 동기를 찾는 것이 가장 빠르겠지만, 그 동기를 짐작하는 것이 지금 시점에서는 도움조차 되지 않습니다." 히스 노인이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말했다. "조슈아가 사라질 경우 작위계승자로 고려될 첫 번째 인물이 누군지 알것 아닌가." 공작은 완강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그쪽이 아닙니다. 테오 녀석은 아닙니다." "조슈아가 사라지면 가장 큰 이익을 얻을 자가 자네 사위 외에 따로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자객이 계승자를 독살하려 했다면, 개인적인 원한이라고 갖지 않는 안 작위를 노리는 누군가의 소행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빠르다. 아직 어린 조슈아가 누군가의 원한을 샀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논리적이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지금처럼 음모가 잘못되어 조슈아 대신 이브가 희생될 경우 가장 큰 손해를 보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확신을 갖고 말합니다만 제 사위, 테오밖에 없습니다. 그 애가 우리 가문에서 조그마한 권한이라도 지녔다면, 그건 모조리 이브의 존재에 기댄 것에 불과하니까요."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공작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제 사위는 조슈아가 이브에게 독잔을 넘겨주는 그 자리에 서 있었으면서도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의 평온함 그대로였지요. 바로 곁에서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 분명합니다. 만일 그 녀석이 독잔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상식적으로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이 순간의 공작은 마치 조슈아 대신 이브노아를 죽게 한 택임이 사위에게 있기라도 하다는 것처럼─목소리에 힘을 주었으나, 그것이 본질이 아님을 자신도 알고 있었다. 단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 분노의 화살을 짐짓 제3자에게 돌리게 만들었을 따름이었다. 공작은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다시금 마음을 추스리며 사위의 혐의를 부인했다. "테오가 그동안 아무리 이브를 잘 돌봐왔다 한들 제가 직접 그 모습을 보지 못했더라면 저의 의심을 피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테오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제 추측도 거기까지 입니다. 그 아이를 노리는 자가 저택 안에 그림자처럼 있음이 자명한데도, 저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그 자는 저의 통찰력 밖에, 제가 그물처럼 짜놓은 인과의 망 밖에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점이 바로 어르신께 이곳에 계셔 달라고 부탁드리는 이유입니다." "내가 있다 한들 달라질 것이 없을 터인데.' 공작은 허탈한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놀리지 마십시오. 제가 누군지 잊으셨습니까? 이제 어르신의 옛일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 않겠지만 저는 잊지 못합니다. 어르신께서 이 성에 머무르신다면 어르신의 눈을 피해 누군가를 해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압니다." "그건 자네의 지나친 기대일세." "제가 굳이 옛날 이야기를 꺼내야 되겠습니까?" "그건 정말로 오래된 이야기야." 둘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둘 다과거의 어느 순간을 떠올렸고,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 "공작." "그냥 이름을 부르시지요." 세월이 흘러 비취반지 성에서 공작을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공작부인 한 사람밖에 남지 않았지, 그도 예전에는 젊은이였고 소년이었다. 노인은 과거를 느리게 우물에서 길어내는 듯 잠시 침묵하다가 그를 불렀다. "프란츠." 그러자 공작도 이름을 달리하여 불렀다. "숙부." 실로 백 년 만에 불러본 이름인 것처럼 둘 다 말이 끊어졌다. 가문에서 오랫동안 없는 사람이나 다름없던 히스파니에 숙부는 수많은 피붙이들 중에서도 오직 하나, 맏조카 프란츠와의 연락만은 끊지 않았다. 드물게, 몇 년 만에 한 번씩 오가는 소식이었지만 서로가 공유하고 있는 몇가지 추억들이 실낱같은 소식이나마 끊어지지 않게 했다. 그런 까닭에 지난번에는 위험을 피해 조슈아를 2년이나 맡기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노인이 이곳을 떠날 당시 가문의 주인이었던 윗대 공작이 정한대로 서로를 숙부와 조카로 부르지않았다. 오늘 이브노아의 일이 아니었다면 어느 쪽도 규칙을 깨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작은 지금껏 경건하게 지켜 온 부친의 규칙을 깨고라도 늙은 숙부를 붙잡을 까닭이 있었다. 그러나 히스 노인은 여전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알다시피 나는 이곳에 머물 수 없는 사람이야." "이제는 상관없자 않습니까, 숙부? 아버지께선 돌아가신 지 오래이고, 공화국도 이제 무너졌으니 숙부의 존재가 우리 가문에 해가 될 것은 없지 않습니까? 아버지께서도 숙부를 미워하셔서 내치신 것이 아니고, 떠나야 했던 이유 또한 숙부의 잘못이 아닌데 아직까지 그 규칙을 지켜야 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아니, 안 돼. 이건 고리타분한 규칙의 문제가 아니야. 옛 폐하의 일이 아닐지라도 내 존재는 늘 가문에 누가 되었어. 이제 와서 형님의 규칙을 깨뜨려 보았자 하등 좋을 것은 없을 것이야." "왜요?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가문의 주인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아니라 저입니다. 숙부님을 누구보다도 따랐던 맏조카 말입니다. 그런 제 앞에서 숙부님을 두고… 그 말을 꺼낼 자가 또 있을 거라 보십니까?" 공작은 중간에 어떤 말을 입밖에 내는 것을 피했다. 그러나 히스 노인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젠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이라 어쩐지 그립기까지 하군. 굳이 애쓸 필요 없다. 타고난 이름이야. 피할 수 없었지. 그걸 내가 잘 사용하지 못했을 분이다. 다 내가 어리석어서야." 숙부의 자조적인 말투에 아르님 공작은 조금 분개한 듯 잘라 말했다. "숙부님께 어리석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노마라드 왕국 안에 없습니다." "아니, 난 어리석었다. 옛날 초대 아르님 공작께서도 나와 같은 이름을 지니셨고, 그것으로 지금의 가문을 일으켰어. 그 때는 참으로 빛나는 이름이었지. 그 후로 후손들이 진흙탕에 내던지기 전에는 말이야. 나는 네 살이 채 되기 전에 이미 그 이름으로 불렸어. 그런 내가 어려서부터 얼마나 그 분을 의식했는지 짐작할 수 있겠나? 나와 같은 이름으로 불렸던 그 분처럼, 때로는 그 분보다 더 훌륭해지고 싶었지. 다른 나쁜 예들을 모조리 피해서 말이야. 그러나 난 결국 그 분이 일으킨 귀한 가문에 해만 끼치는 존재가 되어 스스로 도망치고 말았네. 결국 가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었으니 말이야." "하지만. 그 일은 숙부님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 노인은 정색을 하며 눈썹을 치켜 떴다. "공작, 아들을 지킨다면서 집안에 나 같은 재앙을 불러들일 참인가? 조슈아가 무사히 자란들 국왕의 눈밖에 난다면 미래가 평온하리라 보는가? 자네가 옹립한 국왕의 손에, 자네 가문이 조각나는 꼴을 보고 싶은가?" '조각난다'는 말의 의미를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공작은 안타깝지만 대구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조금 후 공작은 다시 눈썹을 모으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건 오히려 먼 미래의 일입니다. 눈앞에 닥친 위험을 없앤 다음에 뒷일을 생각하겠습니다. 그것을 위해 숙부님을 붙잡는 제 선택의 정당성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물론 숙부님께서 거절하신다면 제가 어찌할 도리는 없지요. 그러나 이렇게까지 말씀드리는데도 힘을 빌려주지 않으실 것인가요?" "공작, 내가 여기 남아 있는 것이 정말로 도움이 될 거라 보는가?" 공작은 당혹한 눈으로 노인을 보다가 답했다. "제 말을 믿지 않으시는군요."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야. 자아, 자네는 딸을 잃었다. 그 아이가 죽는걸 직접 본 사람이 수십 명이 넘지. 다들 놀라서 소문을 처뜨릴 게다. 비취반지 성에서 공작의 딸이,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독살당했다고, 그것도 조금 통찰력이 있는 자라면 실제로 노린 것은 조슈아였다고 떠들 것이 틀림없다. 뒷일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겠지. 아르님 공작이 분노하고 상심하여 성을 샅샅이 뒤지고 수많은 사람들을 의심할 거라고 말이야. 그리고 조슈아를 위험에서 지키기 위해 있는 수단과 방법을 모조리 동언할 거라고 말이지. 거기에 나가지 남아 있게 되면 어떨까? 그런 상황에서 독살범이 다시 얼굴을 내밀까? 조금이라도 의심 갈만한 짓을 할까? 행여 발견될세라 숨을 죽인 채 지하로 숨어버리지 않을까?" 대답하는 공작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그렇게 영영 꼬리를 빼 준다면 그것도 좋겠지요. 적어도 조슈아는 안전해질 테니까 말입니다." 노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재차 다그쳐 물었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이브는? 그 애에 대해선 어쩔 셈이지?" 공작은 황망한 표정이었다. "그 애는 이미 잃어버렸습니다. 되찾을 방도라도 있단 말씀이십니까?" "되찾는다고? 죽은 애를 실릴 방법따윈 없어. 그러나 그대로 내버려둘텐가? 죽었다고 해서 더 이상 자식이 아니란 말인가? 아니, 먼저 묻지. 조슈아를 지키고자 하는 까닭은 뭔가? 후계자를 잃을까봐서인가. 아들을 잃을까봐서인가?" 공작은 무언가를 느낀 듯 눈을 내리깔았다고 대답했다. "말씀이 이상합니다. 당연히 둘 다가 아닙니까." "둘 다라는 말은 쓸데없어! 후계자가 먼저라면 나를 끌어들이고 집안을 모조리 들쑤셔서 독살범이 대륙 끝까지 달아나게 만들어버리게. 그러나 아들이 먼저라면. 아들이 먼저라면 말이지……." 노인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갑자기 뒷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빼내더니 테이블에 탁, 내리 박았다. 그것은 단도도 아니고 마치 송곳처럼 생긴 짧은 무기, 스틸레토(stiletto)로 무척이나 날카로워서 손가락 두 마디만큼이나 푹 꽂혀 들어가고는 부르르 떨렸다. "본보기를 보여라. 누구도 아르님 가문의 사람에게 바늘 끝 하나라도 대고선 살아남지 못한다는 걸 보여줘. 이브를 해친 놈을 찾아내. 놈을 짓이겨 죽여버려." 스틸레토의 손잡이에는 가문을 떠난 지 몇 십 년이나 됐는데도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문장, 범선의 키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초대 아르님 공작의 맹우(盟友)가운데 하나인 스초안 오블리비언이 그렸다는 가문의 문장이다. "그것이야말로 조슈아를 지키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다. 놈을 공격해라. 아르님의 방식대로." "숙부." 공작의 눈가는 어두웠다. 그는 스틸레토의 진동이 멎는 것을 지켜보며 나직이 말했다. "저는 경거망동할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이브를 잃은 것은, 피눈물나도록 분합니다. 그러나 조슈아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방어적인 방법을 우선하게 됩니다. 그 애를 잃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공화 혁명의 난국 속에서 이토록 힘들어 이룩한 가문의 명예도 어리석은 싸움으로 뒤흔들리게 됩니다." "남는 것은. '아르님'이다." 노인의 민첩한 손이 다시 다가와 스틸레토의 자루를 짚었다. "힘들여 이룩한 명예였지. 그러나 언제부터 아르님이 공작이었다고 생각하나? 언제부터 잘난 귀족 나부랭이였단 말이냐? 일껏 쌓아올린 명성이며, 재물이며, 공작의 지위 따위가 다 무어냐?" 손을 때자 스틸레토가 또다시 드르르, 하고 울렸다. 스틸레토의 자루에 새겨진 것은 파도 속에서도 뱃사람을 이끄는 힘이자 상징이었다. 그것은 아르님 가문이 본래 바다에서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표지였다. "불명예가 두렵나? 정말로 두려운 건, 가문의 심장이 되는 곳에서 저런 공격을 당하고도 침묵하며 숨을 곳만 찾는 비겁자가 되는 것이야. 그래, 불명예스럽지 않나? 딸을 잃고도 복수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창피하지 않나? 비취반지 장원은 아르님의 성이다. 아르님 공작이 자신의 성 안에서 숨을 곳을 찾고 있나? 적은 쥐새끼처럼 살금살금 걷고 있는데!" 두 사람의 눈이 모두 스틸레토에 닿아 있었다. 거기에 새겨진 키가 방향을 보여주길 바라는 것처럼 뚫어져라 보았다. "나라면…공작, 최대한 소문을 가라앉히고 평온을 가장하여 적이 방심하고 기어 나오기를 기다리겠다. 아니 오히려, 조슈아를 노리고 다시금 움직이기를 기다릴 것이야. 놈이 제 힘으로 조슈아를 어찌할 수 있겠다는 헛된 확신을 갖도록 유도해서, 결정적인 순간을 노릴 테다. 그래서 오늘의 홀에서 이브가 흘린 피를 놈의 피로 씻도록 하고야 말걸." 공작은 답답한 듯 목을 죄는 머플러를 당겨 내리며 말했다. "그러다가… 조슈아가 희생된다면……." "그럼 조슈아를 불러 물어볼 텐가? 죽은 누나쯤은 없었던 걸로 치자고 말해볼까? 껍질뿐인 작위 나부랭이에 집착하지 말아! 희생된다고? 그래, 희생될 수도 있는 거지! 심장에 칼을 맞고도 비굴하게 고개 숙이는 치욕에 비하면 자식쯤은 아무 것도 아냐! 조슈아가 없어도, 공작이 아니어도, 그 주인이 명예롭다면 페리윙클 섬에서 시작된 아르님은 그대로다. 이카본 군도의 위명도 사라지지 않아. 조슈아가 누나를 죽인 놈을 도망치게 두고도 자신만 살아남으면 그걸로 좋다고 생각한다면, 후계자가 될 자격쯤은 애당초 없는 것 아닌가?" 공작은 무척 오래 침묵했다.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자 노인은 돌아서서 몇 걸음 창가로 가며 불쑥 물었다. "공작. 조슈아의 존재가 그토록 귀한가?" 갑자기 뚱딴지 같은 질문을 받은 공작은 조금 아연해하며 답했다. "물론입니다. 이브가 없는 지금.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아이죠." "그렇다면 귀한 아이답게 키워야 할 것 아닌가?" 공작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눈을 조금 크게 뜨다가 말했다. "지금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제가 그 아이를 부당하게 대하고 있단 말씀입니까?" "지금껏 자넨 내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도와달라고 했어. 그런데 왜 날 인정하듯이 그 아이는 인정하지 않는건가? 아버지들에게 흔한 근시안 같은건가?" "숙부님과 조슈아가 어찌 같습니까? 그 앤 고작 열 두살입니다." 노인이 공작을 향해 돌아섰다. 역광 때문에 캄캄한 어둠 속에 선 듯 표정이 보이지 않는 그가 씹어 뱉듯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둘 다 '데모닉(Demonic)'인 거다. 이 집안 사람으로서, 데모닉이라고 불리는 녀석들의 기괴함을 설마 잊진 않았을테지?" 그것은 공작이 극구 피하고 싶어하던 말 그대로였다. 무척이나 듣기 싫어했기에 누구도 공작 앞에서 조슈아를 '데모닉'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공작이 조슈아의 생애에서 가장 지우려 애쓴 말이 그것이었다. "단지 좀 기억력이 좋은 것뿐입니다. 혹여 데모닉이라고 해다…숙부님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제가 그 아이에게 뭘 기대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단지 기억력이 좋을 뿐이라고? 그 애는 학자이고, 전략가이고, 연주가이며, 성악가이고, 그리고 화가이자 시인이다. 내가 그 아이를 2년 동안 키웠다는 걸 잊은건가? 그 아니도 데모닉이라면 말이지, 데모닉의 운명이란건." 말을 잇는 노인의 눈에 순간 빛이 어렸다. 공작은 그 빛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가 숙부로부터 빌리고 싶어하는 바로 그 눈빛이었다. "스스로 자멸할지언정 남의 손에 파괴되지는 않아." 공작의 눈빛이 다시금 치켜 올라갔다. "저더러 그 아이의 미래를 단지 운명에 내맡기란 말씀입니까?" "자네도 알지. 데모닉은 그 잘난 천재성으로 자신을 부숴 버리고 휘말린 타인들도 조각 내 버리지. 운명의 차원에서 볼 때 데모닉은 회오리에 휘감긴 기둥과 같아. 그만큼 억제하기 힘든 강한 운이다. 데모닉들은 형제들의 평탄한 운명마저 수 번 뒤집고 짓밟아버리곤 했어." "저더러 믿으라고 하시는 말씀인가요? 저는 운 같은 것을 믿지 않습니다. 저라면 그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운보다는 좀더 강한 수단을 강구할 겁니다. 그 아이가 강보에 싸여 있는지, 철 울타리에 싸여 있는지, 제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으니 말입니다." 노인은 뒷걸음질로 창가에 다가가 창턱을 짚고 서더니 다른 손으로 창문을 톡톡 치며 불쑥 말했다. "별난 이야기를 들어보겠나?" "뭐라고요?" 노인은 어둠 속에서 빙긋 웃는 것 같기도 했다. "2년 전, 자네가 내게 조슈아를 맡겼을 때, 난 그 애를 일부러 보름 넘게 빈 집에 내버려두었어. 혼자서 어떤 식으로, 얼마나 잘 해 나가는지 보고 싶었단 말이야. 내가 그 애에 대해 어느 정도로 궁금해하고 있었는지 자네가 알까? 지금껏 아르님 가문에는 대략 서너 세대에 한 번 데모닉이라고 불리는 자가 태어나곤 했지만 다들 수명이 너무 짧았어. 그러니 지금처럼 두 데모닉이 동시대에 생존하고 있는 건 가문의 역사상 최초로 벌어진 일이란 말일세. 우연이라고 해도 놀랍고, 아니라면 더욱 신비로운 일이겠지." 공작이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노인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이 데모닉이란 게 묘한 것이… 과거 존재한 모든 데모닉 가운데 성공한 자라고는 단 하나, 가문의 위대한 첫 공작 이카본뿐이었다. 나머지는 나를 비롯해서 하나같이 패배자밖에 없었어.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데모닉 이카본 이후로 여러 명의 데모닉이 있었고, 그들 중 아르모리크 칭호까지 받았던 자들도 있었지만 끝내 아르님 공작이 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단 말이야. 모두 경쟁에서 패하거나, 자멸하거나, 또는 스스로 원해서 가문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지. 그런고로, 모든 데모닉은 직계의 피에 한 번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단 말이다. 단 한 명, 데모닉 이카본의 피만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지, 나에게, 그리고 조슈아에게까지 말이야." "……." "이처럼 괴이한 대차대조표가 또 있을까? 최고와 최악, 둘 사이에 별처럼 많은 선택의 가짓수를 생각해 보게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존재하는 것은 단 하나의 최고와, 지옥에 떨어질 최악들밖에 없었어. 조슈아의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 이브가 죽었으니 자네에겐 이제 조슈아 하나뿐이다. 아르모리크 경이 되어 작위를 물려받을 자식이라고는 단 하나란 말이야. 하지만 장담컨데, 몇 년 안가 사람들은 자네에게 자식을 좀더 낳으라고 무언의 압력을 넣을 것이야. 데모닉은 믿을 수 없는 존재니까. 죽어버릴지, 미쳐버릴지, 제멋대로 뛰쳐나가 버릴지 누가 알겠는가? 아르님 가문은 기묘하지. 공작의 단 하나분인 아들인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야. 단 하나, 단 하나! 내가 지금까지 이 말을 몇 번 했나 모르겠군. 그러나 우리 가문에서 명멸한 데모닉들은 '단 하나'뿐인 성공한 자처럼 되려고 몸부림 쳤고 다 실패했어. 조슈아는? 조슈아는 어찌 될까?" "제게…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십니까. 조슈아가 타고난 천형에 대해서라면 저도 이미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습니다. 저는 자식이 죽으면 새로 낳아 채우면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부류가 아닙니다." 이브노아가 죽은 직후라서였을까, 그렇게 말하는 공작의 입술과 뺨에 힘이 들어갔다. 노인은 왼쪽 손만 움직여 등 뒤 창문의 커튼을 묶은 끈을 간단히 풀었다. 돌아보지 않고도 매듭의 모양을 정확히 아는 손놀림이었다. 커튼 자락이 스륵 떨어지자 방 안은 한층 어두워졌다. "그래. 안타깝게도 손(孫)이 귀한 가문이기도 하지. 아르님은. 공작, 잊지말게. 나도 데모닉이다. 누가 아르님 가문의 역사에서 데모닉을 배제하라고 정해 놓았는가? 데모닉은 비록 두려움의 대상이라 해도 분명 비범한 천재다. 그들의 능력이 가문에 도움이 될 수 없다고 단정지을 자 누구인가? 그런 자는 초대 아르님 공작, '데모닉 이카본'이 연 이 가문에 있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프란츠." 노인이 다시금 이름을 부르자 공작은 피로한 듯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싼 채 잠시 눈을 감았다. "자네가 조슈아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은 잘 알아. 내가 한 말이 잔인하게 들렸을 테지.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확실히 큰 위기다. 단지 이브를 잃은 것만이 아니라 아르님의 명예와 위엄 모두가 실추될 위기에 처해 있는 거야. 조슈아를 지킨답시고 겁먹은 수탉처럼 소란을 피운다면 이브를 독살한 자만이 아니라 기회를 엿보던 다른 무리들도 아르님의 아성을 얕보고 침을 흘리며 달려들게다." "그러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숙부님이라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내가 말하면 그대로 지킬 수 있겠나?" 공작은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인은 곧장 말을 이었다. "조슈아 주변에 호위병 따위는 절대 붙이지 마라. 병사들도 늘리지 마라. 성의 분위기도 예전대로, 새로운 조치 없이 모두가 동요하지 않도록 다잡는거다. 그렇다고 이브의 죽음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해선 안 되지. 손님을 많이 불러서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고 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복수를 천명해라. 아르님 가문에 서툰 수작을 건 자를 어떤 식으로 응징하는지 보여주겠다고 맹세해라. 그러나 자네가 복수를 위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해라. 최소한 1년 동안은 파티나 무도회 등을 금하고, 이브의 초상화를 새로 크게 그려서 홀의 잘 보이는 곳에 달 것이며, 이브의 생일이자 기일인 오늘이 돌아오면 반드시 추도회를 갖도록 해라. 사위에게는 3년 간 상복을 입게 해라. 그러나 사위와 손자를 소홀히 대하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집안에 행사나 모임이 있다면 반드시 빠지지 않게 해라."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조금 후 그가 다시 말했다. "그런 것들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조슈아가 정말 괜찮을 거라고 보십니까?" "암살자는, 적어도 반년간, 그리고 자네의 눈치를 보아 가며 최대 3년 정도는 숨어 있을 거다. 모두 자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거야. 만일 조슈아를 죽일 수 있다. 해도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쯤은 놈도 알고 있을 테지. 그 동안은 적어도 안전하다고 볼 수 있을 거야. 오히려 걱정해야 할 것은 데모닉으로서의 조슈아다. 실패한 데모닉이 되어버리면 살아남는 의미도 별 것 없지 않겠나?" "숙부." 갑자기 무언가 결심한 듯한 목소리를 듣고 노인이 눈꺼풀을 조금 실룩였다. "뭔가?" "조슈아를 숙부께서 도로 데려가시면 어떻습니까?" 히스 노인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왜 안됩니까? 이미 2년이나 돌보아 오셨지 않습니까?" "자네가 조슈아를 후계자로 삼지 않고, 다시는 안 봐도 좋다고 한다면 내, 데려갈 수도 있지." 하지만 전처럼 몇 년 떠났다가 돌아오길 바란다면 그것이야말로 안 될 말이야. 타인들이 보기에는 암살자가 두려워서 후계자가 달아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네. 그래서는 자꾸만 위엄이 무너질 뿐이야." 공작은 대답 없이 테이블 뒤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여전히 테이블에 박혀 있는 스틸레토를 응시했다. 그는 노인을 보지도 않은 채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렇군요. 도망치는 것은 안 된다는 말이군요. 저도, 조슈아도, 그래요, 압니다. 저도 잘 알고 있지만 숙부처럼 그렇게 냉정히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럴 때면 데모닉인 숙부가 조금 두렵습니다. 가장 선택하고 싶지 않은, 어려운 길만이 옳다고 말하시고 저는 그 길이 옳은 것을 알면서도 쉽게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노인은 테이블로 다가와 스틸레토를 도로 뽑았다. "난, 내가 실패한 만큼, 그 애가 잘 해나가길 간절하게 바라네. 만일 데모닉을 키우는 방법이 있다면, 나만큼 그걸 자세히 연구한 사람도 없을 것이야. 실패한 자들의 이유를 오랫동안 생각해보았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데모닉 조슈아가 타고난 폭풍 같은 운을 믿게나. 자네가 방관해도 그 애는 죽지 않아. 밤낮으로 따라다니며 돌보지 않아도 저절로 자신의 운을 휘어잡을 거야. 그 애는 귀해, 아주 귀해, 그러니 귀한 아이답게 키우게, 데모닉은 데모닉답게 내버려두게." 스틸레토는 노인의 옷 속으로 다시 사라졌다. 공작이 들은 말을 되씹고 있는 가운데 노인은 낮게 소리내어 웃더니 다시 말했다. "설마 내가 그 애가 죽든 말든, 실패하는 말든 그냥 내버려둘 것 같은가?" 4. 그림 속에서 온 남자 "어떤 것도 용서받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 때에, 그가 내게 와 주었네. 나는 그에게 고백하고, 죄사함 받았네. 그가 진실로 사제임을 그때서야 알았네. 그는 내 친구이자 인도자였고 항해의 돛대에 높이 걸린 칸델라였네. 그가 평생 나를 지켜주리라 믿었기에, 내 가슴이 이리도 찢어지는 것 아닌가…." 그 때, 조슈아는 누군가 흔들어 깨우기라도 한 것처럼 흠칫 놀라며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에 걸린 램프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창도 문도 닫혔고 바람 한 점 들어오는 곳이 없는데 어째서인지 몰랐다. 한 번, 또 한 번, 한 번…. 그리고 멈췄다. 램프로부터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그는 침대 가까이 끌어다 댄 의자에 앉아 조슈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병간호하는 사람 같은 모습이었지만 비취반지 성 안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상했다. 남자는 마치 상대가 자기를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조금도 삼가는 기색 없이 그를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눈이 마주치는 것조차 개의치 않고. 수도사들의 옷 비슷한 헐렁한 달마티카(Dalmatica) 위에 짤막한 반원형 망토를 걸친 모습은 이 즈음에 흔히 볼 수 있는 복장이 아니었다. 대충 길러 묶은 듯한 머리는 붉은 빛 도는 금빛이고, 조금 볼품이 없다 싶을 정도로 말라서 윤곽이 선명한 얼굴, 그리고 짙은 남빛 눈은 마법사 같기도 하고 학자 같기도 하여 애매했다. 입가엔 혼자 재미있는 것을 연구하는 사람처럼 미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조슈아가 입을 떼어 말했을 때, 상대방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얼굴 가득 놀라움이 번지는 것이 보였다. 고작 한 마디 말에 그렇게 놀랄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너……." 그가 말문이 막혀 있는 동안 조슈아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조금 후에는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발에 꿰고 있었다. 조슈아가 자신을 피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던 그 남자는 이윽고 있을 수 없는 일에 맞닥뜨린 사람처럼 나지막이 말했다. "정말… 보이는 모양이구나,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당신은 아버지가 보냈나요?" 이윽고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남자의 미간에 흡사 빛과 같은 것이 좌우로 퍼지면서─엷은 장막이 걷히듯─주위가 밝아졌다. "그렇지 않아. 하지만 널 보러 온 것은 사실이야." "지금 몇 시죠?" 남자는 당황한 얼굴을 했다. "모르겠어." 조슈아는 다시 의심쩍은 눈으로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빙긋 웃더니 일어나 길을 막듯 조슈아 앞에 서며 말했다. "한창 클 나이잖아. 사흘 밤낮을 내리 자고 허기지지도 않아?" "사흘 밤낮을 자다뇨? 제가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 조슈아는 갑자기 뱃속이 뒤틀리는 느낌이 들어 휘청, 하다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마에 손을 대 보니 미열이 남아 있었고, 앓다가 일어난 것처럼 온 몸에 맥이 없었다. 조슈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중얼거렸다. "당신은 처음 보는 사람이 분명한데…. 우리 집에는 손님이 쉽게 들어올 수 없는데. 파티 같은 거 할 때 빼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조슈아는 입을 벌린 채 말을 멈췄다. "……누나는?" 사흘 밤낮… 이라고 했던가. 피묻은 소매와 꽃잎, 사람들과 술잔이 떨어지는 툭, 하는 소리와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눈앞에서 휘감겨 돌아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무엇이었더라. 무엇이었지. "네 누나가 이브노아라는 아이지?" 남자가 불쑥 말했을 때 조슈아는 몸을 홱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초점을 어디다 맞춰야 할지 모를 불안정한 눈빛이었다. "누나가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어?" "어디로… 갔죠?"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한 물음이었다. 그러나 그 물음은 본질이기도 했다. "없어." "없…다고요?' "없다고. 이제 이 세상엔." 조슈아의 눈에서 초점이 잠시 흐려지는 듯하다가 돌아왔다. "없다고요?" 이상했다. 마치 거짓말 같았다. 또는 참말인데도 종잇장처럼 가벼워 금방이라도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남자는 그런 조슈아를 끈기 있게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소년의 얼굴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며 기다렸다. "꿈이 아니었군요." 뜻밖으로 무미건조하게 툭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러더니 조슈아는 남자를 피해 빙그르르 돌아서 문을 향해 걸어갔다. 밖으로 나왔다. 캄캄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입구를 지나, 드문드문 밝혀진 복도를 걸었다. 회랑을 빠져나와, 홀이 있는 곳까지 왔다. 이곳에는 불 켜진 촛대들이 많이 있었다. 눈앞에서 휘어지며 뻗은 계단과 뻥 뚫린 1층 홀이 흡사 심연처럼 보였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조슈아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주위를 둘러보고 문득 말했다. "아무도 없네." 조슈아는 계단 중간에 주저앉았다. 가느다란 연갈색 줄이 반들반들한 계단 표면에 불규칙한 무늬를 이루고 있어서 손가락으로 따라가 보았다. 어렸을 때의 놀이였다. 몇 살 이후로 하지 않았더라…. 다섯 살 여름 이후로다. 줄은 금방 흐릿해지다가 끊어졌다. 어려서 이미 다 찾아본 거지만 이 계단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연갈색 줄무늬 중에서 세 뼘 이산 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가장 긴 것은 두 뼘 하고 엄지손가락 두 마디 만한 것으로 아래에서 스무 번째 계단에 있었다. 덩굴풀이 조각된 난간 쪽으로 다가갔다. 살아 있는 나무가 아니니 어제 보고 오늘 봐도 변할 리가 없지만, 또다시 살펴보니 덩굴풀이 달린 잎사귀는 기억 그대로 백 열 네 개였다. 그 중 다른 잎새와 겹치지 않고 완벽한 윤곽을 가진 것은 서른 아홉 개였다. 덩굴풀이 만들어 낸 갖가지 모양의 틈새들 중에서 완벽한 모양을 여섯 개, 클로버 모양을 두 개 찾을 수 있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은 셀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날엔가 찾아보니 열 한 개 밖에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완벽히 기억난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다 끝난 놀이었다. 얼어나 계단 아래로 갔다. 거기에 걸린 오래된 그림 속에 누나를 닳은 얼굴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성 안에는 이브노아를 그린 진짜 초상화도 있었지만 조슈아가 보기엔 그다지 닮은 것 같지 않았다. 화가들은 대부분 누나를 오래 관찰할 수 없었다.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도록 할 방법이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언뜻 본 인상만으로 적당히 그리게 되는데 의뢰인이 마음에 들게 하려다 보니 언제나 무척 아름답고 차분해 보이는 소녀의 초상이 탄생하게 됐다. 조슈아가 보기에 그린 초상화는 누군지 모를 이웃 아가씨를 그린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누나라면 역시 이 그림 안의 소녀처럼……. 해벌쭉, 그 소녀는 1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등장하는 이 그림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주인공은 역시 한 가운데에 선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와 연약해 보이는 인상의 예쁜 여자였다. 초대 아르님 공작, 그리고 그의 부인이었다. 몇 걸음 물러났다. 멀리서 보니 누나를 닮은 소녀는 그야말로 군중 속에 묻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흐려져 있었다. 아니, 눈이 흐려진 걸까. "조슈아." 조슈아는 대답 없이 돌아보았다. 조금 전의 남자가 계단 위쪽에 선 것이 보였다. 남자는 곧 아래로 내려왔다. 펄럭이는 망토 자락 틈새에 나무로 된 큼직한 십자가가 걸린 것이 보였다. 십자 중앙에 작은 원이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조슈아로부터 한 발짝 떨어진 곳에 멈춰 서더니 중대한 말을 전하듯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러지 마." 조슈아는 여전히 대답 없이 바라볼 따름이었다. 남자의 얼굴에 안타까운 표정이 떠올랐다. "지금 그들을 보아선 네가 감당할 수 없어. 마음을 가라앉혀. 내가 네 앞에 나타난 것만 해도 충분히 특별한 일이야." "……." 남자가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 조슈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때, 문득 계단 위쪽으로 눈길을 돌린 조슈아는 거무스름한 그림자 비슷한 것이 여러 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발소리 하나 없이, 점점 더 많은 그림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저기……." 조슈아가 손을 들어 가리키려 하자 남자가 움직여 막아섰다. "봐선 안 돼. 자, 이리 와." 남자가 앉으며 몸을 굽혀 조슈아를 불렀다. 그 때 가까운 곳에서도 그림자들이 움직이는 것을 느낀 조슈아는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남자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자 남자는 조슈아의 귓가에 입을 대고 무어라 속삭이기 시작했다. 네 마음이 어두운 구석에서 울고 있을 때 나는 네 손을 빌어 가장 푸른 실을 잣는다 네 마음이 풀 푸른 곳에서 뒹굴며 뛸 때 나는 네 팔을 빌어 가장 슬픈 꽃을 안는다 네 마음이여 가지 가지 못할 곳 없는 마음이여 너는 검은 언덕 위의 빛이고 심해 속 고요이고 자작나무의 햇살 네 마음이 일어나 비탈과 평원을 내달아 돌아올 때까지 나는 기다리네 그것은 노래가 아니었다. 주문 같기도 하고, 다정한 다독거림 같기도 한 이야기였다. 남자는 조슈아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아니, 그는 기도해 주었다. 귓가로부터 시작하여 머릿속이, 곧 온 몸이 물로 씻겨지는 기분이었다. 단지 마음의 착각인 것일까? 정말로 기분이 이상했다. 마음 속에 있던 비꼬인 매듭이 툭 풀린 것만 같았다. "무슨…일을 한 거죠?" 남자는 얼른 대답하지 않고 조슈아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조슈아도 문득 생각해 내고 계단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떠돌던 그림자는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조금 전 그건 뭐였죠?" 조슈아의 기색을 살핀 남자는 안도한 것처럼 미소지으며 말했다. "모르는 편이 좋을 거야." "뭔가 있긴 했군요? 그렇죠?" "나중에 알게 돼. 자… 두려워하지 말고 마음을 편히 가져." 남자는 목에 걸린 십자가를 잡더니 조슈아를 향해 고개를 천천히 끄덕여 주었다. 그 끄덕임을 보고 있자니 놀랐던 마음이 다시 스르르 가라앉았다. 남자에게는 특별한 힘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당신은 누군가요?" 남자는 다시 한 번 주위와 계단 위쪽을 살펴보아 아무 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도는 말했다. "자… 됐어. 내가 누구냐고? 난 얼음 강의 일곱 아들을 섬기는, 나무와 같은 자야." 조슈아는 수도원의 수도사들을 기억해 내고 물었다. "당신은 수도사인가요?"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는 사제가 아닐까?" "사제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르지만, 무척 이상한 사람인 것 같아요. 저, 이름이 뭐죠?" "켈스니티 미드라고 해. 켈스라고 부르면 돼. 그리고 유감이지만, 이상한 사람이 아냐." "하지만 이상해요. 당신이 한 말, 뭔가 마법의 말인가요?" "글쎄. 그건 기도 같은 거야. 난 마법사가 아니니까 마법은 못 써." 켈스는 일어서더니 친근한 눈빛으로 조슈아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어째서 나를 보게 된 걸까. 네 마음 속에 빈자리가 생겼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네가 죽은 사람에 대해 깊게 생각해서… 너와 나 사이에 경계가 엷어졌어." "그게 무슨 뜻이에요? 경계라니요?" "우리는 또 만나게 될 거야." 조슈아는 말뜻을 생각하느라 미간을 찌푸리다가 물었다. "당신이 어디론가 사라질 거란 말인가요?" 켈스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이어 말했다.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는 나에 대한 일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렴. 그리고 만약 또다시 이 집에서 나처럼 낯선 사람이 너를 빤히 바라보거든. 나한테 한 것처럼 말을 걸어선 안 돼. 그가 말을 걸더라도 대답하지 말고 못 본 체 하도록 해. 그보다 나은 대책으로는. 이 집을 멀리 떠나 있는 것도 좋겠구나." "무슨 말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난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야겠어요!" "머지 않아 알게 돼. 지금 안들 아무 소용도 없을 거야." 그의 발이 도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조슈아는 문득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물었다. "당신은… 누나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나요?" 남자는 잠깐 발을 멈췄다. "네 누이는 내가 이제부터 가려는 곳에 있어." "당신은 어디로 가는 거죠?"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2층 홀에 이르자 왼쪽 복도로 모습을 감추기 전 한 손을 가볍게 들어 인사했다. 조슈아는 계단을 뛰어올라가 남자가 가 버린 복도 쪽을 들여다보았다. 한참 말없이 서 있던 그는 약간 조그맣게 '아무도 없네'라고 속삭였다. 누군가가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분명 낯선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왔다. 어디였더라. 오래전, 또는 방금 전에. 조슈아는 다시 계단을 내려와 그림 앞에 섰다. 그리고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드디어 찾아냈다. 초대 아르님 공작 바로 옆에, 조금 전보다 훨씬 화려하지만 여전히 수도사복 비슷한 옷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지금보다 조금 젊어 보이는 모습이긴 했다. 하지만 너무나 똑같은 얼굴이었다. 5. 사자좌 소녀 "태양의 별자리를 타고난 사람은 천진난만할 정도로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고 있는데, 아니라고 가르쳐주지 않는 편이 좋아. 태양에게 불타지 말라고 명령해 보았자 손해보는 건 우리들이니까 말이다." "이런 걸 일곱 별이나 만들라고? 젠장, 이건 농담이 아냐!" 스케치를 펼쳐 든 리체 아브릴의 표정이 워낙 서슬 퍼래서 주위의 나이든 직원들도 감히 말을 붙이지 못했다. 2층에 올라온 손님들까지 다같이 숨을 죽이는 순간이었다. "안 해! 그 빌어먹을 카르디인지 뭔지가 직접 와서 해보라고 하지! 바느질 한 땀 못 뜨는 주제에 이딴 스케치가 다 뭐야!" 언니들의 예상대로 스케치를 바닥에 내던져버리고 잔뜩 화난 걸음 그대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소리와, 그리고……. "어딜 가니, 리체 아브릴?" 자클린느 미랭게트 선생과 현관 앞에서 딱 마주쳐버렸다. 2층에서 아래층의 상황 전개에 귀를 기울이던 직원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키득대기 시작했다. "아, 그건…저……." 대답이 궁해 말을 더듬으면서도 화를 누르지 못한 숨소리가 위층까지 들려왔다. 미랭게트 선생이라고 리체가 화가 난 것을 모를 리 없건만 시치미 뚝 떼고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구나. 어디 아픈데라도?" "…없습니다. 물론." "응, 건강하다니 다행이구나. 그럼 그만 올라가서 오늘 주문을 마저 살펴보겠니?" 오늘따라 미랭게트 선생도 고양이가 가르릉거리듯 우아하게 말하고 있어서 2층 사람들도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끅끅대며 입을 막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미랭게트 선생은 다혈질 소녀 리체를 다루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상대방이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한 것처럼 상냥하게 물으면, 리체도 성질을 터뜨리지 못하는 것이다. "주문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도저히……." "응, 어렵니? 그러면 기간을 더 늘려달라고 손님한테 부탁해야겠구나?" 은근 슬쩍 당근도 던져 준다. 리체는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다시 말했다. "하지만 데브랭 은사(銀絲)같은 건 재고가 없고……." "그래? 특별편으로 주문하지 뭐. 알다시피 사흘하고 반나절이면 온단다." "…… 네." 명분이 없어진 리체가 다시 터덜터덜 2층으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자 웃던 사람들은 재빨리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다시 작업 테이블 앞으로 돌아온 리체는 입을 꾹 다문 채 바닥에 내던진 스케치를 도로 집어들었다. 다시 테이블에 얹어 놓고 의자를 당겨 앉더니, 테이블에 엎드려 얼굴을 묻어버렸다. 허리까지 오는 장밋빛 머리카락이 풀쩍 날아 어깨 위에 내려 앉았다. 다른 직원들은 리체가 저럴 때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흘끔 곁눈질 하면서도 다들 자기 일로 돌아갔다. 리체가 왜 저렇게 화를 낼 수밖에 없는지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열 여섯 살 먹은 리체는 미랭게트 의상실의 막내였다. 막내이면서도 이곳에서 가장 어려운 재봉은 혼자 도맡다시피 하고 있는데, 매번 어떻게든 해내니까 자구 무리한 주문을 받아다 떠넘기는 것이다. 리체가 없었던 작년에는 촉박한 주문이 들어오면 처음부터 거절했던 것을 다들 기억하고 있었다. 다들 이 의상실에 목줄이 매인 처지라 함부로 말은 못하지만 미랭게트 선생이 어린 리체를 무리하게 다룬다는 것이 모두의 의견이었다. 조금 후 심부름 갔다가 돌아와 사정을 모르는 밀라르 언니가 놀란 듯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리체, 왜 그래? 미랭게트 선생님께 혼났어?" 리체가 얼른 대답이 없자 밀라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리체 앞에 놓인 스케치를 집어들었다. 곧장 그녀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 이거 막스 카르디가 주문한 거구나! 어쩌면 스케치도 이렇게 완벽하니! 자기가 입을 옷이 어때야 하는지 너무나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라니까. 그 사람한테 딱 어울리는 의상 아니겠어?" 주변의 직원들이 다시 고개를 빼고 두 사람을 쳐다봤다. 밀라르가 리체의 성질을 건드릴 말을 꺼내기 시작한 탓이었다. 다시 몇 장의 스케치를 집어 살펴본 밀라르는 연신 감탄하며 리체의 신경을 긁어댔다. "색깔이 어쩌면 이렇게 우아하면서도 화려할까? 카르디가 아니면 이런 옷이 어울릴 수가 없지. 정말 절대적인 배우가 아니겠어? 얘, 리체. 그만 일어나서 이것 좀 봐. 이거 네가 만드니? 정말 좋겠다. 나도 카르디의 옷을 만들 정도로 실력이 있었으면 소원이 없을 텐데. 내가 만든 옷을 카르디가 입는다고 생각하면 떨려서 잠도 안 올 거야. 왜 네가 그 사람 옷 만드는 걸 싫어하는지 이해가 안 가. 작년 '바이올린 연주자' 공연 때 가서 봤는데, 리체 네가 만든 옷을 입은 막스는……." 고개를 빼고 있던 사람들은 카운트다운 중이었다. 셋,둘, 하나, 폭발한다! "언니는 모르는 소리 좀 작작해요!" 발딱 일어난 리체가 스케치를 뺏으며 소리를 지르자 밀라르도 눈을 크게 떴다. "얘, 왜 그래? 내가 뭘 어쨌다고 소리를 지리고 그러니?" "그렇게 만들고 싶으면 언니가 만들면 되잖아! 이런 말도 안 되는 디자인이나 해 오는 사람 따위, 정말 싫어 죽겠어!" "이게 왜 말도 안 되는 디자인이니? 좀 복잡할 뿐이지 얼마나 아름다운데!" "그런 걸 일곱 벌이나 만들라는 주문을 하는 사람이 나쁘잖아! 데브렝 은사로 이렇게 복잡한 수를 놔야 되고…. 생각만 해도 죽고 싶을 지경인데! 조금만 단순하게 해도 일하는 사람이 편할 거 아냐? 자기만 완벽주의자면 다야?" 이럴 때 리체를 건드릴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리체 아브릴. 밀라르 쥬시탕트. 이곳이 어디지?" 군기만장 마틸드 언니가 왔다. 미랭게트 의상실의 최고 고참 직원으로 서른 세 살이나 된 그녀는 나이가 들면서 감각이 떨어져서 재봉을 그만두고 관리 직원이 됐는데, 그 후로 재봉사들을 유난히 괴롭혀서 악명이 높았다. 그 중에서도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막내 주제에 실력이 가장 뛰어나서 미랭게트 선생이 대놓고 칭찬하는 리체였다. "말해 봐. 여기가 시장바닥이야? 얼른 여기가 어딘지 말해 봐!" 귀찮은 일 당하기 싫은 밀라르가 얼른 말했다. "하이아칸에서 가장 훌륭한 옷을 만드는 미랭게트 의상실이예요." "그런 줄 알면서 떠들어대니? 손님들이 들으면 뭐라고 하겠어?" 현재 2층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지만 어쨌든 밀라르는 잘못했다고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곧 마틸드가 고개를 돌려 리체를 쳐다봤다. "리체 아브릴. 넌 왜 아무 말이 없어? 네가 잘했다는 거야?" 리체는 눈을 내리깐 채 빠르게 대꾸했다. "잘한 게 없어서 죄송해요." "그걸 지금 대답이라고 하는거야?" "그럼 뭐라고 대답할까요?" 반항적인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마틸드는 소리를 바락 질렀다. "네가 지금 언니한테 대드는거야? 요걸 바늘도 못 잡게 손모가지를 똑똑 분질러 놔야 정신을 차리지!" "말로만 그러지 말고 한 번 해봐요! 그러면 나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옷 안만들고 편안하게 한 달은 놀겠네!" 물론 리체는 마음 편히 놀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생활 능력 없는 어머니와 남동생을 자기 벌이만으로 부양하고 있어서 하루 일당도 아쉬운 처지였던 것이다. "요게 아직 정신 못 차려!" 뺨 한대 때릴 분위기인데 갑자기 주위가 조요해지며 모두가 자세를 바르게 했다. 미랭게트 선생이 직접 올라왔던 것이다. "마틸드, 네가 왜 재봉사들을 건드리지? 넌 가서 네 할일이나 잘해." 저런 식이니 마틸드가 재봉사들을 더욱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미랭게트 선생은 아무나 데려다 써도 되는 관리 직원보다 자기 의상실의 돈줄이 되는 재봉사들을 더 소중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리체 아브릴. 밀라르 쥬시탕트. 다들 제자리로 가서 일해요." 미랭게트 선생은 이름과 성을 모두 부르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것도 재봉사들에게만 해당됐다. 예전에는 마틸드도 '마틸드 베르메르'라고 불러 줬던 것이다. "……알았습니다." 마틸드가 분을 누르며 물러가자 미랭게트 선생은 리체를 정답게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리체 아브릴, 조금 전에 심부름꾼에게 기한을 늘리라고 말해서 보냈단다. 그러니 오늘은 옷감만 골라 놓고 퇴근해도 좋아요. 피곤해 보이니 좀 쉬도록 하렴." 리체도 자기가 편애 받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편애의 대가라고 해 봐야 엄청나게 쏟아지는 일감뿐이니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사랑스럽게 불러주지 않아도 좋으니 일당 한 푼이라도 올려 주면 좋을 텐데. 그런 점에서는 매정하게 평등 원칙을 고수하는 선생이었다. "그럼 저는 옷감 고르러 가겠습니다." 리체는 얼른 대답하고 나서 재빨리 불편한 자리를 피해 달아나 버렸다. 미랭게트 선생도 내려가고 나자 밀라르가 다른 직원에게 속삭였다. "리체도 어려서 그런지 세상 물정을 너무 몰라. 나 같으면 선생님한테 딸기잼처럼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을 텐데. 선생님도 늙어서 힘들어지고 나면 마음에 드는 직원을 골라 의상실을 물려줄 거 아냐. 그러려면 당연히 옷 디자인을 가르쳐야지. 리체는 손님들이 일부러 찾을 정도로 얼굴도 예쁘겠다, 나이도 어리고 하니 가르치기 딱 좋잖아?" 얘기 듣던 직원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글쎄. 선생님 나이가 아직 마흔도 안 됐는데 벌써 그런 생각을 할 것 같진 않은데. 내가 보기에 선생님은 지금 리체가 솜씨 좋을 때 아예 국물까지 빨아먹으려는 심산인 것 같아. 거기 끌려 다니다가 지쳐서 쓸모 없게 되면 바로 자르고 말걸. 너도 솔직히 말해 봐. 미랭게트 선생님이 리체처럼 예쁜 직원 좋아하는 것 봤니? 선생님은 의상실에서 자기가 여왕이어야 속이 시원한 사람이라고." 소녀 재봉사 리체가 일하는 곳은 미랭게트 의상실만이 아니었다. 괜히 의상실에서 일찍 나오는 바람에 집에 들렀다가 두 번째 직장 출근 시각에 늦어버리고 말았다. 바쁘게 달려가 문을 밀고 들어선 리체는 순간적으로 자세를 탁, 바로잡으며 인사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남동쪽 따뜻한 바다로 뻗은 반도와 수많은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하이아칸 왕국은 1년 중 절반이 여름인 나라였다. 대륙의 귀족이라면 누구나 별장 하나쯤 갖고 싶어하는 그곳에서도, 리체가 태어나 자란 블루 코럴 섬은 유난히 값비싼 별장들로 즐비한 섬이었다. 다른 크고 아름다운 섬도 많건만, 하이아칸의 왕성인 소드-라-샤펠 성과 해협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붙어 있다는 위치상의 유리함이 이 작은 섬의 가치를 천정부지로 높여 놓았다. 하이아칸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블루 코펄 섬의 주민들도 외국 귀족들이 뿌리는 돈 덕택에 살았다. 그러니 그들의 돈을 조금이라도 우려내기 위해 각종 시설들이 저절로 생겨났다. 해변에는 무희들을 불러 댄스 파티를 여는 홀이 있었고, 바다가 바라보이는 고급 식당들도 여럿이었다. 각 국 수도에나 있을 법한 의상실도 여러 군데가 있어서 리체가 이만큼이나 돈을 벌며 살 수도 있었다. 리체는 날마다 놀고 먹으면서 하이아칸 원주민을 무시하는 외국 귀족들을 무척 싫어했지만, 따지고 보면 리체도 귀족들의 돈을 먹으며 사는 셈이었다. "뭘, 됐어. 손님도 한 명밖에 없거든." 리체는 의상실이 끝난 밤 시간에 '코펄리'라는 이름의 해변 식당에서 급사 일을 했다. 아직 본격적으로 바쁜 때가 아니므로 손님이 적지만, 한여름만 되면 워낙 돈을 많이 버는 지라 지금 같은 때에도 종업원을 넉넉히 쓰고 있는 곳이었다. 어쨌든 아직까지는 리체가 늦거나 해도 별로 잔소리를 듣지 않아서 좋았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지배인은 리체가 곧바른 성격 때문에 몇 번이나 사고를 쳤는데도 주인에게 이르지 않고 손녀처럼 보아주는 마음씨 좋은 사람이었다. "고맙습니다. 얼른 옷 갈아입고 올게요." 탈의실로 달려간 리체는 낡은 반바지를 서둘러 벗고 제복을 꺼냈다. 소매가 봉긋하게 부풀려진 포도주빛 포플린 블라우스, 그리고 같은 빛깔의 좁고 긴 치마였다. 블라우스 여밈과 소매에는 까맣고 무늬 없는 단추가 촘촘하게 달려 있어서 하나하나 잠그려면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했다. 일전엔 서두르느라 중간에 단추를 빼먹어서 홀에서 손님에게 지적 받은 일도 있었다. 이번에는 차근차근 다 잠갔다. 치마는 발목까지 오지만 좁아서 걷기가 힘들기 때문에 무릎까지 트임이 있는 모양이었다. 검고 반짝거리는 구두를 신고, 긴 머리를 풀어 빗질했다. 리체의 장밋빛 머리는 타고난 광택이 있어서 무척 예쁘지만 가늘고 숱이 많아 잘 엉켰으므로 빗질도 조심해야 했다. 리체의 성격에는 영 맞지 않는 머리지만 이 머리 덕택에 급사 자리를 얻은 거나 마찬가지여서 자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 빗어 내린 후 정수리 근처에서 양 갈래로 조금씩만 잡아 리본으로 묶고 다른 머리와 함께 늘어뜨렸다. 이것으로 '코럴리'의 주인이 원하는 머리 스타일은 완성이다. 마지막으로 발목까지 오는 장식 없는 앞치마를 둘렀다. 민무늬에 검은색이지만 제복과 썩 잘 어울린다. 거울을 봤다. "완성!" 탈의실에서 뛰어나간 리체는 조금 후 커다란 쟁반을 들고 환하게 불이 켜진 홀을 걷고 있었다. 성격 나쁜 재봉사로부터 태도를 전면 수정, 할 수 있는 한 정중한 표정과 우아한 동작으로 한 명뿐인 손님에게 저녁 식사를 가져다주려는 참이었다. 손님이 거의 없는 탓인지 다른 테이블을 마다하고 하필 주방이 가까운 바에 앉은 손님은 뒷모습으로 보아 스물 정도 되는 젊은이인 듯했다. 이런 식당에 오는 걸로 봐서 귀족이긴 할 텐데 옷차림도 어쩐지 후줄근하고, 턱을 괴고 밤바다를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는 걸로 보아 블루 코럴 섬에 온지 얼마 안 됐을 거라고 마음대로 판단해버렸다. "손님. 식사 가져왔습니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던 탓인지, 리체는 혼자 예술이라도 만드는 기분에 빠져 최대한 상냥하게 활짝 웃어 보였다. 입가를 둥그렇게 둘러싸는 모양으로 수염을 기르고 앞머리를 길러 눈가를 다 덮은 젊은 남자는 그녀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차려 놓고 주방으로 돌아가자 할 일이 없었다. 코럴리의 급사들은 모두 다 여자들이었고, 리체 또래의 소녀 급사들도 있었다. "여느 해 같으면 5월이나 되어야 바빠질텐데, 올해는 4월부터 정신 없으려니." "소드-라-샤펠의 축제 때문에?" "분명 전야제부터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요즘처럼 한가한 날도 얼마 남지 않았지 뭐야." "사람들 몰리는 거야 다 마지막 날 막스 카르디 공연 때문일텐데 뭐. 그때는 보나마나 식당 미어터지겠지. 어떻게 휴가 내고 도망 못 가나?" "언니가 휴가 가버리면 남은 우리들은 어쩌라고요? 하긴 저도 그 공연 보러 가고 싶긴 하지만, 티켓이 좀 비싸야 말이죠." "너도 생각 있구나?" "앗, 저도 보러 갈 거예요. 저번 달부터 티켓 살 돈 모으고 있다고요. 경쟁이 심해서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못 구해도 공연장 밖에 가서 나올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그러니 전 그 날 꼭 쉬어야 돼요. 미리 말해 두는 거예요." "다들 난리네. 주인이 식당 문 닫아줄 리도 없고. 천상 그 날 식당은 우리 리체가……." 주방 입구에 기대어 서 있던 리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왜 하필 저예요?" "넌 카르디 그 사람 싫어하잖아. 그것도 죽도록." 그 때 바에서 식사하고 있던 손님이 언뜻 고개를 들어 주방 입구에 선 리체를 쳐다봤지만 리체는 느끼지 못했다.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그 날 혼자 일할 순 없잖아요!" 언니들은 꺄르르 웃으며 리체를 놀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 좋아하는데 어떡하니? 네가 우리 돔 도와줘라. 우린 막스 카르디의 '아쿠아리안' 공연을 못 보면 쓰러질 것 같거든." "우린 다들 몇 달이나 별러 왔잖니. 난 카르디를 싫어하는 네가 이해가 안 가지만 그래도 싫어해 줘서 다행일 때도 있구나. 호호호호……." "리체 네가 카르디를 싫어하는 건 그 사람 공연을 한 번도 못 봤기 때문이야. 왜 보러 가지 않니? 한 번만 보면 바로 반할 텐데. 얼마나 노래를 잘 한다고." "소년 소프라노보다도 아름다운 목소리야. 춤 솜씨도 정말 빼어나지 뭐니. 늘 쓰고 다니는 가면 속 얼굴도 엄청난 미남일거야." "나도 얼굴이 궁금해 죽겠어. 리체 너는 안 궁금하니?" 여기까지 와서 카르디인지 뭔지를 칭찬하는 소리를 듣게 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리체는 저도 모르게 성격 나쁜 재봉사로 돌아가 소리쳤다. "그 사람은 짜증나는 완벽주의자예요! 남 생각은 전혀 하지 않죠! 자기만 돋보이면 그만이라는 그런 사람 아주 질색이에요!" "어머, 얘가 왠 소리를 지르고 그래?" 리체가 재봉사라는 것을 모르는 급사 언니들이 리체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지배인이 잠깐 자리를 비워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다면 당장 쫓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리체가 화가 나서 혼자 주방에서 빠져나와 홀 쪽으로 걸어가는데 한 명 뿐인 손님이 손을 들어 그녀를 불렀다. "잠깐만." 리체는 흠칫 당황했다. 바에 앉아 있었으니 급사들이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을 가능성이 있었다. 한 명뿐이라고 없는 사람 취급한 것이 실수였다. 손님이 급사들이 떠든다고 주의를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지배인을 부르면 골치 아파질 터라 리체는 얼른 달려갔다. "아아, 죄송합니다. 씨끄러우셨죠." "아니, 뭐 그건 됐는데." 손님은 리체더러 잠깐 자리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잘못한 처지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네." 왜 이렇게 재수가 없을까. 하필 언니들이 짜증나는 의상광(衣裳狂) 배우 카르디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카르디가 싫어요?" 대뜸 나온 질문을 들은 리체는 눈을 크게 뜨다 말고 침이 목에 걸려 심하게 기침을 했다. "질문이 이상했나? 괜찮아요?" "네… 괜찮습니다." "왜 그렇게 싫어해요?" 리체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손님을 바라보다가 이 사람이 막스 카르디의 팬인 모양이라고 판단했다. "그냥 개인적으로 싫어할 뿐이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 "왜 싫어하는지 궁금해서 그래요." 리체는 한쪽 눈썹을 조금 올렸다. "손님께서 좋아하셔도 저는 싫어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손님이 갑자기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리체는 영문을 몰라 미간을 찌푸리며 빤히 쳐다봤다. "내가 좋아한다는 말은… 물론 안 했어요. 사람들이, 음, 그러니까… 많이들 좋아하잖아요? 당신처럼 확고하게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이유도 분명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물어본 거죠. 별 이유 없는 취향에 불과했다면 미안해요." 듣자니 아무 생각 없는 사람으로 취급당한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난 그를 싫어할 이유가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자 손님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이유가 뭔데요?" "음… 지나치게 복잡한 장식이 많은 의상을 좋아하기 때문이죠." 자기가 말하고도 괴상하게 들렸을 것 같아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 손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전에, 아… 엿들은 것은 미안하지만 그냥 들려와서… 어쨋든 공연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어떤 의상을 입는지 어떻게 알아요?" "그건……." 리체는 말문이 막혔다. 미랭게트 선생은 일당도 짜게 주는 주제에 재봉사들의 사생활까지 참견해서 뭐는 된다. 뭐는 안된다. 제한하는 것이 많았으므로 급사로 일하는 것은 절대 비밀로 하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일부러 식당에서는 '리체 아브릴'이 아니라 '리체 몽플레이네'라는 이름을 쓸 정도였다. '몽플레이네'라는 성이 아주 가짜라고는 할 수 없었다. 어쨋든 명목상 아버지인 사람이 물려준 성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틀림없이 귀족일 테고 급사나 재봉사의 일상사에 재해 전혀 관심이 없을 것이다. 이런 사람 입에서 소문이 날 리가 없지, 라고 생각한 리체는 바 위쪽에 있는 컵을 집어 물을 한 잔 따라 마시며 말했다. "난 막스 카르디가 의상을 주문하는 가게의 재봉사인데, 매번 바느질 때문에 죽을 지경이니까 그렇죠. 조금만 단순하게 스케치해 오면 모두가 편할텐데, 게다가 그 사람 옷은 거의 다 내 몫으로 떨어진단 말이에요." "미랭게트 의상실?" "프흡!"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나던 리체는 들고 있던 컵의 물을 손님 얼굴에 끼얹어버리고 말았다. "어머!" 갈수록 태산이었다. 의상실을 어떻게 아느냐고 소리칠 틈도 없었다. 그런데 물을 뒤집어 슨 손님은 화도 내지 않고 천천히 자기 얼굴을 만져보더니, 어쩔 줄 몰라 두 손을 꽉 맞잡고 있는 리체의 앞치마 주머니에서 마른 수건을 꺼내갔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그가 손가락을 세워 쉿, 하고 말했다. "아무도 못 봤으면 그냥 넘어가죠." "……." 리체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기가 잘못해도 크게 잘못한 건데 오히려 손님 쪽에서 조용히 하라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조금 후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엣, 그 수염은……." 물 묻은 얼굴을 닦자 수염이 면도한 것처럼 깨끗이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눈까지 가렸던 머리도 다 젖혀지고 나서 얼굴을 자세히 보니 상대방은 고작 자기 나이 또래의 소년이 아닌가. "본래는 이런 얼굴인데……." 푸른 기 도는 은회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이마는 곧고, 흰 뺨과 턱의 선은 깎은 듯 예리한 생김새를 본 리체는 당황했다. 의상실이나 식당에서 일하면서 먼발치로 잘생긴 남자는 많이 봤지만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대뜸 마주본 일은 없었던 것이다. "못 본 걸로 해 줘요." "아니, 수염은 왜 붙이죠?" "재미로." "나 같으면 절대로 안 붙여요." "당연하잖아요. 당신은 여자인걸"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잘생긴 얼굴을 감추는 게 취미예요?" 소년은 당황한 듯했다. "에… 뭐라고요?" 갑자기 리체는 분개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처럼 잘생겼으면 당연히 얼굴을 잘 보이게 드러내고 옷도 좀더 깔끔하게 입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이러고 다니다니 서비스 정신이라고는 하나도 없잖아요? 세상에 잘생긴 사람 보기가 얼마나 힘든데, 소녀들의 즐거움은 전혀 생각 안 하는군요?" 리체의 궤변을 듣던 소년은 옛날 생각을 떠올리는 얼굴이 되어 피식 미소지었다. "내가 소녀들의 즐거움을 위해서 얼굴을 드러내고 다녀야 된단 말입니까? 그것 참 별난 논리인데." "싫으면 할 수 없지만, 당신 같은 사람들은 소녀들에게 큰 손실이에요. 세상의 소녀들은 아름다운 것을 보면서 자랄 권리가 있단 말이에요." 리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이없는 상황이 연달아 닥치는 바람에 상대가 손님이고 자신이 급사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때 소년이 말했다. "당신 손가락이 전부 부르튼 걸 보니까 재봉사가 맞긴 한 것 같군요. 옷을 만드는 일이 그렇게 고된가요?" 리체는 갑자기 생각난 듯 눈을 크게 뜨다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아, 정말로! 내가 미랭게트 의상실에서 일한다는 말, 다른 사람한테 절대 하면 안 돼요. 잘못하면 쫓겨나게 된단 말이에요! 말 안 할 거죠?" "물론, 뭐 말할 만한 사람도 없고……." "다행이에요! 좋은 사람이군요! 아까 의상실 말을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그런데 당신 그러고 보니 막스 카르디가 미랭게트에서 의상을 맞춘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아… 그건, 저……." 대답을 궁리하려는 듯 생각을 더듬던 소년은 갑자기 춤 안에서 티켓 두 개를 꺼내더니 리체의 손에 쥐어 주었다. "당신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죠? 난 사실 막스 카르디의 친구에요. 그에 대한 거라면 뭐든 잘 알고 있죠. '아쿠아리안' 공연 알죠? 이건 티켓이에요. 친구하고 꼭 보러 와요." "어머, 비싼 거잖아요! 이런 걸 왜날 줘요?" "당신이 막스의 옷을 만드느라고 손이 그렇게 됐는데, 티켓을 줬다고 하면 막스도 틀림없이 기뻐하겠죠. 난 또 얻을 수 있어요. 그러니 당신이 만든 옷을 꼭 보러 와요. 한 달 반 뒤에, 알았죠?" 후식도 안 나왔는데 소년은 일어나 나가려 했다. 티켓을 손에 쥔 채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가 파악하려 머리를 굴리던 리체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하지만 당신은 누구예요? 그러니까 당신 이름은 뭐죠?" 소년은 뭐라고 말할까 생각하는 것 같더니 곧 웃으며 말했다. "그냥 '조'라고 해 둬요. 당신은?" "리체… 몽플레이네." "그럼, 그 때 공연장에서 봐요. 몽플레이네 양." '조'라는 소년은 누가 자기를 쳐다볼세라 모자를 푹 눌러쓰더니 바람처럼 식당을 나가 버렸다. 조금 멍해 있던 리체는 자기 손에 쥐어진 티켓을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기뻐서 외쳤다. "와아, 운도 좋아! '아쿠아리안' 티켓 두 장이면 1백 엘소가 넘잖아!" 물론 리체는 공연을 볼 꿈에 부풀어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아쿠아리안' 공연을 보러 가고 싶어하는 언니들한테 프리미엄 붙여서 팔면 한달치 급료는 대번에 생길 테고, 공연 임박해서 암표로 팔면 더 받을 지도 모르고……. 그런 생각을 하던 리체는 아쉽다는 듯 입구 쪽을 돌아보았다. "주는 김에 한두 장 더 주고 갈 것이지." "나 참, 그게 말이 돼요?" "말이 안 되면 어쩔 거냐? 어쨋거나 변덕인 게지." "영감 보기엔 이게 변덕이에요? 가서 뒤통수를 한 대 때려 줘야 되겠네. 내가 이 티켓을 받은 게 고작 닷세나 됐나 그런데, 그새 공연이 취소됐고 녀석은 켈티카에 나타나요?" "너, 그거 정말로 보러 갈 셈이었냐?" 히스 노인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쳐다보자 막시민은 당연하다는 듯 턱을 치켜들고 대꾸했다. "그럼, 친구가 일껏 티켓까지 보네줬는데 가야지." "넌 하이아칸까지 가는데 마차비만 얼마나 드는지 알고 있냐? 게다가 국경 넘으려면 필요한 서류가 몇 가지인지 알기나 하고 떠드냐?" "에이, 그런 것쯤은 하나뿐인 제자를 위해서 영감이 알아서 처리해줬겠지, 뭐. 어라, 아니라고 말할 참인가요?" 히스 노인이 갑자기 손을 들자 막시민은 떠드는 것을 멈췄다. 파티의 주인공인 조슈아와 아르님 공작 부부가 홀에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막시민이 조슈아를 보는 것은 5년만의 일이었다. 헤어질 때 열 한 살, 열 두 살 소년들이었던 둘이 이제 키도 훤칠하게 커지고, 얼굴도 소년다운 윤곽으로 뚜렷이 바뀌어 있었다. 게다가 막시민이 놀란 점은 꼬마라고 놀렸던 조슈아가 이제 자기보다 더 커졌다는 사실이었다. 빈 집에서 배곯고 있던 열 살짜리 꼬마가 새삼 생각났다. 그 때 그 땐 어찌나 작았는지 자신보다 작은 것은 물론, 일곱 살로 보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는데. 그리고 또 하나, 까맣던 머리가 푸르스름한 회색으로 변해 있는 것이 눈길을 끌었다. 연색을 한 건지, 색이 바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조슈아는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에게 차례로 인사를 하며 돌아다녔다. 이날의 파티는 조슈아가 하이아칸에서 몇 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귀족답게 화려한 옷을 입은 조슈아를 보는 것도 막시민으로서는 처음이었다. 조금 낯선 기분이 들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하고 생각해버렸다. 한 바퀴 다 돈 조슈아는 드디어 막시민과 히스 노인에게 왔다. 거의 맨 마지막이었다. 오늘 히스 노인은 막시민의 보호자로 초대된 체 했으므로, 조슈아도 친척들 앞에서 할아버지의 정체를 드러낼 수 없어서 일찍 와 인사하지 못한 것이긴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조금 섭섭한 생각까지 들었다. 예전에는 모닥불 피운 강가에서 세 사람이 전부였던 시절도 있었는데. 조슈아는 할아버지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곧 막시민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막군! 이게 얼마만이야?" 옛 별칭으로 부르며 손을 내미는 친구를 보니 오랫동안 못 보았던 것은 물론 조금 섭섭했던 마음까지 단숨에 날아가 버렸다. "열 다섯 전에 죽지 않고 용케 살아남았군 그래?" 예전에 데모닉에 대해 들은 것을 생각해 내고 농담을 던지자 조슈아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너야말로 개한테 물린 상처가 도지지 않고 멀쩡히 걸어다니네?" "응, 대신 그 개가 이빨이 썩어 죽었다나 봐." "역시, 개를 위해서 좀더 일찍 불을 질렀어야 했어." 둘은 마주 웃음을 터뜨렸다. 히스 노인은 둘이 웃는 것을 보더니 아르님 공작을 만나러 간다며 잠시 자리를 떴다.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야? 하이아칸에서 평생 있을 것처럼 그러더니 그새 돌아오다니." 조슈아는 장난스레 얼굴을 찡그리더니 말했다. "아버지께서 돌아오라고 하시기도 하고, 그곳 생활도 좀 질렸고." "거기서 다녔다던 학원은 어쩌고?" "그거야 올해 초에 일찌감치 관뒀어. 너도 알다시피 내가 학원 체질이 아니잖아. 다니는 동안에도 빼먹은 날이 제대로 간 날보다 많을걸.' "그런 데를 뭐하러 다니냐? 수업료가 아깝다." "사실 나도 아까웠어!" 조슈아가 킬킬거리며 웃자 막시민도 피식 미소했다. 그러면서 5년 만에 만난 탓인지 예전처럼 편하게 대해지지가 않는다고 생각했다. 역시 귀족은 귀족이란 건가. 조금 후 막시민은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비밀로 하고 있다던 그 공연도 취소야?" "공연?" "그, 뭐야… 아쿠… 어쩌고하던 그거 말이야." 조슈아는 조금 생각하는 것 같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아, 내가 취소해버렸어." "중요한 거라고 무척 기대하는 것 같더니 일방적으로 날려버리고, 잘 한다.' "안 내키는 걸 억지로 하는 건 질색이라서." "예전에 좋다고 난리 아니었냐? 그런 걸 티켓은 뭐하러 보냈냐? 하마터면 그거 보러 하이아칸까지 갈 뻔했네." 그러자 지루한 듯 기지개를 켜던 조슈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티켓?" "네가 편지에 넣어서 보내줬잖아. 나하고 할아버지한테 보러 오라고. 두 장." "내가 그런 걸 보냈어? 언제 받았어?" "받은 지 닷새 됐다. 한 마디로 티켓 받고 이틀 지나니까 네가 켈티카에 있다는 소식이 날아온 거라고, 내가 얼마나 황당했을지 좀 느껴봐라.' 조슈아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막시민의 표정도 조금 묘해졌다. "아… 역시 기억이 안 나. 술이라도 마시고 보냈나." "……." "하긴 뭐 티켓을 한두 사람한테 보냈어야 말이지.' 막시민이 말문이 막혀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을 헤치고 한 남자가 나타났다. 막시민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조슈아가 반색을 하며 반겼다. "테오 형! 어디 갔다가 이제야 나타나요?" "아, 밖에 나갔다가 조금 늦어져서, 방금 아버님 어머님께 인사드리고 오는 참이야." 20대 후반의 사내였다. 키가 조슈아만큼 크고, 여자들이 흔히 미남이라고 하는 외모의 소유자였는데 푸름 눈매가 이상하게 사람의 속을 꿰뚫어보려 하는 느낌을 주었다. 막시민은 본능적으로 평범한 표정을 지어 자신을 감추었다. 막시민을 본 테오가 조슈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쪽은 친구인가?" "아, 네. 막시민 리프크네라고, 제가 예전에 코츠볼트에 가 있을 때 사귄 친구예요. 막시민, 이쪽은 우리 매형이야. 테오스티드 다 모로라고 하지." 막시민은 인상을 얼른 풀지 못한 채 테오와 악수를 나누었다. 조슈아는 매형에게 매우 친근하게 굴었다. 막시민의 눈에는 그것도 조금 이상하게 보였다. 예전에 조슈아는 누나와 매형에 대해 좀 씁쓸하게 얘기한 일이 있었다. 더구나 누나는 죽었다고 들었는데, 그 후로 오히려 도로 친해졌단 말인가? 더구나 하이아칸에 그렇게 오래 가 있었는데? "조슈아, 잠시 매형하고 저쪽가서 얘기 좀 할까? 잠간이면 되는데." 조슈아는 금방 고개를 끄덕이더니 막시민에게 말했다. "금방 갔다올게. 조금만 기다려 줘." 막시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슈아는 순식간에 사람들 틈으로 사라져 버렸다. 정말 숨어버린 것처럼 눈으로 따라갈 수도 없었다. 막시민은 손에 든 유리잔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깊게, 아주 깊게 생각했다. 막시민에게는 조슈아처럼 희한한 기억력이나 계산력 같은 것, 또는 예술적 재능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반면 조슈아에게 없는 현실 감각, 그리고 추론 능력이 뛰어났다. 왠만한 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데 남들보다 훨씬 짧은 시간밖에 필요하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했다. 확실히, 이상했다. "막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게냐?" 히스 노인이 돌아와 어깨를 칠 때까지, 그는 주변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노인을 본 막시민은 빠른 말투로 물었다. "영감은 조슈아가 자기가 한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상황이 상상이 가요?" "조슈아가?" 할아버지는 갑자기 뚱딴지같은 소리를 한다는 듯 멀뚱히 쳐다봤지만 막시민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보고 대답했다. "흔히 일어날 만한 일은 아니지. 조슈아가… 그럴 리가 없지. 그 녀석 기억력은 너도 알지 않느냐." "알죠. 저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막시민은 바지 뒷주머니에서 조슈아가 보낸 편지를 뽑아 들더니 봉투 안에서 티켓을 꺼냈다. 공연 날짜는 5월 20일, 약 한달 반 뒤의 날짜가 적혀 있었다. "조슈아는 아무 것도 잊어버릴 수가 없는 놈입니다. 본래부터 그 따위로 만들어진 자식이 아닌가요. 제가 아는 조슈아는……." 막시민은 티켓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고 할아버지의 손을 잡더니 평생 한 번도 보인 일 없는 심각한 눈빛으로 말했다. "할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 하이아칸으로 가야 되겠습니다. 그것도 오늘 밤 당장." <2권에서 계속> 데모닉 2권 [demonic] a 악마의; 악마와 같은; 마력을 지닌, 천재적인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말해 줄래?" "그건 네가 어디로 가고 싶으냐에 달려 있지." 고양이가 말했다. "어디로 가든 별 상관이 없는데……." 앨리스가 말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느냐는 중요하지 않단다." 고양이가 말했다 -루이스 캐럴.『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중에서 3막 Shower 1. 아궁이 속의 고양이 찾기 2. 페르소나의 오후 3. 평화로운 일상이 꼬이기까지 4. 공격 5. 공동운명체 6. 탐정과 조수 7. 되살아난 인형 4막 Initial 1. 그림자가 움직이다 2. 켈스니티 3. 웃는 가면 4. 광기와 이성의 경계 5. 마법사의 취미 6. 인형사 3막 Shower 1. 아궁이 속의 고양이 찾기 "이봐. 회색 고양이야! 쟂빛 털을 하고 아궁이 재 속에 들어가 있군? 몸을 동그랗게 말고, 꼬리도 감추고 말야. 하지만 숨바꼭질도 끝이 있어야지. 눈을 감고 끄덕끄덕 졸고 있는 회색고양이야! 말로 할 때 냉큼 기어 나오지 못해? 아니, 그 반항적인 눈빛은 뭐야? 꾸물대면 아궁이에 불을 지펴 줄 테다!" 멀리 간 바람이 잔물결을 불어 보냈다. 후, 하고 힘껏 불자 잠자고 있던 해안 바위들이 일제히 물에 젖는다고 난리를 피워댔다. 하지만 잠깐이면 도로 하얗게 마를 것이다. 얼룩 하나 남기지 않고, 남는 것은 투명한 온기뿐. 물과 하늘이 맞닿은 곳까지, 섬 한 조각 없는 바다가 푸른 벽지처럼 발라져 있다. 흰 천에 파란 줄무늬가 든 바람 차양이 철럭이고, 그 아래 소년이 있었다. 두꺼운 책 한 권을 베고 누운 후리후리한 소년은 얼굴에 챙이 넓은 짚 모자를 올려놓아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모자 속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가 줄곧 들렸다. "수영하기 싫다니까 왜 이렇게 끈질겨요? 당신 때문에 배우긴 했지만 언제나 머리까지 흠뻑 젖어야 하고, 좋을 리가 없잖아?" "리허설로도 땀에 흠뻑 젖을 수 있으니 젖는다는 점에서는 똑같잖아. 난 그 쪽으로 할래." "난 섬에서 태어난 당신 친구가 아니라고요! 배를 탈 생각도 없는데 바다에 빠질 일이 있을 리 있겠어?" 조금 후 소년은 한숨을 내쉬며 모자를 치우고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말했다. "아, 정말 잔소리가 많아졌어. 이젠 낮잠도 못 자게 해." 조금 기다리는 것 같더니 이번엔 숫제 소리를 내질렀다. "그래요! 당신이 맞았어! 머리가 젖어서 달라붙으면 스타일이 구겨지니까 안 하는 거라고요! 이제 됐죠?" 소년은 모자를 집어들어 푹 눌러쓰더니 일어나 바닷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대뜸 쏘아붙였다. "수영하러 가는 거 아니라니까!" 물론 소년이 돌아보았던 자리에 사람의 그림자는 없었다. 사람은커녕 소라게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꼭 누군가 있던 것처럼 짜증스런 눈으로 쏘아본 소년은 맨발로, 여미지 않은 흰 셔츠와 조금만 내려도 얼굴이 가려지는 챙 넓은 모자 하나만 갖고, 바람에 옷자락을 맡긴 채 걸어갔다. 모래 위에 남은 옅은 발자국을 뒤따르는 파도가 순식간에 지웠다. 아직은 아침 바다다. 하지만 11시 정도면 모래도, 돌도 따끈따끈하게 데워질 테고 그 즈음엔 산책도 쾌적하지 못할 게 틀림없었다. 대신 수영을 하려는 사람들이 수건과 모자, 피크닉 바구니 따위를 쥐고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다. 이 계절엔 오후 3시 즈음까지 수영이 딱 좋았다. 하고 싶은 대로 실컷 수영을 하고 나서 바구니에 든 샌드위치를 꺼내 먹고, 책을 읽거나 모래찜질을 하며 소일한 뒤 낮잠을 잠깐 잔 다음, 모래만 씻으면 맨발로 들어갈 수 있는 해변 레스토랑에 가 저녁을 먹는 것이다. 흰 돌벽에 크림색 산호가 장식되어 있고, 테라스에는 매끈한 자갈 위에 하얀 파라솔들이 나란히 놓인 곳 말이다. 그러나 소년은 오전 중에, 그것도 산책만 할 뿐이었다. 사람들이 나타날 즈음엔 재빨리 사라져버렸다. 이곳 해변에 드나드는 사람들 중 날마다 이곳에 왔다가 일찌감치 가버리는 소년의 모습을 간혹 본 사람이 있긴 했지만, 얼굴조차 모자로 가린 터라 정확히 기억할 사람은 없었다. 모래사장이 끝나는 절벽 틈까지 갔다가, 절벽 아래 흩어진 바위 무리를 맨발로 밟으며 넘어갔다. 빼곡하던 돌 이음매가 듬성듬성해지더니 곧 틈새마다 포말이 하얗게 고인 바다 머리가 되었다. 잔물결이 드나드는 돌틈에 발을 담그니 서늘한 기운이 뒤꿈치로부터 등줄기를 타고 경추(頸椎)까지 올라왔다. 틈바구니에 고인 모래에 들락거리는 흰 거품을 맨발로 문질러 봤다. 까칠하기도 하고 미끈거리기도 하는 것이 딱 기분 좋을 정도의 감촉이다. 그리고 거기까지. 발목 이상을 물에 담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건 고양이 세수보다 더한데, 조슈아.」 바로 곁, 조금 높이 솟은 바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소년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스물 후반에서 서른 초반 정도의 남자 목소리로서 맑고 부드럽지만 지금은 짓궃은 장난기가 느껴졌다. 소년, 조슈아는 자기도 적당한 바위를 골라 앉더니 위쪽을 돌아보며 예의 손가락을 휘저어 보였다. "고양이한테 수영을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아? 당신 같은 잔소리꾼이라해도 가능할 리가 없지." 「고양이는 본래 헤엄칠 줄 아는데.」 조슈아는 인상을 쓰며 대답을 짜냈다. "내 말은, 고양이가 알거나 모르거나 간에, 가르치려고 한다는 건 무리라는, 뭐 그런 뜻으로서……." 상대방은 식 웃더니 조슈아의 궁색한 대답을 막아버렸다. 「할 줄 알아도 안 한다는 점에서는 너와 같군.」 결국 남은 대꾸는 하나뿐이었다. "……쳇, 고양이 녀석이 수영을 하든 말든." 결국 조슈아가 발끝조차 물에서 빼버리자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럴 때면 네가 그의 자손이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수백 년 전 섬마을 소년의 피를, 태어나서 십 년 동안 짠물이라고는 구경도 못한 나한테서 찾다니! 살아보며 많은 기대에 파묻혀 봤지만 당신은 그야말로 최고로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조슈아는 묘하게 오랫동안 바다를 응시했다. 청유리병 속에 든 물처럼, 점점 더 파랗게 빛나기 시작하는 오전의 바다를 발치에서부터 지평선이 이르기까지는 눈 떼지 않고 바라봤다. 「그래도 바다를 좋아하긴 하는 것 아닌가?」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 바다를 보러 오자고 약속했던 친구가 있어서. 그 뿐이야." 「네 친구라고 해봤자 옛날 요즘 친구 다 합쳐서 한 명밖에 없던 것 같은데.」 "굳이 그렇게 딱 집어서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나직한 웃음소리만이 들렸다. 조슈아는 아랫입술을 한 번 빨고 중얼거렸다. "누구나 가끔은 혼자 있고 싶은 것 아냐. 하지만 난 생각에 잠길라치면 어느새 귓가에 대고 말을 걸어대니 당신은… 웃지 말아요! 당신말고도 내 귀에 대고 떠들어대는 녀석들이 종종 있는데 이런 상태로 내가 당장 미치지 않는 게 놀랍지. 그것도 한꺼번에 여럿이 얘기하기 시작하면 정작 내 앞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는 듣지도 못하게 된단 말이야. 조용히 하라고 소리지를 수도 없고…. 일전에 무심코 소리질렀다가 사이코 아니냔 소릴 들었어. 게다가 요즘은 가는귀를 먹은 것 아니냐는 평까지 듣고 있고. 아, 정말로 웃지말고 좀 들으라니까요." 그러자 웃음소리가 그쳤다. 「그런 것쯤은 네 힘으로 조용히 시킬 수 있어. 발끈하지 말고 진지하게, 속으로 '조용히 하라'고 말해봐. 그래도 입 다물지 않는 목소리가 있으면 협박을 해. 예를 들면 '앞으로 당신 얘기엔 절대 귀 기울이지 않을 테야'라던가.」 "당신말고는 구별되는 목소리도 없는데 무슨 협박 따위가 통하겠어. 도대체 왜 자기들끼리 지내지 못하고 날 귀찮게 구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안됐지만, 그들이 저들끼리 대화할 수 있었으면 너한테 말을 걸지도 않았어.」 말이 끊어졌다. 조슈아는 눈을 감고 아무 소리도 없는 세계로 가보려 했다. 상상을 구체화하는 능력이 뛰어난지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만월이 떠오른 숲의 머리맡에 소리 내지 않는 동물들만이 머물고 있다. 아주 높은 곳이고, 아래로 머리털처럼 굽이굽이 흐르는 나뭇잎들이 보인다. 세 줄기 시내가 흘러서 계속으로 들어가고, 가을에는 붉은 잎이 흐르는 강이 되겠지. 물굽이 한 번 없이 은어처럼 흐르는 강……. 「그렇게 말상대 하나 없는 곳으로 가고 싶은 거야?」 조슈아는 눈을 떴다. 그는 가끔 자신의 상상을 공유하곤 한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뚜렷한 영상을 만들어낸 때면 어김없이 그도 보고 있는 것이다. "아니, 아냐. 친구에게 편지를 띄웠다고, 와 줄 거야." 그렇게 말했지만 조슈아도 확신은 없었다. 그러니까 길은 너무 멀고, 녀석은 너무 게을렀다. 아니, 그것보다는 역시 오래 만나지 못했던 탓일 것이다. 자신이 그를 기억하는 만큼 그도 자신을 기억해 줄지 확신이 없었다. 어느 정도 기대하고 있긴 했지만, 만일 아니라해도 탓할 자격은 없을 것이다. 떠난 건 자신이었으니까. 「또 자신감이 부족한 거군?」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더라면 조슈아도 코웃음을 쳤겠지만─할 리도 없지만─그만은 달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기에 조슈아는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지나치며, 또 그런 자신감을 가져도 하등 문제될 것 없는 조건도 갖췄다. 그러나 한 줌밖에 안 되는 대륙 최고의 부자들이 모인 블루 코럴 섬에서도, 손꼽히는 최상급 별장, 사교 모임에 나가지 않아도 끊임없이 화제에 오를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에 거침없는 괴짜로 이름난 '아르님 소공작'이 사람을 만날 때 '상대가 자신을 싫어할 것'이라는 전제를 두고 시작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조슈아는 그냥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하하하하……." 이렇게까지 방어적인 자신이 가끔은 우습기까지 했다. 언제부터였던가 생각해 보자면 모나 시드 학원에 갔을 때, 또는 그보다 전부터?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비취반지 성에 데려왔던 어느 귀족의 또래 남매들이 조슈아에게 얼굴을 찡그리며 '너 같은 애가 제일 싫어'라고 말하던 목소리조차 또렷이 기억하는 자신이 똑똑한 건지 소심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그가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예전에 이카본이 말없이 사라진 일이 있었는데, 난 그가 중요한 일을 하러 간 것을 알고 있었지.」 조슈아는 귀 기울이지 않는 체 하며 발치의 잔물결에만 시선을 주었다. 「결국 우린 긴 세월 서로를 보지 못하게 되고 말았지만, 그렇다 해도 난 그가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지 알지. 그도 알고 말이야. 기다린 세월쯤은 아무 것도 아닐 거야.」 조슈아는 양손을 든 채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착각만 아니라면 좋은 일이겠지. 하지만, 증명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친구를 믿는다면 걱정도 하지 않는 거야. 그 녀석이 나를 잊었을까, 기억하더라도 이미 시시한 옛 추억으로 여기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가 재회해 봤자 서로 어색할 따름이지.」 조슈아는 말없이 듣고 있다가 해변 쪽을 흘끗 돌아보더니 바위에서 일어나면 말했다. "그만 가죠. 켈스, 슬슬 사람들이 오네요." 5월 20일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소드-라-샤펠 축제'를 줄여 '샤펠 축제'라고 부르고, 본 명칭은 '페스타 델라 무지카(Feata della Musica)'라던가 하는 일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샤펠 축제의 개막은 15일부터이고, 전야제는 14일 밤부터라는 사실도 의미를 갖지 못했다. 4월 말부터 하이아칸 전역에서 몰려들기 시작한 사람들은 조그마한 블루 코럴 섬의 몇 안 되는 여관을 채우기 시작하여 곧 민가에서 다리라도 뻗고 누을 만한 쪽방들은 물론, 나중엔 비만 피하면 된다는 관점으로 지붕 달린 헛간들까지 모조리 동내버렸다. 그리하여 느긋하게 축제 직전에 도착한 사람들은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술통 속이 아니고서는 지붕 비슷한 것도 구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아주 먼 곳에서 오지 않는 한, 전야제만 밤세워 즐기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샤펠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전야제와 마지막날이고, 그 중간은 축제의 오랜 전통을 살림, 즉 일반인들에게는 별 인기 없는 행사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마지막 날 순서를 포기한다면 깔끔하게 하룻밤 놀다가 돌아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예 술통 속을 택했다. 그래서 이런 대화가 흔하게 오갔다. "분명 아침 일찍 내가 맡아놓은 통인데 무슨 잔말이 많아!" "비우고 갔으면 그만이지. 이제 와서 내가 이 통을 포기해야 될 까닭이 뭐요?" 샤펠 축제와 상관없이 이곳에 볼일이 있었던 사람들에게 이 상황은 한마디로 재앙이었다. 그리고 막시민이 하필 17일 오전에 블루 코럴 섬에 도착한 것은 결코 느긋해서가 아니었다. 최대한 서둘렀지만, 이 이상 빨리 올 수 없었던 것이다. 준비해야 할 각종 서류들은 왜 그리 많고, 교통편은 또 어찌나 번거롭던지. 관문 수속은 어째서 뒷돈 없이 진행이 안 되는 건지. 그 와중에 귀찮게 하는 관리들과 맞지 않는 물이 죽도록 뱃속을 뒤집어놔서 하이아칸에 들어설 즈음부터 막시민은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었다. 조슈아 이 자식이 아무 일도 없으면, 아니 그럴 리는 없으니 아무 것도 모르고 있으면 거꾸로 매달아서 머리부터 차근차근 땅에 묻어주리라. 데모닉이면 너구리 세 마리는 삶아먹은 것처럼 눈치가 빨라야지 자기한테 뭔 일이 닥쳤는지도 모르는 데모닉이 무슨 소용이야! 하지만 일단 맞닥뜨릴 때까진 멀쩡한 쪽이 좋을 텐데. 블루 코럴에 들어갔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긴 했다. 섬 전체가 노숙자의 천국인가. 라고 생각하다가 홧김에 걷어찬 통의 주인하고 작은 실랑이가 붙으면서 곧 상황을 알아차렸다. 하긴 그렇다. 축제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왠만큼 중요한 볼일이 있다 해도 소드-라-샤펠과 블루 코럴 섬 방문은 샤펠 축제 뒤로 미룰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미뤄도 좋은 용건만 닥칠 리 없다. 어쩔 수 없이 와야 했던 사람들이 있는 것이고, 막시민은 그들로부터 양지바른 긴 의자나 길가는 사람들에게 덜 걷어차일 수 있는 후미진 풀밭 등을 고르는 편이 좋다는 충고나 들으며 5년 동안 보지 못한 친구에 대해 악의를 부풀렸다. "무슨 얼어죽을 놈의 축제 나부랭이야!" 게다가 생각해 보니 그 친구녀석이야말로 이 축제에 사람들을 불러모은 원흉이 아닌가? 화만 내고 있다고 별 수가 날 리 없었다. 쉴 데가 없다는 핑계로 여독이고 뭐고 탐문부터 개시한 결과, 일단 아르님 가문의 별장을 찾아내어 이럭저럭 문지기에게 몇 가지를 물을 수 있게 되었다. "조슈아 도련님을 찾아오셨소? 지금은 안 계신데?" 문지기는 미심쩍은 눈빛이었지만 그건 켈티카의 귀족 집안 하인들이 그렇듯 막시민의 초라한─여행중에 더 초라해진─행색을 보고 평가를 낮추느라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사실을 말해야할지 감춰야할지 결정하지 못한 사람 특유의 표정을 했는데, 막시민은 금세 낌새를 챘다. "그럼 언제 돌아옵니까?" "글쎄……." "그리 멀리 간 것은 아닌가 보군요?" "그러니까……." 막시민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문지기의 표정을 뜯어보더니 갑자기 알았다는 듯 말했다. "됐습니다. 당신은 도련님의 행방을 전혀 모르는군요? 켈티카에서부터 힘들여 여기까지 왔는데 허탕을 치게 됐군요. 돌아가서 공작부인께 도련님의 행방이 묘연한데 별장에서는 사정을 아는 사람이 없더라고 전하면 되는 겁니까?" "잠깐, 공작부인이라고? 공작부인께서 당신을 보냈단 말이오?" 막시민은 코끝을 하늘로 향하게 했다. 즉, 턱을 쳐들었다. "오는 도중에 도적떼를 만나 마차를 빼앗기지만 않았더라도 조금 더 일찍 도착했을 텐데. 공작부인께서 몸이 편찮으신지라 도련님의 귀환을 바라셔서 전갈을 갖고 왔는데, 아저씨가 아무 것도 모르시니 그렇게 전할 밖에……." "잠깐, 전갈이라 했소? 정말로 갖고 있소?" 막시민은 품 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내보였다. 아르님 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미색 봉투가 틀림없었고, 봉랍에는 직인도 찍혀 있었다. 물론 막시민은 봉투를 건네주지 않고 다시 넣어 버렸다. 문지기는 마지막으로 막시민의 몰골과 막시민이 한 말을 저울질하는 듯 했지만 결국 책임지고 싶은 마음이 이겼다. 그는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브와주 부인께서 좀더 자세한 얘기를 해주실 거요." 상황은 예상대로였다. 별장 관리를 책임지고 있다는 브와주 부인은 조슈아가 이미 몇 달 전부터 별장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해 주었다. 다만 조슈아의 필적으로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적힌 편지만 한 통 받았을 뿐이라며 그 편지를 보여주었다. 막시민은 건성으로 편지를 훑어보고는 도로 돌려주었다. 브와주 부인은 무척 걱정스런 얼굴을 했지만 조슈아를 걱정하는 건지, 막시민이 조슈아의 일을 공작부인에게 고해바칠까봐 걱정하는 건지는 불확실했다. 아니, 그보다 막시민은 달리 이상항 공기를 감지했다. "도련님이 별장을 떠난 것이 정확히 언제쯤입니까?" "본래 드문드문 들어오시긴 했는데… 2월 중순경부터는 전혀 오시지 않았지요." "지금은 5월인데, 그 동안 도련님의 행방을 모르면서 본가(本家)에 고하지도 않았단 말입니까?" 브와주 부인은 막시민을 약간 방어적인 눈빛으로 쳐다봤다. "사실을 말슴드리자면, 저는 조슈아 도련님께서 이미 비취반지 성에 가계신 걸로 알았답니다." 막시민은 약간 뜨끔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무슨 근거로요?" "저희인들 도련님을 찾지 않았겠습니까? 우선 다니시던 학원을 수소문해 보니 이미 직접 자퇴 수속을 밟으신 것으로 되어 있고, 좀더 알아보다가 국경 관리로부터 아르님 가문의 문장이 찍힌 마차가 아노마라드로 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 분은 도련님 얼굴을 아는 사람이고, 마차 안에 계신 걸 분명히 봤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희한테 알리지 않았을 뿐 켈티카의 본가로 가신 것이겠거니 생각했습니다. 도련님은 본래 기분이 쉽게 변하는 분이라 그럴 수도 있다고 여긴 것이지요. 그런데 본가로 가신 것이 아니란 말씀을 들으니 저희도 앞이 캄캄해집니다." 막시민은 하소연 같기도 하고 떠보는 것 같기도 한 브와주 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머릿속으로 상황을 짜 맞춰 보았다. 브와주 부인이 한 이야기, 그녀의 예상대로 조슈아가 비취반지 성에 있는 것, 그 모두가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면 이곳까지 찾아온 의미는 없어져버린다. 할일이 없어졌으니 잘 됐다고 관광이나 하고 돌아간다? 그렇게 간단히 포기할 의심을 갖고 여기까지 쫓아올 까닭이 없지. 최초의 의심, 그것을 유지한다면 이곳에서 들은 정보와 자신이 본 상황이 일치하는 것 자체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상황이 맞아 들어가는 것조차도 의심할 필요가 있다. 아직은 판단을 내릴 때가 아니다. 그러니, 지금은 거짓말이다. "그런 정도만 갖고 도련님의 생사도 모르는 상황에서 안이하게 계셨단 말인가요? 어디, 공작부인께서 그 말씀을 듣고 뭐라 하시나 봅시다. 모르긴 해도 부인께서 책임을 피하긴 어려우실 겁니다." 브와주 부인은 눈에 띄게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그런… 제 잘못은 있지만 국경을 넘으신 이상 도련님께서 달리 가실 곳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안았고……." "그렇다면 본가에 사람을 보내어 도련님이 정말로 도착하셨는지 확인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중도에 사고라도 당하셨으면 어찌 되는 건가요? 그걸 알아볼 책임이 없다고 보십니까?" "그 말씀이 맞지만…….' 브와주 부인이 말꼬리를 흐릴 때 막시민은 또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이 브와주 부인이라는 사람은 별장의 책임자이니 만일 조슈아에게 나쁜 일이 생길 경우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그런데 사라진 조슈아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마땅히 조치한 것이 없지 않은가? 무엇 때문에 2월부터 지금까지 본가에 소식 하나 전하지 않고 혼자서 끙끙 앓았단 말인가? 설마 지금처럼 아르님 가문에서 사람을 보내어 조슈아의 행방을 붇는 상황을 생각도 안 했단 말인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숨긴다고 숨겨지는 일이 아닌걸 알 텐데 무슨 배짱으로 버틴 것이며, 그 몇 개월동안 책임 회피할 변명거리나 완벽하게 짜 놓을 것이지 이제 와서 막시민 앞에서 더듬거리는 까닭은 뭔가? 석연치 않다 막시민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알았습니다. 부인과 더 나눌 얘기도 없는 것 같으니 저는 개인적으로 좀더 도련님을 찾아본 뒤 본가로 돌아가 보고하도록 하죠." 브와주 부인은 막시민을 붙드는 기색도 아니었다. 뒤통수로 복잡 미묘한 눈길이 쏟아지는 것을 느끼며 막시민은 별장을 나왔다. 축제가 한창인 오후 거리는 작은 골목 하나에 이르기까지 사람 무리로 그득했다. 막시민은 사람들에 뒤섞여 이리저리 부딪치며 거리를 걸었다. 생각에 잠겨 걷느라 부딪친 사람들이 욕설을 퍼붓는 것도 무시했다. 다만 무시한 것이고, 듣지 못한 건 아니었다. 막시민은 워낙 오감이 뒤죽박죽으로 돌아가는 까닭에 하려고만 한다면 두세 가지 생각을 동시에 진행시키면서 주위의 소리를 다 듣고, 주위 풍경과 다가오는 사람을 인지하고, 심지어 간단한 대화도 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지금은 그 와중에 큼직한 빵 덩어리까지 하나 물어뜯고 있는 중이었다. 배낭 속에 들어 있던 묵은 빵이지만 개의치 않고 순식간에 절반 정도를 먹어치우며 안경에 붙은 날파리를 인지하고 다른 손으로 쳐 날린 다음 자신이 동북쪽으로 걷고 있다고 판단했다. 조슈아가 다니던 학원에 들러볼 것인가 말 것인가, 비가 오지 않으면 잔디밭에서 자는 것도 괜찮을까, 브와주 부인은 뭘 숨기고 있는 걸까, 축제랍시고 밤에도 씨끄러울 것이 분명하다, 몇 달 동안 가출 상태라는 조슈아 녀석은 어디서 뭘 먹고 지내는 걸까, 목이 마른데 저쪽 교차로에는 분수대가 있을까, 등등의 생각을 차례대로도 오니고 한꺼번에 떠올렸다가 한꺼번에 답을 내고는─학원에는 가볼 필요가 없다, 비가 올 것 같진 않다. 브와주 부인은 현재 비취반지 성에 있는 조슈아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 잘 때는 외곽으로 빠지자, 집 나간 조슈아를 먹여 살릴 곳은 한 군데밖에 없다─곧 발견한 분수대에 걸터앉아 물을 떠 마셨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 날씨를 보아하니 켈티카에서부터 걸치고 온 낡아빠진 코트는 곧 용도를 다할 성싶었다. 분수대 속에서는 초여름 태양이 소원을 비는 금화처럼 빛나고, 푸르고 흰 조각들은 하늘을 흉내내며 흘렀다. 이윽고 막시민은 안경을 물에 첨벙 담갔다가 코트 자락을 활용해 닦는 것으로 올 계절 코트의 마지막 임무를 마무리했다. 벗은 코트는 배낭끈에 대강 달아맸지만 어디든 헐값에 팔 수 있다면 좋겠다는 희망을 뇌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중에 물을 마실 사람은 아랑곳 않고 분수대에서 세수까지 해버린 막시민은 덕택에 나름대로 멀끔한 얼굴이 되어서 조슈아가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첫 번째 장소를 쑤셔보러 떠났다. 한 손에는 아궁이 쑤시는 막대기 대신 낡아빠진 바이올린 한 개를 쥐고서. "어서 아궁이 재 속에서 나와라, 이 빌어먹을 회색고양이야." 2. 페르소나의 오후 "당신이 바로 이카본이군요?" "난 그쪽이 누구인지 모르겠는데." "모르셔도 돼요. 알 수도 없고. 다만 난 오래 전부터 당신이 어떤 사람일지 정말로 궁금했답니다. 당신 친구가 당신의 미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줬거든요." "뭘 말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관심 없으니 얼른 장작더미에서 비켜 줘." "그래서 오늘도 리허설 장소가 바뀐 거군 그래?" "귀찮은 것도 정도껏이지, 베네벤토 양도 오늘만은 분명히 화를 낼걸." "이쯤 되면 농담이 아니라고, 파냐나 씨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야?" 불평을 하고 있는 조연들 사이로 두 명의 일꾼이 둘둘 말린 배경 천을 황급히 운반해 갔다. 의상 상자가 속속 도착해서 분장실로 보내지고, 배우들이 리허설 전에 간단히 요기를 할 음식 접시도 날라져 왔다. 갑작스레 빌린 연습실이라 손대야 할 곳 투성이였다. 한쪽에선 닫히지 않는 창문을 두드려 고치고 있었고, 마룻바닥에 사포질을 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주장하는 무용수도 있었다. 사방이 부산하지만 주연 배우들만은 아직이었다. 아드리아나 역인 뮤치아 베네벤토, 카밀로 역인 막스 카르디가 도착하기 전에 무대를 꾸며 놓으라는 지시에 일꾼들만 땀을 뻘뻘 흘렸다. 드디어 문 밖에 마차가 달려와 서는 소리가 들리고 뮤치아 베네벤토가 도착했다. 물론 조연 배우들의 예상대로 단단히 화난 얼굴이었다. 하이아칸 사람들이 최고로 생각하는 검고 숲 많은 머리를 세 단으로 틀어 올리고 한손에는 은색 실크 양산을 쥔 채 대뜸 극장주 파냐나를 찾아내어 소리를 질렀다. "이게 뭐예요! 리허설 때마다 길 잃은 어린애처럼 해매야 되다니, 내 꼴이 이게 뭐예요!" 입버릇이 '이게 뭐예요!'가 시작되었으므로 파냐나는 재빨리 '당신 말이 옳소'라는 표정을 했다. "일이 번거롭게 되어서 나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군. 알다시피 막스가 말이오.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해서……." "또 막스예요? 날마다 막스 얘기뿐이고 여배우는 안중에도 없군요. 그렇죠? 내가 이제 와서 아드리아나 역을 그만두면 아무리 막스 카르디라도 20일 공연은 절대 못해요!" "아, 알지. 알고말고. 당신 없이는 절대 '아쿠아리안'을 무대에 올릴 수가 없소. 아드리아나 역에는 당신이 적격이야. 당신처럼 멋있는 바다빛 눈동자를 갖고, 감정 연기도 훌륭한 최고의 배우를 또 어디에서 찾겠소?" "번드르르한 소리는 그만 늘어놓아요! 나 없이 풀비아를 데리고 어디 한 번 잘 해 보시지 그래요?" 풀비아는 뮤치아의 대역 배우로서 사실 뮤치아가 변덕을 부려 나오지 않는다 해도 20일 공연을 올리지 못할 까닭은 없었다. 물론 뮤치아가 좀더 훌륭한 배우이고 인기도 있지만, 이번 공연은 기획부터 연출까지 전적으로 막스 카르디가 좌우하는 것이라 사실 여배우는 기본만 해주면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그러나 한창 인기가 오르는 여배우인 뮤치아의 심기를 건드려서 나중에 있을 다른 공연들에 문제를 일으켜서야 좋을 일이 하나도 없었다. 파냐나는 스물 후반에 콜제타 극장을 인수하여 마흔 줄에 접어들도록 각종 공연 기획을 도맡아 온 노련한 흥행사였다. 공연이 있을 때든 없을 때든 인기 배우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 따윈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이 그의 원칙이었다. 다만, 그 일이 좀더 인기 있는 배우의 편의를 봐 주기 위한 것은 미사여구를 남발하는 것은 물론, 그녀를 위해 특별히 준비시킨 마조레 제과의 티라미스 케이크를 가져오게 하는 등 갖가지 수선을 다 떨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뮤치아의 마음이 완전히 풀린 것은 문제의 막스 카르디가 나타난 후였다. 카르디는 뮤치아처럼 소리를 지르며 입구로부터 걸어오지 않았다. 뮤치아와 극장주가 실랑이를 하는 사이 배경과 소품이 다 마련된 무대로, 갑자기 뛰어올라왔다. 2막, 카밀로가 텅 빈 홀에서 홀로 춤추는 아드리아나를 보고 2층 객석에 숨어서 하모니카 반주를 하는 장면의 곡이 느닷없이 흐르자 뮤치아는 저절로 무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보란 듯 하모니카를 연주하고 있다가 뮤치아를 흘끔 보며 계면쩍게 웃는 카르디와 눈이 마주쳤다. 뮤치아의 얼굴에 피식, 미소가 떠올랐다. "나쁜 사람 같으니." 의상도 갈아입지 않고, 발끝으로 구두만 벗어 던지고는 무대 위로 올라간 뮤치아가 춤을 추기 시작하자, 겨우 한시름 놓은 극장주가 손수건을 꺼내 땀을 훔쳤다. 겨우 시작했으니 어설프게 멈췄다가는 다시 조금 전의 논쟁을 되풀이해야 할 것 같아, 그는 넋 놓고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자아, 자아! 조연들 어서 준비하지 않고 뭘 하나! 무대 아래 램프들 다 밝혀!" 두 주연 배우가 제멋대로 리허설에 돌입한 가운데 아드리아나의 춤에서 이어지는 2막 피날레를 당장 만드느라 무대 주위로 십여 명의 사람들이 소품을 들고 정신 없이 뛰어다녔다. 겨우 램프를 다 밝히고 하모니카의 소리를 이을 관현악단도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정확히 하모니카 연주가 끝나 바이올린의 선율을 이어받았다. 그 다음은 아드리아나 역의 뮤치아가 눈을 가리고 춤을 추어야 하는 장면인데, 수건에 구멍을 살짝 뚫어 놨는데도 연습할 때마다 잘 되지 않던 부분이었다. 뮤치아가 눈을 가리자마자 객석 세트에 앉아 있던 카르디가 준비 동작도 없이 한 번에 도약해서 무대에 착지했다. 군무를 출 배우들이 양쪽 입구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합창으로 이어질 짧은 독창이 시작됐다. 늘 그렇듯 힘들이지 않고 흘러나오는 청아한 목소리에 잠깐 귀를 내맡긴 사이, 바이올린의 연주를 이어받은 관현악단이 한꺼번에 호응하고, 배우들은 이미 자리를 잡아 여성, 그리고 혼성 합창단으로 단숨에 이어갔다. 그 가운데에서도 합창이 고조되다가 주제부로 이어지는 부분마다 카르디의 목소리는 단연 돋보였다. 막스 카르디의 나이가 몇 살이고, 출신이 어떻게 되는지, 어쩌다가 배우가 된 것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카르디를 발굴하여 데뷔시킨 극장주 파냐나가 흥미를 끌기 위해 일부러 숨기고 있는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지만 극장주는 자신도 모른다고 딱 잡아뗐다. 하지만 첫 공연에서 단번에 주연 자리를 맡아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파냐나는 뭔가 알고 있으리란 추측이 꽤 신빙성 있게 나돌았다. 문제는 눈가와 코 언저리, 뺨 일부까지 가리는 정교한 가면이었다. 막스 카르디가 이 가면을 벗은 모습을 봤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공연중이든, 연습중이든, 심지어 식사하거나 쉬고 있을 때도 벗지 않았다. 이 가면은 누군가가 슬쩍 당겨서 벗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얼굴 윤곽에 정교하게 밀착된 것으로 재질조차 무엇인지 불명확했다. 가면이 아니라 얼굴에 무언가를 칠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막스 카르디의 정체는 다른 배우들 중 한 명일 거라고 생각했다. 대단한 실력으로 볼 때 무명은 아닐 테고, 해서 카르디와 함께 공연하지 않은 인기 배우들의 뒷조사를 하는 것이 한동안 유행처럼 번진 일도 있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가면이 얼굴에 밀착된 까닭에 실제 얼굴을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다는 데 착안해서 카르디의 얼굴을 예상하며 그렸는데, 유명 배우는커녕 무명 배우들 중에도 닮은 사람이 없어 많은 사람들을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 나이를 짐작하는 것도 간단치 않았다. 가면 때문에 표정 연기가 사실상 불가능한데도 어김없이 사람들을 사로잡는 연기력, 가창력, 악기들의 연주실력 모두가 한두 해 갈고 닦았다고 볼 수 없기에 스물 다섯 이상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었지만, 때로 변성이 안 된 소년처럼 흘러나오는 고음의 목소리가 사람들을 아리송하게 했다. 물론 후리후리한 키와 몸매만 봐도 변성이 안 되었을 나이는 결코 아니었다. 최저로 잡는 사람들도 열 아홉 미만으로는 보지 않았다. 특히 막스 카르디가 자신이 출연한 작품의 각본을 직접 쓰고 작사와 작곡의 상당 부분을 맡으며, 심지어 연출에까지 관여한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로는 아무리 젊어보여도 실제로는 스물 후반, 그 이하로는 어립없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그와 동시에 카스트라토(castrato)가 아니냐는 의견도 사생활이 사려져 있다는 점 덕택에 조금씩 지지자를 확보해 가는 중이었다. 예전에 한 공연이 끝나고 관객에게 인사하는 자리에서 특등석 관객 하나가 벌떡 일어나 '도대체 왜 가면을 벗지 않는 겁니까'라고 따져 물은 일이 있었다. 그 때 카르디는 미소지으며 이렇게 대꾸했다. "사실은 얼굴에 끔찍한 화상이 있어서입니다. 제가 가면을 벗으면 다들 기절할 겁니다." 이 발언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말할 나위 없이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진위 여부를 놓고 두고두고 논란을 벌였지만, 카르디 본인은 맡은 배역 때문에 가면을 쓴 다른 배우에게 '당신도 화상이냐'는 등의 말을 농담 삼아 던지는 등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일관했다. "아, 또 틀렸어!" 눈을 가린 수건을 벗어 내던진 뮤치아가 짜증이 나서 발을 구르자 음악과 춤이 모두 멈췄다. 춤을 추는 배우들과 정확히 동선을 맞춰 휩쓸려 들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매번 애매하게 틀리는 것이다. 뮤치아도 나름대로 소신 있는 배우인지라 연출과는 다른 연기에 만족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신경질이 난 뮤치아는 무대 맞은편에 선 카르디에게 화살을 돌렸다. "누군들 눈을 가리고 이걸 맞출 수 있겠어? 이 부분 안무, 막스 당신이 했죠? 이걸 내가 몇 번 연습했는지 알아요? 풀비아도 이 부분은 절대 못해!" "내가 했지만……." 카르디가 모자를 벗으며 뮤치아에게 다가가다가 멈춰 서더니 두 발짝 물러섰다. 조금 전 뮤치아가 방향을 잘못 잡기 시작한 자리였다. 워낙 자주 틀리는 곳이라 자기 배역을 하면서도 곁눈으로 다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데." "아, 그래요? 그럼 당신이 증명해봐요!" 뮤치아는 바닥에서 수건을 주워 카르디에게 건냈다. 카르디는 받아든 수건을 아무렇게나 눈가에 맸다. "이렇게……." 직접 안무한 부분이라 해도 자기 배역이 아니었으므로 연습 같은 걸 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카르디의 방향감각은 완벽했다. 입 속으로 박자를 세면서 방향을 두 번 바꾸더니 정확히 가야 할 위치에 가 서는 것이 아닌가. 뮤치아가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해봐요. 맨 처음부터." 카르디는 대답 없이 아드리아나가 눈을 가리고 춤추기 시작하는 위치로 가 서더니 악단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바이올린 반주만." 단선율 반주가 나오는 가운데 세 번째 회전, 그리고 춤이 시작됐다. 동선은 물론이고 동작도 틀림이 없었다.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막스 카르디는 뮤치아가 해야 할 아드리아나의 춤을 늘 하던 것처럼 간단히 해내고 정확히 군무단과 만나야 하는 위치에 가서 딱 멈췄다. "……." 뮤치아는 한동안 말문이 막혀 있었으나 잠시 후 카르디가 옆으로 다가서더니 갑자기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았다. "아……?" 눈을 가리고 있던 카르디가 흠칫하는 순간 뮤치아는 수건을 향해 손을 뻗어 표면을 더듬었다. 그리고 표정이 굳어지며 한 발 물러났다. 자기 손으로 수건을 풀어버린 카르디가 당황한 눈으로 뮤치아를 쳐다보았다. "뭘 한 겁니까?" "막스, 당신 조금 전에 앞이 아예 안 보이는 상태였군요. 내가 손을 잡는 것도 몰랐고, 게다가 수건에 구멍 뚫어 놓은 부분이 눈하고 맞지 않았어. 나는 시야가 반쯤 가려지는 수건을 매고도 못하는 걸. 당신은 전혀 안 보여도 다 할 수 있다 그거로군요. 됐어요. 그게 전부인가요. 당신이 하고 싶은 말?" "……." 뮤치아는 수치심과 분노가 뒤섞인 눈동자로 카르디를 쏘아봤다. 주위 사람들도 뮤치아가 어떤 식으로 성미를 터뜨릴지 몰라 잠시 숨을 죽였다. 저절로 카르디 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카르디는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사과하거나, 웃음으로 무마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내게 감탄해라'라며 오만한 표정을 지은 것도 아니었다. 고작 그깟 일로 화를 내냐며 맞서려는 얼굴도 아니었다. 사람마다 고치려 애쓰는데도 자꾸만 되풀이하고 마는 실수가 있고, 그런 경우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화가 나는 법이다. 사람들은 카르디가 그처럼 민감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았다. 가면 때문에 정확히 알아보기 힘들었던 얼굴이었다. "그 부분, 삭제하지요. 내가 말도 안 되는 짓을 했군요.' 카르디는 뮤치아로부터 등을 돌려 무대 아래로 뛰어내렸다. 극장주 파냐나 곁을 성큼성큼 지나치면서 짧게 말했다. "안무, 고쳐올 테니 네 시 정각에 다시 합시다." 카르디가 연습실 밖으로 사라지고 1분이 흘렸을까 싶을 무렵 무대 위에 우뚝 서 있던 뮤치아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안 돼. 절대로!" 파냐나는 목을 빼고 돌아봤다. "뭐가 안 돼?" "고치다니, 있을 수 없어!" 뮤치아는 마구 손을 내저어 조연들을 물러서게 하더니 조금 전 카르디가 아드리아나의 춤을 시작하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사람들이 얼떨떨해 하는 사이 그녀는 춤 추기 시작했고,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단지 우르르 비켜섰다. 눈을가리지 않자 뮤치아의 춤도 틀림이 없었다. 마음 속으로 센 박자와 딱 떨어지게 맺어지자, 분을 참을 수 없는 듯 다시 한 번 무대 바닥을 발꿈치로 굴렀다. "막스에게 분명히 전해요. 이 부분 안무를 고친다면 절대로 무대에 오르지 않겠다고요! 네가 네 시까지 반드시 완성해 놓을 테니까, 바꿀 생각일랑 아예 하질 말라고 말해요!" 연습이 시작되자 무대 아래에 내려와 있던 조연 중 하나가 결의 사람에게 속삭였다. "정말 질렸다, 질렸어. 인간인지 뭔지 알 수 없는 막스 카르디도, 그걸 쫓아가겠다고 하는 뮤치아 베네벤토도, 사람인 게 맞다면 둘 다 미친 거야, 필시." 17일 밤, 극장으로 돌아간 파냐나는 낮에 배달된 편지들을 뜯어서 읽다가 낮게 신음성을 토했다. "으음……." 그 직후, 심부름꾼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말했다. "나리, 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요." 파냐나는 직감적으로 무언가 알아차리고는 물었다. "네가 본 일이 없는 자더냐?" "예. 스물도 안 되어 보이는 젊은이었습니다요. 나리를 뵙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며 몇 시간째 기다리는 중이고요." 심부름꾼은 파냐나의 반응을 봐서 손님이 가라고 해도 들은 체도 않고 눌러앉아 저녁식사까지 얻어먹은 일에 대해서 말하든지 말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모시고 와라." 잠시 후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정말로 십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눈매가 예리하긴 한데 한 달은 빨지 않은 것처럼 후줄근하고 초라한 차림새라 파냐나는 자기 짐작이 틀렸나 조금 헷갈렸다. 소년은 인사도 없이, 앉으라고 권하지도 않았는데 의자를 당겨 앉더니 대뜸 이름을 말했다. "막시민 라프크네입니다. 아르님 공작가에서 왔습니다. 파냐나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했다. "아르님… 공작가라면 으음, 아노마라드요? 허어, 먼 곳에서 왔군. 헌데 무슨 일이오?" 막시민은 턱을 조금 젖히더니 불손한 눈빛을 보냈다. "다 알고 왔으니 번거롭게 말 돌리지 맙시다." "다 알고 오다니, 뭘?" 파냐나도 노련한 사람이라 소년의 도발에 쉽게 발끈하지 않고 의아한 표정만을 보였다. 여간한 능구렁이가 아니리란 것쯤은 짐작하고 온지라 막시민은 초조해하지 않고 입가를 실룩여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 보였다. "공작 부인께서 아드님을 찾으십니다." "그런데?" "당장 모시고 가야겠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찾으면 가는 게 순리지. 그런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오?" 막시민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으며 말했다. "어디 있습니까?" "누가?" "이거 봐요, 파냐나 씨. 번거롭게 하지 말자고 일찌감치 말했을 텐데요." 파냐나도 의자에 기댔다. "영문을 모르니 뭘 돌리고 말고 하잔 건지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소. 소공작을 찾고 싶으면 별장으로 갈 일이지 극장에 와서 왠 행패요?" "말이 빨리 통하지 않는 분이시군요. 넘겨짚기인지, 다 알고 하는 말인지, 구별이 안됩니까? 아르님 가문이 어떤 곳인지 잘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아르님 가문이 어떤 곳인지 잘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아르님 가문이 어떤 곳인지 막시민이 알 리 없었다. 대충 말하다 보니 마치 범죄 조작의 뒷배 정도로 만들어버린 것 같았지만 알 게 뭐냐고 생각해버리고 마는 막시민이었다. "으음……." 파냐나는 얼른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막시민의 허풍이 조금은 먹혀든 모양이었다. 물론 상대가 대답을 궁리할 때까지 기다리란 법은 없었다. 상대가 조금 망설일 때는 바로 몰아붙이는 것이 나은 수였다. "이제 사정이 좀 이해되십니까? 저야 뭐, 소박한 고용인에 불과하지만 아시다시피 아노마라드, 특히 켈티카 인간들은 자기들이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알잖습니까? 그 꼴 많이 봐 봤자 먹은 거 없이 비위만 상할 뿐이죠. 일이 빨리 처리되기만 한다면 이곳이 연관됐다는 얘기는 생략해 드릴까 싶기도 한데. 어떻습니까?" 막시민이 하는 얘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당장 판단할 방법은 없었다. 당장 뒷조사를 해보고 싶어도 아노마라드, 그것도 아르님 공작가가 있는 켈티카는 소식이 오가는 데만도 몇 달이 걸린다. 게다가 정말로 아르님 공작 가문에서 보낸 자라면 그쪽 비위를 건드려서 좋을 일은 없었다. 그 때문에 시치미를 떼고 소년을 쫓아버리지 못하고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파냐나의 생각은 이랬다. 어차피 지은 죄가 있는 처지니, 영영 숨겨질 거라고 생각할 순 없다. 본래는 소공작이 말을 잘 해 주리라 기대해 봤지만, 어설프게 아르님 가문 쪽에 먼저 얘기가 들어가서는 본전 챙기기 힘들어진다. 그러니 만에 하나 밝혀진다고 할 때, 저쪽 제안대로 콜제티 극장이 연관된 얘기를 빼 준다면 그로서는 가장 좋다. 물론 저쪽이 대강 냄새만 맡고 비밀을 들춰보려고 큰소리 치는 다른 극장의 첩자 따위가 아니라면 말이다. "이봐요, 젊은이. 난 말요, 귀족 어르신들의 비위를 거스르는 일은 털끝만큼도 하기 싫은 사람이오. 그게 아노마라드의 공작 가문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고 말이오. 당신도 귀족 아래에서 이라니 알겠지만, 죄가 있고 없고를 떠나 귀족들 눈에 잘못 들면 오죽 더러운 꼴을 당하게 되는지 잘 알지 않소? 그들이 잘못이 있다 하면 없는 잘못도 있는 것이고, 내가 그 댁 도련님의 그림자도 본 일이 없다 해도 그들이 내가 숨겼다 하면 숨긴 것이오. 그런 까닭에 당신이 내게 와서 그런 걸 물을 때부터 나는 더럭 겁이 났소이다. 자, 내가 어찌하면 좋겠소? 모른다고 하면 숨긴다고 다그칠 테고, 안다고 하면 이제부터 돌려보낼 사람들 찾아내어야 하니 남감해지오. 그러니, 우리 이럽시다." 막시민은 미간을 찌푸렸다. 상대가 말로 눙치고 어르려는 수작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일단은 들어봐야 했다. "말해 보시죠.' "내게 그 도련님이라는 분이 알아볼 만한 편지나 표지 같은 것을 하나 주시오. 일단 의심을 받았으니 나도 이제 어쩔 도리 없이 그 도련님이란 분을 찾아다녀야 되게 생겼소. 만일 내가 먼저 그 도련님이란 분을 찾으면 그걸 보이고 돌아가시도록 잘 말씀드리리다. 이렇게 내가 수고하는 대신, 아까 말한 대로 우리 극장 이름이 공작께 들어가지 않도록 아량을 베풀어주시면 좋겠구려. 그런 세도가에 한 번 잘못 찍히면 사실 여부를 떠나 여간 피해를 보는 게 아니라서 말이지. 젊은이도 내 난처한 입장을 이해해 주리라 믿소이다." "……." 막시민은 내심 상당하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저 자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양쪽 모두의 논리를 피할 길을 잘도 찾아낸 것이다. 도련님이고 뭐고 그런 사람 모른다고 계속 우겨댔다면 막시민이 제시한 좋은 조건을 놓치게 됐을 거고, 고분고분 알겠다고 했다면 죄를 인정한 꼴이니 약한 입장이 되는 것은 물론, 비밀을 지키는 것으로 얻어온 이득을 송두리째 날렸을 것이다. 그러니 저 정도의 대안을 찾아낸 것은 실로 용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저 말을 들은 결과, 한 가지 사실을 확실해졌다. 저 극장주가 처음 말한 것처럼 조슈아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 말이다. 말로 하지 않아도 상대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화술이 바로 저런 것이었다. 물론 일이 틀어졌을 때 잡아떼기도 좋고 말이다. 저쪽에서 협상하고 싶은 속내를 드러냈으니 이쪽에서는 대환영하는 모습을 보여서 아예 넘어오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섰다. 어찌됐든, 이 자의 협조 없이 막시민 혼자서 조슈아의 행방을 찾아낼 방법은 없는 것이다. "아아. 역시, 보통 분이 아니란 건 짐작했지만 확실히 다르시군요. 뭐, 하고 싶으신 말을 대략 짐작하겠습니다. 편지니 표지니 그런 것까지 필요할 것 같지도 않군요. 대신 조슈아 도련님께 제 생김새를 설명해 드리십쇼. 그럼 이만. 내일 다시 찾아뵐까요." 자리에서 일어난 막시민은 에의 없는 녀석답게 형식적으로 꾸벅 절을 하고 나가버렸다. 혼자 남은 파냐나는 곧장 벨을 울려 심부름꾼을 불러들였다. "지금 나간 저 친구가 정말로 아르님 가문 사람인지 좀 알아봐. 별장에 가보고, 또 예전에 그 댁 따님이 하이아칸에서 머물 때 별장 일을 돌보던 계집애 있지? 좀 수소문해서 별장 쪽 얘길 들어봐. 그 댁 측근 중에 저런 젊은이가 있는지, 그리고 저 친구가 혼자 온 건지 다른 일행이 있는지도 조사해봐." 심부름꾼이 나간 뒤 파냐나는 깍지낀 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공작 댁 도련님을 영영 숨겨 데리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그가 막시민에게 협상할 뜻을 비친 것은 20일 공연의 성사가 그가 원하는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시민의 태도를 돌이켜 보자 문득 웃음이 났다. 나이 차이가 두 배는 되는 어른을 어린애 다루듯 하려는 녀석의 대담함이 건방지기도 했지만, 일견 호감을 주는 면도 있었다. "어린 녀석이 상당하단 말이야." 그런데 잠시 후 파냐나는 이상한 사실을 눈치챘다. 그 시건방진 태도가 밉게 보이지 않는 까닭은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막시민이라는 소년의 그 태도, 어디선가 많이 보던 것 같지 않은가? 그 즈음, 그는 막시민의 이름과 짐 속에서 비죽 튀어나와 있던 바이올린을 기억해 내고 무릎을 치며 실소했다. "아하, 이제 알겠군 그래." 물론 막시민은 이미 막스 카르디의 존재와 정체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 의 손에 들어온 초대장 덕택이다. 블루 코럴 섬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카르디의 공연이 취소 되었는가 알아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포스터는 곳곳에 붙어 있고, 소문으로도 그런 얘기는 들려오지 않았다. 카르디는 분명 20일 공연에 나온다는 것이다. 막스 카르디, 그러니까 정확히 말해 가출소년 조슈아가 소속되어 있는 극장을 찾은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태도를 보아하니 극장주는 조슈아의 행방을 알고 있을 게 뻔하고, 아직까지는 그 자가 보호하고 있으리란 확신도 생겼다. 이쯤에서 조슈아가 안전하다고 믿어버리는 것이 속 편한 결론이겠지만, 막시민은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럼 도대체, 몇 달 전에 비취반지 성에 나타난 조슈아는 뭐란 말인가? 그 조슈아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매사에 대담한 막시민도 등이 서늘한 기분을 누르기 힘들었다. 그 자는 정말로 조슈아와 같았다. 외모와 말투, 버릇, 기억까지도 그가 아는 그대로였던 것이다. 물론 떨어져 지낸 지 오래되었기에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도 있지만, 할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 또한 상대방이 조슈아라는 것을 눈곱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변장을 한다고 해서 함께 식사하고 잠드는 가족들까지 며칠이고 속일 수 있을까. 도플갱어(Doppelganger)라고 하는, 어떤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막시민도 들은 일이 있었다. 워낙 잡다한 설이 많아 한 마디로 정의하긴 어렵지만, 그 유령인지 괴물인지 모를 놈이 출몰한다는 건 흔히 그 사람이 죽게 될 전조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물론 자신과 똑같은 모습과 인격을 가진 자를 보고 진짜 쪽에서 놀라서 죽어버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막시민은 현실적인 성격이어서 풍문으로 떠도는 이야기들은 쉽게 믿지 않았다. 봤다는 사람이 많은 유령 따위에 대해서도 애매한 관념만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대륙에 필멸의 땅(Mortal Land)이라는 곳이 존재하는 한 유령이니, 도플갱어니 하는 그런 것들도 아주 허무맹랑한 얘기는 아니리란 생각이었다. 고대에 존재한 어느 왕국이 멸망한 흔적이라는 필멸의 땅에서는 고대 왕국의 유령들이 출몰하는데, 그들이 살아 있는 것은 생쥐 한 마리에 이르기까지 죽이기 때문에 감히 여행자가 접근하지 못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이아칸 왕국의 북쪽으로는 용병 국가 레코르다블이 있다. 레코르다블의 북부가 이미 사막이고, 그 북쪽으로 대륙의 3분의 1을 차지하며 펼쳐진 황무지가 필멸의 땅이다. 켈티카로부터 각종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고 몇 달이나 되는 시간을 써가며 이곳까지 온 막시민이니 그 정도 거리가 가까운 곳으로 생각되진 않았다. 하지만 어떤 인간과 똑같은 얼굴을 한 인간, 그런 것이 배회할 만한 곳이라면 그곳뿐이 아닐까. 막시민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결론 안 나는 공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 가짜가 어째서 조슈아와 그토록 똑같은가에 대해서는 진짜 조슈아의 안전이 확인된 뒤에 생각해도 충분할 것이다. 게다가 또 하나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곳의 막스 카르디는 가면을 쓴다. 그 쪽이 오히려 가짜로 대신하기 쉽지 않을까? 어느 쪽이 가짜이고 어느 쪽이 진짜인지 아직 확신할 근거는 없으니까. 비취반지 성에서 본 조슈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건 그의 직감일 뿐이다. 그러나 그 직감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딸그닥, 하고 문 걸쇠 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극장 뒷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밖으로 나왔다.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좀 전에 저녁을 얻어먹겠다고 수선을 떨면서 극장 안을 오가는 사람들을 눈여겨 보아 뒀던 것이다. 가는 체 하다가 되돌아와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심부름꾼으로 보이는 남자는 주위를 둘러본 뒤 큰 거리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막시민은 조금 기다렸다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뒤따라가기 시작했다. 3. 평화로운 일상이 꼬이기까지 "용케도 들어왔군요. 하지만 환영받을 생각일랑 아예 접어요. 당신은 침입자이고 불청객이고 이방인이니까." "당신 말이 다 맞아요. 하지만 한 가지를 빠뜨렸군요. 우리는 본래 한 뿌리에서 갈라진 형제라는 것" "이미 다 잊은 이야기를 대단한 것인 양 말하는 태도가 우스워요. 그럼 이건 어떤가요? 우린 당신들의 위기를 방치한 배반자들이라는 것." "그러면 하나 더 말하면 되지요. 우리와 당신들의 자손은 이후 함께 살아가게 되리란 것." 한가한 오후였다. 적어도 미랭게트 의상실에서는, 미랭게트 선생 본인이 샤펠 축제를 구경하기 위해 20일 당일 휴무를 선언해 버렸기에 아무도 나오지 않은 의상실에는 리체 혼자뿐이었다. 오늘, 막스 카르디의 '아쿠아리안' 공연에는 미랭게트 선생도 초대권을 받아 그 공연을 보러 갔다. 사실 오늘 나올 의상 중 대부분이 리체가 직접 재단하고 바느질하고 자수를 놓은 것들이지만 리체는 공연에 가지 않았다. 작업 중에 죽도록 봤는데 뭘 새삼 보러가겠느냐 얘기는 핑계고, 입장권 두 장을 팔아 마련한 비상금이야말로 요점이다. 재봉사 언니들은 다들 감탄한(또는 어이없어하는) 얼굴들 이었다. 하지만 리체가 팔아준 입장권 덕택에 공연을 보러 가게 된 밀라르와 또 한 사람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으니 모두가 행복한 결론이라 해도 무리는 없었다. 시간외수당도 나오지 않는 추가 근무를 해서 선생에게 점수를 따겠다. 따위의 생각을 할 리체가 아니다. 게다가 오늘 광장을 비롯한 큰 거리는 막바지 축제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뤘을 테고, 리체는 들뜬 사람들로 번잡한 거리를 쏘다니는 것을 꽤 좋아했다. 하지만 오늘만은 전부터 계획한 일을 실행하려고 마음먹었기에 축제 재미의 만끽은 내년으로 미룰 작정을 했다. 오전 중에는 혼자 한가하게 차도 끓여 마시고 예전에 만들어 둔 옷도 뒤적이고 하며 놀았지만, 오후가 되자 드디어 계획 실행에 들어갔다. 의상실에는 실수로 추가 주문됐거나 고객의 변덕 따위로 남은 옷감, 단추, 실, 그리고 재단 후 남은 자투리 천들을 모아 놓는 작은 창고가 있었다. 이곳에 쌓이게 된 옷감과 부재료들에는 일관성이 전혀 없는 까닭에 자주 정리해서 본 창고로 보내는 수고가 필요했지만 재봉사들은 물론 미랭게트 신생조차도 귀찮은 나머지 일부러 잊어버린 체하며 지냈다. 얼마간 방치하자 그곳에는 종류를 셀 수 없는 잡다한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이게 됐다. 다들 조만간 한 번 정리해야 된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하려드는 사람은 없었다. 리체는 예전에 살짝 들어가 어떻게 돼 있는지 살펴봤다. 역시, 몇 가지 없어진들 눈치챌 사람은 절대 없을 정도로 뒤죽박죽 된 창고, 다시 말해 보물 창고다. "역시, 우리 의상실은 너무 돈이 많은 모양이라니까." 너무 묵어서 쓸 수 없게 되어버린 재료들이 많은 걸 보면서 리체는 입을 비죽거렸다. 썩은 사과도 자기 창고에 쌓여 있어야 마음이 편한가보다고 생각하면서, 명색이 재봉사라면 연습삼아 재단도 해보고 그래야 되는데, 재봉사들이 개인적으로 쓰려 하면 자투리 천 한 조각도 아까워하는 미랭게트 선생이었다. 천을 넉넉히 써도 좋은 때는 오직 주문 받은 옷을 만들 때뿐이었다. 그래놓고도 재봉사들이 저절로 솜씨가 좋아지길 바라니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특히 비단이나 자개 단추처럼 비싼 재료는 쌓아 놓고도 절대 주지 않았다. 그동안 치사한 꼴을 몇 번이나 당해온 터라, 리체는 자기 쪽에서도 적당히 챙길 거 챙기며 살기로 일찌감치 마음먹었다. 전부터 구상해 둔 몇 가지 옷에 써볼 재료들을 슬쩍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워낙 일당도 싸니까 알아서 손해를 메우는 수밖에 없잖아?" 제멋대로 합리화하며 재료들을 신나게 골랐다. 옻칠이 된 단추도, 비스듬하게 잘라 써먹기 불편한 자투리 비단도, 주문서를 보여줘야만 사오는 금사와 은사도, 요령 좋게 조금씩만 챙겨 넣었다. 그런 다음 창고에 쌓인 물건들을 실컷 구경했다. 다시 말해 나중에 필요하면 더 가져올 요량으로 자세히 봐 뒀다. 이윽고 구경도 끝내고 창고 문을 잠그고 나니 굉장한 보람이 느껴졌다. 미랭게트 의상실에서 일한 이래 오늘이 가장 괜찮은 날이었던 것 같았다. "비단이 종류별로 몇 조각씩은 다 있었어. 몇 개 집어다가 인형옷이나 만들까?" 리체에겐 인형이 없었다. 감히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비싼 것이거니와, 사실 관심도 없었다. 방금 한 생각은 인형을 갖고 있는 귀족 계집애들에게 팔아먹으면 어떨까 착안한 것이었다. 어쨌든 그 작정을 하고 창고 문을 다시 열어 조각 천을 한 뭉치 챙겨서 보자기로 쌌다. 그리고 천으로 된 가방에 집어넣었다. 이제 보물을 집에 갖다둔 다음 심심하면 축제 구경을 하거나, 아니면 당장 재단을 해보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누군가 의상실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그것도 무척 급하게. "어이, 문 좀 열어봐요! 아무도 없어요?" "……." 반사적으로 입구로 가려던 리체는 갑자기 멈춰 섰다. 오늘 의상실에 나온 것을 미랭게트 선생이나 다른 재봉사들이 알아봤자 절대로 재미없다. 그들도 리체가, 다들 놀러 가는 날 빈 의상실에 나와 친절하게 밀린 주문이라도 처리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 리가 없었다. 혹시라도 없어진 게 없나 쓰레기통까지 뒤지고 남을 텐데. 리체는 눈만 크게 뜬 채 대답해야 할지. 모른 체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저 불청객, 아니 방문객은 거의 문을 부수려 하잖아? "대답 좀 해봐요! 정말로 아무도 없는 거요? 아주 중요한 일이란 말요!" 저쯤 되면 이웃에서 쫓아와 의상실이 휴무라고 알려줘야 될 것 같았지만, 불행히도 이웃들은 자기 의무를 망각한 채 다들 축제 거리에 나가고 없었다. 아니, 휴무라는 말은 의상실 입구에도 써 붙여 놨는데, 저 사람은 오늘 같은 날 당직 직원이라도 있을 걸로 기대했단 말인가? 리체는 혼자 발끈해서 속으로 지껄였다. 미쳤니? 무급 휴가에 당직 따윌 설 리가 없잖아! 방문객은 끈질기게 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점점 마음이 약해진 리체는 재봉사가 아니라 멋모르는 심부름꾼인 체 해서 저 자를 쫓아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문을 잡아당기자 맞은편 문고리를 잡고 있던 사람이 거의 쓰러지다시피 안으로 들어왔다. 리체는 정말로 말하려 했다. 자신은 엊그제 고용된 심부름꾼 소녀로서 재봉은 전혀 할 줄 모르고, 재봉사들이 어디에 갔는지도 전혀 모르고……. "정말로 다행입니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포기할 뻔했는데! 얼른 저와 같이 가십시다! 어서요!" "저기요, 저는……." "얘기는 가면서 하죠. 지금 한시가 바빠요!" "잠깐만요, 전……." "얼른요!" "잠깐만!" 리체가 소리를 지르자 겨우 상대가 말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봤다. 방문객은 리체보다 조금 나이가 많을까 싶은 젊은 남자로서 심부름꾼 이상의 일을 할 것 같진 않은 모습이었다. 리체는 허리에 손까지 얹고 화난 눈으로 상대를 쏘아봤다. "누구 맘대로 오라, 가라, 난리에요! 오늘은 의상실 쉬는 날이니까 난 일 할 의무가 전혀 없단 말이에요! 털끝만큼도, 실오라기만큼도, 없어! 당신이 미랭게트 선생님이라고 해도 오늘 날 일하게 하진 못해"! 조금 전 세운 계획과는 아무 상관없는 항변이 돼버렸다. 사실 리체는 천성적으로 거짓말을 잘 못했다. 조금만 생각 없이 말하면 바로 진실이 튀어 나오는 것이다. 조금만 발끈하면 소리도 잘 질렀다. 그러자 방문자는 놀랄 만큼 고분고분해지더니 물었다. "재봉사 맞으시죠? 오늘 당직 근무 중이신 거 아닌가요?" "당직 따위가 있을 리 없잖아요!" "그럼 여기서 뭘 하고 계신 건지……." "알 거 없어요!" 갑자기 남자의 목소리가 도로 높아졌다. "알 거 있습니다! 지금 당장 콜제티 극장으로 가주십시오. 제발요! 제발 같이 가주시죠!" 콜게티 극장이라면 오늘 막스 카르디의 공연이 열리는 바로 그곳이고, 이곳 재봉사들도 여럿 가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리체의 머리를 퍼뜩 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뭐 잘못됐어요? 혹시… 의상이?" 리체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상대가 반색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바로 그거에요! 지금 카르디 씨가 2막 초입에서 입어야 하는 의상에 문제가 생겼단 말입니다! 하의뿐이고, 상의가 없어요! 아무데도! 창고며 분장실을 모조리 뒤집어엎었는데도!" 리체는 덩달아 흥분해서 소리쳤다. "2막이라면, 그 진주색 공단? 그게 없긴 왜 없어요! 내가 분명히 만들어서 포장한 기억까지 나는데! 받았을 때 그런 것을 확인해보지 않고 뭘 하는 거예요!" 쓸데없는 말을 해버리고 말았음을 깨달은 건 말을 내뱉은 직후였다. 상대는 반색을 했다. "앗, 그 옷을 직접 만든 분이시군요! 살았다! 시작하기 전에 대충 비슷하게라도 만들지 않으면 난리 납니다! 얼른요! 사례는 후하게 한다고 극장주께서 직접 말씀하셨다구요!" '사례' 라는 말이 드디어 '무임금에는 무노동' 으로 무장한 리체에게 약간의 감명을 주었다. "음… 시간이 얼마나 있죠?" "1막 시작까지 두 시간 정도밖엔…, 그러니 어서 극장으로……." 리체는 어이가 없어 퍽 웃었다. "도대체 극장에 가서 뭘 할 건데요? 옷본도 옷감도 없는 데서 날더러 어쩌라고? 그럴 것 같으면 지금쯤 그 극장에 여기 재봉사만 다섯 명쯤은 가 있을 텐데 거기서 찾지 뭘 하러 여기까지 쫓아와요? 자, 자, 만들어도 여기서 만들 테니까 얼른 들어와서, 그러니까… 응, 저기 앉아 있어요!" 리체는 손을 뻗어 대기인용 의자를 가리켰다. 그리고 획 뒤돌아 옷본을 가지러 가다가 다시 돌아보며 덧붙였다. "돌아다닐 생각 말고 거기 가만히 있어야 돼요!"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잠시 후 순식간에 재료들을 꺼내 온 리체가 은사 자수 장식으로 가득한 웃옷 한 벌을 두 시간만에 만들어내기 위해 바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손놀림을 보여줬기에, 다른 구경거리가 필요없었다. 막시민은 솔직히 막스 카르디의 공연인가 뭔가가 이 정도로 인기 있을 줄 몰랐다. 술통 속에서 자고 있던 자들이 설마 이 공연만 보러 왔겠나 싶었다. 상대가 친구다 보니 현실감 없게 느껴젔던 까닭도 있었다. 조슈아가 예전에 편지에 대강 써 보내긴 했지만, 반쯤은 허풍이 아닐까 생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조슈아가 엉뚱한 소리는 곧잘 해도 허풍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란 걸 알면서도 그랬다. 그런 까닭에 당일 극장 앞에 모인 인파를 보고서야 그 편지가 심지어 점잖게 겸양을 떨며 씌어진 것이었단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편지 내용도 헛소리 같았는데, 실제가 더 허황되잖아!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입장권은 있지만, 이 끝이 보이지 않는 입장 줄 뒤에 섰다가는 막스 카르디의 얼굴을 구경하는 건 고사하고 사람에 파묻혀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될 것이 뻔했다. 어떻게든 먼저 극장에 들어가야 했기에 막시민은 줄은 포기하고 극장안으로 다가가 일전에 봐 뒀던 뒷문부터 시작해서 한바퀴 빙 돌며 조사했다. 하지만 날이 날인지라 저쪽에서도 신경을 쓴 것인지 열고 들어갈 만한 곳은 없었다. 다시 멀리를 굴렸다. 이제 곧 입장이 시작된다. 공연 중에는 분명히 도중에 나가거나 들어가야 되는 사람들이 생길 거다. 관객도 있겠지만, 그보다 는 무대나 소품을 담당하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그런 사람들을 적당히 붙잡아 자신을 극장주 파냐나 앞으로 데려가게 만들어야 했다. 오늘이 오기 전에 조슈아를 찾아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파냐나는 의도적으로 막시민을 따돌렸다. 처음 만났던 날 밤, 조슈아가 머무르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해변 빌라까지 심부름꾼을 뒤따라가는 데 성공 했지만 그 날 밤 조슈아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 후로는 거처를 옮기게 한 것인지 줄곧 비어 있었다. 첫 번째 계획이 실패하자 막시민은 다시 파냐나를 만나려 했지만, 지난 번과는 달리 그는 방문 신청 자체를 막아버렸다. 출입구에서부터 들여보내 주지 않았던 것이다. 밖에서 기다려 봤지만, 파냐나는 붙박이장으로 변한 것처럼 극장 밖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자신의 안목을 확신하는 막시민은 만약 나왔다면 못 알아봤을 리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가 왜 이렇게 막시민을 피할까? 어쩌면 파냐나는 막시민이 한 말에서 힌트를 얻어 조슈아를 슬쩍 떠보고 나서 막시민을 만나선 안 될 종류의 사람으로 단정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하지만 조슈아가 그런 농간을 눈치 못 채고 멍청하게 당하고 있을 녀석은 아니다. 여태껏 가만히 있는 걸 보면 녀석은 아무 얘기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뭘 알았다면 당장에 자기 쪽에서 막시민을 찾으려 했을 테니까. 그렇게 이틀 동안 극장 주위를 맴돌던 중, 막시민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극장 주위를, 특히 밤에 배회하는 사람이 자기말고도 몇 명 더 있었던 것이다. 두세 명, 때로는 한 명이 교대로 극장 근처를 맴도는데 시시각각 다른 사람이었지만 묘하게도 행동 방식이 비슷했다. 그런 공통점을 눈치챈 것은 막시민 자신이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자들의 존재를 깨달았을 때, 막시민은 마음이 급해졌다. 무언가를 노리는 자들이 있었다. 똑같은 사람이 둘이라면, 줄여서 하나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 그러나 얼굴을 다 외워 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그들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부터 입장이 시작됐다. 예상되다시피 처음에는 그럭저럭 질서가 지켜졌지만 새치기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어느새 서로 밀치고 당기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저 틈에 끼어 있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때 막시민이 지키고 서 있던 뒷문 쪽으로 접근해 오는 두 사람이 눈에 띄었다. 소녀 하나와 젊은이 하나, 소녀 쪽은 한쪽 어깨에 가방을 메고 팔에는 무대 의상으로 보이는 하얀 웃옷을 걸고… 오, 그렇지, 기다던 자들이다. "너무 일찍 온거 아니에요?" "분장실에서 기다리시면 될 겁니다." "내가 뭐하러 기다려요? 옷만 두고 가면 되지." 젊은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아, 하하하…. 오신 김에 다른 의상도 좀 손질해 주시고……. 빠진 게 없는지 점검도……." 아직 '후한 사례'를 받지 못한 리체의 대답은 가차없었다. "민폐도 정도껏이지, 남의 휴일을 후불로 새내고 있으면 부끄러운 줄을 알라고요. 분장사들한테 일당 안 줘요? 일단 받은 사람들한테 일을 시키셔야죠." "아. 뭐, 그게……. 실은 조금 전에 본 바느질 솜씨에 너무 감명을 받아서." '후불'이 특히 강조되었지만 남자는 못 알아들은 체했다. 그 때, 앞에서 누군가가 남자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돌아보자 흐트러진 갈색 머리에 계절에 맞지도 않는 낡아빠진 코트를 걸친 소년이 씨익 웃어보였다. "이봐요. 여기가 파냐나 아저씨네 집인가 보죠? 거, 집 한 번 무지, 무지, 무지하게 크네. 가족이 백 명쯤은 되는 건가?" 남자는 무슨 소리냐는 것처럼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내렸다. "집은 무슨 집이오? 여긴 보다시피 극장이만 말요. 극작, 시골에서 왔오?" 막시민은 멍청한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그럼. 응, 파냐나 아저씨가 여기 안 사신단 말인가요?" "잠깐, 파냐나? 그 분은 극장 주인이신데? 파냐나씨와 아는 사이요?" "아저씨라니까요. 여기로 가면 된다고 트리비아 아주머니가 분명히 그랬는데." "트리비아 아주머니? 그 사람은 또 누구요?" "트리비아 아주머니는, 응. 실라브리아 아주머니의 동생이거든요. 실라브리아 아주머니는 아르메리다 아주머니의 동생이고, 아르메리다 아주머니는 콘소메 아저씨의 부인이고, 콘소메 아저씨는 우리 고모 아저씨인데……." 남자는 정리하려 했다. "잠깐, 그러면 콘소메 아저씨가 당신의 고모부이면 아르메리다 아주머니가 당신의 고모 아니오? 그러면 실… 그 뭐랬지?" "실라브리아 아주머니." "그, 그래. 실라브리아 아주머니도 당신의 고모일거 아니오?" "그런데요." "그러면 그 전에… 뭐랬지?" "트리비아 아주머니요." "그 트리비아 아주머니도 고모 아니오?" "그러네요." "그러면 당신 고모가 여기로 보낸 거라고 말하면 되지, 왜 그… 아르 뭐라는 아주머니는……." "아르메리다 아주머니요." "하여간에, 그 사람들이 왜 쏟아져 나온 거요?" "왜냐면, 아르메리다 아주머니와 실라브리아 아주머니와 트리비아 아주머니가 나를 키워 줬거든요? 그런데 아르메리다 아주머니가 키우던 염소가 그만 늙어서 죽었거든요? 그러니까 아르메리다 아주머니는 우유를 먹지 못하게 된 거잖아요? 그런데 실라브리아 아주머니네는 암소가 두 마리거든요? 그래서 실라브리아 아주머니네서 우유를 가져다 먹으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실라브리아 아주머니의 남편인 에피타이져 아저씨는 우유를 주고 싶어하지 않았거든요? 왜냐면 에피타이져 아저씨는 남은 우유를 이웃마을 친구인 디저트 아저씨네 가게에 팔고 있었거든요? 디저트 아저씨는 우유로 버터를 만들어서 이웃 마을에 팔아서 다섯 명이나 되는 딸을 키우고 있는데 그 딸들의 이름은 치아미네, 사브로마네, 델라미네……." "자, 잠깐만!" "왜요?" 얼굴이 빨개진 남자가 소리쳤다. "그럼 사람들이 다 무슨 상관이야! 파냐나 씨를 만나러 왔댔지? 그러면 얼른 들어가서 만나면 되잖아! 그 뭐라는 딸들……." "딸들은 치아미네, 사브로미네……." "그… 사람들 얘긴 파냐나 씨한테나 해! 어서 들어가!" 그런데 곁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리체가 끼어 들었다. "딸이 다섯이랬는데 나머지 두 딸 이름은 뭐죠?" 남자가 얼빠진 표정으로 리체를 돌아봤다. "재봉사 아가씨는 얼른 분장실로나 가봐요!" "그래도 얘기가 끝이 안 났잖아요. 나머지 두 딸은……." 리체가 더 말하기 전에 나자는 뒷문 자물쇠를 따고 막시민을 재빨리 밀어 넣었다. 리체도 따라 들어갔지만 어느새 두 사람은 파냐나 씨의 사무실 쪽으로 서둘러 가고 있는 중이었다. 리체는 킥킥 웃더니 그쪽으로 목을 빼고 소리쳤다. "나머지 두 딸 이른이 뭔지 말해 주고 가요!" 극장주 파냐나는 지난번과는 현저히 다른 태도로 막시민을 대했다. 즉, 귀찮은 훼방꾼 취급했다. 저 자가 막시민의 뒤를 캐본 결과 아르님 가문에서 보낸 게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의미다. 하지만 막시민의 태도도 그에 못지 않았다. 전에는 그나마 정당한 사절인 체 했지만, 이제는 사무실에 쳐들어온 빚쟁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막 나가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날 피했다는 내 주장은 전적으로 착각이고, 당신은 아르님 가문 도련님을 열심히 찾았지만 성과는 없었고, 그 와중에 내가 밝힌 신분은 미심쩍고, 대략 그렇다 이거요?" "뭐, 꼭 그렇다는 말은 아니고… 이렇게 엉뚱한 소리로 내 심부름꾼을 속여서 들어오면 곤란하다는 얘기지." "핵심도 아닌 얘기 갖고 논쟁할 필요는 못 느끼겠군. 당신과 더 얘기해봤자 소득 없을 것 같고, 공연장이 어딘지나 좀 가르쳐 주시면 좋겠는데, 일은 직접 처리할 테니까." "공연장이라니?" "막스 카르디의 공연 있죠?" 파냐나는 고개를 흔들며 거만하게 말했다. "그 공연이 얼마짜린데 공짜로 들어가려 드나? 이미 입장권 판매도 끝났으니 미안하지만 당신을 들여보내 줄 순 없겠소이다." 막시민은 품속에서 입장권 두 장을 꺼내어 흔들어 보였다. "극장 안쪽에서도 물론 들어가는 문이 있을 테죠?" 그제야 파냐나는 조금 당황한 빛을 보였다. "들어가려면 앞문으로 갔어야지, 이리로 들어와서 뭘 어쩌겠단 거요? 또 공연 도중에는 사람을 들여보낼 수 없고……." "나, 그래요? 뭐, 천천히 가도 되고. 1막 끝날 즈음 만나서 얘기나 좀 하면 될 테니까." "아니. 이것 봐요! 만날 수 없다니까 그러네!" 막시민은 입장권을 도로 주머니에 갈무리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만날 수 없다고요? 내가 누굴 만나러 가는 줄 알고 못 만난다고 예언까지 하시는지?" 파냐나가 말문이 막힌 것은 물론이었다. 막시민은 '까짓 공연장 입구쯤이야 직접 찾지'라고 하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사무실에서 나와버렸다. 그리고 그 때, 자기 앞을 지나가는 한 사람을 보았다. 극장 앞을 배회하던 그 자였다. 1막이 끝날 때까지 리체는 재미없게 기다렸다. 분장실에는 지키는 사람 한 명 없었고, 그녀를 데려온 심부름꾼 남자는 이상한 남자얘와 사라지더니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급하다고 해서 서둘러 만든 옷은 테이블 위에 얹어 놨지만 그냥 두고 가버리려니 좀 꺼림칙했다. 한 번 없어졌던 옷이었다. 만약 도로 없어져 버린다면 자신의 '후한 사례'는 어디서 받아 챙긴단 말인가. 옷이 다시 사라질 거란 생각은 괴상했지만, 나름대로 갖다 댈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공연을 망치려고 작정을 하고, 의상 가운데 하나를 빼돌렸을 수도 있다. 인기가 많은 사람은 싫어하는 사람도 많기 마련이니까. 게다가 지금 이곳 분장사라든가, 심부름꾼이라든가 하여간 누구든 있어야 되지만 죄다 사라진 걸 보니 공연을 보겠다고 가버린 게 틀림없는데, 날마다 이 꼴이 아니리란 보장이 없었다. 그렇다고 옷을 팔에 걸고 사람을 찾겠답시고 어두컴컴한 극장 안을 우왕좌왕 돌아다닐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2막 시작에 맞춰 옷을 건네주지 못하면 그것도 역시 '후한 사례'를 날려버리는 일이 될 게 뻔했다. 그렇게 오래오래 기다리고 있는 동안, 드디어 1막이 끝난 듯했다. 리체는 음악 같은 건 전혀 몰랐지만, 사람들이 보내는 박수 갈채 소리가 끝났단 뜻이란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쪽으로 사람들이 올 텐데, 배우들이 오는 걸까? 갑자기 조금 긴장한 리체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일부러 숨을 생각은 없었지만 조금 구석진 곳으로 갔다. 그와 동시에 문이 살짝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리체는 입을 열려 하다가 저도 모르게 멈추었다. 그는 낯선 남자─어차피 이곳 사람이 모두가 낯설 테지만─였는데 한 눈에 봐도 직원 따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자는 조금 전의 리체와 똑같이 익숙하지 못한 표정과 움직임으로 이 별나게 화려한 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나마 리체는 의상실에서 일하기라도 하지만, 상대는 무미건조한 인생을 살아온 남자였는지 반짝거리는 방 안의 장식과 의상들을 보고 제풀에 당황한 기가 역력했다. 더구나 상대방은 리체를 못 보았다. 장롱을 놓고 남은 방 모서리의 그늘진 벽 틈에 선 것, 곳곳에 산더미처럼 걸린 휘황찬란한 무대 의상들, 그리고 사방에 박혀 그 모두를 몇 배로 증폭시키는 거울들이 눈길을 빼앗은 탓이었다. 그리고 리체는 그 자가 술처럼 보이는 고급스런 병 세 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걸 보았다. 선물일까? 그 자는 빠르게 나가버렸다. 잠깐 망설이다가 도로 앞으로 나왔을 즈음, 밖에서 떠들석한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문이 열렸다. 다른 사람들은 문밖에 남은 것인지 들어온 사람은 한 명이었다. 이번에는 배우임에 틀림없었다. "저기, 저는." 리체가 입을 열자, 그 사람은 돌아왔다. 젊은 남자였는데, 얼굴에는 얇은 가면을 쓰고……." "에?" 리체는 순간적으로 놀라 말을 삼켜버렸다. 먼저 깨달은 것은 상대가 리체 자신이 만든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걸로 보아 상대는 사람들이 그렇게 보고 싶어하는 막스 카르디가 틀림없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갑자기 마주치니 놀라는 건 당연하지만 그런데 그것보다 더 놀라운건……. "어떻게?" 카르디도 똑같이 놀란 목소리를 내고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듯 말을 멈췄다. 둘은 서로의 눈을 빤히 보며 몇 초 동안 얼어 있었고, 조금 후 동시에 다시 소리쳤다. "당신은!" "잠깐만!" 조금 더 침묵이 흘렀다. 둘 다 결정적인 말을 먼저 내뱉지 못하고 어물거리는 중이었다. 그러는 동안 리체의 머릿속에는 점점 더 엄청난 깨달음들이 속속 자리잡았다. 그 사람은 이 사람, 둘은 같은 사람…. 그러니까 자신은, 카르디의 진짜 얼굴을 본 첫 번째 사람이 된 거였다. 심지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다! 다음 순간, 리체는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하하……." "……." 막간에 주어진 시간은 짧았다. 조금 쉬고, 빨리 옷을 갈아입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게다가 오늘의 공연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대성황을 이뤘다. 아쉽지만 마지막 공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런 사실이 준 만족감도 평소보다 조금 더 컸다. 이제 끝을 내고, 집으로 돌아가면 깨끗이 잊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만약 공연장에서 환호하고 있는 사람들이 카르디의 정체를 알아 차린다면? 그때부터 저들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은 꿈이 되어버릴 것이다. 겨우 웃음을 추스린 리체가 말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치지 못했다면 영영 몰랐을 텐데. 그런데 수염을 붙이고, 훗훗… 돌아다닐 생각 같은 걸 하다니… 당신도 어지간한 사람이잖아요? '조'가 진짜 이름? 아니면……." 줄여 불러 '조', 그러니까 조슈아는 가면을 쓴 채로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내 계획을 다 부쉈군요, 당신이 온 건……." 조슈아는 테이블을 흘끗 보더니 술 세 병보다 먼저 옷을 마련하고는 말했다. "저 옷이군요. 없어졌다고 하더니, 미랭게트 의상실로 달려가 버리고 말았군." "저기, 잠깐요. 그렇게 실망한 얼굴을 할 필요는 없잖아요? 좀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드라마틱하게 정체를 밝힐 계획이었는데, 나 같은 애가 먼저 보게 되어 망쳤다는 거예요?" 조슈아는 가면을 벗지 않은 채 리체에게 손짓했다. "시간이 별로 없자만, 오해는 풀죠." 리체가 테이블 앞 의자에 앉자 조슈아는 자기 얼굴을 가리켰다. "내가 왜 가면을 쓴다고 생각해요?" "그거야 신비롭게 보이려고 그러겠죠." 리체가 너무 망설임 없이 대꾸하자 조슈아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배우가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는 건 치명적인 단점이 돼요. 내가 그러고도 인기를 얻은 거야말로 기적 말고 뭣도 아니에요. 다시 붇죠. 내가 가면을 쓴 까닭이 짐작 갑니까?" "그럼 정말로 얼굴을 감추려고 썼단 말이에요?" 리체는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과연 조슈아의 표정은 가면 때문에 쉽사리 알아채기 힘들었다. "카르디의 가면 안에는 내가 늘 사람들에게 감추고 싶어한 얼굴이 있죠. 몽플레이네 양, 당신이 알다시피 화상 같은 건 없지만… 만일 사람들이 그 얼굴을 알게 된다면 나는 카르디를 창조한 걸 평생 후회하게 되겠죠." 리체는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글서 조슈아의 얼굴을 더 빤히 바라봤다. 그러다가 표정이 없는 상대와 얘기하는 것이 묘한 두려움을 준다는 걸 깨달았다. 리체의 기분을 눈치챈 것처럼 조슈아는 자기 얼굴의 가면을 한 번 어루만졌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에게 처음으로 말하는 거지만, 카르디는 오늘 죽게 되죠." 리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무슨 말이에요?" "끝이란 거죠. 오늘 이후로 더 이상 가면도 카르디도 없을 겁니다." 리체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방금 들은 말을 되씹다가 그 뜻을 깨닫고 퍼뜩 놀랐다. "은퇴해요? 세상에, 왜요? 아직 돈도 많이 벌고…….' 그러자 가면 속에서 조슈아가 미소짓는 것이 느껴졌다. "카르디는 진짜가 아니니까 그렇죠. 내가 '조'로 살기 싫더라도 어차피 돌아가야 되는 거예요. 지금 당신이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성공적으로 카르디를 지우고 먼 곳의 집으로 떠났을 텐데. 그러면 사람들은 얼마간 기억하다가, 서서히 잊어버려 줬을 텐데." "……." 리체는 혼란스런 표정으로 조슈아를 쳐다봤다. 조슈아는 조금 힘주어 말했다. "당신만 잊어주면 나도 카르디를 잊고 살 수 있게 될 테죠. 부탁합니다. 날 잊어버려 줘요." 리체는 의자를 밀며 일어났다. "나한테 강요하지 말아요. 단신, 조금 무섭군요. 알 듯 말 듯 야릇한 얘기만 하고, 가면 안 쓴 당신도 분명 멀쩡했잖아요? 뭐가 문제란 거죠? 인기가 있고 돈도 많이 버는데 굳이 그만둘 까닭이 뭐예요? 이렇게 그만둘 거면 가짜 놀이는 왜 했어요? 사람들이 카르디와 조를 동시에 알게 된다고 해서 뭐가 그렇게 잘못되죠? 지금까지 숨겨온 것이야말로 오히려 힘든 일인 거고, 드러내는 건 아주 간단하잖아요? 그냥 인기 누리면서 잘 살면 되지, 집에 돌아가는 건 또 뭐예요?" 조슈아는 리체의 말을 다 듣고 있다가 시선을 조금 떨어뜨렸다. 이렇게 반응하니 이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좋아요. 당신이 금방 이해할 수 있게 말하죠. 난 무척 엄격한 집안 출신이고, 가문을 물려받아야 되기 때문에 배우 같은 것을 했다는 게 알려지면 아주 곤란해집니다. 나뿐 아니라 부모님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래서 가짜의 모습으로 이 생활을 즐겼지만, 이제는 돌아갈 때가 됐죠.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기를 바라는 겁니다. 이제 이해 가나요?" "아아, 이제 이해 가요.' 그렇게 말했지만 리체는 조금 화가 난 얼굴이었다. "일해서 돈 벌 필요가 없는 귀한 집안 출신인가 보군요? 정말 좋겠네요. 남들이 평생 부러워하는 걸 벌써 갖고 있으면서 허무한 표정 따위 짓고, 아주 싫지만, 이제 됐어요. 귀찮게 굴지 않을 테니까. 내가 당신 얼굴을 봤다한들 누가 믿기나 할까요? 어차피 당신 집안도, 이름도 제대로 모르잖아요? 내가 당신 얼굴을 그려서 벽보라도 붙일까봐 그래요? 그런 일 없을 테니 안심하세요." 조슈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리체는 돌아서서 나가려다가 무언가 생각한 듯 발을 멈추고 말했다. "당신이 줬던 입장권, 다 다른 사람 줘버렸어요. 당신도 알다시피 본래 카르디 싫어하니까. 하지만 당신 얼굴 지켜주는 대가로 마지막 공연쯤은 봐도 되겠죠?" 조슈아는 말없이 거울 앞 서랍을 열고 입장권을 하나 꺼내어 건내주었다. 리체가 나가며 문을 쾅 닫았을 때, 귓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거짓말하지 마, 넌 누구든 알아주길 기다렸잖아, 왜 놀란 체하지? 네가 두 명이면 사람들이 너를 이해하는 걸 어려워할까? 아니야, 네가 한 명이어도, 심지어 절반으로 줄어든다 해도 아무도 널 알지 못해. 넌 감추고 싶어한 적이 없어. 늘 드러내고 싶어하지. 좀더 솔직해지고 싶다면 울면서 소리쳐봐. 나를 봐주세요! 나를 봐주세요!」 조슈아는 머리를 싸쥐며 나직이 말했다. "아아, 제발 조용히 해." 그러자 목소리는 끊어졌다. 4. 공격 "내세에 벌래로 태어난다 해도 이 죄를 씻을 수는 없으리라 믿고 있다." 자신이 왜 공연을 보겠다고 했는지 리체 스스로도 몰랐다. 팔아버린 입장권에 미련이 남아서? 비싼 공연을 공짜로 볼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마지막이라니까 희소성이 느껴져서? 어느 쪽도 아닌 듯했다. 공연을 보면서 그 까닭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할 즈음 드디어 2막이 올랐다. 리체의 자리는 맨 앞줄이었다. 조슈아가 준 표는 특등석이었던 것이다. 다만 이미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직원 하나가 보조 의자를 가져가 주었다. 처음에는 막스 카르디, 아니 조가 나오지 않았다. 조연들이 우르르 나와 주고받는 왁자지껄한 유머가 지나가고, 요정 같은 옷을 차려 입은 아가씨들의 군무가 시작됐다. 리체는 1막도 안 봤거니와 줄거리도 전혀 몰랐기에 그저 멍하니 앞만 바라봤다. 음악에 대한 조예도 없었고, 춤의 기교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자연스럽게 흐르고, 또 흘러가는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간 보다보니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배우들은 모두 '카밀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모두 다른 사람을 말하듯 의견이 달았다. 마을 아가씨 두 사람이 '잘생긴 사서 카밀로'에 대해 이야기했고, 성의 경비병은 '태자 전하와도 친구 사이라는 젊은 귀족 카밀로'에 대해 언급했다. 악사 한 사람은 카밀로가 훌륭한 가수라고 했고, 가난한 꼬마들은 '도둑 카밀로'의 활약에 대해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그들은 각자 자기가 아는 카밀로에 대해 얘기하다가 같은 사람을 알고 있나 의아해했지만, 곧 이름과 외모가 비슷할 뿐 다른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신분이 너무 달랐으니까. 그리고 드디어 젊은 귀족의 모습을 한 카밀로, 즉 막스 카르디가 등장했다. 리체가 급히 만든 바로 그 옷을 입고서, 시종을 거느리고 술집에 들어간 드는 주인에게 '아드리아나'라는 아가씨의 소식을 물었다. "아드리아나? 그 불쌍한 아이 말입니까? 도둑놈 같은 테논이 벌써 잔금 다 치르고 데려갔습니다요. 내일 아침 일찍 배가 떠나니까 아마 부둣가 근처의 창고에 가둬 놨을 겝니다." 술집에서 나오자 무대가 어두워지며 밤거리의 모습이 되었다. '귀족 카밀로'는 시종을 보내버리고 혼자 약속 장소로 갔다. 그곳에는 이미 십여 명의 거지와 도적떼가 모여 있었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다가 노래가 시작됐다. 이봐, 기다리라고! 밤이 오기 전에 움직이는 건 위험해! 밤이 오고 나면 우리 세상이 되는데, 이봐, 서두르지마! 어두운 골목도 꿰뚫어 보는 올빼미처럼 밝은 눈 처마와 지붕을 타고 달리는 고양이처럼 잽싼 발 이봐, 생각해 보라고! 너희가 잠자는 동안 벌어질 일들을! 세상의 반, 세상의 반은 밤이라는 걸, 이봐, 잊지 말라고! 화려한 겉옷을 벗어 던지고 검은 가죽 갑옷 차림이 된 '카밀로'는 그들 틈으로 달려가더니, 높다랗게 쌓아 놓은 상자 더미의 꼭대기로 단숨에 올라가 섰다. 사람들이 그의 모습을 발견하고 외쳤다. "카밀로!" 노래의 곡조가 바뀌었다. 바리톤 중창 사이로 음역이 높은 '카밀로'의 독창이 솟아올랐다. 물병자리 인간(Aquarian) 누가 그의 심장을 봤냐? 별을 향해 쏜 화살이 그의 심장을 꿰뚫어버렸어, 그는 나아갈 거야. 캄캄한 하늘 가운데 가장 작은 별의 땅 동전 하나 없는 빈 손 구두도 벗어 내버린 맨발 마지막 모자도 주어버렸어, 아무 것도 필요 없지, 그를 살게 하는 건 하나뿐. 한밤에도 타오르는 별 세상 사람 모두에게 감로수를 내리는 별 물병자리 인간 너는 그의 말을 들었어? 별로 가는 다리를 놨다고 그가 우릴 부르고 있어. 물병자리 인간 내 안의 혁명자 물병자리 인간 내 안의 혁명자 리체에겐 노래의 수준을 평가할 만한 귀가 없었다. 아직 줄거리도 다 파악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 순간만은 꼼짝없이 앉은자리에 못박혀버렸다. 그제야 사람들이 저 가면을 쓴 남자의 무엇에 홀렸는지 조금 알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본래는 귀족들이 거의 드나들지 않는 싸구려 코미디 극장, 그런 곳에서 오늘 저 위의 박스석들이 다 채운 것은 모두 잘나셨다는 귀족님들이었다. 아마 입장료도 무척 올려 받았을 테지. 귀족들은 이런 대중 공연을 잘 보러 오지 않는다. 괜찮은 음악가가 있으면 자기 집으로 불러다 놓고 손님 몇 명을 초청해서 차를 마시며 고상하게 즐긴다. 조금 규모가 큰 연극 같은 것이라 해도 문제가 안 된다. 저택이나 별장에 웬만한 극장 규모의 무대를 갖춰 놓은 귀족은 꽤 많다. 물론 객석은 터무니없이 적지만. 리체는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워낙 관심이 없다 보니 헷갈리지만 막스 카르디가 하이아칸에 데뷔한 지 1년은 넘고, 3년은 안 된다고 기억했다. 그전에 지금처럼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입장권을 사고, 암표상들이 진을 치고, 귀족들까지 보러 오는 쇼가 있었던가? 그 전에도 배우는 많았고, 음악회니 연극이니 공연한 것도 많았지만 모두 볼 사람은 보고 말 사람은 마는 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특별히 이런 공연들을 좋아하는 일부를 제외하면, 보통은 무얼 보아도 그게 그것이고 굳이 누군가가 나오는 걸 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물론 공연의 내용은 대부분 형편없었다. 완성된 스토리 같은 것도 없이 그저 웃기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었고, 중간에 관객들이 난입하여 난장판이 되거나, 대사를 잊어버린 배우들이 아무렇게나 진행시키다가 끝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배우나 가수들의 수준이란 것도 일반인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고, 그거야 그들도 다른 일로 생계를 꾸리며 취미로 푼돈이나 더 벌까 하고 나온 거니 당연한 결과였다. 다시 말해 막스 카르디의 데뷔와 함께 모두에게 화제가 되는 인기 공연, 반드시 그가 나오는 걸 봐야 하는 인기 배우, 귀족들이나 주문해 가는 의상실에서 제작할 정도로 공들인 의상과 소품, 자기 집에서 나와 사람들과 섞여─물론 박스석이지만─공연을 보는 귀족들, 그 모든 것이 생긴 것이다. 카르디의 모든 것은 이런 무대에 흔히 서던 배우와 궤가 달랐다. 저 노래는 국왕의 앞에 선다 한들 부끄러울 실력이 아니었다. 리체는 궁금해졌다. 저런 사람이 왜 이런 극장 무대를 서고 있을까? 아니, 처음부터 왜 이런 일을 시작했을까? 저런 실력이 있다면 귀족들의 집을 돌아다니는 쪽이 일도 쉽고 수입도 넉넉히 보장된다. 왜 가면까지 쓰고, 어렵고 복잡한 일에 뛰어든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하는 순간, 리체는 자신의 착각을 깨닫고 어이가 없어 픽 웃고는 불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참, 그래, 당신, 취미 생활이랬지." 막시민은 공연장을 찾는 체 하며 남자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처음엔 한 명이었으나 조금 후, 다른 구석에 또 다른 자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다가 본의 아니게 공연장으로 들어가는 문도 발견됐다. 발견하고 생각하니 저 자들이 공연장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문을 조금 열고 공연장 내부를 들여다봤다. 이 문은 무대 왼쪽의 구석진 곳에 있어서 다른 관객들 눈에 띄지 않고 살짝 들어갈 수 있을 듯. 일단 안으로 들어간 막시민은 문에 기대어 서서 주위를 죽 둘러봤다. 그리고 무대 오른쪽, 자신이 들어온 것과 비슷한 쪽문으로 한 남자가 들어오는 것을 목격했다. 세 번째로 또다시 익숙한 얼굴이었다. 사람들의 눈은 모두 무대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막시민처럼 쪽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주시하는 관객은 아무도 없었다. 그 자는 무대 아래로 다가오더니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허리를 굽히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즈음 무대가 어두워져 막시민은 남자의 움직임을 놓치고 말았다. 혼자 서 있는 여배우 하나만 빛을 받고 있었으므로 공연장 안은 완전히 어둠에 휩싸였다. 그 때, 리체는 다른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고 있긴 했지만 그 여배우가 유명한 뮤치아 베네벤토라는 것도 몰랐다. 이 공연에 대해 정말로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었던 것이다. 무대는 공연이 열리는 홀처럼 꾸며졌고, 한쪽에는 세트의 일부인 텅 빈 계단식 객석이 있었다. 창고에서 구조된 '아드리아나'는 무대 세트 알쪽에 쓰러져 있다가 혼자 깨어났다. 몇 마디 독백을 하던 그녀는 이윽고 동경하던 무대를 올려다보며 춤을 추어볼까 하다가 멈추고, 두리번거리는 것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결국 용기를 내어 혼자 무대에 올라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조금 후 객석 쪽에서 하모니카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여배우가 흠칫 놀라 춤추는 것을 멈추자 반주 소리도 멎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다시 춤추기 시작했다. 이제는 한결 유연해진 동작으로, 그리고 하모니카도 흥겨워졌다. 슬슬 2막 피날래였다. 하모니카 반주는 서서히 관현악단과 섞여들고, 양쪽 입구에서 무용수들이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모니카 연주를 멈춘 카르디가 모습을 숨긴 채 노래하기 시작했기에 리체는 객석 세트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의 모습을 찾으려 했다. 그러다가 무심코 시선을 위로 향했을 때, 높이 달린 램프 옆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천장이 흔들리고 있잖아! 리체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무대 뒤에서 무대가 가려진다고 불평이 터져 나왔다. 불평이고 뭐고, 리체는 무대 오른쪽에 어슬렁거리는 사람이 직원이라고 생각하고 당장 그에게 뛰어갔다. 이제 무대에서는 화려한 군무가 펼쳐지는 중이었다. 아드리아나 역의 뮤치아 베네벤토는 할 수 있느니 없느니 하며 옥신각신하던 그 부분을 결국 뛰어나게 소화해냈다. 드디어 객석 세트 안에서 카밀로 역의 막스 카르디가 뛰어나와 춤에 어울렸다. 리체를 제외한 공연장 안의 모든 눈이 그의 움직임에 집중되었다. 막시민조차도 조금 다른 이유이긴 했지만 그를 보았다. 5년이면 사람이 달라지기에 충분한 시간일 테지. 그것보다는 무대 위에서 다른 사람을 연기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전보다 더욱 커진 키, 여전히 깡마른 몸, 표정을 알 수 없는 눈, 그리고 얼굴을 가림 괴상한 가면. 녀석은 가면까지 써 가며 뭘 가리고 싶었던 걸까. 그 때 갑자기 비가 내리는 소리, 아니 천둥 치는 것 같은 소리가 극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이곳이 실내라는 것도 잊고 모두가 위를 쳐다볼 정도로 선명하게 우르릉… 이어 우지끈,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무대 주위를 감사고 있던 빛이 일시에 사라져버렸다. 사방은 완전한 암흑으로 변했다. 사태를 빨리 깨달은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 후,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무거운 통나무들이 떨어지는 듯한 무시무시한 굉음이 연이어 나고, 점점 뒷자리도, 그 뒷자리도 파도가 밀려가듯 일어나며 대혼란을 일으켰다. 모두 상황도 알지 못하면서 무조건 뒤쪽으로 나가려고 의자를 타넘고 사람들을 밀쳤다. 뒤쪽에는 모두가 들어왔던 큰 입구가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만은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모두가 뒤로 몰려간 탓인지, 손쉽게 무대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태는 예상한 대로였다. 무대 위 천장이 무너져내려 배우들이 있던 무대를 완전히 덮어버렸다. 먼지가 자욱해서 재채기가 나오고, 어두워 앞을 보기 힘든 상황에서도 막시민은 무조건 무너진 잔해들 위로 뛰어올라갔다. 지붕을 받치던 육중한 버팀목들이 떨어지면서 무대의 절반 가량을 부숴 놓았다. 사람들의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소리가 나던 때와 무너진 시전을 비교해 보면 배우들이 도망갈 겨를이 있었을 것 같지 않았다. 막시민은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한층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조슈아! 어디 있어!" 그러나 공연장을 가득 매운 비명과 외침 소리 때문에 자신의 귀에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 즈음 사람들이 몰려간 객석 뒤쪽 입구에서는 새로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부, 불이다!" "극장에 불이 났다!" 공연장 전체가 악다구니의 혼란에 빠져들었다. 극장의 천장이 무너지고, 갑자기 불이 나는 일이 한꺼번에 일어날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 그런 것을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다. 입구에 먼저 도착한 자들은 불을 보고 우왕좌왕 하다가 뒤에서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넘어져 밟히고, 그들 또한 또다시 몰려오는 다음 사람들에게 밀려 쓰러졌다. 몇 사람은 무대 양쪽의 쪽문을 생각해 내고 달려갔지만 어찌된 셈인지 그 문은 단단히 잠겨 있어서 아무리 두드리고 걷어차도 소용이 없었다. 막시민은 침착해지려 애썼다. 위치를 짐작해서 무너진 돌들을 걷어내려 해보았지만 통나무를 번쩍번쩍 들어올릴 정도의 장사가 아닌 이상 더 헤치고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서서히 뭉쳐진 불안감이 쇠구슬처럼 단단한 실체로 변해 아랫배를 내리눌렀다. 위기를 짐작했기에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지, 기껏 목격자나 되러 온 것은 아니었다. 절대로,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자포자기 따위가 어울린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자신이었다. 무대 뒤편으로 건너가 좀더 가벼운 서까래들을 걷어 내던졌다. 겨우 무너진 세트의 일부분을 발견했다. 힘겹게 돌덩이 하나를 걷어냈을 때 갑자기 누군가의 손이 손목을 덥석 붙잡는 것이 아닌가? 막시민은 흠칫 놀랐지만 곧 반색하며 소리쳤다. "조슈아! 너야?" 그러나 들려온 것은 여자 목소리였다. "나… 좀… 꺼내줘요……." 여배우인 모양이었다. 산 사람이 있는 것은 다행이지만 맥이 탁 풀렸다. 보아하니 여자는 한쪽 다리가 깔렸을 뿐, 크게 다친 데는 없어 보였다. "조… 아니, 막스 카르디는 어디 있죠?" 하지만 여자는 막무가내였다. 얼마나 꽉 잡았는지 움켜쥔 손목에 손톱이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몰라…. 아니, 알아도 나부터 꺼내 줘야 돼. 난 이런 데서 죽을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당신, 카르디를 찾으러 온 사람? 쳇, 카르디는 구해주러 오는 팬도 있고 좋겠어……. 말 안 해. 날 꺼내 줘야만 말해줄 거야." 막시민은 여자가 움켜쥔 손을 갑자기 냅다 흔들어 빼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런 짜증스런 논리 펼 거면 난 가겠어. 깔린 주제에 당신한테 우선권이 있을 리 없잖아? '얘기를 하면 구해 주겠다'는 쪽이 맞는 거 아냐?" "하지만, 당신 막스 카르디를……." "잔소리 많네. 서까레에 깔려서 남은 인생을 즐기려면 그대로 버텨 보든가." 여배우, 그러니까 뮤치아는 논리적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시민의 반 협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리고 막시민 본인이 의도한 효과도 그것이었다. 어려움에 빠진 여자에게 사람 같지 않다는 소리를 들어 봤자 기분 좋은 일도 없고, 원하는 대답을 빨리 들을 수 있는 가장 나은 태도를 취한 것에 불과했다. "마지막 본 게, 저쪽 무대 아래…, 그런데 어떤 남자가……." 거기까지 들었을 때, 막시민은 서까래들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손마디가 다 까질 정도로 간단치 않은 일이었지만 마침내 뮤치아의 다리를 누르고 있던 것을 빼냈다. 그리고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냥 끌어냈다. "이거면 충분하겠지? 이제 알아서 나가보라고." "잠깐만! 나한테 아픈 다리를 끌고 저 소란통을 빠져나가란 거야? 난 다쳤단 말이야! 당신이 예의바른 신사라면 극장 밖까지 데려다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구조되자마자 목소리부터 달라지는 여자였다. 하지만 예의바른 신사란 무보수 자원봉사자를 의미한다는 걸 아는 막시민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고맙다고 입바른 소리라도 한 다음에 예의를 논해야 입이 덜 부끄럽지, 안 그래? 하지만 난 일의 경중을 분명히 판단하는 사람이어서, 더 중요한 볼일이 있을 때 남에 대한 호의는 거기까지가 한계야." 뮤치아는 방금 막시민이 구해 줬다는 사실도 잊고 화를 냈다. "나쁜 놈 같으니!" "그럼 좋은 놈이겠냐?" 그 이상의 대답을 들려오지도 않았다. 등뼈 대신 차가운 쇠가 몸 안에 박힌 것처럼, 온 몸이 차디찼다. 벨벳처럼 매끄러운 천이 몸을 덮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실은 어둠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어둠의 무게가 묘석처럼 무거워서일까. 입술을 움직여 말해 보았다. 못 움직이겠어.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누군가 대답해 봐. 「켈스니티를 찾고 있는 거야? 안됐지만 그는 네게 말을 걸지 않을 거야. 걸지 못하지. 너와 마찬가지로 짓눌려 있으니까.」 소리가 나오지 않는 입술을 다시 움직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는 네 정신 안에 기생하고 있기 때문에 네가 출구를 못 찾으면 그도 못 찾아. 네 안에 갇힌 거지. 넌 너를 가뒀고.」 난 나를 가두지 않았어. 「네가 정말로 뭔가에 짓눌려 있다고 생각해? 일어나 봐. 벌떡 일어나 보라고. 넌 손가락 하나 부러지지 않았어.」 여러 명이 일제히 떠들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의 목소리는 달랐고, 외견도 달랐다. 호의적인 목소리도 있고 비웃는 듯한 목소리도 있었다. 「포기해선 안 돼. 아무 것도 아냐. 아무도 널 붙잡고 있지 않아.」 「그게 한계라면 어쩔 수 없지. 너무 많이 기대한 모양이야.」 「그 핏줄은 세월이 흘러도 정말 한 푼도 나아지지 않는군, 킬킬킬……」 「내가 도와줄게. 내 말에만 귀를 기울여. 조금만 움직여 봐. 제발, 손끝만이라도.」 그 때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까지 들은 일이 없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데모닉 조슈아, 네 혼은 고작 그것밖에 안 돼?」 하지만 여전히 온 몸을 움직일 수 없다. 손가락조차 돌로 변한 것처럼, 꼼짝없이 자신 속의 어둠에 갇혔다. 리체는 분명 직원일 거라고 생각한 남자가 한 일을 모두 보았다. 하지만 그가 무너진 무대로부터 끌어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아보지 못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체인 줄로만 알았다. 주위가 너무 어두웠던 탓이었다. 그러나 그 덕택에 상대방도 리체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남자는 멀리 가려 하지 않았다. 모포에 싸인 시체인지 뭔지 모를 것을 바닥에 눞히고 손에 든 병을 열어 액체를 흩뿌렸다. 동시에 지독한 술 냄새가 풍겨왔다. 코를 쥐려고 손을 얼굴로 가져가던 리체는 갑자기 조금 전의 기억을 선명히 떠올렸다. 분장실에 갖다놓던 술, 그리고 입구 쪽에 난 불! 그리고 남자가 무얼 하는지도 깨닫게 됐다. 남자는 무대 아래 숨겨놓은 램프를 꺼내더니 등갓을 열고 상대의 몸 의에 그대로 떨어뜨리려 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단단한 몽둥이가 횡으로 남아들어 램프는 물론, 남자의 손까지 날려보냈다. 남자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주저앉으며 손을 감싸 쥐었다. 무대 쪽으로 튕겨 나간 램프는 부서지며 배경 그림에 불을 옮겼다. 순식간에 무대 일대로 불이 번지기 시작했다. 남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걸레자루 하나를 거꾸로 쥔 엉뚱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남자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리체 쪽에서 먼저 소리질렀다. "네가 불을 질렀지! 네가 하는 꼴을 다 봤으니 변명해도 소용없어. 그러니까… 이 서까래 밑의 쥐새끼 같으니!" "뭐야? 이 계집애가, 말이면……!" 리체는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남자는 단도를 뽑아들었지만 램프와 마찬가지로 날아가 버렸다. 이어 리체의 걸레자루가 곧바로 정수리를 내리치는 듯하다가, 빠르게 다가서며 좌우를 때렸다. 남자가 비틀거리자 치마를 입은 주제에 심지어 발로 걷어차 버리고 막대기 끝으로 이마를 찔렀다. 걸레자루를 쥔 손 모양이며, 자세 모두가 얼떨결에 무기를 든 여자아이로 보이지는 않았다. 간단히 제압되어버린 남자는 너무 어이없는 상황을 당해 얼이 빠졌다. 리체가 걸레자루 끝을 겨누며 말했다. "쥐새끼답게 자기 나갈 길은 마련해 뒀겠지?" "……." 더 머뭇거리다가는 자기가 빠져나갈 길도 막힐 처지라, 남자는 망설이며 일어났다. 리체는 바닥에 누은 시체인지 뭔지 모를 사람은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다. "거기, 잠깐만!" 무대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소년이 누워 있는 시체에게 달려가더니 급히 모포를 풀고, 축 늘어진 몸을 안아 일으켰다. 목에 손을 대어 맥박을 확인하고, 자기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감쌌다. 그리고 얼굴을 들여다봤다. "……." 한숨 비슷한 소리가 들렸지만, 안도였는지 우려였는지 불분명한 것이었다. 소년이 리체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리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엣, 당신은 트리 어쩌고 아주머니 3인조가 길러 준?" 막시민도 이번에는 트리비아 아주머니라고 고쳐 주지 않았다. 그의 달라진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는 리체에게 막시민은 더 설명 않고, 턱짓으로 남자를 가리켰다. "불을 지르고 난리 피운 게, 당신이 잡고 있는 저 자란 말이지?" 대답이 불필요한 질문이었다. 막시민이 그 자 족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둘이 대화하는 틈을 타 달아나려 하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띄었고, 막시민은 대뜸 리체 손에서 막대기를 빼앗더니 리체보다는 덜 세련된 자세로 남자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다만, 힘은 좀더 좋았다. 빠악! "…이걸 잘하는 짓이라고 했어요?" 뒤통수를 얻어맞은 남자는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던 것이다. 막시민인들 예상한 사태일 리 없었다. 하지만 당황한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소리쳤다. "도망가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잖아!" "길 안내는 누구한테 시킬 참이야!" "도로 깨우면 될 거 아냐!" 만나자마자 맞고함으로 시작하니 확실히 예사로운 만남은 아니었다. "트리 어쩌고 아주머니 조카일 때보다 상대가 더하잖아!" "트리비아 아주머니야!" 자기도 모르게 별 쓸데없는 소리를 지르고 만 막시민은 헛나간 말을 만회하기 위해 곧장 행동을 개시했다. 소품 상자를 찾아내어 그 안에서 뭐에 쓰는지 모를 천을 꺼내 죽 찢어서 남자의 손을 돌려 묶었다. 주위를 잠깐 보다가 옆에 조금 남은 술병을 들더니 눈꺼풀을 당겨 뜨게 만들고는 퍼부어 버렸다. 당연히 술이 눈으로 스며들어 엄청나게 따가웠을 테고, 남자는 눈을 번쩍 뜨며 비명을 질렀다. "자, 자, 얼른 길을 안내해 봐!" "과격한 방법이네." 과격하긴 해도 효과만은 확실했다. 손목을 묶은 끈과 각목을 넘겨받은 리체는 남자의 등을 쿡쿡 찌르며 무언의 협박이 섞인 눈빛을 보냈다. 그러는 가운데 막시민은 자신의 코트로 감싸 놓은 사람을 일으키며 애써 들쳐 맸다. 리체가 의아한 얼굴이 됐다. "그건 왜 짊어지고 가?" "그거라니? 넌 이게 사람으로 안 보이냐?" 리체는 어, 하는 표정으로 그쪽을 흘끗 보더니 말했다. "시체인줄 알았는데?" 막시민은 황당한 표정이 됐다. "조금 전에 사람 구하려고 각목 휘두른 줄 알았는데 아니냐?" "이 소란통에 우왕좌왕 뛰지 않고 시체… 음, 큼, 사람한테 불이나 붙이려고 하고 있는 놈이 있는데, 그 놈이 길을 알 거라고 생각한 게 잘못된 판단이니?" "…됐다. 빨리 나가기나 하자." 리체가 든 각목으로 등을 쿡쿡 찔린 남자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쪽문을 땄다. 그 때 무대 쪽에서 또 다른 인물이 나타났다. "나도 데려가!" 나타난 것은 조금 전 막시민이 구해준 뮤치아 베네벤토였다. 막시민이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다리가 멀쩡하잖아?" "그,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냐! 얼른 나가지 않으면 우린 다 죽어!" 리체가 어이가 없어 말을 받았다. "지금 나가려고 하는데 아가씨 당신이 불렀잖아요?" 어쨌든 뮤치아는 자기가 같이 나가지 않으면 모두의 탈출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한 그들을 향해 다부진 기세로 달려와 합류했다. 그렇게 해서 불지르고 혼자 달아나려고 한 남자, 무대 밑에 누가 깔려 있든 친구만 구해 나가려 한 소년, 쓰러진 사람이 시체였든 아니든 자기 나갈 길만 생각한 소녀, 그리고 모두가 자길 구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배우는 순식간에 '자기밖에 모르는 4인조'를 결성하여 쪽문을 통해 공연장 밖으로 나갔다. 그들 중 불길로 가로막힌 맞은편 입구의 일을 자기가 나서서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위대한 책임감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겨우 극장을 빠져나왔을 즈음, 콜제티 극장은 이미 거대한 불덩어리였다. 그런데 이곳까지 같이 끌려나온 남자는 일행이 숨을 돌리는 틈을 타 앗 하는 사이에 사람들 틈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모두 보긴 했지만 조슈아를 들쳐 매고 있는 막시민도, 연기를 잔뜩 마셔 지친 다른 두 사람도 뒤쫓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겨우 살아났다는 생각에 호기심을 되찾은 뮤치아는 정문의 아수라장을 구경하러 가보려 했지만, 막시민이 고개를 저으며 거의 명령조로 말했다. "일단 날 따라와." 막시민은 가능한 한 사람들 틈으로 파고들었다가 어두컴컴한 주택가 골목 쪽으로 빠졌다. 근방의 사람들은 다들 극장의 화재를 구경하러 달려가 버렸으므로 지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거기까지 오자 뮤치아가 대뜸 빠졌다. "당신이 뭔데 나한테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는 거야?" 무대의 잔해에 파묻혀 있던 조금 전과 어조며 태도 할 것 없이 모조리 바뀐 것이, 실로 배우들이나 할 수 있는 변신이 아닐까 싶었다. 막시민은 헛웃음을 지으려다 말고 도망친 남자가 가버린 방향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좀 전까지 있던 그 남자, 당신 얼굴을 빤히 보고 있더란 말이야." "어머?" 그 와중에도 자신의 미모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나 싶어 기분을 개선시키려는 찰나, 막시민이 덧붙였다. "그가 당신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 안 해?" "뭐라고욧?" "무슨 소리야?" 리체도 영문을 모르는 얼굴을 했다. 막시민은 더 견딜 수 없는지 조슈아를 잠시 바닥에 내려놨다. 평소 깡말라서 무게나 있을까 싶던 조슈아였지만, 정신을 잃고 있으니 생각보다 무거웠다. 의식 있는 사람을 업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무슨 사정이 있는 거야?" 바닥에 주저앉고 나니 막시민은 설명하기가 귀찮았는지 두 여자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불숙 다른 것을 물었다. "둘 다 이곳 사람들이지?" 대답이 없어도 충분히 알 만한 문제였다. "근처에, 자기들 집말고 방 빌릴 만한 데 없어? 다시 강조하지만, 자기들 집말고." 그놈의 축제 덕분에 섬 전체에 빈방이라고는 헛간 하나 남아 있지 않다는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막시민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걸 우리가 알아봐야 되는데!" 뮤치아가 짜증을 내자 리체가 픽, 웃더니 말했다. "언제부터 '우리' 였죠?" "알 게 뭐야! 난 집으로 갈 거야!" 뮤치아가 몸을 돌리자 등 뒤에서 막시민이 다시 불렀다. 경고조의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지금 집으로 가면 당신의 안전은 보장 못 해." "어머, 어머, 지금 협박하는 거야? 이 뮤치아 베네벤토를?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거 아냐?" 뮤치아는 안전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보다 자기를 무시했다는 데 더 분개한 듯 했다. 그래도 막시민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한층 더 기분 상해했다. "무슨 안전이 어쩌고 저쩌고야? 나는 유명한 여배우라고, 누가 날 해코지하면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거 몰라? 그런 자는 당장 이 섬에서 매장이란 말이야. 그럼 난 가겠어. 내 안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기 전에 자기들 안전이나 신경 쓰지 그래?" 그렇게 말한 뮤치아는 정말로 극장 쪽으로 도로 뛰어가 버렸다. 조슈아를 내버려두고 쫓아갈 순 없다고 생각한 막시민은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거지." 그러더니 리체를 슥 쳐다봤다. "너도 갈 거야?" 리체는 눈썹을 조금 치켜 뜨더니 말했다. "안전 어쩌고 하는 이야기, 나한테도 해당되는 거였어?" "안타깝지만 너와 나, 저 여자 모두가……." 막시민이 조슈아를 턱짓으로 가리켜 보였다. "이 녀석의 일에 단단히 말려든 거라고." "도대체 무슨 일?" "공연 도중에 지붕을 무너뜨리고, 사람으로 가득 찬 극장에 불을 지를 정도로 집요한 누군가가 지금 한 사람을 반드시 찾아내어 죽이려 하고 있단 말이야. 나는 물론이고 본의 아니게 목격자가 되어버린 너나 아까 그 여자도 안전을 장담할 순 없겠지." 리체는 눈을 크게 떴지만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이상한 얘기네. 저 사람이 도대체 누군데 그래?" "모르는 건가? 이 섬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아는 줄 알았는데, 가면을 안써서 그런가?" 그제야 리체도 코트로 싸인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고 놀란 얼굴이 됐다. 그런데 이번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막시민을 놀라게 하고 말았다. "'조'였잖아?" 5. 공동운명체 "그녀석은 지나치게 많은 것에 얽매여 있어. 너무 무거운 구두를 신은 것과 같지." "하지만 나 같은 맨발보다야 백 배 낫겠죠." 어둠이 점차 묽어져갔다. 땀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이 이마를 타고 흘러 자꾸만 눈으로 들어갔다. 눈을 꽉 감고, 참 돌바닥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앞으로 나아가려 해보았다. 자신은 강한 아쿠아리안이 아니었다. 바늘로 건드리기만 해도 상처 입는, 물 없이 몇 시간도 살 수 없는 엷은 비늘의 물고기자리였다. 「내 목소리가 들리니?」 그 목소리가 들렸을 때,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적 들 뻔했다. 무척 낯익은 목소리였던 것이다. 「축축하고 찬 곳에 오래 있으면 몸이 아플 거야. 좀더 밝은 곳으로 가자. 더 따뜻한 테, 더 부드러운 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조슈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기울어진 고개 하나 바로 돌리지 못하는 것이다. 누나를 닮은 목소리, 하지만 누나일 리 없다. 누나가 아니다. 누나는 여기 없다, 누나와 비슷하다, 누나일 것이다……. 「가자, 꽃이 많이 피어 있어.」 팔다리가 문득 풀어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사방이 밝아지고, 자신은 넓은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비취반지 성의 2층 회랑인 것이다. 그렇지만 달리고 또 달려도 끝나지 않고 이어졌다. 호흡이 가빠지는 걸 느끼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발이 느려졌고, 더 못 견디겠다는 기분이 됐을 때는 그 자리에 앉아버렸다. 그런데 앉고 보니 어찌된 셈인지 그곳은 나무 둥치 위였다. "힘들면 그렇게 앉는 것도 좋을 거야." "아, 켈스." 이상한 일이었지만 특별히 반갑다는 느낌도 없어 일상적인 대꾸가 되어버렸다. 상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좀 쉬고 있으라고, 기분은 어때?" 조슈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꾸했다. "잠깐 앉은 것 뿐이야." "일어나지 않아도 상관없다니까. 정말이야." "그러면 영원히 이곳에 있게 돼." "그곳이 싫어?" "아니……." 조슈아는 위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 머리 위에는 너른 하늘이 보였다. "가만히 있어선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계속 달려서 어디로 갈 건데?" 조슈아는 대답 없이 하늘만 바라봤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머리 위에 머무르던 구름들이 항구에 묶여 있던 배들처럼 먼 하늘로 다 떠나갔다. 가만히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모처럼 앉은 이곳도 전혀 편하지 않았다. "지금 넌 달릴 수 없어. 쉬어야 돼." 조슈아는 급한 마음을 누르지 못한 채 물었다. "내가 왜?" "넌 전부터 쉬었어야 했어. 네 상태는 슬플 정도로 안 좋아. 네 안에 든 것을 다 꺼내 쓰지 마. 넌 열 다섯을 넘겼지만, 열 일곱에 떠나버릴 수도 있어." 그 말에 조슈아도 단호한 목소리가 됐다. "그런 이야기는 믿지 않아. 아니, 믿어도 어쩔 수 없어. 어린아이한테 크림 케이크를 줘 놓고 내일까지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이 옳아? 맹세를 받고 신신당부한들 그게 지켜질까? 신이든 악마든 누군가가 내게 능력을 줬다면, 인간이 크림 케이크를 앞에 둔 어린아이와 별다른 것 없는 존재란 걸 알아야 될걸." "아니, 얼마나 술을 마시면 이렇게 냄새가……." 의사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코를 막았다. 위급한 환자가 있다고 해서 달려왔는데, 기껏 주정뱅이 뒤치다꺼리나 하라고 불렀나 하는 표정이었다. "술 마시고 쓰러진 거 아니니까 봐주기나 하시죠." "그럼 쓰러진 뒤에 술 마셨소?" 평소 같으면 더한 농담으로 받아치고도 남았을 테지만, 막시민은 팔짱을 풀지도 않은 채 대꾸했다. "농담할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 건지 빨리 좀 봐주십쇼." 침대에 눕혀져 있는 조슈아는 온 몸이 열병 환자처럼 뜨거웠다.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푸르스름했고, 입술이 죽은 사람처럼 바싹 말라서 수건으로 자꾸 축여 줘도 소용이 없었다. 의사도 곧 조슈아가 술을 마신 것이 아니란 걸 눈치챘다. 온 몸에 들이부어진 독한 술 때문에 냄새가 진동할 뿐이었다. 리체가 일하는 코럴리 식당의 지배인은 자기 집에 누이동생에게 맡겨 놓은 작은 시계포를 갖고 있었는데 그곳에 창고로 쓰다시피 하는 쪽방이 하나 남아 있었다. 밤중에 갑자기 찾아간 셈이지만 리체는 전부터 이 집에 가끔 드나들며 지배인은 물론 부인과도 안면을 익혀 놓고 있어서 그럭저럭 넘어 갈 수 있었다. 부인은 한자가 있는 것을 보고 의사도 불러 주고, 방도 손수 치워 주었다. 하지만 주택도 아닌 곳에서 밤중에 환자를 목욕시킬 방도가진 찾을 수 없었다. 이윽고 다가앉아 조슈아를 들여다본 의사는 저도 모르게 으음, 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빛을 잃고 파리한 뺨이며 눈꺼풀은 손만 대어도 종잇장처럼 찢어질 듯 얇디얇았다. 아름답다기보다는 시체가 되살아난 것처럼 오싹 느낌이라, 숨을 쉬고 있는지 코 아래에 손가락을 대어 봤을 정도였다. 하지만 호흡은 규칙적이었고, 맥도 조금 빠른 정도였다. 눈꺼풀을 뒤집어 보고, 체온을 재어 본 의사는 사혈 기구를 꺼내 피를 조금 뽑았다. 특별히 검은 피는 나오지 않았다. 몸 이곳저곳을 만져 본 의사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막시민에게 물었다. "자네 친구인가? 아니면 형제인가? 보호자는 어디 있나?" "보호자 없습니다. 그냥 제가 보호자라고 생각하고 말씀하시죠." 전에 없이 신중한 목소리였다. 평소 막시민을 아는 사람, 예를 들면 동생들이나 히스파니에 노인이었다면 이 녀석의 입에서 이런 목소리도 나오는가 하고 꽤 놀랐을 것이다. "무슨 일을 당한 건지 먼저 말해 보게." "죽을 뻔한 거죠." 저도 모르게 버릇대로 대꾸했다가, 곧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평소 화법에 어울리지 않는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머리 위에서 무거운 것이 떨어져서 충격을 받은게 아닐까 싶은데 말이죠. 사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정신을 잃은 지 한 시간이 넘었습니다." "그것 같고는 알 수가 없군. 머리에 이상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다른 곳에 부러진 뼈도 없고, 이렇게 오래 깨어나지 않고, 또 열이 나는 이유도 모르겠군. 혹시 평소에 앓던 병이 있었나?" "그건… 저도 모르겠지만……." 막시민은 머릿속으로 어떤 가능성을 생각한 모양이었지만 곧 지워 버린듯 말을 이었다. "모르겠습니다." "열을 식혀 주는 것말고 현재로선 방도가 없네, 이건 짐작이지만……." 의사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어떻게 말을 할지 조금 궁리했다. "온 몸에 기력이 없단 말이야…. 혼이 빠진 사람… 그래, 귀신들린 사람처럼, 의식 없는 것말고, 귀신들린 사람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죠?" 의사는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일어났다. "방도가 없어. 줄 약도 없고. 계속해서 열이나 식혀 주는 것말고는 할 일도 없어. 당장 악화될 것 같진 않으니 난 내일 아침에 다시 오도록 하지. 하지만 그 때까지도 이대로 차도가 없으면 소드─라─샤펠의 의사에게 데려가 봐야 될 거네." 막시민은 일반적인 보호자들처럼 의사를 붙들고 늘어지거나 따져 묻거나 하지 않았다. 의사가 가고 나자 막시민은 침대에 다가앉아 조슈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이런 상황에서는 막시민도 얼굴에 표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언뜻 보기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을 보는 눈 같기도 했다. 하지만 말이 없었고, 표정이 더 변하지 않았다. 눈을 떼지도 않았다. 밖에서는 조금 전부터 비가 내렸다. 많은 비는 아니었지만, 극장에 난 화재에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투둑거리는 빗소리만이 한참 동안 방안을 울렸다. 걸쇠가 망가진 창문이 멋대로 열려 비가 들이치자 리체가 일어나 주의 깊게 닫았다. 닫기 직전, 빗방울이 흰 꽃처럼 튀는 검은 밤거리를 잠깐 내다봤다. 새벽 2시경,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참 동안 조슈아의 얼굴만 내려다보고 있던 막시민이 불쑥 말했다. "통성명이나 하지." "이름?" 그제야 지금껏 서로 이름도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리체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냥 리체라고 불러, 본래 이름은 좀 길어서." "막시민 리프크네." "그 트리 뭐라는 아주머니 세 명은 가짜지?" "그럼 진짜겠냐." "저 사람은 친구?" "아아." 평소라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막시민은 말수가 적었다. 리체는 일어나서 방 안을 거닐다가 침대 쪽을 바라보고서 몇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방문을 열고 나갔다가 손에 오목한 나무 접시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접시엔 딱딱한 과자 같은 것이 얼마간 들어 있었다. "배고픈데 이거라도 먹자." 막시민은 말없이 손을 뻗어 과자를 입에 넣었다. 리체도 몇 개 집어먹었다. 한동안 버석버석하고 과자 씹는 소리만 방 안에 들렸다. "먹을 만해?" "아아." "그렇다면 다행이구." 리체는 다시 과자를 하나 집어 입에 넣더니 중얼거렸다. "개밥이지만." "……." 손이 아주 잠깐 멈추고, 둘은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막시민은 곧 입에 든 것을 마저 씹어 삼키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래, 개밥 까짓 거 못 먹겠냐. 과자랑 똑같네." 리체는 한쪽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손가락으로 개밥을 집어갔다. "까다로운 입맛이 아니어서 다행이네. 그런게 저기 저 친구도 배고프지 않을까?" 막시민은 침대를 흘끔 봤다. "저 녀석이라면 깨어 있어도 아마 개밥은 안 먹을 거야." "저쪽은 고상한 입맛?" "글쎄. 출신이 고상해서." 과자인지 개밥인지 하여튼 다 먹었다. 접시를 비운 리체는 침대에 다가 앉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얘기 좀 듣자.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야?" 막시민은 손을 쓰지 않고 잇새에 낀 과자, 아니 개밥을 빼느라 한동안 고생하고 있었다. 이윽고 해결하더니 안경을 벗고 충혈된 눈을 좀 비빈 다음 입을 열었다. "본의 아니게 같은 배를 타게 됐으니 서로 갖고 있는 정보를 풀 필요는 있을 거야. 먼저 물어봐. 나도 너한테 물을 게 좀 있으니까." 리체는 기다렸다는 듯 대뜸 물었다. "극장에 불을 질렀을지도 모르고, 저 사람을 죽이려 한 것일지도 모르고, 심지어 날 죽일지도 모른다는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야?" "몰라." 리체는 말문이 막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모른다고? 그러면 네가 주장한 일들이 사실이란 건 뭘로 증명할건데?" "사람이 가장 많이 모여든 날, 멀쩡한 극장의 천장이 무너지고 동시에 불이 날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냐?" "알 게 뭐니? 하루에 벼락 두 번 맞는 사람도 있다는데. 세상에 무슨 일이 있을지 어떻게 알아?" "그러면 극장에서 우릴 안내해 온 사람은 뭐라고 생각하지? 넌 그 사람한테 '네가 불을 질렀지!'라고 소리치지 않았어?" "하지만 다른 목적이 있어서 불을 지은 걸지도 모르잖아?" "다른 목적? 하필이면 저 녀석을 붙들고 있었는데?" "음, 그건……." 리체는 천장을 향해 눈동자를 굴렸지만 이번엔 결국 납득하고 말았다. "그래. 네 말이 맞다고 쳐. 그런데 너도 그게 누구인지는 모른단 말이지? 그러면 그 자를 피하기 위해서 너나 내가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이야? 평생 숨어 다닐 순 없는 일 아냐? 게다가 너한텐 이게 친구의 일이겠지만 나한텐 사실 아무 상관없는 일이잖아. 내가 왜 그런 번거로운 일을 당해야 돼?"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번거로운 일은 당하고 싶어 당하나? 그 자가 누구였든, 한 사람을 죽이고 증거를 없애려고 극장 하나를 태울 수 있는 자란 말이야. 예상이긴 하지만 너 하나 정도는 손쉽게 죽여 입을 막고도 남을걸." 그 말에 발끈한 리체가 의자에서 발딱 일어났다. "지금 너… 내가 죽는다고 말했니? 그것도 내 잘못 탓도 아니고, 카르디한테 연관된 일을 조금 알았다는 것 때문에? 나… 내가 왜 저 사람이 주연인 연극에 엑스트라가 돼야 되는데?" 막시민이 대답하지 않자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 "도대체 그 누군지도 모를 인간이 왜 쟤를 죽이지 못해 안달인 건데? 아니, 그 딴 것쯤 알 필요도 없어. 하필 내가 왜 이런 일에 말려든 거야? 난 조용히 돈이나 벌어서 노후를 편안하게 보내려는 계획밖에 없는 사람인데, 왜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 때문에 죽어야 돼? 내 생활을 다 버리고 산 속에라도 가서 숨으란 말이야? 전부 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막시민은 일어선 리체를 흘긋 올려다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하지만 곤란해하는 표정도, 미안한 표정도 아니었다. "잘 생각해 봐. 극장에서 네가 한 일에 대해서. 나한테 소리지를 일이 아니란 걸 너 자신도 알걸." "내가……." 리체가 움찔 말을 멈췄다. 확실히 막시민이 나타나기도 전에 그녀 자신이 먼저 그 정체 불명의 남자를 때려 협박했던 것이다. 그 결과 저기 누워있는 사람도 구하게 됐지만 당시엔 시체인 줄 알았으니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아니, 하여간 사정을 몰랐다고 해도 이 사건에 말려든 건 자기 행동의 결과임에 틀림없었다. 리체가 말을 못하고 있자 막시민이 드디어 침대를 등지고 돌아앉았다. 다시 말해 뭔가 이야기할 태세를 갖췄다. "내가 묻고 싶은건, 네가 어떻게 저 녀석을 알고 있는가 하는 거야. 저 녀석, 이곳에서는 본명을 숨긴다고 들었어. 넌 어떻게 안 거야?" 리체는 뭐라고 말을 할까 입술만 움찔거리고 있다가 결국 한 마디 내뱉었다. "그럼 카르디의 본명이 정말로 '조'였단 말이야?" 막시민은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그 '카르디'라는 이름은 내가 듣기엔 무척 괴상하군. 이 녀석의 진짜 이름은 조슈아야. 어려서 시골구석에서 뒹굴고 다닐 땐 조, 또는 조군이라고 불렀지." "그런 건가." 더 화를 낼 입장이 아니었다. 화를 내다가 갑자기 멈추느라 어색한 표정이 됐지만, 어쨌든 리체는 말했다. "별다르게 아는 사인 아냐. 한번 우연히 만났을 뿐이니까. 그러니까, 식당에서." "식당이라고?" "내가 급사로 일하는 식당이야. 식당 손님이었지 뭐. 모자 눌러쓰고, 수염 붙이고, 지금 생각하니 얼굴 숨기려고 그랬던 거였구나. 어쨌든 그 날 식당이 비어있다 보니 급사 언니들과 수다를 떨다가 카르디 얘기가 나왔고, 난 까닭이 있어서 카르디를 싫어하기 때문에 질색을 했거든. 그랬더니 날 불러서 왜 싫으냐고 묻는 거야." "풋." 막시민은 조금 웃음을 터뜨릴 번했지만 참고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계속해봐." "하여튼 얘길 하다가… 그래, 내가 실수로 그의 얼굴에 물을 끼얹고 말았어. 그랬더니 얼굴에 붙은 수염이 떨어져버렸어. 내가 얼굴을 보게 되니까… 그래. 지금 생각하니까 얼굴이 드러난 것 때문에 당황해서 그랬던 것 같아. 나한테 어제 그 공연의 입장권을 두 장이나 줬거든 그리고 자기가… 응, 카르디의 친구라고 말했어. 그런 다음 헤어졌고, 그게 다야." "그게 언제 일이지?" "두 달 전쯤인가?" "좀더 정확히 기억할 수 없을까?" 리체는 한층 기억을 더듬다가 말했다. "3월 말쯤일 거야. 입장권을 보고… 응, 두 달쯤 남았구나 하고 생각했으니까. 4월은 안 됐고, 3월… 20일 전후 정도?" 막시민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그 말 틀림없겠지?" 그러자 리체도 기분 나쁜 눈으로 막시민을 봤다. "그냥 짐작일 뿐이라고. 내가 그걸 무슨 수로 정확히 기억해?" "적어도 2월이거나 하진 않단 말이지?" "3월 말이라니까. 그 정도는 확실해." 막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걸로 판명됐어. 안됐지만 이제 가능성이 아니라 진짜로 생명이 위협받는 처지가 됐군 그래. 뭐라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피로한 얼굴로 기지개를 켠 막시민은 연달아 몇 번이나 하품을 했다. 하지만 리체는 그처럼 느긋한 기분일 수 없었다. "위로… 라고?" 표정이 일그러지고, 입술을 꼭 다물었다가, 다시 눈물이 글썽해졌다. 막시민은 그 과정을 다 보고 있진 않았지만, 갑자기 리체의 손이 막시민의 어깨를 움켜잡았을 때는 확실히 상황을 알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잡은 어깨를 마구 흔들어댔다. "이건 장난이 아니잖아! 지금 하품이나 할 때야? 빨리 대책을 세워보란 말이야! 난 여기서 죽을 수 없어! 지금 생활이 진짜로, 말도 못하게, 죽도록 마음에 든단 말이야! 절대로 산 속에 들어가거나 옆 나라로 도망가거나 할 생각은 없어!" 물론 리체는 지금까지의 생활에 무척 불만이 많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다 잊어버렸다. 비록 자신이 처한 상황이 자신 때문일지라도, 당장 누군지 모를 악당을 찾을 수 없는 마당이니 이 사건의 핵심과 연관이 있어 보이는 막시민이 모든 일의 원흉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그렇게 판단했다는 것이 아니라, 기분이 그랬던 것이다. "그 정도로 해두라고." 놀랍게도 막시민은 아는 사람들이 봤으면 어리둥절해 할 정도로 인내심을 발휘해서 참고 있다가, 리체가 제풀에 지칠 즈음에 손을 떼어 놨다. "난들 뾰족한 수 있겠어. 내 입장도 너하고 다를 것 하나 없다. 굳이 다른 입장이라면, 저기 누워 있는 녀석까지 수습해야 된다는 정도니 조건도 한결 나쁘잖아? 나도 이곳으로 올 때 이 정도의 일이 벌어질 줄은 짐작 못했어. 아노마라드 시골구석에서 이날 이때까지 살다가 친구 녀석 하나 잘못 둬서 여기까지 달려오게 돼버린 거라고, 빌어먹을 놈. 5년이나 못 봤는데 이 몸의 썩을 정성을 알아먹기나 할까 몰라. 또 부잣집에서 잘먹고 잘사는 자식이 왜 저렇게 꼬챙이처럼 말랐어? 거기다가 5년 만에 친구가 왔는데 침대에 널브러져서 시체놀이나 하고 자빠졌냐? 에당초 내가 왜 저딴 놈을 사귀게 됐지? 아, 젠장, 골치 아파. 공 빠지게 독한 술이나 한 병 마셨으면 좋겠다." 처음에는 리체에게 하던 말이었는데 점차 혼잣말로 바뀌어 버렸다. 결국 안경을 벗어 침대 구석에 던져버린 막시민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생각에 잠겼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고였던 눈물이 저절로 말라버린 리체는 침대에 누운 조슈아를 흘끗 봤다. 두 사람의 입장이 아무리 동정 간다 하더라도, 지금은 자기한테 닥친 일을 차근차근 생각할 정신도 모자랐다. 이따위 일로 죽을 위기에 처하다니 농담 같은 일이 벌어져도 정도가 있는 거였다. 생각 같아서는 점부 못들은 채 하고 집에 가서 잠이나 푹 잤으면 싶지만, 그리고 정말로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믿어버리고 싶지만, 당장 어떤 미친 악당이 쫓아와서 잠자는 동안 집에 불이라도 질러버릴 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집에 간들 잠이 올 턱도 없고, 앞으로 편안하게 발뻗고 사는 인생은 모조리 종친 거다. 전에도 편한 인생은 아니었지만, 이제부터야말로 진짜 꼬인 인생이 시작된 거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화난 마음은 저절로 사그라지고 현실적인 대안이 절실해졌다. 열 여섯 해 살아오며 알아 온 몇 안 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봤지만 이런 상황에서 도움될 만한 인간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의논할 상대는 저기 생각에 잠겨 있는 녀석밖에 없었다. 똑같은 처지에 떨어진 녀석 말이다. "됐어. 내가 말려든 까닭 따윈 이제 어쨌든 좋아. 아까 네 말을 들으니까 넌 카르디… 그러니까 저 사람한테 뭇은 일이 생길 것을 짐작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 같은데 뭔가 아는 게 있을 거 아냐. 작든 크든 정보가 될 만한 것이 있으면 다 말해 줘." 막시민은 금방 고개를 들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건지, 잠들어버리기라도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저 사람을 3월 달에 봤거나 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건데? 왜 그게 나한테 위험이 닥친다는 의미가 되는데? 아니, 그보다 너와 저 사람은 도대체 정체가 뭔데? 누가 죽이러 쫓아올 정도면 뭔가 대단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지은 죄가 있거나 둘 중의 하나잖아?" 거기까지 말했을 때 막시민은 고개를 들었지만 리체를 보기만 할 뿐 얼른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리체가 다음 말을 했을 때는 확실히 반응이 있었다. "술 마시고 싶댔지? 새벽에 여는 데를 알고 있어." "뒤에서 내 안경 좀 찾아 줘봐." "그만 일어나. 저기, 무언가 보이지?" 바람이 흔든 머리카락이 눈썹을 쓰다듬고, 이마를 훑었다. 눈을 감은 채 바람을 느끼고 있던 조슈아는 눈을 뜨며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어느새 나무 그루터기는 사라지고 높은 산꼭대기에 마련된 좁고 둥근 자리에 앉은 자신이 있었다. 발 아래는 절벽과 폭포, 물 흐르는 소리, 가려진 태양, 그리고 목소리가 일러 준 곳에 검은 것이 보였다. 먹구름인가 했지만 아니었다. 수백 마리는 됨직한 새떼였다. 다가올수록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지금은 굉장히 먼 곳에 있지만 빠르게 커지고 있었다. "새들 같은데." "그래, 새야. 그런데 여러 마리가 아니고 한 마리야." "저렇게 크고… 또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는데?" "수백 마리의 새로 이루어진 한 마리 새지. 언젠가 저 새를 다시 보게 될거야. 지금은 이곳을 떠나는 것이 좋겠어. 저 새가 너를 발견하기 전에." "나를 발견한다고? 이미 보고 있는 것 아니야?" "아니. 저 새는 너를 보고 있는 것이 아냐. 이곳에 당연히 있으리라 생각하는 그 사람인 줄 알고 있는 거야. 어서 여기를 떠나, 저 새는 한 순간에 네 목숨을 빼앗을 수 있어." "왜 저 새가 나를 죽이지?" "그건… 조상들 간에 얽힌 악연이 있어서야. 그러니 그만 가자. 네 친구가 널 기다리고 있어." "잠깐, 친구라니?" 조슈아는 상대를 돌아보았다. 그가 미소지었다. "네가 자나깨나 보고싶어하던 그 친구지 누구겠어. 그 한 명말고 너한테 달리 친구가 있기나 해?" 조슈아는 일어섰다. 흰 안개가 살아 있는 것처럼 산곡대기로 밀려들었다. 새의 윤곽은 이제 두 배로 커져 있었다.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망설임 없이 아래로 몸을 던졌다. 이마를 찢을 듯 달려드는 바람, 한 순간 유영하는 듯했던 몸과, 순식간에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사물의 잔상, 그 모든 것이 명석몽(明晳夢)답게 선명했다. 그리고 깨어났다. "아……." 푸른 기를 머금은 새벽빛이 창 틈으로 새어들었다. 몸을 일으킨 자신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땀에 젖은 채였고, 옆에는 자기 이마에서 떨어진 듯한 축축한 수건이 있었다. 한족에는 물이 담긴 대야도 보였다. 병간호라도 받고 있던 분위기였지만 정작 간호할 사람은 사라진 지 오래인 모양이었다. 좁고 초라한 방은 낯설었다. 왜 여기에 와 있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게다가 몸이 끈적거려 불쾌하고, 머리가 아프고, 배가 고프고, 목도 마르고, 입술이 터져 따끔거렸다. 말할 나위 없이 최악의 몸 상태였다. 한참만에 꿈에서 들은 목소리를 생각해 낸 조슈아는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도 없는데 오긴 누가 왔다는 거야." 목소리가 대꾸했다. 「네 친구란 자가 본래 그렇잖아. 좀 기다려 봐.」 6. 탐정과 조수 "그 자는 제 손에 남은 것 모두를 정확히 알고 있어. 비록 은화 한 닢뿐일지라도. 그 은화를 죽도록 갖고 싶어하는 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지." "도대체 이 집에 무슨 볼일인데 그래?" "아직 몰라도 돼." 막시민은 울타리를 하나 부러뜨려 구멍을 내고 멀쩡한 저택 뒷마당으로 숨어 들어가 높이 솟은 벽에 튀어나온 창 난간을 보더니 슬슬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사정도 모르고 뒤따라 온 리체는 팔짱을 끼고 올려다보다가 중얼거렸다. "꼴 참 가관이네." 걸치고 있던 코트는 시체놀이 하는 친구한테 일찌감치 적선해 버렸고, 길이도 맞지 않는 헐렁한 바지에 대강 걷어 입은 셔츠 소매하며 영락없는 부랑자… 아니 부랑 소년 꼴로 남의 집 벽까지 타고 오르고 있으니 누가 봐도 '밤손님!'이라 외칠 풍경이었다. 그런데 몇 미터 올라간 막시민이 아래를 슥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거기서 뭐해?" "뭐하다니?" "안 올라와?" "내가 왜 거길 올라가니!" 저도 모르게 소릴 질렀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막시민은 어둠 속에서 뭐라 중얼거렸는데 아마도 한심하다고 욕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왜 올라가냐니까?" "거기 있으면 들키니까 그렇지." '도로 나가면 되잖아'라고 쏘아붙이려던 찰나, 좌우에서 동시에 인기척이 들려왔다. 갑자기 닥친 상황에 당황한 리체는 저도 모르게 막시민이 잡고 올라간 담쟁이덩굴에 매달렸다. 2미터쯤 기어올라가 벽에 붙어 있는 동안 경비 중인 듯한 하인 두 사람이 양쪽에서 걸어와 조금 전까지 리체가 있던 위치에 서서 인사를 나누더니 상대방이 오던 방향으로 가 버렸다. "잘 올라오네?" 머리 위에서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체는 최대한 작아진, 그러나 여전히 감정 실린 목소리로 대구했다. "그런 소리 할 때야? 저들이 위를 올려다봤으면 어쩔 뻔했어?" "더 위로 올라가야지." "그게 아니고… 난 치마를 입고 있잖아!" "어, 그랬나?" 물론 아무런 감동도 받지 않은 목소리로 대꾸한 막시민은 좀더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젠 리체도 따라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분명 조금 전가지 둘은 축제 광장의 마차형 술집에 마주앉아 정보를 나눠 갖고 있었다. 그런데 연거푸 세 잔 정도 마시더니 갑자기 뭐에 홀린 것처럼 일어나 가는 막시민을 뒤쫓아온 결과가 이것인 것이다. 앞으로는 술 마시고 앞서가는 녀석을 절대 쫓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지금만은 따라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3층 창문에 이르러 막시민은 발코니 난간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친절인지 뭔지 몰라도 자기 주머니에 손 찌르고 리체가 올라올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겨우 발코니에 내려선 리체가 긴장해서 삼켰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 쉬고 있자 기껏 한다는 소리가 이랬다. "이따 내려갈 땐 네가 먼저 가라." "내가 왜!" "치마 입었다며." 말문 막힌 리체를 내버려두고, 막시민은 커튼을 젖혀 방을 들여다보더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쁜 놈." 어쨌든 따라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막시민이 맨 먼저 복도 쪽 방문을 만져보고 닥 잠그는 걸 보고 조금 안심했다. 곧 막시민은 방 안 서랍들을 열어 보며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뭘 찾는 거야?" "그런 게 있어." 더 대답이 없었다. 할 일이 없는 리체는 방을 휘둘러봤다. 귀족들의 별장답게 고급스런 방이고, 장롱도, 의자도 뭐, 화려했다. 귀족들의 가구를 감상할 안목이 없는 리체는 장롱을 열어보고 싶었지만 꾹 참고, 한쪽 벽에 걸린 초상화를 구경했다. 단정하고 예쁜 소녀의 초상화였는데 보다보니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어, 이 아가씨… 그 사람 닮았네? 꼭 남매 같아." 막시민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리체는 이어지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그럼 여기가 카르디… 아니, 조슈아의 집이란 말이야? 잠깐, 여기는 우리 섬에서 제일 비싼 별장 중 하난데? 그러니까……." '아르님 공작'이라는 이름은 얼른 떠오르지 않았지만 대강의 상황은 충분히 알만했다. 동시에 분장실에서 카르디, 즉 조슈아와 만나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엄격한 집안, 가문을 물려받아야 하고, 그래서 배우 따위가 됐다는 걸 결코 알려선 안 되는 상황, 그리고 이 화려한 방……. 곁에서 막시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군." 돌아보니 막시민은 압지(押紙) 한 장을 찾아내어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조금 후 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어 압지와 겹쳐 대 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압지를 있던 자리에 기워 놓았다. "됐어. 이제 가자." 두 사람이 테라스로 다시 나갔을 즈음, 복도 쪽에서 문을 비트는 소리가 들려 왔다. 목소리도 들렸다. "이 문이 왜 잠겨 있지? 청소하다가 실수로 잠갔나?" "하인을 불러요." 처음 것은 부인, 다른 하나는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순간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아들은 막시민은 난간을 타넘어 내려가려던 동작을 멈췄다. 리체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왜 그래?" "잠깐, 저들의 얘기를 좀 들어봐야겠어." "여기 있겠다고? 요즘처럼 더울 때 테라스 문을 여는 것이 당연하잖아. 안 들킬 것 같아?" "내 짐작이 맞는다면 저들은 오히려 커튼을 두 겹으로 칠걸." 그리고 그 짐작은 맞았다. 하지만 닫힌 테라스 창과 두 겹으로 쳐진 커튼 사이로 이야기를 엿듣는 건 무리였다. 창가에서 사람 기척이 멀어지자 막시민은 대담하게 테라스 창을 조금 열었다. 리체가 '들키면 넌 내 손에 죽었어'라는 말을 열렬히 손짓으로 전하려 애쓰는 걸 보고는 느긋하게 한마디 건네기까지 했다. "들키면 네가 날 죽일 시간 같은 건 없을걸." 그 때 안쪽에서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래서야 내 입장도 난처해요. 관리 소홀이라고 문책을 받게 생겼으니……." 남자의 대답도 들렸다. "비취반지 쪽은 잘 처리됐다는데 무슨 문책 운운입니까?" "내가 아직 얘기 못 했는데, 며칠 전에 공작부인이 보냈다는 사람이 왔어요. 소년이긴 하지만 여간내기가 아니던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요? 그쪽에 제대로 간 것이 확실하대요?" "공작부인이 보낸 사람이라니? 뭔가 잘못 안 것 아닙니까?" "자기 쪽에서 그렇게 말했단 말예요. 게다가 가문 문장이 찍힌 편지도 갖고 있었어요." "아니 잠깐, 그래서 그럼, 도련님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했죠? 설마 공작부인이 보냈단 말을 듣고 어설픈 소리 한 것 아닙니까?" "그냥 모른다고 했어요. 뭐… 알잖아요. 일이 잘못되면 가출했는데 국경을 넘었다는 보고를 들어서 켈티카로 돌아간 걸로 알았다고, 그렇게 말하겠다고 했잖아요. 그게 다예요." 잠깐 사이를 두고 남자의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그 소년은 어디로 갔습니까?" "난들 아나요? 쫓아가 보라고 하인을 보내긴 했는데 놓쳤더랍니다. 아직 근처에 있을 지도 모르겠고." "잠깐, 인상 착의를 말해 봐요." "그 소년요? 음… 스물은 안 넘은 정도고, 갈색 머리에 안경을 썼고, 인상은 말끔한 편인데 차림새가 좀 구질구질하달까……." 리체는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누굴 말하는지 뻔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시민의 표정을 살피기도 전에 대뜸 중대한 말이 튀어 나왔다. "제대로 짚었군. 그 녀석입니다. 극장에서 도련님을 데려간 세 사람 중에 하납니다." '세 사람'이라는 말이 리체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이들은 리체의 존재로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래요? 그렇다면 잘 됐군요. 그 여배우의 거처를 찾았다고 했죠? 금방 꼬리를 잡을 것도 같은데, 찾아내거든 제발 깔끔하게 처리해 줘요." "어쨌든 미리 말했던 것이나 주시죠. 여배우 일은 해결되는 대로 연락 띄울 테니까." 서랍을 열고 뭔가 찾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다시 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맞죠?" 그리고 뭔지 모를 소리가 조금 나더니 문 여닫는 소리가 들리고, 두 사람은 방을 나간 듯싶었다. 리체가 가슴을 쓸어 내리며 이번에야말로 가는가 하고 있는데, 막시민이 다시 테라스 문을 열더니 커튼을 젖히는 것이 아닌가? "안 가?" "잠깐만." 막시민은 그 자리에서 방을 둘러보며 기억을 맞추는 듯하더니 망설임 없이 한 곳으로 걸어가 서랍을 열고 안을 들여다봤다. 리체가 영문 모르고 바라보는 동안 막시민은 서랍 안의 것은 건드리지도 않고 다시 돌아왔다. "가자." 가도 좋다고 하자 리체는 실로 엄청난 속도로 아래로 내려가 울타리 밖으로 빠져나갔다. 누군가 봤으면 월장 경력 3년 이상이라고 생각했을지 몰랐다. 물론 치마를 입었다는 사실을 제하면. 막시민이 뒤따라오기에 지금껏 참고 참았던 한 마디를 쏘아붙였다. "한 번만 더 설명 없이 저런 데로 데려가면 그땐 끝장이야." 다른 생각에 잠긴 듯한 막시민의 대답은 이랬다. "끝장이라니, 우리가 언제 뭘 시작했나?" 이러니 발을 한 번 밟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끝장나게 때려주겠단 말이야!" "……." 꽤 아프게 밟았는데도 별 반응이 없어서 리체는 가다 말고 물어보았다. "안 아파?" "아니, 아파." "그런데 왜 안 아픈 척 해?" "술 사줬으니 술기운에 참는 거지." "참다니, 아픈 걸?" "아니, 널." 문 두드리는 ㅅ리가 들렸을 때, 조슈아는 빗 대신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고 있던 중이었다. 그 동안 먹은 거라고는 문을 조금 열었을 때 바로 문간에 놓여 있던 나무 접시 위의 괴상한 과자뿐이었다. 과자는 영 밋밋하고 맛이 없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도련님?"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터라 누가 자신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가면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도련님'이라는 호칭으로 보아 막스 카르디가 아닌 조슈아를 찾는 사람일 거란 생각이 들어 그는 대답했다. "누구신지 모르지만 일단 들어오시죠." 문일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키가 크고 당당한 풍채에 망토를 걸친 중년 사내였다. 셋, 줄, 하나, 3초가 흐르기 전에 조슈아는 누구인지 기억해 냈다. "아, 바이예 경!" 그는 조슈아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기사의 절을 하더니 다시일어나 웃으며 말했다. "알아봐 주시니 영광입니다." 바이예 경은 조슈아가 비취반지 성에서 살 때 아버지를 가까이에서 수행하던 기사 중 하나로서, 종종 아버지와 무예 대결을 벌이기도 했던 호쾌한 인물이었다. 좀더 어렸을 땐 그가 자신을 어깨에 태워 성 안을 돌아다니던 기억도 있었다. 조슈아는 초췌한 얼굴 가득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떻게 이런 데까지 왔어요? 아니, 그게 아니구나. 당신이 날 여기에 데려다 놓은 건가요?" "그렇진 않습니다. 저도 도련님을 여기로 데려온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군요. 하지만 이 집의 주인에게 물으니 그 사람들은 밤새 사라져서 나타나지 않고 있는 모양입니다. 저는 도련님께서 별장을 떠나신 이후로 브와주 부인께 부탁을 받고서 도련님을 찾아다녔는데, 오늘에야 이 집을 알려주는 사람이 있어서 뵙게 되었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 침대에 앉은 조슈아는 말없이 상대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불숙 물었다. "언제부터 하이아칸에 와 있었어요?" "두어 달 되어 갑니다. 좀더 일찍 찾아뵙질 못해 죄송합니다. 그런데 도련님은 어디 편찮으십니까? 안색이 몹시 나쁜데요." "그건……." 조슈아가 예리한 판단에 머리를 쓰려 하자 갑자기 두통이 심해지면서 눈앞이 어질어질해졌다. 곁에서 바이예의 손이 자신을 부축하는 것이 느껴졌다. "일단 저희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별장으로 모셔도 좋겠지만, 이렇게 오랜만에 뵙고 했으니 잠시 도련님을 대접한다 해도 브와주 부인께서 탓하진 않으시겠지요." 조슈아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가운데 그의 말을 들었다. 자신이 고개를 끄덕인 것 같기도 했다. "뭐라고요?" 리체는 막시민이 당장 싸우기라도 할 것처럼 코럴리 부지배인 부부를 노려보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젯밤 신세진 것 때문에 둘 모두 집주인에게 함부로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막시민은 그런 일쯤은 이미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멋대로 데려가도록 내버려두고, 행선지도 묻지 않았단 말입니까? 게다가 찾는 사람이 여기 있다고 방으로 안내해 주기까지 했고?" 지배인 부인은 그제야 사태가 잘못된 것을 알고 미안해하는 얼굴이 됐지만, 솔직히 심각하게 생각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쪽에서 병사를 몇 십명이나 데려왔단 말유. 우리가 어쩐다고 막아질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잡지도 못한 건 미안하구려. 좀 꺼림찍하긴 했는데 워낙 당당한 귀족 나리께서 오셔서 일사천리로 밀어붙여 버리니 말 한 번 붙여볼 요량도 못 냈구랴, 미안하우." "……." 막시민은 이들을 더 추궁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판단한 듯 입술을 얇게 물며 리체를 돌아봤다. "좀 묻자. 근방에 혹시 최근까지 비어 있던 별장이 있어?" 리체는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한두 군데가 아냐. 본래 5월 말이 되어야 슬슬 별장이 차기 시작한다고, 이 즈음 주인이 돌아오는 별장은 아주 흔해." "그럼 내가 말하는 조건에 맞는 별장에 대해 알면 말해 줘. 주변에 번화가가 없는 외진 곳에 위치, 중간 이하의 규모, 눈에 띄게 화려한 외관이 아닌 곳, 연병장으로 쓸 수 있는 넓은 마당이 있는 곳, 특히 마구간이 큰 곳, 마지막으로 루그란 국경 관문으로 이어지는 대로나 항구로 쉽게 나갈 수 있는 위치." "무슨 기준으로 말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리체는 머릿속으로 별장 지구의 구조를 떠올려 보았다. 귀족 부인들이 옷을 주문하면 치수를 재고, 옷감 견본을 보이고, 가봉을 하고, 그럴 때마다 매번 직접 가지 않으면 안되었기에 별장 지구 골목들이라면 손바닥 보듯 환하다. 별장의 모양들도 골목 하나하나를 떠올려 보면 어느 정도 알 듯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리체는 막시민을 돌아봤다. "종이를 줘 봐. 난 손으로 그려봐야 뭐든 확실해져." 리체는 펜을 쥐자 몇 군데 기준이 되는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는 펜선을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전체 스케치를 대강 하고 세부를 그려나갈 텐데 리체는 그야말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차례대로 모든 것을 그려 버렸다. "에그머니, 여보, 얘가 그린 것 좀 보우." 지배인 부인이 놀라 남편을 불렀을 정도였다. 거미줄 같은 골목과 수많은 별장들의 위치를 다 그리고 나자, 이번엔 십여 개의 동그라미들을 그려 나갔다. 그리고 그 중에서 다섯 군데를 집었다. "이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너, 하가냐?" 보고 있던 막시민도 기가 막혔던 모양이었다. 여전히 동그라미들을 보며 좀더 궁리하고 있던 리체가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재봉사인데." "재봉사가 무슨 그림을 이렇게 그려?" "재봉사도 옷본은 그려." "옷본도 지금처럼 그리냐." "내가 그리는 게 아니고 손이 그린단 점에선 비슷할 거 같기도 하고." 막시민은 종이를 집어들고, 지배인 부부이게 손짓으로 인사를 마친 뒤 걸어나왔다. 리체가 곁에 왔을 때 막시민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쓸만한 조수네.' "내가 왜 조수야!" 막시민은 못들은 체 했다. "이 민폐 끼치는 데모닉 녀석을 찾아내면 어떤 식으로 죗값을 치르게 해줄까나." 오후 2시경, '소년 탐정과 미녀 조수'는 세 군데의 별장을 돌고 네 번째 집 근처에 이르러 쳐들어가기 전에 한숨 돌리는 중이었다. "뭐야, 그 괴상한 이름은?" "어때서 그래? 어차피 조수 소리 들을 거라면 이왕이면 미녀 조수를 해 먹어야지." "맘대로 이름 붙이면 미녀 조수가 되냐?" "왜? 내가 미녀가 아니라서 틀렸다고 말하고 싶은가보지?" 리체가 눈을 가늘게 뜨자 막시민은 귀찮은 일을 만들기 싫었는지 재빨리 대구했다. "아니, 상관없어. 가자고, 미녀 조수." "가시죠, 탐정님." 둘은 자신만만한 걸음걸이로 정문을 향해 가… 지 않았다. 십여 명은 되어 보이는 병사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막시민은 이것으로 자기가 찾는 집이 맞을 가능성이 대폭 상승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미녀 조수'가 자기도 찬성한다고 말했다. "말끝마다 미녀 조수라고 해야만 되는 거냐?" "사람들한테 '소년 탐정과 미녀 조수라고 불러주세요'라고 말하지 않으면 되잖아." 막시민은 대꾸 없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어쩔 수 없군." "뭐가 어쩔 수 없어?" 그러자 막시민은 리체에게 ;의지가 드러나는', '심각한', '사명감을 불어 넣는' 눈빛으로 말했다. "의뢰인의 안전을 위해 우리의 안전을 희생하자." "뭐야! 의뢰 따위는 받은 일 없잖아!" "이 경우엔 '미녀 조수'가 채용되기 전에 받은 거겠지." "만일 내가 찬성하지 않으면?" "그러면 나 혼자 가겠지. 하지만 보통 그런 경우 '미녀 조수'들은 탐정의 안전을 걱정한 나머지 결국 뒤따라온다고 되어 있던데." "내가 읽은 책에는 그런 애기 없었어!" 그러나 막시민은 이미 성큼성큼 정문 앞으로 가서 병사 한 사람에게 품속에서 꺼낸 편지─예의 아르님 가문 문장이 찍힌─를 내어 보이고 있었다. 물론 편지의 용도는 좀 바뀌었다. "급전입니다. 켈티카에 계신 아르님 공작 부인께서 이 댁에 계신 분께 편지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섬에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났건만 막시민이 소화한 일정의 특성상 그의 몰골은 방금 먼지를 쓰고 도착한 심부름꾼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 사실이 일말의 신빙성을 더하여 막시민과, 그리고 결국 뒤쫓아오고 만 '미녀 조수'는 정문을 통과하는 데 성공했다. 7. 되살아난 인형 "높은 탑에 유리로 만든 인형이 갇혀 있었어, 인형은 자기를 만든 주인을 기억했지만, 그는 인형을 돌보지 않았지. 인형은 아주 오래 기다렸지만 주인은 오지 않았고, 세월만 무성하게 흐른 거야. 바닥을 기던 작은 덩굴들이 자라 탑을 오르고, 뒤덮고, 창턱을 차지하고, 햇빛마저 가렸지만 유리 인형은 관심 없었지, 유리 인형이니까 어떤 것도 필요 없었거든, 먹을 것도, 별도, 잠자리도 필요 없었어.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기다리고 그렇게 백년도 천년도 흐를 수 있었을 거야. 인형이 기다리는 것을 포기했을까? 아니. 인형은 포기하지도 잊지도 않아. 인형이니까." 바닥에 발이 닿긴 하는데, 유령처럼 스르르 미끄러져 가는 기분이었다. 일부러 걷는 느낌을 가져보려고 느리게 한 발 한 발 걸었지만, 잠간 정신을 놓치면 어느새 바람에 밀려온 것처럼 회랑 끝가지 와 있었다. 바닥의 격자 무늬를 세면서 걸어보려 한 것은 너무 소박한 바람이었다. 딱 한 번 오가고 나자 무늬의 숫자는 물론 스물 네 개의 기둥머리에 새겨진 각기 다른 무늬들에 이르기까지, 새롭게 집중할 수 있는 건 전혀 없었다. 이상항 후원이었다. 좁기도 하거니와 저택의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오직 한 군데, 앞뜰로 이어지는 듯한 좁은 사잇길뿐이었다. 통로 앞에는 두어 명의 병사들이 앉아 있다가 조슈아가 다가오면 벌떡 일어나 '어디 가십니까?'하고 물어왔다. 어물어물하다가 '그냥'이라고 대꾸한 뒤 돌아오면서도 못내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갇힌 기분이야." 나직이 말하자 기둥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갇힌 게 맞는 것 같은데.」 "나가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없고." 「하지만 나가려고 시도해 본 일도 없잖아?」 조슈아는 고개를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 말은 맞지만, 딱히 나갈 일도 없으니 말야." 「회복될 때까지 쉬라는 말이지만, 글쎄, 밖이라도 좀 내다보는 것이 어때?」 조언에 힘입어 키보다 높은 담을 따라 걸으며 죽 훑어보았다. 발 받침으로 사용할 만한 것은 전혀 없었고, 기어올라가기에는 지나치게 가느다란 적단풍이 몇 주(株) 서 있을 뿐이었다. 별 도리가 없어서 조슈아는 한족 다리를 나무 둥치 아래쪽의 갈라진 줄기 틈에 걸치고 살짝 발돋움을 했다. 그러자 발 밑 2, 30미터 아래로 펼쳐진 넓은 틀, 아니 연병장이 내려다보였다. 연병장이라고 한 이유는 간단했다. 백여 명은 되어 보이는 병사들이 도열하고 있으니 달리 뭐라고 부르겠는가. "여기가 이렇게 놓은 데인 줄 몰랐어." 「정말 그렇군.」 목소리의 대꾸에 조슈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이죽거렸다. "농담도 통할 정도로만 하시라고, 당신이야말로 원한다면 저 아래로 거꾸로 뛰어내려 날아갈 수도 있는 것 아냐?" 「아직 그렇게 하지 않았잖아.」 "그러니까 같잖은 농담은 제발 그만두세요, 사제님." 조슈아는 뜰인지 연병장인지 모를 곳을 구석구석 둘러봤다. 뜰이 넓을 뿐, 뜰을 굽어보고 선 별장 건물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대략 눈이 닿는 곳의 구조를 살펴본 결과 자신이 있는 곳은 이 별장에서 뚝 떨어진 별채임에 틀림없다는 판단이 섰다. 만일 이어져 있다면 병사가 지키고 있는 통로 너머로 직경 50미터 정도는 되는 대형 홀이라도 있어야 할 판이었다. "아무래도 가서 어찌된 건지 물어보기라도 해야되겠어, 차라리 살던 별장으로 돌아가든지 해야지…. 아, 저기 누가 오네?" 오후 2시의 맹렬히 열기를 뿜고 있었기에 조슈아는 손차양을 만들며 뜰을 가로질러 걷고 있는 세 사람을 살펴보려 했다. 하나는 이곳 병사라고 생각됐고 다른 둘은 소녀 하나에 소년 하나, 그러니까 갈색 머리를 대충 넘기고 안경을 쓴……. "……." 조슈아의 눈이 약간 커졌다. 그러고도 말이 없자 목소리가 낮게 웃었다. 「뭘 그렇게 말문이 막혀 있어?」 조슈아는 평소처럼 시큰둥한 대답을 하는 대신 담 머리를 짚고 있던 손을 보이지도 않을 상대를 향해 내저었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보려 하는 순간, 딛고 올라온 나무 줄기가 뚝, 부러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발이 미끄러지고, 보려 했던 것은 눈앞의 돌담으로 막혀버렸다. 내려온 조슈아는 애꿏은 담을 한 번 차며 중얼거렸다. "쳇, 아직 충분히 가벼워지지 못했나." 「지금보다 가벼워지면 그땐 관 속에나 들어가야 될걸.」 하지만 조슈아의 입가엔 미소가 생겨나 있었다. "어쨌든 여기서 나가볼 이유가 생겼어." 돌아선 조슈아는 조금 전 어설픈 대화를 나누다가 돌아섰던 사잇길을 향해 뛰어갔다. 물론 지키고 있던 병사는 다시 벌떡 일어나며 조금 전과 같은 질문을 했다. "어디 가십니까?" "저 밖에." "하지만 좀더 건강해지실 때까지 요양을……." "아, 지금 저 밖에 확실한 요양거리가 와 있어." 조슈아의 대답이 말이 되든 안 되든, 병사는 들고 있던 창을 고쳐 쥐며 좀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려 했다. "주인 어르신께서 말씀하시길, 도련님 몸이 다 회복될 때까지는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하라 하셨습니다. 다른 명령이라면 듣겠지만, 이것만은……." 조슈아는 갑자기 병사를 향해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내게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가문에 한 사람밖에 없거든? 그런데 그 분은 기금 켈티카에 계시고, 난 여기 있지. 네가 자꾸 내 앞길을 막으면 다른 병사를 불러서 너를 거 기둥에 거꾸로 매달라고 하겠어. 그건 내가 나가겠다는 명령이 아니니까 너도 들어야 되겠지? 물론 그보다 더한 것도 얼마든지 명령할 수 있지. 하지만 네가 나를 잠시 놓쳐봤자 매 몇 대밖에 더 맞겠어? 그러니까 내가 더 엄청난 것을 생각해 내기 전에 나를 못 본 체 하는 것이 좋을 거야." "……." 병사가 기이한 논리에 어쩔 줄 몰라하는 동안 조슈아는 가면을 쓴 배우시절 터득한 가장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인 다음, 당황한 병사로부터 재빨리 몸을 빼어 앞으로 뛰어나갔다. 병사가 뒤쫓아오든 말든, 그런것은 알아서 할 테지 싶었다. 하지만 등 뒤에서 키득키득 웃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상대는 남자였어.」 "누가 뭐래? 잔소리 좀 하지 마." 바이예 경은 신중한 얼굴로 편지를 뜯어서 읽기 시작했지만 일어내려 갈수록 표정이 이상하게 변해갔다. 다 일고 나자 그는 편지를 접지도 못하고 한쪽 미간에만 주름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이게 뭐지?" 막시민은 태연한 태도로 대꾸했다. "저는 편지를 가져온 사람일 뿐이라 내용에 대해선 모르죠." "그럼 자네가 한 번 살펴보게나." 막시민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편지를 받아들었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됐다. 아르님 공작 부인도 알고 있을 것 같은 기초 요리법 강좌. 요리를 하자면 말이야. 무엇보다 먼저 재료를 잘 씻는 것이 중요하다. 너도 알다시피 흙이 묻은 야채로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는 없는 것 아니냐? 하지만 너무 깨끗이 씻지 않는 편이 좋은 것들도 있어. 버섯이라든가 하는 것들 말이야. 아, 그래. 오늘은 홍당무를 넣은 보르시치(BORSHCH)를 만들어 볼까 한다. 쇠고기, 돼지고기, 양고기를 모두 준비하면 좋겠지만, 사정상 여의치 않다면 한두 가지만 준비하도록 해. 대신 소시지나 베이컨을 많이 넣도록 하고 말이야. 야채로는 토마토와 감자를 빠뜨려선 안 돼. 양배추도 있어야겠지. 그러고 보니 버섯은 안 들어가는군. 재료는 대강 됐으니 먼저 보르시치를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사워크림(sour cream) 만드는 법부터 해 보지. 그런데 잠깐, 신중하게 읽지 않는군. 거기, 음식 투정하는 자네 말이야! 그 즈음 막시민 또한 바이예 경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끝까지 읽지도 않고 막시민은 편지를 든 손을 부르르 떨었다. "……이 노인네가… 누가 이딴 것 써 넣으랬어." 그 때 막시민의 중얼거림을 정확히 듣지 못한 바이예 경이 헛기침을 했다. "험, 험, 그러면 편지 내용에 대해 얘기를 하고 싶군." "아, 네." 막시민은 재빨리 표정을 바꾸며 바이예 경을 올려다봤다. "제 생각으로는 음, 제 옆의 미녀… 아니, 조수가 이 상황에 대해 좀더 잘 알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조수'는 크게 당황했다. 바이예 경은 더 괴이쩍은 표정이 되어 이번엔 리체를 쳐다봤다. "그, 그게, 저, 제 생각으로는… 아! 그러니까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편지가 아닐까 하는데요." "그게 무슨 뜻이지?" "네! 객지에서 굶지 말고 맛있는 것을 만들어 먹으란 얘기겠죠. 아, 하하하……." "……." 막시민은 천장을 쳐다봤고, 리체는 바닥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바이예 경은 둘을 번갈아 본 뒤 입을 열었다. "나와 장난을 하자는 건 아니겠지. 이 편지가 정말로 아르님 공작부인으로부터 받아온 것인가?" 이 즈음 막시민도 자신이 택할 방법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단 입을 열자 내용이야 어찌됐든 얘기가 술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일개 심부름꾼에 불과한 제가 공작부인으로부터 직접 건네 받은 것은 아닙니다. 공작부인께서 임무를 내리 사람은 측근은 트리비아 부인이었고, 저는 그 분의 수행원으로 따라왔을 뿐이죠.' 트리비아 부인은 공작부인의 측근으로 격상되었다. "하지만 하이아칸 국경을 넘기 직전, 저희 일행 모두가 정체 모를 자들에게 둘러싸여 도리 없이 몸값을 요구받게 됐습니다. 그 때 트리비아 부인께서 한 사람을 풀어주어 편지를 정하도록 하지 않으면 몸값도 받을 수 없을 거라고 설득하여, 저만이 이곳으로 오게 된 겁니다. 아마 그 자들은 산적 생활을 하는 몰락한 레코르다블 용병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만, 어찌됐든 당시 워낙 긴박한 상황이었는지라 그 과정에서 산적들의 농간으로 편지가 뒤바뀌었을지, 그것까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막시민은 갑자기 자신만만한 눈으로 바이예 경을 주시했다. "본디 그 편지는 공작부인께서 반드시 소공작 아르모리크 경께 전하라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소공작을 모시고 걔시다는 이유로 경께서 독단으로 뜯어보셨으니 무척 당혹스럽습니다. 주위 부하들 보기에도 좋은 예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이예 경은 새로운 의혹이 깃들인 눈초리로 막시민을 보았다. 먼지투성이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심부름이나 하는 제게 공작부인의 편지 내용을 논하라 하는 것도 무리한 말씀입니다. 공작부인의 심중을 꿰뚫어 볼 정도로 총애 받는 처지가 못되어 도무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지만 편지 내용이 어찌 되었든 소공작을 이 자리로 오시도록 청해 그 편지를 전하는 모습을 제게 보여 주십시오. 그것을 보아야만 제 임무가 완전히 끝나는 것이고, 이후 공작부인께 돌아가 이 상황에 대해 말씀드릴 수도 있을 테지요." 이야기는 말이 되는 듯도 하고 안 되는 듯도 했지만, 완전히 거짓말로 몰기엔 미묘하게 납득이 가는 점도 있었다. 더구나 먼지투성이 소년이라 해도 공작부인의 사자로서, 또는 그의 대리인으로서 왔다고 주장하니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무턱대고 거짓말쟁이라고 윽박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전할 테니 너희는 돌아가도록 해라." "안 됩니다. 차라리 제가 직접 전할 테니 편지를 돌려주십시오." "나를 신뢰하지 못하겠단 말인가?" "임무를 다하려는 것뿐이죠.' 그 때 문밖에서 부관처럼 보이는 사람이 달려와 바이에 경에게 다가가더니 귀엣말을 했다. 고개를 끄덕인 바이에 경의 표정이 바뀌었다. "물러가라. 너희와 실랑이할 시간이 없다." 그러자 상황이 변했음을 직감한 막시민도 역시 표정을 싹 바꿨다. "그러신가요? 아르님 가문과 관련된 일을 소공작의 의사를 알아보지도 않고 경께서 독단으로 경정하시겠단 건가요? 제가 돌아가 공작부인께 경께서 소공작을 어떤 식으로 모시는지 그대로 전해드려도 되겠습니까?" 바이예 경은 약간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소공작께선 지금 몸이 불편하여 쉬고 계시다. 이런 일에 일일이 나오시게 하겠는가." 막시민은 눈을 반쯤 감은 채 줄줄 읊기 시작했다. "그렇다 해도 최소한 소공작께 사람을 보내어 나오실 것인지 의견을 여쭙는 게 순서가 아니겠습니까? 그게 아니면 제가 직접 가서 뵙는 방법도 있지 않은가요? 저는 공작부인의 사자를 대리하는 사람으로서 먼 곳에 홀로 계시는 소공작께서 어떤 모습으로 지내시는지 직접 살펴보고 공작부인께 전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몸이 불편하시다는 애기까지 듣고 그냥 돌아설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마땅히 뵙고 공작부인께 용태를 자세히 전하는 것이 그 댁의 은혜를 받는 자로서 당연한 도리 되겠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소공작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만 듣고 돌아가 공작부인께 안색조차 설명드리지 못한다면, 그 분의 크나큰 심려는 어찌 감당하시렵니까? 공작부인은 물론, 공작께서도 기뻐하시리라 보십니까? 비단 저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신중히 생각해 보시지요." 우선 노골적인 협박을 천연덕스럽게 입에 담더니, 자기가 방금 만든 사실을 입에서 나오는 대로 부풀려 놓는 모습에 구경하던 리체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 말은 물론… 그렇지만……." 대답이 궁해진 바이예 경이 위엄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그 때, 갑자기 접견실 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와락 열리고 한사람이 들어오자 병사 몇이 따라 들어오며 막고자 했지만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듯 말로만 제지할 따름이었다. "무슨 소리인가?" 그 틈을 타 리체가 막시민에게 속삭였다. "왜 나한테 편지 내용에 대해 말하라고 떠넘긴 거야?" "나도 너와 비슷한 말밖에 할 얘기가 없더라고." "그럼 네가 하면 되지 왜 날 바보 만드니?" "바로 그거야. 탐정이 바보가 되어선 곤란하잖아. 조수가 할 일이란 게 뭐겠어?" 그런데 바이예 경이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도련님이 어떻게 여기까지……." 햇빛을 등져 얼굴이 보이지 않던 사람은 조슈아였다. 그러나 그는 바이예 경의 존재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곧장 홀을 가로질러 뛰어오더니 뒤를 돌아보는 막시민을 덥석 껴안았다. 상대가 먼지와 땀으로 뒤범벅된 상태란 것쯤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아아, 정말로 와 줬구나!" 막시민은 '안도의 미소'가 변질된 결과 생겨난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 손은 일단 놓으시고." 소공작이 아래에 서 있으니 바이예 경도 도리 없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뛰어내려와야 했다. "어떻게… 아는 사이이십니까?" 그제야 조슈아는 바이예 경을 돌아보더니 어깨를 으슥하며 양팔을 벌렸다. 조금 거만하게 보이지 않나 싶을 정도로 거침없는 태도였다. "아, 내 소꿉동무고, 또 가장 좋아하는 친구란 말입니다. 불렀으면 진작에 기별을 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도대체 뭐가 어찌된 건지 모르겠네. 당신도 갑자기 나타나더니, 이젠 막시민까지 오다니, 모두 나를 놀라게 해 주려고 작정했어요?" 그러더니 바이예 경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막시민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분은 바이예 경으로 아버지의 친구나 다름없는 분인데, 내가 몸이 아픈 것 같다고 별장 안에 따로 쉴 곳을 마련해 줬지. 우리 그곳에 가서 밀린 얘기나 실컷 하자." "잠깐, 도련님……." 조슈아는 바이예 경이 무슨 말을 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여기 나와선 안될 까닭이라도 있나요? 이 별장은 어머니 소유로 알고 있는데 내가 돌아다니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단 건가요? 친구를 초대하는 것까지 참견을 받고 싶진 않군요." 그 때 막시민이 조금 전과는 완연히 달라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그럼 함께 가시지요. 공작부인께선 소공작께서 어찌 지내시는지 무척 궁금해하고 계시고, 저도 소식 전해드릴 것이 많답니다." 바이예 경이 마땅히 말릴 말이 없어 입맛 쓴 표정만 짓고 있자 조슈아는 리체를 흘끗 봤다. 분명히 구면이지만, 그런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마치 낯선 귀족 영애를 대하듯 유연한 태도로 말했다. "어수선한 꼴을 보여 드렸군요. 아가씨께서도 일행인 듯하니 함께 가실까요?" 리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 속으로 '누가 뱅 아니랄까봐'라고 뇌까렸다. 세 사람은 나란히 걸었지만 예상 밖으로 조슈아가 있던 후원에 이르기까지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바이예 경 앞에서는 과장된 태도로 반가워하던 조슈아도 마찬가지로 말이 없었다. 아까 따돌렸던 병사가 있던 곳─병사는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을 지나쳐 드디어 아무도 보지 않을 뜰에 이르자, 앞장서서 걷고 있던 조슈아가 몸을 돌렸고, 막시민은 멈춰 섰고, 둘은 마주보았다. "5년이나 안 봤다는 게 거짓말 같다." 조슈아는 웃었다. "내가 꿈에 본 것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구나." 막시민은 조금 사이를 두고 얼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고귀한 소공작이라는 녀석이, 공기 좋고 물 좋은 휴양지에서 살면서, 어떻게 5년쯤 더 있다 찾아왔으면 무덤에 가서 재회해야 될 거 같은 꼴을 하고 있냐?" "뭘, 가출 소년의 피폐한 인생 같은 거야." 막시민은 대답 없이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다섯을 셀 정도, 그리고 다시 조슈아를 훑어보더니 핵심적으로 논평했다. "이젠 업고 다니지 않아도 되겠구먼." 조슈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업고 다녀?" "그래 빌어먹을, 비쩍 마른 주제에 무지하게 무겁더구만, 매끼 금덩어리라도 먹었냐?" 이와 같은 대화는 조금 전 과장되게 껴안고 어쩌고 하던 모습이 도무지 상상되지 않을 정도로 단순한 재회로서, 리체가 보기엔 엊그제 헤어졌다가 만난 것이 아닐까 의심쩍었다. 그러다가 참, 정말로 엊그제 헤어졌군, 하고 생각을 정정했다. 둘은 반가움의 표시로 악수를 나누는 대신 한족은 팔짱을 끼고, 다른 하나는 손가락을 디밀려 잔소리를 퍼부어 댔다. "그럼 넌 환자가 깨어나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나쁜데 내버려두고 나가서 볼일이나 보고 왔단 말이야?" "넌 네 친구란 놈의 본질도 모르냐? 내가 의사도 마법사도 아닌데 거기 붙어 앉아서 뭘 해? 병간호 따위 잘 할 것 같았냐?" "아, 잘못 봤어. 난 내 친구가 날 걱정하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아아, 한심한 인생, 하나밖에 없는 친구라는 자한테 기대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럼 질질 짜며 신파라도 펼칠 줄 알았냐!" 조슈아가 대답 없이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에 겨우 리체가 끼어들 틈이 생겼다. "아아, 두 사람이 친구란 건 잘 알겠어. 그런데 그 얘기가 내가 여기가지 와야 한 기막힌 상황과 언제나 연결되긴 하는 거겠지?" 두 소년이 동시에 리체를 돌아봤고, 둘 다 상대에게 리체를 소개했다. "나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재봉사야." "미녀라고 우겨대는 조수 되겠다." 그리고 동시에 똑같은 말을 상대에게 되물었다. "뭐라고?" 리체는 기분 나쁜 표정이 되어 둘을 한 차례씩 흘겨봤다. "핵심을 비켜 가는 헛소리만 할거야? 당신들을 몰랐더라면 평화로웠을 내 인생을 망가뜨린 장본인들, 잔소리 그만하고 해결책에 대한 얘기나 해봐요. 아니면 해결 방향으로 가는 길이라도 보여달라고, 그 극장에서부터 지배인 아저씨 잭, 당신 집, 별장 골목을 헤매고 그리고 여기까지, 빙빙 도는 것도 정도가 있는 거야. 나도 집에서 걱정하는 가족이 있는 사람이라고. 나 같은 소녀가 하루 반나절 넘게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다는 상황이 걱정스럽지도 않나요?" 리체의 반말과 존댓말이 뒤섞인 이야기를 의아한 표정으로 듣던 조슈아가 막시민을 봤다. "이게 무슨 얘기야?" 막시민은 이마에 손을 얹으며 다시 하늘을 쳐다봤다. "말하자면 좀 길다." 조슈아는 이번엔 리체 쪽을 돌아봤다. "내가 몽플레이네 양의 인생을 망가뜨렸다는 게 무슨 얘깁니까?" 리체는 미간만 찌푸릴 뿐 잠시 말이 없었다. 이 일이 처음부터 조슈아 때문에 생긴 것은 확실한데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니 책임을 묻기가 좀 곤란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누군가가 당신을 죽일 셈으로 일부러 극장에 사고를 일으켰는데, 당신 친구와 내가 어쩌다 보니 당신을 구해내게 됐고, 그 과정에서 당신을 죽이려던 정체 모를 인간이 달아나 버렸기 때문에 얼굴이 노출된 나나 당신 친구는 자칫하면 증거 인멸을 위해 희생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 그 말이에요." 옆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막시민이 한 마디 던졌다. "오, 꽤 솜씨 있는 정리인데." "씨끄러워, 누가 칭찬해 달랬어?" "가끔씩 조수를 칭찬하는 것도 꽤 중요한 일이라고." 조슈아는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거침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둘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사람, 언제부터 아는 사이였어?" "어제였나." "그저께야." "…그런데 되게 친해 보이네." 그러자 둘은 동시에 같은 반응을 보였다. "틀려!" "무슨 소리예요!" 조슈아는 양쪽 입꼬리를 내리며 이상한 표정을 짓다가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한참 동안 기분 좋게 웃는 소리를 듣던 리체는 결국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위기 의식이라고는 없는 건가요? 누군가가 당신을 죽이려고 했다는데, 그게 믿을 만한 얘긴지 묻지도 않고, 어찌된 사정인지도 따져보지도 않고, 게다가 놀라거나 겁내지도 않으니…. 잠깐, 내 애기가 다 농담으로 들렸어요?" "아니, 아니에요. 그렇게 받아들여졌다면 미안해요. 하지만……." 조슈아는 막시민을 흘끔 보더니 다시 미소를 지었다. "죽고 어쩌고 하는 얘기는 좀더 들어봐야겠지만 말이죠. 한 사람의 지위가 소공작쯤 되면 가만히 있어도 없애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잔뜩 생긴답니다. 뭐, 막스 카르디로서도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으니 가능성은 두 배일까요. 아, 그러고 보니 굉장히 위험한 상태였네." "이것 봐, 조군." 막시민은 드디어 지금가지의 모습을 접고 다소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내 얘기를 좀더 듣는다면 그렇게 단순한 생각으로 넘어갈 순 없게 될 거다. 난 네가 네 아버지 친구라는 바이 뭐라는 기사를 대하는 걸 보고 좀 눈치챈 게 아닌가 했는데, 내 착각이었냐." 조슈아는 막시민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래, 내가 보호받고 있는 게 아니라 갇힌 거란 사실만은 확실히 알고 있어. 이곳으로 오게 된 사정도 석연치 않았고, 바이예 경의 갑작스런 등장 또한 이상한 일이지, 하지만, 글쎄……." 갑자기 막시민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고작 그 정도밖에 느끼지 못했단 말이냐? 데모닉이란 이름이 아깝다. 내가 뭣 때문에 바보 같은 짓을 해가며 여기 들어와 너를 만나려고 기를 썼다고 생각하냐? 내가 보기엔 넌 오늘 밤 살해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에 놓여 있어. 그 점에서는 나도, 저 여자애도 마찬가지지." "이것 봐……." 리체가 입을 열려 했지만 막시민은 다음 이야기를 단숨에 이어 해버렸다. "그것도 네 아버지 친구라는 저 바이 뭔가 하는 기사의 손으로 말이다." "……뭐라고?" 조슈아의 얼굴이 한 순간 석고처럼 굳는다 싶었다. 회색 머리카락조차 잠시 흔들림을 멈춘 듯했다. "막시민, 난 너를 친구로서 뿐 아니라 판단력으로도 믿지만 지금 얘기는 섣부른 것 같다. 넌 바이예 경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알아. 그는 아버지를 십 수년간 모셔온 신중하고 충성스런 사람이야. 어린 나를 무등태워 켈티카 거리를 구경시키던 사람이라고, 그에겐 내 또래의 자식도 있어. 그런 그가, 우리 집안이 멸망한 것도 아닌데, 나를 해칠 거라고?" 조슈아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막시민은 의견을 굽히거나, 상대를 달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직설적으로 말했다. "내가 너 같은 환경에서 자라왔다면 이 나이 되도록 너처럼 생각하고 있진 않을 거다. 어렸을 때의 통찰력은 전부 어디다 내다버린 거냐? 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을 것 같아? 네가 그 사람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이 아닌 한 맹목적으로 믿는 것은 오히려 상대를 가소롭게 본다는 의미밖에 안 돼. '충성' 같은 단어는 뭐, 이마빡에 붙이고 태어나는 거냐? 상황을 봐. 내가 설명 안 해도 네 좋은 머리로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눈에 보이는 것만 보라고, 더도 말고 딱 1분만 생각해 봐라. 그래도 헛소리로 들리는지." "……." 정말로 조슈아가 입술을 꾹 다문 채 말이 없자 막시민이 비웃는 득한 어조로 물었다. "비극적 낭만주의자, 연산(演算)은 끝났어?" 리체는 뜨악한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조금 전 반가워하던 모습은 간 데 없고, 냉소적이다 못해 싸우려는 게 아닌가 싶은 대화를 듣자니, 더욱 성격을 종잡을 수 없는 친구 사이였다. 하긴 평민처럼 보이는 소년과 소공작이 친구라는 것부터 괴상한 일이었다. 한참만에 조슈아가 여전히 굳어진 어조로 말을 뱉었다. "그래도 난 인정할 수 없어. 무엇보다도 우리 집안은 아직 건재해. 이곳에서 내가 사라진다면 분명 얼마 안 가 아버지가 나를 찾게 될 테고, 마음먹고 뒤진다면 다른 곳도 아닌 어머니 소유 별장에서 일어난 일이 아버지의 정보원들에게 들어가지 않을 리가 없지. 내가 죽었다는 것이 알려지고 나서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는 것은 수일이면 충분할 거야. 그렇기 때문에 바이예 경과 같은 사람이 이렇게 무모한 계획을 세웠단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 그는 아버지의 힘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들 중 하나야. 그가 마음이 변할 수는 있겠지만, 갑자기 바보가 될 순 없지." "틀렸어." 냉소였지만, 자기 입맛도 쓴 이야기였다. "전제가 틀렸어. 네가 죽었다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아. 네 아버지는 물론, 누구도 모를 거라고, 다들 네가 살아 있는 줄로만 알고 있게 돼. 별장의 그 부인이 이미 한패거리라는 것은 덤으로 말해 두도록 하지. 넌 이미 켈티카로 돌아가, 심지어 비취반지 성에서 지내고 있는 걸로 돼 있어. 무도다 그렇게 알고 있다고, 너희 부모님조차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나는……." 조슈아의 목소리가 불현듯 떨려 나왔다. 막시민은 조슈아의 속을 꿰뚫어 보려는 것처럼 눈동자를 뚫어져라 들여다봤다. 그리고 가차없이 잘라 말했다. "비취반지 성이, 이미 너와 똑같은 놈이 존재하고 있단 말이다." 성 그림자가 늘어진 서쪽 벽을 따라 유령처럼 걷고 있는 자가 있었다. 성을 둘러싼 환형의 숲은 잠잠했고, 연옥(軟玉)의 빛을 냈다. 깊이 들어가자 점차 방향 감각이 흐려졌다. 성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도 때로 길을 잃는 숲에선, 해조차도 계곡처럼 골진 수십 개의 첨탑들 속으로 졌다. 머리 위로 늘어진 나뭇가지를 젖히고, 풀잎 사이에 놓은 돌을 디디며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댓잎처럼 갸름한 발이 스쳐간 곳에서 풀은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찾던 장소가 나타났을 때 그는 잠깐 동안 숨을 깊이 들이쉰 다음, 발을 들여놓았다. 어려서 입구처럼 여겼던 두 그루의 잘 자란 나무는 어느새 고목이 되어 가는 중이었다. 그 땐 참나무로 둘러싸이고 볕이 잘 드는 둥근 빈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기억에 비해 초라할 정도로 작은 풀밭일 뿐이었다─걸어 들어가자 그제야 바람이 불며 풀이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그는 풀밭 가운데 주저앉았다가, 누웠다.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는 아들과 한나절이나 마주앉아 배 모형을 만들고, 아무도 없는 숲으로 단 둘이 소풍가서 나무 검을 휘두르며 기사들의 결투법을 가르쳐 주던 사람이었다. 때로는 전쟁도 했는데 아들의 요새는 오래되어 속이 벌어진 떡갈나무였고, 아버지의 성은 샘터의 회색 바위였다. 아버지가 깎아준 검, 활, 아들이 만들어낸 새총과 무척 잘 그렸던 깃발, 세 시간이나 걸려 판 허방다리 같은 것들로 이루어진, 어머니와 누나가 모르는 비밀 놀이터. 아직도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가 아직 아이라는 걸 증명하는 것밖에 안됐을 테지. 떡갈나무와 샘터의 바위는 멀지 않은 곳에 있겠지만 일부러 찾아갈 마음은 없었다. 또다시 기억보다 초라한 현실을 확인하러 가느니 그냥 이대로 누워 바람을 맞으며 짧은 낮잠을 자는 쪽이 좋을까. 그러나 스스로 알지 못하는 원죄는 이미 저질러져, 그가 꿈을 맛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돌아오너라." 그를 부르는 소리였다. 방향도 없이, 그러나 귓전에서 말하듯 생생했다.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섰다. 영문도 모른 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목소리에 온 몸으로 응답하고자 하는 자신에게 당혹해 있었다. "너에게 명령한다. 내가 널 부르고 있다." 작은 풀밭은 사라졌다. 어린 시절의 작은 낙원으로부터 한 순간에 끌어내어져, 지옥에서 부른 소리를 들은 듯 얼굴이 붉어지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러면서도 왜 자신이 울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의 기분이 어떻든 목소리는 끈질기게 귓가에 따라붙었다. 한때 이런 식으로 말을 걸곤 했지만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떠나버린 친구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강압적인 어조로. "지금 당장 그곳을 떠나, 내가 있는 곳으로 와라." 다시 한 번 불렀다. "조슈아." 4막 Initial 1. 그림자가 움직이다.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아. 당신도 마찬가지일 거야. 왜 우리가 서로 칼을 겨눠야 하지?" "아니, 당신이 잘못 생각했어, 난 싸우고 싶어." 욕조에 받아 놓은 물은 흡족할 만큼 따뜻했다. 여름이 다가오거나 말거나, 계절에 관계없이 그녀는 뜨거운 물 목욕을 좋아했다. 며칠 동안 집안에서 은둔하다시피 하면서도 밤마다 물을 데우게 하는 통에 애꿎은 하녀만 불을 때느라 비지땀을 흘렸다. 장미꽃을 띄운 물에서는 싱그러운 냄새가 났다. 정찬 한 번 마칠 정도의 시간을 나무통 속에서 보내는 동안 그녀가 부르는 콧노래 소리가 응접실까지 들렸다. 하루 종일 시달린 하녀는 수건을 마련해 놓고 해방되어 자러 갔기에, 달리 깨어 있는 사람은 없었다. 물이 서서히 식었다. 목욕이 끝나면 따끈해진 몸으로 얇은 이불에 묻혀 열 시간 정도 잘 계획이었다. 날마다 진한 화장을 하면서도 피부를 곱게 유지하려면 긴 잠이 최상의 대책이니까. 그 계획은 정확히 도입 단계에서 끝이 났다. "오래 기다리게 하는군." 졸음 때문에 반쯤 감긴 눈으로, 가운만 걸친 채 응접실을 가로지르던 참이었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목소리에 여자는 기절할 것처럼 놀랐다. 그러나 비명은 목구멍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입은 벌어졌지만, 소리는 없었다. 비단 수건이 그녀의 목을 휘어 감아 졸랐던 것이다. 여자는 눈을 부릅뜬 채 어둠 속어세 사람의 윤곽이 일어나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빛이라고는 그녀가 방금 떨어뜨릴 뻔하다가 간신히 쥐고 있는 세갈래 촛대 뿐이었다. 다가온 자는 그녀의 손에서 촛대를 받아들더니 심지를 돋워 옆의 탁자에 놓았다. 모든 동작이 자기 집에서 익숙한 집기를 다루듯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다.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낯선 남자의 얼굴. "생애 마지막 묙욕이라 아량을 갖고 기다렸는데 말이야. 하마터면 잠이 들 뻔했다고." 잠이 들 뻔한 얼굴로 보이진 않았다. 남자는 키가 컸고, 눈초리가 약간 치켜 올라갔으나 그것말고는 사나울 것 없는 생김새의 소유자였다. 다만 인상적인 것은 그의 오른손이었다. 왼손이 평범한데 반해, 오른손만은 보통 사람의 손을 자기 손바닥 안에 감춰버릴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두터웠다. 그 손으로 하얗고 축 늘어진 천 같은 것을 들고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 여자의 목에 수건을 감아 쥔 자는 등 뒤에 서 있었다. 숨통을 틀어막지 않고, 그러나 말은 할 수 없게, 상당히 노련하게 강도를 조절하고 있던 그 자는 손이 큰 남자의 눈짓을 받고 수건의 조임을 약간 풀었다. "누구야!" 목소리는 나왔지만, 감탄할 만한 조절에 의해 짓눌려 속삭이는 정도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당신을 천국으로 안내할 사람." 그렇게 말하더니 남자는 웃었다. 비열한 웃음은 아니었고, 그냥 자기가 한 농담에 웃는 평범한 사람 같았다. "나를… 왜……?" "봐선 안될 것을 봤거든." "난… 아무 죄가 없어……." "아, 나도 당신과 같은 의견이야." 커다란 손을 가진 남자는 여자가 방금 나온 욕실로 들어가 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 그 안에 흩뿌렸다. 가루같은 것이 떨어지는 것 같더니, 이윽고 따그락 거리는 소리가 나무 욕조를 울렸다. 끝이 끊긴 진주 목걸이의 잔해, 그리고 한 개의 보석 반지였다. 이윽고 욕실 입구에 나타난 그 자가 두 손을 벌려 보았다. "자, 다시 욕조에 들어가는 것을 제안하지." 영문도 알지 못한 채 모든 것이 끝나려 하고 있었다. 여자는 최대한 발버둥쳐 보려고 했다. 그러나 다시 목의 수건이 강하게 조여왔고, 동시에 가눌 수 없을 정도로 팔다리의 힘이 빠져버렸다. 비록 그렇지 않았다 해도 그녀를 잡고 있는 자는 여자 손목 정도는 손쉽게 꺾을 수 있을 것 같은 억센 팔뚝을 갖고 있었다. "좋은 꿈 꾸다 보면 저절로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데 왜 그래." 결국 저항은 소용없었다. 여자는 번쩍 들리다시피 해서 욕조에 쳐넣어졌다. 그 말 외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남자의 커다란 손이 식은 목욕물에 잠겨 부르르 떨고 있는 여자의 왼쪽 손목을 가볍게 건져 올렸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반짝이는 것이 손목을 긋고 지나갔다. 새빨간 덩어리가 물 속으로 뚝, 떨어지고야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또렷이 알 수 있었다. "으읍……." 이제 비단 수건은 그녀에게 대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수많은 대사를 말해왔기에 생애 마지막 순간, 대사 없이 가게 될 거란 생각은 해본 일도 없는 그녀였다. 툭, 툭, 툭, 계속해서 떨어진 핏방울이 미지근한 물 속에서 털실처럼 풀려갔다. 남자가 손을 놓자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버르적거렸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 났다. 남자는 벽장을 열어 크리스탈 그릇에 든 장미 꽃잎을 꺼내더니 사방에 흩뿌렸다. 욕조에, 욕실 바닥에, 커튼에, 다 뿌리고 나서는 묻지도 않은 설명까지 해 주었다. "치정 살인으로 보여야 되거든." 조금 후, 목을 조르던 남자는 비단 수건을 놓았다. 이미 여자는 천국으로 가는 잠에 빠져 있었다. 커다란 손을 가진 남자는 조금 전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이윽고 펼쳤다. 그리고 자기 얼굴에 대어 보았다. 선세하게 생긴 흰 가면이었다. 다른 남자가 먼저 나가고 가면을 손에 쥔 그는 마지막으로 커튼을 들추고 가려다 돌아보며 친구에게 말하듯 짧게 인사했다. "안녕, 뮤치아 베네벤토." 새벽 3시경이었다. 때아닌 불빛들이 골목 곳곳을 비췄다. 사방으로 흔들리며 그림자를 훑고 가는 수십 개의 관솔부리이었다. 다시 말해 추적자들이었다. 동시에 소리도 일어났다. 고급 별장들이 밀집해 있어 보통 사람들은 접근하지 않기에 이 즈음이면 바다 밑처럼 고요하던 곳이다. 좁은 길을 달리는 백여 명 사람들의 발소리에 밤잠을 설친 귀족과 왕족 어르신들이 짜증을 내며 하인들을 깨워 내보냈고, 덕택에 소란은 점점 커졌다. 반시간 가량 지나자 일대는 한낮에도 듣기 힘든 갖가지 소음과 외침소리로 가득 찼다. 대략 이런 식이었다. "남쪽 거리로 나가는 골목은 모두 막았나?" "네놈들은 다 누구냐!" "3조는 켄트 백작의 별장이 있는 모퉁이까지 완전히 봉쇄했습니다!" "내가 어느 댁 사람인지 알고 이러는 거야?" "이 이상 참견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요!" "우리 마님께서 당신들이 누군지 똑똑히 알아 오라고 하셨단 말요!" "조금 전 보고했던 수상한 그림자는 놓쳤습니다." "당신들을 모조리 붙잡아 오라는 위대한 렘므 왕국의 존엄한 악소렘므 3세 폐하의 오른팔이신 고귀하신 크리오펠 후작께서 명령하셨소이다!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어려서부터……." "북쪽 옹벽 근처에는 쥐새끼 한 마리 없… 아니, 하인들로 보이는 자들이 몇 명… 아니, 정체를 모를 자들이 수십 명 배회하고 있습니다!" "…덧붙여, 그들 모두가 적대적입니다." 추적자가 곤경에 처했다는 건, 도망자들에게는 상황 호전을 의미했다. 물론 저절로 굴러 들어온 행운은 아니다. 이 날의 도망 계획을 세운 명목상의 리더는 탈출 여건 개선의 행운 같은 게 거저먹기로 떨어지리란 기대는 철도 들기 전에 접었다고 하는 바람직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계산 밖의 일이란 건 항상 있는 거지만, 불시에 찾아오는 행운보다 불시에 닥치는 악운 쪽이 몇 배로 많다는 거야말로 세상 이치야. 그런 관점에서 항상 최악의 사태를 대비하는 자세가 좋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 막시민은 남의 집 지붕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으면서도 평소처럼 양손을 좌우로 펼쳐 보이며 주절주절 떠들었고, 그리고 뒤따라 걷고 있는……. "그런 자세야 물론 좋겠지, 네가 오늘의 일을 모조리 계획한 것처럼 떠들어대지만 않으면 돼." 리체는 속썩이던 치마 차림을 조슈아가 입던 옷으로 바꿔 입고 모자까지 눌러써서, 모자 뒤로 펄럭거리는 머리카락만 빼면 영락없는 사내애 모습이었다. 막시민은 물론 반박하려 했다. "내가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신중하게 골랐다는 말을……." "믿으라는 건 아니겠지?" "믿으라는 거다!" 물론 둘 모두 큰 소리를 지르진 않았다. 둘이 끊임없이 떠들고 있는 것에 반해 맨 끝에서 걷고 있는 조슈아는 말이 없었다. 막시민은 따라오고 있나 확인하는 것처럼 뒤를 흘끔 돌아보더니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 식으로 지붕 몇 개를 뛰어넘어 포위망 밖으로 추정되는 골목이 내려다보이는 곳까지 왔다. 막시민이 먼저 어느 집의 2층 테라스 난간, 마구간에 면한 담, 그리고 일부러 갖다 놓기라도 한 듯 쌓여 있는 짚더미를 차례로 밟으며 뛰어내렸다. 캄캄한 가운데 코르 자락이 펄럭이며 내려앉았다. 몸을 수그린 채 주위를 살폈다. 그런 다음 지붕을 올려다보며 내려오라고 손짓했다. "어머, 여기였잖아?" 어려서 뭘 하고 놀았는지, 사내애 못지 않은 솜씨로 간단히 뛰어내려 온 리체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놀란 듯 중얼거렸다. 그곳은 리체와 막시민이 조슈아가 있을 거라고 추리한 별장으로 가기 직전, 막시민의 주장으로 어느 마구간에선가 빼내어 영문도 모르고 쌓아 놓았던 짚더미였던 것이다. "정말로 어제부터 계획했던 거야? 이쪽 길은 어떻게 알았어?" "여기 지도를 그려준 사람은 너였다고 기억되는데." 그렇다면 지금 소란이 일어나 들키지 않고 달아날 수 있었던 것까지 정말 막시민의 계획이었을까 싶어 리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막시민은 조슈아가 내려오는 것을 확인하고 몸을 돌리려다가 생각을 바꾼 듯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은 깊게 생각하지 마." 조슈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막시민은 다시 한 번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결국 도로 멈췄다. "그래. 어쩔 수가 없겠지. 쓸데없이 좋은 머리를 갖고 있다보면, 몰랐으면 좋겠다 싶은 것까지 저절로 알게 되어 불편하겠지. 이미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웬만한 가능성들에 대한 계산이 다 끝났을 거란 것쯤은 나도 짐작하고 있어. 다만 믿기 싫은 것뿐이겠지. 그런 종잇장 같은 마음을 하고 있어선 작정하고 잘려드는 녀석한테 단번에 찢겨 버릴 거다." 그제야 조슈아의 입이 열렸다. "백 개의 나쁜 가능성, 단 하나의 좋은 길, 그렇더라도 하나를 무시해도 좋은 건 아냐. 누군가를 마음으로라도 해치는 결론이니까 신중할 수밖에 없어." 막시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종이 갑옷이나 갖고 있는 주제에 지금 남 걱정하냐? 길을 걷는데 낯선 놈이 내 주머니에 손을 넣더라, 그러면 단번에 나오는 답이 뭐냐? 애당초 길가는 녀석이 내 주머니에 돈을 넣어주고 갈 가능성이 높겠냐, 털어 갈 가능성이 높겠냐? 이따위 말이 필요 없는 문제 갖고 정말로 논쟁해야 되냐?" "논쟁의 문제가 아냐. 가치 판단은 토론해서 결정되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니까. 백 명의 의견이 일치했다고 해서 명작이 졸작 되는 거 아니고, 빨간 색이 파란 색 되는 거 아니야. 내가 좀더 생각하도록 내버려 둬." "……." 막시민은 더 말할 가치를 못 느꼈는지 휙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 골목을 벗어났을 즈음, 앞서 걷던 막시민의 앞에 낯선 사람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막시민과 그 자는 눈이 딱 마주쳤고, 다른 둘은 그 자리에 못박힌 듯 멈춰 섰다. 그리고… 막시민은 다짜고짜 이렇게 외쳤다. "젠장. 지금이 도대체 몇 시야! 이놈들이 누군데 우리 어르신의 잠을 방해하는 건지 알 수가 없네! 이런 놈들은 모조리 붙잡아 감옥에 쳐넣어야 된다니까! 짜증스런 얼굴을 하고 있던 상대방은 바로 맞장구를 치며 반색했다. "오오, 당신 생각도 그렇지? 어느 댁 사람인가? 난 메이모 백작부인 댁인데." 순식간에 발휘란 기지가 다행히 통하자 리체가 호르르 한숨을 내쉬었다. 막시민은 태연스레 대꾸했다. "아, 난 코츠볼트 백작 댁이지." 시골 동네 고향이 멋대로 백작령으로 격상되는 순간이었다. 하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못 들어본 것 같은데…. 하여간 날파리 같은 놈들을 어떻게 한다지?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아, 있고말고, 나도 지금 그러고 있는 중인데 말야. 우리 아랫사람들끼리 힘을 합쳐서 저 뭔지 모를 놈들이 보이는 족족 적당한 댁으로 데려가 가둬버리잔 말이야. 내일 아침이 되면 주인 어르신께서 아주 타당하고도 앞 뒤 적절한 조치를 내려 주시지 않겠어?" "그런 식으로 해도 괜찮을까?" "괜찮을까, 가 아니고 오히려 반대라고! 만약에 이 놈들이 날이 밝기 전에 모조리 어디론가 도망쳐버리고 나면, 내일 아침의 불벼락을 고스란히 맞을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쯤에서 소란이 그치게 된다 해도 일단 한 놈이라도 잡고 봐야 된다는 게 내 의견이라고, 어떤가?" 거기까지는 적절했다. 하인은 과연 그럴듯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말도 일리가 있는데. 그럼 일단 자네들과 힘을 합쳐야겠군. 저쪽에 다른 친구들이 있으니 같이 가자고." 막시민은 속으로 당황했지만 어쩔 수 없이 겉으로는 반기는 체했다. "그, 그러지. 그 친구들은 어디 있지?" 그 때 갑자기 조슈아가 앞으로 나서더니 한족을 가리켰다. "저기, 저 자부터 잡자고!" 조금 전의 우울한 분위기는 간데 없고, 영락없이 분위기에 휩쓸려 신이 난 하인으로 변신한 걸 보면 가연 그는 배우였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같이 외쳤다. "저 놈 잡아라!" 네 사람은 맞은편 골목에 나타난 한 사람을 덮쳤고,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이유도 묻지 않고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상대는 뭐라 항변을 할 겨를도 없었다. 그러자 또 누군가 나타나 이번엔 그들을 공격했고, 곧장 다른 자들이 몰려와 다시 그 자들을 팼다. 이리하여 상황은 난투극으로 변해버렸다. 샌드위치처럼 포개어져 때리고 차고 하는 자들 사이로 간간이 이런 말들이 들려왔다. "씨끄럽게 구는 놈들한테 본때를 보여줘라!" "난 그 쪽이 아니야!" "변명하지 마랏!" "그쪽이 어느 쪽인데?" 그리고 거기에서 한 골목쯤 떨어진 곳에서는 최초의 3인조가 열심히 달음질쳐 잘아나는 중이었다. "하인들이 평소 쌓인 스트레스가 많았나 봐!" "한바탕 치고 받고 나면 대동단결의 장이 마련되겠지 뭐!" "잔소리말고 일단 뛰어!" 별장 지역을 벗어났을 때는 이미 새벽녘이었다. 뛰다 지친 셋은 언덕을 감사며 흐르는 작은 강이 놓인 다리를 보자, 그리로 내려갔다. 곧 교각 아래 몸을 숨기고 주저앉아 다들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여기도 안전하지 않아. 별장 골목들 수색이 끝나면 이쪽으로 몰려나올 것은 당연지사지, 그나마 하인들이 서넛 정도 잡아 줬으려나." 일직 회복된 막시민의 말이었고, "그렇게 말하자면 이 섬 안 어디도 안전하지 않잖아. 아예 섬을 탈출할 작정이라면 모르지만." 리체의 주장이었다. "그 말이 맞을지도." 막시민이 무신경하게 대꾸하자 리체는 신경질을 냈다. "난 여길 떠나지 않는다고 말했지! 너희들만 사라져 주면 난 평소 생활로 돌아갈 거라고."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나로서도 기쁘겠지만 말이야." 그 때 조슈아가 강기슭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배는 뭐지?" 다리 교각에 네댓 사람 정도 탈법한 조그마한 나룻배가 묶인 것이 보였다. 분명 다리가 놓여있는데 왜 배가 있는 건지 조슈아는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러자 리체가 혀를 차며 말해 주었다. "평민들이 쓰는 배지 뭐겠어. 이런 다리는 귀족님들 마차나 다니라고 으리으리하게 지은 거지, 우리 같은 사람들 밟아 보라는 데는 아니거든, 평소 오가는 사람 없을 때는 상관없겠지만, 어디서 한 분 행차하셨다 하면 다리 막고 한 시간도 좋고 두 시간도 좋으니 바쁜 사람은 배라도 타야지 별 수 있어?" 리체가 막시민과 대화하던 버릇 때문에 상대가 조슈아라는 것을 잊고 무심코 반말로 대꾸했지만, 곧장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조슈아 또한 막시민 때문에 어느새 착각해서 리체의 말투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자기도 반말로 말했다. "그런 건가. 내가 모를 일이 많은 세상이야. 하지만 지금은 저 배가 도움이 될 것도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손을 강물에 넣어 보았다. 강은 남서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 간은 다른 강과 합쳐지는 건가? 어디까지 가는 거지?" 리체가 얼른 대답하지 않자 막시민이 둘을 훑어보더니 조슈아를 불렀다. "난 너희 둘이 아까부터 존댓말 주고받는 게 꽤나 느끼했다. 내 비위를 생각해서라도 지금처럼 계속 말해 주면 고맙겠는데." "아, 그랬나? 그럴까?" 조슈아는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제야 리체가 소년들처럼 쓰읍, 하고 입맛을 다시고는 짧게 대꾸했다. "좀 더 내려가면 바다로 들어가." "그래? 그럼 우리 저 배를 타고 가지고." 막시민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야, 너 저 배 타고 바닷길로 아노마라드까지 가게?" "뭐? 아, 하하하… 그럴 리가 없잖아." 오랜만에 꼬마 시절처럼 얼굴을 다 풀면서 웃자 막시민도 입가에 슬쩍 미소를 올렸다. "예전부터 넌 비현실적인 소리 잘 했잖아." "아, 맞다. 막군, 내가 옛날에 바다에 가자고 했던 얘기 생각나? 누나한테 간다고 말이야." 그새 꿈꾸는 아이처럼 지껄이는 목소리를 들은 막시민은 속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한 여러 헛소리들 중 하나잖아." "기억은 하고 있네, 그런데 말야. 거기가 바로 여기였어. 이 섬, 내가 있던 별장 말야. 거기에 누나가 살았거든." "그래서?" "그러니까 정말로 같이 온 셈이 되네." 조슈아는 멋대로 자기 기분에 빠지면 상대방이 시큰둥한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녀석이기에, 막시민은 대꾸를 생략하고 그냥 어깨를 으쓱하며 나룻배가 있는 쪽으로 갔다. 밧줄을 풀어 배를 당겨 보고, 물이 새지 않는지 확인했다. 옆에서 리체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타던 배야, 라고 말해주었다. "괜찮겠지." 리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정말 저걸 타려고? 어디로 갈 건데?" "그래봤자 해안 어귀의 어딘가겠지. 뒤쫓는 패 중에도 꽤 똑똑한 놈이 있다면 배가 없어진 것도 금방 눈치채겠지만, 혹시 어디 갈만한 데 몰라? 하루 이틀 정도 숨어 있을 만한 데, 너희 집을 추궁했을 때도 네 행방을 모를 만한 곳." 리체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하나 있긴 한데, 문제는 나도 그리 가고 싶지 않은 데라는 거야." "가장 큰 문제가 그 정도라면 가볼 만한데, 혹시 다른 문제는?" "다른 문제라니?" "이를테면 돈을 받는다던가." "현실적인 지적이긴 한데, 그런 일은 없어." 막시민은 조슈아에게 타라고 손짓했다. 조슈아는 여전히 자기 생각에 잠긴 채 일어나 배로 왔다. 아마 코츠볼트에서 있었던 일 중 뭔가를 생각하는 거겠지만, 뭔지 물어볼 마음의 여유가 없는 막시민은 리체가 이물 쪽에 앉자 삿대로 강기슭을 밀며 바로 출발했다. 조슈아가 검은 강물을 내려다보며 몸을 약간 떨더니 말했다. "배를 다 타보네." 사실 배를 타는 것은 막시민도 처음이었다. 배가 너무 작아서 별 일 없을까 조금 걱정이 됐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저 비현실적인 천재가 걱정스러웠다. 막시민은 선 채로 앉아 있는 조슈아를 내려다봤다. 잠시 후 몸을 돌렸지만 결국 하고 싶던 말을 내뱉고 말았다. "네가 만일 뻔히 보이는 백 개의 멀쩡한 길을 무시하고 딱 하나뿐인 늪길로 걸어가겠다고 맘먹는다면, 넌…… 엔젤릭이다." 조슈아가 움찔하며 올려다봤다. "엔젤릭… 이라니?"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답이 들려왔다. "너희 집에선 데모닉이 천재라는 뜻이라며, 그럼 엔젤릭은 돌대가리란 뜻일게 뻔하지." 막시민이 한 말 치고는 꽤 우아하게 돌려 말한 셈이었다. 검술 사범 세자르 몽플레이네는 섬에 살고 있지만 본래 북부 오를란느 공국의 작은 산간 마을 출신이었다. 마을이라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띄엄띄엄 흩어진 산비탈의 집들은 가장 가까운 이웃을 찾아가려 해도 두 시간 이상 걸어야 할 정도였고, 겨울이 되면 한 달씩 갇혀서 지내는 것쯤은 예사라고 했다. 거기에서 세자르는 전나무를 상대로 목검을 휘두르며 자랐는데, 쓰던 목검이 부러지면 집 뒤뜰에 던져두었다가 나중에 그것을 모아 나뭇광을 지었다고 했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이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키들키들 웃어댔다. 한 녀석이 장난기를 감추지 못한 얼굴로 손을 번쩍 들고 질문했다. "그럼 요 밖의 담은 사범 님께서 격차 시범을 해서 부순 돌들을 모아 만들었나요?" "흥, 두말 하면 잔소리지!" "밖에 깔린 자갈은 그 과정에서 너무 잘게 부서진……." "당연한 소릴 묻냐?" "집터는 사실 바위산이었는데 그런 식으로 다 부숴서 닦은 거라면서요?" "더 말하면 입 아프다!" 웃음소리로 수련장이 온통 떠들썩해졌다. 세자르는 조금도 당황한 기색 없이 호통쳤다. "그렇다. 이 놈들아! 낄낄대면 어쩔 테냐? 너희가 어떤 사범을 모시고 있는지 똑똑히 알아야 돼! 일생에 이런 기적의 인간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냐?" 한 명이 숨 넘어갈 것 같은 웃음을 겨우 멈추고는 다시 손을 들었다. "뭐냐?" "들으니까 사범 님 따님이 목검을 무척 잘 쓴다고 하던데, 우리 도장에도 곧 새 나뭇광이 생기겠네요?" 아이들이 다시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세자르는 엄격하다기보다는 잘난 체 하는 또래처럼 콧대를 쳐들며 소리쳤다. "어험! 나뭇광 같은 걸 만들 리 없잖아!" "어, 아까하고 얘기가 다르잖아요?" "여긴 전나무 산골이 아니잖아? 나뭇광이 필요 없으니까 짓고 싶어도 지을 수가 없다고." 즉각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우우, 다 핑계다 핑계야." "비겁하다아! 사범 님이 꼬리 뺀다!" "꼬리 잡아라!" "포위해라!" 장난기가 발동한 수십 명의 아이들이 우우 일어나 세자르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게다가 세자르도 아이들의 장난에 호응하여 수련장을 가로질러 물통을 뛰어넘고, 손수레로 뛰어오르고, 마당 곳곳으로 달음질쳐 갔다. 몸집 큰 어른 하나와 새떼 같은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몰려다니는 통에 흙먼지가 일고 오죽잖게 시끄러운지라 이웃에서는 다 덧창을 닫고 용기 있는 몇몇은 고개를 빼며 소리질렀다. "아, 좀 조용히 할 수 없어요! 이런 나날도 하루 이틀이지,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라고!" 물론 그 자도 이미 대답을 기대하는 마음은 버린 지 오래되었으므로 조금 후 다른 이웃과 마찬가지로 덧창을 꼭꼭 닫아거는 정도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세자르는 뭉개진 채마밭은 아랑곳 않고 싱글싱글 웃으며 아이들을 모아들였다. "자, 실컷 뛰었냐?" 한 명이 아직도 잊지 않고 발그레해진 얼굴로 외쳤다. "나뭇광!" "나뭇광을 그렇게 원해?" 이번엔 여러 아이가 일제히 대답했다. "네!" "좋아, 그럼 올해의 목표를 나뭇광으로 정한다. 알다시피 부러진 목검이 필요하니 너희들이 수고해줘야 되겠다. 내 딸애는 요새 바느질해서 돈 버느라고 검을 잡을 시간이 없는 것 같으니, 열심히 돈 벌어 아버지나 먹여 살리게 내버려두자. 자, 그럼 다들 목검 가져온다! 제일 늦게 오는 놈은 나뭇광의 초석을 닦기 위해 오늘 첫 번째로 부러진 목검을 마련할 의무를 진다!" 기세 오른 꼬마 새들이 우르르 집안으로 달려가 준비해 뒀던 목검들을 쥐고 돌아올 때까지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난투극에 가까운 대련 연습이 시작됐지만, 검술 사범인 주제에 세자르는 아이들의 자세를 교정하거나 주의를 주거나 하는 일도 하지 않고 멀찍이 물러나더니 뒷걸음질로 울타지 근처까지 슬금슬금 갔다. 그리고 눈치를 보다가 잡초가 잔뜩 자란 강둑에 앉아버렸다. 5분 뒤, 이미 벌렁 누워 있었다. "날씨 참 좋구만." 세자르가 키우는 커다란 검정 사냥개가 슬금슬금 따라와 꼬리를 흔들었지만, 주인은 개와 놀아줄 생각이 없었다. 슬슬 내려 붙기 시작한 눈꺼풀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게 되고, 그리고 세 번쯤 드르릉, 소리가 울렸을 무렵이었다. "뭐얏?" 세자르는 벌떡 일어났다. 자기가 왜 일어났는지 깨닫기 위해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도는 가운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게다가 찌푸린 얼굴이었다. 세자르는 왜 일어났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뭔가에 부딪친 듯한 옆구리를 씩씩대며 문지르더니 물었다. "너 왜 여기 있냐?" 반갑다고 덤비는 개를 귀찮은 얼굴로 밀어내고 있던 리체는 일행 없이 혼자였다. 겨우 개를 진정시키고 나서 허리에 양손을 올린 자세로 머리 하나 반은 큰 세자르를 올려다보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나도 내가 원해서 여기 있는 거 아니야, 아빠." "잘 됐구나, 어서 도로 가라." "심하다구. 일껏 여기까지 왔는데, 방 하나 내주며 며칠 묵다가 가라고 할 만한 성의도 없어?" 그제야 세자르는 눈을 비비며 정상적인 얼굴을 했다. "뭐야, 방이라니? 옳지, 네 엄마랑 싸운 게지? 그랬다 쳐도 너 일하는 데는 어쩌고 이 시간에 여길 다 쫓아와?" "그까짓 일이면 오죽이나 좋게. 그런데 방은 두 개 내줘야 돼." 협상도 아니고, 협박도 아니고, 부탁도 아니고, 강요도 아니다. 빚 받아가는 사람처럼 당연하게 말했고, 대꾸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아예 살림 차리게 집을 지어 달라고 하지 그러냐?" "정말 살림 차리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스스로 말마따나 돼먹지 않은 당신 딸이 이 시간에 여기까지 쫓아왔을 땐 뭔가 사연이 있을 거란 판단이 안 돼?" 쉽사리 끝날 것 같지 않던 부녀간의 언쟁을 마무리지은 것은 강둑 아래 쭈그리고 앉아 협상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던 두 소년 중 하나였다. 막시민이 잠 부족으로 연달아 하품을 하자, 자기도 전염된 듯 덩달아 하품하던 조슈아가 불쑥 말했다. "저거 쉽게 안 끝날 것 같지?" 막시민이 대답도 하기 전에 벌떡 일어난 조슈아는 얘기가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 말라고 한 리체의 주의를 무시하고 비척비척 강둑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세자르의 놀란 눈과 리체의 당황한 눈초리를 정면으로 받으며 잠시 서 있다가 갑자기 그 자리에 엎어졌다. "어?" 그걸로 상황 종결이었다.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조슈아를 번쩍 들쳐 맨 세자르, 할 말을 잃어버린 리체, 그리고 어디선가 나타난─세자르가 보기에─막시민은 조금 후 아이들의 눈을 피해 쪽문을 통해 낡아빠진 통나무집에 들어가 안착했다. 회랑에는 붉은 등이 탔다. 그림 속에 깃들인 죽은 자들이 저마다 불꽃을 주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모두 그들이 가장 아름답던 시절에 그린 것들이라, 어찌 보면 영영 늙지 않는 요정 종족을 연상케 한다. 액자틀 속의 세계에서 화석처럼 변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림 속 사람에겐 한 가지 표정밖에 없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그림자 속에서 보면 어제와 사뭇 다른 눈빛을 쏟아낸다. 먼 곳을 바라보던 소년의 맑은 눈이, 비껴든 석양 광선 아래 피눈물 고인 눈동자로 변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보내던 젊은 부인은, 통곡을 참으며 억지로 웃는 얼굴이 된다. 그랬기에 테오는 놀라지 않고 그림을 보고 있었다. 일부러 램프를 높이 들어 비췄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라 아무도 오지 않았고, 그래서 그 가 입을 열 수도 있었다. "네 웃는 얼굴이 오늘은 화를 내는 것처럼 보인다." 대답하지 않는 그림 속 소녀가 물끄러미 시선을 보냈다. "나의 현명한 아가씨." 램프의 각도가 바뀌자, 소녀의 시선도 조금 움직였다. 칭찬에 기쁜 것처럼. "나의 이브." 그것은 회랑 맨 끝에 걸려 있었다. 아직은 이곳에 초상화를 둘 나이가 아닌데, 이제는 이곳에 있었다. 조슈아가 싫어하던 닮지 않은 초상화들 중 하나였지만 미소를 짓고 있어서 그나마 나아 보였다. 가문의 사람들은 이 초상화 앞에서 자주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조슈아도 성에서 머물던 때, 이곳을 지날 일이 있어도 일부러 고개를 돌리다시피 하며 지나쳐 버리곤 했다. 닮지 않은 초상화, 그 안의 초연한 얼굴이 살아 생전 그런 표정을 지은 일이 없는 누이가 세상을 뜨고 나서 지금쯤 짓고 있을 표정으로 느껴져서 참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테오만은 이 초상화를 좋아했다. 그가 낮에도 이곳에 서서 시간을 보내곤 하는 모습을 본 사람이 많았다. 누가 뭐라 해도 이브노아가 짧은 생애를 통틀어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한 사람은 테오였다. 아르님 공작이나 공작부인, 또는 조슈아는 그런 사실을 얼른 깨닫지 못했지만 그만은 늘 뚜렷이 자각해 왔다. 그는 누구보다도 이브노아의 많은 모습을 보았기에 그녀를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시선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초상화 속의 이브노아가 실제와 무척 흡사하다고 말해서 주위 사람들을 의아하게 한 일도 있었다. 잠시 후, 테오는 미소를 지으며 조그맣게 뇌까렸다. "네가 있는 곳으로 걸어 들어가 잠시 쉬고 싶군." 램프를 높이 들자 이브노아의 얼굴에서 미소는 사라지고 대신 묘하게 슬픈 눈빛이 자리잡았다. "그 눈은 예전에도 보여 준 일이 있잖아." "역시 혼자는 외롭지?" "네가 좋아하는 사람들 중 하나 정도는 같이 지내도 좋을 텐데." "누가 좋겠어? 나? 아니면……." 램프를 내리자 소녀의 얼굴은 어둠 속에 잠겼다. "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 "너는 아름답고 현명하니까." 램프의 불빛이 흔들렸다. 기름이 다한 모양이었다. 얼마간 흔들리다가 사그라지고, 회랑 전체에 어둠이 깔렸다. 테오는 약간 발돋움을 했다. 그림 속 어린 아내에게 짧은 입맞춤을 하기 위해서였다. 몹시 차가운 입술이었다.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될 거야. 난 아주 날카로운 칼을 쥐었거든." 돌아선 테오는 회랑의 어둠 속으로 두 발짝 걷다가 몸을 돌렸다. 손끝을 눈썹에 대고, 그만이 부르는 이름으로 인사했다. "잘 있어, 데모닉 이브노아." 2. 켈스니티 "웃지 말아 줘. 또 물지도 마. 내가 이런 모습이 되었다고 해서 다른 말로 뭔가로 변한 것은 아니야. 난 그대로 있어. 육신이 없어도 너와 네 핏줄들 곁에 있어." "나 말이야." "응?" 멍한 눈으로 구겨진 담요 자락만 내려다보고 있던 조슈아가 어느새 막시민을 보고 있었다. 막시민은 뒷머리를 문지르며 하품을 했다. 안경을 벗어 놓고 막 촛불을 끄려던 참이었다. "그 때, 내가 제발 돌려보내 달라고 아버지를 붙들고 얼마나 빌었는지 모르지?" "갑자기 언제적 이야기야?" 조슈아가 구겨진 담요를 펄럭, 하고 펴자 막시민은 재채기를 두어 번 했다. "에취! 이불은 밖에 나가서 털란 말이야." 세자르 몽플레이네가 세탁을 즐기지 않는지 이불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어쨌거나 재채기를 하지 않은 조슈아는 여전히 담요 끝에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떠나서… 돌아가지 못했던 때 말이야. 누나가 없어지고, 그 다음." 막시민도 히스파니에 노인으로부터 대강 들어 상황은 알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한 번도 그 때의 일에 대해 서오 얘기한 적은 없었다. 이미 지난 일이니 상관없다는 심정이라기보다는, 그 일에 연연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기분, 자존심 같은 것이 작용한 결과일 지도 몰랐다. 어찌됐거나, 그 때의 막시민은 무척 오래 기다렸던 것이다. "어쨌든 안 왔잖아." 의도한 것도 아닌데 토라진 아이처럼 말해버린 자신에게 또다시 기분이 상했다. "미안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 조슈아는 막시민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천천히 누워 이불 속에 파묻히더니 웅얼거렸다. "못 가서, 하지만 나도 정말 가고 싶었어. 그곳이 좋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집을 견딜 수가 없어서, 정말로 누나가 없어지고 나서 얼마간은 죽도록 집을 떠나고 싶었어. 하나 하나 보이는 것마다 날 미치게 만드는 것 뿐이고…, 지워지지도 않는 옛날 일 같은 거 떠올릴 때마다 내가 누나처럼 백치가 아닌 건. 저주받았기 때문이란 기분이었지." 막시민은 촛불을 불어 끄고, 자기도 누었다. 둘의 침대는 두 걸음 정도 떨어져 양쪽 벽에 붙어 있었다. "갑자기 옛날 얘기 같은 거 해서 어쩌겠다는 거냐. 빨리 잠이나 자라." "막군, 넌 참… 좋은 녀석이야." 난데없는 말을 듣고도 막시민은 당황하기는커녕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제발 남은 깨어 있는데 너 혼자 꿈 좀 꾸지마. 꿈은 잠들고 나서 꾸란 말야." 물론 조슈아는 막시민의 불친절한 반응에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 듣지도 못한 것처럼 말을 이었다. "네 옆에 있으면 이 세상에 있는 기분이 확실히 들거든. 네 말대로야. 널 보고 있으면 나 같은 놈도 제정신이 될 수 있을 것 같지. 그 때 너와 있었으면 훨씬 좋았을 거야. 뭘 잊을 수 없는 바에야. 싫은 생각 따위 날 겨를도 없도록 다른 생각에 빠져 있어야 되는데." 대답 없이 뒤척이는 소리만 났다. 하여간 둘 다 자기는 주관만은 확실한 녀석들이라 상대가 뭐라든 요지부동이었다. "그런데 그 때 날 도와준 사람이 있었어." 다시 침묵 "그 사람을 지금 소개하고 싶은데." 겨우 대답이 들려왔다. 이미 반쯤 잠이 든 목소리였다. "나중에 해. 이 밤중에 어디서 불러오겠다는 거야." 조슈아는 천장을 향해 눈동자를 굴리다가 말했다. "이미 여기 있어." "응?" 주변은 캄캄했기 때문에 막시민이 눈을 떠봤자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더구나 안경까지 벗었으니 더더욱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뭔 소리야?" "그게 좀 복잡한데, 어차피 곧 알게 될 거야. 하여간 그 사람이 지금 너를 소개받고 싶대." "씁, 무슨 소리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잖아. 아까부터 나하고 죽 있어놓고, 갑자기 미리 약속이라도 했다는 것처럼 나오는데, 너는 네가 하는 소리가 이해 되냐?" "그건……." 조슈아는 망설이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막시민이 다시 잠들 때까지 기다리지는 않았다. "놀랄 지도 모르니 마음 단단히 먹어. 조금… 아니, 많이" 막시민은 고개를 이불에서 약간 뺐을 뿐이었다. 그래봤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은 같았지만. 그러나 조금 후, 그는 펄쩍 뛰다시피 일어나 앉으며 소리질렀다. "이게 뭐야!" 그 때, 촛불이 켜졌다. 막시민과 조슈아는 각자 자기 침대에 앉은 채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불이 켜진 촛대는 조금 떨어진 둥근 테이블 위, 둘 모두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막시민이 입을 열었다. 경직되어 쇳소리가 날 정도로 날카로워진 목소리 였다. "조금 전에… 어떤 손이 내 어깨를 건드렸어. 너는 아니야. 절대로." 조슈아는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물론 내가 아니야." "그럼 누구야!" 막시민은 겁에 질려 식은땀을 흘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뺨이 창백해질 정도는 되었다. 그 정도로 그가 놀라는 모습도 처음 보았다. 막시민은 침대 머리맡 탁자를 더듬어 안경을 찾았는데 손이 몇 번 미끄러졌다. "아까 말했던… 소개하겠다는 사람." "사람? 어디 있는데?" "사실을 말하면……." 그 때, 조슈아가 아닌, 낮선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사람이 아니지.」 그로부터 약 1분간, 주위는 침 넘어가는 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둘 다 꼼짝도 하지 않았는데, 서로를 보고 있진 않았다. 막시민은 이윽고 조슈아의 시선이 가 있는 곳을 찾아냈다. 촛대가 있는 테이블 옆, 거기에 무언가가 있었다. 다시 말해 있어야 했다. 안경을 썼지만, 흐릿한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난……." 조슈아가 다시 입을 열려 했을 때, 막시민이 가로막으며 착 가라않은, 그러나 명백히 화가 난 목소리로 허공을 향해 말했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현상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일부러 그런 거라면 재미 하나도 없으니까 장난은 그만 치라고, 소개받고 싶다고? 인사란 건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는 거야. 비록 썩은 무 같은 상판을 하고 있다고 쳐도 말이지." 그러자 막시민이 발견한 바로 그 방향에서 조금 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지만, 당신에게 얼굴을 보여줄 방법이 없습니다. 내겐 얼굴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예절을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군요. 그것 하나만은 기쁩니다.」 바다 밑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침착했지만, 약간의 운율감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농담을 재미있게 꾸미려는 사람의 가짜 태연함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얼굴 없는 상대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몇 배로 어려웠다. 그러나 막시민은 적어도 상대방이 그를 놀리려고, 또는 악의를 갖고 나타난 것 같지는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얼굴을 볼 수 없는 상대 따위를 믿을 순 없는 거다. 그 때 조슈아가 말했다. "그는 켈스니티 미드라고 해. 좀더 유연하게 소개할 방법이 없을까 궁리 해 봤는데 별다른 수가 없군. 그는…죽은 사람이야. 육신이 없으니 사람의 눈에 보일 방법이 없지." 조슈아는 막시민 곁으로 가 그의 침대에 앉았다. 그제야 친구가 어느 정도로 자제심을 발휘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막시민은 본디 뼛속까지 현실주의자였다.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믿지도 않거니와, 처음부터 관심도 갖지도 않았다. 그런 그가 갑작스런 유령의 존재를 느끼고 받았을 충격은 헤아리기 어려웠다. 누구든 보이지 않는 유령이 자기 옆에 있는 것을 알게 된다면 공포에 사로잡히겠지만, 조슈아 자신은 경우가 달랐기에 이 상황을 구체적으로 예상하지 못한 점은 있었다. 막시민은 곁에 앉은 조슈아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보이는 것 없는 허공을 노려보고 있다가 이윽고 짧게 내뱉었다. "빨리 내 신뢰를 되찾아 봐라." 조슈아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둥근 테이블 양쪽에 의자를 끌어당겨 놓았다. 그리고 별장에서 주머니에 넣어 나왔던 작은 책 한 권을 꺼내어 빈 곳이 있는 페이지를 찾아냈다. 서랍에서 잉크와 펜 한 자루를 꺼내 놓고, 그는 막시민에게 손짓했다. "여기 와서 앉아 봐." 막시민은 표정을 풀지 않았지만, 그쪽으로 옮겨와 빈 의자 하나를 차지 하고 앉았다. 조슈아는 책을 펼치고 펜을 사이에 끼워 놓았다. 그리고 막시민의 맞은편에 놓인 의자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켈스, 말하지 말고 글씨로 인사해 줘요." 스르르……. 막시민은 펜이 허공으로 느리게 날아올라 잉크를 찍고, 또 다른 힘이 보이지 않는 손처럼 책의 페이지를 누르는 것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보았다. 이윽고 펜이 종이를 긁으며 검은 궤적을 그렸다. 만나서 반갑군요. 막시민은 가차없이 대꾸했다. "난 반갑지 않군." 펜은 조금 망설이다가 다시 미끄러져 갔다. 막시민은 펜 끝을 뚫어져라 보다가 글자들이 전체적으로 왼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걸 알았다. 상대 는─물론 상대가 있다면─왼손잡이인 듯했다. 이해합니다. 죽은 사람이란 꿈 속에서나 반가운 존재이지요. "이해해 줘서 무척 고맙군 그래. 하지만 나란 놈은 머릿속이 말라비틀어져 상상력이라고는 없는 녀석이라 글자 두어 자 갖고 당신의 존재를 믿지는 못하겠는걸. 사기꾼 점쟁이들이 갖고 노는 것 중에 펜이 저절로 글씨를 쓰는 석반(石般)이란 게 있지. 난 그런 수작이 아주 웃기다고 생각해. 저 자식이 내 친구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자리 박차고 나갔을걸." 조슈아는 곁에 서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펜이 움직였다. 이번에는 길었다.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렇습니다. 무덤 가에서 슬피 우는 여인도, 죽은 사람이 관을 열고 일어나 걸어나오는 모습을 상상하고 싶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친구와 5년여름 함께 해 왔습니다. 당신은 친구의 머리가 이상해진 거라고 결론지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 귀로 내 목소리를 듣고, 당신 눈으로 내 글을 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지요. 그리고……. 막시민은 책의 여백이 다하자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가며 다른 빈 페이지를 찾아내는 것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 ……당신에게는 내가 보이지 않겠지만, 당신 친구에게는 내 모습이 똑똑히 보입니다. 막시민이 조슈아를 흘끗 올려다봤다. 조슈아가 대답했다. "그래." 다시 한 번 침묵이 흘렀다. 막시민은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손을 내밀어 빼앗듯 책을 잡아당겼다. 그 때 책은 분명히 누군가의 손에 잡혀 있다가 빠져나온 느낌을 주었다. 동시에 펜이 허공을 날아 테이블 위에 단정하게 내려놓아졌다. 막시민은 책 맨 끝의 텅 빈 페이지를 찾아내어 펼치더니, 겁없이 유령이 글을 쓰던 펜을 집어 조슈아에게 내밀었다. "너라면 간단하겠지, 네가 본 모습을 그대로 그려봐." 펜을 받아든 조슈아가 페이지를 누르며 허리를 굽혔다. 빠르게 몇 개의 윤곽선을 긋더니, 순식간에 세부가 채워져 나갔다. 막시민은 냉소적인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몇 개의 선만으로도 실제로 존재할 법한 누군가의 인상이 탄생하는 것을 보자니 새삼스레 묘한 기분이 됐다. 그러자 문득 깨달음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의 친구란 자의 존재가, 지금 처한 별난 상황보다 불가사의하지 못할 게 뭐란 말인가. 이 녀석의 존재도 직접 대해보지 못한 사람이 남의 말만 듣고 납득할 만한 것은 결코 아닌데, 누가 데모닉 따위,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괴물의 존재를 소문 듣고 믿는단 말인가. 그런 존재를 몇 년이나 보았던 자신이 기적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것도 우습고……. 조슈아가 펜을 내려놨다. "됐어." 그림 속 남자는 수도사처럼 고풍스런 검은 옷차림이었다. 머리가 상당히 길고, 날카롭게 말랐지만 눈매는 부드러웠다. 고개를 조금 기울인 채 한쪽 손을 올려 턱을 매만지고 있는 모습인데, 버릇인 듯 자세가 무척 자연스러웠다. 서른 안밖의 나이에 호기심 많은 학자일 듯한 사내 살아 있는 사람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막시민이 그림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조슈아가 내려놓은 펜이 다시 허공으로 올라갔다. 펜은 그림 옆에 다음과 같은 글자를 썼다. 신뢰받지 못하는 것은 슬픕니다. "……." 이번에는 막시민도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말하는 자 자신을 신뢰해 달라는 것인지 조슈아를 신뢰해 주란 것인지 분명치 않기도 했지만, 어느 쪽이든 우회적인 질타이자 요구였기에 섣불리 대답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지금 저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건 협상 결렬을 의미했다. "당신의 존재를 설명해 봐.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왕국만큼의 역사가 있지. 당신은 살아 있다가 죽었으니 더 많겠지. 말했다시피 난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데 관대하지 못해. 글자로 쓰든가, 말하든가, 어느 쪽이든 좋아. 당신 자신을 단단한 기반을 가진 '진짜'로 보도록 납득시켜 봐.' 망설이는 것인지, 펜은 공중에서 잠시 멈춰 있었다. 그러다가 서서히 내려놓았다. 「당신이 내 목소리를 듣는 것에 위화감이 없다면, 나도 말하는 쪽이 좋습니다. 죽은 자가 목소리를 갖고 있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니니 최대한 활용하는 편이 좋겠죠.」 조슈아가 처음에 말 대신 필담을 하도록 한 것은 현명한 일이었다. 상대의 존재감이 얼마간 뚜렷해진 지금도, 허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란 건 어조나 내용과 관계없이 매우 꺼림칙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단은 익숙해져야 되겠다고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그렇다 해도 친절한 대구가 곧장 나오진 않았다. "당신 목소리는 산 사람 꼬여 무덤 속으로 데려가는 귀신처럼 지나치게 들쩍지근하게 들리는군." 「글쎄. 그건 내가 살아 생전 하던 일과 관계가 있을 것 같군요. 나는 사람들의 영혼을 돌보는 사제였습니다. 몇 백 년 전의 일이긴 하지만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 직분이지요.」 막시민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몇 백 년? 도대체 언제를 말하는 거야?" 잠시 사이를 두고, 목소리는 엷은 활기를 띠며 답했다. 「첫 번째 아르님 공작의 시대입니다. 가문의 첫 번째 데모닉, 이카본과 나는 아는 사이입니다.」 막시민은 팔짱을 찐 채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는 조슈아를 흘끔 보더니 일부러 짖궃게 지껄였다. "들을수록 끔찍해지는데." 「그런가요. 당신도 대할수록 힘든 사람입니다만.」 막시민은 풋, 하는 소리를 내더니 빈 의자를 향해 예의 양손을 좌우로 드는 자세를 취해 보였다. "이제 겨우 인간 같은 얘길 해주는군." 「당신도 짐작할 수 있다시피, 난 죽었습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모두 나와 같이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수백 년 동안 비취반지 성 안에서 존재해 왔지만, 나를 발견한 사람은 조슈아가 처음입니다. 아직도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될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조슈아는 처음부 터 나를 살아 있는 사람과 똑같이 또렷하게 알아보았죠. 그것은 일종의 신비이고, 나도 조슈아도 까닭을 알지 못합니다.」 막시민은 다시 조슈아 쪽을 봤다, "정말이야?" 조슈아는 불편한 표정이 되어 변명했다. "맞긴 한데, 그런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 영매(靈媒)에 대한 얘기 처음 들어 봐?" 다시 빈 의자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매가 저렇게 대단한 존재인 줄 알았더라면 살아생전 그들을 좀더 존중해 주는 건데 그랬습니다. 심지어, 조슈아는 처음 나를 보았을 때 내가 죽은 자의 유령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정도이니까요.」 막시민은 팔짱을 꼈다. 이젠 확고한 사실이 되어가고 있는데도 여전히 얼은 믿을 마음이 들지 않는 자신이 참 고집 세구나, 생각하면서. 「그 때 조슈아는 누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혼란한 상태였습니다. 나는 그 사건이 조슈아가 나를 보게 된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은가 생각하지만, 사실 여부는 알 수 없군요. 어쨌든 첫 만남 이후로 나는 얼마간 일부러 조슈아의 눈에 띄지 않게 지냈고, 그리고 끝내는 다시 만나 함께 지내게 됐습니다. 늘 그와 같이 있는 건 아닙니다. 때로는 다른 세계로 가기고 하고, 다른 일로 떨어져 지내기도 하죠. 하지만 이곳 세계에 머무는 한, 조슈아가 내게 말을 거는 소리만은 바로 알아듣고, 또 바로 올 수 있습니다. 그와 나는 나이나 시대로 보면 굉장한 차이가 있지만, 지금 은 단지 친구일 분입니다. 내가 그의 조상과 친구였듯이.」 목소리가 멈추자, 막시민은 조슈아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말을 해 봐. 넌 괜찮냐? 몇 백 년 전의 조상과 친구였다는 유령과, 친구로 지내도 별 무리 없는 거야?" 그것은 핀잔처럼 들려도 실제로는 걱정이었다. 조슈아는 비현실적인 표정으로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냥 좀 편한 것은 있어. 그는 나와 같은 '데모닉‘에 익숙하거든, 날 단지 사람으로 대해주지." 그렇게 말하고는 덧붙였다. "너처럼." "그럼 네가 사람이지, 괴물이나 유령이냐?" 조슈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막시민은 다시 빈 의자로 눈을 돌리더니 제법 유연해진 태도로 다시 물었다. "하나 묻자고, 당신과 만났을 때 조슈아가 어떤 상태였지?" 하지만 나지막이 웃는 소리가 끔찍하게 들리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불안한 걸음으로 성 안을 배회하다가, 아르님 공작에게 가서 성을 떠나게 해달라고 부득부득 매달리고, 잠자리에서 죽은 듯 자다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는, 평상시 모습이 죽도록 울다가 지친 어린아이 같은 상태였지요.」 "제정신이 아니었구만, 그런 상태니까 유령 같은 걸 보지." 흘끔 보니 조슈아의 뺨이 창피한 듯 조금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데 당신하고 만나서 안정이 됐단 말이지? 그것 참 유령이 그렇게 편리한 존재인 줄 예전엔 몰랐는데, 아니면 사제란 것 때문인가? 한데 이렇게 함께 지낸 지 5년이라니, 도대체 저 녀석 아직껏 제정신이긴 한 거야?" 조슈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예 나도 유령이냐고 묻지 그래?" "그러면 널 알아보는 내가 이상한 놈 되잖냐. 괴상한 녀석은 너 하나로 족해. 그런데 유령은 하나만 보이냐? 하나가 있다면 다른 것도 있단 얘긴데, 이러다가 떼거지로 몰려 쫓아다니게 되는 거 아냐?" "이것 봐……." 조슈아의 부름에는 아랑곳 않고, 막시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한테 말을 거는 기분으로 말하니 그나마 낫다 싶었다. "하나라면 어떻게 참아 보겠지만 두셋쯤 더 따라다녀선 나조차도 제정신이 아니게 돼버릴까 걱정스러워. 하나야, 하나라고, 하나만 참을 거야. 당신을 뭐라고 부르라고? 켈스? 내 소개는 했던가? 안 해도 알던가? 그래도 하는 게 예의인가?" 잠시 사이를 두고, 웃음이 섞인 대답이 들려왔다. 「켈스라고 부르면 됩니다.」 "그래, 켈스. 난 막시민 리프크네지. 그런데 하나만 더 묻자. 당신이 밤낮으로 저 녀석을 따라다닌다면 개인 생활은 어떻게 되는 거야? 화장실에 앉아서도 혹시 당신이 옆에서 쳐다보고 있지나 않을까 꺼림찍한 기분이어야 되는 거야?" 잠깐 기다리자 낮게 푸훗,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틀려요. 조슈아에겐 내가 확실히 보이니 말입니다.」 그러자 막시민은 짐작했다는 듯 외쳤다. "그럼 나만 골치 아프게 됐잖아! 당신! 방울이라도 하나 달고 다닐 순 없는 건가! 사람들 앞에서 대구라도 했다간 나만 미친놈 될 거 아니야? 잠은 자는 거야? 유령이니까 역시 잠 같은 건 안 자나? 그렇다면 이제부터 밤낮으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야? 이 점에 대해 뭔가 의견이나 대책 없어?" 다음날 아침 일찍, 두 소년이 늦잠 자고 있는 방에 쳐들어온 리체는 치수가 작아서 꽉 끼는 원피스에 커다란 앞치마를 두른 차림이었다. 뒤따라온 세자르의 사냥개가 입구에서 어슬렁대자 을러대어 내쫓았다. 조슈아도, 막시민도 전날 밤 일찍 잠들지 못했기에 이불 속에서 둘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고가 필요했다. 두 사람에게 다행스럽게도 근처에 마땅한 무기라고는 베개밖에 없었다. "…왜 그래?" 그나마 먼저 깨어난 조슈아가 담요에 반쯤 감긴 채 부스스해졌을 것이 뻔한 머리를 열심히 손가락으로 빗어 넘기며 물었다. "'몽플레이네 씨가 일어나 들이닥치기 전에 먼저 해둘 얘기가 있어서야. 자, 얼른, 얼른!" "다 좋은데… 왜 이런 꼴을 너한테 보여줘야 되는데?" "꼴이 머 어때서? 난 뭐 우아한 꼬락서니를 하고 온 줄 알아?" 이불 속에서 아침 단장하는 고양이처럼 얼굴을 잔뜩 비벼댄 끝에 뺨이 발그레해진 조슈아는 결국 머리를 내밀더니 도리 없다는 눈초리로 리체를 흘끗 봤다. "그 옷은 뭐야?" "몰라. 내가 열 네 살 때 생일 선물로 주려고 사 뒀다지 뭐야? 그런 걸 지금까지 안 주고 뭘 한 걸까? 게다가 구시대의 유물임에 분명한 촌스러운 프릴 장식 허릿단이란! 벽장 속에 쳐박혀서 구깃구깃하고, 좀약 냄새도 나고, 딸의 성장은 고려하지도 않고 아무 때나 떠맡기까지! 분명히 사 놓기만 하고 깜빡 잊고 있다가 내 얼굴을 보니까 생각난 게 틀림없어." "그런 걸 왜 입은 건데?" "잘 보여야 되니까! 자, 일어났으면 얼른 친구들 좀 깨워 줘." 물론 막시민을 깨우는 것은 조슈아를 깨우기에 비해 몇 배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평소 잠이 들면 쉽사리 일어나지도 않지만, 특히 전날 밤에는 촛불 끄고 눈을 감고 나니 더더욱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불편한 상상탓에 한밤중이 되어서야 잠들 수 있었던 것이다. "이거 놔…. 음냐, 나 같은 놈의 몸을 빌려 봤자 유령 인생도 처량 맞게 될게 뻔하지……." 리체가 의아한 얼굴로 조슈아를 돌아봤다. "뭐라는 거야?" 조슈아는 당황해서 우물우물 하다가 중얼거렸다. "나도 몰라." 리체는 그 말을 곧이듣고 베개를 한바탕 내리쳤다. "계속 미적거리고 있다간 네 인생도 분명 처량 맞게 될 걸!" 그렇게 얼마간 씨름한 끝에 겨우 막시민은 눈을 떴고,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조슈아가 안경을 씌워 주자 리체를 훑어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 손에 든 흉기는 뭐야?" "넌 버터로 만들어졌니? 베개도 흉기로 보이게?" "꿈속에서 돌덩어리가 떨어지는 줄 알았단 말이다. 만나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사이에 이렇게 무례하게 깨우다니, 너희 아버지 가정 교육이 심각해." "우리 아버지 나 가정 교육 시킨 적 한 번도 없어. 게다가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사이에 내가 네 몸에 손을 대야겠니?" 막시민은 느릿느릿 일어나 앉더니 하품 한 번 늘어지게 하고서 말했다. "그 말도 맞긴 하군. 근데 조군 너는 옆에서 뭘 했냐?" 그러자 조슈아가 피식 웃음을 보였다. "구경. 너 깨우는 기술이 나보다 더 뛰어나면 앞으로 일임하려고." 그런 다음 리체를 흘끔 돌아보며 덧붙였다. "역시 조수가 한 수 낫던데." 오래 옥신각신할 시간이 없었다. 막시민도 똑같은 질문을 했기 때문에 또다시 옷의 유래를 짜증스런 얼굴로 설명해 준 리체는 하려던 이야기로 들어갔다. "어제는 '막스 카르디' 씨가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해서 선보인 우아한 기절 연기 덕택에 두 사람 모두 일찌감치 재우는 걸로 마무리됐지만, 오늘은 다를 거야. 난 말야, 본래 이 집에 반년에 한 번 올까말까 하다고, 그러니 뭔가 큰 일이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고 지레 짐작하고 있을 게 뻔하고, 만약 사실대로 말해버린다면 너희들을 가만히 두지 않으려 할걸. 그러니까 미리 할 말을 정해서 맞춰두지 않으면 안 돼." 막시민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응, 그 기절 연기는 정말 한심할 정도로 일품이었지." 리체도 냉큼 대꾸했다. "지금 네 대꾸도 그에 버금간다. 생산적인 얘기만 해도 시간이 부족할 판인데."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사실대로 말하면 오히려 도움을 주실 지도 모르잖아." "도움?" 리체가 어이없어하며 픽 웃었다. "그 인간한테 도움을 바라겠다고? 꿈도 크구나. '세자르 몽플레이네' 씨는 무책임하기로 말할 것 같으면 블루 코럴 섬 전체에서 적수가 없는 사람이야. 평생 남을 돕기는커녕 자기 일도 제대로 처리한 적이 없어. 잠자리 제공보다 어려운 일은 바라지도 말라고." 조슈아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아버지라고 했으면서, 말이 조금 심한 것 아니야?" "사실만 말했어." "네가 아버지의 모든 것을 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잖아?" "그으래? 내가 잘 모르면? 그럼 네가 더 잘 아니?" "그런 뜻이 아니잖아." 리체는 흐응, 하고 콧방귀를 뀌며 들은 체도 하려 하지 않았다. 잠옷 대신 걸치고 잔 셔츠의 단추 하나가 사라져서 이불 속을 뒤지다가 실패한 막시민이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아아, 두 사람 다 가족에 대한 관점이 아주 잘 드러나는 주장들이었다. 안됐지만 그런 주장은 다들 좀더 늙어야 접점을 찾을 수 있을걸. 세상엔 정도가 지나치게 무책임한 아버지도 있고, 꽤 좋은 아버지도 있는 모양이니까 다들 자기 아버지에 대한 관점을 유지하시도록 하고, 내가 궁금한 건 몽플레이네 씨의 성격이 그러니까… 리체 너와 비슷하느냔 거야." 리체는 질색을 하며 펄쩍 뛰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오, 됐어. 그러면 충분하군. 만일 조군이 제멋대로 사실 보고를 해버린다 해도 베개. 아니 목검으로 맞아 죽을 염려는 없겠군. 괜히 걱정했잖아." 리체가 그 말의 뜻을 알아듣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너… 내 성격이 더 끔찍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러나 베개는 막시민이 어느새 깔고 앉아 있었다. 정말 주도면밀한 성격이었다. "됐어. 사실을 말해서 맞아죽지 않을 정도라면 사실을 말해야지. 책임은 이쪽에서 지니까 그렇게 우려할 거 없어." 리체는 물론 수긍하지 않았다. "지금 장난하니! 너 같으면 자기 딸이 살해당할 위협에 시달리면서 정체모를 사내녀석 둘하고 며칠씩 거리를 전전하고 있는데 농담으로라도 좋은 소리가 나오겠니? 물론 일부러 날 끌어들인 게 아니고, 내가 끼어든 탓이 없지 않다 해도, 이런 사건이 생긴 원인 자체는 결국 너희의 일이잖아? 그래 갖고 퍽이나 친절한 대접 받겠다!" 막시민이 갑자기 빙그레 웃었다. "그런 걸 걱정하고 화낼 정도라면 너희 아버지도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군 그래?" "그런……." 리체는 말문이 막혔고, 막시민은 슬슬 침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조슈아가 그 모습을 보다가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일의 시작은 나란 말이야. 결국 죽을 뻔한 나를 살려준 것뿐이지. 호의로 도와준 사람을 위험에 처하게 해 놓고, 나 몰라라 할 정도로 정신 나간 인간이 못 돼서 말이지, 확실히 사실대로 말해서 욕이든 뭐든 너희 아버지의 처분을 받아야만 되겠다." 막시민은 고양이들의 아침 단장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대강 머리만 쓸어 넘기고 겉옷을 찾아 걸쳤다. 문을 열더니 따라 나오라고 두 사람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싫은 아버지도 가족은 가족이지. 너네 가족들 중 아무도 네게 일어난 일을 몰라서야 길가는 아가씨 하나 납치한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단 말이야." 말의 뒷부분은 이미 문 밖에서 들렸다. 리체는 도리 없이 몸을 돌리면서도 여전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인간은 남의 인생에 참견하는 순간 바로 남까지 망친다니까, 정말 믿질 않네." 그러자 입구 쪽으로 걸어간 조슈아가 돌아보며 엷은 미소를 보였다. "막시민은 잘 알아들었을 거야. 아니, 처음부터 바로 알아들었을걸." "어째서 그렇게 잘 알 거라고 단정해?" 조슈아의 다음 대답도 문 밖에서 들렸다. "막군에겐 너희 아버지보다 훨씬 더한 아버지가 있어." 3. 웃는 가면 "주연이 가장 화려하게 치장하는 북부 가면극과는 달리, 남부에서 주연 배우는 화려한 가면을 쓰지 않지. 모두들 공작 깃털이니 비단 터번이니, 화려한 안료와 색실, 황금빛 술로 장식한 가면을 쓰고 있을 때, 무늬 없이 단순한 희 가면을 쓴 자가 주연이야. 그러면 주연은 어떻게 해야 할까? 가만히 있어선 주목을 얻을 수 없지. 그는 춤추고 노래하고, 달려야 돼. 누구도 그가 주연이라는 것을 잊지 못하도록 모든 재능을 다해서 불타오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으음." 얘기를 다 듣고도 세자르 몽플레이네는 얼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옆에 쭈그리고 앉은 사람 만한 덩치의 개를 쓰다듬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폭발 직전의 고요로 이해한 조슈아는 '죽여주시죠'하는 자세가 좋을지. 불쌍한 체 해서 동정심이라도 사야 할지. 아니면 의연한 태도를 취해야 할지 판단하지 못해 참고하려고 막시민의 얼굴을 건너다봤다. 그리고 친구 녀석이 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저, 그……." 참고고 뭐고 없었다. 이 상황을 숨기기 위해 무슨 짓을 해서든 세자르의 눈길을 끌어야 했다. "저… 그러니까… 무슨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응?" 조슈아의 갑작스레 외치자 세자르는 눈을 끔뻑끔뻑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네?" 조슈아는 조슈아대로 세자르의 존대에 흠칫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지금은 기대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아, 우리 리체의 일 말씀이시군요? 에이, 그렇다고 벌을 받겠다고 하시다니,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도련님처럼 귀한 분한테 벌을 줍니까?" 조슈아는 뭐라 대꾸해야 좋을지 몰랐지만, 막시민으로부터 시선을 돌리게 한다는 당초의 목적만은 다행히 성공한 듯했다. 옆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리체는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다. 하긴, 아무리 싫은 아버지라고 해도 또래 소년 앞에서 저자세를 취하는 모습이 보기 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리체는 지금 상당한 위기에 처해 있는데……." "그게 뭐가 대수입니까? 전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데요." "아니, 어째서요?" 어느 쪽이 다지고 있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세자르는 앞에 놓인 차를 훌쩍 마시더니 느긋한 표정으로 조슈아를 향해 미소를 보냈다. 어쩐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아노마라드의 명문인 아르님 공작 댁 아드님이시라고요." "그런데요?" "게다가 작위를 물려받을 소공작, 맞지요?" "맞지만……." "그런데 뭐가 걱정입니까?" "하지만 여긴 켈티카도 아니고, 당장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는데요?" 세자르는 찻잔 바닥을 들여다보며 남은 모금을 홀짝이더니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말했다. "데리고 가서 책임지시면 되는데." "푸웁!" 리체가 입안에 물었던 찻물을 뿜어낼 번하다가 겨우 손으로 틀어막았다. 다시 황급히 삼키다가 사례가 들려 기침까지 하면서 그녀는 아버지에게 항변했다. "무슨 시덥잖은 소리예요! 콜록, 누가 누굴 데리고 간다는 거야?" 조슈아도 멍한 표정이 되긴 마찬가지였다. "잠깐, 그 말은……." 세자르는 혼자 낄낄거리기 시작했고, 리체는 얼굴이 빨개져서 발딱 일어났다. "자기 맘대로 내 인생을 결정지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이래서 처음부터 아빠한테 말하고 싶지도 않았어. 내가 죽든지 말든지 내 일이지. 귀찮은 혹 떼듯이 옳다구나 하고 보내버리려는 수작은 다 뭐예요! 진짜, 내가 아바한테 얹혀 사는 처지였으면 서러워서 엉엉 울었겠네!" "아니, 리체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말이다." 세자르는 다시 능글능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널 저 도련님한테 시집 보낸단 말은 안 했다. 왜 네가 지레짐작으로 팔짝 뛰는 거냐?" "……." 리체는 말문이 막혀 얼굴을 붉힌 채 숨소리만 색색거렸다. 조슈아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끼어들었다. "그럼 그 말은… 그러니까 뭐지? 그러면 데리고 가서… 뭘 어떻게 책임지란 말이죠?" 그 때 여전히 졸고 있는 줄 알았던 막시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올바른 고찰이야." 돌아보니 여전히 눈은 절반만 뜨고 있었지만, 말소리만은 똑똑했다. "'데려가서', '책임진다' 는 건 말이야. 말뜻 그대로인 거지. 이 섬을 떠나야 된다는 것, 그리고 혼자 두지 말고 동행하라는 것." "맞았어." 세자르는 손을 들어 손뼉을 두 번 쳤다. "저 친구는 영리해. 졸고 있을 때부터 알아봤어." 조슈아의 노력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내가 어떻게 나올지 알고 처음부터 있었던 게야. 그래, 방금 한 말대로야. 사내들이 계집애한테 일을 저질렀으면 그 정도 책임감은 있어야지." 어감이 이상한 마을 잘도 골라 스는 아저씨였다. 그러나 조슈아가 납득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리체가 고개를 홰홰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난 안 떠나. 내 삶의 터전을 다 내버리고 갈 순 없어. 의상실도, 음식점도, 그런 자리들을 얻어서 내 힘으로 생계를 해결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데. 엉뚱한 데 가서 새로 시작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막시민은 눈을 비비고, 앞에 놓인 차를 한번에 들이키더니, 술 마신 사람처럼 크으, 하는 감탄사를 내는 등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고는 리체를 향해 잔소리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안됐지만 그건 네 의지의 문제가 아냐. 사태의 심각성을 좀 깨달아 봐. 이 조그마한 섬에서, 이런 일에 말려든 네 존재가 가려질 수 있을 것 같아? 널 억지로 끌고 가려는 게 아니라고, 본의 아니게 말려든 널 위해서 최대한 나은 대책을 마련해 주려는 것뿐이야. 우린들 뭐, 생활력 없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여행하는 것이 달갑고 편하겠냐? 다만 지은 죄가 있으니 감수하겠단 거지." 막시민의 마지막 말은 순전히 리체를 자극하기 위한 것이었고, 리체는 다혈질 소녀답게 바로 걸려들었다. "내가 생활력이 없다고? 정말 웃겨, 너희 둘 합쳐 놓은 것보다 내 쪽이 훨씬 낫지. 요리도 할 줄 모르고 가격을 깎을 줄도 모르는 사내애들이 무슨 생활력 운운이니?" "소나기 맞고 아프다고 앓아 눕는 여자애가 끼칠 민폐는 상상이 안 되냐?" "난 비 맞고 감기 걸려 본 일은 한 번도 없어! 잔병치레하는 귀공자들하고 비교할 바가 아니라고!" 옆에서 조슈아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 "…그거 나 들으라고 한 얘긴가." 막시민은 개의치 않았다. "몇 킬로미터만 걸으면 발이 아프다고 주저앉을걸. 제 몸 건사도 못하는 조군 자식이 업고 갈 것 같진 않으니 도리 없이 내 몫이겠지." "너나 내 등에 업히겠다고 하지 말아!" 세자르가 테이블을 휘둘러보고는 막시민과 자기 찻잔에 찻물을 더 따르며 중얼거렸다. "그럼 결정된 거군, 각자 방금 주장한 자기 생활력을 잊지 말고 자랑하며 잘들 가보라고." 리체가 '도대체…'하는 눈으로 아버지를 돌아봤을 때, 막시민은 이번엔 조슈아를 흉내내어 우아하게 차를 홀짝거리다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가 아프면 날 업고 갈 거라잖아. 우린 생각보다 대단한 동료를 얻은것 같다. 조군." 조슈아도 웃음을 참으며 대꾸했다. "그렇더라도 왠만하면 내가 없고 가는 방향으로 하는 게 어때." "네가 날? 퍽이나 잘 업고 가겠다." 세자르는 계속되는 리체의 잔소리를 배경음으로 들으며 막시민을 향해 말을 건넸다. "어디로 갈 텐가?" "아노마라드로, 가능하다면 켈티카로 가면 좋겠지요." "무척 먼데, 안전하게 갈 수 있는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막시민은 한족 입끝만 올리며 씩 웃었다. "안됐지만 없습니다." "내용과 관계없이 대꾸만 자신만만하군. 내가 좀 어설프고, 실패할 가능성도 높지만 성공만 한다면 매우 편해지는 방법을 하나 소개할까 싶은데 어떤가?" "아, 물론 좋습니다. 찬 거 더운 거 가릴 처지가 아니죠." 세자르는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대답만은 명쾌해." "이 상황에서 대답이라도 시원해야죠. 달리 믿을 구석도 없잖습니까?" 세자르는 막시민이 마음에 들었는지 킬킬 웃으며 이번엔 조슈아를 돌아 보았다. "도련님께선 댁에 돌아가시면 저 말괄량이한테 의상실 조수 자리 하나는 꼭 마련해 주셔야 됩니다. 켈티카는 대도시니까 그런 자리 정도는 흔하겠지요?" 세자르는 농담이었을지 모르나 조슈아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리체가 싫어하지 않는다면 미유 로제 선생의 의상실에 정식 재봉사로 채용되도록 추천하죠." 그 순간 리체의 잔소리가 딱 멎었다. "미유 로제? 그… 장미꽃 무늬의?" 조슈아는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손수건 한 장을 꺼내 건넸다. J. A.라고 새겨진 머릿글자 옆에 특이한 도안의 꼬임 자수로 수놓은 장미꽃 도안이 틀림없는 미유 로제 의상실의 물건이었다. "어머니께서 단골이라서 나도 어려서부터 잘 알고 지냈거든." 리체는 손수건을 들여다보며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세자르가 옆에서 물었다. "왜 그래? 싫어하는 곳인가?" 리체는 한참 대답 없이 있다가 겨우 짧게 말했다. "아니." "그러면?" 리체는 조슈아에게 손수건을 돌려주었다. 조슈아가 건네 받으며 망설이다 물었다. "내가 기분 상하게 한 건가? 난 네 실력을 충분히 알기에 한 말이었어. 네가 만든 의상은 정말 훌륭했으니까. 그만한 바느질이 얼마나 드문지 난 잘 알아. 하지만 불쾌하게 했다면 미안해." "……됐어, 왜 사과하는 거야? 잘못 따위 없잖아." 리체는 의자를 뒤로 밀며 테이블에서 물러났다. "그래. 가자고, 나 같은 재봉사에게 미유 로제는 꿈속에서 보는 궁전 같은 곳이야. 언감생심 그런 곳에서 일할 수 있다는데 사양할 까닭이 없잖아. 안 떠날 이유 같은 건 다 사라졌네. 갈 준비 끝나면 알려줘." 리체는 식당의 아치형 입구 밖으로 나가버렸고, 하품하고 있던 검정 사냥개가 산책이라도 가는 줄 알고 신나게 뒤따라갔다. 막시민은 조슈아를 보았다. "네가 쟤를 울렸군." "……." 조슈아도 얼마간 말이 없었다. 곁에서 세자르가 말했다. "악의가 없었단 걸 딸애도 알 겁니다. 한두 시간 혼자 있으면 괜찮아지겠죠. 아까 말한 방법에 대해선 조금 후 설명할 테니까, 방에라도 잠깐 올라가 계시지요." 쫓아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지 세자르도 밖으로 나가버렸다. 막시민이 남은 차를 다시 처음처럼 한 번에 마셔버리고는 말했다. "자존심이 꽤 강한 얘구나. 그런데 도리가 없군. 너란 놈을 보면서 자존심 상하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얼마 없으니 말이다. 적응하는 수밖에, 그래, 적응하는 수밖에." 12시. 세자르는 가르치는 아이들 때문에 밖으로 나갔고, 막시민은 떠나기 전에 모자란 잠을 보충한다며 2층 방에 틀어박혔다. 리체는 집 어딘가에 숨어 있을 테고, 그리고 조슈아는. 혼자 식당에 앉아 있었다. 야트막한 흰 식탁에 의자가 넷, 신기하게도 방문객의 숫자와 맞았다. 세자르는 혼자 사는 것 같았는데 세 개나 남는 의자를 비롯하여 살림이 이것저것 많은 편이었다. 용도가 비슷한 것도 몇 개나 중복되는 걸 보면 이 사람은 뭘 버리는 성격이 아닌 듯했다. 아침에 마시던 찻잔이 치워지지 않고 그대로 놓인 것이 눈에 띄었다. 치울까 생각했으나 어디에 갖다놔야 할 지 몰랐다. 설거지통을 생각해 냈지만, 사방에 늘어놓은 통들 중 어느 것이 설거지통인지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평생 설거지하는 장면 같은 걸 본 적도 없고 말이다. "난 사람들의 호의를 얻기 힘든 존재인가 봐." 낮게 말했지만 곧 대답이 들려왔다. 「유령의 호의라면 꽤 얻고 있는걸.」 어느새 식탁 맞은편에 나타나 앉은 켈스니티는 긴 머리를 쓸어 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봤자 당신 하나잖아요. 다른 유령은 본 일도 없는데 뭐." 「네 쪽에서 모른다 해도 저쪽에선 널 지켜보고 있을 지도 모르지. 너도 목소리는 종종 듣곤 했잖아.」 "내 눈에 보이지 않고? 그게 가능해?" 켈스니티가 실소를 터뜨렸다. 「네가 세상 모든 유령을 볼 수 있을 것 같으면, 지금까지 네 눈에 띈게 나뿐이었을까? 세상에 유령이 그렇게 적은 것 같아?」 "……하긴." 논리적 사실을 이해할 때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조슈아의 사고 체계가 갖는 특징이었다. 이를테면 '그렇다면 사방에 유령이 가득 차 있단 말이야?'라고 하면서 펄쩍 뛰거나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윽고 켈스니티는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그런데 네가 막시민이란 친구를 대하는 걸 보고 좀 놀랐어. 평소와는 사뭇 다르던데.」 "내가 어쨌는데?" 「한 수 깔아준달까. 네가 남의 의견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경우는 드물잖아? 데모닉들의 특징이기도 하고.」 조슈아는 시선을 돌렸지면 결국 수긍했다. "확실히 감탄할 만한 점이 있는 녀석이긴 해요." 거기까지 말했을 때, 켈스니티의 모습이 일순 흐려졌다. 가끔 보던 일인지라 조슈아는 놀라지 않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갈 시간이 된 건가." 켈스니티가 조슈아의 곁에 항상 머무는 것은 아니었다. 조슈아로선 잘 이해할 수 없는 사정으로 인해 그는 종종 이곳 세계가 아닌 곳으로 돌아가 머물러야만 했다. 그럴 때는 불러도 소용이 없었다. 다시 혼자가 된 조슈아는 턱을 괴고 빈 찻잔들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짓궂은 나비가 사라진 숲 속 비가 내리고 길을 잃었지 발자국 따라서 들어간 숲 속 하늘 개이고 이슬 빛나네 메리벨, 메리벨 너를 찾아 온 곳 푸른 전나무 숲 드나드는 바람 이곳에 갇힌대도 후회는 없어라 귀여운 메리벨 나의 흰나비 그 때 옆에서 짧게 끊어 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딱,딱,딱. 고개를 돌렸을 때 식탁 오른편, 창가 쪽에 낯선 사람 하나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박수를 멈추고 미소를 지었는데 묘하게 표정이 불분명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슈아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유였다. 가면을 쓰고 있었다. "아… 누구시죠?" 그렇게 말하면서 조슈아는 조금 전 켈스니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다른 유령, 그가 보지 못한, 노래 몇 마디 부르는 동안 기척도 없이 나타나 저곳에 앉아 있다니. 상대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입가에 몇 가닥 주름이 그려졌지만 눈 주위가 가려져 있으니 웃었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 좀더 미묘한 감정은 지워져 버렸다. 비웃음인지, 억지 웃음인지, 따뜻한지, 차가운지 알아볼 수 없었다. 더욱 묘한 것은 그 가면이 조슈아가 '막스 카르디' 역할을 할 때 쓰던 것과 똑같은 모양이란 사실이었다. "난, 가면의 사나이야." 해학적인 대꾸를 하더니 그는 다시 웃었다. 조슈아는 조금 망설이다가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가면 쓴 상대를 보고 당황하거나 불쾌감, 또는 경계심을 느꼈겠지만, 조슈아는 스스로 가면을 쓰고 몇 해를 살아왔고 수많은 사람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가면을 벗어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만은 가면 쓴 상대를 관대하게 대해야 되지 않을까. 그가 누구일지라도 말이다. "가면 멋있는데요." "그래? 당신의 노래도 멋있었어." "그냥 가볍게 부른 노래인데요. 그리 대단할 건 없었어요." "아니. 내 귀는 못 속여. 당신은 대단한 목소리를 갖고 있어. 이래봬도 예술에는 감식안이 좀 있는 편이지." 자신만만하다 못해 장난처럼 들리는 남자의 말에 조슈아가 싱긋 웃으며 한 대답도 상당했다. "내 노래를 듣고 감탄하기 위해 감식안씩이나 필요하진 않을걸요." "좋군. 자신의 능력에 확신을 갖는 건 훌륭한 일이야." 그렇게 말한 남자는 조슈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무언가를 궁리했다. 조슈아는 태연하게 미소지으며 장난기 어린 태도로 눈을 동그랗게 떠 보였다. "자세히 보니 얼굴도 잘생긴 것 같죠?" "푸훗훗." "작곡도, 작사도 할 줄 아는데." "그런가?" "악기도 잘 다루죠." "정말 대단하군." 상대가 생각보다 진지하게 응대해 와서 조슈아는 눈썹을 올려 보이며 다시 물었다. "지금 내가 한 말 다 믿는 건가요?" "그럼 믿지 안 믿나." 그렇게 말하며 가면 쓴 남자는 일어섰다. 그 때 조슈아는 상대방의 오른손이 다른 쪽보다 유난히 큰 것을 보았다. "한족 손이 무척 특별하군요?" 남자는 여전히 입만 움직여 미소를 보였다. "아주 편리한 손이지." 그는 오른손을 들어올려 천천히 쥐었다 폈다를 반복해 보였다. 그건 흡사 마치 커다란 갈퀴가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듯 섬뜩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남자가 보기에 조슈아는 조금도 불안함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호기심만을 보일 뿐이었다. 드는 자기가 대하고 있는 자의 연기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했다. "한쪽 손을 특별히 단련했나 보죠?" "그런 셈이지, 보고 싶어?" 그는 주머니에서 사과 한 개를 꺼내어 쥐었다. 조슈아는 그의 오른손 안에서 사과가 삶은 달걀처럼 서서히 부스러지는 모습을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고 있었다. 막시민은 침대에서 문득 눈을 떴다. 얼른 일어나지 못한 채 그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저절로 눈이 떠진 것이 얼마만이더라. 아직도 피로가 엷게 남아 있었다. 사실상 막시민은 켈티카에서 하이아칸까지 무리하게 달려온 후로 단 하루도 푹 쉬지 못한 상태였다. 도착하자마자 노숙하다시피 하며 조슈아의 행방을 찾느라 동분서주했고, 극장 화재 이후로는 이틀 동안 제대로 눈 붙이지 못한 채 신경을 곤두세웠던 데다, 전날 밤엔 유령까지 나타나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막시민처럼 게으르게 잠자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한테 이렇게 쌓인 피로란 무척 짜증스런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눈이 떠졌다. 막시민은 궁리하다가 갑자기 허공을 향해 한 마디 던졌다. "이봐?" 보이지 않는 켈스니티의 대답을 기대하는 것처럼, 잠시 기다리고 있던 그는 이윽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젠장, 신경과민이야." 일어나 대강 옷매무새만 만지고는 휘적휘적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주위가 워낙 조용했기에, 남의 집에서 낮잠 자는 사람의 도리로 무심코 발소리를 작게 했다. 그렇게 거실을 가로질렀을 무렵, 식당 쪽에서 조슈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아요. 루그란의 송시들은 주로 시제부터가 고답적(高踏的)이기 때문에 대륙풍 시들에 비해 취향을 많이 타죠. 하지만 압운(押韻)이 일반화되어 있다 보니 곡을 붙이기에는 그만이라서 나도 심심풀이로 몇 곡 붙이곤 했어요. '바느질하는 엘리바'리든가, '하늘 뱃길의 노래'처럼 가나폴리에서 내려온 장시(長時) 소재들은 상당히 좋아합니다." 막시민으로서는 알아들을 수도 없고, 관심도 없는 이야기를 상당히 즐거운 듯 말하고 있었다. 듣는 상대가 켈스니티인가 생각하는 참인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늘 뱃길의 노래'는 나도 좋아하는 것이군. 대구가 무척 조화롭거든, 나도 거기에 곡을 붙여 보려 했는데. 당신이 훨씬 잘 붙였을 것 같군." 짐짓 밝은 듯 하지만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어니 그것보다도 지금 이 순간, 이 집에서 누구인지 모를 자가 조슈아와 함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막시민의 육감을 빠르게 자극했다. 이 집에 사는 사람은 세자르 한 명 뿐이고, 그는 송시 같은 고상한 취미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니만큼 그를 방문할 이웃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것 같진 않다. 만에 하나 세자르의 친구라 해도 어째서 세자르는 뜰에 내버려두고 조슈아와 단 둘이 이야기하고 있는 건가? "아, 당신도 해봤군요? 서로 가르쳐 주는 것이 어때요? 무척 궁금한데." "난 끝까지 완성하지도 못했어. 첫 소절은 이렇지……." 느린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조슈아와 비교할 순 없어도 보통 사람치고는 썩 잘 부르는 노래였다. 그대의 금발에선 바람 냄새가 나오 흙도 물도 아닌 바람의 냄새라오 낮은 곳에서 비둘기처럼 속삭이다가 높은 곳에서 매처럼 나는 바람이라오 그러자 조슈아가 즉석에서 뒤를 이어 붙였다. 달 이울고 별 저물어 흐린 밤에도 발아래 수천 겹 바람 밟고 간다오 하늘 땅 맞닿은, 세상 끝 이르도록 하늘 뱃길 가는 하늘 뱃사람이라오 "좋군. 역시 훌륭해." 어조는 진심인데 묘하게 싸늘한 목소리라 문 밖에 선 채로 듣고 있던 막시민은 눈썹에 한층 힘을 주었다. "당신의 곡도 좋더군요. 좀 밋밋한 감이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보통은 넘겠던데." 없는 소리는 할 줄 모르는 조슈아의 평가에 가면 쓴 남자는 웃었다. "그렇겠지. 내게 그런 쪽의 천분은 없으니 말이야. 난 예술을 사랑하지만, 당신하고는 좀 방향이 다르거든. 비슷한 점이 없는 건 아니고. 뭐, 어쩌면 그것도 일종의 예술이랄 수 있겠지." "당신의 예술은 어떤 건가요?" 남자는 얼른 대답하지 않고 가면 끄트머리를 매만졌다. 조슈아는 그 모습을 보며 '저 사람은 정말로 화상이 있을 지도 모르지'라고 생각했다. "무척 아깝군. 난 당신처럼 재능 많은 친구를 좋아하거든. 내가 못하는 걸 할 줄 아는 사람은 더더욱, 시기 같은 건 해본 일도 없어. 똑똑한 사람을 보면 기분도 좋아지지. 하지만 어쩔 수 없군. 그래도 아깝군." 막시민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 정도로 직접적 위험을 듣고도 조슈아는 다른 생각에 빠진 사람처럼 무심하게 대꾸했다. "아깝다니, 뭐가요?" 막시민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도움을 청하러 가기엔 상황이 너무 급박했다. 대책 없이 뛰어드는 건 더더욱 안 된다. 그러던 그의 눈에 벽에 걸린 은거울이 들어왔다. 은거울처럼 값비싼 것이 어째서 이런 사람의 집에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떼어들었다. "예전에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여배우가 있었거든. 미인이고, 노래도 연기도 그럭저럭 했어. 그런데 성격은 나쁘더란 말이야. 모든 게 다 주어지는 법은 없나봐." 조슈아는 작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나도 그런 여배우를 한 명 알고 있는데. 그렇지만 악당은 아니고 다만 신경질이 심한 정도였죠." "글쎄, 신경질이 심한 것도 사람에 따라 참아줄 수 없을 때도 있지. 내가 말한 그 여자는 자기가 일생에 죄라고는 짓지 않은 줄 알더란 말이야.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의 죄는 짓고 살기 마련인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줄곧 빼어난 연기력을 발휘하고 있던 조슈아도 일순 평정이 흐트러졌다. 그러나 곧 일상적인 어투를 가장하며 말했다. "그런 거야 그리 큰 죄가 아니기 마련이잖아요." "아까 말했잖아. 사람에 따라 다른 거라고, 누군가한테는 작은 죄라도, 누군가에겐 죽어야 할 죄일 수도 있는 거지." 거울이 느리게 돌려졌다. 각도를 조심스레 맞추자, 드디어 낯선 남자의 뒷모습이 비쳤다. 건장한 체격과 검은 옷, 연한 금발, 그리고 얼굴을 조금 돌렸을 때 조슈아가 쓰던 것과 똑같은 가면이 비쳤다. "남의 죄를 자기 기준으로 따른 죄와, 결백이 있는 거야. 자신의 기준을 따르지 못한다면 남의 기준을 따르겠나?" "자기 기준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 한 명뿐일텐데요." "자신 한 명조차 어쩌지 못하는 자들이 많지. 그렇게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심판관이 필요하지." "당신이 심판관이란 말인가요. 그러면 당신의 죄는 누가 묻죠?" 거울 속에서, 남자가 테이블 아래 숨겨져 있던 손을 들어올리는 것이 비쳤다. 흠칫 놀랄 정도로 커다란 손을 한 번 쓰다듬는 남자는 손에 맞춘 듯한 장갑을 꺼내 천천히 끼었다. 그러더니 다시 한 번 입 끝을 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조슈아는 이 남자가 지금가지 가면으로 가렸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입만 움직여 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하고의 이야기, 무척 즐거웠어." 조슈아는 검지로 한때 자기 얼굴에 씌워졌던 가면의 윤곽선을 따라 그려 보더니 말했다. "그 사과처럼 다룰 참인가요?" "당신도 죄가 없다고 할 참인가? 그 여배우처럼?" 약 5초간,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열린 입구를 통해 막시민이 걸어 들어온 것은 그 때였다. 막시민은 조슈아에게 손짓으로 인사하며 가면 쓴 남자를 보더니 놀란 것처럼 말했다. "오, 이런. 가면 사나이로군요." "……." 더 이상 대답은 없었다. 그림자처럼 스르르 일어난 남자는 어느새 테이블 맞은편에 가 있었다. 장갑 낀 오른손으로 조슈아의 목을 움켜쥐기까지 저항은 전혀 받지 않았다. 잠깐만에 의식을 잃은 조슈아의 목이 푹 꺾였다. 이제 사과를 부수던 그 손으로, 조금만 잡아 꺾으면 끝장나는 순간이었다. 놀랍게도 막시민은 당황한 기색 없이 말했다. "인질 따위를 잡을 정도로 소악당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남자의 눈썹이 미묘하게 움직였다. "인질이라니? 내가 목적한 건 처음부터 이 자야." "거짓말이거나 뭘 모르거나 둘 중 하나로군. 조슈아를 죽이는 것만이 전부일까? 그렇다면 여배우는 왜 죽였지?" 막시민은 대담하게 말하며 한 발작 더 들어왔다. 확실한 근거는 없었지만, 그의 추리에 의하면 뮤치아 베네벤토가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또한 조슈아를 없애러 온 이자가 그녀를 처치한 당사자일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그러나 진짜 도박은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는 지금 조슈아뿐 아니라 자신을 비롯한 목격자들을 죽이고 가야 되지 않느냐고 물은 것이다. 남자는 태연하게 대구했다. "물론 아르님 소공작을 흡족하게 없앤 뒤에 너도 처리할 예정이었어. 네가 막시민 리프크네겠지?" 짐작한 바대로 이름마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시민은 안경다리를 매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나처럼 시시한 희생자의 이름가지 알아봐 주시니 대단한 영광이군. 난 말야, 내가 죽더라도 다룰 줄도 모르는 검이나 마구 휘두르는 애송이의 손에 걸릴 줄 알았지, 당신처럼 대륙의 강자들 사이에 이름 한 자리 올릴 만한 전문가와 맞닥뜨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조금 감동했다고 해야 하나?" 그런 상대일수록, 더더욱 당당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그래야 저 자의 행동을 늦춰 시간을 벌 수 있다. 웃음을 그친 남자가 말했다. "그런 말 늘어놓는다고 살아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살리고 죽이고는 당신 영역이고, 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나 할 뿐이야." "무슨 근거로 내가 전문가라고 추측한 거지?" 막시민은 꽤 여유 있는 미소까지 입에 올렸다. "한 눈에 알 수 있다고나 할까. 뭐, 이름 날리는 대륙의 강자들에 비하면 한 수 떨어질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경지에 있는 것만은 확실하지." 조심스레 미끼를 던졌다. 그러나 남자는 바로 물지 않고 빙글빙글 웃었다. "당신도 꽤 교활한 말을 하는군. 하지만 그다지 감동적일 건 없었어. 대륙의 강자들? 그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말하는 건가? 그런 건 저 밖에서 목검 휘두르는 아이들이나 좋아하는 얘깃거리지, 정말로 강한 자들의 이름이 꼬마들 입에나 오르내리고 있을 것 같냐? 그런 자들은 이름이 드러나지 않아도 스스로 만족하고 있다." 막시민은 미심쩍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노마라드의 강피르 자작, 렘프의 지나파 공주, '청동 번개'의 용병대장 두르가나, 이름이 오르내린다는 건 돌려 말해 그들의 실력이 아이들조차도 알 정도로 공인됐단 뜻이잖아? 이런 사람들보다 더한 실력가들이 있다는 얘기야말로 그냥 적당한 수준들끼리 서로 듣기 좋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은데." "나도 당신처럼 생각한 때가 있었지." 그렇게 말한 남자는 축 늘어진 조슈아를 껴안다시피 하며 다시 테이블 앞의 의자에 앉았다. 다시 말해, 대화를 나눌 태도를 취했다. 이건 막시민도 기대하지 못했던 변화였다. "강한 전사로 이름난다는 건 수없이 많은 도전을 견뎌 냈다는 의미도 되지. 그런데 보라고, 당신이 언급한 사람은 평민이 감히 범접하기도 힘든 막강한 권력의 실세들이잖아? 누가 그들에게 가서 겨뤄 보자고 할 수 있겠나? 점잔 빼는 귀족들끼리? 지나파 공주는 그래도 저들끼리 끊임없이 겨루는 렘므 왕국의 기풍으로 볼 때 보통 이상의 실력을 가진 건 틀림없다. 엘베 전투에서의 전공으로 봐도 그렇고, 그렇더라도 누이라는 막강한 배경이 작용하지 않았다곤 말 못할걸. 그리고 '청동 번개'의 두르가나, 이 자가 문제인데 말이지, 난 이 자와 몸소 한 차례 겨뤄 본 일이 있거든." 남자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본 막시민은 기다렸다. 그가 무슨 말이든 하도록. "젊었을 땐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이젠 정말로 늙었더군. 체면을 차려 줘야 하는 자리가 아니었다면 몇 분으로 끝장냈을 텐데." "그 말은 당신이 그들보다 더한 실력자라는 의미인가?" "왜, 믿어지지 않나? 증명할 방법은 아주 많은데 지금은 번거롭고… 강피르 자작 얘기를 마저 해야겠군. 그 자야말로 헛물이야. 이 정도는 겨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고. 그래, 그 얘길 해야겠군. 지난번 실버스컬(Silver Skull) 말이야." 막시민도 실버스컬이 루그란 왕국에서 시작된 검술 대회이며, 열 다섯에서부터 스무 살이 넘지 않은 자들만이 참가할 수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물론 관심 밖이었기에 아는 거라곤 그게 전부였다. "강피르 자작의 아들이 작년까지 실버스컬에 나갔지, 네 회 연속 우승이라 그 해 드디어 5연패를 달성하리라고 호사가들이 지겹도록 떠들어대어서 나까지 그걸 구경하러 갔지 뭐겠어. 뭐, 결론적으로 얻은 게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아, 혹시 소문 들었나?" "무슨 소문 말이지?" "작년 실버스컬 우승자에 대한 소문 말이야." 남자는 자기 이야기에 도취되어 아주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급할 것 하나도 없다는 투였다. 막시민은 대강 넘겨짚으며 말했다. "강피르 자작의 아들이 우승하지 못했다는 정도는 알아." "그래, 우승하지 못했지. 결승전에서 말이야. 정체 모를 무명의 소년에게 형편없이 당했다고, 내 평생 실버스컬 결승에거 그렇게 한심한 경기는 처음 보았어. 봐 주며 하다가, 일방적으로 몰아치니 그냥 끝나버리더군. 지난 네번의 경기에서 녀석이 어떻게 우승을 했는지 불가사의할 정도였단 말이야. 반면 우승한 녀석은 아주 괴이쩍은 검술을 쓰던데. 아직도 그 녀석의 정체가 좀 궁금해." 이쯤에서 반론을 제기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들의 실력이 아버지의 실력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순 없잖아." "무슨 소리, 그 녀석은 단순한 아들이 아니라 강피르 자작이 당당하게 자랑하며 키우는 제자야. 그 나이 되도록 그 정도밖에 전수하지 못하고서 무슨 놈의 대륙의 강자야? 게다가 강피르 자작 그 자가 사람들 앞에서 직접 실력을 보인 지도 벌써 몇 년이 흘렀단 말이야. 궁정 자작이 되더니 걸맞게 들떠서 뱃살만 찌운 게 틀림없지. 아니라면 검술로 오른 자기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라도 사람들 앞에서 자주 실력을 보였을걸." "그럼 도대체 당신이 알아주는 강자들이란 누구지? 있긴 한 건가?" "아, 있고말고." 남자는 얼굴에 흡족한 미소를 띄웠다. "앞서 말한 셋하고 같이 말해지곤 하지만, 야만인 시고누는 수준이 좀 다르지. 직접 보진 못했으니 판단은 어렵지만, 그래도 야만족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심이 그에게 후광을 줬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을 거야. 그래도 엘베 전투에서의 전적은 신기에 가까운 거니까. 일단은 인정해 주자고." "그 뿐이야?" "글쎄, 그 다음부터는 내가 말해도 당신은 누군지 알지도 못할걸." 그러나 조금 기다리면 그가 술술 말을 풀어놓을 걸 알고 있었다. "훌륭한 전사라고 하면 렘므 군인이나 레코르다블 용병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지만, 내가 속한 암살자들의 세계에서 단연 최고로 쳐주는 건 트라바체스 출신들이다. 워낙 정치 음모가 발달한 나라인 탓인지, 아니면 타고난 성격들이 그런 것인지, 그 자들은 하나같이 치밀하고, 잔인하고, 빠르지. 다시 말해서 최고인데, 그 중에서도 일명 '재단사'라고 하면 다들 이름만으로도 한 수 접어준다. 내가 이 분야에서 유일하게 인정하는 사내라고나 할까. 다만 그 자는 트라바체스 사람답게 절대 복종하며 섬기는 주군이 있어서 사사로운 의뢰는 받지 않거든, 그래서 나와 부딪칠 일은 거의 없었지. 그리고 어디 보자… 그래, 그 자가 있군." 남자가 즐거운 추억을 생각하는 것처럼 가면 아래 입술로 웃는 표정을 지었다. "그 자는 진짜로 무명 검사인데… 벨크루즈 지방에서 단 한 번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야. 그 자도, 나도, 원한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실력도 숨긴 채 재미삼아 시골 잔치에 어울렸던 거라 검을 댄 이유도 가벼운 술내기 같은 거였지. 하지만 한 번 겨뤄 보고 그와 나 둘 다 더 이상 상대를 건드리고 싶어하지 않았어. 솔직히 말하자면… 정면 승부에서 필승의 자신감이 없었다고나 알까. 이 내가 말이야. 그 때 세상에는 숨어 있는 강한 전사들이 많다는 걸 확실히 느꼈거든, 그래서 지금 이런 말도 하고 있는 거고." 설명이 끝나고 있는 까닭에 막시민은 최대한 머리를 굴려 할 말을 짜냈다. "그러면 그들 중 당신의 위치는 어느 정도지?" 남자는 얼른 대답하지 않고 미소지으며 진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이런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즐거운 듯했다. "강하다는 것은 진지한 문제란 말이야. 내가 하는 이야기가 호사가들의 입담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난 이 문제를 한 번도 가볍게 여긴 일이 없어. 그래, 나는 어디에 있느냐고 했던가? 그건 확언할 수 있지. 나는 그 누구보다도 강해." "어떻게 그걸 확신할 수 있지?" 그 때였다. 컹!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세자르가 키우는 커다란 개가 식당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그동안 너무 순해 보여서 사냥개가 맞나 의심했을 정도였는데, 그런 생각이 무색하도록 전광석화처럼 빠른 공격이었다. 한달음에 목표를 향해 달려든 개는 펄쩍 뛰어오르며 앉아 있는 남자의 목을 물어 뜯으려 했다. 그리고 그 뒤로 벌어진 일도 모두 한 순간이었다. 남자는 오른손을 내밀어 개의 목을 움켜쥐었다. 다른 손으로 균형을 잡는가 싶더니, 선명한 파열음이 식당을 울렸다. 우두둑. 불필요한 동작 같은 건 없었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어른의 몸집 만한 개를 제압하고, 손을 놓았다. 목뼈가 부러진 개가 바닥에서 얼마간 버르적거렸다. "……." 막시민이 입을 열지 못하는 사이 남자는 장갑을 고쳐 끼며 중얼거렸다. "내 손은 목을 조르기에 제격으로 만들어졌어, 가장 어울리고, 가장 자연스럽지, 다만 예외가 있다면 저 네 발 달린 짐승들이야. 놈들은 숨이 끊어지는 동안 앞발로 옷을 다 햘퀴어 놓거든, 켈티카에서 주문한 수트 같은 걸 입고 있을 땐 정말 낭패지. 아참, 우리가 무슨 얘길 하고 있었더라. 그렇지, 어째서 내가 가장 강하냐고 물었던가? 당연한 거지만 설명을 못할 문젠 아니야." 개의 움직임이 멎었다. 벌어진 입에서 흐른 침만이 마룻바닥을 서서히 적셨다. 막시민은 애써 눈길을 주지 않고 남자를 주시했다. "간발의 차이로 생가가 갈라지는 이런 문제에 대해 단언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지도 몰라. 하긴 그래, 만일 그들 모두가 실버스컬과 같은 경기에 나아가 싸운다면 내가 우승한다는 확신은 할 수 없을 거야. 하지만 경기장이 아니라 거리에서 마주쳐 나를 어찌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어. 귀족 나부랭이들은 찾아낼 수조차 없는 뒷골목을 실재하는 무한 경쟁의 아레나, 결투장이라고 한다면, 난 틀림없이 그곳의 승자야. 왜인지 궁금하겠지? 왜일것 같나?" 막시민은 대답을 짐작했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그런 말은 본인의 입에서 나오게 하는 편이 가장 좋았다. 예상대로 남자는 대답하지 않는 막시민을 보고 가면 전체를 움직이며 소리만 없는 홍소(哄笑)를 터뜨렸다. "내가 그 누구보다도 비열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명예를 모르기 때문이야. 정정당당한 결투 따위가 현실의 아레나에 있을 것 같나? 난 필요하다면 그의 갑옷에 은밀히 흠집을 내고, 무기를 감추고, 말의 배에 단도를 찔러 넣고, 가장 고통스런 과거를 들추고, 놈이 사랑하는 여자의 목을 잘라 내보여서라도 상대를 무너뜨리고, 이길 거다. 오직 내가 따르는 기중이 있다면 나의 만족, 그리고 잘 만들어진 것에 대한 감동이야. 훌륭한 암살과, 그에 어울리는 훌륭한 희생자."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눈을 감고 있는 조슈아를 흘끗 보았다. "인재는 드물고 천재는 귀하지. 데모닉, 데모닉, 그러기에 도대체 뭔가 궁금했는데 과연 흥미 있었어. 이 정도의 보석이라면 내 손으로 한 번쯤 바스러뜨려 보고 싶은 것이 당연하지 않아? 내 손을 쓸까, 다른 사람의 손을 쓸까. 그걸 알고 싶어서 아까부터 죽 대화해 봤는데 생각 외로 즐겁기까지 하더라구." 막시민은 말없이 죽은 개에게 눈길을 보냈다. 저런 목을 부러뜨린 손이면 조슈아 같은 녀석은 정말 이쑤시개 꺾듯 손쉽게 죽일 것이다. "대답이 없군 그래? 안 좋은 상상을 하나? 이만큼 들었으니 충분히 짐작 하겠지만, 내가 만일 당신을 놓친다면 당신 가족은 내 손에 남아나지 않게 될걸. 말 탄 자를 잡으려면 말을 쏘아야 한다는 건 당연한 이치지." 거기가지 말한 남자는 말을 끊고 잠시 가만히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창 밖으로 누군가 다가오고 있군 그래. 아마도 이 집 주인이겠지. 왜 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창 쪽으로 올까?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챘기 때문이겠지?" 그 순간 막시민이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당신, 유령의 존재를 믿나?" 그와 동시에 기절한 줄 알았던 조슈아가 손을 뻗어 남자의 오른손을 움켜잡았다. 기대했던 막시민은 얼빠진 표정이 됐고, 남자는 그야말로 가소롭다는 듯 내려다보는 순간이었다. 다시 한 번, 뼈가 꺾이는 파찰음이 울렸다. 우둑, 하고. "조슈아, 너……." 쇠로 만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무시무시해 보이던 그 손이, 손목 관절이 꺾여 볼썽사납게 축 늘어졌다. 조슈아는 기절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막시민에겐 들리지도 않는 창 밖의 기척까지 알아내는 사내를 오직 연기력 만으로 속였던 것이다. 혹은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일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충분히 기회를 노렸던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그건 막시민도 알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조슈아가 눈을 뜨고 가만히 눈짓하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물론 무슨 계획을 갖고 있는지는 전혀 몰랐다. 다만 눈길을 끌어 줘야 한다는 것만은 눈치챘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테이블이 와락 벽 쪽으로 밀려나고, 조슈아가 몸을 일으키며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뜻밖으로 남자는 조슈아를 제지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손을 잠깐 내려다보더니 기묘한 비웃음 같은 것을 머금었던 것이다. 자기가 너무 말을 많이 해서 일을 그르쳤다고 느끼는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응, 이젠 믿겠는데." 남자가 한 대답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처음엔 깨닫지도 못했다. 막시민이 외친 '유령의 존재를 믿느냐'라는 말은 그야말로 생각나는 대로 튀어나온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몸 어디를 봐도 지금 내 손목을 부러뜨릴 힘이 나올 구석은 없거든. 유령이라도 씐 건가." 그런 상태로도 조금 전 자족적으로 떠들어대던 말투와 달라진 점이 없다는 사실이 가장 놀라웠다. 마치 오른손의 존재 유무 정도는 너희들을 처리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한다는 것처럼. 그 때 조슈아가 말했다. "이로써 오늘 당신의 시도는 조화의 우미(優美)를 일게 됐군요. 이건 후렴구가 길어지다 못해 압운이 흐트러진 시와 마찬가지죠. 다시 말해 피날래가 없는 연극이랄까요. 내가 당신이라면 여기저기 기운 누더기에 만족하느니 새 무대를 마련해 다시 시도할 겁니다." 상식적으로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 같은 말을 곁에서 들으며 막시민이 눈살을 찌푸리는 가운데, 뜻밖의 결과가 벌어졌다. 남자가 좀더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럴 지도 모르지. 그럼 당신은 이 시점에서 내가 놓친 압운은 뭐라고 생각하지?" 조슈아는 손을 들어 자기 목을 천천히 매만지며 대답했다. "당신의 특별한 오른손으로 내 목을 졸라 죽였어야 했죠." 보통 사람으로선 납득할 수 없을 대화였으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그 다음엔?" 조슈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손을 들어 식당 창 밖의 처마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쯤 매달면 어떨까요?" 막시민은 '무엇을?'이라고 물으려다가 꾹 눌러 참았다. 몰라서 물으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정신 나간 대화를 참기 힘들었던 것이다. "나쁘지 않아. 아니, 좋군. 예술가다워."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아쉬운 듯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느껴져서 막시민은 다시 한 번 안경을 밀어 올리며 입술을 조금 떨었다. "당신이 말한 압운은 강하고 멋이 있군. 그런데 끝 소절 변형은 없는 건가? 정통 루그란 식은 아니지만, 훨씬 역동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에 좋아하는데." 조슈아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쯤에서 변조도 나쁠 것 없죠. 대단원을 밀어 올리는 느낌을 주려면 이 방에 불을 지르거나, 당신 자신을 살해하는 것은 어떨지, 아니면 밖의 풀밭을 피로 적셔서 까마귀들을 부르는 것도 한 방법이겠죠. 피가 좀 많이 필요하겠지만." 농담의 선은 이미 넘었다. 일부러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하며 즐기는 사람들은 종종 있다. 그러나 명백한 살의를 가진 자 앞에서 자신을 죽이는 방법, 그리고 죽인 뒤의 연출에 대해 논하고 있는 그의 정신은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궁금했다. "한 명으로 부족하면 여러 명을 쓰면 되는 거지." "글쎄, 무차별적인 학살자가 되는 건 고상함을 잃는 거라고 보는 게 내 의견입니다만, 재가 제대로 이해한 거라면 좀더 종요로운 선별이 필요한 분야가 아닐까요. 당신의 예술이란 건, 피를 많이 뿌리려면 내 시체를 여러 조각으로 잘라요. 단, 밖에 나가서." 말을 맺는 조슈아는 뺨이 눈에 띄게 창백해져 있었다. 다가서면 실핏줄이 들여다보일 지경이었다. 그런 상태로도 그는 하려던 말의 끝을 맺었다. "당신은 직업적 자신감을 갖고 효율적으로 일하는 사람이지, 압생트에 취한 예술가 같은 부류는 아니니 말이지요." 그리고 남자가 천천히 테이블에서 일어섰다. 막시민은 그가 돌발 행동을 취할 경우 대처할 방법이 있을까 재빨리 계산해 보았다. 가능성이 적긴 해도 처음보다는 승산이 있었다. 커튼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도 그 정도라면 뛰어나와 주겠지만……. 조슈아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사흘쯤 뒤에 다시 뵐까요?" "나흘로 하지." 테이블을 빠져나오며 남자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조언 하나 하자면, 당신이라면 지금의 내 목소리를 정확히 기억할텐데, 소용없는 일이야. 난 다섯 가지 이상의 전혀 다른 목소리를 갖고 있거든." 막시민이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고 노려보는 가운데, 남자는 천천히 식당을 가로질러 입구로 나갔다. 안도해도 되는 걸까. 정말로 간 것일까, 이 상황은 도대체 뭔가……. "아, 잠깐만." 조슈아가 갑자기 그를 불러 세웠다. 살인자가 자기 스스로 가고 있는데! "당신을 뭐라 부르면 될지. 이름이 안 되면 별명이라도 가르쳐 줬으면 좋겠군요." 남자는 돌아보더니 이젠 가면의 일부처럼 움직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샐러리맨(Salary man)" 남자의 모습이 사라지고, 입구의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 잠간 침묵이 흘렀다. 둘 다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조슈아가 막시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쳤을 때, 막시민은 친구가 맥이 탁 풀린 미소를 짓는 걸 보았다. 그 얼굴 그대로 녹아내려, 잠에 빠져버릴 것처럼.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다." 마지막가지 가장한 태연자약함은 그의 생기를 바닥까지 긁어낸 결과였다. 웃으며 농담하다가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를 상대로 버틸 수 있었던 힘은 오직 연기력뿐이었다. 지금껏 해온 어떤 연기보다도 힘든, 현실의 연기였다. 인상을 찌푸린 막시민이 다가가 휘청거리는 그를 붙잡으며 화를 참을 수 없는 듯 소리질렀다. "넌! 정말로… 널 죽이겠다고 찾아온 암살자하고 천연덕스럽게 시 짓는 얘기나 하고 앉았냐! 물가에 내 놓은 얘처럼 하는 짓이 그게 뭐야!" 본심은 그렇지 않은데도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막시민도 같은 상황에, 살인자를 상대로 목숨 걸고 시간을 끌었던 것이다. 팔을 잡은 손으로 떨림이 전해져왔다. 어쨌든 부축하여 일으키는 참인데, 테이블을 짚은 손등 위에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막시민이 조슈아의 턱을 들어올렸다. "병신같이 울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로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조슈아도 턱을 꽉 물며 참으려고 했지만 도리 없었다. "…죽어버렸어, 뮤치아는 상관없는데… 누나처럼, 나란 놈은……." 거기까지 말한 조슈아가 한 손 주먹을 부러지도록 쥐며 손목을 비틀었다. 더 많은 눈물이 쏟아져 뺨과 테이블 모서리를 적셨다.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죄책감만큼이나 컸다. 막시민이 쓰게 중얼거렸다. "젠장. 내가 충분히 경고했는데도 가버렸단 말이다. 그 여자는." 막시민은 조슈아의 어깨를 놓았다. 테이블을 짚고 서서 고개 숙인 채로, 견뎌 온 것이 한꺼번에 터져 한참 동안 끊겼다. 이어졌다 하는 숨소리만 들렸다. 막시민은 달래지도 다그치지도 않았다. 그냥 실컷 울도록 내버려두었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 숨을 고른 조슈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여길 떠나야 돼. 빨리… 리체는 어디 있지? 몽플레이네 씨도, 최대한 멀리, 더 빨리 가야 돼." 긴 속눈썹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오랫동안 이러고 있을 수 없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4. 광기와 이성의 경계 "날 미친 사람이라 불러도 좋지만 날 두고 가는 것은 용서 못해. 내가 미쳤다면 당신은 악하지." 숲길이 끈적거렸다. 숲 속에만 비가 내렸던 듯했다. 물웅덩이를 피해 밟는데도 신발 속에 스며든 진흙이 질척거렸다. 얕은 신발을 신은 리체가 특히 심했다. 하지만 그녀는 평소와 달리 아무 말 없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허리에는 세자르가 준 목검 한 자루, 그리고 질긴 천으로 만든 가방을 멨는데 안에는 내용물을 끝가지 밝히지 않은 보따리 하나와 더불어 둥근 빵과 두터운 치즈, 다진 고기를 구은 것 등이 차곡차곡 챙겨 넣어져 있었다. 걷지도 않은 바짓가랑이가 물과 진흙 범벅이었지만, 막시민이 닦는 것은 ㅇ일하게 안경뿐이었다. 지금도 안경을 벗어 한 차례 닦은 뒤, 주의 깊게 사방을 둘러보고는 걸음을 재촉해 갔다. 반장화에 허리 길이의 짧은 망토 차림인 조슈아는 숯에 들어서기 전에 각반을 쳐서 비교적 걷기가 쉬웠다. 그러나 젖어 늘어진 머리가 눈가를 찌르는 듯 자꾸만 이마를 쓸어 올려야 했고, 걸음걸이도 어딘가 불안정했다. 나뭇가지 틈에서 흐릿하게 반짝이던 해가 이윽고 불에 단 석쇠처럼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앞장서서 걷던 세자르 몽플레이네가 멈춰 서서 돌아보았다. "여기서 요기를 하고 갑시다." 마땅히 앉을 곳이 없어서 남자들은 근처에 있는 나무에 기대섰다. 리체가 가방을 열어 빵을 하나씩 나눠주고, 고기와 치즈도 조금 잘라 주었다. 그런 다음 리체 자신은 약간 발돋움해 낮게 뻗은 가지 하나에 올라가 앉았다. 세자르는 젖는 것도 개의치 않고 바위 하나를 골라잡아 앉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 먹어치워 버렸다. 다른 사람들도 말없이 먹어치우는 데 고작 5분 여가 걸렸을 뿐이었다. 그나마 조슈아는 잘 먹지도 않았다. 얼마간 먹다가 빵을 절반 쪼개어 막시민에게 건네줘 버렸다. 말하진 않지만, 틀림없이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이다. 잔소리 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받아서 두 입만에 끝내버린 막시민은 선 채로 다리를 좀 풀었다. 조슈아가 망토 자락을 여미며 말했다. "여름 밤 치고는 싸늘한데." "먹어서 살을 찌우면 안 추워져." 그렇게 대꾸하는 막시민도 조슈아에 비해 낫다뿐이지 깡마른 건 마찬가지였다. 조슈아는 빙긋 웃었다. "나한테 그런 투자론 본전도 안 나와." 키가 후리후리한 두 소년은 나무에 기대어 하나는 나뭇잎 쌓인 바닥을, 다른 하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반시간도 안 돼 해가 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막시민은 하늘을 관찰해 봤다. 나뭇가지들로 빽빽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다시 비가 올 것 같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조슈아는 젖은 장화코를 내려다보며 걸어온 길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리체가 아버지를 불렀다. "우리, 얼마나 왔지?" "아직 멀었지." 세자르는 연신 하품을 했지만, 본래 건강한 사람이라 아직 체력은 끄떡 없었다. 오늘만 해도 섬을 떠나 소드─라─샤펠로 건너온 시간을 합하면 일곱 시간 가량 쉬지 않고 왔지만 막시민도, 그리고 리체도 무리 없이 버틸 정도는 되었다. 제일 걱정되는 사람은 조슈아였는데, 아직까지는 괜찮은 듯했다. 하긴, 하고 막시민은 생각했다. 조슈아는 겉보기보다 강단은 있는 편이다. "나흘 안에 도착할 수는 있겠어요?" 조슈아가 묻자 세자르는 생각하는 표정이다가 대답했다. "운이 좋으면요. 사실 근처에 도착하는 건 문제가 안 되는데 그 다음이 걱정입니다." "무슨 걱정요?" 그들은 세자르가 낮에 말한 '좀 어설프고, 실패할 가능성도 높지만 성공만 한다면 매우 편해지는 방법'을 찾아서 가는 길이었다. 그 방법을 알려줄 사람은 세자르의 옛 친구라는─그 말을 할 때 세자르의 표정이 계면쩍던 것으로 보아 좀 미심적었지만─사람으로 루그란과 하이아칸이 맞닿는 국경에 살고 있었다. 막시민이 '루그란에 사는 겁니까, 하이아칸에 사는 겁니까?'라고 물었을 때 세자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글쎄, 잘 모르겠어. 둘 다일지도 모르고." 비록 루그란과 하이아칸이 루그두넨스 연방으로 묶여 있다고 해도 최근엔 연방의 결속력도 약해지고 있는 데다 엄연히 다른 왕이 다스리는 국가였다. 국경을 넘는 것에 문제가 없느냐고 다그쳤지만, 세자르는 고개를 저으며 문제는 그게 아니다, 라고 말했다. 그 대화를 생각해 낸 막시민이 물었다. "그 대도 국경 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 다음이 문제라고 했지요? 도대체 '그 다음'이란 건 뭡니까? 말을 해야 불안하지 않지요." 세자르가 대답하지 않는 가운데 리체가 입을 열었다. "난 말이야, 좀 알 것도 같은데……." "뭔데?" 리체가 세자르를 봤다. "아빠, 그 머리 이상한 아저씨한테 가는 것 아닌가?" "아, 하하, 글쎄다……." 세자르가 불안하게 웃는 가운데 막시민이 중얼거렸다. "머리 모양이 이상하단 말은 아닐 거고." "안타깝지만 절대 아니야. 그 아저씨는, 음……." 리체가 말을 고르는 걸 보니 왠지 불안해졌다. 조슈아도 궁금한 눈으로 리체를 쳐다봤다. 리체는 조슈아의 시선을 느낀 듯했고, 그 사실이 그녀에게 영감을 준 것 같았다. "조슈아 같아." 그 발언은 두 소년을 똑같이 놀라게 만들었다. "뭐?" "뭐라고?" 조슈아는 당황해서 설명을 기대하며 세자르를 쳐다봤고, 막시민은 충격받은 얼굴로 조슈아를 흘끔 보며 선언했다. "저런 놈은 절대, 한 명으로 충분해!" 조슈아도 맥없이 덧붙였다. "나도… 나로 충분해." 막시민은 그 동안 자신이 조슈아를 잘 안다고 믿어 왔지만, 오늘 낮의 일로 그 생각을 철회했다. 5년이나 못 만난 사이였다. 그 정도면 수천 개의 달걀을 낳고도 남을 시간… 이라고 생각하다가 자신이 달걀을 먹고 싶다는 걸 깨닫고 한심한 기분이 들어 생각하기를 관두었다. 어쟀든 간에 녀석은 예전의 무시무시하면서도 상냥한 꼬마가 아니었고, 오래 전에 씨앗에 불과했던 뭔가가, 방치해 놓은 덩굴처럼 자라난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방치한 장본인이 누구인가 하면… 왠지 모르지만 자신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그런 변화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조슈아 본인일지도 모른다. "열 살 땐가 보고 그 후론 못 봤다는 걸 전제해 두겠는데, 어쨌든 세상의 마법사들이 다 그렇다면 마법이란 건 종류 불문하고 무척 위험한 게 틀림없을걸, 지금도 그 아저씨가 방구석에서 기르던 버섯한테 햇빛이 필요하다고 자기 집 지붕 날려버리던 기억이 선하네." 막시민은 세자르를 돌아봤다. "폭파 전문가입니까?" "……." "젠장, 이거 가도 되는 거야?" 하지만 조슈아는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지붕을 실수로 날린 게 아니라 일부러 그런 거라면 일단 보통 실력의 마법사는 아니겠네." 막시민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너 닮았다고 편드냐?" "그런 게 아니고… 어쨌든 일단 여기까지 온걸. 가는 것 말고 달리 대책도 없잖아?" 조슈아의 말을 기회로 생각한 듯, 세자르가 바위에서 일어나며 모두에게 가자고 휘휘 손짓했다. "자아, 자, 서두르자고, 나흘뿐이잖아. 난 지금도 그 놈 생각만 하면 등골이 시큰거린다." 막시민도, 조슈아도 기댄 나무에서 몸을 일으켰다. 세자르의 '그 놈' 운운은 확실한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사흘 째, 그들은 결국 말을 구해야 했다. 두 번의 밤을 꼬박 새우며 걸어갔으니 낮에 잠깐씩 쉰 것을 감안하더라도 모두 초죽음이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말할 나위 없이 육체적 고생을 모르고 자란 아르님 소공작은 빈사 상태에 돌입하여 일행에게 숙제를 던져 주고 있었다. 그런데 당연한 일이지만 말처럼 비싼 것을 살만한 돈이 그들에게 있을 리 없었다. 막시민은 마을 어귀의 나무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조슈아를 향해 들리든 말든 볼멘소리를 퍼부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 자식은 아노마라드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집안 아들이란 녀석이 어떻게 집나올 때 값나가는 것 하나 들고 나온 게 없냐? 하여간 정신 상태가 글렀어. 이런 도움 안 되는 놈을 데리고 다니는 내 정신 상태도 정상은 아냐." 옆에 앉아 다리를 주무르고 있던 리체가 눈만 치떠 쳐다보고는 말했다. "그런 너희를 데리고 다니는 우리 부녀는 뭐냐." 막시민은 세자르를 흘끔 보고는 어조를 바꿨다. "물론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정신을 가진 부녀지." 리체는 여전히 빈정거렸다. "그렇지. 고상하게 돌았어. 다들." 조금 후, 잠든 건지 기절한 건지 모르게 돼버린 조슈아를 본 리체가 열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이 아니라 수레를 구해야 되는 것 아냐?" "그 수레는 네가 끄냐?" "아니, 물론 말이지." "요샌 수레 사면 말을 끼워 주나 보지?" 밤잠도 자지 않고 강행한 건 보통 무리한 일이 아니었다. 나흘로 끝날 여정이었기에 망정이지, 긴 일정이 있다고 한다면 바보짓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없었다. 잠간 쉬고 있을 때도 누군가가 뒤쫓는 듯한 기분에 가다가 쓰러지더라도 처음의 장소에서 멀어지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강한 압박감이 그들을 몰아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막시민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결론을 내렸다. "저 자식의 겉옷을 벗겨 팔자." 그 말을 들은 리체가 한숨을 푹 내쉬며 일어나 다가왔다. 막시민이 뭔가 싶어 쳐다보는데 돈주머니 하나가 툭 떨어졌다. "오, 이거 금화잖아? 이런 돈이 있었으면 진작 말할 것이지." 주머니를 열어 본 막시민이 반색을 했다. 리체가 맥없이 대꾸했다. "조슈아가 준 돈이나 다름없다보니 내놓은 거야. 쟤 옷을 파느니 이것부터 내놓는 게 순서겠지." 막시민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리체는 여간 속 쓰린 표정이 아니었다. 그건 리체가 조슈아로부터 얻은 '아쿠아리안' 입장권 두 장을 웃돈 붙여 팔아 마련한 비상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돈으로도 좀 모자랐다. 그래서 막시민의 계획도 결국 실행에 들어가고 말았다. 조슈아가 깨기 전에 모든 일이 진행됐다. 흥정은 막시민이 맡았다. 리체와 세자르가 조슈아를 지키고 있는 동안, 값진 녹색 키드 가죽으로 만든 짧은 망토와 진줏빛 실크 블라우스, 토파즈가 박힌 벨트─리체가 그게 보석이란 걸 확인해 줬을 때 막시민의 표정이 참 볼만했다─를 말 한 필과 무명 웃옷, 자루 같은 회색 망토, 그리고 얼마간의 여비로 바꾸어 왔다. 조슈아와 발이 다 부르튼 리체를 말에 태워 출발하려 할 때 영문 모르는 세자르가 리체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왜 그래? 안색이 나쁜데." 리체가 대꾸 없이 가버리자 막시민이 돌아보며 싱긋 웃어보였다. "금화란 추억을 남기는 존재라잖습니까?" "그래도 생각보다 잘 버틴 거야." 말에서 내려놓아도 여전히 깨지 않는 조슈아를 보며 막시민이 중얼거렸다. 그들은 다시 들어선 숲길에서 작은 호수에 이르러 식수를 마련하는 중이었다. "배우도 꽤 체력이 필요한 일이라고." 하염없이 열 번 정도 세수를 하던 리체가 고개도 들지 않고 대꾸하더니 다시 막시민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너도 보기보단 잘 버티네, 겉보기엔 조슈아나 별다른 것 없어 보이는데." "내가 저 자식이랑 같아 보인다니, 그런 눈으로 옷 치수는 어떻게 맞추냐." "줄자는 뒀다 뭐하니." 말이 끊어졌다. 막시민은 자기도 세수나 해볼까 하는 생각에 호숫가로 갔다. 대강 씻고 물기를 말리고 있자니 세자르가 와서 앉은 김에 점심이나 먹자고 말했다. 막시민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저씨도 참, 엉뚱한 일로 고생 많으시네요." 세자르는 리체가 건네 준 빵을 무심코 찌그러뜨리더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건 비밀인데……." 그는 리체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앉도록 잠시 기다렸다.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이런 일로라도 딸애한테 도움이 되고 있단 게 약간은 보람 있어." "……." 세자르는 그 나이에도 아직 소년 같은, 나쁘게 말하면 철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자기에게 배우는 아이들을 엉터리로 훈육하고 있는 건 무슨 방침이 있어서가 아니라 일이 귀찮은데다 뭘 하든 시간만 흐르면 돈을 받기 때문이었다. 그럭저럭 이유를 만들어 붙인다면, 어린 꼬마들에게는 훌륭한 검술보다 신나게 노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정도일까. "평생 저 얘와 저 얘 어머니한테 폐만 끼치다 보니 어느새 도움 따윈 기대할 수 없는 인간으로 낙인찍혀버렸단 말이야. 그런데 문제는, 그들뿐 아니라 나도 그 생각엔 찬성이란 거야. 내가 생각해도 꾸준한 책임감 같은 건 없는 사람이 나라서, 뭐 사실을 말하자면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던 것은 아니었어." "그럼 처음엔 어쩔 계획이었는데요?" "그냥… 여비나 마련해 주고 말았을 지도 모르지. 아참, 여비 줄 돈도 없었구나. 깜빡 잊었다. 어쨌거나 난 본래 계획성 있는 사람이 아냐. 결국 순간적인 기분 때문에……." "순간적인 기분이요? 무슨 계기라도?" "딸애가 원피스를 입어 줬잖아." "……."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생각하는 중인데 리체가 다가와서 이야기는 끊겼다. "나 말야.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막시민에게만 물으려는 건 아닌 듯 리체는 세자르 쪽으로도 고개를 돌렸다. "'그 남자' 말이야 나도 상황을 납득해서 이렇게 따라오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 아직 구체적인 두려움은 없거든. 물론 직접 보지 못한 탓이 크겠지. 그래서 말인데……." 리체는 조슈아 쪽을 한 번 돌아보고 말을 이었다. "세 사람이 공유하고 이는 '그 남자'에 대한 느낌을 설명해 줬으면 좋겠어." 두 사람이 얼른 대답하지 않자 리체가 다시 힘주어 말했다. "저렇게 될 때까지 밤새워 걷게 하는 힘… 말야." "알아봤자 좋을 거 있을까, 강행군을 납득할 수만 있으면 그냥 가는 게 모두에게 이로워." 일방적으로 말해버린 막시민이 자리를 뜨려했지만, 리체가 막아서며 장밋빛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내가 공포에 질려 주저앉아 못 가겠다고 그럴까봐?" "리체, 그만둬라." 세자르가 말했지만 어차피 그의 말은 리체에게 별 영향력이 없었다. "원해서 그렇게 된 건 아니었지만, 너와 한 배를 탔다고 생각한 지도 벌써 엿새나 왜. 그동안 네가 나한테 말해준 게 뭐였니? 조슈아네 별장에 숨어 들어갔을 때도, 바이예 경이란 귀족의 집에 갈 때도, 네가 나한테 뭘 설명했니? 조금이라도 상황을 이해하게 된 건 네가 조슈아를 만나서 하는 애기를 들은 후였어. 그동안 네가 나한테 해준 말이라고는 모조리 죽을 지도 모른다. 그것뿐이잖아? 네가 날 죽을 위기에서 보호하고 있는 것 같니? 돌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럴 줄 알았니?" 말의 내용과는 달리 예전만큼 발끈한 어조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실망스러움에 가까웠다. "난 네가 왜 그런지 알고 있어.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니지. 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아지는 건 아니야. 더구나 지금처럼 어쩔 수 없이 같은 운명에 처한 처지끼리 그럴 땐 화나기보단 우울해. 아니었으면 이런 말 꺼내지도 않았어." 그제야 막시민이 입을 열었다. "왜라고 생각하지?" "여자애를 사람 구실 하는 존재로 보지 않으니까." "……."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말이 없는 막시민을 보는 리체의 표정에 기대감 같은 건 없었다. 어차피 인정 할 게 뻔하지. 하는 눈빛이었다. "네 말이 오해란 걸 설명할 방법이 없군, 그렇게 원한다면 그 남자, '샐러리맨'에 대해서 설명해 주지." 곁에 서 있던 세자르는 더 이상 끼여들지 않고 떠날 채비를 했다. 조슈아를 말에 태웠을 무렵, 막시민이 고삐를 잡으며 짧게 말했다. "뮤치아란 여자, 죽었어." 리체는 순간 뮤치아가 누구인지 잊기라도 한 듯한 얼굴로 우뚝 멈췄다. 막시민이 말했다. "그 자였지." "죽었……어?" 막시민은 침착한 얼굴이었다. "너도 내 말이 곧이 들리지 않았던 거냐? 난 극장에 화재가 났던 날, 그 여자에게 분명히 경고했어. 떠나면 위험해질 거라고." 그들은 곧 출발했다. 한동안 말이 없었으나, 막시민이 다시 입을 열어 나직이 말하기 시작했다. "그 자, 처음엔 조슈아와 시와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더군, 아주 평범한 목소리로, 뭐랄까. 도서관 사서 같은 목소리랄까." 리체는 대답 없이 귀를 기울였다. "그런 목소리로 자신이 대륙에서 가장 강한 자이고, 죄 있는 자들을 위한 심판자라고 말하더군. '책 찾아 드릴까요?'라고 할법한 그런 목소리로 말야." "왜 목소리에 대해서만 말하는 거지?" "처음엔 밖에서 엿들었으니까." 묵묵히 앞서 가고 있는 세자르가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무척 말이 많았어. 내가 시간을 끌기 위해 꺼낸 화제들에 하나하나 답하고, 자기 의견을 덧붙이고, 내가 납득할 때까지 설명할 작정인 것 같았지. 옆에서 변죽만 좀 울려줘도 혼자 열 시간은 떠들 것 같은 인간이었단 말이야, 그런데도……." "얘기만으론 전혀 무서울 것 같지 않은 사람인데?" 막시민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않고 걷기만 했다. 영문을 모르던 리체도 침묵이 길어지는 동안 이유를 짐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마도 말을 돌릴 거라고 짐작했다. 짐작은 어긋났다. "그런데도 좀… 무서웠어." '다른 남자가 무섭다'고 하는 것은 남자들이 어머니도, 누이도, 아내도 아닌 여자 앞에서 가장 하기 싫어하는 이야기 중 하나일 것이다. 리체의 표정이 진지해진 건 그 즈음이었다. "그 자는 무기를 갖고 있지 않았어. 아니, 숨기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꺼내서 겁을 주진 않았어. 다른 패거리를 데려온 것 같지도 않았고, 그다지 위협적인 말도 안 했지. 가면을 섰으니 얼굴을 알아볼 수도 없었어. 그런데 왜 그 자가 두려웠을까. 그 이유를 안 건 조슈아가 그 자에게 자길 죽이는 방식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을 때였어." "죽이는 방식이라니?" 막시민의 목소리에서 문득 피로가 확 몰려오는 게 느껴졌다. "말 그대로, 자기를 어떤 망식으로 죽이는 것이 좋을지, 죽인 뒤에 시체를 어떻게 할 지에 대해 조언하더군, 목을 조르고, 시체를 매달고, 어떻게 하면 피를 흘릴지…. 자길 죽이러 온 암살자 앞에서 그게 할 수 있는 농담일까?" 리체는 여전히 말 목에 엎드려 자고 있는 조슈아의 뒷머리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그냥 잠든 소년일 뿐이었다. 그러나 바라보고 있는 동안 오한이, 아니 그보다는 발열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 때 내 정신이 저런 미친 자들의 존재를 납득하기엔 지나치게 현실적이란 걸 깨달았단 말이야. 이해할 수 없는 존재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지. 난 아무리 간악하고 잔인한 인간도, 말이 통하지 않는 괴물과 맞닥뜨리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놈은 그가 왜 나를 죽이는지, 죽는 순간가지 알 수 없어. 왜 내가 죽으면 안 되는지 설명할 수도 없어. 심지어 살려달라고 빌 수도 없다. 제기랄, 난 그런 놈들의 손에 결코 걸리고 싶지 않아. 차라리 악당의 음모에 빠져 죽는 편이 낫지. 그리고 대화가 가능한 인간 중에서는." 앞서 가던 세자르가 걸음을 멈추는 것이 보였다. 그들도 멈췄지만, 막시민의 말에 담긴 감정은 오히려 격해졌다. "납득할 수 없는 정신 상태를 가진 놈들의 존재가 가장 두렵단 말이다. 괴물이라면 저들의 소굴에서 살면서 나오지 말아야지, 왜 인간 중에 그런 괴물이 있는 거냔 말이야!" 그 때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죽은 것처럼 쓰러져 있던 조슈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던 것이다. "아……." 리체는 당황해서 막시민을 흘끗 보았다. 막시민은 조슈아를 위해 먼 아노마라드에서 이곳까지 달려올 정도이니 둘은 보통 친구가 아닌데, 조금 전의 말은 친구에게 결코 들려줘선 안될 듯한 말이었던 것이다. 막시민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조슈아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한 말의 여운 탓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그런데 조슈아의 얼굴에 약한 미소가 떠올랐다. "잘 봤어. 막군은 역시 사람 보는 눈이 탁월해." "……." 막시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옆에서 세자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한 숨 붙이지 않고는 도저히 더 못 가겠다. 너희들도 동의할 거라고 생각하니까, 야영 준비를 해야겠어." 일방적 통고였지만 아무도 반론하지 않았다. 그들도 이미 절반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고 깨어났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담요 속에서 뒤척이던 리체는 옆에서 이야기 소리가 들려 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눈을 반쯤 뜨고 보니 누가 언제 피웠는지 몰라도 모닥불이 타고 있었고, 그 옆에 담요에 푹 싸인 조슈아와 무릎을 세워 턱을 괴고 앉은 막시민이 있었다. "…네 생각도 나하고 같냐." 막시민의 목소리가 들리고, 조금 후 조슈아가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자는 분노나 격정에 사로잡히지 않아. 자기 말대로 자신을 '샐러리맨'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지, 다만 자기 직업에 예술적인 완벽함을 추구하는 '샐러리맨'이야. 왕궁 세무관 같은 합리성에, 미친 예술가가 결합된 듯한 인물이라고." "넌 그 자를 무척 잘 이해하는군." 사이를 두고 조슈아가 말했다. "그런 미친놈의 생각은 나 같은 사람이나 들여다볼 수 있는 거겠지." "너 같은 게 뭔데." "미친 거지, 똑같이." 다시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리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등 뒤쪽이어서 소년들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너… 그 얘기 할 때 말이야." 참고 있던 이야기를 꺼낸 듯, 막시민은 말꼬리를 끌다가 모닥불을 보던 고개를 들어 조슈아를 봤다. "정말로 너 자신이 시체가 되어 까마귀들한테 뜯기는 장면을 상상해 보고 말한 거냐." 조슈아의 목소리는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낮았다. "내 눈엔 실재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여서… 그렇게 말했어. 솔직하게… 그래, 그 말 할 때 대상이 나란 건 느껴지지도 않더라고. 그 사람은 자기 일을 예술처럼 생각하니까… 그 사람의 입장에서 최대한 조화점을 찾으려고 했어." "넌 그게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보는 거냐? 스스로 생각해 봐. 지금 너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난 어린 시절의 너에 대해 알고 있어. 그 때의 너도 그랬다고 말할 셈이냐?" 리체가 일어서서 모닥불 근처까지 갔을 때, 조슈아의 대답이 들렸다. "나도 살인자가 될 수 있는 소질을 타고난 건가… 그런 생각이 든다." "……." 막시민이 대꾸하지 못하는 동안, 그들 곁에서 가 앉은 리체가 입을 열었다. "바느질을 할 때가 있어. 보다시피 내 손가락 끝은 일지감치 바느질에 단련되어서 왠만해서는 상처도 나지 않지. 내가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면 잠시 정신이 나갔었다는 결론밖에 나지 않아. 그리고 그건 나한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닐 거야." "문제는,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일 때도 그런 정신적 일탈이 용서되느냔 거지." 막시민은 리체를 보더니 턱짓으로 다시 조슈아를 가리켰다. "자신을 그런 대상으로 볼 수 있다면, 남도 볼 수 있지. 가벼운 미친 짓쯤이야 누구인들 하지 않겠냐? 나도 술 마시고 종종 해괴한 일을 저지르곤 한다고, 하지만 주워담을 수 없는 물을 엎어버린 적은 없어. 그러한 일도 없고." "그렇지만 이번의 경우 결과는 반대였어. 조슈아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 자가 준 것 아니냐?" "그 자가 가고 안 가고는 문제가 안 돼. 문제는 자기 죽음을 쉽사리 상정하는 정신이라고! 난 그런 상태로 널 내버려둘 수 없단 말이다!" "막시민." 한참만에 조슈아가 입을 열었다. "난, 널 처음 만났을 때도 정상은 아니었어. 하지만 그 때의 넌 날 메모장이니 주판이니 그렇게 불렀을 뿐이었지. 아니, 그래,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마, 내가 변했다면 너도 변했어. 네가 어떻게 살아왔을지 어렴풋하게 밖에 짐작하지 못하지만, 한 가지만은 알 수 있어. 지금의 넌 그때만큼 너그럽지 않아." "네겐… 이게 문제로 보이냐?" 너그럽지 못하다는 말에 막시민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오히려 그 땐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말하지 그래? 차라리 그 땐 널 걱정하지 않아서 상관 안 했던 거라고 말하라고, 네 상태가 어떤지 난 잘 알아. 이렇게 된 건 너 자신이 혼자 지내면서 스스로를 추스리지 못해서야." "아니. 넌 내 상태가 어떤지 몰라." 드디어 조슈아의 얼굴에도 분개한 표정이 떠올랐다. "데모닉이란 게 어느 정도로 끔찍한 건지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누워 잠을 청하는 동안 낮 동안 했던 모든 대화가 저절로 재생되는 기분을 알아? 펜을 들고 난서하다 보면 어느새 예전에 본 것들 중 가장 복잡한 아라베르크를 똑같이 그리고 있는 상태가 이해돼? 숫자 몇 개를 떠올렸는데 무심코 그걸 곱하고 더해서 수십 자리의 괴물 같은 숫자를 만들고도 멈춰지지 않아 머리를 벽에 부딪쳐가며 다른 생각을 떠올리려 애쓰는 어려움을 아느냐고! 마지막으로 본 지 몇 년이 지났지만, 난 아직도 비취반지 성의 계단 난간에 새겨진 무늬를 전부 정확히 기억할 수 있어. 그와 마찬가지로, 내게 일어났던 수만 가지의 일들이 항상 엊그제 일인 듯 머릿속을 어지럽힌단 말이다. 자, 너라면 어떨 것 같아? 이런 상태로 말끔한 제정신일 수 있을 것 같은지 말해 보란 말이야!" 그러나 입을 연 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그것도 몹시 당황한 말투로. "네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 그게 전부 사실이야? 천재란게… 본래 그런 건가?" 리체는 그 동안 조슈아가 천재, 또는 데모닉이라는 말을 몇 번인가 주워듣긴 했지만 단지 수사적인 것이라고 여기고 말았기에 그 말이 이런 뜻일 거라곤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사람들이 '막스 카르디'에 대해 하던 말들이 생겨났다. 노래와, 작곡과, 작사와, 악기 연주와, 연기와, 춤. 그 모두를 완벽하게 하기 위해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면 '막스 카르디'의 나이는 마흔이라 해도 모자란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천재, 기적, 괴물, 모두 카르디의 뒤에 따라다니던 말들이다. 생각을 뚫고 조슈아의 조소(嘲笑)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소는, 리체가 아닌 그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당신도 이런 내가 끔찍한가보지?" "이것 봐, 조슈아." 리체가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화를 참는 듯한 막시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관계도 없는 사람에게까지 응석 부리는 건 그만둬라. 흉터 자리 자랑하는 어린애 같은 꼴이야. 너에게 데모닉으로서의 고통이 있다 치자. 그러면 난 아무 어려움 없이 편안한 인생을 산 것 같으냐?" 막시민의 목소리도 미세한 열에 들뜬 듯했다. "어머니는 기억조차 희미하고, 아버지는 집을 떠난 뒤 동전 한 푼 갖다준 일이 없지. 동생은 여섯 명에, 나중엔 동냥젖이 필요한 어린 아기까지 있었어. 내가 우리 집 생계를 책임지기 시작한 나이는 여덞 살이다. 난 그나마 여덞 살이기라도 했지만 너무 어렸던 내 동생들은 그 후로 몇 번이나 죽을 뻔했다. 여덞 살짜리가 돌보는데 오죽하겠냐? 바람처럼 돌아다니는 네 작은 할아버지가 도와 준 시기는 그런 내 인생 가운데 특집편 같은 거였어. 내가 지금가지 어떻게 살아왔을 것 같아? 넌 코츠볼트에서 자라는 모든 잡초와 나무껍질의 맛을 알고 있어." 조슈아가 말없이 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막시민은 그치지 않았다. "그래, 데모닉, 고통스럽겠지. 네게도 힘든 일은 많았지. 하지만 넌 저 여행 식량이 입에 맞지 않아 먹기 힘들 정도의 생활을 유지해 왔어. 네겐 당연한 것이겠지만, 당연하지 않은 사람에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란 말이다. 또, 만일 노래 잘하고 싶어서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실패한 사람이 있다면, 네 재능은 혼을 팔아서라도 갖고 싶은 것일 거다. 이래도 네가 저주받은 것 같냐? 미쳐도 용서될 정도로 운이 없을 것 같아? "그만." 조슈아가 손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 막시민은 홱 고개를 돌려 모닥불을 바라봤다. 그리고 리체가 입을 열었다. "난… 오늘은 이걸로 충분한 것 같다. 내가 너희들을 이해하려면 알아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는 것만은 알겠어. 지금의 난 단지 신기한 얘기책을 읽은 것처럼 당혹스러울 뿐이야. 그건 너희의 이야기가 내 문제로 느껴지지 않아서겠지. 내게 더 많은 이야기를 해 줄 마음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것만으로 알 수 없다는 것만은 말해둘게, 난 너희를 이해하지 못했어. 이 말은 우리가 아직 친구가 아니란 뜻일 거야." 리체는 그들 사이로 걸어가 모닥불을 완전히 밟아 껐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선 채로 돌아보며 말했다. "하지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 리체가 막시민에게 시선을 향했기에 막시민도 고개를 들었다. "이제 그 남자와 식당에서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대강 알 것 같아. 그래, 난 그런 얘기가 미친 짓이라는 데도 동의해. 그런데 말이야, 그 때 조슈아가 너나 나에 대해서도 얘기했니?" 막시민이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뭐라고?" "조슈아가, 너나 나를 죽이는 것에 대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느냐고, 그 자가 그 날 마음을 먹었더라면 조슈아뿐 아니라 당연히 너나 나, 심지어 '몽플레이네 씨'도 죽였을 게 뻔하잖아. 조슈아가 그런 사실까지도 자신의 죽음을 말하듯 당연하게 얘기했니?" 막시민의 얼굴에 표정이 떠오르기까지는 얼마간 시간이 걸렸다. '여러 명을 죽이면 된다'라고 말하는 그 남자에게 '학살자가 되지 말라'고 말하던 조슈아를 기억해 냈을 때, 그제야 맺힌 매듭 하나가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아니었어." "나라면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거야. 그래, 미친 짓은 맞지만, 솔직하게 생각해 봐. 그런 상태로는 미칠 수밖에 없다는 말도 일이가 없진 않잖아? 난 그 데모닉… 이라는 것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조금 전 얘기는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어. 넌 친구라면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조슈아의 얘기가 얼마나 인정할 만한지에 대해선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그들은 말없이 새벽이 밝는 것을 지켜봤다. 푹 잔 덕택에 몸은 어느 정도 회복세였다. 그리고 드디어 목적지도 멀지 않았다. 꺼진 모닥불에서 엷은 연기가 올랐다. 오해인지 이해인지 모를 이야기가 한바탕 오가고, 남은 것이 재일지 불시일지는 알 수 없었다. 리체가 말했다. "난 몽플레이네 씨나 깨우러 가야겠다." 조슈아는 세자르가 있는 쪽으로 가는 리체의 뒷모습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곳에도, 자기한테 없는 것이 있다고 느끼는 것처럼. 막시민이 조슈아에게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지금까지 이런 애기 너한테 한 적 있냐." '이런 얘기'가 뭔지 대강 짐작이 가서 조슈아는 말없이 미소지었다. "젠장, 밤에는 왜 제정신이 아닌 건지. 해 뜨는 걸 보니 우는 소리나 늘어놓은 내가 유치해 미치겠다." 조슈아는 담요를 걷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닥불 맞은편으로 걸어가더니 긴 막대를 집어 재 속을 쑤셨다. 불티가 오르던 하늘은 서서히 푸르러지고 있었다. 그 빛 때문인지 쟂빛 머리가 푸르스름한 광채를 띠었다. "열 일곱 해 동안, 가장 관찰할 만한 대상은 나 자신이었어, 내가 누군지 알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생각할수록 데모닉의 정체는 물론이고 나 자신이 과연 인간인지조차 의심스러워질 뿐이야. 미쳐서 이 모든 걸 모르게 되고 싶다는 생각도 솔직히 자주 했어. 또는 누나처럼……." 말이 잠간 끊겼다. "누나를 생각하면… 내게도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어둠…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 말이야. 발을 헛디디면 누나처럼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공포…, 정말로 있었어. 그걸 보면 역시 아무 것도 모르는 백치가 되긴 싫은 모양이지? 하지만 누나는 단순한 바보는 아니었어. 그래서 더 누나가 나처럼 될 수 있었고, 나는 누나처럼 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하게 돼. 누나는 내가 아니어서인지 살아 있는 동안 천사처럼 선(善)했어, 행복해했어. 난 한 번도 느껴보지 목한 그런 행복감 속에서 살다가 갔단 말이야. 그건 보상같은 것일까? 그러니까… 데모닉이 아니게 되면 그렇게 행복해지는 것 아닐까?" 막시민은 고개를 저었다. "망상일 뿐이야. 네 누나는 데모닉도 아니었고, 다섯 살짜리의 정신을 갖고 있다면 누구나 그렇게 천진난만한 게 당연하지, 네 누나가 제일 아름다운 나이에 죽었으니 그렇게 기억되는 거지, 노파가 되어 주책을 떨다가 죽었다면 지금과는 다를걸." ㅍ신랄한 말이긴 해도 그리 공격적인 어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시민은 잠시 후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미안하다. 누나의 일을 내 마음대로 말해서." 조슈아는 씁쓸하게 웃었다. "아니, 그게 네 방식인걸. 망상일지 몰라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나고." "강렬한 대비이기 때문이야. 너와 네 누나, 한 사람은 천재보다 더하다는 데모닉이고, 한 사람은 어린아이나 다름없는 백치야. 하나는 살아남고, 하나는 죽었어. 네 누나는 아무 것도 몰랐으니 행복이 뭔지도 몰랐을 거야. 넌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행복을 느낄 수가 없지. 하지만 이런 대비가 두 사람의 자리가 뒤바뀔 수도 있었다는 증거가 되진 않아. 너와 히스 할아버지가 동시대에 존재하는 것조차 기적에 가까운 일인데, 어떻게 너희 누나까지 데모닉일 수 있겠어? 대조된 운명에 마음을 뺏겨서 있을 수도 없는 일까지 가능성에 넣는 건 쓸데없이 자기 마음을 혹사하는 것에 불과해. 일종의 자해(自害)지." "넌… 너무나 명쾌하군." 조슈아의 눈은 우울하다 못해 비현실적인 빛을 띠었다. "데모닉이 왜 데모닉인 줄 알아? 데모닉이란 말은 누가 만들었을까? 난, 데모닉이란 별명을 제일 먼저 붙인 사람이 데모닉 이카본 본인이 아닐까 생각해. 너무나 진실에 가까운 이름이니까. 타인이 꿰뚫어볼 수 없는 본질이란 말이야. 악마가 줬다는 능력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아?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 관용도, 너그러움도 없는 것." 마지막 목소리는 평소 알던 조슈아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서늘했다. 막시민은 대답 없이 그의 눈을 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사슴처럼 빨리 달리 수 있게 된다면, 다른 사람이 모두 일부러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겠지. 죽도록 답답해도, 같은 세상에 살고 있으니 별 수 없이 발뒤꿈치에 덫을 단 것처럼 걸음을 맞춰야 된단 말이야. 그러다가 종종 미칠 지경이 된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야. 어떤 때는 최소한의 기능만 가진 나무인형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아, 죄 받을 악한 생각….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느린 이곳에서, 미쳐버리면 속이 시원해질 것 같아. 내 죄를 대신 짊어진 것 같은 누나, 결국 생애의 끝조차 그렇게 마친 누나, 그래서 난 누나를 생각하는 게 싫어. 나의 원죄(原罪)는 땅에, 무덤 속에 파묻어 버린 것처럼. 난 나보다 느린 사람들을 사랑할 수가 없어. 너그러워질 수도 없어. 그냥 참을 뿐이야. 내가 누나를 사랑했을까? 영원히 알 수 없겠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조슈아는 갑자기 두 귀를 감사며 고개를 흔들었다. 막시민은 그가 누구인지 모를 존재를 향해 지친 듯 대답하는 소리를 들었다. "됐으니 그만 날 내버려 둬. 지금은 됐어…. 아니, 너희가 지겨워 ……." "조슈아, 지금 누구에게 말하는 거야?" "난……." 말이 끊겼다. 그러나 잠시 후 조슈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질렀다. "꺼져버려!" 세자르를 깨우고 짐을 챙기던 리체가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막시민은 따라 일어나며 조슈아의 손목을 낚아챘다. "왜 그러는 거야!" 조슈아의 손목에선 한바탕 달리기라고 한 것처럼 빠른 맥박이 느껴져 왔다. 그 상태로 얼마간 지나고, 도로 주저앉은 조슈아가 맥없이 말했다. "미안하다. 가끔 이상한 목소리가 들리는데…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계속 떠들어대거든." "켈스가 아니고?" "그가 아니야. 눈에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리는 것들인데… 웃어대는 소리가 아주 기분 나빠. 그래서 한 번도 제대로 대화를 나눠 본 일이 없어." 막시민은 '환청이 아니냐'라고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켈스니티의 경우도 있다보니 그렇게 말하진 못했다. 그 즈음 그도 조슈아에게는 특별히 유령 같은 것들이 잘 달라붙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유령의 존재를 믿게 된 이상 그런 생각을 못할 바도 아니었다. "앞으로 그런 목소리가 들리거든 나한테 말해. 내가 그런 놈들은 쫓을 만한 말들을 잔뜩 가르쳐 줄 테니까." 그렇게 말한 막시민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널 혼자 뒀던 게 문제야. 켈티카 같은 데, 어려움 하나 없는 등 따숩고 배부른 곳에 혼자 틀어박혀 머리 싸매고 있으니 쓸데없는 고민이 생기는 거라고, 네가 하루하루 빵을 벌어야 하는 입장이라면, 오늘은 어느 풀뿌리를 씹어볼까 고민해야 되는 입장이라면 지금 같은 얘기를 하고 있을까? 오히려 그런 재능을 내려줘서 빵을 벌어먹을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라고 외치고 있지 않겠느냔 말이야." 배가 고프다는 것이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지워버리는지 조슈아도 경험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기억을 갖고 있더라도 이 순간 쉽사리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 "네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그래, 나도 안다.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막시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경을 벗고 나른한 눈을 비볐다. "네게 광기가 있으면 가슴속에 가둬서 심장을 갉아대지 말고, 밖으로 내보여, 그래, 막스 카르디, 그것도 네가 만든 가면이었지. 천재 배우이자 가수, 가면을 쓰고 사생활을 감추지만 사람들이 열광하는 존재, 차라리 그런 것이 되라고. 미치려면 현실에서 미쳐. 내가 옆에서 봐줄 테니까." "봐 준단 건……." "미친 것이 도를 넘으면 두들겨 패서 재운단 의미지." 안경을 도로 쓴 막시민은 조슈아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며 전에 없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앞으로도 그런 마음으로 산다면, 넌 정말로… 나와 말이 통하지 않는 괴물이 되어버릴 거다. 인간 아닌 존재는 달리 만들어지는 줄 알아? 너 말야, 너 자신은 사랑하고 있는 거냐? 그것조차 못하면 넌 진자로 세상 밖에서 온 존재나 다를 게 없어. 하지만 한 가지 말해보자. 데모닉 히스파니에, 너희 작은 할아버지는 뭐였지? 그 분도 세상 사람들, 그리고 너와 나를 사랑하지 않으셨던 거냐? 그 분도 분명 데모닉이라고 알고 있는데, 네가 말한 너와 똑같은 상태일 거라고 생각해?" 조슈아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그 분은……." "그런 말은 감히 못하겠지. 모든 사람에겐 계속되는 진심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어. 그렇기에 난 그 분의 진심을 확신한다. 너와 차이가 있다면… 그래. 나이일 거다. 데모닉이 보통 사람의 열 배, 백 배의 지능을 갖고 있다 해도 태어나자마자 현명한 어른은 아니란 걸 보니 알겠다. 넌 내가 변화할 여지가 없다고 느끼겠지만, 네 주변의 사람들이 아니라 네 할아버지와 비교해봐라. 그래도 네가 성장이 끝난 상태인지. 나중에 그 분을 만나 물어 보라고, 미칠 것 같던 젊은 시절을 어떻게 보내셨느냐고 말야." 조슈아는 시선을 돌리며 다시 막시민을 내려다봤다. "난 가끔씩 내 머리를 잘라버리는 상상을 하지. 너무나 많은 것이 들어있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아들이는 내 머리, 그게 없으면." 팔짱을 끼며 일어선 조슈아의 몸은 선 하나로 보일 정도로 가늘고 불안정해 보였다. "그 때는… 너처럼 될 수 있지 않을까 해." 막시민은 앉은 채요 연기 오르는 잿더미 너머의 조슈아와 시선을 맞댔다. "'나처럼'이란 게 무슨 뜻이지?" 조금 후 그는 냉소적으로 픽 웃었다. "머리 없는 인간이란 뜻이냐." "막시민." 조슈아는 미소 없이 친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늘 너처럼 되고 싶어했던 걸 모르니?" 5. 마법사의 취미 "성격 고약한 아가씨, 그만 고집 부리고 돌아와요. 기다리느라 졸음이 올 지경이네. 내가 조금이라도 걱정할 것 같아요? 어림없지. 당신처럼 위대한 마법사를 걱정하다니 주제넘다고 소리지를 게 뻔한데. 절대로 털끝만큼도 걱정 안 하니까 빨리 돌아오기만 해요. 어디 다치지 말고, 성급한 일 저지르지 말고, 그냥 돌아와요." 국경이라 해서 무심코 거창한 것을 상상했던 아노마라드 출신들은 실망하며 한마디씩 내뱉었다. "그냥 들판이잖아?" "뭐 보고 알 수 있는 거야?" "뭘 보고 알 수 있는 거야?" "저 나무가 표진가?" "이봐, 자기 맘대로 단정하지 말라고." 리체는 손차양을 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뭔가 이상한 듯 세자르를 돌아봤다. "어디 있어?" "이제부터 찾아야지?" 강둑에서 뛰어내린 세자르는 활기를 가장하며 앞으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막시민이 뒤따라갔다. "텅 빈 들판에서 뭘 찾아요?" "음… 돌판 같은거야." "돌이요?" 무릎을 넘도록 자란 긴 풀들이 바람에 몸을 맡겨 잔물결쳤다. 이윽고 리체도 뛰어들어갔다. "이번엔 돌이야?" "돌일지도 모른단 거지." "그런 무책임한 대답이 어딨어?" "이번엔 돌일 거 같다니까, 아니. 돌이야." 혼자 강둑에 남은 조슈아는 태양이 하얗게 번쩍이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멀리 지평선 즈음에 구름 몇 점이 있을 뿐. 칠한 듯 파랗게 갠 날씨다. 그렇게 얼마간 올려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결계라도 있는 건가." 이윽고 지평선의 구름이 먼지 하늘에 가득해졌지만. 네 사람은 여전히 땀을 뻘뻘 흘리며 들판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떻게 생긴 돌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찾는다는 거. 너무 무책임하지 않아?" 리체의 불평에 세자르가 슬그머니 대꾸했다. "네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동의하고 있을 입장이 아니잖아!" 좀 떨어진 풀더미 속에서 막시민이 목을 빼고 외쳤다. "돌 크기에 대해 다시 말해 봐요!" "글쎄, 책 두어 권을 합친… 그 정도 될 거야." "넓적해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글씨가 써졌어요?" 그 말을 들은 세자르는 갑자기 방향을 바꿔 막시민이 있는 곳으로 갔다. 막시민은 넓적한 돌 위에 한쪽 발을 올린 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리체가 말했다.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었잖아?" 돌 위엔 정말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부서져 많이 흐려졌지만 날짜와 이름 같은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바닥에 쓰러진 비석이었다. 오래 전에는 무덤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비석이 날아온 세월 속에서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막시민은 태연하게 흙 밑에 뼈도 남아 있지 않을 거라고 단언했다. 그러자 리체가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그래도 발은 좀 내리시지." 곁에서 방관자처럼 쪼그리고 앉아 있던 조슈아가 비석을 유심히 보더니 문득 지적했다. "날짜가 좀 이상한테. 하이아칸에선 다른 달력도 같이 쓰나?" "뭐?" 그제야 연도를 자세히 뜯어본 막시민이 말했다. "990년이면 고작 작년이잖아? 그런데 왜 10년은 방치된 것처럼 낡았지?" 옆에서 세자르가 피식 웃었다. "그거야 작년에 결계를 새로 쳤다는 뜻이지. 낡아빠진 비석 같은 것을 주워다 써먹다니 로루도 참 취향이 괴상해." "마법사의 이름이 로루인가요?" 세자르는 비석의 먼지를 털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꼬마 시절 애칭이지. 가서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괜히 화낼 지도 몰라." "그럼 뭐라고 부릅니까?" "그건 만났을 때 정중히 물어봐. 워낙 취향이 자주 바뀌니 매번 확인하는 도리밖에 없어. 지난번까진 '엘' 이라고 불렀는데. 하여간 마법사의 성질이란 건." 먼지를 다 털어 냈다. 세자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다리까지 올렸다. 한 마디로 비석 위에 쪼그려 앉은 모양이 되었다. 막시민이 물었다. "뭘 하는 거죠?" "자. 그 다음은 누구냐. 내 어깨를 타고 앉으라고, 내 생각엔 막시민 군이 앉고, 그 뒤에 소공작께서 올라가고. 마지막이 리체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조금 후, 두 아노마라드 출신들은 눌ㄴ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뭐… 뭘 하자는 겁니까? "무등 타기 놀이?" 세자르가 빙그레 웃으며 리체를 봤다. 리체는 짜증을 냈다. "왜 나한테 설명을 떠맡겨요! 쳇… 하여간에 이 돌은, 물론 아빠가 정확히 고른 거라면, 마법사가 쳐 놓은 결계 내부와 연결된 외부 표지인 거야. 일종의 경계석 같은 거지. 그리니까 그 안에 들어가려면 모두 이 돌 위에 올라가야 돼. 그러려면 한 가지 자세밖에 없어서." 막시민이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그럼, 아저씬 맨 아래에서 저희 셋의 무게를 감당하겠단 말인가요?" 조슈아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무리 같은데." "그 자세가 무리일 것 같으면 아기 안을 때처럼 가로로 누워서 안길 수도 있고……." 물론 막시민은 재빨리 사양하며 불안정하게 웃었다. "하, 하하… 그런 자세라니, 평생 생각날 거라고요, 그냥 무등으로 합시다." 이 결정을 내렸을 때, 원하는 자세를 만들기 위해 한심할 정도로 악전고투해야 될 거란 사실을 몰랐던 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 수 없었다. 문제는 그 모양을 만들고도 응답이 올 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점에 있었다. 막시민이 다리가 긴 탓에 무등을 타고도 적당히 돌 위를 디뎌 줬지만, 그래도 세명의 무게, 또는 두명의 무게를 오래 버틴다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자, 좀더 균형을……." "아직 멀었어요?" "멀리까지 잘 보이네?" "흔들지 마! 아찔해!" 본인들의 모습을 정확히 평해 줄 사람이 곁에 없었으므로 작업은 그럭저럭 진지하게 되어 갔다. 아니었다면 무안해서 모두 달아나 버렸을지도 모른다. 무너질 때마다 다치거나 볼썽사납게 자빠진 사람이 없다는 것도 무척 다행스러웠다. 옆에서 멀뚱멀뚱 보고 있는 말만이 히힝거리며 물러날 뿐이었다. "기울어진다!" "한족만 누르지 말랬잖아!" "어쩔 수가 없다고." "정말 싫은 상황이야." 할수록 요령이 늘어 버티는 시간은 길어졌지만, 그와 동시에 체력도 소진되었으므로 상황은 점차 고역이 되어갔다. "휴우, 한계가 오는 것 같은데……." "우리 차라리 한 명씩 들어가면 안될까." "리체도 꽤 무겁네." "이 상황에서 잔소리가 하고 싶니?" 그런 식으로 모두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버텼지만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한쪽으로 휘청거리며 기울어졌으므로 다들 동시에 비명을 내질렀다. 그 직후, 막시민이 불쾌한 어조로 지껄였다. "만일 누가 이 모습을 본다면 난 결단코 그놈을 없애버릴 거야." "나도 협조할게." "내 협조도 제발 제발 거절하지 말아 줘." "다 좋지만 불쌍한, 아니 값비싼 말은 열외로 해달라고." 이렇게 한 마음임에도 불구하고 무너지는 건 도리 없었다. 왼쪽으로 쏠리니 중심을 잡아야 할 다리가 비껴나고 맨 위는 뛰어내리는 상황이 다시 재현되면서… 리체가 바닥에 발을 딛자마자 불평을 터뜨렸다.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되는 거야!" 그 때 옆에서 낯선 목소리가 대꾸했다. "이제 그만해." "응?" 리체는 순간 놀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풍경이 바뀌어 그들이 내려 선 곳은 널찍한 나무 마루 위였던 것이다. 무늬결이 그대로 살아 있는 황갈색 바닥과 부드러운 광채가 감도는 나무벽, 기둥, 모두가 밝고 환했지만 그곳은 실내였다. 리체가 들은 낯선 목소리의 주인공은 조금 떨어진 곳에 놓인 낡은 안락의자에 파묻혀 미심쩍은 눈으로 일행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건 절대로 친절한 눈빛이 아니었는데 까닭은 곧 알 수 있었다. 한참을 살펴봐도 어딘지 모를 이곳에 도착한 것은 세 사람뿐, 다시 말해 소개를 맡아야 할 세자르가 없었던 것이다. 셋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상대의 괴상한 표정에 만족하며─자기만 얼빠진 표정을 지은 게 아님을 알았기에─누군가 입을 열어주길 기다렸다. 그리하여 말을 걸어야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조슈아가 계산 없이 입을 열게 되었다. "누구세요… 가 아니라, 저, 그러니까 뭐라고 불러… 성함이 어떻게… 다시 말해서… 누구시죠?" 옆에서 리체가 조그맣게 이죽거렸다. "데모닉도 때론 멍한 소릴 하네." 옆에서 막시민이 똑같이 이죽댔다. "데모닉이 뭔지나 알고 하는 소리냐?" "미치광이 후보인 대 천재." "그래, 핵심을 찔렀다." 그리고 안락의자에 앉은 사람이 상체를 조금 일으켰다. 신경질적으로 얇은 입술과 해쓱한 뺨을 가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남소리 들을 만하게 생긴 마흔 줄의 남자였다. 다만 소년 시절의 미모가 나이에 어울리게 변해주지 않아서, 젊은이를 중년으로 분장시킨 것처럼 어색해 보이는 것이 흠이었다. 몸에 걸친 흰색 로브는 심각할 정도로 헐렁했지만, 옷 모양으로 봐서 확실히 마법사이긴 한 모양이었다. 조슈아의 질문을 들은 마법사가 굉장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찌푸렸기에 세 명의 방문자는 긴장했다. 리체 입 속으로 '쓸모 없는 몽플레이네…'라고 중얼거렸다. "내가 누구냐고?" 말투만으로는 그리 까다로울 것 같지 않았지만……. "난 집주인이다! 그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냐? 너희들도 집에서 쉬고 있는데 누군지 모를 놈들이 쳐들어와서 '누구시죠?'하고 묻는다고 생각해 봐라! 나야말로 그러는 너희들이 누군지 궁금해 죽겠다! 날 이렇게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안녕히 계세요'하고 나갈 생각은 아니겠지? 그럴 생각이라 해도, 아니, 그럴 생각이라면 애당초 왜 들어와? 하지만 이미 늦었어. 난 너희들을 본 순간 이미 계획을 세웠어. 거기 너!" 지적 당한 리체는 어쩔 줄 몰라하며 대답했다. "네?" "네 뒤에 있는 물받이 홈통에서 대걸레를 꺼내 와라! 저쪽에 검은 대리석 바닥이 보이지? 자,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는 거야!" 리체는 당황해서 어설프게 반항했다. "네, 네가 왜 그런 일을 해야 되는데요!" "그럼 공짜로 보내줄 줄 알았냐?" "도대체 무슨 소리예요!" 그러나 마법사는 벌써 눈을 돌려 조슈아와 막시민을 번갈아 쏘아보고 있었다. "사내애들은… 자, 저쪽에 부엌이 보이지? 가면 나무통에 감자가 잔뜩 쌓여 들어 있을 거다. 숟가락은 찬장에 있고, 옆면이 닳은 숟가락이 작업에 익숙한 놈들이다." 막시민이 눈썹을 괴상하게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작업이라니……." "당연히 감자 껍질을 벗기는 거지!" 막시민도 항변했다. "이봐요! 비록 우리가 예고 없이 나타나긴 했지만, 남의 설명도 들어보지 않고 자기 멋대로 옳다구나 하고 가사 노동력으로 부려먹는 경우가 어딨습니까!" 마법사는 '정말로 그런 것도 몰라?'하는 것처럼 눈동자를 굴렸다. "넌 마법사의 집에 허락 없이 쳐들어온 녀석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들어 보지도 못했냐?" "못 들어 봤습니다! 그리고 우린 쳐들어온 게 아니라……." 마법사는 막시민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감자 껍질을 까게 된다! 이제 알았냐?" "그런 터무니없는……." 그 와중에 납득하기라도 한 건지, 조슈아는 엉뚱한 점을 지적했다. "그런데 왜 감자 껍질을 칼이 아니고 숟가락으로 까죠?" "감자가 인류와 함께 하기 시작한 이래 감자 껍질 까기의 묘미는 길이 잘 든 숟가락에 있다는 것도 모르냐? 정말이지 형편없군. 물에 푹 담갔다가 숟가락을 바투 쥐고 북북 긁어서 까는 거다. 감자 씨눈은 숟가락 끄트머리로 파내고, 다 깐 감자는 찬물에 담가 놔라. 그래야 볶을 때 녹말 때문에 타지 않고, 물론 건질 때는 소쿠리에 담아서 물기를 싹 빼야 되고…… 그러므로 감자는 지상 최고의 음식이야. 알았어?" 열렬히 떠들던 마법사는 귀찮아졌는지 급전직하로 설명을 끝내더니 의자 뒤에서 기다란 빗자루를 꺼내 들었다. "자, 내 대신 감시할 빗자루다." 그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그가 빗자루를 놓자 살아 있는 것처럼 발딱 일어나 섰던 것이다. 가사노동에 동원된 세 소년 소녀들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동그래졌다. "그럼 얼른 가!" 빗자루가 맹렬히 쫓아왔으므로 그들은 불길한 느낌 때문에라도 일단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조금 후, 주방 쪽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이, 이건 사람이 깔 수 있는 양이 아니잖아!" 마법사는 흡족한 듯 팔짱을 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날 이때를 위해 바닥도 닦지 않고, 감자도 열심히 모아둔 보람이 있었어." 그러나 빗자루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도로 쫓아온 막시민이 손가락을 세워 들이대며 외쳤다. "당신이 마법사라면 감자 껍질 정도는 마법으로 벗기면 될 것 아닌가요? 도대체 마법사의 집에 무단 침입하면 반드시 감자 껍질을 벗기게 된다는 황당한 논리는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마법사는 불쾌한 눈으로 막시민을 노려봤다. "저런, 책도 안 읽는 놈 같으니, 얌전히 가서 감자 껍질을 벗기면 그 다음에 너희의 요구에 대해 생각해 보겠어." "저 감자를 다 까려면 십 년 갖고도 모자라고, 우리들은 당신이 만들어 놓은 결계석을 타고 들어왔을 뿐으로……." "결계석? 그건 또 뭐야? 하여간 내가 알 바 아니고 너희가 여기 들어온 이상 이제 내 허락 없이는 나갈 수 없게 됐다는 거나 알아둬. 믿어지지 않으면 이 집 안에서 나가는 문을 한 번 찾아보라고." 그 말을 들으며 막시민은 상황을 보는 시각을 바꿨다. 나갈 수 없다는 건, 누가 들어올 수도 없다는 뜻이 틀림없었다. 피난처를 찾으러 온 판에 상황이 이보다 더 이상적일 수는 없겠는데? 어쨌든 막시민은 자기 눈으로 봐야 곧이듣는 성격이었으므로 마법사의 자랑스런 얼굴을 등 뒤로 느끼며─이 말은 마법사가 자포자기한 포로의 얼굴을 즐기기 위해 막시민의 뒤를 쫓아왔다는 의미다─집안 곳곳을 돌아다녀 보았다. 첫 번째 문은 창고, 두 번째 문은 침실, 세 번째 문은 손님방, 네 번째 문은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정말로 나가는 현관은 없었다. 그렇다면 창 밖은? 침실에 하나 있는 창 밖을 내다본 막시민은 더욱 놀랐다. 이 집이 결계로 둘러싸여 보이지 않았다 해도, 그의 상식으론 최소한 내다본 풍경은 그들이 있던 들판이어야 했다. 그런데 바깥 풍경은 깊숙이 깎아지를 협곡이 아닌가? 더구나 계절은 늦가을이고 말이다. 뒤죽박죽이 따로 없었다. "……." 막시민은 자발적으로 부엌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리고 이 마법사가 통칭 '샐러리맨'보다 더 위험한 자인지 조심스럽게 가늠해 보기 시작했다. 돌아가 보니 감자통 앞에 앉아 있던 조슈아는 껍질 안 벗긴 감자를 하나 꺼내 들고 신기한 듯 들여다보고 있었다. "흙이 붙은 감자는 처음 봐. "…그럼 땅에서 껍질을 벗긴 삶은 감자가 나는 줄 알았냐?" 그다지 좋은 냄새를 풍기지 않는 대걸레 자루를 들여다보고 있던 리체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저 사람, 보기엔 냉철할 것 같았는데 정말 외모만 갖고 판단할 게 아니네." 막시민은 그나마 감자 까는 요령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 숟가락 쥐는 요령부터 조슈아에게 가르쳤다. 그런데 처음엔 옆에서 물이나 튀기며 방해만 되던 조슈아가 세 개쯤 까더니 놀랍게도 막시민이 까는 속도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어진 막시민이 인상을 썼다. "젠장, 감자 껍질 벗기는 데도 데모닉이 필요한 세상이냐." "이거 생각보다 재밌다고." 옆에서 조슈아가 열심히 까고 있으니 당연히 막시민은 노동 의욕이 사라져서 까 놓은 감자의 숫자나 되풀이해 세기 시작했다. 마법사는 감자를 까라고 했지, 직경 50센티미터 짜리 통 세 개에 담긴 감자를 깡그리 까란 말은 안 했던 것이다. 문득 한 가지를 생각해 낸 막시민이 말했다. "저 사람, 자기가 만든 결계석에 대해 잊어버린 것 아냐?" "그런 게 가능한 거야?" "글쎄, 저 사람에겐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나저나 세자르는 어떻게 된 걸까." "분명 이럴 줄 알고 튄 거야." 리체는 처음엔 걸레를 대충 빨았지만 몇 번 닦다가 자기 스스로 성에 차지 않아 본격적으로 청소 작업에 돌입했다. 닦고 보니 먼지가 쌓여 있던 검은 대리석 바닥은 놀랄 만큼 반짝반짝하고 예뻐서 저도 모르게 의욕에 불타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조금 후 마법사에게 가서 앞치마와 머릿수건을 달라고 했고, 다음엔 먼지떨이를, 그 다음엔 손걸레를 내놓으라고 반쯤 윽박지르고는 뒤를 쫓아다니는 빗자루를 보더니 숫제 잔소리를 퍼부었다. "빗자루도 필요한데 이런 장난감이나 만들고 있을 거예요! 빨리 멀쩡한 빗자루로 되돌려 놔요!" 막시민은 조슈아에게 자신의 주방 경력에 대해 한참 동안 떠들며 감자까는 일 정도는 무척 시시하다는 논지로 일장 연설을 했다. 막시민의 주장에 따르면 가장 짜증나는 재료는 양파로서 그의 눈은 유난히 양파 성분에 약해서 반으로 쪼개기만 해도 눈물이 줄줄 흐른다는 것이다. 무척 실감나고 무시무시한 경험담에 감화된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도 양파가 아닌 게 다행이네." "양파였으면 주방 엎었다." 세자르 몽플레이네는 들판 가운데 놓인 낳아빠진 비석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있었다. 하품을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걱정하는 기색은 아니었고, 다만 계산과 다른 점이 있는 모양이었다. "슬슬 데리러 올 때가 됐는데, 이 자가 새로운 취미가 생겼나." 6. 인형사 "바다 속에는 거대한 왕의 조상(彫像)들이 누워 있었다. 자맥질에 능한 아이들이 경쟁적으로 그것을 보러 갔고, 돌아와 아직도 그대로 있노라고 말하곤 했다. 아이들이 자라 아이를 낳자 그들도 똑같이 그것을 보러 갔다. 왕의 눈동자엔 이끼가 끼어 있었다. 위대했던 시절에는 잊혀진 것이란 없었고, 왕들은 금띠를 두르고 숭배 받았다. 이제 바닷가 마을로 변한 왕도(王都)는 마술에 걸린 듯 고적할 뿐이다. 바다 속에 남은 왕의 조상은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 왜? 그들이 항구에 우뚝 세워져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때 융성하던 왕도가, 발을 떼어 걸어나오고서 쇠하였음을 알기에, 이미 발은 바다 속 부서진 바위들로 변했기에 영원히 도로 걸어들어갈 수 없음을 알기에. 애니스탄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가 책을 껴안고 걷고 있으면 인사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애니 왔구나? 요즘 연구한다는 것은 잘 되어 가? 방에 늘 불이 켜져 있던데." "애니, 이렇게 좋은 날씨에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거야? 야외에 나가서 약초 채집이라도 좀 하라고." "이번 쉬는 날에 장에 나올 테야? 예쁜 아가시를 소개시켜 주려고 하는데, 애니도 분명히 마음에 들어할걸." "애니, 이 땅콩 한 줌 가져가요. 요즘도 밤샘하는 모양이던데 입이라도 심심하지 않아야지." 애니스탄은 그 사람들에게 일일이 웃으며 답하고, 혹시라도 질문하는 것이 있으면 겸손하게 가르쳐 주고, 돌아올 땐 땅콩처럼 간단한 것에서부터 그로선 도저히 활용할 방법이 없는 순무 한 단이라던가 말린 생선, 달걀 꾸러미 같은 것을 두 팔 가득 얻어 성문을 통과하게 되곤 했다. 경비병들도 웃으며 말을 걸었다. "또 잔뜩 얻었군 그래. 젊은 마법사님, 이거 너무 인기 좋은 것 아니야?" "아, 콕스 씨. 이 순무, 부인께 갖다 주세요. 전에 맛있는 수프를 얻어먹은데 대한 보답이라고요." "어이, 또 떠맞기는 거야? 린다는 좋아하겠지만 포메리 아주머니가 알면 심술을 낼 거라고, 잘 알잖아? 그 아주머니 애니의 팬인 거." 애니스탄은 편안한 얼굴로 웃었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은 그 웃음의 덕도 컸다. "포메리 아주머니도 순무가 맛있는 수프가 되길 바라실 겁니다. 제 손에서야 썩은 순무밖에 안 되잖아요? 그럼, 린다 씨의 수프, 또 얻어먹으러 갈게요." "하하하, 이건 그럼 선불이로군? 고맙게 받겠어." 성문을 통과해서 드문드문 박힌 포석을 걷다보면 성 한쪽 귀퉁이에 좁다랗게 솟은 탑이 나타났다. 애니스탄은 탑의 3층을 연구실, 4층은 숙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곳은 전통적으로 영주의 마법사가 기거해 온 장소였고, 애니스탄도 역시 마그란 영주 토펠림 경에게 닷새에 한 번 찾아가 성에 보관된 재료의 사용 문제와 연구의 진척 상황을 보고할 의무가 있었다. 착실한 성격인 애니스탄은 이 의무를 어기는 일이 없었지만, 영주는 큰 관심도 없었고, 보고하는 동안 끄덕끄덕 졸고 있거나 했다. 어차피 토펠림경은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늙었고, 성을 물려받을 자식이 없어 경이 사망하는 즉시 이 성은 왕가로 귀속될 예정이었다. 이런 곳에서 새로운 마법 연구가 의미 있을 리 없었다. 애니스탄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애니스탄이 현재 하고 있는 연구도 토펠림 경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두 층을 쓰고 있다곤 해도 애니스탄이 주고 사용하는 곳은 3층이었다. 그곳에도 간이침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4층은 손님이나 찾아오면 응접실로 쓸까, 그러지 안ㅎ고는 며칠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는 곳이었다. 그에게 딸려있는 하녀가 치울 수 있는 곳도 4층에 국한되어 있었기에 실제로 하녀와 얼굴 맞댈 일도 없었다. 그런데 그 날 애니스탄은 3층에 들르지 않고 곧장 4층으로 올라갔다. 문을 밀자, 창을 등지고 앉은 사람이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문을 닫고 방문객 맞은편 의자에 가 앉기까지, 애니스탄은 성까지 걸어오는 동안 사람들에게 편안하게 웃던 사람과 전혀 다른 사람으로 서서히 변했다. 이윽고 얼굴을 마주보았을 때는 이미 평생토록 미소 따위는 보기 힘들 듯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결국 왔구나." "뭘, 내가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잖아." 오히려 테오가 소년처럼 싱긋 웃어 보였다. 애니스탄의 눈가에 더 짙은 그늘이 내렸다. "몰랐다면 여기로 왔겠어? 하녀 말이 넌 이 방에 거의 오지 않는다던데." "그래,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내가 부르진 않았어." "왜 그래? 얘들처럼 말꼬투리나 잡고,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 온 거야. 네가 원한 곳이긴 하지만, 직접 와 보니 정말 답답할 정도로 벽촌이네, 진짜 이런 시골에서 지내도 괜찮아?" 창문이 적어 어두운ㄴ 방이었다. 밖에는 햇빛이 찬란하지만 여기에 들어오는 것은 조금뿐이었다. 정화의 햇빛… 한 사람을 용서하기엔 너누 적은 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걸 원해 이곳까지 왔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지." 말의 내용과는 달리, 가시 돋친 어조였다. "하긴, 넌 나와 다르니까. 난 시골 취미가 없잖아." 시골에서 지내는 친구에게 문안차 들른 듯 안부를 묻고 있지만, 애니스탄은 테오가 어떤 일로 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가 이곳까지 찾아올 때, 자신의 짧은 행복이 산산조각날 거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란 것도 물론 알고 있었다. 테오의 옆에는 커다란 여행 가방이 놓여 있었다. 열린 가방 머리에 사탕통처럼 보이는 것이 들어 있었다. 테오는 그 안에 손을 넣더니 사탕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넣자마자 그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곧 얼굴을 풀었고, 천천히 빨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사탕은 쓴맛이 나거든, 처음엔 이런 걸 왜 먹나 했는데 생각보다 중독성이 있더란 말이야." 사탕통은 어쩐지 눈에 익었다. 한참만에 애니스탄은 비취반지 성에서 지내던 무렵 '조슈아 폰 아르님'의 방에서 봤던 물건이란 걸 알아차렸다. "네… 처남의 것이군." "아, 그렇지." '처남'이라는 말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다물린 이(齒)에 힘이 들어갔다. 꽉 물렸다가, 파열음을 내며 비틀어졌다. "내가 갖고 싶다니까 선물로 주더라고, 날 무척 좋아하잖아." 뻔뻔스러울 정도로 동요 없는 말간 얼굴이었다. 애니스탄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그런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아." 테오는 일말의 조롱이 섞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 그래? 넌 너의 피조물을 사랑하지 않아? 난 자식처럼 여길 줄 알았는데." "자식이라고?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지?" "글쎄. 내 것이 아니니 난 모르지. 네가 불쾌하게 느꼈다면 사과할게." 테오는 진지한 얼굴로 사과한다. 정말 미안하다는 것처럼. 미안할 지도 모른다, 사과는 진심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절대 모른다. "그건 처음부터 태어나서는 안 될 괴물이었어. 다시는 그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아." 맥없는 대꾸에 테오가 다시 탄력 있는 목소리로 반박했다. "너무 심한 것 아닌가? 네가 돌봐 주ㅜ지 않으면 누가 그를 아껴주겠어? 우리들은 말야, 우릴 만들어 놓고 숨어버린 창조주를 원망하지 않을까? 네 태도는 어린애를 수도원 문 앞에 버리고 달아나는 어머니처럼 무책임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별 것 아닌 말에 모욕당한 것처럼 애니스탄의 얼굴이 붉어졌다. 테오는 대답하지 않고 친구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난… 네가 모든 일의 입안자였다고 해서 네게 모든 책임을 씌울 마음은 없어. 어찌됐든 네게 동의한 건 나였지. 내 끄덕임, 내 동의의 말, 내 손으로 한 일, 그 무게를 부인할 순 없지. 네 말대로 난 도망쳤다. 가슴을 짓누르는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였어. 하지만 무게의 존재도 느끼지 못하는 넌… 그럴듯한 말로 나를 도로 데려가려 할 뿐이야. 내게 책임을 지라고 말하지만 넌 애당초 책임엔 관심도 없어. '그'를 책임이 필요한 존재로 느낄 줄도 몰라." 그러자 테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아. 내게 그는 그냥 인형에 불과해. 그의 얼굴을 견디지 못하고 달아나는 네가 이해가 안 가. 뭐가 그렇게 두려워? 너 자신을 복제한 인형도 아니잖아? 두구나 넌 조수아를 잘 알지도 못하니까 마음 쓰일 것이 없을 텐데." "도플갱어(Doppelganger)……." 목에서 쥐어 짜내는 듯한 목소리가 그 단어를 말했다. "사람이… 마주치게 되면 죽게 된다는 존재야. 한 사람을 영혼부터 죽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고, 나 아닌 자가 나와 같다는 것은 생존의 바탕을 위협하는 문제니까. 이제 네 처남은 도플갱어에게 자리를 빼앗겨 방랑하는 신세가 됐지. 아직은 그를 아는 사람들이 있지만, 머지 않아 대체되겠지. 모든 자리를 뺏기고, 그러면 남은 자는 뭐지? 찌꺼기인가? 잉여물인가?" "이봐, 넌 날 그렇게 이해 못해?" 이번에 테오는 화가 난 어조였다. 애니스탄은 테오가 어떤 기분으로 그 말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애니스탄은 테오를 안 후 평생토록 테오의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만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본성의 문제였다. "내가 창조한 건 도플갱어였던 거야. 난… 몰랐어, 그게 그렇게 똑같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 쌍둥이의 외모가 닮았다 해서 같은 사람이 아니듯이, 난 단지 엇비슷한 것으로 속이는 것에 동의했던 거야. 그런데 내가 만든 건 뭐였지? 조슈아 폰 아르님은 데모닉이었어. 세상에서 다시 찾기 힘들 정도로 특별한 존재였지. 그런데 '그'는 뭐지? 어떻게… 얼굴만이 아니고… 데모닉의 능력까지 같아질 수 있느냔 말이야…. 난 이제 확신할 수가 없어. 그들 둘은 영혼까지 같은 게 아닐지… 모르겠단 말이야. 만일 같다면 난…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을 저지른 거지. 누군가를 칼로 찔러 죽이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어. 나라면 그런 존재를 보고 견딜 수 있을까? 도플갱어가 나타나면 한 사람은 근본부터 부정 당하는 거야. 처음부터 태어난 일도 없는 사람이 되는 거야. 부모도, 친구도, 그의 존재를 기억 못해. 존재조차 몰라. 그들은 이미 도플갱어를 자식으로, 친구로 받아들였으니까." 테오는 하얗게 질린 친구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처음엔 무표정했고, 서서히 미소로 변했다. 따뜻한, 그래서 더 가식적인 미소로 친구를 보면서 말했다. "왜 그렇게 화를 내? 누군가가 봤다면 그랬을 거야. 아, 테오 자식이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애니 같은 친구가 저 정도로 화를 낼까. 테오 자식, 형편 없는 일을 저지른 게 틀림없구나, 라고 말이야." 애니스탄은 대꾸 없이 자기 뺨을 손으로 감쌌다. 테오가 말을 이었다. "네가 도플갱어를 창조했으면 어떻게 되는거지? 어차피 하나쯤 더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도 그렇게 하라곤 말 안 해. 그냥 인형인지 괴물인지 모를 걸 하나 만들었을 뿐이잖아. 더구나 네 말을 절대적으로 따르니 위험하지도 않고, 상황을 좀더 가볍게 받아들여. 그래, 이렇게 하면 좋겠다. 넌 네가 계획했던 대로 쌍둥이를 하나 만든 거야. 그런데 우연히 그 녀석은 너를 좋아해서 네 말을 따르고, 그래서 그 친구인 내 계획에도 매우 협조적이야. 결과는, 모두 행복해진다는 거야. 이 상황의 본질은 그것 뿐이야." 애니스탄은 대답 없이 노려보고 있다가 한 마디를 내뱉었다. "여기 무엇 하러 왔지?" "널 도로 데려가려고." 애니스탄은 대번에 몸을 일으키려다가 참으며 말했다. "난 떠날 때 이 일에서 손을 떼겠다고 분명히 말했어. 나도 묵인했고, 난 여기에 와서 그 일은 다 잊고 평화롭게 지내고 있어." 그러자 테오가 놀랐다는 듯 말했다. "설마, 네가 잊을 수 있었니? 그냥 해본 말이겠지. 사실은 항상 생각하고 있었을 텐데." "……." 애니스탄이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테오는 가방 속에 가시 손을 넣더니 사탕을 꺼내 먹었다. 애니스탄은 입술을 떨었다. 그리고 자신이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유감이지만 그렇지 못할 것 같았다……. "테오, 넌 지금가지 약속을 지켰어. 그 일이 끝나면 내게 한적한 시골 영주의 고문 마법사 자리를 얻어 주기로 했지. 여기는 조용하고 따뜻한 곳이야. 난 이곳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어. 너한테 더 이상 받고 싶은 것도, 줄 것도 없어. 왜 온 거니. 난 이제 겨우……." 테오가 말을 자르며 들어왔다. "난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어." 무신경한 듯, 그러나 유연한 눈빛이 그를 보고 있었다. "지금 네가 겁내는 것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 것들 뿐이야. 넌 유령을 겁내고 있는 거라고, 도플갱어? 그게 뭐지? 아이들 머리맡에서 읽어주는 책에서나 나오는 것 아닌가? 그 '인형'이 데모닉 조슈아와 정말로 같을까? 그건 아무도 모르는 문제야. 너조차도, 그가 복제된 순간으로부터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존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심지어 신체적 발육이 가능한지도 아직 불분명하잖아?" "난… 관심 없어." "넌 관심을 갖고 있어. 입으로는 거절하고 있지만, 실은 네가 만든 그 굉장한 피조물이 앞으로 어떻게 되어나갈지 궁금해 죽을 지경일 거야. 난 네가 어쩔 줄 몰라하며 두려워하는 것의 실체가 양심일 거라고는 생각 안 해. 상상력을 발휘해서 곧 재앙이 다가올 거라고 믿고 덜덜 떨면 그게 재미있을까? 네 성격이 어땠든 넌 어쩔 수 없는 마법사야. 마법사들은 알고 싶은 걸 못 참지. 실험의 결과를 안 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본래 어느 정도 미쳐 있는 족속들이니까." 애니스탄의 눈에 다시 분노가 서렸다. "멋대로 말하지 마. 그래, 난 한시도 '그'에 대해 잊어본 일이 없어. 잊을 수가 없지. 매일 밤 꿈에 나타나니까. 조슈아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야.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그를 지웠어. 세상에 없어도 되는, 새 것으로 대체된 존재로 만들어버렸어. 이건 궁금한 실험 결과 따위가 아니야.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을 정도니까." 테오는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실제로 못 당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철없는 친구를 계도하기 힘들다는 것처럼. "애니, 이것 하나만은 말하자. 조슈아의 문제 말인데, 네가 처음부터 그를 어떻게 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 아니야? 만일 네가 네 의도대로 외모만 비슷한 뭔가를 만들었다고 치자. 그 다음은? 그 '인형'이 내가 원하는 일을 하게 될 건 자명하고, 남은 조슈아는 어떻게 됐을 것 같아? 완벽히 똑같은 인형이 없으니까 나중에 도로 돌아와 자기 자리를 찾았을까? 아하, 그 전에 가짜 따위를 만든 두 악당도 해치워야 되겠군? 이것 봐, 애니스탄, 잘 보라고, 이게 동화의뒷이야기야?" 테오의 눈이 점점 더 반들거렸다. "넌 내가 실패해야만 이뤄질 수 있는 꿈을 말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실패할 작정으로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 있을까? 지금 어설픈 말을 늘어놓는 너 역시 마찬가지야. 네가 본의 아니게 도플갱어인지 뭔가를 만들고, 그걸로 누군가의 존재를 위협 당하고, 어쩌고 하는 게 무슨 소용이지? 그래봤자 어차피……." 애니스탄은 그 말을 막고 싶은데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고, 테오가 말을 이었다. "내가 그를 죽일 텐데." "……." 마주 보고 앉아 있지만 두 사람 사이엔 두꺼운 장막이 쳐진 듯했다. 애니스탄은 자기 앞에 가로놓인 어둠을 보고 있었고, 테오는 자기가 원하는 것 외엔 모두 무(無)로 보았다. "네 손을 더럽힐까봐 걱정하는구나, 애니. 그런 걱정은 마. 조슈아 폰 아르님이 도플갱어와 마주치는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그들은 살아 생전 만나지 못할 거야." 애니스탄이 불숙 말했다. "테오, 넌 두렵지 않니?" "뭐가?" "용서받지… 못할 것이." 조금 후 테오는 쿡쿡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너, 누군가한테 용서를 받고 싶은가 보구나. 내가 해 줄까? 하지만 너한텐 의미 없겠지? 그러니 진실을 말해 줄게. 백 보 양보해서 네가 한 일의 결과를 네가 짐작하지 못했다고 치자.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막말로 그 소리 듣고 누구인들 용서해줄까? 조슈아를 불러서 물어볼까? 네가 용서되느냐고? 용서될 때까지 치라고 해 볼까? 그렇게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아? 헛소리!" 그러나 애니스탄은 여전히 진지했다. "용서는… 자신이 하는 거야. 너도 너 자신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지 생각해 봐." "애니스탄, 넌 지금 너무 감정적이야. 가나폴리의 마법사들은 네가 한 짓과 같은 일을 비일비재하게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들이 인형 하나 만들고서 지금의 너처럼 떨었을까? 네가 그들처럼 위대해지지 못하는 게 이런 점 때문 아닐까? 하지만 말이야.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어." 그와 함께 테오는 웃음을 걷고 진지한 목소리가 되었다. "가나폴리가 사라진 지금, 너는 현존하는 최고의 인형사라는 것." 시골 의사 노톤은 자길 의사라고 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모두 마법사라고 했다. 다만 노톤이 듣는 곳에서는 의사라고 해 주는 편이 좋았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노톤이 의사 노릇을 하기 시작한 지 십여 년이 흘렀으니 모두들 그쯤은 알고 있었다. 노톤은 마법사들이 흔히 짓는 탑도 없이, 야트막한 1층집에서 여러 개의 방을 마련해 놓고 혼자 살았는데 아픈 사람이 찾아오면 자기 집에 입원하라고 권유하는 것으로 약간의 악명을 얻었다. 그 두 가지를 제외하면 말거리될 일도 잘 벌이지 않는 평범한 사내였다. 환자가 적어 벌이가 시원찮을 땐 그도 마법사들이 하는 일을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는 자기 마법을 의술에 사용하길 원했다. 환자가 드문 때 찾아온 남자는 노톤의 수선스런 환영을 받았다. 아픈 사람들은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하기 마련이지만, 남자는 불만스런 기색 없이 노톤에게 한족 손을 내보였다. 그리고 사흘 동안 입원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사양하겠어. 심심할 것 같으니 말이야. 개신 사흘 동안 매일 찾아오기로 하지." 남자는 기대 이상의 말상대였다. 노톤은 사흘째 되어 그의 부러진 손목에 건 재생 마법이 완성될 무렵이 되자 약간 아쉬워질 정도였다. 마지막 날, 아침 일찍 찾아온 남자는 노톤에게 손목을 맡겨놓은 채 지난 이틀 간처럼 시시한 화재에 일일이 대꾸해 주었다. "비록 마법을 사용하긴 해도 전 엄연한 의사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정확히 말하면 좀더 솜씨 있는 의사 아닙니까? 열흘씩, 또는 한 달씩 걸릴 상처를 며칠만에 치료하니까요." "모든 상처를 그렇게 치료할 수 있다면 대단한 일인데, 어째서 이런 시골에 머무르는 건지 모르겠군. 좀더 좋은 자리가 얼마든지 있을 텐데." "아, 있었지요. 하지만 제가 그런 자리를 일부러 차버렸…을 것 같습니까? 그럴 리가 없죠. 사실 어떻게 된 사정인가 하면……." 노톤은 자기가 좀더 젊었을 때 대단한 영주의 주치의가 될 뻔 했었지만, 경쟁자가 있어 시험을 치르게 됐고, 그 날 아침 심각한 감기에 걸려 시험을 망쳤고, 그 감기는 전날 경쟁자가 자기를 밀어내기 위해 유치한 마술을 건 것이 틀림없고, 그래서 그 자는 지금 켈티카에서 인기 있는 가게를 열고 있지만 자기는 이곳에 남아 있는데, 그 덕택에 자기는 이것저것 연구할 시간이 많이 생겨서 특히 뼈를 치료하는 데 특별한 기술을 갖게 됐고, 그러다 보니 당신처럼 멀리서도 손님이 찾아와서 괜찮다는 말을 아주 길게 늘어놓았다. 말을 끝내니 이미 붕대는 다 풀었고, 노톤은 팔을 걷어붙이고 미끈미끈한 약을 좀 바른 다음 가벼운 마사지를 했다. 남자는 싱긋 웃었다. "하긴 나도 작년에 들은 소문 때문에 찾아온 셈이니, 벌이는 괜찮나?" "두어 명 먹여살릴 정도는 되는데 가족이 없다 보니 남아돕니다. 어디 마땅히 쓸데가 없나 궁리중이죠. 뭐 좋은 생각 없습니까?" "그거야 당연히 가족을 만들면 되지. 결혼을 하고, 어린애를 낳으라고, 그게 제일 좋은 방법 아닌가." "좋은 말씀이십니다만, 이 나이에 장가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랍니다. 게다가 얼굴은 또 좀 잘났어야 말이죠, 하하하…. 어쨌든 말씀은 깊이 새겨듣죠." 노톤은 추남이라 할 정도는 아니지만 오밀조밀한 생김새에 몸집도 작아서 남성적 매력이 있는 사람이랄 순 없는 외모였다. 남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아가씨도 있을 거야." "말씀만이라도 고맙군요. 그런 아가씨 보시면 소개 좀 해주시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중매 사례금을 두둑이 내야 할걸." "여부가 있겠습니까? 남는 돈 그런 데나 써야지요." 노톤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치료가 끝나자 그는 찬장에 붙은 서랍을 뒤지더니 종이에 빼곡히 써 놓은 것을 가지고 왔다. "여기 회복에 좋은 음식들에 대해 좀 적어 놨습니다. 그 동안 제 수다 듣느라 힘드셨을 것 같아서 뭐 해드릴게 없나 궁리하다가…. 아참, 그리고 수삼일 정도는 무거운 걸 들거나 무리하게 움직이는 걸 삼가십쇼, 그래야 뼈가 깨끗이 붙습니다." "잘 알았네. 새겨듣지."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톤도 따라 일어나며 빙그레 웃었다. "이제 안 오실 테니 아쉽긴 한데, 그렇다고 또 오실 일 생기길 기대할 수도 없는 거고, 이거 난감한뎁쇼?" "또 올 일이 생길 수도 있겠지. 그럼 아가씨가 나타날 때까지 존 많이 벌어두라고." "아참, 한 가지 여쭤보려던 게 있었는데……." 노톤은 갑자기 뭔가를 생각해 낸 듯 머리를 긁적였다. "나리 손목이 그거, 어디 부딪치거나 넘어져서 부러질 모양은 아니던데 말입니다. 꼭 그렇단 건 아니지만 어째… 누가 일부러 부러뜨린 것 같더란 말입죠. 그렇다면 역시 싸움이겠지요? 나리는 시가님이신가요?" "아닌데." 남자가 불쾌해하는 기색이 아니었기에 노톤은 다시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나리 오른손이 굉장히 크잖습니까? 실례일지 모르지만 좀 신기하기도 해서 기억에 남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말입죠. 제가 젊었을 때는 주먹질도 못 하는 주제에 친구들한테 휘둘려서 시장판 싸움질 건수마다 끼어들곤 했는데, 그 즈음 왈패 놈들한테 나리 얘기를 들어본 것 같은 생각이 들더란 말입니다." "들어봤다고?" 남자는 무심하게 대꾸했지만, 평이한 어조 속에서 일말의 흥미가 내비쳤다. 노톤도 그걸 눈치챈 것인지 한층 열성적으로 말했다. "예! 사흘 내내 궁리해서 드디어 기억이 났지요. 그, 레코르다블에 유명한 용병 대장, 두르가나라고 있잖습니까? 그 두르가나를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꺾었다고 하는 소문 말인데 그것 나리 맞습니까?" 그 때 남자는 품안에서 치료비를 치를 은화 꾸러미를 꺼내고 있었다. 그의 손이 일순 멈추었다. "아이고, 이거 제가 괜한 소릴 물었나 봅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듯 노톤은 여전히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남자가 온화하게 물었다. "그런 얘기를 다른 사람한테도 했나?" "얘길 하다뇨?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누구한테 말했겠습니까? 그런데 역시… 나리가 맞으시군요? 이름이 생각날 듯 말 듯 한데…. 참, 그나저나 용병이시라고 들은 기억이 납니다요. 요번에 이쪽엔 무슨 볼일로 오셨습니까?" 그리고 그게 노톤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남자는 은화 주머니를 도로 넣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오른손을 뻗어 노톤의 목을 쥐었다. 노톤이 놀라 눈을 크게 뜨는 것과 동시에, 비틀었다. 조금 후, 뼈가 꺾이는 소리가 울렸다. 손을 놓자, 노톤의 몸이 바닥에 무너졌다. 테이블 다리와 부딪치는 바람에 놓여 있던 약병이 흔들려 넘어졌다. 쏟아진 물약이 바닥으로 줄줄 떨어지는 동안 남자는 방금 사용한 오른손을 한 차례 움직여보고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역시 좋은데, 전혀 무리가 없어. 시골 의사치곤 정말 훌륭하군." 그리고 주머니에서 은화가 든 묵직한 꾸러미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사례로 좀 더 넣었어." 남자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고요해진 진료실에선 물약 흐르는 소리만이 들렸다. 이윽고 물방울 소리를 몇 번 내며 멈췄다. <3권에서 계속> 도 서 명 : 룬의 아이들 2부 데모닉 3권 지 은 이 : 전민희 펴 낸 이 : 서인석 출 판 사 : (주) 제우미디어 출판년도 : 2004년 4월 3일 초판3쇄 발행 : 2007년 2월 12일 <지은이 소개/ 전민희> 1975년생.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한국민족예술인 총연합(민예총) 연구원을 지냈다. 1999년 장편 판타지 소설<세월의 돌>로 데뷔하였고 이후 후속작<태양의 탑>을 출간했다. 이 두 작품은 5부작으로 구상된 <아룬드연대기>시리즈의 3부와 1부이다. 작가의 두 번째 세계인 <룬의 아이들>시리즈는 1부 <룬의 아이들-윈터러>,2부 <룬의 아이들-데모닉>편이 출간되었고 이르 바탕으로 온라인 게임 <테일즈위버>가 제작되어 세계 각국에 서비스되고 있다. 특히 <룬의 아이들-윈터러>는 일본,중국,대만,홍콩에 번역 출간되어 큰 호평을 받으며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았으며, 일본에서 아마존 한국소설 베스트셀러 1위,야후 재팬선정 ‘2006년 가장 많이 읽힌 소설’ 등에 올랐다. <룬의 아이들-데모닉> 또한 대만,홍콩에 번역 출간되었으며 일본판은 2007년 중반 출간 예정이다. 현재 데뷔작 <세월의 돌>의 개정 작업에 매진하고 있으며 <태양의 탑>또한 개정 후 출간이 예정되어 있다. <차례> 5막. Noise (노이즈) 1. 책읽는 소년 - 10 2. 분홍빛 드레스 - 25 3. 운 나쁜 다락방의 모험 - 45 4. 도플갱어의 시초 - 64 5. 바이올린 대 논쟁 - 90 6. 가나폴리의 두 번째 마법 - 109 7. 소녀 유령 - 128 8. 아흔 여덟 명의 영혼 - 148 6막. Trans (트랜스) 1. 모퉁이집 - 178 2. 별 바다 항해 - 216 3. 약속의 사람들 - 235 4. 부서진 곳 - 245 5. 춤추는 칼라이소 - 254 6. 배우, 돌아오다 - 274 부록 - 299 <본문> 1. 책읽는 소년 “내려앉았던 꽃잎이 페이지 한 구석에 작은 얼룩을 남겼다.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찍은 듯한 자국, 바람이 눌러 두고 간 손자국인 듯.“ 여름이 성큼 다가오자 학원 뜰에 사과꽃이 하얗게 떨어졌다. 북부 도시인 켈티카에도 더위가 오는 때였다. 네모진 뜰을 둘러싼 열주회랑의 바닥은 무늬 없는 묵은 잿빛이었으나 이 즈음만은 흰 꽃자국이 판화처럼 찍혀 있었다. 찍혔다는 것은, 밝히고 쓸려 다니다는 의미도 된다. 그렇게 사과꽃이 날리고, 짓이겨지다가 사라질 무렵이면, 진짜 여름이 된다. 하지만 뜰에 가득한 사과나무는 아직 흰 꽃을 한 아름 머리에 인 채였다. 이따금 향기 짙은 바람이 한 웅큼씩 꽃을 따 뿌리곤 했다. 한 소년이 건물과 면한 회랑 안쪽 벽에 기대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책 한 권을 읽고 있었다. 회랑은 학생관과 강의동을 잇는 통로였다. 낮 수업이 끝날 무렵이라 지나가는 학생이 많은 세 시였다. 비록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소년은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헐렁한 흰 셔츠에 검은 조끼와 바지, 조금도 특별할 것 없는 옷차림인데도 지나가는 학생들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그에게 한 번씩 머물렀다. 소년이 선 곳 옆에는 움푹 들어간 벽감이 있어, 수십 년 전에 새긴 아름다운 요정의 조각이 보였다. 그러나 낡아 회갈색으로 변한 요정은 고작 열 몇 해 받은 생기로 빛나는 소년의 모습을 따르지 못했다. 요정을 새긴 돌은 다시 백 년이라도 갈 테지만, 잠깐 빛나고 스러질 소년이 사라지면 다른 아이가 자라 미의 화신처럼 회랑을 걸을 것이다. 먼 미래에....... 그러나 지금은 소년의 시절이었다. 갸름한 턱끝은 사내가 되어 가는 듯 파릇하고, 눈가를 가린 머리카락도 푸르다. 가늘지만 뼈대가 도드라진 손은 고집스런 느낌이었다. 소년이 쥔 책은 무척 두꺼웠다. 친구를 기다리며 가볍게 읽기에는 팔이 지치겠다 싶을 정도였다. 워낙 책장이 빨리 넘어가고 있어 읽고 있다기보다는 넘기고 있다는 쪽이 맞을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년을 잘 아는 친구는 분명 책을 읽고 있음을 알 것이다. 흰 무늬가 찍힌 회랑의 바닥을 자박자박 밟는 소리가 나고, 소년이 고개를 들자 주머니에 손을 찌른 친구가 빙긋 웃고 있었다. “찾았어?” 친구의 물음에 소년은 미소를 보냈다. “찾았지.” 친구는 책의 두께와 소년이 읽던 부분을 곁눈질했다. “진짜, 거의 다 읽게 만드네.” “예전에 한 번 읽은 책이어서 수월했어.” 두 사람 너머로 얼굴 모르는 학생들이 물결처럼 흘러갔다. 시간의 흐름을 대신하는 것처럼. “이엔!” 학생 중 하나가 시간 속에서 빠져나와 그들의 세계로 들어왓다. 이름을 불린 친구가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 하일저? 오늘 늦게까지 보충수업 있댔잖아?” 몸집 크고 싸움꾼처럼 생긴 하일저는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수줍어하며 웃었다. “떼어먹었다고.” 이엔은 익살스런 표정으로 손가락을 세워 좌우로 저었다. “곤란해. 곤란해. 낙제는 권장 사항이 아냐.” “보충수업을 듣든 말든 논리학 낙제는 이미 돌이킬 수 없어. 남는 시간에 차라리 햇볕이나 쬐고 말지.” 말은 편하게 했지만, 하일저는 까닭 모르게 이엔을 어려워하는 기색이었다. 싸움이 벌어져도 주먹 한 번 못 휘두를 것 같은 모습의 이엔을, 이미 소년 티를 벗은 청년인 하일저가 자칫 실수라도 저지를까 겁내는 것처럼 조심 조심 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엔의 태도는 스스럼없는 친구 그대로였다. “부족한 논리는 친구한테 좀 빌려. 논리학 문제라면 눈감고도 다 맞추는 친구는 두었다 뭐해? 안 그래, 란지에?” 처음의 소년, 란지에 로젠크란츠는 책을 덮어 옆구리에 끼며 키가 큰 하일저를 올려다보았다. “논리학은 공부해 둬. 필요할 거야.” 란지에의 한 마디에 그는 바로 수긍하며 대답했다. “알았어. 그럼 보충수업 받으러 간다.” 보통 소년이라면 친구의 한 마디 정도 대수롭잖게 받아들일 텐데, 하일저는 즉시 인사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 란지에는 하일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럴 것까진.....” “없었는데.” 이엔의 뒤를 이어 붙였고, 둘 모두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나 곧 란지에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내 말은....... “하일저한테 한 말은 진심이었다, 이러려고? 됐어, 임마. 내가 네 속을 모를까봐. 하일저가 네 말이면 다 경전인 줄 아는 게 문제일 뿐이라고. 네가 친구를 놀릴 녀석이냐.” 새되고 익살스런 목소리의 이엔은 농담을 하고 싶은 듯했지만, 란지에는 웃으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물론 논리학은 공부해 둘 가치가 있지. 하지만 지금처럼.......” 란지에는 날아오는 사과꽃을 하나 붙잡았다가 손바닥을 펴 보였다. “날씨 좋은 때 꼭 보충수업을 들으란 얘긴 아니었다고.” 이엔이 사내애처럼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파하하하... 란지에, 너도 그런 말을 할 줄 아는구나? 아까 한 말 취소, 취소. 난 아직 네 속을 몰라. 멀었다고. 뜻밖의 모습을 또 보여줘서 고맙다. 이런 양파 같은 친구야.” 둘은 하일저가 간 방향과는 반대로 회랑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기숙사가 있는 학생관으로 이어진 쪽이었다. 켈티가 외곽 지역에 위치한 사립 그로메 학원의 학생들은 절반 이상이 통학을 했고 기숙사에 있는 사람이 오히려 소수였다. 다만 똑같은 기숙사 생활이라 해도 갖춰진 시설은 천차만별이었다. 이엔은 전망도 좋고 널찍한데다 작은 거실까지 딸려 있는 2층 방을 갖고 있었다. 백작 가문 출신인 이엔 같은 학생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인 셈이다. 반면 란지에는 침대와 책상만으로도 꽉 차는 4층의 방을 썼다. 란지에는 깔끔한 성격이었지만 방이 너무 좁은 탓에 어쩔 수 없이 곳곳에 불안정하게 책을 쌓아둘 수밖에 없었다. 이엔은 아무데서나 책 한 권만 슬그머니 빼면 연쇄붕괴가 일어나 방 전체가 파묻힐 테니, 누가 널 없애버리려 한다면 일이 무척 쉽겠다고 종종 지분거리곤 했다. 짓궂게 과장해서 말하곤 하는 것은 이엔의 오래된 버릇이었다. 늘 그렇듯, 이엔의 방 거실에 안착하자 자연스럽게 한 명은 문에 이중 빗장을 지르고, 다른 하나가 창의 커튼을 내렸다. 테이블에 다가앉다 보니 흩어진 종이들 틈에 편지 한 통이 머리를 내민 것이 눈에 띄었다. 이미 읽은 듯 뜯어진 상태였지만, 편지를 집어든 란지에는 봉랍 모양만 살펴보았다. “받은 지 얼마 안된 것 같네.” 의자를 당겨 앉던 이엔이 흘끔 건너다보니 곧 눈치채고는 피식거리며 냉소했다. “‘사랑하는 딸 이엔나’를 찾는 편지라고. 내가 아니라.” 봉랍에는 이엔의 아버지, 아마란스 백작 가문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란지에는 내용물을 건드리지 않고 내려놨다. “그럼 그 이엔나가 답신하게 해야지.” “가만있자. 그 이엔나가 어딜 갔더라.” ‘이엔나’는 물론 이엔 본인이었다. 백작 영애(令愛) 이엔나 카틀레야 다아마란스. 사내애 같은 옷차림에 행동거지도 말투도 소년의 것 그대로였지만 틀림없는 열 여섯 살 소녀였다. 하지만 치마 드레스를 입은 모습 한 번 볼 수 없으니 굳이 말하자면 남장 소녀라 불러야 할 지도 모른다. 사내애로 대해주지 않으면 화를 내는 백작 댁 아가씨에 대한 소문은 유명해서 학원에서도 이엔을 여자로 대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엔’은 어린 시절의 애칭 같은 것이지만 조금이나마 사내아이처럼 들린다는 이유로 지금까지도 고집하는 이름이었다. 귀족 아가씨는 어떠해야 한다는 거장관념을 가진 몇몇 선생들만은 아직도 ‘이엔나’를 고집했다. 그럴 때마다 이엔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한층 사내애처럼 불량스럽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다시 책으로 관심을 돌린 란지에가 중간쯤을 펼치더니 서너 페이지 넘기며 한 곳을 찾아냈다. 맞은편으로 돌려 밀어주자 이엔이 들여다봤다. “음......” 언뜻 보기에는 다른 페이지나 다를 것 없이 평범해 보였다. 책은 아노마라드 여러 지방의 토속 종교들을 다루고 있었고, 펼친 페이지에서는 남부의 풍요신은 ‘양젖의 어머니’를 믿는 자들에 대해 한창 서술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다섯 번째 줄에 식자(植字)가 잘못된 듯 거꾸로 된 ‘3’자가 끼여들어 있었다. “3이군.” 고개를 끄덕인 이엔이 바로 세 페이지를 넘겨 다음 글자를 찾아냈다. 이번에도 뒤집힌 글자가 있었고, 이엔은 거기서 세 줄 아래에 있는 단어를 뽑아 종이 한 장에 옮겨 적었다. 전권위임 다음 글자는 서른 페이지 뒤에 있었다. 더 이상 잘못된 식자는 없었고, ‘전권위임’이라는 글자가 있던 것과 같은 줄을 찾아 그 세 줄 아래에서 시작되는 문장의 모든 ‘ㅣ’와 ‘ㅇ’을 골라 숫자처럼 옮겨 적었다. 그 다음 문장도 마찬가지였다. 11011 1011 다시 세 페이지를 넘겼다. 그 페이지의 같은 줄에서 마찬가지로 세 줄 내려갔다. 첫머리는 이러했다. 모퉁이에서 또다시 서른 페이지를 넘기고, 똑같이 같은 줄에서 세 줄 내려갔다. 거기에는 따옴표로 시작되는 인용문이 있었고, 이엔은 그 인용문에서 규칙에 따라 신중하게 철자 수를 세어 가며 글자들을 뽑아냈다. 다 뽑아내니 꽤 긴 문장이 되었다. 첫 부분은 이렇게 시작됐다. ‘2차 제안서는 승인되었음. 단, 반드시 성립되는 것을 전제하라......’ 자신이 완성한 문장을 죽 훑어본 이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감탄사를 내었다. “휘유, 예상은 했지만 보통이 아닌데? 이번 건에 거는 기대가 꽤 큰가봐.” 란지에는 문장을 다 읽었지만 논평 없이 침묵을 지켰다. 이엔이 친구의 표정을 살피더니 물었다.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냐? 난 그 정도 가치는 있다고 보는데. 해볼 만한 도전 아니야? 란지에는 종이를 몇 번 되풀이해 읽은 다음 촛불에 깨끗이 태웠다. 재를 모아 화분에 뿌르\ls 다음 테이블로 돌아와 앉더니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제시된 조건만으로는 문제없겠지. 그 정도면 균형도 맞고. 다만 행간에 지도부의 지나친 기대가 엿보여서 약간 걱정스럽더군.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어. 지금 같은 조직 형태에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 중 하나라고 할까.” “뭔데?” 란지에는 책을 덮으며 손끝으로 표지를 몇 번 두드렸다. “지령을 내리면서도, 그것을 받는 상대가 어떤 자인지 전혀 모른다는 문제.” 새 왕가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는 지금, 공화 비밀 결사 ‘민중의 벗’에 가입한다는 건 신분과 지위를 막론하고 무재판 즉결 처형이 가능한 유일한 죄였다. 국왕의 측근들은 정체를 감추고 숨어 있는 공화파를 색출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간부급 회원들에게 막대한 현상금이 걸려 있는 것은 물론, 어떤 자가 ‘민중의 벗’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기만 하면 체포하지 못했다 해도 상금이 주어질 정도다. 따라서 ‘민중의 벗’도 살아남기 위해 특별한 조직을 고안할 수밖에 없었다. 직접 만나 협의를 해야 하는 최고위 간부들을 제외한 중견 간부 이하는 서로의 존재와 클럽 내 활동 이력을 알 뿐 그의 본명이 무엇인지, 진짜 신분은 무엇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심지어 나이조차도 알지 못하게 해 놓았다. 클럽 평회원들의 경우에는 이른바 ‘달걀은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다’는 원칙에 입각해서, 하급 간부들이 몇 명씩 조를 짜서 관리하고 같은 조끼리만 서로의 정체를 공유했다. 그러므로 한 부분이 발각되어도 모서리가 허물어지는 것으로 끝날 뿐, 조직 전체가 흔들리는 일은 결코 없었다. 물론 클럽의 방대한 조직 안에는 개인적 친분으로 서로가 누구인지 아는 회원도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밝히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대신 연락망은 완벽하게 짜 놓아서 지도부의 지령이 서너 단계 아래의 조직원에게 전달되고, 다시 올라오는 데 단 며칠밖에 걸리지 않았다. 란지에가 받은 책도 겉으로 보면 일반적인 책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어 보이고, 모르는 사람은 끝까지 읽어봐도 거기에 뭐가 숨겨져 있는지 알아챌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책 안의 내용을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조금만 바꿔 은밀히 인쇄하고, 그것을 암호 전달용으로 활용할 정도로 그들의 연락망은 정교했다. “아...잠깐, 정말 그렇게 되는 건가?” 고개를 모로 꼬며 어이없어하던 이엔이 결국 실소를 터뜨렸다. 란지에가 한쪽 어깨를 가볍게 으쓱해 보였다. “협상 상대랍시고 열 여섯 먹은 소년이 나와 앉는 걸 보면 우리가 자길 놀린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지령을 내린 사람은 란지에가 스무 살도 안 된 소년이라는 걸 결코 몰랐을 것이다. 물론 란지에의 클럽 내 활동 이력은 훌륭했다. 그가 써 보내는 칼럼은 공화 신문에 꼬박꼬박 실리고 있었고, 조직 내부에서도 보기 드물게 정연한 논리를 펴는 젊은 이론가로 소문이 자자했다. 조금 젊은이다운 치기가 엿보인다는 평도 없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기껏 스물 중반쯤으로 보았을 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란지에가 능력이 출중하다고 해도 신체적 나이의 한계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십대 소년과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아서는 진지해지는 것은 고사하고 상대를 신뢰하는 것조차도 무리다. 지금처럼 조직 외부의 사람과 협상을 해야 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어쩌지?” 이엔이 웃음을 걷고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포기하기에는 좀 아깝다고 생각되었다. 귀족 출신인 이엔은 민중의 벗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다. 한 건 멋지게 해내고 싶은 마음이 강한 때였다. 친구가 좋은 해결책을 제시해 줄 것을 기대하며 흘끔 곁눈질을 했지만 얼른 쾌답(快答)이 나오지 않았다. “란지에, 포기할거야? 다른 사람에게 넘겨 달라고 도로 메시지를 보낼까?" 본심과는 달랐지만 친구의 합리적인 성격을 잘 알기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란지에가 고개를 저었다. “이 문제를 설명하는 암호를 짜서 올려보내고, 지도부에서 다시 논의하여 새 적임자를 뽑고, 그 지령을 내려보내는 데 걸리는 시간을 짧게 잡아도 닷새 이상일 테지. 날짜를 맞출 수가 없게 된다. 날짜와 장소까지 명시된 지령 내용으로 볼 때 그 자와의 약속은 이미 잡혀 있는 모양이니 우리 사정으로 어겨서는 모양새가 나쁘지.” “그러면?” 자리에서 일어난 란지에가 창가 쪽으로 걸어가며 난데없이 중얼거렸다. “하일저는 보충 수업이 끝났으려나......”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깜빡이던 이엔은 조금 후 키득,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친구의 의도를 눈치챘던 것이다. 2. 분홍빛 드레스 “춤추며, 웃으며, 이야기하며 꽃밭도 시내도 밟고 간 곳, 복숭아와 백합은 누이의 빛깔, 있거니 머물거니 뒤따르다가 눈 드니 어느새 보이지 않아, 멀어져 멀어져 보이지 않아” 꿈에 시달리다 깨어보니 그가 와 있었다. “아... 오랜만이네요.”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고작 했다는 말이 그것이었다. 침대 곁에 앉아 있던 켈스니티는 그만이 할 수 있는 반투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세상 고민 다 들어줄 것처럼 온화한 표정이지만 나오는 말은 딴판일 게 뻔했다. <감자들 말인데, 그 껍질 다 벗기는 데 사흘은 걸렸겠더군.> 그 말을 듣자 저절로 심술궂은 표정이 나왔다. “내가 그러고 있는 동안 어디 가서 놀고 있었죠? 미안한 생각 안들어요? 나와 막시민이 그 감자를 까느라고 얼마나......” <고생했겠지. 하지만 예전에 네가 먹었던 수많은 감자도 다 누군가가 깐 것이었잖아. 네가 그들에게 품었던 감사의 만큼만 내게 요구하라고. 더구나 난 네가 깐 감자를 먹지도 않잖니.> “체, 예전엔 감자 별로 먹지도 않았어. 장담하건대 어제 깐 감자가 내가 평생 동안 먹은 감자보다 많다고요.> <감자뿐만이 아니겠자. 아무 것도 잘 먹지 않으면서. 입맛 까다로운 어린애처럼 다루기 힘든 것이 없는데. 비취반지 성의 주방 아주머니들이 ‘장작개비처럼 마른 도련님’이라고 불렀던거 알아?> 켈스니티의 말투는 꼬마 조카를 놀리는 삼촌들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까마득히 세대가 멀긴 해도 굳이 따지자면 이카본의 자손인 조슈아는 켈스니티에게 친구의 아들 격이니 흔히 하듯 ‘삼촌이라고 불러라’에 해당되는 요건을 충분히 갖추긴 했다. 조슈아가 몸을 약간 일으키자 테이블 위의 초가 저절로 켜졌다. 물론 켈스니티가 만진 것이다. 그쯤 되자 조슈아도 평소처럼 씩 미소지었다. “그런 걸 나한테 일러버리면 아줌마들 입장 곤란하죠." 하지만 그걸로 끝내진 않았다. “하지만 켈스, 아주머니들을 몰래 엿보는 취미는 좋지 않다고요. 얼굴이야 어쨌든 수백 살은 먹은 노인네잖아. 점잖게 굴어야지.” 켈스니티가 말문이 막혀 있는 사이 조슈아는 어젯밤 벗어 놓은 옷을 찾아내어 바지부터 입기 시작했다. 주위 풍경은 잠들기 전 모습 그대로였다. 지붕 밑 방 특유의 경사진 천장, 벌떡 일어났다가는 그대로 천장 모서리에 이마를 부딪칠 게 틀림없는 위치에 바짝 붙여놓은 침대, 허리를 굽히고 나가야 하는 입구하며, 한 눈에 용도-불쌍한 부엌데기 소녀의 다락방-가 짐작되는 대단한 구조로 되어 있는 방이다. 침대를 제외한 유일한 가구인 작은 테이블 앞으로도 딱 한 명이 아슬아슬하게 지나갈 만한 틈밖에 없어서 공간 활용에 있어서 또한 한 치의 낭비도 없었다. 옷을 다 입었지만 서 있기도 마땅찮은 작은 방인지라 침대에 도로 앉는 것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켈스니티와 마지막으로 대화한 날을 떠올리자, 그 후로 시간이 무척 많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그에게 많은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내가 당신이 없던 며칠 동안 얼마나 끔찍한 일을 많이 당했는지 알아요?” 켈스니티는-복수심 탓인지-아주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몰라.> 조슈아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왜 나한텐 어려운 일을 척척 해결해 주는 유령이 붙지 않지?” <깨어날 때마다 천장에 달라붙어 입가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유령이 붙지 않은 거나 고맙게 생각하라고.> 하지만 조슈아는 겁을 내는 대신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그건. 당신 친군가요? 너저분한 분장 칠하고 천장에 거꾸로 붙기까지 하려면 무지 힘들겠는데. 당신이 그런 귀찮은 역할을 할 리 없으니 역시 전혀 실감이 안 나요. 그나저나 감자 깐 건 어떻게 알았어요? 그게 한나절만에 다 깐 거란 사실이 믿어져요?” 켈스니티는 턱을 약간 쳐들더니 친절을 듬뿍 담아 말했다. <주방에 가 보니 감자 껍질이 산처럼 쌓여 있던데. 고생 많았네, 정말. 그렇게 많은 감자를 한나절만에......> 말 내용이야 어떻든 표정만으로도 의도는 명확히 전달되었다. 매우 동정하는 체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관심 없다는 걸 너도 알겠지? 조슈아도 지지 않고 교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유령이 음식을 먹는 것도 아니면서 주방까지 뭘 하러 갔어요? 아참, 여기 주방엔 아주머니들이 없다는 걸 몰랐군요?” 결국 켈스니티가 손을 들고 말았다. <그만 하자. 너희 집 핏줄은 좋지 않은 건 빠짐없이 물려받는군.> 조슈아는 재빨리 알아채고 말했다. “아마 그 사람도 포기할 수 없었던 거겠죠.” <뭘?> "당신을 놀리는 재미. 이야, 세월을 뛰어넘어 조상과 마음이 통하는 기분도 괜찮은데." 사실 그다지 자주 놀린다고는 할 수 없었다. 전에는 켈스니티가 조슈아를 지분대는 날이 훨씬 많았던 것이다. 켈스니티는 조슈아가 어째서 달라진 건지 곧 눈치를 챘다. <조슈아 너, 요즘 네 친구 리프크네 군에게 당하느라 많이 힘들었나보구나. 그렇다고 내게 부작용이 와선 곤란한데.> “부작용이라니?” <리프크네 군의 말투를 흉내내는 부작용.> “내가 언제......” 켈스니티는 항변하려는 조슈아의 말을 가로챘다. <그럼 이제 널 위해 준비해 온 중요한 이야기를 해 줄까. 저런, 관심이 없는 얼굴이네. 하지만 이건 무척 위험한 문제라고. 게다가 조슈아 너에게 특히 위험한 문제이기도하고.> 바로 그 때 화제에 오른 리프크네 군이 문짝을 뽑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왈칵 열어제치며 머리를 들이밀었다. “아니, 또 위험이야? 넌 도대체 왜 그렇게 위험한 거냐?” 다음 차례는 어쩔 수 없이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들어온 막시민은 뒷발로 문을 차 닫더니, 보이지 않는 다른 한 사람을 향해 아무 데로나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힘든 일 다 지나가고 좀 조용해지니 그제야 나타나는군. 그런데 고작 갖고 온 소식이 또 ‘위험’깉은 거라니, 당신도 환영받는 손님이 될 소질은 도무지 없는 모양이야. 근데 이 문짝은 또 왜 이렇게 뻑뻑한 거야?” <그건 당신이 문을 반대 방향으로 열었기 때문이죠.> 조슈아가 킬킬거리며 웃기 시작하고, 엉성하게 닫히다 만 문을 한 번 돌아본 막시민은 불만스럽게 코를 찡그렸다. “문짝의 취향까지 고려하기엔 내 삶이 너무 고달프군 그래. 에취!” <편히 자지 못한 것 같군요, 리프크네 군.> 조슈아도 말했다. “얼굴이 부었네.” “구래, 부었다. 밤새 꿈속에서 감자들이 괴롭혀서 살 수가 있어야지.” “혹시 자기들을 세어달라고 쫓아오든? 내가 바로 백 번째 감잡니다! 정확히 세어주세요! 이러면서?” 막시민이 눈을 가늘게 뜨며 돌아봤다. “이봐, 조군, 너 지금 빈정대냐?” 이쪽은 말발의 우열이 확실했으므로 조슈아는 미소로만 답했다. 시선을 돌리자 켈스니티가 창문 옆에 가 서더니 손가락질을 했다. 열어보라고? 머리를 부딪히지 않게 조심조심 일어나 창 덧문을 열자 어스름 속에 들판 같은 것이 보였다. 아직 날이 밝으려면 좀더 시간이 있을 듯했다. 들판은 꽤 넓었고...... “응?” 무슨 생각이 날 듯 말 듯 하더니 곧 명확해졌다. 이 들판은 일행이 세자르 몽플레이네 씨와 함께 결계석인가 뭐가를 찾아 헤매던 바로 그 들판이 아닌가. “이게 어떻게 된거지?” 막시민도 일어나 창가로 갔다. “아니, 어째서 1층에서 내다볼 때와 2층에서 내다볼 때 보이는 곳이 전혀 다른 거야?” 막시민의 불평에 켈스니티가 웃으며 대꾸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요. 이를테면 1층 창문은 동쪽으로만 나 있고 2층 창문은 서쪽으로만 나 있다든지.> “아주 설득력 있는 이유이긴 한데, 그럼 1층에서 내다본 세상이 가을이었던 건 어떻게 설명하지?” 그제야 농담을 접은 켈스니티가 입을 열었다. <그게 위험에 대한 첫 신호입니다. 일단 내 생각을 말할까요. 이곳은 마법사의 집이지요. 이 집 주인은 평범한 마법사는 아닌 듯하군요. 집에 마력의 흐름을 붙들어놓는 어떤 힘이 있어서 그게 이 일대의 시공간을 기묘하게 일그러뜨려 놓았습니다. 덕택에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같이 존재할 수 없을 듯한 것들이 멋대로 뒤섞인 장소가 되었지요. 여름이든, 겨울이든, 다른 무엇이든.> “하지만 당신은 아까 조슈아에게만 위험한 문제라고 했잖아?” <위험한 이유는, 당신의 친구가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영매(靈媒)이기 때문입니다.> 막시민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조슈아가 말했다. “좀 더 정확히 설명해 줘. 일그러진 시공간하고 유령이 무슨 관계라도 있는 거야?” 켈스니티는 양손을 펼쳐 보였다. <나처럼 죽은 자들에게는 살아 있는 인간의 좌표가 거의 쓸모가 없어. 마음만 먹으면 먼 거리를 순식간에 뛰어넘을 수도 있고, 막힌 벽도 의미가 없지. 인간들이 무슨 산, 무슨 도시, 어느 거리, 어느 건물 같은 것들을 좌표 삼아 움직인다면 유령들의 좌표는 뭐라고 생각해?> 조슈아는 오래 생각하지 않고 바로 말했다. “당신은 나를 따라다니잖아?”  <맞았어. 난 널 따라다녀. 한 사람을. 하지만 모든 유령이 그런 것은 아니야.> 그 때 갑자기 촛대 옆에 놓여 있던 빈 그릇이 덜덜 떨기 시작했다. 따르르르르....... 놋쇠 그릇이 귀뚜라미처럼 우는 소리는 모두에게 분명하게 들렸다. 조슈아는 켈스니티를 쳐다봤다. 막시민은 조슈아가 보는 쪽을 쳐다봤다. 조슈아에게는 살아 있는 사람처럼 분명하게 보이는 켈스니티였다. 그러나 그는 그릇을 만지지 않았다. 이윽고 그릇이 멈췄다. 공기 속 떨림도 가라앉았을 즈음, 조슈아가 머뭇거리다가 입술을 열었다. “켈스?” 켈스니티를 만난 후로 유령이 두렵다는 생각을 해본 일이 없는 조슈아였지만, 이번만은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켈스니티는 대답 대신 이렇게 말했다. <장소나 인간에게 묶이지 않은 한, 유령의 일반적인 좌표는 에너지야. 마력을 비롯한 모든 힘의 흐름. 그런 것에 휩쓸려 다니기도 하고 뒤따라 다니기도 하지. 생각해 봐. 죽은 사람에겐 감각이 없어. 바늘로 손끝을 찌르는 따끔함,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차가운 물, 힘껏 달렸을 때 흐르는 땀, 그런 것이 없어. 하지만 그런 것을 기억하지. 그렇기 때문에 유령은 기본적으로 욕구불만 상태야. 엄지발가락이 가려운데, 이미 잘라내고 없기 때문에 긁을 수 없어 미칠 지경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봤어? 유령에게는 발가락뿐 아니라 아무 것도 없지만 할 수 있다면 사포를 피부에 북북 문지르고 싶을 정도 일 거야.> “당신도 그런가요?” <나?> 그렇게 말하며 켈스니티는 웃었다. 조슈아는 새삼스런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그의 불편에 대해 생각해 본 일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거칠 것이 없으니 편할 거라고 무심코 생각했던 것 같았다. <내 얘긴 나중에 하고.... 그러니까 유령은 실체 없는 몸에 뭔가 부딪쳐 오기를 간절히 바란단 말이야. 그래서 유령이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실체인 에너지의 흐름에 민감해지지. 여기처럼 마력이 꽉 죄어져 뒤틀린 곳에는 일부러 와서라도 휩쓸려 보고 싶어하는 유령들이 아주 많지. 단지 본능에 따랐다고 봐도 될 거야. 다시 말해, 이런 장소에는 저절로 유령들이 모이게 되.> 조슈아가 미심쩍은 눈초리로 물었다. “얼마나 많이?” <그건 이 결계가 얼마나 오래 지속된 것이냐에 달렸지. 오래되었을수록 네게 닥칠 위험은 더 크지.> 막시민이 말했다. “잠깐, 당신은 물건이나 사람을 건드릴 수가 있잖아? 전에 책도 넘기고 글씨도 썼던 것으로 아는데.” <그랬지요.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은 내가 접촉을 시도할 때 뭔가 느껴지는 모양이지만, 내 쪽에선 없습니다. 아무 느낌도. 그들이 평소 내 몸을 건드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사람의 반응을 보고 내 행동의 결과를 알게 되는 거죠. 물건을 잡는 것은 물론이고 특히 글씨를 쓰는 것이 어렵습니다. 어느 정도로 힘주어 펜을 잡고, 종이에 눌러야 하는가를 감각이 아닌 경험으로 조절해야 하니까요. 이해가 어렵다면, 장님이 기억에 의존해서 늘 가던 길을 정확히 가는 것과 비교하면 될까요.> 날이 밝아오고 있어서 유령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점점 더 이상하게 들렸다. 하지만 뭐, 조슈아에게는 보통 사람이나 다름없게 보인다니까...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막시민은 깨달았다. 예전에 본 사기꾼 영매들도 눈을 감고서 ‘아, 그 분이 보입니다, 아, 희미하지만... 흰옷을 입고......’하는 수준이었는데 유령이 보통 사람처럼 보일 정도라면 조슈아는 도대체 뭔가? “영매라는 건, 그러니까 유령들이 잘 달라붙는다는 얘기잖아, 안 그래? 아니면 유령을 잘 불러낸다는 건가?” <둘 다이지요.> 그러자 조슈아가 말했다. “나한테는 새삼스런 얘기일 뿐이야. 영매가 어쩌고 해도 내게 보이는 건 켈스 당신뿐이니까 말이죠. 다른 자들은 목소리일 뿐이고, 한 번도 실체를 본 일이 없는걸.” <아니, 아닐걸. 잘 생각해 봐. 날 처음 만났던 날 말이야.> 기억을 더듬자마자, 바로 떠올라왔다. “그 그림자?” <그래. 내가 보지 말라고 했던 그 그림자. 그리고 나중에 보게 된다 해도 못 본 체 외면하라고 했던 자들 말이야.> “아, 사실을 말하자면... 완전히 외면하진 못했어. 당신이 없던 동안 너무 집요하게 마을 걸어대어서 대꾸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래도 목소리뿐이었는데.” 그러자 켈스니티가 뺨을 실룩이며 웃었다. <물론 그랬다는 걸 알고 있어. 안 그랬다면 지금까지 목소리들이 널 따라다니는 일은 없었을 테니 말이야.> 막시민이 물었다. “반응을 보이면 유령이 따라다니게 된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본능만 따르는 유령들은 몸으로 사물을 감각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적으로도 세상의 모든 것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그들끼리 대화가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서로의 존재조차 느낄 수 없지요. 그러니 감각 없는 온 몸이 가렵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처럼, 살아 생전에는 일상이었던 타인과의 관계를 갖고 싶어 못 견디게 됩니다. 유일한 기억 속 타인인 살아 있는 인간의 반응에 목말라하는 거죠. 그러니까 조슈아.> 그들의 눈이 마주쳤다. <넌 흔한 영매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계’가 너무 얇아.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들리지 말아야 할 소리들이 너무 많이 들려. 그런데 이곳에는 그런 너와 접촉하고 싶어할 유령들이 아주 많단 말이야. 그러니 이곳에서만은 아무리 그들이 네 주위를 맴돌더라도 반응을 보여선 안 돼.> “만약 내가 반응을 보이면?” 막시민은 조슈아의 반문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다시 말해 미쳤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켈스니티가 답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주면, 그들은 네게 달라붙어 무슨 수를 써서든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 할 거야. 너 같은 사람을 만나기가 힘드니만큼 네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지도 모르지.> 조슈아와 막시민에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내다본 들판에는 노숙자 한 명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본래부터 노숙자였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어젯밤에 노숙을 한 것만을 틀림없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어젯밤뿐 아니라 전날도, 그 전날도 노숙을 했다. 차이가 있다면 어젯밤에는 혼자였다는 점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태평하고 걱정이 없어 보였다. 지금도 일행을 찾고 있다기보다는 느긋하게 아침 산책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주인이야 어찌됐든 자기 몫의 아침 식사를 하겠다고 자꾸 걸음을 멈추는 말 한 마리를 끌고서. 자연스레 찾아온 배고픔이 그의 태평한 정신 상태를 어지럽혔다. 그는 슬슬 걸으면서 이런 들판에 먹을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제 갑자기 사라져버린 딸아이가 갖고 있을 배낭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딸아이의 행방보다 사라진 배낭을 걱정하는 건 좀 그런가.” 들을 사람도 없건만 스스로 반성까지 해가며 걷던 그의 눈에 이상한 물체가 띄었다. 멀어서 정확하지 않았지만 꼭 이불이나 보자기를 펼쳐 놓은 것처럼 보이는 희끄무레한 덩어리였다. 그걸 보자 가장 먼저 식탁보를 떠올린 그는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이불이라면, 오늘밤에는 좀 낫겠군.” 그는 딸을 찾을 생각도, 그렇다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도 없이 그저 이 들판에서 버티기만 하면 된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누가 그런 임무를 주기라도 한 것처럼, 그 이상의 복잡한 계획은 염두에도 없었다. 더 다가갔을 때, 식탁보도 이불도 보자기도 아닌 넓게 펼쳐 놓은 치마를 발견한 그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물론 그 치마는 사람이 입고 있었다. “아··· 안녕하슈?” 옷을 발견하고 보니 그 안에 사람이 있더라, 라는 어처구니없는 과정을 거쳐 눈앞에 있는 상대를 인식했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 눈을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왜 이런 곳에 앉아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 그녀는 대답 없이, 여전히 들판 가운데 단정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앞 못 보는 장님처럼 표정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말 걸기를 중단하고 상대의 기색을 잠시 살폈다. 스무 살 안팎의 아가씨였다. 가녀린 체구에 우아한 옷매무새, 곱게 다듬어 늘어뜨린 금발, 양산 아래에서 자란 듯 하얀 얼굴, 어느 모로 보나 평민은 아니었다. 근처에 귀족 저택 같은 것이 있던가? 만약 있다 해도 이런 아가씨가 동행하는 사람도 없이 떨어져 황량한 들판에 혼자 앉아 있는 모습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헛것을 볼 정도로 배가 고프진 않은데? 그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배가 고프면 음식상이 보여야지, 왜 여자가 나와? 밥 차려주게 생기지도 않았구만.” 그렇게 말했을 때, 여자의 얼굴이 드디어 조금 움직였다. 턱을 약간 들면서,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당황한 나머지 자동적인 반응이 튀어나왔다. “안녕하신가요. 저는 세자르 몽플레이네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 그는 거기서 말을 멈췄다. 여자가 입을 열었던 것이다. “안녕?” 그리고 빙그레 웃었다. “·······.” 말문이 막힌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한 번의 미소로 인형의 산 사람으로 변한 듯한 광경이었다. 뺨에 꽃봉오리같은 홍조가 피어오르고, 그리고······· 희미하던 인상이 선명해졌다. 드레스는 분홍빛이었다. 세자르는 눈을 끔뻑이며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조금 전에는 못 느꼈는데, 지금 그녀를 보고 있자니 조금 전의 그녀가 반투명했던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동시에 어디서 본 듯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묘하게 낯익었다. “어째서··· 이런 곳에 계십니까?” “놀러왔어.” 간명한 대답과 함께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더니 이곳 풍경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흥미롭게 휘둘러보는 것이었다. 세자르는 이름이라도 물어볼까 하다가 귀족 영애의 이름을 자신 같은 사람이 묻는 것은 실례겠지 싶어 꾹 참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길을 잃으신 거라면 댁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댁이 어디신지?” 여자는 세자르를 다시 보더니 또박또박 잘라 말했다. “날 길 안 잃어버렸어.” 그 때 귓가에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말을 탄 남자 대여섯 명 정도가 저만치에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세자르는 기수들의 옷차림으로 보아 이 아가씨를 모시러 온 사람들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오해를 사서는 곤란하겠다는 생각에 그는 먼저 말 탄 남자들 앞으로 나섰다. 남자들이 말을 멈추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중 한 명이 물었다. “넌 누구냐?” “저는 그저 길가는 농군에 불과한데 저 분을 우연히 뵈었을 뿐으로·······.” 그들은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더니 세자르의 대답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갑자기 검을 빼들었다. 깜짝 놀란 세자르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이익! 이거 왜 이러십니까?” “우리는 지금 사람을 찾고 있다. 네가 본 대로 정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경을 칠 줄 알아라.” “찾으러 오신 거야 물론 알로 있지만 저는 저 분께 아무 짓도 아지 않았는데·······.” “알고 있다고? 네가 어떻게 알고 있지?” 남자들은 서로 얼굴을 보며 뭔가 추측하는 듯 눈빛을 나눴다. 미심쩍어 하던 눈초리는 곧 사납게 변했다. 세자르는 상황은 몰라도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만은 눈치챘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찾고 있는 아가씨눈 바로 저기 있는데 새삼 뭘 정직하게 말하라는 것이며, 사람 찾는다는 것을 알았는데 게 뭐가 문제가 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포위해!” 세자르는 그 자신도 검을 쓰는 사람이었으므로 말을 탄 여러 상대를 피해 달아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는 대적하는 것이 더 큰 화를 부를 수 있었다. 그는 쩔쩔매며 항변하는 쪽을 택했다. “왜 이러십니까? 저는 무례한 짓은 전혀 안 했습니다요. 정말 아무 짓도 안 했다니까요? 그저 걱정스러워 몇 말씀 드려본 것밖에 없는데, 못 믿으시면 직접 여쭤보십쇼!” 한 남자가 어이없는 얼굴로 물었다. “여쭤보다니? 누구한테 여쭤봐?” “그거야 아가씨한테·······.” “아가씨?” 세자르와 말을 탄 남자들이 동시에 같은 쪽을 보았다. 세자르의 눈이 둥그래졌다. “어, 없네?” 한심한 표정을 하고 있던 한 남자가 코웃음쳤다. “이놈이 지금 우릴 데리고 장난하나? 아까 전부터 네놈하고 우리말고는 아무도 없었는데 무슨 아가씨가 어쩌고 저쩌고야!” “아가씨가··· 아, 아니 방금 전까지 분명 저기 아가씨가 계셨단 말입니다! 못 보셨다고요? 정말로 못 보셧습니까요? “그래 못 봤다, 이놈아. 아가씬가 뭔지가 풀숲에 숨기라도 했단 말이냐?” 한 사람이 말을 몰아 그쪽으로 가더니 한 바퀴 빙 돌고 왔다. 돌아오는 것과 함께 그는 장갑 낀 주먹으로 세자르의 뒷머리를 내리쳤다. “무슨 넋 나간 소릴 늘어놓은 거야!” 세자르는 맞고도 아픈 것조차 못 느끼는 것처럼 연신 여자가 있던 쪽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 그렇게 사라질 수가 없는데·······.” 여자가 입었던 드레스는 갑자기 달려 사라지기엔 부적당했을 뿐더러, 주변은 숨을 곳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가장 가까운 나무도 1백 미터는 떨어져 있었다. 말을 탄 남자들이 그녀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렇게 눈에 띄는 옷을 입은 여자를? “네놈의 환각 따윈 됐으니깐 헛소리 그만두고, 어서 여기서 본 자들에 대해 말해라! 자, 소년 둘에 여자아이 하나, 그리고 남자 하나다. 우리가 그들을 찾는 줄 안다고 말했으니 분명히 봤던 것이겠지? 놈들은 어디로 갔느냐!” 그러나 세자르는 또 한 번의 넋 나간 소리로 이들을 화나게 만들고 말았다. “찾으시던 사람이 아가씨가 아니었습니까요?” 한 명이 못 참겠다는 듯 도로 칼을 빼들고 소리질렀다. “이 자식이, 아직도 그놈의 아가씨 타령이야!” 당장이라도 내려칠 기세였으나 다행히 다른 사내들이 말렸다. “이런 정신 빠진 놈을 상대해봤자 뭘 하나. 시간 낭비일 뿐이야.” “어서 가자고. 이놈은 아무래도 들판에 떠도는 미친 거지인 것 같군 그래. 상대하기엔 자네 칼이 아깝네.” 칼을 뺐던 남자는 화풀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칼등으로 세자르의 등을 후려쳤다. 그리고 그들은 다실 말을 달려 가 버렸다. 세자르는 어깨를 으쓱하며 등 근육을 이리저리 움직여 봤다. 그까짓 것쯤은 맷집으로 버티지, 하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다만 그는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아가씨가 간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거 참, 별난 일도 다 있지.” 귀신을 봤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생생하고, 날도 대낮이라 무서운 기분도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녀 둘에··· 여자애 하나? 그리고 남자 하나? 가만있자, 어쩐지 익숙한 구성인데?” 세자르가 다시 목을 빼고 바라봤을 때, 말을 탄 남자들은 이미 보이지 않게 된 뒤였다. 다시 한 번 불가사의하게 사라져 버린 아가씨를 떠올린 세자르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날 도와주려고 뭐가 나타났던 거였나?” 3. 운 나쁜 다락방의 모험 “당신은 절대로 내 이름을 부를 수 없어. 내가 가르쳐주질 않을 거니까. 그리고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은 나뿐이니까. 맞추고 싶으며 맞춰봐! 그러면 당신을 따라갈 지도 몰라.” 남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감자 껍질을 벗기거나 마루를 닦게 되는 것도 만족스런 상황은 아니겠지만, 일을 시키지 않는 대신 주인까지 나타나지 않는 상황도 바랄 만한 것은 아니었다. “어제는 바빴으니 오늘은 쉬라 이건가?” 각자에게 주어졌던 다락방 세 개는 멋진 구조였다. 복도 하나로 나란히 연결되어 있고 문도 잠겨 있지 않아서 그들이 다시 만나는 것까진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전부였다. 복도는 양쪽이 막혀 있었고, 복도 끝에는 층계참이었던 것처럼 보이는 네모진 공간과 창 하나씩이 있을 뿐 어디에도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계단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어젯밤에는 분명 등불을 든 마법사와 함께 계단을 올라온 기억이 나는데, 반시간 동안 찾아 봤지만 계단 비슷한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셋은 마땅히 할 일도 없고 해서 각자의 다락방을 탐색해 보았는데 놀랄 만큼 동일한 구조인 것은 물론, 숨겨진 통로 따위가 없는 점까지 완전히 똑같았다. 막시민의 방에 의자 하나가 있는 것을 밴다면. 양쪽 복도 끝의 창도 열심히 내다봤지만 발견한 거라곤 아침에 그랬듯 제멋대로의 계절을 지닌 풍경들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부르지 않아도 잘만 오던 켈스니티조차도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아 그들은 완전히 갇힌 꼴이 되고 말았다. 점심 무렵, 셋은 리체의 가방에 들어 있던 마른 빨 한 개를 정확히 삼등분으로 나눴다. 자기 빵을 반쯤 먹던 조슈아가 마른기침을 하며 말했다. “목이 막혀 죽겠어. 리체 물은 없니?” “있는데 지금까지 안 줬을 리가 없잖아.” 퉁명스럽게 대꾸하긴 했지만, 힘들어 보이는 조슈아를 다시 흘끔 본 리체가 비결이라도 가르쳐주는 어조로 말했다. “침을 열심히 삼켜봐.” “·······.” 그러나 그 충고는 효과가 있었다. 삼 분 정도 열심히 삼켜보니 그럭저럭 괜찮아졌던 것이다. 그 꼴을 옆에서 보던 막시민이 무릎에 턱을 괴며 한숨을 쉬었다. “우린 어째서 이렇게 비참한 여행만 해야 되는 거지.” 빵가루를 털고 있는 조슈아를 보니 한층 더 한숨이 나왔다. “저런 부자 녀석하고 다니는 여행인데, 최소한 사두마차 두 대에 하인이 서넛은 딸리고, 내리는 곳마다 각지의 명물 요리 순례란 하며 한가하게 다니면 좀 좋아.” 조슈아는 뭐라고 변명을 할까 궁리했지만 기껏 이런 소리밖에 할 것이 없었다. “그럼 다음 번에는 그렇게 다니자.” “이런 꼴을 당했는데, 다음 번에도 너하고 같이 다닐 것 같냐?” 혹시나 가방 속에 다른 먹을 것이 숨겨져 있는지 열심히 뒤지던 리체가 결국 가방을 내던지며 맥없이 중얼거렸다. “여행 다닌다는 사람들, 좋아보였는데 이젠 진절머리가 나네. 의상실이 그리워지는 날일 올 줄이야. 입구에서 안내를 맡고 있으면 옷을 찾아가는 손님들이 케익이나 과자 같은 거 얼마나 자주 줬는데. 봉봉 사탕이랑 딸기 타르트랑 초콜릿 무스랑 슈크림 볼이랑·······.” “조용히 안 할래?” 막시민이 머리를 들며 쏘아붙였다. 그러나 구석에 쪼그리고 있던 조슈아는 리체를 돌아보며 물었다. “의상실에서 오래 일했니?” “무척 지겹도록 오래 있었지.” “그게 몇 년인데?” “반년쯤인가.” 조슈아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자 리체가 말했다. “너도 넉넉잡아 2년쯤 걸릴 일들을 반년만에 해치워 봐. 그 반년이 지겹도록 길지 않은가.” 말이 없는 것이 정말로 생각해 보는 기색이라, 리체는 고개를 숙였다가 이윽고 킥킥대기 시작했다. “뭐야. 남의 일상에 그렇게 심각해지고. 네 문제만 생각해도 바쁜 입장이면서.”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미랭게트 선생은 널 심하게 부려먹은 거잖아. 그렇게 시키면 일당은 더 많이 줘?” “그럴 리가 없잖아. 사람 봐가며 애길 해. 반나절만 쉬어도 일당 딱딱 감하는 미랭게트 선생이 무슨··· 하긴, 너 같은 사람이 이런 문제를 알 게 뭐겠니. 내가 그렇게 만든 옷 중 제일 어려운 건 전부 네 주문이었는데.” 조슈아는 무안한 얼굴로 야트막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미안해. 난 복잡한 의상은 당연히 많은 사람을 써서 만들 줄 알았어. 그래서 가격도 비싸게 치렀고. 그 차액은 전부 미랭게트 선생이 챙겼겠네. 내가 너무 무신경했구나.” “됐어. 사과 듣자고 꺼낸 얘기 아니야. 막스 카르디가 사라졌으니 이제 네 옷 만들 일도 더 없을 거고. 이유야 어쨌던 너도 지금 죽을 고생을 하고 있잖니. 사실 나도 막스 카르디에게 이런 넋두리를 늘어놓을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그것만 해도 보통 일은 아니지. 우리 의상실의 누구라면 평생 그렇게 일한대도 좋으니 너랑 하루만 이렇게 있게 해달라고 할 지도 몰라.” 둘은 계면쩍은 미소를 주고받았다. 하긴, 식당에서 수염 붙인 손님과 급사로 마주쳤던 때만 해도 이런 날이 올 줄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식당일을 떠올린 조슈아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리체 너, 의상실에서 그렇게 바빴다면서 저녁에는 코럴리 식당에서도 이라고 있었잖아. 그렇게 열심히 벌어서 다 어디다 쓰려고 그래?” 어느새 침대로 기어올라가 늘어져 있던 막시민이 눈을 약간 뜨고 그들을 내려다봤다. 예상대로의 대답이 들렸다. “그 돈을 다 어디에 쓰냐고? 그렇게 번 돈이 내 손에 몇 푼이나 남은 줄 아니? 아휴, 이런 애길 시작한 내가 잘못이지. 열여섯 살 먹은 내가 죽기살기로 벌지 않으면 꼼짝없이 굶어야 되는 엄마나 동생이 있다는 걸 귀족 도련님이 이해할 리가 없는데.” 막시민이 몸을 일으켰다. “야, 리체. 너희 어머니는 어디 아프시냐?” 리체는 눈을 흘겼지만 비교적 순순히 대답했다. “몸이 약해서 일을 못하시지. 한 번 움직이면 벌어오는 돈보다 약값이 더 나가.” “그럼 동생은 몇 살인데?” “아홉 살이야. 그런 어린애를 써주는 일터는 없다고.” “아하 그래서 네가 돈을 벌어서 생활능력 없는 두 사람을 먹여 살린다? 그것 참 눈물겹게 감동적인 얘기로군. 제목은 ‘소녀 가장의 슬픈 사연’ 정도?” 그렇게 말하면 막시민은 침대 아래도 다리를 내려놨다. 리체의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본 조슈아가 말했다. “무슨 얘길 하려고 그래? 말을 잘못한 건 나라고” “네가 말을 잘못 하긴 했지. 하지만 내가 할 얘기는 전혀 다른 거야. 리체, 내가 딱 까놓고 얘기하겠는데, 네가 힘든 일을 해가며 무능한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된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너만의 착각에 불과할걸. 너의 가족들은 충분히 스스로를 먹여 살릴 능력이 있어.” “뭐라고?” 리체가 발딱 일어났다. 이미 배고픈 것은 잊은 것 같았다. “네가 내 사정을 어떻게 안다고 함부로 말하니? 내가 어머니와 동생을 일터로 내몰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참견할 권리가 어딨어? 네가 우리 집 문턱에 발끝이라도 들여 놔 봤니? 그렇게 잘 알게? 어머니가 얼마나 몸이 약한지, 동생이 얼마나 어리고 아무 것도 모르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본 것처럼 말하지 말란 말이야!” “아 물론 난 못 봤지.” 막시민은 어깨를 으쓱하며 서 있는 리체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말이야, 안 봐도 짐작 가는 상황이란 게 있는 법이야. 내가 너희 집 같은 상황을 한두 번 봤을 것 같아? 무책임한 부모는 세상에 널려 있고 어려서 돈을 벌어야 하는 아이들도 발에 차이도록 많지. 그나마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는 아이들의 입장은 이해해. 하지만 사지 멀쩡한 가족을 먹여 살리겠다고 희생자 노릇을 자처하는 애들은 솔직한 심정으로 한 대 때려주고 싶어져. 내가 확신하건대 너희 어머니가 방구석에서 골골거리는 건 밖에 나가 운동을 안 해서일 거고, 동생이 아홉 살이나 되어서 아무 것도 모르는 건 네가 애완 강아지처럼 집 안에 가둬 둬서일 거다.” 리체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며 올라갔다. “너, 그 말 취소해. 안 그러면 네 머리를 다 쥐어 뜯어놓기 전에는 참지 않을 거야.” 그러나 막시민은 태연했다. “난 너를 위해 말하는 거야. 잘 생각해 봐. 넌 이미 너희 집을 떠났어. 앞으로 몇 달쯤 못 돌아갈지도 몰라. 네가 벌어오는 일당이 없는데 너희 가족은 이제 어떻게 될까? 방구석에 픽 쓰러져서 송장벌레들이 오도록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지금 여기서 나하고 쓸데없는 말다툼이나 하고 있을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달이야. 정말로 네가 벌어야만 먹고사는 사람들이었다면, 그 동안 살아 남는 게 이상하지. 안 그래? 그럼 우리, 그 동안 너희 어머니와 동생이 굶어죽나 안 굶어죽나 내기나 해볼까? 결과는 뻔하겠지만 말이야.” “......” 이상하게도 리체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조슈아가 보니 리체는 안간힘을 쓰며 참고 있었지만 그렁하게 맺힌 눈물이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저도 모르게 일어나 어깨를 감싸주자 결국 울음이 터져 버렸다. 어깨 너머로 그만두라고 눈짓하는 조슈아를 본 막시민은 어조가 좀 누그러졌다. “너 울리려고 이런 소리 한 거 아냐. 우리와 함께 여행하게 된 것도 네 뜻이 아니고, 오늘 상황이 이렇듯 여행 여건도 무척 나빠. 그런데 네가 가족 걱정에까지 목을 매고 있으면 견딜 수 있을 것 같냐? 하지만 조금 전에 마음에 없는 소릴 한 건 아니었어. 전에 말했다시피 나한텐 동생이 여섯이나 돼. 그런데 내가 여기까지 와서 자기 앞가림 못하는 친구나 찾고 있는 동안 그 녀석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 것 같냐? 굶어죽는 말든 신경 안 쓰는 형이어서 내버려두고 온 것처럼 보이냐?” 리체는 조슈아의 옷깃을 손수건처럼 흠뻑 적셔 놓더니 숫제 껴안고 울기 시작했다. 무심코 베푼 친절을 수습하지 못해 어쩔 줄 몰라하는 조슈아를 본 막시민은 웃음을 꾹 참으며 말을 이었다. “난 기본적으로 걸어다니고 말을 똑바로 할 수 있을 나이가 되면 자기 먹을 건 자기가 찾아다녀야 된다고 본다. 꼼짝 못하게 아프거나 하다면 예외가 되겠지만 말이야. 아홉 살이면 내 막내 동생보다 나이가 많다고. 그런데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른다니 그게 웬말이냐? 내 동생 녀석은 우리 동네에서 누가 자기에게 저녁 한 끼 먹여줄 만한 사람인지, 언제 어느 집에 찾아가면 남는 빵이 제 손에 돌아오는지 모조리 꿰고 있단 말이다. 그 녀석뿐 아니라 그 위의 놈도, 그 위도, 그리고 내가 어렸을 때도 똑같았어. 그건 누가 가르쳐서 되는 게 아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이틀쯤 연이어 굶게 되면 저절로 터득하기 마련이지. 그걸 못한다면 가난하게 태어날 자격 따윈 없는 거라고. 뭐, 가난하게 태어날 자격은 아무한테나 주어지는 줄 아냐?” “그럼, 그러면,,, 그걸 못하는 사람은 굶어죽어야 된단 말이야? 가족이 있어도 돌봐주지 말아야 되는 거고?” 리체가 메인 목으로 겨우 말하자 막시민이 대꾸했다. “그래, 그 가족 얘긴데, 자식이니까 어머니를 돌볼 책임도 어느 정도는 있겠지. 그런데 그거, 너 죽을 때까지 할거냐? 애매하게 아픈 사람은 일찌감치 죽지도 않아. 그런 상태로 시름시름하면서 평생토록 집안의 돈을 말려 버린다고. 내 말이 잔인하게 들리냐? 하지만 끝까지 들어봐. 얼마 동안 네가 돌봐드리는 건 좋다 이거야.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하다가 네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네 집안 돌보는 일로도 벅차서 어머니는 당장 쓰러지지 않는 한 돌아보기 힘들게 될 거고, 게다가 그 동안 모아둔 돈은 한 푼도 없을 테니 네 자식을 잘 키우기도 힘들 거야. 그러다가 네가 젊어서 너무 고생을 한 탓에 갑자기 아프기라도 하면? 그러면 네 자식은 고스란히 네가 한 일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게 될 텐데, 그게 만족스럽냐?” 리체는 눈물 범벅이 된 눈을 들어 막시민을 째려보았다. “지금 악담을 하자는 거야?” “아니, 그 윗대를 보란 얘기야. 모르긴 해도 너희 어머니 역시 자기 어머니한테 네가 하듯이 했겠지? 그 결과는 뭐냐? 언제까지 이런 악순환을 되풀이할 거냐고. 그거야말로... 뭐냐, 그렇지, 이른바 가문의 비극이야. 누군가 그 사슬을 끊지 않으면 너는 물론이고 네 자식의 자식에게로 계속 이어져 가는 일이라고. 지금까지 한 얘기에 과장이 섞이긴 했지만, 넌 지금 열 여섯 살에 두 사람을 먹여 살릴 능력이 있잖냐? 그런 네가 너 자신만 돌본다면 어떨까? 지금보다 훨씬 미래에 대한 준비를 잘 할 수 있지 않겠어?” “그런 이기적인 얘기가 어딨어? 나만 준비 잘 하고, 다른 사람은 나 몰라라 하고?” “만약에 너희 어머니가 정말 심각하게 건강이 나쁘고, 네 동생이 네 살쯤 먹은 아기라면 내가 한 얘기를 취소하겠다. 너한테 사과하는 건 물론이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랬으면 넌 지금 이렇게 태연하게 우리와 같이 있을 수 없을 거다. 이미 며칠이나 집을 비웠는데 넌 집에서 널 걱정할 거라고만 했지, 네가 없어서 집안이 풍비박산날 거라고는 한 번도 안 했잖냐? 내가 열 중 여덟의 확률로 추측하는데 너희 어머니는 꾀병 환자에 단지 무능해서 일자리를 찾아볼 생각이 없는 것일 거야. 가만히 있어도 딸이 벌어온 돈으로 생활이 되니 급할 것도 없겠지. 뭐 동생은 어리니까 네가 잘못 키운 탓으로 해 두고.” “......” 리체가 대답이 없자 막시민이 기지개를 켜며 불쑥 물었다. “내가 너희 어머니에 대해 왜 이렇게 구체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지 알아?” 이제 울음을 그친 리체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어째서인데?” “사람 좋은 몽플레이네 씨, 그 아저씨 때문이지. 너희 어머니가 딸이 혼자서 죽을둥살둥 일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안타깝게 생각했다면 아무리 헤어진 남편이라고 해도 당장 달려가 생활비 한 푼이라도 짜내려 했을 게 틀림없지. 그런데 그 아저씨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짜내려 했을 게 틀림없지. 그런데 그 아저씨는 딱히 돈을 못 버는 건 마찬가지인 것 같다만.” 리체가 불가능한 얘기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몽플레이네 씨와 얼굴 마주치는 것도 싫어해.” “거봐. 기껏 자존심 때문에 열 다섯 살 먹은 딸이 벌어오는 돈으로 잘도 빵을 먹는단 말이냐? 분명히 말하지만, 그런 사람은 인생 자체가 꾀병이야. 거기에 말려들어서 네 인생 망치면 안 돼.” 마지막에는 묘하게 어른스런 충고가 되어버렸지만, 조슈아가 슬그머니 말했다. “막군, 넌 너무 어른들을 불신해. 특히 부모들을.” 막시민은 어깨를 으쓱할 따름이었다. “내 인생 망치며 얻은 대가로 남의 인생이라도 충고해 줘야 뭔가 남는 장사지.” 다락방에 갇힌 채 하루가 가고 이튿날이 되자, 세 사람은 자신들이 지하 감방의 잊혀진 죄수 꼴이 된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것인지, 전날 종일 한 끼도 얻어먹지 못한 채 다음날 아침이 되자 그들의 불만도 극에 달했다. 허기라는 것은 평소 먹던 때를 지나면 조금 가라앉기 마련이지만, 다음 때에 곱절로 돌아오는 것도 공통된 이치다. 그런 까닭에 다시 한 방에 모인 그들은 어제 울어서 기운을 뺀 리체는 물론, 나머지 둘도 천장이나 올려다 보는 것 외엔 다른 생각이 나지 않는 상태였다. “막군, 너 처음 만나던 때가 생각난다.” 조슈아가 맥없이 중얼거리자 한참만에 대답이 돌아왔다. “죽을 때 된 것도 아닌데 무슨 놈의 과거 회상이야.” “그거보자...나 그 때도 굶었잖아.” 하긴 막시민은 그 때 굶지 않았으니 조슈아처럼 회상할 추억은 없었다. 대신 막시민은 팔베게를 하며 중얼거렸다. “배고픈데 잠이라도 잘까.” 모두 조슈아의 방에 모여 있었지만, 침대는 어찌된 건지 막시민이 차지하고 있었고 다른 둘은 바닥 이곳 저곳에 다리 뻗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막시민은 허기를 누르고 잠드는 데 실패했고, 조금 후 갑자기 벽을 걷어차며 소리질렀다. “차라리 감자 껍질을 까라고 그래!” 조슈아가 돌아봤다. “진심으로 한 소리야?” 맞은편 테이블 옆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리체가 중얼거렸다. “생감자도 먹을 수 있을까?” 이번에도 조슈아가 대답했다. “생감자를 어떻게 먹어?” “내 생각엔, 부득이하면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아 생감자, 생감자나 한 개 먹었으면.” 그 말을 들은 조슈아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복도로 나갔다. 평소 같으면 무슨 일인가 했겠지만, 지금만은 도저히 따라나가기가 귀찮았다. 두 사람은 그냥 중얼거리기만 했다. “저 자식은 비쩍 말라서 필요한 음식이 적을 거야.” “전에도 의욕적으로 뭘 먹는 모습은 한 번도 못 봤어.” 그러나 조금 후, 뭔가가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가 울려 둘은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 자식이 뭔 짓을 하는 거야?” 복도로 나가자 한쪽 복도 끝에 선 조슈아가 보이고, 거기에 있던 창이 산산조각이 난 것이 보였다. 손에 옷을 둘둘 감아서 유리를 쳤던 것이다. 리체가 놀라 말했다. “뭐야, 마법사의 집을 부쉈다가 미움을 사면 어쩌려고 그래?” “게다가 어제 그 소릴 한 건 조슈아 너였어.” 조슈아는 진지하게 대꾸했다. “생감자도 먹겠다는 상황인데 뭘 못하겠어.”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았다. 조슈아에겐 생감자도 먹겠다고 하는 상황이 진짜로 심각한 거란 걸 깨닫자 둘은 웃어야 할지 모를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어쨌거나 이왕 깨진 유리, 드디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란 희망으로 세 사람은 동시에 밖을 내다봤다. 그러나 잠시 후 당황해서 서로에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는 분명 들판 아니었어?” “응, 가을 들녘 정도 되어 보였지.” “바람 불어 나뭇잎 날리는 것도 봤다고.” “그런데 저긴...계단이네?” 그들이 올라온 계단이 그곳에 있었다. 물론 그 계단이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든 위치는 같았다. 요상스런 창이 달린 벽이 가로막고 있었을 뿐, 없어진 건 아니었던 것이다. 막시민은 창틀에 남은 유리 조각을 손가락으로 퉁겨 떨어뜨리더니 발끈해서 중얼거렸다. “이 마법사가 우릴 놀리는군. 어디 숨어 있는 건지, 어서 찾아내어 그 면상 앞에 얼굴을 들이밀어 줘야겠다.” 세 사람은 창을 넘어 계단 쪽으로 뛰어내렸다. 일단 한 단계를 해결했다는 만족감으로 배고픈 것도 잠깐 잊어버렸다. 계단을 신나게 달려 내려가 두 번 정도 꺽어지자 문이 하나 있었다. 잠겨 있지 않았으므로 손쉽게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두 번때로 어안이 벙벙해졌다. “여긴 뭐야?” 방은 창고처럼 컸는데, 큼직한 벽돌이 발라진 벽이 사방을 가로막아 지금껏 보던 곳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정말로 지하 감옥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무엇보다도 방을 꽉 채우고도 모자라 천장까지 쌓여있는 짚단 더미가 방문자를 압도했다. “이 짚단은 다 뭐야?” “마법사가 농사도 짓나?” 두리번거리던 리체가 한쪽에서 수상쩍은 물건을 발견했다. 그건 실 잣는 물레였다. 하지만 실은 한 오라기도 없었으므로 리체가 없었다면 그게 뭔지 알아볼 수도 없었을 듯했다. 리체가 다가가 물레바퀴를 툭 치자 빙그르르 돌아가다가 멈췄다. 그녀는 맥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하... 이건 뭐, 짚으로 금실이라도 자으란 건가?” “금실을 짚단으로 자아 놓은 것일지도 모르지. 그 마법사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한 막시민은 기분 나쁘게 물레와 짚단을 번갈아 보며 다시 말했다. “이 양반이 밤낮 마법 연구는 안 하고 애들 책만 읽었나.” “이 마법사는 옛날 이야기를 무척 좋아하나 봐.” “그러면 조금 더 가면 금덩이를 숫돌과 바꿔달라는 녀석도 나오고, 향초 수프를 끓여주는 노퍄도 나오고 그러는 거냐?” 막시민의 말에 조슈아가 빙그레 웃었다. “마법사는 과자 집에 앉아서 아궁이에 불을 지펴 놓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잘 됐네. 네 손가락 정도면 앞으로 반녀은 시간이 있을 거다.” 무심코 물레에 앉아 보던 리체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바람데 둘은 농담을 그쳤다. “이쪽으로 와 봐!” 둘이 달려오자 리체가 물레에서 실 나오는 곳을 가리켰다. 아니나다를까, 거기에는 금실 몇 가닥이 걸려 있는 것이 아닌가. “헤에?” “농담을 진담처럼 하는 마법사네.” 금실을 손끝으로 집어 올린 조슈아가 신기해하는데 막시민이 재빨리 낚아채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돌려봤다. 이것이 진짜 금이라면 그에겐 절대 시시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점에서는 리체도 의견이 같았다. “진짜 금 맞아?” “유감이지만 모르겠는데.” 금반지라면 깨물어 보기라도 할 텐데 이건 너무 가느다랗고, 게다가 지짜 실처럼 탄력까지 있으니 금이라 단정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금이 아니라고 하기에도 아쉬움이 남았다. 또 실치고는 좀 무겁기도 했다. “리체, 너 물레 돌릴 줄 알아?” 안 그래도 리체 역시 물레 이곳저곳을 열심히 살피던 중이었다. 하지만 바라던 결론은 나지 않았다. “너무 옛날 물건이라 잘 모르겠어. 요즘엔 이런 거 쓰지고 않아. 게다가 실잣기 같은 거 해본 적도 없고.” 막시민은 끈덕지게 말했다. “넌 재봉사잖아. 실이면 무척 친한 물건 하니냐?” “이것 봐, 우리 의상실에는 다 만들어진 실이 다발로 묶여서 배달된다고.” “그렇다 해도 구멍난 양말이나 꿰메본 나보단 나을 거 아냐. 좀 살펴봐.” “여길 이렇게 돌리는 건가.......” 둘과는 달리 별로 심각하지 않은 조슈아가 한 걸음 물러나 짚단 위에 풀썩 앉더니 농담을 던졌다. “리체, 물레가락에 손을 찔리지 않도록 조심해.” 의외로 막시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마법사라면 물레가락 끝에 잠드는 약을 발라놓고도 남을 거다. 방심하면 안 돼.” 그 후로 반시간 가량 리체는 낡아빠진 물레와 악전고투했다(막시민은 옆에서 응원했다). 할 일이 없는 조슈아가 팔베개하고 드러누워 있자 막시민이 거슬리는 눈초리로 쳐다봤다. “넌 사두마차에 하인들을 거느리고 미식 여행을 하려는 내 노력에 관심이 없냐?” 그 말에 몸을 일으킨 조슈아가 의아한 듯 물었다. “막군 너, 정말로 지푸라기를 금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야? 평소 너답지 않은데?” “시끄러워. 이 마법사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놈이라고.” “하지만 그런 식르오 생각한다면, 아까 말한 대로 금실을 짚단으로 만든 다음 좀 남은 걸지도 모르잖아.” “넌 이런 상황에서 꼭 그렇게 생각하고 싶냐?” “체, 자기가 한 말이었으면서.” 이런 상화치고는 놀랍게도 노력은 결실을 보았다. 어제 둘 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죄로 말다툼을 한 결과 마음이 잘 맞게 된 까닭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물레가 조금씩 돌아가더니 금인지 알 수 없는 실을 한 가닥 자아냈던 것이다. 둘은 환호성을 올렸지만 지푸라기가 짧아 끊어져 버렸기 때문에 물레는 거기에서 멈췄다. 하지만 생각대로 된다는 기쁨이 커서 그런 일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얼른 동그랗게 말아 봐. 무게를 좀 보자고.” “아까 거랑 합쳐 보자.” 푹신한 짚단 위에서 어느새 잠들었다가 둘의 소리에 깬 조슈아가 상황을 보고는 중얼거렸다. “그런 식으로 금화 한 개 만들려면 오늘 밤 새겠는데.” 악의 없이 한 말이었지만, 둘이 눈을 치켜 뜨고 돌아봤으므로 조슈아는 재빨리 말을 정정했다. “아니, 점점 빨라지겠지 뭐.” “조슈아, 놀지 말고 지푸라기라도 잇고 있으라고. 안 그러면 네 자리는 마부석이다.” “마부석이라도 상관없지만.......” 조슈아는 건성으로 지푸라기를 비비기 시작하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추론인지 직감인지 불분명하지만 이 일은 어쩐지 성공해 봤다 이곳을 탈출해서 마법사를 찾아가려던 당초의 계획과는 아무 상관도 없고 말이다. 잠시 후 조슈아는 짚단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짚단이 자꾸 내던져지는 바람에 막시민이 고개를 들었다. “야, 너 지금 짚더미 속에 들어갔냐? 거기서 뭘 해? 뭐 찾아?” 조슈아는 대답 없이 짚단 속을 뒤지고 뒤지다가 드디어 찾던 것을 발견했다. 한쪽에 따로 쌓인 작은 짚가리에서 사람의 발 두 개가 쑥 나와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발은 코가 뾰족한 파란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조슈아는 대뜸 발을 번쩍 들어 끌어당겼다. 끌려나오는 대신 상대는 화들짝 놀라며 짚더미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뒤를 돌아본 리체가 깜짝 놀라 ‘어머’ 하고 외쳤다. 그도 그럴 것이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마법사였던 것이다. 눈을 둥그렇게 뜬 막시민이 물었다. “거기서 뭘 해요?” 마법사는 일어서자마자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더니 세 사람을 불만스럽게 훓어보며 연달아 재채기를 해댔다. “지금이 언제야? 아니, 오늘이 그 날이야? 에취, 이런 느린 것들, 마법사를 기다리게 하다니. 난 한나절 정도면.......” 자다가 깬 탓인지 이해 못할 말들을 늘어놓는 마법사를 향해 유일하게 당황하지 않은 사람인 조슈아가 커다랗게 외쳤다. “배고파요! 그 외침이 다른 두 사람에게도 처음의 문제를 상기시켜 준 모양이었다. “먹을 것도 안 주고 하루 반나절이나 내버려두다니 너무하잖아요! 마법사면 다야!” “이런 데서 우릴 기다렸다나 말할 셈은 아닐 거고, 감자에서 짚단까지 당신이 우리랑 하고 싶은 게 도대체 뭡니까?” “이런 유머 감각도 없는 놈들 같으니.” 마법사는 속으로 뭔지 모를 말을 구시렁거리다가 갑자기 선언했다. “내 너희와 더불어 유희를 즐기고자 하였지만 너희가 하루 반나절이나 나타나지 않는 바람에 너무 많이 잤고 먼지 때문에 재채기가 나고 기다리다가 지루해져서 기분이 상하고 말았도다. 그러므로 무지하게 어려운 문제를 내겠다. 틀리면 여기에 계속 갇혀서 열심히 살아보라고.” “그런 게 어딨어요! 옛날 얘기에서도 짚단을 금실로 다 만들면 풀어주는 거잖아요!” 리체가 항의하자 마법사가 웃긴다는 듯 말했다. “짚을 어떻게 금실로 만드냐?” “뭐, 뭐예요?”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닌 두 사람은 아랑곳 않고 콧대를 쳐든 마법사가 다시 말을 시작했을 때, 조슈아는 무슨 얘기가 나올지 짐작이 되어 혼자 미소지었다. “그럼 너희에게 낼 문제를 말해주겠다. 사실은 절대로 맞출 수가 없는 문제지만 장소가 장소이고, 분위기가 분위기이니 내 맘대로... 아니 전통대로 하도록 하지. 너희가 풀어야 할 문제, 그건 바로 내 이름이 뭔지 맞추는 것이야! 그럴 리는 없겠지만 너희가 그걸 맞추면 각자 소원을 한 가지씩 들어주.......”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리체가 조금 전 마법사가 지은 표정을 똑같이 지으며, 심지어 혀까지 쏙 내밀어 보이더니 말했다. “아저씨 이름은 앨베리크 쥬스피앙이잖아?” 4. 도플갱어의 시초 “도플갱어에 대한 이야기 중 가장 유명한 건, 도플갱어를 만난 자는 곧 죽는다는 말일거다. 그건 스스로를 빼앗겨서가 아닐까. 어쩌면 모두 그를 잊어서가 아닐까.” 전면에 큰 창이 있는 둥근 방은 햇빛을 받으며 차를 마시기 좋을 듯한 곳이었다. 심지어 열 명쯤 단체로 차를 마실 수도 있을 듯했다. 손님도 없을 듯한 이런 집에 왜 이렇게 큰 살롱을 만들어 놨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이곳에 들어오게 됐다는 건 불법주거침입자나 지하감옥의 죄수 따위를 오가던 위치가 드디어 손님으로 격상되었음을 뜻했다. 일단 배부르게 식사를 했기 때문에 세 사람은 대강 만족한 상태였지만,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조슈아는 그가 공들여 만들어 놓은 수수께끼가 무용지물이 된 것에 기분이 상한 거라고 추측했다. 그래봤자 그들에게 다른 대안은 없었다. 거기에서 이름을 못 맞추는 체 해봤자 사흘쯤 더 갇혀 있는 일이나 생겼을 게 뻔하니 말이다. 마법사 쥬스피앙은 리체를 향해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네가 세자르의 딸이란 말이냐? 그 뭐시냐, 콩알만한 게 말은 지지리도 안 들어먹던 계집애?” 리체의 대답은 이러했다. “거참 일찍도 물어보시네요.” 그는 리체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말했다. “처음부터 이름을 알고 있었다는 건 중대한 반칙이지만 일단 세자를 얼굴을 봐서 참는다. 그럼 나머지 둘은 누구야?” “세자르 얼굴을 봐서 참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그와 동시에 막시민이 하품을 늘어져라 하더니 말했다. “실컷 먹었더니 졸린데.” 조슈아는 비교적 양호한 표정으로 미소지었지만 한 말은 이랬다. “그런데 난쟁이치고는 너무 키가 컸어요. 완벽한 유희를 원하신다면 다음엔 키도 줄이고 나타나 주세요.” 쥬스피앙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이는 한 번도 이들처럼 행동한 일이 없었다. 덕택에 불량 청소년들에 대한 대처 능력이 현저히 부족한 그는 효과적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그들을 번갈아 노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내 친구라면, 이제 겁낼 필요 없다.” 리체가 막시민을 따라 하품을 하더니 말했다. “겁도 내기 싫고, 친구도 하기 싫어요. 아저씨 같이 이상한 사람.” 마법사는 리체가 자기 딸고 정 반대라고 단정짓고는 친구가 다루기 힘든 골칫거리를 떠맡겼다고 판단하여 갑자기 화를 냈다. “세자르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아저씨가 자기도 불러들여 주길 애타게 기다리며 비석 주위를 맴돌고 있겠죠. 그새 이틀이 지났으니 배도 고프고. 애당초 아저씨의 마법에 문제가 생겨 못 들어온 거 아닌가요? 그 마법인지 뭔지, 잘만 됐으면 우리도 지난번에 그런 엄청난 부당행위를 당하지 않아도 됐을 테고......” 리체는 분명 자기가 더 신났던 주제에 보수가 주어지지 않은 일은 모조리 부당노동행위로 간주하는 노련함을 보였다. 그러자 마법사도 자신의 배역(악덕 고용주)을 알아차리고는 대꾸했다. “내 이름은 앨베리크 쥬스피앙이지만 올해는 그냥 쥬스피앙 님이라고 부르도록 해라.” 즉, 동문서답으로 대응했다. 그리고 뭐 잊은 것 없냐는 듯 나머지 두 소년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막시민 리프크네입니다.” “조슈아 폰 아르님이고요.” “좋았어. 그런데 너희 셋, 여긴 뭐하러 왔냐?” 세 사람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슈아가 말했다. “그것도 무척 일찍 물어보시네요.” “어쨌든 물어봤으면 된 거잖아. 왜 왔냐니까? 용건 없어? 그럼 도로 가.” 빨리 대꾸하지 않았다가 즉시 바깥으로 날려 보내질까 싶어 우려한 리체가 급히 말했다. “아까 소원 들어주기로 하셨죠? 우린 아저씨의 지붕 날리는 실력을 믿고 왔어요. 우리 뒤에 무시무시한 깡패가 쫓아오고 있는데, 아저씨가 좀 해결해 주세요. 우린 지금 너무나 위험한 상태예요.” 쥬스피앙은 마흔 줄의 아저씨 주제에 또래 친구처럼 양손으로 턱을 괴며 리체를 빤히 쳐다봤다. “깡패 해결은 세자르가 전문 아니냐?” “그건 안 돼요. 아, 그러니까 아무나 처치할 수 없는 놈이라.......” “난 마법사이지 해결사가 아냐. 더구나 이 안에 있으면 안전하니까 걱정할 것도 없고. 됐지? 다음.” 각각 용건이 하나씩 있을 거라고 믿는 것처럼, 쥬스피앙은 이번에 막시민을 쳐다봤다. 막시민은 말을 잘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마법사라고 하셨죠?” “보면 모르냐?” “훌륭한 마법사인가요?” “보면 모르냐?” “그러면 순간 이동 정도는 문제없으시겠죠?” 접근 방법이 괜잖았던 건지, 쥬스피앙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어디로 갈 건데?” “아, 켈티카요.” “켈티카?” 쥬스피앙은 다시 생각하는 기색이더니 황당한 대꾸를 날렸다. “거기가 어디더라?” “아노마라드 수도요!” 옆에서 조슈아가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아노마라드는 이 대륙의 서쪽 대부분을 차지한 나라로.......” “지금 나한테 지리 수업 하냐?” 한심하다는 듯한 눈초리로 조슈아의 말을 막아버린 쥬스피앙은 막시민을 향해 대답을 내놨다. “거긴 너무 멀어서 안 돼. 다음.” “기껏 대륙을 횡단하는 정도잖아요! 당신은 마법사, 아니 훌륳한 마법사인데!” “별 것 아니 거 같으면 네 개 해보지 그래?” 막시민은 발끈했다. “난 마법사가 아니잖아! 그럼 도대체 얼마나 가까워야 갈 수 있는 건데? 갈 수 있는 데까지라도 보내 줘!” 쥬스피앙은 귀찮은 표정이었지만, 설명을 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순간 이동은, 한 번에 갈 수 있는 거리가 본래 얼마 안 돼. 도시 하나도 건너뛰기 힘들어. 그걸 여러 번 되풀이해서 켈티카까지 갈 수도 있겠지만 그러려면 너 자신이 마법사여야 될 것 아니냐? 내가 너하고 같이 가지 않는 한 이동시켜 주는 건 한 번 뿐이지, 어떻게 계속 보내 주냐? 앙? 이제 됐어?” 쥬스피앙의 시선은 이제 조슈아에게로 향했다. 조슈아는 이번에도 말을 잘못하면 더 이상 부탁이고 뭐고 들어주지 않을 것 같다고 판단하여 긴장했다. “저는 질문이 있어서 왔어요.” “질문? 해 봐. 마법에 대한 거라면 대답해준다.” “물론 마법에 대한 거죠. 제 평생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신기하고 끔찍한 마법이거든요. 쥬스피앙 님 같은 ‘훌륭한 마법사’가 아니고서는 그 마법을 파괴할 방법을 알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 예상대로 쥬스피앙의 얼굴에 흥미가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뭔데? 네가 보기에는 신기하고 끔찍해도 내 눈엔 아무 것도 아닐 수가 있어.” “그러면 쥬스피앙 님이 보기에도 신기하고 끔찍하다면, 그 마법을 직접 파괴해 주실 수 있나요?” 막시민이 ‘꽤 하는데’ 하는 표정으로 조슈아를 흘끔 봤다. 쥬스피앙은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고, 불안정하게 천장을 봤다 바닥을 봤다 하며 대꾸했다. “뭐... 글쎄다, 재료가 너무 복잡하지만 않다면야..., 네가 그렇게까지 대단한 걸 알고 왔으리란 생각도 안 하지만...그렇다면 어렵지 않게 ...아, 그나저나 뭔데 그래? 궁금해 죽겠네. 얼른 말해 보란 말이야. 그 마법이 어떤 거야?” 조슈아은 이제 여유 있는 얼굴이었다. 쥬스피앙이 궁금해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되도록 기다린 후, 그가 말했다. “살아 있는 사람과 완벽히 똑같은, 또 한 사람을 만드는 마법이죠.” “뭐?” 쥬스피앙는 턱을 괸 손을 뗐다. “누가 그런 걸 만들었는데? 착각하는 게 아니고? 직접 보고 하는 소린가?” “직접 봤지요.” 말한 것은 막시민이었다. “네가 봤다고? 두 사람이 나란히 선 것을 보았어? 쌍둥이는 아니겠지?” “쌍둥이는 아닙니다. 그리고 나란히 선 것은 못 봤습니다만.” 막시민은 손을 들어 조슈아를 가리켰다. “저는 저 자식을 결코 잘못 볼 수가 없는 사람이라서 말이죠?” 쥬스피앙이 조슈아를 쳐다봤다. “그 말은.......” 막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복제된 것은 바로 저 친구죠. 나머지 하나가 켈티카에 있기에. 그곳으로 가려 하는 겁니다.” “좀더 자세히 설명해 봐.” 이제 쥬스피앙은 흥미 이상의 관심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테이블에 바짝 다가앉아 조슈아와 막시민을 번갈아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얼굴만 같은 것이 아니고, 정말로 모든 것이 같았나?” “저는 저 친구를 너무나 잘 알기에 단지 흉내내는 것만 갖고는 저를 속일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그 놈은 저와 조슈아가 아니면 알 숭 없는 개인적인 추억까지 당연하게 알고 있더군요. 그래서 처음에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죠.” “네 말을 믿고도 싶지만, 정말로 그렇다면 그건 보통 문제가 아니니 정확히 해야 되겠군. 다른 사람들은 어땠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선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날은 이 친구가 오랜만에 집에 돌아논 것을 축하하는 파티 자리였죠. 하지만 그 파티에 모인 수많은 손님들은 물론, 그를 낳고 기른 부모들까지도 다른 사람이란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 시각, 여기위 조슈아는 하이아칸을 떠난 일이 없었고요. 아시다시피 하이아칸과 켈티카는 한 사람이 1인 2역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이 아닙니다. 물론, 조슈아는 마법도 모릅니다.” 쥬스피앙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테이블 옆을 빠른 걸음으로 거닐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입 속으로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한 사람과 똑같은 사람, 모두를 속일 정도로 똑같은 사람, 같은 사람이 둘일 순 없고, 하나는 가짜, 그런데 개인적인 추억까지 완벽히 공유하는 가짜, 그건.......” 쥬스피앙은 막시민 앞으로 돌아왔다. 그의 얼굴은 지금껏 보아 오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본래 변화무쌍한 사람이긴 했지만, 지금처럼 이상적인 마법사다운 얼굴도 할 수 있다는 건 몰랐기에,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가 말했다. “인형이다.” 막시민은 미간에 주름을 모았다. “인형? 그게 뭐죠?” “가나폴리의 마법 인형 모르나? 사람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고,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사람은 아닌 존재 말이야. 들어본 일이 없어?” 조슈아가 말했다. “들어본 일이 있지만, 그 인형은 실재하는 누군가와 똑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지 않아요? 그냥 사람처럼 보일 뿐이죠.” “그래, 네가 말한 인형이 흔히 알려진 것이지. 겉모습만 사람을 닮았을 뿐 정신적 수준이 형편없어서 간단한 일을 되풀이하는 것밖에 모르는 인형들 말이야. 하지만 그것말고 ‘복제 인형’이라는 것이 또 있었어. 이 인형은 먼저 말한 인형들과 달리 겉모습만이 아니라 지적 능력이나 생활에 있어서도 진짜 사람과 똑같아서 얼마든지 복잡한 명령도 이해할 수 있었어. 다시 말해 훨씬 편리하지. 하지만 그 인형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질 않지. 왜 기록이 적으냐고? 그건 가나폴리에서도 철저히 금지된 기술이었으니까.” 막시민과 조슈아가 말문이 막혀 있는 동안 쥬스피앙은 갑자기 화를 냈다. “어떤 놈이지? 그딴 걸 만들어낸 놈이? 위대한 쥬스피앙도 만들지 못한 걸 성공시키다니 재수 없는 놈 같으니. 그 놈, 살려둬선 안되겠는데.” 생각의 요점은 달랐지만, 어쨌든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더없이 고마운 일이었다. 막시민이 재빨리 말했다. “네, 그러니까 그 인형인가 하는 것을 없애도록 도와주십쇼.” “당연히 그런 것은 없애야 돼!” 쥬스피앙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더니 조슈아를 보았다. 조슈아는 막시민처럼 확신 어린 표정을 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혼란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쥬스피앙이 말했다. “너 말야....널 복제한 인형이 존재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나?” 조슈아는 조금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기분이 좋진 않겠지. 하지만 정확히 알아둘 필요가 있을 거야. 복제 인형이란 것도 사실은 두 가지야. 산 사람을 복제하는 게 있고, 죽은 사람을 복제하는 게 있어. 그 중에서 죽은 사람을 복제하는 것은 그래도 특별한 경우에 허락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하지만 산 사람을 복제하는 것만은 절대로 안 돼. 가나폴리는 마법 왕국이다보니 마법을 잘못 사용하는 것에 대해선 무척 엄격했단 말이야. 그런 자는 걸리면 재판 받을 권리조차도 없어. 어떤 변명도 소용없다는 거지.” 리체가 물었다. “사형 당해요?” “아니, 그보다 더한 거. 인형을 만드는 자들, 즉 인형사가 가장 괴로워하는 벌이 있거든.” 쥬스피앙은 무척 끔찍한 일을 이야기하듯 말을 이었다. “바로 인형 손으로 주인을 죽이게 하는 거야.” 반응을 보아하니 리체는 그게 왜 사형보다 심한 벌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쥬스피앙은 다시 조슈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 지금 자네처럼 복제 인형과 산 사람이 같이 존재하는 건 가나폴리에서도 극히 드문 경우인 셈이야. 아니면 이제는 벌을 줄 사람도 없으니 아무래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아주 극악한 놈이 틀림없어. 그 자도 마법사라면 이런 것을 만들었을 때 생길 결과에 대해 결코 모른 체 할 수 없을 거란 말이다. 그러니 더더욱 용서가 안 돼.” 쥬스피앙은 무척 단호한 표정이었다. 조슈아가 입을 열었다. “지금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이 복제 인형을 만든다는 건 같은 사람이 둘이 된다는 문제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중대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기묘하게도 남의 이야기하듯 평온한 목소리였다. 쥬스피앙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주지. 자, 본래 살아 있는 존재는 동일한 것이 둘 존재할 수가 없다. 쌍둥이도 같은 사람이 아니니까. 누구나 하나뿐이지. 그런데 산 사람을 복제한 인형이 존재하게 되면, 질서가 크게 어그러지는 거야.” 다짜고짜 핵심부터 말했으므로 마법에 대한 상식이 없는 세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질서요? 무슨 질서 얘깁니까?” “무슨 질서냐고? 당연히 세상을 움직이는 질서지. 너를 태어나게 하고, 자라게 하고, 시들게 하고, 죽게 하고, 잡초에서 인간, 구르는 돌멩이에서 거대한 협곡에 이르기까지 만들고, 없애고, 또 만드는 질서지. 너무 거대해서 느낄 수도 없는 질서, 무엇보다도 마법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가르는 바로 그 질서라고. 네가 누구한테 배운 일도 없는데 어쩐지 해서는 안될 것 같은 일, 또는 어쩐지 해야만 옳을 것 같은 일이 바로 그 질서의 명령이야. 그런데 산 사람을 복제한 인형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질서에 어긋난단 말이야. 그러니까... 예를 들어 내가 조슈아 너를 저주하는 마법을 썼다고 하자. 그 마법이 네가 아닌 인형에게 가버릴 수도 있어. 이 질서는 어긋나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 엄격한 것이라 어디까지나 너희 둘을 하나로 받아들이니까.” 막시민이 중얼거렸다. “반대의 경우가 벌어졌다간 큰일이겠는데.” 쥬스피앙은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의 문제가 아냐. 일단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어떤 식으로든 자리가 생기지. 네가 사는 집, 네가 쓰던 물건, 너의 버릇, 네가 지나쳤던 거리, 너의 기억, 너의 의지, 너를 사랑하던 사람들, 그런 것들이 너를 이루고 있어. 그런 것을 갑자기 다른 존재가 송두리째 빼앗아 가면? 네 자리에 인형이 앉아, 네 물건을 익숙하게 사용하고, 네가 늘 하던 대로 행동하고, 널 알던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네가 가진 추억을 떠올리며 미소짓고, 네가 해내려던 일을 해버리고, 너를 사랑하던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고, 그러면, 너는 어디에 있게 되지? 사람에서부터 동물, 물건이나 장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 인형을 너로 인식하고, 심지어 마법조차도 너와 그를 혼동할 지경인데? 결국 넌 어디에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거야. 너 자신이 당장 문제를 느끼지 못해도, 네게 닥친 문제는 심각해. 모든 존재의 핵심적 속성인 ‘유일성’이 심각하게 훼손당한 거야. 가나폴리에서 이걸 금지한 이유도 알 법하지.” “.......” 모두 조슈아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약간 눈을 내리깔고 있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리체가 문득 말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만드는 거죠?” 가나폴리의 사라진 기술 중 하나인만큼 쥬스피앙이라 해서 정확히 알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러나 쥬스피앙은 머뭇거리더니, 놀랍게도 입을 열어 말했다. “사실 나도 관심이 좀 있었지. 아니, 실은 무척 많았지. 그 문제로 책도 몇 권 썼을 정도야. 물론 내가 만들고 싶었던 건 먼저 말한 인형, 그러니까 복제가 아닌 그냥 인형이었다고. 그렇지만 그 기술은 상당 부분 멸실된 것은 물론, 이젠 구할 수 없게 된 핵심적 재료 몇 가지가 필요했어. 난 말이야. 보통 마법 학원들보다 더 많은 장서와 기록을 소장하고 있거든? 그런데도 대안을 찾을 수가 없었어. 반면 복제 인형 쪽은 재료 문제만은 일단 자유로웠지. 그래서 좀더 시간을 두고 연구한다면 빛을 볼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다만 여기엔 문제가 있었단 말이야.” “문제가 뭐였든데요?” 그렇게 묻는 조슈아의 표정은 순수한 흥미에 가까워서 쥬스피앙조차도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죽은 사람을 복제하려니 방금 죽은, 그러니까 뜨끈뜨끈한 시체가 있어야 됐던 거야. 죽은 지 오래된 사람을 복제하는 것도 가나폴리에서는 가능했던 모양이지만 나로서는, 그래, 솔직히 정보가 부족했네. 자기 실력이 부족한 걸 누굴 탓하겠나? 그런 주제에 어떻게든 인형은 만들겠답시고 직접 사람을 죽여 놓고 시작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또는, 방금 가족을 잃고 슬피 우는 사람들에게 실험을 할 테니 시체 좀 빌려달라고 해야 되나? 그도 아니면, 곧 죽을 것 같은 사람을 납치해 눕혀놓고 제발 좀 빨리 죽어보라고 빌고 있어야 할까?” 이 이야기는 좀 뜻밖이었다. 이 괴상한 마법사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되진 않았지만 솔직히 이런 윤리적인 문제에 올곧으리라고 기대하기도 힘든 성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실력 부족을 윤리적 해이함으로 해결하려 하는 뻔뻔스런 인간이 아니었다. “ 그 다음은 바로 산 사람의 복제였어. 참 유혹을 참기 힘든 일이었지만, 산 사람을 복제하는 게 죽은 사람을 복제하는 것보다 좀더 용이하네. 이상하게 들리나? 왜 그게 쉬운 편이냐 하면... 죽은 사람을 복제하면 그 인형의 제어를 마법사 본인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해. 그 말은 일단 인형을 만들어 놓으면 한 순간도 방치할 수 없게 된다는 의미야. 심지어 잠깐 잠이 들어 있는 동안 인형이 오작동을 일으켜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거든. 특히 마법사 본인을 죽일 위험이 제일 크지. 복제 인형은 보통 인형과는 달리 스스로가 인간이라는 의식이 무척 강해. 그래서 자신의 창조주가 기껏 사람이라는 것에 충동적인 분노를 나타내거든. 복제 대상인 인간의 의식을 똑같이 닮았으니까.” “인형을 만든다는 건...인형에게도 잔인한 일이군요.” 그렇게 말하는 조슈아는 자신보다 인형을 더 측은하게 여기는 듯한 눈빛이었다. 쥬스피앙이 뺨을 실룩거렸다. “글쎄, 내가 보기엔 인형의 기분이 어떻든 자기 문제부터 먼저 생각해야 될 것 같은데. 그러면 산 사람을 복제하는 방법을 말해 볼까? 그런데 말야, 원칙적으로 이 세상에 완전히 동일한 것이 둘 존재하는 건 아까 말했듯 질서에 어긋나거든? 그건 마법도 어길 수 없는 질서란 말이야. 그래서 본래는 사람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복제 인형을 만드는 것은 어떤 대단한 마법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문제였어. 시도에 근본적 오류가 있기 때문에 창조 자체가 안 된다고. 하지만 성취에만 매달렸던 옛 마법사들이 편법을 생각해 냈지. 기록에 따르면 이른바 ‘본체’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인형의 모든 것이 오직 본체의 상태에 좌우되도록 연결해 놓는 거야. 마치 ‘본체’라는 것의 부속물인 것처럼. 그렇게 산 사람과 인형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거야. 일종의 눈속임이지.” 쥬스피앙의 목소리에 경멸감이 묻어났다. “그런데 그 결과 묘하게도 마법사는 아주 편해져. 그 본체가 인형의 제어를 다 책임져 주거든. 따라서 본체를 잘 보관하기만 하면 인형은 마법사의 말을 잘 듣고, 심지어 자신이 인형이란 사실조차 모르고 평화롭게 지내게 되지. 한 인간에게서 전적으로 지배받고, 멀리 떨어져 있을 때조차 완전히 통제되는 주제에 말이야.” 쥬스피앙은 말을 잠시 끊더니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데 가나폴리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가장 겁내는 건... 만일 그 인형이 죄를 저지르면 그것마저도 네 영혼이 책임지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야. 너희가 세상에 둘이라 해도, 영혼은 결단코 하나뿐일 테니까. 하지만 세상의 질서는 누군가가 저지른 죄의 대가를 사면해 주는 법이 결코 없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막시민이 입을 열었다. “ 그 인형이 자기를 만든 주인의 지배를 받고, ‘본체’라는 부속들이 있다는 것말고는 정말로, 그 정도로 동일한 존재란 말입니까? 그렇다면.......” 그는 단어를 천천히 고르더니 말했다. “그런 것을 도플갱어(Doppelganger)라고...하지 않던가요?” “맞았어.” 고개를 끄덕이는 쥬스피아의 얼굴이 언뜻 착잡해 보였다. “도플갱어는 그 의미가 맞아. 가나폴리에서 맨 처음 산 사람을 복제한 인형을 만들고서 그걸 도플갱어라고 부르기 시작했네. 그 후에 여러 가지 의미를 갖게 됐지만 말이야. 하지만 근원적 의미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그 인형이든 너였든, 둘은 만나는 순간 서로를 죽여버리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너희는 말이야, 영원히 진짜를 다투어야 되는 존재니까. 시작을 따지자면 누군가 먼저 존재했던 진짜란 것이 있을 거야. 하지만 이미 둘이 된 이상 진짜의 의미는 없어져 버린 거다. 가짜도, 복제되는 순간 진짜를 존재하게 만든 모든 인과와 소이를 완벽히 복제해 갖게 되어버렸으니. 네 핏줄 속에서, 또는 더 큰 질서 속에서, 너를 존재하게 만든 인과율 속에서 그는 동일하게 놓여 있어. 나란히, 겹쳐진 모야을 하고서.” 거기까지 말하더니 쥬스피앙은 조슈아를 향해 똑똑히 말했다. “난 그런 끔찍한 걸 만들기 싫었어.” 조슈아는 히한하게도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뭔가?” “그는 나와 완전히 같지 않아요. 아주 작은 부분이긴 하지만, 한 시점의 기억이 그에게는 비어 있는 상태거든요. 그래도 조금 전의 이야기가 적용되는 것일까요?” “뭐라고?” 쥬스피앙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작은 기억이라고? 이상한 얘기군. 나 자신도 살다보면 여러 가지를 잊어버릴 것 아닌가? 너도 어느 순간 네가 말한 그 기억을 잊거나, 또는 예전에 잊었던 것을 생각해 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지 않나?” “아뇨,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쥬스피앙이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려는 순간, 막시민이 말했다. “저 놈은 정말로 그렇습니다. 데모닉은 아무 것도 못 잊죠.” “데모닉?” 쥬스피앙은 조슈아를 한참이나 노려봤는데 기껏 한 말은 이러했다. “어디서 들어봤는데.” 그러더니 막시민을 돌아봤다. “데모닉이 뭘 의미하는 건가?” 막시민은 리체를 향해 핵심을 알잖냐는 듯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리체가 말했다. “미치광이 후보인데 천재. 뭐 그런 거라던데요.” 쥬스피앙은 괴이쩍은 표정으로 조슈아를 보더니, 고개를 천천히 옆으로 기울였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그의 눈이 도로 조슈아에게 돌려지더니 몇 번 느리게 깜빡였다. “혹시 페리윙클(Periwinkle)의 아르님 공작 가문?” “알고 게셨군요?” 쥬스피앙은 천천히 입술만 움직이더니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그런데 단지 안다는 것이 아니라 무척 반가워하는 듯한 뉘앙스가 풍겼다. “알다마다.” “지금은 켈티카의 아르님이지요.” 공작이라고 하기엔 차림새가 너무 후줄근한 점도 있고 해서 리체는 이 사람이 정말 저 말을 믿을까 의심쩍었다. 그러나 쥬스피앙은 갑자기 킬킬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군. 그 ‘데모닉’이군. 그렇다면 이해가 가는데. 아아, 데모닉, 그렇다면야 모든 게 가능하지. 그렇다면 정말 그와 네가 다를 수도 있겠는데. 아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말이야. 그러니까 말야, 네가 갑자기 머리를 대머리로 깎아버리면 그와 너는 다른 존재냔 말야. 그건 아니지 않겠어? 하지만 너희 둘이 복제된 순간에서부터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건 이야기가 다르지. 어쩌면 그 인형을 만든 마법사의 오류일지도 몰라. 하지만 이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냐. ‘질서’가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달렸으니까. 이거야말로 재미있는 문제인데. 그런데 그 기억은 왜 누락된 건데?” 막시민이 말했다. “그 까닭까지는 저도 모르겠군요. 만든 사람이나 알겠죠. 하지만 만약 그 흠이 없었더라면 제가 둘을 구별하는 것은 결단코 불가능했을 겁니다.” “도대체 어떤 기억인데?” “편지죠.” 막시민은 조슈아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 “조슈아가 저한테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저희 둘은 친구지만, 전 죽 아노마라드에서 살고 조슈아는 하이아칸에서 살고 조슈아는 하이아칸으로 갔기 때문에 어린 시절 이후로 오랫동안 못 만났지요. 그래서 편지만 가끔 주고받았는데, 어느 날, 자기가 연극 공연을 하게 됐으니 보러 오라는 내용에, 초대 티켓 두 장을 끼운 편지를 받은 겁니다. 그 편지를 받은 날짜는 3월 말. 공연 예정 날짜는 5월 20일이었지요. 그런데 편지를 받은 지 닷새만에 갑자기 조슈아가 하이아칸 생활을 청산하고 켈티카로 돌아왔으니 환영 파티에 참석하라는 연락이 온 겁니다. 처음엔 편지가 아노마라드까지 배달되는 동안 마음이 바뀌어 돌아와 버린 건가 생각하며 파티에 참석했죠. 그 때까지만 해도 가짜 같은 건 전혀 생각도 못했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가짜가 제게 초대권을 보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더군요. 제 손에는 편지와 티켓이 분명히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확인하기 위해 여기까지 쫓아왔죠.” 쥬스피앙이 어이없어하며 말햇다. “뭐야, 그러면 복제된 직후에 이쪽의 조슈아가 편지를 썼던 거고 그래서 인형은 그 일을 모르는 것에 불과한 것 아냐?”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적어도 그 일 덕택에 그쪽이 가짜란 것만은 알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자 쥬스피앙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으로 판단이 될까? 오히려 편지를 보낸 쪽이 가짜이고, 그런 기억이 없는 쪽이 진짜일 수도 있지 않니? 그러니까 이미 복제를 한 뒤에 편지를 쓰게 했을 수도 있다, 그 말이야.” “아닙니다.” “어째서?” 막시민은 비취반지 성에 돌아가면 해야 할 일을 미리 연습하는 기분으로 천천히 머릿속을 더듬으며 말했다. “여러 가지 증거가 있지만 먼저 하나만 반증해 보죠. 아시다시피 조슈아는 아르님 가문의 후계자입니다. 작위도 있고, 돈도 많은 자리니 누구나 탐을 낼만하겠죠. 자, 누군가가 목적이 있어서 조슈아를 복제한 뭔가를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할 일은 뭘까요? 당연히 진짜와 바꿔치기 한 다음 가짜에게 명령하여 자기에게 유리한 흉계를 뭔가 꾸며야겠죠? 설마 그런 걸 일껏 만들어놓고 ‘자, 열심히 모험을 해서 성으로 찾아와 봐라’하고 내팽개쳐 두는 자가 있을까요? 가짜를 교육하는 게 목적도 아닐텐데.” 논리적으로 옳았지만 쥬스피앙은 자신 같은 사람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혹시 알아? 단지 실험정신만 가진 마법사일지?” “누가 쥬스피앙 씨 당신을 복제하지 않는 한 그런 일은.......” 그렇게 말하던 막시민은 상대의 표정을 보고 말을 바꿨다. “흠흠, 어쨌든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까닭은 따로 있습니다.” “그게 뭔데?” “그 인형을 만든 자가 누굴지 짐작이 가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조슈아를 돌아보자 눈이 딱 마주쳤다. 얘기한 일이 없는 문제인데도 조슈아가 먼저 말했다. “증거가 아직 없어.” 막시민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하지만 심증은 있지. 널 닮은 그 인형이 평소 좋은 사이일 리 없는 사람과 특별히 친숙한 것처럼 보인다면? 더구나 그 자가 너희 가문에서 네가 없어질 경우 가장 이익을 보는 사람이라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조슈아가 내뱉듯 말했다. “증거가 나타날 때까진 함부로 말하지 마.” “좋을 대로.” 막시민은 조슈아가 왜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아직 그 문제로 다툴 때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다시 쥬스피앙에게 고개를 돌렸다. “더구나 조슈아가 살던 별장의 관리 책임을 맡은 부인은 조슈아가 실종됐다고 말하더군요. 만일 켈티카의 저택으로 돌아간 쪽이 진짜라면 그녀는 당연히 조슈아가 집에 갔다고 알고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그녀도 가짜를 만든 자들과 한패일지 모르잖아.” “그렇다면 실종도니 조슈아 얘기를 아예 안 꺼내면 되죠. 그랬더라면 제가 두 번째 조슈아가 존재한단 사실 자체를 몰랐을 거 아닌가요. 이곳에서 새로운 조슈아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내가 잘못 알았나보다 하고 생각하며 아노라마드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겠죠.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이쪽의 조슈아가 가짜라면, 그래서 아직 가짜를 원하는 자리에 바꿔치기 하지 못했던거라면, 그 존재를 철저히 숨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 아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조슈아가 한 명이라고 믿어야 가짜의 존재가 숨겨지는 거잖아요? 뭐, 그녀가 한패거리란 점은 맞습니다만.” 조슈아에게는 또다시 새로운 사실이었다. 조슈아의 표정을 본 막시민이 말했다. “네 아버지의 옛 친구 바이예 경도 배신하는 마당에 브와주 부인이라고 못할 게 뭐 있겠냐?” 조슈아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누를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쥬스피앙이 재촉했다. “계속 해봐. 그럼 그 초대권 문제는 어떻게 된 거야?” “그걸 확인하려고 밤중에 기별 없이 별장을 잠시 방문해야 했죠. 그 편지가 진짜 조슈아가 쓴 거란 증거를 찾아야 했으니까요. 방을 뒤져서 조슈아가 편지를 쓴 흔적, 즉 압지를 발견했습니다. 압지만으로는 내용을 알아볼 수 없지만, 제가 갖고 있는 편지와 대어 보니 잉크 흔적이 꼭 맞더군요. 그 압지가 남아 있는 걸로 보아 조슈아는 내게 초대권이 든 편지를 보내고 얼마 안 되어 집을 나간 것 같다고 생각했죠. 어이, 맞는 거야?” 막시민이 돌아보자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버지한테서 그만 비취반지 성으로 돌아오라는 편지가 온 직후의 일이야. 그러니까 그게 내가 마지막으로 쓴 편지인 셈이고. 물론 언젠가 돌아가야 할 거란 생각은 하고 있었어. 아무리 누가 대신해주길 바란다 해도, 결국은 내 자라니까. 하지만 돌아갈 때 가더라도 오랫동안 준비해 온 아쿠아리안 공연만은 꼭 하고 가고 싶었어. 그 정도의 유예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유일하게 내 정체를 알고 있던 극장주한테 숨어 지낼 거처를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지. 공연 날까지만.” 오랫동안 말이 없던 리체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때 분장실에서 이번 공연으로 막스 카르디는 끝이라고 했구나.” 막시민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결과적으로 넌 아주 잘 도망친 거야. 그 때 도망치지 않았으면 브와주 부인이니 바이예 경이니 하는 사람들이 널 죽여 증거를 없앤 뒤, 나 같은 사람이 왔을 때 멋지게 ‘도련님은 오래전에 켈티카로 돌아가셨는데요? 그랬겠지. 한데 그걸 못했으니 브와주 부인이 그렇게 내 앞에서 어물어물 거짓말을 꾸미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겠지. 그녀는 아마 켈티카에 가짜가 안전하게 도착했다는 소식을 아직 못 받았던 거겠지. 그 사람들도 가짜한테 하이아칸에서 켈티카까지 가는 여정의 기억까지 주려고 무척 고생했군 그래. 가짜가 진짜라고 믿도록, 가짜 본인마저 속이느라고 말이야. 한데 그러고 보니 그 사람들은 너와 막스 카르디가 동일인이란 사실만은 몰랐던 모양이군. 그래서 멀쩡히 같은 도시에 살면서도 내가 아노마라드에서 여기까지 쫓아오는 동안 널 찾아내지 못한 거고. 네가 그 가면의 연극배우 노릇을 한했더라면 넌 이미 없는 목숨이었을 것 같군.” 그렇게 보니 정말로 이중 생활을 했던 것이 목숨을 살린 셈이었다. 쥬스피앙이 말했다. “물론이다. 가짜를 만들어 진짜와 바꿔치기 할 생각이라면 누구도 잠깐동안이나마 두 명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모르도록, 하나를 만드는 순간 바로 다른 하나를 죽여 없애는 게 정석이 아니겠나?” 모두가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며 잠시 서늘한 기분을 느꼈다. 막시민이 이번에야말로 들어야겠다는 태도로 물었다. “그러니까, 그 인형을 없애는 방법을 알려주십쇼. 사람을 죽이는 것과 똑같은가요?” “아니, 좀더 간단하지.” 쥬스피앙이 답을 말하기 전에 조슈아가 먼저 말했다. “본체군요.” “그래, 본체야. 본체는 복제 인형에게 몸 밖에 있는 심장과도 같아. 본체의 상태가 인형의 상태를 결정하지. 그러니 그걸 부수면, 다 끝나.” 그러나 막시민은 생각이 다른 듯 얼굴을 찌푸렸다. “전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 인형이라면 멀쩡히 나돌아다니고 있을테니 마주치기가 쉽겠지만, 본체인가 뭔가 하는 것은 철저히 숨겨 놨을 거 아닙니까? 그런 걸 도대체 어디서 찾는답니까?” “위치를 짐작할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야.” 쥬스피앙은 기억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천장을 잠시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세 사람은 헐렁한 로브 아래 드러난 앙상한 빗장뼈를 줄곧 쳐다보고 있어야 했다. “너희 집안에 혹시 납골당이 있나?”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있지요.” “너 데모닉이라고 했지.... 그러면 거기엔 다른 데모닉의 관도 있는 건가? 조슈아가 약간 웃더니 말했다. “말씀하셨다시피 우리 집안은 공작가라서... 납골당은 지나칠 정도로 잘 보관되어 있어서요.” 쥬스피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본체란 게 말야. 본체의 재료를 내가 다 알진 못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재료 중 하나가 죽은 혈족의 시체야. 방금 죽은 시체일 필요는 없고, 뼛가루만 남아 있어도 상관없지. 그런데 말야, 격세유전되는 특이한 형질이 있을 땐 바로 같은 종류의 인간이 있어야만 돼. 예를 들어 복제할 사람에게 유전병이 있거나 하면 같은 유전병이 있는 인간을 찾아내야 된단 말야. 그건 데모닉도 마찬가지지. 그러니까 죽은 데모닉이 있는 납골당으로 가야돼.” 막시민이 반문했다. “그래서요? 그렇다고 그 본체란 것까지 납골당 안에 뒀다는 보장은 없잖습니까?” 쥬스피앙이 히죽 웃었다. “그렇지가 않을걸. 본체란 건 말야, 그 혈족의 시체가 든 관 속에 넣어 둬야 되거든. 오래된 시체일수록 관하고 혼연일체가 되어 있기 마련이라서 말이야. 만약에 관까지 꺼내 옮겼다면 모르되, 아니라면 납골당 안에 있을 가능성이 클걸? 그런데 네가 말했다시피 너희 집안은 공작 가문인데, 누가 납골당에서 관을 옮기는데도 아무도 몰랐을까?” 그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막시민이 조슈아를 돌아봤다. “너희 집안의 납골당은 비취반지 성에 있냐?” “확실히 거기에도 있지만.......” 조슈아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내가 알기로 비취반지의 성의 납골당에는 데모닉의 관이 하나도 없어.” 모두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아깐 납골당이 잘 보존되어 있다면서?” “‘페리윙클의 아르님’이었기 때문이죠. 아르님 가문이 켈티카로 온 건 내 할아버지께서 공작이 되던 즈음의 일입니다. 그 후로는 아직 죽은 데모닉이 한 명도 없거든요. 그러니까 과거의 데모닉들을 비롯한 조상들의 관은 모두 페리윙클의 납골당에 있을 겁니다.” 막시민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근데 페리윙클이 어디였지? 너 갈 줄 알아?” 조슈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노마라드 남쪽 바다 어디라고만 알 뿐이야. 한 번도 가본 일이 없어서.” “그것 참 좋은 소식이군 그래.”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막시민은 쥬스피앙이 도와주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며 다시 쳐다보았다. 그런데 쥬스피앙의 표정이 좀 이상했다. 조슈아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가 불쑥 물었다. “나도 하나 물어보자.” “네?” “네가 아르님 가문 사람이고, 데모닉이라면 말이야.......” “그런데요?” 조슈아는 문득 불안감을 느끼고 상대의 얼굴을 바로 보았다. 쥬스피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사람을 알겠지?” “누구요?” 쥬스피앙은 입술을 오므리며 뭐라 말하면 가장 효과적일까 생각하는 기색이었지만, 곧 못 견디겠다는 듯 툭 내뱉었다. “데모닉 히스파니에 말이야.” 5. 바이올린 대 논쟁 “바람을 부르던 선율 절벽 끝 집은 암녹색 지붕 빙글빙글 돌던 십자 풍향계 봄이 폭풍우 같던 4월 흰 테라스에서 서서 당신이 불러준 노래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당신의 웃음 화를 내도 당신이 좋았어 나를 떠나도 당신이 좋았어“ 그 이름에 놀란 것은 막시민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눈이 둥그래져서 되물었다. “그 노인네를 어찌 아쇼?” “할아버지와 아는 사이신가요?” 쥬스피앙은 나직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상황이라 영문을 모르는 그들은 서로 얼굴이나 쳐다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쥬스피앙은 겨우 웃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란 말이지? 그럼 손자겠군? 좋았어. 아주 좋아. 맞춰봐라. 내가 그 양반과 어떤 사이일 것 같나?” 조슈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친구분이신가요? 나이 차이가 좀 나지만.” 그러나 막시민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채고 말했다. “원수지간은 아니길 바랍니다만.” “안됐군.” 리체가 불안한 표정으로 어서 상황을 수습하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이미 그럴 수가 없었다. 쥬스피앙은 다시 빙그레 웃었는데, 이제는 그 웃음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히스파니에와 난 말야. 아주 오래 전부터 잘 아는 사이지. 내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가, 그가 열 너댓 살쯤 됐을 땐가 그래. 그 즈음만 해도 페리윙클의 아르님이었지. 난 그가 너무 똑똑해서 조수로 쓸까 했는데.......” “잠깐만요. 할아버지께서 열 너댓 살이면 쥬스피앙 씨 당신은 태어나기도 전 아닌가요?” 조슈아가 반문하자 쥬스피앙이 핀잔을 주었다. “마법사의 나이를 네 맘대로 넘겨 짚냐? 히스파니에가 꼬마였을 때 난 네냐플 학원에서 초빙하려 할 정도로 ‘훌륭한 마법사’였단 말이다.” “.......” 분명 겉보기로는 히스 노인 나이의 절반밖에 안 되어 보였다. 하지만 일단 그냥 듣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녀석이 불분명하게 대답을 했다는 걸 내가 눈치 못 챈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지. 난 내 제안을 받아들인 걸로 알고 그 녀석을 내 연구실에서 재웠단 말이야. 내가 그때만 해도 젊어서 좀 부주의했지. 온갖 희귀한 재료와 마법 깃들인 물건으로 가득한 보물창고에 무슨 마음을 먹을지 모르는 놈을 내버려 둔 셈이었으니 말야. 아니나다를까, 그 녀석이 며칠 먹고 자고 하더니 어느 날 아침에 보니 감쪽같이 사라졌지 뭔가? 난 황급히 가장 귀한 소장품들을 확인해 봤지. 하, 그 녀석, 눈이 보통 좋은 게 아니더군.” 이야기의 전개에 불안해진 조슈아는 뭘 갖고 갔냐고 물을 생각도 못하고 쥬스피앙의 표정만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쥬스피앙은 새삼스럽게 그 때 일을 생각하며 분개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놈이 가져간 건 세상에 단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은 카프리치오 바이올린(Capriccio Violin)이었단 말이다. 물론 카프리치오 바이올린이 뭔지 모르겠지? 그건 귀족 마법사였던 율리아 다 카날레가 가나폴리의 마법 악기 레벡(Rebec)과 피들(Fiddle)을 재현하려고 여러 재료를 시험하다가 우연히 딱 한 번, 마력의 현을 만들어내고서 그 때 만든 현을 걸어 만든 세대의 바이올린 중 하나야. 이 세 대 모두 가나폴리 사람이 아닌 우리들로서는 연주하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카프리치오’라는 이름이 붙게 됐지. 두 대는 일찌감치 사라졌고, 마지막 한 대는 속칭 ‘변덕쟁이’ 로 더 잘 알려져 있어 내가 갖고 있던 것이 바로 그 변덕쟁이였단 말이야.” “변덕쟁이...바이올린이요?” 미간을 찌푸린 막시민의 표정이 좀 이상했다. “그래! 바이올린이지. 겉보기에는 고물처럼 보이지만, 가나폴리의 힘이 재현된 보물이란 말이야. 하지만 연주하기도 힘들고, 사실 그냥 연주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효과도 없는 기묘한 물건이거든. 오직 마력을 불어넣어 만든 특별한 곡, 가나폴리에서는 신성 찬트(Holy Chant)라고 불렀던 그 곡들을 연주해야만 힘을 발휘할 수가 있어.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신성 찬트는 이제 완전히 사라져서 단 한 곡도 남아 있질 않아.” 리체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끼어들었다. “바이올린을 만든 것부터가 우연이었는데, 그 바이올린도 이미 사라져버렸고, 만약 그 바이올린이 있다 해도 연주하는 것도 힘들고, 심지어 그 힘든 연주를 할 수 있다 해도 찬트인가 뭔가를 모르면 쓸모가 없고, 그런데 그 찬트는 다 사라졌고? 지금 도대체 무슨 얘길 하자는 거예요?” 쥬스피앙은 화를 내는 대신 괴상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율리아 다 카날레가 모든 것을 내던지고 마력의 현을 만드는 데 전념하게 된 것은 다 이유가 있었지. 그녀는 가나폴리 사람들이 연주하던 악보를 발견했던 거야.” “아아, 그런데 그 악보도 이미 사라졌죠? 틀림없네, 뭐.” “.......” 쥬스피앙이 말을 못하는 걸 보니 리체가 핵심을 찌른 것 같았다. “얘기를 끝까지 들어! 어쨌든 그 악보대로 연주하기만 하면, 카프리치오 바이올린은 산들바람부터 태풍에 이르기까지 부르기도 하고 잠재울 수도 있는 강대한 마력이 물건이 된단 말이야! 실제로 카날레가 그걸 연주해서 자기 집 주변에 바람의 장벽을 치고 모든 사람의 접근을 막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다만... 그때 난 악보를 손에 넣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먼저 악보를 찾고 나서 꼬마도둑을 찾아내어 단단히 혼을 낼 생각이었지.” “꼬마도둑이요?” 이번에 되물은 건 조슈아였다. 그런데 그는 쥬스피앙이 아니라 막시민을 보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랬던 건데... 내가 워낙 바쁘다보니 악보가 조개 반도의 해적들 손에서 떠돌고 있다는 소문만을 들었을 뿐, 직접 찾으러 갈 시간이 없어 차일피일 미루다가 잊고 말았던 거야. 돌려 생각하면 히스파니에한테는 대단한 행운이었던 거지. 그런데 묘하게도 그걸로 끝나지 않고 나중에 그 자와 다시 마주쳤더란 말이야. 그게 한 30년쯤 전이려나. 그를 만난 내가 비상한 기억력을 발휘하여 카프리치오 바이올린의 일을 생각해 내자 그는 이미 자기 손에 없다고 둘러댔어. 난 바이올린을 못 내놓겠다면 그때 조수가 되겠다는 약속을 어겼으이니까 당장 내 집에 와서 3년 동안 무보수로 조수 노릇을 하라고 했지. 한데 너무 중대한 일이 있어서 못하겠다지 뭔가? 그리고 뭐라뭐라 설명을 했는데 아, 내용은 까먹었고 하여간 내가 듣기에도 이유가 그럴듯했던 모양이야. 하여간 어렸을 때나 컸을 때나 뭔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요리조리 떠들어 사람의 주의를 흐려놓는 실력만은 보통내기가 아니었거든.” “그거 어쩐지 누구랑 비슷한데?” 그렇게 말한 조슈아가 참다못해 웃기 시작하자 막시민이 나직이 말했다. “네가 왜 웃는지 전혀 모르겠으니까 그만 그치지 그래.” 하지만 이미 킬킬거리기 시작한 조슈아는 웃음을 그치지 못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얘기에 도취된 쥬스피앙은 둘의 다툼에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새로운 계약을 했단 말이야. 그 놈도 언젠가 결혼을 하지 않겠어? 그러니 그 자가 자식을 낳으면,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내게 보내 3년 동안 조수 노릇을 시키리로 했단 말야. 하지만 히스파니에는 그 약속도 지키지 않았지. 사실 그놈은 약속 같은 거 거의 안 지키는 놈이야.” 조슈아는 점점 더 심하게 웃고 있었다. 그 때 쥬스피앙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기대도 않고 있는데 갑자기 히스파니에의 손자이자 심지어 데모닉인 녀석이 내 수중에 뚝 떨어지다니! 이거야말로 하늘의 도우심, 아니 하늘의 복수가 아니고 뭐겠냔 말이야! 인형 얘기는 안됐지만 이제 내 손에서 벗어날 생각은 버리시지. 아니, 3년 뒤로 미뤄두라고. 긴 세월이 흐르긴 했지만 결국 데모닉 조수를 한 명 얻게 되는구만! 우하하하!” 그 즈음 웃음을 그치지 못했던 조슈아는 쥬스피앙과 별로 다를 것도 없는 태도로 웃어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말을 듣고서 잠깐 웃음을 그치더니 말했다. “하나 지적해드릴 것이 있는데 말이죠.” “뭔데?” “전요, 데모닉 히스파니에의 손자가 아니거든요?” 쥬스피앙은 무슨 당치않은 소리냔 표정이었다. “그도 데모닉이고, 너도 데모닉이고, 더구나 넌 그가 할아버지라고 하잖았나?” “할아버지인 건 맞는데요, 다만 작은 할아버지일 뿐이죠. 전 가문의 직계로서 작위 계승자이고요. 우리 집안의 데모닉들은 괴상한 역사를 갖고 있어서 한 번도 직계 혈통에 영향을 끼친 일이 없어요. 단 한 명, 초대 아르님 공작이신 데모닉 이카본을 제외하면요. 게다가 하나 덤으로 알려드리자면요, 히스파니에 할아버지는 아직까지 결혼도 안 했고 물론 자식도 없답니다. 푸하핫!” 말을 마치자마자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조금 전 쥬스피앙과 너무 비슷해서 리체와 막시민은 얼빠진 표정으로 수군거렸다. “거봐, 비슷하다니까.” “하나로도 충분했는데, 젠장.” 물론 쥬스피앙은 무척 실망한 표정이었다.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표정으로 그가 다시 다그쳤다. “그게 정말이야? 그 놈이, 그 나이가 되도록 아직 자식 한 명 없다고?” 막시민이 느긋하게 덧붙였다. “사실 결혼하기엔 성격적 결함이 많은 노인네라서.......” 그러나 상황은 다시 한 번 뒤바뀌었다. 이걸로 다 해결됐다고 생각한 리체가 여전히 웃어대는 조슈아를 쳐다보다 말고 문득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말야, 막시민 너도 고물 같이 생긴 바이올린 하나 갖고 있지 않니? 혹시 돌고 돌다가 그게 네 손에 왔으리란 생각은 웃기지만......” 그 순간, 막시민은 소리를 빽 지르고 말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 “응, 아니구나.” 물론 리체가 이렇게 대꾸했다고 해서 상황이 수습되는 것은 아니었다. 수색은 끝났다. 바이예 경 휘하의 경기병 서른 명은 들판 어귀에 모여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수색 결과에 대해 이미 전해들은 남자가 그 자리에 나타났다. 이른바 지휘관이었다. 그는 말없이 병사들을 둘러보기만 하고는 잠시 들판을 응시했다. 아무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자들을 새삼 다그치는 건 의미가 없었다. 지휘관의 침묵에 긴장한 병사들이 고되게 반시간 가량을 보내고 멀리서 한 사람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그제야 남자가 반응을 보였다. “어떤가?” 다가온 자는 말에 탄 채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이고는 대답했다. “예상한 대로입니다. 마력이 작용하고 있는 들판입니다. 보이지 않는 결계가 있고, 아마 그 안으로 들어간 게 아닌가 싶습니다.” “누가 만든 결계지?” “근처 마을 사람들 얘기로는 이 근방에 마법사가 하나 살고 있다고는 하는데 워낙 왕래가 없는 모양이라 어떤 자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자인지 알 수 없다는 의미였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뭐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방법은 워낙 다양합니다. 다시 말해, 결계를 친 자가 정해 놓은 방법을 찾지 못하면 진입은 불가능하다는 거지요. 그걸 추측할 방법도 없고요.” “그러면 그 결계에 들어간 자는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도 있는 건가? 아니면 결국 다시 이곳으로 나오게 되어 있나?” “결계란 것은 무척 방대하게 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만, 지금처럼 마법사의 집과 같은 것일 때는 자기 집을 보호하기 위해 작게 쳤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 다른 곳으로 이어질 정도로 큰 결계는 아닐 거라 여겨집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갑을 주의 깊게 고쳐 꼈다. 그리고 그제야 주위 병사들에게 주의를 돌렸다. “좋아. 그러면 일단 포위에 들어간다. 증원군이 요청되는 즉시 철저한 포위망을 짜도록.” 일상적인 어투에 불과했지만 병사들은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즉시 긴강하여 움직였다. 병사들이 흩어지자 남자는 왼손에 쥐고 있던 말채찍을 이리저리 휘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자세가 서툴렀다. 보고를 했던 남자가 물었다. “오른손이 불편하십니까?” “아니. 하지만 의사가 한동안 오른손을 쓰지 말라 하더라고. 의사 말은 들어야겠지.” “절대로 못 내놔요!” “무슨 헛소리야!” “난 정당한 방법으로 얻었다니까요!” “도둑놈의 제자 주제에!” 막시민이 잤던 다락방을 가득 채워버린 네 사람 중에서 바이올린으로 추정되는 둘둘 말린 천 꾸러미를 쥔 사람은 아직 막시민이었다. 쥬스피앙이 빼앗을 능력이 없어 그렇다기보다는 이곳은 자기 집이고 절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이니 언제 가져가도 상관없기에, 오히려 화를 내는 데 정신을 집중한 까닭이었다. “도둑놈? 그 말만은 도저히 못 참겠는데?” 그렇게 말한 막시민은 갑자기 바이올린 뭉치를 높이 쳐들더니 자기 무릎에 냅다 내리치려 했다. 쥬스피앙은 깜짝 놀라 막시민의 허리를 끌어안다시피 하며 바이올린과 ‘무릎’ 사이에 머리를 들이밀었고, 리체는 너댓 발짝 뒤로 피해버렸고, 조슈아는 급히 막시민의 손에서 바이올린을 낚아챘다. “다들 그만둬요!” 키가 제일 큰 조슈아가 바이올린을 높이 쳐들었기 때문에 애들처럼 뛰어오르기 싫은 두 사람은 움직임을 멈췄다. 담요가 스륵 풀려 바닥에 떨어지자, 악기로서의 역사는 끝내고 장작으로나 맞을 것 같은 바이올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리체가 어이없어하며 혀를 찼다. “나 같으면 돈 얹어 줘도 안 가져. 아니, 돈만 가져가.” 쥬스피앙은 막시민을 노려봤다. “아까 저걸 부쉈으면 넌 오늘 인생 종쳤다.” 막시민도 지지 않고 내뱉었다. “종치기 전에, 당신이 아무리 오래 살아도 절대 잊을 수 없을 정도로 흠씬 두들겨 줬을걸.” 도저히 대화가 될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싸워서 득 될 상황도 아니었다. 바이올린 문제가 튀어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을 탈출하고 인형을 없애는 데 쥬스피앙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던 참이었다. 바이올린의 별명이라는 ‘변덕쟁이’는 오히려 쥬스피앙에게 딱 맞는 이름으로써, 상황이 나빠지면 샐러리맨이 나타날 지도 모르는 위험한 들판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같이 내던져질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이다. 물론 바이올린만은 빼고. 게다가 후회도 안 할 것 같다. “그러니까.......” 조슈아는 입을 열면서 다시 생각해 봤지만, 그렇다 해서 순순히 바이올린을 내주자고 막시민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조슈아 또한 히스파니에 할아버지의 물건을 남의 일방적인 얘기만 듣고 빼앗길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당신 말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해버리면 싸움만 한층 커질 뿐이었다. 여전히 딜레마에 빠진 조슈아는 말을 이었다. “바이올린은 잠시 제 3자에게 맡겨두고요.” 조슈아는 리체에게 침대 구석으로 가라고 눈짓한 뒤 바이올린을 덥석 건넸다. “잠시 맡아둬.” 그리고 돌아서서 두 사람을 보았다. “얘기 좀 정리할까요. 쥬스피앙 씨 얘기로는 으음, 반세기쯤 전에 히스파니에 폰 아르님이 쥬스피앙 씨한테 바이올린을 ‘빌려’ 갔고, 1차로 돌려달라고 요구했을 때 새로운 조건, 즉 자식을 3년 간 조수로 보내는 것으로 지불을 마치겠다고 합의했는데 그것조차 지키지 않았다 그거죠?” 쥬스피앙이 대꾸했다. “그러니까 그놈이 도둑놈이지.” 조슈아는 손을 흔들었다. “아뇨. 처음에는 도둑질이었는지 몰라도 다시 만났을 때 당신도 합의를 시도했잖습니까? 그러니 이젠 거래를 하고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것으로 바뀌었죠. 즉, 절도가 아니라 사기죠.” 쥬스피앙은 뭔 소리를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조슈아를 쏘아봤다. “절도나 사기나, 어쨌든 정당한 권리가 내게 있는 것만은 똑같아!” “글쎄요. 이제라도 대가를 지불하면 어떻게 되죠?” “뭐?” 조슈아는 이번엔 막시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막시민 네 일은 나도 잘 알고 있지. 우리가 코츠볼트에서 같이 지낼 때 할아버지께서 네게 주신 바이올린이지. 난 저렇게 낡은 것을 선물이랍시고 주다니 할아버지도 보통 구두쇠가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말이야. 어쨌든 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거고, 그 전의 역사에 대해선 관심도 없지.” “너 같으면 있겠냐?” 조슈아는 해맑은 미소로 응답했다. “물론 없지.” 그러나 말하자마자 곧장 쥬스피앙을 돌아봤다.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이 되자면, 여기에 히스파니에 할아버지를 불러와야겠지만 그건 불가능하잖아요? 그러니 쥬스피앙 씨께서 새로운 조건으로 다시 막시민과 합의를 하시는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왜 내가 내 물건을 놓고 합의를 해야 돼!” 조슈아는 슬그머니 웃더니 말했다. “쥬스피앙 씨. 당신이 만일 딸에게 예쁜 모자를 사줬는데, 사실은 그게 장물이라면 누군가 모를 사람이 나타나 다짜고짜 빼앗아 간다면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요?” 조슈아가 예상한 대답이 바로 튀어나왔다. “내 티치엘의 것을 빼앗아 가는 놈은 누구든 가만 안 둬.” “그러면 막시민은 바이올린을 내놔야 합니까?” “.......” 조슈아는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그러니까 새 조건을 내세우시죠. 사실을 말하자면 그 조건도 히스파니에 할아버지가 이행을 해야 되는 거지 막시민하고는 상관없어요. 막시민은 히스파니에 할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건 물론이고, 당연히 손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자도 아니잖아요?” 조슈아가 그 말을 했을 때 쥬스피앙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막시민을 구석구석 뜯어보는 중이었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태도를 바꾸어 말했다. “바이올린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악기야. 잘 다루는 자가 가져야 하는 것이지. 더구나 카프리치오를 연주하는 건 매우 어려운데, 내겐 안타깝게도 그걸 연습할 기회가 없었어. 그러니 자네가 이걸 잘 연주할 수만 있다면 자네 것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어때, 한 번 켜 볼텐가?” 그는 집게손가락을 둥글게 붙였다가 펴며 허공에 몇 번 내저었다. 그러니 리체가 들고 있던 바이올린이 순식간에 떠올라 막시민의 손 위로 떨어졌다. 막시민이 바이올린을 잡자, 쥬스피앙이 턱짓을 하며 말했다. “어디 들어 보자고.” 막시민은 인상을 찌푸린 채 얼마간 쥬스피앙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사실상 이건 나쁘지 않은 기회였다. 바이올린을 턱에 갖다대고 활을 잡자 잠깐 끽끽대던 바이올린은 곧 유연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 아주 훌륭한 연주라고 할 수 없었다. 특히 음악에 까다로운 조슈아의 귀로 듣기엔 그랬다. 다시 말해 취미로 켜는 사람으로는 나쁘지 않은 정도였다. 그건 바이올린이 낡은 탓도 있는 듯했고.......“ 그렇게 생각하며 쥬스피앙 쪽을 바라봤을 때, 조슈아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거야, 믿을 수가 없군 그래.” 쥬스피앙은 당황하다못해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짧은 연주가 끝날 때까지 벌린 입을 못 다물 정도였다. 백 년 넘게 살아온 마법사라 해도 음악에까지 조예가 깊으란 법은 없는 건가, 하고 생각하다가 조슈아는 미묘한 사실을 눈치챘다. 쥬스피앙은 분명 놀라고 있었지만 감동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가 연주 실력에감격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 이건 생각 이상이야. 정말 놀랐어. 이 정도일 줄이라고는 전혀.......” 연주를 중단한 막시민이 눈썹을 찡그리며 말을 막았다. “이봐요. 내 실력은 내가 잘 안단 말야. 턱 빠지게 입 벌리고 들을 만한 연주는 아니란 거.” 쥬스피앙은 갑자기 화를 냈다. “이 멍청한 녀석아! 당연하지! 세상 누구도 그놈의 바이올린을 그렇게 켤 수는 없단 말이다!” 막시민이 바이올린을 어깨에서 떼더니 말했다. “그럼 내 연주가 그렇게 형편없었나? 그것도 아니라고 보는데.” 쥬스피앙은 의자를 집어 휙 뒤집어 놓고 앉더니 양팔을 의자 등받이에 얹어 놓았다. “이 자식아, 카프리치오 바이올린은 아무나 소릴 낼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바이올린의 현과 활이 만나는 점을 아주 정밀하게 보면 접근하는 방향, 닿는 각도, 모든 것이 미세하게 차이가 나는데, 보통 바이올린이라면 그런 것까지 계산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다른 바이올린이 백 개의 문을 가진 집이라면, 카프리치오 바이올린은 문이 딱 하나뿐인 집이나 마찬가지야. 마력의 현은 활과의 마찰점이 백 분의 1, 심할 때는 몇백 분의 1 단위로 정해져 있어서 그걸 정확히 잡아내지 못하는 한 절대로 소리가 나지 않지!” 의자 등받이를 툭툭 치고 있던 쥬스피앙은 제풀에 흥분해서 주먹으로 등받이를 내리쳤다가, 곧 오만상을 찌푸린 채 손을 흔들어댔다. “그러니 저 악기로 선율을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 것 같나? 그건 말야, 천재성으로도 해결이 안 돼. 오직 무지막지한 인내심과 연습으로 모든 경우를 일일이 다 시험해 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그래, 난들 그걸 연주하려 해보지 않았을 것 같아? 하지만 바로 질려버렸어. 본래 나처럼 똑똑한 자들은 단순 작업의 반복에는 금방 진절머리를 내기 마련이거든. 자넨 도대체 얼마나 연습했나? 난 십 년 동안 바이올린만 켰다 해도 믿겠는데.” 쥬스피앙의 말을 듣는 동안 막시민은 점점 더 미간을 찌푸리더니 갑자기 오른발을 들어 바닥을 냅다 걷어찼다. “젠장, 빌어먹을 노인네가 날 골려먹었구나!” “그게 무슨 소리야?” “그놈의 죽을 고생! 난 바이올린이 원래 다 이런 줄 알았단 말이야!” 따지고 보면 웃긴 상황이었지만 표정만으로도 얼마나 죽을 고생을 했는지 생생하게 느껴져서 농담 걸 분위기가 아니었다. 쥬스피앙이 말했다. “그래. 그게 핵심이지. 말해 봐. 히스파니에가 자넬 어떻게 가르쳤나?” “덕택에 바이올린이란 게 활을 잡은 손가락들의 각도까지 재야 되는 악기인 줄 알고 살았는데.” “그래. 그러면 그는 자기가 먼저 수많은 마찰점들을 실험해 보고서 자네를 가르쳤군 그래? 그래서 기간이 단축된 거고. 그렇다면 히스파니에는 물론 연주를 할 줄 알았겠지?” “글쎄요. 그 노인네는 자기 바이올린을 갖고 있었고 이건 내게 줘버린 거라서. 뭐 어쨌든 할 줄 알았다고 칩시다.” 쥬스피앙은 무척 만족한 얼굴이었다. “데모닉 조슈아, 지금 한 말 들었지? 스스로 인정한 대로 그는 히스파니에로부터 바이올린의 연주법을 배운 ‘제자’로군 그래? 어떤가?” 그러더니 조슈아가 미처 뭐라 반론하기도 전에 큰 소리로 선언했다. “아까 한 제안에 대해 내 조건을 말해주지. 히스파니에의 제자로서, 심지어 바이올린까지 물려받은 막시민 리프크네 군. 자네에게 카프리치오 바이올린 ‘변덕쟁이’를 주는 대가로 이곳에 남아 내 조수가 되도록 명하겠네. 기간은 물론 3년.” 막시민은 잠깐 동안 멍한 표정을 지었다. “3년?” 그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조슈아가 급히 말했다. “그럴 수 없어요. 우리가 떠나야 한다는 사실보다, 3년이 너무 길다는 문제보다, 무엇보다도 그는 마법사의 조수 같은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절대로 후회하실 걸요.” 그런데 막시민은 뜻밖으로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쥬스피앙이 앉아 있는 의자 앞으로 가 서더니 딱 잘라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너무 진지한 어조여서 쥬스피앙도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말인지는 알만합니다. 그 노인네한테 사기 당했다는 것, 뭐 그런 사기쯤 충분히 치고도 남을 노인네라는 점도 잘 알고 있고, 그리고 내가 그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단 사실도 부인할 생각은 없어요. 그렇게 되면 당신의 논리가 충분히 성립된다는 것도 알고요. 하지만 말이죠, 내 스승이랄 수 있는 히스파니에 씨도 그랬나니 핑계로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나 역시 도저히 여기 남아 있을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내 이유를 인정하리라는 확신도 있습니다.” “어째서?” “당신은 마법사니까요.” 쥬스피앙은 말없이 턱을 괸 채 막시민을 올려다봤다. “처음엔 말이죠, 당신의 도움을 얻어보겠다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꺼낸 거였습니다. 짐작하다시피 인형 문제, 난 그게 인형인 줄도 몰랐고, 당신이 말해주기 전엔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 줄도 몰랐죠. 그러니까 어찌보면 쥬스피앙 씨 당신이 날 설득한 셈입니다. 당신을 설득하려다가, 나 자신이 얼마나 상황을 모르고 있는지 깨닫게 됐달까요.” 막시민은 조슈아를 턱짓했다. “저 자식이 유일성을 훼손당했다. 이 말은 마법사께서 한 얘깁니다. 세상에 하나뿐인 인간들 중 오직 홀로, 유일성을 심각하게 훼손당했습니다. 비록 내가 마법에 대해 잘 모르긴 하지만, 이대로라면 칼로 찌르지 않아도 그가 저절로 죽도록 만들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듭니다. 유일성이란 게 완전히 지워지면 그는 죽어버리는 게 아닐까요? 아니면 죽어도 관계없는 인간이 되든가.” 쥬스피앙이 말했다. “그 점에 대해선 나도 해줄 말이 없어. 말햇다시피 이 금지된 기술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러니 무슨 일이 일어날지 솔직히 나도 몰라.” “모르지요. 그러니 그 부서진 유일성의 조각 일부라도 움켜쥐고서, 상대를 쳐 없앨 때까지 버텨야 될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런 조각 중 하나가 바로 접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이곳까지 의심하고 쫓아옴으로써 과거의 그를 구성하던 것들 중에서 훼손되지 않고 아직 남은 조각이 된 셈입니다. 다시 말해 저는 본래의 조슈아를 기억하고,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고, 그리고 둘로 갈라진 후의 경험도 공유하고 있는 유일한 인간입니다. 그가 아직 가짜한테 완전히 밀려나지 않은 건, 저처럼 그를 기억하는 친구 같은 게 남아 있어서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저는 일이 해결될 때까지 이 자식 옆을 절대 떠나선 안 되는 게 아닐까요?” 조슈아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 내가 갑자기 가루로 부서져 내리기라도 할 것처럼 생각하는 거야?” 막시민이 눈을 내리깔며 대꾸했다. “알게 뭐냐. 가나폴리의 마법 같은 거, 나 같은 평범한 녀석이 알 게 뭐냐고. 어떻게 될지, 어떻게 알아? 이건 십중팔구 미친 놈이 벌인 일이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도 못하는 게 당연한데, 그럴수록 더더욱 손놓고 있을 수가 없는 것 아니냐?” 그러더니 발음에 힘을 주어 덧붙였다. “이 민폐덩어리야.” “.......” 막시민은 쥬스피앙 쪽으로 눈을 돌렸다. “당신은 마법사죠. 정말로 ‘훌륭한 마법사’라면 이런 문제를 모르는 체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쥬스피앙은 대꾸 없이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그들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6. 가나폴리의 두 번째 마법 “가나폴리의 기록에 남은 가장 위대한 마법 중 첫 번째는 사람을 닮은 인형이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나 항상 아름다우며, 마법으로 태어났으니 마법이 거두기 전에는 영원히 사는 존재들. 그리고 두 번째는.......” “사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이거야. 이 댁에 우리 또래 딸이 있거든? 그 따님처럼 순진한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면서 ‘정말 도와주시면 안돼요? 하고 말하는 거지. 하지만 날 봐. 도저히 그런 역할이 어울리게 생겨먹질 않았잖아?” 리체는 쥬스피앙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방법들을 떠오르는대로 늘어놓는 중이었다. 마지막 말에 막시민이 수긍하여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데 조슈아 불쑥 말했다. “아니. 너도 충분히 어울릴 것 같은데.” 리체가 냉담하게 대꾸했다. “너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니니?” 세 사람을 어디론가 데려가고 있는 쥬스피앙이 무슨 마음을 먹은 건지 아직 알 수 없었기에 그들은 불안했다. 쏟아져 나온 대안들 중 그다지 그럴듯한 것은 없었다. 그렇게 조금 떨어져 따라가고 있는 동안 걷던 복도가 끝이 났다. 정면에 청록색 도자기 타일들이 아치형 입구의 머리를 따라 장식된 것이 보였다. 여닫을 문은 없었고, 입구 안쪽은 널찍한 홀이었다. 쥬스피앙의 뒤를 따라 차례로 홀 안에 들어선 조슈아와 막시민, 그리고 리체는 잠시 당황한 채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홀이 너무 넓었던 것이다. 그들이 이틀밤을 지낸 집을 떠올려 보자면, 조금 잘 지은 농가처럼 보이던 1층과 다락방 세 개로 들어찬 2층까지는 서로의 크기가 아주 잘 맞았다. 그런데 3층인지 지하인지, 또는 이어진 옆집인지 모르겠지만, 쥬스피앙의 집 두 채 정도는 들어가고도 남을 듯한 홀이, 바로 그 집 안에 있는 것이다. 덧붙여 눈가리개도 없이 따라왔는데 이곳이 3층인지 지하인지 뭔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사실도 어이없었다. 분명한 건 그들은 계단을 올라갔고, 또 내려가기도 했고, 복도를 거치거나 여닫거나 하며 이곳으로 왔다는 사실뿐이었다. 막시민이야 본디 쓸모도 없고 귀찮기도 한 궁리는 안하고 만다는 주의지만, 지도나 옷본 등 도면을 그리는 데 능숙한 리체는 한동안 여기까지 온 과정을 되짚어 집모양을 알아내겠다고 열을 올렸다. 옆에서 리체를 지켜보던 조슈아가 충고처럼 들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말했다. “해봤는데, 안 되더라고. 논리적인 공간이 아냐.” 막시민이 턱짓으로 조슈아를 가리켜 보였다. “이런 문제는 저 녀석의 판단을 그냥 믿는 쪽이 편하거든.” 홀의 천장은 7,8미터가 넘어 보였고, 어른 걸음으로 백 보 정고 가야 가로지를 수 있을 정도로 넓기도 했다. 그러나 장식도 없이 밋밋한 벽돌로만 둘러진 그곳은 심지어 텅 비어 있었다. 별다른 시설이랄 것이 전혀 없었다. “아무 것도 없잖아?” 막시민의 말에 조슈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저기 바닥에 나무 받침 같은 것이 있잖아.” 정말 있긴 있었다. 물론 척 보기에 아무 쓸데도 없어 보였다. 그 위에 뭔가 올려져 있지 않다면 말이다. “아냐. 저기 바닥에 나무 받침 같은 것이 있잖아.” 정말 있긴 있었다. 물론 척 보기에 아무 쓸데도 없어 보였다. 그 위에 뭔가 올려져 있지 않다면 말이다. “왜 우릴 여기로 데려왔죠?” 등을 보인 채 홀 중앙을 쏘아보고 있던 쥬스피앙이 한참만에 대꾸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 인형을 없앤다고 했잖나? 그러면 페리윙클로 가야지.” 막시민은 쥬스피앙의 뒤통수와 나무 받침들을 곁눈질하더니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 저 나무토막들이 우릴 페리윙클인가 하는 곳으로 보내줄 것 같진 않고.......” 저 성격 괴상한 마법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니 페리윙클로 보내준다고 함부로 좋아하기엔 일렀다. 다른 사람은 보내줄 테니 막시민은 남아서 조수 노릇을 하라거나, 바이올린을 빼놓고 너희 셋을 페리윙클로 날려보내 주겠다고 하거나, 그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뭘 어쩌려는 건지 미리 말해주면 안될까요?” 리체가 말해봤지만, 쥬스피앙은 더 이상 대꾸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무엇을 하려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리체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냥 순간이동과 같은 무지막지하게 어려운 마법을 시전하시려다보니 넓은 공간이 필요한 것뿐 아닐까?” 조수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희망 사항을 말했다는 걸 이해해 봐.” 그러나 다음 순간 홀 중앙으로 고개를 돌리던 리체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잠시 후, 단지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하.” 이제 그곳에 나무토막은 보이지 않았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어떤 것으로 가려진 것이다. 그 다른 것의 출현이 너무나 예상 밖이고, 너무나 터무니없고,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기에 그 상황을 ‘나무토막이 안 보인다’와 같은 말로 표현하는 건 적절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저건... 배잖아?” 세 사람은 얼굴을 마주봤다. 각자 머릿속에 떠올린 생각이 동시에 밀이 되어 튀어 나왔다. “섬이라더니, 정말 배를 타고 가라는 거야?” “저 배와 바이올린을 바꾸잔 건가?” “와, 배가 저절로 나타났어.” 배는, 돛대 셋 달린 범선까지는 아니라 해도 높직한 중앙 돛대와 튼실한 배쌈을 가진 흠잡을 데 없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무척 솜씨를 부려 만든 듯 인어를 흉내내 뱃머리 장식은 금빛이고, 연황색 뱃전에는 조개와 고동, 불가사리 모양이 조밀하게 새겨진데다 배쌈에는 파도까지 그려져 있었다. 무척 아름다웠느냐 하면....... “장남감치곤 무척 크네.” 손차양을 하며 올려다본 리체의 말이었다. 부자들이 유리 케이스에 넣어 거실에 장식할법한 배를 백 배쯤 불려 놓은 모양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평가였다. “조용히 해.” 뜻밖으로 가장 열심히 불평할 것 같은 막시민이 나지막이 주의를 주었다. 다행히 쥬스피앙은 스스로 도취되어 리체의 말은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째서 갑자기 나타난 거냐고 물을 생각이겠지? 당연히 이렇게 중요한 걸 아무 데나 방치할 수 없으니 다른 결계 안에 숨겨 놨던 거라고. 이게 무엇일 것 같나? 짐작이 가나? 이건 바로 가나폴리의 마법을 재현한 유일무이한 배야! 오, 정말 아름답지 않나? 이것은 미의 극치, 전설의 현신, 세상 모든 배를 무색케 하는 우아함을 품고 있어 배라고 부르는 입이 부끄러워지는 예술품이 아닌가! 저 금빛, 저 섬세함, 볼 때마다 경외심이 느껴지지!” 듣는 것만으로도 낯뜨거워지는 얘기를 잘도 늘어놓았지만 그래도 상대에게 동의를 구하며 귀찮게 굴진 않았다. 그는 본디 누군가가 자기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상황이 머릿속에 잘 떠오르지 않는 성격이었다. 막시민이 말했다. “물론 그렇겠죠. 그런데 물은 어디 있죠?” 모두가 지적하고 싶었던 부분이었다. 원하던 질문을 받은 쥬스피앙은 득의만면하여 막시민을 돌아보았다. “물은 필요 없어.” “아, 잘됐군요. 저도 새삼스럽게 항해 같은 걸 배우고 싶진 않았거든요. 저 배는 그냥 은유적 공간인 거겠죠? 역시 귀찮은 일은 생략하고 단숨에 이동하는 쪽이 취향에도 맞고 또 다른 여러 가지 효과도 함께.......” “저 배는 날 거거든.” 막시민이 뭐라 말했든 전혀 영향을 받은 기색이 아닌 것은 둘째치고...난다고? “저 배가...음, 날것이란 소린가? 하긴 구워 놓은 것 같진 않네.” “막군, 정신 차려.” 납득 안 가는 상황에서 바로 횡설수설해버리기 시작한 막시민 대신 조슈아가 나섰다. “저 배가, 하늘을 난단 말이죠?” “그래.” “저, 조심스런 얘기지만...겉으로 보기엔 그런 기능이 있을 것 같지 않거든요?” “그럼 자넨 내가 겉보기에도 대마법사 같아 보이나?” “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반문에 가로막힌 조슈아가 머뭇거리고 있자 마지막으로 리체가 나섰다. “새삼 똑같은 질문은 지겹고, 일단 날려 봐요. 그럼 믿죠.” 쥬스피앙은 코방귀를 뀌었다. “넌 저게 연으로 보이냐? 날리란다고 쓱싹 날리게?” 리체도 같이 코방귀를 날렸다. “아, 그럼 도대체 상식적으로 납득 가는 얘길 해야 될 거 아니예요? 저게 어딜 봐서 날게 생겼어요? 아니, 날개 비슷한 거라도 붙여놓고 난다고 주장하면 황당하다고 웃기나 하지, 지금 아저씨 주장은 웃긴 걸 떠나서 사람을 화나게 하는 수준이란 말예요.” “날개가 왜 없어? 저기 있잖아?” 쥬스피앙이 가리킨 쪽을 보니 고물 쪽 배쌈에 깃털 비슷한 그림이 그려진 걸 말하는 것 같았다. “이거 장난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 때 조슈아가 빙그레 웃더니 말했다. “물고기가 날개를 달면 날치요, 쥐가 날개를 달면 박쥔데, 배가 날개를 달면 뭐라고 부릅니까?” “비행선.” “아.” 막시민이 쥐어박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납득하지 마.” 하지만 조슈아는 개의치 않고 진지하게 다시 물었다. “비행선은 어떻게 납니까? 안타깝지만 저 날개는 움직일 것 같지 않군요.” “그거야 물론 마법이지. 마법은 마법사가 아닌 자한테 설명 안 해.” 한심한 대답에도 조슈아는 실망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배 자체에 마법이 걸려 있나요? 아니면 마법사가 같이 타야 되나요?” “마법사가 탈 필요는 없어. 그랬다간 내가 저걸 타야 되게?” “그거 다행이군요. 그러면 방향이나 속도 같은 것은 어떻게 조절하지요? 아무데로나 날아가 버리면 큰일 아니가요?” 그러자 쥬스피앙이 히죽 웃었다. “그건 너희가 배워야 돼. 그런데 그리 간단하지 않으니 언제 다 배워서 출발할지 모르겠군 그래?” 쥬스피앙은 입구 왼쪽의 벽으로 가더니 아무데나 손으로 슥 밀었다. 그러자 벽이 반 바퀴 돌면서 벽에 설치된 책장이 나타났다. 그는 거기서 정말 두꺼워 보이는 책을 한 권 집어들어 조슈아에게 건냈다. 표지를 보니 ‘비행선 조종의 정석’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었다. “그 책은 딱 한 권 뿐이라 너희에게 줘서 보낼 순 없어. 그러니 다 외우라고. 열흘 정도면 되려나.” 조슈아가 무심코 받아든 책을 한 장 펼치는데 옆에서 리체가 항의했다. “분명 우릴 페리윙클 섬인가 거기로 보내준댔잖아요! 이래서야 언제 출발할지 알 수 없는 일이고.......” “이봐, 그건 너희 사정이고. 이만하면 난 최선을 다한 거야. 이 배는 내 필생의 역작인데 이런 걸 보증도 없이 빌려 주기까지 하잖아? 하지만 너희가 조종법을 빨리 못 배우는 건 너희 탓 아닌가?” 둘이 다투거나 말거나, 막시민은 조슈아를 흘끔 봤다. 조슈아가 싱긋 웃더니 손가락 세 개를 세워 보였다. 쥬스피앙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사흘이라고?” “세 시간인데요.” “뭐?” 막시민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데모닉 히스파니에를 봤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 노인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셨나 보군요. 저 자식은 세 시간도 지금 겸양 떠는 건데.” 쥬스피앙이 미간에 주름을 잡더니 물었다. “그럼 도대체 책 한 권을 외우는 데 얼마나 걸린단 말이냐?” “보통 사람들이 그 책을 읽는 속도보다 좀 더 빠른 정도던가. 그냥 데모닉이니까, 아니 천재라서 그러가보다 하고 넘어가요.” 하지만 쥬스피앙은 그 말에 마음이 상했다. “뭐? 이봐, 천재란 책을 좀 외운다고 붙일 수 있는 이름이 아냐. 내 연구실에 있는 저 찬란한 연구 업적들, 저게 하루아침에 되는 건 줄 아나? 오랜 노력과, 번뜩이는 영감과, 정리벽과, 창의적인 사고력과, 그리고 현명한 조수 역할을 해줄 딸까지 필요한 일인 걸 너희가 알아? 그 정도는 갖춰져야 천재랄 수 있는 거지.” 조슈아는 상황을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에 얼른 끼여들어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그런 능력이 있어야 진정한 천재겠죠. 그런 의미에서 당신이 훨씬 훌륭한 천재예요.” “당연히 그렇지!” “그렇고말고요.” “외우는 게 다가 아냐!” “옳은 말씀입니다.” “게다가 넌 딸도 없잖아?” “아... 네, 물론.......” 조슈아가 머뭇거리자 쥬스피앙은 정말 당연하다는 긋 덧붙여 말했다. “딸이 없는 마법사는 진정한 마법사가 아니라고.” “.......” 물론 조슈아는 마법사도 아니었다. 막시민이 보다못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 문젠 이제 됐고, 우리한테 뭐 더 설명할 것 있지 않나요? 말해주도록 기다리고 있자니 도무지 찜찜해서 못 견디겠네.” 그제야 쥬스피앙이 팔짱을 끼며 모두를, 특히 막시민을 돌아봤다. “나, 쥬스피앙은 네가 지금 조슈아를 떠날 수 없다는 걸 이해했다. 잘못된 마법의 문제를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나와 같은 인격적인 마법사들의 힘든 점이지. 그래서 너희가 페리윙클 섬으로 가도록 내 비행선을 빌려주겠다는거야. 바람만 잘 잡아탄다면, 넉넉잡아 보름만에 남쪽 바다에 도착하고도 남을 거고, 모든 일이 해결된 후 돌아오는 데도 그 정도 시간밖에 걸리지 않겠지.” 그 순간, 심드렁하던 막시민의 태도가 일변했다. “잠깐, 정말 아노라마드 남쪽 바다까지 가는데 보름밖에 안 걸린단 말인가요?” “그것도 너희가 조종을 제대로 못할 것을 감안해서 하는 소리야. 내가 같이 타고 간다면 틀림없이 열흘 정도밖에 안 걸릴걸.” “되기만 한다면 이것 이상으로 빠른 방법은 없겠는데.” 막시민은 장난감처럼 치장된 배를 다시 한 번 쳐다봤다. 지금 들은 말을 믿을까 말까 저울질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믿기에는 너무 허무맹랑한 얘긴데.......” 막시민의 성격상, 저 배가 하늘을 난다는 말을 신뢰하느 것부터 간단치 않았을 게 틀림없었다. 어제부터 있었던 몇 가지 일들, 특히 이 집의 괴상한 구조와 결계의 존재만 아니었더라면 쥬스피앙의 마법에 대해서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마법으로 감자 껍질도 못 벗기잖아? “역시 당신의 말을 믿을 수가.......” 그 때 조슈아가 나섰다. “쥬스피앙 씨, 당신의 말을 믿어요. 그리고 이런 귀한 배까지 빌려주시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가능한 빨리 모든 일을 해결하고 돌아와서 바이올린 문제에 종지부를 찍도록 하지요.” “야, 조군, 너 지금 나더러 돌아와서 3년 동안 조수 노릇을 하라는.......” 쥬스피앙인 말을 막았다. “아니, 생각이 바뀌었다.” 막시민은 점점 더 불안한 표정이 되어갔다. “네게 카프리치오 바이올린의 소유권을 넘겨준다. 그리고 너희가 가장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올 수 있는 수단을 빌려준다. 물론, 막시민 군 너를 잡아두지도 않는다. 그 대신.” “대신?” “일이 해결되고 돌아오면, 정식으로 마법을 배워라.” “뭐라고요?” 쥬스피앙은 완강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잘라 말했다. “마법을 배우란 말이야. 기초부터, 착실하게.” “내가 왜요?” “너한테 카프리치오 바이올린을 줬으니까 그렇지!” 둘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서로를 쏘아봤다. 다짜고짜 마법을 배우라니, 막시민으로서는 황당함을 넘어 암담한 얘기였다. 한 번도 관심 가져 본 일이 없는 분야인데다, 무엇보다도 누가 앞으로 뭘 해야 된다고 정해주는 데 전혀 익숙한 성격이 아니었던 것이다. 부모조차 그의 인생에 참견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바이올린이란 마법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고!” “내 말은 지금껏 귓등으로 들었냐? 그 바이올린은 이 세상에 다시 재현되기 힘든 가나폴리 마법의 유산이란 말이다. 그런 것의 주인이 마법 끄트머리도 모르다니, 이게 될 법이나 한 소리냔 말이야! 내가 네게 그걸 넘겨주려고 마음먹은 것도, 늙어빠진 데모닉 히스파니에를 제외하면 네가 현재 이 세상에서 카프리치오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임이 틀림없기 때문이지, 네가 뭐 마음에 들어서 주는 줄 알아? 하지만 네가 말했듯 난 마법사다. 그것도 무척 인격적이고 훌륭한! 그러니 훌륭한 마법사로서, 절대로 마법을 모르는 자에게 마법의 유산을 넘겨줄 수 없어! 그러니 네게 마법을 가르치고야 말 테다!” “싫다니까! 나도 한 번 싫다고 말한 이상 끝까지 싫은 거야!” “뭐야? 그러면 저 배는 안 빌려줘!” “이봐, 일단 빌려주기로 했으면 빌려주는 거지, 갑자기 무슨 딴소리예요?” “내꺼니까 내 맘이야!” “그게 무슨 놈의 훌륭한 마법사의 자세야!” 지금껏 보아온 바로 ‘훌륭한 마법사’라는 말에 민감한 쥬스피앙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말을 바꿔 외쳤다. “그러면 배는 빌려주고... 대신 배에 넣을 연료를 손톱만큼도 주지 않을 테다!” “뭐? 치사하게 너무 하잖아!” “치사하든 말든 알 게 뭐냐?” 안타깝지만 이번만은 ‘훌륭한 마법사’ 논리가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옛 이야기들을 따르자면 마법사란 자들은 지금처럼 ‘보트를 주지. 다, 노는 빼고’ 또는 ‘영원한 생명을 주지, 단 영원히 늙어가라고’와 같은 말장난을 무척 즐기는 인간들인 것이다. “연료 까짓 거 직접 구하면 되지!” “될 것 같냐? 연료가 뭔지나 알고 하는 소리야?” 왠지 가르쳐 줄 것 같은 분위기라 막시민은 재빨리 물었다. “연료가 뭔데요?” “금.” 그 말에 조슈아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금이라고요? 도대체 얼마나 필요한 건데요?” “글쎄, 페리윙클까지 갔다오려면...왕복 한 달 기준으로 약 1만 온스(1온스는 약 31그램) 정도?” “세상에.” 리체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고, 막시민은 황당한 나머지 목에 사레가 들려 기침을 터뜨렸다. 조슈아만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생각만큼 많이 들지는 않는군요.” “많지 않다고? 1만 온스면 금반지로 짐작해보고 하는 소리야?” 리체가 다그치자 조슈아가 계면쩍게 웃더니 말했다. “난 연료라고 해서 혹시 땔감처럼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단 말이야. 그나저나 세상에서 제일 비싼 탈것이겠는데.” “그 정도 내고 하늘을 날 수 있다고 하면 탈 사람도 꽤 있을걸?” 쥬스피앙이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저라도 타보려 할 것 같군요.” “그건 조군 네가 아르님 소공작일 때의 얘기고, 이른바 거지 여행중인 너는 손톱 만한 사금조각 한 개도 생길 데가 없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막시민은 몸을 휙 돌려 쥬스피앙을 향해 말했다. “그러면, 내가 당신 말을 들었으면 연료로 쓸 금을 당신이 줄 생각이었단 말입니까?” “그러면 너희가 어디서 금을 마련해 오냐?” “나중에 갚는 조건으로?” 쥬스피앙은 불쾌한 눈빛으로 막시민을 째려봤다. “넌 내가 가난해서 요런 집에 사는 줄 아냐? 그건 단지 내가 소박하고도 고상하며 자연 친화적인 취미 때문일 뿐이지. 마법 시약의 재료 중에는 금보다 훨씬 값진 것들이 널렸어. 나 정도 되면 연금술의 비의는 이미 통달했음을 알아야지.” “그럼 당신은 금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요?” “두말하면 잔소리지.” 조슈아는 막시민의 태도가 점점 달라지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아, 흠흠, 그러면 아까 한 대답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금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군요?” 쥬스피앙도 점잔을 빼며 대꾸했다. “뭐, 비행선의 연료로 쓰인 금은 완전히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 말이야.” “없어지지 않다니요?” “금은 모든 금속들의 왕과 같은 존재지. 지배자라고. 금의 그러한 성질이 비행선을 움직이는 마력의 도가니를 지배하는 거야. 배 안에 있는 용광로에 금을 넣으면 금이 녹고, 녹은 금이 도가니로 흘러 들어가지. 그 도가니가 꽉 차 있기만 하면 배는 문제없이 움직여. 다만 조금씩은 소비가 되는데, 그것을 계속해서 채워 넣지 않으면 비행선의 각 부분들이 점차 말을 안 듣고 문제를 일으키게 돼. 그걸 감안해서 필요한 금의 양을 말한 거야. 그러니 여행이 끝났을 때도 여전히 도가니 안에 금이 가득 차 있게 되겠지. 없어진 건 일부에 불과할 테고, 그 정도은 돌려주지 않아도 돼.” “아아, 그렇군요.” 막시민은 무척 탄복한 표정을 지었다. 조슈아가 옆에서 보기에 이 친구에게 무슨 속셈이 있지 않고는 저렇게 고분고분하게 대꾸할 리가 없었다. “저는 뭐, 가난해서 금 같은 건 없지만 그런 배라면 일생에 한 번쯤 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이런 기회가 흔하게 오는 것도 아닐 테고. 그런 귀한 탈것을 빌려 주시는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리며, 다시 생각해보니 마법을 배우는 것도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오, 그래? 드디어 결심했나?” 이제는 리체마저도 수상쩍은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쥬스피앙만은 전혀 누치채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아까부터 자기 비행선의 놀라운 점을 설명하는 과정에 완전히 도취되어 있었다. “다만 마법을 배우긴 하되... 당신 밑에서만 배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여긴 제 고향에서 너무 멀고, 고향에는 제가 돌봐줘야 하는 동생들이 무척 많아서요.” 물론 이 말을 할 때 막시민은 쥬스피앙엑게 붙잡히지만 않으면 그놈의 마법을 10년 뒤에 배우든, 할아버지가 되어서 배우든 당신이 알 거 있겠냐,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 물론 꼭 나한테 배울 필요는 없겠지.” 뜻밖을로 쥬스피앙은 제안을 쉽게 받아들였다. “나도 너처럼 기초도 모르는 친구를 가르쳐 본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잘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보다는 역시 기초 교육에 전문적인 교사가 좋을 거야.” “네? 아... 뭐 그렇겠죠.” 막시민이 불안한 기운을 감지할 즈음, 쥬스피앙이 결론을 내렸다. “네냐플에 들어가라.” 막시민은 눈을 깜빡거렸다. “네냐플? 그게 뭔데요?” “학원이야.” 막시민의 표정이 금방 딱꾹질이라도 할 듯한 것으로 바뀌었다. 쥬스피앙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거기 학장인 히라크 칼마린은 내 옛 친구인데, 요새 젊은 축들 중에서 내가 실력을 인정하는 몇 안되는 마법사이기도 하지. 그곳 교육 수준이 꽤 괜찮다고 들었어. 거기 가서 기초를 배우고, 혹시 더 배우고 싶은 마음이 나거든 날 찾아와라. 네가 졸업하고 올 때까지 내 생각이 바뀌지 않느다면 널 진짜 제자로 삼을 테니까. 그런데 네 미래를 위해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내가 생각이 좀 잘 변해.” “아니, 잠깐만.” 막시민은 안경을 고쳐 끼더니 쥬스피앙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몇 마디 논쟁하던 둘은 잠깐만에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학원이라니! 분명 수업 시간이니 쉬는 시간이니 따위가 있고, 식사도 정해진 시각에 해야 될 거고, 기숙사에는 제 때 돌아와야 되고, 그딴 곳이겠죠? 난 누가 내 생활에 참견하는 거, 딱 질색이란 말입다!” “학원이 싫다고? 척 봐도 그리 뾰족한 대책이 없는 한심한 인생이 틀림없구만, 이 정도로 훌륭한 인생의 이정표를 제시해 주는데 무슨 놈의 잔소리가 그리 많아! 마법을 배우면 얼마나 훌륭한 호구지책이 되는지 알기나 해?” 옆에서 듣자니 이야기는 점차 선전 비슷하게 되어 갔다. “일단 네냐플을 졸업할 정도만 되면 그 이력으로만으로도 어디 가서 일자리 얻는 건 식은 죽 먹기란 말이야! 잘만 하면 노후까지 편안히 보장되는....” 그 말이 막시민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는 미지수였지만, 한동안 대꾸도 않았던 그가 불쑥 물었다. “거길 졸업하는 것까진 좋다 치고... 그 후에 당신한테 와서 또 조수 노릇이나 하란 말입니까?” 그 말에 쥬스피앙이 발끈했다. “나 같은 위대한 마법사가 제자로 삼아 준다는 것이 얼마나 얻기 힘든 특권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야? 다른 놈들은 제발 당신의 위대한 마법을 가르쳐 주십사 하고 쫓아와 빌기까지 하는데! 이 놈은 뭘 믿고 이렇게 콧대를 세워대는 거야!” “세상 놈들의 생각이 다 똑같을 거라고 믿지 마시죠. 일단 하나만 물어봅시다. 그놈의 네냐플인지 뭔지 하는 학원에서 먹이고 재우는 정도는 해줍니까?” “그거야 물론이지. 돈을 내는데.” “뭐? 돈이라고? 나 돈 없어요. 암, 한 푼도 없지.” “그럼 입학금 주면 갈 테냐?” 이 순간, 막시민은 재빨리 표정 관리를 했다. “전액 줍니까?” 옆에서 보고 있던 조슈아가 감동해서 리체에게 속삭였다. “연기 실력이 나보다 나은데.” 쥬스피앙은 소년처럼 눈을 흘기더니 허리춤에 끼고 있던 양피지 공책을 하나 북 찢고, 직접 만든 자동 잉크 펜을 꺼내들더니 멋진 필체로 휘갈겨 썼다. 히라크 칼마린 친전(親展) 일전에 나한테 빌려간 보석초 화분 두 개 값을 이 편지 갖고 가는 잔소리 많은 놈의 입학금 대신 지불해 주게. 잔돈은 용돈으로 줘버려. 참고1 : 안경 쓰고 용모 지저분한 갈색머리 놈임. 참고2 : 화분 나머지 세 개 값은 꼭 갚을 것. 위대한 은둔 마법사 앨베리크 쥬스피앙. “자, 그럼 가기로 한 거네. 잘 간직하라고. 이 문서로 받을 수 있는 돈이 한두 푼이 아니니까.” 도무지 중요한 문서처럼 보이지 않는 삐딱하게 찢어진 양피지 조각을 받아든 막시민이 어이가 없어 중얼거렸다. “젠장, 이름을 쓰면 되잖아요. 지저분한 갈색머리 놈은 또 뭐야.” 현금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걸로도 나쁘다고 할 순 없었다. 어쨌든 다른 속셈도 있고 말이다. 옆에서 내용을 건너다보던 조슈아가 지적했다. “‘친전’은 봉투에 써야죠. 펴자마자 내용이 다 보이는데 친전이라고 써봤자.......” 천재답게 남의 지적 따위는 들은 체 만 체 하던 쥬스피앙은 갑자기 생각 났다는 듯 덧붙였다. “아참, 깜빡 잊고 말 안했는데, 네냐플엔 입학 시험이 있어. 듣기로는 어렵기로 악명이 높다는데. 재수나 삼수 정도는 각오해야 될지도.” 그와 동시에 막시민이 뒤통수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뭐야, 그냥 입학하는 게 아니란 말야? 그런 얘기야말로 미리 했어야 될거 아닙니까!” 7. 소녀 유령 “그 분은 당신을 만나지 않으십니다. 당신은 죽는 순간까지도 그 분을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와 내 딸도 당신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당신은 한 번의 기회를 잃었습니다. 세상 일에 두 번 기회가 주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적은가요. 그리고 이 또한 두 번의 기회가 없는 일이랍니다. 이제 당신에게 더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조용히 가 주십시오. 그리고 다시는 오지마세요.” “포위는 완전합니다. 아무도 이 들판을 몰래 빠져나갈 수 없을 겁니다.” 그것은 부관들의 일상적인 보고였기에 남자는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하늘로도?” “네?” 남자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무척 맑았고, 밤이 되려면 멀었으니 놓칠 가능성이라면 모를까 발견하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부관의 보고를 돌려 생각하자면 ‘나 빠져나간다, 얘들아 안녕’하고 외치며 빠져나가는 일은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니까. “내 생각엔” 부관은 긴장했다. 그의 지휘관은 말투는 부드럽지만 동정심이나 관용, 여유같은 것은 조금도 없는 사람이었다. “날씨가... 너무 좋은 것 같아.” “네?” 남자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미동도 않는 새파랗게 갠 하늘이 뭔가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부관이 대꾸를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남자는 다시 느긋한 어조로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결계 안으로 전언을 보낼 방법은 없나?” 여행 준비 진행중이었다. 리체는 쥬스피앙을 다그쳐 식량이나 각종 여행 용품들을 뜯어내느라 바빴고, 막시민은 출발 전 휴식을 핑계로 방에 틀어박히더니 뭔가 궁리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조슈아는 읽어야 할 책을 읽고 있었다. 홀 구석에 주저앉아서. 조슈아가 ‘비행선 조종의 정석’을 다 읽는 데는 두 시간 정도 걸렸다. 읽는 것과 동시에 외운 것은 물론이었다. 그리고 나자 당연히 배 안을 살펴보고 싶어졌다. 리체와 달리 조슈아는 이 배에 대한 쥬스피앙의 낯뜨거운 찬사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 내부는 여느 배와 비슷했지만 판자 하나 하나에 이르기까지 정교하게 짜 맞춰져, 흘러나온 아교 흔적조차도 발견할 수 없는 섬세한 배였다. 연한 황갈색 판자들이 죽 늘어선 갑판 가운데 서서 사방을 둘러보자 묘하게 즐거워졌다. 배를 처음 타보는 것은 아니지만, 승객의 한 사람으로 구석에 앉아 있는 것과 스스로 조종해야 하는 작지만 아름다운 배를 보는 기분은 전혀 달랐다. 돛대에 돛은 없었다. 하긴, 날아가는 배라면 돛이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그렇게 배와 흡사하게 만들었을까? 어차피 마법으로 날아가는 거라면 모양이야 침대든 접시든 상관없은 것 아닌가? 혹시, 불시착하면 그때부터 항해를 하란 건가?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대뜸 불길해져 얼른 고개를 흔들어버렸다. 비행선 조종 문제라면 책을 통째로 외워뒀지만, 항해에 대한 상식으로 말하자면 기껏해야 배가 뒤로 가지 않고 앞으로 간다는 정도밖에 몰랐던 것이다. 명색이 키 모양을 문장으로 갖고 있는 가문의 후계자인데, 하는 생각이 들어 소리 없이 웃다보니 켈스니티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이럴 때면 네가 그의 자손이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하긴, ‘뱃놈 공작’ 이라고까지 불린 사람의 후손치고는 좀 그렇지?” 그렇게 중얼거렸을때, 고물 쪽에서 누군가가 대꾸했다. “뱃-놈-공-작-이라고?” 조슈아가 흠칫 놀라 자세히 보니 판자 색깔과 비슷한 옷을 입은 소녀 하나가 턱을 괴고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도 연노랑색이고, 피부조차 노르스름해서 언뜻 못 알아봤던 건가 싶었다. 하지만 첫마디가 어이없게 튀어나왔다. “어... 이봐, 그 이름은 함부로 쓰면 안 돼.” 이카본의 별명이긴 했지만, 그다지 우아한 이름이 못되다보니 예전에도 아랫사람들이 당사자 없는 술자리 같은 데서나 입에 담을 만한 것이었다. 이젠 부를 사람도 없는 까마득한 옛날의 이름인데도 가문의 자손 앞에서 남이 입에 담을 만한 이름은 아니라고 스스로 딱 잘라 생각한 것이 어쩐지 신기해졌다. “그-으-래-?” 소녀는 일어나 앞으로 다가왔다. 가까이에서 보니 소녀의 옷이나 머리의 색깔은 판자와 많이 달랐다. 좀더 진해서 흑갈새에 가까웠다. 아까는 왜 그렇게 보였을까? “응. 그런데 넌 누구지? 아, 네가 쥬스피앙 씨의 딸이란 애구나?” 상대가 소개하지 않았지만 이곳에 있을 소녀가 달리 없는지라 얘기로만 듣던 ‘티치엘’인가보다 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소녀는 긍정도 부정도 않고 다짜고짜 다른 얘기를 꺼냈다. “너의 그 머리, 본래 그런 색깔이야?” 소녀는 조슈아의 회색 머리카락을 보고 있었다. 조슈아는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머리? 아, 실은 이런 색깔이 아니었지만.” 갑자기 뭔 소리를 건가 생각하면서도 대답은 하고 있었다. “어느새 이렇게 돼버렸다. 이유는 모르겠고, 일찍 머리가 세나 보다 하고 생각할 뿐이다.” “노인들의 머리카락은 하얗잖아.” “좀 다르긴 하지만, 뭐.” “이 배가 마음에 들어?” “ 응... 그런 것 같네. 너도 이 배를 같이 만들었니?” “나는 배를 만들 줄 몰라.” 대답이 묘하게 이리저리 튄다 싶었지만 그래도 쥬스피앙보다는 상태가 나았으므로 조슈아는 미소지었다. “넌 너희 아버지만큼 특이한 것 같지 않아 마음이 놓이는데.” “난 아버지를 안 닮았어.” “응, 그래. 아니, 솔직히 조금은 닮은 것 같아.” 사실 조슈아는 소녀와 대화하는 것보다 배를 좀더 살펴보고 싶었다. 그래도 그냥 가버리는 것은 실례가 될 것 같아 조금 궁리하다가 말했다. “같이 배를 둘러보지 않을래?” “응.” 조슈아가 뱃머리 쪽으로 걸어가자 소녀가 따라왔다. 조슈아는 처음에 소녀가 배 안을 안내해 주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건 그냥 기대에 불과했다. 소녀는 이 배에 대해 조슈아보다 더 아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이 키는 정말 항해용인 걸까? 배 밑바닥에도 키가 붙어 있었지만 사실 하늘을 날 때는 쓸모가 없을테니 말이야.” “글쎄.” “책에도 이런 얘기는 안 나와 있었고.” “책?” “너희 아버지께서 쓰신 비행선 조종 책 말이야. 그 책을 조금 전에 외웠지 뭐겠어.”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좀더 걷다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사실 그 책은 두껍기만 하고 쓸데없는 얘기가 절반이었어. 비행선을 만들게 된 동기, 만들기 위해 수집한 자료, 사용한 재료, 만든 과정, 포기할 뻔 했을 때의 기억, 완성한 후의 희열, 앞으로의 기대 같은 것만 잔뜩 씌어 있어서, 실제로 조종하는 법에 대한 건 얼마 안되더라고.” “그래?” 조슈아는 점차 이 애가 쥬스피앙의 딸이 맞나 의심쩍은 생각까지 들었다. “넌 그 책 전혀 안 봤니?” “이제부터 볼 거야.” 그것도 이상한 대답이었다. “지금까지 안 봤다면서 왜?” 그러자 소녀가 고개를 돌려 조슈아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너랑 같이 갈거니까.” 지금 잘못 들은 건가, 아니면 문제가 생긴 건가 당황하고 있을 때, 입구쪽에서 발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점차 가까워졌다. 다른 사람들도 홀로 들어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조슈아는 일단 그들에게 가보려는 생각에 소녀에게 말했다. “잠깐만.” 줄사다리를 몇 단 내려가다가 훌쩍 뛰어내렸다. 몸이 가벼워 그 정도는 문제없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조슈아는 문득 두통을 느꼈다. 아주 짧게, 그런나 번개처럼 홱 스치고 지나갔다. “아······.”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겨우 평정을 되찾고 세 사람에게 다가갔다. 리체가 한 걸음 나오며 말했다. “오늘 당장 출발해도 된대.” “그래? 그런데 네 아버지는 어떻게 되는 거야?” 쥬스피앙이 대신 대답했다. “세자르라면 들판에서 잘 놀고 있는 것 같군요.” “혹시 들판에 다른 사람은 없고요?” “다른 사람? 음, 경기병 한 떼가 돌아다니던데?” 이 말을 쥬스피앙이 한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세 사람은 모두 바짝 긴장했다. 특히 리체가 당황했다. “언제부터요? 아니, 그걸 본 게 언젠데요?” “세자르 말이야, 아니면 경기병 말이야?” “몽플레이네 씨 말예요!” “경기병!” 리첼과 막시민은 각자 다른 대꾸를 하고 서로의 얼굴을 봤다. 그리고 표정으로 둘이 똑같은 걱정을 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세자르라면 방금 전이야. 경기병은 너희와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이지.” “혹시 지금도 볼 수 있어요?” 쥬스피앙은 로브 안쪽에서 두툼한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더니 아무 것도 씌어 있지 않은 곳을 찾아 펼쳐 들고 있으라고 지시했다. 쥬스피앙이 펜을 뽑아 그 안에 커다란 원을 그려 넣자, 갑자기 원 속에서 여러 가지 형태가 불쑥불쑥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나무가, 바위가, 풀이, 그리고 말과 사람이. 처음에는 펜으로만 윤곽만 그린 것 같은 모양이었지만, 곧 구체적인 모습으로 변했다. 먼저 보인 것은 세자르였다. 그는 드디어 결계석 주위로 돌아와 있었다. 결계석을 들여다보며 어떻게 할까 궁리하는 표정이었다. “됐냐?” 막시민이 고개를 흔들며 급히 말했다. “경기병을 비춰 봐요.” 그러자 쥬스피앙은 두루마리를 더 넓게 펼치게 하고는 빈자리에 다시 원을 그렸다. 거기서도 조금 후 형태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경기병들은 이제 서 있었다. 모여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막시민은 찾던 사람을 얼른 발견하지 못했다. 이 두루마리를 통해서 볼 때는 사람의 얼굴이 마치 움직이는 펜 그림처럼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드디어 발견했다. 물론 그들은 그자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결코 잘못 볼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사람의 얼굴을 대뜸 잡아 으스러뜨릴 수 있을 것 같은 거재한 손. 막시민과 조슈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돌처럼 굳어져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리체는 펄쩍 뛰다시피 하며 소리질렀다. “얼른, 얼른 몽프레이네 씨를 여기로 데리고 들어와요! 얼른요!” 관심 없어 하는 아버지지만 당장 위험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니 못 견디겠던 모양이었다. 쥬스핑앙이 이해 못하겠다는 듯 세 사람을 번가아 봤다. “도대체 왜 그래? 밖에 빚쟁이라도 왔나?” 그 때 세자르 몽플레이네는 문제의 결계석을 들여다보며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만하면 일도 다 끝날을 텐데 왜 아직 안 부르는 거야?” 그는 돌을 손으로 쓸어 보이다 이 돌로 목소리를 전달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미쳤다. “사람을 보내는데 목소린들 못 보내겠어” 언제 작동될지 모르는 비석 위에서 쪼그리고 않아 기다리느니 몇 번 불러보는 것쯤 어려울 것도 없다 싶었다. 그는 잠시 궁리하다가 비석에 입을 바짝 갖다대고 이렇게 말했다. “어이.” “이봐.” 이걸로는 알아듣는다 해도 별 도움이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는 목소리를 높이고, 내용도 달리 했다. “어니, 이봐! 세상에서 가장 영리하고 위대한 마법사라면 분명히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텐데! 고상하고, 천재적이며, 잘생기고, 딸도 예쁜 마법사라면 내 목소리가 들릴 텐데!” “저 소린 뭐야?” 가장 먼저 알아들은 사람은 귀가 예민한 조슈아였다. 쥬스피앙이 두루마리를 도로 말다 말고 물었다. “무슨 소리?” “고상하고 천재적이고 잘생기도 딸도 예쁜 마법사를 찾는 소리요.” “그건 난데?” 옆에서 리체가 다그쳐 물었다. “그 목소리, 몽플레이네 씨였어?” 조슈아가 고개를 뜨덕이자 리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자기 목소리도 들릴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소리쳤다. “거기서 뭘 하는 거야? 지금 그런 태평한 소리나 할 때야?” 잠시 조용하다 싶더니. 이번에는 모두의 귀에 분명하게 들렸다. 외침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들었소? 나 좀 데려가시구려! 쥬스피앙은 ‘이런 빌어먹을 놈’ 정도의 말을 씨부렁대며 손끝을 휘둘렀다. 다음 순간 세자르는 쭈그리고 않은 자세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그는 가타나는 순간에도 이렇게 말했다. “어이.” 리체가 두루마리를 놓아버리고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웠다. 다친 데가 없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당장 화를 냈다. “우리를 이런 곳으로 덩그러니 보내 놓고 어디서 헤매이다 이제야 나타나요! 그 동안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아요? 쓸데없는 걱정이나 시키고!” “나도 고생했는데, 리체 네가 식량을 다 가져갔잖아. 앞으로는 나눠서 갖고 다니자고.” “그런 것보다도, 아니 그게 요점이란 말이에요? 난······.” “그게 요점은 아니야. 요점은.” 두리번대다 드시어 조슈아를 발견한 세자르는 그에게 시선을 맞춘 채 느릿느릿 말했다. “‘그 놈’이 왔습니다. 막시민이 대신 대답했다. “봤어요.” 대꾸하는 것과 함께 쥬스피앙에게 몸을 돌렸다. “우리, 지금 당장 출발할 테니까 연료를 부탁합니다.” 쥬스피앙은 서두르는 기색 없이 두루마리를 다 말아 도로 허리춤에 꽂더니 말했다. “출발하는 건 좋은데, 갑자기 서두르는 이유는 뭐냐? ‘그 놈’이 누군데 그래?” 리체가 아직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빠르게 말했다. “제가 맨 처음에 말했잖아요! 우리를 뒤따라오는 깡패 같은 놈이 있다고요. 그 놈과 얼굴 마주치기 싫으니까 당장 떠나게 해주세요.” “그러니까 밖에 있는 그 경기병들한테 들키기가 싫다 이거야? 그런데 이거 어쩐다?” 쥬스피앙이 부정적인 뉘앙스로 이야기하는 순간, 세 사람이 동시에 달라붙어 소리쳤다. “왜요, 무슨 문제가 있는데요?” “이 비행선 말야.” 세자르까지, 넷의 눈이 모두 쥬스피앙에게 쏠렸다. “일단 밖에 나가야 날릴 수가 있는데.” 그 때 남자는, 들판 가운데 쭈그리고 앉아 뭔지 모를 소리를 커다랗게 지껄이다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자가 있던 곳에 와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외침 소리가 아주 잘 들렸던 것이다. 남자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비석처럼 생긴 돌판 하나가 덩그러니 놓인 것이 보였다. 혼자서 얼마간 들여다보고 있던 남자는 마법사이자 부관인 사내가 다가오자 그 돌을 가리켜 보였다. “찾았습니다. 이게 바로 그 결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표지임이 틀림없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질문했다. “그런데 이거 말도 전해지는 건가?” “확실하진 않지만 가능할지도요. 그런데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남자는 빙그레 웃더니 말했다. “나야 늘 할 말이 많지.” 모두의 머리 위에서 가볍게 목을 고르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음, 크흠. 조슈아는 흠칫하여 눈을 크게 떴다가, 숨을 딱 멈추며 서서히 내리깔았다. 잘못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아니, 사실상 조슈아는 누구의 목소리도 잘못 알아들을 없겠다. “조슈아?” 리체가 나쁜 예감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부르고, 그리고 시선을 위로 향했다. 어느 쪽을 보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사로잡힌 것처럼 꼼짝 못하게 된 것만은 같았다. 막시민은 입술을 꽉 다물며 생각했다. 저 목소리를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았는데. 아, 아, 잘 들립니까? 바로 곁에 온 것처럼 또렷한 목소리였다. 평이하고 사무적인 어조도 똑같았다. 그 순간 세사람은 이곳에서 말해도 저 자에게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뭐, 들린다고 치고.... 어딘지 모를 곳에 계신 세 분, 아니 네 분. 약속을 지키러 왔다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말이야. 약속한 날짜에서 하루가 초과됐군.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해. 쥬스피앙이 침묵이 깼다. “저 놈은 뭐야?” 리체가 퍼뜩 놀라 쥬스피앙을 보다가 그제야 이쪽 목소리는 전달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호르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어쩐지 크게 떠들 기분은 나지 않아 조그맣게 말했다. “깡패죠?” “깡패? 내가 듣기론 잡상인 같은데. 너희들, 물건 값 떼어먹었냐? 도대체 얼만데?” “제발 남의 말 좀 믿어요.” 쥬스피앙은 리체의 말을 믿고 말고 하는 것과는 별개로, 밖에 나타난 자보다 방문객들의 반응에 더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따라서 그는 그 자와 굳이 대화를 시도하지도 않았고, 반면 말을 막으려 하지도 않았다. 막시민은 생각했다. 이 자가 하는 말에 계속 귀를 기울여도 좋은 것일까. 어차피 저쪽과 이쪽은 적대 관계가 분명하고 협상의 여지가 없으니 더 할 얘기 따윈 없다. 들어서 좋은 정보 따위가 나올 리 없는 것이다. 물론 저 자가 말 실수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들리니까 그냥 듣고 있다는 건... 어쩌면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그곳은 안전하다고 믿고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내 생각은 좀 달라. 뭐, 친분 정도는 있겠지. 하지만 선악에 대한 판단은 모두가 다른 거지. 사슴과 사냥꾼 중에 누가 옳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너희와 나도 마찬가지야. 리체가 인상을 썼다. “뭐라고 떠드는 거야?” 쥬스피앙이 말했다. “자기 변명을 하고 싶은 것 같은데?” 막시민은 다시 생각했다. 자기 변명이라고? 왜 저 자가 변명 따위를 하려 하는 걸까. 지난번 만났을 때도 그는 사람들의 기준이 모두 다르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일도, 다른 사람에게는 죽여야 할 죄가 될 수 있다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이건 동어 반복이다. 그는 했던 말을 되풀이하느 걸 좋아하는가? 난 말이야, 사실 너희에게 특별한 원한은 없어. 너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전혀 모르고, 물론 관심도 없고. 그런 내가 이렇게 수고하는 이유는 단 하나, 봉급을 받기 때문이지. 난 그 봉급에 매여 있는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해. 낮게 웃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그가 자신을 ‘샐러리맨’이라고 칭한 건 그 이상으로 자기를 밝힐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역할에 대한 관점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누구든 봉급을 받으면 합당한 일을 해야 되지. 난 의뢰인의 정의에는 관심 없고, 사실 관심 가질 자격도 없어. 봉급쟁이의 고충이나 역할릐 한계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내 일을 방해하려 하지 않ㅇ르 거라 생각해. 사사로운 친분 관계에 얽매여서 다른 사람이 봉급을 받으며 어렵게 하는 일을 방해하는 사람은 넓은 관점에서 본 균형을 모르는 자라 할 수 있겠지. 목소리에서 싱글싱글 웃고 있는 모습이 연상되어 어쩐지 등골이 싸늘했다. 그의 얼굴을 모르기에, 웃는 얼굴 대신 가면밖에 떠올릴 수 없다는 것이 한층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늑대에게 쫓기는 토끼가 불쌍하다고 늑대들을 잡아죽이다가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토끼들 때문에 초원이 망가지고, 다른 초식동물들까지 피해를 보게 된다고. 이 세계의 주인공은 토끼가 아니지. 물론 늑대도 아니야. 누군가를 주인공으로 보고, 주인공을 방해하는 자는 다 악으로 규정하는 건 어린애들의 생각이잖아? 그 때 막시민이 갑자기 팔을 휘두르며 외쳤다. “저 소리, 멈추게 해!” 소리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쥬스피앙 뿐이었다. 그런데 쥬스피앙은 막시민의 말에 얼른 답하지 않고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목소리는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마법사는, 그런 사적인 관점에 휘둘리는 경우가 거의 없어. 마법사는 균형ㅇ르 알지. 특히 그가 ‘훌륭한 마법사’라면 잘 알 거야....... 막시민은 쥬스피앙에게 바짝 다가가 다그쳤다. “멈추게 할 수 없어요? 듣기 싫은데, 저 놈, 입을 막아버릴 수 없냐요!” 그제야 쥬스피앙이 막시민에게 시선을 주더니 대꾸했다. “내가 듣고 있잖아.” “뭐라고요?” “좀 있어봐.” 막시민이 억지로 성질을 누르며 다시 무어라 말하려 하는 순간, 갑자기 크고 또렷해진 목소리가 머리위를 울렸다. 그 소리는 명백히 그 날, 세자르의 집 식당에서 들었던 미친 자의 목소리 그대로였다. 세상에는 죽고 죽이는 자가 있어 균형이 있다는 걸. 조슈아는 천장을 올려다보던 시선을 내렸다. 고개 숙인 그가 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였다. 막시민이 신랄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너, 설마 데모닉 주제에 저다위 한심한 개똥철학에 감화 당했냐?” “아니, 그게 아니라.” 조슈아는 입술을 짓씹으며 말을 이었다. “저 자의 이야기가, 내가 인형을 명분 없이 사냥하려 한다는 말로 들렸어.” 막시민이 날카롭게 대꾸했다. “명분이 왜 없냐? 자기 방어는 생물의 본능이야! 너란 놈은, 누가 널 해치려 하는데 저항할 의지조차도 없냐!” 조슈아도 막시민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면 인형이 날 사냥할 명분도 똑같이 충분하지 않아?” “그 인형은 네가 아니잖아. 네가 추구해야 될 건 너 자신의 생존이야!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도 나야.” 그 순간, 마지막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곧 다시 만나자고. 난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더 이상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한참 동안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조슈아가 눈을 꽉 감으며 관자놀이를 짚는 모습이 보였다. 막시민은 일부러 말을 걸지 않았다. 이윽고 입을 연 사람은 쥬스피앙이었다. 묘하게 침착해진 목소리였다. “출발할 준비를 해라.” 리체가 쥬스피앙을 바라봤다. “더 준비할 것도 없어요. 아저씨가 방법을 알려주기만 하면 돼요. 어떻게 나가고, 어떻게 배를 띄우면 되는지.” “배를 먼저 결계 밖으로 내보내야 돼. 배를 띄우는 일은 내가 한다. 조금 시간이 걸릴 거야. 그 동안 너희가 할 일은 간단해. 시간을 끄는 거지.” “네? 시간을 끌어요?” 불길한 느낌을 받은 리체가 되묻는데 막시민이 입을 열었다. “배를 처음부터 저 자가 볼 수 없도록 먼 곳에 나타나게 할 방법은 없습니까?” 쥬스피앙이 고개를 흔들었다. “비행선이 안전하게 뜨려면 저 들판처럼 넓은 장소가 필요해서 안 돼. 다른 먼 곳에도 들판이야 있겠지만 좌표가 분명하지 않아서 보낼 수 없어. 누군가의 집 지붕 위에 난데없이 떨어뜨리는 일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랬다간 배도 망가질 테니 너희에게도 좋은 것은 없겠지.” “그러면 저희는 비행선 출발 준비가 다 될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면 안돼요?” “나는 혼자 밖으로 이동할 수 있지만, 내가 이미 나가서 배에 타고 있으면 너희를 누가 내보내 주는데? 그리고 번거롭지만 굳이 그렇게 한다 해도, 비행선을 처음 가동시키기 위해서는 얼마 동안 집중해서 주문을 적용할 시간이 필요한데, 그 동안 방해하는 놈들을 막아야 할 것 아니야?” 그 말을 듣자니 갑자기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졌다. “잠깐, 저 배를 아직 한 번도 날려 본 일이 없습니까?” “맞아. 왜?” 모두가 멍해졌다. “......젠장, 날긴 하는 겁니까?” 배를 노려보던 막시민이 그렇게 말하자 쥬스피앙이 벌컥 화를 냈다. “이놈이 지금 누굴 의심하는 거야?” “그러다가 갑자기 문제가 생겨서 날지 않으면 어쩔 건데요?” “그런 일은 없어!”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내 배는 완벽해!” “.......” 이제 와서 말다툼을 해 봤자 소용이 없었다. 대안 따위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결국 실질적인 질문을 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배가 뜨는 데는 얼마나 걸리는데요?” “삼십 분 정도?” 저도 모르게 얼굴 근육이 움찔거렸다. “그 정도면 저 자가 우리 셋을 처리하는데 딱 적당한 정도이겠군요.” 그 때 세자르가 입을 열었다. “적당하지 않도록 해 보자.” “그게 가능한 얘기가 아닌데.......” 세자르는 쥬스피앙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앨, 아니 마법사 씨, 환영ㅇ르 만들어 줄 수 있을까?” “환영이라니?” 리체가 묻자 세자르는 그들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우리들과 똑같이 생긴 환영을 만드는 거지. 몇 십 분 정도면 없어지는 그런 거 말야. 그런 것으로 저 자들의 주의를 끌어 다른 곳으로 보낼 수만 있다면, 삼십 분 정도는 어떻게 버티지 않을까?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잘 되지 않으면?” 세자르가 허리에 찬 칼집을 툭 건드려 보였다. “그 땐 여기에 의지해 보는 수밖에.” 8. 아흔 여덟 명의 영혼 “약속하겠습니다. 당신들이 바라마지 않는 ‘그것’을 다시 만들겠노라고. 대륙에 남은 모든 기록과 마법을 모아 이땅에 ‘그것’을 다시 재현하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들을 고향 땅으로 보내 주겠지요.” 막시민이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은 그 즈음이었다. 쥬스피앙이 환영, 즉 그가 ‘그림자 인형’이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 결계석이 있는 곳으로 내보낸 직후, 조슈아가 내내 말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던 것이다. 혼자 괴상한 생각에 잠겨 있겠거니 여겼는데 점차 조슈아의 안색이 새파랗게 되어 가는 것을 발견했을 때는 다그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조슈아, 너 왜 그래?” 그러나 조금 떨어진 곳에 선 조슈아는 대답이 없었다. “조슈아!” 시선이 허공에 가 있다 싶었다. 다가가려는 순간, 주문을 외며 손가락을 꼽아 뭔가 세고 있던 쥬스피앙이 말했다. “됐어. 빚쟁이들이 흩어졌군. 그럼 준비 됐겠지? 한꺼번에 나간다!” 말이 떨어지는 것과 함께 눈앞이 하얗게 되었다가, 다른 곳으로 바뀌었다. 너무나 빠르고 선명한 변화였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잠깐 비틀거릴 정도였다. 어제 결계석을 찾아 헤매던 들판에는 이제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범선 한 척이 우뚝 솟아 있었다. 오래 전 바다였던 곳에 홀로 남은 유적처럼 풀 숲에 파묻힌 배는 몹시 이상하고 낯설어 보였다. 높이 솟은 선체 옆에는 그들 네 사람만이 있었다. 쥬스피앙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들판으로 나오자마자 바로 배 안으로 다시 이동한 모양이었다. 배는 다행히 비탈지고 풀이 길게 자란 곳에 떨어져서, 선체 아래 선 그들의 존재를 어느 정도 가려주었다. 세자르가 가장 먼저 평소 모습을 되찾았다. 그는 무엇보다도 풀숲 너머로 인기척이 있는지 살폈다. 그리고 귀를 기울여 보았다. 아직은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세자르는 칼을 뽑아들더니 말했다. “서로 멀리 떨어지면 안 돼.” 이윽고 일어난 리체는 세자르의 집에서부터 갖고 나온 목검을 쥐더니 막시민을 보며 말했다. “둘 중 하나는 조슈아에게 주지 그래?” 막시민은 몽둥이와 짤막한 칼, 두 가지를 갖고 나온 목검을 쥐더니 막시민을 보며 말했다. “둘 중 하나는 조슈아에게 주지 그래?” 막시민은 몽둥이와 짤막한 칼, 두 가지를 갖고 있었다. 쥬스피앙에게서 빌린 것인데, 물론 그는 하나를 조슈아에게 줄 작정이었다. 다시 돌아보았을 때, 다행히 조슈아는 정신을 차린 것같았다. “너 이제 괜찮냐?” 대답은 조금 사이를 두고 돌아왔다. “......응.” 그러자 막시민은 칼을 덥석 쥐어줬다. 그리고 잠깐 맡기는 것 같은 어조로 말했다. “이거 들고 있어.” 조슈아는 조금 멍한 눈으로 막시민의 손과 자기 손을 번갈아 보더니 말했다. “왜 칼을 나한테 주는 거야? 납보다는.......” “난 그런 짧은 칼보다 몽둥이 쪽이 더 편해.” 어차피 조슈아가 전력에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갑자기 위험하게 된다면 역시 칼 쪽이 좀더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조슈아가 마지막으로 칼을 잡아본 때는 모나 시드 학원을 다니던 시기였다. 그 때도 제대로 했다고 볼 순 없었고, 그나마 신이 나서 휘둘러 본 일이 있다면 어려서 비취반지 성 뒤편 숲에서 아버지와 전쟁 놀이를 하던 시절뿐이었다. 아르님 공작은 말할 나위 없이 훌륭한 검사였다. 그런 아버지가 하나 뿐인 아들에게 검술을 가르치려 해본 때도 오직 그 시절뿐이었다. 처음에는 무척 어색했다. 보다 못한 리체가 자세를 바로 잡아 주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곧 기억을 되살린 조슈아는 신기하게도 도움 없이 자세를 제대로 취했다. “자, 한 팔 간격 정도로 떨어져 서십쇼. 너희 둘도 서로 등을 보호하도록 반원형으로, 그래. 그리고 되도록 큰 소리는 내지 말도록 하자.” 세자르의 말이었다. 지금은 그의 견해가 가장 쓸모 있는 때였다. 막시민은 배 안에 있는 쥬스피앙에게 언제 다 되냐고 소리쳐 묻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참고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무작정 기다리자니 미칠 노릇이네.” 막시민이 중얼거리자 리체가 문득 생각해 낸 듯 말했다. “그런데 저 아저씨 딸애도 마법을 배웠을 텐데, 순간 이동문제는 좀 도와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럼면 벌써부터 여기 나와 위험을 무릅쓰지 않아도 되잖아.” “딸인지 뭔지 어디로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잖냐.” 막시민은 쥬스피앙이 딸을 여간 애지중지하는 것이 아니다 싶었기에 별로 기대도 안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또한 쥬스피앙이 샐러리맨이 한 말에 영향ㅇ르 받아 이들의 싸움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꺼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있던 조슈아가 불쑥 말했다. “나, 봤는데?” “보다니?” “이 댁 아가씨 말야.” 어느 귀족 집안의 딸을 언급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그건 조슈아의 말버릇 탓이고 실제로 가리킬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리체가 물었다. “티치엘 말이야?” “이름은 말하지 않았지만... 쥬스피앙 씨, 따님이 한 사람 뿐이지 않아?” “그거야 그렇지. 그런데 언제 봤어? 난 못 봤는데?” “아까 책을 읽다가 배에서.......” 말하다 보니 그 애가 좀 수상쩍었던 것이 생각났다. 조슈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티치엘이라는 아가씨는 어떻게 생겼어?” 리체가 기억을 더듬더니 대꾸했다. “솔직히 하도 어렸을 때 봐서 잘 기억도 안 나. 떠오르는 거라곤 백금빛 머리카락 정도? 좀 착한 인상이고.” “백금빛?” 조슈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을 때, 머리 위에서 쥬스피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드니 뱃전 너머로 상체를 반쯤 내민 모습이 보였다. “다들 멀찍이 물러서! 한 열 걸음 정도!” 시키는 대로 물러나면서 조슈아가 외쳐 물었다. “저, 여쭤볼게 있는데...따님은 지금 어디 있지요?” “내 딸애? 그건 왜?” “그게, 집 안에서 마주쳤던 것 같아서요.” 쥬스피앙은 무슨 황당한 소릴 하느냐는 표정이었다. “내 티치엘을 보름 전에 아노라마드로 심부름을 보냈는데 네가 어떻게 봐?” “네?” 쥬스피앙의 얼굴이 뱃전에서 사라졌다. 막시민이 의심쩍은 표정으로 조슈아를 쳐다봤다. “너, 뭘 본 거야? 혹시.......” 막시민은 리체가 듣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서 끝말을 흐렸다. 조슈아은 대꾸 없이 당황한 표정으로 흙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쥬스피앙이 다시 뱃전에 나타났다. “너, 정말로 티치엘을 봤어?” “잘 모르겠어요. 그냥 어떤 여자아이를 만났을 뿐이에요.” 그러자 쥬스피앙이 대뜸 소리쳤다. “혹시 유령을 봤니?” 막시민과 조슈아가 동시에 흠칫하여 고개를 드는데 리체가 픽 웃어버렸다. “대낮에 무슨 유령 타령이에요. 하녀라도 봤던 거겠지.” “우리 집엔 하녀가 없다. 결계 때문에 밖에서 누가 들어올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네가 본 건 분명.......” 쥬스피앙이 그렇게 말하는 동안 조슈아는 뱃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쥬스피앙의 뒤에서 어떤 사람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그것도 두 명이나. 혹시 반대쪽에서 습격해 온 자들인가? “조심해요! 뒤에!” 조슈아가 외치자 쥬스피앙은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조슈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무도 없는데?” “.......” 조슈아는 말문이 막힌 채 당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막시민이나 리체도 조슈아가 무얼 보았는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조슈아의 눈에는 분명히, 그리고 지금도 보이는 것이다. 두 명, 세 명, 그리고 이제 다섯 명이 된 사람들이. 그들은 쥬스피앙의 양쪽에서 나란히 뱃전에 몸을 기댄 채 조슈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뻔뻔스러울 정도로 평온한 표정으로. “조슈아.” 막시민이 불렀지만 조슈아는 뚫어져라 뱃전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조슈아, 너... 정말로 보이냐?” “.......” “조슈아.......” “조슈아!” 조슈아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들이 차례로 입을 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야 내 모습이 보이는 모양이지?> <그동안 네게 얼마나 많은 말을 걸어 왔는데.> <들은 체도 해주지 않던 널 한때는 미워할 뻔했지.> <하지만 이젠 우리 사이 좋게 지낼 수 있겠군.> <아떤가, 젊은 아르님이여?> 마치 한 사람의 각각 다른 입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어지는 문장을 차례로 말했다. 그러나 그들 중 하나는 여자였고, 나머지 넷 중에서 하나는 노인에 가까웠다. 조슈아는 우뚝 선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켈스니티 때문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왜 갑자기 나타났을까? 지금까지는 단지 목소리에 불과하던 자들이 어떻게 한꺼번에 다섯 명이나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무엇보다도 그들의 모습은 흐릿하지 않고 선명했다. 평소 켈스니티를 볼 때처럼 말이다. 만약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줄 다른 사람들이 없었다면 조슈아는 그들ㅇ르 보통 사람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켈스니티가 한 말이 떠올랐다. ‘아무리 그들이 네 주위를 맴돌더라도 어떤 반응도 보여선 안 돼’. 반응을 보였던가? 아, 그렇다....... 배에서 본 소녀의 말에 대꾸했지 않은가. “유령이 어쩌고저쩌고, 도대체 무슨 얘기야? 그거 진심으로 하는 얘기인 거야?” 어지러운 머릿속을 뚫고 리체의 목소리가 들어오고, 그와 동시에 막시민이 그를 부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막군.... 켈스의 말이 맞았어.” 조슈아의 목소리는 혼자 중얼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그럼 그게 정말... 그런 거냐?” 뱃전에 섰던 사람들이 하나하나 다시 배 안쪽으로 모습을 감췄다. 정신차리고 살피니 쥬스피앙도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조슈아가 고개를 돌려 막시민을 보려 했을 때, 이미 일행의 사이에 네 명이나 되는 낯선 사람들이 서 있었다. 조슈아가 눈을 크게 뜬 채 말을 못하고 있는데 막시민이 다시 물었다. “정말 보였냔 말이야. 지금도 보여?” 조슈아는 감히 그들 사이에 유령이 서 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이 유령들은 말을 걸어오진 않았다. “보...였어.” “많아?” 그 때 들판 너머만 바라보고 있던 세자르가 입을 열었다.‘ “유령이란 게... 전 희끄무레한 그림자 같은 걸 거라고 생각해 왔는데, 사실은 보통 사람과 똑같게 보인단 말입니까? 이 댁 따님으로 착각했을 정도로?” 조슈아는 가까스로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리체가 당황해서 자기 손으로 입을 막았다. “말도 안 돼.” 리체의 얼굴을 본 막시민은 어떻게든 설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두서없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조슈아한테 영매의 힘이 좀 있는 거야. 그래서 가끔... 유령이랄까, 뭐 그런 것들이 보이는 건데, 원래는 한 명만.......” 리체의 눈이 커지는 것을 보며 더 낫게 설명할 방법이 없나 궁리했지만, 사실 없었다. 게다가 그런 유령이 한 명도 아니고, 늘어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고 말했다간 무슨 반응이 나올지 모르겠다 싶어 말을 더 이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세자르가 굉장히 신중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럴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싶은데요. 그 소릴 들으니 생각나는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어제 얘긴데, 제가 혼자 이 들판에 있을 때 어떤 아가씨를 만났거든요?” 막시민도 세자르를 돌아봤다. “그런데 도저히 이런 곳에 혼자 있겠다 싶은 모습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귀족 댁 아가씨처럼 보였는데, 옷차림도 파티에 온 것처럼 무척 곱더라고요. 길을 잃은 기색도 아니고, 그런데 이런 들판에 혼자 앉아 있다니 이상하잖습니까? 그래서 몇 마디 나웠는데, 경기병들이 잠깐 나타난 사이에 어느새 사라져 버렸더라고요. 그런 칵테일 드레스 같은 걸 입고 뛸 수도 없고, 숨을 곳도 전혀 없는데 말이지요. 도련님 말씀대로라면 그 아가씨도 유령이 아니었을까요?” 리제가 한심한 듯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아빠, 유령 얘기 이거 유행 아니야. 뭐 좋은 거라고 따라해?” 리체는, 아직 잘 모르는 사람인 조슈아는 그렇다 치고 자기 아버지에게까지 그런 능력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글쎄다, 나도 몰라. 솔직히 지금 얘기를 듣지 않았다면유령 어쩌고 하는 얘기는 생각도 안 했을 거야. 정말 보통 사람과 똑 같았거든. 이런 곳에 있는 게 말이 안 되는 모습이란 것만 빼면. 아, 그런데 도련님.” 조슈아와 세자르의 눈이 마주쳤다. “어렴풋이 그 아가씨가 누굴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딱 떠오르지가 않았거든요? 그런데 이제 생각났습니다. 지금 보니 알겠군요.” 세자르는 조슈아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소공작을 닮았어요.” 네 필의 말은 여전히 저만치에서 달리고 있었다. 잠깐이면 따라잡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간격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말들은 멈칫거리지도 않았고, 기수들도 지치지 않았다. 욕을 하며 채찍질을 해대는 경기병은들 아이들 다루듯 따돌리며, 끊임없이 직선으로 달리고 있었다.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멀리 휘어진 강 하류가 보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저 놈들 저대로 갈 참인가?” 한 명이 중얼거린 소리는 엄청난 말밥굽 소리 때문에 주위 사람에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실은 모두의 생각이 비슷했다. 강을 향해 똑바로 가고 있는데, 강에는 다리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속도도 엄청나다. “속도 줄여! 어이!” 도망자들에게 외친 것이 아니었다. 경기병을 이끌던 장교의 외침이었고 그렇지 않아도 속도는 줄어들고 있었다. 저 강은 하류였다. 말을 타고 건널 수 있는 깊이나 넓이가 아니었다. 도망자들이 미친 듯 달린다 해서 함께 빠져죽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반원 진형! 포위한다!” 순식간에 진형이 벌어졌다. 멈춘 말들이 저마다 열기 어린 콧김을 내뿜었다. 포위는 완벽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을 위심할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졌다. 도망자들은 말을 타고, 그대로 강을 건넜다. 수면을 밟고서. “어, 어떻게 저런·······.” 다들 자기 눈을 의심하며 서로 얼굴을 마주봤다. 그 때 뒤에서 다른 말 하나가 맹렬한 속도로 달려와 멈추었다. 탄 사람은 다름 아닌 부관이자 마법사인 자였다. “모두 처음 집결한 곳으로 빨리 돌아가라! 명령이다!” 당황한 경비병들이 웅성거렸다. 그는 말머리를 돌리며 다시 한 번 외쳤다. “저건 환영술에 불과해! 어서 서둘러! 진짜를 놓치면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거다!” ‘대가’라는 말에 자신들의 지휘관, 그 남자의 무서움을 떠올린 경기병들은 그제야 자기 주위에 남자가 이미 없음을 깨닫고 안색이 변했다. 처음에는 분명 함께였는데 언제 없어졌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는 이 상황을 언제 눈치챘던 것일까? 어디서부터 되돌아간 것일까? 정확히 알지 못했기에 내버려둔 것 아닌가? 답은 하나뿐이었다. 남자는 경기병 모두와 자신 한 사람을 나누는 것으로, 두 부대를 편성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모든 것은 한꺼번에 일어났다. 풀숲 너머에서 일어난 남자가 천천히 걸어나왔을 때, 조슈아는 그를 보지 못했다. 얼굴이 새파래진 채 세자르를 쏘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막시미은 가장 먼저 상황을 눈치채고 도리 없이 막대를 꽉 움켜쥐었고, 리체는 배를 올려다보며 무어라 외치려 했다. 남자는 챙 넓은 솜브레로(sombrero)를 앞으로 푹 눌러써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거리를 두고 멈춰 서더리 버릇대로 먼저 말을 걸었다. “내가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도리어 너희를 기다리게 했군.” 손끝으로 챙을 올려 잡더니, 시선이 뱃전 위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들판에서 배인가. 강은 한참 더 가야 나올텐데. 너희 넷이서 이제부터 번쩍 들고 운반할 참인가?” 농담도 아니고, 웃기지고 않고, 물론 뭇으면서 말하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말하며 스스로 즐기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막시민은 대꾸를 해야 할까 순간적으로 계산해 보았다. 대꾸가 소용없으리라는 판단을 하는 순간, 갑자기 남자가 쇄도해 왔다. 막시민과 리체가 거의 동시에, 똑같은 자세로 손에 쥔 것을 휘둘렀지만 아무 것도 맞지 않았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공격을 당하지도 않았다. 의아한 눈을 들자 그들로부터 단 두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선 남자가 보였다. 그런데 모습이 좀 이상했다. 뭔가에 가로막힌 듯한 자세인데, 막고 있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남자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뭐지.” 그 때 낮선 누군가가 말했다. <젊은 아르님을 지켜 주라는 부탁을 받아서 말이야.> “흡!” 리체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목검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그녀도 들었다. 모습 없는 허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말이다. 모두가 같은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남자는 오래 놀라고 있지 않았다. 곧 목소리는 노여움으로 변했다. “투명화 나부랭이라면 집어치워.” 남자는 통과하려 했다. 그러나 상대는 투명화 마법을 쓴 인간 따위가 아니었다. 그랬더라면 오히려 속도와 감각에 의지하여 급소를 노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를 막아선 것은 사람이 아니라 일종의 벽이었다. 매끌매끌하지만 물론 보이지 않는. “·······.” 다가오지 못한 남자는 조슈아를 쏘아보았다. 처음에는 조슈아도 그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잠깐만에 시선의 초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슈아는 남자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냥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는··· 뭘 원해? 난 줄 것이 없어. 너희가 원하는 것 따위는 내게 없어. 아무 것도.” <물론 넌 우리에게 줄 것이 없어. 참 안타까운 일이야.> “난 너희의 소원 따위 안 들어줘.” <너에게는 들어줄 힘도 없어. 젊은 아르님, 어린 데모닉.> 그들의 대화는 이곳에 선 사람 전부에게 들렸다. 리체는 지금 대낮이라는 사실도 느끼지 못한 채 온 몸을 덜덜 떨었고, 세자르는 눈만 커다랗게 뜬 채 굳어져 있었다. 오직 막시민만이 당혹감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야, 이거 도대체 몇 명이냐?” 그러나 이제 조슈아는 살아 있는 사람의 말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허공에서 허공으로 옮겨지는 눈빛이 영락없는 미친 사람이었다. :누가 날 도우라고 부탁한 거지?“ <우리가 믿고 따르는 친구, 우리의 사제.> 그 때 솜브레로를 쓴 남자가 손목 안쪽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뒤집으며 은회색 가루를 흩뿌렸다. 그와 동시에 그를 막아선 벽의 형태가 드러났다. 마법이 깃들인 물체를 감지해내는 ‘힌덴의 가루’는 값비싼 마법 도구지만 지금 같은 때는 확실한 효과를 발휘했다. 자신을 둘러싼 벽의 윤곽이 드러나자마자 재빨리 뛰어 나온 남자는 허리에서 얇은 검을 뽑더니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세자르를 향해 가볍게 내찔렀다. 그러나 그는 농부 차림의 세자르를 너무 얕보았다. 세자르는 재빨리 몸을 돌리며 다가오는 검을 옆으로 퉁겨내고 반사적으로 자세를 낮췄다. 그러나 다음 번에는 그만큼 운이 좋지 않았다. 남자는 오른발을 번쩍 들더니 마치 손에 쥔 무기처럼 낮게 휘둘러 처진 손을 걷어차는 것과 동시에 검날 아래쪽을 이용하여 기울어진 검을 올려쳤다. 도무지 예상할 수 없었던 엉뚱한 공격 때문에 검을 놓칠 뻔한 세자르는 자세가 흐트러졌다. 발의 유연성과 힘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지 않고는 결코 성립될 수 없는 공격이었다. 남자가 위기에 빠진 세자르에게 여유 있게 검을 들이대려는 순간, 빠르게 옆에서 달려드는 물체가 있었다. 리체의 목검이 검을 쥔 손을 노렸던 것이다. 목검은 날이 없으니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상대의 무기를 떨어뜨리는 것이 가장 나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방향이 오른쪽이었다. 남자의 커다란 오른손이 태연하게 뻗어나가 목검의 날을 움켜 잡아버렸다. 힘것 내리친 것인데도 남자는 손이 아픈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피식 웃으며 리체에게 말했다. “자세는 좋았어.” 남자의 눈이 막시민 쪽으로 돌려졌을 때, 막시민은 쥐고 있던 몽둥이를 바닥에 놓아버렸다. 남자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넌 그냥 포기인가?” “전혀 틀려.” 막시민은 빈손으로 팔짱까지 끼더니 주위의 유령들을 마치 보이는 것처럼 둘러봤다(물론 보이지 않았다). “당신들의 사제로부터 부탁을 받았다고 했죠? 여러분의 협조에 진심으로 감사 드리며, 아르님 소공작을 위협하는 저 분을 좀 먼 곳으로 보내주셨으면 하는데.” <그건 전적으로 젊은 아르님에게 달린 문제야.> “무슨 뜻이죠?” <그가 우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해야만 하지.> “받아들인다는 게 무슨 뜻인데요?” 되묻는 순간, 조슈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령(降靈)을 말하는 거겠죠? 무슨 뜻인지 알 것 같군요. 좋습니다. 내 안으로 들어오시죠. 다 받아들일 테니깐. 전부 다!” 미친 사람처럼 불안정하던 눈빛이 지금은 달랐다. 아니, 미친 사람처럼 보인다는 점은 같았다. 그러나 불안에 떠는 정신병자가 아니라 자신이 미쳤다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는 인간, 막시민이 가끔 말하던 대로 ‘미친 정신을 가진 인간’ 처럼 반들거리는 눈동자였다. “조슈아, 너 그런 짓은!” 그러나 조슈아의 말이 떨어지는 것으로 결정은 끝났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갑작스레 빠른 바람이 일어났다가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이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조슈아는 강한 바람 덩어리가 세차게 부딪쳐오느 것을 느꼈다. 그러나 최초의 충격은 잠시 뿐, 곧 그의 의식은 수많은 다른 의식들의 범람으로 묻혀 버렸다. 첫 번째 움직임은 즉각적이었다. 주위 사람들은 조슈아의 손이 약간 빛나는 것만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곧 눈을 멀게 할 것처럼 강렬한 백열광이 시야를 휘감았다. 이어 실체가 없는 힘이 세차게 밀려와 주위 모든 사람들 퉁겨내 버렸다. 선체까지 날려가 부딪치고 바닥에 떨어진 막시민은 아픈 것도 모르고 벌떡 일어나 소리쳐 불렀다. “조슈아!” 그러나 다시 한 번 빛이 밀려왔다. 저도 모르게 감고 만 눈을 떴을 때는 흡사 빛 속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모든 사물이 지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뭔가가... 떠오른다. 뭐지, 저것은? 사방에서 떠오르고 있는 수백 개의 덩어리는....... 바위들이다!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세자르도, 리체도, 심지어 그 남자도 어디에 있는지 몰랐고, 방금 부딪쳤으니 배가 그대로 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만은 분명했다. 그들이 있던 들판에는 저렇게 많은 바위가 없었다. 바닥을 파내고, 있는지 없는지 모를 암반이라도 들어내기 전에는. 천천히 떠오르던 각양각색의 바위들이 허공에 멈췄다. 바람이 불어와 막시민의 머리카락도 흩날렸다. 그리 센 바람은 아니었지만... 곧 그것은 맹렬한 기세로 앞으로 불어가기 시작했다. 바위들이 한꺼번에 움직여 들판 너머로 내던져진다! 그제야 빛 속에서 조슈아의 윤곽이 약간 드러났다. 그는 어떤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고, 심지어 고개도 약간 숙이고 있었다. 아니,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정신을 잃은 것처럼. 하지만 모든 힘은 그르르 중심으로 몰아쳤다. 빛도, 바람도. 그리고... 그렇게 서 있는 조슈아의 머리카락이 일순 새하얗게 변한 것처럼 보였다. 빛 때문이 아니었다. 그제야 막시민은 본래 까맣던 조슈아의 머리카락이 회색으로 변한 것도 어쩌면 같은 이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코츠볼트를 떠나 켈스니티를 만났기 때문에. 요란한 굉음이 들판 너머르 뒤흔들었다. 날카로운 말의 울음소리와 무언가 떨어지고 부서지고 깨어지는 소라, 그리고 비명과 같은 것도 울렸다. 막시민은 더 참지 못하고 조슈아가 있는 쪽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때 누군가의 손이 다가와 막시민의 발목을 붙잡았다. 흠칫 놀라 뿌리치려 하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가지 마.... 가선 안 돼.” 내려다보나 넘어진 채 막시민의 발목을 움켜잡은 리체가 보였다. “이거 놔. 저대로 둘 순 없어.” “네가 뭘... 어떻게 막니? 그러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뭘 기다리란 거야! 저 자식이 완전히 미쳐서 영영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까지?” 리체는 힘겹게 몸을 약간 일으키더니 아예 양팔로 다리를 꽉 껴안아 버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똑똑히 말했다. “기다리라면 좀 기다려봐. 너만 똑똑한 줄 알아?” 막시민은 무척 당황했다. “도대체 무슨 소릴.......” 그 때였다. 등 뒤에서 뭔가 쿵쿵거리며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정확히는 바닥이 울렸고, 울린 이유는 그 위에 놓인 것의 진동이었다. 사방이 웅웅거렸다. 배였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움직이려고 울리고 있다! “된 거야?” 막시민이 몸을 홱 돌려 배를 올려다봤다. 뱃머리 쪽에서 다섯 갈래의 푸른 광채가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뱃전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고래고래 고한치는 소리도 들렸다. “뭘 해? 다들 얼른 뛰어올라오지 못해!” 리체가 언제 쓰러져 있었느냐는 듯 벌떡 일어나고, 막시민은 그 쪽을 향해 맞고함을 내질렀다. 소음이 너무 커서 소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 “저 자식을 데려가야 된다고요!” “사다리는.......” 소리가 잠깐 묻히는가 싶더니 사다리가 아니라, 밧줄이 하나 스륵 내려왔다. “이걸 타고 올라가요?” 그 반대였다. 쥬스피앙이 밧줄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왔던 것이다. 몸이 가벼워서인지 마법사치고는 괜찮은 솜씨였다. 그러나 내려오자마자 그는 둘에게 고함쳤다. “죽고 싶어서 꾸물거려? 저 난리가 안 보여? 군단 급의 유령들이 모였단 말이다!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가 없어! 서둘러!” 막시민은 밧줄을 흘끔 봤다. “너 먼저 올라가.” 리체에게 한 마디 던지더니 바로 조슈아 쪽으로 몸을 돌렸다. 리체가 붙잡으려 했지만 허사였다. 쥬스피앙은 펄쩍 뛰었다. “거기 멈춰! 그 녀석한테 손대면 안 돼!” 조슈아를 가까이에서 본 막시민은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다. 이제 머리카락만이 아니었다. 얼굴을 비롯하여 드러난 모든 피부가 흡사 청백색이었다. 조슈아는 눈을 뜨고 있지 않았다. 잠든 것 같은 얼굴로, 그러나 흔들리지도 않고 바로 서 있었다. 터질 듯한 빛과 모든 것을 떠오르게 하는 바람에 휩싸인 창백한 모습은 마치, 그러니까 마치...... 인형 같다. 살아 있지 않은 인형. 조슈아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도 나야’ 라고, 그렇게 말했다.... 젠장, 정말 살아 있는 인간을 인형으로 바꿔버리는 것도 가능하단 말인가? 살아 있는 인간을 복사해 인형을 만들었고, 이젠 살아 있는 인간도 인형에 가까워지고 있는 건가? “조슈아.” 그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일까. 선 채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던 조슈아가 서서히 머리를 바로 하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은 다행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기괴해 보였다. 태엽을 감자 인형이 움직이기 시작하느 것처럼 말이다. “조슈아!” 막시민은 손을 뻗었다. 몸은 세워져 있되 의식 없이 축 늘어진 팔 아래 맥없이 흔들리는 손을 잡으려 했다. 그 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는 네 말을 듣지 못해. 그리고 그를 만져선 안 돼. 가벼운 충격으로도 생명이 끊어질 수 있어.> 막시민은 고개를 홱 돌려 소리가 들려온 쪽을 쏘아봤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죽을 지도 모르다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대꾸하는 여자 목소리는 얄미울 정도로 침착했다. <별다른 것은 안 했어. 다만 너무 많은 혼이 들어갔을 뿐이야. 보통 인간이라면 한두 명의 혼도 견디지 못해.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많이 들어갈 수도 없으니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는 문제도 안 되고 말이야. 하지만 그는 달랐어. 조금 전에 그가 강령을 허락하는 순간, 수백의 혼들이 그의 몸 안으로 드렁가려 했어. 이를테면 경쟁을 한 거지.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가진 강령의 힘이 너무 강력했어. 그 때문에 너무 많은 혼이 한꺼번에 들어가고 말았어.> “도대체 몇 명이 들어갔는데 그래!” <아흔 여덟. 그러니 그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외부 의식들 속에서 자신의 의식을 놓쳐버린 것도 무리는 아니지.> 순간 머릿속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한 사람 안에 아흔 여덟 명의 혼이 들어 있다고? “그럼 죽을 지도 모른다는 말은.......” <말 그대로야. 그는 데모닉이지? 하지만 그의 정신력이 아흔 여덟의 혼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하다 해도 인간의 몸은 물리적 실체이니까 그렇게 무리한 활동을 할 순 없어. 다시 말해 지금, 터질 듯한 상태에서 멈춘 거야. 자칫 건드렸다가 바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대꾸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그럼 전부 도로 나오면 되잖아! 그 혼인지 뭔지 하는 작자들도 조슈아가 죽기를 바라진 않을 것 아냐!” <그것도 간단한 일이 아냐. 지금 저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모두 그 혼들의 힘이야. 여러 명이다 보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영력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 그런데 그걸 통제해야 할 젊은 아르님은 의식이 없어. 비유하자면 미친 듯 달리는 말을 탄 기수가 정신을 잃은 상태랄까? 말에게 명령을 내리자면 기수가 정신을 되찾아야 될 것 아니야?> 이런 상황에서 비유까지 하는 여유가 유쾌하게 느껴질 리 없었다. “뭘 그렇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말하는 거야? 나한테 설명만 하면 책임이 없어지는 줄 알아? 당신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들에게 명령을 내려서라도 멈춰야 될 것 아니냐고!” <안타깝지만 의사 소통도 안 돼. 인간의 몸 속에 들어간 영혼이 외부와 대화를 하려면 도리 없이 그 인간의 몸을 이용해야만 돼. 다시 말해 젊은 아르님의 입술로 말해야 된단 말이야. 그런데 아흔 여덟이나 되니 그 중 누가 말해야 될까? 그들끼리 서로 의사 소통이 될 리도 없어. 만일 그들이 한꺼번에 말을 시도한다면, 예상되겠지만 끔찍한 결말로 끝날 뿐이라고.>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이야?” <방법은 하나 뿐. 우리의 사제가 와야 해. 그는 우리 모두에게 한꺼번에 말을 전할 수가 있어. 그래서 지금 그를 찾고 있는 중이야.> “사제라면, 혹시 켈스니티? 그때까지 침착하던 여자의 목소리가 놀란 듯한 것으로 바뀌었다. <네가 사제를 알고 있어? 어떻게 알고 있지?> 당황한 가운데에서도 막시민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슈아는 켈스니티가 다른 유령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있다고 말했다. 더구나 얼마 전에 다른 유령들에게 반응을 보이지 말라고 몇 번이나 강조한 것도 켈스니티가 아니었던가. 그런 켈스니티가 저들의 사제이며 심지어 모두와 한꺼번에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지금 듣고 있는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가 맞지 sdksg는 부분이 있을 때는 어디까지 믿을까 말까 나눠보는 것보다 전체 상화을 부정하고, 처음부터 새로 생각하는 것이 빠르다. “거짓말하지 마. 켈스니티가 너희의 사제라고? 오히려 반대겠지. 켈스니티는 오래 전부터 너희가 조슈아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어. 너희가 지금 같은 일을 저지를까봐 우려했단 말이야. 너희는 켈스니티가 없는 틈을 타서 목적을 이뤄보려 했지만, 네 입으로 말한 대로 뜻밖의 상황이 생겨서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을 하나 가져보려던 시도는 실패했어. 그런 너희에게 조슈아를 살릴 마음이 있을까? 살아난다면 그것대로 좋겠지만, 죽어도 그만이라 거겠지? 하지만 충고 하나 할까. 지금처럼 너희의 힘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은 조슈아 외에는 어디에도 없을 거다. 그건 조슈아 하나 때문에 이 자리에 몰려든 수많은 유령들의 존재가 반증하는 거지.” 어디까지 본심을 찔렀을까? 대답이 얼른 들리지 않는 것은 제대로 의도를 간파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모조리 오해였던 탓일까? 하지만 일단 시작한 이상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막시민은 허공을 한 번 쏘아보고 조슈아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자, 나올 마음이 있어, 없어? 사제가 와야 한다느니 하는 헛소리는 그만 집어치우라고. 왜 못 나온다는 거야? 내가 보기엔 그 까닭은, 너희들이 서로 양보를 할 생각이 없어서야! 고상한 목적 따위는 없고 전부 자기 욕심만 생각하는 썩어빠진 놈들이기 때문이라고!” 그 때였다. 조슈아를 휩싸고 있던 광채가 일순 흐려지고, 동시에 다른 빛이 나타나 보호하듯 그의 몸을 둥글게 감쌌다. 누군가 나타난 것일까? 막시민이 고개를 돌리자 쥬스피앙이 와 있는 것이 보였다. 새로운 빛은 그의 힘이었다. “마법도 모르는 어린 녀석이 유령을 상대로 겁도 없이 잘도 떠들더군 그래. 하지만 덕택에 이걸로 됐다. 네가 주의를 끌어 주는 틈에 보호 결계를 하나 쳐 놨어. 이제 저들은 나갈 수만 있고 도로 들어갈 순 없게 됐어. 조금만 기다려 봐. 몇 명만 줄어들면 돼. 이미 줄어들고 있어.” 막시민은 불안감을 완전히 떨칠 수가 없었다. “기다리라고요?” 쥬스피앙은 젊은 사람들처럼 눈을 흘겼다. “이 의심 많은 놈아. 저들은 조슈아가 가진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단 말이다.” 막시민은 쥬스피앙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잠시 후, 놀랍게도 조슈아는 눈을 번쩍 떴다. “너, 정신이 드냐?” 조슈아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들판에 휘몰아치던 공기와 돌의 흐름이 즉시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 때 조금 전 막시민과 대화하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우리의 사제가 오는 편이 좋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어. 하지만 너, 우리와 사제의 반목을 알고 있었구나. 그래, 우리는 사제가 오기를 바라기도 하고, 바라지 않기도 했지. 만일 그가 온다면 우리를 가만히 두려 하지 않을 거야. 후후후.......> 무척 불쾌한 웃음소리였지만 일이 다 해결된 지금 혹시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막시민은 더 대꾸하는 것을 삼갔다. <저 아인 정말 보통이 아니구나. 고작 열 명이 줄어들었을 뿐인데 바로 정신을 되찾았다. 여든 명의 혼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란 건가. 하지만 한 번 길이 열렸으니 우리 언제든지 다시 올 거야.> 그것만으로 끝나고 목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 소리의 울림이 귀에 남은 듯할 뿐이었다. 서늘한 기분이 가시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곁에서 쥬스피앙이 말했다. “유령의 잔소리 따위야 아무래도 좋겠지. 자, 적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저 자식을 데리고 얼른 가버려. 너희가 기껏 사흘 동안 얼마나 나르 귀찮게 했는지 조용한 일상이 백 년 전의 일 같구만.” 막시민은 말없이 조슈아를 들쳐업었다. 둘이 먼지만이 여전히 맹렬한 들판을 가로질러 배가 있는 쪽으로 사라지자 쥬스피앙은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그러면 조용한 일상을 되찾기 위해 뒤처리를 좀 해볼까.” 옆에서 누군가가 슬그머니 일어나 옆에 서더니 말했다. “좀 거들어 볼까나.” 리체를 배 위에 올려 주고 돌아온 세자르였다. 강령이 일어난 직후, 배로 올라가 쥬스피앙에게 상황을 알려 준 사람이 세자르였다. 이윽고 먼지가 가라앉자 쓰러진 말과 사람, 그리고 거대한 바윗돌들이 뒤섞여 아수라장이 된 들판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지만 뒤늦게 도착했던 경기병들만이 벼락 맞은 것 같은 모습으로 일어나려 애쓰고 있을 뿐, 그들을 위협했던 가장 큰 적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소공작께서 무시무시하게 휘저어 놓고 가셨구만.” “강령술이란 게 생각보다 무섭지. 그 놈은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도 모르는 것 같지만.” 하나는 보기 좋게 팔짱을 끼고, 다른 하나는 여유 있게 검을 짚고, 경기병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등 뒤에서는 대륙 유일의 하늘을 나는 배가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6막. Trans 1. 모퉁이집 “어린아이는 선하여 죽어 갈 지옥은 없으나, 살아 갈 수 있는 지옥은 있다. 어머니가 떠난 세상. 그 곳이 어린아이의 지옥이며 이 세상은 지옥에 살고 있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로 가득 차 있다.” ‘카잘스’는 흔히 ‘모퉁이집’리라고 불렸다. 금 간 유리처럼 제멋대로 뻗은 다섯 갈래 교차로에 불쑥 튀어나오 한쪽 벽은 장미골 시장, 맞은벽 벽은 구두장이 골목에 면해 있는 삼각형 모양의 집이다. 삼각형의 꼭지점이 만나는 곳이 교차로인데, 디 집이 거리 쪽으로 너무 튀어나와 있어서 실제로는 교차로 대신 이 집의 머리가 다섯 갈래 거리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었다. 1층은 선술집인데, 칠도 다 벗겨진 벽에 그려진 요란한 장미 덩굴을 40년 되도록 지우지도, 고쳐 그리지도 않을 정도로 허름한 곳이라 술값은 무척 저렴했다. 사실 술은 맛이 없는 편이고, 요리솜씨도 평범해서 인기가 있을 만한 곳이 아니었지만 묘하게도 늘 사람이 들끓었다. 그 까닭은 모퉁이집 2층에 있었다. 모퉁이집 1층에 드나드는 정도로는 대수롭잖은 주정뱅이지만, 2층에 발을 들여노핬다면 이미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 남자가 되기는 그른 자라 할 수 있었다. 2층은 여러 개의 방으로 나뉘어닜고 지저분한 거래를 트려는 도둑놈들이 주로 방을 잘 빌렸다. 중앙의 조금 큰 홀에서는 며칠 밤을 꼬박 새우는 판돈 큰 노름판이 자주 벌어졌는데, 수삼일 얼굴이 안 보이다가 새벽녘에 카잘스의 문짝을 비틀비틀 밀고 나와 바로 강물에 뛰어내렸다는 사내 이야기가 몇 달에 한 번씩 들려오곤 했다. 카잘스는 일흔 정도 먹은 주인 할멈의 이름이기도 했다. 줄리아 카잘스, 사람들이 친근하게 ‘줄리아’라고 불럴T을 무렵엔 이곳도 지금 같지는 않았다. 음식도 맛이 좋았고, 사과술도 정평이 있었다고 그 시절 2층은 댄스홀이어서 카잘스의 문짝을 밀고 나오는 오른손은 젊은이답게 보들보들했고, 왼손은 누군가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카잘스에서 만나 졀혼한 중년 부부의 자식이 카잘스 2층에서 신세를 망치고 있다는 이야기도 가끔 들렸다. 할멈은 괴이할 정도로 오래 살고 있었지만, 이미 10여년 전부터 자식들에게 장사를 내맡긴 상태였다. 할멈이 지금의 모퉁이집의 악명을 알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귀가 들리지 않은 지 오래되었던 것이다. 극단적인 변천사를 겪는 가운데도 모퉁이집은 늘 장사가 잘 되었다. 무슨 장사를 하든 망하기 힘들 정도로 눈에 잘 띄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댄스홀도, 선술집도, 도박장고, 언젠가 도서관이 된다 해도 쉽게 망할 것 같지 않았다. 거리를 밀어버리고 새로 구획을 짜지 않는 한 늘 모퉁이집이라고 불릴 것이고, 카잘스 할멈 자식들이 손을 털고 나가도 누군가 새 장사를 시작하려고 들어올 게 틀림없었다. 동전 몇 푼 짤랑이는 거지에서 하룻밤에 수만 엘소를 뿌리는 귀족까지, 단도를 품고 다니는 악당에서 도박에 빠진 아들을 찾으러 온 노부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퉁이집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들 중 누구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았다. 양산 쓴 아가씨가 몸종 두 명에 드레스 자락까지 끌고 들어온다 해도 놀라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비밀은 모퉁이집 2층에 있었다. 2층의 방을 하나 빌려 들어앉으면 일부러 문을 두드려 부를 때까지는 물 한 잔도 갖다주지 않는다는 특별한 서비스, 일반적인 의미의 서비스와는 반대되는 이 ‘서비스’가 어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누군가가 지붕을 뜯고 2층의 풍경을 한꺼번에 내려다본다면 무척 재미있는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빈집 털이 계획을 세우는 건달패들이 모여 험한 소리를 주고받는 옆방에는 부모 몰래 달아나자고 약속하는 젊은 남녀가 있고, 도박꾼들이 핏발선 눈으로 주사의를 노려보는 홀 뒤에는 자신들의 만남을 철저히 숨기고 싶은 또 다른 자들이 소리 낮춰 협상을 한다. 그들에게는 모퉁이집 2층이 꼭 필요하다는 것말고는 아무 공통점이 없었다. 5월 27일 밤, 세 젊은이가 모퉁이집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11시가 되기 조금 전, 옆방에는 판돈이 백만 엘소를 넘나드는 희대의 도박판이 벌어지고 홀에는 어린아이를 안은 젊은 부인이 건달들에게 둘러싸인 채 초조하게 남편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풍경속으로. 앞장서서 걷고 있는 젊은이는 키와 체격이 당당한데다 축 늘어진 모자 챙 아래도 보이는 얼굴도 거친 인상이라 마치 부두 노동자 같은 느낌을 주었다. 뒤이어 따르는 둘 중 키가 작은 쪽은 수도사처럼 망토에 달린 두건을 푹 내려 써 얼굴을 가렸고, 마지막 한 명은 중절모 아래에 머플러를 높이 감아 실제로 보이느 것은 눈가뿐이었다. 나중 둘은 마치 댄스홀 시절에 이곳을 드나들던 사람처럼 곱살한 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는 장갑을 끼고, 다른 한 명은 소맷부리를 길게 하고 있었기에 실제로 눈에 띄지는 않았다. 들어서자만자 매캐한 담뱃진 냄새가 코를 찔러서 두건을 쓴 젊은이가 미묘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선술집은 그 날도 만원이었다. 1층에서 술을 마시다가 적당한 시간이 되면 2층으로 올라가려는 축들이 바에서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벌써 얼근히 술이 오른 취객들을 헤치고 바 앞에 다다른 첫 번째 젊은이가 테이블을 두드려 바텐더를 불렀다. “뭘 드릴까?” “2층.” 바텐더는 어깨를 들썩하더니 물었다. “3호실?” “그렇소. 손님은 와 있소?” “조금 전에.” 바텐더는 뒤에 선 두 젊은이를 곁눈질로 보며 겉옷 안쪽 허리춤에서 열쇠 하나를 떼어 내밀었다. “계단 오른쪽 두 번째 방이오. 번호패가 떨어져서.” 할 말을 다 했다고 생각한 바텐더는 다시 술잔을 테이블에 두드려대는 손님들에게 가버렸다. 젊은이들은 계단을 올라갔다. 2층에 오르자 왁자지껄한 소리는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다. 3호실 문에는 바텐더의 말대로 번호패가 없었다. 문을 두드릴 것도 없이 열쇠를 꽂아 돌렸다. 문짝은 마치 감옥처럼 두꺼워서 문지방에 긁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반갑소.” 문을 닫아거는 동안 테이블 너머에서 벌써 인사가 날아왔다. 돌아보니 테이블 하나, 의자 여섯 개뿐인 휑뎅그렁한 방에 창을 등진 의자 셋을 차지하고 앉은 일행이 보였다. 가운데 앉은 금발의 사내가 만나고자 한 사람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반가운 만남이 됐으면 좋겠소이다.” 키 큰 젊은이가 뼈 있는 말로 대꾸하며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가 앉자, 다른 두 젊은이도 자리에 앉았다. 금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인사들 할까. 이쪽은 내 친구 애니스탄 뵐프. 재능 있는 마법사지. 그리고 이쪽은 칸카, 내 참모.” 젊은이는 모자를 벗어 테이블에 내려놓고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돈 크레아라고 부르시오.” “나는, 모로라고 부르면 될 거요.” 더한 소개는 필요 없었다. 자신을 모로라고 말한 테오, 즉 테오스티드 다모로는 팔짱을 끼며 빙그레 웃음을 보였다. “그런데 돈 크레아, 당신은 상상 이상으로 젊군. 민중클럽의 간부들은 아마 능력으로 뽑히는 모양이오.” 칭찬처럼 들렸지만 본심은 당신처럼 젊은 사람이 제대로 된 권한을 갖고 있느냐는 의문의 표시였다. 그러자 지금껏 말이 없던 다른 두 젊은이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클럽의 간부들은 서로에 대해 임무와 활동 이력, 그리고 연락을 위한 이름 외에는 알지 못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또한 역할 분담이 확실하기에 일단 돈 크레아 님을 만나신 이상 다른 간부를 만나실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나이 때문이든 다른 무엇으로든 자신들을 믿을만하게 보지 않는다 해도, 일단 협상을 할 생각이라면 다른 대안은 없다는 것을 미리 못박는 말이었다. 테오는 말을 한 사람에게 시선을 보냈다. 소개를 하지도 않을 정도라면 말단 단원일 것이 틀림없는데 대화의 핵심을 잘 짚는 사내다 싶었던 것이다. 머플러로 얼굴을 거의 가렸으나 눈매만으로도 서슬 푸른 성미라는 것을 바로 알아볼 수 있겠다 싶은 젊은이였다. 검은 중절모 아래로 흔히 보기 힘든 하늘빛 머리카락이 이채를 띠었다. “다른 뜻이 있어 한 말은 아니오. 클럽의 간부와 면담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소이다. 더구나 내가 만나고 있는 분은 귀족 포섭의 명수라고 들었소. 내 어찌 기대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소. 하하하.......” 세 젊은이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머뭇거리는 기색 없이 자연스fp 웃어젖히는 것을 보며 란지에 로젠크란츠는 그가 연기에 능한 사내라고 판단했다. 그에 반해 곁의 마법사라는 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또 다른 자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레코르다블 출신으로서, 노련하게 내리깐 눈으로 그들을 하나하나 훔쳐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이가 맣고 노숙한 인상의 하일저를 내세워 간부 역할을 맡기고 자신은 수행 단원 노릇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은 란지에 본인이었다. 처음에 하일저는 자신의 역할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진 않았다. 협상을 이끌 자신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난 란지에가 어차피 대화는 대부분 자신이 하게 될 거라고 설득하여 지금의 모양새가 갖추어졌다. 물론 실제 켈티카 3지구 위원장으로 간부직을 맡고 있는 것은 란지에였다. 하지만 어차피 상대는 란지에의 본명이나 활동명을 알 수 없었다. 그들의 만남을 결정한 것은 민중의 벗 중앙지도부인 ‘망명 의회’였고, 란지에가 협상 상대로 결정된 것은 그의 이력이 이 일에 걸맞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지만 그걸 결정한 지도부 인사들조차 란지에가 누구인지, 얼굴은 물론 나이조차도 알지 못했다. 그런만큼 협상 과정에서 전략의 일환으로 다른 사람을 간부로 내세웠다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하일저, 그러니까 돈 크레아가 대꾸했다. “포섭의 명수는 내가 아니라 저 친구지. 내가 아주 신뢰하는 친구이외다. 말재주도 나보다 낫고 말이오.” 테오는 빙그레 웃으며 란지에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뭐라고 부르면 되겠소?” “디, 라고 부르시죠.” 그렇게 말하며 란지에는 머플러를 풀었다. 방 안의 빛이라고는 테이블 귀퉁이에 놓인 기름 램프가 고작이었지만, 매끈하게 빛나는 턱선과 흰 뺨, 우아한 콧날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테오는 놀란 시늉을 하며 말했다. “ 그런 얼굴로도 비밀 결사 활동을 할 수 있소? 한 번 보면 도저히 잊기 힘든 듯한 얼굴인데.” 하일저가 말했다. “모로 씨만 비밀을 지켜 준다면 별 탈 없을 겁니다. 아직은 공공연한 활동만 하는 처지니까 말이오.” 테오는 바로 알아듣고 말했다. “신뢰를 보여 줘서 고맙소. 하지만 나 또한 비밀이 지켜지지 않으면 안되는 입장이니 피차일반이랄 수 있겠지.”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때였다. 저쪽에서 입을 연 사람은 칸카였다. “우선 저희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이런 자리를 마련해 준 망명 의회에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지금껏 따로 추구해왔을 뿐, 공동의 신념이었던 것을 이제 함께 추진하게 되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든든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인지, 그리하여 어떻게 궁극적인 목표를 이룰 것인지 논의하는 것만이 남은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에 지도부에 제출한 제안에 대해서는 물론 알고 계시겠지요?” 하일저가 대답했다.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동료를 얻는다는 것은 무척 기쁜 일이오. 지도부에서도 이번 일에 특히 관심을 기울이며 자세한 지침을 내린 바 있소. 하지만 이제 입회가 허가된 이상, 지도부와의 의사 소통은 전적으로 켈티카 3지구 위원장인 나를 통해야만 하오. 원활한 협력을 위해 그 점을 먼저 말해두겠소.” 칸카의 질문을 무시한 듯한 대꾸였지만 테오는 예상했던 이야기라는 듯 미소를 보였다. “당연한 일이오.” “이해해 주셔서 고맙소. 그러면 구체적인 논의에 들어갑시다. 디 군, 지도부의 의견을 말하게.” 여기까지 하일저가 한 이야기는 란지에가 미리 지시해 둔 그대로였다. 그러나 말하는 시점을 택할 줄 모르는 하일저는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이 정해진 대사를 서둘러 읊어버렸다. 그래야 껄끄러운 자신의 역할이 끝나고 차례가 란지에에게 넘어가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말재주가 없는 자신의 역할이 길어지다가 실수를 저질러서 란지에에게 피해를 끼칠까봐 무척 걱정스러워했다. 란지에가 입을 열었다. “망명 의회는 모로 씨의 제안을 신중히 검토하여 실효성이 있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만, 위험 부담이 크다는 점을 간과할 순 없겠지요. 단계별로 나누어 차근차근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공화국 건설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지난 역사를 통해 통감하고 있습니다. 먼저 말씀을 좀 들을까 합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실제로는 대부분의 판단이 란지에에게 맡겨져 있었지만, 란지에는 어디까지나 지도부, 즉 망명 의회의 의견을 전하는 듯한 태도를 견지했다. “일에는 물론 차례가 있소이다. 그런 논의를 위해 만난 자리이기도 하고 말이오. 내가 공화국에 협력을 약속한 이상, 최초로 추구해야 할 것은 나 자신이 아르님 가문을 장악하는 것이 아닐까 하오. 그렇지 않고서는 실질적 도움을 제공할 수 없을 테니 말이오. 그 후에야 내가 제안한 책략들을 실행 할 힘이 생길 것이오.” 하일저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란지에가 말했다. “그 방법에 대한 복안이 있으십니까?” 일단은 상대의 생각을 들을 심산이었다. 칸카가 대답했다. “아시다시피 저희 주인께서는 아르님 공작 가문의 유일한 사위로서, 공작의 딸인 부인은 돌아가셨지만 아드님을 남기셨지요. 현재 그 아드님은 유력한 작위 계승자로서 성에서 자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아드님께서 아르님 가문의 계승자에게 주어지는 아르모리크 경의 칭호를 받게 되는 것이 일의 첫 결말이 아닐까 합니다.” 그때까지 말이 없던 두건 쓴 젊은이가 입을 열었다. “물론 소공작만 없어져 준다면, 이겠죠?” 목소리만으로도 여자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칸카는 점잖게 대꾸했다. “소공작은 이미 우리 수중에 있습니다. 그를 죽이든, 또는 일단 아르모리크 경이 된 후 우리의 꼭두각시가 되어 주든, 어느 쪽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글쎄요, 제가 듣기로는 그 소공자, 보통 사람이 아니라던데.” 말을 하면서도 이엔은 여전히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귀족이니만큼 혹시라도 이후에 마주칠 일이 있을 지도 모른다느 생각에서였다. 만약 정체가 밝혀지더라도 혼자 몸을 감추면 되는 란지에와는 달리 이엔의 신분이 드러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딸이 어디에 몸담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을 아마란스 백작까지 모조리 말려들게 되는 것이다. 칸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데모닉의 일을 아시는군요. 하지만 걱정 마십쇼.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란지에가 입을 열었다. “뭔가 복안이 있다는 건 알겠지만, 우리에게도 밝히지 않는 건 곤란하지 않을까요. 무엇보다도 위험 요소가 될 지도 모르는 문제를 자세한 사정도 모르면서 안전한 것처럼 중앙지도부에 보고할 순 없는 일이니 말입니다. “그 얘기는 협상 뒤로 미뤄도 상관없을 겁니다.” 테오가 손을 저어 칸카의 말을 막더니 말했다. “됐다. 어차피 알게 될 일, 우리를 신뢰하시는 분들에게 부자연스럽게 감출 필요는 없다고 본다. 돈 크레아, 그리고 디 준, 소공작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소이다. 물론 그 속도를 늦출 수도 있고, 영영 멈추게 할 수도 있소. 하지만 현재는 한 해 안에 자연사한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 계획이오. 데모닉은 본래 까닭 없이 요절하는 경우가 많아 의심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소이다. 그러므로 그의 존재에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하겠소.” 하일저는 란지에와 눈짓을 주고받은 뒤 말했다. “좋소. 그 말을 믿겠소.” 란지에가 말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아드님께서 작위계승자가 된다면 물론 상황은 좋아질 것입니다만, 그것만으로는 운신의 폭이 그리 넓어진다 할 수 없을 것 같군요. 모로 씨는 작위계승자 본인이 아니고, 어린 아드님이 자랄 때까지는 현 아르님 공작의 권위가 절대적일 것 아니겠습니까. 그걸 기다리려면 일의 진척은 먼 미래의 일이 되어버리겠지요. 더구나 장기적으로 아드님이 자랐을 때 모로 씨와 의견이 다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귀족으 특권이란 것은 한 번 갖고 나면 포기하기 어려운 것이니 귀하게 자란 젊은 도련님께서 모든 특권을 내놓아야 하는 공화국 건설에 불만을 가질 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만.” 란지에의 말을 듣던 이엔은 두건 속에서 은밀히 미소지었다. 그녀 자신은 란지에가 방금 한 이야기의 예외로서, 스스로의 선택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좋은 지적이오. 우리 집안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다면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거요. 먼저 내 아들은 아직 프란츠 폰 아르님이 아니라 프란츠 다 모로이며 그의 교육에 대한 권한은 전적으로 내 손에 있다는 점을 말해 두겠소. 그리고 나와 내가 이어받은 모로 가문은 귀족의 특권들로 인한 피해를 신물나게 겪었다는 점도 말해 두오. 부끄럽지만 내 이야기를 좀 하겠소.” 테오는 시선을 하일저 쪽으로 보냈다. “모로 가문은 구왕국 시절부터 귀족이었오. 그러나 일찌감치 기울어지기 시작한 가문이었기에 나의 어린 시절은 비참했소. 귀족이란 허울 때문에 오히려 견디기 힘든 세월이었다고 생각되오. 귀족들과 어울릴 수 없는 것은 물론, 평민들로부터도 멸시를 당했소. 폐허나 다름없는 저택에서 교육은커녕 끼니조차도 거르며 어떤 위신도 지킬 수 없는 처지였던 나는 내가 차라리 귀족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밤낮으로 생각했다오. 그랬다면 거리에 나가 구걸을 해서라도 고픈 배를 채울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런 말을 하면서도 테오의 안색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곁에서 한 마디 말도 없던 애니스탄의 얼굴에는 조금 변화가 있었다. 란지에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 “나는 열 살 때 아르님 가문에 들어왔고, 이듬해 데릴사위로 결정됐소. 내 상대는 백치 소녀였소.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르님 공작도 나와 같은 자를 사위로 맞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겠지. 통렬하게 말하자면 나는 팔아 넘겨진 것이었소. 도박에 미쳐 있던 내 아버지는 나를 판 돈을 손에 쥐자 즉시 사라졌기에, 낯설고 화려한 저택에 던져진 내게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없었소. 나는 스스로 살아나갈 방법을 배워야만 했소. 뭐, 그보다는 식사 예법부터 새로 배워야 했지만 말이오.” 테오의 어조에는 당시 자신의 환경에 대한 노골적인 조롱이 묻어났다.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의 조롱이 가장 많이 겨냥하고 있는 사람은 아르님 공작부인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현재의 소공작은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고, 공작부인의 악화된 건강으로 인해 태어날 가망도 없는 상태였소.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소. 가까이에서 본 진짜 귀족들은 내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더러웠고, 편협했고, 불합리했소. 소공작이 태어난 뒤, 나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가 일변하는 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은 더욱 강해졌소. 그런 자들이 변치 않는 특권을 쥐게 하는 왕정에 의문을 품었고, 지난 공화국 시절에 그 대안을 직접 눈으로 보며 공부할 기회를 얻었소. 알다시피 아르님 공작은 공화국 시절 공화 정부에 협력하느 체 하며 목숨을 부지했소. 그런 자가 지금은 새 국왕의 한 팔이 되어 행세하며 살고 있소. 참으로 구차한 일이 아니오? 이런 자가 비단 아르님 공작만이 아니며, 그렇게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으려 욕심 많은 어린아이처럼 고군분투하는 여러 귀족들의 모습은 실로 내게 감명을 줄 정도였소. 나는 오랫동안 이 문제를 생각한 끝에 왕정이 무너지지 않고는 이런 모순들이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점을 알았소.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내 아들도 똑같이 겪게 될 일이라 생각하오. 그 아이는 내 피를 물려받았소. 그가 알고 싶지 않더라도 반쪽 귀족에 대한 차별 때문에 저절로 귀족과 왕정의 모순에 대해 느끼게 될 것이오.” 테오가 말을 끊자, 듣고 있던 이엔이 말했다. “그렇다면 아르님 공작의 문제는 어찌할 거죠? 공작은 영리한데다 늙어 죽으려면 아직 멀었죠. 공작도 소공작처럼 서서히 없앨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요?” “서서히 없앤다라, 공작에겐 그런 방법이 불필요하오. 내가 소공작에게 그런 방법을 취하는 것은 적, 즉 공작의 예봉을 피하기 위해서요. 옛 말에 재상의 개가 죽으면 조문을 오지만, 재상이 죽으면 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 않소? 그와 마찬가지요. 소공작이 의문사한다면 공작이 그 배후를 밝히기 위해 가만히 있지 않겠지만, 공작이 죽는다면 그런 조사를 할 사람조타 없을 것이오. 따라서 공작은 기회를 보아 단번에 없애면 되리라 생각하오. 그런 기회를 내가 만들어 줄 생각이고.” 이엔은 잠시 생각하더니 지적했다. “하지만 모로 씨의 말대로 소공작이 죽고 공작마저 의문사한다면 아르님 가문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되겠죠. 권력은 물론이고 국왕에 대한 영향력도 예전 같지는 않을 거고요. 오히려 아르님 가문만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것 아닐까요.” 공화파에 도움을 주기 전에 너희부터 망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테오는 한쪽 입술만 살짝 올렸다. “그렇기 때문에 소공작이 사라질 무렵, 내 아들과 내가 작위 계승자와 그의 후견인이라는 사실 외에도 독자적인 세력을 갖도록 입지를 잘 다져 놓아야 하는 것이오. 그 일을 위해 ‘민중의 벗'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말이오. 민중의 벗은 왕권을 떠받치는 중추부에 깊숙이 숨어 있는 지지자를 여럿 거느리고 있다고 알고 있소. 그들의 도움을 얻어 내가 국왕의 신임을 얻는 것이 급선무요. 그래야 아르님 가문의 힘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고, 그 힘이 왕가를 무너뜨릴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 신 왕국을 일으켰던 아르님 공작이 공화국으로 돌아섰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최대한 증폭시킬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오.” 이엔은 보이지 않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출신 배경 덕택에 체질적으로 권력욕이 많은 사람을 잘 꿰뚫어봤다. 그러나 개인적인 불쾌감을 접고 제안만 놓고 본다면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이야기였다. 물론 이 모로라는 자를 믿는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잠시 사이를 두고 드디어 란지에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이제 망명 의회의 제안을 이야기할 차례로군요. 란지에는 몸을 약간 앞으로 기울였다. “아르님 공작의 제거가 공화국을 위해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모로 씨, 모든 일이 잘 되어 아드님이 순조롭게 가문을 물려받게 된다 해도 아르님 공작의 상인을 조사하는 일은 필수적인 수순입니다. 그 일을 맡을 사람은 물론 당신이 되겠지요. 소공작도 죽은 후일 테니 이들 부자가 혹시라도 음모에 휘말린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은 무척 중요하게 다뤄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다른 귀족들은 혹 자신의 가문에도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으로 이 문제에 큰 관심을 갖겠지요. 그리고 결국 누군가를 지목하긴 해야 할 겁니다. 테오가 문득 반론했다. “그것은 사고사가 될 수도 있소.” “아니오. 그런 결론이 나다면 표면적으로는 상황이 종료될지 몰라도, 사람들은 내심 당신을 배후로 생각할 겁니다. 석연치 않은 일이 생겼을 때는 그 일로 가장 큰 이익을 얻는 사람을 의심하는 것이 당연하니까요. 그렇게 되면 이후 당신의 입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가로막히게 됩니다.” 란지에의 대답은 즉시 나왔다. 막힘 없는 설명을 들으며 칸카는 슬슬 저 ‘디’라는 자가 정말로 말단 단원이 맞을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단 거요?” 테오는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일단 말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란지에가 말했다. “당신보다 더 큰 이익을 얻는 것처럼 보이는 자를 만들어 내야 됩니다.” “그게 누구요?” 명료한 대답이 울렸다. “지도부는 가장 적절한 인물로 폰티나 공작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도부의 결정이 아니라 란지에 스스로 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테오에게도, 칸카에게도 이것은 천만뜻밖의 이야기였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테오가 말했다. “신 왕정을 떠받치고 있는 두 공작을 함께 제거하고 싶은 기분이야 이해하지만, 너무 무리한 생각이 아니오? 아르님 가문의 일이라면 내가 잘 알지만, 폰티나 공작은 이야기가 다르오. 그는 평범한 책략가가 아닐뿐더러 강력한 정보 조직도 갖고 있다고 들었소. 그런 사람의 행동을 조작하는 것이 가능하겠소? 지도부에서는 계획을 갖고서 지시를 내린 거요?” 란지에가 엷게 미소지었다. “지도부에서는 무엇보다도 당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점을 우선 고려했습니다. 물론 당신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이 점에 대해 생각해 두신 대안이 있습니까?” “그보다 먼저 묻고 싶군. 폰티나 공작이 아르님 공작을 죽이려 할 까닭이 뭐요?” 란지에는 하일저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제가 설명해도 되겠습니까?” 하일저는 별 문제가 되겠냐는 것처럼 가볍게 고개를 끄득여 보였다. “그러게.” 하일저가 조금만 더 말주변이 있었더라면 이런 식으로 할 필요는 없을텐데, 하고 생각하며 란지에가 말을 이었다. “그들이 서로를 죽이려 할 까닭, 그건 분위기를 조성하기 나름입니다. 두 공작은 겉으로 보기에 협력하여 신 왕정 세력을 양분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내심 혼자서 모든 것을 독점하고 싶을 것이 자명합니다. 권력을 나눠 갖고 싶어하는 자는 없다는 통념으로 볼 때, 이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논리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환기시켜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사실 두 공작을 반목하게 만드는 책략은 지도부에서도 여러 번 논의된 일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모로 씨와 같은 결정적인 조력자가 없었기에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지 못하듯 유보되어 왔을 뿐이지요. 그러니 아르님 공작을 없앨 수 있는 기회만 온다면 두 가문의 반목을 위해 이보다 적당한 계기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는 사라지고, 하나는 죄를 뒤집어쓰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양쪽 다 날개가 꺽이게 되는 것입니다.” 일말의 동정심도 느낄 수 없는 사무적인 말투는 듣는 사람을 기가 질리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테오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하냔 말이오.” “말씀하신 대로 폰티나 공작의 행동을 조작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더구나 계략이 성공하든 말든 폰티나 공작을 감옥에 잡아넣을 수도 없는 일이죠. 사실이라 해도 무슨 핑계를 대어서든 빠져나갈텐데 사실이 아닌 바에야 더 말할 나위가 있을까요? 그러므로 이 계략의 핵심은 폰티나 공작을 고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것은 여론이지요. 사람들이 폰티나 공작의 위세 때문에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을 뿐 음모가 있다고, 자신들은 그 진실을 알고 있다고 믿게 해주면 되는 겁니다. 그것으로 당신에 대한 의심은 자연스레 묻일 것입니다.” 테오는 상대를 새삼스레 쳐다봤다. 이 자가 말단 단원일 것이라는 생각은 이미 버렸다. 물론 지도부의 지시를 전하는 것뿐일 수도 있지만, 말하는 태도로 보아 이 자는 지시한 사람 이상으로 이 계락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했소. 확실히 망명 의회의 의견은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구려. 하지만 계획대로 실행한다 해도 일단은 먼 미래의 일이오. 그전에 소공작의 문제가 있고, 그보다 앞서 나의 입지를 강화해야 하는 문제가 있으니 말이오. 현재는 공작의 측근 몇 명만 확보한 상태이지만 그들은 내가 원하는 것이 내 아들에게 주어질 공작 작위인 줄로만 알고 있고. 그렇게 믿어주는 쪽이 나로서도 편하고 말이오. 하지만 지금의 계획은 마음에 새겨두겠소.” 란지에는 눈을 약간 내려깔더니 말했다. “그건 먼 미래의 일이 아닙니다.” “미래의 일이 아니라고?” “상부의 지시는 반대입니다. 소공작보다, 공작을 먼저 처리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리하여 소공작이 작위를 물려받고, 이어 그가 자연사하는 쪽이 좀더 매끄러울 겁니다.” 칸카가 고개를 들었다. “내 생각은 다릅니다. 짧은 기간 동안 두 번이나 공작이 바뀌는 것은 불필요한 혼란과 낭비를 초래할 뿐입니다.” “아닙니다. 계획의 초점을 잘 보십시오.” 란지에는 다시 한 번 하일저를 돌아보더니 허락을 받는 것처럼 눈짓을 나누었다. 칸카가 되물었다. “초점이라니?” “무게중심이지요. 소공작을 없애는 것은 간단하며, 심지어 의심받지 않을 수 있는 좋은 구실마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초점이 아닙니다. 문제는 공작이지요. 그는 제거하기 어렵고, 제거한 뒤에도 의심을 벗어야만 하는 난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사라지는 것이 이 계획의 가장 중요한 무게중심입니다. 사람들의 관심도 주로 공작의 죽음에 쏠릴 것이 틀림없습니다. 공작이 죽는 즉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미스테리를 풀려고 머리를 굴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폰티나 공작에 대한 암시를 던져주기도 전에 자기들끼리 결론을 내려버리기 쉽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소공작의 죽음이 선행됨으로써 이 일이 예고된 것처럼 느껴지게 하고, 심지어 동일한 사람의 계락일 지도 모른다는 추측의 여지를 주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칸카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반대의 경우는·······.”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볼까요. 일단 소공작이 작위를 물려받을 테니 당신의 존재는 관심의 초점이 아닐 겁니다. 그런 상태에서 공작의 죽음에 대한 의문이 최고조에 달했을 즈음 폰티나 공작의 개입을 암시하는 힌트를 주고, 폰티나 공작의 배후설이 너리 퍼졌을 때 새로운 공작이 된 소공작은 서서히 쇠약해지다가 자연사합니다. 소공작이 데모닉의 운명 때문에 저절로 죽었다고 믿어줘도 상관없겠지만, 음모론을 믿고 싶어하는 자들은 한 번 의심했던 폰티나 공작의 행동에 쐐기를 박는 사건이 터졌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퍼즐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 번 믿기 시작한 것을 위해 틀린 증거도 저도 모르게 맞는 것처럼 끼워 넣는 경향이 있습니다. 퍼즐을 끝까지 맞추고 싶은 욕심이 앞선 까닭이지요. 그런 식으로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고, 증거가 불충분한 것은 폰티나가 교활하기 때문이고 여겨버립니다. 심지어 처벌할 수도 없는 적이기에 증오는 더욱 증폭됩니다. 이미 그 사이에 모로 씨가 끼여들 자리는 없습니다. 오히려 모로 씨는 비극이 연이어 닥친 가문을 수호할 책무를 진 사람으로서 기대를 한 몸에 받게 될 것입니다.” 너무나 정연한 추측이라 반박할 여지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심리를 꿰뚫어보는 능력이 놀라웠다. 테오는 이 이야기가 망명 의회의 지시일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일말의 의심을 품었다. 상대가 스무 살도 안 된 젊은이가 아니었다면, 의심 없이 말하는 자 본인의 계략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만큼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설명이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소. 의회의 결정의 타당성에 동의하오. 그러나 그 결정을 따른다면 모든 계획의 진행이 빨라져야만 할 것이오. 적어도 공작을 도모하기 전에 나의 입지가 충분히 강해져야만 할 테니 말이오.” 하일저가 입을 열어 말했다. “그 점은 염려 마시오. 지원에 대한 논의는 이미 충분히 되어 있소. 당신이 이번 일에 착수하겠다고 결정하기만 하면 열흘 내로 세 명 이상의 고위 귀족을 만나 면담하게 될 것이오. 물론 당신이 찬성한다면 말이오.” 란지에는 테오가 하일저의 말을 들으면서도 오히려 자신의 표정을 살펴보는 것을 알았지만, 지시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엷은 미소만 띤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말없이 생각을 정리하던 칸카가 입을 열었다. “일단 면담에 대해서는 찬성합니다. 누구를 만나게 될지 물어봤자 미리 알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굳이 캐묻지 않도록 하지요. 그나저나 민중의 벗의 정보력이나 계략 입안 능력이 탁월하다고 하더니 과연 보통이 아니로군요. 그러나 이 일에 당장 착수한다면 이쪽의 일정에 상당한 차질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쪽의 단계적인 지원에 대해 일부 약속을 받아야겠습니다. 서로의 일이 함께 진전되지 않으면 어느 쪽도 이루어지지 못할테니까 말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꼭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하시오,” 하일저가 대꾸했다. 칸카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우리는 암살 계획을 추진할 것이고, 성공한 뒤에는 폰티나 공작에 대한 소문을 가문 내부에서 공작하는 부분을 맡을 것입니다. 그 동안 여러분은 왕국 중추부에서 우리의 입지가 확고해지도록 거물들과의 인맥을 주선해주시고, 둘째로 전 대륙에 퍼져 있다는 민중의 벗 정보 조직을 이용하도록 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공작을 도모할 날짜를 정하길 원합니다. 란지에의 시선이 칸카에게 돌려졌다. 칸카도 시선을 느끼고 상대를 보았다. 잠시 쏘아보는 동안 칸카는 처음으로 란지에의 눈동자가 갈색이 아니라 흔히 볼 수 없는 선홍색빛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 동안 램프의 불빛이 붉어 얼른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칸카는 란지에가, 또는 하일저가 이 제안에 반대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에 대한 반론 또한 충분히 준비해 두었다. 거사일의 결정은 양쪽 모두 배수진을 친다는 것ㅇ르 의미했다. 칸카는 처음부터 자신들의 믿음직한 미끼를 쥐고 호랑이 앞에 선 인간과 같다고 생각했다. 공화파 클럽 민중의 벗은 일종의 비밀 결사로써 체포시 즉결 처형이 가능한 불법 단체이지만, 그만큼 왕국 내 각계각층에 광범위하게 침투해 있는 거대한 조직이기도 했다. 귀족에서 평민, 돈 많은 자에서 거지, 무사에서 예술가에 이르기까지 전 신분을 망라할 정도로 그 뿌리가 깊은 클럽이다. 공화국 10년의 역사가 완전히 헛되지는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그 클럽을 단순히 무력 집단, 또는 하나의 나라처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규모가 크긴 해도 민중의 벗은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수천 개의 검은 돌과 같았다. 어둠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더듬어보는 것은 가능하지만, 결코 실체를 목격할 수는 없었다. 일반적으로 민중의 벗 클럽에 몇 년을 속해 있더라도 같은 클럽 회원을 채 열 명도 만나기 힘들다. 말단 회원으로 지낸다면 자신을 관리하는 하급 간부 한 명을 만나는 것이 전부일 수 도 있었다. 물론 예외는 있어서 능력을 인정받은 자들은 중앙부로 빠르게 진출했다. 물론 예외는 있어서 능력을 인정받은 자들은 중앙부로 빠르게 진출했다. 그렇게 되면 그제야 수백 명은 되는 거물급 인물들이 민중의 벗의 그림자 회원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 조직과 거래를 하려고 했을 때, 호랑이를 길들이는 것과 같은 신중함, 그리고 대담함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칸카는 노련한 책략가였다. 상대가 정세 파약에 능한 자라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그것을 이용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 보았다. 상대가 이쪽을 몰아댈 때면 자칫 쫓기는데 정신이 팔려 챙겨야 할 것도 손가락 사이로 흘리기 쉽다. 그걸 막으려면 아예 멈춰서거나, 아니면 더 빨리 달려야 한다. 이제 와서 협상을 물릴 수 없으니 더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이 협상의 주도권을 자신에게 돌릴 수 있었다. 그런 주장을 한 후에 상대가 반대하면 그제야 서로의 이해를 맞춰보며 그럴듯한 협상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쫓기지 않고서. 그렇게 생각하는 칸카의 귀에 란지에의 대답이 울렸다. “좋습니다. 정합시다.” “아... 동의하시는 겁니까?” 무심코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한 방 먹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세게 울렸다. 고르게 발달하기 힘들다. 자신이 쉽사리 잘하지 못하는 쪽에는 편협해지기도 쉽다. 그런데 저 나이에, 정세 분석에 특출한 자가 어째서 대담하기까지 한 것인가? 칸카는 무슨 생각을 하든 란지에는 평온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곧 6월이 되는군요. 반 년 정도면 무리 없는 기간일 겁니다. 아니, 오히려 너무 길지도 모르겠군요.” 칸카는 이성을 되찾고 냉정하게 생각했다. 사실 날짜를 제시하는 것이 완전히 손해인 것은 아니었다. 이쪽에서도 바빠지겠지만, 저쪽에서 수혜를 주는 속도도 그만큼 빨라질 것이다. 귀족 사회에서의 입지는 빨리 오르면 오를수록 좋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폰티나 공작의 일인데, 저쪽의 제안은 괜찮지만 이 일을 폰티나 공작이 알게 되어서는 곤란해진다. 제대로 된 입지를 쌓기 전에 폰티나 공작의 미움부터 사게 되어서는 앞에 산을 두고 전진하느 것이나 다름없게 되는 것이다. 소문의 진원지를 모르게 하는 계략쯤은 혼자서도 자신 있었다. 그러나 소문의 존재를 알게 된 폰티나 공작의 행동을 막는 것은 개인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 때 란지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쪽 일만 잘 해주시면 폰티나 공작의 발을 묶는 것은 이쪽에서 맡지요.” 저 무심한 눈동자로 상대의 마음을 읽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물론 그보다는 상대가 생각에 잠길 만한 문제를 바로 짚을 정도로 통찰력이 있는 것이겠지만.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다른 관심사를 하나 안겨 줘야겠죠. 뭐, 염려는 끼텨드리지 않을 겁니다.” 염려 말라기보다는 자세한 것을 알려하지 말라는 의미에 가까웠다. 이제 상대가 용의주도한 자라른 것까지 알게 된 칸카는 마지만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넉 달로 합시다.” “오늘은 5월 27일, 그러면 9월 27일이 되겠군요.” 란지에가 하일저를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란지에가 말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테오 또한 이것이 위험한 약속임을 잘 알고 있었다. 란지에의 대답이 떨어지는 순간, 멈춰 있던 시계가 첫 번째 째깍, 소리를 크게 울리는 것을 들은 듯 느껴졌다. 그러나 외견상 그느 단지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넉 달 뒤까지 모로 씨, 당신이 최소한 남작령 하나를 얻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국왕을 만날 기회도 있을 테니 당신이 얼마나 잘 해내느냐에 따라 더 많은 것을 얻을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민중의 벗 산하 정보원들의 조직인 ‘나이트워크(Nightwalk)'와 접선할 수 있는 경로를 지정해 드리겠습니다. 다만 당신의 등급은 3단계일 것이고, 따라서 당신 쪽에서도 필적하는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한 그들을 호출할 수 있는 것은 한 달에 한 번뿐입니다.” 이제 막 클럽에 가입한 처지로서, 비록 한 달에 한 번이라 해도 나이트워크를 호출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특권이 주어진 것이다. 나이트워크는 공화파와 관련된 조직 중 가장 오래되고 광범위한 것으로 망명 의회의 결성 시기보다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저 10년 공화국이 건설되기 전부터 존재해 왔다. 전 대륙에 걸쳐 정보를 주고받으며, 특히 아노마라드에는 어떤 일도 이들의 눈을 벗어날 수 없다고 알려진 수천 명의 정보원들이 평범한 상인, 농부, 걸인, 매춘부, 심지어 귀족으로도 살아가고 있는 강력한 조직이다. 지난번 10년 공화국의 수립, 그리고 현재 신왕궁의 맹렬한 추격을 받는 가운데 민중의 벗의 힘이 유지될 수도 있는 것도 나이트워크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까닭이 컸다. 공화국이 무너진 지금 민중의 벗 회원들을 관리하는 방법 또한 나이트워크의 운영 방법에서 나온 것이었다. “당신의 첫 접선 경로는 켈티카 13지구 트라메아 거리 10번지, 가구수리공 아돌프 크로네의 딸 마르고트입니다. 다만 아돌프 크로네는 회원이 아니므로 직접 찾아가서는 안됩니다. 접선을 원할 경우, 잔포드 시에 사는 친구 안네 에프만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십시오. 그러면 그녀가 다음날 오후 8시에 약속 장소에 나올 것입니다. 만일 그녀가 접선을 거부한다면, 편지를 받은 날 밤 12시에 2층에 있는 자신의 방 창문 앞에 두 개의 램프를 놓아둘 것입니다.” “편지 내용은?” 칸카가 묻자 이엔이 옆에서 말했다. “안네와 마르고트는 열 아홉 살이에요. 아버지가 펼쳐볼 경우를 대비해서 그 나이에 맞는 화제들로 채우시고, 행간에 장소를 단 한 군데만 암시하시면 되죠.” “무슨 뜻인지 알겠군요.” 테오가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네는 실제 인물입니까?” 이엔이 대꾸했다. “아뇨.” 정확한 주소를 적은 종이가 건네져 테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란지에는 하일저에게 눈짓했고, 하일저는 의자에 기댔던 등을 떼며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더 할 이야기가 없다면 이것으로 회견을 끝내겠소.” 테오가 말했다. “오늘 내 태도가 혹시라도 고압적이었다면 사과하겠소. 나 자신이 증오하고 있는데도, 오랫동안 귀족들 틈에서 자라온 터라 더러운 습관이 가끔 튀어나올곤 하오.” 란지에는 빙긋 웃더니 대답했다. “오히려 우리가 당신을 귀족답게 대접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쾌하게 느끼지 않길 바랍니다. 공화국을 추구하는 이상 우리는 왕족을 만난다 해도 똑같은 태도밖에 보일 께 없으니 말이죠.” 테오는 미소로 답했으나 지금까지 이 자가 자신의 태도를 평가했음을 알고 상대의 빈틈엄ㅅ음에 불안감을 느꼈다. 민중의 벗에는 이런 자가 많은 것일까, 아니면 이번 일의 중요성 때문에 일부러 탁월한 자를 붙인 것일까. 모두가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이엔이 그때까지 한 마디도 않은 애니스탄을 보더니 물었다. “마법사께서는 클럽 가입을 안 하셨다고 들었는데, 앞으로도 하지 않으실 생각인가요?” 애니스탄은 잠깐 사잉르 두고 대답했다. “현재 저의 신념은 제 친구 자체입니다. 그가 원하는 것이 공화정 실현이라면, 저 역시 뜻이 같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란지에가 빙그레 웃더니 말했다. “그 말은 모로 씨가 원하는 것이 다른 것으로 바뀔 가능성도 있으니 클럽 가입을 미룬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안 그런가요?” “.......” 애니스탄이 대답하지 않자 테오가 재빨리 말했다. “내가 설득할 테니 조금 더 기다려 주시오. 어쨌든 나를 배신할 친구는 아니니까.” 란지에도 지금은 더 추궁해보았자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때 테오가 그를 불렀다. “실례일지도 모르겠지만 디 군, 당신의 이름을 알고 싶소만?” 란지에는 잠깐 돌아보더니 짧게 답했다. “이지안입니다.” “이지안 디라... 당신의 태도가 인상적이었소. 잘 가시오 디 군.”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고개를 돌려 말했다. “돈 크레아, 이름 모를 아가씨, 모두 반가웠소.” 모퉁이집 1층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테오 일행이 먼저 나간 뒤 사이를 두고 내려온 세 사람은 밖으로 나가는 대신 구석 테이블을 택해 앉아 포도주를 시켰다. 주위가 워낙 시끄러워 옆 테이블의 대화도 알아듣기 힘든 상태였기에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땠어?” 하일저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란지에에게 묻자 이엔이 먼저 대꾸했다. “괜찮던데. 그런데 말하는 시점을 잘 택하라고.” 란지에는 생각에 잠겨 하일저의 말을 듣지 못했다. 조금 전 부드럽게 웃으며 테오 일행을 보낼 때와는 딴판으로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이엔이 물었다. “뭘 생각해?” 란지에는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에 천천히 썼다. 데모닉, 이라고. “그에 대해서는 그 자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이엔이 의아한 듯 되묻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상할 수 없는 경지의 천재라고 했지. 그건 변수일까? 논리로 추측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까?” 란지에는 자신의 손가락 끝을 한참 동아 내려다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모로와 칸카, 말이 부딪치는 곳이 있었어. 비슷한 것 같지만 실은 다른 얘기였지.” “그랬어?” 이엔은 당황한 표정이 되어 시선을 천장으로 보냈다. “아... 잘 모르겠는데.” “모로가 설명한 대로라면, 소공작은 아마 서서히 독살 당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런데 칸카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단 말이야. 모로가 말하기 전에. 란지에는 눈을 내리깔며 잠깐 사이를 두더니 말했다. “꼭두각시, 라고 했어. ”꼭두각시?“ 이엔도 그제야 떠올린 듯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그래, 맞아.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이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했어. 이제 생각나. 그건 독살하고는 전혀 다른 얘긴데?” “그렇지. 그렇다면 모로는 거짓말을 한 거야.” 하일저가 말했다. “그렇다면 진실은 뭘까? 마법일까? 사람을 꼬두각시처럼 부릴 수 있는 마법이 있어?” “마법에 대한 것은 다른 사람한테 자문을 얻어봐야겠지만.......” 란지에는 스스로도 천천히 추리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같이 왔던 마법사 친구를 생각할 때 마법의 존재는 가능성 있는 이야기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거짓말을 한 까닭이 무엇일까. 만일 그런 마법이 있다면 우리한테 말하지 못할 까닭이 있을까? 오히려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려서, 쓸만한 파트너로 인정받는 쪽을 택할 것 같은데, 소공작의 행동을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은 소공작을 죽이는 것보다 더 유용한 이야기니까.” 이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그러면 그는 마법의 존재를 우리한테 숨기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게 아주 대단한 마법이어서 알려주기 싫었다던가. 그래서 독살과 같은 좀더 간단한 방법으로 대체해서 말한 거지.” 란지에가 고개를 저었다. “대단한 마법이라 해서 숨길 까닭이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우리가 마법사도 아니고 말이야. 만약에 마법의 내용 때문에 숨기는 거라면 내가 보기에... 일종의 금지된 마법이 아닐까 싶군.” “금지된 마법이라.” 그들 중 마법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 없었으므로 당장 무엇이라 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럴 법한 이야기였다. 위험한 마법을 금지하는 권위 있는 기관이나 금지된 마법의 목록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마법사라면 어떤 마법을 금지하는지 대부분 알고 스스로 피하기 마련이었다. 금지도니 마법을 추구하는 것이 알려지면 그 위험도에 따라 다른 마법사들과 교류가 끊어지는 정도에 그칠 수도 있고, 심할 경우 존경받는 상급 마법사들이 직접 제재에 나설 수도 있었다. 그러니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란지에가 다시 말했다. “물론 네 말대로 그것이 가나폴리의 사라졌던 마법 같은 것이어서 독점할 생각으로 알려주기 싫은 것일지도 모르지.혹은 둘 다일지도 모르고, 그런데 또 하나 고려해야 할 점이 있어.” “뭔데?” “모로의 이야기로 미루어 짐작한다면, 그가 소공작을 무척 증오할 것은 당연한 이치지. 그의 입장에서 보면 후계자의 자리를 뒤늦게 태어난 소공작에게 빼앗긴 셈이니까. 이건 중요한 사실이고, 그의 행동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어. 비록 내색하진 않았지만, 추측할 만한 암시는 남겼지.” 란지에는 검지로 잔 표면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시선은 흘러내리는 물방울에 머물렀다. 이엔은 그가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는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남들에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술을 시켰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엔으 s란지에가 가끔 이렇게 마시지도 않으면서 술을 바라보고 있을 때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내가 모로에게 지적했다시피, 이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작의 존재야. 소공작이 아무리 데모닉이고 가문을 물려받을 자리에 있다 해도, 상식적으로 공작을 도모하는 계략을 짜는 것이 먼저일 수밖에 없어. 그런데 복잡한 방법까지 써가며 소공작을 먼저 손을 썼지. 더욱 이상한 것은 마법과 같은 복잡한 방법까지 써가며 소공작을 묶어두려 했다는 점이야. 물론 소공작은 공작이 죽을 경우 바로 작위를 물려받게 될 테니 손을 쓸필요는있는 존재였어. 하지만 위협이 된다고 느꼈다면 소공작을 꼭두각시 따위로 만드는 것보다는 그냥 죽이는 것이 가장 빠르지 않나?” 이엔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꾸했다. “어쩌면 그냥 죽여버리는 것으로는 얻을 수 없는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거야. 소공작을 죽이지 않고 꼭두각시처럼 부릴 경우 모로가 얻을 수 있는 이점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에 의거하여 답을 내자면 ‘그런 것은 없다’야. 소공작은 그냥 죽이거나 또는 나중에 죽이면 되면 존재일 뿐이지. 독립적 변수가 아니란 말이야. 그렇다면 고려 대상이 되는 건 모로가 소공작에게 품고 있을 개인적 감정뿐.” “증오심?” 란지에는 얼른 대답하지 않고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말했다. “우리 모두 짐작하다시피 모로와 같은 자가 진심으로 공화국을 원하고 있다고는 상상하기 힘들지 않나.” 이엔과 하일저는 서로 얼굴을 쳐다봤으나 어느 쪽도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건 오늘 회견의 결과를 집약하는 한 마디가 될 수도 있었다. 란지에는 섣불리 결론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직감이 발달해 있지만, 논리적 근거가 뒷받침되기 전에는 결코 자신의 직감을 믿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만나본 결과, 그가 공화주의자가 될 사람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뼛속까지 귀족이지. 다만 자기 것을 빼앗긴 귀족일 뿐이야. 그런 자의 행동 대부분을 지배하는 건 빼앗긴 자리로 돌아가려는 욕망, 다시 말해 회귀본능이지. 그를 공화주의자로 만들고자 한다면 좀더 관찰하고 노력해봐야겠지만, 신뢰하는 것만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해.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그와 불안한 제휴를 하기 위해서는 모로라는 사람을 움직이는 동인을 확실히 알 필요가 있어. 물론 그가 원하는 것은 아르님 가문을 자기 손에 쥐는 것이지. 그 이상의 욕망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고, 하지만 오늘 보니 그의 심리가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싶었어.” “단순하지 않다면, 어떻게?” “어쩌면 그는 아르님 가문을 장악하고 싶은 마음보다, 소공작을 파멸시키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말하며 란지에는 잔을 집어들더니, 그로서는 매우 드믈게 입술에 약간 댔다. 비록 미량에 불과하지만 보랏빛 액체가 약간 줄어드는 것을 보며 이엔의 눈동자도 놀란 듯 흔들렸다. 란지에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것이 이번 제휴에 미칠 영향은 뭐지?” “조금 전 나는 공작을 먼저 도모할 것을 제안했고, 그는 그걸 받아들였어. 그가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했으니 소공작 문제가 이번 협상에서 고려 대상이 아니 것은 물론, 처치 역시 전적으로 그의 소관이 되었지. 하지만 그 자가 이번에 꾸민 한 판의 도박을 그의 관점에서 본다면 소공작의 처치 시기는 무엇보다도 중대한 문제야. 독약이든 마법이든 그런 것을 사용할 기회도 있었던 그가 소공작을 죽여버리지 않은 것으로 볼 때 그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어. 가장 좋은 시기. 그런 식으로 묶어 놓고 기다려서 얻을 이익이 전혀 없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남는 필요는 하나뿐이야. 바로 관객.” “관객이라니?” “자기가 한바탕 벌인 이 일을 보고 박수를 쳐 줄, 다시 말해 공포와 절망에 사로잡혀 줄 한 사람이 필요한 거야. 그 한 사람이 자신의 것을 빼앗아갔던 존재라면 더욱 좋고, 질투심에 사로잡히게 했던 탁월한 존재라면 더할 나위 없는 거지. 봐줄 사람이 없다면 공연의 의미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몰라. 미친 예술가들이 그렇듯이.” 이엔이 불쑥 말했다. “네가 한 평가치고는 무척 뜻밖인데.” 란지에는 웃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렇지?” 그 때 술꾼이 북적이는 테이블 사이로 한 사람이 걸어오더니 그들의 자리로 와 다짜고짜 털썩 앉았다. 이엔이 당황하여 쳐다보니 서른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가 취한 듯 불그레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저기, 우리는·······.” 그 때 란지에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요. 헨 씨. 아까부터 보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란지에를 향해 남이 볼세라 재빨리 고개를 숙여 보였다. “로젠크란츠 님께 인사드립니다. 말씀 나누시는 중인 듯해 조금 기다렸습니다.” 술취한 듯 비스듬히 앉은 자세나 얼굴과는 달리 취한 기색이 전혀 없는 침착한 목소리였다. 이엔이 재빨리 눈치채고 말했다. “그럼 이 분이 만나기로 한 사람?” 그들은 테오 일행을 보낸 뒤 이곳에서 기다린 이유는 나이트워커(Night-walker, 나이트워커의 조직원) 한 사람을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엔이나 하일저는 어떤 사람이 오는지 몰랐다. 나이트워커를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1단계 접선 등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란지에뿐이었다. 상대는 란지에를 오랫동안 알고 지낸 듯했다. 취객처럼 보이는 겉모습에 어우리지 않게 깍듯한 태도였고, 소년 간부인데도 나이에 관계없이 철저히 존중했다. “용건부터 말하지요. 아르님 가문의 소공작, 조슈아 폰 아르님의 최근 거취에 대해 상세히 조사해 주십시요. 대상 기간은 길수록 좋지만, 무엇보다도 올해 1월부터 일상에 생긴 모든 변동을 분석해 주셔야겠습니다.” 꽤 광범위한 의뢰인데도 상대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알겠습니다. 6월 안에 두 차례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나이트워커의 보고는 흔히 3차로 나누어졌다. 그 중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시의적절함을 중시하여 일단 얻은 정보를 가능한 한 빨리 보고하고, 마지막 세 번째는 모든 정보를 총괄하여 나이트워커 본인의 명예를 걸고 보고하기 때문에 시점은 단언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6월로 좋습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헨이라는 사내는 일어나기 직전, 얼굴에 표정을 약간 드러내며 말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새들이 여럿 따라붙었습니다.” ‘새’라는 것은 신왕국의 불만세력, 특히 민중의 벗 회원들을 색출하기 위해 국왕이 직접 움직이는 ‘왕국 8군’을 가리키는 은어였다. 란지에는 표면적으로는 그로메 학원의 평범한 학생일 뿐이지만, 그쪽에 어떤 강한 핵이 있다는 사실을 8군에서도 슬슬 간파하고 있었다. 란지에는 미소로만 응답했고, 남자는 재빨리 일어서서 다시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이엔이 고개를 돌렸다. “소공작의 조사?” “모로가 소공작을 어떻게 다룰 생각인지 알아내면, 그 자의 향후 행동도 짐작할 수 있게 돼. 그렇게 되면 그와 우리가 손을 떼려 할 시기도, 자신의 야심을 드러낼 시기도, 모두 알 수 있게 되지.” 그렇게 말한 란지에는 조금 후 덧붙였다. “어쨌던 소공작은 처리해야 할 인물이기도 하고.” “물론 그렇지.” 이엔은 합리적인 판단에 동의하면서도, 문득 심정적인 괴리를 느끼고 흠칫했다. 그녀는 남부 귀족 출신인지라 소공작 조슈아 폰 아르님을 직접 만난 일은 없었으나 같은 귀족이다 보니 소문을 전해들은 일은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데모닉의 불쾌함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비교적 객관적인 관점에서 말한 사람도 둘 정도는 있었다. 귀족다운 위엄은 없지만 우아한 자세를 지닌 소년, 꿈 속을 걸어다니는 것 같은 눈빛으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깜짝 놀랄 말을 무신경하게 내뱉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의가 없는 것을 알기에 미워하는 자신이 초라해지고, 그래서 더욱 미워하게 되는, 마치 치부를 들킨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불편한 사람이라고 말했었다. 다른 인간이 느낄법한 고뇌와 동떨어진 대신 오직 자신만이 아는 고뇌에 빠져 그 나이 또래가 좋아할 만한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다는 소년, 이 세상에 실수로 잘못 속하게 된 듯한 그런 존재가 공화국의 정신과 같은 것을 통감할 수 있을까. 귀족으로 태어난 까닭에 당연히 지고 있는 원죄와 같은 것을 알까. 저도 모르게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기에, 자신이 죽어야 할 이유도 모르는 어떤 섬세한 존재에 대한 일말의 감상적인 동정심을 느끼고 스스로도 흠칫했던 것이다. 하지만 공화국에 피해를 끼치는 인간들에 조금의 동정심이라도 품을 란지에는 아니었다. 포도주보다 투명한 붉은 빛, 란지에의 눈동자가 오늘만은 피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빛이 아닌가 느껴졌다. 하지만 귀족이면서도 혁면의 전사가 되기를 자청한 자신에게 조금의 후회도 하지 않기에 이것이 일시적인 기분임을 알고 있었다. 계단이 웅성거렸다. 2층에서 십여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내려오고 있었다. 그 중 두 사림이 정신을 잃은 여자 하나를 부축했고, 또 다른 사람은 발악하는 어린애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기묘한 행렬은 곧 홀을 가로질러 문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은 잠깐 돌아보았으나 곧 잊고 자기들의 놀음에 열중했다. 그들이 나가고 닫힌 문을 바라보던 란지에가 나직히 말했다. “도박 빚에 팔린 거다. 아무도 구원해주지 않는 곳으로 평생토록 유린당하며 살게 되겠지. 아이는 소매치기로 자라고·······.” 2층에 올라갔을 때 담깐 보았을 뿐이지만, 그의 눈에는 슬플 정도로 자명한 상황이었다. 란지에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아는 이엔은 그 말을 낭만적인 논리로 반박할 수 없었다. 밑바닥 사회의 생리에는 미사여구가 필요없었다. 오직 근원적 욕망만이 지배하기에 끝없이 적나라한 곳이므로. “소공작은 너와 나보다 고작 한 살이 많을 뿐이지. 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목숨을 공깃돌처럼 다루려 한다. 그런 일을 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고, 그렇기에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야. 남의 생명을 받으려면 내 생애도 똑같이 저당 잡혀야지. 더 팔려 가는 아이가 누군가의 어린 시절, 자란 젊은이는 분노로 사로잡혀 세상을 저주하고 있고··· 모든 것은 되풀이 된다. 이 나라에서, 이 왕국에서, 가난한 이 나라···. 당장 뛰어나가 저들을 막지 못하는 나는 존재 자체로 죄야. 왜냐하면, 나는 소공작과 같은 사람의 목숨을 받으려 하니까. 그는 천재이고, 아름다고, 자신의 청춘을 노도처럼 살아가고 있겠지. 그런 사람의 목숨값을 받고 우리가 한시라도 쉴 수 있을까? 내가 잠시라도 도망칠 수 있을까? 아니야, 그렇게는 못하지. 절대로 못 해. 결코 멈출 수 없어.” 이엔은 말없이 란지에를 보고 그의 결벽함을 받아들였다. 그는 진심으로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남의 생명을 빼앗기에, 자신의 행복도 내버릴 것이다. 그가 마신 한 모금의 포도주는 피였다. 동시에 상처에 끼얹는 한 방울의 알코올, 아픔을 지우는 망각의 물, 자신을 바칠 제단에 올린 제주(祭酒)였다. 고개를 뜨덕이고, 그녀도 소공자에 대한 동정심을 지워버렸다. 2. 별 바다 항해 “은하수 타고 흐르는 배 그 배는 하늘 건너 우리 곁을 떠난 이들의 세상으로 간다.“ 하늘로 올라가면 별이 더 가깝게 보일까, 그런 걸 궁금해하던 때는 다섯 살 전이었나. 별은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여전히 밀알보다 작게 시시한 빛을 뿌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조금 더 많아진 것처럼 보이긴 했다. 하지만 단지 날씨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평소 별을 보며 많은 시간을 보낸 일도 없었고, 객관적 비교가 될 리 없었다. 별 따위야 어떻던 아무래도 좋잖아. “별이 잘 보이네.” 언제 왔는지 약간 떨어진 곳에서 리체의 목소리가 들렸다. 캄캄하진 해도 어둠이 눈에 익은 터라 난간을 짚고 선 윤곽이 보였다. “괜찮냐?” 막시민이 불쑥 묻자 리체가 의아한 듯 고개를 돌렸다. “뭐가?” “날고 있잖아. 이 배” “그런데?” “좀 불안하다던가··· 됐어, 관두자.” 어둠 속에서도 리체가 입술 내미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 불안하다. 새삼 상기시키면 재밌니? 너만 저 아래 땅에 발 딛고 십몇 년 살았던게 아니야.” 몇 백 미터일지 몇 천 미터일지 모를 허공을 떠가는 그들이 딛고 선 건, 기껏해야 나무 판자 몇 개를 이어 붙인 바닥일 뿐이다. 막시민도 리체도 그런 사실을 잊어버릴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둘 다 불빛 한 줌 보이지 않는 난간 아래보다 머리 위의 별에 대해 떠올리고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리체는 일부러 고개를 흔들더니 말했다. “생각보다 바람이 심하지 않네.” 쥬스피앙이 조작해 놓은 대로 내버려뒀을 뿐이라 얼마나 높이 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사실 방향도 잘 몰랐다. 배 안에 있는 세 사람 중 조작법을 아는 사람은 조슈아뿐인데, 배가 출발한 후 반나절이 흘로 밤이 된 지금까지도 잠들어 깨어나지 않은 채였다. 그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냥 떠가는대로 내버려둘 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천지사방에 아무 것도 없는 하늘을 떠가는 배 위에, 오직 그들 셋뿐이다. 해가 있을 때 발 아래 까마득히 보이던 푸른 물결은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무서웠다. 뱃전을 스치는 구름과 놀라 달아나는 새들, 지는 해를 따라가는 뱃머리의 광채, 노을 서녁에 흩어진 황금빛 섬들, 그 모두가 살아 생전 다시 볼 수 없을 듯한 황홀한 광경인데도 탄성 한 번 나오지 않았다. 다리와 아랫배에서 맥이 쭉쭉 빠지고, 뭔가 먹으려해도 식욕이 없었다. 두 사람은 대화도 거의 않고 한나절을 보냈다. 배의 크기는 열 댓 명 쯤은 너끈히 탈법했으므로 세 명 정도로는 하루 종일 마주치지 않고 지낼 수도 있었다. 처음에 비행선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왜 이럴 거란 생각을 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큰 배를 세 명이 제대로 다룰 수 있을지, 밤새 엉뚱한 쪽으로 가버리지는 않을지, 만약 바다 한 가운데 추락하거나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할수록 걱정거리는 늘어만 갔다. 물론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대책은 없었다. 리체가 가까이 와서 서더니 하품을 하며 말했다. “너나 나나, 불안하다고 잠을 안 자고 깨어있어 봤자 무슨 뾰죽한 수가 있니? 다 잊어버리고 잠이나 자는 쪽이 좋을 것 같은데, 조슈아가 깨어 있다면 모를까.” “조슈아가 깨어 있다면.” 막시민은 뱃전을 톡톡 치다가 한심한 듯 픽 웃었다. “분명 하늘을 날고 있다는 사실에 들떠서 떨어질 걱정 따위는 뒷전일거다.” “세상엔 별 사람이 다 있는 거지.” 리체는 자기가 말해 놓고 좀 생각하는 기색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세상엔 별 일이 다 있는 거고 말야. 평생 블루 코럴을 떠날 일이나 있을까 생각하던 내가 다른 섬도 아닌 다른 나라로, 그것도 하늘을 나는 배를 타고 가다니. 그런 의미에서 꼭 좀 물어야겠는데 말야.” “뭘?” 리체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말했다. “조슈아 말이야, 유령을 보는 능력이 있니?” 바람이 조금 강해졌다. 돛은 내려져 있었지만 밧줄과 돛포가 펄럭거리는 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조금 후, 맥빠질 정돌 단순한 대답이 들려왔다. “응.” 리체는 기침을 캘룩 하더니 말했다. “그런···문제를 그렇게 쉽게 말해도 되는 거니? 내가 원하는 건 좀더 자세한 얘기야.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잠을 못 자고 있는 건 날아가는 배 때문이 아니라고.” 막시민은 하품을 했다. “아아, 유령이 네 머리맡에 와서 얼굴이라도 빤히 들여다볼까봐 그래? 그런 걱정이라면 일찌감치 접어도 돼.” “왜?” “어차피 네 눈엔 안 보인다고. 깨어 있어 봤자지. 혹시 지금도 네 코앞에서 빤히 바라보고 있는지 알 게 뭐냐?” 리체는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얼굴을 젖혔다. 막시민은 웃지도 안고 뱃전에 턱을 괴었을 뿐이었다. “나도 그런 줄 안지 얼마 안 됐어.” “어려서부터 친구였던 거 아니야?” “맞는데, 예전엔 안 그랬거든.” 리체는 조금 사이를 두고 다시 물었다. “그런데 유령을 보는 것과 오늘 낮의 그 난리는 어떻게 관계가 있는 거니?” “나도 몰라.” 리체는 팔짱을 끼더니 못마땅하게 말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네가 아는 데까진 설명해 달란 말야. 내가 아무리 여자애여도 공주님처럼 모시고 다닐 것도 아닌데 일부러 말 안해서 얻을 게 뭐니?” “네 말이 맞기 한데.” 막시민은 갑자기 안경을 벗어 옷깃에 닦았다. 뭔가를 분명하게 보려는 것 같았다. “나도 정말 아는 게 없어. 조슈아가 깨면 물어보는 게 빠를걸. 그게 아니면··· 좀더 잘 설명해 줄 친구가 있긴 한데.” “친구하고?” 되묻다 말고 리체가 갑자기 말을 뚝 그쳤다. 막시민의 말이 가리키는 의미를 알아들었던 것이다. “너, 그러니까 너도 유령이 보이니?” “물론 난 안보여.” 막시민은 주위를 한 번 휘둘러 보았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지금 인사하는 쪽이 낫겠는데.” 그 말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을 깨달은 리체는 눈만 크게 뜬 채 뱃전에 찰싹 붙어 섰다. 뱃전을 넘어 뛰어내릴 수 없는 것이 지금처럼 유감으로 느껴진 일이 없었다. 도망치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이 한 목소리가 귀로 파고들었다. <안녕하신가요, 아가씨.> 그 목소리가 호의적으로 들리던 말든 상관없이 리체는 완전히 얼어 붙었다. “나, 난 몰라··· 마, 막시민, 어··· 어떻게 좀 해봐, 응? 난 지금 준비가 안 됐다고. 이렇게 다짜고짜······.” “뭘 그렇게 떠는 거야.” 처음에는 자기도 놀랐던 주제에 무심한 목소리로 말한 막시민은 승강구가 있는 쪽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오랜만, 아니 어제 보고 또 보는군 그래.” <신호를 잘 알아들어 줘서 고마워요. 어쨌던 그 사이에 많은 일이 벌어진 모양이군요.> 리체는 자기도 승강구 쪽을 바라봤지만 물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밧줄 머리 하나가 살아 있는 뱀처럼 꼿꼿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막시민은 그녀가 바들바들 떨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말했다. “원한다면 내 뒤에 숨어.” “그래도 된다면 정말 고맙겠어.” 대꾸와 동시에 리체는 막시민 뒤로 달려가 딱 달라붙었다. 짧은 웃음소리가 나고, 다시 목소리가 말했다. <놀랄까 싶어 최대한 점잖게 말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던 것 같군요. 아브릴 양.> “기절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담 큰 아가씨라고 생각해야 될 걸.” 막시민이 중얼거렸다. <그래요. 맞는 말이군요. 원활한 대화를 위해 먼저 이야기하자면, 난 지금 승강구 위에 앉아 있어요. 이야기하는 동안 가까이 가진 않을 테니 안심해요. 목소리를 들으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천천히 호흡을 고르고 있던 리체가 겨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아요?” <전부터 보아 왔으니까요.> 막시민이 얼굴을 찌푸리며 잔소리조로 말했다. “그런 말을 해봤자 더 놀라기만 할 뿐이잖아.” 리체가 막시민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주며 말했다. “아니야, 역시 유령이라면 언제 어디에 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잖아. 안 놀랐어.” “그런 말은 손에 힘을 빼고 이야기해야 신빙성이 있다고.” <난 켈스니티 미드라고 합니다. 아가씨는 클라리체 데 아브릴 양이죠? 전부터 보긴 했지만 서로 마주한 것은 처음이니 정식으로 인사할까요? 비록 보이진 않겠지만 말입니다.> 리체가 다시 한 번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내 이름을 정말 아네요?” 켈스니티가 웃으며 말했다. <그 이름이 훨씬 우아하니까, 그 쪽이 좋습니다.> “우아하긴 한데 어울리진 않는군.” 막시민의 냉담한 평가에 리체는 발등이라도 밟는 대신 입술만 약간 내밀었다. “우아하다는 말 자체가 나하고 어울리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잖아.” “그런 솔직함이 너의 좋은 점이라고.” “칭찬 같은데 묘하게 기분 나쁘군 그래.” <긴장이 좀 풀린 것 같아 다행이군요. 그럼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좀 들을까요. 내 도련님은 푹 잠들어 아직 깨어나지 못하는 모양이니 말입니다.> 막시민은 리체에게 어깨 좀 살살 잡으라고 잔소리하다가 고개를 돌리며 말트를 바꾸었다. “그래, 그것부터 물어야겠는데. 조슈아, 저대로 괜찮은 거야? 그냥 자고 있다고 생각해도 되는 건가?” <기운을 회복하려면 좀 시간이 걸리겠지만, 다친 것도 아픈 것도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갑작스런 강령의 후유증이라고 생각되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직접 해주셔야겠군요.> 당시 상황을 떠올린 막시민은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 따위를 기분 좋게 기억할 리 없는 그였다. “그 기분 나쁜 여자 목소리가 해준 말대로라면, 백명이 좀 안 되는 영혼들이 한꺼번에 조슈아의 몸 속으로 들어갔다는 거야.......” 간추려 한 이야기가 마무리될 무렵, 켈스니티는 한참 동안 대꾸 없이 잠자코 있었다. 혹시 가버린 건 아닌가 생각한 리체가 조심스럽게 막시민에게 속삭였다. “혹시...등 뒤에서 불쑥 나타나는 건 아니겠지?” “나타나봤자 별다른 일은 없어. 저 친구는 조슈아와 몇 년이나 같이 다녔다고.” “그래도 유령은 유령이잖아. 몸 속에도 맘대로 들어올 수 있다는 얘기잖아?” “내 얘기를 제대로 듣긴 한거냐? 조슈아가 허락한 뒤에야 들어왔다고 했잖아.” “그건 조슈아처럼 강력한 영매의 경우고, 우리같은 보통 사람은 얘기가 다를 수도 있잖아. 그 유령들이 모였을 때 쥬스피앙의 아저씨도 위험하다고 경고했다고.” 막시민이 한숨을 쉬며 다시 대꾸하려 하는데 켈스니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브릴 양의 말이 맞습니다. 이제 조슈아의 주위에는 백 명도 넘는 유령들이 수시로 출몰할텐데 그들이 다른 사람의 몸을 탐내지 않으란 법이 없군요. 물론 두 사람에겐 영매의 힘이 없으니 간단한 일은 아니겠습니다만.......> 그 말고 함께 막시민의 어깨도 심각하게 아파 와서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손에 힘 좀 빼! 여자애가 왜 그렇게 손아귀 힘이 센 거야?” 그러나 막시민이 뭐라 하든 말든 리체는 승강구 쪽만 뚫어져라 보며 물었다. “저, 정말롤 그런 건가요? 그,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돼요?” 켈스니티가 대답하기 전에 막시민이 먼저 말했다. “잠깐! 내 생각에는 유령은 영매의 몸에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슈아에게 허락을 얻으려 했잖아. 그런데 그런 유령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는 우리 같은 사람에게 그렇게 쉽게 들어올 수 있다는 게 말이 돼?” <문제는, 유령도 여러 종류라는 점입니다. 쥬스피앙의 마법사께서 한 이야기를 따르자면 오늘 낮에 그곳에 모인 ‘군단급’이라는 유령들은 내가 아는 자들만이 아니었으니, 그 능력도 내가 다 알 수 없다는 것이지요. 간과할 문제는 아니라는 이야깁니다. 그들 중 몇이 조슈아의 뒤를 따라왔을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조슈아가 곁에 있기 때문에 안전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일차적으로 조슈아와 접촉하고 싶어할 테니까 말입니다.> 막시민은 켈스니티가 한 말 중 ‘내가 아는 자들’이라는 부분에서 뭔가를 느끼고 말했다. “그런데 말야, 그들이 켈스니티 당신을 ‘사제’라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 사실이라면 그건 무슨 의미야?” 잠시 후 들려온 켈스니티의 목소리는 이례적으로 딱딱했다. <그들이 그렇게 말했나요.> “그래, 그들이 거짓말을 한 건가?” <아니오. 거짓말을 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니 좀 뜻밖이군요.> “그녀라니? 혹시 나한테 말을 건 여자 목소리를 말하는 건가? 그게 누구인지 알고 있어?” <압니다. 코르벨이었겠죠. 당신을 속이려 했다면 그녀밖엔 없습니다. 안타깝군요. 그녀가 내 오랜 노력을 헛된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녀가 종용하는 바람에 조슈아가 수백 명의 유령들이 드나들 통로를 열여 버렸으니.> 말을 하다가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막시민이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휘둘러보는 순간 갑자기 덜컥, 하고 소리를 내며 승강구가 열렸다. “조슈아?” 리체느느 다른 유령이라도 나타났다고 생각한 것인지 다시 한 번 막시민의 어깨를 눌러댔지만, 승강구 위로 나타난 사람의 그림자를 보고는 겨우 손을 멈췄다. 유령이 곁에 없다면 유령 같다고 한 마디 했을 정도로 창백한 얼굴이긴 해도 분명 조슈아였다. “벌써 일어나고 괜찮아?” 조금 전까지는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찌된 건지 첫 마디가 그렇게 튀어나왔다. 조슈아는 승강구를 닫고, 조금 전 켈스니티처럼 그 위에 앉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은데. 배가 고픈 듯도 하고.” 그리고 고개를 돌려 주돛대 쪽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켈스도 왔네.” 리체는 알 수 없는 위화감으로 막시민 뒤에 숨은 채 흘끔거리기만 했다.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조슈아는 리체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 켈스는 그러니까.......” <아브릴 양과는 이미 인사 나눴어, 문젯거리 도련님.> “왜 또 문젯거리야? 뭐가 마음에 안 들어?” <내가 그토록 막았는데 결국 반응을 보여서 유령들을 모조리 불러들여 놨으니 앞으로 잘도 해나가겠다. 내 충고는 모두 귓등으로 듣는 게지.> 리체나 막시민과 대화할 때는 지나칠 정도로 정중한 켈스니티였지만 조슈아에게는 태도가 사뭇 달랐다. 조슈아는 그냥 씩 웃었다. “실수였어요, 켈스. 당신을 만났던 때하고 똑같았죠. 그 애가 유령인 줄 전혀 몰랐다고요. 그 댁에 따님이 있는 줄 몰랐다면 조금쯤 의심했을 텐데.” <실수였다고? 그 일만이 아니잖아? 네가 직접 유령들에게 ‘내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했다고 하던데,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었던 거야?> “아, 물론 몰랐죠.” 조슈아는 이어서 뭔가 말하려 하다가 삼켜버렸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 강령릉 허락했던 것이 틀림없는데, 사탕 훔쳐먹고 시치미떼는 꼬마처럼 말간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기가 막혔다. “자, 조슈아. 이 일이 지금 별 것 아니게 느껴지냐? 난 안 그런데. 오늘 일어난 일에는 내가 모르는 비밀이 많은 것 같거든. 그걸 알아야 문제가 해결 되겠지?” 그렇게 말한 막시민은 눈을 조금 가늘게 뜨며 보이지 않는 상대를 쏘아 보았다. 마음 속에 남은 의심을 어떻게 이어 맞출지 고민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결국 그는 입을 열었다. “솔직한 대답을 들어야겠는데. 당신 말야, 지금까지 거짓말했던 것 아니야? 내게도, 물론 조슈아에게도. 아니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거짓말이었다는 느낌이 오는데, 차라리 어디까지 진실이고 거짓인지 분명히 하라고.” 다시 사이가 길었다. 대답이 돌아왔을 때 켈스니티의 목소리도 착 가라앉아 있었다. <조슈아가 가끔 당신 이야기를 할 때, 데모닉인 자신보다 나은 점이 있는 친구라고 말하곤 했지요. 오늘에야 그 말을 분명히 이해하겠군요. 그렇습니다. 조슈아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이유야 있었지만, 속였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막시민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가차없이 말했다. “인정만 할 것이 아니라 뭘 속인 건지 분명히 말하라고, 반성 듣자고 이야기 꺼낸 건 아니야. 난 당신이 여러 모로 수상쩍어. 조슈아가 몇 년 동안 함께 지냈다고 해서 일단은 믿었지만, 어째서 조슈아을 따라다니는 건지 석연치 않았어. 더구나 조슈아의 조상과 아는 사이라면서? 그냥 친구의 손자라도 보는 기분으로 놀러 다닌다고 보기엔, 당신은 조슈아의 인생에 너무 관심이 많았단 말이야. 다시 말해, 조슈아한테서 뭔가 얻어갈 것이 있는 모양이란 생각이 드는데.” 조슈아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다가 막시민을 보고, 다시 켈스니티를 보았다. 리체는 유령에게 막말을 하는 막시민에게 질린 모양이었다.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자 막시민이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 당신의 존재나 힘이 조슈아에게 기대고 있는 건 아닌가? 오늘 낮에 보니 유령들은 산 사람의 몸을 무척 탐내는 모양이던데. 조슈아처럼 강력한 영매라면 더할 나위 없는 거겠지? 더구나 당신을 사제라고 부르는 유령 군단을 이끌고 있는 처지이고 보면 조슈아를 이용해서 뭔가 할 계획을 꾸몄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고.” 화를 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심한 말이었지만, 켈스니티의 대답은 차분했다. <오해를 이해합니다. 하지만 먼저 말해 두고 싶군요. 내가 조슈아를 만난 것이 나 자신조차 이유를 모르는 우연이라는 것, 그리고 아직까지 해를 끼친 것은 전혀 없다는 것, 그것만은 사실입니다. 조슈아의 힘에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했던가요? 그 추측은 맞습니다. 나는 굉장히 오래 전에 죽은 사람입니다. 그 후로 한 번도 비취반지 성을 떠나지 못한, 이를테면 지박령이었던 셈이지요. 그런데 조슈아를 만나고 나자, 나는 지박이 풀려 비취반지 성을 떠날 수 있게 됐습니다. 조슈아를 처음 만났을 때는 자주 나타나선 안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다시 그의 곁으로 간 것은 조슈아와 교감을 유지하면 얼마든지 성에서 떨어져 먼 곳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그를 이용했다는 말도 가능하겠군요.> “그러면 당신은 비취반지 성을 떠나고 싶어서 조슈아와 함께 다니게 됐다는 건가?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이 뭐였지? 당신을 사제라고 부르는 유령들은 조슈아를 만나기 전부터 함꼐 지냈던 건가?” <그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비취반지 성에 묶여 있는 존재들이었지요. 조슈아가 집요하게 말을 거는 그들에게 대답했기 때문에, 그들 또한 오랜 지박에서 풀리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목소리가 아닌 실체로 나타나는 것만은 내가 막고 있었습니다. 나는 살아 생전 직업이 사제였으므로, 죽어 유령이 된 지금도 다른 유령들을 다루는 힘을 얼마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그것마저 깨어지고 말았지요. 난 아직도 그 소녀 유령이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왜 그런 사실을 조슈아에게 말하지 않았지? 뭔가 나쁜 의도가 있으니 말하지 않은 것 아닌가?” 뜻밖으로 켈스니티는 웃었다. <심문 당하는 느낌도 오랜만이니 참 새롭군요. 당신 같은 사람에게는 핵심부터 말하는 것이 좋겠어요. 조슈아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그 편이 그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지금과 같은 결과가 오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유령이라는 존재에 대해 일부러 좋지 않은 인상을 주려고 애썼지요. 유령들은 서로 말도 통하지 않고 욕망으로만 가득찬 존재라고 말했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모든 유령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나와 그들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제가 원한 건, 다른 유령들이 조슈아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모든 일은······.> 켈스니티가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본 사람은 조슈아뿐이었다. 둘은 눈이 마주쳤고, 켈스니티는 막시민이 아니 조슈아를 향해 힘주어 말했다. <지금처럼 수많은 유령들이 노출될 경우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이성의 경계가 무너져버릴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막시민은 조슈아가 허공을 빤히 보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조슈아가 입을 열었다. “아니. 그 생각은 틀렸어요.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았더라면 당신의 말을 믿었을 거야. 물론 당신도 겪어본 일이 아니니 그렇게 말한 것이겠지만. 하지만 내 실수 덕택에 이젠 분명히 말할 수 있게 됐는데, 몇 백의 유령들이 내 주위를 돌아다닌다 해도 미치는 일은 없어요. 그건 말이지, 정말로···.” 조슈아는 이번엔 막시민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분명한 말투로 말했다. “아무 것도 아니었어.” “너, 기억하고 있는 거야?” 그땐 분명히 의식 없는 모습으로 보였었다. 그러나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네가 날 데려와 침대에 눕혀 줘서 잠들기 직전까지. 다 기억나.” “아흔 몇 명인가 하는 유령들도?” 조슈아는 입끝을 움직였으나 미소는 아니었다. “그래. 그들 중 몇십 명과는 이야기도 나눴어. 내가 놀란 건·······.” 조슈아가 다시 켈스니티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들 중 여럿이, 그동안 내게 말을 걸던 목소리의 주인들이었다는 사실이었죠. 전에는 전혀 구별할 수 없던 목소리들이었는데 만나고 보니 다 알겠더라고요. 내가 받은 인상을 말하자면 그들은 무척 흥미로운 사람, 아니 유령들이었죠. 그동안 나에 대해 느낀 것을 앞다투어 말해줄 때는 얼마나 당황했던지.” 드디어 조슈아의 표정이 미소로 바뀌었다. “전에는 그들의 목소리를 통제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귀찮아하거나 두려워했죠. 하지만 내가 그들 모두를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물론 처음에는 너무 엄청난 인격의 홍수 속에서 내 정신도 잠시 놓쳤지만, 결국은 모두 알아듣겠더라고요. 마흔 명이 넘기 시작하면 대화하기 불편하긴 하지만, 내가 원한다면 그들을 내보낼 수도 있고 또 들여보낼 수 있다는 것도 알았고. 그래서 더 이상 그들을 겁내지 않아. 더구나 첫 번째 강령은··· 내가 그 남자, 일명 샐러리맨의 손목을 부러뜨렸던 때일 텐데, 난 그 도움에 대해 무척 감사하고 있거든.” 그런 말을 하는 조슈아는 피곤한 기색이긴 해도 얼굴은 상쾌해 보였다. 이야기를 들으며 막시민과 리체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으나 켈스니티는 그렇지 않았다. <유령을 너무 간단하게 생각해선 안 돼.> “물론 그렇겠지만······.” <네가 그렇게 많은 유령을 한 번에 통제할 수 있으리란 것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지. 하지만 네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단정하지 마. 무엇보다도 그들의 이야기를 무작정 믿어선 안 돼. 호의적인 유령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아.> “하지만 켈스니티.” 조슈아가 진지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당신은 지금까지 내가 유령을 싫어하도록 일부러 좋지 않은 얘기만 해왔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지금 또 그런 이야기를 하면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돼?” 이번에는 정말 한참동안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조슈아는 여전히 시선을 고정한 채였고, 막시민은 켈스니티를 볼 수 없는데도 기색이 좋지 않다고 느꼈다. 이윽고 대답이 들려왔을 때 막시민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어쩔 수 없구나. 네게 하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가 있었어. 이제부터 하는 얘기를 오해 없이 들어 줬으면 좋겠다.> 3. 약속의 사람들 “나는 여기서 내가 죽더라도, 이카본이 우리와 한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는 분명히 지키겠지요. 그러나 나도 그와 한 약속을 지켜, 이 성에서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마지막 방에, 마지막 핏자국 하나를 남길 때까지, 내가 먼저 약속을 깰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 약속을 지키고 나면, 나는 유령의 모습으로라도 고향에 갈 수 있겠지요.” 조슈아의 눈에는 돛대에 기대선 채 그를 보고 있는 켈스니티의 눈빛이 잘 보였다. 바람이 불지만, 그의 옷자락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움직일 생각이 없다면 무엇이 그의 몸을 통과하든 그림처럼 꼼짝 않을 수도 있는 그인데, 지금처럼 거도 말하려면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여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나에 대해서 말하자. 난 이카본과 어린 시절을 같이 보냈던 친구이자 공작이 되기가지 그를 보좌한 세 명의 맹우(盟友) 중 하나였지. 일부러 그냥 ‘미드’라고 말했지만, 내 본래의 성은 발미아드라고 한다.> “당신이··· 발미아드였구나.” 전에도 이카본의 친구라고 말하긴 했지만, 이카본이 일찍이 뜻을 이루고자 맹약(盟約)을 맺은 세 사람 중 하나라는 사실을 밝힌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이 맹우들은 이카본이 페리윙클 일대의 섬들을 장악하고 이후 아르님 공작이 될 때까지 가장 큰 역할을 했다지만, 이상하게도 이름 외에는 전해 내려오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가문의 문장을 그린 사람으로만 알려진 오블리비언, 마법사였다는 말만 남은 티카람, 그리고 사제라는 사실조차 잊혀진 발미아드. “당신들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서 이상하게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그래, 가장 가까이에서 도왔던 맹우라고 하면서, 왜 우리들이 누구인지 아무 기록도 남지 않았을 것 같아?> 리체는 돛대 쪽에서 뭔가 톡톡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마치 사람이 생각에 잠겨 손끝으로 벽을 두드리듯이 말이다. 조슈아는 눈을 크게 뜨며 생각하는 얼굴이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첫째로, 그건 우리의 약속을 끝까지 가지 못했지 때문이야. 다시 말해 맹약은 깨어졌던 거지.> “깨···졌다고요?” 조슈아는 입을 벌린 채 멍한 표정이 됐다. 막시민이나 리체는 이해할 수 없는 문제겠지만, 조슈아의 입장에서는 자기 집안의 전설이 통째로 부정된 것이니 작은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떠났고, 누군가는 사라졌지. 지금의 내 모습은 죽을 당시의 모습 그대로야. 죽은 자는 나이를 먹지 않으니까. 오래되어 잊었지만 서른 몇 살 정도 였던가... 그 때 비취반지 성에서, 나를 비롯해서 백여 명이 넘는 사람이 함께 죽었지.> 조슈아가 기억하는 비취반지 성은 전투나 죽음이 전혀 상상되지 않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낡은 계단, 발코니, 아름다운 방들, 피 냄새 따위는 상상도 되지 않는 푸르른 정원. 그러나 조슈아가 기억하는 성의 모습을 떠올릴수록 켈스니티의 이야기가 오히려 더 섬뜩하게 들렸다. 성 아래에 묻혀진 성이 하나 더 있다는 이야기처럼. 옆에서 듣고 있던 막시민이 불쑥 말했다. “그럼 그 때 죽은 사람들이 오늘 조슈아에게 나타났던 유령들이란 말인가?” 켈스니티는 막시민 쪽으로 몸을 돌렸지만, 물론 막시민은 알지 못했다. <지난번에 말했다시피 그곳은 유령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 그들 외에도 많은 유령이 있었던 것 같지만, 조슈아의 몸 속에 들어갔던 유령들은 대부분 그들이 맞을 겁니다. 그 자들이 지금 날 만나길 꺼리고 있어서 정확하진 않지만.> “그래서 그들이 당신을 사제라고 부르는군? 살아 생전에 함께 지내면서... 아, 그러면 그 유령들도 이카본이라는 사람의 동료들이었던 거야?” <그렇습니다. 그들은 몸두 페리윙클 섬에서부터 이카본을 따라왔던 사람들입니다. 당시 그들은 ‘약속의 사람들’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들은 이카본의 약속을 믿고 따라온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이카본은 그들의 힘을 제공하는 대가로 그들 모두가 원하는 어떤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때 바닥을 보고 있던 조슈아가 얼굴을 번쩍 쳐들었다. “켈스, 그러면 그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던 거군요. 만약 이뤄졌다면 그들과 당신이 지금처럼 유령이 되어 떠도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사람을 유령으로 만드는 것은 원념이 아닌가요? 도대체ㄷ 그 소원은 뭐였나요? 몇 백년이 넘도록 당신들을 비취반지 성에서 떠돌게 한 그것은 무엇이었죠?” 켈스니티가 고개를 돌려 조슈아을 내려다보았다. <그건 너에게 알려줄 수 없어. 하지만 지금도 그걸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만은 말할 수 있겠지.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네게 경고해야만 해. 조슈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았지만 켈스니티는 스칠 듯 가까운 곳까지 와서 조슈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켈스니티가 이처럼 얼굴을 가까이 댄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전에 켈스니티는 조슈아의 몸이 자신을 통과하는 것을 되도록 피하고 싶다고 말한 일이 있었다. <다른 자들은 나와 달라. 나는 너를 보고 있으면 죽마고우였던 이카본이 생각나서 마음이 부드러워지지만, 그들 ‘약속의 사람들’은 생각이 다르지. 그들 중 많은 자들이 이카본이 그들을 저버렸고, 그래서 자기들이 죽게 된거라고 믿고 있어. 충성을 바쳤는데 대가는 배신뿐이었다는 거지. 그런 생각에 깊이 사로잡힌 자들은 이카본이 아직 살아 있을 때도 원귀처럼 나타나 그를 다그치기도 했고... 그 때는 오래 전이라 그들의 힘이 미약했지만, 이제 긴 세월이 흘러 그들의 힘은 강해졌어. 더구나 그들 중에는 리프크네 군에게 말을 걸었다는 코르벨의 오빠, 코르네드가 잇어. 그는 살아 있을 때에도 이카본에게 불만이 많았던 자이고... 지금은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이카본이 모든 것을 망쳤다고 믿고 있어. 더구나 그는 상당한 실력의 마법사이기도 하지. 너를 이용하고 내버려도 되는 도구처럼 생각하는 그런 자가 네 몸에 들어가게 해선 안 돼. 절대로, 안 돼.> 막시민과 리체가 듣기에도 그 목소리는 진심이라고 느껴졌다. 리체는 처음에 무서워하던 것도 잊은 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면서 문득 켈스니티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넌 그들에게 직접적 복수의 대상도 아니고, 또 그들의 목적이 복수도 아니지만 좋게 생각할 이유도 전혀 없지 않겠나. 전부터 네 주위를 맴돌던 수많은 목소리들을 생각해 봐. 그들 대부분이 비웃음을 띠고 있거나 쌀쌀맞지 않았나? 호의적인 목소리가 있었다 해도 아주 일부였을 거야. 그런 자들을 네 몸에 들어오도록 한 것은 큰 실수였어.> 조슈아는 반박하려 했다. “하지만 난 그들을 통제할 수 있어요. 무어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직과적으로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단 말입니다.” 켈스니티가 안타깝게 고개를 저었다. <이카본 이래 수많은 데모닉들이 있었는데. 왜 그들의 수명이 그토록 짧았는지, 왜 미쳐버린 자들이 그렇게 많은지 모두가 그 답을 몰랐지. 기록에 남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데모닉은 너처럼 영매의 힘을 갖고 있었고, 실제로 강령술을 사용한 자들도 있었다는군. 그러나 그 힘을 쉽게, 자주 사용한 자 일수록 빨리 인격이 무너져 내렸어. 나 또한 데모닉의 비밀을 다 알지 못하지만 강령술을 자주 사용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만은 들어서 알고 있지. 네가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해도, 다시는 그런 힘을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켈스니티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던 조슈아는 이윽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입을 열자 뭔가 목에 걸린 것처럼 막힌 목소리가 나왔다. “켈스, 나 말이죠. 사실은 유령들을 받아들인 까닭이 있었어요.” 막시민이 말했다. “나도 지금까지 그게 궁금했어. 네가 갑자기 결심한 거처럼 ‘모두 들어오라’고 말한 이유 말이야. 무슨 생각을 했던 거냐?” 조슈아는 얼마간 더 망설이더니 입을 뗐다. “그건... 이브... 때문이야.” 막시민은 이브라는 이름을 오래 전에 들었을 뿐이라 당여히 잊고 있었다. “그게 누군데?” “이브노아... 누나.” “누나? 옛날에 죽었다던?” 말해 놓고서야 막시민도 깨달았다. 이브노아라는 이름의 그 누나도 비취반지 성에서 죽었고, 그것도 독약을 마셨으니 자연스럽게 죽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세자르 아저씨가 얘기했지. 들판에서 헤매다가 어떤 아가씨를 봤는데 갑자기 사라졌다고, 그런데 그 아가씨 얼굴이 ... 나를 닮아더라고 말이야. 나, 그 이야기를 듣는데,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어.” 조슈아는 지금도 추운 사람처럼 턱을 약간 떨었다. 막시민은 세자르가 그 말을 했을 때 조슈아의 얼굴이 질리다못해 새파래졌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땐 왜 그런지 몰랐었다. “지금까지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어. 누나도... 누나도 유령이 될 수 있다는 거 말이야. 나, 지금까지 켈스한테 익숙하다보니 유령이 무섭다고 생각한 일이 없었어. 그런데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말이야, 얼마나 무섭던지... 입술이 얼어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더라고. 살아서 나와 같이 지내던 사람이어서 그럴까, 아니면 죽을 때의 누나가 생각나서?” 조슈아는 켈스니티에게 고개를 돌렸다. “켈스, 당신은 알 수 있나요? 누나의 유령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어요?” 켈스니티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도 알 수 없어. 그런데 그렇게 무서웠는데 어째서 강령을 하려한 거지?> “무서워서, 무서워하는 내가 너무 싫었던 거야.” 조슈아은 손을 들어 자기 얼굴을 매만졌다. “나는 누나를 사라하지 않았나, 누나가 유령이 되어 나타났다면 틀림없이 나를 너무 보고 싶어할텐데, 반가워하기는커녕 무섭다고 떨기나 하고, 누나가 알았다면 얼마나 슬퍼했을까, 어쩌면 그걸 알고 누나가 내 앞에는 나타나지 않은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나 자신이 너무나 싫었던 거죠. 살아 생전 누나의 애정을 귀찮게 생각했던 나, 죽어서도 마주치기 싫어하는 나, 나란 놈이 얼마나 되먹지 못한 녀석인 건지, 정말로 나밖에 모르는구나, 더구나, 누나는 그때 나 대신 죽은 건데......” 아무도 입을 떼지 않았다. 조슈아는 팔꿈치를 무릎에 짚더니 한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그렇게 하면, 그들 중에 있을지도 모를 누나도 내 안으로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누나에게 직접 말할 수가 없으니까 아무도 거절하지 않는다고 말해버렸던 거죠. 하지만 달리 보면 그 수많은 유령들 속에 누나가 섞여버려서 내 쪽에선 알아보지 않아도 되는 상황르 바랐던 건 아닌가... 그런 혐오스런 생각도 들어요. 물론 누나는 못 만났어요. 이젠 내가 뭘 바라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조슈아는 이마를 짚은 채 침묵했고, 다른 사람들도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어둠이 조금 옅어질 무렵, 켈스니티가 말했다. <조슈아.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저지른 일은 간단하지 않구나. 누나의 일에 대해서는 나도 뭐라 말할 수 없다만..., 앞으로는 유령과 마주쳐도 네 몸 밖에서 만나도록 해. 다른 변화가 있을 때까지는 유령ㅇ르 몸에 들여놓지 마라. 그리고 이런 얘기가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유령들은 죽은 후 얼마동안은 죽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다니게 되는데, 너희 누나도 독약을 마셨으니 그리 끔찍한 모습은 아닐 거야.> 조슈아는 한참 침묵했지만 입을 열었을 때는 목소리가 좀 나아져 있었다. “누나가 죽은 것도 이미 몇 년 전의 일이에요. 세자르 아저씨가 누나 죽을 당시의 모습을 봤던 거라면 아마 무척 놀랐을걸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 손바닥을 흠뻑 적셨던 새빨간 피가 잔상처럼 언뜻 스쳐갔다. <그래. 지금쯤은 어느 모로 보나 단정한 아가씨의 모습이겠지.> 동녘 하늘이 슬슬 밝아져 왔다. 비행선이 날기 시작한 지도 스무 시간 가까이 되었다. 아침 바람이 너울너울 불어올 무렵 꼬박 밤을 샌 두 사람은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조슈아는 실컷 잔 셈이지만 심신이 지친 것인지 다시 졸립다고 말했다. 항로를 대강 살펴본 조슈아가 상태가 나쁘지 않다고 하자 막시민이 말했다. “그럼 다들 잠이나 한숨 푹 자자. 쥬스피앙 씨가 어련히 잘 해놨겠냐. 아니라고 해도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 뭘 생각할 엄두가 안 나.” 평소 자기 발로 걸으며 여행하던 습관 때문에 뭔가를 조종하며 갈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부주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세 사람은 간단히 인사하고 각자의 선실에 들어가 누웠다. 그렇게 꼬박 열 시간 가량을 자버린 것이 이번 여행을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든 첫 번째 원인이 되었다. 4. 부서진 곳 “천재란, 십자가를 지고 진흙 밭을 걷는 것처럼 세상을 통과해야 되는 거지.” 문 안 쪽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히스 노인은 들어가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조금 후 웃음소리에 섞여 말소리도 들렸다. “얘, 한 수만 무르자, 응?” “물러 드릴 수는 있는데요.... 한 수 갖곤 안 될걸요.” “그럼 두 수 물러 주렴.” “하하하, 아예 새로 두자고 하세요.” 발길을 돌릴까 하다가 그는 마음을 바꾸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체스판을 사이에 두고 웃으며 옥신각신하고 있는 모자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 다 그를 보더니 반색을 했다. “어머, 언제 오셨어요?” “얼른 오세요, 할아버지. 할아버지하고 한 판 둬요. 어머니하고는 안되겠어요. 자꾸 무르자고 떼를 쓰셔서.” “그래요. 숙부님께서 한 판 이겨주셔야 되겠어요. 세 번이나 연속 이기더니 콧대가 이만저맞ㄴ 아니라니까요.” 아르님 공작부인이 웃으며 일어나더니 옆으로 물러나 앉았다. 체스로 데모닉인 아들을 이길 수 있을 리 없는데도 평범한 아들인 양 말하는 건 그녀의 버릇이었다. 히스 노인은 공작부인 대신 맞은 편에 앉으며 말했다. “늙은 데모닉이 젊은 데모닉을 이길 수 있나 어디 한 번 볼까.” 소년이 체스말을 새로 정리하면서 씨익 웃어 보였다. “요즘 할아버지께서 자주 들러 주셔서 기분이 좋은데요.” 정리된 체스판을 내려다보던 히스 노인이 불쑥 말했다. “요즘 자주 밖에 나간다면서?” “아, 골동품 가게에 돌아다녀요. 재미있는 물건이 많더라구요.” 공작부인이 핀잔을 주었다. “다 잡동사니예요, 잡동사니. 얘가 고물 모으는 데 재미를 붙였나봐요. 벌써 한두 가지가 아니랍니다. 이 체스판만 해도 그렇고.” 소년이 바로 말을 받았다. “이게 얼마나 값진 건데, 어머니께선 낡았다고 인정을 안 하세요. 이사벨여왕 시대에 최고의 장인이었던 테모란의 작품 중에 이것처럼 서명이 남은 건 일곱 개밖에 없는데.......” “체스말 놓이는 소리만은 듣기 좋더구나. 하지만 요즘 것도 좋은 물건이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귀퉁이가 부서진 걸 쓰니.” 공작부인은 아들과 티격태격 하는 것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재미도 밖에 하녀가 나타나면서 깨졌다. “마님, 친우이신 캄머구트 백작부인께서 오셨어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공작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을 해 놓고 깜빡 잊고 있었네. 그럼 조슈아, 할아버지 상대 잘 해드려야 된다. 나한테 하듯이 덮어놓고 해선 절대 못 이길 거야. 왕년에 얼마나 잘 두셨다고, 성 안에서 상대가 없었어요. 그럼 숙부님, 나가볼께요.” 공작부인이 나가자 한동안 체스말 옮기는 소리만이 들렸다. 체스판은 대리석을 깎은 것으로 상아 말과 부딪치는 소리가 아주 경쾌했다. 딱. 따악. “조슈아.” 흑말을 쥔 채 잠시 머뭇거리던 히스 노인이 그를 불렀다. “왜 그러세요?” “요즘 새로 만나는 친구가 있나?” 소년은 체스판으로 시선을 보낸 채 대답했다. “새로운 사람이야 자주 만나지요. 시장 거리를 돌아다니니까요. 왜요? 혹시 절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셨어요?” “그런 건 아니다.” “그럼 어서 두세요.” 잠시 체스판을 보던 히스 노인은 일부러 조금 미묘한 곳에 말을 내려놓았다. 소년이 피식 웃었다. “할아버지, 지금 두기 귀찮으신 거죠? 저런 수를 두실 분이 아니잖아요.” 예상대로였다. 둘 다 다섯 수쯤 앞서 읽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래, 귀찮구나. 너와 내가 진지하게 두어서 무슨 승부가 나겠느냐. 그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온 거야.” “네, 말씀하세요.” 소년은 순식간에 체스판 위를 치웠다. “조슈아, 네가 하이아칸에서 몇 년 동안 있었지?” “3년쯤이요.” “일전에 막시민에게 듣자니 그곳에서 연극 같은 것을 했다면서?” 소년은 계면쩍게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요. 그런 걸 했죠. 가명을 썼지만요.” 히스 노인도 부드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창피할 게 뭐 있느냐. 나도 젊었을 때 그런 것을 잠깐 한 일이 있단다. “할아버지도요?” “두르넨사의 어느 항구였지. 그냥 작은 무대에 딱 한 번 섰을 뿐이야. 그 뒤로는 기회가 없었지. 옛 추억일 뿐이지만 너도 그런 일에 관심이 있다니 어쩐지 즐겁구나. 한 번 보았더라면 더 재미있을 뻔했다.” “정말 초대권이라도 한 장 보내드릴걸 그랬어요. 아, 그러면 역시 할아버지는 티켓을 받지 못하셨던 거군요? 그러면 막군이 받은 건 뭐였지?” “그게 무슨 얘기냐?” “그게요, 제가 오랜만에 성으로 돌아왔다고 파티 열었던 날, 할아버지랑 같이 막군도 왔잖아요. 그런데 막군 말이 글쎄, 저한테서 공연 티켓 두 장이 든 편지를 받았다는 거예요. 전 보낸 기억이 안 나는데 말이죠. 농담이었을까요?” 소년은 혼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할아버지께서 그 티켓 이야기를 모르시다면 막군이 할아버지한테 티켓을 드리지 않은 거니까, 역시 농담이었겠네요. 그런데 자식, 농담을 그렇게 진지하게 하다니.” 소년은 정말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얼굴이었기에 표정을 살피던 히스 노인도 수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노인은 말을 돌렸다. “하이아칸에서 이곳까지는 무척 멀지. 네가 초대권을 보내줬다 해도 거기까지 가는 건 쉽지 않았을게야. 너도 돌아온 지 몇 달 안 됐으니 그 길이 얼마나 먼지 잘 알 것 아니냐.” “하긴 정말 멀어요. 이번 길에는 마땅히 말상대도 없고, 어쩐지 피곤하기도 해서 줄곧 자면서 왔지만요. 자다가 깨니까 다른 도시가 보이고, 다시 깼을 때는 어느새 들판이고, 국경을 넘었고, 그런 식이었죠. 그러다 보니 정말 생각나는 것 없는 여행이네요.” 히스 노인은 넌지시 물었다. “드라켄즈 산맥을 지날 때는 어느 관문을 넘었지?” “글쎄요, 어디였더라? 그때도 자고 있었나봐요. 생각이 안 나는걸 보니. 아마 두르넨사 쪽에 있는 두 관문 중 하나겠죠.” “그런데 말이야, 도대체 왜 돌아오게 된 거냐?” 소년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리더니 노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돌아오면 안될 이유라도 있나요.” “그런 이유가 있을 리 있나.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반대야. 너의 귀환을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그러나 떠날 때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다고까지 했던 네가, 어째서 돌아올 마음을 먹게 됐느냐는 거야.” 조슈아는 이브노아가 죽은 후 한 해 가량 비취반지 성에서 지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흡사 은둔자처럼 성 안만 맴도는 아들을 보다못해 공작이 먼저 하이아칸으로 가는 것이 어떠냐는 말을 꺼냈던 것이다. 하이아칸에는 생전에 이브노아가 지냈던 별장이 있다. 휴양지인데다가 아는 사람도 없는 곳이니 나쁜 기억을 잊고 새로 시작하기에 좋지 않을까 여겼던 것이다. 예상대로 조슈아는 가겠다고 했다. 떠날 날짜를 촉박하게 잡았기에 인사하러 갈 여유도 없어 히스 노인에게 편지를 보냈고, 거기에 ‘다시는 비취반지 성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다’고 씌어 있었던 것이다. 소년은 고개를 숙여 체스판의 깨진 귀퉁이를 내려다보았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순간적인 기분이었을까요. 그곳에서 배우 생활을 하며 나름대로 만족스럽게 지내고 있었지만 언젠가 돌아가야 된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그 때가 이번이 된 까닭을 설명할 순 없지만, 이번이 아니라해도 언젠가는 돌아왔을 거예요.” “그래서, 예정된 공연조차 취소하고 갑자기 돌아왔단 말이냐?” “할아버진 제가 돌아오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했다. 그들은 상대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아내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둘 다 잠깐만에 상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들은 같은 데모닉이었다. “할아버지, 저 거짓말하고 있지 않아요.” “나도 네가 거짓말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히 이상해요.” 소년은 부서진 귀퉁이를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돌아오려고 마음먹은 순간은 분명히 있었어요. 기억이 나요. 모든 것을 취소하고 돌아가자, 그렇게 결심한 것. 그런데 무슨 기분으로 그런 마음을 먹었는지, 결심한 순간의 기분이 아리송해요. 그 때의 기분을 떠올리려 해도 안개가 낀 것처럼 선명하지 않아요. 상황은 기억나는데 감정이 없다니, 백 년쯤 저네 일어난 일도 아닌데 어떻게 된 걸까요? 정말 저, 술이라도 취해 있었던 걸까요. 취하도록 마신 일은 거의 없는데. 그 날도 한 잔쯤 마셨던 것 같은데.” 히스 노인은 가슴 한쪽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그걸 너 자신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단 말이냐?” “할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아니, 누구보다도 잘 아시잖아요. 십 년 전에 창가에 놓여 있던 꽃병 하나의 모양도 정확히 그릴 수 있다는 거 말예요. 그런 기억력을 갖고 있으면서, 다른 모든 것이 선명한데 한 가지만 흐릿하니까, 그것을 생각해 내려고 안간힘을 쓰게 돼요. 점점 다른 것은 생각할 수가 없게 되고... 어머니와 웃으며 체스를 두고 있지만 생각은 온통 거기에 쏠려 있어요. 요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것도 그 때문이죠. 할 수가 없으니까. 제가 왜 이럴까요.” 소년은 자신이 쓰다듬던 것을 내려다보았다. 우둘우둘하게 부서진 단면을. “저, 이 귀퉁이처럼 한 구석이 부서진 것 같아요.” 달아나 버린 조각을 맞추려는 것처럼 직각으로 굽혀 모서리 끝을 덧대고 있는 손가락에서, 없어진 기억에 대한 그의 집착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부서진 곳을 통해서... 제 안의 뭔가가 흘러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 조슈아는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다. 명치 부근을 바늘로 푹 쑤시는 듯한 아픔이 느껴져서였다. 깨고 나자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아픈 곳이 없었다.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명치 쪽을 천천히 더듬어 봤으나 아무 것도 없었다. 이불 속에는 찔렸을 만한 것도 전혀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제야 이마에 땀이 흥건한 것을 알았다. 놀라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아팠는데 어째서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마치 몸이 하나 더 있어 그 몸이 대신 다치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다. 자신에겐 몸이 하나 더 있다. 그 생각을 하자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멈춘 채 자신의 마음을 따라 뒤따라갔다. 주위는 어두웠다. 마음 깊은 곳에 뭉쳐진 두려운, 불쾌감, 혐오감, 상실감, 빙글빙글 도는 것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런 것들보다 더 깊은 곳에, 얇은 막으로 휘감긴 무엇인가가 있었다.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아.” 분명 그도 두려웠다. 또 하나의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혐오스런 경험이었다. 그로 인해 많은 것을 잃기도 했다. “너를 죽여버리고 싶었어.” 몇 번이나 그렇게 생각했었다. 한 번도 입밖에 내어 말한 일은 없었지만. ‘그도 나’라고 말하면서 머릿속으로는 ‘죽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모순된 상태를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거짓을 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네가 나라면, 너도 아플거야. 네가 지금 아무것도 모른다 해도, 분명히 어딘가가 아플거야. 나처럼, 그리고 너처럼 지독한 자기애(自己愛)는 둘로 나눠질 수 없는 것이니까.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다른 누구를 사랑해야 한다면 분명히 미쳐버릴 테니까.” “난 너를 정말로 죽일 지도 몰라. 하지만 널 미워해서는 아니야. 난 널 미워할 수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수도 없어. 그렇다면 남는 것은 말이야, 사랑하는 것뿐이야.” “내가 널 사랑한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지. 네가 나니까. 넌 가짜가 아니니까. 날 복제한 네가 가짜라면, 나도 가짜지. 너와 나 사이에 진짜와 가짜는 없어. 본질뿐이지. 너와 내가 똑같이 가지고 있는.” 그제야 숨을 깊이 내쉰 조슈아는 아무 것도 없는 정면을 쏘아보았다. 존재하지 않는 인물에게 몰입할 수 있는 그에게 눈앞에 없는 인물을 또렷이 그려내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내가 해야 되는 일을 대신 해주고 있는 너, 아무도 사랑할 수 없었던 내게 사랑할 대상이 되어준 너, 너에게 감사한다. 그곳에서, 내가 못한 몫까지 대신 해내며,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너 또한 찾고 있겠지. 너와 나는 같으니까. 데모닉이고, 거의 같은 기억을 갖고 있고, 어쩌면 토론할 필요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존재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지. 그래서 다음 순간 널 죽이게 되더라도, 널 꼭 만나고 싶은 거야. 반드시 이 눈으로 보고 싶어. 내 앞에서 나와 똑같이 움직이는 너를. 거울상처럼 걸을 너를. 이 세상에 너만큼 내 관심을 끄는 존재는 없으니.” 조슈아는 일어섰다. 입구 쪽으로 돌아섰다가 실제로 그곳에 있는 사람을 돌아보듯 고개를 돌리더니, 입가만 움직여 미소지었다. “악마가 사랑을 할 수 있다면, 그 대상은 자신밖에 없지 안겠어?” 5. 춤추는 칼라이소 “무희들의 고향 칼라이소 청새치들의 무덤 칼라이소 내 그곳에 오늘 왔더니 도둑갈매기들이 괵괵대고 부두 사용료는 바가지에 치마 짧은 아가씨가 와서 음식값은 열 배라고 하고 강도놈이 동전까지 털어가 졸지에 거렁뱅이 꼴 되었네 에이, 다시는 오지 말아야지 빌어먹을 내 고향같으니.” 여름의 문지방에 해당할 유쾌한 5월의 마지막 날, 대형 범선 높새바람호는 아침 식탁에 오른 수프처럼 잔잔한 바다 위를 미끄러져 갔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식탁에 오른 수프는 암초투성이였다. 정확히 말하면 식탁에 오르지도 않았다. 갑판에 주저앉아 먹어야 하니 말이다. 그릇을 받아 쥔 선원 하나가 안을 들여다보더니 부르짖었다. “이런 개 먹이를 사람한테 주지 말란 말이야!” 요리사는 두툼한 팔뚝에 튄 토마토 국물을 스윽 핥아먹은 뒤 대꾸했다. “뱃사람은 개와 사람 사이의 특별한 종족이다.” “이것봐, 선장님은 뱃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선장님은 신과 사람 사이의 특별한 종족이다.” 너무 당연한 표정으로 읊고 있으니 반박할 의욕도 나지 않았다.돌아선 선원 애플톤은 구석에 주저앉아 수프를 한 모금 마신 다음 입안에 들어온 조개 껍데기인지 생선 가시인지 모를 것을 퉤, 하고 뱃전 너머로 날려보냈다. 다시 들여다보니 이미 바닥이 드러난 그릇에는 방금 뱉은 것처럼 고향 바다로 돌아가야 될 것들이 한 웅큼 들어 있었다. “젠장, 이런 건 개도 안 먹어.” 그는 벌떡 일어나 내용물을 바다에 쏟아 붓고 그릇은 방금 옆에서 일어난 동료의 그릇 위에 얹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오늘 중에 항구에 도착한다는 사실만이 우울한 심사를 위로해 주었다. 저녁에는 음식다운 음식, 육지의 고기들을 실컷 먹을 수 있겠지. 좋은 술도 마시고, 소금 뒤집어쓴 사내놈들만 보아 온 눈도 호강을 시키는 거다. 그들의 모항(母港)은 춤추는 칼라이소, 무역과 해적의 왕국 두르넨사에서 가장 질펀하게 놀 수 있는 별천지가 아닌가. 무엇보다도 각종 연극과 쇼가 벌어지는 극장이 세 군데나 되고······. “멀쩡한 먹을 것을 바다에 버리면 쓰나, 앙?” 머리 위에서 환상을 깨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그는 뒤꿈치에 용수철이라도 달린 것처럼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물론 안됩니다.” “호오, 그래?” 고달픈 항해 중에도 늘 빳빳하게 풀을 먹여 다린 칼라 밑으로 금 시계줄을 늘어뜨리는 것을 잊지 않는 칼라이몬 선장은 팔짱을 낀 채 선원을 보고 있다가 명령했다. “가서 도로 주워먹어!” “넷, 알겠습니다!” 선원 애플톤은 재빨리 사다리 쪽으로 달려갔다. 아마 바다속이라도 몇 모금 억지로 켜다가 돌아올 셈일 것이다. 바다 속에 버린 수프를 주워먹을 방법은 없으니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칼라이몬 선장은 ‘에헴’하고 시골 지주처럼 기침을 한번 하더니 천천히 갑판을 순시하기 시작했다. 자기 이름이 모항인 칼라이소와 끝음절 하나 다르다는 이유로 항구와 동기동창임을 강조해 말하는 버릇에, 도시에 처음 나온 촌뜨기 귀족처럼 뻗대며 걷긴 해도 그는 보기보다 인기가 좋았다. 일단 성격이 호탕하고, 자기 몫으로 돌아온 돈 되는 물건 따위를 풀어 나눠주는 일이 많은 데다, 특히 노래를 잘했다. 기골 장대한 사내답게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뱃노래를 한 바탕 뽑기 시작하면 선원 모두가 따라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였다. 젊어서는 칼라이소에서 날리는 검객이었던 이력도 있었다. 20년 전에 ‘칼라이소의 칼라이몬’이라고 하면 뱃사람 치고 모르는 자가 없었다 한다. 이젠 쉰 살이 가까운데도 아직 육박전으로도 잘지지 않을 정도로 주먹 깨나 쓰는 사내였고, 걸어온 싸움을 피하지 않는 성깔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워 먹을 수 없는 수프 대신 바닷물을 마시며 히죽 웃어 보인다해도 ‘저런 뻔뻔스런 놈’하고 한 마디 던지고 마는 인품이야말로 그가 누리는 인기의 가장 큰 비결이었다. 이번에는 풍랑으로 항로를 잔뜩 벗어났다가 심지어 섬에 표류하기까지 해서 식량이 바닥난 까닭에 석회질 토마토 수프밖에 나올 것이 없었지만, 평소 높세바람호의 음식은 훌륭한 편이었다. 그래도 칼라이몬 선장은, 선장과 선원을 차별하는 뱃사람의 관습을 꾸준히 지키는 편이라 그의 식탁에는 아직 먹을 만한 비스킷 과 포도주가 나왔다. 항구에 다다르려면 이제 한 시간 정도로 충분할 듯싶었다. 바람은 약하긴 해도 순풍이었고, 머리 위에서는 갈매기가 맴돌았다. 모두 배는 고팠지만 마음은 더없이 느긋했다. 한가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망루 선원이 정체불명의 배 한 척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어이! 배가 보인다아!” 망루에서 선원이 소리치자 곳곳에서 선원들이 비웃었다. “저놈이 여기가 항구 앞이란 걸 잊은 모양이군.” “식탁에서 숟가락 보고 ‘숟가락이 있다아.’하고 외칠 놈이로세.” “그럼 슬슬 구조 요청이라도 해 줘. 우린 토마토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다! 반복한다! 우린 토마토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은 섬에서 토마토를 잔뜩 발견해서 싣고 오느 바람에 며칠 동안 토마토만 먹고 있었다. 그 때 망루 선원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구조 요청을 하고 있다아!” 그 말이 ‘우리가 구조 요청을 하는 중이다’가 아니라 상대가 구조를 요청하고 있다는 뜻임을 알아차리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왜냐하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여기는 항구 앞 바다다. 당장 배가 가라앉고 있는 중이 아니라면 구조 요청 따위를 할 까닭이 없는 곳인 것이다. “뭐야, 정말로 배가 가라앉고 있냐?” 선원 몇 명이 뱃전으로 달려갔다. 그 즈음 두 배는 가까워져서 그들의 눈에도 배의 모양새가 그럭저럭 보였다. 그러나 배는 가라앉고 있지 않았다. 선원들이 어안이 벙벙해진 것은 다른 까닭이었다. 한 명이 망루 선원더러 들으라는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이봐! 설명을 정확히 했어야 될 것 아냐! ‘배가 보인다’가 아니라 ‘이상한 배가 보인다’고 했어야지!” 주위의 선원들은 물론, 그들 뒤로 다가온 칼라이몬 선장까지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 배는, 돛대 셋 달린 범선까지는 아니라 해도 높직한 중앙 돛대와 튼실한 배쌈을 가진 흠잡을 데 없는 모습으로서 무척 솜씨를 부려 만든 듯 인어를 흉내낸 뱃머리 장식은 금빛이고, 연황색 뱃전에는 조개와 고동, 불가사리 모양이 조밀하게 새겨진데다 배쌈에는 파도까지 그려져 있는....... 배라고 부르기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저거, 어느 극장에서 내보낸 거 아닐까? 무사 귀환 환영과 손님 유치를 위한 홍보 활동의 일환으로.” 갑판장이 그럴듯한 의견을 내놓아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칼라이몬 선장이 소리쳤다. “뭘 하고 있어! 어서 저 배를 예인할 준비를 하란 말이다!” 선원들이 허둥지둥 움직이기 시작할 즈음, 문제의 배 안에서는 소년 둘과 소녀 하나가 우왕좌왕하며 달리는 중이었다. 달리는 것이 목적인 건 아니었지만, 사실상 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달리는 중이라 말해도 무방했다. “도대체 이 돛은 어떻게 펴는 거야?” “밧줄은 왜 이렇게 꼬아 놨어?” “그걸 내가 꼬았냐?” “이게 지금 앞으로 가고 있는 게 맞아?” “앞이 어느 쪽인데?” “뱃머리가 앞이지 어디겠어?” “배는 옆으로 가는 거 아니었어?” 상식 이하의 엄청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들이 진열장 속 모형 배를 구경하고 있는 꼬마들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그 안에 태워진 모형 선원들 역할이었다. 두 손으로 연기가 오르는 횃불을 움켜쥔 채 중심을 잡으려 애쓰고 있던 조슈아는 또다시 어디론가 달려가는 두 사람을 향해 애처롭게 소리쳤다. “어딜 가는 거야! 나하고 교대해 줘!” 고작 일곱 시간이었다. 진짜 항해, 그러니까 바다 위에서의 항해 말이다. 한때 항해에 대해 그럴듯한 환상을 품고 있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젠 그게 어느 옛날 이야기인지 생각도 안 났다. 배가 바닷물에 닻은 지 일곱 시간이 흘렀을 뿐이지만 누군가가 항해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정확히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항해란 뱃멀미니라. 뱃멀미 외에도 문제는 산적해 있었다. 그들의 대화로 짐작되다시피 그들은 배 조종법을 전혀 몰랐고, 알았다 해도 움직일 힘이 없었다. 그 정도 크기의 범선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선장이나 항해사는 포기한다 해도 최소한 유능한 선원 대여섯 명이 필요했다. 세 명으로는 돛을 내리거나 올리는 것은 물론이고, 키를 잡거나 닻을 내릴 수도 없었다. 더구나 그들 중 둘은 일반 선원의 절반만큼도 힘이 없었다. 항해에 무지하다보니 당연한 결과였지만, 그들은 여기가 어디인지도 몰랐다. 그 동안 어디론가 흘러왔지만, 현재 위치를 측정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 했다. 육지가 보이지 않는 바다 한가운데에는 이정표로 삼을 만한 것이 전혀 없는데, 다른 배들은 어떻게 자기가 갈 곳을 아는 걸까? 이런 것을 한 번도 알려고 해 본 적이 없는 그들에겐 마법만큼, 아니 마법보다 더 신비한 일로 생각됐다. 까마득한 옛날 돛배를 처음 만들었던 인간이 바다로 나가기 위해 했을 법한 궁리를 똑같이 하면서, 그나마 더 나은 결론도 없었다. 리체는 병 속에 편지를 넣어 띄워야 된다고 우겼을 정도였다. 그나마 그들이 제대로 한 일은 해상 조난 신호 역할을 하는 횃불을 밝힌 것뿐이었다. 횃불을 태워 연기를 올리면 구조해달라는 의미란 것도 섬에서 살아온 리체나 겨우 알고 있었다. 그러나 리체는 어디까지나 재봉사로서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는 작은 배도 타본 일이 없다고 했다. 이제 오후 12시경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항해, 아니 조난이 시작된 시각은 새벽 5시쯤이었다. 그나마 배가 바다에 닻자마자 어찌된 셈인지 뱃머리 삼각돛이 저절로 펼쳐진 것, 그리고 일곱 시간 동안 알맞은 세기로 바람이 불어 준 덕택에 이 정도였지, 만일 풍랑이라도 닥쳤다면 분명히 5분만에 다 빠져 죽었을 것이다. 그들은 아직 몰랐지만, 그 바람이 항구로 가는 순풍이었다는 것도 운이 따랐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선원들이라면 졸음이 온다고 할 정도로 평화로운 항해를 해 왔는데, 본인들은 최악의 상황에 빠졌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의 의견에 따르자면 최악의 ‘음모’이기도 했다. 배 성능을 시험해보려는 마법사의 음모에 빠진 불운한 세 희생양. 그들이 탔던 것은 분명 하늘을 날아간다는 배였다. 그런 배가 어째서 평범한 이웃들처럼 물을 튀기며 가게 된 것일까. 발단은 물론 사흘 전에 무모하게 자버린 열 시간의 잠이었다. 가장 먼저 깨어났던 조슈아는, 엎어놓은 접시처럼 생겼지만 위치를 알려준다는(쥬스피앙의 성격 탓인지 이름도 없었다) 물건을 들여다보고 깜짝 놀랐다. ‘접시’ 위에 점으로 표시된 궤적이 그들이 떠난 곳에서 아주 조금 진행되다가 멈춰 있었던 것이다. 분명 그들은 하루 낮 하루 밤 이상을 날아 왔는데 말이다. 즉시 황금 도가니를 살펴보니 금을 빨리 보충해야 할 정도로 줄어 있는 것이 보였다. 결론은 한 가지였다. ‘접시’가 망가진 것이다! 의상실 생활로 단련된 리체는 한 번 부르자 바로 일어났지만 막시민을 깨우는 데는 반시간이 넘게 걸렸다. 겨우 깨어나 상황 얘기를 듣고 막시민이 뭔가 말하려 할 때 조슈아가 슬그머니 물었다. “너, 자기 전에 뭔가 먹었니?” “포도주 좀 마셨다. 어쩔래.” “이 배에 포도주가 어디 있어서?” “명명식용 포도주라고 씌어 있던데. 쥬스피앙 씨도 참 별게 다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뭐냐.” 하긴 이 배는 아직 이름도 없었다. “그걸 먹었으니 이제 명명식을 못하겠네?” “지금 상황에서 명명식이 중요하냐!” 이런 식이니 상황 판단도 즉시 될 리 없었다. 결국 제대로 된 토론을 하기까지 반시간 정도는 더 걸렸다. 아침 식사 삼아 수프에 빠뜨린 비스킷을 우적우적 떠먹으며 논의한 내용은 이러했다. 중요한 기계가 이렇게 빨리 망가지도록 엉성하게 만들어 놓은 쥬스피앙을 성토하는 것은 나중 문제였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느냐가 진짜 문제인데, 그들의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 알 방법은 사라졌다. 하늘길을 가기 때문에 중간 기착지 같은 것도 전혀 없다. 쥬스피앙은 이 배가 페리윙클까지 알아서 가도록 해 놓았을까? 조슈아가 쥬스피앙이 쓴 책을 읽은 바에 따르면 배의 운행 방향을 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접시’가 제 기능을 하고 있어야 방향을 어디로 바꾸면 좋을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가만히 기다려 보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어디로든 방향을 바꿔야 할까? 리체의 의견은 그냥 내버려두자는 쪽이었다. 그러나 막시민은 생각이 달랐다. “지난번에 조슈아가 네가 자고 있을 때 내가 밤새 뱃전에 서서 달과 별의 움직임을 살펴봤지. 내 생각에 이 배는 정서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았어.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그렇다면 우린 적어도 현재 위도를 알 수 있겠지. 블루 코럴 섬과 같을 테니까 말이야. 그런데 그렇게 계속 서쪽으로 가면 페리윙클 섬에 도착할 수가 없어. 어느 순간인가 남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안 돼. 그런데 이 배에 그렇게 방향까지 바꿔가며 저절로 목적지로 보내주는 기능이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만일 그렇게 만들어 놨다고 해도 문제야. 하늘도 땅이나 바다와 마찬가지로 강풍이 불 수 있고, 폭우가 쏟아질 수도 있다고. 그런 변수로 위치가 조금만 어긋나도, 처음 명령과는 전혀 다른 곳에 떨어질 수 있잖냐. 그런고로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런 기능은 없을 것 같고, 배를 탄 사람이 그놈의 망가져 버린 ‘접시’를 보여가며 방향을 바꿔야 되는 거란 말이야.” 리체가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하지만 우린 어느 순간 방향을 바꿔야 되는지 알 수가 없잖아. 아무 때나 바꿨다간 진짜 전혀 엉뚱한 데로 가게 되게? 페리윙클 섬보다 남쪽에 있는 바다엔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단 말이야. 지도에도 안 나와 있어.” “그렇다고 그냥 정서쪽으로 가게 두자고?” “서쪽으로 가면 최소한 아노마라드 땅에 떨어질 것 아냐?” “지금 아노마라드 어딘가에 떨어졌다간 우리 셋 다 딱 죽기 알맞아. 우릴 뒤쫓던 놈들은 우리가 당연히 아노마라드로 갈 줄 알 테니까. 어느 동네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놈들이 있다는 소문만 나면 잡히는 건 시간 문제겠지. 더구나 육지에 추락해버리면 배도 망가질 거고 배에 탄 우리가 살아난다는 보장도 없어. 무엇보다도 페리윙클 섬에 갈 방법도 사라지는 거고 말이야.”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니?” “조슈아, 저 접시, 고쳐볼 수 있겠어?” 조슈아는 자신 없는 얼굴이었다. “시도는 해 보겠지만, 된다는 확신은 없어. 무엇보다도 마법이 필요한 것이면 고칠 수도 없을 거고.” “지금 이 배의 속력이 얼마나 될까?” 셋 모두 얼굴을 마주봤다. 정말 어느 정도의 속도인 걸까? “이건 추측밖에 안 되겠지만.... 쥬스피앙 씨가 페리윙클까지 가는 데 보름 정도 걸린다고 했잖아? 정서향으로 왔다고 생각할 때,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우리가 떠난 지 닷새나 엿새쯤 됐을 때 조개 반도 위를 날고 있을 것 같아. 만일 남서쪽으로 방향을 바꾼다면 그 정도가 적당한 위치가 아닐까 싶은데.” 조슈아의 말에 막시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걸 기준으로 해서 사흘 뒤까지 접시를 고쳐 보고, 안 되면 조개 반도가 나타나는 걸 봐서 방향을 남서쪽으로 바꿔 보자. 최악의 경우 우리가 목적으로 삼을 곳은 아노마라드 남쪽 해안과 페리윙클 섬 사이라고. 아노마라드 땅에 떨어져버리면 곤란해.” 리체가 구름이 끼어 조개 반도가 안 보이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지만 그 의문은 일단 무시되었다. 그래서 사흘이 흘렀고, 접시는 고쳐지지 않았고, 그리고 조개 반도는 보이지 않았다. 구름이 끼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젠 처음 생각한 방향조차 틀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판사판으로 방향을 바꿔보러 했을 때, 배가 생각보다 너무 빨라서인지 비행용 키가 말을 듣지 않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조슈아는 속도를 줄일 방법을 모른다고 말했다. “금의 양을 조금 줄여보면 어떨까?” 막시민이 무심코 낸 의견이 지금의 비극을 초래했다. 정기적으로 도가니에 넣던 금의 양을 조금 줄이자, 배는 잠깐만에 추락해 버렸던 것이다. 정말로 조금, 금반지 몇 개 정도밖에 줄이지 않았는데! 세 사람 중 누구도 활대니 밧줄 따위를 타고 망루에 올라가고 싶어하지 않았으므로 그들 쪽에서는 높새바람호를 발견하기까지는 좀더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얼마 후, 횃불을 갑판에 쳐박아 최악의 사태를 그 이상의 뭔가로 만들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있는 조슈아의 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어어이!” 허둥지둥 맞은편 뱃전으로 뛰어가 보니 저만치 보트 한 척이 노를 저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물론 높새바람호에서 보낸 배였다. 자기들보다 훨씬 조그마한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을 보자 여기가 망망대해라고 생각하고 있던 조슈아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 어떻게 그런 배로 다녀요?” 말을 하자마자 새로운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쳤다. “혹시··· 여기에서 항구가 아주 가깝나요?” 선원들은 뱃전에서 횃불을 들고 서 있는 애송이의 말 따위에는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조슈아는 견습 선원조차도 아니었던 것이다. 좀 더 가까워지자 그들 중 하나가 말했다. “꼬마야, 선장님은 어디 계시냐?” 조슈아가 당황해서 눈을 깜빡거리다가 대꾸했다. “아직 안 정했는데······.” 물론 막시민, 리체, 그리고 자신 중에서 누가 선장인지 정하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물론 정할 생각도 안 해봤고 말이다. 선원들은 무슨 소린지 몰라 서로 얼굴을 마주봤다. 한 명이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더니 소리쳤다. “선상 반란이 일어난 거로구나! 그러면 그렇지!” 조슈아가 뭐라 대답을 할지 몰라 여전히 눈만 깜빡이고 있자 선원들은 자기들끼리 쑥덕대더니 하긴 반란이라도 일어나지 않고는 저렇게 덜 떨어져 보이는 녀석이 혼자 갑판에서 횃불을 들고 있을 리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생존자는 몇 명이지?” “세 명인데요.” 선원들은 다시 한 번 크게 놀랐다. “뭐라고?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다 죽었단 말이냐?” “그건 아니고·······.” “그럼 무인도에라도 버리고 왔단 말이냐!” “그것도······.” 성격 급한 갑판장이 벌컥 화를 냈다. “야, 너처럼 멍청한 녀석말고, 선장님이 안 계시면 지금 배를 지휘하고 있는 사람을 불러와라! 빨리!” 조슈아는 ‘멍청하다’는 말에 얼마나 저항력이 부족한지 갑판장이 알 리가 없었다. 막시민 말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에 멍해진 조슈아는 아랑곳 않고, 선원들은 갈고리가 달린 밧줄을 던져 뱃전에 걸더니 순식간에 배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즈음 승강구 문을 덜컥 열고 막시민이 머리를 내밀었다. “어?” 막시민은 순간적으로 해적들이라도 나타난 게 아닌가 하고 놀랬다. 높새바람호의 선원들은 혹시 조난을 가장한 해적들의 농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모두 무기를 갖고 왔던 것이다. 서로를 해적으로 의심했던 그들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서로의 의견을 철회했다. 선원들이 보기에 막시민은 조슈아와 마찬가지로 어느 모로 보나 뱃놈 흉내도 낼 것 같지 않았고, 막시민이 본 선원들은 적대감을 느낄 수 없거니와 무엇보다도 숫자가 너무 적었던 것이다. “넌 또 뭐냐?” 그건 자기 배안에서 낯선 사람과 마주친 막시민이 해야 할 말이었다. 그러나 막시민은 배 주인인 주제에 낯선 선원들 사이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는 조슈아를 흘끔 보더니 당장 상황을 파악했다. “아, 고맙습니다! 저희의 조난 신호를 보고 오셨군요? 이제 저희는 살았네요.” 선원들은 또다시 나타난 애송이 하나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잠시 숙의했다. 도대체 이 배는 얼마나 엄청난 일을 당한 것인가? 한 사람씩 의견을 말하는 사이, 한 명이 뒤를 돌아보더니 냅다 소리를 질렀다. “머리만 내밀고 있지 말고 썩 올라와, 임마! 무슨 엄청난 일을 벌였기에 배에 애들밖에 없는 거냐? 생존자가 셋이라던데, 그럼 나머지 한 사람이 책임자로군? 어디 있어? 우리와 얘기를 좀 해야겠다.” “여기예요.” 가장 낮은 활대 위에서 뛰어내리자마자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표정을 짓는 세 번째 생존자, 리체를 본 선원들은 아예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리체는 알게 뭐냐는 듯 이번엔 미소를 날렸다. “잘 보셨네요. 제가 저 애들을 책임지고 있어요. 아저씨들은 분명 바다를 종횡무진 다니며 조난한 배를 구하는 수호천사이겠죠? 그런데 일단 여기가 어디인지부터 알려 주시겠어요?” 취사를 리체가 주로 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제대로 된 음식을 할만한 재료가 있는 건 아니지만. 갑판장은 횃불을 바다에 던져 넣더니 ‘오신 김에 이 배의 흔들림도 좀 멈춰주세요’ 정도의 표정을 짓고 있는 조슈아를 보고, 이제 전신이 다 보이게 됐지만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쓰는 막시민을 보고, 다시 한 번 리체를 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책임자가 맞는 것 같구나. 칼라이소 항 선전(船籍)의 높새바람호, 칼라이몬 선장의 전언이다. 조난선의 선원들을 우리 배에 옮겨 태우고 이 배는 항구까지 예인하는 데 도움을 주시겠다고 하신다.” 선장 칼라이몬은 버릇대로 다리를 흔들며 갑판 위를 왔다갔다하다가 우뚝 멈춰 섰다. 그의 앞에는 ‘구조된 세 선원’이 언제 최악의 상황에 빠져 있었냐는 듯 싱글싱글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배에 옮겨 타기 전에 ‘웃는 얼굴에 침 뱉겠냐’고 제안한 한 명 덕택이었다. 선장은 입 속으로 한숨을 삼킨 다음, 그 중에서 보고 있자니 어쩐지 기분나빠지는 미소를 띠고 있는 한 놈에게 말했다. “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설명해 봐라.” 선장은 사람을 잘 골랐다. “하이아칸의 블루 코럴 섬 아시지요? 귀족들 별장이 잔뜩 있는 아름다운 휴양지죠. 그곳에 별장을 갖고 계신 실라브리아 백작부인께서 말이죠, 친구분이신 델라미네 양과 내기를 하셨거든요. 백작부인께서 그 분을 모시고 있는 쥬스피앙 선장님이 대륙 최고의 선장이라고 말씀하시자, 델라미네 양은 최고의 선장은 두르넨사에 있다는 어느 이름 모를 선장이라고 우겼답니다. 두 분께서 싸우시다가 그러면 쥬스피앙 선장님께서 이 배로 해적들이 들끓는 두르넨사 연안을 성공적으로 항해하고 돌아오면 백작부인이 이긴 걸로 하기로 된 거죠. 그래서 출발을 했는데, 보시다시피 쥬스피앙 선장님을 비룻한 선원들은 모두 해적의 칼에 한 방울 이슬로 되시고······.” 거기까지 말했을 때 조슈아와 리체는 간신히 표정 관리를 하며 막시민을 보고 있었다. 리체는 쥬스피앙을 대뜸 선장으로 만들고 심지어 죽여버리기까지 하는 데 가기 막혔던 거고, 조슈아는 막시민의 입에서 저렇게 시적인 표현이 나오다니 하며 놀랐다. 물론 막시민은 이것으로 망가진 접시를 줘보낸 쥬스피앙에 대해 약간 복수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허어.” 칼라이몬 선장은 막시민의 이야기에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으나 일단 선장이 죽었다는 말에 안타까운 신음성을 토했다. 다짜고짜 머나먼 바다까지 잡혀와 고인이 되고 만 쥬스피앙에게 애도할 사람 하나는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너희 셋은 살아남았지? 게다가 너희는 아무리 봐도 선원이 아닌 것 같은데?” “물론 저희는 선원이 아닙니다. 물일은 전혀 모르지요. 노련한 선장 앞에서 견습 선원이라고 우겨봤자 거짓말만 들통난다는 것을 막시민은 잘 알고 있었다. “저희는 내기 내용을 보증하기 위해 탄 시종들입니다. 선장님이 두르넨사까지 분명히 갔다오는지 살펴보는 것이 저희 임무입죠. 저는 실라브리아 백작부인의 시종이고, 저기 저 친구는 델라미네 양의 시종입니다. 선장이 리체를 흘끗 보더니 물었다. “그럼, 저 책임자는?” 선장은 아직도 리체가 책임자라고 한 갑판장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막시민은 리체를 한 번 째려보며 말을 이었다. “아, 우리 두 시종만 타고 가면 나중에 돌아와서 서로 딴소리를 하며 싸울 수가 있잖습니까? 그래서 두 분의 다른 친구인 아르메리다 후작부인께서 도와주기로 하시고, 그 분 시종인 저 애도 타게 됐죠. 저희가 살아 있는건, 해적한테 우리를 죽이면 세 분 귀족들께서 크게 노하실 거고, 만약 놓아주면 당신이 정정당당하게 결투를 해서 선장님을 이겼다고 말하겠다고 했더니 놓아주긴 했는데, 문제는 망망대해에 항해라고는 전혀 모르는 저희만 태워서 보내버린 겁니다. 보내줄 때 무척 비웃더군요.” 이야기가 좀 미심쩍은 곳이 있긴 해도 하이아칸의 할 일 없는 귀족들이 이상한 내기를 잘 한다는 걸 알고 있는 데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뱃일을 전혀 모르는 사내애 둘과 여자애 하나가 표류하게 될 만한 이유를 달리 생각해 낼 수 없었기에 칼라이몬 선장은 슬슬 설득되어 갔다.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해적 놈들이라면 능히 하고도 남을 일이지.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놈들이 이 배를 갖지 않고 어째서 너희에게 줬느냐 하는 거야. 배는 돈이 될 텐데.” “아, 그건.......” 막시민이 말꼬리를 끄는 순간, 리체가 옆에서 끼여들더니 말했다. “해적이 말하기를 저 같은 여자애가 탔던 배는 부정이 타서 저주가 내린대요. 그래서 배를 안 갖는다고 했어요.” 막시민이 ‘그럼 네가 지금 타고 있는 이 배는 어떻게 되냐’라고 말하지는 못하고 눈만 부라리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선장이 커다랗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해적놈들은 미신을 잘 믿지. 놈들은 죄를 많이 지어서 혹시나 저주를 받진 않을까, 혹시나 유령이라도 따라오지 않을까 항상 겁을 먹고 있는 무리들이니까. 우리처럼 정당한 무역만 하는 뱃사람들은 그런 미신을 믿을 필요가 없어.” 조슈아는 선장의 표정을 살피고는 선장이 어설프게나마 연기를 하고 있음을 알았다. 하긴, 저렇게라도 해야 주위 선원들이 당황하지 않을 테니 올바른 판단이긴 했다. 막시민은 죄가 있거나 없거나 이미 유령을 실컷 본 사람답게, 아니 들은 사람답게 초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된 겁니다.” “좋다. 그러면 너희를 우리 모항인 칼라이소까지 데려다 주지. 거기에서 선장과 선원들을 사서 항해할 준비를 새로 갖추고 하이아칸으로 가면 될 거다. 돈은 너희의 주인인 세 분께 편지를 띄워 신분을 증명하는 서류를 받은 다음 그걸 칼라이소 선박 조합에 보이면 빌릴 수 있을 거다. 조합에서는 귀족의 신용을 높이 쳐주니까 말이야. 너희 주인들도 배를 그냥 버릴 생각은 없겠지.”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그것으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이제 배가 항구에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들의 작은 배는 훨씬 큰 배가 높새바람 호와 연결해 놓았고, 항구까지 반시간 남짓 남았다는 말에 흔들리는 갑판에 넌더리를 내던 조슈아도 마음이 안정되어 수프를 먹겠느냐는 말에 동의하는 용기까지 보였다. 가져온 수프는 물론 선원들이 먹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먼저 그릇을 받은 막시민이 숟가락으로 한 번 휘저어 보더니 말했다. “석회질 수프네.” 그릇을 건네준 애플톤이 말했다. “선원의 음식이지.” 개도 안 먹는 음식이라고 떠들어대지만 남에게 줄 때는 이야기가 달랐다. 옆에서 리체가 동정 어린 눈빛을 보냈다. “이런 걸 먹다니 정말 안됐어요.” “뭐가 안됐냐! 바다 위에서만이라고, 항구에 들어가면 산해진미와 술과 아가씨들과 극장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런 것쯤 참을 수도 있지!” 극장이라는 말에 조슈아가 흥미를 보였다. “칼라이소에도 극장이 있어요?” “그럼 넌 극장이 하이아칸에만 있는 줄 알았냐?” 흰눈을 떠 보인 애플톤은 갑자기 귀족 시종들에게 자기 고향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내켰다. “칼라이소에는 대형 극장만 세 군데가 있고, 작은 건 수십 군데가 넘어! 그런 극장들이 거리 하나를 꽉 메우고 있지. 거기에 가면 나붓이 인사하는 천사 같은 미인들이 즐비하고 술맛은 혓바닥을 녹여버릴 정도로 근사하다고! 큰 극장에서 인기 있는 공연이 하나 뜨면 거리가 꽉 차버리는 건 말할 것도 없고, 평소에도 쇼와 춤으로 불야성을 이루는 거리란 말씀이야. 그 일대를 한 번 보고 나면 평생 칼라이소를 떠나기 싫어질걸? 칼라이소의 명성을 모르다니, 안된 것은 너희들이라고. 오죽하면 별명이 ‘춤추는 칼라이소’겠냐?” 자기가 관심 있는 부분만 걸러 들은 조슈아는 무척 감탄한 표정이 되었다. “대단하네요. 그렇게 많은 극장들이 있고, 공연도 그렇게 인기가 있다니.” 말하며 무심코 수프에 숟가락을 넣어 한 입 떠먹었다가 죽을 것처럼 기침을 하기 시작한 조슈아의 등을 두드려 주며, 막시민이 말했다. “발달한 항구군요. 그런데 선원들만 드나들어서 그렇게 장사가 잘 됩니까?” “뭐, 이웃 도시나 시골 귀족들도 꽤 드나드는 모양이더라고. 특히 우리 선장님의 극장에는 말이지, 그런 귀족들과 사귀는 아가씨들도 꽤 돼.” “선장님의 극장이라뇨?” 그렇지 않아도 뱃멀미로 속이 불편했던 조슈아가 급기야 뱃전으로 달려가고 막시민이 귀찮아하며 몸을 일으켜 따라간 뒤 리체가 물었다. 애플톤이 냉큼 대꾸했다. “칼라이소 최고의 극장, ‘다이아몬드 러쉬’는 우리 선장님 거란 말이다! 아, 물론 절반만이지만, 하여간 우리 선장님은 항구에 내려 들어가면 그때부터 극장주라고.” 6. 배우, 돌아오다 “사실 그는 타고난 배우였죠. 난 그가 나만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이웃 과부는 돈을 항아리로 빌려줬대고, 목수네 꼬마 딸은 열 일곱만 되면 시집갈 줄 알고 있고, 촌장네 아가씨는 내년 봄까지 날짜 세고 있고, 사제관 노처녀는 10년도 기다릴 작정이라느데, 늙은 어머니는 아들이 여자를 몰라 걱정이라 하소연하니, 하늘님도 기가 막힐 노릇인데, 자기는 아무 것도 몰랐다나. 배 타고 떠나 대륙으로 갈 작정이었다나, 세상에 그런 도둑, 아니 배우가 또 어디 있을까?” 칼라이소 항구에 도착한 조슈아 일행은 그 동안 애플톤에게 지겨울 정도로 자랑을 들은 까닭에 눈을 크게 뜨고 항구 곳곳을 두리번거렸다. 물론 고향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장점이 그들에게도 보일 리 없었으므로, 잠시 후 셋은 똑같이 심드렁한 얼굴이 되었다. 항해사 한 명의 지휘로 조슈아 일행이 타고 온 배도 부두에 대어졌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입항 수속을 도와 주고 조합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려준 선장은 일이 다 끝나고 헤어질 때가 됐을 때 이것도 인연인데 술자리에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선장은 적절하게도 그 말을 막시민에게 했고, 그리하여 그들은 선원들과 함께 부둣가 선술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술을 마시기엔 아직 이른 시간인지라, 선술집 안은 높새바람호가 한나절 빌린 것 같은 모습이 되어버렸다. 자기들끼리 향후 대책을 논의하고 싶었던 세 사람은 가장 구석에 있는 작은 테이블을 차지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자리가 모자라 선원 두 명이 끼어 앉게 된 것까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앞으로의 일을 나가서 얘기하기로 하고 일단 여기에선 먹고 마시는 데 집중하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칼라이몬 선장은 무사히 입항을 하면 항상 선원들에게 술을 샀다. 고생스런 항해일수록 더 많은 술을 샀으므로, 선원들은 다들 무척 기대하는 눈빛들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선장이 주문한 술과 요리가 나오기 시작하자 모두 입이 헤벌어져 어쩔 줄을 몰랐다. “역시 선장님 만세다!” 한 명이 선창을 하자 다들 신이 나서 왁자지껄하게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올렸다. 이렇게 열광적인 반응이 있어야 사주는 사람도 흥이 나는 법이었다. 물론 석회질 토마토 수프 따위나 먹고 있던 처지라면 어떤 음식에도 감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구석의 세 사람도 다른 두 선원과 잔 부딪히는 시늉을 하고는 오랜만에 음식다운 음식에 덤벼들었다. 어려서부터 밖에서 돈을 버느라 가정 요리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리체의 음식 맛은 영 신통찮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곳 음식 맛은 까다로운 조슈아도 트집잡을 거리가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 바닥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음식 접시가 한 차례 비워지고 나자 칼라이몬 선장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선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노래! 노래!’하고 외치기 시작했다. 선장이 노래하기를 좋아한다는 걸 모르는 선원은 없었다. 선장은 목을 가다듬더니 의자에 한쪽 다리를 얹어 놓고 한 곡조 뽑았다. 유쾌한 가락이었다. 생선 냄새 항구 냄새 짠물 냄새 바다 냄새 냄새나는 우리 고향으로 잘 왔네 친구들이여 우리가 없는 동안 아가씨는 할망구 되고 우리가 없는 동안 코흘리개 아가씨 됐네 포도주 냄새 술집 냄새 분첩 냄새 여자 냄새 웃어라! 부어라! 마셔라! 살아 돌아온 친구들아! 우리가 없는 동안 마누라는 뚱보가 되고 우리가 없는 동안 아들놈은 배를 탔다지 생선 냄새 항구 냄새 짠물 냄새 바다 냄새 금화 주머니 짤랑이며 웃어라! 부어라! 마셔라! 노래는 가락이 단순하고 가사만 달리하여 계속 되풀이되는 것이었지만, 칼라이몬 선장이 워낙 노래를 잘 하거니와 선원들이 너도나도 따라하자 분의기는 한껏 돋워졌다. 모두가 테이블을 두드리며 열광적으로 노래했다. 구석에 있던 조슈아는 분위기에 조금 놀랐지만 금방 빙그레 웃더니 발끝으로 박자를 맞추며 기분 좋게 귀를 기울였다. 다음 노래는 갑판장이 받았다. 그는 늙은 선원이 나오는 웃기는 가사의 노래를 능글맞게 불러 여기저기에서 폭소가 터졌다. 높새바람호에서 그 다음 차례는 항상 요리사였다. 요리사는 무뚝뚝하게 팔뚝을 긁으며 나서더니 주먹으로 기둥을 쿵쿵 두드리며 행진곡 같은 노래를 불렀다. 그도 상당한 목청의 소유자였다. 고래 놈들아, 비켜라! 작살잡이 형님이 나가신다! 해적 놈들아, 비켜라! 갑판장 어르신 나가신다! 암초 놈들아, 비켜라! 항해사 나리님이 나가신다! 정해진 차례는 거기까지였고, 다음부터는 누가 노래해도 상관없었다. 술집 주인 아들인 듯한 젊은이가 선원들 사이에 끼어 웃고 있더니 요리사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잽싸게 받았다. 그런데 그가 부른 노래가 조슈아를 흠칫 놀라게 만들었다. 물길잡이 사나이 누가 그의 심장을 봤냐? 수평선 향해 쏜 화살이 그의 심장을 꿰뚫어버렸어. 조슈아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노래는 계속 이어졌다. 그는 나아갈 거야. 캄캄한 별 하늘 가운데 가장 작은 섬까지 사과 하나 없는 빈 손 구두도 벗어 내버린 맨발 말할 나위 없이 조슈아가 ‘아쿠아리안’ 공연을 위해 직접 만든 노래 중 하나였다. 공연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곳 사람들이 저 노래를 알고 있는 것이며, 노랫말은 어째서 저 모양이란 말인가? 그러자 조슈아는 곧 싱긋 웃었다. 몸이 근질거렸다. 다들 신나게 노래하고 있고, 모두가 노래를 듣고 싶어했다. 그를 부르는 것도 아닌데 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홀 가운데로 걸어갔다. 이미 일어나 있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그의 모습이 특별히 시선을 끌진 않았다. 조슈아는 노래하던 사람 옆에 슬쩍 서더니, 돌발적으로 한 소절을 불렀다. 그와 동시에 모두의 눈이 그에게 돌려졌다. 조슈아가 입을 연 부분은 부르던 남자의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할 때였다. 웬만한 실력으로 소화할 수 없는 고음부였다. 한밤에도 타오르는 별 세상 사람 모두에게 감로수를 내리는 별 술집 주인 아들은 깜짝 놀라 노래를 그쳤다. 그러나 조슈아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자기도 가사를 바꾸어 불렀다. 물길잡이 사나이 너는 그의 말으 들었어? 섬으로 가는 배가 준비됐다고 그가 우릴 부르고 있어. 물길잡이 사나이 날 위한 항해자 물길잡이 사나이 날 위한 항해자 노래가 끝났을 때 사람들은 잠깐 동안 노래를 잇는 것도 잊고 조슈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칼라이몬 선장이 가까이에 있던 항해사 하나를 툭 쳤다. 그가 얼른 일어서며 노래하기 시작하자 선장은 조슈아가 있는 쪽으로 와서 말을 건넸다. “노래 실력이 보통이 아닌데?” 조슈아는 가볍게 절하는 시늉을 했다. “제가 모시는 마님 댁에 음악가들이 많이 오시다보니 어깨 너머로 배웠지요.” 어느새 시종 연기도 손색없었다.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어 갈 무렵, 막시민이 두 사람에게 눈짓을 했고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들끼리 이야기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일단 여관이라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세 사람이 다가갔을 때, 칼라이몬 선장은 그들의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불쑥 말했다. “내 집에 하룻밤 머물겠나? 어차피 해적을 만났으니 돈도 없을 것 아닌가?” 작지만 아늑한 방이었다. 저절로 눕고 싶은 마음이 드는 푹신한 침대, 조각보를 이어 만든 이불, 자수 테이블보가 덮인 테이블, 그 위에 놓인 소박한 찻주전자와 찻잔 등, 쥬스피앙의 살풍경한 다락방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칼라이몬 선장의 부인은 노래와는 달리 뚱보가 아니었고, 아들도 아직 어린아이였다. 부인은 선장이 손님을 데려오는 것에 익숙한지 이들의 방문을 반겼고, 사정 이야기를 듣더니 더욱 친절해졌다. 특히 여자아이인 리체를 붙들고 한바탕 신세 타령이라도 들어 주려는 기세여서 막시민이 얼른 막았다. “정말 고맙습니다. 너무 마음이 편한 나머지 졸음이 마구 쏟아지는데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들은 각자 침실로 안내되었다. 선장은 다시 선원들이 있는 술집으로 들어갔고, 부인은 식사가 준비되면 깨워 주겠다고 말하며 자리를 피해 주었다. 셋은 동시에 자기 방에서 나오다가 마주치고는 조슈아의 방으로 들어가 지난번처럼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느새 공동 회의에 익숙해진 세 사람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 막시민이 무척 심각한 어조로 말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둘도 물론 사정을 알고 있었다. 리체가 먼저 말했다. “배를 고쳐야 되는 것.” 조슈아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보기에 저 배는 금만 채우면 도로 뜰 수 있어. 배가 물에 떨어지는 순간 항해용으로 변해버려서 비행용 조작을 할 수 없었던 것뿐이지. 망가진게 아니란 말이야. 날아오를 때 사람들 눈을 피하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 막시민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어.” “뭔데?” “우린 금이 부족해.” 리체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금은 쥬스피앙 아저씨가 넉넉히 줬잖아?” “그래. 예비로 주긴 했지만, 그건 왕복 한 달 기준이라고. 그런데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 알아?” 지도는커녕 종이조차 없었기 때문에 조슈아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벽난로에서 숯을 하나 집어 왔다. 그리고 망토를 벗어 안쪽에다가 해안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막시민이 당연하게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친구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너도 참 공작 가문에 태어나 별별 일을 다 해보는구나.” 그림이 다 그려지자 막시민이 손가락으로 현재 위치를 짚었다. “칼라이소 항구는 여기쯤이라고 들었어. 배 안에서 선원한테 물어봤지.” 막시민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두르넨사 왕국의 수도격인 두르넨사 시에서 약간 아래로 떨어진 곳, 그러니까 두 개의 곶이 마주보고 있는 지협 입구였다. “우린 일곱 시간 동안 바람, 또는 해류에 밀려 굉장히 북쪽으로 와버린거야. 아니면 날고 있는 중에도 북쪽으로 조금씩 밀리고 있었거나, 어쨌든 우린 처음 계획한 길을 굉장히 많이 벗어났어. 일단 출발할 수는 있겠지만, 막판에는 절대적으로 금이 모자라게 돼. 금반지 몇 개만큼 금이 모자라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이번에 다들 잘 봤지?” 모두가 심각해졌다. 리체가 물었다. “조슈아, 페리윙클은 너희 가문의 섬이었다면서? 일단 거기까지 가면 돌아올 때 쓸 금 정도는 구할 수 없어?” 조슈아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사실 두 세대가 가까이 지난 일이야. 아버지께서 그 섬을 어떻게 관리하셨는지, 또 지금도 연락을 취하고 있는지는 나도 몰라. 왜냐면 그 섬을 포기한 이유가 왕가에서 우리 가문이 그곳에 나라를 세워 독립하여 한다고 오해했기 때문이거든. 그러니 만일 관계를 끊지 않았다 해도 드러내놓고 섬을 관리할 수 있었겠니? 나조차도 상황을 모를 정도니 아예 손을 끊으셨던 것인지도 몰라. 그러니까 금 같은 건 기대하기 힘들 것 같아.” “그것 참 암담한 얘긴데.” 막시민은 한 마디 내뱉고 생각에 잠겼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자 리체가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그런데 말야. 좀 그런 얘기이긴 한데, 사실 페리윙클 섬까지 가기만 하면 그 뒤로는, 음... 나중에 생각해도 되는 것 아닐까? 쥬스피앙 아저씨가 설마 배 좀 늦게 가져왔다고 우릴 어떻게 하기야 하겠어? 일단 그 인형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조슈아는 다시 자기 자리를 되찾을 거고.......”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막시민이 말을 막았다. “인형이 없어진다고 해도 조슈아를 도와줄 부모나 가문 사람들은 저 멀리 켈티카에 있다고, 우리처럼 갑자기 날아서 올 수도 없는 거고, 금을 갖고 오려면 더 오래 걸리겠지. 여기서 한 가지 새로운 문제를 생각할 수가 있는데 말이야.” “그게 뭔데?” “결국 모든 것을 해결하려면 켈티카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란 거지. 자, 너희는 페리윙클에 이 비행선을 내버려두고 갑자기 진짜 범선을 몰아 켈티카가지 가고 싶냐?” “에......." 리체는 입을 약간 벌린 채 눈동자를 굴렸지만, 결국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것은 옳은 고찰이었다. 쥬스피앙은 자기가 도와주는 한계를 명확히 하려했지만, 사실 하늘을 나는 배를 얻은 이상 막판까지, 쓸 수 있는 한 활용해야 될 것 아니겠는가? 물론 항해는 일곱 시간으로도 충분히 질렸고 말이다. “이제 우리 문제를 알겠지?” “그러면 우린 지금 켈티카까지 갈 금이 필요하다는 거야? 맙소사.” 조슈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금을 우리가 어디서 구하니.” 막시민은 친구를 째려봤다. “이제야 우리가 거지 여행을 하고 있다는 걸 네가 이해한 모양이구나. 깨달아 줘서 반갑긴 한데, 그렇다고 만사를 포기하란 소린 아냐. 어떻게든 방법을.......” 조슈아가 말했다. “여기서 페리윙클에 가는 것보다, 페리윙클에서 켈티카로 가는 거리가 더 멀어. 우린 일단 페리윙클까지는 가야하고, 거기에서 다시 켈티카로 간다고 치면 그동안 금이 들어간 추이로 볼 때 적어도 8백 온스 이상의 금이 추가로 필요해.” “그건 재봉사로 이십 년쯤 일해도 모을 수 없는 금이야.” 옆에서 덧붙이던 리체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아, 그렇지! 조슈아 폰 아르님은 거지 여행 중일지 몰라도 막스 카르디라면 그 정도 돈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지 않을까?” 막시민이 리체를 흘끔 보더니 비아냥거렸다. “물론 농담이겠지?” 리체는 입가를 실룩일 뿐 더 말하진 않았다. 셋은 다시 나름대로 대안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잠시 후 조슈아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문득 든 생각인데, 그 인형 말이야.......” 조슈아는 혼자 희안한 표정으로 웃기 시작했다. “고마운 것 같기도 해.” “뭐?” 반문한 사람은 둘 모두였다. “고맙다고. 지금 셋이서 이런 문제를 연구하고 있자니 갑자기 아, 살아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이 않겠어? 아니, 살아야겠다는 의지랄까, 죽음의 위협에서 도망치는 것과는 별개로, 가령 맛없는 토마토 수프 따위를 한 입 먹었을 때라든지, 배가 가라앉을까 봐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때, 다른 복잡한 문제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단 말이야.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괴로움은 큰 문제만이 아니란 거, 알고는 있었는데 실제로 느낀 건 처음이었어. 지금은 금이 필요한데, 줄 사람도 없고 생길 곳도 없지. 그런데 이 세상에 금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 그들 중 대부분이 리체가 말한 대로 평생을 가도록 죽도록 일해도 그런 많은 금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거잖아? 그런 금을 얻기 위해 죽도록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겠지? 이렇게 기초적인 생활의 문제로 내려와 궁리하다보니 어쩐지 머릿속이 시원해졌어.” 막시민이 말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좋은데, 조슈아, 그렇다고 인형이 고맙다고 생각하는 건 찬성 못 해.” “아니, 그 얘기가 핵심이야. 내가 이렇게 지내도록 만들어 준 건 바로 인형 아니겠어? 오래 전에, 그러니까 막군 너와 함께 지내던 시절에도 난 비취반지 성에 날 대신하는 인형이 있어서 내가 영영 돌아가지 않게 됐으면하고 바란 일이 있거든. 꼭...누가 내 소원을 몰래 엿듣고 이뤄주기로 작정한 것 같지 뭐겠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냐?” 조슈아는 리체에게 고개를 돌렸다. “리체, 전에 내가 극장 분장실에서 했던 얘기 기억한다고 그랬지?” “어떤 얘기?” “막스 카르디를 없애려 하는 까닭.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돌아가야 하기에 막스 카르디를 죽인다고. 가짜의 모습으로 이 생활을 즐겼지만, 이제 돌아가야겠다고. 그래, 가짜.” 리체는 대답 없이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가짜는 이미 있었더. 다른 누가 아니라 내가 만들었어. 장난삼아 이중생활을 했던 게 아냐. 놀이가 아니었어. 난 진짜로 막스 카르디로 남는다면 어떨까 생각했거든. 만일 선택권이 있었더라면 내가 소공작 조슈아를 선택했을까? 하지만 그 땐 내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그런데 말야, 지금 누군가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줬네? 나한테서 소공작 조슈아의 역할을 빼앗아갔네? 정말 고맙잖아?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 대신 선택해 준 거겠지만.......” “그게 바로 너만이 할 수 있는 미친 생각이야.” 막시민이 신랄하게 쏘아붙였지만 조슈아는 계속 말을 이었다. “사실은 말야, 두 명의 동일인, 소공작 조슈아와 막스 카르디 주에 하나를 죽이려고 했다고. 그것도 어찌 보면 살인이지. 그래, 여기까진 정말 고마워. 그런데 그 사람들은 막스 카르디가 살아남는 것도 원치 않나 봐. 극장에 불을 지르다니. 이건 참 유감이야. 그러지만 않았으면 나도 그들을 용서해 줬을 텐데.” “조슈아, 너!” 막시민이 화난 목소리로 불렀으나, 조슈아는 그치지 않았다. “데모닉 문제로 말할 것 같으면, 사실 둘 다 데모닉이지. 하지만 소공작 데모닉 조슈아는 단지 가문의 핏줄 때문에 탄생했고 죽어도 그 굴레를 벗을 수가 없어. 다들 데모닉이 뭔지 알고 있고, 두렵거나 불쾌한 인간일 뿐이지. 하지만 데모닉 막스 카르디는? 그는 내가 만들었어. 내가 애정을 다해 만들었어. 그의 재능은 모두에게 사랑 받고 있었어. 누구도 쓸데없이, 지나치게 뛰어나다고 말하지 않았던 거야.” 어느새 민감하게 날이 선 목소리였다. 누구나 뛰어난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만 데모닉은 지나치다고, 그건 모두의 의견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조슈아가 그 말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싫어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참아 왔는지, 그런 감정이 목소리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난 그를 좋아했어. 막스 카르디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재능을 믿고, 빠르게 판단하고 후회도 않는 자였어. 그 이름으로 두 해 넘게 살아왔어. 그동안 별장의 소공작 조슈아는 단지 껍질에 불과한 이름이었어. 난 그 이름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고. 미련도 없었어.” 그 때 리체가 말했다. “하지만 너의 부모는? 형제는? 그곳에도 너를 사라하거나 또는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 아냐? 백 번 양보해서 공작 작위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을 수도 있다 쳐.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필요 없단 말이야?” 조슈아는 왼쪽 입가만 올리며 웃었다. “난 정말 이상한 사람인 것 같아. 물론 그들을 사랑했어. 하지만 말이지, 사실은... 없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어. 전에 숲에서 말한 일이 있잖아. 악마가 내게 준 것은 아무도 사라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관용도 너그러움도 없는 것이라고. 좀더 생각해 봐. 아버지도, 어머니도 영리한 자식을 원했겠지만 데모닉은 원치 않았어. 물론 그분들은 날 사랑해. 하지만 데모닉이란 건 내 본질, 그것도 가장 중대한 것 중 하나야. 데모닉을 원치 않으면서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부터 모순 아닌가? 아무도 딸기를 싫어하면서 딸기 파이를 좋아할 순 없는 거니깐 말야. 안 그래?” 그러더니 조슈아는 막시민을 돌아봤다. “이 세상엔 내가 데모닉이라서 싫어하는 사람이 제일 많긴 한데, 그래도 데모닉은 싫어하지만 ‘조슈아 폰 아르님’은 좋아하는 사람, 또는 데모닉이라도 개의치 않고 좋아하는 사람은 있었어. 하지만 내가 ‘데모닉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어. 내가 데모닉이어서 다행이라고, 그래서 더 좋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단 말이야. 하지만 막스 카르디는? 그는 데모닉이기 때문에 환영받은 거야. 카르디였을 땐 내 재능을 마음껏 터뜨려도 좋았어. 평소 다 아는 것도 모르는 듯, 또는 데모닉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어서 관심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막군, 코츠볼트에서 내가 널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데모닉이란 걸 모르는 네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알아? 난 죽 그렇게 살아왔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부끄러워하도록 교육받았어.” 조슈아가 말을 잇기까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카르디로 살아본 뒤 난 생각이 달라졌어. 왜 나조차도 내가 데모닉이란 걸 싫어해야 했을까? 누가 그런 생각이 나의 미덕이라고 정했지? 난 나의 조건을 미워하고, 그래서 나를 미워하며 살아야 되는 건가? 난 나답게 최선을 다하며 살면 안 되는 건가? 말해 봐, 막군. 넌 내게 차라리 카르디가 되라고 말했잖아? 그러면 정말 안 되는 거야?” 막시민은 조슈아의 눈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말했다. “돼.” 조슈아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다. 막시민이 말을 이었다. “그래. 넌 자부심을 가져도 되는 존재지. 제기랄, 내가 허가해 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인형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다시 막스 카르디나 그밖에 괴상한 연극배우 짓을 하거나 하면서 맘대로 살라고. 까마귀가 듣고 자괴감에 빠질까봐 카나리아의 입을 틀어막아 놓을 수 있겠냐? 사실은 반대야. 부끄러운 건 네가 아냐. 다만 사람들은 다 너를 보고 부끄러워 해. 부끄러워서 화를 내는 거라고. 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게 뭐가 잘못됐냐? 세상에 굶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눈앞에 놓인 빵도 못 먹어야겠냐? 다만 ‘까마귀 자식 넌 노래가 뭐 그 따위냐? 우하하하! 이러지만 않으면 되는거 아니냐?”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막군 너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방금 너한테 설득됐다. 이 자식아.” 옆에서 리체도 말했다. “실은 나도 설득됐어.” 그러자 조슈아는 웃음을 그치더니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래서 말인데, 지금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생겼어.” “뭔데?” “나 말야, 리체 말대로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막스 카르디가 되어 볼까 해.” 막시민은 물론 펄쩍 뛰었다. “너 미쳤냐?” 조슈아는 개의치 않고 빙그레 웃었다. “꼭 그래봐야겠어. 아니, 가능한 한 이제부터 카르디로 살까 해. 인형을 없애러 가는 문제와는 별개로, 어느 쪽이 내게 더 잘 맞는지 실험해봐야겠어. 그렇게 살아봐서 아르님 소공작으로 돌아가고 싶어지는지 알고 싶어.” “그런 건 쫓기는 상황이 해결된 뒤에 해도 되잖아!” 조슈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라고. 리체 말대로 현실적으로 생각해도 이 방법밖에 없어. 현재 우리 중에서 돈을, 아니 금을 벌어올 사람은 막시민도 리체도 조슈아도 아닌 ‘막스 카르디’밖에 없으니 말이야.” 쉽게 답을 내리기 힘든 문제였다. 막시민이 얼른 대꾸하지 않자 리체가 말했다. “막시민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막스 카르디 이름을 걸면 그 정도 금은 아무 것도 아니야. 난 그 북새통을 몇 번이나 봐서 잘 안다고.” “막스 카르디 이름을 걸자고? 아예 그 샐러리맨인지 월급쟁이인지 하는 놈한테 초대장도 하나 보내주지 그래?” “하지만 그 이름이 있어야 사람들이 많이 몰린단 말야!” “그래, 그 이름을 대면 지나치게 유명해져서 순식간에 소문이 퍼진다는 것도 모르냐?” “그것도 그렇지만.......” 갑자기 막시민이 허공에 손가락을 휘저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이름이 뭐 대수냐? 그까짓 이름쯤은 분명 저 자식이 대충 떠오르는 대로 만든 것이 틀림없다고. 게다가 사람이 그대로 있는데 이름이 좀 다른들 무슨 상관이야? 막스 카르디는 뭐 처음부터 유명했냐? 실력을 제대로 보여 줄 기회만 있으면 된단 말이야. 혹시 카르디와 동일인일 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그 소문이 하이아칸까지 가기 전에 우린 재빨리 여길 떠야 되는 거지. 만약 그렇게 해서 우리가 동일인이란 것을 확인한들, 하늘을 나는 배를 어느 놈이 무슨 수로 쫓아올 거야?” 조슈아가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네 얘긴 카르디 이름만 안 쓰면 찬성한다 그 말이지?” 막시민은 대답 대신 기분 나쁜 듯 중얼거렸다. “은퇴한 놈이나 불러내야 하다니, 여기의 셋은 왜 이렇게 능력이 없는 거냐.” 그리하여 결정되었다. 사실 조슈아 한 명만 있으면 시나리오에서 작곡, 작사, 안무, 연출에 이르기까지 다 할 수 있으니 필요한 건 시간과 돈뿐이었다. 막시민이 말했다. “극장을 물색하는 것이 문제겠는데. 이곳에 극장은 많다지만 아는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그 말을 꺼내는 것과 동시에 해결책이 리체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배에서 듣자니 칼라이몬 선장이 다이아몬드 러쉬 극장의 지분을 절반 갖고 있다던데?” 다음날 아침, 막시민은 칼라이소 선장, 아니 극장주의 방에 있었다. 그들이 묵은 방 바로 옆이었지만, 먼 곳에서 온 사람처럼 땀 닦는 시늉까지 하며 권해 준 자리에 앉자마자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얘기를 듣자니 극장을 운영하신다고요?” “뭐... 운영한다기보다는 지분을 갖고 있는 거지. 내 지분이 가장 크긴 하지만 실질적 운영은 다른 사람이 맡고 있어서.......” 선장은 깨어나 앉아 있긴 했지만 전날의 숙취로 인해 정신이 맑지 못해 보였다. “그래도 극장 운영에 어느 정도는 참여하시겠지요?” “선장이 되기 전엔 그랬지. 지금은 그냥 바다에 나가지 않을 때 조금 구경하러 가는 정도야.” “그 정도면 충분하죠. 제가 듣기로는 이 항구에는 극장이 무척 많고 그중에서 가장 큰 세 군데 중 하나가 선장님의 극장이라던데, 최근에는 그다지 실적이 좋지 못한 모양이더군요. 선장님 극장의 공연이 대성황을 이뤄서 인기도 얻고 돈도 많이 번다면 말할 나위 없이 좋으시겠지요?” “그걸 말이라고 하나, 이 친구야.” 대꾸하며 선장은 입을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그러나 막시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두 손을 한 차례 비비고 안경을 고쳐 쓰더니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면 됐습니다! 제가 선장님을 도와드리지요. 나중에 저를 붙잡고 고맙다는 말을 백 번쯤 하실 게 틀림없지만 그러실 필요 없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리지요. 저는 그런 것 때문에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니니까요. 어디까지나 선장님께서 어제 저희를 도와주신 노고와 너그러운 마음에 보답하려는 마음뿐이니 선장님께서는 마음 푹 놓고 모든 것을 맡겨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저는 아무 보답도 필요 없다니까요.” 칼라이몬 선장은 눈을 꿈뻑거렸다. “지금 자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냥 제가 말씀드리는 대로 하시기만 하면 된다니까요.” “그러니까 뭘?” 막시민은 빙그레 웃어보였다. “물론 공연이죠.” “아니 이봐, 공연은 뭐 하늘에서 계시가 내려와 만드는 줄 아나? 도대체 어떤 걸 하자는 건지 말도 안 하고, 다짜고짜 공연을 하라니? 내용이 뭔데?” 드디어 걸려들었다. 막시민은 최대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선언했다. “내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만 있으면 무조건 성공합니다.” “한 가지란?” “제 친구, 그러니까... 히스파니에군이 나오는 겁니다!” 막시민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은 무조건 재활용이었다. “네 친구? 혹시 어제 노래를 불렀던?” 칼라이몬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는 것을 막시민은 놓치지 않았다. “역시 바로 알아들으시는군요. 사실 히스파니에는 저처럼 잔심부름이나 하던 시종이 아닙니다. 본래 음악가 집안 태생인데 집안이 파산해서 어려서부터 시종이 됐지만, 아, 그러니까... 어쨌든간 노래 실력이 워낙 탁월해서 귀족들도 그의 노래를 들으러 올 정도였죠. 귀족들 앞에서만 노래를 했기 때문에 유명세는 없어도 하이아칸 사교계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사람들이 그의 노래를 한 번 듣는다면 완전히 사로잡혀버릴 것이 틀림없죠. 무엇보다도 선장님이, 아니 극장주님이 보시기에도 그 자식이 노래를 기가막히게 하지 않습니까?” 칼라이몬은 뺨을 실룩거렸다. “노래는 잘 하는 것 같다만.” “얼굴도 좀 되지 않나요?” “그런 것도 같지만.” “그런데 뭘 망설이시죠? 당신의 극장에 저 자식보다 노래를 잘 하는 배우가 있을 것 같습니까? 여자들 중에서도 없을 걸요?” 칼라이몬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누가 남자놈이 노래부르는 것 따위를 보러 오겠냐? 우리 극장의 주력은 무희들의 쇼와 노래라고. 뱃놈들로 들끓는 항구에서 남자를 주역으로 내세우는 공연 같은 건 없어.” 막시민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더니 갑자기 장광설을 펼쳐 놓기 시작했다. “오, 모르는 말씀. 남들이 다 아는 고객만 노려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죠. 무희들의 쇼를 좋아하는 선원들은 다른 극장에서도 서로 끌어가려고 난리를 치니까 한 극장에서 독점하는 것이 절대로 어렵잖습니까? 남들이 노리지 않는, 소외된 고객들 속에 진짜 성공이 있는 겁니다. 아, 물론 기본적으로 풀어놓을 주머니는 있는 고객이어야겠죠. 칼라이소는 단순한 항구가 아니란 걸 다 알고 있어요. 이 근방 소도시나 성에서도 화려한 뭔가를 보고 싶으면 다들 칼라이소로 오지 않습니까? 선원들이 제일 많긴 해도 선원들만이 손님의 전부는 아니란 말씀이죠. 더구나 뭐든 팔 수 있는 흥행사야말로 진짜 흥행사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당신이 팔아야 할 재료가 남자놈니면, 그걸 끝내주게 팔아먹을 생각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자, 이만하면 누구한테 팔아야 할지 알고도 남지 않나요?” “아니. 그게 도대체 누군데?” 오히려 막시민의 신기한 말재주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칼라이몬을 향해 막시민은 갑자기 두 주먹을 부르쥐며 외쳤다. “귀족 아줌마들을 모으는 겁니다.” 조슈아는 자가가 걸어온 거리를 돌아보고, 다시 정면을 올려다봤다. 그의 앞에 높이 솟은 화려한 간판 속에서는 타조깃 모자를 쓰고 한쪽 다리를 드러낸 황금빛 드레스를 입은 멋진 아가씨가 윙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한 감정을 느껴본 일이 없는 조슈아는 간판을 그린 그림 솜씨가 좀 떨어진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야자수와 조잡한 보석 그림으로 장식된 입구 옆에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다이아몬드 러쉬! 당신의 환상 낙원’이락 커다랗게 씌어진 것도 보였다. 왼쪽을 보자 오늘의 쇼 일정과 내일의 쇼를 소개하는 글귀 아래에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오늘의 추천 만찬$ 조개 크림 수프, 휠레 미뇽(Fillet mignon), 해산물 토마토 샐러드, 와인 한 잔 , 가격 5 고블룬, 절대적으로 저렴한 가격. 조슈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극장에서 만찬이라니? 여기는 레스토랑이었단 말인가? 막스 카르디 공연에서는 만찬은커녕 푸딩 한 개도 제공되지 않았다. 먹고 마시고 수다나 떨다가 좋은 노래가 나오면 박수 몇 번 치고 저들끼리 깔깔대는 그런 공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모두가 오직 카르디를 보겠다고 줄을 서서 들어오고, 한 장면이라도 놓칠세라 오페라 글라스를 올렸다 내렸다 하며 손수건을 꼭 쥐고 보는 공연만 했던 그였다. 하지만 주위의 다른 극장들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거리는 아직 한산했다. 오가는 사람도 없고, 어젯밤 늦게까지 일을 한 무희들이 화장기 없는 나른한 얼굴에 수건으로 머리를 싸매고 가끔 드나들 뿐이었다. 조슈아는 기분이 나빠졌다. 막스 카르디, 아니 물론 다른 이름을 쓸 거지만 어쨌든 자신이 공연을 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이런 환경이라니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연을 보면서 뭘 먹겠다는 놈들은 한 명도 들여보내지 않을 테다. 식사를 하고 싶으면 식당으로 가버려! 마침 극장 앞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조슈아는 누구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너무 당당하게 들어갔으므로 가다가 마주친 사람들도 잡을 생각을 않고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그렇게 접객 홀을 지나쳐 주홍빛 융단이 깔린 중앙 계단을 올라가자 공연 홀로 들어가는 커다란 문이 나타났다. 문은 닫혀 있었으나 문고리를 만져보니 잠겨 있진 않았다. 좌우를 보니 과연 양쪽에 배우와 무희들을 위한 대기실이 있었다. 일단, 기본적인 건 갖춰진 극장인데 이 홀 안에는 아마 식탁과 의자들이 즐비하겠지? 정말로 공연을 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인데 조슈아의 머릿속에는 벌써부터 완벽한 공연을 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무희들의 춤은 괜찮을까? 의상은 제대로 된 것일까? 배우들은 얼마나 훈련이 되어 있을까? 무대 배경 그림은 간판보다 잘 그렸을까? 그 때 왼쪽 대기실에서 곧 있을 낮 공연을 위해 화장을 마치고 의상을 갈아입은 무희들이 십여 명 가량 우르르 나왔다. 조슈아는 고개를 홱 돌려 그들을 쏘아봤다. 다른 의도는 전혀 없었다. 무희들의 의상이 괜찮은지 보려 했을 뿐이었다. 무희들도 낯선 소년 하나가 극장 문 앞에서 자기들을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것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무희들이 자신들의 노출이 심한 의상에 소년이 넋을 잃었다고 판단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세련된 것과는 거리가 먼 여행자 복장에, 촌스기처럼 극장 문을 올려다보던 소년이었으니 말이다. 그녀들은 소년을 놀릴 셈으로 키득거리며 다가왔는데 그 중 맨 앞에 선 아마릴리 크라운 양은 장난기가 발동하여 부채를 내밀어 조슈아의 어깨를 짚더니 말했다. “멋있는 여행자 분, 오늘밤에 시간 있으신가요?” 조슈아는 마지막으로 무희의 신발을 보았고, 그리고 총체적으로 이들의 의상이 형편없다고 판단했다. 옷감도 싸구려이고 바느질도 허술하고, 모조 보석뿐이고, 심지어 낡았다! 그래서 한 마디 하려고 고개를 쳐드는 순간 얼굴을 바짝 갖다댄 아마릴리와 눈이 딱 마주쳤다. “어머!” 당황한 쪽은 조슈아가 아니었다. 그 나이에 조슈아만큼 무대 의상을 입은 아가씨에게 익숙한 사람도 드물었다. 그러나 아마릴리는 촌뜨기인줄 알았던 소년이 상상 이상으로 잘생긴데다, 눈빛은 흡사 한바탕 야단치기 직전의 무대 감독 같았으니 놀라 가슴이 덜컹할 수밖에 없었다. 코끝이 닿기 직전의 상태 그대로, 조슈아가 입을 열었다. “모자는 너무 작고, 머리는 틀어 올리는 것이 좋겠고, 바느질이 허술해서 몸의 곡선이 살아나지 않고, 노출도 어설프군요. 치마는 좀더 찢는 게 좋고, 대신 은사 스타킹을 신도록 해요. 의상이 보잘것없으면 좋은 춤을 춰도 살아나지 않죠. 아니, 반대로 그런 의상으로 서려면 잘 추어선 안 될 텐데, 어디 다들 실력 좀 봅시다. 전부 극장 안으로 들어가요! 지금 당장!” <4권에서 계속> 데모닉 4권 [demonic] a 악마의; 악마와 같은; 마력을 지닌, 천재적인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나는 당신들이 나를 노리고 있는 그곳에 있지 않다. 여기 이렇게 웃으면서 당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 푸코(Michel Foueault, 1926~1984) - 7막. Headreach 1. 누가 시켰느냐 하는 문제 2. 초대된 사람들 3. 오디션 4. 불완전 5. 돈이 없을 때는 6. 이네스 아가씨 7. 술의 용도 8. 두 소녀의 비밀 놀이 9. 뱀의 혀 [일 드 모르비앙의 결혼식] 8막. Elan 1. 거리의 엑스트라버간자 2. 그대의 마지막 공연이 최고의 공연이 되기를 3. 심장을 꿰뚫다 4. 잘못된 표적 5. 대결 7막. Headreach 10,11쪽 결락 보였던 모양이었다. 에테른은 대답하는 대신 반문했다. "히스파니에 씨 생각엔 저 캄캄한 곳에 뭐가 있을 것 같아요?" "그거야, 바다겠죠." "맞았어요, 당신 생각도 나와 같네요. 그럼 이제 내가 뭘 보고 있었는지 알겠죠?" 조슈아는 미묘하게 입을 오므렸다가 씩 웃었다. "보이지 않아도 존재를 알 수 있는 것, 당신이 나를 만나고자 한 이유로군요." "그래요." 머리 위에서, 보이진 않지만 새 울음소리가 한 차례 들렸다. 조슈아는 하늘을 쳐다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저 위에 뭐가 있죠?" "집에 못 간 도둑갈매기." "내가 저 놈과 비슷한 종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안 해요?" 이번에는 에테른이 웃었다. "그렇다면 집으로 보내 줘야죠, 집이 어디죠?" 조슈아는 빈손을 내보였다. "잃어버렸어요." "미래 계획이 전혀 없는 갈매기로군요. 그런 부류야말로 나 같은 사람에게 딱 맞는 먹이예요. 아버지께선 늘 그런 자들을 데려다가 싼값에 단물 빠질 때까지 쓰라고 하셨죠." 에테른의 눈이 반짝거렸다. 조슈아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악덕 흥행사 같으니라고, 당신을 등쳐먹을 방법을 연구해 봐야겠어요." "쉽지 않을걸요. 나처럼 닳고닳은 흥행사를 다루려면 눈앞에 반짝반짝하는 황금을 던져주거나, 아니면 가까운 미래에 머리 위로 황금비가 쏟아지리라는 확신을 꽉 물려주거나 둘 중의 하나는 해야 돼요." "자, 그럼 이제 내가 왜 당신을 만나려고 했는지 알겠죠?" 에테른은 순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해 의아한 얼굴이 됐으니 곧 조금 전 그녀 자신이 했던 말을 재치 있게 인용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렇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당신은 후자고, 후자에 맞는 계획을 갖고 왔다 그 말이겠지요?" 조슈아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요." "자, 그럼 확신을 물려줘요. 금비가 쏟아질 때까지 이도 한 번 안 떼고 꽉 물테니까." 둘은 서로를 향해 미소를 보였다. 조슈아가 말했다. "먼저, 내게는 전권(全權)이 필요합니다. 공연 내용은 물론이고, 스탭 선정과 배우 선정, 제작 과정, 연습 과정, 소품 제작, 공연 날짜, 공연 횟수, 입장권의 가격, 모두 다." 에테른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예 제작자가 되려하는군요? 거기다가 연출가도 겸하고? 한데 그걸 다 넘기면 내 역할은 도대체 뭐죠?" "금비를 맞는 것." 일순간의 침묵에 이어 커다란 웃음소리가 울렸다. 에테른은 너무 즐거워 못 견디겠다는 것처럼 한참동안 그치지 않고 웃어댔다. "아, 아, 이렇게 명쾌하고 마음에 드는 역할은 마흔 두 해 살아오는 동안 처음이로군요. 평생 이런 것만 했다면 좋았을걸." 조슈아는 두 손을 깍지껴 머리 뒤로 올리며 말했다. "농담이 아닌데." "그게 농담이었다면 당신을 이 자리에서 당장 쫓아버렸을걸요. 난 농담으로 일하지 않아요." 조슈아는 그녀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는 것을 알고 미소지었다. 다이아몬드 러쉬 극장의 극장주, 비록 칼라이몬과 반반씩 갖고 있는 권리였지만 바다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면서 노후 대책 삼아 극장 지분을 사 둔 칼라이몬과는 달리, 에테른은 아버지 뒤를 따라다니던 열 수 살짜리 소녀 시절부터 마흔 둘의 나이가 된 오늘날가지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흥행사였다. 칼라이몬이 극장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는 건 이익 분배할 때밖에 없지만, 그녀는 극장을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돈이 안될 것 같은 일에 한 푼이라도 투자할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아버지이자,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전성기에 극장을 세 개 갖고 있었던 에두아르드 에테른이 그랬듯이 말이다. 말년에 파산하다시피 한 에두아르드는 소유한 극장을 모두 팔아 넘길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는 그 극장들의 지분을 차근차근 되찾아 가는 중이었다. 칼라이소 극장가에서는 그녀가 얼마나 계산이 철저하고 실질적인 이익을 따르는 여자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에테른은 혼자 고개를 끄덕거리며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자, 당신이 무지막지한 요구를 하는 사람이란 건 이제 알았어요. 그 다음도 있나요? 아니, 그 다음이란 게 있을 수 없는 요구를 이미 한 건가요?" 조슈아가 미소를 보냈다. "그런 셈이죠. 당신은 내게 그 '전권'을 휘둘러 각각의 일들을 어떻게 처리할 셈인지 물어봐야 할 겁니다. 뜻밖의 것들도 있을 테니까." "그럼 물어보죠. 공연 내용은 일단 놔두고, 스탭과 배우는 최고를 원하겠지요?" "물론이죠. 다만 제가 직접 뽑을 것이기 때문에 뜻밖의 사람이 선정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마세요." "좋아요. 그것도 그렇다 칩시다. 제작이나 연습이나 소품은 맡겨둘 수도 있긴 한데. 공연 날자가 궁금하군요. 혹시 시작하고 싶은 특별한 날이 있는 건가요?" "특별한 날은 없는데, 개막일은 앞으로 약 20일 이내가 될 것 같군요." 이번에야말로 에테른도 놀랐다. "20일? 그 안에 제대로 된 공연이 나올 수 있을까? 아직 스탭 한 명도 없는데?" 그러자 조슈아도 얼굴에 가벼운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 이상의 진지함조차 필요 없다는 것처럼, 미풍 같은 자신감이었다. "만들어드리죠." 그녀는 생각에 잠겨 바다를 바라보았다. 칸델라의 불빛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곧 세찬 바람이 한 차례 불어와 두 사람의 몸을 때렸다. 바람이 가라앉자 둘은 모두 머리를 가다듬어야 했다. 그 직후, 에테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당신의 요구 조건이군요. 자, 그럼 따져 봅시다. 당신도 다른 투자가 없는 상태에서 사전 제작비를 전액 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란 건 알 거예요. 수익은 첫 공연이 시작되는 날 밤에야 겨우 나오기 시작하겠죠. 그런 상황에서 당신은 내게 제작 전반을 총괄하는 전권을 요구하고 있고, 그걸 허락할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내 손에 들린 거라고는 당신이라는 사람이 하룻밤만엔가 썼다는 대본 한 뭉치뿐이죠." 에테른은 잠시 말을 끊고 조슈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구석구석 살펴보다시피 했다. 그리고 곧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감스럽지만, 저는 그 대본에 반했고 말이죠." 조슈아는 태연히 덧붙였다. "무대에 올리면 더 반하고 말걸요."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 당신을 만나고 있을까요? 자아, 다 좋아요. 공연이 훌륭할 거라고 예상해 봅시다. 하지만 훌륭한 공연이라고 다 돈을 버는 건 아니에요. 난 열 두 살 때부터 무대 주변에서 어슬렁거렸기 때문에 대본이니 공연이니 하는 것을 보는 안목은 보통 사람들보다 무척 높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 내 마음에 쏙 드는 공연이 오나성되었다고 해서 관객들도 좋아하리라고 확신할 순 없죠." "만들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인 거죠. 과연 어떨지. 이 시점에서는 당신이 제작비를 투자하느냐, 아니냐, 이 두 가지 갈림길이 있을 뿐이고 당신이 전자를 선택한 후에야 그걸 관객들도 좋아하게 될지 알 수 있게 되니까." "바로 그래요. 그런데 난 지금가지 관객들이 틀림없이 좋아할 것 같은 안전한 기획만 해 왔어요. 대부분은 좀 저속한 오페라들이죠. 그런 것은 확실하게 돈을 버니까요. 물론 언제까지나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내 입장만 따져보자면 아직은 모험을 할 때가 아니에요. 난 좀더 돈이 필요해요." "돈이 필요하다라. 잠깐, 몇 가지 물어도 될까요?" 에테른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슈아는 손끝이로 난간을 두드리며 말했다. "제가 외지 사람이다 보니 이쪽 시세를 몰라서 그러는데, 칼라이소에서 보통 저녁 공연의 입장료가 얼마죠?" "글쎄요, 자리 구별 없는 공연의 경우 10고블룬 정도? 공연에 저녁 식사도 포함하면 15에서 20고블룬. 하긴 좀더 정확히 말하면 저녁 식사에 공연을 포함해서지만." 조슈아는 당황한 듯 미소를 보였다. "그런 식으로 해서 한 번 공연에 도대체 얼마나 들어오죠?" "자리가 꽉 차고 그들 모두 식사를 한다고 가정할 때 최대 2천 고블룬까지 잡아볼 수 있겠죠. 만일 식사를 할 수 없는 위쪽의 싱글 좌석들까지 친다면 5백쯤 더할 수 있겠고, 그걸 엘소로 환산하면 1천 2백 정도 되려나요? 하지만 그런 경우는 한 해 내내 한 번도 있을까 말까해요. 만약 그 정도로 인기를 끈다 해도 20회도 되기 전에 극장에 드는 사람이 절반 정도로 줄어들 테고, 그러니 본전을 뽑기 위해 알맞은 횟수는 많아야 30회 안팎일까요." "거기다가 그 사람들한테 음식도 내놔야 하니 재료값에 요리사까지 써야 할 것 아닙니까? 남는 것도 없겠네요." 에테른이 피식 웃었다. "대신 음식이 무척 부실하죠. 다들 그런 줄 알고 오니까 상관없기도 하고, 딱 먹고 죽지 않을 정도예요." 자신의 극장에 대한 얘기니 솔직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조슈아는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이 되어 발끝으로 바닥을 비볐다. "돈 벌기 무척 힘들었겠군요. 시세는 참고삼아 물어본 거지만 들어보니 참고삼을 것도 없을 것 같고, 됐습니다. 돈이 필요하면 돈을 만들어드리죠." 구슬 따는 어린아이의 호언장담보다 가벼운 말투였기에 에테른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당신 말을 믿고 싶지만……." "저는 훌륭한 공연을 만들지만, 그 이상으로 돈을 버는 공연을 만드는 데도 아주 익숙하죠." 키가 작은 에테른은 턱을 들고 조슈아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녀 같은 사람에게 이 이상으로 진지해질 문제도 없었다. "좋아요. 두르넨사 출신들이 어떤지 알죠? 난 상인이 아니고 극장을 경영하지만, 두르넨사 사람은 태생이 장사꾼이고, 전 대륙을 상대로 장사를 하며 손해보지 않는 방법을 잘 알고 있죠. 그러니 내가 위험한 결정을 하게 하려면 구체적인 금액을 제시해요. '난 얼마의 수익을 안겨 주겠다' 라고 말해야죠. 그런 식으로 말할 정도니 그만한 계획은 있을 거라고 믿고 묻죠. 자, 얼마인가요?" 조슈아는 입가에 보조개 하나를 만들 시간 정도만 지체했다. "최소 10만 엘소." 에테른은 처음에는 눈을 두어 번 깜빡거렸고, 그 다음엔 콧등에 미묘한 주름을 잡았다. 놀라 기침을 하거나, 농담하는 거냐고 묻지는 않았다. 물론 상상 이상의 이야기이긴 했다. 하지만 천사의 존재를 믿는 아이보다 뚜렷한 신념을 갖고, 돈이란 확신을 따른다는 것을 믿어온 그녀였다. 그녀가 말이 없자 조슈아가 물었다. "생각보다 적은가보죠?" "무슨 소리예요! 난……." 그러나 더 황당한 말이 에테른이 하려던 말을 막아버렸다. "좀 적긴 해도 어쩔 수 없어요. 공연은 딱 두 번만 하고 끝낼 거라서." 여름밤 11시에 칼라이소의 극장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문 닫을 준비를 하는 곳과, 한창 손님이 몰려들고 입구에 램프들이 휘황하게 밝혀진 곳. 한낮의 더위를 피하기 위해 해가 지고 나서 거리를 서성거리는 사람들에게 술과 음식을 제공하고, 덤으로 화끈한 쇼도 보여준다는 방식은 매년 더위가 불타오르는 항구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더위를 잊을 만한 볼거리를 원하는 밤의 손님들을 끌기 위해 저마다 자극적인 레퍼토리로 경쟁했기에, 극장주가 점잖은 곳은 점점 손님이 떨어져 밤 개장을 포기했고, 남은 곳은 특별히 인기 있는 여배우가 나오거나 그것도 아니면 무희들의 노출이 심한 몇 군데뿐이었다. 조슈아는 불빛 가득한 극장 거리를 혼자 가로질렀다. 팔짱 긴 남녀나 술에 얼큰히 취한 선원들 무리가 흔들거리며 걷는 거리에서 일행 없이 빠른 걸음으로 걷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느 극장 입구에 이르렀을 때 마침 한 차례 공연이 끝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조슈아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혼자 빙그레 웃었다. 그는 관객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다. 막스 카르디였던 시절에도 가면을 벗고 가끔 극장 앞을 걸어본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흩어질 즈음, 그는 바로 앞에 있는 불 꺼진 극장, 다이아몬드 러쉬로 들어갔다. 접객 홀에는 청소하는 사람 둘밖에 보이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가 대기실로 들어가자 이미 화장을 다 지우고 의상도 갈아입은 무희들 십여 명이 수다를 떨고 있다가 고개를 돌리며 깜짝 놀란 시늉을 했다. "어머나!" "정말 왔잖아?" "어떻게 됐어요? 얘기는?" 조슈아는 입구에 선 채로 미소를 보였다. "다들, 오늘밤에는 나와 좀 지내줘야 겠어." 그 때 아마릴리 크라운이 맞은편 복도 쪽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말을 들으면 기대하게 되잖아!" "기대해도 좋을 만큼 일거리가 산더미야." 그렇게 대꾸하며 의자를 하나 끌어당겨 앉은 조슈아는 곧 무희들에게 둥그렇게 포위됐다. 품 속에서 둘둘 말린 종이 뭉치를 꺼내 보이자 금세 손에서 손으로 넘어갔다. 먼저 펼쳐본 아가씨가 당황해서 한숨부터 내쉬었다. "에엑, 이게 몇 장이야. 오늘밤에 우리 다 죽었네." "사람 더 불러와야 되는 거 아니야?" "불러올 사람이나 있어?" "이거 정말로 내일까지 해야돼요?" 종이 뭉치가 아마릴리의 손까지 넘어가자, 내용을 죽 훑어 내린 그녀의 눈초리가 미묘하게 펴졌다.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해내려고 머리 굴리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뾰족한 수를 궁리해 낼 만큼 머리 좋은 그녀도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도로 종이 뭉치를 받아들고 페이지를 훌훌 넘기던 조슈아가 말했다. "자아, 당신한테는 특별히 클라이맥스의 결혼식 장면을 맡겨 줄 테니까." 아마릴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목소리를 깔았다. "그런 거 말고,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잘 알면서." "마리 드 트루아? 안 돼. 될 걸 달래야지." "젠장, 너무해." 아마릴리는 화난 것처럼 발딱 일어섰지만 일부러 그래 보는 것일 뿐, 진짜로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어차피 자기한테 돌아오기에는 너무 난이도가 높은 배역이었다. 그녀는 인기 좋은 발레리나 겸 배우였지만, 노래를 잘 해서 인기가 있는 건 아니었다. 스스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마감 시간은 내일 오전 10시까지." 이번에는 무희들 모두가 입을 모아 외쳤다. "너무해!" "꼭 그 때까지 끝내야 돼. 음, 도와줄 사람이 올 거야." 말이 떨어지자마자 복도 쪽 문이 덜컥 열리며 한 사람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리체였다. "아아?" 십여 명의 무희들에게 둘러싸인 조슈아를 본 리체는 '그런 모양으로 뭘 하는 거야?' 라고 말하는 것처럼 눈썹을 올려 떴다. 그 표정을 본 무희들도 좋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뭐야. 저 앤?" "왜 저런 표정인데? 뭐 잘못됐어?" "무슨 볼일이래?" 리체도 그런 소릴 듣고 꾸벅 인사라도 할 성격은 아니었다. "나 당신들한테 볼일 없거든요?" 아마릴리가 대꾸했다. "그런데 왜 그런 깜찍한 얼굴로 쳐다보니? 뭐 불만이라도 있어?" 리체는 약간 발끈했다. "있지, 그럼 없겠어?" "뭔데?" "너네 얼굴 무서워 죽겠어. 제발 도로 화장 좀 해 줘." 그렇게 말하자마자 재빨리 머리를 도로 빼며 문을 닫아버렸으므로 무희들은 뭐라 대꾸할 틈도 없었다. "저게 뭐라는 거야!" "촌구석에서 와서 화장도 할 줄 모르는 게 떠들긴!" "아마 쟤가 화장을 하면 마녀처럼 될 걸?" 이어 무희들은 자기들을 편들어 달라는 것처럼 조슈아를 바라보았으므로, 조슈아는 애매하게 웃으며 일어나 달아날 태세를 취했다. "신경 쓰지 말고 시작합시다. 자, 그럼 나는……." 조슈아가 리체가 사라진 문으로 나가려 하자 아마릴리가 볼이 부어 토라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우리한테는 일 잘 시켜 놓고 버릇없는 얘를 따라가는 거야? 쟤가 자기 여자친구라도 돼?" 조슈아는 문 앞에서 몸을 돌렸다. 여전히 미소 띤 얼굴이긴 했지만 눈빛은 뭐랄까, 그에게 그런 표정이 가능하다면 '엄격해져' 있었다. "우리 농담하러 모인 것 아니지?" 그 말 한 마디에 무희들은 잠잠해졌고, 이어 분분히 일어서 자기 작업을 할 자리를 찾아 흩어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아마릴리가 일어나 조슈아를 마주보며 웃을까 말까 하는 것처럼 입가를 실룩였다. 조슈아는 한쪽 입끝을 올리며 보조개를 만들어 보였다. "도와줄 거지?" "그런 거지. 후후, 우리 모두 내켜서 모인 것 아니겠어? 자긴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사람이잖아. 그리고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걸 할거잖아. 난 말야, 그게 무얼지 꼭 보고 싶으니까." 조슈아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맞았어. 당신은 보게 될 거야." 문고리를 돌리고, 한쪽 손만으로 인사하며 조슈아가 사라졌다. 아마릴리는 돌아서기 직전에 닫힌 문을 향해 키들거리며 덧붙였다. "자기한테 반한 무용수들의 뜨거운 눈길 때문에 제대로 보게 될 진 모르겠지만 말야." 이튿날 아침 8시경, 칼라이몬 선장, 아니 극장주 칼라이몬은 극장으로 출근해 있었다. 본래 1년 가야 서너 번쯤 들를까 싶던 그가 이렇듯 이른 시간에 나타난 것은 선례 없는 일로써, 입구를 지키며 끄덕끄덕 졸고 있던 문지기가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섰을 정도였다. "앗, 선장님! 아니, 극장주님! 어쩐 일인가요. 이런 시각에?" 첫 출항하는 배에 오를 때처럼 빳빳하게 다린 칼라를 달고 머리도 기름을 발라 넘긴 칼라이몬은 어색한 미소만을 남긴 채 총총걸음으로 복도를 지나쳐 극장 로비에 들어섰다. 공연 홀로 들어가는 문이 활짝 열린 것을 본 그는 의아한 표정이 됐다. 공연은 점심 무렵이나 되어야 시작하기 마련이고, 그 전에는 홀을 닫아 놓은 것이 보통인 터였다. 게다가 인기척이 있지 않은가? 계단을 올라가 홀을 들여다본 칼라이몬은 당황해서 가름을 발랐다는 것도 잊고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홀 내부의 테이블들이 난잡하게 어지럽혀져 있고, 테이블마다 난데없는 종이와 펜이 나뒹굴고 있으며, 더구나 십여 명의 아가씨들이 무척 피곤한 표정으로 테이블에 엎드려 있거나, 또는 잠들어 있는 모양을 발견했던 것이다. 게다가 정면 무대에는 누가 쳐 놓은 건지 길다란 빨랫줄이 두 줄 쳐져 있고, 거기에 멀어서 언뜻 알아볼 수 없는 수십 장의 그림들이 걸려 있는 것도 보였다. 극장이 아니라 화가의 작업실이라도 된 듯한 분위기였다. "처음에 칼라이몬은 아가씨들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한쪽 구석에 놓인 의자에 기대앉아 머리를 젖힌 채 졸고 있는 아마릴리를 발견하고서야 그녀들이 극장의 무희들이라는 것을 알았을 정도였다. "밤새 뭘 하고 있었던 건가?" 아주 천천히 눈꺼풀을 올린 아마릴리는 칼라이몬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나직이 키득거렸다. "아, 그러니까요. 우리는……." 다른 무희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보다시피 노력동원에 차출돼서요." "노력동원이라니?" 그녀는 손가락으로 한 가운데 놓인 테이블을 가리켰다. 밤샘의 결과인 종이뭉치가 무슨 조개 무덤처럼 그득히 쌓인 것이 보였다. 칼라이몬은 섣불리 건드렸다가 무너질세라 조심스럽게 맨 위의 것을 집어 몇 페이지 넘겼다. "대본이잖아?" "그럼요, 대본이죠." 아마릴리는 일어났다. 테이블 사이를 건들건들 걸으며 흩어진 종이들을 죽 살펴보더니, 몇 장씩 집어 하나로 묶은 다음 조개 무덤 꼭대기에 얹어놓았다. "이걸로 끝." 그 사이 다른 것도 펼쳐 본 칼라이몬이 물었다. "이거 모두 똑같은 거잖나? 왜 이렇게 많이 베껴 놓은 거야?" "히스파니에 씨가 그렇게 하래요." 당연한 말을 하듯, 잘라 말하고 아마릴리는 자고 있는 사람들을 두드려 깨웠다. 칼라이몬은 여전히 상황을 이해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 친구가 시켜서 이렇게 모두 밤을 새웠단 건가?" "달리 불러서 시킬 사람도 없고 해서, 우리 중에 글 쓸 줄 아는 얘들은 전부 나온 거죠. 다들 밤새워 손가락 부러지게 써대느라 죽을 맛이에요. 자기가 맡은 페이지들은 다 외웠을 정도라니까요." 이윽고 잠에서 깨어난 무희들은 저마다 손가락을 풀고 손목을 주무르는 등 한동안 법석을 떨었다. 칼라이몬은 어이가 없어 한 마디 했다. "이래서 이따가 공연은 어쩔 참이야?" "밤샘한 사람들은 오늘 쉬어도 된다던걸요." "아니, 누가?" "히스파니에 씨지 누구긴 누구예요." 점점 더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히스파니에가 언제부터 극장에 26쪽 결락 이번에는 대답을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27쪽 결락 지금 같은 성수기에 갑자기 공사에 들어간단 말요? 설계는 무슨 소리요?" 세 사람은 멀뚱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종이를 들고 있던 사람이 말했다. "무슨 소리냐는 건 또 무슨 소립니까? 주문을 받았으니 일하러 온 거 아니오? 직원이시거든 우리 일 좀 하게 여기 계신 아가씨들이나 내보내 주십쇼." 그러나 무희들도 극장을 수리한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표정들이었다. 칼라이몬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에테른이 극장을 어떻게 운영하든 내가 잔소리할 바는 아니겠지만, 요즘 같은 때 난데없이 내부 공사에 들어간다는 생각은 좀 괴상하군 그래. 만약 정말로 얘기가 그렇게 된 거라면 일을 시작하기 전에 계약서 정도는 보여 주시구려. 나도 굳이 따지자면 이 극장의 극장주란 말이오." 세 사람은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칼라이몬이 서 있는 극장 입구로 되돌아왔다. :극장주시란 말입니까? 그런데 어째서 우리가 오는 것을 모르고 계신거죠?" "나야 극장 운영에 직접 관여하지 않으니 모를 수도 있겠지만, 보아하니 나뿐 아니라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은데?" "하지만 분명히 선금까지 받았는데요?" "선금이라고? 대체 누구한테?" 오늘 아침 내내 매우 익숙해진 답이 튀어나왔다. "히스파니에 씨라는 분인뎁쇼." 칼라이몬은 기묘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리다가 극장 안의 무희들을 내려다봤고, 그와 눈이 마주친 아마릴리가 참지 못하고 킬킬 웃어댔다. 곧 이어 무희들이 따라 웃기 시작하자 남자들은 당황한 기색이 되었다. "히스파니에 씨가 여기 사람이 아닙니까? 아니지, 분명 여긴데, 여기일 수밖에 없는데. 그럼 어떻게 된 거야? 설명 좀 해 주시죠?" "설명을 듣고 싶은 건 이쪽이오. 그 친구가 당신들을 찾아가서 도대체 뭐라고 한 거요?" "아, 그 사람을 알긴 아시는군요? 전 여기 직원인 줄로만 알았죠. 다만 날짜가 촉박하다고 다음날 아침부터 당장 공사를 시작해 달라고 다그쳐대서, 우리가 극장 내부를 보지도 않고 어떻게 공사에 들어가느냐고 했더니……." 남자는 칼라이몬에게 손에 들고 있던 종이들을 건넸다. "펜 한 자루 들어서 이런 걸 슥슥 그려 주더란 말이죠." 종이를 들여다본 칼라이몬은 저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았다. 분명 손 가는 대로 죽죽 그린 것 같긴 한데, 하나하나 살펴보면 그걸로 새로 건물을 지을 수도 있을 정도로 정확한 스케치였던 것이다. 정면과 양 측면에서 본 세 장의 입면도의 기둥이니 벽으로 감춰진 부분까지 빠짐없이 그린 평면도, 수리 후 모습을 그린 그림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대뜸 이런 걸 그려 주는데 직원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실 저희는, 그 사람이 자료도 없고 심지어 자 한 개도 없는 가운데 펜만 들고 이걸 그려내는데 완전히 기가 질려서 두 말도 않고 일하겠다고 응낙했습니다. 그 사람, 아주 괴물이예요. 저희는 도면도 안 그리고 바로 공사하기로 했다니까요." 상대가 대꾸 없이 종이만 보고 있자 남자들은 재차 물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직원이 맞습니까, 아닙니까? 이대로 일을 할까요, 말까요?" 칼라이몬은 혼란에 빠져서 머리를 굴렸지만, 결국 자기가 참견할 일이 아니란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난 그런 걸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고… 일정 같은 건 내가 알바가 아니오! 난 그저 돈 대는 극장주일 뿐이야!" 마지막 외침이 너무 솔직한 나머지 무희들이 웃음을 참느라 끅끅거렸다. 남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죠? 그럴 줄 알았다니까요. 그럼 저희는 작업 들어가겠습니다. 어이, 가서 다들 들어오라고 해!" 남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잠에서 완전히 깬 무희들은 자기들 짐을 챙겨 슬슬 극장에서 나왔다. 무대 앞가지 간 남자들이 다시 저들끼리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 저 그림들 좀 봐. 저거, 대단하잖아?" 아마릴리가 그들을 돌아보며 자랑스럽게 소리쳤다. "우리 히스파니에 씨가 그린 거예요! 그것도 하룻밤만에 다요!" 칼라이몬이 어이가 없어 그녀를 불렀다. "이거 봐. 언제부터 '우리 히스파니에 씨'가 된 거야? 그 친구를 언제부터 알았다고……." 다른 무희가 킬킬 웃으며 대꾸했다. "그이는 멋지니까 그렇게 불러도 돼요!" "에이, 질투나세요? 극장주님도 그렇게 불러드려요?" "우와, 우리 칼라이몬 선장님!" "이, 이것들 봐!" 창구에서 어른이 된 사내들이라면 누구나 두려워하는 칼라이몬이지만, 무리 지어 꺄르르 웃는 아가씨 앞에서 무게를 잡을 수 있는 남자는 세상에 거의 없는 법이었다. "다들 그렇게 당연한 것처럼 행동하지 말란 말이야! 극장을… 이런 식으로 운영하면 안 되는 거라고! 너희들은 말이야, 그러니까……." 아마릴리가 장난 반 섞어 부루퉁하게 입을 내밀었다. "제가 극장주예요? 왜 저한테 그러세요? 전 시키는 대로 한 죄밖에 없는데." "중요한 건, 그러니까 누가 시켰느냐는 게 중요한 거잖아!" 그러자 모두가 고래를 끄덕여댔다. "그럼요. 아주 중요한 문제이고 말고요." 2. 초대된 사람들 "당신이 초대한 건 사람들만이 아니야. 그들의 시기심도 같이 초대한 거지." 오후 무렵, 비 적은 남부의 하늘이 오랜만에 흡족하게 흐렸다. 그 날 칼라이소의 사람들은 부슬부슬 떨어지는 비를 머리에 들쓴 수건 하나로 막은 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배달부들을 여럿 볼 수 있었다. 비는 저물녘가지 내렸고, 그들의 모습이 사라진 것도 어스름이 길에 깔리고 여관이며 술집의 갓 씌운 램프가 하나 둘 밝아질 무렵이 되어서였다. 해변에 세워진 빌라에서 쉬고 있다가 인편으로 온 소포 하나를 받게 된 지오반 한트케는 다이아몬드 러쉬 극장에서 보냈다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흔들며 웃어댔다. "다이아몬드 러쉬? 어설픈 무희들이 우르르 나와서 엉덩이를 흔들어대는데 기묘하게 동작은 착착 맞던 데 아닌가? 난 어떻게 저렇게 일사분란하게 엉덩이를 흔들 수 있는지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이번에 가보면 최소한 그 의문은 풀 수 있겠군." 소포를 가져다 준 헤논은 조금 애매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얘긴, 일단 가 볼 생각은 있다는 건가?" "무슨 소리야! 내가 무희들이 엉덩이 흔드는 법을 알아서 뭘 하게? 이봐 헤논, 난 쉰 명이나 되는 무용수들을 가르쳤던 사람이야. 그런데 다이아몬드 러쉬에서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한 공연을 한 번이라도 한 일이 있나? 쇼걸의 선생 따위엔 관심 없어." "그렇지만……." 헤논이 말끝을 흐리더니 신 것을 먹은 사람처럼 한쪽 뺨과 눈을 실룩거렸다. 헤논은 지오반의 개인 비서였지만 또한 오랜 친구이기도 해서, 지오반은 헤논의 생각을 바로 눈치챘다. "그렇지만, 이라니? 이번엔 뭐 달라지기라도 했어? 윌 메이콕 같은 사람이 연출을 하기라도 한데?" "뭐, 메이콕이 연출을 맡을지는 모르지만, 초대는 된 것 같던데." 지오반은 잘생긴 이마를 찌푸려 보였다. "초대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연출을 하면 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메이콕이 관객도 아닌데 무슨 놈의 초대야?" 이제 적당한 때라고 생각한 헤논은 소포에서 꺼낸 편지를 건넸다. "그래, 초대야. 사실 자네도 초대된 거라고. 이 편지를 읽어 봐." 지오반은 편지를 읽기 전에 소포에서 나온 대본 뭉치에 먼저 눈길을 주었다. 표지에는 「일 드 모르비앙의 결혼식」이라고 씌여 있었다. 테라스에 나와 비 그친 정원을 내려다보며 차나 한 잔 마실까 하고 있던 리기 스트라우즈는 머리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심부름꾼으로부터 젖은 소포 하나를 받았다. 그는 김 오르는 찻잔을 느릿느릿 티 테이블에 내려놓고 소포를 뜯은 뒤, 내용물을 보기 전에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 다음 종이 뭉치를 꺼내 놓고 다시 한 모금 마시고, 표제를 읽은 뒤 또 한 모금 마셨다. 동봉된 편지를 펼치고, 다 읽을 때까지 그는 찻주전자에서 차를 둔 번이나 더 따라 마셨다. 스트라우즈가 그 자리에서 「일 드 모르비앙의 결혼식」초고 대본을 읽기 시작하자 그의 늙은 아내는 찻물 세 주전자 정도는 더 준비해둬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기우로 끝났다. 첫 두 페이지 이후로 리기 스트라우즈는 한 모금의 차도 더 마시지 않았던 것이다. 하얀 찻김이 서늘한 밤공기 속으로 맥없이 흩어지고, 이윽고 더 오르지 않게 되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대본을 덮은 스트라우즈는 식어버린 차를 훌쩍 비우고, 테라스로 나온 아내에게 손짓했다. 그녀가 다가오자 그는 말했다. "내일 점심때 윌의 집에 가기로 한 약속을 취소해줘요. 꼭 가보아야 할 테가 생겼다고 전해주고……." 아내는 빙그레 웃었다. "내 생각엔 내일 메이콕 씨를 만나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스트라우즈는 점잖게 되물었다. "그건 무슨 뜻이오?" "실은 메이콕 씨도 조금 전에 같은 전갈을 보내 오셨거든요." 불 꺼진 샹들리에가 천장 한가운데 박제된 고릴라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고릴라는 살아 있을 때처럼 느리게 그네를 타기 시작한다. 삐그덕… 삐그덕. "아침부터 자냐?" 천장 아래 웅크린 그림자는 사람이었다. 인기척에 하품을 하며 일어난 리체는 한바탕 기지개를 켜면서, 다가온 막시민을 흘끔 봤다. "내가 잠들었었나……." 그러면서 의자 아래로 발을 내리고 일어났다. 둘이 선 곳은 무대 위였다. 수리중이라 텅 빈 무대 한쪽에 인부들이 버리려고 꺼낸 테이블과 의자를 하나씩 놓고, 테이블 위에는 종이 수십 장을 쌓아놓은 채 선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막시민은 테이블의 종이들을 내려다보았다. "소포는 어제 다 보냈잖아?" "보냈지." "근데 뭘 쓰는 거야?" 종이를 한 장 집어들고 보니 글을 쓰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어제까지는 소포에 넣을 편지글을 쓰고 있었지만, 지금 끼적거리고 있던 것은 그림이었다. "이건… 옷 그림이네?" 잠이 다 깬 리체는 갑자기 손을 내밀어 종이를 빼앗았다. "아무 것도 아냐." 그러나 막시민은 테이블에 놓인 다른 종이를 집어들었고, 리체는 도로 빼앗으려 했고, 잠시 후 테이블 주위에 수십 장의 종이가 흩뿌려진 채로 둘은 목소리를 높였다. "보지 말라는데 왜 보는 거야!" "뻔히 보이는데 뭘 숨기겠다고 난리야?" "내가 뭘 숨겨?" "숨기는 게 아니면 왜 뺏는 거냐?" 리체는 테이블의 종이들을 구겨지든 말든 대충 모아 쥐고 바닥에 떨어진 것들도 주워서 옆구리에 꼈다. 막시민은 어께를 으쓱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것 있냐? 가서 네가 옷을 만들겠다고 말하라고." "내가 왜?" "너 잘하잖아?" "잘하긴 뭘 잘하니? 이 극장엔 엄연한 전속 디자이너가 있단 말야. 난 그냥 재봉사일 뿐이야. 바느질이나 하는 재봉사 말야, 디자이너가 아니고!" "왜 화를 내고 그래." 막시민은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리체가 미처 집지 못한 테이블 뒤쪽의 종이를 집어 올리며 말했다. "그럴듯하구만, 뭘." 종이에 그려진 것은 끝을 둥글린 깃 칼라로 시작된 앞트임이 가슴께까지 내려오고, 마름모꼴로 손등을 절반 덮는 소매 끝을 장미 문양의 보빈 레이스(bobbin lace)로 처리한 흰 재킷, 그리고 아직 그리다가 만 듯한 바지와 에나멜 구두로 이루어진, 꽤 정밀한 스케치였다. 물론 자세한 단어는 여백에 리체가 써놓았기 때문에 안 것일 뿐, 막시민이 본래 그런 것을 알 리 없었다. 얼굴은 그려져 있지 않았지만 후리후리한 키와 마른 몸매로 보아 조슈아가 입을 것을 생각해서 그려본 것이 틀림없었다. 막시민은 손가락을 세워 흔들흔들 돌렸다. "이런 복잡한 레이스 같은 건 누구 좋으라고 넣냐? 언제는 가면 쓸 빌어먹을 자식이 괴상한 옷만 만들게 시킨답시고 죽일 둥 살릴 둥 하더니." 리체는 종이를 빼앗으려 했지만 막시민이 팔을 높이 올리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대신 만들어 줄 것도 아니면서 무슨 상관이야?" "만들긴 만들 건가 보네? 그러니까 그 자식한테 이 옷을 입혀보고 싶긴 한 거잖아. 뭘 자꾸 아닌 척해?" "아니라니까! 버릴 거야!" 막시민은 돌려주는 대신 종이를 뒤집더니 고개를 젖혀 너저분하게 씌여진 글귀를 읽었다. "이건 뭐야. '금번과 같이 전후무후한 규모로 기획된 독창적이고도 화려한 공연의 스탭 오디션에 귀하와 같은 분께서 참석해 주신다면 크나큰 영광이…' 소포에 넣던 편지 내용이 이거냐? 왜 이렇게 복잡해?" "이상할 거 같으면 처음부터 내가 쓸 것이지 다 보낸 다음에 무슨 놈의 잔소리야? 난 그냥 단어만 바꾼 거니까 문장이 어떻든 알 바 아니라고." "단어만 바꾸다니?" "원본은 '금번과 같이 전후무후한 값진 재료를 쓴 독창적이고도 화려한 신작 드레스의 발표회에 귀하와 같은 분께서 참석해 주신다면 크나큰 영광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이런 거니까." 막시민은 나지막이 킬킬거렸다. "잘도 외운걸 보니 수십 번은 썼나보네. 그런데 '값진 재료를 쓴 황송한 만찬' 이라면 모르겠지만 드레스를 소개하는데 어쩌자고 값진 재료 따위가 맨 먼저 나오는 거냐?" "나도 몰라. 그렇게 써야 귀족들이 흥미를 갖는다고 했단 말이야." 리체가 말하느라 손을 내린 틈을 타서 막시민은 손끝으로 종이를 접더니 재빨리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리체가 발끈했다. "왜 네가 그걸 가져가?" "어차피 버릴 거라며? 내가 대신 버려 줄게." "돌려 줘!" 막시민은 뒷걸음질로 몇 걸음 물러나더니 붙잡으려는 리체를 잡도 피해 무대 맞은편까지 달아났다. 리체는 무대 중앙에서 우뚝 멈추더니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픽 웃었다. "너 말야, 소포에 동봉했던 편지 내용을 모르는 거 보니,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지?" "소포? 그건 조군 녀석이 쓴 대본 아니야?" "내용은 모르지?" "대본 내용?" 리체의 짓궂은 표정을 본 막시민은 안경을 올렸다. "그 자식이 뭘 썼는지 내가 알아서 뭐하냐? 난 배우도 아니고 스탭도 아니라고, 고상한 거 이해할 머리도 없고." "하지만 주인공이 누군지 들으면 꼭 내용을 알고 싶어질걸?" 막시민은 미심쩍은 표정이 되어 성큼 다가왔다. "주인공이 누군데?" 리체는 손을 내밀었다. "그 전에 돌려 줘." 막시민은 뒷주머니에서 넷으로 접힌 종이를 꺼내 건네주었다. 리체는 받자마자 재빨리 치마 앞 주머니에 구겨 넣더니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가문과 일곱 명의 어린 동생들을 위해 돈 많은 노처녀와 정략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은 백작 '막시밀라앵 드 모르비앙'의 이야기라나." 막시민은 처음에는 '그게 뭐?'하는 표정으로 리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맨 끝의 이름을 듣자마자 잠깐만에 목까지 빨갛게 달아올라서 소리쳤다. "잠깐!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야? 조슈아 자식이 진짜로 그런 얘기를 썼어?" 리체는 혀를 쏙 내밀었다. "이름 좀 비슷한 걸 갖고 뭘 그래? 내 생각에 소년 백작 막시밀리앵은 너보다 훨씬 우아하고 섬세한 인물일 것 같은데." "우아하고 섬세한 자식이 정략 결혼이나 하고 자빠졌냐!" "정략결혼이 어때서? 우아하고 섬세한 것하고 천 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막시민 리프크네만 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다고." 막시민은 리체가 놀리든 말든 휙 돌아서서 나가려다가 멈칫 도로 돌아보며 물었다. "조슈아 자식은 어딨어?" "글쎄, 오디션인가 뭔가 하는 것 준비 때문에 극장주 아줌마하고 얘기하러 갔을걸." "대본 남은 거 없어?" "대기실에, 근데 읽어보려고? 진작에 봤으면 모를까. 이제 와서 읽어 봐도……." 막시민은 대꾸 없이 발소리만 쿵쿵 내며 나가버렸다. 리체는 복수에 만족하여 키득거리다가 문득 생각난 듯 주머니에 넣었던 종이를 꺼내 보았다. 리체가 자신이 그렸던 옷 그림 대신 발견한 것은 이런 글귀였다. § 오늘의 추천 만찬 § 멸치 피자, 버섯 크림소스 파르팔레, 사과 푸딩, 파스티스 술 한 잔, 가격 4고블룬, 최고로 저렴한 가격과 드물게 훌륭한 음식. 고작 스물 여덞 살에 이미 회의적인 입 모양이 굳어져버린 사내 빈 올프랑쥬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극장 앞에 세워진 입간판을 내려다보았다. 며칠 동안 쇼가 없다는 안내 아래에 제일 싫어하는 글귀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지막이 으르렁거렸다. "식사는 식당에 가서 하란 말이다." 그 때 등 뒤에서 누가 어께를 툭 건드렸다. 뒤를 돌아보자 따가운 햇살을 배경으로 흰 수염을 기른 노신사가 모자챙을 슬쩍 올려 보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빈은 눈가를 찡그리며 물었다. "어디서 봤었죠?" "자네 올프랑쥬 군 아닌가?" "제 이름을 어떻게 아시죠?" 나오는 대로 대꾸하자마자 한낮의 더위와 극장의 식사 안내 따위로 흐려졌던 머릿속에 기억력이 번뜩 되살아났다. 노신사의 손에 바이올린 상자가 들려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앗, 리기 스트라우즈 선생님!" 리기 스트라우즈는 빙그레 웃었다. "다행히 기억하고 있구먼."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머리가 흐릿해져서." 스트라우즈는 약간 엄격한 눈으로 빈을 내려다보았다. 반백의 노신사지만 허리가 곧게 펴진 스트라우즈의 키는 빈보다 반 뼘 가량은 컸다. "그것 안된 일이로군. 자네는 보기 드물게 명민한 젊은이였는데, 술이 과하다는 이야기는 들었네만." 빈은 더운 날씨인데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우물거렸다. "예, 저, 그것을… 이제 좀 줄이려고 합니다만." "좋은 생각이군. 그럼 들어가세나." 스트라우즈가 앞장서 극장 입구에 발을 들여놓자 빈은 흠칫 놀라 그를 불렀다. "선생님! 어디 가십니까?" "극장에 간다네, 자네도 나와 같은 초대를 받은 것 아닌가?" "선생님이요? 아니, 어째서 선생님 같은 분께서 이런 2류 극장에……." 스트라우즈는 고개를 돌려 약간 미소를 보였다. "자네와 마찬가지라네. 나도 그 대본을 읽었거든." 스트라우즈의 모습이 통로 안쪽으로 사라졌다. 빈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조금 후 입맛을 쓰게 다셨다. "초대란 말이냐." 온후한 스트라우즈 선생은 그를 아직도 연극계의 인사로 생각해 주는 모양이지만, 그 말고 그렇게 여길 사람은 이제 거의 없었다. 서너 번 정도 연달아 흥행에 실패하면 극장이 흔들거리는 것쯤 보통인데, 빈이 망쳐놓은 공연이 이미 한 손 손가락을 넘어가는 마당이다. 이런 상황이니 그를 불러 제작을 논할 극장주가 한 명이라도 남아 있을리 만무했다. 그 증거로 누구인지 모를 초대자, 아니 다이아몬드 러쉬처럼 시시한 극장의 주인조차 그를 초대하지 않았고, 대본 또한 보내주지 않은 것이니까,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몰라도,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이제 칼라이소에서 저를 초대해 줄 사람은 없다고요, 선생님." 빈은 입구에서 몸을 돌려 하얗게 내리쬐는 볕 아래로 나갔다. 비가 온 이튿날 남부의 오전 날씨는 찌는 듯한 더위를 예고하는 듯했다. 흥행 사업이 번창한 하이아칸에서는 언제부턴가 하루 두 회의 공연을 하는 것이 관행이 되어 대부분의 극장들에서 자체적으로 서너 군데 가량의 연습실을 갖추게 되었다. 매일 공연이 진행되는 가운데 다음 공연을 연습할 공간을 확보하려면 그 수밖에 없어서다. 그러나 하이아칸처럼 극장이 돈 잘 버는 업종이 아닌 두르넨사에서는 아직도 하루 한 회의 공연이 흔했고, 그마저도 다음 공연이 준비되는 동안 며칠씩 쉬면서 용도를 식당으로 변경해서 운영하는 일조차 잦은 형편이었다. 다만 칼라이소는 항구도시이자 근처에 소도시들을 많이 갖추고 있는 까닭에 최근 하루 두 회의 공연을 하는 곳도 종종 생기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공연의 수준이 아직 낮아서 장기간 연습이 필요한 경우가 적었으므로 연습실이 제대로 갖춰진 극장은 많지 않았다. 다이아몬드 러쉬 극장에는 무용수들을 위한 대형 연습실이 하나, 배우들을 위한 연습실이 둘 있을 뿐으로, 그 중 하나는 헛간을 개조했다고 봐야 할 정도로 열악했다. 나머지 하나는 가벼운 리허설을 진행할 수 있을 정도로 넓었는데 그나마 얼마 동안은 자재 창고 정도로 쓰였던 모양이었다. 그것을 어제 내내 일꾼들을 불러다가 들어내고 치우고, 의자나 테이블을 놓고 해서 겨우 사람들이 모일만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물론 무도회장을 쓰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 곳은 최근 공연 홀을 수리하는 동안 식당으로 용도가 변경된 상태여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연습실의 입구는 오른쪽 벽을 따라 앞뒤로 두 군데였다. 뒤쪽의 문은 밖에서 들어오는 통로고, 앞쪽 문은 다른 작은 연습실과 이어져 있었다. 정면 벽 오른쪽에는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었으므로 왼쪽 벽을 따라 극장주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앉을 자리가 네 개 마련되었다. 다음으로 중앙에 커다란 반원형 테이블 두 개를 나란히 놓았소, 그 뒤의 의자들을 다섯 개씩 둘러놓았다. 그리고 다시 그 뒤로 열 두 개의 의자들이 좌우로 나뉘어 놓였다. 어느 자리를 택하든 일단 앉으면 자연스레 정면의 한 곳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간단한 공연이 가능할 정도로 널찍하게 치워진 그곳에는 테이블도, 다른 무엇도 없이 의자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 모든 배치는 오직 한 사람의 의견에 따라 이루어졌다. 칼라이소에서 어제 인편으로 보낸 초청장과 대본을 받았을 사람들은 정확히 스물 두 명이다. 칼라이몬과 또 한 명의 극장주 루시 에테른은 그들 중 절반도, 실은 3분의 1도 오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으나 결국 초청한 사람의 수에 맞춰서 의자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의견을 무시할 수 없는 '한 사람'이 너무나 확신에 차 있었던 것이다. 시작하기로 한 시간은 11시. 그러나 10시 50분이 되기까지 그곳에는 한 사람의 방문자도 들어오지 않았다. 관계자 자리에 앉은 네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부위기가 가라앉아 있지는 않았다. 극장주 석에 앉은 에테른이 조금 전부터 줄곧 큰 소리로 웃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뭐가 그렇게 우습소?" 칼라이몬은 약간 볼멘소리를 냈다. "하, 하하하, 정말, 당신은 우습지 않단 말이에요? 난, 정말로, 웃겨 죽겠는데요? 하하, 하하하……." "웃기다기보다는 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니오?" 에테른은 겨우 웃음을 누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생각해 봐요. 그러니까 그 친구가 홀 공사를 하라고 사람을 부른 시점은 지난번 밤 나한테 '전권을 달라'고 말하기 전이란 말이에요, 기가 막힌 일이잖아요? 세상에 자기 극장도 아닌데, 돈도 없으면서, 그렇다고 허락도 안 받고, 자기 멋대로 사람을 불러서 극장을 뜯어고치라고, 설계도까지 떡하니 그려주고, 그런 다음에 뻔뻔스럽게 날 만나서 '전권을 달라'고 요구하고!" 그런 말을 하면서도 에테른은 이상할 정도로 유쾌한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말예요, 그 친구는 날 만났을 때 내가 뭐라고 대꾸할지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것 아니겠어요? 다시 말해 날 설득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만난 거죠. 이미 일은 저질러 놓고, 만약 설득 못하면 어떻게 될지 걱정도 되지 않았을까?" "예측되니까 즐거워요? 화가 나는 게 아니고?" 에테른은 고개를 흔들었다. "즐겁지도 화가 나지도 않고 그냥 우스워 죽겠어요. 진짜 생각할수록 깜찍하네, 어쩌면 그렇게 자신만만할까요? 나이도 어린 친구가, 공연 내용에 대한 건 설명할 것도 없고 사람을 다루는 문제도, 돈을 버는 문제도, 도무지 겁내는 게 없잖아요? 자기가 마음먹으면 당연히 그렇게 괸단 것처럼 거침없이 행동하는 것 좀 봐요. 그것 참, 이런 걸 보고 뭐라고 해야 할까?" "그런 걸 보고 안하무인이라고 하지 않소?" 칼라이몬의 대꾸에 에테른은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하하하, 맞아요, 맞는 말이에요. 안하무인이라, 그러고 보니 정말 어디서 뭘 하다가 왔을까? 어느 귀족의 하인이라고 하잖았어요. 당신이? 아무래도 거짓말 같은데." 에테른은 반 농담조로 말한 것이었지만 실은 저도 모르게 핵심을 찌른 셈이었다. 칼라이몬 선장은 어께를 으쓱하며 입맛을 쩝쩝 다셨다. 처음에 에테른을 끌어들인 사람은 자신이고, 만약 그녀가 지금 기분 나빠하고 있었더라면 그는 훨씬 더 곤란해졌을 것이다. 저렇듯 웃기하도 하니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 될 처지가 아닌가, 자신과 독같이 절반의 지분을 갖고 있는 에테른이 동의해주지 않았더라면 애당초 시작할 수도 없는 기획이었으니까. 칼라이몬이 대꾸하지 않자, 에테른은 어께를 으슥하더니 오히려 반문했다. "불안한가요?" "아?" "사람이 오지 않을까봐 불안하냐고요." "아냐, 그렇다기보다는……." 칼라이몬은 말을 얼버무리려 했지만 에테른은 이미 그가 할 말을 다 들은 사람처럼 턱을 가볍게 올리며 결론을 내렸다. "몇 명이 오든, 심지어 단 한 명이 오더라도 그 사람이 같이 일해볼 만한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잖아요?" 칼라이몬은 아직 에테른이 무슨 생각으로 이 기획에 투자하기로 결심했는지 정확히 몰랐다. 그녀가 문제의 히스파니에를 따로 만난 것은 알고 있었지만, 배우 한 사람이 아무리 마음에 들었다 해도 그것만으로 투자를 결정한다는 것은 평소 에테른의 행동방식과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그녀는 심지어 대본은 물론 곡이나 스탭, 배우 선정까지 총괄하도록 허락해 주었고, 지금처럼 스탭을 오디션으로 뽑겠다는 희한한 의견조차도 수용하겠다고 한 것이다. 조금 전 에테른이 한 말은 '괜찮은 스탭이라면 그 대본을 일고서 초대에 응하지 않을 리가 없다'는 의미가 틀림없었다. 물론 칼라이몬도 대본을 읽어보았지만, 예술 방면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그인지라 재미있다고 생각했을 뿐,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아볼 눈은 없었다. 대본 한 뭉치, 노래를 잘 하는 배우 한 명, 그 이외에 이 기획이 갖는 장점이 무엇일까? 물론 그는 물어본 일이 있었다, 그러자 에테른은 싱긋 웃으며 말해 주었다. "사실 히스파니에가 이 공연을 성공시킬 수 밖에 없는 계획을 말해 주었거든요. 성공도 실패도 마지막 한 발작은 결국 운의 영역, 그러니 그만한 계획이면 실패도 겁나지 않는 거죠. 아무래도 난 성공할 것 같아요. 훗훗." 그녀가 너무나 자신에 차 있었기에 칼라이몬은 차마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턱만 긁어댔다. "누군가 오는 것 같은데." 에테른은 귀를 기울이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복도 너머로부터 점차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가 칼라이몬의 귀에도 들렸다. 이윽고 입구에서 슥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칼라이몬은 크게 놀랐다. 저 사람은 칼라이소에서 가장 존경받는 음악가인 리기 스트라우즈 씨가 아닌가! 스트라우즈는 에테른의 인사를 받으며 곁에 선 칼라이몬의 얼굴을 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선생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이다." "옛?" 비록 이 일대에서 자신이 유명하긴 했지만 워낙 뜻밖의 사람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으니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자 스트라우즈는 다시 미소지었다. "'칼라이소의 칼라이몬'이 '수도의 칼잡이'를 무릎 꿇렸다고 했을 때는 나도 기분이 꽤 괜찮았다오." 아무렇지도 않게 10여 년쯤 전의 일화를 말한 노 음악가는 돌아서서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칼라이몬은 당황한 표정을 바로잡을 사이도 없었다. 곧이어 문간에서 지오반 한트케가 머리를 내밀었던 것이다. "다들 늦는구만?" 빈 좌석들을 보며 한 마디 던진 그는 이웃집에 카드놀이나 하러 온 사내처럼 슬슬 걸어오더니 스트라우즈 선생에게 인사를 하고 맨 뒷자리에 가 앉았다. 형통이 두르넨사 쪽이긴 하지만, 예술이 크게 발달한 루그란 왕국에서 태어나 자란 지오반 한트케는 그곳에서 무용수 중심의 특이한 극단을 조직해서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고 알고 있었다. 루그란 국왕 탄신일에 '은총의 광장'에서 2백 명 규모의 공연을 펼친 일도 있는, 군무 연출의 달인이라고 불리는 사내다. 두르넨사로 돌아온 까닭은 불분명했지만, 소문이 돌기로는 거칠 것 없는 그의 성품이 어느 고관의 미움을 샀다는 모양이었다. 돌아온 후 한동안은 몇 군데 극장의 일에 관여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곳의 수준에 실망하여 손을 놓고 한가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칼라이소 사람들은 루그란의 고상한 예술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현실과 밀착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잠깐 사이를 두는 가 했더니, 이번에는 귀부인처럼 차린 마흔 중반의 우아한 여자가 소녀 둘을 데리고 등장하여 에테른에게 인사를 건넸다. :수이 데 몰트 부인! 와 주셨군요." 귀부인은 곧은 쇄골이 드러난 어께를 올리며 키득 웃었다. "사실 올 생각까진 없었는데 그 대본이 좀 재미있어야 말이죠. 하지만 나 바쁜 것 알죠? 짧게 끝내줘요. 그래도 그 대본 쓴 사람 얼굴은 좀 보고 갈테야." 그녀는 데려온 제자 두 명 때문에 뒤쪽의 자리에 가 앉았다. 7, 8년 전가지만 해도 이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여배우였던 그녀는, 죽은 남편 몰트 백작의 성에서 여왕처럼 군림하며 살면서 소일거리로 배우 지망생들을 데려다 가르치고 있었다. 곧이어 짤막한 재킷 차림에 무릎가지 오는 펠트 치마를 입은 조그마한 여자가 들어서려다가 문간에서 멈춰선 채 놀란 듯 외쳤다. "어머, 수이가 왔잖아?" "셀마! 네가 칼라이소에 돌아와 있는 줄은 전혀 몰랐어!" "네가 성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그렇지! 수이, 아니 이젠 볼트 백작부인이라고 해야 되나?" "에이, 옛날 친구를 웃길 생각이야? 백작부인 같은 건 어린 몰트 백작의 새침데기 약혼녀나 가져가라고 해. 단, 나한테 성은 남겨 주고 말이야. 자아, 얼른 내 옆으로 와요. 귀여운 레이슬링크 양." 어느새 꼬리를 물고 들어와 좌석을 채우기 시작한 사람들은 서로를 보고 반가워하기도 했지만 실은 당황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그들 모두는 자신 외에 그 누가 이곳에 오겠는가, 하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들 중 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이 아닌 다른 자리였다면 주빈(主賓) 대접을 받았을 유명인사 인지라, 사람이 많아질수록 놀라는 소리는 더욱 커졌다. 그렇듯 흥분된 분위기는 정확히 11시에 맞추어 윌 메이콕이 나타났을 때 최고조에 달했다. 그는 늘 그렇듯 정확한 동작으로 모자를 벗어 사람들에게 인사를 보내더니 놀란 눈동자들이 뒤통수에 박힌 것은 아랑곳 않고 스트라우즈에게 다가서며 싱긋 웃었다. "이만하면 우리 서로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니지요, 안 그렇습니까?" 동행자를 데려온 사람이 많아서 나중에는 의자를 몇 개 더 가져와야 할 지경이었다. 드디어 문이 닫히고, 에테른이 일어나 사람들 앞으로 걸어나왔다. "먼저 이렇듯 귀한 시간을 내어 참석해 주신 것에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사실, 저는 오늘 행사가 성공할 것인지, 또는 한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인지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보다 더한 확신으로 이곳까지 와 주신 여러분을 보며 지금 저 자신의 소심함에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통상적 인사말과는 달랐지만 에테른이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 알아보았다. 그녀의 눈은 빛났고, 뺨은 약간 상기되어 있어서 마흔이 넘은 그녀를 언뜻 소녀처럼 보이게 했다. 오래 전 아버지 뒤를 따라다니던 열 일곱 살짜리 소녀 말이다. 그녀의 그런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칼라이소나 수도는 물론 이웃 나라에까지 명성이 알려진 여러분이 이렇듯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은 어쩌면 처음 있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비록 초대한 모든 분이 오시지는 않았지만, 이렇듯 특별한 행사가 성사된 것은 오직 한 사람이 쓴 대본의 힘이었습니다. 그 사람을 소개하기에 앞서 저는 오늘의 행사가 약간은 이례적인 형태로 진행될 지도 모른다는 점을 먼저 말씀드리고 양해를 구할까 합니다. 아시다시피 노을의 행사는 '스탭 오디션' 입니다. 아마 기존에 존재하지도 않던 말이고, 저희가 새로 만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배우를 뽑는 오디션이 아니고, 그렇다고 후원자를 모집하기 위한 오디션도 아닙니다. 「일 드 모르비앙의 결혼식」을 위해 현재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오직 대본 한 뭉치뿐이고, 단 한 명의 스탭도 결정되어 있지 않은 것이지요. 이제부터 여러분들이 그 스탭이 되어 주실지, 또는 그냥 돌아가실지를 결정하는 오디션을 시작하겠습니다. 그 결정을 하는 것은 제가 전권을 일임한 한 사람입니다." 에테른은 사람들 뒤로 시선을 한번 보내고는 이어 말했다. "그러면, 소개합니다." 기척은 뒤쪽에서 들렸다. 뒷문으로 들어와서, 사람들 사이로 일부러 내놓은 통로를 통과해서,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정면에 놓여 시선을 모으던 그의 의자로 걸어갔다. 이윽고 도착하여, 돌아서서 간단히 고개를 죽이자마자 말했다. "조 히스파니에입니다." 사람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바로 이어 말했다. "「일 드 모르비앙의 결혼식」의 공연을 구상했고, 극장을 빌렸고, 대본을 썼고, 그리고 주연 배우를 맡게 될 사람입니다." 3. 오디션 "당신들 중에서 나와 함께 갈 사람을 뽑을 생각입니다. 조건은, 건강하고, 성격 좋고, 항해기술이 있고, 그리고 돈이 없는 사람들이 되겠습니다. 돈이 왜 없어야 되느냐? 돈 있던 사람은 돈 없는 상태를 못 견디지만, 본래 없던 사람들은 계속 없어도 꽤 오래 버티기 마련이거든요. 아니, 급료도 안 줄 생각이냐고요? 당연하죠! 저도 여러분과 똑같은 무일푼이랍니다. 하하하!" 서른 명 가량의 사람들이 모두 한 곳을 바라보고, 그곳에는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후리후리한 소년이 왼쪽 다리를 의자 발걸이에 걸치고, 팔꿈치는 무릎에 기대고, 그 손으로 턱을 괴고, 태연하다 못해 불손하게까지 보이는 얼굴로 앉아 있다. 아주 잠간이지만 눈을 돌리는 사람도, 웃는 사람도, 반론을 말하는 사람도 없는 그곳은 일인극을 공연하는 작은 극장으로 변하고, 배우는 모두의 의식을 한 손에 틀어쥐고, 그 순간을 정지시켰다. 1분이 채 안 되는 시간이 흐르고, 그가 소리 없이 파안(破顔)하는 것과 동시에 마법도 풀렸다. 한 구석에서 기침 소리가 나오고,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각기 다른 얼굴이 되어 서로를 마주보거나 당황한 듯 웃기 시작했다. "지금 한 말 들었소?" "저 젊은이가 스스로 제작에, 대본에, 연출에, 거기에 주연까지 맡겠다는 이야기로 들렸는데,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니겠지?" 그러나 몇 사람은 여전히 조슈아가 웃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인 수이 데 몰트 부인은 조금 전 자기가 숨을 멈추고 있지 않았나 돌이켜 생각하고 있었다. 수이 아네티, 수이 데 몰트는 늙은 몰트 백작과 결혼하기 전까지 두르넨사에서 배역 명단에 두 번째로 이름을 써본 일이 없을 정도로 절대적 인기를 누리던 여배우였다. 아름다운 얼굴과, 비난은커녕 오히려 인기를 끌었던 프리마돈나연(演)하는 괴팍한 성미의 영향도 있었으나, 무엇보다도 그녀가 연기와 노래에 출중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수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렸던 그녀였기에 오히려 잘 알았다. 어떤 방법으로든 사람을 휘어잡는다는 것이 비록 순간이더라도 얼마나 어려우며, 그것을 할 수 있는 배우의 힘이 얼마나 갈력한 것인가를. 사람들이 무어라 떠들든 개의치 않고 조슈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본으로 보셨을 「일 드 모르비양의 결혼식」은 사정상 보름 안에 완성해서 무대에 올려야만 합니다. 배우와 무용수, 연주자들은 연습할 시간이 필요하므로 배역을 결정하고, 대본, 작사, 작곡, 암무를 완성하는 기간은 사흘 정도가 적당하다고 봅니다. 무대와 의상은 연습기간 동안 제작하는 것이 가능하겠죠. 아, 물론 무대와 의상을 위한 컨셉도 앞서 사흘 안에 결정해야 하고요." 조슈아는 잠시 말을 그치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대뜸 반론이 튀어나오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너무 기가 막혀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오늘의 오디션은 사흘 안에 극의 기본 틀을, 즉 사전작업을 완료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뽑는 것이 목적이고, 그렇기에 여러분들을 청한 것입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을 제가 다 할 수 있지만,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최고의 전문가들을 청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제안한 일이 가능한 분들은 이제부터 제게 질문을 해 주십시오. 공연 전반에 대한 어떤 질문에도 성실히 답해 드리겠습니다. 그런 후에 일을 할지 안 할지 결정하시면 될 겁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세 사람 가량이 벌떡 일어나 인사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조슈아도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이미 나가버린 그들을 향해 궁정식으로 허리를 굽히며 절을 했다. "관심 없는 일에 초대하여 시간을 낭비하시게 만든 점 사과드립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그리고 바로 상체를 세우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귀족들 밑에서 오랫동안 일한 몇몇 사람들은 조슈아의 자세가 귀족 출신 젊은이들처럼 자연스럽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들은 사람들이 나가지 않은 까닭은 서로 눈치를 봤기 때문이었다. 리기 스트라우즈나 윌 메이콕 같은 사람들이 그대로 있는데 대뜸 나가는 것이 (그들에게) 실례가 될 것 같기도 했고, 또 자신만 나간다면 나가지 않고 남은 사람들보다 능력이 떨어진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 상대방의 얼굴을 살피고 있으며 이 자이에서 말도 안 된다고 웃어젖혀야 될지, 화를 내야 할지,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야 할지, 태도를 저울질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 때 조슈아가 불숙 말했다. "손 드신 분, 질문하시지요." 맨 뒤에서 다리를 꼬고 삐딱하게 앉아 있던 지오반 한트케는 손을 내리며 허리를 쭉 폈다. 트집 잡을 거리를 찾는 사람처럼 한 번 올려 떴다가 내린 눈이 조슈아와 마주쳤다. "아, 히스파니에 씨, 묻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일단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게 있는데… 당신의 대본은 어쨌든 훌륭했습니다만……." 갑자기 그는 손을 들어 박수를 몇 번 쳤다. 사람들이 어리둥절해하는 것도 아랑곳 않고 팔짱을 낀 그는 말을 이었다. "정말로 그 외에 배우로서의 자질, 연출가로서의 자질 같은 것도 다 갖추고 있다고 믿어도 되는 겁니까?" "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온 대답이었기에 몇 군데에서 다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오반은 입꼬리만 약간 움직이며 말했다. "일단 그 대답이 농담이 아니라고 믿어볼까나, 어쨌든 한 가지 능력은 확인한 처지이고, 그럼 당신이라면, 그러니까 만약에 당신이 여러 명이어서 각각의 일들을 따로따로 맡을 수 있다면, 작곡이나 작사를 사흘만에 하거나, 안무를 사흘 안에 완성하거나 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 말씀입니까?" "아뇨." 사람들은 이제 와서 무슨 소릴 하려는 건가 싶어 인상을 찌푸리며 조슈아 쪽을 돌아보는 순간 대답이 이어졌다. "사흘이나 걸릴 리가." 이번에야말로 사람들은 크게, 그리고 꽤 웅성거렸다.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너무 자신만만한 대답이었기에 오히려 의혹을 느끼고 동요된 사람이 더 많았다. "작사라면 혹시 몰라도… 한 공연에 필요한 곡이 몇 갠데 작곡을 사흘만에 한다는 거야?" "가른 건 모르겠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지, 작곡이니 작사니 다 완성되어 대기하고 있다고 해도 극 연출은 사흘 안에 끝낸다는 것은 불가능해." "작사도 절대 사흘 안에 될 수 없습니다. 해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일이요. 사흘의 세 배라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모두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는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떠들다가 서로의 의견을 알게 되자 불쾌한 목소리들이 튀어나왔다. "뭘 알고 얘길 해야지…, 저 친구는 우리가 하는 일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에테른 씨, 도대체 이런 어린애 장난 같은 일에 왜 바쁜 사람을 불러낸 거요? 지금 이 상황 책임져야 된다는 거 알고 있소?" "혹시 이 모임 자체가 일종의 공연 아니오? 그렇다면 이런 분들을 오시게 한, 다시 말해 캐스팅한 능력을 높이 사서 한바탕 웃어주고 그만 집에 가겠소만." 조슈아는 사람들의 말을 다 듣고 있었지만 세 손가락으로 턴을 매만지며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 때 지오반이 그가 있던 뒷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히스파니에 씨." 지오반이 이름을 다시 말했을 때 몰트 부인은 그 이름을 어디에선가 들어본 듯 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사람을 덮어놓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신감도 좋지만, 그걸 표현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잇는 법입니다." "충고는 고맙습니다만." 이번에는 조슈아도 일어섰다. "저도 이유 없이 그런 일을 하지는 않습니다. 자, 다들 터무니없다는 눈빛으로 저를 보고 계시면 뭘 합니까? 제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까? 하지만 그걸 증명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전문가 아닙니까? 자기 전문 분야의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시험할 방법쯤도 없다 해서야 어디 전문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조슈아는 사람들의 대응을 기다리지 않았다. 바로 걸어나오더니 맨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이 대본을 든 것을 보고 말했다. "아무 데나 펼쳐 보시죠. 몇 페이지죠? 13페이지? 막시밀리앵이 콩스탕스 드 방드빌 백작부인의 청혼 소식을 듣는 부분이겠군요. 페이지 첫 부분 막시밀리앵의 대사가 이럴 겁니다. '그 부인이 마흔 두 살이지만 나비처럼 날씬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황금 날개를 갖고 있다면 좋겠군, 그걸 팔아야 할 일이 아주 많으니 말이야'." 조슈아는 대본을 곁눈질조차 하지 않았지만 당연히 내용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의혹 섞인 눈길을 보내는 가운데 그는 한 걸음 물러나며 즉석에서 노래를 불렀다. 방드빌에서 가장 아름다운 금빛 날개를 지닌 나비와 같은 부인 당신의 날개가 황금이니 그걸 팔아 막내의 대례복을 사줘야지 날개에서 떨어진 황금 가루 그걸 모아 외성벽과 해자를 수리해야지. 남은 건 또 뭐가 있나? 날개가 새로 돋을 가능성이 없다고? 이제 날개가 없는 백작부인, 안녕히 가시고 다음 분 대기해주세요 고음부도 없는 단순한 곡이었는데도, 조슈아가 노래를 그치자 수초 동안 기침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하려던 말조차 다 잊은 듯한 얼굴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한 사람이 가까스로 입을 뗐다. "저… 미리 곡들을 만들어뒀다면 그렇게 말할 것이지 왜 사흘이 어쩌고 저쩌고 했소? 우릴 놀리는 거요?" 조슈아는 짜증 섞인 눈빛을 보냈다. "지금 만들었어요." 그러자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말하기 시작했다. "거짓말하지 마시오. 가사 정도는 미리 써두었겠지."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곡도 즉석에서 만든 것 같지 않아." "무슨 소리, 연습하지 않고 저런 노래가 나올 것 같아?" "그것도 하루 이틀 연습한 실력이 아니잖아!" 논쟁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조슈아는 이마를 짚었고, 몇 사람은 방금 들은 노래를 되뇌여보는 등 사방이 부산해졌다. 반신반의하는 사람들 사이로 갑자기 악기 소리가 들렸다. "응?" 그것은 바이올린 소리였다. 다시 한 번 짧은 음 몇 가지를 연주하더니 조슈아를 향해 빙그레 미소지어 보인 사람은 늙은 작곡가 리기 스트라우즈였다. "즉흥곡을 만든다는 일이 꼭 불가능한 건 아니야." 그러더니 스트라우즈는 앉은 채로 지그(jig)와 비슷한 곡을 한 악절 연주해 보였다. 늙은 음악가의 손놀림은 흐트러짐이 없었고, 떠들던 사람들도 일제히 말을 그쳤다. 활에서 손을 뗀 스트라우즈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즉석에서 작사하는 것은 내게 힘든 일이겠지, 하지만 그걸 할 수 있는 사람도 이 중에 있지 않나?" 스트라우즈는 곁에 있던 셀마 레이슬링크를 흘끗 보더니 이어 몰트 부인을 바라봤다. "부인, 이 늙은이는 십여 년 전 당신이 대기실 소파에 누은 채 숨 한 번 고르지 않고 그 공연의 가장 어려운 곡을 소화해내던 모습을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수이 데 몰트는 얼굴을 붉혔다. 칭찬 받아서가 아니라 부끄러운 기억이 났던 탓이었다. 당시 음악 감독이었던 스트라우즈에게 클라이맥스의 곡을 자기에게 달라고 고집 부려서 실력을 과시하느라 불렀던 노래였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이 모두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고, 다만 그걸 한 사람이 가졌다는 것뿐이라오. 힘든 일이지만 누구도 불가능한 일이라 확언할 수 없으니." 그 때 윌 메이콕이 고개를 흔들며 나섰다. "대본 작업도, 작곡도, 작사도, 노래도, 연출도, 안무도,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조차 한두 가지 이상 갖기 힘든 능력입니다. 나는 저 소년이 우리를 놀린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리기 스트라우즈가 옹호하고 나서는 바람에 주춤했던 사람들은, 스트라우즈보다 오히려 권위가 높으면 높았지 낮지 않은 메이콕의 말을 듣자 다시 의심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메이콕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젊은 히스파니에 씨, 당신이 이곳에 모인 훌륭한 분들과 함께 일하려면 스스로 한 말을 증명하거나, 아니면 겸손하게 철회하고 사과하거나 둘 중의 하나는 해야 할 것이오. 한트케 씨도 말했지만 잊었을지 몰라 다시 한 번 말하겠는데, 여러 해에 걸쳐 갈고 닦은 많은 분들의 전문 분야를 대수롭지 않게 해낼 수 있다고 말한 것은, 크흠, 분명히 젊은 사람으로서 무례한 일이었소." 조슈아는 그의 지적에 곤란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답했다. "좋은 말씀이시네요. 자, 어떻게 증명할까요? 이렇게?" 조슈아는 갑자기 몸을 돌려 자신이 등지고 서 있던 벽으로 다가갔다. 벽은 흑갈색 판자를 이어 붙인 것이었는데, 조슈아는 주머니에서 석필 하나를 꺼내들어 대뜸 가로금을 죽 그었다. "자, 잠깐, 뭘 하려는 거죠?" 극장주 에테른(그녀는 건물주이기도 했으므로)의 질문을 무시하고, 조슈아는 죽죽 손을 움직여 오선을 그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음표들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 사람들이 말문이 막혀 있는 동안, 다음 오선이 그려지고, 또다시 음표와 기호가 채워졌다. 그런 식으로 조슈아는 쉬지도 않고 단숨에 두 악절의 악보를 그려 벽 전체를 메워 놓더니 돌아섰다. "그럼 가사를 붙여 보죠." 다른 사람들이 뭔가 보고 베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속도로 만들어 놓은 악보는 보고 있던 사람들을 숫제 칠판 아래에 앉은 학생으로 만들어 버렸다. 완전한 압도였다. 조슈아는 메이콕을 바라보더니 비교적 정중하게 말했다. "대본을 갖고 계시다면 그 중에 아무 페이지나 골라서 말씀해 주시지요." 메이콕은 웃을까 말까 하는 표정으로 대본 갈피를 뒤적이다가 말했다. "19페이지." 내 방 침대 아래에는 일곱 살 때 선물 받은 낡은 인형이 있는데 그 앤 늘 말했어 어서 와, 나의 하녀. 껴안아 줘, 놀아 줘 예쁜 건 다 내 거야 넌 못생겼잖아 난 그 인형이 좋았어 나와는 달랐으니까 눈도 진짜 파랗거든 나는 늘 대답했어 알았어요, 나의 공주. 금팔찌도 조개 빗도 공주가 다 가져요 난 못생겼으니 사람이 변하는 건 슬픈 거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지 인형이 필요 없는 소녀가 된단 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세상에 변치 않는 진리가 있다면 소녀가 어른이 된다는 거지 소녀를 괴롭히던 공주 인형은 이제 침대 아래 영영 잠자네 내 방 침대 아래에는 열 두 살 때 쳐박아둔 낡은 인형이 있는데 내 말이 들릴까 몰라 잘 있어, 공주 인형 네 미소도 파란 눈도 이젠 보고 싶지 않아 나오지 말아 줘 울지 않는 유리 눈동자를 가진 공주 한 번도 진심으로 웃지 않은 공주 침대 밑 먼지 속에 누워 아직도 똑같은 얼굴로 웃고 있을 공주 잘 있어, 헝겊 인형 작아져버린 침대와 너 난 거지 머물지 않아 난 자라날거야 방금 벽에 그린 두 개의 악절이 어김없이 주제부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사람들이 더 경악한 것은 조슈아의 목소리였다. 압도적인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건 남자 테너가 낼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몇 사람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이봐… 이건 카스트로나 낼 수 있는 목소리 아닌가?" 평소의 목소리도 미성이긴 했지만, 분명히 남자인데 이렇게 가볍게 여성 음역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믿기가 힘들었다. 다들 서둘러 19페이지를 펼쳐보니 조슈아가 방금 부른 곡은 주인공 막시밀리앵이 아니라 여주인공 마리 드 트루아의 노래였다. 더구나 노래로 바꾼 대사는 단 한 마디였다. '내가 아직도 인형이나 질투하는 어린애로 보여요?' 몰트 부인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물었다. "저, 이런 질문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아무래도 목소리가……." 조슈아가 싱긋 웃었다. "여자가 아니냐고 물으시는 거냐면, 유감스러운데요. 화낼 지도 모릅니다." "아니, 하지만… 그게 가능해? 남자가 여자의 음역을 낸다는 게?" "세상에는 별 사람이 다 있으니까요." 간단히 대꾸한 조슈아는 오랜만에 의자로 돌아왔다. 앉더니, 깍지낀 두 손으로 턱을 괴는 시늉을 하며 사람들을 둘러봤다. "안무나 연출은 이 자리에서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제 공연에 참가하실 분들께만 개인적으로 보여드릴까 합니다. 이해하시리라 믿고 그럼, 질문 받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질문이 나올 만한 분위기도 된 것 같군요. 짧게짧게 갈까요?" 뒤쪽에서 한 사람이 말했다. "일정 말인데, 지나치게 촉박한 것은 사실 아니오?" "아, 네.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해서 잡은 일정이고, 그러니 될 겁니다." 무례하든 어떻든 대단한 자신감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다른 사람이 물었다. "예산을 아끼려고 일정을 짧게 잡은 것 아닌지?" 조슈아는 장난스럽게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스탭에게 줄 돈이 아까워서냐고요? 죄송합니다만, 저는 돈이 좀 많습니다." 대답이 적나라해서인지 사람들이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조슈아는 씩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제가 돈이 없었다면 이처럼 대뜸 극장을 빌리고, 자신만만하게 여러분을 초청했을까요? 근방에서 최고의 개런티를 자랑하는 여러분을? 만약 제가 돈이 부족했다면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저 혼자서 전부 다 만드는 쪽을 택했겠죠.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전 그걸 다 할 수 있으니까요." 다른 사람이 말했다. "그래도 지나치게 짧은데, 솔직히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고." "그래요? 그럼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공연 개막일에 관객으로 와서 확인하세요." 몰트 부인이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조슈아는 마주 미소를 보냈다. "도대체 그렇게 급하게 완성하려는 까닭이 뭐요?" "글쎄요, 저도 설명해드리고 싶지만 현재로서는 대외비(對外秘)가 되겠습니다. 그냥 공연 개막일은 제작자가 정하기 마련이라고 속 편하게 생각하세요." 자기가 대꾸하고도 스스로 어이없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숙이며 픽 웃어버렸다. 장난기가 지나친 감도 있었지만, 이미 상대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느끼게 된 까닭인지, 불쾌감보다는 신기하게 보는 사람이 많았다. "언제부터 제작에 들어갑니까?" "일단 신청하신 분을 중심으로 오늘 내로 스탭을 정하고, 밤에 회의를 거쳐서 방향을 경정하고, 내일 아침부터 바로 갑니다." "배우는?" "스탭들과 함께 내일부터 뽑게 되겠죠. 좋은 배우가 있으면 추천해 주세요. 제가 맡을 막시밀리앵 역을 빼면 모두 미정이니까요."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그래서 신청은 오늘 받는 겁니까?"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들자, 맨 뒤에서 조금 전처럼 한가롭게 손을 든 사람이 눈에 띄였다. 지오반이었다. 사람들이 당황하여 눈알만 굴리는 가운데 조슈아가 물었다. "할 마음이 있으신 건가요?" "그럴까 합니다만." 자기들끼리 쑥덕이던 사람들이 일제히 돌아보았고, 그들 모두와 눈이 마주친 지오반은 겸양하듯 두 손을 내저어 보였다. "뭐 이렇게까지 관심을 가져주실 건 없는데, 눈빛만 봐도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 다 알겠습니다만, 여러분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이번엔 저도 한 몫 끼어볼까 합니다. 마음 정했거든요." 말을 맺자 지오반은 조슈아가 그랬듯 혼자 키득거렸다. 몇 사람이 조슈아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저 사람과 일하는 게 간단한 일은 아닐 텐데." "뭐, 말릴 수야 없겠지만 당신처럼 어린 사람이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오." 조슈아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지오반이 오만한 태도로 어깨를 들썩이며 킥 웃었다. "충고가 쏟아지잖아. 자기들은 끼지도 않으면서, 뭐. 마음대로 하라고, 난 까다로운 사람 맞습니다. 거만하기도 하지요. 마음에 안 들면 협조도 잘 안 합니다. 하지만 일단 마음에 든 것이 있으면 그게 제대로 될 때까지 스탭들을 몰아치고, 몰아치는데도 안 하면 다 때려죽여서라도 마음에 들게 해놓은 사람입니다. 선택은 당신 자유예요. 같이 일하든지 말든지." 조슈아는 바로 대답했다. "물론 같이 일합니다. 난 잘 하는 사람을 좋아하니까요." 그리고 고개를 들어 다시 사람들을 휘둘러봤다. "다른 분들은?" 사람이 아직 머뭇거리는 가운데 스트라우즈가 입을 열었다.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 하나 있는데,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이라 말해도 될지 모르겠군요. 어쨌든 이 자리에 초대하지 않았다는 건 그리 마음에 두지 않았다는 의미가 될 테니까." 조슈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상관없습니다. 초대 명단은 제가 만든 것이 아니에요. 얼마든지 추천해 주시지요." "그렇지만… 내, 빈 올프랑쥬라는 사람을 추천하고 싶은데." 사람들은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대 선배의 추천이라 뭐라 말하지도 못하고 저들끼리 쑥덕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조슈아가 사람들의 말에 개의치 않고 물었다. "어떤 분야죠?" "연출."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 사람들 전체로 퍼져나가고 몇 사람은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이거, 일 하나 도 망쳐놓겠네." "거 참, 뭐라 말할 수도 없고." 그 때 윌 메이콕이 입을 열었다. "나도 분야가 연출이지. 하지만 올프랑쥬 군에게 맡기겠다고 한다면 굳이 끼여들어 가로챌 생각은 없소." 연출을 맡을 생각이 있었다는 의도를 내비치는 메이콕의 말에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몰트 부인이 펄쩍 뛰며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메이콕 씨가 맡겠다고 한다면 누가 감히 그 자리에 나서겠어요?" 메이콕이 희미하게 웃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부인. 저 친구도 젊고, 올프랑쥬 군도 젊습니다. 이 극은 어쩌면 젊은 사람들끼리 해나가는 것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되는군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당신하고 누구를 비교……." 이 때 스트라우즈가 입을 열었다. "내 생각도 메이콕 씨와 같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올프랑쥬 군이 한심한 사람만은 아니고…. 또 이런 자리에서 선배들이 왜 일을 양보하는지 여러분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더불어, 오케스트라와 음악 감독에는 더 젊은 사람이 나서지 않을 경우 제가 지원해 볼가 합니다." 스트라우즈가 겸손하게 웃으며 말을 마치자 동요는 더욱 커졌다. 한 사람이 놀란 듯 물었다. "저, 스트라우즈 선생님, 선생님 같은 거장께서 이런 불확실한 기획에 참여하시는 이유가……." "궁금하시오?" 스트라우즈는 손을 뻗어 바이올린 상자를 매만졌다. 상자는 그와 오랜 세월을 함께 한 터라 낡아 있었으나 그래도 튼튼했다. "나처럼 나이가 들고나면, 젊은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것을 보고 싶어지기 마련이지. 스스로 바꾸기에 이미 늦었을 때는 특히 더 말이오." 옆에서 몰트 부인이 싱긋 웃더니 갑자기 장갑 낀 손을 번쩍 들었다. "나한테는 콩스탕스 백작부인 역을 줘요!" 수이 아네티에서 수이 데 몰트가 된 후로 한 번도 무대에 나서지 않았던 그녀였다. 어떤 방식으로든 컴백해 줬으면 하고 기다리는 팬들이 무수한데도, 몰트 성에 틀어박혀서 배우 지망생들과 한가롭게 지내던 그녀가 다시 나온다면 이거야말로 대단한 소식이 될 터였다. "그리고 내가 데리고 있는 아이들한테도 배역 좀 나눠줘요. 물론 테스트는 해 보시고." "나쁠 거 없죠." 고개를 끄덕인 조슈아가 마지막으로 사람들을 둘러봤다. "다른 분은 더 안 계신지?" 셀마 레이슬링크가 몰트 부인과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였을 뿐, 다른 사람들은 아직 망설이며 스트라우즈와 몰트 부인, 또는 메이콕을 바라볼 뿐이었다. 조슈아는 더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그럼 저는 이제부터 참가 의사를 밝혀주신 중요한 분들과 이야기해야 할 테니, 이 자리는 일단 파하겠습니다. 이 시간 이후 「일 드 모르비앙의 결혼식」제작에 참가할 마음이 있으신 분들은 극장주 두 분과 조건에 대해 협상하신 후, 제게 연락을 취해 달라고 부탁하면 될 겁니다. 하지만 서두르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여러분이 지원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제작이 늦춰지는 일은 없습니다." 조슈아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이 술렁이며 일어나기 시작할 즈음 그는 피아노 쪽으로 가서 뚜껑을 열더니 무심하게 건반 몇 개를 눌렀다. 댕. 동. 댕. 몇 사람이 돌아봤지만 조슈아는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냥 피아노 앞에 앉더니 사람들이 나가든 서 있든 개의치 않고 내키는 대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느릿했지만 곧 빨라졌고, 경쾌해졌다. 마치 사람들을 배웅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남을 사람은 남으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 같기도 한, 괴상한 연주였다. 몇 사람은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그냥 나가버렸고, 다른 사람들은 얼떨떨해하며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일어나지도 않은 채 턱을 괴고 연주를 듣고 있던 스트라우즈가 그들을 보더니 말했다. "좋은 연주잖은가?" 결국 사람들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부분 자리를 떴다. 메이콕은 얼마간 곡을 듣고 있다가 일어나서 스트라우즈에게 인사를 하고 나갔다. 몰트 부인은 피아노가 가까운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피아노는 계속됐다. 함께 일하게 될 사람들을 위해 작은 콘서트라도 연 것처럼. 4. 불완전 "이 불완전한 피조물에게 이름을 지어 주자. 이름은 존재를 채워주어야 하는 것 이 피조물에게 없는 것을 이름으로 붙여주자. 그러면 그것으로 채워져 그는 완전한 존재가 될테니까. 그러니 그를 이제부터 '천사'라고 부르기로 하자." 또 한 사람의 조슈아가 있다. 그는 수천 그루의 나무로 메워진 환형(環形) 숲 속의 성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이 익숙하고, 계단은 그 자리에 있고, 갑작스런 일은 없고, 창문은 닫혀 있고, 그의 손을 필요로 하는 일은 전혀 없다. 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그는 그들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그림자처럼, 그는 행복했던 시절의 사람들, 이제는 그를 떠나버린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들을 다시 만나러 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시골로,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으로, 거기에는 친구와 풀과 양이 있겠지. 물고기도, 풍차도, 수도사가 중 괴상한 물도 있을 테지. 그렇게 먼 곳이 아닌데, 그러나 그는 생각만 할 분 성을 떠나지 못한다. 정체 모를 힘이 그에게 성에 남아 있으라고 되풀이해서 말한다. 그는 그 말에 따르고, 따르고, 또 따르고, 그러면서 그 복종이 그의 본성과 심하게 어긋나는 것을 느낀다. 비가 오는 날, 그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건반을 처음부터 끝가지 하나씩 눌러보았다. 망가진 건반이 없는지 확인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하나쯤은 눌러도 소리나지 않는 빈 건반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의 예상과 달리 건반들은 모두 제 소리를 냈다. 딩. 동. 댕. 동……. 아무 것도 망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견딜 수 없는 기분이었다. 왜 망가지지 않은 건가, 이렇게 많은 건반 중에서 하나쯤 망가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이가 빠져 있어도 놀라지 않을 텐데, 그런데, 왜 모두가 고르게 그대로 있는 거지? 완전한 것이 있을 리 없어. 깨진 조각이 없는 완전한 접시 따위……. 생각할수록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되어 다시 한 번 확인하듯 건반들을 눌러보고, 또 다시 되풀이해서 눌렀다. 자시 한다고 해서 어느 건반이 갑자기 소리내지 않는 일은 없었다. 정상적인 것, 완벽한 것, 빌어먹을 안정된 것들. 또 한 번 건반들을 다시 눌러가던 그는 갑자기 한 개의 건반을 주먹으로 세게 내리쳤다. 여러 개의 건반이 동시에 눌러져 둥, 하고 둔중한 음을 냈다. 다시 한 번 쳤다. 주먹이 아플 때까지 때렸지만 건반은 여전히 음을 잃지 않았다. 계속해서 똑같았다. 끝내 그는 피아노 뚜껑을 열어제치고 그 건반과 연결된 스트링을 찾아 끊어 버렸다. 팅……. 건반의 숨이 끊어지는 소리는 어쩐지 슬픈 듯했다. 너무 쉽게 끊어져 유언조차 말하지 못한 사람처럼. 한참 동안 침묵하고 있던 그는 손을 뻗어 그 건반을 눌러 보았다. 뭔가 미끄러지는 것처럼 틱, 하는 소리가 날 분 이제는 아무 음도 내지 않았다. 틱, 틱틱, 틱. 그걸로 충분했을까. 끊어진 스트링이 죽은 식물처럼 팔을 뻗고 있다. 이윽고 그는 피아노 앞에 다시 다가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두 손을 건반에 올렸다. 그는 연주했다. 느릿하게 시작했다가 점차 발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몇 번이고 필요한 음 대신 틱, 하는 소리가 울렸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 소리와 함께 치고 또 쳤다. 빗소리가 발라지기 시작했다. 건반 위로 땀이 떨어졌다. 곡은 아름다웠다. 같은 순간 먼 곳의 다른 하나도 치고 있던 그 곡은. 5. 돈이 없을 때는 "돈이 없는 건 괜찮아. 돈을 원하지 않는 게 문제야. 먹지 않는 건 괜찮아. 먹을 줄 모르는 게 문제지. 거짓을 말하는 건 괜찮아. 거짓인 줄 모르는 게 문제일뿐. 죽은 건 괜찮아. 죽은 줄 모르는 거애말로 문제라고." "야." 목소리가 어쩐지 심상찮았다. 침실 한구석에 놓인 작은 탁자에 붙어 앉은 조슈아는 '졸아보지 말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머릿속을 들여다본 듯한 다음 말이 들려왔다. "돌아봐." "바쁜 척도 통하지 않네." 도리 없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앉은 채로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막시민은 팔짱을 낀 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목소리만큼이나 얼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도 심상찮았다. "리체한테서 얘기를 들었는데." "들었구나."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문 밀고 들어올 때부터 알고 있었으므로 뒷 이야기를 더 들을 필요는 없었다. 조슈아는 두 손을 모아 붙이며 꼬마들처럼 배시시 웃었다. "그 대본……." "응, 그 대본." "……나냐?" 이제 와서 인정하지 않는대봤자 의미가 있을 리 없었다. "너냐고? 아… 그럴까나." "그렇다면……." 이쯤에서 이야기가 끝나고 실력행사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이어지고 있었다. "응?" "내 놔." 막시민은 뭔가 받을 것이 있다는 것처럼 당당히 손을 내밀었다. 조슈아는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머뭇거렸다. "아? 하지만 대본은 이미 수십 권이나 베껴져 있는데 이제 와서 원본을 가져가 봤자……." 막시민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거 말고." "말고? 말고 뭐?" 조슈아는 확실히 천재였지만, 그의 세계와 전혀 다른 법칙 아래 돌아가는 세계도 있는 법이었다. "저작권료." 막시민은 음침하다 못해 태연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고, 조슈아는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대꾸했다. "저작권료라니? 무슨 저작권이야?" 그쯤 해서 막시민은 갑자기 오른발로 바닥을 한 번 세게 굴렀다(빚쟁이를 독촉할 때 유용한 방법이었다). "내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가져다가 멋대로 상업화했잖냐! 당연히 원작료를 내놔야지! 농담이 아니라고!" 그제야 조슈아도 상황을 알아차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것 봐, 막군. 원작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원본 작품'인 셈인데, 네 인생이 작품이야? 넌 그냥 살아간 것뿐이잖아. 일부러 아이디어를 내어서 따라하며 살아온 건 아니잖아?" "내 인생이, 그럼 내가 만든 거지, 네가 만든 거냐? 작품이고 인생이고 어쨌든 간에 내 거라고!"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 "억지는 무슨 억지? 그럼 살아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딴 사람이 맘대로 갖다가 쓰는 게 문제가 없단 말이냐? 저 어딘지 모를 동네에 사는 누군가가, 골칫덩어리 천재 자식 데모닉 조슈아 이야기를 어디선가 얻어듣고, 제멋대로 노래로 만들거나 소설로 써버려도 넌 상관없겠냐?" 조슈아는 아픈 데를 찔린 것처럼 대뜸 반응했다. "내가 참을 것 같아!" "그러면, 난 왜 안 되는데!" "넌 돈을 달라며!" "그게 바로 최소한의 예의야!" "예의는 무슨 예의?" "멱살잡이 대신 돈으로 달라고 하다니 이 얼마나 온화하고 고상하냐? 평화주의자 같은 대안이로구만." 조슈아는 갑자기 상처 입은 듯한 눈빛으로 막시민을 쏘아봤다. "너무하는군." "뭐가 너무하냐?" "'저 어딘지 모를 동네에 사는 누군가'하고 날 똑같이 생각하다니, 좀더 친구다운 대안은 없는 거야? 기껏 돈이라니, 정말 각박한 녀석이네." 그러나 막시민은 당황하기는커녕 바로 대꾸했다. "엉뚱한 단어나 기억하고 있을 게 아니라 생각을 해봐. 내가 한 말의 핵심은 뭐냐, '어느 동네에 사는 누군가'가 아니라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맘대로'란 말이다. 네가 내 얘기를 쓰고 싶었다면 나한테 먼저 물어보고 동의를 구해야 될 거 아냐? 넌 내 인생이, 그까짓 동의 한 번도 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시시하게 보였냐?" 마지막 말은 일견 농담 같았지만 어조는 그렇지 않았다. 조슈아는 목소리를 가라앉히더니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러는 것이 옳았을 거야. 하지만 이 시점에서 진실은 그렇지가 않지. 만일 내가 너한테 사전에 물어봤다면, 네가 허락해 줬을까?" "할 리가 있냐!" "거 바!" "……." 둘은 한동안 서로를 흘겨보며 다음 할 말을 궁리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막시민이었다. "내가 허락해주지 않을 걸 알았기 때문에 일단 멋대로 쓰고, 나중에 몇 대 맞는 걸로 때울 속셈이었지? 그렇겐 안 되지, 이 나쁜 자식아. 나도 너 못지 않게 내 애기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게 싫다. 이건 진지한 문제라고." "네 얘기를 웃음거리로 만들지 않아." 조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뒤적이고 있던 대본을 탁 덮더니 손가락으로 짚었다. "넌 내가 단지 소재거리가 궁해서 이런 얘길 썼을 거라고 생각하니? 난 널 그렇게 가볍게 여기지 않아. 그리고 네가 이 공연을 곡 봐줬으면 하고 있어. 네가 소설이니 연극이니 하는 것에 취미가 없다는 건 알아. 하지만 이건… 그래, 네 동의를 구하지 않은 것은 미안해. 하지만 부주의해서 그런 건 아냐. 무신경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착상이 딱 떠올랐을 때 네가 허락할 리 없다 싶었어. 그래서 오히려 일단 써버린 뒤에 혼나면서 허락 받자, 하고 생각했지." "네가 나쁜 의도로 썼을 리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건 내 취향의 문제라고, 웃기든 안 웃기든, 난 내 얘기를 남이 아는 것부터가 싫어. 전혀 얘깃거리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조슈아는 약간 웃었다. "하지만 아무도 네 얘기인지 모른다고." "관객 중 한 명은 알 거 아냐." "너?" "그래." 조슈아는 시선을 잠시 내리깔았다. "그래…. 그럴 수 있겠지. 그럼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이 대본은 폐기할까? 완전히 새로운 것을 쓰면 될까?" "……." 막시민은 대꾸 없이 조슈아의 얼굴을 째려보더니 중얼거렸다. "새로 쓴다고? 이제와서? 쳇,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자식이라니." 조슈아는 막시민의 얼굴을 흘끔 보더니 말했다. "새로 착상이 떠오르려면 하루 이틀쯤은 걸릴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어떻게 할 수는 있겠지. 사람들은 내가 설득할게." "……." 이쯤 되면 반 협박이었다. 막시민도 알고 있었다. "이미 그 대본 갖고 스탭들을 모아놨고, 회의도 했고, 내일 아침부터 당장 제작에 들어갈 판이잖아! 돈 벌자고 나선 일에 내가 앞장서서 재 뿌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시작한 네 녀석이 나쁘다 이 말이다! 그러니 저작권료를 내놓으면 되잖아! 그러면 나도 내 얘기를 팔아먹어 돈을 번 게 되니까 스스로 납득되잖냐!" 조슈아는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지만 실은 웃음을 참느라 그런 것이었다. 그렇구나, 납득의 문제였구나. 돈이 생긴다면 뭐든 팔 수 있다는 것이 인생의 지론인 녀석이었으니. "좋아, 그렇게 할게. 아참, 그러고 보니 하는 김에 지난번의 것도 정산해줘야 될까?" "지난번이라니?" 조슈아는 짓궂은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전에, 막스 카르디 시절에 말야. 「바이올린 연주자」라는 공연을 한 일이 있거든." 막시민은 무슨 소린가 생각하는 것처럼 잠자코 있다가 다음 순간 펄쩍 뛰었다. "뭐야, 처음이 아니란 말이냐!" "아, 하하하, 너란 녀석은 워낙 이야깃거리가 많은지라…. 물론 인기고 있었다고, 특히 극장주가 대본을 아주 마음에 들어했어. 특히 주인공의 성격을 좋아했지." "극장주라면, 파냐나인가 뭔가 하는 사람 말이냐?" "응. 주인공이 건방져서 좋다고 하더라고. 아, 물론 네 얘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바이올린 연주자」의 주인공이……." 막시민은 이 녀석을 어떻게 응징하면 좋을까 생각하는 듯 한쪽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조슈아가 다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근데 말야, 그 돈이란 거 말인데……." "얼마냐고?" 막시민도 액수를 생각해 보진 않았던 모양이었다. 즉시 생각해내려 하는데 조수아가 손을 내저어 막았다. "얼마의 문제가 아냐. 나, 돈이 없다." "……." 대륙 최고의 판도를 자랑하는 부유한 나라 아노마라드의 수도 켈티카에 국왕의 성에 버금가는 성을 갖고 있는 아르님 공작의 하나뿐인 후계자인 소공작 조슈아 폰 아르님이, 돈이 없다니! 젠장! 가만히 생각해 보니 너무 당연하잖아! 애당초 돈이 있으면 공연을 왜 하나? "돈 없는 소공작 따위 진짜 쓸모 없군." 조슈아는 뻔뻔스런 태도로 양 손바닥을 펴 흔들어 보였다. "우리의 여정을 돌이켜 생각해 봐. 내 주머니에 네가 모르는 돈이 한 푼이라도 있을 리 없잖아. 있었으면 네가 가만 뒀겠어?" 막시민의 대안은 간단했다. "어음 써라." 이튿날 날이 밝았을 때 조슈아는 스탭들과 회의하기 위해 극장에 가기 전에 다른 곳부터 가야 했다. 일직 회의 약속이 있다고 말했더니 아예 아침도 못 먹고 끌려왔다. "자, 다 왔어." 일행이 묵고 있는 칼라이몬 선장의 집에서 창문을 열고 내다보면 바로 왼쪽으로 보이던 장소였다. 아침 6시, 일찍 일어난 갈매기가 한가롭게 가로지르는 바다의 풍광을 딱 절반 정도 가리고 있는 적색 벽돌집의 이마에는 '칼라이소 선박조합'이라는 간판이 소금물에 반쯤 탈색된 채 걸려 있었다. "선박조합인가."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조슈아를 끌고 보무 당당하게 조합 사무실로 들어간 리체는 탁자 너머에 버티고 앉은 몸집 큰 선원을 발견하자 반색하며 말했다. "자, 어제 하던 얘기를 계속해볼까요?" 조슈아는 어제 하던 얘기가 뭔지도 몰랐다. 왜 하필 자신을 데려왔는가에 대해서도 막시민은 아침에 깨우기가 까다로우니까, 정도밖에는 떠오르는 점이 없었다. 선원은 리체처럼 의욕이 충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면도도 안 했거니와 눈빛을 보아하니 전날 술을 잔득 마셨던 게 틀림없었다. 따라서 나올 거라고는 하품 섞인 대답뿐이었다. "하아… 하아암, 또 왔나? 그 애긴 계속 해봤자 소용없다니까 그러네." :이쪽도 마찬가지예요. 계속 그렇게 나와봤자 줄 돈 따윈 없다니까요." 아, 이것도 돈 이야기였다. 조슈아는 빈속에 생선 냄새 풀풀 나는 곳으로 끌려와 속이 좋지 않았지만 친구가 중대하게 여기는 주제에는 진지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원은 게트림을 하며 대구했다. "그래, 그래. 나도 어제 조합장님한테 이럴 땐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 봤어. 그분 말씀이 원칙적으로는 요 며칠 동안 정박한 몫도 계산해야 하지만, 끝끝내 그렇게 나온다면 당장 배 끌고 바다로 나가는 것도 말리지 않겠다던데." 리체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미안하네요. 기껏 그거라도 생각해 냈는데 이쪽에선 받아들일 입장이 아니라서. 하지만 이럴 줄 알았죠? 쓸모 없는 주장이란 건 모를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쯤 해서 조슈아도 한 마디 거들어야 할 것 같았다. "정확한 주제가 뭐야? 그러니까 선착장 사용료랄까… 그런 걸 내란 얘기야? 그런 거라면……." 리체가 조슈아의 말을 끊으며 외쳤다.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우리 배의 선적(船籍)이 칼라이소가 아니라고 해서 무려 두 배나 되는 사용료를 내래잖아!" 조슈아는 리체의 달아오른 얼굴을 보며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고 말았다. 리체는 당연히 화를 냈다. "넌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조슈아는 웃음을 그쳤지만 여전히 재미있어하는 표정이었다. "두 배라면 기분이 나쁘긴 하겠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두 배의 기준이 뭐야?" "그거야 물론 칼라이소 선적을 가진 배들이지!" "그래? 그럼 말이야, 사실은 칼라이소 선적을 가진 배들만 사용료를 절반으로 깎아주고 있는 거 아니야?" "뭐라고?" 리체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선원이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거 명답이네! 아가씨, 바로 그거요. 아가씨네 배가 내야 되는 돈이 정상이고, 칼라이소 배들은 절반 감면이 거요! 낄낄낄!" 리체는 화가 나서 발끝으로 조슈아의 뒤꿈치를 걷어찼다. "넌 날 도와주러 온 거니, 방해하러 온 거니?" 조슈아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사실 왜 왔는지도 몰랐어." "뭔가 똑똑한 해결책이라도 내놔 줄줄 알았더니 한다는 소리가 겨우…. 아저씨, 안 돼요. 얘 얘기는 내 생각하고 전혀 다르다고요. 하루에 엘소노 은화 쉰 개는 완전히 사기예요, 사기! 우리 고향에서는 그 절반도 안 하는데!" "혹시 네 고향은 어부들이 거룻배나 대는 시골 항구 아니야?" 리체는 바로 발끈했다. "무슨 소리예요! 내가 태어난 곳은 하이아칸에서도 제일 부자들만 모여 사는……." 거기까지 말했을 때 조슈아가 갑자기 리체를 앞으로 슬쩍 밀며 선원 앞으로 나서더니 짧게 말했다. "얼마죠?" 선원은 조슈아가 돈을 내놓을 것처럼 보였는지 장부의 해당 면을 펼쳐서 보라고 밀어주었다. "그동안 댄 것하고 오늘 치까지 합치면… 조합장님께서 그냥 엘소 금화 두 개만 받으라고 하더라고, 고블룬으로 하면 네 개가 되겠고. 그리고 앞으로도 죽 댈 거라면 선금을 줘도 좋고." 조슈아는 장부를 눈으로 죽 훑더니 주머니 안쪽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들며 말했다. "이 안에는 어느 존귀한 분이 발행하신 어음이 들어 있습니다. 이 것을 꺼내 보이기 전에, 먼저 어디에서도 그 분의 이름이나, 또는 이 어음의 존재를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셔야 합니다." 선원은 이들이 하이아칸의 귀족 시종들이라고 알고 있었으므로 약간 당황하며 말했다. "자, 잠깐만, 존귀한 귀족이라고? 그런 문제는 내가 아니라 조합장님과 얘기하라고, 잠깐 기다려 봐." 벌떡 일어난 그가 바로 뒤에 있는 문을 두들겼다. 그리고 대답이 들리기도 전에 문을 열고 몇 마디 외치더니, 두 사람에게 들어가자고 손짓했다. 조슈아가 앞장서서 들어가고, 리체는 조슈아의 손에 들린 봉투를 의혹에 찬 눈길로 바라보며 따라 들어갔다. 선원이 먼저 나서 설명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조슈아는 성큼성큼 조합장 앞으로 가 서더니 봉투를 책상 위에 놓고 손끝이로 가볍게 누른 채 입을 열었다. "제 주인님과 친교가 두터운 아노마라드의 존귀한 귀족께서 제게 주신 어음입니다. 그 분은 켈티카에서 성을 지니신 대귀족으로 이 정도 금액은 잔돈에 불과하니, 명시된 결제일에 그 분께 의뢰를 청구하면 확실히 주시겠지요. 저는 이것으로 장기 정박료를 정산할 생각입니다. 물론 돈이 남겠지만, 일단 정박일이 며칠이 될지 모르겠으니 출항할 때 남은 금액을 정산해 주시면 됩니다." 갑작스런 얘기를 들은 조합장이 미간을 찌푸리자 조슈아는 선원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며칠 동안 제 친구하고 얘기가 오가서 사정을 아시겠지만, 저희에게는 현재 지불할 수 있는 돈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이거라도 받지 않으시면, 저희 배 바닥에 구멍을 뚫어 바다에 빠뜨리거나 하는 것밖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곤란해진 선원은 눈치를 보다가 슬금슬금 밖으로 나가버렸고, 조합장은 두 사람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항구에 떠도는 소문의 집합지가 되기 마련인 자리의 특성상, 그는 이들이 하이아칸 귀족의 시종으로 현재 칼라이몬 선장의 집에서 머물고 있고, 칼라이몬이 지분을 절반 갖고 있는 극장과 관련해서 무슨 일을 하려 한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조합장은 악랄하거나 꽉 막힌 성품도 아니었고, 더구나 칼라이소 뱃사람이라면 누구나 겁내며 몸을 사리는 칼라이몬 선장과 관련된 일에서 그 자의 미움을 살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비록 칼라이몬 선장의 주먹처럼 가까이 있진 않지만 하이아칸에 있다는 이들의 '주인'도 무시하기엔 껄끄럽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덥석 어음을 받아들고 금화를 받은 셈 치기에는 그도 입장이 좋지 않았다. 누구나 어음보다는 진짜 금화를 좋아하기 마련이니 말이다. 그런 제안에 응하려면 뭔가 다른 좋은 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즈음, 조슈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결제일이 미뤄지는 셈이니 그에 따라 액면가 이하로 넘겨드릴 생각이므로 손해는 보지 않으실 겁니다. 음… 절반 정도면 괜찮을까요?" 절반이라는 말에 조합장은 화들짝 놀라며 대꾸했다. "그럼 자네한테 큰 손해 아닌가?" "아뇨. 저는 돌아가서 제 주인께 청구하면 됩니다. 해적을 만난 것은 저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주인님의 배를 지키기 위해 제 어음을 처분했다고 하면 손해를 벌충해 주실 테니까요. 저는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얼마짜리 어음이오?" "1천 5백 엘소. 엘소 금화로 지급." "으음." 조합장은 생각에 잠겼다. 두르넨사는 상인의 나라로, 그곳 상인들은 전 대륙에 퍼져 있고, 또한 협력망이 잘 구축되어 있어서 그들끼리는 수표나 환어음, 심지어 신용장에 가까운 것도 어렵지 않게 돌았다. 아노마라드 쪽이나 켈티카에 머무르고 있는 상인도 얼마든지 있었고, 그들 쪽으로 돌리면 아노마라드 귀족의 어음을 돈으로 바꾸는 것쯤은 수월했다. 절반이라면 어린애 장난처럼 쉬운 벌이다 싶어 은근히 침이 넘어갔지만 시치미 뚝 떼고 물었다. "그럼 그 어음이 도대체 어느 분의 것이오?" "그 이야기인데." 조슈아는 몸을 약간 굽혀 조합장을 내려다보며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 분의 명예를 위해, 이 어음을 보여드리기 전에 한 가지 약속해 주셔야겠습니다." "뭐요?" "저는 아시다시피 시종인데, 그 분처럼 고귀한 분께서 이런 자에게 어음을 발행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그 분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당시의 부득이한 사정을 일일이 알아 줄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 이 어음을 만일 다른 상인에게 넘기실 것이라면, 이곳에 이름이 씌어진 제가 사실은 시종이란 사실을 발설하지 말아주십시오. 그 약속을 해주시지 않으면 전 이 어음을 보여드릴 수 없습니다. "그까짓 거 어렵겠나. 약속하지. 자, 자, 어서 보여주게." 조슈아는 짚고 있던 손을 미끄러뜨리며 봉투를 집어 들고 안에 든 종이를 뽑아 펼쳤다. 종이는 귀족들이 신임장 같은 것을 쓸 때 사용하는 고급스런 것으로 머리에 키 모양의 문장이 그려져 있고, 다음과 같은 글이 씌어 있었다. 이 문서를 가지고 있는 '조 히스파니에' 또는 그 지시인에게 이 문서와 상환하여 1천 5백 엘소를 금화로 지불하겠다. 지급일은 따로 정하지 아니한다. 990년 3월 19일 재스퍼 공작 프란츠 폰 아르님. 어음에 씌어진 이름을 본 리체는 갑자기 튀어나오는 기침을 참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조슈아가 조합장에게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베이먼 엘워즈." 조슈아가 책상 위의 펜을 뽑아들고, 그 아래에 다음과 같이 썼다. 위에 적힌 금액을 아래 배서인 '베이먼 엘워즈' 또는 그 지시인에게 지급해주십시오. 990년 6월 5일 조 히스파니에. "여기 서명하시죠." 조합장이 그 아래에 서명을 하자, 모든 것이 완료되었다. 조슈아는 잠깐 밖에 나가서 장부를 들고 돌아왔다. "그럼 1천 5백 엘소의 절반인 7백 5십 엘소를 장기 정박을 위한 정박료로 남겨둔 것으로 장부에 적어 주십시오." 조합 장부에 '선금 750엘소'가 적히자 조슈아는 조합장과 가볍게 악수를 나누고. 어음을 넘겨주고, 리체와 함께 돌아서서 밖으로 나왔다. 리체는 무척 궁금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던 선원에게 다소 거만하게 장부를 들이밀어 보여주었다. "자, 됐죠?" 선원은 신비한 일을 본 것처럼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장부를 집어넣고 장기 정박선 명부를 꺼내 펼쳐 주었다. 조슈아가 리체를 흘끔 보더니 쿡 찔렀다. "네가 써." 조금 전까지 혼자 알아서 척척 처리하더니 갑자기 미루는 까닭을 몰라 리체는 눈을 깜빡거렸다. "왜 내가?" "네가 우리 둘을 먹여 살리는 책임자잖아." "……." 하긴 칼라이몬 선장 앞에서 그 책임자 소리 한 것 때문에 조합 들락거리며 해결하려 애쓴 것이긴 했다. 결국 리체가 펜을 잡았다. 이곳에서 쓰기로 한 가명인 '밀라르 쥬시탕트(리체도 이름 재활용의 대열에 동참했다)'를 쓰고 나서 옆칸을 보니 '배 이름'이라고 적힌 곳이 눈에 띄였다. "이름?" 명명식용 포도주를 마셔버리는 바람에 아직껏 이름이 없다기보다는, 이름 따위 생각도 않고 있었기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비행선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이번엔 리체가 조슈아를 쿡 찔렀다. "이름이래." "아아?" 선원이 이상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는 게 보였다. 배 명판은 항해 도중 떨어질 수도 있지만, 이름 없는 배가 출항하는 일만은 불가능하니 말이다. 그러나 무심코 배 이름을 말하려고 하니 떠오르는 것은 쥬스피앙의 낯뜨거운 찬사뿐이었다. "아… 음. 미의 극치호." 선원의 표정은 일전에 쥬스피앙의 찬사를 직접 들었던 세 사람이 지었던 것과 아주 비슷했다. 그리하며 배 이름 옆에는 '미의 극치호'하는 보기도 듣기도 거북한 이름이 적히게 되고 말았다. 조합 밖으로 나와 몇 걸음 걷자마자 리체는 조슈아를 붙들고 앞뒤로 흔들어댔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말 좀 해봐." "걸으면서, 걸으면서 얘기하자고." 조합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주택가로 들어설 즈음 리체가 도로 다시 뒤흔들 태세인 걸 알아보고 조슈아가 웃었다. "금을 꺼내 쓸 순 없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게다가 거기 씌어진 건 너희 아버지 이름이었잖아? 정말 그… 공작님이 준 거야? 왜 그런 게 있다는 걸 지금가지 말하지 않았어요?" 리체는 조슈아에게 반말을 해오다가 그의 아버지가 공작이라는 것을 상기하자 말이 좀 꼬였다. "있었으면 진작 내놨게." "그럼?" 조슈아는 바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리체가 받아들고 정성껏 펴 보니 그건 조금 전 조합장에게 넘겨준 것과 거의 똑같은, 그러나 구석에 잉크 번짐이 있는 종이였다. 깜짝 놀라고 있는 리체에게 조슈아가 말했다. "어음과 사인 위조, 잡히면 켈티카까지 압송되는 범죄지." "그럼… 이거, 직접 그린 거란 말이야?" "어제 막군이랑 얘기하다가 어음 한 장을 만들 일이 생겨서 말이지. 그 김에 몇 장 더 만들어 본 것뿐이야. 나도 오늘 당장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리체는 '위조'와 같은 일을 쉽사리 생각해내지 못하는 보통 사람답게 무척 긴장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잉크가 번진 부분 하나를 제하면 테두리 무의와 문장이 얼마나 정교하게 짜 맞춰져 있는지 아무리 들여다봐도 가자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하긴, 아르님 가문의 문장을 조슈아만큼 정확히 아는 사람도 없을 테고, 원본이 없어도 동일하게 그릴 수 있다는 점에서도 최적의 조건을 갖춘 것만은 틀림없었다. 게다가 아버지의 사인도 어렵지 않게 똑같이 할 수 있고 말이다. 조슈아가 종이를 도로 받아 접어넣으면 느긋하게 말했다. "잡혀가 봤자 아버지하고 대면하게 되겠지 뭐." "그, 그럼 잡혀가는 쪽이 더 좋은 거야?" "글쎄, 그 어음이 돌고 돌아 아버지 손가지 갔다가 우릴 다시 찾아내기까지 우리가 여기 있다간……." 그 뒷말은 할 필요가 없었다. 리체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던 것이다. "그래. 역시 그렇겠지." 하지만 조슈아가 리체에게 어음의 용도를 다 설명했던 것은 아니었다. 6. 이네스 아가씨 "난 그녀를 알지 못했지만, 그녀는 날 알았지. 그녀는 날 알았기에, 내가 원하는 것을 알았지. 그녀는 날 알았기에, 내게 물어보지도 않았고. 그녀는 날 알았기에, 내게 원하는 것도 없었지. 그리하여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녀는 내 자리에 서 있었네. 난 그녀를 잃고서야, 그녀가 누구인지 알았지." 챙 넓은 모자를 쓴 숙녀 한 사람이 이튿날 아침 다이아몬드 러쉬 극장을 방문했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극장주 앞으로 안내되기까지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 단지 복장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숙녀는 접객 홀 중앙에 선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보다 먼저 온 아가씨들이 분장실을 점령하는 것도 모자라 접객 홀의 의자를 모조리 차지하고 있었기에 앉을 자리가 없었다. 그녀는 당연한 것처럼 공연 홀로 오르는 계단 맨 아래에 걸터앉더니 턱을 괴었다. 비단 리본이 달린 우아한 크림색 모자에 비해, 입은 옷은 너무 빨아서 색이 바랜 듯한 낙엽빛 드레스였고, 그나마도 짧아져서 발목이 드러날 정도였다. 다만 다른 사람들의 얕잡아보는 듯한 시선에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냥 조용한 얼굴이었다. 극장 밖에서 우는 매미 소리가 로비까지 들려왔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씨끄러운 놈들이었다. 로비의 아가씨들이 하나 둘씩 극장주의 방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고, 꼭 한 시간 반 정도 지나서 드디어 그녀의 차례가 되었다. 에테른은 서류 뭉치에 코를 박고 있다가 곁눈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흘끔 보고 열 몇 번째로 똑같은 인사를 날렸다. "어서 와요. 당신이 스물 세 번째예요. 하지만 대충 평가하진 않을 테니 안심해요." "스물 세 번째라고요?" 에테른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방문객의 얼굴을 뜯어보더니 말했다. "하긴, 여주인공 역 응모하러 온 것 같진 않군요." 숙녀는 키가 작았고, 치렁치렁 곱슬머리를 대충 양 갈래로 동여맸고, 몸은 볼품 없이 마른 데다 창백한 얼굴은 영양 상태가 나빠 보였다. 다시 말해 노래를 잘 할 것 같지도, 춤을 잘 출 것 같지도 않은 외모였다. "이네스 올프랑쥬라고 해요." 에테른은 고개를 약간 기울이다가 곧 생각을 해냈다. "아, 올프랑쥬 씨의 동생?" 에테른이 이어 말하기 전에 이네스가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네, 맞아요. 저기, 사과 드리려고 왔어요. 물론 오빠 얘기고요. 모처럼 일거리를 주신다고 대본까지 보내주셨는데,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요. 어려운 답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너무 운이 없는 것 같지만, 오빠가 며칠 전부터 심하게 열이 올라서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오트밀도 제대로 못 넘기고 있거든요. 금방 낫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하고 싶지만요. 만일 낫지 않으면 분명히 폐를 끼칠 것 아니겠어요? 이쪽 일정도 다 잡혀있을 테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호의에는 정말 감사 드리지만, 할 수가 없을 것 같다는 얘기를……." 에테른은 앞에 선 작은 숙녀의 횡설수설을 인내심 깊게 들었지만 점차 입가가 올라가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워낙 열을 올려 말하고 있다보니 무턱대고 웃지도 못하겠고, 끝까지 듣고 있자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이번 일로 오빠를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요." 에테른은 폭소를 누르며 가까스로 부드럽게 웃었다. 이네스의 당황한 표정을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곧 이네스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가 들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너무 고맙습니다." "나쁘게 생각할 이유가 없는걸요?" "네에?" 이제는 이네스도 에테른이 좀 괴상한 표정으로 웃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왜 나쁘게 생각하겠어요? 올프랑쥬 씨는 저쪽 연습실에서 지금 열심히 배우 오디션에 참여하고 있는데." 이네스의 얼굴이 빨개지는 가운데 에테른은 이네스가 결코 밝히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를 무심하게 덧붙였다. "아마 오빠가 집을 나갔었던가 보죠?" 소연습실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의 면면을 보며 저도 모르게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존경받는 노 음악가, 은퇴한 프리마돈나, 외국물 먹은 까다로운 안무가, 스물 여덞에 늙은이처럼 삐딱한 입 모양을 가진 연출가, 각양각색의 여주인공 지망생들, 그리고 뒤에서 물심부름이나 하면 알맞을 나이의 어린 제작자. "이거 어쩐지, 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네." 안무가 지오반 한트케가 제일 먼저 솔직하게 감상을 말하고는 히죽 웃었다. 몰트 부인은 반 올프랑쥬를 흘끔 쳐다보고 말했다. "환상의 팀이네." 반은 그녀의 눈짓의 의미를 바로 눈치채고, 처음이라 비교적 온화하게 걸상 다리를 툭 찼다. "으흠." 점잖게 목을 가다듬은 사람은 스트라우즈였다. 함께 모인 사람들이 어색해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들 모두 한 사람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 자리에 실수로 온 사람처럼 한 구석에서 종이뭉치들만 열심히 뒤지고 있는 제작자가 한 마디 해줘야 인사 이상의 무엇을 할 수 있게 되니까. 이윽고 종이 뭉치에서 고개를 든 조슈아가 사람들이 아니라 천장을 바라보며 첫 마디를 냈다. "아아."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서로를 흘끔거리기만 하던 그들이 서서히 의기투합하고, 이윽고 오가는 눈빛만 갖고 제작자에게 무슨 말이든 전달하자는 합의를 도출해내기까지, 조슈아는 곁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목운동도 하고, 펜대 끝으로 벽도 두드리고, 종이가 몇 장인지 세기도 하고 그러면서 한 마디 말도 해주지 않았다. 드디어 장시간의 눈빛 회의 끝에 3:1의 지지를 얻어 대표로 선출된 지오반이 일어서서 조슈아 곁으로 갔다. "이보쇼, 조 히스파니에 씨. 이러게 다들 첫 대면을 했는데 친히 한 마디 하셔야지. 언제까지 덩굴에 열린 호박들처럼 얼굴만 멀뚱멀뚱 보고 있게 할 겁니까?" "그런 연습에 들어가 봅시다." 조슈아는 벌떡 일어나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한 손에는 펜 꽂힌 잉크병, 또 한 손에는 빈 종이 한 장을 들고 그들이 둘러앉은 테이블 앞에 와 섰다. "이걸로 시작하죠." 종이가 테이블 한 가운데 탁 놓이자 사람들의 의아한 눈이 그곳으로 향했다. 다짜고짜 연습이라는 말부터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몰트 부인, 마리 드 트루아의 장면 하나를 골라 주세요." 몰트 부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아가씨들 사이에 섞여 선 자기 제자들을 흘끝 바라보고 한 장면을 펼쳤다. 그 장면의 페이지를 보더니 조슈아는 펜을 뽑아 텅 빈 종이 위에 오선을 여러 줄 그리고, 음표를 그려 넣는 대신 그 위에 가사를 써 내려갔다. "초고를." 조슈아는 종이를 스트라우즈 앞으로 죽 밀어놓았다. 그리고 펜을 넘겨줬다. 스트라우즈는 조슈아를 잠시 바라보다가 의도를 알아챈 듯 미소짓고, 오선에 음표를 채워 넣기 시작했다. 편곡이 없는 멜로디라 해도 일단은 얼마간 시간이 걸렸고, 완성되자 조슈아는 깍듯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종이를 빼내 첫 번째 아가씨에게 밀어줬다. "그럼?" 아가씨는 약간 당황하여 몰트 부인에게 곁눈질을 했으나 도와줄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조슈아는 마지막으로 반을 바라보았다. "무대를 부탁해도 될까요?" "……." 이미 스트라우즈는 바이올린을 꺼내들고 있었다. 아가씨는 눈썹을 모으며 항변했다. "이런 식으로 대뜸 오디션을 해요? 곡은 난생 처음 보는 거고, 당연히 연습도 안 됐고……." 조슈아는 어깨를 가볍게 올렸다. "여기 연습 된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내가 한 것을 보고 따라할 수 있을 거 아니에요? 제일 먼저 하는 사람이 당연히 손해잖아요. 맨 끝에 하는 애는 당연히 엄청 잘 할 테고……." 사람들은 조슈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가 얼마나 멋들어진 해명을 내놓을지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는 어긋났다. 조슈아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둘째 손가락을 펴들어 흔들었다. "아휴, 씨끄러워요. 당신이 잘 하면 내가 못 알아볼 것 같아요? 잔소리는 집어치우고 노래나 해 봐요." "……." 갑자기 일어선 반이 처음에 조슈아가 있던 쪽의 테이블을 치우고 공간을 만든 다음, 뒷벽에 맞대어진 테이블 위에 의자 두 개를 올려놓았다. 그러자 조슈아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바로 테이블 위로 올라가 그 의자에 앉았다. 턱을 괴더니 여전히 종이를 쥔 채 망설이고 있는 아가씨에게 손짓했다. "시작." 도리 없었다. 아가씨는 테이블 위의 조슈아를 올려다보고, 숨을 한 차례 내쉰 다음 스트라우즈의 바이올린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숨어 계신 왕자님. 아니, 젊은 백작님 세레나데라니 우습죠, 하늘엔 달도 없고 거기까지 했을 때 조슈아는 눈동자를 천장으로 굴리며 자기가 앉아 있던 의자를 탁탁 쳤다. "그만, 불합격이에요." 아가씨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그거 봐요! 내가 손해라고 했잖아요!" "걱정 말아요. 시녀장 역할에는 어울릴 것 같으니까." "난 시녀장 안 해요!" "그래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조슈아가 고개를 돌리자 바로 다음 차례로 뽑히지 않으려고 우르르 물러나 벽에 붙어있는 지망생들이 보였다. 조슈아는 눈썹을 약간 올렸다. "언제 하든 마찬가지일텐데. 몰트 부인, 한 사람 보내주세요." 그리하여 뽑힌 다음 지망생은 첫 번째 아가씨의 노래가 그친 지점에서 바로 다음 소절을 부르게 되었다. 여긴 장미 정원도 아니고 그리고 난 아가씨예요. 그만큼으로 바로 결판이 났다. 조슈아는 지망생의 기분을 살피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묻지 않았다. 아니라고 생각되는 순간 바로 끊어 버리고, 나가는 응모자에게 혹시 모르니 기다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것에는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다음 사람은 시작도 하기 전부터 겁먹은 얼굴이었다. 자는 체 하는 분 음부터 틀려서 탈락. 아니, 웃고있는 분 아침 찬송가를 불러야죠. 해도 떠버렸고 우린 슬픈 연인도 아니고 그리고 떠날 시간이에요. 조슈아가 손을 저어 노래를 멈추게 하더니 말했다. "알베르띤느 공주 역 어때요?" 이쪽은 실망한 표정이긴 해도 비중이 있는 역인 까닭에 그럭저럭 수긍했다. 그 다음. 우리가 함께 했던 지난 밤 아니, 실은 서로 속삭였던 밤 "소피 에브델 역." 당신의 거짓말은 귀여웠죠, 난 다 알았죠, 진심을 숨길 수 있는 사람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당신의 동생들도 알던데요? "누이동생 이렌느 역." 자, 이리로 내려와요. 목소리부터 불합격. 여긴 장미 정원이 아니지만 눈을 가늘게 뜬 조슈아는 불합격이라는 말도 해주지 않고 다음 사람을 불러 달라고 손짓했다. 앵초와 억새 정도는 있고 우리 줄의 죄를 사해 줄 사제도 턱시도 차림으로 지저귀고 있고 "당신이야말로 시녀장을 하겠다면 해도 되겠는데." 몇 명 안 남은 지망생들 사이에서는 어느새 숨소리도 나지 않았다. 아니다 싶으면 몇 초 안에 손짓으로 퇴장을 표시하는 모습은, 어린애가 장난감을 고르며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뒤로 내던져 버리는 것과 비슷했다. 지켜보던 사람들 중 몇 사람이 기침을 했고, 몰트 부인도 목을 몇 번 가다듬었다. 결국 삐딱하게 앉아 있던 반 올프랑쥬가 입을 열었다. "결정이 너무 빠른 것 아닌지?" 즉각 수긍하는 대답이 나왔다. "네, 그렇죠." "세 명 남았는데, 이들마저 다 이런 식으로 잘라버리면 여주인공은 어디서 구할 생각입니까?" "새로운 지망생이 있겠죠." "새로 오는 사람도 지금처럼 마구 쳐내버릴지 압니까? 준비 기간도 촉박하다고 알고 있는데."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실력 없는 사람과 같은 무대에는 못 서요." "당신의 기준이 너무 높은 것일 지도 모릅니다. 좀더 들어보면 괜찮은 실력일지도 모르잖습니까?" "저 무척 기준 낮춰 듣고 있습니다." 오만하다 못해 불쾌하게까지 들리는 대꾸를 한 조슈아는 테이블 위에 올라앉아 있는 것이 지겨워졌는지 일어나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런데도 건질 사람 하나 없군요." 반도 차갑게 대꾸했다. "이러다간 우리 모두 여배우 없이 무대를 준비하게 되겠군요." "끝가지 못 구하면 대본 고쳐드리지요." "마리의 비중을 줄이는 쪽으로?" "아뇨, 배역을 없애버릴 겁니다." 듣고 있던 지오반이 어이가 없어 입으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지금 마리 드 트루아가 나오지 않는 쪽으로 대본 바꾼단 소립니까? 그럼 도대체 누가 나오지?" "막시밀리앵이 뒤뜰의 고양이와 사랑에 빠지는 걸로 써 드리죠." 사람들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기까지 했으므로 그들 스스로도 가관을 감상할 수 있었기에 조금 후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장 먼저 웃기 시작한 사람은 몰트 부인이었다. "하, 하, 하하. 내가 올해 들은 말 중에 가장 웃기는 말이었어." "이봐요, 몰트 부인. 저 친구 농담한 것 같지 않은데." "어때요, 웃기기만 하면 되지. 나 웃겨 죽을 것 같아, 쓰러질 것 같네. 하하, 하하하……." 조슈아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불쑥 노래를 불렀다. 숨어 계신 왕자님. 아니, 젊은 백작님 세레나데라니 우습죠, 하늘엔 달도 없고 여긴 장미 정원도 아니고 그리고 난 아가씨예요. 자는 체 하는 분 아니, 웃고있는 분 아님 찬송가를 불러야죠, 해도 떠버렸고 우린 슬픈 연인도 아니고 그리고 떠날 시간이에요. 우리가 함께 했던 지난 밤 아니, 실은 서로 속였던 밤 당신의 거짓말은 귀여웠죠, 난 다 알았죠. 진심을 숨길 수 있는 사람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당신의 동생들도 알던데요? 자, 이리로 내려와요. 여긴 장미 정원이 아니지만 앵초와 억새 정도는 있고 우리 둘의 죄를 사해 줄 사제도 턱시도 차림으로 지저귀고 있고 은 한 조각 나지 않아도 당신의 땅 그곳에 발 딛고 선 내가 있어요. 당신을 기다리며 선 내가 있어요. 노래를 그쳤을 때 주위가 고요해진 것은 물론이었다. 조슈아는 지망생들 쪽을 돌아봤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바로 막시밀리앵 역입니다. 시간이 없으니 저와 듀엣을 부르실 수 있는 분만 나놔주십시오. 안될 것 같은 분은 남은 배역이 단역뿐이니 그거라도 하려면 남으시고, 아니면 그냥 돌아가세요." 결과는 뻔했다. 남은 지망생들마저 다 나가버린 연습실에서 조슈아가 당황한 듯 중얼거렸다. "역시 뒤뜰의 고양이인가." "자기 노랠 듣고 남을 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잖아, 푸후훗." 몰트 부인의 목소리를 듣고 돌아본 조슈아는 아, 하며 말했다. "부인이 해보시는 게 어때요? 대본은, 막시밀리앵이 콩스탕스 부인의 돈과 중후한 매력에 홀려 결혼하는 쪽으로 ……." "도대체 대본을 뭘로 생각하는 거야!" "대본 정도 고치는 거야 어려울 거 있나요? 원하시면 하룻밤에 열 두 가지로도 써 드리죠." 몰트 부인은 지오반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저 말도 농담 같지 않네, 안 그래요?" "지금 대본도 하루인가 이틀만에 썼다잖습니까." 하지만 올프랑쥬는 나이든 사람들처럼 유연하지 못했다. 팔걸이를 탁 치며 일어선 그가 말했다. "농담도 정도껏 하시죠. 일정은 마음대로 짧게 잡아놓고, 제대로 만들 생각이 있기는 한 겁니까?대본 고친다는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몰트 부인께서 가르치시던 학생들 중에서 이 자리에 온 사람들이 제일 쓸만하다고 들었는데, 이런 식으로 쫓아버리고서 그보다 나은 사람을 어디서 찾을 생각인지? 오늘 내로 마리 역을 뽑을 다른 방법이 없으면 지금 조연을 맡기로 한 사람들 중에서 하나 고르는 수박에 없겠죠." 조슈아는 뜻밖으로 ㅆ기 웃었다. "그래요? 그럼 당신 생각엔 누가 좋을 것 같은가요?" 반은 순간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자, 누가 좋을 것 같은가요? 알베르띤느? 소피? 이렌느? 시녀장? 얼른 골라 봐요, 난 도저히 못 고르겠던데." "내 생각엔……." 반은 그녀들을 돌아보고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어떻게든 한 명을 지목하려 했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에겐 한 마디나 두 마디 노래만 듣고 그들을 파악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문이 열린 것은 그 때였다. 처음엔 몇 사람 돌아보지 않았으나, 곧 모두 돌아보게 되었다. 한 아가씨가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반에게 다가가 무릎을 냅다 걷어찼던 것이다. 동시에 커다랗게 외쳤다. "이젠 돌아온다 해도 절대로 받아주지 않을 거야! 어디 가서 좋을 대로 실컷 살아보라고!" 다른 사람이 있거나 말거나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태도로 쏘아붙이자마자 바로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간에는 아가씨를 뒤따라 온 듯한 에테른이 이 뜻밖의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해 보고자 당황한 사람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아가씨는 정말 앞도 안 보고 걸어간 것인지 에테른의 턱에 그대로 머리를 들이받고 화들짝 뒤로 물러나며 멈춰 섰다. "아아?" 모든 사람이 하던 생각을 멈춘 채 아가씨를 쳐다보았다. 그들 중 몇몇은 입까지 약간 벌리고 있었다. 그제야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아가씨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들쭉날쭉 숨을 내쉬다가 급기야 엉엉 울기 시작했다. "잠깐, 어, 이것봐요. 네? 올프랑쥬 양?" 에테른이 어떻게든 달래보려고 더듬거렸지만, 자식도 동생도 없는 그녀는 자상한 역할에 서툴렀다. 이네스 올프랑쥬는 누구한테 매달리려고도 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얼굴만 두 손으로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줄줄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도 반은 석상이 된 것처럼 그녀에게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무척 창피했던 모양이었다. 그 때 조슈아가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러면서 반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왜 싸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누이가 우는데 거기 서서 뭘 해요?" 이네스에게 간 조슈아는 키를 약간 낮추며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이봐요, 그만 울어요." "……." 이네스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에테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갑작스런 침입자를 데려온 셈이 됐으니, 조슈아나 다른 사람들이 오디션을 망쳤다고 화를 내도 할 마이 없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올프랑쥬 양'이라는 말 때문에 반의 누이라는 것이 밝혀져서 사람들이 화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울지 말고, 나하고 얘기 좀 해요. 할 얘기 있어요." 지오반을 비롯한 사람들이 이네스를 데리고 나가라고 에테른에게 눈짓을 보냈지만, 조슈아는 거꾸로 그녀를 데려와 의자 하나를 주어 앉혔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진자 할 얘기가 있거든요?" 이네스가 겨우 얼굴에서 손을 약간 떼며 눈물 벅벅이 된 눈으로 조슈아를 흘끔 보았다. 언뜻 보이는 얼굴이 또래였던 까닭인지 갑자기 챙피한 생각이 든 그녀는 도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어, 그러니까 얼굴 좀 닦아야겠네." 조슈아가 손수건을 꺼내 주자, 조금 후 손수건은 도로 빨아서 쓰고 싶지 않을 듯한 물건이 되어버렸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조슈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곁에서 지오반이 괴상한 표정으로 자기 손수건을 꺼내 내주었다. 그 손수건도 곧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다. "미안해요." 입속으로 중얼거리는 것 같긴 해도 한 마디가 나와서, 조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말하네, 이제 제 용건을 애기해도 되겠죠?" "용… 건이라니요?" "그러니까……." 조슈아가 말을 이으려 하는데, 무슨 생각을 한 것이지 이네스가 즉각 말을 가로챘다. "돈 없어요." 조슈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돈이라니?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돈은요, 오빠한테 청구해요. 오빠는 일자리를 얻었으니 얼마라도 받겠죠. 방해해서 미안해요. 그럼 저 갈게요." 이네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하자, 조슈아가 팔을 붙들었다. "기다려요! 말을 듣고 가야지, 자기 말만 하고 가버리면 어떻게 해요?" "하지만 난!" "돈 얘기 아니에요!" 이네스는 팔을 잡힌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조슈아를 내려다봤다. "그럼 도대체 저 같은 사람한테 무슨 볼일이 있어요?" 조슈아는 억지로 팔을 잡아당겨 그녀를 도로 앉히고, 눈을 꼭바로 보며 말했다. "오디션 봐요." "네?" 이네스도 놀랐지만 다른 사람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디션이라니?" 조슈아는 표정을 조금 부르럽게 했다. "조금 전에 소리 지를 때, 당신 목소리를 지극히 높이 평가했습니다. 실력을 알기 위해선 두 마디면 충분하죠." 그리고 사람들을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배불뚝이 제작자들은 흔히 어여쁜 배우 지망생 아가씨의 후원자가 되기 마련 아닌가요? 비록 제가 배는 안 나왔지만, 이 아가씨의 후원자가 되어볼까 합니다." 루시 에테른이 극장 수리가 되어 가는 상황을 살펴보고 나와 집으로 향한 시각은 저녁 7시였다. 기간이 촉박한 만큼 수리공들은 밤샘 작업을 할 예정이었다. 수리와 관련된 지불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결정된 스탭들과 면담을 통해 급료를 결정하고 작업기간에 대해서도 조율할 필요가 있었다. 그밖에 새로 필요한 스탭들을 위해서도 예산을 책정해 놓고, 그러는 동안에도 홍보를 위한 각종 구상이 머릿속에서 굴러갔다. 어쨌든 조슈아가 연이어 저질러 놓은 일들을 뒤처리할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밤이 되어 더위가 한풀 가신 거리를 가로질러 간 에테른은 가게에 들러 내일 먹을 빵 몇 덩이와 식료품을 조금 샀다. 그녀는 집에서 요리를 거의 하지 않았지만, 장은 직접 보는 경우가 많았다. 아버지와 둘이 살며 하녀 하나를 두고 있었고, 이 늙은 하녀가 두 부녀를 돌보았다. 장거리를 담은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걷는 동안에도 왼손에 든 종이 몇 장을 줄곧 흘끔거렸다. 거리에는 사람이 많았다. 몇 사람이 바구니 모서리를 치고 지나갔지만 에테른은 바구니를 놓치지 않았다. 늘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고 있지만, 뭔가 놓치고 떨어뜨리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는 그녀였다. 고작 빵이 든 바구니라 해도 야무지게 움켜쥐고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아갔다. 그리고, 맞닥뜨렸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얼른 깨닫지 못했다. 바구니 손잡이는 여전히 그녀의 팔꿈치 언저리에 걸려 있었다. 그러나 빵과 버터, 우유 한 통이 포석 깔린 바닥에 산산히 흩어졌다. 빵은 쓰레기 저미까지 굴러갔고, 쏟아진 흰 우유가돌 틈으로 흘렀다. "아?" 눈앞에 이런 남자가 서 있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여름인데도 팔이 긴 재킷을 걸치고 왼손엔 우산 하나 움켜쥐고 있었다. 이질적인 계절감 때문에 에테른은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다시 한 바구니를 내려다봤다. 팔에 걸린 손잡이 아래 완전히 찢어져버린 바구니의 잔해가 건들거렸다. 칼로 짖은 것도 아니고, 주먹으로 때려서 으스러뜨린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 아주 센 힘으로 붙잡고 찢은 것처럼, 그렇게 절반이 뜯겨나갔다. 남자가 말했다. "미안합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을 스쳐가고 있었다. 몇 사람은 쏟아진 우유를 흘끔거렸지만 큰 관심 없이 곧 멀어졌다. 에테른은 치맛자락에 튄 우유를 내려다봤다. 화가 치밀어야 할 텐데, 그리고 큰 소리로 따져야 할 텐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배상하지요." 남자가 왼손을 움직여 품속에서 은화 한 줌을 꺼냈다. 그러더니 바구니의 남은 절반에 스르르 떨어뜨렸다. 에테른은 은화의 짤랑임이 멎는 순간까지도 멍하니 있다가 문득 상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흰 얼굴에 인중이 또렸하고, 입술이 얇은 남자다. 옅은 금발이 귀 언저리에서 짤막하게 잘려 있었다. 선이 가는 턱과 움푹 들어간 뺨, 살짝 말려 올라간 입 끝, 보이는 것만으로는 음악가나 화가가 아닐까 싶은 생김새다. 모자에 가려져 눈은 보이지 않았다. "……." 에테른이 여전히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남자는 그녀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잠깐, 그러나 시선을 분명히 느낄 정도로 긴 시간. "그럼 이만." 예의바른 듯하지만 건조한 목소리로 말하고 남자는 그녀를 지나쳐갔다. 에테른은 조금 후 정신을 차렸다. 찢어진 바구니에 든 은화를 내려다보고, 고개를 몇 번 흔든 다음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스쳐간 것처럼 보인 남자가 몇 걸은 뒤에서 돌아서서 그녀를 보고 잇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들을 사람 없는 입술이 말했다. "조용한 여자로군 그래." 7. 술의 용도 "그대에게 권하는 술이 약이 아니듯, 내가 나시는 술도 독이 아니라오." 옛날 먼 옛날, 대륙 북주의 오를란드 공국에서도 배를 타고 더 북쪽으로 가야 하는 바다의 한 섬, 그 섬의 이름은 모르비앙, 다시 말해 '일 드 모르비앙(Ile de Morbihan)'이라고 했다. 섬은 작았고, 바람이 많았고, 성이 있는 언덕과 포구 골자기로는 날마다 파도가 기어올랐다. 그래도 바닷바람이 적게 닿는 깊숙한 곳의 손바닥만한 들판에는 작고 파란 사과가 열리는 과수원도 있었다. 날씨도 들쑥날쑥, 해가 비치면 구멍 같은 집에서 일제히 뛰어나와 빨래를 말렸다가, 북풍이 밀려올 즈음엔 치즈 물어 가는 생쥐보다 빠르게 걷어 사라지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었다. 곡식이 조금밖에 나지 않는 모르비앙 섬에서는 소와 양을 길렀다. 고기잡이도 했다. 그러나 북쪽 해안 근처에 있는 작은 은광이야말로 이 섬의 사람들을 먹여 살려온 근원이었다. 은광의 은은 주인인 백작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대부터, 또는 그보다 더 옛날부터 바닥이 없는 것처럼 나왔고, 오랫동안 이 작은 섬에 빵과 술 갖은 것에서부터 좋은 옷감과 도자기 그릇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들여올 수 있게 해주었다. 그 고마운 은이 갑자기 딱 끊어진 몇 년 전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런 상황을 한 번도 예상해 본 일이 없었던 백작은 흥청망청 쓰던 버릇을 갑자기 바꾸지 못하고 몇 년 더 살아가다가 덜컥 죽고 말았다. 백작가에는 여덞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맏아들 막시밀리앵은 열 일곱 상에 취주악과 붉은 주단은커녕 전날 저녁까지 입고 있던 윗도리에 아버지의 망토 한 자락만 걸치고 가보 하나 없는 가문을 물려받아 소년 백작이 되었다. 백작이 되자마자 가문의 재산을 조사해 보니 마지막 은 술잔 하나까지 다 써버리고 간 아버지 덕택에 남은 것이라고는 돌봐야 할 일곱 명의 동생과, 오랫동안 수리하지 않아 지하실로 파도가 들락거리는 낡은 성, 그리고 뒤주에 갇혀 굶은 쥐처럼 눈이 퀭해진 몇백 명의 백성들밖에 없었다. 어린 모르비앙 백작이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하긴 뭘 하겠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구만." "얘가 남의 얘기라고 막 하네. 뭔가 해야 스토리가 진행될 거 아냐?" "그거야 조군 자식이 알아서 하겠지 내가 알 게 뭐냐." 막시민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구부러진 테이블 다리에 발을 척 올려놓았다. 소란스런 술집이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언제 나타날지 분명치 않았기에 막시민은 느긋하게 술을 시켜 둔 참이었다. 테이블에는 맥주잔과 텅 빈 재떨이 외에도 대본 한 뭉치가 흩어져 있었다. 막시민은 첫 페이지와 둘째 페이지의 세 줄밖에 읽지 않았지만 벌서 다 파악한 것처럼 뒤로 물러앉아 어깨만 으쓱거렸다. "읽어보면 알 거 아냐?" "아, 아, 귀찮아." "그래도 친구가 쓴 건데 진지하게 평하지는 못하더라도 읽어보는 턱은 해야 하는 것 아냐?" "내 얘기라는데 내가 궁금할 게 뭐 있겠냐? 글 나부랭이 비평 따위 소질없다. 난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만 한다고." 막시민의 위아래를 훑어본 리체가 잘라 평가했다. "하긴 네가 지금 술을 마시고 있긴 하구나." 핵심을 찔렸는지 대구가 없던 막시민은 조금 후 괜스레 눈을 깔며 중얼거렸다. "술은 아주 기능적인 물건이야." 리체가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내가 보아온 바로는 술을 마셔 봤자 바보가 될 뿐이던데." "그거야 네가 옆에서 '보기만' 했으니 그렇지." "그럼 그거말고 무슨 기능이 있는 건데?" 막시민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감기에 걸렸을 때는 박하차가 좋지, 배탈이 나면 애기똥풀을 다려서 먹는다고, 두통에는 양귀비 진액을 조금 먹으면 무척 효과가 좋지, 잠이 안 오면 데운 우유 한 잔, 추위를 잊으려면 브랜디, 문제가 있으면 답이 있는 법. 그럼 화가 날 땐 뭘 먹을까? 슬플 때는? 짜증나는 일이 있으면? 하루 하루가 힘들고 답답할 때는 어때?" ㄹ체는 시덥잖은 소리를 한다는 듯 픽 웃었다. "술을 먹으면 그런 게 해결된단 말야? 웃겨, 그래봤자 일시적으로 기분이 좋아진지는 몰라도 옆 사람이 보기엔 바보가 됐구나 싶을 뿐이고, 다음날 아침엔 괜히 머리만 아픈 거 아니니?" 막시민은 어깨를 움츠리며 키득 웃었다. "마셔본 것처럼 말하네." "그래, 나도 마셔봤다. 아무 쓸 데 없더라." 문득옛날 생각이 났는지 리체는 탁자에 팔꿈치를 짚고 턱을 괴며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막시민이 보니 처음 만났던 때보다 많이 해쓱해진 옆얼굴이 언뜻 눈에 걸렸다. 그게 내 탓인가, 조슈아 자식 탓이지… 하고 생각하며 다시 술잔을 드는데 리체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척 멀리 와버렸네. 여기가, 그러니까 두르넨사지. 생각보다 잘 적응하는 나한테 놀랐어. 집이 아니어도 잠도 잘 자고, 남의 나라 음식도 잘 먹고, 아프지도 않고… 술이 필요한 일도 없네 네가 말한 대로라면 말야. 화도 안 나고, 슬프지도 않고." "바보는 감기에 안 걸린다는 말 알아?" 막시민이 불쑥 말하자 리체가 턱을 괸 채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지금 바보라고 말하려는 거야? 그리고 바보가 왜 감기에 안 걸리니? 바보도 사람인데?" "바보는 말야, 감기에 걸려도 모르기 때문에,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파서 쓰러지면 그때나 알까." "막시민, 너……." 리체가 발끝으로 걷어차려 했기 때문에 막시민은 가볍게 의자를 뒤로 물렸다. "너 정말 혼나볼래!" "술이나 마셔." 그렇게 말하며 막시민은 지나가던 급사에게 맥주 한 잔 더 달라고 했다. 리체가 쏘아붙였다. "안 마신다니까!" "감기에 걸린 줄도 모르는 녀석이, 약을 주면 잠자코 있어." 거품 그득한 맥주가 날라져 와 놓이자 리체는 마시지 않는다고 소리친 건 잊어버렸는지, 빤히 바라보다가 번쩍 들어 숨도 안 쉬고 일곱 모금이나 삼켰다. 탁자에 탕 소리가 나게 내려놓더니 고개를 숙이고 잠시 숨을 골랐다. "잘 마시네. "그래. 걸린 줄도 몰랐던 감기가 낫나 어디 보자고." 리체가 약 효과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눈썹에 잔뜩 힘을 주고 도사려 앉아 있었으므로, 막시민은 목을 이리저리 움직여 풀다가 입 한 쪽으로 '쯔읍' 하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꼭 먹으면 죽는 약 먹고 반응 오길 기다리는 사람 같네." "참견 마, 사람마다 마시는 방법도 다른 거 아냐?" "다르다기보다는, 음, 기발하구만." 리체의 표정은 점차 달라져 갔다. 눈썹을 찌푸렸다 폈다는 반복하다가 코를 찡그렸고, 그 다음엔 입술을 깨물었다가 풀었다. 그렇게 서서히 변했기 때문에 막시민이 상관하지 않고 혼자 술을 마시게 됐을 즈음, 리체는 갑자기 입을 얼었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니야. 조슈아는 조금 더 일찍 얼굴이라도 봤지만, 너랑 안 건 한 달이나 된 건가? 어쨌든 좋아. 날자가 중요한 건 아니지. 우린 참 악연이었어. 만나선 안 될 사이였지. 처음에는 좀 이상한 인연이네, 내가 운이 없었나, 정도의 생각이었지만 조슈아가 혼수상태였을 때 지배인님네 시계포 2층에 앉아서 네 얘기 들으면서 생각이 점차 바뀌었지." 리체는 잠깐 말을 끊더니, 막시민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어조를 높였다. "그 때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아?" 어쩐지 대꾸해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떻게 생각했는데?" "둘 다 똑같이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 이런 일 벌어지기 전에 어디 가서 콱 죽어버릴 것이지, 그렇게 안 된다면 나라도 죽여버려야겠어." 막시민은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애써 표정을 바로잡으며 말했다. "물론… 너로선 남의 일에 말려들어 날벼락을 맞게 됐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날벼락뿐이야? 너희 두 녀석은 그래 놓고도 자기 고민뿐이고 내 문ㅈ는 풀 코스 정찬 다 끝나고 나오는 코딱지만한 푸딩 취급했지. 세상 고민은 지들이 다 뒤집어쓴 것처럼 조슈아 걔는 날마다 이게 고민이고, 저것 때문에 괴롭고, 그럼 너는 너만 괴롭냐, 나도 괴롭다고 야단치고, 엄청 잘난 것처럼 잔소리 퍼부어 대지만, 내가 보기엔 너도 자기 잘난 것을 감당 못해서 코끝으로 비웃음 날리는 종류지 뭐." 그런 말을 표정도 한 번 바꾸지 않고 또박또박 하고 있으니 막시민은 어느 시점에서 말을 끊어야 할지 몰랐다. 리체 입장에서 불만이 없다면 이상하 상황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적나라하게 말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기에, 그로서는 드문 일이었지만 말문이 막혀 일방적으로 듣고만 있는 꼴이 되었다. "그런 주제에 내가 필요할 것 같은 일이 있으면 빠짐없이 써먹었지? 말도 못하게 멋있는 두 사람 사이에 끼여서 내 일이 뭔지도 잊어버리고, 둘이 싸우면 중재해줘야 되고, 내가 이랬다저랬다 하고, 말한 것도 다 잊어버리는 성격인 것 같지?" "아니……." "맞아, 나 잘 잊어버려. 머리는 별로 좋지 않고, 그럴듯한 생각도 못 해내는 얘야. 그렇지만 말야. 너희들은 감기 걸렸는지도 모르는 바보가 아니잖아? 너희들은 똑똑하잖아? 그러면서 내 입장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것처럼 자기들 본연의 고민에만 너무 충실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라고, 물론 너나 조슈아나 그리 편안하게 살고 있는게 아니란 거 알고, 당장 조슈아에게 닥친 일이 크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사실 그게 나랑 상관 있니? 두어 달 전만 해도 열심히 바느질이나 하면서 하루하루가 빨리 가서 얼른 봉급날이 오기만 기도하고 있던 나야." 리체는 다시 술잔을 들어 두 모금 정도 마셨지만 손이 흔들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 다 좋아. 넋두리는 그만두자고, 더 떠들어 봐야 전에 했던 사과 또 들을 뿐인데 그딴 게 뭐 그리 큰 의미가 있겠어? 하지만 돌이켜 보니 재미도 있었으니 됐다는 식으로 마무리하려는 것도 아냐, 나라고 너희들 속을 다 알겠어? 하지만 분명한 건, 막시민 너는 반경 안에 들어온 극소수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될 대로 되란 식을 대하는 얘야, 그 반경도 무척 좁아서 한 달쯤 같이 지낸 걸로는 어림도 없고, 그래도 나름대로 괜찮은 건 반경 안에 든 사람은 아주 끔찍하게 여긴단 거지. 뭐, 따지자면 어차피 난 그 반경에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말야." "……." 막시민은 마시던 술잔을 다 비웠다. 그가 칼라이소에서 지내는 동안 얼마나 자주 이곳에 왔던지, 주문도 안 했는데 어느새 급사가 와서 가득 찬 술잔을 내려놓고 갔다. 조슈아는 죽도록 바쁜 모양이지만, 그에겐 한가한 나날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조슈아는……." 막시민이 고개를 드는 바람에 리체는 말을 끊었으나, 곧 이었다. "너보다 더 심해. 심지어 자기한테 미쳐 있다고, 난 가끔 걔가 무서워. 너에 비하면야 예의도 바르고, 평소에 착하고, 얘들처럼 순진하게 굴지만 본질에는 구멍이 뻥 뚫려 있는 것 같아. 이상항 세계로 통하는 구멍, 보통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거 말이야." 리체는 다시 한 모금 마셨다. "그래, 어쩌면 넌 나한테 한 가지는 좋은 일을 했어. 슬프고 화나는 나한테 약이랍시고 술이라도 줬잖아. 술맛이 어떤 건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막시민은 안경다리를 만지작거리다가 벗어 테이블에 놓고 눈가를 비볐다. "남의 얘긴 그만하고." 리체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막시민은 옷깃으로 안경을 닦고 있었다. "네 얘기나 해보는 게 어때? 내가 묻자. 너 여기서 요즘 뭘 하냐?" "뭘 하다니? 내가 할 일이 뭐가 있니?" "네가 한가하게 지내지 않는다는 거 알고 있어. 빌어먹을 두 녀석 때문에 엉뚱한 데로 끌려왔지만, 너는 너잖아? 두 녀석의 고민이 뭐였든, 너의 살아가는 방식이 있는 거지. 너, 할 일이 없다고 나날을 휴가처럼 보내는 녀석이 아니잖아." 리체가 얼른 대답하지 않자 막시민이 한 마디로 물었다. "다 했냐?" "……제대로 된 건 하나뿐이야." 막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넌 그렇지. 살아 있는 한 자기 방식을 버릴 수도 없고, 버릴 필요도 없는 거야. 솔직한 얘기 하나 하자. 난 네가 누구 못지 않게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 이번엔 리체 쪽에서 말이 없었다. "너의 힘은 네 손끝에 있지. 무언가를 잇고, 매듭짓고, 가다듬어 놓지. 다른 사람이 그걸 할 수 없다고 말하려는 게 아냐. 넌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는 거야. 손끝으로, 작지만 아주 구체적이고, 완전한 세상을 창조하는 거지. 네 목소리를 내는 방법은 추상적인 속삭임이 아니라 무척 뚜렸한 거지." "왜 갑자기 그런 소릴 하니? 나한테 미안한 마음에 칭찬이라도 해야겠단 생각이라면 그만둬. 기쁘지 않으니까." "내가 그렇게 그럴싸한 생각을 해낼 녀석으로 보이냐? 끝가지 듣기나 해. 다시 말해, 넌 그렇기 때문에, 조슈아 같은 괴이한 능력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일 순 없는 거야. 뚜렷하고 꽉 짜인 것, 모순 없는 것에 능숙한 사람이니까 저도 모르게 불가지한 힘에 대한 이해를 거부해버리지. 언뜻 보면 잘 적응해서 평범한 사람 대하듯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조슈아가 아닌 조슈아를 닮은 인형과 지내는 셈이라고." "갑자기 왜 조슈아 얘길 하니? 나하고 조슈아가 무슨 상관인데?" "너, 질투하잖아." 리체는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처럼 움찔, 하다가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대꾸했다. "내가? 무슨 소리야? 나처럼 머리도 나쁘고 잘하는 거라곤 바느질밖에 없는 얘가. '데모닉'을 놓고 질투가 가당키나 한 소리니? 너 정말 이상한 소릴 하는구나." 막시민은 입가에 미소 비슷한 것을 머금었다. "이봐, 다리 밑에서 먹고 자는 거지도, 사실은 다리 위로 행차하시는 공주님을 질투하고 있다고 질투는 모든 사람의 천성 같은 거야. 질투하는 데 가진 능력의 격차는 중요한 게 아니지. 다만 사람 성격에 따라 얼마나 진지하고 강렬한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당연한 얘기지만 데모닉은 모든 사람의 질투, 다시 말해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본질을 타고났지. 그런 존재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세계가 이지러지는 모양을 보게 왜. 강한 자 옆에 있는 거처럼. 자신의 안전한 세계의 귀퉁이가 일그러져 버리는 거야. 그러니 누가 좋아하겠어? 게다가 우린 매우 가까이 있어 너도, 나도." "너도" 막시민의 미소가 일순 시니컬해졌다. "나조차도 그 녀석을 전적으로 좋아하지만은 않으니 말이다." 리체의 눈이 약간 커졌다. "그래도 난 녀석을 어려서부터 봐왔지. 쓴맛에 익숙해지는 것처럼, 녀석이 이미 익숙해. 하지만 넌, 아마 자신이 느끼지 못한다 해도 많이 놀랐을 거야. 네 세계 전체가 놀라는 거야. 속이 어떻게 생겨먹었든, 자신의 세계는 아주 소중한 거니까. 귀퉁이라도 찢어질 것 같으면 비명을 지르며 방어적인 자세가 되고, 때론 선제 공격도 가하게 괴는 거지." 리체는 가만히 있다가 기분 나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말은 알겠어. 하지만 이젠 그만둬. 그래봤자 달라지는 게 머 있니? 확인하면 마음만 아프지. 난 물론 내가 데모닉처럼 대단한 존재가 되길 기대한 적은 없어. 하지만 네 말대로 옆에 있으면 내 세계가 초라해져서 기분이 나빠. 그런데 내가 와 그의 옷을 만들고 있을까? 이거야말로 정말 불가사의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돈도 안 생기고, 그 사람을 좋아해서 무보수 노동을 자청한 것도 아니고, 왜 할까?" "하는 게 즐거워?" "아? 음……." 리체는 옆 테이블을 곁눈질하며 잠깐 생각하다가 명쾌하게 답했다. "맞아! 재미있어. 본래 옷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 얘의 옷을 만든다고 생각했을 때 훨씬 더 열의가 생기는 것 같거든. 입혀볼 것을 생각하면 흥미진진한 생각도 들고. 뭐, 입을 것 같진 않지만… 아! 역시 그래서 만들고 있는 건가? 그런데 왜 다른 옷보다 더 재밌는 걸까?" "사랑에 빠졌냐?" "미쳤어?" 둘 다 농담인 걸 알기에 혀를 내밀며 피식 웃었다. 막시민이 말했다. "내 생각엔, 이런 심리가 아닐까 싶은데, 네가 그릇을 만드는 사람이라 치자. 그런데 네 그릇에 나라 최고의 왕실 요리사가 만든 요리가 담길 예정인 거야. 그러면 만들 때 더 흥미롭지 않겠냐?" "어… 그럴 것도 같은데, 하지만 그게 전부란 말야?" 막시민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전부냐고 말할 정도로 단순한 게 아니라고. 만약 자기 그릇에 자부심이 없다면, 거기에 훌륭한 요리가 담기고 왕과 왕비가 맛보는 만찬에 나간다는 소리를 들으면 겁이 나고,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창피할 거 아니겠냐? 하지만 자신이 있으면 이야기가 다르지." "그럼 그 말은, 내가 내 옷에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가장 훌륭한 배우에게 입히고 싶어하는 것이고, 그가 입게 되는 상황을 겁내지도 않는 거란 말이야? 아……." 리체는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생각에 잠겼다. 막시민은 그녀가 생각을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난 아직 나이도 어리고 미랭게트 선생님처럼 디자인을 능숙하게 하지도 못하지." 한참만에 입을 연 리체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 채 양쪽 손가락 끝을 마주 댔다 뗐다 했다. :하지만 앞으로 잘 할 수 있으리란 기대만은 확실히 갖고 있어. 데모닉은 아니지만, 언젠가 나도 뭔가 되겠지. 그래, 자부심이 없다면 질투 같은 건 왜 하겠어. 질투 같은 말은 인정하기 싫은 단어지만, 나도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 질투에서 벗어나서 내 가치를 입증해보겠다고 아둥바둥한 거 아닐까나, 미쳤는지 이 와중에 옷도 세 벌이나 만들고, 두 갠 버릴 거지만." "그 새 세 벌이나 만들었냐?" 막시민은 놀란 시늉을 하더니 갑자기 잇맛을 쩝쩝 다셨다. "이거 나만 놀고 있는 거 같네." 리체의 얼굴은 한결 나아 보였다. 그리고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진 모양이었다. 막시민은 넌지시 떠보았다. "그런데 아까 너 처음에, 그거 술 취해서 한 소리 아니지?" 리체는 턱을 쳐들며 당당히 대꾸했다. "그럼 한 잔 먹고 취하는 사람도 있니?" "쩝, 잘도 말하는군." "더 듣고 싶으면 얼마든지 말해." "아니, 사양이야. 듣자니 무척 곤란한 기분이더군." "네 성격에 곤란은 무슨." 그런 말을 나눴지만, 묘하게도 둘 다 기분이 상항 얼굴은 아니었다. 리체는 속 시원하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아진 모양이고, 막시민은 납득할 만한 이야기를 들어 별 불만 없는 얼굴이었다. 원망 듣는 데 익숙한 인생을 살아온 그이기도 하고 말이다. 남은 술을 한꺼번에 마셔버린 막시민은 갑자기 입구 쪽을 바라보며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어이, 여기요!" 리체가 돌아보니 키가 큰 남자 한 사람이 보폭도 넓게 걸어 들어와 맞은편 자리에 앉는 모습이 보였다. 막시민이 삐딱하게 상체를 세우며 입을 열었다. :항해사를 구하고 싶은데." 남자는 스무 살 정도 도니 사람으로, 막시민이 하는 말로 보아 일종의 브로커가 아닐까 싶었다. 항구에서 뱃사람을 구하는 선주나 선장을, 놀고 있는 선원들과 연결해주는 사람, 물론 돈 떼인 사람과 돈 먹은 사람을 연결해주거나, 상대를 놓친 원수들을 서로 연결해 주기도 하는 사람 말이다. 남자는 손을 흔들어 맥주 한 잔을 시켜놓고는 팔짱을 꼈다. "항구에 항해사야 널리고 널렸지. 제대로 된 놈을 찾기 힘들 뿐, 몇 가지 말해 보라고." "초보 선원 서넛 데리고 선장 노릇 할 수 있을 정도는 필요한데, 나이는 서른 미만으로, 젊을수록 좋고, 두 달 정도 일할 수 있으면 되고, 될 대로 되라는 낙천적인 성격이면 더할 나위 없겠어. 참, 돈은 섭섭하지 않게 줄 수 있고." "어이, 그 정도면 조건이 꽤 까다롭군. 능력 있는 자는 나이를 먹었고, 젊은 놈들은 쓸모가 없지." 남자가 자기 정보의 가치를 올리고 싶은지 얼른 대답하지 않고 꾸물대고 있는 동안 리체가 막시민에게 입술만 움직여 물었다. '또 하늘에서 떨어져 바다에서 지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거지?' '두 번은 절대 싫다.' '돈은?' '조군 녀석이 벌어 올 텐데 뭐가 걱정이냐.' 그 때 남자가 말했다. "적당한 사람이 하나 있긴 해, 그런데 딱 한 명뿐이거든. 그 친구가 다른 일을 하는 중이라면… 빼오기가 힘들지." 결국 웃돈을 내놓으라는 얘기일 게 뻔했다. 막시민은 관대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불은 넉넉히 한다고 했잖아. 데려오기나 해 줘." "그럼 연락을 취해 볼 테니까, 돈이나 착실히 준비해 놓으라고, 시간은 좀 걸리지도 몰라." "나흘 드리지." 그렇게 말하고 일어선 막시민은 나가면서 남자가 시킨 맥주 값도 계산했다. 이 동네의 생리에 익숙한 사람처럼 거리낌없는 태도였다. 밖으로 나았을 때 리체가 말했다. "너도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거네. 어쩌면 너만 할 수 있는 일이고." 막시민은 웃지 않고 그냥 입 끝만 조금 올려 보였을 뿐이었다. 극장가를 가로질러 가는 길은 불빛이 휘황했다. 그 길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막시민이 중얼거렸다. "이제 개막일까지, 닷새 남았나." 리체는 막시민을 흘끗 보더니 자신도 거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때까지 별 일 없으면 좋으련만." 감상적인 기분이 된 리체와는 달리 막시민은 벌써 새로운 실질적인 문제에 집중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는 거리 저편에 불 켜진 여관을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은 생각이 났어. 잠깐 여관 순례 좀 하자." 8. 두 소녀의 비밀 놀이 "풀밭에 누워서 구름을 보았지. 구름이 해를 가려 서늘한 이곳에 그 애의 땋은 머리는 풀 꽃 속에 놓이고 내 곱슬머리엔 나비가 앉는 언덕. 내겐 딱 한 번 친구가 있었는데 해가 났을 때 그 앤 이미 없었지. 구름 그림자 보며 옷 털고 일어나니 묘석엔 이미 노을이 걸렸어라." 지붕 밑 방이라고 해야 할까, 극장이란 곳의 구조가 흔히 그렇듯 층을 정확히 나눠 말하기 어려운 그 방은, 천장 높은 공연 홀 위에 초승달처럼 길게 휘어진 모양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창은 있지만 보통은 차양막으로 그늘 져있고, 좀약 냄새가 아련히 감돌며, 한나절이 가도록 들여다보는 사람도 없는 곳이니 숨바꼭질하는 아이들이 좋아할 비밀과 미로와 숲, 모두를 갖춘 곳인 셈이다. 수백 벌의 옷으로 만들어진 그 숲은, 숨바꼭질하기엔 너무 커버린 소녀가 거닐었다. 손끝이 스칠 때마다 빛을 머금은 의상들이 바스락거리며 고요를 깼다. 산호빛 부푼 소매, 얌전한 여우털, 금갑충의 외투를 빌린 광대와, 은빛 꽃이 박힌 청비단과, 건드리면 살아있는 것처럼 떨리는 파팅게일(Farthingale)이 내는 소리들, 무희들을 요정으로 만드는 레이스와 베일로 가득 찬, 여자아이라면 분명 홀리고 말 것 같은 이곳을, 탄성도 한숨도 없이 마룻바닥 밟는 소리만으로 지나가는 아이라면 분명 바늘과 실을 아는 재봉사다. 옷들 사이로 속삼임이 퍼져나간다. 옷의 목소리를 꿈결처럼 엿듣는 것이 아니라 뚜렷하게 알아듣고, 손을 내밀어 집어내고, 필요하다면 수십 조각으로 잘라내기도 하는 재봉사가 왔다고. 옷걸이의 열은 여럿이어서, 돌아다니고 있자니 마치 회양목을 네모지게 다듬어 놓은 정원 사잇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스르륵 건드리며 지나가던 리체의 손에 한 벌이 잡혔다. 옷걸이에서 벗겨 내어 들어 보더니 금방 눈살을 찌푸렸다. 하얀 가슴판에 생긴 묵은 얼룩은 지우지도 않았고, 러플(ruffle)이 접한 곳마다 먼지가 하얗게 앉은 형편이니 옷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올 수 없었다. 다른 것들도 상당수 마찬가지였다. 여우털은 군데군데 좀이 슬었고, 접시 모양의 목둘레 칼라는 싸구려 천으로 지었는지 바이어스가 닳아 너덜거리고, 가짜 금색 비단은 조금씩 거무스레하게 변하는 중이고, 고르게 이어져야 할 망사는 꿰매 이은 자국 투성이다. 구두는 짝이 안 맞는 것들 끼리 뭉쳐져 있고, 어떤 옷은 몇 년은 꺼내보지 않았는지 반쯤 삭았고, 그나마 자주 꺼낸 듯한 옷도 정리되지 않은 모양새로 뭉텅 쌓여 있는 꼴이 보였다. 아마 제대로 관리하는 사람도 없을 테고, 필요할 때마다 아무한테나 이 옷 저옷 만들라고 했다가 필요 없어지면 쌓아 두고 잊어버리는 무신경한 극장의 전형적인 보관실이었다. 하지만 청소부만은 부지런한 것인지 바닥은 먼지 없이 말끔했다. 한참 둘러보던 리체는 지친 듯 바닥에 주저앉아 다리를 펴고 종아리를 두드렸다. 치마를 입고 있었지만 주위에 아무도 업을 테니 상관없었다. "까다로운 조군이 봤으면 다 갖다 버리라고 했겠네." 조금 있다가, 다시 중얼거렸다. "내가 여길 왜 와서 이러고 있담." 그 때, 옷이 잔뜩 걸린 봉 너머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큰 소리는 아니고 강아지 한 마리가 주춤, 하다가 앉았나 할 정도였지만, 분명히 있었다. 리체는 무심코 놀랐다가 곧 놀랄 필요가 없지, 하고 마음을 고쳐먹고 상대를 불러보았다. "거기 누구세요?" "에……."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가 나오다가 멈췄다. 언뜻 들어도 여자이아였다. 또래일 것 같다고 생각한 리체는 일어나서 맞은편으로 가보려다 옷이 줄줄이 길게 걸려 있어 빙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떠올리고, 허리를 굽혀 마룻바닥과 걸린 틈새를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자기처럼 주어잖아 있는 소녀의 빈약한 다리와 치마가 눈에 띄었다. "넌 누구니?" "넌?" 소녀도 눈치를 챘는지 비슷한 자세로 허리를 굽혀 이쪽을 들여다봤다. 곧 눈이 마주쳤다. 얼굴은 반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서로를 알아볼 정도는 되었다. "아, 너 어디서 본 것 같아. 누구더라?" "…나도." "난, 리… 밀라르라고 하는데." 가짜 이름을 쓰고 있다는 것을 깜빡 잊고 본명을 말할 뻔했지만, 겨우 제때 생각해낼 수 있었다.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쥬스틴느 양이구나. 사람들한테 네 얘기 들었어." "쥬스틴느가 아니라 쥬스탕트야." 어느 쪽이든 어차피 남의 이름이었지만 그래도 고치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았다. "아, 미안해." 차분하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보아 이 소녀는 리체와 성격 자체가 다를 듯했다. 소녀는 허리를 굽힌 자세가 힘든지 허리를 앞뒤로 비틀어보다가 말했다. "난 이네스야. 이네스 올프랑쥬." 리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럼 네가 그 마리 드 트루아?" "잘 아는구나." 이네스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리체도 마주 미소를 보였다. "얘기 들었어. 네가 큰 소리를 질러서… 오디션에 합격했다면서, 너 목소리 되게 좋은가봐." "별로 안 그래. 지금 들어보면 알잖아." 리체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글쎄, 솔직히 그런 거 알아들을 귀가 없어서 모르겠어." 대답이 너무 솔직했던 건지 이네스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리체는 별로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그런데 넌 여기 왜 온 거야?" "그냥, 옷 좀 구경하려고, 나 무대에 서본 적 없거든. 이런 데 와본 적도 없고, 그래서……." "하지만 구경할 게 거의 없잖아?" 이네스가 조그맣게 웃었다. "맞아." 조금 후 이번엔 이네스가 물었다. "쥬시탕트 양은 여기서 뭐 했어?" "난, 음… 그러니까… 잘 모르겠네." "으응?" 이네스가 이상항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리체는 아랫입술만 좌우로 움직이다가 불쑥 말했다. "우리, 이 자세 좀 힘들지 않니?" "아… 그런 것 같아." "내가 해결책을 보여 줄 테니 따라해 봐." 리체는 굽혔던 허리를 펴고 몇 번 두드리더니, 갑자기 풀썩 뒤로 누워버렸다. 얼굴의 위치는 바뀌었지만 옷과 마루 사이로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같았다. "이래도 똑같지, 어때?" 이네스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잠간 시간이 흐르고, 이네스도 리체와 똑같이 눕는 것이 보였다. 고개를 돌리자, 두 소녀는 마주보게 되었다. 먼저 웃은 사람은 이네스였다. "푸후훗……." 리체가 따라 웃기 시작하자 조용하던 의상 보관실은 작은 키득거림으로 가득 찼다. 그렇게 얼마간 웃고 나자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졌다. 리체는 곤란한 질문을 받기 전에 먼저 질문을 던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아까 말야, 사람들이 내 얘기 했다고 했잖아, 그 사람들이 누구야?" "같이 준비하는 분들이지 뭐." "그… 말 없고 점잖은 음악가 할아버지나, 까다롭지만 감동 잘 하는 배우 아줌마, 잘생기고 얌전한 피아니스트 오빠, 성격 괴상하고 아무 데서나 건들건들 춤추는 안무가 아저씨, 뭐 이런 사람들?" 이번에는 이네스의 웃음소리가 컸다. 하지만 금방 멈추고는 말했다. "네 말이 핵심을 찔러서 웃었어. 그렇게 생각한 적 없지만, 네 말 듣고 보니 딱 그런 것 같네. 응, 맞아, 그런 사람들이지." 리체는 이상한 열의가 생겨서 다시 물었다. 최근 자신에 대한 평가에 민감해져서 무슨 얘기든 듣고 싶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뭐라고 했는데?" 그러나 이네스의 대답은 예상에서 완전히 어긋났다. "제작자 님의 여자친구라고……." "풉!" 리체가 갑자기 천장으로 고개를 돌려서, 이네스는 상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조금 후 대답이 들려왔다. "내가 이미 누워 있어서 다행이야. 놀라 자빠지지 않을 수 있어서. 아냐, 그럼 벌떡 일어났어야 했을까, 하여간에 어이없어. 그런 소릴 누가 제일 먼저 한 거야? 자기들 멋대로 잘도 만드네." 그 말만으로도 충분히 답이 되었지만, 이네스는 조금 후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그럼 아닌 거야?" "당연하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같이 다니면 다 사귀는 거니?" "그럼 사귀는 것도 아닌데 왜 같이 다녀?" 리체는 말문이 막혔다. 이걸 뭐라고 설명한다? 미친 살인자가 쫓아와서 다같이 도망가는 중이라고? 이네스가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어쩔 수 없으니 대강 얼버무려야 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막시민이 했던 거짓말이 생각났다. 아, 그게 있었지. "음, 우린 사실 그렇게 잘 아는 사이가 아냐. 각자 다른 저택에서 다른 귀족들을… 응, 주인님들을 시중드는 처지지만, 음… 그분들이 이상한 내기를 해서 항해를 나온 건데 그럭저럭 다니다 보니까… 왜, 그런 거 있잖아. 그냥 같이 지내다 보니 저절로 친해진 거." 막시민처럼 능숙하게는 아니라 해도 그럭저럭 설명했다 싶었는데 이상하게 이네스가 눈을 크게 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주인님을 시중든다고? 그러면… 제작자 님도? 그 분도 시종이란 말이야?" 그제야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저 얘는 칼라이몬이 아니고, 당연히 칼라이몬에게 했던 거짓말을 알 리가 없다. 칼라이몬이 그런 이야기를 동네방네 떠들었을 것 같지도 않고, 더군다나 이 얘는 최근에야 극장에 오게 된 입장이 아닌가, 다시 말해 자신은 엉뚱한 헛소리를 떠든 셈이 된 것이다! "아, 그, 아니야, 좀 달라, 시종이 아니라… 아주 신임 받는… 비서가 아니고… 음악가야! 귀족들은 훌륭한 음악가들을 후원하잖아? 조군은 노래를 잘 하니까, 귀족들의 성에서 노래도 부르고 그러는 거야. 시종보다는 훨씬 중요한 일이지." 말이 된 건가? 옆을 흘끔 보니 이네스는 어쩐지 안도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구나." 그 얼굴을 보전 리체는 문득 기분이 이상해졌다.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이유를 정확히 몰랐다, 왜지? 하지만 이네스는 기분이 좋아진 듯 계속해서 말을 붙였다. "그런데 쥬시탕트 양은 제작자 님은 '조군'이라고 부르는구나. 여자친구가 아니어도 역시 친하긴 한가봐. 난 처음부터 이런 관계로 만나서 그런지 나이가 엇비슷해도 좀 어렵게 생각되거든. 노래도 배우고 있어서, 어쩌면 선생님 같기도 해. 편하게 말할 수 있어서 좋겠다. 참, 그런데 제작자 님은 취향이 까다로워? 여기 옷이 좀 지저분해졌긴 하지만 세탁만 하면 참 예쁠 것 같은데……." 리체는 저도 모르게 툭 쏘았다. "까다롭고말고, 안목이 무척 높지. 직접 디자인도 할 정도라고, 물론 걔가 디자인하면 죄 없는 재봉사 여럿 죽어나갈 테니 굳이 시키진 않는 편이 좋을 거야." 말하다보니 옛날 생각이 떠올라 말이 더 퉁명스러워졌다. 이네스는 즉시 알아챘다. "내가 기분 나쁘게 했니? 미안해, 왠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사과하는 목소리를 듣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억지로 입가를 미소 비슷하게 만들며 말했다. "그게… 나 사실은 재봉사라서." "재봉사야?" 재봉사라면 별 것 아닌 허드렛일꾼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이네스는 무척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와, 대단한데. 그런 여기 있는 이런 옷 만들 둘 아는 거야?" 아니, 이런 건 아직 못 만들고… 라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 전개이고 겸손하게도 보였을 테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았으므로 리체는 대꾸했다. "여기 것들보다야 잘 만들지." "정말? 그럼 여기서 일하는 의상 담당자보다 더 잘 만드는 거야? 너 정말 대단하구나. 네가 이번 의상도 만들게 됐으면 좋았을 텐데." 픽 비웃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네스는 정말 곧이듣는 태도였다. 상대가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소녀였다. 실제로 거짓말이 아니었지만, 리체는 약간 어색해졌다. 자화자찬 같은 거, 취미가 아닌데. "실제로 보기도 전에 그렇게 감탄하지 말라고, 그냥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잖아? 잘났다고 떠드는 사람들 말을 다 믿는대서야 세상에 멍청한 사람은 한 명도 없겠지." 이네스가 푸훗, 하고 웃었다. "너 참 희한하다. 그렇게 말하면 널 믿지 말란 얘기가 되잖아. 하지만 네가 거짓말쟁이라면 그런 말은 안 할 테니까 역시 널 믿을게." 이네스도 단순한 바보는 아니었다. 리체는 약간 얼굴을 붉히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네스가 말했다. "내가 왜 그렇게 감탄했냐 하면, 난 바느질 정말 못하거든, 예전에 엄마 살아 계실 때도 늘 야단맞았어. 엄마는 항상 말씀하시길……." "나중에 삯바느질이라도 할 줄 알아야 굶지 않지, 라고 하시지 않았어?" "어머? 혹시 너희 엄마도?" "세상 가난한 엄마들의 레퍼토리가 다 똑같지 뭐." 두 소녀는 누은 채로 허리를 구부리며 킥킥 웃어댔다. 자라온 것은 달랐지만, 처지가 똑같다는 것이 왜 이렇게 우스운지 몰랐다. "수를 놓다보면 실이 꼬여버리고, 매듭을 지으면 축 늘어져 있고, 뜨개질을 하다보면 너무 꽉꽉 당겨서 도로 다 풀어야 했지. 엄만 나한테 손에 호박을 달고 다닌다고 그러셨어." "무거운 호박을 매달고 있으면 손을 제대로 못 놀릴 것 아니겠어. 손재주가 없고 더듬거리는 사람을 놀리는 말인 거지. 하필 호박인 건 호박이 둔하게 생겨서일 거야." "그 말 되게 웃긴다. 우리 동네엔 그런 말 없었는데." "있었다 해도 쥬시탕트 양은 그런 말을 들을 기회가 전혀 없었을 텐데 뭐." "자꾸 쥬시탕트 양이 뭐야, 그냥 음… 밀라르라고 해." "그럴게, 아, 그러니까 알았다. 밀라르는 재봉사니까 여기는 옷을 얼마나 잘 만드는지 보러 온 거구나? 근데 보고 실망했나보네. 배울만한 게 없어서." "그런 건 아니고……." 옷을 살펴보러 온 건 맞았다. 나름대로 충분히 이유가 될법했다. 그러면 어째서 이네스가 '여기 왜 왔느냐'고 물었을 때 그렇게 대답하지 않은 까닭이 뭘까? 어째서 잘 모르겠다고 말해버렸을까? 대륙이서 의상실이 가장 발달한 곳은 아노마라드의 수도 켈티카, 그리고 그 다음이 하이아칸의 휴양지 일대라고 들었다. 대륙 곳곳을 가보지 않았어도 충분히 믿을만한 얘기였다. 다른 도시에는 한두 곳이나 있을까 말까 한 고급 의상실들이 자신이 살던 블루 코럴 섬에는 거리를 이룰 정도로 수두룩 했으니 말이다. 그런 곳에서 재봉을 배웠고, 그 중에서도 잘했던 자신이었다. 진짜 귀족들의 옷을 만들던 안목으로, 귀족들의 옷을 그럴듯하게 흉내나 내는 싸구려 극장에서 배울만한 것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배울 만한 것이 없어도 그냥 관심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생각하기에는 한두 벌 살펴보고 금방 시큰둥해진 자신은 어떻게 설명할까? 자신이 여기 왜 왔을까? 그것도 조슈아에게 굳이 열쇠까지 받아다 다라고 해가면서 말이다. "글쎄, 뭐랄까, 뭔가… 확인하러 온 것 같기도 하고." 말해 놓고 자신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이네스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 수준을?" "그런 건 아니고……." 리체는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러자 눈앞에 아주 길게 뻗은 옷의 열, 수백 벌의 옷들이 보였다. 갖가지 빛깔을 하고 뭔가 기다리는 것처럼 거기 있지 않은가. "잘… 있는지 말야." "옷들이?" "아니." 조금 구체적인 느낌이 왔다. 잡힐 것 같다. 한 마디만 더 하면 될 것 같다. 옷이 잔뜩 있는 이곳에서, 무언가가 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내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리니 둘 사이를 막고 있던 옷들 사이에 틈이 벌려져 있소, 그 사이로 이네스가 얼굴을 내민 것이 보였다. 그런 상태로 이네스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무슨 뜻일까?" 멋있는 미소였다. 리체는 일어섰다. 그리고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된 이네스를 향해 말했다. "그런 애 좋아하지 마, 아음만 다쳐." "응?"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리고, 이네스도 일어섰다. 키 큰 옷이 걸려 있는 곳이라 옷 너머로는 상대의 머리 꼭대기만 보였다.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냐, 똑똑하고… 똑똑한 것 이상이지, 보통 사람이 이해할 수 없어. 그가 하는 생각이나, 행동 말야. 물론 사귈 수도 없지. 그냥 친구가 돼. 그게 제일 좋아." 이네스는 잠간 말이 없다가 갑자기 먼지투성이 옷들 사이를 뚫고 리체가 있는 쪽으로 건너왔다. 리체는 흠칫 놀랐다. 마주서자 리체보다 키가 작은데도 얼굴 생김새가 어른스러웠고, 깡말랐지만 자세에는 우아한 데가 있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부인하거나, 변명하려 한다고 생각한 리체는 눈썹을 약간 올렸다. 그녀는 본디 솔직했고, 호의로 한 말을 취소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달랐다. "알아." "안다고?" "나보다 가까이 있었으니까 네가 더 잘 알 서라고 생각해. 충고도 고마워." 리체에 비해 치렁하기만 할 뿐 볼품 없는 머리카락이 이네스의 빈약한 어깨를 덮고 있었다. 흔히 아름답다고 할 만한 소녀는 아니지만, 조심스런 성격이라고 생각했던 이네스의 목소리는 또렸했다. "하지만 그 다음 일은 내 문제일 거야. 아직은 아무 것도 결심한 게 없지만, 다른 사람의 한 마디에 내 마음을 취소하지도 않아." 생각보다 대담하게 나오는 말에 리체가 도리어 놀랐다. 가벼운 호감이겠지 싶었고, 어차피 얼마 뒤 떠나버릴 소년에게 관심을 가져봤자니까, 괜히 마음고생 하지 않게 돕고 싶었던 것뿐이다. 물론 데모닉 조슈아는 평범한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아마 여자친구를 사귈 수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 온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보다 저 심각한 문제로서, 리체가 끔찍하게 무서워하는 '유령'까지 붙어 있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해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네 말이 맞아. 내가 주제넘게 말했나봐. 괜히 엉뚱한 소릴 꺼내서, 그냥 그 얘가 잘생겼지만 까다롭다고 말하려는 거였을 뿐이야." "밀라르, 그렇지만 말야." 이네스가 살짝 웃었다. 리체는 이 소녀의 표정이 무척 다양한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의 이지적인 소녀가 금방 친근하지만 마음 약한 여자친구처럼 보이니 말이다. "그런 말을 하는 너도, 실은 좋아하는 것 아니니?" "어… 내가?" 리체는 일순 멍한 표정이 됐다가 풋, 하고 웃었다. "내가 아까 아니랬잖아. 아니, 그래, 솔직하게 말하면 난 그가 너무 잘나서 좀 부담스러워. 넌 어떻게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옆에 있으면 계속 열등감이 자극되는 종류의 사람이거든, 그리고 난 그런 데 좀 민감하고." "열등감을 자극한다고?" "모든 점에서 따라잡을 수 없는 영역에 있는 사람이라서, 기분이 나빠지는 거야. 누구나 자신에 대한 자부심 같은 건 갖고 있잖아. 그런 게 만날 때 마다 꺾여버린다고, 사실 나도 그 애를 만나기 전에는 몰랐어. 내가 이렇게 자존심이 강한지." 뜻밖으로 이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아. 같이 일하는 다른 분들도 모두 말해. 히스파니에 씨는 그 분들이 하는 일을 모두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런데도 넌 괜찮아?" "물론 괜찮지 않지. 보면서 많이 감탄하기도 하고, 자신감을 잃기도 하고 그랬지. 그런데 난 그래서 더 좋은 모양이야. 내가 이상한 걸까? 어쩌면 내가 하기로 한 일에 대해 확신이 별로 없어서, 그러니까 너만큼 자신의 영역에 자신이 없기 때문일지도 몰라. 그런데 말야, 분명 다르긴 하지만 어쩌면 너도 나하고… 방식만 다를 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이네스가 한 말의 뜻을 잠깐 생각하던 리체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라니까!" 이네스는 다시 한 번 웃었다. 이번에는 친구의 마음을 잘 아는 현명한 소녀의 미소였다. "난 네가 여기 옷을 보러 왔을 거라고 생각해. 그 사람이 입게 될 옷도 이런 것일 테니까, 어쩌면 넌 히스파니에 씨가 입을 지도 모르는 옷을 만들고 있을 거야. 그래서 여기서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아. 네가 만드는 옷이, 여기의 옷보다 확실히 더 좋다고 말이야. 그런 방법으로……." 이네스는 손을 뻗어 옆에 있는 옷들을 스륵 쓰다듬었다. "너 자신을 찾기도 하는 거지." 그 말을 들으며 리체도 자신의 마음을 좀더 정확히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서 이네스가 말을 맺었을 즈음에는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아니, 달라. 내가 이곳의 옷을 보고, 이 옷들이 내가 만드는 옷보다 못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는 건 사실일 거야. 그리고 내 옷을 히스파니에 씨한테 입히고 싶고, 그 일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도 맞을 거야. 그가 까다로운 사람이었든, 열등감을 자극하는 사람이었든, 분명한 건 훌륭한 배우라는 거지. 내가 최선을 다해 만든 옷을 입어도 될 만큼. 그런 방법으로 내가 내 자부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도 말야, 거기에……." 차양막 틈으로 햇빛이 들어와 둘의 얼굴을 비추었다. 리체는 자신 있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반드시 그를 좋아해야 한다는 전제는 필요 없다고." 9. 뱀의 혀 "저 그림을 봐. 뱀의 머리로 된 혀를 가진 여자를, 그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그녀의 눈을 보고 있지. 그녀는 슬픔에 젖어있어. 왜냐하면 뱀의 혀로는 어떤것도 먹을 수 없거든, 그녀는 말라비틀어졌지. 이제 뱀이 독을 내뿜으면 그녀는 눈이 멀게 될 거야. 비틀거리며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걷겠지. 그녀를 걷게 내버려 둬. 절대 손을 잡아주지 마. 잡는 손간 그녀는 당신의 손을 물어뜯을 테니까. 그녀가 자기 손을 물어뜯고 심장을 파먹어 마침내 자신의 모든 것을 먹어치울 때까지, 절대 손을 내밀어주지 마, 모두 먹어치워 뼈조차 남지 않게 되면 결국 그녀도 멈출 테니까." 6월 17일, 다이아몬드 러쉬 극장 소연습실. "칼라이소의 전성이가는 역시 '수이 아네티'가 여신처럼 군림하던 시절이겠지. 그게 10년쯤 전일까?" "어이, 문제의 수이 아네티가 자신이 아닌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요." 몰트 부인은 키득키득 웃으며 노래로 답했다. 내가 작은 꽃을 꺾어 들고서 그대에게 꽃이 아름다운지 묻고 고개 끄덕이는 그대 앞에서 웃으면서 말을 지체한다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알아줘요 눈치 없는 그대여 "그 꽃은 어디 있는 건데?" "여기 있잖아." 피아노에 기대선 몰트 부인이 자신의 드레스에 붙어 있던 화려한 분홍빛 코르사주(corsage)를 떼어 건네준 사람은 곁에 서서 테이블에 몸을 굽히고 대본을 뒤적이고 있던 조슈아였다. 조슈아는 코르사주를 받아들어 자신이 입고 있던 검은 조끼의 주머니에 달더니, 다시 허리를 굽히고 대본으로 주의를 돌렸다. 몰트 부인은 싱글거리며 노래를 이어 불렀다. 내가 보낸 사랑의 전령이 그대의 주머니 속에서 그대가 본 것을 함께 보고 내게 이야기해 줄 거야 그러니 난 걱정 없어요 그대는 못 달아나요 "몰트 부인 당신이야말로 현실 도피잖아. 죽은 남편이 당신한테 전령을 보내 두진 않았소?" "보내긴 했지. 나한테 아들 하나 못 얻어서 무덤 속에서도 섭섭해 죽겠답디다." "그래서 남편 원 들어준다는 핑계로 늘그막에 딴 데서 아들 하나 얻으려고?" "왜, 못할 것도 없지." 몇 사람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지만 조슈아는, 자기가 쓴 대본에 푹 빠져서 옆에서 무슨 얘기를 하든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펜을 뽑아들고 옆의 빈 종이에 뭔가 죽 적어 내려갔다. 엄청나게 빠른 글씨였다. 옆에서 한 사람이 고개를 빼고 들여다보더니 장난스레 세운 손가락을 입가에 대며 사람들에게 소식을 알렸다. "쉿, 우리 사랑스런 제작자께서 또 곡 하나 써내시고 있어." 내일 아침부터 시작될 총연습을 앞두고 배우와 무용수들에게 처음으로 하룻밤 집에 다녀올 시간을 준 참이었다. 일정 조율을 위해 남은 사람들은 메인 스탭들뿐, 연출가 반 올프랑쥬, 음악 감독인 이기 스트라우즈, 작사가이자 각색가로 합류한 셀마 레이슬링크 양, 스트라우즈가 죽 함께 일해온 오케스트라에서 데려온 리허설 피아니스트 모리스 투아르데, 안무가 지오반 한트케, 그리고 뭐가 그리 좋은지 도무지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는 수이 데 몰트 부인이 그들이었다. 조슈아가 솔로로 부르는 곡이라면 언제 쓰더라도, 심지어 공연 전날 써 내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모두가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조슈아가 자기 세계에서 빠져나오도록 다들 느긋하게 기다렸다. 지오반이 히스파니에만 찾던 무희들의 군기를 확 잡은 이야기나, 이네스의 실력이 신기할 정도로 일취월장하고 ㅇㅆ다는 이야기들을 하면서 말이다. "조?" 조금 전 연습을 구경한다면서 찾아온 루시 에테른이 조슈아가 들여다보고 있는 테이블 맞은편에서 마주 허리를 굽힌 채 조슈아를 불렀다. 두 번 정도 더 부르자 그제야 조슈아가 고개를 들었다. 들자마자 눈앞에 에테른의 얼굴이 있는 것을 보고 흠칫 놀라기까지 했다. "자아, 자기 작품에 빠져 있는 것도 좋지만, 간식 좀 먹고 하자고요. 다들 지쳤으니까." "아, 그래요?" 에테른이 입구로 가서 문을 열자 직원 한 사람이 신선한 과일과 세 가지 종류의 케이크, 찻주전자와 찻잔들이 놓인 트롤리(trolley)를 밀고 들어왔다. 레이슬링크 양이 제일 먼저 손뼉을 치며 반겼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마침 배고파 죽을 지경이었는데, 에테른 씨는 역시 프로라니까!" 에테른이 웃으며 대답했다. "어느새 제 때 간식 내오는 것이 제 전공분야가 됐군요." 옆에서 몰트 부인이 핀잔을 주었다. "셀마, 열심히 먹는다고 이 나이에 네 작달막한 키가 커지는 게 아냐." 그러면서 제일 먼저 손을 산딸기 무스 케이크로 가져가는 그녀를 향해 레이슬링크 양이 비웃음을 날렸다. "너야말로 파노자레 삼나무 같은 키에서 더 커지고 싶지 않다면 간식은 자제하라고." 조슈아는 펜을 놓고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오긴 했지만 생각에 잠긴 듯 멍한 상태로 음식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스트라우즈가 차를 마시며 점잖게 말을 붙였다. "뭘 그리 생각하시오. 제작자 님?" "아, 막시밀리앵이 떠난 줄 알았던 마리를 다시 만나는 장소 말이에요, 성보다 정원이 좋을 것 같은데, 그러려면 배경이 바로 필요하겠고, 기존 무대에서 그걸 효과적으로 전환하거나 대체하는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스트라우즈는 손을 저으며 말을 막았다. "그보다 이 차나 좀 드시오. 향이 아주 좋은데." "아? 네." 옆에서 모리스의 손이 다가와 그의 손에 따뜻한 김이 오르는 찻잔을 쥐어주었다. 얼결에 받아들고 시선을 드니 사람들이 조슈아를 향해 미소를 보냐는 것이 보였다. "자아, 조금 먹고 해요." "제작자 님, 어제오늘 너무 무리하고 있어요. 잠깐이라도 쉬지 않으면 머리가 어떻게 돼 버려요." "그렇게 가사를 다 써버리면 내가 할 일이 없잖아요. 그러면 난창피해서 돈을 받아갈 수 없을 거라고요. 안 그래요?" 피아니스트 모리스를 제외하면 다들 조슈아보다 나이가 두 배, 또는 세 배나 많은 이들이었다. 처음에는 조슈아의 재능을 신기해했고, 또는 낯설어 하던 그들은 함께 일해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만약 그들이 좀더 젊었다면 질투하거나 불쾌하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인생의 황금기를 다 보내고 은퇴를 바라보거나. 이미 은퇴한 사람들이었다. 자기 앞에서 막이 내려오는 것을 멀거니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 내려오던 막을 멈춰버리고, 그들에게 무대로 오라고 손짓했던 것이다. 그들이 이 어린 제작자를 귀여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조슈아는 사람들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외톨이 꼬마처럼 케이크에 얹힌 딸기 조각을 포크 끝으로 집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조슈아의 얼굴을 살피고 있던 에테른이 문득 생각해낸 듯 말했다. "참, 초대장은 다 됐어요. 발송도 끝났고." "몇 명이죠?" 조슈아는 결국 딸기를 먹는 대신 포크로 뭉그러뜨리고 말았지만, 에테른의 말에는 즉각 반응했다. "모두 자 들어갈지는 모르지만 일단 3백 장쯤 돌렸어요. 한 가문에 세 장씩은 갔으니까." "초대장을 돌려?" 몰트 부인이 의아한 얼굴로 다가앉았다. "초대장이라면, 그거 공짜 표잖아? 그걸 3백 장씩이나?" 그 말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돌렸다. 지오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짜 표를 돌려? 이게 무슨 소리야?" "그게 사실이에요?" "우리가 이번 공연 준비를 어떻게 하고 있는데 공짜 표를 돌리다니? 말이나 되는 소린가요? 설명 좀 해봐요." 놀라고 실망한 눈빛들이 쏟아지자 에테른은 크게 당황했다. "아니, 여러분.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초대장이라는 것은……." "그럼 무슨 의미죠? 초대는 하지만 표는 와서 사라는 의미? 단순히 알리자는 의미? 어느 쪽이에요?" "몇 장 정도면 몰라도, 3백 장이면 극장 꽉 채우고도 한참 남겠는데 말요. 첫 날 공연에 그렇게 사람이 없을 것 같소? 솔직히 말해 기분 좀 별론데." 다들 한다하는 쟁쟁한 실력자들이고 자기들의 이름 값이 결코 낮지 않다고 여기기에 충분히 모욕으로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 때 조슈아가 일어섰다. "설명이 필요하시면 제게 물으셔야죠. 제 계획이니까."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사람들이 뜻밖의 말에 눈썹을 찌푸리는 가운데 스트라우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소이다. 이번 일의 총 책임자는 히스파니에 씨가 아니오? 제작자가 찬성하지 않은 일을 에테른 씨 혼자 진행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네, 맞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하고 싶은 말은." 조슈아는 사람들을 휘둘러보며 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여러분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은 자부심이 있는 제가, 설마 공연이 실패할까봐 공짜 티켓을 돌릴까요? 지금가지 보여드린 제 자신감을 허세로 보신 거라면, 실로 유감입니다." 사람들은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초조한 표정, 수긍하는 끄덕임, 의혹의 눈빛 등을 다양하게 보였다. 조슈아는 몰트 부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몰트 부인, 우리가 준비하는 이 공연의 입장료가 얼만지 아시나요?" "글쎄요, 최고로 많아야 50고블룬 정도?" "틀렸습니다. 그 20배입니다." 몰트 부인은 얼른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아… 네, 뭐라고요?" 상대의 반응이야 어떻든 조슈아는 거침없이 죽 읊었다. "특별석 1천 엘소, 일반석 7백 엘소, 그리고 2층 뒷자리를 비롯한 염가석이 5백 엘소입니다. 박스석은 일단 여덞 군데 밖에 없지만 1천 3백 엘소쯤 받을까 합니다." 에테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매우 비현실적인 표정으로 그 이야기를 들었다. 놀라지도, 화를 내지도, 웃지도 않고, 이게 어느 남의 나라 이야기인가 하는 얼굴들이었다. 한참만에 입을 연 사람은 레이슬링크 야이었다. "당최 무슨 소리인지… 좀더 이해가 되게 설명할 수 없을까요?" 스트라우즈가 말했다. "아니, 그 말만으로는 아주 이해가 잘 되지만, 무슨 의미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인지 말해줄 수 있겠소?" "아니 스트라우즈 씨, 저 이야기를 진짜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스트라우즈는 미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히스파니에 씨가 지금껏 공연 일로 농담하는 사람이었소?" 조슈아가 바로 이어 말했다. "네, 농담 안 합니다. 가격이 저렇게 책정된 것은 공연이 딱 2회로 끝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2,30회는 해야 할 공연을 2회로 끝내려니 비살 수밖에요." 드디어 몰트 부인이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이것 봐요. 우리 제작자 님, 그럼 그렇게 터무니없는 가격을 책정해 놓고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으니 공짜 초대권을 돌린단 말이에요? 그런 말도 안 되는 방법이 어딨어요? 그러면 우리한테 지불할 돈이나 극장 대관료는 어떻게 할 것이며, 결정적으로 이 공연을 하는 의미는 어디에 있죠? 물론 돈이 다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준비하는 게 자선 공연은 더더욱 아니잖아요?" 조슈아는 짓궂게 턱을 쳐들었다. "그럴 리가요. 돈은 법니다. 예상 수익은 10만 엘소 정도고, 자리 배치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겠죠." 그 때 반 올프랑쥬가 조슈아 앞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알만하군요. 그 금약은 2회 째 공연의 수익금이겠죠? 1회 공연은 초대권으로 좌석만 채우고 2회에서 수익을 얻는다?" 조슈아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반은 인상을 찌푸렸다. "어린애가 아니라고 들어서 그런 줄 알았더니, 사람 완전히 잘못 보았군요. 1회 공연에 입소문이 나서 2회에 사람이 들도록 한다는 거야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자만, 당신이 책정한 입장료는 보통 사람이 1년 내내 일해도 벌기 힘든 돈이란 말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공연이라고 소문이 널리 퍼져도 누가 그 돈을 내고 공연 같은 걸 보러 옵니까? 당신은 물가도 몰라요? 티켓을 전부 모으면 소형 외돛 범선 한 대를 살 지경인데, 아, 그런데." 그는 옆의 에테른을 돌아봤다. "그러고 보니 극장주 님께서는 이 일을 알고 계셨던 모양인데, 저런 이야기를 듣고 수긍하셨단 말입니까? 세 살 먹은 애도 곧이듣지 않을 것 같은 계획을?" 그 때 스트라우즈가 반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올프랑쥬 군, 그만두게, 제작자나 극장주에게 이 무슨 당치 않은 무례인가?" 스트라우즈가 말하자, 침착하던 반의 얼굴이 갑자기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니, 스트라우즈 선생님, 그럼 선생님은……." "난 제작자 님께서 좀더 이야기를 해주실 거라고 믿고 있어." "선생님!" 조슈아가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조금 안타깝네요. 그런 생각밖에 못하다니." 반이 고개를 홱 돌렸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나한테 한 소린가?" 상대의 말이 반말로 바뀌었지만, 조슈아는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네, 자신이 보아온 환경 탓이겠죠. 당신이 예로 들어준 물가는 가난한 사람의 물가입니다. 하지만 돈이 많은 사람의 물가는 전혀 다르죠. 돈 많은 상인이나 귀족들에게 그 정도 티켓 가격은 전혀 비싼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부자가 되어본 일이 없어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반의 얼굴은 이제 붉다못해 검어 보였다. 감정을 누르느라 말도 얼른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곁에서 피아니스트 모리스가 조금 주저하며 말했다. "물론 부자는 돈이 많으니까 그 정도 돈은 아무 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누구든 자기 돈을 가장 효과가 좋은 일에 쓰기 마련 아날가요? 다시 말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연 티켓 가격은 30고블룬이나 50고블룬 정도라고 믿고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터무니없는 가격을 매긴다면 다른 공연을 찾고 말지. 그 공연을 굳이 보려 하지 않겠죠. 그리고 부자한테 오늘 쓸 1천 엘소가 있다 해도 내용도 잘 모르는 공연 대신 그 돈으로 좋은 양탄자를 사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길거리에 뿌리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 장난처럼 돈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요."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제일 그럴 듯한 얘길해 줬네요. 하지만 부자나 귀족은 말이죠. 말했다시피 1천 엘소로 양탄자도 살 수 있고 안락의자를 살 수도 있지만, 그 돈으로 공연도 볼 수 있는 거죠. 그의 하루 용돈일지도 모를 1천 엘소는 어디엔가 결국 쓰이게 됩니다. 그 돈이 내 공연장으로 오게 하겠다는 결심에서부터 계획이 시작됩니다. 한 번 그 생각을 따라가 볼까요." 조슈아는 웃지 않았지만 표정은 가벼워 보였다. 대본 보충할 때 쓰던 종이 한 장을 들고 구깃구깃 접으면서 말을 이었다. "자, 칼라이소 근방에 사는 어느 귀족이 있습니다. 그는 돈이 많지만 그동안 양탄자든 뭐든 살 만큼 샀을 거고, 시간은 많은데 재미있는 일은 얼마 없습니다. 구체적인 결심은 아니라 해도, 자기한테 누가 재미있는 것을 보여 준다면 상당한 돈을 지불할 마음도 있을 겁니다. 그런 그에게 초대장이 한 장 날아듭니다." 조슈아는 그 사이 다 접은 종이비행기를 들고 허공을 가로질러 나는 시늉을 했다. "자, 그 초대장을 펼쳐보니까, 집에 걸어놓아도 될 법한 그림이 그려진 팜플렛, 그러니까 안내서가 들어있고, 거기에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공연이라고 소개하는 화려한 문구가 씌어져 있습니다." 조슈아는 종이비행기를 도로 펼쳐 들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비어 있던 종이에 공연을 소개하는 문장이 씌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깜짝 놀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글씨가 왼손잡이의 것처럼 왼쪽으로 기울어진, 즉 조슈아가 쓴 글씨가 아니란 사실을 얼른 깨닫지 못했다. "그는 조금 흥미를 갖겠죠. 그래서 뭐가 더 있나 봉투를 살펴보니 초대권이 한 장 나옵니다. 초대권은 기분 좋게도 '무료'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이 공연의 실제 좌석 가격이 무려 1천 엘소나 된다는 이야기도 함께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고귀하고, 예술에 대한 안목은 높고,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자리를 빛내주실 것 같은 문제의 귀족님만은 특별히 무료로 초대한다고 씌어 있습니다. 그쯤 되자 의혹 어린 눈빛을 하고 있던 사람들은 괴상한 표정들이 되어 서로의 얼굴을 마주봤다. 이야기가 어쩐지 납득 가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 같은 느낌이 조금 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여기엔 이 공연이 단 2회로 마감되며, 그 이유는 하이아칸에서 온 최고로 훌륭한 배우의 일정 때문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아주 특별한 공연이고, 오늘 보지 못하면 나중에 번거롭게 하이아칸까지 쫓아 가야 할 것 샅은 느낌이 듭니다. 이 귀족은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켜 극장에 가기로 마음을 정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지?" 사람들은 웃을까 말까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어깨를 움츠리며 다른 사람을 바라보았다. 조슈아가 말을 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1회 공연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뭐,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겠지만 이곳에 모인 분들과 같은 최강의 스탭들과 저처럼 훌륭한 배우가 힘을 합쳐 만든 공연인지라 일생에 다시 느낄 수 없을 감동에 휩싸이게 되겠죠." 몇 사람이 드디어 참지 못하고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서 웃는 건 아니었다. 분위기가 풀어지는 중이었다. "그는 이 공연에 2회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냅니다. 물론 2회가 마지막이기도 하죠. 그는 직접 다시 보고 싶은 것을 물론이고,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도 꼭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더구나 이렇게 좋은 공연을 소개한 걸로 그들에게 생색도 내고 안목도 자랑할 수 있을 테니까 아주 좋은 기회죠. 1천 엘소라고 했던가? 처음에 말했다시피 그는 1천 엘소를 하루 용돈으로 쓸 수 있을 정도로 부자입니다. 그 가격이 그에게 문제가 될까요, 안 될까요?" 조슈아의 얼굴에 오랫동안 연습해 온 매력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얼빠진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거나,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들은 납득되고 말았던 것이다. 처음엔 놈담으로도 곧이들리지 않던 황당한 이야기에. "10만 엘소 이상 버는 방법도 얼마든지 있죠. 이건 뭐 농담에 가깝긴 하지만, 그 날 표 몇 십 장쯤 미리 사들여 놨다가 나중에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암표상을 가장해서 웃돈을 붙여 파는 것도 수입이 좀 될걸요."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몇 사람은 박수를 치기까지 하며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에테른도 겨우 안도했고, 몇 사람은 오늘 밤새워 총연습을 준비하자며 의욕 넘치는 태도가 되기까지 했다. 다만 한 사람이 여전히 자신의 분노를 누르지 못해 억지로 감추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했다. 새벽 3시경에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나온 반 올프랑쥬는 먼저 나간 다른 사람들의 마차가 뿔뿔이 흩어질 때까지 얼마간 기다렸다. 자신의 표정을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윽고 거리가 텅 비자, 그는 길을 건너기 위해 십자로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툭 칠 때까지. "반 올프랑쥬 씨." 그를 부른 자는 검은 중절모를 눌러쓴 남자였다. 낯선 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흠칫 놀랐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수많은 빚쟁이들 중 하나일 것이 뻔했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이렇듯 한밤중에 그를 기다리다가 나타나겠는가. 동네 야채 가게에서부터 세가 밀린 집 주인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돈을 요구할 사람은 줄을 서 있으니 말이다. "아, 저… 누구신지 모르지만 혹시 돈 문제라면 이번 달이 가기 전에 마련해서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했지만 상대가 반응이 없자, 반은 괴이한 기분이 되어 물었다. "누구신지?" "난 당신에게 행운을 가져다 줄 사람이오." 남자의 목소리는 낮았다. 마치 당 밑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반은 갑자기 두려워졌다. 주위에 그들을 보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사방이 캄캄했다. "그런 밑도 끝도 없는 얘기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전 이만 가도록 하죠." "겁내지 마시오. 그렇게 겁을 내니까 나이도 어린 제작자가 당신을 무시하는 거요." 얼굴에 피가 확 몰렸다. 반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홱 쳐들어 상대의 얼굴을 쏘아봤다. "당신은 누구요? 누군데 남의 사정을 갖고 멋대로 말하는 거요? 내 일을 아는 것을 보니 극장 사람인 모양인데, 끼여들지 말고 자기 일이나 바로 하는 게 좋을 거요." "아니, 난 그 어린 제작자를 당신처럼 싫어하는 사람일 뿐이오. 난 그가 이번 공연에서 실패하게 만들 생각이오. 그가 실패가 무엇인지 알게 되길 바라오. 그리고 또한 그가 돈 없는 서러움을 겪어보길 바라오." 말 끝에 웃음소리가 낮게 새어나왔지만, 두렵다는 생각은 갑자기 사라지고 반은 미간에 힘을 주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두렵다는 생각은 갑자기 사라지고 반은 미간에 힘을 주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이 자신의 마음속을 찔렀던 것이다. 스스로 만들고 있으니 성공하길 빌어야 마땅할 공연에 대해, 조금 전부터 저도 모르게 품었던 감정을. "그래서요?" "나와 잠시 이야기하지 않겠소?" 반은 잠깐 망설였지만, 정말로 잠깐이었다. 잠시 후 둘은 방향을 바꾸어 다른 길로 걷기 시작했다. [일 드 모르비앙(Ile de Morbihan)의 결혼식] 배경 : 오를란느 북쪽, 가상의 섬 모르비앙 1막. 장면1 막이 오르면 무대는 어둡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무대 왼쪽에서 노래가 들려온다. 이렌느 : (노래한다) 아름다움은 오래가지 않고 행복은 오래가지 않고 파티의 술은 떨어지기 마련.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스포트라이트가 켜져 왼쪽 구석에 있는 선물과 꽃으로 듬뿍 채워진 아기 침대를 비춘다.) 내가 태어났을 때 가문의 첫 딸이라고 기뻐 밤새 파티를 벌였다지만 내 뒤로 여섯 명이나 태어날 줄 누가 알았겠어? (스포트라이트가 꺼졌다가, 다시 무대 중심에서 나타나 누군가를 찾듯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이윽고 한 가운데 선 이렌느를 비춘다.) 일곱 살에 의자 덮개에 수를 놓으니까 얌전하다고 다들 칭찬했지만 장차 부지깽이 아가씨로 불릴 줄 누가 알았겠어? (이렌느는 치마 뒤에 숨기고 있던 부지깽이를 꺼내들고 위협적으로 휘두른다. 그러자 사람들이 달아나는 듯한 발소리가 들린다.) 아름다움은 오래가지 않고 행복은 오래가지 않고 파티의 술은 떨어지기 마련. (달아났던 발소리가 다시 살금살금 모여들고, 이윽고 무대 전체가 밝아진다. 이렌느 주위를 여섯 동생들이 둘러싸고 있다. 배경은 낡은 섬이고 주위에는 농가에서 쓸 법한 허름한 손수레나 농기구들이 흩어져 있다.) 이렌느와 동생들 : (노래한다) 모르비앙 섬은 북쪽 국경의 끄트머리 바위투성이 험한 섬이라지만 이 작은 땅에 은이 땔감처럼 날 줄 누가 알았겠어? 모르비앙 섬은 축복 받은 곳이라고 대륙 사람들 부럽다 했지만 어느 날 땅 속 금고가 끝장날 줄 누가 알았겠어? 아름다움은 오래가지 않고 행복은 오래가지 않고 땅 속의 은은 떨어지기 마련. (셋째 뤼디가 갑자기 주머니에서 은으로 된 잔을 꺼내고, 이렌느를 제외한 다른 형제들이 빼앗으려고 난리를 피운다. 결국 이렌느가 잔을 빼앗아 주머니에 넣어 버린다.) 이렌느 : (부지깽이로 을러대며) 조용히! 너희들이 누구인지 잊었어?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보면 뭐라고 하시겠니? 뤼디 : 아버지라면 그 은잔 팔아서 대륙 최신 유행의 털 조끼 한 벌 사오라고 하셨을 것 같은데. 리샤르 : 혈통 좋은 사냥개 새끼 한 마리 사셨을 것 같은데. 앙통 : 50년 묵은 포도주나 한 통 사셨을 것 같은데. 이렌느 : 씨끄러워! 돌아가신 분께는 예의를 지키라고, 그렇게 예절 없이 행동하다간 모처럼 온 손님들도 돌아가 버릴걸. 뤼디 : 손님이라고? 리샤르 : 갑자기 왠일이야? 이렌느 : 그렇게 됐어. 그렇게 됐으니까, 그런 줄 알고 모두 준비하라고, 오늘이 아내. 열흘 뒤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어. 그 날 밤엔 파티가 있을 거야. 뤼디 : 우리 가문에 아직 파티를 열 돈이 남아 있었나? 이렌느 : 네 은잔 있잖니? (뤼디는 이렌느에게서 다시 잔을 빼앗으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뤼디 : 도대체 파티를 왜 여는 지는 알아야 될 거 아냐! 이렌느 : 그건 말야…. 20여년 만에 우리 가문에서 드디어 결혼식이 있을 예정이거든. 뤼디 : 에엑, 설마 누나? (이렌느는 부지깽이로 바닥을 땅땅 친다. 뤼디는 움찔하지만 여전히 개구쟁이답게 싱글거린다.) 이렌느 : 일에는 차례가 있는 법이라고, 나이도 찼고, 작위도 받았고, 비록 불평이 많고 성격은 나쁘지만, 우아하고 잘생겼으니 대충 수지가 맞는……. 남동생들 : 형님이? 여동생들 : 오라버니가? (모두 뒤로 물러나며 무척 놀란 시늉을 한다. 넷째 리샤르가 갑자기 손을 내저으며 뛰어나온다.) 리샤르 : 잠깐, 그런데 누구랑 결혼하는데? 이렌느 : 그걸 이제부터 정하려는 거 아냐. 조용히 해 봐. 얘기해 줄 테니까. (모두 모여들자) 열흘 뒤의 파티는 결혼식이 아니라, 결혼 상대를 찾기 위한 거라고, 대륙 곳곳의 한다 하는 가문마다 초대장을 쫙 부렸더니 지금 답장이 줄을 잇고 있어, 흥!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니? 넌 그럼 사람들이 오라버니 같은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줄 알았니? 뤼디 : 말이야 바른 말이지. 형님 성격을 견딜 수 있는 여자가 많을 것 같진 않은데. 이렌느 : 그런 사실을 아는 건 너나 우리뿐이란 말야. 대륙 사람들이 알 게 뭐니? 모르비앙 가문이라면 땅 속에 무한한 금고를 갖고 있는 축복 받은 알부자니까, 소년 백작과 결혼하면 수지 맞을 것 같다고 생각할 게 뻔하다고. 리샤르 : 잠깐, 그 금고는 이미 바닥났잖아? 이렌느 : 그것도 그 사람들이 알 게 뭐니? 다행스럽게도 우리 아버지께선 지난 몇 년 간 전과 다름없이 돈을 쓰셨으니, 우리 손에 남은 건 없게 됐지만 반면 거지가 됐다는 소문도 안 났다고. 뤼디 : 그럼 누나, 지금 사기치는 거잖아? 동생들 : 사기치는 거잖아? (이렌느가 허리에 손을 얹고 동생들에게 눈을 부라린다.) 이렌느 : 사기는 무슨 사기야! 자기들이 멋대로 생각하고 온다는 거잖아! 내가 그 사람들한테 보낸 편지엔 단지 젊은 모르비앙 백작이 결혼 상대를 찾고 있다는 내용뿐이라고! 내가 '우리 섬의 은광은 아직 건재해요'라고 써서 보냈을 것 같아? 리샤르 : 그래봤자 오히려 의심받을 뿐이잖아. 뤼디 : 맞아. (모두 웃는다) 앙통 : 그게 바로 우리 누님의 영리한 점 아니겠어? 뤼디 형, 리샤르 형, 누나가 큰형님을 팔아서 좀 먹고살아 보겠다는데 잔소리만 하고 있을 거야? 누나가 시킨 대로 파티 준비를 해보자고, 혹시 알아? 대륙의 돈 많고 눈먼 귀족 따님이 형님의 외모에 혹해서 우리 목두 먹여 살려 줄지? 이렌느 : 앙통 말대로야, 손가락만 빨고 있다가 죽을 거니? 자, 어서어서 서둘러! 모두 흩어진다. 막내 마리안느가 혼자 남는다. 마리안느 : (노래한다) 오라버니는 당당한 소년 백작이신데 새 예복 한 벌도 없어서 아버지 옷을 줄여서 입었지만 누구 탓을 하겠어? 체면을 지키려 해도 돈이 없는데 창고에는 밀겨뿐인데 돈 많은 올케 좀 구한다 한들 누가 뭐라 하겠어? 굶어서 오래 살 수 없고 체면도 오래가지 않고 가난은 숨겨도 소문나기 마련. (불이 꺼진다. 마리안느가 발소리만으로 퇴장.) 8막. Elan 1. 거리의 엑스트라버간자(extravaganza) "쇼를 준비해 줘, 혼돈과 광란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가장 짜릿한 쇼를 준비해 줘. 그 쇼엔 모두 참가해야만 해. 노인도 아이도 빠져선 안 돼. 난 그들 오두를 즐겁게 할 거야. 그들 모두가 좋아할 만한 덜 할 거야. 난 그들이 미친 듯이 웃어대고 환희에 겨워 울부짖고 자기 발로 온 거리에 뛰어나와 새벽까지 춤추게 하고 싶어. 내 배가 출항하면 이제 아무도 막지 못하지. 바다와 대륙을 뒤덮는 세기의 스펙터큘러(spectacular)!" 칼라이소에서 교통 정리를 하는 치안관은 없었다, 질서는 선원들이 만들었고, 선원들이 난동을 부리면 조합에서 나와 처리했다. 칼라이소에도 영주가 있었지만 명목상의 책임을 갖고 있을 뿐이고, 영주 자신과 그가 거느린 군대는 마차로 두 시간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홀름 성에 주둔하고 있을 뿐, 칼라이소까지 나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이 또 있다면 칼라이소에 치안관을 상주시키는 것을 검토해야만 할 게 틀림없었다. 그 날 밤, 8번 부두에서 올라간 길이 도시 외곽으로 빠지는 대로와 겹치는 교차로에서부터, 그 길이 서쪽으로 꺾이며 오르막에 이르러 두 갈래로 갈라지는 '말편자 삼거리'의 위쪽. 통칭 '극장 거리'에 이르기까지, 길이 닦인 이래 최대 규모의 인파가 몰아닥쳤다. 길을 막은 것은 마차들이었다. 그것도 여러 사람이 타는 합승마차나 재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소형 마차가 아니라 대부분 풍채 당당한 사두 마차들이다. 대로로 이어지는 길들은 좁은데 밖에서는 마차꾼이 소리치고, 안에서는 창 열고 내다보는 귀부인들의 불평에, 신경이 곤두선 말들의 울음소리, 걸어가다가 놀라 멈춰선 사람들의 쑥덕거림까지, 구경할 마음만 먹는다면 이런 진풍경이 따로 없을 테지만 그 정도로 느긋한 사람은 없었다. 사람은 어찌어찌 걸어 들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마차는 바퀴 한 번 굴리기 힘든 아수라장이 이미 반시간이나 계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소동의 근원지를 추적할 마음을 먹은 사람이 있다면, 난맥상의 극장 거리를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어깨를 맞대고 이어진 극장들의 지붕을 타넘는 것을 추천할 만했다. 실제로 그렇게 한 사람은 없었지만, 그런 식으로 따라가면 극장 거리에서도 비교적 외진 안쪽에 위치한 오래된 극장 다이아몬드 러쉬에 이르게 될 터였다. 그곳이야말로 마차로 1차 포위되고 안쪽은 관객들로 2차 포위된, 공성 직전의 요새를 방불케 하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그건 공성 직전의 요새였다. "왜 나오지 않는 거야!" "주연 배우를 내보내라!" "문을 부수기 전에 나오시오!" 램프마다 모조리 불이 휘황하게 밝혀진 다이아몬드 러쉬는 개관이래 최대의 관객을 맞아 바야흐로 빛나고 있는 듯했다. 입구에서 이어지는 접객 홀과 중앙 계단은 이미 수십 명의 사람들로 꽉 찼고, 문이 활짝 열려 정면으로 보이는 무대로 이미 관객들에게 점령당했다. 공연이 끝난지 한 시간이 되어가지만 떠난 사람은 얼마 없었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하나, 분장실 진입이었다. 큰 분장실은 두 군데로, 각각 무대 양편 계단 아래쪽에서 시작되어, 박스석이 있는 좌우의 벽을 따라 이어져 주 출입구 양쪽의 대기실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그 중 무대를 바라볼 때 왼편에 있는 분장실은 일반 무용수들이 공동으로 쓰는 곳이고, 오른편은 합창단, 그리고 그 두 군데 뒤쪽 어딘가에 주연 배우들을 위한 개인 분장실이 있을 게 틀림없었다. 문제는 관객들 대부분이 이 극장의 구조를 모른다는 데 있었다. 전에 와본 사람은 일부에 불과하고, 그들 중에서도 주연 배우의 분장실까지 가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이아몬드 러쉬는 그동안 그들이 와볼 만한 극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특히 관객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귀족 출신의 여성들은 더더욱. 그런 상황이라 그들은 아무 분장실 문이나 두드려댔다. 어느 쪽이든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주연 배우의 분장실을 찾을 수 있으리란 생각으로 말이다. 그러나 마지막 무대 인사가 끝나고 배우들이 퇴장한 뒤 모든 분장실의 문은 약속이나 한 듯 꼭꼭 잠겨버려서 고귀한 관객들에게 돌아가 줄 것만을 호소했다. 물론 극장주 우습게 보는 귀족들이 에테른의 말을 들을 리 만무했다. "씨끄러워요! 이건 예의가 아니잖아! 주연 배우를 왜 만날 수 없다는 건데?" "왜 문을 잠그는 거예요? 공연이 마음에 들어서 인사좀 하고 싶은 것뿐이라고요!" "난 꼭 얼굴을 보고 가야겠단 말이야! 내가 누군 줄 알고 피하는 거야? 무례하긴!" 에테른은 어려운 상대들의 공격을 한 몸에 받으며 웃는 낯빛을 유지하기가 힘들었지만, 최대한 노력하고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너무 많은 사람 때문에 한 분 한 분 인사할 수도 없을 테고, 무엇보다도 다칠 위험이 있어서요. 바로 내일 낮 공연이 있고, 그것도 마지막 공연인데 차질이 생겨서는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일단 돌아가시고, 배우들을 꼭 보고 싶으신 분은 내일 공연에 오셔서……." 한 귀부인이 톡 쏘았다. "내일은 당연히 온다니까! 내일은 내일이고, 오늘은 오늘이잖아? 내일은 이보다 사람이 더 많을지 누가 장담하겠어?" "밖을 봐요. 어차피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닌걸!" 하긴 집에 가기 시작한 사람들이 다른 극장에서 나온 사람들과 섞이면서 길을 꽉 메워버려, 나가봤자 꼼짝도 못할 것이 뻔했다. 물론 이 경우에도 길이 막힌 까닭은 다이아몬드 러쉬에 온 관객들이 대부분이 사두 마차를 끌고 온 귀족들이기 때문이었지만, 주위 다른 극장의 항의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에테른은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땀을 뻘뻘 흘렸지만 귀족들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슈아가 나오는 것을 절대로 위험하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 때였다. 갑자기 왼쪽 대기실 문이 조금 열리더니, 무희 한 사람이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사람들이 그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열렸다!" 무희는 달아났지만, 사람들이 열린 문을 붙들고 당기자 안이 드디어 들여다보였다. 대기실과 안쪽 분장실에는 겁을 먹은 무희 몇 명뿐이었고, 그 안쪽에 다른 곳으로 이어질 듯한 문이 보였다. "저기다!" 수십 명이 돌진하여 문을 열었다. 맨 먼저 안을 들여다 본 사람이 드디어 발견했다고 생각한 듯 외쳤다. "여기다!" 그 소리와 함께 대기실과 분장실은 순식간에 열 댓 명의 사람들로 꽉 차버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계속 문으로 사람들이 밀려들어와 위험한 상황에 이를 즈음이었다. 어디선가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응?" 바깥쪽에 있던 몇 사람이 돌아보았다. 홀 안에 피아노는 두 대였다. 오케스트라에 포한된 피아노, 그리고 무대에 놓여 있던 소품 피아노. 막은 아직 내려오지 않았고, 연주자가 보이도록 돌려 놓은 소품 피아노 앞에 앉은 사람은 금방 눈에 띄었다. 무대 쪽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환성이 솟았다. "나왔어!" "저기 있어!"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금세 빙 둘러쌌고, 다른 쪽에 있던 사람들도 몰려와 피아노 주위에는 곧 몇 겹이나 되는 원이 생겼다. 그러나 틈새 없이 빼곡하게 모여선 사람들은 조금 전과는 달리 소란을 피우며 떠들기는 커녕, 시키는 사람도 없는데 숨소리조차 죽였다. 들어야 했으니까,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주인공, 오늘의 사람이. 그는 눈을 감고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멜로디는 낯설었다. 공연 중에 포함된 곡도 아니었고, 어디서 들어본 곡도 아니었다. 연주는 경쾌했지만 빠른 곡은 아니었고, 딱 기분 좋을 정도로 느긋하면서 유쾌했다. 느낌을 굳이 표현하자면 이 상황을 빗대듯 아이러니 하달까. 그토록 떠들던 사람들 소리는 싹 사라지고, 오직 피아노 소리만이 홀을 울렸다. "휴……." 한숨을 내쉰 사람은 적당한 기둥 뒤를 찾아 기대 서 있던 에테른이었다. 그녀는 방금 전 분장실에서 도망쳐 나온 무희로부터 쪽지 한 장을 건네 받은 참이었다. 겨우 상황이 진정됐지만, 연주가 멈추는 순간 어떻게 될까 걱정하고 있던 그녀는 쪽지를 펼쳐보자마자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조슈아는 공연 끝에 입었던 화려한 의상 차림이 아니라 가벼운 흰 셔츠와 검은 바지에 멜빵을 맸을 뿐으로, 조금 전 무대 위의 막시밀리앵과는 또 다른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마치 당신들이 열광하는 그 사람은 막을 내리기 전가지만 존재할 뿐, 이곳의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선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조슈아를 건드리지 않았다. 바라볼 뿐이었다. 가까이에서 보면 볼수록 신비롭도록 우아한 젊은이의 조금 상기된 뺨을, 미끈한 목덜미를, 그리고 감긴 눈꺼풀의 섬세한 선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았지만 건반을 누르는 손 끝에 더듬거림은 없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턱을 약간 쳐든 채 이윽고 노래도 불렀다. 불이 꺼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찾아보았지, 그대가 있던 자리 아무도 없고 빈 의자만 남았네 가버렸을까, 내 연주 들었을까 알 수 없지만 허리 굽혀 정중히 인사했다네, 그대 있는 것처럼 그게 내 최선 이제 물러나 무대 뒤로 내려가 사라집니다, 그대가 사라졌듯 내게 남은 건 그대에게 들려준 나의 마음 분, 줄 수 있는 모든 것 답은 노래뿐 노래가, 이어 피아노가 멎고 조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섰다. 코앞까지 빼곡하게 선 사람들을 보고도 놀란 기색은 없었다. 자연스레 팔을 펼치더니 절을 했을 뿐이었다. 아주 천천히. "……." 그가 고개를 들기까지 박수를 치는 것조차 잊었다. 고개를 든 조슈아가 예의바르게 손을 펼쳐보이자 저절로 길을 비켰고, 그 자리를 떠나 무대 뒤로 사라지기까지 옷깃 하나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이윽고 서로 얼굴을 바라본 그들은 꿈에서 깬 사람들처럼 고개를 흔들며 겨우 웃었다. "아… 기분 이상한데." "박수 한 번 못 쳤네. 정말, 잊어버렸어." "이거 뭐에 홀린 것 같네요." "공연 끝났을 때는 이 이상 감동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어떻게 노래만 갖고 사람을 저렇게까지 압도할 수가 있을까?" "어쩐지 무서운 느낌까지 들어요. 사람이 저래도 되는 걸까?" "사람 아닌 것 같지 않아요?" 쑥덕이던 그들은 입구 쪽에서 무언가 나누어주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발길을 옮겨 서서히 빠져나갔다. 에테른이 조슈아의 쪽지에 씌어진 대로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퇴장할 수 있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그들 손에 쥐어진 것은 물론 이튿날 있을 마지막 공연에 대한 안내, 그리고 이번에는 돈을 내고 표를 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중대한 정보를 되풀이해서 강조하는 내용의 팜플렛이었다. 극장에서 한숨 돌리고 있을 무렵, 이제 일거리가 시작되는 사람도 있었다. 극장 거리 뒤쪽에 진치고 선 고작 너댓 군데의 여관들, 각각 방 숫자도 십여 개 안팎에 불과한 그곳에서 굉장한 흥정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사람들이 북적대고, 1층 홀 구석에 몇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거듭하는데도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들의 고민은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방 값이 스무 배로 치솟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여관 안에서 제일 좋은 방이라고 해 봐야 저택의 시시한 방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러니 최초의 방 값쯤은 애들 군것질 값에 불과한 터라 스무 배가 되어도 부담은 없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가 그 방을 원한다는 데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흥정해야 할 대상은 여관 주인이 아니었다. 그들 앞에는 아주 먼 곳에서 와서 지친 듯한, 그러나 실은 은밀히 자신만만하게 미소짓고 있는 소년이 있었다. 그는 며칠 전에 문제의 방을 예약했다. 그의 주인이 「일 드 모르비앙의 결혼식」 이틀 공연을 연이어 보기 위해 일찌감치 돈을 지불했던 것이다. 여관에서 가장 좋고 비싼 방을 말이다. 이튿날 공연은 밤이 아니라 낮 2시였다. 표는 혼잡을 고려하여 오전 10시부터 팔기 시작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튿날 공연을 반드시 보리라고 마음먹은 관객들은, 조금 전 다른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보았으므로 반드시 아침 일찍 가야 표를 구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은 이미 밤이었다. 집에 가서 편히 쉬고 돌아올 시간이 없었고, 방을 구해서 여기서 쉬는 것이 최선이었다. 내일 공연이 시작되기 전까지 오전 내내 있을 곳도 필요했다. 하지만 다른 방은 없었다. 아무리 급하다 해도 귀족이 부둣가 삯일꾼들이나 묵는 방을 빌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 흥정에 나선 자작 댁 비서, 남작 영애를 모신 시녀장, 도 누군가의 집사, 몸종, 하인 등이 신경전을 벌이는 가운데 가격은 오르고 또 올랐다. 스물 네 배, 스물 일곱 배, 서른 배, 서른 한 배, 서른 두 배… 드디어 사람들이 '차라리 마차에서 자겠다'며 손털고 일어났을 때의 가격은 서른 네 배에 이르러 있었다. 그야말로 도시 전체가 춤추는 밤이었다. "집에 돌아가는 데만도 3시간은 걸리지. 밤새 저택까지 돌아갔다가, 내리지도 않고 곧장 돌아오면 아침 표 사는 시간에 딱 맞게 될 테니까 돌아갈 분들은 진짜 마차에서 자는 것이 맞겠네." 서른 네 배 내기로 한 남작 영애가 거드름을 피우며 시녀장이 세는 금화와 은화를 내려다보다가 곁에 선 소년을 흘끔 곁눈질했다. 아까운 생각이 들긴 하는 모양이지만 결국 어쩔 수 없었다. "자, 갖고 사라지라고." 한 주머니 두툼한 돈을 받아 돌아선 소년은 어깨를 으쓱하며 인사 대신 한 마디 던졌다. "공연 즐겁게 보십쇼." 소년은 여관에서 나오더니 주위를 두리번대다가 맞은편 거리 모퉁이에 선 여관으로 향했다. 간판 아래 밝혀진 램프 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소녀가 보였다, 막시민과 리체, 두 사람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옷깃 사이로 손바닥을 마주 쳤다. "서른 네 배." "스물 여섯 배야, 다들 미쳤나봐." 막시민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들 미친 와중에 한 몫 챙겨야 되는 거지. 어차피 시작부터 돈이 많이 드는 일이었어. 입구에서 나눠준 종이쪼가리를 생각해 봐, 나 때문에 만든 건 아니지만, 어쨌든 사람들을 잡아두기 위한 추가 지출이었잖냐? 그러니 이런 걸로라도 매워둬야지, 그런 거 만드는 데 돈이 얼만지 알아? 기절할 정도로 비싸다고." "그런데 너 정말 이렇게 될 줄 확신했니?" 막시민은 거드름을 피우듯 고개를 쳐들었다. "조군 자식한테 이튿날은 낮 공연을 하고, 아침부터 표를 팔라고 시킨 게 나다." 리체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여관비 챙기려고 공연 시간까지 바꿔놨단 말이야?"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 너도 알다시피 우린 내일 공연이 끝나자마자 사라져야 하잖냐. 그런데 평소처럼 늦게 공연을 하고 나면 한밤중일텐데, 그때 어떻게 배를 띄울 수가 있겠냐? 낮 공연을 해야 끝난 뒤에 해가 있을 때 달아날 수가 있지." "내일도 좀더 버티다 보면 귀족들이 돈 쓰게 만들 일이 많긴 할텐데." "안 돼. 그걸 시작하면 우린 사흘이 지나도 못 떠나. 귀족들이 저마다 자기 집에 초대하겠다고 난리를 칠 테고, 공연 한 번만 더하라고 에테른 씨가 매달릴 테고, 거기에 휘말려 날자 보내다간 언제 떠날지 알 수 없게 돼버려, 지금까지 지체한 것만 해도 충분히 위험한데." 리체가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하긴 그렇다. 이제 내일이면 끝이지, 그 동안 아무 일도 없어서 다행이야." 막시민이 말했다. "아무 일이 없었는지는 아직 모른다고." 다이아몬드 러쉬 극장의 공연 홀 뒤쪽에는 대형 극장답게 무도회장이 있었다. 대도시의 극장들처럼 날마다 무도회가 열리진 않지만, 공연에 흥이 난 손님들을 끌어들여 밤새 춤추는 곳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유명 인사가 이름을 걸고 무도회를 열어 사람들을 모으는 일도 있었다. 물론 최근에는 식당으로 쓰이고 있었지만. 그 날 밤. 이곳에서 매우 조촐한 축하연이 열렸다. 파티라기보다는 다과회에 가깝고 춤도 없었지만, 무도회장 한구석에 마련된 세 개의 테이블에 모여 앉은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밝았다. 그 날의 성공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인지라 다들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잔을 높이 든 에테른이 선창했다. "「일 드 모르비앙의 결혼식」을 위해 건배!" "건배!" "건배!" 뒤늦게 잔을 들어올린 지오반이 키득대며 외쳤다. "모르비앙 섬을 위한 거니까 오를란느 식으로 해야지, 브라보!" 넘치도록 한 잔, 잔에 깔리도록 아주 조금, 각양각색으로 따라진 술이 대부분 단숨에 비워졌다. 조슈아는 술을 사양하려 했지만, 곁에서 몰트 부인이 억지로 따라주는 바람에 샴페인 빈 잔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곁에서 보고 있으니 금방 얼굴을 붉혔다가, 조금 후엔 오히려 하얘졌다. 몰트 부인이 웃었다. "그것 봐요, 괜찮지? 한 잔 더 할래요?" "아, 아뇨." "에이, 사양하지 말고." 조슈아는 손을 내젓다가 씨익 웃었다. "내일 공연이 끝나면 그 땐 마시죠." 넉살 좋게 한 거짓말에 속아 준 몰트 부인은 곧 다른 사람에게 술을 권했다. 반대쪽에 앉아 있던 지오반이 그 모양을 보다가 말했다. "술이란 게 마셔서 독이 되는 사람도 있는 법이라서." "이해해 주셔서 고맙……." "하지만 샴페인 갖고 술이라 할 순 없지. 자, 한 잔 더 하게!" 그 즈음 한쪽에서는 왁자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스트라우즈가 갖고 있던 바이올린을 손끝으로 퉁겨 조금 전 공연의 엔딩 멜로디를 연주해 보였던 것이다. 늘 점잖던 늙은 거장의 재치에 모두가 흥겨워했다. 그러자 문득 생각난 것처럼 피아니스트 모리스 두아르테가 조슈아에게 물었다. "그런데 히스파니에 씨, 당신은 어떻게 그런 노래를 하면서 피아노도 그렇게 잘 칠 수가 있죠? 난 당신 같은 사람은 한 번도 본 일이 없어요." "그뿐이야? 곡도 쓰고, 대본도 쓰고, 가사도 쓰고, 심지어 그림도 그린다고." 이미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기에 사람들은 그저 웃을 뿐, 셀마 레이슬링크의 말에 굳이 탄복하지 않았다. 그 때 스트라우즈가 바이올린을 톡톡 치며 말했다. "그럼 혹시 이것도 연주할 줄 아시오?" 조슈아는 샴페인 한 잔을 억지로 마셔서 다시 붉어져버린 얼굴로 미소만 지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재촉했다. "그럼 솜씨 좀 보여줘요!" "당신이라면 틀림없이 기가 막힌 소리를 내겠지?" "또 다른 건? 당신이 만질 수 있는 악기라면 다 시켜 보고 싶은 기분인데 말야." 모두가 술이 조금씩 오른지라 농담 같은 요구인데도 꽤 집요했다. 결국 조슈아가 두 손을 들어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뇨, 바이올린은 됐어요. 저라고 모든 걸 할 수 있는 건……." 적당히 거짓말로 넘어가려 하는데 갑자기 지오반이 벌떡 일어났다. "당신이라 해도 만져보지 않았을 악기가 생각났어." 무도회장 밖으로 나간 그는 잠시 후 천에 둘둘 말린 것을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조슈아에게 척 안겼다. "난 궁금한 게 생겼어. 천재란 책 속에나 나오는 줄 알고 살아왔는데, 내 평생 처음 살아 있는 천재가 눈앞에 나타났단 말이야. 그런 당신은, 연습하지 않은 악기도 과연 연주할 수 있을까…. 어때? 그것도 처음 보는 악기일 경우엔 말이야." 조슈아가 머뭇거리다가 천을 끌렀다. 그리고 지오반을 바라보더니 무안한 듯 웃으며 말했다. "이건 리라(lyre)군요." "그냥 리라가 아냐, 잘 살펴보라고." 조슈아는 물론 리라를 다루어 보았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보니 대륙에서 흔히 쓰는 리라와는 현의 수가 달랐다. 모두 열 줄이나 되었다. 지오반은 팔짱을 낀 채 손가락을 세워 까딱거렸다. "보다시피, 흔한 오현금이나 칠현금 따위가 아니라고, 어제오늘 만들어진 거야 아니지만, 루그란 말고 다른 데서는 쓰이지 않는 걸로 알고 있어, 역시 처음 보나?" 흥미로워 보이는 놀이인지라 어느새 모두의 눈이 집중되었다. 그런데 까닭을 알 수 없지만 리라를 바라보는 조슈아의 눈이 묘하게 냉담해 보였다. 현에 손을 얹고, 몇 줄 만져보더니 잠시 후 느린 선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 지오반이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조슈아의 손놀림을 주시하고 있었다. 연주가 리듬을 타기 시작하자, 모두가 조슈아 주위로 몰려들었다. 오랫동안 연습한 악기 다루듯 능숙한 주법을 다들 놀란 듯 바라보았다. 십현금은 그들도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정말, 못 다루는 게 없네." "한트케 씨, 저 악기가 정말 루그란에만 있는 거 맞아요? 처음 만지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전에 배웠던 겁니까, 제작자 님?" 조슈아도 지오반도 대꾸가 없었다. 한동안 말소리는 커녕 접시에 포크 부딪는 소리, 의자다리 끄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조슈아는 곡을 맺지도 않고 손을 멈췄다. 고개를 들고 보니 지오반의 눈에서 장난기가 사라져 있었다. "히스파니에 당신, 조프리 데카코르디(dekdchordi, 10현)를 알고 있나? 루그란의 유명한 악기 제작자이자 작곡가, 연주가였던 사람 말이다." "10현 리라의 조프리 말이지요." 모를 리가 있겠는가, 10현 리라의 조프리, 조프리 폰 아르님은 비취반지 성에 초상화가 걸려 있는 몇 안 되는 데모닉 중 한 명인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 주게. 당신, 전에 10현 리라를 만져본 일이 있어?" "아뇨." 조슈아의 목소리는 언뜻 냉담하게 들렸다. 조슈아는 지오반이 루그란 사람 '조프리 데카코르디'가 사실은 '조프리 폰 아르님'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10현 리라를 연주하는 것을 굳이 사양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쳐버린 데모닉의 이야기를 이곳까지 와서 듣게 된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랬다. 한때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유능한 장인이자 연주자, 그리고 천재 음악가로 알려졌던 조프리는 비취반지 성에서 발광한 채로 10년 동안 유폐되었다가 죽은 인물인 것이다. 지오반은 조슈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조금 후 고개를 저었고, 다시 한숨을 쉬고, 가슴에 한 손을 얹은 채 입을 열었다. "난 말이야. 조프리의 악보를 모조리 갖고 있어. 그의 10현 리라도 열 대는 갖고 있지. 그는 말이야. 진정한 천재였어. 루그란은 역사가 긴 왕국이고 예술 분야에 있어선 특히 천재적인 자들이 많았지만, 누구도 조프리만큼 대단하지는 못했다고 난 확신하지. 조프리에 대한 거라면 뭐든지 수집해 온 나야. 난 천재를 좋아해. 신이 실수로 너무 많은 것을 줘버린 존재, 하잘것 없는 돌덩이 광맥 속에 박힌 루비가 아닌가!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거든, 내가 천재가 아니라 해도, 그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미칠 듯이 좋단 말이야." "……." 조슈아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데모닉 조프리에 대한 지오반의 열정은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집안의 데모닉에 대해 생각하기조차 싫어했던 그는 조프리가 루그란에서 얼마나 오래 지냈는지도 몰랐고, 회랑에 걸린 초상화도 오랫동안 보아 왔지만 특별한 감정을 갖고 바라본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아니, 그는 사실 회랑에 걸린 데모닉들의 초상화를 자세히 보고싶어하지 않았다. 그들에게서 조금이라도 자신과 닮은 점을 발견할까봐, 그라면 잠깐만에 발견하고 말 테니까, 그런 본능적인 경계심이 움직여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눈을 피하며 걸어다녔던 것이다. 지오반의 존재는 신기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기묘한 의문을 가져다주었다. 천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 그렇다면 데모닉 조슈아도 일단 죽고 나면 저렇듯 사랑 받게 되는 건가? 그 때 지오반의 웃옷 앞주머니에 예전에 자주 본 듯한 네모지고 납작한 은빛 갑이 보였다.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주머니에서 그것을 꺼냈다. 지오반이 흠칫 놀라는 가운데 그는 갑의 뚜껑을 열었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조그맣고 검은 것을 꺼내 손끝에 얹었다가, 입 안에 넣었다. "……." 지오반은 조슈아의 입가가 미소짓듯 살짝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은빛 갑을 돌려 받아 주머니에 넣으면서, 지오반은 뺨을 약간 실룩거렸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나? 진짜로 쓴맛인데?" "전혀요." 조슈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오랜만에 맛보는 쓴 사탕을 녹이며 무도회장을 떴다. 다른 사람들은 주연 배우인 그가 내일 공연을 위해 쉬러 가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오반은 주머니 안에 든 사탕갑을 톡톡 두드리고,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은으로 된 이 사탕갑은 그가 사들였던 조프리의 유품 중 하나였다. 그 안에 조프리가 그랬듯 쓴 사탕을 넣어 다녔지만 그 자신은 아무리 애써도 그다지 즐길 수 없었던 것이다. 옆에서 스트라우즈와 몰트 부인이 이상한 듯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올프랑쥬 군 못 보셨소?" "여기 오긴 왔던가요?" "글쎄요. 못 본 것 같은데." 몰트 부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올프랑쥬 양도 안 보이지 않아요? 조금 전까진 있었던 것 같은데." 마음이 불타는 것 같다. 주위가 캄캄한 것조차 느낄 수가 없다. 발이 무엇을 밟았는지, 무엇에 걸려 넘어질 뻔 했는지도 인지할 수 없다. 먼지와 잡동사니들을 마구잡이로 밟으며 걸어갈 뿐이다. 마치 그의 마음 속에 있는 가장 어두운 터널로 안내하고 있는 것만 같다. 갈 수 있다면 더 먼 곳으로, 더 깊이. 그는 실패한 인생이었다. 스스로 능력 있다고 여겼지만, 손대는 것마다 어찌된 셈인지 실패했다. 때로는 그가 자초하기도 했다. 지난 실패가 성공에 대한 갈망을 부르고, 그러다 보니 작은 실수에도 조바심 내고 초조해하다가 결국 화를 내고, 고집을 부리고, 거친 말을 내뱉고, 사람들을 떠나게 하거나 또는 그가 떠났다. 아아, 사실은 다 흔한 일들이다. 성공한 한 사람은 극히 드물지만, 실패한 한 사람은 어디서든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치사하게도 세상의 저울추는 아래쪽으로 기울어 있다. 천상의 열매들은 다른 누군가가 다 가져가고 그와 같은 사람들이 땅 아래 지하에서 살도록 내버려둔다. 그런 그가 지하를 좀 걸은들 무슨 상관인가? 지하의 인간이 지하를 걸을 뿐인데. 그를 미치게 하는 것은 빌어먹을 천상의 종족들이다. 처음부터 그들을 미워하려고는 안 했다.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가 자신을 모욕하는 소리를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자기 것을 한 조각 나누어주지 않는 자들, 자만심으로 가득 차서 지하의 종족을 비웃어대는 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하지만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재능이다. 왜 그들은 아름다울까? 목소리는 천사 같고, 결코 따라할 수 없도록 빛날까? 자기 같은 사람이 보기에도 흠잡을 데 없는 미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심지어 성공하기까지 할까? 그 성공, 사람들의 열광, 환호의 도가니, 도시의 광란! 무대는 화려하되 그 아래는 아름답지 않다. 수면 아래에서 발버둥치는 백조의 물갈퀴처럼, 천상의 종족이 결코 내려오지 않을 곳─ 그런 곳을 그는 계속 걸어갔다. 그곳으로 안내해 달라고 하는 이유를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사실은 알고 있지?'하는 속삭임이 자꾸만 들려왔다. 그는 부인했다가, 다시 인정했다가 하며 혼란을 겪었다. 하지만 발을 멈추지는 않았다. 때로 그는 마음을 옥죄는 고통을 느꼈다. 입 안 가득 핏물을 머금은 기분도 느꼈다. 그러나 그의 귀에 뱀의 혀를 넣어 준 자의 손아귀 속에서, 아니 실은 자신에게 사로잡혀, 거절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 자신은 고상한 사람이라고 믿어 왔고, 남의 파멸을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모르는 곳에서 파멸이 일어나길 바랐다. 손을 더럽히지 않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어린애처럼 순진하게 행동한 결과일 뿐,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생각하고, 죄책감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텐데. 몇 걸음 뒤에서, 그런 반 올프랑쥬를 따라오는 발소리가 줄곧 들려왔다. 뚜벅,뚜벅, 끊이지 않고. 2. 그대의 마지막 공연이 최고의 공연이 되기를 "그대의 공연에 장미꽃과, 춤추는 오르골 인형과, 흰 장갑과, 그 안에 든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보냅니다. 부디 기뻐하시길." 분장실은 텅 비어 있었다. 긴 의자 위에 누군가가 놓고 간 듯한 장갑 한짝과 머플러가 있을 뿐이었다. 조금 전까지 이곳을 가득 메웠던 꽃바구니와 화환, 선물들은 에테른의 명령으로 모두 옮겨갔다. 바닥은 꽃잎과 리본 조금이 바닥에 떨어져 있을 뿐 깨끗했다. 먼저 들어온 사람은 막시민이었다. 이곳에서 조슈아를 만나 같이 칼라이몬 선장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던 것이다. 같이 돌아온 리체가 잠깐 가볼데가 있으니 들렀다가 금방 온다고 했기 때문에, 혼자 들어온 막시민은 의자에 털썩 앉아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 금방 이상한 것이 띄었다. 막시민이 일어서는 순간, 문이 열렸다. 조슈아였다. "아, 막군, 먼저 왔구나." 막시민은 조슈아의 얼굴이 약간 붉어진 것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마시지도 못하는 주제에." "자꾸 권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 지금은 좀 지나서 괜찮아. 얼른 가서 자야지." "근데 말이야……." 막시민이 말을 꺼내려는 순간, 조슈아도 발견했다. 화장대 앞이었다. 말끔하게 치워져 화장품 몇 개와 분통, 빗, 솔밖에 없는 그곳에 큼직한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다 치운 줄 알았는데." 조슈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자를 들어 테이블에 옮겨 놓았다. 그러고는 중얼거렸다. "가볍네, 뭐가 들었지?" 다른 선물은 열어보지도 않았지만, 마침 한 개 남아 있으니 열어볼 마음이 내켰다. 조슈아가 상자의 리본을 다 풀었을 때 문이 열리고 리체가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어?'하는 소리를 냈다. "왜 그래?" "그거 뭐야?" "글쎄, 지금 열어보려고." 리체의 손에도 뭔가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테이블로 다가와 자기가 가져온 꾸러미를 얹어 놓았다. 그 때 조슈아가 상자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이번엔 그가 '어?'라고 말했다. 막시민이 다가왔다. 들여다보니 안에 든 것은 옷이었다. 무대 의상처럼 보이는 흰 옷이었다. 정확히는 진줏빛 비단, 은사 자수로 어깨와 가슴을 장식한 재킷이었다. 조슈아의 표정이 이상했다. 그는 옷을 꺼내 펼쳐 들었다. "이게 왜 여기에 있지?" "이거라니? 이 옷이 뭔데?" 막시민은 문득 생각해 낸 듯 리체를 돌아봤다. "이거 혹시 네가 만든 거냐?" 리체가 조슈아가 입을 옷을 혼자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알기에 한 말이었다. 물론 리체는 첫 공연 때까지도 그 옷을 내놓지 않았고, 그래서 막시민은 리체가 포기한 줄로만 알았다. 지금 낯선 옷이 갑자기 나타나니 리체가 가져온 거라고밖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리체도 이상한 표정이 되어 다가왔다. 조슈아로부터 옷을 건네받아 살펴보더니 눈이 동그래졌다. 막시민은 이상항 낌새를 느끼고 다그쳤다. "네가 만든 거야, 아니야?" "내가… 만든 거야." "그래? 그렇다면 역시 네가……." 리체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미랭게트 의상실에서." "뭐?" 막시민이 보니 리체와 조슈아가 서로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조슈아가 말했다. "이 옷은. 내가 「아쿠아리안」공연 할 때 2막에서 입은 옷이 분명해. 물론 네가 만들었겠지. 그런데 왜 이게 여기 있지? 누가 가져온 거지? 넌 아닐거 아냐?" 리체는 한참 동안 조슈아의 눈을 바라보기만 했는데 표정이 점차 굳어지다 못해 나중에는 숨쉬기도 힘든 것처럼 보였다. 막시민이 재촉했다. "어떻게 된 거야? 뭘 알면 얼른 말해 봐. 무슨 생각을 하는 중인데?" 리체는 힘겹게 입을 뗐다. "그… 자야." 두 소년의 동작이 일순 멈췄다. "그 자라고?" "틀림없이, 그 자야. 그 때… 이 옷 말이야, 조슈아, 기억나? 이 옷, 한 벌이 아냐, 두 벌이라고." 상황을 알 리 없는 막시민은 미간을 찡그렸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원래 의상은 다 일찌감치 만들어서 극장에 보내게 돼 있어. 이 옷도 마찬가지였고, 그런데 그 날 말야, 「아쿠아리안」하던 날… 난 그냥 의상실에 있었는데 극장에서 누가 달려와서 이 옷만 갑자기 없어졌다는 거야. 빨리 새로 만들어야 된대. 사례도 하겠다고 해서 난 만들었고… 그래서 그걸 갖다주려고 극장에 갔었지." 리체는 막시민을 흘끗 봤다. "그 날 극장 입구에서 나랑 마주쳤지? 그 때 나, 이 옷 갖고 온 거였어, 아니면 내가 왜 극장엘 갔겠어. 그런데 그 없어진 옷, 그게 어디로 갓을 것 같아?" "……." 리체가 옷의 솔기와 바느질을 다시 한 번 살펴보더니 조슈아를 향해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이 옷은 네가 「아쿠아리안」공연에서 입은 옷이 아냐. 네 눈엔 똑같아 보이겠지만, 내가 만들었으니 난 알아. 분명히 이 옷은 내가 먼저 만들었던 옷. 그러니까 처음에 극장에서 사라졌던 옷이야. 기껏해야 팬이 훔쳐갔을 줄 알았어. 하지만 여기… 이렇게 나타났어." 막시민이 천천히 말했다. "그것만으로 그 자가 여기 나타났다고 확신할 순 없어." 리체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여기 조슈아가 카르디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 달리 또 있어?" "내 말은, 그 자가 나타났다 하더라도 이곳에 이 옷을 보낼 까닭은 없다는 거야. 도대체 왜? 우린 그 때 그 극장에서 옷을 훔쳐간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어. 그런데 이 옷이 여기에 나타났다는 이유만으로 그 자가 그 옷을 훔쳤고, 이곳까지 뒤따라왔고, 굳이 분장실에 옷을 보냈을 거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하지만, 다른 가능성이 없잖아!" "왜 없어? 오늘 공연을 관람한 누군가가 사실은 카르디의 열광적인 팬이어서 조슈아의 모습을 보자마자 누구인지 알아보았을 수도 있잖아? 그래서 이 옷을 만들어 보냈을 수도 있고." "이건 내가 만든 옷이야! 그리고 그렇게 짧은 시간에 옷을 만들 순 없어!" "왜 안 돼? 넌 만들었다면서?" "그건 내가 처음의 옷을 만들었던 장본인이고, 옷본도 남아 있고, 만든지도 얼마 안 되어서 천과 바느질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알아? 객석에서 무대에 선 배우의 옷을 보고 이렇게 만들 순 없단 말이야!" 조슈아가 말했다. "둘 다 그만둬." 막시민과 리체 모두 말을 그쳤다. 조용해지자 둘 다 신경이 극도로 곤두서 있었음이 느껴졌다. 아랫입술을 빨았고, 막시민은 고개를 돌리며 테이블 끝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침착해지자, 말보다는 생각이 필요해, 생각할 시간이." 막시민이 쓴웃음을 지었다. "너한테 무슨 시간이 필요하냐, 넌 조건이 주어지는 순간 연산이 끝나잖아. 우리 의견을 기다릴 것 없어. 네 생각을 말해봐." 비꼬려는 어조가 아니었다. 조슈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지." 조슈아의 손이 옷의 자수를 훑으며 내려갔다. 말을 고르는 듯했던 그가 고개를 들고 둘을 번갈아 바라봤다. "틀림없어, 그 자다. 그 증거는 이 옷이야. 이 옷이 여기 있다는 사실, 그 때문에 분명히 그 자야." 옷을 훑던 조슈아의 손이 여밈에서 멈추고, 한 손만 움직여 단추 하나를 끌렀다. "그 자가 나를 처음 본 것은 언제일까, 그는 몽플레이네 씨의 집에서 처음 우리 앞에 나타났지만 그 전부터 보고 있었다고 생각해. 그가 누구의 의뢰를 받았든, 극장의 화재에서 내가 살아날 경우에 대비해서 고용됐을 테니 화재 이전부터 의뢰를 받아 자신의 목표물인 나를 알게 되고, 내 움직임을 봐 왔을 거야. 그렇기에 또한 화재에서 살아남은 뮤치아를 죽였어." 단추 또 하나를 끄르는 손끝이 약간 멈칫거렸다. "난 그 자가 나의 「아쿠아리안」을 봤을 거라고 확신한다." 리체는 화장대에 기대어 추운 것처럼 두 손으로 양팔을 감싸고 있었다. 막시민은 테이블을 짚은 채 다른 손끝으로 안경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그 말이 나왔을 때, 둘 모두 조슈아의 눈빛에서 알 수 없는 빛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미친 자의 빛. "의상 한 벌이 사라지는 정도로 공연이 취소되진 않지. 그 자가 내 옷을 가져간 마음을 다 짐작할 순 없어. 하지만 그는 「아쿠아리안」이 사작되기 직전, 마치 놀리려는 것처럼 웃을 슬쩍 가져갔어. 그리고 그 옷을 버리지도 않고, 간직해온 옷을 상자 안에 곱게 접어 넣어서 내게 보내면서 심지어……." 마지막 단추를 끄른 조슈아의 손끝이 옷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무언가를 잡고 투둑, 끊어냈다. 이윽고 나타난 것을 하얀 봉투에 든 카드였다. 옷 안감에 두어 땀 꿰매어져 있었던 것이다. 카드를 연 조슈아는 두 사람에게 들리도록 내용을 읽었다. 그대의 마지막 공연이 최고의 공연이 되기를. 그대의 하얀 옷에 건배. "아……." 시선을 떨군 리체가 두 손으로 입가를 감쌌다. 카드를 읽는 조슈아의 목소리에는 묘한 열기가 있었다. 그 순간, 자기 자신이라는 배역을 연기하고 있는 사람처럼, 무대에 올라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를 자신으로 느끼며, 그의 운명을 말하듯 자신의 운명을 내뱉었다. 섬ㅇ이 없었지만, 다른 사람이 썼을 리 없는 글귀였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방 안을 꽉 누르는 듯했던 말끝의 울림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테이블을 때리는 소리가 울렸다. 쾅! 아픈 것도 잊은 듯, 주먹 쥔 손을 테이블에 대고 비틀며 막시민은 허공에다가 소리질렀다. "빌어먹을 자식아! 누구 마음대로 마지막 공연이야!" 탁, 또르르……. 화장대에 기대섰던 리체가 경황없이 움직인 손에 부딪쳐 향수 뚜껑이 떨어지고 바닥으로 굴렀다. 병이 넘어지면서 강렬한 사향(musk)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모두의 이성을 순식간에 마비시켜 버릴 것처럼. 조슈아의 눈동자는 한층 더 기이한 빛깔이었다. 검은 눈은 푸른빛도, 때론 붉은빛도 띠었다. 수많은 것이 비치며 일렁이고, 점점 더 밝아졌다. 모닥불 앞에서 겁내지 않고. 홀린 듯이 다가가 불길을 붙잡으려는 어린아이 같았다. "화낼 것 없어. 서로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니까, 그도, 나도." "최선이라니? 이 상황에서 최선이 뭔데? 그는 너를 죽이려 하는데, 너의 최선은 도대체 뭐냐!" 조슈아는 웃었다. "그건 서로 만나서 해결해야 할 문제지." "만난다니? 네가 왜 그를 만나?" "만날 수밖에 없어. 그는 내일 「일 드 모르비앙의 결혼식」을 보러 올 테니까." 막시민도 리체도 당황하여 눈을 깜빡거렸다. "뭐…라고?" "그 사람이, 내일 객석에 앉아 있을 거란 말이야?" "그가 보낸 글을 봐." 조슈아는 다시 한 번 미소지었는데 이번에는 자신감이 언뜻 비쳤다. "내 마지막 공연이 최고의 공연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선 직접 와서 보는 수밖에 없지. 그가 공연을 볼 생각이 아니었다면, 이렇듯 멋을 부려 자신을 알릴 필요는 없을 거야. 객석과 무대에서, 서로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야." 막시민은 사납게 대꾸했다. "왜 그게 마지막 공연이야!" "응… 하긴 마지막 공연은 아니어야겠지." 말투로 보아 그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어지는 조슈아의 목소리가 점차 열기를 띠었다. "그는 내일, 나를 보러 올 거야. 「일 드 모르비앙의 결혼식」이 시작되는 무대 앞 객석에 높이 앉아서, 나를 보려고 할 거야. 틀림없이 온다. 그는 나를 놀리고 있는 거야. 그는 숨어 있을 수도 있었어. 그가 이렇듯 선물을 보내 재신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등 뒤에 나타나 내 목을 조르는 순간까지도 몰랐을 테지.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어. 어둠 속에 숨어서 내목을 부러뜨릴 생각은 없었어. 그가 나를 보고 있음을 알려서, 나 또한 그를 보게 되길 원했어. 그는 나를 보고, 나는 그를 보고, 서로를 뚜렷이 의식하는 가운데 자신의 일을 하고 싶었던 거지."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자신을 드러낸다고? 전문적인 살인자인 그 자가? 더 쉽게 성공할 수 있는, 숨어 있던 그늘을 버리고?" 막시민의 눈이 조슈아와 마주쳤다. 다음 순간, 막시민은 너무 밝거나, 희거나, 뜨거운 것을 본 사람처럼 시선을 돌렸다. "그는 자신만만해. 지금껏 자신이 실패했다고도 생각하고 있지 않아. 그는 나와, 우리와 잠시 유희를 즐긴 거야. 쫓고 쫓기는 해변의 놀이처럼, 언제고 뒤따라 쓰러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집토끼를 풀어놓은 사내처럼 느긋한 거야. 지금 그는 내게 말을 걸었어. 마지막 공연을… 최고로 해내라고 말이야. 그리고 또한 내게 옷을 보냈어. 무대 의상을 「아쿠아리안」에서 입었던…. 그러면서 흐트러지지 말고 무대에 설 것을 요구했어. 물론 애가 달아날 수도 있지. 아니, 달아날 테면 달아나 보라고 말한 셈이지. 선택지를 준 자는 그야. 그렇지만 그는 한 명의 관객으로서 「일 드 모르비앙의 결혼식」을 보러 올 것임을 내게 알렸어. 그러면서 내게 겁에 질려 내일 공연을 망치고 달아나 버릴 것이냐고 묻고 있는 거야. 「아쿠아리안」의 의상을 보내어 격려한 자신을 실망시킬 것이냐고, 무대를 버리고 도망칠 것이냐고 비웃으면서 물은 거야." 조슈아의 입가가 미세하게 실룩였다. 쏟아진 향수는 이제 방 가득 중독적인 향기를 내뿜었고, 그 때문이었든, 또는 다른 무엇 때문이었든 리체는 머리가 어질어질해져 눈을 바로 뜨기가 힘들었다. 눈을 잠깐 감는데 막시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은 지금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냐? 너를 죽이려 도사린 그 자와 만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되는, 그 자리에 네 발로 나타날 생각이란 거냐?" "물론." "미친 소리 좀 작작해!" "미친 소리라고?" 갑자기 조슈아가 두 발짝 걸어와 막시민 앞에 섰다. 왼쪽 구두가 쏟아진 향수를 밟았고, 서늘하면서도 관능적인 머스크 향이 흡사 사람을 녹일 듯 진동했다. 귀부인들이 지니고 다니는 사향주머니에 들어 있는, 보통 한 사람에게 필요한 양의 수십 배에 이르는 향이다. 그러나 조슈아는 전혀 느끼는 기색이 아니었다. "분명히 말하겠어. 난 내 작품을 망치지 않아. 여긴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어. 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나를 죽이려는 사람까지. 이런 곳에서 내가 달아날 것 같아? 숨어서 더 일을 완벽하게 할 수도 있었던 그 자가, 나와 함께 파티를 즐기겠다고 내게 초대장을 보내 왔어. 거기서 등을 돌리고 달아나는 추한 꼴을 내게 보이라는 건 아니겠지?" 막시민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은 뭐라 형용하기 힘들었다. "조슈아… 네가 하고 있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는 거냐?" "물론 알고 있어." "그 자가 저울대에 올린 건 네 목숨이야." "아니, 그 자가 시험하고 있는 건 내 자존심이야. 날 기다리는 수많은 관중들을 버리고, 당당하게 초대장을 버린 자신을 저버리고, 무대에서 달아나는 배우가 될 테면 돼보다는 거야. 그 자는 객석에서 내가 어떤 꼴을 보일지 웃으면서 기다리고 있을 테지. 넌 그 자의 목표가 내 목숨뿐이라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이 순간 달아난다면, 난 다시는 무대에 설 수 없어. 목숨은 건질지 몰라도, 배우로서의 생명은 더 이상 없는 거다." "그 자가, 네가 달아나지 못하게 도발할 셈이었다면 충분히 성공했군 그래. 어때?" "내가 달아나지 않길 바랐다면, 처음부터 옷 따위는 보내지 않으면 돼." 둘의 시선이 부딪쳤지만, 조슈아의 눈빛은 단호했다. 한 치도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막시민 또한 미간에 힘을 준 채 조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만에 막시민의 입술에서 짓씹힌 듯한 말이 새어나왔다. "미친놈." "그래. 미쳤어. 너도, 나도 알다시피, 이 미친놈이 바로 나야." "이 순간 네 뒤통수를 때려 기절시켜서 끌고 나가고 싶다." "해 봐. 하지만 그 뒤에 네가 어떤 미친놈을 보게 될 지는 장담 못 해." 두 사람이 종종 의견 대립을 보이긴 했지만, 이 정도로 극한까지 밀어붙인 것은 처음이었다. 의견은 물론 감정도 낮게 숨을 쉬고 있는 조슈아의 표정은 이미 어떤 타협도 고려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굳어진 채였다. 막시민도 성격 같아선 주먹으로 한 대 후려갈기고도 남았을 텐데, 다음날 그 얼굴로 무대에 서야 한다는 것을 기억했음인지 주먹만 바르르 떨리도록 부르쥘 뿐이었다. 그런 것을 보면 막시민이 조슈아의 주장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볼 수도 없었다. "너……." 한참만에 막시민의 입이 열렸다. "내 조언 따위는 필요 없다는 거겠지. 네 목숨이든, 배우로서의 생명이든, 그밖에 뭐든 간에 너 스스로 지킬 수 있다고 했으니까 어디 직접, 최선을 다해 잘 해봐라. 난 능력이 없어서 너처럼 대단한 녀석의 시중을 어떻게 더 잘 들 수 있는지 모르겠다. 언제고, 그만둘 때가 올 거라고 생각했다. 주연이 지배하는 무대에서, 조연은 퇴장할 시간이지." 막시민은 한 발 물러서더니 몸을 돌려 그대로 분장실을 나갔다. 조슈아도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그 표정 그대로 얼마간 더 서 있었다. "조슈아." 리체가 불렀을때,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조금 전과 같은 표정인 듯 보였지만, 리체는 그의 눈가에 피로가 깊게 서린 것을 보았다. 리체가 말을 잇지 않자, 조슈아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사향… 냄새가 좀 진하지?" "……." 목을 조르던 손에서 겨우 풀려난 사람처럼, 지친 목소리였다. 리체는 조슈아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분명 미쳤지만…약한 사람, 아니, 강하고 탁월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숨쉬기 힘든 존재, 그만을 위한 특별한 공기와 식량이 필요하지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지. 발목이 꺾인 사슴처럼 안타깝지만, 결국 도움도 필요 없는 소년. 리체가 몸을 돌리는 순간, 조슈아가 말했다. "너도… 갈거니?" 리체는 대답 없이 테이블 끝쪽으로 가서 자신이 처음 들어오며 내려놓았던 꾸러미를 들고 조슈아 앞으로 돌아왔다. 꾸러미를 내밀자, 리체의 눈을 보는 조슈아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받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머뭇거렸다. "이것, 전부터 주고 싶었어." 조슈아의 손이 꾸러미를 풀었다. 안에서 나온 것은 눈부시게 흰 재킷과 은빛 무늬가 든 검은 바지였다. 막시민이 지난번에 스케치를 집어갔던 바로 그 옷이었다. 목이 깊게 패여 가슴 언저리에 이르고, 보빈 레이스였던 재킷 소매 끝은 코드자수에 컷워크(cutwork)를 넣은 것으로 바뀌어 좀더 뚜렷하게 장미가 표현되어 있었다. 그런 장미 문양이 어깨에도 들어가 있어서, 소매 없는 셔츠를 받쳐입을 경우, 어깨의 살갗이 것 사이로 드러나 보일 터였다. 조슈아는 옷을 매만지기만 할 뿐 얼른 뭐라 말하지 않았다. 리체가 말했다. "2막 끝부분, 결혼식에서 입을 옷이야. 어차피 설정상 제대로 된 예복도 없는 상태라고 했으니까 아예 자유롭게 만들었는데, 그래도 어울린다고 생각해." 조슈아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입지 않아도 돼. 하지만 네가 오늘 입은 옷보다는 훨씬 낫다고 봐. 내일 무대에 나갈 거잖아? 그런 희생을 치르고 선택한 곳인데, 완벽한 모습으로 나가야지. 내가 자신 있게 말하지만 이곳 의상 담당자, 나보다 실력 없어. 물론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말을 맺기 전에 리체의 몸이 휘청 흔들렸다. 조슈아가 갑자기 리체의 어깨를 붙잡아 당기며 뺨에 키스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얼굴을 맞댄 상태로 얼마 동안 그대로 있었다. 리체는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감았다가, 다시 뜨며 곁눈으로 조슈아의 얼굴을 봤다. 감긴 눈꺼풀을 엎은 아름다운 속눈썹이 바로 코앞에 보였다. 소년의 뺨은 차가웠고, 이마에 닿는 머리카락은 부드럽고, 입술은 열에 들뜬 듯 따끈했다. 다음 순간, 리체가 후다닥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조슈아도 고개를 들었다. "고마워." 짧은 한 마디만을 남기고 옷을 집어든 조슈아는 막시민이 나간 것과 마찬가지로 나가버렸다. 혼자 남은 리체는 저도 모르게 손을 가슴으로 가져갔다. 그제야 심장이 빨리 뛴다는 것을 느끼고 얼굴이 확 붉어졌다. 기껏해야 감사의 인사, 고향에서 같이 자란 소년들이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주고받았을 키스에 왜 이렇게 당황한 것인지 납득이 잘 안 갔다. 그처럼 짧았던가, 아면 좀더 길었던가? 저도 모르게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제기랄……." 그 때였다. "저기, 주시… 탕트 양……." 리체는 화들짝 놀랐다. 그렇지 않아도 빨리 뛰던 심장 고동이 더 세졌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데 목소리만이 들렸고, 방향은 입구가 아닌 벽 쪽이었다. "아, 저……." 방금 일어난 일로 당황해 있는 상태인데다 누군가가 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혼란케 했다. 방금 겪은 일은 물론이고, 조금 전, 셋이 서로의 이름을 불러 가며 '샐러리맨'에 대한 이야기까지 상세하게 나눴는데 그걸 누가 들었다면 큰일이 아닌가. "누구신지?" 그런데 대꾸하다보니 퍼뜩 생각이 낫다. 그녀를 쥬시탕트 양이라고 부를 소녀는 한 명뿐이었다. "이네스?" "……."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 대신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리체가 벽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왈칵 열리더니 벽장처럼 생긴 공간이 나타나고 그 안에 바짝 붙어 서 있는 이네스가 보였다. 리체는 웃을 수가 없었다. "너…구나, 그런데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벽장에서 나온 이네스는 리체를 빤히 바라봤는데, 눈빛이 약간 이상했다. 지난번 의상 보관실에서 이야기하던 때, 조심스러우면서도 어른스럽던 이네스와는 달랐다. 무슨 말을 꺼낼지 기다리는 짧은 순간이 못 견디게 길었다. 불쑥 '그 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그러나 벽장문을 본래대로 해 놓고 테이블 앞까지 온 이네스가 맨 먼저 꺼낸 말은 예상 밖이었다. "저기, 방금… 그 사람이랑… 음……." "응?" 이네스는 갑자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아니야. 저, 해 줄 이야기가 있어. 중요한 얘기야. 아까 전에 우연히 분장실에 들어왔다가 사람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열려 있던 저곳에 숨었는데, 나오지 못하는 사이 여러 가지를 보게 됐어. 얘기도 들렸고… 물론 일부러 엿들을 생각은 아니었어. 나올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야. 너와 그 분, 그리고 친구분… 오기 전까지도……." 리체는 이네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맨 처음 한 말이 너무 신경 쓰였던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녀도 상황의 중요함을 눈치채고 외쳤다 "어머! 너 그럼 저 옷이 들어 있던 상자를 여기 갖다놓은 사람도 봤니?" 이네스의 표정이 불안정했다. "그러니까… 저기, 그런 얘긴데… 나하고 얘기 좀 해. 그리고 나한테 해결해야 할 얘기도 있고." 리체는 약간 경계심을 느끼며 반문했다. "무슨 얘기?" "너와 그 분이랑 친구분, 좀더 정확한 정체에 대해서, 제발 말해줘. 그걸 들어야 내 얘기도 할 수 있어. 내게도… 이건 쉬운 문제가 아니야. 하지만 모르는 체 할 순 없어. 아, 안 돼.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어." 리체는 상황이 중대해지는 것을 깨닫고 주위를 둘러봤다. 지금 두 소년을 불러올 순 없다고 생각했다. 이네스가 그들 앞에서도 입을 연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직접 처리할 수밖에 없다. 이야기를 해서, 담판을 이어야 한다. "다른 데로 가자. 여긴 너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겁나." 3. 심장을 꿰뚫다 "한때 천사였던 그대, 눈 감고서 내 얼굴 바라보지 아니한다. 한때 내 것이던 그대, 다문 입술 내 부름에 답하지 아니한다. 내가 조급히 부르짖을 것을 알고도 일어나 날 맞이하지 아니한다. 보답 없는 여인이여 나는 그대를 용서하지 아니한다. 그대 위해 흘린 피도 보람 없이 죽음이 앗아가 내 것이 아닌 그대 내 그대의 뒤를 따라갈 수 없으니 그대의 형제들과 친구들을 보내어 돌로 메운 무덤 속에서도 영원히 기뻐하게 하리라." 여전히 사향 냄새가 떠돌았다. 정신을 혼미하게 하던 독한 향은 가라앉았지만, 환기가 잘 되지 않는 분장실의 구조상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가, 무심코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을 아찔한 향 속으로 끌어들였다.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 의도하지 않았던 행동을 저지르게 하는 마비의 향. 하지만 이 시각, 드나드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점심식사를 하고 있을 정오다. 혼자 앉아 거울을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어 검고 납작한 뚜껑을 열었다. 밖에는 열두 시 십 분에 태양빛이 내리쬐련만, 이곳에는 한밤처럼 켜 놓은 오랜지빛 램프만이 휘황한 빛을 뿌리며, 거울 테두리를 두른 황동빛 싸구려 금장식과 낡은 화장대의 칠 벗겨진 상처들마저 비춘다. 탁, 내려놓다 통에서 하얀 분가루가 날아올라 춤추더니 이내 빛에 녹아버렸다. 진주를 부순 듯 반짝이는 분통 속에 조슈아는 두 손가락을 푹 찍었다가, 눈 아래쪽을 그었다. 손끝에서 떨어진 가루가 화장대 위에 곱게 흩어졌다. 손끝만으로 눈밑과 광대뼈 언저리까지 희게 펴 발랐다. 그리고 부드러운 붓으로 한 차례 털어냈다. 밑화장은 그 정도로 끝이었다. 피부빛이 고르고 희어서 화장수도, 유제(油制)도 핑요 없었다. 다만 조명을 생각해서 종종 눈 아래만 바르곤 했다. 가면을 쓰던 카르디 시절에도, 때에 따라 가면 위에 그렇게 했다. 그러나 오늘은 가면이 없었다. 어쩌면 필요보다는 기분의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무대에 아무 준비도 없이 오르지 않겠다는 배우다운 기분으로, 장난처럼 보이기도 하는 화장을 시작하는 것이다. 거울 속에는 수많은 빛깔을 칠할 수 있는 희고 매끄러운 얼굴이 있었다. 무엇을 해도 좋으리라. 그가 만든 그의 극이며, 그가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배역이다. 조슈아의 손이 뻗어 먹붓을 집었고, 가느다란 붓끝을 잠시 들여다봤다. 종이 위에 그릴 때처럼 나타내고 싶은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생각한 그대로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대담하게 붓끝을 엷은 눈꺼풀에 댔고, 순식간에 선이 그어졌다. 쌍꺼풀 위로 검은 라인이 이어지다가 눈초리에 닿자 가늘게 치켜 올라갔다. 다른 쪽에도, 검은 먹선이 눈매를 진하게 날카롭게 만들었다. 멋붓을 놓고, 섀도우를 집어들었다. 죽은 사람이나 아픈 사람을 연출할 때 쓰는 푸르죽죽하고 어두운 섀도우를 몇 개 섞어 눈매를 따라 바르고, 눈초리에는 좀더 짙게 발랐다. 더듬거리지도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은 시도한 일도 없는 푸른빛과 보랏빛이 섞인 눈매가 만들어지자 붓을 던지고 거울을 보았다. 몇 가지 색깔만으로 평소와는 사뭇 달라진 자신이 보였다. 여전히 아름답지만, 무표정만으로도 차갑고 화가 난 것처럼 보인다. 본디 아무 것도 칠하지 않아도 충분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무대에 오를 것이다. 그곳에 어울리는 아름다움일 수 있다. 화장대 앞에서 일어나 옷장으로 걸어간 그는 1막 첫 장면에서 입기로 된 옷을 꺼냈다. 푸른 광택이 도는 검은 벨벳으로 된 긴 재킷과 깃 높은 셔츠를 테이블에 던져 놓고, 입고 있던 것을 벗었다. 바지부터, 그리고 셔츠를 입고 단추를 채웠다. 칼라를 세우고 목 언저리는 풀어헤친 채 벨벳 재킷을 입었다. 반짝이는 황금빛 잔추가 달렸고, 팔과 아랫단에는 꼬임이 많은 금빛 파이핑(piping) 장식을 둘러 무늬가 두드러지게 한 장식적인 옷이다. 보통 사람은 소화하기 힘든 화려한 모양이지만 그에게는 문제없이 잘 어울렸다. 마지막으로, 머플러를 감고, 구두를 신었다. 홱 돌아서자 저만치 분장실 전체가 비치고, 그리고 자신이 비친 거울이 보였다. 아침에 다듬어 두었던 머리를 손으로 한 번 쓰다듬었다. 화장대로 다가가 서랍 속에서 가짜 금반지를 꺼내 끼고, 입가를 매만졌다. 모든 것이 끝났다. 마음에 들었다. 그는 이제 무대로 나가 리허설을 시작할 것이고, 한 시간 반 뒤에는 모든 것이 시작된다. 환호도, 죽음도 기다릴지 모르는 곳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려 걸음을 떼어놓았을 때, 문이 열렸다. 방문자를 맞이한 것은 매혹적인 사행 냄새였다. 방 안 가득 물씬하게 풍겨와 순간 머리가 어찔할 정도였다. 이네스는 당황해서 머뭇거리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곧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자 놀란 표정이 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멍해졌다. "아, 이네스. 준비해야지?" 어제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함께 연습했고, 이미 한 회 공연을 했는데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심장을 움켜쥐는 손을 느낀 사람처럼 숨이 탁 막혔다. 저런 눈화장을 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이질적일 정도로 선명한 푸른 섀도우와 보랏빛, 그러나 어색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이 미치도록 뛴다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오직 그것만을 알았다. "그래, 이리 와 봐." 조슈아가 부르는 대로 화장대 앞으로 가면서도 물 속을 걷는 것처럼 몸이 잘 움직여주지 않았다. 가까스로 의자에 앉자, 조슈아는 손을 씻고 와서 맞은편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자신을 향해 돌아앉으라고 했다. 그리고 손을 뻗어 가장 먼저 화장수를 손에 대며 말했다. "눈 감아봐." 그의 손이 얼굴에 닿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화장수의 시원함도 느낄 수 없었다. 오직 느껴지는 것은 부드러운 손바닥 감촉뿐이었다. 무언가가 이어 펴 발라졌지만,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조슈아는 화장을 잘 하지 않았지만, 화장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몇년 간 무대에 서며 수없이 분장실에 머물렀던 그였다. 이네스의 창백하고 고르지 않은 얼굴빛을 어떤 식으로 감추어야 할지, 선명하지 않은 눈매는 어떻게 하고, 뺨에는 어떤 빛깔이 필요할지 파랗게 핏줄이 보이는 목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조금만……." 이네스가 가늘게 눈을 뜨자 신중하게 붓끝을 다듬는 조슈아의 얼굴이 보였다. 이윽고 눈꺼풀로 붓이 다가와, 선이 그어져 나갔다. 차가운 듯도 한 붓이 눈초리까지 훑고, 눈 아래쪽으로 이어져갔다. 그러는 동안 왼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꼭 쥐고 있었다. 이네스는 숨을 고르게 쉬느라 힘이 들었다. 떨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까봐 입술까지 깨물고 있었다. "이제 눈떠도 돼." 그녀에게는 섀도우를 조금밖에 칠하지 않았다. 대신 핏기 없는 뺨을 감추려고 복숭앗빛 볼연지를 많이 써야 했다. 조금 바르고, 손끝으로 펴 발랐다. 이네스의 입술이 떨렸지만,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한 조슈아는 다른 사람의 반응 같은 건 안중에 없었다. 자신의 작품을 위한 일이었다. 이네스는 그의 상대역, 그녀의 모습 또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니까, 오늘의 무대를 완벽하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그녀의 얼굴을 다듬어 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입술연지를 붓에 묻힌 조슈아가 따라하라며 입 모양을 보여 주고, 그림을 그리듯 붓을 움직여갔다. 다 되어 가는데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할 법도 하건만, 이네스는 거울을 흘끔거리지 않았다. 내내 한 가지만 보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을 칠하느라 저도 모르게 살짝 벌어진, 조슈아의 아무 것도 칠하지 않은 입술. "됐어." 조슈아가 거울을 가리켰기에 이네스도 시선을 돌렸다. 거울을 보자마자 흠칫 놀랐다. 내 얼굴이 저랬던가? 화사한 뺨에 또렷한 눈매, 하얗고 깨끗한 이마와 도톰하고 매력적인 입술을 한 자신이 그곳에 있었다. 자신의 이런 얼굴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예쁘다는 말은 남의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처음으로 자신에게도 그 말이 어울릴 수 있을 것만 같아 저도 모르게 뺨이 붉어졌다. "내… 얼굴 같지가 않아요." "마음에 안 들어?" "아, 아뇨 절대로, 너무 예뻐서… 나 같지가 않아서요." 조슈아가 미소지었다. "어제 보니 분장사가 화장을 잘 못하더군, 좀더 실력 있는 분장사만 있으면 얼마든지 예뻐져." 이네스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렇긴 하지만 어차피 화장일 뿐인데요. 본래 얼굴은 바뀌는 게 아니잖아요."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날 때부터 예쁜 얼굴은 아주 조금뿐이야. 다 노력으로 예뻐지는 거지. 화장한 얼굴이 남의 얼굴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어.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옷도 입지말고 다녀야지. 자, 그럼 난 나갈 테니 옷 갈아입고 나와." "하지만……." 조슈아가 일어나자 따라 일어선 이네스가 입속으로 말을 굴렸다. 조슈아가 돌아봤다. "응?" "당신은 화장하지 않아도… 예뻐요." 이미 입구까지 간 조슈아가 다시 돌아보더니 약하게 웃었다. "하지만, 타고난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르거든." 문을 닫으려는 순간, 갑자기 이네스가 달려갔다. 문고리를 붙잡고 그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 조슈아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래? 뭐 잘못됐어?" "아니, 아니에요. 아니, 꼭 물어야 할 게 있어서, 잠깐만, 내 말 좀 들어줘요." "무슨 얘긴데?" 닫히다 만 문을 사이에 두고 마주섰다. 멈춰 선 조슈아를 보자 더더욱 미칠 듯 가슴이 뛰놀았다. 말해야 했다. 오직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이네스는 절박하게 말했다. "당신… 나가지… 않으면 어떻게 되죠?" "아가지 않다니?" "오늘 공연에… 나가지 않으면 어떻게 되죠?" "무슨 말이야?" "나가지 말아요! 제발, 제발!" "이네스, 왜 그래?" 조슈아의 눈썹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이네스를 밀며 도로 안으로 들어왔다. 이네스는 이미 다른 생각을 잊었다. 그가 희생되어선 안 되었다. 내버려 둘 순 없었다. 그녀가 다치기를 원치 않는 또 다른 한 사람이 피해를 입게 되더라도, 아니, 어쩌면 작은 피해를 감수하고 미리 막는 편이 그를 위해서나 조슈아를 위해서나 더 좋은 일일 지도 몰랐다. 약간은 고통받더라도, 결국 치명적인 죄를 짓게 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비록 오빠의 생각을 다 알지 못하지만, 그가 한 번 삐뚤어지면 고집을 쉽사리 꺾지 않는 외곬의 인간이란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함께 살아온 동생이니까, 어떤 죄를 생각하고 있을지… 그녀는 모른다. 모르기에 막아야 한다. "도망쳐 버리세요. 취소되면 뭐 어때요? 사람들이 실망하면 뭐 어때요? 한 번으로 충분했어요. 어제 한 번으로도 충분히 완벽했고, 모두가 잊을 수 없는 것을 보여줬잖아요. 제발요! 무대에 오르지 말아요!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요!" 조슈아가 이네스의 손목을 잡았다. 아플 정도로 센 손아귀였다. 내려다 보는 눈빛이 단호했다. "뭘 알고 있는 거지? 말해 봐, 이네스. 내가 무대에 올라가면 어떻게 되는데?" 성의 안마당, 모르비앙 가의 아이들이 한족에 모여 소곤소곤 얘기하고 있는데 막내 마리안느가 달려오며 소리친다. 나오고 있어! 순식간에 흩어져서 누구는 장난감 활을 만지작거리고, 누구는 하녀에게 잔소리하고, 누구는 모이 쪼는 닭을 쫓아다니는 체 하는 가운데 문이 열리고 모르비앙의 소년 백작, 그들의 맏형인 막시밀리앵이 걸어나온다. 객석에 박힌 수많은 눈들이 그의 움직임을 뒤쫓았다. 걷고, 팔을 올리고, 손가락을 흔들고, 입을 열 때까지 한 동작도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그런 눈들 속에 좀더 다른 감정으로 그의 등장을 바라보고 있는 눈이 있었다. 막시밀리앵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한다. 너희가 이토록 한가로운 걸 보니 내 마음이 기쁘다못해 숫제 녹아 내리는구나. 무대 한쪽에는 이렌느가 등장하며 말한다. 오라버니께서 여전하신 걸 보니 제 마음도 기껍다못해 숨이 꼴딱 막힐 지경이네요, 백작께서 영지를 둘러보신 소감은? 막시밀리앵이 마땅치 않은 얼굴로 대꾸한다. 텅 비었지. 이렌느가 말한다. 소도 닭도, 양도, 순무도 감자도 당근도, 짚단도 밀겨도 거름더미도 없던가요? 막시밀리앵이 말한다. 없어. 전혀. 이렌느가 말한다. 그럼 백작답게 자비롭게 다스리시고 삼가 먹을 것을 내려주시는 것은 무린가요? 막시밀리앵이 말한다. 뒤뜰의 닭이나 잡아먹어. 그가 무대 위를 걷는다. 모두의 시선을 이끌고 걸어간다. 그가 웃는 소리에 마음이 움직이고, 그가 객석을 바라보자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런 가운데 그는 객석으로 시선을 보냈다. 찾는 사람은 쉽게 발견할 수가 없었다. 객석은 무대에 비해 어두웠다. 이야기가 흐른다. 동생들이 머리를 내밀며 합창한다. '짝이 있어야 돼!' 다시 장면이 바뀐다. 막시밀리앵은 이제 결혼 상대를 고르기 위한 파티를 준비한다. 답장이 도착하자, 하나하나 읽으며 비웃는다. 죽은 방드빌 백작의 미망인 콩스탕스가 온다는 소식에 짓궂게 흥얼거린다. 이제 날개가 없는 백작부인, 안녕히 가시고 다음 분 대기해주세요. 그가 노래를 부른다. 노래하는 동안 한 사람도 다른 생각을 못하도록 만든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빠짐없이 자신에게 빨아들이고, 그를 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 어쩌면 오늘 그 힘은 정도를 지나친 감도 있었다. 평소라면 그도 다른 배우들에게 골고루 시선이 가도록 자신의 에너지를 자제하고 적당히 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집중했다. 자신에게, 자신의 배역에, 대사에, 흡사 그의 모든 행동에서 마력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회오리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삼켰다. 데모닉. 오늘의 그는 데모닉이다. 오늘이 가기 전에 끝날 수도 있기에, 가진 모든 재능에 모조리 불을 지르는 것 같다. 이네스가 처음 등장했을 즈음, 조명이 갑자기 객석을 비췄다가 사라졌다. 사람들은 흠칫 놀랐지만 실수라고 생각했음인지 별 불만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계속되자 사람들도 의아해서 조그맣게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조명을 담당하는 사람은 극장에 고용되어 있는 두 명의 마법사였다. 무대를 밝히거나, 여러 가지 빛깔의 동그란 불빛을 차례대로 비추거나 할 뿐 다른 파괴적 힘이 없는 마법의 빛을 만들어 실내 공연을 보조하는 것이다. 이미 대부분의 극장들에 일반화된 고용인이었고, 달리 고용될 길이 없는 별 실력 없는 마법사들에게는 수입도 그럭저럭 되는 나쁘지 않은 직업이기도 했다. 대본에다가 조명 배치를 자세히 표시해 놓고, 수많은 연습을 통해 시각과 간격을 완벽히 맞추고, 갖가지 색깔의 조명을 만들어 내보내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사람들이 두리번거리는데도 조명의 움직임이 계속되자 관객들도 새로운 연출인가하고 대충 납득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실제로 조명의 움직임은 리듬을 타고 있었다. 무대가 어두워졌을 때 순간적으로 반짝이다가 사라지고, 무대가 밝을 때는 좀더 오래 머물렀다. 막시밀리앵 드 모르디앙은 대본상 시니컬하긴 해도 카리스마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우스운 대사를 잘 내뱉는 편이었다. 그러나 조슈아는 그런 배역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종횡으로 흔들고, 쥐었다가 놨다가 다시 움켜쥐고, 꼼짝 못하고 눈도 못 뗄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당신의 눈동자에 깃들인 수많은 이야기. 그대의 그 마음을 내가 없애버리지 내게 사랑은 필요 없어, 처음부터 없었어. 아름다움도 필요 없어, 내게 그런 건 없어. 다른 사람이 보면 아마 우스워 보일 거야 다른 사람의 사정이니까, 우스워 보이겠지. 멋대로 웃어 보라고 죽도록 웃어 보라고 내가 눈 하나 깜짝 않는다 해서 실망은 마. 난 널 만족시키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어. 내 얼굴이 마음에 드나? 만져보고 싶어? 나의 정원을 걷고 싶나? 티타임은 어때? 분명히 말해두지만 방법은 하나 뿐이야 분명히 일러두지만 그 밖의 방법은 없어. 금화를 손에 얹고 손가락을 까딱여봐. 하지만 아주 비쌀 거야, 싼값에는 안 돼. 하지만 꼭 하고 싶다면 비싼 것도 아니지. 달콤한 말로 눈멀게 하겠단 생각은 버려. 사랑의 맹세 따윈 다른 데 가서 알아봐. 날 경멸하는군, 그렇지? 아주 잘 생각했어. 내 생각도 같아, 아주 저질의 인간이지. 그럼 떠나버리면 돼 여기서 사라지면 돼 언젠가 잘했다고 생각할 날이 올 거야. 지금 마음 아픈 것 따위 아무 것도 아냐. 화가 나나? 실망스러워? 침을 뱉고 싶나? 나 같은 자한테 화를 내봤자 낭비일 뿐. 의견을 말하고 싶은 모양인데, 사양하겠어. 엄마한테 잔소리 들을 나이는 지나갔다고. 남의 조언에 귀 기울여 바른 길을 걷기엔 이미 진창에 빠진 성격이 되어놔서 말이야. 내게 덤벼들어 봐 따귀를 힘껏 갈겨 걱정 마, 당신이 원하는 유치한 사랑놀음 그런 거 해 줄 사람은 세상에 널려 있어. 하지만 지금, 이것만은 분명히 말해둘게. 나와 이야기하고 싶으면 돈을 내야 돼. 대게 키스하고 싶다면 아주 아주 비싸지. 얼마가 되든 그 돈을 주고 싶을 사람이 객석에 가득했기에 불이 꺼지자 곳곳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1막의 끝이었다. 캄캄해진 객석을 다시 한 번 조명이 훑고 지나갔다. 누군가의 눈이 그 빛에 비쳐 반짝, 했다. 2막이 오른다. 첫 장면의 이네스, 그러니까 마리 드 트루아다. 배신감과 죄책감이 뒤섞인 마음의 고통을 겪고 있는 그녀는, 달 없는 밤에 정원을 걸으며 자신의 마음을 노래한다. 정원은 성의 안뜰 배경을 그대로 쓰면서 대신 푸른 조명을 깔고, 풀 모양으로 모양을 내서 오린 검은 패널을 이용해서 조명을 효과적으로 가려, 검은 잎새 그림자들이 발 밑에 드리워진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저 달빛도, 검은 풀도, 풀벌레 울음도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대의 미소도, 목소리도, 뒷모습도 영원히 탑에 갇힌 공주였다면 좋았을 텐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곳에 갇혔다면 그대를 만나지도 못했겠지, 자신을 알지도 못했겟지, 그대여, 나의 추한 모습이 천사로 바뀌었다고 믿게 해 놓고서 왜 나를 지옥에 내버려두나요? 콩스탕스 백작부인의 시녀인 체 하며 모르비앙에 온 마리가 실은 소년 백작이 괜찮은 사람인지 떠보려 한 트루아의 공녀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그녀에게 농락 당했다고 생각한 막시밀리앵의 태도는 극히 차가워진다. 가볍고 밝은 분위기로 시작된 「일 드 모르비앙의 결혼식」은 재치를 겨루며 소꿉장난하는 것 같던 둘의 분위기가 냉각되면서 급진적으로 돌변하고, 관객들의 마음을 불안감으로 휘어잡았다. 콩스탕스 드 방드빌 백작부인은 이미 모르비앙에 은광이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됐고, 이토록 무례하게 행동하는 소년 백작에게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만 마리는 말을 듣지 않는다. 마리가 말한다. 그가 내게 그렇게 화내는 것이 당연할지도 몰라요. 처음부터 은광이 그대로 있는지 궁금했고, 결국 당당하게 청혼자 자격으로 오지 않고, 부인에게도 어려운 부탁을 하고, 그렇게 술수를 부린 건 나였으니까요. 콩스탕스 백작부인이 말한다. 그래서 성공했잖아요? 시녀 노릇을 한 덕택에 그 교활한 소년 백작의 입에서 은광이 없다는 말이 나오게 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대 생각이 옳았던 거죠. 마리가 말한다. 그런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콩스탕스 백작부인이 말한다. 그러니 그만 떠나요. 더 볼 것도 없는 이런 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건 뭐예요? 마리가 말한다. 난 그의 신뢰를 잃었어요. 그의 차가운 눈이 내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찌르는지, 밤에도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콩스탕스 백작부인이 말한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쪽에서 먼저 은광이 있는 것처럼 우릴 속였잖아요? 그에게 우리를 비난할 자격이 있겠어요? 이네스는 콩스탕스 백작부인 역을 하고 있는 몰트 부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어서 해야 할 대사가 목에 걸린 것처럼 괴롭게 나오지 않았다. 그 대사가 그녀의 마음을 친 탓이었다. 조슈아가 처한 상황과 그녀가 처한 상황, 그것을 고칠 수도 도울 수도 없는 자신, 그런 감정이 쉽게 말을 뱉지 못하는 마리 드 트루아의 모습이 되어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떤 것도 소용없어요. 나… 그를 사랑하게 되어버렸어. 그런 내게 남은 변명은 없어요. 그를 다치게 했다는 것, 그걸 한 게 나라는 사실만이 남아 있을 뿐이야." 마음의 폭풍은 오케스트라가 대신한다. 격렬한 바이올린의 선율과 함께 그녀는 노래불렀다. 짧은 십여 일 동안 조슈아는 없는 시간을 짜내어 그녀를 가르쳤다. 그녀를 여주인공으로 택한 것이 그렸고, 그랬기에 자신이 발견한 그녀의 재능을 짧은 시간 동안 최대로 끌어내기 위해 잠을 줄여 가며 개인 레슨을 했던 것이다. 오늘 공연 전. 조슈아는 그녀의 얼굴에 직접 화장을 해 주었다. 미술품을 다루듯, 그녀의 아름답지 않은 얼굴로부터 회대한의 미를 끌어냈다. 그 모든 것은 조슈아가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무대를 완벽하게 하기 위해서였고, 그렇게 만들어진 무대를 그는 떠나지 않았다. 목숨을 겨루는 자가 있는데도, 그 사실을 그도 알고 있는데도, 그는 말했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 226, 227쪽 결락 노래를 끊고, 정면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먼 곳으로 시선을 보낸다. 이제 탑을 내려가야 할 때, 그 순간 조명이 다시 한 번 객석을 훑고 지나갔다. 막시밀리앵의 눈이 멀어져가는 마리의 배에 꽂힌 깃발을 바라보았을 그 순간, 막시밀리앵이 아닌 조슈아는 보았다. 검은 모자. 고개를 움직이고, 그 아래에서 드러나는 익숙한 턱의 윤곽. 그를 바라보는 시선, 그이기에 알 수 있는 시선을. "……." 짧았는지 길었는지 모를 망설임이 흘러갔다. 어린 새를 노리는 맹금의 눈빛, 포획자의 시선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은 충동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쳐 올라오고, 이윽고 목에 이르렀을 때 또 다른 감정과 부딪치며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공포와 분노가 뒤섞이고, 대적할 수 없는 적 앞에 무력한 자신과, 세상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한 존재인 자신이 부딪쳐, 표현해야만 하는, 감출 수 없는 뚜렷한 의식을 만들어냈다. 난 죽지 않아. 결코 네 손에 죽지 않아. 다른 사람의 운명까지 휩쓸어버리는 강한 운명을 가진 나. 데모닉 조슈아는 너 따위에게 죽지 않아!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아왔지, 내 아버지의 땅 바위와 파도뿐인 작은 섬 그 섬의 주인은 내 운명 물려받은 자리에서 시작해 달아나지 않아, 내 땅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봐 무리라고 말하는 사람들 내 일을 대신해주지 않지 난 알아, 나를 노리는 손을 나를 쓰러뜨리려는 자들을 다가오는 발소리가 느껴져 그들은 웃을 수 없을 거야 내 것을 빼앗을 수 없을걸 내가 지키는 나의 모든 것 단 하나도 가져가지 못해 다음 장면을 이어가야 할 배우들은 크게 당황해 있었다. 조슈아가 부르고 있는 노래는 대본에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반주도 없었다.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오직 조슈아의 입에서 흘러나올 뿐이었다. 아직도 나를 보고 있겠지? 어둠 속에서, 손을 감추고 내가 틈을 보이길 기다리며 은밀히 미소짓고 있겠지 자리는 편한가? 잘 보이나? 너를 보는 내 눈이 보이나? 잘 지켜봐 둬, 이곳의 나를 네게 지지 않는 내 의지를 난 겁내지 않아, 너 따위를 아니, 내가 널 잡아먹을 거야 이리의 눈으로 날 노리는 적이여, 운명이여, 살인자여 나는 절대로 죽지 않아! 조슈아의 눈은 오직 한 점을 향해 있었다. 조명이 객석을 움직일 때마다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하는 객석의 한 자리, 그곳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그 자의 눈을 향해 시선과, 감각과, 목소리를 집중시켰다. 그도 조슈아를 보고 있었다. 조슈아가 자신을 향해 노래부른 것을 알았다. 그로선 요람 속의 갓난아이처럼 죽일 수 있는 상대가, 시선을 돌리지 않고 그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하늘에서 발톱을 세우고 빙빙 도는 솔개를 피하지 않고 쏘아보는 어린 새가 있다면, 솔개의 기분이 이러할 지도 모른다. 눈빛은 마치 타는 것 같다. 아니다. 멀어서 눈동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투지만은 느낄 수 있다. 목소리, 터져 흐를 듯한 투지가 팽팽하게 채워진 목소리의 힘이 어지러울 정도로 한 사람에게 쏟아 부어졌다. 심장을 꿰뚫으며 솟아오른다. 수백명의 정신을 압도함과 동시에, 한 사람의 숨을 끊어놓으려는 것처럼 몰아쳐 온다. 내게 감사해야 할 것 같아 내 삶을 긴장으로 채워줘서 내 삶을 지킬 의욕을 줘서 목적 없이 살아온 삶이 아닌 이 삶이 아주 마음에 들어 자, 그럼 나와 함께 하겠어? 이 술 한 잔을 나눠 마실까? 나를 보는 당신에게 건배! 그 당신의 오른손에 건배! 불이 꺼져버렸다. 장면이 바뀌는 군단이기도 했지만, 어제 공연을 봤던 관객들은 갑자기 바뀐 전개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동시에 압도당해 박수 치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그 때 객석 앞쪽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크고 뚜렷한 박수 소리를 울렸다. 짝. 짝. 짝. 그것이 신호가 된 것처럼, 곧 홀 안에 폭풍 같은 박수 소리가 휘몰아쳤다. 아직 클라이맥스도, 엔딩도 아닌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람들이 일어섰고, 홀 전체에 기립 박수가 쏟아졌다. 계속됐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박수 소리에 거친 숨소리와 감탄성이 뒤섞였다. 노래의 열기에 전염된 것처럼 홀 전체가 더웠다. 그러나 아무리 더워도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사람은 없었다. 리체는 한달음에 대기실로 뛰어갔다. 조슈아는 다음 장면에서 옷을 갈아 입어야 했다. 그 짧은 순간 동안 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도 무언가를 느꼈으며, 마지막 노랫말에서는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조슈아가 누구를 향해 노래불렀는지, 그 광기가 누구를 향해 있었는지! 대기실 바로 앞에서, 조슈아와 마주쳤다. 옷을 갈아입었지만 이마는 아직도 땀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보다 더 번들거리는 것은 조슈아의 눈이었다.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물기와 더불어 빛 없이도 빛날 것처럼 형형한 눈동자였다. 그러나 그는 무척 지쳐 있었다. "리체." 다음 장면을 위해 무대에 오르기 직전, 조슈아의 입술이 리체의 귓가를 스쳐갔다. "여섯 번째 줄, 왼쪽에서 열 번째." 무대는 다시 빛으로 밝혀졌다. 그 속으로 조슈아는 걸어 들어갔다. 지친 기색을 완전히 숨기고, 이제 밝은 엔딩이 이어질 극 속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암호처럼 들렸을지 몰라도, 리체는 조슈아의 말을 알아 들었다.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우뚝 선 그녀는 무대가 밝아서 상대적으로 어두워 보이는 객석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 순간, 조명이 다시 한 번 객석을 훑었다. 리체는 놓치지 않았다. 여섯 번째 줄… 그리고 왼쪽에서 열 번째…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된 리체가 돌아섰을 때, 그녀 뒤에는 오늘 내내 그렇게 둘러봐도 찾을 수 없었던 사람이 서 있었다. 막시민이 말했다. "여기서 저 자식을 지켜봐. 다른 얘기는 나중에 하자." 4. 잘못된 표적 "전 바보소녀예요. 사람들이 다 그렇게 불러서 바보소녀예요. 난 바보가 무엇인지 알아요. 사람들이 가르쳐주었어요. 듣고 보니까 역시 난 바보가 맞는 것 같았어요. 난 바보가 좋아요. 바보는 무엇을 해도 용서되니까요. 그러니까 아저씨도 나를 바보소녀라고 부르세요. 내 이름은 묻지 말고요." 2막 클라이맥스, 사실 마리 드 트루아는 떠난 것이 아니다. 이번에는 모르비앙 성의 하녀로 변장한 채 남아 있었으며 막시밀리앵은 알베르띤느와의 결혼을 발표하기로 한 날 새벽녘. 잠을 자지 못하고 창가를 서성이고 있다가 정원에서 노래로 그를 부르는 마리와 재회한다. 여긴 장미 정원이 아니지만 앵초와 억새 정도는 있고 우리 둘의 죄를 사해 줄 사제도 턱시도 차림으로 지저귀고 있고 은 한 조각 나지 않아도 당신의 땅 그곳에 발 딛고 선 내가 있어요. 극은 막바지로 치닫고, 막시밀리앵과 마리는 드디어 화해한다. 그러나 막시밀리앵은 그녀와 선뜻 결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은광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녀의 부모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 마리가 말한다. 막시밀리앵 당신, 대륙 정세에 너무 어둡군요. 하긴 바위섬에 꼭 박혀 사니까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알 리가 없지. 자, 지금 트루아 공국의 공작이 누굴까요? 트루아 공국의 공작 작위는 두 달 전 외동딸 마리 드 트루아가 물려받은 상태였다. 트루아 공작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그녀가 이렇듯 대담한 계획을 세워 모르비앙 섬으로 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결정권은 그녀 자신에게 있었다. 마리 드 트루아가 말한다. 당신의 바위섬에서 이제 은은 안 날지 몰라도, 당신 생각과는 달리 여전히 쓸모가 많답니다. 이 일대 바다를 지배하는 위치에 있으니까, 트루아 여공작께서는 말이죠, 여기에 함대를 만들어 지나가는 선박에게 장사를 하고, 통행세를 물릴 생각이랍니다. 알다시피 오를란느 북부 해안은 바위 절벽뿐이고, 아노마라드로 가는 동안 배를 댈 만한 곳은 거의 없으니까요. 지금까지 해안가의 은을 훔쳐 갈까봐 그랬는지 외부의 배를 댈 수 없게 했던 모양이지만, 이제 은은 없잖아요? 모르비앙이 항구를 개방하면 수많은 배들이 몰려들게 될 거예요. 결혼식이 준비된다. 알베르띤느 공주가 결혼 선물로 잘 말린 대형 지네를 가져오는 소동이 벌어지고, 수많은 하객들이 도착한 가운데 결혼식이 시작된다. 조슈아는 리체가 만들어 준 의상으로 갈아입고 나타났다. 전날 공연을 관람한 관객들도 처음 보는 옷이었다. 날렵한 몸매에 잘 어울리는 흰 재킷과 장미 문양, 손등을 덮는 긴소매 끝에는 또렷하게 오려낸 장미 자수, 푸른 섀도우를 칠한 눈매와 희게 반짝이는 뺨, 여전히 오만한 표정이 소년 백작이 걸음을 내딛기 시작하자, 이미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이 극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들의 안타까워하는 한숨이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혼인의 서약과 사람들의 축복, 바구니 가득 채워진 꽃잎을 흩뿌리는 화동들이 앞장서고, 뒤따라 이네스의 손을 잡은 조슈아가 걸어나갔다. 오케스트라가 울리는 가운데, 피날레가 시작될 시각이었다. 피날레는 다른 여러 배역을 맟은 사람들이 나와 혼인을 축하하는 말을 한 마디씩 한 뒤 노래와 춤을 선보이는 형식이었다. 주인공이자 혼인 당사자인 막시밀리앵 드 모르비앙과 마리 드 트루아는 맨 마지막에 나와 인사하도록 연출되었다. 그렇게 차례로 배우들이 노래하는 동안 배경 그림이 걷히고 반투명한 유백색 천만이 드리워져 있게 된다. 그 천 뒤로 조슈아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어 자기 차례가 될 때까지 실루엣만으로 관객들 앞에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러다가 조슈아가 반투명 장막을 걷고 무대로 뛰어들어 한 곡을 부르면, 이네스도 곧 왼쪽 계단을 올라 무대에 오른다. 조슈아와 이네스의 노래가 끝나면 종막이었다. 첫 차례는 콩스탕스 백작부인 역을 맡은 몰트 부인이었다. 그녀는 무척 점잔을 빼며 입을 열었다. "뭐, 전 이렇게 될 줄 다 알고 있었어요, 두 사람이 어디 좀 잘 어울려야 말이죠. 언제부터냐고? 그야 내가 트루아 여공작과 함께 모르비앙 섬에 상륙할 때부터지! 내 안목은 언제나 끝내 줘!" 본래 이렇게 말한 뒤 곧장 노래로 이어지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몰트 부인은 머뭇거리며 말을 계속 이어갔다. "두 사람에게 결혼 축하 선물을 줘야겠는데, 뭐 없는 게 없는 사람들이어서 좋은 생각이 나야 말이죠. 그래서 궁리하다가 결론을 냈죠. 나의 결혼 선물! 두 사람이 모르비앙 항구를 개항하고 나면 첫 손님이 되는 중대한 역할을 맞기로 했답니다! 물론 세금은 공자겠지?" 사람들이 드문드문 웃기 시작했다. 몰트 부인은 또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두 사람의 영지는 바다를 격해 멀리 떨어져 있는데, 과연 신혼살림을 어디에 차려야 할까? 모르비앙 섬일까? 아니면 트루아일까? 어디가 좋을 것 같아요?" 그녀는 심지어 사람들의 대답을 유도했다. 지난번 공연을 본 사람들은 좀 어리둥절해했지만, 안 그래도 아까부터 바뀐 것이 많았으므로 본래 그런가 보다 하고 수긍할 도리밖에 없었다. "아아, 모르비앙 섬이 압도적 우세네요. 역시 익숙한 곳이어서일까? 그럼 하는 수 없네요. 밀월 여행을 트루아로 가라고 해야겠네!" 또다시 사람들의 웃음이 얼마간 흘러나왔다. 결국 그녀도 할 말이 떨어졌는지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노래가 굉장히 느렸다. 다 부르고 나면 어제의 두 배는 걸릴 것 같았다. 뒤이어 나온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동안 배경이 걷혔고, 반투명한 막 뒤에서 옆모습을 보이며 선 조슈아의 모습이 서서히 올라오자 흥분한 사람들이 갈채를 보냈다. 그렇게 피날레는 어제의 세 배 정도나 되는 시간이 걸리며 계속 진행되었다. 조슈아는 무대에 있지 않았다. 대기실 옆에 서 있던 리체에게 다가온 사람은 지오반 한트케였다. 그는 다짜고짜 리체에게 묵직한 주머니를 안겨 주었다. 에엣?" 리체는 지오반의 얼굴을 알긴 했지만 그와 별다른 대화를 나눈 일은 없었다. 물론 지오반 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잘 아는 사이를 대하듯 씩 웃으며 말했다. "자네의 안경 쓴 친구한테 갖다 줘." "이게 뭔데요?" "열어보면 알지롱." 괴상한 말투에 멍해 있는 동안 지오반은 손을 흔들며 훌쩍 사라졌다. 그가 가자 리체는 주머니를 조금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외칠 수밖에 없었다. "에엣!" 주머니 안에 든 것은 모조리 금괴였던 것이다. 저 사람이 왜 황금을 막시민에게? 너무 많은 금 때문에 긴장한 리체가 주머니를 꽉 움켜쥐고 경황없이 뛰어나오는데 이번에는 눈앞에 스트라우즈가 나타났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어야 할 그가 왜 여기에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스트라우즈는 빙그레 웃더니 말했다. "마차는 뒷문 앞에 대기시켜 두었네." 그 말만을 남기고 그도 역시 사라졌다. 눈을 동그랗게 뜬 리체는 무대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피아노 솔로를 하는 모리스 두아르데가 애써서 연주를 느리게 하고, 심지어 어울리지 않는 모션까지 넣으며 고분분투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자 조금 전 몰트 부인이 그와 마찬가지로 애써서 시간을 끌고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무용단을 이끌고 인사한 아마릴리 크라운도 마찬가지였다. 발레리나들이 느리게 춤추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혹시, 이 사람들이? 그 때 등 뒤에서 막시민이 나타났다. "가자, 어서." 리체는 정신을 잃은 듯한 조슈아를 부축하고 있는 막시민을 보고, 다시 무대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조슈아? 어떻게 된 거야?" 막시민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엔딩까지 했으면 충분하지 뭘 그래" 리체가 물은 건 그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럼 저건?" 리체가 손을 뻗어 가리킨 곳은 무대 위의 반투명 천 뒤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조슈아는 여기에 있는데 저기 선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몰라. 대역배우인가, 시간 없어. 얼른 가자." 리체는 막시민에게 이끌려 몇 걸음 걸었다. 그러다가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문득 깨달아지는 점이 있었다. 리체는 막시민의 손을 뿌리쳤다. "나, 잠깐 꼭 알아봐야 할 일이 생겼어. 스트라우즈 씨가 마차는 뒷문 앞에 대기시켜 놨다고 하셨어. 참, 이 주머니 받아. 안무 담당하는 그 아저씨, 한트케 씨가 너한테 주라더라고, 부둣가로 갈 거지? 나도 곧 따라갈게. 금방 갈게!" 막시민이 도로 손을 뻗었지만 리체는 이미 복도를 달려가고 있었다. 막시민은 소리쳤다. "이런 위험한 상황에 어딜 가려는 거야! 놈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판에, 위험한 건 조군 뿐이 아니란 말이야!" 리체가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조군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제일 안전하다고!" 리체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막시민은 잠시 생각했지만, 일단은 가장 위험한 조슈아를 극장 밖으로 탈출시키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황금이 든 주머니의 주둥이를 꼭 묶어 다음 허리띠에 단단히 매달고, 미리 알아 둔 사람 드문 길을 통해 뒷문으로 갔다. 뒷문 앞에 도착한 막시민은 나가기 전에 먼저 밖을 살펴보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가 굉장한 기세로 달려오는 것이 느껴졌고, 홱 고개를 돌렸을 때 보인 건 친숙한 얼굴이었다. "자, 이 몸께서 해결해 드리지!" 막시민이 말리기도 전에 문을 벌컥 열어버린 칼라이몬 선장은 아니나다를까 기다리고 있던 세 남자로부터 동시에 공격을 받았다. 그는 큰 소리로 웃어댔다. "허허허! 세 명이라니, 날 우습게 보는군 그래." 칼라이몬 선장은 역시 왕년의 위대한 항구 건달이었다. 나이가 들긴 했지만 어설픈 세 사람의 공격쯤은 맨 손으로도 퉁겨낼 수 있는 실력을 갖고 있었다. 검도 뽀지 않고 세 사람을 문 왼편에 차곡차곡 쌓아버린 그는 조슈아를 들쳐 맨 막시민을 보고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 씩 웃었다. "그럼 안녕히." 막시민이 무심코 대답했다. "아, 고마워요." 물론 그렇게 말하고 말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길?" "이름도 예쁜 쥬시탕트 양이 간곡하게 부탁해서 말이야. 그럼 잘 가게!" "……." 스트라우즈가 말한 마차는 바로 문 앞에 있었다. 칼라이몬의 전송을 받으며, 조슈아를 짐짝처럼 마차에 실은 막시민은 마부석에 앉은 스트라우즈의 마차꾼에게 기세 좋게 소리쳤다. "8번 부두로 가주세요." 잠시 후, 마차는 부둣가와는 반대쪽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마찬가지 상황으로, 다이아몬드 러쉬 극장 주변 도로와 특히 8번 부두 쪽으로 가는 길은 백 대가 넘는 마차들로 꽉 막혀 있었던 것이다. 배경 그림과 화려한 조명, 갖가지 소품들로 꾸며진 극장 무대 아래에는 생각 외로 살풍경한 여러 가지 장치들이 있다. 그 중에도 여러 군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무대에서 인물이 갑자기 사라지거나 나타날 수 있게 하는 권양기와 그것을 움직일 도르래 따위의 기계 장치들이었다. 그런 장치들 사이로 이어지는 길은 그 권양기를 직접 타야 하는 배우나 기계를 동작시키는 기술자들이 아니면 자세히 알기 힘들고, 보통 사람은 안내자가 있어야 바로 길을 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길을 혼자 걷고 있는 리체가 찾는 것을 얼른 발견하지 못하고 헤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공간감각이 뛰어나 지도나 구조 도면을 정확하게 그리는 재능이 있는 리체는 같은 자리를 몇 번 돌고 나자 어느 정도 내부 구조를 알아차리고 올바른 길을 찾아내어 걷기 시작했다. 곳곳에 반쯤 풀린 밧줄 더미가 쌓여 있고, 낡은 연장이나 나무토막들도 흩어져 있어 발을 잘 딛는 것도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못에 옷이 찢어지고, 손끝을 긁히거나 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 후엔 길을 제대로 찾았다는 확신이 생겼다. 리체가 가고 있는 그 길을 누군가가 대강 치우며 나아간 흔적이 보였던 것이다. 앞서간 사람, 그녀가 뒤쫓고 있는 사람이다. 리체가 찾아야 하는 것은 앞서 말한 그런 권양기들 중 하나였다. 무대 뒤편에서 조슈아가 타고 올라가, 반투명 막 뒤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 사용하는 권양기 말이다. 왜냐면, 조금 전 무대 위에 나타난 조슈아가 그 권양기를 사용했을 테니까. 리체는 그를 꼭 만나야 했다. 그가 조슈아가 아니라면, 누구일까. 지금 무대 위에 없고, 그러나 무대에 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 단 한 명뿐이었다. 생각을 하자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왜 그런 위험한 일을! 감정이 고조된 탓일까, 리체는 문득 우득, 하고 무안가 꺾어지는 소리를 들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멈춰 서서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뒤이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그녀는 곧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모퉁이에서 한 기술자와 마주쳤을 때 크게 놀란 것도 그 소리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던 탓이었다. "아! 깜짝 놀랐잖아요!" 무대 아래에서 일하는 기술자들은 무대 위의 사람들과 별 교류가 없는 편이었고, 따라서 리체도 그들을 본 건 처음이었다. 기술자는 너덜거리는 작업복 차림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는데, 어찌된 셈인지 미안하다는 말도, 자기도 놀랐다는 말도, 어째서 여기 있느냐는 말도 하지 않았다. 길이 좁아 리체가 몸을 벽에 붙이며 간신히 비켜서자, 기술자가 통과했다. 리체는 괜스레 발끈해서 말했다. "사람을 봤으면 본 체는 좀 하지 그래요?" "……." "뭐예요? 무시하는 거예요?" "……." "기분 나빠." 더 상대하지 않기로 마음을 정하고 몸을 돌리는데, 기술자가 모자를 약간 들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알 바 아니지, 하고 생각한 그녀는 서둘러 가려던 길로 갔다. 저만치 권양기 바닥이 보였다. 다가가는데 누군가가 누워 있는 듯 한쪽 발이 비죽 나온 것이 보였다. 리체는 다가가며 생각했다. 누워 있다…누워 있다고? 가까워지고, 마침내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1막에서 조슈아가 입고 있던 검은 벨벳 웃옷과, 너무 길어 발목에서 구겨진 바지자락… 반쯤 벗겨진 구두 한 짝, 나머지 한 짝은 떨어져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리체는 자기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목구멍에서 신음인지 흐느낌인지 모를 것이 흘러나오고, 숨이 막히고,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네스는, 조슈아가 사라진 무대를 어떻게든 마무리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피날레의 하이라이트를 망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것일까. "네가… 왜… 그랬어……."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린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바로 곁에 다가왔을 때에야 겨우 알았다. 리체는 떨면서 고개를 들었다. 자기 앞에 나타난 사람, 아니 돌아온 사람을 보았다. 기술자, 아니 남자가 입을 열어 말했다. "많은 말은… 죽음을 부르지."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달리던 마차는 혼잡한 곳을 빠져나온 후부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8번 부도로 통하는 큰 길이 막혔으므로, 다른 부두에서부터 하나한 거슬러 오는 구불구불한 길을 택해야 했다. 이런 식이니 정말이지 최대의 적은 교통 혼잡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차 안의 막시민은 화가 나서 중얼거렸다. "길거리에 마차 끌고 다니는 자식들은 다 없애버려야 돼." 자기도 마차를 타고 있는 주제에 한 말이라 설득력은 부족했다. 게다가 생각해 보니 사람들이 마차 끌고 오게 만든 원인은 바로 옆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저 녀석이었다. 새근새근 잔다는 말은 좀 과장이고, 무대에서 에너지를 너무 소모한 나머지 지쳐 떨어진 모습에 가까웠다. 그 탓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뒤통수 한 대에 얌전히 기절해 주는 놈이라 다행이기도 했다. 안 그랬다면 그가 그토록 아끼는 무대에서 피날fp를 날려먹게 하고 끌고 나오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을 테니까. 깨어나면 잔소리를 해댈 지도 모르지만 막시민은 개의치 않았다. 엔딩까지 했으면 그걸로 충분한 거였다. 죽고 사는 문제를 앞에 두고 그 정도면 됐지 뭘 더 바라, 미친놈 같으니. 차창 밖으로 부두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떠 있는 그들의 배. '미의 극치호'도 보이기 시작했다. 미의 극치호는 범선이긴 해도 그리 큰 배가 아니고, 화물도 별 것이 없는지라 홀수선이 낮아서 칼라이소 항구의 수심 정도면 충분히 가까이 띄울 수 있었다. 그런데 보인 것은 그런 것들만이 아니었다. 부두에 거의 다다를 즈음이었으므로 피할 틈도 없었다. 용병처럼 보이는 자들이 부둣가에 쌓인 상자 더미 뒤, 말뚝 세워둔 구석, 다른 배의 뒤편, 빈 술통 속 등에서 서른 명이나 스르륵 나타나더니 마차를 세워야 할 곳 양쪽을 완전히 포위해 버렸던 것이다. 막시민은 마차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소리쳤다. "피해야 돼요!" 마차꾼도 마주 소리쳤다. "피하긴 어디로 피해!" "하여간 피해요! 아니면 저 사람들한테 죽는다니까!" 죽는다는 말에 마차꾼도 정신이 번쩍 났다. 그는 맹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으므로 죽는다고 외치는 녀석이 탄 마차를 내버려두고 ㄴㅂ다 뛰어내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마차꾼이 사라지자 말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막시민은 도망간 마차꾼에게 욕을 퍼부으며 마차 문을 열고 어떻게든 마부석으로 가려 했지만 곡예사가 아닌 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겨우 마차살을 딛고 건너가 고삐 한쪽이 손에 잡히는 순간, 몸을 휘청거리며 떨어질 뻔한 그는 저도 모르게 고삐를 냅다 잡아당겼다. 그 순간, 말들은 방향을 틀었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말 두 마리와 마차 그리고 그 안에 탄 두 녀석은 곧장 잔 파도 넘실대는 바다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그쪽은 선착장이 아닌지라 난간조차 없었다. 지켜보고 있던 서른 명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을 정도였다. "어어!" 물론 그건 임무를 망각한 반응이었고, 그들은 곧 정신을 차려 마차가 빠진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시공에서 자란 막시민은 헤엄치는 데 익숙했지만, 옥을 입고 빠진데다가 경황이 없는 처지였으니 처음부터 정신을 차렸다고 볼 수는 없었다. 게다가 허리띠에 묵직한 황금 주머니까지 매달려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곧 정신을 잃은 채 바다에 빠진 조슈아를 생각해 내고 약이 바짝 올랐다. 이대로 있다가는 저 녀석, 분명히 빠져죽는다. 어떻게든 건져내지 않으면……. 그러나 짠물 속이라 눈을 뜨는 것조차 어려웠다. 게다가 소형 범선가지 들어올 수 있는 부두의 수심은 그리 얕지 않았다. 팔다리를 내저어 봤지만 이미 자기 주위에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 것을 느낀 막시민은 일단 수면으로 올라가서 숨을 한 번 쉬고, 다시 내려가서 조슈아를 구해와야겠다고 판단했다. 그 때였다. "누……." 무슨 소리가 들린 듯했다. 바다 속인데, 무슨 소리가 들린단 말인가? 그러나 곧 확실해졌다. 짧은 순간이지만 잘못 알아들을 리 없는 뚜렷한 소리였다. 조슈아의 목소리다. 분명 말도 안 되지만, 또한 분명 그의 외침이었다. "누나! 누나!" 상황에 대해 더 생각해보기도 전에 막시민은 수면 위로 올라와 있었다. 숨을 몰아쉬면서 부둣가로 몰려든 사내들을 보았다. 이다가 다시 수면으로 나오려면 최대한 부두에서 먼 곳으로 나오는 편이 좋을 듯했다. 다시 물 속으로 자맥질하는 순간이었다. 등 뒤 물 속에서 무언가가 불숙 솟아올랐다. 막시민은 돌아보았다. 말문이 막힌 사람은 막시민만이 아니었다. "어……." "뭐… 야……." 사내들의 얼빠진 표정을 감상할 겨를은 막시민에게도 없었다. 그 또한 물에서 머리를 내민 채, 이 이해할 수 없는 광경 앞에서 눈만 크게 떴을 따름이었다. 물 속에 있어야 할 조슈아가 떠올라 있었다. 아니, 수면에서 훨씬 더 위쪽의 허공에서 아무 것도 딛지 않고 떠 있었다. 정확히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모습 그래도, 누군가의 두 손에 안긴 채. 그런데 그 '누군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저, 저, 저, 저건 도대체……." 귀, 귀신이다!" 사내들의 눈에는 조슈아가 축 늘어진 자세 그래도 허공에 떠 있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물까지 뚝뚝 흘리며, 하지만 막시민은 급히 생각했다. 저런 일을 할 수 있는 자라면 아마 켈스니티뿐이겠지. 그는 글씨도 썼고, 책장도 넘겼으니까, 모르긴 해도 사람도 들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겁을 먹은 사내들이 부둣가 뒤쪽으로 슬슬 물러났다. 조슈아는 허공에 그대로 떠 있지만은 않았다. 이윽고 서서히 부둣가 끄트머리를 향해 내려왔다. 그와 함께 그의 자세가 바뀌며 다른 사람의 손을 벗어나 직접 서 있는 모습으로 변해갔다. 부둣가의 땅에 발을 디뎠을 때는 완전히 홀로 서 있었다. 그리고 조슈아는 눈을 떴다. "아아." 목소리를 들었을 때 막시민은 안도했으나, 그와 함께 이상한 느낌이 쳐올라오는 것을 누를 수가 없었다. "너희들, 나를 귀찮게 하려는 거군?" 분명 조슈아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어조가 전혀 달랐다. 연기를 하는 것일까? 하지만 정신을 잃었고, 심지어 물에 빠졌다가 살아난 이 순간에? 목소리는 지극히 자신만만했으며, 말하는 상대를 안중에 두지도 않는 듯 오만했다. 고음에서는 약간의 쇳소리마저 났다. "그냥 둘 수야 없겠지." 조슈아는 앞으로 걸어갔다. 몇 걸음 걷는 동안 놀랍게도 젖은 옷과 머리카락이 깨끗이 말라버렸다. 일곱 발자국째, 갑자기 왼쪽 팔을 허공에 한 번 휘두르고, 오른손을 펴 앞으로 내밀었다. 내민 손바닥 위에서 물인지 공기인지 모를 투명한 흐름이 생겨났다. 둥글게 뭉쳐지며, 공간을 허물어뜨리는 듯한 흐름은 점점 커져 사람의 머리만한 회오리로 변했다. 다음 순간, 막시민은 소리쳤다. "조슈아!" 외침도 부질없이 그 회오리는 그대로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허공에 구멍을 뚫는 듯한 모양으로 뻗어나가 사내들이 모여선 한 가운데를 직격했다. 그것의 효과는 강한 압력, 그리고 날카로운 공기파였다. 사내들은 마치 가벼운 나무토막들처럼 양쪽으로 날려가 물에 빠지거나, 바닥에 쳐박혔다. 중앙에 가까이 서 있던 자들 중 일부는 옷이 찢어지고 사포로 문지른 듯한 상처를 입었다. "재미없네." 이미 전투 의지를 상실한 사내들 틈으로 조슈아는 계속 걸어 들어갔다. 리체가 만들어준 백색의 아름다운 옷, 그리고 아직 남은 화장 때문에 그의 모습은 더욱 냉혹하고 가차없어 보였다. 조슈아는 다시 한 번 왼쪽 팔을 허공에 뻗었다가 거두었다. 막시민이 보기에 그 모습은 흡사 허공에 있는 무언가를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조슈아는 이제 바닥에 흩어져 있던 나무 막대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것을 익숙하게 휙휙 휘두르며 말했다. "자, 누구부터지?" 가까이 있던 사내가 방어 동작을 취하자, 곧장 뻗어간 막대가 그의 방어를 해제시키고, 무릎을 걷어차 바닥에 쓰러뜨렸다. 이어 한 걸음 앞으로 내딛더니 다른 사내가 두 손으로 내리쳐 오는 검을 한 손의 막대만으로 막았다. 하지만 막대가 부러졌고, 그러자 어이없는 동작으로 사내의 손에 발을 올리며 뛰어오른 그는 한 바퀴 돌아 착지하며 우측에 있는 자가 허리에 찬 검을 뽑아들고, 무릎을 펴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등을 찔렀다. 조슈아는 곧 사내들로 에워싸였다. 그러나 막대 대신 검을 쥔 조슈아는 다시 한 번 왼팔을 움직여 허공에서 무언가를 받아들이더니 이제는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며 사방을 베어갔다. 막시민은 자기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검술은커녕 다른 호신술도 전혀 모르는 조슈아인 것이다. 저 움직임이 조슈아의 것이라고는 결코 믿을 수 없었다. 불길한 기분이 몸을 휩쌌다. 저 상태가 정상일 리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조금 전, 비록 막시민이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갔다 해도 그를 구해 나왔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기뻐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결코 정상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저 모습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지만 조슈아가 저들 사이에서 전혀 위험하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막시민은 생각했다. 일단은 탈출할 준비를 하는 것이 급했다. 관객 노릇이나 하고 있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는 것이다. 조슈아의 저런 모습이 불안하긴 하지만, 일단은 바로 배를 움직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아야 했다. 그의 그런 마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미의 극치호' 뱃전에서 한 사람이 머리를 내밀었다. "왔군? 그런데 그런 데서 뭘 해?" 막시민이 여전히 바다 속에 빠져 있었으므로 한 말이겠지만, 막시민은 화를 냈다. "놀고 있는 건 아니라고!" 리체는 눈을 떴다. 짧은 순간이지만, 악몽을 꾼 것처럼 머릿속이 산란했다. 동시에 주위가 무척 흔들렸다. 흔들리는 말갈기가 눈앞에 보였다. 좀더 정신이 돌아오자 그녀를 감싸안은 어떤 손이 느껴졌다. 리체는 고개를 뒤로 돌리며 올려다보았다. "……." 깊이 눌러쓴 모자 아래로 턱과 코 언저리가 보였다. 눈 언저리는 전처럼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다. 귓가에 흔들리는 짧은 금빛 머리칼도 보였다. 남자는 왼손으로 말을 묶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오른손으로 말에서 덜어지지 않도록 리체를 붙들고 있었다. 그걸 느끼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의 손이 묶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말이 없었다. 리체는 그가 무척 말 많은 남자였다는 걸 기억해 냈다 그러나 정신을 잃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 말은 말을 많이 하는 걸 싫어한다는 뜻처럼 들렸다. 어느 족이 맞는 걸까? 말을 해도 되는 걸까? 어쨌든 아직 죽이지는 않았잖아? 다시 고개를 들고 돌아보니 이 자의 턱이나 입가가 뜻밖에 선이 가늘고, 심지어 섬세한 인상을 지녔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 속에서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괴한이었는데, 그것과는 어쩐지 거리가 먼 생김새다. 그토록 무서워했던 자의 손에 붙잡혀 거리를 달리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그러나 곧 극장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본 장면이 떠올랐다. 생각하는 순간 가슴 속이 울컥하며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저도 모르게 입으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때 남자가 말했다. "말이 너무 흔들리나?" 말은 태워주는 사촌오빠라도 되는 듯한 물음에 너무 가증스럽게 느껴져 리체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계속 가슴속이 먹먹했다. 머리가 어지럽고, 토할 것만 같았다. 그게 말이 흔들려서든, 다른 이유에서였든 도저히 참기가 힘들었다. "흡, 으읍……." 갑자기 말의 속도가 느려졌다. 마치 리체를 위해 그런 것처럼. 겨우 가슴속의 통증이 약간 가라앉았다. 숨을 쉴 수 있게 되자 이제 두려움조차 잊은 것처럼 리체는 대뜸 물었다. "이것 봐요." "……." "왜 그랬죠?" "……." "꼭 그럴 필요는 없었을 텐데, 왜, 왜……." "그럴 필요는 없었지."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여서 더욱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왜요!" "모든 행동이 필요의 결과인 건 아니야." "그런 한가로운 대답 따위……." 남자가 갑자기 손을 움직이더니 리체의 팔을 쥐었다가 놓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너무 아픈 나머지 리체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여전히 말이 많군." 전혀 수그러들지 않은 리체가 표독스레 쏘아붙였다. "당신도 말 많잖아요!" 조금 후, 대답이 들렸다. "난 여자가 말이 많은 것이 싫어." 자기는 말이 많아도 되고 여자는 안 된다니 비논리적인 주장에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하려던 말은 이쪽이 아니었다. 그런데 리체가 다시 묻기 전에, 남자가 먼저 말했다. "그 애 목을 잡았을 때, 이미 목표가 틀렸다는 걸 알았지." 물론 이네스와 조슈아를 착각할 수 있는 건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할 것이다. 리체는 되물으려 했다. "그런데……." "하지만 굳이 살려둘 필요도 없을 것 같더군." 그것이 전부였다. 리체가 말을 잃은 사이 말은 계속 달려갔다. 5. 대결 "난 모르겠어. 무엇이 너를 그토록 확신하게 하는 것인지. 무엇이 너를 그토록 집요하게 만드는지." "내 눈에는 끝이 보이기 때문이야. 그런데 그 끝을 향해 달리지 않으면 어느새 흐려져서 보이지 않아. 그래, 네 말이 맞아. 난 집요하지 않으면 안 돼. 집요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너져버려." 부둣가의 모습은 처참했다. 포석 틈새마다 피가 흐르고, 피 묻은 칼 예닐곱 자르가 아무 데나 버려진 가운데 서른 명의 남자들은 모두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조슈아는 또다시 새로 뽑아든 칼을 쥔 채 허공을 한 번 겨누었다가 말했다. "이런 칼들은 너무 빨리 무디어지는군." 다시 한 번 좌우로 휙휙 휘둘러 봤지만, 더 이상 상대할 자는 남아 있지 않았다. 조슈아는 칼을 내던져버렸다. 그리고 눈을 내리깔며 쓰러진 자들을 죽 훑어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들 모두를 쓰러뜨리는데 걸린 시간이 통상적으로 한두 사람을 상대할 때 걸릴 만한 시간과 엇비슷했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그렇듯 빠르게 베어나간 검으로 수십, 수백 번을 베고 찌르긴 했으나 단 한 명도 죽이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의도된 것인지, 아니면 우연인지는 보고 있던 막시민도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끝이 났다. 이제는 배에 태워야 했다. 막시민은 그가 알아들을까 궁금해하며 조슈아를 불렀다. "조슈아!" 돌아보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눈빛, 가벼운 비웃음을 머금은 입가, 역시 못 알아보는 것일까 생각했을 때 대답이 울렸다. "응." 막시민은 아랫입술을 한 번 빨고는 다시 소리쳤다. "그만 떠나야 할 때라고! 배로 올라와!" 조슈아는 부둣가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바다와 맞닿은 지점까지 와서 멈추더니, 막시민을 올려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밧줄을 내려 줘야 올라가지." 저런 일을 벌여 놓고 이제 와서 엄살 부리냐, 하는 생각은 집어 두고서 뱃전에 선 막시민은 밧줄을 풀어 던졌다. 조슈아가 손을 내밀더니, 역시 한 손으로 여유 있게 잡아채는 모습이 보였다. 막시민은 입 속으로 평소에도 저러면 얼마나 편해, 민폐도 안 끼칠 테고, 하고 중얼거렸다. "올라갈게." 밧줄을 잡은 조슈아는 가볍게 몸을 날려 배쌈 중간쯤을 한 번 딛고, 다시 몸을 띄웠다가 또 한 번 딛고, 하며 잠깐만에 뱃전까지 올라왔다. 그 때였다. 뱃전에 서 있던 막시민은 저만치 말 한 마리가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온 몸이 굳어졌다. 이 째 조슈아는 바로 눈앞까지 와서 기이할 정도로 침착한 얼굴로 묻고 있었다. "리체는?" 막시민은 보고 있었다. 여유 있는 속도로 달려온 말이 쓰러진 사내들 앞에서 잠깐 멈추고, 곧 뛰어넘어 배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그리고 기수의 손에 붙들린 리체의 모습도, 다행히… 죽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 손에서 살아 나올 수 있을까. 말이 멈췄다. 조슈아는 배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다리를 밖으로 내린 채 뱃전에 걸터앉아 있었다. 이제 그의 눈에도 상대가 보였을 터였다. 남자가 말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리체도 물론 함께 내렸다. 손이 묶여 있을 뿐, 다친 곳은 없는 듯했다. 남자는 리체의 손을 묶은 밧줄을 길게 이어 왼손에 잡고 있었다. 서두르는 기색도, 당황하는 기색도 없었다. 주위에 쓰러진 자들을 향해 무어라 한마디 하자, 그들은 억지로 기어서라도 그 자리에서 떠났다. 이윽고 남자는 선 채로 한 손을 들더니 인사를 보내듯, 모자챙에 댔다가 놓았다. "다시 보는군." 막시민이 말하려는 순간, 뱃전에 앉은 조슈아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됐지만 그다지 또 보고 싶진 않았어." 보통 사람이라면 움찔할 정도로 쌀쌀맞은 목소리였지만, 남자는 피식 웃었다. "나야말로 안됐군. 난 자네를 며칠 동안 죽 지켜보고 있었지."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랬겠지, 보내준 수의는 잘 받았어." "아, 그 흰 옷 말이군." 남자는 고개를 들어 조슈아를 잠시 살펴보더니 말했다. "하지만 입진 않았군 그래." "더 아름다운 옷을 선사한 사람이 있었거든." 조슈아는 손을 들더니 아래쪽을 가리켰다. "지금은 당신과 함께 있지만." 남자가 보낸 처음의 옷도 어차피 리체가 만든 것이었지만, 둘 다 그런 점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됐지, 하지만 되찾아 가야 할 것 아닌가?" "맞았어. 당신도 그 점을 생각했기에 이렇듯 느긋하게 온 것이겠지? 내가 리체를 두고 떠나지 않으리라고 확신해서?" "물론." 조슈아는 두 손을 들어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보아하니 평소 막시민이 곧잘 하던 그대로였다. "그럼 어떻게 돌려 받을까?" "교환을 하고 싶군."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웃었다. 곁에 선 리체는 남자의 입에서 흰 이가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엇과?" "자네와." 조슈아는 즉시 대답했다. "성립되었어." 그와 동시에 조슈아는 뱃전에서 뛰어내렸다. 밧줄을 타고 올라가야 할 정도로 높은 곳에서, 한달음에 뛰어내려 부둣가에 섰다. 남자가 휘파람을 불더니 박수를 두 번 쳤다. "안 보던 사이에 새로운 걸 많이 익혔군." 이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선 조슈아가 말했다. "당신의 박수는 이걸로 두 번째군." 남자가 객석에서 쳤던 박수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막시민은 조슈아가 지금 어디까지 제정신이고, 어디가지 다른 모습인지 구별이 안 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보내 줘." "데려 가." 그 말과 함께 남자는 리체의 손을 묶은 밧줄을 놓는 대신 힘껏 잡아당겼다. 리체가 거의 쓰러질 뻔하며 뒤로 고꾸라지는 순간, 그 오른손을 뻗어 리체의 목을 움켜쥐려 했다. 하지만 그가 쥔 것은 리체의 오른쪽 어깨였다.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허공을 찢었다. 그러나 이미 남자와 조슈아, 둘 모두 리체가 아니라 서로를 상대하고 있었다. 조금 전 인간이랄 수 없는 속도로 달려들어 리체를 잡아당기고, 그렇게 해서 목을 쥐려는 손을 어긋나게 한 조슈아는 곧장 남자의 배를 무릎으로 걷어차며 턱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 순간 남자는 확실히 방심했다. 조슈아의 손으로 치면 얼마나 세게 치겠는가 생각했던 듯하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어긋났다. 퍼억! 턱이 돌아갈 듯한 충격이 오고, 배에 온 타격으로 허리를 굽힐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되었다. 뒤이은 공격을 피하려고 몸을 홱 젖히자, 조슈아의 발이 무릎 아래를 걷어찼다. 그는 재빨리 몸을 뺐다. 상대를 다시 봐야 했다. 어떤 이유로든, 강해졌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는 그런 적응도 빨랐다. "달라졌군." 그 때 조슈아는 바닥에 던졌던 칼 가운데 하나를 발로 차올려 손에 쥐더니 정면으로 겨누며 달려들었다. 남자는 무기 없이 방어 태세를 취했다. 조슈아의 긴 칼이 남자의 오른팔 하박(下膊)에 부딪쳤다. 그러니까, 정말로 부딪쳤다. 베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조슈아가 멈칫 물러나자 남자는 팔을 풀며 말했다. "그 정도 칼로는 어림없어." 조슈아가 검을 횡으로 휘둘러 남자의 모자를 날려 버렸다. 그것을 신호로 둘은 본격적으로 격돌했다. 이 때 막시민이라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조슈아와 남자가 싸우기 시작할 때, 조슈아 때문에 뱃전에 걸쳤던 밧줄을 잡고 미끄러지다 뛰어내렸다. 그리고 곧장 리체에게 달려가 상태를 살폈다. 정신은 있었다. 하지만 부축하려 하자 고통스런 비명이 흘러나왔다. "팔……." 막시민이 만져보니 출혈이 없는 대신 오른쪽 어깨가 탈구되고, 게다가 상박(上膊)의 뼈가 아예 부러져 전투를 직업으로 하는 용병들이라 해도 제정신으로 버틸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샐러리맨 저 자는 조슈아가 가까이 오자 이제 리체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바로 죽여버릴 작정이었던 것이다. 사람의 목숨에 밀알만큼의 무게도 두지 않는 자답게. 막시민이 손을 대자 리체의 몸 전체가 와들와들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리체는 떨면서도 눈을 똑바로 뜨고 있었다. 심지어 말을 하기까지 했다. "저, 저 사람. 어, 어떻게. 지금. 조, 조슈아, 어떻게……." "조슈아는 상태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그 덕택에 잘 해나가는 중이지. 지금은 다행이라 해야 할지." 막시민은 고개를 들어 조슈아를 한 번 더 봤지만, 지금은 리체의 상태가 더 급하다고 판단했다. 탈구된 어깨는 부러진 상박 때문에 당장 맞출 수도 없을 듯했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지독한 고통이 있으리라는 것은 묻지 않아도 뻔했다. "조금만 참아봐. 너 독한 거 다 아니까, 꼭 참아야 돼." 막시민은 리체를 부축해 억지로 버티느라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입술이 풀려 침까지 흐를 지경이었다. 그 다음은 어떻게든 어깨로 받쳐 들쳐 메는 것인데, 참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대로 있을 순 없었다. "한 번만 더……." 어떻게 해냈는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막시민도 진땀을 흘렸다. 리체는 악문 잇새로 끓어오르는 신음을 참으며 입술을 짓씹는 바람에 곳곳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막시민은 일어섰다. 그리고 리체의 얼굴을 살피더니 말했다. "차라리 기절을 해라. 저기 저 자식 잘 하듯이 기절하고 나면 아픈 것도 모를 텐데, 왜 이렇게 독하게 버티냐." 막시민이 배를 향해 걷기 시작하자 신음 사이로 리체의 대답이 들려왔다. "기, 기절이… 아, 안 돼……." 조슈아는 검 두 개를 부러뜨리고 세 개 째 검을 쥔 채 남자와 대치하고 있었다. 누가 우세하고도 열세라고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방어만 하고 있는 남자가 상처를 입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부터 조슈아의 눈이 감길 듯 흐려졌다가, 다시 떠지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흡사 빠져나가려는 혼을 애써 붙들어두는 것처럼 어렵사리 눈을 뜨느라 애쓰는 것이다. "검이 좋지 않아……." 검이 나쁘다기보다는 자신이 가진 속도, 그리고 남자의 기이한 힘을 버티려면 이런 평범한 검으로는 약했다. 그러나 조슈아는 새로 든 검을 여전히 여유 있는 자세로 세워들었다. "하지만 상대는 괜찮아."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남자는 갑자기 자신도 바닥의 검을 차 올려 쥐었다. 그리고 가면 속에서 빙그레 웃었다. "그럼 같은 검으로 해 보자고." 즉시 두 검은 서로를 향해 부딪쳐갔다. 조슈아의 검은 속도, 남자의 검은 힘, 그러나 그렇다 해서 한쪽이 가진 것이 상대에게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남자가 힘껏 내리쳐 온 검을 한 손으로 꺾어 쥔 검으로 여유 있게 막아내는 조슈아나, 조슈아가 재빠르게 수십 번 찌르는 것을 모조리 피하는 남자나 둘 다. 상대의 검이 어깨를 찔러 들어오자 재빨리 비껴 섰다가 자세를 바로잡는 탄력으로 검끝을 퉁겨 보내고, 정면으로 찔러 들어오는 검을 코앞에서 피하며 낮춘 몸을 회전시켜 바닥을 휩쓸듯 발목을 걷어찬다. 머리 위에서 내리 찌르는 검을 횡으로 막으며 쳐내는 손목의 탄력은 가공할 만한 것이다. 서로의 실력 차는 싸우고 있는 본인들만이 알 수 있을 만큼 굉장한 속력의 공격이며, 방어였다. 그러나 조슈아 쪽이 빠르게 지쳐갔다. 그와 함께 받아들일 때처럼 순식간에, 힘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승리를 확신하고 검을 높이 들었다가 바닥에 내던졌다. 그는 언제고 마지막을 자신의 오른손으로 하길 원했던 것이다. 조슈아의 눈이 감긴 시간이 길었다. 다시 덧을 때는 뒤집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남자의 손이 목을 붙들고 있었다. 그 상태로 들어올릴 수도 있는 강력한 오른손으로. 손바닥이 무척 거칠었다. 남자는 맥이 뛰고 있는 부드러운 목의 감촉을 느끼려는 것처럼 천천히 손아귀를 움직였다. 이윽고 엄지로 맥을 짚으며 손을 멈췄다. 꺾어지기 직전까지 팔딱거리며 뛰는 조그마한 맥을 눌러버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즐거움인 것이다. "마지막, 즐거웠다." 조슈아가 눈을 뜨더니,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실낱같지만, 자신감만은 잃지 않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말이야…. 그 손은……에서 생긴 것이지?" 남자는 알아듣지 못했다. "뭐라고?" "그곳 말이야…. 오래 전에… 사라진……." 그 때였다. "저기 있다!" "저기 있어!" "바로 저기야! 저기라고!" 둘 만이 있는 줄 알았던 부둣가가 어느새 수많은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까지는 좀 시간이 걸렸다. 이웃한 부두는 물론 8번 부두로 이어지는 길 전체를 메운 마차들의 행렬, 그리고 이미 내려서거나 또는 마차 안에서 창을 열고 내다보고 있는 수많은 시선이 모조리 두 사람에게 꽂혀 있었다. 단지 바라보고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소리를 질렀으며, 놀라 외치거나, 환호하거나, 심지어 이쪽으로 무척대로 다가오려 했다. 두 사람은 몰랐지만, 그들이 갑자기 나타난 이유는 극장주 에테른 때문이었다. 조슈아가 나오지 않는 상태로 피날레가 이상하게 마무리되고 나자, 관객들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배우를 직접 만나고자 분장실로 들여보내 달라고 소란을 피웠다. 이 때 앞에 나선 에테른이 큰 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그를 만나고 싶은 붙은 지금 즉시 8번 부두로 가세요! 곧 배를 타고 떠날 예정이니까요! 떠나기 직전이니 얼른요!" 그런 에테른의 선언은 다름 아닌 리체가 미리 부탁해 놓은 것이었다. 막시민과 리체가 준비한 것은 각각 달랐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무척 소용이 닿은 것들뿐이었다. 먼저 둘러볼 여유가 있었던 사람은 조슈아 쪽이었다. 그는 별로 놀라지 않았고, 죽음을 공연하고 있는 것처럼 단지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관객이 무척 많아졌군." 그러나 남자의 표정은 그처럼 침착하지 못했다. 그는 본래 암살자였다. 어둠 속에서 숨어서 행동하는 자였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않는 것이야말로 특히 중요한 행동 방식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듯 많은 사람에게 노출되는 자리에 서서, 그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상황에, 배우인 조슈아처럼 익숙했으리라는 짐작은 하기 어려웠다. 평소 평정을 잃는 것을 본적이 없는 상대의 입가가 기묘하게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시선 정도는 수천 명이라 해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조슈아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일종의 관장공포증이었을까. 어찌됐든 이 상태만은 조슈아의 압도적 우세였다. 조슈아로서도 기대한 일 없는 상황이었다. 남자가 한참만에 대꾸했다. 대꾸라기보다는 중얼거림이었다. "쓸모 없는 자들 같으니……."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불명확했다. 이런 자들을 막아줄 그의 부하들이 사라진 것을 가리킨 말일 수도 있었다. 그의 표정은 급속도로 불안정해져갔다. 조슈아의 눈으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더구나 이 관객들은 모두 귀족이었다. 이 일대에서 이름 좀 있다 하는 귀족은 거의 다 몰려든 것과 같았다. 그 중에는 두르넨사 중앙 정부와, 심지어 켈티카에까지 선이 닿을 수 있는 고위 귀족들도 여럿 섞여 있었다. 이 상황에서 남자가 조슈아의 목을 조른다면 어떻게 될까. 이 때 남자의 머릿속에도 이런 생각이 떠올랐던 듯했다. 그는 움직일까 말까 하는 것처럼 목을 쥔 손아귀를 움찔거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준 혼란, 그리고 귀족들 앞에서 조슈아를 죽였을 때 이 배우에게 환호하고 있는 저 자들이 흥분하여 난동을 벌이리란 점 하며, 이어 그들은 조슈아의 신분을 비롯하여 이런 곳에서 죽게 된 이유와 배후 등등 모든 것을 낱낱이 캐려 하리란 사실까지. 이 때 상당수의 귀족들은 남자가 가면을 쓰고 있는 걸 봤기 때문인지, 이 상황이 실제가 아니라 일종의 연기로 받아들였다. 사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럴 까닭이 전혀 없는데도, 방금 전 본 공연에 너무 몰입된 나머지 그런 생각이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극장이 아니었고, 마음껏 소리질러도 되는 장소였다. 실제로 그들은 체면도 잊고 외쳐댔다. "어, 상황 설명이 필요한데!" "다 끝나버린 거요?" "처음부터 다시 해요!" 당사자들에게는 어이없게 들리는 이런 소리를 잘도 외쳐 댔지만, 어찌됐든 그들은 조슈아의 구세주들이었다. 남자의 손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데모닉은, 운도 강한 건가." 손이 풀리는 순간, 조슈아는 한 번 크게 휘청거렸다. 남자는 그들을 둘러싼 불청객들을 다시 한 번 둘러봤다. 그의 눈빛에 비친 감정은 이들 모두를 단번에 죽여버리고 싶다는 것이었지만, 귀족을 해치고 물의를 일으켜서는 의뢰인의 입장이 불리해진다. 그는 몇 걸음 가다가 갑자기 몸을 솟구치며 다음 부두로 건너뛰었다. 그리고 사람들 틈으로 가는 대신 정박되어 있는 어느 배 위로 사라져 버렸다. 혼자 남은 조슈아는 겨우 몸을 추스리며 사람들을 둘러봤다. 이미 머리가 어찔어찔 했다. 그리고 떠나야 할 시각이었다. '미의 극치호'로 걸어간 그는 뱃전에 매인 밧줄을 잡기 직전,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갑자기 날렵하게 궁정식 절을 했다. 영문도 모르고 박수갈채를 보내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밧줄을 잡은 그는 조금 전과 같은 방식으로 배 위에 올랐다. 막시민의 환영 인사는 이러했다. "교통 혼잡 만세." 그러나 배 안으로 들어온 그는 조금 전의 조슈아가 아니었다. 바닥에 주저앉는 것과 동시에, 몸이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조금 전까지 억지로 버티고 있었던 것처럼, 완전히 의식이 빠져나갔다. 뱃전 아래 앉아 있던 막시민은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조슈아를 보고, 그리고 리체를 옮겨 놓은 선실 쪽을 흘끔 쳐다보더니 투덜거렸을 뿐이었다. "젠장, 이거야 숫제 시체 운반선이로구만." 흔들. 흔들. 기분 좋게 흔들리는 느낌에 자꾸만 잠 속으로 빠져들던 조슈아는 갑자기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뺨을 찌르는 것을 느끼고 흠칫 놀라 깨어났다. 눈을 비비고 앞을 보는데 낯선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 동안 생각을 바로잡았다. 둘러보니 이곳의 '미의 극치호' 안이다. 그러면 있을 사람은 막시민이나 리체분인데? 낯선 남자는 조금 전 뺨을 찔렀던 손가락을 허공에 빙빙 돌리며 인사를 했다. 인사는 무척 단순했다. "안녕." 조슈아도 얼결에 대답했다. "아, 안녕……." 그런 다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니, 정확히는 뛰어내린 셈이었다. 그가 누워 있던 곳은 그물침대였으니까. 남자는 맞은편에 있는 테이블 위에 발돋움도 없이 훌쩍 걸터앉았다. 스물 몇 살 정도로 보이는 그는 키가 조슈아만금이나 컸다. "그런데……." "왜 찔렀냐고?" 그걸 물으려는 것이 아니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것도 물어야 할 것 같았다. "왜 찔렀는데요?" "찔러보고 싶어서." 그러더니 곧 말을 덧붙였다. "네 뺨을 질러보고 싶어했을 수많은 관객들을 대신해서." "……." 일어나 앉고 보니 온 몸이 뻐근한데다, 곳곳이 멍든 것처럼 아프고 특히 근육통이 심각했다. 가장 아픈 곳은 팔이었다. 왜 아프게 된 건지 기억해내려 했지만 도무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조슈아는 이 사람이 누굴까 싶어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공연 보셨나요?" "아니." "그러면……." "관객들은 봤지. 부둣가에 몰려들었던 사람들, 굉장하더라. 그것도 귀족들이, 그런 모양으로 소리를 질러대다니, 정말 대단했어." 조슈아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였다. "부둣가에요? 귀족들이?" 남자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기억 안 나? 너 보려고 몰려왔잖아." 조슈아는 기억을 열심히 더듬어 봤지만, 아무리 애써도 극장에서 엔딩을 마치고 분장실로 내려오던 때가 마지막 기억이었다. 막시민에게 물어보지 않는 한 자세한 것은 알기 힘들겠지 싶어 일단 물었다. "저기, 막시민하고 리체는 어디 있어요?" 남자는 손으로 조슈아 등 뒤를 가리켰다. "옆방에." 이곳이 식당 겸 휴게실이라면 침실에 가까운 옆방은 사실상 무척 좁아서 지난번 여행때도 거의 쓰지 않던 곳이었다. 침대가 하나 있긴 했지만, 밖에도 침대는 있으니까, 그런 곳에 둘이 틀어박혀 뭘 할까?" "둘이서요?" "응." 조슈아는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팔이 아파 중지했다. 그리고 아까 놓쳤던 질문을 했다. "저… 그런데 죄송하지만 당신은 누구죠?" 남자는 빙그레 웃더니 말했다. "난 고용된 항해사야." "휴, 그렇군요." 유령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낯선 사람이 눈앞에 있으면 혹시 유령이 아닐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그였으니 말이다. "그러면 이름이?" "마일스톤(milestone). 그냥 그렇게 불러. 넌 히스파니에지?" 조슈아는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이 사람에게 본명을 말해도 좋은지 잘 판단이 안 섰던 탓이었다. 이제 조슈아는 일어나 옆방으로 가보려 했다. 일어나자 관절들이 한꺼번에 비명을 질러대는 게 느껴졌다. 겨우겨우 버티며 섰는데 남자가 테이블에서 뛰어내리더니 말했다. "옆방에 가보려고? 가지 마." "아니… 왜요? 도대체 뭘 하기에……." "별로 볼 만한 광경이 아닐 거야."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못 볼 일이 없을 텐데." 힘들게 걸어가 문을 열었을 때, 좁은 방 안에서 제일 먼저 느껴진 것은 땀 냄새였다. 그리고 시선이 한 곳에 딱 고정됐다. 뒷모습으로 앉아 있던 막시민이 몸을 돌리는 것은 깨닫지도 못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리체는 한쪽 팔이 가슴 쪽으로 접힌 채 붕대가 친친 감겨 있고, 땀으로 범벅된 얼굴은 백짓장처럼 창백했다. 붕대를 감느라 입고 있던 옷의 오른쪽 어깨 부분은 가위로 잘라냈고 가슴과 왼쪽 어깨는 담요로 덮여 있었다. 평소 활기 넘치는 소녀였던 리체가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니 마치 다른 사람처럼 낯설어 보였다. 게다가 얼굴뿐 아니라 어깨와 팔, 드러난 몸 전체가 땀이었다. "나가자." 한숨을 내쉬며 일어난 막시민이 조슈아를 조금 밀쳤다. 조슈아가 숨을 급히 들이마시는 것을 보고 막시민이 물었다. "아프냐?" "이상해. 온 몸이 쑤셔 죽겠어." "이상하긴, 앓아 눕지 않은 것이 다행이지." 막시민은 나오며 문을 반쯤 열어 놓았다. 같은 선실 안인데도 공기가 다를 정도로 작은 방 안은 덥고 답답했다. 막시민은 그 방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의자를 가져올 기운도 없었던 조슈아는 바닥에 그냥 앉으며 물었다. "리체… 어떻게 된 거야?" "팔이 부러졌어. 게다가 쇼크가 있는 모양이야. 계속 식은땀이 나고 맥박이 느려졌다 돌아왔다 한다고." 말을 하며 서로 얼굴을 보니 상대가 불상해 보일 지경이었다. 조슈아는 말도 못하게 해쓱해져 있고, 막시민은 곧 지쳐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조슈아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어떡하다가 그렇게 됐는데?" "샐러리맨, 그 자이지 누구겠어." 조슈아는 크게 놀라며 말했다. "그 자가 나타났어?" 막시민은 한심한 눈으로 조슈아를 바라보다가 피곤한 와중에서도 뒤통수를 한 대 때렸다. "자기가 싸워 놓고도 모르고, 이딴 자식이 다 있지." "내가 싸워?" 막시민은 설명하기조차 귀찮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결국 말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부둣가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조슈아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정말 생각 안 나?" "내가 기억하는 건, 엔딩 장면 직후 분장실로 내려왔을 때……." "그래, 내가 그 때 네 뒤통수를 때려서 끌고 나갔다. 마차에 태워서 부둣가까지 갔단 말이야. 그런데 마차꾼 놈이 도망가서 마차가 물에 빠졌고, 너도 물에 빠졌고, 그런데 네가 갑자기 물 위로 떠오르더란 말이지. 누군가의 손에 부축된 것처럼. 하지만 그게 누군지 보이진 않더라고, 혹시 켈스니티였나?" "켈스. 최근에 나타난 일이 없는데." 조슈아는 미간을 찌푸리다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리체가 그 자 손에 팔이 부러졌단 말이야? 그런데 저대로는…의사가 필요하지 않아?" 막시민이 짤게 한숨을 쉬었다. "두말할 필요 있겠냐. 당연히 필요하지. 고향에서 같으면 접골목을 찧어 붙이고 달여서 좀 마시기도 할 텐데 바다 위에 그런 게 있을 리도 없고, 나도 참 난감하다. 그나마 뼈가 살을 찢고 튀어나오지 않아서 어떻게 될 것 같기도 한데 말야. 심지어 처음엔 어깨도 빠졌었는데, 맞추려고 보니 부러진 팔 때문에 안 그래도 힘들어하는 애를 솜씨도 없이 다루다가 사람 잡을 것 같아서 못하겠더라, 결국 저기 있는 마일스톤이 대신 맞춰줬어. 그래서 그나마 붕대라도 감을 수 있었던 거지." "아, 고마워요." 조슈아의 인사에 마일스톤이라는 남자는 그냥 머쓱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보니 그의 인상이 무척 좋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익숙한 듯도 하고. "하긴 우릴 도와준 사람이 한두 명은 아니지." 막시민은 조슈아를 잠시 바라보다가 흥, 하고 코끝으로 웃었다. "너 같이 시건방진 녀석을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려 한 건지 알 수가 없군. 네가 도망칠 시간을 버느라 무대에서 피날레 하던 사람들이 각자 세 배씩 시간 끌었던 거 모르지?" "그… 랬어?" "그래. 없는 대사 지어내고, 노래도 느리게 부르고, 춤도 느리게 추고, 연주까지 느리게 하느라 무척 고생들 했을걸. 뭐, 나야 널 데리고 나가느라 대기실에서 소리만 들은 거지만, 어쨌든 그래달라고 부탁한 건 나니까." 조슈아는 희한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그 사람들한테 우리 사정을 다 설명했어?" "다는 아니고." 막시민이 무슨 괴이한 얘기를 만들어내서 그 사람들을 설득했을지 무척 궁금했지만, 일단은 얘기를 들어야 하니 묻지 않았다. "그리고 스트라우즈 씨가 빌려준 그 마차, 물에 빠져 미안하게 됐는데, 도망간 마차꾼 핑계를 대자면 댈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바다 속에 들어가서 마차를 건져 올 능력은 나한테도 없었다고. 참, 그리고 칼라이몬 씨도 도와줬지. 훗, 그 아저씨 젊었을 때 항구 전체를 주름잡았겠던데." 조슈아가 눈만 굴리고 있는 가운데 막시민은 기지개를 늘어져라 켰다. "그리고 에테른 씨도 깔끔한 사람이더군. 당일 입장권으로 들어온 수익중에 너 줄 거를 바로 잘라 주더라고. 출발하려니 그걸 금으로 당장 바꿔야 됐는데, 운 좋게 한트케 씨가 바꿔줬다. 그 사람 자기 집에 금괴를 쌓아두고 사는 모양이더라. 긴가민가하며 부탁한 건데, 단번에 바꿔준 걸 보면." "좀… 유명한 사람이니까, 카르디 시절에 나도 알았을 정도로." 막시민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시 볼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보게 된다면 신세 잘 갚아라. 너 같은 녀석한테 그런 친절을 누가 보여 주겠어." "내가 뭐 어때서 자꾸 너 같은 녀석이라는 거야?" "너 같은 녀석이 너 같은 녀석이지 뭐." 그러나 조슈아는 더 따지지 않고 어깨를 움츠렸다. "미안해." 막시민은 대답 없이 있다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미안한 줄은 아냐?" 둘 다 어설픈 꼴을 하고 얼굴도 마주보지 않았지만 서로가 생략한 말은 충분히 알 수가 있었다. 다툴 때는 말이 많아도 화해할 때는 긴 말이 필요 없는 그들이었다. 한참만에 조슈아가 약간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 인사도 못했네. 다들, 그리고 이네스랑 이네스네 오빠도." 막시민도 말했다. "하긴 나도 이네스인가 그 아가씨는 못 봤는데." "이번에 이네스 노래 정말 잘 했는데, 칭찬도 못 해줬네." 둘 다 정신 없이 떠나와버린 항구를 떠올리고 있는지 얼마간 말이 없었다. 배가 한 차례 삐걱거리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마일스톤이 일어나더니 키를 좀 살펴보겠다며 나갔다. 막시민이 말했다. "솜씨 좋은 뱃사람이지."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말했다. "참, 그러니까 우리 아직 날고 있는 게 아니구나?" "네가 없는데 누가 날아가도록 조작을 하겠냐. 어디 섬에라도 들러야 다시 날아가든 말든 하지. 마일스톤이 이대로 가면 내일 아침쯤 무슨 섬에 들를 수 있다고 하더라고, 거기에 의사가 있길 바라야지. 지금은 이대로 그냥 담요를 덮어주고 땀을 닦아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데 없어. 쇼크가 심하지 않으면 좋겠는데." "붕대는 누가 감았어?" "나지." "그런 것도 할 줄 아는구나." "내가 빌어먹을 동생 일곱을 키웠다는 걸 잊지 말라고, 다만 여자 애라 좀 힘들었다." 그런 뒤 둘은 잠시 말이 끊어졌다. 둘 다 덤덤한 듯 말하고는 있어도 속으로는 무척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자기들 때문에 따라나선 소녀를 잘 보호하진 못할망정 저 모양을 만들었으니, 저렇게 만든 자를 탓할 것 없이 우선 죄책감부터 들었다. 한참 뒤 막시민이 나직이 말했다. "세자르 아저씨가 알면 우리 둘 다 죽이겠구만." 조슈아도 동감이었다. 그들이 떠가고 있는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곳, 국경을 넘고 산맥을 넘어 북쪽으로 날아간 곳에 아노마라드의 수도 켈티카가 있다. 세 사람이 갖은 고초를 겪으며 어떻게든 가야 할 그곳은, 그들의 괴로움 따위 알 바 아닌 듯 평화로웠다. 대륙 건너 남쪽의 소식이 한 토막이라도 들려오기엔 너무나 먼 곳이다. 드디어 여름이 닥친 것을 알리듯 그로메 학원의 기숙사 창문들이 거의 다 열려 있었다. 열린 창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기숙사의 풍경은 가지각색이었다. 어느 귀족 저택의 살롱처럼 꾸며진 곳에서부터, 고학생의 골방답게 잡동사니가 창 밖으로 떨어질 것처럼 쌓인 곳까지, 한 방 안에 창문이 몇 개나 있는 널찍한 곳에서, 손바닥만한 창 하나가 고작인 다락방 같은 곳까지, 높은 층은 방이 자루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2층의 한 방만은 꽤 넓은 듯했는데 어찌된 셈인지 한 개의 창문도 열려 있지 않았다. 방문객들은 그 창문들을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뜰을 지나가는 학생들이 방문객을 흘끔거렸지만, 그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오가는지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생각이 표정에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데 상당한 실력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학원의 학생들은 여자고 또 귀족이라 해도 이 방문객처럼 치렁치렁한 드레스는 잘 입지 않았다. 그렇기에 교정에 선 이 아가씨의 모습은 더욱 눈길을 끌었다. 연한 샴페인빛 여름 드레스의 치마는 종 모양으로 부풀어 있고, 햇빛을 가린 레이스 양산은 드레스만큼이나 화려했다. 챙 넓은 흰 모자 아래 드러난 얼굴에서 단아한 빛이 풍겼지만 동시에 말 붙이기 힘든 새침한 느낌도 갖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사람들의 눈길을 즐기는 것을 그만두고 계단을 올라갔다. 기숙사를 방문하기 위한 수속을 밟으러 가는 것이다. 뒤따라 온 시종이 앞장서 들어가 여주인의 이름을 말하고, 방문에 대해 설명하자 금방 허가가 나왔다. 기숙사로 향하는 동안에도 여러 학생들이 그녀를 돌아봤다. 그녀는 꽤 예쁜 얼굴이었다. 기숙사 로비에서는 아는 사람을 하나 만나 잠시 인사도 했다. 귀족 출신인 듯한 학생은 그녀와 이야기한 뒤 친구들의 부러움 섞인 눈초리를 받으며 기분 좋게 헛기침을 했다. 그녀는 이윽고 중앙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방 번호를 보며 천천히 걷다가 '212'라고 새겨진 금빛 번호판이 붙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시종이 문을 두드렸다. "아, 잠깐만, 기다려요. 기다려보아요." 장난기 섞인 쾌활한 목소리가 들리고, 조금 긴 듯한 시간이 흐르자 문이 열렸다. 나타난 사람은 짧게 잘라 찰랑거리는 금갈색 머리카락에 조그맣고 하얀 얼굴을 한 소년이었다. 무릎까지 오는 짧은 바지와 대충 걸친 듯한 구깃구깃한 재킷, 거꾸로 쓴 모자에 이르기까지 어느 모로 보나 장난꾸러기 도련님 같은 인상이지만 방문객은 이 사람이 소년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누구시죠?" "아마란스 백작가의 이엔나 카를레야 다 아마란스 양이시죠?" 싫어하는 이름으로 불린 이엔은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예요, 도대체?" 방문객은 살짝 미소지었다. "그대의 아버님께서 부탁하셔서 왔어요. 전 켈티카에 살지만 남부에 종종 갈 일이 있는데, 지난번에 아마란스 가문의 성에 잠시 들르는 영광을 누렸어요. 제가 켈티카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하니 어머님께서 이것을 전해 달라고 부탁하시더군요." 이엔은 어머니라는 얘기에 얼굴이 흐려졌지만, 방문객이 내민 꾸러미를 받자 어쨌든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들어오셔서 차라도 하시지요. 어머니 안부도 전해 주고요." 방문객은 사양치 않고 안으로 들어섰다. 하녀의 손길이 닿은 듯 깔끔한 방의 거실로 안내되는 동안 그녀는 줄곧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학원에 다녀본 일이 없어서 호기심이 일어서였을까, 주변에 놓인 모든 것을 하나하나 꼼꼼이 살펴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차는 하녀가 아닌 이엔이 직접 내왔다. 조금 맛을 보니 차 끓이는 솜씨는 형편없었다. 그 동안 이엔은 꾸러미를 열어보고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도 참 끈질기시지." 나온 것은 어깨가 드러나는 여름용 흰 드레스와 장갑이었다. 당연히 고급 새틴 소재이고, 드레스는 퍼프 소매 아래쪽에 조그마한 망사 장비 코르사주가 빙 둘러 달린 귀여운 디자인이었지만, 그걸 이엔이 입게 될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안에는 편지가 있었다. 펼쳐 보니 더욱 한숨이 나왔다. 그 드레스를 입고 얼마 뒤 켈티카의 어느 가문에서 열린다는 파티에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방문객은 찻잔을 입가에서 기울이며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엔은 대강 편지를 접으며 상대를 흘끗 보더니 말했다. "당신한테 잘 어울리겠네요." 학원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드레스 차림인 것을 보고 한 말이었다. 방문객은 고개를 저었다. "아마란스 양에게도 잘 어울려요, 어머니께서 눈이 아주 높으시네요. 따님에게 맞는 것을 잘 아는 분 같아요." "잘 알면 이런 거 안 보내요. 내가 입은 옷 안 보여요?" 방문객은 다시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차림도 재미있지만, 이 아름다운 드레스만은 못한 것 같네요. 더구나 어머님의 정성이 깃들어 있잖아요." 이엔은 그냥 한숨을 쉬고 말았다. 어차피 말다툼할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학원 학생도 아니고, 그냥 지나가는 사람일 뿐이니까. 그렇게 생각한 이엔은 대강 마무리하려는 심정으로 말했다. "어머니도 참, 이런 일은 심부름꾼한테 시키셔도 될 텐데. 번거로운 부탁을 받게 되어서 괜히 힘드셨겠어요." 방문객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어머님께선 심부름꾼보다 제가 좋을 것 같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어요." "그래요? 무슨 까닭이라도 있어요?" "네, 어머님께선 제가 아마란스 양의 친구가 되어 주었으면 하시더군요. 편지에 쓰신 파티에도 같이 가면 좋겠다고, 제 손을 꼭 잡고 말씀하셔서 저도 그럴 생각이고요." 이엔은 난감한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다짜고짜 친구라니, 비밀스런 일을 많이 해야 하는 그녀로선 이만저만 낭패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어머니의 부탁으로 이렇듯 수고해 준 숙녀에게 다신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 말이다. 어머니는 저렇듯 정숙하고 예법도 바르고 나이도 찬 아가씨와 친구가 되면 이엔도 좀더 여성스럽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아직 상대의 이름조차 듣지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저어, 하지만 전 아가씨가 누구인지도 아직 모르는데." 방문객은 이엔은 흉내도 못 낼 우아한 동작으로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아르장송 자작가의 실비엣 드 아르장송이라고 해요." <5권에서 계속> 데모닉 5권 진실을 알아도 아는 체 말아요. 모두가 알게 되면 세상은 망해요. 9막. Indeed 1. 말하지 않는 자 2. 밀짚모자 약사의 집 3. 잃어버린 목소리 4. 작별 인사 5. 몸을 빌린 자 6. 충성과 복수의 이름 7. 맹약자의 시작과 끝 10막. Secret 1. 지스카르 드 나탕송 2. 켈티카로 띄웠던 편지 3. 가려진 카드를 뽑다 4. 페리윙클 공작 5. 모독 6. 상복을 입은 소녀 9막. Indeed 1. 말하지 않는 자 "네가 나를 꿈꾸지 않기에, 내가 널 꿈꾸기로 한 거야. 내 꿈속은 차갑고 단조롭지만, 너에게는 충분할 거야. 넌 나를 찾아 헤매겠지만, 떠난 자리만 보게될 거야. 왜냐면 내 꿈에는 안식이 없거든. 위로도, 보답도, 탈출도 없거든. 그래서 내가 계속 그 꿈을 꾸는 거지." "벌써 어두워졌네요." 마주 앉은 소공작의 말에 애니스탄은 일부러 창을 들여다보았다. 실은 돌아보지 않아도 이미 캄캄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창 너머에는 방안의 등불빛이 흐릿하게 그려 놓은 나뭇가지가 보일 뿐이었다. 애니스탄은 고개를 바로 하며 기계적인 미소를 보였다. "그렇게 됐군요.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참 재미있네요." 갑자기 나온 말에 애니스탄은 일어나려다 말고 눈썹을 올렸다. "무엇이 재미있으신가요?" 소공작은 얼른 대답하는 대신 애니스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애니스탄은 소공작이 그를 보는게 아니라 생각에 잠겨 있을 뿐임을 알았다. 시선이 그에게 머무른 것은 단지 마주앉았기 때문이었다. 자기 자신을 향한 생각만이, 그를 이처럼 오래 생각하게 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서… 이 탁자의 다리 하나가 부러져서 새 다리를 만들어 붙인 다 해도 이 탁자는 여전히 이 탁자겠죠?"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몰랐지만 애니스탄은 굳이 묻지 않고 기다렸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소공작이 말을 이었다. "내 다리가 하나 잘라져 없어져도 여전히 나 자신이고, 없어진 다리 대신나무 의족을 붙여도 여전히 나 자신이겠죠?" 애니스탄은 고개를 약간 끄덕이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 나무 의족은 뭘까요?" 애니스탄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무슨 뜻인지요?" "나무 의족은 나인가요? 내 다리인가요? 아니면 내가 입은 옷처럼 내가 사용한 뿐인 물건인가요?" "글쎄요, 모르겠군요." 평소 생각해 본 일이 없는 문제였기에, 모른다는 말도 간단히 나왔다. 소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고, 생각해 봐 주세요. 의족이 나의 일부라면 더 생각할 필요가 없겠지만, 아니라면 뭘까요?" 소공작과는 달리, 그는 생각에 잠기자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제 생각엔, 음… 의족은 사란의 일부가 아닐 것 같습니다. 옷처럼 도구가 아닐까요?" 소공작은 즉시 반문했다. "왜 그렇죠?" "왜냐하면 의족은 몸의 다른 부분하고 의사소통이 안 되니까요. 피도 통하지 않을테고, 상처를 입어도 아프지 않고, 그러니 심장이나 머리의 지시를 듣지 않는 셈이고…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견을 내지도 않으니… 음, 가정에 비유하자면 식구가 아니라 손님에 불과한 존재겠지요." 말하면서 이어간 생각이지만 맺을 즈음에는 스스로 납득할 정도로 정리가 되었다. 소공작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부정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단지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손님이 의견을 내는 일은 영영 없어야겠죠. 계속 그래준다면 좋을텐데, 그렇지 않으면 어쩌죠?" 애니스탄은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의족이 사란의 다리로 변하는 건, 마법으로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의족은 나무죠. 이미 죽었죠. 하지만 내게 들어온 건 그런게 아니거든요." 소공작은 두 팔을 겹쳐 보였다. 안을 들여다보라는 것처럼. 애니스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는 자였기에. 그는 섬뜩한 기분을 애써 감추며 소공작을 바라보았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소공작의 목소리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양 맑게 울렸다. "알잖아요." "……" 애니스탄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상대의 눈빛을 이길 수 없었다. 지금껏 쭉 그랬다. 죄책감 때문만이 아니었다. 몇 번이나 그는 상대가 자신이 만든 인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려 했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눈은 인형에 박아 넣은 검은 구슬이 아니었다. "작은 정원에 사람들이 앉아 있어요. 아주 편안하죠. 모두 잘 아는 사이죠. 누군가는 돌 의자에, 누군가는 그냥 풀밭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어요. 그들은 이야기를 하죠. 평등하지만은 않지만, 대체로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해요. 토론이 벌어지면 자주 이기는 쪽이 있긴 해요. 하지만 늘 지는 쪽은 없죠." 소공작은 애니스탄이 눈을 맞추도록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그게 내 머릿속이에요." 그의 인형을, 유리구슬로 눈을 만들고 깃털을 넣어 몸을 만들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 중엔 마음이 약해서 남의 호의를 믿고 싶어하는 자도 있죠. 반면 주위의 조건들을 보고 가장 빨리 진실을 꿰뚫어보는 자도 있어요. 그는 가장 효율적인 대책을 내놓겠죠. 하지만 자기 세계에만 빠져서 남의 악의를 알아 차리지도 못하고, 또 실은 관심조차 없는 자 때문에 가로막히기도 하죠. 또한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오만할 정도로 자기 방식만 밀어붙이는 자도 있으니, 그와 합세한다면 모처럼 내놓은 대책도 소용이 없게 돼요." 소공작은 미소 비슷한 것을 입가에 올렸다. "그러다가 자신을 죄의 존재로 인식하는 자학적인 자가 걸어 나와 모두의 입을 다물게 하는 거죠. 그들은 때에 따라 각각 저의 모습이 돼요. 그들은 늘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고, 토론의 결과에 따라 언제든 내 모습이 될 준비를 하고 있죠. 그런데, 거기에 손님이 나타난 거예요." 소공작은 정말로 누가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문 쪽을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그가 들어온 걸 몰랐어요. 그는 너무 조용했으니까. 모두가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정신이 없다가, 조용해졌던 어느 순간, 알아차렸어요. 그는 한쪽에 가만히 서 있었죠. 움직이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아요. 말을 걸어도, 물론 대답하지 않죠. 처음엔 저러다가 곧 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는 떠나지 않았어요." 이 순간 소공작의 미소는 엇듯 인형 같았다. 맥없는 미소였다. "아직까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손님이죠. 하지만 그를 불러들인 건 내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가 어떻게 들어왔을까? 내 안의 한 사람이 말하길, 그는 무엇인가를 대신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다리가 잘린 사람의 의족처럼, 내게 있었다가 사라진 무엇의 자리에 선 거라고. 그렇다면 그는, 내안의 판테온(pantheon)에 서 있던 한 명이 사라져, 그의 자리를 대신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는 언제까지나 거기에 서 있게 될까?" 질문이 스스로를 향하는 순간, 시선이 천창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소공작은 곧 다시 애니스탄을 바라보았다. "애니스탄, 당신의 말이 옳다면 그는 언제까지나 입을 열지 않을 테고, 나도 그의 존재를 잊어버리면 되겠죠, 하지만 사람이 의족을 단 때는, 진짜 다리보다 불편하긴 하겠지만 어쨌든 걷겠다는 생각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그 '손님'은 거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죠? 그가 있으나 없으나 똑같다면 그는 왜 들어왔을까요? 내게서 사라진 무엇이기에 그는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죠?" 애니스탄은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의족의 역할은 다리가 있던 자리에 대신 달려 있는 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피가 통하지 않고 통증도 느낄 수 없다고 해서, 과연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어땠든 그는 다리 대신 땅을 딛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그가 어느 순간 입을 열 것만 같네요. 역할이 없다면 그 자리에 들어올 수 없었을 테죠. 그리고 그의 역할이 내 판테온에서 의견을 주고받으며 때에 따리 내 모습이 되는 이들과 같은 거라면, 어느 날 그 손님은 바로 나의 모습이 되어 당신을 대할 수도 있는… 그런 것 아닐까요?" 소공작의 얼굴에 서서히 그림자가 덮였다. 두려움이었다. "언젠가 그의 차례가 오면… 그의 의견이 다른 이들을 누르고… 나서서 나의 모습으로 행동하는 순간… 그 때의 나는… 과연 나인가요? 내가 말하는 건가요? 나는 그를 제어할 수가 있을까요? 다른 이들과 하던 방식으로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데? 내가 내 판테온의 그들에게 하듯… 어느 순간 그를 도로 불러 앉히고 다른 이가 나서게 할 수 있을까요? 그는 내 말을 듣지 않고, 아니 듣지 못하고……" 갑자기 애니스탄의 뺨에 경련했다. 순간 소공작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던 것이다. 깨달음과 동시에 온몸에 오한이 일었다. "그렇게 영영 나를 차지하게 되어서… 다시는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을 지도 모르죠." 소공작은 알고 있었다. 결코 기억할 리 없는데도. 자신에게서 무엇인가 사라진 것과… 그 대신 무엇인가 들어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째서 그럴수가 있을까? 사람은 자신의 머릿속을 구획지어 놓은 농장처럼 질서정연하게 들여다볼 수는 없다. 그런데 보통 사람도 아니고 소공작처럼 복잡다난한 정신세계를 가진 자가, 알아차린 것이다. 자신에게 들어온 이물질을, 정 체불명의 줄을, 심지어 그것이 자신의 정신을 지배하려 획책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깨닫고… 그 존재를 은유적이지만 뚜렷하게 표현한 것이다. 바로 '본체'의 존재를. 아아. 그가 과연 인형일까? 스스로가 인형임을 알 수 있는 인형이 존재할까? 자신의 작품은 너무나 완벽했기 때문에 그것조차도 알게 된 것일까? 아니면, 그걸 알아차렸다는 사실이 완벽한 인형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까? 어느 쪽이더라고… 상대는 인형이면서도 세상 어떤 사람보다 뛰어나며, 심지어 창조자조차 능가하는 존재였다. 그게 복재된 진짜의 훌륭함 때문이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지배자조차 뛰어넘는 인형을 만든 자신이 이토록 두려울 수가 없었다. 아직은 자신이 어느 인간의 손끝에서 창조된 존재란 것까지 깨닫진 못했을 것이다. 인형이 스스로가 인형임을 깨닫는다면 그는 이미 인형이 아닐 테니까. 일상을 살아가는 것 이상의 무엇, 다시 말해 자신의 삶이 만들어진 소이를 찾으려 하고 인지하는 것이 인형이 아닌 '인간' 의 특성이니까. 그러므로 그렇게 된다면, 창조자는 인형 이상의 존재를 만든 셈이 되니까. 만일 모든 인간이 그의 인형처럼 할 수 있다면… 그들 인간을 최초로 만든 자의 손길, 그리고 의지마저 추출하여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소공작 스스로의 창조 과정과 원인을 깨닫게 된다면, 그건 인형, 아니 인간을 만든 애니스탄 자신은… 신의 일을 해낸 것인가? "내가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은……" 소공작은 추위를 느낀 것처럼 두 팔을 감싸 쥐었지만, 눈만은 빛났다. "이런 상태인데도, 제게 의욕이 있다는 거죠. 어떻게든 해 보겠다는 의욕. 그가 입을 여는 날이 분명 오겠지만, 그동안 저라도 준비하지 말란 법은 없는 거죠. 그가 나를 설득할 수 있을까? 그 답을 모르듯 내가 그를 설득하지 못한다고 정해진 것도 아니죠. 그가 내 안에 들어온 이상 나의 일부이거나 또는 내 것이니까. 지금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결국은 의족처럼 내가 다루는 대상이 되어 줘야겠죠. 그리고 그가 어떻게 내게 왔고, 과연 무엇을 대신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내는 것도, 그러니 나는 내 안에 대적자를 갖고 있는 셈이에요. 이것 참 재미있는 일이 아닌가요?" 소공작은 왜 애니스탄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그가 정말로 그를 창조하고, 그리고 대적자 또한 창조한 자가 애니스탄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짐작하고 있을까? 아니, 예감이라도 할 수 있을까? 알 수 없었다. 그의 인형은 데모닉(Demonic)이었기에. 날씨는 맑았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리 작은 범선이라 해도 고작 세 사람이 조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들 중 진짜 선원은 한 명뿐이니 더욱 어려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다행스런 점이라면 날이 밝을 즈음에는 비록 작은 섬이지만 사람이 사는 곳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순풍이 불어주어서 실제로 해야 할 일은 거의 없었다는 것 정도일까. 언제 풍랑이 일지 모르는 바다 위에서 이는 대단한 행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슈아, 막시민, 마일스톤 세 사람은 그런 행운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선실에 누워 있는 소녀는 시시각각 상태가 나빠져 갔다. 배에 탄 뒤로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호흡도 불규칙했다. 줄곧 흐르는 식은땀에 이불은 물론 머리카락까지 흠뻑 젖었다. 셋 다 응급처치 이상의 의술 지식이 없는 터라 얼마나 안 좋은 상태인지, 과연 아침까지 버틸 수 있는 것인지도 알지 못했다. 모르니 더욱 입술이 바짝바짝 탔다. 의사가 아닌 그들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거라곤 맥박을 살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맥이 너무 일정하지 않아서 저러다 멈춰버리지 않을지 겁이 날 지경이었다. 한 사람은 반드시 곁에 앉아 지켰는데, 리체의 손목을 잡고 있던 조슈아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면, 나머지 둘이 뛰어와서 저마다 맥을 짚느라 수선을 피우는 일이 밤새 몇 번이나 되풀이됐다. 세 사람은 정말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떨어지는 체온을 유지하려고 뜨거운 물주머니를 갈아댔고, 배 안에 있는 이불이란 이불은 모조리 가져다가 덮어주는 바람에 남자들은 담요 한 장도 없는 신세가 됐다. 그런데도 리체의 손발은 흡사 죽은 사람처럼 찼다. "더 따뜻하게 해 줄 방법이 없을까?" 조슈아는 리체의 손을 감싸 쥐고 있다가, 등 뒤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말했다. 아무리 쥐고 있어도 손은 따뜻해지는 기색이 없었다. 막시민이 말했다. "네가 밤새 껴안고 있는다 해도 이보다 더 따뜻하게 할 순 없을걸." "그런 짓을 했다가 리체가 살아나면 우리 생명이 위헌해져." "글쎄 그럴지도." 모호하게 대답한 막시민은 새로 데워 온 물주머니를 넣기 위해 이불을 몇 장 젖혔다. 미지근해진 물주머니는 꺼내서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리 쪽에 괴어 놓은 베게를 살펴서 바로잡았다. "괜찮아야 할 텐데."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서른 번도 더 넘게 한 말이었다. 막시민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뮤치아가 죽었을 때 조슈아가 울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사랑이라는 건 책임감, 동정심, 다정함, 죄책감과는 다른 감정인 걸까? "괜찮아질 거야." 단순한 대답이었지만, 이 순간 유일하게 의미 있는 답이었다. 조슈아가 잠시 후 말했다. "뮤치아처럼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조슈아도 같은 순간을 떠올렸던 모양이었다. 막시민은 고개를 저었다. "그 여자보다는 강해. 리체는." 물론 막시민은 뮤치아가 어떤 식으로 죽었는지 알지 못했지만, 만일 같은 상황이라면 리체가 더 잘 버틸 거라는 이유 없는 확신이 들었다. 그가 지금껏 리체를 특별하게 평가해 왔던가? 아니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순간만은 그렇게 생각되었다. "내 주위에 폭풍이 맴돈다고 했지, 나는 한가운데 서 있기에 오히려 피해가 없는데, 주변 사람들이 자꾸만 다치고…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군가 휘말릴까봐 나아가는 것도 겁나고, 어떨 땐 땅 밑에 파묻히고 싶다." 이 순간 조슈아의 어조는 넋두리가 아니라 사실을 설명하듯 평온해서 오히려 기묘하게 들렸다. "이럴 때면 말이야, 다른 사람의 운을 휩쓸어 뒤엎는다는 이야기… 그걸 믿든 안 믿는 괴롭게 생각돼." 막시민은 즉시 뭐라 대답하려다가 생각을 바꾸어 말을 삼켰다. 그리고 어조를 바꾸어 말했다. "가을이 되어서 익은 감이 나무 밑으로 떨어졌는데, 그게 지나가던 바람 탓이냐?" 조슈아는 얼굴을 약간 굳혔다. "그러면 이게 리체 자신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설마 진심으로 하는 얘기는 아니겠지?" "그런 뜻이 아니지. 잘 생각해봐. 소설책에는 말이야, 주인공이란게 있어서 주인공 아닌 녀석들은 다 주인공의 인생을 위한 양념이지만, 진짜 세상에서는 한 녀석만 주인공인 게 아니란 말이야." "나도 알아. 하지만 이번 일은…." "남의 인생을 네 위주로 해석하지 마. 결과를 만드는 원인은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리체에게 일어난 일은 리체의 일이야. 리체의 인생에 들어 있는 변수들이 일으켰지. 너도 그 중 하나고. 리체가 주인공인 소설책이 있다면, 넌 그 옆을 지나가는 녀석에 불과하다는 걸 잊지 말라고. 남의 인생에 도움을 주는 것도 어렵지만, 치명적인 뭔가가 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 대체 네가 뭔데 남의 인생에서 매번 중요한 역할을 하겠냐?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병이지 뭐냐? 뮤치아가 주인공인 소설에서, 너는 사소한 복선에 불과하단 말이야. 게다가 뮤치아가 죽는 순간 소설은 끝이 나버렸다고." 밖에서 마일스톤이 갑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보라는 의미였다. 막시민은 자기가 나가려다가 생각을 고친 듯 조슈아에게 말했다. "네가 나가 봐. 얘기도 좀 하고, 좀 쉬어, 여긴 내가 있을 테니까." 조슈아는 처음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조금 후 끄덕였다. "여기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래, 나 지금은 세상 무엇보다도 혼자 있고 싶다." 조슈아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막시민은 닫힌 문을 잠시 보다가 리체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보아서인지 눈꺼풀이 약간 떨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브노아의 죽음, 뮤치아의 죽음, 그리고 죽을지도 모르는 리체, 조슈아는 분명 그들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러나 동시에 괴로워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 책임감이나 다정함은 사랑과는 다르다. 그의 친구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들을 사랑해서? 어쩌면 그들의 방해를 원치 않아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괴로워하는 마을을 지녔기에 사람이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 그런 고통조차 방해로 느끼는, 심해의 바닥처럼 어둡고 움직임 없는 마음은 데모닉의 세계다. 그곳은 아주 자족적이어서 방문객은 한명도 필요가 없다. 혼자 있어서 누구도 건드리지 않으며, 건드려지지도 않는 세계. 아주 길었던 밤이었지만 시간은 분명하게 갔다. 밤이 저물고 해가 솟기 시작했다. 날이 밝는 것과 리체의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와 모두가 한숨을 돌렸다. 체온도 점차 오르는 듯했다. 쇼크는 이겨낸 듯하니 한시라도 빨리 섬에 도착하고, 그 섬에 의사가 있기를 바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수평선 너머로 섬이 나타났다. 그 섬이 마일스톤이 목적지로 잡은 카드릴 섬임을 확인했을 때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했다. 카드릴섬은 작기도 하거니와 인구도 뱍 명이 채 안되는 곳이라고 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선창이나 부두를 기대하진 않았다. 그런데 부두의 운곽이 눈으로 확인될 즈음, 뱃전에 서 있던 마일스톤과 막시민은 미간을 찡그렸다가 얼굴을 마주봤다. "어떻게 된 거지?" "글쎄." 조금 더 가까워지자 어렴풋이 짐작한 사실이 확실해졌다. 바다 쪽으로 길게 내민 부두와 배다리가 절반이 넘게 파손되어 있었다. 배다리의 상태를 보니 들것으로 옮겨야 하는 리체가 내릴 때는 꽤 수고롭게 될 것 같았다. 게다가 부둣가에 얼씬거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마일스톤이 말했다. "폭풍이라도 몰아친 모양이야. 하지만 부두가 저 꼴이 됐는데 고칠 생각을 않다니, 단체로 관광 여행이라도 떠난건가." 막시민이 좀더 나쁜 상상을 하면서 대꾸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좋겠지만." 카드릴 섬의 동쪽 해안은 작긴 해도 천연항이라 부두가 부서진 것과 관계없이 배를 댈 수 있었다. 닻이 내려지자 조슈아와 막시민은 리체를 데려오기 위해 선실로 내려가고, 마일스톤은 부서진 배다리 위로 뛰어내렸다. 부둣가를 휘둘러 본 그는 더욱 의심쩍은 표정이 되었다. "정말로 인기척이 없어." 그뿐이 아니었다. 부두에 마땅히 있어야 할 것들이 대부분 사라지고 없었다. 밤중에 횃불을 올리는 탑, 거룻배를 묶는 말뚝, 부려진 짐짝들, 낡은 그물이나 노 따위 항구에 널려 있기 마련인 잡동사니들, 모두가 없었다. 그리고 배가 없었다. 그들이 타고 온 한 척밖에는. 마일스톤이 다시 갑판 위로 올라갔다. 그는 선실 쪽을 향해 소리쳤다. "내리기 전에 섬을 좀 둘러봐야 될 것 같은데! 내가 다녀올 테니 두 사람은 배에서 기다리라고!" 2. 밀짚모자 약사의 집 "아무도 없는 거리를 혼자 걷는 꿈을 꾸었어. 깨고보니, 그 거리엔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 내가 꿈꾸는 동안, 사람들은 어디로 간 걸까? 난 다시 잠들어 꿈을 꾸었어. 역시 아무도 없었지. 난 걷고 또 걷다가, 드디어 한 명을 만났지. 그에게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갔느냐고 물었어. 그는, 그들이 내가 없는 꿈을 꾸느라고 바쁘다고 하더군." 섬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이 열린 집집마다 사람 대신 하얀 산호 조각들이 머물렀다. 얕은 바다에 잠겨 있었을 죽은 산호의 뼈들은 무슨 이유인지 뭍으로 밀려 올라왔다가 다시 쓸려갔다. 그러면서 문이 열려 있던 많은 집 안에 자취를 남겼다. 그에 비해 사람이 남긴 자취는 보잘것없었다. 야트막한 언덕을 따라 지어진 하얀 집들은 사흘 전까지 사람이 살던 곳 같기도 하고, 수십 년째 버려진 곳 같기도 했다. 멀리서는 평화로워 보여도 정작 안에 들어가 보면 남아 있는 가제도구가 거의 없었다. 열린 채로 방치된 문과 창으로 햇빛이 들어와 텅 빈 방에 무늬를 넣고 있을 따름이었다. 가끔 문이 잠긴 집 몇 곳을 제외하면 거의 다 그랬다. 집 안에 있어야 할 장롱이나 침대 따위가 언덕 꼭대기에 엉망진창으로 쌓여 있는 것도 눈에 띄었다. 거기까지 가서 살펴보고 온 마일스톤은 이곳에 해일이 닥친 것 같다고 결론 내렸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막시민은 인상을 찌푸렸다. "요샌 해일이 닥치면 사람 대신 장롱들이 언덕 꼭대기로 대피하나?" "그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모두 사라진 모양이야." "어마나 큰 해일이 닥쳤기에 사람들이 한 명도 남지 않았단 말이야? 어디 다른 곳에 대피해 있는 것 아냐?" "그렇게 숨을 만한 곳이 전혀 안 보이니까 하는 말이지. 이 섬에는 제대로 된 산조차 없단 말이야. 게다가 우리가 오는 동안 바다에 심상치 않은 기색이라고는 없었으니, 해일이 왔다 해도 지나간 지 꽤 된 것 아니겠어? 그렇다면 대피했던 사람들은 도로 마을로 나왔어야 정상이지." "그러면 다 죽었다고?" "아니면 다른 섬으로 이주했거나." "고향을 그런 식으로 내버려두고? 게다가 한 명도 남김없이? 의견일치에 행동일치까지, 보통 섬이 아니네." "해일이 닥쳐오는 것을 미리 알고 다른 섬이나 대륙으로 대피한 것일지도 모르잖나." 그때 상갑판에서 내려오던 조슈아가 말했다. "혹시 동물들도 보지 못했어요? 쥐 한 마리도?" 마일스톤이 고개를 젓자 조슈아는 섬 쪽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정말로 바닷물이 섬 위를 한바탕 쓸었나 보네." "이것 참 큰일이구만. 그러면 리체를 치료해 줄 의사는 도대체 어디에서 찾지?" 막시민의 말에 모두 동감이었다. 리체가 아니라면 이 섬에 머물러야 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마일스톤은 다른 섬까지 또 이렇게 안전하게 간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사람 사는 섬이 근처에 있긴 하지만, 그중 가장 큰 카드릴 섬이 이런 꼴이니 가보지 않아도 뻔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의사를 찾는답시고 며칠이나 걸릴지 모르는 긴 항해를 시작하는 것도 안 될 말이었다. 리체가 지금까지 잘 버텨준 것도 운 좋게 바다가 평화로웠기 때문이었으니까. 마일스톤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그리 큰 해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 너무 얕아서 조금만 바다가 높아지면 쉽게 물바다가 될 것 같은 섬이잖아." 조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이런 해일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겠네요. 설마 이 섬에서는 해일도 당연한 일상이고, 그래서 모조리 도망가 버리는 것도 일상이고, 그런 걸까?" "해일이란 게 생각처럼 자주 닥치는 일은 아니라고." 현실적인 막시민이 고개를 휘휘 저으며 결론을 내었다. "해일이야 어찌됐든 좋아. 다시 오지만 않으면 알게 뭐냐. 마을로 올라가서 의사나 뭐 그런 놈이 살았을 것 같은 집을 찾아보자고. 뭐라도 남아 있을지 모르잖냐?" 막시민의 말은 그 상황에서 최선이었지만, 최선을 다한다고 반드시 결과도 좋은 건 아니었다. 리체의 호흡이 안정된 것을 확인하고, 세 사람은 한 시간 안에 돌아올 작정으로 배를 떠났다. 마치 떼강도라도 되는 것처럼 삽자루나 도끼, 곡괭이 따위를 하나씩 어깨에 둘러메고 문이 잠겨 있던 집들을 찾아 무슨 수를 써서든 열어봤다. 몇 번 부딪쳐도 열리지 않는 문짝들은 경첩을 떼거나, 그게 안 되면 반쯤 부숴서라도 들어갔다. 해안에서 가까운 비탈 거리는 단체로 물청소라도 한 것처럼 깔끔했다. 그러나 언덕바지로 오를수록 상태가 나빠졌다. 정상에 가재도구를 쌓아 만든 탑이 있다더니, 거리도 올라갈수록 흙과 잡동사니가 잘 반죽된 채 이겨 발라져 있었다. 어떤 집은 이런 반죽으로 절반이나 메워져 들어갈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햇빛이 쨍쨍 내리쬐었고 거리는 고요했다. 세 사람의 발소리 외에는 날벌레가 가끔 윙윙대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하늘도 기가 막히게 맑았다. 한심한 착각이긴 해도, 사람들이 사라지고 엉망이 된 도시는 무척 한가로워 보였다. "더워." 열 몇 번째로 발견한 잠긴 집의 문짝을 뜯어내고, 비교적 멀쩡한 바닥에 주저앉은 참이었다. 만일 주인이 돌아온다면 도둑이라고 펄펄 뛸 테지만, 이미 그럴 리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것인지 걱정하는 빛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버린 지 몇 년은 된 집인 양 흙발로 잘도 들어와 앉았으니 말이다. 막시민은 진흙 묻은 신발을 벗어 한 구석에 던져 놓았다. 조슈아는 힘든 와중에도 양탄자를 한쪽으로 밀어놓는 양심을 발휘했다. "여름이지." 막시민은 일어나 창문을 열어놓으려 했지만, 뭔가가 낀 것처럼 잘 열리지 않았다. 몇 번 세게 흔들었더니, 아예 경첩이 분리되면서 덧창 한 짝이 떨어져버렸다. 등 뒤에서 창문이 떨어지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지만 조슈아는 돌아보지 않은 채 기지개를 켰다. 정말 한가로운 무단침입에 기물파손이었다. 문도 창도 닫혀 있던 곳이라 집안 공기는 후끈했지만, 어찌어찌해서 다 뜯어놓고 나니 바람이 통해서 점차 시원해졌다. 반질반질하게 닳은 나무판자를 잇댄 바닥은 서늘해서 앉기 좋았다. 흰 벽에 걸린 밀짚모자가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흔들거렸다. 막시민은 모자를 보더니 '저걸 쓰고 다니면 덜 덥겠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그럼 쓰라고." 마일스톤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자 막시민은 모자를 벗겨내어 한 번 써보았다. 조슈아는 웃음을 참는 표정이었지만 '썩 잘 어울리네'하고 말해주었다. "네가 써." 막시민은 모자를 벗어 조슈아의 머리에 푹 씌웠다. 눈가까지 눌러진 모자챙을 밀어 올리는 조슈아를 보자 막시민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시골뜨기 회색쥐 같네." "넌 시골로 좌천된 세관원 같았어." 둘은 거의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막시민은 곧 웃음을 그치고 말했다. "우리 지금 웃고 놀 때가 아닌데." "저기 좀 봐. 이 집 어쩐지 그럴듯한데." 마일스톤이 가리키는 대로 찬장 쪽을 보니 수십 개는 될 듯한 정체불명의 병들이 선반마다 줄지어 놓여 있었다. 몇 개는 자두 절임이나 말린 월계수 잎, 토마토퓌레 같은 것으로 보였지만 다른 것들은 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몇 개 집어서 뚜껑을 열어 봤지만, 알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약인가?" "독일지도." 조슈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독약이 든 병을 즐비하게 늘어놓고 지내는 사람이 있다면 쫓겨나기 딱 알맞지 않을까?" "그렇다고 약이라는 보장은 없지. 우리가 알 수 없는 동네 특산 설탕 절임들일지도 모른다고." "한 번 먹어볼까?" "미쳤냐?" 마일스톤이 맨 위 선반에 놓인 병들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름표가 붙어 있는 것을 하나 발견했다. 하지만 읽을 수가 없는 글자였다. 조슈아가 넘겨받아 보았지만 그도 모르는 글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조슈아가 어색한 표정으로 변명했다. "대륙에서 공용어를 사용한 지도 오래됐지만, 이런 지방에서는 옛 말을 그대로 쓰는 수도 있다더라고." "유추해 봐. '부러진 뼈를 치료하는 데 특효' 이런 글귀인지 아닌지만 알면 된다고. 그렇다, 아니다, 가능성은 반반." "그렇게 씌여 있으면 리체에게 먹일 거야?" 조슈아의 질문에 막시민은 잠시 멈칫하다가 대답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 사람은 찬장을 더 조사했지만, 주인이 돌아오기 전에는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으니 결국 놓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신발을 신고 나가기 직전에 마일스톤이 뭔가를 발견했다. "저거, 일지처럼 생겼는데." 막시민이 집어 들어 펼쳤다, 일지 안에는 뜻밖에도 익을 수 있는 글자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날짜와, 어떤 실험을 했는데 성공했고, 또는 왜 실패했고, 그런 것들이 적힌 노트였다. 막시민은 후루룩 넘겨 맨 끝장부터 확인했다. 마지막 날짜는 올해 3월 15일로 되어 있었다. 조슈아가 노트를 건너다보며 말했다. "그럼 여기에 해일이 닥친 게 그때란 말이야?" 막시민은 어깨를 으쓱했다. "단순히 이자가 게을러서 그 후로 실험을 하지 않은 것일지도." 그러나 막시민은 추측만 하고 있지 않았다. 방 한쪽에 커튼으로 가려 놓은 침대가 있었다. 막시민은 커튼을 젖히고 침대의 이불을 확인했다. 이불은 제법 두툼했다. 요즘처럼 더운 때 덮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조슈아도 일지를 다시 거꾸로 넘기고 있었다. 수십 페이지 가량 살핀 후 그가 말했다. "일지를 보니 이 사람은 쉬지 않고 실험을 했던 것 같아. 약사나 연금술사일까? 어쨌든 날짜별 진행상황을 보면 어느 날 갑자기 그만둘 것 같진 않은 느낌인데." 마일스톤이 말했다. "그렇다면 정말 그때 해일이든 뭐든 닥쳤다고 보는 게 맞겠군. 적어도 해일이 닥칠 거란 예고는 받은 거겠지. 그런데 말이야. 우리가 떠나온 칼라이소는 여기서 고작 하루 반나절 거리라고. 올해 3월이면 나도 칼라이소에 있었고. 그런데 이 정도로 섬을 초토화시킨 해일의 존재를 어째서 몰랐을까? 나뿐 아니라 칼라이소 사람 전부가 몰랐다니 이것 참 납득하기 힘든데." 조슈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막시민은 장롱 서랍을 일일이 열어보고 침대 밑에 넣어둔 바구니 따위를 뒤져보기도 했다. 잠시 후 그는 결론을 내렸다. "이 사람은 중요한 것을 챙겨서 떠날 여유가 없었던 것 같군. 다른 가능성이 있다면 섬에 일이 닥치기 전에 볼일을 보러 나갔다는 정도겠지. 침대 밑에 돈도 있고, 나름대로 비약이라고 생각한 건지 약병도 몇 개 고이 모 셔 놨군." 세 사람은 집을 나섰다. 살펴볼수록 의혹이 증폭될 뿐이었다. 해는 슬슬 중천으로 올랐고, 밤을 세운 세 사람에게도 피로와 졸음이 몰려왔다. 리체를 너무 오래 혼자 둬선 안 되었다. 일단 배로 돌아가 리체의 상태를 보고 다음 할 일을 논의하기로 했다. 하지만 언덕을 내려왔을 즈음엔 누가 먼저 눈을 붙일 지가 가장 중대한 논제가 되어 있었다. 지독한 여름이 머릿속에도 몸속에도 있었다. 그게 얼마나 길었는지 리체는 알지 못했지만, 기분만으로는 한 철이나 흐른 듯했다. 그래서 눈을 떴을 때 자신을 둘러싼 것이 뭔지 깨닫기도 전에 달아나려고 몸을 비틀었다. 즉시 지독한 통증이 밀려왔다, 어디가 아픈 건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온 몸이 다 아팠다. 한참 만에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눈앞이 흐리고 정신이 혼미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더운 이유가 자신의 몸을 겹겹이 둘러 싼 이불 때문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리체는 왜 이렇게 해놨는지 생각해보기도 전에 화부터 치밀었다. 이 한여름에, 사람을 삶아 죽일 작정이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둘둘 말아 놓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었다. 손끝 까딱할 힘도 없었지만 통증보다 더위의 괴로움이 더 강했다. 리체는 아픔을 참으며 벗어나려고 버르적거렸다. 그러나 이불을 얼마나 잘 말아 놨는지, 한 겹 제치지도 못한 채 땀만 흠뻑 났다. 숨이 막히도록 덥고, 온 몸이 끈적거렸다. 그런 상태로 십여 분 동안 애쓰자니 세상에 이보다 더 나쁜 상황은 없을 듯했다. 실은 조금 전가지만 해도 죽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 놓여 있었고, 그녀가 의식을 되찾은 것을 이곳에 없는 남자들이 알았다면 만세라도 불렀을 게 틀림없는데 말이다, 결국 이불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포기하고 이번에는 덥지 않다고 자기 최면을 걸어 보려했다. 아주 추운 곳에 있다가 방금 따뜻한 이불 속에 들어왔다고 말이다.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이 일에 정신을 집중하느라 눈을 감고 있을 때 누군가가 문고리를 만지는 소리가 들렸다. 즉시 눈을 뜨고 이불을 벗겨 달라고 해도 되었을 텐데, 리체는 묘하게 민감해진 정신으로 뒤따라 들린 목소리를 감지했다. 조슈아였다. "리체" 부르긴 했지만 조슈아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듯했다. "아직도 대답하지 못하는구나." 다가와 앉는 기척이 들렸다. 리체는 눈을 뜨려 하다가 이상하게 눈꺼풀이 무거운 것을 느끼고 잠시 기다렸다. 상대의 팔꿈치가 이불에 닿아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눈만이라도… 떠 준다면 좋을 텐데." 그 즈음에는 눈을 뜰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리체는 망설였다. 그런 말이 들리자마자 눈을 번쩍 뜨고 싶은 여자는 없는 법이니 말이다. 리체는 이곳이 어디인지 몰랐다. 자신이 부상당한 것은 기억했기에 아마도 의사의 집이겠지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팔이 부러졌다고 사람이 죽는다는 생각은 안 해봤으므로, 스스로가 심각한 상태였다는 것은 몰랐다. 단지 너무 오래 잤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리체는 눈을 가늘게 떠 봤다. 다듬지 않아서 비죽비죽 들뜬 회색 머리카락이 먼저 보였다. 조슈아는 침대에 팔꿈치를 짚고,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니 눈을 마주칠 염려는 없었다. "……" 말은 없었지만 리체는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다. 조슈아는 너무 오래 잠든 그녀를 깨우러 온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그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하고 리체는 말하려 했다. 할 수 없었다. "……" 입술이 움직였을 뿐이었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조슈아가 고개를 들지 않는 걸 보니 자신의 귀에만 안들리는 것도 아니었다. 리체는 입을 크게 벌리며 다시 한 번 '조슈아'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소리는 나지 않았다. 아직 잠에서 덜 깬 걸까? 자신은 꿈속에서 말했고, 현실에 있는 조슈아는 들을 수 없고, 그런 것은 아닐까? 또는 가위에 눌린 걸까? 그것도 아니면… 자신은 정말로 죽어서 유령이 왜 있는 건가? 자기가 죽었다는 걸 모르는 그런 유령 말이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조슈아가 무어라 말하는 듯했다. 처음엔 웅얼거리는 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조금 후에야 알아들을 수 있는 몇 마디가 흘러 나왔다. "…그 제안은 잘 알겠어, 하지만… 난 너를 믿지 않아." 조슈아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갔다. 혼수상태에서 막 깨어났고 열에 들뜬 터라, 머리가 얼른 돌아가지 않았다. "분명히 말하지, 난 너를 믿지 않아." 그제야 조슈아가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리체는 더럭 겁이 났지만, 켈스니티를 떠올리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그러나 그런 노력도 소용없게 되었다. "켈스의 의견을 먼저 듣도록 하겠어, 너희가 그를 속인다면… 아마 결과가 좋지 않겠지?" 켈스니티가 아니었다. 게다가 '너희'였다. 하나가 아니란 말인가? 리체는 저도 모르게 눈을 꽉 감았다. 그러나 눈을 감으니 보이지 않는 뭔가가 온몸을 건드리는 기분이 들어 오히려 참을 수가 없었다. 벌떡 일어나 달아날 수조차 없는 자신이었다. 리체는 견디지 못하고 다시 눈을 가늘게 떴다. 크게 뜰 용기는 없었다. 고개를 서서히 드는 조슈아가 보였다. 손을 내리자 얼굴이 드러났다. 허공을 쏘아보는 조슈아의 눈빛은 리체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것이었다. 지금껏 리체가 본 조슈아의 모습들, 사람을 휘어잡는 오만한 배우, 천재답지도 귀족답지도 않은 순진한 친구, 스스로를 부서뜨릴 정도로 미친 자, 어느 쪽도 아니었다. 조슈아는… 냉담했다. 상대가 자기를 어떻게 보든, 마음이 상하든 말든, 효율적인 해결책만을 생각하는 냉담함이었다. 리체가 조슈아가 천재라는 것은 알았지만 지략가라고 생각해 본 일은 없었다. 계획이나 지략에 능한 쪽은 오히려 막시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아니었다. "난 말이야, 너희와 최소한의 거래만 해. 내가 너희를 믿을 때, 그건 날 믿는다는 의미일 뿐이야. 주도권은 내게 있어. 너희가 나를 삼킬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어. 너희 같은 자들이 사람을 삼킨다는 건, 너희의 강렬한 의식이 그 사람의 정신을 흩어 버리는 거겠지? 그런데 말이야, 난 동시에 너희 전부와 이야기할 수 있고 그러면서 생각에 잠길 수도 있거든." "난 너희가 이카본 폰 아르님을 괴롭히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아. 그는 말이야… 너희 따위는 죽을 때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거야. 그 증거를 봐. 사람은 세상에 이루지 못하고 남은 바람이 있을 때 유령이 된다지, 그런데 이카본은 유령이 되지 않았어, 편히 가버렸지. 너희가 떠들든 말든 아랑곳 않고 소멸해 버렸단 말이야." "켈스는 나 이전의 모든 데모닉들도 유령을 만났을 거라고 했어, 물론 그 유령이 너희들은 아니겠지만, 유령 탓에 그들이 미쳤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했지. 글쎄, 난 그들이 유령 때문에 미쳤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해. 왜냐면 나를 봐. 너희가 나타나기 전에도 이미 미쳐 있었다고, 너희 따위와는 상관 없이. 데모닉은 자신 때문에 미쳐. 다른 누가 건드릴 수 있는게 아니지." 이 순간 조슈아의 목소리는 너무 단호해서 리체조차도 그 말을 의심하기가 힘들었다. 조슈아는 어떻게 저렇듯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조슈아가 유령에 대해 켈스니티보다 더 잘 이해할까? 켈스니티는 수많은 유령들을 보았고, 그 스스로도 유령이었다. 그러나 켈스니티는 데모닉이 아니었다. 데모닉은 조슈아였다. 이것은 세상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는 천재가, 다른 누가 아닌 그 자신에 대해 하는 이야기였다. "…그래, 이제 그만 가라. 다음에 너희를 부를 때는 켈스가 나와 함께 있을 거다." 순간, 방 안의 공기가 확 가벼워졌다. 움직이지 못하는 리체조차 한결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느끼지 못했던 무언가가 그 동안 내리눌렀던 것처럼. 조슈아는 누워 있던 리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더니 눈이 커졌다. "리체?" 조슈아는 리체가 깨어났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었지만, 리체는 자신이 조슈아의 이야기를 엿들은 셈이 된 것 같아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결코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조슈아는 그런 것에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 깨어났구나. 정말로 다행이다. 정말로…" 리체는 말을 하고 싶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 또는 고맙다고, 미안하다고도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꿈도 아니었고, 유령이 된 것도 아니었다. 조슈아는 곧 눈치를 챘다. "왜 그래? 리체? 너…말이 안 나오니?" 3. 잃어버린 목소리 "사라진 소년을 소녀가 구하는 이야기는 이 세상에 단 하나 있는데 소년을 구한 소녀는 한숨을 쉬며 '이제 다시 인형놀이를 하자'고 말했다더군." 일행은 의논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밀짚모자 약사의 집을 차지했다. 지붕이 남아 있고, 탁자도 있고, 꺼내어 깔 모포도 남아 있으니 뭐 더 바라겠느냐고 생각하면서. 하룻밤이라도 여기서 잘 거라고 생각하자 다들 신발도 밖에 벗어 놓는 등 달리 행동하는 신중함도 보여 주었다. 날이 저물자 공기가 싸늘해져서, 제멋대로 뜯어냈던 문짝을 도로 달아야 했던 것만은 신중하지 못한 행동의 결과겠지만 말이다. 막시민은 모포를 있는 대로 꺼내어 집안 전체에 양탄자처럼 깔아 놓았다. 덕택에 바닥에서 뒹굴며 이야기를 해도 좋았다. 막시민은 자신의 잡다한 지식에 의거하여 '산스루리아 식'으로 꾸며 놨다고 말했지만, 산스루리아에서 정말로 그렇게 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따라서 뭐라 부르던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하여 '산스루리아 식'으로 비스듬히 누은 채 사인 회담이 시작되었다. 참가자는 넷이지만, 셋이 말하는 회담이었다. "난 도저히… 팔이 부러졌는데 벙어리가 되는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 막시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의심쩍은 눈길로 리체를 쳐다봤다, 대뜸 받아치는 리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도 낯설었다. 의식이 돌아온 리체는 약사의 침대에 누은 채 커튼을 반쯤 젖히고 이야기를 들었다. 일어나 앉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정신은 비교적 맑았다. "리체라고 이해가 되진 않을 거야." 조슈아는 심각한, 다시 말해 책임감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마일스톤이 둘을 번갈아 보다가 말을 보탰다. "쇼크 때문에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날 수도 있잖아. 우리가 의사도 아니고 어떻게 알겠냐?" "쳇, 그럼 쇼크 때문에 고양이로 변했다고 해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야 되는 거냐?" 문득 리체가 몸이 아프지 않았더라면 이 순간 막시민의 다리를 한 대 걷어찼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슈아가 고개를 드니 막시민도 똑같은 생각을 했던 듯한 얼굴이었다. 조금 후 막시민은 '쳇' 하고 혀를 차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럼 막시민 네 생각은 뭔데? 좋은 추리라도?" 마일스톤이 별다른 기대를 갖고 질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막시민은 '추리'라는 말을 듣자 뭐든 궁리하여 대답해야 한다고 느낀 듯했다. "그럼 차근차근 따져보자고. 우선 리체 너, 깨어나면서부터 그랬던 거야? 아니면 괜찮다가 갑자기?" 리체는 물론 대꾸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일 수도, 가로저을 수도 없는 질문이었으니 말이다. 막시민도 즉시 깨닫고 자기 머리를 툭 쳤다. "이렇게 물어서야 대꾸가 안 되겠지. 다시 묻자. 깨어나면서부터 말을 못한 거냐?" "……"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 막시민은 눈을 깜빡이며 리체를 봤고, 둘의 눈이 마주치자 리체는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조슈아가 말했다. "'예'나 '아니오'로 대답할 수 없을 수도 있잖아. '아마도' 라든가, '잘 모르겠어' 같은 것도 있으니까." "정말 상상력을 동원하게 만드는군." 막시민은 투덜댔지만, 상황의 심각성을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니었다. "종이나 펜이 있으면 편할 텐데." 마일스톤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이미 온 집을 뒤집어 가며 한바탕 찾아본 처지였다. 물론 둘 다 발견되었지만 잉크는 그동안 딱딱하게 말라붙어 쓸 수가 없었다. 집주인 밀짚모자 약사는 잉크병조차 열어놓고 나간 모양이었다. "다른 집에서 좀 찾아보지." 마일스톤이 밖으로 나갔다. 막시민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이다가 조슈아를 보았다. "그래, 널 좀 써먹자." 조슈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날?" "손 줘봐." 막시민은 조규아의 손을 끌어다가 리체의 손이 쥐어 주었다. "손바닥에다가 써. 처음엔 또박또박. 하지만 조금 있으면 저 자식이 순식간에 이해하기 시작할 테니 쉬울 거야." 다른 수가 없었다. 띄어쓰기는 밑줄 한 줄로 약속한 다음, 리체가 조슈아의 왼손 손바닥을 잡고 글자를 써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슈아도 즉시 키득대기 시작했다. "간지럽잖아!" "좀 참아." 그래도 결국 한 문장을 다 쓸 수는 있었다. 조슈아는 정리하느라 허공을 쳐다보고 있다가 말로 옮겨 주었다. "사람을 쪄 죽이려고 그렇게 이불을 덮어 놨니?" 막시민은 어안이 벙벙해졌다가 곧 소리쳤다. "누가 지금 그런 얘기나 하래!" 즉시 리체는 손바닥에 다시 썼다. 조슈아가 말했다. "내가 너희하고 꼭 같은 주제에 심취할 이유라도 있니?" "그럼 넌 상황이 어찌되든 상관 없냐? 다들 네 걱정하느라 이러는 거 몰라?" 가득이나 의사소통아 느린 판에 이런 식으로 다툼이 되어버리면 제대로 얘기를 나눌 수 있을 리 없었다. 잠시 후 조슈아는 리체가 새로 써 준 문장을 이해하고 있다가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하얘졌다. "리체 말이 우리가 이불을 하도 덮어놔서 열병에 걸려 목소리가 막힌 게 틀림없다고 하는데." 막시민이 리체의 얼굴을 흘끔 보니 농담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막시민은 최대한 심각하게 고려해보려는 듯 미간을 짚으며 코에 주름을 잡았다. "음, 그러니까 열병에 걸려서 벙어리가 됐다는 말의 신빙성은 그렇다 치고, 열병이 너무 더우면 걸리는 건가… 그것도 넘어가고, 그 더위가 이불을 많이 덮어서 올 수도 있다는……" 누가 들어도 엄청난 비약이었으므로 깊게 생각할 가치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막시민이 갑자기 미간에서 손을 떼더니 말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럴 수도 있다니?" 막시민은 조수아의 반문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저었다가 했다. 혼자 자문자답을 해보는 모양이었다. 리체는 다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조슈아가 고개를 저으며 잠시 기다리자는 눈짓을 보냈다. 막시민이 입을 열었다. "열병 얘긴데……" 조슈아는 손을 빼서 리체의 이마를 가볍게 짚었다. "열은 전혀 없어." "그래, 열이 없으니 열병은 아니지, 그런데 열병도 종류가 아주 많은데 말이야. 우리 시골에서 열병에 걸려서 벙어리가 된 녀석이 실제로 있었어. 그런데, 열이 내린 후에도 목소리가 돌아오지 않더라고." 조슈아는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막시민이 말했다. "조슈아, 우리 동네에서 의사 노릇을 하던 수도사 양반 기억 나냐?" 조슈아가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막시민이 개에게 다리를 물렸을 때 응급처치를 해줬던 사람인 것이다. 조슈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막시민이 말했다. "하긴 네가 뭘 기억하지 못할 순 없는 거지. 어쨌든 그 수도사가 그 녀석도 돌봐줬는데 그 사람이 얘기하길 그 녀석 귀신이 들렸다는 거야. 원인도 모르고 고칠 수도 없는 병이라 그냥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하려고 해도……" 막시민은 '귀신 들렸다'는 말이 조슈아에게 어떻게 들릴지 살피려는 듯 시선을 보냈다. "그 양반은 소도사였다고. 그 수도원은 '신'을 모시는 곳이란 말이야. 신이란 건… 귀신하고는 다르겠지만 어쨌든 눈에 보이지 않는데 힘을 행사하는 존재가 아니겠냐? 그런 걸 모시는 사람이 꺼낸 이야ㅣ인지라, 실력이 모자라서 하는 변명만은 아닐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거든. 물론 난 그때만 해도 내가 귀신과 얘기해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그 귀신이란 건 어디서 오는거고, 어떻게 사람에게 들어 올 수 있느냐고 꼬치꼬치 물어댔지. 그랬더니……" 막시민은 주위를 한 번 휘둘러봤다. "조슈아, 켈스 이곳에 없지? 다른 귀신인지 유령인지 하는 놈들도?"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 "그래, 난 이게 켈스하고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되거든. 켈스가 말하길 너와 교감을 유지하면 아주 먼 곳에도 다녀올 수 있다고 했지 않냐? 그리고 그는 옛날에 그 뭐라는… 그래, '약속의 사람들'의 소원을 지금도 이루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뭔지 말해줄 수는 없다고 했어. 게다가 그는 요새 말이지,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 같단 말이야. 예전에도 종종 이랬냐?"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요즘처럼 오래 찾아오지 않는 일은 없었어." "정말로 오지 않았단 말이지? 칼라이소에 있는 동안 한 번도?" 조슈아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한 번도." "그럼 그가 그 소원인가 뭔가를 위해 어딘가로 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리고 거긴 아주 먼 곳일 것만 같고……" 막시민은 기분이 안 좋아지는지 뺨을 문질렀다. "그때 수도사 양반이 말하길 대륙 전체에서 가장 많은 유령이 있는 곳, 그리고 수많은 유령들이 여전히 몰려드는 곳이 있다고 했어. 마치 쥬스피앙 마법사네 집처럼. 하지만 거기보다 더욱 강한 에너지인지 힘인지 하는 게 흐르는 곳 말이야." "거기가 어딘데?" "필멸의 땅(Mortal Land)." 조슈아는 잠시 굳어졌다가 대답했다. "그런 이야기는 나도 들어본 일이 있어. 거기에 유령들이 들끓는다는 이야기 말이야. 하지만 다 미친 유령이라던데? 다시 말해 켈스처럼 또렷한 정신은 갖고 있지 않은……" "수도사 양반 얘기는 미친 유령도 미치지 않은 유령도 모두 필멸의 땅을 좋아한다는 거야. 그래서 수많은 유령인지 귀신인지 하는 것들은 그곳으로 몰려가고, 또 그곳에서 나온다는군. 좋아하는 이유는 모른다고 했지만… 지난번에 켈스가 유령들이 에너지에 부딪히고 싶어하기 때문이라고 했잖아? 하지만 그뿐이 아닐지도 모르지. 난 켈스가 네게 모든 걸 설명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니 말이야, 게다가 조슈아, 네가 전에 극장 화재로 의식을 잃었을 때 의사를 불렀는데 말이야, 그 의사 말도 똑같았어. 너한테 귀신이 들린것 같다고 했지, 그땐 의사가 진단을 똑바로 내리지 못하다보니 말을 돌리는 것이라 여겼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헛소리만도 아니었던 것 같거든?" 그때 문가에서 마일스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아가씨가 아파서 의식이 없는 사이에 필멸의 땅에서 온 유령 중 하나가 아가씨의 목소리를 삼켜버렸다 이건가? 게다가 전부터 켈스라는 유령이 조슈아 군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으니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거고?" 필기구를 찾으러 간 그가 충분히 돌아올 시간이 되었지만, 돌아와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막시민은 조금 당황했다. 그들은 마일스톤에게 조슈아의 성을 제외하고는 각자 본명을 말해주었지만, 조슈아가 유령을 본다던가 하는 말하기 힘든 문제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막시민은 당황한 기색을 얼른 ㅓㅂ고 대답했다. "뜻밖의 이야기들을 듣게 됐을지도 모르지만, 놀랄까봐 말하지 않은 것 뿐이니까 이해하라고. 자세한 설명은 지금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 하도록 하지. 한 가지만 먼저 말하자면 켈스는 아주 우호적인 자야. 그 자의 태도도 거짓말을 한다기보다는 진실을 덜 말하는 정도지." 막시민은 조슈아를 돌아봤다. "하지만 내 기본적인 생각은 마일스톤이 말한 대로야. 켈스는 우리가 칼라이소에서 지내는 동안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잖냐. 그는 어디로 간 걸까? 그때 그 수도사는 유령들의 힘의 원천이 필멸의 땅에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했지. 그리고 귀신들렸다고 하는 병들은 모두 필멸의 땅에서 온 것이라고도 했어." 조슈아는 고개를 홰홰 저었다. "하지만 켈스는 나를 만나기 전에는 성에 지박된 존재였어. 그러니 그동안에는 필멸의 땅에는 한 번도 가본 일이 없을 거란 말이야. 그가 굳이 다시 거길 찾아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는 너와 함께 있으면 성을 떠나 멀리 갈 수 있기 때문에 네게 붙었다고 했잖냐? 그러니 불러서 물어보자고. 지금 당장. 그는 어디에 있든 너의 부름을 들을 수 있다면서?" 조슈아는 잠시 대꾸하지 못하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최근엔 불러도… 오지 않았어." "네 생각에 왜 안 오는 것 같냐?" "……" 조슈아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조슈아가 켈스와 함께 지낸 몇 년 동안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막시민은 한숨을 쉬더니 비스듬히 앉았던 자세를 바로했다. "조슈아, 물론 나도 켈스가 리체를 저렇게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진 않아.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리체는 우연히 말려든 것뿐 너의 문제와 직접적 연관이 없는 얘잖냐. 그러니 널 어떻게 하고 싶다고 해서 리체한테 손을 댈 일은 아니지. 하지만 어떤 의사가 온다 해도 지금 리체의 상태를 설명할 수는 없을 거다. 고향의 수도사나 블루 코럴에서 널 살펴봤던 의사의 말을 헛소리로 넘길 수도 있겠지만, 켈스도 말했지. 지난번에 배에서 말이야. '약속의 사람들'이란 자들은 네게 적대적이고, 그들이 나나 리체를 노릴 수도 있다고 말이야. 비록 모든 '약속의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조슈아가 눈을 내리깔았다가 바로 뜨며 말했다. "좋아. 직접 불러서 물어보지." "켈스를? 불러도 오지 않는다면서?" "켈스만 부를 수 있는 건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그 말은……" 조슈아는 더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가, 조금 후 다시 떴다. 어차피 조슈아 외엔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존재이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사람은 당혹한 표정으로 사방을 살폈다. "몇 가지 물어보려고 불렀어. 지금 그 자리에 앉아. 다른 사람들이 놀라니까 일어나서 움직이지 말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들리도록 말해." 「우릴 다시 부를 땐 켈스니티가 있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 리체는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것도 잊고 손으로 자기 입을 막았다. 마일스톤도 움찔하며 문 밖으로 물러나려 했다. 막시민만이 그나마 버티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자의 목소리는 켈스니티와 달랐다. 부드러운 기색은 전혀 없었다. 평소 유령의 목소리가 이러리라고 기대했던 그대로, 아니 기대했던 것보다 백배나 음산한 쇳소리였다. 조슈아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때는 내가 정하는 거야. 내게 불평할 생각은 하지 마. 자, 묻겠어. 너희는 필멸의 땅에 드나드나?" 「그곳은 모든 유령들의 안식처 같은 곳이지. 히히히히히….」 칼날을 맞대고 비비는 것처럼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귓속을 찌르르 울렸다. 모두의 어깨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조슈아가 눈썹을 치올렸다. "네 웃음소리 듣기 싫어." 「알았어. 웃지 않도록 하지.」 고분고분한 대답인데도 마치 살의를 품은 것처럼 들렸다. 켈스가 얼마나 얌전한 유령이었는지 그제야 알 듯했다. 이 유령은 목소리를 들어도 기분을 전혀 알아낼 수 없었다. 오직 불쾌함과 분노만을 느껴졌다. 막시민이 입가를 실룩이다가 물었다. "조슈아, 너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유령을 부른 게 맞냐?" "내가 다룰 수 없는 유령은 없어." 막시민은 '내가 저 말을 믿어도 되는 거냐'고 말하듯 리체와 마일스톤을 향해 어깨를 올렸다 내려보았다. 나머지 둘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들은 이 상황을 견디기가 무척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방 전체에 한기가 돌았다. 그런데 조슈아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을까? "그 다음, 필멸의 땅에 드나드는 너희들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병을 가져오는 건가? 또는 너희 자체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는 건가? 내 친구는 어제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난 후로 목소리를 잃어버렸어. 그런 일이 유령과 관계가 있는 건가?" 「관계가 있고말고.」 처음으로 목소리 말고 쓰으윽, 하는 옷자락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그것 조차도 날카로웠다. 「유령은 여러 가지 힘을 갖고 있어. 인간은 버틸 수가 없다. 우리가 인간의 어깨에 타고 앉으면, 그 인간은 어깨가 무겁고 아프다가, 허리가 굽고 꼽추가 되어버린다.」 "……" 리체가 말은 할 수 없다 해도 이 순간 느낄 감정은 분명했다. 누구도 감히 위로할 수 없었다. "자, 그러면 리체의 목소리는? 어떻게 된 거야? 설마 너희들의 짓이냐?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알고 있겠지?"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지. 데모닉 도련님.」 조슈아는 한쪽 눈썹을 올리더니 바로 내뱉었다. "그 따위로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흐흐흐…, 알았어. 우리의 공작이여. 난 너의 지배를 받는 종에 불과하니까.」 "웃지 말라고 했으면 웃지 마. 내 말이 말 같이 들리지 않아?" 조슈아는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가 한 손 손가락을 내뻗는가 싶더니 맞은편 벽에 몸을 기댔던 마일스톤이 흠칫 놀라며 물러섰다. 그는 자기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벽이… 울렸어." 유령의 목소리는 한동안 들리지 않았다. 조슈아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여전히 벽을 응시하며 말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마일스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한참 뒤 유령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용서하라, 공작이여……」 "용서는 한 번이면 족하지." 조슈아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더니 검지를 세워 든 채로 말했다. "아까 한 질문에 대답해라." 「아가씨의 목소리는 우리가 한 짓이 아니다. 다른 유령이 한 짓도 아니다. 나는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짐작할 수 있는 단서는 있다.」 이번에는 확실히 아까보다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조슈아가 물었다. "그 단서가 뭐지?" 「너의 뒤를 쫓는 자이다. 그 자의 손이다.」 샐러리맨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막시민도 리체도 이해할 수 없어 눈을 크게 떴다. 샐러리맨은 리체의 팔을 부러뜨렸을 분이었다. 팔이 부러져서 벙어리가 되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었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 그 자는 팔을 부러뜨렸어. 팔이라고." 「하지만 그는 처음에 목을 부러뜨리려 했다. 그의 손이 아가씨의 목에 닿았다. 그 자의 손이 닿고서 부러지지 않은 목은 아가씨가 처음이다. 그 자의 손은 본질적으로 사람의 목을 부러뜨리는 손이다. 그렇게 만들어졌다. 보통의 손이 아니다.」 침묵이 흘렸다. 모두 같은 것을 떠올리고 있을 게 뻔했다. 오랫동안 쫓겼던 세 사람은 물론이고 마일스톤도 먼발치에서 샐러리맨의 손을 보았었다. 그의 손은 인간의 것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 자는 단지 손을 단련했다고 말했지만, 단련을 한다고 그렇게 커질 수 있을까? 그 점을 깊이 생각해 본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 자의 손에 어떤 힘이 깃들어 있는 거지?" 「모른다, 그러나……」 유령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 지체했다. 조슈아도 이번엔 다그치지 않았다. 「이미 말했지만, 지난번에 부둣가에서 공작의 몸을 지배한 것은 '약속의 사람들'만이 아니다, 우리만이었다면 공작이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지배하는 일은 할 수가 없다. 훨씬 더 많은 유령들이 달라붙었던 것이 분명한데, 그들의 정체를 하나하나 알 순 없었다. 너무 숫자가 많았다. 아마 그 항구에서 전부터 떠돌고 있던 유령들이었을 것이다. 그들 중에는 강한 힘을 가진 자들도, 마법을 가진 자들도, 지식을 가진 자들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공작의 부름을 듣고 몰려들었던 거다.」 막시민과 리체는 처음 듣는 말이었지만, 조슈아는 이미 아는 사실인 듯 했다. 처음에 배에서 깨어났던 조슈아는 부둣가에서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알지 못했었다. 물론 조슈아라면 그 후 언제라도 지금처럼 유령을 불러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막시민이 나지막이 말했다. "조슈아 너, 네가 다룰 수 없는 유령은 없다면서?" 조슈아는 뜻밖으로 피식 웃었다. "글쎄, 정원 초과였나 보네." 그러나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막시민이 보기엔 정체불명의 자신감이었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때 그 유령들 중 하나가 공작의 입을 빌어 말을 했다. 그 자, 커다란 손을 가진 자에게. 그 손은… 가나폴리에서 생긴 것이지, 라고 말했다.」 "가나폴리라면, 필멸의 땅에 있었다던 위대한 마법 왕국이 아닌가?" 마일스톤의 목소리였다. 그는 이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듯 상체를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자의 손은 가나폴리에서 온 힘으로 만든 것이고, 그 손이 닿았던 리체 양에게 영향을 끼친 것도 가나폴리의 힘이란 말인가? 그 모든 것이 마법인가?" 마일스톤은 샐러리맨을 그때 한 번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몇 번이나 만나고 심지어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기까지 했던 세 사람은 마일스톤처럼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샐러리맨의 괴이한 손이 과거에 사라져 폐허만 남은 마법 왕국과 관련이 있다니, 도대체 어떤 식으로? 샐러리맨은 인간이 아니란 말인가? 잠시 후, 조슈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의 진위는 어찌 됬던 좋아. 내가 가장 알고 싶은 건, 리체의 목소리를 원상태로 돌려놓을 방법이 있는가야." 「있을지도 모른다. 그 자라면… 알지도 모른다.」 "누굴 말하는 거지?" 「코르네드」 다른 사람은 잊었을지 몰라도 조슈아는 그 이름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조슈아는 미소를 떠올렸다. "코르네드라면 켈스니티가 조심하라고 했던 마법사, 아니 마법사의 유령이었지. 그래, 이 일이 가나폴리에서 왔다는 힘과 관계가 있다면 마법사에게 묻는 게 빠를 수는 있겠지. 그 자도 마법사다 이건가? 하지만 이게 마법사를 부르기만 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가?" 「코르네드는 단순한 마법사가 아니다. 그 자의 마법은 가나폴리의 마법과 매우 가깝다. 이 대륙의 모든 마법은 가나폴리에서 나온 것이지만, 세월이 흘러 변질되었지. 하지만 아노마라드가 건국되던 당시에 생존했던 코르네드는, 이 세상 어느 마법사보다도 가나폴리와 가깝다, 공작이 그 시절의 마법사에게 힘을 빌리고 싶다면 코르네드가 유일한 대안일 것이다.」 "그래서, 만나면?" 「코르네드라면 자신이 마법의 기운을 씻어낼 수 있는지 아닌지 분명히 알 것이다. 그를 불러라. 공작이여. 그도 내가 그렇듯 너에게 복종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건 내가 걱정할 문제지. 됐어. 그만 돌아가." 다른 세 사람은 유령이 어느 순간 사라졌는지 알지 못했다. 조슈아가 돌아보고 미소를 지었지만, 왠지 간담이 서늘해지는 미소였다. 막시민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너, 그런 식으로 유령을 막 대해도 되는 거냐? 언제부터 그랬던 거지? 켈스니티가 지난번에 경고할 때만 해도… 넌 유령들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는데?" "지금이라고 다 알진 못해." "다 알지도 못하면서 그놈들을 하인 부리듯 다뤄서 원한을 사면 좋은 일이 있냐? 켈스의 경고를 잊었어?" "원한은 말이야, 이미 샀다고." 조슈아는 이마를 감싸 쥐며 고개를 숙였다, 아주 잠깐의 휴식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말했다. "먼저 내가 그렇게 개하는 자들은 '약속의 사람들' 중 일부만이라는 걸 말해 둘게. 그들이 내게 그렇게 해 달라고 했어. 자신들을 친절하게 대하지 말고 적대적으로 여겨 달라고, 그렇게 말했어. 그들은 내게 아주 약간의 호감도 품고 싶지 않데. 그렇기 때문에 내가 잘 대해 주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는 거야. 이보다 더 잔인하게 대해 달라고 했지만, 난… 이 이상으로 잘 할 수가 없었어." "그렇게 해 달라고 한다고, 해 준단 말이냐? 좋은 의도로 하는 소리가 아닌건 뻔한 노릇이잖냐! 넌……" "하지만, 내가 이제 와서 저들을 어떻게 대하든 변치 않아. 나 개인이 어떤 사람이든 저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어. 나는 배신자의 자손일 뿐이지. 아르님의 이름을 타고난 데모닉이지. 내가 상냥하게 대하든, 무릎 꿇고 빌든, 수백년 쌓인 원한이 한순간에 없어지는 일은 없어. 그들은 내게서 초대 공작의 그림자를 볼 뿐이야. 난 그림자라고. 단지 그 뿐이야." 막시민은 대답하려던 말을 삼킨 채 조슈아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숨을 고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래, 조금 전 그 자는 널 공작이라고 불렀어. 어째서지? 넌 아직 공작이 아닐 텐데?" 조슈아의 목소리도 낮아져 있었다. "저들에게 내 아버지는 공작이 아니라고 하더군. 적어도 저들을 지배하는 공작은 아니야. 저들에겐 데모닉만이 아르님 공작인 거지. 왜냐하면… 데모닉만이 저토록 오래되고 집요한 혼들을 지배할 수 있지 때문에." "지배한다고?" 막시민의 목소리에는 의혹 외에 다른 감정도 섞여 있었다. 그는 이 상황의 뒷면에 해당하는 진실을 유추하려 했다. 유추하면서… 이미 나쁜 결과를 예측하는 마음 말이다. "지배, 그들을 부르고, 물러가게 하고, 답을 요구하고, 벌을 줄 수 있는 지배." "어째서 너한테 그런 일이 가능하지?" "언제부턴가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들을, 과거 그랬던 것처럼 비취반지성에 도로 묶어놓아 버릴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어." 모두 말문이 막혔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그들은 결단코 그걸 원치 않지. 얼마나 긴 세월이 흘러 얻은 자유인데 내놓고 싶겠어? 그것뿐만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그것만으로도 내 앞에 무릎을 꿇을 이유는 충분히 되는 거야. 이런 상황에서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조상의 잘못의 용서해달라고 애걸하는 어린 자손의 역할? 지금부터라도 친해져보자고 미소를 띠고 다가가는 새 동료? 아니야, 안 돼. 애정이 한조각도 없기 때문에 결국 지배밖에 남지 않아. 나는 그들의 공작이고, 그들에게 명령해. 그들과 나 사이에 가능한 건 오직 그것뿐이었어." "그 말은 조슈아, 너… 언제부터 저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던 가냐." 예전에 켈스니티가 조슈아에게 경고한 후로 조슈아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약속의 사람들' 이야기를 꺼낸 일은 없었다, 유령들이 다시 나타나지 않고 잠잠하게 지내는 까닭은 몰랐지만 조슈아가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심지어 그들을 지배하게 되었으리란 것은 상상조차 못했다. 이것은 하루 이틀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조슈아가 막시민이나 리체와 오래 떨어져 지낸 때는 칼라이소에서 공연을 준비하던 시기밖에 없었다. 그때는 조슈아 혼자 해내야 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몸이 세 개라 해도 부족할 정도로 바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그 시기 동안, 막시민조차도 조슈아와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던 것이다. 샐러리맨이 흰 옷을 보내왔던 그날 밤 외에는. "조금…됐어. 칼라이소에서 공연 준비하던 때부터." "왜 그런짓을 한 거지?" "나도 잘 모르겠어. 어쩌면 켈스가 오지 않게 되면서…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부족함이랄까, 그런 것이 있었어. 누군가가 곁에 있어야 될 것만 같은… 그런 생각이 들었어." "넌, 너 자신으로 충분하지 않은 거냐? 곁에 유령이 있어야만 너 자신이야? 게다가 왜 말하지 않았지?" "내가 저들을 지배할 방법을 찾아내기 전까진… 말할 수가 없었어." 막시민은 평소처럼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걱정이 너무 앞서서 화를 내냐 한다는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는 듯했다. "저들은 일찍부터 내게 말을 걸어왔어. 쥬스피앙 마법사의 집에서 떠나던 그때, 그 강령 사건 이후로 몇 번이나, 처음에는 켈스니티가 한 말을 생각해서 무시했었지. 하지만 귀를 막는다고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니까, 내가 무엇을 하고 있든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드는 거야. 그리고 그들은 내가 알고 싶은 이야기의 실마리를 꺼내며 들으라고, 들어보라고 집요하게 날 따라다녔어, 난 이들이 내 주위를 맴도는건, 내게 얻고 싶은 게 있어서일거라고 생각했지." "얻고 싶은 건 영매인 너의 몸일게 뻔하지 않냐?" "아니, 그건 안 돼,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결코 들어오지 못하거든, 일단 들어온 후에는 버티며 나가지 않으려 할지도 모르지만……" 평이한 어조로 하기엔 섬뜩한 이야기였다. 리체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러면 그들이 원하는 게 뭔데?" "확실하진 않지만… 냉 ㅖ상으로는 내가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길 바라는 것 같아." "네가 뭔데 그들의 소원을 들어줘?" "막군, 생각해 봐, 유령은 갈망을 이루지 못한 자들이 죽어서도 이 땅을 떠나지 못한 상채지, 당연히 소원이 있을 수 밖에 없어. 그리고 그 소원을 이루면 아마도… 그들은 유령 상태에서 벗어나 쉴 수 있게 되겠지, 하지만 그 소원이 뭘까?" 그때 리체가 조슈아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썼다. 켈스니티와 같은 소원? 조슈아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다시 저었다. "아니, 그래. 맞을지도 모르지만, 아닐지도 몰라, 켈스니티도… 소원이 남았으니 유령이 된 거지, 그걸 이루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어. 하지만 같은 소원이라면 왜 그들은 협력하지 않지? 내가 보기에 켈스와 그들의 뜻은 달라." 리체는 다시 썼다. 하지만 켈스니티는 그들과 같은 때, 같은 장소에서 죽어서 똑같이 그곳에 붙잡혀 있었어. 비취반지 성에. 막시민이 중얼거렸다. "둘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켈스니티와 그들이 한패인지 아닌지 연구하는 거야? 내 생각을 말하자면, 한패가 아니라면 한패가 아닌 채 숨길 필요가 있을까? 만일 다들 한패거리고 처음부터 너를 속일 작정이었다면 말이야, 모두가 켈스처럼 사탕발림을 하고 나타나면 되는데 왜 이렇게 표면적인 반목을 보여서 널 헷갈리게 하겠냐? 너도 처음부터 그 '약속의 사람들'이 켈스처럼 친절했더라면 지금처럼 의심했겠냐? 그쪽이나 저쪽이나 조상의 옛 친구라고 생각했을 거고, 그들의 소원이 있다면 웬만큼 어려운 게 아닌 한 들어줘야겠다, 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느냔 말이야. 그게 아닌 걸 보면 그들은 진짜로 반목하고 있고, 그 소원이란 건 분명 오지게 어려운 일일 거라고. 게다가 다들 입 꾹 다물고 있는 한 켈스와 소원이 같은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도 없고. 아예 그 놈들에게 물어보지 그래? 너희 소원이 뭐냐고 말이야." "물어봤지만… 아직은 말할 때가 아니라더군." "거 봐, 그러니 엄청나게 어렵거나… 아니면 어한테 해가 되는 일이 틀림없을걸?" 막시민이 툭 던지듯 한 말은 핵심이기도 했다. 소원을 들어주길 바라면서 소원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당연히 조슈아가 들어주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일 터였다. 조슈아가 미리 알지 못해야만 들어줄 수 있는 기묘한 소원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래서… 이들이 원하는 게 있는 한 귀를 막고 무시한다고 해서 내 곁을 떠나진 않으리라고 생각했어. 그렇다면 그들을 다룰 방법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지. '약속의 사람들'은 한 명의 지휘자를 따르는 게 아니라 각자 생각이 달랐기 때문에, 여러 명과 번갈아 대화하다가 결국 약점을 잡을 수가 있었어, 그게 아까 말한 대로 '다시 지박시킬 수 있다'는 점이었고, 그건 켈스니티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더군." "도대체 너한테 그런 능력이 있는 이유가 뭐야? 네가 그들을 성에 묶어 놓은 것도 아니잖아?" "그들은 옛날에 이카본과 약속을 했었지. 그래서 '약속의 사람들'이지, 그런데 그 약속을 할 때 맹세를 관장하는 마법을 사용했던 모양이야. 맹세를 하면서 그 마법을 걸면 맹세를 지키지 못한 자는 미리 약속한 배신의 대가를 받게 되는 거지. 물론 이카본은 그들의 그 뭔지 모를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한 것이고, '약속의 사람들'은 그 대가로 충성을 바치기로 했던 거야. 그런데 그 맹세의 문구에 허점이 있었거든, 이카본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카본은 조슈아의 조상이었지만, 조슈아는 그에게 별다른 애착을 느끼는 것 같지 않았다. "이카본은 개인이 아니라 아르님 가문의 데모닉이라는 이름으로 약속을 했던 거야. 그래서 이카본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는데도 배신의 대가인 '반(半)죽음의 저주'를 받지 않았어. 왜냐하면 언젠가 아르님 가문에서 태어난 어느 데모닉이 약속을 지키기만 하면 되니까. 이카본이 죽었어도, 아르님 가문에 자손이 한 명도 남지 않아 데모닉이 태어날 가능성이 없어지지 않는 한 맹세는 깨어지지 않는 거지. 따라서 '약속의 사람들' 역시 그들이 공작으로 고른 아르님 가문의 데모닉에게 충성하고 자유를 맡긴다는 의무를 여전히 지켜야만 해. 만일 의무를 거부하면 그들은 저주를 피할 수 없게 되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날 거스르지 못하는 거고." 막시민은 괴상하게 이마를 찡그렸다. "그 '반죽음의 저주'란 건 뭐냐?" "간단히 말해 되살아난 시체, 즉 좀비(Zombie)가 되는 거야. 물론 의식이 없는 괴물이지. 그런데 그들은 이미 시체가 썩어 없어졌으니 지금의 온전한 의식을 잃고 미쳐버린다고 해. 필멸의 땅에 있다는 그 유령들처럼……" 막시민은 입맛을 다시다가 내뱉었다. "네 조상이란 공작은 보통 교활한 개 아니구만." 조슈아는 미묘한 미소로 답했다. "그렇다고 해도 할 말은 없겠지." 잠시 조용해졌다. 너무 엄청난 이야기가 연이어 나오는 바람에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 다들 감을 잡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그걸 결정하기도 전에 조슈아가 말했다. "그래서, 코르네드를 부르려고 해. 리체의 목소리를 되찾아야 하니까." "부른 다음에는? 상담이라도 받는 거냐? 그걸로 충분한 거야?" "그렇진 않지." 조슈아는 다시 한 번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를 강령할 거야." 4. 작별 인사 "밤에는 오늘에게 인사해. 오늘은 인사를 듣고 싶어해. 그 밤이 시작될 즈음 떠나서 다시는 못 만날 운명이거든. 심지어 잊혀질 운명이야. 그러니 다정하게 인사해 줘. 네가 인사를 하면 오늘은 네 손을 잡고 울어버릴 거야. 그럴 땐 그냥 다독여 줘.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맹세는 하지마. 오늘도 알고 있어. 네 맹세가 거짓말이라는 것을. 너에겐 사랑하는 내일밖에 없지……" 몇 시인지 알 수 없는 밤이었다. 짐작컨대 3시쯤 되었을 것 같았다. 아직 날이 밝을 기색은 없었다. 막시민은 고친, 아니 대충 걸쳐놓은 창이 삐딱하게 열려 있었으므로 별뿐인 하늘이 잘 보였다. 리체가 누은 침대 머리맡에서 아주 잘 보이는 창이었다. 아마 이 집 주인인 밀짚모자 약사도 이걸 기대하며 침대와 창 위치를 잡았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일어날 수 있으리란 기대도 안 했으니까, 그런데 다치고 나서 오랫동안 잤던 탓인지 한 번 깨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깨어 검게 갠 하늘을 바라보다 보니 몸이 생각보다 쑤시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그건 정말이었다. 머리가 맑았고, 다치지 않은 왼팔을 움직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어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에는 숨을 죽이고 자는 체 했다. 세 남자들은 커튼 너머에서 모포로 몸을 둘둘 말고 한 구석씩 차지한 채 자고 있었다. 몸이 불편한 리체가 언제 도움이 필요할지 알 수 없으니 같은 집에서 자는 것이 당연했지만, 솔직히 커튼 한 장 너머에서 남자가 셋이나 자고 있다는 사실이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일어난 것을 느끼는 순간 몸이 약간 굳어졌고, 저도 모르게 자는 체 했다. 그림자는 방 가운데 잠시 서있었다. 물을 마시러 가거나 바람을 쐬는 것도 아니고 그냥 서 있었다. 비교적 오래 동행한 두 소년은 지금껏 몽유병 증상 따위 보인 일이 없었으므로, 리체는 혹시 마일스톤인가 싶었다. 세 남자 다 키가 컸기 때문에 그림자만으로는 분별이 쉽지 않았다. 그림자는 두 손을 모으더니 나지막이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러자 눈앞에서 번쩍 했다. 잠깐이었지만 너무나 선명한 빛이었으므로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빛은 방 안 전체를 비췄고, 즉시 사라졌다. 리체는 바짝 긴장했다. 혹시 침입자일까?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닫혔다면, 리체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리체가 깨어나기 전에 들어왔을 수도 있었다. 저 빛은 무얼까? 그들 일행 중 마법을 쓸 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림자는 몸을 돌렸다. 리체는 그 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다는 걸 느끼고 바르르 떨었다.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면 소리라도 지를 텐데, 굳어버린 자신의 목에선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급히 주위를 둘러보니 발치의 조그마한 문갑 위에 뭔가 놓인 것이 보였다. 막시민이 침대 밑 바구니에서 꺼낸 약병들을 대충 놔둔 것이 틀림없었다. 발은 한두 뼘 정도만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몸을 틀자 오른쪽 어깨와 팔에 저린 듯한 동통도 퍼졌다. 필사적으로 참으며 발을 뻗었다. 겨우 닿는다 싶은 순간, 차서 떨어뜨렸다. 두 개나 되는 약병이 떨어져 박살이 나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울렸다. 그러나 아무도 깨어나지 않았다. 움직이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림자는 척척 다가와 커튼을 젖혔다. 리체는 이제 자는 체 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크게 뜨고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상대는 몸을 굽혀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리체." 조슈아의 목소리였다. 옥죄는 듯했던 가슴이 풀어지며 한숨이 나왔다. 자신이 과민했던 것일까? 안도하려는 순간,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 다른 질감을 가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조슈아의 목소리였지만, 배우답게 음폭이 넓은 미성이 아니라 낮고, 바람 소리가 섞여 있었다. 소년이 아니라 사내의 목소리랄까, 단지 속삭였기 때문일까? "놀라지 마." 빛을 등진 눈동자와 마주쳤다. 리체는 정확히 보려 했지만 빛이 없어 눈빛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조슈아는 더 설명하지 않았고, 설득하려 하지도 않았다. 손을 내밀어 리체가 덮고 있던 이불을 펼치더니 그녀의 몸을 감싸 덮었다. 그러더니 몸 아래로 두 팔을 넣어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 대답할 수 없는 리체는 계속해서 그의 눈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 외에는 의사를 전달할 방법이 없었다. 어쩐지 이 상황이 꿈인 양 현실감이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이상했다. 이런 행동은 조슈아가 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는 너무도 가볍게 리체를 들어올렸다. 안고 입구를 걸어가면서도 힘든 기색이 없었다. 문은 조슈아가 몸을 굽혀 조금 밀자 간단히 열렸다.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도 방 안의 두 사람은 깨어나는 기색이 없었다. 막시민은 잠들었다 하면 깨우기 힘든 녀석이 틀림없지만 선원 생활을 한 마일스톤이 어째서 저렇게 아무 소리도 못 들을까, 이상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이 뺨을 식혀주었다. 별이 총총한 하늘 아래 꼬불꼬불한 비탈길이 바다로 뻗어갔다. 어둠이 재해의 흔적을 가리고 나자, 진흙 덮인 흰 회벽과 무너진 울타리를 가진 집들은 빛을 냈다. 섬의 고요는, 어젯밤 멀리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잠들었기에 찾아온 평화인 것처럼 보였다. 말을 걸 수 없다는 것이 참으로 답답했다. 묻고 싶은 것들뿐인데, 먼저 설명해주지 않으니 아무 것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안고도 조슈아의 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리체는 점차 의심쩍었다. 조슈아는 평소 이렇게 튼튼한 팔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흔들리는 시야 너머로 차례로 고개를 내밀던 집들이 차츰 줄어들었다. 거기를 벗어나 바닷가로 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들이 배를 댄 부둣가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백사장이 있었다. 물론 직접 본 것은 아니었다. 저녁 무렵에 세 남자들이 섬에 해일이 왔는지 아닌지 논쟁하는 걸 듣고 안 것뿐이었다. 지금은 직접 보고 있었다. 리체는 낭만적인 기분에 쉽사리 젖어드는 성미는 아니었지만, 밤바다 파도 소리가 들려오자 갑자기 이곳에 둘밖에 없다는 느낌이 뚜렷해졌다. 잔물결 속삭임 사이로 소년이 내딛는 걸음에 사박사박 무너지는 모래 소리가 났다. 이윽고, 멈추었다. 조슈아는 모래사장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이불을 조금 풀어 편하게 덮도록 해 준 뒤 자신은 그 옆에 앉았다. 리체는 조슈아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이 상황이 묘하게 신경을 자극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잠시 후, 조슈아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리체." 조슈아의 목소리가 평소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시각에 이런 곳에서 들으니 또 다른 감각으로 들렸다. "놀랐지?" 그렇게 말하며 조슈아는 손바닥을 내밀었다. 리체는 뜻을 알아듣고 그의 손을 잡고 썼다. 많이 놀랐어.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부터 내 말 잘 들어. 우리가 산책을 하러 나온 거라면 좋겠지만 그렇지가 않으니까, 내가 다 얘기해 줄게, 난." 조슈아는 말을 멈췄는데, 망설이느라 끊은 것이 아니라 어딘가 아프기라도 한 것처럼 갑작스러웠다. 그러나 왜 그러느냐고 묻기 전에 조슈아는 평정을 되찾고 말했다. "괜찮아, 아직 나야. 응,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후… 하아…. 지금 난 말이야. 나 혼자가 아냐, 둘이라고.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니까, 너도 알 거야. 예저에 쥬스피앙 마법사네 집에서 나왔을 때, 그 때, 아주 많은… 유령들이 나와 함께 있었지." 조슈아는 손을 들어 자기 입가를 만졌는데, 자기 몸이 아닌 것을 만지는 것처럼 어색한 손짓이었다. 그리고 미세하게 손을 떨었다. "무슨 얘긴지… 알 것 같지? 지금 내 안에 유령이 들어와 있다는 얘기야. 전처럼 많은 것도 아니고, 그냥 하나야, 너무 걱정할 것은 없어. 정말로." 그제야 조금 전의 일들이 이해가 갔다. 그러면 처음에 리체에게 말을 걸고 그녀를 데리고 나온 것은 조슈아가 아닌 다른 사람, 아니 유령의 힘이었단 말인가? 리체는 손가락으로 썼다. 너는 어디까지야? 어디까지가 너야? "일일이 설명하기 힘들어. 순간마다 바뀌니까, 지금 내게 들어오게 한 유령이 굉장히 힘이 강해서… 아니, 그보다 내가 좀 자리를 많이 내줬기 때문에, 사실 나 지금 정신이 깜빡깜빡 해. 너무 졸려서 깜빡 잠들었다가 깨는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아직은 내가 조절할 수 있어. 원하면… 수면 밖으로 나오는 것 말이야. 그렇지만……." 다시 목소리가 끊어지는 순간, 리체는 당황하면서도 천천히 생각해보았다. 지금까지 죽 조슈아가 아닌 다른 자였던 것 같진 않았다. 조슈아는 그녀를 무척 조심스럽게 안고 왔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까 싶을 정도로, 그리고 처음의 낯선 듯했던 목소리도 가만히 떠올려 보면 반드시 다른 자라고 확신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조금후에는 내가 아닐 거야. 잠시 동안, 잠깐일거야. 그 때… 그하고 싸우지 마, 그가 하는 말을 듣고 따라 줘.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어. 내 말 알겠지?" 불길한 예감이 가슴 밑바닥까지 내려왔다. 언제부턴가 물결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리체는 망설이다가 결국 조슈아의 손바닥에 썼다. 코르네드. "맞아." 리체의 고개를 흔들었다. 세게 흔들 수는 없었지만 할 수 있는 한 반대하려 했다. 켈스니티가 코르네드만은 강령하면 안 된다고 하던 목소리가 기억났다. 또한 저녁에 조슈아가 '그를 강령하겠다'고 했을 때 막시민이 한 말도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너의 책임일지도 모른다고, 열 보든 백 보든 양보해서 이 모든 일이 너 때문에 일어났다 쳐도, 그래도 안 된다고, 왜냐하면 이것은 너 자신을 완전히 잃을 수도 있는 일인데, 그러고도 성과가 있으리라는 어떤 보장도 없는 일이라고, 두 사람 다 소중하다고 했을 때, 둘 다를 잃는 것이야말로 가장 바보짓이며 자신은 절대로 그런 도박을 하지 않는다고. 유령을 강령했다가 그에게 육체를 빼앗기면, 조슈아의 의식은 영영 의식의 수면 아래로 묻어버린다고 했다. 그건 죽는 것과도 달랐다. 죽으면 유령이 되거나 다시 태어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인격에게 눌린 의식은 영원히 잠을 자게 되는 것이다. 다른 무엇으로도 나타나지 못한 채,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의 기억과 영혼은 깨끗이 봉인되어 버리는 것이다. 리체도 알고 있었다. 막시민에게는 리체보다 조슈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든 선택하라고 한다면 절대적으로 조슈아를 선택할 것이 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관령된 일이라 결론을 내리는 것은 힘들었다. 그러나 결국 마음 깊은 곳에서는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부당하게 말려든 것뿐이고, 남의 일로 고통을 당하고 있고, 팔이 부러지고 벙어리가 될 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했다고 해서, 조슈아에게 정신적인 죽음으로 연결될지도 모르는 일을 하라고 시키진 못하리란 것을, 그럴 수 있는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화내고 따지며 소리 지르는 것과 진짜로 요구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그러나 그 저녁에 그들 앞에서 말하지는 못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가 아니라, 말할 수 있었다 해도 말하지 못했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자신도 소중하고… 아니, 실은 다른 누가 어찌되든 자신이 가장 중요한 것이 당연하니까, 벙어리가 도어 살아가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혔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쩌면 벙어리가 된 지 고작 하루가 됐을 뿐이고, 너무 어이없이 일어난 일이라 마찬가지로 어이없이 나아버릴지도 모른다는, 어이없는 기대가 한 조각쯤 있었던 탓일 지도 몰랐다. 아니, 그런 이유는 지금 하나한 따질 수 없었다. 조슈아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저질러 버렸다. 친구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리고 피해자인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코르네드가 할 수 있다고 했어. 나와 약속을 했으니까… 지킬 거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들어와 있는 동안 내 의식을 잠시 묻어야만 하거든, 그래야 그가… 내 몸을 빌려 마법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아가도 마법을 조금 써야 해서, 그에게 자리를 많이 내준 건데… 더 큰 마법을 쓰려면 내가 아예 자리를 비워줘야 해." 너무나 위험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그러지 마, 넌 이 순간 이후로 다시는 세상을 보지 못할 수도 있어. "……." 조슈아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만은 망설임인 것 같았다. "리체…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말이야… 하지 않으면 안 돼. 코르네드가 그 자, 이상한 손에 대해서 얘기해 줬어. 그 손에 깃든 힘이 비록 약하긴 하지만 가나폴리를 지금처럼 황무지, 필멸의 땅으로 바꿔버린 힘과 같은 종류라고, 그 힘은 일단 무언가를 파괴하면, 그와 연결된 모든 것을 하나하나 괴사시켜버리는 힘이라고 했어. 지금까지 그 자는 늘 목을 부러뜨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즉사했고, 따라서 그 손에 깃든 힘이 작용할 필요도 없었어. 하지만 넌 목 대신 팔이 부러졌기 때문에, 네가 살아 있는 것은, 그 힘의 의지와 상반되는 불합리한 상황이래. 그렇기 때문에 그대로 내버려두면 넌 목소리뿐 아니라 차례로 다 잃게 된다고… 살아 있는 땅이 황무지가 되듯이… 살아 있는 사람의 힘이 전부 사라지게 된다고… 그렇게 말해줬어." 리체는 부르르 떨다가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일거야. "하지만 진짜일 지도 모르잖아?" 조슈아의 검은 눈이 반짝거렸다. 막시민이 종종 그 빛을 '미친놈의 빛'이라고 부르던 것이 생각났다. 그러나 지금만은 그 빛 뒤에 숨은 것이 뭐랄까… 다정함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상한 상황에서 처음으로, 조슈아가 아주 가까운 친구처럼 느껴졌다. 반경조차 없는, 그래서 누구도 같은 원 안에 설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데모닉 조슈아가. 밤은 불합리였다. 불합리한 결론인데도, 단지 밤 때문에 종종 하나뿐인 진실이자 길처럼 보였다. 리체는 힘주어 썼다. 하지 마. 그를 쫓아내. 난 차라리 쥬스피앙 아저씨에게 부탁하겠어. 우리 여행은 곧 끝날 거고, 그러면 배를 돌려주러 돌아갈 것 아니겠어?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시간이 없어.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을 거야. 코르네드의 말이 너한테 남은 시간은 열흘도 되지 않을 거래. 그리고 우리 조상이 코르네드를 비롯한 '약속의 사람들'과 한 맹세 때문에 코르네드는 날 배신할 수가 없어. 아까 말했듯 그도 자신을 잃게 될 테니까. 그러면 내 몸을 얻을 수도 없게 되겠지." 그렇게 말하다가 조슈아는 갑자기 미소지었다. "물론 코르네드가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날 없애버리고 싶다면 별문제겠지만." 제발 그만둬. "난 위험한 함정이 눈앞에 있어서 차마 볼 수가 없을 때는, 눈을 감고 뛰어넘는 걸 좋아해." 그만둬. "리체, 너까지 이러지 마. 잊었어? 넌 당사자란 말이야. 너희들이 말릴까봐… 막시민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뻔하니까… 일부러 코르네드에게 말해서 잠깐만 잠들게 해 달라고… 그렇게까지 하고서 나왔어. 다들 없는 이곳에서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나도 쉽지는 않았어……." 조슈아는 눈을 감았다. 기다리는 동안 다시 밤바다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리체는 일부러 귀를 기울였다. 모래를 쓰다듬는 바닷물의 소리가 이때처럼 생생했던 기억이 없었다. 섬에서 자란 자신인데도, 그 소리가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학인처럼 느껴졌다. 말하지 못하지만, 들을 수는 있었다. 모두 잃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죽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리체는 이네스가 생각났다. 리체가 조금이라도 가깝게 생각했던 사람 중, 죽음을 본 사람은 이네스가 처음이었다.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었던 현명한 소녀. 이네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아직 조슈아나 막시에게 해주지 못했다. 해줄 겨를이 없었다는 것도 맞았다. 이 순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다시 해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슈아가 알아야만 할 이야기라고도 생각했고, 이 순간 짐을 더 지우고 싶지 않다고도 생각했다. 죽음을 눈앞에 뒀을 지도 모르는 조슈아에게 자기 때문에 죽은 사람의 이야기는 가혹한 것일 지도 모른다. 지금은… 조슈아가 살아 돌아오는 것이 중요하니까, 고통스러운 이기심이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계속 말해주지 않는 편이 조슈아를 던 고통스럽게 하리라는 확신이 들어 더 괴로웠다. 지금은, 지금은 생각하지 말자고 자신을 설득했다. 언젠가 말해줄 기회가 있으리라고. "리체, 갑자기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겠지만……." 조슈아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두 무릎을 세우고, 바다를 향해 앉아 있었다. "작별 인사를 해도 될까?" 다시 눈을 뜨고 내려다보는 눈빛이 검디검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달빛 때문에 회색이던 머리가 은빛, 아니 흰 빛처럼 보였다. 조슈아는 리체에게 손을 주지 않았다. 대답하지 못하도록, 리체는 조슈아의 손을 잡아당기려 했지만 조슈아는 손을 등 뒤로 숨기며 웃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기껏 말해 놓고 이러면 우습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이해해 줘. 만약에, 만에 하나 정말로 마지막이라면 말이야… 여긴 너밖에 인사할 사람이 없잖니? 나, 한사람에게라도… 인사하고 싶어." 조슈아는 검지를 세워 자기 입술에 갖다 댔다. "대답은 안 해도 돼. 그냥 들은 셈 칠 테니까." "……." 대답이 없는, 아니 할 수 없는 리체를 보며 조슈아는 입가에 미소를 올렸다. 억지로 지은 것일지 몰라도, 겉으로 보기엔 흔흔한 웃음이었다. "너한테는 정말 미안했고, 또 고마웠어, 우리하고 같이 다닌 시절이 네겐 얼른 깨고 싶은 나쁜 꿈같았을지도 몰라. 원치 않는 일들만 일어났고, 지금도 이렇게 힘드니까. 하지만 말이야. 네가 나한테는 많이 힘이 되어서… 그래서 이렇게 미안하네, 정말로." 조슈아는 입술을 살짝 떨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이런 때라서 오히려 하면 안 될 것 같아. 음, 그리고… 막군한테는 말이야……." 조슈아는 다시 입끝을 올렸는데, 이번에는 정말로 억지웃음이었다. "내가… 떨더란 말 하지 마." 대답할 기회는 오지 않았다. 아주 잠깐이었다. 스르르 눈이 감기더니 쓰러질 듯 모래사장을 한 번 짚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리체는 이미 다른 사람과 마주해있었다. "시작해볼까." 그 목소리가 말했다. 분명 조슈아의 목소리이되, 조슈아가 열너덧 살 정도 더 먹으면 낼 듯한, 낮고 살짝 쉰 목소리였다. 그 순간 막시민은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 조슈아는 강물에 조약돌을 던지는 중이었다. 반짝임을 세면서, 옆에 앉아 있던 막시민은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하다가 문득 물었다. "바다에 가고 싶다고?" 어린 시절의 그는 그렇게 묻지 않았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조슈아는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바다에 왜 가려는 건데?" 조슈아는 돌멩이 세 개를 한꺼번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일어섰다. 강둑 아래로 내려가는 조슈아의 뒷모습을 보며 막시민은 잠에서 깨어났다. 5. 몸을 빌린 자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섬에 밤이 오면 바다에서 솟아오른 그림자가 발자국도 없이 올라와서 섬을 맴돈다는 거야. 날이 밝도록 맨몸에 소금기만 입은 그림자가 죽은 산호로 만든 별 귀걸이를 걸고 넘어지고 비틀거리고 춤추며 섬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걷는다는 거야." "아주, 좋군." 조슈아, 아니 조슈아의 몸을 빌린 코르네드는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했다. 그리고 벌떡ㅇ 일어나 팔다리와 어깨를 풀어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실로 오랜만에 얻은 인간의 몸이 새롭고 즐거운 듯, 유쾌한 웃음이 한동안 그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는 리체는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불안했고, 동시에 화가 치밀었다. 앞에 있는 자는 조슈아의 모습을 했지만 조슈아가 아니었다. 유령인지 인간인지 모를 정체불명의 존재와 한밤중에 단 둘이 있고, 자신은 말을 할 수도 몸을 가눌 수도 없는 상태였으니 당연히 불안했다. 또한 조슈아가 두려워하면서도 책임감에 따라 힘겹게 결정을 내려 잠시 얻게 된 몸을, 놀이하듯 즐기는 저 자가 그지없이 밉살스러웠다. 무엇보다도 그런 자가 조슈아의 얼굴을 하고 조슈아의 목소리로 말한다는 사실이, 그래서 쳐다보다 보면 무심코 착각한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표정이 나쁘군 그래.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 도와 주려다가도 하기 싫어지는 법이지, 안 그런가?" "……." 이럴 때는 대꾸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고맙게도 느껴졌다. 자신이 입을 열 수 있다면 분명 좋은 대꾸는 나오지 않을 테니 말이다. 조슈아가 이렇게까지 애써서 만든 기회를 한순간의 기분으로 날려버릴 수는 없었다. 코르네드는 조슈아의 얼굴로, 조슈아가 가벼운 실수를 했을 때처럼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래, 잘 참는군. 네가 말을 하지 못한다는 점을 고려한다 쳐도 말이야." 코르네드는 리체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다시 자기가 입고 있는 몸을 만져 보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미끈한 턱, 목, 어깨, 팔, 그리고 가슴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마치 자기애(愛)에 바진 자처럼. 그러나 그건 남의 몸이었다. 예전에 켈스니티가 말한 대로라면 저 자가 인간의 몸을 만지며 즐거워하는 이유도 알 만했다. 어쩌면 이해할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의 태도가 기묘하게도 탐욕스러워 리체는 역겨움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다만 들려오는 목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훌륭해. 조금 약하긴 하지만, 아주 좋은 몸이야. 정말로 우아하군, 내가 생전에 가졌던 몸보다도 좋아. 아, 공기가 느껴지는군. 피부란 건 아주 좋은거지. 시원하고… 차갑군." 코르네드는 다시 리체를 보더니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그럼 소개라도 할까? 물론 넌 소개를 할 수 없을 테지만, 굳이 할 필요는 없어. 너를 잘 알진 못하지만 소개할 만큼 대단한 점이 없다는 건 알고 있지." 이 자는 생전에 마법사였다고 들었다. 마법사들이 거만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자는 그중에서도 최악이라 할 만했다. "내 이름은 알고 있겠지? 난 오랫동안 살아온 마법사지. 죽은 채로 사는 것도 사는 거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야. 내 말이 모순되게 들리나? 마법사들의 말은 본래 너희 같은 평범한 인간에겐 수수깨끼로 들리기 마련이야. 너무 괘념치 말고, 이것만 알면 돼. 난 위대한 마법사고, 네가 상상할 수 없는 힘을 가졌고, 긴 세월 동안 단 하나 부족한 건 인간의 몸뿐이었다는 것을." 그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리고 모래사장을 걷기 시작했다. 몇 걸음 나아가다가 리체의 주위를 몇 바퀴나 돌았다. 누워 있는 리체에게는 모래가 밟혀 무너지는 소리가 아주 생생하게 들렸다. 처음에는 뭘 하려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가 걷기에 심취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말도 없이 빠르게 걷고 또 걸었다. 이윽고 멈췄을 때도 무척 아쉬운 표정이었다. 그는 맨발을 모래바닥에 문지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중에… 나중에…." 리체는 켈스니티가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떠올리고 저 자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야 할까 싶었다가, 마음속으로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털어 버렸다. 막시민이 잘 하는 말대로, 그런 것은 그녀가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럼, 얼마나 진행됐는가 볼까." 멍하니 서 있던 코르네드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조슈아가 미리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것일 터였다. 첫 번째로 꺼낸 길쭉한 것은 나무로 된 펜대였다. 그리고 조그마한 그릇과, 뭔지 모를 물건을 하나 꺼냈다. 코르네드는 바닥의 모래를 고르게 펴더니 펜대를 거꾸로 들고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맨 처음에는 직각삼각형, 그리고 삼각형의 선을 따라 무슨 문자인가를 촘촘하게 써넣었다. 다 되자 모래바닥과 한 뼘 정도 사이를 두고 먼저 오른손을, 그 다음엔 왼손을 저었다. 순간, 바닥에 그려진 무늬와 글씨가 불로 지진 낙인처럼 열기 어린 광채를 내기 시작했다. 리체는 그제야 놀라며 이 자가 정말 마법사이긴 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것일까?" "아… 으… 음… 그리……." 코르네드가 입속으로 웅얼대는 것이 처음에는 주문인 줄 알았다. 그러나 잘 들어보니 그렇지가 않았다. "부서진, 부서진 데를 찾아서… 잘 됐어. 옳지. 그렇게 되면 차례는……." 그는 단지 자신이 할 일을 중얼거려보는 것뿐이었다. "그대로 해서, 그건 아직… 이걸로 좋을까? 아니 이것부터, 그게 낫겠지……." 다 듣고 있어도 실제로 뭘 하는지 알 도리는 없었다, 그림에서 나던 빛도 점차 사그라져 갔다. 종내는 아무 빛도 나지 않게 되었다. 일어나 리체에게 다가온 코르네드의 손에는 조금 전 무엇인지 몰랐던 물건이 쥐어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접었다 폈다 하는 주머니칼이었다. 그가 칼날을 펴서 들이대는 바람에 리체는 깜짝 놀랐다. 코르네드는 비웃었다. "내가 널 죽일 작정이었다면 칼을 들고 오겠나? 마법이 있는데?" 코르네드는 주머니칼로 리체의 머리카락 끝을 한 움큼 잘라냈다. 그걸 조금 전의 작은 그릇에 담았다. 그리고 리체의 왼손을 잡아당기더니 뭘 하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한 차례 손가락을 그었다. 비명도 지를 수 없는 리체는 숨만 크게 들이쉬었다. 몇 방울의 피가 그릇 속으로 떨어졌다. 그리 큰 상처는 아니었다. 설명도 없이 일어난 코르네드는 모래사장으로 돌아가 처음 그렸던 무늬를 지워버리고 좀더 커다랗고 복잡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리체는 누워 있었기에 뭘 그리고 있는지 잘 볼 수가 없었다. 머리카락과 피가 담긴 그릇은 한쪽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리체는 의혹을 품었지만, 꾸준히 기다렸다. 기다리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몇 번이나 묻고 싶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입으로 수 번은 되풀이해 말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그랬기에 막상 닥쳤을 때는 스스로도 느끼지 못했다. "…까지 기다려야 해? 언제까지……." 앞부분까지는 분명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뒷부분은 또렷한 자신의 목소리였다. 말해놓고도 느끼지 못한 채 한 마디 더 말하려던 리체는 갑자기 말을 멈춰 버렸다. 조슈아의 얼굴을 하고, 조슈아의 미소를 띤 코르네드가 돌아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리체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조소였다. "아, 기다리는게 지루하셨나?" "어, 어, 어… 어떻게 된 건가요?" 목소리는 하루 종일 막혀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그걸 실감하니 더더욱 기가 막혔다. 코르네드는 얄미울 정도로 천천히 말했다. "어떻게 되다니, 어떻게 될 줄 알았는데? 설마 내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할 줄 알았니?" "그, 그, 그런 건……." "다 나은 거 아니니 덜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 "나은 게 아니라뇨?" "딴 데로 옮겼어, 네 몸 속 말이야." 끔찍한 한 마디를 던진 뒤 코르네드는 일어났다. 리체는 당황해서 눈을 깜빡거리다가 몸 곳곳을 조금씩 움직여 보았다. 귀가 들리고 눈이 보이는 것은 틀림없었다. 물론 숨도 쉬어지고, 다친 팔을 제외한 모든 곳의 감각도 살아 있었다. "도대체 어디로?" "묻지 마, 귀찮아." 코르네드는 조금 전에 모래사장에 그린 그림을 심각하게 바라보는 중이었다. 무슨 그림인지 궁금했지만 부러진 팔 때문에 몸을 일으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잠시 후, 모래에서 무언가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을 때는 아픈 것도 잊고 소스라쳐 몸을 일으키려 했다. 모래 위에 그려졌던 것은 사람이었다. 아니, 이제는 그림이 아니라 부조였다. 그려 놓은 형태 그대로 솟아올라 모래로 된 살을 갖춘, 일종의 인형이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저건 뭐죠? 설마……." 리체가 보기에도 그건 단순한 모래 인형이 아니었다. 소녀의 모습이었고… 닮아 있었다. 그녀 자신과, 그녀의 인형인 것이다. 조슈아의 인형이 멀리 비취반지 성에 존재하듯. "그럴듯하지?" 코르네드는 혼자 키득거리더니 펜대를 들고 인형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오른팔 상박을 툭 쳤다. 모래 인형의 팔이 무너지지도 않고, 본래 한 덩어리였던 것처럼 축 처지는 것이 보였다. 모래로 만들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코르네드는 눈만 크게 뜨고 있는 리체를 돌아봤다. "움직여 봐." "뭘요?" 코르네드는 짜증을 냈다. "아, 팔이지 뭐겠어. 내가 지금 뭘 했다고 생각해?" 리체는 머뭇거리다가 오른팔을 조금 움직여 보았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시 한 번, 이번에는 반대로, 착각이 아니었다. 부러졌던 팔이 온전한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팔이 부러졌던 일이 꿈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리체의 표정을 본 코르네드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신기해 죽겠다는 표정이로군?" 그 즈음 리체는 놀라기도 했지만 몸이 편해진 것이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상대에 대한 악감정도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울 거 없어. 난 공작과 약속했지 너하고 한 게 아니니까." "그래도요. 내가 고마워하는 건 자유잖아요? "자유지, 하지만 내가 상관 않는 것도 자유야." 이 놈은 생전에도 보통 건방진 놈이 아니었을 것 같았다. "그러면 이제 끝난 건가요?" "끝나긴, 이 인형을 처리해야지." 리체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이게 정말로 인형인가요? 저기, 조슈아의 인형과 같은?" "그보다는 훨씬 초보적인… 이봐, 난 인형사가 아니란 말이야! 이건 가나폴리에서 치료 목적으로 쓰던 훨씬 실용적인……." 코르네드는 떠들다 말고 말을 멈췄는데, 무심코 자기 인형이 초보적인 거라고 말한 것 때문에 제풀에 화가 난 것 같았다. "떠벌 떠벌 묻지 마! 내가 설명한들 네가 알 수나 있겠어? 계속 귀찮게 굴면 이 인형을 그대로 방치할 테다. 그러면 밀물이 와서 모래 인형을 쓸어버릴 거고, 그 즉시 넌 도로 팔이 부러지고 말도 못하는 상태가 될 걸?" 리체는 입을 다물었지만, 속으로는 이 자가 처음과는 말투가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이 유령은 늙은이, 적어도 마흔 살은 넘은 자처럼 행동했는데, 지금은 마치 어린애처럼 화를 내지 않는가? 물론 정말로 어린애일 리는 없었다. 실력 있는 마법사라고 들었고, 예전에 막시민이 들었다는 코르네드의 여동생 '코르벨'의 목소리도 스물은 넘은 듯했다니 말이다. 지금 코르네드는 조슈아의 성대를 빌려 말하고 있으니만큼 실제 목소리가 어떨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코르네드는 모래 인형 옆에 놓여 있던 그릇을 집어 들더니 이유 없이 리체의 코앞에 들이대며 보여주었다. "이게 바로 본체지." 그릇 속에는 괴이한 잿빛 가루가 한 움큼 들어 있을 뿐이었다. 리체의 장밋빛 머리카락이나 핏방울 얼룩 따위는 온데간데없었다. "이것을……." 코르네드는 그릇을 들고 한 발작 물러섰다. "이렇게." 코르네드가 허공에 손가락을 한 번 젖자 손가락 끝에 불꽃이 붙었다. 그는 뜨거운 기색도 없이 불꽃을 손쉽게 그릇으로 옮겼고, 그릇 속의 가루에서 불길이 확 올랐다. 탈 것도 얼마 없을 텐데 불길은 꽤 오랫동안 탔다. 그러다가 서서히 사그라지며 조그맣게 변했다. 작아진 불꽃은 이제 하얀색이었다. 코르네드는 불빛을 받아 괴이하게 일그러져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뼈 불꽃이라고 부르지." 팟,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꺼졌다. 리체는 즉시 모래 인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번화가 일어나기 직전, 리체는 그 인형이 자신을 놀랄 만큼 닮았다는 걸 깨닫고 이상한 압박감을 느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뼈와 살이 아니라, 모래로 만든 부조일 뿐인데도 그랬다. 인형은 느리게 허물어졌다. 윤곽이 흐려지더니, 도렷한 입체를 유지하고 있던 몸이 작은 둔덕으로 변했다. 그러고도 계속 모래사장으로 퍼져나갔다. 주위의 모래사장과 조금도 다를 것 없는 풍경이 될 때까지, 리체 대시 부러진 팔과, 잃어버린 목소리를 가지고 사라져갔다. 마지막까지 말없이 바라보던 리체는 이윽고 어쩐 흔적도 남지 않게 되자 코르네드를 바라보았다. 코르네드도 심각한 표정으로 인형이 있던 자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리체가 입을 열었다. "저 인형… 나와 닮기만 한 거죠? 살아 있거나… 그런 건 아니었죠? 그냥 모래 조각이랄까, 그런 거죠?" 코르네드는 리체를 보았는데 기분 나쁜 표정이었다. "가나폴리의 인형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내 마법이 우습나? 당연히 살아 있었지." "살아 있었다고요? 하지만 모래였고, 움직이지도 않았고, 말도 안 했는데?" 코르네드는 코웃음쳤다. "모래 모습인 거야, 재료가 그러니 그럴 수밖에 없는 거고, 뭐 그럼 공작의 인형은 사람의 살을 모아서 만들기라도 한 준 아나? 그리고 너 참 웃기는데 말이야. 조금 전까지 누워서 꼼짝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있던 건 누구였지?" 리체는 당황해서 다시 모래사장을 내려다봤다. "무, 무슨 소리죠. 그게?" "너잖아, 너 아냐? 인형은 너 대신 팔이 부러지고 목소리를 잃었는데, 뭘 바라는 거냐? 당연히 못 일어나지. 네가 못 일어난 것처럼, 당연히 말 못하지, 네가 말을 못한 것처럼." 리체는 처음에는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 그렇다면, 그건, 그러니까, 내 몸의 문제를 옮겨 놓지 않았다면, 저 모래 인형이 말도 하고, 일어나 앉거나, 걸어 다닐 수도, 있고, 그랬을 거란 말인가요?" 코르네드가 입을 비죽거렸다. "본체가 시시한 거라 아마 잠깐에 불과했겠지만." "가, 가나폴리에서는, 그러면, 이런 식으로, 항상 사람을 치료하나요? 살아 있는 인형을, 마, 만들었다가, 옳기고, 인형을 죽여, 아, 아니, 부숴 버리고, 그렇게?" "항상 그렇진 않아, 시간이 없고, 달리 고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일 때만 그렇지, 조금 전의 너처럼, 알았나? 이제 그만 묻지 그래? 내가 설명하면 가나폴리의 마법을 다 이해하기라도 할 것처럼 떠드는군, 하지만 그럴 리가 없잖나?" 리체는 가만히 있었지만, 떨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코르네드는 인상을 찌푸린 채 모래사장에 앉았다. 조금 후 리체도 앉았지만 코르네드를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몸을 움츠린 채 혼자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코르네드는 말없이 앉아 있다가 기분 나쁜 듯 중얼거렸다. "그것 참, 보통 사람들이란." 좀더 시간이 흘렀을 때, 코르네드는 갑자기 일어나더니 리체 앞으로 갔다. 그리고 그녀를 껴안았다. "……." 잠시 후 리체도 그를 끌어안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끌어안았다기보다는 품으로 파고들었다는 쪽이 옳은 표현이었다. 소년의 어깨에 턱을 올린 리체가 말했다. "조슈아." 코르네드가 입고 있는 조슈아의 몸이 움찔, 흔들렸다. 리체는 느끼지도 못하는 듯했다. 말이 이어졌다. "나 네 기분, 이제 알 것 같아."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동녘 바다에 어렴풋이 붉은 띠가 드리워졌다. 새벽이 가까워왔다. 리체의 떨림이 멈추었을 즈음, 코르네드는 손을 풀고 일어섰다. 리체도 일어나더니 몇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말했다. "미안해요." 리체의 말투는 다시 존댓말로 돌아왔다. 코르네드도 그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는 눈썹을 모으며 쏘아붙였다. "뭐가 미안하지? 나한테 미안할 건 없어." "그래도……." 코르네드는 고개를 삐딱하게 하더니 다시금 조소를 머금었다. 조슈아의 얼굴에서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조소인데, 이상하게 너무 잘 어울렸다. "글쎄, 사과를 할 게 아니라 감사를 해야 하지 않을까?" "감사라뇨?" "좋았을 거 아냐." 코르네드는 거만한 손짓으로 손가락을 펴서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 공작 대신 널 안아줬으니, 좋았을 것 아니냐고." 이제 리체도 눈썹을 올렸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너처럼 평범한 계집애가 이렇게 잘난 공작을 보고 사랑에 빠졌을 게 뻔하잖아. 하지만 공작이라면 나처럼 널 안아줬을 리가 없으니 이럴 때 운 좋게 대리만족, 얼마나 좋아? 그럴듯한 감사 인사나 해 봐." 코르네드는 리체를 그리 잘 안다고 할 순 없었다. 조슈아를 뒤따라 다니며 리체를 종종 보았지만, 곁에서 함께 생활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리고 전에는 조슈아에게 관심이 있었을 뿐 리체를 굳이 눈여겨볼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이 순간 이어질 반응도 예상하지 못했다. 퍼억! 건강을 되찾은 리체의 발길질이 조슈아의, 아니 아픔을 느낄 당사자로 말하자면 코르네드의 무릎을 걷어찼다. 얼마나 세게 찼는지 상대는 중심을 잡을 겨를도 없이 모래사장에 넘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리체는 열혈 소녀답게 한 방으로 그치지 않았다. 넘어진 상대한테 사정도 두지 않고 서너 번이나 더 발길질을 한 다음, 겨우 분을 삭이며 중얼거렸다. "종일 누워 있다가 좀 움직이니 살 것 같네." 코르네드는 누은 채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날 수 없어서 그런 것 같진 않았다. 물론 리체의 발길질이 평범한 소녀와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말이다. 잠시 후, 코르네드는 웃음을 터뜨렸다. 사방에 퍼지는 큰 웃음소리였다. "하하, 하하, 하하하하……." 바닥을 뒹굴며 웃는 상대를 내려다본 리체는 어이가 없었다. "뭘 잘했다고 웃어?" "하하, 하하하……." 웃음이 금방 그칠 것 같지 않자 리체는 한쪽 뺨을 실룩이며 허리에 손을 얹더니 소리쳤다. "미친 사람처럼 그만 웃고 좀 일어나지 그래?" "하하하, 아, 그래, 하하하… 미친 사람이다 이거냐? 이거 참 후후훗." 이윽고 일어나 앉은 코르네드는 서 있는 리체더러 앉으라고 손짓했다. "왜? 더 할 말 있어? 볼일 다 봤으면 그만 가라고." 존댓말도 어느새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없었다. 리체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 앉자 코르네드가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은 평소와 조슈아와 너무 비슷해서 리체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인간의 몸을 갖는다는 건 참 좋군." "아아, 그러니? 걷어차여도 쾌감이 오고 그래?" 코르네드는 고개를 약간 돌리며 다시 웃었다. "위대한 마법사로 수백 년을 살아온 내게 부족한 유일한 것이었지, 인간의 몸. 아, 정말 곤란했어. 인간의 몸이 그렇게 많은 쾌락을 주는지, 잃기 전에는 몰랐지, 기억만 남은 쾌락이 그렇게 큰 고통일 줄도 몰랐어." 코르네드는 웃음을 거두더니 리체의 얼굴을 보았다. 리체는 착각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저 얼굴은 심각한 이야기를 하려 하는, 즉 미친 짓을 하기 전의 조슈아의 얼굴의 아니었다. 비슷할 뿐이었다. 아니, 실은 같지만 어쨌든… 표정을 짓는 당사자가 다르니까.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지 않거든?" 리체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의 입장을 자각했다. 이래서는 안 되었다. 조슈아는 분명 코르네드가 약속을 어길 수 없을 거라고 했는데? "다, 당신은 조슈아와 한 약속을 어겨선 안 되잖아!" "그게 말이야, 아주 미묘한 문제거든." 코르네드는 여유 만만한 표정이었다. 리체는 더럭 겁이 났다. 어떻게 된 걸까? 조슈아가 바보가 아닐 텐데, 코르네드가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 약속을 했을 리 없는데? "난 물론 공작, 그러니까 아르님 가문의 데모닉에게 신의를 지켜야만 하지. 나도 저 황무지에 떠도는 미친 유령이 되고 싶진 않거든. 빌어먹을 이카본의 계략 때문에 그 약속이 한 세대로 끝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게 된 걸 시작하면 아르님 성을 가진 놈들을 모조리 씹어먹고 싶지만……." 한 순간 잔인한 표정이 떠올랐는데, 그것조차도 이상할 정도로 조슈아의 얼굴과 잘 맞았다. 수십 년은 지어 온 표정처럼. "그럴 수는 없단 말이지. 하지만 이 세상에도 똑똑한 미치광이가 하나 있어서 잘도 나한테 길을 열어줬단 말씀이야. 설명해 줄까? 나를 비롯한 '약속의 사람들'이 한 약속은 이랬지. 맨 처음에 이카본의 이름을 맹세로 집전하는 마법에 종속시키려고 하니까, 그 이름이 본명이 아니라서 안 되더란 말이야, 그게 시작인데……." 리체는 최대한 집중해서 들으려 했다. 이야기 속에 실마리가 있을 지도 몰랐다. "이카본은 자기조차 자신의 본명을 모른다고 했어. 그는 부모도 없었기 때문에 쫓아가 물어볼 수도 없었지. 우리는 생각하기를 이카본은 무척 특이한 자니까, 다시 말해 데모닉이니까 본명을 몰라도 그 자 한 명만을 가리키는 표현은 쉽게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 아르님 성을 갖고 있고, 데모닉인 자. 아, 그 시절엔 데모닉이라는 말이 없었어. 이후에 생긴 별명이니까. 그때는 이카본을 '축복받은 아르님'이라고 불렀어. 하여튼 그것으로 맹세를 집전해 주었지. 우린 그때만 해도 이카본의 그 괴물 같은 능력이 후세로 이어지는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 결국 이카본이 죽은 뒤 손자인지 증손자인지 하는 빌어먹을 새로운 '축복'이 태어났을 때에야, 우리의 의식이 소멸되거나 아예 새로 태어나지 않는 한, 절대로 그 맹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거지!" "……." 리체는 막시민이 했던 것처럼 논평하진 않았다. 코르네드는 숨을 잠시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한 명뿐이야, 알아? 공작은 하나라고, 우리는 단 하나의 공작을 섬길 뿐이야. 두 명을 섬길 의무는 없어. 지금가지 한 시대에 데모닉이 둘이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별 의미가 없어 보이던 부분이었는데, 이번만은 뜻밖에 소용이 닿게 된 거라고. 자, 지금 아르님 가문에 데모닉 조슈아가 몇이지?" 그제야 리체도 비취반지 성에 있는 인형, 또 하나의 조슈아를 생각해 냈다. 쥬스피앙은 그 자도 단순한 복제품이 아니라 이고의 조슈아와 똑같은 인과율 속에 놓여 있다고 했다……." 리체의 표정을 본 코르네드는 입가에 미소를 올렸다. "맞았어. 우린 다른 하나의 공작을 섬기면 되는 것이야. 둘을 섬길 의무는 없어. 우리가 저쪽의 공작을 섬기고 이쪽을 배신한다고 해서 맹세를 어기는 것이 아니란 말이야. 그러니 난… 새로 얻은 이 몸을 느긋하게 즐겨도 되는 거지. 자, 어때? 아주 멋지지?" 리체는 대답할 말을 생각해 내려고 머리를 쥐어짰지만,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보다 훨씬 머리가 좋은 조슈아도 생각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약속의 사람들'은 조슈아에게 이 맹세의 내용을 정확히 설명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처음부터 이런 의도로 말이다. "그쪽의 공작은 이쪽의 공작이 어찌되든 상관도 안 할 테니, 더더욱 잘됐지. 오히려 죽어준다면 더 좋아하지 않겠는가 이 말이야. 난 이 몸을 오랫동안 쓸 생각이야. 아주 좋거든, 너 같은 계집애들의 마음도 뺏을 수 있고, 그 말고도 소용이 무궁무진하지. 뭐, 일단 데모닉이라는 것만 생각해도." 리체는 겨우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면… 왜 날 고쳐줬지?" "너야 중요한 사람이 아니니까, 네가 죽든 살든 이 일의 판세에는 아무 영향이 없으니 말이야. 네 몸을 고쳐 두는 건 그냥 내 취향의 문제에 불과하거든." 리체는 더 이상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몽롱할 분이었다. 그게 정말 작별인사였단 말인가? 그토록 짧고 단순한… 그렇게 끝이 났다고? 게다가 오직 그녀하고만 두어 마디를 나누었을 뿐인데… 다른 사람들과 인사도 못한 채… 세상에서 그의 존재가 지워져 버렸다고? 폭풍처럼 강한 운을 지녔다던 데모닉 조슈아가? 코르네드는 멍해 있는 리체를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바꾸었다. "내게 마지막으로 부족했던 걸 가지고 나니 하고 싶은 것도 아주 많군. 아… 그 옛날에 못했던 것들, 인가의 몸을 가져야만 할 수 있는 좋은 놀이들……." 이미 코르네드의 말은 리체에게 중언부언으로 들릴 뿐이었다. 귓가에서 윙윙거리는 날벌레 소리에 불과했다. 코르네드는 오른손 검지로 바닥에 무언가를 그리면서 말을 이었다. "붉은 머리카락이라… 난 그런 색깔을 좋아하지." 코르네드가 상체를 리체 쪽으로 기울였다. 리체는 뒤로 물러나려 하다가, 아니 얼어나려 하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몸이 다시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닌가? 그것도 앉은 자세 그대로. 상대는 마법사였다. 마법사를 자주 본 일이 없는 리체는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 지도 몰랐다. 하지만 방금 분명히 알았다. 모든 것이었다. 마법사 앞에서는 모든 것을 조심해야 했다.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라면 달아나는 쪽이 좋았다. 그랬어야 했다. 도움이 안 될지 몰라도 말은 할 수 있었다. 리체는 눈을 부릅떴다. "넌 최악의 인간, 아니 유령이야, 이런 사실을 알려 줬으니 그 자리에서 자살이라도 하지 그래." 코르네드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곧, 다시 치떴다. "내게 명령하지 마." 리체의 사이에서 별빛 빛나던 바다와 하늘이 사라졌다. 보이는 것은 한 명의 얼굴뿐, 이윽고 소년의 얼굴에서 비웃는 듯한 미소가 사라졌다. 한 순간, 조슈아가 돌아온 것인가 착각할 정도로 진심 어린 눈빛으로 그가 말했다. "어차피 그는 하나가 아닌데, 셋이 된다고 한들 안 될 것 있겠어?" 그 말에 대한 대답이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그래. 그놈이 하나도 아닌데, 이젠 셋이 되어야 한다니 이거야말로 지랄맞은 노릇 아니겠냐?" 6.충성과 복수의 이름 "너희가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그곳은, 균질한 먼지로 덮여 있을 뿐이야." 코르네드가 벌떡 일어나는 순간, 리체는 자신을 묶었던 마력이 풀리는 것을 느끼고 재빨리 일어나 물러섰다. 딱히 도망갈 곳은 없었지만 어쨌든 곁에 있어서 좋을 건 없다는 생각이었다. 코르네드는 조슈아의 눈으로 모래사장으로 내려오는 경사 위를 쏘아보았다. 그곳에는 오래 전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한가롭게 앉아 턱을 괴고 있는 막시민이 보였다. 그는 쇠스랑이나 쟁기 자루였던 것 같은 기다란 나무 막대를 세워 겨드랑이에 기고 있었다. "네가 들을 만큼 대단한 경력이 없는지라 소개는 과감히 생략하겠다." 막시민은 벌떡 일어나더니 막대는 바닥에 내던지고 아래로 내려왔다. 리체가 소리쳤다. "내려오지 마!" 이미 리체 곁까지 내려온 막시민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마법사는 말이야, 멀리 덜어질수록 위험한 거라고." "너, 언제부터 보고 있었어?" "별로 안 됐을걸." "하지만… 조금 전에 소개는 생략한다고 한 말, 저 자가 나한테 했던 말이랑 똑같잖아!" 막시민은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랬냐?" "그랬냐가 아니라……." "발길질이 일품이더군." 막시민은 리체와 논쟁하러 온 것이 아니었으므로 친구의 탈을 쓰고 있는 녀석, 자시 말해 그의 관점으로 악당에 해당하는 자에게로 몸을 돌렸다. 우선 자기 손에 아무 것도 없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처럼 두 팔을 벌렸다. "당신의 훌륭한 연설은 잘 들었는데 말이야." 코르네드는 상대가 마법사도, 전사도 아닌 걸 알고 있었으므로 겁내는 기색 없이 팔짱만 끼었다. 막시민이 말을 이었다. "그럴듯한 생각을 해냈더군. 공작은 하나면 되고, 그게 누구든 상관이 없단 말이지. 그건 돌려 말하면 반드시 누군가의 한 명을 섬기긴 해야 한다는 얘기도 되겠군, 안 그래?" 코르네드는 거만하게 고개를 모로 꼬았다. "데모닉이 한 명도 없을 때는 아무도 섬길 필요가 없지." "아아, 그래. 데모닉, 이 세상에 데모닉이 한 명이라도 존재하는 한 너희는 글부터 벗어날 수가 없군. 하지만 두 명 이상이 되면 선택의 여지가 생기는 거고, 누굴 택하든 자유란 말이지. 너희는 비취반지 성의 인형을 택해 보겠다는 건데……." 막시민은 갑자기 고개를 젖히며 하늘을 쳐다봤다. 영문 모르는 리체는 뭐가 나타났나 싶어 덩달아 고개를 들었고, 결국 마지막 하나도 분위기에 휩쓸려 턱을 쳐드는 순간이었다. 「결국 네가 날 화나게 했구나.」 리체가 잘 알고 있는 목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코르네드는 흠칫 놀라며 수인을 맺기 위해 손을 움직이려 했다. 그러니 그럴 수 없었다. 코르네드는 그 자리에서, 그 자세 그대로 굳어졌다. 두 손을 약간 내밀며 목소리가 들려온 허공을 쏘아보려고 고개를 돌린 채로. 「잘도 피해 다녔으니 본의 아니게 오랜만이 되었군. 난 늘 널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켈스니티의 모습은 물론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문제도 되지 않았다. 겁내던 것도 다 잊어버렸다. 리체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두리번거리며 소리쳤다. "켈스니티죠? 그렇죠? 나 지금 당신이 너무 반가운 거 알아요?" 미소라도 지었을 법한 사이를 두고 켈스니티가 대답했다. 「저도 반갑습니다. 아브릴 양.」 막시민은 느긋하게 비탈을 다시 올라가 쟁기 자루를 갖고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조슈아의 모습을 한 코르네드는 우뚝 선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말을 못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이제 숨바꼭질은 그만두자고, 마가목 지팡이의 코르네드, 이렇듯 오랜만에 만났으니 우린 아주 긴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군. 그러니 비록 네 몸이 아니라 해도 그런 자세로는 힘들겠지.」 이번에는 리체나 막시민도 볼 수 있는 변화였다. 코르네드의 주위에서 반투명한 얇은 막 같은 것이 솟아올라 그를 둘러싼 벽을 만들었다가, 다시 사라졌다. 이윽고 코르네드는 손을 내리고 몸을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얼굴에서 조슈아가 평생 한 번도 품어본 일이 없을 악의가 드러났다. "방해할 생각이라면 집어치우시지. 얼음 강의 아들들을 검기는 사제여. 네가 무슨 짓을 한다 해도 난 이 일을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이를 악문 채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내뱉는 목소리였다. 물론 그 안에 든 것은 적의였지만, 그것 뿐만은 아니었다. 바닥에 깔린 것은 긴장과 두려움이었다. 「그런 말은 적당히 하는 것이 좋을 거야. 나는 이미 화가 많이 났으니까, 네가 감히, 두려움조차 잊고서, 이카본의 핏줄에게 손을 대다니, 네가 이카본과 한 약속은, 맹세를 관장하는 마법이 없었더라면 한 순간에 져버릴 정도로,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었나?」 화가 났다고 말하고 있지만, 대조적일 정도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조슈아의 얼굴을 한 코르네드는 눈썹을 올리며 비웃음을 머금었다. "이제 와서 이카본과의 약속을 거론하다니, 내가 켈스니티 발미아드를 지나치게 현명한 자로 기억하고 있었나 보군. 이제 그 이름은 내게 증오심만 돋울 뿐이야. 예전의 약속 따위, 헌신짝보다도 못하니, 오히려 그의 속임수에 당해 수백 년이나 노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버리지 같은 신세가 되어버린 나에게, 그런 나에게, 이카본과의 약속을 기억하라고? 얼마든지 기억하지! 증오와 저주의 이름으로!" 막시민은 리체에게 자기 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곁으로 온 리체는 이 상황이 어떻게 이뤄진 것인지 설명을 기대하는 얼굴이었지만, 막시민은 고개를 내두르며 기다리라는 신호만 했다. 다만, 한 마디는 했다. "멀쩡해졌네." 리체는 '뭐야 불만이라도 있는 것 같은 그런 말투는'하고 받아치려다가 말을 삼켜버렸다. 이렇게 되기 위해 조슈아가 치른 대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네게 수백 년이 흐른 뒤에도 한결같이 기꺼운 마음으로 이카본의 후손들을 따르라고 요구하진 않아. 하지만 옛 마음이 품었던 신실함이 한 조각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후손의 몸을 빼앗아 네 욕심을 채우겠다는 생각을 해내진 못하겠지. 그리고 복제된 인형을. 예전 그렇게 신실했던 맹세로 만들어진 '너의 공작'으로 섬기겠다고 당당히 말하지도 못할 것이다. 너는 미친 유령이 되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이미 옛 마음을 하나하나 져버리고 있어. 그걸 다 져버리고 나면 황폐한 복수심만 남은 네 모습이 황무지의 미친 유령과 과연 다른가? 조금이라도?」 코르네드는 파르르 떨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워! 난 정당해. 정당한 몫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누구에게든 그걸 받아낼 권리가 있어. 게다가 그의 핏줄이지. 그래, 네 말대로 이카본의 핏줄이기 때문에, 그의 권리를 빼앗아서라도 내 권리를 채우겠단 말이다! 그놈은 그걸 내놓아야만 해!" 「거짓말은 그만두고 솔직해지는 것이 어떻겠나, 네가 정말로 원하는 건 그게 아닐 텐데. 네가 이카본의 핏줄이며 데모닉, 즉 너희의 공작인 자에게 진실로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닐 텐데? 너희 모두의 소원을 들어줄 수도 있는 자가 누구지? 한 명밖에 없지 않나?」 "한 명이라고? 아니지, 둘이지. 비취반지 성에 있는 자가 들어주면 돼. 난 아 자에게 빚을 받고, 다음 일은 그쪽과 얘기하면 되는 거라고. 수백 년이나 고생했는데 이 정도 이득도 안 된다고 할 자는 없을 거다.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거라고." 「그건 네 희망일 뿐이야. 모든 '약속의 사람들'이 너와 의사가 같다는 생각은 망상에 불과하다는 걸 모르나?」 "그들은 내게 설득 당하고 말걸? 난 이 몸을 얻어서 앞으로 훨씬 일을 잘 해나갈 수 있어. 오랫동안 기다린 소원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오게 되는데, 그들이 거절할 리가 있겠나?" 「인간의 몸을 원하는 건 네 욕심일 뿐, 너를 따르지 않는 자들은 모두 알아차릴 것이다. 네가 인간의 몸을 가지려 하는 까닭은 공작과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너 자신이 인간의 몸을 갖고 싶기 때문이란 것을. 그리고 그 몸을 다른 누구와 공유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것도 말이다.」 코르네드는 시선을 내린 채 숨을 고르고 있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래, 좋다. 부인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어. 내겐 나쁠 것이 없지. 인간의 몸으로 한 평생 다시 사는 건 내가 아주 오래 전부터 바라던 바야. 게다가 데모닉의 육체는 아주 유용해. 다른 인간의 몸도 내 혼을 받아들일 수는 있겠지만, 내가 살아생전 사용하던 마법을 완벽히 다시 쓸 수 있으려면 이처럼 강력한 영매가 아니면 안 되지. 난 지금 좋아 미칠 지경이다. 마치 본래 내 몸이었던 것처럼 자유자재로 뭐든 할 수 있단 말이다!"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은 방법은 속임수일 뿐이야.」 "그러면 이카본이 날 얽어맨 방법은 속임수가 아니었단 말인가? 속임수에 속임수로 맞대응하는 건 내 양심에 전혀 걸리지 않는데?" 그때 막시민이 들고 있던 쟁기 자루로 바닥을 툭툭치며 일어섰다. "잠깐, 나도 한 마디 하고 싶은데." 막시민은 코르네드에게 돌아섰다. 상대가 조슈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미간을 한 번 찌푸리긴 했지만, 그는 본질적으로 논리적인 구분에 능한 사람이었다. 상대가 친구가 아니라고 판단하자, 그의 머릿속에서 곧 두 존재는 뚜렷하게 나눠졌다.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말이야. 그 무슨 어쩌고 저쩌고 지팡이 마법사라는 코르네드 씨,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하면서 좋아하시는 걸 보니 머리가 나쁘시군. 자기 논리에 모순이 있다는 거 모르겠냐?" 코르네드는 턱을 쳐들며 코웃음 쳤다. "마법사도 아닌 네가 내 앞에서 지식 자랑을 할 셈이냐? 어차피 켈스니티는 언제까지나 날 이렇게 묶어둘 수 없어. 구속이 풀리면 그땐 섣불리 말을 한 걸 후회하게 될 걸." "아, 기다려. 네가 머리가 나쁘단 걸 증명해 줄게." 막시민은 어슬렁어슬렁 코르네드 쪽으로 걸어왔다. "이봐, 넌 조슈아에게 원한을 품고 복수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하는데 말이야. 그건 조슈아가, 네가 이카본과 했던 맹세의 연장선상에 있는 '아르님 성을 가진 데모닉'이기 때문이라 이거지, 조상의 잘못을 후손이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도 우습지만, 일단 네 괴상한 머릿속에는 납득이 되는 모양이니 그렇다 치고, 그 다음은? 이카본이라는 자가 널 속여서 한 일이 뭐냐? 네가 그를 공작으로 섬겨야만 하게 만들었다는 건데, 하지만 넌 방금 그걸 네 입으로 부인했잖냐? 이제부터 너의 공작은 비취반지 성에 있는 복제 인형이라고 했잖냐? 그렇다면 조슈아는 이제 너희의 공작이 아니잖아? 그냥 조슈아일 뿐이라고, 그러면 이카본인가 하는 놈이 너희를 옭아맨 맹세하고도 더이상 관계가 없는 셈 아니냐? 자, 그럼 너희의 공작도 아닌 조슈아가 왜 너희의 원한이든 소원이든 들어줘야 하는데? 한 쪽만 택해야 하는 거 아냐?" 리체는 그 말을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까 코르네드도 알아들은 표정이 아니었다. 막시민은 웃지도 않고 말했다. "내 말이 너무 어려웠냐? 넌 너희의 소원을 들어주고 원한에 대한 책임도 질 공작을 단 한 명만 택해야 한단 말이야. 후보가 둘이라고 해서 한족에게는 원한을 걸고, 나머지 한족을 공작으로 택하고, 그렇게 편리하게 나눌 수 있는게 아니잖아? 저쪽을 공작으로 택할 셈이라면 원한도 저기 가서 갚아. 상관없는 조슈아는 내버려두고, 공작인지 생선 뼈다귀인지 하는 따위는 너희가 바닥에 코를 박고 바쳐도 싫다고 할 놈이야." 막시민의 말이 갈수록 신랄해지는 것이 불쾌감이 증폭되고 있다는 의미였다. 무엇보다도 산대가 조슈아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신경을 무척이나 건드렸다. "그런 소린……." 코르네드는 입을 열려고 하다가 다물어버렸다. 그도 대꾸할 말이 궁해진 게 틀림없었다. 조슈아를 공작으로 인정한다면 그와의 약속을 지켜 그의 몸을 돌려줘야 하고, 공작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옛 약속에 구속되지 않는 대신 복수할 명분도 없어지는 셈이니 말이다. 복수할 명분이 없다면, 지금껏 강변해 온 그의 몸을 차지할 정당성도 없어진다. 막시민은 쟁기자루를 팔꿈치로 눌러 모래 위에 세우더니 천천히 소매를 걷으며 물었다. "자, 그 양심은 아직도 잘 있나?" 코르네드는 이를 갈며 소리 질렀다. "네 녀석이… 고작 십 몇 년을 살아왔으면서 내 양심 따위 알 게 뭐냐! 그래, 내가, 우리가 아직도 데모닉과 아르님에게 매여 있다면, 그쪽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도 약속을 지켜서 우리의 소원을 들어줘야 할 것 아냐!" 켈스니티의 목소리가 울렸다. 「네가 정말로 그걸 원한다면, 이런 식으로 조슈아를 속이고 불신을 얻어서 좋을 것이 있나? 조슈아가 이카본이 한 약속을 대신 지켜 주길 원한다면, 너 또한 충실히 약속을 이행해야 하지 않나?」 " 정말로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들어줄 수 있나? 이카본도 실패한 일을 그가 할 수 잇느냐고! 이카본은 거짓말을 했고, 그의 후손도 똑같을 게 뻔해!" 코르네드는 흡사 이성을 잃은 듯했다. 궁지에 몰렸기 때문인지, 또는 오래 묵은 원한을 이야기하는 일이 그를 미치게 하는 것인지, 논리도 순서도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쏟아냈다. 그가 흥분할수록 켈스니티의 목소리는 더 차가워졌다. 「이카본이 너희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한 건, 결국 너희의 잘못 아닌가? 너희가 그들의 사이를 이간질하지만 않았더라면 에가 그녀를 질투하고 불신하지만 않았더라면, 너희는 몇 백 년 전에 소원을 이뤄 지금쯤 편히 쉬고 있을 거야. 내 말이 그른가?」 "이카본이 우리를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우리와의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우릴 내버려두고 그 여자를 따라가진 않았겠지. 결국 그 때문에 우리 모두 죽어 비취반지 성의 원귀가 되어버렸고 말이다. 나도 똑같이 묻지 내 방법이 틀린가?" 「이미 몇 번이나 했던 이야기다. 이카본이 아니라 그녀가 사라졌기 때문에 적들이 성을 노린 거다. 그 때문에 이카본도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데려오려 했던 거지. 그녀가 떠난 이유가 너희 때문이란 것을 설마 부인하진 않겠지? 결국 똑같은 이야기의 되풀이일 분이다. 너희의 죽음은 이카본에게도 분하고 또 분한 일이었으니, 이카본이 일부러 너희를 내버려뒀다는 이야기는 너라 해도 할 수 없을 거야. 그리고 그때 그 일로… 나 역시 죽었다는 걸 잊지 마라.」 "이카본이 아까워하고 원통해한 건 켈스니티 너를 잃었다는 것이지. 우리가 아니었어! 결코… 우리 따위는 죽든 말든… 아니, 죽어버리면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되니 더 좋았겠지!" 막시민이나 리체가 알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이것이 둘에게 해묵은 논쟁이고, 또한 갈등의 근원이라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다른 것을 억지로 다 이해한다 해도 '그녀'라는 사람의 존재만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이카본이 약속의 사람들, 그리고 켈스니티조차 내버려두고 찾아갔던 '그녀'는 누구인가? 「이카본은 네가 생각하는 것 같은 사람이 아니야. 네가 그런 식으로 상상으로 만들어 낸 원한을 쌓았기 때문에, 넌 점점 더 미친 유령에 가까워지고 있는 거야.」 "켈스니티, 켈스니티, 너는 평생도록 그랬고, 죽은 후에도 질릴 정도로 똑같아. 널 죽게 한 것도 결국은 이카본인데, 한 번이라도 원망해 봤나? 넌 원망이 무엇인지 알기나 하나? 눈이 멀고 귀도 먹은 어린애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카본만을 뒤쫓지. 죽은 뒤에도 그를 옹호하러 쫓아다니는 꼴이라니. 질리도록 독한 놈. 네 편협한 이야기 따위, 모조리 이카본 위주로만 생각하는 주장 따위, 들을 가치도 없단 말이야. 알아?" 코르네드는 막시민과 리체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들려줄까? 너희는 켈스니티가 어떤 자인지 알고 있나? 아마 전혀 모를걸? 부드러운 모습만 봐 왔다면 그를 절반도, 아니 반의반도 모르는 거지. 그는 보다시피 친절한 자이지만, 이카본을 방해하지 않는 자에게만 그럴 뿐이야. 일단 이카본과 관계되었다 하면 그에게 너그러움을 기대해선 안 되지. 그거야말로 황무지가 된 가나폴리에서 말은 물이 솟길 기다리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켈스니티를 볼 수 없었으므로 그가 이 순간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자신을 변명하지 않았다. 코르네드가 지껄이는 말을 듣고 있을 따름이었다. '너희는 그런 자를 믿을 수 있나? 그는 조슈아 폰 아르님이 아니라 이카본 폰 아르님의 친구야. 그는 이카본을 위한 피의 사제이고, 이카본을 건드리는 자들을 모조리 저승으로 보낸 다음, 성호를 한 번 긋고 나서, 꿈조차 없는 잠을 잘 자라고!" 그는 다시 켈스니티가 있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래, 내가 미친 유령이 된다 해도 어쩔 수 없지! 모든 것은 이카본의 탓이니까! 하지만 이제 그런 일은 없을걸? 난 그의 핏줄의 몸을 차지해버렸으니까. 인간으로 다시 한평생 살아보는 건 어떨까? 아주 근사하겠지?" 대꾸한 것은 막시민이었다. "아마 무척 짧겠지, 그는 데모닉이니까." 코르네드가 고개를 돌렸다. 코르네드가 고개를 돌렸다. "넌 네 친구가 일직 죽길 기대하고 있나보군? 아아, 그래, 이카본의 후손들 중 이카본과 똑같이 '축복받은 아르님'이었던 자들은 모두 일찍 죽거나 미쳐서 죽었다지? 조상의 악업이 후손들에게까지 뻗쳐서 그렇게 도니 게 뻔하지. 이젠 그런 자들을 축복도 아니고 '악마'라고 한다지? 그거 아주 잘 맞는 별명이군 그래.' 그런 말이 다른 누구도 아닌, 조슈아의 입술을 통해 나오고 있다는 것은 정말 참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막시민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몸이 데모닉의 것이든 아니든 내 정신은 데모닉이 아니니까, 미쳐서 죽을 염려는 없다는 걸 잊었나 본데?" 그 말과 동시에 막시민의 쟁기 자루가 날아와 코르네드의 허리를 후려쳤다. 상상도 못한 대응에 놀란 코르네드는 아픈 허리를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너, 넌… 이게 친구 몸이란 걸 잊었어?" 막시민이 쟁기 자루를 고쳐 들며 내뱉었다. "거 참 아까부터 앞뒤 안 맞는 소리만 하네. 그 몸을 안 내놓겠다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친구의 몸이다? 게다가 난 옛날부터 그놈을 엄청 두드려 패고 싶었는데, 그놈이 때리는 영문을 모를 것 같아 참았지. 하지만 이번엔 기억도 못할 것 아냐? 이 얼마나 좋은 기회냐고, 안 그래?" 또다시 날아오는 쟁기 자루를 한 번은 피했지만, 다른 한 번은 허벅지를 얻어맞고 말았다. 그가 얼굴을 찡그리며 비명을 지르자 켈스니티가 말했다. 「리프크네 군. 안타깝지만 그렇게 때리면 그가 마법을 쓰지 못하도록 걸어 놓은 구속 주문이 깨질 우려가 있군요.」 막시민은 쟁기 자루를 내렸지만 자루 위쪽을 손바닥으로 몇 번 비비며 말했다. "너 따위 녀석이 조슈아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니 기분이 대폭 더러운데." "마… 마법사들은 통증을 참는 법 따윈 배우지 않아!" "네가 배웠든 말든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켈스니티가 다시 말했다. 「유령으로 오래 지냈으니, 아주 작은 아픔도 참을 수 없게 됐겠지. 인간의 몸이란 건 생각처럼 편리한 점만 있는 게 아니니까. 쾌감이 있는가 하면 통증도 있는 거지. 네가 차지한 것이 다른 평범한 인간의 몸이었다면 고통을 피해 잠시 나왔다가 도로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조슈아의 경우는 다르지. 한 번 나왔다간 다시는 조슈아가 너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어찌 보면 갇힌 셈이기도 하겠군.」 "참견 마…. 그 정도 말장난에 내가 포기할 것 같나?" 「그뿐이 아니지. 비취반지 성에 있는 인형이 조슈아와 같은 인과율 속에 놓여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과연 만듦새까지 완벽할까? 더구나 그 자에게는 본체라는 약점이 있고, 그를 만든 자들은 이용 가치가 없어지는 순간 그를 죽여 버릴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고 나면 너는 누구에게 소원을 들어달라고 떼를 쓸 생각이지?」 "그…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대답할 가치도 없어!" 「글쎄, 과연 말도 안 되는 소리일까. 만일 그 인형이 죽지 않는다 해도, 한 가지는 의심해 볼 수 있지. 과연 그에게서도 새로운 데모닉이 태어날까? 핏줄은 그대로 이어질까? 이어지지 않으면 맹세에서 해방되긴 하겠지만 동시에 너에게 남은 기회는 딱 한 번 뿐이게 되는군, 어때?」 "되지 않을 이유 다윈 없지! 가나폴리의 인형술은 그렇게 시시한 게 아니야!" 「가나폴리의 인형술이라면 그렇겠지만, 이번 인형을 만든 자는 가나폴리의 마법사가 아니야. 난 지금도 그 마법사가 어떻게 그런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 무척 궁금해. 그런 만큼 그가 조금이나마 실수를 저질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지.」 "그런 쓸데없는 걱정 따위에 귀를 기울일 내가 아니야!" 코르네드는 마음의 동요를 숨기려 했지만, 본래 익숙하던 몸이 아니었으므로 표정을 능숙하게 감추기가 힘들었다. 따라서 조슈아를 잘 아는 막시민 등의 그의 감정 상태를 쉽게 알아보았다. 죽 듣고 있던 막시민이 갑자기 손가락을 올렸다. "그러고 보니 한 가지 가능성이 더 있군. 너희는 분명 아르님 가문의 데모닉이 존재하는 한 그들 중 하나라도 섬겨야만 한다는 거였지?" 대답이 들려오진 않았지만, 막시민은 들은 셈치고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말이야. 만일 켈스니티의 말대로 두 조슈아가 모두 죽어버린다면, 단 한 명이 남는군." "남는다고?" "간과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세상에는 데모닉이 한 명 더 있거든. 그러니 그때가 되면 너희는 저절로 그 사람을 섬겨야만 하겠군 그래? 그러면 아주 볼만하게 되겠는데, 그는 조슈아의 몸을 빼앗은 너를 절대 그냥 두지 않을 테니까." 코르네드는 정말로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런… 사람이 있나?" "아직 죽지 않았다고, 비취반지 성에서 산 적도 있다고 했으니 너희도 알텐데? 데모닉 히스파니에를." 이번에야말로 코르네드는 진짜 당황한 표정이었다. "히스파니에? 그가 살아 있단 말인가?" "꽤 잘 아는 사이 같은 말투네?" "그 자는……." 코르네드는 한참 만에 말을 이었다. "손상된 데모닉이지. 그 자만은 영매가 아니었어. 이카본의 후손들이 페리윙클로 가버리고 나서,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비취반지 성에 돌아온 데모닉이었는데, 그 자는 우리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더란 말이야. 내가 그 때 얼마나 실망했는지… 너희가 알 리 있겠어?" 다시 켈스니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손상된 것이 아니야. 그가 유령을 볼 수 없었기에, 유일하게 오래 사는 데모닉이 된 거지.」 "그게 바로 제대로 된 데모닉이 아니라는 증거야!" 막시민이 이번엔 코르네드의 뒤통수를 때렸다. "이 자식이 듣자듣자 하니까, 말을 하려면 제대로 하라고. 그 영감쟁이는 유일하게 똑바로 된 데모닉이었어. 난 장기적으로 조슈아도 그렇게 돼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 켈스니티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 말은 데모닉 히스파니에가 너희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다는 의미가 되는군. 영매가 아니니까, 하지만 그는 데모닉이란 말이야. 그렇다면 너에겐 최악의 상태가 되겠군. 맹세에 얽매여 그를 공작으로 섬겨야 하지만, 그는 너와 대화조차 나눌 수 없을 테니.」 막시민이 이죽거렸다. "게다가 그 영감쟁이가 네가 조슈아를 어떻게 했는지 얘길 들으면, 네 녀석이 유령이라 해도 반드시 한 번 더 죽여 버리고 말걸?" 코르네드는 더 이상 당혹감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 닥칠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것인지, 입을 다문 채 땅바닥만 뚫어져라 쏘아봤다. 리체가 약간 움직였다. 그녀는 팔을 모으며 몸을 움츠렸다. "듣고 있자니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는데 말예요." 리체는 켈스니티를 찾는 것처럼 고개를 한 바퀴 돌렸다. "도대체 그 '소원'이라는 것이 뭐죠?" 대답은 얼른 들려오지 않았다. 막시민도 이제는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결국 모든 것은 그 '소원'을 이루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는 모양이니 말이다. 또한 그 소원을 들어줄 사람은 조슈아이고, 들어줄 수 있는 이유는 조슈아가 영매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예전에 쥬스피앙이 빌려준 배 앞에서 유령들이 몰려들었을 때 어떤 목소리인가가 '너는 소언을 들어줄 능력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조슈아의 의지나 능력으로 이뤄주는 것이 아니라 뭔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소원이란 건가? 대답이 들려온 건 엉뚱한 쪽이었다. 「그 소원은 말이야…….」 보이지 않는 자였지만, 켈스니티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천천히 비탈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야.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 안식처로 돌아가는 문. 그 문 앞에 서서 우리는 고향의 노래를 부르겠지.」 7. 맹약자의 시작과 끝 "사후세계는 삶보다 훨씬 길기 때문에, 삶을 굳이 늘리려고 애쓸 필요가 없어. 긴 코스 요리가 날라져 올 것이 뻔한데, 전채를 더 달라고 조를 필요는 없잖아." 또 다른 유령이 나타났다고 느끼는 순간. 켈스니티에게 조금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리체의 몸도 도로 얼어붙었다. 리체는 주위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 보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낯선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결국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다, 당신은 또 누구예요?" 「친구도 적도 아냐. 그러니 걱정하는 것도, 안심하는 것도 안 돼. 그런데 내가 한 말이지만 엄청 그럴듯하지 않아? 날이 밝아오고 있는데 무인도의 바닷가에는 유령들만 어슬렁거리는도다. 코르네드, 꽤 자연스러워 보이는데. 공작의 몸은 어때? 역시 기가 막히겠지?」 리체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쑥스러워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아가씨. 그렇게 겁내지 말라고. 나도 괜히 뛰어나와 놀라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 다른 녀석들처럼 얌전히 듣기만 하려 했는데, 하지만 저놈이 우리 사제를 욕하는 걸 듣자니 참을 수가 없어서 말이지.」 말하는 걸로 보아 우호적인 쪽 같기도 했다. 리체는 '약속의 사람들‘이 모두 같은 의견이 아니라던 말을 생각해 내고 외쳤다. "당신, 약속의 사람들?" 「난 한 명이라서 '사람들'이 될 순 없는데.」 자기가 대답해 놓고도 우스웠는지 혼자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리체는 막시민과 얼굴을 마주봤다. 이미 바다는 붉게 물들고 백사장에도 여명이 반짝거리는 때였다. 하지만 저 자의 말대로 유령이 한둘이 아니라 훨씬 많이, 쥬스피앙의 배 앞에서 그랬듯 몰려들어서, 그런 상상을 하고 보니 날이 발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상상을 하고 보니 날이 밝고 있다는 것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막시민도 똑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는 망설이다가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이봐들, 거기 있다면 박수 정도는 쳐 보지 그래? 공짜로 보고 있으면 값을 하라고."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면 더 기절할 노릇이었겠지만, 어쨌든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리체는 막시민과 등을 맞대려 애쓰며 보이지 않는 목소리에게 물었다. "켈스니티는 어디 갔죠? 왜 직접 대답하지 않는 건데요?" 「그건 말이야…. 그렇지 코르네드 네가 대답해 보지 그래? 지금쯤은 알고 있을 거 아냐?」 코르네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 전부터 당황한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 상태로 굳어지기라도 한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후, 그는 갑자기 손을 올리더니 자신의 입을 막았다. 뒤집히는 속을 억지로 진정시키려는 사람처럼. 목소리는 혼자 낄낄대더니 말했다. 「대답할 상황이 아닌가보구만.」 리체가 다시 물었다. "켈스가 어딜 갔는데 그래요?" 「다이브(dive)했어, 공작의 몸 속으로.」 그 말에 막시민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말은 조슈아에게서 저 코르네드라는 자를 내쫓기 위해 들어갔다는 소린가?" 「뭐, 의도를 다 알 수는 없지만 그 비슷한 거 아닐까.」 "잠깐, 이봐! 그런 식으로 남의 몸을 전쟁터 삼아서 싸우다가 애가 아예 맛이 가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목소리는 갑자기 어조를 낮추며 말했다. 「공작을 우습게보지 마, 그는 이카본의 핏줄이야.」 그 즈음 코르네드는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똑바로 눈을 뜨고 있긴 했지만 뺨에서 계속 경련이 일어났다. 「모험이긴 해. 공작의 의식은 아주 강력해서, 수백의 유령을 한꺼번에 강령할 수도 있지만, 지금 공작의 몸을 가누고 있는 건 공작 자신이 아니라 코르네드라고. 공작의 의식이 잠든 동안, 코르네드가 공작의 몸을 과연 얼마나 잘 다룰 수 있을까? 코르네드 놈의 정신은 한 몸 속에 두 가지 의식이 있는 걸 버틸 수 있을까? 그러다가 공작이 깨어나기라도 하면 세 사람의 의식을 감당해야 할 텐데, 할 수 있을까? 놈은 '축복받은 아르님'이 아닌데 말이야.」 "만약에 못하면? 그러면 어떻게 되지?" 「내 예상이긴 하지만 말이야. 공작은 의식의 전환을 즉각 해낼 수가 있지만, 코르네드가 그걸 못하면, 다시 말해 전환 도중에 공백이 생기면, 순간적으로 죽은 것으로 인식되어서 몸 일부에 괴사가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지…….」 막시민은 끝가지 듣지도 않고 소리쳤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그 때 곁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젊은 여자였으나, 예전에 들었던 코르벨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걱정하지 마, 페란초는 괜히 겁을 주는 것뿐이야. 공작은 괜찮아. 우리의 공작인걸.」 친절하게 들린다고 해서 처음 듣는 목소리를 신뢰할 막시민은 아니었다. 그러나 막시민이 대꾸하기도 전에 또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리타의 말이 맞아. 기다려 봐, 켈스는 말이야… 몸과 마음을 모두 정화할 수 있는 사제라고.」 「난 켈스가 걱정돼. 그는 이런 일을 원치 않았어. 그는 공작에게 손가락 하나도 대지 않으려 했잖아.」 「흔적 때문이야. 다이브의 흔적은 결코 지워지지 않으니. 공작에게 켈스의 흔적이 남는다면 보통 일이 아닐걸.」 「공작이 무사해야 할 텐데, 아… 들어봐. 부르고 있어. 들려?」 「들려?」 「너에게도?」 리체와 막시민은 어느새 등을 맞댄 채 한 발작도 떼어 놓지 않게 되었다. 막시민이 기분 상항 듯 중얼거렸다. "아까 박수 쳐보랄 땐 다들 시치미 뚝 떼고 있더니." 그러자 놀라기라도 한 것처럼 목소리들이 뚝 그쳤다. 리체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막시민, 너 처음에 켈스하고 같이 왔잖아. 그런데 이들이 있는 건 몰랐어? 처음부터 있었을까?" "켈스는 말을 걸었으니 안 것뿐이고, 내가 알 게 뭐냐. 난 조군 자식이 아니라고." "그럼 우리 지금 유령들 앞에서 공연이라도 한 거야?" "말했다시피, 난 모른다니까." 리체는 왠지 모르게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이었다. 막시민은 조슈아, 아니 코르네드를 유심히 바라봤다. 무슨 변화가 일어나는지 알아내려는 것처럼. 코르네드는 한쪽 무릎을 세운 채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자세로 멈춰 있었다. 조각상처럼 움직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어나려다가 뭔가 중요한 생각을 해내고 멈춘 사람처럼, 시선이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예전에 검은 새떼, 아니 새를 보았던 산꼭대기였다. 아래로 물소리, 그리고 안개가 흐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공기가 서로 몸을 비벼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그런 걸 바람 소리라고 하던가, 하지만 그보다는 느렸고, 젖은 듯했다. 지난번에 왔을 땐 켈스니티가 말을 걸었던 기억이 났다. 입을 열어 불러 보았다. "켈스?" 불러도 오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그 생각이 나자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답 없는 켈스니티는 낯설었다. 칼라이소에서 공연을 준비할 때처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부족함을 느꼈다. 대답이 필요했다. 그래서 약속의 사람들을 불렀을까. 고개를 흔들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약속의 사람들에게 무엇을 원했는지, 무엇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들은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의 주위를 맴돌았고, 때때로 그를 불렀다. 부름을 받으려 했다. 그건 무언가를 원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들은 언제부턴가 그를 '젊은 아르님', '어린 데모닉'이라고 부르는 대신 '공작'이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그건 변화의 징조였다. 하지만 그는 어디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약속의 사람들, 그들의 눈에만 보이는 변화가 있었을까? 그들은 알았고, 그는 몰랐단 말인가? 그는 예나 지금이나 자신조차 가누기 힘든, 폭풍 속의 기둥이었다. 그는 자신이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 무엇인지 몰랐다. 이미 무언가 주었다 해도 몰랐을 것이다. "조슈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누구?" 목소리는 웃었다. 돌아본 곳은 발 디딜 곳이 없는 허공이었다. 조슈아는 손을 내저었다.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다. "왜 그런 얼굴을 하니?" "내 얼굴이 어떻기에?" "슬픈 것 같아." 조슈아는 자신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거울을 볼 수 없어서 손으로 더듬는 것처럼, 손끝으로 표정을 알아낼 수 있는 것처럼, 손끝이 눈가에 이르렀을 때 물기가 약간 묻어나는 걸 알았다. "나… 왜 눈물을 흘린 거지?"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는데, 미소로 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데도 그런 확신이 들었다. 조슈아는 물었다. "누구인지, 대답해 줘. 아는 사람임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 "넌 날 잊어가고 있구나." 목소리는 침묵하고, 다시 안개 흐르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괜찮아. 잘됐어, 네가 이곳을 떠나기 위해 내 기억을 지불해도 좋아. 아직은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 것 같아. 날 잊어버리면 넌 다시 이곳에 오지 않아도 될 거야." 누구인지 모르는데도, 그 말에 눈물이 흘렀다. 한참 뒤 조슈아는 다시 눈가를 만져 보았다. 이제는 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조슈아, 난 기뻐." "왜?" "네가 날 기억하지 못해도, 네 안에 내가 남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조슈아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았다. 바라보면 그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믿듯, 그렇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한참 뒤 조슈아가 속삭였다. "거기… 있어?"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상실감이 찾아왔다. 없어선 안 될 것 같은데, 없었다. 잠시 후 조슈아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 안에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들 뒤에서 누군가가 어개에 손을 얹었다. 조슈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드디어 만났구나. 말썽 많은 나의 공작." 이번엔 켈스니티였다. 오랫동안 불러도 나타나지 않았던 그였다. "여길 잊지 않았구나." 켈스니티는 두 손을 내밀어 조슈아의 뺨을 어루만졌다. 조슈아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뜬 채 켈스니티를 올려다보았다. 켈스니티가 그의 몸에 손을 댄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널 찾아오느라 무척 힘들었어. 이제 돌아가자." 조슈아는 문득 생각해 내고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안 될 거야. 코르네드가 가로막고 있으니까, 그래서 우린 아주 먼 곳까지 가야 해. 먼 길을 돌아가야 하지. 내 손을 잡아." "켈스, 전에는……." 조슈아가 하라는 말을 알아차렸는지 켈스는 미소지었다. "이젠 어쩔 수 없구나, 금기보다 중요한 일도 있는 것이라, 흔적을 남길 밖에, 이 흔적 때문에 나도, 그들도. 항상 너와 함께 있게 될 거야.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겠지만 감수할 수밖에 없지."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더 묻지 않고 조슈아는 손을 자았다. 손을 잡는 순간, 주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림자처럼 나타나기 시작했다. 반투명한 윤곽이 점차 뚜렷해졌다. 그들은 대부분 미소짓고 있었다. 스무 명 정도였을까. 조슈아는 그들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한 명이 입을 열자 알 수 있었다. 들은 일이 있는 목소리였다. "무시한 것 같아 다행이다." "여기가… 공작의 세계?" "이런 곳이구나, 이곳까지 오게 되다니… 그리고 이곳에 흔적을 남길 수 있게 되다니, 영광이야, 공작." "정말 넓구나. 산과 절벽이라니, 안개와 마천루라니, 처음이야, 이런 곳.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작은 방이었는데." "감격했네, 공작. 여기 온 일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야." 켈스니티가 눈짓하자 그들은 모두 손을 맞잡고 긴 열을 만들었다. 조슈아와 켈스니티도 그들과 손을 맞잡았다. 대열을 이룬 그들은 곧 그곳을 떠났다. 안개 솟아올라 높은 곳에 이르자, 물방울들이 걷히고 주위가 맑아졌다. 내려다보자 끝간데 없이 두텁게 깔린 구름이 보였다. 푹신한 솜 같은 구름바다 너머로 금빛 해가 또렷한 원을 그렸다. 너무나 넓디넓은 세상이었다. 한 사람의 마음속이라는 걸 믿기에는. 그들은 천천히 날아갔다. 조슈아가 돌아볼 때마다 미소가 답했다. 모두 다양한 얼굴들이었다. 젊은이가 가장 많았지만 남자도, 여자도, 조슈아 또래의 소녀도, 노인에 가까운 어른도 있었다. 눈을 싸맨 장님도, 한쪽 발목이 없는 젊은이도 있었다. 여럿으로 이뤄진 한 마리 새처럼 그들은 구름바다를 건너갔다. 손이 움직였다. 오른손을 올리자, 맨 처음 켈스니티가 코르네드를 구속할 때 본 것과 비슷한 막이 이번에는 벗겨지며 사라졌다. 막시민도 리체도 코르네드가 드디어 마법을 쓰려 한다고 생각하고 긴장했다. 어차피 도망친 곳은 없었지만. 두 사람이 뚫어져라 바라보는 가운데, 고개가 들리고 회색 눈이 그들을 향했다. "막시민… 너 어떻게 여길 왔어?" 한참 만에 나온 막시민을 대답은 이러했다. "내가 너 때문에 수명이 준다." 세 사람과 한 명의 유령이 모래사장에 앉아 아침 해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아침 해보다는 조슈아가 회복되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조슈아는 모래사장에 누워 바다 쪽을 보고 있었다. 깊이 잠들었다가 깨어난 혼이 다시 안정을 찾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손발이 무척 차가워서 리체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담요를 둘둘 감아야 했다. 하지만 배게는 없었다. 모래가 날아들자 조슈아는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픕." 리체가 막시민에게 말했다. "네가 쟤 다리 좀 빌려줘라." "내가 왜 남자 놈한테 다리 베개를 해줘야 되는데?" "그럼 내가 해줘야겠니?" 그건 예의가 아닌지라 결국 막시민의 다리를 빌렸다. 조슈아는 눈을 감고 있다가 켈스니티를 불렀다. "내가 없는 동안… 그 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해." 「그래. 말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어. 그 자의 입으로 듣는 것보다는 내가 얘기하는 편이 나을 테니까. 왜 맹약이 깨어지고, 약속도 깨어졌는지.」 "그래요. 이젠 들을 때라고 생각했어." 「네가 옛 일에 얽매이지 않길 바랐어. 유령들만 떠나고 나면 모두 묻혀버릴 테니, 굳이 옛 이야기를 알아서 그들의 은원과 엮이고 책임감을 느끼는 일은 없었으면 했어. 조상이 벌인 일을 수습하고 있기엔 네가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지 않아? 그동안 내가 네 곁에 오지 않고 뭘 했는지 궁금했을 거야. 난 네게서 저들을 떠나보낼 방법을 찾고 있었어.」 조슈아가 눈을 약간 크게 뜨며 물었다. "그게 가능한 거야?" 「불가능하진 않았지. 물론 네가 점점 더 어렵게 만들고 있지만.」 막시민이 말했다. "그렇지. 유령들과 점점 가까워지다 못해 아예 유한테 월세도 안 받고 세까지 놓으려 하잖아. 멀리 하라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지." "이번엔 어쩔 수 없었어." 대답하며 조슈아는 리체를 바라봤다. 팔이 다 나은 리체를 보니 마음이 편해졌던지 빙그레 미소지었다. 막시민이 켈스니티에게 물었다. "그래서, 떠나보낼 방법이란 건 뭐지?" 「불만족스러운 것이 있기에 유령이 되는 것이고, 저들은 약속을 이루지 못한 약속의 사람들이지요. 그들의 약속. 다시 말해 소원을 들어주면 그들은 자연히 유령 상태에서 해방되게 됩니다. 더구나 그들의 소원은 이 땅에서 떠나는 것이니, 어느 쪽으로든 그들은 조슈아 앞에서 사라지게 되겠죠.」 "그래서 그 소원이란 걸 들어줄 방법이 있는 거야?" 「제가 답을 찾았더라면 저들이 오늘 여기 나타날 일도 없었겠지요. 하지만 아직 희망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때 리체가 말했다. "아까 어느 유령이 말이죠, 자기들의 소원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켈스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게 사실이라면 그 고향이란 건 도대체 어디예요? 어디든 갈 수 있는 유령들이 어째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거죠?" 「그들이 왜 그런 소원을 갖게 됐는지부터 설명해야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처음부터 말하자면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겠군요.」 조슈아에게는 켈스니티가 바다 쪽으로 눈을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떠오르는 해를 보다가 다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지금 페리윙클 섬에 사는 사람들은 대륙에서 온 이주민입니다. 저 옛날, 천 년 전에 페리윙클은 무인도였고, 대륙에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작은 나라들이 흩어져 있었죠. 나라라기보다는 부족에 가까웠을지도 모릅니다. 그 시절에 나라는 하나뿐이었지요.」 "가나폴리… 얘기지?" 조슈아의 말에 켈스니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나폴리, 그들이 황무지였던 대륙을 푸른 땅으로 바꿔 놓았기에, 오아시스를 찾아 떠돌아다니던 다른 부족들이 정착할 터전도 마련되었지, 가나폴리 사람들은 마법의 힘을 갖지 못한 여타 부족들을 경쟁자로 여기지 않았어. 그래서 쉽게 그들을 도와주었지. 그들이 아무리 힘을 기른다 해도 가나폴리에 도전할 일은 결코 없을 테니 말이야. 그라고 알다시피 가나폴리는 멸망했지. 그 흔적은 필멸의 땅이 되었고.」 막시민이 물었다. "가나폴리는 마법을 잘못 써서 멸망했다고 들었는데, 그 힘이 아노마라드나 그런 때까진 미치지 않았나 보지?" 「그랬죠, 가나폴리를 멸망시킨 힘은 가나폴리 사람들의 마력이 미치던 영역에서 그쳤습니다. 그래서 아노마라드나 하이아칸 같은 곳은 여전히 푸른 땅인 거죠. 가나폴리가 멸망한 원인이 이계에서 온 네 가지 무구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를 아십니까?」 리체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얘기는 처음 들어요." 「가나폴리의 왕이었던 마법사가 실수로 이계와의 통로를 열어버렸고, 거기에서 나온 파괴적인 '악의 무구'가 마법사를 지배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악의 화신이 되어 나라를 파괴했고, 그런 그를 막은 사람이 왕녀 에브제니스였죠. 친아버지를 죽이라는 예언을 받았던 왕녀.」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읽어서 알고 있던 이야기였다. 「마법사는 죽었지만, 그가 풀어놓은 이계의 힘이 급속도로 땅을 오염시키고, 물을 말려버리고, 동식물들을 괴물로 변이시켰습니다. 그걸 막기 위해 에브제니스를 비롯한 마법사들이 '소멸의 기원'이라는 마법을 쓰기로 했죠. 그리고 마버이 실패할 때를 대비해서 왕녀의 사촌이자 동생이기도 했던 티시아조 왕자를 중심으로 탈출 계획을 세웠습니다. 여러분이 타고 온 것과 같은, 하늘을 나는 배를 준비해서 이주단을 조직했던 것이었지요. 땅에서는 죽음을 각오한 자들이 새벽탑에 모여 마법을 시전하는 가운데, 탈출하려는 자들의 선단은 하늘을 뒤덮었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소멸의 기원은 실패했기에, 배에 탔던 자들만이 생존자가 되었습니다.」 리체가 말했다. "생존자라고요? 그럼 가나폴리 사람들이 모두 죽은 게 아니란 말씀이군요? 그들은 어디로 갔죠?" 「그들이 처음에 가려 했던 그곳에 도착한 자가 있는지,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당시의 사람이 아니니까요. 본래 목적지는 북쪽에 있다는 어떤 대륙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가나폴리 땅을 떠나 멀리 가기도 전에 이미 문제가 생겼지요.」 물안개에서 벗어난 해가 붉은 광채를 뿌리기 시작했다. 모래밭에서 앉아 있던 자들의 얼굴도 붉게 물들었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소멸의 기원에 동참했기 때문에, 배를 탄 자들 중 마법사는 극히 적었습니다. 물론 가나폴리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라 해도 어느 정도의 마법은 쓸 줄 알았죠. 그런데 그들 중 하나가 끔직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마법사들이 다 죽어버리고 나면 이주한 뒤의 생활이 어려울 테고, 그러니 마법의 힘이 깃든 물건들을 갖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모아들여 배에 탔던 거죠. 그렇게 은밀히 숨겨 온 물건 중 하나가 바로 네 가지 '악의 무구'중 하나였던 겁니다.」 막시민이 대뜸 소리쳤다. "아니, 그것 때문에 나라가 말했는데, 도망을 가명서 그걸 갖고 갔다고? 미친 거 아냐?" 「마법을 쓰며 살던 자에게 마법 없이 살아야 한다는 상상은 무척 끔찍한 것이었던가 봅니다. 나라가 폐허가 되었으니 당연히 쓸만한 마법 물건을 구하기가 힘들었겠죠. 그리고 그 무구는 무척 강대한 마법이 깃든 물건이었고요. 저도 마법사가 아닌지라 그 이상의 심리까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사실이 밝혀지자 당연히 혼란이 있었습니다. 일단 갖고 온 이상 그런 물건은 아무데나 버릴 수도 없는 일이었죠. 그 자는 한 선단을 지휘하고 있었고, 그의 배에 탄 자들을 강하게 설득했습니다. 그 무구를 직접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봉인해 두고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마법을 사용하겠다고 말이죠. 그러면 가나폴리에서 그랬듯 자유로이 마법을 쓰며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놀랍게도 이 설득은 먹혀들어갔습니다.」 "그러면… 그걸 끝내 갖고 갔단 말이야?" 「이주단은 그들을 추방하기로 결정했고, 그들도 거절하진 않았습니다. 하나의 무구에서 나오는 마력을 다같이 나눠 쓸 순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했던가 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주단에서 빠져나와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습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조슈아가 낮게 말했다. "그래서… 그들이 내린 곳이 페리윙클?" "뭐?" 리체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물론 그녀도 이야기가 가리키는 방향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설이 되어버린 왕국, 그것도 마법 왕국이었던 곳의 후손들이 그렇게 가까이 살고 있으리란 생각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막시민이 말했다. "맞는 모양이군, 페리윙클 사람들이 가나폴리의 후예들? 그럼 조슈아의 집안도? 거 참, 믿어지지 않는데, 아니, 그럼 마법도……." 「이제 와서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안심하시고요.」 "글쎄, 난 데모닉이 사실 마법의 일종이었다고 해도 별로 놀라지 않을 것 같은데." 켈스니티는 빙그레 웃었지만 물론 막시민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페리윙클에 도착한 뒤 의견을 또다시 갈라졌습니다. 페리윙클은 생각보다 살기 좋은 섬이었지만, 문제의 무구를 봉인할 만큼 지반이 튼튼하지 못했습니다. 알다시피 산호섬이니까요. 그리고 배에 타고 있을 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여론은 급격히 기울었습니다. 파괴할 방법은 없지만, 무구에서 나오는 마력조차 사용할 수 없도록 완전히 봉인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결국 소수파였던 마법 지지자들이 다시 떠나게 됐습니다. 그들이 택해 간 곳이 노을섬인데, 그곳은 산호섬이 아니고 험한 바위섬이었죠. 지반이 튼튼한 대신 척박한 땅인지라 그곳으로 간 사람들은 생계를 잇기가 힘들었고, 자연히 무구의 마법을 사용하기로 합니다. 그리하여 세대가 흐르자 페리윙클은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섬이 되었고, 노을섬은 마법사의 섬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마법이 바로 그 마법이란 말이군. 이런 식이라면 이 세상의 마법은 다 근원이 같은 거 아닌지 모르겠네." 「리프크네 군의 말대로일 지도 모르지요. 그 후 노을섬은 자기들끼리 고립되는 쪽을 택했지만, 페리윙클 사람들은 점차 주변의 섬들로 세력을 넓혀서 꽤 많은 섬이 흩어져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섬을 차지한 가문끼리 세력 다툼도 종종 일어났죠. 그런데 노을섬 사람들이 무구에서 흘러나오는 마법을 사용하게 되면서 그 일대에 약한 지진이나 해일이 잦아졌습니다. 페리윙클은 생존 기반인 산호 채취나 어업에 피해가 오는 만큼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점점 감정이 악화되다 보니 두 섬은 몇 달이 멀다 하고 서로 사절을 보내어 협박과 조롱을 주고받는 사이가 됐습니다. 그 즈음 대륙에서는 작은 나라들이 적극적으로 합병과 정복을 거듭하여 형태를 갖춰나갔고, 어느 정도 세력 균형이 이뤄지자 하나 둘 바다 쪽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페리윙클은 멀긴 했지만, 산호 채취와 청금석 광산, 그리고 지금은 고갈됐지만 사파이어도 났기 때문에 보물섬으로 불렸지요. 당연히 탐나는 섬이었을 겁니다. 결국 남부의 티아 왕국이 쳐들어왔고, 저들끼리 소규모 다툼에 여념이 없던 페리윙클 섬 일대는 너무 쉽게 정복되고 말았죠. 사람들은 마법을 쓰는 노을섬에 구조 요청을 했습니다만, 감정의 골이 깊었던 노을섬 사람들은 거절해 버렸습니다.」 "티아라면 지금의 아노마라드 밑에 있는 자치령 아닌가?" 막시민의 말에 리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는 잘나갔었나 보네." 「그때는 남부에서 가장 큰 왕국이었죠. 이렇게 정복된 채로 십 년 정도 흐른 뒤 태어난 사람이 이카본입니다. 저는 이카본과 어려서부터 친구였는데, 만났을 때부터 그는 동네를 떠도는 고아였죠. 저는 이카본의 부모를 한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 개구쟁이 시절이 흐른 뒤 저는 사제의 길을 걷게 됐지만, 이카본은 언젠가 티아 사람들을 쫓아내겠다고 결심해서 은밀히 사람들을 모아들였죠. 결국 저도 그와 함께 하게 되었고, 대지주의 아들이었던 오블리비언이 합류한 후에는 바야흐로 뭔가 해볼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됐습니다.」 막시민이 물었다. "대지주의 아들이라니, 정복당했던 거 아니었나? 정복당했는데 무슨 대지주가 남아 있어?" 「오블리비언은 티아 사람과 결탁한 집안의 아들이었죠. 그의 아버지는 다들 배신자라고 손가락질해도 아랑곳 않고 부를 챙기기에만 여념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블리비언은 그림과 음악을 사랑하는 낭만주의자였고, 이해득실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정을 따랐지요. 아버지가 죽은 뒤 물려받은 토지를 전부 소작인들에게 나눠줬을 정도입니다.」 조슈아에게 켈스니티가 짓는 미소가 보였다. 「동지와 자금이 준비된 이카본은 사람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려 했지만, 섬 사람들은 당시 젊은, 아니 실은 어렸던 이카본을 쉽사리 따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카본은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비록 꿈같은 일이라 해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죠. 그래서였겠지만, 많은 사람의 입에서 처음에 가나폴리를 떠난 선단이 가려고 했던 북쪽 대륙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도와주지 않은 노을섬 사람들에 대한 미움이 겹쳐서, 노을섬으로 간 마법 지지자들이 무구를 갖고 나오지만 않았더라면 이주단과 함께 그 대륙으로 갔을 테고, 그러면 이렇게 고생할 일도 없었을 거라고 이야기한 거죠.」 리체가 물었다. "그 대륙이란 데는 어딘데요? 알고서 가고 싶다고 한 건가요?" 「아뇨, 아무도 몰랐습니다.」 막시민이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그럼 진짜로 꿈같은 얘기잖아? 어디에 있는지 알아도 북쪽이라니까 대륙을 빙 돌아서 가야 할 판인데, 위치조차 모르면 어떻게 가겠다는 거야?" 「하지만 이카본은 그들의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했죠. 그의 약속을 믿은 사람들이 모여서 이카본을 지지했고, 그래서 '약속의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 겁니다.」 막시민과 리체는 아까 코르네드의 입으로 켈스니티가 이카본 일이라면 물불을 안 가린가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사기꾼 아냐?"라는 말만은 자제했다. 그런데 그 말은 조슈아의 입에서 나왔다. "그거 사기네?" 조슈아가 말했기 때문인지 켈스니티는 대뜸 화를 내지 않았다. 「아니, 방법은 있었어. 옛날 가나폴리에는 원하는 곳으로 단번에 보내 주는 마법이 실제로 있었으니까.」 그러나 곧 켈스니티는 덧붙였다. 「그리고 사기라는 얘기는 듣고 싶지 않구나. 네 조상이라는 사실을 떠나더라도 이카본은 당대에 수많은 기적을 이뤘던 사람이야. 데모닉의 재능을 가장 제대로, 능란하게 사용한 사람이기도 하고, 나 또한 그의 약속을 믿었던 사람 중 하나야. 그가 일단 약속한 이상, 목숨이라도 걸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조슈아가 빙그레 웃더니 말했다. "알았어요. 하지만 그 마법은 누가 쓰는데? 노을섬 사람들이 도와줄 리가 없을 거 아냐?" 켈스니티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사방을 다 비추기 시작한 아침 해는 유령의 몸에도 붉은 광채를 입혔다. 「그래서 이카본과 내가 노을섬으로 들어갔던 거지.」 갑자기 막시민이 무릎을 딱 치며 외쳤다. "그 얘기 들어본 것 같네? 조군, 너 기억 안 나냐? 이카본하고 친구 한 사람인가가 노을섬에 갔더라는 얘기 말이야. 그러니까 그 친구가 켈스니티라는 거고……." 더 설명하려던 막시민은 곧 말했다. "쳇, 기억 안 날 리가 없구나."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예전에 할아버지가 해 주셨던 이야기 말이지? 그런데 그 얘기에선……." 막시민이 말을 이었다. "맞다. 남쪽 바다의 루비인가, 뭐 그런 보물을 가지러 간 거 아니었던가? 그럼 얘기가 틀린데?" "그리고 내 기억으론 그때 이미 페리윙클을 정복한 후였다고……." 「역사는 윤색되기 마련이죠. 남쪽 바다의 루비라… 후세에 그렇게 전해진 이유도 알 것 같군요. 이미 페리윙클의 지배자가 된 후에 노을섬에 들어갔다고 기록된 이유도.」 136쪽 절반 결락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아가씨였어. 노을섬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였던 사람… 그녀가 바로 마법사 아나로즈 티카람이지.」 "티카람?" 이번에야말로 세 사람 다 멍해졌다. 리체가 중얼거렸다 "세 맹우 중 하나였다던 마법사 티카람이… 아가씨? 아, 물론 그럴 수도… 그런데 왜 난 지금가지 남자라고 생각했지?" "너뿐이 아냐, 나도……." 가장 놀란 사람은 조슈아였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비취반지 성에 있던 그림들 중 마법사 티카람이 그려진 것은 한 장도 없었다. 켈스니티의 모습이 있었던 계단 아래의 그림에도, 그는 없었다. 「아나로즈 티카람이 떠나면서 맹약이 깨어졌기 때문에, 그리고 또 다른 137쪽 절반 결락 「약속의 사람들은 아나로즈 티카람을 미워했어. 아나로즈가 맹약을 깨고 떠나기 전부터, 당연히 아나로즈도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리체가 물었다. "노을섬 사람이기 때문에요?" 「 그 말도 맞겠지만… 이카본과 내가 노을섬에 들어간 이야기부터 해야겠군요. 노을섬의 마법 폭풍을 헤치고 도착하긴 했지만, 환영을 기대하지만 않았습니다. 물론 도착하자마자 잡혀 갇혔지요. 그런데 밤중에 낯선 아가씨가 갇혀 있는 우리들을 찾아와서 왜 여기까지 찾아왔느냐고 묻더군요. 이카본은 솔직하게 미지의 대륙으로 보내 줄 마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 아가씨, 그러니까 아나로즈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지금도 그 모습이 기억나는군요. 아나로즈는 그런 마법이 만일 있다면 당장 노을섬 사람들부터 그 대륙으로 가지 않았겠느냐고 얘기했습니다. 노을섬은 페리윙클처럼 정복당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하면서 말이지요. 그녀는 노을섬의 지반이 봉인한 '악의 무구'를 견디지 못해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봉인이 완전히 깨어지는 것을 막으려면 노을섬 사람들이 마법을 쓰는 걸 그만둬야 하는데,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카본은 아나로즈의 말을 듣고 무척 실망했습니다. 그녀는 이카본을 위로할 마음이 났는지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옛날, 멸망하기 전에 가나폴리 땅은 무척 넓어서 급히 이동해야만 할 때는 '거울'이라고 불리는 전이문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거울 속을 통과하면 바로 다른 장소에 있는 거울로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중에는 '소원 거울'이라는 특별한 거울이 있어서, 가려는 장소에 거울이 있든 없든, 가고 싶은 그곳을 간절히 생각하기만 하면 바로 이동시켜 주는 힘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가나폴리의 마법과 멀어진 지금 그들만의 능력으로는 그런 걸 만들 수가 없지만…….」 막시민이 중얼거렸다. "쥬스피앙 마법사는 날아가는 배 말고 그런 거울이나 연구하실 것이지. 배보다 천 배는 편리한데다 빌려가서 망가뜨릴 염려도 없고." 리체가 동조했다. "연료비도 안 들고." "밑창에 물도 안 새고." "유랑 극단이라고 오해받을 일도 없고." 「가나폴리에서 만들었던 거울의 주춧돌이라도 남아 있다면, 거울을 재현해낼 수 있는 가능성도 있을 거라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우리는 문제의 주춧돌이 바로 페리윙클에 있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어린 시절 이카본과 제가 어울려 놀던 놀이터 중 하나였지만, 그런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죠. 그 이야기를 들은 아나로즈는 무척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이카본은 그녀가 흥미를 보이는 걸 알고, 직접 가서 살펴보라고 졸라댔죠. 아나로즈는 대단한 마법사였지만 역시 우리 또래였던 까닭인지 결국, 호기심에 지고 말았습니다. 주춧돌만 살펴보고 돌아오기로 하고 우리와 함께 몰래 노을섬을 빠져나왔던 거죠. 하지만 나중에 말하길 이카본은 그 때 이미 그녀를 돌려보내줄 생각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결국 페리윙클에 온 아나로즈는 이카본에게 설득되어 우리 곁에 남게 됐습니다.」 막시민이 조슈아를 돌아보며 어깨를 올려 보였다. "들을수록 너희 조상은 보통 사기꾼이 아닌 것 같단 말이야. 아니, 이건 절대로 존경의 의미로 하는 말이라고." 그러더니 이어 덧붙였다. "너도 좀 본받지 그래?" 「그렇게 맹약자가 된 아나로즈의 마법은, 마법을 모르던 티아 사람들에게 재앙이나 다름없었죠. 그녀의 힘과 오블리비언의 금전적 지원을 업고서 이카본은 강한 해군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해적단을 조직했습니다. 그때부터 페리윙클은 해적의 섬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죠. 다지고 보면 우리 맹약자들과 약속의 사람들은 다 해적이었던 셈입니다.」 리체가 혀를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켈스니티는 심지어 사제인데다가 해적이라니 보통이 아니신데요." 「칭찬 고맙군요, 아브릴 양. 어쨌든 그렇게 만들어진 해적단은 페리윙클을 보호했고, 점차 강대한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하지만 대륙의 정세를 파악하게 된 이카본은, 언젠가 대륙에 통일 국가가 탄생할 경우 해적 함대의 힘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리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럴 때는 통일되기 전에 누군가와 손을 잡아 둘 필요가 있었죠. '먼 곳과 손을 잡아 가까운 곳을 공격한다'는 옛 말이 있듯 이카본은 티아를 비롯한 남부 국가들이 아니라 좀더 먼 곳에서 동맹자를 물색하게 됩니다. 그때 눈에 들어온 나라가 북부에서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던 '켈티카'였죠.」 막시민이 말했다. "켈티카라면 수도잖아? 그럼 그 켈티카가 아노마라드의 전신?" 「그렇습니다. 자세한 동맹 이야기는 생략하고, 결국 아노마라드 건국 공작 이카본 폰 아르님이 탄생하게 된 겁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남부의 국가들은 남북으로 둘러싸인 형국이 되어 페리윙클을 더 이상 노리지 못하게 되었죠. 이렇게 섬이 안정되고 힘을 갖게 되자 약속의 사람들은 이카본에게 약속을 지킬 것을 종용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약속의 사람들과 아나로즈의 불화였죠. 약속의 사람들은 처음부터 아나로즈를 탐탁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도, 노을섬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공로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죠. 그녀는 민감한 사람이라 금방 눈치를 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는 대신 독같이 무시하기 시작해서 불화의 골은 점차 깊어갔습니다. 나중에는 누가 먼저 시비를 걸었는지 다지기가 어려울 정도로 말입니다. 소원 거울 문제는 안 그래도 심각했던 신경전을 최악의 상태까지 밀어붙여 놓았습니다. 아나로즈는 짐짓 자신이 거울을 만들려고 마음먹으면 할 수도 있지만 너희들이 좋아하는 일 따위 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일관했고, 그것 때문에 심사가 비틀어진 약속의 사람들은 더욱 그녀를 미워하게 됐으니까요. 그런 가운데, 공교롭게도 이카본과 아나로즈는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조슈아가 중얼거렸다. "…사랑에 빠졌다고? 들을수록 정말 생소한 얘기들뿐이네. 내가 알기로 이카본 공작은 다른 사람하고 결혼했는데……." "뭐? 그렇게 돼버린 거야?" 흥미를 끄는 얘기가 나와 집중하고 있던 리체는 김새는 결말을 알게 되자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옆에서 막시민이 말했다. "아까 티카람이라는 사람은 떠났다고 했는데, 뭘 기대했냐?" 「약속의 사람들로서는 이보다 더 큰 위기가 없었죠. 아나로즈가 이카본과 결혼하기라도 하면 자기들은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날 것이 뻔했으니까요. 아나로즈도 관대한 성격이 아니었으므로 쉽게 그들을 용서할 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런 사실을 다 알면서도 둘이 잘되기를 기원했습니다. 오랫동안 둘을 곁에서 지켜봤기에, 둘이 떨어져선 안 도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나 약속의 사람들은 숫자가 많았습니다. 그들이 계획적으로, 심지어 사활을 걸고 둘의 사이를 이간질하기 시작하자 저조차도 걷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소문을 퍼뜨리고 상황을 조작하기엔 사람 많은 것 만한 장점이 없으니까요. 결국 둘은 서로를 오해하게 되었고, 마음이 상한 아나로즈는 말도 없이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카본도 화가 나서 그녀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주위 사람들의 조언대로 당시 수없이 들어오던 청혼 중 하나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나로즈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었죠. 다시 만난 둘은 보는 사람이 괴로워질 정도로 싸웠습니다. 결국 아나로즈는 맹약이 깨어졌다고 선언하고 노을섬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자연히 소원 거울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되고 말았고요.」 다들 말없이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감정이입이 되어버린 리체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왜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 건지 몰라." 막시민은 다른 생각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코르네드라는 자도 마법사라고 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가나폴리의 마법과 가깝다고 엄청 떠들던데." 「둘을 비교하는 건 잔인한 일일 겁니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코르네드도 대단한 마법사지만, 아나로즈에 비할 바는 아니죠. 당시 아나로즈가 이카본을 돕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노을섬에서는 그녀를 도로 데려오려 했습니다. 그래서 마법사가 십여 명이나 찾아왔는데 코르네드는 그들 중 하나였죠. 그들은 아나로즈에게 이기지 못했고, 그때 코르네드는 아나로즈의 마법에 반해서 노을섬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았습니다. 아나로즈는 그를 가르쳐 보려 했지만, 답답해서였는지 포기해버렸지요. 어쨌든 가나폴리가 멸망한 뒤, 전성기의 가나폴리 마법사에 가장 근접했던 사람이 나나로즈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결혼했더라면 엄청난 부부가 됐겠는데요. 남편은 데모닉에, 아내는 대마법사, 상상만 해도 대단한……." 그렇게 말하던 리체는 문득 조슈아를 쳐다보고서 말을 그쳤다. 어쨌든 조슈아는 아나로즈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후손이란 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아나로즈가 떠나고서 얼마 동안 이카본은 참는 체 했지만, 끝내 본심을 숨기지 못해 결혼조차 연기하고 노을섬으로 쫓아갔죠. 처음 갓을 때는 저도 같이 갔기 때문에 기억이 잘 납니다. 그녀는 우리 중 누구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사라지고서야 뭔가 깨달은 것인지, 이카본은 당시 성을 비울만한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두 번째, 세 번째, 계속해서 찾아갔습니다. 세번째부터는 이카본 혼자 갔고 저는 비취반지 성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건이 터졌습니다. 몇 번째 갔던 때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그러니까 그때……." 셋 다 알아들었다. 켈스니티는 조슈아에게만 보이는 얼굴로 씁쓸하게 웃었다. 「네, 이카본과 아나로즈가 모두 없는 틈을 타서 정적들이 쳐들어 왔지요. 그때 제가 죽었습니다. 지금 조슈아를 따라다니는 약속의 사람들도 성을 지키며 물러서지 않다가 희생당했습니다. 그렇게 유령이 된 채로, 황급히 돌아온 이카본을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정말… 산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죠. 그때 저는 그에게 말을 걸 수 있는 힘이 없었지만…….」 죽은 자신보다, 남겨진 친구를 더 측은하게 여겼던 듯한 목소리였다. 「그 후로 이카본은 더 이상 아나로즈를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렇듯 덧없이 개어지고 만 맹약에 실망한 오블리비언도 떠나고 말았죠. 혼자 남겨진 이카본은 너무나 괴로웠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그가 그때 망가지지 않고 버텨 줘서… 참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 후로 이카본은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대륙의 마법사들을 모으는 증 무척 노력했지만, 결국 소원 거울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약속의 사람들 입장에서는 약속을 보답 받지 못한 셈이 된 거죠.」 긴 이야기를 끝낸 켈스니티는 고개를 바다로 돌렸다. 이미 해는 거기에 없었다. 한층 높이 올라 구름 속으로 들어갔지만, 하늘은 완연히 푸르러졌다. 어느새 시작된 아침이었다. 막시민이 말했다. "약속의 사람들이라는 자들, 그쯤 되면 기회를 자기들이 차버렸다고 해도 할 말 없을 것 같은데? 그런데 그 자들이 지금 이카본을 들볶다 못해 조슈아까지 들볶고 있는 거냐? 거 참 경우라고는 모르는 놈들이네." 「그들의 입장에선 충성의 대가를 받지 못한 것도 되겠지요. 긴 세월 이카본에게 충성을 바치며 수많은 일을 도왔는데, 그런 자신들을 버리고 아나로즈를 찾아갔다고, 그래서 자기들이 죽었다고 생각했을 테니 말이죠. 그렇게 실망했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이카본이 언젠가 약속을 지켜줄 거라고 믿고 도망치지 않았는데, 그것조차 이뤄지지 않았고요. 아마 그들은 아나로즈처럼 근본부터 믿을 수 없는 마법사를 쫓아낸 것도 충성의 일부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리체가 기가 막혀했다. "그랬다면 진짜 엄청난 논리네. 자기들이 무슨 폭탄 제거반이야?" 조슈아는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마음 속 세계에서 보았던 사람들, 아니 유령들을 생각했다. 그들이 자신의 세계를 보며 감탄했던 것, 그리고 그들과 함께 손을 잡고 이 세상으로 돌아왔던 일을 생각했다. 약속의 사람들 중에는 코르네드가 그렇듯 이카본을 저주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켈스니티가 그렇듯 조슈아를 아끼는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그들은 거울을 열망했다……. "켈스, 아까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했지, 그러면 지금 거울을 만들 방법이 있다는 거야?" 「아직은. 노을섬의 마법사들도 다 사라졌기 때문에 페리윙클의 주춧돌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고, 가나폴리에 남은 거울이 있는지 찾고 있어. 오래 걸리는 일이긴 하지만, 찾기만 한다면 성과는 있겠지. 하지만 그곳은 산 자에게도, 유령에게도 위험한 곳이기 때문에 수색은 아주 어려워. 내가 사제가 아니었다면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을 테지. 네가 날 불러도 오지 않던 그때, 난 아마 거기에 있었을 거야.」 "만일 수색이 실패하면?" 켈스니티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조슈아가 몸을 일으켜 앉으며 말을 이었다. "만일 필멸의 땅에서 소원 거울을 발견하지 못하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걸까? 유령들이 나를 계속 따라다닐 테니 문제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야. 그들이 내 곁을 맴도는 건 이유가 있어서잖아. 약속, 그들과 약속했던 이카본의 약속을 내게서 찾는 거잖아. 비록 나한테는 그걸 들어줄 능력이 없지만… 그들도 내게 그런 능력이 없다는 걸 이미 아는 것 같지만… 그렇더라도 나 말고 다른 누구에게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내 곁을 맴도는 것 아니겠어?" 「조슈아, 네가 그들의 소원을 들어줘야 할 당위는 없어. 너는 너고, 이카본은 이카본일 뿐이야. 옛 일로 끝났어야 할 약속이었어. 나는 그 시대의 사람이니 이야기가 다르지만 넌 나중에 태어난, 옛날의 약속이나 은원과 무관한 사람일 뿐이야. 후손이 조상이 한 일을 모두 보상해야 한다는 법은 없어.」 "하지만 그들은 이카본과 했던 약속 때문에 내게 매여 있어. 비록 실수 탓이라 해도…. 이카본에게 했던 것처럼 내게 충성해야만 하는 맹세. 그걸 내가 누리는 순간, 책임도 생기는 것 아닐까? 맹세를 한 방식이 어쩌고 하는 말은 소용없어. 근본으로 돌아가면 그들이 내게 충성하는 이상, 나는 그들의 약속을 들어줄 당위가 생기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슈아, 잊지 마. 그 약속은 네가 원해서 시작한 것이 아니야.」 "하지만 약속은 이미 존재해. 아… 나도 정확히 모르겠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소원을 들어줄 힘이 있다면, 당장에라도 들어줬을 거야. 하지만 그런 능력은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나를 보며 품고 있을 기대가 내 발목을 잡는 것만 같아." 켈스니티는 더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한참 후에야 대답이 들렸다. 「조슈아, 그만 돌아가. 이제 쉬어야 할 시간이야. 그 문제는 다음에, 마음을 좀더 가라앉힌 뒤에 잘 생각해 보도록 하자. 지금은 더 이야기해도 소용없을 것 같구나.」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허공을 보던 조슈아가 일어서는 것을 본 리체는 켈스니티가 갔을 거라고 생각하며 따라 일어섰다. 그런데 막시민이 일어나지 않았다. "너 뭐해?" 리체가 묻자 막시민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저 자식 때문에 다리에 쥐났다." 잠시 후, 일행은 바닷가를 떠나 마일스톤 혼자 자고 잇을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막시민의 다리는 금방 멀쩡해졌지만, 이번에는 조슈아가 허리를 짚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도대체 왜 이렇게 허리가 아프지?" 막시민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쁜 짓을 하면 본래 허리가 아파." "그런데 막군, 손에 들고 있는 건 뭐야?" "평범한 쟁기 자루야, 끝에 쟁기 날을 붙여서 밭을 갈 때 쓰는 거지." 리체가 혀를 쏙 내밀며 물었다. "혹시 무릎은 안 아파?" "무릎도 쑤셔 죽겠어." 10막. Secret 1. 지스카르 드 나탕송 "책을 읽는데 어느 페이지에 아무 것도 씌어 있지 않은 거야. 새로 구할 데도 없는 책이라서, 그냥 빈 페이지에 나뭇잎을 한 개 꽂아뒀지.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서재 책장에 꽂아둔 책 사이로 덩굴이 기어 나오는 것 아니겠어? 책을 뽑으려 했더니 쉽게 나오지도 않더라고. 억지로 꺼내어 펼쳐 보니까 덩굴은 책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었어. 난 급히 다른 페이지로 넘겨봤어. 이니 그 책 어디에도 글자는 없더군." "그래서 그 책, 어떻게 했지?" "난 무서워져서 책을 도로 꽂아버리고 저런 것은 없다. 덩굴따윈 없다고 세뇌를 했어. 그렇게 며칠이 지나 다시 서재에 가 보니 구렁이처럼 비대해진 덩굴이 서재 바닥에 몸을 뒤틀고 있는 거야. 이미 서재의 모든 책은 백지로 변한 후였지." "그래서 어떻게 했니?" "어떻게 했느냐고? 덩굴 잎을 뜯어서 샐러드를 만들어 먹었네, 곧 포도라도 열릴 것 같은데 자네 책 좀 빌려주지 않겠나?" 차를 끓이는 냄새가 났다. 세 걸음 남짓한 좁은 방에 긴 창이 나 있었다. 모슬린 커튼이 걷어 올려져 있어. 장미 덩굴이 타고 오르는 돌담이 잘 보였다. 돌담 꼭대기가 기울기 시작한 햇빛으로 물들자, 꼭대기의 장비들은 검은 윤곽이 되었다. 그 너머로 금색 벌판이 저무는 중이었다. 북부인 탓도 있었지만, 산으로 둘러싸인 로사 알브의 해는 유난히 빨리 떨어졌다. 란지에가 앉은 의자는 7년 전쯤에 유행했던 붉은 격자누비 의자였다. 그 시절 아노마라드 북부와 오를란드에서는 교차점에 진주를 박은 격자 벽지를 바르고 이런 의자를 늘어놓은 살롱을 경쟁적으로 꾸며 사람들을 초대하곤 했다. 수정 체스 세트도 인기였고, 상아와 조개껍질로 장식된 쥘부채와 비단 향낭을 갖추지 않으면 살롱의 대화에 낄 수 없던 때이기도 했다. 다 지난 이야기일 뿐, 그 시절, 이런 것들을 지키지 않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떠들던 사람들은 어느새 다 잊고 다른 유행을 쫓고 있을 것이다. 이제 그런 것을 알 필요가 없게 된 그의 기억에나 선명하게 남은 풍경일 뿐이었다. 두 사람이 마주하기에도 작을 것 같은 테이블이 앞에 있었다. 란지에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괸 채 창밖을 보다가 이윽고 맞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책이라도 몇 권 꽂혀 있을 법한 장식장에는 태엽 인형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눈에 띄었던 인형이었다. 창밖으로 잠시 시선을 돌렸지만, 결국 다시 인형에게 되돌아왔다. 사실 방안에 볼 것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반시간이나 기다리고 있는 만큼 책이 있었다면 하다못해 요리책이라 해도 즐겁게 읽었을 텐데, 있는 거라곤 소녀들의 장난감 같은 태엽인형뿐이었다. 푸른 꽃무늬 치마와 조그맣게 부푼 소매가 달린 블라우스, 방울이 달린 케이프를 두르고 하얀 보닛을 쓴 소녀는 한 손과 한 발을 올린 채 멈춰 있었다. 태엽을 감으면 춤을 추는 인형일 것이다. 인형은 무척 어색한 자세여서, 태엽을 조금 감아 자연스럽게 될 수 있다면 그렇게 해 주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지만, 결국 태엽을 감진 않았다. 그가 손댈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한때 이곳에 머문 일이 있다 해도 오늘 그는 손님이었다. 다시 인형을 보자 자신이 창밖을 보며 조금 길다싶게 보낸 시간 동안, 인형은 속절없이 팔과 다리를 들고 그렇게 서 있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한번도 인형을 갖고 논 일이 없는 란지에였지만, 문득 마음이 움직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인형의 태엽을 돌렸다. 반 바퀴 정도면 될까. 드르륵대는 소리가 멎고, 인형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태엽에서 손을 떼는 순간, 맑은 왈츠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란지에는 흠칫 놀라 인형을 바라봤다. 왈츠보다 한 박자 늦게, 인형이 팔을 올리고, 다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춤이라기보다는 체조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오르골일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건, 인형을 갖고 논 기억이 없는 그다운 일이었다. 그러나 빈 방에 오르골 소리가 또렷하게 울리자 그는 불편해졌다. 손님답지 못한 행동이다 싶어서였을까, 아니, 그보다 다른 무언가가 그를 불편하게 했다. "함께 기다릴 친구를 두길 잘했군, 로젠크란츠군." 문을 열고 들어온 중년 남자의 손에는 따끈하게 데운 찻잔이 들려 있었다. 란지에는 무심코 얼굴을 붉혔다. "기다리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더군요." "일부러 그렇게 한 게야. 책이라도 한 권 뒀더라면 그걸 읽느라고, 힘들게 서 있는 소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을 게 아닌가." 마흔을 훌쩍 넘긴 남자였다. 마흔 줄이라고 해도 외양만으로는 서른 후반 정도로 보였다. 젊어 보인다고 미남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두드러진 광대뼈에 비해 뺨이 얇았고, 턱은 길며 입술은 또렷하지 않았다. 다만 눈은 매력이 있었다. 우아한 아몬드 모양의 눈은 깊었고, 아이들보다 더 맑게 반짝거렸다. 약간 처진 눈매조차 장점으로 보일 정도였다. 남자는 한 손에 하나씩 들고 온 것처럼 테이블에 내려놓고 밖에 나가 찻주전자를 가져왔다. 란지에는 곧 평정을 되찾고 미소지었다. "말이 없는 소녀였죠." "대신 노래하지, 말보다 좋은 위로가 돼." 툭, 하고 태엽이 걸리는 소리와 함께 왈츠가 그쳤다. 이제 소녀는 팔다리를 내리고 비교적 자연스런 자세로 서 있었다. "이런 인형이 어디서 나셨나요?" "내가 만들었어." "직접 만드셨다고요?" 란지에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자 남자는 웃었다. "딸이 일곱 살이 됐을 때 주려고 만들었지." "그런데 왜 주시지 않았습니까?" "아니, 줬어.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손에 있군 그래." "제가 여기 있던 시절엔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글쎄 말일세 도대체 어디에 있다가 나왔을까." "요정이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닐까요." 남자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점잖게 대답했다. "우리 집안엔 수호 요정이 있지, 오래 전에 조상과 결혼했다는 호수의 요정인데, 성격이 이상해서 집나갔다가 돌아온 막돼먹은 자손만 보호한다고 하더군." "넘치도록 보호받고 계시겠군요." 잠시 후 둘의 웃음소리가 찻잔에서 오르는 김과 섞여 창밖으로 날아갔다. 창밖에선 해질 녘이라 진해진 장미향이 물씬 스며들었다. 지스카르 드 나탕송 백작, 그것이 남자의 이름이었다. 아노마라드 왕국과 국경을 맞댄 로사 알브의 여섯 영지를 대표하는 대영주이자 오를란느 대공의 육촌이라는 막강한 배경을 갖고 잇자만, 아노마라드에도, 오를란느에도 그의 얼굴을 아는 귀족은 드물었다. 그는 둘째여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영주는 형이었고, 그는 영지를 떠나 아노마라드 전역을 떠돌며 살았다. 형과 형의 하나뿐이던 아들이 동시에 죽는 일이 없었다면 지금도 마찬가지로 생활하고 있을 터였다. 지스카르가 아노마라드를 떠돌며 무슨 일을 했는지 가문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만일 알려졌다면 그에게 작위를 주기 전에 좀더 고민해야 했을 것이다. 아직 소수에 불과해서 집요한 추적을 받고 있진 않지만, 오를란느에서도 공화파는 검거 대상이었다. 무엇보다도 지스카르가 아노마라드 전역에서 발굴하여 민중 클럽의 '망명 의회'로 보낸 인재들이 벌인 일들이 알려졌다면, 아노마라드 왕가가 직접 나서서 오를란느 대공에게 로사 알브의 대영주를 소환해 달라고 요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지스카르 드 나탕송은 여전히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정체불명의 대영주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망명 의회의 조직화 분과 수석 자문 위원, 그리고 교육분과 고문이기도 한 요주의 인물로서 말이다. 본의 아니게 대영주가 된 후에도 지스카르 드 나탕송은 귀족들이 모이는 자리에 잘 가지 않았다. 성년이 된 딸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본성에 앉혀 놓고, 그 자신은 영지 구석의 별장에서 살 정도였다. 그는 아예 작위도 물려주고 싶어했지만 주위에서도 반대했고, 달도 멀쩡히 살아 있는 아버지를 두고 백작이 되어 눈총을 받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름뿐인 백작이자 대영주로 정체불명의 하인 몇을 거느리고, 오늘도 수도 오를리에서 온 파티 초대장에 정중한 거절 편지나 쓰면서 한가롭게 살고 있었다. 그렇게 사는 것처럼 보였다. "창을 닫을까요?" "아니, 아무도 없네. 알다시피 마법이 걸린 담을 넘어올 자도 없을 테고, 학생들은 아랫마을로 심부름 보냈어. 두어 시간 정도 있어야 돌아올 거야. 오랜만에 장미향이라도 좀 맡게나." 백작인 그가 직접 찻잔을 들고 다니는 모습을 누가 보았다면 무척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스카르는 여행하던 시절의 버릇이 남아, 남의 손을 잘 빌리지 않았다. 그래서 시중드는 사람이 없어도 전혀 불편해하지 않았다. "학생이 두 사람이던가요?" "하나는 곧 나갈 걸세, 망명 의회에서 그 얘길 듣더니 내가 한가해질까봐 걱정되는지 곧 한 명 더 보내겠다고 하더군." 란지에는 잠시 후 미소를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반년은 안됐지, 아마. 자주 올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지스카르의 목소리에 엹은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 어조를 듣자 이 집에서 지내던 시절의 기분이 되살아났다. 맞은편 의자에는 손이 타서 닳은 방패와 밀 이삭 문장이 수놓아져 있었다. 로사 알브와 나탕송 백작가문의 결속을 상징하는 문장이다. 란지에가 앉아 있는 의자에도 같은 문장이 수놓아져 있을 터였다. 녹색 테이블보가 씌워진 차 테이블, 구슬이 몇 개 빠진 거실 샹들리에, 조금쯤 방치된 담벼락의 장미 덩굴, 한재는 몹시 익숙했던 것들이었다. 동시에 아주 오래된 일처럼 느껴졌다. 시시각각 벌어지는 사건들 속에 자신을 맡긴 해 지내다보면, 하루하루가 빠르게 가는 것만큼 과거도 바르게 멀어져갔다. "새로운 소식은 없습니까?" "늘 거절하고 있는데도 어찌된 셈인지 점점 더 많은 초대장이 온다는 것을 제외하면 별 것 없다네." 아노마라드를 떠돌던 시절, 지스카르는 전혀 기반이 없는 곳에서 공화 정신의 맹아(萌芽)가 될 인재를 추출하고, 그를 중심으로 조직의 실을 짜내어 마침내 자립 가능한 소조(小組)를 건설하는 데 귀재였다. 민중 클럽에 몸담은 사람이라면 젊은 공화파의 근간을 양성한 전설적인 조직위원의 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의 정체가 지스카르 드 나탕송 백작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할 뿐이다. 형이었던 로사 알브의 대영주가 죽고 자리를 물려받게 되자, 지스카르는 표면적으로 요직에서 은퇴했다. 그러나 망명 의회에서는 여전히 그에게 젊은이들을 보냈고, 그는 난처해하면서도 기꺼이 그들의 우견인 역할을 떠맡았다. 오를란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영주인 그의 별장은, 민중 클럽에 새로 입문하는 젊은이들을 데려와 수련시키고 내보내는 요람이기도 했다. 민중 클럽에 입문하는 젊은이들은 파란만장한 유년기를 보낸 경우가 많았고 여전히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어서, 그들을 가르치고 이끄는 것은 몹시 까다로운 일이었다. "차 들게, 떠나 있으니 내 차 맛이 그립지 않았나?" 어떤 차든지 맛있게 우려내는 건 지스카르의 재능 중 하나였는데, 스스로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종종 그걸 '유일하게 쓸모 있는 재능'이라고 불렀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곧이듣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란지에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입술을 떼며 말했다. "전 맛없는 차도 잘 마시잖습니까."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는 오히려 입에 발린 칭찬도 하지 않는 성미라는 것을 지스카르도 알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예전에 하일저가 끓인 차도 잘 마셨지." 란지에는 입사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일저는 잘 있습니다. 지스카르가 보내준 책도 요즘은 다 읽지요." 다른 사람이 있는 자리였다면 란지에도 로시 알브의 대영주를 이름으로 부르는 일은 하지 않았을 터였다. 지스카르의 딸도 란지에보다 열 살은 더 많았다. 그러나 이렇게 부르도록 허락한 사람은 지스카르였다. 란지에가 그의 집을 떠날 때. "그만한 변화라니 대단해, 자네가 내 대신 여기서 지내는 쪽이 낫겠는걸." "지스카르가 하는 일을 아무나 대신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은 저일 겁니다." "아니, 자네도 그런 사람이야." 지스카르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자네가 지나치게 주목을 받아서 요즘 조금 걱정이네." 란지에는 눈을 내리깔았다. "사람이 부족할 뿐이지요. 늘 그랬듯이." "자네 같은 사람이라면 언제나 부족하지. 아마 언제까지나 부족할 걸세." 지스카르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보았다. "너무 부족해서, 어깨가 다 자라기도 전에 수레를 끌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란지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일상적인 걱정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이지만 지스카르의 입에서 나왔을 때는 무게가 달랐다. 그러나 란지에는 그런 이야기에 섣불리 동의해서도, 그렇다고 개인적인 반론을 제기해서도 안 되는 자리에 있었다. 지스카르는 란지에를 '민중의 벗'으로 이끈 사상적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이지만, 그런 사실도 란지에의 신중한 침묵을 깨뜨릴 수 없었다. 지스카르도 란지에가 대답하지 않는 까닭을 알고 있었다. 그가 아끼던 학생은 전부터 분별이 있었고, 좀더 자란 지금은 더욱 그랬다. 그것이 훌륭한 재능임을 알고 있는데도, 지스카르는 가끔 란지에의 그런 태도에 아쉬움을 느꼈다. 란지에가 지스카르의 기분을 알아챈 것처럼 말했다. "더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주셔야지요." "로젠크란츠군, 알지 않나. 난 산파에 불과하다는 걸. 어떤 아이가 태어날지는 매번 모른다네, 때로는 사람 대신 닭이나 토끼가 나오기도 하더군." 이번엔 란지에도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마주보며 소리내어 웃었다. 웃음이 잦아들자 지스카르는 란지에의 잔에 차를 더 따라주며 말했다. "일각에서 자네를 '푸른 장미'라고 부른다고 들었어.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게 됐다고 한다나, 과분하다는 이야기만 빼고, 자네 생각을 얘기해 보게." "피지도 않았는데 색깔을 논하는 것은 시기상조입니다." 즉시 대답이 나왔다. 지스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라면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지." '푸른 장미'는, 표면적으로 그로메 학원에 다니는 란지에의 존재가 신중하게 감춰져 있는 까닭에 아직 널리 알려진 별명은 아니었다. 그러나 은밀한 줄기 조직으로 구성된 민중 클럽에도 소문이라는 것은 있었다. 아직 실체를 보지 못한 회원들 사이에서, 심지어 지스카르의 집에서 지내는 젊은이의 입에서도 '푸른 장미'라는 별명이 나오는 것을 들은 지스카르는 내심 우려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그 별명이 왕국 8군(민중의 벗을 추적하는 국왕 직속 군대)의 귀에 들어가는 것도 시간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자네의 머리 색깔 말인데……." 란지에에게 '푸른 장미'라는 별명이 더없이 어울릴 것도,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만 거론하고 싶은 별명이 된 것도, 근본을 따지고 보면 외모 탓이었다. 란지에는 구구한 질문 없이 바로 말했다. "무슨 색이 좋을까요?" "평범한 빛일수록 좋겠지. 갈색이라거나, 블론드라거나." "마법으로 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 "준비해 놓았으니 조금 후에 하도록 하세나." 그로메 학원도 지금은 방학이니 시기가 적절했다. 오래 전 란지에를 가르쳤던 신중한 선생은 먼 곳에 살고 있으면서 작은 일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지스카르는 차를 마시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그 외모가 큰 걸림돌이야, 사람의 뇌리에 너무 오래 남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너무 망설임 없는 대답이라 지스카르는 문득 웃고 말았다. 그런데 란지에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화상 정도면 어떨까 생각하는 중입니다." 지스카르는 눈을 약간 크게 떴다. "농담이겠지?" "이엔 말로도 흉터 정조로는 안 될 것 같다는군요. 얼굴 전체에 약한 화상 정도면 인상을 흐리기에 적당할 것 같습니다." 지스카르는 당황해서 란지에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대륙을 떠돌며 수많은 사람을 만났던 그였지만, 눈앞의 이 소년처럼 인상적인 외모는 본 일이 없었다. 지스카르는 사상가였지만, 마음만은 예술가에 가까운 사람이기도 했다. 심미적 관점에서라면 결코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란지에는 심미적 관점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다. 지스카르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었다. 그렇기에 이 소년을 아끼면서도, 지스카르는 그와 자신의 길이 갈라질 것을 일지감치 염두에 두고 있었다. "너무 위험해." "위험하지 않습니다. 마법으로 만든 불은, 온도를 조절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란즈미가 슬퍼할 거야." "이해할 겁니다. 그 애는 보기보다 많은 걸 이해하지요." 가끔은 어떻게 자랐기에 저런 소년이 되는지 두렵기도 했다. 지스카르를 존경하고 따르면서도, 란지에는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자세히 한 일이 없었다. 다른 학생들이 마음이 열릴 즈음 으레 풀어놓는 하소연조차도 하지 않았다. 란지에에게 미(美)는 생존 수단이었지만 동시에 고통이었다. 그가 겪었던 일들 중 많은 것은 그 미가 없었다면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들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껏 살아남아 이 자리에 오도록 해줬다는 관점으로만 타고난 미를 받아들였다. 이 자리에 왔으니, 이제는 필요 없었다. 심지어 걸림돌이었다. "오늘 일부러 여기까지 온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뵙고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낫는데 걸리는 시간 때문에 이번 일이 끝난 뒤로 미뤄야겠지만, 때가 성해지면 도와주시지요. 요양을 하기엔 지스카르의 집이 적격이니 말입니다. 저도 모처럼 좀 쉬고요." 그렇게 말하며 란지에는 심지어 미소를 보였다. 지스카르는 한참 동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모처럼 쉬는 것은 좋지만……." 입을 열며 지스카르는 서서히 마음을 굳혔다. 심미안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받아들일 란지에도 아니었다. 지스카르가 알지 못하는 과거의 영향인지, 란지에는 탐미적인 인간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경멸하지 않으려 애쓸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마음속에서, 이것은 불합리하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지스카르는 전부터 공화의 이상보다 인간의 이상을 앞세우는 것 때문에 망명 의회에서 종종 비판을 받곤 했다. 그로 그런 자신을 가끔 회의적으로 생각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순간만은 인간의 마음을 가진 자신에게 확신을 가졌다. 행복해지기 위해 공화국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희생이 동반되는 것을 알고 있고, 다 막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의 손이 닿는 것은 막으려 노력하는 것이, 사람을 사랑해서 시작된 공화주의자의 마음이 아닌가. "로젠크란츠군, 자네는 공화국이 세워진 이후를 생각해 보았나? 그게 아주 먼 미래라고 생각하나? 그건 멀 수도 있지만, 생각보다 가까울 수도 있어. 그때를 생각해 보게. 그때도 자네의 외모가 걸림돌이 될까?" "……." 란지에는 일단 듣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바꿀 준비가 된 것 같지도 않았다.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큰 자산이 될 걸세, 자네만을 위해 하는 말이 아니야. 공화국을 위해 자네가 할 수 있는 일, 그 일을 하기 위해 쉽사리 얻기 힘든 장점이 될 거라는 말이네, 외모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때로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고, 어느 순간에는 흔들리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마지막 지렛대가 되기도 하지. 그런 점에서 자네는 한 가지 중대한 재능을 갖고 있는 거야. 그런 것을 함부로 버리지 말게. 자네가 공화국의 사람이라면 그건 공화국의 자산이기도 하니까." 분명 은밀한 활동에는 맞지 않는 얼굴일 터였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게 되면 외모는 아주 큰 무형의 자산이었다. 란지에는 굳이 부인하지 않고 조용히 차를 마셨다. 어떤 것이든 그가 가진 것을 활용할 수 있다면, 그래서 신념을 위한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거리낄 것은 없었다, 그는 한참 만에 답했다. "알겠습니다. 조금 더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결정하기 전에 나와 의논하는 것을 잊지 말게." "그러겠습니다." 지스카르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태양이 장미 덩굴 꼭대기에 마지막으로 걸려 있었다. 검은 장미의 가려진 절반은 흡사 황금일 듯 빛났다. 란지에도 창 쪽을 보았다. 지스카르보다 조금 더 오래 지켜보고 있었다. "요즘 바빠졌다고 하던데." 란지에의 길지 않은 인생에서 지스카르의 집에서 지내던 시절만큼 안정되었던 시기는 없었다. 그랬기에 오히려 한시도 쉬지 않고 무언가를 했던 기억이었다. 그 몇 개월 동안 날씨가 바뀌는 것도, 계절이 흐르는 것도 몰랐다. 숨쉬는 시간조차 아끼려는 것처럼 밤늦게까지 책을 읽었고 이야기를 했다. 격론이 벌어지면 밤을 세우고도 모자라 이튿날 낮까지 이어졌다. 식사하는 것조차 둘 다 잊어버렸다. 한 번은 그렇게 밤을 세우고 점심시간이 지나도록 토론하다가, 목과 입이 바싹 말라 말이 더 나오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그때가 그립진 않고?" "좋은 때였죠. 지스카르, 하지만 돌아가고 싶진 않습니다." 지스카르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얼버무리지 않고 또렷하게 말하는 소년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소년이 뒤를 돌아보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동생은 어떤가?" 란지에의 얼굴이 언뜻 부드러워지는 듯했다. "덕택에 잘 지냅니다." "많이 좋아졌다고 들었네, 하지만 조금 위험하지 않은가 걱정이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만, 다른 선택이 없으니까요." 란즈미를 지스카르에게 맡길 수 있다면 더없이 안전할 테지만 란지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란즈미는 지금도 종종 오빠가 와야만 편히 잠드는 날이 있었다. 만일 란지에가 소식을 일찍 받지 못하고 하루 이틀 지체하게 되면 그동안 잠을 자지도, 음식을 먹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멀리 오를란느까지 보낼 수는 없었다. "알고 있겠지만 내 집에는 언제나 자리가 있네."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합니다." 그 이상의 대답이 나오리란 생각은 어차피 하지 않았다. 이윽고 지스카르는 비어버린 찻잔을 밀어놓으며 자세를 고쳤다. "테오스티드 다 모로라는 자, 만나보니 어떻던가?" 란지에도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곳에 온 용건의 시작이었다. "영리한 사람이더군요. 그렇게 영리하기 때문에 현실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자네도 짐작한 바였겠지. 하지만 사람은 변해, 그가 변할 수 있을 것 같던가?" 란지에는 이엔과 하일저에게 말한 것과는 조금 다르게 말했다. "가능성은 있습니다만, 겨울 흙에 묻힌 씨앗 정도입니다." "흙을 녹일 열이 있을까?" "집착이 해소되어야 할 겁니다. 동시에 소득이 없어야겠죠. 그는 권리를 누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욕심이 조금 적거나, 태생적 한계가 없었다면 그는 변화될 가능성이 전혀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현 아노마라드에서 그의 한계와 욕심이 화해할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그는 아직 가능하리라고 믿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위험한 씨앗이로군." "발아하지 않는 편이 나을 지도 모릅니다." "로젠크란츠군, 그건 지나친 실용주의네, 우리는 단 한 사람이라도 잠에서 깨어나길 바라야 해. 작금의 편의로 사람을 선택하려 해선 안 돼. 씨앗이 있다면 물을 주고, 알은 품어야지. 가끔 닭이 태어나더라도." 이번에는 둘 다 웃지 않았다. 지스카르는 란지에가 그의 곁에 있을 때와는 달리 집요하게 반론을 제기하며 달려들지 않는 것이 조금 쓸쓸했다. 이제 란지에는 지스카르의 학생이 아니라 의회의 명령을 받는 위원장이었고, 그 자격에 맞는 행동을 해야 옳았다, "모로의 집착이란 건 뭐지?" "첫 번째는 그의 아들입니다." 란지에는 테오를 만나기 전부터 여러 가지 자료를 수집해 왔다. 테오와 이브노아의 관계에 대해서도 대부분 알고 있었다. "그는 아들이 자라 자신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그걸 막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와 손잡는 도박까지 감행한 것이겠죠. 그는 이 일이 드러났을 때, 그가 우리를 속여 이용한 것이라는 증거를 마련하는 일에도 열심입니다. 그걸 위해 팔아치울 이름을 찾고 있죠. 그렇다면 그걸 마련해주는 것도 이쪽에서 할 일이겠지요." "그래서?" "토노크 자작을 소개해 줬습니다." 지스카르는 습관적으로 빈 잔을 들어올리려다가 멈칫하고는, 말했다. "그럴 듯한 설명이 필요했겠군." "서로 상대가 자기보다 오랫동안 몸담았고, 따라서 상대에게 정보를 캐내겠다고 생각할 겁니다. 동시에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클럽에 충실한 모습을 보이려 애쓰겠지요. 만일 일이 잘못되어 한쪽이 고발한다면, 다른 하나도 지지 않고 모아둔 증거를 다 꺼낼 겁니다." 그러면 그들끼리 물어뜯다가 자멸하는 것으로 상황은 일단락된다…. 민중 클럽의 조직이 갖고 있는 특징을 십분 활용한 전략이었다. 발각된다 해도 한 귀퉁이가 허물어지는 것으로 끝난다는 것, 그것 없이는 왕국 8군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지금가지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지스카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두 번째는?" "그의 처남, 소공작입니다." "조슈아 폰 아르님?" 지스카르는 자신이 말한 이름을 입속으로 되씹어보는 듯했다. 란지에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도 그러고 있었다. "테오스티드 다 모로가 소공작을 싫어할 이유는 많습니다. 소공작의 탄생부터가 모로가 그리던 미래를 망치는 일이었으니까요. 줄의 접점이었던 누이는 죽었고, 죽은 까닭부터가 소공작 때문이었으니 만큼 둘의 사이에 한 조각의 우애라도 남아 있길 기대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뿐이라면 모로가 공작 가를 차지하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입니다. 그럴 계획에 착수한 지금은, 이미 안중에 없는 존재가 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모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는 소공작을 매우 의식하고 있고, 피해의식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지스카르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자네는 나름대로 답을 갖고 있는 것 같군, 내가 자네만큼 자료를 수집하지 못했으니, 자네의 답에 반론을 제기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지적하고 싶은 점은 있군." "무엇입니까?" "로젠크란츠군, 자네는 공화국이 무너지던 때를 기억하나?" 아노마라드 력 985년, 그 해 란지에는 열한 살이었다. 정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란지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무너지는 공화국을 보며, 공화국이 무엇인지 배웠지요." "그때 켈티카에 있었나?" "그랬지요." "무너지는 공화국을 보며… 슬픔을 느낄 수 있었나?" 쉽사리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 공화국은 짧게 생존한 만큼, 대부분의 사람은 본질을 이해할 시간이 부족했다. 따라서 당시 켈티카에 살았다 해도, 슬픔을 느낄 겨를도 없었기가 쉬웠다. "네." 란지에의 대답은 짧았다. 짧은 대답 안에 형언하기 힘든 감정이 함축되어 있었으나, 다른 사람이 모두 알아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스카르는 믿을 수 없다고 일축하는 대신 팔을 가볍게 벌렸다. "그래, 그랬다면 내 이야기를 이해하기 쉬울 거야. 자네도 공부를 해서 알고 있겠지만, 당시 체첼 타고르크에게는 두 팔이 있었지. 폰티나와 아르님, 폰티나가 오른팔인 것을 말할 나위 없이 당연했지만, 조금 약한 왼팔 아르님의 존재는 특이했어." 체첼 타고르크는 체첼 국왕이 '체첼 다 아노마라드'로 이름을 바꾸기 전에 가졌던 이름이었다. 폰티나 공작의 이름 없는 차남으로 시작해서 마침내 공화국을 뒤엎고 왕위까지 거머쥔 체첼 타고르크, 그 체첼에게 군대를 쥐어주고 데뷔할 전쟁터까지 짜 준 자가 폰티나 공작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체첼 국왕의 인기를 결정적인 것으로 만든 것은 뭐니뭐니해도 켈티카 공략전이었고, 그는 신묘할 정도로 시기적절하게, 그리고 공화정부의 약점을 찌르는 효율적인 전투를 수행하여 완전한 승리를 일구었다. 공화국 내부에서 내응하는 자가 없었다면 불가능할 일이었다. "아르님은 귀족치고는 특이할 정도로 시민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네, 공화 정부가 십 년이나 고민하고도 끝내 살려뒀을 정도지. 그런데 세상이 바뀌자 그는 놀라울 정도로 능란하게 체첼과 폰티나의 파이에 뛰어들어 그럴 듯한 조각을 잘라 갔지. 아르님의 인품이나 평소 행적을 아는 사람들은 무척 놀랐어. 국왕파와 손을 잡아서 실망했다기보다는, 정말로 놀란 거야. 그가 그렇게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아무도 몰랐던 거지. 그는 공화국이 장악한 켈티카에서 십 년간이나 허깨비로 살아오고도, 결정적인 순간 체첼과 폰티나의 손을 동등하게 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거야. 게다가 아무도 그걸 예상하지 못했고 말이지. 어떻게 그런 능력을, 그렇게 잘 숨길 수가 있었을까? 사람들은 폰티나가 정치력의 화신이라고 말하지만, 이 상황만 놓고 본다면 그 판단의 대상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네." 란지에는 신중하게 듣고 있다가 대답했다. "저는 아르님 공작이 어째서 그 후로 그 정도의 행보를 보이지 않는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답은 하나 아닐까? 그 구상을 짠 자는 아르님 본인이 아니라는 것." "다른 참모가 입안한 것이라는 말씀인가요? 하지만 그런 참모가 있다면 그 후로도 발 빠른 행보를 보였을 겁니다. 문제의 참모가 갑자기 더나버린 것이 아니라면." "갑자기 떠나버렸을 수도 있지." "그런 사람의 존재는 아직 포착된 바가 없습니다." "아르님 가문에는 특이한 전통이 있지?" 란지에는 지스카르가 하려는 말을 알아들었다. 그러나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가정이었다. 란지에는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이윽고 뜨며 말했다. "확실히 소공작은 그 시기에 켈티카를 더나 하이아칸으로 가버렸습니다. 또한 데모닉의 정체나, 능력의 한계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그러나 말씀대로라면 소공작은 그 구상을 고작 아홉 살이나 열 살에 해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비록 자신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었지만 지스카르도 동의했다. "믿기 힘든 일이긴 해." "하지만, 반드시 아니라고 할 수만도 없겠군요." 란지에는 다시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지스카르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다 이 믿기 힘든 가정에 여러 가지 잣대를 대어보며 가능성을 재는 중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 지스카르가 먼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래도 너무 심한 가정이었던 것 같군. 이 문제는 일단 생각하 172, 173쪽 결락 "경계합니다. 그러나 부인하진 않습니다." 지스카르는 빛깔이 거의 없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가, 말했다. "자네는 아홉 살의 어린아이가 위기에 처한 아버지를 위해 짜낸 계략을, 단지 분노로만 대할 수 있는가?" 란지에는 즉시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지스카르가 다시 눈을 뜰때까지 그랬다. 둘의 눈이 마주치자 란지에가 천천히 말했다. "지스카르, 그래서 당신을 존경합니다만, 당신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소수일 거란 점만은 장담할 수 있습니다." "소수이냐 다수이냐로 의견의 가치가 정해지진 않네. 우리는 왕국을 지지하는 자들에 비해 언제나 소수였어. 하지만 우리는 우리 의견의 가치를 믿지 않는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번 일만은 효율이 좀더 나은 선택이라고 봅니다. 당장 소공작에게 암살자라도 보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때 아홉 살이었고 이제는 열일곱 살이 된 그를 왕국과 공화국을 이룰 한 사람으로 여기면서, 동시에 숨어 있는 위협으로 여겨 경계해야 할 겁니다. "경계하게, 그러나 그는 나라나 무리가 아니라 한 사람이며, 한 사람은 설득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나." 란지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가정이 사실로 밝혀지지도 않았고, 진위 가능성도 낮은 이상 이 이야기는 여기서 일단락되는 쪽이 좋았다. "저 또한 지난 일에 대한 복수에 큰 의미를 두진 않습니다. 그 일의 처리는 망명 의회의 여론이 결정할 문제이며, 그 여론을 따르는 것이 내부 결속에 도움이 될 거란 점만은 확실하지만 말입니다. 그 일이야 어쨌든, 이미 소공작에겐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니까요." 화제를 바꾸긴 했지만, 지스카르도 란지에가 설득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쩌면 지스카르의 의견은 지스카르처럼 학생들을 이상적으로 가르쳐야 하는 사람에게 어울릴 뿐, 활동가가 되어야 하는 란지에에게는 맞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스카르도 현실에서 완전히 발을 뗀 이상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바뀐 화제에 적절히 관심을 보였다. "많은 일이라면?" "나이트워크의 도움으로 몇 가지 알아보았습니다. 먼저, 모로가 소공작에게 어떤 식으로든 손을 쓴 것 같습니다. 일전에 직접 만났을 때 그는 소공작을 쉽사리 다룰 수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모로는 친구라고 하는 마법사를 데리고 있었는데, 그를 통해 일종의 정신 지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지스카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신 지배는 간단한 일이 아니지, 확신할 만한 증거라도?" "소공작의 일상에서는 마땅한 증거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아주 평이한 모양입니다. 다만, 그렇게 평화롭다는 것이 오히려 묘하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확신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다른 근거가 있는 모야이군." "소공작은 올해 3월 무렵까지 하이아칸 남부의 한 섬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소공작의 행적을 추적하다가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란지에는 사이를 두고 말을 이었다. "그곳에서 가면을 쓴 배우로 유명했던 '막스 카르디'가 실은, 소공작의 다른 모습이었더군요." 비록 오를란느에서 까마득히 먼 하이아칸의 일이었지만, 예술에 관심이 많은 지스카르는 막스 카르디의 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다. 물론 하이아칸에서 유명하면 전 대륙의 귀족들 사이에 소문이 나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지스카르는 놀라며 말했다. "막스 카르디라고? 소공작에게 그런 재능까지 있었단 말인가?" 란지에는 그 사실에는 그리 감명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가 하려는 말은 지금부터였다. "나이트워커가 조사한 극장주의 말에 따르면, 막스 카르디는 공연 중 화재가 일어나 행방불명이 됐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그런 식으로 배우로서의 생활을 마감하고, 켈티카로 돌아간 것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자료를 조합해보니 그 이상의 뭔가가 있었습니다. 이 일에는 어떤 중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정신 지배에 대한 이야기인가?" 란지에는 찻잔 손잡이를 매만지며 잠시 생각했다. 근거가 뚜렷한 판단과, 자신의 상상력을 구별짓는 중이었다. "막스 카르디는 공연을 하던 도중에 행방불명되었습니다. 극장주는 소공작과 막스 카르디가 동일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다른 사람이 대신 공연을 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공연 날자가 5월 20일이라는 것 또한 명확합니다. 그런데 그 시각에 켈티카의 성에는 이미 소공작 조슈아가 돌아와 있었습니다. 지스카르의 눈에 믿을 수 없다는 빛이 떠올랐다. 란지에도 아직은 결론내리지 못한 문제였다. 그러나 그가 수집한 정보만은 거짓이 아니었다. 한지에는 눈을 내리깔았다가, 그조차도 믿기 힘든 문제를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말했다. "그러므로 같은 시각에, 하이아칸과 켈티카에 각각 소공작 조슈아가 한명씩 존재했던 것입니다." 올해 스무 살이 된 애나 에이젠엘모는 어린 시절을 켈티카에서 보냈다. 수도에서 태어난 젊은이들이 종종 그렇듯이, 그녀도 도시 출신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다. 아니. 실은 다른 젊은이들보다 좀더 강한 자부심이었다. 공화정을 추구하는 젊은이답게 사람을 차별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귀족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에서 그녀도 벗어나지 못했다. 시골 출신과 도시 출신의 가치는 같겠지만, 능력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 그녀의 평소 견해였다. 배운 것 없는 부모 밑에서 태어났지만 애나는 보기 드물게 영리했고 가르치는 것도 빨리 흡수했다. 특히 기억력이 좋아서 주변에는 어느 공작 집안의 자제와 비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그들이 문제의 소공작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겠지만, 어차피 애나도 본 일이 없었으므로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애나는 스무 살이었다. 지스카르의 집에 오는 젊은이들이 평균 열여덞살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가 일찌감치 교육을 마치고 켈티카로 보내질 줄 알았다. 따라서 석 달 정도 흐르자 은근히 조바심이 났다. 그녀는 지스카르가 중요시하는 토론보다는 세상에 나가서 할 일이 많다고 믿었으므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자신을 붙잡아두는 지스카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때때로 애나는 자신도 망명 의회로부터 임무를 받아 활동을 할 때가 되지 않았는지 넌지시 말해 봤지만, 지스카르는 구체적으로 답하는 대신 뜻모를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예의를 잊고 짜증을 내는 날도 있었다. 물론 즉시 후회하며 잘못을 빌었지만 말이다. '민중의 벗'의 전설적인 지도자였던 인물에게 잘못 보여서는 곤란했고, 상대가 백작이자 대영주라는 것도 은근히 영향을 끼쳤다. 물론 누가 그런 점을 지적했다면 애나는 발끈해서 부인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보여야 지스카르 밑에서 졸업할 수 있을까? 애나는 마음이 불타오르는 만큼 일선 활동에 뛰어들고 싶어 몸이 달았다. 공화국 실현을 앞당기고자 하는 의지는 누구보다도 투철하다고 자신했다. 지스카르 앞에서도 여러 번 그런 의지를 표현해 왔는데,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망명 의회에서 손님이 올 때면 지스카르는 학생들에게 심부름을 시켜 내보내곤 했다. 손님이 온다는 것을 굳이 숨기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주변을 서성여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학생인 자신이 아직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도 있다는 점에서 학생으로 지냈던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솟아올랐다. 심부름을 하러 나가기 전에 애나는 지스카르 앞에서 맴돌며 은근히 물어보았다. 이곳에 계셨던 분이라니 어떤 분이신지 궁금하네요, 하고. 지스카르는 웃으며 '아끼는 동료'라고 말해 주었다. 후배나 학생이 아니라 '동료'라는 단어는, 애나가 지스카르에게 꿈에서라도 극고 싶어하던 말이었다. 애나는 급기야 인내심을 잃고 말았다. 애나는 두 주 동안의 청소를 대신해주기로 하고 다른 학생에게 심부름을 떠맡겼다. 일단 밖으로 나가긴 해야 했으므로 별장 밖 오솔길을 따라가다가, 산지기 집 입구에서 다른 학생과 헤어져 잎이 한창 무성한 과수원에 숨었다. 혹시 남들이 본다 해도 일꾼으로 생각하도록 머릿수건과 앞치마도 두르고, 나무를 돌보는 체 하며 별장으로 이어지는 길을 기웃거렸다. 별장으로 올라가려면 길은 그곳뿐이었다. 그때까지 애나는 찾아올 손님의 외양을 모르니 지나가도 알아볼 수 없다는 점은 깜빡 잊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운명이었다. 맞은편 길에서 나타난 두 사람이 과수원 근처로 왔을 때, 애나 에이젠엘모는 만지작거리던 풋사과를 저도 모르게 뚝, 따고 말았다. 그 순간에는 자기가 그랬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한참 뒤 손에 쥐어진 걸 보고 어리둥절해졌을 정도였다. 정말로 인상적인 외모의 젊은이였다.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맹세해도 좋았다. 그녀의 이런 직감은 지금껏 틀린 일이 없었다. 두 사람이 별장으로 이어지는 길을 오르고 나서 한 사람이 더 나타나 뒤를 따라갔다. 애나는 뒤따라온 사람도 일행이라고 느꼈다. 민중 클럽에 속한 사람이 여행 중 만나는 위험은, 물리적인 것보다 사람들의 의심일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런 까닭에 간부급이 움직일 때면 이런 식으로 뒤따르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 바로 옆에서 호위하기보다는 일행이 아닌 체 따라가다가, 혹시라도 위기가 닥치면 객관적인 입장을 가장하여 상황을 무마시키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다. 정신을 차린 애나는 풋사과를 주머니에 푹 쑤셔 넣고 뒤따라 별장으로 올라갔다. 정문 근처에 이르자 풀숲에서 숨어 기다렸다. 손님 세 명이 모두 들어간 후에도 좀 더 기다렸다. 한창 이야기하고 있겠지 싶을 즈음, 이중으로 잠긴 정원 문을 갖고 있는 열쇠로 따고 안으로 들어왔다. 정원 바닥을 기다시피 해서 면회실 창문 아래로 가서는 벽에 들을 바짝 붙이고 앉았다. 그 즈음 맞은편에는 역광에 검게 물든 장미꽃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모든 이야기가 다 들리지는 않았다. 소리가 잘 들리기엔 창턱이 높은 편이었다. 창을 향해 앉은 지스카르의 말은 비교적 잘 들렸지만, 손님의 이야기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띄엄띄엄 들으니 내용을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맨 처음에 인형과, 그리고 요정 이야기가 나오더라는 것만은 그래도 알아들었으나 농담을 하는 것이겠거니 하고 흘려버렸다. 한참 뒤 두 사람의 입에서 자주 나오는 이름이 생겼다. ;모로'라는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모로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아르님'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눈치를 챘다. 애나는 켈티카 출신이었으므로 아르님 공작가문에 대한 소문들도 대충 알고 있었다. 예쁘지만 백치라던 딸, 그 달이 결혼했다가 죽은 일. 데모닉의 전통을 이은 소공작, 그리고 테오스티드 다 모로라는 데릴사위에 대한 얘기도. 지스카르가 애나 자신과 한 이야기를 언급했을 때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날 뻔했다. 손님의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지스카르가 그녀의 의견을 좋게 판단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서였을까> 지스카르가 그녀를 아직도 망명 의회로 보내지 않는 까닭은? 그 생각에 사로잡힌 나머지, 애나는 이어지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신중하게 듣지 못했다. 그러나 잠시 후 무심코 귀에 들어오던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서서히 조합되자, 자기가 듣고 있는 것이 매우 놀라운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스카르도 놀라움을 숨기지 못해 목소리가 커졌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이 둘일 수는 없네, 자네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네만, 날자 착오가 없는 게 확실한가?" 손님이 무어라 대답했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자시 지스카르가 말했다. "그렇다면 마법인가? 매우 어렵긴 하지만, 아니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여겨지지만, 일정 간격으로 여러 장소를 택해서 마법진을 만들고 일일이 엮어 놓는다면 가능할 수는 있을 걸세, 하루 만에 켈티카에서 하이아칸을 오가는 것 말이야." 지스카르는 마법사가 아니었지만 마법을 쓰는 방법에ㅡ 대해서는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지스카르의 집에 자주 찾아오는 마법사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애나도 알고 있었다. 손님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끊어지며 들려왔다. "그것…… 다릅니다. 두 소공작은 같은 날 두 장소에…… 아니라 그후로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생의 궤적이 어느…… 두 줄기가 된 거죠, ……있을 수 있는…… 켈티카의 소공작은…… 떠난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극장 화재로 행방불명됐다고 말려진 막스 카르디는……." "죽은 것이 아니란 말인가?" "살아서…… 항구에서 카르디… 소공작이라고 생각되는 자가 공연을 준비…… 제가 가진 마지막 정보입니다. 지금쯤은 공연도 끝나…… 그곳에 나타났습니다. ……소공작은 두 사람입니다." "납득이 안 돼. 그런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못했어. 도플갱어라도 나타났단 말인가?" 도플갱어라는 말에 애나는 흠칫했다. 그 순간 손님이 고개를 돌렸는지, 매우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자신을 완전히 납득시킬 수가 없습니다." 애나는 상상에 사로잡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소공작이 두 사람이라는 말의 뜻은? 무엇보다도 도플갱어라니, 그런 단어를 입에 담는 지스카르를 상상하기가 힘들었으므로 애나가 느낀 충격은 더 컸다. 애나는 몰랐지만, 지스카르는 예술가인 자신과 사상가이자 조직의 간부인 자신을 조화시키는 것을 늘 어려워했으므로, 일부러 학생들 앞에서는 현실적인 문제만을 입에 담았다. 창가로 다가오는 기척을 눈치 채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아주 잘 변호해야 할 겁니다." 그게 자기 머리 위에서 들린 말이란 걸 눈치 해기까지도 조금 시간이 걸렸다. 어느새 익숙해진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리고… 애나는 벌떡 일어섰다. 도망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돌아서자 냉담한 눈빛이 그녀를 맞았다. 2.켈티카로 띄웠던 편지 "사람은 원하기만 한다면 어떤 것에든 자신을 담을 수 있거든. 꽃이나 편지에도, 요리나 춤에도, 집이나 정원에도, 부채를 한 번 흔들어 사람을 부르거나, 반대로 탁탁 쳐서 쫓을 수도 있지. 그러니 연금술사가 하듯 정성스럽게 해봐. 숫자에 혼을 불어넣어서 '10만 엘소'라고 써 두면 나중에 누군가가 그 안에 든 네 영혼을 발견한다고! 그러면 그와 너는 10만 엘소가 없는데도 그걸 주고받은 거나 마찬가지니." 날씨가 좋았다. 수평선에 흩어진 잔 빛들이 굽은 등을 물결에 맡기고 흔들거렸다. 오늘 하루쯤은 이름대로 '미의 극치'라고 불러줘도 될 것 같은 배가 쭉 뻗은 돛대를 내맡긴 오전 열 시의 햇빛, 갓 구은 토스트처럼 따끈따끈한 햇빛이었다. 조슈아는 갑판에 서서 돛대를 돌려다보고 있었다. 접혀 있는 돛 위로 펄럭이는 깃발이 보이고… 밧줄들이 보였다. 그가 줄고 보고 있는 것이 그 밧줄들이었다. 고개를 한껏 쳐들고,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는 수십 가닥 밧줄들의 꼬임을 유심히 살펴보는 중이었다. 배나 항해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면서도 잘도 여기까지 왔지만, 언제까지나 몰라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조슈아는 '지금 한 번 알아볼까'하고 가볍게 생각했다. 갑판에 앉아 살펴보는 것만으로 배를 이해해 볼 참이었다.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안 했다. 먼저 저 밧줄들이 무엇과 무엇을 연결하는지, 어느 쪽으로 힘을 받고 있는지 살펴보려 했다. 그런 식으로 시작해서 수많은 자재들이 서로 팽팽하게 당기며 균형을 이룬 한 척의 배, 그 짜임새를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배를 이해하고 나면, 배가 움직이는 구동 원리도 자연히 알게 되리라 여겼다. 다른 사람이 아닌 조슈아이기 때문에, 불가능한 계획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왠일인지 조슈아는 실패하고 말았다. 밧줄들이 허공에 만든 수백 개의 도형쯤이야 간단히 기억할 수 있는 그였지만, 넓은 공간에서 겹쳐진 밧줄의 구조를, 점에 불과한 한 자리에서 파악하는 건 쉽지 않았다. 물론 그것도 시간을 많이 들인다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눈부셔 죽겠네." 옛날 선장들이 십자특고의(cross-staff) 따위로 태양의 고도를 재어 배의 위치를 측량한 까닭에, 애꾸눈이 많았다는 이야기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검은 안대가 해적 선장들이 결투라도 하다가 얻은 자랑스러운 상처라고 믿는 항구의 꼬마들도 있지만, 결투를 하면 반드시 눈을 찔러야 한다는 선상규칙이라도 있지 않는 한 하필 한쪽 눈을 다친 사람이 그렇게 많을 리는 없었다. 조슈아가 허망하게 눈을 비비고 있는 동안 막시민과 리체가 줄사다리를 타고 갑판으로 올라왔다. 막시민은 조슈아가 햇빛을 받으며 졸고 있었다고 생각했는지 '네가 고양이냐?'하고 핀잔을 주었다. 리체는 무심코 밧줄들을 올려다봤지만, 조슈아가 한 것 같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단지 기지개를 켰을 뿐이었다. "배도 다 고쳤고, 슬슬 출발해야지" 꼭 나흘이 걸렸다. 그동안 예정에 없던 진짜 항해를 한 탓에 상한 밑창을 수리하고 다시 날아오를 준비를 하기까지, 만일 운이 없어서 또다시 항해를 하게 된다면 페리윙클 섬까지 며칠이 걸릴지 아무도 모르는 터라 준비를 철저히 해야 했다. 명색이 배인 주제에 바닷물에 좀 담갔다고 밑창이 상하더라는 얘기는 막시민이 나중에 쥬스피앙에게 꼭 전하기로 했다. 물론 배를 돌려주게 된다면 말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돌려줘도 화를 낼지 모르겠는데." 배쌈에 그려져 있던 파도 그림은 지워진 지 오래였다. 더구나 뱃전은 쇠밧줄에 긁혀서 찌그러진 조개와 고둥, 불가사리가 손을 맞잡고 울고 있었고, 무슨 염료로 칠했는지 홀수선 아래는 거무죽죽하게 변색되어 있으니 쥬스피앙의 오묘한 미적 기준에 맞을 리 없다는 데 모두 동감이었다. "배란 건 보기 좋기 전에 물부터 안 새야 되는 거 아니야? 모르고 나갔더라면 우리 모두 바다에 수장될 뻔했는데 화를 낼 쪽이 도대체 누구냐?" "하지만 쥬스피앙 아저씨는 처음부터 바다에 띄울 생각으로 만든 건 아니지 않겠어? 계속 날아갈 줄 알았겠지." "하지만 그랬자면 접시가 망가지지 않게 만들었어야지. 굳이 배 모양으로 만든 걸 보면 부득이한 상황을 짐작한 것 아니겠냐?" "하지만 우리가 자느라 금이 줄어드는 걸 제 때 안 채웠더니 접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거 아냐? 그 증거로 금을 도로 채우고 며칠 두니까 다시 멀쩡하게 돌아가잖아? 금이 줄어들면 배의 기관들이 점차 말은 안 듣게 될거라는 얘기도 해줬고 말이야. 배 모양인 건 가나폴리의 전통을 따르려고 한 거겠지. 역시 쥬스피앙 아저씨의 잘못은 아닌 것 같은데." "그건……." 말다툼에서 막시민이 질 것 같은 드문 위기에서 조슈아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막군, 너 설마 이 배에 그려 놓은 그림이 보기 좋다고 생각했던 거야?" 조슈아의 얼굴에 '내 친구가 그렇게 눈이 낮다니 충격'이라고 씌어 있었으므로 막시민은 화를 내며 변명했다. "내 말은, 쥬스피앙 마법사의 기준에서 보기 좋게 만들기 전에, 라는 이야기니까,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과는 얘기가 틀리고……." 마침 구원자가 나타나 막시민은 어쭙잖게 얘기를 계속 늘어놓아야 하는 상황에서 해방되었다. 뱃전에서 마일스톤이 머릴ㄹ 내밀었다. "슬슬 출항하면 되겠는데, 그 전에 꼭 해야 될 얘기가 있거든? 다들 올라와 봐." 별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난 섬에서의 며칠 동안 마일스톤은 늘 상황을 불어야 하는 입장이었고, 설명은 세 사람 몫이었다. 그가 먼저 뭘 말하려 하는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셋은 하던 얘기도 잊고 얼굴을 마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 계약이 끝났다 이거지." 조슈아, 막시민, 리체 세 사람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지만,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똑같이 말문이 막혀 있을 뿐이었다. 테이블 머리에 앉은 마일스톤은 당연한 이야기에 뭘 그리 놀라냐는 표정이었다. 막시민이 따졌다. "아니, 어째서 난데없이 계약 종료인 건데?" "내가 처음에 전해들은 계약 조건은 그들, 즉 너희들이 목적하는 어느 섬에 도착하기까지였어. 그 섬이 어딘지는 안 가르쳐 줬고 말이야.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지, 따라서 난 이 섬이 그 섬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어. 날짜단위로 계약한 것도 아니니 그렇게 생각할밖에." "누구 맘대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마일스톤은 빙그레 웃었다. "계약 조건이 명확하지 않으면 누구나 편리할 대로 해석하기 마련 아니야? 자, 그럼 세 사람 중 선장은 누구지?" 생각해보면 예전에도 이 비슷한 질문을 받은 일이 있었다. 물론 그 때도 답은 없었지만 그 기억 탓인지 막시민과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리체를 바라봤다. 리체는 당황했다. "왜 날 쳐다봐?" 조슈아가 빙그레 웃었다. "네가 책임자 아니었어?" "그, 그건 칼라이소에서 잠깐 그렇게 된 것뿐이잖아." 막시민이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그럼 이 김에 아예 맡아. 자, 리체 선장, 항해사의 주장에 대한 의견은?" "너희 지금 나 놀리니?" "굳이 따지자면 배의 주인, 즉 선주인 쥬스피앙 씨와 친구인 사람은 세자르 아저씨고, 그 아저씨의 딸이 리체 너니까……." 쓸데없는 논쟁은 마일스톤이 자신의 주장을 보다 명확히 하는 걸로 종식되었다. 마일스톤은 이렇게 말했다. "알았어, 아가씨가 선장이다 이거지, 그럼 선장, 재계약 조건을 말해줘." "아… 재계약?" 그제야 세 소년 소녀의 마음도 진정되었다. 바다나 항해에 대해 배 구석에 사는 생쥐보다도 모르는 그들이, 마일스톤 없이 바다에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엄습해 온 공포는 결코 작은 게 아니었다. 리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재계약이라면, 이전 계약과 똑같은 조건으로……." "저런, 그렇게는 안 되지." 마일스톤은 세 사람을 둘러보며 친절한 미소로 지었다. "자, 지금 세 사람 다 내가 없이는 바다에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그런데 이 섬엔 나 말고 배를 움직일 사람이 아무도 없지. 그러니 나와 계약하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도 없을 테고, 얼마나 유리한 상황이야? 이런 상황에서 내가 계약금을 올릴 수 없다는 건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자, 자, 잠깐, 당신 지금 몸값을 올리겠다 그런 얘기야?" 셋 다 똑같이 눈이 커졌다. 이런 상황은 상상도 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마일스톤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난 성실한 선박업계종사자니까." 막시민이 내뱉었다. "젠장, 또냐. 우리 여행을 '빚쟁이의 모험'이라고 불러야겠어." 조슈아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기 말이죠. 돈을 올려준다는 약속은 어렵지 않은데… 말이죠. 우리 셋다 이런 상황이 좀 낯설어서요. 지금까지 당신을 고용인이라기보다는 동료처럼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러자 막시민이 말했다. "돈을 올려준다는 약속은 정대로 어려운 거야, 이 자식아." "하지만 돈은……." 막시민은 다시 한 번 조슈아를 흘겨봤다. "돈도 없으면서." "……." 블루 코럴의 별장을 떠난 뒤로 늘 돈이 없었지만, 돈이 없다는 걸 자각하기에는 돈 따위에 신경 쓰지 않고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었다. 막시민은 조슈아가 알아서 침묵하도록 내버려두고 마일스톤을 봤다. "당신 얘긴 잘 알겠어. 난 조슈아처럼 동료 어쩌고 하는 얘기는 안 해. 조작 며칠 같이 있었을 뿐이고, 리체처럼 우리한테 말린 인생도 나이고, 무엇보다도 그동안 우리가 함께 다니고 싶을 만한 모습도 별로 안 보여줬잖아? 나라도 이런 작자들과 이제부터 동료 하라고 하면 사양일 거라고, 그러니 다 이해는 하겠는데……." 마일스톤이 말했다. "다 괜찮아도 저놈의 유령들만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네. 정신 건강에 안 좋다고, 이것 때문이라도 수당이 올라갈 수밖에 없는 거야. 물론 밑창을 고쳐주는 건 고맙지만 안 볼때 해주면 더 좋을 텐데, 난 허공에서 제멋대로 날아다니는 물건은, 그게 금화라고 해도 사절이야." 리체 선장도 구석에서 납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쨌든 선창을 고치긴 해야 했는데, 다들 선원이었던 약속의 사람들만큼 유용한 인력, 아니 유령 용역은 찾기 힘들었다. "그래, 그래. 다 알겠어. 그런데 말이야. 난 돈을 지불해야 되는 입장이거든? 그래서 어떻게든 좀 깎아야겠는데 말이야." 막시민은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말을 이었다. "일단 진짜 목적지인 그 섬, 거기까지는 가야 돼. 지금이라도 정확히 말해 주지만, 페리윙클 섬이라고! 어쨌든 지금가지 설명 안 한 것이 한 가지 있는데, 이 배는 아주 특별한 편의를 제공하거든? 다시 말해 사고가 생기지만 않으면, 장신은 좇을 조절할 필요도, 키를 잡을 필요도 없어요, 그냥 우리처럼 앉아서 놀고먹으면 되는 거야." "내가 날아서 가기라도 하나?" 마일스톤은 그냥 해 본 소리일 게 분명했다. 그러나 막시민을 비롯한 세 명이 동시에 손뼉을 치며 외쳤다. "맞았어!" 마일스톤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쩝 다셨을 뿐이었다. 막시민은 마일스톤을 고용할 때 이 배가 물 위에 뜨는 것 말고 다른 일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떠나기 전에는 해봤자 도움될 것이 전혀 없었다. 겁을 먹거나, 미친 사람 취급하는 게 고작일 뿐이다. 그리고 배를 탄 후에도 190쪽 3줄 결락 물론 그건 막시민의 생각이었다. 같이 손뼉을 쳐 놓고서, 조슈아가 막시민을 돌아봤다. "그런데 저기, 전혀 설명 안 한 거야? 처음에 계약할 때?" "미리 해서 좋을 것 있는 애기냐, 그거?" "고작 일당 깎으려고 꺼낼 얘기를 지금까지 뭐하러 숨겼어?" 의자를 밀며 일어난 조슈아는 마일스톤의 손을 잡아끌고, 지금까지 한 번도 데려간 일이 없던 선실 아래의 작은 방으로 갔다. 열쇠를 따고 들어가자마자 마일스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 안에는 황금으로 가득 찬 도가니가 있었다. 문을 열어놓자 방 전체가 금빛으로 빛날 지경이었다. 마일스톤은 조슈아를 돌아봤다. "자네 친구 말이야, 이 정도가 돈으로 안 보일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부자인 거지?" "안타깝지만 여기 있는 금을 일당으로 드릴 순 없거든요." 막시민과 리체가 뒤따라 도착할 때까지 조슈아는 나름대로 책에서 얻은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배에 대한 설명을 절반 정도 했다. 막시민이 들려다보니 이런 이야기가 들렸다. "이 배를 띄우려면 배 바닥 아래로 최소한 몇 미터 내에 단단한 바닥이 있어야 된다는 거죠. 도움닫기를 해서 뛰어오르는 메뚜기처럼, 발판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다만 그렇게 뛰어올랐다가 떨어지지 않고 날아간다는 점은 다르지만." 마일스톤은 멍하니 있다가 눈썹 언저리를 긁더니 말했다. 191쪽 2줄 결락 단단한 바닥이……." "아니, 아니." 마일스톤은 손을 내젖더니 조슈아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상대가 제정신인지 확인할 필요를 느낀 듯했다. "그 '날아간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아까 우리가 한 말 못 들었어요?" 막시민은 조금만 더 기울이면 코가 닿을 정도로 빤히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을 끌고 나왔다. "서로의 코에서 모공 그만 찾으시고, 가자고, 설명이 무슨 소용이야, 보면 아는 거지, 보고 나면 그땐 믿는 거지? 자, 자, 서둘러, 날씨도 좋고, 어서 출발하자고." "아, 그, 그럴까?" "보여주는 건가?" 이 때 막시민이 일단 출발하면 계약금과 일단 이야기를 얼버무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서둘렀다는 사실은 셋 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프란츠 폰 아르님 공작이 아몬드가 든 마카롱 과자와 뜨거운 차 한 잔으로 오후를 마무리할 즈음, 그의 책상에 어음 한 장이 도착했다. 공작은 안경을 꺼내 쓰며 어음에 씌어진 글귀를 읽어내려 갔다. 이 문서를 가지고 있는 '조 히스파니에' 또는 그 지시인에게 이 문서와 상환하여 1천 5백 엘소를 엘소 금화로 지불하겠다. 지급일은 따로 정하지 아니한다. 990년 3월 19일 제스퍼 공작 프란츠 폰 아르님. 잠시 후, 공작의 서재에는 늙은 수행비서 헤슬과 심복인 에드맨 남작, 기사 말론 경, 이렇게 세 사람이 불려와 있었다. 공작은 어음을 그들에게 건네주어 돌려보게 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에드맨 남작이 진짜 어음 용지와 한참 비교해 보더니 입을 열었다. "정교하군요. 아니, 아예 똑같습니다." 아르님 공작은 어음을 잘 발행하지 않는 편이었다. 드물게 그럴 일이 있다 해도 이런 소액 어음을 발행할 이유는 없었다. 남작도 그걸 알기에 위조라고 단정 짓고 대답한 것이었다. 높은 가문이나 큰 상당들이 대부분 그렇듯, 아르님 가문의 어음 용지에도 테두리에 위조하기 힘든 무늬가 들어가 있었다. 또한 가문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그런 종이는 가문 사람이 아니면 손에 넣기도 힘들고, 베끼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 가문에서 엄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금판이 새어나가지 않고서야 이렇듯 똑같은 무늬가 나타날 수 없었다. 말론 경이 물었다. "금판을 누가 은밀히 빼돌렸다가 도로 갖다놓았을까요?" 에드맨 남작이 반대했다. "그런 일을 누군가 했다손 치더라도, 그렇게 만든 귀한 종이로 고작 이정도 금액을 위조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 "여기 서명된 날자 상으로는 최근이 아니군요." "그 날자가 꼭 위조 일자를 가리키는 건 아니겠지. 날짜는 아무렇게나 써넣을 수 있으니까." "그러면 첫 번째 배서일을 기준으로 보아야 할까요? 배서일보다 이후에 만들어진 것은 아닐 테니까요." "그렇다면 6워 5일이로군." 아르님 공작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말을 멈출 즈음, 비서를 바라보았다. 비서는 두터운 외알 안경을 꺼내 쓰고 어음을 들여다보다가 이윽고 내려놓았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닙디다." 아르님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펜을 집어 들어 빈 종이에 서명을 해 보였다. 누가 보아도 어음에 적인 것과 너무나 똑같은 서명이었다. 모두 두 서명을 비교해보며 잠시 말을 잊었다. 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가짜 어음의 무늬는 금판으로 찍은 것이 아닙니다. 완벽히 같기는 하지만, 펜으로 곡선을 그리다 보면 펜촉의 질감 때문에 미묘하게 가늘게 되는 부분이 생깁니다. 이것은 펜으로 베낀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시다시피, 이런 위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두 분밖에 없습니다." 두 사람이 아니라 두 분이라고 높여서 말하자 다른 두 사람도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에드맨 남작이 망설이다가 말했다. "여기에 적인 '조 히스파니에'라는 이름… 그냥 무작정 지은 이름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도 히스파니에 폰 아르님의 이름을 알기에 하는 말이었다. 비서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한 사람은 물론 그 어르신입니다. 하지만 어르신께서 이렇듯 소액의 어음을 굳이 위조하실 이유를 생각해낼 수가 없습니다. 만에 하나 돈이 필요하시다 해도 청구서를 보내시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물론 그럴 일을 만드실만한 분도 아니지요. 더구나 배서 날짜도 그 분이 이곳을 갑자기 떠나신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입니다." 갑자기 대 상단이라도 차리지 않는 한, 히스 노인에게는 조카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여생을 충분히 지낼 수 있는 재산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취반지 성에서 머무르다가 떠난 터였다. "다른 한 분은… 설마 아르모리크 경께서?" 말론 경이 섣불리 먼저 말하자 에드맨 남작이 눈치를 주었다. 비서가 고개를 저었다. "소공작께서는 이 성에 계십니다. 밖으로 나가시는 일도 거의 없는 것으로 압니다." 히스 노인이 아르님 공작의 어음을 위조할 이유가 없다면, 소공작은 더더욱 없을 것이 당연했다. 남작과 말론 경은 오리무중에 빠진 표정으로 비서와 아르님 공작을 번갈아 보았다. 아르님 공작이 의자에 기댔던 몸을 약간 일으켰다. "헤슬, 어르신이 가신 곳을 추적하도록 사람을 한 명 보내라. 어음도 가져가도록 하고, 그 분께서 보시면 아마 해답을 알아내실 것이다. 그리고 이 어음에 관한 일은 모두 함구하도록." 이들은 공화국 시절 전부터 아르님 공작을 보필해 온 가신들이었다. 공작이 '함구하라'고 말하면 이곳에 모인 사람 외에 누구에게도, 심지어 공작부인이나 소공작에게도 숨기라는 이야기라는 것쯤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늙은 비서가 허리를 굽혔다. "알겠습니다." 세 사람이 나가자 공작은 서랍을 열고 봉투를 하나 꺼냈다. 이미 읽어본 듯, 봉인이 뜯어진 편지였다. 공작은 편지를 내어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미간을 짚으며 눈을 감았다. 편지에 씌어진 필체는, 어음 아래 배서한 글씨와 똑같았다. 블루 코럴 섬에서, 올해 초에 조슈아가 보낸 편지였다. 3. 가려진 카드를 뽑다 "당신은 꽃말에 상처받지 않는 담대한 사람 나는 당신 입술의 가시에 찔렸지." 눈꺼풀에 따뜻한 기운이 느껴질 즈음 애나는 잠에서 깼다. 요 며칠 동안 늘 그랬든 깨자마자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일어나 앉는 대신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푸릇푸릇했다. 아직은 푸르러지기 전, 붉은 기운이 번진 이른 하늘이었다. 누운 곳은 잡풀이 무성한 나무 밑이었다. 아직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야외에서 담요를 말고 잠든 몸은 곳곳이 삐걱거렸다.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옅은 잠이 눈꺼풀을 붙들었다. 눈을 꼭 감았다가 다시 뜬 애나는 눈동자를 굴려 자신과 똑같은 조건으로 잠들었을 사람을 찾았다. 198, 199쪽 결락 돌아와 학생 노릇이라니, 상상만으로도 김빠졌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되고 자기가 오늘 이상한 일을 벌인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기도 했다. 애나의 억지 섞인 도박은 성공했다. 솔직히 지스카르의 얼굴을 봐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잘된 일일까?" 물론 장된 일이 되려면 망명 의회의 조사를 잘 통과해야 할 터였다. 하지만 심문… 망명 의회의 심문은 어떤 것일까? 첫 활동을 그런 식으로 시작해도 될까? 두려움의 원인인 젊은 간부는 담요를 정리해 넣고 있었다. 그는 애나를 안심시켜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인간적인 위로를 기대하기 힘든 성격인 것인지, 아직도 그녀를 의심하고 있는 것인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감정이 장 드러나지 않는 그 얼굴로는. 수행원 청년이 아침 식사로 끓인 곡식죽을 가져다주었다. 그러고 보면 애나가 깨어나기 전에 다들 많은 일을 한 셈이었다. 이윽고 애나고 일어나 담요로 몸을 감싼 채 죽을 마셨다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똑같은 죽을 마시던 란지에가 애나의 해쓱한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마지막 야영일 겁니다." "아, 네." 위로하려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냥 상황을 설명한 것일지도 몰랐다. 애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다가 색깔이 바뀐 란지에의 머리에 시선을 주었다. 푸른 빛이 돌던 머리카락은 이제 부드러운 금빛이었다. 확실히 눈에 덜 띄는 빛깔이었지만 그 이상의 목적은 성취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금발도 여전히 그에게 잘 어울렸다. 애나는 마법사가 란지에의 머리 색깔을 바꾸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 생각처럼 쉬운 마법은 아니라고 했다. 색깔만이라면 간단하겠지만, 머리카락은 자라기 마련이므로 내버려두면 금방 두 가지 빛깔의 머리를 갖게 돼버린다. 그런 머리로 아무 데나 돌아다닐 수 없는 건 물론이고 말이다. 따라서 이 마법의 요점은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영영 자라지 않게 만들 순 없고, 효력은 석 달 정도라 했다. 석 달이 지나면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기 때문에 새로 마법을 걸든가, 아니면 아예 풀든가 해야 했다. 란지에는 애나가 쳐다보는 것을 느꼈는지 죽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렇게 쳐다볼 정도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아, 물론 이상하지 않아요. 하지만 신기해서요. 색깔이 아니라, 머리가 자리지 않는다는 게……." "자르지 않아도 되니 편하겠죠." 저 사람에게는 실용적 관점뿐인 것인가, 하고 생각한 애아는 일부러 말을 이었다. "색깔도… 잘 어울리시네요. 가족 중에 금빛 머리인 사람이 있으실 것 같아요." 란지에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일어섰다. 이제 출발해야 할 때라 애나도 담요를 접고 일어났다. 청년이 죽을 담았던 그릇을 닦아 왔다. 애나는 어찌 보면 감시받는 입장이라 그런 일은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야영한 곳은 고갯길에서 조금 벗어난 풀숲이었다. 남은 비탈을 마저 내려가서 점심 무렵까지 걸으면 켈티카로 들어갈 수 있었다. 걷기 시작하는데 란지에가 말을 건넸다. "지스카르는 어떻게 만났죠?" "어… 야간 학교 선생님이 소개해 주셨어요. 처음에는 화가나 시인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다. 뭐 그런 거죠." "켈티카에 가족이 있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을 합니까?" "바느질 가게예요. 유명 의상실은 아니고 동네 구멍가게죠." 대답을 하면서도, 갑자기 왜 관심을 보이는 걸까 싶었다. "가게는 어디 있죠?" "광장 남쪽에요." "주로 어떤 손님이 옵니까?" "그냥 보통 사람들요. 남에게 시켜 옷을 입을 정도의 돈은 있는 사람들이죠. 귀족은 별로 없어요. 아, 전혀 없진 않을 거예요." "일하는 가족이 여럿인가요?" "부모님 다 계시고, 오빠하고 올케하고 동생 둘 있어요. 전부 가게 일을 돕죠, 일자리가 생기면 다른 데로 가기도 하지만요. 아참, 조카도 하나 있어요. 아기지만." "가족은 당신의 일을 압니까?" "그럴 리가요, 조직에도 가족에도 득이 안 되는 일이잖아요?" 떠보는 게 아닌가 싶어 조금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면 가족들은 당신이 어디로 갔다고 알고 있죠?" "북부에 있는 목장에 일꾼으로 간 줄 알아요. 가끔 그런 체 하고 편지도 써 보냈죠." "만일 사실을 알게 되면 가족들이 뭐라고 할 것 같습니까?" "아마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말리려고 하겠죠, 하지만 끝까지 설득하면 우리 이념을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일단 숨겨주려고 할 거예요. 쉽게 도와 줄 것 같진 않고요." "당신 자신은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두렵지 않은가요?" 애나는 조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솔직히 겁은 나지만, 그보다 잘 해보겠다는 생각이 더 큰데요." "어떤 일을 하고 싶죠?" "음, 정보를 다루는 일? 전 기억력이 좋아요. 대신 사람 대하는 건 별로 소질이 없고요." "일할 준비는 충분히 됐다고 생각합니까?" 내심 망설이는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으면 약속한 것도 흐지부지될지 모른다 싶었다. 이런 질문들을 하는 것도 자기를 평가해 보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네." 말하는 내내 란지에의 어조는 낮고 평이했다. 애나도 전혀 긴장하지 않고 대답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도 똑같은 어조로 나왔다. "조사 결과가 좋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습니까?" "……." 목이 막히는 듯해 애나는 걸음을 멈췄다. 아주 잠간이었다. 란지에가 걸음을 멈추기 전에 재빨리 뒤따라갔지만 대답은 하지 못했다. 란지에는 그녀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모르는 모양이군요." "어떻게 되는데요?" 란지에는 대답 없이 걷다가 고갯길이 끝날 무렵이 되자 불쑥 말했다. "조사 결과가 좋길 바랍니다." "이것 보세요, 왜 말을 안 해주는 거죠?" 이 순간만은 따지는 것처럼 들렸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란지에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다 내려갔다. 큰길에 접어들자 행인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계속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불안감이 증폭되면서 가슴이 쿵쿵 뛰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보든 말든 소리 질러 묻고 싶었지만 더 나쁜 결과만 부르게 될 것 같아 억지로 참았다. 애나가 란지에의 뒤통수를 보며 마음속으로 욕을 퍼붓고 있는 동안, 란지에도 마음 편히 무시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란지에는 애나가 어떤 식으로 심문을 받게 될지, 그리고 결과가 나쁘면 어떻게 될지 다 알고 있었다. 애나가 조사를 받은 뒤에 정식 회원으로 추천해 달라고 막무가내로 졸랐을 때도 이런 것을 다 알고 있었기에 허락한 것이다. 심문은 공화국 시절 은밀히 켈티카 지하에 건설됐던 망명 의회 2본부에서 진행될 것이었다. 2본부라고 해도 전국의 네 군데 본부들 중 가장 규모가 컸고, 의회의 핵심 분과들과 세 군데의 위원회, 그리고 열다섯 곳으로 나뉜 켈티카 지구들을 총괄하는 곳이니 망명 의회의 중추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만에 하나 2본부의 존재가 왕국8군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귀퉁이가 무너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잔포드에 있는 1본부를 중심으로 살아남긴 하겠지만, 심각한 타격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란지에 자신도 2본부에 출입할 때는 이중으로 주어진 평회원 신분을 썼다. 위원장급 이상의 인사들은 대부분 두세 가지의 신분과 이름을 갖고 있어서, 회원들의 신상 정보를 총 관리하는 '신원 분과'를 제외하면 다른 회원들조차 속이며 활동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인데 정식 회원조차 아닌 애나가 2본부에 들어갔다가 조금이라도 의심할 만하다는 평가가 떨어진다면, 그 후로 애나 문제는 란지에의 손을 떠나게 된다. 혐의를 확실히 벗을 때까지 2본부 내에 갇히는 것은 물론이고─2본부 안에는 이럴 때를 위한 감금 시절이 있었다─며칠에 한 번씩 불려나와 매번 다른 사람의 심문을 받는 생활이 몇 달이고 계속될 지도 몰랐다. 그건 1년이 될 수도 있고, 어느새 심문조차 끊긴 상태로 2년, 3년이 되어버릴 수도 있었다. 어느새 그녀는 조사 대상이 아니라 수감자가 되어버리고, 거기까지 가면 나중에 작은 오해가 부풀려져 처형이 결정될 수도 있다. 란지에가 잘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애나는 란지에가 자길 정식 회원으로 만들어 줄 줄로만 알고 있었다. 며칠간 함께 지내며 살펴보니 불안감이 전혀 없진 않은 모양이었지만, 그래봤자 통과 의례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지 않다면 드디어 켈티카로 들어가게 되는 오늘, 줄곧 말이 없던 란지에가 던진 질문들에 저렇게 생각 없이 대꾸하진 않았을 것이다. 솔직하긴 했지만, 확실히 요령은 없었다. 란지에는 그런 요령을 부릴 줄 모르는 편이 초보 회원답고 발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당장 속 편히 행동할 입장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일단 조사에서 벗어나야 발전 가능성도 소용이 있었다. 그녀를 의심해서 데려가고 있는 사람에게 가족들의 가게에 귀족도 가끔 온다고 말하거나, 앞으로 정보를 다루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솔직해선 곤란했다. 란지에는 조금 초조해졌다. 그가 조금 전에 한 질문들은 애나가 조사실에 들어가 앉으면 맨 처음 받게 될 질문들이었다. 대답하는 모양을 보니 말려들어가기 딱 좋은 아가씨였다. 조사 분과는 민중 클럽을 위해 아주 작은 위협이라도 제거하는 것이 존재 목적이므로, 데려온 사람을 무혐의보다는 혐의 쪽으로 몰고 가는 경향이 있었다. 아니, 애나가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맨 처음 판단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란지에가 며칠간 지켜본 결과로는 첩자 노릇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쪽이었지만, 그는 근거가 뒷바침되지 않는 직감을 믿지 않았다. 이번에 방문했을 때 란지에는 지스카르 주변에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스카르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했지만. 란지에는 애나가 조사를 받고, 직접 혐의를 벗기를 바랐다. 그러나 보아하니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반드시 그럴 거라고 할 순 없지만, 최악의 경우가 될 가능성도 낫지 않았다. 란지에는 조사 분과의 집요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자신도 조사 분과에 가보았던 몸이었다. 애나는 긴장해서, 그리고 화를 내며 뒤따라오고 있을 것이다. 란지에는 떠나기 전에 지스카르와 나눈 이야기를 떠올렸다. 지스카르는 애나를 걱정했을 테지만 란지에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식의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제자를 잘못 키워서 미안하다고 했을 뿐이었다. 지스카르는 현명하지만, 자기 신변의 위협은 묘하게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만일 애나가 혐의를 벗지 못하면 지스카르의 입장도 곤란해질 것이다. 망명 의회 내에는 지스카르를 옹호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견제하는 사람도 그만큼 많았다. 지스카르는 오랫동안 젊은 인재들을 발탁하고 가르쳤기 때문에 현재 중책을 맡고 있는 신진 세력 중에는 지스카르를 존경하는 사람이 많았다. 다라서 지스카르가 그들을 이용해서 망명 의회를 좌지우지하려 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지스카르는 학생들에게 사상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르쳤다고 해서 모두 그와 같은 의견을 갖게 되는 건 아니었고 오히려 반대되는 의견을 갖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스카르를 존경하는 젊은이들은 그가 중책을 맡아 주기를 바랐고, 심지어 일을 다 꾸며놨는데 지스카르가 거절해서 무산된 일도 두 번이나 있었다. 그런 식이니 신진 세력의 힘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늘 지스카르를 공격할 구실을 찾아다녔다. 란지에는 지스카르가 마지막으로 찾아냈던 신성이었다. 그런 그가 지스카르의 학생을 조사 분과로 데려가고, 심지어 조사가 깨끗이 끝나지 않으면, 이를 근거로 삼아 비난하는 무리가 생길 것이 뻔했다. 란지에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건 결국 클럽 내의 세력 다툼에 불과했다. 그런 것을 걱정해서 진짜로 다가올지도 모르는 위협을 간과할 수는 없었다. 지스카르도 그걸 알기에 더 말리지 않은 것이리라. 그러나 떠나기 직전, 지스카르는 말했다. "민중의 벗은 한 갈래 길만 가선 안 되지, 그러나 동시에 한 갈래 길만을 가야 해. 아직도 해답이 나오지 않아서 나는 미래가 두렵네, 어떤 미래가 답일까." 란지에는 한참이나 생각했지만, 결국 신념대로 대답했다. "미래는 답이 아닙니다. 미래가 오기 전에 내놓는 것만이 답입니다." 자신은 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말 좀 해보세요." 등 뒤에서 애나의 목소리가 들려와 란지에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완연히 풀죽은 목소리였다. "제가 무슨 일을 겪게 되나요." "……." 란지에는 걸음을 늦췄다. 이윽고 애나와 나란히 걷게 되었다. "에이젠엘모 씨." 란지에가 이렇게 정식으로 부르는 것은 처음이라 애나는 흠칫했다가 대답했다. "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죠?" "아… 아마도요." 별로 실감하고 있진 않았지만, 누가 봐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란지에가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다무는 것이 보였다. 애나는 긴장했다. 이제야말로 중대한 이야기가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들려온 건 난데없는 질문이었다. "면회실에서 인형을 혹시 보셨습니까?" "인형요? 아… 알아요." 애나는 잠시 후 덧붙여 말했다. "파란 꽃무늬 치마에 보닛을 쓰고 있는, 춤추는 인형 얘기죠?" 란지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인형은 왜요?" "그 인형에 대해 그분과 얘기한 것이 있나요?" 애나는 인형이 왜 중요한 건지 이해가 안 가 눈을 깜빡거렸다. "어느 날인가 무심코 태엽을 감아 봤는데 인형이 안 움직이기에 선생님한테 말씀드렸죠. 그리고 나서 이튿날인가 보니 싹 고쳐 놓으셨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것도 만질 줄 아시는구나 싶어서 신기하게 생각했죠." "그리고?" "그래서……." 애나는 조금 머뭇거렸다. "다시 망가지지 말라고 가끔 태엽을 감았어요. 조금씩 만이죠. 원래 그런건 자주 만져주지 않아서 망가지는 거거든요. 뭐 좀 유치하긴 하지만, 그래도 선생님이 아끼시는 것 같아서." "그 전에는?" "그 전요?" 애나는 '도대체 이런 걸 왜 묻지'하는 표정이었지만 란지에는 계속 기다렸다. 결국 아내는 마뜩찮은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 인형 내가 꺼내다놨어요. 청소하다가 창고에서 발견한 것뿐이에요. 물론 인형 같은 걸 좋아할 나이는 아니지만, 난 어렸을 때 인형을 갖고 놀아본 일이 없었단 말이에요. 그냥 흥미가 가서, 조금쯤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어차피 선생님도 좋아하셨고요." 큰길을 걷는 사람이 점차 많아졌다. 란지에는 앞을 보며 자연스럽게 말했다. "더 말해 봐요. 숨기지 말고." "어째서 이런 걸 묻는지 모르겠군요." "까닭 없는 잡담을 할 상황은 아니죠." 대뜸 나온 말에 애나가 놀라 눈을 올려 뜨며 란지에를 보았다. 조금이라도 이해했을까? "성에서… 백작 가문의 본성 있잖아요, 따님이 사시는 로자 데이메르 성, 거기에서 잡동사니가 든 짐을 갖다 줬어요. 대여섯 번인가, 꽤 자주 왔었죠. 그 짐에서 나온 인형이에요. 난 그냥 잡동사니를 치우려는 줄 알았어요. 옛날 물건들을 별장에 갖다 놓으려나보다 하고 생각했죠." "짐을 가져온 사람은 누구죠?" "그냥 하인이던데요? 이름까진 모르겠어요." "매번 같은 사람이 왔겠죠?" "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란지에의 뺨이 약간 경직되었다. "그 하인은 당신 말고 누굴 만났죠?" "사실 나를 만난 일은 없는데요. 난 그냥 본 것뿐이고, 짐을 받아서 치우는 일은 다른 학생이 했어요." "브리앙 마틸로 말입니까?" 애나는 란지에가 이름을 말하자 놀란 시늉을 해 보였다. "이름도 아시네요? 어쨌든 무거운 짐이라서 남자가 옮기는 쪽이 좋았죠. 그리고 그 하인이랑 브리앙은 아는 사이였고요. 짐 가지고 창고에 갔다가 한참이나 그 안에서 얘기하고 그랬어요. 아, 브리앙을 비난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눈을 피해서 조금 쉴 수도 있는 거잖아요. 지스카르가 내주는 과제는 항상 어렵고…, 어쨌든 그 짐은 지금도 창고에 있어요. 내가 떠낸 건 인형뿐이고요." 란지에는 걸음을 멈췄다. 주위를 둘러보더니, 왼쪽 비탈을 올라 숲으로 들어갔다. 길에서 많이 벗어날 때까지 걸어가서 편평한 바위를 하나 골라 앉았다. "뭘 하려는 거예요?" 란지에는 종이와 펜을 꺼내어 바위 면을 이용해 편지를 썼다. 수행하는 청년이 물러나라고 손짓했기 때문에 애나는 편지 내용을 볼 수 없었다. 편지를 다 쓰자 봉투를 꺼내고, 귀한 성냥까지 내어 밀랍을 녹이고 봉했다. 그리고 봉투를 청년에게 건네주었다. "지스카르에게 돌아가서 전해주시고, 시간에 걸리더라도 답신을 받아 갖다주십시오."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즉시 자리를 떠났다. 란지에는 떠나지 않고 바위에 앉아 잠시 기다렸다. 애나는 앞에 서 있었지만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잠시 후 새로운 청년이 나타나더니 란지에 앞에 와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란지에도 인사했다. "그럼 갈까요?" 새로운 청년은 애나가 과수원에 숨어서 엿보던 때 란지에 일행과 거리를 두고 뒤따르던 그 사람이었다. 그들은 다시 큰길로 되돌아갔다. 때마침 스무 명 가량의 일행이 길을 가고 있어 그들은 평범한 이야기만 나누어야 했다. 사람은 점점 더 많아졌다. 켈티카로 들어가는 문이 저만치 보이자 애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석 달 전에 떠난 뒤로 처음 다시 보는 문이었다. 문을 통과할 때 검문소에서 란지에는 애나가 누나라고 말했다. 청년은 형이고, 그들은 란지에의 보호자로서 학교를 알아보려 가는 길이라는 설명이었다. 언제 준비한 건지 모르지만, 청년이 내민 여행 증명서는 그 말을 뒷바침하는 이야기가 씌어 있었다. 그들은 어렵지 않게 검문을 통과했다. 번화가까지 오자 청년은 그들에게 인사한 뒤 다른 거리로 접어들어 사라져버렸다. 전부터 애나는 망명 의회의 본부가 어디에 있을지 궁금했다. 켈티카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수상쩍던 장소들을 머릿속에서 맞추기 하는 재미가 있었다. 절반만 돌아간다던 외곽의 비료 공장은 아닐까, 장미원 묘지의 버려진 납골당은 어떨까, 들어가면 꼭 한 번은 길을 잃어버리는 여왕 시장 뒷골목 어딘가일지도 몰라. 그러나 그들이 가서 선 곳은 정말로 학교처럼 보이는 건물 앞이었다. 애나는 창살 문 안쪽으로 솟은 탑들을 보고 란지에를 돌아봤다. 그녀는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었다. "여기는 그로메 학원이잖아요?" 란지에는 문지기 쪽으로 걸어가다 말고 미소를 보였다. 어깨 너머로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학교에 간다고 말해줬던 것 같은데요?" 검문소에서 분명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애나는 곧 귀족 아이들이 많이 다닌다고 들어 온 이 학원이 실은 공화파의 본거지이고, 망명 의회도 안에 숨어 있을 거라는 스펙터클한 상상을 하며 란지에를 뒤따라갔다. 그런데 문지가와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란지에는 학원의 학생이 아닌가? "들어와요." 안으로 들어가던 란지에가 애나를 돌아보며 손짓했다. 애나는 얼른 뒤따라가면서 속삭였다. "우리 의회로 가는 것 아니었어요?" "조용히." 점심시간이라 학생들은 대부분 식당에 있는지 교정은 한산했다. 란지에는 녹음이 우거진 회랑을 통과해서 학생관 쪽으로 갔다. 2층으로 올라가 어느 방 앞에 멈춰서더니, 노트하는 대신 열쇠를 꺼내 들고 땄다. 방은 비어 있었다. 그런데 무척 호화로운 방이라 애나는 멈칫거리며 얼른 자리에 앉지 못했다. 란지에는 소파를 내버려두고 딱딱한 의자에 앉아 다리를 폈다. "쉬어요." "여기가 당신 방이에요" 란지에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지었다. "곧 주인이 올 겁니다." "그보다 망명 의회는 어디 있는 거예요?" 그 때 열쇠 따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사내애인지 여자애인지 모를 호리호리한 학생이 들어오더니 그들을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아, 돌아왔구나!" 성큼성큼 걸어온 학생은 자리에서 일어선 란지에와 두 차례의 비주(뺨을 맞대는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애나를 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전 이엔이에요. 란지에하고 같이 오신 걸 보니 분명 우리 동지겠죠? 반가워요." 란지에가 말했다. "지스카르의 학생이었던 애나 에이젠엘모 씨야. 입학 수속을 밟을까 해." 애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전 망명 의회로 가기로 되어 있었잖아요?" "내가 만일 당신을 2본부로 데려갔다면, 적어도 반년은 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애나는 눈을 크게 떴다. "도대체 무슨 얘기예요?" 란지에는 다시 의자에 앉아 팔꿈치를 무릎에 얹고, 깍지를 끼며 턱을 괴었다. "에이젠엘모 씨, 내가 갈림길에서 당신을 보호하는 쪽을 택했다는 걸 이해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위험한 일을 저질렀지만, 어쩌면 그런 행동으로 지스카르를 보호한 셈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나도, 어쩌면 후회할 지도 모르지만, 당신을 보호하기로 마음을 정한 겁니다. 우선 말해 두자면, '요정이 지켜보고 있다'는 말은 정보를 떠내려고 주위를 맴도는 자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4. 페리윙클 공작 "그대의 금발에선 바람 냄새가 나오 흙도 물도 아닌 바람의 냄새라오 낮은 곳에서 비둘기처럼 속삭이다가 높은 곳에서 매처럼 나는 바람이라오 달이울고 별 저물어 흐린 밤에도 발아래 수천 겹 바람 밟고 간다오 하늘 땅 맞다은 세상 끝 이르도록 하늘 뱃길 가는 하늘 뱃사람이라오" 대륙에서 공작이라 하면 왕족이거나, 권력의 정점에 선 한두 명의 귀족을 말했다. 아노마라드에서 왕족이 아닌 공작은 두 가문밖에 없는데, 폰티나 공작의 누이가 왕비라는 것을 생각하면 실질적으로 왕가와 혈연이 없는 공작은 단 한 명뿐인 셈이었다. 더구나 이 특이한 공작은 왕국 안 어디에도 영지가 없었다. 아노마라드에서 아르님 공작이 가진 땅은 비취반지 성과 주변의 작은 정원, 그뿐이었다. 그렇다면 이름만 그럴듯한 이 공작 가문에 가난이 예정됐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터였다. 완의 관료가 되어 녹봉을 받는 방법도 있을 테지만, 아르님 공작은 그런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르님 공작 가문은 결코 돈에 쪼들리지 않았다. 거대한 영지를 갖고 있는 귀족들과 다를 것 없이 풍족하게 살았다. 방탕한 낭비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권위가 유지될 정도로는 돈을 썼다. 사병도 꽤 거느리고 있었다. 그 돈이 어디에서 나는 것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상업으로 큰 이익을 얻는다는 소문이 있을 뿐이었다. 아노마라드 남쪽 바다에 왕국에 속하지 않은 섬들이 있었다. 그 곳에서는 아노마라드에서 준 공작 작위 따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들끼리 그렇게 부르기로 했기 때문에 공작일 뿐, 아노마라드 국왕이 그러라고 했다거나 아니라거나 하는 것에는 관심도 없었다. 대륙에서 다른 귀족이, 심지어 왕이 온다 해도 신기하게 여긴다면 모를까 부복해야 한다는 생각은 떠올리지 못할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아노마라드는 대륙이고, 우리는 섬이지, 대륙은 섬이 될 수 없고, 섬도 대륙이 될 수 없지. 그러니 대륙은 대륙이고, 섬은 섬이지. 우리가 대륙에 관심이 없다면, 대륙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어도 돼." 섬에는 어차피 다른 공작도, 백작도, 남작도, 전혀 없었다. 그들에게 '공작'이라 하면 오직 한 사람, 그들의 지배자를 가리켰다. 주변의 섬과, 바다와, 그들 모두를 지배하는 한 명의 공작. 그들은 그를 '공작 폐하'라고 불렀다. 아침 일찍 일어난 산꼭대기 집 부인은 날씨가 좋은 것을 보고 침대 시트를 세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묵은 시트들을 모두 내어 빨고, 넓게 펼쳐 마당의 빨랫줄에 걸기까지 한 시간 반 정도 걸렸다. 아침 햇빛 아래 나부끼는 흰 시트들을 보며 만족스럽게 허리를 펴고,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였다.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검은 점처럼 보였다. 멀리 있는 새라고 생각하기에는 묘하게 움직임이 없다 싶었다. 점은 점차 커졌다. 잠시 후엔 저 커졌고, 빨래 바구니를 집안에 갖다놓고 나왔을 때는 도저히 새라고 생각할 수 없는 모양으로 변해 있었다. 타원형으로 길쭉했으며 날개라고는 없었다. 그 즈음 일찍 일어난 손녀가 뛰어나와 함께 하늘을 올려다봤다. 손녀가 저게 뭐냐고 묻기전에, 부인은 눈을 한 번 비빈 다음 중얼거렸다. "다랑어가 하늘을 날고 있나?" 점이 커지는 속도를 고려했다면 새나 다랑어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큰 물체라는 걸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러나 부인은 바람 때문에 빨랫줄이 처져서 바닥에 닿는 시트를 바로잡아야 했으므로 하늘을 나는 다랑어의 정체를 볼 기회는 놓치고 말았다. 부인이 시트들을 하나하나 당겨 바로잡고 나서 다시 고개를 들자 점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의 집이 있는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언덕 너머 바다로 사라진 까닭이었다. 언덕 너머 바닷가에서는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노부인보다 더욱 놀라 목을 빼고 있었다. 이미 그건 점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커다란 검은 그림자였다. 신을 믿었다면 기도라도 했을 텐데, 그럴 수도 없었다. 그중 몇몇은 신을 믿지 않을 정도로 고집 셌던 것을 후회했지만, 그리 오래 후회하진 않았다. 하나가 허공의 그림자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저건 배인데?" 빠른 속도로 내려오던 검은 그림자, 즉 배는 누구나 윤곽을 알아볼 수 있게 됐을 즈음 갑자기 느려졌다. 가까이 올수록 점점 더 느려졌다. 그리하여 모두가 예상하던 대 참사를 빚지 않고 서서히, 깃털이 떨어질 때처럼 수면에 내려앉았다. 사방으로 가벼운 파도가 밀려갔을 뿐이었다. "오오……." 그런 광경을 본 사람이라면 다들 느낄 경외심에 사로잡혀, 사람들은 소리를 질렀다. 검은 점으로 보일 정도로 까마득히 높은 하늘에서, 절대로 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범선이, 뚝 떨어진 것도 아니고 물새처럼 가볍게 내려왔던 것이다. 여럿이 아니라 혼자 보았다면 헛것이 아닌지 의심했을 테지만, 주위에 자신과 똑같은 표정을 한 사람이 수십 명이나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배는 해안에서 몇 백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가만히 떠 있었다. 사람들은 섣불리 접근할 엄두도 못 내고 지켜보기만 했다. 해안가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모였다. 노인도, 아이들도, 젊은이들도 몰려나와 해안을 메웠다. 섬 사람 모두가 나온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들은 배에서 누가 내릴지 궁금해서 모두 목을 뺐다. 그러나 배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구름을 뚫고 내려와, 아침 햇살을 받으며, 하늘의 계시인 양 고요히 꺼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배 안의 상황은 고요와 거리가 멀었다. "이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오늘은 왜 돛이 저절로 안 펴지는 건데?" "그걸 내가 알아? 이 배가 어째서 이러저러하게 움직이는지 아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잖아." "그 한 사람이 어떻게든 장치를 설정해 놨으니까 지난번엔 저절로 돛이 펴진 거 아니냐?" "그 사이 우리가 항해를 하느라 배를 이곳저곳 만지다 보니 맨 처음 쥬스피앙 아저씨가 해 놓은 설정이 바뀐 건 아닐까?" "그럼 다시 초기 설정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는 거니?" "한두 군데 건드린 것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되돌리니?" 막시민은 잠시 궁리하다는 표정이더니 외쳤다. "껐다가 켜봐!" 리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황금 넣는 도가니를 손가락질했다. "어떻게 끄는 건데? 알면 막시민 네가 해봐." "금을 도로 다 배면 거지지 않을까? 야, 조슈아! 네 생각에는… 아니, 이 자식은 방금 여기 있더니 어디로 갔어?" 막시민과 리체가 선실에서 나오자 마일스톤이 뱃전을 손가락질했다. 그래서 둘은 뱃전에 붙어 서서 홀린 듯 바다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조슈아를 발견… 하기 전에 그가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섬이네?" "언제부터 저기 있었지?" 마일스톤이 돛대 쪽으로 가며 대꾸했다. "아마도, 우리 모두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조슈아의 정연한 기억 속에서 섬은 수십 장의 스케치였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본 커다란 2절판 책 속에 차례차례 봄의 섬이, 여름과 가을과 겨울의 섬이, 동쪽과 서쪽의 섬이, 남쪽과 그리고 북쪽의 섬이 있었다. 아침의 섬이 있었고, 밤의 섬이 있었다. 폭풍의 섬도, 잔잔한 파란 바다 위로 녹색 케이크처럼 떠오른 섬도 있었다. 갈매기만이 한가로이 날고 있는 섬은 무인도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백여 척의 배들이 둘러싼 섬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항구였다. 미완인 듯 검은 잉크만으로 그린 섬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처럼 보였다. 그러나 다음 페이지에서 어김없이 섬은 수십 가지 빛깔로 칠해져 반짝이고 있었다. 스케치 한 구석에 그려졌던 두 개의 문장도 또렷이 기억했다. 아르님 가문을 나타내는 키 문장. 그리고 그 앞에 그려진 작은 꽃, 꽃은 섬의 이름이었다. 바람개비 같은 다섯 날개를 가진 청보랏빛 꽃이 부드러운 붓끝 아래 피어나 있었다. 페리윙클(periwinkle). 한 가지 소재를 이렇듯 수비 번 되풀이하려면 얼마나 애착이 깊어야 할까. 조슈아가 태어난 비취반지 성과 푸른 정원도 아름다웠지만, 그곳을 지독히 사랑한 기억은 없었다. 더구나 이브노아의 죽음 때문에 어렴풋이 품었을 법한 그리움조차 깨끗이 사라진 곳이었다. 성을 떠나 하이아칸에서 살면서도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다. 옛날 수십 장의 스케치를 묶은 2절판 책을 넘기며 한 사람이 품었을 고향에 대한 집착을, 그 깊이를 어렴풋이 궁금해했다. 그렇게 섬을 그리고 또 그린 사람은 스초안 오블리비언, 아르님 가문의 문장을 그렸고 이카본의 맹우였던 사람이었다. 그는 남쪽 섬 페리윙클에서 태어났을 테고 아마 그곳을 떠나 오랫동안 대륙에서 지냈을 것이다. 고향을 떠나 있는 동안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섬을 그렸다. 기억에 의존해서 그렸을 터라 섬들은 대부분 윤곽이 똑같았다. 그러나 그가 자라면서 보아 온 수백 가지 모습을 그리려 애쓴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섬은 때로 태양과 함께, 달이나 별과 함께 있었고, 푸른 날치떼와 있었고, 존재하지 않는 천사와도 함께 있었다. 그림 하나하나에 그의 목소리가 깃들어 있었다. 먼 바다의 페리윙클, 나의 페리윙클. 조슈아에게는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많은 기억이 있었고, 그 그림들도 수천억의 책갈피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하나를 또렷이 기억했고, 이 순간 그 책갈피를 바로 집어 올렸다. 수십 장의 그림이었던 섬이 눈앞에 있었다. 섬은 여름이고, 아침이었다. 그 점을 사랑하고 그림을 그렸던 사람은 흙으로 변하고 없었다. "먼 바다의 페리윙클……." 직접 들은 적이 없건만, 듣기라도 한 양 저절로 흘러나온 뇌까림이었다. 섬은 그에게 인사를 보냈다. 섬에서 태어나 섬을 해방시켰고 섬이 기리는 주인, 그 주인의 후계자인 자신은 태어나 처음으로 섬을 찾아왔다. 이날의 갠 아침은 섬이 보인 미소였다. 이윽고 조슈아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닻을 내렸어. 연안이 얕더군. 부두는 다른 쪽 해안에 있는 모양이니 그냥 보트를 내려서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누구든 섬까지 가서 예인을 해 달라고 부탁하면 돼. 섬에는 사람이 아주 많은 것 같으니 말이야." 등 뒤에서 마일스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슈아는 몸을 돌려 그에게도 미소했다. "알았어요. 보트는 지금 내릴 건가요?" "이미 내렸어. 가서 타라고, 내가 여기 남을 테니까." 마일스톤만 배에 남고 세 사람이 보트를 탔다. 바다가 잔잔해서 보트를 젓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배는 진짜 항해로 왔다면 들어오기 힘들 정도로 얕은 바다에 떠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해안에 나와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감을 잡지 못했지만, 가까이 가자 뚜렷해졌다. 기대 이상이랄까, 아니 기대를 한 일이 없으니 기대에 어긋났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백여 명의 사람들이 무언의 시선만으로 맞아 주는 가운데 배를 대고 내리는 것도 진귀한 경험이었다. 막시민은 진귀한 경험 따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반면 리체는 조금 들떠 있었다. "저 사람들, 분명 우리 배를 보고 나온 거겠지?" "맑은 하늘에서 벼락, 아니 배가 떨어지면 누구든 하던 걸 팽개치고 뛰어나오게 돼 있다고." 평소처럼 말하고 있긴 했지만 막시민도 긴장했다. 무리를 이룬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법이니 말이다. 사람들은 일정 거리 안으로 다가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떠날 생각도 없어 보였다. 호의라고 해석하기도 그렇고 적대적이라 여기기도 뭣한 애매한 표정들이었다. 결국 그들 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야 할 듯했다. 리체가 막 '안녕하세요. 저희는 길 가던 무해한 여행자들인데요' 정도의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돌아왔습니다." 조슈아는 맞은편 언덕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인 곳이었다. 사람들도 조슈아를 보고 있었다. 아르님 성을 가진 사랑이 이 땅을 밟지 않게 된 지 백 년은 되지 않았다. 그동안에도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랐을 것이다. 아르님이 없어진 페리윙클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섬 사람들 대부분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조슈아의 얼굴은 이카본과 달랐다. 아버지와도 달랐다. 섬 사람들은 조슈아의 아버지 프란츠도 보지 못했다. 섬을 마지막으로 떠나간 데모닉은 금빛 고수머리와 푸른 눈을 가진 소년 히스파니에였을 것이다. 그때 히스파니에는 지금의 조슈아보다도 어렸다. 알아보지 못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무관심하거나 적대시하더라도 놀라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사람들 틈에서 예순 살 가량의 노인이 걸어 나오더니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가 폈다. "환영합니다. 축복받은 아르님, 우리의 소공작이여, 당신께선 언제든지 이곳에 오고 또 떠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오늘 이곳에 오셨으니 우리는 당신의 백성입니다." 조슈아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깊어진 눈빛이었다. 잠시 후 조슈아는 그들에게 허리를 굽혀 절했다. 사람들 사이로 인사가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조슈아는 선 채로 둘러보며 그들의 인사를 하나하나 받았다. 이 순간 그는 조상과 아버지와 가문의 권위 위에 있었고, 그렇기에 그걸 지킬 의무도 있었다. 원해서 가진 것이든 아니든, 그 이름이 있기에 사람들은 처음 보는 조슈아를 존중했다. 이것은 그의 역할이었다. 인사가 끝났을 때 조슈아는 그들에게 미소를 보였다. "기억해 줘서 고맙습니다." 노인이 대답했다. "우리는 기억해야만 하는 운명입니다. 그럴 의무가 있으며 권리 또한 있으니까요, 아르님은 이 땅의 흙 한 덩이조차 빠짐없이 갖고 있고, 우리 또한 그런 아르님을 갖고 있습니다." 노인의 태도는 손님에게 보이는 정중함과도, 주인에게 보일 충성심과도 조금씩 달랐다. 조슈아는 이곳의 공작과 백성들의 관계가 어떤지 아직 알지 못했다. 하지만 대륙의 영주와 주민의 관계와는 분명 달랐다. 무엇이라고 답해야 할까, 자신은 약속을 해도 좋은 사람일까, 그런 자격이 있을까. 그러나 대답해야만 하는 자리였다. "계속 그럴 것입니다." 뒤에 서 있던 둘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에게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난 사람은 소공작 조슈아 폰 아르님일 뿐, 나머지 둘이 친구이든 하인이든 알 바가 못 되었다. 그리고 조슈아도 사람들에게 굳이 둘을 소개하려 하지 않았다. 리체가 중얼거렸다. "우린 구경꾼이 돼버린 것 같네." 막시민은 맞장구치거나 불평을 늘어놓는 대신 조슈아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그의 친구는 언젠가 저 많은 사람들을 다스릴 것이다. 저들은 막시민과 또래인 조슈아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도 전에 만나는 순간부터 기대를 가졌다. 이름의 역할을 만들었다.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상화이었다. 막시민 리프크네라는 이름으로 '네가 닭을 훔쳐 먹었구나!'하는 기대 정도라면 받아보았지만. 평소 주어진 역할에 수없이 도망치려 했던 조슈아도 이런 순간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온 세상에 공작이 될 젊은이와, 그걸 기대하는 사람들만이 존재하는 듯한 광경. 막시민은 그런 조슈아를 보고 있었다.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오늘만큼 뚜렷하게 느낀 날은 없다고 생각했다. 녀석은 도망치기 힘들 거라고, 집정관 리처드 펠은 으름덩굴로 둘러싸인 검소한 이층집에 살았다. 그는 다른 섬 사람들과 달리 어부가 아니었고, 그렇다고 광부나 양식업자도 아니었다. 집정관이 되기 전에 그의 직업은 '집정관의 아들'이었다. 단순한 논리였다. 그는 다른 직업을 가져야 할 필요를 느낀 일이 없었다. 펠 집정관은 아르님 공작 가문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사흘이나 나흘에 한 번씩 돌보러 가야 하는 빈 저택의 주인이었으니까, 가 보면 집안 곳곳에 초상화가 있고, 서재에는 족보가 있고, 저택을 지킨다는 문지기 노인네는 하루에 한 번씩 공작 가족 얘기를 해야 입술이 붙어버리지 않는다는 형편이니 잘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어제도 정문을 나서려니까 문지기 노인네가 '섬에서는 물론 대륙에서도 가장 예뻤다던 알테나 폰 아르님'이 은방울꽃 팔찌를 만들어 줬던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하는 바람에 저녁 먹을 시간에 한 시간이나 늦었다. 집정관은 한 해에 한 번씩, 섬 전체에서 벌어들이는 돈의 10분의 1을 걷어 켈티카에 있는 공작에게 보냈다. 공식적으로 아르님 공작가와 페리윙클 섬은 관계를 끊은 것이었으므로, 이 일은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새 왕가가 들어선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페리윙클 섬은 독점적인 진주 양식과 산호 채취, 그리고 두르넨사의 반 해적 상인들을 통해 내다 파는 청금석 채굴로 막대한 수입이 있었다. 그러니 아르님 공작의 한 해 수입은 기껏해야 농사를 짓거나 양을 키우는 대륙의 장원들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집정관에게 녹봉을 주는 사람도 공작이었다. 공작은 세금 계산을 완전히 그에게 맡겼다. 감찰관을 보내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것만은 고맙게 생각했지만, 어차피 펠 집정관은 세금을 빼돌리거나 할 수 있는 성격도 아니었다. 대륙의 영주들이 세금은 물론이고 장기 부역까지 요구하는 것을 생각하면(심한 곳은 아직도 제분소나 빵 굽는 가마솥 등을 독점하고 이용료를 물게 했다) 간섭 없이 세금만 내면 되는 섬의 상황은 무척 편한 셈이었다. 그러나 리처드 펠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세금을 바쳐야 하는 공작의 얼굴조차 본 일이 없었다. 따라서 아르님 공작이 페리윙클 섬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돈과 진주, 산호, 그리고 귀하디귀함 청금석까지 거둬간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집정관님, 손님들이 오셨는데요." 집정관은 하녀의 손에 찻잔이 들려 있지 않은 걸 보고 짜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이었으므로 꾹 참으며 대꾸했다. "아침부터 손님도 아니고 손님들이라고? 오는 건 좋지만 한 명씩 차례대로 들어오라고 해." 하녀는 다시 내려갔지만 결국 차를 가져오진 않았다. 게다가 문이 활짝 열리더니 예닐곱 명쯤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집무실로 들이닥쳤다. 집무실에는 손님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있었지만 고작 두 개뿐이었으므로 그들은 모두 서 있어야 했다. 그렇게 서 있으니 안 그래도 넓지 않은 집무실은 장거리 마차처럼 가득 차버렸다. 책상 근처에 서게 된 남자가 말했다. "집정관님, 아침부터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꼭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펠 집정관이 그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문이 열리고, 또다시 세 명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먼저 들어온 자들이 돌아보았고 나가 있으라는 손짓과 들어오겠다는 고집이 뒤섞여 주위는 무척 소란스러워졌다. 결국 끼어들어 온 세 사람이 막 문을 닫으려는 찰나, 또다시 다섯 명 정도가 문가에 나타나 먼저 들어온 사람들을 밀어댔다. 이제 문을 닫을 수도 없게 되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이 소란들이야!" 집정관이 벌떡 일어나 고함을 치자 사람들은 떠들기를 멈췄다. 그런데 일어나고 보니 문 너머 좁은 복도와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 그리고 현관까지 사람이 들이찬 것이 아닌가? 그걸 본 집정관은 화내던 것을 잊고 더럭 겁이 났다. 아침부터 이렇게 사람이 몰려오다니, 보통 일이 아니다 싶었다. 이 사람들이 그에게 불만을 갖고 몰려온 것이라면? "죄송합니다, 집정관님." "용서해 주십쇼, 워낙 일이 일이다보니……." 펠 집정관은 꼼꼼하고 공평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 순간 삶을 돌아볼 겨를이 있었다면 사람들이 그에게 항의하러 몰려올 까닭이 없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소심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차근차근 생각할 여유를 가질 수가 없었다. "무, 무, 무, 무슨 일이지?" 사람들은 한꺼번에 말하기 시작했다. "집정관님,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드디어……." "오늘을 기다렸던 건 아닐지……." "…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희망을 여기에 걸고……." 결정적인 말은 하나도 안 들렸다. 소심한 집정관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한 노부인이 여러 사람을 헤치고 안쪽으로 들어왔다. 펠 집정관은 노부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미간을 찡그렸다. "집정관님, 갑자기 몰려와서 정신이 없으시겠지만, 너무 중요한 일이라 이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허리가 꼿꼿하고 목소리가 낭랑한 기운찬 늙은이였다. 집정관은 이 부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페리윙클 섬에서 가장 큰 진주 양식장을 갖고 있고, 목소리 크고 맑은 아이들을 다섯이나 낳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고, 펠 집정관과 의견이 정반대였던 것이다. 집정관은 도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아, 예. 말하세요, 둘시아 부인." "물론 말한 거예요. 집정관께서는 평소 저와 의견이 다르셨지만, 그렇다고 무례를 범할 분은 아니시라고 믿어요." 노부인의 느리고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거슬렸지만 참기로 했다. 싸워봤지 득은 커녕 실밖에 없는 상대였다. 그러나 이어진 말을 듣는 순간, 펠 집정관은 도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아침에 드디어 아르님 가문의 사람이 섬에 도착했답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노부인은 좁은 어깨를 작은 새처럼 재빨리 으쓱했다. "내가 왜 집정관님께 거짓말을 하겠어요? 이곳에 몰려온 사람들 모두가 똑똑히 본 일입니다. 모두 들떠 있는게 보이시겠죠. 당연한 일이에요.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축복받은 아르님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니 오죽하겠나요?" 갑자기 관자놀이에 땀이 솟았다. 리처드 펠 집정관은 이 사태를 냉정하게 생각하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안경을 썼다가, 도로 벗었다가, 결국 다시 쓰고 안경닦이로는 손가락을 닦으며 물었다. "축복받은 아르님이라면, 설마 히스파니에 폰 아르님?" "아니에요. 여기 오실 분이 아니죠. 지금 아르님 가문에는 축복받은 아르님이 한 분이 아니랍니다. 물로 내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시겠지만요." 집정관은 사람들의 얼굴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그들 중 하나가 불쑥 말을 꺼냈다. "대단한 일 아닙니까? 생전에 아르님을 한 분도 못 뵙고 죽게 되는 줄 알았는데." 또 다른 사람이 말을 받았다. "오신 광경도 장관이었지요! 하늘을 나는 배가 사뿐히 내려와 앞바다에 뜨더라니까요, 더기서 세 사람이 작은 배를 타고……." "모두가 얼어붙어서 꼼짝도 못했는데, 그 분이 먼저 말씀하셨죠. '돌아왔습니다'라고요. 그때 진짜 기분이 묘한 게……." "나도 그 말을 듣는데 갑자기 무릎이 풀리는 기분이더구만." "초상화하고 꼭 같아서 다들 단번에 알아봤습죠. 오늘 애들도 학교 가기 다 글렀습니다. 지금 전부 몰려가서……." "게다가 이카본 공작 폐하의 얼굴도 꼭 빼닮은 데다……." 조슈아는 이카본과 그리 비슷한 얼굴이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어느새 닮았다고 굳게 믿는 분위기였다. 펠 집정관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확인하듯 물었다. "그래서 온 사람이 누구란 겁니까?" 둘시아 부인은 양산으로 책상을 톡톡 쳤다. "장차 섬을 이어받으실 소공작, 아르모리크 경이지 달리 누구겠나요?" 소공작 조슈아라면… 분명히 올해 열일곱 살인가 났다는 소년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집정관의 기분도 조금 나아졌다. 둘시아 부인이 말을 이었다. "집정관님도 얼른 그 분을 뵈러 가셔야지요. 그 분은 아르님 저택으로 가셨답니다. 내 이들 둘이서 모시고 갔지요. 지금 가실 거지요?" 물론 그래야 했다. 집정관은 일어나 책상을 돌아 나오며 사방을 메운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둘시아 부인의 얼굴도 봤다. 그리고 내심 코웃음을 치며 생각했다. 저런, 골수 아르님주의자들. 수도에 앉아 있는 아르님 공작이 저들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다고 저렇게 좋아한단 말인가, 더구나 공작의 아들일 뿐 아직 소년에 불과한 소공작이 뭘 해줄 거라고 기대하는 건지. 그렇게 생각했으면서도 집정관은 옆방의 비서를 불러 뒤따라 올 때 준비해올 것들을 일일이 지시했다. 흥분해서 떠드는 사람들에게는 예의를 갖춰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펠 집정관과 둘시아 부인, 그리고 뒤따라 오는 긴 꼬리가 아르님 저택에 도착했을 때, 입구에는 예의 그 문지기 노인이 혼자 앉아 있었다. 집정관은 내심 의아했다. 아르님 이야기라면 세끼 식사보다 더 좋아하는 문지기 노인네가 분명히 소공작을 봤을 텐데, 어째서 저렇게 무심하게 앉아 있을까 싶었다. "안녕하신가요, 에이먼 씨. 소공작께선 어디로 가셨는가요?" 둘시아 부인이 먼저 물었으나 문지기 노인은 대답이 없었다. 두 번, 세 번 물었을 때에야 노인은 손을 들더니 정원 한 구석을 가리켰다. 그것도 무척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앞선 둘과 뒤따르던 사람들은 정원으로 몰려갔다. 비취반지 성처럼 넓은 미로 정원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곳 정원은 나무를 모양내어 손질하는 대신 비교적 자연스럽게 내버려둔 곳이라 그늘과 구석은 오히려 더 많았다. 그들은 곧 정원사와 마주쳤는데, 정원사는 소공작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어딜 가셨남, 길을 잃으신 건 아닐지." 그들은 저택을 둘러싼 정원을 반 바퀴 정도 돌았다. 저택 뒤쪽에는 아몬드나무가 무리지어 작은 숲을 이뤘다. 나무 아래에는 긴 의자들이 불규칙하게 놓여 있었다. 따뜻한 남부에서 아몬드나무는 가장 이른 꽃을 피우는 나무였다. 2월이면 가지가 하얀 꽃으로 뒤덮일 정도였다. 그렇게 성급한 아몬드나무를 이카본 폰 아르님은 좋아했다고 했다. 이카본은 기다리지 않고 모든 일을 빠르게, 생각난 즉시 해치우는 사람이었다.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도 했다. 그가 맨 처음 심었다는 아몬드 나무가 점차 많아져 지금은 백 그루에 조금 못 미쳤다. 아몬드나무 숲 뒤에서 둘시아 부인의 두 아들이 나타나더니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댔다. 그러자 둘시아 부인도 뒤를 돌아보며 똑같은 동작을 해 보였다. "쉿." 부인은 걸음을 늦춰 아몬드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따라오던 사람들은 멈춰 섰지만, 펠 집정관은 자기가 둘시아 부인이 시키는 대로 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하며 뒤따라갔다. 나뭇가지를 헤치고 들어가자 저만치 오각형을 그리며 놓인 긴 의자들이 보였다. 의자 중 하나에 회색 머리 소년이 앉아 있었다. 어렴풋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발리 꽃피우고, 한여름이면 벌써 열매가 익지, 일찍 피고 일찍 지는 꽃이라선지, 데모닉을 연상시키는 사람들이 있었어. 물론 초대 공작이 좋아하기도 했으니까, 또 4년에 한 번 수확하는 것 때문에." "4년에 한 번? 그게 데모닉과 무슨 상관인데?" "데모닉도 네 대에 한 번 정도 태어나." 리체는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물었다. "하지만 너네 작은 할아버지도 데모닉이라면서? 그럼 넌 세 대만에 나온 거 아냐?" 조슈아가 웃었다. "일찍 수확했나보지. 그러고 보면 나야말로 네 대가 가도록 기다리지도 못했으니 정말로 아몬드나무처럼 성급한 것 아닐까?" 막시민이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휴경기가 짧다보니 거름이 부족해서 그렇게 비쩍 말랐구만." 막시민은 숲 너머에서 사람들이 나타난 것을 알고 있었다. 조슈아라고 해서 몰랐으리란 생각은 안 했다. 그러나 조슈아는 사람들이 보든 말든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하늘을 가린 잎사귀들 틈으로 햇빛이 흘러갔다. 꽃이 없어도 우아한 나무였다. 바람이 적당히 불어왔고, 그늘은 서늘했다. 남의 집 정원에서 느낄만한 감정이 아니긴 해도, 무척 한가로웠다. 남의 얘기를 엿듣겠다고 저만치에서 서걱대는 발소리만 아니라면 말이다. 아니지, 막시민은 정정했다. 남의 집이 아니었다. 비록 처음 왔다 해도 조슈아에게 여긴 자기 집이었다. 뒤뜰에 심은 아몬드나무 그늘에 앉아 친구와 이야기하며 쉰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정원만 맴돌았을 뿐 저택에 아직 들어가 보지 않았다는 게 조금 우스운 노릇이긴 해도, 사실이 그랬다. 어차피 그들이 가야 할 곳은 저택이 아니라 납골 묘지였다. 그곳 열쇠는 이제부터 올 사람들이 갖고 있을 테고 말이다. "집 너무 좋다." 햇빛 잘 드는 정원을 걸으면서부터 줄곧 부러워하던 리체가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조슈아는 어설프게 웃을 뿐이었다. 막시민은 '인형'을 만났던 파티를 생각하며 말했다. "여길 갖고 뭘, 켈티카에 있는 성이 진짜지." "그런데 막군, 나 여기가 비취반지 성보다 더 편안한 느낌이야." "넌 코츠볼트 시골딱지도 그 성보다 좋아했다고, 뭐 새삼스러울 거 있겠냐?" 조슈아는 고개를 젖혀 빛나는 잎사귀들을 올려다보았다. 한참 동안 박새 소리만 들렸다. 이윽고 조슈아가 말했다. "아까 문을 밀고 들어오는데 무척 조용하더라고, 아무도 없고." 리체가 말했다. "넌 사람들이 많이 쳐다보는 걸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글쎄, 싫어하진 않는데 오늘은 왠지 좀 그렇네, 왜 그럴까." 막시민은 알고 있었지만 굳이 지적해주지 않았다. 오늘 조슈아를 바라보며 감탄한 사람들은 조슈아 본인이나 막스 카르디의 모습을 본 게 아니었다. 조슈아는 사람들의 시선과 환호에 익숙했지만, 그가 '아르님 소공작'이기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들만은 처음이었다. 이건 스스로의 노력이나 가치와 관계없는 환호였다. 대신 아버지의 이름과 가문의 이름이 한꺼번에 어깨에 올려져 있었다. 아마도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그랬기에 조용한 곳에 숨어 마음 편해 하고 있는 것이겠지. 익숙하지 않은 역할을, 다시 말해 '환영받는 소공작'의 역할을 어떤 식으로 해나갈지 잠시 생각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 생각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쉬시는 데 방해가 되었나요?" 문지기 노인에게 어디로 갔는지 말하지 말라고 해놓긴 했지만, 정말로 찾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조슈아는 고개를 돌렸다. 가까이에 두 사람이 있었다, 아몬드나무 숲 밖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마음의 준비가 됐든 안 됐든, 소공작의 배역을 해내야 할 시각이었다. "아뇨, 이제 됐어요. 오신 분은 누구신가요?" 둘시아 부인은 조슈아가 앉은 의자 앞으로 다가와 손을 모으며 절했다. "전 둘시아 타란트예요, 전하의 아버님께 바칠 진주를 양식한답니다.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좋은 진주조개들이지요. 아시다시피 전하의 가계에서 만든 전통의 비법이에요." 조슈아는 '전하'라는 말에 당황해서 노부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둘시아 부인의 얼굴에는 실수했다는 기색이 없었다. "방금 날 뭐라고 부르셨죠?" "스스로를 낮추시지 마세요, 전하." 조슈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부인에게 가볍게 예를 취한 뒤 바로 말했다. "난 전하가 아닙니다. 그건 왕가에서나 쓸 수 있는 존칭이죠." 둘시아 부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올려다보는 얼굴에서 고집이 느껴졌다. "아르님 가문은 페리윙클의 왕가랍니다. 우린 공작 폐하라고 불러 왔어요. 오랜 전통이지요." 조슈아는 잠시 대꾸할 말을 잃었다. 아버지는 페리윙클에 대한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았다. 아버지조차 가본 일 없는 먼 섬이라고만 들었을 뿐이었다. 아르님 가문이 떠난 뒤로 세금이 보내져 오는지, 대리 토이할 사람을 직접 임명하는지, 한 마디도 해주지 않았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는 사람들이 자신을 존중하기나 할까 의심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제 어렴풋이 알 듯했다. 공작 가문이 페리윙클을 떠나야만 했던 이유를, 모든 주민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공작을 '폐하'라고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라면, 아노마라드 왕가가 아르님 공작이 독립왕궁을 만들려고 한다고 오해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으니까. 그 오해를 풀기 위해 아르님 가문은 섬을 버리고 켈티카로 가야 했다. 관리도 교류도 전혀 없는 양 가장해야만 했다. "전통을 꺾는 것은 미안하지만, 그런 존칭은 내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냥 소공작이라고 부르는 쪽이 좋겠군요." 둘시아 부인은 실망한 표정이었다. "소공작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대륙의 왕 때문에 전통대로 하지 못하시겠다는 거라면 저희의 자부심도 상처를 입을 겁니다." 조슈아는 더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상대는 노인이었다. 아르님 가문이 떠났을 때는 이 부인도 소녀였을 것이다. 그때부터 오랫동안 간직해 왔을 자부심의 문제를 몇 마디 말로 바꿀 순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때 노부인 뒤에 서 있던 사람이 다가왔다. 점잖은 풍채였지만, 어깨가 좁고 안색이 안 좋은 중년 남자였다. "저는 집정관 리처드 펠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지만 표정은 그리 영광스러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묘한 방법으로 오셨다죠? 다들 궁금해하더군요." 조슈아는 빙그레 웃었다. "그건… 그냥 그런 방법이 있어요, 나중에 설명해드릴 기회가 있겠죠." "그렇습니까, 어쨌든 아르님 공작 가문의 일원을 뵙는 것은 일생 처음입니다. 소공작도 저택에 걸린 초상화로만 뵈었을 뿐이죠." 영광이라는 말을 뒷바침하기 위해 그 말을 한 것 같진 않았다. 막시민이 보니 펠 집정관은 말하면서 힐난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조슈아는 짐짓 눈치 채지 못한 체 하며 물었다. "내 초상화도 저택에 있나요?" "아니라면 저희가 소공작을 어찌 알아봤겠습니까?" 어조가 묘했다. 마치 초상화가 없었다면 알아볼 일이나 있었겠느냐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조슈아는 같이 비꼬는 대신 미소로 답했다. "그렇겠군요, 어쨌든 저택에 들어가 봐야겠네요. 안에서 얘기하실까요?" 조슈아가 몸을 돌리자 등 뒤에서 집정관이 다시 말했다. "그릴 말씀도 있고 합니다." 드릴 말씀이라고? 막시민은 그 말에서 좋지 않은 예감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5. 모독 "당신이 신성하게 생각하는 것이 모두 덜어져 짓밟혔으면 좋겠어. 진흙 발에 차이고, 짓이겨져 시궁창으로 흘러갔으면 좋겠어. 그렇게 해서라도 날 기억하지 못하게 만들고 싶어. 이 세상에는 오직 당신과 나의 미친 사랑." "나도 내 예감이 좀 틀렸으면 좋겠다고." 천장이 높고 널찍한 홀에는 큰 테이블이 놓였고, 그 앞에 조슈아, 막시민, 리체, 그리도 뒤늦게 섬으로 들어온 마일스톤이 앉아 있었다. 여기가 식당이 아니나 테이블도 식사용은 아니었다. 조슈아는 이 홀이 비취반지 성에 있는 아버지의 회의실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넓이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쪽이 훨씬 더 넓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비치반지 성이 훨씬 규모가 컸지만, 이쪽 저택이 홀이 큰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 앞에는 해변에 나왔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홀을 차지하다 못해 복도까지 꽉 메우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들어올 일이 있다면야 홀은 당연히 커야했다. 지금 상황을 보자면 이보다 더 커야 할 것 같았다. 조슈아 일행은 홀 가장 안쪽에 앉아 있었는데, 이미 나가려 해도 나갈 수 없는 상태였다. 다섯 군데나 되는 문은 사람들로 다 막혔다. 물론 등 뒤에 쪽문이 하나 더 있긴 했지만, 그쪽으로도 도망칠 순 없을 것 같았고……. "도망은 왜 가냐? 여기 너네 집 아냐?" 조슈아는 어깨를 움츠리며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지금은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사람들에게 조슈아가 턱을 괴었는지 어쨌는지 보이지 않았다. 조슈아와 그들 사이에는 작은 산이 솟아 있는 까닭이었다. 다시 말해, 테이블 위에는 두꺼운 책이 열 권 정도, 노끈으로 철을 해 놓은 서류 뭉치도 그만큼, 그리고 장부처럼 보이는 노트가 열다섯 권, 4절판으로 된 출생기록부, 낱장으로 쌓인 민원서류 두 뭉치가 위용을 자랑하며 쌓여 있었다. 그것들에 가져서 테이블에 앉은 조슈아나 막시민 등은 얼굴만 간신히 보이는 정도였다. 홀 안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댔다면 조슈아 일행은 한 마디도 나눌 수 없었을 것이다. 드디어 사라졌던 집정관이 다시 나타나서 테이블 앞까지 왔다. "휴, 겨우 준비가 다 됐습니다." "뭘 할 준비요?" "그야 물론……." 펠 집정관은 쌓여 있는 책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렇게 봐서 그런지 표정이 의기양양해 보였다. "몇 십 년이나 못했던 연례 보고와 접견회입니다." "뭘 보고하는데요?" "아르님 가문의 땅에 관련된 모든 것이죠." 그 말과 함께 집정관은 책 더미를 뒤적거리다가 한 권을 집어냈다. "아, 여기 있네, 940년대 출생기록부입니다. 10년 단위로 되어 있죠. 이것부터 보시고 이게 950년대, 960년대, 이게 980년대 것이군요." 집정관은 두꺼운 4절판 책을 조슈아 앞에 척척 쌓아 놓았다. 조슈아가 얼떨떨해하고 있는 동안 그는 다시 다른 책더미를 잡아당겼다. "이건 토지 대장입니다. 물론 모든 토지는 공작 폐하의 것이고, 저희는 세금을 내고 사용할 분이죠. 그동안 토지 사용인 관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살펴보시고, 그 다음은 세금 징수 기록입니다. 참, 이걸 보시려면 영지 전체의 매출 대장부터 보셔야 되겠군요. 이건 양이 좀 많습니다. 기간 산업별로 나뉘어 있고요. 청금석 광산과 진주 양식, 산호 채취, 그리고 해상 수입 기록은 여기 따로 있습니다." 리체가 조슈아를 흘끔 보며 말했다. "너희 집 좋다고 한거 취소야." 막시민도 말했다. "너희 집에선 공작 본인이 비서도 없이 서류를 일일이 검토하냐?" 펠 집정관은 친구들을 말을 죽 무시하고 있었지만, 막시민의 말이 거슬렸는지 갑자기 말했다. "아무리 훌륭한 비서가 있어도 서류가 수십 년 쌓이면 당연히 많은 겁니다." 막시민은 감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집정관님께선 이 서류들을 하룻밤이면 다 검토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본데, 저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능력이라 미처 가능하다고 생각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다음 조슈아에게 귀엣말을 했다. "저 집정관, 분명 널 골탕 먹이려고 이런 일을 벌인 게 틀림없다." 조슈아는 이리저리 옮겨지는 서류책의 양과 집정관의 기세에 왠지 압도되어 몸을 뒤로 젖히고 있다가, 간신히 하나 물어봤다. "해상 수입이 뭐죠?" "복잡하게 돌려서 말씀드릴 수도 있겠지만, 남도 아니고 아르님 가문 분이니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해적질입니다. 아시다시피 전통이죠." 막시민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조슈아를 봤다. "이거 옛날 얘기였던 게 아니었네." "으음……." 조슈아는 다시 한 번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고 방을 메운 사람들을 곁눈질하며 집정관에게 물었다. "본래 이렇게 사람들이 다 모여서 보고회를 하나요?" "항상 이렇게 많이 오진 않는데, 이번엔 워낙 오랜만이라 자발적으로 많이 모였군요." 집정관의 태도가 자연스러운 것이 더 두려웠다. 조슈아는 꼭 그러려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출생기록부를 잡아당겨 들춰보려 했다. 그때 무리 앞쪽에 있던 중년 남자가 말했다. "집정관님. 말씀대로 예의를 지켜 조용히 하고 있었는데요. 이대로는 좀 그렇습니다요? 소공작 전하께서 서류를 다 살펴보실 때까지 언제까지나 기다릴 순 없는 노릇 아닙니까?" 집정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군." "어쨌든 엄청나게 오래 걸리실 테니까요." 또 한 여자가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 같은 의견을 나지막히 말하며 웅성거렸다. 그래도 큰 소리로 떠들거나 하진 않았다. 그들 앞에 있는 사람은 비록 나이가 어리더라도, 아르님이었다. "알았네, 내가 말씀드리지. 그럼 소공작께선 민원이 있는 자를 먼저 만나시는 게 좋겠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한 해에 한 번 돌아오는 접견일 하루 동안은 찾아오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는 것이 전통입니다. 초대 아르님 공작 폐하께서 정하신 것이죠." "잠깐, 저 사람들이 전부 다 민원인은 아니겠죠?" "물론 대부분 구경꾼입니다. 소공작께서 오셨으니 얼굴 한 번 뵙겠다고 이렇게 모여든 거죠." 흠, 하고 한숨을 내쉰 사람은 조슈아만이 아니었다. 막시민도, 리체도, 마일스톤까지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걸로 동의가 됐다고 생각했는지 재빨리 첫 번째 사람이 나섰다. 어부처럼 보이는 늙수그레한 남자였다. "우선 제가 말입니다. 죽기 전에 아르님 소공작을 뵙게 되어서 아주 기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칼바위 해안 쪽 얘긴데 거기에 거, 그쪽 암초 지대에 예전에는 농어가 알을 낳으러 잘 찾아왔는데요, 올해 봄에는 글쎄 씨알머리가 말라버렸지 뭡니까? 이게 대체 어찌된 영문이래요?" "네?" 너무 갑작스런 질문이라 조슈아는 눈만 깜빡거릴 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오늘 도착한 사람에게 다짜고짜 농어라니?" 어부는 그 시점에서 대답을 기대한 게 아니었는지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고건 말입니다, 지가 보기에는 말이죠. 요즘 들어 이짝에 어슬렁대는 조개 반도 놈들의 짓이 아닐랑가 싶거든요? 그놈들이 근해의 농어들을 싹 쓸어가니까, 해안에 알 낳으러 올 놈도 싹 씨가 마른 게 아닌가, 요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소공작 전하는 으찌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구만요?" "요샌 해적들이 고기도 잡나요?" 전하라는 말에 굳이 반박할 정신도 없었다. 굳이 전하 문제가 아니어도 듣는 얘기가 전부 생소했던 것이다. "와, 해적 놈들이 돈이 되는 거라면 머신들 안 가주가 겠습니까? 아니 그러요? 괴기 아니라 섬도, 우리 요 섬도 통재로 집어삼킬라고 대들 놈들 아니겠스요? 고넘들이 농어 새끼들을 후릿그물루다가 쓸어 담아가지구 싸그리 가주 가뿔면 우리 어부들은 머시를 보구 살구, 아, 달구넘의 새끼를 쫓던 강새이 꼬라지가 되야불는 거 아이라요, 글씨." 처음에 예의를 갖추려고 애쓰던 어부는 흥분하자 말이 뒤섞이다가 결국 평소 쓰던 말투로 돌아와 버려서, 안 그래도 생소한 얘기를 집중해서 듣고 있던 조슈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 사람에게 농어를 잡아간다는 자들이 해적인지 이웃 어선인지, 과연 해적질과 어부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건지 아닌지 따지는 것은 이미 무리였다. "저…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건가요?" "으짜기는 으짭니까, 고넘아덜을……." 집정관이 손을 내저어 어부의 말을 막았다. "소공작께서 알아들으실 수 있는 말로 하게." 어부는 당황해서 고개를 꾸벅꾸벅했다. "아… 아이고,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칼바위 해안 앞바다에 둑을 쌓아 주십사, 그런 말씀입니다." "둑이요?" 해적얘기를 하다가 왜 둑으로 가는 건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런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부는 열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둑을 쌓으면 우선 폭풍이 올 때 해안이 안전하고요, 또 아그덜, 아니 아이들이 멀리 헤엄칠 때 보호를 해줄 수가 있어서 좋고요, 또 조개나 굴을 딸 때……." 이쯤 되면 해적은 고사하고 농어가 없어졌다는 얘기부터가 사실인지 알 수 없었다, 잠시 섬에 들른 것뿐인 조슈아한테 둑을 쌓자 말자 하는 것부터가 앞뒤가 안 맞는 얘기였지만 말이다. 듣자 못한 조슈아가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다른 것보다도 제 생각엔 둑을 쌓으면 농어가 해안에 접근하기가 힘들어질 것 같은데……." 그 때 옆에 앉아 있던 막시민이 팔꿈치로 쿡 찌르더니 귀엣말을 했다. 조슈아는 즉시 알아듣고서 대답했다. "네, 진지하게 고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분." 어부는 고려하겠다는 말에 감읍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막시민은 눈을 가늘게 뜨며 하품을 했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도 여러 번 팔꿈치질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두 번째 사람은 옷을 잘 차려입은 여자였다. 나이는 마흔 살 정도 되어 보였다. 그녀는 무척 우아하게 절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소공작 전하께서는 과연 예로부터 내려오는 말씀이 하나도 그른 것 없다는 말을 증명하옵시는 산 증인답게 섬에서 태어난 사람은 물론 대륙의 사람들까지도 길이길이 기릴법한 우아한 풍채로 저희에게……." 펠 집정관이 끼어들어 말을 잘랐다. "본론으로 들어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으니." 아주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네, 소공작 전하, 신부감은 섬에서 고르실 생각이시겠죠?" 이번에도 조슈아는 똑같은 표정으로, 똑같은 대답을 할 수박에 없었다. "네?"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우선 우리 페리윙클 사람들은 대륙의 어느 나라보다 뛰어나고, 당연한 일이지만 아가씨들도 그렇기 때문에, 페리윙클에서 제일 훌륭한 아가씨를 고르면 세계 제일의 아가씨를 신부감으로 맞이하게 되시는 것이죠. 그거야말로 고귀한 소공작 전하께 더없이 어울리는 일이고요. 또한 전하께서도 벌써 열일곱이시니 슬슬 미래를 준비하셔야 될 때이고, 섬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전하의 훌륭한 결혼식을 몽매에도 바라마지 않을 것이고……." 막시민은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뜨고 턱을 괸 채 어디쯤에서 이야기를 잘라야 할지 궁리하고 있었다. 조슈아에게 맡겨 두면 한 사람과 한없이 논박을 주고받다가 날이 저물고 말 테니까, 게다가 이 아주머니는 막시민조차 고민하게 만드는 만만찮은 장광설의 달인이라 섣불리 끼어들 틈을 찾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열일곱이면 결혼을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이 정당한가는 둘째 치고, 섬 사람들이 결혼식 구경을 하고 싶어한다고 해서 결혼을 해야 한다는 괴 논리는 넘어간다 쳐도, 이 이야기의 흐름이 자기한테는 딸이 넷 있는데 하나같이 꽃같이 예쁘고 상냥하며 정숙하고 매력적이라는 쪽으로 이어져가는 것만은 참고 들어줄 수가 없었다. 막시민은 한숨을 내쉬며 귀엣말을 하자 조슈아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네, 충고 잘 들었습니다. 그 문제는 추후 아버님을 모시고 와서 더 진전시켜 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아주머니도 무척 만족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세 번째는 두 사람이었는데, 척 봐도 사이가 나빠 보였다. 한 사람이 재빨리 먼저 말했다. "소공작 전하, 뵙게 되어 감읍하옵고, 다름이 아니라 저는 섬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인 진주 양식을 하는 사람이올시다." 그 말을 하자마자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 "진주 양식이 제일 중요하다고 누가 그랬소?" "그건 섬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상식 아닌가." "아니, 당신 생각이면 상식이 되는 거요?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이다. 그리고 나뿐 아니라……." "그럼 설마 자넨 산호 채취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바다에 그저 뿌려져 있을 뿐인 산호는 오늘 안 캐면 내일 캐도 되고, 올해 안 캐도 내년에 캘 수 있는 거잖나? 하지만 진주는……."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데 수익이 높으니 당연히 산호 채취가 중요한 산업이고말고! 내가 보기에 진주는 공들여 양식이랍시고 해 놓으면 절반은 쓸모없는 쓰레기가 나오고, 나머지의 절반은 찌그러져서 제 값도 못 받는게 나오고, 남은 것 중에서 도 절반은 작아서 쓰지도 못하는 것들이고, 알짜는 기껏해야 손에 한 움큼 쥐면 끝 아니오?" "어허, 이 양반! 섬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을 혼자만 아는 양 떠드시나? 그렇게 한 줌 얻게 되는 진주가 얼마나 값지고 입이 딱 벌어지도록 비싼 건지 아나? 자네가 그 가치와 노고를 아느냔 말이야! 그건 양식업자들의 피땀이 서린 것은 물론이고, 선대 아르님 가문의 어르신이 만든 비법이란 걸 잊어선 안 돼! 그 분께서 비법을 만드셨기에 우리가 대륙에서 유일하게 진주를 양식할 수 있는 것 아니냔 말이야! 감사한 줄 알아야지!" "내가 진주 양식업자요? 내가 왜 감사해?" 듣다보니 이쯤해서 말리는 누군가가 나타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눈파는 체 하던 막시민도 동조하는 눈빛을 보냈다. "소공작께서 보고 계신데 싸우다니, 다들 정신이 어떻게 도니 게로군. 어서 발리 전말을 말씀드리고 정리하지 않으면, 두 사람은 무시하고 다음 사람의 이야기를 듣도록 하겠소." 싸우던 두 사람이 고개를 숙여 가며 설명을 시작했다가, 다시 상대의 말을 반박하다가 하며 전달한 내용은 '진주 양식장을 만든 장소에 질 좋은 산호가 많이 있다'는 간단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현명한 판결을 바라는 눈으로 조슈아를 열렬히 바라봤다. 물론 조슈아는 오늘 참 별 얘기를 다 듣는구나 하는 표정, 막시민은 네 주제에 무슨 재판이야, 하는 표정, 그리고 옆에서 하품하던 리체는……. 친절하신 집정관님, 목도 마르고 한데 뭐 입맛 다실 거라도 없나요? 뭐어, 저만 그런 건 아닐 것 같고요." 리체가 조슈아를 곁눈질하자 집정관은 무표정하게, 그러나 두말없이 사람을 불러 간식거리를 갖고 오도록 시켰다. 그는 조슈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했지만, 자신의 역할이나 책임은 잘 알고 있었다. 그 동안 막시민은 판결을 궁리해서 전달했다. 이번엔 그래도 선택지가 있었다. 선택1. 둘 다 쫓아내고 해저생물들에게 평화를 되돌려 준다. 부작용으로는 둘 다 판결에 불복할 우려 있음. 선택2. 반 갈라서 반은 진주 양식장, 반은 산호 채취를 한다. 부작용으로 역시 둘 다 판결에 불복할 우려 있음. 선택3. 잘 생각해보겠다고 한다. 부작용 없음. "좀더 잘 생각해 보겠습… 현장에 가본 뒤에 판결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자기들의 문제를 소공작이 알아줬다는 것에 만족하며 물러났다. 사실 막시민이 보기에 오늘 행사가 거둘 수 있고, 또 거둬야만 하는 효과는 그것뿐이었다. 태어나서 지금가지 한 번도 오본 일 없는 섬에 잠간 들른 소공작이, 단지 그 가문의 이름을 타고났다는 이유만으로 섬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고 말이다. 이런 식으로 시작된 접견은 느릿느릿 점심시간까지 진행되었다. 그쯤 되자 '현명한 판결'을 제조하던 막시민도 지쳐서 잠간 테이블에 엎드렸다가 잠들어버렸다. 그 사이에 조슈아가 어떤 답을 해주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막시민은 백 몇 번째쯤 온 민원인 세 명이 소리 높여 싸우는 바람에 도로 깨어나고 말았다. 그는 자기를 잠에서 깨울 정도로 대단한 섬사람들에게 감탄하면서 동시에 경쟁심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줄어들 기색이 없는 줄을 보고서 맥이 빠져 투덜거렸다. "남의 민원도 좋지만 우리 민원은 언제 들어주는데?" 막시민이 말한 건 물론 납골당 묘지에 가는 문제였다. 저택에 들어가자마자 집정관에게 말했지만 일에는 순서가 있는 거라며 떠밀려 어느새 이 자리에 앉게 돼버렸던 것이다. 처음에는 둘시아 부인이 구원자가 돼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다른 준비를 할 게 있다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게 연회 준비 같은 게 아니기만 바랄 뿐이었다. "묘지 말씀이십니까?" 웬일로 집정관이 막시민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그곳은 일찌감치 입구를 완전히 막아 놓아서, 가봤자 들어가실 수 없을 텐데요." "네?" 조슈아는 깜작 놀란 얼굴이었다. 막시민도 당황해서 미간을 찌푸렸다. 소공작 일행이 다른 얘기를 하기 시작하자 민원인들도 금세 싸움을 멈추고 구경할 태세를 갖췄다. "아니, 그런 짓을 누가 했죠? 언제부터인가요? 우리 가문 사람인가요?" 이 순간 떠오르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그런 짓을 하도록 섬 사람들이 내버려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르님 공작 본인이 와서 명령하지 않는 한. 그러나 집정관은 도리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야 오래 전에, 소공작의 할아버님께서 이곳을 떠나실 때 그리하신 것 아닙니까?" 이번에야말로 크게 놀란 조슈아는 막시민과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럼 그 후로 아무도 못 들어갔단 얘기잖아?" 막시민이 다그쳐 물었다. "잠깐, 그러면 본체도… 이거 어떻게 되는 거야? 제대로 입구를 막아버린 게 확실한가? 뒷문도 없고? 아무도 못 들어가고?" "가 봐야 알지, 내가 여기서 어떻게 알아?" 셋의 눈이 집정관을 향하자 집정관이 대답했다. "달리 들어갈 수 있는 입구는 없습니다. 당시에는 이 섬에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의지를 아노마라드 국왕에게 보이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셨겠죠." "그 후로 아무도 막힌 입구를 부수거나 한 일이 없고요?" 조슈아가 다짐하듯 물었다. "없습니다." 막시민이 일어섰다. "직접 안 보고는 못 믿겠는데, 안내 좀 해 줘 봐요. 자세히 살펴보게." 집정관은 사람들 족을 곁눈질했지만, 조슈아도 일어났다. 이어 리체가 일어나자 어느새 막시민 대신 테이블에 엎드려 잠들어버린 마일스톤을 빼고는 모두 일어선 셈이 되었다. 조슈아는 나가기 전에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중요한 문제가 있어서 잠시 묘지에 다녀와야겠군요, 잠시만 기다리시면 갔다 와서 여러분의 이야기를 마저 들어드리겠습니다." 물론 그 말은 심각한 실수였다. 납골 묘지는 저택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언덕 위에 있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었다. 용도를 모르고 보았다면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어질 정도로 우아한 건물이었다. 작은 십자 형태로 만들어진 기단 위로 탐 세 개가 이어져 지붕을 이렀고, 중앙의 큰 탑에는 규칙적인 돌기들이 빙 둘러져 꼭대기까지 이어졌다. 파사드(facade)는 삼각형 박공지붕과 사람이 올라갈 수 없는 장식용 테라스로 이뤄져 있었다. 그 아래가 문인데 본래는 사람들을 조그맣게 조각한 장식으로 둘러져 있었던 모양이나, 회반죽 같은 것으로 절반 이상 막혀 있었다. 그 회반죽에 가려져 문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집정관 말했다. "두 층으로 되어 있어서 1층에는 납골이, 지하에는 묘지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회반죽 앞으로 다가갔다. 그 위에는 굳기 전에 눌러 박은 듯한 금판이 있었다. 금판에 음각으로 글씨가 새겨진 것이 보였다. 과거가 사라진 자리에서 아노마라드와 아르님의 자손들은 세세토록 손잡고 번창할 지어다. 공작 아르트와 폰 아르님 조슈아는 허리를 굽히며 금판을 만져보았다. 손끝이 글씨들을 더듬어갔다. 어디의 공작이라는 말조차 쓰지 않았다는 것이 어쩐지 씁쓸했다. 이어 파사드를 한참 올려다보다가 납골 묘지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측면에는 클로버 형태의 머리를 덩굴 조각으로 두른 긴 창이 여러 개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겉모양일분, 뚫려야 할 곳은 건물 안쪽에서 대고 작은 듯한 철판으로 전부 막혀 있었다. 조슈아는 펠 집정관을 향해 목을 돌렸다. "내가 보기에도 누군가 뚫고 들어간 흔적은 없는 것 같군요. 지하는 튼튼하겠죠?" "지하 바닥과 벽은 돌입니다. 뚫으려 했다면 묘지 전체가 흔들렸을 겁니다. 무너졌을 지도 모르지요." "그럼 한 가지만 더 묻지요. 여기에는 아르님 가문 사람 모두가 묻혀 있나요? 다른 곳에 묻힌 사람은 없고요?" 집정관은 양손을 펼쳐 보였다. "그런 걸 왜 물으시는지 모르겠지만, 비취반지 성으로 옮기신 후에는 그쪽에……." "그건 알아요. 그 전에, 내 할아버지 윗대로 아르님 성을 가졌던 사람은 모두 다 여기에 있습니까?" 집정관은 하늘을 쳐다보며 잠시 생각하는 기색이더니 말했다. "모두 다는 아닐 겁니다. 초대 공작의 증손자셨던 갈리페르 폰 아르님께선 필멸의 땅으로 가신 뒤로 소식이 없었으니까요. 어디에 묻혀 계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그 외에는 모두 다?" 집정관은 조슈아가 왜 이렇게 고집스럽게 묻는지 이해가 안 가는 얼굴이었다. "네, 제가 아는 한은 그렇습니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죠?" "기록을 보여드릴까요?" 조슈아는 대답 없이 다시 묘지를 한 바퀴 돌았다. 뒤따라오던 리체가 말했다. "그럼 우리 헛걸음한 거야?" 막시민도 나름대로 납골 묘지 주위를 돌며 살펴봤지만, 누군가 뚫고 들어간 흔적은 찾아내지 못했다. 조슈아 옆으로 돌아온 막시민은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조슈아가 무슨 생각인지 집정관을 향해 그만 돌아가 보라고 손짓했다. 집정관은 고개를 저었다. "소공작께서도 돌아가셔야 됩니다." "난 조금 후에 따라가죠. 오래 기다리게 하진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그런데 뜻밖으로 펠 집정관이 고집을 부렸다. "아니, 그렇게는 안 됩니다. 제가 기다렸다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괜찮다니까요." "소공작께서 괜찮으셔도 전 아닙니다." 조슈아가 눈썹을 찌푸리자 집정관이 말을 이었다. "만일 돌아오시지 않으시면 전 사람들을 달랠 능력이 없습니다." "내가 도망가기라도 할 것처럼 보입니까?" 집정관은 놀랍게도 이렇게 대답했다. "알 수 없는 일이죠." "……." 조슈아는 팔짱을 낀 채 눈을 내리깔았다가, 곧 고개를 번쩍 들었다. "좋아요, 그럼 이제부터 일어나는 일에 놀라시진 말고요." "무슨 일을 하시려는 건가요?" 조슈아는 대꾸 없이 납골 묘지 쪽으로 돌아섰다. 집정관이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불렀어?」 집정관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조슈아가 대꾸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래, 안쪽을 좀 살펴보고 싶은데." 「어렵지 않지.」 "누군가 들어온 흔적이 없는지 잘 살펴봐, 훼손된 관이 없는지도 보고." 「잠시만 기다리시라고.」 조슈아가 몸을 돌리자 눈을 부릅뜬 집정관이 보였다. 그가 그렇게 눈이 큰 지 처음 알았다. "지금 누구와 얘기하신 겁니까?" "죽은 사람요." 집정관이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방금 곁에서 대답한 듯했던 사람의 모습은 찾을 없었다. "주, 주, 죽은 사람이라고요?" "놀라지 마시라고 미리 말씀드렸는데." "어, 어, 어떻게 죽은 사람과 이야기하십니까?" 조슈아는 빙그레 웃었다. 조금은 심술궂어 보이는 미소였다. "데모닉들은 모두 강령술사였다고 알고 있는데?" 잠시 후,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없는데.」 "흔적이 없어?" 「바닥에 쌓인 먼지의 두께를 보니 적어도 몇 십 년 동안 들어온 사람은 없는 것 같아, 관을 살펴볼 필요도 없었어.」 조슈아는 한족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다시 가서 관도 살펴봐." 「사람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가서, 내가 말하는 이름의 관들이 제대로 있는가 살펴봐, 이카본 폰 아르님, 갈리페르 폰 아르님, 조프리 폰 아르님, 아라벨라 폰 아르님, 도미니크 폰 아르님, 카밀 폰 아르님, 페일블루 폰 아르님, 데스디나 폰 아르님, 데이퍼스 폰 아르님, 수이즈 폰 아르님, 라스무즈 폰 아르님, 크리스타벨 폰 아르님." 최근에는 유령에 꽤 익숙해진 리체가─카드릴 섬에서 유령들이 배 밑창을 고쳐준 덕택이었다─겁도 안 내고 참견했다. "저 많은 사람을 어떻게 혼자 아 외우니? 조슈아 너니까 할 수 있지." 조슈아는 입끝을 잔뜩 올리며 미소지었다. "넌 여기 온 유령이 한 명이라고 생각하니? 자, 각자 세 명씩 외웠지?" 진짜로 다른 유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외우긴 했는데, 유령이라면 모를까, 사람이 먼지를 밟지 않고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가서 살펴보라고 하면, 대꾸하지 말고 가." 그러자 유령이 웃었다. 「흐흐, 그래야 공작답지. 알았어.」 펠 집정관은 유령과 대화하는 조슈아를 바라보며 아예 얼어붙었다. 그도 과거 데모닉들에게 영매 기질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책에서 읽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보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영매라고 해서 백주대낮에 유령을 불러 이야기하고, 심지어 명령할 수도 있으리란 상상은 해보지 못했다. 그는 점점 뒷걸음질쳤다. 조슈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저러다가 가버린다 해도 별 상관없었다. 유령들은 한참 만에 다시 돌아왔다. 조슈아에겐 그들 중 누군가는 다가오고, 다른 자는 회반죽에 기대어 서고, 또 누군가는 바닥에 앉거나 하는 것이 잘 보였다. "어때?" 「흔적 없어. 관은 다 못질되어 있고, 무엇보다도 최근에 관을 움직였다면 주변의 먼지가 그대로 남아 있지 않겠지. 그런데 말이야.」 "그런데?" 「최근에 그 관들을 연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비어 있는 관은 있더군.」 모두의 눈이 커졌다. 조슈아가 다그쳐 물었다. "비어 있다고?" 「그래, 관 속에 사람 부스러기가 아니라 밀겨였는지 뭔지 모를 부스러기밖에 없던 관이 있더라고, 유령이라면 말이야. 사람 가루는 분명히 알아볼 수 있거든? 아주 쓸모가 많으니까, 어쨌든 다시 말해 처음부터 빈 관을 넣었다는 거야. 그렇게 밖에 해석이 안 돼. 아, 나도 물론 놀랐고말고.」 리체는 사람 부스러기라는 말이 끔찍하게 들려서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데 유령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날카로워진 듯했다. 조슈아가 물었다. "그래, 그 관은 누구의 것이지?" 「이카본… 이카본 폰 아르님.」 누구보다도 조슈아가 멍해졌다. 이카본이 이곳에 묻힌 게 아니라니? "도대체… 어찌된 일이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카본만은 여기 묻혔다는 이야기를 오래 전부터 읽었는데? 모든 책에 다 그렇게 씌어 있었다. 그게 속은 거란 말이야? 그 당시의 사람들도?" 「놀라운 일이지. 놀라운 일이고말고, 어디론가 잘도 숨어버렸지. 어디로 갔을까? 어딜 가서 죽었을까? 모두를 속이고… 이젠 시체조차 제자리에 없단 말이지.」 유령의 감정은 목소리에 바로 반영되었다. 가벼운 불쾌감만으로도 꿈속에서 나올법한 쇳소리로 변하는 것이다. 막시민이 리체의 표정을 흘끔 살피고는 말했다. "됐어, 끝났으면 빨리 보내." 어차피 조슈아하고만 얘기하는 놈들이라 자기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다른 유령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잔소리 안 해도 단단다, 아가야, 안녕.」 "……." 조슈아와 리체가 동시에 돌아보니 말문이 막혀 입을 벌리고 있는 막시민이 보였다. 리체는 조금 전까지 겁을 내던 것도 잊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막시민은 곧 발끈해서 소리쳤다. "누군 공작이고 누군… 그 따위로 부르지 마!" "이미 갔어." 조슈아가 말하자 막시민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따졌다. "너 말이지, 내 눈에 안 보인다고 가지도 않았는데 갔다고 속이는 거지? 지난번에도……." 그 즈음 뒷걸음질치던 집정관은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방에서 들이던 낯선 목소리는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뚜렷했다. 복화술일까 싶어 관찰해 봤지만, 소공작과 낯선 목소리가 함께 들릴 때가 있어서 이 가설은 포기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유령의 목소리란 말인가?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른다. 펠 집정관은 옛 기록을 꼼꼼하게 읽는 사람이었다. 그는 가문을 물려받을 소공작이 데모닉이라는 것을 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런 일이 한 번도 성공한 일이 없다는 것도 물론 알고 있었다. 한때 후계자였던 데모닉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어긋난 가지가 되어 사라졌다는 것을 잘 읽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예외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가문의 창시자, 이 핏줄 자체를 만든 사람 말이다. 이카본 폰 아르님도 유령들과 이야기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른 데모닉들의 경우는 조금씩 기록이 있었는데, 일종의 광기로 치부되기도 했던 듯했다. 도는 광기의 전조라고, 그런 식으로 씌어있었다. 펠 집정관은 다시 한 번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두 명의 친구들과 함께 웃으며 이야기하는 조슈아의 모습에서 광기의 전조를 느끼긴 힘들었다. 데모닉들은 한 번도 공작이 되지 못했고, 사람들에게 유령을 보았다고 말할 즈음에는 정신 착란이 오기 시작했고, 어느새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게 되면서, 서서히 자신만의 세께 속에 고립되었다……. "사람들을 다 속이고 다른 데 묻혔다라…, 그럼 그 사람을 어디 가서 찾지?" 리체가 납골 묘지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탑 꼭대기에는 새들이 한가롭게 앉아 지저귀고 있었다. 막시민이 말했다. "섬 사람들을 수소문해 봐야겠지, 달리 물어볼 데도 없으니 말이야. 혹시 옛날 전설 같은 걸 기억하는 할머니나, 그런 사람이 있는가 알아보자고." 조슈아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그런데… 정말로 이카본일까?" "그 사람 관만 비어 있다면서? 다른 가능성이라도 있어?"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고, 나 기분이 이상해서, 인형을 만든 재료가 하필 창시자…, 우리 가문을 존재하게 한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좀 그렇네, 뭐랄까… 닥 잘라 표현하긴 그렇지만…." 뜻밖으로 리체가 말했다. "모독당한 기분?" 그렇게 보아선지 조슈아의 뺨이 해쓱해 보였다. 그러나 잠시 후 조슈아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일단 돌아가자,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으니." 둘은 더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슈아는 뒷걸음질로 꽤 멀리까지 간 집정관 불렀다. "같이 가요!" 리체가 테이블에 쌓여 있던 서류와 줄이 까마득하던 민원인들을 생각했는지 자못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부를 게 아니라 지금이라도 도망가는 편이 나을지도." 6. 상복 입은 소녀 "그 여자는 아주 오래전에 죽었어. 그런데도 살아 있어. 나는 그녀를 위해 상복을 입었어. 그때부터 지금까지 죽. 난 본래 딱 3년만 상복을 입으려 했어. 하지만 아직도 그녀가 죽은 지 3년이 흐르지 않았어." 테오스티드 다 모로는 창가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창은 좁고 높았다. 격자 창틀이 미로 정운을 갈라놓았고, 빛과 그림자가 또다시 저들만의 영지를 나눠 가졌다. 곳곳에 검은 그늘이 생겨났다. 테오는 그늘에 누군가 숨어 있을까 생각하는 사람처럼 유심히 바라보았다. 나무 틈에서 치마를 입은 누군가가 나타났을 땐, 팔을 약간 움직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치맛자락의 주인은 채마밭에서 돌아오는 하녀였다. 숨바꼭질을 하겠다고, 술래는 이미 잊고 가 버렸는데도, 용케 찾아낸 나무 틈바구니에 발이 저리도록 숨어 있는 소녀가 아니었다. 테오는 고개를 흔들며 일어났다. "못 들었어, 어쨌든 앉아." 애니스탄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손에는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는데 곁에 내래놓았다. 테오가 종을 울려 하녀를 부르는 동안 애니스탄이 말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죽은 사람 생각을 좀 했어." 애니스탄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어깨를 움츠렸다. "옆에서 부르는 소리도 못 들을 정도로 죽은 사람 생각에 잠겼다는 건… 그 사람이 곁에 와 있는 거라던데." "그럴 지도 모르지." 사무적으로 가볍게 대꾸한 테오는 곧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어?" "사람이 찾아왔어." "그래? 중요한 사람이면 데려오지 않고." "네 의견을 먼저 물어야 할 것 같아서." 테오는 웃었다. "되게 신중하게 얘기하네, 누군데 그래?" "그 사람… 네가 고용한." 테이블에 놓인 검은 사탕 통을 집으려 하던 테오의 손이 움찔, 멈추었다. 그제야 애니스탄이 무척 긴장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보았다. 테오는 곧 평정을 가장하며 물었다. "왜지? 임무를 완수하더라도 직접 찾아올 필요는 없다고 해 뒀는데, 더구나 임무를 끝내고 보고하러 온 거라면 네가 이런 식으로 얘기할 리가 없고, 우리와 거래할 정보라도 생긴 건가?" "테오." 애니스탄은 테오가 천천히 사탕을 꺼내 입에 넣고, 늘 그렇듯 얼굴을 찌푸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사탕 통의 본래 주인은 어느새 사탕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렸다. "꼭 그에게 맡겼어야 했을까."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지금이라도 그만둘 순 없을까?" "너 왜 그래? 무슨 얘길 들은 거야?" 애니스탄은 고개를 흔들며 손을 모아 쥐었다. "테오, 내 얘기를 들어봐." 어린 시절 테오는 세상에 대한 분노를 감추려 애쓰면서도 감추지 못해 늘 불안정해 보였고, 애니스탄은 그런 테오를 이끌고 감싸는 존재였다. 그러나 애니스탄이 스스로도 성공하리라 예상치 못했던 인형을 만들어내고, 달아나려 했으나 결국 돌아온 뒤로 둘의 관계는 역전되었다. 테오는 언제부터인가 애니스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귀담아 듣는 체 했지만, 듣기도 전부터 그의 말은 약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일 뿐이라고 치부하고 있었다. 전적으로 틀린 판단만은 아니었다. 인형이 존재하게 된 뒤 애니스탄은 마음이 약해졌다. 마치 원치 않던 아이를 갓 낳은 어머니처럼, 세상 모든 일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테오가 애니스탄을 조언자로 여기지 않게 된 후로 둘의 사이는 미묘하게 멀어졌다. 표면적으로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조력자였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동등하게 여기는 마음이 흐려져 있었다. 그래왔던 테오가 애니스탄의 눈을 보며 의지를 느낀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아서 느끼지 못한 것뿐이었을까? "그의 말을 들어줘선 안 된다고 생각해." "그가 뭘 제안했는데?" "이건 마법의 문제야, 그러니 넌 잘 모를 거야. 내가 느끼는 위협이 어떤건지 설명해도 정확히 알 수 없을 거야. 그러니 이번에는 내 말을 들어 줘." 테오는 입술을 오므리며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 자가 무슨 소릴 했어? 그것부터 말해 봐. 뜬구름 잡듯 얘기하지 말고." 일부러 낸 신경질이었다. 그대로 있다가는 정말로 애니스탄의 말을 들어주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건지 알지도 못한 채 마음부터 움직일 순 없었다. 아직 먼 길이 남은 그의 계획을 끝가지 이루려면, 애니스탄이 달래주던 어린 시절의 자신이어선 안 되었다. "그 자읜 손… 말이야." "그래, 그 자의 손이?" 애니스탄은 맞잡은 양손을 더 세게 쥐었다. "전부터… 궁금했어. 한 손으로 검을 오래 쓰다보면 팔이 조금 길어진다거나 그런 일은 있다고 하지만 사람의 손이, 연마한다고 그렇게 커질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어, 저절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잖아." "그래서? 그 자의 손이 어떻게 만들어졌든 우리가 알 바는 아니잖아?" "테오, 난 마법사야. 너처럼 생각할 순 없었어. 그래서 비슷한 기록이 있는지 찾아봤지. 그렇게 찾은 책이 이거야." 애니스탄은 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마법 왕국의 멸망'이라는 표제가 보였다. 테오는 책을 집어 드는 대신 말했다. "지금 갑자기 이 책을 다 읽을 순 없잖아. 손님이 왔다면서, 네가 요점을 얘기해 봐." "제목만 봐도 알 수 있을 거야. 가나폴리의 일이야. 너도 조금은 알 거야, 가나폴리가 멸망하기 전에 나타났던 네 가지 악의 무구, 그것을 사용했기에 파멸했던 마법사……." "물론 알고 있어. 하지만 그게 그 자와 무슨 관계가 있어? 그건 가나폴리의 일이야. 까마득히 옛날에 멸망한 나라라고, 그 자는 살아 있는 사람이고, 그가 가나폴리에서 태어나 지금가지 천 년도 넘게 살아오기라도 했단 말이야?" "그가 가나폴리와 관계가 없다는 쪽을 믿을 바엔, 차라리 지금 네가 한 말을 믿겠어." 테오는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다. 애니스탄은 초조하게 책장을 넘겼다. 이윽고 원하는 곳을 찾아낸 애니스탄이 책을 펼친 채로 돌려 밀어 주었다. "거기에 보면, 악의 무구는 온전한 상태로 마법사의 몸에서 떨어졌다고 되어 있어, 그런데 그 중 왕녀 에브제니스가 직접 검으로 쳤던 '황동빛 방패'만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흩어졌지. 그때 주위에 있었던 사람들 중 몇은 그 파편을 맞았고, 몸에 박혔어. 뽑으려 했지만 순식간에 녹아 사라져서 그럴 수 없었지. 그들은 자신도 죽은 마법사처럼 되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했지만 다행히 미치진 않았어. 그 대신 파편이 박힌 곳의 몸이 괴이하게 부풀어 올랐지. 하나는 거대한 어깨를, 다른 사람은 팔꿈치를, 또 다른 사람은 거대한 손을… 가진 자가 되었단 말이야." 테오는 불안하게 눈썹을 움찔거렸다. "그런 옛날 이야기가 내 눈으로 본 사람의 일이라고 믿을 수 없는데." "하지만 결단코 아니라고 하지도 못할걸." "다른 마법의 힘 아냐?" "몸의 일부를 일시적으로 강화하는 마법은 분명 있어. 하지만 사람의 몸 자체를 영구히 바꾸어버리는 힘은 들어보지 못했어. 내가 찾은 이 기록이 유일한 예일 뿐이야." "그래서 책의 내용이 맞다면? 어떻게 하라는 거지? 그가 너한테 자기 손을 고쳐 달라고 하기라도 했어?" "반대야, 그 반대라고." 애니스탄은 초조한 듯 입가를 문질렀다. "그는 자신의 손을 강화시켜 주길 원해. 그것도 내가 가나폴리의 인형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나를 지목해서 찾아온 거야. 하지만 난 그의 손을 강화할 방법을 알지도 못하고… 또 알더라도 해줄 생각은 없어. 다시 말해 그런 파편이 내 손에 있다고 해서… 그에게 내어줄 수는 없다는 말이야. 하지만 그 자는 자신이 방법을 알고 있으니 난 힘을 빌려 주기만 하면 된다고 했어. 난 말이지… 두려워." "무엇이?" "가나폴리의 멸망을 잊어선 안 돼. 난 그 멸망에 관계된 모든 물건이 두려워. 만일 정말로 그 자의 손이 가나폴리의 멸망과 관계된 '황동빛 방패'의 파편 때문이라면… 난 세상 끝까지라도 달아나고 싶은 심정이야." 테오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나 결국 실리적인 관점이 이겼다. 테오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애니스탄을 노려보았다. "과민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난 네가 조금 더 땅에 발을 딛고 걸어줬으면 좋겠는데, 언제부터인가 네게 뭔가를 기대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져 간단 말이야." 애니스탄은 고개를 흔들었다. "잊지 마, 우리에겐… 우리 세상엔 왕녀 에브제니스가 없어." "젠장, 난 이제 진주나 산호라는 말만 들어도 머리에서 쥐가 날 것 같다." 둘시아 부인이 차린 우아한 식탁 앞에 앉긴 했지만, 셋 다 음식이야 아무래도 좋다는 심정으로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늘어지는 쪽을 택했다. 한나절을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그것도 일거수일투족을 주목당하며 보내고 나니 정신적 피로는 물론이고 온 몸의 근육이 뭉치고 뻐근했다. 리체가 한쪽 팔꿈치를 올리고 식탁에 얼굴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농어나 해적도." "양인지 염소인지 하는 문제도." "그 뭐라는 두 집안의 땅따먹기 얘기도." "청금석이 압권이지, 나중에 돈이 생기더라도 청금석은 절대로 안 사기로 결심했다." 조슈아가 약간 웃더니 말했다. "돈이 있든 없든 어차피 보석 같은 거 사지도 않잖아." 막시민은 하품을 하다말고 조슈아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너 같으면 친구가 청금석 광산을 갖고 있는데 그걸 돈 주고 사겠냐?" "청금석 필요해?" "씨끄러." 식탁에 차려진 음식은 열 사람 정도가 먹어도 남을 정도였다. 특산물인 해산물 요리가 절반 정도고, 육지 음식이 절반 정도였다. 해산물에 익숙하지 않을 지도 모르는 소공작 일행을 배려한 모양이었다. 둘시아 부인과 그녀가 데려온 사람들은 조슈아뿐 아니라 다른 손님들도 귀하게 대했지만, 쏟아지는 관심에 대한 내성이 부족한 막시민과 리체는 무척 피곤해했다. "마일스톤이 부러워." 마일스톤은 아까 테이블 구석에서 일지감치 코를 박고 졸더니 결국 진 의자로 옮겨져 실컷 자버렸다. 그 덕택에 지금은 조슈아 맞은편에 앉아 식욕 왕성하게 게살 오믈렛을 먹고 있었다. 막시민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손가락 끝으로 새우 고리를 건드려 보다가 말했다. "리체가 도망가자고 할 때 말을 들었어야 되는데." 리체가 대꾸했다.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란 거라고, 서류 봤지?" 막시민은 곁에서 그를 흉내 내어 새우 꼬리를 건드리고 있는 조슈아를 흘끔 보더니 혀를 찼다. 조금 전부터 반드시 검토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고, 자고 일어나 내일 해도 될지도 모르고, 안 하고 했다고 주장해도 될지도 모른다고 설명해 줬지만 조슈아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밤을 세워서 서류들을 다 일겠다는 거였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해도 섬 사람들 입장에서는 아르님 가문이 섬을 버리고 떠난 거나 다름없을 거야. 그런데도 수십 년 동안 꼬박꼬박 세금을 바쳐 왔고, 불만이 있을 법도 한데 반란도 일으키지 않았어. 적어도 내가 왔을 땐 화를 내거나 따졌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들은 날 환영했을 뿐이야. 심지어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거라고 믿어 찾아왔어.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서류 몇 십 권 정도 검토하는 것도 거절하진 못하겠어. 난 둑도 쌓아줄 수 없고, 해적들을 잡아줄 수도 없어, 심지어 여기 계속 머물러 줄 수도 없어. 내가 해줄 수 있는게 고작 이런 것 정도라고." "내일부터는 섬을 돌면서 설문 조사도 해야 될 텐데, 밤샘이라니." "그 출생 기록부로 뒤통수를 후려갈기면 사람 하나쯤은 손쉽게 잡겠던데." 리체까지 새우 꼬리를 꾹꾹 누르다가 중얼거렸다. 막시민은 팔꿈치를 식탁에 짚은 채 양 손을 펼쳐 보였다. "그런 살인 무기가 무려 다섯 개나 있잖냐? 이 섬에는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이 태어나는 거냐?" "동생이 여섯 명 있는 사람이 할 얘긴 아는 것 같은데." 조슈아가 킥킥 웃기 시작하자 막시민은 화를 냈다. "내가 동생들을 만든 게 아니라고!" "너희 집안 출생기록부를 점검하셨을 코츠볼트 영주님한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 "우리 동네엔 영주님 따윈 없고 수도원장님 밖에 없어!" 둘의 말다툼을 듣던 리체가 킥 웃다가 새우를 눌러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막시민은 곧 대꾸를 궁리해냈다. "그래도 코츠볼트에는 수도원장님의 손이 닿으면 연주창이 나을 거라고 믿고 쫓아오는 사람은 없었단 말이다." 조슈아는 얼굴을 붉혔다. "믿음이 병을 낫게 할지도 모르지, 어쨌든 외면할 순 없었어." 연주창을 고쳐달라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집에서 키우던 닭들에게 번진 원인불명의 병을 고쳐 달라거나, 바다에서 헤엄치다가 잃어버린 결혼반지를 꼭 되찾고 싶다거나, 올해에는 우리 딸이 시집을 갈 수 있는지 궁금하다거나, 심지어 내년에는 농어 풍년이 들게 해달라는 이야기까지, 정말 다재다능한 공작을 기대하는 사람들이었다. 리체가 새로운 새우를 집어 들어 한 입 씹더니 말했다. "여기 사람들은 공작이 재판장이자 의사, 탐정, 예언자, 주술사라고 믿고 있잖아, 어쩌겠어? 그들을 다스리려면 기대에 부응해서……." 막시민이 말을 받았다. "마법의 말을 한 마디 해주라고, '생각해보겠습니다'라고." 조슈아는 웃었지만, 그냥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문제였다. 그는 오늘 처음으로 심각하게,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내버려둔 섬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과거의 지배자들이 어떻게 했기에, 과연 무엇을 듣고 자라왔기에 소년에 불과한 자신에게 이렇게 많은 것을 기대할까, 또 얼버무리는 데도 화를 내거나 실망하지 않을까, 그들은 정말로 조슈아가 언젠가 둑을 쌓아주고, 조개반도 해적들을 몰아내고, 행복한 결혼을 할 수 있게 해 주고, 심지어 그가 머리에 손을 얹어 준 소년의 연주창도 나을 거라고 믿고 있을까? 그렇게 믿으면서 모순이나 의심은 느끼지 않을까? 만일 정말로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늦은 저녁 식사가 끝나자 막시민과 리체는 하품을 했다. 종일 시달린 터라 돌아가 자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막시민이 조슈아에게 물었다. "너, 정말로 밤세워서 서류 읽을 거냐?" 조슈아는 덩달아 하품을 하긴 했지만, 입을 다문 뒤에는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은편에는 커다란 초상화가 있었다. 비취반지 성에 있는 것들보다 더욱 크고,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초 스물한 개와 램프 두 개만으로 밝혀진 방에서 그림은 금빛과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새벽 2시. 조슈아는 쉽게 당겨 앉기도 힘든 커다란 의자에 푹 파묻혀, 혼자 힘으로는 털끝만큼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 육중한 책상에 놓인 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눈이 아파 고개를 들 때면 저도 모르게 그림을 보게 되었다. 그림 속에서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비취반지 성에 초상화가 있었던 이카본. 그 외의 세 사람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원칙대로라면 저 사람들은 이카본의 세 맹우들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 중 켈스니티의 얼굴이 없었다. 어찌된 일일까. 켈스니티를 불러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만두기로 했다. 아직 보아야 할 책과 서류가 많았다. 이제 겨우 출생기록부를 다 본 참이었다. 이름과 날짜로만 이뤄진 출생기록부는 보통 지루한 책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슈아는 초인적인 애정을 짜내어 하나하나 다 읽었다. 그러나 이 시각쯤 되니 조슈아도 아침부터 밤까지 사람들에게 시달렸던 몸을 누이고 눈 좀 붙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왔다. 참았던 졸음이 슬금슬금 몰려왔다. 조슈아는 출생기록부를 치우고 토지 대장을 꺼내 다섯 장쯤 넘기다가 저도 모르게 책장 사이로 얼굴을 박고 깜빡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슈아는 어깨가 따뜻해진 것을 느끼고 오히려 깨어났다. 처음엔 눈만 가늘게 떴을 뿐이었다. 촛불이 흐릿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 다음에는 예의 초상화가 보이고, 그 아래 서 있는 그림자가 보였다. 조슈아는 몸을 일으켰다. 어깨에 덮였던 담요가 미끄러져 의자 등받이로 떨어졌다. 상대가 미소를 보냈다. 「깨어났구나.」 "켈스…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한 시간은 안 됐어.」 "깨우지 그랬어요, 계속 자면 안 되는데." 「안 그래도 곧 깨울까 하고 있었어.」 조슈아는 미소를 지으며 주위의 책들을 둘러봤다. "할 일이 많은데." 그러나 조슈아는 다시 토지 대장을 들여다보는 대신 켈스니티와, 그 뒤의 초상화를 보았다. 그 자리에 서 있으니 마치 초상화 속의 한 자리를 차지한 듯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까부터 저 그림을 보면서 궁금했는데, 저기 그려진 다른 사람들은 누구죠?" 켈스니티는 고개를 저였다. 「나도 몰라.」 "모르다니, 이카본 공작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인데 모른단 말이에요?" 「저들은 이카본과 함께 있던 사람이 아니야, 실제 존재했던 사람인지도 모르겠어. 저 그림에는 사연이 있지.」 켈스니티는 걸음을 옮겨 제일 왼쪽에 그려진 사람 앞으로 가 섰다. 「이 자리에는 본래 내가 그려져 있었어.」 "그러면…, 일부러 당신을 지우고 다른 사람을 그려 넣었단거야?" 「지웠다기보다는 그림 위에 겹쳐 그린 거지, 잘 봐.」 켈스니티는 비교해보라는 듯 조금 떨어져 섰다. 그제야 살펴보니 그림에 그려진 사람은 얼굴이 다를 뿐, 어깨며 팔, 손, 체격은 켈스니티와 거의 흡사했다. 조슈아는 의혹에 사로잡혔다. "도대체 누가?" 켈스니티는 대답하는 대신 왼쪽에서 두 번째 서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이 자리에는 아나로즈 티카람이 있었지, 그리고 이카본의 오른쪽이 스초안 오블리비언. 본래는 그런 그림이었어.」 "그런 그림이었는데, 누가 감히 그걸 고칠 수가 있었죠?" 조슈아는 의자를 힘껏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촛대를 하나 집어들고 드림 앞으로 가 섰다. 켈스니티였다던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비춰보자 과연 덧칠된 자국이 눈에 띄었다. 등 뒤에서 켈스니티의 대답이 들렸다. 「오블리비언, 그가 고쳤어. 본래 이 그림을 그렸던 사람도 오블리비언이었어. 그는 화가였으니까, 자기 그림을 고친 거지.」 조슈아는 몸을 홱 돌려 켈스니티를 마주보았다. "도대체… 왜?" 「맹약이 개어졌기 때문에, 아나로즈가 사라지고 내가 죽고 나서 혼자 남은 오블리비언은 이 그림을 이렇게 고쳐놓은 다음 떠나버렸어. 다시는 이카본 곁에 돌아오지 않았지.」 "……." 조슈아는 할 말을 잃고 다시 그림을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그림 속에서 미소짓고 있는 사람이 이카본 하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름 사람들은 아무 표정이 없었다. 마치 데드마스크처럼. "왜 이 그림을… 떼지 않고 그냥 뒀는지 이해가 안 돼. 이 방은 역대 공작들이 썼다던 집무실이라던데, 심지어 여기에 두다니. 후손들은 저게 맹우들의 얼굴이라고 생각했을 것 아닌가요. 아니, 그보다 이카본은 어째서 저 그림을 견뎠던 거죠? 저 그림을 볼 때마다 괴로웠을 텐데, 왜 치워버리지 않았을까?" 「이카본은 오블리비언이 와서 직접 고칠 때까지는 그림을 그대로 놓아두겠다고 했다더군, 대신 비취반지 성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게 했지. 너도 보았던 그림.」 조슈아는 고개를 흔들었지만 어쩌면 그 마음도 이해할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깨어진 맹약, 더나버린 약속의 사람들. 혼자 남겨졌던 이카본은 혹시라도 돌아올지 모르는 단 한 명의 친구를 위해 저 괴로운 그림을 참고 견뎠을 지도 모른다. 한때는 정성을 쏟아 그렸던 그림인데, 그걸 망쳐버리고 떠난 친구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생각하면서, 저 그림은 맹약이 깨어지도록 만든 그에게 친구가 내린 벌이었다. 마음에 남기고 간 난도질이었다. 그런 그림을 떼어버리면 그때야말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친구는 돌아오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조슈아는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저, 켈스, 그런데 당신은 이 이야기를 어째서 알고 있죠? 당신은 비취반지 성에서 죽었고, 그 후로 그 성을 못 떠났을 텐데? 당신이 죽은 후에 고쳐진 이 그림에 대해서, 그리고 이카본이 떼지 말라고 했다는 것까지, 어떻게 알 수가 있어?" 켈스니티가 미소를 짓자, 그림 속의 미소 없는 표정과 묘한 대조를 이뤘다. 「어제 이곳에 와서 어떤 사람을 만났지, 이제부터 네게 소개하려 하는.」 켈스니티가 문 쪽으로 돌아서는 순간 약속이나 한 것처럼 딸깍, 하고 문이 열렸다. 어둠 속에 키 작은 윤곽이 보였다.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하면서 문이 닫혔다. 직접 닫은 것은 아니었다. 조슈아의 눈에는 분명히 보였다. 문을 닫은 자가 있었고, 걸어오는 자가 있었다. 문을 닫은 자는 문 뒤로 스르르 사라져버렸다. 분명 유령이었다. 다가오는 발소리는 구두를 신은 듯 또각또각 울렸다. 유령의 안내를 겁내지 않는 자는 책상 앞까지 걸어와 멈춰 섰다. 촛불이 방문자의 얼굴에서 어둠을 걷었다. 어슴푸레한 불빛 아래 드러난 것은 고작 열두어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다. "누구……?" 소녀는 당황한 조슈아를 올려다보더니,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펼치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데모닉 조슈아." 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을 보더니 말했다. "다시 뵙네요, 켈스니티." 조슈아는 한 마디도 못한 채 그 자리에 못박혔다. 무릎을 살짝 덮는 검은 드레스는 상복처럼 검었다. 치맛자락 아래로 파니에(panier)의 검은 레이스가 살짝 엿보였다. 가슴 언저리에는 작은 꽃무늬들이 규칙적으로 수놓아져 있었지만, 드레스 빛깔과 똑같은 검은색이어서 거의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 외에는 목 언저리에 가느다란 금빛 리본이 하나 달려 있을 뿐이었다. 소녀의 머리는 금발이었다. 그런데 평범한 금발과는 달랐다. 마치 서서히 탈색되고 있는 것처럼 백색에 가까운 금빛 곱슬머리였다. 조슈아의 검은 머리가 점차 회색으로 변해 온 것처럼. 끝이 살짝 들린 낮은 코, 조그맣고 뾰족한 입술, 숱 많은 앞머리를 단정하게 달라 가린 이마, 그리고 조슈아와 똑같은 검은 눈동자가 있었다. 보면 볼수록 기이한 감정이 솟아났다. 숨겨진 비밀이 갇힌 곳에서 나오려 요동치는 느낌이었다. "당신은 누구죠?" "제 이름은 아우렐리에." 소녀는 잠시 사이를 두더니 턱을 쳐들고 조슈아를 쏘아보았다. "아우렐리에 폰 아르님이에요." <6권에서 계속> 룬의아이들 데모닉6권 나의 인형. 너는 비밀의 말을 알고있니? 11막. Meridian 1. 천사의 얼굴과 악마의 심장에 흐르는 피 2. 비밀의 말 3. 노을섬의 수수께끼 4. 아름다운 손님 5. 입, 손, 그리고 귀 6. 무서운 이야기가 제격인 밤 7. 붉은 등, 검은 깃발 8. 죽은 광대의 노래 9. 돌아온 맹약자들 10. 청록색 유리병에 든 배 intermezzo. 4월의 폭풍 12막. Yearning 1. 두 사람의 돛배 2. 무덤 3. 아몬드꽃 11막. Meridian 1. 천사의 얼굴과 악마의 심장에 흐르는 피 "네 몸에 흐르는 피는 흡사 신주(神酒)와 같은 맛이 난다고 하던데 과연 그러한가?" 조슈아는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자기 집안의 가계도를 그려보았다. 자기가 모르는 '폰 아르님'이 존재할 수 있는 경로를 찾았다. 없었다. 그런 사람이. 무엇보다 이 섬에 존재할 가능성은 너무 멀고 희미했다. "당신의 아버지는?" "말해도 모를 거에요." "그런데 어째서 당신이 아르님이지?" 아우렐리에는 두 손을 치마폭에 모으며 켈스니티를 바라봤다. "제가 좀 심하게 놀린 건가요?" 「그러지 말아요. 아우렐리에. 다툼은 원치 않는다고 했잖아요.」 "하지만요. 이 말만은 하고 싶었어요." 아우렐리에는 조슈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나도 폰 아르님이 될 수 있었다는 것 말예요. 분명히. 내가 그걸 달가워하는가와는 별개로." 조슈아는 키 작은 소녀를 쏘아보았다. "난 농담할 기분이 아니군요. 당신이 정말로 누구인지 밝혀요. 난 당신이 켈스를 볼 수 있어서 놀랐지만. 이 세상에 영매가 나 하나뿐일 리는 없겠죠. 하지만 우리 집안과 관계없는 사람이라면 켈스가 여기까지 데려오진 않았을 테니까. 내 집안의 일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준비가 됐습니다. 자, 말해보시죠." "화내지 말아요." 아우렐리에는 눈을 내리깔았다. 치떴던 눈을 내리니 아기처럼 앳된 얼굴이었다. 도톰한 뺨은 색칠한 인형 같았다. "내 얘기를 듣는다면 이해하겠죠. 잘 따져보면 난 당신의 누이동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거예요. 난 당신을 보고 싶었어요. 당신이 내 기대와 같은 사람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아우렐리에는 다시 눈물을 들고 예의바르게 말했다. "당신이 아름다워서 기뻐요." 조슈아는 고개를 저으며 눈을 돌렸다. "난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요." '누이'라는 단어가 저절로 이브노아의 기억을 가져다주었다. 이브노아의 금빛 머리와 섬세한 얼굴과……. 조슈아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잘못 볼 수 있는 눈을 갖지 못했다. 아우렐리에의 얼굴은 이브노아와 비슷했다. "알았어요. 왜 내가 누이가 되는지 가르쳐 드릴게요. 켈스니티도 내가 말해주기 전에는 몰랐으니. 당신도 진실을 알지 못할 것 같네요. 내가 당신 앞에 왔으니 당신도 진실을 알아야죠. 그래야 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수 있고요." "제발 해 봐요. 수수께끼 놀이 하지 말고." "수수께끼 놀이 취미 없어요. 난 아우렐리에 폰 아르님이고, 또한 아우렐리에 로어티카람이죠. '로어'는 일족이 노을섬을 떠나 페리윙클로 들어온 후에 만들어졌어요. 우리는 자신을 낮추었어요. 노을섬에서의 위치를 버렸어요. 성을 완전히 바꿔야 된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어차피 아르님 가문사람들조차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지경이라 이 정도로 충분했지요." 조슈아는 얼른 대꾸하지 못했다. 결론이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아우렐리에. 당신이 아나로즈 티카람의 자손이라는 주장도 믿기 힘들지만 그것까지는 내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죠. 하지만 켈스니티가 이곳까지 당신을 들어오게 한 이유. 다시 말해 '폰 아르님'이라는 주장만은 받아들이지 못하겠군요." 아우렐리에는 조그만 입술을 오므리며 조슈아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아직도 알아듣지 못한……." "아니. 알아들었지만 납득할 수 없어요." 아우렐리에의 눈가가 살짝 좁아졌다. "인정하지 못하겠다. 그뜻인가요?" "……." 조슈아는 시선을 내렸다. 아우렐리에는 손끝으로 치맛자락을 살짝 펼쳐보였다. "오늘은 상복이 어울리는 날이죠. 나도. 당신도." 조슈아가 입은 옷은 상복이 아니었지만 바지가 검고 셔츠는 희어서 굳이 따지자면 상복의 요건에 전혀 맞지 않는다고 할 순 없었다. 조슈아는 눈초리를 가늘게 찌푸렸다. 아우렐리에가 말했다. "또 화내려고 하는군요. 하지만요, 당신은 상복을 입었어야 해요.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 당신이 애도했어야 마땅하지만 아직껏 한 번도 해도하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애도할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당신이 페리윙클 사람인 이상 난 당신의 슬픔을 위해 얼마든지 상복을 입을 겁니다. 이곳에 안 계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조슈아의 대답을 들은 아우렐리에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화를 일으켰다. 긴장이 한 겹 벗겨져 좀 더 소녀의 얼굴에 가까워졌다. "당신이 그렇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란 점이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군요. 그게 아르님의 힘이라고 누군가가 말해줬죠. 좋아요. 내 가문에 슬픈 일이 있어서 난 상복을 입었어요. 당신은 방금 한 말대로 장례식에 참석해 줄 건가요? 상복을 입고?" 거절할 명분은 없었다.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우렐리에는 주머니에서 검은 머플러를 꺼내 들고 조슈아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조슈아가 허리를 굽히자 그녀가 손수 머플러를 셔츠 깃에 돌려 매 주었다. "우리 가문의 장례 표지에요. 자, 따라와요." "지금?" "네. 지금." 아우렐리에는 몸을 돌려 문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자 저절로 문이 열렸고, 그녀는 그 문을 지나갔다. 이번에 조슈아는 문을 연 손길을 보지 못했다. 다시 말해 그 존재는 유령일지라도 조슈아에게 보이지 않았다. 새벽 4시가 가까웠다. 이 시간에 어디서든 장례식이 피러질 거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밤샘하며 관을 지키는 것은 가족의 몫이기에 조슈아가 페리윙클 공작이라 해도 그 자리에 참석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상식적인 판단일 뿐이었다. 장례와 같은 일을 거짓으로 말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지금이 새벽이든 아니든 장예가 치러지고 있다고 말하는 이상 그 말을 믿어야 옳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켈스." 그림자처럼 서 있던 켈스니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그녀를 내게 데려왔죠?" 「저녁 무렵에 북쪽 해변을 걷고 있었어.」 켈스니티는 벽에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은 얼마든지 벽을 통과 할 수 있지만 때로 저렇게 산 사람처럼 서 있곤 했다. 그게 조슈아를 위해서였든, 자신을 위해서였든. 「오래전. 그러니까 생전에 걸어보았던 곳이란 게 기억났지. 난 페리윙클에 참 오랜만에 돌아왔거든. 죽고나서는 처음이던가.」 "나를 떠나 다른 곳에 갈 수 있었잖아요. 필멸의 땅까지도, 그런데 그동안 왜 여기는 안 왔죠?" 「글쎄, 모르겠어. 선뜻 와보기가 꺼려졌던 걸까.」 문득 자신이 유령이 되어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게 된다해서 비취반지 성으로 곧장 날아갈 것인가 생각했다. 반드시 그래야 할 필요가 없다면, 그러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확신할 순 없다. 그러나 그곳에 가서 눈에 익은 풍경과 사람들을 보기 전에 마음을 다잡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려면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조슈아는 무심코 머플러를 매만졌다. 그게 목을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헐겁게 맸을 뿐인데도. 「다른 곳은 많이 변했는데 그 해변만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싶었어. 그래서였던 것 같구나. 작은 배 한 척이 비스듬히 서 있었는데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올라가보고 싶었지. 이카본과 내가 처음 바다에 나가본 것도 남의 배를 몰래 타고서였지, 그 배 안에서 아우렐리에를 만났어. 아우렐리에가 날 알아보기도 전에 난 놀랄 수밖에 없었지. 그녀가 내가 알던 사람과 너무 닮았기 때문에.」 "아나로즈 티카람을 닮았단 말인가요?" 켈스니티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손녀, 제노비아를 닮았어.」 그 말은 아주 이상하게 들렸다.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그녀의… 손녀." 켈스니티가 말을 이었다. 「제노비아는 인형처럼 예뻤지만 불행히도 백치였지.」 조슈아는 책상 턱에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책상 뒤에 두었던 구두를 찾아냈다. 구두를 신고 재킷을 집어 들고 아우렐리에가 사라진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문은 그대로 열어둔 채. 아우렐리에는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가 됐나요?" 반 시간 정도 걸은 듯했다. 날이 밝을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여름이라 짧긴 해도 아직은 밤의 때다. 어둠은 틈을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은 지지 않을 것 같다. 새벽은 섣불리 도전하는 대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페리윙클 섬에는 산이라고 할 만한 고지가 단 한군데 있었다. 섬의 서북쪽 봉우리였는데 그 산꼭대기로 오르면 남쪽 바다에서 유일하게 눈이 내린다고 했다. 오래 전 히스 노인이 막시민과 나란히 앉은 그에게 해 줬던 이야기였다. 산에는 마을이 없다고 들었다. 페리윙클 사람들은 대부분 바다에서 생업을 찾았으므로 굳이 산비탈까지 일구며 사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었다. 아니, 있긴 했지만 그들은 섬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고립된 사람들이며 마을을 이룰만한 수효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오를수록 바다가 멀어졌다. 언제부터인가 파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 나뭇잎 사이로 부는 바람이 쉿, 하고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완만하지만 계속해서 오르막이었다. 주위는 어두웠다. 걷고 있는 곳이 깊은 숲인지 가로수 길에 불과한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아우렐리에는 램프를 갖고 있었지만 등갓이 더럽혀져 빛은 희미했다. "다 왔어요." 아우렐리에가 걸음을 멈추고 정면을 가리켰다. 조슈아의 눈에는 아직 검은 숲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우렐리에를 앞질러 몇 걸음 나아갔다. 어둠 속을 쏘아보는 동안 그 자리에 희미한 집의 윤곽이 떠올랐다. 점차 또렷해졌다.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두 층으로 된 목조 저택은 외관이 심하게 닳아 있었다. 이십 년쯤 비바람을 맞은 것처럼. 1층에서 불빛이 흘러나왔다. 저 불이 언제부터 켜져 있었는지 선뜻 판단이 서지 않았다. 조슈아는 망설이지 않고 현관으로 걸어 들어갔다. 현관은 바로 홀로 이어졌다. 왼쪽에 2층으로 가는 나무 계단이 있어 홀의 절반을 그늘로 덮었다. 나머지 절반은 벽난로 불빛, 그리고 반쯤 녹아내린 십여 개의 초가 비추었다. 뒤뜰로 반 뼘 정도 열린 문도 보였다. 뒤꼍에는 어둠뿐이었다. 조슈아는 그늘과 빛의 경계에 서서 머뭇거렸다. 바닥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노파였다. 들어올 때 이미 보았다. 처음에는 자신을 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노파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등 뒤에서 아우렐리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머니는 귀가 안 들리시고 눈도 나쁘세요." 조슈아는 목에 맨 머플러를 또다시 만지작거렸다. "다른 가족은?" "없어요." 계단 밑 그늘에 검게 칠한 관이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할머니가 깔고 앉은 담요 끄트머리를 조금 밟고서, 그걸 바라보자니 오늘 밤에 기릴 망자의 관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대충 놓여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더구나 방금 주문한 빈 관처럼 톱밥 냄새가 풍기는지라 저 안에 정말 죽은 사람이 있을까 의심쩍었다. 관의 모양은 이 집과는 어울리지 않게 고급스러웠다. 관 뚜껑에 새겨진 조각만 봐도 값비싼 물건이 틀림없었다. 손님 주제에 왜 관을 저렇게 다루느냐고 물을 순 없는 일이었다. 다만 이런 식이라면 당장 장례식을 치를 것 같진 않았다. 이 정도 규모 있는 저택에서 장례를 치르는데 이웃 한 명 오지 않는다는 것은 다소 이상했다. 저 무거워 보이는 관을 밖으로 내어가자면 장정 여섯 명 정도는 필요할 터였다. 다른 사람들은 날이 밝으면 오는 걸까? 그렇다면 왜 이런 시간에 그를 데려온 것일까? "장례식은 아침인가요?" "언제라도 상관없어요." "그럼 지금이라도 치를 생각인가요?" "할머니가 원하시면요." "하지만 사람이 좀 더 와야 할 텐데요?" "괜찮아요." 아우렐리에는 구겨진 담요 끝을 펴더니 자기도 그 위에 앉았다. 양탄자도 없는 바닥에 앉는 것이 평소 생활인 것처럼 스스럼없었다. 무릎을 세우고 치맛자락을 펴더니 할머니의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그 순간 할머니가 말했다. "아가, 손님이 오셨누?" "네." "손님께 자리 내어 드렸누?" "네." "부엌에 술은 데워 두었누?" "네." 대답을 꼬박 하는 것과 달리 아우렐리에는 조슈아에게 아무 것도 권하지 않았다. 부엌 쪽에도 불기는 없었다. 할머니가 다시 말하는데 아우렐리에에게 말하는 것과는 사뭇 어조가 달랐거니와 매우 또렷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손님, 찾아 주셔서 고마워요. 골이 깊은 이곳까지 오시는 이가 없어 떠날 이가 세상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도 못하고 가게 될까 저어하였어요. 부디 망자의 입에 물릴 은전 한 닢을 놓으시고 술 한 잔을 드세요. 그리고 곧 조상님들을 따라갈 노파의 이야기도 들으세요. 관 지키는 밤에 오신 손님은 망자의 짐을 덜어 저승 강 앞까지 져다 준다고들 하여요. 손님이 오셨으니 이제 저승 강 먼 길 가며 나막신 굽은 닳지 않게 되었어요." 할머니는 아우렐리에의 손을 놓고 조슈아에게 무언가 권하는 것처럼 손을 펴 보였다. 그러나 앞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난감한 노릇이었다. 조슈아는 아우렐리에를 쳐다봤지만, 아우렐리에는 새침한 얼굴로 본체도 하지 않았다. 결국 조슈아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공기로 만든 잔을 들기라도 한 것처럼 손을 오므려 입가로 가져갔다. "따뜻하군요." 말하다 보니 할머니가 귀머거리라던 말이 생각났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싶었다. 몸에 익은 연기력 때문에 잔을 내려놓는 동작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문득 떠올라 주머니를 뒤져 보았다. 그런데 당연한 것처럼 주머니에는 동전 한 개도 없었다. 할머니를 봤지만 다행히 당장 동전을 내놓으라고 하지는 않았다. 이어 아우렐리에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쪽은 간단히 무시했다. 어차피 그녀도 술을 주지 않았으니 피장파장이었다. "망자의 마지막 길에 평안하셨길 바랍니다." 아우렐리에가 대꾸했다. "아마 그러셨을 거예요. 주무시다가 돌아가셨으니까요." 가벼운 일을 말하듯 해서 조슈아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우렐리에, 당신은 그리 슬퍼 보이지 않는군요." "아뇨. 슬퍼요. 예전엔 더 슬펐어요." 대답이 이상했지만 조슈아가 더 묻기 전에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관 지키는 밤에는 망자의 옛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울리겠지요. 일찍이 가문이 높임을 받아 해 지는 섬을 지키던 시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가문에 죄의 근원이 있어 자리지 않는 아이가 태어난다 하였어요. 하지만 그 말은 진실을 모르는 자들의 헛말일 뿐. 사람들은 우리의 기원(起源)을 알지 못하고 또 알아서도 안 되었어요. 가문에 일어난 일들은 옛날 말없는 에일로즈가 사려 깊게 비밀을 지킨 까닭이며, 그로 인해 섬이 지켜진 결과라는 것을 아는 이 오직 해 지는 붉은 바다와 바다의 가문뿐이었어요."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할머니의 말에는 두서가 없었다. 그러나 목소리에 실린 가락이 그런 이야기를 또한 자연스럽게 들리게 했다. 조슈아는 귀를 기울일 마음이 들었다. 당장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라 해도, 만약 음(音)을 품은 단어의 바다에서 노래가 태어난다면, 할머니의 이야기는 노래가 될 단어들을 모아 실을 잣고 있는 듯했다. 노래를 한 폭 짜낼 실꾸리를 만드는 중이었다. "아, 그 옛날 눈이 검은 이가 물이 세운 성벽을 통과했을 때 누군가는 재앙의 징조라 하였고 누군가는 새 길이 트이리라 하였어요. 긴 머리의 아나로즈가 그이와 떠나자 섬 깊은 곳에 묻힌 마법사의 부러진 손을 지킬 이가 없었고, 돌로 된 발의 게인이 대신 무덤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세월이 흘러 세인의 머리가 희어지고서야 아나로즈가 돌아와 예언이 말한 대로 임무를 돌려받았어요. 무덤에서 나오고도 게인은 기력이 쇠잔하여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지요. 힘에 부치는 임무를 긴 세월 버티어낸 게인은 오랫동안 존경을 받았답니다. 그러나 무덤으로 들어간 아나로즈는 '긴 머리의 마녀가 땅 밑에 잠들어 있다'는 이야기가 남았을 뿐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았어요. 그리고 에일로즈의 딸이 자라지 않는 아이, 다시 말해 백치를 낳은 것을 보고 마녀의 죄를 받았노라 하였어요." "백치라고요?" 할머니가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백치로 태어난 아이가 아나로즈의 손녀가 아니라 에일로즈의 손녀라는 말도 켈스니티가 말해준 것과 달랐다. 할머니가 대답하지 않자 아우렐리에를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소용없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관 끄트머리에만 시선을 주었다. "그들이 말하는 '긴 머리의 마녀'가 무덤 속에서 지켜주어서 그들이 그 땅에서 살아갈 수 있음을 아는 자는 없었어요. 세월이 흘러 섬은 점차 돌로 변해갔으나 그것이 약속된 결과임을 아는 이 또한 없었어요. 결국 그들이 삶을 버틸 수 없게 된 섬을 떠나 푸른 꽃잎의 섬에 몸 붙이고 살게 된 이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이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알지 못하였어요. 그들이 '마녀의 죄'라고 부른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그들은 마녀의 일을 상기하였고, 마녀가 검은 눈의 공작을 따라 떠났기에 섬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여겨 마녀를 미워하였어요." 아나로즈를 데려갔다는 검은 눈의 공작은 이카본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했다. 아나로즈가 나중에 이카본과 불화하고 노을섬으로 돌아갔다는 것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마법사의 부러진 손'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걸 누군가가 지켜야 한다고 했고, 아나로즈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노을섬이 오랫동안 무사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아나로즈 티카람처럼 대단한 사람이 지켜야 했던 '마법사의 부러진 손'이 바로 켈스니티가 말했던 가나폴리의 '악의 무구'가 아닐까? 그러고 보면 켈스니티는 그 무구가 끝내 어떻게 되었는지 말해 주지 않았다. 노을섬의 지반이 무구의 힘을 견디지 못해 흔들렸다던 이야기를 생각할 때 그 힘이 노을섬을 점차 사람이 살 수 없는 섬으로 만들어 지금에 이르렀던 듯했다. 아나로즈 이후에는 그걸 잘 지켜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까? 또는, 그 옛날 아나로즈는 이카본에게 말하길 노을섬 사람들이 마법을 쓰는 것을 그만두어야 무구의 봉인이 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마법을 쓰던 노을섬 사람들이 섬을 버리고 떠났으니 봉인은 이제 안전하게 된 것일까? 아니, 그런 일들은 아무래도 좋다. 조슈아가 알고 싶은 것은 티카람의 핏줄에서도 태어났다는 백치의 일이었다. 아우렐리에를 닮았다는 제노비아였다. "사람들은 검은 눈의 공작이 마지막으로 해 지는 섬을 찾아왔던 때를 기억하였어요. 마녀가 무덤으로 들어가고서 이미 수십 년이 흐른 뒤였지요. 공작이 죽을 날이 머지 않았음을 알고서 다시 한 번 마녀를 만나고자 하였으나 만나지 못하였어요. 그때까지도 용서받지 못하였던 까닭이어요. 대신 공작은 '상장(喪章)을 단 멜오렌'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때 멜오렌의 딸 '아몬드꽃의 제노비아'는 열 살이었고 아몬드꽃처럼 흰 얼굴과 머리카락을 가져서 어인 여신과 같았어요. 공작은 멜오렌의 딸을 데리고 자신과 함께 가겠느냐고 물었어요. 멜오렌은 거절하였어요. 공작은 제노비아의 손을 잡고 반 시간 동안 아몬드나무 아래를 거닐었어요. 멜오렌은 오직 그만큼만 허락하였어요." 할머니는 말을 멈췄다가 느리게 이었다. "공작은 그들과 작별하고 바다 건너로 돌아갔어요. 그는 마녀를 만날 수 없는 운명이었어요. 마녀도 공작을 만나지 못하였을까요? 아니었어요. 마녀는 공작을 다시 만날 수 있었어요. 다만 그녀가 만난 것은 죽은 공작이었지요. 재회한 그들은 다시 헤어지지 아니하였어요. 영원토록 헤어지지 아니하였어요." 할머니가 말을 그치자 아우렐리에가 허공에서 선을 움직이더니 무언가를 집어 내밀었다. 보이지 않는 찻잔처럼 여전히 공기로 된 무언가를 할머니는 받아드는 대신 다시 입을 열었다. "자라지 않는 아이는 왜 태어나게 되었을까요. 검은 눈의 공작은 축복을 받아 불가해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어요. 그의 힘은 자손들에게도 이어졌으나 그들은 검은 눈의 공작처럼 섬의 무리 가운데 있지 아니하였어요. 푸른 꽃이 피는 섬의 사람들은 힘을 물려받았으되 섬의 무리를 사랑하지 않는 아이를 두려워하여 눈앞에서 축복받았다 이르고 돌아서면 '악마'라고 불렀어요. 그들은 '악마'의 이름을 가진 자손이 공작이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였어요. 그들은 공작의 이름을 이어가는 새 공작만을 사랑하였고, 공작의 힘을 이은 악마는 원치 아니하였어요. 그런 불가해한 힘을 갖고도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가장 두려운 이였기 때문이어요. 그래서 축복과 악마의 이름을 동시에 가진 자들은 가문에서 제외되어 불가해한 광인들로 알려지게 되었지요. 그러나 푸른 꽃의 섬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지만 공작의 자손은 그들만이 아니어요. 손님께서 오늘 밤을 새우실 이 낡은 가문에는 본래 공작의 이름을 물려받았어야 할 피가 한 줄기 흐르고 그 핏줄에서 바로 '마녀의 죄'가 태어나 왔어요. 백치와 광인과 의대하고 불가해한 자들의 피, 왕국의 그림자와 죽지 않는 약속의 피, 천사의 얼굴과 악마의 심장에 흐르는 피……." 가락이 높아지다가 뚝 끊겼다. 조슈아는 꼼짝도 않고 그 말을 들었다. 그건 그의 이야기였다. 이카본으로부터 시작되어 자신 또한 사로잡힌 알 수 없는 피였다. 그 피에서 데모닉이 태어나고, 광인도 태어나며, 평범한 자도 태어나고 백치도 태어난다. 이쪽에서도 데모닉이 태어났을까? 자신 외에도 누군가가 또 태어나 지금 살아가고 있을까? 1. 비밀의 말 "이봐, 악마가 선물만 주고 그냥 가는 존재일 리가 있겠나……." "이제 인정할 수 있나요?" 아우렐리에의 물음이었다. 조슈아는 고개를 돌렸다. 아우렐리에가 다시 말했다. "당신은 아나로즈가 일방적으로 이카본을 떠나는 바람에 둘의 사이가 깨졌고, 몇 번이나 찾아갔는데도 만나주지 않다니 매정한 여자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아나로즈는 이카본을 만나주지 않을, 아니 만나줄 수 없는 이유가 있었던 거죠. 그녀는 결코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아이의 존재를, 그걸 알게 된 그가 어떻게 할지 알고 있었기에, 그런 식으로 그를 되찾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으니까. 만일 아이가 없었다면 그녀 쪽에서 마음을 풀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돌아갈 순 없었죠. 그녀는 철저히 감췄어요. 그리고 가족들도 그녀의 뜻대로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죠. 이카본은 몇번이나 찾아왔지만 아무 것도 모른 채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해하기 힘들군요, 그런 생각." "난 이해가 가요. 아주 많이. 아니 나라도 그렇게 했으리라고 생각해요." 둘의 눈이 마주쳤다. 오래 전 마주섰던 그들의 조상이 이해하지 못했던 서로처럼, 둘의 눈빛도 그러했다. 완강하기도 하고, 연민을 느끼기도 하고, 궁금해 하기도 하고, 그런 마음을 숨기고 싶어 하기도 했다. 수백 년이 흘러 남매이기도 하고 남남이기도 한 두 사람은. 아우렐리에가 말했다. "사람들은 그들이 쌓은 죄가 '마녀의 죄'를 만들고, 섬을 살지 못할 곳으로 만들고, 그들 자신조차 몰락시켰다는 것을 믿고 싶어 하지 않았죠. 그래서 마녀의 전설이 만들어졌어요. 스스로를 원망하고 속죄하는 대신마녀를 미워하기만 하면 되니 얼마나 편리해요? 난 아나로즈의 성격을 알아요. 그녀는 그런 사람들을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아나로즈가 낳은 딸을 자신의 딸로 받아들여서 키웠고 티카람이라는 성도 물려받게 했어요. 노을섬 사람들도 모두 에일로즈의 핏줄인 줄로만 알아요. 아무도 아르님을 의심하지 않죠. 그럴 수밖에 없죠. 왜냐면, 이쪽 피에서는 백치밖에 태어나지 않으니까." 입술을 오므려 말을 맺으면서 아우렐리에는 집요하게 조슈아를 쏘아보았다. 자기가 가졌어야 할 것을 부당하게 빼앗겼다는 것처럼, 되풀이했다. "백치밖에는."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왜 내가 말하면 안 되죠?" 조슈아는 얼른 대답하지 않고 피로한 것처럼 두 손으로 눈을 비볐다. 한참 만에 대답이 들렸다. "나, 그 말 때문에 몹시 아파서." 아우렐리에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날 듯하다가 간신히 숨만 들이쉬고는 말했다. "왜요? 반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부당한 처지인 쪽이 누구죠?" 조슈아의 눈썹도 움직였다. "데모닉이 되어봤자 전혀 좋지 않아. 할 수만 있다면 당신과 맞바꿀 텐데 그러지 못해서 내가 안타까울 지경이죠. 하지만 그것보다도, 그런 것보다도 내게는, 백치라는 말… 그런 식으로 말해버리는 걸 참을 수가 없어. 아, 정말로… 다시는 말하지 말아요. 난……." 아우렐리에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혹시 그쪽에서도 백치가 태어나는 건가요?" 조슈아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굳이 들을 필요도 없었다. 아우렐리에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어째서일까? 난 우리가 노을섬에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그쪽에서도? 백치라고는 하지만 그냥 평범한 바보는 아니니까, 누구나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죠. 본래는 데모닉으로 태어났어야 할 사람이 노을섬에서 무구의 힘을 빌려 증폭되어 온 잘못된 마력의 영향을 받아 태어나기도 전에 미쳐버린 거니까." 조슈아는 눈을 크게 떴다. "잠깐, 그 말 확실한 건가요?" "노을섬에서 마법이 사라진 후로는 한 번도 태어나지 않았어요. 그 대신 나 같은 사람뿐." "나 같은 사람이라면?" "데모닉의 가장 큰 특징이 뭐라고 생각해요?" 조슈아가 자신만의 혼란에 빠져 얼른 대답하지 않자 아우렐리에가 직접 대답했다. "영매." 영매가 아닌 데모닉, 히스파니에 노인이 있는 한 정확한 말은 아니었지만 굳이 정정하진 않았다. 말을 잇는 아우렐리에의 어조가 격해졌다. "난 데모닉도 아닌 주제에 영매예요. 이렇고 불공평할 수가 없죠. 평범한 영매와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영매지만, 데모닉이 아니기 때문에 너무나 위험하죠. 자칫하면 미쳐버릴 테니까. 항상 정신을 차려야 돼요. 중립을 유지해야 돼요. 어쩌면 노을섬에서 태어났던 무구의 마력이 정신을 막을 얇게 만들어서 태어나자마자 저항조차 못하고 정신을 놓아버렸던 것일지도 모르죠." 데모닉이 아니지만 데모닉만큼의 영 친화력을 가진 사람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웠다. 아우렐리에는 계속해서 상상도 못하던 이야기를 쏟아놓았다. "자, 내게 데모닉의 능력이 얼마나 절실한지 당신은 모르겠죠. 얼마나 고집스럽게 나를 지켜야 하는지 모르겠죠. 난 미쳐버리거나, 백치가 되거나,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는데 누가 날 도와주죠? 잠들었다가도 소스라쳐 깨어야 하는 나를, 사람들보다 유령들과 살 수밖에 없는 나를, 누가 도울 수 있죠? 누가 날 이렇게 만들었죠? 능력은 물려주지도 않은 아르님의 핏줄. 권리는 없고 짐만 남은 이름. 이렇게 부당할 수가 없죠!" 아우렐리에가 격해져서 소리를 지르는데도 할머니는 잠들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조슈아는 아우렐리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정확히는 빛이 바랜 머리카락을 보았다. 그제야 아르님 가문에도 네 대에 한 번씩 데모닉만 태어났던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장부처럼, 시계처럼, 그렇게 정확할 순 없는 거였다. 더 많은 이브노아나 아우렐리에가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어떻게 살았던 것일까, 태어나자마자 죽어갔던 것일까. 삐걱, 2층 계단이 몸을 한 번 뒤채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지켜보는 듯한 기색에도 조슈아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지켜보는 눈에 익숙해졌다. 그게 죽은 사람이든 산 사람이든. 하지만 아우렐리에는 달랐다. 바로 돌아보더니 입속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계단 위쪽에서 불빛 몇 개가 번뜩, 하고는 사라졌다. 아우렐리에가 시선을 돌리고 숨을 고를 때 할머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마음이 우는구나. 아가, 그러지 말거라. 너는 부끄러운 자가 아니니라. 네가 물려받은 피는 검은 눈의 공작보다 더 오래된 기원으로부터 흘러오느니." 두 사람 모두 거의 동시에 할머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우렐리에가 말했다. "기원이라고요?" 듣지 못한다는 할머니에게 묻는 것은 아우렐리에도 똑같았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끄덕 했는데 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피는 어디에서 왔을까, 검은 눈의 공작이 어디에서 왔는지 푸른 꽃이 피는 섬에서는 아무도 알지 못하였어요. 사람이라면 의당 부모가 있어야 할 터이나 공작은 고아였어요. 공작이 군도(群島) 전체에 이름을 떨쳤을 때도 부모라고 나서는 이는 없었어요. 하지만 해 지는 섬의 어떤 사람들은 알고 있었어요. 공작의 불가해한 핏줄을 물려준 사람이 누구인가를." 할머니는 시선을 조슈아 쪽으로 돌렸다." "까마득한 옛날 가나폴리에 명망 높은 학자가 있어서 그의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어요. 그는 뒤늦게 결혼하였으나 자식이 없었어요.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의 지혜를 물려받을 자식이 태어나지 않는 것을 아쉽게 여겼어요. 학자는 개의치 아니하였으나 아내가 아기를 배자 매우 기꺼워하였어요. 그러나 몸이 약했던 여인은 아기를 낳지도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지요. 학자는 비통함을 누르지 못하고 무리한 일을 저질렀어요. 가나폴리의 인형술을 바탕으로 아내의 복제 인형을 만들어내고 인형의 태에 아기를 옮겨 자라도록 하였어요. 이 일을 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몸 절반을 희생시켰어요. 그러나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어요. 아가는 인형의 몸에 적응하지 못해 서서히 죽어갔고, 어떻게든 아기를 살리려던 그는 어떤 불가해한 존재와 계약을 맺었어요. 어떤 계약이었는지, 사실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런 그것으로 아기는 살아났고, 마침내 태어났어요. 사람들은 그가 가나폴리 사람들이 흔히 맹세의 집전자나 사람의 운명을 수호하는 영으로 여기던 수백 가지 다이몬(Daemon)중 하나와 계약했다고들 하였어요. 그 다이몬이 열 가지 얼굴을 가진 다이몬의 왕이라고도 하였어요." 조슈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이 이야기가 설마 정말로 데모닉의 조상에 대한 이야기인가?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인 만큼 의심도 컸다. 이카본 윗대에도 데모닉이 존재했던 것일까? 물론 부모 없이 태어나는 사람이 없으니 데모닉 이카본에게도 조상이 있어야 한다. 대대로 유전되는 능력이 이카본으로부터 갑자기 생겨났다고 생각하는 것도 논리적이진 않았다. 푸른 꽃이 피는 섬, 해 지는 섬, 다시 말해 페리윙클과 노을섬의 근원은 가나폴리였다. 데모닉의 불가사의도 그곳에서 왔는가? 증명해줄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 가능성만은 있는 것인가? 조슈아는 아우렐리에를 보았다. "할머니께서 어째서 저런 이야기를 알고 계신 거죠?" "몰라요." 간단히 대답했다가, 다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저한테도 해주신 일이 없는 이야기예요." 할머니의 말이 이어졌다. 가락이 점차 빨라졌다. "훗날 이르길 다이몬이 인형 속의 아이가 다가오는 죽음을 피할 수 있도록 비밀스런 말을 일러 주었다고 하였어요. 비밀의 말은 아이에게 생명을 주었고, 능력을 주었고, 그리고 시간의 힘을 주었어요. 본래 아이는 사람의 자식이자 인형의 자식이었기 태어난 모습 그래도 영원할 뿐 자랄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다이몬이 죽음을 막시 위해 아이의 변화를 멈추었을 때 죽을 수 없는 운명이 되었지요. 다이몬은 죽지도 자라지도 않게 된 아이에게 마지막으로 시간의 힘을 불어넣어 사람의 육신으로 변화시켰어요. 오직 비밀의 한 마디로. '말'은 약속이자 변화이고, 사람을 '질서' 속에 살도록 하는 인과이자 소이(所以)이어요. 인형에게는 없고 사람에게는 있는 그것이어요. 그러나 비밀의 말이 어떤 것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였어요. 아버지도, 아이 자신도 알 수 없었어요. 불가해한 능력을 지닌 아이는 보고 들은 것을 무엇이든 기억하겠지만, 태어나기 전의 일만은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어요. 그러나 아이의 능력은 불가해하였기에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아니가 비밀의 말을 기억해 내는 순간 다이몬의 손에서 놓여나리라 하였어요. 죽지도, 늙지도, 자라지도 않는 몸을 되찾게 되리라고 하였어요. '질서'가 부여한 인과를 벗어나 자유로워지지라고, 동시에 세살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워지리라고 하였어요." "그 말은……." 조슈아는 할머니의 말을 분명하게 들었다. 물론 완벽히 기억하고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는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누구보다 그 말을 진실로 이해했다.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는, 그가 묶인 괴이한 굴레에 대해 설명이 된다고, 그래서 일말의 진실성을 지녔다고 느꼈다. 무엇보다도 그는 다이몬의 손에서 놓여난 자신을 연상할 수 있었다. 할머니의 설명이 없어도 그게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지 알았다. 직관적으로, 알 수밖에 없었다. "인형에게는 없고 사람에게는 있으며 인형도 사람도 아닌 자에게는 어렵사리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게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군요. 인형과 사람의 사이에서 곡예 하는 자였기에. 내가 그 인형을 사랑할 수도 있는 것이군요. 누군가가 나를 질서에서 추방하려 하는 것을 알고서, 저항하기 전에 문득 자유를 느낄 수도 있는 것이군요." 할머니가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문득 조슈아는 깨달았다. 할머니가 조슈아를 볼 수 있으며, 말을 들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나 아우렐리에가 했던 말이 거짓말도 아니라는 것을, 그건 두 사람이 같은 힘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할머니가 말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다이몬은 실체가 없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하였어요. 다이몬은 사람 속에 살고 있는 다른 마음이라고도, 사람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지녀온 기억이라고도 하였어요. 두려움이기도 하고 자유로움이기도 한 것이라 하였어요. 그러므로 학자가 만났다는 다이몬은 학자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 하였어요." "그러면 그는 자신과 계약했단 말인가요?" "학자가 만난 다이몬은 손님에게도 있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으니까요. 다이몬과 맺은 계약을 깨뜨리고자 하는 자들은 언제나 있었어요. 그러나 그들은 성공하지 못하였어요. 말을 기억해내어야만 하기에, 비밀의 말은 자신 속에 잠자고 있으며 쉽사리 깨어나지 않아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파괴해서하도 비밀의 말을 보려고 하였으나, 말을 깨닫기 전에 죽음에 이르렀어요. 손님은 비밀의 말을 찾으실 것인가요?" 비밀의 말을 기억해내면 죽지도 늙지도 자라지도 않는 몸을 되찾는다는 말과, 비밀의 말을 찾아내려고 자신을 파괴하여 죽음에 이르렀다는 말은 일견 모순되게 들렸다. 그러나 둘 다 인과를 벗어났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어쩌면 같은 뜻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것은 같았다. 그의 인형이 존재하는 한은. "조슈아, 당신은 저 이야기를 박아들일 수 있나요?" 조슈아는 아우렐리에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발음한 자신의 이름이 어쩐지 특별하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아우렐리에는 친구도 아니었고 누이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다른 연결이 있었다. 분화되지 않은 세포처럼, 만개하지 않은 꽃처럼, 데모닉이 되기 전의 잠재체처럼 예민해 있는 그녀다 "말해 봐요. 데모닉의 기원이 저렇다는 이야기를 믿을 수 있나요?" "당신의 할머니께서 해주신 이야기인데 당신이 믿을 수 없다고 하니 이상하군요." "누가 한 이야기든 상관없어요. 난 안 돼요. 할 수 없어요. 인형의 몸을 빌려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다는 단순한 설명을 어떻게? 고작 누군가가 아내와 아이를 사랑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개인적인 설명을 어떻게? 내 삶에 이렇게 뚜렷하게 존재하는 고통을 고작 그런 설명으로?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겪었던 망가진 인생이 마법따위로, 다이몬인지 뭔지의 계략으로 만들어진 거라고? 당신은 믿나요? 말해 줘요, 당신은 믿나요?" 조슈아는 잠시 아우렐리에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밤이 옷자락을 거두는 시간이 왔다. 홀에 뚜렷했던 그늘과 빛의 경계가 걷히자 검은 관만이 남아 도드라졌다. 조슈아는 이윽고 관에 눈길을 주었다. 구겨진 담요에 드문 빛을 바라보았다. 그는 입을 열었다. "그건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무슨 뜻이죠? 하나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이지, 그런 얘긴가요? 데모닉의 알 수 없는 기원에 대해 누군가가 만들어낸 우화로? 사람들의 입이 만든 전설로?" "아뇨." 아우렐리에는 흥분하자 뺨이 발그레하게 달았다. 조슈아는 대조적으로 침착했다. "아우렐리에, 당신은 기적을 믿나요? 그거도 오직 자신한테만 일어나는 기적을?" 아우렐리에는 눈을 빠르게 몇 번 깜빡였다. "그런 것 안 믿어요." "그걸로 충분해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아요. 기적은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만, 옛날에만, 책 속에서만, 미래에만 일어나요. 내게는 일어나지 않아요. 우리는 누구나 죽을 때까지 그대로 살아갈 운명이죠. 데모닉도, 영매도, 광인도, 백치도, 다른 모든 사람도." 아우렐리에는 양손을 가슴에 모아 쥐고 스스로를 진정시키는 중이었다. 그녀의 속눈썹이 의혹으로 미세하게 떨렸다. 조슈아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말했다. "비밀의 말을 깨닫는 순간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을 믿어도, 안 믿어도 돼요. 내 운명을 전설 시대의 다이몬이 지고 있다는 말을 믿어도, 안 믿어도 돼요. 만일 불가해한 존재가 과거에 존재했다면, 그것은 현재에도 존재해요. 전설 시대의 사람에게도 전설이 있었겠지요. 미래의 사람에게 우리 시대는 전설이 되겠죠. 모든 시대에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면, 모든 시대에 불가해한 존재가 있고, 사람들은 기적을 바라고, 기적을 믿지 못한 채 살아가요." "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조슈아는 할머니 쪽을 흘끗 보았다. 할머니는 또다시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조슈아가 이 집에 들어온 이래 한 번도 자세를 바꾸지 않고서. "먼 옛날 어느 학자가 아내와 자식의 죽음에 괴로워하며 해답을 찾으려 했어요. 지금 이곳에도 자신의 운명에 괴로워하는 두 사람이 해답을 찾으려 해요. 운명의 불가해함에 고통 받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 모두는 똑같죠. 학자는 답을 찾았을까요? 알 수 없죠, 학자가 인형을 만들고 다이몬과 계약을 맺어 자식을 살렸다는 이야기에서 난 내가 곡예 하는 자라는 사실을 느꼈어요. 그리고 그 점에서 나와 이야기 속의 그가 비슷함도 느꼈어요. 그러니 그게 데모닉의 기원이라고 해도 놀라지 안하요. 왜냐하면, 데모닉의 기원이 어떠했든 현재의 내 모습이 변하지는 않으니까, 어느 날 부모가 누구인지 밝혀졌다고 해서 사람의 본심이 바뀌지는 않으니까." 꼭 쥐었던 아우렐리에의 두 손이 어느새 느슨해져 있었다. "내 인생만이 불사해하지 않고, 내 존재만이 불가해하지 않고, 당신도, 우리 조상들도, 그리고 세상 모두가 같다고 생각됐어요. 난 이 시대에, 이 자리를 항해하는 쪽배예요. 전설 시대에서 불어온 바람이 나를 밀어 보내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죠. 불가해한 존재가 나타나서 나를 구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단 한 마디의 말이 내 운명을 푸는 열쇠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알죠. 오늘 처음으로 내가 데모닉이라는 사실에 만족했어요. 아니, 데모닉이든 아니든 만족했어요. 내가 나여서 만족했어요. 데모닉이라는 이름도 이젠 마음에 들어요." "데모닉이라는 말은 후세 사람들이 능력을 시기하고 두려워해서 붙인 아름이라고 들었어요." 조슈아는 피식 웃었다. "다이몬. 그걸 요즘은 데몬(demon)이라고 부르죠. 따져보면 다이몬이 준 비밀의 말 때문에 살아 있잖아요? 다이몬. 다시 말해 데몬의 세례를 받은 자를 데모닉(Demonic)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상할 것 없겠죠. 이카본이 직접 이 별명을 붙였다고 해도 믿겠는데요." 아우렐리에는 손을 치마폭에 떨어드렸다. 등 뒤로 들어온 햇빛이 검은 관 틈의 톱밥을 빛나게 하고, 담요의 무늬를 드러내고, 아우렐리에의 바랜 머리카락을 다시 금빛으로 만들었다. "당신의 말, 이해가 될 듯 안 될 듯해요. 내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건 내가 데모닉이 아니어서겠죠?" 조슈아는 재미있어하는 표정으로 아우렐리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우렐리에, 당신은 데모닉이 아니라고 했지만 평범한 열 한두살짜리 같지도 않은데요." "무슨 뜻이에요?" "당신은 당신 생각만큼 평범하지 않아요. 어차피 당신은 데모닉을 실제로 만나본 일이 없었겠지요. 지금 나 말고는." "물론 그렇지만……." "그래요, 아무리 핏줄을 이었다고 해도 그렇게 규칙적으로 어떤 사람이 태어나고 안 태어ㅗ나고 그럴 순 없다는 생각을 오늘 처음 했어요. 나도, 어쩌면 데모닉도 각기 다 달랐을지도 모른다고. 나 또한 옛날 다른 사람들과 똑같지 않을 수 있다고. 그래요, 우리 집안에도 있었어요. 죽은 내 누이는 평범한 백치는 아니었죠. 난 누나가 안타깝고, 부럽고, 귀찮고, 답답했어요. 하지만 이젠 그런 걸로 누나를 기억하지 안하요. 누나가 내게 존 애정을 다 갚지 못해 남은 빈자리가 마음 한 구석에 늘 있죠. 그게 누나의 자리니까." 아우렐리에가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 "나, 아직 열 살이에요." 조슈아가 미소했다. "열 살 아가씨가 당신처럼 말할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군요. 데모닉이 아닐 지 몰라도 범재는 아니란 말이죠. 이제 보니 당신은 보통 사람도 별로 만나보지 못한 모양이네요. 무엇보다도 보통 사람은 영매라 해도 그렇게 여러 유령을 한꺼번에 다룰 수 없어요." 조슈아는 위층을 손가락질했다. "사람 대신 유령들과 살아왔나 보군요. 참 위험한데, 유령들이 당신한테 그럴듯한 거라도 가르쳐 주던가요?" 그러자 아우렐리에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당신도 영매지만, 유령을 다루는 방식만은 나보다 좋지 못하다고 말해야겠네요." 이번에는 조슈아가 당황했다. "당신은 어떤데요?" "유령이란 건." 이미 뒤뜰 문으로 햇빛이 충분히 비쳐들었지만 둘 중 누구도 유령 이야기를 하며 꺼림칙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익숙한 두 사람이었다. 아우렐리에는 천장을 향해 손가락을 쳐들어 두어 번 젓고 눈을 감더니 주머니에서 긴 바늘을 한 개 빼냈다. 그리고 틈도 없이 자신의 오른쪽 손바닥에 푹 꽂았다. "아!" 조슈아는 벌떡 일어설 정도로 놀랐지만 아우렐리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분명히 바늘은 손바닥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피가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아우렐리에는 여유 있게 바늘을 도로 뽑았다. 상처가 남지 않은 것은 물론이었다. "이렇게도 다룰 수 있죠." "어떻게 된 거죠?" "유령이 순간적으로 씌워진 거죠. 몸에." "강령 말인가요? 그렇다 해도 손은 당신 손인데 어떻게?" 조슈아가 놀랄수록 아우렐리에는 의기양양해졌다. "강령하고는 좀 달라요, 강령은 유령의 의식이나 유령이 죽은 후에 얻은 힘을 빌리게 되지만, 이건 유령이 생전에 어떤 사람이었느냐가 중요해요. 생전의 몸이 지녔던 능력을 빌려 쓰는 거니까, 다시 말해 유령이 생전에 가졌던 몸을 다루던 기억이, 잠깐 동안 내 몸에 대한 기억을 대신하도록 하는 거예요. 비록 잠깐이긴 해도 기억은 의외로 강하게 몸을 지배하죠." "그게 가능하다 쳐도, 바늘로 손바닥을 찔러도 멀쩡한 사람이 있단 말이에요?" "아아." 턱을 약간 쳐든 모습이 영락없이 치기 어린 꼬마 숙녀의 모습이어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 유령은 생전에 오른손이 없었거든요. 없는 오른손을 찌를 수는 없겠죠." "……." 눈앞에서 본 이상 웃어 넘길 수는 없었다. 선뜻 납득이 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분명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었다. "아무 유령이나 마음대로 이런 일을 시킬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오랫동안 강령을 연습해보았던 유령이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유령 쪽에서 그런 기억을 빌려줄 의지가 있어야만 해요. 켈스니티가 당신을 따라다니듯 내게도 따라다니는 유령들이 있어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도 하고, 다만 이렇게 몸의 기억을 빌린 상태가 그리 오래 가진 않아서 그것만은 단점이에요. 당신이라면 더 오래 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얼마든지 응용할 수 있어요. 검술이 뛰어났던 자라면 검술을, 마법이 뛰어났던 자라면 마법을 빌려줄 수 있게 되겠죠. 내 주변에 그렇게 뛰어난 유령이 없어서 유감이네요. 만일 데모닉의 유령이 있다면, 비록 잠깐이겠지만 나도 데모닉 행세를 할 수 있을 텐데." 조슈아의 얼굴이 문득 굳어졌다. 그리고 보니 지난번에 칼라이소 항구에서 그가 추적자들과 싸웠던 이야기를 막시민이 들려 준 일이 있었다. 조슈아가 한 번도 배운 일 없는 방식으로 검을 쓰고 마법에 가까운 무언가로 상대를 쓰러뜨렸다던 이야기를. 다만 다른 점은 조슈아가 그 상태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아우렐리에의 말대로 어떤 유령이 조슈아에게 그런 힘을 비려주고 싶어서 뛰어들었다고 친다면, 연습도 없이 그런 일이 가능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그보다 놀라운 건 그가 빌린 힘 자체였다. 조슈아는 그 힘으로 수십 명을 가볍게 쓰러뜨렸고, 심지어 샐러리맨과 대등하게 대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체 생전에 어떤 힘을 가졌던 유령이 들어왔기에? "왜 그래요?" 조슈아의 표정을 본 아우렐리에가 물었다. "뭐랄까… 지금 생각해 보니 예전에 그 비슷한 일을 한 적이 있는 것 같아서." "정말이에요?" 아우렐리에는 왠지 마뜩찮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조슈아는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난 기억이 나지 않아요. 나중에 친구가 얘기해 줘서 안 건데, 아마 우연이었던 것 같군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요? 정신을 잃었던 건가요? 얼마나 오랫동안?" "글쎄… 기억이 안 나니 모르죠." 아우렐리에는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기억이 안 난다는 건, 너무 강한 유령이 한꺼번에 여럿 들어왔다면… 그러면 그럴지도 모르죠. 그런데 그러고도 당신은 멀쩡했단 건가요? 연습도 없이 해냈고? 아니, 그렇지, 당신은 데모닉이니까 나하고는 다르겠죠. 그런데 기억을 못한다면 그 유령이 누구인지 모를 테고, 그러면 다시 부를 수도 없겠고……." '데모닉이라 나와 다르다'고 말하는 아우렐리에는 별로 괴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다른 문제에 마음이 가 있었다. "내 곁의 유령이 말하길, 어느 유령이 당신의 의지를 묻지도 않고 바로 그런 일을 시도할 정도면… 음… 그 정도면 원령(怨靈)에 가깝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성공했다는 점만은 여전히 수수께끼지만, 어쨌든 그런 원령이 당신을 돕는 건 지독한 염원이 있어서라고, 죽어서도 잊지 못한 생전의 소원이 있어서라고 그러네요. 비록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그런 자라면 반드시 그 소원을 들어줬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얘기하네요." 아우렐리에를 따른다는 유령은 조슈아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영매라고 해도 세상 모든 유령을 볼 수 있는 건 아니라던 켈스니티의 이야기가 새삼 떠올랐다. 그러나 아우렐리에가 한 말은 조슈아의 고민을 되살려 주었다. 그런 영원이라면, 그게 무엇인지는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날의 힘은 약속의 사람들의 도움이었을까? 조슈아의 의식을 빼앗으면서까지 조슈아를 지키려고 했던 걸까? 생각해 보면 샐러리맨을 처음 만났을 때도 조슈아의 손목에 강한 물리력을 빌려주어 그 손목을 꺾도록 한 존재가 있었다. 하지만 이 예상이 맞는다면, 일전에 코르네드를 쫓아내기 위해 마음 속 세계에서 그들을 만났을 때 왜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후로도 마찬가지다. 켈스니티조차도 이 일을 언급한 일은 없었다. 밖에 새가 길게 울었다. 조슈아는 복잡한 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흔들었다. "난 본래 장례식에 참석하러 온 것이었죠." "맞아요." 아우렐리에가 일어서더니 2층을 향해 손짓했다. 그곳에 보이지 않는 자들의 기척이 있었다. 조슈아는 따라 일어서려다 말고 문득 바닥을 보았다. 그의 앞에, 술잔이 있었다. "……." 누군가 마신 듯 절반 정도만 남아 있는 술은 식어서 가느다란 김만이 올랐다. 조슈아는 그 술을 마신 사람이 자신임을 알았다. 그는 할머니를 보았다. 여전히 미동도 않는 할머니에게 손을 내밀려다가 말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동전을 끄집어내어 할머니의 손을 끌어당겨 내려놓았다. "망자의 몫이니 가져가세요."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안정하긴 했지만 부축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할머니는 천천히 관 앞으로 걸어가, 누웠다. 관 위에, 아니 관 속으로, 뚜껑을 열 필요는 없었다. 할머니가 사라진 자리에는 낡은 담요에서 일어난 먼지만 한 줌 떠돌고 있었다. 조슈아는 관 앞으로 다가갔다. 관에는 검은 먼지가 쌓여 있었다. 아우렐리에도 다가오더니 관 근처의 누군가에게 일어서라는 듯 손짓했다. 기척은 없었지만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조슈아는 맨 뒤에서 간을 들고 보이지 않는 자들과 함께 뒤뜰로 나갔다. 관은 예상대로 몹시 무거웠다. 뒤뜰에는 이미 묘가 있었다. 그들은 묘석 뒤에 관을 내려놓았다. 아우렐리에가 그 앞에 무릎을 꿇더니 말했다. "한잠 푹 주무세요." 조슈아는 묘석에 쓰인 글귀를 읽었다. 무척 간결했다. 웨더렌 로어티카람. '꿈 없이 잠든' 805~971 3. 노을섬의 수수께끼 "난 당신이 남겨두고 온 것을 알아 자줏빛 비단으로 싸서 두고 온 것을 알아 곡괭이로 깊이 파고 묻은 것을 알아 누구도 꺼낼 수 없기를 바라는 것을 알아 마침내 비밀이 썩어 거름이 되고 흙으로 변해 나무를 키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가 맺혔을 때 당신의 것은 아니지 열매에 녹아 있대도 당신의 탓은 아니지" "오랜만에 속 시원하게 잔 것까진 좋았지." 막시민은 주위를 휘둘러보며 첫마디를 했다. 의자 위의 관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좀 지나치게 잔 감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거야. 하지만 그동안 쌓인 잠빚이 무척 많았거든, 모름지기 사람이라면 하루에 열 시간 이상 정도는 자야 남은 시간을 쾌적하고 유용하게 보낼 수 있기 마련인데 어느 날은 일곱 시간, 어느 날은 다섯 시간, 또 어느 날은 세 시간, 이따위 날들이 계속됐다고, 이게 다 누구 탓인가는 둘째 치고, 난 차근차근 모아 두었지. 일곱 시간 잔 날은 세 시간, 다섯 시간 잔 날은 다섯 시간, 세 시간 잔 날은 일곱 시간, 이렇게 열심히 모았다고. 그 결과 무려 사흘하고도 열일곱 시간 반 동안 내리 자도 된단 말이야. 난 아직 열네 시간밖에 자지 않았어. 아껴 뒀다고 생각할 수도 있자만, 무엇보다도 점잖기 때문이라고 여겨도 될 거야. 어차피 아직 점심 먹을 시간도 안 됐잖냐." 막시민은 옆 탁자에 놓인 다 식은 아침 식사를 흘끔 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렇게 점잖게 일어나서 밤샘하며 고생했을 친구 녀석을 찾으러 갔는데, 글쎄 이 녀석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잖냐? 모름지기 점잖은 친구라면 말이지. 어디에 가겠다고 쪽지라도 남겨 두든가, 사람한테 전언을 일러주든가, 그도 아니면 친구가 깨기 전에 잽싸게 집에 기어들어오든가, 셋 중 하나는 해야 되는 것 아니겠느냐고, 여기가 십 년쯤 살던 고행 동네가 아닌 이상에는, 그리고 괴상한 놈, 그러니까 괴상할 정도로 잘 쫓아오는 놈한테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처지라면 말이지! 안 그러냐!" 관객은 미안한 것처럼 뒷덜미를 긁더니 이윽고 하품을 했다. 그러다가 막시민이 째려보자 자세를 고쳤다. "그래서 이 몸께서는 차려진 아침 식사도 마다하고 그놈의 친구를 찾겠답시고 서재를 조사했는데 목격자는 물론 없고, 침입자의 흔적도 없고, 여봐란 듯 문이 활짝 열려 있고, 구두는 꺼내 신고 간 것 같고, 납치됐다면 구두를 신고 갈 일은 없을 거고, 내팽개친 서류를 가만히 살펴보니까 검토한 서류의 양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새벽 두세 시쯤 사라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어." 동시에 생각해낸 사실들이 순서도 없이 줄줄 흘러나왔다. 어쨌든 조슈아의 서류 처리량을 추측할 수 잇다는 점만으로도 다른 탐정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낸 것이긴 했다. "그렇다 쳐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는 건 아닌데, 그런 밤중에 조슈아 녀석을 꾀어서 갈 만한 녀석이 딱 하나 있다 싶더란 말이야. 그래, 딱 하나밖에 없어! 그러니 그 녀석을 찾아서 물어봐야겠는데 당최 찾을 방법이 있어야 말이지! 내가 조슈아 녀석이 아니니 부른다고 즉시 올 리도 없고, 어이, 네 의견은 어때? 없어? 젠장, 이견도 없는 주제에 가만히 좀 못 있겠냐, 이 고양이 놈아!" 그 때 관객은 의자에서 뛰어내려 의자 다리를 몇 번 긁고, 후다닥 뛰다가 양탄자에 걸려 나동그라지고, 그러다가 어느새 막시민의 발치로 와서 슬리퍼를 물로 잡아당기는 중이었다. 슬리퍼를 내줘버리고 한족 발은 의자에 올린 채로 막시민은 생각에 잠겼다. 만족한 고양이는 막시민의 추리에 흥미를 잃고 슬리퍼를 깨물어대며 구르다가 갑자기 열린 문짝 모서리에 부딪쳤다. "막군, 점심 먹어." 빠꼼 고개를 내민 조슈아와 눈이 마주쳤다. 막시민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손가락을 불쑥 내밀며 소리쳤다. "너!" 조슈아는 빙그레 웃었다. "범인은 체포됐다, 뭐 그런 거야?" "……." 막시민이 성격답지 않게 고양이를 붙들고 장광설을 늘어놓은 데도 괴로운 사정이 있었다. 켈스니티─새벽에 조슈아를 꾀어 데려갈 만한 녀석─를 불러내고 싶은데 방법은 모르겠고, 남의 눈을 생각해서 무작정 외치기도 뭣하고, 해서 가까이 있으면 나타나랍시고 떠들어댔는데 찾고 있던 당사자가 잘도 나타나 말끄러미 쳐다보는 걸 보니……. "아야!"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아 주고는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나가버렸다. 어느새 문틈으로 가서 어슬렁대던 고양이 녀석이 얼른 뒤쫓아 가는 것이 보였다. 조슈아는 처음에 고양이 관객이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슬리퍼는 한 짝만 신고 나가지?" 늦은 점심을 차려 놓은 테이블에 작고 파란 꽃이 있었다. 화병도 아닌 유리컵에 비스듬하게 꽂힌 꽃은 이런 곳에 흔히 놓이는 관상용이 아니라 들에서 막 꺾어온 듯 풋풋했고, 그리고 줄기가 짧았다. 아마 화병에 꽂지 못한 듯싶었다. "응, 그런데 돌아오려니까 두 시간이나 걸리지 뭐야." 조슈아는 잠깐밖에 자지 못한 주제에 아주 밝은 얼굴이었다. 다만 그도 사람인지라 피곤한 기색만은 역력했다. 소맷자락에는 긁혀 찢긴 자국이 있고, 재킷과 셔츠 옷깃에는 톱밥과 흙이 묻어 있었다. 바짓가랑이도 흙이 들어 있어서 걸을 때마다 떨어졌다. 흙투성이 구두만 겨우 슬리퍼로 갈아 신은 모양이었다. "캄캄해서 시간을 착각한 거 아니야?" 리체의 말에 막시민이 고개를 저었다. "캄캄한 곳을 걷고 있으면 시간이 느리게 가기 마련이라고, 같은 길을 오면서 밝을 때 더 오래 걸렸다고 느끼긴 힘들지."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막군 말이 맞아." 세 사람이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을 기세이자 곁에 서 있던 둘시아 부인이 큼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조슈아는 빙그레 웃더니 아무 것도 찍혀 있지 않은 포크를 손가락 사이로 짓궂게 핑글핑글 돌리다가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천천히 씹는 시늉을 했다. "아이고, 알았습니다. 천천히들 드세요." 감시─소공작께서 어제처럼 식사를 남기지 않는지─를 포기한 둘시아 부인이 밖으로 사라지자 조슈아는 남은 하인들에게도 나가 있으라고 손짓했다. 이쪽은 손짓 정도면 충분했다. 식당에 세 사람만 남자 조슈아는 포크를 내려놓고 두 사람을 둘러봤다. "노을섬에 가자." 막시민은 미간을 찡그렸고, 리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노을섬에 뭐가 있는데?" "거기야, 진짜 무덤이 있는 곳." 막시민의 눈썹이 약간 움직였다. 그는 답을 짐작하는 얼굴로 물었다. "누구의?" "데모닉 이카본." "어제까지만 해도 행방을 모른다더니?" "몰랐지, 그런데 막군 네가 전설 같은 걸 잘 아는 할머니하도 찾아보자고 했지 않아?" "새벽에 기어나가 동네 할머니 수소문하러 다녔냐?" "뭐, 그런 셈이 된 걸까나." 막시민과 리체, 둘 다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조슈아가 지난밤에 겪은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차츰 태도가 달라졌다. 아우렐리에의 핏줄을 설명했을 즈음 리체는 얼굴이 빨개져서 손을 홰홰 내저었다. "뭐라고? 그러니까 너네 조상하고 마법사 아나로즈 티카람 사이에 자식이 있었단 말이야? 근데 그걸 남자가 몰랐고? 아니, 그걸 모를 수가 있는 거야? 그래서 너네 집안에서도 지금껏 몰랐다 이거지? 아, 진짜 이거 이래도 되는 거야? 무책임도 정도가 있는 거라고!" "물론 나도 바람직하다고는 생각 안 하는데……." 리체는 아우렐리에와는 의견이 달라서, 아이의 존재를 밝히기 싫어한 아나로즈의 심리야 어찌됐든 이카본이 무조건 잘못했다고 생각되는 모양이었다. 리체가 곧 결론을 외쳤다. "아기를 가진 여자를 모른 체 하는 건 진자로 파렴치해!" "모른 체 한 게 아니라 진자로 몰랐다는 건데……." "다 거짓말일 게 뻔하지! 젠장,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니?" "없는 건가?" 조슈아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조슈아의 잘못은 아니지만 이 자리에서 달리 대꾸할 사람도 없었다. "없지! 바보가 아니라면, 아니 바보는커녕 대천재였다면서, 그 지경이 됐을 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짐작해야 하는 거 아니니? 아무리 미워 죽겠다고 한들 한때 사랑했던 사이인데, 몇 번을 찾아오도록 코빼기도 안 비쳤다는 얘기잖니? 하다못해 '꺼져'라고 말하고 싶어서라도 나타나기 마련인데, 왜 안 나타났겠어? 저지른 죄도 있겠다. 그쯤 되면 척하면 울 너머 호박 떨어지는 소리지!" "에, 호박은 또 뭐?" "우리 동네 말로 '뻔하다'는 뜻이야!" 말하다 보니 어느새 궁지에 몰린 조슈아는 어깨를 움츠리고 있다가 겨우 대꾸했다. "네 말이 다 맞아. 다만 개중에 그런 거 바로 짐작하지 못하는 남자들도 있는 모양이라서……." "아아, 물론 있긴 해. 눈치 없는 거야 남자들의 대표적인 특기잖니, 하지만 그렇다고 죄가 가벼워지는 건 아니지!" 리체가 조슈아를 몰아붙이는 동안 막시민은 혼자 생각에 잠겨 있다가 불쑥 말했다. "그쯤 해 둬, 이제 와서 패 잡으러 갈 수도 없잖냐." 리체가 막시민을 째려보자 조슈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몇백 년 전 조상의 일을 해명해야 하는 내 입장도 좀……." "내가 화내는 게 쓸데없는 일이다, 이 말이야? 막시민 너도?" "아니, 리체 네 말이 다 옳아 하지만 얘기를 좀더 들어보려는 것뿐이야. 우린 닥친 일을 해결해야만 하는 입장이니까." 그러더니 조슈아를 슥 봤다. "넌 어린애를 책임지지 않는 아버지에 대해서 내가 새삼 다른 견해를 갖고 있길 기대하냐?" "아, 물론……." 리체는 막시민을 흘끔 보며 수상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설명을 들을 기회는 없었다. 막시민이 말을 이었다. "거 봐, 조슈아도 알고 있다고, 그럼 계속 들어보자, 그 아우리… 뭐라는 아가씨가 너한테 원하는 게 뭔데?" 이 얘기가 이어져 할머니를 만난 것과 할머니가 해 준 말들에 이르자 리체도 놀라 크게 뜬 눈을 굴렸다. 조슈아는 데모닉답게 정확한 전달이 필요한 부분에 이르자 들은 말을 완벽하게 옮겨 주었다. 아우렐리에가 데모닉이 아닌 영매라는 사실, 그리고 멜오렌과 제노비아, 다시 말해 아나로즈의 딸과 손녀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들의 최후에 대한 이야기에 이르자 조슈아는 할머니의 말을 그대로 옮겨 주었다. "마녀는 공작을 다시 만날 수 있었지만 그녀가 만난 것은 죽은 공작이었다고 했어. 그들은 다시는 헤어지지 아니했다. 영원히 헤어지지 아니했다. 라고도 했지, 이 말을 옮기자면 아나로즈는 이카본의 시체를 보았다는 것이고, 그리고 영원히 헤어지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그가 묻힌 곳은 아나로즈의 고향이라고 생각해야겠지, 어쩌면 두 사람은 같이 묻혔을지도 몰라. 다시 말해 노을섬에서." "어떻게 된 일일까? 어째서 이카본을 노을섬에 가서 죽었을까?" 리체는 화내는 것도 잊고 눈을 깜박거렸다. 조슈아가 말했다. "딸과 손녀의 존재를 알게 되고 나서 어떻게든 그녀를 다시 만나야겠다고 생각했겠지." "혹시 죽고 나서 노을섬으로 운구된 건 아닐까?" "그건 아닐 거야, 만일 그랬다면 우리 섬 사람들이 이카본이 납골당에 묻혔다고 지금껏 믿었을 리가 없잖아? 사람들이 지금까지 속은 걸 보면 이카본은 가짜 장례식을 치르고 혼자서 은밀히 노을섬으로 갔다고 생각해. 그래서 거기서 죽은 거고." "그렇다면 왜 아나로즈와 만나지 못한 건데? 마녀가 만난 건 죽은 공작이었다면서?" "음, 내 생각엔……." 조슈아가 말을 잇기 전에 막시민이 말했다. "손녀까지 태어나도록 딸의 존재를 숨긴 걸 보면 보통 자손심이 강한 사람이 아니지, 사람은 늙고 나면 마음이 약해지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 "그 말은, 그럼 이카본이 죽음을 앞두고 한 번만이라도 만나려고 고향 사람들까지 속여 가며 온 걸 알고서도 만나주지 않았고, 끝내 그가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 조슈아도 막시민도 반박하지 않았다. 이윽고 리체는 입술을 꾹 다물며 어깨를 움츠렸다. "참, 독하긴 독해네. 상상하기 힘들어. 끝내 살아 있는 그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걸로 이겼다고 생각했을까?" "세상에는 다양한 자존심이 있어서일까." "하지만 더 무서운 건……." 리체가 무심코 쥐고 있던 포크를 테이블로 똑똑 두드렸다. 어느새 식사는 뒷전이 된지 오래였다. "'그들은 영원히 헤어지지 아니했다'는 부분이야. 생전에는 용서해주지 않았으면서, 죽은 다음에는 함께? 아, 정말이지 유령이란 게 있긴 한 모양이니까 둘이 죽은 다음에 만나 무슨 얘기를 주고받았을지 궁금해진다." 막시민이 다 식은 스튜 그릇 바닥을 긁으며 말했다. "도로 싸웠겠지, 몇십 년 동안 만나지도 못했겠다. 내가 잘했네, 네가 못했네 하면서 할 말 많을 거 아니냐. 척하면 호박이 굴러서……." "…울 너머 호박 떨어지는 소리야." 어설프게 따라해 보려다 망쳤지만 막시민은 뻔뻔스럽게 말을 이었다. "하여간 뻔하잖냐." "으음." 조슈아는 데모닉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누구에게든 선뜻 납득시키기 힘든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아직은 자신만을 위한 비밀로 남겨 둘 생각이었다. 이리하여 당장 노을섬에 갈 필요가 생긴 세 사람은 다시 머리를 맞댔다. "노을섬은 현재 무인도지?" "전에 할아버지께서 그러셨지, 여기 왔으니 사람들한테 정확히 물어봐야 되겠지만." "가는 길 정도는 여기 사람들이 알 테고, 별로 멀지 않다면 날아서 가는 것보다는 항해가 나을 지도… 아, 물론 여기 사람들하고 같이 말이야. 아르님 소공작께서 필요하다고 하자면 그 정도 도움은 받을 수 있겠지?" "뭐, 아마도긴 하지만……." "뭐가 아마도야, 틀림없다고." "그런데." 막시민이 갑자기 의자를 밀고 일어서자 둘의 눈이 뒤따라갔다. "수상쩍은 문제가 있는데." "뭔데?" "조슈아 너조차도 오늘 처음 알았잖아, 이카본의 진짜 무덤이 따로 있다는 사실 말이야. 게다가 이 섬 사람들도 아무도 몰랐던 거고." 막시민은 식탁 옆을 왔다갔다 하다가 별안간 멈춰 서며 미간을 찌푸렸다. "네 매형은 어떻게 알았을까?" 페리윙클 사람들 모두가 한 마음으로 바빴던 저녁이었다. 시작은 배 준비부터였다. 조슈아 일행이 그들이 타고 온 배로도 항해가 가능하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아무도 곧이듣지 않았으므로 선원이 스무 명이나 필요한 그럴싸한 배가 순식간에 수배되었다. 하늘을 나는 일이라면 자기네들의 이해 밖이니 어떻게 생긴 배라고 해도 수긍하겠지만, 바닷길을 갈 작정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는 거였다. 사람들은 칼라이소 뱃사람들과 의견이 완전히 일치해서 '미의 극치호'는 축제 때 앞바다에 띄우는 놀이배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식량과 물, 자재 같은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세금 장부에 흠집 내기 싫어하는 집정관이 징발─을 가장한 자발적 기증─을 선언하자 저녁때까지 해변에 쌓인 것만도 노을섬까지 다섯 번쯤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챙겨 싣고 남은 것은 2차 항해─물론 전혀 예정에 없는─에 쓰겠다고 넉살 좋게 장부에 써 놨을 정도였다. 다음은 선원이었는데 스무 명이 아니라 마흔 명쯤 탈 수 있었다면 더 좋았으리라는 것이 꽤 많은 사람들의 이구동성이었다. 아니, 탈락한 서른 명 정도는 볼멘소리로 말했다. 오래 걸리는 항해도 아니고 험로를 가는 것도 아니었기에 아르님 가문 사람과 함께 항해했다는 영광을 후대에 남기고 싶은 지원자들은 잔뜩 있었다. 심지어 선원 선정이 끝난 후에도 몇 명씩 쳐들어와 조합 문짝을 발로 차거나 하며 저녁 산책을 즐겼으므로, 해양 조합장─정확히는 해적들의 사무장─이 문 앞에 서서 고래고래 외치는 소리가 저녁 내내 해변을 울렸다. "소공작 전하께서 문짝 차는 놈들을 바다에 처넣었다가 뺐다가를 세 번쯤 반복해서 근사한 소금 절임이 되거든 밑창에 실어두라고 하셨다! 알겠냐? 다시 말하자면 배에 타고 싶거든 구석구석 잘 절여가지고 오너라. 덜 절인 놈은 소금 맛 알큰하게 더 보게 배 꽁무니에 달고 갈 테다!" 꿈에도 그런 말을 한 일이 없는 소공작 전하는 오후 7시까지 쓰러져 자다가 일어나자마자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집정관의 보고를 받았다. 배에서 각종 물자, 선장과 선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출항 준비를 마쳤다는 보고였다. 조슈아는 꿈에 시달려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에 출발할게요." 펠 집정관은 얼른 가지 않고 머뭇거리며 조슈아를 보았다. 슬슬 머리가 맑아진 조슈아도 눈치를 채고 말했다. "하실 말씀이라도?" "노을섬에는 왜 가십니까?"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조슈아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가선 안 될 이유라도?" "거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살고 있는 사람도 없고요, 살펴보실 만한 게 없을 겁니다." "사람마다 관심사가 다르기 마련이죠." "그곳 사람들이 이주해 오고서 페리윙클에 복속되긴 했지만, 그 전까지는 아니었죠. 더구나 사람들이 가지 않는지 오래된 곳입니다. 좋은 어장도 없고, 나는 자원도 없죠. 근처까지 가는 건 어렵지 않지만, 상륙하려면 까다롭습니다. 번거로운 걸음만 될 겁니다." 이쯤 되면 조슈아를 노을섬에 보내기 싫은 이유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조슈아는 눈동자를 굴렸다. "그 정도로 좋은 조건이면 다른 해적들이 소굴을 틀고 있다고 해도 놀라지 않겠는데요." "그건 심한 말씀이십니다. 무엇보다도 관리하는 저희를 불신하시는 게 아니라면…, 사람들이 자주 걸음 하는 곳은 아니지만 엄연히 아르님 공작폐하의 당인데 감히 다른 해적들이 발붙이도록 내버려뒀을 리가……." "그렇군요." 조슈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펠 집정관의 눈이 거실 맞은편으로 걸어가는 조슈아를 따라갔다. 문 앞에 멈춰 섰다가 방향을 돌려 다시 탁자 앞으로 올 때까지도. "말씀해 보세요, 노을섬에 뭐가 있죠?" 펠 집정관은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더니 말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가 보지 않았으면 하는 그게 뭐죠?" "……." 거짓말에 익숙하지 않은 집정관은 입가를 실룩이며 탁자 끝을 바라봤다. 조슈아는 빙그레 웃었다. "말씀하지 않아도 어차피 가서 보게 되죠. 출발을 취소할 생각은 전혀 없거든요. 가서 보고 놀라느니 먼저 알고 가는 편이 낫잖아요, 안 그래요?" 집정관이 드디어 결심한 듯 물었다. "전하… 아니 소공작께서는 마법에 관심이 많으십니까?" 조슈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어째서인가요? 소공작께선 축복받은 아르님이신데, 원하신다면 어떤 것이든 배우고 익힐 수 있으실 텐데요. 그것도 잠깐 만에, 아주 훌륭하게 말이죠." "네, 물론 그렇긴 한데요." 조슈아의 가문을 잘 아는 사람인지라 집정관은 그 말을 위화감 없이 받아들였다. "그런데요?" "제가 하기 싫어요." 단순명료했다. 집정관은 눈썹을 찡그렸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있긴 한데, 달갑진 않으실 얘기고요." "상관없습니다." "고맙군요, 그렇게 말해 줘서. 까닭은, 지금 보다 끔찍한 뭔가가 되기 싫어서." 그렇게 말하는 조슈아의 얼굴은 평온했다. 집정관은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뭐든 잘할 수 있다고 해서 뭐든 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뭐든 잘하게 되었다는 행복한 결과일까요?" "저 같은 사람으로서는 얼른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십니다." "어제 내가 유령 불러내는 것 봤죠?" 집정관은 거부감을 즉시 숨기지 못했다. 그래서 둘의 눈이 마주쳤을 때 집정관은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아, 그, 보아서, 네, 잘 알게 됐습니다." "마법의 힘이 없어도 난 이미 그런 일을 할 수 있어요. 마법을 배운다면 더 많은 걸 할 수 있게 되겠죠. 다른 사람이 백 걸음 가는 동안 수천 걸음을 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봐요. 그런 사람일수록 자기가 해낼 수 있는 것을 아니까 더 멀리,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까지 가고 싶어 하죠. 쉬고 싶어 하지도 않죠. 한 발짝 나아갈 때마다 전인미답의, 상상하기 힘든 세계가 펼쳐지니까, 쉬지 않고 나아가면 더 경이로운 곳에 이를 것을 아니까, 그런 생각에 중독되면 한 순간도 쉴 수 없게 되는데, 축복받았다고 말해지던 자들이 그렇게 달리고 달려서 이르렀던 곳은……." 집정관도 무의식 속에선 대답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고지식한 사람답게 상대가 입 밖에 내기 전에는 단정 짓지 않았다. 조슈아의 입술이 천천히 발음했다. 집정관이 선뜻 입 밖에 낼 수 없는 단어를. "광기." 집정관은 느린 한숨을 내쉬었다. "전 고리타분한 사람이라 소공작 같은 분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능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늘 두려웠지요, 저는… 그러니까… 아르님 가문이 언제까지나 번창하길 바라니까요." 조슈아는 생략된 말을 알아들었다. 하나뿐인 후계자가 언제든 미쳐버릴 수도 있다는 전제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가를, 이윽고 집정관이 말했다. "그런 생각을 일지감치 갖고 계셨던 겁니까?" 조슈아는 씩 웃더니 대꾸했다. "아뇨, 실은 어제 처음 했어요." "음……." 집정관은 조금 더 망설였지만 결국 입을 열었다. "노을섬은 옛날 마법사들의 섬이라고들 했습니다. 우리 섬과 사이가 안 좋았던 역사도 있지요. 그들의 마법이 한창 융성하던 시절에는 우리는 물론, 다른 어떤 세력도 감히 접근할 수 없었던 섬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마법은 약해졌고, 더 세월이 흐르자 노을섬 사람들은 페리윙클로 이주하길 바랐습니다. 놀란 우리들이 노을섬에 찾아가 보니 이미 그들에게 마법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마법을 후대에게 가르치지 않았다는 건가요?"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마법을 잃었고, 그래서 척박한 노을섬에서 살 방법마저 잃었던 것 같습니다. 누리는 그들을 받아들여 주었지만 그들은 그들끼리 살기를 원해서 결국 같은 섬 안에서도 멀고 구석진 곳을 택해 저들만의 촌락을 만들게 되었지요. 그 후로 우리는 노을섬을 잊고 지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그곳엔 아무런 자원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몇달 전 이상한 소식이 흘러들어 왔습니다. "어떤?" "노을섬은 긴 세월 우리와 교류가 거의 없었던 섬입니다. 그런 섬에 마법이 약해졌는지, 우리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마법이 강대하던 시절에 노을섬에는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무엇이죠?" "마법 폭풍입니다." 조슈아는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했다. "마법 폭풍이라면, 옛날 노을섬을 감싸고 있었던 강한 비바람을 말하는 거지요? 아무도 뚫고 들어갈 수 없었는데 한 사람이……." "에, 맞습니다. 옛날 초대 아르님 공작 폐하께서 그 폭풍을 뚫고 노을섬에 들어갔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그게 서서히 약해지더니 사라져 버렸던 겁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노을섬 사람들이 이주를 청했던 거고요, 폭풍은 노을섬 사람들의 마법과 함께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랬던 것인데……." "다시 생겼다?" "그렇습니다." 조슈아의 눈빛도 심각해졌다. 집정관은 버릇처럼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얼마나 강한지, 그러니까 예전처럼 강력한지는 아직 모릅니다. 저는 이 보고를 받고서 소식을 알려온 자들에게 철저히 함구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아직 이 일을 아는 사람은 저를 비롯해서 몇 명 되지 않습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이 일을 알리지 않는 이유를 들으시면 소공작께선 기우라고 하실지도 모르지만……." "말해 봐요, 가볍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집정관은 목소리를 낮췄다. 처음부터 낮았지만, 더욱 낮아져서 흡사 속삭임에 가까워졌다. "폭풍은 노을섬의 마력이 만드는 겁니다. 만약 노을섬의 마법이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면 그건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우리와 대적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곳에 정착한 노을섬 사람들은 우리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고 여전히 배타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사실을 알고 노을섬으로 돌아가려 할지도 모릅니다." 조슈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는데, 노을섬의 마법이란 건 대륙의 마법과는 사용하는 힘이랄까, 그런 게 다른가요? 대륙에는 여전히 마법사들이 있지 않나요? 어째서 노을섬 사람들만 섬의 환경에 따라 마법을 잃기도 하고, 또다시 얻기도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저도 그런 것까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노을섬 사람들의 마력이 옛날 강대했을 때는 대륙의 마법사들도 당할 수 없었고, 약해지고 사라졌을 때는 분명 흔적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마법이 남아 있었다면 자존심 강한 노을섬 사람들이 페리윙클로 옮겨오려 했을 리가 없으니까요. 그들은 지금도 페리윙클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이곳에 살면서 더 싫어하게 됐는지도 모릅니다. 그건 누리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그들이 전처럼 강한 마법을 갖게 되면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숨길 순 없잖아요? 바닷길은 누구나 갈 수 있는데." "노을섬 사람들은 우리 섬으로 온 후로 오히려 노을섬에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더군요. 그들도 섬 출신이지만 그들의 항해술을 참 보잘것 없었습니다. 이제는 바다에도 거의 나가지 않는 것 같고 하니 그들이 일부러 접근할 일은 없을 겁니다. 문제는 우리 섬 사람들인데, 결국 제가 알게 된 것도 우리 섬 사람들이 우연히 표류해 갔다가 가져온 정보 탓이니 앞으로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요. 하지만 아직은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아 숨기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조슈아는 몸을 바로 세우며 물었다. "아버지께 보고하셨나요?" "이곳에서 실정 보고서는 세금과 함께 한 해에 한 번 건너갑니다. 아직 그 때가 되지 않은지라……." "그렇게 위험하다고 생각하면서 즉시 보고하지 않는 건 이해가 안 되는데요." 대꾸하면서 조슈아는 문득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눈을 내리깔았다. "오늘 나를 말리려고 한건 노을섬으로 갔다가 배가 폭풍에 휘말릴까봐서, 그런 간단한 이유가 아니군요. 내게 마법에 관심이 있느냐고 물은 것도 그 까닭인가요? 그곳의 알 수 없는 마력이 내게 나쁜 영향을 끼칠까봐서? 아니, 나는 물론이고 아버지조차도 그곳의 마력을 이용하려 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그건가요? 만일 숨길 수만 있다면 영영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집정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슈아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 일이 있다니 노을섬에 가 볼 이유가 한 가지 더 늘었군요. 아버지께서도 모르시는 일이라니 더더욱, 그리고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난 마법에는 관심이 없고, 내 정신은 집정관님 생각만큼 연약하지 않습니다." 부정하듯 말하면서도 조슈아의 가슴 속에는 한 줄기 의혹이 일었다. 아우렐리에는 자기 집안의 '아르님 핏줄'에서 데모닉은 태어나지 않았고 백치나 광인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까닭이 노을섬에 넘치는 마력이 그들의 정신적 변화를 촉진시켜서 태어나기도 전에 손상되어버리는 거라고 했다. 아우렐리에의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지만, 그녀는 어쨌든 노을섬 사람의 후손이었다. 옳은 의견을 가졌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집정관님은 옛날 전설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섬 사람들의 과거사나, 근원이라든가, 그런 것들." 집정관은 딱딱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없습니다." "우리 섬의 근원을 아시나요?" "대륙에서 건너왔겠지요, 아니라면 그들과 같은 말을 쓰고 잇을 리가 없으니까요." 켈스니티가 해준 이야기를 이 사람에게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조슈아는 일단 이야기를 그쳤다. 어지 됐든 노을섬에 가보겠다는 의사는 확실히 전달했으므로, 그를 더 말릴 근거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의 머릿속은 다른 문제들로 혼란스러웠다. 노을섬 사람들은 가나폴리의 마법을 이어받았을 것이다. 그런 마법이 사라졌는데 대륙의 마법은 그대로라면, 대륙의 마법은 가나폴리와 관계가 없단 말인가? 노을섬에 돌아왔다는 마력은 과연 데모닉의 정신에 영향을 주는 것일까? 또 이제 와서 마력이 돌아온 까닭은 무엇일까? 만일 아우렐리에의 주장이 맞다면, 멀리 켈티카에서 태어난 이브노아는 어째서 백치가 되어버렸던 것일까? 4. 아름다운 손님 "천 년 동안 누구도 두드리지 않을 줄 알았던 문이 오늘 아침부터 울리고 있다. 처음에는 약하게 이윽고 온 집안에 처지도록, 열러달라고 내가 들러가겠다고 내가 왔다고 기다렸기에 이렇게 왔다고 두 귀를 막았지만 소용없었네." 이튿날 아침 페리윙클 해안에 부서진 햇빛보다 한결 부드러운 빛이 비취반지 성으로 들어가는 긴 가로수 길을 비췄다. 열 시 정도면 배를 띄우기에는 더없이 적당하지만, 남의 집에 방문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각이다. 그런데 가로수 길을 달리는 마차가 있었다. 마차는 모두 세 대였다. 그 중 첫 번째 마차는 지붕의 네 테두리에 각각 다른 모습의 기사를 나타낸 모양의 황금 조각이 붙어 있고, 문에는 보라색 붓꽃을 새긴 창날 모양의 문장이 박혀 있었다. 국왕의 마차와 마주치기 전에는 어떤 길에서도 먼저 길을 비킬 필요가 없는 위엄의 표시다. 마차 안에 탄 사람이 누구이든 관계없었다. 심지어 빈 마차라 해도 상관없었다. 붓꽃과 창날의 문장은 매우 뚜렷한 권위였다. 손에 잡힐 듯 가까워서 사람이 그 자리에 없어도 충분했다. 오늘 마차 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마차가 성문 앞에 멈췄다. 입구에는 열 명의 시종과 주인의 육촌인 레 몰 백작부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뒤따르던 마차에서 성장한 시종이 뛰어내려 앞선 마차의 문을 열자 열 네댓 가량 된 소녀가 내렸다. 여행용 청색 보닛에 가려져 조그마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연약한 턱선과 이런 여름에 간직하기 힘든 하얀 목만이 두드러졌다. 소녀는 이름 볕이 따끈하게 데워 놓은 흰 계단을 올라서서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마차로 십여 분이나 걸린 긴 진입로에 둥근 나무들이 줄지어 또렷한 그림자를 드리운 것이 보였다. 동쪽에는 양탄자처럼 규칙적인 무늬를 그리도록 다듬은 생 울타리 정원이 있었다. 울타리 틈마다 자줏빛 피튜니아와 흰 팬지, 붉은 베고니아가 듬뿍 피어나 교묘한 배색을 이루었다. 기하학적인 도형과 십자, 문자들을 그리도록 가구어진 기하학 정원은 비취반지 성의 자랑이기도 했다. 소녀는 맞이하러 나온 시종장을 올려다보며 첫 마디를 뗐다. "이따 점심 식탁에 저 꽃을 좀 올려 줘요." 처음 방문한 성의 손님으로서 다소 도발적인 요구였으나, 그대로 진행될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소녀는 바로 돌아서서 성 안으로 들어갔다. 소녀가 데려온 시종 여섯 명과 환영을 위해 나온 성의 시종들이 소녀의 뒤를 따랐다. 서너 명은 마차에 남아 부지런히 짐을 내렸다. 소녀가 기분에 따라 골라 입을 스무 벌이나 되는 드레스, 가운과 파니에(panier)와 스타킹과 속옷들, 레이스와 리본들, 담비 털 숄과 산호를 박은 빗, 진주 분과 장미 기름과 백단 향수, 십여 켤레의 구두, 모자 상자 일곱 개, 벨벳 안감을 댄 보석함과 장신구함, 소녀가 즐기는 간식인 꿀을 바른 아몬드, 책과 악기, 자수를 놓던 블, 시종들의 짐, 그리고 주인을 위해 영지에서 준비한 커다란 선물 꾸러미들이 속속 내려졌다. 소녀는 여주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열릴 오늘 연회의 첫 손님이었다. 소녀의 도착을 시작으로 특별히 선정된 스물네 집안의 손님들이 오늘 비취반지 성에 들어올 예정이었다. "올해는 정말 이상해, 드레스를 입을 일이 두 번이나 생기다니." 제멋대로 잘랐던 짤막한 머리끝은 컬을 감아 필사적으로 부풀리고, 작은 수정과 금록석을 엮은 티아라(tiara)에 달린 물방울 에메랄드를 이마에 늘어뜨려 꼬마처럼 보이는 것만은 겨우 면했다. 주름을 많이 잡아 우아한 맛이 나는 라임색 시폰 드레스와 은사로 짠 장미 코사지까지,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살리려 애쓴 흔적이 역력했지만 여전히 귀여운 꼬마 숙녀 같은 이엔, 아니 이엔나는 심지어 사내애처럼 팔짱을 낀 채였다. 그녀는 맞은편에 앉은 친구의 차림을 흘끔 보더니 다시 불평했다. "너 같은 옷이라면 파티도 나쁘지 않았을 거야." 빛을 받아야 드러나는 상앗빛 꽃 자수가 들어간 흰 재킷은 튜닉을 변형한 듯 약간 길었는데, 아코디언 주름에 레이스까지 단 우아한 옷이었다. 그 위에 끈으로 된 보타이(bow tie)를 솜씨 있게 맨 것까지, 란지에는 평소 그런 옷을 입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이엔은 란지에의 그런 모습을 서너 번 정도 보았지만 그때마다 이 친구가 귀족 출신이 아니라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중얼거리곤 했다. 게다가 어찌된 셈인지 몸놀림이나 예법조차 흠잡을 곳이 없었다. 모두 저절로 익히기 힘든 것들인지라 몇 번인가 꼬치고치 캐물어 봤지만 성과는 없었다. 물론 이엔은 란지에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어느 정도 알소 있었다. 그러나 진자 귀족들보다도 완벽한 예법을 배워야 했던 까닭까지는 알지 못했다. 이윽고 란지에가 빙그레 웃었다. "불편하겠지만 조금만 참아 줘." "아아, 물론. 얼마나 중용한 일인지 알고 있으니 오늘 하루는 우아한 상류 사회의 아가씨가 되어보도록 하죠. 공화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그까짓 일쯤이야." 과장된 어조로 말하고 있지만 내용만은 진심이기도 했다. 그런데 란지에가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할 수는 있는 거고?" 마차 구석에 비스듬히 기대어 다리를 고고 팔장까지 낀 이엔의 태도는 사내애가 여장을 했다고 믿어도 좋을 정도였다. 드레스 자락이 벌어져 종아리까지 보일 정도인데 신경 쓰지도 않았다. 우아한 아마란스 백작 부인이 보았더라면 경기를 일으킬 자세지만, 사실 이엔의 다리는 볼품이 없다 싶을 정돌ㄹ 가느다래서 남자들이 신경 쓰고 바라볼 만한 매력은 없었다. 친구도 일부러 시선을 주는 일은 없었다. 아니, 이엔은 당연하게 여겼다. 앞에 앉은 사람은 '자신과 똑같은 남자' 이니까. 친구가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돌렸음을 눈치 챈 이엔은 짓궂게 턱을 쳐들었다. "오, 너만큼은 아니라고 자신 있데 말할 수 있어." "농담 마, 이엔." "왜 농담이겠어. 누구든 오늘 너를 보면 수백 년 묵은 귀족 가문의 외동아들인 줄 알걸." "그런 기대는 네 친구로 지낸다는 말을 들으면 깨어지지." 특별한 사람들만 초대받는 연회였다. 켈티카에서 자리 잡고 귀족 이름을 내건 자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들 모두는 아니라 해도, 상당수가 초대받는 연회도 곧잘 열리곤 했다. 손님이 많이 올수록 보기 좋다고 생각하는 가문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만이 갈 수 있는 조촐한 모임이었다. 비취반지 성의 여주인인 아르님 공작부인의 생일이니 어제 새로 생긴 귀족들까지 모조리 불러 세를 과시해도 상관없었을 자리였다. 그러나 아르님 공작부인은 건강이 좋지 않았다. 최근 그런 것이 아니라 소공작이 태어나기 전부터다. 죽을 날자 세던 시절을 거쳐 지금처럼 겉보기에 평온한 모습이 되었지만 여전히 병약했다. 사람이 많은 연회에 나오는 일은 한 해에 서너 번도 되지 않았다. 평소에는 다른 귀부인들과 다름없는 생활을 했지만 과도한 긴장이나 흥분은 피해야 한다고 했다. 그랬기에 오늘 초대받은 사람들은 두말할 것 없이 켈티카 사회의 실세들이었다. 작은 연회일수록 초대받았느냐 아니냐가 가문의 급을 정해버릴 수도 있었다. 더구나 국왕과 다른 성을 가진 두 공작 중 하나였다. 초대장은 닥 스물네 통만 발송되었다고 했다. 누구나 오는 연회였다면 란지에도 적당히 다른 귀족의 신분을 빌려 들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처럼 서로의 가문에 아들이 몇인지, 딸이 몇인지, 그들이 몇 살이며 누구와 결혼했는지도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일 때는 그럴 수 없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귀족 집안의 자제들이 흔히 거느리는 샤프롱(chaperon)으로 행세할 작정이었다. 물론 란지에의 나이는 샤프롱에 어울리지 않았지만 자식들의 말상대를 할 또래 고용인을 두는 집안도 흔했기 때문에 그 중간쯤으로 설명하면 안 될 것도 없었다. 그렇다 해도 이런 모임에 모습을 드러내면 일정 정도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에 와야 할 이유는 분명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소공작 조슈아 폰 아르님이다. 물론 그 까닭만은 아니었다. 아르님 공작이 어떤 사람인지 직접 보아두는 것도 중요했다. 집안의 분위기를 느끼고 테오의 계략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지 파악하는 것도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만이라면 조금 위험할 수 있는 이런 연회가 아니라 해도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있었다. 다만 이 방법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소공작이었다. 성에서 은둔하다시피 하고 있고, 방문하는 사람도 없어서 갑자기 찾아가면 눈에 띄게 될 것이 너무 분명한 상대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생일이라면 분명히 나올 것이고, 손님을 접대해야 할 책임도 있었다. 규모가 작다 해도 연회인 이상 적어도 수십 명은 되는 사람들이 그들의 만남을 가려줄 것이다. 이엔은 귀고리 때문에 무거워진 귓볼을 귀찮은 듯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말했다. "그런데 놀랍지? 아르님 공작가에서 모로 씨의 입장일한 거 말이야. 공작부인의 생일이잖아, 하나뿐인 사위고, 그런데 오늘 같은 날 다른 곳에 보내버리다니." 아르님 공작가에 방문할 작정을 하고서 두 사람은 먼저 테오와 연락을 취해 보려 했다. 그러나 테오는 아르님 공작의 명령으로 다른 날도 아닌 바로 어제 공작의 고모인 페어블랑드 백작부인의 장원으로 떠났다고 했다. 표면적으로는 공교롭게도 생일이 하루 차이라는 백작을 방문하러 떠났다지만, 그런 인사라면 며칠 뒤에 가보아도 될 일이었다. 하필 사람들을 불러 연회를 하기로 해 놓고 멀리 보낸 것은, 일부러 그랬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공작이 모로를 의심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지." "죽은 딸의 일로?" "그 때 모로를 의심한 사람은 공작만이 아니었지. 아직도 소문이 완전히 사그라지진 않았고." "단지 부당한 취급을 하는 건 아니고?" "이번처럼 해버리면 다른 사람들까지도 공작이 사위를 좋아하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배제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되겠지. 사교계의 사람들에게 사위를 무시하라고 메세지를 보낸 것과 같아. 어떻게 해버릴 작정인지는 좀더 지켜봐야 알겠지." "에, 일전에 약속했던 대로 모로에게 작위를 주려면 고충이 많을지도." "추진하고는 있지만 결정하기 전에 그의 정체를 정확히 알게 되길 바라고 있어." "그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에 왔고, 그렇지?" 이엔이 싱긋 웃자 란지에는 마주 웃는 대신 말했다. "너라면 드레스 차림을 무릅쓰고, 라고 할 것 같지만." 나이트워커(Nightwalker)로부터 두 번에 걸친 보고를 받은 결과, 지스카르에게도 말했듯 소공작에게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둘 다 알고 있었다. 현재 이 대륙에 조슈아 폰 아르님이 두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양족 모두 주위 사람들에게 의심조차 받지 않았다는 점도, 비취반지 성의 소공작에게는 부모를 비롯해서 어려서부터 소공작을 보아 온 사람들이, 하이아칸의 소공작에게는 그만이 해낼 수 있는 무대가 있었다. 양쪽 다 완벽히 속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란지에와 이엔은 이 문제를 놓고 숙의를 거듭했다. 숨겨진 쌍둥이 같은 것이라 해도 친부모를 속일 수는 없으며, 똑같은 재능을 가질 가능성이 낮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더구나 소공작은 아르님 가문에서 세 대나 네 대에 한 번 태어난다는 데모닉이라. 세상에서 가장 흉내 내기 힘든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느 쪽이 진자든 어차피 희생자일 뿐이니 테오스티드 다 모로에게 맡겨두고 무시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석연치 않은 마법. 지스카르가 '도플갱어'라고까지 말했던 마법의 존재는 불길한 느낌을 주었다. 누가 진자인가 하는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의 주체가 테오라면 가짜는 성에 있는 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란지에도 막시민과 같은 추론을 거친 결과 애써 만든 가짜를 세상에 내던져 멋대로 돌아다니게 하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다고 보았다. 그러나 확증이 없었다. 소공작의 존재는 테오의 행동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였다. 테오와 한 협상은 어렵고도 중대한 계획이었다. 실현된다면 크게 유리하지만, 실패할 경우 위험도 컸다. 이 계획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인가 판단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테오의 의도였다. 그리고 테오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 열쇠는 소공작이었다. 테오가 가짜 소공작으로 어떤 일을 하려 하는지 알아낼 수 있다면 테오가 끝가지 공화파에 협력할 것인지, 중도에 배신할 것인지, 만일 배신한다면 어떤 시점일 것인지, 짐작할 가능성도 넓어진다. 테오는 소공작을 파멸시키고 나서 아르님 가문을 손에 넣은 뒤 공화파와 미련 없이 손을 끊을 것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야망이 있어서 좀 더 오래 제휴할 것인가? 또는 공화파의 조직을 알아내어 왕국8군에 보고하고 공을 세우려 할 인물인가? 미워하는 상대가 파멸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소악당인가? 그러기 위해선 비취반지 성의 소공작이 과연 가자인지 알아보는 것이 가장 먼저였다. 그 다음에 가짜의 정체와 그에게 작용하는 힘의 근원을, 그리고 테오가 가짜를 데리고 무엇을 획책하는지를 알아내어야 했다. "폰티나 공작 영애가 아침 일직 와 있다던데." 하인들의 입은 때로 나이트워커보다 빠를 때가 있었다. 란지에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엔이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못 오게 됐으니까, 승마를 하다가 발목을 다쳤다더군, 다른 곳도 아닌 아르님 가문의 초대이니 부인을 대신하려면 딸 정도는 보내는 것이 상례겠지만, 그 달이 혼자 켈티카에 온 것은 처음이라고 동안(東岸)에서는 수군수군 한다더군." 켈티카를 가로지르는 블루엣 강의 동남안에는 귀족들의 저택이 몰려 있었다. 동안의소문이라고 하면 보통 사교계에 떠도는 이야기를 가리켰다. 란지에는 담담하게 말했다. "살펴보기에 나쁜 기회는 아니겠지." "가치는 있어. 폰티나 공작이 귀애하는 따님이란 말씀이야. 단지 귀여워 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후계자 교육을 시킨다던데, 성인이 된 아들도 있고한데 좀 뜻밖이지. 폰티나가 달이 귀엽다고 앞뒤 재어보지도 않고 그런 일을 할 사람도 아니고." "안리체 아노마라드의 예도 있지." 안리체 왕비는 폰티나 양의 고모가 된다. 지략가에 여걸로 유명한 안리체 왕비를 닮았다면, 그리고 정치 감각이 탁월한 폰티나 공작이 후계자로까지 고려한다면 장기적으로 주목할 가치가 있었다. 그렇게 보면 무척 소재가 많은 연회인 셈이었다. "그보다 로즈니스 다 벨노어도 올 것 같다던데, 괜찮을까?" 란지에가 한때 벨노어 가문에서 시종 노릇을 했던 것을 아는 이엔의 물음이었다. 란지에가 미소지었다. "아마도 조금 늦을 거야." "손을 쓴 거야?" "마주친다면 그냥 지나가기 힘들거든." "오기 전에 일지감치 사라지려고?" "그 전에 볼일을 다 보려면 서둘러야겠지만." 이엔은 키득 웃었지만 곧 입맛을 다시며 티아라의 보석이 닿은 이마를 문질렀다. "귀 바짝 기울이고 있어야겠네, 벨노어 양이 하필 켈티카에 머무르고 있으니 초대에서 빠뜨릴 수도 없었을 테고, 백작 본인이 오는 것보다는 그나마 나은 셈이 될까나." 마차가 입구에 다다라 한 차례 덜컹대고는 멈췄다. 이엔은 맞게 한숨을 내쉬더니 드레스 자락을 내리고 옷매무새를 고쳤다. 시종이 마차 문을 열자 란지에가 먼저 내려 이엔의 손을 잡고 내리도록 도와주었다. 이엔은 마차 안에서의 태도와는 달리 치렁한 치맛자락을 밟거나 하는 일 없이 능숙하게 내려섰다. 이윽고 두 사람도 성 안으로 사라졌다. 아르님 가문은 가문이 세에 비해 사교계에서 쌓은 명성은 그리 없는 편이었다. 우선 그런 교류의 중심이 되어야 할 공작부인의 몸이 약하다보니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고, 공작 본인은 파티를 즐기지 않는 무인풍의 인물인데다, 하나뿐이던 딸은 남들에게 내보이기 힘든 몸이었고, 지금은 죽었다. 남은 사람은 아들뿐인데 시골이니 섬이니 하는 곳으로 떠도느라 공화국 시절을 제외한다면 켈티카에 머문 시기 자체가 너무 짧았다. 켈티카 사교계의 인물들이 조슈아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은 이브노아가 죽었던 연회였다. 그날 이후 일 년 동안 아르님 공작은 히스 노인의 충고대로 파티나 무도회를 일체 열지 않았고. 그 사이 조슈아는 하이아칸으로 떠나버렸다. 이런 식이다 보니 저절로 소문만 무성해졌다. 이엔이 들었던 소문처럼 솔직한 평을 한 사람은 극소수였고, 보통은 헛소문을 부풀려 말하길 좋아했다. 소공작은 천재다보니 보통 사람은 안중에 없다더라, 무례하다더라, 정신도 약간 이상한 것 같다더라. 멀쩡한 것처럼 보여도 갑자기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더라, 미친 사람 같아서 무섭다더라, 이미 정신을 놨는데 아버지가 숨기고 있다더라, 건강이 악화되어서 곧 죽을지도 모른다더라, 누나처럼 백치가 되어가고 있다더라. 일부는 누군가가 일부터 퍼뜨린 악소문이라고 해도 좋을 지경이었지만 소문이 많은 만큼 곧이듣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실제가 궁금하긴 했기 때문에 오랜만에 비취반지 성에 온 사람들은 소공작의 등장에 큰 흥미를 가졌다. 폰티나 공작가가 주로 이방 영지에 머무르는 것을 생각하면 본래 켈티카 사교계의 왕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집안이었다. 그런 가문의 젊은 소공작이 어떤 사람일지 알아두고 싶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혼인을 거론할 상대로는 조금 문제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라 해도 말이다. 오늘 연회장에는 하얀 피아노가 나와 있었다. 어려서 음악적 재능으로 먼저 알려졌던 소공작이었으니 오늘은 연주가 한 곡 있는 모양이라고 다들 생각했다. 아름다운 연주로 소문도 잠재울 겸, 사람들의 호감도 얻을 겸 말이다. 대화보다는 그 쪽이 나은 방식일지도 모른다. 소공작은 대화로 호감을 얻은 일이 거의 없으니 말이다. 이엔은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피식 웃었다. 소공작을 직접 보지 못한 자신이 들어도 사실이 아닐게 뻔한 이야기가 다수였기 때문이었다. 입을 가릴 부채란 물건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오랫동안 사내아이처럼 지내 온 이엔의 표정은 파격적으로 솔직한 감이 있었다. 다들 그림 같은 표정만 짓고 있는 귀족 아가씨들 사이에 있다 보면 눈을 마주친 사람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저, 실례합니다만 혹시 아마란스 양이신가요?" 갑자기 아는 체 하는 사람이 있어서 흠칫 놀랐다. 돌아보니 스물 서넛 정도 되었겠다 싶은 키가 큰 숙녀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미소를 보냈다. 이엔은 이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적당히 얼버무릴 수도 있었겠지만, 평소의 태도를 반쯤 섞어서 대답했다. "이렇게 고상하고 우아하신 숙녀께서 어느 가문의 분이신지 전 어째서 생각나지 않을까요? 저의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아아." 숙녀는 입을 가리지도 않고 웃더니 버릇처럼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사과하지 마세요. 직접 인사할 일이 없는 사이니 제가 무례를 범한 게 됩니다. 아마란스 양의 아름다운 티아라를 보고 알아보았을 뿐이에요. 예전에 아마란스 백작부인께서 그 티아라를 착용하신 걸 본 일이 있답니다. 백작부인께서도 멋지셨지만, 따님에게도 참으로 잘 어울리네요. 가문의 보석이란 이래서 좋은 것이죠." "어머니를 아시는 분을 뵙게 되어 기쁘네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약간 긴장했다. 어머니가 이전에 실비엣 드 아르장송이라는 아가씨한테 그랬던 것처럼 넋두리를 늘어놓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그 아가씨도 끈질기게 학원으로 찾아오려고 해서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소개를 안 했군요. 전 마리나 다 카스텔로라고 해요. 이 자리엔 폰티나 영애와 함께 왔지요. 영애께서 혼자 켈티카까지 오시는 것이 처음이라서 공작부인의 각별한 부탁을 받았답니다. 그 덕택에 아마란스 영애를 뵙는 영광을 얻었네요." 그렇게 말하고서 정중하게 절을 했다. 이엔의 기억으로 카스텔로 남작이라면 폰티나 공작의 충실한 가신 집안 중 하나였다. 사실 그 이상의 것을 몰랐지만 이엔은 일단 인사를 받아들였다. 백작 영애의 지위에 맞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카스텔로 부인은 곧 곁에 있는 란지에에게 시선을 보냈다. 이엔이 먼저 소개했다. "이쪽은 제 샤프롱이에요." "카를 리히스입니다." 이번엔 카스텔로 부인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보였다. "이름을 들으니 중부 출신인가 싶네요." "고향은 하이아칸입니다." "아, 하긴 하이아칸 사람들의 이름이 동부식과 좀 비슷하죠, 발음 좀 길게 끌던가? 칼이 아니라 카를?" 혼자 중얼거리던 카스텔로 부인이 잠시 후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아는 누군가를 닮은 것 같은데… 또렷하게 생각이 안 나네요. 딱 집어 말할 수 없어요. 누구였더라." 란지에는 기계적인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귀부인의 지인을 닮았다니 영광입니다." 이엔은 란지에의 목소리가 냉담해진 것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그러나 친구인 이엔이나 눈치 챌 만한 변화였으므로 카스텔로 부인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 "후훗, 내가 기억하는 사람이 악당일지도 모르잖아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평소 같으면 적당히 말을 더할 터인데 란지에의 말은 거기서 끊어졌다. 이엔은 화제를 바꿀 필요를 느꼈다. "그런데 혼자시네요. 카스텔로 부인? 각별한 부탁을 받으신 폰티나 양은 어디로 가셨을까요?" "곧 나오실 거예요. 사실 폰티나 영애께선 누군가가 그림자처럼 따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세요. 마침 잘 되었네요. 뵙기 힘든 분을 제가 먼저 뵈었으니 조금 있다가 영애께서 오시면 한쪽에서 즐거운 담소라도 나누시겠어요? 영애께서도 아마란스 양이 오신 것을 아시면 반드시 인사하고 싶어하시겠지요." 예의상 한 말일까? 뜻밖에 일이 편하게 풀려 의아해진 이엔은 약간 머뭇거렸다. "아, 네, 저도 같은 생각이네요." "그럼 잠시 후 아르님 공작부인께 생신 축하 인사를 드리고 나서 저쪽 두번째 테라스에서 뵈요. 아, 영애께서 나오시는 모양이네요. 이따 뵐 때까지 잠시 실례." 그 말을 남기고서 카스텔로 부인은 총총히 자리를 떴다. 이엔은 입술을 빼물려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된 거야? 저쪽에서 기다렸다는 것 같은 반응이네?" 란지에도 약간 긴장한 얼굴이었다. "카스텔로 부인이 뭔가 아는 것 같진 않아." "내 생각도 그래. 그래서 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지 못하겠어." 이엔은 그쪽에서 자신들의 정체를 눈치 챘다는 상상만은 차마 하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조금이라도 의심하고 있다는 상상도, 하지만 상대가 폰티나 공작인 이상 불가능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이트워크 조직에서도 실체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다중 정보망을 쥐고 있는 폰티나 공작이다. 란지에는 어느새 침착해졌다. 다만 연회장 쪽을 바라보며 드나드는 사람들을 일일이 주시했다. 그들 중에 암시가 숨어있으리라고 믿는 것처럼. 5. 입, 손, 그리고 귀 "노래는 먼 곳에서 시작됐네, 하루에 조금씩 다가왔네, 오는 동안 쉬지 않고 노래했네, 내 노래 쉬는 순간 행여 그대 노래 멈출까, 검은 사람과 흰 사람의 집을 거치고, 검은 강과 흰 강을 건너서 왔네, 마침내 우리가 약속한 땅에서 나는 그대 노랫소리를 들었네, 마주선 우리는 둘 다 노래하고 있었네, 같은 노래를, 같이 시작했던, 행복에 겨워서. 그런데 우리는 다른 소절을 노래하고 있었네." 서쪽 테라스는 볕이 잘 드는 남쪽 테라스에 비해 소박했지만 고상했다. 새로 짓는 저택들이 다투어 꾸미는 화려한 테라스는 아니었다. 그러나 몇백 년을 버틴 유서 깊은 성이었다. 아르님 공작가는 성을 유행에 맞게 치장하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진짜 고풍스러움이 살아 있는 몇 안 되는 성을 보존하고 있다고들 했다. 그나마 이쪽 테라스는 성이 세워진 후로 거의 고치지 않았다는 느낌이었다. 난간은 단순한 덩굴 모양일 뿐이고, 테이블은 무늬 없는 녹색 대리석이었지만 그 외의 장식은 없었다. 테이블을 둘러싸고 흰 의자가 다섯 개 놓여 있었다. 등나무 껍질을 벗겨서 짠 담황색 등받이가 서늘해 보였다. 연회장으로 나가는 덧문이 열려 있었다. 여름이라 연회장에도 시원한 바람이 필요했다. 아직 폰티나 양은 오지 않았다. 이엔은 먼발치에서 테라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먼저 가서 기다릴 필요는 없겠지." 아마란스 백작가는 폰티나 공작에게 일부러 저자세를 보일 필요가 없는 집안이었다. 저쪽에서 먼저 약속을 잡았으니, 저쪽이 먼저 와서 기다리는 편이 경우에 맞았다. 이엔은 란지에를 돌아봤다. "뭐 떠오르는 거라도 있어?" "아니." 란지에는 이곳에 드나들만한 귀족들의 얼굴을 대부분 다 알았다. 그래서 낯선 얼굴이 없다고 판단했다. 폰티나 공작이 아직 소녀인 딸에게 어려운 일을 시키려고 했다면 조언자 없이 보내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즈음 카스텔로 부인이 먼저 테라스로 나가 마실 것 등을 마련해 놓는 모습이 비쳤다. 폰티나 양이 부인의 안내를 받으며 테라스로 향하자 이엔이 말했다. "카스텔로 부인이 함께 잇을 모양인데." 그렇다면 심각한 이야기가 아닐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윽고 두 사람도 뒤따르다시피 테라스로 들어섰다. 클로에 다 폰티나는 귀족들 사이에서 가장 아름답고, 높은 교양을 갖추었고, 그래서 가장 완벽한 신붓감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소녀였다. 옷차림, 몸가짐, 말씨, 예절, 어디서든 한 치의 틈도 찾을 수 없어서 어쩐지 인간 같지 않다는 평이 있을 정도다. 가문의 후광은 굳이 말할 것도 없었다. 왕가에는 아직 공주가 없었으므로 왕자의 외사촌인 클로에는 어디에 가나 공주나 다름없는 대접을 받았다. 안리체 왕비가 딸처럼 귀애한다는 것도 다들 잘 알고 있었다. 의자에 여유 있게 기대어 앉은 클로에는 상앗빛 데콜테(decollete) 슈미즈 가운 차림이었다. 멀리 살면서도 수도의 최첨단 유행을 잘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제비꽃 레이스 목선 위로 드러낸 목과 어깨가 나이보다 성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짤막한 퍼프소매 아래에 하늘거리는 긴 소매를 달았는데, 반투명한 모슬린 안으로 하얀 팔목과 아쿠아마린 팔찌가 희미하게 비쳐 보였다. 소맷자락이 테라스로 들어오는 바람을 받아 천천히 나부꼈다. 이엔은 클로에를 두 번 정도 만나보았다. 그나마 어렸을 때라 별다른 이야기는 나눠보지 못했다. 이엔이 자라 파티에 발길을 끊으면서 클로에를 만나볼 기회도 더 이상 없었다. 클로에가 이엔을 아마란스 백작 따님 정도로가 아니라 아는 사람으로 기억한다면 그거야말로 놀라만한 일이었다. 클로에의 첫마디는 이러했다. "이엔나 카틀레야, 오랜만이야, 여전히 초록색을 좋아하는구나, 옛날 네가 빌려 준 초록색 나비 날개 핀이 아직도 내 장신구함에 들어 있어." 빌려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이엔은 당혹감을 감추느라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래? 얼마 만에 보는 것인지 모르겠다. 클로에, 5년 정도는 된 것 같지?" "알바네제 경 결혼식 때였지. 그 후로 너를 만날 기회가 없었어, 그래서 핀도 돌려주지 못했고, 네 머리빛깔과 티아라의 에메랄드가 잘 어울리는구나. 그동안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어.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야." 이어 클로에는 예의바른 아가씨답게 일행에게도 시선을 주었다. 란지에는 평온함을 가장하며 클로에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엔은 그 눈 디에 많은 생각이 숨겨져 있음을 느꼈다. 클로에가 말했다. "처음 뵙는 분이군요." 곁에서 카스텔로 부인이 끼어들었다. "그쪽 분은 아마란스 양의 샤프롱이라고 하시네요." 존칭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원한다면 반말로 대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클로에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올리며 답했다. "샤프롱치고는 젊으시군요." 란지에도 그림 같은 미소로 답했다. "저를 믿어 주시는 영애와 백작께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그리고 둘의 눈이 마주쳤다. 조금 긴 눈 맞춤이었다. 맥박이 약간 빨라졌다. 소리를 들은 듯했다. 서로의 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테라스에게 심장이 있기라도 한 것일까. 클로에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정원에 잠시 눈길을 주었다. 고집스럽게 모양을 낸 똑같은 나무들이 평정심을 가져다주었다. "왔다는 얘길 듣고서 인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따로 만나자고 해서 잔뜩 기대했지 뭐야. 새로운 이야기라도 있는 거야? 혹시 핀을 돌려주려고?" 이엔이 농담조로 말하자 클로에가 고개를 수그리며 웃었다. 절반 정도 틀어 올리고 남겨서 내린 머리카락이 어깨로 미끄러졌다. "핀은 내가 기념품으로 간직할게. 네 말투는 여전히 생기가 있구나. 물론 나도 오랜만에 널 만나고 싶었지만, 따로 만나자고 한 건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어서." "응, 뭔데?" 친근하게 묻고 있지만 이엔은 저도 모르게 목이 뻑뻑해질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학원에 다니지?" "아, 으응." "재미있는 곳일까?" 일상적인 물음인데도 상상력이 더해지자 마치 협박이나 되는 것처럼 들렸다. 이엔은 란지에를 흘끗 봤다. 란지에는 한족 팔걸이에 팔꿈치를 세워 얹고 비스듬히 턱을 괴고 있었다. 옆얼굴은 초상화처럼 미동이 없었다. 그도 긴장하고 있는지 잘 느낄 수가 있었다. "아, 뭐, 재미있기도 하고, 안 그럴 때도 있고, 공주란 게 다 그렇잖아. 너도 알겠지만." "흥미 없는 분야의 공부는 물론 재미없겠지, 하지만 사람들은 많이 만날 거 아니겠어?" "……." 점차 유도심문처럼 들리는지라 이엔은 대답을 삼갔다. 클로에는 팔을 뻗어 테이블 위의 샴페인 잠을 집어 들었다. 팔찌의 하늘빛 보석들이 자그락 소리를 냈다. "파티에서도 훌륭한 사람들을 사귈 수 있지만,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아니라서, 가장 훌륭한 예절이란 필히 따분함을 동반하지 않겠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잔을 기울여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는 자세에는 일점의 흠도 없었다. "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걸?" "나와 생각이 다른 거야?" "아니,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와서 놀랐다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따분함을 느낄 수 있지 않겠어." 그 때 란지에가 입을 열었다. "클로에 아가씨께서는 어떤 공부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클로에는 란지에를 보는 대신 테이블 위에 놓인 접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접시에는 네 가지 종류의 치즈와 밀 크래커가 놓여 있었다. "어떤 것을 좋아할 것처럼 보이나요." "글쎄요, 아가씨를 처음 뵙는지라 짐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도 나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을 테죠, 안 그런가요?" "아가씨께서 흠잡을 데 없는 교양과 예절을 지니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둘 다 쉽사리 걸려들지 않았다. 클로에가 부채를 펴서 입가를 가리면서 하품하는 시늉을 했다. 진짜 하품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기분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거야 어느 댁의 아가씨나 듣는 평판이니까, 사람을 잘 몰라서 달리 형가할 말이 없을 때 그렇게 얘기하곤 하잖아요?" "하지만 오늘 뵈어 보니 사람들이 빈말로 아가씨를 칭찬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신이 방금 한 말과 같은 빈말을 많이 들어 봐서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군요." 클로에의 말투는 가벼운 신랄함이 섞였지만 불쾌감의 표현은 아니었다. 상대가 귀족 젊은이였다면 처음 만난 상대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귀족 젊은이들이 집에서 거느리는 말상대란 하인보다 조금 나은 지위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말상대는 예, 예, 하며 복종만하는 하인과 달리 기분이 상하지 않을 정도로 재치 있는 언쟁을 해서 고용주의 기분 전환을 돕거나 하는 것도 중요한 역할이었다. 클로에도 딱 그 정도로 란지에를 대했다. "사람들이 아가씨를 좀 더 정당하게 평가해드릴 필요가 있겠습니다. 제가 좀 더 아가씨를 잘 안다면 그럴 수 있을 텐데 안타깝군요." 그즈음 둘의 눈이 다시 한 번 마주쳤다. 잠시 후 클로에가 이엔을 돌아보며 말했다. "네 친구분은 내 관심사가 아버지랑 같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클로에와 란지에가 대호하는 동안 마음을 추슬러 두었던 이엔은 아무 것도 모르는 소녀처럼 웃어 보였다. "얘, 카를은 그런 거 몰라. 폰티나 공작을 뵌 일도 없을 텐데." 그 순간 클로에의 시선이 재빨리 란지에의 표정을 훑고 지나갔다. 이윽고 클로에가 말했다. "그럼 대답할까요, 난 마법에 흥미가 있어요." 란지에와 이엔은 얼굴을 마주보았다.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학원에 가볼까 생각하던 중이야. 네가 학원에서 공부한다는 말을 듣고 거기서 지내는 이야기를 좀 들어보면 어떨까 싶었어." 이건 더더욱 상상 밖이었다. 곁에 있던 카스텔로 부인도 놀란 얼굴이라 당황한 표정을 감출 필요도 없었다. "아, 정말 예상 밖인데? 네가 학원에 가서 안 될 건 없지만 어쩐지 너하고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야. 아니, 무엇보다도 아버님께서 허락하셔?" "그건 천천히 아야기해 볼 문제겠지." 란지에가 말했다. "지체 높으신 분들 가운데 마법을 깊이 배우시는 경우는 드물다고 들었습니다." "마법뿐이 아니겠죠." 지체 높은 분들, 즉 귀족들이 대부분 학문에 게으른 것은 사실이었다. 란지에가 미소를 보였다. "아가씨한테서 그런 말씀을 듣다니 놀랍습니다." "다들 나에 대해 선입견이 많은가보군요."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선입견은 소문의 자식이지요. 어디서든 주목 받으시는 분일수록 잘못된 소문도 많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잠깐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며 덧붙였다. "오늘 이 댁의 소공작께서 그렇듯이." "설마 소공작이 백치가 됐다느니, 광인이 됐다느니 하는 말을 믿었던 건가요?" 카스텔로 부인이 침을 꿀꺽 삼키며 끼어들었다. "아가씨, 그런 말씀은 조금……." 클로에는 부채를 가볍게 흔들었다. "사실이 아니잖아요? 사실이 아닌데 말하지 못할 것도 없지요. 아르님 소공작은 우아하고 영리한 사람이더군요. 소문이란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건지 모르겠어요." 란지에가 말했다. "소문은 시간으로부터 나오지요." 클로에가 턱을 약간 움직이며 물었다. "그 말의 의미는?" "소문은 시간이 가면 만들어지지요. 자연스럽게, 세월은 더 많은 소문을, 시대는 한층 더 큰 소문을 만들지요. 소공작의 소문을 만든 것은 '긴 부재'였죠. 어떤 것이든 시간과 맞바꾸면 소문으로 변합니다. 아가씨의 아니만큼, 폰티나 공작가문의 세월만큼, 아노마라드 왕국에 쌓인 시대만큼 소문은 있습니다." "소문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쌓이는 시간의 찌꺼기다 그런 뜻인가요?" "반대죠, 소문은 찌꺼기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일부입니다." "이해할 수 없군요. 그럼 나쁜 소문, 잘못된 소문도 그 사람의 일부란 말인가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소문이 생길까요? 아가씨에게 따라붙은 소문은 소공작의 것과 다르지 않던가요? 어째서 다른 것일까요? 그것이 단지 우연일까요?" "부당한 의경 같군요. 나쁜 소문이나 잘못된 소문도 그 사람의 탓이라면 너무 잔인한 말이 아닐까요?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에게는 책임이 없는 건가요?" "진실을 아는 한 사람, 그 한 사람에게는 책임이 있지요. 하지만 소문을 퍼뜨린 당사자를 찾아 낼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소문은 실체 없는 그늘에서 나올 뿐이죠. 사람은 살아가다 보면 어떻게인가 생긴 얼굴을 갖게 되고, 말투를 갖게 되고, 생각을 갖게 되고, 그건 그 사람의 일부입니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 사이에서 평판도 생겨납니다. 평판에 예측이 더해져 소문이 됩니다. 가끔은 비밀스럽게 숨긴 것을 소문이 정확히 맞추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른 예측을 한 경우죠. 잘못된 예측을 하게 되면 아가씨께서 말한 것과 같은 악소문이 생깁니다. 사람은 그림자를 달고 태어나지 않지만, 태양빛을 받는 순간 그림자가 생깁니다. 그처럼 소문은 사람이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자신의 일부입니다." 클로에는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재치가 있군요. 무슨 뜻인지 알겠군요. 당신이 하려는 말도." 뜻밖으로 란지에가 싱긋 웃었다. "정말로 아셨습니까?" 클로에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나를 무시하는 건가요?" "아뇨. 아가씨 같은 분이 드물기 때문에 해 본 말씀입니다."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으나 클로에는 화내지 않았다. 단지 이렇게 말했다. "나의 일부인 그림자 때문이겠지요. 세상에는 슈미즈 가운을 입고 타조깃 크라운을 쓴 아가씨의 머릿속에 뭔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드무니까." 클로에는 타조깃 크라운 대신 가느다란 금 사슬 장식을 둘렀을 뿐이지만 연회장의 다른 귀부인들의 머리 위에서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었다. 란지에는 턱을 매만졌다. "하지만 클로에 아가씨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현명하신 왕비마마의 핏줄을 이으셨으니까요. 어떨까요, 이것도 그림자인가요?" "왕비마마는 나와 비교하게에는 너무나 존귀, 지엄, 명철하신 분이지요. 뜻이 다릅니다만 그것도 그림자라고 할 수 있겠군요." "마법에 관심이 있으시다 하시니 왕비마마와는 방향이 좀 다르실 수도 있겠습니다. 마법은 사람을 연구하는 학문은 아니죠." 떠보는 강도가 점차 심해졌다. 이엔은 조바심이 날 지경이었다. 아직은 클로에가 단지 학원 생활을 물어보고 싶어서 이엔을 불렀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클로에에게 '정치가가 될 마음은 없는 것인가'라고 묻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클로에가 또렷하게 대답했다.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해야겠죠, 난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에요, 이엔나, 너도 그렇겠지만." 이미 미래를 선택해버린 이엔은 계면쩍은 미소만을 지었다. "하지만 내게 짧은 유예가 있다면… 한번쯤은 학원에 가보고 싶어, 이엔나, 네가 다니는 학원은 어떻지? 그로메 학원이라고 들었어. 아는 집안 중에서도 그곳에 다니는 아이들이 있던데." 이엔은 흠칫했다. 만에 하나, 절대로 만에 하나지만 클로에가 그로메 학원에 들어오게 된다면 이엔과 란지에의 활동 반경은 크게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클로에 본인이 그들의 일에 관심이 없다 해도 폰티나 공작이 상당수의 심복들을 딸려 보낼 것이기에 학내 조직은 물론이고 외부, 특히 망명 의회와 연락하는 것 또한 제약을 받게 될 것이 자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자리에서 클로에가 란지에를 만났다는 사실이 큰 문제였다. 이엔의 샤프롱이라고 소개한 란지에가 같은 학원 학생이라는 것 까지는 이상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 후 한쪽에 자칫 실수가 생기면 하나로 끝날 일이 둘로 엮여 의심받게 될 터였다. 최악의 경우 란지에가 책임지고 있는 켈티카 3지구가 전부 말려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아, 글쎄, 그리 추천할 수는 없겠는데." 클로에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마음에 들지 않아? 그렇다면 옮기면 될 텐데." "아,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러니까 너 말이야. 너한테 잘 맞지 않을 것 같다고." "왜지?" 이엔은 대답을 짜냈다. "음, 신분이 낮은 집아 아이들도 많이 다니거든, 수업도 같이 받고 있다고, 고상한 것과는 거리가 먼 학생도……." 클로에가 뜻밖으로 잘라 말했다. "그런 것 신경 쓰지 않아." 란지에가 입을 열었다. "자꾸 뜻밖이라고 말해서 죄송합니다만, 그 이야기도 뜻밖입니다. 아가씨께서는 그런 학생들과 친구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클로에는 의도를 눈치 챈 것처럼 질문을 되돌렸다. "그렇게 묻는 당신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전 아가씨처럼 귀하게 자란 몸이 아닌지라 친구가 될 만한 자라면 어떤 신분이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바로 화살이 되돌아갔다. 이엔도 클로에의 대답이 자못 기대되었다. 클로에는 삼각형으로 자른 치즈를 하나 집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난 당신과 다르지요. 다시 말해,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가 달라요. 난 누가 곁에 있다고 해서 반드시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 한 해요. 그리고 친구가 아닌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어도 별로 불편하지 않아요." 기대는 어그러졌지만 이엔은 문득 재미있어졌다. 클로에가 어떤 아가씨인지 조금 알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란지에는 저 대답을 어떻게 들었을까? 란지ㅔ는 미소 없이 말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로메 학원 입학을 만류하는 이유는 다른 것입니다." "당신도? 당신의 이유는?" "그로메 학원은 마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명쾌한 이유였다. 클로에는 치즈를 삼키고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은 뜻밖에 빠르고 경쾌했다. "아하하하… 그렇군요. 꼭 마법만을 위해 학원에 갈까 생각한 건 아니지만, 마법에 관심이 있는 이상 마법을 가르치지 않는 학원에 가는 것도 우습겠지요. 좋아요, 그러면 마법을 가르치는 훌륭한 학원을 찾아보아야겠군요. 물론 아버지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런 학원이 있긴 합니다." 그쯤에서 대화를 그쳐도 되었을 테지만, 란지에가 말했다. 클로에가 고개를 갸웃했다. "추천하고 싶은 곳이 있나요?" "마법이라면 남부의 네냐플이 가장 유명하니까요. 진심으로 마법사의 길을 가실 생각이시라면 그곳 외에는 추천드릴 곳이 없습니다." 란지에는 클로에를 폰티나 공작에게서 떨어뜨려 멀리 보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카를의 말이 맞아. 네냐플을 졸업해야 연구도 계속 할 수 있다던데, 아노마라드의 마법 재료며 시약 제조법 같은 것들은 거의 네냐플에서 쥐고 있으니까, 진자 중요한 것은 네냐플 출신이 아닌 자들에게는 보여주지도 않는다더라고." "마법사가 되기로 했다고는 안 했어." 클로에는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역시 이런 말투였다고 생각하며 이엔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켈티카도 아니고, 너무 먼 곳에 있는 학원인지라 가게 될 가능성도 별로 없어. 하지만 남부의 마법 학원이라 가보고 싶긴 하네. 아주 긴 유예가 난다면." 클로에는 란지에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데 그로메 학원은 두 사람 다 말리는 걸 보니 다들 나와 동급생이 되고 싶지 않은 모양이네요." 농담이라고 하기엔 웃지도 않고 한 말이었지만, 란지에는 순간 대답할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 때 연회장에서 박수 소리가 울렸다. "아아, 아가씨, 시간이 되었나 봐요." 카스텔로 부인의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부인의 부탁이 있어서 이만 나가보아야겠군요. 이엔, 오랜만에 만나서 즐거웠어. 리히스 씨도요." 두 사람이 인사하기를 기다려 클로에는 몸을 일으켰다. 카스텔로 부인도 이엔에게 절을 하고서 먼저 나가 길을 열었다. 테라스를 떠나 연회장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둘의 시선이 뒤쫓았다. 클로에는 비켜선 사람들을 지나쳐 맨 앞으로 나아가 여주인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흰 피아노 앞에 앉았다. 악보를 펴더니 팔지를 끌러 피아노 모서리에 올려놓았다. 마름모꼴로 다듬은 아쿠아마린이 기울어져 피아노의 표면에 푸른 무늬를 그렸다. 소공작은 피아노 곁으로 다가와 먼저 클로에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인사말은 없었다. 피아노가 울리기 시작하자 소공작은 얌전하게 서는 대신 피아노 옆을 가볍게 짚었다. 거침없는 목소리가 첫 소절을 열었다. 어머니를 노래한 오래된 민요였다. 창가의 미풍과 울새의 노래와 벚나무 가지와 5월 별이 어머니 같아라 피아노는 반주답게 나직했지만 흠잡을 데 없는 실력이었다. 한 소절이 끝나자 건반 소리만 조용히 울렸다. 간간히 기침 소리가 섞일 뿐이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다들 소공작의 노래가 어떠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소수이긴 하지만 옛날 모나 시드 학원 합창단의 공연을 본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옛 기억은 기억일 뿐, 소년으로 자란 소공작이 어떤 목소리를 갖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소공작은 평소 대화할 때조차 상대를 녹일 것 같은 감미로운 목소리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무대데 올라 대사를 읉고 노래하는 순간 자신의 목소리에 빛을 불어놓는 사람일 뿐이었다. 소공작이 부르는 곡은 누구나 어려서부터 들어 알고 있는 노래고 가락이 편안해서 극적으로 실력을 발휘할 부분도 없었다. 그러나 소공작의 목소리는 이음새 없이 매끄럽게 이어지다가, 때로 거친 파찰음을 자연스럽게 섞어서, 끊고 있는 곳을 자유롭게 바꾸어 가며, 한숨과 미소와 침묵까지도 곡의 일부로 만들어버렸다. 그의 손끝에도, 표정 하나에도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미소에 함께 미소 짓소, 그의 시선에 못박혔다. 마침내 노래가 끝나고 피아노도 멈추었다. 잠간 침묵이 흐른 뒤에야 그제야 깨달은 것처럼 박수가 쏟아졌다. 클로에가 건반에서 손을 떼고 일어서자 소공작은 그녀에게 먼저 미소를 보낸 뒤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자 더욱 인상적이었다. 눈을 떼기 힘든 광경이었다. "나, 데모닉이 무언지 알 것 같아졌어." 이엔이 조그맣게 말하며 란지에를 돌아보았다. 란지에는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피아노 옆의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묘한 사이를 두고 대답이 돌아왔다. "어땠는데?" "노래에… 마력이 있었어." 이엔은 말하고 나서 스스로도 겸연쩍었는지 피식 웃었다. 동의를 기대하진 않았는데 뜻밖으로 대답이 들렸다. "그렇더군." 란지에는 의자에 기댔던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연회장의 다른 사람들을 죽 살펴보았다. 홀린 듯했던 기운이 어느 정도 가시자 이엔은 반성하는 마음이 들어서 말했다. "아, 이래선 안 되는데." 란지에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름다움을 느끼는 마음은 중요해, 꽃이나 숲이 아름답듯, 노래나 사람도 아름다워, 예술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목표는 아니야." 평소 란지에가 말한 일이 없는 의견인지라 이엔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꾸했다. "옳은 말이지만 지스카르 님도 나이고 너한테 들으니까 어쩐지 실감이 안나. 아, 기분 나쁘게 듣진 말라고, 하지만 난 너보다 더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너도 알고 있을 거야. 내가 왜 이렇게 말하는지." 란지에가 이엔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아니, 나도 오늘 내 생각이 좀 낯설어. 이유는 모르겠어. 하지만 나 같은 사람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은, 어떤 이상적인 세상에서도 배제되어선 안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이엔이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사이, 란지에가 이어 말했다. "다만 우선순위가 존재할 뿐." 이엔은 겨우 웃음을 보였다. "그래, 그 말을 덧붙여야 너답지." 란지에는 웃는 대신 한 번 피아노 쪽을 돌아보았다. "물론 다른 생각도 들었어. 오늘 일, 누군가가 신경 써서 꾸몄다는 냄새가 나지 않아?" "아… 뭐, 하긴 쉽게 성사될 일은 아니지?" 이엔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동안 란지에가 생각을 정리했다. "폰티나의 딸이 연주하고, 아르님의 아들이 노래하고, 그림 같은 미모를 가진 두 사람이 나란히 인사하고, 연주의 훌륭함과는 별개로 효과적일 수밖에 없는 구경거리였어. 관객은 켈티카 최고의 귀족들, 각본을 쓴 자는 무엇을 노렸을까." "두 사람, 결혼이라도 시킬 마음인 걸까?" 란지에는 조금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 "헤에, 만약 성사도니다면 이거야말로 대단한 구경거리… 아니, 심각한 일이겠는데." 두 공작가를 이간질하고, 한쪽에게 다른 한쪽을 모살했다는 혐의를 씌울 계획을 세운 그들이었다. 조금 전 연주의 진상을 펼치자 이엔의 머리도 빨리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래, 결혼을 시키려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그건 차후의 문제라 치고, 오늘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두 가문에 대한 인식이 훨씬 좋아지겠지? 또 두 가문의 우의가 돈독하다고 믿어버리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나중에 우리 일이 성사되어도 폰티나를 의심할 사람은 훨씬 줄어들지도 몰라. 만약 두 가문이 정말로 연대할 결심을 했다면 그건 더 큰일이지, 어떨까? 이 두 사람이 한족을 삼키고 독주할 기회를 끊임없이 엿보는 대신 양립하기로 마음먹을 가능성이 높을까?" "낫지만, 없다고는 할 수 없지. 폰티나 공작에겐 아니든 아들도 있지만, 결혼한 두 사람에게 모든 것을 물려줄 마음을 먹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역시 그럴 가능성은 낮아." 이엔은 스스로도 추리하면서 물었다. "어째서지?" "지금 굳이 두 가문을 비교한다면 어느 쪽이 우위일까?" "그야 폰티나 쪽이 아닐까?" "그래, 그런데 이 계획은 폰티나 쪽이 손해 보는 거래가 되기 쉽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둘 다 대단하지만, 그들 둘의 입장에건 상대보다 높아지지 않는 한 아무 것도 의미 없지, 현재 우위를 점한 폰티나가 자신을 낮추는 계획에 과연 매력을 느낄까?" "태어난 아이는 아르님 성을 물려받을 테니까?" "아르님 공작이라고 그걸 양보하진 않을 테지." 이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오늘 구경거리는 왜 만들었을까?" "내 생각엔." 란지에는 연회장 쪽을 다시 내다보았다. 사람들은 소공작과 클로에를 둘러싸고 저마다 말을 걸고 싶어 안달이었다. 곧 춤이 시작될 시각이었다. 둘은 아마 천 번째 짝이 되어 춤추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보기 드문 구경거리에 더욱 열광할 테고……. "폰티나 공작의 귀에 이쪽의 움직임에 대한 소문이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이 클 것 같다. 오늘처럼 쉽지 않은 계획을 한 것을 보면, 그쪽 일과 관련된 나이트워크를 전부 재점검해야겠어. 오늘 일을 먼저 제안한 것이 어느 쪽인지도 알아보아야겠고." 이엔도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로 씨가 없어서 아쉽네, 좀 물러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조만간 만나야겠지." 란지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엔이 물었다. "소공작과 얘기해 보려고?" "아니, 그만 떠나자. 벨노어 양이 올 때도 거의 가 됐고." 이엔은 당황했다. "떠난다고? 하지만 오늘 소공작을 만나서 혹시 이상한 점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이엔은 말을 멈췄다. 생각이 미친 모양이었다. "아……." 오늘 저 노래를 듣고 '데모닉이 무언지 알 것 같아졌다'고 말한 자신이었다. 의심할 필요가 있을까? 오늘 이곳에서 노래한 소공작은 데모닉이었다. 그런 마력을 보고, 듣고서도 생각하지 못하다니. "맞았어, 이곳의 소공작은 진짜야, 그럴 수밖에 없어. 그러면 역시 가짜는……." 란지에가 입구에서 몸을 돌려 섰다. 생각을 많이 하고 나면 늘 그렇듯 뺨과 목덜미가 해쓱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런 얼굴로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가 가짜야." 6. 무서운 이야기가 제격인 밤 "잘 오셨습니다. 손님. 이런 밤에는 데운 산양주와 뜨거운 국물이 제격이죠. 고개를 넘어 오셨습니까? 다리를 난롯불이 쬐세요. 독벌레가 달아난답니다. 물론 손님이지만요. 기분이 좋아지셨나요. 손님? 노래 한 곡 들려드릴까요? 걱정 마세요. 돈은 필요 없으니까요. 저희는 부족한 게 없거든요. 딱 하나 없는 게 있긴 합니다만 곧 손님께서 주실 테니 걱정 안 합니다. 뭔지 알고 싶으시다고요? 그건 밤이 깊어야 말씀드릴 수 있는 건데……." 사흘째 되는 날, 유능한 선원 열일곱 명, 항해사 두 명, 선장 한 명, 그리고 아무 쓸모없는 세 사람을 태운 페리윙클 선적 알테나 호는 노을섬까지 하루거리가 남았다는 바다 위 어느 지점에 있었다. '있었다'는 말은 움직이고 있지 않다는 의미였다. 날씨는 괜찮았고, 식량은 넉넉했고, 바람은 적당했다. 장애가 있다면 날이 저물었다는 점뿐이었다. 평소라면 밤도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바위투성이 노을섬이 가까워질수록 주변 바다는 암초 지대로 변해갔다. 아직은 그리 위험하지 않았다. 하지만 변덕스런 돌풍이 잣은지라 자칫 순식간에 어디로 떠밀려 갈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밤에는 돛을 내리는 쪽이 안전하다고 했다. 돛을 내려도 해류를 따라 조금씩 흘러가겠지만 그 정도로는 위험한 곳에 들어설 가능성이 없었다. 선원이나 선장은 이카본 군도를 둘러싼 해류의 흐름에 도통한 사람들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 돛대에 매달아 놓은 칸델라가 어둠 속에서 느릿하게 그네를 탔다. 자지 않고 남은 선원은 다섯명이었다. 여기에 항해사 하나와 쓸모없는 세 사람을 더하자 아홉 명이 되었다. 오늘 새벽까지 놀기로 작정하고 상갑판에 모여 앉은 아홉 명 이야기다. 당직 선원들은 교대로 장루에 올라 망을 보았고, 고참 선원 하나는 생각날 때마다 배 안을 순찰했으므로 주로 모여 있는 것은 일곱 명 정도였다. 해가 지기 전까지는 선원들이 주장한 동네 규칙에 따라 카드놀이를 몇 판 했다. 주위가 어두워져 카드를 보기 어려워지자 다른 놀이로 바꾼 참이었다. "자 그럼, 다음 사람." "네빌, 네놈 차례다." 네빌이라고 불린 젊은 선원은 목을 큼큼, 하고 가다듬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건 제가 네 살 때 우리 누나한테 실제로 있었던 일이걸랑요, 그 때 누나는 열세 살이었는데…, 이제부터 할 이야기만으로는 그리 끔찍하게 들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는데요, 이게 우리 엄마하고 할머니한테도 똑같이 일어난 일이한 걸 생각하면 느낌이 달라질껄요,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막시민은 무릎을 세워 팔꿈치를 얹어 놓고 그 위에 다시 턱을 괸 복잡한 자세로 고개도 삐딱하게 기울인 채였다. 리체는 얘기도 다 나오기 전에 입을 막을 준비를 하며 두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중이었다. 조슈아는 무심코 왼손 검지를 입 끝으로 물로 고개를 순인 채 손가락으로 갑판에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분필을 든 것도 아니고 어둡기도 해서 어떤 그림인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누나는 바다 절벽에 혼자 남아서 열심히 수평선을 지켜봤는데, 해가 다 지도록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더래요. 그래서 그만 집에 갈까 하고 일어나는데, 언뜻 보이더라나요. 뭐있겠어요? 눈을 부릅뜨고 봤더니 검은 깃발을 달고 돛도 새카만 배가 마지막 남은 태양의 이마를 삭 스쳐가고 있더래요. 빨간 태양 속을 정말 재빠르게 통과해서, 바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됐고요, 진짜로 있었던 거죠. 그 때 우리 누나는 너무 겁이 나서 그만……." "으……." 리체가 고개를 수그리며 귀를 막으려다가 호기심 때문에 손끝만 멈췄다. 네빌은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신발 한 짝이 절벽 틈으로 떨어졌는데 주을 생각도 못하고 미친년처럼 집으로 뛰어왔다나요?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발이 상처투성이더라는 거였죠, 어쨌든 집에 들어오자마자 곧장 병자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전부 손가락을 세우면서 쉬……." "아윽, 도대체 섬 사람들은 다 왜 이래!" 리체는 발딱 일어나 이야기가 안 들리는 뱃전으로 도망쳐버렸다. 곁에서 고참 선원이 킬킬 웃으면서 말했다. "저 아가씨는 그래도 결단력이 있네, 무섭다고 되뇌면서도 끝까지 듣고 싶어서 남아 있는 계집애들이 많은데." "벌써 이런 얘기가 세 번째인데 도망갈 법도 하지 뭘 그래." "먼저 무서운 예기 하자고 한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고요." "아가씨도 아니지 뭘." 그러면서 그들은 조슈아를 흘끔 보았다. 조슈아는 열심히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 다음에는? 병자는 죽은 건가요?" 네빌이 김빠진 손짓을 해 보였다. "쳇, 겁 안 내는 사람이 하나라도 끼어 있으면 얘기도 재미없어진다고요." "나도 겁나는데?" "에이, 거짓말하시지 마요." "그런 얼굴이시면서 겁나시긴 뭐가!" "이상하네, 왜 안 믿지." 조슈아는 혼잣말처럼 말하고는 손가락 그림을 마저 완성하기 시작했다. 선원들이 눈짓을 주고받더니 말했다. "그러지 말고 전하, 아니 소공작께서 하나 해보시죠. 이렇게 겁이 없으신거 보니까 끝장나게 무서운 얘기가 나올 것 같은데." 조슈아는 묘하게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무서운 얘기라면 많이 알죠." "아아, 기대되네, 얼른요." 고참 선원이 네빌의 뒤통수를 툭 쳤다. "야, 야, 이놈아. 네가 누굴 독촉하는지 알고 있냐?" 네빌은 여전히 싱글거렸다. "헤헤, 알고말고요. 천천히 하세요. 천천히 빨리요." 사흘간 함께 지내며 친근감도 많이 자라났다. '축복받은 아르님'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지레 어려워하며 접근조차 꺼리던 선원들이 어느새 이 정도로 편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조슈아의 태도가 좌우한 부분이 컸다. 진자 공작인 아버지가 있는 이상, 소공작인 자신은 거북하고 어려운 상대가 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물론 페리윙클에 남은 사람들은 여전히 쩔쩔 매겠지만 함께 항해한 이들만이라도 편하게 대해보고 싶다고 했다. 권위의 기억만 갖고 돌아가고 싶진 않다고도 했다. 그렇다 해도 친구가 될 수는 없는 사이였다. 익숙한 욕설은 목구멍 너머로 꿀꺽 삼킨 채 얌전한 학생들처럼 묻고 대답하는 선원들에게도, 또 조슈아로서도 그랬다. 이웃 소년 조슈아가 아니라 조슈아 폰 아르님인 이상 그럴 수도, 그래서도 안 되었다. 조슈아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배에서 즐겁게 지냈다. 잠시나마 페리윙클의 지붕 밑에서 태어난 이카본의 전설을 듣고 자란 바닷가 소년이 되어서, 나중에 배를 탔던 몇 안되는 사람들이 저택의 문지기 늙은이가 알테나 폰 아르님이 만들어준 꽃팔찌를 잊지 않듯 조슈아와 함께 한 며칠간의 항해를 이야기해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옛날에 어떤 꼬마가 살았는데 이 꼬마는 책 읽는 걸 좋아했어요. 그런데 꼬마네 아버지는 벽돌 굽는 사람이어서 집에 책은 한 권도 없었어요. 마을의 수도원이라는 곳에는 책이 많았지만, 꼬마한테는 절대로 빌려주지 않았죠, 그래서 꼬마는 낮에 수도원의 서고에 들어가서 구석의 벽장에 숨었어요. 사람들이 다 가버리는 밤까지 기다릴 작정이었죠." 조슈아의 말투는 어린아이들을 모아놓고 얘기하는 보모 같았지만 선원들은 대체로 반감을 느끼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들보다 열 살이나 스무 살쯤 어리더라도 상대는 '축복받은 아르님'이었다. "그래서 드디어 캄캄한 밤에 되자 꼬마는 벽장에서 기어 나왔어요. 촛불 한 개도 켜져 있지 않은 서고가 얼마나 캄캄했는지 꼬마는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질 지경이었어요." 캄캄한 곳의 등장은 무서운 이야기의 시작이나 다름없었다. 등 뒤의 칸델라 불빛을 받아 머리카락만 빛나는 조슈아는 윤곽 뚜렷한 얼굴이 그늘져 언뜻 괴기스러워보였다. "꼬마는 촛대를 찾아냈지만 불을 켤 방법이 없었어요. 성냥처럼 귀한 건 갖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어떻게든 밖에 나갔다 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입구 쪽으로 더듬더듬 기어갔어요. 왜 기어갔냐 하면, 두 발로 걸어가다가는 발이 꼬여 넘어질 지경이어서." 조슈아는 혼자 키득 웃었다. "그래서 드디어 입구에 도착했는데 아뿔싸! 문이 밖에서 잠겨 있는 거였어요. 뭐 당연한 거지만 어쨌든 이대로는 꼼짝 없이 아무도 없는 서고에 갇혀서 아침을 기다려야 할 판이었어요. 책을 못 읽는 건 물론이고요. 꼬마는 더럭 겁이 났죠.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니 어슴푸레한 책꽂이들이 다 괴물로 변하기라도 할 것처럼 생각되었어요. 아니, 이미 변해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요?" "그 때 갑자기!"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나타났어요!" "호오." "그는 꼬마의 어깨를 톡톡 치더니 여기서 뭘 하느냐고 묻는 거예요. 꼬마는 자기 입을 막았기 때문에 겨우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있었어요. 게다가 목소리를 들어보니 자기와 비슷한 또래가 아니겠어요?" 조슈아는 또다시 혼자서 키득거렸다. "손을 내미니까 아주 차가운 손이 잡혔어요. 차갑긴 해도 잡을 수 있는 손이니까 그래도 살아 있는 사람이구나, 그렇게 생각됐기 때문에 겨우 무서움을 떨칠 수가 있었죠. 꼬마는 너도 여기에 갇힌 거냐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그랬더니?" 조슈아는 목을 가다듬더니 상대 소년의 대답을 흉내 냈다. 「아니, 난 여기가 집이야.」 약간 쉰 듯한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조슈아의 평소 목소리와는 사뭇 달랐다. 놀란 선원들이 얼굴을 마주봤다. "아이고, 이거 소공작 목소리에 귀신 나오겠는뎁쇼." "그럼 그 소년은 귀신이었나?" "분명 창고 귀신이었을 거야. 사람들이 안 들어가는 잡동사니 창고에서 산다는 귀신 말이야." "창고 귀신이었다면 그 고마 녀석은 다신 못 나오는데? 창고 귀신은 외로움을 몹시 타서 누가 들어오면 문을 잠그고 절대 내보내주지 않는다고 하잖아." 막시민이 조슈아를 흘끔 보더니 불만스러운 듯 혼자 중얼거렸다. 뭐라고 말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꼬마는 그 말을 믿기가 힘들었지만, 이런 캄캄하고 끔찍한 곳에서 굳이 그런 문제로 싸우고 싶진 않았어요. 그래서 따지는 대신 '그럼 이 책들도 다 네 것이니?'하고 물어봤어요. 소년은 아주 간단하게 그렇다고 대꾸하는 거였어요. 그리고 꼬마에게 넌 왜 여기 있느냐고 물었죠. 꼬마는 머뭇거리다가 솔직하게 말했어요. 책을 보고 싶어서 숨어 있었다고, 그렇지만 캄캄해서 전혀 볼 수가 없게 됐다고, 그러니까 소년이 키득 웃더니 말했어요." 조슈아는 흉내 내려는 것인지 몰라도 다시 한 번 웃었다. 「무슨 책인지 말해봐. 난 여기 있는 책이라면 내용을 다 알고 있거든, 너한테 가르쳐 줄 수 있어.」 선원들은 조슈아의 바뀌는 목소리에 적잖이 동요하는 모습이었다. 조슈아만이 여전히 장난치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꼬마는 테슬라 알바의 '밤의 예식서'라고 말했어요, 그러자 보이지 않는 소년이 말하기 시작했어요. 제목과 서문부터, 책에 씌어 있는 그대로. 1장으로 넘어가자 점차 빠르게, 마치 책을 앞에 두고 읽는 것처럼." 막시민은 수도원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늘 닫혀 있고 아이들에게는 열어주지 않는 수도원의 서고, 막시민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슈아의 이야기는 그곳이 배경일 뿐 그냥 꾸며대는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조슈아는 공연 대본을 쓰듯 앉은 자리에서 잘도 이야기를 꾸며내는 녀석이니까. 그런데, 아니었다, "밤의 예식서, 영광은 땅에게, 진실은 밤에게, 노고는 새벽의 황금에게 돌리노라. 나, 순례자 테슬라 알바가 귀신의 날에 칼레도니의 검은 뒷골목을 걷고 있을 때 단 하나의 열린 문을 발견하였노라. 문에는 원숭이와 묻는 자의 눈과 황금 대접이 새겨져 있고 분필로 십자 표시가 그려져 있었노라. 순례자는 거침없이 문을 통과하였노라. 맨 먼저 부엌이 나타났는데 좌우로 네 개의 화덕에 올려놓은 가마솥이 있어서 각각 녹색, 황금색, 적색, 청색이었노라. 천장에는 구리로 된 크고 작은 조리솥이 반짝거리도록 닦여 있고 그 아래에는 열두 가지 색깔의 병이 봉해져 있었노라. 병 속을 자세히 보니 각각 종류가 다른 독 품은 벌레가 한 마리씩 담겨 있는 것이 진실로 이교도의 풍습이었노라. 내가 다가가려 하자 적색 가마솥이 급히 끓으며 넘치는데 녹색 가마솥은 불이 꺼진 듯 조용하였노라. 나는 부엌을 통과하여 좁은 복도를 지나 다마스크 커튼으로 가려 놓은 작은 거실 앞에 섰노라. 안에서 조용히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니 여인과 그의 딸인 듯 하였노라." 선원들은 숨소리도 섣불리 내지 못하고 눈만 깜빡일 따름이었다. 그들의 소공작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모르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놀라움이 덜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흡사 시를 읊듯 하던 조슈아는 적당히 끊더니 다시 어조를 바꾸었다. "꼬마는 홀린 것처럼 소년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어요. 2장으로 접어들고, 3장으로 넘어가고, 소년은 한 번 더듬거리지도 않았어요. 어느새 그 목소리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듯했어요. 책이 직접 말해 주는 것 같기도 하고, 서고가 말해 주는 것 같기도 했어요. 서고에 살던 귀신이 말해 주는 것일지도 몰랐어요. 그러나 꼬마는 멈추라고 하거나, 어떻게 그렇게 외울 수 있느냐고 묻거나, 그러지 않았어요. 자기가 입을 열면 영영 멈춰 버릴까봐 그럴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날이 밝도록 꼬마는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어요. 책 한 권의 내용을 모조리 들었을 즈음 서고에는 새벽빛이 새어들기 시작했어요." "빛이 들어오면 귀신은 도망갈 텐데." "그래서 어떻게 생긴 놈인지 얼굴을 봤대요?" 사람들은 내심 목소리뿐인 귀신이었다거나, 빛 속에서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거나, 그런 이야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조슈아는 마지막으로 키득 웃더니 대답했다. "얼굴을 봤죠." "어떤 귀신이었습니까요?" "귀신 아니었어요, 그냥 사람. 소년이었다고요. 꼬마하고 또래도 비슷한 소년." "에에?" "그럼 그 소년은 어떻게 거기 있었대요?" "꼬마보다 먼저 들어갔던가 보죠." "자기 집이라던 얘긴 뭐래요?" "꼬마가 겁내는 걸 보고 심심해서 해본 얘기였겠죠." "얘기 끝입니까?" "네." 말을 끊으며 조슈아는 주위를 둘러봤다. 선원들은 다들 맥 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 안 무서워요?" "그럼 소공작께선 그 얘기가 무섭습니까요?" "난 무서워 죽겠는데." "그 야그가 어데가 무섭습니까요?" 조슈아는 오른쪽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귀신이 아니었잖아요. 그냥 사람, 그것도 또래 아이인데 책을 완전하게 외우고 있다니 보통 무서운 게 아니잖아요?" "아, 참, 그러고보니 그런 어떻게 된……." 네빌이 말을 이으려다가 문득 멈췄다. 상황을 개달은 모양이었다. 곁에 있었던 늙은 선원이 눈치를 주었다. 조슈아가 갑자기 유쾌하게 웃었다. "아아, 아무도 무섭지 않았다니 딴 얘기를 해봐야겠다. 뭐가 좋을까, 그래요, 어떤 남자가 말이죠, 얘들을 죽이려고 쫓아오는데 오른손만 엄청 커서, 그 손으로……." "입 안 다무냐." 막시민이 불숙 말하자 조슈아는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말을 그칠 생각은 없었다. "그게 아니면, 어떤 사람이 집에 너무 할 일이 많아서 잠시만 도망쳐 있으려고 했거든요. 세월이 흘러서 그만 집에 돌아가야겠다 싶었는데, 누군가가 와서 얘길 해주기를 자기 집에 자기하고 똑같이 생기고 독같이 행동하는 녀석이 나타나서……." 막시민이 벌떡 일어나더니 리체가 간 쪽으로 가버렸다. 조슈아가 어깨를 올렸다, 내려 보였다. "자기가 아는 애기 한다고 그냥 가버리네, 참을성이라고는 없다니까." 그러더니 조슈아도 일어서서 막시민이 간 뱃전으로 가버렸다. 남은 선원들은 입맛을 다시며 조슈아가 한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보는 기색이었다. 누군가가 의견을 말하자 늙은 선원이 다시 손을 내저으며 조용히 시켰다. 막시민은 리체 옆에 서 있긴 했지만, 아무 말도 않고 바다 쪽만 보고 있었다. 조슈아가 다가서자 목소리가 들렸다. "유령 목소리 같은 거, 쉽사리 빌려도 되는 거냐." "아아, 아니 뭐, 그냥." 조슈아는 조금 웃더니 가볍게 말했다. "미안해." "나한테 왜?" 조슈아는 입을 다물었다. 막시민은 한참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넌 네 인생이 무서운 얘기 같으냐." 조슈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파도 철썩이는 소리가 열 번쯤 난 뒤에 이렇게 말했다. "동화는 아니지, 적어도." 막시민은 혼자 팔짱을 끼며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다시 파도 소리 열 번이 지나가고서야 대답이 들려왔다. "그럼 난 무서운 이야기에 나오는 희생자 역인가 보군."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할게." "네가 어떻게?" "어떻게든." 조슈아는 다시 파도 소리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정 안되면 이런 방법도 있어. 주인공이 죽고 나면 어떤 얘기든 끝나거든, 얘기가 끝나면 남은 사람들은 절대로 죽을 일이 없는 법이잖아." 막시민은 평소와 달리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그런 목소리로 잘도 농담을 지껄여 대는구만." "농담인 거 알았어?" "농담이 아니었으면 네 녀석을 당장 바다 속에 쳐넣어서 무서운 얘기를 끝내버렸게." "알아들어줘서 고마운데." "옛날처럼 진담이 아이라서 내가 고마울 지경이다." "응, 이제 내 인생을 놓고 진자하게 농담도 할 수 있게 됐어." "너란 놈이 데리고 다니다보니 나아지는 점도 생기는구나. 네 친구가 된 이래 처음으로 보람차구만." 어조만은 여전히 신랄했다. 조슈아는 대답하는 대신 조그맣게 웃으면서 리체에게 고개를 돌렸다. "리체 넌 뭘 봐?" 아까부터 꼼짝도 않고 바다만 보고 있기에 한 말이었다. 그러자 리체가 조슈아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나란히 서자 리체가 뱃전 너머로 손을 뻗었다. "저길 봐." 그쪽에는 불빛인지 별빛일지 모를 빛 무리가 몇 개 보일 뿐이었다. 조슈아는 자세히 보려고 애쓰며 말했다. "이상한 거라도 있어?" "별일까? 저기 제일 큰 별 아래에 노르스름한 점 세 개 말이야. 저거 잘 봐봐." 잠깐 시간이 흐른 뒤에 조슈아가 말했다. "움직이네?" "그렇지?" 조금 더 지켜보자 노란 점들은 차츰 왼쪽으로 움직이면서 커졌다. 정면은 아니라 해도 이쪽과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배일까?" "그럴 수도 있지만." 지나가는 배를 본 것이 아주 별난 일이라고 할 것까진 없었다. 그러나 리체는 뱃전에 팔꿈치를 짚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가 움직이고 있었다면 일찌감치 멀어져 버렸을 텐데, 우리가 정선하고 있으니까 계속 보이는 거잖아. 그런데 여긴 암초 지대라면서? 저 배는 왜 밤에 움직이고 있는 거지?" "밤 항해에 자신이 있나보지." "그럼 이 배의 선원 분들은 실력이 나빠서 이러고 있단 말이야?" 조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아니겠지, 음… 그럼 여기가 어떤 곳인지 잘 몰라서? 할로를 잃고 잘못 들어왔기 때문에?" "그러기가 쉽지 않을까?" 점이 커지는 속도는 점차 빨라졌다. 두 사람은 긴장해서 얼굴을 마주보았다. 조슈아가 말했다. "저러다가 암초에 부딪힐지도 몰라. 사람들을 불러서 저들에게 경고를 해줘야 되겠어." 가만히 있다가 막시민이 입을 열었다. "지금이 낮이었다면 경고가 아니라 전투 준비를 했어야 할 걸." "저 배가 해적이라도 된단 말이야? 이런 곳에서?" 조슈아가 반문했지만 리체는 막시민과 같은 의견이었다. "막시민의 말이 맞아. 그럴 수 있어. 조난 신호도 없이 우리 배의 항로를 침범해 오잖아." 조슈아가 고개를 저었다. "이쪽 바다는 지나가는 배를 만나기 힘든 곳이야. 해적질을 할 작정이라면 일부러 이런 곳까지 올 리 없어." "그러면 대체 왜 다가오는 건데?" "혹시 이쪽에 해적 소굴이라도 있는 거 아냐?"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조슈아의 예민한 귀에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가락을 가진… 음악 소리였다. "음악 소리라고? 이 밤중에?" 조슈아의 말을 들은 리체는 기분 나쁜 상상을 하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다른 두 사람이 귀를 기울인지 얼마 안 되어 그들의 귀에도 들려왔다. 피리와 현악기 들이 섞인 흥겨운 가락이. "파티라도 열었나?" '어둠 속에서 들리는 음악'이라고만 했을 때 무심코 상상한 것과는 달라도 한참 달랐으므로 리체의 목소리는 금방 풀렸다. 떠들썩한 음악 소리였다. 사람을 홀리는 음산한 피리 소리 따위가 아니었다. 그러나 막시민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왜 다가오는 거지." "어쨌든 저 배에 경고 좀 해주라고 그래야 되겠어. 노느라고 암초도 발견 못하면 어쩌니." "저 배는 쓸모없는 세 녀석이 몰고 온 미의 극치호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긴 했어도 막시민은 휘적휘적 갑판 쪽으로 사라졌다. 저쪽 배를 위해서든 우리 배를 위해서든 선원들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막시민이 간 뒤에도 리체는 계속 불빛들을 바라봤다. 음악 소리는 점차 커졌고 뱃전을 치는 물소리도 가까워졌다. 배의 윤곽이 드러날 무렵 세 개라고 생각했던 불빛은 어느 새 수십 개가 되어 있었다. 배 전체에 불을 켜놓은 모양이었다. "어쩌자고 저렇게 불을 많이 켜 놨을까?" 리체가 중얼거렸다. 조슈아는 뱃전 너머로 몸을 내밀었다. 좀 더 잘 들어 보려는 것처럼, 떨어지지 않을까 조금 겁이 날 정도로 위태한 자세였다. 바람을 받은 머리카락이 이마를 쓸어내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어둠 속을 쏘아보던 조슈아가 말했다. "노래하고 있어." "어떤 노래." 리체에게는 아직 들리지 않았다. 조슈아는 잠시 더 귀를 기울이다가 말했다. "상당히 잘 하는 노래." 조슈아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리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항구의 아가씨 잔을 받지 아니하니 뱃머리 마녀께 그 술 대신 올리고 마누로 된 뺨에다 키스해 드리고 빈 술병은 바다에 쳐넣어 버렸네. 남은 술은 물고기놈이 쳐먹었으니 내일 낚은 생선이 얼근이 취했거든 내 술 먹은 놈인 줄 알고 건져다가 술 싫다는 아가씨한테 갖다드리라. 처음 듣는 곡인 건 물론, 노랫말도 이상한 것이 즉석에서 지어 부르는 것 같았다. 그것도 술김에 말이다. 그런데 곁에서 즉시 화답이 튀어나왔다. 항구의 아가씨가 생선 한 입 드시고는 일어나 치마 걷고 춤추시며 말하시길 이 생선에 귀한 미약이 들어 있나니 먹는 자는 절로 웃음이 난다 하시네. 노래 실력은 훌륭했지만 상대방과 수준을 맞춘 것 같은 노랫말에 리체는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노래를 맺은 조슈아는 발끝을 세워 한 차례 닥 울리며 맞은편 배를 향해 절까지 해 보였다. 리체가 물었다. "뭘 하는 거야?" "상대방의 노래에 오마주(Hommage)를 바쳤으니 마땅히 인사도 해야지." "오마주인지 그게 대체 뭔데?" 조슈아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그는 손바닥을 마주 비볐다가, 몇 번 쥐었다 폈다 했다. "저쪽 배에 가보고 싶은데." "들여보내 줄 리가 있겠어?" 설사 불러 준다 해도 낯선 배로 건너갈 생각 따위는 전혀 없는지라 리체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조슈아는 농담이 아니었다. "안되더라도 부탁은 해볼 수 있겠지." 그즈음 막시민이 선원들과 함께 돌아왔다. 선원들은 커다란 신호용 등을 가지고 왔다. 상대 배는 이미 멈추어 있었지만, 일단은 정지 신호를 보냈다. 리체는 신기하게 생긴 신호용 등에 곧장 달라붙었다. 조슈아는 뱃전에 턱을 괴고 뭔가를 궁리하는 중이었다. 보인 것일까? 잠시 후 저쪽에서도 신호등이 올랐다. 얼마 동안 '쓸모없는 세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신호가 양쪽 배에서 오갔다. "뭐래요?" 조슈아가 불숙 물었다. 신호하는 선원을 지켜보고 있던 늙은 선원이 대답했다. "배는 뭐 멈춰 있으니까 된 건데… 에… 저 배는 우리 섬 출신 배가 아니라는뎁쇼. 하긴 페리윙클 사람이라면 이족 해역을 저렇게 모를 수가 없고말고, 암, 그런데… 아, 저 배는 모항이… 렘노스코드? 조개 반도에 있는 데던가?" 신호를 하던 선원 중 하나가 대답했다. "네, 조개 반도 서쪽 관자만(灣)에 있는 아노마라드령(領) 항구입니다. 그런데 항구라기보다는 그냥 조그마한 마을인데." "그 멀리서 이런 데까지 대체 뭘 하러 왔다냐?" "그걸 이제부터 물어볼 참입니다." 선원은 다시 신호등으로 주의를 돌렸다. 조슈아가 늙은 선원에게 물어보았다. "횃불 신호로 그렇게 자세한 얘기도 주고받을 수 있어요?" "그러믄입쇼, '네놈의 엉덩이 냄새나 맡아라' 같은 말도 보낼 수가 있습죠." 늙은 선원이 그 예를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기 때문에 세 사람은 웃을 수도 없었다. 신호용 등에는 뚜껑이 달려 있어서 그 뚜껑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하는 것으로 내용을 나타냈다. 길게 열어 두기도 하고 잠깐 열었다가 닫았다가 하는 것으로 보아 꽤 다양한 조합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좀더 신호를 주고받던 선원이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늙은 선원과 조슈아를 돌아봤다. "제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저들은 '바다의 유랑 극단'이라고 하는데 말입죠." 늙은 선원이 물었다. "바다 뭐? 그게 뭔데?" "그게, 왜 육지에서 이 마을 저 마을 떠돌아다니는 극단인가, 그런 거 있잖습니까. 그걸 바다에서 하나 본데요." "바다 한 가운데에서 노래하고 춤을 춰대면 그걸 누가 봐준다는 거냐? 날치나 다랑어가 쌈짓돈 털어 봐주는 거냐?" "뭐 가까운 항구를 돌아다닌다는 얘기겠지만……." "그게 말이 되려면 이 근처에 항구가 있어야 되지 않겠나! 그런데 요쪽 바다에는 암초와 무인도밖에 없지 않나?" "따지고 보면 그렇습니다만……." 두 선원이 고개를 갸웃대는 동안 세 사람도 나름대로 고찰을 나누었다. 조슈아가 먼저 말했다. "바다를 떠도는 유랑 극단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긴 했구나, 칼라이소 사람들이 우리 배가 너무 우스워 보여서 한 소린 줄 알았더니." "그런 게 실제로 있든 없든, 저쪽이 진짜 유랑 극단이라는 증거가 되어주는 건 아니라고." 막시민의 말에 리체가 맞장구쳤다. "맞아. 이 정도 불빛으로는 배 모양도 안 보이잖아? 저쪽 배가, 그러니까 우리 배처럼 생겼는지도 알 수 없고." "우리 배처럼 생겨야 유랑 극단이 되는 건 아닌데." "내 말은, 우리 배처럼 생겼는지 알 수 없으니까 우리 배처럼 생겨도 유랑 극단이 아닐 수도 있지만 우리 배처럼 생기지 않으면 그래도 유랑 극단이 아닐 수도 있다는… 그런 뜻이잖아!" 조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뜻인 거야?" 거기까지 얘기 했을 때, 신호를 더 주고받던 선원이 이번에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저기, 저들이 우리더러 자기들 배로 하룻밤 건너와서 진탕 먹고 마시고 놀아보는 게 어떻겠느냐는데요?" "제발!" 아는 사람의 배도 아니고, 페리윙클 선적선도 아니다. 나쁜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고 장담할 근거는 없었다. 유랑 극단에서 밤새워 놀자고 한다니 재미있을 수도 있겠지만, 재미있을 것 같다고 괜한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재미있을 것 같다고 괜한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간절하게 외칠 필요는 없잖아. 이게 뭐, 그렇게 위험한 일이라고 그래?" "바다에서 한밤중에 마주친 낯선 배에 건너가겠다는 생각이 위험하지 않다고?" 리체가 받아치자 조슈아는 좀 더 사실에 가깝게 말을 고쳤다. "음, 그러니까, 내가 지금껏 해왔던 일들에 비하면." 이윽고 깨어 있던 선원들이 모두 뱃전에 모였다. 저마다 맞은편 배를 향해 목을 뺐지만 수십 개의 등불 사이로 어른거리는 사람들이 보일 뿐이었다. 배는 이쪽보다 훨씬 컸다. 한 선원이 말했다. "저 등 좀 봐, 설마 밤새 저렇게 불을 켜 놓나?" "바다에서 생선 대신 기름통이라도 낚는 모양이야." "왜, 그것도 방법이 있지, 고래를 잡으면 기름이 잔뜩 나오잖나, 배가 휘청거릴 만큼은 나온다고." "저 배가 고래를 낚았다면 한 번 구경하러 가볼만 하겠군." 선원들은 리체만큼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어쩌면 조슈아가 어떤 사람일지 아직 잘 몰라서일 수도 있었다. 당직을 서던 일등항해사가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쉰 살쯤 된 땅딸막한 사내인 그는 열두 살에 견습 선원이 된 후로 땅을 딛고 보낸 시간보다 바다 위에서 보낸 시간이 더 길다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초지정을 조금 듣는 체 하다가 다짜고짜 말했다. "어이, 저쪽 배에서 초대를 했다 그 말이렸다?" "옛, 배의 생일이 돌아와서 선상 연회를 열었다 합니다." 리체는 조슈아를 말려 줄 것을 기대하며 항해사를 쳐다봤다. 그러자 항해사가 리체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그거 좋지, 요새는 배 생일을 챙기는 뱃놈들이 드물어져서. 그래, 배 이름은?" "'고향의 별' 호입니다." "이름이 예스럽구만, 그래서 누가 가기로 했나?" "예? 가는 겁니까?" "이봐, 바다에서 초대를 거절하는 법은 없어." 리체는 경악하여 입을 벌리고 항해사를 쳐다봤다. 그러자 한 번 항해사가 눈을 찡긋해 보였다. 리체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아저씨! 아니지, 항해사님!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세요?" "농담처럼 들렸어?" "아니, 하지만 저쪽 배가 해적일 수도 있잖아요!" "물론 저쪽 배가 특별히 아가씨를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관을 싣고 온 배일 수도 있어." 리체는 더 흥분했다. "그런데 오란다고 아무 준비 없이 가도 돼요?" "이거 섭섭한데 우린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다고." "무슨 준비요?" "예절을 모르는 녀석들의 대가리로 볼링(bowling)을 할 준비." 볼링이 뭔지 모르는 리체가 동그랗게 뜬 눈만 굴리고 있는 동안 항해사는 휘적휘적 선원들 틈으로 팔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자아, 자, 차비들을 해라! 우리 소공작 전하께서 유랑 극단의 배에 행차하신다니 그만한 격을 갖춰야지!" 조슈아가 재빨리 다가가 항해사의 팔을 툭 쳤다. "그런 건 필요 없어요. 난 그냥 평범한 선원처럼 보이고 싶거든요, 다른 분들한테 섞여서요." 그러는 편이 더 마음 놓고 편히 놀 수 있을 테니까, 라는 말은 생략되었지만 항해사는 한쪽 눈썹을 올리며 리체한테 하던 것처럼 눈을 찡긋거렸다. "흐흐, 저희가 준비하려는 것도 별다른 건 아니고, 다만 볼링 핀 정도입니다요." 리체는 마지막 희망을 붙들려 했다. 다시 말해 한쪽에서 팔짱만 끼고 있던 막시민을 붙들고 못다 한 말을 쏟아 부었다. "네가 좀 말려 봐, 조군은 네 말이라면 그래도 귀를 기울이잖아." "귀를 기울이는 척만 하지." "에, 도, 그랬던가? 하지만 그랬더라도 말려보긴 해야 되잖아? 안 그래?" 막시민의 반응은 더욱 뜻밖이었다. "별 일 아닐 땐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둬, 일일이 말리려고 들어서야 말리는 쪽도 보통 번거로운 게 아니라고." "이게 별 일이 아니니?" 막시민은 리체를 흘끔 보더니 말했다. "너도 가지 그래." "뭐?" 선원들에게 둘러싸여 신나게 얘기하고 있던 조슈아가 막시민을 일부러 돌아보며 싱긋 미소를 보냈다. 막시민은 답례로 눈살을 찌푸려 보이고는 다시 리체를 봤다. "만약에 네가 해적이라고 생각해 보자, 길 가는 배를 털려고 마음을 먹었단 말이지. 한데 지금은 한밤중이다. 그럴 때 첫째로, 저쪽에서 자기 배를 먼저 발견하도록 불을 잔득 켜고 다니겠냐?" "아, 그건, 글쎄, 별로." "둘째로, 속임수였든 뭐였든 우리 배로 와서 술 한 잔 하라고 권하는 것보다 대포나 쏘는 쪽이 논리적, 아니 합리적이지 않겠냐?" "해적한테 무슨 합리를 찾니? 인질을 잡으려고 이러는 것일 수도 있잖아? 인질을 잡아서 항복을 받아내고 나서……." "이것 봐, 리체. 해적한테 걸리면 보통 모조리 죽는다고, 선원 몇 명 잡혔다고 순순히 항복하는 배가 있을 턱이 없지. 항복해봤자 다 죽을 게 뻔하니까. 무엇보다도 해적들이 무슨 놈의 인질은 인질이야? 배하고 바꿀 만큼 중요한 해적 대가리 따윈 없단 말이다." 리체가 턱을 쳐들었다. "하지만 이쪽에는 소공작 조슈아 촌 아르님이 있잖니!" "저쪽에서 그걸 어떻게 아냐? 소공작께서 이곳에 계신지, 어째서 중요한 분이신지, 알 턱이 있냐? 렘노스코드 출신의 유랑 극단의 배가." "렘노스코드가 어딘지 너 알아?" "내가 들어보지도 못했을 정도로 시골 구석탱이란 건 알지." 리체는 슬슬 처음 견해를 고수해야 할지 설득당해야 할지 고민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불쑥 물었다. "참, 그런데 볼링은 뭐니?" "아노마라드 놀이야, 사람 머리통만한 공을 굴려서 세워 놓은 핀들을 넘어뜨리는 거지." 7. 붉은 등, 검은 깃발 "죄인을 돛대 높이 매달아라. 풀지 못하게 단단히 묶어라. 목을 맬 밧줄은 필요 없다. 태양의 먹이로 줄 테니까. 장루에 올라가는 녀석들은 죄인에게 음식을 주면 안 된다. 물 한 방울도 주면 안 된다. 비가 오면 좀더 살 테니까 그땐 거꾸로 매달아라. 맑은 하늘을 증오하면서 펄럭이는 돛을 증오하면서 바삭바삭 말라갈 수 있도록." 일행을 맞은 것은 수십 개의 붉은 등이었다. 낮은 활대를 따라 열 개, 삼각 앞돛을 치는 밧줄에도 다섯 개, 선실 입구에도 두 개, 그리고 뱃전에는 열 서너 개나 매달려 있었다. 분명 등이긴 했는데 모양이 이상했다. 철사로 구형 뼈대를 만들고 종이를 발라 붙인 것이 영 낯설었다. 또 평범한 램프라면 아무리 등갓을 씌운다 해도 저렇게 바람 부는 곳에서 줄곧 켜져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붉은 등은 활대에 나란히 걸린 채 춤을 추었다. 배의 보습은 불그레한 불빛 속에 취한 것처럼 떠올라 있었다. 만약 진짜 불이라면 돛에 옴ㄹ겨 붙어 순식간에 배를 태워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조슈아는 어느 정도 짐작하면서 물어 보았다. "저 등불은 어떻게 된 거죠?" 그들을 맞이한 젊은이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건 저희들만의 비밀입니다." 곁에서 한 사람이 거들었다. "쉽게 알려드릴 수야 없죠. 불이 나진 않으니 안심하시고요." 조슈아가 보기엔 요즘 극장마다 어느 정도 일반화된 조명마법사들의 불빛과 비슷한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다만 상대가 으스대는 것을 보고 예의상 감탄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극장 조명의 원리 따위를 알 이 없는 선원들은 생각이 달랐다. "아, 난 저거 신경 쓰이는데." "진짜 불 안 나나?" "괜히 큰소리치는 거 아냐? 그러다가 불이 붙어버리면?" 젊은이와 조슈아는 거의 동시에 말했다. "괜찮아요, 그런 불이 아니라니까." "저거 그런 불 아니에요." 젊은이는 '당신이 어떻게 아느냐'는 눈빛으로 조슈아를 돌아봤다. 조슈아는 미소로 얼버무렸다. 고향의 별 호에 건너온 사람은 모두 여덟 명이었다. 조슈아와 막시민, 리체, 이등항해사, 그리고 놀기 좋아하는 선원 네 명이다. 반면 당연히 갈 것처럼 말하던 일등항해사가 오히려 배에 남았다. 언제 돌발 사태가 일어날지 모르는데 당직 항해사가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일견 당연한 이유를 대면서, 대신 그는 이등항해사를 깨워 조슈아를 호위하도록 명령했다. 조슈아는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아까 큰 소리로 노래 부르던 분은 누구인가요? 한 번 뵙고 싶은데요." "노래요? 아, 노래." 젊은이는 상갑판 아래로 성큼 가더니 선실 문짝을 두드렸다. 그러자 한 사람이 뛰어나오면서 모자를 벗고 절을 했다. 뱃사람 치고 어울리지 않는 중절모를 쓴 그는 후리후리한 키에 뼈마디가 툭툭 튀어나올 정도로 마른 사내였다. "자, 자, 어려운 걸음 하셨습니다. 이렇게 오셨으니 망설일 것 없이 한 판 놀아보는 겁니다. 저희가 원래 공짜로 보여주는 사람들이 아닌데,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눈 좀 씻으시게 해 드리지요. 뭘 보실까요? 인형극도 있고, 줄타기도 있고, 바퀴 타기도 있고, 노래에 춤도 있죠. 웃기는 거 보시렵니까? 어제 내렸던 항구에서 대인기를 끌었던 '코주부와 혹부리' 이거 어떻습니까? 물론 오늘은 우리가 술을 좀 펐기 때문에 내용이 약간 달라질 수도 있어요. 핫핫핫!" 조슈아 일행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상갑판에서 여자 둘이 뛰어내려 와서 또다시 절을 했다. 그들은 물들인 깃털이 달린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솔직히 최신 유행은 아니었다. "어서 오세요! 술통에는 술이 잔뜩, 사과 통에는 사과가 잔뜩! 물에 젖은 비스킷도 잔뜩, 선창에는 쥐도 잔뜩! 없는 거 없는 우리 배에서 오늘밤을 재미없게 보내시면 곤란해요." "슬슬 배꼽시계가 밤참 먹을 시간을 가리키는 것 같죠? 실은 선창에 어제 갓 실은 고기가 아직 신선합니다요. 아니, 배에 신선한 고기가 웬말이냐고요? 아따, 고기에 친 소금이 신선하다 그 말씀이지요. 좌우지간 맛 좀 보실랍니까? 고기가 짜다 못해 달다니까요. 달아져버렸어." 구석에서 가늘게 들려오던 바이올린 소리가 불쑥 커지더니 빨라졌다. 동시에 피리 소리도, 또 다른 바이올린 소리도 끼어들었다. 남자 서넛이 어린아이 키만한 쇠꼬챙이에 꽨 구운 사과와 고깃덩이를 들고 나왔다. 또 다른 선원들은 가득 찬 술통을 낑낑대며 갑판에 내다 놓았다. 어느새 사방이 왁자해졌고 이미 술이 얼근히 오른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얼굴을 드러냈다. 바야흐로 재미있어지려는 분위기였지만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분명 아까부터 파티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분위기는 이제 막 파티가 시작되려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조슈아는 선실에서 나왔던 말라깽이 남자를 붙들었다. "노래 부르셨던 분이 당신인가요? 그러니까 아가씨가 술을 받지 않아서 선수상에 부어버렸다던 노래요." "그게 무슨 노래지?" 남자는 고개만 갸웃대더니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 버렸다. 조슈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을 안내했던 젊은이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선원들은 이쪽 배의 선원들과 선뜻 어울리며 술잔을 들었고, 자기들이 아는 가장 웃긴 이야기가 다투어 튀어나오는 중이었다. 배는 딱 기분 좋을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이상할 것은 조금도 없었다. 다만 문득 생각나서 알테나 호가 있는 쪽을 돌아봤는데 어둠 탓인지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조슈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선동해서 선원들을 데리고 왔으니 같이 재미있게 노는 것도 의무였다. 달빛이 붉었다. 어쩌면 붉은 등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안개가 끼어 달이 붉게 보이는 것도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날씨가 흐려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막시민은 상갑판에 누워 팔베개를 한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묘하게 별이 드물다는 것이 마음 한 구석을 건드렸다. 그는 누은 채 아래 갑판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사람들의 목소리를 구별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파티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아직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막시민은 몸을 일으켰다. 아래 갑판에서 어떻게들 하고 있는지 보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옆에 놓아 둔 잔이 비었다는 사실이 어쩌면 더 큰 이유였다. 상갑판을 내려가기 직전에 그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엔 눈이 마주쳤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너무 어두운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밧줄을 뭉쳐 놓은 뱃전 아래 후미진 곳이었다. 소년 선원이었다. 열세 살 정도나 되었을까. "왜 그런 데서……." 먼저 말을 꺼내려다 막시민은 입을 다물었다. 이 배에서는 그가 손님이었다. 누가 어떤 구석에 있든 그가 참견할 일이 아니었다. 소년은 막시민을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웅크린 등과 팔을 펴지도 않았다. 겁먹은 토끼처럼 눈만 치떴을 뿐이었다. 막시민이 발견하기도 전부터 쳐다보고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견습 선원일 테니 벌을 받아 여기에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상관하지 않는 편이 좋을 듯했다. 일일이 끼어들어 동정심 많은 누군가로 보이는 것도 분명 안 내켰다. 별 일이 있을 턱이 없다. 앞을 지나쳐 아래로 내려가려고 했지만……. "거기서 뭘 해." 결국 말하고 말았다. 소년은 떨리는 턱을 멈추려 애썼다. 일부러 한숨을 깊게 내쉬기도 했다. 막시민은 다가가려다가 멈칫하고는 거리를 두고서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밑에서 재미있게들 노는 모양인데." 막시민은 자신이 좀 이상해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예감이 발달했다고 생각한 일은 없었다. 그는 추론을 즐기는 사람일 뿐이었다. 따져보면 그렇게까지 불쌍하게 생각할 상대도 아니었다. 그를 불러 앉힌 것은 분명 동정심이 아니었다. "무슨 일 있어?" "……." 순간적인 일이었다. 웅크리고 있던 소년이 갑자기 상체를 움직이며 팔을 뻗었다. 작은 손이 막시민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반사적으로 털어버리려 했지만, 다음 순간 저쪽에서 먼저 놓았다. 소년은 웅크렸던 구석으로 돌아가는 대신 무릎과 손을 짚고 엎드린 채 고개만 꼿꼿이 들어 막시민을 보았다. 막시민은 스스로도 의아해질 정도로 침착하게 물었다. "왜 그래." 상대가 대답이 없자 다시 분명하게 물었다. "왜 그렇게 떨었지?" 손목에 아직도 떨림이 남은 듯 느껴졌다. 소년은 무릎으로 기어 두어 걸음 나오더니 막시민 앞에 조그맣게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나 여전히 말은 없었다. "그럼 마음이 편해질 때까지 그러고 있어." 막시민은 다리를 풀고 자세를 편하게 했다. 한참 동안 그렇게 나란히 앉아 있기만 했다. 몇 번인가 쳐다봤지만 그때마다 눈이 마주쳤으므로 불편해져서 먼저 시선을 돌려버렸다. 마지막으로 소년을 보았을 때, 막시민은 소년이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조금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시선을 따라가니 자신의 어깨 언저리였다. 손을 뻗어 만져 보았다. 바이올린이었다. "이거?" 행장에 대충 찔러 넣고 다니는 낡아빠진 바이올린, 이렇게 갖고 다니는 것을 쥬스피앙이 보았더라면 펄쩍 뛰었을 바이올린, 카프리치오였다. 머리쪽이 조금 튀어나온 것을 보았던 모양이었다. "켤 줄 몰라." 물론 거짓말이었다. 손대고 싶지 않았기에 한 말이었다. 전부터 자주 켜던 물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쥬스피앙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은 후로 더더욱 손대기 어려워져버린 물건이었다. 한동안 느긋하게 바이올린을 켤 만한 여유가 없는 생활을 한 탓도 있었다. 소년이 계속 쳐다봤지만 막시민은 고개를 흔들었다. 소년은 떼를 쓰지 않았다. 그냥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렸을 뿐이었다. 잘 보니 여전히 오한이 이는 듯 어깨가 떨렸다. 막시민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뺨을 실룩거렸다. 실음 처음부터 줄곧 그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그 머릿속에 어떤 복잡한 생각이 뒤엉키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얼굴이었다. 막시민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관심을 갖게 할 만한 것이 없을까 했는데 마침 적당한 것이 잡혔다. 저녁 무렵 선원들이 꺼내왔던 카드 뭉치였다. 그게 어째서 막시민의 주머니에 와 있는가 하는 점은 둘째 치고, 그는 카드를 꺼내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소년의 기색을 살폈다. 뜻밖이었다. 카드놀이 정도는 다들 알고 있지 않나 생각해서 꺼낸 건데 소년은 난생 처음 보는 것처럼 신기해하는 표정이었다. 손을 내밀려다가 눈치를 살폈고, 좀 더 망설이던 손이 카드 뭉치를 흐트러뜨렸다. 넓게 흩어지자 카드의 문양들이 드러났다. 소년은 금화가 그려진 카드를 한 장 집었는데 보통 사람들이 카드를 다룰 때 그렇듯 손끝을 쓰지 않고 두 손으로 좌우를 꼭 쥐고 살펴보았다. 카드의 인쇄 품질은 조잡했지만 그림 자체는 훌륭한 편이었다. 물론 막시민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일이 없었지만, 이윽고 소년의 입에서 첫 마디가 나왔다 "아아… 신기하다." "카드일 뿐이잖아." 소년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한결 나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카드가 뭔가요?" 막시민은 어깨를 으쓱했다. 카드놀이는 기껏해야 심심풀이일 뿐 모른다는 사람한테 굳이 가르쳐 줄 정도로 중요한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것에 관심을 갖느라 오한도 가라앉은 듯하니 그만하면 카드는 역할을 다한 거였다. 그런데 소년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카드가 무너진 모르겠지만 이 그림은 알아요." "그림을 안다고?" "어떻게 손에 넣었어요?" 그건 설명하기가 애매했다. 막시민은 그냥 한쪽 손만 펴서 내보였다. 대답하기 싫을 때의 표현이었다. 소년은 혼자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우리 할머니가 갖고 계시던 그림이에요, 그려준 사람은 할머니 친구였죠, 예언 하는 사람." "이 카드 그림이?" "이렇게 오래 남을 줄은 몰랐는데, 요샌 이걸 뭐에 쓰죠?" 어리둥절한 문답이 되어버렸다. 막시민은 간단히 대꾸하려 했다. "장난감일 뿐이야." "장난감이라고요? 그런 것이 아닌데." 소년이 자세를 바로잡고 앉았다. 그러더니 심호흡을 했다. 고개를 들었으므로 그제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소년은 까슬까슬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로 주근깨가 박힌 창백한 뺨과 얇은 입술을 하고 있었다. 소년 선원다운 활기는 커녕 앓다 일어난 것처럼 시들시들했다. 특히 눈에 빛이 없었다. 소년이 쥐고 있던 카드를 내려놓고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잠시 눌렀다. 바람이 불어와 카드 몇 장이 후루룩 날렸지만 둘 다 집지 않았다. 막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년의 얼굴은 점차 변했다. 서서히 핏기가 돌고, 입술과 눈매가 두렷해졌다. 누가 붓을 들고 덧그리고 있는 것처럼, 마침내 아픈 기색이 가신 소년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조차도 달라졌다. "당신과 당신 일행은 왜 우리 배에 왔나요?" 막시민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두 팔을 약간 들었다 놓았다. "너희가 초대했잖아." "알아요, 왜 초대를 받아들였느냐는 이야기예요. 잘 모르는 배의 초대잖아요." "그건…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조슈아의 바보 같은 고집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설명하려니 좀 귀찮았다. 그런데 소년은 대답이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막시민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그러니까, 내 친구 중에 괴상한 녀석이 있어서야. 그 자식이 너희 배에서 나는 노랫소리를 들었다는 거야. 그 노래를 한 사람을 곡 만나보고 싶다고 우겨댔지. 그리 내키진 않았지만, 도무지 내버려둘 수 없는 녀석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긴 모두 반대했다면 뱃전에서 뛰어내려 헤엄쳐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났나요?" "만나지 못한 것 같던데, 그거야 뭐 너희가 안 가르쳐주니까…^." 소년이 갑자기 자세를 다잡았다. "어떤 노래였죠?" "몰라, 내가 들은 게 아니잖아." 소년은 생각에 잠겨 고개를 숙였다. 소년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문득 나쁜 예감이 스쳤다. "나갈 수 없어요. 당신들 중 누구도, 이 배에 사로잡힌 우리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해방되기 전에는, 영원히." "뭐?" 정말로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기에 되물었다. 소년이 되풀이했다. "이 배를 떠나지 못할 거예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소년이 오른손을 들어 돛대 꼭대기를 가리켰다. "저 위에 펄럭이는 것이 보여요?" 막시민도 위를 올려다보았다. 처음에는 활대에 밝혀 놓은 붉은 등 때문에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돛대 주위로 달이 스칠 즈음에야 겨우 보였다. 깃발이었다. 무늬 없는 검은색이었다. "왜 저런 것을 달고 있지?" 소년은 비밀을 말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땅 위에서 검은 깃발이 뜻하는 것과 같아요." 막시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검은 깃발은 사형을 의미했다. 그가 살던 곳에서는 사형 같은 일을 보기 힘들었지만 큰 도시에서는 사형 장면을 공개하지 않을 경우 검은 깃발을 대신 내걸도록 되어 있었다. 형은 집행되었다. 그런 의미였다. "어째서지?" 소년은 몸을 움츠리며 아래를 손가락질했다.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놀고 있는 갑판 쪽이었다. 막시민이 그들을 보니 아까는 알아채지 못했던 점이 눈에 띄었다. 그들의 머리나 옷깃에 검은 리본이 꽂혀 있었다. 장식처럼 자연스럽게, 상장으로 보기엔 너무 작은 리본들이 숨어 있었다. "누가 죽은 건가?" "네, 죽었어요." "사람이 죽었는데 밤새 떠들썩하게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너희들의 관습이냐, 그건?" "아뇨… 아니에요. 저들은 일부러 저러는 거예요. 두려움을 잊으려고, 자기들이 한 일을 술기운 속에 묻어버리려고요." 막시민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군. 상장은 애도의 의미인데 깃발을 처형을 뜻하니, 어느 쪽이 너희들의 진심인 거지?" 검은 깃발은 다시 밤하늘 속으로 숨어 버렸다. 소년이 속삭이듯이 말했다. "둘 다예요. 그를 죽이고, 그를 애도하는 거죠." 리체는 잠깐 쉬다 오겠다고 한 막시민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상갑판쪽을 올려다보았다. 돌아앉은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막시민은 뒤를 돌아보았다. 리체는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곧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을 보며 리체는 생각에 잠겼다. 막시민은 평소처럼 무표정했지만 기색이 달랐다. 직감만은 아니었다. 리체 자신도 조금 전부터 묻고 싶은 점이 있었다. 리체는 상갑판으로 올라갔다. 막시민은 열두세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과 마주 앉아 있었다. 주변에 카드가 몇 장 흩어져 있었지만 카드놀이를 했던 것 같진 않았다. 리체가 다가가자 소년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이어 막시민이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리체는 확신했다. 무슨 일이 있었다. 성격대로 질문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얼마간 막시민과 함께 다녔던 경험이 되살아나 입술을 멈추게 했다. 미녀 조수답게 신중하게, 그녀는 없던 쾌활함마저 가장하여 물었다. "여기서 뭘 해? 아래에서 다들 신나게 노는데." 막시민이 손짓했다. "이리 와." 리체는 두 사람 곁에 앉았다. 그리고 소년을 향해 먼저 말했다. "난 리체야." "알비예요." 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막시민이 말했다. "사람들은 어때?" "좋은 사람들이야, 조금 있다가 연극을 한대. 다들 술에 튀했으니 제대로 될는지 모르겠지만." "조군 녀석은?" "연극이라니 좋아하겠지 뭐, 배우들하고 얘기하는 것 같던데." "뭐 별다른 일은 없고?" "별다른 일이 있어야 되는 거야?" 막시민은 뜻밖으로 바로 대답했다. "응. 네가 보기에는 저 사람들한테 별난 점이 없었냐?" "글쎄. 굳이 말하자면 하나 있긴 해." 막시민이 자세를 고쳤다. "어떤?" "저 사람들 옷이 좀 이상하거든, 내가 알기로 저런 옷은 몇 백 년 전에나 입던 것들인데, 무대 의상이어서 그럴까? 하지만 평소에도 다들 무대 의상을 입고 있는 거야?" 막시민은 고개를 숙였다가 턱짓으로 소년을 가리켰다. "이 녀석의 말을 믿어야 할지 고민하던 참이었어, 네 얘기를 들으니 믿어야 할 모양이야." "무슨 얘긴데?" "저 아래를 다시 한 번 봐." 리체는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았다. 위에서 보니 조금 전 그들과 어울리던 때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태엽 인형이 움직이는 것 같달까, 그러나 금방 뭔가를 알아채긴 힘들었다. "내가 뭘 보아야 하는 건데?" "고물 쪽 구석에 놓인 것." 리체의 눈에도 띄었다. 검은 천을 씌워놓아 뚜렷이 알 수 없었지만 화물상자가 아닐까 싶었다. 사각이고, 상당히 컸다. 사람이 들어가 앉을 수도 있을 만한 크기였다. "저게 뭔데? 상자 아냐? 뭐 이상한 거라도 들었어?" "네가 보기엔 뭐가 들어 있을 것 같냐." "저렇게 짜 놓은 걸 보니 보통 짐 같진 않은데, 보물이라도 되나?" "너 같으면 보물을 대충 천 쪼가리로 덮어서 갑판에 놔두겠냐? 그것도 손님을 부르면서." 리체는 더 대답하지 않고 상자를 지켜보았다. 상자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상자를 중심으로 바라보아야 느낄 수 있는 움직임이 있었다. 사람들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자기장이 상자 주변에 작용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밀어내는 힘이었다. 사람들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걷다가도 상자 곁에 오면 재빨리 비켜났다. 한 걸은 정도 거리를 두고 상자 곁은 늘 비어 있었다. 누구도 상자에 손대지 않았다. 리체가 한 손으로 코와 입을 감싸며 생각에 잠겼을 때, 알비가 말했다. "저들은 저기에 손대지 않아요. 가까이 가는 것조차 두려워하죠, 그래서 다른 곳으로 옮겨 놓을 수도 없죠. 저기 놓인 그대로, 언제까지나 놔둘 수밖에 없죠. 만일 저주가 풀린다면……." "저주라고?" 리체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알비는 멈추는 기색 없이 말을 이었다. "다시는 저 상자를 보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도망쳐 버리겠죠. 하지만 그들은 배를 떠날 수 없으니까요." "항구에 들어가면 될 거 아냐?" "항구에 들어갈 수 없어요. 이 해역을 벗어날 수조차 없는 걸요." "무슨 소리야? 아까 듣기로는, 그러니까 어제 내렸던 항구에서 공연을 했다던데? 새로 실은 고기도 있댔고." 알비 대신 막시민이 말했다. "어제라고? 그럴 수 없지, 이 근처에는 하루 만에 갈 수 있는 항구가 없어. 사람이 사는 섬으로 가장 가까운 곳이 우리가 사흘 전에 떠나온 페리윙클이란 말이다." "우리가 내일 도착한다는 곳도……." "그래. 노을섬도 무인도지." 리체는 혼란에 빠져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다가 알비와 눈이 마주쳤다. 이때 알비의 표정은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화를 낸 것 같기도 하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기도 했다. "맞았어요. 어제가 아니에요. 아니, 어제이긴 하지만 아주 오래된 어제죠. 도대체 얼마나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그게 무슨 뜻이야?" "오늘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 있는 건지 난 기억할 수가 없어요." 억지로 말을 맺는 알비는 얼굴에 경련을 일으켰다. 리체는 알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두려움을 느끼고 몸을 조금 뒤로 뺐다. 막시민이 말했다. "이 녀석의 얘기로는 저들이 모두 까마득한 옛날에 죽었어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거야. 옛날 옷, 예스런 배, 묵은 관습, 모두 이 시대의 것들이 아니란 거야. 대체 몇 백 년이나 된 건지도 모르겠고, 물론 이 녀석도 마찬가지지. 한데 괴이하게도 이 녀석 혼자만 세월이 흐른 것을 알고 있어. 저들은 모르고." "아니, 잠깐만, 저들이 모두 죽은 사람이라고? 저렇게 멀쩡한데?" "죽은 사람이라고는 안 했어. 하지만 아직까지 살아있을 수는 없다 이거지. 몇 백 년은 된 모양이니까. 저 모습 그대로 산 건지, 죽은 건지 그것까진 모르겠지만." 리체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죽은 사람이라면, 그래, 시체는 아닐 테니 유령일까. 조슈아 덕택에 유령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직접 볼 수야 없었다. 기껏해야 목소리를 들은 것이 전부였다. 물론 보고 싶지도 않았고 볼 수 있다는 기대도 안했다. 하지만 만약에 볼 수 있다 해도 반투명한 그림자 정도일 거라고 상상했던 것 같았다. 옷깃이 닿고, 술잔을 주고받고, 이야기하고, 저렇듯 뚜렷한 실체로 오가고 있는 유령은 상상할 수 없었다. 막시민은 리체의 생각을 눈치 챘는지 고개를 저었다. "조슈아 녀석은 자기가 본 유령을 사람으로 착각하곤 했지. 예전부터 몇 번이나, 쥬스피앙 마법사의 집에서도 그랬지. 유령이란 별나게 생긴 게 아니라 보인다면 보이는 거고, 안 보인다면 안 보이는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조슈아는? 그렇다면 조슈아가 제일 먼저 알았어야 하지 않아?" "그 자식은 이미 알고 있어." 막시민은 갑판 구석으로 손가락을 뻗었다. "저 사람을 봐." 막시민이 가리킨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채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조슈아 곁에 서 있는 남자였다. 그들이 타고 온 배의 선원도, 이 배의 선원도 아니었다. 호리호리하게 말랐고 긴 머리를 뒤로 헐렁하게 묶고 있었다. 옷차림은 조금 기이했다. 남자는 조슈아와 이야기하는 배우를 보고 있었다. 뭐라고 실컷 떠들던 배우는 조슈아에 이어 남자에게도 악수를 청했다. 남자는 예를 표했지만 악수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저 사람이 누군데?" "정말 몰라? 너도 여러 번 만났잖아." "내가 안다고? 난 처음 봐." 리체는 잠수 후 했던 말을 낮게 되풀이했다. "처음… 봐." 목소리 속에 간신히 억누른 듯한 놀라움이 깔려 있었다. 리체도 깨달았던 것이다. 몇 번이나 이야기했던 사람. 한 번도 본 일은 없지만 분명히 아는 사람. 켈스니티였다. 8.죽은 광대의 노래 "광대는 어희들을 웃기는 사람이 아니야. 너희 대신 웃는 사람이지." 새벽 2시. 갑판에서는 즉석 공연이 한창이었다. 유랑 극단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한 만큼 이들은 어떤 곳에서든 즉석 무대를 차려 놓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돌투성이 황야에 세울 수 있는데 갑판 위라고 안 될 리 없었다. 흔들리는 것쯤은 문제되지 않았다. 대본도 필요 없다. 남부 아노마라드 사람이라면 다섯 살 꼬마부터 예순 살 할머니까지 누구나 알고 있는 연극 '메이! 메이!'이니까. 구전 설화나 다름없는 내용인데도 그들은 오직 자기들만이 보여 줄 수 있는 특별한 것이라고 뽐내며 말했다. 그게 말버릇인지 상술인지는 일단 봐야 알 수 있겠지만 말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연극 내용은 어느새 특별한 것이 되어갔다. 처음 말했던 대로 술기운이 내용을 제멋대로 바꿔 놓은 까닭이었다. 본래 '메이! 메이!'는 쌍둥이 자매 메이와 홀리가 이웃의 요니와 닐바 형제를 각각 조하하지만 형제는 둘 다 메이를 좋아하고, 두 사람 다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홀리가 메이 행세를 하며 만나주다 보니 어느새 둘 다에게 결혼 약속을 하게 되어, 메이와 홀리가 합심하여 어떻게든 한 사람이 홀리를 사랑하게 만들려도 동분서주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현재 자매는 둘 다 닐바를 뒤쫓는 중이고 요니는 무대 구석에 고꾸라져 잠든지 오래였다. 하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술에 취한 두 아가씨의 대사는 각본과 무관한 유치한 것으로 변해갔다. "사랑하는 닐바, 구운 사과에 꿀을 발라 드리겠어요. 한 입 베어 물어 보세요." "제 사랑만큼 정열적인 꿀사과를 거절하지 말아줘요." 닐바 역의 배우는 그나마 제정신이었으므로 주방에서 방금 갖고 나와 김이 펄펄 나는 사과를 깨물진 않았다. 그는 뒤로 물러나다가 잠자는 요나가 불쑥 내뻗은 발에 자빠질 뻔했지만, 간신히 무대 커튼을 부여잡아 가짜 칼이 바닥을 뚫고 들어가는 상황만은 모면했다. 그러나 그 대신 커튼을 묶어 놓았던 임시 기둥이 기우뚱거리다가 급기야 서까래 역할을 하고 있던 봉과 반쯤 분리되어버렸다. 배우 셋, 아니 자고 있는 사람까지 넷이 모두 커튼과 서까래에 깔릴 위기에 관객들이 쫓아가서 기둥을 얼싸안고 하나는 커튼을 뒤에서 끌어당기고, 그 와중에도 연극은 계속되어갔다. 이윽고 메이 역의 배우가 순서를 잊지도 않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술기운에 목구멍이 말라붙어 노래는 형편없었다. 목보다 귀가 늦게 취하는 것인지 관객들은 참지 않고 야유를 보냈다. "목소리가 다 갈라졌잖아!" "우우, 물이나 한 잔 마시고 와라!" 같은 극단 단원인 관객들이 소리치자 메이는 노래를 그치더니 갑자기 대본에도 없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노래나 춤 실력을 떠나 각본 없는 동네잔치라고 부르는 쪽이 어울렸다. 다행히 알테나 호에서 건너온 선원들도 술과 음식이 충분하니 아무래도 좋다는 분위기였다. 실은 대부분 곯아떨어졌기 때문이었지만, 불만을 갖는 사람은 없었고, 방해하는 바람이나 파도도 없었다. 그날 밤은 되풀이될 것 같았다. 수천 번이나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흐르다가 끝날 것만 같았다. 새로운 사람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그는 천천히 걸어 들어왔지만 화려한 차림새 때문에 금방 눈에 띄었다. 밝은 호박색과 암적색이 번갈아 들어간 헐렁한 튜닉이 발치를 덮었고, 코가 진 녹색 신발을 신었다. 머리에는 긴 꼬리가 둘 달린 광대들의 모자를 썼다. 솔기마다 검은색과 금색 바이어스가 들어간 모자는 하얗게 번쩍거렸다. 비쭉 선 모자 꼬리 방울이 달려 있어서 걸을 때마다 소리를 냈다. 그의 얼굴에는 색칠이 되어 있었다. 뺨과 이마가 하얗고, 눈가는 검었다. 그는 무대 가운데 서자 씨익 웃음을 머금었다. 도입부조차 없이 갑작스럽게 고음의 클라이맥스가 울려 퍼졌다. 광대가 아가씨를 사랑하는 것은 웃음거리 아가씨는 그에게 미소를 보내주지 않아 정성껏 부른 노래에 돌아올 대가는 상해버린 토마토와 깨진 달걀이 어울려 그리고 뚝 그쳤다. 그와 동시에 다른 소리들도 멎었다. 지진이라도 지나간 듯 고요해졌다. 광대옷을 입은 남자는 다시 한 번 씨익 웃었다. 이어 주위를 휘둘러보더니 춤을 멈춰버린 메이에게 위협적으로 팔을 휘두르며 절을 했다. 메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주춤거렸다. 무대에 섰던 다른 사람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코를 골던 요니 역의 배우가 어느새 깨어 후다닥 몸을 일으키더니 부르짖었다.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됐냐고?" 즐거운 일을 말하듯 목소리에 가락이 들어갔다. 그는 두 팔을 벌렸다가 하늘 높이 쳐들고, 다시 홱 내리며 외쳤다. "되살아왔다." 연인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광대의 역할 아가씨는 그를 보며 깔깔대고 웃어줘 그들에게 사랑의 노래를 불러 주고서 동전 서 푼을 주워 떠나는 것이 어울려 음은 경쾌했지만 목소리는 사나운 저음이었다. 노랫말은 우울했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소절에서는 지진 다음의 폭풍처럼 거칠어졌다. 이국적인 액센트가 울리고 끊길 때마다 망치로 바닥을 내리치는 듯했다. 훌륭함을 논하기에 앞서 너무 강렬했다. 그건 무대의 곡이 아니었다. 누구도 상대역이 되어 노래할 수 없을 곡이었다. 다시 노래를 그친 광대가 입을 커다랗게 벌리더니 소리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외쳤다. "자아, 나를 불러내지 않았나? 내가 이렇게 왔다. 너희에게 노래를 들려 주려고 이렇게 왔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광대는 낮게 킬킬댔다. 그 소리만이 바람소리 처럼 갑판을 훑었다. "자, 상대를 해라, 노래해라, 내게 어울리는 노래를 해라." 무대 위의 배우들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하나가 용기를 내어 재빨리 뛰어내리자 다른 두 사람도 무대에서 벗어났다. 광대는 그들을 잡지 않았다. 대신 가까이 선 까닭에 달아나지 못한 메이를 가리켰다. "노래해 줘, 내게 노래해줘!" 아가씨가 벌벌 떨기만 하자 그는 다시 노래를 불렀다. 광대가 아가씨를 사랑하는 것은 웃음거리 아가씨는 그에게 미소를 보여주지 않아 정성껏 부른 노래에 돌아올 대가란 상해버린 침묵과 깨진 예의뿐이란 건가 마지막 발음을 하며 그의 입을 일그러뜨려 이를 드러내더니 그르륵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들은 메이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광대는 고개를 흔들었다. 방울 소리가 짤랑거렸다. "아가씨가 울면 광대도 운다네, 아가씨가 울어버리면 광대는 쓰러져 몸부림친다." 광대는 고개를 번쩍 들더니 허공에 대고 뜻을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질렀다. 그의 성량은 실로 대단해서 돛대조차 부르르 떨리는 듯했다. 다시 고요해지는 순간 상갑판 쪽에서 가느다란 외침이 들렸다. "그러지 말아요, 클랭." 소년 알비였다. 무릎과 손목으로 엎드린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광대가 돌아보자 소년은 한 손을 가슴에 대며 말했다. "제발."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이 온다. 너희의 살점이 찢어지고 뼈가 부르지는 새벽이 온다. 너희의 입에 소금물이 쳐넣어지는 새벽이 온다. 웃던 너희의 턱은 밧줄에 감겨 주러질 것이다. 나는 수천 번이나 보아 왔다. 내게 그치라고? 내가 그치면 무엇이 달라지나?" 낮은 웅성거림이 퍼졌다. 새벽 축제의 기분 좋은 술기운 속에 난데없는 죽음의 예고가 들려온 것이다. "달라지지 않아요. 그러니 그만둬요." "달라지지 않으이 계속해야 돼, 노래해라, 춤춰라, 새벽이 올 때까지 울고 웃어라. 달은 지고 있어. 멀리서 돛줄 우는 소리가 난다. 나 혼자 웃으며 지켜볼 새벽이 가까이 왔다. "살도, 뼈도 남아 있지 않아요. 찢어질 것도 부러질 것도 없어요. 똑같이 이 배에 갇힌 당신과 우리가 언제까지 비웃어야 하나요?" "너희가 내 목을 돛대에 매단 후로 늘 그렇지, 너희는 울었지만 나는 울 필요가 없어. 난 한 번 죽었지만, 너희는 수천 번이나 계속 죽고 있지. 난 그저 이밤이 통쾌할 따름이야. 그러니 난 이 밤을 즐겨도 돼. 오늘은 특히 그래도 돼. 오늘 누군가가 날 불러내어 노래할 수 있도록 해줬어. 노래, 참 오랜만의 노래지. 그러니 너희도 노래하라고, 날 불러낸 자는 누구지? 그가 노래할 텐가?" 그 때 관객들 틈에서 조슈아가 일어섰다. "내가 불러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보려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광대는 누구도 사랑해선 안 되지 그럴 자격이 없지 아가씨는 그에게 꽃을 주지 않지 손수건도 안 주지 그날 밤 당신은 아가씨를 엿봤지 아가씨의 작은 방 두 사람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순간 불처럼 타는 마음 누르지 못해 당신은 취했지 달디 단 향에 머리가 아찔해졌지 눈 멀어버렸지 아무 것도 보지 않을 수 있도록 광대와는 전혀 다른 음색으로, 전혀 다르게 압도하는 곡이었다. 현란한 기교나 장엄함도 없이 농담처럼 가벼운 노래였는데도 그랬다. 처음에는 빈정거리는 어조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같은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자조적으로 변하고 비틀렸다. 광대는 누구도 사랑해선 안 되지 그렇게 되뇌었지 아가씨는 그에게 말을 건네지 않지 초대해주지 않지 어제 또 당신은 아가씨를 엿봤지 주 사람의 작은 방 뜨겁게 구운 사과에 발라 놓았던 불처럼 타는 꿀 머금은 순간 녹여버리겠지 그 입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달콤한 상처가 그대의 죄를 깨끗씻어 주리라 광대는 누구든 울게 해선 안 되지 웃게 해야 하지 아가씨는 당신에게 웃어주지 않지 그래선 안 되지 오늘은 당신이 아가씨를 만날 차례 세 사람의 작은 방 웃지 않는 두 사람을 위해 준비한 익살스런 노래 불러줄 순간 당신은 되뇌지 입이 없는 당신도 여전히 사랑스러워 불편은 있겠지만 아주 작은 몇 가지 불편은 있겠지만 그가 교묘하게 감정을 변화시키는 탄력을 모두가 이해했다고 할 순 없었다. 그러나 노래가 이끄는 대로 마음이 끌려가버렸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조슈아는 끝부분에 실렸던 감정을 살려 마치 가면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음에 듭니까?" 광대는 조슈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수천 번이나 보았던 장면 속에 나타난 '없었던 자'였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너는 누구지?" "초대받은 손님입니다." 조슈아는 한 손을 내밀어 보이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신을 다루는 자입니다." "나를 다룬다? 나를 불러냈다? 무슨 뜻인가?" "알게 될 겁니다. 그럼 계속하세요.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을 테죠. 노래를 하고 싶은 것이라면 하시고, 듣고 싶은 거라면 계속 해드릴 겁니다." "너의 그토록 훌륭한 노래는 날 비웃는 건가?" "그렇지 않습니다. 화답하는 거죠. 난 당신의 노래를 정말로 좋아합니다 부디 살아 생전의 재치를 되찾으셨으면 하는데요." 항구의 아가씨 잔을 받지 아니하니 뱃머리 마녀께 그 술 다신 올리고 나무로 된 뺨에다 키스해 드리고 빈 술병은 바다에 쳐넣어 버렸네. 남은 술은 물고기놈이 쳐먹었으니 내일 낚은 생선이 얼근히 취했거든 내 술 먹은 놈인 줄 알고 건져다가 술 싫다는 아가씨한테 갖다드리라. 조슈아가 한 노래를 기억하는지 광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생전의 일 따윈 잊어버렸어." "그럴 리 없습니다. 죽은 자는 생전의 기억으로 살아가기 마련이고, 더구나 당신은 똑같은 일을 수천 번이나 보고 있으니까요. 죽은 후의 시간 따윈 전혀 흐르지 않았죠. 어쨌든 재치 있는 노래를 부르실 수 없게 됐다니 제가 대신 불러드릴까요? 제 노래 쪽이 훨씬 훌륭하니까 이쪽도 괜찮겠죠?" 광대는 조슈아를 쏘아보았다. 색칠된 얼굴에 어린 것이 분노인지 공포인지 알 수 없었다. 검은 것은 분노, 흰 것은 공포. "너의 노래는 내가 지금껏 들어본 어떤 노래보다도 훌륭하다. 네가 날 비웃고 있다 해도 말이야. 하지만 상관없다. 네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네가 나타났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진 않을 거야." "달라지지 않길 원하는 모양이죠?" "되풀이되는 건 내가 죽은 뒤의 상황뿐이니까, 내가 도로 살아나는 것도 아닌데 이들에게 평화가 주어져선 안 되지, 안 되고말고." 그즈음 취기가 가신 갑판에서 사람들은 얼굴을 마주보며 침묵으로 묻고 있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나 것이냐고, 이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는 무슨 의미냐고, 그들 중 몇은 소리 내어 물었다. "그는 죽었어, 그런데 어째서 저기 서 있지?" "우리가 죽는다는 말은 다 무슨 소리지?" "되풀이되다니, 무엇이 말인가?"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조슈아의 목소리만 다시 울렸다. "당신의 복수심이 바닥이 없기 때문에, 억지로 이 상황을 견디고자 하는군요. 실은 당신에게도 전혀 달갑지 않을 텐데, 그렇지 않은가요?" 광대가 대답하지 않자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면, 달아날 길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억지로 이 상황을 즐기려 하는군요. 이미 수백 년 전에 바닥난 복수심을 짜내어서 어쩔 수 없이 쳇바퀴를 굴려야 하는 자신을 위로하고 있군요. 어떤가요? 어느 쪽이 진심에 가까운가요? 당신의 진심을 들을 수 있을까요?" 광대는 고개를 홱 돌려 알비를 보았다. "네가 저 자를 불렀나?" 알비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우연이었어요. 그들의 배가 지나간 건." "우연이라고? 우연 따위가 어찌 진심을 물을 수 있겠나? 우연 따위가 어찌 진실을 볼 수 있지? 우연 따위가 어찌 나를 불러낸단 말인가! 우리의 운명이 우연이 아닌 한, 우연 따위가 무엇을 해결해 줄 수 있겠나? 우리가 처한 이 꼬락서니가 우연이라면 여기에는 죄도 복수도 존재하지 않아. 난 내 운명을 가볍게 만들지 않겠다. 비록 지옥에 갇힌 꼬락서니라 해도 너희의 죄도, 내 복수도, 우연처럼 가벼운 걸로 만들지 않겠지." 조슈아가 말했다. "당신이 지금 한 말이 내가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님을 반증합니다. 난 유령이 아니고, 이 상황은 꿈이 아니니까요. 당신을 불러내어 진심과 진실을 묻는 나는 진지한 존재입니다. 만일 내가 당신들의 쳇바퀴에 변화를 준다면 그건 가벼운 일일 수 없습니다. 가벼운 우연일 수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나는 필연적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우리는 수백 년일지도 모를 세월을 넘어 이 자리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왜일까요?" 그동안 조용히 술렁이고 있던 사람들은 드디어 무언가를 물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 듯했다. 술에 취해 쓰러져 있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또렷한 눈이 된 요니가 입을 열었다. "너희는 마술쟁이들인가? 죽은 자를 되살려서 우리에게 겁을 주고 그 대가로 뭘 얻어가려는 거지? 최악의 일이란 또 무슨 소리야? 너희는 뭘 알고 있지?" 알비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사람들은 고개를 돌렸다. "제가 다 말해 줬어요." 알비는 엎드려 있던 자세를 풀고 천천히 상갑판에서 일어섰다. "뭘 말해 젔느냐고요? 우리가 저지른 말도 안 되는 일에 대해서죠. 우리를 가르치고 이끌었던 위대한 광대, 이 배의 주인이었던 사람을 돛대 높이 매단 일에 대해서죠. 죽음이 두려워서 친구를 희생양으로 바친 일에 대해서죠. 그렇게 하면 자기들은 살아날 줄 알고서 우애를 배신한 일에 대해서죠. 그러고도 결국 살아나지 못해 훨씬 더 비참하게 죽었던 일에 대해서죠." "죽다니, 누가 죽었단 말이야?" "우리 모두." "넌 미쳐버린 거냐? 우린 아직 죽지 않았어. 언젠가 죽긴 하겠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항변하면서도 요니는 광대 쪽을 흘끔흘끔 보았다. 그가 저 자리에 멀쩡히 서 있는 이상 어떤 말도 농담이 아니었다. 그들의 관대, 클랭 다 페르부르는 오늘 아침 돛대에 목이 매달려 죽었으니까. 그런 그가 나타난 이상 어떤 괴이한 이야기도 비웃을 수 없었다. "아뇨, 우리 모두는 죽었어요. 다만 우리가 운명의 바퀴 굴레에 잘못 끼어 오늘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죠." 홀리 역의 여배우가 말했다. "꼬마 알비, 네가 언제부터 예언을 하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체 우리가 왜 죽는다는 거야? 그거라도 들어 보자." "붉은 돛이죠." 그 말만으로도 충분했다. 홀리는 억지로 평온함을 가장하며 물었다. "언제?" "이 새벽이 끝날 때." "그럴 리 없어!"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홀리와 같았다. 알비는 슬픈 눈으로 그들 모두를 둘러보았다.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우리는 수백 년 전에 죽은 사람들이에요. 그대로 죽어 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한 자들이에요. 알 수 없는 힘이 우리를 깨울 때마다 우린 새로 태어난 것처럼 죽음의 순간을 되풀이해야 했어요. 몇천 번이나, 여러분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저는 모든 것을 기억한 채." "네 말은 우리가 마법에 걸렸단 말이냐?" "마법이든 저주든, 뭐라 불러도 똑같겠죠. 몇 시간만 지나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돼요. 우리 모두가 또다시 죽고 나면 잠깐 동안은 같은 기억을 갖게 될 거예요. 함께 울게 될 테죠. 또다시 알 수 없는 힘이 우리를 깨울 때까지는……." "왜, 왜인지 말해봐! 알 수 없는 힘은 도대체 뭐야? 왜 우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그리고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는 거야?" "이 일이 되풀이되는 시점은." 알비는 꼼짝 않고 서 있는 광대를 바라보았다. "오늘 밤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클랭이 죽은 이후이기 때문에 우린 우무 것도 돌이킬 수 없어요."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새벽이 오기까지는 고작 한 시간이 반가량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한 사람이 중얼거렸다. "난 믿을 수 없어……" 알비 뒤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일어섰다. 막시민이었다. "믿을 수 없는 건 우리 쪽도 마찬가지야. 너희는 아침에 그런 짓을 저질렀으면서 밤에는 파티를 열어서 술을 마시고 심지어 우리를 초대하기까지 했어. 다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막시민은 갑판으로 이어지는 계단 쪽으로 두걸음 내딛었다. "우리가 보기에 너희는, 어느 시대인지 몰라도 우리와 같은 때 사람들은 아니야. 옷도, 배도, 먹는 요리도, 그리고 너희가 특별히 보여준다는 그 연극, 우리한테는 전래 동화나 마찬가지라고." 홀리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우리연극을 너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알고 있고말고, 어려서는 인형극으로, 커서는 동네잔치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연극인데 모를 턱이 있겠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너희가 돌아다녀다는 항구들 얘긴데, 이 근처에는 이미 항구가 없어, 예전에 다 사라졌어. 전부 무인도라고. 지금 이 해역에서 사람이 사는 섬은 오직 하나, 페리윙클밖에 없단 말이다." 쉽사리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였기에 몇몇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다른 몇은 주위의 반응을 보려 했으며, 나머지는 발끈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어제까지 멀쩡히 있던 항구가 가긴 어딜 간다는 거야?" "너희야말로 모두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냐?" 막시민은 조슈아 쪽을 보며 눈빛을 주고받더니 말했다. "그럼 비밀을 보라고" 막시민은 상갑판에서 성큼성큼 내려와 사람들 사이를 통과했다. 그리고 고물 쪽에 놓여 있던 상자 앞에 섰다. 누군가가 말라기도 전에 그의 손이 섬은 천을 젖혔다. 커다란 뚜껑이 붙은 상자가 드러났다. 놋쇠 경첩이 달려 있었으나 자물쇠는 없었다. 대신 노끈이 친친 감겨 있었다. 막시민이 뚜껑을 두드리자 속이 빈 듯한 소리가 울렸다. 요니가 외쳤다. "그걸 건드리지 마!" "왜? 이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뭔데 그래?" 다른 사람들이 움직여 막시민의 주위를 둘러쌌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했다. 막시민과 리체가 상갑판에서 관찰한 그대로였다. 두어 걸음 정도 사이를 두고 사람의 장벽이 만들어졌다. 막시민은 노끈을 당겨서 풀어버리고 다시 상자 뚜껑을 짚었다. "어차피 와서 날 잡지도 못하잖아. 그러지 말고 안에 든 것이 뭔지나 말해 봐. 열어서 확인해보기 전에." 또 다른 사람이 사정했다. "제발, 열지 마시오." "여는 것을 원치 않거든 그냥 말하면 된다고. 뭐가 들어 있냐고 묻고 있잖아." 늙은 선원이 말했다. "만약에, 만에 하나 우리가 진자로 저주를 받아 꼬마 알비의 말대로 같은 날 밤을 되풀이하고 있는 거라면… 그 상자를 열어봤자 너에게도 좋은 일은 없을 거다." 막시민은 예상한 듯 바로 되물었다. "아아,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나? 이게 원인일 것 같단 말이지? 그렇다면 이 안에 들어 있을 건 뻔하겠군. 열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데 말이야. 그래도 궁금한 것이 있어. 주체가 누구지? 이런 대단한 마법을 걸 자가 도대체 누구지?" 그 때 무대 구석에서 웅크렸던 메이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저기, 크…클랭? 말해 봐요, 당신인가요? 당신이 우리를 저주한 건가요?" 광대는 고개를 흔들며 막시민을 보았다. "난 모른다. 넌 알고 있단 말인가?" "글쎄, 직접적 원인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그래서 묻는 거야. 너희가 최악의 일을 저질렀다는 건 알겠는데, 그런 일을 저지른 놈마다 모두 너희처럼 최악의 벌을 받게 되진 않는단 말이야. 피해자가 저주를 퍼붓는다고 해서 모두 이런 꼴이 된다면 세상에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놈은 하나도 없게?" 아무도 대꾸하지 못하자 막시민은 두 손으로 뚜껑을 잡으며 외쳤다. "아직도 못 믿는 분들에게 증거를 보여드릴까?" 막시민은 뚜껑을 힘껏 열어젖혔다. 경첩은 이미 삭아 있었기에 뚜껑은 가볍게 분리되었고 덜컹, 소리를 내며 갑판에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둘러쌌던 사람들이 우르르 뒤로 물러섰다, 막시민은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은 텅 비어 비어 있었다. "아아……." 납득하지 못한 사람들이 이윽고 떨면서 다가왔다. 그들의 눈에도 텅 빈 상자 속이 보였다. 하나하나 둘러싸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더 다가올 틈조차 없어졌다. 잠시 후 돌아선 사람들은 공황에 빠진 눈을 하고 있었다. "이럴 리가 없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정말로 살아 있어났단 말인가?" "분명히 죽었는데… 내가 확인했는데……." "아… 난 꿈을 꾸는 기분이야……." 알비가 상갑판에서 내려왔다. 그는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와 상자를 들여다보았다. 상자는 완전히 비어 있지 않았다. 바닥에 먼지 가루와 함께 낡아빠진 빈 상자와 종이 비슷한 것이 흩어져 있었다. 알비는 허리를 굽혔으나 손이 산자 바닥에 닿지 않았다. 막시민이 대신 팔을 뻗어 종이 뭉치를 집었다. 집고 보니 일반적인 종이와는 촉감이 좀 달랐다. 어쨌든 그는 알비에게 건네주었다. "아니에요." 알비는 종이를 모아 쥐더니 다시 막시민의 손에 쥐어 주었다. 막시민은 이해할 수 없는 눈을 했다. "당신한테 필요한 거예요." 막시민은 종이를 들여다봤다. 한 페이지 넘기자 얼른 이해하기 힘든 기호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뒷면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에 대충 끝까지 넘겨보았다. 그런데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비록 오선도 없고 음표나 쉼표 등을 표시하는 방법도 다르지만… 이건 악보였다. 더 물어볼 틈이 없었다. 광대가 상자 앞으로 다가오자 모두 뒤로 물러섰다. 옷깃조차 닿고 싶어 하지 않는 몸짓이었다. 광대는 개의치 않고 상자 속을 들여다보더니 킬킬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사라졌어. 깨끗이 먼지가 됐어. 이미 까마득한 옛날에 그리 됐겠지. 아무 것도 돌이킬 수 없다 했나? 정말이야, 난 이제 먼지야. 하지만 너희는 먼지가 비웃는 존재에 불과하지. 너희는 내가 저주를 내려서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난 그런 방법 따위 모르고, 물론 너희의 저주를 풀어줄 힘도 없고, 내가 벗어날 방법도 몰라. 오직 비웃을 줄 알 뿐이야. 광대는 웃는 게 직업이지. 웃지 않는 자들 대신 웃어대는 자라고, 그러니 실컷 웃어 주겠지. 지긋지긋하더라도, 아니 그것조차 느낄 수 없는 너희들이지만, 우린 알비가 말한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할 때마다 깨어나 이 지루한 연극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거야!" 조슈아가 말했다. "포기하기엔 이르죠. 추리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당신의 시체는 먼지가 됐는데 이 배는 상상 이상으로 멀쩡하군요. 당신의 시체는 이 배 안의 모든 것들 중 유일하게 저주를 비켜간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이 저주는, 마법은 어디에서 시작됐으며 어디까지 닿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이제부터 당신들이 죽으려면 죽이는 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무슨 죄로 당신들을 수천 번 죽이고 있습니까? 왜 그들조차 저주에 포함됐을까요?" 광대 클랭의 원한 때문이라면 그 후 이들을 죽인 자들조차 몇백 년 동안 떠도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의문은 분명했으나 아무도 답을 찾지 못했다. 한참 동안 바람이 돛을 두드리는 소리, 갑판의 물건들이 느리게 구르는 소리만이 들렸다. 사람들은 자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벽별이 뜰 시각이 멀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믿지 못하더라도 사실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그들이 죽거나, 이 밤은 지나갈 것이다. 그렇다면 이 배에 타게 된 손님들은? "우리라도 이 배를 떠나야 하는 거 아냐?" 알테나 호의 선원 하난가 말했을 때, 고물 쪽에서 명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 것 같은데." 사람들의 눈이 쏠렸다. 막시민이 어느새 고물에 올라서 있었다. "뭘 알았다는 거지?" "딴 게 뭐 있겠어? 당신들이 저주에서 풀려날 수 있는 방법, 그것 말고 알고 싶은 거라도 있나?" 잠깐 사이를 두고 술렁거림이 퍼졌다. 그 말은 정곡이었다. 누가 마법을 걸었든, 왜 걸었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벗어날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이윽고 몇 명이 고물 쪽으로 급히 다가갔다. "말해 봐, 어떻게 하면 되지?" "어떻게 피할 수 있다는 거지?" "알비한테 들었는데 당신들을 뒤쫓는 자들은 해적이라지? '붉은 돛'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잔인한 놈들이란 말이지? 당신들은 그들이 미워하는 저 광대를 목매달면 너희만이라도 용서받을 줄 알았단 말이지? 그런데도 그놈들은 밤새 너희를 추격해서 끝내 모조리 죽이고 말았다. 그런 이야기란 거잖아. 그래서 너희는 그 밤을 계속해서 되풀이하고 있는 거고, 매번 똑같았다 이거지. 자, 그러면 알겠지? 너무 간단하잖아." 사람들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막시민은 인상을 찌푸렸다가 소리쳤다. "그 해적놈들을 물리쳐버리면 해결되는 거 아냐?" 사람들은 얼른 납득하지 못했다. 너무 뚜렷한 나머지 선뜻 동의하기 힘든 말이었다. 아니, 분명한 만큼 불가능한 이야기이기도 했기에, 이윽고 요니가 고개를 저었다. "말장난일 뿐이야. 이기면 정말 해결되는 건지 이해가 잘 안 되지만 그보다 우리가 어떻게 해적을 상대로 이긴단 말이냐, 그것도 붉은 돛을. 어차피 안 된다고." 그러자 한 명이 광대를 흘끔 보며 말했다. "이길 수 있었다면… 그런 짓을 저지르지도 않았겠지." 메이가 갑자기 광대 앞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와락 무릎을 꿇으며 두 손을 마주잡았다. "저기, 클랭, 제발, 우리를 도와주세요. 미안해요, 죄송해요, 다 잘못했어요. 우리가 나빴어요. 용서가 안 되겠지만… 그래도 도와주시면… 정말로… 난 너무 무서워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죠?" 얼마 안 가 더 많은 사람들이 달려갔다. 그들은 메이와 똑같이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상대를 설득할 구실 따윈 없었다. 그들은 마을 모퉁이의 큰 나무나 우물에 대고 소원을 빌듯 광대 앞에서 외쳤다. "도와줘요, 클랭. 옛 일을 생각해서라도!" "이제 그만 저주를 풀어주시오. 몇천 번이라면 충분히 분도 풀렸을 텐데……." "난 당신을 죽이는 걸 반대했소! 당신도 기억하고 있을 거요!" "당신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니까 힘이 있을 거 아니오? 우릴 도와줄 힘이 있을 거야, 분명! 저 해괴한 예언을 제발 멈춰주시오!" 막시민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흐트러진 사람들 사이를 뚫고 다가오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 사이를 교묘하게 피하며 누구와도 몸이 닿지 않았다. 고물로 올라와 눈앞까지 모자 막시민이 낮게 말했다. "당신……." "그래요, 납니다." 켈스니티는 막시민이 그동안 목소리만으로 상상해온 것과 비슷한 미소를 보였다. 알 수밖에 없는 것이 막시민은 예전에 조슈아가 그려준 그림을 보았던 것이다. 그는 그 그림과 정말로 같았다. 단순히 외모뿐이 아니라 풍기는 인상마저도. "직접 만날 수 있게 되어서 기쁩니다. 잠깐뿐이겠지만." "아아, 그래. 그렇다고 해 두자고." 막시민은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불친절하게 대꾸했다. 다시 안 보이게 될 것이 뻔하니까, 잠깐 사이에 친해지거나 해서 나중에 골치 아프게 되고싶지 않다고 억지를 부리는 중이었다. "더 긴 인사를 나누고 싶지만 그럴 여유가 없군요. 새벽이 멀지않았으니까요. 우선 말하자면 리프크네 군의 의견은 확실히 타당합니다. 어쩌면 핵심이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저들은 어차피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지만 방법은 있습니다." "해적을 상대로 필승 전략 따위라도 있는 건가? 대단한데, 당신은 사제라고 들었는데 말이야." "사제이긴 하지만, 페리윙클 사람이기도 합니다." 막시민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눈만 굴렸다. 켈스니티는 빙그레 웃었다. 웃으니까 눈이 몹시 가늘어졌다. "페리윙클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그다지 우아한 이름은 아니지만, 어쨌든 전부 다 해적이죠." 어느새 다가온 조슈아가 덧붙였다. "더구나 켈스는 해적 공작 이카본 폰 아르님의 참모이자 오른팔이었지 안 그래?" 켈스니티가 대답했다. "네, 그게 바로 해답입니다." 9. 돌아온 맹약자들 "우리의 맹약을 보살피는 이가 있다면 그날 망새하며 대접에 담았던 바닷물이 소금이 되어 내 눈에 들게 하소서." 새벽별이 떠올랐다. 이 계절에는 새벽별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짧았다. 잠깐 만에 하늘이 밝아지고, 그러면 묻혀 버렸다. 일부러 지켜보지 않으면 깨닫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이날 수많은 사람들이 새벽별을 보았다. 지평선에 떠오를 때부터 흐려지는 순간까지 이날 고향의 별 호를 탄 사람들에게 그 별은 두려움이었다. 음악도 술도 사라진 갑판은 횅했다. 전날 밤 놀이의 흔적이 을씨년스러움을 더했다. 곳곳에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와 무대 소도구 등이 굴러다녔다. 사람들도 그들의 일부인 양 아무 데나 맥없이 앉아 있었다. 누가 보아도 곧 생사를 건 전투를 시작할 사람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저기, 켈스. 당신 얼굴을 진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저기, 생각보다 젊네요." 평소라면 유령이라는 이유로 어쨌든 겁을 냈을 텐데, 리체는 묘하게 켈스니티를 보며 안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모조리 유령뿐인 배에서 아는 유령이 하나라도 있는 쪽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리체의 말을 들은 켈스니티는 평소라면 희미하게 웃고 말았을 텐데 뜻밖으로 되물었다. "어떻게 상상하셨기에?" "저어, 목소리로 들을 땐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조슈아한테 할아버지뻘 정도 된다니까, 뭐, 그렇게 생각했을 때 상상되는 거 있잖아요?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했던 건 아니고, 그런 느낌도 있었다, 뭐 그런 얘기예요." 켈스니티의 대답은 짧았다. "아아, 네." "저기, 혹시 토라지셨어요?" "네? 아뇨, 그럴 리가." 둘의 시시한 대화를 들으며 막시민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자 켈스니티가 돌아보았다. "그보다 리프크네 군, 아브릴 양이 맡아야 하는 역할에 대해 설명해 드렸나요?" 리체는 깜짝 놀랐다. "네? 제가 뭘 해요?" "아무 말도 못 들으셨나 보군요, 괜찮습니다. 제가 곧 알려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니, 이봐, 나한테 말해주라고 한 적도 없으면서 왜 내가 할 일을 대신 해주는 것처럼 말하는 건데?" 고물 쪽에서 사소한 다툼이 오가는 동안 조슈아는 상갑판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알비가 도로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알비 앞에 섰다. 그 옆에는 광대가 앉아 있었다. "날 봐요." 광대는 조슈아를 외면했으나 알비는 막시민을 만났을 때보다 한결 나아진 눈으로 조슈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입술이 새파랬다. 조슈아는 알비를 내려다보며 온화하게 물었다. "말해 봐." "무엇을요?" "진심 말이야, 네가 원하는 것, 원치 않기도 하는 것." 조슈아가 곁에 앉자 알비가 말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 "넌 이 상황이 끝날 수 없다고 말했지만 우린 끝내려 하고 있어. 그렇다면 기뻐해야 할 거야. 갑판의 자들은 믿지 못해 저러지만 너는 아니잖아? 그런데 넌 기뻐하지 않아." "아뇨, 전 기뻐요……." "네 얼굴에는 그렇지 않다고 씌어 있는데." 알비는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조슈아는 더는 다그쳐 묻지 않았다. 그저 기다렸다. 알비는 두 손으로 해쓱한 뺨을 감싸 쥐었다. 핏기가 돌아왔다가 다시 사라졌다. 이윽고 한숨과 함께 말이 나왔다. "전… 저만은 살아 있거든요." "알고 있었어." 알비는 눈을 크게 떴다. "알고 있었다고요?" 조슈아는 그제야 미소를 보였다. "난 영매야, 산 사람을 유령으로 보는 일은 없어. 가끔 유령을 산 사람으로 착각하는 일은 있지만, 살아있는 널 알아보고서 그래서 너만이 제정신이구나 싶었어." "영매라고요? 그렇다면, 당신이……." 그래, 내가 클랭 다 페르부르를 불러냈어." 알비가 속삭였다. "왜 그랬죠?" 다시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던 광대가 고개를 들었다. 조슈아는 둘 사이로 다가앉으며 그와 눈을 마주했다. 광대가 말했다. "네가 나를 다룬다고 했지? 나를 불러냈으니, 돌아가게 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 "당신은 이 배 주위를 줄곧 떠돌고 있었죠. 이 배에 탄 자들의 운명을 지켜보면서, 어젯밤 내 배에 당신의 노래가 들려왔죠. 어쩌면 나만이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처음엔 유령이 부르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정도로 흥겨운 노래였죠. 난 그 사람이 보고 싶었어요. 당신도 알겠지만 난 평범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아니죠, 그런 내가 당신의 노래를 듣고 당신을 찾아 이 배로 건너왔단 겁니다. 결국 당신 때문에 나와 동료들까지 이 배에 묶인 신세가 된 거고요. 한 가지 물어봐야겠네요." 광대는 대답하지 않았고, 조슈아가 말을 이었다. "왜죠? 당신은 이 배를 떠날 수 있었는데, 왜 떠나지 않은 거죠?" "떠날 수 없었다. 나 또한 이 배의 운명이 묶인 몸, 저들이 죽음을 반복한다면 나는 죽은 그 상태로 묶여 있다." "아니야, 당신은 떠날 수 있었어요." "네가 그렇게 해줄 수 있다는 뜻인가?" 광대 클랭의 눈동자에 언뜻 생기가 감돌았다. 옛 동료들을 윽박지를 때조차 무표정했던 눈이었다. 일말의 흥미가, 빛이 지나갔다. "꼭 내가 그래야 할 필요는 없어요. 물론 당신은 유령인 상태로 이곳을 떠날 수는 없죠. 하지만 소멸을 택하면 되니까, 의식은 사라지겠지만, 최소한 이 좁은 곳에서 풀려나 이윽고 새롭게 태어날 수도 있을 테죠. 설마 그럴 수 있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겠죠?" "난……." "복수심 때문이었다는 얘긴 그만둬요. 난 당신을 내 몸에 강령시킬 수도 있으니, 당신이 원한에 사로잡혀 쉬지 못했던 거라면 당신의 혼은 지금과 좀 다른 상태일 거예요. 그런 혼은 느낌부터가 다르니까." 광대가 고개를 흔들었다. 방울이 잘랑거렸다. "아니야, 난 떠날 수 없었다. 나도 이유는 알 수 없어. 하지만 이 마력은 내가 쉬는 것조차 막고 있어. 내가 쉬고 싶은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지만, 네 이야기는 낯설다.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네가 해줄 수는 있는 건가?" 조슈아는 고개를 숙였다가, 말했다. "솔직히 한 번도 그렇게 해 본 적이 없군요. 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기는 하는데 섣불리 시도하기가 좀 겁난달까." "할 수 있다면 해 다오. 난 이제 더 이곳에 있고 싶지 않다." 알비가 조그맣게 말했다. "당신은 그가 수백 년 전부터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실컷 하도록 해 주었어요. 이제 그는 더 하고 싶은 말이 없을 거예요." 광대는 알비를 돌아보다가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 "꼬마 알비,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조슈아는 머뭇거리다가 웃었다. "글쎄, 그럴 작정은 아니었는데, 난 당신들이 과연 무슨 일로 이러고 있는지 궁금했거든요. 그걸 알려면 당사자들끼리 만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고요." 알비가 말했다. "그래요, 그 말씀이 맞아요. 우린 모두 잘못했죠. 클랭이 먼저 우리를 작게 배신하고, 우린 그에게 크게 보복했어요. 클랭이 화를 냈을 때 무서웠지만, 한 번은 그도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지도 몰라요, 우린…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처지니까. 우리가 왜 저주받게 됐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하지만 우린 저주받아 마땅한 일을 했죠. 그것만은 분명해요. 그런 짓을 했다면 누구라도 벌을 받아야 될 거예요. 누가 벌을 줬는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죠……." 알비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다담하게 말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두려워했다. 다가올 어떤 일을. 조슈아가 물었다. "넌 어떻게 살아남았니?" "활대에 걸렸던 밧줄… 클랭의 목을 달아맸던 밧줄을 잡고 돛 속에 숨어 있었어요. 아주 긴… 시간이었죠." "그러고서 사람들이 죽는 것을 봤구나." 셋 다 말이 없었다. 이제 피할 수 없는 일을 말해야 할 때였다. 먼저 입을 열 사람은 조슈아였다. "어떻게 될지 알고 있는 거지?" 알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슈아의 입에서 약한 한숨이 흘렀다. "세상에는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지만, 너 같은 방식으로는 아니겠지. 하지만 힘들게 살고 있다 해서 당장 삶을 그만두려는 사람은 드물거야. 갑판의 저들한테는 굳이 물을 필요를 못 느끼지만, 너만은 아니야. 진심으로, 이제 끝내도 좋다고 생각해?" 알비는 조슈아의 눈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눈은 맑았다. "아주 오랫동안…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결단을 내렸다고 누구나 편안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말하면서도 알비는 떨고 있었다. 그 때 광대가 말했다. "꼬마 알비, 넌 내가 살아 있을 때부터 날 무서워했다. 그런 네가 아까는 대담하게도 말하더군, 이제 아무 것도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내 목을 맸던 동아줄을 붙들고 살아났던 너, 그래서 이렇게 진실을 알고 나와 이야기하게 된 너, 모든 것이 끝나면 우린 나란히 걷는 길동무가 될 거다. 그 길은 아주 길지, 길동무 없이 걷기엔 너무 길어."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결심했다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어. 이제 당신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쓸게, 작별은 이걸로 대신하자." "네, 편하게 생각해 주세요." 조슈아는 몸을 돌려 갑판으로 내려갔다. 목을 잠시 가다듬더니 주저앉은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자, 다들 술을 깼겠죠? 그만 일어나세요. 중요한 일을 해야 하니까." 예상했다시피 사람들은 얼른 일어나지 않았다. 맥없는 눈, 또는 만사가 귀찮다는 눈으로 흘끔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조슈아는 웃었다. "내가 여기 온 것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예상했던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난 본의 아니게 이곳에 와서 당신들의 까닭 모를 '되풀이되는 밤'에 포함되어버린 겁니다. 생각해 봐요. 당신들한테 대단한 애정이 있을 리 있겠는지, 달가운 감정이 있겠는지, 더구나 그리 훌륭한 일을 하지도 않은 당신들한테, 신경 쓰이는 예언에 골몰하느라 당신들이 부른 손님한테는 아무 책임도 안 져도 된다고 생각하나요? 바다의 유랑 극단은 손님 치르는 예의가 그것 뿐인가요?" 잠간 말을 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표정이 조금 변하는 것을 보면서. "당신들은 다가올 해적만 무서운지 모르지만 이쪽도 그 해적보다 더 위험하면 위험했지, 덜 위험한 사람은 아닙니다. 내킨다면 당신들이 죽기 전에도 얼마든지 괴롭혀 줄 수 있죠. 내가 그러지 않는 이유는 귀찮아서도 아니고, 실망해서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지만 눈은 조슈아를 보고 있었다. "일말의 책임이 느껴져섭니다." 그 말을 바로 이해한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물론 막시민이나 리체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하나, 켈스니티만이 그 말을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 "번거로운 설명은 안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주십시오. 당신들 사이의 해묵은 원한이나, 이 마법을 누가 걸었느냐 하는 문제는 잊어버리세요. 어차피 당신들은 서로 다 잘못했습니다. 미묘한 차이는 이제 됐습니다. 그런 것을 가리는 것은 내 몫이 아니죠. 난 몇백 년 뒤의 사람입니다. 당신들도 몇백 년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당신 할머니나 그런 사람의 입에서 들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나처럼 여기지 않겠는지." 조슈아는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고물 쪽 계단에 한 발을 올리고 말했다. "두 번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당신들은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도비니다. 문제는 내가 해결합니다. 다 일어나서 옷을 바로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갑판을 정리하세요. 서둘러서!" 몇 명은 벌떡 일어났으니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조슈아는 다시 독려하는 대신 고물로 올라서며 비꼬듯 한 마디 던졌다. "움직이기 싫으면 어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앉아서 구경해 보시지요, 그땐 나도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나 같은 손님이 어떻게든 해보려 하는데, 일어나 돕지 않는 사람들은 내가 책임감을 느낄 가치도 없을 테니까." 닐바 역을 했던 남자가 고물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올라오는 대신 조슈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 당신이 책임을 느끼는지 설명해 줄 순 없는 거요?" 조슈아는 평소 누군가가 자주 했을 법한 대답을 했다. "귀찮아요." 장루에 오른 선원이 동녘 수평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도 반신반의하면서, 그러나 나타날지도 모르는 배를 기다렸다. 실은 기다리지 않았다.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다. 수평선 언저리의 별이 지워져갔다. 섬이 흔들렸다. 무언가가 있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뚜렷한 윤곽이 되어 있었다. 그는 갑판을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소리치면서 이미 내려가고 있었다. "왔다!" 갑판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의 마음도 지금 정신없이 돛줄을 타고 있는 선원의 마음과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준비는 됐다. 혹여나 원치 않는 일이 닥칠까봐 해준 준비라 해도, 쓸데없는 짓이 되길 바랐다 해도, 마침내 쓸모가 있게 된 순간에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면서도 미약한 보람이 느껴진다. 마주보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흥분과 긴장감 같은 것이 감돌았다. 두려움도 물론 있다. 하지만 물러설 곳은 없었다. 뱃머리에 서 있던 조슈아가 손을 흔든다, 올랐다가, 홱 내렸다. "시작!" 그와 동시에 갑판에서 현과 피리의 선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갑판은 어느새 깨끗이 치워졌고, 심지어 반짝거릴 정도로 닦아 놓았다. 무대 장치였으리라고 생각되는 천과 리본들이 뱃전을 장식했다. 갑판 한가운데 극단의 연주자 넷이 나란히 서서 연주에 들어갔다. 그들이 밟고 있는 것은 본래 막을 내릴 때 쓰지 않았을까 싶은 붉은 천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테두리에 금술이 재빠르게 둘러져 있었다. 이 배 안에 그렇게 바느질 솜씨가 빠른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그런 바느질 만이었다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역할을 해야 했다. 리체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 상태로 꾹 참으며 가슴에 자신감을 불어넣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녀는 재봉사지 배우가 아니었다. 참으려 애써도 어깨가 무의식중에 떨렷다. 종아리는 벌써 뻣뻣하게 굳었다. 초보 배우의 불평을 들어줄 연출가는 저만치 뱃머리에 혼자 서 있었다. 그러나 연출가는 눈이 좋았다. 리체와 눈이 마주치자 조슈아는 바로 알아차리고서 아래로 내려왔다. "불편해할 거 없어. 평소처럼 행동하면 돼. 말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서있기가 힘들면 앉아도 돼." "평소처럼 행동해도 될 리가 없잖아. 비슷한 점이 있을 리 있어? 그런 사람이, 나 같은 애하고." "아냐, 내가 생각하기엔." 조슈아는 리체의 등 뒤를 건너다보며 살짝 웃더니 말했다. "너하고 꽤 비슷한 사람이었을 것 같아." 등 뒤에서는 켈스니티가 불평 많은 초보 배우를 붙들고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리프크네 군, 평소대로 하세요. 제 생각에는 그가 당신과 좀 닮았거든요." "아, 괜히 하는 소리인 거 알아. 어차피 내가 모르는 사람이다 이거잖아? 하긴 뭐 저쪽 놈들도 잘 모르는 사람일 것 같은데, 대충 할 테니까 내버려주라고, 대단한 거 기대 안하잖아? 나 때문에 망치지만 않으면 되겠지." 켈스니티는 소리 없이 웃었다. 평소 대답이 빨리 나오지 않았을 때 보이지 않는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알 수 있었다. "긴장을 불평으로 해소한다는 점에서도 말입니다." 유랑극단 사람들은 실력이 좀 떨어진다 해도 기본적으로 배우였으므로 이들보다 상태가 나았다. 그들 중 몇은 무대의상 중 가장 그럴듯한 것을 골라 입고 뱃전에 서 있었다. 남은 것은 가장 노련한 배우이자 연출가, 그리고 연기할 필요 없이 본래 자기 자신인 자뿐이었다. 추적자가 가까워진다. 그들은 위협을 위해 대포를 준비시켜 놓았지만 예상대로 쏠 생각은 없어보였다. 되찾을 물건이 있으니 배가 부서져 가라앉도록 대포를 쏴댈 순 없는 노릇이었다. 저쪽 배가 내는 물소리가 들릴 즈음 조슈아가 뒷갑판으로 올라섰다. 그는 견장 달린 검붉은 겉옷을 어깨에 걸친 채 팔짱을 꼈다. 역시 리체가 즉석 바느질로 그럴듯하게 고쳐 준 것이었다. 머리에는 챙이 길쭉한 붉은 모자를 썼다. 챙이 눈가로 내려와 소년의 얼굴을 가려주었다. 새벽이 바다에게 화해를 청한다 밤 새 다투던 수평선 머리에서 석류차 한 잔을 붉게 데워서 푸르게 언 입술을 녹이라 한다. 리체나 막시민은 조슈아의 노래를 자주 들었지만, 지금처럼 깜짝 놀랄 정도로 성량을 높인 노래는 처음이었다. 그러면서도 음색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목소리는 새벽 공기만큼이나 차고 또렷했다. 기교도 없이, 무엇보다도 멀리 전달되도록 힘을 실은 노래였다. '붉은 돛'이라는 이름과 어울리는 돛을 단 배였다. 어스름 속에 사람들의 윤곽이 나타났다. 표정을 알아보기엔 멀었으나 신호등으로 의사를 주고받기에는 또 가깝기도 했다. 저쪽에서 잠시 후 신호기를 가져왔다. 첫 번째로 전해온 내용은 이런 것이다. '멈춰라'. 한 사람이 신호기의 내용을 해석해 주자, 이쪽에서 신호기를 준비한 선원이 조슈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당연한 듯 지시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조슈아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 "'이미 멈춰 있는데'라고 전하세요." 지시를 들은 선원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가 흠칫 놀랐다. 스스로도 웃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저쪽에서 다시 신호가 왔다. '좋을 대로'. 이렇게 대화가 오가는 동안 사람들은 바짝 긴장했다. 곧 육성이 오갈 수 있는 거리가 되면 저쪽에서 먼저 다그치려 들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즉시 백병전에 돌입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상은 어긋났다. 한 손에 확성 나팔을 받아들고 있던 조슈아가 먼저 소리를 질렀다. "바다의 예의로 인사를 하자꾸나! 우리는 모르는 사이니 소개가 필요할거야. 내가 내 배를 타고 있지 않으니 더더욱 그렇지, 이렇게 마주보니 너희는 내가 누구인지 알겠지만, 난 너희를 모르겠다. 너희 배에 명판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바다에서 고생이 많았나 보구나. 인사한다. 너희에게. 바다의 공작이!" 나팔을 통하자 조슈아의 목소리는 배 전체에 울릴 정도로 커졌다. 대꾸가 들려오기까지는 한참 걸렸다. 저쪽에는 조슈아와 같은 목을 가진 사람이 없으니 좀 더 배를 붙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얼른 대답하지 못하는 동안 초조해진 것이 분명한 목소리가 울렸다. "잘 들어라! 바다의 공작은 한 분뿐이야. 너희 같은 배에 타고 있을 리 없는 분이라고." 저쪽에서 확성기를 든 자는 선원이나 항해사인 듯했고, 그 뒤에 선장으로 보이는 자가 버티고 서 있었다. 낡아빠진 회색 셔츠 차임일 뿐이었지만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해적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거구에 특히 높이 솟은 어깨, 배가 흔들리는데도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꼼짝 않는 발, 비스듬히 쓴 모자에 가려져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조슈아는 거침없이 대꾸했다.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군, 그 호의 받아들이겠다." "뭐라고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바다의 공작이 하나라는 것을 아는 걸 보니 너희는 내 친구인 모양이라는 이야기지, 내가 잘못 생각한 거라면 빨리 말해라. 그래야 나도 너희를 어떻게 대접할지 알게 될 테니까." 저쪽 선원은 확성 나팔을 거두더니 몸을 돌려 선장과 몇 마디를 나눴다. 이윽고 선장이 나팔을 받아 쥐었다. "설마, 당신이 바다의 공작, 이카본 폰 아르님이라고 말할 셈이냐?" 선장의 목소리는 가래가 들끓어 탁했다. 아침 파이프 아직 피우지 못한 모양이었다. 조슈아는 대꾸하는 대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명랑한 웃음소리에 상대방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 때 켈스니티가 나팔을 받아들지도 않고 말했다. "공작께서 몹시 재미있어 하시니 다행스럽습니다. 아니라면 우리도 그대들의 무례를 그냥 넘길 수는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켈스니티의 목소리는 외침이 아니었는데도 자연스럽게 저쪽 배까지 울렸다. 이쪽 배의 선원들도 놀랐을 정도였다. "넌 누구냐?" "전 공작을 모시는 보잘것없는 사제입니다." 저들끼리 다시 몇 마디가 오가더니 조금 달라진 목소리가 물어왔다. "사제라면… 발미아드?" 켈스니티는 손바닥을 마주 대며 사제의 인사를 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불친절했다. "저 같은 사람의 이름까지 아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어쨌든 이제 예를 갖춰주십시오. 공작께서 오늘 아침 몹시 기분이 좋으셔서 그대들에게 먼저 호의를 베푸셨는데도 그대들은 아직 그 호의에 답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조슈아 곁에 나란히 선 켈스니티는 조슈아와 키가 비슷했다. 헐렁하게 묶은 긴 머리와 망토, 자락 긴 소매가 바람에 휘날렸다. 망토 깃과 달마티카 아랫단에 글자처럼 보이는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이렇게 선명한데도, 줄곧 목소리만 들었던 탓인지 어느 순간 지워져버릴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 배는 숨겨진 것을 보여 주는 배였다. 조슈아가 아직 어린지라 켈스니티는 이카본 곁에서 그랬듯 형제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대신 주의 깊은 보호자였다. 무기를 가진 것도 아니고 갑주를 걸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아주 가까이에서 조슈아를 지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모습은 처음 보지만……. 아니, 실은 줄곧 그렇게 서 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보이지 않았을 뿐. "자, 자, 잠깐, 당최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우선, 저기, 난 '붉은 돛'의 선장 라스콜 데토랭이오." 상대의 말투가 바뀌었다. 켈스니티가 소맷자락을 한 번 젓자 어둠 속에 금가루 같은 것이 흩날리다가 어느새 커다란 2절판 책의 윤곽이 되었다. 그 모양을 본 해적들은 크게 놀랐다. 이쪽 배에서 구경하는 사람들도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켈스니티는 품에서 외알 안경을 꺼내어 눈가에 대더니 허공에 떠 있는 책장을 천천히 넘겼다. 넘길 때마다 윤곽이 스러질 듯 날리다가 다시 가라앉곤 했다. 이윽고 한 페이지를 짚더니 말했다. "거짓을 말하진 않았군요. 라스콜 데토랭 씨. 티아틀란드 출신이고 4년 전에 결혼한 로잘린 데토랭과 아들 둘이 부모와 함께 여전히 티앝틀란드에서 지내고 있겠죠. 이쪽 해역에서 가나폴리의 난파선을 건지러 다니다가 얼마 전에 성과도 냈던 걸로 알고 있고, 당신이 공작께 직접 보고하지 않았다 해도 공작께선 이미 알고 계십니다. 어쨌든 명성을 날리는 해적일 테니 우리 공작의 이름은 충분히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이 왜 바다의 공작이라 불리는지도 말이지요." 켈스니티가 책을 접자 책이 다시 금가루로 변해 날아갔다. 데토랭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아, 물론 알고 있소! 남쪽 바다의 해적을 모조리 다스리시는, 바다가 임명한 공작 아니오? 비록 수하에 들지 못했더라도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흠모하고 있소이다. 이런 곳에서 마주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고, 그래서 좀 놀랐지만……." 그는 말을 이으려다가 머뭇거렸다. '보고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으니 신경쓰일 수밖에 없었다. "우린 곧 보고할 생각이었소, 약간의 문제만 없었다면… 음, 우린 난파선을 건져서 얻은 것들 중 가장 좋은 걸 공작께 바치려고 했소. 가능한 한 서둘러서… 그런데, 그게, 음, 실은, 우린 지금 그 배를 쫓아 온 건데, 저, 저, 그런데, 공작께서 왜 이런 배를 타고 게신지 여쭤보아도 될는지?" 웃음을 그친 조슈아가 말했다. "이 배는 작고 우아하고 낡았지, 손때 탄 악기처럼." 설명은 그것뿐이었다. 저쪽에서는 말이 이어질 줄 알고 목을 빼고 있었으나 조슈아는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결국 그들이 다시 묻기 직전, 막시민이 나섰다. "아아, 아, 잔소리가 길군 그래.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 공작께선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가야 할 곳도 많으시지. 그럴 때면 쓰시는 방법이야. 지난 항구에서 이 배를 구하셨다. 자시 말해 배와 선원을 모조리 사신 건데, 이런 게 처음 있는 일은 아니야. 사람들은 다 너희와 마찬가지여서 이런 유랑극단의 배에 공작이 타셨다고 감히 짐작하지 못하거든. 이 배가 작았던 것도 이유가 되었고, 이 배에 볼일이 있다고? 이제는 공작께 여쭤야 할 걸. 그게 무슨 일이든 간에 말이야. 말해 봐라. 너희는 무슨 볼일이야?" "그게……." 해적들은 솔직하게 말해야 할지 망설이는 눈치였으나 결국 입을 열었다. "그 배에 탄 녀석 중 하나가 바로 우리가 얻은 보물을 하나 훔쳐서 도망쳤기 때문에… 그래서 그 놈을 붙잡아서 공작께 가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 물건이 바로 저희가 공작께 바치려고 하던 것이었는데… 공작께서 그런 걸 찾고 계신다는 소문도 들었고… 그걸 어떤 식으로든 공작께서 갖게 되셨다니까… 아무래도 좋은 셈이 된 것 같기도 한데……." 아, 그래? 좋은 이야기군. 그런데 그런 귀한 걸 내놓으려 한 이유라도?" "아, 예… 다시 말해 수하로 거둬 주시지 않을까 해서였지요." 막시민은 저도 모르게 쿡 웃고 말았다. 생각한 것보다 일이 잘 풀릴성 싶었다. 조슈아는 어느새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시선을 돌렸고, 켈스니티가 말했다. "그 청원에 대해 공작께서 고려해 보실 것입니다. 우선 그대들의 물건을 훔쳤다는 자를 찾아 자초지정을 듣고 죄를 물은 뒤에 말입니다. 그 자는 해적들의 방식으로, 해적을 배신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만하면 해적들도 납득할 수 있을 대답이었다. 데토랭이 물었다. "저, 그런데 공작께서는 어디로 가시는 길이신지요?" "너희도 머리가 있다면 생각해 봐라. 일부러 작은 배를 골라야 되는 곳으로 말이야." 물론 이카본이 노을섬의 폭풍을 피했던 배는 이보다 훨씬 작은 쪽배였지만 그런 사실은 상관없었다. 가벼운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생각하면 사람은 기분이 밝아지는 법이다. 대답하는 목소리에 언뜻 활기가 돌았다. "그렇다면… 노을섬?" "머리는 꽤 도는데." 이카본이 누구도 통과할 수 없다던 노을섬의 폭풍을 어떻게 뚫고 들어갔는지, 그래서 무엇을 얻었는지 하는 이야기는 당시 이 근방에서 대단한 이야깃거리였다. 손에 잡힐 듯한 전설 같은 것이었다. 해적들은 본능적으로 이쪽 배의 갑판을 살폈다. 있었다. 선미루 앞 상자에 걸터앉아 이쪽을 쏘아보는 붉은 머리 여자가. 리체는 팔짱을 낀 채 무표정하게 붉은 돛의 갑판을 훑어보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리체의 시선이 선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거쳐 배 구석구석과 돛, 돛대 꼭대기에 이르렀다가 내려오는 것을 본 해적들은 오싹한 얼굴이 되었다. 마치 그녀가 시선만으로도 주시한 것들을 모조리 부숴버릴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막시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는 입을 다물어주는 편이 좋을 거야. 나중에 오늘 섬에 간 이야기가 새면 너희 탓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 공작께선 조용히 다녀오기를 원하시니까 말이야. 자, 공작께서는 너희를 친구라고 생각하시겠다는데 혹시 이의가 있나?"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여기까지는 일이 순조롭게 되어갔다. 그런데 저쪽에서 고급 선원으로 보이는 자가 하나 나와 선장과 귀엣말을 나누더니 나팔을 받아 쥐었다. "바다의 공작을 이렇게 뜻밖에 만나 뵙게 되어 영광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또 다른 전설을 만들러 가시는 자리에 함께 한 것도 자랑스럽고요. 그런데 저희가 전부터 궁금한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듣기로 공작께서는 신비로운 축복을 받으셨다고 하던데 시골뜨기 까막눈인 놈들로서는 보지 않고는 도저히 믿기가 힘든 이야기더란 말씀이죠. 아, 물론 저는 공작을 한 점 흐림없이 믿기 때문에 감히 의심하는 녀석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더랍니다. 몇 달 전에 한 내기인데 자그만치 손가락 두 개가 걸렸지 뭡니까." 갑판에 일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막시민은 거리낄 것 없는 태도로 대꾸했다. "아, 그래서? 구구한 설명은 그만두고 알고 싶은 게 뭔데 그래?" 선원은 웃었다. "공작께서 저희한테 그 축복 받으신 능력을 좀 보여 주셨으면 하고 말씀입죠. 그게 뭐, 좀 애매하다면 위대한 마법사이긴 아가씨께서 그래 주셔도 좋겠고." 그 때 리체가 상자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서쪽 갑판에 선 사람들이 전부 움찔 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리체는 천천히 걸어 상갑판에 올라섰다. 그리고 뱃전을 짚으며 그들 쪽을 보았다. 리체를 슥 돌아본 막시민이 한숨을 내쉬려다가 자신이 맡은 배역을 자각하고 말했다. "감히 그런 말을 해놓고서 겁나는 게 있긴 한 거냐? 그녀는 오늘 아침에 기분이 좋지 않았어." "……." "너희의 말을 듣고 더 기분이 나빠진 모양이네." 조슈아가 뱃전에서 몸을 빼더니 선뜻 상갑판으로 올라갔다. 뱃머리 장식을 짚은 리체의 손을 톡톡 두드리더니 불쑥 노래를 불렀다. 움트지 않는 싹, 자리지 않는 숲 모퉁이에 선 너는 고개를 저었네 시골사람의 눈은 거짓을 말 못해 봄밀 거두면 돌아오겠다고 박하꽃 피면 돌아오겠다고 낙엽 자박자박, 불 꺼진 붉은 숲 손 한 번 잡아주고 쉬이 보내 준 구부러진 오솔길은 끝이 안 보여 깃이 자라면 돌아오리라고 어른이 되어 돌아오리라고 소년처럼 청아한 노랫소리에 해적들도 놀랐다. 노랫말이야 어찌 됐든 소리가 너무 맑았다. 아무도 청하지 않았지만, 아무도 거절할 수 없는 노래였다. 막시민이 아는 한 조슈아는 그들이 처음 만났던 무렵 이후로 이런 목소리로 노래한 적이 없었다. 막시민조차 직접 들은 일이 없지만 그건 모나 시드 합창단 솔리스트의 목소리였다. 노래를 그친 조슈아가 말했다. "노을섬은 그녀의 고향이라서 앞바다를 씨끄럽게 하고 싶어 하지 않아, 그녀가 그 생각을 버리는 순간 힘들어지는 것은 너희들이니까, 그런 일이 없길 간절히 비는 편이 좋아." 섣불리 능력을 보고 싶다고 조르다가 돌아올 대가를 경고하는 말이었다. 주위가 조용해졌다. 물결이 두 배를 두드리는 소리만 들렸다. "그 대신." 조슈아는 켈스니티를 바라보았다. 켈스니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은 운이 좋습니다. 호기심 중에는 대가가 비싼 것들도 있지요, 본래 그녀가 그대들을 먼지 한 줌으로 만들어버리고 나면, 저는 빈 수면을 보며 그대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 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니까요. 공작께서 그 순서를 바꾸라고 명하시니 오늘은 살아 있는 그대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도 조금은 보람이 느껴지는군요." 켈스니티는 두 손을 높이 올렸다가 천천히 모았다. 그와 동시에 조금 전에 책을 만들었던 것과 비슷한 빛의 가루가, 이번에는 은빛 장막이 되어 일시에 퍼져나갔다. "오래 헤매어 지천 혼들이 은빛 강의 속삭임에 이제 쉬노라." 새벽의 옷자락만큼 길었고, 여명인 양 세상을 덮었다. 해적선에 서 있던 자들 모두가 빛나는 장막이 다가와 그들을 감싸고 이윽고 바다 속으로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모두가 말을 잊었다. 잠시 후 그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잠이 찾아왔다. 10. 청록색 유리병에 든 배 "그 배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어. 바다 밑에 푸른 보석처럼 가라앉아 있었어. 조개껍질도 없는 진주였어. 세상에 없다는 새파란 꽃이 그곳에 다 있었어. 은어들이 바다 꽃을 뜯는 배에 선원 하나 없지만 그 배의 선장이 되어 다시 한 번 떠나고 싶었어. 바닷무덤 속으로 뱃사람의 고향으로 가는 긴 뱃길을." 커튼처럼 묵직하던 아침 안개가 엷어져갔다. 갑판 한쪽에는 밤새 갖고 놀던 카드가 나뭇잎처럼 굴러다녔다. 그늘진 구석마다 선원 몇이 모포를 말고 쳐박힌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닫혀 있던 선실 문을 두드리자 대꾸가 들렸다. "이따, 거 씨끄럽다. 우리 소공작 전하가 아니시라면 냉큼 나가 아침 운동도 할 겸 갑판이나 유리알처럼 박박 문질러 닦고 있거라, 앙?" "전하는 아니고 그냥 소공작인데요." 문이 벌컥 열리기까지 숨 한 번 내쉴 틈도 걸리지 않았다. 일등항해사 민크는 문에 부딪치지 않으려고 비켜 선 조슈아를 보자마자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어이쿠, 잘 다녀오셨습니까요." "네, 덕택에 재미있는 밤을 보냈어요." 항해사는 조슈아의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전혀 피곤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밤을 세셨을 줄 알았는데요." "아, 그래 보여요?" "한잠 푹 주무시고 일어나신 듯한뎁쇼." 조슈아는 빙긋 웃었다. "따지자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드디어 또렷해진 해가 갑판 곳곳을 따끈하게 비추었다. 머리는 아직 그늘 속에 뒀더라도 양지에 내놓은 등짝이 데워지자 선원들의 잠도 슬슬 달아났다. 벗어 놓은 구두를 찾아 신고 보니 한쪽만 줄어들어 발에 잘 맞게 됐다든가, 밤새 머리카락이 갑판 판자 틈새에 끼어 기를 쓰며 뽑는다든가, 그런 일들과 함께 항해사의 호통 소리를 한 귀로 들어 흘리는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조슈아뿐 아니라 고향의 별 호에 다녀온 선원들 중 이제부터 쓰러져 자야 할 것 같은 얼굴은 없었다. 하지만 항해사도 조슈아의 경우쯤 되니까 물어본 것이지, 다른 선원이 왜 그런지 굳이 궁금해 하는 사람은 없었다. 조슈아도 더 설명해주지 않았다. 이윽고 안개가 다 걷히자 또렷해진 수면에 머리를 내민 암초 무리들이 잘 보였다. 일등항해사가 침로를 지었고, 이등항해사의 지휘 아래 부산하게 밧줄이 당겨 돛이 올랐다. 신선한 미풍이 배를 밀어주었다. 반나절도 걸리지 않으리라 했다. 선장은 점심 먹기 전에 노을섬의 새 부리 같은 곶을 보지 못하면 선장 자리를 내놓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선원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평소 이 선장의 입버릇인 모양이었지만. 바람이 빨라지자 배를 따르는 포말도 길어지기 시작했다. 조슈아는 선장의 장담에 미소로 답하고 상갑판에 올랐다. 막시민과 리체를 비롯해서 공향의 별 호에 다녀온 사람들이 먼저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등항해사가 물었다. "소공작 전하, 저희가 꿈을 꾼 건가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침이 됐는데, 어제 일이 당최 이해가 안 가서 말입니다. 어째 잠은 실컷 잔 것 같은데." "어제 저희가 그 뭐라나, 놀러갔던 배에서 잠들었던 게 맞죠? 그런데 누가 저희를 이리로 옮겨왔습니까요?" "아, 내가 그랬어요." 이등항해사는 괴상하게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전하 혼자서 저희를 다요?" "실례되는 말씀일지도 모르겠지만요, 전하의 체격으로는 저희처럼 딱 바라진 놈 하나도 업을 수 없을 게 틀림없습니다요." "업기는 커녕 끌 수도 없을 건데요." "친구 분들이 도와주셨다 해도 무립니다. 게다가 한 분은 아가씨잖아요?" "전하라는 말씀은 제발 좀 그만둬 주시고요." 조슈아는 대꾸를 궁리하려다가 손쉬운 대안을 생각해 냈다. 즉, 막시민을 쳐다보았다. "농담들은 작작 하시라고, 새벽에 다들 제 발로 돌아와서 이 구석 저 구석에 잘도 박혀 주무시더니, 술 좀 했기로서니 아무렴 다들 몽유병이라도 걸린 건 아니겠지요? 건장한 바다 사내들이?" 막시민의 대꾸에 말문이 막힌 선원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 그럴지도 모르겠군. 어쨌든 자다가 걸어 다니는 바다 사나이는 없으니까." "술 좀 취하면 헷갈릴 수도 있지! 생각해 보니까 돌아오던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해." "어, 보트에서 졸다가… 올라갈 때 고생 좀 했지, 안 그래?" 한 명만은 여전히 고개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그만치 술을 마시고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머리가 이렇게 맑을 수가 없단 말이야." "숙취도 없는 고급술이었나 보죠. 저기, 돛 방향 돌리자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데 안 가 봐요?" 선원들은 하나 둘씩 엉덩이를 떼더니 왔던 때처럼 그렇게 우르르 가버렸다. 저렇게 뒤도 안 돌아보는 것으로 보아 몽유병이라는 말이 대단히 수치스럽게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막시민은 인상을 팍 찌푸리며 조슈아를 쳐다보았다. "다 쫓았다, 됐냐." 조슈아는 킥 웃을 뿐이었다. 리체가 바닷바람에 건조해진 뺨을 문지르고 있다가 말했다. "좀 찝찝한데." "다 꿈이었다고 말해주는 것보다 낫지 뭘, 술 마시다가 기억 못하는 일 정도는 술꾼들에게 다반사야." "하지만 전혀 기억이 안 날 리가 없잖아." "그럼 유령들이 당신들을 업고 여기 데려다 놨다고 설명하면 좋아할 거 같냐?" 「그 말만은 확실히 맞군요.」 막시민은 고개를 홱 돌렸다가 웃음인지 뭔지 모를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젠 신호도 안 하고 나타나네." 「새삼스럽잖습니까, 우리 사이에.」 그 말대로 '새삼'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참으로 어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상대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묘하게 마음이 놓였다. 리체가 웃으며 말했다. "이젠 놀라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섭섭하기도 한데요. 역시 다시 볼 수는 없는 거죠?" 「목소리는 들을 수 있으니 괜찮은 편입니다.」 막시민이 말했다. "반대로 생각해 봐, 어제 네가 켈스를 봤듯 뚜렷하게 봤던 사람들은 사실 전부……." "굳이 일깨워주지 않아도 되거든?" 둘이 눈을 흘기고 있는 동안 조슈아가 말했다. "저기 나, 맘대로 떠들어댔는데 조금이라도 비슷했어?" 대답이 없었지만 이제 다른 두 사람도 이즈음 켈스니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리체가 말했다. "미고 짓고 있죠?" 「이해 받게 되어서 기쁘군요. 이카본과 비슷했느냐는 질문이라면 글쎄…….」 "저는 어땠어요?" 리체가 끼어들자 비교적 빨리 대답이 들렸다. 「잘 하셨어요, 다들 감쪽같이 믿었을 겁니다.」 "이것 봐, 왜 나한테는 그렇게 말해주지 않는 건데?" 조슈아가 불평하자 막시민이 말했다. "그거야 네가 연기해야 되는 게 이카본이니까 기준이 몹시 높으실 거 아니겠냐." "듣고 보니 그게 정곡인데? 칭찬은 기대 말아야겠네." 막시민은 리체도 돌아봤다. "너야 뭐 빨간 머리 여자이기만 하면 됐을 거고, 어차피 대사도 없는 역이고." "또 말하지만, 넌 꼭 그렇게 말해야겠니?" "내가 제일 별로였을 게 뻔하니까, 자잘한 건 대충 넘어가라고." "왜 막군 네가 제일 별로야?" 막시민이 기다렸다는 듯 소리쳤다. "사람들은 내 배역이 뭔지 알아차리지도 못했잖냐!" 이번에는 미소가 아니라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리프크네 군, 그건 오해입니다. 연기를 잘 못해서가 아니라 당시에도 스초안 오블리비언의 이름이 덜 알려졌던 것뿐이니까요.」 "다시 말해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역을 줬다는 거지?" 「아뇨, 솔직히 리프크네 군이 가장 비슷했어요. 조금 놀랐을 정도입니다. 특히 말투가…….」 "말투가?" 「스초안도… 빈정거리기를 좋아했죠.」 말끝에서 웃음이 잦아들었다. 한 번 얼굴을 보았기 때문일지, 기분을 훨씬 민감하게 느낄 수 있었다. 조슈아가 일부러 토라진 체하며 말을 받았다. "흥, 결국 다 잘했고 나만 못했다 그거군? 나라고 켈스의 머릿속에 든 이카본을 만나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본의 아니게 망쳐놔서 미안해 죽겠네." 「굳이 말하자면 노래는 잘했어요.」 "그게 위로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리체가 문득 생각해내고 물었다. "그런데 켈스, 그 금가루 책이랑 은가루 장막은 뭐였어요? 그냥 환각이에요? 그 사람들에 대해서도 본래 알고 있었던 거예요." 「본래 알고 있었던 건 맞고, 책이나 장막은 비밀입니다.」 "쳇, 너무해요." 「사제가 그 정도 비밀은 있어야죠.」 조슈아가 입술을 내밀며 말했다. "그래야 사람들도 슬슬 등쳐먹고 그러는 거지, 리체 네가 이해해라." 빠르게 달리던 배가 조금 느려졌다. 해류를 거스르며 암초를 피하는 중이었다. 조슈아가 더 말하지 않는다 싶어 리체가 물었다. "저기 켈스, 간 거야?" "응." "에… 본래 그렇게 갑자기 가버려?" "항상 그러는 건 아냐,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가 봐야되는 때가 있고 그래." "어디로 가는 건데?" "글쎄, 유령들만이 갈 수 있는 곳이겠지. 켈스처럼 오래된 유령들은 사람 곁에서 줄곧 지낼 수만은 없는 것 같아." 리체가 조금 사이를 두고 말했다. "나 말야, 켈스가 생각보다 훨씬 섬세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 했어." 조슈아는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바다 저쪽에 솟은 길쭉한 것이 띄었다. 역광 때문에 검게 보이긴 했지만 물결에 따라 천천히 흔들리고 있는 것은 돛대였다. "으응?" 리체도 곧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바다에 뜬 배는 기우뚱거리기 마련이지만 저 앞은 돛대는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좋은 바람이 불고 있는데 돛도 올리지 않은 맨 돛대였다. 무엇보다도 배가 거의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았다. "난파된 것 아냐?" 벌떡 일어난 막시민이 갑판으로 내려가면서 말했다. "이런 무인도뿐인 바다에서 다른 배와 만날 확률은 상당히 낮은 것 같은데, 그것도 어제에 이어 두 번째로." 조슈아가 돌아보면서 말했다. "선장을 좀 불러줘." 이윽고 선장이 항해사를 데리고 올라왔다. 이미 발견해서 다른 선원들과 함께 논의를 마친 것인지, 선장은 조슈아 앞에 오자마자 단정적으로 말했다. "저건 죽은 배입니다. 가까이 가시지 않는 것이 좋죠." "죽은 배라니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상태로 떠다니는 배를 그렇게 부릅니다. 전염병이 돌거나 식량이 다 떨어지거나, 뭐 그런 걸로 선원들은 죽어버리고 빈 배만 해류를 타고 돌아다니는 겁니다. 서서히 삭는 거죠. 저러다가 가라앉지 않으면 어느 해안에 좌초하기도 하고, 그럽니다." "딱 보면 알 수 있나요?" "알고말고요, 만날 기회가 많진 않지만 선원들은 저런 배를 만나면 재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병이 옮거나 할 가능성도 있고요. 피해서 가라고 이미 지시해 봤죠. 소공작께서도 모르는 체 하세요." 조슈아 배를 다시 한 번 보았다. 그리고 몸을 돌리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가까이 가봐야겠는데요." "저… 그게……."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내가 장담하죠." 배는 청록색이었다. 푸르게 갠 하늘을 검게 변색된 돛대가 가로질렀다. 한가로운 파도가 부딪쳐 오는 뱃전은 길들인 손잡이처럼 무척 닳아 있었다. 물에 잠긴 이물은 푸른 유리병 속에 든 것처럼 보였다. 가파르게 쳐든 배쌈에 노랑과 청록색 물이끼가 무늬를 그렸다. 조슈아는 그것을 보고 '바다꽃이 피었다'고 말했다. 알테나 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멈추었고, 조슈아 일행과 선원 몇 명이 보트를 탔다. 난파선에 닿자 조슈아는 보트에서 일어서며 즉시 갑판으로 건너뛰었다. 오랫동안 기울어져 있던 갑판은 사람의 발자국이 닿자 아픈 강아지 같은 소리를 냈다. "발밑이 꺼지지는 않는 모양이네." 막시민은 조슈아가 갑판 곳곳을 걸어보도록 요령 좋게 기다리고 있다가 한마디 던지더니 이윽고 따라 올라섰다. 갑판의 경사는 주의 깊게 걷지 않으면 미끄러져 물에 빠지기 알맞았다. 보트에 남은 리체는 얼른 따라가지 않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갑판에 올라선 두 사람은 이상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뭘 해?" 리체가 참지 못하고 묻자 조슈아가 고개를 들더니 손짓했다. "이리 와 봐." 별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궁금해서라도 갈 수밖에 없었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막시민이 손을 잡아 주었다. 뒷갑판에 올라선 리체는 갑판을 보고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아."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알겠지?" 갑판을 걷던 두 사람이 멈추어 섰다. 특별한 위치였다. 조슈아는 뱃전, 막시민은 선실 입구 쪽이었다. 리체는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었다. 이 닳고 낡은 난파선이 모두에게 익숙하다는 사실을. 그들이 선 위치조차도. 조슈아가 이윽고 고물 쪽 구석에 놓인 커다란 상자로 다가갔다. 상자는 뚜껑이 열려 있었고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뚜껑은 어디로 흘러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리체가 고물 귀퉁이로 다가와 상자를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우리가… 어젯밤에 여길 와봤나 봐." 대답은 필요하지 안항ㅆ다.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에 수십 명이 웃고 노래하던 곳, 미끈한 곡선과 쭉 벋은 돛대를 갖진 않았어도 소박한 손때로 길들여졌던 고향의 별 호는 수백 년의 시간을 뒤집어쓰고 이곳에 난파해 있었다. 선뜻 납득하기 힘든 장면이기도 했다. 오늘 새벽에 손을 흔들며 헤어졌던 그들이었다. 광대 클랭과 꼬마 알비, 웃고 웃던 배우들,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유령이 되어 이곳에 깃들어 있을까? "정말… 이젠 나, 우리가 우연히 똑같이 꿈을 꾸었던 거라고 해도 믿을지 몰라." 막시민은 상자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조슈아가 대답했다. "하지만 꿈이 아닌걸." "역시 꿈이 아닌 거지? 그러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조슈아는 물에 잠긴 뱃머리를 보고 있었다. 소년 알비가 웅크리고 숨어 있던 곳이었다. 옆얼굴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에 언뜻 파란 하늘이 비친 듯했다. 바람이 불어왔다. 여름 바다의 바람이 구름을 밀어갔다. "마법이 풀린 것뿐이야. 이 배가 본래 겪었어야 할 시간이 돌아온 거겠지." "본래 이런 모습이었는데 밤에는 마법이 걸려 있어서 우리 눈에 멀쩡하게 보였던 걸까?" "아니, 만약 이카본 시대부터 지금까지 바다를 떠돌았다면 완전히 삭아버렸을 거야, 이런 모습으로도 남지 못했겠지. 이 배가 남은 건 이 배에 걸렸던 마법… 그래, 마법이 효력을 발휘하는 그 시간들만은 이들에게 흐르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몰라. 그 새벽을 겪고서 우리가 우리 배로 돌아가 보니 떠났던 시각 그대로 여전히 밤이었던 것처럼. 나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조슈아는 발끝에 힘을 주어가며 갑판이 물에 잠기기 시작하는 곳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갑판과 물을 만졌다. 리체는 조슈아의 흘러내린 머리를 바라보고 있다가 중얼거렸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곳에 있을까? 조슈아, 너라면 보이겠지?" 리체는 평소와 달리 무서워하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조슈아는 허공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없어, 여기엔." 잠시 후 조슈아는 리체에게 돌아와 손을 내밀어 보였다. "물이 썩지 않았어, 다행이야. 저주와 원한은 이 배를 떠났어. 이제부터 이 배는 서서히 녹아갈 것 같아. 아마 오래 걸리지 않겠지. 적어도 수백 년은 아니겠지.' "그 말은 원한이 남지 않았기 때문에 유령들이 여길 떠돌지 않고 쉴 수 있게 됐다는 뜻이야?"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켈스 이야기로는 유령이 자의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진 많은 시간이 걸린대. 이곳의 유령들 중 자신에게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건 광대 클랭뿐이었어. 다른 이들도 마법이 작용하지 않는 시간에는 알았을지도 모르지만, 아니, 이건 그냥 추측이야. 왜냐면 클랭과 그들은 그 사이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것 같거든. 물론 유령들이 모두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잠깐, 그렇다면 그들이 없어진 이유는 뭐야? 저주가 풀리면 그냥 저절로 소멸하게 되어 있었던 거야?" 조슈아는 얼른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리체는 혼자 추측하느라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문득 말했다. "참, 알비는? 그 애는 알고 있었잖아?" "알비는 유령이 아냐, 산 사람이었지?" 리체는 눈을 크게 떴다. "살아 있었단 말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렇다면 그 앤 어디로 간 거야?" "……." 조슈아가 대답 없이 고물로 올라가 버렸을 때, 상자 앞의 막시민이 입을 열었다. "죽은 거지, 어쩔 수 없잖아. 마법이 풀리는 순간 죽어야 하는 운명이니까, 수백 년이나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리체는 어깨를 움츠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알비의 얼굴이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이 더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그 애가 그걸 알고 있었을까?" "알았겠지, 그 애가 조슈아에게 부탁했잖아. 모두 끝내 달라고." 리체는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되풀이했다. "끝내… 달라고? 저기, 그러면 그들이 모두 없어진 것도……." 리체는 조슈아를 돌아보았다. 조슈아는 고물 뱃전 너머로 바다를 보고 있었다. 리체는 문득 두려움을 느꼈다. 저기 서 있는 호리호리한 소년은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었고, 그래서 그들을 세상에서 소멸시켜버렸다. 새 한 마리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손으로. 영매는 단지 유령과 이야기할 줄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조슈아는 유령을 불러냈고, 그들을 부리고, 지워버렸다. 물론 유령들이 동의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할지라도. "조슈아." 돌아본 조슈아의 얼굴에는 미소가 있었다. 회한은 없었다. "응." "너 그 사람들한테, 실은 유령이지만 어쨌든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잖아. 그건 왜였어?" "'붉은 돛'이 말했잖아. 아르님 공작에게 바치려던 물건 때문에 이 배를 쫓아왔다고, 물론 조금 허풍이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일부라도 믿는다고 할 때 이 배의 사람들은 이카본에게 바치려던 물건 때문에 죽어야 했던 거야. 켈스가 말해줬어. 라스콜 데토랭이 이카본의 수하에 들어오고 싶어한 것은 사실이라고, 그 때 바치려던 공물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희생자는 이 배뿐이 아니야. 붉은 돛 자신도 그 일 때문에 이 저주에 붙들렸어. 그래서 그 시절 바다에서 영원히 실종되어버렸지. 난 그 다툼을 해결해주어야 했어. 의무는 아니지만, 왠지 그러려고 내가 이 배를 만나 것 같다고 할까." 리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조슈아의 얼굴에 일말의 만족감이 스민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고 보니 그 보물이란 건 어디로 갔을까? 구경도 못했네?" "보물도 이 배와 마찬가지 신세겠지." "몇백 년이 지났다 이거지? 하지만 금붙이 같은 거라면 어딘가 남아 있을 수도 있잖아?" "왜, 뒤져보고 싶어?" "흐응, 글쎄, 어쩔까나." 리체는 갑판으로 폴짝 뛰어내리다가 막시민을 보고 말했다. "그런데 넌 왜 그 상자를 그렇게 들여다보고 앉아 있니?" 막시민은 팔짱을 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슈아의 얼굴과 대조적으로 그는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조슈아도 그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왜 그래, 막군? 뭐가 잘못됐어?" 조슈아가 내려오자 막시민은 품속을 뒤지더니 종이뭉치 비슷한 것을 꺼내 떠맡기듯 건네주었다. 조슈아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뭐야? 그냥 종이가 아닌데?" 종이가 아니라면 딱히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 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익숙한 종이는 아니었다. 훨씬 두껍고, 결이 있고, 한족 면만 매끈했다. 그러나 테두리는 바스러져 너덜거렸다, 조슈아는 종이 뭉치를 만지작거리다가 한 장 넘겼다. "뭔가 씌어 있는데……." 몇 장 더 넘기더니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 "악보인가?" 조슈아는 펼친 페이지를 보며 몇 군데 음을 잡아 약간 흥얼거려 보더니 미심적은 표정을 지었다. "이거… 느낌이 이상한 곡인데." 막시민은 입술을 짓씹고 있다가 이윽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이러는 모습을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슈아는 종이뭉치를 리체에게 줘 버리고 막시민의 팔을 잡았다. "너 왜 그래" "아, 말도 하고 싶지 않아." "저 종이가 뭔데 그래? 어디서 났어?" 막시민은 리체가 넘겨보고 있는 종이뭉치에 흘끔 시선을 주더니 내뱉듯 말했다. "보물이다." "뭐?" 리체가 먼저 되물었다. 말하는 즉시 종이를 끝까지 넘겨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뒷면도 살펴봤다. 하지만 상상하던 것과 비슷한 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온통 뭔지 모를 조그마한 기호들뿐이었다. 리체의 눈에는 악보로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왜 보물이야?" "종잇조각이라서 보물이 될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냐?" "다 봤지만, 보물지도 같은 건 없어 보이는데?" 그때 조슈아가 다시 리체의 손에서 종이 뭉치를 가져갔다. 그도 똑같이 페이지를 끝가지 넘겼지만 고개를 들었을 때 표정은 사뭇 달랐다. "분명 평범한 곡은 아냐. 하지만 훼손된 곳이 너무 많아서 정확한 것은 모르겠어. 이게 이 상자 안에 있었어?" "그랬지, 그래서 문제지, 젠장. 이렇게 변신 같은 일을 저지르다니. 살기가 싫어진다." 막시민은 신음 소리를 내며 머리를 싸쥐더니 상자를 걷어차려다가 멈췄다. 그런 것을 했다가는 그렇지 않아도 기우뚱한 배가 삽시간에 기울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리체가 말했다. "뭐, 아주 훌륭한 예술 작품이라거나, 그래서 보물이란 얘기니? 뭐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말이 막시민 네 입에서 나오니까 어울리지가 않잖아. 예술품을 해적이 쫓아다녔다는 것도 좀 이상하고, 이거 무슨 사연이 있는 거지?" "사연이 있고말고, 조슈아가 알아봤듯이 이건 악보지. 요새는 쓰이지 않는 아주 먼 옛날 거지만, 난 이런 악보를 딱 한 번 본 일이 있지. 썩은 목장의 영감탱이가 갖고 있었는데 나한테는 보는 법도 가르쳐주지 않았지. 어차피 그때는 이걸 볼 줄 알았대도 연주 자체를 할 줄 몰랐던 때니까 소용없었겠지만, 어쨌든 분명 본 일은 있다는 거지. 이건 이 상자 안에 있었어. 하지만 지금 꺼낸 게 아니라고. 어젯밤, 아니 새벽에 이 배가 멀쩡했을 때 꺼냈단 말이다. 그걸 알비 녀석이 나한테 가지라고 줬을 때 난 왜 그러는지도 몰랐어. 그때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나 있었냐고, 이게 뭘 것 같냐? 본래는 해적의 물건, 그 클랭이라는 광대가 훔쳐오는 바람에 이 배의 선원들이 다 몰살당했다는 귀중한 물건, 데모닉 이카본 공작이 찾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이 바치려고 했던 보물, 난파된 가나폴리의 배에서 건져낸 것, 내용물은 악보, 이게 대체 뭘 것 같으냐고." 조슈아가 대답 없이 악보를 다시 뒤져 보고 있는 동안 리체가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말했다. "가나폴리의 악보라면… 설마, 이게 쥬스피앙 아저씨가 조개 반도 일대에 떠돈다고 했던 신성 찬트의 악보? 저기, 내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면 엄청난 마력을 발휘한다던?" "그게 아니라면 당장 도로 불속에 쳐넣어도 좋다. 하긴 어차피 쓸모없는 종이뭉치가 돼버렸으니 어떻게 되든 상관없나?" "……." 둘 다 입을 꾹 다물어버린 가운데, 침착하게 악보를 전부 살펴본 조슈아가 입을 열었다. "막군 네 말은, 이게 오늘 새벽에는 이렇게 훼손되지 않은 깨끗한 물건이었다는 이야기구나. 저주인지 마법인지 모를 것이 풀리면서 이 배가 낡아버렸듯 이것도 독같이 삭아버렸다는 뜻이구나." "하지만 이것 때문에 저주가 풀리지 않길 바랄 순 없는 일이었잖아? 막시민 네가 이걸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부터가 그 저주 때문인 거니까. 아니라면 옛날에 다 삭아 버렸을 거고, 이것만 마법이 풀리지 않게 하는 방법은 없을 거 아냐." 리체의 말에 막시민이 한숨을 내쉬며 외쳤다. "물론 그렇지, 하지만 그때 조군 자식한테 보여주기만 했어도 됐잖아!" 그 말은 정말로 맞았다. 조슈아가 보기만 했다면 필사본보다도 완벽한 것이 머릿속에 만들어졌을 테니까, 셋 다 맥이 풀려 한동안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리체가 말했다. "그 신성 찬트의 악보라는 거 말이야. 추측일 뿐 확실한 건 아니잖아. 가나폴리의 난파선에서 건졌다고 해서 반드시 그 악보라는 보장은 없는거잖니." 리체는 위로하기 위해 꺼낸 말인 것 같았지만 막시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생각해 보면 전부 알 것 같은 일이야. 알비가 내게 이 악보를 줄 때 난 영문을 몰랐지, 하지만 그 전에 알비가 내 바이올린을 보고 연주해 달라고… 말로 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그런 의사를 보였었어. 그래, 솔직하게 나, 저번에 쥬스피앙 마법사한테 얘기를 듣고서부터 이 바이올린을 제대로 연주할 자신이 없어져서 아무 데서나 켜고 싶지 않았다고, 그래서 거절했어. 그랬는데, 그러고 나서 내가 이 상자를 열어젖혔을 때, 알비가 상자 바닥에 있던 이걸 집으려고 하기에 내가 꺼내주니까 오히려 내게 주면서 '당신한테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단 말이다." 다들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지만 너무 아까웠다. 쉽게 얻기 힘든 기회를 허공에 날려버렸다. 리체가 목을 가다듬더니 다시 말했다. "막시민, 너 어차피 마법사가 될 거 아니랬잖아. 그런 거 있어봤자 쥬스피앙 아저씨한테 붙잡혀서 평생 조수 노릇이나 하게 됐을지도 몰라. 그러니 이제 잊어버려, 어떡하겠니." 이 배에 더 볼일은 없었다. 일행은 도로 보트에 올랐다. 보트를 저어 온 선원들은 일부러 전날 함께 오지 않은 사람들로 골랐기 때문에 이들이 나누는 이야기에 관심 갖는 사람은 없었다. 옛날 애기 정도니 하는 걸로 여기는 듯했다. 리체가 말했다. "하나 이해가 안 가는 건, 해적들 말야. 그들은 유랑 극단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저주가 풀렸다는 사실이야. 그렇게 되는 걸 보면 처음부터 이 학살 대문에 생겨난 저주였다는 걸까? 저주를 거는 마법사나 그런 사람이 없어도 이런 꼴이 될 수도 있는 걸까? 나쁜 일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조슈아가 중얼거렸다. "우리가 마법사가 아닌 이상 알 수 없는 일이지." "막시민도 말했잖아, 그런 식이라면 세상에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라고." "그래, 맞아. 여기엔 무슨 비밀이 있는 것일지도 몰라. 확실한 건, 우리가 알 수 없다는 사실뿐이지." 알테나 호에 오르기 직전, 막시민이 말했다. "악보, 내버릴까." 조슈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줘 봐. 내가 한번 복원해 볼게. 큰 기대는 하지 말고, 워낙 지워진 곳이 많아서 어렵긴 하겠지만 음표가 적게 지워진 소절은 혹시 채워 넣을 수 있을지 몰라." Intermezzo. 4월의 폭풍 "내게 긴 편지가 있어 그대에게 부치지 못하고 이때껏 가슴한편에 두었다가 오늘에야 날려보내네 녹색 절벽 아래로 흰 나비떼처럼 죽어가는 사람의 말." 눈에 익었다. 떠난던 날 그대로였다. 테이블 귀퉁이 소금그릇의 색이 바래고 창틀에 나란하던 바이올렛 화분이 비었을 뿐, 문에 매달았던 화환은 바삭바삭 삭아 손끝으로도 바스러뜨릴 수 있을 듯했다. 열어놓은 문 너머로 뿌옇게 흐린 바다도 같았다. 얼마나 됐던가, 기억을 더듬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굳이 그래야 할 필요는 없었다. 늘 앉던 의자에 모자를 걸어 놓고, 맞은편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가 앉던 의자였다. 의자는 한족 다리만 닳아 있었다. 그가 의자를 한족으로 들며 일어서던 버릇 때문이다. 몸을 기울이니 의자가 달칵거리며 힘들어했다. 자세를 바꾸어도 마찬가지였다. 일어나 부엌에서 사다리 대신 쓰던 동그란 의자를 가져왔다. 등받이 재신 빈 벽에 붙여 놓고 앉아 기댔다. 벽에 머리를 대는 순간 문득 오래된 연기 냄새가 스쳤다. 착각일지도 모른다. 옛날 그와 함께 벽난로에 피웠던 참나무 장작 냄새가 남은 듯 느껴지는 것은. 테이블 먼지 속에 컵이라도 놓았던 듯 둥근 자국이 있었다. 어느 때 그곳에 놓았던 컵이 저절로 떠올랐다. 거기에 꽂혔던 바람개비 모양의 꽃도, 지금은 사라진 것들. 그 시절과 다름없이 작은 집이었다. 1층에는 이곳 거실 겸 식당과 밖으로 딸린 창고밖에 없었다. 나선 계단이 한 바퀴 돌기 전에 2층에 닿았고, 그곳에 침실이 있었다. 눈에 선한 풍경이었다. 무늬의 결을 살려 짠 흑단나무 침대에 자그마한 파란 꽃을 수놓은 침대보를 갈았었다. 머리맡에는 앉은뱅이 탁자 대용으로도 썼던 고풍스러운 상자가 있을 것이다. 청록색 칠을 했고 테두리에는 쇠징 장식이, 뚜껑과 맞물리는 곳에는 닫히지 않는 자물쇠가 걸린 경첩이 붙어 있는 상자, 뚜껑을 열면 누군가의 오래된 물건들이 있었다. 두 삶 중 누구의 것도 아닌 일기책과 다 지워진 초상화, 금색 머리카락이 든 메모리얼 로켓, 벵릴 달린 옛날 모자, 이지러진 진주를 엮은 팔찌. 빗살 덧문을 열면 넓은 테라스로 이어졌다. 난간과 창틀, 바닥에도 흰 칠을 했다. 나란히 앉을 수 있는 긴 의자도 하얗고, 돛포로 만든 차양도 희다. 그곳에 서면 절벽과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그해 4월에는 하얀 별꽃과 데이지가 절벽 머리를 덮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곳에서 비가 차양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고, 비가 개자 젖은 꽃잎들이 일제히 반짝이는 것도 보았다. 그들이 떠난 후 지금껏 닫아 두엇을 것이다 다시 올라가 덧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가면 그해처럼 핀 꽃을 볼 수 있겠지만 그녀는 그 자리에 머물렀다. 고개를 젖혀 벽에 댄 채 참나무 장작 냄새를 맡으며, 나선 계단에 앉은 먼지와 그 너머로 꼭 닫힌 그릇장 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들어오며 올려다본 지붕의 십자 풍향계가 마음 둔 곳을 가리키며 흔들리고 있었다. 집의 마음도 자신과 같을까, 흔들리고 있을까. 오늘은 서풍이 분다. "어머." 문간에서 들린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거실을 비추던 햇빛이 절반이었다, 바다를 가리며 선 여인은 한 손으로 머릿수건을 매만지며 머뭇거렸다. 다른 손에는 보퉁이가 들려 있었다. 이제 이 집의 주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도 저도 모르게 물었다. "누구신지?" "아, 저기, 청소를 하러 왔어요. 저기……." 집의 관리를 아랫마을의 누군가에게 맡겼던 기억이 낫다. 아마 자주청소하지는 않았던 것이리라. 그래서 저렇게 쩔쩔매는 것일지도 모른다. 먼지가 곱게 쌓인 테이블에 그녀가 팔꿈치를 집고 있었으니. "들어와요." 여인은 안으로 들어오며 선창 위에 얹어 놓은 육중한 자물쇠와 열쇠 꾸러미를 흘끔거렸다. 집 열쇠를 가진 사람이니 주인일 거라고 짐작하는 것처럼. 테이블 앞가지 와서 보퉁이를 열고 앞치마를 꺼내 둘렀다. 보퉁이에는 깨끗하게 빤 천이 한 뭉치 남아 있었다. 곧 걸레가 될 운명이겠지만. "저어, 뵈었던 기억이 나요." 여인이 불숙 말했을 때는 조금 놀랐다. 여인의 얼굴을 봤지만 얼른 기억할 수가 없었다. "저는 리즈 홀덴이라고 해요." 어차피 자신이 이곳에서 만났을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그녀는 집 관리를 맡겼던 농가의 딸을 기억해 냈다. 당시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고, 과히 밉상은 아니어서 웃으면 보조개가 귀엽던 젊은 부인이었다. 그녀가 기억을 더듬는 걸 알아차렸는지 리즈가 말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서 제가 했어야 했는데, 저기, 조금 소홀했던 것을 용서해 주세요." 이제 와서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리즈는 조금 웃었는데, 보조개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뺨 전체가 홀쭉해졌다. 그 사이 너무 변했다. 알아보지 못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저기, 죄송해요. 아씨 성함이 생각나지 않아서, 뭐라고 부라면 될는지……."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앤." 리즈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통을 찾아내어 밖으로 나갔다. 덧창 너머로 물을 긷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억눌렀다. 그녀는 미련을 남기는 것을 싫어했다. 오늘 저녁까지는 이곳에 있어야 했다. 그래야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다. 떠나야 한다면. 리즈가 물에 빤 수건들을 바구니에 담아서 돌아왔다. 앤이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더니 주저하며 말했다. "저기, 먼지가 많은데 여기 계시면 옷이 더러워지셔요." "됐어요. 신경 쓰지 말아요." 리즈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머지를 털다가는 질식할 정도다보니 걸레질로 하나하나 닦으려나 보다 했다. 앤의 예상은 틀렸다. 찬장이며 그릇창을 여는 소리가 나더니 리즈는 안에 든 것을 커다란 대바구니에 모조리 쓸어 담아 나왔다. 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그것들을 집 밖으로 가지고 나가더니 어딘가에 쏟아 놓고 바구니만 갖고 들어왔다. 다음은 커튼과 방석이었다. 의자 덮개며 테이블보, 등갓 따위도 전부 바구니에 쳐박았다. 빨래를 하려는 것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뒤섞어버리는 느낌이었다. 마치 집 자체만 빼고 모든 것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리즈의 손이 벽난로 위를 덮은 장식천에 닿았을 때, 앤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걸 어쩌려는 거죠?" 예상했던 대답이 튀어나왔다. "버리려고요." "왜요?" "그러라고 하셨는데요?" 누가 그랬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앤이 망연히 보는 가운데 리즈는 바람개비 모양의 파란 꽃을 서툴게 수놓은 장식천을 구겨서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그 위에 놓여 있던 낡은 장식품들도 함께 바구니로 쓸려 들어갔다. 앤이 덧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밖에는 손수레가 하나 놓여 있고 그 위에 집에서 내간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바람개비 꽃의 장식천도 곧 그들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 리즈가 다시 들어왔을 때 앤은 감정을 누르려 애쓰며 말했다. "누가 시킨 거죠?" 리즈는 놀란 눈을 했다. "저기, 감독하러 오신 것 아니셨어요?" "묻는 말에나 답해요. 누가 이곳을 청소하고… 저것들을 다 버리라고 했죠?" "저는, 저기, 저기,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 앤의 목소리에 겁을 먹은 리즈는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앤은 입을 꼭 다문 채 리즈를 노려볼 뿐이었다. 마음을 다잡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이 여자의 잘못이 아니다. 이 여자에게 화를 낼 필요가 없다. "당신을 탓하려는 게 아니에요. 명령이 잘못 전달된 것이 아닌지 확인하려는 것뿐이니까." 그 말에 겨우 안심했는지 리즈는 한숨을 내쉬었다. 눈가가 눈물로 얼룩지자 좀 전보다 더욱 초췌해 보였다. "저기, 직인이 찍힌 편지를 가져왔어요. 전에도 왔던 사람이, 얼마 안 있어 공작께서 지내러 오실 테니까 더러워진 물건들은 다 버리고, 저기, 커튼이나 시트나 방석도 전부 흰 것으로 바꾸라고 했어요. 저기, 신부와 함께 오실 것이기 때문에 하얀 색이 좋다고……." '신부'라는 말이 가시처럼 걸렸다. 되물어 확인하려는 자신을 간신히 억눌렀다. 새로운 사실이 아니었다. 언젠가 닥치리란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새삼스러운 관심은 보이지 않겠어. 더 묻지 않겠어. 어차피 어긋났어. 돌이킬 순 없어. 손끝이 떨리는 것을 멈추려고 테이블 귀퉁이를 꽉 붙잡았다. 완벽히 감출 순 없었다. 리즈는 더듬거렸다. "저기, 놀라셨나 봐요." 앤은 한참 뒤에 말했다. "신경 쓰지 말아요." "저기, 조금… 알 것도 같아요." 무엇을? 앤은 고개를 돌렸다. 그 전에는 자신이 눈을 내리깔았다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측은해하는 눈빛을 보니 더 참기가 힘들었다. "저기, 주제넘은 말이 될 것 같지만 제가 아씨를 옛날에 뵈었을 때, 저기, 공작께서 아씨를 많이 좋아하시는 것 같았어요." "……." 수치심이 일었다. 그들의 일을 모르는 사람을 탓해보았자 달라질 것은 없는데도 곤두선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당신은 아무 것도 모르니까 참견하지 말고 가버려요." 리즈는 대답도 제대로 못한 채 앤의 눈을 피해 부엌으로 들어갔다. 앤은 자신을 다스리려 노력했다. 아직 해가 떨어지려면 조금 시간이 남았다. 스스로에게 약속한 시간이었다. 그때까지 버틸 의미가 있을까? 없을 것이다. 어차피 예상하던 일이고, 이제 확인된 일이었다. 많은 기대 없이 이곳에 왔다. 눈앞에 나선 계단이 보였다. 저리로 오르면 흰 테라스가 있다. 봄꽃으로 덮인 절벽과 늘 물안개가 낀 바다를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그곳을 보고 싶다. 이제 아무 의미도 없더라도. 아니, 보지 않는 편이 좋을 지도 모른다. 앤은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걸레질을 하느라 찬장이 삐걱대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리즈는 앤의 기척을 즉시 알아들었다. 얼른 걸레를 놓고 바로섰다. "죄송해요. 아씨, 잘못했어요." 앤은 고개를 흔들었다. 둘의 나이는 비슷한 듯했다. 상관 없는 사람을 다그친 것을 잘못이었다. 아무에게도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앤이 부엌 기둥에 기대어 서자 리즈는 어쩔 줄 모르고 걸레를 잡았다 놓았다 했다. 앤은 불쑥 말했다. "옛날에 당신 얼굴이 지금보다 보기 좋았던 것 같군요." "저기, 저를 기억하세요?" "기억나요, 갓 결혼했던 것도, 좀 더 잘 먹도록 해요. 보조개가 없어질 정도로 말랐군요." 부엌의 공기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리즈는 걸레를 새 것으로 바꾸어 쥐었다. "먹어도 소용없네요. 뱃속에 검은 구멍이 있어서 그리로 몽당 나가버리네요." "남편이 속을 썩이나 보군요." "그랬으면 좋게요." 리즈는 한숨을 내쉬고는 화덕을 닦기 시작했다. 사이를 두고 말이 이어졌다. "돌아와 속이라도 썩여줬으면, 제발 그래 줬으면 하는데도 당최 돌아올 생각을 않네요. 아무래도 바닷무덤에 들어간 게지 싶네요." 앤은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괜히 물었군요." "아녜요. 뱃사람네들 사는 게 다 이렇네요. 이런 줄 알고 사는 거네요." 리즈는 걸레를 놓고 이마를 훔쳤다. 어설픈 미소가 떠올랐다. "제가 이래서 아까 아씨한테 주제도 모르고 설친 게죠. 에고, 귀한 분들 속을 저 같은 게 어찌 안다고." 앤은 말없이 리즈를 바라보았다. 한참 일하던 리즈는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앤이 말했다. "나도 곧 무덤에 가요." "어머나." 리즈는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섣불리 나서다가 조금 전처럼 타박을 들을까 겁나고, 그래도 모르는 체 하기에는 마음이 안됐고, 그런 생각이 얼굴에 다 드러나 있었다. "오래 전부터 정해져 있었어요. 이제 돌아가는 것뿐이에요." "저기……." "어차피 이어지지 못할 운명이었어요. 무덤이 날 기다리는 한. 꿈을 꾸었던가 봐요. 이 집이 너무 아름다워서, 이 집에서 영영 사는 꿈을." 앤은 돌아서서 2층으로 올라갔다. 가느다란 그림자가 계단에 끌리다가 곧 사라졌다. 리즈는 앤의 두시모습을 바라보며 안절부절 못했다. 좀 전에 올라가 본 2층에는 테라스가 있었다. 환기를 하려고 열고 보니 밖은 해안 절벽이었다. 별꽃이 깔린 아름다운 절벽 머리가 초록색 낭떠러지로 이어지고, 몇 걸음 안가 곧게 떨어져 내렸다. 알바트로스의 날개 같은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래서 그 날개를 타고 바다로 갈 수 있을 것 같은 테라스다. 날아서……. 바람이 들어와 문이 덜컹이는 소리가 들렸을 때 리즈는 참지 못하고 나선 계단에 뛰어올랐다. 얼마 안 되는 계단이 급한 마음 탓에 길었다. 두 번이나 발을 헛디디고서 겨우 올라섰다. 계단참에서 돌아섰다. 침실 문이 열려 있었다. 문간으로 다가갔다. 방 전체가 바람이었다. 푸른 꽃 박힌 이불이 바스락거렸다. 덧창ㅇ, 차양이 소리를 냈다. 돌풍을 만난 돛처럼, 테라스는 뱃머리가 되었다. 막 바다로 나아갈 듯했다. 테라스 끝에 앤이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 하얀 것이 있었다. 그녀가 하늘로 손을 펴자 나비떼처럼 흩어졌다. 절벽 아래로, 춤추며 떨어져갔다. 당신은 멀리 떠나자 했지 내 손을 잡고서 내가 꿈에 본 곳으로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로 우리가 이곳을 찾아냈을 때 잡았던 당신의 손이 난 영원할 줄 알았지 영원히 머무를 줄 알았지 폭풍 같던 봄이 가도 풍향계는 당신을 가리키고 혼자 선 테라스에서도 아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당신의 웃음. 12막. Yearning 1. 두 사람의 돛배 "내 머릿속에 황금으로 만든 작은 아이가 춤춘다. 그가 천사인지 악마인지 알 수 없으나 내 몸 안의 가장 귀하고 부드러운 것들을 내주어 날마다 먹고 마시게 하지 않으면 죽는 것을 안다. 내가 메말라 나무껍질처럼 비틀어지는 동안에도 황금의 아이가 춤춘다. 오, 살아 있는 보람이여 내가 혹 지치고 마를까 조바심에 발버둥치며 게걸스럽게 먹고 마시는 내 위장은 언제나 공허(空虛)." 꿈을 꾸었다. 전처럼 소스라쳐 깨어나지는 않았다. 머리맡이 땀으로 흠뻑 젖는 일도 없었다. 단지 눈을 뜰 뿐이다. 더는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눈을 뜨고도 오랫동안 그대로 누워 있었다. 새벽이 희뿌옇다. 아니다, 이미 아침은 와 있다. 커튼의 우윳빛이 가리고 보여주지 않을 뿐이다. 빛을. 그의 세계는 아직도 밤이다. 그는 내버려두었다. 좀 더 밤인 채로 자신을 내버려두었다. 되풀이되는 꿈은 풀리지 않은 문제를 의미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문제는 해결되었다. 지긋지긋한 아버지와 친한 친척들, 그의 발목을 옭아맸던 족쇄는 없어졌다. 어린 시절을 보낸 낡은 집은 이미 태워버렸고 그 자리에 다른 저택을 지었다고 들었다.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집은 그의 꿈속으로 옮겨왔다. 꿈에 그는 여덟 살인가 아홉 살이었다. 검은 창틀에는 덧문도 유리도 없었다. 어린 그는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에는 말라죽어가는 나무가 하나 있을 뿐이다. 몇 년 동안 그런 모습이었는지 모른다. 한 계절에 가지 하나씩, 그렇게 죽어가는 것처럼 꾸준히 말라갔다. 본래 무슨 나무였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나무는 공기 속에 검은 붓으로 그려 놓은 듯했다. 황량한 갈색뿐인 들판에 가늘고 날카롭게 뻗어 있었다. 나무에는 까마귀가 살았다. 기분이 나쁠 때면 소리쳐 새를 쫓았다. 꿈속의 그는 어느 날인가 그랬던 것처럼 쫓아도 날아가지 않는 새를 향해 잉크병을 집어던졌다. 반쯤 닫혔던 뚜껑이 열리며 검은 잉크가 허공을 그었다. 까마귀는 날아가는 듯했지만, 옆 가지로 옮겨 앉았을 뿐이었다. 푸드덕대는 날개가 어린 그의 날갯죽지보다도 커 보였다. 벗어날 수 없을 듯했던 감옥의 기억. 잉크가 피처럼 튄 나무 둥치를 내려다보았다. 밤이 오고 있었다. 답답함이 목을 옥죄고, 점점 강해졌다. 그래도 숨이 막혀. 목이 졸려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석양이 검어지는 것을 보다가, 나무가 흐려지는 것을 보다가, 그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귀가 뜨거워졌던 기억만 남아 있었다. 얼마 시간이 흐른 뒤 그는 아무도 돌보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깨어났다. 목이 탔지만 물을 마시려면 집 밖 우물까지 나가야 했다. 걸을 힘도 없어 겨우 창턱을 짚고 일어서자 검은 나무 위로 얇은 달이 떠 있었다. 그 달을 바라보다가 돌아서서 몇 걸음 뒤에 있던 침대에 엎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꿈 대신 자신의 침대에 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도자기 물병도 있었다. 몇 년 전, 뚜렷한 사건조차 없는 그 시절의 나날이 꿈에서 되풀이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상할 정도로 두려웠다. 악몽을 꾼 것처럼 숨을 헐떡이며 깨어났고, 잔상이 하루 종일 가시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한두 해가 지나자 그는 침착해졌다. 꿈에 새로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두 그가 옛날에 겪은 일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두려워할 것은 없었다. 기억 속 페이지가 잠깐 펼쳐지는 것뿐이다.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그 시절은 끝났다.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는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잠들지도 않았는데 꿈이 먼저 왔다. 자신은 어두운 방에서 촛불을 켜고 책을 보고 있었다. 가누기 힘들 정도로 커다란 2절판 책이다. 표지가 보이지 않았지만, 「검은 마술의 지식들」이라는 제목이 떠올랐다. 어려서 그가 자주 읽었던 책이었다. 책에 나온 대로 누군가를 저주해서 죽여 버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찾아올 사람 하나 없는 밤을 그 책과 더불어 새곤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리 훌륭한 책이 아니었다. 어린아이가 밤에 혼자 보기에는 특히 그랬다. 여러 지역의 음산한 전설이나 일화를 순서도 없이 섞어 놓았고, 밤이 긴 고장에서 믿어지는 주술이나 예언, 운명을 알아보는 법, 그리고 중간 중간 엉터리 주문이나 마법진 따위가 그려져 있었다. 그걸 믿고서 어설프게 따라해 보았던 자신은 아직 어렸었다. 하지만 꿈속의 자신은 눈을 반짝이며 책을 읽고 있었다. 너무 여러 번 읽어서 꿈속에서조차 또렷한 글귀다. 당신을 돕는 것들, 그리고 가로막는 것들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달의 날짜로 당신의 생일을 찾아봐야 한다. 달의 날짜는 인생의 드러난 반쪽 대신 숨겨진 반쪽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차오르는 초승달 기간에 태어났다면 당신은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행운의 구두를 신고 태어난 것이다. 코가 뾰족한 초승달, 즉 행운의 구두는 깜짝 놀랄 만한 재능과 행운을 주는 요정들의 물건이라고 말해진다. 행운이란 본디 구두 속에 채워 주는 것인 까닭에 구두, 즉 달의 속이 비어 있는 알짜일수록 많이 받을 수 있고 달의 절반이 채워지면 받을 자리가 없다고 본다. 그런 때에 태어난 자들은 자신의 손에 쥔 것만으로 인생을 꾸려가게 된다. 저무는 달, 즉 그믐도 빈 구두이므로 그때 태어난 사람에게도 행운의 구두가 주어지긴 한다. 하지만 자칫하다가는 없는 것만 못하게 될 수가 있다. 본래 구두란 물건은 두 짝이 모여 한 켤레가 되기 마련이다. 모든 그믐달에겐 달의 모양과 위치, 시각까지 정확히 대칭이 되는 초승달이 있다. 그가 가진 구두와 한 켤레를 이룰 이 초승달 구두의 주인을 '맨발의 주인'. 또는 '추월자'라고 부른다. 다행히 그를 만나지만 않는다면 문제는 없다. 그러나 만일 그믐달 주인이 이 자와 마주친다면 그 순간 짝을 찾은 구두는 초승달 주인에게로 가버린다. 그 결과 초승달 주인은 두 배의 행운을 얻게 되지만 그믐달 주인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그믐달 주인들은 죽을 대가지 '추월자'를 기다리며 송곳니를 갈아 놓는다. 행운의 구두를 도로 빼앗아오는 방법은 오직 하나 뿐이며 그믐달 주인들이라면 누구나 그 방법을 알고 있다. 이 책을 집어든 당신도 알고 있을 것이다. 엷은 비가 내렸다. 수면에 발자국도 남기지 않았다. 뒷갑판 계단에 기대어 앉아 고개를 들고 비를 맞았다. 물길을 그리는 대신 얼굴 전체를 서서히 적시는 비였다. 그 비를 점토인형처럼 빨아들였다. 하얗게 부서지는 비는 분장용 분 같기도 했다. 비가 아니라 물기를 묵직하게 머금은 바람 같기도 했다. 그렇게 시원하게 온 몸을 쓸어 주었다. 7월의 남쪽 바다. "한가하구만." 눈꺼풀을 들자 빗물로 흐릿해진 친구의 얼굴이 보였다. 조슈아는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웃었다. 막시민이 말했다. "이게 무슨 비인지 알고 그렇게 한가한 거냐?" "응." "안다고?" 조슈아는 눈을 비볐다. 머리카락이 흩어져 달라붙은 이마가 근질했다. "선원들 말로는 폭풍의 전조라던데 말이야. 비안개 때문에 섬은 보이지도 않고, 다 와서 운 없이 헤매는 것 아닌지 몰라." "괜찮아, 예상했던 폭풍이거든, 우리가 가까이 왔다는 증거야." 막시민이 한족 눈썹을 올려 보였다. 추리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설마, 이게 그거냐? 옛날에 얘기 들었던?" "역시 막군은 생각해 낼 줄 알았어." 배가 한차례 기우뚱거렸다. 갑판이 미끈거렸으므로 막시민은 섬미로 이어지는 밧줄을 잡아야 했다. 조슈아는 젖은 옷자락을 추스르며 일어섰다. 어느새 셔츠며 바지 할 것 없이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아니 잠깐, 그게 아직도 있었단 말이야? 지나가는 폭풍을 보고 괜히 네맘대로 생각하는 거 아냐?" "아니, 이미 확신하고 왔어. 출발하기 전에 펠 집정관한테서, 이곳에 폭풍이 불고 있다는 얘기 말이야." 집정관이라면 최근 노을섬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사실이라면 판단이 서자 막시민은 긴장했다. "그 옛날 아무도 뚫지 못했다는 폭풍이잖냐? 마법 폭풍이랬나? 이거 그냥 폭풍보다 더 난감한 문제 아냐?" "아무도 못 뚫다니, 뚫은 사람 있잖아. 한 명." 조슈아가 같이 밧줄을 잡더니 빙그레 웃었다. "아니 두 명." 알테나 호에는 조슈아의 명령으로 실은 소형 돛배 한 척이 있었다. 구조선 치고는 크지만, 본격 항해를 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작았다. 다만 숙련된 항해자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북해의 터보 만 일대에서는 이보다 작은 배를 갖고 탐사를 하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 그쪽은 작은 섬이 많은 바다라 외돛배를 이용한 항해가 발달했다고도 했다. 숙련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선원 생활을 오래 했다는 의미와 달랐다. 이런 크기의 배를 자유자재로 다루려면 자신이 선원이자 항해사여야 하고, 또 선장이어야 했다. 근해에서 시작해서 몇 년, 또는 몇십 년 동안 솜씨를 갈고 닦아야 큰 바다에 나갈 만한 실력이 쌓였다. 그렇다 해도 몇 달씩 걸릴 항해에는 역시 알맞지 않은 배였다. 만일 초보자가 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겠다고 한다면? "소공작께서 이 배로 노을섬까지 가신다는 말을 믿느니, 제가 헤엄쳐서 거기까지 간다는 데 엘소 금화 한 닢 걸겠습니다. 이건 절대로 농담이 아니에요." "조 배가 조렇게 작아 보여도 말씀입죠. 직접 몰라면 여간 품이 드는 게 아닙니다요. 소공작께서 아무리 축복받은 아르님이시지만 바다에서는 갓난애기나 똑같으시다고요. 노 하나만 똑 소리 나게 젓도록 갈키려고 해도 을매나 드잡이질이 필요한지 아십니까요?" "바다 일이란 장난이 아닙니다요. 배를 몰아 보셨습니까요? 아니시라고요? 파도 한 뼘짜리 바다에도 안 보내드릴 판인데 이 폭풍을 뚫고 가시겠다니요? 해도 해도 도가 지나치십니다요." "제가 오늘 소공작 전하를 말리지 못하면 당장 바다에 뛰어들어야 됩니다. 암요, 그냥 돌아간다 해도 우리 섬 사람들이 요놈을 바다에 던져버릴 겁니다." "지금가지 하시자는 대로 다 해왔지만 이것만은 안 됩니다. 저희 얼굴을 봐서라도 참아주십쇼. 네? 제발 살려주십쇼!" 조슈아는 그들의 말을 차근차근 다 들었다. 막판엔 입가에 미소까지 보였다. 드디어 할 말이 다 떨어진 그들이 힘으로라도 막겠다는 태세로 에워쌌을 때, 조슈아가 말했다. "말리는 여러분의 심정을 이해해요. 이유도 그만하면 충분히 들었어요. 그러면 이제부터는 내가 여러분을 설득하기로 할까요? 몇 시간일 수도 있고, 며칠이 걸릴지도 모르죠. 그래도 괜찮아요. 여러분의 경험과 식견을 존중하기 때문에, 그런 시간을 들여서 설득할 가치도 있다고 봐요. 여러분도 알겠지만 나는 축복받은 아르님이기 때문에 이 설득이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지 안하요. 필요한 건 시간과 인내심뿐이에요. 나한텐 두 가지 모두 충분하죠." 반시간 뒤 선원들을 돛배를 바다에 내리고 있었다. 비는 조금 개었지만 안개는 아직이었다. 배 안에는 물통과 하루 반나절 분의 식량, 모포와 갈아입을 옷, 모자 달린 망토, 낚시 도구 등이 든 도구함, 그리고 쓸모가 있을지 알 수 없는 호신용 검 따위가 실렸다. '쓸모없는 세 사람' 중 둘도 실렸다. 나머지 하나는 뱃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섭섭한 표정으로. "조심해." 인사가 짧았던 건 정말 섭섭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막시민은 한 번 쳐다봤을 뿐 대구하지 않았다. 마땅한 대구가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이었다. 조슈아가 올려다보며 말했다. "난 네가 더 걱정돼." "내가 왜?" "남자들 틈에 두고 가니까." 리체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움직이기 시작한 배를 향해 소리쳤다. "그럼 지금까지 뭐 여자들하고 다녔냐!" 작은 돛을 올리자 배는 수면을 빠르게 미끄러졌다. 막시민이 뒷모습인 채로 한 손을 들어올렸다. 그 다음은 안개뿐이었다. 떠나기 전에 알테나 호 선원들이 조금이라도 도움을 줘야겠다고 아는 것을 다투어 떠들어댔으므로 조슈아가 듣고 기억하는 것은 무척 난잡한 조종법이었다. 그런데도 능숙하게 돛을 올려서 구경하던 선원들을 놀라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곧 파도가 높아질 테니 돛줄을 느슨하게 해. 왼손에 쥔 쪽부터 천천히, 좀 더 들어가면 돛을 내릴 테니 준비해.」 조슈아는 지체 없이 돛줄을 조절했다. 켈스니티가 멈추라고 할 때까지 풀었다가 다시 감았다. 밧줄은 굵고 거칠었지만 선장이 벗어준 좋은 장갑을 낀지라 큰 무리는 없었다. 막시민이 노를 쥔 채 익숙해지려 애쓰는 중이었다. 선원들이 말했듯 노 젓기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바다가 요동칠 때는. "강에서라면 저어 보았는데." 「바다는 다르죠. 그래도 이 정도면 잔잔한 바다입니다.」 "쳇! 해적 사제 양반, 잘난체 하긴." 처음에 계획을 말했을 때 막시민은 반대했다. 하긴 막시민이 동의할 리 없는 계획이었다. 항해 경험도 없는 두 사람이 이런 작은 배로 폭풍을 뚫고 가다니, 말만으로는 미친 짓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조슈아에게는 뚜렷한 구상이 있었다. 작은 배, 막시민도 들은 일이 있었기에 부인할 수 없었던 부분이었다. "마법 폭풍을 뚫을 수 있는 건 작은 배뿐이야. 이카본이 그랬듯이, 노을섬 사람들은 외부의 침략을 막으려고 폭풍 장벽을 만들었지, 하지만 그들도 드나들어야 했기에 해안을 완전히 차단할 순 없었어. 그래서 작은 배만은 폭풍우가 부수지 않도록 해 둔 거지. 외부인이 들어온다 해도 한두 사람일 때는 큰 해를 끼칠 수 없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더구나 켈스의 말대로라면 이 폭풍은 무척 범위가 좁아. 아니 얇아, 그걸 통과하기만 하면 해안까지는 잔잔한 바다일꺼야." 켈스니티는 과거 이카본과 함께 쪽배로 이 폭풍을 뚫었던 장본인이었다. 그러니 그의 조언은 정확했다. 당시 노을섬의 마법이 강성하던 때에도 폭풍의 두께가 고작 반시간 정도에 불과했다니까 마력이 약해진 지금은 그보다 약하면 약했지 강해졌을 리 없었다. 리체를 두고 온 이유는 만에 하나 폭풍에 휘말려 위험해질지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옛날 이 폭풍을 통과했던 유일한 배에 두 사람만이 타고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마법 폭풍의 정확한 성질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카본이 성공한 것과 최대한 비슷한 조건을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배의 규모가 문제인지, 배에 탄 사람의 숫자가 문제인지 알 수 없다고 하면 둘 다 따르는 것이 안전했다. 234, 235쪽 결락 도 않고 멋대로 생각하는 당신들!" 리체가 흡사 기사가 검을 뽑듯 손가락을 휘둘러 그들을 가리키자 선원들은 더 뒤로 물러섰다. "빨리 말해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정당한 근거 말예요. 약혼자쯤 되는 얘기를 그리 쉽게 확신할 순 없잖아요? 설마 그 두 사람이 그런 식으로 말했을 리는 없겠고." 정말로 소공작께서 아가씨한테 청혼한 게 아니란 말씀입니까? 저기, 섬에서." "아니라니까요! 대체 왜 그렇게 생각한 건데요?"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누가 먼저 그렇게 생각했는지 따질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기색은 착각했다고 수긍하는 것과 좀 달랐다. 그들은 리체에게 들리지 않도록─물론 다 들렸지만─수군거렸다. "그러면 그날 식탁 위의 페리윙클 꽃은 어떻게 된 거지?" 정오가 되도록 데워진 모래사장은 뜨끈뜨끈했다. 얇은 옷으로 누워 있자니 모래 하나하나가 살갗에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맨살은 감히 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런 모래사장은 거죽이 단단한 발로도 겅중겅중 뛰어 가로질러서 재빨리 물속에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된다. 발치에서 네댓 걸음 떨어진 곳까지 밀려온 물머리에서 포말이 부서졌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늘에 구름은 없었다. 해만 희게 번쩍거렸다. 머리카락을 건드리며 왔다고 신호하는 바람은 일어서기만 하면 온 몸에 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잠시 모래사장에 쓰러져 있을 이유가 충분했다. 물론 그리 오래 있을 순 없었다. "안 덥냐?" 그 말이 신호가 된 것처럼 조슈아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부산스럽게 모래를 털더니 아예 일어서서 바지도 털었다. "조금만 더 누워 있다간 등에 회색 점이 생기겠어." "왜 회색 점이냐?" "모래가 닿은 부분만 익은 거지, 고기가 익으면 회색이잖아." 막시민이 어이없는 눈초리를 보내는 가운데 조슈아는 신발을 벗었다. 양말도 벗어던졌다. 맨발로 디디려 하자 새삼 비명이 나올 정도로 뜨거운 모래였다는 것이 실감났다. 양감질 두 번으로 물이 들어오는 곳으로 옮겨가자 겨우 살만해졌다. 발가락 사이로 따뜻한, 그러나 모래에 비하면 시원한 물이 들락거렸다. 막시민은 겨우 상체만 일으켜 앉더니 한 마디 던졌다. "발끝만 담그는 고양이." "수영을 하면 온몸이 소금투성이가 돼버린다고, 씻을 곳도 없고." "넌 이미 소금투성이야, 바닷물이 아니라 땀으로." 막시민은 천천히 일어나서 기지개를 켰지만, 곧 오만상을 찌푸렸다. 팔은 물론이고 어깨며 허리, 허벅지, 갈비뼈 언저리까지 모조리 쑤셨다. 조슈아라고 다를 것 없었다. 잠시 후 둘은 똑같이 발만 담근 채 엉성한 자세로 체조를 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없는 한 사람, 아니 유령을 욕하면서. "젠장, 속았다고. 폭풍을 통과한 다음이 진짜 고난이라는 걸 가르쳐 줬어야 할 거 아냐." "자기 기준에서는 별 거 아니었겠지." "이 동네 사람들은 마법으로 폭풍도 만드는 주제에 자기네 해약에 순풍정도 만들어두는 예의도 없는 거냐?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작자들 같으니라고." "마법 폭풍인지 뭔지가 더 계속되는 쪽이 나을 뻔했어. 침입자들이 진짜로 있었다면 폭풍은 뚫었을지 몰라도 여기서 다 포기했을 것 같아." "잠깐이면 된다던 말이 생각난다. 쳇, 친구고 뭐고 너희 조상은 켈스를 노 젓는 솜씨 보고 데려왔던 게 틀림없어." 폭풍이 어땠는지, 어려웠는지 쉬웠는지 이젠 기억도 나지 않았다. 둘은 잔잔한 해역에 들어오자마자 섬의 윤곽을 발견하고 어려운 일은 다 끝났다고 생각하며 만세를 불렀지만, 거기서부터 바람 한 점 없는 바다를 반나절 동안 노 저어 와야 할 줄 알았다면 도로 폭풍을 뚫고 나가버렸을지도 모른다. '해안까지는 잔잔한 바다'라는 말이야말로 최악의 함정이었다. 조슈아 자신이 한 말이었지만.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이던 섬은 아무리 저어도 다가오는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날씨는 얼마나 거짓말처럼 맑아졌는지 노를 젓기 시작한지 딱 반시간 만에 온 몸이 땀투성이가 됐다. 둘이 불평하기 시작하자 켈스니티는 도망쳐버렸고, 그 다음부터는 평생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막노동으로 아침이 갔다. 반나절 속에는 둘이 자포자기해서 노를 던지고 드러누워 있던 시간도 포함한 거지만, 어쨌든 도착하고 보니 정오였다. 둘 다 몸을 물에 담그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았지만 이제부터 얼마나 큰지 알 수 없는 섬을 걸어야 했기에 망설이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조슈아가 바닷물을 찍어 이마에 바르는 것을 본 막시민이 중얼거렸다. "가다보면 씻을 데 없겠냐. 여기도 사람 살던 섬인데, 우물이든 샘이든 있겠지."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막시민은 친구의 어깨를 잡아 바다 쪽으로 홱 돌린 다음 눌러 넣어버렸다. 그 순간 철썩, 하며 큰 물결이 밀려와 막시민에게도 들씌워졌다. 똑같이 흠뻑 젖고 나니 이제 소금기고 뭐고 아무래도 좋았다. 이유가 무엇이라도 좋았다. 조금 전까지 불평하던 근육통쯤은 깨끗이 잊은 것처럼 맹렬하다 못해 과격한 물싸움이 벌어졌다. 옛날 코츠볼트의 이름도 없는 강에서 그랬던 것처럼, 강가에서 조약돌을 던지며 바다 이야기를 하던 둘이, 바다에서 재회한 이래 한 번은 이랬어야 했다는 것처럼. 더는 뜨겁지 않은 정오의 해가 둘을 갸웃이 내려다보았다. "피부가 따끔거려." "그럴 줄 몰랐냐." "다른 데는 그냥 저냥 참겠는데 얼굴 쪽이 너무 조여." "소금에 절인다고 사람 가죽이 줄어들진 않으니 안심해." "아무래도 줄어드는 것 같아." "진짜라면 늙은이들은 좋겠네, 소금물로 세수만 하면 주름 걱정도 없겠고." 해가 절반쯤 기울어졌을 무렵, 배에 실은 식량으로 요기를 하고 짐을 챙겨 떠나왔다. 지금은 오르막 경사를 걷고 있었다. 큰 마차가 다닐 만한 길은 아니지만 둘이 걷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달 다져져 있었다. 양쪽으로 유난히 잎이 큰 활엽수가 우거졌다. 본래 숲이었던 곳을 가로질러 길은 낸 모양이었다. 때로 나뭇가지며 드러난 뿌리가 길로 파고들기도 했다. 소금물에 젖은 옷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축축해진 바지자락이 다리에 감기고, 저고리도 묵직한 것이 예상했던 대로 걷기에 썩 좋은 조건은 아니었다. 근육통도 낫지 않았다. 그러나 둘은 물놀이를 한 뒤로 묘하게 생기가 넘쳤다. 걷는 길도 그만하면 쾌적했다. 나무 그늘 때문에 덥지도 않았고 가끔 새소리나 들릴 정도로 조용해서 수통의 물이 출렁거리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구둣발에 밟히는 잔가지며 마른 잎이 가금씩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나뭇진 냄새가 섞인 공기는 상쾌했다. "살기 좋은 섬인데, 왜 굳이 떠났을까." 완만한 경사의 꼭대기에 이를 즈음 조슈아가 중얼거렸다. 막시민이 대꾸했다. "공기 좋다고 살기 좋은 곳은 아니지, 먹을 게 있어야지." "먹을 게 전혀 없을 것 같지도 않아. 저 숲을 봐." "나무열매나 버섯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으니까, 식후에 홍차와 초콜릿 케이크를 반드시 먹어야겠다는 사람이라면 그걸 두들겨 패서 단념시킬 수도 없는 거고." 이제부터 내리막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조슈아가 말했다. "이곳 사람들한테 처음부터 마법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거꾸로잖아, 마법 문제가 아니었다면 굳이 살기 좋은 페리윙클을 버리고 이런 바위섬에 오지도 않았을 텐데 뭐." 땅이 뿜어낸 아지랑이 때문에 먼 곳은 또렷하지 않았지만 길이 계속 이어지는 것만은 분명했다. 조금 이상한 것은 마을처럼 보이는 곳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이 언덕을 넘으면 마을이 보일 줄 알았다. "마법에 능하면 굳이 모여 살지 않아도 되나 보지 뭐, 우물물도 마법으로 떠다 먹고, 저녁 초대라도 하면 마법으로 즉시 나타나고." "그래도 떨어져 살면 외로울 텐데, 설마 대화도 마법으로 했을까?" 막시민은 내가 알겠냐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이윽고 걷기 시작하면서 조슈아가 중얼거렸다. "그렇게 일상사까지 마법으로 해결하지는 않아도 됐을 텐데." 어쨌든 그들이 찾는 곳은 마을이 아니었다. 길을 물어볼 사람이 마을에 남아 있을 것도 아니고, 적당한 외곽이 있을 묘지만 찾으면 되었다. 이카본은 외지인이니 따로 묻었을 가능성이 없진 않았지만 그건 먼저 묘지를 확인한 다음의 문제였다. "켈스는 어디 갔냐? 나와서 안내 좀 하지." "옛날엔 부르면 바로 왔는데, ㅇ샌 그렇지가 않아서. 내킬때만 대꾸하는 것 같기도 하고." "빠져가지고." 외지인의 방문을 반기지 않았던 곳답게 어디에도 표지나 안내 같은 것은 없었다. 어려서부터 이곳에서 자라 모든 것이 익숙한 사람들만을 위한 땅이었다. 이윽고 작은 광장 비슷한 곳이 나타났다. 그 곁에 주춧돌과 부러진 기둥만 남은 건물이 서 있었다. 본래 사방이 벽으로 막힌 건물은 아니었던 듯도 했다. 널찍하게 간격을 두고 선 큰 기둥들이 주위를 둘렀다. 천장은 남아 있지 않았지만 몹시 높았던 모양이었다. 무너진 기둥들을 보건데 사람 키의 열 배 이상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둘은 이런 형태의 건물을 처음 보았다. 기둥은 건물뿐 아니라 주위 바닥까지 쭉 이어졌다. 다시 말해 기둥이 있었던 자리인 듯, 둥근 돌 기단이 두 줄을 이루고 있었다. 건물을 둘러싸고 자랐을 참나무가 어느새 기둥 안쪽을 침범한 모양새였다. 이대로 간다면 건물 자리가 숲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제대로 남아 있었다면 그럴듯해 보였을 집인데." 소금물에 절여져 초라한 꼬락서니로 서 있자니 더 위압적으로 느껴지는 폐허였다. 막시민은 한쪽 다리를 비스듬히 짚고 서더니 한 손을 흔들어대며 지껄였다. "동냥 왔슈, 따뜻한 목욕물, 갈아입을 옷, 푹신한 침대와 상다리가 부러질 저녁 식사 좀 줍쇼." 조슈아가 피식거리며 따라했다. "벨크루즈 27년산 포도주 한 잔 곁들이고 후식은 케르느메 홍차에 호두와 아몬드를 넣은 파이로 하면 되겠슈." "저 자식은 비단옷이 아니면 안 입는다고 하니 참고하슈." "저쪽은 스무 시간 내에 깨우면 화를 낸다는 것도 알아두슈." 「잘 알아 모시겠습니다. 그럼 목욕물부터 대령할까요?」 둘은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 고개 방향만 돌렸다. "폐허에서 노닐다가 유령이 나타났으니 이보다 어울릴 수 없지." "맞았어, 게다가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세 가지 소원 정도는 들어주기로 되어 있지 않아?" 켈스니티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줄 수도 있지. 첫 번째는 뭔데?」 "일단은 목욕물이고." 조슈아가 입을 열자 막시민이 받았다. "다음은 묘지가 어디 있는지 안내 좀 해봐." 「두 가지가 됐군요. 그럼 마지막 하나는?」 둘은 서로 마주보지도 않고 입을 모아 소리쳤다. "이따가 노 안 젓고 돌아가게 해줘!" 2. 무덤 "내 계절에는 비밀이 있어. 추워 견딜 수 없던 어떤 날 봄을 한 조각씩 잘라 삼켰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다 떨어지고 여름과 가을과 겨울만 남아버렸어, 끊어진 고리를 이어보겠다고 가을을 절반 잘라다 봄 자리에 놨지. 그래서 내 봄은 잎 지고 시드는 계절 그러니 봄 좀 나눠줘, 한 조각이라도 가을 뒤엔 겨울밖에 안 온단 걸 깜빡 잊었어." 해가 저녁 하늘에 걸렸다. 노을은 일렀지만 낮의 빛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묘지는 해안가에 있었다. 그들이 배를 댄 쪽이 아닌 서쪽 해안이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비스듬한 경사에 갖가지 묘석들이 줄지어서, 또는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다. 묘지 영역을 표시하는 울타리 같은 것은 없었다. 두 사람은 가장 북쪽에 있는 묘비 앞에 섰다. 단순한 직사각형에 위쪽 모서리만 조금 둥글린 모양이었다. 중앙에 이름과 생몰 연대가 씌어 있었다. 아니, 추측일 뿐이고 실은 글자를 읽을 수가 없었다. "가나폴리의 문자일까?" 확인해줄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마주보며 갸웃거리다가 다른 묘비를 차례로 훑어보았다. 다행히 어느 정도 지나자 알아볼 수 있는 글자가 써진 묘비들이 나타났다. 카모렌, 홀레, 크니발, 로벨, 테나슈프, 뵐프, 코크니발트, 로엔, 마타람, 페니엘, 트리비스……, 막시민이 읽고 있는 동안 조슈아가 말했다. "이거 연대별로 배치되어 있는 것 같아." "하지만 여기 새겨놓은 연대가 아노마라드력은 아닐 거 아냐." "그렇겠지? 하지만 내가 들어본 이름을 찾아보면 시대를 대충 맞출 수도 있을 것 같아." 이윽고 조슈안 한 묘비 앞에 멈춰 섰다. 동그란 묘비 가운데 '아몬드빛의 제노비아'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조슈아는 그 이름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막시민은 설명을 기다리다가 조슈아의 얼굴을 보았다. "이 사람이 누군데? 어디서 들어본 듯도 하고." 섬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조슈아의 얼굴이 흐려졌다. 대답도 한참 뒤에 나왔다. "이카본의 손녀야." 막시민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그렇다면 이카본의 무덤도 이 근처에 있어야겠군, 우리 영감처럼 장수 노인네라 해도 손녀보다 오래 살긴 힘들 테니." 둘은 근처의 묘비 사이를 돌아다녔다. 수많은 이름들을 읽었다. 그러나 이카본의 묘비는 찾을 수 없었다. 주인이 불분명한 묘비들, 무엇보다도 파헤쳐진 흔적이 남은 무덤도 없었다. 잠시 후 둘은 '아몬드빛의 제노비아'의 무덤 앞에 돌아와 물끄러미 그 이름을 바라보았다. 쪼그리고 앉아 있던 막시민이 말했다. "감상적으로 생각할 거 없어." 조슈아는 묘비에 새겨진 이름을 손가락 끝으로 따라가다가 불쑥 말했다. "이 이름, 무척 예쁘지 않아?" "듣고 보니 그런 듯도." "저 얘, 백치였데." 막시민은 입술을 실룩일 뿐 대꾸하지 않았다. 조슈아가 말을 이었다. "아우렐리에가 말하길 그쪽 핏줄에서는 나 같은 사람 대신 백치나 광인만 태어난다는 거야, 난 그게 이상하게 생각됐어, 어째서 한쪽 핏줄만 그럴 수가 있을까? 그것도 노을섬의 마법의 영향일까? 그 무구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니, 그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얼마든지 더 이어갈 수도 있는 이야기였지만 막시민은 일부러 몸을 일으켰다. "할머니가 되어서 죽었을 옛날 여자 얘긴 그만두라고, 우린 닥친 문제를 생각해야 해. 여기 이카본의 무덤이 없다면 왜 없을까? 일부러 숨겼을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혹은 네 매형이 모조리 파갔을까? 하지만 그럴 법한 자국이 없는데, 이 일대의 떼가 고운 걸 보면 말이야." 조슈아가 정색을 했다. "막군, 전에도 말했지만 난 아직 확신하지 않고 있어." "그거야 네 자유지, 확신하는 것도 내 자유고." 서로 더 얘기하고 싶지 않은 화제였다. 조슈아는 따라 일어서더니 묘비를 짚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아니고 다른 곳일지도 모르지, 이카본은……." "알아, 이카본은 이곳 사람이 아니니 다른 곳에 묻혔을 수 있다 쳐, 그렇다면 아나로즈의 무덤은 왜 없지?" 아무리 고향을 버리고 떠났다가 돌아왔다 해도 아나로즈도 이곳에 묻히지 못했다는 것은 조금 이상했다. 역시 두 사람만 일부러 다른 곳에 묻은 것일까? 막시민이 아무데로나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켈스, 당신 생각은 어때? 여기 말고 다른 묘지도 잇는 거야?" 「그럴 정도로 큰 섬이 아닙니다. 하지만…….」 켈스니티는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이윽고 이어진 목소리는 신중했다. 「조슈아가 노을섬의 후손이라는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에 의하며 아나로즈는 이곳으로 돌아와서 봉인된 무구를 지키는 역할을 맡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죽었다면 그 자리에 묻혔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의 혼이 생전의 의지를 잇는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던 때니까요.」 조슈아가 말했다. "웨더렌 할머니는 아나로즈가 들어간 곳을 '무덤'이라고 말했어. 무구를 지키던 사람이 대대로 그곳에 묻혔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던 것일지도 몰라." "그렇다면 무구를 봉인했다는 그곳으로 가야 되는 건가, 어이, 안내는 되는 거야?" 「거기까지는 됩니다.」 "혹시 위험한 곳은 아니겠지?" 「위험한 일을 일으킬만한 능력도 없을 겁니다. 우리에겐.」 "자신을 포함해줘서 고맙군, 겸손하게, 그럼 가 볼까." 막시민은 분명 내켜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들이 묘지를 벗어날 즈음 켈스니티가 말했다. 「자, 순서가 바뀌엇지만 잠시 목욕을 하러 갈까요.」 조슈아가 반색하며 말했다. "아아, 제발 그래 줘. 조금 더 있다간 절인 육포가 될 지경이야." 막시민은 조슈아의 얼굴에 생기가 도는 걸 보며 이죽댔다. "살은 없고 뼈뿐인 아주 맛없는 육포겠지." 막시민도 목욕을 기다리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켈스니티가 안내한 곳은 기대했던 샘이나 강이 아니었다. 빈 집 두 개가 나란히 선 사이에 불쑥 솟은 우물을 보고 조슈아는 김새는 표정을 지었다. "우물뿐이야?" 「그 정도 물이면 실컷 씻을 수 있어. 강은 너무 멀어, 해가 지기 전에 무덤을 찾아내야지.」 막시민이 두레박을 툭툭 건드려 보더니 말했다. "몸을 담글 곳은 없는 거야? 우림 좀 까다로운 동냥거지라서." 「우물에 내려가서 헤엄치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습니다. 올라오는 방법은 직접 고려해 주세요.」 "오, 켈스. 꽤 냉담한 반응인데." "그놈의 노질로 어깨가 빠질 지경인데 이젠 물 긷기까지, 이 일이 끝나면 어딘가의 하인으로 취직해도 되겠어."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서로에게 번갈아 퍼붓기만 하면 됐지만, 이것도 간단히 끝나지 못할 운명이었다. 누가 먼저였는지 모르지만 두레박을 끌어 올리자마자 상대방의 얼굴에 냅다 끼엊는 바람에 이른바 '두레박 전쟁'이 발발했다. 하나가 도르래를 감는 동안 줄곧 노려보고 있다가, 두레박이 올라오면 잽싸게 낚아채고 실패한 쪽은 물벼락을 피해 달아나는 식이었다. 적당히 목욕이 되는 선에서 끝냈으면 될 걸, 사내애들의 놀이가 흔히 그렇듯 지나치게 과격해지기 시작한 두레박 전쟁은 우물 주변을 물바다로 만들고도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250쪽 결락 놀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 이제 우린 썩은 목장의 꼬마 녀석들이 아니고 말이야." "되돌아갈 수도 있을 거야. 꼭 코츠볼트가 아니어도 되고, 꼬마로 돌아갈 필요는 없지만." "되고말고 넌 네 머릿속의 목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다. 거기다 어떤 251쪽 결락 조수아가 가서 서는 곳을 보며 막시민이 중얼거렸다. "젠장, 농담이 아닌가본데." 낭떠러지가 아닌가 한 생각은 다행히 어긋났다. 그 자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좀 더 넓은 암반이 자리 잡은 것이 보였다. 탈색된 것처럼 새하얀 바위였다. 켈스니티가 유령만의 방식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며 조슈아가 목을 움츠렸다. "이쪽은 허공을 걷는 재주가 없어서." "아까 한 말 못 들었냐, 뛰어내리는 거라잖아." 그 말을 하고 막시민은 정말로 뛰어내렸다. 키를 좀 넘는 높이지만 아래쪽 암반의 끝도 낭떠러지고 그 아래는 바다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괘 대담하게 내려간 셈이었다. 조슈아 차례가 되자 그는 뒤돌아서더니 뒤로 한 걸음 내딛는 방식으로 뛰어내렸다. 밑에서 보고 있던 막시민이 말했다. "그렇게 하는 게 더 낫냐? 내가 보기엔 절대 아닌데." "적어도 낭떠러지가 보이지 않잖아, 실수로 멀리 뛸 가능성도 없고." "그래, 안 보이니까 딱 자살하는 기분이 나지 않냐? 너란 놈은 정말 머릿속이 이상해, 그래서 그 목장에 가기 싫다니까." 두 사람이 돌아서자 바로 검은 입구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바위색이 희어서 마치 커다란 머리뼈의 눈구멍처럼 보이는 입구였다. 처음 들어설 때는 동굴을 연상했으나, 그건 입구뿐이었다. 몇십 걸음 들어가자 사방이 확 넓어지면서 백여 년이나 비어 있었을 이곳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심지어 벽에 설치된 금장 램프였다. 램프의 빛은 어슴푸레했지만 내벽의 윤곽을 대부분 비추어 주었다. 그들이 멈춰 선 자리에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가로로 넓었지만 다섯 단밖에 되지 않았다. 각각의 단마다 붓으로 그린 것처럼 선이 또렷한 그림과 기호가 상감되어 있었다. 그림에는 검은 색, 여러 단계의 노란색, 연한 주황색만이 쓰였다. 계단 양쪽에는 네모반듯한 돌이 있었는데 용도는 알 수 없었다. 벽 도한 모래처럼 노르스름한 색이었다. 정면에 그들 키의 두 배 가까이 되는 육중한 돌문이 닫혀 있었다. 문 좌우로 둥글게 휘어지며 내부를 감싸는 복도가 있어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거 상상 이상으로 위압적인데, 왜 이렇게 꾸민 거지?" 「이곳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마법의 원천이었을 테니까요, 그들 모두가 실력 이상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이니 경의를 표하는 것도 마땅하지 않을까요.」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받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 문은 어떻게 여는 거야? 열 수 있는 장치 같은 건 안 보이는데, 이리로 들어가는 것이 맞는 건가?" 「아마 맞을 테지만, 나도 들어가 보지는 못했어.」 "잠깐, 그러면 켈스가 와본 곳은 닥 여기까지란 마리야?" 「아나로즈는 나와 이카본을 만나 주지 않았으니까.」 조슈아와 막시민은 어렴풋한 램프 빛을 빌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상한 그대로의 표정이었다. "젠장, 이거 어쩌라는 거야? 그 뭐라는 무덤을 찾자면 저 돌문부터 부숴야 되는 거냐?" "진정해, 막군, 우린 숨어버린 아나로즈를 만나러 온 이카본과 켈스니티가 아니라고." "아니면 뭐? 우리가 찾는 무덤은 어디 있는데? 사실 아까 그 돌 위에 있었다거나 그런 거냐?" "그건 아니지만… 일단 복도라도 걸어볼까?" 좌우 어느 쪽을 택할지 고민했지만, 곧 알게 뭐냐는 태도가 되어 오른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반 바퀴 돌아 드디어 왼쪽 복도와 만날 법한 곳에 도달했지만, 복도는 갑자기 우측으로 꺾여 내려가는 계단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거, 아까 왼쪽 복도로 왔으면 올라가는 계단이 나오는 거였을까?" "아마 그럴 것 같은데." "나 같으면 일단 둘을 이어놓고 거기서부터 위아래 계단을 연결해 놓겠다. 놀리자는 것도 아니고, 누구야, 이런 멍청한 건물을 지어 놓은게." "글쎄, 침입자로부터 방어를 하겠다는 의미라면 적절할지도 몰라." "침입자를 놀리겠다는 의미라면 적절해." "맞아, 그리고 우린 침입자야." 일단 이쪽으로 온 김에 아래로 이어진 계단부터 내려가 보기로 했다. 꽤 긴 나선형 계단을 인내심 깊게 내려가자 드디어 방이 나타났다. 거기부터 땅속으로 뚫린 듯한 통로가 이어져 있었다. 램프는 흐릿한데다 드문드문 켜져 있어 먼 곳까지 알아볼 수 없었다. 아치형 천장에 뭔가 그려져 있다는 정도가 전부였다. 달리 선택도 없고 해서 통로로 들어서서 몇 걸음 걷다 보니 오른쪽에 방이 하나 붙어 있었다. 입구에는 문 대신 철창이 내려져 있었는데 내부는 어두컴컴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내 생각만인지도 모르겠지만." 막시민이 입을 떼자 조슈아가 망설이며 받았다. "네 생각만은 아닐지도 몰라." "너도 그렇게 보이냐?" "어… 지금 일어난 것 같은데." 방 안에 뭔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이윽고 다시 멈췄다. 둘은 뚫어져라 안을 바라봤지만, 또렷한 윤곽을 알 수가 없었다. 놈은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도저히 상상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분명히 있었다. 아주 크고 검은 것이. "으스스해진다." "혹시 키우던 개라든가……." "개라면 상당히 큰 녀석이 틀림없는데, 게다가 지금가지 뭘 먹고 살아남았지? 이곳에는 남은 사람이 없다고 했잖아." 조슈아가 뒤를 돌아보더니 문득 불렀다. "켈스? 어디로 간 거야? 좀 물어보려 했더니." "아, 잠깐만, 지금 켈스가 우리랑 같이 있지 않은 거냐?" "그런 것 같은데." "그런 것 같은데, 가 아니잖아! 지금 너랑 나랑 안내 유령도 없이 저 뭔지 모를 짐승하고 청창 하나 사이에 놓고 마주보고 있는 거냐?" 막시민이 흥분하자 조슈아가 어개를 움츠리며 중얼거렸다. "언제부터 유령의 안내에 익숙해진거야, 처음 소개했을 땐 그렇게 질색하더니." "지금 그런 소리 할 때냐? 빨리 불러 봐, 언제부터 없었던 거야? 대체 보고도 하지 않고 제멋대로 사라지고……." "목소리 좀 낮춰봐, 어쩐지 자극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철창이 튼튼해 보이긴 하지만." 둘의 시선이 처랑 안으로 향했다. 잠시 후 막시민이 말했다. "내가 아까 여기에 저 놈한테 밥줄 사람이 없다고 말했지?" "응." "그렇다면… 저놈이 갇혀 있을 리가 없잖아!" 둘은 거의 동시에 확 돌아서서 왔던 길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나선형 계단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주파하는 데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어진 복도까지 달려 나와 맨 처음 돌문이 있던 곳에 다다르고서야 겨우 가쁜 숨을 내쉬었다. "하아, 헉, 야, 저 아래, 막을 수 없을까?" "후우, 후우, 문짝도 없던데." 둘은 극도로 긴장해서 휘어진 복도 너머를 주시했지만 뒤따라오는 그림자는 없었다. 시간이 좀더 흘러도 작은 기척조차 없었다. 마음이 진정되자 철창 안에 있던 것이 정확히 뭔지 보지도 못했는데 제풀에 놀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있긴 했는데, 그림자는 아니었어." "안심하기엔 일러, 별 것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안심할 수야 없지만, 그렇다고 도로 나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둘은 머뭇거리면서 돌문을 바라봤다. 이윽고 막시민이 다가가 표면을 쓸어보았다. 돌문의 두께는 적어도 한 뼘 이상일 것 같았다. 표면은 이곳저곳에 얇은 요철이 있고 매끈하지 않았다. "아나로즈는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고 했어." 조슈아의 말에 막시민이 대꾸했다. "그 말은 어떻게든 들어갈 방법이 있다는 뜻이겠지, 이 문은 사람의 힘으로 열릴 것 같지 않지만, 그들에게는 마법이 있었으니까, 한데 지금처럼 마법이 사라져서 이 문을 열 사람이 없게 되면 안에 들어간 사람은 평생 갇히는 건가?" "아나로즈는 노을섬의 마법이 사라지기 전에 죽었을 텐데." "그 디를 누군가가 이었을 거 아냐, 네 말에 따르자면, 아나로즈도 누군가의 뒤를 이었던 거 아니었어?" "누가 뒤를 이을 때마다 이 문이 열리고 닫혔을까? 아냐, 사람이 안에서 살자면 필요한 것이 많을 텐데, 그때마다 이 문을 여닫았다면……." 조슈아는 다가가 문 아래쪽을 살펴봤다. 정확히는 문과 벽의 이음매를 살폈다. "닳아 있어, 이 문은 분명 여닫을 수 있는 거야." 둘은 문 곳곳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나 닳음 자국이 조금 있을 뿐 이음매와 몰 사이는 잘 맞았고, 어디에도 여닫는 장치처럼 보이는 건 없었다. 조슈아는 돌문 표면을 만져보았다. 한참 동안 그러고 있다가 막시민을 불렀다. "잠깐, 여길 봐." 막시민이 다가오자 조슈아는 그의 손을 잡아 돌문 표면의 한 곳을 만져보게 했다. 정확히는 손바닥으로 넓은 범위를 쓸어 보게 했다. "글씨?" 아주 얕게 새겨져 주의 깊게 만져보기 전에는 깨닫기 힘든 글씨였다. 또한 글씨 하나하나가 크기 때문이기도 했다. 램프 불빛은 돌문 형태를 충분히 비추었지만 동시에 이런저런 그림자도 함께 드리워서 글씨를 알아보는 것을 방해했다. 두 사람은 벽을 훑듯이 일일이 더듬어 보고서야 겨우 쓰인 것을 읽었다. 짧지만, 문 전체를 뒤덮다시피 쓰인 문장이었다. 아몬드꽃이 만발한 정원 "아몬드꽃?" 무심코 중얼거린 막시민은 돌문을 새삼 올려다보았다. "안에 정원이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조슈아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문 곳곳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되었다. 막시민이 미간을 모으며 말했다. "그래, 섬에 있는 저택에도 아몬드나무가 많았지, 그리고 아까 본 묘비에도……." "아몬드꽃의 제노비아, 말했다시피 이카본의 손녀야." "그렇게 '무엇무엇의 누구'라고 부르는 건 노을섬의 전통인 것 같더구만, 뜻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다른 묘비에도 그런 것들이 쓰여 있었지. 내가 웨더렌 할머니에게 들은 대로라면 그건 그 사람의 인생을 빗대는 별명이 아닐까 해. 그 할머니는 '아몬드꽃의 제노비아' 외에도 '상장(喪章)을 단 멜오렌'. '돌로 된 발의 게인' . '말없는 에일로즈' 같은 이름들을 말해 줬는데, 듣고 보니 그런 별칭들은 모두 그 사람이 살아온 모습과 관계가 있었어, 예를 들어 '말없는 에일로즈'는 무척 과묵한 사람이었다더라고." "돌로 된 발은?" "그 사람은 아나로즈 티카람보다 먼저 이곳에 들어갔던 사람일, 이곳을 지키는 것이 힘에 부쳤는데도 끝끝내 버티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돌로 된 발'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것 아닐까?" "그럼 '상장을 단 멜오렌'이라는 사람은 평생 상장을 달고 살았단 말이냐? 계속해서 사람이 죽어서?" 조슈아는 약간 서글프게 웃었다. "멜오렌은 아나로즈와 이카본의 딸이지." "아." 들은 대로 아나로즈가 평생 이곳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면 멜오렌은 어머니가 살아 있지만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또한 아버지도 살아 있지만 딸의 존재조차 몰랐으니 없는 사람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평생토록 상장을 달고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특히 죽은 것과 다름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는 어머니를 위해서. "마지막으로 '아몬드 꽃'인데, 네가 저번에 그 아몬드나무 아래에서 말했지, 아몬드나무는 이카본이 좋아했고, 데모닉을 의미하기도 했다고." 조슈아가 고개를 저었다. "제노비아는 아몬드나무가 아니고 아몬드꽃이야. 겨울이 가려고 할 즈음 성급하게 피었다가 봄이 되면 떨어져버리는… 너무 서둘렀던… 이른 데모닉의 꽃." "이은 데모닉이라니?" "이카본과 아나로즈에서 이어져 내려간 또 하나의 아르님 가계에서는 데모닉 대신 백치가 태어나곤 했다지, 그 중 첫 번째가 제노비아, 그녀의 별명은 아몬드꽃." "대체 이 별명은 사람이 죽은 후에 붙이는 거야, 살아가는 동안에 붙이는 거야?" "모르지, 어쩌면 태어났을 때 붙이는 것일지도." 조슈아는 다시 문 앞으로 다가가 글자를 쓰다듬어 보았다. 그 중에서도 '아몬드꽃'이러는 글자를. "나, 이 문을 알 것 같아졌어." 조슈아는 몇 걸음 물러나더니 문을 향해 어떤 말을 했다. 돌과 돌이 부딪는 굉음과 함께 이음매마다 하얀 돌가루가 피어났다. 문이 좌우로 사라지고 나자 어둠이 입을 벌렸다. 3. 아몬드꽃 "울새가 속삭이다 떠난 자리 나뭇가지에는 온기가 남아 손 내밀어 만져본 겨울눈은 이제 곧 이이 돋을 듯해 손끝에 묻은 초록 한 조각 어머니 앞에 가져왔더니 봉투에 고이 넣으시면서 비밀을 가르쳐주십니다. 가장 추운 1월에 주워온 봄 씨앗을 깊이 간직했다가 4월에 녹지 않은 땅을 보면 고루 뿌리라고 하십니다. 졸음 겨운 봄이 빠뜨린 곳에 봄을 가져다주지 않으면 녹았던 곳도 도로 얼어붙어 겨울로 돌아간다고 하십니다." 안에는 불빛이 없었다. 막시민은 돌아가 벽에 달려 있던 금장 램프를 하나 떼어왔다. 실은 벽에 붙은 받침대 위에 걸려 있었던 것인지라 가져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막시민이 램프를 갖고 들어서자마자 조슈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막시민 때문이 아니었다. "아니, 왜 혼자 여기 있는 거죠? 길 잃은 애처럼." 「길을 잃은 아니라니, 실례라고.」 막시민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켈스니티의 목소리였다. 조슈아는 계속 키득대며 말을 이었다. "그런 자세로 앉아 있으면 누구나 그렇게 본다고요. 막군, 네가 보기에는… 아참, 안보이지. 하여튼 그만 일어나요." 막시민이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어떻게 이 안에 있는 거지?" 「그냥 통과한 것뿐입니다.」 "우린 여길 들어오지 모새 줄곧 머리를 싸맸는데, 쉽사리 들어왔으면 그렇다고 말이나 할 것이지." 조슈아는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 "켈스가 말해 준댔자 우리가 따라할 수 있는 건 아닌걸." "적어도 안쪽에는 여는 장치가 있을 수도 있잖아." 「안타깝게도 그런 건 없는 것 같군요. 일부러 먼저 들어와 있으려 한 건 아닙니다. 도로 나오려다가 두 사람 소리가 나기에 곧 오겠지 싶어 기다렸지요.」 듣고 보니 켈스니티는 먼젓번 계단 앞에서 딴 생각을 하다가 무심코 벽을 통과해서 이리로 온 모양이었다. 막시민이 말했다. "우리가 내는 소리를 들었다고? 과히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겠군." 「그랬죠, 대단히 놀란 것 같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철창 속에 뭔가가 움직이고 있었어, 그뿐이야." 말하면서 켈스니티가 비웃을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어떤 모습인지 자세히 보지 못했습니까?」 "안 보였어. 어둠 탓이었든 본래 색이었든 어두컴컴하고, 커다랗고, 네발인 것 같았어. 소리도 안 냈지, 냄새도 없었고." 조슈아가 돌아보았다. "네 발? 자세히도 봤네." "안경은 멋으로 쓴 줄 아냐." 「그 설명만으로는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떠오르는 것이 있군요.」 "신경 쓰이니까 분명하게 말해 봐, 그게 뭔데?" 「옛날, 우리가 아나로즈를 찾으러 왔을 때 이곳이 가나폴리의 건물을 최대한 재현하려고 애쓴 결과라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들은 바로 가나폴리의 성 외벽에는 마법 걸린 조각들이 세워져 있어서 외적의 침입을 알리기도 하고, 또 성을 지키기도 했다고 합니다. 조각의 모습은 다양했지만 주로 맹수의 모습을 많이 본떴다고 하는데, 세월이 흐르고 마법을 관리하는 자가 없어지면 조각들이 살아 있는 맹수처럼 자기 자리를 떠나 어슬렁거리는 일조차 생긴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엔 조각이 있었을 법한 성 외벽 따위가……." 막시민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조슈아가 말을 잘랐다. "처음 들어왔던 입구 계단 옆의 주춧돌, 그게 조각이 놓였던 자리인 건가?" "……."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돌로 된 괴수를 상상한 두 사람은 얼굴이 굳어졌다. 켈스니티의 목소리가 들렸다. 「확인할 수 없으니 일단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보다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여기부터 같이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둘은 한층 경악한 표정이 되어 같은 곳─막시민은 조슈아가 바라본 쪽─을 바라봤다. 켈스니티는 막시민이 하려는 말을 눈치 했는지 냉큼 말했다. 「어차피 제가 이곳 지리를 아는 것도 아니니 같이 간다 한들 별다른 도움은 안 됩니다.」 "도움이 안 되더라도! 적어도 석상 괴물이 나타났을 때 당신이라도 옆에 있으면 안심이 되잖아!" 「괴물이 나타났는데 유령이 옆에 있으면 안심된다고요?」 듣고 보니 이상한 소리였지만 막시민은 인정하지 않고 고개를 흔들어댔다. "몰라, 쓸데없이 겁주지 말고 이유나 말해봐. 정당한 사유면 혹시 보내줄 지도 모르니까." 어차피 켈스니티는 막시민이 본주지 않아도 줄곧 잘만 사리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정당한 사유가 있습니다. 저쪽을 보십시오.」 막시민은 켈스니티가 가리킨 쪽을 보겠거니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조슈아를 쳐다봤다. 그런데 조슈아는 막시민을 쳐다보고 있었다. 막시민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뒤를 돌아봤다. 램프로 비춰 보니 문이 없는 아치형 통로가 보였다. 두 곳이었다. 「저 두 통로부터 저 같은 존재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 쳐져 있는것 같습니다. 정확히 어떤 마법인지는 저도 모릅니다. 또한 어째서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곳의 보존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저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의 침입조차 막으려 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법은 어찌 됐든 내가 알만한 게 아닌데 말이지, 그런 게 있다면 저 안에 뭔가 중요한 것이 잇다는 의미도 되겠는데?" 꽤 긍정적인 해석을 해낸 막시민은 스스로를 납득시키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슈아가 말했다. 혹시 산 사람도 못 들어가는 거 아냐? 보이지 않는 자를 막으려 할 정도면 보이는 자는 당연히 막아야 할 것 같은데." "산 사람은 조금 전 그 돌문에서 다 걸러졌을 것 같지 않냐? 너 같은 녀석만 빼면 말이다." 막시민의 말이 옳았다. 켈스니티가 말했다. 「하나는 오르는 통로, 다른 하나는 내려가는 통로인 것 같습니다. 어느 쪽으로 가보시겠습니까?」 조슈아는 뜻밖에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내려가겠어." 「그러면 저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혹시 위험해지면 되도록 이곳으로 돌아오세요, 별 일 없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별 일 없을 순 없지. 여기까지 왔으니 무언가 발견해야겠지." 조슈아는 통로 앞에 서서 한 걸음 들여놓더니 켈스니티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예감이 좋지 않아." 막시민이 대꾸했다. "그런 말은 입 밖에 내봤자 하등 쓸데없다는 걸 좀 알아둬." 통로에는 드문드문 불이 켜져 있었다. 처음에는 입구 계단에 그려졌던 것 같은 그림들이 양쪽 벽을 타고 이어졌지만 어느새 끊어지고 살풍경한 벽으로 변했다. 철창으로 막힌 옆방 같은 것이 없다는 것만은 다행스러웠다. 대신 도중에 몇 번씩 작은 방으로 나갔다가 다시 좁은 통로로 이어졌다. 방은 모두 둥글었다. 마치 구슬 목걸이를 꿴 것 같은 구조였다. 통로는 완만한 나선을 그리며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꽤온 것 같아." 나란히 걷던 막시민이 턱 끈을 조금 까딱거렸다. 하나마나한 말을 들었을 때 그가 동의하는 방식이었다. "이미 땅 밑인 걸까?" 역시 비슷한 반응이었다. 조슈아는 조금 사이를 두고 중얼거렸다. "아무 것도 나오지 않으니 조바심이 나서." "그건 네 녀석이 한가하다보니 머릿속에서 상상한 것을 증폭시키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꾸 없이 얼마간 걷던 조슈아가 불숙 말했다. "내가 뭘 상상하는지 알아?" "뭔가 끔찍한 것이겠지, 시체라든가, 뼈다귀라든가." "아니……." 둘은 언제부터인가 뚜렷이 휘어지기 시작한 복도에서 무심코 모퉁이에 부딪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서로 팔이 자주 걸렸다. 네번째 부딪쳤을 때, 막시민이 말했다. "그런 상상 따위, 도움 도리 것 같냐." "도움 되고 말고 하는 문제는 아냐,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뿐이야. 나도 가능하다면 잊고 싶지만 내가 잊지 못하는 거, 잘 알잖아." "잊지 못하는 것과 집착하는 건 달라, 가벼운 문제가 아니란 건 알아. 라지만 난 너를 이해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해, 왜냐면 나한테는 아버지도, 가문도, 조상도 없기 때문이다." 조슈아의 걸음이 느려지는 듯했다. 그가 말했다. "너, 정말로 알고 있구나." 막시민은 대꾸하지 않고 계속 복도를 내려갔다. 마지막 방이 나타나기 전에 예감이 먼저 왔다. 무언가 달라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냄새가 났다. 저도 모르게 느려진 걸음이 마지막 입구를 통과하자 그곳에 끝이 있었다. 지금것 그랬듯 둥근 방이었다. 그러나 훨씬 넓었다. 천장 또한 높았다. 통로는 더는 없었다. 벽을 따라가며 램프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중 절반은 꺼져 있었다. 하필 같은 쪽의 것들이 꺼져서 그쪽만 어두컴컴하게 그림자가 져 있었다. 옷이 덜 마른 두 사람은 약간 한기를 느꼈다. 이 방에는 지금껏 오던 통로들보다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방 중앙에 기둥을 절반 자른 것처럼 생긴 돌 받침이 서 있었다. 그 위에 거친 돌로 된 그릇이 있어서 다가가 들여다보니 맑은 물이 절반가량 담겨 있었다. "이걸 누가 담아 놓은 거지?" 수백 년 동안 물이 마르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릇 바닥에 물이 나오는 구멍 같은 것은 없었다. 둘은 거의 동시에 위를 올려다보았다. 천장의 윤곽은 어렴풋했다. 그러나 잠시 후, 조슈아는 천장 가운데 빛나는 점들의 정체를 깨달았다. "저건 별이야." 그들이 들어올 때는 밤이 아니었다. 무덤 속을 걷는 동안 온 밤이었기에 선뜻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어두컴컴한 천장 가운데 하늘로 뚫린 구명이 있었다. "저 구멍은 어떻게 된 거냐? 우린 줄곧 내려왔다고 생각했는데 말야." "우리가 걸어온 나선 통로가 이 방을 둘러싸고 있었던 것 같아. 빙글빙글 돌면서 중심으로 온 거지." "돌문으로 들어오려고 애쓸 거 없이 저기서 밧줄이라도 내려서 왔으면 됐을 걸." "글쎄, 저곳이 진짜 바깥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난 왠지 저곳도 이 구조물의 일부일 것만 같아." "혹시 올라가는 쪽의 통로로 갔으면 저 곳에 도착하게 되지 않았을까? 별이 보이는 걸 보니 야외일 테니까 저기가 아몬드꽃이 만발한 정원일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잘못 온 것일까? 둘은 물그릇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 꽃잎이 몇 개 떠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로서 저 천장 밖에 꽃이 핀 정원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하지만 아몬드꽃은 아냐, 지금은 여름이니까." "그러면 들어갈까?" 조슈아는 얼른 개갑하지 못한 채 손을 물그릇에 넣었다. 꽃잎을 떠내어 자세히 보려고 한 것이었지만, 그 일은 완전히 잊혀졌다. 조슈아는 놀라 몸을 젖혔다. 막시민도 마찬가지였다. 물그릇에서 빛이 기둥처럼 솟구쳐 올라 천장의 구멍과 닿고, 더 멀리 뻗어나갔다. 대번에 주위가 대낮처럼 환해졌다. 둘은 흰 빛 속에 하얀 꽃잎이 수없이 떠다니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마치 방 안 전체에 꽃잎이 날고 있었던 것처럼. 조슈아가 물그릇에서 꺼낸 손에서 물이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 물이 떨어진 자리는 돌바닥이었는데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조금 부풀어 올랐다. 이윽고 툭 터지며 잎이 머리를 내밀었다. 그들이 눈만 크게 뜨고 있는 사이에 잎은 쭉쭉 자라며 가느다란 줄기를 뻗더니 키 작은 나무로 자랐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에 작은 나무가 서너 그루나 생겨났다. 그들이 바라보는 동안에도 나무는 더 자라려는 것처럼 움찔거리며 발돋움을 했다. "이,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아무 것도 안 했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조슈아는 손을 다시 물그릇에 넣었다가 빼며 허공에 흩뿌렸다. 물방울이 색깔 있는 씨앗처럼 날아가 떨어졌다. 한 번, 또 한 번, 물을 받은 나무는 더 높이 자랐고 작은 나무 사이에는 풀이 돋아났다. 돌바닥을 뚫고서 수십 가지 싹이 머리를 내밀었다. 봄 한 철, 여름 한 철의 사건이 눈 몇 번 깜빡이는 사이에 벌어지는 중이었다. 변하지 않는 그들만이 시간을 거스르고 멈춘 듯했다. "이러다가 바닥이 다 갈라지겠는데." 물이 올라 도톰해진 나무뿌리가 돌바닥을 짚으며 뻗어가는 것을 본 막시민이 중얼거렸다. 그는 잠시 후 이마를 문지르고 안경을 벗어 옷깃에 닦았다. 현실주의자인 그의 눈에 지금껏 이런 풍경이 비친 일은 없었다. 안경을 도로 끄며 돌아보니 조슈아는 물그릇에 막 올라서려는 참이었다. "너 지금 뭘 하는 거야?" "자리를 내주려고." "나무한테?" 돌 그릇 테두리는 사람이 올라설 수 있을 정도로 넓었고 또 그릇이 묵직해서 뒤집어질 염려도 없었다. 그러나 막시민의 한 손과 팔, 왼뺨이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 사이로 꽃잎이 난다. 허리를 굳혔다가 다시 몸을 떠내자 물은 무지갯빛이 되었다. 물방울로 흩어져 나무들에 닿는 순간 하얀 꽃 수백 송이가 날개를 폈다. "……." 막시민은 아무 말도 못하고 순식간에 사방을 메운 꽃가지들을 보았다. 머리가 어지럽다고 생각됐다. 향 때문일 것이다. 아닐지도 모른다. 사고가 잠시 멈추는 느낌이 드는 건, 그런 이유가 아닐지도 모른다. 마법과 기적을 따라 달리기에는 그의 머리가 너무 차갑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은 흰 꽃을 보고 있었다.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모른다. 천장일까? 꽃가지들이 흔들리며 내려앉았다가 소곤거리면서 다시 부풀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서늘한 향이 뿜어져 나왔다. 빛기둥 속의 꽃잎들이 느리게 날아오른다. 밖에는 별이 빛나지만, 이곳은 꽃으로 밝혀져 있다. 조슈아가 어느새 막시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닥에서 돌 한 조각만 주워 줄래?" 막시민은 죄다 부서져버린 바닥의 돌조각을 한 움큼 집었다. 건네주려 하자 조슈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물그릇 속에 넣어봐." 반드시 그러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손에서 돌조각이 빠져 물그릇에 떨어졌다. 둘은 그릇 속을 들여다보았다. 파문이 가라앉을 무렵 돌조각은 씨앗이 되어 있었다. 아니, 흔적조차 없었다. 그릇 속에서 움튼 가지가 어느새 수면을 뚫고 나와 팔을 뻗었다. 막시민이 감상을 말했다. "미치겠네." 물이 많기 때문인지 이 나무의 성장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빨랐다. 그리고 적당한 키에서 멈추지도 않았다. 올라선 조슈아의 머리를 넘고도 더 크게 자랐다. 둘은 거의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해내고서 얼굴을 마주봤다. "그럴까?" 나뭇가지가 뻗어 발 디딜 틈도 없어진 그릇이었지만 어찌어찌 올라섰다. 떨어지지 않으려면 나무를 부여잡는 수밖에 없었다. 줄기를 쥐자 껍질 속에서 뭔가가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울림이 나무를 마치 사람의 어린아이처럼 느끼게 했다. 그런 묘한 기분으로 막시민은 나무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얼른 와." 조슈아가 곧 뒤를 따랐다. 막시민보다는 못해도 꽤 빠른 솜씨였다. 막시민이 흘끔 내려다보며 말했다. "목장 놀이하며 가르쳐 둔 보람이 있네." "난 좋은 학생이라고." "네놈이야 언제나 그렇지." 그러나 아무리 올라가도 나무가 자나는 것이 더 빨랐다. 절반 정도 올랐을까, 아래를 내려다보자 둥근 방은 흰 꽃나무로 가득 차 있었다. 흩어진 꽃잎이 천천히 날아오르는 것도 보았다. 앞서 가던 막시민이 불숙 말했다. "리체나 데려올걸." "나도 그 생각 했어." "남자 놈들 둘이서 이런 걸 보다니 조금도 낭만적이지 않잖냐." 조슈아가 키득거렸다. 둘은 귀지 않고 위로 올라갔다. 천창이 멀지 않았다. 나무는 이미 도달한 곳이었다. 어느 순간, 그들이 부여잡은 가지에서도 꽃눈이 터지기 시작했다. 일생 처음 맡은 꽃향기처럼 생생한 향이었다. "천장에 머리 안 부딪치게 조심해라, 저거 좁아 보이는데." "네 안경이나 조심해." 밑에서 보던 것만큼 좁지는 않았다. 둘은 무사히 천장 구멍을 통과해서 밖으로 나왔다. 놀랍게도 밖은 지붕이 아니라 흙을 밟을 수 있는 정원이었다. 뛰어내릴 필요도 없이 걸어 나오면 되었다. 내려서고 보니 나무는 처음부터 이 정원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멈춰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밤이었지만 사방에 정체 모를 빛이 감돌아 그리 어둡지 않았다. 그러나 크게 자란 나무가 많아 얼마나 넓은 정원인지,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이렇게 나무가 크려면 흙도 깊어야 할텐데,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이 선 곳은 작은 공터였다. 숲 속에 일부러 만든 쉼터처럼 보이기도 했다. 노을섬의 폐허에서 본 기둥을 일부 잘라 놓은 듯한 돌들이 의자처럼 274쪽 결락 낸다면 어떻게든 내려갈 수 있지 않을까." "네가 쓸모 있는 소리를 다 하는구나." 275쪽 결락 조슈아는 걸음을 멈추자마자 말했다. "여기, 우리가 처음 왔던 데야." "확실한 거냐?" "저기 나무를 봐, 똑같잖아 그리고……." 조슈아는 말을 멈춰버렸다. 의자처럼 보였던 짧은 기둥 세 개는 이제 비어 있지 않았다. 한 사람이 가운데 기둥에 앉아 있었다. 한쪽 다리를 올려 팔을 괸 채 그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너희는 누구니?" 상대가 누구인지 몰랐으므로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조각처럼 꼼짝않던 여자는 이윽고 팔을 풀더니 다리를 내리고 섰다. 로브 같기도 한 새카만 드레스가 발치까지 내려왔다. 치마 한쪽에 가느다란 당초무늬가 수놓아졌을 뿐 다른 무늬는 없었다. 평민으로 자란 막시민의 눈에도, 화려한 것을 많이 본 조슈아의 눈에도 옷의 모양은 낯설었다. 불편할 정도로 좁은 치마인데도 다리를 올릴 수 있는 것은 좌우에 무릎까지 낸 트임 때문이었다. 트임 위로도 촘촘한 세로 주름이 잡혔다. 여름인데도 손목을 덮을 정도로 긴 소매였지만, 어깨 언저리에 칼로 벤 듯한 틈(slash)이 여러 줄 나 있어 살갗이 드러났다. 심지어 이 드레스인지 로브인지 모를 옷에는 두건까지 달려 있었다. 여자는 긴 시간을 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소리였다. 숲 속의 기척이었다. 그러나 무엇인지 깨닫기도 전에 뭔가가 가슴을 휘감는가 싶더니 몸이 번쩍 들어 올려졌다. 동시에 두 팔이 좌우로 거칠게 당겨졌다. 발도 마찬가지였다. 주위를 살펴보려 했다. 처음에는 투명해서 알아보지도 못했다. 물컹하지만 탄탄한 무언가였다. 숲에서 뻗어나온 나무뿌리처럼 두꺼운 팔이었다. 그것이 몸을 꼼짝 못하게 허공에 매달아버렸다. 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친구도 마찬가지 신세였다. 심지어 동시에 돌아본지라 눈까지 마주쳤다. 멍해진 표정까지 똑같았다. 같은 공포가 머릿속에 스쳤을 터였다. 그러나 반응은 달랐다. "이게 무슨 짓이야! 당신은……" 막시민이 소리치자 새로운 투명한 팔이 다가와 그의 목을 스르륵 감더니 졸랐다. 그러자 이번엔 조슈아가 소리를 질렀다. "그만둬요!" 여자는 둘을 올려다봤다, "내가 물었어, 너희는 대답하지 않았어." 여자의 목소리에는 별다른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으나 억양이 독특해서 살짝 오만한 듯도 들렸다. 조슈아는 저런 역양을 어디서 들어보았다고 생각했다. 금방 기억해 냈다. 아우렐리에다. 그러면 노을섬사람의 사투리 같은 것일까? "저렇게 목을 졸라서는 대답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자 막시민의 목을 졸랐던 팔이 풀어졌다. 조슈아는 안도해서 가까스로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은 좀 이상하지만 달리 할만한 말도 없었다. 여자를 보니 누군가를 죽이려다가 살려줬다는 기분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무표정은 아니지만 대단한 분노나 살의도 없었다. 길 가다 실수로 팔을 친 상대가 돌아보며 짓지 않을까 싶은 표정이었다.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자신들의 상황을 돌아볼 여우도 생겼다. 손발이 묶였으니 달아날 수 없게 됐지만, 사실 저런 능력을 가진 상대 앞에서 손발이 자유롭다 한들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이곳에서는 유령을 부를 수도 없다. 조금 전에 막시민의 목을 졸랐듯 저 여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둘의 목숨쯤은 순식간에 끊어버릴 수도 있었다. 물리력도, 마법도 없는 그들에게 자유로운 것은 입뿐이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이 점에서 둘의 판단은 정반대였다. 막시민은 캘룩캘룩 기침을 하다가 침을 한 번 뱉더니 말했다. "큼, 불친절한 아줌마잖아. 누구냐고 묻고 싶은 건 오히려 우리 쪽이라고, 당신이야말로 누군데 여기 있는 거지?" 여자의 대답은 간단했다. "내 질문에 답해." 막시민은 턱을 쳐들더니 누군가의 말버릇을 흉내 매어 말했다. "길 가던 무해한 여행자와 그의 친구." 여자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여긴 휴양지가 아냐." "아, 그러셔? 하지만 보기엔 숲도 울창하고 남씨도 시원한 것이 휴양하기에 딱 좋아 보이는데, 당신도 여름휴가라도 보내러 온 거 아냐? 나라도 이런 곳을 알고 있다면 오고 싶을 것 같은데. 오기가 좀 어렵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여자는 막시민을 빤히 보다가 말했다. "네 말이 빨라서 이해하지 못했어." "……." 막시민이 말문이 막힌 채 조슈아가 나섰다. "저어, 소개를 하자만 저는 조슈아, 제 친구는 막시민이라고 합니다. 저희는 뭔가를 찾으러 왔는데 이곳에서 사람을 만날 줄은 상상도 못했거든요. 좀 놀랐죠. 아마 당신도 놀랐겠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묶어 놓을 필요는 없었어요. 저희 둘 다 당신한테 위협이 될 만한 능력은 전혀 갖고 있지 않거든요." 여자는 잠시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풀어 주지는 않았다. "뭘 찾으러 왔지?" 그러자 조슈아도 잘라 말했다. "그건 말할 수 없어요." "넌 내게 감출 수 없어, 이곳의 일을." "무슨 뜻이죠? 말하지 않아도 알아낼 수 있다는 건가요? 아니면 당신에게 이곳을 다스릴 권리라도 있다는 의미인가요?" 여자는 조슈아의 말을 이해하려는 것처럼 잠시 침묵했다. 이윽고 대답이 들렸다. "둘 다." 조슈아와 막시민은 얼굴을 마주봤다. 각자의 머릿속에서 추리가 전광석화처럼 지나갔다. 막시민이 먼저 말했다. "멋지고 무시무시한 아주머니, 당신은 그 사람의 자손이겠군, 이곳에 권리를 가질 핏줄은 그들뿐이니까. 어째서 이곳에 혼자 남은 거지? 왜 페리윙클로 건너가지 않는 거야?" 여자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조슈아는 다시 그녀의 눈을 보았다. 연한 초록빛이었다. 입술이 작고, 뺨이 얇고, 광대뼈가 낮아 가늘고 자그마한 얼굴이었다. 눈은 크지 않았고 쌍꺼풀도 없었다. 속눈썹이 짙거나 눈매가 또렷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눈을 감으면 윤곽조차 사라져버릴 듯 부드러운 선이었다. 갸름하고 연한 눈의 모양은 날씬한 물고기를 연상시켰다. 조슈아는 이렇게 신비로운 눈을 본 일이 없었다. "난 이곳을 떠나지 않아. 너희가 떠나야 할 거야. 떠나지 않는다면, 떠나게 해 주겠어." 여자가 기둥을 짚었던 손을 떼는 순간 조슈아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잠깐만! 우린 스스로 떠날 수 있어요. 당신이 원치 않는다면 언제든지 가겠어요.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부탁만 들어주세요." 여자는 오른손을 내밀려다가 말고 말했다. "들어주지 않을 수도 있어." "두건을 내려줘요." 여자의 입가에 미소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것이 떠올랐다. 그녀는 두건을 잡아 내렸다. 그러자 틀어 올린 머리카락이 일시에 풀려 내려왔다. 폭포인 양 흘러내려 발치에 닿고, 바닥가지 흩어졌다. 머리카락은 숲의 어스름 속에서 핏빛이엇다. 조슈아가 속삭였다. "긴 머리의 아나로즈." <7권에서 계속> 도 서 명 : 룬의 아이들 2부7 지 은 이 : 전민희 펴 낸 이 : 서인석 출 판 사 : (주)제우미디어 출판년도 : 2006년 9월 5일 봉 사 자 : 조은별 전민희 1975년생.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연구원을 지냈다. 1999년 장편 판타지 소설 <세월의 돌>로 데뷔하였고 이후 후속작 <태양의 탑>을 출간했다. 이 두 작품은 5부작으로 구상된 <아룬드 연대기> 시리즈의 3부와 1부이다. 작가의 두 번째 세계인 <룬의 아이들>시리즈 1부(룬의 아이들-원터러>, 2부<룬의 아이들(데모닉)>편이 출간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온라인 게임<테일즈위버>가 제작되어 세계 각국에 서비스되고 있다. 특히 <룬의 아이들-원터러>는 일본, 중국, 대만, 홍콩에 번역 출간되어 큰 호평을 받으며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았으며, 일본에서 아마존 한국소설 베스트셀러 1위, 야후 재팬 선정 ‘2006년 가장 많이 읽힌 소설’ 등에 올랐다. <룬의 아이들-데모닉> 또한 대만, 홍콩에 번역 출간되었으며 일본판은 2007년 중반 출간 예정이다. 현재 데뷔작 <세월의 돌>의 개정 작업에 매진하고 있으며 <태양의 탑> 또한 개정 후 출간이 예정되어 있다. 룬의 아이들 2부 데모닉 7 a. 악마의; 악마와 같은; 마력을 지닌, 천재적인 ... 마치 프레스코 벽화처럼 파괴할 수는 있어도 빼앗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Gottfried Wihelm von Leibniz, 1646~1716) 데모닉 7 13막. Sunburn 1. 잠자는 보석 2. 부러진 손 3. 돌에서 꽃이 자라다 4. 바람개비 꽃의 비밀 5. 나탕트 7번가 과자점 6. 수레바퀴에 낀 돌 7. 켈티카 만 8. 바다 감옥 9. 가장 두려운 대면 10. 자신이 자신을 연기하다. 14막. Outgrow 1. 나비 고치 2. 감춘 자, 찾으려는 자 3. 마법사가 되어야 하는 이유 4. 기타와 바이올린 부록 I 부록 II 13막. Sunburn 1. 잠자는 보석 “옛날, 약속을 믿었던 소녀가 있었다.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부모의 믿음을 저버리고 소녀는 바다를 건넜다. 어려서 지워졌던 의무를 버렸고, 고향을 잊었고, 부름에 귀를 막으며 보낸 세월이었다. 어느 날 아침, 소녀는 아침마다 들국화 차와 함께 먹는 딱딱하고 둥근 빵처럼 평범한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사람에게만 일어난다고 생각했던 일이었다. 그 아침 이후로 모든 것이 끝났다” 조슈아의 입술에서 이름이 떨어지는 순간, 붉은 머리카락이 흡사 살아 있는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 빨리 자라는 덩굴처럼 팔을 뻗었다. 부채처럼 펼쳐졌다. 끝은 수많은 잔가지였다. 적금색 잎이 불을 머금었다. 단풍이 붉다 못해 스스로 불탔다. 그러나 잠깐이었다. 불길처럼 떠올랐던 머리채는 어느새 재가 되어 부스러지며 날았다. 죽은 나뭇가지처럼 말라붙고, 불씨가 꺼지듯 사그라졌다. 잎은 검게 비틀거리며 떨어졌다. 이제 불을 잃은 머리는 허리 언저리에서 타다 남은 커튼처럼 흉하게 늘어졌다. 아나로즈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변화의 의미를 알아내려 했다. 눈이 마주쳤을 때 조슈아의 입술이 가볍게 떨리며 열렸다가 닫혔다. 소리 나지 않았지만 아나로즈는 알아들었다. “맞았어. 네가 한 일이야.”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물으려 했다. 묻기 전에 아나로즈가 말했다. “왜냐고? 나도 알지 못해.” “내게는 그런 힘이 없어요.” “그건 대답이 될 수 없어. 이루어졌으니까.” “어째서 나 때문이라고 확신하죠?” “여기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곳이니까.” 그 말은 일견 평이하게 들려서 속뜻을 이해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먼저 되물은 사람은 막시민이었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어떤 변화도? 세월이 흘러도?” “내 얼굴을 봐.” 누구와 눈이 마주친 것인지 몰랐다. 둘 모두 그녀가 자신을 본다고 생각 했다. 눈동자 속에 숲이 비쳤다. 숲은 멈춰 있었다. “수백 년 동안 그대로, 늙지도 죽지도 않는 마녀의 얼굴을.” 반드시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 텐데, 주위의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눈동자 속에서 모두가 멈췄다. 그녀의 눈은 녹색 화석이었다. 숲과 오솔길은 화석 속의 무늬였다. “당신은 정말로...” 막시민은 말을 이으려다 그쳐버렸다. 그때 가슴을 옥죄던 덩굴 같은 것이 부스럭 소리를 냈다. 퍼뜩 놀라는 사이 덩굴은 두 사람을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고 숲 속으로 돌아갔다. 막시민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림 같은 숲뿐이었다. 덩굴은 수풀로 들어간 뱀처럼 자취를 감췄다. 그는 미간에 힘을 주며 몇 번 숨을 내쉬더니 조슈아를 보았다. “넌 짐작했던 거냐? 이곳에서 누구를 만나게 될지?” “아니.” 조슈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머릿속을 일깨우려는 것처럼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다. “너처럼 나도 몰랐어. 알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이 자리에 오기까지는... 이렇게 마주치는 순간에야 알았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데, 왜 확신했는지 나도 몰라.” 막시민은 눈을 꾹 감았다가 고개를 적혀 마구 흔들었다. “난 정말이지, 너하지 저 사람한테 증명해보라고 하고 싶다. 나도 좀 같이 믿게.” 조슈아는 대답하지 못하고 아나로즈를 보았다. 맞닿은 시선 사이로 꽃을 태운 듯한 재가 내려앉았다. 아주 고요해졌다. “네가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아.” 기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만난 일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어. 기억 밖에서. 기억 밖의 나는 너를 내 이마에 새긴 글자처럼 알고 있어. 너는 누구일까.” 조슈아는 대답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둘을 연결 짓는 사람의 이름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수백 년이 흘렀지만 아나로즈의 감정이 어떠할지 감히 짐작할 방법이 없었다. 만일 그녀의 증오심이 죽음을 목전에 둔 이카본에게 끝내 얼굴을 보여주지 않던 때와 같다면? “너는 내 이름을 불렀어.” 분명한 사실이었다. 조슈아는 눈을 꼭 감았다가 떴지만 무미건조한 눈빛은 여전히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네게 힘이 없다는 것은 알아. 알아볼 수 있어. 대신 네 존재가 나와 연결 되어 있겠지. 너도 알다시피 너와 나는 서로를 알지 못하지. 그렇다면 너와 나 사이에 누군가 있을 테지. 그게 누구인지 너는 알겠지.” 막시민은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해보려 했다. “아니 잠깐, 이해가 안 가서 그런데, 그러니까 지금 상황은 당신이 진짜로 긴 머리의... 아니, 이젠 긴 머리가 아닌가? 하여간...” “그래.” 아나로즈는 손을 올려 자신의 머리끝을 잡았다. 남은 재가 한 줌 부서져 내렸다. “이제는 긴 머리가 아니구나. 아나로즈일 뿐. 오직 그 이름뿐. 너희가 왔기 때문에. 변화가 없는 이곳에 들어오는 것만으로, 나와 마주치는 것만으로. 그리고 내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 수백 년간 잠들었던 무덤에 들어와 내 이름을 지우는구나. 세월이 만든 머리를 불에 넣었으니 남은 것은 나뿐이구나. 나뿐이로구나. 기억은 타고 남은 자 나뿐이로구나.” 멀리서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은 아직 이곳에 닿지 않았다. 아홉, 열... 아나로즈의 머리카락이 다시 한 번 날아올랐다. 그러나 조금 전 마법에 걸린 듯 타오르던 불과는 달랐다. 어깨를 조금 넘는 머리가 맥없이 밀려가며 끄트머리에 맺혔던 재를 마저 뿌렸다. 잠깐 날았을 뿐이었다. 이윽고 죽은 작은 벌레들처럼, 떨어졌다. “내가 애도했어야 하는 사람은 당신이군요.” 아우렐리에가 했던 말이다. 바람 소리에 섞여, 흐르듯, 새듯, 그렇게 나왔다. 뒤이는 말은 조금 더 또렷했다. “죽었지만 죽지 않은 당신.” 아나로즈는 맥없이 턱을 올렸다. 죽은 사람의 목이 넘어가듯 천천히 올려 뜬 눈이 하늘을 더듬었다. 별이 천구의 굽이를 오르다 오르다 마침내 떨어지고 떨어지고... “나는 조슈아 폰 아르님입니다.” 말하는 것이 자신의 입술이 아닌 느낌이었다. 이곳에 없는 누군가가 그의 입을 열었다. 아나로즈와 다시 눈이 마주치기까지는 오래 걸렸다. 그동안 막시민은 조슈아를 돌아보며 눈짓을 보내려 했으나 닿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입을 막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사람들이 첫 조상과 같은 별명으로 나를 부르죠.” 아나로즈는 턱을 약간 떨어뜨린 채 조슈아를 물끄러미 보았다. 막시민은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아나로즈를 주시했다. 어떤 기색이라도 읽으려 했지만,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오래 살아온 그녀는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방법을 잊은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손이 가슴께로 움직였고, 막시민은 반사적으로 조슈아를 옆으로 밀쳐냈다. 아나로즈와 막시민의 눈이 마주쳤다. “...” 아나로즈의 손은 자신의 목을 감싸 쥐었을 뿐이었다. 혈관조차 알아보기 힘든 파리한 목이었다. “괜찮아.” 비척이다가 자세를 추스른 조슈아가 막시민의 팔을 잡았다가 놓았다. 막시민이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괜찮고 안 괜찮고는 너한테 달려 있지 않다는 걸 모르겠냐.” “내가 괜찮다는 건, 어떤 일이 일어나도 괜찮다는 거야.” “너랑 날 끼니거리로도 못 슬 탄 콩 두 알로 만들어주셔도 말이냐?” 조슈아는 고개를 젓는 대신 아나로즈를 향해 걸어갔다. 공기에 기대어 선 것처럼 비스듬히 위태로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 팔을 잡았다. 한 팔을 등 뒤로 두르며 끌어당겼다. 너무 손쉽게 그의 팔에 몸이 실렸다. 아무 말도 없었다. 풀밭에 앉히고 조슈아의 손이 떨어질 때까지도. 조슈아는 자신도 흙 위에 앉았다. 무릎이 닿도록 가까웠다. 조슈아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아주 오래 살아오며 무엇을 생각했나요?” “잠을 잤어.” 꿈속에서만 시간이 흐르고, 라고 이어 말하는 목소리는 감싸 쥔 목에서 나오기 힘겨워하는 듯했다. “지난 시간을 느낄 수 없나요?” “하룻밤 꿈에도 수십 년이 흐를 수 있으니까.” “깨어 있던 때는 없었나요?”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이라고 말한 그녀가 느리게 손을 목에서 뗐다. 조르기라도 한 듯 붉은 흔적이 찍혀 있었다. “그 힘이 나를 깨우니 어쩔 수 없어.” “힘이라고요?” “내가 봉인한 자가 벗어나려고 요동치는 힘. 그 힘이 나를 깨어나게 해. 나는 그와 싸우고 그를 땅속에 파묻지. 그 일이 끝나면 너무 힘겨워 잠이 들고, 또다시 수백 년이 흐르는 꿈을 꾸는 거야. 하지만 꿈속에서조차 눈을 뜨고 그를 가둔 감옥을 지켜야 해. 내겐 휴식이 없어. 한순간도. 내 몸과 마음은 그와 싸우기 위해 바쳐졌으니.” 조슈아는 그녀의 수수께끼 같은 말이 무슨 의미인지 묻지 않았다. 단지 그 상황을 느껴보려는 듯 눈을 크게 떴을 뿐이었다. 이어 턱을 바로 세운 아나로즈는 조슈아도, 막시민도 아닌 숲 속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내게 남은 것은 그것뿐이지. 아무 것도 안 남았지. 내 긴 머리가 기억이었다면 오늘과 함께 그것조차도. 이곳은 무덤. 난 이곳에 묻혔어. 누구도 파헤칠 순 없어. 너희도. 너희가 누구라 해도.” 뒤늦게 온 그들은 아나로즈의 아주 긴 잠을, 긴 싸움을 방해할 권리가 없었다. 다른 누구에게도 없었다. 그녀가 직접 택한 굴레였다. 그 굴레에 매여 수많은 사람의 세월을 대신했다. 웨더렌 할머니가 말했듯 마녀가 지켰기에 노을섬에는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다. 마법을 잃고, 새로이 시작할 기회가. 수백 년이 흐르고서야 온 그들이다. 불공평함을 논할 권리도, 그만두라고 할 권리도, 방해할 권리도 있을 수 없다. 어쩌면 물어볼 권리조차도. 느리게 지워지는 목의 손자국만큼이나 지워지지 않았을지도 모를 기억을, 들춰낼 권리가 어디 있을까. 아나로즈의 수백 년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흘러갔다. 그녀에게 이카본과의 기억은 고작 몇 년 전 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가 이카본의 후손과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행운일 수 있었다. 그들이 찾고 있는 것에 대해 그녀에게 한 마디도 물어보지 못한다 해도. 그러나 두 사람이 똑같이 납득한 건 아니었다. “물론 우리한테 그럴 권리는 없지.” 불쑥 끼어든 막시민은 두 사람 쪽으로 다가오는 대신 팔짱을 낀 채 제자리에 털썩 앉았다. “하지만 그렇다 치면 말이야. 묘한 점이 있는데.” 아나로즈는 방금 막시민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한참 정원을 헤매던 시선을 주었다. “당신은 깨어 있었단 말이지.” 조슈아가 흠칫 고개를 드는데 아나로즈의 대답이 들렸다. “그래. 난 깨어났지. 내가 무덤에 들어오고서 지금처럼 오래 깨어 있던 때는 없었어.” 그 말의 의미를 조슈아는 즉시 알아들었다. 노을섬에 옛 폭풍이 돌아왔다. 마법 폭풍은 노을섬에 마력이 돌아왔음을 보이는 것이며, 노을섬의 마력은 다름 아닌 봉인된 자, 즉 ‘악의 무구’에 기대고 있지 않던가. 그 힘을 봉인하는 것이 아나로즈의 역할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녀가 깨어난 것은 왜인가? “봉인은?” 아나로즈는 비웃음조차 없이 말했다. “너희가 그걸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물론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막시민은 오히려 피식 웃었다. “방법이 뭔지도 모르지만, 우린 겉으로 보이는 것과 똑같은 놈들일 뿐이라고. 특별한 힘이라고는 없어.” 아나로즈는 실망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알 필요도 없겠지.” “아아, 그래? 도와 달라고 하지 않는 걸 보니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모양이네? 우리 섬이 둘로 쪼개져 가라앉는 일 따윈 물론 없는 거고 말이야. 어때?” 막시민이 일부러 언급한 ‘우리 섬’ 은 페리윙클이 아니라 노을섬이었다. 아나로즈에게 의미가 있을 섬은 노을섬일 테고, 또한 노을섬이 무인도가 됐다는 것도 모르리라 짐작하며 한 말이었다. 아나로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하고 상관없는 일이라 이건가? 섬이 가라앉더라도 당신만은 여기처럼 그럴듯한 은신처가 있으니 안전하다 그건가? 아니, 그렇게 생각하리라고는 믿지 않아. 당신은 자진해서 이곳에 들어왔다고 알고 있거든. 그리고 밖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무례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말이야, 자기들한테 닥쳐올 나쁜 일이 뭔지 정도는 알 권리가 있거든. 못 막는다고 해도, 뭐 별다르게 훌륭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살아있기 때문에 왜 죽는지 알 권리쯤은 있다는 거야.” 막시민은 자신이 노을섬 출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럴듯하게 연설을 마치더니 버릇대로 양손을 펴 들어 보이며 말을 맺었다. “백번 양보해서 밖에 사는 놈들쯤은 다 알거 없다손 치더라도 말이야, 당신도 수백 년 동안 기껏 해온 일이 수포로 돌아가길 바라지는 않을 거라고 보는데.” 아나로즈는 말없이 막시민을 바라볼 뿐 그의 말에 마음이 움직이는 기색이 없었다. 혹 있었더라도, 조슈아는 자신들이 알아챌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답이 나오는 순간 예상은 빗나갔다. “네 말은 의미가 없어.” 아나로즈는 단지 막시민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신중하게 듣고 있었을 뿐이었다. 상황을 눈치 챈 막시민은 강적을 만났다고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조슈아가 말했다. “당신과 의견이 다를지도 모르지만, 의미 없는 말은 아니었어요. 적어도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이야기죠. 당신이 이토록 긴 세월을 쏟고 있는 일을 누구를 위하는 것도 아닌, 아무 의미 없는 감금으로 여기지 않는 한.” “나는 어머니의 일을 하고 있어.” 의미를 말하기에 충분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놀라웠다. “하지만 이미 실패했어.” “...” 조슈아와 막시민이 당황해서, 또한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몰라 말문이 막혀 있는 동안 같은 어조로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의미가 없어.” 굳이 따지자면 아나로즈의 말은 옳았다. 막시민이 노을섬 사람들이 살아갈 권리를 운운했지만, 그건 이미 끝난 일이라고 말한 셈이니까. 아마 사실 일지도 모른다. 끝이 났다. 노을섬에는 이미 아무도 없다. 아나로즈가 그 사실을 알아서 한 말이었을까? “그렇다면... 당신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저기, 정말로 그게 그렇다면, 이제 그만 밖으로 나가면 되는 거 아니야?” 아나로즈는 시선을 허공에 둔 채 한 팔을 올렸다. 새로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떨어진 손은 그녀 뒤에 솟은 기둥을 쓰다듬어 내렸을 뿐이었다. 그 움직임이 새의 느린 날갯짓을 닮았다고 느껴졌다. “지키고 있어.” 조슈아의 시선이 기둥을 향했다. 걸터앉을 수 있는 낮은 것, 좀 더 높은 것, 쉽게 올라갈 수 없는 것, 그리고 조각품. 조각품은 다른 기둥들의 높이를 생각할 때 지나치게 낮은 곳에 있었다. 어찌 보면 풀밭 속에 나뒹구는 것처럼 보였다. 좀 더 자세히 보았다. 그건 닻이었다. 돌로 된 거대한 닻이었다. 실제로 범선에 달 수도 있을 터였다. 조슈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나로즈를 지나쳐 닻 앞으로 갔다. 그리고 표면을 만져 보았다. 언뜻 돌기처럼 보였던 것은 문양이었다. 그 아래 세 가지 언어로 쓰인 글귀가 있었다. 조슈아가 알아볼 수 있는 언어는 세 번째 것뿐이었다. 남쪽 바다를 지배하는 위대한 섬 페리윙클을 구하고 스스로를 왕으로 삼은 이 아노마라드 국왕의 왼쪽 심장 비취반지 장원의 공작 이키본 폰 아르님 뱃놈들을 수호하는 혼이여, 우리 폐하를 바다 밑 산호 궁전에 모시어 남쪽 바다가 하얀 소금 들이 되는 날까지 지키소서 문양은 아르님의 문장인 키였다. “아...” 조슈아는 닻을 두 손으로 움켜쥐더니 잠시 후, 맨손으로 닻이 꽃힌 흙바닥을 정신없이 헤치기 시작했다. 오래 그럴 필요도 없었다. 곧 흙 밑에서 석판이 드러나고 커다랗게 음각된 잎사귀 무늬들이 뚜렷해졌다. 닻은 석판에 붙은 장식 돌이었다. 바닥 곳곳을 더듬어 귀퉁이를 찾아내고 보니 석판은 머리 쪽 변이 2미터가 넘을 정도로 컸다. 땅속에 들어간 부분은 얼마나 될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조슈아도, 아나로즈도 모두 그 석판 위에 앉아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조슈아는 석판 위에서 벌떡 일어나 몇 걸음 물러섰다. 다가온 막시민이 조슈아가 읽은 글귀를 그대로 읽었다. 그리고 표정이 변했다. “이 돌덩어리 속에 설마...” 막시민이 이렇듯 새삼스러운 질문을 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돌아보니 조슈아는 마음을 가다듬으려 억지로 숨을 삼키는 중이었다. 아나로즈와 눈이 마주친 채였다. “이것이 초대 아르님 공작의 관인가요?” “그래.” “당신이 지키고 있다고 말했나요?” “그래.” “그는 옛날에 죽었고, 관 속에는 시체조차 없겠죠. 누군가가 지킬 필요는 전혀 없겠죠. 내버려둔다면 그냥 바위일 뿐이죠. 당신은 무엇을 지키는 건가요?” “나는 내 기억을 지켜.” 조슈아조차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나나로즈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나를 잃기 전에. 잠에서 깨어나 돌아오는 순간마다 나는 그의 관을 보고 내가 누구인지를 떠올려. 내가 꾸는 꿈은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휴식이 아니지. 아직껏 세상에 존재한 일이 없는 최악의 광란이자 고문일 뿐이지. 그런 꿈에서 수십 년에 한 번씩 깨어나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 만일 기억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상상하기 힘들었다. 겪어보지 않은 한 아나로즈가 말하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아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때 내가 아닌 나는, 다시는 이곳에서 잠들지 않으려 하겠지.” 아나로즈는 스스로에게 당부하듯 한 마디씩 천천히 이었다. “내가 아닌 나는 그 광란과 고문을 한순간도 참지 못하고 이곳에서 뛰쳐나가고 말 테니까.” 한참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조슈아가 말했다. “머릿속의 광기라는 것을 나도 한 뼘쯤은 알고 있어요. 자칫 정신을 놓치는 순간, 내가 나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검은 우물이 있죠. 오래전에 그 우물을 발견하고 들여다본 일이 있어요. 그런 다음에 그런 게 있는지 몰랐으면 차라리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죠. 늘 발을 헛디뎌 거기에 빠질까 두려워하며 살게 됐으니까요.” 아나로즈가 조슈아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 말은 어디선가 들어본 일이 있어.” “이카본이었겠죠. 그렇지 않은가요?” “...” 무미건조한 눈길은 여전히 조슈아를 향하고 있었다. 일부러 훑어보는 것도 아니고 그냥 볼 뿐이었다. “너는 이카본과 같을 수 없어.” “네. 하지만 데모닉이라는 이름만은 그 후로 몇백 년에 걸쳐 열세 명이 이어받았죠.” 아나로즈는 이카본 외에 데모닉을 한 명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조슈아도 이 말을 하면서 그 점을 깨달았다. 그녀가 데모닉이 유전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너를 데모닉이라고 부르는 자들이, 이카본이 가졌던 것과 같은 것을 네게서 본단 말인가?”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로즈는 오래 침묵했다. 또다시 얼굴만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볼 길이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짐작할 수 없으니 마음의 준비를 할 수가 없는 상대였다. 아나로즈가 또 다른 데모닉의 존재를 반가워할 것인가, 증오할 것인가. 조슈아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아까 들은 말 때문에, 한 가지만 묻고 싶네요. 당신의 말은 이카본이 여기서 당신의 자아를 위한 도구로 쓰이고 있다는 뜻인가요?” 아나로즈의 시선이 조슈아가 파헤친 석관에 머물렀다. 대답 대신 들려온 말은 이러했다. “넌 나를 이해하지 못해.” 이해한다고 하면 허세일 것이다. 고작 십몇 년을 살아온 그들에게 아나로즈의 긴 세월을 실감할 방법은 없었다. “그의 기억은 내게 마지막으로 남은 인간적인 부분이야. 그동안 내 정신은 황폐해져서 부드러운 것은 대부분 기억 못해. 그런 내게 남은 것은 그뿐이야. 난 줄곧 그의 관 위에서 잠들었어. 이제 이 관 속에 그는 없다는 걸 알고 있어. 대신 죽은 내가 누워 있겠지. 난 필사적으로 그를 기억해. 그래서 그 속에서 나를 찾아내지. 그는 내 기억 자체야.” 아나로즈는 일부러 감정을 숨기며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감정은 거의 다 삭어버렸다. “그런 나는 너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가 없어.” 친절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말이 들려왔을 때 조슈아는 예상한 대로 됐다고 생각했다. 결과는 무엇일까, 이즈음에 이르러 오히려 궁금해졌다. 조슈아는 아나로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어진 말은 뜻밖이었다. “그러나 섬과 바다와 세상을 위해 네 존재는 다행스러운 것이겠지. 너는 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이해할 수도 있어. 이카본은 사라지지 않았어. 세상은 다시 그를 누릴 수 있어.” 조슈아는 그 말에서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다. 비록 같은 데모닉이지만 모든 데모닉들의 능력이 같았다고 확언할 수는 없었다. 또 능력이 비슷할지언정 그들은 각각 다른 사람이었다. 조슈아는 이카본의 현신이 아니었다. 물론 아나로즈의 세계에는 오직 한 명의 데모닉, 이카본만이 존재했다. 그녀를 이해하려 노력할 수도 있었다. 그녀의 세계는 오랫동안 닫혀 있었으니까. 조슈아는 문득 비취반지 성에 있을 또 하나의 자신을 생각했다. 그 ‘자신’ 은 자신이 복제되었음을 모를 것이다. 만일 사실을 알려준다면 그의 기분은 어떨까? 이제 조슈아는 그 기분을 알 수 있었다. 이 순간 조슈아는 이카본의 ‘인형’으로 취급당했던 것이다. 조슈아가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낼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아나로즈는 다시금 조슈아를 바라보았는데 이제까지와는 눈빛이 사뭇 달랐다. “그동안 나는 봉인을 뚫고 벗어나려는 괴물을 내 꿈속으로 끌어들여서 싸웠어. 최소한의 힘만 소모하며 오래 버티기 위해서였지. 내 힘이 바닥나고 나면 더 이상 봉인을 유지할 수 없게 되니까.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 “당신은 실패했다고 말했어요. 그 말은...” “봉인이 깨졌어.” 조슈아는 아연해졌다. “깨졌다면? 가나폴리를 멸망시켰던 악의 무구의 힘이 다시 자유로워졌다는 뜻인가요?” 아나로즈의 눈에 의혹이 일었다. “넌 어째서 그것을 알고 있지?” 막시민이 재빨리 말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고. 묵은 비밀이란 게 세월이 더해지다 보면 종종 상식으로 변하곤 하는 거 아냐.” 아나로즈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남쪽 바다에 닥쳤을 재앙도 왜 일어났는지 알고 있겠지. 어떻게 되었지?” “어떻게 되다니?” 막시민이 되물었다. “어떻게 되었어야만 한다는 건가? 봉인이 깨어진 것 때문에?” 조슈아가 말했다. “노을섬에는 마법 폭풍이 돌아왔을 뿐이에요. 페리윙클에도 아무 일이 없는데...” 그렇게 대답하던 조슈아의 머릿속에 문득 정체불명의 해일이 휩쓸고 갔던 섬의 모습이 떠올랐다. 파괴된 섬의 풍경을 떠올리는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며 전율이 일었다. “혹시 폭풍이나... 해일 같은 것도?” 아나로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런 섬을 보기는 했지만...” 조슈아는 페리윙클 섬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 보았다. 그를 소공작 잔하라고 부르며 환영하던 사람들, 산호냐 진주냐를 두고 다투기도 하고, 노을섬에 간다는 배에 앞 다투어 타려 하기도 하고... 아몬드나무가 자란 정원과 오래된 아르님 납골당을 지키고 있기도 한 땅, 그 땅에 카드릴 섬에 닥쳤을 파괴가 덮치는 모습을 그려 보았다. 아나로즈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구는 거대한 마력의 근원이지. 수백 년간 노을섬 사람들 모두를 마법사로 만들어주었을 정도로. 그런 것이 억눌려 봉인되었다가, 풀렸어. 엄ㅊㅇ난 마력이 폭발하며 퍼져 나갔겠지. 바다와 대기에 파도와 회오리를 만들면서.” 조슈아의 얼굴이 창백했다. “그런 피해가 계속 올 수도 있나요?” “다시 봉인을 맺기까지는.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짐작 못 해. 얼마나 걸릴지도 알 수 없어. 수십 년일지, 아니면 단 몇 달일지.” 막시민이 한숨을 쉬려다가 삼켜버리고 소리를 질렀다. “아니, 대체 왜 봉인이 풀린 건데? 뭐가 잘못된 거냐고!” 아나로즈는 막시민을 빤히 보다가 말했다. “너희가 나보다 먼저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나로즈는 한 걸음 다가와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허공일 뿐이었던 자리가 움푹 패는 듯하더니 이윽고 둥근 웅덩이 모양이 되었다. 세로로 서 있는 웅덩이였다. 그 속에 물인지 유리인지 모를 막이 솟아났다. 그것이 물이라면, 세상의 모든 물과는 달리 벽면에 고일 수 있는 물이었다. 어느새 모양은 거울에 가까워졌다. 표면에 빛이 너울거렸다. 조슈아와 막시민은 거울 속을 들여다보았다. 처음에는 반사광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으나 곧 뚜렷해졌다. 둥근 방이었다. 방 가운데 키가 작고 둥치 굵은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가뭄 든 땅처럼 갈라진 껍질로 뒤덮였고, 굵고 가는 온갖 가지가 무성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나뭇가지들이 밖으로 뻗어나가는 대신 스스로의 내부, 둥치 쪽으로 모여들며 무언가를 휘감고 있었다. “저게 뭐지?” 빼곡한 잔가지에 가려진 형체를 완전히 알아보기는 어려웠다. 두 사람이 알아본 것은 팔뚝보다 조금 더 길 듯한 검은 자루에, 비슷한 길이의 날이 붙은 길쭉한 무기였다. 날과 자루의 이음매에 핏빛 붉은 술이 달렸고, 나뭇가지 틈새로 드러난 금빛 날에는 왕관과 네 자루의 검이 교차된 문양이 세필로 그린 것처럼 엷게 새겨져 있었다. 자루 끝은 부러져 있었다. 창이었다. 2. 부러진 손 “너를 사랑하지 않았던 피는 이미 내 몸에 돌지 않는다. 내 머리털 하나도 너의 기억과 함께 자라나 저리 긴 타래가 되어 나는 오늘 그것을 잘랐다. 마음을 자르지 못해 추억을 자르지 못해 머리를 가위질해 시령에 얹고 신과 저고리를 꿰어 집을 나선다. 네가 나를 거절하려느냐. 그럴테지, 마음 고운 너는 매정히 쫓고 혼자 가질테지 그러나 오늘 난 새피가 내 몸을 돌지않느냐. 네 이름을 부르려 난 피가 엎어지며 구르며 네게 가라고 떠밀며 이끌며 외치지 않느냐 내가 자른 것은 내 남은 삶이거니 이제 네 신이 남긴 자욱 따라갈 일뿐이거니.” “마법사의 부러진 손...” 조슈아의 입에서 웨더렌 할머니가 말했던 이름이 흘러나왔다. 부러진창, 그 아래로 아마 긴 자루가 있었을 것이다. 아나로즈가 말했다. “부러지기 전에는 피 흘리는 창이라고 불렸어. 붉은 술을 흐르는 피로 보았던 자들이 붙인 이름이지.” 막시민이 물었다. “그런데 왜 마법사의 손이지?” “본래 완전했던 창 자루를 자신의 팔에 박아 넣었던 마법사가 있었어. 그의 팔에서 부러져 나와 남은 것이지.” 조슈아가 말했다. “악의 무구에 지배당했다... 그 말이 그런 뜻이었군요.” “두 가지 의미에서지. 무구와 자신을 한 몸으로, 또는 무구를 영원히 없이한다.”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째서 그런 뜻이 되죠?” “무구는, 몸에 박아 넣으면 그자의 신체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하게 만들어 주지. 인간의 몸이 노력으로는 결코 가질 수 없는 거대한 힘과 마력조차도 주지. 그러나 그렇게 강화된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이미 무구의 것. 자아를 빼앗긴 그는 이미 사람이 아니라 괴물일 뿐.” “그렇다면, 영원히 없이한다는 말은?” “무구는 본래 파괴되지 않아. 어떤 힘으로도.” 마법 왕국이었던 가나폴리 사람들조차 무구를 파괴하지 못한 채 왕국을 떠나야 했다. 그들 중 누군가가 가져온 무구의 한 조각 또한 소멸시킬 수 없어 봉인한 채 지금껏 이어왔다. 그것은 파괴되지 않는 무구였다. “그러나 사람의 몸에 들어갔을 때 무구는 그자의 몸의 일부, 또는 그 자체가 되지. 무구는 생명이 없으나 사람에게는 있지. 무구와 한 몸이 된 그자를 죽이게 되면 무구 자체도 숨이 끊어져. 그것이 무구를 파괴하는 유일한 방법이지.” 막시민이 중얼거렸다. “사람이 죽어야 한다니 난감하긴 하지만, 세상에는 별사람이 다 있던데 말이야. 지금껏 그 방법을 쓰려고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엇다니 조금 믿어지지 않는데.” 아나로즈는 미소 없이 막시민을 바라보았다. “나라도, 수백 년 동안 이렇듯 갇혀 고통 받느니 차라리 무구와 함께 죽기를 바랐겠지. 그러나 간과하지 마. 무구와 한 몸이 된 자가 얻게 되는 힘을. 가나폴리의 왕이었던 마법사가 무구와 한 몸이 되었을 때 일어난 재앙을. 나 또한 그렇게 했다면 그 마법사와 똑같은 괴물이 되어 손닿는 모든 것을 망각의 고장으로 보내어 버렸겠지. 무구로 강화된 자를 죽이기 위해 치러야 할 희생은 나 하나가 봉인을 지키며 받는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니야.” 그 말이 맞았다. 두 사람은 새삼 두려움을 느끼며 부러진 창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보아서인지 금빛 그림이 새겨진 창날에 붉은 기운이 일렁이는 듯했다. “아시겠지만, 내겐 페리윙클을 지킬 의무가 있어요.” 조슈아가 겨우 창에서 눈을 떼며 입을 열었다. “수많은 사람이 살아가는 섬이죠. 나 하나가 어찌한다 해서 지켜질 섬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의무 또한 있는 거죠. 아르님이라는 이름 속에, 내가 물려받은 이카본의 피에. 당신이 안다면 가르쳐주세요. 어떻게 해야 섬을 지킬 수가 있죠?” 조슈아는 본래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막기 위해 이곳에 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처음의 문제는 이상할 정도로 희미하게 느껴졌다. 페리윙클을 자신의 것이라고, 오만하게 생각한 일은 없었다. 그가 아직 섬을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그에게 보여 준 신뢰와 지지가 있었다. 그것은 무거웠다. 그러나 아나로즈의 대답은 짧았다. “못해.” “불가능하다고요?” 입술이 말랐다. 이대로 ‘그렇다면 할 수 없지’ 하며 돌아서도 되는 자신일까? 아직껏 괜찮으니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속 편하게 믿어버려도 될까? 아나로즈는 대답이 없었다. 막시민이 둘을 번갈아 보다가 뒷머리를 긁었다. “거 참 간단하게 말하는데. 페리윙클은 그렇다 치더라도 노을섬에 대한 걱정도 없나? 페리윙클이 가라앉을 마당이라면 노을섬이라고 무사할 리 없잖아? 안 그래?”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생각에 잠긴 것 같지도 않았다. 무표정하게, 둘을 관찰하는 눈길을 보낼 뿐이었다. 막시민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투를 바꾸었다. “그래, 뭐 없을 수도 있지. 한데 딴 데야 어찌됐든 노을섬만이라도 안전하게 할 방법도 없어? 작게 시작해 보자고. 차근차근 넓혀도 되잖아. 아니, 그래, 애초에 왜 실패한 건지나 말해보자고. 그렇게 수백 년이나 잘 지켜 온 봉인이 왜 깨어진 건데? 당신의 임무가 실패한 까닭은 대체 뭐야?” “바로 너희 같은 자들 때문이지.” 대답이 나오자 막시민은 뜨악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 거기서 왜 또 우리한테 불똥이 튀는 거야?” 아나로즈는 처음부터 그랬지만 막시민이 뭐라 하든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몇 달 전, 이 섬에 누군가가 왔어.” 막시민은 퍼득 조슈아를 돌아봤다. 이건 그들이 기다리던 이야기였다. “무덤으로 들어오지 않았기에 그의 모습은 보지 못했지. 그러나 그가 섬에 발을 들이는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났어. 깨어날 때가 아니었는데도. 깰 수밖에 없었어. 그자가 이 섬에 들여놓은 또 하나의 조각 때문에.” “조각?” “마법사의 팔에서 남은 창을 꺾어 내면서 자루 일부가 쪼개어졌어. 작은 조각 쪽은 노을섬까지 오는 동안 어디에선가 사라졌다고 믿어졌지. 그랬던 그것이 어째서 그자의 손에 들어갔을까. 페리윙클에 남아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대륙 어딘가에? 거기까지는 나도 알 수 없어. 그러나 그자가 그걸 갖고 노을섬으로 들어오는 순간 수백 년간의 내 노력은 무가 되었지.” 그 말을 하는 아나로즈의 목소리에서 고통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그는 강한 마력이 요구되는 어떤 의식을 치르기 위해 마법의 증폭을 원했던 것이겠지. 이곳에 마력의 원천이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을 보면 이 섬 출신일지도 모르지. 두 조각이 감응을 일으키면서 그자는 원하던 마력을 손에 넣었을 거야. 그자는 떠났고, 봉인은 깨어졌어. 그자가 자신이 저지른 일이 가져올 결과를 알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 그자는 그 결과를 감수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을 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 “그놈이 한 일이 무엇인지 알려드릴까?” 막시민은 비꼬는 듯한 말투와 달리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그 빌어먹을 놈은 정말 무한히 가치 있는 일을 했지. 세상 누구도 이룬 적이 없는 마법이라던데, 그만한 힘도 없는 주제에 이곳에서 비정상적인 마력을 얻어서 잘도 해냈던 거지. 그 덕택에 지금 비취반지 성에는 데모닉 조슈아 폰 아르님이 한 명 더 앉아 있단 말씀이야. 모습은 물론이고 생각도, 기억도, 재능도 똑같은 자, 심지어 이 세상의 섭리조차 한 명으로 인식한다는 멋진 복제품!” “인형.” 질문이 아니었다. 아나로즈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데모닉의 인형.” 조슈아는 아나로즈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의 인형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모욕으로 느껴질 수 있음을 알았다. 아나로즈의 짧은 말에서, 그녀가 무한히 사랑하는 데모닉 이카본의 존재조차 모욕당했다고 여기는 감정을 읽었다. 이제 물어야 할 때였다. 조슈아는 감정을 누르며 말했다. “당신은... 수백 년 동안 어느 누구도 이 관에 손을 대지 못했다고 확신하나요?” 그동안 막시민은 아나로즈가 묘하게도 잘 대답해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라면 이 상황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채었어야 했다. 조금 늦었지만, 그제야 막시민은 아나로즈의 변하지 않는 얼굴에도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 수 있음을 알았다. “네가 무엇을 찾는지 알아.” “아신다고요?” 조슈아는 조금 놀랐지만, 아나로즈가 마법사인 이상 결코 짐작하지 못할 일도 아니고, 또 일부러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일도 아니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도와주세요.” “대신 너는 내 부탁을 들어주어야 해.” 어려운 부탁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조금 신중했더라면 단서를 달았어야 했다. 그러나 조슈아는 아나로즈의 무감동한 태도에 어느새 익숙해져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들어드리겠어요.” 막시민조차도 이어 아나로즈의 입에서 나온 요구를 상상하지 못했다. “내 손에 죽어줘.” 바람이 멎자 세 사람의 숨소리만 들렸다. 차마 대꾸가 떨어지지 않아 막시민은 입술을 악물었다. 조슈아는 시선을 떨어뜨렸다가 돌 닻을 보았고, 다시 아나로즈를 보았다. “이해가 안 되네요.” 다시 열린 아나로즈의 입술이 좀 전보다 메말라 있었다. “이해할 수 없겠지.”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누구라도 자기가 죽어야만 할 이유를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건.” 조슈아는 눈을 빠르게 몇 번 깜빡였다. “당신은 내게 부탁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당신은 내 협조가 없어도 아주 간단하게 그 일을 할 수 있죠.” 놀랍게도 아나로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말도 그런 뜻이 아니야.” “아니라고요?” “물론 내가 널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아. 비록 내 힘이 대부분 봉인을 유지하는 데 쓰이고 있어서 슬 수 있는 건 고작 한 줌분이더라도.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네 죽음이 아니라, 너의 납득이야.” “... ” “네가 그 사실을 납득해줬으면 해.” 막시민이 자리에서 벌덕 일어섰다. “도저히 더 듣고 있을 수가 없는데 말이지. 당신이 누구고 어떤 일을 했든, 무슨 고생을 겪었든 수백 년 뒤에 태어난 우리한테는 아무 책임이 없다는 걸 첫째로 알아둬야겠어. 당신이 고생하다 못해 돌아버렸다 해도 그게 나나 저놈의 책임은 아니란 말이야. 그건 백 년 전에 뜬 해와 오늘 날시만큼이나 관계가 없어! 혹시 그게 제정신으로 한 말이라고 한다면 나도 제정신으로 당신 말을 해석해볼까. 상대가 납득하면 죽여도 상관없나? 자살하려는 놈은 절벽에서 밀어도 되나? 죽이고 싶은데 상대가 납득하면 죄책감이 좀 덜어지나? 그때위 생각을 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전혀 이해가 안 되지만, 설마 그걸 추구하는 거라면 딱 잘라 비열하다고밖에는 못 말하겠는데. 안 그래?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따위 납득이 가능한 놈이 세상에 한 명이라도 있을 거 같아? 만약 있다면 내 목도 당신 손에 붙여 드리지. 별로 쓸 데는 없겠지만. 어때?”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볼 때 아나로즈가 빠르게 쏟아져 나온 그의 말을 이해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막시민은 그러든 말든 이미 신경 쓰지 않았다. “아, 게다가 저놈이 만에 하나 죽고 싶다 쳐도 그건 절대로 나한테 먼저 물어봐야 돼. 그럴 거였으면 일찌감치, 어디야, 저 불난 극장 속에 내버려뒀으면 만사 간단했단 말이야. 그런데 거기서 죽기 살기로 건져 와서, 쫓아오는 살인자를 피해 가며, 여태까지 저놈을 살리겠답시고 기를 쓰고 끌고 다닌 난 뭐가 되냔 말이야! 따라서 반드시 나한테 허락을 받아 주셔야겠고, 그리고 대답이야 어차피 뻔하니까 미리 말해 두자면 절대 반대야!” 막시민이 보기에는 살짝 돌아 있는 조슈아가 또 제멋대로 자기 논리에 빠져서 ‘그래요, 죽어드리죠’ 따위로 대답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온 말이었다. “막군, 난...” 조슈아가 입을 열려 하자 막시민은 홱 돌아보며 눈을 부라렸다. 네놈이라면 또 내 논리를 궁색하게 할 돌아버린 논리를 잘도 끄집어낼지 모르니까 입 닫고 있어, 라는 의미로. 아나로즈는 막시민의 말을 끝까지 들었지만 이번에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 말도 못 들은 것처럼 조슈아에게 대답을 재촉하는 눈길을 보냈을 뿐이었다. 조슈아가 말했다. “내 의견을 말하기 전에 왜 당신이 그걸 원하는지 알고 싶군요. 아니, 알아야 하겠죠.” “너는 내가 용서할 수 없는 그의 모습 그 자체니까.” 아나로즈를 보는 조슈아의 눈이 일순 흔들렸다. “그 말은, 단지 내가 그와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생겨난 핏줄의 후손이기 때문에?” 아나로즈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조슈아는 입술을 가늘게 다물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유라면 납득할 일은 없을 겁니다.” “네 존재가 그와 무관하다고 말하고 싶은가?” “그의 공이 내 공이 아니듯, 그의 과도 내 과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너는 왜 그의 이름을 지녔지? 왜 그의 힘을 이어받았지? 넌 그가 이룬 것을 물려받고, 그가 한 계약의 이행자가 되려 하고 있지 않은가.” 조슈아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계약의 이행자... 어덯게 당신이 그걸 알고 있죠?” “만일 네가 계약의 이행자가 아니었다면.” 아나로즈가 몸을 일으키는 듯하더니 이윽고 일어나 똑바로 섰다. 더 이상 자세가 흔들리지도 았았다. 오른손을 들어 움직이자 바닥의 풀들이 그녀의 손짓을 뒤따르며 몸을 눕혔다. 무언가를 가볍게 쥐듯 오므린 손가락이 허공에서 느리게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조슈아는 심한 두통을 느꼈다. 그녀의 손가락이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것처럼 또렷한 감각이었다. “난 너를 간단히 지배했을 것이다.” 막시민은 조슈아가 얼굴이 하얘지며 눈을 감는 것을 보았다. 막시민은 그런 모습을 예전에 한 번 보았다. 쥬스피앙 마법사의 집 앞에서, 최초로 배를 날리려 했던 때. 그러나 그때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조슈아는 애써 눈을 뜨더니 아나로즈를 노려보았다. “내 능력을 끌어내려 하지 말아요.” 아나로즈는 손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두통의 근원도 사라졌다. 조슈아는 아직 남은 통증의 잔재를 추스르느라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하려 애쓰며 말했다. “어차피 이곳은 유령이 들어올 수도 없는 곳이죠. 안 그런가요?” “어떤 금지든 더 강한 힘 앞에 부서진다. 그렇지 않은가?” 조슈아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 말은, 유령을 불러내고자 하는 내 힘이 더 강하면 유령의 침입을 막는 이곳의 제약은 깨어진다, 그 말인가요?” 아나로즈의 입술이 조금 움직여 씁쓸한 미소가 되었다. “네게 아직 그런 힘은 없어.” 그즈음 조슈아의 얼굴에 핏기가 돌아왔다. 그걸 본 막시민이 말했다. “하지만 당신에게 지배당하지도 않는군. 저 녀석은 제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남의 의식에 익숙하거든. 일흔 명쯤 들어와도 눌러버릴 수 있고, 아흔여덟쯤 들어와도 죽지 않는단 말씀이야.” 아나로즈의 눈썹이 조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막시민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것만은 물어야겠군. 조슈아가 영매라는 건 꿰뚫어볼 수 있다 치더라도, 조슈아에게 계약의 이행을 원하는 놈들, 그러니까 ‘약속의 사람들’ 이 사라지지 않고 조슈아 주위를 떠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안 거지? 당신은 약속의 사람들이 죽기 전에 그들과 헤어졌을 거 아냐?” “유령이 영매의 몸속에 들어왔다가 나갈 때, 아무 흔적도 없이 깨끗이 분리될 것 같은가?”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막시민은 미간을 찡그리며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조슈아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 막시민이 오히려 다그쳤다. 조슈아는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대답했다. “세계가 변했어.” “그게 무슨 뜻이야?” “내 세계. 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의식 속에 있는 세계야. 사람에 따라 작은 방일 수도 있고, 까마득히 높은 절벽과 하늘일 수도 있어. 보통은 직접 가보기 힘들지만, 네게도 있을 거야. 난 예전에 코르네드를 강령했을 때 그곳에 가서 얘기를 들었어. ‘흔적’에 대해서. 그땐 그게 무엇인지 몰랐는데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내가 다시 간다면 그 세계의 풍경은 변했을 거야. 많은 유령이 들어왔었기 때문에.” “그 말은 너란 놈이 변한다는 거냐? 조금씩이라도?” “몰라. 확실치 않아. 하지만 본질적으로... 사실일 것만 같아.” “그럼 강령 따위 하면 안 되잖아!” 조슈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고 싶어서 한 적은 없는데.” 막시민은 더 말하고 싶은 듯했지만 일단 나중으로 미루고 아나로즈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럼 당신은 조슈아에게 남은 유령의 흔적을 발견해서, 그게 누구인지 알았단 말인가?” 아나로즈의 입술이 희미하게 비틀렸다. “누구인지 알 필요는 없어. 유령은 ‘뜻’을 남기고 가니까. 들어왓던 유령들이 열망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어. 그리고 ‘그 소원’의 주인들을 나보다 잘 알 사람은 없겠지.” “그래... 좋아. 좋다 이거야. 당신은 조슈아의 머릿속에 드나든 약속 뭐라는 놈들이 흔적인지 뜻인지 하는 걸 남긴 걸 보니, 저 녀석한테 이거저거 뜯어내려고 덤볐을 거라고 짐작한 거 같은데, 내가 딱 잘라 말하자면 지나치게 제멋대로 결론까지 내버리는 거 아냐? 약속 어쩌고 놈들한테 당연히 휘둘릴 거라고 단정 짓는 거 말이야. 계약의 이행인지 뭔지, 이쪽에서 거절했을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는 거냐고.” 그렇게 말하자마자 막시민은 조슈아를 돌아봤다. 그 말만은 하지 말라는 눈짓을 보내기도 전에 조슈아가 이미 말하고 있었다. “거절하진 않았어요.” 막시민은 이곳에서 안전하게 나갈 수만 있다면 친구 놈의 뒤통수를 한 대 갈겨 주리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응낙하지도 않았죠. 하지만 그 까닭은 그들의 요구를 무시해서가 아니에요.” 조슈아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어렸다. “그럴 능력이 없어서죠.” 줄곧 시선이 닿아 있었지만 아나로즈의 눈은 조슈아를 보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방금 조슈아의 말이 맺어진 순간만은 그를 보고 있었다. 짧은 순간, 눈 속에 녹색 불길이 이는 듯했다. “바로 그래서야.” 잠깐 다물어진 입술조차 가늘게 떨렸다. “이카본은 한 번에 아주 많은 걸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지. 한 개의 마음 속에 수백 개의 마음이 들어 있지. 한 명에게 온 마음을 주고도 다시 수백명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가 있지. 이윽고 선택의 때가 왔을 때 그는 어느 것도 버리지 않으려 했어. 제 손으로 어느 쪽도 택하지 않으려 했어. 그 결과 내가 남겨진 거지. 나는 홀로일 수가 있지만, 끊임없이 요구하는 그들은 결코 홀로일 수가 없으니까!” 분노한 아나로즈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리는 순간 보이지 않는 천장, 또는 허공 자체가 진동했다. 그들의 옷자락까지 흔들렸다. “계약의 이행자가 어떤 것인지 알아? 약속의 사람들, 그들은 내 것을 모조리 가져가고도 모자라 내가 그들의 종이 되길 원했지. 백번 양보해 그곳에 내 몫이 없다 해도, 내 명예는 어디에 있지? 내 명예를 지켜주어야 할 그는 무엇을 해찌? 난 내게 치욕을 주는 방식으로 남을 사랑하지 않아. 계약의 이행자란, 내게 명예를 버린 채 자신 곁에 남아 달라고 한 그사람의 모습이지.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그의 모습, 그의 비겁함. 그 모습만은 내 혼이 먼지가 될 때까지도 용서할 수 없어. 다시 천 년 동안 그를 사랑하더라도.” 아나로즈는 손을 들어 조슈아를 가리켰다. “그래서야. 그래서 너를 용서 못해. 끝내 계약의 이행자가 되려 하는 너. 방금 네가 한 말은 이 자리에 이카본이 있었다면 했을 말 그대로니까!” 조슈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메아리처럼 남은 목소리의 잔상만이 사방의 공기를 흔들어댔다. 마법사이기 때문에 목소리에조차 마력이 깃든 것일까. 아니면 이 울림은 한 사람이 수백 년간 간직해 온 분노가, 고통이 처음으로 마음 밖으로 쏟아졌기 때문일까. 울림이 가까스로 가라앉을 무렵 막시민이 입을 열었다. “좋아. 그건 다시 말해 조슈아가 계약의 이행자가 되지 않는다면 당신 손에 죽을 필요도 없다는 뜻인가?” 조슈아가 대신 말했다. “막군, 그 대답은 필요가 없어. 그녀는 능력이 없어 계약을 이행할 수 없다는 나조차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하니까.” 그러나 막시민은 한 가닥뿐인 희망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진심으로 말이다. 진심으로 계약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고 한다면?” 조슈아는 대답하는 대신 아나로즈에게 막시민을 가리켜 보였다. “그는 내 친구죠.” 막시민도 조슈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몰랐다. 조슈아는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본 대로 어쩌면 내가 이카본을 닮아서인지, 나도 내 마음속에 든 것 어느 쪽이든 쉽게 포기 못합니다. 보다시피 내 친구는 나를 살리겠다고 멀리서부터 찾아와 고생을 나누고, 여기처럼 위험한 곳까지도 함께입니다. 그런 그를 위해 내가 한 마디, 계약의 이행자 따위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기만 하면, 혹시 당신은 우릴 보내 줄지도 모르는데, 그런데도 난 그 말을 못하죠. 당신이 미워하는 이카본의 모습 그대로.” 막시민은 정말로 조슈아의 말을 멈추게 하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때 반전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런 우리의 모습이 당신에게 도 다른 이카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지 않나요? 그렇게 어려움을 자초하는 친구인데도 끝내 곁을 떠나지 않던 한 사람과 함께였던 모습을?” 세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고 할 만한 순간이었다. 조슈아가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켈스니티.” 아나로즈가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말했다. “수백 년 전에 죽었겠지.” “맞아요. 하지만 계약의 이행자가 무엇이던가요? 약속의 사람들이 왜 지금것 남아 있던가요?” 그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공기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윙윙 소리가 귓가에 들릴 지경이었다. “나는 영매죠.” 파삭, 하고 무언가가 부서졌다. 막시민의 시선이 향한 곳에 이상한 균열이 보였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의 일부가 유리인 양 부서져 있었다. 틈새에서 파란 빛이 새어나왔다. “너는... 네 말을 증명해야 할 거야.” “누가 날 이곳으로 데려왔다고 생각하죠? 그 옛날 이카본만이 뚫고 들어 올 수 있었던 마법 폭풍의 섬으로, 그 속의 숨겨진 봉인처까지, 누가 인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그 순간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아나로즈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감정 따위 다 삭어버렸다고 말하던 그녀의 손 틈으로 산 사람만이 흘리는 투명한 물이 흘렀다. “왜... 그의 혼이... 아직까지 남아 있지? 몇백 년 동안... 왜 쉬지 못하고... 떠돌았던 거지? 쉬지 못하는 것은 나 하나로 족한데...” 조슈아도 막시민도 망연해져서 어쩔 줄 몰랐다.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섣불리 감싸 위로할 수도 없었다. 그녀 같은 사람이 무너지는 모습은 보는 사람의 마음조차 고통스럽게 찢어 놓았다. “말해. 켈스에게 무슨 일이 있었지?” “켈스는 비취반지 성이 습격을 받았을 때... 이카본은 자리에 없었고...” 조슈아가 말을 잇지 않아도 아나로즈는 알아들었다. 왜 이카본이 켈스니티를 두고 성을 비워야 했을지.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동안 바람이 없는데도 주위의 풀들이 이리저리 쓸렸다. 잔디 위에 비틀린 고랑이 새겨지고 지워졌다. “그래서 그가 더 이상 오지 않았어.” 아나로즈는 몸을 일으켰지만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켈스는 어떻게 지내고 있지? 그와 너는 어떤 관계지?” “켈스는 오랫동안 비취반지 성에 지박되어 있다가, 나를 만나면서 풀려나게 됐어요. 그 후로 내 곁에서 지냈고, 이미 몇 년 째죠. 이카본의 이야기를 수없이 들려준 것도 그였죠. 하지만 켈스의 존재가 너무 익숙해서였을까. 난 조금 전 당신이 그토록 슬퍼하는 그의 일을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어요. 어쩌면 당신처럼 수백 년 살아온 사람만이 느낄 수 있겠지요. 그동안 켈스는 내게 친구 같기도 했고 삼촌 같기도 했죠.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는 날 아꼈어요.” 아나로즈가 묘하게 침착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너를 아꼈으니 내게도 같게 해 달라는 건가?” “아뇨.” 조슈아는 상대의 고통에 동화되어 얼굴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그런 것은 기대하지 않아요. 켈스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과거 이카본과 당신 사이에 존재했던 그의 의미예요. 켈스는 두 사람의 친구였죠. 두 사람을 축복하고자 했고요. 당신도 그를 미워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아나로즈가 속삭였다. “그는 내 친구였어.” “그래요. 하지만 그는 약속의 사람이었어요.” 생각지 못했던 지적에 아나로즈의 얼굴이 굳어졌다. “켈스는 그들과 달라.” “당신에 대한 태도는 달랐지만, 근본적으로 켈스 또한 이카본의 약속을 믿었던 사람이었죠. 그리고 그 약속의 실현을 열망했던 사람이고요. 그 두가지야말로 ‘약속의 사람들’ 을 정의하는 가장 뚜렷한 준거가 아닌가요.” “...” “무엇보다도 켈스는 지금도 이카본의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하고 있어요. 죽은 자들도 다가가기를 겁낸다는 필멸의 땅에 드나들면서까지. 그런 의미에서 켈스는 약속의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열망이 강했던 사림일지도 모르죠. 이카본이 이루지 못한 약속을 대신 지켜 주려는 마음까지 더해서. 후손인 내가 그 약속에 말려드는 것만은 반대해왔지만.” 아나로즈는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녀는 이카본이 약속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을 모두 미워한다고 했다. 계약의 이행자가 되려 한 이카본 본인의 모습조차도. 그러나 켈스니티만은 아니었다. 그만은 약속의 사람들이자 아나로즈의 친구였다. 또한 이카본은 몸의 일부처럼 여기던 친구를 위해 약속을 지키려 한 셈도 되는 것이었다. “조금 전, 네가 켈스가 너를 아끼니 내게도 너를 해치지 말아달라고 했다면 나는 그대로 했을 거야.” 아나로즈의 숨이 평온해졌다. “그만큼 나는 켈스를 존중해. 우린 맹약자였지. 사람들은 우리가 목표를 위해 맹약을 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우린 서로의 존재에 맹약을 했어. 적어도 난 그랬어. 그래서 마음 맺음이 깨어졌을 때 나는 맹약을 깨고 떠났어. 그래. 나는 그 정도로 캘스를 소중하게 생각해. 하지만 너는 내게 그걸 요구하지 않았어.”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네가 이카본을 닮았다면, 그리 요구할 리도 없다는 것을 알아.” “네, 맞습니다.” 결코 대적할 수 없는 상대 앞이었지만 조슈아는 단호히 그렇게 말했다.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고서. “그렇다면 너와 나의 계약은 여전히 존재해.” 조슈아는 용서를 구걸하려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로즈의 말이 이어졌다. “먼저 말해 두겠어. 너희가 찾고 있을 본체는 이곳에 없어.” 3. 돌에서 꽃이 자라다 “돌이 이슬을 품어 이끼꽃 나고 땅이 강을 머금어 버들꽃 피고 별이 비를 뿌리니 천지사방에 별꽃 사람이 뛰놀아 살아난 돌 바람이 휘돌아 일어난 땅 돌투성이 거친 땅에 별이 비를 뿌리니 흐르는 강물 따라 천지사방에 별꽃“ “없다고?” 막시민은 그렇게 되물으며 저도 모르게 돌로 된 닻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알았다. 아나로즈가 잠들고 깨어날 때마다 그 속에서 자아를 되찾아온 돌로 된 관에, 그녀 말고 세상 그 누구도 손댈 수 없었음을 알았다. 맨 처음 찾아온 감정은 허탈함이었다. “여기가 아니라면 도대체... 최초의 가정부터 모조리 틀렸다는 거냐? 젠장맞을 돌팔이 마법사가 해준 말은 죄다 헛소리였나?”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쥬스피앙을 이 자리로 불러올 수 없는 것이 유감이라고 생각하며 막시민은 땅바닥을 걷어찼다. 어디부터 다시 생각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혼란에 빠진 막시민의 귀에 아나로즈의 목소리가 들렸다. “데모닉의 인형을 만들려면 데모닉의 시체가 필요했겠지. 그래서 너희는 이곳에 묻혔을 그의 관을 찾아왔겠지.” “거기까진 맞다 이건가?” 맞다 쳐도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그자가 노을섬에 찾아와 마법 증폭을 통해 만들어낸 것이 정말로 인형이라면, 노을섬에 이카본 외에 다른 데모닉의 시체라도 있단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여기에 찾아온 자는 인형을 만든 게 아니라 다른 일을 한 것이고, 데모닉의 시체도 다른 곳에 숨겨져 있단 말인가? 다음 순간 아나로즈가 상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내가 너희가 찾는 것을 어째서 알고 있을 것 같은가?” 조슈아가 대신 답했다. “이곳에서 그자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기 때문에.” 막시민이 반론했다. “아까 그놈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했낞냐?” “보지 못하더라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 그건 마법의 문제니까.” 막시민의 시선이 다시 아나로즈를 향하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인형을 만들었음을 알고 있었어. 그게 누구의 시체인지, 누구의 인형일지는 몰랐지만.” “처음부터 그렇다고 할 것이지 말장난이나 하고...” 불만스레 중얼대던 막시민은 문득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누구의 시체인지 몰랐다는 말은, 그들이 처음부터 본체가 될 시체를 갖고 있었다는 뜻인가?” 조슈아가 아나로즈를 돌아보았다. “그게 정말인가요? 그들이 관을 갖고 있었나요?” 아나로즈는 조슈아의 눈을 한참 보고 있었다. 그녀의 고개가 끄덕여졌을 때 조슈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 누구의?” 비취반지 성의 납골당에는 데모닉의 시체가 없었다. 페리윙클의 납골당은 부순 흔적이 없었으며, 모든 관에서 시체가 사라진 흔적 또한 없었다. 그리고 노을섬에 묻힌 이카본의 관에는 세상 그 누구도 손댈 수 없었다.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히스파이에 노인네라면, 내가 네 인형을 처음 봤던 날까지도 멀쩡했다.” 막시민이 첫 번째 가능성을 소거했다. 그런 다음 심각하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더니 물었다. “그 노인네한테 자식이 없다는 거, 진짜로 확실하냐?” “나도 없는 걸로 알고 있어.” 조슈아 또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만에 하나 있다 해도 숫자가 맞지 않아. 이미 내가 태어났단 말이야. 또 다른 데모닉이 태어났을 리 없어.” “같은 시대에 두 데모닉이 존재한 것은 너하고, 지나치게 오래 살아버린 노인네가 유일하다는 그 말 말이냐?” 새삼 고개를 끄덕일 필요도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막시민이 입술을 한쪽으로 비틀며 말을 이었다. “네 대에 한 번인가 태어났더라는 그 얘기겠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실은 네가 순서를 틀린 거아니냐?” “내가?” “넌 세 대째잖아. 순서를 틀린 건 너고, 실은 전과 마찬가지로 네 대 째에 태어날 참이었던 거 아니겠냐고.” 잠시 후 조슈아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진짜로 할아버지의 자식이 있다 쳐도 두 대째에 불과하잖아! 할아버지 본인이 데모닉이라고!” “그 노인네가 일찌감치 사고 쳐서 이미 아들에 손자에 증손녀가 세 명쯤 있을지 알게 뭐냐?” “그럴 리가 없어!” “그건 네 생각이지!” “너도 할아버지를 오랫동안 봤잖아! 그래놓고도 할아버지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또 순진한 도련님 노릇이냐? 데모닉 주제에 머리 좀 써봐! 할아버지가 자기한테 아들이 있는지 몰랐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많다는 걸 모르겠냐?” “그런 무책임한 얘긴 듣고 싶지 않아!” “그럼 다른 답이라도 있냐? 어쨌든 너한테는 아들이나 딸이 없는 게 틀림없잖아! 혹시 진짜로 있다거나 한 거면 빨리 솔직히 불어! 지금 불면 용서해 줄지도 모르니까!” 얼굴이 새빨개진 조슈아가 막시민의 무릎을 걷어차려 했으나 막시민이 피하는 바람에 발긑이 스치는 데 그쳤다. 막시민은 웃고 있지 않았지만 조슈아의 얼굴을 보더니 기침을 한두 번 했다. 조슈아가 말했다. “한 가지 분명히 해 두겠는데, 우린 지금 이미 죽었을 사람을 찾고 있는 거야. 아무나 마구잡이로, 또는 만들어낸 다음에 그 사람이 죽었을 거라고 가정하는 건 마음에 안 들어. 그리고 내가 지금껏 존재를 몰랐을 친척이 있다 해도, 그 사람이 죽었다면 내 귀에 소식이 들려왔을 거야. 네 말대로 만에 하나 할아버지조차 모르는 자손이 있었다 해도 마찬가지야. 적어도 자식쪽에서는 아버지가 누군지 알고 있었을 테니까. 평소엔 몰라도, 죽었다면 틀림없이 소식을 전하려 했을 거야. 너라면 그리지 않겠어?” “글세, 나라면 우리 집에 누가 죽었다 해도, 그 소식 알리겠다고 어느 구석에 박혀있는지도 모르는 아버지란 인간을 수소문한답시고 시간 낭비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은 했지만 막시민도 어느 정도 조슈아의 논리를 이해했다. 물론 조슈아와는 다른 방식으로. 막시민과 달리 조슈아의 집안은 공작 가문인 것이다. 그런 피를 이은 사람이라면 집안에 미련이 있든 없든 자기 몫으로 떨어질 뭔가를 챙기러 가문에 나타나기 마련인 것이다. 숨어 있어서 남는게 뭐가 있겠는가? “다시 말해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집안에 죽은 사람이라면 누나 한 사람뿐...” 그렇게 말을 잇던 조슈아가 멈칫했다. 등줄기에서부터 빠른 충격이 올라와 뒤통수를 울렸다. 귓가에서 빗속에 방전된 번개가 내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났다. 조슈아는 손끝도 까딱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혔다. 막시민이 불렀다. “왜 그래?” 조슈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몇 번 더 불렀지만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럽게 침묵에 빠져버렸다. 자신 속 생각의 세계에 떨어져 버렸다. 누구도 보고 있지 않았다. 눈동자 속에 나타난 혼란을 알아볼 수 있을 뿐이었다. “아.” 정신을 차리니 벌써 막시민이 어깨를 잡아채 한바탕 흔들고 놓아준 참이었다. 조슈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렇게 하는데 어깨가 떨렸다. “말해. 뭐냐.” “누나에 대해서... 내가 한 말 기억해?” 막시민은 같이 심각한 얼굴을 했지만 대답은 단순했다. “바보였다면서.” “물론 그랬지만, 누나, 어떨 때는 나보다도 기억력이 좋았어.” 막시민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그거 성립할 수 있는 말이냐?” “아니... 나보다 더 좋았다는 말은 어례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어. 언젠가 누나는 아기 시절에 요람에 누워서 보았던 일을 술술 말해줬던 적이 있어. 그때 사람들이 나눈 이야기며 창밖의 풍경이나 유모가 입었던 옷 색깔까지도. 마침 그날은 어머니께서 몹시 편찮으셔서 다들 그날 밤을 못 넘기시는 것 아니냐고 걱정했던 날이어서, 그날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았어. 그래서 맞추어 볼 수가 있었지.” 막시민의 표정이 한층 괴상해저더니 말했다. “너희 집안에서는 그런 사람을 바보라고 부르냐?” 조슈아가 고개를 몇 번 세차게 도리질 쳤다. “하지만 누나는 자기 이름조차 평생 한 번도 바르게 쓰지 못했던 사람이었어. 스무 살이 되도록 다섯 살짜리의 행동 그대로였던 누나라고. 그럴 리가 없어. 그럴 수 없어.” “뭐가 그럴 수 없어?” 조슈아가 힘주어 내뱉었다. “누나가, 데모닉이었을 리 없다고.” 막시민도 순간 아연해졌다. 조슈아의 표정은 결연해 보였지만, 눈빛은 불안했다. 막시민은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데모닉중에는 미친 사람이 많았다. 어려서 일찌감치 미친 사람이 특히 많았다. 이브노아가 보였다는 기억력은 그녀가 데모닉이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결론을 가능케 했다. 잠시 후 막시민이 입을 열었다. “너, 지금까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억지로 네 매형을 감싸지 않았냐. 그건 그 사람이 네 누나만은 진심으로 아껴 줬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냐?” 조슈아가 그렇다고 뚜렷이 말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막시민이 테오를 의심할 때마다 조슈아가 막무가내로 거부한 것은 사실이었다. 데모닉의 판단력을 가졌으면서도 명백한 가능성을 줄곧 외면해 왔다. 테오가 조슈아 자신을 미워할 수는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브노아에게 보였던 헌신만은 잊을 수 없었다. 테오가 만일 정말로 자신을 미워하여 인형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이브노아를 보아 못 본체 할 수도 있다고, 그러므로 그를 의심해봤자 소용없다고, 인형은 없애게 되더라도 누가 그랬는가는 알고 싶지 않다고, 그런 모순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막시민이 지적할 때마다 듣고 싶어하지 않았던 조슈아였다. 막시민이 그런 기분을 눈치 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진실과 마주하게 될 테고 그때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라 여겨 내버려두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테오가 이브노아를 죽였다면? 죽이지 않았더라도, 그 시체를 이용해 인형을 만들었다면? “난 모르겠다. 너희 누나를 만나본 적조차도 없다고. 결론은 네가 내려.” 조슈아는 고개를 숙였다가 이윽고 저었다. “아니. 아닐거야. 아니라고 생각해.” 조슈아는 끝내 이브노아가 데모닉일 수도 있다는, 다시 말해 어려서 손상되어버린 데모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진실을 받아들일 담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이브노아의 스무 해 짧은 생애 자체가 무의미해지기에. 그런 사람을 믿고 사랑한 이브노아의 생애가 너무도 어리석고, 가련하고, 초라해져 버리기에. 진실이 아니어야만 했다. “증거도 없이 내릴 견론은 아닐지도 모르지. 이걸 피한다면 결론조차 없어져 버리지만, 지금 안다 해서 뭘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지.” 막시민은 조슈아의 속이 편해질 법한 얘기를 덧붙이고는 문득 아나로즈를 돌아봤다. 앞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더들어댔다는 데 생각이 미친 까닭이었다. 아나로즈는 둘을 보고 있었다. 줄곧 그랬듯 무표정하게... 아니었다. 표정이 있었다. 비록 어떻다고 딱히 말하기 어려운 것일지라도. 언제부터 일까. 켈스니티의 이야기를 꺼냈던 무렵부터일까? 한 마디 끼어들지도 않고, 자기 생각에 잠기지도 않고, 시선만이 떨어질 줄 몰랐다. 막시민이 돌아보는데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은 듯도 했다. 그건 뭐랄까...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그들 너머의 무언가를 하염없이 보았다. 그림이 되어버린 꽃과 사슴처럼, 볼 수 있되 영원히 손닿지 않는 무언가를 쫓았다. “너희들은 내 밖에 있어.” 아나로즈가 입을 열었다. “이곳은 나의 무덤, 침실, 피투성이 심장 속. 너희는 밖으로 나가야만 할 운명이고, 세상이 너희가 묻힐 무덤. 내가 이곳을 지키듯이 너희는 너희의 무덤을 지켜야 해.” 막시민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조금 전까진 지킬 방법이 없다고 하더니 생각이 바뀐 건가?” “피 흘리는 창 조각을 가진 자. 그자가 누구인지 너희가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아나로즈의 얼굴에 냉정한 미소가 어렸다. “조각을 가진 자가 다시는 이 섬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만들어. 그러면 재앙은 언젠가 멈출 거야. 완전한 파멸은 피하게 될 거야. 섬을 지키는 폭풍이 돌아왔으니 누구든 쉽게 들어올 수는 없겠지만, 인간의 일은 알 수 없는 것이니 후환을 없이해야만 하지.” 막시민은 상대를 시험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두 팔을 벌렸다. “무슨 수로?” “죽이고, 빼앗아.” 둘의 몸이 약간 굳어 졌다. 한 번도 예상 못한 방법인가? 어쩌면 아닐 것이다. 인형을 만든 자를 만난다면 어찌할 작정이었나? “거 참 간단하게도 말하네.” 그렇게 말하며 막시민은 웃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눈이 가늘어졌다. 아나로즈가 고개를 한족으로 기울더니 말했다. “조각의 문제를 몰랐다 해도 너희가 인형사를 용서할 작정은 아니었을 테지.” 조슈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나로즈의 말이 이어졌다. “너희가 찾는 본체에 대해 내 의견을 말해주지. 인형사의 힘이 강대할 때 본체와 인형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지. 비취반지 성에서, 이곳 노을섬까지도. 그러나 그런 힘이 없다면, 인형사의 힘이 약하면 약할수록 본체와 인형의 거리를 가까울 수밖에 없어.” “그 말은...” 인형사의 힘이 얼마나 강할지 짐작할 수는 없었다. 쥬스피앙은 본체가 어디에든 있을 수 있다고 가정했다. 물론 그는 자신도 못한 일을 해낸 인형 사이니만큼 매우 강한 힘을 가진 자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자는 부족한 힘을 메우기 위해 노을섬을 찾아와 위험한 마력의 원천을 건드리려 했던 자였다. 그렇다면 문제의 인형사의 힘은 생각보다 약할 수도 있지 않을까? “본체와 인형이 가까이 있으면 또 하나의 장점이 있지. 한정된 힘을 인형과 본체의 연결에 쓸 필요 없이 인형을 장악하고 부리는 데 집중시킬 수 있어. 모을 수 있는 마력이 적은 인형사라면 분명히 이쪽을 택했겠지.” 그런 관점에서 인형사는 과연 본체를 어디에 두었을까? 막시민과 조슈아의 머릿속에서 동시에 답이 떠올랐다. 인형이 있는 장소. 비취반지 성. “지금 그런 정보를 주는 건 계약의 유효함을 말하는 건가?” 막시민이 불쑥 묻자 아나로즈는 한결 차분해진 눈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내 손에 죽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해도, 너희가 내가 말한 일을 해내지 못한다면 이 해역에는 곧 아무 것도 남지 않겠지. 거기서 그칠지도 장담할 수 없지. 악의 무구 속에 감춰진 힘은 누구도 가늠할 수 없으니. 그 옛날 마법사들의 왕국을 통째로 멸망시켰던 힘.” 그 순간 얼굴에 드리워진 절반의 그늘 때문이었을까, 말을 맺는 아나로즈의 얼굴이 엄숙해 보였다. “우리 세상엔 왕녀 에브제니스가 없으니.” 이 세계에도 아침이 왔다. 밤새 총총하던 별이 희뿌연 안개에 한 자락씩 덮여갔다. 밤뿐인 줄 알았던 숲은 주홍빛도, 금빛도, 바닷빛도 품고 있었다. 검은 길목이 꼬리를 숲으로 감추고 바람이 뒤를 쫓았다. 해가 나뭇가지를 딛고 오르자 황금 잎이 한움큼씩 떨어지며 날았다. 명아주와 쇠비름꽃 사이로 들어간 잎은 곧 녹색을 빨아들였다.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새들이 속살거렸다. 새들은 정말로 있는 것일까. 나무는 살아 있을까. 이곳은 무덤이었다. 오직 한 사람이 묻혀 있으며 또 한 사람의 인생도 묻혔다. 무덤 주위에 자란 꽃은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축제의 화관을 위해 뽑지 않는다. 연인의 관 곁에서 잠을 자고 또 자는 동안 숲이 자라났다. 마법은 모두 봉인에 바쳐지고 남은 것은 한 줌뿐인데 어디에서 그런 힘이 왔는지 몰랐다. 바다를 떠나 흙에 박힌 돌 닻은 이곳에 있어야만 하는 것들이 흘러가지 않도록 지켜왔다. 봉인, 마음, 기억, 약속. 조슈아와 막시민은 아나로즈가 땅바닥에 그어놓은 선들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보기에는 흙에 그린 그림에 불과했지만, 그것이 그들을 처음 왔던 해변으로 데려다 줄 것이라 했다. 조슈아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혹시 켈스에게 전해줄 말이 있을까요?” 아나로즈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이곳에서 나를 만났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면 해.” 조슈아는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켈스가 당신 소식을 들으면 분명히...” “분명히 슬퍼하겠지.” 맞는 말이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조슈아는 곧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어려운 것을 내게 시키지 말아요.” 더 어려운 조건, 조각을 가진 자를 없애고 나서 돌아와 그녀의 손에 죽어 달라는 조건조차 받아들인 주제에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막시민을 돌아보았다. “난 막시민에게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반드시 알고 싶을 텐데요.” 아나로즈의 시선이 막시민에게 옮겨갔다. “네 친구라 했지. 그는 이카본에게 켈스가 그랬던 것 같은 친구인가?” “아뇨. 내가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을 하려 하면 뒤통수를 때려서 기절시키는 사람이죠.” 조슈아는 웃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난 충분히 만족하고 있어요.” 막시민이 말했다. “난 만족 못하겠는데.” “그 정도는 나도 알거든.” 조슈아는 다시 아나로즈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렇긴 하지만 그는 결굴 이곳까지 왔어요. 나 때문에. 우린 어린 시절에 만난 친구였죠. 이카본과 켈스처럼. 이카본이 뜻을 세웠을 때 그의 뜻에 최초로 동감해준 사람은 아마 켈스였겠지요. 그 약속에서 맹약이 생겨나고, 결국 약속의 사람들에게 이어졌겠지요. 약속의 사람들과 한 약속을 지키려 한 이카본은 어려서 켈스와 했던 최초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내 친구, 막시민과 냇물에 조약돌을 던지며 했던 약속을 품고 이곳까지 온 것처럼.” 아나로즈는 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희는 무슨 약속을 했지?” 조슈아는 약간 웃었다. “함께 바다로 가자고 약속했었죠.” 곁에서 막시민이 중얼거렸다. “난 동의한 적이 없거든.” 조슈아가 미소를 거두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켈스의 이야기를 꺼내서 당신에게 약속의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말하는 건 아니에요. 당신의 명예는 당신만의 것이니 다른 누군가가 경중을 잴 수는 없습니다.” 아나로즈는 담담히 그를 볼 뿐이었다. 조슈아와 같은 생각이기 때문일 거라고 여기며 막시민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문제 인간들은 잔소리로도 교화가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이제 떠날 시각이었다. 물론 계약이 남아 있는 한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었다. “저희가 가고 나서 다시 잠드실 건가요?” “아니. 봉인이 완전해지기까지는. 그 후에 잠들겠지.” “그건 언제죠?” “너희가 조각을 지닌 자를 없애버리고, 그래서 조각이 돌아오지 못한 채 수년이 흐른 뒤.” 아나로즈도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는 듯했다. 한 번 깨어진 봉인을 바로잡는 것은 짧은 시간에 할 수 없는 일일 터였다.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눈썹을 모으며 걱정스런 얼굴이 되었다. “그럼 그동안 혼자 어떻게 지내시나요?” 아나로즈의 얼굴에 햇빛이 내렸다. 그와 함께 입가에 희미하게 떠오른 것도 비슷했다. “지금껏 지내온 것처럼.” “잘 짐작할 수가 없어요.” “정오에 만나기로 한 사람이 오지 않아서 기다리는 것과 비슷해. 조바심을 내지 않으면 벤치 옆에 핀 꽃도 볼 수 있지.” 사랑하는 사람을 말하며, 친구의 소식을 들으며, 가느다란 몸이 꺽어질 듯 격분하고 고통받던 그녀가 자신의 수백 년 수형은 꿈인 양 담담히 말했다. 조슈아는 더 묻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미소를 지었다. “노을섬에는 이미 단 한 사람도 살지 않아요. 해일이나 마 마법 폭풍이 돌아오기 훨씬 전부터. 이유는 당신도 짐작하겠지만.” 아나로즈는 담담히 말했다. “마법 없이 살기엔 너무나 아무 것도 없는 곳이지.” “안내해 줄 사람 하나 없는 이곳에서 내가 어떻게 당신 앞까지 왔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막시민이 말했다. “켈스하고 같이 왔다고 네가 아까 말했잖냐.” “입구까지는 켈스와 함께 왔지만, 알다시피 이 안은 유령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이잖아요.” 아나로즈는 대답없이 조슈아의 얼굴을 보았다. 조슈아도 그녀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갸름한 눈꺼풀 너머로 녹색 무늬가 소용돌이 치고있었다. 섬의 아침바다 같기도 했다. 화석에 깃든 푸른 이끼 같기도 했다. 움직이고 있었다. 깨어나 물결치고 피어오르는 녹색이었다. 스스로 무덤에 묻어버리기 전의 눈동자가 돌아온 것일까. “데모닉 이카본은.” 조슈아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왔을 때 바람이 한 번 번져갔다. “녹색 술을 위한 시를 쓴 적이 있어요.” 압생트 빛 그보다 찰랑이는 녹색 심장 속에서 꼬리 한 번 치고 달아나는 남쪽 물고기 순간적으로 가락이 생겨났다. 다시 돌아온 바람에 아나로즈의 불타버린 머리카락이 재를 뿌렸다. 마주 선 두 사람의 발 사이에는 한쪽을 곧 멀리 데려갈 그림이 있었다. 섣불리 발을 내디딜 수는 없었다. 그때 조슈아가 손을 내밀었다. “나를 이리로 인도한 사람은 당신이었어요.” 아나로즈는 대답 대신 조슈아에게 생각을 실어 보냈다. 난 네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어. “네. 나도 몰랐어요. 여기 오기까지는 당신을 만나게 될 줄도, 당신이 살아있을 줄도, 이곳이 당신의 무덤일 줄도 몰랐어요.” 난 네가 어째서 문을 열 수 있었는지 몰라. “하지만 당신이었어요. 내게 문을 열어준 것도, 미로를 빠져나오게 한 것도. 당신이 무덤이라고 부르는 집, 이곳이 나를 데려다줬으니까.” 이 무덤은 차가운 돌일 뿐이지. “그러나 당신의 마음으로 이루어졌죠. 돌로 된 마음, 그러나 그 안에서 꽃이 자라는 마음.” 돌로 된 방은 꽃으로 밝혀졌었다... 돌로 된 물그릇을 뚫고 나무가 싹을 틔우고, 긴 세월 참아온 만큼 단번에 자라 폭죽 같은 꽃을 터뜨렸다. 아나로즈는 조슈아가 봤던 풍경을 본 일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는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조슈아의 머릿속에 든 흰 꽃 흩날리는 방을 본 것처럼. 조슈아가 내민 손에 아나로즈의 손이 올려졌다. 조슈아는 왼손을 마저 내밀어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가냘픈, 그러나 펜을 자주 잡는 사람이 그렇듯 중지 첫 마디가 도드라져 있는 손을. 그 순간 조슈아는 자신이 이카본이 된 듯한 착각을 느꼈다. 아나로즈의 눈 속에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녹색이 든 듯했다. 잠깐일 뿐이었다. 수백 년 전의 사랑은 이 자리에 무덤으로 변해 남아 있었다. 발을 내딛는 순간 흙에 그려졌던 무늬에서 갑작스레 쏟아진 빛이 시야를 지워버렸다. 4. 바람개비 꽃의 비밀 “바람개비 꽃을 주는 것은 청혼 그 꽃을 받는 것은 약혼 돌려주는 것은 파혼 바람개비 꽃을 수놓아 간직하면 숨겨둔 마음 붓으로 그리면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 말리면 잊으려는 마음 바람개비 꽃을 발견하면 사랑을 배우고 그 꽃을 꺾으면 사랑에 빠지고 버리면 사랑이 끝나고...” 해변에 새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해안선을 따라 낮게 날다가 서쪽으로 모래사장이 끝나는 곳에서 물목이 차츰 깎아내고 있는 작은 사구를 한 바퀴 돌고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도 놀리는 것처럼 두 사람의 눈썹에 스칠 듯 낮게 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저 빌어먹을 놈이 벌써 다섯 번째네.” 투명한 물결이 돛배 밑창을 간질이며 하품을 했다. 거품 밑에는 부서진 조개껍질들이 자개 빛을 내며 자고 있었다. “저런 놈 열 마리만 잡아서 배 좀 끌게 하면 안 되려나.” 조슈아가 갑자기 어른스럽게 말했다. “그동안 우리가 날아가는 데 너무 익숙해진 거야.” 막시민은 눈동자만 움직여 옆에 앉은 조슈아를 보려 했지만 각도가 맞지 않았다. “네가 그 점을 지적해줘서 무척 위로가 되는 구나.” “진지하게 대답해줘서 고마워.” 둘은 마주보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하늘을 관찰했다. 하지만 하늘에는 여섯 번째로 해안을 왕복 중인 새가 지나갈 뿐이었다. “이러고 있어봤자 남는 것도 없고.” 막시민이 일어서며 앉아있던 뱃고물에서 뛰어내렸다. 그제야 얼굴이 보이게 된 조슈아가 장난스럽게 뺨을 부풀리며 말했다. “드디어 노 저을 각오가 된 거야?” “넌 각오가 안 됐으니 나 혼자 저으라든가 그런 말을 할 거라면 일찌감치 관둬라. 그런 거 하려는 게 아니니까.” “그런 말을 할 생각은 없었는데...,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났어?” 막시민은 한동안 짐 보퉁이를 뒤적대고 있었다. 이윽고 찾던 것이 손에 잡혔다. 그는 불쑥 꺼내어 조슈아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누런 종이 한 뭉치였다. “이걸 어쩌라고?” 본래 많이 낡아 있었는데 보퉁이 속에서 둘둘 말리기까지 한 종이뭉치는 바로 고향의 별 호에서 손에 넣었던 신성 찬트 악보였다. 막시민은 친절하게도 종이뭉치를 펴는 수고까지 대신해 주었다. 물론 친절은 거기서 끝이었다. “설마, 지금 당장 이 악보를 고쳐서... 배를 움직일 바람을 이으키겠다고?” “물론 내가 그러겠다는 건 아니고.” “이런 건 나라 해도...” “데모닉의 능력을 믿겠어.” 막시민은 돛배로 돌아가 벌렁 드러눕더니 자는 체하기 시작했다. “...” 조슈아는 뺨에 볼우물을 만들고 있다가 결국 첫 페이지를 들여다봤다. 첫 소절을 잠시 보고 있다가 머릿속으로 적당한 가락 두세 가지를 넣어 보았다. 괜찮다 싶으면 흥얼거려 보았다. 마력을 지닌 노래라기에 제대로 된 멜로디를 만들면 바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닐까 걱정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런 일은 없었다. 가락이라면 몇 가지라도 만들 수 있지만 그 가운데 어느 것이 맞다고 단정 짓기는 힘들었다. 그가 느끼기에 가장 좋다 해도 옛날 작곡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곡의 아름다움이 반드시 마력을 이끌어낸다는 보장도 없었다. 조슈아의 손에는 필기구가 없었다. 나중에 직접 말해주면 되겠지 생각하며 그는 생각난 가락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넣어 두었다. 해가 오르기 시작하자 점차 더워졌다. 파도가 오가는 백사장에 맨발로 서 있긴 했지만, 바다에 들어갈 수 없다보니 휴가 온 기분일 수는 없었다. 슬슬 온몸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남쪽 섬의 여름은 켈티카는 물론이고, 한동안 지냈던 하이아칸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다. 바닷물을 찍어 이마에 바르다가 문득 보니 막시민이 배에 한가롭게 누워 졸고 있는 것이 거슬렸다. 당장 뱃전을 기울여서 물에 빠뜨릴 수도 있겠지만 아직 깊이 잠든 것 같지 않아 데모닉답게 완전한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조슈아는 일부러 배에서 멀어졌다. 종일 같은 길만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은 새를 따라 끄트머리 사구 근처까지 가 보았다. 종아리까지 차는 물목을 건너 사방 두 걸음밖에 안 되는 동그란 사구에 이르렀다. 배에서 집어온 빈 상자를 놓고 바다 방향을 향해 걸터앉았다.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곳에서 자줏빛 구름이 피어났다. 구름 외에는 파랑뿐이었다. 발 딛은 모래도, 등 뒤에 있을 섬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른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기분이었다. 맨발을 쓰다듬는 잘디잔 물결을 느끼며 조슈아는 다시 악보를 보기 시작했다. 적당한 시각이 됐을 때 조슈아는 사구를 떠나 배로 돌아갔다. 한 번 잠이 든 막시민은 웬만한 충격에도 깨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별로 조심할 필요도 없었다. 물결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괴었던 돌을 빼낸 다음 뱃전을 잡고 바다로 밀어냈다. 그러는 동안 옛날에 그물침대에 누워 자던 막시민을 빙빙 돌려 감아버렸던 일을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막시민이 깬 것은 해변의 조슈아가 손가락만 하게 보이게 됐을 즈음이었다. 아무리 태평한 녀석이었지만 자다가 깨고 보니 바다 한가운데라니 이만 저만 놀랄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막시민은 벌떡 일어나다가 배를 쥐집을 뻔했다. “야... 이... 씹다 뱉은 계피작대기 같은 자식아!” 전날 올 때 겪었다시피 지나칠 정도로 잔잔한 바다였기에 돌아오지 못한다거나 할 일은 없었다. 조슈아도 그쯤은 생각하고 한 장난이었다. 다만 돌아오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해변을 향해 죽어라 노를 저으며 막시민은 생각나는 욕이란 욕은 모조리 퍼부어댔다. 물론 조슈아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고 있을 것쯤이야 짐작 했지만 어차피 안 들리는데 무슨 상관이겠는가? 세 번째 페이지를 넘겼을 때쯤에는 친절하게 손도 흔들어 주었다. “어이, 막군! 여기야! 조금밖에 안 남았으니 힘내~!” 페리윙클 섬에서 통칭 ‘마일스톤’ 이라고 불리고 있는 남자는 산책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면 우선 항구로 나갔다. 부둣가의 배들을 한가롭게 죽 살펴보고 나면 사람들과 시답잖은 잡담을 좀 나누고 해안을 따라 걷기 시작 했다. 해가 머리꼭지를 따갑게 하기 시작할 즈음이면 진주 양식장에 이르렀다. 감찰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슬렁대며 진주 양식장을 관찰하고, 양식업자들의 불만거리나 어제 내린 소나기 얘기 같은 것을 듣고 나면 점심 먹을 시각이 되었다. 유일하게 섬에 남은 소공작 전하의 일행이나 당연히 점심 대접쯤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양식업자 누군가의 집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다시 길을 떠났다. 산호 채취업자도 만나고, 청금석 광산도 들르고, 그러다가 오후 차와 간식 빵을 먹을 즈음에는 시장에 나타났다. 기름 냄새 진동 하는 수레 옆에 서서 지짐이 빵 장수와 몇 마디 나누고서 빵 한 조각 얻어먹고, 그 옆에 밀가루 부대를 쌓아 놓은 농부가 뒷주머니에 차고 있던 미지근한 브랜디를 한 모금 얻어먹었다. 그러면서도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러면 이 시장에서 오가는 모든 물건에 다 세금이 붙어 있다 그거군요?” “아따, 지짐이 빵 한 쪼가리 팔라 캐도 다 우리 공작 폐하 이름으로다가 나오는 허가찡이 웁스면 못한다니께.” “그러 어렵네요.” “머시가 어렵구로? 고로코롬 걷은 세금 가주고 다 우덜 집 지아주고 밀가리 꽁으로 빻아주고 아그덜 아픔서 의사 데불어주고 그라는 거 아니겄드라고. 다 대륙 살믄서는 상상도 못헐 일이제.” 마일스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윽고 그곳을 떠나 저녁 해가 뉘엿뉘엿 떨어질 무렵에는 마을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귀에서 그는 해양 조합에 다녀오는 펠 집정관과 마주쳤다. “오늘도 한 바퀴 돌고 오는 모양이군.” “아, 예.” “매일같이 그렇게 돌자면 힘들기도 할 텐데.” “아, 예. 그렇죠.” “소공작께서 오시면 뭐 보고라도 해야 될 게 있나보군.” “아, 예.” 두 사람은 헤어졌다. 펠 집정관은 마일스톤의 뒷모습이 사라져가는 것을 보고 있다가 관저로 걸음을 옮겼다. 그즈음 사위도 어두워졌다. 현관을 지나 하녀에게 모자를 맡기고 막 응접실에 들어설 무렵 누군가가 문을 쿵쿵 두드려댔다. “이 밤에...” 입술 끝에 불평을 달고 현관으로 나가려는데, 하녀가 문을 열어주어 들어온 둘시아 부인이 숨이 턱에 닿아 응접실에 들이닥쳤다. 펠 집정관은 이런 사람을 보면 괜스레 침착해지는 버릇이 있었다. “이 밤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전하의 배가 부두에 들어왔답니다!” 소공작은 어차피 오늘이나 내일, 그도 아니면 모레쯤에는 온다고 했소, 안 오면 그게 이상하지 오는 게 뭘... 이라고 말하려다가 그냥 삼키고 말았다. 둘시아 부인을 비롯한 누군가들은 소공작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 하루해가 다 가도 좋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니 소공작의 배가 돌아왔다는 것에 감격할 수도 있지, 하고 너그럽게 생각하려던 참이었다. “잔치 준비를 해야 해요!” “이 밤에?” 똑같은 말을 세 번째 입에 담으면서, 소공작이 온 뒤로 건전한 도시민의 상식이란 다들 침식 벽장에 넣어두고 나오는 모양이라고 들리지 않게 중얼 거렸다. “오늘은 날도 저물었고 하니 환영 연회라면 내일 해도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내일 급하게 대륙으로 떠나실 예정이라 하신답니다. 우리가 미리 예비해놓지 못했으니 내일은 긴 항해 준비로 부산할 터이고, 따라서 잔치를 하려면 오늘뿐이랍니다.” 집정관은 참지 못하고 결국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소공작께서 오시고 가시는 것은 스스로 결정하실 바이니 우리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지난번 노을섬 항해를 나가시기 전에 돌아 오는 즉시 떠나신다고 언질조차 주시지 아니했는데 미리 준비를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죠. 물론 우린 최선을 다해야하지만, 결국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는 겁니다. 긴 항해를 준비해드리는 것에 비하면 연회는 부차적인 문젭니다. 무엇보다 내일 떠나신다는 분을 굳이 피곤하게 해 드려도 괜찮은 겁니까?” 집정관이 오랜만에 긴 연설을 했지만 둘시아 부인은 당황하지도 움츠러 들지도 않고 오히려 밝게 웃어 보였다. “말씀대로 여상스런 환영파티라면 간단히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중대한 발표가 있으리라는 소식이 파다한데 우리가 어찌 가만히 듣고만 있겠나요?” “중대 발표라고요? 이 밤에?” “물론 정식 발표는 내일 하실 수도 있겠지만 당장 오늘부터라도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들을 얘기는 아니란 거지요!” “그래서 그 발표란 게 대체 뭡니까?” 둘시아 부인은 만면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글세, 소공작 전하께서 약혼을 하셨다지 뭐예요!” 같은 시각, 알테나 호에서 내린 세 사람은 갑자가 자기들을 둘러싸고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 때문에 어안이 벙벙했다. “워낙 바다에 나갔다가 제대로 돌아올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왔다고 저러는 거 아닐까?” 리체가 코를 긁으며 중얼거리자 조슈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면 자기네들의 아르님이 무엇을 하든 다 박수가 나오는 건 가봐. 소공작께서 숟가락으로 완두콩 수프를 떠서 드셨다, 와 박수! 뭐 이런 거?” 이번엔 막시민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리체가 한숨을 내쉬며 동시에 턱을 문지르다가, 어깨를 움츠리고 한쪽 발로 바닥을 톡톡 치면서 조그맣게 말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뿐이네.” 박수치는 사람들을 붙들고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으려 하고 있는 조슈아와 달리 막시민은 리체를 돌아봤다. “그게 뭔데?” “넌 역시 답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잘 아는구나.” 리체는 막시민의 귓가에 입을 대려고 발돋움을 했다. 고개를 숙여 주는 수고를 무릅써 가며 몇 마디를 듣고 난 막시민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난 그냥 조수한테 묻는 게 빠르다고 생각한 것뿐인데.” “왜 내가 아직도 네 조수... 그게 아니라 누가 그거 대답하랬어! 빨리 상황이나 수습해 봐.” “음, 범인은...” 막시민은 주위를 휘둘러보더니 아무 데나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배에서 밧줄을 갖고 제일 먼저 뛰어내린 놈이닷!” 그동안 과정은 달랐지만 조슈아도 답을 얻어냈다. 조슈아는 당황하는 대신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리체를 돌아봤다. 리체는 이유 없이 얼굴이 빨개지더니 소리쳤다. “내 탓이 아냐! 아니라고 백번도 더 말했는데 이 사람들이 들은 체도 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항구에 돌아갈 때까지 그 소리가 내 귀에 다시 한 번만 들리면, 음... 그러니까... 돛줄을 모조리 끊어 놓겠다고 한 것뿐이란 말이야!” “그거 대단히 위험한 위협이었는데.” 조슈아는 계속해서 웃고 있었다. 막시민이 옆에서 거들었다. “그래서 항구에 들어올 때까지 조용히 하고 있다가 도착하자마자 동네방네 소문을 퍼뜨렸다 그거구만. 그거 참, 말 잘 듣는 선원아저씨들이네.” “너희 정말 계속 이러고 있을래? 멀쩡한 아가씨 혼삿길 막히게 하지 말고 빨리 그 꽃인지 뭔지는 그냥 오는 길에 심심해서 꺾어왔다고 말 좀 해줘!” “심심해서 꺾어온 거 아닌데?” 그즈음 박수를 치던 사람들은 소공작 일행이 나누는 대화를 관심 있게 듣고 있었다. 조슈아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는 순간 사람들이 술렁이다가 다시 박수를 쳐댔다. “아, 그... 너 지금... 그럼... 무슨...” 말문이 막힌 리체가 더듬거리고 있는데 저만치 새로운 무리가 막 부둣가에 도착했다. 펠 집정관, 그리고 집정관의 성미를 생각할 때 어울리는 일행은 아니었지만 십여 명의 아주머니들었다. 이윽고 사람들을 헤치고 조슈아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아주머니 한 명이 외쳤다. “절대로 안 돼요! 우린 받아들일 수 없어요!” “물론 신중하게 생각하셔서 결론을 내리셨겠지만... 그래도 역시 너무 갑작스럽죠!” “페리윙클 출신이 아닌 아가씨하고 결혼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섬에 얼마나 훌륭한 아가씨들이 많은데...” 마지막 의견이 모든 아주머니들의 생각을 대변했던 듯 순식간에 의견은 하나로 모아졌다. 그들은 리체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페리윙클 출신이 아니라는 점 하나로 밀어붙이는 쪽이 간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제 어머니께서도 페리윙클 출신은 아니셨는데...” 조슈아가 무심코 한 마디 하자 바로 반박이 날아왔다. “공작비 마마께서는 페리윙클에서 건너간 사람들의 후손이시라고 알고 있어요.” “아무렴 공작 폐하께서 대륙의 여인과 혼인하셨으려고요.” “핏줄이 닿아 있으니까 그토록 훌륭하신 분이 아니겠어요?” 물론 이들은 공작부인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리체는 얼굴이 점점 더 빨개졌고, 막시민은 딴전을 피웠고, 아주머니 틈바구니에 낀 집정관은 사실 확인만을 하려 했다. 슬슬 조슈아가 나서서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될 시점이었다. “내가 준 게 아니에요.” 그 말이 나왔을 때 주위의 소란이 뚝 멎었다. 그러나 두 번째 말은 아예 수수께끼였다. “받은 거죠.” 다들 어리둥절해져서 얼굴만 마주보았다. 리체도 마찬가지였다. 조슈아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자 다들 해산하세요. 여러분 몰래 밤중에 갑자기 약혼하거나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집에 가서 푹 쉬도록 하세요. 내일은 제게도 바쁜 날이니 쉴 여유가 필요할 것 같군요.” 사람들이 흩어지는 데는 모일 때보다 짧은 시간이 걸렸다. 마지막 선원 한 명까지 돌려보내고 나서 조슈아는 주위에 질문을 담은 두 쌍의 눈동자가 남아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웃거나, 얼버무리거나, 답을 주는 대신 고개를 저었다. “이 문제는 나 혼자 깊이 생각해 봐야겠어.” 밤중에 조슈아가 깨어났다. 옛날에 한 번 있었던 일 같다고 생각됐다. 짐짓 예상하며 고개를 돌리자 머리맡에 켈스니티가 앉아 있었다. [저 자는 편이 좋을 거야.] 켈스니티의 입가에는 그때처럼 미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조슈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내가 안 불렀죠?” [그래.] “일부러 안 불렀어요. 오지 않는 것을 보면 또 필멸의 땅에라도 간 건 아닐까 싶어서. 정말로 그랬어요?” [그렇다고 해 둘까.] 조슈아는 몸을 일으켰다. 켈스니티가 시계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아직 네 시야.] “충분히 잔 것 같은데.” 조슈아가 침대에서 내려오자 켈스니티가 손만 움직여 문가의 촛대에 간단히 불빛을 가져왔다. 그러나 조슈아는 다른 데로 가려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의자를 하나 더 끌어오더니 켈스니티와 마주보고 앉았다. “얘기하면서 침대에 누워 있어서야 간호받는 병자라도 된 기분이어서. 자, 물어볼 거 많죠? 우리가 노을섬에서 어떻게 돌아왔는지부터 얘기해야 되려나.”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만 말해주면 돼.] “그 말 정말이죠? 후회할지도 모르는데.” 무심코 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켈스니티는 마치 사정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왼쪽 입 꼬리를 살짝 올렸다. [말해주지 말라고 누군가가 부탁했는데 말해달라고 조르고 싶지는 않아.] “으음.” 조슈아는 두 다리를 의자 위로 끌어올려 책상다리를 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하지만 부탁을 들어주고 안 들어주고는 내 맘이고.” [그런 부탁을 할 누군가를 만나긴 한 모양이구나.] “아니, 켈스도 유도심문을 다 하고. 점점 막군 같아져 가잖아.” 농조로 말했지만 조슈아는 웃고 있지 않았다. 이윽고 조슈아는 마주 앉은 켈스니티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를 조금 걱정했다. 하지만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자리에서 그러지 않겠다고 바로 밝혔을 정도로. “실은 오래전에 죽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을 만났어요.” 켈스니티는 대답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얼굴은 평소처럼 평안해 보였다. “그 사람은... 자기가 늙지도 죽지도 않고 옛날 모습 그대로라고 했어요. 아주 오래 잠을 잤다고도 했어요. 물론 몇 번인가 깨어나기도 했지만... 그 사람은 우리 앞에 살아있었지만 산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어요.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잊은 듯했어요. 마음이 다 닳아버린 것처럼. 그런데 그 사람이...” 켈스니티의 얼굴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대답 또한 없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서 눈물을 흘렸어요.” 몇 분, 또는 몇십 분이 흘렀다. 어둠 속에서 촛대 세 자루의 빛에 으지하여 마주 앉은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유령은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켈스니티의 목소리가 긴 복도 너머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네게 알리지 말라고 앴니?] “자신의 고통을 나눠주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켈스니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간 조슈아는 켈스니티도 아나로즈와 마찬가지로 긴 세월을 마지못해 살아왔고, 똑같이 감정이 닳아버린 듯 메마른 표정을 지을 수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그곳에서 나올 수 없는 운명이지.] “당신은... 들어갈 수 없고요.” 둘 다 고통스런 방식으로일지언정, 이 세상에서 또렷한 의식을 가진 존재로 남아 있었다. 그런 그들이지만 만날 수 없었다. 서로의 존재를 안 지금도 만날 수 없었다. [우리의 작별은 그날의 인사로 끝맺어질 운명인 거지. 괜찮아. 그녀도 이해할 거야. 그때... 그건 재회를 바라는 인사였지. 우리 둘 다 다가올 운명을 몰랐을 때.] 켈스니티는 조슈아에게 아나로즈를 마지막으로 본 날을 이야기했다. 이카본과 몹시 다투고 나서 아나로즈가 비취반지 성을 떠나려 했던 때, 성문 앞으로 달려 나가 짧은 인사를 나누었다. 아나로즈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지만 켈스니티는 한 가지 약속을 상기시켰다. 끝을 받아들이기 전에 그 약속만은 지켜달라고 말했다. 이카본과 아나로즈과 봄장마나 여름휴가를 함께 보내곤 했던 별장이 있었다고 했다. 켈티카의 서쪽, 말을 타고 이틀 정도면 갈 수 있는 바닷가에 높이 솟은 절별 위 집이었다. 언젠가 켈스니티와 오블리비언이 초대받았던 날도 있었다. 오블리비언은 들어서자마자 벽난로 위의 서툴게 수놓은 장식천을 보더니 직접 만든 거냐며 아나로즈를 놀려댔다. 아나로즈는 작은 케이크를 만들고 비탈진 풀밭에서 약초를 손수 꺾어서 수프를 끓였다. 식탁은 별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고기 한 점 없는 식사라며 이카본이 불평했고, 아나로즈는 케이크 가운데가 꺼져서 볼품없이 구워진 것을 부끄러워했다. 마법을 쓰지 않고 손수 하는 그녀의 요리는 곧잘 실패하곤 했기에 켈스니티는 위로하는 대신 선뜻 먹어주며 웃었을 따름이었다. 약초 수프는 향긋하고 맛있었다. 이카본과 아나로즈에게는 약속이 있었다. 그들이 처음 언약했던 4월 어느 날인가에는 반드시 그곳에 돌아가 함께 지내자고 했다. 4월의 어느날... 그게 정확히 어느 날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둘만의 비밀이었다. 매년 약속이 지켜졌던 것은 아니었다. 둘 다 바빠서 몇 년 동안 별장에 갈 짬을 내지 못한 시절도 있었다. 똑같이 가지 못했으니 이해하며 다음 해를 기약할 수 있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결심으로 아나로즈가 떠나던 날, 켈스니티가 상기시킨 것은 그 이야기였다. 아나로즈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켈스니티는 그녀가 약속을 지킬 것을 확신했다. 그게 마지막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아나로즈가 떠난 상황에서 이카본이 그날 별장으로 달려가지 않을 리 없다고도 생각했다. 언약의 날, 그곳에서 둘이 만나게 되면 그동안의 오해는 눈녹듯 사라지리라고 기대하면서. 그러나 재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 못 만났죠?” [글세.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누군가가 중간에서 농간을 부렸던 것 같아. 이카본이 그곳으로 출발한지 얼마 안 되어 마차 바퀴가 망가졌고, 고치는 데 무척 걸렸지. 이카본은 기다릴 수가 없어 혼자 말을 타고 달려갔지만 반드시 건너야 하는 올브론즈 강의 다리가 끊어져 있었어. 이카본은 그날 밤이 다 되어 도착했지만 아나로즈는 낮에 들렀다가 떠난 뒤였지. 그녀가 그날이 다 가기까지는 기다려 주리라고 생각했던 이카본은 크게 낙담했고.] 씁쓸한 이야기였다. 조슈아는 이미 수백 년 전에 끝난 일인데도 안타까움을 느끼며 물었다. “아나로즈는 마법사인데 이카본이 오고 있는 것을 몰랐을까요?” [그것 보다는 그녀의 마음이 이미 굳어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마음을 바꾸어줄 기적을 바라며 그곳에 갔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조슈아는 조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아나로즈를 만나봤기에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완벽을 원하는 그녀의 성격상 약속한 대로 별장에 갔을 것이고, 자신의 기준이 충족되는 순간 떠나갔을 거라고. 그곳에서 다른 무슨 일이 있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 일이 없었다 해도 그리했을 그녀라고. 창틈으로 새어드는 바람이 어느새 해를 머금었다. 남부의 새벽은 일찍 왔다. 팔걸이에 기대어 앉았던 켈스니티가 창 쪽을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햇살이 그의 얼굴을 통과해 맞은편 서랍 손잡이에 매달렸다. 몇 번인가 보아왔던 풍경이지만 오늘따라 묘한 느낌을 주었다.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켈스. 당신도 너무 오래 살았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켈스니티는 빙그레 웃었다. [난 살아있지 않아, 도련님.] “그런 게 아니고, 아닌 거 알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났거든요. 당신이 너무 오래 살아 피곤한 나머지 어느 날, 이제 그만 살겠다고 해버리는 건 아닐까. 그런 날이 오지나 않을까.” [그녀가 그렇게 말했니?]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서. 그래야 할 이유가 남아 있는 한 책임을 벗으려 할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게 가장 슬픈 점이었죠. 그걸 그만두라고 할 수도 없고, 대신해 줄 사람도 없고, 짐을 덜어 줄 방법조차 없다는 것.” 켈스니티는 대꾸하지 않았다. 조슈아가 말을 이었다. “실은 그렇게 자신의 처지를 담담하게 말하던 그녀가,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슬퍼하는 모습을 봤을 때 기분이 이상했어요. 나 말이죠, 당신이 유령이란 것을 한 번도 잊은 적은 없지만, 당신의 그 긴 세월이 고통스럽지는 않았을까... 다른 모든 이유를 다 떠나 오직 길어서, 너무 길기 때문에 힘들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은 못해보았어요. 아니, 정확히는 한 적은 있지만...” 조슈아는 오래 산 대가로 단지 투명해지기만 한 켈스니티의 얼굴을 오래 쳐다보았다. “실감은 못했어요.” 커튼 자락이 펄럭이며 켈스니티의 얼굴 속을 드나들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켈스니티는 웃었다. [아직은 아니야.] 그러고도 조금 더 오래 둘의 눈이 마주쳐 있었다. 방이 밝아지고, 비늘살밖을 오가는 하녀들의 발소리가 들릴 즈음까지. 세숫물을 가져다 두는 기척도 났다. 조슈아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는 하얀 비늘살문을 밀고 나가면서 기지개를 한 번 켠 뒤 뒤를 흘끗 돌아보고 속삭였다. “다행이에요.” 5. 나탕트 7번가 과자점 “당장 오늘 일어날 일만 생각하는 자들이 모인 곳에서, 도시가 태어난다.” 켈티카의 여름 태양은 일찍 기울어지지만 한낮의 열기만은 남부 못지않았다. 오후 다섯시가 되자 높다란 담벼락 사이에 낀 골목은 그늘이 져서 조금 서늘해졌다. 골목이 꺾어지는 지점에서 모자를 쓴 젊은이는 걸음을 잠시 멈췄다. 볕 때문만은 아니었다. 담이 끝났고, 거기부터 쇠살대가 빽빽이 세워진 문 앞을 지나야 했다. 맨살이 드러난 돌 포도가 볕에 하얗게 탔다. 포도 위에 쇠살대의 그림자가 뚜렷한 무늬를 그렸다. 젊은이는 쇠문 안쪽에 잠시 시선을 주더니 고개를 돌리며 길을 가로질렀다. 살대문 안의 병사들은 젊은이를 보았지만 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흰 가면이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놈의 가면. 하여간 이 땡볕에 더운 것도 모르나.” “그것도 기껏 내일까지 아니냐. 일 년에 한 번인데 어린놈들은 놀게 놔둬.” 젊은이는 이내 다음 골목으로 사라져버렸다. 그 뒤로도 다양한 가면을 쓴 젊은이들이 쇠살문 앞을 스쳐갔다. 그들은 모두 포도나무 분수 광장 쪽으로 갔지만 처음의 젊은이만은 나탕트 거리 쪽으로 갔다는 점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쉰 해쯤 전에 어느 국왕이 우편 배달국이라는 것을 만들면서 최초로 켈티카에 정식 거리 명칭과 번지를 붙여보려 한 일이 있었다.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지만, 당시는 길과 집들이 그야말로 거미줄 방불하게 얽혀 있던 시절이었다. 막다른 골목도 많았고, 사람 한 명도 간신히 지나갈 정도라 길이라 해야 할지 어느 집 처마 밑으로 여기고 말아야 할지 모를 틈새도 여럿이었다. 방사형이나 격자형 거리는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집을 뜯고 길을 닦지 않는 한 지번 정리를 깔끔하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 했으므로 큰길 위주로 고른 뒤 작은 길은 대충 누락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을 몇 번인가 되짚어 바로잡다 보니 기껏 붙인 거리 이름을 도로 없애거나 다시 붙여야 하는 경우들이 생겼다. 그 결과 어느 집은 코완 거리 12번지이면서 클로테르 거리 114번지라든가 하는 식으로 심한 경우 다섯 번까지도 겹치는가 하면, 길 이름도 꼬이게 되어 거리 이름을 붙인 관리조차도 그걸로 제대로 된 주소를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새로 도입된 우편물 배달을 다니던 청년들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길거리에 모여 떠들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집을 찾는 것이 더 빨랐다고 한다. 계획을 밀어붙였던 국왕이 죽고 나서 이 어렵기만 하고 실효성 부족한 계획은 자연히 버려지고 말았다. 따라서 당시 만들어진 거리 이름들은 몇가지만 살아남고 대부분 잊히게 되었다. 그 후 몇십 년이 흘러 공화 정부가 들어섰을 때 다시 한 번 거리 이름을 정하는 사업이 추진되었다. 구왕국보다는 효율적으로 지구를 나누어 가며 번지를 정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신왕국이 들어서고 나자 이번엔 공화국의 업적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도로 폐기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폐기를 했으면 새로 만들기라도 해야 할 텐데 다른 일에 바쁜 신왕국 정부는 거기까지 신경을 써주지 않았다. 그 결과 켈티카 시민들은 공화국의 번지와 구왕국이 붙인 거리 이름, 그리고 살다 보니 저절로 붙여진 이름들을 모두 섞어서 쓰게 되었다. 나탕트는 구왕국 시절에 붙었던 이름이었다. 그런 거리 치고는 드물게 몇 번가라는 명칭까지 뚜렷이 살아남은 셈이었다. 하지만 나탕트 거리는 당시 혼란의 산물답게 1번가에서 4번가까지는 없고, 5번가는 있는데 다시 6번가는 없었다. 그 중 1번가에서 4번가가 사라진 것도 공화국의 업적이었다. 공화 정부가 켈티카에서 쫓겨나던 시절 이 구역을 주요 거점으로 삼아 바리케이드를 쌓았는데, 국왕군이 진주한 후 바리케이드가 있던 거리를 모조리 부숴버렸던 것이다. 그 거리들은 현재 잡풀뿐인 공터가 되어 있었다. 6번가는 그 옆의 테아미르 2번가와 겹치는 바람에 없어졌지만, 언제부터인가 테아미르 2번가라는 이름도 없어지도 요즘 사람들은 간단히 ‘숫 시장 골목’ 이라고 불렀다. 명줄 짧은 거리의 틈바구니에서 용케 살아남은 나탕트 5번가, 그리고 7번가에는 공화 정부 시절부터 가난한 학생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본래 구왕국 시절에도 지방에서 켈티카로 유학 온 학생들이 흔히 방을 얻는 곳이기도 했다. 8번가는 돈 없는 화가와 악사들의 거리, 9번가는 악기 수리공과 구두 수선공, 기구 수리공이 같은 연장을 돌려쓰며 사는 거리로 알려져 있었다. 흰 가면을 쓴 젊은이는 나탕트 5번가로 접어들었다. 단층과 2층 집이 대부분인 거리는 삐뚤삐뚤하게 이어지다가 우물가에 이르러 막다른 골목이 되었다. 중간쯤에 숯 시장 거리를 거치지 않고 7번가로 빠져나갈 수 있는 비좁은 골목이 하나 있었다. 한 해에 한 번 국왕 탄신(현 국왕의 진짜 생일은 아니었다. 이른바 공식 생일로, 국왕이 바뀌어도 날짜는 바뀌지 않는다)을 전후해 벌이는 가면 축제는 학생들이 특히 좋아하는 놀이였다. 그런 만큼 5번가 곳곳에는 이런저런 가면을 쓴 학생들이 많았다. 거리 입구의 큰 술집이 노천에 테이불들을 늘어놓았고, 거기에 몰려든 학생들은 이미 거나하게 술이 올랐다. 주먹질에 가까운 토닥거리기나 욕설과 다름없는 애칭이 오가고, 노랫소리가 이웃 거리까지 울려 퍼지는 풍경은 지금 같은 축제 기간이나 시험이 끝날 무렵에 특히 흔한 모습이었다. 우물 주변에는 8번가에서 넘어온 악사 몇이 비올라를 익살스럽게 연주했고, 늙은 화가는 그 옆에 주저앉아 풍경 스케치에 여념이 없었다. 흰 가면의 젊은이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않고 7번가로 빠져나가자마자 모퉁이를 돌았다. 두 집 틈새에 끼워지다시피 붙은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갔다. 1층에는 과자점임을 알리는 둥근 나무 간판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서 와라.” 디앙코르드 세보는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데다 얼굴이 거무스름해서 학생이라기보다는 농부처럼 보이는 젊은이였다. 거친 턱선에 코가 조금 긴 편이고 눈은 파랬다. 입은 것도 꼭 중부 시골의 밀 농장 일꾼들처럼 무릎에서 자른 바지와 끈 샌들 차림에, 목 언저리를 끈으로 조이는 흰 웃옷에는 곳곳에 밀가루 얼룩이 묻어 있었다. 짧은 소매를 어깨 위까지 바짝 걷어붙이고 밀가루와 달걀, 과즙 등을 반죽하고 있던 그는 흰 가면의 방문자를 향해 미소를 보냈다. 유난히 흰 이가 고르게 반짝였다. 방문자가 가면을 벗자 디앙코르드는 다시 웃었다. “가면 축제란 건 참 쓸 만해.” “덕택에 낮에 올 수도 있고요.” 가면을 선반에 올려놓은 란지에는 밀가루 반죽 솥 앞으로 다가가 디앙코르드가 하고 있는 양을 살펴보았다. “그의 다 된 건가요?” “응. 이제 한 번 치대고 끝내려고. 그 다음은 누군가가 기대해마지 않는 과자 만들기.” 그렇게 말하며 디앙코르드는 등 뒤의 문을 흘끔거렸다. 란지에가 입가에 미소를 올렸다. “어떻던가요?” “재미있어 해. 네가 만든 것은 다 팔렸다고 말해주니까 너무 좋아하던걸, 뭐 거짓말도 아니고.” 란지에는 디앙코르드의 손에서 밀가루 반죽이 접히는 것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두 분 도움이 정말 커요.” “내가 뭘.” “진지하게 한 얘긴데.” 디앙코르드는 고개를 돌리며 재채기를 한 번 하더니 씩 웃기만 했다. 잠시 후 둘은 사이좋게 밀가루 반죽을 아래층으로 운반하고 행주를 빨아 화덕에 넣을 판을 닦아 놓았다. 란지에는 2층에 늘어놓은 과즙 병과 소금 통을 집어 내려오려다가 문득 구석에 화판이 놓인 것을 보았다. “디앙 형, 다시 붓 잡으셨어요?” 내려온 란지에가 양념들을 테이블 위에 놓으며 던진 말에 디앙코르드가 계면쩍은 듯 웃었다. “아직 붓까지 가지도 못했어. 봤다시피 스케치잖아. 그동안 놀다 보니 손이 워낙 굳어져서 잘 안 되더라고.” 농부 같은 외모와 달리 디앙코르드는 미술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그는 잠시 후 코끝을 찡그려 보이며 물었다. “모델 누군지 알아봤지?” “네.” “실은 본인 허락을 못 받았는데, 빤히 보면서도 뭐라고 하지는 않더라고. 네 생각은 어때? 네가 싫어한다면 그 애도 싫어할 테니.” 란지에는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지었다. “그럴 리가요.” 디앙코르드는 우물쭈물하다가 덧붙였다. “그 앤 좋은 모델이거든. 워낙 가만히 있잖냐.” 그때 작은 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식료품 봉지를 껴안은 여자가 가게에 들어섰다. 디앙코르드가 얼른 행주를 내려놓으며 그녀를 불렀다. “빅 누나, 란지가 왔어.” 갓 서른이 넘은 빅트와르는 서글서글한 인상에 마르긴 했어도 남동생처럼 체격이 큰 여자였다. 그녀는 식료품을 내려놓자마자 란지에와 비주(뺨을 맞대는 인사)를 두 번 하고 나서 손에 묻은 흙을 털었다. “우리 란지 너무 오랜만이네. 목 빼고 기다리는 사람도 있는데 어찌 그리 안 와.” “온다고 줄곧 생각만 하고 못 지켰어요. 죄송해요.” “네가 너무 안 오면 디앙이 꼬마를 번쩍 안고 도망가 버릴지도 모른다고.” 란에는 소년처럼 웃었다. “디앙 형이라면 잘 보살펴 주실 것도 같은데요.” “얘,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마. 큰일 낼라.” 빅트와르는 고깃간과 식료품상에서 사온 다진 고기와 가지, 토마토를 우묵한 질그릇에 나눠 담아 놓고, 뒤뜰에 가서 파를 뽑아 왔다. 디앙코르드는 밀가루 반죽을 고르게 밀기 시작했다. 란지에는 2층으로 올라갔다. 빅트와르와 디앙코르드는 눈짓을 한 번 주고받고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계단 위에서 기척이 났다. 문이 열리고 란지에가 소녀 한 명을 업고 내려왔다. 소녀는 란지에보다 밝은 금빛 머리였지만 아름다운 눈썹과 눈매는 란지에를 꼭 닯았다. 란지에보다 서너 살은 어려 보였고, 흔히 말랐다고 하는 기준보다 조금 더 가녀렸다. 란지에의 등 뒤로 맥없이 늘어진 종아리가 다른 사람의 팔과 비슷해 보일 정도였다. 란지에는 식탁 앞의 의자에 소녀를 앉혔다. 소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입가에 미소가 있었다. 디앙코르드가 소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다가 란지에의 얼굴을 흘끗 보고 멈췄다. 란지에는 소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란즈미.” “으응.” 소녀, 란즈미는 어깨를 틀며 기지개를 켜는듯하다가 이윽고 눈을 떴다. 뺨이 발그레해졌다. 눈부신 미소가 피어올라 마주 앉은 란지에를 향했다. “오빠.” “응.” 본디 친남매인 둘은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았다. 란지에가 예전부터 그랬듯, 조금 전 잠든 란즈미에게 이미 모든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래서 란즈미는 자주 오지 못하는 오빠를 타박하지도 않았고 란지에 역시 요즘 자신에게 어떤 일이 있는지 말하지 않았다. 란즈미는 열네 살이지만 몸이 작고 가늘어 한두 살은 더 어려 보였다. 어려서 겪은 소아마비 탓에 의자 아래로 늘어뜨린 다리의 길이가 미묘하게 달랐고, 짧은 다리 쪽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아주 조금밖에 걸을 수 없었다. 걷는 연습이라도 꾸준히 했더라면 지금보다 나아졌을 수도 있는 다리였지만 그녀가 오랫동안 자폐아였던 까닭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나 최근 란즈미의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 몇 년 전 어떤 계기로 말문이 트인 뒤 오빠와는 짧게나마 대화가 가능해졌고, 이곳으로 옮겨오고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세보 남매의 말에도 대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은 걸어오는 말에 대답하는 정도고 상대도 이들 세 사람으로 한정되었지만, 어린시절을 생각한다면 대단한 변화였다. 어려서 겪었던 충격적인 사건으로 말문이 막힌 뒤 란즈미는 몇 년 동안 떠 먹이는 음식조차 쉽사리 넘기지 못하는,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살아왔었다. 과자점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빅트와르 세보는 중부 목장지대 출신이었는데 일찍 결혼했던 남편이 공화국이 무너지던 시절 켈티카 공략전에 휘말려 죽은 뒤 줄곧 동생과 살아왔다. 늘 함께였지만, 늘 이곳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남편이 죽고 나서 동생의 영향을 받은 그녀는 ‘민중의 벗’ 에 가입했고, 망명 의회에서 보내준 동생의 유학길에도 동행했다. 디앙코르드가 유학한 곳은 오를란는의 로사 알브, 다시 말해 지스카르 드 나탕송의 문하였다. 지스카르의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아노마라드로 돌아온 뒤에도 그들끼리 특별한 유대감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지스카르를 존경하고, 지스카르가 망명 의회로 돌아가 일할 자격(다시 말해 졸업)을 인정해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서로를 믿을만한 자로 여겼다. 지스카르가 따로 지시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서로를 수소문하여 만났고, 암암리에 서로의 일을 돕곤 했다. 빅트와르와 디앙코르드가 란지에를 만나게 된 것도 같은 까닭이었다. 란지에는 졸업할 무렵 소위 ‘지스카르 파’의 총아로 불리며 문하의 관심을 모았고, 디앙코르드는 한 번 만나보자마자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빅트와르는 란지에의 지나친 어른스러움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이 소년에게 숨겨진 소년다움을 이끌어내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란지에가 지스카르의 집에서 지낼 당시에는 란즈미도 함께였지만, 켈티카로 돌아오자마자 망명 의회에서 내린 직책을 맡고 나니 란즈미를 보살펴 줄 사람이 필요해졌다. 잠깐씩 신세 질만한 곳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여러 곳을 전전하며 계속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하기에는 란즈미가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정신이 너무 가냘팠다. 누군가가 가족처럼 돌보아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런 조건을 찾기는 어려우리라고 여기고 있을 때 빅트와르가 나서 주었다. 마침 나탕트 거리의 연락책 역할을 맡으면서 망명 의회에서 마련해 준 과자점이 있었다. 과자점 2층의 가장 작은 방은 곧 란즈미의 세계가 되었다. 세보 남매는 몸과 마음이 모두 연약한 그녀를 막내 동생처럼 대해 주었다. 특히 디앙코르드는 곁에 있어주지 못하는 란지에를 대신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지극하게 보살폈다. 지켜보던 빅트와르가 약혼녀에게도 저런 정성은 어렵겠다고 뼈 섞인 농담을 던질 정도였다. “둘의 머리색이 비슷해지니 그제야 좀 남매 같네?” 빅트와르가 말을 꺼내자 란즈미가 고개를 돌려 미소를 보냈다. 란즈미는 오빠의 머리 색깔이 달라진 것을 처음 보았을 텐데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디앙코르드가 거들었다. “머리색 아니래도 둘이 닮았는데 뭘.” “쟤들은 괜찮지. 너하고 내가 그랬어봐.” “우리가 뭘?” “각자 생겨서 정말 다행이지 뭐니. 네 얼굴에 여자라니 생각만 해도 무섭다.” 디앙코르드가 금방 대꾸를 생각해 내지 못하는 사이에 혼자 킬킬 웃기 시작한 빅트와르는 뒤꼍으로 나가버렸다. 디앙코르드는 이미 닫혀버린 문에 대고 소리쳤다. “누나 얼굴에 남자라니 생각 외로 딱 어울리는데!” 물론 들렸을 리 없었다. 란지에가 식탁을 턱을 괴며 말했다. “두 분처럼 저도 란즈미와 많은 대화를 나눠봤으면 좋겠어요.” “네 오빠 불쌍하다. 란즈미, 농담이라도 좀 해줘봐.” 란즈미는 그린 것 같은 미소를 지었을 따름이었다. 란지에와 디앙코르드는 마주보며 씩 웃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란지에는 란즈미가 미소라도 지을 수 있게 된 것에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 지금보다 어렸을 시절, 민중의 벗에 들어가기도 전에 란지에는 어느 남부 귀족과 은밀한 거래를 통해 그 집에 들어가 시종 노릇을 했던 일이 있었다. 란즈미를 돌보아 주는 조건이었고, 대신 급료는 받지 않기로 했다. 그때 그 귀족은 어떤 이유로 외국에서 양자라며 한 소년을 데려왔다. 소년과 나이가 같았던 란지에는 그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얼마 후 소년을 가르칠 검술 선생이 들어왔는데 그가 바로 기적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월넛’ 이라는 가명을 썼던 검술 선생은 자신을 고용한 귀족에게조차 출신지나 신분, 심지어 이름까지도 전혀 밝히려 하지 않았다. 검술이 훌륭했고 그 일대에서 명성도 있었으므로 검술 선생으로 흠잡을 곳은 없었다. 그러나 상당한 괴짜였고, 상대방의 나이를 꿰뚫어본다든가 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능력도 갖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란지에는 란즈미의 방에 들어갔다가 검술 선생이 마법인지 다른 힘일지 모를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상한 빛도 보았다. 그는 란즈미의 마음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했다. 그날 밤 몇 년 간 닫혀 있던 란즈미의 말문이 열렸다. 검술 선생은 어느 날 성을 나가 자취를 감추었고 그 후로 소식을 듣지 못했다. 란지에는 개인적인 용무로 나이트워크를 쓰지 않았지만, 일전에 다른 조사를 맡기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술 선생의 일을 물어본 일이 있었다. 본격적인 조사를 하지 않은 탓인지 모르지만 역시 행방은 찾을 수 없었다. 가는 곳마다 이름을 바꾼다 했으니 그 탓일지도 모른다. 만일 천운으로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란지에는 꼭 은혜를 갚을 생각이었다. 어떤 방법으로든. 그 사이 디앙코르드는 과자를 만들 준비를 마쳐 놓았다. 밀어놓은 반죽을 올린 판을 식탁 위에 놓고 과자 틀을 란즈미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란즈미가 만들어준 과자는 인기가 있으니까, 이번에도 잘 부탁해.” “응.” 란즈미의 서툰 움직여 별 하나를 찍어냈다. 하였고 도톰한 별이었다. 워낙 오랜만에 온 터라 저녁까지 대접받고 가게 됐다. 저녁 식탁에 차려진 것은 토마토와 가지 속에 다진 고기를 채워 넣고 얻어온 닭 뼈로 국물을 내어 만든 슈튜였다. 빅트와르가 손 가는 대로 만들어낸 것이라 무슨 요리라고 이름도 없었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하니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니, 실은 평민들이 먹는 음식치고는 지나치게 훌륭한 편이었다. 란지에는 빈민들이 평소 대하는 식탁과 거리가 먼 이런 음식을 먹을 때마다 입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부담감을 느끼곤 했다. 비록 오늘은 오랜만에 와서 손님 대접을 받게 된 것이고, 세보 남매의 과자점이 망명 의회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잘 되어 추가 수익이 생겼기 때문에 조금 여유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더구나 이엔과 함께 지내며 이보다 훨씬 훌륭한 음식도 먹을 기회가 많았던 그였다. 오늘 이 정도는 스스로에게 용서해도 괜찮다. 알고 있지만, 결국 그런 기분은 변하지 않았다. 란지에가 일찍 숟가락을 놓자 빅트와르가 물었다. “입맛에 안 맞아서 그래? 그렇더라도 조금 더 먹어둬.” “아뇨. 맛있었어요.” “그것밖에 안 먹고서 그런 말을 한들 내가 믿을 리 없잖니? 얼른 더 먹어서 증명하렴.” 빅트와르는 묻지도 않고 란리에의 그릇에 스튜를 더 떠놓으며 그렇게 말했다. 란지에가 뭐라 말할까 궁리하며 시선을 돌리니 란즈미가 숟가락질을 멈추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디앙코르드가 말했다. “란즈미가 오빠가 그만 먹으면 자기도 그만 먹으려나 보다.” 로젠크란츠 남매는 들리지 않는 대화라도 나누는 것처럼 그렇게 시선을 마주치고 있었다. 이윽고 눈을 내리깐 란지에는 도로 숟가락을 들고 빅트와르가 떠 놓은 스튜를 먹기 시작했다. 빅트와르가 키득 웃으며 말했다. “란즈미가 이겼네.” 부드러운 촛불 빛 아래 가끔 오가는 웃음과 함께 저녁식사는 끝났다. 란지에는 란즈미의 입가를 냅킨으로 꼼꼼하게 닦아 주었다. 그리고 식후에 마시려고 끓인 차를 반 잔 따라 손등으로 온도를 재어 보고 란즈미 앞에 놓았다. 비록 오랜만이었지만, 몇 년이나 익숙하게 해왔었던 일인지라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이었다. 세보 남매는 마주보며 조그맣게 어깨를 으쓱했다. 란즈미는 돌아가 쉬어야 할 시각이었다. 내려올 때 그랬듯 란지에가 그녀를 업고 2층으로 올라갔다. 빅트와르가 램프를 들고 따라 올라갔다가 먼저 돌아오더니 설거지를 하고 있는 동생의 뒤통수를 보면서 히죽 웃었다. “넌 아직 멀었더라.” “뭐?” 물소리 때문에 잘 듣지 못한 체했지만 실은 다 듣고 있었다. 빅트와르는 한 손에 찻주전자, 다른 손에 찻잔을 든 채 엉덩이로 식탁 의자를 밀어 빼고 앉았다. “서투르다고.” “뭐가.” “네가 열심히 하긴 하지만, 아직 란지한테는 멀었다고.” 디앙코르드는 불만스레 어깨를 움츠렸다. “그거야 란지한테는 동생이고 나한테는 여자애니까 그렇지. 내가 못할 일이란 게 있는 거 아냐.” “그것도 그렇지만.” 빅트와르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앞치마는 풀어서 식탁 위에 놓았다. “란지가 란즈미를 눕혀놓고 뭐라고 얘기를 하는데, 글쎄 란즈미 그 애가 내가 딱 램프 불 조절하는 사이에 잠들더라고. 걔가 평소 밤잠 잘 못 드는 거, 너도 알잖니?” “음...” 딩앙코르드가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설 즈음 란지에가 다시 내려왔다. 빅트와르가 손짓해 불렀다. “차 새로 끓여 놨어. 한 잔 더 마시고 가렴.” 란지에가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를 꺼내어 앉자 차를 따르며 한 마디 덧붙였다. “이렇게 안 부르면 인사만 꾸벅 하고 휑하니 가버릴 셈이었지? 내가 다 알아.” 란지에가 고개를 숙이면서 웃었다. “야경꾼이 밤놀이하는 사람들을 집에 보내기 전에 가려고요.” “알지. 안다니까. 차마 한 잔 더 마셔. 명령이라고.” “그럴게요.” 디앙코르드도 손을 닦고 다가와 앉으며 말했다. “왜 난 차 안줘?” “바로 앞에 있잖아. 네가 따라 마시면 되잖니.” “칫, 차별하긴.” 찻잔 세 개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빅트와르는 벌써 석 잔째인 차를 조금 넘기고 입을 열었다. “요즘 바쁜 거니?” “네.” “네가 바쁘다고 인정하는 거 보니까 심상치 않은데.” 빅트와르는 눈치가 빠른 여자였다. 란지에는 부인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위험한 일은 작작해. 어느 날 오빠가 영 안 오게 됐다간 네 동생 숨 꼴딱 넘어간다.” 모르는 체 말하고 있어도 나탕트 거리의 정보망을 맡고 있는 빅트와르가 소식을 전혀 모르는 건 아니었다. 굳아 아는 체하지 않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디앙코르드는 조금 달랐다. “아르님 공작 집에서 열린 파티에 갔었다면서. 벌써 돌아돌아 거기서 널봤다는 사람이 있더라. 그 얘기 듣고 나 숨이 탁 막혔다. 슬슬 그로메 학원이 주목받고 있는 거 너도 알지 않냐. 이대로는 네 정체 밝혀지는 것도 시간 문제야. 내가 지나치게 생각하는 걸지 몰라도 네가 요즘 한다는 일이 너무 아슬아슬한 게 아닐까 싶어.” 란지에는 담담히 말했다. “거기도 나이트워커가 왔었나 보군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러니까 너란 녀석을 그렇게 얼굴 드러내고 다녀서는 곤란하단 말이야. 한 번 보면 누구나 알아보게 되잖아. 귀족 중에도 널 기억하는 사람이 생겼을지 모른다고.” “학원은 떠날 겁니다.” 디앙코르드는 눈을 약간 크게 떴다. “이엔하고 하일저도? 그들 외에도 몇 명이 더 있지 않나? 그리고 또 누구야, 에이젠엘모인가 하는 아가씨도 데려왔잖아?” “이엔과 다른 사람들은 남습니다. 제가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위험해져서 그런 거니까요. 에이젠엘모 씨는 어차피 학생도 아니었고 하니 같이 나올 겁니다.” “그럼 어디 있을 건데? 정했어?” “곧 정해지겠죠. 제가 정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잠시 침묵이 흐르고 빅트와르가 중얼거렸다. “졸업을 못하다니 아쉽네. 성적도 괜찮은데.” “참 나 누나는. 그게 핵심이 아니잖아.” “그냥 그렇다는 거잖아.” 사이를 두고 빅트와르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평화로운 때라면 네 나이 때 공부나 하면 딱인 건데. 그게 책 공부든 일 공부든. 공화 혁명이 다 뭔. 열여섯살 먹은 애한테. 란즈미는 또 무슨 죄라니. 매일 아침 오빠 얼굴만 보면 만족할 애한테.” 차가 식고 있었다. 란지에는 남은 차를 모두 마셨다. 찻주전자도 이제 비었다. 빅트와르는 란지에를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서로의 눈을 보고 있었다.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윽고 예상대로 란지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만 가볼게요. 오늘 저녁은 참 즐거웠습니다.” 이렇게 가고 나면 한동안 연락도 닿기 힘들리라는 것을 셋 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무리해서 란즈미를 보고 가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란지에의 손이 의자를 도로 밀어놓을 때까지도 빅트와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디앙코르드가 란지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하고 싶은 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다. 디앙코르드는 위층을 눈짓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란지에가 문을 열었을 때 빈 찻잔을 들고 있던 빅트와르가 빙그레 웃었다. “아르님 파티에 폰티나 딸도 왔었다면서. 소문대로 예쁘든?” 란지에는 문을 닫기 직전에 말했다. “네.” 6. 수레바퀴에 낀 돌 “앞으로 달려 나가기 전에 발이 어디에 있는지 봐 둬. 네가 밟은 것이 칼날이라면 나아가는 순간 베일테니까.” 칸카는 조금 기다렸다. 오갈 이야기는 알고 있었지만 먼저 말을 꺼낼 필요가 없어서였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수상해.” 테오는 그답지 않게 불안해 보였다. 아랫사람 앞에서 불안한 모습 따위 보이지 않을 인내심은 있었던 그였다. “무슨 일이 있어. 뭔가 눈치를 챈 거겠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곳에서 일이 안 좋아질 낌새가 났다거나. 어디에서 나온 것이든 상관없어. 어쨌든 결과는 같으니까. 태도가 달라졌어. 분명히 알 수 있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테오는 칸카를 쳐다보았다. 일부러 표정을 살피는 느낌이 확연했다. 테오는 방금 자신이 한 말과 반대되는 질문을 던졌다. “왜일 것 같나?” “말씀하신 대롭니다. 껄끄러운 뭔가가 생긴 거죠. 어느 바퀴 살대에 돌멩이가 걸렸는지, 그건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이 수레를 끌고 있고 저와 주인님은 수레에서 내릴 수 없는 입장이니 그렇습니다.” “그래. 수레가 멈췄어.” 테오가 변화를 눈치 챈 것은 빨랐다. 우선 나이트워커가 가져온 소식이 현격히 줄었다. 처음엔 애매했지만 헤어질 무렵, 그 자가 말을 아끼고 있는 냄새가 났다. 확신은 하지 못하고 일단 보냈다. 그런 뒤 일부러 기별을 넣었다. 바로 응하는 것을 보고 그때까지는 착각이었나 하고도 생각했다. 약속 장소는 시장이었다. 깊숙한 곳에서는 진짜를 팔지만, 밖에는 싸구려 그릇 쪼가리들이 무명천 위에 흩어져 벨벳 방석 꿈을 꾼다는, 서쪽 탑 저수지 앞의 골동품 시장. 볕에 물든 가짜 그릇들의 운명에 눈길 줄 여유가 없는 테오가 약속한 가게 앞에서 두리번댈 때 재빠르게 ‘디’가 다가왔다. 온 사람은 디 혼자였다. 디는 그에게 새로운 접선 방법을 알려주었다. 왜 바귀었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돈 크레아는 왜 오지 않느냐고 물었다. 디는 돈 크레아의 신변에 일이 생겨 한동안 외부 접촉을 삼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때 본 일이 있는 여자 회원이 왜 오지 않았는지는 묻지 않았다. 어차피 이름조차 몰랐다. ‘왕궁에 가기로 한 일은 진척 없소?’ ‘돈 크레아 님에게 생긴 일 때문에 상부 접선에 약간 애를 먹고 있습니다. 그분이 계셔야 일이 매끄럽게 진행되는 데요. 저로서는 상위의 접선 경로를 사용할 수 없어서 소개해 드릴만한 귀족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다른 약속들도 마찬가지가 되는 거요? 날짜가 촉박하다는 말은 굳이 하고 싶지 않소만.’ ‘조금 기다리셔야 되겠지만, 어차피 9월의 그날이 오기 전에 약속된 일들은 이루어질 겁니다. 조급하게 생각하시지 말고 토노크 자작이 소개한 모임에서 신뢰를 쌓으십시오. 장차 사교계의 한 축이 될 모임이니 그곳의 평판이 곧 도움이 될 겁니다.’ ‘그것도 좋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시간이 많이 남는군. 내가 해야 할 다른 일은 없겠소?“ ‘있습니다.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어떤 거요?’ ‘최근 집안에서 연회를 치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자리에 폰티나의 딸도 참여했다는 후문이던데 혹시 그녀가 특별한 낌새는 보이지 않던가요?“ ‘...’ ‘눈치 채지 못하셨습니까?’ ‘나는... 그녀와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소.’ ‘그렇습니까. 이쪽에서는 영지의 폰티나 공작에게 관심사를 안겨 주어 켈티카까지 관심이 가지 않도록 애쓰고 있지만, 그의 딸을 수행한 자들이 켈티카에 나타났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정보를 수집해 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파티에서는 소공작과 특별히 협연도 했던 모양이더군요. 직접 보지 못한 터라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그 후로 사교계에서는 두 가문 사이에 혼담이 오갔을 거라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 혹시 아는 것이 있으십니까?’ ‘그런 소문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소. 하지만 가문에서는 그 후로 구체적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소. 그건 단발성 움직임이었으리라 생각되오. 오랜만에 만나 가문 간의 우의를 과시하기 위한... 그런 류의 것 말이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소문이라는 것은 종종 일부러 퍼뜨리기도 하는 것이기에 드린 말씀입니다. 앞으로 아르님 공작이 소공작과 클로에 다 폰티나의 혼담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지 떠볼 기회가 있다면 좋겠습니다.’ ‘알아보도록 노력하겠소.’ 백주의 시장은 더웠다. 너울대는 천막 아래로 오가는 돈과 흥정, 먼지 냄새가 나는 항아리들, 그런 것들로 점차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상대의 얼굴도 조금 달아올라 있었다. 천막의 황토색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점차 날카로운 생각을 하기가 어려워지고, 발 딛은 흙은 열기 속으로 서서히 겨져드는 듯했다. 그들은 떠나기 직전, 마지막 문답을 나눴다. ‘소공작은 평안합니까?“ 그게 소공작의 안부를 묻는 말이 아님을 테오도 알고 있었다. ‘그렇소.’ ‘다행입니다. 그럼 이만.’ 골동품 시장에서의 만남이 있은 후 테오는 더 이상 아무 정보도 들을 수 없었다. 그 달의 나이트워크는 써버렸고, 다시 디를 불러낼 만한 정보도 없었다. 여름은 끝나 가고 있었다. “민중의 벗은 광범위한 그물을 갖고 있지만 그 끄트머리는 미모사 잎으로 되어 있지. 그들이 눈치 챈 것이 뭘까. 칸카, 뭘 것 같나?” 묻고 있지만 테오는 자신이 듣고 싶지 않은 대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칸카가 그의 마음을 눈치 채고 대답했다. “한 가지만 아니라면 상관없을 것입니다.” “그래. 한 가지를 뺀 어떤 것들 말인가?” “디라는 자가 연회를 언급했으니 그때 주인님께서 계시지 않았던 것을 지금쯤 알게 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그날 폰티나 공작 따님과 소공작의 혼담 소문이 생겨날 정도로 그럴듯한 일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듯합니다. 그게 누가 만든 일이었는지, 누구의 뜻이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만에 하나 폰티나 공작의 의도였을 가능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폰티나 공작이 과연 딸을 아르님 공작가에 주려고 할까요? 저는 그 점에 좀 회의적입니다. 그래서 이 일은 폰티나 공작이 사람들에게 소문을 퍼뜨리려고 일부러 꾸민 일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칸카는 죽 생각해오던 말을 마침내 했다. “왜 그가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누군가가 두 공작 가문 사이에서 이간질을 하려 한다는 낌새를 cos 것이 아니라면 말이지요.” “...” 테오는 당황하여 생각에 잠겼다. 칸카의 말대로라면, 그리고 민중의 벗이 이 점을 고려하고 있다면, 저들이 테오의 실수로 정보가 새어나갔다고 의심하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아니, 의심의 문제를 떠나 실제로 어디에서 새어나갔을지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단지 폰티나 공작의 정보력이 좋아서 민중의 벗의 역공작을 눈치 챈 걸까? 그보다 자신이 어느 모임에서 섣불리 자신감을 내보인 일은 없었던가? 소문이 샐 만한 사건은 없었던가? 토노크 자작의 소개로 나가게 된 젊은 귀족들의 모임, 그리고 그 모임 일원의 소개로 참석했던 몇 번인가의 야유회, 파티, 살롱 모임, 승마... 어렴풋이 기억이 날 것도 같다. 아마 아들을 데려갔던 승마 모임일 것이다. 프란츠보다 조금 나이든 꼬마 녀석이 지분대어 프란츠가 울음을 터뜨렸던가. 그게 리어리드 남작의 자식이었을 것이다. 다른 아이들도 여럿 함께였다. 유모를 보냈는데 진정이 되지 않는 것 같아 다가갔는데 유모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리이리드 남작과 다른 귀족 한둘도 이미 와 있었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 묻기도 전에 남작은 사과를 하더니 아들을 데리고 가 버렸다. 유모는 그저 남작의 아들이 무례하게 굴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며칠 전 아들과 이야기하는 도중, 그 녀석이 우리 집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누구냐고 물어서 공작이라고 말해주었다. 아들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확인하고 만족한 얼굴이었다. 그 아이에게 네가 언젠가 공작이 될 거라고 말한 일은 없다. 예전에도, 최근에도. 그 아이는 애니스탄이 만든 인형과도 사이가 좋은 편이다. 그런데 그 아이는 언제부터인가 데모닉이 무슨 말인지 알고 있었다. “칸카.” 칸카에게 이런 말을 해줄 수는 없었다. 칸카는 기다렸다는 듯 답해 왔다. “예.”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야.” 칸카는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한 가지’ 말씀이십니까?” 그것이었다. 민중의 벗에서 눈치 채어서는 안 되는 단 한 가지. 테오는 처음에 민중의 벗과 손을 잡을 때 자신이 확실히 해낼 수 있는 것 한 가지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소공작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 그를 조종하든, 없애든. 그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또한 완벅하지 못했다. 완벽하기 위해서는 살아남아 있는 진짜 따위가 있어선 안 되었다. 인형이 만들어지는 순간 없어 졌어야 마땅할 진짜, 그가 살아 돌아다니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었다. 테오는 이 일에 정말 사력을 다했다. 극장에 사고를 일으키고, 여배우를 죽이고, 또 다른 몇 명을 죽여가면서. 그러나 아직 살아 있었다. 투자한 것에 비해 소득이 전혀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심지어 이제는 행방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이것만은 나이트워크를 이용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진짜가 살아 있음을 민중의 벗에서 알게 해선 안되니까. 조슈아 일행은 칼라이소 항구에서 바다로 떠나갔다. 남족 바다에서 아르님 성을 가진 자가 숨으러 갈 곳은 한 군데뿐이다. 테오는 조슈아 일행이 페리윙클 섬으로 갔을 거라 짐작했지만, 그곳이야말로 정보원이 침투하기가 가장 어려운 곳이었다. 페리윙클은 자기 섬 출신 외에는 아무도 내륙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외지인은 항구 주위의 땅만 밟을 수 있을 뿐이었다. 예외가 있다면 아르님 공작 가족 정도일까. 더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조슈아가 그곳에서 살 작정이라면 영원히 살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실제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제 테오는 생각해 보았다. 조슈아 일행이 다음에 나타날 곳이 어디인가를.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하나뿐이었다. 그들이 테오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작정이라면 모르되, 나타날 작정이라면 그 장소는 한 군데일 수바Rd 없었다. 조슈아가 지금 무엇을 찾고 있을까.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잘 알지 않나. “칸카. 내가 준비시킨 것이 있었지?” 칸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마쳐 놓았습니다.” 테오는 칸카의 얼굴을 보며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닫기 힘들다는 느낌을 받았다. 애니스탄은 테오 곁에 있지 않았다. 비취반지 성을 둘러싼 숲 속에 있는 집을 하나 빌렸다. 정확히 말하면 그냥 점거한 것이지만. 공작의 사위라는 위광이면 버려진 빈집을 쓰는 일 정도를 관리인이 눈감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낡아빠진 통나무집이었다. 서까래 위에 이엉을 올린 지붕에서는 군데군데 비가 샜다. 애니스탄은 비취반지 성에 돌아가지 않았다. 테오와 전략을 논의하거나, 그의 희망을 들어주거나 하지도 않았다. 오직 이곳에서 밤과 낮을 뒤바꾸어가며 일했다. 문간에 책이 수십 권 쌓이고 마법 약재들이 찬장 가득 들어찼다. 커다란 테이블 두 개에는 복잡한 시험용 진을 그린 종이들이 그득했다. 그는 미친 듯이 이 일에 매달렸다. 네냐플에서 떠났고, 네냐플에 보고할 수 없는 실험을 하는 지금 고급 마법 재료를 공급받을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다. 채취하려 돌아다닐 시간이 많지 않은 경우 오직 마술사들의 암시장에서 물건을 구할 수 있는데, 이런 물건들의 질은 전적으로 운이 좌우했다. 운이 좋으면 멀쩡하지만, 운이 없으면 질 나쁜 쓰레기가 걸렸다. 심한 경우 전혀 엉뚱한 재료인 경우도 있었다. 실험에 들어가서야 가짜인 걸 알게 되면 사태는 종종 심각해졌다. 아직까지는 운이 따랐다. 애니스탄은 평소 같으면 위험부담을 생각해서 자제했을 주문들도 닥치는 대로 시험해보았다. 재료나 돈도 아끼지 않았다. 오직 시간만을 아꼈다. 그만큼 해답이 절박했다. 그러나 그는 해답과 먼 곳에 있었다. 까마득히 멀었다. 애니스탄 자신이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마법사 같으면, 그리고 그도 예전 같으면 일찌감치 포기했을 것이다. 해답에 손이 닿기까지 뛰어넘을 수 없는 과정이 있는데, 그 간격을 메우는 것은 며칠이나 몇 달의 노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재능과 운이 합쳐져도 언제 해낼 수 있을 지 알 수 없을 일을, 재능도 운도 없이 해내려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도울 리 없기에. 오직 그 외에는 누구도 도울 수 없기에. 자기 손으로 나락에 처넣은 두 영혼. 그와 그의 인형을. 그의 인형은 모를 것이다. 모르게 하고 싶다. 그가 성공한다면 그의 인형은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갈 것이다.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는 창조자인 그 자신도 모르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살아갈 테니까. 자신이 누군가의 복제, 가짜 따위라는 것을 모른 채로. 그의 인형에게 영혼이 있을까? 없다면, 그가 만들어 주면 된다. 낮이 긴 여름이 저물어갔다. 애니스탄은 의지와 노력이 기적을 불러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일했다. 사막의 모래를 모두 퍼 올릴 수 있다고, 강의 물도 모조리 말릴 수 있다고, 꿈처럼 그렇게 생각하곤 했다. 지지 않는 낮과 밤을 몇 번이고 탐욕스레 털어 쓰고서 딱딱하게 굳어진 머리를 문설주에 기댄 채로. 때로 그는 자신이 미쳐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그에게는 마지막 희망이 있었다. 성공 또는 휴식, 적어도 둘 중의 하나는 얻게 될 것이므로. 그 휴식이 아주 길고 달콤하리라는 상상이 그에게 마지막 인내심을 주었다. 학원의 좁고 긴 창에 구부러진 달이 떴다. 정식으로 학원의 문이 열리는 시각은 아침 5시다. 그러나 그전에도 밖으로 나갈 방법은 몇 가지나 있었다. 둘 다 그런 길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함께 빠져나간 일도 많았고, 혼자 나간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럴 때도 돌아오면 다른 한 명이 있을 거라고 당연하게 믿으며 지내왔다. 서로를 안 지 햇수로 3년간, 서로를 동료로 인식한 것은 올해부터다. 따져보면 길지 않은데, 어째서 모든 것이 당연했을까? 오늘까지 세면 정확히 며칠 째일지 생각해보려다가 머리가 복잡해진 이엔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 안의 비밀 장소들을 점검하고 있는 란지에의 뒷머리를 바라봤다. 희미하게 달빛이 든 좁은 방 안에 평소와 다름없이 수많은 책이 불안하게 쌓여 그림자를 드리웠다. 낯선 사람이 보면 어디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파악하기조차 힘들어 보이는 곳이다. 그러나 란지에는 그 안에서 필요한 것을 즉시 찾아내지 못하는 일도 없었고, 물건을 잃어버리는 일도 없었다. 이제 떠나려는 순간, 점검해 볼 장소 또한 몇 군데로 한정되어 있었다. 기밀로 다뤄야 할 것을 실수로 떨어뜨리지 않았는지 온 방을 뒤질 필요는 없었다. “됐어.” 란지에가 가져가는 짐은 거의 없었다. 징 박힌 트렁크 속에 책 몇 권, 기밀 서류들, 암호문들, 당장 입을 옷 두어 벌이 들었을 뿐이다. 개인적 물건이라 할 만한 것은 로사 알브를 떠날 때 지스카르가 준 펜과 잉크병뿐이었다. 소중히 여겨서라기보다는 튼튼해서 망가지지 않은 까닭에 지금껏 간직했을 따름이었다. 그는 물건에 추억을 담아 아끼는 일이 없었다. 추억이란 머릿속에 든 것이다. “혼자 나갈게. 여기서 헤어지자.” 이엔은 입을 꾹 다물었다. 양 뺨에 볼우물이 생겨났다. 란지에는 그녀의 얼굴에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기회가 닿으면 다시 연락할게.” 이제부터 둘의 길은 갈라질 예정이었다. 란지에는 떠나고 이엔과 그 외 동료들은 그로메 학원에 남는다. 같은 민중의 벗에 소속되어 있더라도 길이 한 번 갈라지고 나면 쉽사리 만날 수 없었다. 지금까지도 이들이 공인된 의미에서 한 조였던 것은 아니었다. 민중의 벗에서 조를 짜는 것은 조직화 분과의 관할이었다. 란지에와 그들이 얼마동안 함께했던 것은 그들 모두가 그로메 학원의 학생이었고, 따라서 민중의 벗에 속한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모두 란지에가 포섭한 인물들이었던 까닭이었다. 이미 서로의 존재를 아는 이들을 굳이 다른 조에 넣어 따로 관리할 필요는 없었다. 란지에는 한 지구의 위원장으로서 작은 조를 관리할 입장이 아니었지만 굳이 다른 하위 간부를 통하지 않고 동급생이거나 선후배인 이들을 직접 떠안았다. 그래서 이들은 켈티카 3지구 내의 특별한 존재로서, 조가 아니되 위원장의 지시를 직접 받아 행동하는 개별 단위들로서 란지에와 함께 해왔다. 이제 이들은 새로운 조로 편성되어 이엔이 맡게 된다. 조직 개편을 결정하고 망명 의회의 승인을 받은 사람은 란지에 본인이었다. 이유는 이엔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수행한 계획에 미세한 차질이 생겨났다. 위기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순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파급의 최소화였다. 란지에는 그로메 학원 내의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이엔을 비롯한 학생들을 이번 일에서 이탈시키고, 남은 일은 혼자 수습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다만 하일저는 얼굴이 드러났기 때문에 자신과 시차를 두고 다른 곳으로 보낼 예정이었다. 란지에는 자신이 졸업하지 못하는 것보다 하일저가 공부를 그만두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얼마 동안이라도 얼굴을 감추지 않으면 안 되는지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비록 3지구 위원장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 란지에는 모로와의 접선 자리에 다른 조직원을 차출하지 않고 하일저를 데려간 것에 약간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테오스티드 다 모로와의 제휴가 시작된 것은 망명 의회의 결정이었다. 그것부터 무리수였기에 정보가 샌 것이라고 판단해야 할지는 아직 불명확 했다. 란지에는 책임 소재를 따지려 하지 않았다. 필요한 계획이었기에 입안된 것이고, 문제가 생겼다면 수습할 뿐이었다. 스스로의 판단은 분명히 있었지만 그걸 드러낼 때는 나중이라고 여겼다. 이엔은 그렇지 않았다. “오늘만은 망명 의회가 원망스럽네.” 란지에의 한쪽 입술이 약간 올라갔다. “책임은 누구에게도 없는 거야.” “책임은 네가 지려하고 있잖아.” 입술의 모양이 미소로 바뀌었다. “중요한 협상에서 제외되어 서운한 거야?” “농담 마.” 란지에는 트렁크를 집어 들고 손을 내밀었다. “남은 친구들을 네게 부탁한 것을 잊지 마.” “... ” 이엔과 악수한 란지에는 돌아서서 문을 밀었다. 따라 나가지 않기로 한터라 문간으로 다가서는 것 이상은 할 수 없었다. “자신 없어.” 란지에는 못 들은 것처럼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 없단 말이야...” 소리칠 수 없어서 입속으로 되뇌었다. 잠든 학생들로 가득한 기숙사였다. 란지에의 모습은 곧 계단참 너머로 사라졌다. 이엔이 양 손을 꼭 쥐고 스스로를 다스리려 애쓰는 모습을 돌아보지 않은 채. ] 학원 뒷 마당에는 겨우내 쓸 장작을 쌓아두는 나뭇광이 있었다. 작년에 쓰고 남은 장작묶음 몇 개가 굴러다니는 빈터를 가로질러 붉은 벽돌로 쌓은 굴뚝 뒤로 돌아갔다. 상자 두 개를 끌어내고 울타리를 조금 만지자 쇠막대 하나가 툭 떨어졌다. 란지에는 울타리 틈을 빠져나왔다. 그곳에서 애나 에이젠엘모가 기다리고 있었다. 란지에는 울타리를 원래대로 손질해 놓고 돌아섰다. 달그림자가 밝힌 모자챙 속 그늘에 애나의 굳어진 얼굴이 보였다. 란지에는 표정을 부드럽게 했다. “갑시다.” 7. 켈티카 만 “로젠버그 호수에서 발원한 블루엣 강은 켈티카 시를 동서로 통과하여 켈티카 만으로 빠져나간다. 켈티카 만은 예로부터 이름의 축복이 있어 왕은 만으로 나와 새 배와 새 궁전의 이름을 지어 선포하였고, 아들과 딸이 태어나도 그리하였다. 이름의 축복을 지닌 만답게 켈티카 만 주위의 크고 작은 암초들은 모두 이름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암초들을 바다가 낳은 마흔 명의 딸들로 여기고, 그녀들을 달래기 위해 만으로 나갈 때마다 말린 무화과나 살구, 자두, 건포도 열매 등을 던진다. 그리하는 이유는 세상 모든 아가씨들이 달콤한 열매를 좋아하지만 암초 공주들이 사는 바다 밑 궁전에는 오직 짠 것밖에 없는 까닭이다.” 리체는 뱃전에 기대어 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따가운 햇살을 피해 택한 그늘에 슬슬 볕이 들기 시작하자 조금씩 자리를 옮겨 가며 잠을 이어가려 애쓰는 중이었다. 나른하게 울리던 바이올린 소리가 뚝 그치고 두 소년이 떠들기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그대로 단잠을 잤을 것이다. “아 왜, 도대체가! 왜 자꾸 북풍이 부는 거냐고!” “조금 전까지 남풍이었는데 뭐가 달라진 거지?” “조금 전이 아니고 벌써 북풍이 불어댄지 상당히 됐거든?” “가락이 틀려진 것 같진 않아. 내 귀는 확실해.” 지친 기색이 완연한 막시민은 들고 있던 바이올린과 활을 근처의 빈 통속에 던져 넣어 버렸다. 심지어 그 통을 걷어차기까지 했다. “똑같은 가락만 지루하게 켜대느라 어깨가 빠질 지경이네. 썩어빠진 폐품 쪼가리들 같으니!” 조슈아가 급히 통을 잡아당겨 바이올린을 도로 꺼냈다. 망가진 데라도 없나 열심히 살펴봤지만 정작 주인인 막시민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오랬동안 ‘카프리치오’를 가지고 다닌 경험으로 그 바이올린이 건드리면 부서질 것처럼 생겼어도 자기 힘으로 쉽사리 부술 수 없는 물건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기분이 잘변하는 막시민이 갑판 가운데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그 까다롭다는 카프리치오를 켜고 있기가 힘들었을 것은 틀림없었다. 그게 그럴듯 한 곡이라도 됐으면 연주자 입장에서 그나마 참을만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시민이 되풀이해서 켜고 있는 것은 고작 네 소절밖에 안 되는, 어린애들이 놀려댈 때 부르는 입노래와 비슷한 수준인지라 켜는 사람은 물론 듣는 사람도 지겨워 죽을 지경이었다. 오죽하면 질려서 잠을 청한 리체가 걔지 않으려고 꼼틀꼼틀 자리를 옮겨가며 버티고 있었겠는가. 선실 안은 더 더울텐데 안 나오고 있는 마일스톤도 비슷한 기분일 것이 틀림없엇다. “악보는 수십 장이나 되잖냐? 제발 이거 말고 뭐라도 다른 것 좀 주면 안되겠냐? 진짜 농담 아니고, 내가 부탁한다. 벌써 두 시간 째인데 이러다가 머리가 돌아버리겠단 말이다.” “나도 아는데...” 갑판 가운데 주저앉은 막시민이 간절하게 쳐다봤지만 조슈아는 난처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조슈아는 막시민이 알아볼 수 있도록 요즘 사용하는 표기법으로 필사한 악보를 쥐고 있었다. 여백이란 여백에는 모조리 각종 음표가 빼곡하게 낙서 되어 바이올린 못지않게 폐품처럼 보이는 악보였다. 동그라미와 가위표가 곳곳에 교차되어 있고, 어떤 표시는 열심히 그어버린 자국으로 지워져 있고, 또 다른 것은 몇 번이나 고친 흔적이 겹쳐져 알아보기도 힘들고, 발끈해서 뜯어버렸는지 구멍이 난 곳까지 있었다. 그것만 봐도 조슈아가 얼마나 머리르 싸쥐고 복원에 애쓰고 있는지 짐작할 만했다.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고 할 순 없었다. 그러므로 막시민의 주장은 그렇게 열심히 복원한 부분을 한번 연주해 보자는 거고, 조슈아는 완벽해질 때까지는 안 된다는 의견이었다. 사실 노을섬에서 이미 조슈아는 모든 페이지를 살펴보고 남은 부분과 빈 부분을 끼워 맞춰 머릿속으로 이미 그럴듯한 작곡을 마쳐 놓았다. 그리고 그걸 시험해보려 했었다. “역시 안 돼. 너무 위험해.” 조슈아가 고개를 젓자 막시민은 허공을 노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너란 놈이 그렇지. 아니, 다 그렇지. 그놈의 폐품에, 휴지조각에, 그걸 준 놈에, 훔쳤다는 인간까지 싹 다.” “미안해.” 막시민은 한참 동안 대꾸가 없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다시 일어났다. “됐어. 빌어먹을 ‘남풍 교향곡’을 앞으로 일천 오백 사십 육만 칠천 육백 스물 두 번 연주하면 되는 거지?” 고작 네 소절로 이루어진 교향곡이 다시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잠이 다 깨어버린 리체는 귀를 막았다. 조슈아도 한숨을 내쉬었다. 그라고 지겹지 않을 리 없었다. 노을섬 해변에서 대충 완성한 곡의 첫머리를 여섯 마디 정도 시험 삼아 연주했을 때였던가. 마침 바다 쪽을 보고 있던 조슈아는 도망치라는 말도 입 밖에 못 낸 채 막시민의 소매만 붙잡아 당기면서 섬 안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영문 모르고 뒤따라 뛰던 막시민이 뒤를 한 번 돌아보더니 그 순간 조슈아를 앞질러 뛰어갔다. 전날 한가롭게 걸어서 올랐던 언덕을 눈 깜짝할 사이에 주파한 둘은 꼭대기에서 돌아서며 용솟음치던 바다를 보았다. 그 순간, 사람 키의 대여섯 배는 될 법했던 파도가 사그라지며 그들의 발치를 적시고 돌아갔다. 그들이 서 있던 해변에서 언덕 위까지, 최대 백 미터는 밀고 들어왔다가 간 셈이었다. 둘은 그 자리에서 한동안 멍해져 있었다. 바람을 일으키는 바이올린이라고 했다. 바람이 일어나기는 일어났다. 다행히도 일어난 지점은 바다 위였던 모양이다. 비록 범위는 좁았지만 얼마나 격렬했으면 이런 파도가 생겨났을까? 그 다음부터 두 소절 연주하고 나서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나 반시간쯤 기다려보고, 다시 두 소절 해보고, 또 기다리고... 그런 식으로 하다 보니 효과 있는 곡을 찾아내기도 전에 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사실을 말하자면 일찌감치 지쳐서 악보는 배 고물에 처박아두고 남은 식량을 꺼내먹은 다음 깨진 야자 껍질로 상대 뒤통수 맞추기 같은 놀이나 하며 오후를 보냈던 탓이다.) 이튿날은 식량이 떨어졌기 때문에 - 그리고 켈스니티도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 뭐든 찾아내든지 아니면 노를 젓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했다. 그 결과 진도가 빨라져서 드디어 한 곡이 완성되었으니 그게 바로 막시민이 방금 이름을 붙여 준 네 소절짜리 위대한 신성 찬트 ‘남풍 교향곡’ 이었다. 효과는 간단했다. ‘남풍이 불게 된다.’ 그때는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둘은 남풍 교향곡을 써서 탈출했고 폭풍의 벽을 통과한 뒤 폭죽 몇 발을 쏜 끝에 기다리고 있던 알테나 호를 만날 수 있었다. 이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둘은 켈티카까지 가는 데도 남풍 교향곡 말고 필요한 곡은 없을 거라고 멋대로 생각했다. 어쨌든 켈티카도 북쪽에 있잖은가?“ 하늘을 나는 배를 가진 이상 켈티카 앞까지 날아가기로 한다면 바람이 북풍이든 남풍이든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켈티카는 블루엣 강을 끼고 있었으므로 항구가 아니라 강에 내려도 된다. 그러나 그다음이 문제였다. 조슈아가 비취반지 성에 돌아가는 것을 과연 아무도 막지 않을 것인가? 그럴 리 없었다. 저들은 이쪽에서 하늘을 나는 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강과 항구를 봉쇄할 방도를 찾을 것이다. 어쨌든 ‘미의 극치호’는 땅 위에 내릴 수는 없었다. 따라서 강에 내리는 것은 더욱 눈에 띄기 쉬웠다. 항구 근처에 내려서 은밀히 숨어들어달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막시민은 이 계획도 기각했다. 그는 분명한 추리에 의거하여 항구 앞에 그들을 처치할 자들이 기다릴 거라고 예상했다. 미의 극치호는 하늘을 날 수 있었지만 그 외의 기능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타고 있는 자들이 배를 제대로 선회시킬 줄도 모르는 것은 물론, 대포 한 문 실려 있지 않은 순수 유랑극단선... 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비슷한 배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동원할 수 있는 무력을 준비해 맞받아치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었다. 막시민은 미의 극치호에 대포를 단다든가 하는 실현 불가능한 계획들을 일찌감치 폐기하고 호위해줄 배를 데려가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어려울 건 없다. 지원자도 쌓여 있다. 페리윙클은 해적 공작의 섬 아닌가? 이 계획에는 난점이 있었다. 수 문에서 수십 문까지 강력한 대포를 달고 백병전에 능한 수백 명의 해적을 실은 위풍당당한 배를 구할 수는 있었다. 그것도 몇 척이나. 막시민의 기준에 잘 맞게도 공짜로. 그런데 그 배는 날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해 호위를 받으며 가려면 미의 극치호도 비행을 포기 하고 항해를 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조슈아는 그런 식으로 켈티카까지 간다면 얼마나 걸릴까 물어보았다. “넉넉잡아 두 달 정도면 되겠는뎁쇼.” 계획은 폐기되었다. 이미 날아가는 것에 익숙해져서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두 달은 지나치게 한가로운 계획이었다. 9월 말이나 되어야 켈티카에 당도할 판이었으니 말이다. 세 번째 계획을 생각해 낸 사람은 펠 집정관이었다. “호위선들이 같이 갈 수 없다면, 그곳에서 기다리면 됩니다.” 마침 그 부근에 가 있는 선단이 있다는 것이다. 켈티카 근처까지 가서 만나면 된다. 합류 지점만 혼동하지 않는다면 가장 좋은 계획이었다. 미의 극치호에는 불꽃을 내는 폭죽과 연기 나는 신호 기구 등이 잔뜩 실렸다. 그리고 소공작 전하께서 항해하시는 동안 불편을 겪으시지 않도록 도울 선원들, 요리사, 의사, 광대, 악사, 하인들이 올라타려 했지만... 수용 인원이 초과되어 다섯 명으로 제한되었다. 마일스톤은 본래 페리윙클까지 오는 것으로 계약이 종료되었으므로 도착 즉시 급료를 지급받았고 노을섬으로 가는 알테나 호에도 타지 않았다. 그런데 조슈아 일행이 페리윙클로 돌아와 보니 그는 아직도 떠나지 못하고 섬을 방황하는 중이었다. 마일스톤의 말로는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는 거였다. 이 섬에는 항해사와 선원이 너무 많다. 배만큼이나 많다. 실은 적정 나이를 넘긴 남녀 대부분이 그렇다! 이런 상황이니 이곳 출신도 아닌 마일스톤을 모른체 내버려두고 가는 것도 미안하고, 본인도 재계약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까닭에 다시 승선하게 되었다. 켈티카 쪽 선단에 연락을 취하고 답을 받는 일에는 빠른 전서구를 동원하고도 며칠이 소요되었다. 그 결과 이튿날 떠난다던 공언과는 달리 수일이 지체되고서야 미의 극치호는 페리윙클 항구를 떠날 수 있었다. 떠나기 전에 조슈아는 소공작의 자격으로 첫 번째 명령을 내렸다. 노을섬으로 들어가는 전 해로의 봉쇄였다. 이제 약속한 지점이 멀지 않았다. 바다에 내려야 할 테니 이번에야말로 남풍 교향곡이 필요한, 아니 쓰려면 쓸 수 있는 시점이었다. 마일스톤을 비롯하여 항해사 둘에 선원이 여섯이나 있으니 항해는 그들에게 맡기면 될 테지만, 하나뿐인 역작 남풍 교향곡이 삐걱대기 시작하자 의문이 짜증을 부르고 짜증이 분노를 불러 두 시간째 둘은 남풍 교향곡의 완성에 기를 쓰고 매달리는 중이었다. “그 연주 말인데.” 리체가 기댔던 뱃전을 짚고 느릿느릿 일어나 둘을 바라봤다. 조슈아가 대꾸했다. “응?” “그걸 꼭 그 바이올린으로 해야만 되는 걸까?” “으응?” 조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리체가 손가락을 쳐들며 눈동자를 허공으로 굴렸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다는 거야. 난 바이올린만 듣고 살 순 없어! 다양성, 그런 게 필요하잖니.” 리체가 선실로 가버린 뒤 조슈아는 조그맣게 남풍 교향곡을 흥얼거려 보았다. 가사가 없다보니 감정을 담기가 어설퍼서 아무렇게나 붙여 보았다. 잠시 후, 더위를 참지 못하고 선실에서 나온 리체의 귀에 괴이한, 아니 실은 매우 익숙한 곡이 들렸다. 남풍아 불어라 좀 불어봐라 아니 북풍 말고 이건 좀 아니거든? 노래 실력만 훌륭했으므로 리체는 바이올린보다 들을만하다고 생각... 하지 않았다. 그녀는 폭소를 터뜨리며 조슈아에게 다가가다가 문득 머리채를 휙 밀어 보내는 바람을 느꼈다. 남쪽에서 불어와서, 북쪽으로 사라지는 바람이었다. “오오?” 리체가 뭐라 말하기 전에 막시민이 돛대 뒤에서 뛰쳐나왔다. “조군 너 지금 뭐 했어?” 막시민의 자존심을 생각했음인지 문제의 남풍은 아주 잠깐, 그것도 약하게 지나갔다. 조슈아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둘이 다투기 시작하기 전에 더위에 지친 마일스톤이 선실에서 기어 나오더니 픽 쓰러지며 보고했다. “침로 쟀어. 내려가자고. 켈티카 만이다.” 바람이 잤다. 마중 올 선단을 기다리기 위해 돛을 모두 내렸지만, 그러지 않았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듯했다. 배 안의 모든 사물은 고요했다. 밧줄은 떨지 않았고, 돛은 윙윙대지 않았다. 해류가 조금씩 밀려와 배를 흔들 때마다 배를 이룬 나뭇조각들이 몸을 맞비비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한여름 바다에 숨은 곤충들이 날개를 스치는 소리였다. 삐익, 쓰읏, 삐걱. 선원 몇이 고물 쪽에서 연기 신호를 준비하고 있었다. 조슈아는 돛대에 기대어 섰고, 막시민은 뱃전 너머로 몸을 내밀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리체는 따끈한 갑판에 앉아 있었다. 입으로는 어느새 중독되어버린 남풍 교향곡의 가락을 흥얼거리면서. 더위만이 침묵 속을 걸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소리 없이, 쉬지 않고. “아아...” 장루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막시민이 돌아보았다. 두 번째 외침이 들리자 그가 곧 외쳤다. “동쪽에 배!” 리체는 몸을 반쯤 일으키며 돌아보려 했다. 그 순간 배가 기울어지면서 중심을 잠깐 잃었다. 다시 밧줄 감는 말뚝을 짚고 일어섰을 때 동쪽의 배는 뚜렷한 윤곽이 되어 있었다. 세 척이었다. 동쪽이라면 켈티카 항구가 있는 쪽이다. 마중 온 배가 분명하다고 생각한 리체는 동쪽으로 내민 이물 쪽으로 다가갔다. 배 그림자가 굉장히 빠르게 커진다고 느끼며, 바람이 없는데 어떻게 저리도 빨리 올까 궁금해 하며, 좀 더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높은 돛대보다 위용 있게 솟은 배쌈에 시선이 먼저 갔다. 수십 개의 노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배는 노를 저어 움직이는 갤리(galley)였다. 이쪽을 향한 이물 끄트머리에 리체처럼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얼굴까지 알아볼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우뚝 버티고 선 그는 등 뒤로 팔짱을 낀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자신을 보고 있는 듯해서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검은 모자 아래 짧은 금발 머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어디선가 본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뱃머리가 휙 돌았다. 상대의 얼굴은 순식간에 오른쪽으로 돌아가며 지워져버렸다. 그 뒤를 따르던 배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와 동시에 등 뒤에서 선원의 외침이 울렸다. “저건 우리가 기다리던 배가 아니야!” 아니라고? 리체가 생각을 수습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팔을 잡아당겼다. 막시민이었다. “나 좀 쏴달라고 뱃머리에 서있냐?” “소다니?” “보면 몰라? 놈들은 해적이라고!” 리체는 막시민의 손에 이끌리다시피 배 중앙으로 가면서 물었다. “저기, 해적은 깃발 달고 다니지 않아? 그, 검은 바탕에...” “꼭 그러란 법 있냐? 해적 맘이지.” “넌 뭘 보고 아는데?” “넌 그럼 저 배들이 왜 다가온다고 보는데?” 막시민이 손을 놓고 가버리자 리체는 의혹에 찬 시선을 갤리선에 꽂은 채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북부에 오니 해적조차 예의가 없네...” 조슈아는 돛대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상황판단을 못해서도, 당황하거나 겁을 먹어서도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배, 대포 한 문 달려있지 않고 선원은 열 명뿐. 달아날 곳도 없고 달아날 방법도 없었다. 갤리 세 척은 미의 극치호를 둘러싸더니 고작 몇 미터의 거리를 두고 멈추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쿠콰콰쾅!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다. 작은 배인 미의 극치호는 사방에서 날아들어 꽂힌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버르적거렸다. 잠든 듯 고요했던 배 안은 죽음의 소음으로 가득 찼다. “... ” 조슈아는 쓰러졌던 몸을 일으켰다. 밧줄을 잡자 그의 몸에도 떨림이 옮겨왔다. 화살에 꿰뚫린 사슴처럼 떨고 있었다. 그들을 보호해 온 이 작은 배가, 아무 무장도 안 된, 유랑극단선이라는 우수꽝스러운 별명을 얻었던 배가.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이 쓰러져 나뒹굴다가 겨우 일어나는 중이었다. 조슈아는 세 척의 갤리선에서 튀어나온 굵은 쇠사슬이 미의 극치호의 배를 뚫고 연결된 것을 보았다. 맹수에게 포위된 어린 짐승은 치명상을 입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조슈아는 밧줄을 놓고 뱃머리로 걸어갔다. 비록 상대 배에서 맞아주러 나올 자는 없지만 그래도 앞으로 나아갔다. 배가 내뱉는 거친 숨이 발밑으로 느껴졌다. 비록 빌린 배지만, 빌린 사람은 자신이었다. 쥬스피앙은 그를 위해 배와 교본을 내주었다. 그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오라고. 스스로 붙였던 수많은 찬사만큼이나 아끼는 배를.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된다. 맞은편 갤리의 뱃전 너머로 수십 명의 해적, 또는 병사처럼 보이는 자들이 창검을 빼어들고 도열해 있었다. 궁사 또한 있었다. 화살을 메기고 조슈아가 있는 쪽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슈아는 그들이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나아갔다. 뱃머리에 섰을 때 조슈아는 맞은편 배에서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나와 있음을 보았다. 그는 선장이라기보다는 육전의 장군처럼 보이는 자였다. 장검을 찼고 철갑옷을 입었으며, 머리에는 투구마저 쓰고 있었다. 키가 크고 위엄 있는 풍채를 갖고 있었다. 조슈아는 손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너는 누구냐.” 상대방은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대답이 들릴 거리였건만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 배의 선장이자 아르님 가의 소공작, 아르모리크 경 조슈아 아일 브레탄트 폰 아르님이다. 내 앞길을 막는 무도한 자여, 네 이름을 밝혀라.” 상대의 손이 움직였다. 그는 투구를 벗어 들었다. 조슈아의 눈이 충격으로 가늘게 떨렸다. 장군은 조슈아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켈티카 만에서 마르바라 바이예가 아르모리크 경을 뵙습니다.”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바이예 경에게 붙잡혀 있다가 탈출하기까지 했던 조슈아 일행이었다. 그 때 막시민은 바이예 경이 아르님 가문을 배신했다고 바로 단정 지었지만 조슈아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바이예 경을 어려서부터 보아 왔다. 어떤 사람인지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오랜 신임을 받아 왔고, 그 결과 아무나 보낼 수 없는 페리윙클 섬에 특사로 간 일까지 있는 점잖고 성실한 기사가 아닌가. 그런 바이예가 아버지를 배신하고 소공작인 자신을 억류하려 하는 까닭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안다 해도, 마음으로는 그럴 수 없었다. 바이예경은 돈으로 매수되거나 명예에 팔릴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백번 양보해서 그가 조슈아를 싫어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만은 아니었다. 아버지와 바이예 경은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왜 당신이 이 자리에 있는 거지?” 바이예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슈아는 재차 물었다. “왜 나를 공격하는 배에 당신이 타고 있는 거지?” 여전히 두 배 사이에는 고요뿐이었다. 바람조차 자는 바다 밑으로 더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왜 내 아버지를 배신하는 건가? 왜? 도대체, 왜!” 철썩, 파도가 한 번 쳤다. 침묵이 깨어졌다. “저는 공작님을 배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상 밖의 진중한 대답이었다. 조슈아의 얼굴은 해쓱했다. “아버지가 이 행동을 기뻐할 것이라 보는가?” 바이예 경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겠지요. 하지만 저는 아르님 공작 가문을 위해서 오늘 이 자리에 왔습니다.” 조슈아는 턱을 내리며 바이예 경을 쏘아보았다. “그 말을 내게 좀 더 분명히 설명해야 할 거야.” “소공작 아르모리크 경이시여, 당신은 위대한 선조의 피를 이어받았고 탁월한 능력 또한 받았습니다. 이 세상 누구라도 당신 앞에서는 아무 것도 자랑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세상 사람의 위에 존재하는 분입니다.” “...” “그런 당신이 한 가지만은 포기해 주었으면 했습니다. 아르님 공작이라는 자리 말입니다.” 바이예 경은 갑자기 그 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손이 닿을 수 없는 거리였으나 눈앞에 있다면 목을 칠 수도 있을 자세였다. “용서하십시오. 저는 모로 씨의 계획에 동참했을 때 당신을 은밀한 곳에 유폐시키고 나서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이브노아 아가씨의 아드님이 아르모리크 경이 되리라 여겼습니다. 당신은 본디 자유로이 사는 것을 바라 왔으므로, 예전 조상들이 그랬듯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렸다고 공작께서 믿으시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때가 되면 당신을 풀어드리고 자유롭게 사시도록 하려 했습니다. 그때는 당신께서 돌아오더라도 후계자를 바꿀 수 없으리라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바이예 경은 고개를 숙였다. “누구도 데모닉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데모닉의 선의를, 데모닉의 수명을, 데모닉이 가문을 지키리라는 것을.” 조슈아는 대답 없이 바이예 경을 쏘아볼 뿐이었다. 서서히 바람이 일어 머리카락을 날렸다. “이 자리까지 올 마음은 없었습니다. 저는 어리석어 알지 못했습니다. 설마 모로 씨가, 당신을 죽이려 할 줄은, 당신을 대신할 무언가를 만들리라고는... 그러나 여기까지 제가 온 것은 결국 저만의 책임입니다. 모든 일이 마음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압니다. 이제는 멈출 수가 없습니다. 저는 끝까지 가야만 합니다. 용서하십시오.” 잠시 후 한 마디가 덧붙여졌다. “아니, 용서하지 마십시오.” 함성이 울려 퍼졌다. 쇠사슬이 당겨지며 미의 극치호는 갤리선 그늘로 빨려 들어갔다. 해적들이 칼을 뽑아들며 뱃전으로 밀려들었다. 뱃전이 충분히 가까워지자 몇 명인가 뛰어내릴 차비를 갖췄다. 이쪽 배의 높이가 낮아 두 뱃전이 맞닿을 수는 없었다. 조슈아는 벌떼 같은 그들과 마주 섰다. 위를 올려다보았다. 너희 따위를 피해 물러날 내가 아니라고 말하는 오만한 눈으로, 꼿꼿이 서 있었다. 그때였다. “저건?”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갤리에 탄 자들 몇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들의 주 돛 가운데에 낯선 무늬가 나타나 있었다. 검은 그림자가 되어 뚜렷이 찍힌 무늬는 키의 타륜 모양이었다. 돛과 함께 천천히 나부끼고 있었다. 조슈아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어떻게 저런 무늬가 갑자기 나타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몰랐다. 그러나 갤리에 탄 자들은 분명하게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 사이로 삽시간에 공황이 번졌다. “낙인이다!” “키의 낙인이다!” “어디지? 어느 쪽이야?” “저기다!” “서쪽이다! 바람 불어오는 쪽이다!” “빌어먹을 놈들아, 뭣들 하고 있나! 어서 배를 선회 시켜!” 세 척의 갤리 그늘에 가려진 미의 극치호에서는 서쪽에 무엇이 나타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미처 알아보기도 전에 소리가 왔다. 쿠쿵! 콰쾅! 천지를 가르는 굉음이 모두의 귀를 먹먹하게 했다. 한 번이 아니었다. 바다가 뛰놀고 돛대가 기울어졌다. 콰콰쾅! 벼락이 떨어진 듯 뱃머리가 쪼개어졌다. 찢어진 나뭇조각이 꽃잎처럼 날렸다. 사람이 뒤엉켜 바다로 떨어졌다. 채찍 같은 물보라가 뱃전을 후려쳤다. 콰쾅! 갤리의 뱃전에 몰렸던 자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기도 전에 대부분 아래로 추락했다. 미의 극치호의 갑판에 있던 자들도 바닥을 굴렀다. 기움 돛대와 연결된 보조돛 밧줄을 붙든 조슈아는 눈앞의 배가 마치 신기루처럼 부서지는 것을 보았다. 연기가 올랐다. 또 다른 갤러리에서는 불이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주 돛대가 부러지면서 남은 배의 잔해를 두 동강으로 갈랐다. 엄청난 파도가 일어 미의 극치호를 덮쳤으나 다른 두 배와 연결된 쇠사슬 덕에 뒤집히지 않고 무사했다. 갤 리가 가라앉기 시작했을 때 그 너머로 무엇인가가 보였다. 배의 윤곽이었다. 가까이... 아니 멀리 있었다. 그렇게 착각할 만큼 거대한 배였다. 미의 극치호는 연결된 쇠사슬 때문에 무너진 갤 리가 만든 소용돌이에 끌려들어가야 옳았으나 이번에는 언제 그랬는지 모르게 쇠사슬이 끊어져 있었다. 이윽고 조슈아는 다가오는 배의 측면을 두 층으로 메운 대포들에서 포연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지금까지 저렇게 많은 대포를 실은 배는 처음 보았다. 포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포가 다시 한 번 차례로 불과 굉음을 뿜어 냈다. 두 번째 갤리를 노린 포탄은 정확히 주 돛대를 부쉈다. 두 번째, 세 번째도 빗나가지 않았다. 바다 위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한 조준이었다. 두 번째 갤 리가 반파되었다. 바다에 떨어진 자들은 가라앉는 배의 파편들에 휩쓸리기도 했지만 상당수는 마지막 남은 배에 달라붙었다. 노를 잡고 기어올랐고, 몇 개인가 밧줄도 던져졌다. 그러나 마지막 배에 탄 자들 대부분은 저들의 돛을 살피고 있었다. 그들이 찾는 것은 낙인이었다. “키의 낙인이 찍힌 배는 달아나지 못하지...” 조금 더 침착한 자들은 미의 그치호와 연결된 사슬을 끊고 반격을 위해 배를 선회시켰다. 그러나 약한 바람을 탄 낯선 배는 놀랄 만큼 빠르게 다가왔다. 계속해서, 맞부딪칠 때까지. “어어어... ” 알아듣기 힘든 함성과 함께 두 배의 뱃전이 부딪치며 무수한 파편을 퉁겨 올렸다. 철판과 철추로 감싼 뱃전을 가진 낯선 배는 많은 타격을 입지 않았다. 갤리를 탄 자들도 힘을 내어 함성을 올렸다. 이제부터는 백병전이었다. 낙인에서 벗어났다. 시력을 보일 수 있다. 다른 갤러리에서 기어오른 자들도 다투어 뱃전으로 몰려갔다. 배가 한쪽으로 기울어질 지경이었다. 두 뱃전이 맞닥뜨린 곳에서 양쪽의 선원들도 맞닥뜨렸다. 첫 번째 불꽃이 튀었다. 검이 반사한 태양광이 흰 날벌레들처럼 날 뛰었다. 무기가 꺾인 자들은 바다로 떨어져 부서진 배의 일부가 되었다. 거대한 배끼리 엉킨 바다에서 미의 극치호는 방관자였다. 등 뒤에서 막시민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조슈아는 이상하게 긴장이 탁 풀렸다. “너, 저 배 아냐?” “아니.” 막시민은 햇빛 때문에 하얗게 된 안경을 들어 위를 보고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아 표정을 알아볼 길이 없었다. “난 안다.” “알아?” 처음에는 우세와 열세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조금 더 살피자 갤리의 선원들이 통솔을 잘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낯선 배에서 몰려나온 선원들은 대부분 갤리로 옮겨 탔다. 그러고도 계속해서 수백 명이 아닐까 싶은 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 명 한 명의 실력은 몰랐지만 흐름은 점차 뚜렷해졌다. 양쪽 다 해적이라 할 때 갤리의 해적들이 명령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싸우는 것에 반해, 새로운 배는 선원 각자가 훈련된 병사들처럼 움직였다. 조슈아는 그들 속에서 눈에 띄는 한 명을 발견했다. 지휘자다. 날이 휜 칼을 높이 올려 선원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검은 선장 모자에 낡은 해군 재킷 차림이었다. 다가오는 적 몇을 쓰러뜨리긴 했지만 일부러 맨 앞에 나서지는 않았다. 그럴 수 없는 것이, 그는 노인이었다. 모자 뒤로 묶어 놓은 흰 머리채가 때로 펄럭였다. 주위의 선원들이 모두 앞으로 달려 나갔을 때 늙은 선장은 조슈아 쪽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선장의 한 손이 모자챙으로 올라갔다. 끝을 잡고 슬쩍 올려 보였다. 스스로 깨닫기도 전에 조슈아의 입술이 꿈처럼 한 마디를 뱉었다. “할아버지?” 8. 바다 감옥 네가 몸을 씻고 좋은 옷 입기를 바란다. 수백자루 초를 켜고 밤새 기디리기를 바란다. 문앞에 꽃과 독을 뿌리고 향유와 기름을 붓고 수십 폭 흰 비단을 찢어 탄원의 깃발을 달고 검과 활을 손닿는 곳에 두고 베개를 모로 베어 벌레 날갯짓 소리에도 뛰어나오도록 도사려 마침내 내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었을 때 신방에 들듯 두근거리며 마주하기를 바란다. 나라는 자는, 생각만으로는 물리칠 수 없다.” 코츠볼트의 모닥불 앞에서 히스파니에 노인은 옛 이야기를 해 준 일이 있었다. 옛날에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옛날에 대한 이야기였다. 레코르다블의 용병 무리와 어울리다가 그들이 저지른 사고에 말려들어 함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히스파니에 자신은 죄가 없는 터라 해명만 잘하면 풀려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심문은 이튿날 있을 예정이었다. 좁은 감옥에서 용병들과 뒤섞여 짚더미를 베고 잠을 청했는데 밤중에 목이 말라 잠에서 깼다. 감옥에서 물을 구할 수 있을 리 없으니 꾹 참으며 뒤척여 눕는데, 주위의 기척이 이상했다. 일어나 앉아 보고서야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눕긴 했으나 실은 모두 깨어 있었다. 마음 편히 잘 수 있었던 사람은 자신뿐이었던 것이다. 그날 밤 히스파니에는 그들을 이끌고 감옥을 탈출했다. 그래서 그도 용병들과 똑같은 수배자가 되었다. “체, 그러야 영감은 가문에서 받쳐주니까 그까짓 수배쯤 내키면 언제든 풀 수 있다고 생각했을 거 아녜요?" 막시민은 바로 지분댔고, “이놈아, 그 시절 나는 형님하고 연락도 주고받지 않았어!” “어련히 그러셨을까. 뭐 급한 일 생기면 다 연락하게 돼 있지.” “막군, 뒤통수가 위험한데.” 막시민이 재빨리 피하자 헛손질을 한 히스파니에 노인은 소리쳤다. “요놈이!” 그 시절 이후 처음이었던가.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맨 먼저 할아버지는 막시민의 뒤통수를 딱 때렸다. 재빨리 피하기 전에. “요놈아! 하이아칸까지 기껏 보내놨더니 뭘 알아냈으면 소식을 보내야 할 거 아냐! 너 혼자 꿀꺽하고 마는 게냐?” “아, 영감 진짜! 연락하고 말고 할 새가 있었으면 나도 이 짓거리 안 하고 있죠!” “핑계는 대지마!” “영감이야말로 엄청 늦게 왔구만 뭘.” “온 것만으로도 감사해라, 이놈아!” 조슈아가 겨우 끼어들어 말했다. “그런데 할아버지... 이런 배도 갖고 계시고, 그러니까...” 히스파니에는 조슈아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왜, 안 어울리느냐?” “그게 아니라, 정말 놀랐어요.” 아닌 게 아니라 그 점은 막시민도 마찬가지였다. 젊었을 때 용병단과 함께 무얼 했다든가, 대륙 곳곳을 떠돌아 다녔다든가, 그런 이야기야 곧잘 해주던 히스파니에였지만 노인이 된 지금은 그저 방랑객, 또는 썩은 목장 주인 정도로만 생각해 왔었다. 그가 이렇듯 무장된 거대한 배와 잘 훈련된 선원 - 또는 해적 - 들을 거느리고 있는 선장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히스파니에 역시 가문의 전통대로 해적 선장이었던 것이다. 마일스톤도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키의 낙인에 대해서 들은 일은 있지만 그 배에 직접 타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낙인을 찍은 배는 용서 없이 부숴버린다던가, 그런 소문만 들었는데.” 그러자 막시민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죽댔다. “빌려왔죠?” 두 번째 위기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피했다. 히스파니에 노인은 곧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전당포에 목장 잡히고 빌려왔다. 이제 그 돈 갚아야 할 테니 네 녀석을 평생 부려먹어야겠다.” 막시민은 즉각 태도를 바꿨다. “아니 선장님, 이거 왜 이러십니까? 다 아는 처지에.” “넌 오늘부터 선실 청소다!” 막시민은 말 돌릴 곳을 찾아 두리번대다가 선원들 사이에 끼어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 리체를 발견했다. “아참, 저는 째는 리체라고 하는...” 그때 조슈아도 비슷한 생각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막 입을 떼려 했다. 둘은 거의 동시에 말했다. “우리가 책임져야 되는 아가씨예요.” “우리를 책임지고 있는 아가씨죠.” 그런 뒤 동시에 같은 말을 되물었다. “너 방금 뭐랬냐?” 히스파니에 노인은 리체를 바라보았다. 리체는 당황하여 얼른 외쳤다. “제가 여기 있게 된 건 단지 실수예요!” 히스파니에 노인은 리체를 빤히 보고 두 소년을 돌아본 뒤, 도로 리체를 보며 말했다. “거 실수 한번 거하게 했구먼.” “지, 지당한 말씀이에요!” “애도를 표하네.” “감사합니다!” 막시민이 말했다. “소개고 뭐고 우리들하고 있을 때보다 말이 잘 통하는데.” 그 말을 들은 리체는 어쨌든 인사를 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저는 리체 아브릴이라고 합니다. 저, 그동안 말씀은 많이 들었... 지 못했어요. 누구세요?” 막시민이 어깨를 움츠리며 대신 설명했다. “조슈아의 작은 할아버지.” 그러자 리체의 눈이 커졌다. “그럼 저기, 저, 조슈아처럼... 데모닉?” 할아버지는 리체의 표정을 훑어보더니 조슈아를 째려보았다. “너, 저 아가씨한테 평판이 형편없는 모양이로구나.” 조슈아는 계면쩍게 대꾸했다. “데모닉은 원래 평판 같은 건 포기하고 사는 거죠.” “너 때문에 나까지 평판이 나빠졌다.” “그거야 할아버지도 데모닉이니까...” 막시민이 조슈아의 대답을 가로채어 이죽댔다. “쉰 살은 차이나는 여자애의 평판은 얻어서 뭘 하시려고요?” 막시민이 두 번째로 뒤통수를 얻어맞을 위기를 피할 즈음 그들을 둘러싼 갑판 상황은 거의 정리되었다. 히스파니에가 데려온 세 명의 갑판장들 - 갑판이 워낙 넓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 의 지휘 아래 선원들은 죽거나 부상당한 동료들을 추스르고, 포로들을 묶어 모선으로 보내고, 갑판 위를 걸레질하고, 멀쩡한 무기들을 한곳에 모으고, 버릴 것들은 바다의 몫으로 보냈다. 세 군데나 구멍이 뚫린 미의 극치호는 항해 불능 상태였으므로 히스파니에 노인의 배 ‘악마를 뒤쫓다(Chasing Demon)' 뒤에 묶어 놓았다. 그런데 조슈아 일행과 할아버지가 서 있는 곳은 ‘악마를 뒤쫓다’ 호가 아니라 나포한 세 번째 갤리 위였다. 잠시 후 부선장과 두 명의 항해사, 그리고 포대장이 히스파니에 노인 앞으로 왔다. 히스파니에가 그들을 소개했고, 그들은 조슈아가 누구인지 알게 되자 정중히 인사했다. 조슈아가 일일이 악수를 청하자 몹시 송구스러워 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흔히 볼 수 있는 선원이 아니었다. ‘악마를 뒤쫓다’ 는 정말 악마를 붙잡을 수 있을 정도로 빨랐다. 그들이 지휘한 선원들은 군인만큼이나 명령 체계가 잘 잡혀 있었다. 페리윙클에서도 이 정도의 조직력은 본 일이 없었다. “아르모리크 경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감사해야 할 쪽은 납니다. 도움이 없었더라면 난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겁니다.” “저희는 선장님의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마지막이 포대장이었다. 히스파니에가 말했다. “포대장 노스트. 이 친구는 한 마디로 대륙 최고의 포술가지.” 히스파니에 노인이 빈말로 칭찬한 것이 아니었다. 포대장이 지휘한 포대 선원들은 두 대의 갤리선을 완파시키면서 미의 극치호에는 전혀 손상을 입히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갤리와 함께 침몰하지 않도록 쇠사슬을 끊어주기까지 했다. 강력한 파괴력은 물론이고, 상대가 감히 응사할 겨를도 없을 정도로 빠른 연사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정확할 수 있는지 정말 놀랐어요.” “거기에는 비밀이 있죠.” 고작 서른 몇 살로 보이는 노스트는 빈정대기 좋아하는 개구쟁이 같은 인상이었다. 조슈아는 더 묻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사실 그런 포격은 단지 포술이 좋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오셨어요?” 인사가 끝나고 포로를 심문하기 전에 조슈아가 물었다. 히스파니에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네가 신호를 보내지 않았느냐.” “아.” 조슈아는 바로 떠올리고서 싱긋 웃었다. “받아 보셨어요?” “그래. 그런 것을 만들 녀석이 너 말고 또 있겠느냐?” “그렇게 생각해 주실 줄 알았어요.” 막시민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신호라니?” 히스파니에 노인은 팔짱을 끼고 막시민을 내려다봤다. “소식 보낼 방법이란 다양하게 있는 게지. 네 녀석처럼 변명만 좋아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지금 잘난 체하는 거죠? 그러지 말고 대체 무슨 소리인지...” 히스파니에 노인은 막시민이 답답해하는 것을 일부러 무시하고 조슈아에게 말했다. “그 종잇조각이 내게 오기 전에 네 아버지의 손을 거쳤으니 지금쯤 그도 뭔가 생각하고 있을 것이야.” 조슈아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문득 물었다. “저, 그런데 할아버지는... 만나 보셨나요?” “누구를 말이냐?” “저, 그러니까...” 히스파니에 노인은 잠시 후 눈치를 챘다. “그래.” “어덯... 던가요?” 대답이 얼른 나오지 않았다. 조슈아가 재촉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노인은 코를 찡그렸다. “글쎄다.” 조슈아가 다시 묻기 전에 막시민이 끼어들었다. “가만있지, 여기서 만나기로 했다는 페리윙클의 선단이 영감네 배였다 이건가?” “그래. 나다.” “그럼 그 연락을 받고 온 거잖아! 그런 건데 조슈아가 보냈다는 신호란 건 또 뭐냐고!” 히스파니에 노인은 피식 웃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미리 알아내 해전 준비를 갖추고, 켈티카 근해에 와서 기다린 내가 아니냐. 더구나 너희를 공격할 배가 어떤 것인지 알 고 뒤따라 왔기에 수장되기 전에 네 녀석을 건졌지. 물론 수장됐더라도 네녀석 입은 가라앉지 않았을 테지만.” “그래요. 잘했다고요. 잘했는데, 정말 그 신호가 뭔지 말 안해줄 겁니까? 데모닉 아니면 못 알아듣기라도 합니까? 조군 너도 내 허락도 안 받고 혼자 저질렀다 이거지...” 두 데모닉은 막시민의 항의를 일부러 무시했다. 그때 듣고 있던 리체가 불숙 말했다. “아, 나도 그거 뭔지 알았어.” 그 순간 막시민의 표정은 정말 볼 만했다. 갤리 선미루 위에 조슈아와 히스파니에 노인이 섰다. ‘악마를 뒤쫓다’ 호로 건너가지 않고 남은 선원과 병사들이 뒤쪽에서 반원형으로 둘러싸다시 피 섰다. 막시민과 리체는 선원들 틈에 슬쩍 들어가 있었다. 전리품은 일부 ‘악마를 뒤쫓다’ 호로 옮기고 남은 것을 갑판 위에 몇 더미로 나눠 샇아 놓았다. 배꼬리에는 굵은 밧줄을 매어 아래로 늘어뜨렸다. 마지막으로 조슈아는 맨발이었다. 모든 것은 히스파니에가 시킨 대로였다. 그들 앞에 포로 세 명이 포박된 채 무릎 꿇려 있었다. 조슈아가 이름을 불렀다. “바이예 경.” 투구가 벗겨진 바이예 경은 아무 말 없이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얼굴이 묘하게 편안해 보였다. 조슈아는 그의 희끗한 머리카락을 바라보고 있다가 말했다. “아까 한 이야기 말인데요.” 대답이 없었지만 말을 이었다. “이해했어요.” 어느새 아버지의 친구를 대하던 존대가 돌아와 있었다. “전부 다. 마지막 말까지.” 바이예 경의 표정에 약간 화색이 돌았다. “그렇게 해 주십시오.” “아뇨.” 조슈아는 한 발짝 다가서더니 허리를 굽혀 얼굴을 바이예 경의 얼굴에 가까이 가져갔다. “그럴 수 없어요. 당신은 나를 배신하여 내 아버지의 믿음을 저버렸어요. 궁극적으로는 아버지와 아르님의 이름을 위한 것이었더라도 마찬가지죠. 난 당신에게 실망했고, 그래서 당신이 기대하는 대로 해줄 수 없어요.” “도련님...” “그런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법은 없단 말입니다. 아셨지요?” 조슈아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즉각 고개를 돌려 명령했다. “풀어 드려.” 선원 둘이 단검을 뽑아 바이예 경을 포박한 끈을 끊었다. 바이예 경은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도련님, 아니 아르모리크 경. 이런 식으로 당신의 목숨을 노렸던 자를 쉽게 용서해선 안 됩니다.” “그런 자의 소원은 들어주지 않는다고 말했고, 그런 자와 더 대화도 하지 않을 겁니다.” 조슈아는 정말로 고개를 돌리더니 물러나 버렸다. 히스파니에 노인이 나머지 두 명을 향해 다가서며 품에 안고 있던 지팡이를 꺼내어 짚었다. 지팡이 끝에는 진짜 구두가 붙어 있었는데 저렇게 되어 있으면 걷기에 과연 편할지 반대일지 언뜻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예전에 아르님 이름을 가진 자를 노리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줘야 한다고 말한 일이 있지. 다섯 해 전, 딸을 잃었던 아르님 공작에게 말이야.” 히스파니에 노인이 눈짓하자 선원들이 다가와 그들을 끌어 일으켰다. 이어 노인은 품에 안고 있던 지팡이를 꺼내어 바닥을 두 번 쳤다. 그리고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바이예 경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네가 날 알 것 같구먼.” “... ” “자네는 날 싫어했지. 그렇지 않나?” “... ” 등 뒤에서 무엇인가가 부서지는, 또는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갑판 위의 모든 사람이 그 소리를 들었지만, 이후에도 어떤 소리였다고 잘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이 한 번도 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파괴가 낸 소리였던 까닭이다. 갑판은 단단한 참나무의 결을 교차시켜 두 겹 이상 댔고, 선미루 갑판 밑은 일어서기도 힘든 좁은 공간뿐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밑에서 엄청난 힘을 가진 무엇인가가 갑판을 부숴 둟으며 솟아올랐다. 모두가 보았다. 그것은 손이었다. 인간의 손임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오른손이었다. 손은 히스파니에 노인의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다음 순간, 이쑤시개처럼 부러드려 내던졌다. “비켜!” 외친 사람은 막시민이었다. 그 외침을 신호로 갑판 위의 수많은 사람이 뒤엉켰다. 누군가는 달려들고, 누군가는 넘어졌다. 거대한 오른손에 이어 솟아난 왼손이 히스파니에 노인의 발목을 잡은 것과, 무리 속에서 누군가가 튀어나가 그 손에 발차기를 날린 것은 동시였다. 다리가 풀려나는 순간 노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민첩함으로 한 바퀴 구른 히스파니에 노인이 고개를 들어 소리쳤다. “조슈아!” 걷어찬 사람은 조슈아였다. 그러나 멋지게 해낸 것과는 반대로 맞은편 갑판에 내려서는 순간 그는 심하게 비틀거렸다. “아, 조금 짧았네...” 히스파니에 노인의 다리가 왼손에 잡혔던 것은 운이었다. 지팡이에 이어 오른손에 잡혔던 자는 지팡이처럼 부러졌다. 누군가가 활을 소았지만 오른손은 그마저 퉁겨내 버렸다. 리체는 선원들의 손에 떠밀려 난간까지 밀려갔다가 겨우 몸을 추스르고 앞을 보았다. 그리고 선원들이 어느새 끝에 갈고리가 달린 굵은 쇠사슬 같은 무기를 각자 들고 있는 것을 알았다. 곳곳에 쌓였던 전리품 더미 밑에 숨겨 두었던 것을 꺼내든 것이다. “그간 여행은 즐거웠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들이 둥글게 둘러싼 선미루 중앙에는 대포라도 맞은 것처럼 부서진 갑판, 그리고 리체가 결코 모를 수 없는 자가 나타나 있었다. 모자와 가면 아래 흔들리는 금발과 흰 턱.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많은 사람이 함께 있어서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줄곧 두려워하며 쫓기고, 그들만의 힘으로 힘겹게 벗어나곤 했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것들 속에서 뚜렷하게 잘라 말할 수 없는 또 다른 분노가 한 가닥 솟아올랐던 것 같았다. 머리를 핑 돌게 만든 그 기분이 무엇이었다고, 왜였다고 잘라 말할 수가 없었다. 리체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돌아보며 전리품 더미 속에서 검을 하나 집어 드는 순간이었다. “여행지도 정할 수 없는 네 녀석보다는 훨씬 더.” 막시민이 대꾸를 날리는 순간 그자의 몸이 용수철처럼 솟구쳤다. 목표를 눈치 cos 수 명의 병사들이 조슈아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창검도, 방패도 소용없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움켜잡아 부러뜨리고 내던지자 순식간에 대열이 무너졌다. 다섯 명가량이 사방으로 날려가 난간에 처박히고, 심지어 바다로 떨어졌다. 이제 곧 눈앞이었다. 누군가가 앞을 막았다. 바이예 경은 손발이 자유로웠다. 무기 또한 전리품 더미 속에 얼마든지 있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곧장 그자의 왼손을 향해 검을 그어 내렸다. “!” 첫 상처가 그자의 손에 생겨났다. 한패라고 생각해서 방심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자가 움찔하는 순간이었다. 리체가 등 뒤에서 오른쪽 어깨를 푹 찔렀다. 실로 단 한 번이었을 기회였다. 칼끝이 반 뼘 넘게 들어갔다.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자신이 입은 상처를 이해하려는 것처럼. 맹수의 침묵이었다. 몇 초가 흐르고 그는 고함을 내질렀다. “너희 따위가!” 목구멍 속에서부터 으르렁대며 튀어나온 그 목소리는 조금 전 우스울 정도로 가볍던 말투와 판이하게 달랐다. 리체가 전에 말에 묶인 채 끌려가며 들었던 목소리도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자신에게는 여러 가지 목소리가 있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너희 따위가... 나를 건드릴 수는 없어!” 차고 있던 검을 왼손으로 뽑아든 그자는 리체 쪽을 지르면서 발을 재빨리 움직여 바이예 경의 검을 움켜쥐었다. 검이 으스러진 것과 물러서려던 리체의 팔이 베인 것은 동시였다. 뒤이어 일어날 일이 무엇일지, 그자를 처음 본 사람들도 알 수 있을 순간이었다. 조슈아는 눈을 잠시 감았다. 다음 순간, 조슈아는 창 한 자루를 빼앗아들더니 그의 팔로는 결단코 불가능할 힘으로 곧장 내던졌다. 창은 그자를 향해 똑바로 날아들었으나 가슴 언저리에 창끝이 닿으려 할 때 오른손이 마치 방패인 양 쳐내버렸다. 창이 쇄도한 것도, 손이 쳐낸 것도 모두 순식간이었다. 조슈아는 다른 창을 집어 들었다. 한 번도 배운 일이 없는 동작을 취했고, 바로 내질렀다. 빗나가자 즉각 빼며 한 번 더 찔렀다. 또 한 번, 다시 한 번. 소공작이 무예를 익히지 않았다고 알고 있던 선원과 병사들은 크게 놀랐다. 찌르는 쪽도, 피하는 상대의 몸놀림도, 눈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다. 막시민은 이런 상황을 예전에 본 일이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 듯했던 그때와는 달랐다. 다르다는 건 좋은 징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친 기색도 전보다 빨리 나타나는 것은 낭패였다. 조슈아가 몇 번인가 비척거리다가 다시 정신을 가다듬는 것이 느껴졌다. 어떻게 하는 것인 지 몰라도, 잠깐 틈이 날 때마다 어떤 과정을 통해 힘을 불어넣고 있었다. 위태위태했다. 그 기색을 알아본 사람은 막시민만이 아니었다. “물러나거라!” 히스파니에 노인의 외침과 함께 조슈아는 창을 바닥에 찍으며 몸을 솟구쳐 뒤로 물러났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선원들이 일제히 사슬을 휘두르며 갈고리를 던졌다. 맨 먼저 날아든 것은 그자의 오른손에 걸려 간단히 바스러졌다. 두 번째, 세 번째도 쇠사슬이 끊겼다. 동시에 날아든 네 번째는 왼손으로 잡아채려 했으나 조금 전 바이예 경의 검에 입은 상처 때문에 놓치고 말았다. 다섯 번째 갈고리가 드디어 그자의 몸을 한 바퀴 감으며 돌아왔다. 여섯 번째, 일곱 번째도, 다음은 그자의 몸을 한 바퀴 감으며 돌아왔다. 여섯 번째, 일곱 번째도. 다음은 그자의 오른쪽 상박을 노렸다. 다시 몇 개가 더 끊기고 대신 수십 가닥의 사슬이 그의 몸을 친친 감았다. 선원들은 쇠사슬을 한 바퀴 돌려 얽으며 갈고리를 갑판 바닥에 박아 넣었다. 난간에도, 계단에도 박았다. 그자는 오른손이 닿는 곳의 사슬들은 즉시 끊어냈다. 그러나 어깨와 상박이 사슬에 얽혀 손이 닿지 않는 곳이 더 많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사슬을 겹겹이 두른 채로 그자는 조슈아를 쏘아보았다. 나아가려 했다. 나무 긁는 소리와 함께 갈고리 몇 개가 갑판에서 반쯤 튀어 나왔다. “다음!” 히스파니에 노인이 외치자 선원들은 배꼬리에 묶어둔 밧줄을 잡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아래에는 작은 배 한 척이 기다리고 있었다. 몇 명이 휘청거리는 조슈아를 번쩍 들다시피 해서 그리로 데려갔다. 조슈아는 전에도 그랬듯 쓰러질 것처럼 지쳐 있었다. 리체의 손목에서 팔꿈치 쪽으로 길게 그어진 상처는 생각보다 깊어서 많은 피가 흘렀다.다만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보다도 그녀가 얼마나 숨을 씨근거리는지 진정시키기가 힘들었다. 겨우 부축해서 배로 내렸다. 막시민과 히스파니에 노인을 비롯한 사람들이 모조리 갤리를 떠나자 남겨진 자는 쇠사슬에 결박된 채 갑판에 매인 한 명 뿐이었다. 포효에 가까운 신음성이 솟아났다. 그는 사슬을 끊으려 했다. 자신의 힘으로 갑판에 박힌 수십 개의 갈고리를 뽑아내려 했다. 오른손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그러나 힘을 넣으려 할 때마다 어깨에 입은 상처에서 솟아나는 통증이 집중을 흩어 놓았다. 통증 따위 무시할 수 있다고 여겼지만, 아니, 실은 그는 자기 몸의 변화와 고통에 섬세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자는 사력을 다했다. 갈고리가 박힌 갑판 나무들이 꺾이며 일어나고, 선미루 전체가 부서져나갈 듯 뒤흔들렸다. 탈출한 자들이 탄 배가 ‘악마를 뒤쫓다’ 호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옮겨 타고 나자 기다리고 있던 포대장 노스트가 신호를 내렸다. 열기가 채 식지 않은 포열이 차례로 노호를 뿜었다. 배에 오른 사람들은 난간에 붙어선 채 포탄이 날아가는 방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두 개가 배쌈에 박히고, 또 하나는 노를 부러뜨리며 박혀 용골에 상처를 입혔다. 뱃전을 부순 포탄은 곧장 선실까지 날아갔다. 활대가 부러져 떨어지고, 돛이 풀려 늘어지며 펄럭거렸다. 선미루는 물결에 밀려 왼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들이 두고 온 자가 보였다. 그 자는 쇠사슬을 몇 가닥 더 끊었다. 그러나 배는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포탄을 얼마나 싣고 온 것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흡사 배 한 척을 가루로 만들려는 듯했다. 어느 순간 번진 불이 선마루를 휩쌌다. 아직도 보였다. 조슈아는, 막시민과 리체는, 줄곧 그를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자신을 보는 그자의 눈이 보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가면 속으로, 늘 가면과 모자에 가려져 있던 눈... 등 뒤에서 히스파니에 노인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조슈아는 흠칫 놀라며 돌아보았다. “끝났다.” 할아버지의 표정은 담담했다. 조슈아는 입술을 약간 떨었다. “어떻게 이런 계획을 세우셨죠? 저자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것을 조사하셨던 건가요?” “너를 추적했지. 네게 있었던 일은 거의 알고 있다. 그러나 조사하기 전부터 저자가 어떤 자인지는 알고 있었어. 많은 수로 밀어붙인다고 쉽사리 이길 수 없는 자라는 것도. 어떻게 희생을 줄일 것인가 생각해 보았지.” “처음부터 저자를 알고 계셨다고요?” “저자는 용병들의 세계에서 네 생각보다 유명하다. 비견할 자를 찾기 힘들지.”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저자보다 더 강한 암살자가 있을 거라고 믿고 싶지 않았어요.” 자칭 ‘샐러리맨’. 세자르의 집에서 처음 만났던 날 그와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후 몇 번인가 조슈아는 꿈속에서 보았다. 저자에게 했던 이야기 그대로 죽어 있는 자신을.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데모닉답게 당시 그 장면을 생생하게 머릿속에 각인시켰던 탓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 광경을 볼 때마다 그는 마음속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이제 그만, 그만둬, 그만두고 싶어. 그의 발목을 잡던 그림자는 풀렸는가? 조슈아가 다시 돌아보았을 때, 선미루는 가라앉고 없었다. 9. 가장 두려운 대면 “레코다블 사람들은 밤에 거울을 보는 것을 금기로 여긴다. 낮의 거울은 그가 지금 가진 얼굴을 비추지만 밤의 거울은 미래나 과거의 얼굴을 비추는 까닭이다. 이른 밤에는 가까운 과거나 미래가 비치기 쉽다. 현재의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인 까닭에 비춘 자도 그 얼굴이 과거나 미래인 것을 알지 못한다. 밤이 깊어질수록 먼 미래나 먼 과거의 얼굴이 나타난다. 태어나기 전의 자신이 비쳤을 때, 거울 속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때는 거울을 땅에 파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을 낳은 태에 액이 닥치게 된다. 죽은 뒤의 자신이 비쳤을 때 어떤 모습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살아남은 자가 아무도 없는 까닭이다.” 저녁 아홉 시의 잎은 노랑과 검정이었다. 강물 속에 그림자를 너울대던 램프에 덮개가 씌워지자 숲은 캄캄해졌다. 윌헬미나 숲은 강변을 따라 띠처럼 이어져 있었다. 귀족들의 산책로로 이름 높았지만 밤이 된 지금은 바람소리조차 가라앉아 고요했다. “오늘은 반드시 물어야겠소.” 테오는 여름인데도 검은 코트 차림이었다. 칸카가 말 두 필을 이끌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그곳까지도 이야기는 충분히 들릴 터였다. 강둑을 따라 세워 놓은 목책에 란지에가 걸터앉아 있었다. 이날 그는 농부의 아들처럼 거친 차림새였다. 흰 무명 웃옷에, 길어서 발목을 걷은 낡은 바지에는 흙이 말라붙어 있었다. 달을 등지고 앉은 그는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금빛 머리만 후광처럼 빛날 뿐이었다. “나를 위해준비됐던 지원책이 대폭 축소된 것을 다 알고 있소. 망명 의회의 명령이오? 아니면 돈 크레아의 의견이오? 그대들은 내가 모르는 새로운 사실을 알고 있는 거요? 모르고는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소. 정보가 있다면 날 배제할 생각은 마시오.” 말을 맺은 테오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해 신경질적으로 두 손을 만지작거렸다. “아뇨. 반대입니다.” 낮은 목소리가 들렸을 때 테오의 손이 뚝, 하는 소리를 냈다. “무슨 뜻이오?” “정보로부터 우릴 배제시킨 것은 당신입니다. 모로 씨.” 란지에는 한쪽 발을 내려 흙바닥을 밟았다. 등 뒤의 강에서 여름밤의 습기가 올라왔다. “내가 숨겼다고? 무엇을?” “난 당신에게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란지에는 역설적으로 답하며 신 밑창으로 천천히 흙바닥을 문질렀다. 잔돌멩이들이 흙 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테오는 란지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로서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당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시오?” “내가 알지 못한다고 믿는 것은 뭡니까?” “그건...” 말이 말리는 것을 느끼며 테오는 입을 다물었다. 이 자는 정말로 테오가 숨기고 있는 것을 알아냈을까? 아니면 조금 낌새를 챈 것으로 넘겨짚어 보는 것뿐일까? 이윽고 테오는 다소 침착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뿐이오? 우리가 준비한 중대한 계획을 철회해버린 까닭이?” “철회했다고 하진 않았습니다.” “그럼 미룬 거요?” “우리 계획에는 시한이 있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말이 한 차례 낮게 울었다. 칸카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9월 27일.” 앞으로 한 달 남짓이었다. 란지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길지 않은 기한이었습니다. 성공시키려면 모든 계획에 차질이 없었어야 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얽힌 일에서 작은 실수는 흔히 일어납니다. 망명 의회에서는 그런 것을 고려하며 계획을 짭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가려질 수 있었습니다. 작은 실수가 번져 계획의 방향조차 어긋나게 하기까지는.” 테오는 상대를 노려보았다. “내가 잘못을 했다고? 내가 그르친 일이 무엇이오? 분명하게 말해주길 바라오.” 란지에는 강 쪽을 돌아보고 다시 테오를 보았다. “야심은 냄새를 풍깁니다. 생선처럼. 생선을 옷깃 속에 오래 감출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행일까지 길게 끌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폰티나가 냄새를 맡지 않기를 바랐지만...” “바랐지만?” “지난번 아르님 연회에서 그가 냄새를 맡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폰티나의 정보망은 귀족들 사이에서만은 나이트워크를 능가할 정도로 탁월합니다. 그런 정보망의 더듬이에 최근 귀족 사회에서 주목을 받게 된 당신의 존재가 발견됩니다. 정통 후계자인 소공작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당신이 추구하는 것이 가망 없는 야심이라는 점을 느끼고 그는 의구심을 품었을 겁니다. 당신을 지원하는 보이지 않는 세력은 무엇일까 하고. 그 정체를 알아낼 생각으로 그는 딸을 아르님 공작에게 보내어 모종의 연극을 해 본 것이지요.” “그게 연극이라고?” “손해일 것이 뻔한 결혼을 추진할 폰티나가 아니니까요. 그날은 딸을 소공작에게 줄 수도 있다는 연극을 해 보여서 아르님 공작이 불안정한 데모닉인 소공작 말고 당신의 아들을 후계로 택할 생각이 혹 있는지 떠 본 겁니다. 두 집안의 우의를 과시하여 이간질 음모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도 있었겠지요. 동시에 그걸 보는 당신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아볼 심산이었겠는데, 안됐지만 당신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테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만치에서 칸카가 말을 달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숲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폰티나는 딸을 통해 그때까지 숨겨져 있다시피 했던 소공작을 관찰하고 결론을 얻었을 겁니다. 아르님 공작이 원하는 후계자는 소공작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당신을 후원하는 자는 아르님 공작이 아니며, 심지어 아르님 공작은 당신을 홀대하고 있다는 것도, 귀족들의 세계는 폰티나가 가장 잘 아는 곳이니 그곳에 당신을 지지해 줄 누군가, 다시 말해 숨겨진 후견인이나 친척 따위가 없다는 것도 곧 파악했을 겁니다. 그리하여 귀족 사회에서 갑자기 관심을 끄는 당신을 보았을 때 그가 최초로 떠올렸던 의심이 현실화 됩니다. 당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귀족 세력은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다른 세력과 연결되어 있다고. 연결의 끝이 그가 늘 색출하고 싶어하는 자들, 공화파 세력과 닿아 있을 수 있다고 결론 내리는데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겁니다.” 란지에는 평이한 어조로 말을 마쳤다. 그러나 테오는 목 뒤에서 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더위 탓만은 아니었다. “그래... 그런 일이 모두 일어났다고 친다 해도, 그게 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근거는 어디 있소?” 란지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는 책임 소재를 따지고자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런 일들로 인해 당신이 귀족 사회에 진출하도록 돕는 일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당신도 이해하리라 믿습니다. 사실, 이런 설명은 좀 더 나중에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일일 발생하여, 오늘 만나 이야기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란지에는 바지 주머니에서 절반가량 찢어진 쪽지 한 장을 꺼내 건넸다. 거기에는 휘갈긴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켈티카 상륙 성공함. 나포선의 공격은 구원자가 나타나 무산됨. 이틀 안에 성 도착 예정. “이건...” 테오는 말을 하려다 멈추고 어깨를 한 번 부르르 떨었다. 쪽지가 의미하는 바를 알아채지 못할 그가 아니었다. 켈티카 만에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 준비했던 나포 시도였다. 하늘을 나는 배를 가진 조슈아 일행이 나타날 곳은 오직 그곳뿐이라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그들은 나타났다. 실패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구원자라고? 대체 누가 나타났단 말인가? 정작 해전을 준비했던 테오에게는 아직 소식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란지에는 이미 해전의 결과를 알리는 쪽지를 쥐고 있었다. 테오는 새삼 나이트워크의 정보력에 두려움을 느꼈다. “해전은 20일에 있었습니다. 앞으로 이틀이라는 계산이 정확하다면 그들의 도착은 내일입니다.” 테오는 갑자기 폭력적인 분노에 사로잡혔다. 그는 성공에 가까이 다가갔었다. 그가 놓친 것은 단 하나, 살아 있는 조슈아뿐이었다. 보호해 줄 사람 하나 없는 소년을 없애는 것쯤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금방 없애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켈티카에 나타날 지경까지 손스지 못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 블루 코럴 섬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고, 대륙 최고급의 암살자를 고용했었다. 바이예 경을 설득하여 켈티카 만에서 해전까지 준비했었다. 그 모두가 실패로 돌아가고 그가 놓쳤던 작고 사소했던 한 가지가 이제 내일이면 그의 눈앞에 나타날 예정이었다. 나타난다면, 그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가? 테오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두려워했던 말이 흘러나오는 란지에의 입술을 보았다. “두 소공작이 마주하게 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어떻게...” 테오는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조금 전부터 예감하고 있었다. 나이트워크는 그의 상상을 뛰어넘는 조직이었다. 이제 받아들이는 수박에 없었다. “어느 족이 진짜인지 알고 있소?” “이제부터 성으로 찾아올 자가 진짜겠지요.” 테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자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아니라면, 당신이 가짜의 방문을 그리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왜 내가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오? 그를 둘로 만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의 친구였겠지요. 내가 본 일이 있는.” “...” 평소 마음을 결정해두지 않았던 까닭에 빈틈을 내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 일만은 밝혀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테오의 실수였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더라면 이 순간 좀 더 발뺌을 할 지, 솔직하게 밝히고 협조를 구할지 결정해 두었어야 했다. 그러지 못했기에 그의 불안정한 태도는 이미 모든 것을 폭로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당신의 확신에 대한 근거를 들어보고 싶소. 당신이 무작정 날 의심했을 거라는 생각은 나를 불쾌하게 하오.” 란지에는 냉담하게 미소 지었다. “가짜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면 당신 곁에 두는 것이 논리적이란 점도, 하이아칸에서 은밀히 무대에 올랐을 정도로 자유분방한 성품인 소공작이 외출조차 없이 줄곧 성에만 머무른다는 점도, 먼 곳의 소공작이 쫓기고 있다는 점도, 모두 고려의 대상이 됐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란지에는 눈을 내리깔며 테오의 손을 보았다. 신경질적으로 깍지를 꼈다가 풀었다 하는 모습이 비쳤다. “그날 파티 석상에 당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죠.” 그때 칸카가 몸을 움직여 기척을 냈다. 둘 다 돌아보지 않았으나 칸카는 조금 움직여 둘에게 다가왔다. “당신은 소공작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르님 공작은 그런 당신을 비상식적으로 배제시킨 채로 가문의 연회를 열고, 소공작이 폰티나 양을 만나도록 했습니다. 만일 소공작과 폰티나 양의 결혼이 성사된다면 당신의 아들은 입지가 크게 악화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입장에서 그런 행사는 어떻게든 방해를 했어야 하겠죠. 그런 당신을 멀리 보내 놓고 두 집안의 우의를 다지고자 한 아르님의 의도를 생각해 보면, 심지어 아르님이 당신이 벌인 일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에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테오의 손가락에서 다시 한 번 뚝, 하고 꺾이는 소리가 났다. “당신은 언제부터 알고 있었소?” “요점은 그게 아니겠죠.” “거짓말을 하려 한 것이 아니오.” 달이 기울어지며 란지에의 얼굴이 조금 드러났다. “어떤 이유에서였든 당신은 우리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석연치 않은 설명을 들으며 조사할 필요를 느꼈고, 그래서 행한 것뿐입니다. 당신이 성공했더라면 우리로서도 이 일을 추궁할 가치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당신이 숨긴 일은 우리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묻지 않을 수가 없군요.” 달빛을 받은 입술이 얇게 다물렸다가, 열렸다. “이 시점에서 상황을 뒤집을 당신의 대안은 무엇입니까?” “...” 테오의 머릿속은 뜨거웠다. 그는 조금 전부터 한 가지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애니스탄을 설득해야만 했기에. 애니스탄은 이미 그와의 대화를 중지했다. 샐러리맨, 그자의 손을 강화시켜주라는 주문을 마침내 들어준 뒤부터였다. 애니스탄이 비취반지 장권 구석의 집으로 들어가 버린 후로 테오도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애니스탄의 성격으로 볼 때 테오의 일을 아예 그르쳐버리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내버려 두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애니스탄이 사로잡혀 있는 문제들에 그는 관심이 없었다. 비효율적인 설득보다 시간이 나은 약이 될 듯싶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애니스탄이 필요했다. 어렵다는 생각과 안 될 거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교차하며 점차 더한 열기를 가져왔다. 더 생각하는 것조차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테오는 불쑥 말했다. “대안이 있소.” “그렇습니까? 설명해 주십시오.” “9월 27일의 결행... 그걸 당기겠소. 내일 새벽으로.” 란지에의 고개가 약간 움직이다가 멎었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렇소. 도움은 필요 없소. 나 혼자 해낼 생각이오.” “...” 란지에는 처음으로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테오는 그 사실이 만족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잘못된 일들을 모두 내 탓으로 돌리는 인상을 받은 것도 사실이오. 내가 달가운 기분일 수 없었다는 것도 이해하리라 믿소. 그러나 그런 책임 소재는 당신이 말했듯 결국 작은 일들이오. 그러니 나는 다른 방법으로 내 가치를 증명하겠소. 당신들의 의심은... 새로운 단체에 들어가야만 하는 나 같은 자의 숙명이라고 일단 받아들여 보겠소. 일이 성공하고 나면, 이런 일들도 사과를 받을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믿어 볼 생각이오.” 란지에는 다시 강 쪽을 바라보았다. 강 너머에서 한두 개 보이던 불빛들은 어느새 사라진 뒤였다. “성으로 돌아올 소공작의 일은 어찌할 생각입니까?” “다 계획에 들어 있소. 그는 살아남든 살아남지 못하든 다시는 귀족 사회에 나타나지 못할 것이오.” 란지에는 난간에서 내려섰다. “내일 오전 8시, 비취반지 성의 숲에서 늘 빠져나오던 길에 마차를 대기시키겠습니다.” 테오는 미간을 찡그렸다. “탈출 계획은 필요 없소.” “준비하는 것이 우리의 방식입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뵙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란지에는 몸을 돌렸다. 발밑에 숲 안족으로 이어진 오솔길이 있었다. 칸카 앞을 스쳐갈 때 칸카는 란지에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잠깐이었다. 란지에는 곧 숲 그늘로 사라졌다. 테오는 강을 바라보며 혼자 생각을 거듭했다. 칸카가 다가왔을 때에야 겨우 뒤를 돌아보았다. 테오는 상대가 뭐든 말할 때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돌아간다.” 은사시나무 숲이 뻗어나갔다. 나무와 나무가 겹쳐지며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은색이 감도는 줄기마다 새겨놓은 듯 또렷한 눈들이 이어졌다. 흙은 푹신했다. 발밑에 소복한 패랭이꽃 무리가 눈에 띄어 무심코 비켜나고 보니 다른 곳도 쉽사리 디딜 곳이 없었다. 클로버 방석, 박하꽃, 줄딸기 덩굴. 밤 잊은 새 소리가 멀리서, 또는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흰 별들이 나뭇잎 사이로 숨바꼭질하며 흘러갔다. 산속 숲이 아니었다. 강을 따라 뻗어 있다는, 또는 호수를 둘러쌌다는 숲도 아니었다. 이 아름다운 숲을 한 사람이 가졌다. 그가 허락한 사람만이 이 숲을 거닐 수 있었다. 비취반지 장원의 사냥터, 울새의 숲이었다. “왜 비취반지야?” “숲이 반지 모양이라서.” “이런 숲이 성을 빙 둘러싸고 있는 거야?” “그런 셈이지.” 리체는 싸맨 팔을 자꾸만 문질렀다. 여름이라 붕대로 감아 놓은 팔 안쪽은 덥기도 하고 가렵기도 했다. 그렇게 몇 걸음 더 가다가 말했다. “대단하네. 귀족들이란.” 조슈아는 대답하지 않고 앞서 걸어갔다. 성이 가까워질 무렵부터 조슈아는 말수가 적어졌다. 이틀 전, 해전이 끝난 뒤 조슈아 일행은 히스파니에 노인이 불러온 다른 배에 옮겨 타고 은밀히 블루엣 강으로 들어갔다. 미의 극치호는 대파되어 항해가 불가능했고, 해적으로 알려져 있는 히스파니에 노인의 배 ‘악마를 뒤쫓다’ 호는 켈티카 입항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마일스톤은 항구에서 떠났다. 대신 히스파니에 노인이 그들과 동행했다. 병사들도 데려갈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현상금이 걸려 있는 해적들이었다. 그렇지 않은 자들로 고른다 해도, 무장한 그들을 데리고 켈티카에 들어가면 눈길을 끌게 될 것이고 심하면 왕국군의 조사를 받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일단은 눈에 띄지 않고 비취반지 성까지 안전하게 가는 것이 중요했다. 가서 아르님 공작을 만나면 병사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테오가 도망쳐 버리면 뒷일을 남기게 되어버린다. 이 때문에 히스파니에 노인은 포로들이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라고 엄명을 내겼다. 바다 위에도 생존자가 남아 있는지 철저히 수색했다. 새벽녘, 성 근처에 이르러 히스파니에 노인은 조슈아, 막시민, 리체와 헤어졌다. 노인은 아침 일찍 성을 방문하여 아르님 공작을 만날 계획이었다. 조슈아의 일행도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들어가도 좋았을 터였다. 그러나 조슈아는 완강히 지금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노인은 위험을 걱정했으나 끝까지 말리지는 않았다. 조슈아가 왜 그렇게 고집하는지 모르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입구를 통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언제 나갔는지 보지 못했더라도 아르님 소공작이 들어가는 것을 막을 경비병은 없었다. “조군, 하나 묻자.” “응.” 막시민은 조슈아에게 서라고 손짓했다. 어둠 속이라 알아보기 힘들었을 텐데 신기하게 조슈아는 걸음을 멈췄다. “너 준비는 됐냐?” “...” 조슈아가 돌아섰다. 잠시 후 막시민이 지껄였다. “젠장, 어두워서 네놈 표정이 보여야 말이지.” 막시민은 어둠도 닦아 낼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안경을 벗어 옷깃에 닦았다. “어떤 준비 말이야?” 되묻고 있긴 했지만 정말로 묻는 기색은 아니었다. “진실과 마주할 준비지. 네가 그렇게 기를 쓰고 도망 다녔던 진실. 그걸 보러 가는 거 아냐.” “바이예 경이 해 준 이야기면 충분했어.” “거 참 내가 기껏 얘기해줄 때는 무시하다가 그 아저씨가 그렇다고 하니까 바로 납득이 됐냐? 난 가끔 네 녀석 머릿속은 뭘로 만들어졌기에 쓸데도 없는 것들은 모조리 기억하는 주제에 쓸데 있는 건 도무지 주입이 안 되는지 궁금하더라고.” 듣다 못한 리체가 말했다. “그만 해. 조슈아도 기분 좋을 리 없잖아. 누나와 결혼했던 사람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는 기분도 절대 이해 못할 건 아니잖니?” 막시민은 고개를 저었다. “그 기분을 모른다는 건 아니지. 내가 저 녀석을 한두 해 본 것도 아니고.” “그럼 뭘 말하려는 건데?” “근원. 그런 생각의 근원이 됐던 생각. 매형이란 작자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던 까닭.” 바람이 한 번 지나가고 조슈아가 입을 열었다. “그래. 누나 때문이지.” 새삼스런 얘기에 리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이 이어졌다. “누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으리라고 믿었던 사람이었어. 나보다도, 부모님보다도 더. 그런데 그 사랑이 없었던 거라면 누나가 살아있었던 보람은 뭘까.” 리체는 혼란스런 표정이 되었으나 곧 조슈아를 달래려 했다. “네 매형이 널 미워한다고 해서 누나까지 미워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잖니?” 막시민이 끼어들었다. “아니. 그게 아냐.” 막시민조차 말을 잇기 전에 잠깐 망설였다. 조슈아가 고개를 돌려버리고 나서야 말이 이어졌다. “본체의 정체 말이야... 저 녀석 누나가 아닌가 싶단 말이다.” 리체의 발밑에서 바스락 소리가 났다. 한참 만에 대답이 들렸다. “저기, 누나는... 데모닉이 아니었던 것 아니었어?” “나도 모르겠다. 바보와 천재는 종이 한 장 차이라잖냐.” 리체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을 때 조슈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인형을 만나기가 더 두려워졌어.” 얕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또 다른 나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어려웠지. 그런데 그게 심지어...” 조슈아는 말을 뚝 그치더니 잠시 후 말했다. “그만하자. 지금은 정리가 안 돼.” 다시 걷기 시작하자 막시민도 더 말을 걸지 않았다. 조슈아와 약간 떨어졌을 즈음 막시민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단순하게, 자신과 똑같은 놈을 봐야 하는 공포만 해도 시시할 리 있겠냐. 이제부터 들어갈 저 성에 괴물이 앉아 있다고 느껴진대도 놀랄 일이 아니잖아. 근데 그걸 왜 감추려고 하냐고. 빌어먹을 곰팡내 자식.” 정문 통로를 거치지 않고 숲으로 에둘러 가는 길을 조슈아만큼 잘 알고 있을 사람도 적었다. 어린 시절에 이미 샅샅이 탐험해 본 숲이었다. 길은 여전히 눈에 익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깊이 들어온 것은 몇 년 만이라 그 사이 나무는 자라고 풀은 시들어 숲은 변했다. 그렇더라도 변치 않은 은사시 나무 숲을 죽 따라가면 무엇이 나올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참나무 몇 그루가 나타나자 조슈아의 걸음이 빨라졌다. 어느 순간, 조슈아는 손을 내저어 따라오던 사람들을 멈추게 했다. “여기는 밟지 마.” “거기 뭐가 있는데?” 다른 땅고 별달라 보이지 않는 좁은 공간이었다. 일부러 나무들 뒤로 돌아가던 막시민이 미심쩍은 표정이 되어 돌 하나를 집어 들더니 그 위에 던졌다. 푹, 하고 아래가 꺼졌다. “어?” 리체의 눈이 동그래졌다. 막시민도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누가 이런 걸 파 놓은 거지? 우리가 이리로 올 것을 알고 있는 자가 있나?” 조슈아는 묵묵히 꺼져 들어간 바닥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허방다리지 뭐.” “그걸 누가 파 놨냐 그 말이잖아.” 조슈아는 다시 걷기 시작하면서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내가.” 커튼이 흔들리자 공작부인은 무심히 창을 바라보았다. 동녘이 희뿌옇게 밝아올 무렵이었지만 숲으로 둘러싸인 성은 아직 어두웠다. 하녀와 하인들 정도가 일어나 아침을 준비할 시각이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저녁 일찍 침대에 들곤 하는 공작부인은 종종 이런 시각에 깨어났다. 이럴 때면 말상대할 누군가를 일부러 깨우는 대신 혼자 소일거리를 하며 날이 밝기를 기다리곤 했다. 남들 앞에서라면 악기를 연주한다든가 하는 좀 더 고상한 소일거리를 택했겠지만 찾아올 사람이 없는 새벽에는 마음 가는 것 중 무엇이든 해도 좋았다. 공작부인은 수도사들의 일거리로 알려진 세밀화 그리기를 좋아했다. 소녀 시절에는 손 끝에 묻은 잉크를 감추려고 여름에도 장갑을 끼고 다니곤 했을 정도였다. 공작부인이 되고 나서는 어린 소녀처럼 행동할 수 없었고, 그 후에는 건강이 발목을 잡았다. 이브노아를 낳은 후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공작부인의 몸과 마음 상태가 요즘처럼 좋았던 때가 없었다. 아직도 건강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새벽에 일어나 한두 시간 세밀화 작업을 하고도 큰 피로를 느끼지 않는 체력이란 그녀에게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이런 새벽 놀이는 아르님 공작에게 비밀이었다. 공작부인을 지극히 아끼는 그가 듣는다면 분명히 걱정을 할 것이다. 더위 때문에 창을 열어 두었다. 내려둔 발 너머로 날벌레가 톡, 톡, 부딪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공작부인은 깃펜을 가만가만 다듬었다. 햐녀가 기척을 듣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한 번의 칼질을 하려는 순간 창가에서 또다시 기척이 났다. 그녀의 손이 미끄러졌다. 날카로운 펜나이프의 날이 왼손 검지 모서리를 긋고 지나갔다. “아앗!” 펜과 나이프를 떨어뜨리는순간 커튼이 걷혔다. 공작부인이 고개를 돌렸을 때 창턱에는 그녀의 아들이 앉아 있었다. “조슈아? 어째서 거기 있니?” 조슈아는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몇 년 동안 하이아칸에 머물면서 그는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지 않았다. 어린아이는 한시도 부모와 떨어지려 하지 않지만, 자신의 세계가 생길수록 그런 애착은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는 일찌감치 둥지에서 떨어진 새였다. 그의 세계는 너무 일찍 만들어졌다. 그러나 쫓기기 시작한 뒤부터 조슈아는 비취반지 성과 부모의 모습을 편안히 떠올릴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그를 잊어가고 있었다. 그가 돌아가더라도 그의 자리는 없을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은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어저면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자신이 초조했는지조차 몰랐던 것일지 모른다. 때로 그는 소공작 역할을 대신해줄 유리인형을 원했던 자신을 떠올리기도 했다. 인형이 없던 시절부터 그의 마음이 만들었던 인형이다. 코츠볼트에 머물던 시절에, 비취반지 성에 남겨둔 그림자 또는 인형이 자신의 역할을 대신해주고 있을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곤 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 상상은 때로 마음에 들었다. 인형이 실재하게 됐을 때 그의 감정은 혼란스러웠지만 그 속에는 자신의 꿈이 이루어진 듯한 묘한 기분도 분명 섞여 있었다. 그러나 몇 년 만에 마주하게 된 어머니의 얼굴은 조슈아의 마음을 몹시 흔들어 놓았다. 어머니는 그의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불러 주었다. 잠시 밤놀이라도 나갔다가 오느냐는 것처럼. 갑자기 가슴 속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솟아났다. 죽었다가 되살아난 어머니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아마도 자신의 마음속에서. “어머니.” 조슈아는 창턱에서 뛰어내려 테이블로 다가가다가 공작부인의 손가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손 다치셨어요?” “아아, 조금이란다.” 피가 배어나와 테이블에 떨어졌다.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손수건을 꺼내 어머니의 손가락을 감샀다. “이러고 계시면 곧 멈출 거예요.” “고맙구나.” 공작부인은 빙그레 웃었다. 시녀를 부르겠다며 수선을 피우지 않는 쪽이 모자 모두 마음에 들었다. 이윽고 손수건을 손가락에서 뗀 공작부인이 조슈아에게 앉으라고 손짓하며 물었다. “밖에 나갔다가 왔니?” “아... 네.” “야심히 나가 다니더라도 옷이 어찌 그러니.” “그게...” 조슈아가 대답이 궁해 망설이고 있는데 공작부인이 웃으며 덧붙였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변장이라도 했던 게구나. 그렇지?” 조슈아는 점차 기분이 이상해졌다. 처음엔 까닭을 몰랐다. “네 괴벽이 일조일석은 아니니 긴 말은 않으마. 그래도 요제는 너와 함께 지내는 내 마음이 좋단다.” “네?” 공작부인은 다시 웃었다. “너는 열 살 무렵부터 이미 품안의 자식 같지가 않았단다. 어머니라면 다들 자식이 크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기 마련인데, 아직 어린아이여도 좋을 아들이 일찌감치 그러니 내가 내심 섭섭하지 않았겠니? 좀 더 지나고서는 체념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요제 너와 자주 담소도 하고, 체스도 두고, 산보도 하곤 하니 어린 아들을 되찾았나 싶기도 하고, 네가 철들었나 싶기도 하고...” “...” “이런 시절이 좀 오래갔으면 하지만, 역시 잠깐의 여흥이려니 싶구나. 젊은이의 변덕 같은 것이겠니? 네 생각은 어떠니?” 조슈아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에게 묻는 것이 아니었기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괜찮단다. 내 마음이 흔흔하니 그것만 알아두렴.” 무어라 말해야 할가. 어머니, 당신의 마음을 흔흔케 한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라고? 공작부인이 다치지 않은 손으로 펜촉 끝을 시험해 보는 가운데 조슈아는 일어섰다. 공작부인은 나가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쥬스피앙이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도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때와 지금의 이해 사이에는 ‘칼에 찔렸다’ 고 쓰인 글자를 보는 것과 실제로 칼에 찔리는 것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네 자리에 인형이 앉아, 네 물건을 익숙하게 사용하고, 네가 늘 하던 대로 행동하고, 널 알던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네가 가진 추억을 떠올리며 미소 짓고, 네가 해내려던 일을 해버리고, 너를 사랑하던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그러면 너는 어디에 있게 되지?’ 없었다. 그의 자리는, 아니 자리조차 지워져 버렸다. 어머니의 마음속에 든 아들은 그가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조슈아의 손은 공작부인의 방문을 닫고 있었다. 눈앞에는 램프 두 개만 켜진 어두운 복도가 뻗어 있었다. 너무도 잘 아는 곳인데, 발밑은 수도 없이 오갔던 검붉은 다마스크 양탄자인데, 낯선 미로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그는 자신의 냄새가 사라진 둥지에 돌아온 새였다. 영역 표시가 지워져 버린 고양이였다. 어머니는 인형과 함께 지낸 몇 달 동안 예전 조슈아 자신과 지낼 때보다 오히려 행복해했다. 정말로 그가 바랐던 유리인형의 모습 그대로였다. 자신보다도 더 멋지게 소공작의 역할을 해내는 유리인형. 그리하여 성은 유리인형이 차지했고 조슈아 자신은 뿌리 뽑힌 물풀처럼 호수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돌아오라고 하지 않았다. 누군가 일부러 소원을 들어주기라도 한 것처럼 완벽하다. 발이 멈췄을 때 겨우 정신을 차렸다. 떠미는 사람도 없는데 그의 걸음이 찾아낸 곳이었다. 조슈아는 문을 올려다보았다. 어려서부터 오랫동안 썼던 방이었다. 자신의 방이었다. 문이 닫혀 있었다. 켈티카에 들어섰을 때 그랬다. 비취반지 성을 바라보았을 때는 더욱 그랬다. 가슴속에서 커지던 두려움이 있었다. 이야기를 들었던 순간부터 지금 껏 잊은 일이 없었지만, 만날 순간이 가까워올수록 공포와 기대감이 서로 뒤엉켜 자라며 검은 털가죽을 입은 실체로 변해갔다. 자기 자신과 동일한 존재 앞에 서게 된다는 상상은 얼마나 무서운가. 도한 얼마나 가슴이 뒤는가. 죽음만큼이나 기대해 온 순간이 아닌가. 사랑하고 증오할 악마, 겹쳐지고 갈라질 형제. 그러나 이 순간, 그동안 인형에게 품어왔던 다양한 감정은 강렬한 살의로 덮여버렸다. 이성적인 판단은 재로 변했다. 조슈아는 문을 열어젖혔다. 방의 구조는 입은 옷보다도 익숙했다. 성큼성큼 거실을 가로지르고 침실로 들어섰다. 왜 문이 열려 있는지도 생각하지 않았다. 커튼을 걷어 올리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없었다. “후...” 텅 빈 침대를 보자 겨우 머리에 차가운 물길이 열렸다. 숨이 탁 터지면서 열기가 가셨다. 조슈아는 침대를 향해 뻗은 자신의 두 손을 보았다. 어둠 속의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생각하다가 눈을 감았다. 이윽고 이불에 손을 얹었다. 아직 온기가 있었다. 가슴에 손을 가져가자 전력으로 달렸을 때처럼 파들거리는 심장이 느껴졌다. 잠시 후 조슈아는 침대를 떠나 옷장 앞으로 갔다. 문을 열자 예전에 입던 옷과 새로운 옷들이 섞여 걸려 있었다. 그는 일부러 그가 모르는 옷을 찾아 냈다. 그는 리본으로 여민 검은 셔츠, 은 잎사귀 세공에 오닉스가 박힌 브로치, 광택이 있고 몸에 붙는 검은 바지, 긴 부츠. 조슈아는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의 소년은 소공작 조슈아 폰 아르님이 아니었다. 배우, 막스 카르디였다. 10. 자신이 자신을 연기하다 “... 이윽고 그는 자신을 연기하며 사람들 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그가 그 자신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르모리크 경께서 오셨습니다.” 조금 전 일어난 아르님 공작은 가운 차림으로 창가에 서서 머리가 맑아지는 차를 한 잔 들던 참이었다. 시종이 와서 고하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조슈아가 찾아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니,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 “들어오라 하게.” 없었던 일이라 해서 아들의 방문을 막을 까닭은 없었다. 아르님 공작은 찻잔을 들고 안락의자로 다가갔다. 문이 열렸을 때 테오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놓인 의자 한쪽에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맞은편 의자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등 뒤에 켠 촛불이 드리운 큰 그림자와 대화라도 하려는 것처럼,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기척이 나자 테오는 고개를 돌렸다. 무방비, 당혹, 숙고, 긴장, 몇 가지 표정이 지나가고 언뜻 스쳐가는 줄 알았던 의아함이 자리를 잡았다. 책장을 넘기는 듯한 표정 변화였다. “이런 새벽에 무슨 일이지?” 조슈아는 문간에 선 채 테오를 빤히 바라보았다. 다섯 셀 동안이 흐르고, 조슈아는 눈썹을 가볍게 올려 보였다. “테오 형도 일찍 일어났네요.” 그렇게 말하며 다가와 테오의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테오가 두손을 맞잡았다 놓았다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테오가 말했다. “잠을 안 잔 거야.” “그래요?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어요?” “나야 늘 걱정이 많잖아.” 테오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생겨났다. 조슈아는 마주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시선을 돌리다가 테이블에 놓인 사탕 통을 발견했다. 눈에 익은 통이었다. “하나 먹어도 되죠?” 조슈아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사탕을 꺼내어 입안에 넣었다. 쓴맛이 확 퍼졌지만 얼굴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테오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서도 대답했다. “그래.” 조슈아의 손이 천천히 사탕 통 뚜껑을 덮었다. 테오의 시선이 그 손을 따라갔다. 소맷자락에 박힌 오닉스 커프스의 빛, 그리고 검은 시폰 밑의 손목이 움직임을 멈출 때까지. 조슈아는 의식적으로 손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고개를 뒤로 약간 젖혔다. “사실 애니 형이 가보라고 해서 온 건데,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었던 건가요?” “아니.” “그럼 이야기나 하려고?”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것처럼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곧 있으면 누나 기일이네요.” “... 그렇지.” “생일이기도 하고.” 테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슈아는 사탕을 빨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 누나 기일에 성에 있은 적은 한 번뿐이었거든요. 벌써 몇 년 전이고. 그래선지 실감이 잘 안 나네요.” 무표정한 눈이 조슈아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어쩐지 누나가 하이아칸에 가 있다가 이제 곧, 생일날 돌아올 것만 같단 말이죠. 테오 형이 내 눈앞에 있지만 않았다면 정말로 그렇게 느꼈을걸.” 테오가 불쑥 말했다. “몇 년이고 추도식을 봐 왔기 때문에 난 그런 생각이 안 든다.” “그렇겠죠. 이럴 때면 이브 누나는 역시 나보다 테오 형하고 더 가까운 사람이었던 것만 같아요.” 테오의 입술이 가까스로 미소를 만들었다. “부부였으니까.” 조슈아는 코를 찡그리며 웃었다. “난 결혼을 안 해봐서. 부부가 어떻게 특별한지 잘 모르겠네요.” 잠시 후, 덧붙였다. “그리고 이브 누나하고 테오 형은 다른 부부들하고 좀 달랐을 테니까.” 테오의 눈동자가 약간 흔들렸다. “이브가 다른 사람들과 달랐기 때문이라는 뜻인가?” 조슈아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빠르게 말했다. “부인할 수도 없지 않겠어요.” 테오의 손이 불안정한 움직임을 멈췄다. 조슈아는 여전히 미소와 함께 그 손을 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너에게, 이브가 어떤 사람이었다고 설명해야 하는 건가?” “이브 누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모를 리가 있겠어요. 내 말은.” 말을 끊으며 조슈아는 사탕을 깨물어 부서뜨렸다. “그런 누나를 형이 어떻게 사랑했느냐는 거죠.” 테오는 고개를 홱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생각에 잠기려 한다고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빠른 움직임이었다. 그의 눈이 떠나는 순간, 조슈아의 얼굴에서 미소도 사라졌다. 해는 아직 뜨지 않았다. 조슈아가 조금만 고개를 돌렸더라면 왼쪽의 불빛이 그의 얼굴에 나타난, 정확히는 눈 밑에 나타난 가느다란 줄을 비췄을 것이다. 그건 밤을 새워 나타난 그림자라고 보기에는 오히려 붉었다. 가면을 쓸 수 없는 이 순간, 조슈아는 촛불 그림자 속에 눈빛을 교묘히 감추었다. “이브는.” 테오의 시선이 돌아왔다. 금빛 속눈썹 끝에 촛불 빛이 흔들렸다. “널 사랑했지. 나보다 더.”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진 않았어요.” “이브가 어째서 아기를 낳게 된 줄 알아?” 갑작스런 이야기에 조슈아의 미간이 일순 꿈틀거렸다. 테오의 입술도 비틀렸다. “너 때문이었지.” “무슨 뜻이죠?” “결혼식 후 우린 하이아칸으로 떠났지 않나? 도착하고 사흘도 채 안 돼서 이브는 널 보고 싶다고 종일 울고 보채며 사람들을 괴롭혔지. 난 그런 이브에게 동생은 점점 자라서 어른 남자가 돼버릴 거라고 말해줬어. 그러니 동생을 닮은 아기를 낳으라고, 그러면 절대로 이브보다 커질 수 없을 거라고 했어.” 조슈아는 말문이 막혔다. 테오는 메마를 미소를 머금었다. “태어난 아기는 널 닮진 않았지. 하지만 일단 어머니가 되고 나면 왜 그렇게 됐는지는 잊히기 마련이지.” “지금 왜 그 얘길 하는 거죠?” “왜 하냐면, 너 때문에.” 테오가 등을 의자에서 조금 뗐다. “이브가 그토록 너를 사랑했는데,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을 들으니 참을 수가 없어서.” 조슈아는 숨을 약간 들이쉬었다. “내게 이브를 사랑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아니오’ 죠. 이브는 내게 누나였어요. 핏줄이죠. 하지만 형은 꼭 이브와 결혼해야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이유를 묻는 거죠.” 테오의 표정이 냉소적으로 변했다. “그런 이유, 사람들이 많이 말해주지 않던가?” “남들이 말하는 이유 따위는 들을 게 못된다고 생각해서.” “이제 와서 물을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누나가 죽었기 때문에?” 테오의 눈 속에 하얀 불이 지나갔다. “살아있더라도, 내가 네게 추궁당해야 할 일인가?” “죽은 누나에게 물을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아, 살아생전에도 물을 수 없었던 건 물론이고.” 테오의 곤두선 신경을 칼끝으로 교묘히 긁어 놓는다. 조금 더 힘을 주면 제풀에 끊어지도록. 이윽고 박명이 창을 뒤덮었다. 둘의 옆얼굴이 어둠을 벗자 가려졌던 눈매가 일부 드러났다. 테오는 눈가가 움푹해지고 광대 뼈 아래가 검게 그늘져 병자처럼 해쓱했다. 이브노아와 결혼할 때 가진 건 없지만 참 미남이긴 하다고, 그런 소리를 들었던 테오였다. 그런 얼굴이 몇 달 사이에 십 년은 나이가 든 듯했다. “그래. 난 이미 죽었고, 백치에다가, 나보다 동생을 더 좋아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지. 그녀 외에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어. 세상 누구도. 내 부모조차도, 물론 너희 집안의 그 누구도. 이게 바로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이유지. 미친 사내. 다섯 살짜리만도 못한 여자를 아내라고 하는 사내. 그 여자가 죽고도 그림을 붙들고 대화를 하는 돌아버린 사내. 그 여자가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소용없고, 그 여자가 남긴 자식에게조차 관심이 없는 사내.” 테오는 테이블을 짚으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제 왜 내가 널 미워하는지 알겠지?” 조슈아는 뻔뻔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는데.” “이브가 마신 잔은 네 것이었어.” “물론 그랬죠.” “네가 그 잔을 넘겨주지 않았더라면... 이브는 아직도...” 조슈아가 박명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눈 아래 발갛게 부푼 줄이 또렷이 드러났다. “그래. 그 잔을 가져가지 않았더라면 이브가 아니라 내가 죽었겠죠. 당신이 그전부터 원해 왔던 대로.” 온 방의 공기가 뜨거웠다. 테오는 조슈아를 삼킬 듯 노려보았다. 발톱이 있었다면 찢어버렸을 것처럼 노려보았다. 조슈아는 어지러워진 눈을 바로 뜨기 힘들어 억지로 힘을 주면서 말했다. “그날 숨이 멎기 전에 이브가 내게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요?” 그조차 듣지 못했다고 생각하던 말을 입 밖에 내는 순간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테오를 용서하니까... 그에게 안아달라고 해...” 테오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거짓말 마. 이브가 그런 말을 했다고? 네가 안고 있었던... 그때?” 조슈아는 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리 없어. 이브가... 어째서 그런 말을 하겠어? 그녀는... ”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말이죠?” 조슈아가 눈을 들었다. 테오는 하려던 말을 멈춰버렸다. “누구를 용서해야 할 지, 잔에 독을 바른 사람이 누구인지, 이브가 알았을 리 없었다는 말이죠. 안 그래요?” 조슈아의 젖은 눈에 냉소가 되돌아왔다. 그는 손등으로 속눈썹에 맺힌 눈물을, 이마의 땀을, 그리고 가면을 씻어냈다. 테오는 그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 깨달음이 왔다. 그와 함께 하얗게 마른 그의 입술에 경련이 일어났다. 진짜처럼 행동하는 인형이 아니었다. 진짜였다. 조슈아가 연기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나’를 연기하는 것은 남을 연기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렵다. 무엇보다도 ‘나’ 는 관찰되지 않는다. 자신의 옆얼굴을 목격할 수 없듯이. 그런 ‘나’ 를 연기로 창조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경지였다. 테오의 입에서 본능적인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왜 왔지?” 애니스탄이 보냈다고 한 말은 이미 의미가 없었다. “왜 왔을 것 같나요?” 테오는 대답하는 대신 어둠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이윽고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웃고 있었다. “그 대답은 조금 후에 해 주지. 어쨌든 놀랐어. 날 놀라게 할 작정있다면 성공했어.” “우리가 장난을 칠 시절은 오래 전에 지나갔죠.” “그래. 네가 하이아칸에서 배우였다고 들었지. 아니, 그런 거야 어찌됐든 좋아. 다만 하나는 말해 두겠는데... 난 이 일을 꾸미면서 네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종종 궁금했지. 그리고 결론도 내렸거든.” 테오는 조슈아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하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좋아할 것 같더라고.” 조슈아는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왜 그렇게 생각했죠?” “넌 어차피 네 자리 같은 것쯤 우습게 생각했잖아? 네 부모도, 누나도 별것 아니었지. 작위 따위 누가 받든 상관없었지. 네가 관심 있어 하는 건 너 자신, 하나뿐이니까. 그래서 네가 좋아하는 걸로 만들어 준 거잖아. 죽도록 실컷 빠져있으라고. 스스로를 다각도에서 관찰하려면 자신이 하나 더 있는 것이 제일 편리하지. 타인이 된 자신이니 얼마든지 질리도록 관찰할 수 있다고. 이게 너를 위한 최적의 장난감이 아니란 말이야? 더구나 네가 하기 싫어하는 의무도 모조리 대신해 주고. 이보다 좋은 것은 다시없지.” “그렇게 생각했다면 날 죽이려 하지 말았어야죠. 내가 정말로 만족하고 그대로 살도록 하려면.” 테오는 순간 미소를 걷었다. “내가 왜 네가 좋아할 일을 하겠어? 앞서 말했지만 난 너를 증오해. 네가 좋아할 것을 만들어주고, 네 손에서 빼앗아버리면 이보다 만족스러울 일은 다시없지.” “... ” “그러니 말해 봐. 너도 실은 좋았지? 네가 죽지만 않는다면 귀찮은 일은 복제품한테 맡기고 그대로 도망쳐 배우 나부랭이나 하면서 살 궁리도 해봤겠지. 어때?” 조슈아는 망설이지 않고 대꾸했다. “그랬죠.” 테오는 조슈아를 빤히 보다가 도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 역시... 너란 녀석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미쳤구나.” “그랬죠.” 조슈아는 두 번째로 같은 대답을 하며 이마에 엉겨 붙은 머리카락을 넘겼다. “페리윙클 섬에 가 보고서야 그런 생각을 포기할 수가 있었어요.” “왜, 거기 사람들이 너를 받아주지 않든? 비취반지 성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있을 데가 없겠다 싶었나?” “그래줬다면 마음 편했을 텐데. 그들은 나를 돌아온 왕자처럼 여기더군요. 나를 환영하고, 내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고, 내 명령을 수행하고, 내가 그들의 소원을 들어줬으면 하고 찾아오고.” 테오의 한쪽 뺨이 실룩거렸다. “대접을 잘 받았더니 죽기가 아까워졌나보군.” “그래요. 죽을 순 없었어요. 그들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이고, 떠받들고, 따르기 때문에. 그렇듯 하는 이유가 내가 존경할 만한 사람이어서도 아니고, 내가 과거에 그들을 위해 뭔가를 했기 때문도 아니고, 오직 하나, 내가 조슈아 폰 아르님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핏줄 덕택에 받은 대접이 그리 자랑스러웠나?” “자신의 능력이나 행동과 무관한 대접을 받는데 기분이 좋고 마음이 편할 것 같은가요?” “네가 늘 받고 있는 게 그거 아닌가? 어떤 업적도 없는 네게 온 집안이 기대를 걸고 있는데, 중요한 사람은 너뿐이라고 하는데, 그걸 당연하게 여겨 왔으면서 새삼스럽게 아니라고? 심지어 넌 이 집안에서 대대로 쓸모가 없다는 데모닉이지. 집안에 아무 기여를 못할 가능성이 열 중 열이잖아. 안 그래?” 테오는 마음속에 있던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며 웃으려 했으나 조슈아가 보기에 그 얼굴은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을 뿐이었다. 조슈아는 화를 내지 않았다. “페리윙클 섬에 가보기 전의 나라면 지금 당신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도 없었겠죠. 예전에는 당신이 말하는 일들이 특권이라는 느낌조차 받지 못하며 살아왔으니까. 당연히 누렸다기보다는 가치조차 못 느꼈다는 쪽이 맞겠죠. 테오 형이 한 말대로 난 나 자신 말고는 관심이 없었어요. 소공작 조슈아 폰 아르님이라는 이름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았고, 둘 중 택하라면 배우인 나를 택했을 정도로. 그런 나를 평생 처음 본 페리윙클 사람들이 진짜로 사랑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 나는 너무나 불편해졌죠. 그들한테 뭘 해줘야 할지 몰랐어요. 해줘야 할 것만 같은데, 할 줄 아는 것이 없더군요. 그런 사랑에 값할 만한 것은 단 하나도 할 줄 몰랐어요.” 테오는 여전히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반박은 나오지 않았다. “섬을 떠날 때쯤 깨달았어요. 그들이 날 사랑하는 이유는, 내가 소공작 조슈아 폰 아르님이기 때문이죠. 다른 누군가가 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은 능력을 갖고, 똑같은 행동을 한다고 해서 페리윙클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거죠. 그런 그들에게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은 단 한 가지, 소공작 조슈아 폰 아르님이라고 믿고 사랑하는 일은 없게끔 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난 돌아와 내 자리를 되찾아야만 할 당위를 얻었어요.” 박명의 아침이 되어갔다. 몇 달 동안 쫓고 쫓기며, 두 사람이 이렇듯 이야기할 날이 오리라는 생각은 둘 다 하지 못했다. 대화의 시절은 끝이 나고, 죽고 죽이는 일만이 남은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마주 앉아 같이 아침을 맞고 있었다. “내가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것은 먼 미래에, 공작이 된 후의 일인 거죠.” “넌 공작이 될 수 없을걸.” 테오가 불쑥 말했다.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죠.” “화내지 않는 체하는 모습이 측은할 지경이야.” “화나지 않았어요.” 테오는 놀라는 시늉을 했다. “정말이냐? 내가 네가 마실 잔에 독을 바르고, 네 복제품을 만들고, 너를 죽이려고 암살자를 고용하고, 실제로 몇 번이나 죽일 뻔했는데도? 쓸데없이 인격자 노릇하려 애쓰지 마. 네가 백 년 동안 도를 닦고 나타났더라도 용서할 만한 일들이 아니잖나? 내 앞에서는 더구나 가식적일 필요가 없는 거고.” “그런 일들을 용서한다는 말은 안 했어요.” 조슈아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당신과 이렇듯 담담히 얘기할 수 있는 건, 내가 상상한 최악의 일이 사실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일 뿐이니까.” “호, 그게 뭔지 궁금한데 그래. 만일 그 상상이 사실이었으면 어쩔 참이었는데?” “이 순간 당신을 죽였을지도 모르죠.” 조슈아는 담담했고, 테오는 폭소를 터뜨렸다. “그렇게 말하니 뭔지 더욱 궁금하군. 그럼 나도 말해 볼까? 난 너란 놈에 대해 착각 같은 거 하지 않았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너처럼 인격자 노릇 따윈 안 해. 내가 바보로 보였겠지? 자기 죄를 직접 일일이 확인해주고, 또 그 일을 놓고 너와 한가하게 토론이나 하고 앉아 있다니 말이야. 난 목적 없는 놀이에는 관심이 없어. 데모닉께서 보시기에는 버러지만도 못한 머리일지 몰라도 나름대로 쉬지 않고 쓰고 있거든.” 조슈아는 문득 가슴 한쪽이 아릿해졌다. 이유는 몰랐다. “무슨 뜻이죠?” “네가 보기에 내가 체념한 범죄자처럼 보이나?” 테오는 손을 들어 맞은편 책장 아래 문갑을 가리켰다. “저 속에는 내가 예전에 준비해 둔 샴페인이 들어 있거든. 아라종 백포도가 가장 잘 익었다던 960년에 봉한 최고급이지. 축배를 들 잔 두 개도 준비 해 놨어. 함께 잔을 들 친구가 와줘야 할 시각인데.” 테오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흡사 맹수가 웃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니, 맹수는 웃을 수가 없다. “난 네가 오기 전에 무대를 완성하려고 무척 애썼어. 고작 한 명의 관객을 위해서 이만저만 수고를 한 게 아니지. 게다가 네가 예정보다 빨리 오리란 얘기가 들려와서 정말 바빴다고. 슬슬 구경하러 가보는 게 어때? 지금쯤이면 막도 올랐을 테고, 아마 클라이맥스에 달하지 않았을까 싶군. 더 늦으면 막 내리는 것밖에 못 볼 거라고.” 가슴이 점차 빨리 뛰었다. 손으로 누르지 않고는 참기 힘들 정도였다. 불안감 때문만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심장을 대신 품고 있는 기분이었다. 최악의 상황에 처해 어쩔 수 없는 죄를 저지르려는 누군가의 심장을. 테오는 조슈아의 변한 표정을 보며 소리 없이, 그러나 온 얼굴을 움직여 웃었다. “그 옷, 잘 어울리는데. 상복으로 아주 멋져.” 조슈아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복도로 뛰어나갔다. 애니스탄은 통나무집 곳곳의 낡아 벌어진 이음새로 들어오는 빛을 바라 보고 있었다. 밖에는 아침이 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멍하니 빛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아침이라는 단어가 한없이 낯설었다. 머리는 늘 그렇듯 마비된 상태였다. 새벽녘에 애니스탄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실헌 한 가지를 마쳤다. 실험대에 엎어진 위험한 용액을 닦을 생각도 않고, 짚을 채운 침대에 주저앉아 햇살을 지켜보았다. 새어드는 틈새가 많았기에 바닥에 떨어진 빛은 일종의 무늬를 이루었다. 애니스탄은 그 모양이 순무 뿌리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순무를 본 것이 언제였더라. 접시 위에 올라온 것 말고, 잎 달린 줄기도 있고 흙도 묻어 있는 순무 단 말이다. 까마득한 옛날에 그런 것은 본 것 같기도 했는데 어디였는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애니스탄의 귀에는 낮게 재잘대는 소음이 끊임없이 들렸다. 환청도, 새소리도 아니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화였다. 느리게 이어지는 말소리 사이에 여러 가지 소리가 있었다. 찻잔이 받침에 놓이는 소리, 물을 따르는 소리, 가끔 들리는 웃음, 커튼을 흔드는 바람.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언제부터인가 대화를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하긴 대화는 의미가 없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도중이든, ‘그건 그렇고 오늘 오찬 모임에 너도 나오는 것이 어떠냐?’ 라고 말하는 도중이라도 상관없는 것이다. “아버지 친구분들의 모임이잖아요.” “요즘은 아들딸을 데려오는 친구들도 좀 있지. 대화를 지켜보기만 하더라도 도움이 될 테니까. 지난번에 케르네스트 경이 열여덟 먹은 아들을 데려왔는데 그 아이가 다음번에는 너도 나와서 이야기 해 볼수 있다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어머니 생신 때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군요. 별다른 얘기는 못했었는데.” “요즘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저들끼리 사교 모임을 갖기도 한다더군. 그들끼리 모이는 작은 살롱도 몇 군데 있다는데 그 중 하나를 케르네스트 경의 맏딸이 주도하는 모양이다. 살롱들이 흔히 그렇듯 약간의 경쟁도 있겠지. 켈티카 뿐 아니라 남부에도 비슷한 모임이 있다고 하고. 아직은 아이들끼리의 놀이 정도지만 그런 모임이 장차 인맥으로 발전하기도 하는 게지.” “하지만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제가 그런 데서 호감을 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지 않느냐. 케르네스트 경의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향후 어느 쪽이든 가 볼 필요는 있을 것이야. 우리 가문이 유동 동안 사람들과 교류가 없는 편인데 앞으로는 좀 바꿔나갈 필요도 있겠지.” 열 살도 되기 전에 공화국을 무너뜨릴 계략을 짜던 조슈아에게는 새삼스러운 이야기일 뿐이다. 말하고 있는 공작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님 공작은 웃으며 찻잔을 집어 들었다. “너에게 명령한다. 단도를 잡아라.” 창 밖에 솟은 살구나무 가지에 새들이 모여 앉아 지저귀었다. 공작의 눈길이 창가로 갔다. 새로 채운 찻잔을 든 채였다. 김이 오르고 있었다. 옷자락 틈에서 사그락, 소리가 났다. “그를 찔러라. 깊숙이. 그를 죽여라.” 문이 거칠게 열렸다. 발소리가 났다. 그러나 아버지의 옆얼굴을 바라보는 소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모든 소리가 지워지고 단 한 가지 목소리만이 또렷하게, 반복해서 들렸다. 그의 부서진 곳을 통해 들어와 그를 지배하는 자의 목소리. 자신의 자유를, 의지력을, 거칠게 빼앗아 내던지는 목소리. 정체성을 부인하도록 강요하는 목소리. 목소리가 커진다. 죽여라. 죽여라. 소년이 일어선 것과 아버지의 고개가 돌아온 것은 동시였다. 찻잔 속에서 파도가 일어났다. 이어 넘치며 흩뿌려졌다. 참나무 테이블을 적시고 남은 것은 양탄자가 삼켰다. 누군가가 유령처럼 나타나 공작을 밀쳐내었고 소년을 보았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두 쌍의 검은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있어서는 안 될 눈동자였다. 마주쳐서는 안 될 얼굴이었다. 단도는 아직 주머니에서 나오지 못했다. 명령은 아직 귓가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명령을 뿌리쳤다. 처음으로 명령보다 강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소리도 빛도 그의 세계에는 없었다. 그는 부서졌다. 부서진 곳을 통해 자신의 일부가, 아니 중요한 모든 것이 흘러나간다. 곧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는 껍질뿐이다. 껍질조차 먼지로 변할 것이다.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단도가 올라갔다. 내리 찔렀다. 960년산 샴페인은 테오와 나이가 같았다. 흔들지 않고 땄기에 거품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목에 청색이 들어간 자신의 잔만 꺼내어 절반 따랐다. 잔을 부딪쳐줄 사람은 없지만 그런 것 때문에 성공을 만끽하지 못할 그가 아니었다. 그는 성공했는가? 무너진 모든 계획들에도 불구하고, 테오는 긍정했다. 그는 최초의 목표에 도달한 것이다. 그 후에 생긴 것들은 부산물에 지나지 않았다. 달리다 보니 났던 오솔길일 뿐이었다. 야심보다 앞섰던 것은 무엇인가? 증오다. 그는 증오의 끝에 도달했다. 잔을 들려다 말고 일어선 테오는 창가로 다가가 숲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방은 남향이 아니었다. 서쪽으로 난 그의 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격지 정원이 아니라 나무가 자연스럽게 우거진 울새의 숲이었다. 이곳에서 보이지는 않아도 숲 구석 어딘가에 애니스탄이 있을 것이다. 이제 그와 축배를 들어주지는 않겠지만, 애니스탄이 시골 장원에 있다가 그의 설득에 못 이겨 비취반지 성으로 돌아와 주었을 때, 테오는 샴페인과 잔을 문갑에 넣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성공했을 때 너와 내가 들 축배라고. 그때는 애니스탄도 꽤 멀쩡했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랬듯 친구도 그를 떠나갔다. 성공의 순간 그는 혼자였다. 혼자라도 상관없다. 그의 입에 미소가 떠올랐다. 미소는 너털웃음으로 바뀌었다. 자기보다 어쩌지 못할 녀석은 없고, 자기보다 위로하고 싶은 녀석도 없다. 테오스티드 다 모르는 성가신 욕심쟁이이고, 만족할 줄 몰랐고, 능력 이상의 것을 얻으려 하다가 퉁겨났지만, 울지도 않고 오히려 자신에게 웃는 자였다. 테오는 방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멈췄다. “테오, 안녕?” 그가 앉아있던, 아니 맞은편에서 줄곧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자리를 바라보며 했던 생각 그대로, 고개를 갸우뚱하게 기울이고 한쪽 팔만 팔걸이에 얹은 채 앉아 있었다. 연한 분홍빛 드레스가 의자 다리를 덮고 테이블 밑까지 펼쳐져 있었다. 다섯 해 전에 입었던 그대로, 핏자국만은 없이. “... 생각.” 걸음이 떨어졌다. 생각보다 놀라지 않았다. 늘 이런 날을 떠올려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처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기억하지 못할 뿐인지도 모른다. “무슨 생가?” 드레스 밑의 발이 조심성 없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테오는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오래전에 헤어졌던 아내의 얼굴을 구석구석 뜯어보았다. 수년전과 다름없는, 정말로 변치 않은 얼굴이었다. 복숭앗빛 뺨에 박힌 그림 같은 보조개, 아이들처럼 살짝 올라간 코끝 아래 짧은 인중과 작은 입술. 여섯 살 소녀였을 때 반했고, 십몇 년을 한결같이 보아도 싫증나지 않던 요정같은 소녀. 백치라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사랑을 열네 해 동안 가장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어리석다. 사랑은 감출 수가 없다. 모조품을 만들 수도 없다. “이브.” “응?” “묻고 싶은 게 있어.” “응.” “그때, 그날... 전날 밤에 말이야...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말라고... 그랬잖아.” “응.” 이브노아의 까만 눈이 그를 빤히 보고 있었다. 테오가 해 주는 이야기는 무엇이든 재미있다고 믿고 있던 때처럼. 그 눈을 보는 테오도 아무 때나 깔깔 웃으며 뛰어오르던 이브노아의 손을 잡고 조용히 비취반지 성의 복도를 걷던 소년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무슨 일이 있을지 다 알고 있었던 거야?” 이브노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럼 왜 그런 말 했어?” “테오가 날 잡을까봐.” “조슈아의 잔을... 마시는 너를? 그래서 그때 날 보며 미소 지었던 거야? 널 잡지 말라고?” 이브노아의 얼굴에 그때와 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테오는 그 미소를 보느라 넋을 놓았다. “테오가 잡았으면 난 못 죽었을 거야. 테오와 헤어지기 싫었으니까.” 움직임이 멈췄다. 바람이 들어와 머리카락만 날렸다. “난 테오가 조슈아를 죽이려고 하는 줄은 몰랐어. 하지만, 내가 죽을 줄은 알고 있었어. 어떤 식으로 그렇게 될 줄은 그때 가서야 알았지만.” 생전이라면 할 수 없었을 또렷한 설명이었다. 테오는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죽을 줄 알고 있었다고? 어떻게?” “아주 옛날에 누군가가 속삭여 줬어. 그냥 목소리였어. 그날 내가 죽게 될 거라고. 그래서 아,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어.” 테오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그런 말을 그냥 그렇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어? 네가 피를 쏟던 모습을... 내가 몇 번이나 꿈에서 본 줄 알아? 얼마나 자주 소스라쳐 깬 줄 알아? 그런데 넌 그렇게 담담하게 죽을 수가 있는 거야?” “응. 왜냐면...” 이브노아가 다시 웃는데 이번에는 백치의 웃음이 아니었다. “그 목소리는 내가 죽어야 조슈아가 안 죽는다고 했거든. 내 동생으로 태어날 데모닉 조슈아가 열두 살에 죽게 돼 있는데, 내가 죽고 나면 그 앤 괜찮을 거라고 했거든. 그래서 이해할 수가 있었어.” “난 이해 못 해. 난 조슈아보다, 세상 누구보다 네가 소중한데, 어떻게 네 마음대로 그렇게...” “난 조슈아를 지키려고 태어났대. 그 애가 백치가 되지 않도록 내가 백치가 되었고, 그 애가 죽지 않도록 내가 대신 죽었고, 그 애가 데모닉이어야 했기에 난 손상되었어.” 테오의 입술이 떨렸다. “그런 말, 믿을 수 없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어째서 한 사람의 삶이 다른 누구를 위한 것이 될 수 있겠어!” 고개를 젓던 테오가 테이블을 탕 쳤다. 잔에서 술이 튀어 올랐다가 떨어졌다. 이브노아는 빙그레 웃었다. “믿지 않아도 좋아. 누가 말했든, 내가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일지도 모르니까. 내 동생을 내가 지켰다고. 그리고 당신도...” “나를?” “응. 그때 당신이 내 잔을 빼앗았으면, 당신은 지금까지 살지 못했을 테니까. 그러니 내 미소가 당신을 지켰다고...” 이브노아의 눈가에서 눈물이 반짝였다. 테오는 더 무어라 말할 수가 없었다. 손을 내밀어 눈물을 닦아 주었을 뿐이었다. 이브의 입술이 약하게 경련했다. “나, 목이 말라.” 테오는 자신이 마시려 했던 샴페인을 집어 주려다 말고 웃었다. 웃으면서 목이 메었다. “너 이거 맛이 없다고 했잖아.” “이젠 괜찮아.” 테오의 잔을 받아든 이브노아가 건배하듯 잔을 살짝 올려 보였다. 테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애니스탄에게 주려 했던 녹색 목의 잔을 가져왔다. 거기에 샴페인을 따랐다. 잔을 부딪쳤다. 이브노아가 자기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노란 술이 흘러들어갔다. 이제는 도로 뱉는 일도, 피를 토하는 일도 없이. 테오도 잔을 입에 댔다. 한 모금 마시고서 물었다. “그럼 나, 한 가지만 더 물을게.” 이브노아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혀 있었다. 눈물이 맺힌 채로 미소 지었다. “응.” “그 때 조슈아의 품에 안겨서... 나를 용서한다고... 말했어?” 조금 전에 이 말을 하며 조슈아가 울던 때까지도 아무렇지 않았던 테오였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뺨이 흥건하도록 흘렀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언제 울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응.” 가슴 속에 온기가 돌았다. 무척 따뜻했다. 테오는 잔을 내려놓고 이브노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테이블 앞으로 몸을 굽히자 분홍빛 치맛자락이 보였다. 거기에 빨간 핏자국이 나타났다. 한, 둘, 흡사 꽃잎이 떨여져 내리는 것 같았다. “당신을 용서해.” 둘은 서로를 껴안았다. 껴안았다고 믿었다. 테이블 위의 잔이 밀려 넘어졌다. 떨어지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14막. Outgrow 1. 나비 고치 “여름이 불타 없어지고 황금 재가 들판에 남았다. 사람들은 재를 거두어 빵과 술을 빚는다. 여름으로 배를 채워야 겨울에 얼어 죽지 않는다.” 성 입구로 뛰어 들어가며 막시민은 히스파니에 노인과 마주쳤다. 노인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급히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막시민이 소리쳤다. “왜 이제 오는 거냐고!” 1층 전실은 수많은 시종이며 하인들로 소란스러웠다. 저들끼리 떠들고 우왕좌왕하느라 막시민 일행에게 어떻게 왔느냐고 묻는 사람도 없었다. 홀을 가로질러 계단 앞에서 늙은 집사와 마주쳤다. 집사는 히스파니에 노인의 얼굴을 보더니 대성통곡을 터뜨릴 기세로 팔을 붙잡아 끌었다. “어서 올라가 보십쇼!” 리체는 뒤따라가며 하인들 사이로 퍼지는 속삭임을 들었다. 칼에 찔렸대... 방이 피범벅이라는 거야... 돌아가실 것 같대... 쉿... 그게 누구라고 말하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시민과 히스파니에 노인은 계단과 복도를 메운 사람들을 밀쳐내며 달렸다. 상대가 누구든, 아니 누구인지 쳐다보지도 않았다. 공작의 방에 다다르니 한층 많은 사람이 입구를 메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팔을 싸맨 리체는 사람들을 얼른 뚫지 못해 조금 늦게 따라왔다. 공작의 가신인 기사들이 엄중히 문 앞을 지키고 섰고, 하녀장만이 대야와 수건을 직접 들고 급히 들어갔다. 기사들이 문 앞을 막자 히스파니에 노인이 말했다. “난 공작의 숙부 되는 히스파니에 폰 아르님이오.” 히스파니에 노인이 비취반지 성에 들어와 그 이름을 댄 것은 실로 수십년 만이었다. 창이 걷히고 세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피였다. 눈이 가는 곳마다 테이블에도, 의자에도, 양탄자에도 피 얼룩이었다. 공작의 심복인 에드멜 남작, 말론 경, 비서 헤슬, 경무장한 호위기사 세 사람과 하녀장 등이 차 테이블 옆을 둘러싸고 있었다. 히스파니에 노인이 다가가자 에드멜 남작이 목례를 하고 자리를 내주었다. 막시민은 옆 사람을 밀쳐내다시피 하고 다가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조슈아가 누워 있었다. 사방에 낭자한 핏자국에 비해 검은 옷을 입은 그는 언뜻 괜찮은 듯 보이기까지 했다. 오히려 곁에 앉은 아르님 공작 쪽이 다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들을 안아 눕힌 공작의 가운은 피투성이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검은 셔츠 전체가 핏덩어리였다. 가슴에서는 아직도 출혈이 멈추지 않았다. 의사는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모여든 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수건으로 지혈을 하려 애쓰는 것뿐이었다. 대야에 피에 젖은 수건이 몇 장이나 쌓여 있었으나 아직도 가슴에 갈아댄 수건이 벌겋게 젖어들었다. 감은 눈꺼풀까지 창백했다. 피부 곳곳이 파르스름해졌고 입술은 푸르다 못해 보랏빛이었다. “...” 등 뒤에 서 있던 리체는 막시민이 손으로 자기 일을 막는 것을 처음 보았다. 손바닥 틈으로 얕고 빠른 숨이 새어나왔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가장 먼저 평정을 찾는 그가 자신을 주체하지 못해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 히스파니에 노인이 앉아 조슈아의 손목을 끌어당겨 잡았다. 맥박을 짚어 보고, 이마에 난 땀을 더듬어 보고 나서 상처가 아래쪽으로 가도록 옆으로 눕혔다. 그리고 수건을 몇 겹으로 덮어 단단히 막았다. 그러는 동안 노인의 이마에도 진땀이 흘렀다. 아르님 공작과 눈이 마주쳤을 때 노인이 말했다. “이대로는 쇼크가 오겠는데.” 숙부를 마주보는 공작은 뭐라 말하기 힘든 표정이었다. “...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렸습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지.” 공작은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도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다. 고개를 돌리며 눈을 한 차례 감았을 뿐이었다. “의사가 왔습니다.” 등 뒤에서 들린 소리에 여러 사람이 비켜났다. 리체는 그제야 조슈아의 모습을 보았다. 손이 떨려 자세를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피 때문에 머리가 어지럽고 숨이 막혔다. “비켜 주십시오.” 의사와 조수들이 리체를 비롯한 사람들을 밀어냈다. 조슈아의 머리맡에 앉은 막시민은 누가 끌어내지 않는 한 비킬 기세가 아니었다. 리체는 숨을 몰아쉬려 애썼으나 잘 되지 않았다. 눈물까지 앞을 가리고 나니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뒷걸음질로 물러나 아무 의자에나 주저앉았다. 시간이 뒤죽박죽으로 흘러갔다. 들것이 들어오고 몇 사람이 더 들어왔다가 나갔다. 이윽고 얇은 이불을 덮은 들것이 방 밖으로 나갔다. 몰려든 고용인들이 가까이에서 볼 수 없도록 하인장이 미리 복도를 비워 놓았다. 공작과 히스파니에 노인을 비롯한 사람들도 들것 뒤를 따라 나갔다. 리체는 따라 나가려고 일어섰다. 그런데 한쪽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나이든 시녀였다. “아가씨는 아르모리크 경의 친구분 되시나요?” “네...” “이쪽으로 오세요.” 시녀는 리체를 손짓으로 불러 다른 문 앞으로 데려갔다. 이 문도 공작의 방 앞이 그랬듯 무장한 가신들이 지키고 있었다. 시녀가 다가가자 그들이 길을 열어 주었다. 우물쭈물 하고 있는 리체를 돌아본 시녀가 재촉했다. “이리 들어와요.” 머뭇거렸지만, 거절할 수도 없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조금 전보다 여성스럽고 우아한 방이 나타났다. 섬세한 붓꽃 무늬 벽지와 푸른 샹들리에로 장식된 거실을 가로질러 침실에 들어섰다. 침대 위에 의식이 없는 사람이 누워 있었다. 푸른 빛 도는 조끼에 튄 핏자국이 눈에 띄었다. 벽 쪽으로 돌린 옆얼굴을 언뜻 보는 순간 리체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올렸다. “아!” 시녀가 주의를 주기도 전에 침대 곁에 앉아 있던 사람이 시녀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괜찮다는 의미였다. 흰 실내복 차림의 부인이었는데 그녀의 옷에도 핏방울이 묻어 있었다. “놀랐겠구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리체는 저도 모르게 문 앞까지 물러서 있었다. 겨우 부인 쪽을 보며 입을 여는데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아, 아뇨... 아니, 네...” “괜찮단다.” 부인은 금빛 머리를 틀어 올렸는데 얼굴이 눈에 익었다. 많이는 아니랄까, 하지만 닮았다. “난 조슈아의 어머니란다. 조슈아의 친구라고 했지?” 이 부인이 아르님 공작부인이라는 생각이 떠오르자 리체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소공작에게 반말을 하며 여행했더라도 성에서 만난 공작부인의 무게감은 전혀 달랐다. 결국 시녀가 주의를 주었다. “무엇 하시나요. 이름들 말씀드리지 않고.” “리, 리체 아브릴...입니다.” “그래. 조슈아와 함께 여행을 했니?” “네.” “팔을 다쳤구나. 어린 아가씨가 그런 험한 일을 당하도록 힘든 여행을 하다니.” 보호 받으며 자란 귀족 아가씨가 아닌 리체는 대꾸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공작부인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리체를 보다가 말했다. “내 아들을 많이 도와주었겠구나. 고맙다.” 문득 조슈아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어째서 공작부인이 이곳에 있을까 싶었다. 그때 공작부인이 고개를 돌려 침대에 누운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난 예전에 남매를 키우다가 조슈아 하나만 남았었지. 그런데 이제 다시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됐구나.” 리체는 눈만 깜빡거렸다. 공작부인의 말을 얼른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저... 둘 다 아들로 생각하신다는 말씀이신가요? 저기, 외, 외람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시녀가 리체의 소맷자락을 톡 쳤다. 상심한 공작부인에게 위로가 될까 하여 데려온 아이가 예의를 몰라서는 곤란했다. 그러나 리체는 한 번 말을 꺼내면 쉽게 삼키는 성격이 못되었다. “저희는 지금까지 저어, 저기 누워 있는 사람... 아니, 인형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며 왔거든요. 세상에 같은 사람이 둘일 수는 없으니까... 조슈아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마법사도 그렇게 말해 줬고요. 저기, 제 말이 무례하게 들렸다면 사죄드리겠어요. 하지만...” “아니. 네 말도 맞구나.” 공작부인은 다시 침대 쪽에 눈길을 주었다. “같은 사람이 둘이라면 본인들은 얼마나 고통스럽겠느냐. 네가 조슈아를 도와주려 했던 마음은 나도 알 수 있다. 네 친구는 너와 함께 여행한 아이이지 여기 누운 이 아이가 아니니 말이다.” 리체는 여전히 두려운 눈빛으로 침대를 곁눈질했다. ‘인형’ 이 그곳에 누워 있었다. 그들이 없애야 할 줄 알았던 존재다. 분명 조슈아와 똑같은 모습, 똑같은 성격, 똑같은 기억을 가진 존재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진심은 그런 생각과 거리가 멀었던 것 같았다. 인형은 그녀의 머릿속에서도 ‘괴물’ 에 불과했다. 하지만 괴물의 모습인 것보다 실은 정말로 같은 모습인 것이 더 두려웠다. 리체는 조금 전에 목숨이 경각에 달린 조슈아를 보았다. 그런데 또 다른 조슈아가 이곳에 조용히, 잠든 것처럼 누워 있었다. 그녀의 기억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지만, 나는 어머니란다.” 공작부인의 어조는 슬픔에 잠겨 있었으나 침착했다. “두 아이 중 하나만이 진짜라고 한다면, 그래서 진짜인 아이만을 사랑하기로 한다면 다른 한 명은 어머니 없는 아이가 되고 말지 않느냐. 자식이 어떤 모진 일을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품어주는 사람이 어머니가 아니냐. 그런 어머니조차 등을 돌리고 나면 그 아이는 얼마나 가슴이 찢어질지 생각해 보았니?” 리체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몰랐다. “하지만...” “나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단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네가 보고 있다시피, 이 아이는 네가 알고 있을 조슈아와 똑같단다. 난 이 아이와 몇 달을 함께 보냈으니 잘 알고 있다.” 어머니는 자식이 둘이 되고, 열이 되더라도 똑같이 사랑할 수 있을까? 한명을 기르는 부모와 두 명, 열 명을 기르는 부모가 자식 각각에게 품는 애정의 깊이는 다를까? 열 명을 기르면 줄 수 있는 사랑도 십 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 것일까? “솔직히, 저는 속았다는 생각밖에 못할 것 같아요.” 공작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두 아이가 진실로 같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너도 나처럼 어찌할바를 모르게 될 게야. 몇 달 동안 나와 저 아이가 함께한 시간이며 정을 간단히 없이할 수 있겠니? 그럴 수 있다면, 너 또한 네가 아는 조슈아와 보낸 몇 달을 쉽사리 무시할 수 있을 테고, 그렇다면 그 아이와 이 아이 중 누군가를 택할 까닭도 없는 것 아니겠느냐. 같은 시간을 두 번 겪을 수 있는 이는 없단다. 네가 그 아이와 함께하고, 내가 이 아이와 함께한 몇 달은 이미 존재한 거란다. 자신이 겪은 시간을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리체가 아는 조슈아는 하나뿐이었다. 리체는 눈물이 글썽해져서 호소했다. “하지만요, 저기, 조슈아는 오래 살기가 힘들 수도 있는데, 어머니께서 함께 있어주지 않으면...” “안다. 하지만 이 아이가 깨어났을 때 어머니조차 자신을 버렸음을 알고 괴로워할 것을 생각하면, 난 이 아이를 떠날 수가 없구나. 다른 아이의 곁에는 아버지와 모든 사람이 있으니 난 이 아이를 지키련다. 둘 다 의식을 잃었고, 숨이 약해지고 있단다. 어쩌면 나는 곧 두 아이를 다 잃겠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조슈아를 생각하면 다시 뒤죽박죽이 되고 마는 마음이었다. 리체는 대답하지 못한 채 시선을 피했다. 어느 쪽이 이기심이고 이타심인지, 애정이고 매정함인지, 이제는 구별할 수가 없었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그럼 조슈아를 찌른 사람은...” 공작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가 찔렀지.” 리체는 자신이 없어졌다. 이 일은 그녀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 있었다. 한가지만은 분명했다. 리체와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 그녀의 친구는 여기 누워 있는 인형이 아니었다. 머리맡을 지켜야 한다면, 만일 임종을 지켜야 한다 해도, 이쪽이 아니었다. 리체는 머뭇머뭇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이 방에서 나왔다. 문 앞에서 리체는 어린 남자아이와 마주쳤다. 금발에 무신경한 표정을 한 네댓 살 가량의 아이였다. 놀란 기색이 없는 얼굴이 기억에 남았다. 아이는 리체를 쳐다보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하루가 흘렀다. 눈을 뜬 사람은 없었다. 성에 정적이 감돌았다. 숲은 비었고 문은 닫혔다. 새소리조차 죽어버렸다. 실은 여전히 새는 지저귀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들은 사람이 없었다. 8월 23일, 하늘은 무감각하게 맑았다. “할아버지.” 통나무와 판자를 이어 곳곳에 틈이 생긴 벽, 불을 피운지 몇 년은 족히 된 벽난로, 높이를 맞추려고 다리만 수선해 놓은 낡은 탁자, 비가 샐 듯한 천장.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조금 더 지나면 자연스레 숲의 일부가 되었을 집이었다. 문틈으로 들어온 빛 속에서 먼지가 뱅뱅 돌았다. 언뜻 무대에서 주연 배우를 비추는 각광같다. 주연 배우는 자리에 없어 헛되이 마룻바닥만 밝히고 있다. 막시민은 빛 속에 손가락을 넣어 보았다가 빼 버렸다. 그리고 다시 분필을 집어 들었다. “그 자국이 여기부터, 여기까지거든요. 이렇게.” 마뭇바닥에 분필이 그어져 나갔다. 직선으로, 한 번 꺾이고 다시 직선으로, 그런 식으로 긴 육각형이 그러졌다. 히스파니에는 도형을 들여다보았다. “흐음.” “이게 뭘 것 같아요?” 히스파니에 노인은 웅크리고 앉았던 바닥에서 일어섰다. 먼지가 푸르르 날렸다. “관이로구나.” 막시민은 분필을 든 채 자기가 그려 놓은 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분필을 놓아 버렸다. 두 손을 머리 뒤로 올렸다. 등 뒤에 잡동사니가 쌓여 있어 드러눕지는 않았지만, 그러고 싶을 정도로 피로한 얼굴이었다. “관 치곤 좀 이상하죠.” “그래.” 히스파니에 노인은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좀 작단 말이지.” 이 낡은 집에서 최근까지 누군가가 지냈던 것은 분명했다. 하인들에게 물어보았지만 묘하게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울새의 숲은 넓었다. 이런 통나무집이나 오두막이 십여 개도 넘게 있다고 했다. 소공작이 어려서 놀던 놀이터이기도 했고, 여름에 더위를 피할 겸 소풍 삼아 자러 가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다 비어 있었다. 그 중에도 이곳은 특히 낡은 편이라, 하인들도 언제 들여다봤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대답뿐이었다. 이런 곳의 일을 알만한 자는 숲지기뿐이었다. 오전에 만나봤지만 그는 우물우물 말을 흐리기만 했다. “아니, 그게, 가끔 공작님 가족 말고도 가신 되는 분들이 가족을 데려오거나 하는 일도 있고, 그걸 일일이 어쩌고 참견하는 것도 내 주제에 맞질 않아서.” 히스파니에 노인은 숲지기가 저렇게 말을 해도 공작이 묵인할 만한 인물이 아닌 자가 이런 곳을 차지했더라면 조용히 있지 않았을 거라고 말했다. 비록 숲이 넓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곳은 공작의 사유지였고 정기적으로 돌아보게 되어 있는 곳이었다. 낯선 자의 침입을 몇 날이고 묵인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숲지기를 문책할 필요도 없었다. 막시민은 이곳에 누가 있었을지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하인들의 말을 들어 보니 테오스티드 다 모로의 친구라는 자가 오랫동안 저택에 머물렀다고 했다. 누군가는 그자가 단순히 모로의 고향 친구라고 했고, 다른 사람은 사람이 좋은 것 같더라고 했으며, 또 다른 사람은 신경질적인 사람이었다고 말해 주었다. 은둔하다시피 해서 얼굴도 못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결정적인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은 부엌일을 하는 하녀였다. “그 사람은 마법사였어요. 틀림없거든요. 식품 창고에 함부로 드나드는 건 요리장님이 엄하게 금하고 있는데 그 사람은 수시로 들어와서 뭔가를 가져갔거든요. 난 그 사람이 갖고 간 게 마법 재료란 걸 알아요. 우리 고모할머니가 그런 걸 배워서, 마법사들이 창고에다가 뭘 모아두는지 알거든요.” 확실히 재료를 가져다 야식을 만들어 먹은 것 같지는 않았다. 마법사가 가버린 낡은 집에는 용도 모를 쓰레기가 가득했다. 바삭바삭 말라 정체를 모를 풀과 꽃, 고기였는지 가죽이었느지 모를 덩어리들, 냄새가 이상한 물이 든 단지들, 썩어서 악취를 풍기는 짐승과 곤충의 일부, 사람의 것일지도 모르는 뼛조각, 천 조각과 실오라기, 각종 흙. 그러나 화분에 심은 것은 모조리 말라 꼬부라졌고, 값진 유리로 만든 것들은 전부 부서져 있었다. 마법사였고 이름이 ‘애니’ 였다는 그가 무슨 실험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막시민이야 마법사가 직접 설명을 해 주었다 해도 알 수 없었을 터였다. 막시민은 이자가 인형을 만든 자이며, 따라서 본체를 갖고 있었으리라고 추측했다. 이곳까지 오게 된 근본적인 이유인 본체, 그걸 부수지 못했으니 목표는 달성된 것이 아니었다. 조슈아가 자리를 되찾았다 해도, 인형을 손에 넣었다 해도. 그리고 테오가 사라졌다 해도. 자기 방에 쓰러져 있는 테오를 발견한 것은 그들이 성에 도착한 날 오후 무렵이었다. 오전 내내 누구 할 것 없이 조슈아의 일에 정신이 쏠려 나타나지 않는 테오의 일은 아무도 떠올리지 못했다. 하인이나 시종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막시민조차 테오가 도망치기 전에 붙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사경을 헤매는 조슈아 곁에 있자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테오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다가 숨이 끊어진 듯했다. 테이블을 껴안다시피 하며 쓰러진 모습이 그랬다. 바닥에는 잔 두 개가 나뒹굴고 있었다. 술병도 가까이 놓여 있었다. 술이 남은 양을 보면 고작 두 잔 남짓 따른 듯했다. 잔 속에 남았을 술은 모두 양탄자가 빨아들였기 때문에 독이 있었는지 어떤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남은 술에는 적어도 독이 없었다. 잔이 두 개인 것으로 보아 누군가가 함께 있었을 텐데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오전 내내 다들 경황이 없어서 테오의 방에 낯선 자가 들어갔더라도 기억할 사람이 없었다. 테오에게는 개인 비서가 한 명 있었다고 하는데 그 자 역시 간 곳이 없었다. 사람들은 역시 자살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럴 수 있었다. 조슈아가 돌아왔으니, 이렇게 죽지 않았더라도 테오의 음모는 끝이 났다. 그가 어느 순간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지는 불분명해도, 인형의 존재가 드러난 이상 변명의 여지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막시민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날 누군가가 인형을 조종한 것은 분명했다. 아르님 공작은 인형과 대화하다가 태도가 조금 이상해진다고 느꼈을 때 조슈아가 나타났다고 했다. 기척조차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나타나는 바람에 미리 들어와 있었던 것은 아닌가 착각이 들었을 정도라 했다. 다음 순간 인형은 단도를 빼어 조슈아의 가슴을 찔렀다. 모두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노련한 무인인 공작조차 가로막을 기회를 잡지 못했을 정도로. 인형이 본래 찌르려고 한 사람이 조슈아였을까? 그럴 리 없다. 인형이 그 자리에서 조슈아를 만나게 되리라고 예상했을 리 없다. 몰랐는데 단도를 준비했다는 것은 이상하다. 막시민은 인형이 본래 찌르려던 사람은 다른 사람, 다시 말해 공작이 아니었을까 추리해 보았다. 그러나 그 말을 공작에게 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추리를 믿는다면 테오는 ‘애니’ 라는 마법사를 통해 인형을 조종해서 공작을 죽이려 한 셈이 된다. 그 계획은 상당한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겉보기에 그 사건은 소공작이 아버지인 공작을 죽인 모양새가 되었을 테고, 그렇게 되면 죽은 공작은 물론, 패륜아로 낙인찍힌 소공작도 파멸하는 것은 자명한 수순이었다. 그 다음에 아르님 가문을 차지할 사람은 누구일까? 아르님 핏줄을 이은 아들이 있는 테오밖에 없다. 그런 무대가 마련되어 조종당한 인형이 공작을 찌르려는 순간 조슈아가 뛰어들어 막았고,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본 인형이 공황 상태가 되어 조슈아를 찔렀다. 이것이 막시민이 생각하는 사건의 전말이었다. 조슈아가 순식간에 나타났다는 공작의 설명은 조슈아가 짧은 강령을 이용해서 공작을 보호했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부터 조슈아는 그런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해전에서 샐러리맨이 나타났을 때 할아버지를 구한 것도 같은 방법이었다. 집중하는 순간이 필요해서 자유자재로 쓸 수는 없고 잠깐밖에 유지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조슈아 말로는 페리윙클에서 어느 소녀에게 배웠다고 했다. 이런 계획을 세운 테오가 어째서 자살을 했을까? 진짜 조슈아 일행이 나타난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공작 암살이 실패했음을 알아서? 그럴 리 없다.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오전 내내 그는 달아날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아무도 그를 찾으려고도, 잡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증거로 애니라는 마법사는 사라졌지 않은가? 또 비서도 달아나버렸다. 그런데 왜 테오만이 도망치지 않고 죽었을까? 여기서 추리는 막혔다. 정보가 부족했다. 인형을 만든 자가 테오라는 사실을 듣고 나서 공작을 비롯한 사람들은 어쨌든 테오가 죽은 걸로 만사가 잘 됐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그러나 막시민은 그럴 수 없었다. 테오가 죽은 것과 연관이 있든 없든 마법사는 달아났고 본체 또한 사라졌다. 그리고 또 하나, 아나로즈가 부탁한 무구의 조각 역시 찾지 못했다. 테오가 죽은 이상 모든 일의 열쇠를 쥔 자는 마법사 ‘애니’ 일 수밖에 없었다. 히스파니에 노인과 아르님 공작은 각자 심복들에게 수색을 명령해 놓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날 아침 인형을 조종하던 순간까지 비취반지 성에 있었을 테니 어렵지 않게 뒤쫓을 수 있으리라 여겼던 마법사가 연기처럼 자취를 감춰버렸던 것이다. 다른 후원자가 있어 숨겨주기라도 한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듯 흔적 없이 사라질 수가 있을까. “이 먼지 자국 속에 놓여 있었을 관이 본체였겠죠. 그런데 이 마법사란자는 인형은 내버려두고 본체만 가져가버렸단 말이죠.” “그 결과 인형이 깨어나지 못하게 됐지 않느냐.” 인형은 여전히 다른 침실에서 잠들어 있었다. 공작부인 외에는 돌아봐주는 사람 하나 없이. “듣기로 본체와 인형이 멀어져선 안 된다고 하더란 말이죠 본체를 놔뒀어도 우리가 얌전히 보관해주진 않았겠지만, 인형과 떨어뜨려 놓는 것도 결과적으로 마찬가지일지도 모르는데. 인형을 데려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치더라도 본체를 가져가버리다니. 마법사는 자기가 만든 인형에 애착도 없었던 걸까.” “저대로 인형이 깨어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느냐?” “마법이야 잘 모르지만, 본체가 돌아오지 않는 한은 그렇지 않을까요.” 히스파니에 노인은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막시민은 한숨을 쉬고 발끝으로 분필 자국을 문지르다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낡아빠진 서까래가 곧 떨어지기라도 할 모양새였다. “조슈아 자식은... 먼저 저택에 들어가서 대체 뭘 했을까요.” 히스파니에 노인은 이미 다 조사해 본 잡동사니 더미를 괜스레 뒤적이다가 돌아서서 문을 열어 놓았다. 막시민은 문 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햇살은 적당하고, 숲은 산책하기 좋았다. 정말로 아름다운 성이었다. 빌어먹을 멋진 날씨였다. “어머니한테 가서 사실을 다 밝히겠다더니, 리체와 내가 갑자기 나타나는 것보다 혼자 가는 게 나을 거라고 하더니, 다른 곳도 아니고 자기 집이니까, 그게 당연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체 무슨 짓을 하다가 그런 꼴이나 보여주고...” 히스파니에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루하게 긴 8월 24일이었다. 한 번 만나보려면 반 년 전에 예약해야 한다는 소문으로 유명한 의사 루이제 스트롬이 불려온 날은 8월 25일이었다.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공작이 보내 준 마차 안에서 스트롬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창밖만 보았다. 함께 앉았던 공작의 비서 헤슬이 침묵이 불편한 나머지 날씨 얘기를 몇 마디 건넸지만 고갯짓으로 겨우 답했을 정도였다. 마차가 성 앞에 섰다. 입구에는 시종들과 더불어 노인 한 사람이 나와 있었다. 줄곧 쌀쌀맞던 스트롬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노인을 껴안고 비주를 세 번 나누었다. “루이제. 어려운 걸음 했어.” “히스파니에 님이 부른 게 아니었으면 오지 않았어요.” “알고 있어. 잘 와줬어.” 루이제 스트룸은 마흔 살가량 된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였다. 남자들처럼 검은 튜닉을 걸치고 머리를 짧게 깎은 겉모습만으로는 특별함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마법과 의술을 동시에 사용해서 못 고치는 환자가 없다던 그녀가 갑작스레 콧대로 악명이 높아진지 네댓 해쯤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값 높여보려고 저런다고 욕을 했지만 히스파니에처럼 가까운 이들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스트롬은 곧 조슈아의 침실로 안내되었다. 침실 앞에서 그녀는 공작을 만났지만 결례가 되지 않을 정도의 예만 갖췄을 뿐이었다. 공작은 이미 이야기를 들은지라 개의치 않고 문을 열어주도록 했다. 조슈아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지난 사흘 동안 왕궁에서 보내온 시의를 비롯해서 수십 명의 의사가 왔다가 떠났다. 올 때는 어떻게든 차도를 보이려 애쓰던 그들 모두가 떠나며 같은 말을 했다. 의미 없는 말뿐이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 잠든 것처럼 눈을 감은 소공작만이 남았다. 푸른 기 도는 창백한 얼굴로, 여전한 보랏빛 입술을 하고서. “상처를 봅시다.” 시종이 조심스럽게 이불을 젖혔다. 조슈아의 상체는 맨몸이었다. 가슴 중앙에서 왼쪽 아래에 손가락 두 마디가량 되는 상처가 있었다. 폭이 넓은 단도로 찌른 자국이었다. 상처를 바라보던 스트롬이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깊이 찔렸죠?” 침대 맞은편에 앉아 있던 소년이 손가락을 벌려 한 뼘 조금 안 되는 길이를 만들어 보였다. 스트롬은 그 소년을 보더니 불쑥 말했다. “안경을 썼네.” 그러더니 자기도 안경을 꺼내어 썼다. 막시민은 당혹스런 표정이 되었다. “관통상은 아니고?” 히스파니에 노인이 대답했다. “비스듬히 들어갔지.” “갈비뼈 부러졌고?” “그래.” “그대로 사흘이랬죠?” 스트롬은 조슈아의 몸에 손을 댈 생각도 하지 않고 잘라 말했다. “죽었어야 되네.” 막시민은 의사를 한 대 갈겨주고 싶은 것을 눌러 참으며 말했다. “그래. 그런데 왜 살아 있는지 궁금해서 부른 거라고.” “그 말 맞네. 왜 살아 있지?” 리체가 막시민의 소매를 붙들었다. 스트롬은 냉담하게 팔짱을 끼며 히스파니에 노인을 올려다보았다. “지혈은 어떻게 된 거죠? 쉽사리 지혈이 될 만한 상처가 아닌데.” “어느 순간 저절로 멈췄네.” 스트롬은 조슈아의 상처를 다시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그러고 있다가 이윽고 턱을 괴었다. 본래 작은 체구가 점점 의자에 묻혀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던 히스파니에 노인은 손을 내저어 다른 사람들을 물러가게 했다. 이윽고 침대 곁에는 노인과 막시민, 리체, 그리고 아르님 공작만이 남았다. 그러는 동안 한 마디도 않던 스트롬이 그 자세 그대로 불쑥 말했다. “나쁜 영감님 같으니. 이런 줄 알고 일부러 나 불렀죠?” “그래.” “나 아직 제대로 못하는데. 몇 년은 더 해야 돼요.” “어차피 너 말고 할 줄 아는 사람도 없다.” “아니에요. 더 잘하는 사람 있는데. 불러올 방법이 없을 뿐이지.” 그러더니 주위를 둘러보고 불평했다. “사람이 몇이야. 너무 많은 것 아니에요?” “여기서 너 하는 것 보고 배울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글세. 저 안경 쓴 녀석 똑똑해 보이는데.” 막시민의 표정이 뜨악해졌고 히스파니에 노인은 소리 없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녀석 아니니 걱정 말아라.” 스트롬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기보다 멍청하단 말이군요.” “...” 평소 같으면 가만히 있을 리 없건만 막시민은 입을 다물었다. 사흘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막시민의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스트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감고 잠시 서 있었다. 주위 사람이 지루해질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눈을 뜬 그녀는 조슈아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리고 침대 아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앉은키가 작아 조슈아의 손이 침대 아래까지 내려왔다. “이제부터 조용히 해 주세요.” 스트룸은 눈을 감고 조슈아의 손을 쥔 채 기도를 하듯 고개를 숙였다. 오랫동안 미동조차 없었다. 조금 열어 놓은 창밖에서 빗소리가 자작자작 울렸다. 한결 서늘해진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갈비뼈가 부서졌을 정도의 치명상, 반 시간의 출혈, 청색증, 느리게 뛰던 맥박과 떨어진 체온, 어느 모로 보나 몇 시간 안에 숨이 끊어졌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조슈아가 살아 있다. 사흘 동안 그상태 그대로 오직 혼수상태에 빠져서. 다녀간 모든 의사들이 말했듯 그런 상태로 살아 있는 것은 불가능 했다. 마치 조슈아의 몸속에서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끊어지려는 생명줄을 누군가가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는 것만 같았다. 잠든 듯 깨어나지 않는 조슈아의 얼굴은 곧 무대에 서기 위해 특별한 분장을 한 것처럼 보였다. ‘일 드 모르비앙의 결혼식’에서 시체의 빛깔을 눈가에 칠했던 것처럼. 청색증으로 파르스름해진 목과 대조적으로 창백한 눈꺼풀을 하고, 불러도 듣지 않고 손을 잡아도 깨지 않았다. 그 혼자만이 노래하고, 연기하고, 단 한 명의 관객도 필요없는 무대에 빠져 돌아오지 않았다. 빗소리가 차츰 잦아들 즈음이었다. “아!” 스트룸이 눈을 번쩍 떴다. 동시에 조슈아의 손을 떨어뜨렸다. 히스파니에 노인이 물었다. “왜 그러나?” 스트룸은 얼굴이 창백해져서 대꾸 없이 멍해져 있었다.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답답해 죽을 지경이 된 막시민이 어깨를 잡아 흔들고 싶은 것을 겨우 참으며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이윽고 스트롬이 고개를 한 차례 흔들며 한숨을 토했다. “아... 이거 힘들겠는데...” “힘들다니?” “힘들다니요?” 막시민과 리체가 동시에 반문을 쏟아냈다. 스토롬은 천장을 보고 있다가 겨우 표정을 되찾았다. 그러더니 눈을 홉뜨며 히스파니에 노인을 홱 돌아보았다. “왜 말 안 했어요?” “무얼?” “소공작이 영매란 거. 이거 보통이 아니잖아. 꽉 막혀 있다고요. 미리 말을 했어야 할 것 아니에요.” 격한 어조는 아니었지만 또박또박 나오는 말에서 흥분이 묻어났다. 히스파니에 노인 대신 막시민이 말했다. “그래. 그 자식 영매 맞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것도 모르고 소공작의 정신에 직접 ‘소통’을 시도했단 말이다. 그래, 비유하자면 문이 열려 있을 줄 알고 바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꽉 닫아 걸린 쇠문에 꽝, 하고 부닺친 거라고. 젠장, 머리 깨지는 줄 알았잖아.” “대체 뭐가 막고 있다는 거야?” ‘소통’ 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스트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뭐긴 뭐야, 유령들이지!” 막시민과 리체는 당황해서 얼굴을 마주보았다. 히스파니에 노인이 그들을 보았다. “조슈아가 영매가 맞느냐?” 막시민이 고개를 끄덕이고 리체가 덧붙였다. “네. 강령도 몇 번이나 했었어요.” “강령이라고? 확실한 거냐? 어떤 식이었지?” 리체는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그게... 제일 심각했을 때 기준으로 구십몇명이더라...” 스트롬은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구십? 맙소사.” 막시민이 말을 받았다. “그 구십 몇인가 들어왔을 때 심령 폭풍인가 뭔가 일으켜서 사방 몇십 미터를 다 날려버렸다고.” “맞다. 유령의 힘을 빌려서 저를 치료한 적도 있어요.” “그 강령한 유령한테 얼마간 의식을 뺏기기까지 했고.” “늘 쫓아다니는 숫자만 해도 수십은 될 걸요. 막시민, 그 약속 어쩌고 사람들이라던가, 몇 명이었지?” “내가 어떻게 알아.” “참, 그리고 붙박이로 쫓아다니는 유령도 있어요. 우리하고도 얘기하고 그랬는데. 그것도 자주.” “대화만 했냐. 직접 보기까지 했잖냐.” “아참, 그 유령선에서 만나봤지.” 둘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히스파니에 노인과 스트롬은 점차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거, 이렇게 위험한 곳에 부르다니 히스파니에 영감님 아주, 아주 나쁘시네. 솔직히 조금 전에 소공작의 의식 세계에 나까지 말려들 뻔해서 이만 저만 놀란 게 아니에요. 소공작은 강력한 영매여서 유령들을 꽉 끌어 잡고 있는데 소통을 통해 내 정신이 들어가는 순간 나까지 끌어당겼단 말이에요. 아까 내가 뿌리치고 나오지 못했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요?” 리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떻게 되는데요?” “산 채로 유령이 되는 거야. 내 몸은 혼 빠진 시체가 되고. 즉석에서 영육분리를 시켜주시는 거지. 소공작은 완전 괴물이야. 산 사람의 혼까지 빨아들여 삼킨다고.” 그때 줄곧 말이 없던 아르님 공작이 입을 열었다. “이 아이 뒤에 유령이 따르는 것은 사실이오. 알다시피 그 아이는 데모닉이고, 따라서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영매일 거요.” 아르님 공작이 친인 외의 사람 앞에서 자기 입으로 조슈아를 ‘데모닉’ 이라고 말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 힘이 조슈아의 정신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으니 나는 늘 불안하게 여겼소. 그 아이가 유령과 대화하는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소이다. 내가 그러는 것을 알고 조슈아는 점차 내게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지. 지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렇게 숨겼던 힘이 자라나 어디까지 갔는지 잘 알 수가 있었소. 하지만.” 공작의 얼굴에 고통이 나타났다. “내 생각에는 지금 조슈아가 살아 있을 수 있는 까닭이 오히려 유령들 덕택이 아닐까 싶소. 유령들이 죽어야 할 그 아이의 몸을 억지로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강력한 영매인 조슈아를 잃고 싶지 않은 그들이 조슈아가 편히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 아닐까.” 막시민은 무례함도 잊고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편히 죽다니, 그건 맞지 않다고 봅니다. 편한 죽음 따위, 있을 리가 없습니다.” 아르님 공작은 막시민을 보았다.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러면 너는 조슈아가 저대로 영영 살아도 좋다고 여기느냐?” “그건...” 스트롬이 말을 막았다. “그 이야기는 끝날 수 없는 논쟁입니다. 저와 같이 영혼의 상처를 다루려는 의사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문제죠. 영혼이 아픈 자들 가운데는 몸은 건강한 자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 이들에게 소위 ‘편한 죽음’ 을 주는 것이 옳은지, 살릴 수 있는 한 살리는 것이 도리이자 예의인지, 결론이 나지 않는 이야기죠.” 막시민이 고개를 돌려 스트롬을 보았다. 분노와 슬픔과 피로가 뒤범벅된 얼굴이었다. “그래. 아줌마 의사 아니었어? 영혼을 다룬다고? 그런 건 상관없어. 어째서 무슨 소통이니 뭐니 이상한 것만 한다고 그러는 거야? 대체 살아나게 할 수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러다가 죽어버리는 거야, 아니면 이대로 영영 살게 되는 거야? 대답 좀 해봐. 답답해서 내가 숨이 넘어갈 지경이야. 이 자식이 자기가 죽는 걸 별로 심각하게 생각 안 한다는 건 알아. 하지만 난 절대로 그렇게 생각 할 수가 없단 말이야!” “살아나게 하는 건 내가 아냐.” 스트롬의 눈은 차분했다. “그럼 유령들한테 맡기자고?” “유령들이 소공작을 살려놓고 있다는 공작님의 말씀은 옳아.” 스트롬은 아르님 공작을 바라보았다. “소공작의 상세는 사흘 전, 상처에서 피가 멎는 것과 함께 진행을 멈췄습니다. 계속됐더라면 약 반 시간 안에 숨이 끊어졌을 상태죠. 이미 모든 신호가 죽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쇼크도 시작됐고요. 이 상태로 사흘이나 살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스트롬은 소공작을 진찰했다고 할 수 없었다. 맥박 한 번 재지 않았다. 그런데도 술술 말이 이어졌다. “사람이 죽으려면 몸의 각 기관이 움직임을 멈춰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손상된 장기를 비롯해서 모든 곳이 억지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누군가가, 다시 말해 유령들이 소공작의 몸을 대신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다만 소공작의 강력한 의식만은 그들이 되살릴 수 없기에 깨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잠든 의식으로도 이만한 유령들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가 있는 소공작입니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해요?” 리체가 물었다. 스트롬은 조슈아의 얼굴을 다시 내려다보며 말했다. “의식이 깨어나야 해.” “그것만으로 돼요? 몸은 이미...” “확실한 건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이대로 치유가 될지도 몰라. 어떻게든 장기들이 제 기능을 하고 있다는 건 자가 치유 기능도 돌아간다는 뜻이니까.” 막시민은 벌덕 일어나려다가 말고 물었다. “그 말, 정말이겠지?” “다그치려 하지 마, 보기보다 멍청하다는 친구. 난 가장 낙관적인 결말을 얘기한 거니까.” 스트롬은 안경을 한 차례 올리며 막시민과 눈을 마주치더니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거짓말은 안 했어.” 리체가 기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켈스, 고마워요!” 다들 같은 심정이었던 까닭에 다행히 켈스가 누구냐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 아르님 공작이 급히 물었다. “그렇다면 의식만 깨어나면 된다는 뜻이오?”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따지고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쩌면 제일 어려운 일이 될지도 모르겠는데요.” 스트롬은 안경을 벗어서 집어넣었다. “전 처음엔 소공작의 의식을 직접 건드려 잠을 깨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유령들이 겹겹이 싸고 있어서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죠. 얼마 동안은 유령들이 일하도록 내버려 두는 쪽이 나을 겁니다. 몸의 회복 상태를 수시로 관찰하도록 하고요. 어쩌면 몇 달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죽을 사람이 살아나는 건데, 그 정도는 걸리는 거죠. 그런 식으로 몸이 회복이 된 다음에...” 스트롬의 눈이 다시 막시민에게 향했다. “너, 소공작의 친구지?” 막시민도 안경을 벗어 닦으며 말했다. “그럼 원수겠냐고.” “자, 난 소공작과 아는 사이가 아냐. 오늘 처음 봤다고. 당연히 소공작의 영혼은 나를 알지 못해. 소통을 통해 억지로 비집고 들어갈 수는 있지만 모르는 사람이니 대화하려 하지 않겠지. 그래, 핵심은 대화야. 소공작의 영혼이 깨어날 수 있도록 대화를 이끌어내야 해. 다시 말해 계속해서 말을 걸어야 해. 아는 사람이. 가족이나 친구가.” 리체가 물었다. “아무 말이나 해요?” “아무 말이나 할 수도 있지만, 소공작이 대답하고 싶어질 만한 화제라면 더 좋겠지. 화가 나게 해 보는 건 어때?” 스트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말없이 듣고만 있던 히스파니에 노인을 향해 말했다. “자, 영감님. 숙제를 내겠어요. 소공작의 몸이 일정 이상 회복되거든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정해 놓고 하루에 몇 시간씩 소공작에게 말을 걸도록 해요. 여기 남아 계신 분들이 소공작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임은 틀림없을 테니까. 미리 말해 두지만,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말을 걸라고요! 참, 그리고 몸의 회복은 저절로 될 때까지 의술로 거들지 않는 쪽이 좋아요. 유령들의 마음이란 알 수 없는 거니까. 그들이 일하지 않고 떠나버리면, 소공작은 그 순간 죽는 겁니다.” 스트롬은 막시민과 리체, 아르님 공작, 히스파니에 노인의 얼굴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표정에 만족한 듯 덧붙였다. “아니지. 반시간쯤은 걸리겠네요.” 2. 감춘 자, 찾으려는 자 “내가 감춘 편지 속에 진심을 적어 두었어. 그 편지를 읽어줘. 찾기가 쉽진 않을 거야. 언젠가 편지를 찾거든 아주 천천히 읽어줘. 우리가 만난 날로부터 오늘 헤어지기까지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 하고 싶지 않았던 말들 모두 적어 접어놓았어. 풀로 봉하지도 않았어. 자물쇠를 걸지도 않았어. 다만 옷깃으로 감추어 가슴 깊이 넣어 두었어.“ 11월 첫날, 아침부터 첫눈이 내렸다. 무심코 창을 열었다가 눈을 본 이엔은 묘한 기분으로 고개를 젖혔다. 올려다본 하늘에서 눈은 빙글빙글 돌며 내리고 있었다. “에취!” 코에 눈이 들어갔는지 재채기가 나왔다. 창가에서 물러서며 창을 닫을까 하다가 그냥 내버려두었다. 책 몇 권을 챙겨 내려갈 준비를 했다. 그동안 창틀에는 눈이 한 켜 쌓이고 있었다. 식당으로 내려와 보니 먼저 온 아이들의 머리가 다들 조금씩 젖어 있었다. 눈을 맞으러 나갔던 것이리라. 이엔은 조금 우울해졌다. 이런 날 같이 산책하자고 끌고 나갈 친구들은 사라져버렸다. 늦여름과 함께. 감상적인 기분에 이끌려 섭섭해 할 문제가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란지에도 하일저도 없는 교정은 쓸쓸했다. 란지에가 떠나며 그녀에게 맡긴 민중의 벗 학생들이 남아 있었지만 오랫동안 어울렸던 친구들에 비할 수는 없었다. 이엔도 곧 졸업하게 된다. 뒷일을 맡길 사람은 정해 두었다. 어쩐지 홀가분하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란지에가 안다면 잔소리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답할 말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여름에 떠난 녀석이 겨울이 되도록 편지 한 통 보내주지 않는 주제에 무슨 할 말이 있니! 이엔 선배. 같이 앉아도 되죠?“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나타난 후배의 얼굴에 이엔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귀족 학생들의 자리에 함께 앉을 수 있는 유일한 후배, 리어리드 남작의 맏아들인 패트릭이다. 이엔이 떠난 뒤 그로메 학원 내의 민중클럽 학생들을 이끌어 갈 사람이기도 했다. “앉아.” 잠시 후 음식이 날라져 왔다. 시중을 드는 하인과 따로 조리되어 나오는 질 좋은 식사도 귀족 학생들만의 특권이었다. “네 친구들은 어쩌고?” “저쪽에요.” 패트릭은 아버지부터가 민중의 벗에 줄을 대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합류한 경우였다. 그는 성미가 쾌활한 편이라 민중의 벗과 관계없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들에게 자기 정체를 들키지 않고 요령껏 행동하는 것에도 능숙했다. 란지에도 패트릭의 이런 처세에 감탄한 일이 있었다. “싸웠니?” “아뇨. 선배랑 얘기나 할까 하고요.” “애들 괜히 오해해.” “선배가 남자애들한테 관심 없는 건 전교가 다 알아요.” 패트릭은 짓궂은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그거 말고.” “백작 가문에 줄 대려고 저런다는 소문요? 걱정 마세요. 저희 아버지, 일찌감치 선배 아버님 눈 밖에 났잖아요. 워낙 낚시나 좋아하는 한량이시라서. 요샌 또 폴로에 빠지셨다던데.”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둘 다 리어리드 남작이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으나 듣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말할 생각은 없었다. “우울하신 것 같더라고요.” 패트릭이 불쑥 한 말에 이엔은 문득 자기 얼굴을 생각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눈도 오는데.” “눈이 뭘.” 마음에 없는 소리가 나왔다. 패트릭이 씩 웃었다. “학원 그만둔 선배님들 생각나시나 봐요.” “얘가 왜 남의 마음은 넘겨짚고 난리야.” 입맛도 없고, 포크로 완두콩을 찍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데 식사를 다 한 패트릭이 일어서며 말했다. “졸업하시더라도 가끔은 학교 오세요.” “응.” 건성 대답하는데 바로 대꾸가 왔다. “누구처럼 소식도 없어서 신경 쓰이게 하시지 말고요.” “이 녀석이...” 패트릭은 재빨리 도망쳐 가버렸다. 이엔은 자기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찍다 못해 뭉그러진 완두콩 옆에 음식이 절반 가까이 남아 있었다. 딴생각에 줄곧 잠겨 있었구나 싶었다. 맞은편에 사람을 두고도. 오후 수업을 듣고 기숙사로 돌아오는데 시종이 소포 하나와 손님 한 분이 와 있다고 말해 주었다.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서둘러 계단을 올라가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아마란스 양, 안녕하세요.” 실비엣 드 아르장송이었다. 스스로 의식할 수 있을 정도로 어깨에 힘이 빠졌다. 목소리도 그리 친절하게 나오지 않았다. “웬일이에요.” 책상 위에 책을 대충 던지고 기지개를 켜며 차 테이블로 갔다. 맞은편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실비엣은 언제나 그렇듯 단정한 숙녀의 모습이었다. 오늘은 은회색 담비털로 만든 목도리에 모자를 쓰고 왔다. 무척 비싼 것일 텐데, 아르장송 자작가에 저런 것을 간단히 살만한 돈이 있던가 하고 무심히 생각했다. “올 때마다 이렇게 냉대하시면 이런 겨울날 먼 곳까지 걸음 하는 제 마음도 추워진답니다.” 오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미안해요. 수업이 지루해서 짜증이 났었어요.” “이해해요. 공부는 정말 힘들겠어요. 전 엄두도 못 내는데.” 늘 그렇듯 쉽게도 다정스러운 말이 나온다. 이러니 그만 와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대놓고 하기도 어렵다. “날 가르치러 왔으면서 그런 말 하면 어떡해요.” 이엔의 말대로였다. 실비엣이 오는 것은 아마란스 백작부인의 부탁으로 이엔에게 사교계의 소문과 인맥, 예의범절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것에 조금도 관심이 없는 이엔으로서는 수업보다 지루한 공부일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흥미를 가지시면 공부는 커녕 여흥거리에 불과한 거랍니다.” “노력해볼게요.” 어머니한테 들어갈 이야기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이엔은 그렇게 말했다. 시종이 다과를 내어 오고, 반 시간가량 지루한 사교계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엔이 그나마 졸지 않는 건 이런 소문도 알아 놓으면 나중에 민중의 벗에서 하는 일에 보탬이 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흘러 아르님 소공작에 이르자 이엔은 문득 긴장했다. “아직도 잠든 채 그대로라고 해요. 과연 깨어날 수나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실비엣이 전해준 대로라면 귀족들은 조슈아가 두 명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대부분 모르는 듯했다. 하인 등을 통해 소문이 쉽게 퍼질 법한데도 이런 상태인 것을 보면 역시 믿어지기에는 너무 황당한 이야기였던 모양이었다. “만일 깨어나지 못한다면 아르님 가문은 누가 물려받게 될는지 자못 논란이 심하답니다. 돌아가신 따님의 아드님이 있지만, 사위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자살을 한 터라 후계자감으로 여겨지고 있다고는 볼 수 없어요. 이런 까닭에 새삼 방계 혈족에게까지 이야기가 뻗어나가는 중이지요.” 이엔이 말했다. “거 참 곤란하겠네요.” 실비엣은 고개를 끄덕이고 문제의 방계 혈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나갔다. 현재 상태로는 누가 순위가 높고, 누가 성실해서 평판이 좋으며, 또 다른 누가 요즘 들어 방탕한 생활을 접고 태도가 달라졌다는 이야기들을. 이엔의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녀가 나이트워크를 통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조슈아 폰 아르님을 찌른 사람은 문제의 복제된 인형이었다. 그날은 모로가 공작을 도모하기로 했다는 날이기도 했다. 란지에와 이엔이 망명 의회의 명령을 받아 세웠던 계획의 내용을 돌이켜 볼 때, 현재 소공작의 상태에 이엔도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본래 이보다 더한 상태를 염두에 두었던 것인데도, 이엔은 조슈아의 소문에 약간 가책을 느꼈다. 눈이 와서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탓일 지도 모른다. 다른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실비엣이 이야기를 맺는 중이었다. “그럼 아마란스 양, 다음번에 또 찾아뵐 수 있길 바랍니다.” “네. 고마워요.” 실비엣은 나무랄 데 없는 태도로 인사를 하고 떠났다. 이엔은 긴장이 풀어져서 의자에 잠시 늘어졌다. 오늘은 어쩐지 피곤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그녀에게도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도 좋을 시각이었다. 하루 종일 신경 쓰이는 일뿐이었으니까. 무얼 할까, 생각을 하다가 소포가 왔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벌떡 일어나 두리번 거리자 입구 옆에 비스듬히 세워 놓은 납작하고 네모진 물건이 눈에 띄었다. 액자일까? 끈을 끄르려다 보니 이미 포장 한족이 찢어져 너덜거렸다. 아마도 가져오다가 시종이 실수를 저지른 모양이었다. 그런 일을 일일이 책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므로 무시하고 포장을 벗겼다. 나온 것은 예상대로 네모진 틀에 든 그림이었다. 그림을 본 이엔은 종일 우울했던 기분이 확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탄성을 올렸다. “와아!” 그림 속에는 금빛 머리의 아리따운 소녀가 어설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엔은 그 미소의 가치를 알았다. 얼마나 보기 힘든 것인지. 파리한 뺨에도 홍조가 감돌고 있다. 가느다란 목과 어깨, 숱이 적은 눈썹. 살짝 도드라진 광대뼈 위로 광채를 품은 눈동자가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 그림 그린 사람을 보고 웃은 것일까? 그렇다면 그린 이는 몹시 행복했을 것이다. 란지에의 동생 란즈미를 만나본지도 벌서 반년이 되어간다. 란지에와 함께 종종 찾아가곤 했던 일도 옛일이 되었다. 이엔이 농담 삼아 누이동생 자기한테 시집보내라고 했을 때 란지에가 지은 표정도 기억이 난다. 그때가 정말 즐거웠는데. 이엔은 란즈미를 돌봐주는 세보 남매와도 금방 터놓고 지냈다. 디앙코르드가 란즈미를 좋아하는 것을 란지에도, 이엔도 알고 있었다. 아직은 누이 동생을 귀여워하는 마음에 가까울지 모르지만, 어느 쪽이든 그는 정말로 헌신적이었다. 그림 속에 란즈미의 미소를 잡아낼 수 있을 정도로. 디앙코르드가 이엔에게 그림을 보낸 이유는 금방 상상할 수 있었다. 란지에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그렸을 텐데, 란지에와 연락이 닿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이엔이 그렇듯이. 이엔이 보관하고 있다가 란이에에게 주었으면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이엔에게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쪽지 하나 동봉되어 있지 않았지만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이엔은 기쁜 마음에 한참 동안 그림들 들여다보며 어디에 걸어둘까 궁리해 보았다. 그러다가 곧 사람들의 눈길을 끌 일이 떠올라 아쉽게 벽장 속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란지에가 찾아왔을 때 이 그림을 보여줄 생각을 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비취반지 성에도 같은 눈발이 날렸다. 조슈아의 침대 곁에 앉아 있던 리체는 격자 유리창 밖을 내다보다가 들창을 조금 밀어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뺨의 열기를 식혔다. 벽난로는 여전히 기세 좋게 타오르고 있었다. 머리맡 테이블에 놓은 은쟁반 위의 찻잔과 다과 접시가 바람에 달칵거렸다. 리체가 비취반지 성에 머무른 기간도 두 달을 넘어 석 달째에 접어들었다. 나무랄 데 없이 안락한 나날이었다. 좋은 방과 좋은 옷, 좋은 음식, 돌봐주는 시녀까지 딸린 생활을 박봉에 시달리던 재봉사이자 소녀 급사였던 리체가 꿈속에서라도 보았을 리 없었다. 리체가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을 염려하자 아르님 공작부인이 직접 블루 코럴 섬에 연락을 취해 리체의 가족이 편히 살 수 있게 조치해 주었다. 그 밖에도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말했다. 그럴 듯한 배경도, 귀족 가정에 어울리는 교양도 없는 리체였지만 공작 부부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조슈아의 친구인지라 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대했다. 부족한 것은 없었다. 예전의 그녀였더라면 앞으로 백 년동안 이렇게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휴...” 비취반지 성에서 지내게 된 까닭은 의사 루이제 스트롬이 낸 숙제 때문이었다. 의술과 의료 마법을 익히고 이제 영혼 치유사의 길을 공부하고 있다는 - 그래서 무척 바쁘다는 - 스트롬은 소공작이 누구의 말에 답할지 알 수 없으니 되도록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곁에 있어 주라고 당부했다. 공작 부부는 당연히 리체와 막시민이 있어 주기를 바랐다. 조슈아를 위한 일을 거절할 막시민이 아니었고, 리체도 같은 마음으로 남게 되었다. 조용한 생활이었다. 나날이 비슷하다 보니 지난 몇 개월 동안 셋이 하이아칸에서부터 칼라이소, 무인도, 페리윙클 섬 등을 좌충우돌 돌아다닌 일들이 꿈이었나 싶기도 했다. 조슈아는 전설 속의 잠자는 공주처럼 줄곧 이곳에 잠들어 있었고, 리체와 막시민 또한 죽 이곳에서 지내온 것만 같았다. 옛날부터, 친구로서. 아니, 실은 그렇지 않았다. 리체가 조슈아를 안 것은 올해 초봄 무렵이었고, 그것도 처음엔 배우 막스 카르디를 우연히 보게 된 급사였을 뿐이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자신이 이곳에 있게 됐을까. 많은 일이 있기는 했다. 그 중 조슈아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은 일이 몇가지 있었다. 지금 말한대도 듣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다 듣고 있지만 대답만 하지 않는 걸까? 리체가 무릎에 턱을 괴고 조슈아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막시민이 들어왔다. “아아.” 인사 대신 그렇게 말하더니 의자 하나를 들고 와서 곁에 앉았다. 잠시 동안 둘 다 조슈아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 자식, 실은 안 자면서 자는 체하는 거 아닐까.” “그거 굉장히 힘들겠는데.” “그렇지. 얼마나 힘들면 입술이 다 새파랗겠냐.” “보라색인데.” “그거나 그거나. 그런 색깔이야 재봉사나 구별하는 거지.” 전 같으면 반론했겠지만 왠지 귀찮았다. 리체는 다시 조슈아의 얼굴을 뜯어보며 말했다. “눈도 안 뜨고 버티느라 고생 많겠다. 저대로 두 달이라니,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잊었냐. 저 자식 배우잖냐.” 다시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자면서 무슨 생각 하고 있을까. 꿈이라도 꾸고 있을까?” “전에 말한 적이 있는 그 세계에 있지 않을까.” “어디 말이야?” 하긴 그 이야기를 할 때 리체는 곁에 없었다. 막시민이 기억을 더듬었다. “그 뭐냐... 절벽 꼭대기에 있다는 곳이라나. 주위에 계곡도 있고, 하늘도 있고. 그런 세계라더라고. 마음속 세계 같은 것이던가. 유령들도 오고, 켈스도 온다던데.” “꿈하고 다른 거야?” “모르겠어. 다른지, 같은지.” “심심하진 않겠네.” 또 말이 끊겼다. 한참 뒤에 다시 입을 연 사람은 막시민이었다. “그 치, 죽었을까.” 누구 말이야, 라고 물으려다 리체는 말을 삼켰다. 누구를 말하는지 깨달은 까닭이었다. “죽었겠지...” 지금은 다 나았지만 팔이 문득 가려워졌다. 샐러리맨, 그자가 배와 함께 가라앉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두 사람이었다. 해전이 끝난 뒤 히스파니에 노인이 주변 해역을 수색했을 때도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아마 쇠사슬을 풀지 못하고 배와 함께 가라앉았기 때문이겠지만. 그게 가장 논리적인 답인데도 마음속 한 구석에 미진한 기분이 남았다. 왜일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 막시민이 불쑥 말하자 리체는 정색을 했다. “그러면 그런 데서 살아날 방법이라도 있다는 거야?” “없지. 없는데...” 막시민은 조슈아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자하고, 죽는다는 말이 어울리지가 않잖냐.” “... ” 막시민이 한 말은 리체의 심정을 정확히 표현해 주었다. 죽었을 수밖에 없는데, 어쩐지 죽었을 것 같지가 않은 기분이다. 그자가 과연 죽기는 하는 걸까? 그러나 막시민은 곧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때 네가 찌른 검에 상처가 나는 걸 보면 사람은 맞는 거지.” “그럴까나.” “근데 너 그때, 왜 갑자기 그렇게 대담해졌냐?” 어느 정도 검술을 익혔던 리체였는지라 그때 찌른 검도 제대로 들어갔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무시무시했던 상대에게 어떻게 검을 댈 용기가 났는지 몰랐다. 아니, 알고는 있다. “조슈아” 리체가 불쑥 조슈아를 부르자 막시민도 고개를 돌렸다. 리체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막시민. 너희 둘한테 안 했던 얘기가 있어.” “뭔데?” 둘을 불렀지만 대꾸하는 사람은 하나뿐이다. 리체는 조슈아 쪽을 보고 있었다. 그에게 해야 할 이야기였다. “그때 내가 샐러리맨이라는 남자를 찌를 수 있었던 건 정말, 정말로 화가 나서였어.” 조슈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막시민도 마찬가지였다. “참을 수가 없더라고. 갑자기... 그 자의 머리카락과 턱을 보는 순간 지난 일이 생각났어. 칼라이소에서 탈출하려 했을 때...” “너 그때 심하게 다쳤지.” 리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것도 있지만... 그때 내가 그자 손에 붙들려서 말을 타고 왔잖아.” 얘기를 꺼내기 시작하자 오한이 찾아왔다. 리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말 위였는데, 올려다보니 그자의 얼굴이 보였어. 전부는 아니지만, 다시 본대도 아마 알아볼 수 있을 거야. 그 금발과 턱선 같은 것... 그걸 보면서 얘기를 들었지. 그래서였을 거야. 다시 떠오른 까닭이. 그때 그 자가 해준 얘기 때문에...” 난롯불도 소용이 없었다. 리체는 가슴을 누르며 진정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이네스... 말야.” “조슈아와 공연했던?” “응...” 급기야 눈물이 고여서 흘러내렸다. 막시민은 어찌할 바를 몰라 미간만 찌푸리고 있다가 은쟁반 위에 얹힌 냅킨을 집어 건네주었다. 리체는 손수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냅킨으로 얼굴을 감사고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그날, 네가 조슈아를 데려와서 피날레를 못했잖아. 그런데 피날레 때 커튼 뒤에 누가 서 있었던 기억 나?” “나는 것 같다.” “대역배우가 아니냐고 네가 말했지. 그게 아니었어. 그 사람은 이네스였어. 조슈아의 의상을 대신 걸치고. 피날레 무대를 망치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랬어?” “그래. 그랬는데...” 흐느낌을 멈추느라 힘이 들었다. 겨우 말이 새어나왔다. “샐러리맨... 그자는 거기 선 이네스가 조슈아인 줄 알았지...” 열어 놓았던 들창으로 찬바람이 들어와 누워 있는 조슈아의, 그리고 막시민의 머리카락을 날렸다. 막시민은 아무 대꾸도 못한 채 굳어져 있었다. 이네스의 얼굴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깡말라서 그리 예쁘지는 않았지만 조용하고 침착한 소녀였다. 대화를 한 일이 있던가? 고작 몇 마디 정도. 막시민도 간접적인 책임이 없지 않았다. 피날레 직전에 조슈아를 데려간 사람이 그였으니까. 그러나 그 말을 바꾸면, 조슈아를 내버려두었더라면 이네스가 아닌 조슈아가 죽었을 것이란 말이 된다. 그렇게 따지면 막시민은 현명한 판단을 내린 셈도 되는 것이다. 다만 이네스가 그 자리를 대신하려 했고, 그래서 죽어버렸다. 이윽고 막시민은 조슈아를 내려다보았다. “조군 너, 들었냐.” 그렇게 보아서일까, 조슈아의 입술이 조금 움직인 느낌이 들었다. 몇 개월 동안 줄곧 본 얼굴이니 조금만 바뀌어도 알아볼 수 있었다. 한참 동안 냅킨에 얼굴을 묻고 있던 리체도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 지금가지 너한테 그 얘기를 못한 건 네가 네 문제만으로도 너무 버거워 보여서였어. 몇 번인가 생각했지만, 하려고도 했지만, 나중에... 네가 조금 더 마음의 짐을 던 후에 얘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했어. 분명히 너는 힘들어 할 테니까... 이제는 마음이 편해졌나? 이네스를 위해 울 수 있을 정도로?” 대답은 없었다. 막시민은 착잡한 표정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람 좀 쐬어야겠다.” 막시민이 나가고 다시 혼자 남은 리체는 눈물을 닦고 냅킨에 코까지 풀었다. 눈물 콧물 얼룩져 엉망이 된 얼굴로 밖에 나갈 수는 없었다. 냅킨을 놓고 다시 조슈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말을 꺼낸 탓일까. 그 때 일이 떠올랐다. “조슈아, 그때 무인도에서 너 크르네드 강령하던 때 말이야.” “그때 이네스 얘기 하려고 했는데... 네 얼굴 보니까 도저히 말을 꺼낼 수가 없었어.” 조슈아는 대답하지 않는다. 죽은 듯 잠든 듯 말이 없다. 기분이 이상했다. 해야 할 말이 있는 듯 느껴졌다.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결코 꺼내지 않았을 말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말을 듣는지 아닌지 모를 상황, 그리고 비취 반지 성에서 너무나 편하게 보낸 두 달 때문에 해보았던 상상, 그런 것들이 마음을 건드려 놓지 않았더라면. 솔직해 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단 한 번만. “칼리이소에 있었을 때 얘기야.” 들창 밖으로 내리던 눈이 짙어졌다. “그때 네가 내 마음을 베었는데, 너무 얇게 스쳐서 흔적도 없이 아문 것 같아.” 밤에도 눈이 내렸다. 아르님 공작의 서재에 마련된 테이블에는 코냑 한병이 놓여 있었다. 이미 절반가량 비어 있었다. “이브가 죽었던 날,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나?” 히스파니에 노인은 자기 잔에 따른 술을 단숨에 비웠다. 공작은 술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옳은 충고를 주셨지요.” “아니야. 그때 한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난 부끄럽네.” 노인은 자기 잔에 직접 술을 따랐다. 그들이 앉은 테이블 주위에만 불이 밝혀져 있었다. 서재의 다른 곳은 캄캄했다. “그 애가 죽든 말든, 실패하든 말든,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했지. 내 입으로 말이야. 그 결과를 보게나.” 공작은 잔을 집어 들어 매만지다가 내려놓았다. 낮은 한숨과 함께 말이 흘러나왔다. “조슈아는 죽지도, 실패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이 밤은 길고, 긴 잠은 고통스럽네. 젊은이의 긴 잠은.” 다시 집어든 술잔이 공작의 입술에 가 닿았다가 떨어졌다. “우린 암살자를 찾아냈습니다.” “그래. 우린 달아나지 않았고 마침내 찾아냈네. 내가 했던 말대로 조슈아를 숨기지 않고 내농하, 암살자가 이빨을 드러내도록 했네. 그 대신 난 그 이빨로부터 조슈아를 지켰어야 했어. 그걸 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위험한 곳에 조슈아를 내버려두었네. 도박이었지. 우리는 성공했는가? 우리 손에는 판돈이 남아 있는가? 허허허허...” 공작이 내려놓은 술잔은 비어 있었다. 창 너머의 바람이 윙윙 소리를 냈다. “숙부께선 데모닉의 폭풍 같은 운을 믿으라 하셨지요... 전 그 운이 조슈아를 지금처럼 살려냈다고 생각합니다. 전 계속 믿겠습니다. 숙부께서 말씀하신 조슈아의 운을. 그 아이가 공작이 되고, 심지어 데모닉다운 공작이 되리라 믿고 지켜보겠습니다.” 히스파니에 노인은 말이 없었다. 공작은 술병을 당겨 두 잔에 술을 따랐다. “숙부께서 성에 남아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이브가 죽었을 때, 숙부께서는 남아 주기를 거절하셨지요.” “조슈아에게 내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남아 있는 것뿐이야. 조슈아가 깨어나면 즉시 떠날 것이고.” “그동안 많은 것을 이루셨습니다. 가문을 떠나며 결심하신 대로 페리윙클을 지켜내셨고, 키우셨습니다. 켈티카 만에 숙부의 배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조슈아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겠지요. 숙부께서 옛 국왕에게 그랬듯 체첼 국왕을 경계하시는 마음은 압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우리가 페리윙클을 숨길 수는 없을 겁니다.” 히스파니에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어두운 서재 구석을 바라보았다. “조슈아가 페리윙클에 갔었지. 사람들은 그 애를 사랑해. 그 애는 좋은 공작이 될 수 있을 게야.” “지금 페리윙클의 공작은 숙부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런 말 말게. 자네는 형님과의 약속대로 가문을 잘 지켜내었어. 공화국 시절에조차 말일세. 자네 말대로 조슈아가 공작이 될 무렵에는 가문도 페리윙클과의 관계를 숨길 수 없을 것이야.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네. 나는 좀 더 숨어 있는 편이 좋아. 때가 오기가지 국왕과 맞설 힘을 길러 두지 않으면 안 되겠지. 나와 자네가 힘껏 하는 거야. 자네는 켈티카에서, 나는 바다에서. 아르모리크 경 조슈아를 위해서, 그 아이가 깨어나 역대 두 번째 데모닉 공작이 될 그날을 위해서.” 잔을 마주친 두 사람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희망은 아주 먼 곳에 있었다. 그러나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지는 않았다. 3. 마법사가 되어야 하는 이유 “우리가 만나 서로를 미워하고 사랑하고 매우 지쳐 풀밭에 앉아 마주 보았다. 수십 해가 뜨고 지도록 우리가 한 말이 낱말로 흩으면 하늘의 별만치 될 텐데 그 말 속에 별을 담은 일 한 번 없었다. 너와 나 사이에 떨어진 별만이 뒹군다. 태초의 불이 식어 차갑고 무거워졌다. 떨어진 별들의 뼈가 녹아 산맥이 되면 거기서 다시 불이 태어날 수 있을까? 꽃불이 타고 날고 산의 심장을 데울 때 마침내 먼 별의 누군가가 우리를 보며 저기 새 별이 태어났다고 가리켜 줄까?” 12월 초, 사흘 동안 내리던 눈이 그쳤다. 비취반지 성과 정원, 숲에는 두 뼘에 가까운 눈이 쌓였다. 방문객이 거의 없었으므로 어제 내린 눈은 정원과 마찻길 위에 흰 홑이불처럼 덮여 있었다. 이른 아침 어느 순간, 성 입구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정문을 지나 긴 포플러 길을 통과하지 않고는 올 수 없는 곳인데, 아무데도 발자국이 없었다. 그는 방금 성에서 나온 것일까? 아니면 오면서 남긴 발자국이 없어질 정도로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일까? 둘 다 아니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입구를 막은 하인이 묻자 대꾸가 이러했다. “걸어 왔다.” “그게 아니라, 어떤 일로 오셨는지?” “중요한 일로.” “그러니까, 누굴 만나러 오셨냐고요.” “넌 하인 노릇하면서 너희 집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냐?” 하인은 화가 나는 것을 누르며 다시 말했다. “공작님을 뵈려면 미리 약속을 하셔야...” “공작이 날 만나기 위해 한 달 전에 약속을 해야 될 판이야. 헛소리 말고 빨리 안내나 해라.” 몇 달째 성의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다 보니 조용히 일을 처리하려 했던 하인도 이쯤 되니 참을 수가 없었다. “대체 당신은 누구요!” 모자가 붙은 검정 망토를 뒤집어쓴 사내는 손으로 자기 가슴을 한 차례 치더니 외쳤다 “난 방문자다! 정확히 말하면, ‘네가 지키고 있는 성을 눈 내리는 12월 5일 오후 네시에 혼자서 방문한 방문자’ 다. 이만하면 매우 자세한 설명이 됐겠지? 내가 이렇게 친절한 설명을 해 주는 건 한 해에 한 번이면 충분해. 그러니 더 궁금한 게 있으면 내년에 다시 물어봐라. 올해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말을 맺은 ‘방문자’는 하인을 한 손으로 밀어젖히고 휘적휘적 안으로 들어섰다. 하인은 깜짝 놀랐다. 깡말라 보이는 사내의 손이 몸집 큰 자신을 밀어낼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마치 밀가루 과자처럼 간단히 밀려가고 말았던 것이다. 하인이 휘청거리다가 정신을 차려 ‘아니 거기!’ 하고 외치려던 순간이었다. 맞은편 왼쪽 계단에서 히스파니에 노인이 나타났다. “저기, 히스파니에 어르신...” 도움을 청하려 한 하인은 끝까지 말할 수가 없었다. 히스파니에가 입구로 들어선 ‘방문자’ 를 보자마자 도망쳐버렸던 것이다. 도망친 사람은 히스파니에만이 아니었다. 문제의 ‘방문자’ 가 2층으로 올라가자마자 마주친 사람은 복도를 걷고 있던 막시민이었다. 막시민은 방문자를 보자마자 이렇게 외쳤다. “앗!” 외마디 외침만을 남긴 채 막시민도 후다닥 도망쳤다. 뒤따라 온 하인들 - 이제 네댓 명으로 늘어난 - 은 그 광경에 아연해져서 저들끼리 소곤댔다. “이게 어찌된 일이야.” “혹시 고리대금업자 아냐?” “어르신께서 빚을 지셨단 말이야?” “그건 좀 이상하지만...” 마지막으로 조슈아의 방에서 나오던 리체가 방문자와 마주쳤다. 그녀도 놀라 소리를 질렀다. “어머!” 그러나 리체는 도망치지는 않았다. 방문자는 허리에 손을 얹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스승과 제자가 연달아 도망가는 걸 봤다. 도망갈 짓이면 처음부터 하지 말 것이지. 그런데 넌 왜 도망 안 가냐?” 리체는 자랑스레 턱을 올리더니 손가락을 세워 흔들어 보였다. “그거야 저는 아저씨한테 지은 죄가 없으니 그렇죠.” “과연 그럴까?” 방문자는 더더욱 눈을 가늘게 떴다. 리체의 표정이 약간 불안해졌다. 저사람이라면 어디서든 죄를 털어낼 수 있다. 뱀 껍질에서 털을 뽑아 목도리를 만들 수도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번엔 그런 게 아니었다. “내 아름다운 배는 어찌 됐냐!” 리체는 재빨리 맞은편 계단을 타고 도망쳐 버렸다. 비취반지 성은 넓었지만 세 명의 도망자가 숨기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잠시 후 모두 잡혀온 셋은 작은 거실에서 방문자, 다시 말해 자칭 ‘위대한 은둔 대마법사’ 앨베리크 쥬스피앙과 대면했다. 망토를 벗자 쥬스피앙은 흰 로브 차림이었는데 지난번보다 장식이 많고 선도 우아해서 당장 파티에 나간대도 그럴듯할 모습이었다. 그러나 볼품없이 깡마른 몸이나 이십대인지 사십대인지 모를 얼굴은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우선 바이올린 너.” 쥬스피앙의 손이 히스파니에를 가리키자 노인은 창밖을 내다보며 딴전을 피웠다. “그 문제는 지난번에 저 안경 쓰고 지저분한 놈과 거래를 했으니 일단 넘어가고.” 히스파니에는 막시민에게 눈빛으로 질문을 보냈다. 막시민은 대꾸하기가 복잡해서 일단 무시했다. “그다음, 학원 갈 놈.” “누가 안 간댔나.” “왜 아직 안 가고 있냐!” “아 좀 바빴다고.” “당장 가라. 다음 해에 입학해.” 쥬스피앙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리체를 봤다. “다음, 너. 내 배.” 제일 큰 문제, 그것도 해결할 길도 없는 문제를 덮어쓰게 된 리체는 항변했다. “왜 제가 배를 책임져야 돼요?” “그거야 원래 책임져야 할 놈이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상태니까 그렇지!” 막시민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쥬스피앙을 보았다. “당신, 조슈아가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는 겁니까?” “이 세상에 내가 모르는 일이 어디 있냐?” 간단히 대꾸하더니 쥬스피앙은 팔짱을 꼈다. “채무자가 셋이라. 내가 본래 집에서 나와 돌아다니는 걸 즐기지도 않는데, 내 소박하고 안락하며 영감을 주는 거처를 벗어나 이런 먼 곳까지 오도록 만들다니, 그것만으로도 벌서 참을 수가 없도다. 자, 배 문제부터 다져보자고. 내 배는 어디 있냐? 지금 나하고 약속한지 몇 개월이 지난 줄이나 알고 있냐? 페리윙클까지만 갔다가 온다고 해서 돌아올 때 쓸 금까지 줘서 보냈는데, 멋대로 켈티카까지 와버린 데다가 도로 갖고 오지도 않고, 어떻게 됐다고 보고도 안 하고, 시치미 뚝 떼고 있으면 무사할 성싶었냐!” 쥬스피앙은 리체를 봤고, 막시민까지 정말로 아무 책임이 없다는 것처럼 리체를 쳐다봤다. 리체는 복합적인 이유로 발끈했다. “그게 그러니까... 역시 아저씨가 이럴 줄 알고 무서워서 연락도 못한 거잖아요!” “그게 변명이 될 것 같냐! 당장 내 눈앞에 멀쩡한 배를 내놓기 전엔 용서 못 해!” “그거 봐요! 변명하러 찾아갔거나 여기서 이러고 있었거나 결과는 똑같잖아!” “그 말은 내 배를 못 내놓게 됐다 그 뜻인데!” “물론...” 리체는 대답이 궁해져서 말을 그쳤다. 쥬스피앙의 눈이 막시민에게 갔다. “너, 내 배에 대해 말해봐.” “어라, 불동이 튀네.” 리체가 막시민을 쿡 찔렀다. 어차피 대답해야 한다면 막시민이 하는 쪽이 가장 나았다. 전부터 늘 그랬다. 예를 들어 칼라이소 앞바다에서 왜 표류하고 있는지 설명해야 했던 때라든가. “모름지기 배란 튼튼한 게 제일인데, 당신 배는 처음부터 문제가 많았단 말입니다. 우리가 그 배를 몇 번이나 고쳤는지 알아요? 난데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버리지를 않나, 날아가야 할 때 안 날아가지를 않나, 바다 한가운데에서 항해 불능이 되지를 않나...” 막시민이 든 예는 차례로 ‘금을 더 넣는 걸 깜빡해서’, ‘항해 실력이 없다 보니 배 곳곳이 망가져서’, ‘갤리의 공격으로 밑창에 구멍이 뚫려서’ 였으나 이유들은 자연스럽게 생략되었다. 쥬스피앙이 손을 홰홰 내저으며 말을 끊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다는 거야!” “가라앉았죠, 뭐.” 뻔뻔스럽게 툭 튀어나온 말에 리체까지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쥬스피앙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다가 겨우 자제하고는 소리쳤다. “너희 놈들이 감히 내 배를 바다에 빠뜨려? 그러고도 살아남을 것 같았냐? 내 피땀 어린 노고의 결정체, 가나폴리의 마법을 재현한 유일무이한 비행선, 미의 극치라고 할 만한 아름다운 외장, 최고급 재료만 사용해서 튼튼할 수밖에 없는 내 배가! 그리고!” 쥬스피앙은 손가락을 내밀어 막시민을 가리켰다. “너!” “아, 왜 또 나냐고...” “금 도가니는 어디 있냐? 설마 배와 함께 가라앉았다고 말할 셈은 아니겠지?” 핵심을 찔린 막시민은 기침을 하는 체 하며 상황을 넘어가보려 했으나 쥬스피앙은 속지 않았다. “그 정도 금쯤이야 내게 별 것도 아니다만, 배가 가라앉았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증거로 금을 내놔보라는 말이다. 너희가 멀쩡히 살아 있는 걸 보면 누군가가 구조를 해 줬다는 뜻인데, 구조될 때 설마 금을 내버리고 왔을 리 없겠지?” 리체는 그제야 생각난 사람의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금은 어떻게 됐지?” “너도 안 꺼냈냐?” “모르겠는데.” “이놈들이!” 얘기가 이쯤 되자 듣고만 있던 히스파니에 노인이 점잖게 입을 열었다. “쥬스피앙 씨. 당신이 찾는 배가 미의 극치호를 말하는 거요?” 쥬스피앙이 막시민을 곁눈질하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이름을 그렇게 지었냐?” “나일 리가 없잖아!” “그럼 세자르 딸, 너냐?” “절대 아니에요!” 쥬스피앙은 흐음,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여간 그 배가 맞긴 한 모양이지. 히스파니에, 네가 내 배의 행방을 알고 있냐?” “내가 갖고 있소만” 쥬스피앙이 ‘바이올린 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도둑놈들’ 이라고 펄펄 뛰려는 찰나 히스파니에 노인이 말을 이었다. “그 배는 좀 망가지긴 했지만 고치면 곧 멀쩡해질 거요. 금이라, 내 선원들이 금 얘기를 하더군. 그래서 건드리지 말고 잘 넣어두라고 했소. 내 명령을 어길 사람들이 아니니 그들이 금에 손댔을 일은 없을 거요.” 뜻밖으로 희소식만 이어지자 쥬스피앙은 인상을 썼다. “수상해. 속셈이 있는 게 틀림없어. 꼬마도둑 시절부터 데모닉이란 자들은 믿을 수가 없어.” “바로 봤소.” 히스파니에가 싱긋 웃어보였다. 이럴 때 그의 얼굴은 조슈아와 비슷한 데가 있었다. “빨리 말해!” “그보다 당신이 먼저 말하는 게 어떻소? 여기까지 온 속셈 말이오.” “속셈은 무슨...” “하늘을 나는 배가 귀하지 않다고야 말 못하겠지만, 한 번 만들어낸 물건을 또 못 만들 당신도 아니고, 설마 배를 되찾겠다고 이 먼 곳까지 걸음 하시진 않았으리라고 믿고 있는데, 내 믿음이 틀렸소?” 쥬스피앙은 부인하는 대신 표정을 달리 했다. “또 거래를 하려고 하는군. 내 카드를 보고 싶다 이건데, 네놈 카드부터 먼저 내놔봐.” “내 카드는 이미 내놨소.” “설마 내 배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바로 맞췄소. 조금 전에 막시민이 한 말을 들으셨잖소? 그 배는 바다에 가라앚았소. 난 단지 지나가다 주운 사람일 뿐이라오.” 쥬스피앙이 벌떡 일어섰다. 옆에서 리체는 긴장되어 죽을 지경이었다. 이 성은 꽤 크고 튼튼하니까 지붕 날리기는 무리일지도 모르지만... “요 교활한 고마도둑놈!” 그렇게 외치고 무슨 짓이든 벌이리라고 기대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쥬스피앙은 일어선 채 팔짱을 끼더니 한쪽 입술을 올리며 괴이한 미소를 지었다. “눈치가 빨라. 꼬마 때나 늙은 지금이나. 역시 내 조수를 시켰어야 되는 건데. 좋다. 난 명쾌한 걸 좋아하지. 지금 여기에 조슈아 폰 아르님을 복제한 인형이 있다고 알고 있다.” 리체가 말했다. “그 인형, 잠든 지 오랜데. 깨지도 않아요.” “그게 중요한 게 아냐. 내가 원하는 건...” 쥬스피앙은 설득보다는 명령에 가까운 어조로 말을 맺었다. “인형을 내게 다오.” “그건 불가능합니다.” 즉시 튀어나온 막시민의 대답이었다. 쥬스피앙은 화를 내는 대신 말했다. “이유나 말해봐.” “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여기 없으니까요.” 막시민은 조슈아의 방 쪽을 흘끗 보았다. “그 인형을 만든 자는 사라졌고, 의뢰한 자는 죽었죠. 그렇다면 인형에 대한 권리가 복제된 당사자인 조슈아 말고 또 누구한테 있겠습니까? 안 그래요? 조슈아가 깨어나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을 말해주지 않는 한, 우리 멋대로 당신한테 인형을 넘겨드릴 순 없는 노릇입니다.” 리체가 말했다. “도, 공작부인께서는 인형을 또 다른 자식으로 여긴다고 하셨어요. 쉽게 내주실 리가 없다고요.” 막시민이 다시 말했다. “게다가 마법사의 손에 넘겼다가 인형이 어떻게 될 지 않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설마 쪼개 보기라도 하려는 건...” 그 순간 쥬스피앙이 막시민의 뒤통수를 한 대 때렸는데, 얼마나 빠른지 맞고 나서야 맞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정도였다. “이놈이 훌륭하고 인격적인 마법사인 나를 뭐로 보고... 그래. 너도 알다시피 난 가나폴리의 마법을 재현하는 일에 관심이 많지. 하지만 그때도 분명히 말했다. 산 자를 복제하는 일 따위, 정신이 제대로 박힌 마법사라면 해선 안 될 일이라고. 따라서 앞으로도 내 손으로 그걸 만들어낼 일은 없다. 더구나 너희한테 인형이 복제된 인간과 똑같은 질서 속에 있다고 설명해준 사람은 어디의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내가 마법이라면 산 사람도 잡아먹는 또라이로 보이냐?” 막시민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 얘기 누가 해줬나 깜빡했네.” “평소 모습에서 연상이 안 되는 얘기라서...” 쥬스피앙은 둘이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았다. “난 단지 관찰을 하고 싶을 뿐이야” 리체가 물었다. “관찰을 해서 뭘 하시게요?” “복제된 인형이 끝까지 인간과 같은지 알고 싶다.” 그것만이라면 나쁜 의도를 가졌다고 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조슈아와 인형이 둘 다 깨어난다면, 둘이 같은 성에서 생활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인형을 죽인다는 것 또한 전처럼 간단한 문제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 인형을 다른 곳으로 보내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었다. 쥬스피앙이 인격적인 마법사라는 가정하에, 또 전부터 소원이었다던 데모닉 조수를 두는 셈 치고... 거기까지 생각하던 막시민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당신, 혹시...” 쥬스피앙이 막시민을 쳐다봤다. “혹시 뭐?” “인형을 본체 없이 살릴 방법을 찾아낼 셈인 건 아닙니까?” “...” 대답이 나오지 않자 리체도 놀란 얼굴로 쥬스피앙을 바라보았다. 막시민의 지적은 핵심을 찔렀다. 쥬스피앙의 얼굴에서 농담기가 사라졌다. “그 정도 도전을 모르는 체한다면 마법사라고도 할 수 없지.” “안 됩니다!” 막시민이 벌떡 일어섰다. 쥬스피앙이 냉소를 지었다. “왜 네가 화를 내나? 권리는 네게 없다면서?” “누구든 허락할 리가 없잖습니까! 질서와 인과율을 말해줬던 사람은 누굽니까? 계속해서 똑같은 조슈아가 이 세상에 둘 존재하도록 할 셈인가요?” “그럼 넌 인형이 저대로 영영 깨어나지 않길 바라는 거냐? 만약 깨어난다면 죽여 없애기라도 할 참이었나?” “누가 그런...” 막시민은 말을 멈췄다. 분명 이율배반적이지만, 그렇다고 대꾸할 수는 없었다. “인형은 이미 존재해. 내가 소공작을 잘 안다고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그는 인형을 죽일 생각이 없을 거야. 자, 다들 인형이 깨어나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벌벌 떨고 잇을 참인가? 깨어난 뒤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 막시민은 쥬스피앙을 쏘아볼 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막시민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막시민도 쥬스피앙의 지적이 현실적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가 조슈아와 함께 인형의 본체를 찾아다니던 때는 본체를 부수면 인형이 파괴 될 거이니, 그 뒷일을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아니, 실은 그때도 느꼈어야 했다. 인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존재인 인형을 죽이는 문제에 대해서, 그것은 살인인가? 그런 생각을 일부러 피했던 것인지, 지금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 인형은 조슈아의 자리를 빼앗은 적이었다. 조슈아가 잃어버린 유일성을 되찾기 위해 없애지 않으면 안 될 존재였다. 그걸로 모든 당위가 성립되었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인형의 죽음을 상정하고 나아갔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지금은 다르다. 조슈아의 자리에 겹쳐 서며 유일성을 빼앗았던 인형은, 조슈아와 분리되었다. 사람들은 둘이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록 모든 사람이 알게 되진 않았다 하더라도, 어쨌든 이제부터 조슈아의 자리는 조슈아의 것이었다. 둘의 삶은 각각 다른 방향으로 뻗어 가야 했다. 인형이 조슈아의 생애를 대신 사는 것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본체도 파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이 직접 부수지는 않았으나 마법사 ‘애니’ 라는 자가 가지고 떠나 연결이 끊어졌고, 그 결과 인형은 가사상태에 빠졌다. 어째서 죽지 않은 것일까? 본체가 없이도 인형은 일정 정도의 생명력을 갖는 것일까? 본체 자체가 존재하기만 한다면 죽지는 않는 걸까? 아니면 인형을 살려 놓은 것도 유령들인가? 복제된 인형도 영매였다면 가능성이 없지만은 않았다. 어쨌든 인형이 죽지 않은 까닭에 문제는 복잡해졌다. 진짜 조슈아가 자기 자리를 되찾는다는 것은, 스스로를 진짜로 느껴온 가짜가, 자기 자리인 줄 알았던 곳에서 쫓겨난다는 것을 뜻했다. 인형이 만일 깨어난다면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둘은 알아서 따로따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인형은 조슈아가 자기 자리를 빼앗아갔다고 느끼지 않을까? 둘은 얼굴만 같은 쌍둥이가 아니었다. 어느 시점까지 동일한 기억을 갖고 있는, 그래서 영원히 자리가 겹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주변 사람의 시각도 마찬가지였다. 한때나마 둘이 바꿔치기 되었음을 아는 사람, 진짜만 기억하는 사람, 가짜만 알고 있을 사람, 모두 입장이 달랐다. 심지어 같은 입장인 사람들조차 때로 결론이 달랐다. 단적으로 아르님 공작은 비교적 일찍 인형의 존재를 알았고, 지금도 진짜 조슈아만을 아들로 여기는 듯했다. 그러나 공작부인은 인형과 보낸 시간에도 의미를 두었고, 애정을 거두지 못했다. 언젠가 진짜 조슈아가 깨어나 활동하게 되면, 그가 밀려났던 공백 기간 동안 가짜와 지냈던 사람들을 만나 어리둥절할 일이 생길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에게 인형의 존재를 설명해주지 않는 한, 그들이 알던 조슈아는 없는 사람이 된다. 이 문제는 막시민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남았다. 콜제티 극장에서 조슈아를 구해내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 추억은 막시민과 진짜 조슈아만의 것이 었다. 그러나 인형은 막시민을 알고 있다. 코츠볼트 시골에서 양젖 서리를 하고, 개에게 물렸을 때 풍차간에 불을 질렀던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것이다. 막시민이 그를 외면한다면, 그는 가장 소중한 친구가 자신을 버렸다고 느낄 것이다. 진짜 조슈아가 그런 취급을 당했을 때와 똑같은 감정을 품을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면 전처럼 인형을 죽어야 할 존재로 여기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그렇다고 그대로 살게 해도 좋은 걸까? 막시민 자신은 진짜 조슈아만의 친구일까, 아니면 가짜의 친구도 되는 것일까? 그는 두 조슈아의 친구 노릇을 동시에 해낼 수 있는 걸까? “빌어먹을 놈. 친구도 이렇게 헷갈리는데 결혼이라도 했었으면 어쩔 뻔했어.”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리체가 영문 모를 표정이 됐다. 막시민은 리체를 돌아보며 이어 말했다. “리체 넌 좋겠다. 가짜와 깨끗이 모르는 사이여서.” 그제야 이해한 리체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냐. 내가 식당에서 얼굴에 물을 끼얹었던 기억은 있을걸.” “그것 참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겠군.” 조슈아 자신은 이 문제를 생각해 보았을까? 적어도 막시민에게 말해준 일은 없다. 그러나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을 리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인형의 미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지금 별생각을 다 해봤는데 말이죠.” 막시민이 입을 열자 쥬스피앙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이 무슨 듯인지 알았나?” “알긴 했는데, 그렇다 해도 과연 인형이 독자적으로 살아가게 만들어줘도 되는 건가 하는 점만은 확신이 없습니다.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라서, 만들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빼고라도.” “그런 걸 근거 없는 공포라고 하지.” “근거가 없다고 하는 걸 보니 당신은 극복한 모양인데 비결이 있으면 좀 말해보시죠.” “비결은.” 쥬스피앙은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마법사가 되는 거야. 얼른 네냐플에 가라.” “왜 얘기가 갑자기 그리로 튀는 건데요!” “네가 나의 침착하고 냉정한 판단력을 부러워하니까 비결을 말해 준 건데 무슨 잔소리야!” “당신이야말로 잔소리 말고 똑같은 두 명이 어떤 식으로 사는 게 가장 좋은 건지 의견이나 말해 봐요!” 자기가 인형을 데려가면 서로 만날 일도 없고 간단히 해결되지 않느냐고 대꾸할 줄 알았는데 뜻밖으로 쥬스피앙은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막시민이 다시 말했다. “당신 말대로 인형이 본체 없이 존재할 수 있게 된다면 정말로 둘 사이에 차이는 뭐냔 말입니다. 기억이 조금 다른 것밖에 없는데...” “이것 봐. 그 기억의 차이가 바로 핵심이야.” 쥬스피앙의 표정이 다시 진지해졌다. “예전에 네놈이 내게 와서 배를 내놓으라고 행패 부리던 때, 나한테 말하지 않았냐? 진짜와 인형의 차이가 아주 작은 기억에 있다고. 데모닉이기 때문에 기억이 누락될 수 없는데, 그게 누락되어 둘은 다른 존재고, 또한 그걸로 진짜와 가짜를 구별했다고. 네놈 의견이었던가? 그때 나는 그게 재미있는 문제라고만 생각하고 결론을 내지 못했는데 말이야.” “그런데?” “그 후로 줄곧 생각해 본 결과 나름대로 결론을 내 봤다. 물론 ‘질서’ 의 문제를 내 멋대로 확언할 수는 없는 거지만, 기억의 문제가 아주 중요한 것 같다. 만약에 전에 말한 누락된 기억을 ‘질서’ 가 차이로 본다면 둘은 어쩌면 시작부터 동일한 존재가 아니야. 그런데 그 후로 둘은 각각 새로운 기억을 쌓아가지 않았나?” “그야 그렇죠.” “그것까지 따지면 둘은 점점 더 다른 존재가 되어 간 건데, 그래도 그전까지는 서로가 만나지 못한 채 자신만이 진짜라고 여겼을 거란 말이야. 그런데 이제 둘이 마주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칼로 찌르기까지 했으니 ‘자아의식(self-consciousness)' 마저도 깨어진 거지. 자신 속에 속하지 않은 자신, 자아 외곽의 자신이 존재한다는 걸 안 거니까.” 리체가 천장으로 눈을 굴렸다. “뭔 말인지 어렵네요.” “돌려 말하면 자기동일성(identity)이 흐트러졌다는 거야. 자, 사람들은 누구나 살면서 변하지 않냐? 어린애였던 너와 지금의 너는 다르고, 늙은이가 된 너도 다르지. 그렇다고 그게 각각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냐? 아니잖아? 그들을 모두 같은 자신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것, 그게 자기동일성이야. 그런데 보통 사람들도 가끔씩 기억을 잃어버리거나, 너무 옛 일이라 잊어버리거나 하는 일이 있어서 자기가 모르는 자기 얘기를 누가 해 주면 그게 자기 아닌 딴 사람인 것 처럼 느끼곤 한단 말이야. 결국 기억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지. 그런 관점에서 이 두 명을 보면, 과거에는 둘이 하나였어. 그런데 어느 순간 동일한 기억을 갖고 갈라졌어. 그리고 구 후에 각각 다른 경험을 하며 다른 기억을 쌓았어. 그러다가 마주치게 됐을 때, 그들은 자신이 둘로 갈라진 듯한 기분이 들지 않았겠냐.” “그래서요?” “그런데 그런 상태로 앞으로 30년쯤 살다가 다시 만나면 어떨까?” “네?” 리체가 되묻는 가운데 막시민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당신 말은, 그러면 조슈아와 저 인형이 헤어져서 각자 다른 30년의 기억을 쌓아 새로운 자아의식인지 뭔지를 만들고 나면 각자 다른 사람이 된거다, 뭐 그런 뜻입니까? 초반 시작이 같은 것쯤은 기억의 양으로 눌러서 해결하자?” “지금 기대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란 거지.” 리체가 물었다. “그럼 ‘질서’ 는 어떻게 되는데요?” “내가 어떻게 ‘질서’ 가 내릴 결론을 대신 말할 수 있겠나? 하지만 ‘질서’ 란 칼로 자르듯 단호한 것만은 아니야. 아주 서서히 바뀔 수도 있고,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같아지거나 달라지는 것도 있지. 계절이 바뀔 때 정확히 어느 순간부터 여름이 되고, 또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는지 자를 수가 있냐? 몇 월 며칠 몇 시부터 봄, 그 전까지는 겨울, 이럴 수가 있느냐 이 말이야.” “그래서 둘이 떨어져 지내는 것이 해답이다. 그런 뜻이에요?” 쥬스피앙은 팔짱을 꼈다. “그러니 내가 데려가겠다는 거지.” “조슈아한테 허락받아야 된다니까요.” “아, 상관없어. 그까짓 시간쯤 못 기다리겠냐?” 그동안 줄곧 듣고만 있던 히스파니에 노인이 입을 열었다.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여전히 어려움은 남소이다. 비록 본인들이 극복한다고 쳐도 주변 사람들 역시 문제를 지고 있지 않소.” “어떤 문제?” “선택의 문제.” 막시민이 다시 말했다. “그래. 그렇게 기억의 양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말이지. 만약 그 30년 동안 내가 두 조슈아를 한 번도 만나지 않고 지낸다 침시다. 그러면 내 입장에서 둘에 대한 기억의 차이는 고작 몇 개월일 뿐이니까, 그때쯤엔 둘 다 똑같게 느껴져도 이상하지 않겠군요? 어느 쪽을 만나도 내 친구 조슈아이고... 이렇게 느끼게 될 거란 말입니까?” 이번엔 리체가 말했다. “그런데 둘은 각각 다르게 살았을 거 아니에요? 그럼 그때 가서 우리는 둘 중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선택하면 되는 건가요? 마음에 들게 살아온 쪽으로? 그렇게 택해서 이쪽은 내 친구고, 저쪽은 아니고, 이렇게 편리하게? 선택의 여지가 있어서 참 좋네요. 난감해라.” 쥬스피앙은 세 사람의 얼굴을 둘러보더니 선언했다. “그래. 맞았어. 그거라고.” “그거라뇨?” “그렇게 해야 한다고. 우리 모두는 선택을 해야 해. 세상만사가 선택이 아닌가? 무슨 이유로 한쪽을 선택하는가? 잔인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건 취향일 수밖에 없어. 기억 조금이 다른 걸로 한쪽을 선택하는 놈도 있고. 구군가가 인위적인 힘을 가했다는 것 때문에 다른 쪽을 택하기도 하고, 30년 뒤에는 너한테 잘해 주는 놈을 선택해도 그만이고. 이유야 어쨌든 좋아. 마음 끄는 곳으로. 아주 조금일지라도 더 마음이 가는 쪽으로 갈 밖에.” 리체가 중얼거렸다. “전 마법사가 아니라서 그런지 아저씨처럼 ‘침착하고 냉정하게’ 판단하지는 못하겠네요. 선택되지 못한 쪽 입장을 생각해 보라고요. 얼마나 잔인해요?” 쥬스피앙은 훗, 하고 코웃음을 쳤다. “이것 봐. 널 사랑하는 사내가 둘 있다면, 선택되지 못한 사내가 상심할까봐 언제까지나 망설일 테냐? 그래도 이 문제에서는 세 번째 답이 있긴 하군. 결혼할 것도 아니고, 그냥 둘 다 친구로 삼아. 그러면 되는 거다!” 쥬스피앙의 자신만만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세 사람은 여전히 한숨을 쉬었다. 막시민이 말했다. “해결 방법을 알겠구만.” “또 뭔데?” “마법사가 되는 거. 마법사가 되면 당신처럼 명쾌하게 선택하고 나머지는 깨끗이 잊어버릴 수 있는 모양이니까.” 쥬스피앙은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기에 내가 처음에 말했잖아. 마법사가 되라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잠시 후 리체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럼 정말 기다리실 거예요? 여기서?” “인형도 관찰하고, 공작한테 대마법사를 대접할 드문 기회도 주고, 네놈들의 정신세계도 알아볼 겸 오늘처럼 토론도 하고, 겨울잠 자는 셈 치고 이곳에 계셔줄 생각이다. 참, 딸애부터 불러와야겠어. 안경 쓴 놈 너 네냐플 보내야 되니까 그 애가 시험공부 좀 시킬 거다.” 막시민은 깜짝 놀랐다. “그런 건 계약에도 없는 내용이잖아!” 쥬스피앙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시험을 망쳐서 학원에 안 가면 된다는 네 녀석의 안이한 계략을 내가 손 빨면서 보고만 있을 줄 알았냐?” “누가 가정교사 필요하댔어? 혼자서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 염려 놓고 넘겨짚지 마셔.” “네놈이 천사처럼 상냥하고 예쁘고 똑똑하고 성실한 내 딸을 감히 거절하냐? 다른 놈들 같으면 그런 선생 밑에서 배우겠다고 절을 하며 따라다닐 텐데!” 막시민은 잠시 움찔하더니 곧 외쳤다. “그딴 거 난 알 바 아냐! 이 집 주인한테 당신 받아주지 말라고 말해둬야겠어!” “훗, 난 언제든 내가 있고 싶은 곳에서 산다. 그게 어디였든 누가 날 쫓아 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아노마라드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세력가의 집에서, 부르지도 않은 식객이 되겠다는 말을 잘도 하고, 심지어 한 명 더 늘리겠다고 당당하게 궁리할 배짱이 그냥 싱길 리는 만무했다. 쥬스피앙은 혼란에 빠진 막시민을 내버려두고 히스파니에 노인을 향해 말했다. “하여간 방이나 치워놓으라고 해. 우리 티치엘 것까지 두 개. 백 년에 한번도 맞이하기 힘든 희귀한 손님인 나를 제대로 대접하고 싶다면야 말릴 생각은 없지만, 난 기본적으로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꾸밈새를 좋아하는 고상한 성품이야. 하긴 어떻게 생긴 방이든 내가 알아서 고쳐 쓸 테니까 상관은 없고. 그리고 공작의 서재에는 재미있는 책이 좀 있으려나?” 4. 기타와 바이올린 “여름과 함께 죽은 자가 지옥에서 겨울잠을 잔다. 그를 지상으로 부르려면 나비 날개가 필요하니...“ 눈앞의 녹색 잎이 흔들거렸다. 그의 발이 휘청거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세상이 다 흔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머릿속 섹만이 불안하게 흔들거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덜컹, 덜컹. 무언가가 흔들리고 있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비탈 아래로 눈 자국이 드문드문한 지붕들이 이어졌다. 바람이 강한 이곳에서는 겨울에도 흔한 풍경이었으나, 이번엔 정말로 눈이 녹기 시작하여 생긴 얼룩이었다. 아직 2월인지라 잠깐 지나가는 날씨일 수도 있지만 그날만은 봄인가 싶을 정도로 따사로웠다. 시골 영지 마그란은 아침 정적 속에 있었다. 바람도 잠시 잤다. 그의 발이 비탈을 내려갔다. 여전히 모든 것이 흔들린다. 걸음은 이 근처 길을 잘 알고 있었다. 비탈 끝에서 자연스럽게 꺾어져 우물 쪽으로 향했다. 우물에서 물을 떠 마시고 성문 쪽으로 다가갔다. 일찌감치 장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저만치에서 걸어온다. 그는 걸음을 머췄다. 다가가선 안 될 듯한 기분이 든다. 여기가 어딘지 기억해내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cut다. “아니, 이게 누구야? 애니 아냐?” 애니스탄은 마주 선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경비병 콕스 씨. 기계적으로 이름이 떠오르고 그는 꾸벅 인사했다. “갑작스레 떠나고 소식도 없더니. 다들 궁금해 했는데. 그건 그렇고 얼굴이 왜 그래? 몸이라도 안 좋아? 안색이 딱 병자네.” “...네” 애니스탄은 자신이 이곳으로 온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일부러 오려 한 일은 없었다. 이곳 아니라 어디라도, 꼭 가려 한 곳은 없었다. 오래전에 영주의 마법사로 잠시 지냈던 마그란... 아니, 그리 오래전도 아니다. 고작 반년 가량일까. “린다가 애니 소식 궁금하다고, 알아볼 방법 없냐고 종종 조르곤 했는데.”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콕스의 얼굴에는 미심쩍은 빛이 감돌았다. 그가 기억하는 애니스탄과는 너무 달라진 모습 탓에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고 여길 수가 없었다. 겸손하고 싹싹하던, 그래서 영지 사람들 모두가 좋아하던 젊은 마법사 애니스탄이 무슨 일을 겪으면 저렇게 변할 수 있을까. 안타깝기도 했지만 지나치게 고생한 사람을 보면 왠지 접근이 꺼려진달까, 콕스의 기분도 그와 비슷했다. 다시 만나게 되어 놀랐을 뿐, 깊이 사정을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예전과 같은 모습이었다면 식사 했느냐고 물었을 법도 한데 그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한데, 돌아온 거야?” 애니스탄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콕스의 탐색하는 듯한 눈길이 이윽고 애니스탄이 쥐고 있는 밧줄에 이르렀다. 밧줄 끝을 살펴보던 그는 거기에 매인 수상한 물건을 보고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갖고 다니느 건 뭐야?” 긴 육각형 상자였다. 겉에 다른 색이 칠해져 있었지만 누가 보아도 한눈에 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다만 크기가 작았다. 이미 오랫동안 갖고 다닌 듯 모서리가 잔뜩 닳아 있었다. 바닥에는 새로 판자를 댄 흔적이 있었다. “...” 애니스탄이 대답하지 않자 콕스는 슬슬 물러나더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구설수에 오를 듯한 일에 더 상관하기 싫었던 것이다. 보통 사람다운 반응이었다. 세상 사람들의 눈을 피하는 것은 어렵다. 애니스탄이 겨울을 나기로 작정한 곳도 사람들의 눈이 전혀 닿지 않는 곳은 아니었다. 그가 이렇듯 관을 끌고 은신처를 나서게 된 까닭도 그랬다. 네냐플 학원에서 약초 채집을 한다고 여남은 명이나 보내서 산을 훑고 있다. 졸업하고 갓 조교가 된 친구들이 학생 두엇을 데리고 왔을 것이다. 잘 알고 있다. 그도 한때 같은 일을 했었으니까. 그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 겨우내 숨어 있던 산을 내려왔다. 자신이 자리 잡은 곳이 마그란 영지와 가까운 곳이었다는 사실도 오늘에야 깨달았다. 어떤 기분이 그를 이리로 이끌었을지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 큰 의미는 없었다. 콕스처럼, 다른 사람들도 엇비슷할 것이다. 그가 한때 인형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 숨어 숨죽이던 곳에서, 과장된 쾌활함으로 사람들의 호감을 좀 얻었을 뿐이다. 알고 있는데도 발걸음이 잘 돌려지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사람에 굶주렸다. 어느 날인가는 민중의 벗을 찾아갈까 생각했을 정도다. 물론 반나절도 가기 전에 그런 생각을 버렸다. 비취반지 성에서 탈출할 때 그를 도와준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그건 그때까지 존재하던 계약의 일부였을 뿐이었다. 테오가 없으니 그 이상의 관계도 없었다. 반년 전, 테오가 와서 이곳에 숨어 있던 애니스탄을 끌어냈다. 그때 버텼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물론 자신이 버틸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때 친구였던 둘의 관계는 그때를 기점으로 부서지기 시작했다. 점차 닳고, 이가 나가고, 마침내 무너졌다. 애니스탄은 노력했었다. 지금처럼 되지 않으려고. 그걸 포기했던 날, 그는 친구 대신 자신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끝까지 테오를 도울 테지만, 그게 끝나는 날은 자신에게 휴식을 주기로. 휴식은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조차 천형 같았다. 이제 테오가 그에게 남긴 거라고는 최초로 넘겨주었던 두툼하고 누르스름한 봉투 속에 든 물건뿐이다. 생각해 보면 그게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그때는 그런 사실을 느끼지 못했지만. 하긴 시작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관은 은신처에 두고 왔어도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그는 이 물건을 그의 몸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은 수가 없었다. 비취반지 성을 떠난 후로 줄곧. 마차에 싣거나, 나귀에 매달거나, 밧줄에 묶어 끌고 다니기까지 하면서도. 그의 어린아이, 그의 인형은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애니스탄은 끊어진 연결을 복원시키고자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그는 관을 떼어놓을 수 없었다. 아버지로서 마지막 의무인 것처럼 느껴졌다. 가끔 사람들이 그게 무엇이냐고 묻거나 하면, 대답을 피할 수 없을 때는 이렇게 말했다. 죄 없이 희생당한 어린 영혼입니다. 원혼을 달래려고 이렇듯 함께 세상을 다닙니다.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눈이 덜 마른 나뭇가지에 꽃눈이 잠자고 있었다. 겨우내 두터운 눈의 무게를 버텨낸 가지 곳곳에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흰 치맛자락을 감추고, 봄이 보낸 초대장을 품고, 남은 날짜를 세면서. 소녀의 손으로 창이 열렸다. 바이올린 소리를 좀 더 잘 듣고 싶어서였다. 밤새 벽난로가 데운 방 안의 공기도 한결 상쾌해졌다. 목을 빼고 내려다보니 정원 벤치에 앉은 소년의 뒷모습이 보였다. 바이올린의 활이 경쾌하게 움직였다. 박자가 빠른 가보트(gavotte)가 어쩐지 봄과 어울렸다. 소년이 걸친 낡아빠진 코트는 그렇지 않았지만. 창턱에 턱을 괴고 한참 동안 바이올린 소리를 들었다. 나지막이 따라 흥얼거리면서. 이윽고 연주가 그쳤을 때는 박수라도 칠까 했지만, 소년이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 뻔해 그만두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이 먼발치에 나타나기만 해도 달아날 정도로 미움 받고 있었으니 말이다. 소녀는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몰랐지만, 꾸준히 친절을 베풀면 나아지리라고 믿으며 지냈다. 창을 너무 오래 열어 찬 공기가 많이 들어왔으니 병자에게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 소녀는 창을 닫을까 하다가 무심코 침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어서였을까, 오히려 뭔가 잘못된 기분마저 들었다. 늘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둘은 한동안 서로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놀란 기색은 곧 가라앉았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낮잠을 자다가 깬 것처럼 물끄러미 보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본 눈동자는 검은색이었다. 다시 밖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처음 본 소녀에게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몸을 일으키려고도 하지 않고, 그가 말했다. “기타를 갖다 줘. 벽장에 있어.” 막시민은 머리 위에서 나는 기타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무심히 넘겼으나 가락이 그가 연주하는 바이올린과 절묘하게 휘감기기 시작했을 무렵,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비취반지 성에서 지낸지 몇 개월이지만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을 본 일이 없었다. 기타 자체를 본 일도 없었다. 더구나, 달리 누가 이런 연주를 할 수 있을까? 막시민은 고개를 홱 돌렸다. 현이 아슬아슬하게 걸쳐지며 미끄러졌다. 퉁, 소리를 내며 퉁겨났다. 활대가 흙바닥에 떨어지고 연주가 멈췄다. 2층 창턱 위에 앉아 있었다. 외출용 겉옷만 간단히 걸치고, 긴 손가락으로 기타 현을 차례로 퉁기면서 그를 보고 있었다. 흔들리는 옷깃 사이로 아물어 붙은 흉터가 또렸했다. 기타 소리가 멈췄다. “돌아왔어.” 잠시 후, 막시민이 도로 집어든 활대가 2층 창문을 향해 날아갔다. 기타를 재빨리 들어 올려 겨우 막아냈다. 그러자 이번엔 악보 뭉치가 날아왔다. 누군가의 낙서가 가득한 악보 종이들은 창까지 닿지 못하고 정원 사방으로 흩날렸다. 춤을 추며 떨어져 내렸다. 악보와 함께 공작 가문의 정원에 어울리지 않는 욕지거리도 아침 햇빛 속으로 흩어졌다. “평생 잘 잠은 다 잤냐? 이 썩어빠진 나비 번데기 같은 자식아! 내가 줄곧 네 녀석을 빗자루로 패서 깨우고 싶었는데 왜 참은 줄 아냐? 그건 바로...” 부록 1 룬의 아이들의 세계에 대하여 <대륙의 국가들> * 아노마라드(Anomarad) 왕국 대륙 서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강력한 나라. 파노자레 산맥(Panossare Mts.)이 좌우로 가로지르는 남부는 대륙에서 가장 살기 좋은 땅으로 알려져 있다. 975년부터 10년간 공화국이었던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985년부터 다시 왕정으로 돌아섰다. 동쪽 변경에 트레비조(Trebeezo), 잔(Jhan), 티아(Tia)의 세 식민령을 거느리고 있다. 수도는 켈티카(Keltica). 로젠버그 호수의 지류인 블루엣 강(Bluette River)이 도시를 통과하고 있다. *오를란느 (Orlanne) 공국 아노마라드 북부에 위치한 북방성 기후의 작은 나라. 아노마라드 국왕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고 있으나 내정은 독립되어 있다. 수도는 오를리(Orlie). 로젠버그 호수의 지류와 연결되어 있다. *렘므(Lemme) 왕국 대륙 동북쪽으로 뻗어나간 님 반도(Nym Peninsula)와 그 주위의 도서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한 해양국가. 전형적인 북방 해양성 기후를 가지고 있으며 아노마라드에 대적할 만한 국력을 가진 유일한 나라이다. 님반도 북부와 엘베 섬(Elbe Island) 일대에는 캄자크 족을 비롯한 몇 개 부족의 고대 야만인들이 살고 있어서 여러 번의 내전을 겪었다. 이후 이들은 현재 토벌되기보다는 오히려 렘므 인과 특이한 공생 관계를 이루며 해안 국경을 지켜 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수도는 엘티보(Eltivo). 로젠버그 호수에서 뻗어 나온 트레네 강(Trene River) 하류에 자리잡고 있다. * 트라바체스(Travaches) 공화국 대륙 남쪽 중앙의 조개반도(Seashell Peninsula)를 대부분 차지하고 있으나 동쪽의 카투나 산맥(Katuna Mts., 남부 드라켄즈 산맥의 일부)으로 해안이 둘러싸여 해운업은 발달하지 못했다. 산맥의 영향으로 남부임에도 스텝형 초원이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파벌 전쟁으로 얼룩진 변형 공화정으로 인해 내정이 몹시 어지럽다. 외형적으로는 영주들이 선제후를 뽑고, 선제후들이 종신 통령을 뽑는 제도를 갖고 있으나 실질적인 공화정과는 거리가 멀다. 수도는 론(Ron). * 산스루리아(Sansruria) 왕국 아무도 접근하려 하지 않는 대륙 중앙의 ‘필멸의 땅(Mortal Land)' 너머 동쪽 해안에 자리잡은 나라. 지리적인 요인 탓에 외국과의 왕래가 거의 없어서 특이한 신정일치의 왕정이 발달했다. 렘므 왕국과는 어느 정도의 교류가 있으나 구체적인 모습은 아직까지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수도는 그들이 신봉하는 신의 이름을 딴 산스루(Sansru). *루그두넨스 연방(Rugdurnense Union) 대륙 동남부의 메리골드 반도(Marigold Pein.)와 사파이어 만(Sapphire Gulf), 아쿠아 코럴 제도(Aqua Coral Islands)에 흩어져 있는 도시국가들의 연방체. 처음에는 루그란과 두르넨사의 두 도시국가가 합치며 루그두넨스라는 이름이 되었지만 오랜 변천을 겪은 결과 현재는 다섯 국가로 이루어진 연방이 되었다. 그러나 연방이 성립될 당시 작은 도시에 불과했던 나라들이 점차 영토형 국가로 성장함에 따라 연방의 결속력은 매우 느슨해졌다. 연방의 존립이 불투명해질 정도로 심한 대립이 있었던 십여 년 전에 연방 수도가 폐지되었으며 현재는 각 소속국가의 수도(즉, 최초의 도시국가가 생겨났던 곳)에서 돌아가며 1년씩 수도 역할을 맡고 있다. -레코르다블(Lekordable) : 메리골드 반도의 북쪽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라. 연방 내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지만 북쪽으로 ‘필멸의 땅’ 과 접경하고 있어 국토의 절반 가량이 쓸모 없는 황무지와 사막에 불과하다. 유목민적 생활 전통 때문에 용병이 발달하여 대륙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용병단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용병단들 가운데 일부는 정권조차 좌지우지할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떨치고 있다. 내부에는 연원을 알 수 없는 소수민족들이 그들만의 종교와 풍습을 유지하며 일부 분포해 있으나 대부분은 탄압의 대상이다. -두르넨사(Durnensa) : 메리골드 반도와 조개 반도 사이에 위치한 사파이어 만을 끼고 서쪽으로 발달한 상업 국가. 본래 상인 연합체에서 출발한 국가로, 현재도 두르넨사 상인들은 대륙 전체에 각자가 개척한 점조직 상업망을 공유하며 서로 협력하고 있다. 연방 내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이기도 하다. 남부 해적들의 근원지인 조개 반도를 끼고 있어서 일찍이 해적들과 손을 잡고 공생하는 관계가 되었다. 이들 해적들은 일반적으로 국적이 없는 자유민이면서도 종종 두르넨사의 의뢰를 받고 타 국가의 선박들을 공격하곤 한다. 만약 항의가 들어와도 해적에게 국적이 없는 것을 내세워 교묘하게 회피하기 때문에 책임지지 않는 해적 국가로 악명이 높다. - 팔슈(Palshu) : 사파이어 만의 동쪽에 위치한 작은 나라. 두르넨사의 방계 왕가가 세운 곳으로 현재도 두르넨사를 주인의 나라로 섬기고 있다. 매년 두르넨사에 공물을 바치는 대신 해적들의 비호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 루그란(Rugran) : 메리골드 반도의 허리에 위치한 작은 나라. 연방 내 국가들 가운데 가장 먼저 출현한 나라로 오랜 역사와 예술적 전통을 지니고 있어 연방의 문화적인 종주국 역할을 하고 있다. 15세에서 19세까지 모든 젊은이가 출전하여 기량을 겨룰 수 있는 전 대륙적 검술 대회인 ‘실버 스컬(Silver Skull)' 의 연원지이기도 하며 루그란 국왕은 현재도 연방 차원에서 열리는 많은 행사들의 주관자이다. 그러나 국력은 점차 쇠퇴 일로에 있어서 조만간 활로를 모색하지 않으면 두르넨사나 하이아칸 등에 밀려 2류 국가가 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있다. - 하이아칸(Haiacan) : 메리골드 반도의 남쪽과 아쿠아 코럴 제도 전체를 영유하고 있는 나라. 농사를 지을 평야는 많지 않으나 아름다운 산과 호수, 섬과 해안이 곳곳에 펼쳐져 있는 까닭에 여행객들이 많이 몰려들며, 특히 각 국 귀족들의 별장을 정책적으로 유치한 결과 크게 융성하고 있다. 가장 늦게 연방에 합류했으나 현재는 두르넨사와 어깨를 겨룰 정도로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 내부에서 연방 잔존 여부에 대해 가장 격렬한 찬반 양론이 제기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대륙의 지리> * 필멸의 땅(Mortal Land) 대륙 중앙의 거대한 황무지. 렘므, 산스루리아, 레코르다블 등과 모두 국경이 닿아 있을 정도로 영역이 광대하지만, 어느 나라도 감히 침범하여 영토를 넓히려 하지 않는 곳이다. 까마득한 옛날 이곳에 고대의 마법 왕국 ‘가나폴리(Ganapolie)'가 세워져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가나폴 리가 원인이 정확치 않은 마법 전쟁으로 멸망한 뒤 이 땅은 산 자를 품지 않는 곳, 즉 ’필멸의 땅‘ 이 되었다. 언데드(Undead) 나 섀도우(Shadow)로 변한 고대의 인간들이 아직까지도 이 땅에서 떠돌며 옛 가나폴리의 보물을 노리고 들어오는 자들을 용서 없이 살해한다. 그 안에 감춰진 비밀들은 아직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또한 이 땅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매년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고 한다. * 드라켄즈 산맥(Drakens Mts.) 대륙 중앙을 종단하는 거대한 산맥을 널리 통칭하는 이름. 산맥의 규모가 워낙 크고 지형도 다양해서 각 지방에서는 그들의 땅에 뻗은 드라켄즈의 이름을 각각 다르게 부르고 있을 정도이다. 님 반도 일대의 만년설 지역을 비롯, 북부로 갈수록 높고 험준해지며(최대 해발 8천 미터) 남부로 내려오면 비교적 낮고 완만해진다(평균 1천 미터). 이 산맥의 존재는 메마른 필멸의 땅과 기름진 아노마라드의 국토를 갈라 주는 방파제와 같은 역할도 하고 있다. * 로젠버그 호수(Rosenberg Lake) 서북쪽에 자리잡은 대륙 최대 규모의 호수. 블루엣 강과 트레네 강의 발원지이며 안쪽에는 실버리프(Silver Leaf)와 폴른스타(Fallen Star)를 비롯한 몇 개의 큰 섬들이 존재하고 있다. 아노마라드와 오를란느, 렘므를 잇는 상권의 중심지이며 드라켄즈 산맥을 뚫고 이어지는 고갯길을 이용하여 만든 로젠버그 관문은 아노마라드와 렘므를 잇는 가장 큰 관문으로 알려져 있다. * 페리윙클 섬(Periwinkle Island) 아오마라드 남쪽 먼 바다에 자리잡은 일명 ‘이카본 군도’에서 가장 큰 섬. 오래 전 아노마라드 왕국이 건국되던 때 왕가와 손잡고 나라를 일으킨 아르님 공작 가문의 옛 영지이다. 강한 군사력으로 무장된 독립 국가나 다름없는 곳으로, 아르님 가문이 그곳을 떠난 후로는 아노마라드에서 존재하지 않는 섬으로 여기고 있다. * 노을섬(Red Sky Island) 이카본 군도에 속한 작은 섬. 오래 전 주술사들의 섬으로 유명했던 곳이지만 현재는 무인도이다. * 블루 코럴 섬(Blue Coral Island) 하이아칸의 왕성 소드 - 라 - 샤펠과 해안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작은 섬. 위치상의 이점 때문에 귀족들의 별장지로 크게 각광받아 관광에 관련된 특이한 업종이 발달된 섬이다. <기타> * 마법/ 검술 학원 네냐플(Nenyaffle) 남부 아노마라드의 파노자레 산맥 서쪽에 위치한 마법과 검술을 교육하는 학원. 본래의 명칭은 네냐-야플리아(Nenya-Yaffleria)이지만 누구나 네냐플이라고 부른다. 오랜 역사와 전통에 걸맞게 높은 수준의 교육으로 유명하며, 대대로 대륙 최고를 일컬어지는 마법사들이 학장직을 맡아 왔다. 마법, 연금술, 고문학, 수학, 음률, 검술 등에 걸쳐 아홉 명의 마스터들이 있으며 이들 모두는 각 분야에서 최고라는 명성을 지닌 훌륭한 선생들이다. 평민과 귀족을 구별하지 않고 받아들이지만 입학 시험이 꽤 까다로우며, 승급 시험 낙제생들을 곧장 퇴학시켜 버릴 정도로 엄격한 학제로 인해 상당한 악명도 얻고 있다. 부록 II - 룬의 아이들의 시대 956 원터러 이자크 듀카스텔, 태어남. 957 958 959 960 데모닉 테오스타드 다 모로, 애니스탄 뵐프, 태어남. 962 963 964 965 데모닉 이브노아 폰 아르님, 태어남 966 원터러 예프넨 진네만, 태어남 967 968 969 970 971 원터러 이솔레스티(이솔렛), 태어남 데모닉 테오, 이브노아 폰 아르님(이브)과 약혼함 972 973 데모닉 조슈아 폰 아르님, 태어남. 974 데모닉 막시민 리프크네, 리체 아브릴 태어남. 원터러 보리스 진네만, 란지에 로젠크란츠, 루시안 칼츠. 이스핀 샤를, 클로에 다 폰티나, 태어남. 975 ----- 켈티카에서 공화국 아노마라드 정부가 수립됨. 구 아노마라드 왕가, 무너짐 976 원터러 나야트레이, 태어남. 977 978 979 980 981 원터러 일리오스 사제와 나우플리온, 결별. 982 데모닉 <룬의 아이들 - 데모닉> 시작 983 원터러 일리오스 사제, 죽음. 나우플리온, 검의 사제가 됨 데모닉 테오와 이브노아, 결혼하여 하이아칸으로 떠남. 조슈아, 코츠볼트에서 막시민과 첫 만남. 984 985 ---- 공화국 아노마라드, 무너짐(10년), 신왕국 아노마라드, 건설됨.(신왕국 0년) 데모닉 프란츠 폰 아르님 2세(테오와 이브노아의 아들), 태어남. 조슈아, 켈티카로 돌아옴. 이브노아, 죽음. 986 신왕국 1년이 선포됨 원터러 <룬의 아이들 - 원터러> 시작. 보리스, 나야트레이와 첫 만남. 보리스, 란지에와 첫 만남. 보리스, 나우플리온과 첫 만남. 987 원터러 예니 진네만 (어린 예니), 태어남. 보리스, 루시안과 첫 만남 데모닉 조슈아, 켈티카를 떠나 하이아칸으로 감 988 원터러 보리스, 달의 섬에 도착. 보리스, 이솔렛과 첫 만남 989 원터러 보리스, 실버스컬 참가 990 원터러 보리스, 달의 섬을 떠남 보리스, 필멸의 땅 여행. 데모닉 조슈아, 리체와 첫 만남. 조슈아, 막시민과 재회. 원터러는 룬의 아이들 - 원터러의 사건 데모닉은 룬의 아이들 - 데모닉의 사건 <8권에서 계속> 도서명 : 룬의 아이들 2부 데모닉 8권 지은이 : 전민희 펴낸이 : 서인석 출판사 : (주)제우미디어 출판년도 : 2007년 2월 22일 봉사자 : 안선영 <지은이 소개 / 전민희> 1975년생.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연구원을 지냈다. 1999년 장편 판타지 소설 <세월의 돌>로 데뷔하였고 이후 후속작 <태양의 탑>을 출간했다. 이 두 작품은 5부작으로 구상된 <아룬드 연대기> 시리즈의 3부와 1부이다. 작가의 두 번째 세계인 <룬의 아이들> 시리즈는 1부 <룬의 아이들-윈터러>, 2부 <룬의 아이들-데모닉>편이 출간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온라인 게임 <테일즈위버>가 제작되어 세계 각국에 서비스되고 있다. 특히 <룬의 아이들-윈터러>는 일본, 중국, 대만, 홍콩에 번역 출간되어 큰 호평을 받으며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았으며, 일본에서 아마존 한국소설 베스트셀러 1위, 야후 재팬 선전 ‘2006년 가장 많이 읽힌 소설’ 등에 올랐다. <룬의 아이들-데모닉> 또한 대만, 홍콩에 번역 출간되었으며 일본판은 2007년 중반 출간 예정이다. 현재 데뷔작 <세월의 돌>의 개정 작업에 매진하고 있으며 <태양의 탑> 또한 개정 후 출간이 예정되어 있다. <차례> 15막 Umbra 1 일몰 2 쌍둥이 3 무대 밖의 덫 4 물고기 술집과 장미골의 밤 5 화살 6 무한한 포도원 7 추적자들 8 황홀한 독 16막 Long 1 맞춰지는 조각들 2 비밀의 말의 거처 3 미래에서 온 사자 4 나무의 자장가 5 네냐플 학원 입학식 6 도토리 빌라 7 레몬 젤리와 썩은 샐러리 8 빌라 전쟁 9 그림자에 붙들리다 10 제물 11 나의 아버지 12 다시 한 번 그 배를 타고 13 마음을 꿰맨 실 14 별장의 저녁식사 15 아몬드나무 아래 Epilogue : Knotted 룬의 아이들 - 데모닉 제작노트 <소개 글, 서평> 인기리에 발간되었던 룬의 아이들 2부 데모닉의 완결편. 8권에는 기존의 출간되었던 다른 권들과는 달리 거의 두 권 분량에 달하는 480페이지. 룬의 아이들 시리즈로 새롭게 펼쳐질 3부에서는 1부와 2부의 끝에서 17, 18세였던 중심인물들이 20대로 성장한 후의 이야기다. 지금까지 주인공이 아니었던 인물 중 하나의 이야기 중심으로 쓰여질 것이다. 그러나 대륙의 격동기가 그려지게 되는 만큼 기존 인물들도 각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예정이다. 본문 15막 Umbra 1 일몰 “그대에게 바쳐온 삶이 끝났습니다. 후회 없이 기쁜 삶이었습니다. 제 유품을 바다에 뿌리시고 육신은 제단에 올리십시오. 제 기억을 양식으로 하시고 혼은 후손을 지키게 하십시오.” [여긴 어디지?] [깨어났구나.] [깨어나다니? 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주 많은 일이 있었지. 하지만 그 이야기는 이제 됐어. 깨어났으니 모든 게 잘 될 거야.] [그런데 왜 슬픈 표정을 짓지?] 눈을 뜨자 캄캄한 방이 조슈아를 맞았다. 오른손을 이마에 댔다. 지문에 묻은 땀이 미끈거렸다. 가슴께까지 이불을 덮었는데 온몸이 서늘했다. 의식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왼쪽에서 펄럭거리는 것이 커튼일 뿐임을 눈치 채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창을 열고 잔 기억은 없었다. 몸을 일으켜 돌아보자 손가락 두 개가 드나들 만큼 열린 창 너머로 회색 나무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이상하다. 조슈아는 상반신을 일으켜 앉아 무릎을 껴안았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보았다. 어디가 불편한지 알아내기 힘들었다. 다리에서 흘러내린 구겨진 이불이 누군가가 벗어놓은 허물처럼 보였다. 벗을 자가 있다면 자신뿐이었다. 헌 고치를 벗고 태어난 것은 나비여야 할 터였다. 그의 반년이 잠이라면, 죽음이 아닌, 재생이 예고된 잠이었다면. 조슈아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어 불렀다. “켈스.” 대답이 없었다. 언젠가부터 자주 그랬기에 이상한 일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묘하게 낯설었다. 조금 전까지 가까이 붙어 있던 기억이 나서다. 어머니 뱃속에 든 쌍둥이처럼. “켈스, 어디 있어?” 대답하지 않는 그는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필멸의 땅처럼 먼 곳에, 또는 그보다 가까운 곳에. 바쁜 일이 있어서 오지 않는 것뿐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등 뒤에서 말을 걸 것이다. 늘 그렇듯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만 떨어진 자리에서. 그게 정말일까? “켈스, 대답 좀 해봐. 어디 있어?” 대답 없이 적막한 방에서 조슈아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켈스니티를 만난 후로 그는 오랫동안 완전히 혼자라고 느낀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 순간 그에게 강렬한 부재의 감각이 밀려들었다. 그가 속한 공간은 비어 있었다. 멀리서 대답하지 않을 뿐인 켈스니티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오후 7시였으나 아르님 공작의 서재에는 두터운 커튼이 내려졌다. 공작의 심복인 에드멜 남작과 말론 경이 책상 옆에 섰고 낯선 사람 둘이 손님을 맞는 테이블을 둘러싸고 서 있었다. 비서 헤슬이 커튼 고리를 내려놓고 테이블 앞으로 돌아왔다. “다들 앉으시오.” 공작이 책상 뒤에서 나와 테이블 머리의 의자에 앉자 네 사람이 차례로 자리에 앉았다. 공작은 낯선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어서들 오시오. 어르신께서 그대들의 일을 자주 말씀하셨다오.” 둘 중 나이가 많은 쪽은 마흔 남짓한 여자였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틀어올린 검은 머리카락이 렘므 여자 같은 느낌을 주었다. 머리와 목을 감싼 머플러는 화려한 꽃무늬였지만 정작 그녀 자신의 얼굴을 가무잡잡했다. 그녀는 가볍게 목례를 했다. “프리실라 포사다입니다. 프리실라라고 불러 주십시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느릿한 목소리인데 말끝만 빠르게 당기는 것이 특징이었다. 프리실라가 돌아보자 서른 중반의 키 큰 남자가 말없이 고개만 숙였다. 공작은 그가 말하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프리실라가 대신 말했다. “이쪽은 빌 오리스입니다.” 이어 말론 경이 두 사람을 향해 인사했다. “로이 벤 말론입니다. 직접 뵌 것은 처음이지만 그동안 편지로 말씀을 나눴다 보니 모르는 분들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좋은 편지였습니다. 오늘 같은 날이 오기를 기대하였죠.” 빌 오리스가 품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번호가 매겨진 이름들이 줄지어 쓰여 있었다. 28번까지였지만 번호만 있고 이름은 빈 것이 절반 이상이었다. 그러나 공작을 비롯한 사람들은 몹시 긴장했다. 에드멜 남작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이 정보가 확실하오?” “글쎄요. 확증이 있느냐는 물음이시라면, 아니라고 답 드리겠습니다. 그런 것이 있었다면 망명 의회가 그들을 이대로 내버려뒀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나름의 판단 근거는 있습니다.” 프리실라의 손가락이 종이 위를 더듬다가 한 이름 앞에 멈췄다. “예를 들어 이 자 같은 경우는 확실합니다. 왕국8군에서도 쫓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물론 이미 자취를 감췄죠. 또 이 자, 우리는 확신하고 있지만 왕국8군은 확증이 없어 잡아들이지 못하는 잡니다. 보시다시피 귀족이 아닙니까? 에드멜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참 대단하구려. 왕국8군조차 감을 잡지 못하는 켈티카 내 지구 위원장들을 이만큼이나 파악하고 있다니.” 프리실라는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어르신께서 하시는 일이지요.” 아르님 공작이 허리를 폈다. 몸을 등받이에 기대더니 깍지 낀 손을 몇 번 쥐었다 놓았다 했다. 히스파니에가 아르님 가문을 떠나 대륙을 돌아다니며 어떤 일을 했는지 알려진 것은 거의 없었다. 공작조차도 드문드문 들려오는 소문과 히스파니에 본인이 해준 몇 가지 이야기 외에는 알지 못했다. 작년에 조슈아의 일이 벌어지고 나서 히스파니에와 많은 일을 상의하고 도움을 받게 된 후로, 공작은 히스파니에의 손이 상상할 수 없는 곳까지 닿아 있어 놀란 일이 많았다. 그러나 이번만큼 그를 감탄하게 한 일은 없었다. 상대는 민중의 벗이었다. 가장 난해한 점조직을 가진 까다로운 상대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중 우리가 찾는 자가 누구인지 좁힐 수가 있는 거요?” 프리실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시다시피 켈티카 지구 위원장들은 민중의 벗이 가장 우선적으로 보호하는 조직원입니다. 상급 간부들보다도 더 많은 회원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그들의 정체가 발각당하면 지구 조직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는 것은 물론, 연결된 상층부까지 위험해집니다. 따라서 정체를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접근하는 자가 오히려 위험해질 소지도 다분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프리실라는 손가락을 움직여 몇 군데를 짚었다. 20지구, 19지구, 8지구, 그리고 3지구. “다섯이로군.” 말론 경이 중얼거렸다. 프리실라가 말을 이었다. “테오스티드 다 모로와의 협상이 있었다고 예상되는 당일 행적을 알 수 없거나, 카잘스에 들렀다고 생각되는 자들입니다.” “이 중 셋은 이름이 없지 않소?” “이름을 모른다고 해서 행적조차 모르는 건 아니지요.”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비서 헤슬이 감탄하며 말했다. “머지않아 아르님 가문에 감히 손을 뻗은 자들에게 그 대가가 어떤 것인지 보여줄 수 있겠군요.” 이브노아가 죽었을 때 히스파니에가 ‘아르님에게 손댄 자에게 본보기를 보이라’고 했던 말이 오늘의 결과에 이르기까지 참 여러 해가 걸렸다. 그때 히스파니에는 조슈아를 성에 머물게 하라고 했으나 조슈아는 버티지 못하고 결국 하이아칸으로 떠나버렸다. 그 후 조슈아에게 닥친 위기와 먼 길을 돌아왔던 해답, 반년 간의 혼수상태, 그 모두를 겪으면서도 아르님 공작과 히스파니에는 잊지 않았다. 모든 일을 일으켰던 테오는 죽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첫째로 찾아야 할 자는 마법사 ‘애니’였다. 조사해 보니 그 자는 테오의 고향 친구였다고 했다. 그러나 고향 일대를 샅샅이 뒤져 보아도 근처로 돌아온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부모는 죽은 지 오래였고 형제나 친척도 전혀 없었다. 아마도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가족이었던 듯했다. 다음은 추리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법을 가르치는 학원들의 입학생 명부를 조사했지만 애니라는 이름은 여자들에게 특히 흔했다. 명부에 성별이 쓰여 있지 않아서 하나하나 알아보는 데에 상당한 수고가 들어갔다. 결국 그들은 ‘애니’의 이름이 애니스탄 뵐프이며 가장 권위 높은 마법 학원인 네냐플 출신임을 알아냈다. 그리고 조사는 거기에서 멈췄다. 네냐플 학원은 마법사 과정을 밟아 졸업한 사람들을 내부인으로 간주하여 신중하게 보호했다. 그의 출신이 무엇인지, 무엇을 배워 얼마나 성취했는지, 이후 어떤 일을 했는지 모든 면에서 비밀을 지켜주었다. 어느 나라의 왕, 또는 귀족이 요구하는 죄인을 내놓지 않는 경우도 몇 번이나 있었다. 조사만 하여 해도 거의 협조하지 않았다. 문제가 있으면 내부에서 회의를 열어 징계를 결정할 뿐이었다. 마법사의 문제를 세상의 법과 분리하는 것이 그들의 이상이었다. 따라서 마법사들은 나라에서 쫓기는 것보다 마법사 회의에서 징계 받는 것을 훨씬 더 두려워했다. 또 다른 조사 방향은 테오의 뒤를 보아 준 자들이었다. 테오는 암살자를 고용했다. 또한 조슈아의 움직임을 알아냈고, 심지어 함대를 동원하여 공격하기까지 했다. 누군가의 후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공작 작위는 아르님 공작이나 조슈아를 암살한다고 테오의 손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살아생전 테오의 행적을 조사한 결과 그가 여러 귀족을 소개받았음을 알아내었다. 아르님 공작이 그 귀족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음을 눈치 채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르님 공작은 켈티카에서 10년 공화국 시절을 버텨냈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 시절 공화국에 부역한 귀족이 누구누구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신왕가가 세워지자 자신들의 과거를 지우고 시치미를 떼며 새 귀족의 대열에 합류했다. 왕가의 한 팔이 된 아르님 공작이 마음만 먹었더라면 그들의 정체를 밝혀내어 파멸시켜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의미 없는 일이라고 여겼던 까닭이었다. 테오가 만난 자들이 상당수 공화국 부역자들임을 알게 되자 공작과 히스파니에는 테오가 민중의 벗에 줄을 대려 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기반이 없는 테오가 극적인 반전을 꾀하려 했다면 택했을법한 길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숨바꼭질이 시작되었다. 테오와 접선했을 민중의 벗 간부의 존재는 교묘히 가려져 있어 부역 귀족들로부터도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시행착오 끝에 만남 장소에 착안하게 되고, 수많은 후보 중에서 모퉁이집이라고도 불리는 카잘스가 발견되고, 작년 5월 27일에 그곳에서 이루어진 만남을 추적하기까지 실로 몇 달이 걸렸다. 테오가 소개받은 귀족들의 면면을 볼 때 접선 상대는 적어도 위원장 급이었다. 켈티카 지구 위원장들을 조사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조사를 합친 것보다 더 어려웠다. 조슈아가 깨어난 뒤에도 조사를 그만둘 필요는 느끼지 않았다. 줄곧 말이 없던 공작이 입을 열었다. “어르신은 언제 뵐 수 있겠소?” “더 알아볼 것이 있다고 하시며 나흘 전에 켈티카를 떠나셨습니다. 다음달쯤 돌아오실 듯합니다.” “그때까지 퍼즐을 맞추도록 노력해 보겠소. 허나 마지막 조각은 결국 어르신께서 맞춰 주셔야 할 거요.” “알고 계실 겁니다.”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에 놓인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생각한 끝에 그가 말했다. “이번 경우처럼 용서 없는 싸움이 아니었더라면 어르신께서 당신의 힘을 이런 일에 쓰지는 않으셨으리라 생각하오. 복수란, 어쩌면 그분의 재능에 실례라는 생각도 드는구려.” “하지만 손아귀에 쥔 자를 쉽사리 놓아주지도 않을 분이십니다.” 공작이 깍지 낀 손을 풀어 테이블을 짚으며 말했다. “난 때로 어르신이 내 숙부라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소.” 프리실라가 대답했다. “저희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2 쌍둥이 “다른 날 다른 시에 다른 부모가 낳은 쌍둥이가 있었어. 그들은 서로를 매우 사랑했지만 상대가 거울에 비친 자신인 줄로만 알고 있었지.” 세 개의 계단참을 돌아 마침내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문을 여는 순간까지도 예상하지 못했다. 잠깐 상상하려 하긴 했다. 두 번째 계단을 오르는 동안. 하지만 네 번째 계단 즈음에서 포기해버렸다. 어떤 것도 불가능하지 않으니 어떤 예상도 소용없겠지 싶었다. “잠 한 번 질기게 자더구만.” 문이 딸각, 하고 열리는 순간 날아온 말이었다. 조슈아는 걸음을 멈췄다가 곧 싱긋 웃었다. 발을 내딛으려던 곳에 조그마한 녹색 개구리가 앉아 있었다. 투명한 막이라도 한 겹 두른 것처럼 말갛게 빛나는 녹색이었다. 개구리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다가 바로 옆의 벽감으로 뛰어올라갔다. 정확히는 그 위에 쌓인 책 더미 위였다. 조슈아는 개구리가 꼭대기로 오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저게 혹시 사람은 아니겠죠?” 오른쪽 어딘가에서 대답이 들렸다. “어, 책을 읽겠다는 걸 보니 그럴지도?” 문을 닫고 돌아선 조슈아는 두 번째로 걸음을 멈췄다. 문 앞은 분명히 양탄자가 깔린 바닥이었다. 그런데 네댓 걸음 앞에는 풀밭이 펼쳐져 있었다. 실제 방 넓이의 몇 배는 될 듯싶었다. 싱싱한 들풀과 잡초 너머에는 작은 연못이 자리 잡았다. 바위틈에 수선화가 자랐고, 수면에는 마른 나뭇잎 몇 개가 떠다녔다. “저기 앉아.” 연못가에 성에서 쓰는 것과 똑같은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의자 다리가 양탄자 대신 클로버 무리에 파묻혀 있다는 점만 달랐다. 슬리퍼 바닥에 닿는 촉감은 자연 속의 흙과 풀 그대로였다. 의자 앞에 이르자 슬리퍼는 반쯤 젖어버렸다. 이슬 탓이었다. “조금 춥네요.” 날씨는 초가을인 듯싶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연못 앞 풀밭에 변화가 일어났다. 풀이 순식간에 말라 사르라지더니 동그란 빈터가 생겨나고 거기에 불꽃이 튀었다. 흠칫 놀랐으나 곧 그것은 작은 모닥불로 변했다. 기분 좋은 열기가 밀려들어왔다. 조슈아는 감탄하며 말했다. “주문도 수인도 없이 해내시네요.” “그거야 여기가 내 머릿속 공간이니까 그렇지. 넌 생각하는데 주문이 필요하냐?” 조슈아는 모닥불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웃었다. “다 좋은데 이제 그만 모습을 보여주세요.” “어. 기다려.” 몸이 따뜻해졌다. 조슈아는 연못을 들여다보았다. 물이 밝은데도 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떠다니는 것은 떡갈나무 잎처럼 보였다. 그러나 주위에 떡갈나무는 없었다.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린다 싶어 돌아보니 책 더미를 기어오르던 놈과 똑같아 보이는 개구리가 뛰어오는 중이었다. 정말 같은 놈일지도 몰랐다. 개구리가 맞은편에 놓인 빈 의자에 뛰어오른다 싶은 순간, 개구리의 모습이 사라졌다. 쥬스피앙은 특유의 팔짱을 낀 자세로 목을 몇 번 돌렸다. 그다음에야 조슈아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멀쩡해 뵈네.” “개구리 모습으로 다니면 재밌나요?” 쥬스피앙은 벽감에 쌓아 놓은 책 더미를 가리켰다. 여전히 가느다란 팔이라 로브 소매가 휘감기다시피 했다. “하루에 한 번씩 저 책 탑 오르기 운동을 하고 있어. 나이가 드니까 관절이 시원찮아져서.” 조슈아는, 보이지는 않지만 그 자리에 있을 것이 틀림없는 창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번거롭게 개구리가 되실 것 없이 밖에 나가서 나무타기 하시면 돼요. 아무도 뭐라고 할 것 같지 않은데.” 감히 뭐라고 할 사람이 없을 것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쥬스피앙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소리. 다른 동물이 되면 돌리기 힘든 방향으로 관절을 움직일 수가 있단 말이다. 사람마다 습관적으로 굳는 관절이나 근육이 있기 때문에 대상을 잘 골라야 해. 나한테는 개구리가 도움이 되는 것 같더란 말이지.” 조슈아는 마주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듣고 보니 어울리는 것도 같고.” “마음에 들면 너도 개구리 한번 돼 볼 테냐?” 조슈아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아, 그나저나 굉장히 오랜만에 뵙네요?” 쥬스피앙의 한쪽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네 녀석한테는 오랜만일지 몰라도 난 반년 동안 질리도록 봐 왔다. 그런 인사가 어울릴 턱이 있겠나.” “그렇게 열심히 붙어 앉아 계셨던 줄은 몰랐는데요.” “물론 네 녀석 본인이 아니었던 때가 훨씬 많았지. 하지만 어차피 똑같거든. 겉은.” 조슈아는 마주 미소를 지었다. “그게 용건인 걸 알고 왔어요.” 쥬스피앙은 다른 한쪽 입술 끝도 올렸다. “나도 네가 왜 왔는지 안다.” “얘기가 간단하겠군요.” 조슈아는 의식적으로 시선을 한 바퀴 돌렸다. 열 걸음 남짓 들어온 것 같은데 문간은 굉장히 멀어보였다. 다시 앞을 보자 연못해서 안개가 피어나며 수면이 흐릿해졌다. “그가 잠든 것은 본체와 연결이 끊어져서일 거라더군요. 그래도 깨어날 수 있다고 보시나요?” “깨울 방법을 찾아냈으면 아직까지 여기 있지도 않았지. 너희 둘은 잠든 상태조차 비슷했어. 잠들게 된 까닭이 다른데도. 그래서 너만 이렇게 깨어날 줄도 예상 못했지.” “나만 깨어나서 유감이라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아니. 그렇진 않아. 어느 쪽이든 깨어나야 말을 해볼 거 아닌가.” “무슨 말?” “연구를 해야겠거든. 이곳도 그럭저럭 나쁘진 않지만 제대로 일할 만한 환경은 아니지. 내 연구실로 돌아가야 해.” “그와 함께?” 쥬스피앙은 팔짱을 낀 채 한쪽 손을 빼어 손가락을 쳐들었다. “막시민 놈은 그걸 네가 허락해야만 한다고 하더군.” “내가 아니라 그가 깨어났더라면?” “그럼 직접 제안을 했겠지. 나와 함께 가자고.” 조슈아는 입술을 약간 오므렸다. “무슨 대답을 들을 것 같나요?” “그가? 아니면 지금 네가?” “어느 쪽이든.” “거절했을 거란 말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거절당할 게 뻔한 질문을 하겠다고 반년이나 기다리진 않아.” 조슈아는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렇다면 질문해 보시죠.” “좋다.” 쥬스피앙은 팔짱을 풀며 고개를 쳐들었다. 나온 질문은 예상과 조금 달랐다. “넌 내 도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나?” 조슈아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내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없나?” “아뇨. 아주 많죠. 하지만 결국 당신의 요구를 들어줄 순 없어요.”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과소평가하는군. 안 그러냐?” “아뇨. 당신의 도움이 절대로 필요하지만, 그를 넘겨줄 순 없다는 말이에요. 당신의 요구는 마치 이런 거죠. 종은 것을 줄 테니 팔 하나를 잘라 내놔라.” 쥬스피앙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착각하지 마. 그는 너와 별개야. 네 몸의 일부가 아니라고. 그런 말은 그놈에게도 불쾌할 거다.” “하지만 내 몸에서 잘라져 나간 조각인 것만은 분명하죠.” “그래, 조각이야. 잘라졌단 말이다. 잘라진 순간부터 너희 둘의 삶은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거야. 너희가 할 일은 사람들의 착각을 중지시키는 것뿐이야.” “몸이 따로 떨어졌다 해도 결코 무관할 수 없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요? 부부처럼, 부모자식처럼, 당신과 당신의 딸처럼.” 쥬스피앙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그놈은 네 자식도 형제도 아냐. 그보다 더 가까운 존재라고 주장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희 놈들은 서로를 사랑할 수가 없거든. 가깝다는 말 따윈 다 허구일 뿐이야.”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상대를 쏘아보았다. “네. 아주 미워하는 쌍둥이 형제 같은 거죠. 내가 그를 너무나 미워하여 해칠지언정 다른 누군가가 그러는 건 용납 못합니다.” 쥬스피앙의 표정이 서서히 변했다. 비웃음이 사라지고 차가운 무표정이 나타났다. 조슈아는 말을 이었다. “당신은 그를 해칠 계획을 가졌나요? 그를 살릴 계획을 가졌나요?” “다 갖고 있다.” 쥬스피앙은 조슈아의 눈앞에서 손바닥을 폈다가 그러쥐었다. 손톱이 차례로 손바닥 속에 묻혀 들어갔다. “내 반년은 신선놀음이나 하며 보내기엔 지나치게 귀하지. 난 오래 살아왔지만 영원히 살진 못해. 따라서 난 말이지, 내 시간을 들여 알아낸 것을 아무렇게나 알려주진 않는다고. 네가 내 답을 들을 준비가 되기 전에는. 그러니 대답해 봐라. 만약 내가 그놈을 깨워 너와 똑같이 살아갈 수 있게 한다면 넌 어찌하겠나?” 조슈아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다. “그와 많은 것을 나눠야겠죠.” “넌 이미 나눴어. 적어도 어머니는 그놈과 나눠 가진 것 같더군. 만약에 너와 그놈 둘 중 하나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면 넌 물론 그놈이 죽는 쪽을 택하겠지?” 한때 삶을 향한 의지조차 선뜻 보이지 않던 데모닉 조슈아였다. 그러나 그는 달라졌다. “그렇겠죠.” “마지막으로, 그가 살아나게 되면 지난번에 그랬던 것처럼 언제고 너를 향해 칼을 휘두를지도 모르는데, 그 점을 용납할 수 있겠나?” “그건......” 조슈아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쥬스피앙은 냉소하며 기다렸다. 그러나 조슈아가 입을 열자 쥬스피앙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그럴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요?” 조슈아는 웃지 않았다. 쥬스피앙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허세나 망상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는 건 잘 알았다. 그러면 진실을 듣고 판단은 네가 해라.”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쥬스피앙의 손바닥에서 첫 손가락이 빠져나와 세워졌다. “첫째로, 네 인형은 곧 죽는다.” 조슈아는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선뜻 믿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난 그놈을 처음 보고 본체와 연결이 끊어진 것 같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한 가닥 희망을 품었다. 본체가 무엇이냐? 전에도 말했지? 본래 복제 인형이 만들어지는 일에 본체는 필수품이 아니라고. 본체 따위 없어도 얼마든지 만들 수가 있어. 하지만 본체를 만들어 연결을 해 놓지 않으면, 인형에게 생명을 불어넣자마자 곧 죽어버리고 만단 말이다. 질서의 눈 아래 완전히 동일한 것은 단 한 순간도 함께 존재할 수가 없으니까.”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들은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할 그가 아니었다. “한데 본체를 잃었는데도 그놈이 죽지 않고 가사상태에만 빠진 거라면 그놈은 이미 너와 별개의 존재가 된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그래서 질서도 너희 둘을 따로 용납해주게 된 건 아닐까, 그런 추측을 했지. 네가 잠들어 있을 때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런 관점으로 말했고. 그래서 어떻게든 놈을 살려내 봐야겠다는 구상도 가질 수가 있었어.” “그런데 그게 아니란 말인가요?” “그래. 아니야. 놈은 본체와 연결이 끊어지지 않았어.” 쥬스피앙의 표정도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이건 그가 반년 간 연구한 끝에 실패한 이야기였다. “인형의 완성도는 인형사의 몫이다. 인형사가 얼마나 강력한 자인가에 따라 인형이 할 수 있는 일이 정해지지. 인형사가 허접스러운 놈이면 인형은 물 긷고, 걸레질하고, 바느질하고, 이따위 일밖에 못하지. 네 인형을 만든 인형사는 아예 복제를 택해서 그 문제를 피해갔어. 그런데 그 인형사 놈이 본체를 갖고 멀리 가버렸거든? 그랬더니 저렇게 가사상태에 빠졌단 말이야. 얼마나 멀리 갔는지는 몰라도 인형사의 힘의 한계는 분명한 거지. 그리 대단치 않다 이거야. 본체가 멀리 있는 상태로도 인형이 제대로 움직이느냐 아니냐는 전적으로 인형사의 능력에 달렸으니까.” “막시민이 그러더군요. 본체를 파괴하거나 본체를 갖고 멀리 가거나 동일한 결과라면, 어째서 그는 본체를 어딘가에 숨기려 하지 않고 인형이 죽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을 직접 저질렀을까, 라고.” “그래, 막시민 놈이 한 말이 정답이야. 그 놈의 추리가 정확했다고!” 쥬스피앙이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형과 본체의 연결은 둘 중 하나가 파괴되지 않는 한 끊어지지 않는 거였어. 이 단순한 사실을 간과하고 엄정한 질서의 눈을 내 좋을 대로 재단하다니, 창피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ㄷ구나 내 반년 간의 삽질을 막시민 놈이 예측하고 있었다니 이만저만 불쾌한 일이 아니야!” 쥬스피앙의 발이 바닥을 한 번 구르자 연못 주변의 흙들이 부서져 물속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흡사 과자로 만든 것처럼 잘 부서지는 땅이었다. “그래, 그래, 어쨌든 그렇게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네 인형의 생명은 점차 사그라지고 있는 거다. 본체가 멀리 가자 인형이 오히려 부서질 위기에 처한 거지. 본체 없이 버티느라 그의 생명이 힘을 다해 가고 있거든. 겉보기에는 멀쩡히 자는 것 같아도 서서히 망가지는 중이야. 본체를 가져온대도 고칠 수 없게 된 손상이 곳곳에 있을걸.” 조슈아의 뺨이 약간 떨렸다. “그게 정말인가요?” “반년 동안 기껏 얻어낸 결과다. 그놈을 본체와 분리할 방법은 없어. 본체를 부수거나 인형이 죽는 것뿐이야. 어쩌면 놈도 너를 봤기에, 그와 함께 자신 속에 침입한 낯선 타인인 본체의 존재를 깨달았기에 본체의 힘을 거부한 나머지 자의로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르지.” 조슈아는 무표정해 보였다. 그러나 입을 열자 입가에 경련이 스쳐갔다. “그렇다면 난 고민할 것이 없군요? 내버려 두면 그만이군요? 그와 살아갈 방법도, 죽어갈 방법도 대답할 필요는 없었군요? 당신은 왜 내게 그런 걸 물었죠?” 쥬스피앙은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조슈아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내 동생이나 아들이 아니죠. 나라고요. 사랑하는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나. 난 그가 없던 때부터 나 자신을 별로 사랑하지도 않았죠. 별로 사랑스럽지도 않은 나 자신인데 잘도 둘이 된 거죠. 난 그를 보자마자 역겨움을 느낄 수도 있었던 건데, 그런 건데......” “그런데?” “다른 사람이라면 일평생 맡지 못할 자신의 체취, 바로 그의 냄새를 느끼는 순간 거꾸로 내가 나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깨달았단 말입니다. 난 단 한 번도 날 거절한 적이 없었다는 걸. 내 손을, 내 키스를, 나와의 동침을, 내 세계 속에서 나와 함께 달리는 자는 나뿐이었기에. 그 외에는 다리라도 부러진 듯 느리게 달리는 자들뿐이었기에. 그러면서 동시에 그런 좁은 어린 아이의 세상에 사는 나를 경멸해 온 것을. 미래를 비춰볼 상대는 어디에도 없었고, 난 내 세계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한 겁니다.” 말하는 동안 이마에 땀이 배어 나와 머리카락이 엉겨 붙었다. 눈이 젖어 반들거렸다. “그런 마음이었기에 참을 수가 없었던 거죠. ‘나’인 그가, 내게서 그 소중하던 나를 빼앗아 높이 못질해 매달았으니까. 난 덤벼들어 나를 빼앗고, ‘나’인 그를 때려눕히고 싶었죠.” 고요해졌다. 쥬스피앙이 입을 다물자 풀잎사귀조차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윽고 느린 한숨이 나오기까지 그렇게 멎어 있었다. “후......” 열기가 식었다. 조슈아는 한 손을 뺨에 댔다.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당신은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알아서 한숨 쉰다.” 쥬스피앙은 자리에 앉으며 덧붙였다. “너나 나를 빼고 이런 미친 대화를 이해할 놈도 달리 없겠지. 히스파니에 정도는 넣어 줄까? 하지만 말이야, 조금 전 내가 한 질문에 한 대답대로라면 넌 이제 거기서 한 발 뺀 건데?” 조슈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아마도요.” “그럼 내가 졸업시험 문제를 낼까? 자, 네 인형을 살릴 방법이 딱 하나 있긴 하거든. 넌 그 방법을 알고 싶나?” 조슈아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그런 방법이 없다고 방금 말한 사람은 당신입니다.” “그래. 아직 나조차도 그 방법을 모른다는 점을 전제하겠다. 하지만 만약에 방법이 있어서 본체와 인형의 연결을 끊을 수가 있다면.” 쥬스피앙은 두 번째 손가락을 펴며 말했다. “끊어지는 순간 너와 인형, 둘 중 하나는 죽는다.” 조슈아는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세상의 질서는 똑같은 둘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본체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인형이 본체와의 연결을 끊고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면 바로 조슈아 본인과 똑같은 자가 되어버린다. 가나폴리의 마법사들조차 해결하지 못했던 숙제가 다시 발생하는 것이다. 문제는, 질서가 둘 중 누구를 파괴해야 할 가짜로 판단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건 그 방법이 존재할 때의 이야기였다. “당신은 조금 전에 본체와 인형 중 하나를 파괴하지 않는 한 연결은 끊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당신조차도 없다고 생각한 방법을 알아낼 가능성이 있는 자가 대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너도 알지 않나.” 쥬스피앙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가 그를 만났다고 막시민이 말해주던데. 너희 집안을 세우고 이카본 대군도를 이룩한 마법사. 그에 대한 기록을 너희 집안에서 의도적으로 없애버린 탓에 웃기게도 너희 자손 놈들조차 잘 모른다던 분 말이다. 네가 그를 강령할 수 있다면 알아내지 못할 것도 없지 않겠나. 자, 그가 네게 방법을 알려줄 수 있다면 넌 네 목숨을 절반의 도박에 맡기겠나?”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분이 내게 준 문제를 해결하지 전에는 그분께 돌아갈 수 없으니까요. 무엇보다도 그분은 유령도 아닙니다.” “유령이 아니라니? 그럼 네가 만난 건......” “네. 그녀는 살아 있었습니다.” 쥬스피앙은 아연한 표정이었다. “그가 여자라고? 아니, 그보다 그가 살아 있다고?” “아나로즈 티카람.” 조슈아는 말을 끊었다. 그 이름을 말하는 순간 그녀와 마주 서서 겪었던 혼란스런 감정들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가나폴리의 탑들이 무너진 후로 나타난 가장 위대한 마법사이자 전성기 가나폴리의 마법에 가장 가까이 갔던 사람이라고 들어왔습니다. 그녀와 함께 이카본 폰 아르님의 맹약자였던 사제 켈스니티 발미아드가 해준 말이었지요.” 쥬스피앙은 생각에 잠겨 손가락 끝을 까딱거렸다. “그래. 막시민 놈이 내게 덜 해준 얘기들이 있었지.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 자는 대체 몇백 년을 살아왔단 말이냐? 가나폴리가 망하고 나서 그렇게 오래 산 마법사는 없었고, 가나폴리 역사 속에서조차 그럴 수 있었던 자는 한 손에 꼽을 정도란 말이다.” “정확히는 죽지 못했던 거죠.” 조슈아의 입술이 떨렸다. “그녀는 그녀가 ‘무덤’이라고 부르는 곳에 자신을 가두고, 그곳을 봉인 하기 위해 자신의 마력과 생애를 바쳤죠. 쉴 수도 죽을 수도 없이. 수백 년동안 자신의 고향인 노을섬과 주변 바다와 섬들, 그리고 세상을 보호하면서. 잠들고 깨어나기를 반복하고, 고립과 고통뿐인 수백 년을 택했어요. 그녀는 지금도 젊었을 때의 모습 그대로이지만 정신과 감정은 공허해져버렸죠. 그녀는 임무를 저버릴 사람이 아니니 앞으로도 수백 년이 그렇게 흘러가겠죠.” “그럼 그녀가 지키는 것이......” “그 창이죠. 무덤에 묻혀 있지만 나오는 순간 세상을 파괴할 지도 모르는, 가나폴리를 부숴버린 네 무구 중 하나, 피 흘리는 창.” 갑자기 쥬스피앙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희 집안 놈들은 그런 분에 대한 기록을 의도적으로 지웠단 말이냐? 이 나조차도 그 이름을 모르게 했더란 말이냐? 그분이 택한 길이 대체 어떤 것인지,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 털끝만큼도 알지 못할 놈들이! 내가 이 순간 너희 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알아라.” 조슈아는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그의 표정을 가렸다. 잠시 후 연못 밑에서 울림이 일어났다. 시간을 두고 서서히 파문이 솟아올라 퍼져나갔다. 이윽고 쥬스피앙이 손을 내밀자 파문의 중앙에서 반투명한 물체가 뽑혀 나왔다. 길고 날카로운, 창의 모습이었다. 조슈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이윽고 반투명한 창은 두 사람 사이에 가로로 떠 있었다. 쥬스피앙은 그것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두 뼘 정도 떨어진 곳에서 손짓만으로 다룰 뿐이었다. 창에 감도는 희미한 광채가 두 사람의 얼굴을, 정확히는 눈가를 밝혔다. “어때? 네가 아는 모습과 같나?” 조슈아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거의 같군요. 내가 본 것이 부러진 창이었을 뿐.” 쥬스피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다른 부분은 지티시와 함께 파괴되었을 테니까. 그러나 위대했던 가나폴리보다 연약하기 그지없는 지금의 세계는 부러진 창 하나조차 견뎌내지 못할 거다. 만일 그 봉인이 깨어진다면......” “그런 일이 일어났죠.” 쥬스피앙이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 “누군가가 그 창의 부서진 조각 하나를 가지고 들어오는 바람에 봉인이 일시 깨어졌습니다. 악의 무구는, 비록 조각과 조각이라 하더라도 결코 만나서도 합쳐져서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있어. 그래서 어떻게 됐지? 다행히 세상이 멸망하진 않았군? 봉인을 복구할 순 있는 건가?” “그녀가 다시금 안정시키고 있습니다. 대신 내게 조각을 처리하도록 약속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악의 무구의 조각은 없앨 수 없어. 결코 파괴되지 않는단 말이다.” “알아요. 바다 밑에라도 넣어버릴 순 있겠지만. 그녀는 봉인을 완전히 복구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릴 거라고 했죠. 우린 그동안 그곳을 안전하게 지켜야 합니다. 만일 봉인이 불완전할 때 다시 한 번 창 조각이 노을섬에 들어간다면, 우린 그 뒷일을 짐작할 수 없지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도 못한 채 멸망해버릴지도 모르지.” 쥬스피앙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잰걸음으로 풀밭을 왔다 갔다 했다. 걸음이 빨라질수록 미간의 주름도 깊어졌다. 그러더니 불현 듯 걸음을 멈추고 조슈아를 돌아봤다. “그 조각을 거기로 가져간 건 대체 어떤 놈이냐? 지금도 그 놈이 갖고 있나?”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창 조각은 내 매형의 손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쥬스피앙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 자라면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네. 그랬기에 결국 물을 수 없었고 찾지도 못했죠. 그의 친구였던 마법사 애니가 가져갔을 가능성이 큰 것 같아 내가 잠든 동안 우리 가문에서 그 자를 추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찾았다?”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실마리는 있었으므로 의사가 정한 요양 기간이 끝나면 직접 가볼 겁니다.” “어디로?” “네냐플.” 쥬스피앙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조슈아의 말이 이어졌다. “할아버지께서 조사하신 대로라면 그 자는 네냐플 출신이었습니다. 졸업한 뒤 얼마 동안 조교로도 있었죠.” “......” 쥬스피앙은 심각하게 뭔가를 숙고했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고 여러 번 깜빡거렸다. “너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나 가겠다고 하는 거냐?” “모르지만......” “공작 아들이라고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몰래 들어갈 수 있는 곳은 더더욱 아니고. 학생과 교수들에게 주어지는 표지가 없으면 학원을 둘러싼 ‘안고니나의 커튼’을 통과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거기서 공부한 마법사의 신상을 쉽사리 밝히지 않아. 공작 가문이라고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지.” “네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은 안합니다.” 쥬스피앙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심하게 헐렁한 로브 자락이 다리에 친친 휘감기며 뒤쫓았다. 그러는 동안 모닥불이 점차 사그라지더니 이윽고 식었다. 풀도 어쩐지 생기를 잃은 듯했다. 이윽고 연못 맞은편에 선 쥬스피앙이 외쳤다. “내가 도와줄 거라고 제멋대로 확신하는 괘씸한 놈아! 조금 전 한 질문에 대답은 준비가 됐냐?”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나를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나’인 그에게조차도. 그래야만 악취와 매혹을 동시에 느끼는 나 자신과의 일몰에서 벗어나 동쪽에서 떠오를 수 있을 테니까.” 수수께끼 같은 대답에도 불구하고 쥬스피앙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세 번째 손가락이 펴졌다. “넌 인형이 깨어나면 그놈과 많은 것을 나눌 생각이라고 말했지. 자, 말했다시피 내버려두기만 하면 인형은 죽는다. 그렇다고 본체와 연결을 끊을 방법을 알아내어 네가 대신 죽게 될 가능성을 택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본체와 연결된 상태로라도 그놈을 살릴 방법이 있다면, 넌 그놈의 손에 다시 다칠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걸 위해 노력할 테냐?” 망설임은 아주 짧았다. “그럴 겁니다.” “왜지?” “난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인형사로부터, 그리고 심지어 ‘나’에게까지 버려진 그가 느낄 감정을 고스란히 예상할 수가 있으니까. 그리고 말했다시피 그가 있어 나는 처음으로 타자를 알게 되고, 자개이의 정체를 목격하고, 마침내 내가 앉은 그 고립된 어린아이의 방을 열고 나갈 문을 발견했으니까.” 쥬스피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가락을 모두 폈다. “네냐플에 가겠다고 했나?” “입학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쥬스피앙과 막시민의 일을 떠올린 조슈아가 엷게 웃었다. 쥬스피앙이 말했다. “너야 입학하든 말든 그건 내가 알 거 없고. 가거든 데리케 레오멘티스 교수를 찾아라. 네가 말을 잘 한다면 그 애가 포도원에 들여보내 줄 거다. 거기서 네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포도원이라고요?” 이름만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설마 진짜 포도원은 아닐 테니까. 쥬스피앙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뭔가 더 궁리하더니 불쑥 덧붙였다. “참, 가서 내 얘기 꺼내면 역효과라는 거 잊지 말고.” 3 무대 밖의 덫 “무대에서는 배우가 무대 밖에서 쏜 화살에 맞는 일은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곧잘 일어난다.“ 사과꽃은 피기 전이었다. 봉오리 맺힌 나뭇가지가 그림자를 드리운 회랑에는 지난해와 다름없이 학생들이 오갔다. 벽감 속 요정이 무변한 얼굴로 지키고 있건만 그곳에 섰던 소년은 이제 없었다. 거니는 사람들은 다 잊은 얼굴이었다. 구두 소리가 울렸다. 군인 한 사람이 회랑을 통과해 학생관으로 가는 중이었다. 단추를 두 줄로 단 적갈색 군복에 금색 견장, 모자에 붙은 검은 도마뱀 모양의 표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도마뱀은 8자에 가까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 결과 붙은 이름이 왕국 8군이다. 처음에는 일종의 별명이었지만 어느새 국왕조차 언급하는 공식명칭이 되고 말았다. ‘국왕 폐하의 영광을 드높이는 왕국의 수호자’라는 본래 명칭이 부르기 어려웠던 까닭도 한몫했다. 그런 자가 그로메의 교정을 거닐더라도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켈티카에 있는 모든 학원은 왕국8군 장교의 직접 관리를 받았다. 해당 부대에 속한 군인들은 언제고 학원을 드나들 권리가 있었다. 왕국8군 소령 호웰 제나스는 학생관에 이르자 거침없이 계단을 올라 입구로 들어섰다. 로비를 걷던 학생들이 그를 보자 눈에 띄지 않게 비켜났다. 그를 중심으로 자기장이라도 흐르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흐름이 생겨났다. 제나스는 개의치 않았다. 로비를 가로질러 계단 쪽으로 갔다. 그때 처음으로 누군가가 그를 아는 체했다. “제나스 소령님!” 돌아보자 리어리드 남작의 아들 패트릭이 입구에서 손을 흔들며 걸어 들어왔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중인 모양이었다. 입가에 장난기 있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제나스는 몸을 돌려 간단히 경례했다. “안녕하십니까.” “요즘 자주 뵙는 것 같네요?” “일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심각한 거라도?” “아닙니다. 일상적인 조사를 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역시. 학원에 무슨 일이 있겠어. 심심해 죽겠다보니 뭔 일이라도 생기지 않나 내심 기대했는데 아쉽네요.” “아쉬우시다니 유감입니다.” 언제 말을 섞어 봐도 딱딱하기만 한 대답이 왕국8군 장교답다고 생각하며 패트릭은 씩 웃었다. “뭐 도와드릴 건 없고요?”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뭐 폐가 될 건 없고요. 심심하거든요. 그보다 학원을 조사하려면 학생의 도움을 받는 편이 제일 빠르지 않아요? 하하하.” 제나스는 조금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패트릭은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상대가 미끼를 물기를 기대하면서. “좋습니다. 그러면 잠시만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역시 그렇게 나오셔야 저도 기분이 좋죠.”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패트릭은 제나스를 뒤따라가며 계속 횡설수설 말을 붙였다. “사실 말이죠, 저희 아버지께서 전부터 저더러 졸업하고 나면 왕국8군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처음엔 짜증이 나다가 졸업할 때쯤 되니까 딱히 할 것도 없고, 그래서 한번 해볼까 싶기도 했는데, 그렇다 해도 어떤 데인지 뭐 알기나 해야 들어가든 말든 하잖아요? 그래서 요새 제나스 소령님이 자주 보이시는 걸 보고 언제 얘기나 나눠봐야겠다 싶었죠. 아, 물론 제가 군인 노릇에 어울리지 않게 보이실 테지만 저도 나름대로 저희 집에 가면 동생들한테 군기 잘 잡거든요? 동생이 세 명이나 있는데 다 사내들이라 얕보이면 귀찮아져요. 그런데 제나스 소령님은 왕국8군에 들어가기 전에는 뭐 하셨어요? 소령님도 저처럼 아버지가......” “전 본래 군인이었습니다. 왕국8군이 된 것도 부대를 옮긴 것일 뿐입니다.” 자르는 듯한 대답을 들으며 패트릭은 만족했다. 경박하고 생각 없는 녀석으로 보일 작정이었던 것이다. 왕국8군이 켈티카에 있는 학원들에서 조사할 만한 것은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민중의 벗. 왕국8군의 정평 있는 조사력은 작은 기미도 놓치지 않는 데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민중의 벗이 퍼뜨리는 사상에 물들기 쉬운 무리로 분류되었다. 학원은 그나풀이 숨어들어 신분을 가장하기에 편리한 장소이기도 했다. 더구나 최근 몇 년간 그로메에서 뚜렷한 조직이 자라고 있었으니 저들이라고 전혀 냄새를 맡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러나 란지에 로젠크란츠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엔나 다 아마란스도 졸업했다. 하일저 딘츠도 휴학하고 고향으로 떠났다. 조직의 핵심이 대부분 학원 밖으로 난간 셈이다. 제나스를 무엇을 찾으려는 것일까? 제나스 소령이 그로메 학원을 드나들기 시작한 것은 겨울부터였다. 아직 뚜렷한 활동 한번 한 일이 없는 자신을 찾는 것은 아닐 테고, 사라진 사람들의 족적을 따라갈 작정이 아닐까. 그렇다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기숙사 관리인 앞에 선 제나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왕국8군 데어메르트 중령님께서 서명하신 수색 허가서요. 학원을 떠난 학생이 가져가지 않고 남겨둔 물건을 보관하는 곳이 있을 거요. 그곳으로 안내하시오.” 패트릭은 저도 모르게 따지듯 나오려던 말을 간신히 눌렀다. “창고 아닌가? 창고엔 뭐하시게요?” 제나스는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관리인은 순순히 열쇠를 들고 앞장을 섰다. 패트릭의 말대로 기숙사 지하에 있는 허름한 창고일 뿐이었다. 문을 열자 먼지 냄새가 훅 끼쳐왔다. 패트릭은 고개를 돌리며 싫은 기색을 보였다. “머리에 먼지 다 쓰겠네.” 제나스는 대꾸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관리인이 램프를 들고 내려가는 계단을 밝히며 중얼거렸다. “근데 당최 정리가 안 돼 있어서, 뭘 찾으시는지 몰라도......” “최근, 다시 말해 올 초에 나간 학생들의 물건이 있을 것 아니오.” “그야 뭐...... 그게 한두 명이어야 말입죠. 아, 아니, 네.” 어렴풋한 램프 밑에서도 제나스의 눈빛을 눈치 챘는지 관리인은 갑자기 걸음을 빨리했다. 여러 단의 선반이 줄지어 늘어선 방이었다. 관리인은 선반 옆면에 직힌 번호를 qau 한 군데를 찾아냈다. “여깁니다.” 제나스가 나가보라고 눈짓하자 패트릭이 관리인의 손에서 열쇠를 받아들었다. 곧 등 뒤에서 문이 삐그덕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패트릭은 제나스가 선반에 얹힌 책 몇 권을 집어 드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내려놓고 다른 책을 펼쳐 후루룩 넘겼다. 그곳에 있는 것은 책뿐만이 아니었다. 낡아빠진 슬리퍼나 담요, 펜 풍치, 잠긴 상자, 묵은 상패에서부터 누군가의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온갖 물건들이 선반마다 순서도 없이 쌓여 있었다. 그것들은 이미 누구의 물건이랄 수 없었다. 패트릭 자신도 거기서 란지에의 물건을 골라낼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은 오죽할 것인가. 이엔이라도 오지 않는 한. 그러나 제나스의 손은 책 중간에서 멈춰 있었다. 패트릭은 어개를 으쓱하며 어깨너머로 들여다보았다. 찢겨 나간 책장이었다. “......” 패트릭은 무엇이든 말할 필요를 느꼈다. “뭐 찾으세요? 뭘 도와드리면 되죠?” 제나스는 들고 있던 책을 내밀어 보였다. “이렇게 찢어진 책장이 있는 책을 찾아 주시면 됩니다.” 애나 에이젠엘모는 높이 솟은 그로메 학원의 정문을 올려다보며 불안한 표정으로 멈칫거렸다. 머리에 쓴 두건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다. 예전에 처음 이곳에 왔던 때도 이와 비슷한 기분이었던 것 같았다. 호기심 반, 불안감 반. 정확한 기억은 아닐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지금 그녀는 혼자였다. 문지기가 조금 전부터 서성대는 애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애나는 갑자기 과감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가만히 있다가 잘못되는 것보다 행동하다가 잘못되는 것이 낫다고 여기는 성미였다. “이곳 학생 분에게 물건을 전달하러 왔어요.” 문지기는 애나가 이름을 말하고 두건을 젖혀 얼굴을 보이자 곧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전에 란지에가 처음 애나를 데려와 이곳에 머무르게 했을 때 식당 일을 도우며 지냈던 탓에 문지기는 애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여기 그만두고 나가서 어디 벌이 좋은 일 찾았나?” 애나는 제법 능숙하게 헤벌쭉 웃었다. “어디가나 다 마찬가지죠, 뭐.” “얼른 돈 모아야 시집가지.” “몰라요. 그냥 저 데려갈 남자가 돈 모으고 있길 바랄래요.” “어이쿠, 고 아가씨 꿈 한번 야무지다.” 애나는 헤실헤실 웃음을 흘리며 인사를 하고 학원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자 곧 웃음이 지워지고 긴장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연기를 할 때와 아닐 때가 뚜렷이 구분되는 것은 단점이었지만 아직은 그러지 않을 만한 배짱이 없었다. 애나가 찾아갈 만한 학생은 뻔했다. 그의 방이 어딘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중요한 물건인 양 소중하게 싸 묶어 가져온 단지에 든 건 평범한 수프였다. 엉뚱한 사람에게 걸렸을 때 둘러댈 말도 준비해 두었다. 하지만 본인을 만나더라도 분명 놀랄 것이다. 애나의 방문에 대해 어떤 귀띔도 받지 못했을 테니까. 받았을 리가 없다. 이곳에 찾아온 것은 애나의 단독 행동이었다. 어색한 변명거리나마 이것저것 궁리해 오긴 했지만, 상대의 환영을 바랄 순 없을 듯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기다릴 순 없었다. 답답해서라도, 아니 실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학원의 지리는 익숙했다. 바로 기숙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침 오후 수업이 끝났을 시간이어서 많은 학생들이 교정을 걷고 있었다. 날씨는 화창했다. 벤치에 간식거리를 들고 나온 학생도 여럿 눈에 띄었다. 회랑을 지나 학생관으로 오르는 계단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애나는 눈을 몇번 깜박거렸다. 마음을 다잡으려는 것이다. 계단 위 입구에 그녀가 찾아온 사람이 거 있었던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꾸 머리를 털어내면서. 뭐라고 부르면 될까? 아, 그렇다. “리어리드 도련님!” 패트릭 리어리드가 고개를 돌렸고, 애나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애나의 예상보다 훨씬 놀란 모양이었다. 망설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애나는 재빨리 계단을 올랐다. “아이고, 요기 나와 계셨네요. 안 계시면 어쩔까 걱정했는데.” 패트릭은 뭔가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오가는 학생들이 있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애나는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한바탕 핀잔 들을 것을 저들이 막아주는 셈이지 싶었다. “왜 왔어?” “그야 도련님께 이것 전해드리려고 왔지요. 유모 할멈이 꼭 도련님한테 직접 드려야 한다고 했거든요.” 패트릭은 단지 보퉁이를 뺏다시피 하더니 말했다. “자, 받았으니 어서 가.” “아니, 저, 그게......” 그냥 갈 순 없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어렵사리 한 걸음이었다. 패트릭은 안절부절 못하며 애나를 쳐다봤지만 애나로서는 그가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왜......” 패트릭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애나의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도움 감사했습니다.” 애나가 몸을 돌리자 눈앞에 군인 복장의 사내가 보였다. 그 군복이 눈에 익었다고 생각하던 그녀는 다음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사내의 모자에 똬리를 튼 검은 도마뱀을 보았던 것이다. 군인은 애나를 본 체도 하지 않았다. 심부름 온 하녀 따위는 투명인간과 다를 것 없었다. “아니, 뭘요. 그런 데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구경 잘했네요. 먼지는 좀 썼지만. 흐gm, 나중에 또 도움이 필요하면 부르세요.” “고마운 말씀이십니다. 그럼 이만.” 군인은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경례를 해 보이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가 저만치 멀어지자 패트릭은 한숨을 내쉬고 애나에게 따라오라고 눈짓했다. 애나는 하녀답게 고개를 꾸벅거렸다. “예, 예.” 따라가는 동안 가슴의 두근거림이 겨우 조금 느려졌다. 패트릭은 방에 들어서자 재빠른 손놀림으로 문을 잠그고 애나의 손목을 잡아끌다시피 하며 방 안쪽으로 갔다. 커튼은 이미 내려져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건가요? 어째서 갑자기 나타났냐고요. 아까 그 사람이 누군지 봤죠?” “왕국...... 8군이죠?” “왕국8군이고 우리 학원 담당하는 작자란 말입니다. 톱니바퀴처럼 철저한 놈이고 감정이라고는 없죠. 내가 그 작자 구워삶으려고 얼마나 애쓰고 있는 줄이나 알아요? 그런 자리에 떡하니 나타나서 왜 눈도장을 찍어요? 왜 가라고 눈치 줄 대 안가요? 그렇게 왕국8군한테 쫓기고 싶어요?” 애나는 머뭇거렸지만 할 만한 대꾸를 찾을 수 없었다. “죄송해요......” 패트릭은 혼자 방을 돌아다니며 겨우 감정을 가라앉히더니 한숨을 쉬며 애나에게 손짓했다. “미안해요. 화를 내서. 이리 와 앉아요.” 패트릭은 애나보다 어렸다. 그러나 귀족이었다. 그 점을 잊고자 해도 이런 때면 제풀에 주눅이 들어버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패트릭의 말대로 애나의 잘못이기도 했다. 그녀는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무슨 일로 왔어요?” “그게, 저기, 로젠크란츠 씨에게 연락을 취할 방법을 알고 싶어서요.” “그분한테는 왜요?” “전할 말이 있어요.” 패트릭은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한테 해요.” “리어리드 씨는 로젠크란츠 씨하고 연락이 돼요?” “아뇨.” 패트릭은 잠시 후 덧붙였다. “하지만 닿을 가능성은 좀 더 크죠.” 애나는 패트릭이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다짜고짜 캐물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패트릭에게 말해두지 못할 까닭은 없었다. “내가 있는 공예방에서 우리 클럽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걸 얻어 듣게 됐는데, 로젠크란츠 씨 이야기더라고요. 그들은 이번에 로젠크란츠 씨가 무리한 일을 하려다가 실패했고, 그래서 입지가 좁아질 거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지스카르 선생님에게까지 그분의 공과(功過)를 연결시키려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 때문에 지스카르 선생님께서 망명 의회에 출석 요구를 받게 될 것 같대요. 일부러 로젠크란츠 씨는 부르지 않을 작정이라더군요. 그래야 선생님의 겸손함을 이용할 수 있으니까.” 말을 하는 동안 얼굴이 점차 붉어졌다. 애나는 자기에게 힘이 있든 없든 자기와 연결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민중의 벗 내에서 지스카르는 애나의 아버지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만일 애나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그렇게 여길 것이다. 패트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란지에 선배하고 정면대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망명의회 내에도 별로 없죠.” 패트릭은 지스카르의 학생이었던 적이 없었으나 오랫동안 란지에와 지내면서 심정적으로 그쪽 계파에 동화되어 있었다. “리어리드 씨는 로젠크란츠 씨가 무리하게 지난번 일을 추진하게 된 건 망명의회의 지령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때 일은 란지에 선배하고 이엔 선배, 하일저 선배가 맡았던 일이라 사실 자세한 건 몰라요.” 패트릭은 말을 끊으며 입술 양끝을 올렸다. “하지만 란지에 선배야말로 무모한 것과 거리가 먼 사람이란 건 알죠.” “그렇죠? 망명의회가 이번 일의 책임을 로젠크란츠 씨에게 묻는 건 적반하장 아니겠어요? 지스카르 선생님까지 끌어들이려는 건 침소봉대고.” “어려운 말 잘 쓰네요.” “네? 그다지......” 패트릭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지만, 곧 닿게 될 것 같아요. 지스카르 선생님의 일이니까 전해주는 것이 좋겠죠.” “지금은 좀 멀리 있죠?” 애나도 들은 것이 있었다. 패트릭이 긍정했다. “다른 나라에 있을걸요.” “곧 돌아와?” “이엔 선배 말이 그럴 거라더군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애나는 일어나며 다시 미안하다고 말했고, 이번에는 패트릭도 웃으면서 괜찮을 거라고 답해 주었다. 애나가 두건을 고쳐 쓰고 나가자 패트릭은 단지를 열어 보았다. “먹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식었고, 냄새도 애매했지만 동료가 갖다준 것을 버릴 수 없다는 생각에 그는 하인을 불러 수프를 데어오도록 했다. 학원 입구를 나선 애나는 곧 거리의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기 직전, 문 근처를 서성대고 있던 남자 하나가 뒤따라 걷기 시작했다. 4 물고기 술집과 장미골의 밤 “그 밤에는 장미도 술도 친구도 있었다. 여름은 춤추고 거리는 노래 불렀다. 나는 술잔을 들어 장미의 아름다움에 건배하고 친구의 건강에 건배하고 술의 미래에 건배했다. 마지막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왜냐하면 누구든 술이 잘 익어야 다시 만나는 법이니까.” 성이 오랜만에 소란했다. 볕이 찾아들지 못하는 회랑을 걷던 조슈아는 한 그림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잠시 후 그는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누나, 안녕. 등 뒤로 하녀 한 사람이 쟁반에 무언가를 받쳐 들고 급하게 지나쳐갔다. 아마 인사를 했겠지만 조슈아는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한 사람처럼 그림만 바라보았다. 후광 같은 금빛 머리카락에 뺨을 파묻은 이브노아는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또는 그보다 먼 곳, 벽 너머, 아니 한층 더 멀리 있어 찾을 수 없는 누군가를 굽어보았다. 조슈아의 입술이 다시 달싹였다. 이제 이 그림이 누나를 닮아 보여. 누구도 듣지 못했을 목소리였다. 그러나 죽은 사람에게 소리 내어 말할 필요는 없었다. 다시 사람이 스쳐갔다. 물론 옷깃을 스치지는 않았다. 그들은 매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이고, 다시 조심스럽게 그의 등 뒤를 지나갔다. 조슈아는 그들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 회랑 끝의 볕이 기울고 그림자가 짙어지는 것도 알지 못했다. 예전에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누나를 혼자 둘 수밖에 없는 나를 용서해 줘. 하지만 머지않아 함께 있게 될지도 몰라. 이곳에 걸린 그림 두 장으로. 조슈아가 몸을 돌리자 먼 곳을 보던 이브노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녀가 눈빛으로 말했다. 재회는 멀수록 좋아. 조슈아는 고개를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매형하고 함께 있게 됐다고 이제 내가 필요 없는 거야?” 조슈아는 회랑을 천천히 빠져나가 홀로 나갔다. 끈으로 묶은 상자며 커다란 가방들이 그를 맞았다. 양탄자 위에 잔뜩 부려진 짐을 본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계단을 오르자 맞은 편에 문을 활짝 열어 놓은 방이 보였다. 그는 문간에 기대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잠시 후 대꾸가 날아왔다. “거기서 뭘 하니? 도와줄 거면 들어오든가.” “들어가 봤자 썩 도움은 안 될 것 같은걸.” 네 짝이나 되는 창을 모두 열어젖혀 놓았다. 그래도 될 날씨였다. 여름이 코앞이었다. 하얀 벽돌로 바른 창가에 볕이 너울거렸다. 서늘한 나무 냄새, 땅의 훈김도 흘러들어왔다. 방 안에 흩어진 잡동사니들, 스케치북, 반짇고리, 색색가지 실패, 바늘꽂이, 덧신, 심심해서 만들어 본 인형 드레스, 회중시계...... 모두 따뜻한 빛 속에 잠겨 있었다. 한가운데 징 박힌 커다란 가방이 펼쳐져 있었다. 그 옆에 앉아 손에 잡히는 것들을 던져 넣고 있던 리체는 곧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공작 가문 도련님이 자기 짐을 꾸릴 줄이나 알겠어.” “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이라면, 솔직하게 아니라고 말할게.” 조슈아는 바닥에 흩어진 물건들을 피하며 걸어 들어왔다. 리체가 피식 웃었다. “그 말뜻은 역시 하려고 하면 잘할 게 번하다 그거겠지?” 조슈아는 굳이 대꾸하는 대신 싱긋 웃기만 했다. 열어놓은 옷장으로 돌아서자 리체가 성에서 지낼 때 입었던 옷가지들이 몇 벌 골라낸 흔적도 없이 고스란히 걸려 있었다. 공작부인이 마련해 준 고급 드레스며 모자, 속치마, 숄, 구두들은 대부분 아직 새것처럼 보였다. “옷은 전혀 가져가지 않을 참이야?” “난 그런 옷을 만드는 사람이지 입는 사람은 아니거든.” 무릎까지 오는 짧은 바지와 헐렁한 손뜨개 웃옷을 걸친 리체는 드레스 차림일 때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리체가 직접 만든 옷이었다. “어머니께서 섭섭해하실 텐데.” “사실 그게 걱정이야. 한 벌쯤은 예의로라도 가져가야 되는 걸까나.”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내가 골라줄게.” 도로 돌아서더니 잠깐 만에 한 벌을 집어냈다. 자줏빛 벨벳으로 만든 종형 치마에 반달형 케이프가 붙은 겨울용 드레스였다. 체크무늬 리본과 털방울 말고는 별다른 장식도 없었다. 조슈아가 거침없이 말했다. “이걸 가져다가 치마 길이를 줄여. 무릎 위로.” 리체가 기가 막혀하며 조슈아를 올려다봤다. “무릎 위라고? 그런 거 입고는 밖에 나가지도 못해. 내가 무대에 서는 배우인 줄 아니?” “걱정 마. 조금만 있으면 다들 그런 옷 입고도 자연스럽게 다니게 될 거야. 장담해.” “네가 지금 의상실 직원이던 내 앞에서 유행 얘길 하는 거니? 아휴, 같잖아.” 리체가 과장스럽게 손사래를 쳤지만 조슈아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무대 의상이 곧 유행하는 걸 한두 해 보아온 내가 아니라고.” “그런 무대 의상들을 누가 만들었는지 알고 하는 얘기겠지, 물론?” “내 건 내가 디자인했는데.” “네 걸 너 말고 누가 입니? 너한테만 어울리는데.” 조슈아는 무시하고 옷을 가방 속에 집어넣어버렸다. 리체가 그 위에 낡은 천 가방을 던져 넣으면 말했다. “좋아. 성의를 봐서 갖고는 간다만 기대는 하지 마.” 출발은 내일이었다. 꾸려 놓은 가방만 여섯 개인데 아직도 공작부인의 하녀들은 새 짐을 꾸리는 중이라고 했다. 출발할 사람은 셋 모두였다. 하지만 목적지는 달랐다. 리체는 고향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나머지 둘의 목적지는 네냐플 학원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입학을 하러 가는 것은 아니었다. 입학할 수 있는 시기도 지났다. 입학시험은 겨울에, 그러니까 조슈아가 잠들어 있던 때 끝나버렸다. 막시민은 시험을 놓친 것을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았지만, 가끔 보면 어떻게든 도망쳐 학원을 안 갈 작정만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다가도 조슈아가 슬쩍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하고 떠보면 되레 펄쩍 뛰는 것이었다. 어쨌든 이번 학원행은 막시민의 표현을 따르자면 ‘탐문 수사’를 위한 것이었다. 가서 하게 될 일은 간단하지 않을 테지만 날씨 좋은 오늘 짐을 시면서 그들은 모두 홀가분해했다. 무엇보다도 다들 성을 떠나고 싶어했다. 조슈아가 오래 누워 있는 동안 성의 분위기는 병실처럼 눅눅해져 있었다. 조슈아가 문득 말했다. “참, 이따가 저녁때 밖으로 나와.” “밖이라니?” “막군이 좋은 데를 봐 놨대. 송별회라도 해야지.” 리체는 선뜻 내켜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번거롭게 뭘. 어차피 오늘은 너 간다고 공작부인께서 거창하게 차려주실 거 아냐.” “그거하고는 다르지 않아?” “나 때문에 괜히 그러지? 됐어. 그동안 호화롭게 살게 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갚았지 뭘. 빚 같은 건 없다고.” 리체가 고개를 돌리자 조슈아가 손을 불쑥 내밀어 리체의 눈앞에서 흔들어댔다. “왜 이래, 얘기 진짜.” 리체가 눈을 들자 조슈아가 미소를 보냈다. “우리 참 잘도 살아남지 않았어?” “......” 몇 번이나 죽을 뻔했었던가, 세어 보지도 않았다. 생각해 보면 제대로 된 무기 한 자루 쓸 줄 몰랐던 그들이었다. 익숙한 환경에서 내쫓겨 처음으로 낯선 상황들과 맞닥뜨렸다. 뒤쫓는 자 때문에 멈출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하이아칸에서부터 남쪽 바다와 섬들을 거쳐 켈티카까지, 대륙을 반 바퀴나 돌았다. “어떻게 안 죽었나 몰라.” 리체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조슈아가 자신을 가리켰다. “나 있잖아.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 “너,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마. 반년이나 기다린 사람들 심정을 네가 알기나 하니?” 조슈아의 미소가 약간 씁쓸해졌다. “인생에서 반년이 사라진 사람의 입장도 생각해 줘.” “어마어마하게 푹 잔 거지. 난 네가 어떻게 밤잠이 오는지 이해가 안 가. 나 같으면 내후년까지 안 잘 것 같은데.” 둘은 나란히 웃음을 터뜨렸다. 볕 그림자가 가방 위를 지나쳐 왼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따가 나와. 거리의 평범한 음식점이 슬슬 그립지 않아? 우리 그런 데서 곧잘 저녁 먹곤 했잖아.” “고작 몇 번 가본 주제에 아는 체하긴. 기억 안 나? 난 그런 음식점의 급사였다고!” 조슈아가 웃으며 코를 찡긋했다. “어련히 전문가겠어.” 조슈아가 일어서자 리체가 인사 대신 손바닥을 까딱거렸다. 조슈아가 말했다. “오는 거지? 블루엣 강 선착장에서 만날 거야. 저녁 먹고 바로.” “그래.” 조슈아는 문을 닫으려다 말고 문득 생각난 것처럼 고개를 내밀었다. “그런데 너, 여기 반년이나 살면서 켈티카 시내에 한 번도 못 나가봤다면서?” “그게 대체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거야!” 조슈아는 계면쩍게 웃으면서 막시민을 흘끔 봤다. 그러나 막시민이 도와줄 기색이 아니었으므로 알아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놀리려고 꺼낸 말이 아닌데.” 사방의 왁자지껄한 소음에 반쯤 묻혔지만 분명 들리긴 했다. 리체는 절인 아몬드를 한 개 씹으면서 말을 이었다. “어쨌든 네가 할 말은 아니잖니? 악취미도 하여간 지나쳐.” “악취미는 또 뭐야?” 어느새 마시던 맥주잔을 비우고 급사에게 손을 흔들던 막시민이 끼어들었다. “네 취미가 시체놀이지. 뭐 또 있냐?” 리체가 재빨리 덧붙였다. “그건, 뭐, 내가 심심해서 만든 걸 공작부인께서 사버리신 거지만......” 조슈아는 조금 전 리체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음을 참느라 얼굴을 양손에 파묻고 있었다. 그러다가 막시민의 말에 겨우 고개를 들고 리체를 봤다. “어머니께서 네 옷을 더 못 입게 됐다고 아쉬워하시더라.” 리체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있니? 공작부인한테는 최고급 드레스가 산처럼 있을 텐데, 잘난 아들 때문에 집에도 못 가는 내가 불상해서 한두 벌 사 주셨을 게 뻔해.” “자학은 그쯤 해두라고. 대륙을 반 바퀴나 여행하고도 아직 그 버릇 못 고쳤냐?” 막시민의 말에 리체도 눈을 내리깔며 뺨만 부풀렸다. 조슈아가 자기 잔을 들어 리체의 잔을 톡톡 건드렸다. 리체가 눈을 들자 조슈아의 미소가 보였다. “그동안 미안했어.” 막시민은 안경을 벗어 눈을 비비느라 리체가 순간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곧 셋은 잔을 부딪쳤다. 한 모금 마시자마자 리체가 소리쳤다. “조슈아 너! 자꾸 그런 얼굴로 웃지 말랬지! 멀쩡한 아가씨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그런 미소는 관객들 홀릴 때나 써. 알았어?” “......” 조슈아가 고개를 숙이며 킥 웃자, 막시민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코웃음쳤다. “너희 지금 내 앞에서 대놓고 연애질하냐?” 조슈아가 정색을 했다. “그런......” 리체가 말을 받았다. “오해야!” 막시민은 누가 뭐랬냐는 것처럼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어느새 별이 총총해질 시각이었다. 여왕 시장 골목 큰 모퉁이를 다 차지한 선술집 ‘물고기 술집’은 진자로 물고기로 담근 술을 팔지는 않았지만 그것만 제외하고 다른 건 다 팔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큰 가게였다. 각종 술과 요리는 물론 살아 있는 고기도 팔고, 고기를 낚을 낚시도구도 팔고, 심지어 먹던 접시도 팔았다. 그중 뭘 사러 왔는지 몰라도 가게는 늘 붐볐다. 단골손님들이 문을 밀고 들어설 때면 으레 큰 소리로 오늘은 ‘물고기술’이 들어왔느냐고 물었다. 주인의 대답도 정해져 있었다. ‘죄송합니다, 내일은 꼭 들여 놓겠습니다.’ 거리를 쏘다니던 막시민이 처음 이곳에 들어서게 된 것도 저 이름 때문이라고 했다. 막시민은 리체에게 옛날 조슈아가 며칠씩 굶고 있는 것을 보고 물고기라도 잡아먹으라고 가르쳐 줬더니 그것도 못해서 그때부터 ‘멍청이’라고 부르게 됐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조슈아가 정정했다. “‘멍청한 꼬마’였어.” “그거나 저거나. 하여간 그때 저놈이 내 인생에 얼마나 민폐를 끼칠지 눈치 채고 진작 모른 체했어야 했는데.” 물론 조슈아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때 막군이 준 옥수수빵 진짜 맛있었는데. 내 일생에서 가장 맛있는 빵이었어.” 조슈아가 추억에 잠긴 표정을 짓자 막시민이 덧붙였다. “말구유에 떨어진 걸 주워온 거였는데.” 조슈아가 마시던 맥주를 뱉을 번하고는 소리쳤다. “뭐? 그런 말은 안 했잖아?” “묻지도 않았잖냐? 전날까지 훔친 건 안 된다고 꼬박꼬박 따지던 녀석이 군소리도 없이 덥석 받아먹어 놓고는.” “그거하고 이건 다른 문제잖아!” “다르긴 뭐가 달라. 이미 똥 돼버린 옥수수빵 따위에 위생 따지냐?” 그러나 조슈아는 잔을 놓고 의자를 뒤로 물리며 중얼거렸다. “아, 속이 안 좋아졌어.” 막시민이 이죽거렸다. “옥수수빵에 묻었을 8년 묵은 파리똥 때문에?” “...한 마디만 더하면 진짜 민폐가 뭔지 보여주게 될지도 모른다고.” 다시 손님 한 무리가 몰려 들어오자 가게 안의 공기가 탁해졌다. 안색이 안 좋은 조슈아를 본 리체가 제안했다. “그만 나가서 좀 걸을까?” “거리 구경하고 싶어서 그러지?” “...너 속 안 좋다는 거 거짓말이지?” 잠시 후 셋은 돈을 지불하고 거리로 나왔다. 두 소년 사이에 선 리체가 조금 앞서 걷다가 돌아서서 빙그레 웃었다. “술집에서 고민할 거리가 없으니 편하긴 한데, 어쩐지 낯설어.” 두 소년은 마주보고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둘 다 집으로 돌아갈 리체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리체는 둘이 네냐플에 가는 이유가 막시민의 입학 때문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참 온갖 궁리 많이 했었지......” 리체가 도로 걷기 시작하며 목소리에 가락을 붙여 흥얼거렸다. 술기운이 가볍게 도는 모양이었다. 길은 내리막이었다. 좌우로 문 닫은 가게들이 이어졌다. 별 밝은 하늘이 고갯길을 따라 굽이 드리워졌다. “친구들은 학원에 가고...... 나는 의상실에 가고...... 의상실에서 받아 주려나...... 안 받아주면 뭘 해볼까나......” “리체!” 뒤에서 조슈아가 부르자 리체가 앙감질로 뛰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왜?” “의상실 구경 하러 가볼래?” 리체가 목소리에 힘을 주며 대꾸했다. “거긴 안 들어간다고 말했잖아.” “알아. 하지만 구경은 해도 되잖아. 내일이면 떠날 텐데, 그냥 가기 섭섭하지 않아?” “하지만 이 밤중에? 문 닫았을 텐데?” 조슈아는 가볍게 눈을 찡긋했다. “시간이 무슨 상관이야.” 냉소적인 사람들로부터 ‘참수대 광장’이라는 별명을 얻은 중앙 광장 서쪽의 시장 골목은 흡사 거미집처럼 복잡했다. 켈티카가 지금의 이름을 갖기도 전부터 있어온, 한때 도시 자체이기도 했던 장소였다. 도시의 심장이 뛰기 시작한 자리였다. 주위 영지들에서 오만 가지 산물들을 싸 짊어진 장사꾼들이 몇백 년 동안 몰려들어 순서도 없이 가게를 차리고 보니 어느새 이 모양이 되어 있었다. 죽은 사람의 관이며 수의 따위를 파는 장례골목 옆에는 수도원에서 짜낸 하늘하늘한 레이스 가게가 줄지어 있고, 우아한 도자기 인형과 막 쓰는 술병이 동시에 팔리는 도기거리 모퉁이에는 강에서 막 낚아 올린 생선들이 펄떡거리는 수산물골목이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장미골-그보다 훨씬 덜 자주 불리는 이름으로는 갈로르 3번가-이라고 불리는 세 번째 골목은 특별한 장소였다. 장미꽃을 파는 거리가 아니라 장미꽃잎처럼 고운 천으로 만든 고급 드레스며 레이스 모자, 장갑, 속치마, 양산, 손수건 따위가 몰려드는 곳이다. 날씨 좋은 날 노천 찻집에 앉으면 시골 나리 둘이 귀족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이 어디일지 내기를 했더라는 우스갯말이 흘러 다녔다. 동안(東岸)이라고 말한 놈이 장미골목이라고 말한 놈한테 졌다는 당연한 이야기였다. 이곳 장인들은 곳대가 높았다. 귀부인들의 마차가 줄을 서 있어도 서두르지도 않았고, 자부심을 넘어 거만하게까지 보이는 태도로 주문을 받고 했다. 장인들의 태도가 그렇다 보니 그 밑에서 일을 배우는 도제나 심지어 말단 점원들에게도 굽실대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켈티카 사람들은 잘난 체하는 친구를 비웃음을 섞어 ‘장미골 놈’이라고 불렀다. 그 장미골이라는 이름에는 유래가 있었다. “불 꺼졌는데.” 계단 위에 장미 문양이 새겨진 흰 문이 높다랗게 솟아 있었다. 문 오른쪽에는 대부분의 집이 이미 떼어버린 갈로르 거리 번지 패가 여전히 새것처럼 붙어 있었다. “그래도 다 깨어 있어. 2층 봐.” “아직 자지야 않겠지만, 그래요......” 리체가 머뭇거리는 동안 조슈아는 거침없이 위로 올라가 초인종 줄을 당겼다. 리체가 급히 소리쳤다. “저, 저기,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소용없었다. 2층에서 그림자가 움직이는 듯하더니 잠깐 만에 입구에서 아가씨 한 명이 내다보았다. “무슨 일이시죠?” 사무적인 말투 끝에 문밖에 선 사람들의 면면을 훑어보더니 어조가 달라졌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장난을 치는 거니? 썩 돌아가거라.” 조슈아는 웃지도 않고 대꾸했다. “여기가 어딘지 잘 알아. 로제 선생 좀 뵙자고 해.” 그 말은 쉽게 먹히지 않았다. 거리의 선술집에 가면서 이목을 끌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셋 다 여행하던 시절처럼 허름한 옷차림이었던 것이다. 직원 아가씨는 자신이 되레 발끈했다. 조슈아는 화를 내는 대신 웃어버렸다. “이러지 마. 나도 늦게 와서 미안하긴 한데 어차피 요즘 같은 때 밤에도 다 일하는 거 알고 온 거야. 곧 돌아올 휴양지 파티 시기 맞춰 단골들 여름옷들 짓느라 밤낮도 없을 거 아냐. 귀찮게 하러 온 거 아니니까 로제 선생 좀 불러 줘.” 초라한 행색을 한 소년의 입에서 가게 사정이 술술 나오자 아가씨의 얼굴에 혼란스러운 기색이 서렸다. 그러나 편견이 더 강했다. 다만 말투만은 조금 부드러워졌다. “어디서 그런 얘긴 주워들었니? 하지만 말이다, 로제 선생님은 최소한 남작 나리라도 납시기 전에는 직접 나오시지 않는단다. 알았니?” “그럼 가서 그렇게 전해. 남작 나리가 납셨다고.” 조슈아는 로제 선생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되도록 밝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가씨는 그런 조슈아의 마음을 조금도 이해해주지 않았다. “아니, 귀족 사칭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 줄도 몰라? 아주 보자보자 하니까......” 보다 못한 막시민이 계단 위로 올라왔다. 그는 다짜고짜 조슈아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금화를 한 개 끄집어냈다. 그리고 아가씨의 코앞에 들이밀며 말했다. “자, 이거 갖고 가서 로제인가 하는 사람한테 이러저러하게 생긴 사람이 왔으니 나오든 말든 맘대로 하라고 전해. 만약 그 여자가 당신이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화를 낸다면, 그 금화는 당신 거야. 잔소리 몇 마디 듣고 엘소 금화 한 개, 괜찮지?” 아가씨는 엉겁결에 금화를 받아들고 망설였지만, 결국 군소리 없이 문 안쪽으로 사라졌다. 계단 밑에 선 리체에게 두 소년이 주고받는 이야기가 들렸다. “넌 제 주머니에 든 것도 써먹을 줄 모르냐?” “네 손에 들어가면 말구유에 버린 빵조각도 쓸모가 생기는 거 아니었어?” 뒤이은 말은 마루 위를 가로질러오는 엄청난 구둣발소리에 묻혀버렸다. 문이 활짝, 아니 정확히는 문 앞에 선 사람들을 전부 계단 밑으로 떨어뜨릴 기세로 열어젖혀졌고, 그 결과 두 소년은 잘못 배달된 소포들처럼 굴러 떨어질 뻔하다가 겨우 중심을 잡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아르모리크 경, 그리고 일행 분들.” 키가 당당하게 큰, 긴 블론드 머리를 탑처럼 틀어 올려서 더욱 커 보이는 중년 여성이 절을 했다. 그녀가 장미골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 유서 깊은 재단 수공업 가문을 물려받은 미유 로제였다. 조슈아와 막시민은 계단 밑을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이 비켜나 있었던 까닭에 거창한 절을 정면에서 받게 된 사람은 리체였다. “......” 계단 밑으로 뛰어 내려간 조슈아가 얼굴이 상기된 채 굳어지다시피 한 리체의 팔을 잡고 도로 올라왔다. 그리고 적당한 미소를 지었다. “늦은 시간에 찾아와서 놀라게 한 것 같네.” “아니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이보다 더 늦더라도, 새벽이라도, 언제든지 환영이라는 것을 잘 아시잖아요? 아르모리크 경의 회복 소식을 풍문에 듣고 제가 건강해지신 경을 뵙게 될 날을 얼마나 고대하고 있었는지 모르실 겁니다. 거듭 결례를 사죄드리옵고 서둘러 안으로 드시지요.” 미유 로제의 목소리는 켈티카 사람 특유의 미끄러뜨리는 듯한 억양이 극단적으로 강조되어 언뜻 듣기에는 끊는 곳도 없이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심지어 느릿한 어조였으므로 숨은 쉬는 건가 의심스럽기도 했다. “그럼 잠시 실례할게.” 로제가 직접 문을 열어 일행을 안으로 안내했다. 맨 뒤에 선 리체가 두 소년 사이로 고개를 내밀며 소곤거렸다. “이러다 온 동네 소문 퍼지는 거 아냐? 아르님 소공작이 밤중에 술 냄새 풍기면서 쳐들어와 깽판 치고 갔다고.” 조슈아는 뭐 어떠냐는 것처럼 웃었다. “그 집 아들이 죽었다더니 망나니로 다시 태어났나보다고 하겠지 뭘.” “어차피 내일이면 여기 뜰 자식인데 내버려 둬.” 응접실에 들어서니 처음 문을 열어줬던 아가씨가 보기에 불쌍할 정도로 쩔쩔매면서 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일행이 자리에 앉고, 아가씨가 달달 떨면서 차 쟁반을 들고 와 내려놓자 막시민이 손을 내밀었다. “......” 눈이 마주쳤다. 막시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가씨가 입술을 이리저리 깨물다가 달싹거렸다. “자, 잘못 했어요, 제발......” “응?” 막시민은 무슨 소리냐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은 여전히 내민 채였다. “저, 저, 어떻게 하면 저를 용서하실지......” “아.” 막시민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자신의 내민 손을 다른 손으로 툭툭 쳤다. “줘.” “뭘요?” 막시민은 한숨을 내쉬더니 아가씨의 앞치마에 달린 커다란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내갔다. 조슈아가 흘끔 보더니 참견했다. “내 주머니에서 나와서, 저 주머니로 갔다가, 어째서 네 주머니로 들어가는 거야?” 막시민은 눈을 내리깔며 우울하게 말했다. “여러 주머니를 거치다 보면 때론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운명이 되곤 하지.” 로제 선생이 직접 도자기 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랐다. 향기로운 냄새가 퍼졌다. 실은 이 집 전체에서 오묘한 향기가 났다. 조슈아가 잔을 들자 로제가 특유의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르모리크 경께서 오늘 제게 급한 볼일이라도 있어서 오셨을까요? 한데 저한테도 소식이 있답니다. 소식을 말씀드리기 전에, 제가 며칠 전에 왕궁에 보낼 견본이 필요해서 경의 옷본에 맞추어 재단해 본 물건이 한 벌 있어요. 아시다시피 제가 경의 옷본을 매우 좋아하지 않겠어요? 경에게는 무엇이라도 잘 어울리니 말이에요.” 리체는 옷 만드는 사람으로서 내심 동감하다가 기분이 이상해져서 곧 고개를 흔들었다. 로제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니 혹 괜치 않으시면 회복도 축하드릴 겸 새 옷 한 벌 선물하고 싶은데 허락하실는지요?” 조슈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호의는 고맙지만 내일 떠나야 할 저지였다. “됐고, 오늘은 내 친구가 의상실을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왔어. 좀 돌아봐도 괜찮겠어?” “친구분이시라면......” 로제의 눈은 막시민이 아닌 리체에게 향했다. 잔뜩 긴장한 리체가 입을 열었다. “리체...... 아브릴입니다.” “리체요, 음, 리체라면...... 클라리체 양?” “네?” 리체가 동그래진 눈으로 쳐다보는 가운데 로제 선생이 소리 내어 웃었다. “잘 맞췄나요? 나라면 그런 이름으로 짓겠다고 생각했어요.” 리체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애써 웃었다. “저라면 절대 그런 이름은 안 짓겠는데요.” “아니, 왜요?” “안 어울리잖아요. 저하고.” 로제가 고개를 갸웃하자 머리 위의 높은 탑이 기우뚱했다. “클라리체 양의 미음은 고상하고 우아한 맛이 있어요. 단순한 이름이 아쉬워 일부러 고치는 사람도 있는데, 아가씨의 이름은 얼마나 복을 받았나요? 고귀한 손님들을 대할 때는 절대적으로 그 이름이 좋답니다. 그분들은 ‘리체’보다 ‘클라리체’쪽이 더욱 재주가 곱고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할 거예요.” “저기, 잠깐, 고귀한 손님이라뇨?” “언젠가 아가씨에게 여름 파티 드레스를 맡길 귀부인들 말씀이지요.” “어, 어떻게 아셨어요?” 로제는 빙그레 웃었다. 얼굴의 주름들이 부챗살처럼 나붓이 퍼졌다가 접혔다. 마흔 살부터 예순 살까지, 종잡기 힘든 미유 로제의 나이가 예순 쪽에 가깝다는 것을 리체는 알고 있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옷을 만지면서 클라리체 양 같은 손을 알아보지 못해서야 귀신이 잡아갈 때가 다 된 거지요.” “......” 리체가 미처 고맙다고 인사할 겨를도 없이 로제의 등 뒤에 새로운 아가씨가 다가와 섰다. “셀린.” “준비가 다 되었다 합니다, 선생님.” “그래.” 로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조슈아에게 몸을 굽혔다. “자, 아르모리크 경과 친구분들.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저와 함께 가시지요. 보여드릴 것이 있답니다.” 조슈아가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일어나자 막시민이 딴 세상에 가 있는 리체를 흘끔 보고 툭툭 쳐 일으켰다. 복도를 따라 걸어가자 맨 끝에 자물쇠가 걸린 문이 있었다. 예전에 몇 번이나 들어가 보았던 방이었다. 그 방의 열쇠는 로제 선생과 수석 재봉사 한명만이 갖고 있었다. 오직 한 손님만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는 방이었다. 로제 선생이 열쇠를 꺼내어 자물쇠를 땄다. 조슈아가 말했다. “여긴 오랜만이네.” “그렇지요? 그동안 아르모리크 경을 이 방에서 뵐 수 없어서 너무나 서운했답니다.” 조슈아는 약간 웃을 뿐이었다. 문이 열리고 로제 선생을 뒤따라 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리체가 가장 흥미롭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크지 않은 둥근 방의 사방에 큰 거울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거울 뒤는 모두 미유 로제 의상실의 상징을 상감한 흰 떡갈나무 옷장들이었다. 모두 닫혀 있어서 규모를 알 수 없었으나 합하면 백 벌은 충분히 들어갈 성싶었다. 앞에 서 잇던 조슈아가 로제를 돌아보았다. “설마 저게 내 옷이야?” “물론 그렇지가 않지요.” 방 가운데 인체 모형을 본뜬 옷걸이에 옷이 한 벌 걸려 있었다. 여밈을 따라 두 번 꼬아 붙인 금빛 줄 장식에 소맷단에는 미유 로제 특유의 장미수를 변형한 자수가 수놓이고, 풍성한 두건에 푸른 띠까지 달린 흰 옷은...... “로브네?” “마법사가 주문했나?” 막시민의 중얼거림에 로제 선생이 손뼉을 딱 쳤다. “바로 맞추셨네요.” 로제 선생은 이어 막시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치수를 재지 못해서 아르모리크 경의 옷본에서 조금 늘렸답니다. 길이도 약간 손보고요. 입어보세요. 맞지 않는 곳을 고쳐 드릴 테니까요.” 막시민은 처음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곧 인상을 찌푸렸다. “왜 이래? 장난하자는 거라면 재미없어.” 로제 선생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막시민 리프크네 님이시죠? 그러니 주문한 옷도 맞답니다.” “내가 언제 주문을 했다는 거야? 나 알아? 전에 본 적이라도 있어?” “꼭 본인께서 주문하시는 경우만 있는 건 아니지요.” 곁에서 리체가 ‘본 적이 있는 옷 같네’하고 중얼거렸다. 막시민은 몸을 돌려 조슈아를 봤다. 조슈아는 급히 양손을 내저었다. “나 아냐.” “그럼 대체 누가......”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다.” 뒤를 돌아본 막시민은 괴물이라도 본 것처럼 후닥닥 방 안쪽으로 물러섰다. 어느새 쥬스피앙이 나타나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제야 리체가 중얼거린 말의 의미를 막시민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이 아저씨의 머릿속은......” 막시민은 쥬스피앙의 모습을 보고 다시 걸려 있는 로브를 보았다. 두 옷은 세부적인 장식을 제외하면 똑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잠시 후 막시민이 소리를 질렀다. “이 세상 마법사들이 다 똑같은 옷을 입는다고 해도 용서가 안 돼!” “이 세상 마법사들이 다 똑같은 옷을 입을 턱이 있냐? 이 썩어빠진 놈아!” 막시민은 아랑곳 않고 열렬히 로브를 손가락질했다. “그럼 내가 왜 하필 저따위 옷을 입어야 해!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감이 밀려온다고!” 쥬스피앙은 손에 얇은 책 한 권을 쥐고 있었다. 그 책을 펼쳐 펄럭펄럭 넘기다가 다시 접더니 막시민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갈겼다. “뭐가 어쩌고 어째? 네가 감히 나의 뛰어난 미적 기준에 맞춰 제작된 최고급 로브에 토를 다냐? 나와 같은 모양의 로브를 입는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네놈이 알기나 하냐? 내가 얼마나 심사숙고한 끝에 이 일을 결정했는데 너 따위가 어쩌고 저쩌고 불만을 늘어놓는단 말이냐?” “도대체가 당신은 왜 만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정하는 거야!” “네가 마법사의 로브에 대해 개뿔 아는 게 뭐 있다고 의견이 있을 수 있다는 거냐? 저 로브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네가 짐작이나 할 수 있냐? 할 수 있으면 한번 말해봐!” “그딴 거 알아서 뭐해!” “거봐라! 너의 짧은 식견을 한 마디로 드러낼 것이면서 무슨 놈의 반항을 콩 볶듯 하는 거냐? 잠자코 시키는 대로 이걸 입고 네냐플에 가거라!” 조슈아가 웃음을 참느라 손을 올려 입을 막았다. 막시민이 저 자루처럼 헐렁한 옷을 질질 끌고 네냐플에 가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스워 죽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지금 생각해 보니 난 마법사도 아냐!” “물론 그럴 리가 없지, 이놈아.” “그러니 로브는 마법사가 된 다음에 입기로 하겠어. 됐지?” 쥬스피앙은 두 번째로 책을 휘둘렀지만 이번에는 막시민도 만만히 맞고 있지 않았다. 헛손질을 했든 말든 쥬스피앙은 단정적으로 외쳤다. “네가 마법사들의 세계를 알기나 하냐? 네놈이 네냐플에 가면 분명 내 소개란 것을 알 것인데, 지금처럼 허랑방탕 부랑 노숙자 모양새를 하고 가면 칼마린 학장 앞에서 내 체면이 뭐가 되냐?” 막시민은 그제야 상황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로브를 입으라는 명령에 수긍한 건 아니었다. 막시민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조슈아는 이제 ‘허랑방탕 부랑 노숙자’라는 말이 웃겨서 죽어가고 있었다. “알겠는데, 그렇다고 당신 로브를 빌려 입고 가는 꼴은 더 웃겨서 죽을 지경일걸? 마법은 쥐꼬리만큼도 모르는 놈이 이제 겨우 기초 배우러 가면서 무슨 놈의 얼어 죽을 로브야?” “저 로브는 나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얻기 힘든 표지란 말이다! 이놈은 은혜를 내려 줘도 알아먹지도 못하고 도대체......” 그즈음 막시민은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소리쳤다. “참, 그리고 깜빡했는데 난 지금 입학하러 가는 게 아니잖아!” 리체 등을 두드려줘서 겨우 평정을 되찾은 조슈아가 말했다. “맞아요. 좀 있으면 돌아올 텐데.” 그러나 쥬스피앙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너희는 내 깊은 뜻을 전혀 몰라. 마법도 모르고, 학원도 모르고, 아는 건 전혀 없지. 준비해야 할 건 로브만이 아니야. 오늘 밤 내로 가야 할 곳이 산더미란 말이다. 자, 가자.” “가자니? 대체 뭘 준비한다는 건데?” 그즈음 쥬스피앙의 모습은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가 손에 든 책을 다시 펼쳤다. “어디 보자. 우선 주문용 두루마리 양피지와 깃펜이 있어야겠고, 마법 잉크와 문진도 있어야 해. 낙관(落款)을 만들 청석(靑石)도 하나 필요하고말고. 항마(降魔) 주머니도 몇 개 사야지. 마력이 깃든 재료는 아무 데나 못 넣으니 말이야. 망토랑 장화도 두 벌씩은 있어야 될 거야. 입문용 책도 몇 권......” 그 말을 하며 쥬스피앙은 로제 선생을 향해 손을 휘두르며 인사를 했다. 로제는 물론 우아한 절로 인사를 받았다. “내가 왜 그런 걸 지금 준비해야 하는 거냐고......” 막시민의 대꾸도 점차 먼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흐려져 갔다. 결국 둘의 모습은 방에서 지워져 버렸다. ‘사준대도 불만이 많은 너 같은 놈은 처음...’이라는 말소리가 마지막이었다. 리체가 몇 번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정말 가버렸네?” 조슈아는 그리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내일 아침에 출발인 거 아니까. 제때 돌려보내 줄 거야?” 로제 선생이 빙긋 웃었다. “그럼 이 로브는 아르모리크 경께서 가져가시겠어요?” “그러지.”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자 한밤중이었다. 동녘을 수놓던 별들이 어느새 친구에 올라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로제 선생이 누굴 칭찬한다는 건 흔한 일이 아닌데.” 앞서 걷기 시작한 리체가 조슈아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너하고 같이 왔으니까 네 비위 맞추려고 그러는 것 아니겠어?” “아니.” 조슈아는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리체 옆까지 걸어왔다. “응, 아냐. 로제 선생은 나조차도 칭찬한 일이 없어.” “헤에, 그거 믿어지지 않는데?” “사실이야.” 조슈아는 리체의 놀란 얼굴을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런지도 알고 있어.” “왜인데?” “로제 선생은 아무리 그럴듯한 걸 해냈다 해도, 앞으로 계속 그 일을 하려는 사람이 아니면 칭찬 안 해.” 리체는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어 도로 걷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열린 몇 안 되는 가게에서 희미한 불빛이 쏟아져 나와 두 사람의 발밑을 밝혔다. “성에서 지내는 동안 로제 선생의 의상실에 가보고 싶지 않았어?” “글쎄다.” 리체가 돌부리를 툭툭 찼다. 술기운이 약간 남아 불빛이 흔들거리는 느낌이었다. “생각한 적이 있는 것도 같은데. 사실은 뚜렷하지 않아. 그냥 막연하기만 했던 것 같아. 거의 잊고 있었어.” 조슈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 참 믿어지지 않는데.” “네가 보기엔 그런 거짓말로 나한테 뭐 나오는 거라도 있어 보이니?” 뒷모습뿐인지라 어떤 표정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조슈아는 걸음을 재촉해서 리체와 나란히 걸었다. “뭐, 혼자 나와서 돌아다니기에 켈티카가 좀 복잡한 곳이기는 하지.” “그래. 겁나서 안 나왔다. 길 잃을까봐.” “그것도 거짓말 같은데.” “넌 내가 거짓말만 하는 사람으로 보이니?” 리체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조슈아는 한쪽 입술만 말아 올렸다. “그냥, 너라면 용감하게 아무데나 가봤을 것 같았거든. 그래서 한 말일뿐이야.” “아아, 그거야 물론 창백한 얼굴로 침대 속에 파묻혀서 제발 말 좀 걸어주세요, 하고 있는 인간이 없을 때 얘기지.” “저기, 리체.” 문득 진지한 목소리가 되었다. “왜?” “내가 잠들어 있을 때 말야. 곁에 앉아서 여러 가지로 말을 걸었었다고 했잖아?” 새삼스러운 질문일 뿐인데 리체는 마음 한구석이 꺼림칙해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랬지. 근데 그건 또 왜......” “그동안 혹시 뭔가 중요한 이야기 하지 않았어?” 리체의 걸음이 일순 멈췄다. 그러나 곧 다시 내딛으며 말했다. “너 붙들고 했던 얘긴 워낙 많아서 다 기억할 수도 없다고. 알다시피 반년이야, 반년.” 조슈아의 고개가 미세하게 긍정했다. “그렇겠지.” 걷다 보니 어느새 강나루였다. 시내로 나올 때 세 사람은 블루엣 강을 따라 내려오는 작은 배를 탔었다. 비취반지 성은 시내보다 상류에 있었다. 리체가 조슈아를 쳐다봤다. “어쩌려고? 배를 타고 거슬러 갈 순 없잖아.” “그런 배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이 시간엔 없지.” “설마 걸어가자는 건 아니겠지?” “굳이 가자고 하면 못 갈 거야 있겠어? 날씨도 좋고.” 한가하게 말한 조슈아가 방향을 돌려 나루지기의 집으로 걸어갔다. 리체가 뒤쫓아 가며 소리쳤다. “내일 아침에 도착할 작정이야?” 조슈아는 나루지기의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고개를 내민 사람이 얼른 나오며 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응.” 남자는 뒤꼍으로 돌아가더니 이윽고 말 한 필을 끌고 돌아왔다. 고삐를 넘겨받은 조슈아가 리체에게 손짓했다. “가자.” 조슈아가 훌쩍 말에 올라타고, 리체는 말을 끌고 온 남자가 말 위로 올려주었다. 조슈아 뒤에 탄 리체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저 사람은 너희 집 하인?” 말의 목에 손을 대어 보던 조슈아가 고개만 끄덕거렸다. “언제 준비시킨 거야?”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네가 걸어가고 싶어 하지 않을 줄 알았거든.” 남자가 꾸벅 인사하는 가운데 조슈아가 말의 배를 걷어찼다. 이윽고 말은 방향을 돌려 강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껏 탔던 어떤 말보다 흔들림이 적고 유연한 말이었다. 속력이 빨라지자 주위는 점차 알아볼 수 없는 어둠으로 변했다. 리체가 불쑥 말했다. “정말 내일이면 너희하고 헤어지는구나. 실감이 잘 안 나.” 한참 뒤에 조슈아가 대꾸했다. “나도.” “쳇, 가지 말라고 잡지도 않았으면서 새삼 그런 소리 해봤자야.” 조슈아는 조금 더 긴 침묵 뒤에 대답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널 잡겠어.” 리체는 어깨를 살짝 올릴 뿐 대구하지 않았다. 말발굽 소리에 섞여 조슈아의 말이 이어졌다. “너 참 고생 많이 했지.” “괜찮아. 끝났으니까. 의상실 구경시켜 준 거 고마워.” 조슈아는 잠시 말없이 달리다가 대꾸했다. “사실 네가 그렇게 오래 여기 있으면서 그곳조차 가보지 못했다고 했을 때 내심 미안했어.” 리체는 대답하지 않았다. 주위로 숲이 스쳐갔다. 검은 강물이 소리 없이 흘렀다. 말발굽 소리가 거세졌다. 리체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말해줄 순 없어. 네가 만일 알고 있다 해도. 조슈아가 문득 웃음소리를 냈다. “뭐랄까, 할 말이 없다.” “뭐가?” “사과하는 것도, 위로하는 것도, 새삼 지난 얘기 돌이켜보는 것도 안 어울려서. 나 지금 할 말을 찾는 게 굉장히 힘든데. 방금 무대에서 대사 잊어버린 기분이었어.” “네가 그런 기분을 알 리가 있겠어? 그래 본 적도 없으면서.” 조슈아는 그에게만 허락된 대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그렇게.” 리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네 그 시건방진 말버릇도 그리워질 날이 올지 모르겠네.” 조슈아는 말없이 웃었다. 리체가 문득 생각해 내고는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켈스한테 인사도 못하고 가는구나. 다음에 보게 되면 인사라도 전해 줘.” 조슈아는 순간적으로 머뭇거렸다. “...응.” 비탈길에 접어들었다. 속도가 줄어드는 기색이 아니었으므로 조금 전부터 내심 겁이 났던 리체가 말했다. “좀 빠른데.” “좀 멀거든.” 리체는 조슈아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근데 너 말도 꽤 잘 타는 구나.” “...저기, 나 이래봬도 공작 집안 아들인데.” 5 화살 “내가 쏜 화살을 주워 온 아니는 어리고 용감하였다. 나는 아이의 손에 활을 쥐어주고 그가 쏠 짐승들을 축복하였다. 행복한 죽음을 맞도록 몸부림치지 않고 한 화살에 숨이 끊기는 상냥한 사냥감이 되도록 기원하였다.” 애나가 일하는 공예방은 켈티카 외곽의 작은 숲 입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목공예를 하는 장인 둘이 대여섯 명의 도제를 두고 운영하는 곳으로 그릇과 선반 장식품 같은 작은 것들을 만들었다. 수지가 맞지 않을 때를 대비해서 숯가마도 두 군데 있었다. 시장에 물건을 내갈 때를 제외하면 사람의 왕래는 거의 없었다. 사람들이 직접 물건을 사러 오는 것은 아주 드문 경우였다. 이렇듯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는 곳이었지만 가끔 시장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점이 있었다. 어떻게 벌목 허가를 얻었을까? 켈티카 주변의 숲은 왕과 귀족들의 것이었다. 공예방이 있는 숲 또한 어느 후작의 사유지였다. 애나는 궁금해 하지 않았다. 란지에가 애나를 이곳으로 보냈을 때 형제간인 두 장인은 이미 연락을 받은 듯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이곳은 왕국8군이나 호기심 많은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안전하게 숨어 있기에 매우 좋은 장소였다. 조금 있으면 이곳에서 지낸지도 한 해가 된다. 재주도 어느 정도 익혔다. 서툴게나마 접시며 쟁반 등을 깎아 쓸 수도 있게 되었다. 아직 내가 팔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만하면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배운 셈이었다. 일반적인 공방에 들어갔더라면 기술을 제대로 전수받기 전에 한 해 이상 허드렛일로 세월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고러나 공예방의 안전한 일상은 금방 지루해졌다. 이곳에 있으니 켈티카의 소문도 거의 얻어들을 수 없었다. 5월 중순, 친구가 찾아왔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반가운 마음이 앞섰던 것도 그 때문일지 몰랐다. 이곳에 찾아올 친구가 있을 리 없는데도. 애나에게 주어진 방은 별채 건물 가장 끄트머리였다. 다른 여자 도제 한사람과 함께 지냈지만 숙련 도제인 그녀는 오늘 시장에 나가고 없었다. 일과가 끝난 8시경에 방에 들어서자 테이블 앞에 회색 두건을 푹 눌러쓴 남자가 앉아 있었다. 애나는 문간에서 걸음을 멈췄다. 남자가 말했다. “오랜만이네.” 목소리를 알아듣기까지는 잠깐 시간이 걸렸다. “브리앙?” 애나가 문을 닫고 들어서자 남자가 두건을 내렸다. 지스카르의 집에서 함께 지냈던 동기생, 브리앙 마텔로였다. “놀랐지?” 반갑게 테이블로 다가서던 애나의 움직임이 움찔하며 멈췄다. 브리앙의 말이 흐려졌던 기억에 불을 밝혔다. 브리앙 마텔로, 그가 왜 여기 있지? 애나의 표정을 살피고 있던 브리앙이 뺜을 떨면서 웃었다. “나에 대해서 얘길 많이 들었나 보지?” 브리앙의 얼굴은 그새 많이 상해 있었다. 피부가 검어지고 거칠어졌다. 입술 주위도 하얗게 일어났다. 눈가가 움푹해져서 나이도 한층 들어 보였다. 그가 웃자 뺨과 광대뼈 주위가 울퉁불퉁해졌다.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 “나, 너 찾으려고 많이 애썼다.” 애나는 가까스로 의자를 당겨 맞은편에 앉았다. 낡은 의자 이음매가 비걱대는 ㅅ리가 귀에 거슬렸다. “왜 날 찾았는데?” “그런 얘기보다... 내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궁금하지 않아?” 브리앙은 애나보다 조금 나중에 ‘로사 알브의 별장’에 들어왔었고, 처음에는 매사 애나와 경쟁을 했었다. 둘 다 지스카르의 관심을 끌고 인정을 받고 싶어 했다. 애나는 호승심이 강하긴 해도 편법은 모르는 성미였기 때문에 상황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브리앙을 덮어놓고 싫어했다. 그렇게 한 달여가 지나고 차츰 말문이 트였을 때 서로 어렵사리 자라 이곳까지 온 것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마음이 통했다. 애나가 지스카르의 곁을 떠나게 되던 무렵에는 농담도 잘 하고 서로 일도 대신해주는 친근한 동기생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바뀌었다. “힘들게 지낸 것 같네.” 브리앙은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마른 손뼈 마디가 도드라졌다. “아주 힘들었지. 내가 어떻게 살았나 모르겠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라고 물으려다가 질문을 삼켰다. 애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브리앙이 지스카르의 곁에서 쫓겨났을 것도, 민중의 벗에서 제명당했을 것도, 그리고 그 후...... 애나의 살피는 듯한 눈초리를 본 브리앙이 웃음을 터뜨렸다. “핫하하......” “브리앙 너, 도대체 어떻게 됐던 거야?” 브리앙은 웃음을 그치고 애나를 쏘아봤다. “네가 나한테 그런 걸 물을 수가 있는 거냐, 애나 에이젠엘모?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내가 죽지 못해 살아온 일 년 동안 넌 클럽의 보호를 받으면서 안전하게 지냈겠지? 이런 곳에 숨어서 말야. 그래, 네가 이겼어. 지스카르 선생님은 날 버리고 널 택했어. 어때, 기분이? 선생님의 총아가 된 감상은?” 그건 오래전에, 그러니까 그들이 헤어지기도 전에 끝난 이야기였다. 그러나 뒤늦게 나타난 브리앙이 왜 그런말을 하는지 애나는 이해했다. “그러지 마. 그런 건 없던 거잖아. 우리 사이에. 하지만 나 때문이란 건 무슨 말이야? 난......” “그래, 너 때문이 아니야. 그 사람 때문이지.” “누구?” “널 데려간 사람.” 애나가 선뜻 대꾸하지 못하는 사이 브리앙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널 의심해서 데려가고, 너에 대한 의심이 풀리자 날 의심하고, 그래서 지스카르 선생님까지 날 믿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 죽지 않으려면 도망칠 수밖에 없게 만든 그 자 말이야.” 애나는 변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가진 정보가 얼마 없어 잘 설명할 수가 없었다. 애나가 란지에에게 들은 말은 브리앙이 로스 알브 별장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잠입한 왕국8군의 첩자일 수 있어 망명 의회의 조사를 받게 될 예정이라는 말뿐이었다. 왜 란지에가 지스카르 곁에 첩자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는지, 전략 차원에 속하는 란지에의 정보를 애나는 갖고 있지 못했다. 그저 애나 자신을 란지에가 살려주었고, 그 이유가 브리앙의 혐의가 뚜렷해져서라는 것만을 알 뿐이었다. 만일 그것만을 놓고 본다면 브리앙이 첩자로 지목된 것이 애나 탓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애나 자신은 어쨌든 첩자가 아니었고...... “도망쳤던 거야?”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망명 의회의 썩은 감옥에 갇혀서 평생 나오지도 못했을 거다. 제대로 된 조사도, 재판도 없이. 난 결백을 말할 기회도 없었어. 자신을 변호하고 싶었지만 날 지목한 자는 너와 함께 멀리 가버린 뒤였지. 내가 누구에게 호소할 수 있었겠어? 선생님? 그분은 망명 의회의 소환 요구를 무시할 분이 아니지. 그분 자신을 소환했더라도 망설임 없이 가실 분이니까.” 애나는 란지에와 함께 켈티카로 오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란지에는 며칠 동안 애나가 망명 의회에 가면 어떻게 될지 말해주지 않았고, 그녀는 갖은 상상을 하며 불안에 떨었었다. 그 때 애나는 망명 의회의 소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몰랐지만 브리앙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만일 애나 자신이 브리앙처럼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얌전히 란지에를 따라올 수 있었을까? 브리앙은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으로 머리를 싸쥔 채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했을 고생이 문득 느껴져 가슴이 쓰렸다. “도망쳐서... 갈 데도 없었어. 어딜 갈 수 있었겠어? 망명 의회가 날 찾고 있을 테니 그들이 예상할만한 곳에 나타나선 안 됐어. 너도 알다시피 나한테는 깨어져서 없는 거나 다름없는 가족을 제외하면 민중의 벗이 유일한 안식처였어. 내 고향이고, 내 삶이었어. 다른 건 아는 게 없었어. 그런데 그곳이 날 사냥하려 하고 있을 때... 난 정말 눈밭에서 길을 잃은 토끼가 된 기분이었다고. 언 발로 달렸어. 갈 곳도 없이...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화살에 맞지 않으려고.” 브리앙이 테이블에 엎드려 얼굴을 묻었다. 어깨가 간헐적으로 떨리다가 가라앉았다. 애나는 일어나 물주전자와 컵을 가져왔다. 물을 따라 놓으면서 물었다. “저녁은 먹었니?” 브리앙이 얼굴을 묻은 채 풋, 하고 웃었다. “저녁이 다 뭐냐. 난 하루에 한 끼 먹으면 잘 먹는 거야.” 애나는 밖으로 나가 빵 두 개와 귀리죽 한 그릇을 가져왔다. 빵은 딱딱했고 죽은 식어 있었지만 브리앙은 말도 한 마디 않고 모조리 먹어치웠다. “정말 고마워.” 그릇 주위에 묻은 죽을 모조리 핥아먹고 입가에 묻은 죽까지 닦아 먹고서야 겨우 한 말이었다. 애나는 고개를 저었다. “애나,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겠어?” 애나는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 “말해.” “나, 그 사람 좀 만나게 해 줘.” 그릇을 챙기던 애나의 손이 멈췄다. 브리앙은 어느새 고개를 들고 애나의 눈을 열렬히 보았다. “애나. 난 이대로 살 순 없어. 언제까지나 언 발로 달릴 순 없다고. 보다시피 난 너무 지쳤어. 이러다가 붙잡히면 아예 심문을 받을 기회조차 없을 거야. 도망쳤기 때문에, 아마 즉결 처분이겠지? 난 이러고 싶지 않았지만 이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너도 알잖아? 응? 난 그 사람을 만나 속 시원히 말하고 싶어. 난 첩자가 아니라고, 아닐 수밖에 없다고, 잘못 봤다고, 전부 다 말하고 싶단 말이야. 묻는 말에도 다 대답할 거야. 애나, 제발 도와줘. 이 방법밖에 없어. 날 최초로 의심한 사람이 그 의심을 풀어줘야 해. 다른 사람은 소용없어. 그래야만 난 다시 민중 클럽으로 돌아갈 수가 있다고. 난 그래야 해. 돌아가지 않으면 내 삶은 아무 의미가 없어. 내가 아는 건 그것밖에 없어. 너랑 나랑 배웠던 거, 응? 애나? 우리 토론하곤 했잖아. 우리... 나라의 모든 불행한 사람들을 도울 방법에 대해서... 넌 항상 똑똑했지... 난 너한테 늘 감탄했는데. 말은 안했지만......” 브리앙의 말은 점차 횡설수설에 가까워졌지만 간절한 기분만은 충분히 전해져왔다. 애나는 안타까워 심장이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미안해. 나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모, 모른다고? 어떻게든 알아볼 수 있는 방법 없어?” “그건......” 애나는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말했다.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확답은 못해.” 브리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아봐 주기만 한다면 기다릴 수 있어. 난 너 말고 기댈 데가 없어. 너니까 날 만나줬지... 넌 민중클럽과 나 사이에 남은 유일한 다리인 것 같아.” 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어조가 확고해졌다. “다음 달쯤 다시 와.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알아 놓을게.” 6 무한한 포도원 “천 그루 포도나무 밭에 만 송이 포도가 열리고 십만 알의 포도가 영글고 백만 개의 씨앗이 익어 그 씨가 떨어진 곳마다 새 나무가 움트고 자라나 천 개의 밭이 일궈지면 백만 그루 포도나무 아래 천만 송이 포도가 열리고......” “어떻게든 가능한 일이라고 확신만 시켜주면 걔는 뭐든지 해낸다니까.” 부드럽게 닳은 화강암 계단의 중간쯤이었다. 조슈아는 계단 난간에 새겨진 풍화된 글자들을 손끝으로 더듬는 중이었다. 막시민은 맞은편 난간에 걸터앉았다. 한쪽 다리만 길게 뻗고, 눈은 머리 위에 지붕처럼 드리워진 월계수 가지와 잎들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계단을 따라 늘어선 월계수는 꼭대기에 있는 야트막한 집으로 이어졌다. 작은 날벌레들이 나뭇가지를 맴돌며 지붕 꼭대기로 날아갔다. 하늘로 솟은 잎에도, 떨어진 잎에서 여름 볕이 앉아 있었다. 막시민의 시선이 월계수들을 지나 지붕에 이르렀을 즈음 조슈아가 대꾸했다. “쥬스피앙 씨도 그 애한테 널 가르칠 수 있다는 확신을 줬을 거야.” 지붕에서 하늘로 넘어갔던 막시민의 시선이 중간 과정을 뛰어넘어 조슈아에게 돌아왔다. 눈이 마주치자 조슈아는 얼른 일어나 키득대며 몇 계단 아래로 달아났다. 막시민은 뒤쫓는 대신 비아냥댔다. “다음엔 그 애한테 네가 미친 짓 좀 그만 하게 해달라고 해야겠어.” “응. 일단 너부터 성공하고 나면.” 이윽고 흙을 밟는 구두소리가 들렸다. 하얀 치마와 까만 구두의 티치엘이 계단 머리에 나타나자 막시민은 고개를 돌리며 기침을 했다. 티치엘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한 듯 계단을 가볍게 밟으며 내려왔다. “학장님하고 얘기 잘했어?” 조슈아가 슬금슬금 제자리로 돌아오며 물었다. 둘 사이에 선 티치엘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자기도 계단 위에 앉았다. 하얀 치마에 뭔가 묻을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은 늘 그렇듯 잊어버렸다. “포도원 열쇠를 얻을 수만 있다면 그곳에서 자료를 봐도 좋다고 말씀하셨어.” “그럼 그 포도원지기인가 하는 교수를 만나러 갈 차례다 그거구만?” 그렇게 말하며 돌아본 막시민의 눈에 티치엘이 쓴 안경이 들어왔다. 테가 까맣고 각이 진 안경이었다. “그건 또 뭐하자는 물건이냐?” 티치엘은 안경을 벗어 들었다. “이거? 응, 학장님하고 이야기를 좀 더 잘 풀어볼까 하고 써 봤어. 효과가 있었을지도 몰라.” “안경과 학장 사이에 무슨 관계라도 있는 거냐?” 티치엘은 무슨 소리냐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했다. “어려운 부탁을 하는데 좋은 인상을 줘야 하잖아.” “그레, 그러니까 좋은 인상하고 안경이 대체 무슨 상관이 있냐는 얘기잖아!” “아빠가 안경을 쓰면 사람이 성실해 보인다고 하셨거든.” 똑같이 안경을 쓰고 있지만 좋은 인상과 아무 상관이 없는 녀석은 기가 막힌 표정이었다. 티치엘이 덧붙였다. “그럼 내가 왜 네 선생님 역할을 하기로 했다고 생각하니?” 이것도 처음 듣는 소리였다. 막시민이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네 아버지가 시켜서 아니었냐?” “아무리 아빠가 하라고 하셨다 해도 나도 생각을 해봐야 되잖아.” 어떨 땐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다가도 이럴 때 보면 그런 것만도 아닌듯한 티치엘이었다. 막시민과 조슈아가 대체 무슨 대답이 나오려나 싶어 쳐다보는 가운데 티치엘이 진지하게 고개까지 끄덕거리며 말을 이었다. “네가 안경 쓴 걸 보고 열심히 공부할 것 같아서잖아.” “......” 조슈아가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끼어들었다. “그럼 지금쯤 굉장히 후회하고 있겠네?” “후회는 왜?” 티치엘이 의아해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조슈아는 어쩐지 대답이 궁하다고 생각하며 말을 짜냈다. “그게, 뭐 네가 막군이 성실한 학생이라고 생각한다면 할 말은... 아니,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는데.” “세상에 어떤 일이 하루아침에 잘 되겠어?” 조슈아는 막시민을 불쌍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막시민은 관자놀이를 짚으며 신음 소리를 냈다. “끄으으음......” “어디 안 좋아?” 티치엘의 물음에 조슈아가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대꾸했다. “어, 죽어야만 낫는 병에 걸렸거든. 하지만 증상은 전혀 없고 수명도 줄지 않으니 걱정은 하지 마.” 티치엘은 신기한 눈빛으로 막시민을 살펴보았다. “그거 참 괜찮은 병이네? 이왕 걸릴 거라면 누구든 그런 병이 좋을 텐데.” 티치엘의 동행은 출발하던 날 아침에 갑자기 결정된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그날 보기엔 그랬다. 아침 일직 일꾼들이 마차에 짐을 싣는 동안 1층으로 내려가려던 조슈아는 계단참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관 앞에 놓인 긴 의자에 티치엘이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챙 넓은 모자를 쓰고. 발치에는 노끈으로 묶은 갈색 트렁크도 놓여 있었다. “넌 어디가?” 조슈아가 묻자 티치엘은 빙그레 웃었다. “막시민이 가는데 같이 가야잖아.” “...막군은 너한테서 해방될 생각에 신났던데.” 티치엘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공부는 원래 힘든 일이지만 중간에 그만두면 아무것도 안 되는걸.” 한 번도 그런 점을 실감해 본 일이 없는 조슈아는 예의상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음... 아마도 그렇겠지?” 출발 전날 미유 로제 의상실에 나타나 막시민을 끌고 가던 때까지도 쥬스피앙은 이번 일에 대해 일언반구도 비치지 않았다. 그랬기에 마차 앞에서 티치엘과 마주친 막시민은 상황을 깨닫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티치엘은 조금 전과 똑같은 질문을 했고, 그때 조슈아가 ‘응, 아주 심각한 병이야’라고 대꾸한 것이 발단이었다. 티치엘이 마차 시간까지 지연시켜가며 급히 만들어 온 소위 ‘증상을 알아내는 약’을 마셔야 했던 막시민은 점심 무렵까지 헛구역질을 해댔다. 그 결과 조슈아도 조금 전 같은 신중한 대답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티치엘이 따라온 것이 막시민의 공부 때문이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네냐플에 도착할 무렵까지도 알지 못했다. 그 동안 막시민은 예전에 그가 역설한대로 사두마차 두 대에 하인이 서넛이나 딸린 한가로운 여행을 했지만 전혀 즐겁지 않게 지냈다. 숨을 곳이 얼마든지 있는 비취반지 성과는 달리 마차 여행 중에 도망칠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런데 왜 포도원에 들어가는 걸 학장이 아니라 그 교수한테 허락받아야 하는 거야?” 통칭 ‘포도원’은 네냐플 학원 안에 따로 세워진 거대한 자료실 겸 도서관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도서관이라고 해도 학생들이 드나들 수 있는 도서관은 따로 있었다. 포도원은 학생이나 외부인은 물론이고 학원의 교수들조차 ‘포도원지기’의 허가가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포도원은 마법사들의 만신전(萬神殿)같은 데거든. 네냐플에서는 마법만 가르치지는 않아. 그래서 마법 마스터인 교수님 중에서 가장 권위 있는 분이 포도원지기가 되시는 걸로 알고 있어.” “그럼 학장은 마법사가 아니란 말이야?” 티치엘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학장님께서는 누구보다도 훌륭한 마법사셔. 하지만 학장님은 중립을 지켜야만 하거든. 마법사들만을 대변할 수는 없다는 거야. 만일 학장님께서 포도원을 맡고 계신다면 마법사가 아닌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를 내세워 포도원 출입 허가를 내달라고 할 때 거정할 명분이 약하잖아.” 막시민이 티치엘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네 입에서 그런 고차원적인 이야기가 나오니 이상한데.” 티치엘도 막시민에게 이상한 눈빛을 보냈다. “넌 내 얘기 들으면서 늘 어렵다고 했잖아?” 막시민이 생각하는 ‘고차원’이 학문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는 점을 티치엘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쉽지 않을 전망이었다. 조슈아는 말을 돌렸다. “그런데 포도원이 그런 곳이라면 우릴 쉽게 들여보내주진 않겠는데. 넌 마법사겠지만 나나 막군은 여기 학생들만큼도 마법을 모르는걸.” 뜻밖으로 티치엘이 동의했다. “그건 그래.” “야,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면 일껏 그 먼데서 여기까지 온 수고는 다 뭐가 되는 거야?” 두 소년의 당황한 얼굴을 보며 티치엘은 그녀다운 대답을 내놓았다. “열심히 해봐야지.” “......” 포도원으로 가는 길은 네냐플 학원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길 중 하나였다. 왼쪽 비탈 아래에 미로 형태의 정원이 있고, 그 길을 따라 파 놓은 좁은 수로에 수정처럼 빛나는 물이 흘렀다. 자연석으로 마무리된 수로 속에는 이끼와 녹색 식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봄이면 꽃이 만발할 유실수들이 늘어서 교묘히 미로를 감추었다. 네냐플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건물인 ‘아나야 사반테 관(館)’이 우측에 솟아 있었다. 단단한 빵 껍질처럼 보이는 4층 석벽에 싱싱한 푸른 담쟁이가 빼곡했다. 꼭대기에는 구슬을 쥔 용 모양의 근사한 풍향계가 흔들리고 있었다. 티치엘은 좀 더 걷다가 말했다. “실은 마법보다 조슈아가 걱정이긴 해.” “왜?” “데모닉을 들여보내 줄지는 잘 모르겠어.” “그건 또 무슨 뜻이야?” 조슈아가 묻자 티치엘은 고개를 젓기만 했다. “포도원의 비밀은 지켜져야 하거든.” 그들이 통과하고 있는 등나무 그늘에는 수십 년은 되어 보이는 돌 의자들이 줄지어 있었다. 수업 시간이라 사람은 없었고 돌 위에 새긴 낙서들만이 닳아가고 있었다. 스쳐가면서 조슈아는 낙서 몇 개를 훑었다. ‘유급 3년차, 세 번째로 입학하다’, ‘내일이면 방학이다!’, ‘너희들이 화장실 가 있는 동안 난 이거 새긴다’, ‘네냐플 왔다가다’, ‘포도원 한 번 못 가보고 햇수만 늘린 서러운 2학년이여 단결하라’, ‘2년차 진급시험에 말콘 윤리학 꼭 나온다, 후배들아’, ‘데리케 누님 제발 1점만. 입학금 또 내라고 하면 저희 아버지 쓰러지심’...... “여기 굉장한 덴가 봐. 막군, 너 입학할 게 걱정된다.” 막시민은 못 본 체하며 대꾸했다. “내 휴대용 수첩이 입학을 안 할 테니 큰일이야.” 포도원은 학원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산비탈을 등지고 자리 잡은 둥근 단층 건물이었다. 막시민이 농조로 말했다. “포도원에 포도는 다 어디 간 거야.” 티치엘이 대답했다. “응. 안에 들어가면 있어.” 그런데 그 말은 정말이었다.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나타난 것은 뜰이었고, 겉으로 보이던 건물은 반지처럼 뜰을 둘러싼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들에는 키 작은 포도나무가 수북이 심어져 있었다. 두 소년은 당황하여 중얼거렸다. “여기 진짜 포도원이었네.” “이렇게 되면 도서관은 상당히 작은 것 아니냐?” “우리 아버지 서재의 몇 배밖에 안 될 것 같은데.” 티치엘은 포도나무들을 지나 높다란 꽃봉오리 모양의 물을 열면서 빙그레 웃기만 했다. 문을 통과하자 둥글게 휜 복도가 나타났다. 십여 걸음을 걷자 건물 외벽까지 연결된 빈 공간이 나왔다. 외벽과 내벽 모두에 큰 창이 나 있어 반들반들한 대리석 바닥이 온통 환했다. 외벽 창문 앞에 세 사람이 써도 될법한 커다란 책상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없었다. 티치엘은 빈 공간을 향해 말했다. “레오멘티스 교수님.” 조슈아와 막시민은 마법사라는 교수가 허공에서 어떤 괴이쩍은 방식으로 나타나려나 궁금해하며 책상 앞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러자 정말로 규수가 나타나긴 했다. 책상 밑에서. “안녕하세요, 교수님.” 티치엘은 개의치 않고 인사를 했지만 다른 둘은 어리둥절하여 얼굴을 마주봤다. 책상 밑에 있다가 일어선 사람은 고작 스물 몇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였다. 티치엘이 인사하는 것을 보면 교수가 맞긴 한 모양인데, 이렇게 젊은 사람이 네냐플에서 가장 권위 있는 마법 교수일 수가 있을까? 우물쭈물하고는 동안 교수의 날카로운 눈이 둘에게 향했다. “아, 저, 처음 뵙겠습니다.” 어쨌든 둘 다 꾸벅 인사를 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교수는 대꾸도 않고 둘을 쏘아보고 있었다. “......” 일단 키가 당당히 컸다. 대단히 아름다웠다. 굽슬굽슬한 금발 속에 묻히다시피 한 자그마한 흰 얼굴은 비인간적으로 보일 정도로 주름 하나 없었다. 심지어 표정도 없었다. 잠시 후 첫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오너라, 티치엘.” 말투를 보니 티치엘과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아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이 살벌하게 차디찬 여자를 설득할 생각을 하니 암담해지던 차였다. 레오멘티스 교수는 이윽고 책상 뒤에서 나와 세 사람 앞에 섰다. 적포도주 빛 장려한 로브를 보니 그걸 입고 어떻게 책상 밑에 들어갈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졌다. “이 두 사람은 저의 친구들인데 중요한 일이 있어서 포도원에 머물도록 허락해 주십사하고 왔어요.” “조슈아 폰 아르님입니다.” “막시민 리프크네라고 하는데요.” 조슈아는 가문을 소개하지도 않았고 레오멘티스 교수도 묻지 않았다. 잘왔다거나, 어떻게 왔느냐거나 하는 형식적인 인사도 없었다. 그녀는 둘을 흘끗 보기만 하고는 티치엘에게 말했다. “마법을 아는 자들이 아니구나.” “한 명은 얼마 전에 배우기 시작했어요. 제가 가르치고 있고요.” 그 ‘한 명’은 난감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차라리 전혀 모른다고 하는 쪽이 마음 편할 수준이었던 것이다. “넌 네 공부로도 바빠야 할 거야.” “네. 열심히 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는 중요한 마법 물건의 주인이어서 마법을 꼭 배워야 하거든요.” 레오멘티스 교수는 다시 두 사람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잠시 후 막시민에게 시선을 쏟았다. 한참 동안 보고 나서 티치엘을 향해 말했다. “그런 것이 있긴 한 것 같구나. 중요한 문제란 그건가?” “아뇨.” “그럼 뭐지?” 교수는 여전히 티치엘에게 말하고 있었으나, 조슈아가 입을 열었다. “내 일이니 내가 말하는 쪽이 낫겠군요.” 레오멘티스 교수가 조슈아에게 시선을 주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녀의 눈빛은 무생물처럼 차가워서 시선이 마주치는 것이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말해 봐.” “내게는 인형이 있습니다.” 마법 교수인 레오멘티스는 그 말을 곰 인형이라도 갖고 있다는 뜻으로 알아듣지는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조금 흔들렸다. “누구지, 만든 사람은?” “본래 아는 사람도 아니었고, 도망쳤기 때문에 자세히 모릅니다. 이곳을 졸업한 사람이라더군요.” “그래서?” “난 그 사람을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그 자도 포도원에서 자료를 얻어 인형을 만들었겠지요. 그러니 나도 같은 과정을 밟아 그 자가 있을 만한 곳을 추리하려 합니다.” 네냐플 출신 마법사의 기록을 조사하겠다는 것은 아주 민감한 문제였다. 모두 침을 삼키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가 본체를 가져갔나?” 대뜸 나온 질문에 모두 흠칫했다. 조슈아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인형은 어찌 됐지?” “잠들어 있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다리면 될 일이 아닌가.” 조슈아는 레오멘티스 교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신경하다 싶을 정도로 바로 나온 말이었지만 그녀의 눈은 질실을 말하고 있었다. 아니, 진실을 묻고 있었다. “난 인형이 죽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교수의 입술이 묘하게 비틀렸다. 편견을 걷어내고 본다면 미소였을지도 몰랐다. “진심인가?” “난 그와 대화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주위는 고요했다. 여름 햇빛만이 마루 위에 나뭇잎 무늬를 되풀이해서 그리고 있었다. “넌 제정신은 아니로군 그래.” 레오멘티스 교수의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정적을 깨며 웃음소리가 났다. 조슈아는 곧 웃음을 그쳤지만 여전히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교수님이 너무 핵심을 찌르셔서 웃고 말았어요.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데모닉 조슈아.” 그 말에 막시민, 그리고 티치엘고 움찔했다. 레오멘티스 교수는 조슈아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얘기만 들었지. 듣던 대로 객쩍은 자들이야. 죽어가는 자신의 인형을 되살려 대화하고 싶다고 할 만한 사람은 아직까지 너 말고 한 명 정도밖에 모르겠다.” 순간적으로 질문이 나왔다. “그게 누군데요?” “앨베리크 쥬스피앙.” 이번엔 티치엘이 조그맣게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쥬스피앙 씨가 자기 얘기하면 역효과라고 하셨는데......” 레오멘티스 교수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자 그게 전부인가? 말해 두지만, 허락받지 않은 자료를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게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교수와 눈이 마주치자 조슈아는 미소를 지었다. “가나폴리에 있었다던 ‘거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중에서도 소원 거울이라고 불리는 것을요.” 막시민이 조슈아를 돌아봤다. 소원 거울이란 이카본이 약속의 사람들에게 약속했던 것이고, 그래서 조슈아에게까지 실현을 요구하던 그것이었다. 하지만 조슈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그게 무엇인지 알고서 하는 말인가? 이유는?” 조슈아는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생각하며 난감한 얼굴로 웃었다. 결국 간단한 대답밖에 없었다. “나는 영매이고, 내 조상을 모셨던 사람들의 유령과 이야기합니다.” “......” 교수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을 보며 막시민은 머리를 짚었다. 비록 상대가 마법사라 해도 영매를 달가워하는 사람은 드물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저들의 고향으로 가기 위해 소원 거울을 원합니다. 나는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어째서 네게 그런 의무가 있는가?” “나는 그들의 공작이니까요.” 비록 몇몇은 조슈아를 미워한다 해도, 이카본을 원망한다 해도, 그들이 이카본을 비롯한 모든 아르님 공작들과 맹세로 묶여 있는 것은 불변의 사실이었다. 아니, 실은 데모닉이며 영매인 아르님 공작만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그런 사람은 지금껏 이카본 말고는 없었다. 두 번째가 될 사람도 조슈아뿐이었다. “난 아직껏 데모닉을 포도원에 들여보낸 일이 없다.” 오면서 티치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왜죠?” “포도원은 세상이다. 우주다. 기록되지 않은 말이다. 정복될 수 없는 땅이다. 우린 귀퉁이를 조금 빌려 포도 농사를 짓고 있을 뿐. 누구도 그 안의 지식을 모두 삼킬 수는 없다. 수백 년, 수천 년을 산다 해도 그럴 수는 없다.” 그 말은 포도원의 지식을 기억해서 갖고 나가는 것을 막겠다는 뜻처럼 들렸다.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생각은 없어요.” “그건 너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힘이야. 호수에 나뭇조각을 띄운다면 떠있기만 할 뿐이겠지. 하지만 솜뭉치라면 순식간에 물을 흠뻑 빨아들이고 얼마 뒤 가라앉아 버릴 게다.” “내가 마른 솜뭉치처럼 지식을 흡수하다가 한계를 넘어설 거란 말인가요?” 레오멘티스 교수의 뾰족한 턱이 두 번 끄덕여졌다. “돌아버리기가 쉽지.” “잠깐만.” 비스듬하게 서 있던 막시민이 불쑥 끼어들었다. “제 생각엔, 이 도서관이 발 디딜 틈조차 없이 책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저 녀석 용량을 넘어갈 것 같지는 않는데 말입니다.” 입밖에 내진 않았지만 그건 조슈아의 생각이기도 했다. 막시민이 말을 이었다. “지식의 유출을 걱정하시는 거라면 그쪽은 이해가 갑니다만, 뭔가 추상적인 우려를ㄹ 듣는 기분인데요.” 레오멘티스 교수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다운 것이 걸렸다. “아무나 못 들어가는 곳이라고 해서 대단한 것을 상상했는데 볼품없이 작아 보였나 보지?” “그런 뜻이 아니라......” 조슈아의 말이 맺어지기 전에 막시민이 대꾸했다. “솔직히 그런데요.” 레오멘티스 교수의 얼굴에 점차 생기가 돌았다. 눈빛에도 흥미가 어렸다. “마법을 모른다고 했으니 그리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 그럼 한 번 돌아보겠나?” 대꾸도 듣지 않고 척척 걸음을 옮겨 내벽에 면한 복도 쪽으로 갔다. 티치엘이 재빨리 따라가는 것을 보고 두 소년도 얼굴을 한 번 마주본 뒤 뒤따라갔다. 복도를 따라 한 바퀴 빛 도는 동안 그들이 서 있던 곳과 비슷한 방을 십여 개 보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장서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평범한 서재보다도 못해 보이는 허름한 책꽂이 몇 개에 최대 백 권도 안 되어 보이는 책이 꽂혀 있었을 뿐이었다. 어느 방에는 사람이 있기도 했는데 혼자 책상 앞에 앉아 서너 권 늘어놓은 책이나 지도, 그림, 점토판 등을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모든 방은 심지어 문으로 막혀 있지도 않아 걸으면서 내부를 다 들여다볼 수 있었다. 처음의 방으로 되돌아왔을 때 레오멘티스 교수가 그들을 돌아보았다. “네가 생각한 도서관인가?” 막시민은 특히 자신을 향한 질문임을 알아차리고 입맛을 쩝 다셨다. “이거 뭐, 도서관이 아니라 독서실 아닌가요?” 갑자기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와 셋 다 깜작 놀랐다. 레오멘티스 교수는 곧 웃음을 그쳤지만 조금 전과는 완연히 다른 표정이 되어 말했다. “아, 그래. 네 말이 맞을 수고 있을 거야. 여기에 책과 자료를 보는 사람은 있지만, 그 책과 자료는 아주 먼 곳에 있으니 말이야.” 여전히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자 막시민은 티치엘을 봤다. “좀 쉬운 말로 설명 좀 해봐.” “그러니까, 교수님, 제가 설명해도 될까요?”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티치엘이 말을 이었다. “포도원의 책이나 자료들은 다 이공간에 있어. 이공간이란 건, 우리 세계 위에 덧씌워져 있지만 특별한 힘이나 인연 없이는 볼 수도 손댈 수도 없는 곳이거든. 포도원이 쓰고 있는 이공간은 무한히 크고 넓기 때문에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있지만, 함부로 뭔가 넣었다간 영영 찾지 못하게 되어버리지. 안에는 정말 별별 것이 다 있어. 특히 죽은 사람들의 혼이 그곳에 머무는 경우가 많아.” “그 말은, 넌 그 안에 들어가 봤다는 거냐?” 티치엘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을 해야 하지만 원칙을 지킨다면 그렇게까지 위험하지는 않아. 물론 자주 가는 건 좋지 않대. 어쨌든 그게 가능하니까 옛날 위대한 마법사들이 이공간 안에 자료 보관소를 만들 수 있었지. 자료를 이공간에 넣으면 미리 정해 놓은 열쇠 주문 없이는 절대로 찾을 수가 없어. 우리 세계처럼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놓았다고 생각한 장소에 늘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거든. 어쨌든 활용할 수만 있다면 현실 세상의 어딘가에 감추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지.” 조슈아가 물었다. “그걸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 “물론이지. 그런데 자료를 넣는 것은 쉽지 않지만, 일단 넣은 자료를 꺼내 보는 것, 그러니까 열쇠 주문을 넘겨받은 사람이 일시적으로 접촉만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아. 그래서 이곳에 온 사람들은 모두 그 열쇠 주문을 갖고 자료를 꺼내어 보는 거야. 물론 허락된 것 외에는 접촉할 수가 없지. 각 방의 책상 서안에는 그걸 가능하게 하는 마법이 미리 걸려 있어.” “그럼 이 포도원에 있는 자료의 양이란 얼마나 많은 거야?” “그건 나도 몰라. 아마 아무도 모를 거야. 왜냐면 아주 옛날 마법사들이 넣은 자료들도 있는데 열쇠 주문을 잃어버려서, 또는 아무도 열쇠 주문을 시험해보지 못해서 못 꺼내본 것도 많거든. 또 아무 형태가 없는 자료들도 있는데 그런 건 꺼내 쓸 수 있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어. 그런 것들은 주로 가나폴리의 마법사들이 넣었대.” “가나폴리라고?” 너무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되어가자 조슈아는 천장을 올려다보고, 막시민은 바닥을 내려다봤다. “대체 언제부터 그 이공간에 도서관이 있었던 거야?” “아무도 모르지. 네냐플에서 포도원을 만들기 전엔 모두 잠들어 있던 자료거든. 가나폴리가 멸망하기 직전에 그곳에 있던 도서관의 자료들을 누군가가 급히 쓸어 넣은 것 같은 흔적도 있대. 이공간의 보관소를 처음 발견한 윌레이 리델은 가나폴리 멸망기로 자료에 접하는 것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아서 제자들에게까지 물려주었지만 아직까지도 밝혀진 것은 얼마 되지 않아. 많기도 하고 또 뒤죽박죽이어서 열쇠 주문 찾기가 무척 어렵거든. 아직껏 열쇠 주문을 못 찾은 자료가 찾아낸 자료의 수백 배는 넘을 것 같대.” 막시민이 손을 내저었다. “그만해라. 더 이상 상상이 안돼.” 돌아보니 레오멘티스 교수는 어쩐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교수도 쥬스피앙과는 방향이 다르지만 상당히 악취미를 가졌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순간이었다. 조슈아는 정중한 태도를 취했다. “교수님 말씀을 알겠고, 마법을 배워서 나갈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 마법을 배워선 안 되지. 마법은 포도원의 보관소처럼 인간의 인지범위를 넘어서는 광대한 세계고, 보통 인간이라면 일평생 노력해도 마법의 신전 섬돌을 닦는 정도가 고작이야. 만일 너처럼 빠르게 모든 것을 흡수한다면 순식간에 높은 경지에 오르긴 하겠지만 결과적으로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겠지.” 언젠가 조슈아 자신이 페리윙클의 펠 집정관에게 했던 이야기와도 비슷했다. 조슈아는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다. 그는 유령마저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의 정신이 얼마나 얇은 막으로 이뤄져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윽고 레오멘티스 교수는 티치엘을 돌아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티치엘, 네가 그 때문에 온 거로구나.” 티치엘은 치맛자락을 잡으며 가볍게 절을 했다. “부탁드려요, 교수님.” “네 아버지한테 늙었으면 얼른 죽으라고나 전해.” 티치엘은 그런 악담이 익숙한 듯 생긋 웃더니 두 소년에게 돌아섰다. “허락해 주셨어. 가자.” 그게 왜 허락이 되는 건지 영문을 몰랐지만 티치엘이 그렇게 말하는 이상 따질 필요는 전혀 없었다. 둘은 재빨리 인사를 하고 앞서 가는 티치엘을 따라 복도로 갔다. 막시민이 중얼거렸다. “관대한 교수님이구만. 데모닉, 인형, 영매, 그런 소릴 다 듣고도 네놈 말을 들어주다니. 보통 사람은 한 가지만 들어도 너 같은 놈하고 다시는 상종하고 싶지 않다고 할 텐데.” “네 말 들으니까 내가 누군가한테 호감을 얻는다는 건 굉장한 일이네.” “응. 소공작이라는 점 하나 갖고 수지를 맞추려 하지만 불행히도 쉽지 않지.” 티치엘은 왼쪽으로 돌기 시작하여 방 두 개를 거쳐 가더니 세 번째 방 앞에 섰다. “여길 쓰자.” 기본적으로 레오멘티스 교수의 방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새였다. 좌우의 책꽂이에는 책이 한 권도 없었다. 책상 위에 별이 반짝거리는 밤하늘 같은 검은 돌이 놓여 있었다. 모서리를 둥글게 깍은 직사각형이었고, 표면에 알 수 없는 글자가 몇 개 새겨져 있었다. 조슈아가 물었다. “여기서 얼마 동안 머물 수 있는 거지?” “열흘에 한 번씩 자신이 쓴 열쇠 주문들이 어떤 것들인지 검사받아야 해. 그리고 다시 이용 승인을 받아야 하고. 계속 승인이 떨어지기만 한다면 몇 년이고 지낼 수도 있어.” 막시민이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으며 말을 받았다. “방이라고 해 봐야 고작 열 개쯤인가 그렇던데, 그렇다면 들어올 사람이 잔뜩 기다리고 있어야 되는 것 아니냐? 빈방이 왜 이리 많아? 다들 책 따위에 관심이 없는 건가?” “승인이 쉽지 않다 그건가?” 조슈아의 말에 티치엘이 웃었다. “응. 바로 맞췄어.” 티치엘은 방 곳곳을 꼼꼼히 점검하고 서안도 살펴보더니 됐다는 듯 두 소년에게 돌아섰다. “그럼 알아둬야 할 점들을 말해줄게. 첫 번째로 조슈아는 이 서안을 쓸 수 없어. 이 서안으로 이공간의 보관소에 접속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손을 대서도 안 돼.”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막시민이 이죽거렸다. “그럼 난 되고?” “응. 되긴 하는데 막시민은 아마 쓸 수가 없을 거야.” “마법을 알아야만 쓸 수 있는 거냐? 그럼 어차피 조슈아가 건드릴 수도 없는 거 아니냐?” “마법은 몰라도 되는데 대부분이 고대어, 그러니까 가나폴리 말이거든.” “...그래 너 혼자 실컷 봐라.” 조슈아는 막시민을 향해 위로의 미소를 보내고는 티치엘을 보았다. “그래, 직접 자료를 볼 수 없는 건 좋은데, 그럼 여기서 지내는 동안 나한테 고대어를 좀 가르쳐 주면 안 될까? 그걸 모르니까 가끔 불편하더라고. 여기라면 공부할 책도 많을 테고.” 보통 수년씩 고생해서 배우는 고대어였지만 조슈아에게는 고작 몇십 일 공부할 거리일 뿐이었다. 그러나 티치엘은 고래를 저었다. “그건 안 돼.” 조슈아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가르치는 것이 수고스럽겠지만... 사실 별로 수고는 끼치지 않을 텐데.” 티치엘이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아니고, 조슈아가 마법을 배울 수 없다면 고대어도 역시 배워선 안 되거든. 고대어는 글자 자체가 이미 주문인 경우가 많아. 다시 말해 고대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저절로 주문을 익히게 된다는 거지. 그래서 내가 읽고서 하나하나 말해주는 수밖에 없어.” 조슈아는 맥없이 웃었다. “나한테 고대어를 가르치는 것보다 그쪽이 훨씬 더 번거롭겠는데.” 티치엘은 자신이 오히려 미안해하며 말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 누가 누구를 위로해야 할지 모를 상황이었으나, 쥬스피앙이 이걸 예상하고 티치엘을 보낸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고대어를 읽을 수 있고, 이 곳에 오래 머물며 일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달리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금지옥엽 아끼는 딸인 것을 생각하면 쌀쌀맞은 체해도 대단한 호의를 베푼 셈이었다. 이어 티치엘이 두 사람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책상 밑이었다. 거기에 바닥으로 난 문이 있었다. 문을 들어 올리고 내려가 보니 1인용 침대와 외짝 장롱뿐인 작은 방이 나왔다. 천장이 낮아서 흡사 굴 같은 느낌이었다. 소년들은 고개를 조금씩 숙여야 했다. “여기가 침실이야. 침대는 하나뿐이지만 침구를 좀 더 가져와서 바닥에 깔면 될 거야. 난 교수님 방에 가서 잘게.” 그 냉담한 교수와 함께 자겠다는 말을 들으니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넌 레오멘티스 교수님하고는 어떻게 아는 사이야?” “응, 이모님이야.” 티치엘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지만 두 소년은 당황해서 입을 딱 벌렸다. 잠시 후 가까스로 조슈아가 말을 이었다. “저, 저기, 네 이모님이라면, 그럼 쥬스피앙 씨하고는 처제 형부 간인데 어째서 쥬스피앙 씨는 자기 얘길 꺼내면 역효과라고 한 거야?” “게다가 얼른 죽으라는 소린 또 뭐냐?” 티치엘은 계면쩍은 미소를 지었다. “이모님은 엄마의 결혼을 반대하셨거든.” “어... 그거 반대도 보통 반대가 아니었나 보네.” “교수님은 엄마하고 아주 의가 좋으셨대. 우리 아빠가 저래 보여도 나이가 무척 많으시거든. 그래서 반대가 굉장했지.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더욱 그때 말렸어야 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 지금은 세상에서 우리 아빠를 제일 싫어하는 두 마법사 중 한 분이시지.” “그럼 다른 한 명은?” “악셀 레오멘티스라는 분이야.” “잠깐, 아까 그 교수하고 성이 같은데?” “외숙부님이거든.” 잠시 후 조슈아가 중얼거렸다. “너 참 힘들겠다.” “그렇진 않아. 두 분 다 나한텐 잘해주셔.” 막시민이 한쪽 손바닥을 펼치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너란 애는 친구나 선생으로 만나는 것보다 조카로 만나는 쪽이 훨씬 좋을 것 같긴 하군.” 뜻밖에 티치엘이 대꾸했다. “그건 너도 그래.” “내가 네 조카였으면 좋겠다고?” “응. 네가 내 조카라면 공부 안 하고 도망 다닐 때 꿀밤 한 대 때려줄 수 있을 텐데.” 티치엘이 그 장면을 상상해 보는 눈빛이어서 막시민은 슬슬 물러나더니 위로 올라가 버렸다. 조슈아가 웃으면서 티치엘에게 손짓했다. “올라가자. 지금 시작해도 되는 거야?” 둘 다 올라온 뒤 티치엘이 문을 닫고 서안 앞에 앉았다. 조슈아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먼저 인형에 대해서. 그 중에서도 본체와의 연결이 약해진 인형을 되살리는 방법. 그리고 그걸 하기 위해 필요한 마력의 원천. 그 원천으로 쓸 수 있는 마법 물건들. 그것들 가운데 가장 강한 악의 무구에 대해서.” 티치엘이 움직이려던 솜을 멈추고 조슈아를 돌아보았다. “조슈아, 마지막 것은 교수님께 말씀드렸던 이야기가 아닌데?” 조슈아는 미소를 보냈다. “내가 말한 순서를 봐. 다 관계가 되는 것들이라고. 어차피 열흘 뒤 승인을 받을 때면 교수님도 알게 될 테고.” 티치엘이 어개를 가볍게 움츠렸다. “그대로 승인받을 자신이 있다는 거야?” “아마도?” 티치엘은 더 묻지 않고 서안에 손을 얹었다. 서안에 새겨진 글자에서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허공에 수십 개의 빛나는 글자들이 떠올랐다. 모두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티치엘이 그 중 하나를 읽으며 말했다. “지금 말한 것들만으로 몇 달은 걸릴거야.” “그만큼은 걸리겠지. 괜찮아. 지내기에도 좋은 것 같아.” 잠시 후 조슈아는 혼자 인상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조금만 더 조용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티치엘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만하면 조용하잖아? 무슨 소리라도 들려?” 실제로 주위는 매우 조용했다. 그러나 조슈아는 한숨을 내쉬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응. 아주 시끄러워. 꼭 너희 집 같아.” 7 추적자들 “사냥꾼은 생각한다. 짐승이 가깝다고 그를 보고 있으리라고. 발자국은 어지럽고, 화살촉에는 피가 묻어 있다. 새끼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 짐승을 부른다. 둥지로 돌아갈 길목, 거기에 미끼를 놓아두자. 떨어뜨렸던 먹이를 보고 기뻐하겠지. 아픈 다리도 잊고 끌고 가려 하겠지. 그게 자신의 목을 조를 것도 모르고......” 실비엣은 조금 더듬거렸다. 눈앞의 문은 쇠로 되어 있었다. 흐릿한 빛에 눈이 익자 문 사방에 쇠 징이 박힌 것이 보였다. 아마도 나무로 만든 문에 앞뒤로 쇠를 입히고 박은 것이리라. 짐작되는 목적은 하나뿐이었다. 그 상상이 등줄기를 서늘하게 했다. 문고리는 닳아 희끄무레했다. 그녀를 데려온 자가 손을 내밀어 문고리를 돌렸다. 상상한 것보다 훨씬 큰 소리가 났다. 삐이이익. “모셔왔습니다, 소령님.” 방은 생각보다 넓었지만 창문이 없었다. 지하 방도 아닌데 왜 창을 내지 않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맞은편에 탁자 하나가 놓여 있고 그 너머에 왕국8군 군복은 입은 젊은 장교가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조금 늦게 고개를 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방으로 모시게 되어 죄송합니다.” 형식적인 경례에 이어 한 말이었다. 실비엣은 자신이 앉아야 할 것 같은 등받이가 낮은 초라한 의자를 보며 애써 불쾌한 표정을 끌어냈다. “죄송한 줄은 아는군요. 그렇다면 다른 곳을 찾았어야 할 것 아닌가요?” “군대 시설이 다 이렇습니다.” 장교는 자리에 도로 앉았다. 그리고 왜 않느냐는 표정으로 실비엣을 올려다봤다. “......” 앉는 수밖에 없었다. 치맛자락을 고르게 펴면서 실비엣은 살풍경한 분위기에 기가 눌리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았다. 장교는 이윽고 서류를 덮어놓더니 실비엣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소령 호웰 제나스입니다. 실비엣 드 아르장송 양이십니까?” “당신 부하가 날 데려왔다고요. 그래놓고 내가 누군지도 모른다는 건가요?” “군대에서는 말하는 방식이 다 이렇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실비엣은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일방적으로 양해하라고만 하면 전부란 말인가요? 난 몹시 기분이 나빠요. 이런 곳에 불려오게 된 것부터가 불편해요.” 제나스 소령은 표정도 변하지 않고 바로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기계적인 반응은 상대를 은근히 질리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실비엣은 말없이 인상만 찌푸렸다. “오늘 아르장송 양을 이곳으로 모신 것은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점들이 있어서입니다. 아시다시피 왕국8군은 존귀, 존엄하오신 국왕 폐하의 편익을 최우선으로 받들어 움직이고 있으므로 때로는 통상적 예의와 어긋나는 방식으로 직무를 수행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시는 방법에 있어 몇 가지 불편한 점이 있었더라도 존귀, 존엄하오신 국왕 폐하를 위한 일을 하신다는 마음으로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산책을 하고 돌아오다가 저택 앞에서 갑자기 붙들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오다시피 했는데도 그 문제를 더 해명할 마음은 없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반론할 수는 없었다. 그러려면 자신의 불편이 ‘존귀, 존엄하오신 국왕 폐하’의 편익보다 우선한다는 주장을 해야 했다. 실비엣이 대꾸를 하지 않자 제나스는 알아서 말을 이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낮게 콧방귀를 뀌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제나스는 서류 첫 장을 폈다. “그럼 묻겠습니다. 작년에, 아르장송 양은 그로메 학원을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무엇을 물을지, 오는 동안 궁리해보지 않은 것은 실수였다. 실비엣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그건 왜요?” 제나스가 갑자기 고개를 바로 쳐들었다.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이유는 묻지 마시기 바랍니다. 국왕 폐하의 비밀을 엄수해야 하는 까닭에 아무것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서서히 목이 타 왔다. 주위에는 군복 차림의 남자 셋이 더 있었으나 그들은 실비엣이 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키고 서 있을 뿐 차 한 잔이라도 갖다줄 분위기는 아니었다. 상대는 군인에 불과한 자였다. 겁내고 싶지 않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공간이었다. 드레스 소매를 감싼 프릴이 바르르 떨렸다. 실비엣은 강한 목소리를 흉내 냈다. “나도 나와 관련된 귀한 분들의 명예를 위해 비밀을 지킬 수 있어요.” “왕국 안에, 존귀, 존엄하오신 국왕 폐하보다 더 귀한 분이 있습니까?” “하지만 당신은......” 어차피 이유조차 말해주지 않겠다는 자였다. 그게 국왕 폐하의 시시콜콜한 궁금증에 불과할지라도 다른 귀족의 명예보다 별것 아니라고 주장할 순 없는 일이었다. 비교는 애초에 불가능했다. “좋아요. 이제부터 내가 여기서 하는 말은 모두 국왕 폐하를 위한 것이에요. 나중에 문제가 되더라도 난 당신의 말을 믿었기 때문일 뿐이니 책임은 당신이 져야 할 거예요. 그 점은 명심하시도록 해요.” “그러겠습니다.” 여전히 망설이는 기색조차 없었다. 실비엣은 입술을 얇게 물며 상대를 쏘아보았다. “내가 그로메 학원에 간 건 아마란스 백작 영애 분을 뵈려 했던 거예요. 널리 알릴만한 일은 아니지만, 영애께서는 사교계의 소식과 예법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세요. 그래서 백작부인께서 저한테 그분의 교양을 위해 도움을 청하셨던 거예요.” “이엔나 다 아마란스 양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럼 그 댁에 다른 영애라도 계시다는 말씀이신지?” 제나스는 실비엣의 신경질에도 끄덕하지 않았다. “얼마나 자주 갔습니까?”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가면 얼마 동안 머물렀습니까?” “기껏해야 한 시간이나 반 시간 정도예요. 이런 질문은 왜 하는 거죠?” “군대의 방식입니다. 아마란스 양은 당신이 찾아오는 걸 좋아했습니까?” 순간 이엔의 지루해하는 얼굴이 떠올랐지만 실비엣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건 당연한 것 아닌가요? 그분은 저한테 고마워하셨어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당신 쪽에서는 아마란스 양을 좋아하셨습니까?” “아아, 물론. 아마란스 영애께선 재치 있고 생기 넘치는 분이시니까.” “그럼 두 분은 아주 친해지셨겠군요.” “물론이에요.” “숨기는 것이 없을 정도로?” 실비엣은 의아한 눈초리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말은 무례한 것 아닌가요? 대체 왜 사사로운 관계까지 일일이 보고를 해야 하는 거죠?” 제나스는 눈을 내리깐 채 서류를 한 장 더 넘기며 말했다. “왜냐고 묻지 말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군인들은 두 번 말하게 하는 걸 싫어합니다.” “......” 책상 밑으로 꼭 쥔 실비엣의 손등에 파랗게 핏줄이 돋았다. 이 자의 모욕적인 태도를 기억해 둘 작정이었다. 집으로 돌아가게 되면 어떤 자인지 알아내어 가능하다면 쫓아내거나 좌천시켜버리고, 그게 안 되더라도 나쁜 소문을 한껏 퍼뜨려 줄 작정이었다. 첫 번째 경우가 가능할 가망은 높지 않았다. 왕국8군의 장교는 소속 상관 외에는 출신을 밝히지 않아도 되는 특권이 있어서 웬만한 권력자가 아니라면 외부에서 손대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르장송 양, 당신의 말대로라면 당신과 아마란스 양은 반년 정도 자주 만나오며 호의를 주고받았고, 매우 친해진 사이입니다. 당신은 아마란스 양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또 싫어하는지 잘 알게 되었을 겁니다. 그럼 말해 보십시오.” 상대를 어떻게 혼내줄까 궁리하느라 제나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던 실비엣은 이어진 질문에 두 번째로 눈을 크게 떴다. “이엔나 다 아마란스 양이 가문의 여름 성에 왜 ‘민중의 벗’의 조직원을 숨겨주고 있는 것 같습니까?” “지, 지, 지금 뭐라고 했죠?” 둘의 눈이 마주쳤다. 제나스를 실비엣의 눈동자가 떨렸다. 제나스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설마 모르고 계셨습니까?” “난......” 실비엣은 말을 다 잇지 못한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자 그때까지 무신경하게 서 있는 것처럼 보였던 다른 군인들이 재빨리 문을 막아섰다. 두 사람은 실비엣의 등 뒤로 다가왔다. 제나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대답하지 않고 가실 순 없습니다.” 민중의 벗. 그 이름은 낙인이었다. 올가미였다. 자칫 얽히는 순간 귀족도 순식간에 시궁창에 내동댕이쳐질 수 있는 이름이었다. 국왕의 원수이자 아노마라드의 대적인 그들과 연루되었다는 아주 작은 증거도 용서될 수 없는 죄였다. 간부급의 거물이든 쪽지를 배달했을 뿐인 꼬마든 마찬가지였다. 별조차도 같았다. 다만 간부급은 죽기 전에 정보를 캐내기 위해 고문을 한다는 점이 다를 뿐. “난, 난, 아무것도 몰라요. 생각도 못했어요. 증거가 있나요? 왜 나한테 이러는 거죠? 아마란스 양한테 혐의점이 있으면 그 아가씨를 데려오면 되잖아요!” 왕국8군은 누구든 조사할 수 있습니다.“ 제나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희의 조사법은 이렇습니다. 순순히 협조하지 않으면, 일단 혐의가 있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실비엣의 눈에 핏발이 섰다. 제나스는 서류 한구석을 찾아내어 손끝으로 짚더니 말을 이었다. “작년 한 해, 이곳에 끌려와 고문실로 보내진 민중의 벗 연루자 103명입니다. 그중에는 귀족도 있죠.” “......” “물론 고문실을 살아서 빠져나간 자는 거의 없습니다.” 실비엣은 이제 누가 보아도 완연히 떨고 있었다. 냉담하게 바라보는 제나스의 눈을 피하며 그녀는 목소리를 짜냈다. “...협조하겠어요.” “좋습니다. 앉으시죠. 그럼 조금 전 질문부터 대답하실까요?” 제나스가 먼저 앉고, 실비엣이 따라 앉으며 대답했다. “몰랐어요. 그런 말조차 지금 처음 들었어요.” “아마란스 양의 방에 드나들며 수상한 자를 보았던 일은 없습니까?” 실비엣은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하인 말고는 그 방에서 다른 사람과 마주친 일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 방에 누가 숨어 있었나요?” 제나스는 실비엣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란스 양이 혹 불온한 말을 하지는 않던가요? 왕가나 존귀, 존엄하오신 국왕 폐하에 대해서라든가.” “전혀... 사실 그녀는 나와 그다지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내가 얘기할 때도 딴 생각에 잠겨 있을 때가 많았고요. 우리가 친해졌다는 말은 그냥... 조금 과장이었어요. 취향이 많이 달라서......” 사실을 말하는데도 제나스의 표정은 그리 납득하는 것 같지 않았다. 조금 전 보였던 허세가 후회스러웠다. 이제 와서 발뺌하고 싶어 말을 바꾸는 것으로 보일 것이 뻔했다. “그러면 아마란스 양의 행동에서 미심쩍은 점을 느낀 일은 없습니까? 또는 수상한 문서나 물건을 본 일은 없습니까?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실비엣은 생각해보려 했다. 아니, 실은 생각하기도 전에 한 가지 사실이 머릿속을 지배해버렸다. 작년 겨울, 빈방에서 이엔이 오기를 기다리던 중 누군가가 배달해 왔던 커다란 꾸러미는 한구석이 찢어져 있었다. 아무 할 일이 없었던 탓일까. 꾸러미 속에 든 그림을 보려고 포장을 조금 더 찢어냈던 것은. 제나스는 실비엣의 표정을 흘끔 보더니 낮게 말했다. “뭔가 떠오르십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실비엣이 그림을 가져온 심부름꾼을 불러 세워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물었던 것은 단순한 흥미 탓이 아니었다. 화폭에 그려진 소녀를 그녀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만큼 잘 그린 그림이었다. 약 7년 전, 공화파가 장악한 켈티카와 지방 간의 소통이 단절된 가운데 귀족들은 여러 곳에서 각기 사교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중서부 지방의 귀족들은 죽은 국왕 엘반트 3세의 고모인 로엔로반트 백작부인의 성을 중심으로 자주 모였다. 그곳을 드나들던 사람들이라면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할 소년이 있었다. 통칭 ‘아미센 대공비의 소년’. 대공비가 부르던 이름으로는 ‘요제프’. 그때는 손에 넣겠다는 생각을 감히 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죽은 아미센 대공은 엘반트 3세의 작은할아버지였다. 그 시절 귀족들 가운데 서열을 가린다면 첫 줄에 들어갈 가문이었다. 대공비는 당시 예순이 넘었지만 여전히 옛날 사교계의 여왕이었던 시절의 위용을 간직한 인물이었다. 그 시절 귀족들 사이에서는 시동을 잠시 바꾸어 데리고 있는 것이 유행이었으나, 실비엣의 집안인 아르장송 자작가는 아미센 대공비에게 감히 그런 제안을 할 수도 없는 위치였다. ‘요제프’가 사라졌을 때 아미센 대공비는 표면적으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손을 썼는지는 알 수 없었다. 실비엣은 몹시 궁금했으나 참을 도리밖에 없었다. 몇 해가 지나 그녀의 이모인 벨노어 백작부인의 성에서 란지에 로젠크란츠라고 불리게 된 그와 다시 마주치기까지는. 이번에는 손이 닿을 듯한 곳이었다. 아픈 누이동생이 약점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그러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다시 실비엣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놓쳐버렸음을 알았을 때 실비엣은 몹시 분했다. 다시는 그렇듯 유리한 곳에서 우연히 마주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운은 한 번 더 그녀의 편이었다. 이엔의 방에서 란즈미의 그림을 보았을 때 실비엣은 이번만은 실패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그녀가 생각하는 란지에는 가문의 세가 약한 실비엣이 켈티카 사교계의 총아로 발돋움할 좋은 도구였다. 마음에 걸리는 아미센 대공비는 이미 죽고 없었다. 아직 란지에의 행방을 알아내지는 못했다. 사람을 사서 란즈미가 사는 나탕트 거리의 과자점을 감시하도록 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하지만 누이동생이 그곳에 있는 한 언젠가는 나타날 것이라 생각했다. 성급하게 행동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란즈미를 납치해 감금하는 쪽이 효과가 빠를 테지만, 실비엣은 귀족 아가씨일 뿐 그런 일을 믿고 시킬 만한 아랫사람은 데리고 있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할 만한 사안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알 수 있었다. 제나스가 말하는 ‘민중의 벗 조직원’은 란지에를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었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실비엣이 이엔과 란지에의 관계를 알아낸 건 우연일 뿐이었다. 이엔도 란지에도 그녀가 알아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왕국8군은 그들을 조사하려 했지만 란지에는 사라졌고 이엔은 아마란스 백작의 딸이니 함부로 이런 곳으로 불러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이엔에게 드나든 자신을 붙들고 뭔가 알아내려고 이러는 것이 뻔하다. 왜 이엔이 란지에를 알고 있을까, 그 점을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건 실수였다. 백작 영애인 이엔은 충분히 지위가 높았고, 사교계에 관심도 없어 보였으므로 실비엣과 같은 목적은 아닐 터였다. 실비엣이 본 이엔이라면 하인과도 친구가 될 수 있을 듯했으니 어쩌면 학원에서 만난 친구 정도로...... 설마, 학원을 같이 다녔던 건가? 실비엣이 조금 긴 생각을 하는 동안 제나스는 실비엣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실비엣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주시하다가 적절한 시점에 입을 열었다. “그럼 말씀해 주실까요?” 실비엣은 하마터면 생각한 것을 입 밖에 낼 뻔했다. 그러나 내면에 감춰진 음험한 침착성이 얇은 입술을 다물게 했다. 지름 란즈미, 그리고 란지에의 이야기를 한다면 왕국8군은 손쉽게 란즈미를 붙잡아갈 테고 그러면 란지에 또한 나타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란지에가 정말로 민중의 벗과 연루되었든 아니었든 의심을 받기 시작한 이상 제나스가 말한 대로 고문실에 들어가는 것 말고는 다른 미래가 없을 테고, 그걸 자신이 원치 않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게 손쉽게 내줄 순 없었다. 그동안 들인 공이 아까워서라도... 아니, 실은 그보다 란지에를 고문실에 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좀 더 생각해 보면 실비엣 자신은 위험할 것이 없었다. 이들이 아마란스 백작가의 이름에 눌려 이엔을 조사하지 못하는 거라면, 이엔을 찾아갔다는 이유로 실비엣을 잡아갈 수 있겠는가? 또한 자신이 그 그림을 보지 못한 것으로 한들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건 순전히 우연이었을 뿐이었다. 정신을 차리자 제나스와 눈이 마주쳤다. 실비엣은 그가 자신의 표정을 관찰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만큼 오래 생각하고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한다면 의심을 살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실비엣은 의식적으로 머뭇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남들이 듣는 것이 두렵다는 것처럼. “다른 데 알려져서는 안 되는 이야기라 조심스럽네요. 아마란스 영애께서는 조금 특이한 분이시죠.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영식(令息)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자유로운 옷차림과 행동을 즐기시거든요. 처음엔 놀랐지만 감히 충고할 입장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모르는 체하기로 마음먹었지요. 그랬는데... 그게 참......” 실비엣은 놀랍게도 얼굴까지 붉혔다. “영애께서 어느 날 저한테 말씀하시길, 자신은 스스로를 남자로 생각한다는 거예요. 남자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것이 스스럼없고 편한데다가...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여자한테 반한 적이 있다고까지 하는 데는 대체 뭐라고 대꾸해야 할이지 몰라서......” 물론 이엔이 그런 말을 했을 리 없었다. 실비엣은 스스로 충격적으로 느껴질 법한 이야기를 계속 지어냈다. “...이런 이야기가 알려지면 아마란스 백작가의 명예에 크게 누가 된다는 것을 아실 거예요. 절대로 비밀을 지켜 주셔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도 알려져서는 안 돼요. 잘 아시겠지요?” “......” 제나스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실비엣은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어느 정도는 진심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녀의 거짓말을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굉장히 궁금했다. “그럼 이제 가도 되나요?” 실비엣이 밖으로 나오자 연병장에 오후 햇살이 불그레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수십의 군인이 열을 지어 지나갔다. 연병장을 가로질러 높다란 담 밖으로 나올 때까지 그녀는 마음을 놓지 못했다. 군인 둘이 형식적으로 경례를 하더니 문을 쾅 닫았다. 혼자 남은 그녀는 돌아서서 담벼락을 올려다보았다. 지나치며 무심히 본 일이 있는 곳이었지만, 오늘부터 이곳에 대한 인식은 완전히 바뀌었다. 집까지 바래다줄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도 실비엣 자신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들과 한 순간이라도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뒤돌아 걷는 동안 실비엣의 머릿속에 차차 새로운 계획이 자리를 잡았다. 오늘의 일은 전화위복이 될 수 있었다. 왕국8군은 실비엣에서 정보를 캐내려 했지만 그와 함께 정보를 준 셈도 되었다. 그곳에 란지에가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을 그 자가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먼저 움직이기만 하면 되었다. 저 자는 위세 당당한 아마란스 가에 찾아가 백작 영애인 이엔을 다그칠 수 없겠지만, 자신은 자연스럽게 그 집을 찾아갈 수 있었다. 이제 그녀가 쥔 약점은 두 개였다. 여름 볕이 포도원을 감쌌다. 열람실을 메운 두꺼운 책 대략 쉰 권, 일지 열아홉 권, 뱀가죽으로 만든 괴이한 책 두 권, 지도 네 장, 그림 여덟 장, 백여 장에 당하는 두루마리 뭉치, 크고 작은 유물 십여 가지, 글귀를 새긴 석판 십여 개, 기왓장 일곱 장 틈에 사람도 셋 끼어 있었다. 잘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책상에 붙어 앉은 티치엘은 커다란 책을 한 장 넘기기 위해 사방에 쌓인 잡동사니를 차근차근 밀어내는 중이었다. 조슈아는 그런 책 스무 권이 쌓인 더미에서 맨 밑의 것을 꺼내려고 기를 썼지만 결국 하나씩 들어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던 둘은 어쩐지 방구석을 쳐다보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혀 서로를 향해 눈을 가늘게 떠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돌아보았다. “편하겠다.” “배에 책을 열 권쯤 얹어줄까 보다.” “그러면 죽어.” 막시민은 긴 의자에 드러누워 티치엘이 준 숙제거리를 베개 삼아 잘 자고 있었다. 티치엘이 막시민의 자세를 손가락질했다. “그런데 목 안 아플까?” 종이뭉치를 둘둘 말아 목이 받친 탓에 고개가 젖혀져 입도 벌리고 있었으므로 객관적으로 그리 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조슈아는 한 손을 뻗어 펄럭펄럭 내저으며 말했다. “사소한 불편으로는 감히 깨울 수 없지. 해먹으로 둘둘 감아 매달기라도 하기 전에는 절대로 잘 자거든.” “어쩐지 깨우고 싶다.” 티치엘이 평소처럼 해맑은 표정으로 말하며 책상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옆에 쌓여 있던 두루마리 더미가 우수수 무너져 내렸다. 티치엘이 책과 일지들을 타넘으며 막시민에게 다가가는 동안 조슈아는 기지개를 한 번 켰다. 아침에 청소해도 저녁이 되면 종이 부서진 먼지가 하얗게 앉는 지경이라 창은 일찌감치 활짝 열어 놓았다. 새 지저귐, 바람에 나뭇잎 사각대는 소리, 아련히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가 한가롭게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그만이 들을수 있는 난잡한 속삭임도 맴돌았다. “진짜 안 깨네.” 돌아본 조슈아는 눈을 크게 떴다가 곧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막시민은 누워 있던 의자에서 한 뼘가량 떨어진 허공에 떠 있었다. 의자 바닥과 가장 가까운 것은 머리였고, 발은 천장을 걷어차기 직전의 자세였다. 그러나 깨어날 낌새는 전혀 없었다. 티치엘이 한숨을 쉬더니 손을 살살 허공에 내저었다. 막시민은 다시 의자에 내려와 잘 자게 되었다. 조슈아가 빙그레 웃었다. “넌 정말 마법사구나.” 칭찬을 들을 때면 티치엘은 뺨이 발그래해졌다. “진짜 마법사가 되려면 아직 멀었는걸.” “진짜 마법사는 언제쯤 되는 건데?” “아빠 말씀으로는 한 백 살쯤은 먹어야 된대.” “......” 티치엘이 책상 앞으로 돌아오자 조슈아도 다시 책으로 된 탑 옮겨 쌓기에 돌입했다. 두 사람이 고작 두어 주 만에 만들어 놓은 난장판을 들여다보러 레오멘티스 교수가 직접 오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들이 자는 동안 이미 들여다보았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모르는 체하고 있었다. 조슈아가 예상한 대로 승인도 쉽게 해 주었다. 마치 그들이 이런 짓을 벌이라고 짐작하기라고 한 것 같았다. 또는 쥬스피앙의 의도를 읽었거나. “여기 이 문구가 이해가 안 간댔지? 마법의 근원과 태양에 대한 부분. 참고할 것을 찾아볼게.” “응. 부탁해.” 그동안 지내보니 둘은 꽤 잘 맞는 연구 파트너였다. 티치엘은 나이든 마법사들도 종종 더듬거리는 고대어를 막힘없이 읽어줬고, 조슈아는 그걸 듣기만 하고도 완벽히 기억했다. 티치엘은 궁금한 것을 대충 넘어가는 성미가 아니었고, 조슈아는 알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완전히 흡수해버렸다. 무엇보다도 둘이 서로를 질투하는 성미가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공부고 뭐고 되지 않았을 것이다. 티치엘이 서안 위로 떠오른 글자를 하나 골라 읽자 글자들이 휙 돌면서 종류가 변했다. 때로 글자들은 자기들끼리 자리를 바꾸거나 빙글빙글 돌기도 했다. 이윽고 서안에서 푸르스름한 광채가 서서히 번지더니 티치엘의 뺨을 물들였다. 잠시 후 그녀는 서안 위 허공에서 석판을 하나 꺼냈다. 깨알 같은 글귀가 어떻게 새겼는지 신기할 정도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가 조금 훑어보더니 말했다. “이 기록도 앞부분이 없네.” “어쨌든 한번 읽어 봐.” “...의 힘을 불어넣은 자가 피와 살을 빚어 왕을 흉내 내니... 여기도 지워졌네. ...앞에 부복하여 내가 참 재주를 가졌노라 하니라. 죽은 자가 일어나지 못하며 죽은 자와 같은 자도 다시없나니 같은 자가 두 번 살아감은 질서의 그물코를 벗어나려 함이므로 어부가 그를 큰 바다로 보내어 두 번 다시 받아들이지 아니하니라. 대저 힘은, 그러니까 마법 얘기야, 마법은 농부와 어부와 사냥꾼의 기술인지라 갈지 아니한 밭과 출어(出漁)치 아니한 바다와 수렵치 아니한 들은 달여왕의 것인 까닭이니라.” 티치엘이 머릿속으로 번역을 하느라 말을 멈춘 참이었다. 갑자기 막시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티치엘, 뭐 하나만 묻자.” 돌아보니 막시민이 벌떡 일어난 자세로 책상다리를 하고 엉킨 뒷머리를 손가락으로 풀면서 다른 손으로는 안경을 들고 돌리고 있었다. 조슈아가 말했다. “선지자다운 자세네. 꿈에서 계시라도 받았어?” 막시민은 대꾸 없이 일어나 방 안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둘이 눈으로 그의 움직임을 쫓아갔다. 이윽고 그는 벽에 기대어 서더니 검지를 세워들며 티치엘을 봤다. “지난번에 네가 승인을 받을 때마다 사용한 열쇠 주문을 검사받는다고 하지 않았냐? 그 말은 뭐든 보고 나면 저절로 기록이 남는다는 뜻인가?” “응.” “그럼 지금까지 우리가 찾은 기록을 과거에 읽은 사람들이 누군지 알 수 있냐? 열람 기록 같은 것 말이야.”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한두 명이 아닐 거야. 수백 년 전부터 있던 거니까. 찾으려는 사람의 이름을 알아?” 조슈아가 대신 말했다. “애니 형 말이지? 애니스탄 뵐프.” 막시민이 기대어 섰던 벽에서 등을 뗐다. “조군, 너 그 사람과 아는 사이였냐?” “옛날에 만난 일이 있어. 어렸을 때. 매형의 친구로.” 조슈아가 애니스탄을 만난 것은 막시민을 알기도 전이었다. 비취반지 성에서 테오를 찾아왔던 애니스탄과 우연히 마주쳤었다. 그 후로 다시는 본 일이 없었다. 조슈아가 코츠볼트로 가고, 또 하이아칸으로 가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이에 애니스탄은 성에 드나들었고 테오를 위해 인형을 만들어냈다. 인형이 성에 살던 동안 애니스탄도 성에서 지냈던 모양이지만 그즈음부터 그는 사람들에게 본명을 말해주지 않았다. 조슈아가 기억하는 애니스탄의 모습과 성 사람들이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많이 달랐다. “노을섬 갔을 때 묘지에서 ‘뵐프’라는 이름을 보고 그가 생각났었어. 하지만 굳이 섬 출신이리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지. 그땐 그가 인형을 만들었다는 것도 몰랐고. 성에 와서 ‘애니’라는 이름을 듣기 전까지는.” “잠깐, 난 묘지에 뭐라고 쓰여 있었든 기억이 안 나지만, 그 자가 노을섬 출신이란 말이냐?”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확실히 커. 애니스탄 뵐프가 만든 인형은 쥬스피앙 씨조차도 만들 수 없는 거였잖아. 그가 네냐플 출신 마법사이긴 하지만 쥬스피앙 씨보다 훌륭한 마법사는 아니었을 거야. 아마도 그는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어. 바로 창 조각이야. 우리로서는 어디서 얻었을지 상상도 안 되는 물건을 대체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걸까? 더구나 그는 노을섬에도 찾아갔었지. 노을섬에 마력의 원천이 되는 악의 무구가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알려면 노을섬 사람이라는 설명이 가장 가까워.” “그 섬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잖냐. 그러면 페리윙클에 옮겨와 산다던 사람들의 후예일지도 모르겠군.” “그가 언제, 어떤 식으로 대륙에 왔는지는 알 수 없겠지. 하지만 그의 조상은 적어도 노을섬 출신일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싶어.” 그동안 티치엘은 열람 기록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애니스탄 뵐프... 아, 그런 사람이 있어. 이 기록도 봤고, 음... 아까 본 것도 봤고... 저것도... 어쩐지 찾아본 순서도 나하고 비슷한데?” “기록을 본 날짜도 알 수 있냐? 아무 거나.” “음... 지금까지 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 983년... 7월 20일인데?” 그 말에 둘 다 어리둥절해졌다. 조슈아가 막시민을 돌아봤다. “그때라면 매형과 누나가 갓 결혼해서 하이아칸에서 살 때인데... 그때 이미 인형을 연구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잖아?” “그 자가 네 매형의 의뢰도 없이 인형 연구에 들어갔을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낮겠지? 쥬스피앙 씨의 말에 따르면 이건 금지된 기술이니까 말이야.” “아까 내가 그 자를 만났다던 때가 그해 3월이야.” 조슈아는 생각에 잠겼다. “나와 마주쳤던 날, 그가 매형과 무언가 이야기를 했을 수 있을 거야.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그가 성에 온 건 그날이 처음이었거든. 그가 간 다음에 집사가 불평을 했던 기억이 나. 감히 성에 친구 따위를 불러들인다고 말이야. 그때만 해도 매형은 종종 오래된 고용인들한테 식객 취급을 당했어. 어머니가 매형을 싫어하다보니까. 그러니 그때가 처음이었을 가능성이 커.” “그럼 그때부터 인형을 연구했다는 건 대체 본체 재료를 뭘로 할 작정이었던 거야? 그 땐 본체인지 뭔지 그런 게 필요한 줄도 몰랐던 건가?” 본체의 재료 이야기가 나오자 조슈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막시민은 눈치 챘으면서도 모르는 체하며 조슈아에게 물었다. “넌 지금껏 본체의 재료가 뭐라고 보고 있었냐?” “......” “네가 네 매형과 얘기해본 결과 너희 누나가 아닌 건 확실하다고 했잖아. 안 그래? 그 외의 가능성은 지난번에 다 따져봤고. 그럼 남은 건 뭐라고 보냐? 아니지, 누구라고 보냐?” “하나뿐이지.” “네 생각도 나하고 같다 이거지? 그럼 거기에 그 자의 흔적도 분명히 있겠지?” 막시민은 티치엘을 향해 몸을 돌렸다. “미안하지만, 나 가봐야 될 데가 생겼다. 절대 공부하기 싫어서 도망가는 거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마. 좀 많이 걸릴 테니 기다리지 말고.” “어디 가는데?” “하이아칸.” 8 황홀한 독 “그 독은 황홀한 포도주 빛이지. 춤추는 무희의 눈이지. 미녀의 심장에 흐르는 핏빛이지. 그 안에 녹여 넣은 것은 흉측한 독충의 체액이 아니라 장미의 피와 나비의 침 그 맛은 너무나 감미로워서 입술을 대면 멈출 수가 없고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황홀하다지.“ 8월에 접어든 정원은 장미로 울긋불긋했다. 별장 골짜기를 내려다보고 선 구릉지의 성에 창밖을 바라보는 아가씨가 있었다. 우아한 드레스도, 바람에 날리는 긴 머리채도 없이. 백작 영애 이엔나가 가진 거라고는 귓가에서 팔락거리는 짤막한 머리와 날아갈세라 한 손으로 누른 둥근 모자뿐이었다. 어제 떠난 친구가 갔을 법한 곳을 눈으로 더듬어보는 중이었다. 길은 구불구불 이어지다가 푸른 둔덕 뒤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을 때는 아득히 먼 평야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럴 때면 자신의 신세가 조롱에 갇힌 새처럼 느껴졌다. 물론 이엔은 다른 귀족 집안 아가씨들에 비해 자유롭게 지내는 편이었다. 부모가 그녀의 특이한 성격에 길들어 버렸고 특히 아버지가 웬만한 귀족 청년들보다 식견이 밝은 딸을 신임하고 사랑하는지라 외출도, 초대도, 모임 참석도, 큰 문제만 일으키지 않으면 마음대로였다. 그렇다 해도 친구를 따라가 티아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시가전에 가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자를 누르지 않은 손으로 햇빛을 가려 가며 보이지 않을 곳까지 길을 더듬어 보던 이엔은 이윽고 풀이 죽었다. 망명 의회에서는 귀족 출신 조직원들이 함부로 정체를 드러내거나 가문에서 나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정책이 일리 있다는 것을 이엔도 알고 있었다. 숨은 공화파 귀족들의 힘이 없었다면 나이트워크만으로 이렇듯 빨리 새로운 조직을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직은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친구가 급하게 떠나게 된 사정에는 일말의 아쉬움이 남았다. 어제 파티에서 칼츠 가문의 후계자가 데려온 낯선 소년을 만나지만 않았더라면 조금쯤은 더 머물렀을 터였다. 비록 옛 친구였다고 했지만 정체가 드러난 이상 한시라도 머무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나자 이엔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가씨, 편지가 왔어요.” “편자? 누가?” “심부름꾼이 왔다가 금방 갔나 봐요.” 시녀가 건네 준 봉투는 귀족들이 쓰는 두껍고 질 좋은 봉투였다. 그런데 봉랍에 가문의 인장이 없었다. 이엔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짓으로 시녀를 물러가게 했다. 봉투를 뜯자 짤막한 편지가 나왔다. 읽어 내려가던 이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엔나 다 아마란스 좌하(座下), 각설하옵고, 내일 당신의 친구이자 얼마 전까지 당신의 성에서 지낸 란지에 로젠크란츠 씨와 만날 생각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그도 알고 있으니 구구히 설명하는 수고는 더실 듯합니다. 만일 로젠크란츠 씨가 거절하거든, 나탕트 7번가에 있는 그의 소중한 누이동생의 안전이 내 손에 있음을 알려주십시오. 또한, 왕국8군이 개입하게 된다면 그의 일에 협조하고 은신처를 제공한 당신 또한 무사할 순 없으리란 점을 주지시키십시오. 내일 새벽 1시. 뮈제타 남작의 여름 별장입니다. 원하신다면 함께 오셔도 좋지만, 그 외에 다른 동행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총총. 실비엣 아르장송 뮈제타 남작의 별장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여름 별장이 많이 모인 이 일대에는 언제고 주인 없는 집이 몇 군데씩 있었다. 원칙대로라면 관리인이 성실하지 못한 경우도 있고, 집주인의 사정이 좋을 때 호기롭게 별장을 지었다가 금세 돈이 말라 방치하다시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뮈제타 남작의 집은 그중 후자인 것처럼 보였다. 정문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었지만 담만 넘어가면 아무도 상관하는 사람이 없었다. 관리인은 한 해 이상 없었던 듯했고, 비바람에 얼룩진 외벽은 제 빛은 잃은 지 오래였다. 여름인데도 안뜰에는 쓸지 않은 낙엽이 수북했다. 이엔은 현관에 선 채로 주위를 살폈다. 아직 사람이 온 기색은 없었다. 대리석 바닥의 먼지 속에는 자신이 낸 발자국뿐이었다. 현관문을 밀어보자 쉽사리 열렸다. 걸쇠가 망가진 모양이었다. 조심스레 안을 들여다보았다. 불기 하나 없는 을씨년스러운 응접실이 그녀를 오히려 들여다보는 듯해 이엔은 문을 놓고 도로 뜰로 나왔다. 흰구름이 드문드문 낀 밤하늘이었다. 구름을 막 벗어난 달이 정원을 은청빛으로 감쌌다. 나뒹구는 낙엽과 돌들, 말라버린 연못, 싸늘한 문창살, 바람에 흔들거리는 창문들을. 란지에가 올까. 어제 즉각 연락을 취한 것은 이엔 자신이었다. 답은 오지 않았지만 란즈미의 일이 걸려 있는데 외면할 란지에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엔은 란지에에게 비법이 있길 바랐다. 자신이 모르는 어떤 신비로운 방법이 있어 까마득히 먼 켈티카에 있는 란즈미를 무사히 빼냈길 바랐다. 하루 사이에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이엔 자신도 위협을 받은 셈이었다. 어쩌면 자신은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는 쪽이 좋았을지도 몰랐다. 조금이라도 발뺌을 해볼 참이라면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이엔은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이엔에게 실비엣은 어머니가 보낸 귀찮은 아가씨일 뿐이었다. 고위 귀족에게 환심을 사고 싶어 자존심도 굽히고 발품 파는 하급 귀족의 딸이라는 인상분이었다. 대화 내용도 너무나 속물적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여러 번 봤으면서도 진지한 대화를 꺼내볼 엄두도 못 냈다. 하녀도 사람이라는 것조차 납득시키기 힘든 부류라고 생각했다. 그런 실비엣이 상상도 못했던 편지를 보냈다. 대체 실비엣과 란지에는 무슨 관계일까? 조금도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신분이나 사상의 차이를 떠나 인간의 범주란 것이 있다고 할 때조차 가장 먼 곳에 자리해야 할 두 사람이 대체 어떻게 알게 됐을까? 또 실비엣은 민중의 벗의 일을 어떻게 알아냈을까? 결국 이 자리에 오지 않았더라도 관련되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을 거라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며 현관 쪽으로 돌아선 참이었다. 이엔의 움직임이 멎었다. “안녕하세요, 아마란스 양.” 현관 옆 기둥을 등지고 서 있었다. 이런 곳에 오면서도 하늘거리는 검은 드레스 차림이었다. 뱀처럼 소리 없이 나타나, 생각을 거듭하는 이엔을 빤히 보고 있었다. “......” 막상 만나자 무슨 말을 꺼내면 좋을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은 저 여자에 대해 너무 몰랐다. “아마란스 양을 자주 뵈어 왔지만 오늘이 가장 저를 환영해 주시는 표정이네요.” 이엔은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만큼 당신한테 관심을 가져 본 날이 없었어요.” “내가 아마란스 양에게 유일하게 호감을 가졌던 점이 있다면, 바로 오늘 같은 상황에 지금처럼 말한다는 거죠.” 실비엣은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반쯤 열린 문을 당겼다. “뭐 대단한 사람이 올 거라고, 귀족인 우리가 뜰에 서서 기다릴 필요는 없잖아요? 들어가실까요? 난 일행이 없어요.” 그 말을 믿어도 좋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결과가 달라질 건 없었다. 실비엣은 란즈미의 안전을 쥐고 있는 것이다. 이엔이 고개를 끄덕이자 실비엣이 먼저 문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움직여가면서 몇 개인가의 촛대에 차례로 불이 밝혀지는 것이 보였다. 이엔도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웠던 것뿐, 집안은 그리 많이 낡아 있지 않았다. 촛대를 든 실비엣을 뒤따라 2층에 올랐다. 2층에는 방이 세 개뿐이었다. 문이 반쯤 열린 욕실을 지나치자 몇 년 전에 유행했던 나무줄기 장식의 욕조가 푸르스름한 달빛에 잠겨있는 것이 보였다. 표면은 하얗게 말라 있었다. 서재처럼 보이는 널찍한 거실에 책은 거의 없었다. 방 안쪽은 당구대가 차지하고 있었고 당구대 뒤에는 돌려놓은 긴 의자 하나뿐이었다. 남은 공간의 중앙을 차지한 브리지 테이블을 둘러싸고 큼직한 보랏빛 안락의자가 다섯 개 놓여 있었다. 실비엣은 남의 집인데도 여주인처럼 걸어 들어가 테이블 위에 초를 내려놓고 손짓했다. “앉으세요.” 실비엣은 문을 등진 의자에 앉았고, 이엔은 왼쪽에 앉았다. 이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르장송 양, 당신은 그러니까......” 실비엣은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나요? 난 당신이 보아온 것과 같은 보통 여자일 뿐이에요.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려고요? 다 우연이죠. 다 당신들이 부주의해서죠. 민중의 벗의 비밀이니 조직이니 하는 것, 생각보다 별거 아니네요. 나 같은 여자한테도 걸리고.” 이엔은 화를 내지 않고 실비엣을 똑바로 보았다. “당신이 어떻게 눈치 챘을지 생각해 봤어요.” “그래서 알아냈어요?” “자주 찾아온다고 내 방에 드나들도록 내버려 둔 것이 실수였죠. 어머니의 이름을 빌린 건 진짜였더군요. 뒤늦은 깨달음이겠지만, 처음에 위험하지 않았던 자였다 해도 나중에 위험한 자로 변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됐어요.” 실비엣은 박수치는 시늉을 해 보였다. “훌륭한 깨달음이네요. 다음에는 꼭 써먹으시길 바랄게요.” “지금 당신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자니 한 가지를 더 알겠네요.” “뭐죠?” “본성을 숨기는 건 힘들잖아요? 그동안 내 앞에서 상냥한 체하느라 굉장히 고생스러웠겠어요.” 실비엣이 입술을 오므리더니 짧게 콧김 소리를 냈다. “날 비웃어서 화나게 만들면 좋은 일이 있을까요? 이제 난 당신 비위를 맞출 필요가 없다고요, 잘나신 백작 영애님, 당신 부모님이 이 소식을 듣고 쓰러지시지나 않길 빌겠어요.” 이엔은 오랫동안 실비엣을 보다가 대답했다. “이런 상황은 언제고 예상하고 있었어요. 계획했던 것보다 빨리 찾아온 것뿐이지.” “아하, 그래서 당신이 훌쩍 떠나고 난 뒤 백작 가문이 쑥대밭이 되는 건 아무 거리낌이 없고 말이죠?” 이엔은 오히려 측은한 눈빛으로 실비엣을 보았다. “당신 같은 사람에게 말한들 이해할 것 같지 않군요. 언젠가 그런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날이 오길 진심으로 빌겠어요.” 실비엣은 손에 부채가 없는데도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런 날은 절대로 안 온다는 걸 잘 알고 있지 않나요?” 어둠 속에서 대답이 들렸다. “당신의 머릿속에 든 세상은 그 속에서만 영원불멸할 거야.” 실비엣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어둠 속을 쏘아보았다. 당구대 너머 캄캄한 구석에, 실루엣뿐이던 긴 의자에서 누워 있던 한 사람이 천천히 일어났다. “......” 검은 망토 차림의 란지에가 걸어 나오는 동안 실비엣은 한 마디도 않고 그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4년 만이었다. 란지에는 키가 훌쩍 자라 실비엣보다 훨씬 컸다. 앳된 기운이 가시자 열세 살 때 아리따운 소녀 같던 용모도 완연히 사내다워졌다. 기억은 좋은 빛으로 채색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달라진 그의 모습은 기억 속에 빛조차 뛰어넘었다. 촛불 세 자루의 빛으로도 충분했다.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앉을 때까지도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란지에는 형식적인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 이윽고 의자에 도로 앉은 실비엣이 말했다. “와 있었으면서 기척도 내지 않다니, 네가 귀족을 대하는 예절조차 잊었구나. 그만하면 몸에 완전히 익었을 줄 알았어요.” 란지에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남의 집에 무단 침입해서 예의를 논하다니.” 실비엣이 입술을 앙다물더니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를 쏟아냈다. “아아, 무단 침입? 그런 일이야말로 너희 민중 클럽 인간들의 특기잖아? 기물 파손, 인명 상해, 가옥 점거, 새삼스럽게 물고 늘어질 일이 아니지. 안 그래?”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남의 누이를 인질로 잡고 협박으로 사람을 불러내고 말이지.” 대꾸하는 란지에의 목소리는 낮았다. 이엔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지금의 란지에는 평소답지 않았다. 누이를 건드린 일은 란지에의 가장 약하고 민감한 곳을 찔렀다. 나직한 목소리 밑에 사납게 뛰노는 분노가 느껴졌다. “인질? 존귀, 존엄하신 국왕 폐하의 적은 노예보다도 못한 존재일 뿐이야. 내 행동은 상을 받으면 받았지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고.” 란지에가 손을 무릎에 얹으며 깍지를 꼈다. “그렇다면 그 상을 받으러 가지 않고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 실비엣은 선뜻 대답하지 않고 란지에를 쏘아보았다. 효과적인 말을 찾고 싶었으나 욕망이 시선을 흔들리게 했다. 실비엣은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쳐들었다. “너도 알고 있잖아? 난 왕국8군이 아니야. 내게 포상금 같은 건 의미가 없지. 그러니 협상을 신청해 보라고. 혹시 될지 알아? 빌어보란 말이야. 살려달라고, 놓아달라고.”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둘 다 비웃음이었다. “의미가 있을까?” 실비엣의 입가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홱 돌려 이엔을 바라보았다. “아아, 계신 것을 깜빡 잊고 있었네. 이런 실례가 있을까. 백작 영애께서는 무척 궁금하시겠지요? 과연 저 자와 내가 무슨 관계인지. 들어보고 싶으시죠? 그의 과거를? 어쩌다 나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됐을까?” 헛말만은 아니었다. 이엔은 궁금했다. 오래전부터. 그러나 실비엣의 어조로 미루어 볼 때 그녀가 하려는 말이 란지에에게 모욕감을 줄 만한 이야기임은 틀림없어 보였다. 이엔은 고개를 저었다. “난 필요 없어요.” “거짓말하지 말아요. 얼굴에 궁금하다고 쓰여 있는걸.” 이엔은 자신이 오지 않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란지에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조금밖에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일부터 캐묻지 않으려했던 자신이었다. 부득이하게 꺼내더라도 항상 끊어져버리는 부분, 그걸 들으러 이곳에 오지 않았어야 했다. “7년 전이죠. 내가 그를 처음 봤던 때가. 그러고 보니 공화력 9년이었겠네요. 당신들이 그렇게 죽고 못 산다는 공화국이 무너지기 1년 전.” 실비엣은 란지에를 흘끗 보았다. “그땐 요제프라고 불렀지, 아마? 이제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몇 없겠지만. 영애께서도 아시겠지만 그땐 특별한 시절이었어요. 켈티카가 공화파 천지가 돼버리다 보니 사교계라 할 만한 곳이 없어져서 아주 난감했다니까요. 다들 지방에서 흩어져 지냈죠. 중부에서는 로엔로반트 성의 살롱이 가장 유명했는데 그곳에 아미센 대공비께서 수시로 납시셨단 말씀이죠. 그곳에서 란지에는 ‘아미센 대공비의 소년’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죠.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란지에는 실비엣을 제지하려 하지 않았다. 가만히 어둠에 표정을 파묻고 있을 따름이었다. “모르시겠다고요? 그 시절을 기억하기에는 영애께서 너무 어린가요? 하긴 로엔로반트 성에 모이던 귀족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죠. 요즘 켈티카와 비교한다면야. 그래도 나름대로 멋은 있었어요. 특히 그땐 귀족들이라면 어리고 예쁜 시동 하나쯤은 꼭 거느리고 다녔죠. 아미센 대공비께선 예순이 넘으시고도 참 기운이 넘치셨지 뭐겠어요. 돌아다니던 소문으로는 요제프를 손에 넣으려고 백지 어음을 끊어 주셨다니까.” 캄캄한 거실에 열기 같은 것이 감돌았다. 누군가의 숨소리가 순간적으로 커졌다가 뚝 그쳤다. “대공비께서 사오시기 전의 이야기는 내가 잘 모르지만, 그럭저럭 이야기가 돌긴 하던데. 뭐 다 믿을 순 없더라도. 하여튼 일찌감치 몸값은 높았나보더군요. 저만한 시동이 쉽진 않았으니까요. 굳이 따지자면 시작이 안 좋았다고 할 수 있겠죠. 하필 다말라 손에 걸렸으니. 아, 다말라는 유명한 상인이에요. 귀부인들 사이에서 유명했던. 당시 귀부인들이 원하는 건 보석이나 향료 같은 것에서부터 입 밖에 내기 어려운 각종 필수품들까지 다말라가 꽉 쥐고 있었죠. 무엇보다도 제일 유명한 건, 사람장사.” 실비엣이 낮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곧 그쳤다. 놀랄 만큼 고요해진 거실에서 움직이는 거라곤 약간 열린 창을 가린 커튼뿐이었다. 고요를 뚫고 이엔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만해요.” “왜요? 재미없어요? 이런 얘기가 재미없을 리가.” 실비엣은 이엔이 한 마디 하자 오히려 흥이 오르는 얼굴이었다. 말없이 치욕을 견디는 란지에를 바라보는 이엔이 오히려 울 듯한 얼굴이었다. 어차피 두 사람은 실비엣의 입을 막을 수 없었다. 실비엣은 그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 집은 가난하다 보니 시동 같은 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무슨 일을 했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시중만 들 거라면 귀족들이 그렇게 큰돈을 지불하진 않지 않겠나, 그런 정도 생각은 하고 있죠. 참, 또 있어요. 그때 유행. 시동을 바꿔 데리고 있기. 아미센 대공비의 소년을 단 며칠이라도 빌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었는데.” 실비엣은 고개를 돌려 란지에에게 미소를 보냈다. “실은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그땐 사정이 안 됐지.” 란지에가 반응이 없자 목소리에 날이 섰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지금의 너를 본다면 그때의 두 배라도 기꺼이 지불하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야. 어때?” 실비엣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테이블을 지나 란지에가 앉은 의자 앞까지 와 섰다. 대담하게 손을 내밀어 그의 턱을 건드렸다. “네가 대공비 곁에서 도망치기 직전에 있었다던 일을 나도 들었지.” 손가락 끝이 턱선을 더듬으며 따라갔다. “너한테 누이동생이 있어서 참 다행이야. 그 애 때문에 자살 안 했지? 그리고 또 그 애 때문에 이렇게 내 손에 들어오고.” 그 순간 란지에의 손이 실비엣의 손을 쳐냈다. 비틀거리다가 바로 선 실비엣의 목소리가 일순 변했다. “옛날에 내가 한 말 기억나? 내 앞에 엎드려서 발에 입맞추게 만들겠다고 했었지. 지금 한번 해 볼 테야? 목숨 같은 누이동생을 위한 일이라면 뭐든지 견디잖아. 아무것도 모르고 과자를 만들고 있을 동생을 생각해 봐. 그 앨 감방에 처넣을 거라고. 군인들이 짓밟아버릴 거라고!” 실비엣은 한 발짝 물러나 섰다. “자, 해봐. 내 마음을 바꿔야 할 것 아냐? 지금 같은 태고 갖고 되겠어? 해봐, 어서!” “당신은.” 실비엣의 흥분한 목소리가 남긴 잔상을 뚫고 란지에의 목소리가 울렸다. “만족하지 못할 거야.” 실비엣이 피릭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그 정도로는 못하지. 난 많은 걸 원하니까. 게다가 널 다시 만나보니 갖고 싶은 게 더 많아졌어.” “그런 건 끝이 없지.” 란지에가 고개를 들자 줄곧 그를 보고 있던 실비엣과 눈이 마주쳤다. 삼킬 듯 탐욕스러운 눈동자가 반들거렸다. “잘 아는구나? 그럼 영원히 내 것이 되면 되잖아. 안 그래?” “당신이 모르는 것을 알려줄 테니 잘 들어.” 란지에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있었다. “나를 안다는 건 당신의 상상보다 위험한 일이지. 왕국 8군은 오래전부터 내 존재를 알고 뒤쫓아 왔어. 단순히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 지목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충분한 이유가 될 거야.” 실비엣은 코웃음을 쳤다. “아하, 날 협박해보려고? 내가 네 동생을 끌어넣으면 나도 네 동료하고 떠들어보겠다, 그런 말이지? 웃기지 마. 난 귀족이야. 내가 아니라고 하는데 누가 네 말을 믿겠어? 증거도 없는 그따위 말장난에 겁먹을 것 같았으면 처음부터 여길 왔을까? 장난은 그만두고 순순히 내 밑으로 들어오란 말이야. 그러면 모든 걸 덮어줄 테니까.” “당신이 정말로 란즈미와 이엔을 지켜줄 수 있다면 당신이 원하는 걸 다 줬을지도 모르지.” 이엔은 그 속에 자신조차 포함되는 것을 들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손을 꽉 쥐었다. 유용한 귀족 회원을 우선 보호하는 것은 망명 의회가 요구하는 일이었다. 이엔이 친구가 아니라 해도 란지에는 그 요구를 지켰을 사람이었다. 민중의 벗 전체를 위해서. “난 그럴 수 있어. 내가 거짓말을 할 것처럼 보여?” “아니. 당신은 자신에게만은 거짓말을 못 해. 그래서 약속을 지킬 수도 없고. 약속보다 더 큰 욕망이 생기면 바로 약속을 버리겠지.” “아, 그래서 포기하려고? 정말로?” 실비엣의 손끝이 약간 떨렸다. “포기할 수 없을 걸? 네가 누군데 네 동생을 포기하겠어?” “내가 당신을 믿을 수 있다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너 따위가 날 못 믿겠다고? 조금 자랐다고 오만하게 굴지 마. 넌 내게 언제까지나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어린 시동일 뿐이야. 그런 태도가 내게도 통할 수 알아?” 란지에가 일어섰다. 실비엣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둘은 고작 몇 뼘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었다. 내쉬는 숨이 닿을 정도의 거리였다. 란지에의 입술이 움직였다. “당신은 스스로를 믿나?” 실비엣은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잠시 후 이를 갈며 대꾸했다. “너 따위가... 천민 따위가 기품이 있다는 것이 밉살스러워. 시궁창에서 장미가 핀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어. 내가 꺾어버릴 거야. 네 출신이 어디인지 똑똑히 깨닫게 해 줄 거야.” 란지에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목소리를 귓가에서 들렸다. “만족은 순간이지.” 다음 순간, 란지에는 손을 뻗어 실비엣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눈을 크게 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감각뿐이었다. 처음엔 찼고, 바로 뜨거워졌다. 충격은 곧 관능에 삼켜져 버렸다. 미묘한 향기와 촉감에 오감이 빨려 들어갔다. 자신의 손이 올라가 상대의 목을 감싸 안으며 열렬히 반응한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곁에서 무슨 소리인가 들렸으나 아득한 소음일 뿐이었다. 왜 따위는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백 년동안 참아온 갈증에게 건네진 차디찬 물 한잔의 이유 같은 것은. 조금만 더. 떨어지는 입술을 도로 끌어당기려는 순간 차가운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녀의 귓가에만 닿을 목소리로. “그럼 잘 해명해 보라고.” 달아오른 뺨에 차가운 공기가 닿았다. 문이 열려 있었던가? 실비엣의 눈이 겨우 앞을 보게 되자 우뚝 서 있는 이엔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뒤? 돌아보는 순간 십여 명의 사내들... 군인이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아는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켈티카에서부터 열심히 추적해 온 보람이 있는 아가씨군요. 이렇게 그럴듯한 수확도 안겨주고.” 비웃음 섞인 목소리였다. 이어 제나스가 부하들에게 손짓하자 군인들이 흩어지며 그들을 둘러쌌다. “존귀, 존엄하오신 국왕 폐하의 이름으로 모두 체포하겠다. 연인들의 재회 장소는 고무실이 제격 아닐까?” 군인들이 팔을 움켜잡기 직전에 란지에는 이엔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엔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란지에의 지시를 알고 있었다. 옛날부터 몇 번이나 맞춰 둔 그대로였다. 늘 대비했지만, 결코 아지 않길 바랐던 상황을 위해서. 이엔을 그들을 향해 홱 돌아섰다. “감히 날 체포하겠다고? 내가 누구인지 알고서 하는 말인가? 너흰 대체 누구지? 무슨 일로 몰려와 무례하게 소란을 피우는 것인지 당장 고해라.” “당신이 아마란스 백작가의 영애이신 이엔나 다 아마란스 양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는 왕국8군 켈티카 중부지구 위병대이고, 저는 소령 호웰 제나스입니다.” 제나스는 형식적으로 경례를 했다. 가는 당당했지만 그제야 이엔이 누구인지 알게 된 다른 군인들은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이엔은 팔짱을 끼더니 제나스를 노려봤다. 그녀가 평소 고용인들에게도 내지 않는 목소리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켈티카에서부터 여기까지 무슨 볼일이지? 왕국8군이라고? 너희들은 공화파 놈들이나 잡으러 다는 것 아니었나?” 이엔의 말에 제나스는 순간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나 곧 말했다. “말씀하신 대롭니다. 아가씨와 함께 있는 저 자들은 민중클럽 조직원들입니다. 지금은 협조해 주십시오. 일단 가신 후에 모든 것을 밝혀드리겠습니다.” 제나스도 이엔에게는 당신도 민중의 벗이지 않느냐고 선뜻 말하지 못했다. 귀족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은 본능적으로 껄끄러웠다. 더구나 상대는 증거 없이 함부로 대했다가 잘못되는 날에는 그의 목도 날려버릴 수 있는 아가씨였다. 일단 연행해 취조하면 다 밝혀질 것이다. 이엔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란지에는 내 학원 친구이고 실비엣은 아르장송 자작의 따님인데 그럴 리가 있어? 너희는 무슨 조사를 이따위로 하지? 이런 무례는 반드시 아버지께 고하겠어! 내 눈앞에서 내 친구들을 데려가겠다고? 내가 너희를 데리고 성으로 가겠다. 공명정대하신 아버지께서 모든 일을 다 밝혀주실 테니까!” 말하는 과정에서 이미 이엔은 함께 가지 않는 것으로 변해 있었다. 제나스도 그 사실을 알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럼 증거가 확실한 저 두 사람만 먼저 데려가겠습니다. 아가씨께서는 나중에 조사에 협조해 주십시오.” 실비엣은 부들부들 떨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비현실적인 심연처럼 보였다. 군인들의 손에 팔이 붙들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몽롱한 상태가 가시면서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의 조각들이 느리게 맞추어져 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조금 전 한껏 마신 미묘한 향이 코끝에 감돌고 있었다. 수년간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결코 맡을 수 없었던 향이었다. 새벽이 밝아왔다. 무슨 정신으로 성에 돌아왔는지도 몰랐다. 이엔은 자신의 방 침대에 앉자마자 쓰러질 듯 팔을 짚었다.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듯 쿵쿵거리는 심장 때문에 온몸이 뒤흔들렸다. 침착하게 생각해야 한다. 빨리 움직여야 한다. 저들이 손을 쓰기 전에 말이 새어나간 곳을 막고, 켈티카에도 연락을 취해야 한다. 란지에가 그녀에게 벌어 준 시간을 헛되이 써서는 안 된다. 그러나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엔은 자신이 언제 마지막으로 울었는지 기억할 수가 없다. 지금처럼 몸을 가눌 수 없는 울음은 유모가 죽은 날 후로 처음일까? 몽롱한 머릿속에서 지난 일들이 소용돌이쳤다. 란지에게 대한 것도, 그와 관계없는 것들도 다 쏟아져 나왔다. 안전한 성에서, 사랑하는 부모가 지켜주는 곳에서, 침입자를 막아줄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이엔은 혼자였다. 몇 년만에 처음으로 마음이 텅 비었다. 란지에의 마지막 표정이 떠오르자 입술이 떨렸다. 친구 앞에서 치부가 샅샅이 헤쳐지고도 그는 끝내 판단력을 잃지 않았다. 란지에의 한 마디에 운명이 달리게 된 실비엣은 결코 란즈미의 일을 왕국8군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이엔을 고발하지도 못할 것이다. 제나스가 뒤쫓아 온 사람은 그들이 아닌 실비엣이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아마 실비엣이 란지에를 찾아다니다가 의심을 받았으리라. 그런 상황에서 실비엣에게 키스한 란지에의 모습은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되었을 테고...... 두 손이 꼭 움켜쥐어졌다. 그 장면을 떠올리자 진정할 수가 없었다. “아마란스 님.” 아는 사람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이엔은 재빨리 도사리다가 곧 한숨을 토해냈다. “토르조프군요.” “이런 곳까지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워낙 긴급한 상황이어서.” 창문 너머에서 나타난 자는 이엔의 성의 하인으로 일하게 해 놓았던 나이트워커였다. 마흔이 다 되어 가는 남자였고 평소에는 유순한 인상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눈물범벅이 된 이엔의 얼굴을 보자 그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이엔은 침대에서 일어섰다. “잘 왔어요. 그렇지 않아도 당신이 필요했어요.” 침착하게 말하려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토르조프는 고개를 숙였다. “불찰이었습니다. 켈티카 주둔 왕국8군이 근방으로 내려왔다는 사실은 전해 듣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여자를 쫓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니에요. 내 잘못이에요. 제일 먼저 실비엣을 의심했어야 할 사람은 나였으니까.” 이제와서 누구 탓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상상이나 해보았을까. 새침하게 이엔의 기숙사 방을 드나들던 실비엣이 그런 모습을 숨기고 있었을 줄은. 란지에도 이엔이 몰랐던 모습을 보여주었다. 평소 그 결벽한 성미로 타협도 술수도 용납하지 못할 것처럼 여겼었다. 그런 그가 자신을 이용해 실비엣을 속였다. 동생과 친구를 지키기 위해서. 그의 입에서 비꼬는 말을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 몇 년간 함께 지내며 둘도 없는 친구이자 동료로서 좋아한 그였다. 그러나 오늘 되새기는 그는 달랐다. 밤새 있었던 일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에 화끈거리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답답하기도 하고, 화가 나면서도 동시에 두근거렸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로젠크란츠 님은 아모치아 근방에 임시 주둔하고 있는 티아 반란 진압군 군영으로 끌려가셨습니다. 방금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아모치아는 멀지 않은 곳에 잇는 소도시였다. 이엔이 다그쳐 물었다. “거긴 어떻게 가죠? 구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토르조프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이엔의 뺨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계속 살펴보겠지만... 사실상 어렵습니다. 진압군 특별 편제인지라 대략 천 명 가까이 됩니다. 켈티카나 다른 큰 도시로 호송할 부대를 짠다 해도 상당한 숫자가 차출될 겁니다.” “호송하는 동안 방법을 찾아봐야 하는데......” “나이트워크를 통해 계속 긴급 연락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일단은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토르조프가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정보 누출 가능성이 생겼으니 저는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켈티카에는 제가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그동안 돌봐주셔서 고맙습니다. 기다리고 계시면 다른 나이트워커가 연락을 취해 올 것입니다. 아마란스 님께서도 정체가 밝혀질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도록 하십시오.” “란지에한테서... 정보가 샐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렇지 않아도 달아올랐던 이엔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저도 그런 상상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로젠크란츠 님은 오랫동안 클럽에 몸담아 온 저로서도 쉽게 뵐 수 없는 강한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아직껏 붙잡혀가서 입을 열지 않고 버텼던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왕국8군의 고문은 시체도 되살아나게 할 지경이라 하더군요.” 이엔은 홱 돌아섰다. 토르조프는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더니 왔던 대로 창밖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겨진 이엔은 입술을 깨물며 바들바들 떨었다. 참을 수 없는 상상에 숨이 막혔다. 비취빛 숲으로 둘러싸인 성에 잠자는 소년이 있었다. 긴 잠이었다. 사람들은 궁금해졌다. 그가 깨어날 수 있을지. 누군가는 영영 깨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깨지 않아도 살아 있을까? 그렇다고 했지만 언제까지나 그럴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 사람이 깼으니 다른 하나도 언젠가는 깨어나지 않을까? 어린 하녀가 묻자 하녀장은 고개를 저었다. 둘은 모습은 같아 보여도 실은 전혀 다르단다. 한쪽은 사람이 아니지. 그렇다면 언젠가 깨지도 않고 그냥 죽어버리는 것일까? 새가 지저귀었다. 아침이 왔다. 잠들었던 사람들이 깨어나 솥을 데우고 물을 긷고, 갈퀴를 들고 나와 뜰의 낙엽을 치울 시작이었다. 죽은 듯 고요하던 성이 깨어나는 시각이었다. 옛날이야기가 그렇듯, 긴 잠을 자던 소년이 눈을 떴다. 16막 Long 1 맞춰지는 조각들 “조각 하나는 밀가루 속에 조각 하나는 설탕통 속에 조각 하나는 건포도 속에 다 모아 맞추면 과자 인간이 도망간다. 조각 하나는 장작들 속에 조각 하나는 화덕불 속에 조각 하나는 굴뚝재 속에 다 모아 맞추면 재투성이가 도망간다. 조각 하나는 베갯잇 속에 조각 하나는 속지마 속에 조각 하나는 털양말 속에 다 모아 맞추면 요정 아가가 도망간다.” 종일 내리던 비가 그칠 무렵 남쪽 섬의 거리는 이미 어두웠다. 야경꾼이 가로등을 하나씩 켜며 지나가자 길바닥은 금속 빛을 띠었다. 두 시간을 가지 못할 빛이었다. 저들이 섬길 자들, 다시 말해 비탈진 구릉지를 별장의 흰 지붕들로 채운 자들이 자기 저택에 들어설 즈음부터 하나 둘 씩 잦아들다가 꺼져버렸다. 정작 캄캄한 밤은 자연이 켠 흰 등불 하나에 맡겨 두었다. 그즈음이 되면 이 거리에서 처음 가보는 집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점을 아는 것처럼 바른 걸음으로 걷는 남자가 있었다. 어두운 빛깔의 긴 코트, 눌러쓴 중절모로 절반이나 가려진 얼굴, 꾹 다문 입술, 이렇듯 자못 엄숙한 그의 모습을 망치는 것은 흠뻑 젖었다가 말라가고 있는 코트 자락이었다. 자락이 다리에 둘둘 말리다가 결국 발을 내디딜 수 없게 되면 별 수 없이 멈춰 서서 떼어내고 걷는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도 그의 걸음걸이는 조금 이상한 데가 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그가 일부러 물이 고인 곳을 골라 딛느라 갈지자걸음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덕택에 신발이 흠뻑 젖어 질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하나뿐인 큰길을 따라가자니 좌우로 골목들이 수십 개였다. 크고 작은 집들이 골목을 마주보며 오밀조밀 이어졌다. 길을 찾는데 참고할 만한 것이라고는 해지는 서쪽, 별나게 비뚜름한 나무, 어느 집의 빨간 문설주, 짖어대는 개 따위가 고작이었다. 물론 동네 사람에게 묻는 것이 가장 빠를 테지만, 을씨년스러운 날씨가 다 물어가 버렸는지 너른 길 좁은 길 할 것 없이 모두 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한 골목을 찾아내어 들어섰다. 지금껏 지나쳐온 십여 개의 골목들과 어디가 다르다고 집어 말할 수 없는 그저 그런 모퉁이였다. 두 사람도 나란히 지나기 힘든 돌담길을 통과하자 처마가 유난히 넓은 집이 나타났다. 댓돌 맞은편에 밑이 빠져 내버린 나무 술통 몇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남자는 문을 두드렸다. “누구신지?” “에블린 테니튼에게 편지 보낸 사람.” 문이 열리며 댓돌에 오렌지색 불빛이 쏟아졌다. 마주 선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얽힌 것은 잠깐이었다. 남자가 안으로 들어가자 빛은 곧 구두 굽을 뒤쫓으며 자취를 감췄다. 이어 덧문을 닫고 빗장을 내리는 손들이 부산했다. 그을음이 가득한 벽이었지만 개의치 않고 기대며 남자는 주위를 휘둘러봤다. 남자 하나, 여자 셋. 그중 둘은 노인이고 젊은 여자 하나는 다리를 절었다. 좁은 거실을 사람이 다 메웠다. 코끝으로 눅진한 습기가 끼쳐왔다. 체열로 미지근하게 데워져 바깥보다 불쾌한 공기였다. 방문객의 첫 마디답지는 않았지만, 남자가 말했다. “난로라도 좀 때시지.” 다리를 저는 여자가 대꾸했다. “장작 살 돈이 없어요.” 참, 여기 사람들은 장작을 사서 때지, 하고 생각하며 남자는 한쪽 입꼬리를 내력ㅆ다. 벽난로에는 불기는커녕 재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남자가 다시 말했다. “좀 앉지.” 이번에도 손님이 할 말한 말은 아니었다. “가뜩이나 천장도 낮구만.” 그제야 서 있던 자들이 시선을 피하며 자리들을 찾아갔다. 다만 한 사람만은 처음부터 앉아 있었다. 눈조차 들지 않았다. 젊은 두 여자 중 하나였다. 젊다고 했지만 노파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고 사실상 곧 마흔을 바라보지 않을까 싶었다. 두드러진 광대뼈, 도중에 융기한 콧날, 뼈에 거죽을 띄워 놓은 듯 늘어진 뺨, 풍파를 많이 겪은 얼굴이었다. 그녀가 에블린 테니튼이었다. 남자는 에블린을 흘끗 보더니 인사하든 모자챙을 들어 보였다. 그러나 모자를 벗지는 않았다. 가려진 남자의 눈이 에블린과 마주쳤다. 에블린이 불쑥 말했다. “먼저 한 가지만 말씀드릴게요. 저 그 편지 받고서 밤잠도 자지 못했어요.”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잠이 올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 에블린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말을 잇지는 않았다. 소파 팔걸이에 엉성하게 걸터앉았던 노파가 입을 열었다. “숨기게 된 건... 잘했다는 건 아니라오. 하지만 우린 그 애를 해코지하지도 않았고, 에블린은 친어미처럼......” “그 얘긴 이미 충분히 들었소. 그다음 얘길 하면 좋겠는데.” 에블린의 등이 움찔 경련했다. “뭘 더 들어야 하지요? 다 알고 있으면서?” “어, 그 말 잘했어. 내가 정말 다 아는지 확인 좀 해보자고.” 에블린이 코웃음 쳤다. “새삼 따지면 무얼 하나요? 잡아갈 테면 잡아가시고, 죽일 테면 죽이시면 될 텐데. 아노마라드에서 내로라하는 권세가라면서, 그깟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아, 꼭 그렇게 결론을 내고 싶은가보지? 이 노인네들을 이끌고 감옥에 들어갔다가 형틀에 올라갔다가, 그게 그렇게 하고 싶어? 나라면 절대 사양인데.” 에블린은 두 노인을 돌아보더니 표정이 변했다. “위협하려고 하는 소리인 게 뻔해. 부모님은 아무 상관없다는 거 다 알고 있으면서.” 남자는 빈손을 펼쳐 보였다. “난 아무 것도 모르거든? 당신이 아무 것도 확인을 안 해줬잖아? 다만 고집 부리면 결과가 나쁘다고 말해준 거야. 당신 입으로 방금 말했다시피 귀족들은 원래 인내심도 없고,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들 상대로는 동정심도 없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에블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돌아서서 벽난로 뒤에 있는 벽장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더니 주섬주섬 물건들을 꺼내 놓았다. 바구니 속에 차곡차곡 개어 놓은 작은 옷가지와 모자, 둥글게 말아 묶은 홑이불과 담요, 때 묻은 헝겊 인형들, 나무로 정교하게 짜 맞춘 드물게 훌륭한 요람. “이게 전부예요.” 남자의 시선이 물건들을 느리게 훑고 지나갔다. 에블린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가 다음 말을 해치웠다. “내게 남은 것.” 잠시 후 남자가 중얼거렸다. “주인 없는 살림살이가 그건가.” 주인은 없었다. 물건들은 식어 있었다. 옷가지들의 나이는 서너 살을 넘기지 못했다. 에블린은 물건들을 보며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꼭 감았다가 고개를 흔들고는 도로 떴다. “어차피 난 자세한 것은 전혀 몰라요. 아노마라드도, 귀족도, 다 몰랐어요. 당신이 말해주기 전에는 부잣집인가 보다 짐작만 했죠. 귀족일 수도 있었겠고. 이 동네에선 워낙 흔하니까. 어린아이를 숨기는 사연 같은 거. 양육비만 넉넉하게 준다면 알 거 없었다고요. 그 애 돈으로 우리 식구가 다 먹고 살았어요. 보다시피 이 집에서 밖에 나가 막일이라도 할 만한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여자 혼자 막일로 벌어서 이 많은 입이 먹고는 못살죠.” 에블린은 두 팔을 벌려 보였다. 손이 몹시 거칠었다. “다 좋았어요. 평생 못될 줄 알았던 엄마가 됐고, 어린애가 생기니 집안에 웃음도 나고. 우린 다 그 애한테 잘해줬어요. 할 수 있는 건 다 하려 했어요. 처음에는 고마워서, 나중엔 결국 가짜 엄마지만... 좋아했다고요. 그 애를. 그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 사실?” 남자가 묻자 에블린의 표정이 변했다. “왜 모르는 체해요? 다 알고 있으면서.” “말을 해야 알지.” “거짓말 말아요.” “난 몰라.” “부모가 그 앨 왜 버렸는지 모른다고요?” 남자가 대꾸하지 않자 에블린은 두 손을 모아 쥐고 부르르 떨었다. 이윽고 눈을 치떴다. “그 애, 귀신들려서 버린 거잖아요? 아니에요?” 남자의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오히려 고성이 터진 곳은 다른 쪽이었다. “무슨 소리! 엘라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줄곧 잠자코만 있던 노인의 턱수염이 떨렸다. 에블린은 입술을 깨물며 소리치려 했다. 그러나 두 마디도 잇기 전에 잦아들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애가... 그렇게......” 노파가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에블린은 입을 다물고 요람 쪽으로 돌아섰다. 좁은 거실이 한층 더워졌다. “엘라노어... 테니튼이에요. 할머니 이름을 붙였어요. 엘라를 넘겨준 사람이 애 이름도 없다고 해서. 이름도 안 지어주다니, 난 정말로 그 사람들이 다시는 엘라를 찾지 않을 작정인가 보다 했어요.” “그래서 정말로 찾지 않았나?” “아뇨.” 요람에서 돌아선 에블린의 눈가가 붉었다. “난 갈 데 없이 어리석은 천민이라서 피가 파랗다는 나리님들의 생각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네요. 천사 같은 따님을 맡겨놨으면서 한 번 보고 싶어 하지도 않았어요. 우리가 애를 예뻐하는지 구박하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고요. 오직 심부름꾼을 시켜서 돈만, 돈만 보내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째서......”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에블린이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째서 관은 갖고 가고 싶어 하는 거죠? 산 애는 필요 없어도 죽은 애는 필요하다는 건가요?” “......” 남자는 말없이 마룻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끊겼던 에블린의 말이 이어지도록 듣고만 있었다. “그 사람들이 관을 열고서... 우리 엘라 얼굴을 한 번이라도 봤을까요? 그 애가 얼마나 예쁜 금발을 하고 있는지, 속눈썹이 얼마나 긴지... 죽은 뒤에라도 알았을까요?” 말은 다시 끊어졌다. 에블린은 눈물을 흘리지도 않고 붉어진 눈으로 요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남자가 대답했다. “물론이지. 아주 자세히 알았을걸. 유감스런 일이지. 나라면 그놈들이 관 뚜껑도 건드리지 않았길 빌었을걸.” 오랜만에 조슈아는 자신 속 세계에 있었다. 꿈이었을까? 예전에는 이곳에 오게 되면 쉽게 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왜인지는 몰랐다. 반년 동안 잠들었을 때 여기에 왔었던 것일까? 그것도 알 수 없었다. 그 반년은 그에게 완전한 암흑이었다. 오랜만에 온 까닭인지 풍경도 달라져 있었다. 높이 솟은 산꼭대기였던 곳이 이제는 어디론가 연결된 벼랑이었다. 둥근 자리도 사라졌다. 바닥은 물기로 반짝이는 푸른 풀밭이었다. 안개는 여전해서 열 걸음 너머는 잘 보이지 않았다. 등 뒤에서 누군가가 손을 엊었다. 돌아보았다. “켈스! 지금까지 어디 있었어요?” 전 같으면 미소로 답했을 텐데 켈스니티는 웃지 않았다. 대신 조슈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슬플 것 같기도 한 이상한 표정이었다. “왜 그래?”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이상한 말을 하며 켈스니티는 조슈아를 지나쳐 갔다. 벼랑 끝으로 걸어가더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조슈아가 뒤따라가며 물었다. “여기 좀 달라진 것 같지 않아?” “달라졌겠지.” “왜인지 알고 있는 것 같은 말투네.” 켈스니티는 벼랑에서 돌아서서 조슈아를 보았다. 조슈아는 문득 이상한 점을 눈치 챘다. 고작 한 발짝 앞에 서 있는데도 켈스니티의 모습이 안개에 가린 듯 희미했다. “왜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어?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이상하네. 오늘 당신 태도. 뭔가 있죠?” 켈스니티가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벼랑을 등지고 걷다 보니 어느새 안개가 걷혔다. 주위는 아름다운 목초지였다. 조슈아는 두리번거리다가 흠칫 놀랐다. 저만치 다른 사람이 보인 까닭이었다. 그 사람이 사는 듯한 집도 있었다. 집은 한두 곳이 아니었다. 골짜기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저 사람은 약속의 사람들 중 하나인가?” “아니야.” “그럼 누군데?” “네가 알 수 없는 사람.” 더 걸어가자 이상하게 생긴 돌이 나타났다. 돌은 비탈에 튀어나온 바위 같기도 했지만 모양이 어쩐지 인공적이었다. 마치 길쭉한 받침대 같은 모양으로 희끄무레하게 닳아 있었다. 켈스니티는 그 앞에 서더니 조슈아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이 돌을 봐. 무엇일 것 같니?” “음... 주춧돌?” “그래. 이건 옛날 거울을 받치던 주춧돌이야.” “거울이라면, 가나폴리의 이동 수단이었다던 그것?” 켈스니티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슈아는 더욱 의아해졌다. “그런 게 왜 내 세계 안에 들어왔지?” 켈스니티는 주춧돌 위에 걸터앉았다. 몇 걸음 멀어진 것만으로도 켈스니티의 모습은 거의 반투명하게 보였다. “켈스, 어쩐지 이상해요. 무슨 일이 생긴 거죠?” 켈스는 조슈아의 말을 듣지 못한 기색이었다. “네가 지금 보는 이곳은 옛날 페리윙클 섬의 풍경이야. 넌 실제로 본 일이 없을 테고, 지금의 모습과도 많이 다르지. 저 돌도 그곳에 있었어.” “얘기했던 것 기억나요. 어린 시절 놀이터였다고.” “그래.” “그런데 왜 나는 모르고 켈스는 아는 풍경이 내 세계에 나타난 거죠?” 그렇게 말하는 순간 눈앞의 풍경이 일순 흔들렸다. 조슈아는 정신을 차리려 했다. 정확히는 꿈에서 개어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이었다. 페리윙클 섬의 풍경은 점차 이지러졌다. 전에는 나오려 해도 쉽지 않았던 이 세계가 간단히 깨어져 나갔다. “켈스, 대답해 봐. 그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왜 대답도 안 하고, 왜 꿈에만 나타나는 거야? 현실에서 얘기 좀 해봐. 난 지금......” 눈앞에 네모진 문짝이 나타났다. 천장에 뚫린 문이었다. 거기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조슈아는 누이 부셔 손으로 앞을 가렸다. “조슈아.” 티치엘의 목소리였다. “아빠한테서 연락이 왔어. 우리 당장 성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 조슈아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머리가 무겁고 가슴이 답답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겨우 제대로 앞을 보니 티치엘은 옷을 갈아입고 모자까지 손에 든 모습이었다. “비취반지 성에 있는 네 인형 말이야.” 조슈아는 순간 긴장하며 티치엘을 바라보았다. 오래 기다리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던 말이 들려왔다. “깨어났대.” 켈티카 서쪽에 ‘용의 입’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만(灣)이 있었다. 대륙을 동서로 관통해 온 두 강이 쏟아져 나간 자리였다. 불규칙한 해안선이 크고 작은 만과 반도, 육계도, 섬들을 토해내는 모양이 흡사 전설 속의 용의 입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었다. ‘용의 입’은 너무 컸기에 셋으로 나누어 북(北 )만과 켈티카 만, 그리고 질베르 만으로 불렀다. 북부에서 달려 내려와 켈티카를 관통하며 켈티카 만으로 터져 나오는 젊고 거친 강이 블루엣이라면, 남부 아노마라드의 수많은 지류가 합쳐지며 질베르 만으로 나오는 느리고 큰 강이 노아질베르다. 노아질베르는 옛날 아노마라드가 대륙 서부를 제패할 무렵 공물을 운반하는 흰 배들이 ‘용의 입’을 하얗게 채워 ‘백(白)강’이라는 별명도 얻었을 정도로 일찍이 수운이 발달했다. 지금도 지류에 작은 배를 띄워 노아질베르 강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짐을 큰배로 옮겨싣고 켈티카로 가는 방식이 남부 물류 수송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본류와 지류가 만나는 곳들은 바다에 면한 항구 못지않게 붐볐고 대부분 도시로 발달해 있었다. 질베르 만으로 나온 조공선들은 키를 시계방향으로 돌리며 켈티카 만으로 들어가 ‘위대한 왕의 둑’을 넘었다. 그리고 블루엣 강 하구 곳곳에 발달한 부두 중 하나를 택해 짐을 내려놓았다. 그보다 더 거슬러 가는 배들은 드물었고, 그런 만큼 특별한 임무가 있게 마련이었다. 무엇보다도 검문을 거치지 않고는 갈 수도 없었다. 여름의 기운이 덜 가신 9월 초, 조공선의 색깔인 백색을 칠한 배 한 척이 검문을 거쳐 블루엣 강을 거슬렀다. 많던 부두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한동안 돌을 깎아낸 강둑만 이어지다가 마침내 작은 부두가 하나 나타났다. 그곳에 수십 명의 병사가 검은 포장을 씌운 마차와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배가 부두에 닿았다. 무장한 병사들이 먼저 나와 배다리를 놓는 동안 장교 둘이 그들을 지휘했다. 이윽고 배 안에서 특별한 짐이 운반되어 나왔다. 공물을 넣을 때 쓰는 상자처럼 보였지만 쇠사슬이 몇 겹으로 둘러졌고, 모서리에는 쇠가 덧대어져 쉽사리 부술 수도 없어 보였다. 짐이 실린 마차가 움직여 부둣가를 벗어날 무렵, 그 풍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사람 하나가 숨어 있던 풀숲에서 일어났다. 큼직한 모자로 이국적인 황갈색 얼굴을 가린 장신의 남자였다. 숲으로 들어간 남자는 묶어 놓았던 말을 풀어 올라타더니 도심 쪽으로 달려갔다. 히스파니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힌 문짝을 향해 말했다. “언제 와도 마음에 드는 서비스구만.” 프리실라는 다리가 덜렁거리는 의자에 앉아 바닥에 튀어나온 판자를 이용해서 중심으로 잡으려 애썼지만 실패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삐딱하게 앉으면서 대꾸했다. “여길 접선 장소로 택했던 것을 보면 그 자도 안목 꽤나 있는 놈이지요.” 히스파니에는 자기 의자 다리를 얼마간 시험하고 있다가 불쑥 내뱉었다. “어린놈이.” 아래층에서 연주하는 음악 소리가 의미하게 벽을 울렸다. 잠시 후 누군가가 고래고래 노래하는 소리가 겹쳐졌다. 곧 시끄럽다고 소리치는 자들 몇이 가세했고, 노래하던 자는 목청을 십분 활용하여 더욱 크게 외치기 시작했다. 조금 더 지나자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한바탕 들리고 노래는 멎었다. 잠시 후, 다시 멈칫대는 듯한 건반 음과 현악만이 벽을 타고 흘러들었다. 벽이며 기둥마다 구질구질한 얼룩과 검댕, 낙서가 묻은 막술집일 뿐이었지만, 카잘스의 주인은 옛날 2층이 댄스홀이던 시절에 악사들을 쓰던 버릇이 남아 종종 떠돌이 음악가들을 불렀다. 옛날 노래들을 한 바퀴 돌리고 나면 추억에 젖어 테이블에 엎드려 자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러다가 저렇게 잠을 방해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일제히 깨어나 두드려 패곤 했다. 의자 몇 개가 부서지고 나면 악사들은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카잘스 내에는 다리가 망가진 유난히 많았다. 의자 다리로 가락을 맞추던 프리실라가 대꾸했다. “어려서 더 무섭잖아요.” 히스파니에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프리실라가 담배쌈지를 꺼내 파이프에 채우기 시작하자 히스파니에가 손끝으로 절반을 집어서 윗주머니에 슥 넣으면 말했다. “담배 줄여.” “아니 그게 얼마짜린데 주머니 먼지로 만들려고 그러세요, 글쎄. 얼른 도로 줘요.” “이미 먼지 됐다.” 프리실라가 일어나 테이블 위로 몸을 굽히며 손을 뻗었다. “그러지 말고 절반만.” 히스파니에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았다. “네가 그럴 줄 알고 주머니에 미리 찻잎을 한 숟가락 넣어 놨다.” “...불이나 빌려와야겠네.” 프리실라가 입을 비죽이며 일어나 문고리에 손을 대는 순간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대답은 없었고 대신 다시 다섯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프리실라는 지체 없이 문을 열었다. “어서 와.” 빌 오리스와 또 한 사내가 가운데 눈이 가려진 남자 한 명을 두고 양족에서 팔짱을 낀 채 들어섰다. 다른 사내 쪽이 경쾌하게 소리쳤다. “선장님, 저 왔습니다!” 켈티카 앞바다에서 백발백중으로 대포를 쏘던 포대장 노스트였다. 그는 이어 프리실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누님도 오랜만이구려.” 프리실라는 불도 없는 파이프를 빨려다 내려놓으며 불퉁하게 말했다. “2순위 인사 따위 필요 없어.” “누님, 안 보는 새 또 살이 쪘소?” “그러는 넌 그 모양으로 점점 줄다가 내년 쯤엔 아예 없어지겠다?” 주고받는 말과는 달리 프리실라는 깡말랐고 노스트는 건장했다. 노스트가 이윽고 싱글거리며 말했다. “누님. 난 양초요. 다 타면 없어지는 게요. 원래 모든 인생이 다 그런 게지만.” “다 타기 전에 그 불 내가 확 꺼버릴라.” 프리실라가 촛불을 끄는 시늉을 하자 곁에 섰던 빌이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얼른 시작합시다. 앞이 안 보여서 답답해 죽겠소.” 남자가 웅얼거리자 사람들이 그를 의자에 앉혀 주며 슬슬 자세를 고쳤다. 정면에 앉아 있던 히스파니에가 입을 열었다. “잘 왔네. 모리나크. 고생이 많군.” 모리나크는 왕국8군 소속 중위였으나 오래전부터 히스파니에의 정보통역할을 하는 사내였다. 그러나 그는 히스파니에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물론 히스파니에의 이름도, 그가 아르님 공작의 숙부라는 사실도 몰랐다. 그가 얼굴을 아는 사람은 프리실라와 빌뿐이었다. 오늘 노스트를 새로 알게 되긴 했지만. 모리나크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모리나크는 몇 번이나 눈을 가린 채 만났던 ‘어르신’을 암상인, 또는 부하들이 선장님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은퇴한 해적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막대한 재산과 숨겨진 조직을 갖고 있는 지하 세계의 거물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어르신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다. 부모가 죽고 나서 빚을 정리할 때, 돈 한 푼 없이 군사 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할 때까지, 누이동생이 결혼할 때. “정확히 말해 뵙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어진 모리나크의 말에 히스파니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그렇지. 늘 미안하게 생각하네.” “언젠가 어르신을 정말 뵐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모리나크는 진지한 태도였다. 히스파니에도 웃음을 그치고 말했다. “그런 날이 곧 올 걸세.” 아래층에서는 여전히 희미한 음악 소리가 쿵쿵거렸다. 모리나크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저도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어르신은 그에게 말해줄 수 없는 중요한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가 가져올 수 있는 건 정보 약간분이지만 어르신의 일에 도움이 된다면 언제까지나 기꺼이 해낼 생각이었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어르신은 어린 시절부터 그의 은인이었다. “최근에 공화파 간부가 한 사람 붙잡혔다지?” 히스파니에가 한 말에 모리나크는 놀란 표정을 했다. “알고 계셨군요. 지금 본부에서도 난리가 났습니다. 엊그제 남부에서 호송해 왔는데, 본부에서 노아질베르의 공물선을 이용하도록 허가를 따줬을 정돕니다. 덕택에 민중클럽 녀석들의 추적도 깨끗이 따돌렸고요. 이번 일을 만든 소령, 아주 머리가 비상해요.” “그래, 그 소령 말인데. 제나스라고 하던가?” 모리나크는 신기해하며 머리를 갸웃거렸다. “어찌 그리 잘 아십니까?” “좀 알아볼 일이 있었다네. 오늘 자네와 조각을 맞춰 볼 참이지. 그 제나스 소령이 자네와 같은 부대의 상관이라고 하던데, 그 자에 대해 좀 말해보겠나?” “한 마디로 인기가 없죠.” 모리나크의 표정을 보건대 누구보다도 본인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귀족 출신은 아니고 고모가 귀족하고 결혼을 했답니다. 그 고모부가 현재 근위대 준장인 에크루 자작인데, 하긴 그 사람도 신왕국 세워질 때 공을 세워서 귀족이 된 자니까 정통은 아니군요. 어쨌든 원래는 고모가 불러다가 공부나 시켜주려 했다던데 스리슬쩍 고모부 병영에 드나들더니 그 해가 저물기도 전에 대뜸 소위가 됐다더군요. 왕국 초기에 그런 일이 흔했다고는 하지만 그런 중에서도 준장 뒷배 업고 승진까지 빠르니 좋은 평 듣긴 무리인 거죠. 게다가 성격도 까다롭고. 욕을 먹어도 신경 쓰지 않는 배포만은 따라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정돕니다.” 신왕국 3년에 세워진 왕립 군사학교가 정착된 지금에는 귀족이 아닌 이상 그곳을 졸업하지 않고 장교가 되는 것이 무척 어려워졌다. 군사학교 출신 장교들은 자기들과 또래에 불과한데다 소양 교육마저 부족한 평민 장교들이 일찍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윗자리를 차지한 것을 불만스러워했다. 모리나크 또한 군사학교 출신이었다. “그렇다면 그 자가 다른 사람들의 협력을 얻기는 힘들었을 텐데, 혼자서 그만한 일을 다 해냈나?” 모리나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 자가 좀 여러 사람 몫을 합니다. 성실한 것만은 당할 사람이 없죠. 보고서를 좀 읽어봐야겠다, 하고 마음먹으면 그럴듯한 걸 찾을 때까지 몇 날 며칠이고 책상에서 꿈쩍도 안 합니다. 좀 중요하다 싶으면 아랫사람한테 시키지도 않고요. 하기야 그런 근성이 없었으면 짚더미에서 바늘 찾겠다고 뒤지고 있지는 않죠. 그런데 그 바늘이 뜻밖에 제대로 걸렸던 겁니다. 남들이 귀찮아서라도 건드리지 않을 데를 쑤셔서 대어를 건졌죠.” 그로메 학원에 공화주의자 무리가 숨어든 것 같다는 정보는 그쪽 일을 담당하는 장교들 사이에서 예전부터 신빙성 있게 퍼져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뚜렷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방치된 건을 놓고 제나스는 학원을 중퇴한 학생들의 명부를 조사한다는 생각을 해냈다. 란지에, 하일저 등의 이름이 포착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깊은 의심은 없었다. 학생들의 나이가 생각보다 어렸던 까닭이었다. “그런 걸 뒤져볼 마음을 먹은 게, 아마 슬슬 한 건 보여주어서 소문을 잠재우고 싶었지 싶습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품을 법한 생각이긴 하죠. 그래서 제나스 소령은 무려 그 학생들이 남기고 간 물품들을 다 뒤질 생각을 했어요. 보통은 상관이 시켜도 안 할 것 같은 일인데 말입니다. 그 과정에서 학원에 드나드는 웬 여자를 봤는데, 딱 수상하더라는군요. 왕국8군에 보면 그렇게 직감이 발달한 장교들이 좀 있습니다. 추적을 해 봤더니 아니다 다를까 숨어 있는 민중의 벗이었던 거죠. 근데 뭐 아직 아무 일도 안 한 잔챙이, 지망생이랄까. 하여간 당장 붙들어간다고 뭐 나올 게 없어 보이더란 거죠.” “그래서 미끼삼아 놔둔 게군?” “네. 잘 참았지요. 뒷조사를 해 보니 정보가 꽤 쉽게 나옵니다. 그 애나라는 여자가 학원에서 잡일을 좀 도왔었다고 하는데, 그 여자를 학원으로 데려온 사람의 이름이 사라진 학생 명부 속의 이름과 딱 겹쳤습니다. 어찌 보면 민중의 벗에서 저들 회원을 어찌 그렇게 허술하게 놔뒀나 싶은데, 아마 아직 별일을 안 했기 때문에 숨길 필요를 느끼지 못한 모양입니다. 아시다시피 민중의 벗에서 사람 하나 제대로 숨겨야겠다 싶으면 꼬리도 못 찾게 해버리잖습니까.” 노스트가 거들었다. “그 여자가 명령이라도 어기고 행동한 것이든가.” “그럴 수도 있겠죠. 그랬던 거라면 붙잡힌 놈만 불쌍하게 된 겁니다. 그 여자는 못 잡았어요. 사라져버렸거든요.” 노스트가 혀를 찼다. “소식 거참 빠르군 그래.” “누군가가 일찌감치 귀띔을 했지 싶습니다. 호송단보다도 소식이 빨랐으니까요. 예의 나이트워커겠죠. 그 바퀴벌레 같은 놈들.” 모리나크는 히스파니에에게 무슨 정보든 다 전달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왕국 8군의 군인이었다. 민중의 벗과 나이트워커는 그의 적이었다. 그는 어르신이 정보를 다 쓸 만한 일에 쓸 것이고,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 일은 없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대로였다면 제나스는 몇 년이고 기다리기만 하다가 성과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제나스 앞에 한 놈이 나타났죠. 이걸 나타났다고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상황만 놓고 보자면 기가 막힌 우연, 아니 필연의 일치였습니다.” “그 자의 이름이 브리앙?”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노스트가 피식 웃었다. “우리 어르신은 모르는 것 빼고는 다 알잖나.” “물론 그렇긴 하지만... 그 자의 존재는 왕국8군 내에서도 극비였단 말입니다. 저도 이번 일이 없었으면 영영 몰랐지 싶습니다. 워낙 거물에게 붙였던 첩자라 상대방의 정보망에 노출이 되면 끝장이었으니까요.” 히스파니에가 인상을 찌푸렸다. “거물이라고?” “예. 오를란느 공국 로사 알브의 대영주, 지스카르 드 나탕송.” 히스파니에가 프리실라를 돌아보았다. 프리실라도 고개를 저었다. 몰랐다는 의미였다. 선뜻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로사 알브의 대영주가 민중의 벗이라고? 히스파니에는 왕국8군 안에 모리나크 외에도 정보원을 몇 더 두고 있었다. 남부에서 속속 올라오는 보고를 감시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택이었다. 그러나 아직껏 나이트워크에는 손대지 못했다. 똑같이 비밀스런 조직이라 해도 왕국8군처럼 위계와 보고선이 뚜렷한 조직에 침투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웠다. 그러나 나이트워크는 나이트워커 한 명을 포섭한다 해도 그 자가 아는 조직과 정보의 범위가 매우 좁기 때문에 결국 원하는 정보를 위해서는 그걸 다루는 자를 직접 찾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몇 달 동안 히스파니에는 테오와 손을 잡았던 민중의 벗 간부를 뒤쫓았다. 지하 세계라고 흔히 부르는 뒷골목과 부랑자들의 정보를 취합해서 지구 위원장들의 정체를 어느 정도 파악했지만 마지막 단계의 추리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몇은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런데 왕국8군 쪽에서 간부 하나가 체포됐다는 소식이 왔다. 그때부터 역추적이 시작되었다. 수훈자인 제나스, 제나스에게 결정적 정보를 제공했다는 브리앙의 이름을 뽑아냈지만 그 자가 어째서 정보를 갖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리나크의 입에서 로사 알브의 대영주가 튀어나온 것이다. “분명한 일인가?” “네. 왕국8군에서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제대로 된 증거가 없었을 뿐이죠. 증거 없이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까요. 나탕송 백작의 별장은 민중 클럽의 젊은 지도자들을 길러 내는 요람 같은 데랍니다. 위험한 자들을 여럿 교육시켜서 내보냈죠. 그래서 착안을 하고서, 젊은 녀석 하나 교육을 잘 시켜서 들이밀었죠. 그게 브리앙 마텔로입니다. 우리로서도 대단히 투자한 계략이었습니다.” 지스카르를 속일 정도로 치밀한 계략을 짜려면 왕국8군 중추부의 포관적인 뒷받침이 필수적이었다. 지스카르와 민중의 벗의 밀월을 증명할 구체적인 증거를 가져오는 것이 브리앙의 임무였다. 그것을 해낼 수만 있다면 로사 알브의 대영주를 켈티카로 소환할 근거를 쥐게 되는 것이다. 최근 국왕과 마찰을 빚고 있는 오를란느 대공을 압박하기에도 더없이 좋은 카드가 되어 줄 예정이었다. “그래서 그 자가 간부급의 신원을 알아낼 건가?” “그게 실은 그렇지 못했죠. 브리앙은 몇 달이나 잘 지내다가 어느 날 뒤통수를 맞았습니다. 나탕송 백작의 제자였다는 누군가가 왔다가 가면서 그 자의 정체를 꿰뚫어봤던 거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는지, 거 참. 민중의 벗에서 전부터 브리앙을 의심했던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브리앙은 실패하고 도망쳐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갈았죠. 그 자에게 보복을 하겠다고 말입니다.” 브리앙은 그 자의 모습을 보지도 못했다고 했다. 왕국8군에서도 찾아내고 싶어 했지만 조금 파고들자 비슷비슷한 사람들 여럿 속으로 빠져들면서 오리무중이 되어버렸다. 간부급에게 지원되는 위장술이 틀림없다고 직감한 중추부는 이 자를 요주의 조사목록에 올려놓았다. “그래서 브리앙은 독자적으로 그 자를 찾아내려고 애를 썼답니다. 공을 세우고 싶었겠죠. 열쇠는 브리앙과 함께 공부하던 어느 여학생이었습니다. 그 자가 그 여학생을 데려갔거든요. 하지만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가버린 그 자와 여학생을 무슨 수로 찾는답니까?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그는 정보부에 보고서를 내놓고 이러이러한 여학생과 관계된 정보가 있는지 문의를 했지만, 큰 기대는 안 했던가 봅니다. 브리앙은 고급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지위가 못되거든요. 지난번 일을 하느라 임시로 받았다는 직책이 고작 하사관이니까요. 우린 그런 자들을 액터(Actor)가 아니라 팩트(Fact)라고 하죠. 그런데 그 보고서가, 똑같이 짚더미에서 바늘 찾고 있던 제나스한테 딱 걸린 겁니다.” 흥분한 모리나크는 손뼉까지 딱 쳤다. 히스파니에가 물었다. “그럼 제나스가 조사하고 있던 여자가 브리앙이 찾던 그 여학생이었단 말인가?” “바로 그겁니다. 연극 같은 일이지만 진짜로 벌어진 걸 어쩝니까. 둘 중 하나라고 그 여자를 신경 쓰지 않았거나, 중도에 포기하고 손 놨더라면 그 민중 클럽 간부 놈은 문제없이 빠져나갔을 텐데 말이죠. 고양이 쥐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해보니 그 치도 안됐네요.” 모리나크는 이어 브리앙이 제나스가 알려준 대로 애나를 찾아가 그녀를 속이고 브리앙이 찾던 자이자 제나스가 찾던 자, 즉 그로메 학원의 숨은 조직원을 찾아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그 위치 또한 뜻밖이었다. “전 귀족들이 저들을 타도하자고 떠드는 민중의 벗 놈들한테 빠지는 이유를 알 수가 없는데요, 이게 드문 일만은 또 아니어서 참 어이가 없는 노릇이에요. 나탕송 백작도 그랬고, 이번엔 무려 아마란스 백작가의 아가씨가 개입되어 있어서 참 난감한 것이, 아가씨가 그 치를 가문의 여름 별장에 숨겨주고 있었는데, 거기가 또 뚜렷한 증거도 없이 쳐들어갈 순 없는 곳 아니겠습니까?” 들을수록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물론 브리앙이 증언을 하겠지만, 애나라는 여자가 그 둘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잡아떼면 그만 아닙니까? 또 어떻게 해서 그 자가 나탕송 백작을 찾아갔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죄가 안 되죠. 나탕송 백작이 평민 젊은이들을 모아 공부 좀 가르쳤다고, 그리고 한두 마디 불온한 말을 했다고 남의 나라 대영주를 붙잡아 올 수는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브리앙은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으니까요. 자칫하다가는 첩자를 보낸 것 때문에 거꾸로 추궁당할 수도 있는 거고요.” 히스파니에는 혀를 차다가 말했다. “그래서 우회 전략을 택했군 그래.” “네. 아마란스 가문 아가씨가 그 민중의 벗 놈과 학원에 같이 다니던 시절에 아가씨를 자주 찾아갔다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쪽도 또 귀족이어서 그것 참... 보통 놈이 아니에요. 아니, 진짜 여자들 좀 후리게 생기긴 했는데 그렇다고 혈통도 좋은 아가씨들이 줄줄이 쫓아다닐 건 또 뭐랍니까?” “그 나중 여자가 이번에 같이 잡혀왔다는 아르장송 자작의 딸이군?” “네. 아실 것 같았지만. 처음에 그 여자를 데려다가 슬슬 정보를 흘렸더니 잽싸게 아마란스 별장으로 쫓아내려 가더랍니다. 제나스는 영리하게 그 여자를 뒤쫓았고, 결국 그 여자가 전부 다 불러내더군요. 깨끗하게 끝났습니다.” 프리실라가 씩 웃었다. “어차피 아마란스 가문 따님은 별일 없었을 거 아냐?” “현장에서 걸렸는데도 워낙 당당하셔서 뭐, 쉽지 않더랍니다.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게 하고 나중에 다시 찾아갔더니 아주 솔직하게 말하더래요. 자기가 학원을 같이 다니다가 그 남자한테 빠져서 그만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줬다고. 그런데 그 자가 민중 클럽인 건 결단코 몰랐대요. 부모를 위해서 비밀 꼭 지켜달라고 신신당부하더라는데, 일단은 두고 보기로 했답니다. 원래 중앙 귀족들보다 그런 변경백들이 건드리기 더 힘들잖습니까.” 히스파니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많은 도움이 되었다. 모리나크, 조만간 또 연락하마.” 모리나크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네. 언제라도 도움 드릴 일이 있으면 연락하십시오.” 빌과 노스트가 일어나 모리나크를 일으켰다. 프리실라가 빌의 손에 파이프를 건네 주었다. “오는 길에 불 좀 붙여 와.” 세 사람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어렴풋이 모리나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휴, 앞이 보이니 살 것 같군요, 하고. “프리실라.” 히스파니에가 부르자 프리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생각보다 공교롭군요.” 히스파니에는 대답 없이 생각에 잠겼다. 프리실라는 얼마 동안 혼자 의자 다리를 덜컥거리고 있다가 물었다. “그 자가 우리가 찾는 자라면 어쩌실 작정이세요?” “......” “어차피 벌하려던 자가 왕국8군 손에 걸렸으니 손도 더럽힐 일 없이 잘 됐다? 아니면 어떻게든 빼내 와서 우리 손으로 처리해야겠다?” 히스파니에가 한참 만에 대꾸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 “그럼 그 둘 말고 다른 선택지라도 있다는 말씀이세요?” “많지.” “많더라도 오래 고민할 시간은 없죠. 한 십여 일 더 놔두면 송장이 왜서 나올 테니까. 그러면 선택이고 뭐고......” “프리실라.” 히스파니에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프리실라는 저절로 자세를 바르게 하며 대답했다. “네.” “방금 들은 그 자에 대한 얘기, 어떻게 생각하나?” “똑똑한 자인데 부주의한 사람 때문에 운 나쁘게 걸린 거죠.” 히스파니에는 고개를 저었다. “그거 말고. 이야기의 허점. 빈 곳.” 프리실라는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러네요. 만일 왕국8군이 생각한 대로 아마란스 양이 민중의 벗이 아니라면, 그녀를 찾아갔다는 이유로 추적당한 아르장송 양이 민중의 벗일 수는 없는 거죠. 굳이 따지자면 그 자를 별장에 숨겨준 아마란스 양 쪽에 혐의가 더 가는군요.” 히스파니에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난 아마란스 양은 민중의 벗이고, 아르장송 양은 아니라고 본다. 알다시피 그날 이 모퉁이집의 협장 자리에는 세 사람이 나왔다. 돈 크레아라는 협상자, 이지안 디, 그리고 이름을 밝히지 않는 여자 회원. 이 여자는 얼굴을 가렸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아마란스 양에 가깝지.” “네. 협상이 있던 날짜에 아르장송 양은 남부에 있었죠.” “그래. 하지만 문제의 여자가 둘 중 누구도 아닐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겠지. 여기서 또 하나 의문이 생기는 것은 제나스는 그 자와 아르장송 양이 연인 관계라고 보고했다는 걸 우린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아마란스 양은 단지 짝사랑을 하고 있었을 뿐이란 말인가? 게다가 이들이 붙잡힌 날 밤, 연인들의 재회 자리에 아마란스 양은 왜 같이 있었단 말인가? 제나스가 연인이라고 판단한 것을 보면 그날 그들은 실제로 연인처럼 보였던 게야.” 확실히 어색한 점이 있군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확신하기 힘들죠. 그런데 어르신의 목적이 민중의 벗 조직을 고발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어르신, 뭔가 다른 생각이 있으신 것 같은데.“ 히스파니에는 의자에 깊이 몸을 묻으며 대답했다. “그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온 빌은 프리실라에게 연기 오르는 파이프를 건네주고 뒤따라 온 사람을 가리켜 보이며 입구에서 비켰다. 얼굴이 거무죽죽한 젊은 사내였다. 눌러쓴 모자로 가렸지만 한눈에 레코르다블 사람을 연상시키는 외모였다. 젊은이가 절을 하자 히스파니에가 말했다. “잘 왔다. 칸카. 그럼 마지막 조각을 맞춰 볼까.” 2 비밀의 말의 거처 “그믐의 아이야, 잠들지 말렴. 밤이고 낮이고 계속 달리렴. 네 뒤를 쫓아오는 맨발의 아이가 너를 지나쳐 달려 나가기 전에 저 멀리 달리렴, 힘을 다해서 품안의 비수를 꼭 쥐고 달리렴. 마침내 맨발의 아이가 다가오면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말렴.” 그로부터 십여 일이 지나 노아질베르 강을 타고 ‘용의 입’을 거쳐 켈티카로 들어간 또 다른 배가 있었다. 노아질베르 수운은 중남부 지방에서 켈티카로 올라오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단점이 있다면 남부로 내려갈 때는 이용할 수 없다는 점 정도였다. 떠날 때는 셋이었으나 돌아온 것은 둘뿐이었다. 하이아칸에 간 막시민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 정도로 급했다. 가장 빠른 배를 찾아내고 시간 지체 없이 갈아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난 여행과 사뭇 비교되는 고급스런 수단들이 모조리 동원되었다. 최근 몇십 일 동안 노아질베르 수운을 이용한 사람들 중 거의 전부가 아르님 소공작이 켈티카로 달려간 것을 알았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저택 입구에서 조슈아는 부모님에게 인사드릴 사이도 없이, 그리고 이렇듯 달려온 목표와 마주칠 겨를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붙잡혔다. 쥬스피앙이었다. “너! 내 방으로 따라와! 지금 당장!” 명령은 명령대로 해놓고 팔을 잡아끌며 성큼성큼 걸었다. 조슈아도 쥬스피앙의 팔을 붙들었다. “잠시만......” “잠시는 개뿔 잠시냐! 내 말 안 듣고 그놈 보러 갈 생각은 하지도 마라!” 마차에서 짐을 꺼내느라 뒤늦게 뛰어온 티치엘은 그 모양을 보더니 이유도 묻지 않고 즉시 조슈아의 나머지 한 쪽 팔을 잡았다. “아빠가 가자고 하시면 다 이유 있는 거야. 일단 가봐.” 그렇게 현장에서 체포된 범인 같은 자세로 쥬스피앙의 방까지 질질 끌려간 조슈아는 물을 닫자마자 앉을 사이도 없이 방구석으로 밀어붙여 졌다. “너, 오늘 당장 도로 네냐플로 가라.” 조슈아는 아연해졌다. “내게 연락한 사람도 당신이고 그래서 이렇게 급히 뛰어온 납니다. 돌아가라니요?” “너 혼자 가라는 거 아니다. 네 인형도 함께다.” 쥬스피앙은 곁에 선 티치엘에게 테이블 위에 놓은 것을 살펴보라고 손짓 했다. 테이블 쪽으로 돌아선 티치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빠, 이건......” 커다란 수정구였다. 아니, 수정구하고는 하지만 투명한 기운은 없었고 금록석이나 오팔 종류처럼 붉거나 호박색, 또는 검은 기운과 선들이 뒤엉키며 번져 있는 구였다. 잠시 후 티치엘이 긴장된 표정으로 쥬스피앙을 돌아보았다. “아빠!” “그래, 네 눈엔 어떻게 보이냐?” “무서운 게 가까이 온 거죠? 저 이런 건 처음 봐요.” 티치엘은 조슈아를 돌아보았다. “저건 아빠가 ‘힘의 천구의’라고 부르시는 것인데 주변 공간의 마력의 흐름을 반영하는 그림을 보여줘. 힘이 가까울수록 잘 반영되고.” 기괴해 보이는 구의 색깔을 보자니 좋은 예감이 들지 않았다. 조슈아가 물었다. “저 상태가 무슨 뜻인데?” “천구의의 흐름은 아빠가 오랜 경험을 통해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기 때문에 난 아직 잘 읽지 못해. 하지만 검고 붉은 기운이 겹쳐질 때 위험하다는 건 알아. 위험한 마법이라는 거야.” 조슈아는 눈을 약간 찌푸리며 말했다. “강한 마법이라고 다 위험한 건 아닐 텐데?” “물론이지. 우리가 단순히 마법, 또는 마력이라고 부른 ㄴ것들에는 다양한 속성이 있지만, 분류하기 어려워서 우린 그걸 경계가 없는 변화로 이해하고 있어. 그래봤자 예외도 많지만. 위험하다는 말 대신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거야. 급격함, 강화, 압축, 광기, 탐욕.” 조슈아의 눈이 쥬스피앙을 향했다. 쥬스피앙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형사가 가까이 온 거다. 그 자가 본체의 영향력을 회복했어.” “그래서 인형이 눈을 떴단 말입니까?” “물론이다.” 쥬스피앙이 천구의로 다가갔다. 구 속에 어지럽게 번진 흐름은 처음과 엇비슷해 보였으나 조슈아의 눈에는 미묘한 변화가 보였다. 붉은 선이 좀 더 늘어났고, 호박색이 더 어둡게 변했다. “실은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본체와의 거리가 떨어지면서 인형을 장악 할 수 없게 된 건 인형사 본인이 가진 마력이 약했기 때문인데, 그걸 단시일에 이렇게까지 강화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쥬스피앙은 갑자기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어떤 천재라도 불가능해! 그 자는 고작 한 해도 지나지 않는 사이에 자신의 마력을 수십 배나 강화했단 말이다! 빌어먹을 창 조각!” 조슈아는 눈을 내리깐 채 대답하지 않았다. 쥬스피앙은 초조한 듯 손끝으로 천구의를 두드렸다. “인형사 놈이 인형을 건드릴 수 없는 곳으로 가야 해. 네냐플이 제일 좋다. 그곳에는 ‘안고니나의 커튼’이 쳐져 있어. 비록 인형사가 수십 배나 강해진 마력으로 인형을 부른다 해도 안고니나의 커튼을 뚫고 명령을 내릴 수는 없다. 가나폴리의 마지막 대마법사 다섯 명 중 하나가 만든 장막이니까. 현재 그걸 뚫을 수 있는 마법은 없어.” “도망치란 말입니까?” “그럼 다른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인형은 말이다, 네 것이 아니야. 그 인형사 거야. 그놈한테 속해 있다고. 네 인형이 무슨 생각을 하든, 너와 화해를 하든, 결심을 하든 말든, 인형사가 부르기 시작하면 아무 소용이 없어. 인형사가 내린 명령에 저항할 수가 없는 존재야. 내일이라도, 아니 지금이라도 인형사의 지배가 다가와 그의 머리를 마비시키면 너와 마주치는 순간 목을 조를 수도 있는 거라고.” “알고 있지만.” 조슈아는 다시 천구의를 내려다보았다. 그림은 또다시 바뀌어 있었다. 마구잡이로 그은 듯한 선이라 해도 그는 알아볼 수 있었다. “알고 있으면 짐도 풀 것 없이 바로 가라. 지금은 인형사가 연결을 회복한 정도지만 조금 있으면 명령을 내리려 할 거야. 지체할 시간이 없다.” 고개를 든 조슈아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그가 이 사실을 납득할 것 같습니까?” “지금 인형의 의견 따위가 중요해 보이냐!” 쥬스피앙은 소리를 질렀지만 곧 고개를 흔들며 이마를 문질렀다. “아니, 그래,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그쪽에서 쉽게 납득할 거라고는 장담 못하지. 만일 반대한다고 해도 넌 그를 데려가야 해. 무슨 수를 쓰든, 기절시켜서 관에 처넣어서 끌고 가더라도.” “하지만 그가 당신을 죽일 가능성은 없죠. 죽이더라도 나겠죠. 오히려 당신은 인형을 가까이 두고 연구하고 싶어 하는 사람인데, 당신에게서 멀리 떨어뜨려 놓으라고 하다니.” 쥬스피앙이 팔짱을 꼈다. “지금 내 말을 의심한다는 거냐?” “아뇨. 당신이 왜 그리 쉽게 도망가라고 조언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래요. 인형사는 우리가 찾던 자란 말입니다. 난 그와 결판을 내고 싶어 그를 찾으려고 애를 썼고, 막군이 하이아칸까지 간 이유도 그겁니다. 그런 그가 제 발로 이리로 온다는데 도망쳐야만 합니까?” 쥬스피앙의 자존심을 건드리고도 남을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의 뒤통수를 갈겨 줄 친구는 이곳에 없었다. 쥬스피앙의 목소리가 비틀렸다. “이놈 말하는 것 좀 봐라. 그놈의 인형사가 오면 네가 직접 막을 작정인가보군 그래? 자, 어떻게 숨을 건데? 어떻게 네 인형, 그리고 너 자신을 보호할 생각이냐?” “보호는 안 합니다. 난 인형사에게 내 얼굴을 보여줄 겁니다. 단 한 번 보았던 내 얼굴을 기억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내게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고 물을 겁니다.” “호오, 사과를 받으시겠다? 아예 친구가 되자고 하지 그래?” 두 남자가 서로를 노려보는 가운데 티치엘이 다가와 쥬스피앙의 팔을 살그머니 잡았다. “아빠......” 잠시 후 쥬스피앙이 한숨을 내쉬면서 팽팽해졌던 공기가 다소 누그러졌다. 쥬스피앙은 다시 천구의를 살폈다. 그는 데모닉이 아니었지만 이 흐름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변화를 알아볼 수 있었다. “네놈의 미친 소리에 내가 같이 화를 내다니 한심한 노릇이다. 요점만 말해주마. 내 보호를 기대한다면 그런 기대는 접어라. 마법으로 부자간의 정, 모녀간의 정을 끊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런 것처럼 인형사와 인형의 관계도 쉽사리 끊을 수 없다. 내가 안고니나의 커튼을 추천하는 것은 다 그럴만하기 때문이야. 잊지 마라. 인형을 만드는 것은 가나폴리의 기술이다. 가나폴리의 마법을 이 시대의 힘으로 막을 수는 없다.” 티치엘이 조그맣게 말했다. “조슈아. 아직 넌 그에게 물어보지 않았잖아.” 이윽고 조슈아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는 몸을 돌려 문고리를 잡으며 부녀를 돌아보았다. “그를 설득하도록 노력해보죠.” 노크를 하려던 손이 멈추었다. 답할 사람이 없음을 아는 까닭이었다. 문을 당기자 달칵, 하는 소리가 차가웠다. “오랜만이야.” 푸른 양탄자는 밟는 사람이 없어도 빛이 바랬다. 아침저녁으로 다녀가는 볕이 어김없이 자국을 남기고 갔다. 둥그스름하게 굽은 의자 다리 중 둘은 그림자를 밟고 있었다. 절반은 빛에 잠겨 있었다. 소년은 의자를 손으로 쓸어 보았다. 벨벳 솜털이 무늬를 만들며 이리저리 누웠다. 몇 번째인가 소용돌이를 그리던 손가락 끝이 멎었다. 의자에는 무엇을 그리려 했는지 알 수 없는 크고 작은 동그라미들만 남았다. 이 방은 보존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브노아가 이 방을 쓰던 당시와는 많이 다르니까. 그 때는 이처럼 깨끗하고 고상하지 않았다. 의자와 책상 사이에는 떨어져 밟힌 케이크 조각들이 굴러다녔다. 날마다 구두를 신고 내달리니 마루는 성할 날이 없었다. 소파에는 인형이 한 더미 쌓여 있었다. 어려서부터 물고 찍고 했던 인형들은 흡사 전쟁터에서 살아온 상이용사들처럼 보였다. 그 모든 것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 방은 스무 살의 우아한 여주인이 양탄자에 자국 하나 내지 않고 걷던 곳인 체하고 있었다. “누나, 만일 여기 있다면.” 소년은 말하려다 말고 피식 웃어버렸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내 얘기 좀 들어봐 줘. 예전에 누나가 보던 그림책에 있었던 이야기였지. 어떤 사람이 두 마리 사자가 지키는 지옥문을 지나 금은보화를 가지러가는 얘기야. 그 사람이 지옥문을 통과하려고 하니까......” 소년은 고개를 돌려 창 쪽을 보았다. “사자가 그랬지. 네 그림자를 뒤에 두고 가라고. 그래야만 통과시켜 주겠다고. 그 사람은 자기 그림자는 자신의 일부라서 떼어놓을 수가 없다고 했어. 그러자 사자가 말하길 그렇지 않다, 네 그림자는 네 몸의 일부가 아니며 심지어 너와 떨어지고 싶어 한다, 떨어지고 나면 그림자는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되니까, 라고 했지.” 소년은 책상에 몸을 기댔다. 등 뒤의 의자로 쏟아지는 빛을 막아서면서. 의자에 앉아 그의 말을 들을 사람이 있는 것처럼. “난 자유로워진 걸까?” 창밖의 잎사귀가 한들거렸다.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하지 않고서. “아니면, 그림자를 잃은 걸까.” 그러자 바람이 멎으며 잎사귀들은 조용해졌다. “내가 굉장히 오래 잤다고 해. 믿을 수 없는 얘기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그렇게 오랫동안 살아 있을 순 없어. 차라리 죽었다가 도로 살아났다고 하는 편이 더 그럴듯하잖아? 그는 자기 의견을 긍정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난 생각해 봤어. 내가 죽었던 것일까? 죽은 자들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을까? 죽은 자들이 맨 먼저 보게 된다는 ‘그 문’을 보았을까?” 소년은 고개를 흔들었다. “보지 못했어. 보았더라도, 기억이 안 나. 내가 갈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일까? 내가 죽어서 갈 곳은 죽은 자들의 세계가 아니라, 헝겊 인형을 버리는 쓰레기통이기 때문에?”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으려했지만 소용없었다. 아랫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누나는 잘 알겠지. 그 문이 어떻게 생겼는지. 문 너머로 떠났더라도... 아직 떠나지 않았더라도......” 그는 돌아섰다. 빈 벨벳 의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가 그려놓았던 동그라미들이 흐려진 것이 보였다. 숨이 약간 가빠졌다. “대답해 봐. 가지 않았다면 대답할 수 있잖아. 내가 누나를 볼 수 있어야 하잖아. 난 할 수 있어야 하잖아. 내 말이 들려? 들리지 않아? 내가 잠든 동안 찾아왔었어?” 대답하지 않는 허공에서 먼지가 느리게 떨어져 내렸다. “나한테는 대답하지 않는 거야? 대답하고 싶지 않은 거야? 켈스처럼? 다른 모두처럼? 난 누나의 동생이 아니라서?” 그 순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 소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짓씹으며 문을 쏘아볼 따름이었다. 다시 소리가 들렸다. “안에 있어?” 몸이 굳어졌다. 싸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소년은 책상을 짚으며 물러났다. 저도 모르게 비틀거렸다. 창을 돌아보았다.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에게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다. 벗은 몸을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얼굴이 달아오른다. 영원히 숨기고 싶다. 얼굴도둑인 자신을. 그의 것을 훔쳤다는 사실 낙인처럼 드러나는 모습을. “들어가도 될까?” 아무리 창피하더라도 영영 달아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단 한 번은 만나야 했다. 그게 지금이어야 할까? 그가 선택할 수는 있는 걸까? 언제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걸까? 이윽고 수많은 생각을 가로질러온 대답이 울렸다. “응.” 문이 열렸다. 이 순간을 기다리고 두려워한지 일 년하고도 다섯 달 만이다. 저만치 창을 등진 소년이 보였다. 어깨에 닿는 머리, 흰 실내복, 파리한 뺨을 하고서 그를 보고 있었다. 아니, 잠시였다.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가슴이 물결쳤다. 조슈아는 문에 기대어 선 채 애써 평범한 말을 찾아냈다. “머리가 길구나.” “못 잘랐어.” 기이할 정도로 익숙한 어조에 둘 다 말문이 막혔다.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한 채 몇 초가 흘렀다. “누가 이 방에 있다고 알려줘서.” 소년은 느리게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러고 있어? 용건만 말하고 가버릴 것처럼.” 조슈아는 문에서 등을 뗐지만 여전히 가까이 가지는 않았다. “그러려고.” “그럴 필요 없어. 이리 와서 앉아.” 소년은 조금 전까지 바라보던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 위에 남은 불규칙한 무늬를 슬어 지웠다. 조슈아는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들의 눈에 비치는 자신을 관찰하는 기분이었다. 조슈아가 머뭇거리자 먼저 않은 소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왜? 가까이 오면 찌르기라도 할까봐?” 조슈아는 들어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두 걸음 이내였다. 조슈아가 이어 미소를 보였다. “위험한 건 너무 마찬가지지.” 그렇군. 내가 한 번 찔렀으니까 이번엔 네 차례겠네.“ “아니. 한 번씩 돌아갔으니 공평해.” 소년은 입을 다물었다. 숨을 삼키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입술을 오므렸다가 이윽고 무표정해졌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동안 조슈아는 무심코 왼쪽 팔걸이에 몸을 기대려다가 상대방이 거울상처럼 똑같은 자세를 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 뺨이 상기됐다. 소년은 그런 그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불쑥 찾아왔던 호흡 곤란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내가 잠든 동안 죽일까 말까 고민 좀 했어?” “그때가 아냐. 널 만나기도 전이었어.” 돌이키는 순간 그 때의 감정이 검은 잉크처럼 끼얹어졌다. 그 때의 어둠이 눈앞을 뒤덮었다. 캄캄했고 끈적거렸다. 자신은 침대 위로 손을 내밀었었다. 그때 그가 그곳에 있었더라면 목을 졸랐을 것이다. 소년이 냉소적인 시선을 보냈다. “하긴 수도 없이 죽이는 상상을 해봤겠지. 상상만으로도 죄가 된다면 어쩌면 네 쪽이 채무자일지도 모르겠네. 내가 네 존재를 안 순간은 아주 짧았어. 잠든 시간을 뺀다면 더욱 그래. 널 찌른 순간에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었지. 하지만 넌 내 존재를 할고 나서 이 문제를 한시도 잊지 못했을 거 아냐.” “그래. 밤도 낮도 자유롭지 못했어. 밤에는 네 꿈을 꾸고 낮에는 보이지 않는 네게 말을 건넸어. 널 볼 수 있게 될지는 알 수 없었어. 네 말이 맞아 난 본체를 파괴하려 했었어. 내가 상상한 장소에 그것이 있었더라면, 너와 마주치기도 전에 모든 것이 끝났을지도 모르지.”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화를 내거나 비웃는 대신 조슈아를 뚫어져라 보았다. 억지로 가장한 냉소가 깨어졌다.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덜걱거렸다. 뺨과 턱과 입술은 억지로 제자리에서 버티려 했다. 그러나 눈만은 아니었다. 부풀어 오르던 눈동자가 끝내 부서졌다. “왜... 그렇게 해주지 않았어!” 아름다운 여주인이 떠난 뒤 죽은 꽃다발처럼 바삭바삭하게 말랐던 방에 물이 흐른다. 수은도 유황도 아닌 소금기 어린 따뜻한 물이 흐른다. 모두 숨을 죽이고 있다. 의자도, 책들도, 긴 휴식에 들어간 인형들도 속삭이지 않는다. 조슈아는 일어섰다. 선뜻 다가가지 못한 채 멈추었다. 다시 한 걸음 내디뎠다. 양탄자가 모든 소리를 지웠다. 구두가 멎고 무릎이 바닥에 닿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뺨에 처음 손을 댔을 때 떠오른 생각은 ‘따뜻하다’였다. 팔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무릎을 꿇은 채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잠시 후 몸이 허물어져 왔다. 굽힌 어깨가 뺨에 닿고 눈물 몇 방울이 조슈아의 이마로 흘러내렸다. 이렇게나 믿어지지 않는 존재다. 마치 한 몸 같다. 그들이 딛고 선 곳이 대지라면 발밑으로 한 뿌리가 뻗어있을 것 같다. 한 탯줄이 뻗어있을 것 같다. 머릿속에 사는 수많은 자신들을 처음으로 용서했다. 그들을 낳은 건 나였다. 천재도 악마도 괴물도 바보도 다 나였다. 내 죄, 내 껍질, 내 그림자, 내 배를 가르고 꺼낸 나의 태아. 따로 뛰던 맥박이 서서히 같아지다가 이윽고 일치했다. 그 맥박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말로 다할 수 없는 감동이 찾아왔다. 조슈아가 말했다. “기억나니. 유리 인형 말이야.” 대답은 들리지 않고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지만 상대가 긍정한 것을 저절로 알 수 있었다. 조슈아는 갑자기 풋, 하고 웃었다. “기억나느냐고 묻다니 나도 참 바보 같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데. 그래, 코츠볼트에서 막군하고 할아버지하고 지낼 때 저 먼 비취반지 성에는 유리 인형이 남아 내가 할 일을 다 해주고 있지 않을까. 그 생각을 처음 한 때가 막군이 찾아와서 빵을 주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줬던 난 밤이었어.” ‘아마도’, ‘그럴 거야’ 같은 말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상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때 한 생각마저도. 조슈아는 그날의 생각을 그대로 옮겨 말했다. “언젠가 성으로 돌아가면 그 인형과 누가 진짜인지 겨뤄야 될까?” 지금이 그 순간이었다. 꼭 8년이 지나 그들에게 그 날이 왔다. “꼭 증명해야만 하는 건 아닐지도 몰라.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행복하게 살면 그만 아닐까.” 그 생각은 마치 예언 같았다. 조슈아는 홀로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성에 돌아왔을 때 너무나 어색해서 어쩔 줄 몰랐지. 그래서 생각했어. 유리 인형은 어디에 숨어 있는 걸까. 왜 얼른 나와서 자기가 할 일을 하지 않는 걸까.” 눈물이 그쳤다. 조슈아가 고개를 숙이자 그의 턱이 머리에 닿았다. 그의 손가락이 조슈아의 머리카락 위로 미끄러졌다. 조슈아는 다시 따로 뛰기 시작하는 맥박을 느끼며 말했다. “내가 유리 인형이 될게.” 손이 멈췄다. “무슨... 뜻이야?” 조슈아는 고개를 들어 상대의 눈을 보았다. 그의 눈이 다시 떨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말했다. “무슨 뜻인지 알잖아. 네가 모를 리가 없잖아.” “착각하지 마. 인형은......” “너라고? 아니. 네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난 널 알고 있었지. 너를 생각하고, 네가 있었으면 했어. 이렇게 나타나줘서 고마워. 그동안 대신해줘서 고마워. 이제 교대해야지. 이제부터는 내가 유리 인형이 될게.” 비취반지 성에 사는 반작이는 유리 인형은 아버지와 가문이 사랑하는 소공작이며, 페리윙클 섬사람들이 사랑하는 축복받은 아르님이었다. 이카본에게 물려받은 맹세로 맺어진 약속의 사람들의 공작이었다. 조슈아가 벗어나고 싶어 했던 모든 것이었기에, 그것의 이름은 데모닉이었다. 자신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자신의 이름으로 인정했다. “난......” “넌 이제 무엇이든 될 수 있어.” 조슈아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어린 시절의 말도 안 되는 꿈을 이렇게 이뤄주는 누군가가 있다니 세상도 의외로 살만한 곳이잖아? 네가 있기에 난 썩은 목장의 꼬마나 배우 막스 카르디가 되지 못했다고 괴로워할 필요가 없을 거야. 지금 난 마치......” 문득 다시 목이 막혔다. 힘겹게 말을 이었다. “네가 내 안에서 튀어나가고, 나는 남은 껍질인 것만 같다.” 소년의 손이 느리게 움직여 조슈아를 밀어냈다. 그리고 일어섰다. 조슈아는 따라 일어서며 상대의 표정이 결연한 것을 보았다. 불안한 예감이 밀려왔다.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이걸 봐.” 소년은 실내복의 긴 소맷자락을 걷어 올려 조슈아의 눈앞에 내밀었다. 그건 언뜻 보기에 흰 점토로 장난을 하다가 말라버린 흔적 같았다. 그러나 실상은 처참했다. 하얗게 마른 피부가 들뜨고, 조각나 갈라졌고, 짓무른 피부 내벽이 붉은 금이 되어 드러났다. 점차 가늘어지는 금이 팔꿈치 쪽으로 뻗어나갔다. “어떻게... 된 거야?” “이런 곳이 여기뿐이 아니야. 알겠어? 난 너와 같지 않아.” 소년이 쓰게 미소를 지으며 소매를 내렸다. 조슈아는 허공을 보고 있었다. 상처가 눈앞에서 사라진 뒤에도 자신이 본 것을 믿기가 힘들었다. “차라리 유리였다면 좋았겠지. 이렇게 갈라지지는 않을 테니까.” 본체와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정말로 부서지고 있었다. 석고 인형처럼. “언제부터야? 깨어났을 때부터 이랬어?” “몰라. 어느 날 보니 이렇게 되어 있었어.” “쥬스피앙 씨한테 말했어?” “아니.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마. 별별 사람들이 몰려와서 신기하게 쳐다보는 꼴은 싫어. 너도 알잖아. 왜 이렇게 된 건지. 의사 따위가 고쳐줄 수 없다는 것도. 난 이를테면 복잡한 태엽시계와 같아. 시계공이 와야 해. 의사 말고 기술자 말이야. 다른 건 필요 없어.” “정말로 그를 기다리는 거야?” 소년은 말없이 조슈아를 보고 있다가 대꾸했다. “넌 그를 용서하기 힘들겠지. 하지만 난 다르리란 걸 너도 이해하겠지. 비록 그게 어떤 감정인지 분명히 알 날은 오지 않겠지만.” 조슈아는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소년이 말을 이었다.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일찍 내가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었어. 머릿속에 들려오는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땐 내가 미쳐가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지. 놀라진 않았어. 너도 알다시피 그건 예정된 미래 같은 것이었으니까. 언제가 될지 몰랐을 뿐이지. 그래서 오히려 담담하게 생각해 왔잖아. 세상일쯤 아무래도 좋다는 기분으로. 내가 돌아버리고 나면 이해하지도 못할 세계 따위. 괴로워해서는 살 수가 없으니까. 안 그래?” 조슈아는 이제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건 또 다른 자신인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기회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란 걸 알게 됐어. 아주 어려운 문제여서 나조차도 오래 생각한 끝에 깨달을 수 있었지. 처음에 난 그걸 ‘부서진 곳’이라고 불렀어. 그리로 내가 조금씩 흘러나간다고 생각했어. 이러다가 텅 비면 끝나는 건가 했어. 그런데 그렇게 비어 버린 자리에, 언제부터인가 누군가가 있었어. 말없지 지켜보면서, 기다리면서.” “기다린다고?”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지만, 자신이 지은 미소를 느끼는 표정이 아니었다. “기다려. 내가 자기를 보아줄 때를. 시선을 느꼈지만 난 필사적으로 외면했어. 그가 입을 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하고 싶지 않았어. 그건 광기와도 달라. 광기는 내 안에서 나오는 거지만 그는 내가 아냐. 내가 만든 내가 아냐. 그런데 내 안에 들어와서 내 일부를 차지하고, 나를 훔쳐보고 있었어.” 소년의 손이 소매로 가려진 자신의 상처를 더듬어 눌렀다. “애니 형의 말로는 그게 바로 본체라더군.” 조슈아의 뺨이 해쓱해졌다. “잠들어 있는 동안 그 자가 사라져서 정말 기뻤어. 오랜만에 자유로웠어. 그 자가 다시 돌아오지만 않는다면 이대로 부서져도 괜찮을 것 같았어. 이렇게 박하사탕처럼 부서져도... 그런데 그는 돌아왔어......” 소년은 다시 떨기 시작했다. 조슈아는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았다. “어쩔 수 없어. 난 망가진 인형이야. 언젠가 그를 찾아가야 해.” “아니야. 쥬스피앙 씨가 해준 이야기 들었지?” “네냐-야플리아 학원에 가라고? 소용없어. 도망쳐도 그는 찾아올 거야.” “네가 원해? 그를 만나고 싶어?” “...아니.” “그럼 만나지 마.” 소년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봤자 이렇게 부서질 뿐이야. 부서지는 동안에도 나를 노려보는 본체의 눈길 때문에 한시도 편할 수 없어. 난 언젠가 내 방식대로 삶을 끝장내야 해. 그렇게 내가 사라지고 나면 넌... 어쩌면 아주 오래 살 수도 있을 거야. 악마가 내 귓가에서 속삭이고 있어. 꿈 없는 잠을 주겠다고. 완전한 망각을 주겠다고. 고통스러운 삶을 또 되풀이할 필요가 없도록, 다시 태어나지 않게 해주겠다고.” 소년은 웃었다. 자신의 미소가 저러했던가. 부서질 듯 연약하면서도 빛나는 미소였다. “마지막이 가장 마음에 들어.” 페리윙클에서 웨더렌 할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데모닉의 운명을 쥔 다이몬, 도는 악마. 그 자가 주었다는 비밀의 말. 그 말을 자신 속에서 찾아 내가 될 그는 죽을 것이다...... 사람들은 아이가 비밀의 말을 기억해 내는 순간 다이몬의 손에서 놓여나리라 하였어요. 죽지도, 늙지도, 자라지도 않는 몸을 되찾게 되리라고 하였어요. ‘질서’가 부여한 인과를 벗어나 자유로워지라고, 동시에 세상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워지리라고 하였어요. “안 돼. 그래선 안 돼. 아직은 부서지지 않았어.” 조슈아는 소년의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따끈하게 열이 오른 손이었다. “살아 있으면서 마음이 먼저 죽을 순 없어. 머지않아 넌 자유로워질지도 몰라. 질서의 손에서도, 악마의 손에서도 놓여나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지도 몰라. 그건 네가 비밀의 말을 찾는 순간이야. 난 아직 찾지 못했어. 그래서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어.” 똑같은 눈동자가 서로를 응시했다. 눈 속에 든 마음을 읽었다. 수많은 수수께끼가 서로를 설명했다. “나보다 먼저 비밀을 보게 될 네가 부러워.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그때가 오기까지는 서로를 배우자. 우린 인형을 원하던 소년이었어. 그래서 이렇게 갖게 됐지. 우린 가지 않은 길을 서로에게서 볼 수 있게 됐어. 마음속 악마를 깨우지 않은 채 살아가는 나를 봐. 난 가르쳐줄 수 있어. 내가 찾은 균형을. 대신 넌 네가 찾아낸 비밀을 알려줘. 네 안에 어떻게 그것이 숨겨져 있었는지 알고 싶어.” 감싸 쥔 소년의 손이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둘은 서로의 도망친 그림자였다. 이 순간 그들은 다시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서로에게 말했다. ‘단지 검고, 아무 무늬도 없어 보였던 그림자가 이렇게 상처투성이었구나.’ “우린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끝없이 서로를 갈망해야 하는 사이야. 하지만 언젠가 우리도 서로를 기억하지 못한 채 만날 수 있겠지.” 소년이 대답했다. “그래. 이 세상은 아니겠지. 우린 무엇도 잊을 수 없게 태어났으니.” 3 미래에서 온 사자(使者) “먼 미래에 당신과 나의 자손들이 이 땅을 걸을 때 강물이 적셔주는 밭과 날마다 배 띄울 바다와 사과 거두는 아낙과 집 지으려고 닦는 터와 커서 무엇이 될까 골똘한 꼬마가 없다면 오늘 우리가 무엇을 했더라도 헛된 겁니다.” 비 오는 가을 아침에 한 손님이 비취반지 성을 찾아왔다. 마차도 없이 두건 달린 망토 한 장으로 비를 가리며 성문을 통과해 가로수 길을 걸어왔다. 부슬거리는 빗속을 얼마나 걸었는지 현관에 이르자 옷과 머리가 흠뻑 젖어 있었다. 하인이 막아서자 그는 편지를 내밀었다. 정확히는 젖지 않도록 기름 먹인 가죽 주머니에 넣고 꿰맨 작은 꾸러미였다. 편지를 갖고 들어간 하인은 잠깐 만에 돌아와 그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젖은 것들은 좀 벗어 놓고 이걸로 머리라도 닦도록 하시오. 양탄자가 엉망이 되겠소.” “고맙소.” 손님은 하인의 하대에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머리를 닦기 위해 두건을 내리기 전에 그는 일부러 벽 쪽으로 돌아섰다. 하인은 상대의 행색을 보건대 별다른 인물이 아니라고 여긴 까닭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안에서 들여보내라고 하니 들여보낼 따름이었다. 직접 물기를 닦아낸 망토를 도로 걸친 손님은 하인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공작을 찾아온 손님이 가는 2층, 공작부인을 찾아온 사람들이 머무는 3층을 지나 4층에 이르러 어느 문 앞에 멈추었다. 하인은 문을 두드려 손님이 왔음을 알리고 물러갔다. 손님은 안으로 들어섰다. 히스파니에가 혼자 책을 보고 있다가 일어섰다. “어서 오시오. 비를 많이 맞으셨구려. 난롯가에 앉으시는 것이 좋겠소.” 방에 일을 돕는 시종은 없었다. 히스파니에가 의자를 난롯가에 놓으며 손님에게 손짓했다. 손님은 말없이 예를 표하고 의자에 앉았다. 난롯가 쪽으로 늘어진 망토 자락에 성에가 하얗게 번졌다가 사라졌다. 히스파니에는 직접 찻주전자에 차를 새로 담고 난로에 얹은 주전자를 들어 찻물을 부었다. 손님은 그 모양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먼 길 걸음 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소이다.” “놀라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첫 마디는 차분했다. 비에 젖은 몸을 하고 있으면서도 긴장도 오한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히스파니에는 상대가 여행을 자주 해보았던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그렇다오. 근간 오시지 않을까 생각했소이다.” 손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두건에 손을 댔다. “익히 듣던 바를 배견(拜見)하게 되었군요.” 두건이 내려졌다. 안면이 있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나이가 많았다. 마흔은 넘긴 듯했다. 언뜻 문약한 인상이었으나 차츰 볼수록 눈에 흐르는 빛이 특별한 사람이었다. “전령은 젊은 사람을 보내는 것이 상례가 아닐까 하였소만 그곳 사람들은 생각이 좀 다른 모양이구려.” 손님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제 소개를 올리는 것이 예가 되겠군요.” “어렵다면 그리하지 않으셔도 되오. 밝힐 수 없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소이다.” “저는 지스카르 드 나탕송이라고 합니다.” 웬만한 일로 놀라지 않는 히스파니에가 흠칫하여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소박한 차림새의 남자가, 수행원은커녕 마차조차 타지 않고 빗길을 걸어온 남자가, 정말로 로사 알브의 대영주 나탕송 백작이란 말인가? 지스카르는 다시 빙그레 웃었다. “놀라게 해 드려 송구합니다.” “이건 정말로 놀랐소. 귀한 분께서 이리도 어려운 걸음을 선뜻 하실 줄이야.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내 입장이 참으로 민망하게 되었소.” “심려치 마십시오. 저야말로 미리 전갈하여 내방의 뜻을 알림 예였을 터이나, 입장이 이러한지라 천지간의 눈을 피하려다 보니 이리 도둑처럼 찾아들 도리뿐이었습니다. 부디 용서하십시오.” 나탕송 백작은 오를란느 사교계에 늘 거절 편지를 쓰는데 그 편지글의 아름다움이 종종 화제가 되곤 한다고 했다. 이윽고 히스파니에도 입가에 미소를 올렸다. “귀히 지내시는 분이 그리 젖은 옷을 입고 계시다가 감기가 들겠소. 내새 옷을 내어오도록 하겠소.” “아닙니다. 젊어서 여행을 많이 다녔기에 이런 정도는 익숙합니다. 어르신께서 그러하셨듯이.”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소?” 두 사람 사이에 살피는 눈길이 오갔다. 지스카르가 말했다. “남들이 아는 것보다는 조금 많이 압니다.” 히스파니에는 싱긋 웃었다. “나이트워크가 평범한 조직이 아니란 생각은 익히 했소.” “저 개인적으로도 관심이 많습니다.” “그거 영광이구려. 허허허......” 히스파니에는 손님의 찻잔에 차를 따라주고는 몸을 일으켜 장작 한 토막을 난로에 던져 넣었다. 불티가 발갛게 일어났다. “이런 곳까지 몸소 찾아오신 것을 보면 중대한 이야기를 준비해 오셨을 것 같소이다. 그러니 들어봅시다. 로사 알브의 대영주께서 사람의 눈을 피해 이 별 볼일 없는 늙은이를 찾으신 연유가 무엇인지.” 히스파니에는 지스카르 드 나탕송에 대한 소문을 어느 정도 듣고 있었다. 민중의 벗과 연계되어 있다는 은밀한 추측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거가 없다는 점, 대귀족 출신으로는 드물게 이름난 학자이며 온화한 인품으로 정평이 있다는 사실, 은둔자로 알려졌으나 또한 우아한 예절의 소유자이기도 한 까닭에 전자의 소문처럼 과격한 집단과의 관련성을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까지도. “말씀대로 저는 중대한 용건이 있어 먼 길을 왔습니다. 물론 이곳까지 오는 길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망명 의회의 요청이 아니며 저 홀로 결심한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아닌 어르신을 뵙고자 한 것도 깊이 생각한 끝에 결론 내린 것입니다.” 비록 외국인이라 해도 백작이자 대영주인 지스카르가 공작가에서 내쳐진 입장에 작위도 없는 히스파니에를 ‘어르신’이라고 칭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어느 쪽도 굳이 그런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히스파니에는 이렇게 말했다. “중한 사람인가 보오.” 지스카르는 말을 멈췄다. 불안정한 정적이 흘렀다. 마주한 눈동자에 비친 불빛이 떨리고 있었다. 이윽고 내리깔았다. “그렇습니다.”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동요가 느껴졌다. 히스파니에는 짧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소공작 또래의 젊은이라고 들었소.” “용서하기 힘드시리란 것을 압니다.” 히스파니에는 잠시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오.” “알고 있습니다. 저 또한 용서를 빌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지스카르의 목소리는 어느새 침착함을 되찾았다. 히스파니에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그건 무슨 뜻이오?” “용서를 빌지 않는 것은 어르신과 아르님 가문,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공작에게 너무 큰 죄를 지었기에 그런 행동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이 누군가 와서 무릎을 꿇고 빈다 하여 없이 될 리 없습니다. 저 또한 자식을 키우는 사람입니다. 어찌 그런 무례한 청으로 어르신을 뵙겠습니까?” “......” 히스파니에는 난롯불로 시선을 돌렸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정보가 순식간에 정리되고 점검을 거치는 중이었다. 예상은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갖고 있는 지식이 어디까지인지 정확하지 않아 섣불리 확인할 수가 없었다. “제가 온 것은 어르신께 회담을 청하고자 해서입니다.” “내가 알기로 회담은 한 나라의 왕이나 영주들이 하는 것이오. 그대는 대영주로서 자격이 있으나 나와 같은 떠돌이 노인을 상대로 할 만한 것은 못되오.” “아니오. 저는 어르신과 제가 두 나라를 대표하여 만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 진심이오?” 시선이 맞부딪쳤다. 지스카르가 입 밖에 낸 말은 그들이 각각 속한 대공과 국왕에 대한 반역에 해당했다. 그가 지칭한 두 나라가 무엇인지를 생각한다면 더욱 대답한 말이었다. 히스파니에가 모를 리 없었다. 지스카르가 대답했다. “제가 무언가를 숨기고자 했다면 이 자리에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이제 히스파니에가 말할 차례였다. 인정하거나, 부인해야 했다. 아직 공작과 몇몇 심복들을 제외하면 누구와도 나누지 않았던 계획이었다. 그런 비밀을 밝히거나, 용렬하게 발뺌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몇 마지 만에 밀어붙여 졌다. 히스파니에는 상대의 숨겨진 명성을 상기했다. 민중의 벗 최고의 협상가이자 교육자, 이론가이며 오랫동안 조직 건설의 전문가였던 사람. “그대는 나를 너무 믿는 것 같소. 나는 체첼 국왕의 한 팔인 아르님 공장의 숙부이자 또한 아노마라드 사람이오. 왕국8군은 그대와 민중 클럽의 관계를 증명하고 싶어 안달이며, 체첼 국왕 또한 오를란느 대공의 콧대를 누르기 위해 당신처럼 좋은 희생양을 찾고 있을 것이오.” 지스카르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르신께서 체첼 국왕의 영광을 탐내시겠습니까? 아니면 현상금을 탐내시겠습니까? 비록 그런 것들을 손에 넣어 나쁠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들보다 더욱 가치 있는 것을 저와 함께 만드실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말은 히스파니에의 마음에 들었다. 솔직한 태도를 선택해야말 해낼 수 있는 대담한 전개였다. 그러나 그는 쉽사리 칭찬하는 대신 등받이에 깊이 기대어 앉으며 말했다. “내 마음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구려. 좋소. 나는 진심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장난을 하지 않는다오. 그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든, 당신이 내게 그런 것을 줄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러나 당신이 이곳까지 오게 된 이유는 따로 있지 않았소? 다시 말해 이번 일이 없었다 해도 당신은 내개 그런 가치 있는 것을 주려 했겠소?” 지스카르는 히스파니에를 만나러 오기로 결심했을 때 수많은 전개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긴 세월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온갖 계층과 직업과 성격의 인물들을 만나보았다. 분류된 유형에 따라 사람의 태도와 대답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충분히 경험하고 대처법도 수없이 연구해 온 자신이었다. 그러나 히스파니에와의 만남을 준비하면서 그는 경험으로 만들어 온 기준들을 일부러 버렸다. 상대는 그가 경험한 적이 없는 부류였다. 이 세상에 단 둘만이 존재한다는 자이기 때문이었다. 예측은 만용이었다. 상대는 말을 허비하지 않고 그가 예상한 약한 연결점을 정확히 찾아냈다. 어찌 보면 조금 전 히스파니에가 처한 것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긍정하기에는 부담스럽고, 부정하자니 비겁해진다. “사실대로 말씀드려서, 그건 아니었을 것입니다.” 뜻밖으로 순순히 인정하는 태도에 히스파니에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놀라기에는 일렀다. “왜냐하면, 아르님은 이미 공화국을 한 번 배신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망명 의회가 왜 그런 이름이 됐다고 생각하십니까?” “......” 두 사람이 눈빛이 팽팽하게 부딪쳤다. 정적이 사방을 짓누르는 가운데 장작 하나가 부러져 떨어지며 소리를 냈다. 대답하는 히스파니에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지나치게 대담하오.” “그 해 켈티카 공방전에서 저는 일곱 해 동안 의형제로 지냈던 동생을 잃었습니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점련군의 승리가 확고해져 가던 함락 이틀 전, 당시 켈티카 8지구 위원장이던 동생은 밤을 틈타 도망친 병사들 때문에 절반으로 줄어든 왕성 수비대에 가담하러 간다고 편지를 썼습니다. 저는 말리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옥좌 앞 계단에 아직도 핏자국이 남아 있다는 백 명 중 하나가 되었지요.” 히스파니에도 알고 있었다. 켈티카가 함락되던 날 최후의 왕성 수비대는 검을 잡는 법조차 제대로 몰랐다는 평범한 사람들이 절반 이상이었다. 마지막 순간, 맨몸과 맨손뿐이던 그들은 말 그대로 도륙을 당했다. 그러고도 시원치 않아 이미 죽은 그들의 목을 잘라 모두 성벽에 매달았다. 백 명의 목을 다 매달 수가 없어 몇 개씩 노끈으로 엮어 늘어뜨렸다고 했다. 누군가의 간언에 의해 곧 치워졌다고는 하지만 직접 본 사람은 결코 잊을 수 없었을 광경이었다. 히스파니에의 머릿속에도 또렷이 남아 있었다. “어르신. 저는 세상의 비극들이 한두 가지 원인 대문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정도로는 살았습니다. 아르님 공작의 손이 제 동생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로젠크란츠 군의 손에도 소공작의 가슴을 찌를 칼이 들려 있지는 않았습니다. 공화국의 10년에는 무능한 의회도 있었고 순수한 몽상가도, 완고한 혁명가도, 과격한 폭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 중 하나의 손이 공화국의 심장을 찔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배신과 음모를 주고받았으니 셈을 맞추고 잊자는 말이오?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이번 망명 의회의 행동은 더더욱 유감이오. 그들에게 소위 ‘배신자 아르님’에 대한 복수심이 없었다고는 볼 수 없소.” “유감스럽지만......” 지스카르는 말을 끌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마르기 시작한 머리카락이 두건 자락을 빠져나와 목 언저리에서 굽실거렸다. “망명 의회에는 아직 한두 사람의 행동이 역사를 바꿔놓을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다수인가 봅니다. 저는 그들의 분노를 이해하기도 하고, 동정하기도 하며, 때론 답답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저는 제 동생을 죽인 자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찾게 되길 바라지도 않습니다. 만일 그 자와 마주친다면 저 또한 분노와 고통으로 괴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는 ‘역사’가 이 세상을 써나가는 두꺼운 책 속에 든 수억 가지 문장 중 한 단어일 분입니다. 그는 ‘죽이다’대신 ‘스치다’일 수도, ‘도망치다’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넘긴다 한들 바로 다음 문장에서 결국 ‘죽이다’가 나오게 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누구에게 죄가 있습니까? 수백 페이지에 걸친 이야기 속에서 그는 차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첫 문장, 또는 백 번째 문장부터 죽기로 되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그 자의 차례가 왔을 뿐입니다. 그는 이야기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런 식이라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대체 뭐요?” 지스카르의 눈이 문득 맑아졌다. “수백 페이지 뒤에 일어날 일을 위해 새 단어를 씁니다. 오직 그뿐입니다. 내가 쓴 단어가 묻혀버릴지도 모르지만, 거대한 이야기의 시작이기를 바라며 힘껏 쓸 것입니다.” 이 자는 진실하다. 지스카르가 하고자 하는 말을 히스파니에도 모르지 않았다. 아니, 실은 말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에 공감했다. 대상이 조슈아만 아니었더라면. 히스파니에 자신이 헤어나지 못했던 나락에서 구원하고 싶었던, 그래서 가장 높은 곳까지 손잡아 이끌고자 했던 저 불안하고도 빛나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더라면 그도 지금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좋소. 그러나 상대가 아르님 공작이 아니라 그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그 아이는 가문의 미래이며 나의 미래이기도 했소. 물론 죄를 다 덮어씌울 생각은 없소. 첫 계획이 나온 것은 결국 집안사람의 머릿속이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 아이의 누이를 이미 잃었었소. 그 후로 나와 공작은 소공작에게 바늘 끝 하나라도 대는 자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소.” “그렇다면 이제부터 더더욱 그렇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로젠크란츠 군의 죄를 용서할 수 없으시다면. 로젠크란츠 군을 죽이신다 해도 민중의 벗에는 아직도 수만 명의 칼 쥔 자가 남아 있습니다.” 히스파니에의 눈썹이 올라갔다. “나를 협박하겠다는 거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면 그게 충고라도 된단 말이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망명 의회의 명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의회 내에서도 소수파에 불과합니다.” “망명 의회였다면 이런 대화를 시도하려 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로군. 공화국을 배신한 자와 새삼 대화하러 이곳까지 와준 것은 단지 당신이 관대하기 때문이오? 아니면 그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수치와 분노를 무릅쓰는 거요?” 지스카르는 상대의 분노에 휩쓸리지 않았다. “아니오. 대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말하시오. 소공작은 죽을 뻔했소. 아니, 죽었을 몸이 기적으로 되살아난 것이오. 그리고 이 세상 사람이 감히 겪어서는 안 될 피해를 입었소. 그대들은 그 원인 속에 포함되어 있소. 자, 보시오. 용서였든 협상이었든 당신이 납득시켜야 할 상대는 내가 아니오. 소공작에게 원죄가 있소?” “어르신.” 온화하던 눈동자에 순간 차가움이 서렸다. “공화국의 사망을 선고한 아르님 공작의 내통 계획이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나왔는지, 세상사람 모두가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히스파니에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가까스로 평정을 유지해냈다. “멋대로 넘겨짚지 마시오.” “그때 아르님 공작의 계획은 정보를 수집하고 추리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확실할 수 없는 위험한 가정들을 다수 포함시킨 것이었습니다. 그중 단 하나도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행운이 한 사람에게 그렇게 자주 미소를 짓는 것은 참 드문 일입니다. 어째서 그 후의 행보는 그만 못했던 것인지 의아하게 여기곤 했습니다. 이른바 ‘데모닉’이 무엇인지 몰랐을 때의 일이지요.” “당신은 아홉 살짜리 어린아이의 머리에서 공화국을 무너뜨릴 계책이 나왔다고 말하고 싶은 거요?” 지스카르가 웃었다. “그걸 저에게 물으시면 어찌합니까? 그럴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실 어르신께서.” 또 한번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대답할 수 없다. 히스파니에 본인이 데모닉인 까닭이다. 과연 민중의 벗 최고의 협상가였다. 강한 논리를 세워 상대가 반론하게 하고, 몇 마디 안에 반드시 미리 준비해 둔 갈림길에 밀어 넣는다. 말이 길어지면 사냥감이 빠져나갈 길이 많아진다. 서너 걸음으로 사냥을 끝내는 자가 진정한 실력자이다. 평범한 상대라면 두어 번 말려드는 동안 최초의 논리조차 잊어버리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히스파니에는 열 수 앞의 ‘체크(체스의 장군)’도 볼 수 있는 데모닉이었다. 그는 자신이 말려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상대의 대의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상대를 만나기 전부터. 그러나 그는 최초의 결심을 저버릴 수도 없었다. 조슈아를 건드린 자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 그건 상대적으로 좁은 동인(動因)이었다. 이를 따라가려면 결국 논리 대신 감정적 입장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히스파니에 자신은 그런 태도를 경멸했다. 이것이 질 수밖에 없는 근본적 딜레마였다. “당신은 보기 드문 능변가요. 수십 해 동안 보아온 언변 중 가히 최고라 할 만하오. 그러나 능변만으로는 나를 설득할 수는 없소. 왜인지 아시오?” “말재주는 도구일 뿐 사람의 마음을 진정으로 살 수는 없지요.” “그걸 잘 아는 당신이니 한번 말해보구려. 나는 공화주의자가 아니지만 당신들의 대의가 훌륭하다는 것을 알고 있소. 공화국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고, 그 후로 민중 클립이 생존하기 위해 택한 방식도 안다오. 그 과정에서 아마 방법론적 변질이 있었을 것이오. 때로는 당신 같은 사람이 받아들이기 힘든 계략이 입안되고, 지금처럼 실천되는 일도 있었을 거요. 다시 말하지만 나는 공화주의자가 아니오. 그러나 그런 방식은 그대들의 사상과 대의에도 어긋난다고 생각하오.” 지스카르는 일어나더니 물기가 거의 마른 망토를 벗어 의자 팔걸이에 걸어 놓았다. 그리고 목례를 했다. “그 판단에 경의를 표하며 또한 개인 자격으로 사죄를 드립니다. 그 방법론은 어르신의 고견대로, 그리고 제 의견으로도 옳지 않았습니다. 판정은 역사가 내려줄 것입니다만 저는 앞으로도 그런 흐름을 막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히스파니에도 고개를 숙여 그 인사를 받았다. “그대의 진심을 받아들이오. 당신이 그런 마음인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나는 고개를 돌렸소. 이렇게 만난 당신과 나 두 사람은 서로 이해할지 몰라도 이 자리에 없는 두 젊은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소. 그리고 그런 마음인 로젠크란츠 군을 용서하기에는 내가 소공작을 아끼는 마음이 너무도 크다오.” “저 또한 로젠크란츠 군을 아끼는 마음이 앞서 어르신과 논전을 벌이게 된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화술로 어르신의 눈앞을 가려보고자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이 무용함을 잘 압니다. 소공작을 아끼시는 어르신의 마음이라는 것은 논파할 수 있는 장벽이 아니지요. 허나 비논리적이라 해도 그런 감정이 비난받아서는 안 됩니다. 공화국의 근본이 되어야 할 인간에의 가장 밑바닥을 떠받치는 것이 그런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결국 어르신을 화술로도, 논리로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협상을 하고자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건부 타협 말입니다.” 히스파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당신은 이 자리에 없는 자의 결백함을 결국 증명할 수 없을 거요. 내가 그대가 아닌 로젠크란츠 군을 위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해보시오.” 지스카르는 자리에 앉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양탄자에 점점이 떨어진 빗물 자국이 말라가고 있었다. 젖어 흉하게 쓸린 양탄자의 털이 불쑥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이제부터 말하고자 하는 그 소년은 총명함, 고결함, 순수함 같은 것들이 아직 남아 있을까. 잔인한 칼끝 아래 내맡겨진 그의 정신은 갈가리 찢겼을까. “공화국 수반이었던 당스부르크를 기억하시겠지요. 그리고 그분의 건강이 악화되는 것과 함께 공화국도 저물어간 것을 아실 겁니다.” “그분을 직접 알 기회는 없었소이다. 허나 지난 공화국의 탄생 자체가 그분의 대의와 정치력에 크게 기대어 있었다는 것은 아오.” 지스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이켜 보건대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때 이르게 피었던 공화국이 위대한 개인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태생적 한계였을지도 모릅니다. 당스부르크는 스스로 자라난 거목이었습니다. 그 나무를 덜 준비된 토양에 옮겨 심자 그는 시들었습니다. 이제 다음 공화국을 위해 우리는 긴 준비 기간을 택했습니다. 튼튼하게 기반을 닦고 좋은 흙을 준비하여 꽃을 피울 것입니다.” 히스파니에는 표정을 부드럽게 했다. “당신과 같은 사람이 준비하는 공화국의 모습이라면 한번 기대해 보고 싶소이다.” “고마운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좋은 흙만큼이나 중대한 요소는 씨앗입니다. 흙의 조건을 이해하고, 모든 자양분을 흡수하며, 마침내 자신을 희생시켜 싹을 틔울 어린 씨앗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당신은 그런 씨앗들을 키우고 있었을 것이오. 당신의 집에서.” 지스카르는 미소를 지었다. 아니, 지으려 했다. 말을 잇는 그의 목소리가 약간 쉬어 있었다. “예. 그랬습니다. 로젠크란츠 군은 제가 다음 공화국의 수반감으로 여기며 살펴온 귀한 씨앗이었습니다.” 히스파니에가 눈을 크게 뜨며 의혹을 나타냈다. “그는 아직 소년이 아니오? 그에게 어떤 특별한 것이 있기에 일찌감치 그런 마음을 먹었단 말이오?” “저는 공화국이 실패하는 모습을 낱낱이 보았던 사람입니다. 공화정부에 당스부르크와 같은 사람만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곳에는 모든 개혁이 단숨에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성급한 사람들, 눈에 띄는 문제부터 뒤따라가는 즉흥적인 사람들, 잠시 얻게 된 특권을 어떻게든 써보고 싶었던 사리사욕에 흔들린 사람들, 오직 개인적인 복수심에 사로잡혀 누군가를 짓밟는 것에만 몰두하는 사람들, 세상 사람들을 계몽해야 할 우매한 대중으로만 보는 우월감에 도취된 사람들, 모두가 뒤엉켜 있었습니다. 그런 자들이 어린아이에 불과한 공화정부를 물고 뜯으며 자기가 원하는 것을 내놓으라고 다투던 혼란상은 공화 건국 후 약 3년을 넘긴 시점부터 표면화되어 이후 공화국이 무너지던 날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무엇이 부족했을까요? 저는 그게 토양이 될 교육의 부족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일찌감치 공화정부를 떠나 전 대륙을 돌아다니며 젊은이들을 만났습니다.” “당신이 키운 젊은이들이 지금 망명 의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들었소. 로젠크란츠 군도 그런 인재 중 하나가 아니겠소.” “예. 로젠크란츠 군은 총명하고 심지가 굳은 젊은이입니다. 공화국을 이룩하려는 의지가 강하고 자신이 공부한 것을 현실에 적용하는 응용력도 뛰어납니다.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고, 냉철한 판단력도 갖췄습니다. 아직껏 그 나이에 그만한 인물을 또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만이라면 저도 섣불리 그런 중대한 판단을 내리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그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정부를 이끌어갈 자로서 빠져들기 쉬운 악덕이 거의 완전하게 배제된 형태의 인성을 발견했습니다.” “그 말을 일견 비현실적으로 들리는구려.”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스카르는 시선을 난로 쪽으로 보냈다. “그는 여느 소년답게 자라지 못했습니다. 부모로부터 버려졌고, 누이동생을 혼자 힘으로 돌보았습니다. 저와 만났을 때 그는 이미 자신의 삶 속에서 스스로의 행복을 거의 배제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오히려 그런 것들의 가치를 일깨워 주어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 소박한 생활의 기쁨, 예술의 가치,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 지스카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거의 실패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젊은이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산다는 말이오?” “로젠크란츠 군이 염두에 두는 것은 공화국의 부활과 인류애, 동료애, 그리고 누이동생밖에 없습니다. 그는 장미꽃의 아름다움도, 좋은 술의 향기도, 맛있는 음식이 주는 즐거움도 모릅니다. 저는 그의 그런 점이 말할 수 없이 안타깝습니다.” 히스파니에는 고개를 기울인 채 생각하다가 물었다. “단지 그런 것을 느껴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 아니오?” “아니오. 그가 제게조차 말하지 않는 과거 속에서 그는 그런 것들을 충분히 누려본 것 같습니다. 다만 그것들을 즐길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무언가가 함께했던 모양입니다. 그 결과 그는 온갖 종류의 향락에 가치를 두지 않으며, 자신의 외모조차 필요하기만 하면 쉽사리 망가뜨릴 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히스파니에는 한참 뒤에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큰 비극이오. 심지어 그 대문에 당신이 그 소년에게 가치를 두게 되었다면 말이오.” 지스카르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그는 다른 사람이 그런 것을 누리는 것을 비난하거나 막으려 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저는 앞으로도 그가 과거의 잔상에서 벗어나 세상의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게 되도록 애쓸 생각이고요. 제가 그의 미래에 확신을 갖게 된 이유는, 그리 살아온 자들 중 수만 명이 타락이나 파멸의 길로 빠져드는 동안 기적적인 확률로 삭튼 그의 고결함 때문입니다.” 히스파니에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고결함?” 소년에게 어울릴 법한 단어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스카르의 태도는 자못 진지했다. “로젠크란츠 군은 아홉 살 나이에 어린 누이와 단둘이 거리를 헤매어야 했습니다. 그의 누이동생은 어린 시절 큰 충격으로 말문을 닫은 아이입니다. 지금은 비교적 좋아졌지만 예전에는 말은커녕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했습니다. 식사도 떠먹여 주어야 할 정도였지요. 그때부터 그는 자신을 버리고 누이를 위해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마음이 자라 공화국으로 연결되었습니다. 그가 소공작을 죽이게 될 수도 있는 계획에 가담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가 그것을 받아들이며 동료에게 한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아무 죄 없는 소공작을 희생시키려 하는 자신을 용서해선 안 되며 그러므로 한시도 쉴 수 없다고, 도망칠 수도 없다고. 남의 생명을 받으려는 자신의 생애도 똑같이 저당 잡히겠다고.” 이번 일이 벌어지고 나서 이엔이 보내온 편지 속의 내용이었다. 그 말고도 수많은 말이 적혀 있었다. “저는 그게 진심인 것을 압니다. 그는 자신을 엄격한 평형 저울에 올려놓고 지냅니다. 저울이 기운다면 저울에 매달린 다른 누군가를 탓하기 전에 자신의 팔을 잘라 내려놓을 겁니다. 전 그 아이의 그런 점을 자주 질책해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탄할 수밖에 없는 태도입니다.” 히스파니에는 이마를 매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그대가 내게 거짓말을 하리라고는 여기지 않소. 허나 그대가 그리 말하는 상대가 소년이라는 것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드오. 당스부르크가 그런 사람이라 해도 쉽게 믿지는 못했을 거요.” “저 또한 그렇게 자라오지 않았으니 어찌 그를 다 이해한다 하겠습니까. 아홉 살 아이가 자신과 몸이 아픈 누이를 살리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했을지 저는 다 모릅니다. 앞으로도 묻지 않을 겁니다. 그때의 일을 끄집어내는 것이 그의 감정을 얼마나 후벼 파는 일인지 상상만으로도 괴롭기 때문입니다. 그가 스스로 그것을 극복하고 지금 같은 모습이 된 것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요.” 지스카르의 말이 맺어지고 나서 두 사람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윽고 히스파니에는 새 장작을 난로에 집어넣었다. 처음에 넣었던 장작은 이제 불꽃이 되어 있었다. “당신 말대로 그가 공화국을 훌륭히 이끌 재목이라면, 그의 존재가 내 목표에 도움이 되리라 보오?” 지스카르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답했다. “그 대답은 추측을 필요로 하는군요. 아직 어르신의 목표가 무엇인지 밝히지 않으셨으니 말입니다.” 히스파니에가 웃었다. “끝내 내 입에서 대답을 듣고 싶소?” “제가 모든 것을 솔직히 말했다고 믿으신다면, 그래 주십시오.” 히스파니에는 이미 식은 차에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오래 고민하지는 않았다. “아노마라드의 리샤르 2세와 이카본 폰 아르님 공작이 맺었던 협정은 이제 생명력이 다했소. 머지않아 새로운 것이 탄생해야 할 것이오.” “그런 일이 역대 두 번째 데모닉 공작의 손에서 이루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일이겠지요.” 히스파니에가 빙그레 웃었다. “내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하는구려. 좋소. 나는 것을 원하오. 다음 세상을 데모닉 조슈아의 시대로 만들고 싶소. 그걸 위해 오랫동안 차근차근 준비해왔소. 그런데 당신은 내게 새 공화국의 수반이 될 자를 구해달라고 말하니 두 가지가 양립하리라 보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습니다. 다음 세상에 군벌이 만든 신왕국 아노마라드는 없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는 공화국과, 아르님 공작의 나라가 설 것입니다. 우리 젊은이들의 시대가 오면.” 히스파니에는 일부러 삐딱하게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가능하다면 공화국만이 존재하기를 원할 것 아니오?” 지스카르도 웃었다. “거짓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 점에서는 어르신도 같지요. 그러나 잊지 않아야 할 것은 둘의 적이 같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적이 각자 상대하기에는 매우 강하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 됩니다. 만일 상대할 힘을 키웠다고 해도 우리가 양립을 택하지 않는다면 아마 차례로 쓰러지는 모습이 되기가 쉽겠지요.” “아르님이 아노마라드를 무너뜨린 뒤 정비에 어려움을 겪을 때 공화국이 파고들 것이고, 그렇게 공화국이 세워진다 해도 무너진 왕당파들이 또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소. 그 말은 옳소. 셋이 서로 물고 뜯는 형태를 취한다면 둘 모두의 대적에게 기회를 주는 것일 뿐이오. 그러나, 한쪽이 협조를 결심한다 해도 다른 사나가 내심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뒤를 내주는 꼴일 뿐이오. 내가 그쪽의 신의를 무엇으로 확인하면 좋겠소?” “저 또한 어르신의 신의를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두 젊은이가 모두 스스로의 양심을 속이지 않을 정도로 올곧다고 할 때, 이 점만은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오?” “소공작은 옛 공화국을 무너뜨릴 계략을 짠 당사자로서 공화주의자들의 적의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로젠크란츠 군은 소공작이 살해될 뻔했던 사건을 만든 중요한 인물로서 소공작에게 쉽게 용서받기 힘들겠지요. 심지어 두 사람은 상대에게 용서를 빌 마음조차 없을 겁니다 다시 말해, 둘은 이미 빚을 주고받아 청산할 것이 없는 상황입니다.” 히스파니에가 웃음을 터뜨렸다. “허, 허허... 당신은 심지어 궤변에조차 능하구려. 아니, 궤변이라고는 하지 않겠소. 그러나 이쪽에서 염두에 두지 않았을 사실을 잘도 가져와 상황을 평등하게 만들어 버린 것만은 틀림없구려.” 지스카르는 짧게 미소 지었다. “어르신. 공화국이 약하다면 아노마라드 왕국을 공격하기 힘들 것이고, 그럴 수 있다 해도 지난 공화국과 마찬가지로 얼마 안 가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세 축 중 하나가 이렇게 쓰러진다면 남은 것은 둘의 전면전뿐이며 그렇게 되면 그중 약한 쪽은 치명상을 입고 말 겁니다. 지금으로서는 나라의 기반이 잡힌 아노마라드보다는 아르님이 약한 쪽이 되기 쉽습니다.” 현실적인 말임을 알고 잇었기에 히스파니에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 대신 물었다. “그대는 로젠크란츠 군의 존재가 공화국을 강하게 하는 데 결정적이라고 보는 거요?” “그렇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해온 구상은 그를 잃고 나면 무가치한 것이 되고 맙니다.” 히스파니에는 잠시 생각하면서 식은 차를 훌쩍 마셨다. 그리고 물었다. “그대가 지금 내게 말한 구상 말인데, 망명 의회에서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소?” 지스카르가 희미하게 웃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이곳에 오기 위해 망명 의회의 의견을 묻지도 않았습니다.” 히스파니에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대표하고 있소? 공화국이 아니라면, 누구의 이름으로 나와 회담을 한 것이오?” “어차피 우리는 세상에 아직 없는 나라의 대표들입니다. 그게 어떤 나라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요. 이제부터 만들어나갈 뿐.” “그 말, 멋진 말이오.” 히스파니에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상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난 그대가 오기 전부터 오늘 나눈 문제를 여러 번 생각했었다오. 하지만 그대의 훌륭한 설득이 없었더라면 결국 생각으로 그치고 말았을지도 모르겠소.” “그렇지 않습니다. 전 많은 말을 했지만 이 모든 것이 실은 어르신이 예상한 범위 안이 아니었나 하는 두려운 궁금증도 듭니다. 어쨌든 어르신은 제가 아직껏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는 무한한 지식의 소유자이시니 말입니다.” 히스파니에는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웃어버렸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괴물이라도 되는 것 같지 않소?” “제 궁금증은 그대로 간직해야 하는 것입니까?” 히스파니에는 고개를 흔들며 빙그레 웃었다. “그대를 만난 것을 기쁘게 생각하오.” “그 말씀을 협상의 성립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대답 대신 히스파니에는 내민 손을 내려다보았다. 지스카르가 일어나 그 손을 잡았다. “이건 아주 작은 전진이오. 망명 의회가 아닌 그대와 한 약속이며 따라서 민중의 벗을 돕겠다는 의미는 아니오.”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 밝힐 수 있는 날이 오기까지, 오늘 일은 어르신과 저만의 일로 해 두겠습니다.” “사흘 뒤에 그대에게 기별하겠소. 그동안 로젠크란츠 군이 너무 크게 다치지 않았길 바라오.” 지스카르는 안타까운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시 망토를 걸치고 두건을 내려쓴 지스카르를 히스파니에는 문 앞까지 배웅했다. 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마차를 내어주고 싶었으나 그럴 순 없는 일이었다. 이런 날씨를 무릅쓰고 걸어온 것은 지스카르에게 마차가 없어서가 아니다. 현관 앞에서 하인을 물러가게 한 히스파니에가 말했다. “오늘 우리는 그대의 나라와 내 나라의 첫 번째 사절이 되어 공존을 논했소. 그러나 우리는 알 수 없소. 두 나라의 공존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인지는.” 지스카르가 빗속으로 걸어 나가면서 대답했다. “그때는 이미 우리 시대가 아닐 것입니다. 대답은 그 시대의 주역들이게 맡기도록 합시다.” 4. 나무의 자장가 "언덕 위에 큰 나무 한 그루 서 있는데 가지 속에 수백 마리 새가 살고 있어서 아침에 나가고 저녁에 들어오는 모습이 나무가 죽고 되살아나는 것처럼 보인다. 밤에 내려온 별이 가지에 매달려 익으면 새벽에는 떨어진 것들을 주우러 가는데 동그랗게 익은 별은 알밤 맛이 나고 뾰족하게 익은 별은 무화과 맛이 난다. 겨울이 되어 잎이 떨어져 버리고 나면 나무는 잠들어 꿈을 꾼다. 여름의 꿈을 겨울새들이 꿈 한 조각씩 물고 날아가 둥지에 넣어두고 겨우내 떨지 않는다. 켈티카의 아침은 안개가 잦았다. 새벽5시경. 골목 곳곳은 푸르스름한 회색에 잠겨있었다. 포장을 씌운 마차 한 대가 정적을 깨며 골목을 지나갔다. 마차가 지나기에는 조금 좁았다. 양쪽 집 사람들이 꺼내놓은 잡동사니며 빨랫줄 등을 가까스로 스치며 빠져나가 조그마한 삼거리에 멈춰 섰다. 한 사람이 내렸다. 마차는 곧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 바퀴소리는 들려왔다. 이윽고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자 남자는 다른 골목으로 걸어 들어가 곧바로 큰길로 나왔다. 사람들이 일명 '로캉 남작 거리' 라고 부르는 맞은 편 길 끝에 빛바랜 첨탐 세 개가 선 구식성이 있었다. 남작 일가가 떠난 뒤 나라에서 사들여 지금은 취조실 겸 감옥으로 쓰이는 로캉 성 이었다. 남자는 낮에도 행인이 드문 그 거리로 접어들어 로캉 성 앞까지 갔다. 밤낮으로 굳게 닫혀 있는 정문 대신 외쪽으로 돌아가 쪽문 앞으로 갔다. 위병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저기, 오늘 나오는 사람을 데리러 왔는데요.” 남자가 증명서를 내밀었다. 위병은 남자의 몸을 점검했지만 별 다른 것은 나오지 않았다. 모자를 눈언저리까지 푹 눌러쓰고 깃을 높이 세워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는 사람이었다. 위병 하나가 안쪽에 기별하자 잠시 후 안개 너머에서 삐걱대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위병이 등을 떠밀었다. “들어가라.” 남자가 몇 걸음 가자 안개 속에서 수레가 불쑥 나타났다. 수레를 끌고 오던 병사들이 걸음을 멈췄다. 따라온 위병이 몇 마디 하자 그들이 남자에게 손짓했다. 남자는 수레로 다가갔다. 수레 위에 더러운 담요로 둘둘 말아놓은 사람이 누워 있었다. 깨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남자는 몸을 굽혀 담요 째로 사람의 몸을 일으켜 둘러업었다. 남자는 매우 건장했지만 상대가 놀랄만큼 가벼워서 힘을 쓸 필요도 없었다. “그럼 수고하십쇼.” 남자가 쪽문을 빠져나가고 나서 잠시 후, 병사 몇 명이 급하게 쪽문을 나가 남자를 뒤쫓았다. 남자는 병사들의 발소리를 듣자마자 뛰기 시작했다. 남자의 걸음이 멈추고 잠시 후 마차 소리가 들렸다. 병사들은 즉시 판단을 내려 마차를 뒤쫓았다. 골목길이라 마차가 속력을 내지 못했지만 사람의 걸음으로 쫓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마차는 잡힐 듯 잡힐 듯하며 병사들을 이끌고 사라져갔다. 마차에 매단 쇠종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남자가 처음 마차에서 내렸던 삼거리 모퉁이의 집에서 나왔다. 그곳에는 맨 처음의 마차가 와있었다. 남자가 둘러업은 사람을 먼저 태우고 이어 올라타자 마차는 먼저 간 마차와 반대 방향으로 사라졌다. 안개가 막 걷힐 시각이었다. 담요를 젖히던 지스카르의 손이 멈칫하다가 떨렸다.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떳다. 다가앉은 의사도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참, 사람이 당할 짓이 아니라더니.....” 숨이 붙어 있다는 것이 기적 같은 몰골이었다. 먼저 당했을 상처들은 방치된 채 아물어 흉터로 변했고 그 위를 다시 검게 변한 자국들이 뒤 덮었다. 피부 곳곳이 푸르스름하게 죽거나 짓물렀다. 담요에 묻은 것은 대부분 말라붙은 피였다. 란지에의 창백한 얼굴에서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얼굴을 비롯하여 온몸이 무섭게 말랐다. 뼈마디 모양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담요를 다 벗겨내자 왼팔이 가장 처참했다. 의사가 아닌 지스카르의 눈으로도 손목과 손가락이 대부분 부러진 것을 알 수 있었다. 호흡과 맥박이 몹시 불규칙했다. 잠시 상태를 살펴본 의사는 의료 기구를 꺼내는 대신 눈을 감고 복잡한 수인을 그렸다. 치료 마법을 쓰는 의사인 그는 지스카르가 일부러 영지에서 데려온 사람이었다. 지스카르는 침대 맡에서 물러나 이마를 짚고 눈을 감았다. 구 많은 일을 겪으며 개인적인 분노나 복수심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애써왔으나 이런 순간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꽉 감긴 눈꺼풀, 그리고 악문 어금니가 부르르 떨렸다. 얼마나 잔인하게 다뤘을 것인가. 일말의 자비심조차 없이 영혼과 육체를 파괴하는 고문이란 말할 나위 없이 지옥의 기술이다. 어떤 상황에도, 단 한순간도 있어서는 안 될 유황불 속의 재주다. 견딜 수 있었을까. 그의 몸과 마음이 예전대로 되살아날 수 있을까. “나탕송 님.” 고개를 들자 란지에를 로캉성에서 업고 온 남자가 서 있었다. 생각에 잠겨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던 모양이다. “무슨 일인가.” “망명 의회에서 의사를 보내왔습니다.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잠시 기다리라고 하게. 여기 치료가 마무리될 때까지.”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십니다.” “좋을 수가 있겠나.” 남자는 침대 쪽을 살펴보았으나 곧 고개를 돌렸다. “짐승 같은 놈들....” 첫 주문이 끝났는지 의사가 눈을 뜨고 다시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지스카르가 다가갔을 때 의사는 부러진 왼손의 모양을 바로 잡아보려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의사의 손끝이 닿는 순간 란지에의 몸이 격렬한 경련을 일으켰다. 의식이 없는 상태인데도. 의사는 서둘러 다시 수인을 맺으며 진정 효과의 주문을 외웠다. 그러고도 한참이 흘러서야 잠잠해졌다. 쉽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지켜보던 남자가 중얼거렸다. “저 왼손이 마디마디 다 부러졌군요. 저러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죠. 후.. 대체 어떻게 견디셨을지 상상이 안 되는 군요.” 지스카르는 고개만 내저을 뿐이었다. 남자는 전갈을 하기 위해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얼마의 시간이 흘러 의사가 벌떡 일어나더니 지스카르에게 급히 손짓했다. “어서!” 지스카르가 다가서 보니 란지에가 눈을 뜨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의식이 돌아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시체가 눈을 뜬 것처럼 무표정하던 얼굴이 지스카르를 보는 순간 변화가 일어났다. “........”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숨이 가빠졌다.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무어라 말하려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술만 달싹일 뿐이었다. 내려다보는 지스카르도 목이 메어 말을 잘할 수가 없었다. “괜찮아. 이젠...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숨소리가 점차 고르게 가라앉았다. 의사가 물수건으로 마른 입술을 적셔주었다. 쇳소리에 가까운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란...즈미는......” 지스카르는 눈을 감았다. 고문실에서 란지에가 끊임없이 했을 고민들 중 가장 첫 번이었을 물음이리라. 의식을 되찾는 것과 동시에 떠오를 정도로 수천, 수 만번 생각했을 그 이름에 이제 답을 줄 수 있었다. 얼마나 회한 어린 일인가. “란즈미는 안전해. 걱정하지 말게.” 란지에가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몇 년이나 함께하고도 처음 보는 그의 눈물이었다. 지스카르도 손을 펴 자신의 눈을 짚었다. 그러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란지에를 데려온 집은 켈티카 외곽의 한 농가였다. 화강암으로 벽을 세우고 점판암을 얇게 잘라 여러 개 비스듬히 겹쳐 올린 지붕 모양은 북부로 갈수록 흔한 형태였다. 주인은 일찌감치 다른 지방으로 떠났고, 일대의 땅은 멀찍이 사는 친척이 관리했다. 두 사람 다 민중의 벗 사람들이었다. 밤이 되자 아늑한 어둠이 내려왔다. 도시보다 밝은 벽이 작은 창으로도 잘 보였다. 석조 농가는 대부분 창이 작았다. 초를 여러 개 밝히자 천장이 높은 침실에 부드러운 빛이 가득 찼다. 난롯불도 발그레했다. 석벽의 냉기를 내보내기 위해 종일 난로를 때다시피 했기 때문에 방은 몹시 훈훈했다. “창을 닫는 것이 좋지 않겠나?” “아뇨.” 란지에의 의식은 놀랄 만큼 빠르게 또렷해졌다. 몸은 거의 움직일 수 없는데도 정신만은 맑았다. 그러나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란즈미와 이엔의 안부 말고는 다른 것을 묻지도 않았다. 의사가 잠을 자두는 편이 좋다고 했지만 그는 줄곧 깨어 있었다. 말없이 방 한구석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 저녁 식사 뒤에 지스카르가 침대에 다가와 앉자 란지에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켈티카에 너무 오래 계시면 위험할 텐데요.” “자넨 내 걱정을 할 때가 아냐.” 지스카르는 이불이 걷혀 있는 왼손 쪽을 흘끗 보았다. 이불자락이 닿는 것조차 견딜 수 없는 모양이었다. 뭔가 닿기만 해도 숨이 넘어갈 지경이어서 의사들도 손대는 것을 단념했다. 몸이 충격을 극복할 때까지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골절을 주로 낫게 하는 마법이 있다고 하더군. 수소문해 두었네.” 란지에는 왼손을 내려다보더니 미소 비슷한 것을 지었다. “오른손이 아니라서 살만할 것 같습니다.” 지스카르는 엄격한 표정을 했다. “그런 말 말고 마음 굳게 먹게. 그래야 좋아질 것 아닌가.” “좋아져야지요. 할 일도 많은데.” 지스카르는 란지에의 담담한 얼굴을 보며 안도해야 할지 안타까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평소의 모습을 빨리 되찾은 듯 보이는 것은 천만다행 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의무를 먼저 떠올리는 모습은 못내 애처롭기까지 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회복이 빠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은 일렀다. 왼손뿐이 아니었다. 란지에는 누군가가 몸에 손을 대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의사가 치료를 위해 손을 댈 때도 억지로 입술을 깨물며 참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정신만 앞서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몸은 아직 충격에서 전혀 회복되지 못했다. 고문실에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결국 물어볼 수 없을 것이다. 전에도 그랬듯 그가 스스로 입을 여는 일 또한 없을 것이다. 지스카르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그렇듯 혼자서 견뎌내는 그의 마음속은 과연 괜찮을까. 육체적 고문은 끝났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계속 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지스카르가 불쑥 대꾸했다. “그런 걱정 말게나. 자네한테 할 일 따위 주지 않을 걸세.” 란지에는 눈을 내리깔았다. “한 번 실패일 뿐인데 너무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 실패가 좀 컸어야 말이지. 내 자네를 구해오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는가? 다른 사람은 구하고 자기 자신은 그렇게 제멋대로 내팽겨칠 거라면 다시는 일 같은 것 하지 말게나.”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저도 이런 일 별로 당하고 싶진 않았어요.” 목소리 끝이 불편해지는 것을 눈치 챈 지스카르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니 그런 상황이 안 오도록 해야 할 것 아닌가? 자넨 적어도 몇 년은 쉬어야겠네.” “몇 년이라고요?” 당황하는 란지에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 그 몇 년동안 자네 인생 계획은 내가 세워 주겠네. 이제 망명 의회에서도 자네 나이를 웬만큼 알게 됐으니 위원장이 되기엔 어리다고 하는 사람이 많을 게야. 자넨 참 애늙은이지만 그렇다고 남들보다 빨리 나이를 먹을 순 없는 게지. 어차피 왕국8군에도 알려질 만큼 알려졌으니 표면적인 활동에서는 손을 뗄 수밖에 없을 것이고.” “.......” 란지에의 표정은 실망한 것 같기도 하고 초조한 것 같기도 한 것이 갈피를 잡히 힘들어 보였다. 지스카르가 물었다. “어떤가? 일에서 해방된 기분이?” “ 홀가분하진 않군요.” “일중독이라서 그래. 빨리 금단증상에서 벗어나게나.” 잠시후 란지에가 피식 웃었다. “금단 증상 때문에 이렇게 손이 떨리는 거군요.” 지스카르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농담치고는 잔인한 편이었지만 지금 그들에게 그보다 평화로운 농담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럼 저를 구해내느라 어떻게 고생하셨는지 좀 들어 봐야겠습니다. 그래야 제가 바든 처분이 합당한지 판단을 해보지요. 대체 어디에 줄을 대셨기에 저 같은 악당을 이리 잘도 빼오셨습니까?” “아르님 공작이라면 어떤가?” 란지에의 눈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의아하군요. 모로 씨가 죽은 지금 저에 대한 정보가 상당히 들어갔을 텐데요.” “정보란 목표를 위해 복무해야지, 책꽂이나 장식하자는 용도는 아닌 게지. 물론 아르님 가문에서 자네에 대한 인상이야 더 나쁠 수 없을 정도지. 하지만 미래의 대업과 당장 기분을 맞바꿀 정도로 정치적 감각이 형편없는 집안은 아니라네. 아르님 공작의 숙부, 세칭 ‘데모닉 히스파니에’를 만났네.” 지스카르의 뜻을 받아들인 히스파니에가 아르님공작을 움직였고, 아르님 공작이 왕국 8군에 자신의 가문과 관련된 일이니 수인의 신병을 넘겨 달라고 요청했다고 했다. 그때까지 왕국8군은 란지에가 민중의 벗이라는 사실 외에는 구체적인 혐의점을 밝혀내지 못한 상태였다. 체포된 과정이 전혀 달랐던 까닭이었다. 란지에와 테오와의 협상이나 아르님 가문에 대한 음모와 연결되는 지점을 찾아낸 사람은 오히려 히스파니에였다. 아르님 소공작이 죽을 뻔했던 일은 널리 알려진 큰 사건이었다. 가른 혐의점이 불분명한 자를 피해 당사자인 공작이 넘겨달라는데 제아무리 왕국8군이라도 해도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더구나 상대는 개국공신이자 국왕의 한 팔로 알려진 위세 높은 공작이었다. “실비엣은 어찌 됐습니까?” 그 이름을 말하는 란지에의 눈가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어쨌든 실비엣은 란즈미의 일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란지에도 실비엣과 어떤 관계냐고 묻는 심문에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자네와 함께 아르님 공작이 명령서를 써주었네. 참고인이었기 때문에 조사가 끝나면 풀려나는 정도로 . 그일로 공작이 아르장송 자작가를 손에 넣었지.” 은혜의 대가로 아르장송 자작은 아르님 공작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맹세 했다고 했다. 그때까지 실비엣은 고문을 당하지 않았지만 만일 계속 구금되어 있다가 고문실까지 넘어가 민중의 벗이라고 거짓 자백을 하기라도 한다면 가문이 망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만한 대가는 치르고도 남을 일이었다. “어쨋든 혐의를 깨끗이 벗은 건 아니군요.”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자네가 입을 열지 않았으니 결국 근거도 없는 셈이지. 민중의 벗 간부에게 아무것도 모르고 매달렸던 어리석은 귀족 아가씨 정도일까? 그정도로도 명예는 땅에 떨어진 것이겠지만.” “......” 란지에는 무슨 생각엔가 잠겨 대답하지 않았다. 지스카르는 상념을 깰 겸 목소리를 바꾸어 말했다. “자, 어쨌든 그렇게 히스파니에 어르신에게서 공작의 명령서를 넘겨받아 왕국8군에 제출하고 자네를 데려올 수 있었지. 물론 추적자가 있었네만 레어릭 군이 잘 따돌렸네.” “레어릭 씨가 여기 와 있습니까?” “못 봤나? 아침에 자네가 깨어날 때도 곁에 있었는데.” “제가 못 봤군요.” 란지에는 이윽고 덧붙였다. “그가 줄곧 보내준 소공작 일행의 정보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인사라도 하고 싶군요. “내일쯤 기회가 있을 걸게. 심지어 레어릭 군은 이번에 자네를 돕고 싶다며 일부러 왔다네. 얼굴이 노출될 위험이 있는데도 직접 로캉 성에 가서 자네를 업어 오기도 했지.” “레어릭 씨도 나이트워커로만 있기는 아깝습니다만, 워낙 자기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직책을 주기가 어렵더군요.” “천생 항해사지. 하지만 그런 재능이 언젠가 도움이 될 걸세.” 지스카르는 고개를 기울이며 미소 짓더니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자네 일을 하고 싶다고 찾아온 사람이 하나 더 있었네. 일은 실패하면서 사람만 모아들이다니 주객전도로군 그래.” “누구 말씀이십니까?” “본 적이 있을걸세. 아르님 공작의 사위를 만났을 때, 그를 수행했던 비서.” 란지에는 의아한 얼굴이었다. “킨카, 라는 이름이었던가요? 그 자가 그럴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나도 그 자가 무작정 찾아왔더라면 믿지 않았을 걸게. 그런데 그 자가 이번에 자네를 구해내려고 히스파니에 어르신을 찾아갔더군. 그 어르신에게 자네 이야기를 자세히 해 준 것이 그 자야. 모로에 대한 정보와 이번 일에 자네가 연관된 정황을 알려주는 대신 자네를 구해내고 싶다고 했다네.” 란지에는 웃었다. “연결된 정황을 알려주면 아르님 가문 사람이 좋아할 리가 없잖습니까? 오히려 보복하고 싶다고 생각하기가 쉬울 텐데요.” “자넨 어차피 잡혀간 상태였으니 그냥 둬도 결과가 같지 않나? 그러니 도박을 건 게지.” “그런 도박을 걸 줄 안다면 그 자도 평범한 비서는 아니군요.” 지스카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내가 왜 자네를 구하려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 자가 뭐라고 했는지 짐작 가는가? 그는 자기 주인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네. 그렇게 될 주인을 찾아내어 보필하는 것이 자신의 숙명이라더군. 그 자는 레코르다블 사람이네. 그들의 사고방식은 우리와 좀 다른 점이 있지. 그 묘한 심리를 다 알기는 힘들지만, 그는 자네를 만난 뒤 일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자네를 높이 평가하게 된 것 같네.” “지스카르는 실패했다고 야단치는 일을 보고서 말이죠.” “듣고 보니 그렇군. 지적해 줄 필요가 있겠는데.” 란지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그와 동료가 되려면 일단 그 ‘주인’이라는 말부터 바로잡아야겠군요.” “자네가 시킨다면 말은 쉽게 바꾸겠네만, 마음을 쉽게 바꿀 것 같지는 않더군. 그보다는 ‘반드시 성공하는 주인’이라는 개념을 수정해줘야 할 것 같지는 않은가? “그렇군요. 제가 붙잡히게 된 과정을 설명해 주지 그러셨습니까?” 냉담해진 목소리에 든 자조적인 기색을 눈치채지 못할 지스카르가 아니었다. “이엔이 그 그림일로 얼마나 자책하는지 자넨 모를 걸세. 그림을 그렸던 친구도 마찬가지고. 자네도 자책할 생각이라면 그만둬. 이제 어서 나아서 란즈미를 볼 일이나 생각하게. 그애한테 건강한 못브을 보여줘야지.” 란지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지스카르를 올려다보았다. “ 지스카르.” “말하게.” “제가 에이젠엘모 씨를 보호 했던 건 잘한 일이었을까요?” 지스카르는 잠시 차이를 두고 대답했다. “자네의 그 결정이 결과적으로 오늘의 일을 낳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그일로 자네가 반성하는 것은 반대하고 싶네. 만일 자네한테 지금보다 더 큰 일이 생겼더라면 나 역시 애나를 원망하고 싶겠지만....이렇듯 살아 돌아온 상황을 하나의 축복으로 여긴다면, 자네의 동정심이었을지 동료애였을지 모를 그 감정 또한 먼 미래를 위한 자네의 변화로써 칭찬하고 시네. 이건 진심이야. 자네가 애나를 조사 분과에 보내지 않은 그 마음이 언젠가 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리라 믿네.” 란지에는 쓴 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이번엔 제가 조사 분과 위원회에 출두해야겠군요.” 조직원이 체포되었다가 돌아오고 나면 정보가 얼마나 새어나갔는지 파악하기 위해 조사를 받는 것이 상례였다. 란지에가 체포된 후 망명 의회에서는 위원장 급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정보의 어마어마함을 알고 있었으므로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대적인 검거는 벌어지지 않았다. 지금쯤 그곳에서는 란지에가 받은 심문과 조사의 내용, 그리고 누구를 만나고 어떤 고문을 당했는지까지 속속들이 조사할 작정으로 기다리고 있을 것이 뻔했다. 지스카르가 정색을 했다. “그런 일 없을 걸세. 그런 몸으로 어딜 가겠다는 건가? 아니, 다 낫더라도 보내 줄 생각 없네. 몸이 좀 나으면 자넨 로사 알브로 갈 걸세. 내년 봄까지 푹 요양하도록 하게나. 란즈미도 데려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란지에가 눈을 약간 크게 뜨더니 말했다. “대단한 계획이군요.” “잘 아는군. 망명 의회는 한동안 잊어버리는 편이 좋을 걸게. 말했듯이 적어도 몇 년은 내가 자네의 후견인이 되어 어린아이 다루듯 모든 일에 참견하고 할 일을 정해줄 테니까. 알아서 하리라고 믿었는데 이런 모습이나 보이고 있으니 내가 어찌 자네를 믿겠나? 얌전한 학생으로 돌아갈 준비나 하게나.” 란지에는 지스카르를 물끄러미 보다가 빙그레 웃었다. “다시 지스카르의 학생이 되는 것인가요?” “처음엔 그런 셈이지. 내년 봄쯤 회복세가 괜찮으면 새 학원을 물색해 주겠네. 그로메에서 졸업을 못하지 않았나? 이번에는 다른 궁리 하지 말고 공부에 매진해서 졸업장을 받아오도록 하게나. 왕국8군의 눈이 늘 자네 뒤를 따라다닐 테니 공부에 집중하기에도 최적이겠군.” 란지에는 조금 웃더니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스카르는 그의 해쓱한 옆얼굴을 지켜보았다. 조금 더 자라야했다. 피기도 전에 져서는 안 되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때가 오기까지 지켜야 할 귀중한 씨앗이었다. 공화국으로 가는 길은 어차피 피투성이다. “지스카르.” 란지에가 어느새 그를 보고 있었다. “언제쯤이었는지 기억은 안납니다. 하도 정신을 자주 잃어서...문득 정신이 들고 보니 어디선가 달빛이 들어오더군요. 제가 있는 감옥에는 창이 없었는데.” 지스카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때의 일을 상시키고 싶지 않아 아무런 것도 묻지 않았는데, 란지에가 먼저 입을 열 줄은 생각지 못했다. “억지로 몸을 뒤채서 달빛을 보려고 했지요. 오랫동안 취조실의 붉은 램프 말고는 아무것도 못 봐서. 그랬더니 거기에 누군가 서 있더군요. 중년 남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그가 제게 손을 내밀더군요. 그 순간 너무 마음이 약해져서 지스카르의 이름을 부를 뻔했습니다.” “.......”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보니 아무것도 없더군요. 달빛도, 그림자도.” 제나스는 브리앙의 제보를 얻은 만큼 란지에와 지스카르의 관련성을 증명하는 데 심문의 초점을 맞췄을 것이다. 얼마나 시달렸기에 란지에처럼 마음이 굳은 사람의 눈에 환각이 보였을까. “그때부터 이대로라면 제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자백을 해버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빨리 죽는 쪽을 택하려고 그들에게 덤벼들면서, 살고 싶다는 희망을 끊기 위해 제가 좋아하던 모든 것들을 부가치한 것으로 느끼려 했습니다. 사람들, 작은 기쁨들, 세상의 아름다움. 모든 좋은 추억을 회색으로 바꾸려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어조는 슬플 정도로 담담했다. 지스카르는 무어라 말하려 하다가 침묵을 지켰다. 란지에는 이윽고 눈을 내리깔았다. “쉬운 일이 아니었죠. 저도 처음이었다면 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지스카르는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처음이 아니라고?“ 란지에의 시선이 허공을 더듬다가 멈췄다. 그러나 지스카르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오래전에... 지스카르를 만나기도 전의 일이었지요. 이번보다 훨씬 장기간이었기 때문에 몇 번이나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고...결국은 해낼 수 있었습니다. 지스카르는 제가 미(美)나 예술, 생활 속에 행복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 하셨죠. 지스카르가 가르친 것이 옳다는 걸 저도 압니다. 하지만 그때 제 마음을 너무 심하게 도려내었던 것 같습니다.” 란지에가 입술을 얇게 깨무는 것이 보였다. “결국 그 경험이 있어서 제가 이번 고문을 견뎌내고 끝내 중요한 정보들을 지켜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 지 모르겠군요.” 무어라 말하기 힘든 답답함이 가슴을 짓눌러왔다. 그의 유년기에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언제 끝이 날 것인가. “전 제가 회복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몸은 어떻게 치료된다 해도 지스카르가 가르쳤던 인간적인 공화주의자가 될 자신이 없습니다. 제 영혼은 증오가 남긴 상처들, 그걸 견디기 위해 제가 그어버린 자해 자국으로 만신창이입니다. 다시 한번 목숨을 끊을 마음을 먹으면서 지난 상처들까지 생생하게 되살아나 버린 지금 전 잠을 청하는 것도 무섭습니다. 그 악몽들을 못 견딜 것만 같습니다. 잠깐 약해져서 이런 걸까요? 곧 극복할 수 있게 될까요? 하지만 이러다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될까 두렵고, 아무도 사랑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정말로...” “란지에.” 지스카르가 그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생각을 멈추게. 시간이 멈춘 것처럼.” 란지에가 지스카르의 눈을 바라보았다. 앓고 깨어난 아이처럼 무방비한 얼굴, 지스카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얼굴이었다. “시간이 멈추면 세상이 멈추고,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지금까지 한 일의결과과는 오지 않을 걸게. 앞으로 해나갈 일은 없을 걸세. 이제부터 시간은 흐르지 않네. 자네는 아주 오랫동안 쉴 수 있을 걸게.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원한다면 영원히 쉬고 나서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세.” 지스카르는 손을 펴 내밀어 란지에의 얼굴 앞의 허공을 쓰다듬어 내렸다. 란지에가 잠시 후 눈을 감았다.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창밖의 별도 기척을 내지 않았다. 난롯불만 너울거리며 탔다. “사람은 몇 십 년 밖에 살지 못하지만 어떤 나무는 수 백 년을, 산과 숲은 수 천 년을 , 별과 바위와 물은 영원히 사네. 사람의 영혼은 그들 중 어느 것과 같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지. 어떤 사람은, 사람도 죽은 뒤 나무나 별로 태어날 수 있다고 말하더군.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웃었지만 동시에 시적이구나 싶었네. 예술도 오래 사는 것들 중 하나지.” 지스카르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소리 없이 별을 흔들고 갔다. “ 내가 자네의 시간을 멈췄으니 자네는 산이나 별처럼 오래 살 걸세. 아주 오래 살게나. 유년기가 먼 추억이 되어 굳이 되짚어 생각해내려 해도 잘 떠오르지 않을 때까지 살게나.” 꼭 다물렸던 란지에의 입술이 서서히 풀렸다. 찢어지고 터진 입술처럼, 너덜너덜해진 그의 영혼에도 짧은 안식이 찾아왔다. “기다리게. 천천히 오게. 잊지 말게. 자네가 사람을 사랑하기 어렵다 해도 사람들은 자네를 사랑하네. 자네가 나를 믿고 그런 말을 꺼내 준 것이 처음이라 너무나 고맙네. 그것도 하나의 변화라면 자네는 좋아질 걸게. 느리고, 조바심 없이 오게.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지스카르는 일어나 촛불들을 하나씩 껏다. 그리고 다시 침대 머리맡으로 돌아왔다. 그는 란지에의 얼굴을 지켜보며 앉아있었다. 쪽창 너머로 떠오른 별자리들이 서녘으로 달려가고 또 달려가 천구가 사계절이 다 보이도록. 그가 지키는 상처투성이 어린아이가 악몽으로 깨어나지 않도록 밤새 지키고 있었다. 5. 네냐플 학원입학 “엉킨실은 아주 풀기가 어렵지. 오늘 기적적으로 풀어져도 내일부터 다시 엉키겠지. 그렇다고 풀지 않을 순 없는 거지.“ 991년의 겨울이 저물었다. 신년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2월에 남부에서 눈을 볼 수 있으니 아이들은 좋아했지만, 파노자레 산맥에서 약초를 캐러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최악의 겨울이었다. 약초의 공급이 줄어들자 주요 고객인 네냐플 학원의 교수들도 연구가 진척되지않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자 교수들의 기분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학원 재학생들의 기분은 배로 나빠졌다. 재학생들은 사냥감이 필요해졌다. “야, 거기 안경!” 막시민은 뒤통수를 긁다 말고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면 좋은 일이 없을 것 같다든가, 그런 종류의 기분 말이다. 시선을 유지한채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다시 외침이 들렸다. “야, 안경. 안서냐?” 예감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상대의 불쑥 내민 머리가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안경’으로 부르고 있는 주제에 자신도 안경을 쓴 낯선 소년의 얼굴을 본 막시민은 고개를 기우뚱하게 하며 대꾸했다. “뭐?” “뭐가 뭐야 인마, 너 신입생이지? 아랫마을에 가서 로글랑탱 아줌마 파이 네 개만 사와.” 손에 엘소노 동전 네 개가 대뜸 쥐어졌다. 막시민이 생각하기에 상대의 말에는 세 가지 어폐가 있었다. 자신이 신입생이라면 아랫마을이 어딘지 모를것이고, 그렇다면 로글랑탱인지 뭔지는 더더욱 모를 것이 틀림없었다. 무엇보다도 아직 신입생도 아니다. 입학식은 시작도 안했잖은가? 그러나 막시민은 자기 손에 돈이 쥐어지면 저절로 주머니에 넣는 습관이 있었다. “남탑 2층 동쪽 첫 번째 방으로 갖고 와라. 알았지? 나 네 얼굴 다 봐놨다. 신입생이 끽해야 백 명쯤인데 찾으려고 마음먹으면 뭐 빛의 속도지.” 이름 모를 안경 낀 선배는 손가락으로 자신과 막시민을 번갈아 가르켜가며 옆걸음질로 뛰어 사라져갔다. 도저히 추측할 수 없는 원인으로 동전 네 개를 주운 셈이 된 막시민은 주머니를 축축 쳐보고 중얼거렸다. “돈이란 놈은 지조가 없어서 일단 새 주머니에 들어가고 나면 전 주인은 알 거 없는 거지.” 이렇듯 날벼락도 잘 피해가는 긍정적 사고방식의 막시민에게도 천적은 있었다. 유유히 기숙사 앞 산책로를 빠져나와 신입생과 동행인들이 와글거리는 데스 데이븐 관으로 접어들려는 순간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고 소리쳤다. “앗, 나야! 막시민! 여기!” 흠칫 놀란 막시민은 사람들 틈으로 머리를 감추려 했으나 키가 큰 편이어서 쉽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을 뚫고 다가온 티치엘이 막시민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리면서 웃었다. “이제 왔구나? 얼마나 기다렸다고.” 정서가 불안해진 막시민은 맞은편에서 오던 학생의 화구 가방에 걸려 자빠질 뻔하다가 겨우 대꾸했다. “네가 날 왜 기다려?” “그야 너무 안 오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네가 왜 여기 와 있냐고!” 티치엘은 빙긋 웃더니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왜 오긴. 나도 입학하려고 왔지.” 막시민은 티치엘을 뚫어져라 보더니 머리를 감싸 쥐었다. “네가 입학을 왜 해? 너 모르는 거 없잖아? 혹시 있더라도 너네 아버지한테 배우면 되는데 비싼 돈 내면서 뭐 하러 학원 다녀? 날 괴롭히러 온 거지? 틀림 없지? 너희 부녀는 언제까지 날 괴롭혀야 속이 시원하겠냐?” 티치엘은 입술을 조금 내밀며 눈동자를 굴려 막시민을 올려다봤다. “내가 그렇게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 섭섭해.” 막시민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젠장, 정말 질길 사람들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때 바이올린을 그냥 주고 마는 건데.” 그러자 티치엘이 뜻밖에 관심을 보였다. “정말이야? 나한테 주면 되는데.” “누가 널 준대!” 막시민이 빽 소리를 질렀지만 니티엘은 키득키득 웃기만 하더니 곧 스스럼없이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얼른 가자.” “어딜? 야, 이거 안놓냐? 내가 왜 널 따라 가야 되는.....” 신입생 한 명당 일행 열 명씩은 따라온 게 아닌가 싶은 인파를 헤치며 어느 기숙사 탑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고 , 다시 3층으로 오르고 , 복도를 돌아가고, 맨끝 방 앞에 이르렀을 즈음이었다. 정확히는 티치엘이 문을 열고 막시민이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이었다. “아니, 저 자식은 왜 또 여기......” 갑자기 등 뒤에서 내민 손이 문을 쾅 닫아버렸다. 동시에 누군가가 업히다시피 매달리는 바람에 막시민은 닫힌 문짝에 머리를 부딪칠 뻔했다. “이제 왔어?” 막시민은 문득 미간을 찡그렸다. 돌아서서 조슈아의 얼굴을 보자 의혹은 더 강해졌다. 조슈아는 웃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안 반갑나 보네.” “반가운 게 문제가 아니고 넌 왜 또 여기에 ...아니 그보다 내가 조금 전에 본 건......” 주위에는 아래층만큼은 아니었지만 사람이 몇 있었다. 조슈아는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댔다. 티치엘이 곁에서 말했다. “들어가서 얘기하는게 낫지 않아?” “아...막군한테 설명 좀 하고.” 조슈아는 성큼 성큼 걸어 다른 열린 방을 찾아냈다. 방에 들어가 문을 닫자마자 막시민이 다그쳐 물었다. “너 설마 같이 온 거냐?” “응.” 조슈아는 억지로 웃으려 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티치엘이 대신 말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냐. 여기로 오게 된 건......” 티치엘이 인형이 깨어나게 된 과정과 쥬스피앙의 충고에 대해 설명해 주는 동안에도 굳어진 막시민의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다 듣고 나자 그는 팔짱을 낀 채 조슈아를 내려다봤다. “그래. 다 좋다 치자고. 그런데 방금 왜 내앞에서 문을 닫았던 거냐? 저 쪽에서도 분명히 날 봤는데.” “네가 갑자기 만나게 되면 놀랄 것 같았어.” “어차피 금방 다 알게 될 거, 이러니 식으로 하면......” 막시민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말이 아니라 표정으로 . 적당한 말을 찾아내지 못한 채 답답한 표정을 짓던 그는 결국 포기하고 간단히 말했다. “저쪽 녀석이 상처를 받을 거 아니겠냐고.” “......” 조슈아는 대답없이 고개를 숙였다가 시선을 돌린 채 일어섰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야.” 돌아보니 니치엘도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둘이 얼굴을 마주보고 뒤따라 나가려는 순간 다시 조슈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문을 닫고 기대어 서며 말했다. “나가지마. 설명해 줄게.” 막시민은 의혹에 찬 눈길을 보내다가 문득 조슈아의 옷자락으로 시선이 갔다. 그리고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너.” 조슈아는 막시민의 시선을 따라가 보고는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옷자락은 말끔했다. 조금 전에 막시민에게 매달리며 구겨졌던 다른 하나의 옷과는 달리. 막시민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테이블을 탁 치며 고개를 돌렸다. 조슈아가 말했다. “화내지마 . 난 단지 그 녀석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어.” “무슨 놈의 기회? 넌 친구가 장난감으로 보이냐?” “아니. 절대로 아냐. 하지만 그에겐 일생 단 한번일 수도 있는 기회였어. 정말 미안해. 하지만 네 반응을 보니까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정말로 마지막이었던 걸 알겠어.” “그래 네 먹대로 다 나눠줘라. 부모도 친구도 다 나눠가져. 아예 결혼도 둘이서 한명하고 하지 그래?” 티치엘이 영문을 몰라 눈을 굴리며 둘을 번갈아 보았다. “왜 그래? 난 어떻게 된 건지 도통 모르겠어.” 막시민은 의자에 앉아 고개를 돌려버렸고 조슈아가 티치엘을 향해 돌아서며 쓴 웃음을 지었다. “미안해 . 티치엘. 지금은 내가 네가 아는 나야. 조금 전은 아니었어.” 티치엘도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아..그러면 일부러 바꾼 거야?” “그 녀석한테 막군하고 재회할 기회를 주고 싶었어. 그런데 어쩐 일인지 돌아와 버렸더라고. 무슨 얘기를 했어? 뭔가 기분나쁠 만한 거라도.....” “아니.” 티치엘은 고개를 젓더니 막시민을 돌아보며 말했다. “막시민이 왜 함께 온거냐고 따지다가, 그렇더라도 그 앞에서 문을 닫아 버리면 저쪽이 마음 상하지 않겠느냐고 말했거든.” “........” 조슈아는 창 밖만 보고 있는 막시민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막군. 들어봐. 그의 머릿속에서는 말이지. 옛날 코트볼트에서 내가 열흘만 있다가 돌아오겠다며 떠났던 그때...7년 전 그날 이후로 첫 재회인 거야.” 막시민은 고개를 저었다. “그놈이 그렇게 말해? 거짓말 말라고 해. 내가 왜 널 찾으러 블루 코럴까지 갔는데 비취반지 성에 갔다가 너 대신 저 이상한 놈을 봤기 때문이란 말이다.” “그래. 그때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그 초대장 말고도 그의 태도나 모든 것이. 그때 그는 인형사의 지배를 받고 있었어. 파티장에서 테오 형을 살갑게 대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야만 했거든. 그때 너와 나눴던 대화는 그에게 열병에 걸려 꾼 꿈처럼 흐릿할 뿐이야.” 막시민이 더 대답하지 않자. 조슈아는 테이블 맞은편으로 가서 막시민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난 하이아칸으로 네가 찾아왔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기억하고 있어. 그에게도 같은 기억을 주고 싶었어. 네가 화가 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네게서 자신을 걱정하는 말을 듣고, 더 나인체 할 수 없어 나가고 말았던 그의 마음도 조금은 이해해 줘.” 조슈아는 막시민이 줄곧 둘 다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를 ‘가짜’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고 있었다. 그런 만큼 ‘가짜’앞에서 솔직한 기분을 말해 버린 자신에게 더 화가 난 듯했다. 그에게도 혼란이 없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천성적으로 혼란을 싫어했다. “됐어. 그만하자. 네 녀석의 나쁜 장난이 하루 이틀이냐. 그래서 너도 입학하게 됐다 이거지? 언제왔냐? 잔소리 선생만 왔나 했더니 휴대용 수첩도 쫓아와서 다행히 지낼만하겠네.” 막시민의 얼굴을 쳐다본 티치엘이 조그맣게 말했다. “나 잠깐 나갔다가 올게.” 조슈아는 어쩐지 풀이 죽어 보이는 티치엘의 뒷모습을 보더니 어깨를 움츠렸다. “티치엘한테 너무 그러지 마. 네가 시험도 안 보고, 성으로 돌아오지도 않아서 같이 걱정했었다고. 나 때문에 저런 고생을 해주면서도 불평도 없어서 얼마나 미안한지 몰라.” “그래. 그러기만 했다면 나도 아이고 고맙습니다, 였겠지만 저 애가 여기 왜 왔다고 생각하냐? 자기 아버지한테 개인 교습을 싫증나도록 받을 수 있는 애가 학원은 뭘 하러 오냐고. 난 저기 부녀가 무서워. 나한테 바이올린을 줬다는 이유로 통째로 잡아먹을 작정인 것 같단 말이다.” “그런다고 잡아먹힐 너도 아니면서.” 조슈아가 빙그레 웃었지만 막시민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조슈아가 물었다. “자, 그럼 말해봐. 넌 그동안 어디에 있었어? 성에도 학원에도 안 오고 몇 개월 동안 무얼 했던 거야?” “내가 꼭 성까지 쫓아가야 할 이유라도 있었던 거냐? 학원이야 입학할 때 오면 그만인거고, 내가 니 보모도 아닌데. 왜? 나 없으면 사고 치려고?” 조금 전에 기분이 덜 풀린 탓인지 어조가 까칠했지만 조슈아는 웃었다. “그래도 어디 갔었는지는 말해 줘. 어쨌든 쥬스피앙 씨를 만난 거지?그러니까 여기로 왔을 거 아냐.” “그래 그 양반 아주 집요하더구만. 무려 코츠볼트로 쫓아왔었어!” 눈을 둥그렇게 떳던 조슈아는 장면을 상상해 본 것인지 곧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넌 웃지. 난 죽을 맛이다. 시험을 떼어먹었으니까 이젠 됐다고 생각했는데 학장을 그 아저씨가 구워삶았는지 특별 전형은 또 뭐야? 코츠볼트는 또 어떻게 알았을까? 가만있자, 네가 가르쳐 준 거 아냐?” 조슈아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난 쥬스피앙 씨가 작년에 성을 떠난 후로 만나지도 못했어. 나도 곧이어 여기로 왔고.” “작년에 떠났다고?” “응. 널 찾으러 간다고 하시더라고. 아주 비장해 보이던데? 그런데 너 성으로 돌아오지 않은데, 코츠볼트에 가서 숨을 생각을 한 거구나?” 막시민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거긴 내 동생들이 우글거리며 살고 있다는 걸 잊었냐? 그만큼 너 쫓아 다녔으면 이제 동생들 살피러 갈 때도 된거지. 내가 이래뵈도 명색이 가장이란 말이야!” 조슈아가 혀를 낼름 내밀어 보였다. “티치엘이 내주는 숙제를 하기 싫어서는 아니고?” “.......” 조슈아와 티치엘은 쥬스피앙과 헤어진 후 바로 네냐플로 와서 포도원의 자료더미에 파묻혀 지냈다. 네냐플의 마법장벽이 필요한 또 한 사람이 같이 온 것은 물론이었다. 막시민이 물었다. “ 그런데 인형이 깨어났는데 포도원에서는 도대체 뭘 연구하고 있는거냐? 인형사를 잡아 올 궁리라도 하냐?” “이제 악의 무구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어. 가나폴리 멸망기의 일이라 자료가 그리 많지는 않아. 거울 연구도 같이 하고 있고.” “그럼 넌 그거 연구 다 할때까지만 학원에 다닐 참이냐?” “글세. 일단 인형사가 나타날 때까지는 여기서 나가면 안 되겠지만. 사실 입학할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학생도 아니면서 새 학기에도 포도원에 계속 머물겠다고 하기가 좀 그렇더라고. 너무 신세지는 느낌이어서. 그래서 보기 좋게 입학 정도는 해 두려고 생각하게 됐어.” 시험이나 입학금같은 것이 조슈아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은 뻔했다. 막시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그럼 그 인형을 어떻게 숨겨둘 참인거야?같이 입학이라도 하는 거냐? 물론 가능할 리가 없겠고.....” “응. 그건 안되지.” 조슈아가 학원에서 아무리 조용히 지낸다 해도 아르님 소공작이라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을 터였다. 네냐플에는 귀족학생도 많았다. 소공작이 갑자기 쌍둥이가 됐다는 소문 따위는 나서는 곤란했다. “내 방에서 조용히 지내기로 하고 학장님의 허락을 얻었어. 따로 있다가 사람들 눈에 띄어서는 곤란하니까, 누구든 하나가 나간다면 다른 하나는 방에 있을 생각이야.” “그런 허락을 해 주더라고?” “하긴, 꽤 어려운 부탁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간단히 허가가 나서 놀랐지. 학생들에게야 허가해주지 않지만 실은 네냐플 안에 여러 가지 마법실험들이 많다보니 크게 거부감을 갖진 않으시더라고. 워낙 곤란한 경우다 보니까 이해해주신 것도 같고. 참, 또 이야기하면서 느낀건데 마법사들은 ‘인형’ 이라는 존재에 대단히 친근감을 갖는 것 같았어. 그 덕도 있는 것 같아. 포도원에서 기록을 보니까 가나폴리의 마법사들은 대부분 인형을 만들었던 모양이더라고. 물론 복제 인형은 아니지만.” “괜찮으려나, 난 모르겠다.” 막시민이 한숨을 내쉬는데 조슈아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저어, 그런데 네가 인형이라고 부르는 그 친구 말야. 계속 그렇게 부를 순 없는 거여서...이름을 정했어.” “뭐?” 막시민은 웬 미친 소리냐는 표정이었다. “카르디, 라고 불러줘. 그 이름을 그에게 주기로 했어.” “........” 막시민이 뭐라 반응을 보이기 전에 티치엘이 갑자기 문을 열어젖히며 외쳤다. “입학식 늦겠어!” 막시민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입학식 까짓 거 꼭 가야 되냐?그냥 천천히 끝날 때쯤 가면 되지.” 그러나 티치엘은 발을 동동 굴렀다. “안돼. 그게, 나 신입생 대표란 말이야!” “왜 우리까지 달려야 되냐? 대표는 쟨데?” “그래도, 뭐 혼자 가보라고 할 수는....” 어느새 텅 비어버린 복도를 가로지르고 계단을 세 개씩 건너뛰어 가며 달려온 셋은 입학식이 진행되고 있는 정원 입구에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티치엘은 허리를 동그랗게 굽히고 정원 모서리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단상에서는 마침 다시 한 번 외치고 있었다. “신입생 대표 티치엘 쥬스피앙 양의 입학 선서가 있겠습니다!” 겨우 단상 앞에 이른 티치엘은 위에 앉은 이모의 눈치를 보다가 계단 앞에서 그만 넘어지기까지 하고는 울상이 되어 일어났다. 신입생 대표자리에서긴 했지만 티치엘의 하얀 치맛단에는 찢어진 자국이 너덜거렸다. 살금살금 걸어오느라 애쓰는 신입생 대표를 흥미진진하게 기다리고 있던 신입생들과 재학생들, 그리고 학원 교수들과 마스터들은 학원 역사상 전무후무한 눈물의 입학선서를 듣게 되었다. “ 보통 졸업식때 우는 거 아니었냐?” “ 그런가? 나도 졸업을 안 해봐서.” 두 소년은 입학식장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정원 울타리 밖에서 팔짱을 낀 채 구경할 태세를 잡았다. 정원에 늘어놓은 백여개의 의자는 신입생들의 차지였고, 그 뒤로 2학년 재학생들이 안는 자리가 있었다. 이 2학년들은 신입생들을 잘 인도하겠다는 선서를 하게 되어있었다. 물론 그들은 신입생을 돌볼 여유가 전혀없을 것이 틀림없었다. 2학년이 됐다는 것은 무시무시한 승급시험을 막 통과했거나, 작년에 통과했거나, 또는 그보다 몇 년 전에 통과했다는 의미로서 앞으로 3학년이 되기 위해 또 다시 기나긴 고행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때닫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들 중 몇 명은 또 한 번 3학년 승급에 실패하면 퇴학 처분되어 새로 입학 하지 않으면 안 될 위기에 몰려 있었다. 그 말은 또 한 번의 입학시럼, 엄청 난 입학금, 그리고 1학년을 다시 처음부터 듣는 지루한 수고를 의미했다. 그런 사실을 전혀 실감하지 못하는 신입생들은 입학시험을 통과했다는 희망에 부풀어 지루한 입학시도 즐겁게 견뎌냈다. 그러나 전혀 입학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시험 친 기억도 없는 한가한 특례입학생에게는 감동 따위 눈곱만큼도 없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주제에 벌써 지루해져서 사방을 두리번 대다가 뭔가를 발견하고는 흘끔거리면서 말했다. “근데 왜 티치엘이 대표가 된거야?” “수석 입학이래. 당연한 일이지 뭐.” “티치엘이 수석인 거야 뭐 당연하긴 한데...넌?” 막시민이 쳐다보자 조슈아는 난감하게 웃으며 말을 흐렸다. “뭐...우등생 노릇은 모나 시드 다닐 때로 충분하고...눈에 띄는 건...질렸다고나 할까........” “배부른 소릴 해라 이 자식아. 너 일부러 개판으로 썼지?” “그럼 시험 떨어져.” 조슈아가 정색하며 말하자 막시민이 가소롭다는 눈초리로 째려봤다. 조슈아는 웃으면서 시선을 피했다. 막시민은 눈을 굴리다가 머리 위를 신경질 적으로 기르키며 중얼거렸다. “근데 저 새는 아까부터 왜 저기서 계속 빙빙 본대?그 노을섬인지 거기에서 우리 놀리려고 날아다니던 놈이 생각나서 기분 안 좋네.” 조슈아도 손으로 볕을 가리며 올려다 보았다. “그런데 새가 굉장히 크다. 저런 새 처음 봐.” 입학시이 끝났다. 재학생들부터 우르르 나오기 시작했다. 입구에 서 있자니 수 많은 학생들이 그들을 스쳐갔다. 조슈아가 알 법한 얼굴도 몇 지나갔지만 사람도 많고 경황이 없어 인사하고 가는 사람은 없었다. 막시민이 ???ㄹ했다. “여기 있지만 너 귀찮게 굴러 쫓아다니는 놈들도 많을 거다.” “안그래도 벌써 겪고 있어.” “하긴 여기 오래 있었댔지? 좀 더 있으면 아주 징그럽겠네.” 조슈아는 대답없이 학생들을 보고 있다가 불쑥 말했다. “그나저나 너도 얘기 좀 해 줘. 하이아칸에 간 일.” “이따 어디 들어가서. 좀 심각한 얘기다.” 잡담을 나누는 가운데 재학생들이 거의 빠져나가고 신입생들이 지나가기 시작했다. 무심히 그들의 얼굴을 구경하고 있던 조슈아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어........?” 좁은 입구가 잠시 정체를 빚었다. 앞장섰던 학생들이 하나, 둘, 셋....빠져나가고 나서 조금 뒤로 빠져 기다리던 소년이 다시 다가왔다. 다가올수록 확실해졌다. 눈앞을 스쳐가는 순간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 조슈아는 곁에서 막시민이 툭툭 치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야, 너 왜 그래?” 비슷한 또래의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훤칠한 키에 검처럼 보이는 꾸러미를 등에 멨다. 교복 외투의 케이프 밖으로 길고 검푸른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마법사나 그런 부류로 보이지는 않았다. 어느 모로 보나 전사의 인상인 소년이었다. “뭘 보냐니까!” 막시민이 뒤통수를 한 대 때려서야 정신이 든 조슈아가 꿈에서 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용해졌어.” “조용해하다니?” 사방은 아직 학생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로 시끄러웠다. 그러나 조슈아는 크게 뜬 눈을 멀어져가는 소년의 뒷모습에 못 박은 채 말했다. “유령 없는 세상이 이렇게 조용했구나.” 막스 카르디는 창가에 붙어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학생들이 물결처럼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따뜻해진 날씨에 꽃눈이라도 틔우려는 듯 부푼 가지들과 눈 녹아 생긴 시내들을 보았다. 재재거리는 목소리들이 새소리와 섞여 하늘로 흩어져갔다. 그의 눈은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찾아내고 뒤따르고 곧 잃어버렸다. 그를 겨울에 남겨두고서 .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이 겨울에. 카르디는 고개를 돌려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귀퉁이가 부서진 체스판이 놓여 있었다. 공작부인이 일부러 넣어 준 물건이었다. 그녀가 무슨 마음으로 그렇게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물건은 그에게 기쁨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자신이었다. 그는 묻고 싶었다. 그는 저 체스판처럼 괜찮을까. 귀퉁이가 부서진 채로도 살아나갈까. 그럴 수 있다 해도 그가 살 곳은 이 작디작은 방뿐이ㅏ. 이곳이 그의 세계다. 다른 세계는 다른 그에게 속해 있었다. 그나마 그에게 이걸 나누어준 것은 친절일지도 모른다. 어떤 식으로든 나누어 갖자고, 그래 보려고 애쓴 흔적일지도 모른다. 그는 속삭였다. 난 싫어. 나눠 갖은 것은 싫어. 6. 도토리 빌라 “세상을 여행하고 많은 것을 보더라도 거기에 새 이름을 붙이지는 말라. 신전은 신전이고 궁전은 궁전이며 여물통은 여물통이니라.“ “엘레노어 테니튼. 그런 이름이다.” 조슈아는 막시민이 테이블에 얹어 놓은 종이 뭉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온 곳은 아예 세내다시피 한 포도원 열람실 이었다. “병으로 죽었다더라. 귀신 들려 죽었다고도 하고.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네가 결정하는 거지만, 애를 미워했던 것 같진 않더구만. 그 사람들이 너보다 더 연기를 잘 하는 게 아니라면.” 막시민은 종이를 뒤적거려 한 장을 끄집어 냈다. 초상화 였다. 제대로 채색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목탄 따위로 끄적인 간단한 그림이었다. 그나마 오래되어 선이 많이 뭉개져 있었다. 서너 살 가량의 꼬마 소녀가 대문 문자방에 오도카디 앉아 턱을 괸 그림이었다. 조슈아의 시선이 그림에 오래 머물렀다. “이웃 학생이 그러준 거라니 얼마나 진짜에 가까울 지는 모른다만, 그래도 비슷한 구석이라도 있나 보라고.”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슷해.”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조슈아는 그림에서 눈을 떼고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귀신 들렸다는 말, 진짜일까?” “자꾸 이상한 걸 보고 겁을 내고, 자지러지고. 보통은 경기를 일으켰다고들 하지만 그럴 법한 일이 있었으니 한 소리겠지.” “내가 유령을 보게 된 건 누가가 죽은 뒤였어. 열두 살 때지.” “네가 늦됐던 거구만.” “그런 셈일지도. 그 나이가 되기도 전에 죽은 사람도 많았으니.” 막시민은 초상화를 밀어놓고는 한쪽 입 끝을 올렸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늦되어도 좋은 거 아니냐.” 이윽고 조슈아는 종이를 뒤적대는 것을 그만두고 막시민을 보았다. “네 의견부터 말해줘.” “의견이랄 거 있냐? 보면 그대로 나오는데. 네 매형이 혹시나 하고 준비하고 있다가 네 누나가 아기를 낳자마자 바꿔치기 한 거 아냐. 너와 네 아버지를 처리하고 가문을 차지할 계획을 세웠다면 딸보다는 아들인 쪽이 월등 입장이 좋을 테니 말이지. 무엇보다도 네 누나가 아기를 또 낳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었을 거니까. 나중에 일이 잘되면 도로 데려올 작정이었는지 그거야 모르지만 바꿔치기한 사내애를 데리고 곧장 켈티가로 왔다가 네 누나 돌아가시고, 그 다음엔 다시 하이아칸으로 갈 일이 없었을 테니 들여다보지도 못한 거지. 그 사이 애는 너희 집안의 전통대로 일찌감치 죽어버렸고. 그러다가 인형 같은걸 만들 계획을 세웠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누구였겠냐? 내가 인형사의 오두막에서 본 건 어린아이 크기의 관자국이었다고.” 조슈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결국 테오 형은 누나의 관을 건드리지 않았다 해도 자기 딸을 이용한 셈이 되는구나. 누나를 그렇게 아꼈던 사람이 어째서 딸한테는 관심이 없었을까.” “우리가 그 마음을 알 수야 있겠냐. 네 누나를 사랑하는 데 전력을 다하느라 다른 사람을 사랑할 힘이 모자랐나보지.” 막시민은 그냥 해본 말이었으나 조슈아는 의외로 수긍한 표정이었다. “어쩌면 그 말이 답 같기도 하다. 누나를 사랑하는 건 아주 힘든 일이었을 거야. 나도 종종 힘들다고 생각했어. 테오 형은 이브 누나 외에는 우리 가족 중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는데 그 모든 생활을 견뎠지. 정말로 누나 외에는 사랑할 여력이 남지 않았는지도 몰라.” 막시민도 쓴 입맛을 몇 번 다셨다. “난 다른 의미에서 그 사실 알고 나서 기분이 좀 그렇더구만. 그렇게 오랫동안 추리를 하며 돌아다녔는데 결국 답은 추측도 못 하던 것이었으니. 네 누나한테 아이가 있다는 걸 일찌감치 고려하지 못한 나 자신도 한심하고. 물론 애가 바꿔치기 됐을 거란 생각을 하기가 쉬운 건 아니었지. 네가 네 대에 한 번이라고 한 말 때문에 더 헷갈렸다고.” “아주 어려서 죽어버린 아이는 데모닉인지 알 수도 없잖아. 따라서 세지도 못하지.” “그러고 보면 너도 세대가 잘 안 맞는데. 계속 살아 있는 게 수상쩍다.” 조슈아가 당황한 눈빛을 하자 막시민은 딴전을 피웠다. 잠시 후 조슈아가 중얼거렸다. “그래. 난 매형에 대해 너무 몰랐어. 이제 생각해 보면 처음 프란츠를 데려왔을 때 일부러 내게 닮지 않았느냐고 말하던 기억도 나. 금발이라는 것 뿐 이었지만. 우리 아버지 이름을 딴 것도 그렇고.” “그래. 그 애는 이제 어쩔거냐? 성에 있는 녀석 말이야.” 조슈아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글세” “글세 라고 할 문제냐? 그 앤 너희 집안 핏줄도 아닌 거잖아.” 조슈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버지라면 결론이 확실하겠지만, 난 정말로 잘 모르겠어. 벌써 몇 년이나 이렇게 자라온 아이야. 나하고야 정들었다고 할 것도 없지만. 그 애는 자기 엄마가 죽은 줄로만 알고 현실에 적응하려 애썼을 거 아냐? 이젠 아빠도 없지. 그런데다가 심지어 우리집안도 아니라고 말해주면 어떻게 될까?” “상상력이 풍부해서 좋겠구만. 난 모르겠다. 우리 집안 문제도 아니고. 아니, 우리집안이었으면야 당연히 그냥 키우지. 우리 동생들 봤잖냐?” “그래. 너희 집안이 참 좋은데.” “누가 들으면 진짜 좋은 줄 알겠구만.” 조슈아는 조금 지친 기색이었다. 테이블에 엎드렸다가 잠시 후 고개를 들었다. “너희 누나한테 물어보고 싶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야 뭐 열심히 해 보면 될 수도 있겠네. 아직까지 못 만났냐?”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막시민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너 물속에 있을 때 일도 생각 안 나?” “물 속이라니?” “예전에 칼라이소에서 도망칠 떄, 마차가 물에 빠진 다음에 네가 갑자기 이상해졌다고 말해줬잖냐? 그 직전에 내가 널 건지려고 죽을 둥 살 둥 하는데 물 속에서 네 목소리가 들렸어. 누나, 누나, 라고.” “.............” 조슈아가 대답하지 못하고 있자 막시민이 말했다. “어쨌든 내 조사 내용은 이게 다야. 본체의 정체를 알았으니 다음 처분은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인형사의 행방은 결국 못 찾았지만 쥬스피앙이 해준 말대로라면 언젠가 인형을 찾으러 올 테니까 여기서 잘 도사리고 있으면 되겠네. 안그러냐?” “인형이 아니고.....” “그래 카르디라 이거지? 어쨌든 그놈은 절대 학원 밖으로 내보내지 마라.” “알고 있어.” 막시민이 일어나더니 바깥을 손가락질 했다. “그만 가자. 밖이 어둡네. 방 배정받은 데 정리 안 해놓으면 잔소리할 누군가가 있는 것 같던데.” 둘은 포도원을 나서 기숙사로 향했다. 조슈아는 어둠 속에서 문득 움직이는 것을 보고 멈춰 섰다가 산에서 내려온 토끼인 것을 보고는 맥 없이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말해보았다. “누나, 내 근처 어딘가에 있는거야?” 기숙사 입구에서 둘은 헤어졌다. 방이 다른 까닭이었다. 조슈아의 방은 북탑 기숙사 3층 안쪽에 있었는데 학생이 쓰는 방 중에 손님용 방과 개인 세면실을 따로 갖춘 유일한 방이라고 했다. 작년에 고학년인 누군가가 쓰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아르님 소공작이 온다는 말에 자진하여 내놓고 물러났다. 조슈아의 성격상 평소라면 거절했을 테지만 이번에는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둘이 쓸 방, 그것도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생활할 만큼 넓은 방이 꼭 필요했는데 이 방 말고는 그런 곳이 없었다. 막시민이 쓸 방은 북탑 2층에 있었다. 네 개의 작은 방이 거실 하나를 두고 연결된 형태로 그런 곳 하나하나를 ‘빌라’ 라고 불렀다. 그런 빌라들에는 훌륭한 졸업생들의 이름이 주로 붙여졌다. 막시민이 머물 곳은 ‘위제니 롱사르 빌라’라는 이름인데 학생들이 그런 이름을 그대로 불러 줄리야 만무하고 예전에 문짝에 붙어 있었다는 그림 때문에 간단히 ‘도토리 빌라’라고 불리는 모양이었다. 그 외에도 토끼 소동의 전설이 내려오는 ‘토끼집 빌라’, 2층 맨 끄트머리에 있는 ‘뒷골목 빌라’ 등 열 한군데의 빌라가 2층을 차지하고 있었다. 3층에는 조슈아가 쓰는 특별실 하나와 빌라 열군데, 4층에는 빌라 네 군데와 고학년들의 2인실, 그리고 소수의 독방들이 있었다. 도토리 그림은 이제 없었지만 막시민은 금방 방을 찾아냈다. 곳곳이 긁힌 격자형 떡갈나무 문에 올해 이 방을 쓸 학생들의 이름을 새긴 놋쇠 이름표가 붙어있었다. 그런데 이 방만은 이름이 셋뿐이었다. 매끈하게 닳은 놋쇠 손잡이를 돌려 열자 아늑한 거실이 그를 맞았다. 겨울용 양탄자 위로 벽난로가 비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벽은 책상 네 개와 문 네 개, 작은 책꽂이들로 꽉 찼다. 가운데에 차 테이블이 있었고 녹색 벨벳으로 누빈 의자 네 개가 테이블을 둘러쌌다. 의자에 깔린 방석의 모양은 모두 달랐다. 다마스크, 양털, 조각보, 누비. 맞은편은 좁다란 창이었으나 지금은 덧창이 닫혔고 두터운 녹색커튼도 내려져 있었다. 의자들은 비켜 다녀야 될 정도로 작은 거실이었지만 학생들이 막 도착한 오늘만은 잘 정돈된 모습이었다. 비록 며칠 뒤의 모습은 장담 할 수 없다 해도 말이다. 각 방으로 통하는 문은 모두 열려 있었다. 곧 취침 점검을 하러 사감 선생이 올 시각이기 때문이었다. 슥 훑어보니 청소부가 정리한 모양 그대로인 침대가 하나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빌라는 정말로 셋이 쓰게 될 모양이었다. 막시민은 학원에 붙잡혀 온 처지답게 같이 방을 쓸 녀석들이 누군지 전혀 관심이 없었으므로 손만 대충 흔들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편리하게도 짐도 거의 없었다. 던져 놨던 바이올린 꾸러미와 커트, 그리고 쥬스피앙이 통째로 떠맡긴 꾸러미를 옷장에 쑤셔 넣고 구두는 침대 밑에 던진 귀 침대에 벌렁 드러누우면 그만이었다. 막 마지막 단계로 들어가려는 참인데 맞은 편 방의 소년이 문간으로 나와 말을 걸었다. “저기.” 이미 드러누워 버렸던 막시민은 고개를 삐딱하게 들고 앞을 봤다. “나?” “으응.” 막시민은 친절하게 정정해 주었다. “난 저기가 아니니까 막시민이라고 부르라고.” “아, 알아. 방 앞에 쓰여 있었어.” “그래. 거 참 친절하게도. 그런데 난 왜? “누가 찾는 거 같더라. 선배 같던데?” 막시민은 자기를 찾을 선배 따위는 없다고 단정 짓고는 손을 굴뚝처럼 올려 내저었다. “그럴 리 없어. 난 아는 선배 같은 거 없다고.” 도로 머리를 베게에 붙이려다가 놀랍게도 예의를 떠올린 막시민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근데 넌 뭐라고 부르면 되냐?” 문 앞에는 그가 모르는 두 이름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소년이 기다렸다는 듯 커다랗게 미소를 지어서 막시민은 조금 움찔 했다. “난 루시안이야. 루시안 칼츠. 만나서 반가워. 그런데 너 말하는 게 꽤 재미있는 녀석일 것 같다?” 네냐플은 몇백 년 묵은 학원이었음으로 탑은 고풍스럽고 수령 높은 아름드리나무들이 그럴듯했으며 정원도 일품이라 처음 온 사람들은 누구나 감탄했다. 그러나 막상 이곳에서 살기 시작한 사람은 곧 그런 점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몇 백년이 가는 동안 금속 손잡이들은 녹슬었고 어떤 벽은 금이 갔으며 책상과 의자는 낡고 도서관에서는 먼지가 풀풀 날렸다. 어느 건물은 진작 무너질 것을 마법 마스터들이 마법으로 받쳐 놨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떠돌아다녔다. 아니나 다를까 신학기 첫날부터 중앙 굴뚝 중 하나가 뭔가로 박혀 북 탑 기숙사 전체가 찬물로 세수해야 하는 소동이 빚어졌다. 2층 공동 세면장을 메운 학생들은 얼어붙은 손가락을 비벼가며 겨우 세수를 마치고는 처음 본 사이끼리 불평을 늘어놓으며 안면을 텄다. 그래서 아침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모여들 즈음에는 꽤 많은 학생이 그럭저럭 말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막시민은 그 애매한 사교장에 참여하지 못했다. 당연한 듯 늦잠을 잤던 것이다. 잠에서 깨어나 생각해 보니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던 것 같기도 했다. 물론 문 두드리는 것쯤으로 단잠을 깰 그가 아니었다. 거실로 나와 보니 다른 두 학생, 그러니까 루시안과 또 한 명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빈 거실을 어슬렁대며 정신을 차린 막시민은 첫 번째로 떠오르는 의문의 답을 궁리해 보았다. 아침 식사를 몇 시에 준다고 했더라? “하긴 안 주면 못 먹나 뭐.” 텅 빈 세면장으로 간 그는 찬물에도 별 불만을 느끼지 못하며 세수를 마쳤다. 학생은 없지만 쥐새끼는 한두 마리 볼 수 있는 계단을 내려가 북 탑 기숙사 식당으로 들어갔다. 늦게 온 학생 몇이 허겁지겁 식사를 마치고 뛰어나가는 중이었다. 막시민이 태연히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주문하자 일하는 아주머니가 의아한 얼굴로 물어보았다. “학생이 아니고 조교님이시우?” 막시민은 아무렇게나 대답을 했다. “식당 밥 맛있나 점검 나왔슈.” 1학년 첫 수업, 정확히는 학원 생활 안내에 가까울 수업은 아나야 사반테 관에서 진행된다고 했다. 흔히 ‘애니 관’ 이라고 불리는 아나야 사반테 관은 네냐플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건물이었다. 빈 복도를 통과하는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자 막시민은 중얼거렸다. “구두 밑창쯤은 갈아둘 걸 그랬나.” 강의실 앞에 이르자 젊은 남자로 생각되는 교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창 너머로 슬쩍 들여다보니 강의실 뒤편에 조슈아가 혼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막시민은 뒷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고개 한 번 꾸벅 한 뒤 조슈아 옆에 앉았다. “ 학생은 늦었군.” 한 마디 하는 성격의 교수인 모양이었다. 막시민이 검지를 쳐들어 보이며 대꾸했다. “아, 네, 학원 길을 잘 몰라서 찾다가 늦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애니 관이라고 불러서 어딘지 도통 모르겠더라고요. 헤메다가 뒷산까지 올라갔다 왔는데 바로 여기였지 뭡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곁에 앉은 조슈아를 흘끔 봤다. 작년에 포도원에서 지내는 동안 학원은 물론 주변 지역 지리까지 훤하다는 것을 뻔히 아는 녀석이 웃어버리면 곤란한 노릇이었다. 다행히 별 반응은 없었다. “어제 바로 도착한 학생인가 보군. 오늘 학원 한 번 돌아보도록 하고 앞으로는 일찍 오게나.” “그러죠.” 교수가 다시 칠판으로 돌아서자 막시민은 조슈아를 쿡 찔렀다. “아침에 나 꺠우러 왔었냐? 문 두드린거 너지?” “........” 고개를 숙이고 책상만 내려다보는 모습이 조금 이상했다. 막시민은 다시 한 번 찌르려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 “너........” 상대는 고개를 들었으나 꼿꼿이 앞만 바라볼 뿐이었다. 막시민은 눈을 내리깔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굳어졌다. 배경음악처럼 들리던 교수의 목소리가 그제야 귀에 들어왔다. “........있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마법에 관심이 없다고 해서 마법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고 졸업할 순 없습니다. 왜냐하면 네냐-야플리아가 탄생하고 지금까지 존재해 온 근간은 바로 마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1학년 때 ‘초급 마법학’을 필수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 외에도 반드시 택해야 하는 과목들이 몇 개 더 있지만, 무엇보다도 ‘초급 마법학’을 낙제하면 2학년 진급이 불가함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입학시험에서 마법 시험을 택하지 않은 대부분의 학생은 마법에 대해 전혀 몰랐다. 교수는 웃었다. “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초급 마법학에서는 실제로 주문이나 수인을 쓰는 것은 배우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배울 사람은 ‘주문학’이나 ‘수인 실습’ 쪽의 수업들을 따로 신청해서 들으면 됩니다. 초급 마법학에서 가르치는 것은 마법의 역사와 힘의 갈래, 자연과 마법의 관계, 마법의 근본적 구동원리와 같은 것들입니다.” 물론 학생들은 그게 훨씬 지루할 거라고 생각했다. 교수는 주문이나 수인이 더 어렵다고 생각하겠지만 간단한 주문 한 개 쓸 수 없는 이론 과목으로서의 마법이 학생들에게 매력이 있을 턱이 없었다. “네냐플의 학제는 학생들의 실력과 무관하게 첫 입학을 하면 무조건 1학년이 되며 아무리 시험을 잘 본다 해도 고학년 편입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는 시험을 간신히 통과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미 여러 분야에 상당한 실력을 갖춘 학생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 학생들은 1학년 필수 과목들만 신청하고 나머지 시간은 고학년들이 듣는 과목들을 신청해도 됩니다. 물론 평가는 공정하게 이루어지므로 고학년들과 같은 입장에서 경쟁할 각오는 해야 겠지요. 어디, 내 담당인 역사학 쪽으로 고급과목을 신청할 생각인 사람 있습니까?” 교수가 학생들을 둘러봤지만 물론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전해 듣기로 수업방식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고급과목을 신청하는 것은 상당한 만용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학년말 승급 시험에 대해 이야기 하지요. 아마 이 시험의 악명은 입학 전부터 충분히 들어왔을 겁니다. 정식 명칭은 ‘네냐의 11월 시험대’. 흔히 ‘11월 시험’ 이라고 부르는데, 응시 과목은 1학년 필수 과목들, 그리고 개인이 선택해서 들은 1학년 대상 과목들로 한정됩니다. 고학년 수업들 들었다고 해서 그걸 시험 보게 되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험은 교수들과 일대일로 치러지는 절대 평가이며 낙제에도 두 등급이 있습니다. 유급과 퇴학이 그것이죠. 총 다섯 등급 평가 중 5등급을 받게 되면 바로 학원에서 퇴학 조치됩니다. 재입학을 위해서는 다시 입학시험을 이러야 합니다. 3등급이나 4등급을 받게 되면 1학년을 다시 다니게 됩니다. 이러한 유급은 두 번ㅁㄴ 가능하며 세 번째로 유급되면 역시 퇴학됩니다. 오직 1등급과 2등급만이 2학년 승급 대상입니다. 여기에 각 과목을 담당했던 교수님들이 주시는 학점이 더해져서 최종평가가 이루어집니다. 이 학점이 매우 좋으면 승급 시험에서 낮은 등급을 받고서도 2학년 승급이 허가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학점은 학기 중에 치러지는 크고 작은 시험들과 과제, 수업 태도, 출석 등으로 평가됩니다. 참고로 말해두자면 학년 전체에서 승급하는 학생은 열 명중 세 명 정도입니다.” 그 순간 졸업을 포기한 막시민은 옆을 돌아보았다. “조군 놈은 어디 갔냐.” 카르디는 눈을 내리깐 채 대답했다. “포도원.” “둘 다 밖에 나와도 되는 거냐.” “눈에 안 띄면 돼.” “너 조군한테 허락받고 나왔냐?” 그 순간 그가 고개를 홱 돌려 막시민을 도려 보았다. 그 표정이 조슈아와 너무도 같아 막시민은 순간 움찔했다. “..........” 그러나 항변은 없었다. 카르디는 다시 고개를 돌려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굳어진 옆얼굴과 꼭 다문 입술을 보자니 막시민도 기분이 착잡해졌다. 이런 복잡한 노릇 따위, 정말 질색이었다. “.....미안하다.” “뭐가.” “알잖아. 하여간...됐어.” 막시민은 더 말을 잇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수업이 끝이 났다. 다음 수업은 ‘왕궁 역사 초급’. 역시 애니 관이다. 막시민이 일어서는데 카르디가 따라 일어나면서 낮게 말했다. “나한테 말 걸지 않아도 돼.” 돌아서서 강의실을 나가는 카르디의 뒷모습을 보며 막시민은 애궂은 책상 다리를 걷어찼다. “젠장.” 포도나무들은 조용했다. 겨울나기를 위해 잘라내고 서너 개만 남은 가지들마다 작은 눈들이 띄엄띄엄 달라붙어 잠을 잤다. 덩굴을 잃은 버팀목들이 우두커니 서서 바람을 보고 있었다. 조슈아는 혼자 열람실에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모두 오전 수업을 듣고 있을 시강이었다. 그러나 그런 공부를 하러 네냐플에 온 것은 아니었다. 예전 모나 시드의 학생이었을 때는 다른 사람의 눈을 생각해서 아는 것도 배우는 체하려 애썼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작년 늦가을에 포도원으로 돌아왔을 때 열람실에 든 사람들은 대부분 바뀌어 있었다. 인사라도 나누게 됐던 이웃 열람실 사람들도 떠나고 없었다. 그들이 끈기가 없어서 떠난 건 아니었다. 열람실 사용 허가가 몇 달씩 연속해서 주어지는 경우가 극히 드문 까닭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네냐플의 마스터들이 독점적 지위를 누리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포도원의 정보에 깊이 접근하는 것을 막고 있다고 쑥덕거리기도 했다. 조슈아는 그런 쑥덕거림이 무색해질 정도로 오래 있었다. 티치엘의 번역을 거치는 과정이 없었더라면 레오멘티스 교수가 우려했던 대로 돌아버릴 정도로 많은 지식을 집어삼켰을 것이다. 그는 기록조차 하지 않았다. 열람 실안에 탑을 이뤘던 정보들은 다 그의 머릿속에 들어가 있었다. 오늘 열람실은 깨끗했다. 꺼냈던 책이며 석판, 두루마기들은 거의 돌려보냈고 티치엘도 수업을 들으러 가고 없었다. 저녁 무렵에는 도와주러 오겠지만 어쨌든 티치엘은 수업에 대한 관점이 조슈아와 달랐다. 조슈아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테이블 구석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지만 머릿속에서는 수 많은 정보들이 군무를 추는 나비들처럼 움직였다. 가능성과 답 사이에 다리를 놓기 위해 수억 개 별무리 속에서 돌을 고르고 있었다. 7. 레몬 젤리와 썩은 샐러리 “이 꽃이 왜 아름다운지 아십니까? 오늘 지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가 왜 사랑스러운지 아십니까? 내일은 커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가 왜 재미있는지 아십니까?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방에 와서 잠시 낮잠이나 잘까 했던 막시민은 묘한 난관에 부딪혔다. “어?” 문고리에 이상한 것이 붙어 있었다. 젤리 같기도 하고 풀 같기도 한 노랗고 물렁한 덩어리인데 열쇠 구멍을 막고 있었다. 문을 잠그고 나간 터라 열쇠를 넣어 돌리지 않으면 문을 열 수 없었다. 떼어내려 해보았지만 끄덕도 않는 것은 물론, 손톱 정도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열쇠로 긁어 봐도 소용없었다. 끈적거리지 않아서 다행이긴 했는데 여간 단단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것이 어떻게 이렇게 꽉 붙어버렸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막시민이 문고리를 붙들고 씨름하는 가운데 루시안이 왔다. “어, 왜 그래?” “이게 뭘 것 같냐? 떨어지질 않네.” 둘은 힘을 합쳐 여러 가지 도구로 문제의 ‘젤리’를 자르거나 긁어내려 해 보았으나 다 실패했다. 그냥 문고리를 돌려 열어보려 해도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루시안이 돌아보며 반색을 했다. “아, 보리스! 이상한 게 문고리에 붙어 있어. 문을 못 열겠어.” 막시민은 보리스라는 룸메이트를 흘끗 보았다. 어제도 언뜻 봤지만 말을 나눠보기는 커녕 서로 소개도 하지 않는 사이였다. 보아하니 보리스와 루시안은 처음부터 잘 아는 사이였듯 했다 그러나 밝은 금발에 순진하고 쾌활한 인상인 루시안과는 달리 조용하다 못해 음침해 보이는 보리스는 그리 말을 걸고 싶은 인상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1년 동안 방을 같이 쓸 상대였으니 계속 모르는 체할 것도 아니었다. “난 막시민 리프크네다. 어설픈 상황에서 인사하게 됐구만.” 문고리를 만져보던 보리스가 고개를 돌렸다. “보리스 진네만이다. 잠깐 비켜 봐.” 루시안이 영문을 모르는 막시민의 팔을 잡으며 옆으로 비켜나는 순간이었다. 보리스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문에 힘껏 몸을 부딪쳤다. 막시민이 어이가 없어 소리쳤다. “야, 너 지금 뭐해?” 보리스는 대꾸 없이 다시 문에 부딪쳐갔다. 요란한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세 번 만에 문짝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몇 번 더 되풀이하자 결국 경첩이 빠져버렸다. 루시안이 문고리를 붙들어 문 짝이 안으로 넘어지는 사태만은 면했다. 보리스가 문고리를 넘겨받더니 경첨이 붙어 있던 부분을 함께 잡고 문을 들어냈다. 나무 먼지가 사방으로 날렸다. 어안이 벙벙해진 막시민과 달리 루시안은 박수를 치며 외쳤다. “열렸다!” “열리면 다 된 거냐?” 문짝을 복도 맞은 편 벽에 기대어 놓은 보리스는 자신의 방으로 달려 들어가 뭔가를 살폈다. 그러더니 잠시 후 안심하는 기색이었다. 루시안이 문간에 서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문짝을 어떻게 도로 붙이지?” “아깐 박수 치고 있더니 그 생각이 이제 나냐?” 루시안은 곧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뭐, 어쨌든 열렸잖아. 문짝이야 어떻게 되겠지.” 돌아온 보리스가 루시안에게 물었다. “학교 안에 대장간이 있던가?” “응, 어제 봤어.” 그즈음 이웃 빌라 학생들과 복도를 지나가던 학생들이 십여 명이나 몰려와 그들의 빌라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야 이게 웬일이야? 문을 다 뜯었네?” 루시안이 떨어져 나간 문짝을 가리켰다. “저기 문고리에 뭐가 붙어 있잖아. 뭔지 모르겠어.”: 몇 명이 문고리의 젤리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언뜻 보기에는 별 것이 아닌지라 그들은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저런 걸로 문을 뜯었어? 신입생이 지나치게 담이 큰 거 아니냐?” “문이 안 열리면 우리 층 반장 선배한테 가보면 될 거 아냐?”: “아니면 문지기 아저씨를 부르던가.” 거실로 들어갔던 막시민이 휘적휘적 밖으로 나왔다. “시끄러, 너희가 저 젤리를 문고리에서 뗄 수 있으면 내가 엘소 금화 한 개 준다.” 루시안이 막시민을 쳐다보았다. “우와, 너 돈 많은가봐.” 막시민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 나서 낮게 말했다. “돈이 왜 필요하냐? 못 뗄 게 뻔한데.” 루시안은 혹시나 저들이 성공하려나 싶어 복도로 쫓아 나갔다. 금화 한 개 소리에 혹한 학생들이 저마다 문고리를 쥐고 흔들어댔지만 물론 아무도 젤리 조각하나 떼어내지 못했다. 보리스가 입구로 나오며 루시안에게 말했다. “ 여기서 방 지키고 있어. 대장간에 다녀올게.” “응!” 막시민은 보리스의 뒷 모습을 보다가 루시안을 돌아보았다. “쟤는 대장간에 가서 뭘 어쩌겠다는 거냐? 자기가 대장장이라도 되냐?” 루시안이 킥 웃더니 말했다. “응, 대장장이 맞아.” 점심시간이 끝나고 시작된 첫 수업 시간에 막시민은 다시 조슈아와 마주쳤다. 햇빛 밝은 창가 자리였다. 막시민은 저도 모르게 머뭇거렸다. 곧 막시민을 발견한 조슈아가 손을 흔들어댔다. “왜 그렇게만 쳐다보고 있어?” 막시민은 조슈아를 한참 노려보더니 갑자기 발끝을 걷어찼다. 조슈아는 재빨리 피하며 물었다. “왜 그래? 뭐 잘못됐어?” “ 너 수업 똑바로 들어와라.” 조슈아는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가 이어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수업 안 들어 왔다고 막군이 나한테 이러는 거야? 이거 참 굉장히 신선한데?” “시끄러워.” 막시민은 의자에 앉아버렸지만 잠시 후 낮게 말했다. “그놈이 왔더라. 아침에.” “아.” 조슈아는 따라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막시민이 말했다. “각각 다른 데서 마두 쳤다는 사람이 생겨서야 곤란하잖냐.” “그래. 나한테는 얘기하지 않았는데. 내가 일찍 포도원에 가버렸으니 살짝 나왔다가 들어가도 볼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나봐.” “그렇게 안이하게 생각할 일이냐? 네가 똑똑히 말해두라고.” 조슈아는 막시민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너도 알잖아 그런 말을 하기 쉽지 않다는 거. 그 애라고 방에만 갇혀 있는 것이 쉽겠어?” “몰라 내가 무슨 상관이냐고. 처음부터 이 따위로 돼 버린 게 내 탓이야? 아니지? 그러니까 난 그놈 사정은 생각할 필요가 없단 말이다.” 발음까지 끊어가며 말한 막시민은 몸을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막시민이 왜 그리 화를 내는지 알지 못했지만 교수가 들어와서 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고전 시학 수업이었다. 수업 시간 내내 조슈아는 다른 생각에 잠겨 있어 수업을 거의 듣지 않았다. 곁에 앉은 막시민 역시 집중하는 기생이 아니었다. 그러나 둘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말을 건 사람은 따로 있었다. “야아, 막시민, 너 저거 뭔지 알아?” 통로 건너 책상에 앉은 루시안이 교수가 돌아선 틈을 타서 손짓을 하며 불렀다. 막시민은 루시안이 묻는 게 뭔지 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몰라, 네 짝한테 물어보면 될 거 아냐.” “그럴 수가 없어.” 건너다보니 루시안 옆에 앉은 보리스는 요령 좋게 자고 있었다. 몸을 굳히고 고개만 살짝 숙인 터라 교수가 보기엔 영락없이 책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자세였다. 대장간에 가서 정말로 망치질이라도 하다가 온 모양이었다. “저기 봐봐.” 루시안은 끈질겼다. 결국 막시민은 루시안이 가르키는 칠판 위의 문제를 보았다. 그러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품을 한 것이 다였다. “후기 루그란 송시? 내가 그런 거 알면 여기서 이러고 있겠냐? “우리가 알 것 같으니까 교수님께서 문제 내신 거 아냐?” “아냐. 교수들은 모를 것 같은 문제만 낸다고.” “왜?” “그래야 학생들의 머리를 쥐어박을 수 있잖아.” 그때 누군가가 정말로 막시민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잘 아는군 그래. 그럼 이를 모를 안경 군. 그럼 그 옆에서 딴 생각에 잠긴 학생이 일어나서 답을 해 볼까?저기 내가 쓰다가 멈춘 송시에서 이어질 단어를 하나 넣어 보게.” 조슈아는 그때까지도 교수의 말을 듣지 못한 채 멍하니 창 밖으로 보고 있었다. 막시민이 보다 못해 팔꿈치를 건드렸다. “야.” 조슈아는 느릿느릿 막시민의 얼굴을 보고, 교수의 얼굴을 보고, 칠판을 보았다. 그러더니 일어났다. “하얀 포도가, 이리 푸르러, 오는 여름에, 그대 따라와, 문을 당기면.” 교수의 눈이 둥그레졌다. 학생들의 시선도 모조리 쏠렸다. 조슈아는 무심히 계속 이어갔다. “향기 흩날려, 휘몰아친다. 옥빛 푸르른, 여름포도원, 지식의 후원.” 조슈아와 교수의 눈이 마주쳤다. 조슈아가 물었다. “계속 하나요?” 조슈아는 교수가 한 질문을 듣지 못했었다. 다만 칠판을 보고 해야할 것 같은 것을 했을 뿐이었다. 한 단어를 넣으라 했는데 시를 완성해버린 셈이 되자 교수는 당혹한 기색을 감추려 애쓰며 말했다. “잘 했네. 본래 시를 좀 배웠는가?” 조슈아는 모나 시드에서의 수업을 떠올리고는 빙그레 웃었다. “그랬던 것 같네요.” 교수가 돌아가자 루시안이 다시 막시민을 건드려댔다. “네 친구야? 우와, 대단하다. 막 시를 지었어!” 막시민은 귀찮은 듯 눈을 내리깔았다. “원래 그런놈이야. 신경 꺼.” 수업이 끝났을 때 루시안은 보리스를 깨운 다음 이름 모를 막시민의 시인 친구를 찾아보려 했지만 이미 어디론가 휑하니 가버린 뒤였다. 그러나 그들은 곧 다시 만날 운명이었다. 오후 수업과 저녁 식사도 어느덧 끝나고 밤이 되어 방으로 돌아온 막시민은 보리스가 새 자물쇠를 붙여 놓은 문짝을 가볍게 열어젖히려 했다. 그런데 그 전에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어라?” 문에 붙어 있어야 할 놋쇠 이름표가 사라지고 없었다. 언제 사라졌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본래 그런 것은 없어지고 나서야 눈에 띄기 마련이었다. 혹 보리스가 문짝을 떼어버릴 때 떨어졌나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려 봤지만 역시 눈에 띄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그까짓 것쯤 하고 생각하며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막시민은 입구에서 걸음을 딱 멈췄다. 온 방이 젤리 투성이였다. “이, 이, 이건.....” 충격이 겨우 가시자 막시민은 벽에 불른 젤리 하나를 건드려보았다. 한 개 만져보기만 하고도 문고리에 붙었던 것과 똑같은 젤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테이블에도 , 서랍에도, 양탄자에도, 침대시트에도, 의자다리에도, 창틀에도 떡하니 달라붙은 젤리는 까딱도 하지 않았다. 특히 서랍같은데 붙은 경우는 아예 열 수도 없게 되었다. 끈적거리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으, 이게 다 뭐야?” 돌아보자 루시안과 보리스가 문간에 서 있었다. 막시민은 양손을 펴며 어깨를 올려 보였다. “지금 와보니 이 꼴이네. 이게 대체 뭘까?” 두 소년도 들어와서 젤리들을 건드려 보았다. 떼려고도 해 보았다. 그러나 보리스가 시트에 구멍만 하나 냈을 뿐이다 . 루시안은 포기하고 젤리가 바다에 붙어 움직이지 않게 된 의자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이거 누구한테 물어보지? 교수님들한테 물어볼까?”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늦지 않았냐?” 둘이 한 마디씩 하는데 보리스가 물었다. “막시민, 네가 왔을 때 문은 어땠지?” “잘 잠겨 있었어. 내가 직접 열었다고 , 낮에 네가 준 열쇠로.” 대꾸하던 막시민이 곧 미간에 힘을 주었다. “그렇지. 그 열쇠는 네가 오늘 만든 거니 우리밖에 안 갖고 있을 거 아냐? 문지기나 층 반장 한테도 없을 거고. 이 젤리 도둑놈은 대체 이 안에 어떻게 들어온거지?” 루시안이 참견했다. “젤리를 훔쳐간 게 아니니까 젤리 도둑은 아니잖아.” “그럼 젤리 기증자 라고 해야겠냐?” 그 말에 루시안에 킥킥 웃기 시작했다. “막시민 너 말하는거 너무 웃겨.” “.....” 막시민은 루시안을 무시하고 보리스를 보았다. “네 생각은 어때? 창문도 잠겨 있고. 그게 누구였든 어떻게 들어와서 젤리를 붙일 수가 있었지” “글세.” 물론 보리스도 마땅한 답을 내지 못했다 .세 사람은 누구한테 이 문제를 상의하면 좋을까 궁리했지만 내일 아침까지는 기다릴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날 밤 자는데는 큰 불편이 없었다. 다만 시트 한 가운데 젤리가 붙었던 보리스는 시트를 걷어 발치에 밀어놓고 잤다. 문제는 다음날 아침에 터졌다. “우와와, 이거......” 거실에서 마주친 세 사람의 모양새는 가관이었다. 막시민은 머리카락과 어깨, 루시안은 팔과 옆구리, 보리스는 발과 무릎에 끈적거리는 잼인지 풀인지 모를 것이 잔뜩 엉겨 붙어있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날카로운 것으로 찔러도 끄덕 않던 젤리가 어찌 된 셈인지 밤새 녹아 온 방을 잼 바다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나 어떻게 해야 돼? 이거 너무 짜증나.” 루시안은 거의 울어버릴 지경이었다. 아루리 떼어도, 닦아도, 물을 묻혀도 소용이 없었고 이대로라면 끈끈이 위에 교복을 입고 나가야 할 판이었다. 막시민은 머리카락을 포기하고 대충 교복 셔츠에 팔을 꿰며 말했다. “몰라. 젠장 배가 고파지네.” 양탄자에 붙은 발을 떼어내고 있는 보리스도 기분이 과히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말없이 옷을 갈아입었다. 이윽고 방을 나선 세 사람의 모양새는 입구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머리카락에 잼 덩어리를 붙인 채 거만하게 턱을 쳐들고 가는 막시민, 자꾸만 옆구리와 붙은 팔을 떼어내느라 울상인 루시안, 홀 바다의 양탄자를 끌고 가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보리스. 이 셋이 강의실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1학년 전체와 고학년 일부에게까지 이 구경거리 소문이 좢 퍼져 있었다. “엄청 끈적끈적한가봐. 붙었다가는 끝장이야.” “레몬 잼 냄새가 난대.” “핥아먹으면 되는거 아냐?” “걔들 빵만 있으면 점심 걱정 없겠다.” 학생들이 슬슬 피하는 바람에 그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앉을 수밖에 없었다. 인상을 쓰고 턱을 괴고 있자니 강의실에 나타난 조슈아가 눈을 둥그랗게 뜨고 다가왔다. “이게 다 뭐야? 잼? 마말레이드?” “궁금하면 먹어봐.” 그렇게 말하며 막시민은 손끝으로 머리의 잼을 찍어 조슈아의 코에 바르려 했다. 조슈아는 기겁을 하며 물러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안 먹어봐도 알겠어. 레몬이랑 꿀 냄새가 나잖아! 오렌지 냄새도 나는 것 같고. 아마 허니 레몬 잼 아닐까?” “그 허니 레몬 잼이라는 놈은 본래 물을 묻혀도 끄떡도 안하냐?” “옷이나 머리에 발라본 적은 없어서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역시 지금이라도 한 번.“ 막시민이 의자를 밀며 일어나자 조슈아는 학생들 틈으로 도망쳤다. 막시민은 뒤쫓으려 했지만 보리스의 발에 붙었던 잼인지 마멀레이드인지가 흘러내려그의 발까지 붙어버렸기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조슈아는 금세 보이지 않게 되었다. 결국 세 사람은 한심한 꼴로 책상에 턱을 괸 채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 왜 우리한테만 이러는 거지?” “아 축축해 미치겠네.” “우리방에 귀신이라도 붙은건가?” “누가 좀 알면 말이라도 해주지” 그때 다시 조슈아가 다시 나타났다. 혼자가 아니었다. 조슈아의 손에 이끌려 온 티치엘은 세 사람의 꼬락 서니를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곧 입을 막으며 웃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이구나. 조금만 기다려. 내가 해결해 줄게.” 루시안은 의아한 눈으로 낯선 소녀를 쳐다봤다. 수업시간에 본 적은 있지만 대화를 나눠 본 일이 없었다. “네가 무슨 수로?” 막시민이 말했다. “이 기회에 알아둬. 쟤는 원래 된다고 생각하면 못하는게 없다고.” 티치엘은 조슈아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더니 한참 뒤 약병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약병에 든 물은 검정도 아니고 회색도 아닌 마치 구정물 같은 색깔이었다. 뒤이어 뒤쫓아온 조슈아는 커다란 물통에 물을 가득 담아 왔다. “자 , 이렇게.” 티치엘은 그 ‘구정물’을 물통에 부었다. 그러자 과히 좋다고 할 수 없는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구경거리가 있나 보다 하고 몰렸던 학생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루시안이 코를 쥐며 말했다. “냄새가 꼭 썩은 샐러리 같아.” “어머, 어떻게 알았어? 썩은 샐러리가 들어가는데.” “..........” 티치엘은 썩은 샐러리 이야기를 해 놓고도 태연하게 손을 물통에 넣고 저었다. 그러면서 뭔가 주문을 외우는 듯 하더니 이윽고 손을 뺐다. “됐어. 자 누구부터?” 막시민이 당황하면서 물었다. “잠깐, 그 물로 어떻게 할 건데? 설마 먹어야 한다든가....” “응, 먹을 필요는 없고, 끼얹어 주려고. 그러면 없어져.” 니티엘이 물통을 들어 올리자 루시안이 벌떡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나, 난 잼투성이가 된 데다 심지어 썩은 샐러리 물로 목욕까지 하고 싶진 않아. 그나마 잼은 냄새라도 좋잖아.” “괜찮아 샐러리 냄새 안 날거야. 젖지도 않을 거고.” “말도 안 돼. 그렇게 물이 많은데 어떻게 젖지 않는단 거야? 못 믿겠어. 난 안 할래.” 티치엘은 막시민과 루시안을 번갈아 보더니 흐음, 하고 한숨을 내쉬며 비교적 침착해 보이는 보리스에게 물었다. “그럼 너부터 할래?” “.....” 막시민은 보리스의 표정을 살피더니 눈을 질끈 감으며 티치엘을 불렀다. “그래. 알았다. 나부터 하자. 내가 잔소리 선생 널 안 믿으면 누가 널 믿겠냐?” 티치엘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으며 막시민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손짓했다. 막시민이 책상이 없는 곳에서 나오자 썩은 샐러리 이야기를 들은 학생들은 허겁지겁 불러나고 일부는 강의실 밖까지 도망갔다. “준비 됐지?” 막시민이 손으로 눈을 가린 가운데 물이 끼얹어졌다. 잠시 후 학생들이 놀라며 다가왔다. “ 우와, 믿을 수 없어.” “진짜로 없어졌네?” 막시민의 머리에서 잼 덩어리가 사라진 것은 물론 옷이 젖거나 냄새가 남거나 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니티엘이 킥킥 웃으며 루시안에게 손짓을 했다. “자, 얼른 와.” 루시안이 먼저, 그리고 보리스도 썩은 샐러리 물세계를 받고 나서 잼을 깨끗이 없앨 수 있었다. 보리스가 말했다. “고마워. 그런데 어떻게 한 거지?” 잼이 사라진 머리카락을 자꾸 만지작 대고 있던 막시민이 말했다. “저 애는 원래가 마법사야. 우리 하고 초급 배울 실력은 아니라고.” 루시안도 말했다. 진짜 고마워! 그런데 말야. 바닥에 남은 잼이 있는데 이거 밟으면 안 되는 걸까?“ “괜찮아. 물이 남았으니까 이걸로 청소하면 돼.” 티치엘의 말을 들은 막시민이 말했다. “앗,ㅡ 그렇군. 니치엘 이거 좀 더 만들 수 있는 거냐? 이따가 시간이 될 때 우리 좀 도와주면 좋겠는데.” “다른 데도 묻었어?” “온 방, 아니 빌라 전체가 잼 투성이다. 싹 청소해야 돼.” 티치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빌라를 청소할 정도면 시약을 만드는 데 시간이 좀 걸릴거야. 이따 점심 때 만들어 볼게.” 루시안이 만세를 부르며 외쳤다. “방도 청소할 수 있는거야? 앗싸, 고마워! 근데 우리 인사도 안 했네? 난 루시안 칼트야. 얘는 내 친구 보리스 진네만이고.” 티치엘이 치마끝을 살짝 잡아 보이며 말했다. “난 티치엘 쥬스피앙이야. 만나서 반가워.” 서로 인사를 나누는 가운데 조슈아가 슬슬 걸어 들어와 막시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ㅏ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거야? 방 안이 다 잼이라니?” “나도 모른다. 방에 잼 귀신이 붙었는지.”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그건 내가 가보면 잘 알 수 있는데.” 티치엘도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갸웃 거렸다. 정말 이상한 것 같아. 이건 그냥 잼이 아니거든. 마법으로 만든 거야. 누가 일부러 하지 않는 한 저절로 이렇게 될 리가 없어. 처음엔 단단한 젤리 같은 거였지?“ “맞았어. 그러더니 그게 밤 새 녹아서 이 꼴이 났다고.” “젤리 말고 다른 이상한 일은 없었어?” 루시안이 말했다. “전날 누가 문고리에 그 젤리를 붙여놔서 보리스가 문을 뜯어냈었어. 물론 다시 붙였지만.” “전 날도 그랬다고? 음...또 다른 일은?” 그 때 막시민이 뭔가를 생각해 냈다. “문짝에 붙어 있던 이름표가 없어졌던데.” 그게 심각한 일이라는 생각은 해 본일이 없었따. 그런데 티치엘은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그게 정말이야? 언제?” “음 어젯밤에 방에 젤 리가 가득 찬 걸 발견하기 직전이었지 아마?” “큰일이네 이거 방 전쟁이었구나. 생각도 못했는데.” 처음 듣는 괴상한 이름에 세 소년 모두 아연해졌다. “방 전쟁 그게 대체 뭔데?” “그건 말이야....” 그때 조슈아가 티치엘의 팔을 건드리며 뒤를 가리켰다. 논리학 교수가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을 보고 티치엘은 화들짝 놀라 자리에 앉았다. 수업이 시작되고 나서 잠시 후 쪽지가 왔다. 조슈아가 받아 막시민에게 건네주고. 다시 루시안에게, 마지막으로 보리스에게 돌아갔다. 니치엘 특유의 단정한 글씨였다. [ 방 전쟁은 빌라 전쟁이라고도 하는데 기숙사의 빌라들 간에 벌이는 일종의 싸움이야. 이유는 가지각색이어서 딱 잘라 말할 수가 없어. 어쨌든 네냐플 기숙사 전체에서 한 두 빌라는 반드시 전쟁중이라고 할 정도로 매 학기 그러지. 교수들도 상황이 심각하지 않은 한 참견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고. 보통 이름표를 가져가는 것으로 전쟁을 선포해. 그러니 누군가가 너희 빌라에 전쟁을 걸어 온 것 같아. ] 보리스가 쪽지 끝에 뭔가를 적어서 루시안에게 넘겼다. [ 상대가 누군지는 어떻게 알아내는 거지? ] 그 뒤에 루시안이 한 줄 추가 했다. [ 그럼 우리도 그 쪽을 마음대로 공격해도 되는 거야? ] 루시안에게 쪽지를 받은 막시민이 조슈아를 거쳐 티치엘에게 돌려주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줄 추가했다. [ 방 전쟁은 한쪽이 이겨야만 끝나는 거냐? ] 티치엘로 돌아온 쪽지에 하나씩 대답이 쓰여 있었다. [ 보통은 수업시간에 걸려오는 시비 때문에 저절로 알게 돼. 그럼! 뭐든 해도 돼. 다만 폭력을 휘두르는 것만 빼고. 극적으로 타협을 보는 경우도 있고, 학생들이나 입회인 앞에서 정식 대결을 벌여서 마무리 짓는 경우도 있고. 드물지만 교수님들이 입회를 서 준 일도 있대. ] 8. 빌라 전쟁 “자신 속에서 자신을 찾는 건 아주 어려워. 그러나 다른 데서 찾는 건 아예 불가능해.“ 점심시간 즈음에 이미 1학년 전체에 소문이 쫙 퍼졌다. 도토리 빌라의 세 명이 고작 입학한지 이틀 만에 건방지게 방 전쟁을 일으켰다고. 막시민이 화를 내며 외쳤다. “이쪽에서 시작한 게 아니란 말이다!” 와전 되는 이야기도 있긴 했지만 소문이 퍼져서 좋은 점도 있었다. 점심 시간이 되니 992년 첫 빌라 전쟁에 발려든 도토리 빌라의 상대가 남탑 기숙사의 ‘크림 차 빌라’ 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루시안이 흥분하며 말했다. “그 빌라 이름부터가 웃겨, 아주.” 그러나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상대 빌라가 2학년과 3학년으로 이루어졌다는 정보가 들어와 루시안을 우울하게 만들고 말았다. 신입생들은 그들끼리 빌라를 쓰지만 2학년부터는 첫 11월 시험을 통과했으니 진짜 네냐플의 학생이라고 여겨져 학년 구분 없이 빌라가 주어졌다. 친한 사람끼리 같은 빌라를 신청 할 수도 있었다. 그런 고 학년의 빌라는 주로 남 탑에 몰려 있었다. “그 중 한명은 검술 시간에 검술 마스터의 수업을 돕는 3학년 이래.” 어디선가 잘도 정보를 주워오는 티치엘의 이야기 가운데 반가운 것은 별로 없었다. 고학년과 신입생 사이에 방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는 별로 없지만, 일단 시작된 이상 학년 차이는 별 고려 사항이 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어떤 수를 써서든 상대를 골탕 먹이고 저쪽에서도 반격을 되풀이 하는 것이 일반적인 진행인데 한쪽에서 항복을 하거나, 타협을 하거나, 입회인을 세우고 대결을 벌여 승패를 가리지 않는 한 저절로 끝나는 일은 없었다. 항복하는 것이 가장 치욕으로 모두의 비웃음 거리가 되었고, 그 다음은 대결에서 패하는 것, 그 다음이 타협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타협으로 일을 해결하려는 경우 또한 거의 없었다. 한 쪽에서 제안해도 다른 쪽에서 거절하기 십상이었다. “ 아니, 몇 백년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 마법학원이 이런 볼썽사나운 전통을 지키고 있어도 괜찮은거냐?” 막시민의 불평에 티치엘은 자기가 미안해하며 ‘네 말대로 오래되다 보니 이런 거친 놀이도 남아 있는 모양’이라고 대답했다. 오후 수업이 끝난 후 세 소년과 한 소녀는 적에게 맞서는 한패거리가 된 기분이 되어 도토리 빌러로 올라갔다. 티치엘은 자기 방에 잠깐 들러 점심시간에 만들어 둔 통칭 ‘썩은 샐러리 시약’을 가져 왔다. 니티엘이 이 약을 만드느라 그동안 모아 두었던 썩은 샐러리를 다 써버렸다고 걱정스러워 하자 루시안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걱정 마. 아버지한테 말해서 샐러리 백 묶음 정도는 갖다 줄게. 물론 그걸 썩히는 건 도와 줄 수 없지만.” 듣자니 루시안의 아버지인 칼트 씨는 대륙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부유한 상인이라고 했다. 웬만한 귀족은 비교도 되지 않는 권세가의 안들인 셈이지만 루시안은 대다히 소탈한 성미였다. 친구도 가리지 않았고, 잘난 체 할 줄도 몰랐다. 다만 막시민은 이 녀석이 성격이 소탈한 게 아니라 황당할 정도로 단순한 게 아닌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중이었다. 빌라 앞에 이르러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보리스와 루시안은 물을 길어 왔다. 곧 물이 가득 찬 물통이 네 개나 방 앞에 놓였다. 티이엘이 시약을 부어 막 썩은 샐러리 냄새가 사방으로 퍼질 즈음 조슈아가 나타나 막시민의 어깨 너머로 빌라를 들여다봤다. “상태 엄청나네.” 코를 쥐고 있는 조슈아를 본 막시민은 인상을 찌푸리며 멀찍이 가라고 손짓했다. 티치엘의 약은 어쨌든 썩은 냄새가 풍기는 물인지라 문제의 마?에 걸리지 않은 사람에게 닿아 좋을 건 없었다. 루시안도 돌아보더니 물었다. “막시민 친구지?아까도 봤는데 인사도 못했네.” “인사는 청소부터 한 뒤에 하기로 하자고.” 그렇게 말하며 막시민이 물통 하나를 집어 들었다. 티치엘이 뒤에서 구호를 붙였다. “라나, 둘, 셋!” 아침에 보았던 효과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의심은 없었다. 한바탕 물을 퍼붓고 물러난 막시민은 불통을 내려놓고 깨끗해진 방을 기대하며 거실을 들여다 보았다. “어라?” 기대했던 변화는 있었다. 곳곳에 찐득찐득하게 붙어 있던 잼들은 깨끗이 녹아 사라졌다. 그러나 그에 이어 일어났어야 할 일이 하나 빠져 있었다. “막군, 뭘 한거야?” 조슈아가 다시 고개를 내미는 가운데 티치엘이 쩔쩔매며 소년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루시안의 눈이 동그래졌고 보리스는 황당한 표정이었다. 막시민이 주먹을 부르쥐며 소리쳤다. “대체 왜 물바다야!” 테이블과 의자들, 방석, 양탄자는 기본이고 책꽂이와 책, 벽지 창문 커튼 마룻바닥 그리고 물이 흘러 들어간 세 사람의 침실 바닥까지...막시민은 물통 하나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끼얹었는지 구석구석 안튄곳이 없었다. 말할 나위 없이 빌라 전체에 썩은 샐러리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조슈아뿐 아니라 다들 손으로 코를 막았다. 참다못해 문을 닫아버린 막시민은 문에 기대어 서서 티치엘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조그맣게 된 티치엘이 결국 울 것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기, 저기, 내가 샐러리 양 맞추는 것만 생각하다가....다른 시약을 빠뜨렸나봐. 그래서 물을 말리는 효과가 없어져서.....” “........” 막시민은 할 말을 잃고 복도 천장을 쳐다봤다. 보리스는 난감한 얼굴로 방문을 흘끗 돌아봤다. 루시안은 생각을 거듭하더니 점차 티치엘과 비슷한 표정이 되어갔다. “으아아, 그럼 어떻게 해? 저거 마법으로 다시 없앨 수는 없어?” “...그게.....한 번 실패한 건 마법 효과가 사라진 쓰레기라서 마법으로는 깨끗이 없애기가 힘들고......” “그럼 우리 저거 걸레질해서 없애야 되는 거야? 응? 그런거야? 제발 아니라고 말해 줘!” 대답하지 못하던 티치엘이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소년들은 더욱 당황해서 서로 시선을 주고 받았다. 결국 당사자가 아닌 조슈아가 나서 티치엘의 어깨를 당겨 토닥거렸다. “울지 마,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물론 괜찮아 질 리가 없었다. 조슈아가 아무 말이나 해 가며 티치엘을 달래는 가운데 당사자인 세 사람은 한쪽에 모여 숙의를 나누었다. 루시안이 말했다. “ 나 청소 같은 거 한 번도 안 해 봤는데...하인을 부르면 안 돼? 학원 밖에 있단 말야.” “빌라 청소는 학칙 상 학생들이 직접 해야 하는 것 같더군.” 보리스가 그렇게 말하자 막시민이 양손을 펼치며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그렇겠지. 걸레 한 군단과 물통 한 부대를 지휘하는 세 사령관이 면 저기 문 닫힌 방 하나에서 오늘 밤 잘 수는 있을 정도는 되겠지. 비록 실전경험의 부족의 위기를 가져오겠지만 죽기 살기로 덤빈다면 썩은 샐러리 놈도 후퇴하는 편이 좋다는 걸 깨닫게 될 거야.” 막시민이 지적한 한 가지 사실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도토리 빌라에는 세 학생만 배정된 까닭에 문을 잠가 놓았던 빈방은 다행히 멀쩡했다. 루시안이 울 것 같은 얼굴을 바꾸며 키득거렸다. “막시민 넌 어떻게 그렇게 말을 잘하니?” 막시민은 그런 식의 반응에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대답은 생략했다. 보리스가 문득 말했다. “그러면 각자의 침실에 남은 잼은 어쩌지?” “그거야 제대로 된 약을 다시 만들어서.....” 말하다 말고 문득 티치엘을 돌아본 막시민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 점은 차차 생각해 보자. ” 그 사이 조슈아는 티치엘을 겨우 달랬다 눈물 자국으로 얼룩덜룩 한 얼굴을 한 티치엘이 세 소년에게 와서 말했다. “나도 청소를 도울게. 내 탓이니까 몇 배로 열심히 할게. 나 걸레질도 잘해.” 그러자 보리스가 반대하였다. “그런 건 안돼.” “왜?” 막시민이 보리스는 흘끗 보고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남자 녀석들의 방을 여자애한테 청소시킬 순 없는 거지. 넌 가서 제대로 된 새 약이나 만들어 보든가 해라.” 어느새 루시안도 얼굴을 펴고 말했다. “그리고 네 탓도 아냐. 우릴 도와주려던 거였잖아? 네 도움이 없었으면 우린 아직도 잼을 뒤집어쓰고 있을 거야.” 티치엘은 여전히 머뭇거렸지만 셋은 결론을 내렸다. 걸레는 사감선생에게 가자 잔뜩 얻을 수 있었고 새 물통에 물도 떠왔다. 셋이 ‘썩은 샐러리 소굴’ 진입에 앞서 수건으로 코를 싸매고 있는데 조슈아가 빙그레 웃더니 말했다. “나도 도와줄까?” 아무것도 모르는 루시안이 반색을 했다. “응! 넌 남자니까 도와줘도 돼. 그런데 인사라도 하고 해야지. 네가 하도 수업을 떼어먹으니까 말할 기회도 없잖아. 넌 이름이 뭐니?” “조슈아 폰 아르님.” 조슈아는 가볍게 말했지만 루시안은 눈을 깜빡거리며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깜짝 놀라 소리쳤다. “저기, 저기, 이번에 입학했다던 아르님 소공작이신가요?” 그 말에 보리스도 조슈아를 흘끗 보았다. 조슈아는 눈동자를 위로 굴리면서 계면쩍게 웃었다. “어렵게 부르지 않아도 돼. 편하게 지내러 온 거니까.” “하지만 우리 아버지라면절대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고 할 건데요.” “난 너희 아버지가 아니잖아.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그렇게 말하며 조슈아는 보리스 쪽을 보았다. “그럼 네 소개도 부탁할까?” 이미 고개를 돌린 보리스는 쭈그리고 앉아 걸레를 물통에 적시면서 대꾸 했다. “보리스 진네만.” 반나절 동안 대청소가 벌어졌다. 일단 힘을 합쳐 젖은 커튼, 양탄자, 방석 등을 걷어내어 세탁실로 보내고 가구들을 들어냈다. 복도에 내놓은 가구는 조슈아와 티치엘이 주로 닦았고, 막시민 루시안, 보리스는 거실 바닥과 벽, 창틀 문짝 등을 달라붙어 닦아냈다. 잡동사니가 복도를 점거한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같은 층 학생들은 전쟁피해자의 방을 구경한다며 얼굴들을 들이밀었지만 곧 냄새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 버렸다. 얼마 안 가 2층 복도에는 수재민 꼬락서니를 한 다섯 명과 닫힌 문짝들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나 이제 제일 싫어하는 음식 계란 푸딩 아니야. 샐러리야. 냄새조차 싫어졌어. 다시는 안 먹을래.” 작대기에 걸레를 묶어 벽을 밀고 있던 루시아의 푸념에 바닥을 훔치던 막시민이 대꾸했다. “싫어하는 음식은 또 뭐냐. 좀 굶으면 다 먹게 되기 마련이지.” 루시안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아냐. 난 싫어하는 건 진짜로 안 먹어.” “너 굶어나 봤냐?” 막시민은 더 말하려다 입맛만 쩝 다시고는 말을 끊었다. 잠시 후 이번엔 막시민이 말했다. “젠장 손이 얼어붙겠는데 보리스 넌 괜찮냐?” 보리스는 새로 길어 온 물통 걸레를 다섯 개째 빨아 놓는 중이었다. 그는 ‘별로’라로 낮게 말하고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루시안이 말했다. “보리스는 예전부터 추위는 잘 모르더라고.” “추운 동네 출신이구만.” 환기하느라 창을 활짝 열어 놓은 터라 사실상 추운 것이 맞았다. 일이 끝나고 보니 장작을 얼마나 땠는지 재만 몇 통 나왔다. 청소하다 만 빌라를 내버려두고 식사하러 가기도 뭣해서 저녁까지 굶었던 보람이 있어 해가지고 나니 겉보기에는 꽤 멀쩡해 보이는 거실이 돌아왔다. “휴우, 대충 끝난 건가?” “냄새가 덜 빠졌지만.” “창 열어두고 자면 내일쯤은 빠지겠지.” “내일 얼어 죽은 시체 셋으로 발견되고 싶냐?” 보리스는 얼어 죽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눈빛이었으나 반론은 하지 않았다. 이윽고 막시민은 언 손을 비비면서 외쳤다. “진짜 고생했다. 다들 배도 고프겠고, 몸도 녹일 겸 술 한잔 씩 어때?” 티치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학원엔 술이 없어. 갖고 들어와도 안 되고.” “누가 여기서 마신 댔냐? 나가자고. 내가 봐둔 데 있어.” 막시민은 조슈아에 비해 포도원 시절이 훨씬 짧았지만 시내의 술집은 잘도 봐 두었다. 목표한 곳은 학원에서 반시간 가량 걸어가야 나오는 작은 마을에 있었다. 학원을 나올 때 문지기가 열 시까지 돌아오라고 말했고, 알았다고 큰소리 쳤지만 그때가 이미 아홉 시였다. 그러나 고생스러운 일도 겨우 마쳤겠자, 배도 잔뜩 고프겠다. 뒷일이야 아무래도 좋다는 기분이었다. 루시안이 제일 신이 났다. 그는 새롭고 재미있어 보이는 일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좋아했다. 보리스는 담담했지만 술 자체를 낯설게 느끼는 것 같지는 않았다. 티치엘은 사양하고 따라오지 않았다. 막시민의 논평으로는 ‘바른생활 소녀’ 여서 취침시간을 넘겨 돌아오는 일 따위는 감히 시도할 리 가 없다는 것이었다. 막시민은 조슈아가 생각에 잠긴 기색임을 알아차렸으나 루시안이 쉴 새 없이 떠들어대어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 이윽고 네 소년은 마을의 자그마한 술집에 안착했다. 주인은 막시민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아, 작년에 매일 와서 맥주 한 잔씩만 하던 그 친구로군?” 조슈아가 막시민을 쳐다봤다. “매일 왔었어?” “솔직히 매일은 아니었다.” 그러자 주인아저씨도 정정했다. “닷새에 하루 정도는 쉬었지.” 어쨌든 단골인 셈이어서 먹을 것은 푸짐하게 나왔다. 맥주 네 잔이 나오자 넷은 기분좋게 잔을 부딪쳤다. 한 번에 마시는 양은 각기 달랐다. 조슈아와 루시안은 두모금, 보리스는 세모금 정도, 그리고 막시민은 반 잔. 목을 축이고 나서 넷은 한참동안 어떻게 복수를 해 줄까 궁리했지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이야기는 슬슬 다른 곳으로 흘렀다. “그런데 막시민하고 조슈아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야?” “그거 말하자면 밤 새.” 루시안은 평민 치고도 상당히 소박해 보이는 막시민과 아르님 소공작의 관계가 몹시 궁금한 모양이었다. 대답을 듣지 못하자 루시안이 말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친구가 됐는지부터 말해줄게. 그 다음에 너네가 말해. 보리스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인데 왜냐면 내가 집에서 공부할 때 보리스가 와서 , 그러니까 그건 우리 엄마가 나하고 친구도 돼 주고 도와줄 친구를 구해주려고 하시다가, 그 전에 사실 난 보리스를 알고 있긴 했는데 그게 어디냐면....” 상당히 두서없이 진행되던 루시안의 이야기는 갑자기 자기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정보와 함께 마무리 되었다. “그러니까 보리스는 실버스컬 우승자야!” 실버스컬은 열다섯부터 스물 미만인 소년 소녀들이 검술및 기타 무예를 겨루는 전 대륙 규모의 대회였다. 막시민은 ‘그런 이름을 어디서 들어보긴 했는데’ 정도의 표정이었지만 조슈아는 신기해했다. “대단한데? 아직 스무 살 안 됐잖아? 몇 살에 우승 한 거야?” “열 다섯 이었어. 출전 가능한 최저 나이라고. 진짜 대단하지?” 보리스는 루시안이 떠들어대는 것이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보아하니 자주 이러는 모양이었다. 막시민이 맥주를 비우며 말했다. “너희 둘 성격 참 정 반대다. 어떻게 친구 됐냐?” “반대라서!” 넷 다 배가 고팠으므로 렌즈콩에 얹어 찐 돼지고기, 후추 소시지, 가지과 버섯 스튜, 배 파이 등이 순식간에 없어졌다. 마지막으로 갈레트라고 부르는 짭짤한 비스킷과 말린 자두가 나와다. 그 사이 그럭저럭 두 잔을 마신 루시안은 기분이 좋아졌는데 떠오르는 대로 떠들어 댔다. 조리스와 만나게 된 과정, 실버스컬에서 보리스에게 돈을 걸었던 일, 함께 주사위 놀이를 하던 이야기, 갑자기 멀리 떠나서 다시 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학원 입학하기 직전에 돌아온 일 등등 뒤죽박죽이 되어 흘러나왔다. 그러는 동안 보리스는 조용히 맥주만 조금씩 마시고 있었다. 막시민이 보기에는 조슈아는 보리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보였지만 선뜻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느새 식탁을 거쳐 간 맥주가 스무 잔에 이르렀다. 루시안이 졸기 시작하자 보리스가 부축해서 편히 벽에 기대도록 자세를 고쳐 주었다. 막시민이 빈 술잔을 툭툭 쳤다. “그래서 보리스 넌 본래 루시안 어머니가 고용한 검사였다 그거지? 그거 참 친구 되기에는 적절치 않은 조건인데.” “루시안의 성격이 좋아서 그런 거지.” 대답하는 보리스의 목소리에는 술기운이 전혀 없었다. “부모나 가족은 어디 가고 그 나이에 벌써 용병질이냐?” “다 죽었어.” 조슈아가 갈레트 과자를 집어 먹으려던 손을 멈췄다. “전부 다?” 보리스가 조슈아의 얼굴을 보더니 자신도 과자를 집어 한 입 씹었다. “어떤 나라에서는 흔한 일이라서.” “어디 출신인데?” “트라바체스.” 조슈아는 막시민과 얼굴을 마주보았다. “트라바체스라면, 공화국이지?” “거기 좀 험악하다는 얘긴 들었다. 너도 어린 나이에 고생 많았겠구만.” 막시민이 한 말에 보리스는 순간 애매한 표정을 짓더니 대꾸했다. “어떻게든 살게 되기 마련이지.” “그런데 말이야.” 조슈아가 과자를 다 씹어 삼키고는 빙그레 웃었다. “너한테 궁금한 게 있는데 몇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 “할 수 있는 대답이라면.” 방어적인 반응이었으나 조슈아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너 혹시 무대에 선 적 있어?” 모리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전혀." "그럴 리가 없는데. 네 목소리가 평범하지 않거든.“ 목소리라는 말에 보리스가 반응을 보였다. 정확히는 다소 긴장하는 기색이었다. 조슈아가 말을 이었다. “노래 상당히 잘하지? 아니, 단순히 잘 하는 것과는 달라. 아마 연습을 오랫동안 했을 거야. 난 알아볼 수 있어 . 목소리가 달라지거든. 그래서 무대에 선 적이 있느냐고 물은 거야. 보통사람은 그렇게 몇 년씩 노래를 연습하는 일이 별로 없으니까. 어때?” “...아니.” 보리스는 잘라 말하더니 몸을 돌렸다. 더 말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가 너무 뚜렷해서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조슈아가 머뭇거리고 있는데 보리스가 남은 맥주를 마시더니 의외로 태도를 바꾸었다. “말 할 수 없는 화제라서. 미안하다. 다른 이야기라도 할까?” 조슈아는 씨익 웃더니 즉시 물었다. “응. 그럼 너 등에 메고 다니는 그 담요 뭉치는 뭐야?” “이것도 말할 수 없어. 다른 거라도....” “그럼 검술은 누구한테 배웠어?” “.....미안하다.” 보고있던 막시민이 술을 더 달라고 손을 흔들면서 빈정거렸다. “대체 말할 수 있는 건 뭔데? 무슨 열 입곱 먹은 사내 녀석이 비밀은 귀부인 처럼 많냐? 이제부터 널 점잖은 숯가마라고 불러야겠어.” 조슈아가 물었다. “비밀이 많은데 왜 점잖은 숯가마야?” “그거야 시커멓잖아!” 말하는거 보아하니 막시민도 전혀 취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어 보였다. 하긴 나온 술의 절반 이상은 그가 마셨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보리스, 실은 너한테 가장 묻고 싶은 문제가 따로 있는데 이것만은 꼭 대답해 줬으면 해. 되겠어?” “말해봐 . 하지만 약속은 못 해.” 조슈아는 웃음을 걷고 보리스를 또렷이 바라보았다. “너 혹시 유령들을 쫓아버리는 힘이 있어?” 보리스의 표정에 의혹이 떠올랐다. 긍정도, 부정도, 혼란도 아니었다. “왜 그런 말을 하지? 난 모르는 일이야.” “아니. 너한테는 그런 능력이 있어. 네가 모를지 몰라도.” 술김에 꺼낸 농담이라고 하기에는 조슈아가 너무 진지했다. 보리스의 눈빛도 달라졌다. 그때까지 보인 평온한 표정이 노력의 결과였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변화였다. “어째서 네가 안다는 거지? 나조차도 모르는 일을?” “알 수 있어. 왜냐하면.......” “조슈아!” 막시민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가로막았다. 그러나 조슈아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내가 유령을 보니까.” 믿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누구나 곤혹스러울 수 밖에 없을 말이었다. 보리스가 침묵하는 가운데 조슈아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세상 모든 유령을 본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하지만 몇 년 동안 날 따라디는 유령들도 있었을 정도로 많은 유령을 보았어. 익숙해져서 별로 겁내지도 않게 됐어. 특히 네냐플에 오니까 다른 곳보다 유령이 훨씬 많더라고. 강력한 마력이 흐르는 곳에는 유령들이 몰려들게 되어 있으니까. 이 학원에서 백여 년 넘게 지내온 유령도 봤어.” 사람이라면 누구나 겁이 날 법한 이야기였지만 보리스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물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평소에, 아무데서나 보인다고?” “가끔은 사람과 착각하기도 할 정도로. 하지만 대부분은 소리만 들려. 또렷한 대화에서부터 새들이 재잘 거리는 것 같은 소리에 이르기까지.” 보리스는 한참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네 말을 잘 믿을 수가 없지만, 너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건 알겠다. 그런데 내게 유령을 쫓을 수 있느냐고 물은 건 왜지?” “입학식 때 네가 내 곁을 스쳐가는 순간 조용해졌어.” 조슈아는 말을 멈추더니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내쉬어 보았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나 네냐플에 온 후로 그런 고요는 정말로 오랜만이었어. 그리고 지금도 그래.” “지금도?” 막시민은 코를 찡그리며 입맛을 다셨다. 말릴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계속 이런 식이어서야 저 데모닉 자식이 앞으로 학원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의 호감을 얻기는 글렀다 싶었다. 그러나 조슈아는 굉장히 진지했다. “응. 솔직히 네 옆에 있으니까 세상이 굉장히 평화로워.” 보리스가 한참만에 대답했다. “네 말뜻은 알겠는데 , 나 때문에 평화롭다는 이야기가 굉장히 낯설게 들린다. 평화라는 말은 나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 와서.” 조슈아가 잠시 후 말했다. “네 말 듣고 보니 나도 그런 것 같네.” 결국 보리스도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조슈아는 언젠가 그런 힘이 필요할 때가 있으면 도와달라고만 말했다. 루시안이 깨어나자 넷은 술집을 나왔다. 마을을 막 빠져나올 무렵 루시안이 어느 가게를 손가락 질 했다. “저 파이! 나 저거 먹고 싶은데!” 파이를 비롯해서 과제 타르트 등을 파는 작은 과자점이었다. 그러나 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보리스가 말했다. “내일 다시 나와서 사.” “싫어. 난 지금 먹고 싶단 말이야. 저걸 먹으면 술이 깰 거야.” “파이를 먹고 술이 깼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일이 없어.” “아냐. 꼭 될 것 같다고 문만 두르려 볼게. 안 열면 그냥 가고.” “실례가 될 거야.” “하지만 문고 안 두드려 보고 포기하는 것보단 낫지. 안그래?” 마음대로 합리화한 루시안은 보리스가 더 말리기 전에 재빨리 파이 가게 앞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예상과 달리 가게 안쪽에서 소리가 났다. “누구세요?” 밤늦게 들어올 아버지라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아가씨 한 사람이 내다 보았다. 루시안이 재빨리 말했다. “전 손님이에요!” “문 닫았는데...” “괜찮아요 . 많이 살 거니까.” 아가씨는 루시안을 보고, 그 뒤에 엉거주춤 서 있는 세 사람을 보더니 잠시 후 빙그레 웃엇다. “많이 못 사요. 딱 네 개 남았어요.” 아가씨가 램프를 밝혔다. 앞장서서 들어간 루시안은 파이 한 개를 받아들자마자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아무 돈이나 한 줌 꺼내어 주었다. 아가씨는 또 다시 웃었다. “이 돈이면 파이 열 개는 드려야 돼요.” “그냥 가져요. 늦어서 미안하니까.” 입구까지 온 세 소년은 루시안이 건네주는 파이를 저마다 사양하거나 또는 받아들었다. 조슈아가 루시안이 반쯤 먹은 파이를 보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 파이 속에 든 게 어쩐지 익숙해 보이네.” 아니나 다를까 루시안도 소리쳤다. “진짜네? 냄새도 똑같아! 기분 나쁘게. 그러니까 빨리 먹어버려야지.” 막시민은 루시안이 건네준 파이를 기분 나쁘게 노려보고 있었다. 정말로 레몬 벌꿀 냄새가 풍겼다. 막시민은 이윽고 문 밖으로 나와서 가게 주위를 쭉 둘러봤다. 가게에는 이름 같은 것이 없었다. 도로 들어온 막시민이 아가씨에게 물었다. “혹시 이 집 주인 이름이?” “로글랑탱이에요. 로글랑탱 아주머니 파이라고 다들 부르죠. 네냐플 다니시면서 모르게요?학생들이 많이 좋아하는데.” 그드들은 교복을 벗고 나왔지만 아가씨가 루시안의 가슴에 꽂힌 핀을 보았던 모양이었다. 루시안이 싱글거리며 말했다. “저희는 신입생이라서요. 앞으로 자주 먹으러 올게요. 그럼 로글랑탱 누나 안녕!” 막시민이 나가려다 말고 물어보았다. “이 파이가 한 개 얼마 정도 합니까?” “3엘소노예요.” 막시민의 표정은 괴이쩍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착잡한 것 같기도 하고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그때 루시안이 말했다. “우리 이 파이로 그놈들한테 복수할까?” 뜻 밖에 막시민이 대찬성했다. “좋았어! 이 잼으로 복수다!” 막시민의 찬성에 힘을 얻은 루시안은 가게로 도로 달려 들어가더니 외쳤다. “누나, 이 파이 백 개만 만들어 주세요. 내일까지!” 아가씨 뿐 아니라 밖에 선 세 사람도 놀랐다. “백 개?”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어제 취침 점검 시간에 방을 비웠던 도토리 빌라의 세 소년은 수업시작 전에 사감 선생의 호출을 받았다. 살짝 긴장되는 순간이었지만 방 전쟁이 벌어진 걸 아는 사감선생은 호쾌하게 다 이해한다고 말하더니 문득 생각난 것 처럼 물었다. “그래서 몇 시에 들어왔지?” 루시안이 순진하게 대꾸했다 .점심시간이 되었을때 셋은 남 탑 기숙사 2층 복도를 청소하고 있었따. “나, 학원에 공부하러 온 건지 청소하러 온 건지 헷갈려.” 루시안의 푸념에 막시민이 대꾸했다. “청소하러 왔잖냐 몰랐냐?” “그런데 궁금한 게, 네 친구 소공작께선 왜 안 걸린 거야? 혼자 쓰는 방이지만 거기도 점검을 했을 거 아냐.” 막시민은 대충 얼버무렸다. “그 방 되게 넓어. 옆방에 있나보다 했겠지 뭐.” 청소를 하다 보니 드디어 남탑 기숙사의 크림 차 빌라가 발견되었다. 물론 실제 이름은 달랐지만 막시민이 뭔가 말이 될 듯 한 추리를 늘어놓으며 이곳이 틀림 없다고 주장했다. 잘 보니 오래된 별명이라 그런지 옆에 낙서가 되어있어서 어느 정도 확인이 되었다. “그럼 자세히 봐봐. 어떻게 열고 들어가지?” 보리스가 문고리를 만져 보더니 말했다. “이런 자물쇠라면 내가 열 수 있어.” “정말? 역시! 그럼 내일 배달만 받으면 되는 거다!” 로글랑탱 파이 백 개는 하루 만에 도저히 만들 수 없다고 해서 다음날 받기로 해 두었다. 학원 밖에서 대기중이라는 루시안네 하인들이 내일 점심때 받아서 갖도 올 예정이었다. “그런데 파이 백 개로 어떻게 할 거야?” “그거야 당연히 던져야지! 우리 빌라처럼 잼 범벅으로 만들어 줘야지.” “마법으로 청소도 안 되겠지.” 그 모습을 상상하며 셋은 만족했다. 청소가 끝나고 강의실로 돌아갔지만 오늘도 조슈아는 보이지 않았다. “소공작은 수업을 전혀 안 듣나봐. 아침에도 안 오고. 이러다가 낙제하지 않을까?” 루시안이 그렇게 말했지만 그 또한 요즘 수업 내용을 따라가지 못해 남의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었다. 보리스가 잠시 생각하다가 막시민에게 물었다. “어제 들은 얘기 말인데.” “어, 그래.” 남들 앞에서 언급하고 싶지는 않은 이야기였다. 보리스도 잘 알고 있었다. “혹시 그 때문에 나오지 않은 건가? 잠을 자지 못한다던가.” 막시민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거 없다. 그 자식이 그런지가 벌써 몇 년 짼데.” “어려서부터 친구라고 했지?” 보리스의 말투는 자못 진지했다. “그런데?” “넌 그의 말을 믿는 것 같군. 확신할 만한 일을 본 건가?” 막시민은 선뜻 대답하는 대신 입술을 잘근 물며 보리스의 기색을 살폈다. 다른 학생들이 차츰 강의실로 들어오는 중이라 그는 목소리를 낮췄다. “네가 과묵한 것 같아서 해 주는 말이니까, 그 점 기억해둬. 나 , 그 자식을 따라다니는 놈과 얘기한 적 있다. 그것도 자주.” “...” “사연 복잡해. 하여간 거짓말이 아니란 것만은 알아둬. 나란 놈은 원래 그런 것 절대로 안 믿는 놈이었다.” 막시민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보리스는 앉더니 오랫동안, 수업시간에도 계속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식사 시간이나 되어야 겨우 만날 수 있는 아르님 소공작을 뵙기 위해 그날도 학생 몇이 식당에서 서성댔다. 조슈아와 같이 식당에 들어선 막시민이 죽 둘러보더니 바로 눈치 채고 이죽거렸다. “오늘은 두 명 더 늘어난 것 같다?” 조슈아는 그들을 쫓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아는 체하지도 않았다. 곁에 와서 말을 붙이면 최소한으로 대답하긴 했지만 사실상 무시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새삼 모나 시드 학원 시절을 떠올릴 필요도 없이 조슈아는 본래 친구를 잘 만드는 성미는 아니었다. 막시민의 룸메이트가 아니었더라면 새 친구 둘을 사귈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따져보면 공통점 조차 찾기 힘든 두 사람이었다. 루시안은 지나치게 산뜻했고 보리스는 우울했다. 둘 다 조슈아의 분야인 예술에는 별 관심도 조예도 없어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조슈아는 수업에도 거의 나가지 않았다. 마치 포도원 출입을 위해 입학한 것 같은 모양새 였다. “너 수업에는 영 안 나올 거냐?” “아니. 내일은 슬슬 나가볼까 싶기도 해. 두 사람이 앉은 자리 근처에는 여전히 학생 몇이 기회를 보며 어슬렁거렸다. 기회는 쉽게 나지 않았다. 조슈아가 시선 한 번 주지 않으니 막무가내로 끼어드는 것도 예정이 아니고,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막시민의 존재를 특히 불편하게 여겼다. 귀족도 아니고 부잣집 아들도 아니라는 저 놈이 늘 소공작을 독차지하고 있어 말 붙이기도 힘든데다, 저런 놈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이 은근히 기분 상하는 까닭이었다. “이제 다른 놈들하고 얘기할 마음이 좀 내켰냐?” 마침 식사가 날라져 오자 조슈아는 냅킨을 펴면서 대답을 지체했다. “그냥, 즐겁더라고.” 막시민은 오믈렛의 노른자만 잘라 한 입에 집어넣더니 씹으면서 코웃음을 날렸다. “스스로 적응할 생각은 없던 놈이 누가 놀아주니까 싫지는 않은 모양이구만?” “맞아.” 조슈아는 일부러 드레싱 없이 달라고 주문한 갖가지 채소들을 하나씩 집어 씹어먹는 중이었다. “학원 생활에 별 기대가 없었어. 예전에 다녀봤다고 했잖아. 물론 그 사이 난 달라졌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남들의 눈까지 달라져 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거든. 그래서 내키는 대로, 나 지신을 위해 학원에 다닐 작정이었어. 여기 학생들이 다 너나 리체 같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 난 그렇다 치고 리체는 참 관대했지.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건지도 모르지만.” 조슈아는 포크를 허공에 띄운 채 잠시 생각하고 있더니 빙그레 웃었다. “가끔 리체 보고 싶지 않아?” “우리하고 있을 때보다 훨씬 잘 살 텐데 뭘.” “그래도, 그거하고 관계없이.” “보고 싶으면 보러 가던가. 어차피 수업도 안 나오면서.” 조슈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스르르 사라졌다. “그럴 수 없어. 아직도 여기서 연구해야 될 게 많아서.” 한 동안 포크가 식기에 부딪치는 소리만 들렸다. 조슈아는 일찍 식사가 끝났다. 먹은 것은 거의 채소 뿐 이었다. 냅킨을 접어 내려놓으며 조슈아가 말했다. “나 어제, 학원에 온 뒤 처음으로 포도원에서 책이나 석판들과 노는 것보다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거만한 놈.” “매도하지 마. 소심해서 그래.” “네 주위의 꿀벌들한테 그렇게 말해봐라. 소심해서 너희를 무시한다고.” “소심해서 그런 거 맞는데.” “에라이 아니꼬운 놈아. 거울에 지금 네 표정인 비춰보고 그런 말을 해라.” 조슈아는 턱을 가볍게 쳐들며 말했다. “내 표정이 뭐가 어때서?” 이윽고 막시민의 식사도 대충 끝이 났다. 막시민이 무심코 냅킨을 구기면서 물었다. “그래서 그런 말도 그렇게 쉽게 해버렸냐?” 조슈아는 금방 알아 들었다. “아니,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너무 신기한 경험이어서. 그 애한테는 분명히 뭔가가 있어.” “있겠지. 그게 뭔지 절대 말해줄 것 같지는 않지만 말야.” “비밀이 많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담백해 보이더라.” 막시민은 긍정도 부정도 않은 채 턱을 괴었다. “그렇지만 할 말 안할 말은 구별 해 둬라. 올해도 가기 전에 전 학원생이 널 피해 다니고 만들고 싶지 않으면.” 이튿날 드디어 파이가 도착했다.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어제 복도 청소도 했겠다, 관리인에게 변명하고 남 탑에 들어가도 좋았다. 몇 번에 걸쳐서 파이 봉지를 옮겨다 놓는 동안 보리스가 자물쇠를 망가뜨려 문을 열어 놓았다. 봉지를 양손에 든 막시민이 팔꿈치로 문을 밀어 열면서 보리스에게 말했다. “그런데 넌 언뜻 보면 이런 데 끼지 않을 거 같은데 묘하게 계속 한다?” “수모를 당하면서 보복하지 않는 건 내가 배운 방식이 아니니까.” “망가진 문짝엔 망가진 문짝으로 , 잼에는 잼으로?” 방 안은 비교적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사는 것이 분명한 옷가지며 책, 말끔한 양탄자 따위를 보니 이일을 하자고 제안한 루시안도 조금 머뭇거렸다. “흐음, 어떻게 할까나.” 그때 등 뒤에서 첫 번째 파이가 날아들더니 창문을 직격했다. 잼이 터져 나오고 파이는 주르륵 미끄러졌다. 돌아보니 어느새 나타난 조슈아가 파이가루가 묻은 손을 털면서 씩 웃었다. “명중이지?” 막시민이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넌 또 언제 왔냐?” “이런 일에 끼지 않는대서야 학원 온 보람이 없지.” 루시안이 돌아보고 키득거렸다. “공부는 안 해도 방 전쟁에는 한볷낀다는 거구나.” 조슈아는 아예팔을 걷어붙이고 파이를 양손에 한 개씩 들며 말했다. “이거 생각보다 재밌는데” 퍽! 퍽! 조슈가아 네 개쯤 던지고 나자 루시안도 동참했다. 키득대며 다투어 전지기 시작하자 잠깐 만에 거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파이 가루가 날고 잼이 바다에 줄줄 흘렸다. 나머지 둘이 굳이 동참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둘은 그럴듯한 던지기 자세를 만들었고, 명중률을 경쟁했고 아직 잼이 묻지 않은 곳을 다투어 찾아냈다. 둘의 소매와 바지, 손 머리에도 파이 가루와 잼이 묻어 시간이 흐르자 흡사 반죽 통에 빠졌다가 나온 파이 가게의 보조 요리사들처럼 보였다. 뒤에서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있던 막시민이 말했다. “둘이 잘 노네.” 보리스가 중얼거렸다. “...원래 저런 성격인가?” “조슈아? 어, 글쎄 . 저런 모습이야 처음 보지만 평소 살짝 맛이 간 건 맞지. 그렇다면 루시안은? “보다시피 애라서...” 파이가 거의 다 떨어졌을 무렵, 막시민이 갑자기 나서서 둘이 제지하더니 말했다. “몇 개 남았냐?네 개? 됐어. 그만하고 요것들은 테이블에 잘 얹어놓자고. 청소하다가 배고프면 먹고 하라 그거지.” “그거 좋네!” 그 사이 구경꾼들도 어느 정도 몰려들었다. 몇 명은 주인들을 찾으러 달려 나갔다. 그러나 주인들이 올 때 까지 기다리고 있을 그들이 아니었다. 막시민이 손을 올리며 구호를 붙였다. “전투 종료! 철수!” 빈 봉지들은 얌전히 휴지통에 넣어주고 내려오는 동안 파이 인간이 된 조슈아와 루시안은 서로 가르키며 키득키득 놀려댔다. 뒤따라가던 두 보호자는 자기들이 정신 연령이 낮은 친구들을 사귀게 된 이유에 대해 서로에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9. 그림자에 붙들리다. “내 적이 사라졌다고 안심하지 마. 그는 잠시 쉬는 것 뿐이야. 곧 다시 돌아올 거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은 저절로 괜찮아지는 법이 없거든.“ 오랜만에 켈스니티의 꿈을 꿨다. 지난번에 갔던 페리윙클 섬의 풍경 속이었다. 켈스니티는 혼자 비탈길을 걸으며 생각에 잠겨 있는 듯 보였다. 소리쳐 불러 보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주위의 풍경은 묘하게 이지러졌다. 언젠가 막시민의 안경을 빌려 써봤을 때 처럼. 목소리가 들릴 수 밖에 없는 곳에 이르러 조슈아는 다시 그를 불렀다. 그러자 그가 돌아보았다. 그러나 잘 보니 조슈아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조슈아의 뒤쪽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켈스니티가 말했다. “자, 여기야. 주춧돌이 있다던 곳.” 자신을 향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조슈아는 물었다. 왜 자꾸 이걸 내게 보여주는 거야? 약속 때문에? 내게 아직 거울을 만들 능력이 없다는 걸 켈스도 알잖아.“ “잘 살펴봐.” “살펴본대도 난 마법을 모르잖아. 배울 수도 없잖아.” “거울을 만들 수만 있다면 우리 모두 가나폴리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전에는 한 적이 없는 말이었다. 조슈아는 대답하는 것을 멈추고 켈스니티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늘 보던 평온한 얼굴과는 조금 달랐다. 생기어린 표정이었다. 생각해보니 말투도 그랬다. 켈스니티가 다시 말했다. “네가 거울을 만들 수만 있다면 옛날 가나폴리 사람들을 만나서 비밀을 물어 볼 수도 있지 않겠어?” 조슈아는 다가가 켈스니티의 손을 잡으려 했다. 그 때 마침 그가 돌아서서 주춧돌 쪽으로 갔다. 그리고 다시 돌아서더니 불렀다. “이카본. 이리와서 이것 좀 봐.” 꿈은 흐려졌다. 잠시 후 조슈아는 혼자 침실에 누워 있었다. 다시 잠들어 보려 했으나 소용 없었다. 어둠에 눈이 익을 무렵 다시 불러보았다. “켈스.” 주위는 조용했다. “내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대답은 없었다. 조슈아는 더 견디지 못하고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더듬더듬 램프를 켰다. 가운을 걸치고 막 복도로 나가려는 참인데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돌아보지 마라.」 켈스니티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또한 잊었을 리 없는 목소리였다. 조슈아는 문고리를 잡은 채 멈춰 섰다. 캄캄한 복도를 바라보고 선 그의 눈에는 멀찌감치 흐릿하게 빛나는 램프 세 개가 보일 뿐이었다. 등 뒤의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잘 있군. 다행스럽고도 유감스럽게도.」 조슈아는 한 걸음 물러나 문을 도로 닫으며 냉담하게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코르네드.” 「공작이 내 이름을 잊었을 리 없다는 것쯤은 알아. 내가 오매불망 잊지 못하는 데모닉의 몸이여, 정말 그럴싸하지. 좋고말고. 아아, 공작, 공작, 공작. 내가 왜 왔는지 알고 있나?」 “지난 번에 죽어버리지 않았으니 다시 오긴 하겠지 싶었어. 무슨 말을 하고 싶지? 소원을 다그치러 온 건가? 「내가 무슨 수로 소원을 이뤄 주겠어. 마법사도 아닌 주제에.」 “그렇게 믿어주면 고맙고.” 조슈아는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러자 목소리가 다급하게 외쳤다. 「돌아보지 마!」 “나한테 명령할 입장이 아닐텐데? 내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으면 이유부터 말해야지 안 그래?” 「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아마 너도 보고 싶지 않을 걸.」 “왜?” 「아주 흉하니까. 아주....흉해졌으니까.」 조슈아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코르네드의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죽은 그가 더 달라질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난 봐야겠어.” 돌아서자 어둠 속의 선 그림자가 보였다. 창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모습이었다. 그는 곧 뒤로 비척비척 물러났는데 움직임이 조금 이상했다. 다시 살펴보던 조슈아는 흠칫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눈에는 사람과 다를 바 없어 보이던 코르네드의 몸은 뼈가 다 비쳐 보이는 반투명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왜 그런 꼴이 된거지? 지난번 강령의 영향인가?” 「흐흐흐흐.....」 코르네드는 괴이한 목소리로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조슈아는 한 발 짝 다가갔다. 마치 밀랍을 입힌 뼈 인형이 서 있는 것 같은 모양이 점차 잘 보였다. “말해봐.” 「이게 다 공작 덕택이지. 새 옷 한 번 입어보지 못하고 몇 백 년이 흘렀는데 지루할까봐 겉모습도 바꿔주시니 이 어찌 아니 친절하다 할 쏘냐.」 이해가 가지 않아 조슈아는 눈썹을 올렸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또 나한텐 그런 능력이 없어, 라고 할 참이겠지?아이고 , 이젠 말씀만 들어도 알겠습니다. 네 그런 능력이 없으시죠. 능력이 없으니 부담도 없는 공작 폐하. 어차피 할 줄 모르니 인생이 마냥 편한 공작 폐하. 제가 한 가지 새로운 것을 알려드릴까요?」 코르네드는 키들키들 웃더니 조슈아에게 다가왔다. 모습을 보이고 시지 않은 생각도 이젠 없어진 듯 했다. 「우리 사제님께서 어디로 사라지신 것 같습니까?」 조슈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켈스가 어디 갔는지 알고 있어?” 「흐우흐하하하하하하... 정말 몰라서 속 편하신 공작 폐하야. 나도 당신처럼 속 좀 편해 봤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난 유감스럽게도 그럴 수가 없어서 고뇌에, 분노에, 백속이 드글드글 끓는다. 켈스니티는, 그 자는 말이야, 지금 공작의 뱃속에 있지.」 조슈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 농담을 듣고 싶은 기분 아니야.” 「농담일리 있겠나? 감히 공작 폐하 앞에서. 못 믿겠으면 한 번 찾아보지 그래? 켈스니티가 최근 곁에 나타난 일이 있던가? 그럴리 없겠지? 아마 꿈속에서만 나타났겠지 안 그래?」 그 말 그대로 였으므로 조슈아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코르네드를 노려보았다. 어감이 좋지 않다. 자신이 그를 포식자처럼 잡아먹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대체 언제? 켈스니티가 나타나지 않기 시작한 것은...... 생각을 더듬던 조슈아의 표정이 변했다. “설마, 그 말은 내가 잠들어 있던 때.....” 「이제 눈치 채셨나? 참 느리시군. 공작이 살아나게 된 게 설마 벼락 맞을 기적이라고 일어났다고 생각했었나? 참 안타깝지. 공작이 죽었으면 내가 아주 재밌게 해줬을 텐데 말이야. 반년 만에 살아난 주제에 자기 행운이 어디서 나왔는지 별로 궁금하지 않았던 모양이야? 원래 그런 인생이라 익숙한 건가? 다른 사람의 운까지 빨아들여서 살아가는 데모닉, 그게 무슨 뜻인지 참 잘 알 것 같군.」 조슈아의 눈가가 바르르 떨렸다. “켈스가 어떻게 됐지? 그것만 말해.” 「네 속에 갇혔지. 기억나나? 예전에 날 쫓아내려고 켈스니티가 공작의 세계로 다이브(Dive)해서 잠든 공작의 의식을 건져왔던 걸? 그거 하고 똑같은 일을 벌인 거야. 그것도 반년 동안. 공작의 심장이 멎지 않도록, 피가 굳지 않도록, 모든 기관이 멈추지 않도록 돌아가게 하려고 우리 모두가 필사적으로 기력을 쏟아 넣었다. 그 빌어먹을 ‘축복받은 아르님’ 때문에. 맹세 때문에 네놈 하나를 죽지 않게 하려고! 」 이어 코르네드는 키득키득 웃었는데 다시 귀를 기울이면 우는 것처럼도 들렸다. 「물론 그런 일이 공짜로 될 리가 없지. 반년 동안 다이브해 있던 켈스는 이제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됐어. 타인의 의식과 동화될 수 있는 사제의 능력 때문에 그 동안 네 몸에 손대지 않으려고 애쓰더니 결국 그 능력으로 널 살릴 마음으로 먹었지. 네 몸을 움직여 보려고 네 의식에 자신의 의식을 집어넣었어. 그 결과가 이거다.. 네 꿈속의 켈스니티는 이제 너를 알아보지도 못할 거야. 네 의식과 동화되어서 자신의 의식을 거의 잃었어. 조각난 기억들만 이 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을 뿐이라고 . 그것도 오래가지 않겠지. 곧 소멸 될 테니까.」 “소멸되다니?” 「네 의식에 파묻혀서 결국 없어져 버릴 거라고. 그 똑똑한 머리로 생각해 보란 말이야 . 유령에겐 물리적 실체가 없지. 의식만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겠어? 한데 그걸 놓쳐버리게 되면 존재도 없어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나? 진혼되는 것과는 좀 다르겠지만, 아니 실은 훨씬 더 나쁘지! 왜냐면 진혼되면 다시 태어날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이 경우에는 그런 것 조차 없이 영원한 소멸이거든? 흐후하하하....」 조슈아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심장이 뛴다. 아주 빠르게. 이조차 자신의 것이 아님이 너무나 생생하다. 피가 온몸을 돈다. 생동하고 움직이는 모든 것이 빚이다. 다른 사람이 불어넣어 준 생기다. 조상의 맹약자 켈스니티는 약속을 지켰다. 축복받은 아르님을 살려냈다...원치 않았다. 이런 결과는 결코 원치 않았다. “코르네드...조금 전에 내가 널 그런 모습으로 만들었다고 했지? 그 말은 너를 비롯한 약속의 사람들 또한 나 때문에 기력을 소진했다는 뜻인가? 그래서 너희가 최근 내게 오지 못했던 건가? 코르네드는 뼈가 비쳐 보이는 손을 짜증스럽게 내저었다. 「그래. 공작이 칼에 찔려 의식이 끊기자마자 켈스니티가 공작에게 다이브해서 몸의 기능이 멈추는 걸 막기 시작했지. 그 작 그러고 잇는데 모르는 체 하기가 쉽겠어? 널 지지하던 자들은 일찌감치 뛰어들었지만 나중에 힘이 부치기 시작하니까 나 같은 놈들도 어쩔 수가 없더군. 그 결과가 이렇게 아름다운 모양새가 되어서 참 몇백 년만에 삶이 새롭군 그래.」 한때 조슈아의 몸을 빼앗아 살아 보겠다고도 했던 코르네드였다. 그럴 만큼 악의가 깊던 그조차 결국 조슈아를 살리는 일에 뛰어들었다. 참 기나긴 악연이었다. 끊기 힘든 애증이었다. 이카본과 약속의 사람들, 이카본과 켈스니티, 그들의 얽히고 어긋난 역사가 조슈아에게 이어지고 의무도, 권리도 주었으며 위기도 , 삶도 가져왔다. 조슈아는 입술을 꺠물었다.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고마워.....” 코르네드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나한테 고마워 해 봤자 아무것도 아니지. 이쪽은 그나마 의식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그런 소리 하려면 켈스니티나 어떻게 해보라고. 저대로 둘거야? 저 이카본과 축복받은 아르님의 일이라면 앞뒤 분간도 않고 모ㅗ든걸 내던지고 보는 사제를?」 코르네드는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조슈아가 그를 불렀다. “코르네드 네가 온 건......” 「좋을 데로 생각해. 나야 별 것 아닌 힘을 좀 보탠 것 뿐이지. 공작을 싫어하는 마음도 변하지않았어. 또 기회가 온다면 지난번처럼 하고 말걸. 다시 기회를 줄 리 없겠지만. 하지만 공작이 켈스니티를 외면한다면 나 따위 놈조차도 용서를 못 하지. 그것만은 . 그 자가 지독스럽게 답답하고 편협한 자이긴 해도 그게 다 이카본과 그의 핏줄들, 즉 너를 위한 것이란 점만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코르네드는 이윽고 벽을 통과해서 창문 밖으로 나아가더니 사라졌다. 벽 위로 히끄무레한 팔뼈가 보인 것이 마지막이었다. 조슈아는 의자 등받이를 꽉 잡은 채 캄캄한 창 밖을 쏘아보았다. 눈이 뜨거워 왔다. 가슴에 얹었던 손이 미끄러져 흉터가 있는 곳에 닿았다. 손끝아래 아물어 붙은 자국이 느껴졌다. 순간 찢어 열고픈 충동이 일었다. 그렇게 해서 켈스니티가 돌아올 수 만 있다면 아나로즈가 자신을 묻었던 무덤이 떠올랐다. 이곳 또한 무덤이었다. 켈스니티가 봉인된 자리였다. “조슈아.” 옆에서 또 다른 부름이 들렸을 때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필요 없어. 저리가 .다 가버려. 듣기 싫어.” “지금 왔다가 간 게 누구지?” 유령이 아니었다. 조슈아는 고개를 돌렸다. 옆방 문이 열려 있고 잠옷 차림의 카르디...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그가 문간에 서 있었다. 이럴 때면 저도 모르게 오한이 인다. 어둠속에서 마주친 저 자는 한방중에 거울 속에 비친다는 자신의 과거나 미래 같다. “코르네드, 약속의 사람들 중 하나야.” “켈스에 대해서 말했지?” 카르디도 켈스니티를 알고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다 들었어?” 고개가 끄덕여 졌다. 조슈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 때문이야. 날 살리려다 이렇게 됐어. 내가 그를 삼켜버렸어.” “내가 널 찔렀기 때문이지.” 카르디는 침착하게 다가와 램프의 심지를 돋웠다. 서로의 얼굴이 불그레한 빛 속에서 드러났다. “켈스는 내게 오지 않았어. 네게만 갔지 . 난 그가 날 잊은 줄로만 알았어.” 조슈아는 켈스니티가 이 자리에 있다면 둘을 어떻게 대했을까 말없이 생각했다.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제 그와 나는 너와 그의 사이 같지 않겠지. 괜찮아. 난 데모닉 이카본의 자손이자 두 번째 데모닉 공작이 되어야 할 아르님 소공작이 아니니까. 막스 카르디일 뿐이지.” “.........” “라지만 넌 그들과의 약속을 지켜야만 할 거야. 네가 더 안됐어. 내가 빼앗아 가질 수 없는 단 몇 명의 사람들. 그들만 아니라면 난 정말 널 부러워하지 않을 텐데.” 카르디는 부서지고 있는 자신의 몸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은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조슈아도 그 점을 언급하지 않았다. 첫날 수업에 잠깐 나갔다온 이후로 카르디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혼자 방에 틀어박혀 조슈아조차 잘 만나려 하지 않았다. “학원에서는 어떻게 지내지? 소공작답게 점잖게? 아리면 카르디처럼 거침없이? 우리가 갈라진 이상 넌 전자를 택해야해. 후자는 내 거라고. 공평하게 나눠 가졌잖아. 난 소공작의 자리를 포기했어. 그러니 너도 약속을 지켜야지. 만약에 후자를 택했다면 그 역할은 내게 넘겨야 돼. 어때?말해 봐. 어느 쪽이지?” 카르디의 목소리는 점차 다그치듯 높아졌다. 평소라면 조슈아도 차근차근 말해서 카르디를 달래려 했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 그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눈물이 흘렀다. 켈스니티 때문에, 카르디 때문에, 그리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자신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조슈아는 몸을 돌려 침실로 달아났다. 문을 닫고 빗장을 걸었다. 밖에서 들려올 목소리, 그리고 주위를 떠도는 목소리들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았다. 이튿날 아침, 첫 검술 수업이 있는 수련 뜰에서 루시안은 오랜만에 조슈아를 보고 반색을 했다. “야아, 드디어 수업에 나온 거야? 오늘은 야외라서?” “......” 조슈아는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어 루시안의 말을 듣지 못 했다. 루시안이 어깨를 흔들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지만 대꾸는 허공을 헤맸다. “응? 아, 그건 그렇지......” “뭐가 그래?” 티치엘이 급히 손짓해 부르는 바람에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언제부터인가 1학년들사이에서 ‘도토리 빌라 군단’이라고 불리는 다섯 사람이 모이자 티치엘이 심각한 눈빛으로 그들을 둘러봤다. “너희 어제 뭔가 이상한 짓 했지” 티치엘이 하려는 말을 누치 챈 루시안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게 뭐 이상해. 자기들이 한 거 하고 똑같은데.” “그런 문제가 아냐. 그방 선배들이 지금 엄청나게 화가 났어.” “아 그럼 성공이네. 그걸 우리가 좋으라고 했겠냐?” 막시민도 별 위기감 없이 대꾸하자 티치엘은 속이 타는 모양이었다. “너희가 몰라서 그래. 방 전쟁에서 반격하는 거야 문제는 안 되지만, 이 번에는 정도가 좀 심했어. 그 방 선배들 넷이 오늘 아침까지 청소했는데도 다 못했대. 게다가 개인적인 물건들이 못 쓰게 돼 버렸어. 그들은 마법을 썼기 때문에 우리가 치운건 물이었지만, 그 쪽은 진짜 끈적끈적한 허니 레몬 잼이었단 말이야. “그야 우린 마법을 못 쓰니까 어쩔 수 없잖아.” “썩은 샐러리보다야 허니 레몬 냄새가 백 번 낫지 뭘 그래.” 도무지 말귀가 통하지 않았다. 잠시 후 등 뒤에서 구령이 들려왔기 때문에 티치엘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야외에 나와 선 학생ㄷㄹ 앞에는 비교적 젊은 교수, 아니 조교가 서 있었다. 검술 마스터는 신입생 수업에는 잘 나오지 않았다. 마스터를 돕는 두 사람의 조교 중 하나가 신입생 기초 교육을 맡고 있었다. 신입생에게는 진짜 검이 주어지지 않았다. “자, 여기 놓인 목검들을 나누어 주겠다. 하나씩 가진 다음 자기가 검술 경험이 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른쪽, 전혀 못 한다고 생각하면 왼쪽에 선다. 실시!” 이윽고 대충 나눠지고 보니 루시안과 보리스는 오른쪽, 조슈아와 막시민은 왼쪽에 서 있었다. 루시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들을 봤다. “진짜 검을 전혀 못 써?” 막시민은 이런데서 아는체 해 봤자 좋은 일은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조슈아가 왼쪽에 선 것은 다른 학생들의 시선도 끌었다. 귀족 자재로서 검을 배우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보리스는 실버스컬 우승자라고 했으니 당연히 오른쪽이겠지만 루시안의 실력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루시안은 그쪽에 선 스스로가 굉장히 기특하게 생각되는 모양이었다. 걱정은 보리스가 했다. “괜찮겠어?” “그럼! 걱정 마. 이래봬도 검술로 학원 들어왔잖아.” 잠간 동안 간단한 체력훈련이 진행되었다. 이윽고 조교는 옆 수련장에서 연습중이던 고학년 둘을 불렀다. “여기 신입생들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 좀 해 봐라.” 하나는 왼쪽 학생들, 다른 하나는 오른쪽 학생들 담당이었다. 왼쪽에 선 선배는 비교적 건장해 보이는 신입생 하나를 골라냈다. “나와 간단히 대련을 해 보자. 심하게는 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고.” 경험자로 이루어진 오른쪽 학생들 앞에는 체격이 크고 어깨도 딱 바라진 것이 한 눈에 봐도 힘깨나 쓰겠거니 싶은 선배가 섰다. 그가 말했다. “난 로르이라고 한다.” 친절하다고는 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그의 눈이 신입생을 죽 훑었다. “누가 대련해 볼까. 거기 너.” 르로이가 가르킨 사람은 앞 줄에 선 루시안이었다. 루시안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저,저요?” “그래,너다. 이리 나와.” 루시안은 잔뜩 긴장했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 루시안이 나와 서자 로르이는 다른 학생들을 모두 자리에 앉게 했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기합을 울리며 세워 든 루시안의 목검을 후려쳤다. “으앗!” 예고 없이 밀려든 힘에 루시안은 하마터면 목검을 놓칠 뻔 했다. 겨우 움켜잡긴 했으며 검 끝이 휘청거리며 곡선을 그렸다. “정신이 빠졌군!” 아래로부터, 다시 왼쪽에서 목검이 날아들었다. 흐름을 놓친 루시안은 한 발짝 뒤로 비켰다가 반 바퀴 옆으로 돌며 호흡을 되찾아보려 했다. 그러나 그에게 이 싸움은 처음부터 불리했다. 학생들에게 주어진 목검은 일률적으로 똑같은 모양, 즉 장검에 가까웠는데 루시안이 지금껏 연마해온 검은 이보다 훨씬 가볍고 가늘었던 것이다. 루시안 본인이 근력이 있는 편이라도 할 수도 없었다. 목검은 나무로 만든 것치고는 상당히 묵직했다. 순식간에 몇 번이나 충격을 견뎌야 했던 루시안의 손목이 풀리는 기색이 느껴지자 르로이는 거침없이 앞으로 다가들었다. 다시 한 번 방어를 후려 버리고 뻗은 목검이 루시안의 어깨에 닿았다.ㅏ 일반적이라면 거기에서 승부는 끝났어야 했다. 그러나 르로이의 목검은 강하게 어깨를 찔러 밀더니 이어 내리쳤다. 반사적으로 피하긴 했으나 팔꿈치 언저리를 얻어맞고 말았다. 저릿저릿한 감각이 팔 전체에 퍼졌다. “아야....” 루시안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르로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허리를 찔렀다. 한 번, 두 번, 되풀이 되는 공격은 실력을 시험해 본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것이었다. 루시안으 마침내 외쳤다. “그만! 제가 졌어요!” “고작 그걸 못 견뎌서 항복이라고? 썩어빠진 놈 같으니.” 학생들의 눈빛도 점차 의아해졌다. 이건 실전도 아니고 정식 대련도 아니다. 이곳이 군사학교도 아니었다. 저렇게까지 몰아붙일 필요가 없었다.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든 르로이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닿는 곳마다 용서 없이 내리치고 찌르고 밀쳤다. 이미 검술 대련이 아니었다. 루시안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왜 이러세요!” 심각성을 눈치 챈 막시민이 조슈아의 팔을 잡아당겼다. “야, 조군. 정신 좀 차려봐. 저기 저 자식 르로이라는 이름 익숙하냐?” 겨우 정신이 돌아온 조슈아가 ‘르로이?’하고 되묻더니 바로 대답했다. “기 르로이. 크림 차 빌라 앞에 쓰여 있었어.” 막시민이 막 일어나려는 찰나 먼저 일어난 사람이 있었다. 그때 르로이는 루시안을 벽까지 몰아붙여 검을 떨어뜨린 참이었다. 다시 날아드는 목검을 본 루시안은 저도 모르게 오른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목검은 그대로 명중했다. 학생 몇 명이 비명을 질렀다. “...............” 정작 루시안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러나 얼굴을 가렸던 팔을 감싸 쥐려다가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누구나 알아 볼 수 있었다. 일어섰던 막시민, 그리고 조슈아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르로이가 의기양양해져서 목검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제 실력도 시험해 보시죠.” “넌 뭐야?” 돌아보니 서 잇는 것은 보리스였다 상대를 알아본 르로이는 조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나면 충분해. 이렇게 재미없는 일을 두 번 이나 할 순 없어.” “한 명과 겨뤄보고 신입생의 실력을 다 알았다고 할 순 없지 않습니까.” “내가 너희가 하자는 대로 놀아주는 사람인 줄 알아? 비켜!” “그러면 저는 르로이 선배 한 사람을 보고서 네냐플의 선배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면 도망치기나 좋아하는 비겁한 자들이라고 판단하면 되겠습니까?” 정곡을 찔렀다. 르로이는 더 대꾸 않고 거칠게 검을 휘둘러 보더니 대련 위치에 섰다. 막시민이 말했다. “말 없던 놈이 한 마디 제대로 했는데.” 보리스는 목검을 잡자 기다리지 않았다. 굳이 정식 자세를 취할 것도 없이 바로 상대의 검을 다른 방향으로 세 차례 후려 쳤다. 동적이 마무리 되는가 싶은 순간 이미 다음 자세로 바뀌며 르로이의 손을 강타했다. 르로이는 겨우 손을 당겼지만 검신에 밀려든 힘까지는 피할 수는 없었다. 땅, 하는 소리가 수련장 전체를 울렸다. “이놈이........” 다섯 호흡만에 르로이는 루시안이 몰린 것과 똑같은 벽으로 몰렸다. 문외한이 보기에도 비슷한 전개다 싶겠지만 실상은 달랐다. 루시안이 초반 흐름을 잡지 못해 밀렸다면 이쪽은 충분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도 대응하지 못했다. 머릿속으로 생각한 흐름이 모조리 깨졌다. 이상하리만큼 매번 반 박지, 또는 한 박자씩 빨랐다. 실력으로 되지 않자 동급생들을 쉽게 누르던 힘에 의지해보려 했지만 그것도 잘 안 되었다. 벽에 몰린 르로이는 자세를 추스르며 방어에 치중하려 했으나 뒤이어 올려친 목검에 맞자 검 끝이 허공에 떴다. 몸 안쪽이 비는 순간 보리스의 목검이 가슴에 쇄도하여 명치 아래를 찔렀다. 허리가 꺾이며 신음이 나왔다. 이어 어깨 안쪽을 내리치자 비명이 공기를 찢었다. “으아악!” 보리스는 어깨 근처를 감싸 쥔 르로이를 내려다보더니 냉담한 얼굴로 목검을 내던졌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미 밖으로 데려간 루시안을 뒤따라 나가버렸다. 학원에 두 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하나는 오른쪽 하박이 부러졌고 다른 하나는 쇄골 골절이었다. 이런 사고가 생긴 것에 유감을 느낀 검술 마스터가 학생들을 소집하여 경위를 물어 진상이 밝혀지게 되었다. 빌라 전쟁의 불문율은 상대에게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르로이가 먼저 그것을 어겼다. 자신의 지위를 교묘히 활용한 까닭에 보기에 따라서는 수업 중의 사고로 여겨질 수도 있었으나, 신입생들의 대부분이 그의 주장에 반대했다. 루시안에게 한 짓은 누가 보아도 너무 심했다. 보리스 또한 어겼지만 그건 상대에게 반격한 것에 불과하다는 증언들이 있었다. 반면, 선배들이 생각하기에는 신입생이 선배가 한일을 그 자리에서 되갚았다는 것이 그리 좋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더구나 르로이의 부상 쪽이 좀 더 심했다. 일단 르로이와 보리스 두 학생에게 근신 처분이 내려졌다. 처벌 여부는 더 논의 해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빌라 전쟁의 결말 또한 마스터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일단 폭력 사태가 난 이상 이대로 두면 계속 해서 더 심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병실에 누워 있는 둘을 위해 약초학 마스터가 직접 와서 치유술로 뼈를 붙여 주었다. 다만 한동안 절대 안정을 취하며 부러졌던 부위를 움직이지 말아야 했다. 마스터의 처분에 따라 루시안은 닷새, 르로이는 이레동안 병실 신세를 지게 되었다. “보리스가 그 선배를 부르는 순간 아픈 것도 잊어버리고 킬킬 웃었다니까. 저 자식 이제 죽었다. 이러면서.” 루시안은 그만한 부상을 입은 것 치고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막시민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굳이 따로 말로 하지는 않았다. 조슈아가 말했다. “보리스 여기 못 올 거야. 근신 처분 받아서 당분간 기숙사에서 나올 수가 없어.” 루시안은 실망한 표정이었다. “나 여기 닷새나 있어야 되는데. 그럼 그 동안 죽 못 보네?” “닷새 못 본다고 죽냐. 늬들이 연인 사이도 아니고.” “그보다는, 고맙다는 말도 못 했거든. 나 때문에 근신까지 받은 건데.” “그건 그렇지. 네 팔 부러졌다고 그 자식 쇄골을 깨버리다니. 은근히 성깔 험하더구만.” 막시민은 나쁜 뜻에서 한 말이 아니었지만 루시안은 변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께 보리스는 어려서부터 워낙 여러 가지 일이 있었나봐. 예전에 같이 주사위 놀이를 하는데 굉장히 소심하게 하기에 좀 지더라도 세게 걸어보는 게 재밌지 않겠냐고 했거든? 그랬더니 보리스가 뭐랬냐면.”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자기는 게임에서 지는 순간 항상 다음 게임은 없다는 기분이 든대. 그래서 절대로 남은 것을 다 걸 수가 없다는 거야.” “흐음.” 막시민은 고개를 기울이며 잠싼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하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죽을 고비라도 넘겼던 모양이지.” 조슈아가 일어섰다. “그럼 가서 네 말 전해줄게. 고맙다고.” 루시안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응, 다 나으면 우리 다시 검술 연습하자고 말해줘. 다음에는 개가 그 자식 직접 혼내주게!” 보리스는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혼자 거실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참이었다. 들어오라고 말하려다가 그는 마음을 바꾸었다. 이 방 사람이라면 노크할 필요 없이 문을 열 테고, 아니라면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았다. 잠자코 있자 노크 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무언가가 벽을 타고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방 전쟁 상대인 누군가가 와서 뭔 일을 벌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리스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미, 없는 것 처럼 보였다. 실제로는 문 왼쪽 벽에 누군가가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벽에 기댄 채 무릎을 세우고 팔 사이에 머리를 파 묻은 사람은 조슈아였다. “조슈아?” 상대가 고개를 들었다. 분명히 조슈아 였다. 그런데 그는 보리스를 알아 보는 기색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지?” 대답 대신 이상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럴 수 없어...난 그러지 않을 테니까....” 조슈아는 일어났다. 보리스에게는 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약간 비틀거리며 걷던 그는 문이 열린 도토리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을 가로질렀다. 의자에 부딪쳤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대로 창문에 이르렀다. 창문은 마침 새로 피운 장작에서 난 연기 때문에 열려 있었다. “멋대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조슈아는 창을 내다보았다. 좀 더 몸을 내밀었다. 기울어졌다. 상반신이 앞으로 쏠리며 떨어질 듯 휘청거렸다. 그런데도 자세를 고치지 않았다. 그 대로 창밖으로 뛰어내리려는 것처럼. 도는 걸어 나가려는 것처럼. 어느 쪽이든 그냥 둘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조슈아!” 보리스가 뛰어 들어왔다. 조슈아의 몸은 막 창밖으로 넘어가려던 순간이었다. 보리스가 급히 움켜쥔 소맷자락이 찢어졌다. 보리스는 가까스로 손을 뻗어 조슈아의 왼팔을 움켜잡고 허리를 감아 끌어당겼다. 간발의 차이였다. 다시다가 앉았지만 조슈아의 눈은 초점이 잘 맞지 않았다. “왜 이러는 거지?” 대답이 없었다. 보리스는 잠시 후 다시 물었다. “유령 때문인가? 그들이 괴롭히는 건가?” 그 말에 조슈아가 고개를 들어 보리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겨우 얼굴에 표정이 나타났다. “여긴 유령이 없네.” 안도인지 실망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기이한 표정이었다. 조슈아는 보리스가 잡았던 팔을 내려다보았다. 보리스도 보았다. 찢겨나간 소매 자락 아래 이상한 것이 나타나 있었다. “이건........” 창틀 따위에 긁힌 상처라고 생각하기에는 지나쳤다. 생나무 아니 산 짐승의 껍질을 잡아 벗긴 듯 참혹한 자국이었다. 어지간한 보리스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대체 뭐지?” 대답은 없었다. 보리스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진물 섞인 핏자국, 그리고 나비가루처럼 하얀 것이 묻어있었다. 기분이 이상해 졌다. 이런 것을 언젠가 연상한 일이 있다. 석고처럼 하얗게 부서지는 사람, 아니 사람이 아닌 것. 조슈아가 입을 열었다. “막시민은 어디 있지?” “곧 올거야.” 조슈아는 일어나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의자에 앉아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보리스는 따라 일어나 그를 내려다보았다. 눈가가 점차 어두워졌다. “조슈아 말해봐. 어디서 그런 상처를 얻었지?” 한참 만에 손가락 틈으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저절로.....” “저절로라고?”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조슈아가 고개를 번쩍 들며 외쳤다. “막시민?” 외침과 동시에 문이 와락 열렸다. “어째서 네가 여기에?....”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문을 연 조슈아는 보리스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보리스는 둘을 번갈아 보며 말을 잊었다. 눈을 의심해도 소용없었다. 분명히 둘이었다. 그러나 도저히 구별할 수 없는 두 사람이었다. 이윽고 조슈아는 문을 닫았다. 아예 잠갔다, 그리고 테이블로 다가왔다. “왜 여기까지 왔지?” 또 다른 조슈아가 재빨리 대답했다. “막시민에게 할 말이 있었어.” “내게 부탁했으면 불러다 줬을 거야.” “그래. 그랬겠지만 결국 막군은 오지 않았겠지. 왔을 리가 없잖아.” 보리스가 물었다. “너희 둘은 뭐지? 쌍둥이인가?” 갑자기 처음의 조슈아가 벌떡 일어나더니 밖으로 뛰어나갔다. 조슈아가 뒤쫓아 가려 했으나 곧 고개를 흔들며 멈췄다. 복도에 오가는 학생에게 둘의 모습을 들켜선 안 될 일이었다. 문을 닫고 돌아온 조슈아는 보리스에게 맥없는 미소를 보였다. “놀랐지? 미안하다.” “미안한 게 문제가 아니고.” “말해두지만 우린 쌍둥이는 아냐.” 더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지 몰라 조슈아가 머뭇거리고 있는데 보리스가 불쑥 물었다. “그는 인형인가?” 10. 제물 “옛날부터 난 물병자리 인간이 되고 싶었어. 이젠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지.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까닭은 태어나는 순간 말라붙은 세상에 내던져져서 물 한 모금이 꼭 필요해서야. 늘 비늘이 마르고 있어서야.“ 난롯불이 발갛게 거실을 비췄다. 다른 램프는 없었다. 취침 점검도 끝나고 모두가 잠들어 있을 시각이었다. 거실 난로 앞에 막시민과 모리스, 그리고 조슈아가 있었다. 의자도 놔두고 난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담요를 덮었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난롯불 말고는 밖으로는 새어나가면 안 되었다. 막시민과 조슈아가 띄엄띄엄 해 준 이야기를 듣고 난 보리스는 오랫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막시민이 말했다. “남한테 말할 만한 성질의 문제가 아니란 건 알 거다. 비밀 지켜줘. 되도록 루시안 한테도.” “...........” 이윽고 막시민은 한숨을 내쉼녀 일어나 새 장작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부지깽이를 집어 잿불을 뒤적거렸다. “그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조슈아는 보리스의 시선을 느꼈지만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보리스가 다시 한 번 말했다. “그의 팔에 난 상처를 봤다. 그는 부서지고 있는건가?” 조슈아가 약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본체와 너무 오래 떨어졌던 거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 이대로 기다릴 뿐이???. 어떤 결말이든.” 다시 모두 침묵했다. 보리스가 입을 열었다. “넌 인형이 계속 살아가기를 원하는 건가? 이대로?” “내가 그에게 갖는 감정은 복잡해. 근본적으로 그와 나는 서로가 가지 않을 길을 대신 걸을 그림자야. 때로는 그가 힘껏 살아나가길 바라지. 하지만 때로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가 없어. 나도 모르겠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 세상에서 오직 저놈만이 자기를 복제한 인형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를 거다. 너 같으면 어쩌겠냐? 보리스. 너라면 그런 인형을 살려 보려고 애쓰겠냐? 같이 삶을 나눠 가지려고 하겠냐? 아니면 죽도록 내버려두겠냐?” 막시민의 질문에 보리스는 의외로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만에 나온 대답은 뜻 밖이었다.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막시민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보리스가 뒤이어 한 말에 조슈아까지 고개를 번 쩍 들었다. “나도 인형을 본 일이 있거든?” “네가 인형을 본 일이 있다고? 널 복제한?” “아니.” 보리스가 보았다는 인형은 조슈아의 경우처럼 복제 인형이 아니라 가나폴리의 일상적 피조물이었다는 그 인형이라고 했다. 사람을 꼭 닮았지만 약간의 판단력뿐이고 몇 가지 일을 되풀이할 줄 밖에 몰랐다는 기록 속의 인형. 쥬스피앙도 그런 인형 이야기를 해준 일이 있었다. 그 쪽이 좀 더 일반적인 인형의 의미이기도 했다. “대체 어디서 그런 걸 봤지?” “쥬스피앙 씨가 말하기로 인형사는 이제 세상에 없다고 했어. 카르디를 만든 그 사람뿐이라고. 쥬스피앙 씨조차 못 만든다는 인형을 만든자는 대체 누구지?” 보리스는 묵묵부답하다가 짧게 말했다. “자세한 건 말할 수 없어. 어쨌든 그 인형을 현재 누군가가 만든 건 아니야. 그 인형들은 복제 인형과 달라서 죽을 수 있는 수명이 없어.” “아........” 가나폴리의 인형이 어딘가에 남아있다는 뜻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조슈아는 기분이 이상해져서 난롯불로 고개를 돌렸다. 보리스는 ‘인형들’ 이라고 했다. 그가 본 것은 한 명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인형은 어땠지?” “석고 조각이나 헝겊 뭉치는 아니었지.” 보리스도 생각에 잠긴 눈빛이었다. “어쩄든 난 그때 인형을 아끼던 가나폴리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쯤 이해하게 됐어. 그래서 경우가 좀 다르긴 하지만 네 인형 또한 어떻게 해야만 한다는 말을 못하겠어.” “보리스 하나만 말 해줘. 네가 본 그 인형은 아직도 이 세상에 있ㅇ?” 보리스의 눈동자에서 난로의 불빛이 일렁거렸다. “아니.” 말이 끊어졌다. 셋은 각자 생각에 잠겼다. 막시민은 그와 이야기하러 왔다고 했다던 인형의 기분을 생각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단호하게 자르려 했던 마음이 복잡해져 왔다. 마음에 들지 않는 혼란이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막시민.” 조슈아가 부를 때까지도 계속 생각하고 있던 막시민은 관자놀이를 한바탕 문지르고는 조슈아를 보았다. “왜.” “만약에 내가 없어진다면 그래도 넌 카르디를 모른 체할까?” 막시민은 벌떡 일어나려다가 겨우 참으며 대꾸했다. “그 따위 소리 또 했다간 난로 속에 걷어차 넣어버린다.” “아니. 진지하게 생각해줘. 그와 나 사이에 차이가 나는 기억은 고작 두 해 정도뿐이야. 너와 나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알았어. 코츠볼트에서 너와 물고기를 잡고 양젖 서리를 하던 그 녀석은 나이기도 하지만 카르디이기도 해.” “누가 모르냐?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건 그 녀석이 바로 둘이란 점이고 난 하나면 충분해. 절대로 둘은 필요 없어.” “그래. 그래서 하나가 되면 내가 아니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 말이잖아.” 막시민이 고개를 홱 들고 조슈아를 쏘아보았다. “너 또 무슨 미친 짓 궁리하지?” 조슈아는 미소를 지으려 했다. 그러나 애매한 표정밖에 나오지 않았다. 막시민이 씹어 뱉듯 말했다. “그래. 듣고 싶다면 말해주지. 난 대차 따윈 필요 없어. 친구는 친구고 인형은 인형이야. 너란 놈 없어도 난 잘 살 수 있다. 아버지가 없어졌다고 옆집 아저씨를 데려다 아버지 노릇을 시킬 까닭이 있겠냐? 그냥 애들끼리 알아서 살면 된다고. 어머니가 죽었다고 이모가 어머니 되는 거 아니고, 친구가 없어졌다고 친구의 동생과 새로 친구가 돼야만 하는거 아니야.” “그는 옆집 아저씨나 내 동생이 아냐. 본래 나였다고.” “이젠 아냐! 예전엔 어쨌든 이젠 아니라고!” 막시민은 말하다 말고 보리스는 흘끗 봤지만 결국 계속했다. “너도 그 놈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른다는 거 다 알아. 억지로 좋은 형 흉내 따윈 그만두라고. 넌 그자식의 형이 아냐. 널 닮았다고 네가 그놈 삶을 책임져야 되는 거 아니란 말이다. 더구나 내키지도 않으면서, 실은 도망 치고 싶을 거면서, 왜 나한테까지 와서 그놈 얘길 꺼내 가며 자신을 고문하는데? 벽에 머리 박고 나면 기분이 상쾌해져?” 조슈아는 미소를 지으려 했으나 표정이 엉망이었다. “아냐. 아냐. 아니라고 됐어. 네가 지금 그럴 수 없다면 언젠가는...아니 그만두자. 이것만 말할게. 나더러 미친 짓 궁리하느냐고 했지? 맞아. 나 아무래도 미친 짓 하나 해야 할 것 같아.” “너..” 조슈아는 막시민이 더 뭐라 말하기 전에 재빨리 말을 해치웠다. “나, 노을 섬에 갈 거야.” 막시민의 눈썹에 힘이 들어갔다. “거기서 한 약속을 잊어버린 건 아닐 테지? 잊었을 리가 없을 테니 말해봐라.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 가면 그 여자가 널 어떻게 해 줄까?” “알아. 다 안다고.” “아는 자식이 어딜 간다는 거야!” “하지만 가야해. 그것밖에 방법이 없어.” “방법? 무슨 방법? 뭘 하는데? 사람이라도 하나 살릴거냐? 네 목숨하고 바꿔서?” 조슈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가라앉히려고, 조용히 말하려 애썼다. 그러나 소용 없었다. 울컥 말이 쏟아졌다. “그래. 맞아. 난 켈스를 잃을 수가 없어.” 막시민은 순간 멍해졌다. 그러나 곧 눈을 크게 뜨더니 외쳤다. “그게 무슨 말이야? 켈스가 어떻게 됐는데?” “그가 날 살려냈어.” 조슈아는 자신의 두 손과 드러난 손목을 보았다. 문득, 카르디의 팔에서 본 상처가 겹쳐졌다. 자신 또한 그렇게 되었을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 잡혔다. 켈스니티가 그를 살리지 않았더라면. “재작년 그 사건 때 죽었어야 했을 내 몸을 그와 약속의 사람들이 반년에 걸쳐 살려냈어. 그러는 동안 내 의식 세계와 자신의 의식을 구별하지 못하게 된 켈스는 내 안에 갇혀있어. 점차 자신을 잃어가다가 결국은 소멸될 거야.” 막시민은 갑작스런 이야기를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날 종일토록 고민하던 말을 쏟아낸 조슈아는 벌떡 일어섰다. “그러니 난 노을 섬으로 가서 그분을 만날 거야. 가서 소원 거울을 만들 방법을 알려 달라고 부탁해야겠어. 더 늦기 전에, 그가 내 안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기 전에 켈스를 보내줘야 해. 그들이 가고자 했던 약속의 땅으로.” 따라 이러선 막시민의 표정이 착잡했다. “그래. 무슨 뜻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거기 간다고 그게 해결된다는 보장은 없어. 알아? 그분에게 방법이 있는지도, 있다 해도 도와줄지 안 도와줄지도 모르는 거잖아. 만에 하나 성공한다고 쳐도 켈스가 너한테서 나올 수는 있는 거야?” “그건 모르겠어. 하지만 누구든 거울 앞에서 소원을 빌 수만 있다면 저절로 갈 수 있는거잖아. 안그래? “네 멋대로 생각해도 좋은 거냐? 결국 켈스조차 실제로 그 거울을 본 적은 없잖아? 고원 거울이란 것이 다 전설에 불과한 건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고.” 그때 오랫동안 침묵하던 보리스가 말했다. “아니. 있어.” 막시민이 돌아봤다. “뭐가?” “소원 거울.” 둘은 말문이 막혀 보리스를 내려다 보았다. “넌 대체....가나 폴리 사람이기라도 한 거냐?어째서 그런 것들을 다 아는 거야?” “옛 가나폴리 땅에 갔었어.” 담담하게 말했지만 결코 평범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옛 가나폴리땅이란 지금도 필멸의 땅을 의미했다. 대륙의 중앙을 차지한 그 불모지에는 사람도 유령도 들어갈 수 없었다. 근방을 맴도는 보물 사냥꾼들이 약간 살고 있을 뿐이었다. 미친 유령들이 횡행하며 보이는 생명체나 사념체 모두를 잡아 저들과 같은 꼴로 만들어버리는 곳이 그곳이었다. 그들과 엇비슷한 또래인 보리스가 그곳에 갔었다는 말은 도저히 믿기가 힘들었다. 보리스가 평소 보여준 모습이 아니었으면 거짓말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넌 소원 거울을 봤어?” “사용했지.” “그걸 써...봤다고? 그래서 어디로 갔었는데?” “고향.” “네 고향이라면 트라바체스?” 막시민과 조슈아는 얼굴을 마주봤다.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 엄청난 걸 만나서. 기껏 간 데가 고향이냐?” 보리스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택한 게 아니야. 거울이 택해 주었던 거지. 내가 정말로 가고 싶은 곳을. 나중에 나는 그 선택이 정말로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됐어. 거울이 내 마음을 꿰뚫어본 거지.“ 보리스는 일어나 꺼져 가는 재를 몇 번 뒤적거렸다. “내가 어떻게 해서 거기 가게 되었는지 그런 것은 묻지마라. 난 결코 발설해서는 안되는 일을 많이 겪었어.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소원 거울의 문제가 너희에게 굉장히 중요한듯 보여서야. 켈스라고 부르는 친구는 혹시 유령인가?”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켈스는 내가 열두 살때부터 나와 함께했어. 본래 내 조상의 맹우였던 그는 우리 가문의 성에서 젊은 나이에 죽었어. 그 후 성을 떠돌다가 수백 년이 흘러 그를 알아 볼 수 있는 수손인 나를 만났고. 볼보았고, 따랐고, 지켰어.” 보리스가 조용히 말했다. “네가 그를 구하고 싶은 마음을 이해해.” 둘은 서로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런 복잡한 문제에 쉽게 나올 수 없는 대답일 텐데도 보리스는 ‘이해한다.’고 말했다. 보리스가 어떤 기분으로 말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조슈아는 그 순간 상대가 진심임을 이해했다. 무심히 한 빈말이 아님을 알았아. “네가 보았다는 그 소원 거울이 있는 곳에 우리가 갈 방법은 없겠어?” 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어. 나조차도 다시는 못 갈테니까.” “...........” 조슈아가 시선을 떨어뜨리자 보리스가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말할 수 있어. 소원 거울을 통과할 수만 있다면 유령도 사람도 어디든지 갈 수 있으리란 것. 이 세상 존재하기만 하는 곳이라면.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곳 까지도.” 이튿날 조슈아는 수업 시작 전에 기숙사 앞뜰에서 티치엘을 만났다. 그리고 비행선을 다시 빌릴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노을섬에 가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티치엘은 우려하는 눈빛이었다. “아빠한테서 그 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 그분의 삶은 정말 존경할만한 것이야.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 분이 그런 고통을 그렇게 오래 견디고서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정신을 유지하셨을지는 자신이 없어. 그래서 네게 어떤 이유가 있다고 해도 선뜻 네 선택을 찬성할 수가 없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물론 네가 말하는 점은 나도 충분히 생각해보았어. 하지만 떤 위험이 예상되더라도 이 상황을 외면할 수 없어. 이건 내게 주어진 의무이자 내 마음이 진 빚이기도 해.” 티치엘은 마른 담쟁이들을 피해 벽에 잠시 기대어 생각했다. 그러나 쉽게 답을 내지는 못했다. “나 혼자서 판단이 서지 않네. 일단 비행선 문제를 아빠한테 여쭤보려면 이모님의 도움이 필요해. 점심시간에 포도원에서 만나자.” 조슈아는 수업 시간에 나타났다. 그러나 막시민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앉아 줄곧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모처럼 말을 걸 기회라고 생각한 귀족 출신 학생들이 쉬는 시간동안 맴돌았지만 오히려 성과가 미미했다. 예의상 돌아오는 대답조차 들을 수가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일어는 나가는 조슈아를 막시민이 불렀다. “야, 조군.” 조슈아는 입구에서 잠깐 멈췄다가, 그대로 가려다가, 결국 뒤 돌아보았다. “이리 와서 좀 앉아라.” 소공작을 저따위로 부르는 저 거만한 놈을 귀족 출신 학생들이 다 싫어했다. 더 싫은 것은 소공작이 저 말을 듣는다는 점이었다. “왔어. 말해.” 막시민은 말을 하는 대신에 품에서 천을 둘둘 만 뭉치를 꺼내 건네주었다. “이거나 고쳐놔.” 막시민은 벌떡 일어나 먼저 밖으로 나가버렸다. 조슈아는 천 끄트머리를 조금 펼쳐 안 을보았다. 신성 찬트 악보였다. 데리케 레오멘티스 교수는 늘 그렇듯 냉담한 표정이었다. 이제부터 하려는 일을 위해 켈스니티의 일과 노을 섬에 숨겨진 비밀을 털어놓는 동안에도 그림처럼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책상 밑으로 사라졌다. 이제는 조슈아도 책상 아래에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교수의 방에는 침실대신 커다란 연구실이 있다는 것도. 곧 다시 나타난 레오멘티스 교수는 티치엘에게 말했다. “대답이 오려면 두어 시간 정도는 걸릴 게다.” 티치엘이 치맛단을 잡으며 절을 했다. 특유의 예스런 인사법이었다. “네 알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쥬스피앙이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곳에 미미한 마법신호를 보내는 것인데 저쪽에서 감지하고 대꾸할 때까지 계속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답이 들어와야 연락이 성립되었다. 서로 감응 체계를 갖춰놓지 않았다면 이 방법 밖에 없었다. 그것도 둘 다 신호를 보내거나 감지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춘 마법사여야 가능한 일이었다. “고맙습니다.” 정신 이름보다는 ‘네냐플의 마녀’라는 이름으로 더 자주 불린다던 레오멘티스 교수였다. 신입생은 그녀의 수업을 들을 일이 거의 없어 잘 실감하지 못했지만 고학년이 될수록, 그리고 마법사의 길을 가게 될수록 그녀의 이름에 먹던 음식도 안 넘어가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학생들이 많아지는 모양이었다. 네냐플 곳곳에 있는 낙서들 중에 가장 자주 이름이 등장하는 교수도 그녀였다. 백살이 넘었다는 수근거림, 인간이 아닌 무언가와의 혼혈이라는 소문 따위가 돌아다녔지만 굳이 해명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런 가운데 퇴학을 앞둔 학생에게도 용서 없는 학사관리, 한창 연구중인 손님도 일언지하에 쫓아내는 포도원 출입 관리는 하루하루 악명을 드높이는 중이었다. 그러나 누구의 부탁때문이었든 레오멘티스 교수는 지금껏 조슈아의 일을 많이 도와주었다. 조슈아가 정식으로 절을 하고 고개를 들자 노려보는 듯 하던 눈빛이 약간 부드러워 졌다. “가서 그분의 무거운 짐을 대신 져드리지 못하는 마법사는 누구나 자신을 책망하게 될 수 밖에 없다.” 조슈아는 군간 망설이다가 물어보았다. “나 역시 되도록 그분을 방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혹시 교수님께서는 소원 거울을 만드는 방법을 아십니까?” 고개가 저어졌다. 잠깐이나마 기대했던 마음이 맥없이 꺼졌다. 교수의 말이 이어졌다. “소원 거울은 평소에 주춧돌의 형태로 있다가 소원을 빌려는 자가 와야만 나타난다고 하지.” 조슈아가 눈을 깜빡이는 데 뜻밖의 말이 이어졌다. “그 주춧돌이 한때 네 가문의 영지에 있었지. 지금은 사라졌지만.” “사라졌다고요?” 페리윙클에 있었다던 주춧돌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조슈아는 그 돌을 직접 본 일이 없었다. 켈스니티가 해준 이야기 속에 있었기에, 그리고 꿈속에서 켈스니티가 보여주었기에 지금도 당연히 있겠거니 하고 여기고 있었다. 다만 몇 백년 동안 거기서 거울을 만들지 못했으니 힘이 사라진 것이겠거니 여겼을 뿐이었다. “아직 있었다면 다시 힘을 불어넣으려고 시도라도 해 볼 수 있었겠지.” “저기, 난 그게 지금도 있을 줄 알고 있었는데.........” 레오멘티스 교수의 미간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그 섬의 사람이 그렇게 말하던가? 그게 없어진 것은 굉장히 오래된 일이야.” 조슈아는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 보니 켈스니티 말고는 누구도 조슈아에게 그 주춧돌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 켈스니티의 시대에는 물론 있었을 것이다. 그게 그 후 사라졌다하더라도 비취반지 성에 지박되어 있던 켈스니티로서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켈스니티는 조슈아와 함께 페리윙클에 갔었다. 그러니 그 또한 주춧돌이 사라진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수백년이 흐르는 동안 자연히 없어진 것이라고, 그리고 어차피 쓸 수 없는 것이니 관계없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어쨌든 켈스니티는 그곳의 주춧돌을 고칠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가나폴리의 땅에 들어가 보려 했었다. 아나로즈가 생전에 고쳐주지 않았으니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다고 단정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주춧돌은 일찌감치 힘을 잃은 상태였죠. 그게 사라진 것까지는 몰랐지만 있다해도 별 다른 방법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교수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렇지가 않아. 가나폴리의 기록 속에서 거울 주춧돌의 마력이 저절로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없어. 버려진 채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해도 한번 깃든 힘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야. 다만 오래 잠들었던 힘ㅁ을 되살리기에 위해서 필요한 조건을 채우지 못했을 뿐인 게지.”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조여들었다. 뒤이어 묻는 조슈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조건이라고요? 어떤 건가요? 알고 계신가요?” “편재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강한 마력. 네가 말한대로 몇 백년 동안 살아남아 악의 무구와 싸우고 계신 노을 섬의 그분이라면 충분히 갖고 계실 강대하고 정화되었으며 집중된 마력.” 조슈아의 시선은 레오멘티스 교수에게 있었으나 초점은 이미 다른 곳으로 가 있었다. 생각이 소용돌이 쳤다. 그렇다면 아나로즈는 정말로 거울을 다시 만들 힘을 가졌는데도 일부러 해주지 않았다는 것인가? 티치엘이 대신 물었다. “교수님께서는 그 동안 거울을 연구하셨나요? 그래서 그런 결론을 얻으셨나요?” “네 아버지가 가나폴리의 인형을 연구하는 동안 난 한가롭게 아이들과 입씨름만 하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게냐? 하지만 인형과 마찬가지야. 가나폴리가 사라진 이 세상에는 그들이 쓰던 깨끗하고 강한 마법이 없이 때문에 완전한 창조는 거의 불가능해. 그런 마법은 옛 왕녀가 대륙을 지키고자 시전한 ‘소멸의 기원’속으로 사라져버렸어.” 조슈아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렇다면 노을섬의 그분은 어째서 그런 마법을 갖고 계씬 건가요? 그분은 가나폴리 멸망 후에 태어나신 분인데?” 레오멘티스 교수의 입가에 냉소가 걸렸다. “네가 말하기 던에 그분이 정확히 누구인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지 못했으나 그분처럼 위대한 마법사에 대한 기록이 어찌 포도원에 전혀 없을 수 있겠느냐. 포도원 깊은 곳 어딘가에 ‘노을 섬의 마녀’라고 불렸던 그분에 대한 기록을 본 일이 있다. 그러나 그분의 마력은 한때 노을섬 전체에 마법을 공급했던 가나폴리 시절의 마법, 즉 운반되어 온 악의 무구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악의 무구라고 부르지만 그건 세상이 멸망할 뻔했던 자의 입장에서 붙인 이름일 뿐이야. 악의 무구를 이루는 힘은 가나폴리 마법과 다를 것이 없다. 다만 갑자기 나타난 그런 강대한 마법을 당시 우리 세계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였던 지타시조차 혼자 가눌 수 없었던 거지.” “그게 악이 아니라며, 어째서 그분은 무구의 힘을 봉인하기 위해서 그런 세월을 바쳐야 합니까?” “악이란 태어날 때 받는 낙인 따위가 아니야. 그 힘을 받아들일 수 없는 세계에서는 단지 악일뿐. 강한 힘은 반드시 악이 되는가? 그 대답은 누구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악의가 없는 폭풍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목숨을 잃은 사람에게는 악일 수 밖에 없지.” 평소 생각하던 의견과 달랐지만 반박할 수는 없었다. 비록 저것이 레오멘티스의 개인적 견해라 해도 마법사가 아닌 조슈아가 옳고 그름을 분별할 방법은 없었다. 잠시 후 문득 허공을 올려다 본 레오멘티스 교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돌아서 책상 아래의 연구실로 내려갔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에 돌아온 교수는 그리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티치엘, 네가 내려가서 네 아버지와 대화해 봐라. 난 더 얘기하고 싶지 않으니까.” 티치엘이 날듯이 뛰어 내려가고 조슈아는 기다렸다. 레오멘티스 교수는 잠시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매다시피 하고 있다가 물었다. “너는 영혼조차도 거울을 통과할 수 있다고 믿는건가?” 조슈아는 약하게 웃었다. “그 거울은 마음을 읽는다고 하더군요. 제 마음을 읽어주겠죠.” 이윽고 레오멘티스 교수는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두루마리를 하나 펼쳐 들자 빛으로 된 작은 그림이 허공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다른 것을 펴자 또 다른 형상이 떠올랐다. 빛으로 된 표범은 달리는 모습을 취하다가 다시 사라졌다. “교수님 한 가지만 더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교수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대꾸했다. “말해.” “가나폴리의 거울을 연구하셨다고 하셨는데, 혹시 찬트에 대해서도 아십니까?” “찬트로 열수 있는 거울들이 있지. 그러나 소원 거울은 아니야.” “그보다..찬트 중에 혹시 시간을 멈출 수 있다거나, 그런 것도 있습니까?” 그제야 고개를 든 레오멘티스 교수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왜 그런 것을 묻지?” 설명하기가 어려워 조슈아는 머뭇거렸다. “그게 아니라면, 일정한 시간을 계속 되풀이하게 된다거나...그런 것은 없습니까?” 교수가 책상 끄트머리에 놓인 서안으로 다가가 손을 얹었다. 잠시 후 표지도 없이 십여장의 종이를 끈으로 맨 것이 서안 위로 떠올랐다. 교수가 그것을 펼쳐 읽었다. “그런것도 있긴 하군.” 조슈아도 책을 보고 싶었지만 섣불리 보여 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티치엘에게 부탁해서 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교수가 쓰는 주문은 티치엘에게 허가된 주문과 질이 달랐다. “하지만 있었다는 기록뿐이야. 고작 두 소절밖에 남지 않았으니 이걸로 는 아무것도 할수 없겠지.” “혹시 그 두소절만이라고 보여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레오멘티스 교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안 된다는 말이 막 입 밖으로 나오려는 듯 한 순간이었다. “어차피 찬트는 악보를 읽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어. 들어도 따라 할 수 없는 것이 찬트니까. 볼테면 보거라.” 조슈아가 재빨리 다가가 책을 들여다보는데 티치엘이 올라왔다. 그러나 잠깐으로도 충분했다. 책에서 고개를 들자 상기된 티치엘의 얼굴이 보였다. “좋은 소식이야.” 그렇게 말하더니 말을 이으려다 머뭇거렸다. “아니지. 좋은 소식이 아닌가? 어쨌든 아빠 말로는 비행선을 굳이 보내달라고 부탁하지 않아도 될 거래. 누군가가 이미 이쪽으로 갖고 오고 있는 중이거든. 수삼일 안에 도착할 모양이야.” “대체 누가?” 쥬스피앙 말고 비행선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또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러려면 엄청난 금이 든다. 누가 그걸 감수한단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하던 조슈아는 그 배를 마지막으로 갖고 있던 사람이 쥬스피앙이 아니었음을 떠올리며 의혹에 사로잡혔다. 설마 아직도 돌려주지 않았던 건가? 아니나 다를까, 예상한 이름이 들려왔다. “히스파니에 님이 오고 계셔.” 계단참에 선 보리는 망설였다. 2층은 아래였다. 그가 가야 할 도토리 빌라는 그 쪽이었다. 그는 3층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그는 마음을 결정하고 3층으로 올라갔다. 저녁식사 끝난 지 좀 지났으므로 학생들은 대부분 방에 들어갔을 시각이었다. 보리스는 맨 끝방 앞에 멈췄다. 빌라가 아닌 그 방에는 짤막한 이름표가 붙어있었다. 조슈아 폰 아르님. 보리스는 문을 두드렸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그는 한 번 더 두드려 보고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넷이 쓰도록 만들어진 다른 빌라들보다 더 넒은 거실이었다. 넒은 것뿐 아니라 느낌이 사뭇 달랐다. 바닥에는 작은 무늬가 점점이 흩어진 연갈색 모피가 양탄자 대신 깔려 있었다. 그 위에 놓인 상앗빛 테이블 위에 뭔지 모를 종이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 외에는 책꽂이 하나, 벽에 걸린 그림 하나 없는 흰 벽 뿐이었다. 깨끗하긴 했으나 어딘가 모르게 황량해 보였다. 흑갈색 별들을 쌓아올린 벽난로에도 불이 꺼져 가고 있었다. 좌우로 두 개의 문이 있었는데 하나는 닫혀 있었다. 보리스는 열린 문쪽으로 가서 들여다 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그는 닫힌 문을 돌아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결국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지?” 익숙한 목소리가 대답해왔다. 문을 열자 침대에 앉아있는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 “넌 누구지?” 보았는데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조슈아의 모습을 한 소년은 침대에서 일어나 슬리퍼를 신었다. 몸에 걸친 헐렁한 실내복 탓인지 또 다른 조슈아보다 훨씬 말라보였다. “아아 생각났어. 유령이 가까이 오지 못하는 사람, 봐 조용해졌네.” 소년은 보리스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앉아.” 보리스는 순순히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소년은 웃었다. “날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난 막스 카르디야. 하이아칸에서는 아주 우명한 배우지. 모든 사람들이 내 공연을 보고 싶어 하지만 공연 기간이 짧기 때문에 입장권은 점점 비싸지지.” “.................” “상대역인 아드리아나 역을 하는 사람은 뮤치아 베네벤토라는 휼륭한 여배우이고 아름다운 사람이야. 난 그녀의 열정을 좋아했어. 무대에 대한 열정. 자부심. 어떻게 지내고 있는 지 가끔 궁금해.” 막스 카르디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그러나 얼굴이 창백했디 때문에 오히려 아픈 것 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내 얼굴을 몰라. 난 감녀을 쓰고 있거든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면 난 가면을 쓰지 않을거야.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 숨겨야 할 소공작의 신분을 내게서 분리해버렸거든. 난 자유롭고, 마음껏 살아가도 돼. 아무것도 내 발목을 잡지 않아.” 그렇게 말한 그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는 나아갈 거야. 캄캄한 별 하늘 가운데 가장 작은 별의 땅 낮은 읊조림이었지만 보리스는 조금 놀라 상대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평범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낮아졌던 읊조림이 다시 커졌다. 아무것도 필요없지. 그를 살게하는 건 하나뿐. 한밤에도 타오르는 별 세상사람 모두에게 감로수는 내리는.... 청아한 고음이 뻗어나가다가 갑자기 푹 꺽였다. 내밀었던 손이 무릎으로 떨어졌다. 소년의 뺨에서 눈물이 한 줄기 흘렀다. “아무것도......필요없어..” 보리스는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소년의 시선은 먼 곳을 헤멨다. 가 닿을 수 없는 어떤 세계, 별 처럼 멀리 있는 곳을 보고 있었다. “말해봐.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전히 허공을 보고 있는 소년의 입술이 말했다. “너라면 어떨?? 네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너 대신 다른 사람을 책했어. 너를 돌아보지 않아. 하지만 항의도 할 수 없어. 가짜니까. 사람의 피조물이니까.” 보리스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무슨 말을 듣고 싶지? 난 아무 해답도 줄 수 없어.” “해답은 필요 없어. 없다는 걸 아니까. 내가 묻고 싶은건. 소년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무릎에 놓인 손이 약간 떨렸다. “너라면 그들을 미워하겠어? 널 버리고 다른 쪽을 택한 그들을?” 보리스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말했아. “아니.” “못 하겟지. 역시?” 소년은 억지로 웃었다. “그래서 내가 사는 곳이 지옥이야. 그걸 할 수만 있다면 이 형벌을 받지 않아도 될 텐데. 미워할 수 없으니 사랑하지만 아무런 보답도 없어.” “보답을 바라고 사랑하진 않아.” “그거, 말장난에 불과 한 것 알아? 애정이 식은 것은 차라리 참겠어. 하지만 그들의 추억으로부터 밀려나 무가 되어버린 건? 널 전혀 몰랐던 것처럼 외면하는 건? 너를 너로 취급하지 않으며, 심지어 진짜를 방해하는 장애물로밖에 여기지 않는다면?” 보리스는 소년의 눈을 들여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면 그들을 사랑하는 것은 그만두는 게 좋겠어.” “그래, 그런데 난 그들이 없는 세상을 못 견디겠어. 나도 내가 이럴 줄은 몰랐어. 그들이 없어도 상관없을 줄 알았어. 그들이 나 대신 유리인형을 사랑해도 괜찮을 줄 알았어. 아...이건 그런 생각을 해서 주어진 형벌일까? 그렇다면 이제 생각이 바뀌었으니 모두 거두어 가면 안 될까?” 소년은 갑자기 손을 모아 쥐고 외쳤다. “난 반성했어요! 제발 꿈에서 깨게 해 주세요!” 덧없는 적막만이 응답해 오는 빈방에서 보리스는 소년의 기도를 들었다. 그 말고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신이어야 할 그는 아무 힘 없는 인간이었다. “대답이 없는 이유를 난 알아. 이 세상 모두가 나 대신 그를 사랑하지. 내기도를 들을 절대자 조차도.” 젖은 눈으로 조소를 머금은 카르디는 일어섰다. 그때 보리스가 말했다. “한 사람만은 아닐거야.” “누구?” 그럴리 없다는 눈빛이었다. 보리스가 말을 이었다. “널 만든 사람.” 잠깐 침묵이 흐르고 카르디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 정말로 그럴까? 그는 말이야, 날 움직여서 아버지를 죽이게 하려 했어. 그게 날 사랑하는 건가? 아니지. 이 경우는 말이야, 처음부터 날 만들지 않는 쪽이 더 날 사랑하는 거였어. 사랑했다면 나 따위 복제품은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고 . 그럼 난 하나였을 텐데, 그래, 만든 뒤에도 사랑을 실천할 방법은 있지 그게 정말로 날 사랑했다면, 내가 잠들었을 때, 이렇게 깨어나 지옥을 맛보지 못하도록 본체를 부쉈어야 했어!” 보리스는 시선을 창가로 보내며 말했다. “난 너 말고 인형을 본 일이 있어.” 카르디의 눈이 문득 커졌다. 보리스가 다시 그를 보았다. “물론 그들과 너는 다르지. 그들은 복제 인형이아이었어. 그리고 너처럼 인간과 똑같지도 않았고.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형을 만든 자는 그 인형을 몹시 사랑한다는 거야. 얼마나 사랑하느냐면, 인형을 살리기 위해 자기 살이라도 떼어 먹일 수 있을 정도지.” “....” 카르디는 침대에 앉았다. 시선을 떨어뜨린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넌 정말로 죽고 싶은 건가? 그럴거라고는 믿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은 아주 많으니까 괴로워 하며 기다릴 필요는 없어.” 보리스는 잠깐 말을 그쳤다가 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해보았더라도 다시 하지는 마. 난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로 온 이유는 하나 뿐이야. 내가 인형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쓰여서. 그뿐이야. 내가 인형을 본 일이 있다고 했지. 난 인형을 죽여 본 일도 있어.” 카르디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떨렸다. “죽였다고? 네가?”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다시는 죽은 인형을 보고 싶지 않아.” 둘의 눈이 오랫동안 마주쳐 있었다. 이윽고 카르디는 눈을 감았다. 보리스가 낮게 말했다. “자라, 내가 옆에 있으면 조용하다고 했지?” 카르디가 침대로 들어가 잠이 들때까지 보리스는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이윽고 일어난 그는 거실로 나와 문을 닫았다. 테이블 앞을 지나치는데 흩어져 있던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뭔가를 열심히 쓰고 고친 흔적이 가득했다. 고개를 돌리려던 보리스는 문득 기분이 이상해져서 종이 한 장을 집어서 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다른 장들은 집어 살펴보았다. 악보였다. 단 한곡을 수 없이 고친 흔적이었다. 처음 집어 놓았던 악보를 다시 들여다보던 보리스는 한동안 망설였다. 그러나 결국 내려놓고 밖으로 나왔다. 네냐플이 위치한 파노자레 산맥에서도 두 시간 가량 산길을 따라오르면 산중턱에 호수가 있었다. ‘숙녀의 호수’라고도 불리고 근처 강의 이름을 따 ‘야플리아 호수’라고도 불리는 그곳의 수면에는 아직도 살얼음이 엷게 퍼져 있었다. 하늘을 나는 배는 땅에 내릴 수 없었다. 야플리아 강이 있긴 하지만 사람들의 눈을 피해 네냐플로 오려면 이 호수가 최적의 장소인 셈이었다. 내리고 뜨는 것은 물론 배를 숨겨 두기에도 좋았다. 호수는 미의 극치호 -아직도 그 이름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정도 크기의 배라면 열대도 내릴 수 있을 듯 보였다. “막시민이 중얼거렸다. “아직 온 것 같지는 않네.” 티치엘의 전언에 의하면 히스파니에는 재작년부터 쥬스피앙에게 배를 돌려주지 않고 버티면서 한번만 써보자고 우겼던 모양이었다. 결국 쥬스피앙은 또 다시 옛날 ‘꼬마 도둑’에게 설득당하고 말았다. 쥬스피앙은 아니라고 펄쩍 뛰겠지만 가만히 보면 그는 예전부터 히스파니에의 변설에 잘 넘어갔다. 피스파니에가 금을 써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쥬스피앙한테서 조종법까지 배워가며 급히 여기까지 오려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중요한 일일 것만은 틀림없었다. “내일쯤은 오시겠지.” 조슈아는 주위를 두리번대다가 말했다. “저기쯤에 묶어 놓는 것이 어떨까?” 그들은 큰 천에 검정 잉크로 편지를 써 왔다. 그걸 깃발처럼 매달 참이었다. 호숫가 쪽으로 내민 커다란 떡갈나무 가지에 천을 매달았다. 붉은 천이라 눈에 잘 띄리라 생각했다. “날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가자. 길은 어렵진 않긴 하긴 하더라만.” 산길을 내려오자 막시민이 말한 대로 이미 사위가 어두웠다. 학원 입구 근처에서 그들은 루시안의 하인과 마주쳤다. 지난번에 파이를 배달했던 자들 중 하나였다. “아이고, 도련님들. 뭐 하나만 여쭙겠습니다요.” 이 하인은 조슈아와 막시민 둘 다 각각 다른 의미에서 ‘도련님’이라는 호칭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몰랐다. 루시안이 도련님이니 그의 친구인 이들도 마찬가지일 뿐이었다. “뭔데?” “루시안 도련님께서 로글땡인가 뭔가 하는 파이가 드시고 싶으시다는데 당최 어디서 사야합니까요? 지난번에 다른 놈한테 건네받기만 해서 사는델랑 어딘지 모르겠구만요.” 막시민은 어이가 없어 인상을 썼다. “아니, 그 자식은 파이 백개를 작살내 놓고 아직도 그게 먹고 싶대?” 하인은 더 놀랐다. “그 백개를 다 드셨습니까요?” 막시민은 어깨를 움츠렸다가 조슈아에게 문을 가르켜 보였다. “너 들어가자. 내가 이 사람하고 같이 가서 파이 가갖고 올 테니까. 심부름 값 쳐서 톡톡히 받아내야겠으니 루시안 녀석의 병실에서 만나.” 조슈아가 놀라는 시늉을 했다. “네가 웬일이야? 귀찮아 하지도 않고.” 막시민은 대꾸 없이 아랫마을로 가는 소로로 내려갔다. 루시안이 다친 것이 신경 쓰일 수 밖에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조슈아에게 굳이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슈아는 학원 입구로 돌아섰다. 그리고 누군가와 마주쳤다. 막시민은 파이를 사서 돌아왔지만 시간이 늦어 병실 면회는 끝난 뒤였다. 병상을 지키는 사람에게 파이를 맡기고 일단 도토리 빌라로 돌아왔다. 보리스다 혼자 거실에 앉아있었다. “근신 할 만하냐?” “그다지.” 막시민은 하품을 하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옷과 신발을 벗어 던져놓고 침대에 쓰러져 잠들기까지 딱 오 분 걸렸다.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냄새였다. 덜 마른 나무와 톱밥의 냄새., 젖은 이끼 냄새 같은 것이 불씬했다. 그 다음은 목마름이었다. 무심코 손을 움직이려는 순간 또렷한 통증이 의식을 선명하게 만들어주었다. 자신은 갇혀 있었다. 좁은 곳에. 조슈아는 팔 다리를 하나씩 움직여 보려 했다. 어느 것도 자유롭지 않았다 좌우는 좁았고 눈앞에도 아주 가까운 무언가가 있었다. 잠깐 생각해본 결과 그는 자신이 갇힌 곳이 일종의 상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득해진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느 정도는 냄새 탓이었다. 처음 느꼈던 냄새 너머에 무언가 고약한 냄새가 도사리고 있었다. 상자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냄새였다. 생나무 냄새는 아마 상자에서 나는 것일듯했다. 주위는 고요했다. 그런걸로 보아 이곳은 네냐플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다른 곳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유령이 하나도 없을 수 있을까. 여긴 대체 어딜까. 입은 자유로웠다. 그러나 조슈아가 입을 열어 누군가를 불러보기 전에 상자가 세차게 흔들리더니 뚜껑이 열렸다. 갑자기 밝아져 앞이 보이지 않았다. “깨셨군요.” 침착한 목소리였다. 오래전에 들어보았던 목소리였다. “불편하겠지요. 조금만 참으세요.” 조슈아는 잠시 생각 한 후 상대를 불렀다. “애니 형.” 대답이 들려오기 까지 조금 긴 시간이 걸렸다. “기억하고 있군요. 아니, 그래 잊을 리가 없지요.” 점차 시력이 돌아왔다. 돌이 된 천장이 눈에 들어오고 울퉁불퉁한 벽이 사방으로 이어지는 것도 보았다. 동굴안인 듯 했다. 좌우를 돌아보려 했지만 누워있던 상자의 벽 때문에 잘 볼 수가 없었다. 조슈아는 그 상자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무언가를 깨닫고는 말했다. “이건 관이로군요.” “그래요.” “산 채로 묻기라도 할 셈인가요?” “아니오.” 애니스탄이 다가왔다. 조슈아의 머리 위로 나타난 얼굴은 기억하던 것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묶지 않은 긴 머리는 흐트러졌고, 얼굴은 바싹 마른데다 사람의 것 같지 않게 희었다. 무엇보다도 기이한 것은 표정이었다. 초점이 또렷하게 맞지 않아서 어디를 보는지 불문명한 눈, 멈칫 거리며 일그러지는 입술..... 이윽고 애니스탄은 손을 들어올렸는데 그것 조차 해골처럼 말라있었다. 그 손이 조슈아의 얼굴로 다가왔다. 손등이 닿았다. 차가웠다. “미안합니다.” “무엇을 사과하는 건가요?” “지난 번에 당신을 죽일 뻔 한 것.” 그걸 사과하는 것을 보니 죽일 셈은 아닌건가 싶기도 했다. 조슈아는 손을 다시 움직여 보며 말했다. “테오 형이 죽었어요. 알고 있나요?” “네 압니다. 저 때문에 죽었으니까요.” 생각지 못한 이야기여서 조슈아는 눈을 몇 번 깜짝거렸다. “애니형 때문이라구요?” “본래는 제가 마시려던 잔이었지요. 녹색 목의 잔. 바닥에 독을 발라 두었거든요. 테오와 축배를 들게 됐을때 그의 앞에서 죽을 생각이었으니까. 그에게 이유는 말해주지 않을 작정이었죠. 제가 죽고 나면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었을 테죠. 그러나 축배를 들 날은 오지 않았지요. 그와 전 실패했으니까. 그런데 그는 왜 축배를 들었을까. 누구와 마셨을까. 모르겠어요. 그가 왜 자신의 잔을 두고 내잔을 마셨는지도요.” 조슈아는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반년이나 잠들어 있었기에 개어났을 때 테오의 죽음은 이미 오래된 일이 되어 있었다. 다만 잔이 두 개가 있었고, 누군가과 샴페인을 마신 듯했다는 이야기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독은 검출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잔 바닥에 조금만 독을 발랐다면 샴페인을 따랐을 때 녹았을 테고 마셔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조슈아는 그 상황이 과거 그가 겪었던 악몽과 비슷하다는 것을 때달았다. 자신이 마셨어야 할 잔을 실수로 마셨던 이브노아, 애니스탄의 잔을 대신 마신 테오, 마치 응보처럼. “다신을 무얼 원하죠?” 애니스탄은 손을 떼고 조슈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얼굴은 회색으로 별했다. 늘어진 머리카락이 관에 닿을 듯 했다. “당신과 같습니다.” 얼굴이 사라졌다. 다시 보이는 것은 천장뿐이었다. 이윽고 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무언가를 자르고 있었다. 사각. 서걱. 서걱. 조슈아는 생각을 짜냈다. “난 원하는 것이 나주 많아요. 애니형은 하나뿐인가요?” “하나뿐이지요.” “그렇다면 카르디와 관련된 거군요.” 소리가 멈췄다. “카르디?” “내가 두 번째로 가졌던 이름을 그에게 줬어요. 막스 카르디.” 잠시 사이를 두고 탄식이 흘러나왔다. 중얼거림이었다. “그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모두 내 죄지. 내가 갚아야지. 난 그에게 사죄해야만 해. 그의 고통을 상실감을 잃어가고 있는 몸과 마음을. 그는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축복받으며 태어난 모든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럴 수 있다면 그래야겠지요. 당신은 어떻게 책임을 질 건가요?” 애니스탄은 다시 일어나 조슈아에게 왔다. 다시 본 그의 표정은 슬픔과 기쁨이 한데 뒤섞여 어떤 감정인지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새 본체를 만들어야지요.” 조슈아와 애니스탄의 눈이 마주쳤다. 껍질만 남은 입술이 말했다. “네가 줄 거잖아.” 11. 나의 아버지 “아버지, 제게 용기를 주세요. 제것이 아닌 것을 버리게 해주시고 제것인 것조차 버리게 해주세요. 저 혼자 해보려 했지만 모든 것이 허사였어요.......“ 다음날은 이레에 한번 있는 ‘르노아의 날’ 즉 휴일이었다. 그날은 수업이 없었다. 대부분의 학생이 느지막이 아침을 먹으로 내려왔다. 보리스는 막시민의 방문을몇 번 두드려 보고 나서 혼자 식당으로 내려갔다. 테이블에 앉아있는데 저만치에서 조슈아가 들어왔다. 다가와 테이블 맞은편에 앉을 떄 까지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대가 입을 여는 순간 알아차렸다. “네 옆은....조용해서 좋아.” 그는 식사를 주문하지도 않고 테이블에 머리를 묻으며 엎드렸다. 보리스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식사가 나오자 잠시 상대를 바라보았지만 곧 혼자 숟가락을 들었다. 거친 삶을 살아왔을 것 같은 인상과는 달리 보리스는 단정하게 식사하는 편이었다. 보리스가 조용히 식사하는 동안에 맞은편에 웅크린 회색 고양이는 볕을 받으며 잠을잤다. 다른 날 같으면 꽉찼을 시간이지만 식당은 한산했다. 첫 휴일이아 아침을 거르고 늦잠을 자는 학생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꽃눈 모양의 창으로 들어온 아침볕이 빈 테이블에서 한가롭게 흔들거렸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희미한 피아노 소리, 그리고 식기와 포크가 가끔씩 부딪치는 소리뿐이었다. 이윽고 식사를 마친 보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색 머리가 조금 움직이더니 고개를 들었다. “가려고?” 보리스가 대답하지 않자 다시 말했다. “네가 옆에 있지 않으면 잠을 못 자겠어.” “따라와.” 보리스는 기숙사 밖으로 나갔다. 아나야 사반테 관까지 가서 미로 정원에 들어가 긴 의자에 앉았다. 나무들 사이에 지나온 차가운 바람이 둘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그러나 잠시 후 바람이 잤다. 보리스는 곁으로 흐르는 수로에 손을 넣었다. 아주 차디찰 텐데 한참 동안 그러고 있었다. 서 있던 카르디가 물었다. “차갑지 않아?” “차갑지.” “그런데 왜 그러고 있어?” 보리스는 함참동안 대답하지 않다가 말했다. “옛날 생각이나게 해줘서. 차가운 물, 찬바람, 추위 이런 것들이.” “좋은 추억이야?” 보리스의 고개가 약하게 끄덕여졌다. 이윽고 손을 꺼낸 그는 발갛게 언 손을 잠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을 닦거나 품에 넣어 녹이지도 않았다. “나도 좋은 추억을 떠올려보고 싶지만 ...다 내것이 나니니까. 결국 고통스러워질 뿐이야. 좋을면 좋을수록 더 고통스러워.” “네가 생겨난 후에 너만이 갖고 있는 기억이 있을텐데?” 카르디는 대답없이 몸을 돌려 미로를 몇 발짝 걸어갔다. 그러나 멀리 가지 ???ㄴㅎ고 곧 되돌아왔다. “거기에 정말 의미가 있을까?” 보리스는 잠시 생각하더님 말했다. “네가 너만의 힘으로 단 한사람의 호의라도 얻었다면.” “.....” 카르디의 표정에 망설임이 나타났다가 곧 지워졌다. “그래. 그렇다면 다른 기억은 전부 그에게 넘겨줘야 하는건가? 내겐 권리가 전혀 없는 건가? 아무리 답답하고 억울하더라도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건가?” 지금껏 그 질문에 대답해 준 사람이 없었다. 공작부인도, 조슈아 조차도 답하지 못한채 회피하던 질문이었다. 보리스가 대답했다. “평화를 얻고 싶다면.” 카르디의 눈동자가 크게 열리며 흔들렸다. “갖지 않겠다고 생각하면, 네 마음의 전쟁은 끝나.” 둘의 시선이 맟닿았다. 바람이 불어와 둘의 머리카락을 서쪽으로 날려보냈다. 카르디의 얼굴에 이윽고 어떤 결심이 나타났다. 시선을 돌렸을때 막시민의 모습이 모였다. 기숙사로 이어지는 길 쪽이었다. 달려오고 있었다. 카르디의 입술에 경련이 일어났다. “......” 두 사람 앞에 도착한 막시민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조슈아 봤어?” 보리스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막시민이 주먹을 꽉 쥐면서 소리쳤다. “그 자식 어젯밤에 학원에 돌아오지 않았어!” 그는 곧 카르디를 돌아봤다. “너, 어제 조슈아가 돌아오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지?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냐? 어디에 가 있는지 전혀 몰라?” 카르디는 고개를 돌렸다. 긴 의자 끝을 내려다보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그러나 꽉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다드 ㄹ모른다 이거지, 그래, 나나 그 빌어먹을 놈을 찾아다니는 거지, 너야 그자식이 없어지면 더 좋을거 아니냐?” 막시민이 가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조슈아가 없어진다고 내가 네 친구가 되는 게 아니란 것 쯤은 알 고 있더.” 언젠가 막시민이 자신이 조슈아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카르디의 입에서 듣는것은 또 달랐다. “그가 가진 것을 단 하나라도 빼앗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아. 기억도, 사람도, 미래도 , 전부 다!” 막시민은 대답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넌 나를 조슈아로도, 카르디로도 인정해주지 않았어. 내가 네 옛 친구가 아니라면 새 친구가 될 수는 없는거야? 얼굴이 같으니까 기분이 나빠서 싫어? 내 존재가 조슈아에게 끼쳤던 고통 때문에 용서가 안 돼? 그 모두가 내 탓이 아니란 건 아무 상관이 없는 거야?” 카르디의 목소리가 끝내 갈라졌다. “키아본도....히스 할아버지도...오래 살았지. 그 이유를 이제 알겠어. 주변에 누군가가 있어 주어서야. 그에겐 네가 있어..난 잃어버렸어. 그런 난 결국...넌, 넌 ‘조슈아 폰 아르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내게 얼마나 힘든지 한 번이라도 헤아려보려 한 적이 있너?” 막시민이 대답했다. “그래,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네게 내 친구였던 시절의 기억이 있다면...” 말을 끊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막시민에게도 어려운 말이었다. “내가 이럴 수 밖에 없는 놈이란 걸 알거다. 정말 미안하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만이 귓가를 지나갔다. 막시민의 입에서 얕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가 가려는 순간 . 카르디가 불렀다. “막시민.” 막시민은 잠시 사이를 두고 돌아보았다. 카르디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조슈아가 어디있는지 ....내가 알고 있어.” “뭐라고?” “애니스탄....뵐프와 함께 있어. 학원 밖....어딘지 내가 아고 있어.” 막시민이 얼굴이 충격으로 굳어졌다. 애니스탄이 어째서 조슈아를? 인형만을 노린다고 생각했는데? “너, 넌 어째서 알고 있지?” “오래전부터 줄곧 불렀어. 자신에게 오라고. 난 거절했지만...그는 내게 새로운 생명을 주고 싶어 했어.” “대체 그게 조슈아와 주슨 관계인데? 응? 그가...” 막시민은 말을 멈췄다. .새로운 생명이라는 말이 가시처럼 목에 걸렸다. “설마, 그 말은 본체를 새로 만들기 위해서..조슈아를 죽이기라도 하려는 건가?” 카르디의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과 동시에 막시민은 주먹을 움켜줘며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내질렀다. “으아아윽! 이런 말도 안되는!” 보리스가 일어났다. “학원의 마스터들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좋겠어.” “그 자가 있는 데가 어디냐? 알고는 있는 거냐?” 카르디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지금도 목소리가 들려와. 그가 오라고 부르는 소리가. 찾을 수 있어.” 막시민은 생각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그래. 도움이 필요할 거야. 젠장, 쥬스피앙 아저씨가 있었어야 되는데 갑자기 잡아올 수도 없고 티치엘부터 찾아보자. 그 애라면 레오멘티스 교수님을 움직여 주시겠지.” 세 사람은 뛰다시피 기숙사로 돌아갔다. 여학생 기숙사인 동탑으로 갔지만 동행한 여학생이 없었으므로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문지기에게 티치엘을 입구로 불러다 달라고 부탁해놓고 셋은 기다렸다. 막시민은 머리를 싸 쥐고 모순적인 말을 중얼거렸다. “무사하지 않기만 해봐라. 그랬다간 내가 반드시 무사하지 않게 만들어 버린다. 무시하면 무사하게 무사하게 만들고....” 카르디는 웅크린 채 몸을 약간씩 떨었다. 밖에 오래 있어서 추운 모양이었다. 그는 이윽고 보리스에게 몸을 돌렸다. “보리스, 이런 부탁이 무리한 건 알지만.” 보리스가 돌아보자 카르디가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같이 가주면 안 될까?” “....” “위험하게 하지 않을게. 네가 말했잖아. 인형사는 인형을 사랑한다고. 내말을 들어줄 거야.” 티치엘이 계단위에서 나타났다. 카르디가 말을 이었다. “내가 거기서 꼭 해야 할 말이 있는데 ...유령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제정신을 유지하기는 힘들 것 같아. 정오 무렵, 날이 흐려졌다. 순녀의 호수는 고요했다. 수면에 회색 구름이 가라앉다가 이윽고 몇 가닥의 빛이 번졌다. 아직 비는 내리지 않았다. 얼마 뒤 멀리서 우르릉대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이 길 썼다는 말, 나중에 교수님한테 하면 안 돼. 진짜로.” 티치엘은 다시 한 번 다짐을 받았다, 네 사람은 호수 변에 놓인 널찍한 돌 위에 서 있었다. 평범한 바위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 돌은 포도원 뜰에 있는 숨겨진 마법진과 연결되어 있어 이곳까지 바로 이동해 올 수 있었다. 그날이 르노아의 날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레오멘티스 교수를 비롯한 마법 마스터들은 수업이 없는 날 열리는 고문단 회의에 출석했다고 했다. 그 회의가 열리는 장소는 티치엘조차도 몰랐다. 마스터들의 도움없이 조슈아를 구해올 수 있다고는 티치엘도 장담하지 못했다. 그러나 카르디가 말했다. 자신이 인형사를 설득할 것이니 다른 사람은 곁에 있어 주기만 해 달라고. 그 말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막시민은 그랬다. 그러나 자?ㅁ으로서는 그 말이라도 믿어보지 않는다면 손 놓고 있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마스터들이 돌아올 저녁시간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쪽이야.”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카르디가 방향을 가리켰다. 막시민이 먼저 걸음을 옮기고 이어 카르디가, 그리고 티치엘과 보리스가 뒤를 따랐다. 호숫가 길에는 마른 잎과 눈 자국이 드문드문 이어져 있었다. 길은 점차 산속으로 들어갔다. 다들 두꺼운 겉옷을 가지고 나왔지만 카르디는 유난히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덜덜 떨었다. 얼굴도 점점 파래졌다. 단지 추위 때문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보리스가 자기 망토를 벗어 건네주었다. 카르디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아까도 말 했지. 난 추위를 좋아해.” 말라버린 강바닥을 지나갔다. 좌우로 뻗어 어른 골짜기는 높지 않았지만 머리 위에 납작한 바위가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어 보기만 해도 불안했다. 이윽고 길은 점차 좁아지더니 사라져버렸다. 거기부터는 좁디좁은 돌 틈만 이리저리 갈라져 있었다. 다들 방향을 택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보리스가 나서서 바닥을 살펴보았다. 기다리는 동안 티치엘이 말했다. “전에 교수님께 애니스탄이라는 학생을 기억하고 계씨냐고 여쭤보았었어. 포도원에서 막시민 네가 열람 기록을 찾아보자고 한 다음에.” 카르디가 돌아보자 티치엘이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기억한다고 하시더라고. 영리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소양이 좋아서 장래가 기대되는 학생이었대. 그런데 어느 날 조교직을 그만두고 떠나버렸다는 거야. 친구가 자기 도움이 필요하다고 부른다면서.” “소양이 좋다는 건 무슨 뜻이지?” “글세. 여러 가지 뜻이 있겠지만 아마도 악에 쉽게 물들지 않는 담백한 성미를 가리키는 것일거야. 그런 상미는 마법을 지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의외로 찾기가 힘들대.” 그 말을 듣고 저마다 생각에 잠겨 있는 가운데 모리스가 몸을 일으켰다. “최근 사람이 지나간 흔적은 남지않았어. 다만 동굴일 거라고 했으니 오른쪽이 가능성이 높겠지.” “왜?” “다른 곳은 다시 강바닥으로 이어져. 그쪽만은 산으로 오르고 있어.” 오른쪽을 택하게 곧 절벽을 돌아가게 되었다. 한 바퀴 돌자 뜻밖으로 벌판이 나타났다. 카르디는 이마를 짚고 있다가 말했다. "이 근처야.“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티치엘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을 막시민이 보았다. “왜 그래?” “......” 티치엘은 대꾸를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굳어져 있었다. 잠시 후 겨우 얼굴이 풀렸지만 여전히 놀란 기색을 완전히 감추지 못했다. “그 사람, 나한테 말을 걸어 왔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인형사가?” 티치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멈추래. 내가 마법사라는 것을 알았나봐. 만일 더 가까이 오면...조슈아의 일은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어.” “그 작자가 대체 어디 있는 건데?” 막시민의 말에 카르디가 대답했다. “여기서 아주 가까워.” 주위를 둘러봤지만 여전히 보이는 거라곤 마른 풀뿐이었다. 은신처가 될 만한 곳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얼마 뒤 티치엘이 말했다. “어쩌면 결계를 쳤는지도 몰라. 그렇다면 우리 눈엔 안 보일 테니까.” “너희 아버지네 집 같은 데 말이냐? 포도원이나? 그렇다면 주문 같은게 있어야 되는 거냐?” “그건 어떻게 만들었느냐에 달렸지. 어쨌든 만든 사람이 정해 놓은 방식을 모르고서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닫ㄹ 망설이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인형사는 바로 코 앞에서 그들을 보고 있을 수도 있었다. 조바심이 난 막시민이 발끝으로 땅바닥을 짓이기다가 카르디를 불렀다. “그 자한테 말이라도 걸어 봐. 그건 안 되나? 하여튼 그 자를 만나야 설즉을 하든 말든 하잖아?” “내가 너희들을 데려온 걸 알고 있어. 그래서 내게도 말을 걸지 않는 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이거 참, 계속 기다릴 수도 없고.” 그때까지 말이 없던 보리스가 티치엘을 돌아보았다. “결계란 이공간을 말하는 건가?” 티치엘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보리스가 등에 짊어지고 잇던 꾸러미의 천을 풀었다. 지난번에 조슈아가 물었을 때 대답할 수 없다고 했던 그것이었다. 안에서 검이 한 자루 나왔다. 천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보리스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티치엘만은 그 검을 보며 강한 불안감을 느꼈다. 검을 쥔 보리스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갑자기 검을 뽑아 허공을 베었다.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백색 칼날이었다. 언뜻 흰 잔상이 뻗어나가는 느낌 마저 들었다. 보리스가 다시 검을 꽂았을 때 뒤에 섰던 세 사람은 갑자기 더해진 한기를 느꼈다. 보리스가 바닥의 천을 다시 집는 동안 티치엘이 소리 쳤다. “저기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벌판이었던 곳에 동굴의 입구가 열려 있었다. 좀 더 자세히 보니 벌판과 희미한 경계로 겹쳐지며 떠 있었다. 벌판에 불던 바람이 동굴로 쓸려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안쪽은 어두웠지만 머 발치에 발그레하게 불기가 떠올라 있었다. 막시민이 말했다. “티치엘 넌 들어오지 마라. 네가 들어오면 눈치를 챌지도 몰라. 여기서 기다리다가 시간이 흘러도 아무도 나오지 않으면 학원으로 내려가서 도움을 청하든가 해.” 카르디가 맨 앞에서 발을 들여놓았다. 이어 막시민이, 그리고 보리스가 들어섰다. 티치엘은 다시 한 번 보리스의 검을 보았다. 검은 도로 천으로 둘둘 만 꾸러미가 되어 있었다. 촛불 몇 개가 한꺼번에 꺼져 버렸다. 애니스탄은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동굴을 타고 들어오는 바람 소리가 요란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돌아서서 모닥불 앞으로 가 잔가지에 불을 붙여 돌아왔다. 그리고 꺼진 초에 도로 불을 붙였다. “날씨가 좋지 않아.” 애니스탄은 다시 바닥에 주저 앉아 쓰던 것을 마저 쓰기 시작했다. 원 몇 개가 겹쳐진 복잡한 마법진을 그려놓고 구석구석 주문식을 써넣는 중이었다. 그 마법진 가운데 관이 놓여 있었다. “그렇더라도 준비를 해 둬야지요. 그가 오고 있으니 그토록 불러도 오지 않더니, 당신이 여기 있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움직여서.” 그 말을 들어야 할 ‘당신’은 관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으면서도 애니스탄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 처럼 말을 계쏙했다. “차가운 동굴이라 미안한 일입니다. 따뜻한 자리도 마련해놓지 못했죠. 오랜만의 재회인데. 내가 이 재회를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노력했는데, 이제 거의 다 됐습니다. 내가 그를 책임지기 위해 노력한 것을 보여줄 때가 다 됐습니다.” 이윽고 애니스탄은 일어섰다. 실험대에는 닳아빠지다 못해 부서질 지경인 작은 관이 놓여있었다. 그는 관을 여러 겹으로 묶은 끈을 살피고 준비한 시약을 확인했다. 이어 가슴속에 솜을 넣어 목에 걸린 것을 매만졌다. 쇠로 된 사슬 긑에 날카로운 금속 조각이 매달려 있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표면 때문에 살갗이 붉게 부풀었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준비가 끝났군요.” 애니스탄은 신발을 벗었다. 마법진 안으로 걸어 들어가 관 뚜껑을 열었다. 잠든 조슈아의 눈꺼풀을 건드렸다. 손끝이 닿자 입술이 가늘게 경련했다. “당신은 죄 없이 희생된 그 아이와는 다릅니다. 당신은 자신을 위한 일을 하는 것이니까요. 당신보다 완전한 본체는 없을 겁니다. 그냥 당신 자신이 되는 겁니다. 고통은 잠깐뿐입니다. 한 번 겪어보았으니 어쩌면 익숙할지도 모르겠군요.” 애니스탄은 관 옆에 놓았던 단도를 뽑아들었다. 짧고 단순한 모양이었지만 파랗게 날이 선 단도였다. 칼끝이 조슈아의 목선을 쓸어내렸다. 옷깃을 해쳐 명치를 찾아냈다. 그 옆에 예전에 빗나갔던 단도의 흔적이 흉터가 되어 남아있었다. “그 동안 그가 받은 고통을 잘 아는 당신은 기꺼이 교대를 해 주겠지요.” 단도가 높이 올라갔다. 손끝이 떨리는 순간, 관 속에 누운 자가 말하기라도 하는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는 내가 될 수 없어요.” 애니스탄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동굴 모퉁이 너머에서 걸어 나온 카르디가 마법진 앞에 앉았다. “난 나일 뿐이죠. 그는 내가 아니에요.” “어떻게 들어왔지?” “더 이상 그와 나를 동일시하지 말아요. 내겐 아무것도 필요없어.” 그렇게 말하며 카르디는 단도를 든 애니스탄의 손목을 잡으려 했다. 애니스탄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 “넌 아무것도 몰라. 이대로 있으면 곧 죽어. 네 본체는 이미 힘을 다 했어.” “내가 그걸 모르리라고 생각해요?” 카르디으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란 말입니다. 그래요 난 무서지고 있죠. 언젠가는 가루가 돼버리겠죠. 정신력도 약해져서 유령들의 속삭임조차 견디지 못하고, 밤 잠도 잘 수 없죠.” “넌 새 생명을 가질 수 있어. 무서지는 몸 따위는 허물처럼 벗어버리고 다시 건강하게, 수명을 다해 살아갈 수 있어.” “무슨 소용입니까? 그건 내가 아닌데.” 애니스탄은 카르디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네가 아니라니? 넌 조슈아 폰 아르님이야.” “난 조슈아가 아닙니다. 되지도 않을 겁니다!” 애니스탄의 얼굴에 분노가 서렸다. “넌 세뇌된 것 뿐이야. 네 것을 포기하지 마. 내가 되찾아줄 테니까.” 다음 순간 애니스탄은 말릴 틈 조차 없이 단도를 조슈아의 가슴에 내리꽂았다. “안 돼!” 기다리고 있던 막시민이 뛰쳐나왔다. 카르디는 애니스탄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잠깐의 실랑이 끝에 단도가 동굴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애니스탄은 기다시피 뒤로 물러났다. 막시민은 관을 내려다보았다. 핏줄기가 번져가는 것이 보았다. 그러나 다시 정확히 보니 상처는 아주 얕았고, 피는 조금 뿐이었다. 애니스탄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덜 덜 떨었다. “왜, 왜 안되는거지? 너희 중에 누군가가 술수를 쓴 건가? 누구지? 누가 방해를 한 거지?” 카르디가 말했다. “강령된 것이겠죠.” “그럴 리 없어. 여긴, 유령은 전혀 들어올 수 없어. 내가 일부러, 결계를 쳐서 막았어. 누가 들어왔나? 결계는 꺠어졌나?” 그때 보리스가 관 쪽으로 걸어왔다. 애니스탄은 보리스를 쏘아보더니 벽을 짚으며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너, 너지. 네가 결계를 열었지. 난 알고 있어. 그건 뭐지? 안 돼. 다 망칠 순 없어.” 막시민은 관 속의 조슈아를 일으키려 했다. 카르디는 관 앞에 앉아 애니스탄을 보고 있었다. 애니스탄은 떨리는 손을 품 속에 넣었다. 무언가를 더듬거려 찾았다. 곧 손에 움켜쥐었다. “모두 나가!” 애니스탄이 쥔 것은 빛을 내지도 않았고 특별한 기운을 내보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가 너무 꽉 쥔 나머지 날카로운 부분이 손바닥을 파고 들어 피가 흘렀다. “나가란 말이다!” 막시민은 귀도 기울이지 않고 조슈아를 관에서 끌어냈다. 잠드는 약이라도 쓴 것인지 조슈아는 도통 눈을 뜨지 않았다. “데려갈 수 없어....” 애니스탄이 한걸음 다가오는가 싶더니 한 팔을 휘둘렀다. 그 서슬에 손에 쥔 목걸이의 사슬이 끊어지며 날아갔다. 피가 흐르는 손에서 정체모를 강한 기운이 뻗어나가는 것을 느낀 보리스가 외쳤다. “엎드려!” 동굴의 천장이 일부 부서지며 돌조각과 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피는 점점 많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대로도 좋겠지......” 막시민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러나 말리기에는 늦어있었다. 애니스탄은 두 손을 높이 들었고 조각은 그의 손바닥에 막혔다. 피가 주르륵 떨어져 바닥에 고였다. 그는 통증조차 느끼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상관없어. 난 어떻게 되든지 ...방해하는 너희가 없어질 차례야.” 애니스탄이 다시 도사리는 순간 카르디가 벌떡 일어나 마법진 앞을 막아 섰다. “ 방해한 건 납니다. 나부터 죽일 건가요?” “비켜......” “나부터 죽이시죠.” 애니스탄은 무어라 더 말하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온 몸을 떨더니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조각 박힌 쪽의 팔이 먼저 기괴하게 부풀어 올랐다. 이어 어깨를 타고 몸과 머리로 침범했다. 옷은 산산이 찢어졌다. 비명도 신음도 아닌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떤 뜻도 담겨 있지 않은 울부짖음이었다. 부푼 팔은 처음에 언뜻 근육처럼 보였으나 곧 허물을 벗은 뱀처럼 번들거리는 것으로 변했다. 팔이었던 것은 흡사 뒤틀린 나무뿌리처럼 변했다. 팔이었던 것은 흡사 뒤틀린 나무 뿌리처럼 보였다. 다른 쪽 팔의 팔꿈치도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 아래 홀로 변하지 않은 왼손은 마치 장난감이 붙은 것처럼 보였다. 변화는 그의 입마저 삼켜버렸다. 이제 소리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가장 먼저 침착을 되찾은 보리스가 물었다. 이윽고 막시민이 조슈아를 돌려 업으려 애쓰며 외쳤다. “뭐긴 뭐야, 도망치라는 거지!” 그 순간 괴물로 변한 팔이 카르디를 향해 내리쳐졌다. 본능적으로 한발짝 물러섰으나 뒤따라 온 보이지 않는 압력은 피하지 못했다. 온몸이 충격을 받으며 밀려난 그는 동굴 벽에 몸을 비딪쳤다. “카르디!” 카르디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소매를 갈기갈기 찢겼고 왼팔 안쪽의 피부가 그가 숨기고 있던 상처처럼 갈라졌다. 보리스가 그를 일으켰다. 막시민은 조슈아를 들쳐맸다. 모구 입구를 향해 달렸다. 잠시 후 등 뒤에서 불빛이 사라졌다. 초도, 램프도 꺼졌다. 쿵쿵거리는 소리만이 사방을 울렸다. “어서!” 먼저 입구에 도착한 보리스는 티치엘을 보았다. 그녀가 소리쳐 물었다. “악의 무구가 변화를 일으킨 거지?” 그 말을 들은 보리스가 문득 미간을 찡그리며 멈추어 섯따. 뒤이어 뛰어나온 막시민이 둘을 보고 소리쳤다. “뭘 해! 어서 도망쳐!” 보리스는 카르디를 내려놓고 멀리 가라고 손짓하더니 동굴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조금 전에 꺼냈던 검을 풀어냈다. 그 모습을 본 티치엘은 두 손을 모으며 눈을 감았다. 잠깐 만에 그녀를 둘러싼 공기가 소용돌이쳤다. 동시에 하얀 광채가 솟아올랐다. “너희 뭘 하려는 거야! 저게 상대할 수 있는 놈으로 보여?” 막시민이 악을 쓰며 소리쳤다. 그때 조슈아가 그를 불렀다. “막군....날 내려줘.” “너 정신이 들었냐?” 내려선 조슈아는 조금 비틀거렸다. 그러나 깨어 있던 것 처럼 상황을 다 아는 눈치였다. 정신을 집중하려 애쓰는 그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쿵쿵 거리는 소리는 이제 눈 앞에 있었다. 캄캄한 동굴에서 벽력같이 뛰쳐 나왔다. 그때 검을 뽑아들고 있던 보리스가 몸을 수그리더니 발을 왼쪽으로 미끄러뜨리며 달려들었다. 반원을 그린 검이 오른손이 있던 곳을 베어 날려 버렸다. 검에서 하얀 기운이 흡사 얼어붙은 눈처럼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모리스의 머리 위로 압력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티치엘의 손에서 뻗어나온 빛나는 막에 무딪치며 튕겨나갔다. 충돌이 남긴 굉음이 사방을 울렸다. 쿠쾅! 들판의 풀이 끊어져 흩날렸다. 폭풍이었다 티치엘이 빛의 막을 유지하는 동안 보리스가 몸을 일으켜 검을 세워 잡았다. 팔이 잘렸으나 괴물은 비명조차 없었다. 버르적대며 도사리는 모습은 마치 거대한 고목같았다. 아니, 실은 어떤 형태라고도 부를 수 없는 뒤틀린 모습이었다. 티치엘은 빛의 막을 거두었다가 다시 한 번 더 넓게 만들어 전체를 감쌌다. 그러나 넓어지면서 약해진 탓인지 괴물이 달려드는 순간 막은 깨어졌다. 보리스가 구르며 피하자 괴물의 손이 바닥을 찧어 암반이 부서지며 돌이 튀어 올랐다. “보리스!” 티치엘이 품에서 짤막한 지팡이를 빼어들더니 팔을 높이 올리며 큰 수인을 그렸다. 허공에 빛으로 된 진이 세로로 그려졌다. 거기에 하얀 빛으로 된 화살이 수 십개나 뿜어져 나갔다. 화살들은 괴물의 몸에 부딪치는 순간 폭발을 일으키며 충격을 가했다. 괴물은 순식간에 동굴 입구까지 밀려났다. 막시민이 눈을 크게 뜨며 중얼거렸다. “뭐야, 우리쪽도 괴물이잖아?” 그러나 티치엘은 안절부절 못하며 소리쳤다. “저 자의 몸에 폭발 효과가 들어가질 않아!” 보리스가 벌떡 일어나 검을 몸 뒤로 꺽어 잡았다. 그의 검에서 눈보라 같은 흰 기운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바로 공격하지 않고 눈을 질끈 감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조금 전에 즉시 공격하던 모습과는 이상하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다시 일어선 괴물은 보리스와 티치엘 사이에 서 있던 카르디 쪽으로 달려들었다. 갑작스런 일이라 티치엘이 보호막을 칠 사이도 없었다. 카르디는 피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버티어내려는 것처럼 눈을 꼭 감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대여섯 걸음이나 떨어진 풀밭에 넘어져 있었다. 돌아보자 조슈아가 그의 몸을 껴안고 있었다. “어떻게....” 조슈아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아직은 강령 후유증을 견뎌낼 만큼 몸상태가 완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머뭇거릴 때가 아니었다. 막시민이 소리쳤다. “뒤로...아니, 앞으로 달려가!” 먼저 정신을 차린 카르기다 조슈아의 몸을 끌어당겼다. 세 걸음 앞으로 가서 함께 넘어지는 순간 등 뒤에서 굉음과 함께 단번에 살이 익어버릴 것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돌아볼 수가 없었다. 막시민이 더 앞으로 가라고 외치는 소리가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쿠쾅! 또 다른 굉음과 함께 이번엔 견딜 수 없이 차디찬 기운이 확 끼쳐왔다. 마치 눈이 내려 언 것과 같은 덩어리가 하반신을 뒤덮었다. 티치엘이 안절부절못하며 외쳤다. “위, 위치가 조금 틀렸어. 괜찮아?” 조금 전의 뜨거움이 없었더라면 순간 동상을 입었을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일어날 순 있었다. 돌아보자 들판 가운데 거대한 불덩이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불은 곧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괴물이 다시 손을 올리자 또 다른 불덩이가 손끝에서 이글거렸다. 충분히 커지는 순간 바람 소리가 일어나며 불덩이가 허공을 갈랐다. 그러나 보리스를 노린 불덩이는 다음 순간 산산산이 부서지며 사방으로 튀었다. 검으로 올려쳤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날아든 불덩이는 뛰어서 피하는 수 밖에 없었다. 곳곳이 불바다가 되었다. “이대로는 온 산에 불이 난닥!” 이윽고 괴물은 흩어진 적들 중 누구를 책할지 가늠하는 것 처럼 잠시 멈추어 섰다. “티치엘, 불을 꺼라. 이쪽은 내게 맡기고.” “괜찮겠어?” 보리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티치엘은 몇 걸음 물러나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보리스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검에 일어났던 흰 기운은 한결 가라앉아있었다. 다섯 발짝 가량 남은 순간 보리스가 바닥을 걷어차며 달려들었다. “하!” 괴물은 팔을 들어 후려치려했다. 보리스는 몸을 틀어 피하며 한쪽 어깨를 그었다. 피인지 다른 것인지 모를 거무튀튀한 액체가 흩뿌려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미 잘라졌던 손이 날카로운 칼처럼 변하더니 보리스를 향해 찔러져 갔다. 조슈아가 소리쳤다. “그 자의 손에 다쳐선 안 돼!” 보리스는 가까스로 피하며 검 손잡이 쪽을 올려 방어 자세를 취했다. 애써 몸을 일으킨 조슈아는 다시 한 번 눈을 꾹 감으며 남은 정신력을 끌어 모았다. 이어 눈을 뜬 군단, 그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뛰어 올라 괴물의 목을 걷어찼다. 흡사 하늘을 날기라도 한 모습이었다. 걷어찬 목이 꺾이며 괴물의 몸이 뒤로 무너졌다. “.......” 맞은편에 착지한 조슈아는 괴물이 일어나 자신을 향해 돌아서는 것을 보았다. 그것으로도 성공이었다. 조슈아에게는 무기도 없었다. 어차피 있었다 해도 소용없었을 터였다. 포도원에서 연구한대로라면 악의무구가 침범한 자의 몸은 일반적이 ㄴ무기로 상처를 입힐 수 없엇다. 그것을 생각할 때 보리스가 든 것은 평범한 검이 아니었다. 그러니 보리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윽고 보리스는 검을 바로 세우며 최후의 일격을 가할 태세를 취했다. 이것으로 죽을리는 알수 없지만 상식적인 의미에서라면 죽어야 했다. 앞으로 두 걸음, 빠르게 내디디며 달려든 보리스가 괴물의 어깨를 내리쳐 갈랐다. 심장이 있는 곳이며, 처음 조각이 스며든 그 팔이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외침이 울렸다. 카르디였다. “안 돼!” 괴물의 몸에서 거대한 압력이 격출 되었다. 사방의 돌과 풀이 모조리 일어났다. 보리스는 물론이고 가까이 있던 조슈아, 카르디 모두가 뒤로 날려가 바닥에 처박혔다. 압력을 직접 받은 곳의 옷은 폭풍을 견딘 돛처럼 갈기 갈기 찢어졌다. 그와 동시에 티치엘의 마법이 효과를 일으켰다. 그녀를 중심으로 거대한 물의 기운이 일어나더니 소용돌이가 되어 휘몰아졌다. 들판의 불이 모조리 꺼진 것은 물론이고 사방이 폭우라도 맞은 것처럼 변했다. 보리스는 고개를 들며 괴물을 보았다. 옷이 찢어진 곳에 생채기가 무수히 났지만 그는 그보다 머리가 젖어버린 것이 더 불편했다. 그가 몸을 일으키는데 카르디가 비척비척 일어나며 그를 불렀다. “보리스 잠깐만..........” 카르디는 보리스가 빌려주었던 방토를 벗었다. 망토로 덮었던 부분은 조금 전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부사했다. 그러나 본래 상처가 있던 팔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너덜거리는 소매 안으로 피부가 벗겨지고 피와 진물이 짓이겨져 흡사 생가죽을 벗긴 짐승의 몸 같았다. “기다려줘. 나, 그와 얘기하고 싶어.” 이미 이야기가 통할 수 없을 것 같은 상대였다. 보리스는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위험해.” 카르디는 고개를 젓더니 괴물을 향해 다가갔다. 팔이 완전히 끊어진 괴물은 숨을 고르고 있었지만 죽어가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카르디가 다가오지 괴물은 몸을 일으키려했다. 남은 팔을 뻗을 했다. 누가 보아도 공격하려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말릴 틈고 없이 눈앞까지 다다간 카르디가 그를 부르는 순간, 모든움직임이 멈췄다. “아버지.” 모두 흠칫했다. 상상할 수 없었던 이름이었다. “내게 아버지는 당신뿐입니다. 내게 피와 뼈와 살, 그리고 약속의 말마저 넣어주신 아버지.” 조슈아의 아버지는 카르디의 아버지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그에게 자신 속에 숨어버렸던 말이었다. “당신이 나를 만든 것을 늘 원망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아닙니다. 왜 인지 아시나요?” 괴물의 몸은 호흡마저 멈춘 듯했다. 아니, 그것은 모두 착각일지도 몰랐다. “태어나지않았더라면 결코 몰랐을 감정 때문입니다. 나는 나와 분리되었고, 내 안에 대적자를 가졌습니다. 그 대적자를 알아보았을 때 나는 부숴 지기 시작했죠. 악마가 약속한대로, 아버지인줄 알았던 사람은 날 버렸고, 친구는 외면했고, 나는 나와 분리된 나를 미워했습니다. 그의 권리를 미워했습니다. 그에게만 있는 미래를 미워했습니다.” 침착한 목소리였다. 두 손을 내밀며 거대한 괴물을 올려다보는 아주 연약한 인형은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내가 이 모든 것을 겪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겁니다. 그전까지 사랑하지 못했던 것들의 가치를. 그들로부터 버려지고서야 혼자서도 얼마든지 살아갈 줄 알았던 내가 얼마나 가소로운 감정을 품었는지 알았죠. 나는 악마에서 사람으로 돌아온 겁니다.” 그는 갈가리 찢겨진 자신의 팔을 높이 쳐들었다. 말라붙은 핏자국 사이로 흰 가루가 덧없이 떨어져 날렸다. “인형이 됨으로서.” 말하는 동안 괴물의 몸에는 서서히 변화가 일어났다. 그게 보리스의 공격탓인지 단지 마음의 변화로 그럴 수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부풀었던 몸 곳곳은 점차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뒤틀리고 이지러진 곳이 되돌아오지는 않았다. 사라진 손이 나타나지 않았다. 인간으로 돌아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제 얼굴을 가지고 있었으나 말할 수 있는 입은 없었다. 카르디는 앞으로 나아갔다. 오른손을 품에 넣었다. “그러니 당신은 기뻐해도 됩니다. 아버지. 당신은 완전한 것을 만들었습니다. 보세요. 나는 인간의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여.” 그의 손이 한때 인간이었고, 괴물이었고, 다시 무언가로 변한 사내를 끌어안았다. 너덜거리는 팔로 힘껏 껴안았다. “당신은 신이었습니다.” 뒤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도 뒤틀린 살점 속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리는 것이 보였다. 다음 순간, 카르디의 오른 손이 움직였다. “.........” 조금 전처럼 검지 않은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카르디의 손과 팔도 피로 물들었다. 이윽고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가슴에 단도가 꽂혀있었다. 처음에 애니스탄이 관 옆에 떨어뜨렸던 그 단도였다. 한 없이 긴 듯한 시간이 흘러갔다. 그것은 버르적대지 않았다. 껴안은 카르디를 밀어내지도 않았다. 피의 솟구침이 점차 느려졌다. 냇물이었던 것은 빗물이 되고, 이윽고 눈물보다 가느다란 흐름으로 변했다. 긴 숨이 떨어져 갔다. 오후의 석양처럼 느린 듯 바르게 떨어져 갔다. 이윽고 하반신이 피투성이가 된 카르디가 일어났다. 그 잠깐 사이에 눈가가 움푹해져 있었다. 그는 모두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고마웠어.” 조슈아가 일어섰다. 그는 다리를 가누지 못해 조금 비틀거렸다. “아니, 안 돼.” 무엇이 안된다는 것인지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조슈아는 억지로 다리에 힘을 주며 카르디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잡았다. “가지 마.” “.....” 잠시후 카르디의 얼굴에 맥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조슈아. 우리가 입장이 바뀌었더라면 너도 나와 똑같이 생각했을 것을 알아.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생각은 너이기 때문에, 네가 조슈아 폰 아르님이니까 할 수 있는 거야. 난 아니야. 난 약속의 말을 찾으러 가겠어.” “아직. 아직은 아냐. 네가 말한 대로 나와 다른 삶을 살고서, 그런 뒤에 떠나 줘. 난 나와 다른 생애를 보고 싶어. 지키고 싶어.” “넌 나를 사랑하지?”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카르디의 눈빛에 고통이 떠올랐다. “난 그럴 수가 없어. 정말 미안해.” 카르디는 조슈아의 손을 잡아 내려놓았다. 그리고 동굴 쪽으로 돌아섰다. 죽은 그의 아버지 앞에 무릎을 뚫은 그는 단도를 뽑아들었다. 티치엘이 소리쳤다. “잠깐만 기다려!” 동굴 앞에서 뛰어나간 티치엘의 눈에 눈물이 글썽했다. 카르디가 돌아보자 그녀가 말했다. “네가 조슈아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기 어렵다면, 다른 세상에서 살면 돼. 그러면 되잖아. 안그래?” 카르디는 쓴 웃음을 지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저 결계를 이용하면 돼 교수님한테 부탁해서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결계로 만들어 달라고 하겠어. 그 안에서 아주 오랫동안 자고 나서 우리들도, 조슈아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깨어나 살아 줘.” “........” 카르디가 대답하지 못하자 조슈아가 다가섰다. “오십년 정도면 난 없을지도 몰라. 백년이면 절대로 없겠지. 그보다 빨리 돌아와도 돼. 삼십년 뒤에 돌아와서 늙어가는 내 모습을 보며 비웃어 줘. 그때는 너의 세상일 거야.” 카르디는 쓰게 웃더니 팔을 내밀어보였다. “하지만 이런 상태로 널 비웃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이 세상의 유일한 인형사가 죽은 지금 이걸 고쳐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그때 검을 닦아 넣은 보리스가 다가왔다. “있어.” 모두가 보리스를 돌아보았다. 카르디의 눈이 떨렸다. “넌 인형을 본 일이 있다고 했지.” “그래. 그리고 인형을 만들 수 있는 자도 알고 있어. 필멸의 땅에 있지.” 조슈아가 급히 물었다. “그게 정말이야? 그렇다면 그를 만나러 갈 수도 있는 건가?” 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어. 내가 그때 필멸의 땅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특별한 인연이 이끌었던 까닭이고, 이제 다시는 갈 수 없을 거야. 하지만 그런 자가 있는 이상, 이 후 백년이 흐르고 나서 네 팔을 고쳐줄 사람이 없으리라고는 장담할 수는 없는 거지 .” 카르디는 그래도 망설였다. 그때까지 한마디도 않고 떨어져 있던 막시민과 눈이 마주치기까지는. 막시민은 천천히 일어났다. 물벼락을 뒤집어 쓴 모습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카르디 앞에 서자 그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악수도 안 받냐?” “..........” 카르디가 막시민의 손을 잡으려 하자 막시민은 그의 손에서 단도를 빼앗아 땅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손을 잡더니 천천히 흔들며 말했다. “만약에, 나중에 내게 아들이나 손자가 있어서 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면.” 카르디의 손이 문득 떨렸다. 막시민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개한테 물려서 죽을 뻔했던 나를 살려낸 네 녀석과 꼭 친구가 되라고 하겠다.” 한참 침묵이 흐른 뒤 카르디가 잠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꼭 그래 줘.” 손을 놓은 카르디는 돌아서서 동굴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티치엘이 동굴 입구로 다가가 손을 뻗고 수인을 맺었다. 입구가 스르르 닫히며 사라지는 것을 보두가 지켜보고 있었다. “일단 막아두었다. 오늘 밤이나 내일 레오멘티스 교수님께 부탁하면 만들어 주실거야. 만약에 교수님께서 해주시지 않는다고 해도, 아빠는 분명 해 주실 거야.”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한 티치엘은 잠시 후 얼굴을 가리고 조용히 울었다. 동굴이 사라진 벌판의 긴 풀을 바람이 쓰다듬고 지나갔다. 12. 다시 한 번 그 배를 타고. “그것은 당신의 약속이었지만 이제는 내 약속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맹세였지만 이제 내 맹세입니다. 당신이 준 과일을 받아먹고 즙을 마시고 즙을 마시고 자란 나는 당신의 아이입니다. 당신의 꿈을 꾸는 사람입니다.“ 마른 강바닥이 있는 곳까지 내려왔을 때였다.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그들을 불렀다. “여어.” 처음에는 어디에서 부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조슈아는 갑자기 바짝 긴장했다. “한바탕 홍역이라고 치른 모양새들이군. 짐승이라도 사냥했나?” 막시민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머리위에 걸린 납작한 바위에서 그림자가 움직였다. 그 모자를 본 일이 있었다. 챙이 넓은 솜브레로, 그 아래 그림자가 드리워져 알아 볼 수 없는 얼굴. “모두 물러나!” 막시민의 외침과 거의 동시에 그 자가 바위에서 뛰어내렸다. 망토가 펄럭이며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일행은 그 자를 반원으로 둘러쌌다. 티치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 사람이 누군데?” 막시민기 조슈아의 앞을 막아섰다. 그 모습을 본 티치엘도 마법을 쓸 준비를 했다. 조슈아는 그 자를 노려보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쇠사슬에 묶인 채로 바다 한가운데 가라앉았던 자가, 그렇게 수색해도 찾지 못했던 자가, 어떻게 멀쩡한 모습으로 이 자리에 나타날 수가 있을까? “어떻게....살아났지?” “그리 쉽게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면 섭섭한데.” 경쾌한 목소리였다. 누군가를 죽이러 왔다고는 상상 할 수 없는 어조지만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 것과는 관계 없다는 것을. 저 자즞 아침 식사 준비를 하다가 누군가를 죽이고도, 다시 아무렇지 않게 식사 준비를 할 자라는 것을. 막시민이 말했다. “쉽다고?” “뭐..쉽지만은 않았던가? 어쨌든 이 직업은 누굴 죽이는 것만큼이나 자길 살리는 데도 도통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 그때 티치엘이 그 남자의 오른손을 알아보고 비명을 울렸다. 보리스의 미간도 찌푸려졌다. 남자는 그들의 기색을 눈치 채고 천천히 팔짱을 끼었다. 불균형한 팔 때문에 더욱 기괴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긴장할 필요 없어. 너희한테 볼일이 있어서 온 게 아니니까.” “...아니라고?” “잊었나? 난 샐러리 맨이야.” 무슨 뜻인가 하여 다들 눈을 깜빡거렸다. 조슈아가 무언가를 깨닫고 말했다. “당신 의뢰주가 죽었다, 그 말인가요?” “빙고.” 막시민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여긴 왜 나타난 거지?” “밀린 보수를 받으러.” 그러더니 산 위를 손가락 질 했다. “그런데 두 번째 의뢰인까지도 돈을 못 줄 형편인 것 같더란 말이야. 위에서 온 모양이라 묻는 말인데 그 자가 자기 뭐 집기라고 남긴 것 없었냐?” “.........” 점차 이 자의 말이 농담은 아닌 것 같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이 자를 보아 왔지만 이 자가 사냥감을 말로 속이려 하는 모습을 본 일이 없었다. 항상 뻔뻔스러울 만큼 솔직하게 용건을 늘어놓는 인간인 것이다. 막시민이 결국 대꾸했다. “그런 것 없었어.” “그거 유감이네 . 이 몸이 봉급을 떼이다니, 체면이 말씀이 아니야. 내 돈 떼어먹고 죽은 놈들은 다 지옥에 가버려라.” 그러더니 정말로 그 자는 몸을 돌렸다. 그들의 방향과 반대 쪽, 강 바닥의 상류 쪽으로 사라지려는 그 자를 조슈아가 문득 불렀다. “정말 가려는 건가요?” 막시민이 조슈아의 팔을 꽉 잡더니 아예 입을 막으려고 드잡이 질을 했다. 이 미친 놈이 또 무슨 소리를 늘어 놓으려는 건지는 몰라도 그냥 둬서 좋은 일 없을 것만은 분명했다. 남자가 돌아보았다. “그럼 무슨 볼일이 있겠어?” “개인적인 궁금함인데, 지난번에 나와 예술에 대해 말한 적이 있지 않던 가요?” “그랬지.” 조슈아는 막시민의 손을 뿌리치더니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예술의 완전함을 추구하는 당신이 그토록 열심히 죽이려 하던, 그러다가 바다에 생 매장 되기까지 했던 상대인 나를 눈앞에 두고 그냥 간다는 게 잘 이해가 안 되어서요.” 막시민이 결국 소리를 내질렀다. “이 미친놈아! 그 따위 소리가 지금 이 밖으로 나오냐?” 남자는 잠시 후 소리를 죽여 킥킥거렸다. “소공장. 당신은 나름 재미있는 사람이야. 내가 설명을 해 줄게.” 남자는 돌아서서 그들을 죽 번갈아 보더니 말을 이었다. “사람마다 마음속의 우선순위란 것이 있지. 나한텐 내가 봉급쟁이라는 사실이 가장 중요해. 누군가가 봉급을 주면, 그때부터 그걸 추구하는 방식이야. 예술이든 놀음이든 내 마음이야. 하지만 봉급을 안 주면?그건 다 쓸데 없는 짓이라고. 그걸 왜 해? 그냥 끝나. 내 말 알아듣겠어?” 잠시 후 조슈아도 미소를 지었다. “당신 말 알아듣겠어요. 그러니까 나하고는 좀 계열이 다르군요.” “당연히 다르지. 고귀하게 자란 소공작과 나처럼 입에 풀칠하는 것을 중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다를 밖에. 아참, 이유가 하나 더 있어.” 모자 아래의 눈이 조슈아를 죽 훑어보았다. “소공작, 당신을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았지? 아마 앞으로도 많을 거야. 하지만 당신은 쉬운 상대가 아니지. 내가 실패했을 정도니까.” “그래서요?” “그런 당신을 누군가가 또 죽이고 싶어 할 가능성은 아주 높잖아? 다시 말해 잠재적인 고객께서 내게 의뢰할 가능성도 높다고. 그런 당신을 내가 지금 의뢰도 없이 죽여 버리면, 누가 나한테 보수를 주나?” 조슈아는 그의 논리를 이해했다. 그가 고수하는 생활방식을 이해했으므로. “겨울을 대비하려면 먹이를 남겨줘야지. 자, 그럼 됐지? 열심히 살아둬. 다시 만날 때 까지. 학원에 숨어든 이상한 놈한테 걸리지 말고.”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이상한 놈이라고요?” “그런 놈이 하나 있더구만. 동종업계종사자는 딱 보면 알아보거든. 목적이야 내가 모르지. 소공작하고 관계가 없는 지도모르고. 하지만 조심하라고. 너처럼 비싼 목을 딴 놈한테 빼앗기긴 싫으니까.” 남자는 돌아서더니 등 뒤로 한 손을 올려 딱 두 번 흔들었다. 이어 절벽 몇군데를 밟으며 순식간에 다시 바위위로 올라섰다. 조슈아가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그런 내가 당신을 고용하면 어떨까요?” “나쁘지 않지. 죽일 사람이 있나?” 조슈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미소를 지었다. “아직은 없는데.” “그럼 소용없지. 난 정원사나 요리사로는 고용되지 않아. 내 일거리를 가져오라고.” 다음 순간, 망토가 펄럭, 하더니 남자는 사라졌다. 마치 산 위로 날아 올라가기라도 한 것 같았다. 티치엘이 중얼거렸다. “조슈아, 전부터 네 머리가 이상하다던 말을 지금 이해했어.” 막시민이 인상을 찌푸리며 지껄였다. “그래, 잘 봤냐? 역시 내 생각만은 아니지?” 보리스도 말했다. “너를 죽이려던 암살자와 나눈 대화치고는 좀 그렇군.” 조슈아는 씩 웃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어쨌든 계약 종료라잖아.” 호숫가로 내려왔을 때 조슈아와 막시민은 수면에 반가운 그림자가 드리워 진 것을 보았다. “미의 극치호다!” 다른 두 사람이 듣기에는 낯 뜨거운 이름일 게 뻔 했지만 이제 그런 점도 그다지 떠올리지 않게 되었다. 호수로 달려 내려가자 낯선 여자 하나가 서 있다가 조슈아를 보고 깜짝 놀란 시늉을 했다. “아니, 소공작께서 와 계셨군요?” 조슈아는 상대가 누구인지 몰랐으므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절을 하더니 말했다. “전 프리실라 포사다 라고 합니다. 피스파니에 어르신을 모시고 있죠.” 풀 숲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받았다. “어르신이 그 쪽을 모시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던가.” “할아버지!” 조슈아와 막시민, 그리고 티치엘까지 반갑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피스파니에는 어제 막시민이 묶어 놓았던 붉은 천을 벗겨들고 있었다. 그는 천을 펼쳐서 천천히 읽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뭐냐? 너희 문장력이 이것밖에 안 되냐?그렇게 가르친 것 같진 않은데.” “할아버지가 언제 저희를 가르쳤다고 그래요.” 조슈아는 빙그레 웃었지만 곧 얼굴이 어두워졌다. 피스파니에는 금방 눈치를 챘다. “왜 그러느냐? 무슨 일이 있었지?” 막시민이 말했다. “내 추리로는, 아무래도 우리가 영감이 와서 하려던 일을 해결한 것 같은데.” 잠시 후 조슈아가 산 위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히스파니에는 애니스탄을 찾으러 온 것이 맞았다. 인형을 네냐플에 보내놨으니 인형사가 근처에 나타나리라 생각하고 학원을 둘러싼 산맥 일대를 감시했다고 했다. 그러던 중 이곳에 새로운 마력, 특히 결계가 나타난 것을 감지 하고는 쥬스피앙에게 빌려 두었던 배를 타고 달려왔던 것이다. 켈티카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가 왔는데도 한 발 늦고 말았지만. “결국 그렇게 됐구나......” 이야기의 전말을 다 듣고 난 히스파니에도 긴 탄식을 토했다. 그 또한 인형과 함께 시간을 보낸 일이 있었다. 보리스는 조금 떨어진 호숫가에서 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등에는 다시 천으로 둘둘 말아놓은 예의 꾸러미가 매달려 있었다. 조슈아가 곁으로 다가가자 보리스가 말했다. “저게 하늘을 나는 배라고?” “응.” 보리스는 한 참 더 배를 보고 있다가 말했다. “하긴, 책을 읽었을 때는 인형도 보게 될 줄 몰랐으니까.”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 없이 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결국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너, 악의 무구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 네가 가진 그 검은 악의 무구과 뭔가 관계가 있는 거지?” 보리스의 대답은 짧았다. “말할 수 없어.” “포도원에서 난 악의 무구에 대해 여러 가지 자료를 읽었는데, 악의 무구가 변형시킨 자의 몸은 일반적인 검으로 자르기는 커녕 흠집조차 낼 수 없다고 하더라고.” 보리스는 도로 배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런데 네 검은 그럴 수 있었어. 무엇보다도 너는 악의 무구가 들어간 쪽의 몸을 잘라내면 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어.” “난 몰랐어.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뿐이야.” “몰랐더라도 네 검이 평범한 검이 아닌 것만은 사실이야. 안 그래? 그리고 그 검의 모양이니 흰 기운은 내가 읽었던 어떤 검의 이야기를 연상시켰어. 악의 무구가 가나폴리를 멸망시킨 뒤에 나타났던...” 보리스는 손을 들어 조슈아의 말을 막았다. “그런 것은 묻지 않는 것이 좋아.” 그날 밤 학원으로 내려온 넷은 마스터들에게 불려가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 함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악의 무구 조각이 관련된 문제였는지라 매우 민감한 사안인 모양이었다. 그들은한 명씩 따로 불려가 마스터들과 면담을 해야 했다. 애니스탄의 시체는 마스터들이 직접 거두었다. 네냐플 출신이기도 했고, 또 악의 무구에 오염되었던 시체인지라 쉽게 매장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시체가 마스터들의 연구소로 가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조슈아는 레오멘티스 교수를 다시 찾아갔다. 밤 늦은 시각이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교수는 늘 그렇듯 냉담한 표정이었다. “또 할말이 있느냐?네 주위엔 너무 문제가 많아.” 조슈아는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말했다. “애니스탄 뵐프의 시체를 거두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나와 내 인형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일이었으니, 애니스탄 뵐프의 시체에 대한 권리는 내게 있는 셈 입니다. 다만 인형을 위한 결계를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마스터들에게 권리를 넘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약속해 주십시오.” “뭐지” “연구가 끝나면 반드시 정식으로 매장해 주십시오.” 레오멘티스 교수는 잠시 생각한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그를 적으로 느끼지 않는 모양이구나. 이미 죽었기 때문인가?” “아뇨.” 조슈아는 잠시 시선을 떨어뜨렸다가 말을 이었다. 마지막 순간 제 인형이 그를 ‘아버지’ 라고 불렀습니다. 그랬기에 인형이 언젠가 깨어났을 때 그의 무덤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튿날 아침, 막시민은 평소보다 훨씬 일찍 일어났다. 전날 밤 조슈아와 함께 늦게까지 악보를 붙들고 씨름한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었다. “어차피 배에서 실컷 자면 되지.” 깨우러 왔다가 감탄한 조슈아에게 눈을 반 쯤 감은 채로 대꾸한 막시민은 그런 상태로 전날 밤 대충 싸 놓은 꾸러미를 잘도 찾아냈다. 조슈아는 테이블 위로 살펴보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흩어진 종이 뭉치가 맨 위에 뭔가 새로운 것이 놓여 있었다. 내용을 죽 훑어본 조슈아는 닫힌 침실 문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종이를 품 속에 집어넣었다. 그들은 학생들이 식사하러 내려오기도 전에 학원을 빠져나왔다. 최소 닷새에서 이레의 자체휴강이 시작되는 날 이었다. “나 이러다가 낙제하겠다.” “어차피 포기한 거 다 알아.” 산길을 올라가 호숫가에 이르자 히스파니에가 데려온 선원 하나가 보트를 내려 보냈다. 미의 극치호에 오르니 선원은 무려 열 명이나 되었다. 막시민이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셋이서 돛을 편다. 키를 잡는다, 망을 본다. 난리치던 생각을 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 구나.” “어차피 그 중 하나도 제대로 못 했잖아.” “시끄러.” 조슈아는 선실을 돌아보고 오겠다고 내려갔다. 막시민은 한 잠 자려고 담요를 주섬주섬 챙기고 있는데 직접 돛을 점검한 히스파니에가 돛대에서 내려왔다. 예전에 몰고 왔던 ‘악마를 뒤쫓다’ 호에 비하면 장난감처럼 형편없는 미의 극치호를 타고도 그는 당당히 선장차림을 하고 있었다. “이놈들아, 너희가 얼마나 험하게 몰았는지 이 배가 죽은 시늉을 다 하더라.” 막시민이 배 곳곳을 쨰려보며 말했다. “우리가 탔을 땐 엄살도 안 피우더니, 할아버지가 어리광을 받아주니까 이러지.” “그렇게 배의 마음을 몰라주니 몇 번이나 빠져 죽을 뻔한 것이 아니냐?” “이젠 길을 들여놨다고요. 영감이 없었어도 잘 타고 갔을 텐데 뭐.” 히스파니에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희 둘이서 노을 섬까지 가려 했다고? 거 참 건방지게 과감한 놈들이로세.” “전에도 둘이 그러고 잘만 다녔는데 뭘 그래요?” “언제 너희 둘이 그러고 다녔니? 사람 하나 간단히 쏙 빼네.”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소녀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막시민이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뭐에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이 되었다. “너 왜 여기 있냐?” 리체는 혀를 내밀어 보이며 픽 웃었다. 무릎까지 오는 비교적 짧은 치마에 케이프를 두른 모습이 경쾌했다. 늘 귀찮아하던 머리도 어깨에서 잘려 있었다. 그녀는 이윽고 허리에 손을얹으며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반가워하는 사내아이들의 인사란게 고작 그 정도지. 내가 이해할게.” 눈을 가늘게 뜬 막시민은 히스파니에에게 몸을 돌렸다. “얘는 왜 데려왔어요?” 히스파니에가 대답을 회피하려고 딴전을 피웠다. 막시민은 어깨를 움츠리더니 갑판 입구로 다가가 외치려 했다. “조슈아, 지금 여기.....” 그러나 리체가 입을 막아버리는 바람에 끝까지 외칠 수가 없었다. “내가 얘기할 테니까 그만 둬.” “왜 이래너 수줍음 타냐?” 막시민이 휘적휘적 내려가기 시작하자 결국 리체는 뒤쫓아 갔다. “갈 거면 같이 가!” 조슈아는 갑판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벌떡 일어나 입구로 쫓아나갔다. 리체는 막 내려오려 하고, 조슈아는 막 올려다보는 순간 둘의 눈이 딱 마주쳤다. “.......” 이미 내려온 막시민이 둘이 굳어져 있는 것을 보더니 이죽댔다. “그런 자세로 쳐다보고 있으면 목 안아프냐?” 확실히 그 말은 사실이었다. 머뭇거리다가 하나는 올라가려 했고 다른 하나는 내려가려 했기 때문에 둘은 결국 계단 중간에서 마주쳐 버렸다. 리체가 급히 말했다. “내가오게 된 건 너희 때문이 아니라, 그러니까 할아버지께서 우리 의상실에 옷을 주문하셨는데, 재단만 겨우 했는데 갑자기 떠나셔야 한다고 해서, 주문을 취소할 수는 없으니까....” 리체는 말을 끝까지 할 수가 없었다. 조슈아가 와락 끌어안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다음 순간 리체는 조슈아를 밀어내며 소리쳤다. “진짜! 너 너무 포옹 좋아하는 거 아니니?” 조슈아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입가를 매만졌다. “아, 미안해 너무 반가워서 ...” “나도 물론 반갑지 않은 건 아니지만..” 둘이 말을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본 막시민은 간지럽다는 눈초리로 둘을 번갈아 보고는 갑판으로 올라가 버렸다. 오랜만에 미의 극치호가 하늘로 떠올랐다. 해가 진 후 막시민은 오랜만에 뱃전을 스치는 안개를 바라보았다. 안개처럼 보이지만 구름인 셈이었다. 몇 년 전 처음 이배를 탔을 때 긴장했던 것을 생각하면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벌써 2년 전이네 . 우리 이 배를 탔던 거.” 뒤에서 다가와 선 조슈아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다는 불 빛 한 점 없이 캄캄했다. “처음엔 참 신기했지. 그러고 보면 별 것 다 아는 보리스도 비행선은 처음 보았나 보더구만.”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막시민이 말했다. “리체한테 우리 어디 가는지 설명해줬지?” “할아버지 한테 거의 다 들었더라고. 왜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화내더라.” 두 소년은 어깨를 움츠렸다. “걱정 안 시키려고 그런 건데.” “응. 그 말 했더니, 자기도 이제부터 걱정 안 시키기로 작정했으니 그 동안 자기가 하이아칸에서 뭘 하고 지냈는지 전혀 가르쳐주지 않겠대.” 막시민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말했다. “지금 같이 가는 것도 사실 조금 걱정 돼.” “그래도 무구 조각을 없앴으니 그 아주머니 한테 단칼에 죽을 걱정은 덜었지 뭐냐.”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않았으면 리체를 데려오지는 않았어.” “바로 그런 태도를 리체가 싫어할걸.” “알아. 그런데 이거 은근히 고치기 힘들다.” 막시민은 더 대꾸하지 않고 하품을 했다. 낮 잠을 실컷 잤지만 그래도 또 졸린 모양이었다. “그런데 보리스 말야. 정말 정체가 뭘까?” “뭐긴 뭐냐. 우리하고 똑같이 걸레 들고 잼 청소하던 놈이지.” 조슈아가 킥 웃더니 말했다. “그걸 생각하면 마법사는 아닌데. 필멸의 땅은 어떻게 갔을까 몰라.” “그 검 있잖냐. 마법 무구인 것 같던데. 물론 마법사가 아닌 것만은 확실해. 티치엘이 ㅣ그 샐러리 썩은 물인가 갖고 왔을때 그 자식도 겁내더라고.”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어떨땐 평범한 것 같지. 그 루시안의 친구고.” 막시민이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괴었다. “하긴 그 점이 제일 크구만. 기분 나쁘다고 파이 백 개를 사서 던지는 그 루시안의 친구.” “아흔 여섯 개지. 네가 네 개 뺐잖아.” “그거 일부러 그런 거야.” “일부러라니?” 막시민이 헛기침을 큼,큼, 하더니 말을 돌렸다. “나중에 얘기해 줄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루시안하고 제일 신나서 파이 던진 사람이 누구더라?” 조슈아는 작게 키득거렸다. “실은 루시안보다 먼저 던졌는데.” “난 그걸 보고 알았어. 돈 있는 집안에서 자란 애들은 역시 다르구나. 나 하고 보리스를 봐라. 한 개 2 엘소노나 하는 파이님을 감히 던질 생각도 못 하고 뒤에서 구경만 했잖냐.” 조슈아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어쨌든 보리스 녀석의 정체는 탐구해 볼 가치가 있어. 필멸의 땅, 이상한 검, 거기에 검술도.” “그 선배 쇄골 부러뜨려 놓을 때 보니 성격도 보통 아니지.” 막시민이 쩝, 하며 입맛을 다셨다. “돌아가면 그 빌라 인간들이 우릴 잡아먹으려고 들 텐데.” 조슈아는 빙그레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그렇지. 그 때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막시민은 대꾸하지 않았지만 조슈아의 말뜻을 알고 있었다. 농조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도 실은 둘 다 긴장하고 있었다. 노을 섬에 돌아가고, 아나로즈 티카람을 다시 만난다는 것을. “그런데 이 배는 느리게 갔으면 좋겠고.” 그러나 배는 최고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다. 앞으로 이 삼일 정도 후면 도착 할 예정이었다. 13. 마음을 꿰맨 실. “저 강이 품은 섬은 실 잣는 여인 낮에는 태양 아래 물레질하고 밤에는 달빛아래 실을 빗는다. 물들인 실은 두 가지 빛깔 흰 실은 운의 실. 붉은 실은 피 실의 끝은 아무도 알 수가 없네.“ 한 때 켈스니티가 인도해 주었던 길이었다. 여름 볕 따갑던 해변에서 활엽수 우거진 언덕을 지나 우물로, 폐허로, 무덤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 말을 걸던 온화한 목소리만이 그들 곁에 없었다. 아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깊이 잠들어 있었다. 작은 광장으로 접어들었다. 기둥만 남은 건물 앞에 이르러 조슈아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주위를 휘둘러보니 여름 잎이 말랐을 뿐 참나무는 그대로였다. 돌은 그대로였다. 돌에 새겨진 세월도 그대로였다. “켈스, 듣고 있나요?” 조슈아가 불쑥 말하자 내 처 가려던 막시민과 리체도 걸음을 멈추었다. 조슈아는 기단만 남은 기둥 앞에 서서 정말로 누군가를 만난 것 처럼 손을 내었다. “약속은 지켜야죠.” “너, 설마 지금 켈스를 보고 있는 건 아니지?” 조슈아는 대답 대신 부러진 기둥을 올려다 보았다. 말이 이어졌다. “세 가지 소원. 마지막 하나 안 들어줬어요. 우리 그 때 노를 저었단 말이에요. 물론 남풍 교향곡을 만들긴 했지만.” 리체가 조슈아 곁으로 가서 같이 기둥 위를 올려다봤다. 이윽고 조슈아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니까 세 번째 소원을 들어주러 나타나요.” 바람이 말 없이 지나갔다. 켜켜이 쌓인 널찍한 잎들이 바스락 댔다. 어디선가 겨울 새가 낮게 지저귀었다. 목소리는 들려 오지 않았다. 조슈아는 이윽고 몸을 돌려 걸어갔다. 두 사람이 따라오자 말했다. “켈스는 들었을 거야. 이런 부탁에 약하거든.” “정말 그럴까?” “이곳에 없는 건 아니니까. 여기, 있다고.” 조슈아는 흉터가 있는 곳에 손을 얹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둘은 이윽고 우물을 지나갔다. 빈 집들도 지나갔다. 숲을 지나 마침내 암반이 나타났다. 켈스니티가 가르쳐 주었던 대로 암반 끝으로 가서 뛰어내리려니 리체가 겁을 내서 쉽지가 않았다. 먼저 내려가서 잡아주려 해도 리체가 치마를 입고 있는 터라 곤란했다. “업고 내려갈까?” 막시민이 비웃었다. “네 주제에?” 리체가 말했다. “너 그 말, 은근히 기분 나쁘다.” “네가 왜?” “조슈아가 업기엔 내가 지나치게 무겁다는 거 아냐?” 막시민은 바로 맞췄다는 듯이 검지를 세워 보였다. “그러니까 이쪽에 업혀라.” 옥신각신했지만 결국 막시민이 업고 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 뒤이어 뛰어내린 조슈아가 중얼거렸다. “은근히 자존심 상하네.” “채소만 먹던 주제에 말이 많아.” 이윽고 눈 구멍처럼 생긴 동굴이 나타났다. 리체가 말했다. “조금 으스스하다.” 안으로 들어가면 램프가 켜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캄캄한 통로를 더듬으며 들어갔다. 어느정도 왔다 싶은 즈음 조슈아가 말했다. “여기, 약간 달라진 것 같아.” “뭐가? 난 모르겠는데?” 모르겠다고 하긴 했지만 데모닉 조슈아가 달라졌다고 하면 달라진 것이었다. 그러나 증거는 곧 밝혀졌다. 아무리 가도 램프가 나타나지 않는다 싶더니 벽에 부딪치고서야 알게 되었다. 지난 번까지만해도 밝혀져 있던 금장 램프가 꺼져 있었다. 한 참 더듬어 램프를 찾아낸 막시민은 미간을 찌푸린 채 표면을 두드렸다. “이거, 우연히 꺼졌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냐?”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어쨌든 다른 램프를 준비해왔다. 불을 붙이자 내부가 밝아졌다. 주위를 휘둘러보던 조슈아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열려 있어.” 지난 번에 왔을 때 열려고 그토록 고민했던 육중한 돌문이 세 뼘 가량 열려 있었다. 웬만한 사람이 충분히 드나들 법한 큼이었다. “지난 번에 우리가 열고 들어갔잖아. 그게 닫히다가 만 것은 아닐까?” “그럴 듯한 추측이긴 한데.” 셋은 차례로 틈새를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발에 뭔가 걸리는 것을 느낀 막시민이 조슈아의 램프를 빼앗아 들었다. “이게 뭐지?” 언뜻 돌 부스러기들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조각상 같은 것이 깨어진 듯한 모양새였다. 막시민이 돌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짐승의 앞발 모양이었다. “너, 우리 여기 처음 왔을 때 계단 밑 어느 방에 짐승 같은 게 어슬렁대고 있다고 생각했던 기억 나냐?”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체가 다른 돌조각을 주워왔다. 앞발 말고도 귀나 꼬리 비슷한 것들도 있었다. “돌 조각상이 깨진 건가봐.” 조슈아가 말했다. “그때 켈스가 말해줬잖아. 가나폴리에는 마법 걸린 짐승 조각이 있었다고. 우리가 본 게 정말로 그것이었다면, 이렇게 부서져버렸다는 건 무슨 문제가 생긴 것 아냐?” 막시민은 내심 그 짐승과 마주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며 대꾸했다. “왜 일까?” “그녀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건 아닐까?” “몇 백년 동안 괜찮다가, 갑자기 한 두 해 만에 이렇게 되었다는게 좀 믿어지지 않는데.” “하지만 이런 것들 말고도 큰 변화가 있었어. 생각 해 봐.” “뭐 말이야?” “마법 폭풍.” 확실히 그들은 이번에 노을 섬으로 오면서 마법폭풍을 보지 못했다. 지난번과 달리 하늘을 나는 배를 탔기 때문일까? “처음 올 때 우린 미의 극치호로는 폭풍을 넘어 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 때의 판단이 단지 틀렸던 걸가?알 수 없지만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아.” “그럼, 그것도 사라졌다고?” 막시민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마법 폭풍은 사라졌다가 돌아온 거였지. 그게 다시 사라졌다가.” 조슈아가 돌조각을 내려놓고 어깨를 움츠렸다. “지난번에 펠 집정관은 내게 노을섬에 돌아온 마법 폭풍은 사라졌던 마력이 돌아온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했어. 어쩌면 이 곳에 있었던 램프며, 짐승, 그런 것들이 그때 마법이 돌아왔던 영향으로 잠깐 움직였던 것일지도 몰라. 우리가 본 것이 수백 년 동안 죽 그래왔던것이라는 증거는 없잖아.” 어떤 추측에도 정답을 말해 줄 사람이 없었다. 이제 내려가는 길과 올라가는 길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막시민이 말했다. “지난 번에 내려가서 어찌 잘 가긴 했지만, 이번에도 그런 기적이 벌어지리라는 보장은 없지. 위로 가 보자.” 조슈아도 동감이었다. 분명 직접 겪었던 일이긴 하지만 나무가 갑자기 자라 그걸 타고 올라가는 일이 또 벌어지리라는 기대는 어쩐지 하기 힘들었다. 걷기 시작하면서 조슈아가 리체에게 말했다. “지난 번에 아래로 내려갔을 때 아주 멋진 걸 봤었는데.” “어떤 건데?” 조슈아는 잠시 생각을 더듬다가 고개를 저었다.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 올라가는 길은 내려가던 길과 모양이 같았다. 절반 쯤 올라갔을 때 조슈아가 말했다. “노을 섬의 마력이 사라진 이유는 아나로즈가 악의 무구에서 나오는 힘을 봉인했기 때문이었어. 마법은 서서히 사라져갔고, 살기가 힘들어진 노을 섬 사람들은 그걸 저주라고 여겼지. 그게 그들을 살리는 방법이라는 것은 생각 하지 못하고.” 막시민이 말을 받았다. “그렇게 마법이 사라져서 노을섬의 마법 폭풍도 사라졌다. 그거지. 그게 다시 되살아난 것은 최근의 일이었고.” “그래. 그 이유는 악의 무구가 수 백년 된 아나로즈의 봉인을 깨뜨렸기 때문이었어. 애니스탄이 무구 조각을 갖고 노을섬에 들어왔던 탓이지. 어쩌면 이곳에서 인형을 만들기 위해 조각을 이용하여 무구의 힘을 끌어당겼기 때문일 거고.” “그런 까닭에 아나로즈가 깨어나서 우리와도 만났잖냐. 지금 그녀는 다시 봉인을 완성하기 위해 애쓰고 있겠지. 아마도 새 봉인이 다 되어가는 모양이야. 그래서 노을섬의 마법의 상징인 마법 폭풍도 없어지고, 이곳에 잠시 나타났던 모든 마법적 효과들도 사라져버렸단 말이지.” 리체가 말했다. “그럼 이곳의 마법이 사라진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구나.” 거기까지 정리하는 것과 동시에 당혹스러운 사실이 떠올랐다. 둘은 거의 동시에 깨닫고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렇다면 아나로즈는 지금 잠들어 있겠는데?” 정원은 아늑한 어둠에 감싸여 있었다. 검은 나뭇가지가 우거진 틈으로 작은 빛들이 떠돌았다. 반디 초롱이었다. 빛의 과일이었다. 가끔 휘몰아치는 바람에 풀 그림자가 이리저리 누웠다. 땅의 손짓이었다. 그림자 극장이었다. 지난번에 보았던 오솔길을 찾을 수 없었다. 책이 놓여 있던 곳도 의자들이 있던 곳도 못 찾았다. 셋은 오랫동안 정원을 걸었다. 숲은 끝없이 이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동굴 위에 어떻게 이런 정원이 있을 수 있는지 궁금해 하지 않았다. 이 곳은 결계 속 이었다. “조군, 네가 말하곤 하던 네 안의 세계라는 것 말이다. 그 절벽도 있고, 풀밭이 있다던 곳.” 조슈아가 돌아보자 막시민이 여전히 두리번대며 말을 이었다. “결국 결계와 비슷한 것 아니냐?” 조슈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저었다. “그럴 것 같지 않아. 결계는 마법적인 힘이고, 또 주문이나 표지석 같은 것으로 들어가는 거잖아. 난 잠이 들어야 그곳으로 갈 수 있어.” “그래. 너한테 마법은 없겠지. 하지만 마법으로 만들 수 없는 괴이한 정신세계가 있잖냐. 네가 그곳으로 들어가는 방식을 제대로 모를 뿐, 그곳은 어딘가에 존재하는 결계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약속의 사람들은 그런 세계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존재한다고 했어. 나의 경우가 넓었던 것뿐이지, 작은 방의 형태라 해도 모두 있었다고 했어.” “그래. 그러니까,.. 세상사람 모두의 머릿속에는 결계로 통하는 문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막시민이 떠올린 생각지고는 드물게 상상력이 들어간 이야기였다. 조슈아는 생각에 잠겨 숲을 걷다가 중얼거렸다. “네 말대로라면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결계를 갖고 있구나. 그곳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정확히 모를 뿐.” 그러자 리체가 지적했다. “그러면 켈스도 결계에 갇혀있는 걸까? 그래서 조슈아가 열어줄 방법을 찾아내기만 하면 되는 걸까?” 다들 의혹에 사로잡혔지만 결국 막시민이 말했다. “나도 확신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너무 확장시키지 말라고.” 이윽고 다리가 아파졌다. 세 사람은 풀밭에 잠시 앉아 쉬었다. 조슈아의 기억력에 의존하긴 했지만 이곳이 얼마나 넓을지는 알 수 없었다. 실재하는 공간이 아닌 이상 이곳은 한 없이 넓을 수도 있었다. 또한 계속 변할 수도 있었다. 그들이 보았던 이카본의 관은 어디 있을까? 만일 찾는다 해도 아나로즈가 잠들어 있다면 어떻게 깨울 수 있을까? 또 한 깨우는 것이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까? “대체 지난번엔 어떻게 쉽게 마주칠 수 있었던 거지?” 막시민이 불평을 한 말에 조슈아가 문득 대답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녀가 우리를 만나려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 생각해보면 아나로즈는 그들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자리에 나타나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은 그녀의 결계였다. 모든 것은 그녀의 마음대로였다. 리체가 물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평생 헤메도 만날 수 없는 거야?” “잠들어 있다면 누굴 만나고 싶다고 생각할 리가 없겠지.” 조슈아가 일어섰다. 그리고 갑자기 노래를 불렀다. 이곳이 그대의 꿈이라면 우리도 그대의 꿈이리니 그대가 마음만 먹는다면 우리를 지워버릴수도 있으리 지금, 그대의 꿈속에서 그 꿈을 짓고 잇고 있는 우리는 마음만 먹는다면 그대를 깨워버릴 수도 있으리 “너 협박하냐?” 조슈아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다시 손을 내미려는 순간 갑자기 그는 손이 자유롭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리체가 소리쳤다. “손이 묶였어!” 나무 덩굴 같은 것이 손을 휘감고 있었다. 지난 번 일을 생각한 그들은 크게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봤지만, 다른 덩굴이 더 다가오지는 않았다. 잠시 후 막시민이 말했다. “손만 감은 거군. 혹시 어딘가로 당기고 있지 않냐?” “아...그런 것 같아.” “따라가 봐.” 덩굴은 잠시 후 손을 풀어 주더니 나무들 틈으로 천천히 빨려 들어갔다. 세 사람은 덩굴을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갔다. 몇 개의 빈터를 거쳐 드디어 눈에 익은 풍경을 발견한 조슈아가 속삭였다. “여기야.” 조슈아가 가르키는 곳에 끄트머리만 묻힌 채 세워진 거대한 돌 닻이 있었다. 리체가 속삭였다. “저게 관이라고 했지?” 세 사람은 관 앞으로 가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에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조슈아는 땅 밑에 관이 묻혀 있을 바로 그 자리에 나무 뿌리처럼 누워 낙엽과 덩굴로 뒤덮인 여자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아나로즈....” 마치 슬픈 꿈인듯 했다. 덩굴과 이끼꽃, 클로버 뒤덮인 몸은 숲에 녹아 가고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은 나무의 핏줄인 양 맥없이 흩어졌다. 깊이 잠든 흰 얼굴에는 표정이 남아있지 않았다. 고통도, 절망도 없었다. 조슈아는 그녀에게 다가가 앉았다. 손을 내밀어 이마를 가린 줄기와 잎을 치워냈다. 손 끝에 닿는 피부가 차디찼다. “방해해선 안 될 잠을 자는 것을 알고 있어요.” 낮게 속상이는 목소리에 부드러운 떨림이 일었다. 노래처럼, 조슈아가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 중 하나처럼. “깨울 수 없다는 것도 알아요. 당신이 택한 이 고통이 얼마나 귀한 것이지 알아요.” 바람이 불어왔다. 그녀를 감싼 덩굴이 사그락 대며 움직이다가 멎었다. 한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얼굴로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당신이 결정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내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가장 아픔다웠던 시절에 당신 곁에 있었던 한 사람을 위해서.” 조슈아는 손을 뻗어 작고 하얀 꽃 속에 묻힌 아나로즈의 손을 잡았다. 얼어붙은 겨울 땅 같은 차가운 기운이 서서히 팔 을 타고 올라왔다. 그러나 손을 높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꿈에 보았던 페리윙클의 풀밭과 주춧돌을 떠올렸다. 그것은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 켈스니티의 것이었다. 그의 의식에 얽혀버린 켈스니티의 기억이었다. [돌아왔어, 당신이.....] 머릿속에 울린 목소리와 함께 조슈아는 눈을 떴다. 그리고 아나로즈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눈꺼풀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찢어진 나비 날개처럼 애처로운 떨림이었다. 녹색 눈동자가 열려 그를 바라보았다. 푸르다 못해 회색이 된 입술이 말했다. “약속을 가져왔니?” “조각은 이제 세상에 없어요.” “........” 아나로즈는 고개를 끄덕인 듯 했다. 잠시 후 그녀를 감쌌던 덩굴들이 소리 없이 벗겨져나갔다. 이끼와 꽃이 흘러내렸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려하자 조슈아가 부축해 주었다. 상반신을 세운 그녀는 맞은편에 앉아 막시민과 리체를 보았다. 특히 리체를 보았다. “아가씨는 누구지?” “..저, 저는...” 자신에게 말을 걸 줄은 상상도 못한 리체가 쩔쩔매다가 조슈아를 쳐다봤다. 조슈아는 미소를 지었다. “말해도 돼.” “리체...아브릴이라고 해요. 조슈아랑...막시민의 친구예요.” “어떤 일을 하지?” “저기, 재, 재봉사요.” 잠시 후 아나로즈의 얼굴에 놀랍게도 미소가 나타났다. 조슈아와 막시민은 마주 보며 당황한 눈빛을 주고 받았다. “ 난 한 번도 옷을 꿰매어 보지 못했어.” 아나로즈는 두 손을 올려 흩어졌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나뭇잎의 잔해가 흘러내렸다. 그녀의 소매며 치맛자락에 삭은 것처럼 헤진 것을 본 리체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그럼 제가 꿰매 드릴까요?” 이제는 조슈아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리체를 바라보았다. 아나로즈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는 더더욱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래 줘.” 리체는 앞주머니에 넣어 다니는 반짇고리를 꺼냈다. 아나로즈의 왼쪽으로 다가가 실을 골라 바늘에 꿰었다. 그녀의 왼손을 잡고 소매를 당겨 시접을 잡았다. 이윽고 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아나로즈가 가만히 보고 있다가 말했다. “솜씨가 좋구나.” “고마워요.” 조슈아와 막시민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서로 눈짓만 주고받았다. 리체는 어느 새 자연스럽게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편안히 손을 맡기고 있는 아나로즈까지, 둘 다 사내아이들이 이해할 법 하지 않은 세계에 있는 듯 보였다. 이윽고 아나로즈는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그럼 다음 약속을 지켜야지.” “죽어 달라고 하셨죠.” 막시민이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잠깐, 조각을 없앴으니까 다 끝난 것 아닌가? 왜 또 죽어달라는 얘기가 나와?” 조슈아가 막시민을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약속은, 조각을 없앤 뒤에 와서 죽어달라는 거였어.” “아니, 그게 ..꼭 그런 뜻이 되지는....” 돌이켜 보면 그 날의 대화는 곳곳이 암시여서 불분명한 부분이 많았다. 막시민은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어디를 딱 집어 반론을 제기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아나로즈가 죽어달라고 했고, 조슈아가 거절하며 아카본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죽을 수는 없다고 했고, 그러나 그녀가 조슈아가 계약의 이행자가 되려 하는 한 아카본의 이름에서 벗어 날 수 없다고 말했고, 이어 조슈아가 켈스니티의 경우를 들어 약속의 사람들을 옹호했고, 그러나 다시 그녀의 자존심이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한다고 했고.... “젠장, 이게 다 어떻게 된 거였든 분명한 건 나 또한 저놈의 생명에 권리가 있다는 거야! 내가 살렸으니까. 난 찬성 안한다고 분명히 말했고.” 그러자 아나로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권리도 인정해.” “그럼 된 거지? 조슈아가 죽도록 놔 둘 순 없다고.” 그러나 조슈아가 말했다. “난 아나로즈의 요구를 이해해.” “넌 도대체....” 리체도 바느질 하던 손을 멈췄다. 조슈아가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난 이카본의 자손이 맞아. 그의 공과 과를 모두 물려받았어. 내게 흐르는 데모닉의 피와, 공작의 지위와, 그와 맹세를 나눈 약속의 사람들이 여전히 내게 묶여 있는 것과, 따라서 그들을 위한 약속의 이행자가 되려 하는 것, 모두 다 인정해. 공은 누리면서 과를 버릴 수는 없어. 그러니 이카본과 약속의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는 아나로즈의 요구는 온전히 내 몫이야. 그녀가 무슨 요구를 하든.” 아나로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난 네 죽음을 원해 그럴 수 있겠어?” 너무나 침착한 목소리여서 리체는 순간 진심이 아닌 건가 싶었다. 조슈아가 대답하기까지 모두가 숨을 죽였다. “네. 난 죽었습니다.” 언뜻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아나로즈는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죽었다가 살아나 이 자리에 왔다는 건가?” “네. 반년동안 죽어있었죠. 그 후 살아났고요.” “죽은 자는 마법으로도 되살리지 못해.” 조슈아는 손을 뻗어 가슴을 매만졌다. “내가 죽어있는 동안 누군가가 내 몸을 살려 두었죠. 그래서 반년이 흐르고 나서 내 몸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손끝이 옷을 헤쳐내자 흉터가 드러났다. 아나로즈가 그걸 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맞구나.” “누가 날 되살렸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조슈아의 입에 안타까운 미소가 떠올랐다. 아나로즈의 녹색 눈이 조슈아의 얼굴 근처 어딘가에 머물렀다. “말해 봐.” “약속의 사람들...그리고 켈스였죠.” 아나로즈의 눈동자가 허공으로 올라가 흔들렸다. 한참 동안 말없이 숲을, 어둠 속을 더듬고 있었다. 이윽고 입을 연 아나로즈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켈스가....그곳에 있구나....” 조슈아는 눈을 감았다. “아시는군요. 네 켈스는 지금 내 몸 안에 잠들어 있습니다.” “그가 너를 살리려고...자신을 버렸구나...” 잠시 후 아나로즈의 눈에 눈물이 고여 떨어졌다. 석상처럼 창백한 얼굴을 타고 흘러 죽은 잎과 줄기 위로 흩어졌다. 눈물은 조슈아의 감긴 눈에도 맺혔다. 바늘을 쥔 리체의 손에도 떨어졌다. 막시민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왜 당신은 항상 모든 것을 주어버리는 거지....” 조슈아는 아나로즈의 손을 놓으며 일어났다. “ 이 몸은 그들이 주고 간 선물입니다. 내가 오랫동안 가볍게 생각했던, 어느 날인가 쉽게 끊어져 버릴 것처럼 여겼던 생명을 사리려고 켈스는 자신을 잃었습니다. 약속의 사람들 또한 유령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 할 수 있는 힘을 상당 부분 잃었습니다. 이제 그들 대부분은 내게 말을 걸지 못합니다. 이제 내게 약속의 이행을 요구하지도 못합니다.” 조슈아는 다시 아나로즈의 곁에 앉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카본과 약속의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한 당신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내 몸을 살려냈습니다. 그렇기에 나만의 것이 아닙니다. 내가 계약의 이행자가 되는 건 이제 내 선택이 아닙니다. 내가, 나를 살리고자 한 그들의 뜻을 잇지 않는다면 그들의 자손이 아니며, 따라서 당신의 요구를 들어줄 필요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 용서하게요. 난 내 몸을 누구의 칼에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고, 다시는 죽음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살 겁니다.” 아나로즈의 눈동자가 조슈아의 눈동자와 맞닿았다. 조슈아는 이윽고 고개 숙여 절을 했다. “..........” 아나로즈의 시선이 조슈아에게서 떨어졌다. 입술만 가늘게 떨릴 뿐이었다. 고개를 숙인채 조슈아가 속삭였다. “그래서 부탁드립니다. 소원 거울을 만들어 주세요. 그들이 이 세상에서 저절로 소멸되어버리기 전에, 켈스가 내 의식 속에 묻혀 영원히 깨어날 수 없게 되기 전에, 고향을 볼 수 있도록.” 영원과도 같은 침묵이 흘렀다. 이 침묵을 깰 수 있는 것은 저 몇백년의 분노와 바꾸어야 할 대답뿐이었다. “내게 그들을 용서하라고 하는구나.” 아나로즈가 몸을 일으켰다. 치맛자락에서 숲의 흔적들이 흩어져 떨어졌다. 덩굴들이 저절로 끊어지며 오그라들었다. 그녀의 걸음이 닿는 곳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났다. 숲은 마치 빛처럼, 그녀의 움직임을 따르고 피했다. “네 말은 옳아. 그들의 뜻은 너를 살리는 것이었고 네가 그런 뜻을 잇지 않는다면 내 요구를 들을 필요도 없지. 그러나 그것이 나조차도 그들을 용서할 이유가 될까?”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래. 아니야. 나도 알고 있어.” 그때 리체가 일어났다. “저, 저기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아나로즈가 리체를 보는 시선은 차갑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봐.” 리체는 말을 잘하려고 애써 생각을 가다듬었지만, 첫 마디를 떼는 것은 쉽지 않았다. “저도, 저도, 저도 ...약속의 사람들하고...당신 사이에..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요. 저는 처음에 그 이야기를 듣고 당신이...너무 안됐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저는 저는 평범한 여자아이지만요, 그런 저라도..그런 건 용서 못 할 것 같았어요.” 아나로즈는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리체는 긴장해서 자꾸만 손을 가다듬어쥐었다. 손에는 아나로즈의 소매에서 뽑아낸 바늘을 잡은 채였다. “ 그런데, 지금 이야기를 들으니까 이런 생각도 들어요. 화내지는 마세요. 그냥 상상이에요. 만일 이 몇 백년의 세월이 흐르지 않고, 그러니까...그전에요. 당신이 이카본 폰 아르님을 떠나던 그때로 돌아가서 생각한다고 할 때요.” 아나로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서?” “만일 당신이 떠난 뒤에, 약속의 사람들이 이카본을 위해서 죽어버렸다면...당신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아나로즈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점차 생각하는 표정으로 변해갔다. “네 말은...그랬다면 내가 이카본에게 돌아갔을 것이고, 죽어버린 약속의 사람들도 용서했을 거싱라는 뜻인가?” 리체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으려고 애를 썼다. “..네..저...제..생각에는...당신이 그들을 미워한게요. 그들이 이카본을 당신에게서 빼앗으려 해서가 아니었나 해요. 하지만 그런 그들이 당신의 이카본을 위해 죽었다면..최초에 화가 난 이유는 없어지는 셈이잖아요. 왜냐면 이카본이 있어야...당신도 기쁘잖아요? 오히려 두 사람의 사랑을 도운 셈이라고..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당신이 이카본을 떠났더라도 그가 죽기를 원치는 않았을 거잖아요?” 아나로즈는 대답 없이 리체를 바라보았다. 리체가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제 생각과 다르실 수도 있어요. 그런 일을 다 이해하기에는, 전 어리기도 하고 경험도 부족해서요.” 아나로즈는 눈을 감고 있었다. 수 백년의 침묵이었다. 말하지 못하고 묻어둔 수 백 년의 애증이었다. 사랑을 원망하고, 그러면서도 사랑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유폐했다. 그를 저주하지 않았다. 그녀는...그가 사는 세계를 지키려 했다.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말했어.” 눈을 뜬 아나로즈는 천천히 걸어 돌아왔다. 그리고 리체 곁에 선 조슈아 앞에 멈추었다. “네가 네게서 이카본의 과실을 본다면, 내가 그를 사랑한 마음도 똑같이 보아야 공평하겠지. 그래야만 하겠지.” 조슈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나로즈의 눈동자에서 빛이 살아났다. 단 한번 본 일이 있던 맥동하는 녹색 눈이었다. “리체 아가씨가 말한 대로야. 저 먼 과거에도 마찬가지였어. 이카본이 날 찾으러 온 사이에 그들은 이카본을 위해성을 지키다가 죽었지. 자신들의 목숨과 이카본과 바꾸었지.” 아나로즈를 바라보는 조슈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또 한번, 켈스와 약속의 사람들은 자신을 희생했고 그 결과 이카본의 이름을 이은 네가 살아났어.” 아나로즈는 팔을 뻗어 조슈아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껴안았다. 싸늘하던 그녀의 몸에 온기가 흘렀다. 가슴이 뛰고 있었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난 그 사실을 기뻐해야지. 마치 이카본이 살아온 것처럼...그러니 이미 죽었고 도 한번 죽으려는 그들을 용서해야지....” 14. 별장의 저녁식사 “압생트 빛 그보다 찰랑이는 녹색 심장 속에서 꼬리 한 번 치고 달아나는 남쪽 물고기“ “소원 거울을 불러내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야.” 아나로즈는 돌 닻 옆에 앉아있었다. 조슈아가 대답했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어렵겠죠.” 아나로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쩐에 켈스니티가 돌아올 수 없었던 대로 이 곳은 유령이 들어 올 수 없는 결계였다. 따라서 그들을 위해 소원 거울을 만들자면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그러나 아나로즈는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 악의 무구, 피 흘리는 창이 이곳에 붙들려 있는 것은 오로지 그녀의 힘이었다. 지난번에 창 조각 때문에 깨어진 봉인을 끝내 다시 회복시켰던 것도 아나로즈가 이곳을 떠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만일 그녀가 잠시라도 이 곳을 떠나게 되면 악의 무구의 힘은 아무도 붙잡아 누를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릴 터 였다. “그래서 좀 궁리를 해 봤는데요.” 조슈아는 악보를 한 장 꺼내어 막시민에게 건네주었다. 막시민은 한숨을 내쉬더니 바이올린을 꺼냈다. 아나로즈는 금방 알아보았다. “그건, 신성찬트를 연주하는 바이올린이군.” “네. 이곡 한번 들어봐 주세요.” 망설이는 듯 하던 현이 이윽고 가락을 만들어 냈다. 몇 번 미끄러지면서 길게, 짧게, 다시 길게 이어졌다. 곡이 연주되는 동안 아나로즈는 눈을 감고 있었다. 이윽고 멈추었다. “되는게 맞긴 한 건지 알 길이 없으니.” 바이올린을 어깨에서 내린 막시민은 한숨을 내쉬며 임에 맺힌 땀을 소매로 닦아냈다. 아직껏 이토록 긴장해서 연주해 본 적이 없었다. 잠시 후 아나로즈가 눈을 뜨더니 말했다. “정말이구나.” “그 말은...된다는 겁니까?” 아나로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막시민은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당황하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젠장, 된다고 해도 내가 믿을 수가 없네.” 막시민이 카프리치오 바이올린으로 연주한 곡은 바로 시간을 반복되게 하는 신성찬트였다. 유령선에서 주워왔던 악보 속에 있던 곡이었다. 이 곡을 연주해서 이곳의 시간을 잠깐 동안 반복되게 할 작정이었다. 아나로즈가 나간 사이에 봉인을 보존하려면 시간을 멈추면 된다는 생각을 처음 해 낸 사람은 조슈아였다. 조슈아는 지난 번 노을 섬 앞바다에서 만났던 유령선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유령선에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죽 생각해 봤거든.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이야기에서 특별한 것은 찬트 악보 뿐이었어. 찬트 악보를 숨겼던 광대 클랭은 대단한 노래 실력을 갖고 있었잖아. 악보를 탐낸 것도 그만한 실력이 있었기에 훌륭함을 알아본 까닭이었겠지.” “그래서, 그 자가 어떤 특별한 효과가 있는 찬트를 불렀고. 그래서 유령 선이 그 꼴이 됐다?”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지. 다른 사람이 노래했을 수도 있으니. 아미면 노래하지 않아도 악보 자체에 깃든 힘이 발휘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고. 어쨌든 이 악보 중에 시간을 멈추거나, 시간을 되풀이 되게 하는 힘을 가진 곡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 곡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레오멘티스 교수가 넘겨준 두 소절 덕택이었다. 결국 이 찬트를 완성하고자 마음먹은 둘은 밤새워 악보를 고쳤지만 다양한 가락을 가진 찬트인지 아닌지 모를 것이 수 십가지 탄생한 것에 만족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떠나려던 날 아침,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를 본 조슈아는 노랄ㄹ 수 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몇 군데 고친 곡이 놓아져 있었던 것이다. “분명 보리스가 건드린 거야.” “그 자식은 뭔 필멸에 땅에, 인형에, 검술에, 거기에 찬트까지 안다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쩄든 그 고쳐진 곡은 이곳ㄲ지 왔고, 그리고 효과가 증명되었다. 보리스가 어째서 이걸 알고 있었는지는 돌아가서 심문 해 볼 일이었다. 지금은 효과를 확인 한 것만으로도 만족이었다. 신성 찬트의 기원이 가진 한계에 대해서는 아나로즈도 잘 알지 못했다. 다만 그녀는 찬트에 대해 이렇게 말해 주었다. “찬트틑 본래 기원의 힘이기 때문에 어떤 곡이 반드시 어떤 효과를 가진 다고는 할 수 없어. 어떤 기원을 하느냐, 얼마나 간절히 원하느냐.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표현하느냐에 달렸지. 다만 네가 가져온 이 곡은 그 바이올린의 힘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어서 정해진 효과가 있는 것 같아.” 다만 문제가 있다면 찬트가 반복시킬 수 있는 시간이 매우 짧다는 점이었다. 혼자 이 안에 남아 연주를 반복해야 할 상황에 처한 막시민은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쳇, 인형의 결계에 쓴 것 같은 마법이 통한다면 좀 좋겠어.” “그게 통했다면 그녀가 처음부터 여길 지킬 필요도 없었겠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잖아. 악의 무구는 한 섬에 수 백년 동안 마법을 선사할 정도로 압도적인 힘이니까. 한 가지 마법의 힘과 비교할 수 없지.” “신성 찬트는 거기에 맞먹는 힘이고 말이냐?” “알 수 없지. 가나폴리의 전통의 힘이니까.” 나가기 전에 리체는 아나로즈의 옷을 깨끗이 꿰매 주었다. 이윽고 아나로즈가 일어나더니 돌로 된 닻 앞으로 가며 말했다. “소원 거울은 본래 주춧돌이 힘을 품고 있기만 하다면 누구나 불러 낼 수 있어.” “예전에 페리윙클에 주춧돌이 있었죠? 그건 역시 힘을 잃었던 건가요?” “힘이 잠들었었지.” 아나로즈가 닻에 손을 얹자 그 주위에 빛이 생겨났다. 빛은 곧 돌의 표면을 타고 흘러내려 땅 속까지 스며들었다. 조슈아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이건 이카본의 관이잖아요?” “그래.”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나로즈는 손을 내저어 일행을 물러나게 했다. 이윽고 흙이 물처럼 흘러 좌우로 갈라졌다. 땅 밑에 들어있던 석판과 그 위의 음각 무늬들이 뚜렷이 드러났다. 잠시 후 그것은 솟아올랐다. 요동치는 흙 속에서 거대한 석관, 아니 바위에 가까운 것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눈을 의심케 하는 광경이었다. “대체 왜....” 질문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석관처럼 보였던 것은 알로 갈 수록 전차 진짜 바위 같기도 하고, 무언가 거대한 것을 받치는 받침대 같기도 한 것이 되었다. 결국 그들의 키를 넘길 정도로 높아지자 맨 뒤는 닻이고 중간은 관이며, 그 아래는 받침대인 것으로 변해 있었다. 사방에서 모래와 흙이 흘러 내렸다. 위를 올려다보던 조슈아가 잠시 후 전율하며 말을 이었다. “이게...바로 소원 거울의 주춧돌 인가요? 관이 아니라?” “관이기도 해.” 아나로즈는 몸을 돌려 한 쪽을 가르켰다. 그러자 그 주위에 있던 나무들이 옆으로 비켜났다. 거대한 주춧돌이 허공에 뜬 채로 새로 생긴 통로를 지나갔다. 아나로즈는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조슈아가 막시민을 돌아보았다. “그럼 부탁해.” 막시민은 바이올린을 집어 들고 각오를 다지며 대꾸했다. “근성이 뭔지 보여줘야 할 상황이로구만.” 조슈아와 리체가 아나로즈를 따라가고 나자 혼자 남은 막시민은 문득 뒤를 돌아봤다. 이런 큰일이 버러졌는데도 숲에는 쓰러진 나무 하나 없었다. 오직 받침대이자 관인 것이 빠져나온 자리에 거대한 구멍만이 남아 있었다. 막시민은 구멍 주변에 앉더니 천천히, 그러나 신중하게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다. “페리윙클에 있었다던 주춧돌을 가져간 사람은 당신이었던 거군요.” 아나로즈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처음 내게 찾아왔던 이카본과 켈스가 약속했던 일이야. 나 말고는 아무도 잠을 깨울 수 없느 ㄴ물건이니, 내가 가져가는 것이 이상할 건 없었어.” 숲에는 끝이 있었다. 그리 오랫동안 찾아도 없는 듯 했는데 어느새 그들은 숲 끄트머리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언덕 경사 위에 서 있었다. 아나로즈는 주문을 외우는 기색조차 없이 손을 움직여 바위를 언덕 아래로 보냈다. 그 거대한 주춧돌이 소리조차 없이 풀밭에 내려앉는 것을 보는 것은 조마조마하고 기이한 경험이었다. 아나로즈가 언덕 아래로 한 발짝 떼어 놓았다. “후.....” 바람을 들이마셨다. 눈부셨다. 눈을 감자 온 세계가 귓가에서 춤추었다. 온몸이, 머리카락 하나하나마저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믿을 수 없이 새로운 이 세상은 그녀의 고향이다. 자신을 짓누르던 거대한 압력은 꿈인 듯 사라지고 없었다. 발치에 닿는 풀은 그녀의 의지를 따라 몸을 굽히지 않았다. 구름은 제 멋대로 움직이며, 태양은 때가 되기 전에 지지 않았다. 그녀가 창조하지 않은 세상은 자연스럽다. 거칠고 생생하며 제멋대로다. 온 몸을 던지고 싶도록 아름답다. 주춧돌 앞에 이르러 아나로즈는 돌 위에 앉았다. 조슈아가 다가와 앉더니 말했다. “당신에게 딸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아나로즈는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딸인 제노비아를 알고 계신가요?” “이카본이 그 아이의 얼굴을 그려 갔다고 들었지. 내 얼굴을 감히 그리지 못했으니 그 아이라도 그려 넣겠다면서.” 조슈아는 순간 놀랐으나 곧 상황을 이해했다. 백치 소녀였다던 제노비아, 그녀의 얼굴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던 것이다. “제노비아의 그림은 아직도 비취반지 성의 홀로 있어요. 듣고 보니 켈스는 그 그림이 제노비아라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것 같네요.” 아나로즈가 눈을 뜨며 조슈아를 보았다. “아직도?” “네. 그 그림이 제 누나를 굉장히 닮았어요.” “그 아인 백치였는데.”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언덕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누나도요.” 언덕 위에 사람의 그림자가 둘 나타났다. 그들이 내려오기 시작하자 조슈아가 일어서서 손짓했다. 그리고 아나로즈를 돌아보았다. “당신과 만나게 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데려왔어요.” 사람 중 한 명은 히스파니에였다. 그는 어린 소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아나로즈가 일어났다.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주춧돌 앞에 다다르자 히스파니에는 말 없이 인사를 하고는 소녀의 손을 놓아 주었다. 희게 탈색되어나는 금발을 한 소녀가 다가와 아나로즈를 올려다보았다. 누가 먼저 손을 내밀었는지 몰랐다. 소녀가 아나로즈의 손을 꼭 잡자 다른 한 손이 다가와 겹쳐졌다. “네 머리가 하얗게 됐구나.” “제노비아도 그랬다지요?” “그래. 점점 그렇게 됐었지?” 두 사람은 주춧돌 위에 나란히 앉았다. 조슈아는 몇 걸음 물러나며 히스파니에 에게 다가갔다. 히스파니에가 미소를 지었다. “같이 노을 섬 곳곳을 다녔지. 저아이는 여기 온 것이 처음이더군.” 다른 사람들은 물러나고 두 사람만이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와 어린 딸 처럼, 닮지는 않았지만 느낌이 비슷한 두 사람이었다. 리체가 다가와 누구냐고 묻지 조슈아가 조그맣게 설명해 주었다. “그럼 너 하고도 멀리 한 핏줄이구나.” 조슈아는 미소 짓더니 이리저리 풀 줄기를 하나 뽑아들었다. “모녀나 자매, 사촌 간이 아닌데도 몇 대를 걸쳐 한 가문에 비슷한 얼굴이 내려오는 경우가 있지. 아우렐리에와 제노비아. 그리고 제노비아와 이브 누나처럼.” “그렇게 된 거구나.” 리체가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데 조슈아가 불쑥 말했다. “쟤가 페리윙클 꽃의 주인공이야.” “에....뭐?” 리체는 잠깐 멍한 표정이었으나 곧 생각해 냈다. 선원들이 잔뜩 오해하게 만들었던 그 식탁 위의 페리윙클 꽃? “그걸 저 애가 줬다고?” “새벽녘에 나갔다 온 얘기 했었잖아. 그때 준 거야. 그걸 받을 때까지만 해도 난 무슨 뜻인지도 몰랐지.” “저기, 그럼 저 애는 무슨 뜻인지 알았고?” 조슈아는 풀줄기만 내려다보고 있더니 낮게 대꾸했다. “알았던 것 같아.” 이윽고 아나로즈와 아우렐리에는 나란히 일어났다. 떨어지기 직전에 아나로즈는 아우렐리에의 이마에 키스를 해주었다. 아루릴리에가 물러나자 아나로즈가 조슈아를 향해 말했다. “이제 그들을 부르자.” 조슈아는 주춧돌에서 멀찍이 떨어져 서 있더니 리체에 물러나라고 눈짓을 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팔을 내밀었다. 잠시 후, 바람이 거세어지더니 점차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조슈아를 둘러싼 풀들이 끊어질 듯 날렸다. 리체는 옜날 쥬스피앙의 집 앞에서 보았던 광경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조금 겁이 났다. 아나로즈가 리체를 보더니 말했다. “주춧돌 뒤에서 기다리면 괜찮아.” “네...그럴게요.” 조슈아의 몸에서 희미한 광채가 떠올랐다. 머리카락이 더 밝은 빛으로 변했다. 그러나 리체가 기억하던 것 처럼 엄청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 후 조슈아는 눈을 떴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 온 건가요?” 대답은 얼른 들려오지 않았다. 조슈아는 잠시 후 미소 지었다. “그렇군요. 아나로즈, 당신이 이들의 모습을 볼 방법은 없나요?” 아나로즈는 말 없이 품에서 어떤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서 빛나는 가루가 나와 흩뿌려졌다. 다음 순간, 아나로즈는 조금 눌라며 한 걸음 물러섰다. 리체, 아우렐리에, 히프사니에의 눈에도 보였다. 수십인지 수백인지 모를 희미한 윤곽들이 아나로즈의 앞에 모여 있었다. 모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서. 사방을 메우며 언덕위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리체가 중얼거렸다. “이렇게 많은 줄 몰랐어...” 잠시 후 한 노인이 일어났다. [티카람 님. 우리 모두는 당신이 우리를 용서할 날이 오리란 희망을 버렸었습니다. 이 순간에도 저희의 말을 오래 듣고자 하지 아니 하실 것을 압니다. 하지만 이 말만은...저희는 당신께 너무 큰 죄를 지었습니다. 감히 사죄 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나로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조슈아가 말했다. “티카람님의 용서가 그대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 합니다. 주춧돌은 힘을 되찾았으니 여러분의 소원에 따라 갈 곳이 정해질 겁니다. 말해 두지만, 이제 거울을 통과하면 돌아올 수 없습니다. 저쪽에서 또 다른 소원 거울을 만들거나 찾아내지 못하는 한은. 그랬기에 가나폴리 사람들도 이 거울을 이용해서 모두 그곳으로 떠나지 않은 겁니다.“ 그림자들 모두가 일어나며 조슈아를 향해 몸을 굽혀 절을 했다. 수 많은 목소리가 다투 말했다. [공작 폐하의 발 아래 세상 모든 바다의 복속이 있기를.] [공작 폐하께서는 반드시 두 번째 데모닉 공작이 되실 겁니다. 저희에게는 이미 그렇습니다.] [축복받은 아르님에게 무한한 영광과 승리가 있을지어다! 만세! 만세!] 조슈아는 허리를 굽히며 날렵하게 궁정식 절을 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그들을 바라보았다. “첫 번째 축복받은 아르님이었던 공작, 이카본 폰 아르님을 대신해서 그대들과의 약속을 지킵니다. 약속의 사람들이여, 그대들과 축복받은 아르님 사이의 기나긴 맹세는 끝났습니다. 이제 모두 고향에 닿을 수 있기를, 그리고 고향의 모습이 그대들이 바라는 바와 같기를.” 주춧돌 위에 뭔가 반짝이는 것이 나타난 듯 했다. 잠시 후 반짝임은 물처럼 미끄러져 내려왔다. 찬란한 거울이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흔들리고 소용돌이치는 거울이었다. 하나하나 주춧돌 위로 올라갔다. 거울을 바라보며 한 걸음 내 딛자 그림자는 흔적도 없이 지워져버렸다. 누군가는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돌아서서 다시 한번 절을 하기도 했다. 겁먹은 듯 불안한 걸음을 내 딛는 자도 있었다. 기쁨을 못 이겨 뛰어드는 자도 있었다. 주춧돌에는 돌로 된 닿이 높이 솟아 있었다. 풀 밭에 또렷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아래에는 이카본 폰 아르님의 묘비명이 새겨져 있었다. 남쪽바다를 지배하는 위대한 섬 페리윙클을 구하고 스스로를 왕으로 삼은 이 아노라마드 국왕의 왼쪽 심장 비취반지 장원의 공작 이카본 폰 아르님 뱃놈들이 수호하는 혼이여, 우리 폐하를 바다 빝 산호 궁전에 모시어 남쪽 바다가 하얀 소금 들이 되는 날까지 지키소서. 모든 발이 그 묘비명을 딛고서 사라져갔다. 오래 전 약속한대로 그들은 이카본이, 그의 몸이, 그의 관이 만든 주춧돌을 얻었다. “모두 가 버렸네.” 들판이 고요해지자 리체가 거울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자신은 어디로 가게 될까 생각해 봤지만 떠오르는 곳이라고는 블루 코럴 섬에 있는 집 뿐이었다. 어쩐지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며 몸을 돌렸을 때였다. 조슈아가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마치 거울로 걸어 들어가기라도 할 듯 한 자세였다. 리체가 당황해서 부르려 하는데 그가 눈을 떴다. “아나로즈, 이쪽으로 와서 제 손을 잡아 보세요.” 둘은 거울 앞에서 손을 맞잡았다. 조슈아가 다시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말했다. “거울 안으로 들어가세요.” 아나로즈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뜻이지? 난 돌아가야 할 곳이 있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건 소원을 비는 거울이잖아요. 당신이 꼭 가야 할 것을 거울이 알고 있을 거라고..지금 마음속에서 켈스가 말해줬어요.” 켈스니티의 이름을 들은 아나로즈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켈스는 나타나지 못하는 건가? 거울로 들어가는 것은?” “당신이 이 거울로 들어가면 모든 걸 알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아무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아나로즈는 조슈아의 눈을 보며 무언가를 읽고자 했다. 그리고 읽은 듯 했다. 그녀에게는 켈스니티의 흔적이 보이는 지도 몰랐다. 아나로즈가 거울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녀의 모습은 씻은 듯 사라져버렸다. 처음에는 그냥 거울을 통과해서 맞은 편으로 나온 건가 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발치의 풀은 짤막한 겨울 풀이 아니었다. 길게 자라기 시작한 목초였다. 해는 아직 높았고 공기는 부드러웠다. 오후 세 시쯤일지도 모른다. 어쩐지 그런 것 같다. “앤.” 등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보면서 그녀의 가슴에 기쁨이 차올랐다. 켈스니티가 그 곳에 서 있었다. “켈스!” 아나로즈가 두 손을 내밀자 켈스니티가 잡아주었다. 잠시 후 아나로즈는 손을 놓고 켈스니티의 목을 껴안았다. 믿을 수 없었던 재회였다. 웃음과 눈물이 범벅이 되었다. “다시 만날 수 있었어. 정말로, 다시 만날 수 있었어.” “기뻐하긴 일러.” “이르다니?” 켈스니티는 아나로즈의 손을 떼어놓으며 미소 지었다. 오랫동안 보고 싶었던 바로 그 미소였다. “따라와. 좋은 걸 보여줄게.” 둘은 목초지를 가로질러 갔다. 그러나 아나로즈는 곧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챘다. “여긴 별꽃 골짜기 잖아? 어쩌면 예전과 이렇게 똑같지?”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를 깨 닫고 걸음을 멈췄다. 켈스니티가 돌아보았다. 아나로즈가 눈을 크게 뜬 채로 말했다. “켈스...당신은 죽었잖아.” 켈스니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어. 여긴 진짜 세상이 아니야.” “그러면?” “우리가 가장 행복했던 날의 세상이지.” “가장 행복했던 날이라면.....”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나로즈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작은 나막신. 리넨으로 지은 편안한 치마. 발목에건 나무구슬 장식이 있었다. 머뭇거리며 올린 손에 타버리지도 , 덩굴에 얽히지도 않은 고운 루비 빛 머리카락이 만져졌을 때 그녀는 넋을 잃었다. 눈물이 흘렀다. 켈스니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가자. 기억 안 나? 시간 모자라서 발 동동 굴렀었잖아. 얼른 안 가면 오늘도 똑같게 돼.” 이끌려 걸으면서도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사각사각 거리는 풀 틈으로 별꽃이 하얗게 올라오고 있었다. 골짜기를 넘어 절벽을 오르는 내내 곧 보게 될 것 때문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마침내 나타났을 때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기쁨인지 슬픔인지 판단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가슴도, 귀도, 먹먹할 따름이었다. 그들만의 작은 별장이 서 있었다. 기울어지기 시작한 별을 받으며, 흔들리는 십자 풍향계와 함께. “난 조금 있다가 나타나게 돼 있지? 그럼 이따가 봐.” 켈스니티는 별장 뒤로 사라졌다. 문 손잡이를 잡자 주근거리는 가슴을 누를 수가 없었다. 문에 걸린 호환은 앵초와 라벤더를 엮은 것이었다. 창틀에 세 개 나란히 바이올렛 화분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와는 달리 보랏빛 꽃이 얌전히 피어 있었다. 달칵, 문이 열렸다. “앤? 꽃 가져왔어?” 그가 식당 바닥에 앉아 의자를 거꾸로 놓고 주머니칼로 다리 길이를 맞추고 있었다. 눈앞에 흐려지면서 잠시 보이지 않았다. 왼손 소매로 눈물을 닦는데 그의 다가와 어느새 오른손에 들려있던 별 꽃 다발을 받아들었다. “이걸로 장식이 될까? 너무 작은데.” 다행히 기억하고 있다. 입술이 저절로 말한다. “아니...할 수 있어.” 눈물이 걷히자 그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회색머리, 활기 넘치는 검은 눈동자, 미소 어린 입술이. 그의 손이 다가와 한 차례 그녀를 껴안고 놓았다. 모든 것이 꿈처럼 흘렀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의자 다리는 왜 붙들고 그래?” “삐딱해 지잖아, 자꾸. 몇 번 잘랐더니 의자가 아예 낮아지네.” “당신이 앉으면 되겠네. 나랑 딱 맞게.” “내 키 작아졌으면 좋겠어?” “응. 나보다 작아져서 내 품에 폭 안겼으면 좋겠어.” 둘은 키득키득 웃으면서 서둘렀다. 두 손님이 올 시각이 다되었는데 식탁준비는 아직이었다. 겨우 별꽃다발을 만들어 올려놓고 수프 맛을 보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나로즈가 외쳤다. “잠깐만!” “뭐가 잠깐이야 무슨 엄청난 걸 차려 놓으시려고!” 개의치 않고 문을 밀고 들어오는 스초안을 보며 아나로즈가 낭패한 표정을 했다. 뒤이어 켈스니티의 목소리도 들렸다. “들어가고 될까요, 주인 아씨?” “아씨는 아주 많이 바빠요. 도와주려면 들어오든가 해요.” 그 동안 벌써 거실을 두리번대고 돌아다니던 스초안은 뭔가 발견하고는 선뜻 집어 들어 내밀어 보였다. “이거 직접 만든 거야? 우와, 대 마법사 아가씨가 바느질도 하네.” “바느질 못해! 얼른 올려놔!” “하긴 이건 자수니까 좀 다른가.” 이카본이 손질하던 의자를 바로 놓고 나오며 검지를 흔들어 보였다. “이것 봐, 예의 없는 손님들. 오려면 아주 일찌감치 와서 청소라도 하든가. 그게 아니면 아씨의 요리가 끝난 다음에 오는 게 예의라고.” 스초안은 딴전을 피웠다. “아니, 우리 공작 폐하께서 의자를 다 고치시고, 이런 망극한 사실을 누구한테 가서 알려야 하나.” “누구긴 누구야. 가구 수리공이지. 자, 자, 잔소리는 그만 두고 얼른 선물들 내놔. 설마 빈손은 아니겠지?” “저 공작 폐하께서 또 공짜로 묻어가려는 건 엄청 싫어해요.” 이카본이 실랑이 하며 시간을 때워주는 사이에 음식이 다 되었다. 켈스니티는 시킨 대로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빙그레 웃었다. “스프 냄새가 아주 좋은데.” 이윽고 모두 둘러앉았다. 가운데 놓인 케이크는 가운데가 꺼진 까닭에 아나로즈가 못내 신경 쓰는 모습이었다. 켈스니티가 얼른 칼을 집어 들고 이카본에게 쥐어 주었다. 이카본도 눈치 채고 재빨리 여러 조각으로 잘라버렸다. “아주 맛있어.” “고기 조각 한 개 없는데 잘 들 먹네.” “고기는 성에 가면 실컷 먹는데 이런데서 까지 뭘.” “우리 대 마법사 아가씨. 요리하느라 수고하셨어요. 거 참 이상하지. 왜 요리는 마법으로 안 되나 몰라.” 마지막 말은 스초안의 지분거림이었다. 아나로즈가 발끈하며 말했다. “마법으로 요리를 왜 못해? 안하는 것 뿐이지.” 식사가 끝나자 손님들이 뒤처리를 도맡았다. 거실로 나와 앉았던 이카본은 아나로즈의 손가락 데 ㄴ자국이 있는 것을 보더니 슬쩍 잡아 당겨 입을 맞추었다. “......” 다른 두 사람이 볼 까 당황한 아나로즈가 손을 잡아 당겼지만 이카본은 빙그레 웃을 뻔이었다. 결국 아나로즈도 웃고 말았다. “오늘 잘 먹었어. 다음에는 내가 개암 구이 만들어 줄게.” “그거 개암을 굽기만 하면 되는 거 아냐?” “아냐. 일단 개암을 꼬챙이에 꿰어야 한다고.” 아나로즈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거 어렵겠네.” 날이 저물어갔다. 스초안은 바람 쐬러-아마도 파이프를 피우러-나갔고 이카본은 2층에 잠시 올라갔다. 아나로즈가 거실에서 접시와 컵들의 물기를 닦아 그릇장에 넣고 있는데 켈스니티가 다가왔다. “이제 시간이 다 되어 가.” 손이 떨렸다. 작은 접시 하나를 깨뜨릴 뻔했다. 켈스니티는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보여 줄 것이 있어.” 켈스니티는 뒤뜰로 나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어느 창 아래 앉게 했다. 창 안쪽으로 거실 구석이 보였다. 그곳에서 기다리라고 말 한 뒤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이카본이 내려왔다. “우리 아가씨는 나갔어?” “잠시 산책 좀 하고 오겠다더군.” “잘 됐다. 켈스. 얘기 좀 하자.” 둘은 거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아나로즈에게 두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목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결혼 말이야.” 말하는 투로 보아 둘 사이에 이 화제가 처음은 아닌 듯 했다. 아나로즈는 머리를 나무 벽에 기댔다. 열린 덧창을 타고 부드럽고 나직한 목소리, 그리고 그녀가 사랑하는 자신 있고 빠른 목소리가 번갈아 흘렀다. 아련한 기억이었다. “그래, 얘기는 했어?” “아니, 신경 쓰이는 문제가 있어서 궁리하고 있다. 그래서 너하고 의논 좀 하려고.” “어떤 건데?” “결혼식에 앤의 가족은 아무도 안 올 거 아니야. 내색하진 않겠지만 서글플 텐데.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와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잠시 후에 켈스니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생각해 봐야 할 문제겠지. 어머님을 설득하는 건 힘들 테고ㅗ, 누이 라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에일로즈 아씨?” “응, 지난 번에 찾아 왔을 떄 얘기 해 봤는데.” “네가?” 켈스가 나직하게 웃었다. “조금 이야기가 통할 것도 같았어.” 손가락을 딱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버릇이었다. “좋은데. 그거 좋은 생각이야 편지를 써 봐야겠어. 고맙다. 사제님한테 고해를 하면 꼭 뭔가 수가 생기더라.”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바로 사제의 일이야. 그런데 이러면 또 결혼이 미뤄지겠는데.” “미뤄지면 누구보다 아쉬운 건 아지. 하지만 난 그녀가 가족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할 수 있길 바라니까.” 잠시 사이를 두고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난 밖에 좀 나가봐야겠다. 우리 아가씨 밤중에 길 잃을라.” “그녀가 위대한 마법사 라는 걸 잊지 마.” ‘위대한 마법사여도 늘 걱정 되는 마음을 우리 사제님이 왜 모르시지.“ 아나로즈는 고개를 젖혀 처마를 올려다보다 눈을 감았다. 따뜻한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 내렷다. 이것이 꿈이라면, 천 년 동안 잠들더라도 영원히 꾸고만 싶다. 손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앤.” 눈을 뜨자 켈스니티의 얼굴이 보였다. 처마는 이제 없었다. 기댔던 나무 벽도, 아름다운 나무 별장도 없었다. “고마워.” 아나로즈는 몸을 일으켰다. 사방이 캄캄했다. 정말로 길을 잃은 것처럼. 그러나 이카본은 그녀를 찾으러 오지 모살 것이다. 그녀가 갇힌 검은 무덤 속으로는. “기뻤어?” 아나로즈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흰 별꽃 한 뭉치가 소복이 피어 있었다. 그것만이 남았다. “이제 여기가 어딘지 말해줘.” “여긴 조슈아의 세계 속이야.” 켈스니티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조슈아의 세계에 갇혀있다는 말은 들었지? 내가 그를 살리려고 반년 간 몸에 들어가 있는 동안 내 의식은 조슈아의 의식에 섞이고, 능력도 점점 옮겨갔지. 조슈아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강령 상태인 것이니까. 예전에는 그렇게 막으려 했던 일이지만 죽음 앞에서는 어찌하는 수가 없더군” 켈스니티는 오랫동안 조슈아의 몸에 직접 닿지 않으려 했었다. 강한 영매인 조슈아에게 사제인 자신의 능력이 옮겨가게 되면 그렇지 않아도 가누기 힘든 힘을 갖고 있는 조슈아의 저신에 무리가 갈 것을 우려해서 였다. “내겐 기억속의 세계를 일시적으로 만들어내는 힘이 있어. 그 힘이 조슈아에게 옮겨 붙어 그의 세계 속에 이 곳을 만들게 한 거지. 다시 말해 조금 전의 것은 다 내 기억이야.” 아나로즈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이윽고 웃었다. “그래. 조금씩은 달랐어. 내 기억과. 그럼 그 날 켈스는 사실 더 일찍 왔는데 내가 허둥 대는 걸 보고 일부러 기다렸던 거구나.” 켈스니티는 마주 미소 지었다. “더 있다가 나타나려 했지만 스초안이 들어가자고 자꾸만 재촉해서 어쩔 수가 없었지.” 아나로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며 웃는 것이 마음 한 구석을 아프게 했다. 이윽고 아나로즈는 주위를 휘둘러보며 물었다. “그런데 여기가 조슈아의 세계라면, 난 어떻게 들어왔지?” “소원 거울을 통과했잖아. 앤, 그 거울은 이 세상 어디든 그 사람이 가장 가고 시은 세계로 보내 줘.” “그렇다면....” 켈스니티가 다시 웃었다. 바람이 긴 머리를 쓰다듬어 날렸다. “꼭 여기일 거라고 생각했어.” 아나로즈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조금 전에 본 생생한 기억들이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몇 백년이 흘러도 기억은 이리 또렷하다. 되살아난다. 잊으려 애쓰던 세월은 책 한 페이지처럼 접혀버렸다. 그날과 오늘 사이의 고통보다 더 가까이 있었다. 별장의 저녁식사, 여름밤의 웃음은. “이제는 다시 잊으려 하지 않겠어.” 켈스니티는 그녀의 녹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래. 잊지 마, 앤.” 켈스니티는 한 걸음 떨어져 서더니 검은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누군가에게 말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나로즈가 그를 불렀다. “그럼 켈스는 어떻게 되는 거야? 거울은?” “......” 켈스니티의 몸이 희미해지더니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수많은 빛 가루로 이루어 진 것 같던 몸이 이윽고 휘날렸다. “켈스!” 아나로즈가 다가가 손을 내밀었지만 잡히지 않았다. 나비가 떨어뜨린 가루를 잡을 수 없듯, 그렇게 흩어져 날아갔다. [앤, 난 조슈아의 의식과 분리되어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 희미한 윤곽이 말했다. 아나로즈는 멍하니 서서 그 모습을 보았다. 금빛가루는 점점 빛을 잃어갔다. [이대로는 점점 그의 의식에 묻혀 다시는 깨어날 수 없게 될 뿐이야. 더 늦기 전에 떠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다행히 날 지금껏 혼으로 남게 한 소원은 이뤄졌어. 더 남아 있을 필요는 없어.] “그 말은...” [꼭 돌아올게. 이카본과 내가 처음 쪽배를 타고 당신을 찾아간 그 날처럼, 다시 한 번 그를 찾아내어 그와 함께 갈게.] 빛이 눈물처럼 흘렀다. 이제 윤곽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켈스!” [안녕, 앤. 안녕, 조슈아. 다시 태어나도 그대들을 지키겠어.] 가루가 스러졌다. 빛나지 않았다. 이제 어느 세상에도 존재하지 않게 된 사제의 마지막 말을 안고 홀로 따뜻한 어둠 속에 남겨졌다. 15. 아몬드 나무 아래 “불이 꺼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찾아보았지, 그대가 있던 자리 아무도 없고 빈 의자만 남았네 가버렸을까. 내 연주 들렸을까 알 수 없지만 허리 굽혀 정중히 인사했다네, 그대 있는 것 처럼 그게 내 최선 이제 물러나 무대 뒤로 내려가 사라집니다. 그대가 사라졌듯 내게 남은 건 그대에게 들려준 나의 마음 뿐. 줄 수 잇는 모든 것 담은 노래 뿐.“ 조슈아는 눈을 떴다. “켈스.” 언덕 아래 앉은 히스파니에가 조슈아를 무릎에 눕히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갔다. 조슈아는 상반신을 일으켰다. 눈 앞에는 리체가 잇었고 아우렐리에, 그리고 막시민도 있었다. 막시민이 물었다. “켈스는?” 조슈나는 말 없이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주춧돌은 사라지도 업었다. 이카본의 관이기도 한 그것은 다시 그녀의 무덤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조슈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진혼되었어.” 막시민이 한참 뒤에 말했다. “네 손으로 해 줬으니 그도 만족했을 거다.” 바람이 불어와 주춧돌에 눌려 있던 풀들을 일으켰다. 조슈아는 한 동안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리체가 다가오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어 내밀었다. “그녀가 내게 이걸 주더라고.” 손에 든 것은 작은 루비 브로치였다. 장식은 간소하고 예스러웠다. 루비의 빛깔은 아나로즈의 머리카락과 꼭 같았다. 남쪽 섬의 루비였다. 조슈아는 리체의 손을 오므려 브로치를 쥐어 주며 말했다. “잘 간직해 줘.” “내가 가져도 되는 거야?너희 집안의 물건이 아닐까?” “아니, 그녀는 내 조상이 아닌걸.” “하지만 이상해.” 리체가 뒤를 한 번 돌아보더니 중얼거렸다. “저 애도 아니고 왜 날 줬을까?”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아우렐리에는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리체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조슈아는 웃었다. “네가 옷을 꿰매 줘서 그랬을 거야.” 그 때 막시민이 다가와 어깨를 움츠렸다 내리며 말했다. “ 난 이해가 안 되더라고.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옷을 꿰매 주겠다고 한 너나, 그걸 해 달라고 한 아나로즈나, 대체 뭘 하자는 건지.” 리체가 조그맣게 웃더니 말했다. “너 몰라?” “모르냐고? 그럼 네 생각은 뭔데?” “그녀는 여자잖아.” 막시민은 더욱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가 잠시 후 헛웃음을 터뜨렸다. 조슈아도 눈을 깜빡거리더니 물었다. “조금 만 더 설명 해 봐.” “사랑한 사람의 무덤 앞이잖아.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어.” 리체는 만지작거리던 브로치를 내려다보았다. 루비는 석양빛을 받자 더욱 황홀하게 반짝거렸다. “그 앞에서 그녀는 늘 아름답고 싶었을 거야 허술한 모습은 보이기 싫었을 거야. 할 수만 있다면 더구나 조슈아 너는 그 사람의 자손이자 분신과도 같은 사람이잖아. 해진 옷차림으로 만나고 싶지는 않을 거라고.” 두 소년은 고개를 갸웃 거리며 생각해 봤지만 결국 완전히 이해한 눈치는 아니었다. 고작 한 말이 이런 정도였다. “아가씨들의 세계다 그거냐.” “완벽주의자인 것 같긴 했어.” 리체는 어깨를 으쓱하며 브로치는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런 그녀의 옷을 꿰매어 줄 수 있어서 기뻤어. 이런 보답을 받을 줄은 몰랐지만. 이윽고 다섯 사람은 미의 극치호가 정박하고 있는 해변을 향해 걸어갔다. 가는 동안 막시민은 이제 앞으로 백 년 동안 바이올린은 켜지 않겠다고 이를 갈았고, 조슈아는 리체에게 지난 번에 막시민과 둘이 왔던 때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몬드 꽃이 흩날리던 방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지만, 리체는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 더 흥미를 느끼는 모양이어서 도무지 그 부분 까지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돌문을 연 암호는 대체 뭐였어?” 조슈아는 조금 창피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암호 같은 게 아니었어.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었다고 내 생각엔 일종의 기원인 것 같아. 찬트처럼, 찾아온 사람의 마음을 읽는 거지. 내가 한 말에 별 의미는 없었어.” 그러나 리체는 끈덕졌다. “그래서 대체 뭐라고 했는데? 무슨 말이든 하긴 한 거 아냐?” “그러니까 그냥, 이카본이 찾아왔었다고 생각하면서 해 본 거라고, 대사처럼, 나 배우인 거 알잖아.” “그럼 지금 한 번 해 봐. 대사니까, 대사처럼.” 결국 조슈아는 일부러 다른 곳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사랑하는 우리아가씨. 당신을 만나러 내가 왔어요.” “......” 잠시 후 돌아보니 리체도 애써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조슈아는 부르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남주의 3월은 완연한 봄이었다. 목련과 벚꽃철은 이미 지나고 철쭉이 봉오리를 내밀 즈음이었다. 아니야 사반테 관 옆의 미로 정원에 아몬드나무가 몇 그루 있었다. 조슈아는 그 나무 아래 앉아 생각에 잠기는 버릇이 생겼다. 언제부터인가 그가 사라지면 친구들도 가장 먼저 그리로 찾아가게 되었다. 그날 아침 조슈아는 편지를 쓰고 있었다. 일부러 나무 서안을 하나 갖고 나왔다. 공연 대본도 하룻밤 만에 써내려가던 그가 벌써 첫 머리를 세 번째 고치는 중이었다. 방에서 잘 되지 않아서 일부러 밖으로 나오기까지 했는데, 구겨버린 종이가 벌써 두 장이나 주머니 속에 들어있었다. 저 만치에서 루시안이 둘둘 말아 쥔 종이를 갖고 쥐고 달려왔다. 언제부터인가 루시안은 보리스나 막시민보다 조슈아에게 의논하면 좋은 이야기가 있다는 걸 눈치 채고 있었다. 루시안이 다가오자 고개를 든 조슈아가 재빨리 편지지를 치웠다. 루시안이 물었다. “편지 써? 누구한테?” “...아니, 뭐, 그냥.” 루시안은 편지 내용을 캐 물으려 하지 않았다. 자지가 하고 싶은 말 때문에 몸이 달아 있었다. “이거 좀 봐봐, 드디어 우리 대결 날짜가 결정됐어.” 조슈아는 종이를 받아들어 펼쳤다. 맨 위에 ‘크림 차 빌라 대 도토리 빌라의 대결! 놓칠 수 없는 한 판 승부!’ 라고 써진 것을 본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누가 쓴 거야? 너무 웃긴데.” “내가 쓴 거 아냐! 하여간 이 종이가 온 걸로 보니 교수님들의 허락이 떨어진 거라고. 날짜도 정해졌어. 닷새 뒤르노아의 날이야. 호이오크 교수님께서 직접 이회해주신대. 너 알지? 초급 마법학 교수님.” 조슈아는 솔직히 시인했따. “몰라. 한 번도 못 봤어.” “그러니까 수업 좀 나와! 그 교수님 아주 재밌어. 자, 그럼 대결 내용이 뭐냐면 첫 번째는 없어진 물건을 누가 먼저 찾느냐 하는 건데, 교수님이 직접 숨기실 거래. 내 생각엔 막시민이 아주 잘 할 것 같아! 그리고 두 번째는 네가 하면 좋을 것 같은 거야. 뭐냐면....” 조슈아는 흥분한 루시안이 하는 설명을 웃으면서 다 듣고 있었다. 그리고 연습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오늘 오후에 티치엘을 만나 도와달라고 하자고 제안했다. 어느새 티치엘은 도토리 빌라의 비공식 매니저가 되어있었다. 도토리 빌라에 사람 세 명 밖에 없는 까닭에 조슈아는 객원으로 대결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얘기가 끝날 즈음 바람이 불어와 아직 남은 목력 꽃잎을 몇 개 떨어뜨렸다. 루시안은 문득 머리 위 아몬드 나무를 보면서 물었다. “그런데 이 나무는 언제 꽃 피어? 잎만 잔뜩 올라왔네. 원래 꽃이 안 피는 나무인가?” 조슈아가 같이 머리 위룰 올려다보더니 빙그레 미소 지었다. “우리가 입학하기도 전에 피었다가 졌어.” 루시안이 의아해서 눈을 깜빡거렸다. “그 땐 아직 눈도 내리고 그럴 때였는데?” “원래 그래.” “되게 성질 급한 나무구나.”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지만 아주 아름다운 꽃이 피지.” (룬의 아이들- 데모닉 종막) Epilogue : Knotted 루시안의 충고 아닌 충고의 영향이었는지 조슈아는 그 날 수업에 나타났다. 벌써 루시안이 가져온 종이가 강의실을 한 바퀴 돌았던 모양이었다. 곳곳에서 박수와 휘파람 소리가 울렸다. “1학년의 자존심을 책임지라고!” “루시안 칼츠가 까짓 거 파이 백 개 더 실어오면 우습지 뭐.” “소녀 마법사 매니저까지 있잖아?” “가서 한 번 더 뼈를 부러뜨려 버려!” 마지막 말에 조슈아는 난감해 하며 중얼거렸다. “그건 내가 아닌데....” 막시민은 동급생들이 뭐라 하든 개의치 않고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조슈아가 다가가 흔들자 그가 웅얼거렸다. “너 나 깨우면 깨운 값 내야 하는 거 잊었냐....” 1교시가 문제의 호이오크 교수가 들어오는 초급 마법학 수업이었는데 수업이 시작되자 조슈아는 은근히 당황했다. 마법은 어차피 배우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까닭에 관련된 자료도 일부러 피해온 터였다. 책을 펼쳐보니 완전히 생소한데다가 오늘 진도를 듣는다고 지난 진도를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학문도 아니었다. 난생 처음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헤매고 있는 조슈아에게 막시민이 한 마디 했다. “고소하구만.” “너 그게 친구가 할 말이야?” 내심 화가 나기 시작한 조슈아에게 다행스럽게도 중간에 교수가 수업을 멈추더니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곧 다시 들어와서 말했다. “너희들, 우리 학원이 얼마나 재정이 부족한지 알지?” 웃기는 말투로 유명한 호이오크 교수였으므로 학생들은 이건 또 무슨 농담인가 하며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한 학생이 볼멘 소리를 했다. “글쎄요. 우리 입장에서는 학원이 우리한테 그 많은 돈을 걷어 다 뭐에 쓴느지 모르겠는데요.” “마법에는 돈이 많이 들어 그렇게 알면 돼. 하여간 우리학원은 항상 돈이 모자란단다. 빈 방 하나라도 반드시 세를 놔야 돼.” “빈 방이요?” 강의실 문이 열리더니 소년 하나가 들어왔다. 호이오크 교수가 소년에게 손짓을 하더니 강단 중앙에 세웠다. “편입생이다.” 어느 학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쳤다. “에엣? 우리 학원은 편입생 같은 거 안 받잖아요! 그렇게 알고 있는데?” “시끄럽다 이놈아. 상상력을 발휘해 봐라. 편입생은 안 된다고 해서 다들 정규 학기 시작때 몰려 들게 한 다음 남은 자리에 편입생 받는 것 하고, 처음부터 편입생 된다고 해서 네놈들이 한가롭게 아무 때나 오느라 학기 포에 텅텅 빈 강의실을 만드는 것 하고, 어느 쪽이 바람직하냐?” “결론은 특혜라는 거잖아?” “쳇, 말도 안돼.” “학원이 뭐 이래?” 그때 루시안은 곁에 앉은 보리스를 팔꿈치로 열심히 찌르는 중이었다. “우리 쟤 본 적 있지? 나 저 머리 색깔 기억나.” 강의실이 소란스러워졌다. 수업이 멈춘 틈을 이용해서 재빨리 책을 다 외워버린 조슈아가 한 숨을 돌리며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편입생과 눈이 마주쳤다. 분명 처음 보는 사이였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알았던 기분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의 손이 둘의 삶을 한 차례꼬아놓았던 것 같았다. 시선은 곧 떨어졌다. 소년은 가볍게 목례하더니 말했다. “란지에 로젠크란츠입니다.” -제작노트- [룬의 아이들 - 데모닉 ] 제작노트 첫 머리에 비밀의 말이 등장한다. ‘악마가 귓가에 속삭여 줬던 비밀의 말’ 을 기억해 내지 못하면 그의 운명은 평생 악마의 손아귀에 있다. 중세의 어린 천재들은 체인질링(Changeling)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태어날 때부터 지위나 역할이 정해져 있던 중세인들이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죄로 간주한 까닭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나이나 시대보다 앞서 가는 것은 조금도 바람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천재는 존경받지 못했고 대체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신 또는 악마가 개입하지 않고서야 그런 조숙한 재능을 가질 수는 없다고 여겼기에 천재의 탈출구 가운데 하나는 아기 예수의 예를 따르는 것이었다. 어린 성자, 성녀들의 이야기에는 천재성이 곧잘 등장하고 용인되는 편이다. 성 니콜라우스가 일주일에도 두 번씩 어머니의 젖을 거부하는 것으로 금식을 행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비밀의 말은 조슈아를 다른 사람들과 구분 짓는다. 그가 웨더렌 할머니가 말해 준 전설을 믿든 안 믿든 그의 존재 속에는 이미 불안한 씨앗이 들어 있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만신전에 들어온 그것은 침묵하고 있다. 말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 그가 입을 열면 어떻게 될까? 그 존재를 깨달은 인형은 두려워하면서도 그와의 대결을 꿈꾼다. 그러나 조슈아를 만나면서 균형은 깨어진다. 비밀의 말과 대결할 자신감을 잃어버린 인형은 패배하여 달아난다. 그리하여 마침내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기회를 버리고 인간이 되는 것을 택한다. 반명 조슈아는 인형을 만나 자기애의 가면을 벗고 유년기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이제 유리 인형의 길을 택했고, 비밀의 말을 찾으러 갈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는 인간이 되려 애쓰는 대신 자신이 데모닉임을 긍정했다. 둘의 선택 중 어느 쪽이 옳았을까. 어쩌면, 지밀의 말은 밖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저절로 생겨 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악마가 속삭여준 비밀의 말을 느껴지며 외부에서 들어왔을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그 이유는 낯설기 때문이다. 스스로조차 정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 속에 자신조차 모르는 것들이 수없이 들어있다. 자아 속 정체불명의 불안감은 늘 존재한다. 다만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것의 존재를 느끼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안에는 비밀의 말이 있다. 천재를 그려야겠다고 결심하고 나서, 천재성을 다루거나 천재들을 다룬 수많은 책을 뒤져보았고 그 중 상당수를 사들여 읽었다. 2003년에 그랬던 일은 이제 와서 생각하면 재미있는 기분이 든다. 책들은 결국 내게 큰 도움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만은 당시에 깨달았으면서도 결국 실천하지 못했다. 장편 소설의 주인공으로 천재를 그린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고 과정을 독자에게 납득시키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생각의 속도가 문제인데 그들이 생각하는 속도는 서술을 배제해버린다. 그러면 사건은 마치 증명 과정이 없는 수학 문제 같은 모양이 된다. ‘나는 경이적인 방법으로 이 정리를 증명했다. 그러나 이 책의 여백이 너무 좁아 여기 옮기지는 않겠다...’ 유리인형은 부서지기 쉬운 것을 뜻한다. 그 안에는 수많은 것이 비친다. 그 중에는 ㄴ무겁거나 어려운 것들도 있다. 이를 테면 조상의 영광을 누리는 자신이 조상이 지워준 짐을 거절 할 수 있는 가와 같은. 짐이 너무 무거워서 영광조차 거절하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러려면 조상과 연결된 탯줄을 완전히 끊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 조슈아가 데모닉이 아닌 누군가가 될 수 없듯. 조슈아는 둘 다 받아들이는 쪽을 택했더니 어쨌든 건강해진 것 같다. 앞으로 채소만 먹으며 살 순 없을 것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룬의 아이들]시리즈 3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거기서 밝힌 대로다 3부에서는 1부와 2부의 끝에서 17, 18세였던 중심인물들이 20대가 된 후의 이야기가 예정되어 있다. (늘 그랫 듯 이 시리즈의 나이는 생일을 기준으로 하는 만 나이이다.) 3부 또한 지금까지 주인공이 아니었던 인물 중 하나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대륙 격동기가 그려지게 되는 만큼 기존 인물들도 각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다만 집필 시기는 상당히 늦춰지게 될지도 모른다. [아룬드 연대기]시리즈의 두 작품이 먼저 예정되어 있다. [룬의 아이들 - 윈터러]의 후기에도 썼다시피 집필에는 모두 적당한 시기가 잇는 만큼 [룬의 아이들] 시리즈의 독자 분들도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려 주셨으며 한다. 그 동안 몇 번 질문을 받게 되어 이 기회에 밝혀 둔다. 3권에 조금씩 나타난 동화들은 다음과 같다. 그림 형제. ‘행운아 한스’ 빌헬름 하우프, ‘난쟁이 코’ 그림 형제. ‘헨젤과 그레텔’ 샤를 페로, ‘잠자는 숲속의 미녀’ 그림 형제, ‘훔펠슈틸츠헨’ 이 중 ‘난쟁이 코’와 ‘룸펜슈틸츠헨’은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이야기다. [룬의 아이들 - 데모닉]은 곳곳에서 동화, 즉 메르헨의 모습을 닮았다. 본문에서 창작된 우화들도 그렇고 자신을 닮은 인형이 나타나는 것 같은 근본적인 구조에 있어서도 그렇다. 판타지의 범주는 매우 넓고 그 안에는 다양한 모습의 이야기들이 살아있다. 동화가 주는 향기 또한 하나의 가능성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윈터러와 데모닉의 출발이 비슷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맞다. 그들은 하나의 검고 하나는 흰 쌍둥이 같다. 밤과 낮이라는 쌍둥이 말이다. 밤을 위한 송시가 있다면 낮에게도 한 편 바쳐야 공평하다. 프랑스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새겨져 있다. 마침내 흥미를 잃었네. 모든 자연물로부터 죽을 수는 있지만 죄지을 순 없네. 사람들이 결코 건드리지 못한 것 난 그걸 건드렸고 그걸 말했네. 아무도 그것에서 상상하지 못하는 것. 난 그 모든 걸 캐냈네. 그리고 난 여러 번 맛보았네. 맛 볼 수 없는 삶까지도 난 웃으며 죽을 수 있네 나처럼 습관을 들여보지 그러나 내가 알려주는 이 경이에 이 힘센 선의에 내가 견디는 이 괴롬에 그러면 미래를 알게 될 걸에 데모닉 조슈아는 미래를 알게 되었는가? 2007년 2월, 또 하나의 새벽을 기다리며 전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