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프롤로그 -- > 12살이 되던 해 어느 날 여름. 루시아의 세상이 뒤집어졌다. 기점은 그녀가 어머니를 여의고 왕궁에 들어온 첫날이었다. '꿈을 꾸었나. ..아니면 지금이 꿈인가...' 침대에 앉아 루시아는 넋 놓고 중얼거렸다. 긴 꿈을 꾸었다. 과거로 되돌아온 것인지 예지몽을 꾼 것인지 알 수 없다. 루시아는 꿈속에서 삶을 경험했다. 평온한 인생은 아니었다. 대부분 고통과 눈물로 얼룩졌다. 그래도 가끔은 행복도 기쁨도 있었다. 그 자그마한 희망에 기대 근근이 살아갔다. '어머니.... ' 몰랐다. 어머니는 귀족이었다. 어머니는 살아생전 그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꿈속에서 스물 중반 나이 무렵 우연히 어머니의 오라버니, 즉 외삼촌을 만나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어머니 아만다는 바덴 백작의 막내딸이었다. 바덴 가문은 한 때 제법 세력을 떨친 변경백이었으나 지금은 가진 땅 한 뼘도 없이 간신히 이름만 유지하는 몰락 가문이었다. 나름 유서 깊은 가문이지만 대부분 사람들 기억에서 지워지고 언제까지 작위를 유지할 수 있을지조차 장담하지 못하는 신세였다. 아무것도 없는 변방의 고리타분한 집구석과 가난이 지긋지긋했던 아만다는 그나마 유일하게 돈 될 만한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펜던트 목걸이 하나 챙겨서 수도로 야반도주했다. 아만다가 사라진 즉시 사람을 풀어 잡아왔어야 했다고, 외삼촌은 쓸쓸히 말했다. 그것이 누이를 보는 마지막이 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고 했다. 어리석은 혈기로 뛰쳐나갔지만 금방 들어오겠지 생각한 것이 오산이었다. 한 달여가 지난 후 찾으려 했을 때는 이미 찾을 길이 막막했다고 말했다. 외삼촌이 어머니를 찾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살던 지역 근방만 뒤졌으니 수도로 올라온 아만다를 당연히 찾지 못할 수밖에. 수도로 올라온 아만다가 그 후 어찌 지냈는지 루시아로서는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다만 미혼의 몸으로 왕의 사생아인 루시아를 낳은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우여곡절이 있었을까 짐작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루시아를 낳았을 때 그 사실을 왕실에 알려야 했지만 아만다는 누구도 하지 않는 선택을 했다. 귀족 신분을 감추고 평민들과 섞여 살며 홀로 루시아를 낳아 키웠다. 루시아는 몰랐다. 어머니가 귀족이고, 바덴 백작가문이 외가이며 자신이 왕가의 혈통이라는 것, 그 무엇도 몰랐다. 오직 아만다의 딸 루시아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름다운 어머니, 인심 좋은 마을 사람들, 또래 친구들과 개울가며 숲이며 뛰놀던 나날들. 마치 어제와 같은, 또는 아득히 먼 옛날과 같은 기억을 떠올리며 루시아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녀 인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들은 모두 그 때 있었다. 불행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수도를 휩쓸고 간 유행병이 루시아가 사는 마을을 덮치고 아만다를 피해가지 않았다. 루시아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힘 좋은 마을 여자들과 다르게 체구가 작고 가늘었다. 아무리 가난했어도 귀족 아가씨로 자라며 그리 험한 일은 해 본 적 없었을 것이고, 루시아를 키우며 억척스레 일하며 몸은 점점 망가졌을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던 것 같다. 루시아는 어머니가 세상을 뜨기 며칠 전에 편지 심부름을 했다. 아마 왕실로 보내는 편지였을 것이다. 루시아는 어머니가 내린 결정을 이해했다.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딸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고아가 된 어린 여자아이의 인생은 대개 나락으로 굴러 떨어진다. 루시아가 왕궁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창기가 되어 몸을 팔았을지도 모른다. 아만다가 죽고 며칠 안 되어 왕실 근위대가 들이닥쳐 루시아를 왕궁으로 데려갔다. 왕가의 보물 중에는 친자관계를 증명하는 특수한 감별 마도구가 있었다. 왕실 재산이지만 귀족들은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며 종종 이용하곤 했다. 사생아가 넘쳐나지만 별다른 혈통 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감별 마도구 덕분이었다. 그걸로 루시아는 단번에 공주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왕은 루시아 얼굴만 확인하고 이름을 내렸다. 그것이 태어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라는 사람과의 만남이었다. 비비안 헤세. 그건 루시아의 새 이름이 되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원래 이름이 무엇이었냐 묻지 않았다. 모든 것이 일방적이었다. 엄마를 잃고 느닷없이 왕궁에 끌려온 어린 소녀에게 인심 쓰듯 낡은 별궁 하나를 처소로 던져주었다. 밤새 울다가 자고 일어난 아침. 그것이 지금 루시아 모습이었다. 공주로 인정받았다고 루시아 인생이 하루아침에 뒤바뀐 것은 아니었다. 방탕한 왕은 이곳저곳 가릴 것 없이 자신의 씨를 뿌렸다. 어느 날 불쑥 왕의 자식이라며 새로운 왕자 혹은 공주가 등장하는 일은 호사가들 뒷담화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루시아는 무려 16번째 공주였다. 루시아는 자신이 16번째라는 사실도 먼 훗날 알게 된다. 왕의 사후 자식들을 집계하면서 루시아가 계산해보니까 자신은 16번째였다. 신분이 불분명한 모친과 왕 사이의 하루 야합으로 태어나 어려서 평민들과 어울려 자란 무늬만 왕족이었다. ‘미래를 안다고 해봤자...’ 루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예지력은 보잘 것 없었다. 세상을 바꿀 능력이 아니었다. 가장자리에서 시작한 루시아의 인생은 마지막까지 가장자리만 맴돌다 끝났다. 귀족들의 주류 사회에 편입하지 못했기에 미래를 알아봤자 중요한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루시아가 아는 건 오직 자신의 인생이 앞으로 어찌 흘러가는가, 뿐이었다. 궁에 들어온 이후 루시아의 인생은 하나도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냥 이 별궁에서 굶어죽을 걱정은 없이 그럭저럭 조용히 살아간다.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지만 그랬기에 아무도 괴롭히지 않았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았던 삶이 변환기를 맞이한 건 루시아 나이 19살 때였다. 19살에 루시아의 친부이자 이 나라 국왕 헤세 8세가 죽는다. 딱 1번만 얼굴을 보았던 부친의 죽음을 알았을 때 아무 감흥이 없었다. 친부의 죽음 같은 건 그녀의 인생에 아무런 영향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뒤를 이어 왕이 된 헤세 9세는 왕궁 예산을 잡아먹는, 부왕의 방탕한 결과물들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헤세 9세는 본인과 자식을 제외한 왕족은 모두 궁 밖으로 내보내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루시아가 20살 될 무렵 여전히 왕궁에 남아 있는 선왕의 자식들은 공주만 6명이었다. 루시아는 외가가 없었다. 별궁에 틀어박혀 지내서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를 거두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왕의 딸도 아닌 수많은 왕의 누이 중 하나에 불과한 루시아는 미인도 아니었다. 정략결혼으로 이용할 가치조차 없었다. 헤세 9세는 짐스러운 루시아를 결혼 시장에 내놓았다. 가장 많은 지참금을 낸 남자에게 루시아는 21살 팔려가듯 결혼해서 왕궁을 떠나게 되었다. 루시아의 남편이 되는 메튼 백작은 그녀보다 무려 20살이나 나이가 많고 2번의 이혼 경력이 있었다. 아들만 셋이었는데 큰 아들이 루시아와 동갑이었다. 그와의 결혼생활 5년이 그녀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기간이었다. 별궁에서 지낼 때보다 조금 더 물질적으로는 여유로웠을지 모르나 정신은 피폐해졌다. 그는 나이 많고 뚱뚱한데다가 변태에 성불구자였다. 자신이 해소하지 못하는 성적 욕망을 루시아를 학대하면서 풀었다. ‘싫어!!’ 루시아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한 번 겪었던, 혹은 겪게 될 일에 몸서리를 쳤다. 죽어도 그 놈하고 다시 결혼하기는 싫었다. ‘내 미래를 바꿔야 해. 반드시 바꾸고 말거야!!’ 이미 꿈에서 본 미래는 달라졌다. 원래 루시아는 왕궁에 들어와 근 몇 개월 자폐증상을 보였다. 어머니의 죽음, 갑자기 알게 된 신분, 누구 하나 애정 한 톨 보이지 않는 낯선 환경을 감당하기에 아직 어렸다. 외부 세상과 단절해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넋 나간 루시아를 보듬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형식적으로 의사가 몇 번 다녀가고 굶어죽지는 않게 챙겨주는 의무적인 시녀들의 보살핌만으로 방치되었다. 오히려 그런 지독한 무관심이 방어기제를 작동시켰다. 스스로 자폐증상에서 깨어나 조금씩 달라진 환경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루시아는 자폐 증상을 겪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그녀에게는 수십 년 삶을 살며 쌓은 경험과 지혜가 있었다. 거창하게 세상을 바꾸려는 짓 따위는 엄두도 내지 않는다. 그녀가 원하는 건 오직 그녀 자신의 인생이었다. ‘할 수 있어. 바꿀 수 있어. ’ 방법은 모르겠다. 아무것도 갖지 못한 12살 공주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절망하지 않았다. ‘시간은 아직 많으니까. ’ 시간은 무정하게 흘러갔다. 어느 새 루시아 나이 18살이 되었다. < -- 18살 -- > 아침에 눈 뜨는 기분은 최악이었다. ‘아..또 망할 두통. 이런 미래까지 똑같을 필요는 없잖아. ’루시아는 쑤시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꿈속에서와 똑같이 초경을 시작한 15살 무렵 편두통이 발병했다. 드물면 한 달에 1번, 잦을 때는 3~4번 정도로 중병은 아니지만 평생 달고 가야 하는 고질병이었다. 18살이 되는 새해 첫 아침을 맞이하던 날, 루시아는 세상을 얕보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녀는 분명 열심히 노력했다. 꿈속에서 봤던 미래와 확실히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러나 노력만으로 바꿀 수 없는 미래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령 13살 여름에 전례 없는 폭우로 별궁 1층 바닥에 찰랑거릴 정도로 침수되었다. 그 해 겨울은 한파가 불어 닥쳤는데 여름의 폭우 때문에 저장해둔 땔감이 부족해서 오들오들 떨며 겨울을 보내야 했다. 15살에는 초경을 시작했고 편두통을 앓기 시작했다. 이렇듯 루시아가 감당할 수 없는 힘이 작용하는 미래는 아무리 알고 있다고 해도 결코 바꿀 수 없었다. 19살이 되면 왕이 죽을 것이고, 루시아는 탐욕스런 메튼 백작에게 팔려갈 것이다. 이건 루시아가 바꿀 수 있는 미래가 아니었다. 그걸 깨닫고 절망했다. 차라리 보여 주지 말 것이지, 왜 내 운명에 이런 장난질을 하느냐 하늘을 원망했다. 좌절에 빠져 며칠 두문분출 했지만 며칠 만에 털어냈다. ‘여기서 굶어죽어도 한참 만에 발견되겠지. ’ 생각하니까 맥이 풀려서 방구석에 처박혀 있을 마음이 사라졌다. 루시아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차가운 아침 공기가 바람처럼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창틀에 기대어 살갗을 파고드는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했다. 마치 자신이 처한 운명에 순응하는 것처럼. 겨우 고개를 내밀 수 있었던 창틀에 이제는 손을 딛고 기댈 수 있을 만큼 루시아는 훌쩍 자랐다. 어머니를 닮아서 그녀는 체격이 가늘었다. 약간 붉은 기운이 감도는 갈색 머리카락은 당장 거리를 나가면 여기 저기 눈에 띌 만큼 흔했지만 금빛으로 보이는 호박색 눈동자는 상당히 독특했다. 하지만 그것 외에 그녀의 외모는 평범한 편이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매력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피부가 맑고 하얗기 때문에 꾸며놓으면 청초하거나 매혹적일수도 있는 팔색조 매력이 잠재되어 있었다. 코르셋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가는 허리의 가냘픈 몸매는 남성들의 보호본능을 자극 할만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녀가 고귀한 아가씨로 사교계에서 활동할 것을 전제로 했다. “어디보자..장작이 다 떨어졌고, 감자와 달걀도 얼마 안 남았고..” 그녀의 현재 처지는 나이를 호소하며 삐걱대는 낡은 테이블에 앉아 바닥을 보이는 생필품을 확인해야 했다. 등을 덮는 풍성한 머리카락은 하나로 대충 묶고 입고 있는 밋밋한 무늬의 포플린 드레스는 시녀 의상에 가까웠다. 누구도 지금 루시아를 보고 그녀가 공주라는 것을 알 수 없을 것 같다. “탁지부에 들러 물품 신청을 해야겠네.” 공주인 루시아가 직접 할 일이 아니지만 몇 년 전부터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현재 별궁에는 상주하는 시녀가 한 명도 없었다. 다행히 혼자 관리하기 벅차지는 않았다. 2층짜리 낡은 별궁은 관리상 이유로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2층을 폐쇄한 상태였다. 현재는 1층 일부까지 폐쇄하여 루시아에게 주어진 공간은 침실을 제외하면 방 몇 개뿐이었다. 처음 궁에 들어왔을 때는 루시아를 전담하는 시녀 5명이 있었다. 그러나 전부 여관조차 되지 못한 시녀들이었다. 시녀에도 급이 있다. 왕족 곁에 붙어 다니며 말벗을 하는 팔자 좋은 수석시녀는 대개 귀족 영애들로 ‘시녀’라는 호칭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애초에 격이 달랐다. 직접 일을 하는 시녀는 관리로 인정받는 ‘여관’과 잡일 담당의 고용노동자 ‘시녀’가 있다. 원칙대로면 왕족인 루시아 곁에는 수석시녀와 여관, 노동시녀 3유형의 시중인들이 있어야 했다. 문제는 궁에 왕족이 너무 많고 루시아는 그 중에서 가장 급이 떨어지는 공주였다. 곁에 있어봤자 득볼 기대를 전혀 할 수 없는 루시아 곁에 수석시녀를 자원할 사람이 있을 리 없고, 부가 수입조차 얻을 가능성이 없으니 여관들은 기피했다. 적당히 나이 들면 그만 두는 고용 시녀들이 하나씩 출궁하자 어느덧 루시아 곁에는 한 명의 시녀도 남지 않게 되었다. 당연히 그만 두는 만큼 시녀가 보충되어야 한다. 그러나 추가 소득을 한 푼도 기대할 수 없는 이곳을 기피하는 건 여관이나 시녀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여관은 왕실에서 지급하는 봉급으로 생활에 부족함이 없지만 고용시녀는 받는 보수만 기대서는 생활 유지가 힘들었다. 배정되는 시녀는 며칠 일하다 그만두거나 뒷돈으로 다른 곳을 배정받았다. 언제부터인가는 며칠 일하는 시녀조차도 오지 않았다. 명부에 이름만 올려 일을 하러 오지 않고 탁지부에서 돈만 받아갔다. 루시아가 항의하면 어긋난 일은 제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아무리 가진 것 없어도 그녀는 공주였으니까. 꿈속에서는 직접 여관장을 찾아가 문제를 제기했다. 그 일로 명부 조작을 했던 시녀들 여럿이 중벌을 받았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녀들과 청소나 빨래 등을 함께 했다. 처음엔 놀라던 시녀들도 시간이 지나자 그러려니 했고, 15살에는 마지막으로 남았던 시녀마저 그만두었다. 그래서 루시아는 벌써 이곳에서 3년 가까이 혼자 생활 중이었다. 아마 서류에는 여전히 별궁에 5명의 시녀가 일하고 있다고 나와 있을 것이다. 문서와 실질의 일치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건 명백한 행정 처리 공백이었다. 그러나 수십이 넘는 왕의 자식들은 단지 왕족이라는 명목만으로 요구사항이 굉장히 많아 늘 궁내 재정을 관리하는 탁지부를 골치 아프게 했다. 어떤 요구도 하지 않는 루시아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루시아는 이 상황에 오히려 만족했다. 덕분에 행동의 자유를 얻었다. 시녀 행세를 하며 생필품을 신청하고 일을 해야 했지만 외출이 자유로웠다. 루시아는 탁지부에 들러 물품을 신청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적당한 수고비를 쥐어주고 물건들을 별궁 앞뜰까지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궁이건 더러운 뒷골목이건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했다. 적당한 돈은 사람이 살아가는 윤활유였다. 시녀가 궁을 나가려면 출입문이 따로 있었다. 나가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 뒤에 섰다. 조금씩 줄이 짧아져 마침내 루시아 차례가 되었다. 루시아는 품에서 외출패를 꺼내 경비병에게 보였다. 공주 비비안 이름으로 발급한 외출패였다. 하지만 외출패를 내보이지 않아도 어차피 경비병은 루시아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눈으로 대충 패를 확인하면서 경비병은 눈인사를 하며 아는 척을 했다. “가지고 나가는 물건은?” 루시아 손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눈으로 보면서도 경비병은 재차 확인했다. “없어요.” 경비병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가는 것을 허용했다. 루시아는 궁을 빠져나오자마자 숨이 트이는 것처럼 크게 호흡했다. 흘끗 시선을 돌리자 거대한 장벽처럼 성벽이 높게 솟아 있었다. 저 안은 안전했다. 어디를 가도 루시아 나이의 어린 여자가 아무 위험 없이 혼자 지내기 힘들 것이다. 멍에로 여겼던 공주라는 신분은 사실 그녀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다. 꿈속에서와 달리 현재의 루시아는 그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궁은 그녀에게 숨이 막히는 공간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저곳에서 벗어나고 싶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사람이 많은걸. ’거리에 사람이 그득그득했다. 인파를 헤치며 겨우 몇 걸음 걷다가 이리저리 휩쓸려 제자리만 맴돌기를 여러 번이었다. 간신히 목적했던 2층짜리 작은 집에 도착했다. 문을 두드리자 풍만한 중년 부인이 문을 열어주었다. 약간 부루퉁한 표정이 마치 화가 난 것처럼 보였지만 중년 부인은 언제나 그런 표정이었다. “어서 오시구랴.” “안녕하세요. 필 부인. 마담 놀만은 안에 계시지요?” “매일 집에만 박혀 있는 인사인데 뭘. 어젯밤에는 밤새 술 퍼먹고 아직도 늘어지게 잔다우. 잠시 기다리면 내 차 한 잔 내오리다.” “감사합니다. 필 부인.” 은은한 차향이 떠도는 아늑한 응접실에 앉아 차를 마시는 루시아 표정이 평화로웠다. 간혹 주방 쪽에서 필 부인이 만드는 작은 소음이 들려왔지만 그 마저도 음악처럼 들렸다. 언제고 이런 아담한 자신만의 집을 마련하는 것이 루시아의 꿈이었다. 일하는 사람 한두 명 고용해서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맡겨두고 자신은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고 고요한 삶을 즐길 것이다.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겠지만. 루시아 얼굴에 살포시 웃음이 떠올랐다. 2층 계단을 타고 깡마른 여자가 비틀거리면서 내려오고 있었다. 간신히 몸을 가누듯 위태위태하게 계단을 내려오며 주방을 향해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필 부인. 나 무울~~!” 놀만은 루시아 앞자리 소파에 몸을 던져 앉으며 반쯤 늘어졌다. 마른 체구만큼 마른 얼굴 때문인지 그녀의 인상은 강퍅해 보였다. 나이는 서른이 훨씬 넘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그보다 어렸다. 놀만은 필 부인이 가져다주는 물 한 잔을 단번에 다 들이키고 죽겠다는 신음을 질렀다. “아아아아. 속 아파.” “거 적당히 좀 퍼 마시지. 쯧쯧.” 필 부인이 특유의 불퉁한 표정으로 투덜거리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말과 태도는 퉁명스럽지만 놀만의 숙취를 해소하기 위한 해장음식을 만들러 가는 필 부인의 친절함을 루시아는 알고 있었다. “뭘 그리 많이 마셨어요.” “술이라도 한 잔 마시면 한 줄이라도 써질까 해서 마시다가 주체를 못하겠더라고. 큭큭. 미안해. 내가 이 꼴이라 손님 대접을 제대로 못하겠네. 여기까지 오는 수고했는데.” “손님은 무슨. 수고 아니에요. 어차피 바람 쐬러 나왔을 테니까요.” “그 앞에 테이블 서랍 있잖아. 거기 열어 봐. 이번에 나온 책 있어.” 마담 놀만은 작가였다. 그것도 유명한 로맨스 소설 작가다. 놀만의 작품은 귀부인들 사이에 인기가 좋았다. 사랑 이야기를 다루지만 내용이 고급스럽다는 평이었다. 지적 허영심과 재미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놀만의 책은 귀부인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근 몇 년 낸 작품 덕에 놀만은 수십 년은 족히 놀고먹을 재물을 벌었다. 서랍 안에 든 책을 꺼내며 루시아는 환호성을 질렀다. “드디어 나왔군요! 진짜 많이 기다렸어요.” 루시아는 얼른 책의 맨 뒷장부터 펴 보았다. “끝? 왜요? 이 시리즈 인기 많잖아요.” “더 늘어지면 재미없고 그 정도가 깔끔하게 딱 좋아. 안 그래도 편집자가 두 세권 더 늘리자고 방방 뛰더라. 크크큭.” “그래도 아쉽네요. 편집자 말대로 두 세권 더 나와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책 안에도 봐.” 루시아는 페이지를 넘기다가 중간에 꼽힌 봉투를 찾아냈다. 안을 열자 입금확인증이 들어 있었다. 거금을 확인한 루시아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만. 이건 너무..” “받아. 그 정도 받아도 돼.” “하지만 그 동안에도 적지 않게...” “완결 기념이야. 뭐하면 아이디어 값으로 쳐. 이번 작품 아이디어를 준 건 너니까. 놀만은 과거에도 이처럼 잘나가던 작가가 아니었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작가였다. 놀만이 쓰던 이야기는 주로 평민 여성과 귀족 남자의 로맨스였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그래서 더 꿈꾸게 되는 전형적인 환상소설. 그러나 여주인공이 평민이라는 건 주 고객도 평민일 수밖에 없었다. 돈을 벌려면 타깃을 귀족으로 해야 한다. 놀만이 여주인공을 귀족으로 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귀족의 생활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었다. 사교 파티라고는 구경도 해보지 못한 가난한 평민 출신 놀만이 귀족 생활을 알기 위해서는 다른 작가 작품을 다독해 간접 체험하거나, 귀족 세계를 잘 아는 하녀나 시녀 출신을 수소문해서 고용하는 방법뿐인데 돈이 없으니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적어도 놀만은 그렇게 생각했다. 배는 고프고 의욕은 없고 넋 놓고 광장 공터에 앉아 있는 놀만에게 루시아가 빵 하나 건네주면서 인사를 텄다. 놀만은 몰랐지만 루시아는 그전부터 놀만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거지같지는 않는데 굶주린 표정으로 하릴없이 앉아 있으면서 사람들에게 구걸도 하지 않는 놀만이 자주 눈에 띄자 어느 날은 일부러 말을 걸었다. 그게 두 사람 인연의 시작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다 루시아 네 덕분이야.” 루시아는 놀만에게 사교계를 알려주었다. 루시아는 꿈속에서 직접 귀부인으로 파티에 참석했다. 심부름꾼에 불과한 하녀나 시녀의 경험은 비할 것이 못 되었다. 루시아가 말해주는 화려하지만 추악한 사교계 이야기를 기반으로 놀만은 생생한 귀족여인의 삶을 소설 속에서 그려낼 수 있었다. “놀만 작품이 훌륭하기 때문이에요.” “네가 아니었으면 한 줄도 쓰지 못했을 테니까 네 덕 맞아. 난 앞으로도 더 벌 수 있어.” 루시아는 일주일에 한 번 놀만을 방문했다. 몇 시간 이야기를 나누는 대가로 놀만은 꽤 많은 수고비를 주었다. 물론 초반에는 오히려 루시아가 빵을 가져가 나누어야 했지만 책이 팔리기 시작하자 놀만은 상당한 돈으로 감사를 표시했다.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이야깃거리는 화수분이 아니다. 이제 슬슬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고 놀만은 이제 루시아가 없어도 얼마든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놀만은 어려울 때 얻은 은혜를 잊을 배은망덕한 인간이 아니었다. 놀만은 지금 당장 주는 거금에 더해서 앞으로도 쭉 루시아를 지원해서 결혼도 시켜주고 싶었다. 단지 돈으로 거래하는 관계가 아니라 루시아를 여동생처럼 생각했다. “고마워요. 놀만. 놀만은 만난 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어요.” “내가 할 말이야.” 금액을 확인하는 루시아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까지 모은 돈과 이 돈이면..지금이라도 도망쳐 기반을 잡고 살아가기에 충분하다. ‘아니야. 위험부담이 커. ’아무리 관심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루시아는 공주였다. 사라지면 당연히 병사들을 총 동원해 자취를 쫓을 것이다. 루시아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왕실의 위신 문제였다. 그러면 루시아 행적은 놀만으로 이어질 테고 죄 없는 놀만이 무슨 곤욕을 치를지 알 수 없다. 무사히 도망칠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도망치려면 아예 수도를 떠나 멀리 가야 할 텐데 어린 여자 혼자 몸으로 먼 길을 가다가는 십중팔구는 사고가 날 것이다. 호위를 고용한다고 해도 믿을만한 호위인지 알 수 없고 오히려 가던 중 호위에게 뒤통수 맞고 가진 돈을 모두 빼앗기지 않으면 다행이다. 도망을 치려면 차라리 메튼 백작과 결혼 후에 하는 것이 낫다. 결혼해서 왕실 일원에서 빠져나갔으니 실종되어도 이전보다 관심이 덜 할 테고 1년 정도만 백작부인 노릇을 하며 믿을 만한 측근을 두고 철저하게 준비해 숨으면 누구도 찾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싫어. 그 자는..’그 자의 얼굴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정말 방법이 없는 걸까. 그 자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건가. “루시아. 너 남자는 없니?” “네..네??” “뭘 그리 놀라. 만나는 남자 없냐고. 없으면 내가 아주 좋은 사람 알아서 말이야. 소개해 주려고 하는데.” “내 나이가 몇인데요. 아우. 됐어요.” “18살이면 뭐. 당장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부터 여러 남자 알아봐야 적당히 스물 둘 셋쯤에 그 중 골라 결혼하는 거지. 시녀로 일한 아가씨들 인기 좋다? 조신할 거라고 생각하거든. 농사나 바깥 노동하는 여자들과 달리 피부도 하얗고. 말 나온 김에 말해 봐. 어떤 남자 타입이 좋아? 나이 많고 듬직한 사람? 어리고 귀여운 남자? 원하는 대로 내가 골라올 수 있다니까.” “그러는 놀만이야말로 왜 혼자인 건데요?” 눈을 반짝이던 놀만은 화제가 자신에게 돌아오자 지루함을 표현했다. “난 뭐. 이젠 나이도 많고.” “나이가 무슨 상관이에요. 놀만이 그럴 생각이 없는 거지. 놀만은 독자들을 기만하고 있다구요. 사랑을 믿지 않으면서 로맨스 소설을 쓰다니.” “어허. 기만이라니.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을 소설로 이루어주잖아. 내 소설을 보며 독자들은 꿈을 꾸며 살아가는 거라구.” “그러면서 왜 나보고는 결혼하래요?” “영원한 사랑 같은 건 없지만 부부가 서로 마음이 맞으면 아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거든. 난 네가 혼자니까 평생 함께 할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어.” “내가 왜 혼자에요. 놀만이 있잖아요. 놀만은 내 친구이고 가족인걸요.” 감동한 눈으로 루시아를 바라보던 놀만이 두 팔을 그녀를 향해 쫙 벌렸다. 어서 와서 이 언니 품에 안기렴. 그렇게 눈을 반짝거리는 놀만을 보며 루시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술 냄새 나서 싫어요.” “엥. 지금 이 감동의 순간을 그렇게 초 치기야?” “가볼게요. 놀만은 더 자요. 지금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얼굴이라구요.” 놀만의 얼굴은 눈 밑이 꺼멓게 죽어 반은 시체 같았다. “아후. 정말 나는 더 자야겠어. 누가 내 내장을 쥐어짜는 것 같아. 급한 거 아니면 넌 좀 더 여기서 노닥거리다가 천천히 들어가. 어차피 지금 나가봐야 사람들에게 치이기만 할 걸.” “그러고 보니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오다보니 사람이 무척 많던데요.” “무슨 일이냐니.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나보다 어째 더 몰라. 오늘 기사단이 모두 수도 귀환해서 사열식을 하잖아.” “아...” 그게 오늘이었구나. 보기 드문 장관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하던 일 제쳐두고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꿈속에서 아마 나는 이 때 이런 일이 있는 줄은 전혀 모르고 별궁에만 있었지. ’현재의 루시아가 가장 크게 그녀의 미래를 바꾼 것은 이것이었다. 루시아는 시녀 행세를 하며 외출하고 사람을 만나며 제법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아가고 있었다. 놀만 덕분에 돈도 꽤 모았다. ‘전쟁이 끝났구나..’루시아가 별궁이라는 좁은 한정적 공간에서 굴곡 없이 살아갔던 것과 별개로 바깥세상은 상당히 시끄러웠다. 루시아 나이 8살부터 시작된 전쟁은 처음엔 소국끼리의 국지전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규모를 더해서 세상이 둘로 갈라져 싸웠다. 훗날 이 전쟁은 1차 대륙전쟁으로 불렸다. 루시아가 11살 무렵에 제논이 참전을 결정해 북동연합국 주축이 되었다. 이후 5년은 전쟁의 절정기였다. 북동연합국이 승기를 잡기 시작하면서 점차 전쟁의 소강상태가 길어지고 그렇게 2년 정도 대치만 하다가 18살 되던 해에 휴전에 가까운 종전협상이 끝났다. 그 전쟁에서 루시아의 조국, 제논은 승전국의 위치에 있었다. 사람들 북적이는 건 질색인데다가 몸도 안 좋은 놀만은 모처럼 구경거리를 포기했고 루시아는 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구경꾼들 틈에 끼어들었다. 다시 할 수 없는 구경이었다. 놓치기 아까웠다. “와아!!!” 갑옷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기사단 행진을 보며 사람들이 질러대는 함성과 휘파람 소리에 귀가 멍멍했다. 제논은 비록 참전국이지만 제논의 영토가 직접 전쟁터로 이용된 것은 아니라서 전쟁 중에도 제논 백성들이 전쟁을 피부로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전쟁은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승전의 기쁨과 전쟁이 끝났다는 해방감이 뒤섞여 사람들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사람들이 뿜어내는 기운에 동화된 것인지 루시아도 조금씩 들뜨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자신이 속한 가문마다 갑옷의 형태가 조금씩 다르고 갑옷의 가슴 혹은 등에 그려진 문양이 달랐다. 어떤 기사단은 굉장히 화려한 갑옷에 어깨에 붉은 망토까지 걸친 반면 어떤 기사단은 다소 투박한 갑옷을 입었다. 그것만 봐도 대충 그 가문이 지닌 작위와 권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우와아!!!!! 타란!!” 지금까지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함성이 터졌다. 남자들은 발을 구르며 환호하고 여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타란, 타란 구호를 외쳤다. 그 어마어마한 함성을 가르며 한 무리의 기사대가 당당하게 행진했다. 기사들은 모두 갑주의 가슴 한 복판에 포효하는 흑사자 문양을 새겨 넣었다. 귀족이 아닌 일반 백성이 귀족 가문의 문양을 아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제논 백성 치고 흑사자 문양의 가문이 어디인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타란.... ’루시아의 귀에서 시끄러운 함성 소리는 멀어지고 배경은 흐릿해지며 오직 하나만 눈에 들어왔다. 기사단 맨 앞에서 흰 백마를 타고 새카만 갑옷을 입은 선두의 한 사람. 투구를 쓰고 있지만 루시아는 투구로 감추어진 그의 외모를 눈에 그릴 수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안다. 휴고 타란. 타란 공작가의 젊은 공작이었다. 전쟁의 흑사자. 그는 무력과 지략 모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무장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북동연합국이 승리한 것은 그의 활약 덕분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제논은 늦게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종전협상을 주도했다. 가장 적게 잃고 가장 많은 것을 가져갔다. 제논, 정확이 말하면 타란 공작이 이끈 군대는 항상 승리했고 그건 북동연합국이 승리하는데 가장 큰 밑거름이 되었다. 사실 원래의 그녀라면 타란이 공작가인지, 공작의 이름이 뭔지, 그가 전쟁에서 뭘 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의 지금 지식은 모두 꿈을 기반으로 했다. 그녀가 결혼했던 메튼 백작은 제법 교활한 인물이었다. 어느 쪽에도 치우지지 않고 이곳저곳에 모두 발을 담가 언제든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어 두었다. 덕분에 전쟁 후 승승장구한, 태자를 지지하는 파벌에 빌붙어 재미를 보았다. 그래서 루시아는 상당히 많은 파티에 참석해야 했다. 남편과 부부동반으로든, 혼자로든. 마치 업무처럼 꼬박꼬박 파티에 참석하다보니 타란 공작을 보게 될 일이 꽤 많았다.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득시글거렸다. 마치 고기에 몰려든 하이에나떼 같았다. 메튼 백작이 어떻게 해서든 타란 공작에게 줄을 대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빤히 보였는데 잘 되지는 않았다. 그 때만 해도 타란 공작에 대해 잘 몰랐다. 그저 대단한 기사라니까 그런가보다 했다. 실제 그에 대해 쓸데없는 것까지 꽤 자세히 알게 된 건 그 후로 무척 많은 시간이 흐른 후였다. 루시아가 결혼하고 약 2년 후, 타란 공작이 결혼했다. 그의 결혼은 사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공작의 결혼 상대는 가문도 재력도 모두 보잘 것 없는 가문의 아가씨로 그저 발랄해 보이는 귀여운 여인이었다. 딱 봐도 미인은 아니라서 모두들 대체 왜 공작이 그녀와 결혼 했는가 궁금해서 견디지 못했다. 딱히 타란 공작이 어떤 의문에도 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많은 소문이 양산되었다. 그 중 가장 신빙성 있게 나돌던 설은 타란 공작이 그녀를 너무나도 열렬히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지만 다들 설마, 저 타란 공작이..하며 고개를 내저으며 믿고 싶지 않아했다. 그가 왜 그녀와 결혼했는지 루시아는 아주 오랜 후에 알게 되었다. 정보 통로는 사교계 뒷소문이었지만 그 정보의 출처는 정확도를 거의 100% 보장했다. 소문처럼 타란 공작은 그녀를 열렬히 사랑한 건 아니었다. 알고 보니 그녀의 가문이 대단히 부유했던 것도, 두 가문 사이에 뭔가 대단한 거래가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이유가 있다면 그녀가 가문도 재력도 없는 별거 아닌 가문의 아가씨였기 때문이었다. 타란 공작은 공작가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는 이름뿐인 아내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녀와 결혼했다. [ 그럼 그렇지. ] [ 아니면 타란 공작이 왜 그런 결혼을 했겠어요. ] 귀부인들은 천년 묵은 체증이라도 내려가는 것처럼 즐거워했다. 별 볼일 없는 가문 출신 주제에 남편을 등에 업고 사교계의 중심에 있는 공작부인에게서 느꼈던 박탈감이 해소된 것이다. 하지만 루시아는 겉모습만 우아한 그들의 천박한 웃음을 들으며 생각했다. 그게 어때서. 당신들도 다 그런 결혼을 한 거 아닌가. 남자는 지참금으로 후계를 낳아줄 혈통 좋은 여자와 여자의 배경을 사오고, 여자는 후계를 낳아주고 어떻게 해서든 결혼 생활 동안 남자로부터 재물을 얻으려 한다. 철저한 정략혼에 기초한 귀족의 결혼은 가문의 결합이며 계약이었다. 조금 형태가 달라도 타란 공작부부의 결혼 역시 보통의 귀족과 다를 바 없었다. 더구나 어쨌든 공작부인이었다. 이름뿐인 아내건 뭐건 대외적으로 그녀는 공작가 안주인이었다. 타란 공작은 첩을 들이지 않았고 애인도 만들지 않았다. 누구도 모르는 숨겨둔 애인이 있을지는 몰라도 소문에는 없었다. 적어도 타란 공작은 루시아의 남편이었던 메튼 백작보다 개새끼는 아니었을 것이다. 멍하게 생각에 빠진 동안에 타란의 기사단은 모두 지나가고 다른 가문의 기사단이 뒤를 이었다. 점점 멀어져가는 타란의 기사단을 보며 루시아는 아프도록 뭔가를 꽉 쥐고 있던 손을 보았다. 놀만이 준 소설책이었다. ‘계약결혼이었지...’이번에 대박을 친 놀만의 시리즈 소설 모티브는 계약결혼이었다. 그건 루시아가 별 생각 없이 제안한 아이디어였다. 아마 무의식중에 타란공작의 결혼 비사를 떠올렸던 것 같다. ‘계약결혼..’루시아의 눈동자에 빛이 돌기 시작했다. ‘이름뿐인 아내. ’갈구하던 진리를 발견한 학자처럼 몸이 부르르 떨렸다. 온 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 싸늘하게 체온이 식어가는 느낌이었다. ‘공작가 안주인...’루시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녀의 머릿속을 후려치는 생각 하나가 어쩌면 지금까지 고민하던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열쇠인지 모른다. ‘...해 볼까?’ 우선 타란 공작을 만나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는 만나자고 해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왕 조차도 마구 오라 가라 할 수 없는 거물이었다. ‘그래..파티! 오늘밤부터 승전기념파티가 열리겠지. ’적어도 3일에서 5일 이상은 계속될 것이다. 타란 공작이라면 최소한 그 중 하루 이상은 참석할 테고 그건 첫날인 오늘일 가능성이 컸다. 기념 혹은 축하를 위해 여는 무도회는 규모가 크고 가능한 많은 사람들 참석을 유도하기 위해서 참석자의 신분 확인에 너그러웠다. 공주라서 다행이다. 신분만큼은 확실한 덕분에 참석에 아무 제한은 없을 것이다. 오늘밤 파티에 나가려면 준비할 것이 많았다. 우선은 드레스. 드디어 계좌에 모아둔 상당한 돈을 유용하게 이용할 순간이 왔다. 당장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다음은 움직일 차례였다. < -- 18살 -- > “...없다..구요?” 의상실 여주인은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루시아는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쉴 새 없이 발품을 팔아가며 도달한 마지막 희망마저 절망을 안겨주었다. 루시아가 감당할 수 있을 가격, 그리고 왕궁에서 열리는 파티의 격을 욕보이지 않는 품질. 2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드레스를 제작하는 의상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평소라면 재고가 남아돌겠지만 오늘은 특별했다. 오랜만에 대대적으로 열리는 무도회였다. 수도의 모든 귀족 아가씨는 물론이고 지방에서 올라오는 마차가 줄을 이었다. 귀족이라도 돈이 많은 쪽보다는 그렇지 않은 쪽이 훨씬 많다. 루시아가 원하는 드레스는 치열한 경쟁 대상이었다. 당장 오늘 밤에 입을 드레스를 그 날 오후에 찾아다니는 루시아가 어리석었다. 한 달 전에는 주문했어야 했다. 적어도 일주일 전이라면 취소되거나 제작이 좀 잘못된 것이라도 건질 수 있었을 것이다. ‘파티에 참석하겠다고 생각한 것이 오늘인데 어쩔 수 없잖아!’ “그..한 벌이 있긴 한데..” 절망으로 허우적대는 루시아가 몹시 안 되어 보였는지 여주인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루시아는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있어요??” “음. 근데 몇 년 된 것이라 스타일이 좀..뭐, 조금 수선하면 입을 만은 하겠지만..” “괜찮아요! 살게요. 무조건 사요!” “아니 근데 이게 좀 작아요.” “작아요?” “아가씨 체구 정도면 맞긴 하겠지만 아가씨가 입을 건 아니잖수?” “제가!” 루시아는 얼른 말을 고쳤다. “아니, 입을 분이 저랑 똑같아요. 저랑 아주 똑같은 치수니까 그건 문제 없어요.” “그래요? 그럼 와서 한 번 입어 봐요. 수선이 필요한지 봐줄 테니까.” 여주인은 창고 깊이 걸어둔 드레스를 가지고 나왔다. 루시아 안색이 환해졌다. 연한 푸른색 드레스는 예상보다 훨씬 색이나 스타일이 무난해 보였다. 기본 스타일이라 유행을 크게 타지 않는 것이 몇 년 전 것이라도 촌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드레스를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섰다. 코르셋이나 파니에(치마를 부풀리기 위해 안에 몇 겹으로 겹쳐 입는 속치마)를 갖추어 입지 않아 영 볼품이 없었다. 화장은 물론 머리도 대충 묶어서 따로 놀았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목적은 차려 입는 것이 아니라 몸에 맞는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여주인이 뒤에서 돌면서 이곳저곳 만졌다. “어쩜 아가씨. 허리가 이렇게 가늘대. 맞는 코르셋도 없겠네. 드레스도 허리를 좀 줄여야겠는걸. 기장은 좀 짧은데..아무래도 밑에 좀 덧대야 할 것 같고. 레이스가 망가진 부분이 있어서 뜯어내고 새로 붙여야겠고..좀 수선할 곳이 있겠는데요.” “여기서 수선 할 수 있겠죠?” “음..좀 손이 많이 갈 것 같아서..곤란해요. 당장 수선할 것이 밀려 있거든요.” “수선 안하고 그냥 입으면..” 여주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건 안 돼요. 망신만 당할 거예요.” 산 넘어 산이라더니. 루시아가 끙끙거리자 여주인이 다시 그녀를 구원해 주었다. “우리 어머니가..지금은 은퇴하셨지만 꽤 오래 수선 일을 하셨거든요. 그래도 괜찮으면..” “괜찮고 말구요!” 투구를 벗자 새카만 머리카락이 후드득 어깨로 떨어졌다. 하인들이 사방에 달라붙어 가죽 매듭끈을 풀어서 주인의 가슴과 양 팔, 양 다리에서 갑옷을 벗겨냈다. 그는 전쟁터에서조차 이렇게 꽁꽁 싸매는 무장을 하지 않는다. 골머리를 쑤시는 사람들의 비명 같은 환호성을 받으며 광대처럼 길거리를 행진하고, 왕의 사병이라도 된 것처럼 줄을 맞추어 사열식을 한 것 까지는 간신히 참을만했다. “좀 여기 저기 그림 같은 것 좀 걸어놓지 그러나? 너무 삭막하잖아.” 그의 신경을 더 거슬리는 존재는 따로 있었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은 그의 개인 공간까지 멋대로 들어와 평가질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있다는 걸 빤히 보면서도 뻔뻔한 손님은 휘휘 고개들 돌리며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여긴 제 침실입니다.” “엄밀히 침실은 아니지. 침실에 딸린 응접실이지. 손님을 맞기에 적절한 장소라네.” “손님을 맞는 응접실은 1층입니다.” “내가 오늘이 아니면 언제 공의 저(邸)에 와보겠어. 너무 인색하게 굴지 말게나. 내게 좋은 그림이 있지. 몇 점 보내주겠네.” 그는 부글거리는 속을 꾹꾹 눌렀다. 실제로 그의 표정만으로는 그의 속내를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차가운 가면을 쓴 것처럼 그의 붉은 눈동자는 가라앉아 있었다. 표정 없는 얼굴로 그는 하인들 시중을 받으며 연미복을 차려 입었다. 저녁부터 시작될 승전기념파티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원래 그는 좀 쉬다가 저녁 느지막이 가려 했다. 함께 가자고 쳐들어온 불청객만 아니었으면. “참석하는 건 오늘만입니다.” 그는 소매의 커프스를 접으며 버튼을 채웠다. “알았다니까. 근데 파티가 3일이 아니라 5일이라는데...” “딴 소리 하실 겁니까?” “알았다고. 이봐, 공. 대체 파티가 왜 싫어? 맛있는 술에 요리에, 아름다운 미녀들까지. 즐겨보지 그러나.” “술은 와인장에 충분합니다. 딱히 요리를 찾아 즐기는 미식가는 아니고, 여자는 파티에 굳이 가지 않아도 많습니다.” “거 참. 꼭 그런 이유만이 아니잖아. 공은 날 도와줘야 된다고. 그러기로 했지 않나.” “정확히는 왕이 되시면 돕기로 했지요.” “허어. 대체 나 말고 누가 왕이 될 거라고 그러나?” 태자 퀘이즈의 자신만만한 어조에도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왕 되시고 다시 이야기 하지요.” 세상일은 모르는 거 아닙니까? 말하는 것 같은 그의 태도에도 퀘이즈는 그다지 불쾌해 하지 않고 그저 탄식만 했다. “공은 정말 새침한 아가씨보다 꾀기 힘들군.” “집착하는 남자는 인기 없습니다.” “음? 어? 공, 그거 농인가? 농이지?” 퀘이즈는 반색했지만 그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출발 하시죠.” 그는 한시라도 빨리 이 불청객을 그의 휴식처에서 내보내고 싶었다. 구원자나 다름없었던 의상실 여주인은 결국 어쩔 수 없는 장사치였다. 루시아는 드레스와 수선비까지 평소 시세의 무려 2배나 지불했다. 여주인 말에 따르면 그 가격이 ‘오늘’의 평소 시세였다. 어울리는 구두와, 코르셋, 파니에 등등 필요한 것들 모두 일체로 살 수 있어서 수고는 던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입고 갈 드레스는 구했지만 화장과 머리를 도와줄 미용사를 섭외하는 일은 결국 실패했다. 다행히 루시아는 대충 화장을 하고 머리를 만질 줄 알았다. 그래도 아마 전문 미용사가 그녀를 봤다면 대체 누가 이 꼴로 해놨느냐 혀를 찼을 것이다. 루시아는 연회장에 들어설 때부터 이미 지쳐있었다. 몇 시간을 정신없이 돌아다녀 다리가 아프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화장이나 머리를 몇 번이나 고쳤더니 진이 다 빠졌다. ‘이 모든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지 말아야 할 텐데...’꿈이 아닌 현실에서 사교파티에 처음 참석하는 것인데 설렘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아아..많다. 사람에 치이겠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시장통에 몰린 것처럼 와글와글 떠들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놀기 좋아하는 귀족들이지만 나름 전쟁 중에는 자제하다가 무척 오랜만에 열린 화려한 궁중 파티였다. 수도의 모든 귀족이 여기 있을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격이 있는 파티일수록 초대장으로 입장객을 제한했다. 귀족들은 자기들끼리도 급을 매겨 끼리끼리 어울린다. 오늘 같은 자리가 아니면 낮은 급의 귀족이 고위귀족 얼굴이라도 구경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러니 인맥이 필요한 귀족일수록 오늘 기를 쓰고 참석했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안면을 터서 그럴듯한 파티 초대장을 얻을 수 있으면 거기서 또 새로운 인맥을 쌓을 수 있는 기회의 시작이었다. 반짝이는 샹들리에, 넘쳐 쌓여 있는 온갖 진미들, 눈부신 드레스와 보석으로 치장한 여인들과 그들을 맴도는 화려한 연미복의 남자들,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선율. 누구나 한 번쯤 그려보는 환락의 밤이 여기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혹시라도 그를 찾지 못할까 걱정했지만 그건 기우였다. 사람들의 술렁거림과 몰리는 시선을 쫓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그다..’휴고 타란.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는 꿈에서 본 기억보다 훨씬 더 환상적이었다. 전쟁의 흑사자라는 위명만 들어오던 사람들이 실제 타란 공작을 직접 보면 열이면 열 모두 놀랐다. 우락부락하고 거친 무인은 없었다. 그는 대단히 준수한, 아니 그 이상으로 매력적으로 잘 생긴 남자였다. 새카만 흑발과 핏빛의 붉은 눈동자의 선명한 대조에 처음 시선을 빼앗기고 나면 그 다음으로 수려한 조각 같은 얼굴은 감탄을 자아냈다.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는 긴 눈매가 깊이 음영이 지고 높은 콧대가 가운데에서 기가 막히게 균형을 잡아 주었다. 차갑게 다물린 입술이 벌어져 그가 말을 하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다. 강인한 턱선으로 이어지는 적당히 도드라진 목울대는 그의 남성성을 드러냈다. 루시아는 잠시 입을 벌려 넋 놓고 보다가 재빨리 입을 다물고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그녀의 추한 모습을 관심 있게 본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계약결혼..?’ 루시아는 꿀꺽 침을 삼켰다. ‘과연..할 수 있을까..?’ 너무 수준이 높았다. 감히 네가 눈독을 들일 남자가 아니야. 그녀의 양심 비스무리한 것이 속삭였다. 퀘이즈는 신나게 휴고를 여기저기 끌고 다녔다. 엄청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과시하고 싶어 했다. 퀘이즈 입장에서 보면 타란 공작은 보물이 맞았다. 손에 넣고 싶어 아주 공을 들이는 중이었다. 둘 중 누구도 우리는 손을 잡았다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다만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사람들의 풍부한 상상력을 자극했다. 퀘이즈는 그걸 이용했고, 휴고는 묵인했다. 휴고는 지루한 시간이 어서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만약 퀘이즈가 왕이 되면 이런 자리를 지속적으로 참석해야겠지만 그 때는 그 때고 아직까지는 태자를 위해 그렇게까지 최선을 다할 생각은 없었다. ‘뭐지...?’ 그는 아까부터 끈질기게 자신을 주시하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그는 대단히 예민한 사냥꾼이었다. 누군가에게 ‘겨냥’당하는 일에 민감했다.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누군가를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닌 목표 대상이 되는 것은 찜찜했다. 그는 티 내지 않고 시선의 주인을 찾았다. ‘여자...?’ 시선의 주인은 의외로 여자였다. 아무런 특징 없는 갈색 머리카락에 푸른빛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성년은 지난건가 싶을 정도로 앳되어 보였다. 휴고의 시선이 스치고 지나가면 여자는 안보는 척 눈을 돌렸지만 이미 그는 그녀가 계속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여자들이 자신을 뜨겁게 바라보는 시선에 익숙했다. 하지만 갈색 머리 여자는 그런 종류의 시선이 아니었다. 뭔가 할 말이 가득한 표정으로, 초조함이 언뜻 묻어나면서 때로는 간절한 눈을 하고 있었다. ‘할 말이 있으면 오겠지. ’그는 관심을 거뒀다. 그러나 여자의 집요한 시선은 자꾸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이제는 그가 잠깐 잠깐 여자가 뭘 하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고, 춤을 추지도 않고 오직 그만 보고 있었다. 아주 잠깐. 짧은 순간이지만 그가 혼자가 되었을 때 그녀가 한 걸음 내딛으려 하는 것을 분명 보았다. 하지만 그의 주변에 누군가 다가오자 그녀는 이내 다시 물러섰다. 그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결국 파티가 끝날 때까지 끝내 여자는 가까이 오지 않았다. ‘도무지..가까이 갈 수가 없어. ’그는 마치 오늘의 주인공 같았다. 사람들은 절대 그를 혼자 두지 않았다. 같이 있는 사람 중에 평범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미래의 헤세 9세, 태자 퀘이즈는 줄곧 그의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내 끔찍한 결혼의 원흉이 저기 있군. ’배다른 오라비를 보며 루시아는 짧게 감흥을 표현했다. 딱히 태자를 원망하는 마음은 없었다. 비록 반은 같은 피가 흐른다 해도 그가 루시아를 챙겨줄 의리는 없었다. 배다른 형제 같은 건 원래 남보다 못했다. 결국 파티가 끝날 때까지 루시아는 말 한 마디는커녕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하아..어쩌지. 그가 내일도 참석할까?’ 그를 과연 내일도 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지만 유일한 희망이었다. 루시아는 다음 날도 참석하기로 마음먹었다. < -- 18살 -- > 5일째. 마지막 날이었다. 5일 연속 이어진 파티에도 사람들은 지치지 않는지 홀 가득이었다. 아마 이 파티가 끝나면 체력이 방전되어 한 동안 몸져누울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한동안은 사교계가 꽤 한가해지겠다. 첫 하루 이틀에 비하면 사람이 꽤 줄었다. 오늘까지 참석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파티광이었다. 혹은 어두운 복도나 눈에 안 띄는 정원에서 함께 즐길 상대를 물색하기 위해서거나. 모든 사람이 파티를 즐기는 건 아니었다. 식욕을 자극하는 성찬들도, 새로운 인연을 트는 일도, 이성과 어울려 은밀한 신체 접촉을 나누는 일도 관심 없이 음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진로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벽 가까이 붙어 무알콜 샴페인을 홀짝이는 쓸쓸한 외톨이는 루시아였다. 5일간 저녁부터 밤까지 서 있었더니 다리는 저리고 구두 속 발바닥에서 불이 났다. 바짝 조이지 않았는데도 코르셋은 등과 가슴을 앞뒤로 압박해 숨쉬기가 힘들었다. 코르셋 때문에 배는 고파도 음식은 그저 조금 맛보는 수준이었다. 저렇게 많은 요리들이 먹음직한 냄새를 풍겨도 장식품이나 마찬가지였다. 화장실을 다녀오는 일이 번거로워서 지금 한 잔의 샴페인을 들고 입술만 축이며 몇 시간을 버티는 중이었다. 확실히 배가 고프면 우울해 지는 건 맞는 것 같다. 루시아는 지금 몹시 우울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뱃가죽이 달라붙을 정도로 배가 고프기 때문인지, 5일간 타란 공작에게 말을 붙이기는커녕 근처에도 못 갔기 때문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어쨌든 2가지 이유는 거의 동등한 비중으로 그녀를 우울하게 했다. 루시아는 멀찍이 서 있는 검은 연미복 남자를 응시했다. 그의 신체조건은 사람들 속에서 압도적으로 우월했다. 큰 키와 넓은 어깨, 날렵함이 느껴지는 허리까지, 그의 몸은 완벽한 비율과 균형을 드러냈다. 어느 정도 밀착하는 스타일의 연미복 안에 감추어진 그의 몸이 무척 단단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만이 아닐 것이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와 결국 인사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이번 기회는 끝날 것이다. 언제 또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암담했다. ‘그의 얼굴 구경만큼은 원 없이 했구나. ’엄밀하게 말하면 그녀는 5일 내내 그를 스토킹하고 있었다. 루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이 짓에 빠져들었음을 인정했다. 그를 시선으로 쫓는 일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즐겁게 해주는 근사한 남자였다. 그에게 몰려드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도 재미있었다. 특히 여자들이 가슴을 들이밀며 노골적인 유혹을 하는 모습은 참...그는 실로 아름다운 피조물이었지만 자신의 외모적 매력을 이용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의 표정은 언제나 차갑고 희로애락의 감정이 없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거나, 눈썹을 올리거나, 시니컬하게 웃거나 입술로만 미소 지었다. 그 정도만으로도 사람들은 심기를 살피려고 전전긍긍했다. 그는 존재감으로 사람들을 압도했다. 자연스럽게 주변을 눌러내는 기세를 뿜어냈다. 그건 지배자의 위엄이었고 강자의 여유였다. 그를 멀찍이 보며 감히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타란 공작 외모만 보며 의외라고 고개를 갸웃하지만 오히려 가까이 대화를 나눈 이들은 공작이 왜 전쟁의 흑사자라 불리는지 이해했다. 강한 수컷 앞에서 주눅이 드는 동종의 수컷과 달리 강한 수컷을 본능적으로 갈구하는 암컷들은 끊임없이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루시아는 계속 접근을 시도하는 많은 여자들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는 신분과 재력, 외모와 젊음, 그야말로 모든 것을 갖추었다. 미혼인데다가 아직 특정한 상대도 없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 정도의 남자는 없었다. 그는 특등품 중에서도 특특등품이었다. 아마 자신이 조금만 더 자격을 갖추었다면 저 많은 여자들 틈에 끼어들었을 것이다. ‘최소한 가슴만 컸어도 말이지. ’ “하아아아아.” 다양한 의미가 담긴 깊은 한숨이었다. 저 멀리 있는 타란 공작과의 간격을 좁힐 가능성이 도저히 없었다. 루시아만큼 지금 이 자리를 힘들어하는, 그 이상으로 지긋지긋해서 미칠 것 같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떨거지들이 대체 언제 입을 닥치고 꺼져줄지 그는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당하고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전쟁터가 그리워졌다. 거기라면 얼마든지 다시는 떠들지 못하도록 조용하게 만들어 줄 수 있었다. 그에게 악마라 지껄여대던 적장 목을 날려버리는 일은 소소한 재미가 있었다. 당장 근처에 검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는 대체로 자신의 인내심을 믿었지만 완벽히는 아니었다. 휴고의 붉은 눈동자가 한 순간 흘낏 한 구석을 스쳐 지나갔다. 그건 아주 잠깐이었기 때문에 그가 어떤 여인을 확인하려 한 것을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전하군. ’붉은 빛이 감도는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는 아까부터 한 자리에서 똑같은 잔을 들고 서 있었다. 지난 4일 내내 봤던 연하늘색 드레스는 오늘도 바뀌지 않았다. 그는 사교 파티에 능통하지는 않아도 여인들이 한 번 입은 드레스를 다음 날 연속으로 입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이번처럼 5일 연속 파티라면 최소한 3벌의 드레스를 마련해서 돌려 입는다. 3벌의 드레스조차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지독히 가난하다면 오히려 이런 자리는 오지 않는 것이 더 낫다. 그녀는 남들의 비웃음을 살 정도의 관심조차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돈인가?’그녀가 그에게 원하는 것이 돈이라면 그냥 와서 달라고 하기를 바랐다. 이유 불문하고 내줄 용의가 있었다. 저 끈질긴 근성에 감탄해서라도. 그는 첫 하루만 참석하려던 원래 계획과 달리 그 다음 날도 참석했다. 여자가 또 나타날까 호기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전날과 똑같은 드레스를 입고 똑같이 한 구석에 서서 계속 그를 바라보았다. 매번 똑같은 드레스를 입은 것이 그의 인상에 남기 위한 작전이라면 성공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여자는 두 번째 날에도 결국 다가오지 않았다. 그가 먼저 다가가 말을 붙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약간의 게임처럼 느껴졌다. 결국 그는 5일 연속 파티에 참석하는 기록을 세웠다. 퀘이즈는 몹시 흡족해 했지만 태자 기분을 맞추려고 이런 짓을 한 건 아니었다. 결국 여자는 그에게 오지 못하고 언제나처럼 멀리 거리를 유지했다. ‘아무래도 이 떨거지들 때문이겠지. ’그의 주변에 둘러서서 열심히 떠들고 있는 자들은 나름대로 타란 공작의 뇌리에 자리 잡았다고 기뻐하고 있겠지만 실상 휴고는 등 돌리면 머릿속에서 까맣게 지워버릴 자들이었다. ‘아무도 없으면 올 것 같은데. ..사람들 눈 닿지 않는 곳으로 피해 볼까. ’5일이나 계속 참석한 덕에 그에 대한 폭발적 관심은 그래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렇게 옆에서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던 퀘이즈도 오늘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잠시 실례하겠소.” 휴고가 양해를 구하고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자 사람들은 아쉬운 얼굴로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 볼일을 보러 가는 것이려니, 그들은 다시 돌아올 공작은 기다리며 자기들끼리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어라?’ 이제는 습관적으로 그를 보고 있던 루시아는 돌발상황에 당황했다. 그는 이리저리 이동하는 편이 아니었다.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은 몰려들었다. 그가 갑자기 혼자 어디론가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루시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가 간 방향을 가늠하며 뒤를 따랐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휴고는 느긋하게 걸었다. 이미 기척으로 뒤를 누군가 따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내가 뭐하는 짓인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여자의 말 한 마디 듣자고 굳이 자신이 이러는 모양이 꽤 우스웠다. 그는 쓸데없는 호기심에 시간을 낭비하는 편이 아니었다. 이번 경우도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침대로 데려가고 싶은 그런 종류의 관심은 아니었다. 그에게 여자는 두 부류였다. 침대로 데려가고 싶거나, 그렇지 않거나. 그렇지 않은 여자에게 호기심이 든 건 처음이었다. ‘요즘 좀 무료하긴 했지. ’ 팽팽한 긴장감, 광기에 휩싸인 병사들의 함성, 뜨겁고 찐득한 피의 느낌. 그런 것들이 그리웠다. 잠시 전쟁터를 떠올린 그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어쨌든 지금 그는 여자의 목적이 무엇인지 몹시 궁금했다. 그는 동쪽 방향의 정원으로 나왔다. 달이 가장 밝게 비치지만 그래서 밀회는 즐기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그나마 숨어서 운우지락을 즐기는 이들이 가장 없을만한 곳이었다. 아직 물을 채우지 않은 분수대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사방 어느 정도 주변이 트인 곳이었다. 사람이 없으나 으슥하지 않았다. 그는 장소 선택에 만족했다. 바스락, 마른 잎을 밟는 소리에 그는 몸을 돌렸다. 나타난 여자를 확인하자마자, 아주 조금 품었던 즐거움이 날아가 버렸다. “휴고...” 풍성한 금발이 달빛을 받아 보석처럼 빛을 발했다. 미모만큼이나 매혹적인 몸매를 지닌 미녀의 등장에 그는 표정을 굳혔다. “이름을 허락한 건 과거의 일이오. 레이디 로렌스.” 미녀는 큰 충격으로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중하고 차가운 말투로 그는 선을 그었다. 그의 이름을 부를 자격을 빼앗고 전처럼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지도 않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젖은 눈으로 그를 응시하다가 소피아는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무례하였습니다. 전하.” “내가 산책을 방해하였소?” “아닙니다. 제가..전하께서 이쪽으로 오시기에..” “자리를 비켜주면 고맙겠소.” “잠시면..잠시면 됩니다. 전하. 제발..” 그가 낮게 한숨을 흘렸다. “우리가 나눌 말이 남았던가?” “...매정하십니다. 어찌 그리 차갑게 자르십니까. 한 때는 그래도 마음을 나누었다 믿었습니다,” 울먹이는 미녀의 호소에 그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레이디 로렌스. 난 누구와도 마음 같은 건 나누지 않소. 침대는 나누지만.”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소피아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손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는 위로는커녕 차가운 눈으로 뒷짐 지고 보기만 했다.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가 밤놀이 대상에서 미혼 아가씨들을 제외하기 시작한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번번이 룰을 위반한다. 더 이상 보는 것도 곤욕스러워 등을 돌렸다. “이야기가 길어져 서로에게 도움될 건 없소.” 소피아는 벽을 세우며 등을 보이는 그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그의 차가움이 믿기지 않았다. 하염없이 그의 등을 바라보다가 점점 원망은 사라지고 뜨거운 감정이 솟았다. 소피아는 달려가 등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그의 단단한 허리를 두 팔로 감고 너른 등에 고개를 묻었다. 오랜만에 접하는 그의 온기에 가슴이 벅찼다. 그와 보낸 격정적인 밤이 미련으로 달라붙었다. 터질 듯 풍만한 그녀의 가슴이 부드럽게 등을 눌렀으나 그는 앞을 감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 무심하게 떼어냈다. 몸을 돌려 한 걸음 간격을 유지하는 그를 보며 소피아는 비참함에 몸을 떨었다. 그는 아주 완벽하게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제가 무얼 그리 잘못하였습니까? 정인께 연모의 정을 고백하였을 뿐입니다. 그 보답이 이별을 선언하는 장미꽃이라니 잔인하십니다.” “여인이란 참.” 그가 혀를 찼다. 어찌 그리 어리석은가, 말을 하는 것처럼. “내가 분명 처음부터 이르지 않았던가. 그대 마음을 잘 간직하라 하였지. 그대는 내게 그러겠다 약조했고. 모른다 할 참이오?” 소피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에게 사랑한다 말을 꺼내면 버려진다는 걸 소피아도 알고 있었다. 소피아 이전에 많은 여자들이 그리 되었으니까. 하지만 차가운 저 남자가 다정히 이름을 불러주고 뜨겁게 안아주면 그런 건 다 잊고 말았다. 나는 달라. 나는 그의 인연이야. 나는 특별해. 다른 여자들이 범하는 어리석은 실수를 결국 소피아 역시 답습했다. 소피아는 그의 ’전(前) 여자들’의 하나로 전락했다. “다시..시작할 수는 없을까요? 전하. 다시는 마음을 보이지 않겠습니다. 다른 여인을 취하셔도 좋습니다. 곁에 있게 해주셔요.” “그대는 아름다운 꽃이었소. 레이디 로렌스. 나는 정원에서 그 꽃을 꺾어 화병에 꽂아두었지. 하지만 화병의 꽃은 언젠가 시드는 법이라오.” 시들어 버려진 꽃이 되어 버린 소피아의 꼭 다문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그녀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그와 연인이 되었을 때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그는 다정하고 격정적인 연인이었다. 값비싼 선물들을 안겨주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침대에서 슬쩍 뭐가 예뻐요, 말하기만 하면 다음 날 그녀의 것이 되었다. 그가 준 목걸이나 귀걸이를 보란 듯 자랑하며 온갖 파티에서 과시하고, 은근히 그와의 관계를 드러내도 그는 뭐라고 하는 적 없었다. 어느 날, 어느 무도회에서 아마도 과거에 그의 여자였을 것이 분명한 여인이 소피아에게 경고했다. [ 그의 곁에 하루라도 더 오래 있고 싶다면, 다가가지 말아요. 언젠가 장미꽃을 받을 그 날까지 즐기세요. 레이디 로렌스. ] 당시에는 질투하는 여자의 헛소리로 들어 넘겼다.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소피아는 그에게 너무 깊이 빠져버렸고, 그는 이별을 선언했다. 노란 장미 꽃다발과 함께. “팔콘 백작부인은 딴 사내가 꺾어 이미 시든 꽃이 아닙니까?” 그에게 이별 선언을 들은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그에게 달려온 이유는 그가 근래 가까이 한다는 여자에 대한 소문 때문이었다. 팔콘 백작부인은 결혼한 남편이 셋이나 죽은 미망인이었다. 자신을 버리고 선택한 여자가 그런 여자라는 사실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휴고는 슬슬 불쾌해졌다. 그의 시선이 흘끗 풀숲을 향했다. 누군가 아까부터 두 사람 대화를 숨어 듣고 있었다. 휴고는 아마 그 여자일 것이라 확신했다. 그의 애초 목적은 옛 여자의 미련 섞인 투정을 듣는 일이 아니었다. 숨어 있는 저 여자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는데 그 약간의 호기심도 이제는 성가셨다. “내 침실의 일은 그대가 관여할 바가 아니오. 정도를 넘지 마시오.” “불길한 여인입니다. 전하. 단지 전하 존체에 해가 미칠까 염려되어 드리는 말씀이어요.” 소피아를 침대로 데려갈 때 그는 꽤 공을 들였다. 여자의 접근에 응한 것이 아닌, 그가 먼저 다가가 춤을 청하고 침대로 유혹한 여자는 처음이었다. 그가 그전까지 즐기던 여자들과 스타일이 다른 미녀였다. 아마도 지금까지 그가 가장 좋아했던 여자였을 것이다. 더 아름다웠고 덜 속물스러웠다. 이후에는 그 반대되는 여자를 찾을 생각이었다. “레이디 로렌스.” 그의 목소리가 유독 차가워서 소피아는 흠칫했다. “난 감정소모를 싫어하는 사람이오. 그래서 화를 내지 않지. 화를 낸다는 건 상당히 불쾌한 감정 소모거든. 나를 화나게 하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오. 지금껏 그 대가는 목숨으로 받았지.” 소피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날 화나게 하지 마시오.” 소피아는 입술을 바르르 떨며 창백한 안색으로 그를 보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뛸 듯이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그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보던 그가 정확히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하며 말했다. “나오시오. 고양이처럼 숨어 엿듣는 건 이제 끝이오.” < -- 결혼할까요 -- > 처음부터 엿들으려던 의도는 없었다. 바쁘게 그의 뒤를 쫓다가 그가 대충 어디쯤 가는지 알면서 걸음을 늦추었다. ‘도대체..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하지?’ 암담해서 머릿속이 캄캄했다. 그를 만나겠다는 맹렬한 목적에 눈이 멀어 그 너머를 대비하는데 소홀했다. 그래도 발은 그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서 있는 그를 발견했을 때 루시아는 다시 한 번 망설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에게 기회를 빼앗기고 말았다. 못 본 척 돌아서기에는 이미 너무 가까이 갔다. 움직이면 눈에 띌 것 같아서 그대로 풀숲 뒤에 쪼그리고 앉았다. 생생하게 들려오는 두 사람 대화는 듣고 싶지 않아도 귀에 쏙쏙 들어왔다. ‘레이디 로렌스...? 설마..소피아 로렌스..?’ 소피아는 루시아의 꿈속에 등장한 유명인 중 하나였다. 친분 있는 관계는 아니었지만 몇 번 본 적은 있었다. 사교계에 미인은 많지만 그녀는 그 중에서도 단연 압도적이었다. 자연의 먹이사슬에 비교하면 최고의 포식자였다. ‘소피아 로렌스가..그의 옛 연인이었단 말이야?’ 그에게 애인이 많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거기다 수시로 바뀌었다. 그가 데리고 다니는 여자는 하나 같이 가슴은 수박만하고 허리는 개미만한 화려한 미녀들이었다. 공통점을 찾자면 성격 나빠 보이는 백치미인들 이었다. 거의 일관된 스타일이라 그의 취향인 줄 알았다. 소피아 로렌스는 전혀 달랐다. 소피아는 한 떨기 백합 같은 미인이었다. 화려한 미인과 나란히 세워도 전혀 눌리지 않는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부친인 로렌스 남작이 여식 교육에 관심이 많아 음전하고 교양 있는 숙녀라고 들었지만. ‘음전한 건 아니었구만. 좀 노셨어. ’소피아 로렌스는 그녀의 미모에 반한 후작의 구혼을 받아들여 루시아가 결혼해서 사교계 활동을 시작할 당시에 이미 후작부인이었다. 상처(喪妻)한 후작의 재취로 들어간 것이지만 남작 여식으로 그 정도면 분에 넘치는 결혼이었다. 그리고 먼 훗날. 아이를 출산하다가 사산하고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루시아는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정말 처절하게 매달리는구나. ’소피아 정도의 미녀가 자존심 다 내버리고 저러는 것을 듣고 있자니 참 안타까웠다. 세상에 남자가 저거 하나가 아니랍니다. 말해주고 싶었다. 물론 세상에 ‘휴고 타란’이란 남자는 하나뿐이지 않느냐, 말하면 할 말은 없겠다. 이런 식으로 적나라하게 그의 연애사를 목격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가장 최악의 순간을. ‘하아..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옛 연인한테 죽고 싶냐 협박하는 남자라니...’자신이 만약 소피아의 입장이라면 그 말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을 것 같았다. ‘이건 정말..예측을 벗어난 건데...’루시아는 그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지만 모두 주변에서 들은 소문이었다. 개인적인 휴고 타란 공작은 전혀 알지 못했다. 꿈속에서는 그와 단 한 번도 인사조차 나눠본 적 없었다. 늘 멀찍이 보기만 했던 것이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그를 보며 나름 머릿속으로 그리던 그에 대한 이미지가 있었다. 그게 다 와장창 깨져버렸다. 그는 그녀의 예상을 훨씬 뒤엎을 정도로 무자비했고, 동정심이 없었다. ‘계약결혼..? 그 말 꺼냈다가는 가당치 않은 소리 한다고 화낼지도 몰라. ’그리고 그가 화가 나면, 대가는 목숨이었다.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을 때 고맙게도 그가 종지부를 찍어 주었다. “나오시오. 고양이처럼 숨어 엿듣는 건 이제 끝이오.” 루시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주 잠시 더 숨을 죽였지만 아무래도 자신을 칭하는 것이 분명했다. 도망은 글렀다 생각하고 천천히 웅크린 몸을 펴고 일어났다. 역시 그는 루시아가 있던 방향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송구..합니다. 전하. 엿들으려 한 것이 아니라..” “대화를 나누기에는 좀 멀지 않나?” 루시아는 쭈뼛쭈뼛 풀숲에서 걸어 나와 그와 몇 걸음 거리 정도까지 다가갔다. “다시..한 번 죄송합니다. 정말 엿들으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의도치 않게 그러고 말았지만...절대 여기서 들은 것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약속드릴게요.” “그건 됐고. 할 말이 뭐요?” “.... 예?” “내게 할 말이 있어서 며칠 내내 날 쫓아다닌 것 아니었나?” 그는 대충 여자의 목적이나 듣고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조금 전까지의 흥미는 이미 다 식어버렸다. ‘헉. ’알고 있었어??? 계속 스토커짓 한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이야??? 루시아는 당황해서, 아니 창피해서, 둘 중 어떤 감정이 우선하는지 알 수 없어서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식은땀이 나려는지 등에 한기가 들었다. 밀랍인형처럼 굳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자를 보며 휴고는 기분이 좀 나아졌다. 멀찍이 봤을 때와는 좀 느낌이 달랐다. 차분한 목소리는 맑아서 듣기가 좋았고, 표정은 훨씬 생동감이 있었다. 축 처져 있던 모습은 아무래도 피곤해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미인은 아니지만 뭐랄까. ‘귀엽군. ’마치 작은 초식동물 같은. 다람쥐나 토끼 같은? 그런데 그는 다람쥐나 토끼 따위를 귀엽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건 사냥할 가치조차 없는 하찮은 생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모순에는 대단히 관대한 남자였다. “할. 말. 같은 말 여러 번 하게 하지 마시오.” 화내는 건가? 안 돼! “저기 저는. 그러니까. 계약..계약을 말씀드리려고.” “계약?” 휴고는 좀 실망했다. 기대와 달리 매우 재미없는 용건이었다. “예. 계약입니다. 인생을 바꾸는 계약이요.” 내 인생을. 루시아는 속으로 덧붙였다. “인생을 바꾸는 계약이라.” 그건 좀 흥미롭군. 그는 흐음, 중얼거렸다. “자신이 누구인지 소개하는 것이 너무 늦지 않았소?” “아. 예. 물론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말씀드렸듯이 중요한 계약이라..” 루시아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지금은 이 자리를 벗어나고 나중 일을 생각하고 싶었다.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기가 적절하지 않습니다. 제가 누구인지, 계약 내용이 무엇인지 전부 다요.” 이 여자가 무슨 수작인가 미심쩍게 그녀를 보다가 일단은 호응해 주기로 했다. 그의 기감으로 주변에 그들 외에 사람은 없었지만 정말 그렇게 중요한 내용이라면 안전을 기하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이득이 될 계약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었다. “어쩌자는 거요?” “제가 공작저로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 그는 잠시 생각했다. “좋소. 언제?” “훗날 연락드리겠습니다.” 지금껏 그는 수많은 계약을 맺었고, 맺을 것이지만 늘 그는 갑이었고, 앞으로도 갑일 것이다. 그는 갑이 아닌 계약 따위는 맺지 않는다. 그녀가 말하는 계약 또한 먼저 제시한 사람은 그녀이니 이번에도 그가 갑이었다. 그런데 마치 입장이 뒤바뀐 것처럼 행동한다. 둘 중 하나였다. 뭘 몰라 겁을 상실했거나, 정말 고단수이거나. “지금 나보고. 언제 올지 모르는 연락을 기다리라는 건가?” 루시아는 삐질 등 뒤에 식은땀이 솟았다. 하지만 겉으로는 의연하게 되받아쳤다. “그 정도는 감수하셔야지요. 인생을 바꾸는 계약이니까요.” 그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루시아를 주시했다. 지금껏 그에게 이런 되도 않는 짓거리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아무리 봐도 이 여자는 그에게 사기를 칠 만큼 간이 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겁 많아 보이는 커다란 눈을 해서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는 것이 제법 앙큼했다. “그 말 그대로이길 바라겠소. 내가 그렇게 관대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거든.” 루시아는 관대한 ‘적’이 없는 거라고 그의 말을 정정해주고 싶었다. 협박이 생활인 남자였다. 어쩌면 자신은 타란 공작이라는 사람에 대해 처음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하나는 알겠다. 이 남자는 절대 신사가 아니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루시아는 상담이 필요했다. 누군가와 이 고민을 나누고 싶었다. 그녀 주변에 적절한 사람이라고는 놀만 뿐이었다. 놀만은 루시아보다 나이도 많고(꿈속 기억까지 따지면 루시아가 훨씬 더 많겠지만) 다양한 소설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삶의 경험과 상상력이 풍부했다. 도움이 될 것이다. 놀만에게 모든 사실을 다 털어 놓을 수는 없었다. 놀만은 루시아를 시녀로 알고 있었다. 사실은 공주이고, 타란 공작을 상대로 계약결혼을 시도하려 하는데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요?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놀만. 내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데요.” 루시아는 최대한 추상적으로 표현했다. “가령 내 인생 앞에 2가지 길이 있어요. 가만히 두면 왼쪽 길로 갈 것이 분명해요. 어떻게 될지 뻔해요. 죽도록 고통스럽고 힘들 거구요. 그런데 오른쪽 길로 가도록 시도는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시도가 성공할지 실패할지 알 수 없고, 성공하면 오른쪽 길이 어떤 길인지는 전혀 몰라요. 왼쪽 길보다 나을 수도 있지만 더 최악일 수도 있겠죠. 놀만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어요?” “나라면 오른쪽으로 가보려고 시도할래.” “...망설이지도 않네요.” “왼쪽으로 가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안다며. 그것도 행복한 것도 아니라 괴로울 것이라는 사실을. 그럴 거면 질러놓고 보는 거지. 만약 오른쪽 길이 더 괴롭다 해도 내가 선택한 거니까 미련은 없을 거야.” “미련...” “그리고 앞으로 어찌 될지 안다면 얼마나 재미없니? 인생은 원래 예측할 수 없어야 살만 한 거야. 지금 괴로워도 내일은 어쩌면, 이런 희망이 있어야 살 수 있는 거지.” “우와. 놀만. 마치..현자 같아요.” “푸하핫. 현자는 무슨. 내가 원래 내일 같은 거 모르고 사는 사람이잖아. 인생은 도박이야. 한방이라구.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뭔가를 얻을 수 없어.” 놀만 말대로 이건 도박이었다. 루시아 인생을 건 도박이다. 만약 이 도박이 성공해서 공작부인이 된다면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혼을 해서 전(前) 공작부인이 된다고 해도 최소한의 품위유지는 보장 받을 것이다. 꿈 꿔온 아늑한 2층집 같은 건 더 이상 꿈이 아닐 것이다. 꿈속에서 펼쳐진 그녀의 인생은 너무 고달팠다. 아무 고민 없이 평온하게 살고 싶었다. ‘그래. 지르는 거야. 인생은 한 방. ’애써 낸 용기가 사라지기 전에 루시아는 놀만의 집을 나와 곧바로 타란 공작저로 향했다. 길 가던 아무나 붙들고 물어도 알고 있는 공작저를 찾는 건 쉬웠다. 순조로운 건 거기까지였다. 굳게 닫힌 거대한 철창문 앞에 서자 숨이 턱 막혔다. 부푼 용기 주머니가 다시 쪼그라들었다. ‘왜 아무도 없지..?’ 대체 어찌된 일인지 공작저 대문 앞에 근위 병사 하나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야 해?’근위 병사가 누구냐 위압적으로 물으면 어물거리다 오히려 도망쳤을지도 모르면서 막상 아무도 없자 괜히 억울했다. 분풀이처럼 철창문을 확 밀었는데 스윽 문이 열린다. ‘헉..열려 있네. ’열린 문 안쪽을 몇 번 고개를 들이밀며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명색이 공작저인데 들어가면 곧 누군가 보겠지 기대했다. 그러나 제법 한참을 걸어도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왜 이렇게 허술하지? 여기 공작저가 맞기는 한 거야?’ “누구쇼?” 두리번거리며 조심조심 걸어가는 루시아 앞에 불쑥 한 남자가 나타났다. 루시아는 놀라 헉, 숨을 삼키며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남자는 루시아를 놀라게 한 것을 전혀 미안해하지 않고 오히려 고개를 들이밀며 이리저리 그녀를 살폈다. “보아하니 여기서 일하는 사람 같지는 않은데 여기서 뭐해?” 건들거리는 태도에 무례한 말투. 막돼먹은 붉은 머리 남자는 겉보기에 그럴듯한 기사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가슴에 흑사자 문양이 선명했다. 루시아는 꼿꼿하게 허리를 세웠다. “그대는 공작가 기사인가?” 남자는 얼씨구, 이건 뭐야. 중얼거리며 루시아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렇소만?” “전하께서는 안에 계시는가?” “글쎄올시다. 전하는 왜 찾으시오?” “비록 무례하게 이렇게 갑자기 방문했으나 전하께 말을 전해 줄 수 있겠는가? 휴고 타란 공작을 뵙기를 청하오.” “그래서. 댁은 뉘시오?” “나..나는 전하께 중요한 말씀을 드릴 것이 있소. 전승파티에서 계약을 제안했던 사람이라 전하면 분명 만나주실 것이오.” “난 그런 건 모르겠고. 댁은 누구냐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주군께 데려갈 수는 없잖아. 귀족은 아닌 것 같고. 상인인가?” 루시아는 귀가 화끈거렸다. 도무지 지금 차림새로는 공주는커녕 귀족 아가씨라고 주장하기도 힘들었다. 곤욕을 당하고 끌려 내쳐져도 할 말 없었다. 차라리 심부름꾼이라고 말을 전해 달라고 할 것을 그랬다. 하지만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비록 이런 차림이지만 전하를 뵙기에 부족할 것 없는 고귀한 신분이오.” 가만히 루시아를 바라보던 남자가 휙 몸을 돌렸다. “따라오슈.” < -- 결혼할까요 -- >쾅쾅, 주먹으로 내리치는 소리에 뒤이어 답변을 하지 않았음에도 “나, 들어가요.” 하며 벌컥 문을 열고 적발의 사내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집무실 안쪽 널찍한 책상 앞에 암흑처럼 새카만 머리카락의 사내가 곧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는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녀석을 확인하며 시선을 다시 내려서 서류에 서명했다. “제롬은.” 그의 충직한 집사가 있었다면 저 녀석이 이런 만행을 저지르도록 두고 보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 나간다던데. 이유를 듣긴 했는데 잊어버렸소.” 어지간히 급한 용무였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녀석만 남겨두고 자리를 비웠을 리가 없다. 아마 장시간 자리를 비울 것은 아니라서 방해가 될까봐 그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것 같다. “너랑 놀아줄 시간 없다. 혼자 놀아.” “...참 나. 맨날 철없는 꼬마 취급이라니까.” 그래봤자 나보다 몇 살 많지도 않으면서. 적발 사내는 구시렁거렸다. “철없는 꼬마면 혼내기라도 하지.” “...우와. 대련을 빙자해서 그렇게 두들겨 패고도 그 말이 나오오?” “그건 귀여워해 준거고.” “아우씨!!!” 씩씩대며 울분을 터뜨리는 반응을 즐거워하며, 휴고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사라졌다. 감정표현에 인색한 그를 그나마 웃게 하는 건 녀석이었다. “손님 왔소.” “오늘 일정에 그런 거 없다.” 그를 만나려고 안달복달하는 사람들을 줄을 세우면 끝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자들을 일일이 다 만나주었다가는 밤을 새워도 부족하다. 예의는 차린답시고 대개 편지를 보내왔지만 막무가내로 찾아오고 보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안 된다는 근위병 경고는 예사로 무시했다. 무조건 응접실을 차지하고 앉아서 근위병에게 고지하고 들어왔으니 반허락은 받은 것이라 주장하는 뻔뻔한 자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결국 아예 대문에 병사를 치웠다. 대문을 넘어오면 무조건 무단침입으로 간주했다. 그렇게 들이닥친 귀족 몇의 목에 검을 겨누어 주었다. 목의 살갗이 살짝 베여 흐르는 피에 혼비백산 달아나더니 그 후에는 누구도 감히 들어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대신 그에 대한 악명은 더 높아져 하늘을 찔렀다. “되게 재밌는 손님인데. 만나보시죠?” “아는 사람이냐?” “그건 아닙니다만 겉으로 보기에는 영 아닌데 본인이 귀한 분이라고 주장합디다.” 적발 사내는 킬킬대며 웃었다. “그런 것 치고는 차림새도 그렇고 수행원이고 뭐고 없이 혼자인데 되게 당당하오. 재밌지 않소? 대체 뭔 용무로 주군 보러 온 건지 몹시 궁금하단 말이오.” 눈을 반짝이는 적발 사내, 로이를 보며 휴고는 혀를 찼다. 일하는 중에 난입해 제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손님을 만나보라 떼쓰는 꼴이라니. 집사 제롬이 알았다가는 길길이 뛸 일이었다. 제롬이 돌아와 이 사실을 알면 족히 두 시간은 꼼짝없이 붙들려 퍼붓는 비난을 들어야 할 것이 빤한데 곧 있을 일보다는 당장의 재미가 중요한 로이다웠다. 안 그래도 심심해 죽겠다고 노래를 부르던 녀석이었다. 안 된다고 하면 그를 무척 성가시게 할 것이다. 마침 그도 끝이 보이지 않는 서류 작업이 지루해지던 참이었다. 잠깐 머리를 식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다른 말은 전혀 없고?” “그..뭐더라. 일단은 여자요.” 당연히 남자일 줄 알고 가볍게 생각했던 휴고가 사납게 눈썹을 추켜세웠다. 로이는 데인 것처럼 움찔하며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전승파티? 거기서 계약 어쩌고 하던데요. 주군께서 꼭 만나줄 거라고.” 휴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파티 이후 열흘 넘도록 무소식이라 그는 슬슬 그 여자 의도를 의심하던 중이었다. “손님은 어디로 모셨지?” “응접실이요. 아, 혼자 두진 않았소. 하녀에게 차를 갖다 주라고 했지. 내가 그쯤은 아오.” 으스대는 꼴이 퍽 한심해 보였다. 루시아 맞은편에 두 남자가 앉아 있었다. 루시아는 차를 마시는 척 하며 계속 그를 곁눈질했다. 정말 그와 이렇게 마주앉아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신기했다. ‘진짜..타란 공작이야..’흑발과 피처럼 붉은 눈. 강렬한 색상의 대조에 처음 보는 순간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남자. 그는 한 번이라도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강한 인상을 지녔다. 지난 전승파티 때 그와 대화한 것이 처음이고, 이렇게 밝은 곳에서 그와 가까이 마주 앉은 것 역시 처음이다. “내가 집에 있는 줄 알고 온 건가?” “아..아닙니다. 안 계시면 말씀만 전하려 했습니다.” 그는 목소리마저도 지독하게 외모와 닮았다. 무겁고 낮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날카롭고 그러면서도 귀에 쏙 들어오게 선명했다. 이 남자는 목소리까지도 근사하구나, 그 날 풀숲에 쪼그리고 앉아 그런 생각을 했다. ‘난..외모며 목소리며. 이런 것들에 정말 쉽게 흔들리는구나. ’꿈속에서도 그래서 호되게 당했으면서 정신을 못 차린다. 겉만 멀쩡한 남자한테 홀딱 빠져 모아둔 재산을 홀랑 날렸었지. 아무리 쓴 대가를 치러도 사람 본성이란 그리 쉽게 변하는 게 아니었다. ‘메튼 백작. 그 자 때문인지도 몰라. ’남자라고는 모르고 궁에 갇혀 살다가 남편이라고 처음 접한 남자가 나이 많고, 뚱뚱하고, 짤막한 키와 못난 외모, 거친 목소리를 가졌다. 이후에는 정반대의 남자에 마음이 갈 수밖에 없었다. ‘미남이라고 좋은 남자는 아니지만..’ 눈앞의 남자가 증거였다. 이 남자는 나쁜 남자다. 여자 마음을 아주 우습게 가지고 놀았다. 다 알면서도 루시아는 자신이 소피아처럼 되지 않을 것이라 자신을 할 수가 없었다. 저 얼굴로, 저 목소리로 달콤한 말을 해주면 과연 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 정신 차리자. 넌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루시아는 흔들거리는 마음을 단단히 잡았다. “사전 약속도 없이 방문한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뒤늦게 인사드리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저는 국왕 폐하의 16번째 공주, 비비안 헤세입니다. 고명하신 분을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큭.” 루시아가 ‘16번째 공주’라는 말을 할 때 웃음이 터졌다. 루시아를 안내해 저택 안으로 데려온 적발의 남자였다. 남자의 웃음이 불쾌한 건 아니었지만, 공작가 기사 치고는 참 경망스럽군, 생각하다가 적발 남자가 누군지 기억해냈다. ‘로이..크로틴’타란 공작의 충성스러운 수하. 그리고 사람들이 적발의 사내를 칭하는 또 다른 호칭이 있었다. 광견 크로틴. 그가 저지른 만행들은 소문이 부풀렸겠지만 그 중 반만 사실이어도 미친개라고 불릴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전하의 귀한 시간을 아끼기 위해 본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전하께 청혼을 드리러 왔습니다.” 루시아는 말을 끝내자마자 숨을 죽였다. 잠시의 정적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미 물은 엎질렀다. 되돌릴 수 없다 생각하니 한편으로 후련했다. 루시아는 계속 그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순간 그의 눈썹이 꿈틀했을 뿐 그는 놀랍도록 냉정함을 유지했다. 격렬한 반응은 옆에서 터졌다. “푸하하하하하!!!!!!!!!!!!!!” 로이가 죽어라 웃기 시작했다. 흡사 미친 것 같은 폭소는 타란 공작이 그를 싸늘하게 노려봐도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공작이 그의 뒤통수를 퍽 소리 나도록 내리치고 나서야 비명 소리와 함께 웃음이 끝났다. “아우욱. 죽일 작정이요???” 뒤통수를 움켜잡고 눈물을 찔끔 달며 로이는 공작에게 사납게 대들었다. 지켜보는 루시아가 겁이 날 정도였다. 저래서 미친개인가? “시끄럽고. 너 나가.” “에? 왜요? 조용히 입 닫고 있을게요. 진짜~로.” 입을 합 다무는 로이를 향해 쯧, 혀를 찬 휴고는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공주라고?’ 그는 스스로를 공주라고 주장하는 여자를 살펴보았다. 그래도 지난 파티 때는 귀족 아가씨처럼 보였지만 지금 하고 있는 꼴은 거리 나가면 마주치는 평민 여자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면서 공주? 왕실 족보 따위는 관심 없었다. 아마 왕도 자식들 얼굴을 다 모를 것이다. 한 둘 이어야 말이지. 그래도 진짜 공주는 맞을 것이라고 전제했다. 거짓으로 꾸며대기에는 터무니없는 신분이었다. 16번째 공주라는, 이상하게 구체적이기도 하고. 그는 여자를 좋아하지만 나름의 원칙이 있었다. 건드려 껄끄러울 대상은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그에게 필요한 건 하룻밤 침대를 덥힐 여자였고, 내키면 취했다가 버릴 수 있어야 했다. 공주는 그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첫 순위에 속했다. 애초에 접점조차 만들지 않는다. 그녀가 공주라는 것을 알았다면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맹렬하게 두뇌를 회전시켰다. 도무지 여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파티에서 5일이나 쫓아다니며 계약을 하자더니 갑자기 불쑥 나타나 이제는 제가 공주란다. 그러면서 결혼을 하자는 건 또 무슨 속셈인가. 갈피를 잡을 수 없이 이리저리 튀는 이 여자의 생각을 도무지 모르겠다. 상대의 의도를 전혀 감조차 잡지 못한 건 처음이었다. “누굽니까?” “...네?” “공주님을 이곳에 보낸 사람. 대화를 나누려면 결정권을 가진 사람과 나눠야지요.” “제가 공주라고 믿어주시는 건가요?” 루시아는 그가 사람을 기만했다고 화를 낼 것을 각오했다. 온갖 모욕을 받아도 참으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그의 반응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거짓말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거짓말은 절대 아닙니다. 저는..화내실 줄 알았어요.” “거짓말이라면 화날 겁니다.” 그녀는 지난 파티에서 엿들은 그의 말이 떠올랐다. 등에 쭉 소름이 돋았다. 화날 거라는 단순한 말로 이처럼 공포를 안겨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짓말 아닙니다. 말씀드리지 못하는 건 있어도..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배후는 없습니다. 결정권은 제가 가지고 있어요.” “공주님이 여기 오신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비비안 공주가 궁을 나왔다는 것은 누구도 모릅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분명 공주 비비안의 시녀 자격으로 출궁했지, 공주 비비안은 지금 얌전히 별궁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는 나중에 확인하겠습니다. 지난번에는 계약을 제안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늘은 전혀 엉뚱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엉뚱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 계약을 제안하는 겁니다. 결혼이라는 인생을 바꾸는 계약을요. 그른 말씀을 드린 적 없습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는 화낼 타이밍을 잊고 있었다. 이제 슬슬 부글부글 뱃속이 거북해지기 시작했다. 시간낭비, 헛소리. 그녀는 그가 싫어하는 짓을 골라 하고 있었다. 그는 차갑게 조소했다. “지금 나와. 말장난 하자는 겁니까?” “제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말씀을 드리는지, 갑자기 이런 말을 듣는 전하께서도 불쾌하시다는 것도 이해합니다. 저는 다만 전하께서 저와 결혼해서 얻는 이점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듣고 나서 거절하셔도 괜찮아요. 많은 시간을 빼앗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귀찮게 해드리는 일도 없을 겁니다.” 순한 토끼 같은 인상의 자그마한 여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나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진지한 눈동자는 똑바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승전파티에서 봤던 간절한 눈이었다. 뭔가를 바라는데 탐욕은 없는 신기한 눈빛이었다. 그래서 승전파티에서도 내내 신경이 쓰였다. 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어가며 상대해 주는 것도 저 눈 때문이었다. 그는 조금 더 시간낭비를 해보기로 했다. “좋습니다. 들어보지요.” “저..그 전에. 옆에 계신 분은 자리를 피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니 왜요!” 초롱초롱한 눈으로 앉아 있던 로이가 버럭 소리쳤다. 모처럼 재밌는 구경거리를 놓치게 생긴 로이는 거세게 반발했다. “솔직히 공주님이 여기서 주군이랑 앉아 있을 수 있는 것도 순 내덕이라는 거 아쇼. 이런 식으로 뒤통수치면 안 되는 거란 말이요!” “음. 감사해요. 그리고 죄송하구요. 하지만 지금부터 드릴 말씀엔 제 개인적인 내용이 들어 있어요. 어쩌면 제게 치명적인 내용일 수도 있거든요. 못 믿어서가 아니라 그 정도쯤은 이해해주실 수 있을 거라 믿어요.” “내가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닐 것도 아닌데..근데, 혹시 날 알아요?” “아? 아..음..유..유명하신 분이니까.” “내가? 내가 그렇게 유명했나...”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갸웃하는 로이를 보며 루시아는 식은땀이 났다. 먼 훗날 그가 유명한 건 분명 사실이었지만 어쩌면 지금은 아닐 수도 있었다. ‘잘 다루는군. ’날뛸 것 같던 로이를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단번에 얌전하게 만드는 것을 보며 그는 픽 웃었다. 로이는 귀한 아가씨가 상대하기 결코 편한 쪽이 아니었다. 적발에 커다란 체구, 머리에 떠오른 생각을 걸러 말할 줄 모르는 무례함에, 큰 목소리는 마치 윽박지르는 것 같다. 하지만 알고 보면 녀석보다 단순한 생명체는 없었다. 고집 센 대형견이라고나 할까. 종잡을 수 없지만 재미있는 여자였다. “나가 있어라.” “.... 쳇.” 로이는 다소 구시렁거리기는 했지만 순순히 나갔다. 막상 둘만 남게 되자 루시아는 살짝 긴장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머릿속의 시나리오를 정리했다. 이건 도박이었다. 그녀는 주사위를 던졌다. “저는..전하께 후계로 삼은 아들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 -- 결혼할까요 -- > 그가 이름뿐인 아내가 필요했던 가장 큰 이유. 그에게는 혼외 아들이 있었다. 어지간한 귀족에게 혼외자식 한 둘은 발에 채는 돌처럼 흔했지만 그는 혼외 아들을 작위를 물려줄 후계로 삼았다. 제논은 사생아에 관대했다. 혼외자라도 입적하면 적자와 동일하게 취급해 주었다. 다만, 혼적에 입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인의 동의를 요했다. 루시아가 알기로 공작과 공작부인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갖지 못한 것인지 갖지 않기로 약속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후자일 것이다. “절대 전하께 세작을 심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급한 그녀의 변명이 가소로웠다. 세작? 고작 16번째 공주 따위가?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공작가의 보안을 담당하는 자들은 당장 모두 내일 목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세작을 심었다 해도 관계없습니다. 계속하세요.” 어찌 알았냐고 다그치면 어쩌나 불안했던 루시아의 예상과 달리 그는 차분하게 응대했다. 오히려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루시아는 지난번에 만났던 그와 어쩐지 느낌이 달라 의아했다. 생각보다 그는 인내심 강하고 온화했다. 역시 사람은 한 번만 봐서는 알 수 없는 법인가보다. 이야기가 잘 통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생겼다. “아..네. 그래서..후계에게 작위를 물리시려면 전하께서 결혼은 하셔야 할 테니까요.” “그래서. 그 결혼을 공주님과 하자는 겁니까?” “...네.” 그가 피식 웃었다. “내게 후계가 있음은 비밀이 아닙니다. 알아내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 형식비라 할 수 있겠군요. 그 사실을 빌미로 삼으려는 것이라면.” “아니에요! 전하를 협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생각은 감히 안 해요. 말씀드렸다시피 전 제안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이 결혼으로 전하께서 얻을 이득을요.” 물끄러미 루시아를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뭡니까? 공주님과 결혼해서 내가 얻을 이득이.” 그의 말투는 건조하고 사무적이었다. “저는 외가가 없습니다. 결코 전하께서 제 외가에 신경 쓸 일이 없어요. 그리고 전 16번째 공주라 왕실 내에서의 위치도 보잘 것 없으니 왕실에 지불할 지참금도 별로 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어쨌든 공주이긴 하니까 겉보기에 아주 별 볼일 없는 가문과 혼인하는 것보다는 대외적으로 그럴 듯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점은 전하께서 별로 개의치 않을 부분일 것 같지만. 그리고 저는 전하 사생활에 전혀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마음껏 노셔도, 아니 그러니까 아마 결혼을 하기 전의 생활과 차이가 없으실 거예요. 원하시면 중간에 이혼해도 괜찮습니다. ” 가만히 듣고 있던 그의 표정이 아주 이상해졌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작가 후계에 제가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겁니다. 저는 아이를 낳을 수 없어요.”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대단히 불편한 표정으로 미간을 꾹 눌렀다. 루시아가 지금껏 봤던 중에 가장 많은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도대체가.” 그의 표정이 다시 차갑게 돌아왔다. “공주님 머리통에 대체 무슨 생각이 들어있는지 열어보고 싶군요. 정말. ..아니, 다 집어치우고. 정말 공주님은 말씀하신 것들이 제가 이 결혼으로 얻을 이득이라 생각하십니까?” “.... 예?” “하나씩 따져봅시다. 공주님 외가, 결혼하면 아내의 친정이 되겠군요. 타란은 안주인 가문 하나 건사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지 않습니다. 가문의 인척과 친척은 관리처가 따로 있고 제가 신경 쓸 일은 없을 겁니다. 반역이라도 저지르면 모를까. 뭐, 설마 그렇다 해도 처리 못할 건 없겠군요. 지참금은..말했지만 타란은 가난하지 않습니다. 지참금 아끼는 짓 따위 안 합니다. 처가의 가문이 이름이 있건 별 볼일 없건 그 또한 상관없고. 타란 가문 전통에 이혼은 없습니다. 정히 가문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죽어야. 아니 죽어도 안 되려나. 아무튼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생활 이야기는.” 그는 다시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 하셨는지 대충 짐작은 가는데. 저를 결혼하고 나서 이 여자 저 여자 여기 저기 애인이며 첩이며 두고 난잡하게 노는 바닥으로 취급하시는 겁니까?” “.... 예?” 루시아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하..하지만 지난번에 제가 들은..” “현재 저는 미혼입니다. 미혼 남자가 어떤 연애를 하던 누구도 간섭할 바가 못 됩니다.” 그의 말은 지극히 타당했다. “그런 단편적인 일로 누군가를 파악하는 일은 어리석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의 비꼬는 것 같지 않은 비꼼은 루시아 심기를 건드렸다.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결혼하면 오직 아내에게만 충실해서 평생 다른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을 거라고 다짐하신다는 건가요?” 그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물론 그건 아니었다. 그는 그런 다짐 따위는 안 한다. 가끔 놀 수도 있지. 그런데 그는 왜 이런 변명을 스스로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공주님이 상관할 자격은 없습니다.” “네. 물론이죠. 그래도 아니라고는 안 하시네요.” “기건 아니건. 그건 공주님이 따질 일이 아닙니다.” “압니다. 누가 뭐래요?” 옥신각신하던 두 사람 사이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루시아는 잠시 흥분해서 저만치 날아간 제정신을 얼른 챙기고 조신하게 입을 다물었고, 그는 괜한 헛기침을 했다. 루시아는 흥분이 가라앉자 시무룩해졌다. 그가 자신과 결혼해서 얻을 이익이 없다면 이 계약결혼이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그럼..후계 문제는요? 제가 아이를 못 낳는 건 전혀 전하께 도움이 안 되나요?” 여자가 아이를 못 낳는 건 굉장히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마치 의상실에서 이 색은 별로인데 저 색은 어때요? 묻는 것처럼 말하는 그녀의 태도에 그는 혼란을 느꼈다. “내가 후계로 삼은 아들이 있는 건 사실이고. 결혼해서 아내가 아들을 낳는다면 조금 골치 아프겠지만 그건. 그 일까지는 설명할 필요 없겠군요. 아무튼 그 문제도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건 증명할 수 있는 겁니까?” “.... 아뇨.” 의사는 진단해도 확언은 해주지 않을 것이다. 만에 하나 임신하면 거짓 진단을 내린 의사는 목을 걸어야 하는데 그런 위험을 누가 감수할까. “증명할 수 없다면 어차피 조건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하아...” 루시아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면 그녀가 준비한 것은 모두 바닥이 났다. 그럼 꿈속에서 그는 무슨 이유로 그 여자와 결혼을 했을까. 그래도 무슨 조건이 맞았으니 한 것 아닌가. 어쩌면 계약결혼 같은 건 다 사교계 헛소문이고 사실은 그 여자와 열렬히 사랑한 건 아닐까? 절망하던 루시아는 번뜩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이건 어떤가요? 전하를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뭐요?” “절대로 전하를 사랑하지 않겠어요. 제 마음은 제가 가지고 있을게요.” 그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루시아는 멍하게 그를 보았다. 그가 소리 내어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 이렇게 웃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제대로 웃어본 적은 있을까 궁금해 했던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주님이 제안한 조건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군요.” 재밌다. 이 여자는 정말 재미있었다. “좋습니다. 그걸 이득으로 치면. 그럼 공주님은 남편이 애인을 두는 것도 괜찮고 언제든 이혼해도 괜찮은 결혼을 해서 대체 뭘 얻으려는 겁니까?” “전 그냥..공작부인이라는 이름을 얻는 걸로 충분해요.” “공작부인이라고 터무니없는 사치를 허용할 생각 없고, 가문을 이용한 정치놀음이나 권력싸움 같은 건 어림없습니다.” “그런 것은 바라지 않아요. 저는 다만..말씀드렸지만 전 16번째 공주에요. 폐하께서는 제 존재조차도 아마 잊으셨을 거예요.” 그는 ‘그렇지 않을 거다. ’ 등의 입 발린 위로조차 건네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다워서 너털웃음이 나왔다. “공주는 왕실의 이익을 위해 언제든 팔려나갈 준비가 되어 있지요. 적당한 지참금만 받으면 왕실에서는 절 아무 곳에든 시집보낼 겁니다. 나이가 얼마나 많든, 몇 번의 결혼경력이 있든, 얼마나 최악의 평판을 가진 사람이든. 전하께서는 최소한 나이도 젊고 미혼이시잖아요. 팔려나가기 전에...제가 절 팔고 싶었어요. 그럼 최소한 제가 선택한 것이니까.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덜 억울할 것 같거든요.” 그녀의 눈은 서럽게 우는 것 같았다. 그는 쉽게 타인을 동정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사정이 어찌되었든 그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그녀의 제안은 두서없고 터무니없으며 신뢰할 근거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껏 살아오며 이 정도 재미를 느낀 건 처음이었다. “그럼 이만. 실례가 많았습니다. 많은 무례를 끼쳤어요. 용서하셨으면 합니다.” 루시아는 일어나 그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드는 그녀의 표정은 조금 개운했다. 최선을 다해 부딪쳐 보았다. 일의 성사는 하늘에 달린 것이다. 이 정도면 되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루시아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확답은 못하겠군요. 공주님 말씀대로 이건 인생을 바꾸는 계약이니까요.” “아...” 믿기지 않았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생각해 본다고 했습니다.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알아들었어요.” “일이 성사된 것 같다는 표정이기에, 확인해 본 겁니다.” 루시아는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약을 올리는 건지, 괜히 속을 긁는 건지. 정말 이 남자는 뒤집어 쓴 껍데기 외에는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다. “그럼 일단.” 그가 일어나서 자신을 향해 손을 뻗을 때 루시아는 멀뚱히 그를 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턱을 틀어쥐고 그대로 입술이 부딪쳐 왔을 때까지도 루시아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뜨거운 살덩이가 입안을 가르고 들어와 목 안 깊은 곳을 건드리자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꼭 쥔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갑자기 시작된 진한 키스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그의 혀가 입안을 가볍게 훑고 지나가며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그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의 그녀를 보며 웃었다. “확인입니다.” “뭘..요..?” “부부가 되려면 최소한. 살이 닿아 혐오감은 없어야 할 테니까요. 다행히 그렇진 않은 것 같군요.” “아..그..” “잠시 있으세요. 궁 앞까지 모셔다 드릴 마차를 준비하라 하겠습니다.” 그가 몸을 돌려 나가고 루시아는 그대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얼굴이 화끈거려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당연히 결혼해서 부부가 되면 이런 저런 일도 다 하는 거고, 조금 전의 접촉 같은 건 당연한 건데. 루시아는 두 손으로 주먹을 쥐고 제 머리를 마구 두드렸다. “이 멍청아. 넌 정말 말도 안 되는 멍청이야.”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겠지만, 루시아는 ‘결혼’ 그 자체 외에는 생각을 안 했다. 결혼과 수반하는 부부 사이의 일에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막연하게 ‘결혼해도 그는 애인이 있을 테니까 서로 얼굴 몇 번이나 보겠어. ’ 이런 식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와 한 침대에서 자는 일은 정말. 상상도 안 했다. “...이건 어디 가서 상담도 못해.” 그녀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오그라드는 수치심으로 몸부림쳤다. 모처럼만에 그를 꽤 시간을 두고 고민하게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결혼. ..이라.” 그의 나이 25살. 이미 결혼 적령기였다. 하지만 그는 당장 결혼 생각이 없었다. 안 그래도 할 일이 산더미다. 아내라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아예 결혼 따위는 하고 싶지도 않았다. 여자가 부족한 적은 없다. 그러나 녀석을 후계로 삼아 작위를 물려주려면 결혼을 해야 한다. 혼적에 올라간 적자만 작위를 계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을 해야만 혼적을 작성할 수 있다. 사별을 하건 이혼을 하건 결혼은 해야 후계자를 인지할 수 있었다. 제논의 법은 독신남의 양자 입적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직 녀석은 어렸다. 결혼이 당장 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마 언제고 하기는 해야 한다. 녀석을 혼적에 입적할 것을 동의하며, 후계로 작위를 물려줄 것까지 이해할 여자를 찾아서. 그런 점에서 오늘 찾아왔던 공주님은 꽤 구미가 당겼다. “사생활의 자유라. 그 점도 좋지.” 그는 큭 웃음을 터뜨렸다. 날 뭘로 보느냐 공주에게는 정색했지만 사실 상당히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문득 반은 놀릴 의도로 키스한 후 새빨갛게 익은 얼굴을 떠올리자 다시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귀엽긴 했다. 좀 신선하기도 했고. 하지만 석연치 않은 점이 너무 많다. 공주가 맞는지부터 확인해야 할 것이다. 배후에 누가 있는지도 알아봐야겠다. 대체 뭘 노리고 이런 일을 꾸미는지도. 그는 오늘 그녀에게서 들은 모든 말들은 일단 거짓이라고 전제했다. 의심스러울 때는 최악을 가정한다. 그의 좌우명이었다. “전하. 제롬입니다.” 들어와, 답하자 문이 열리고 그의 충직한 집사가 들어왔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전하. 오늘과 같은 일이 추후 다시는 없도록 하겠습니다.” “네 잘못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녀석을 감시할 수도 없는 거고.” “이제부터는 그럴 생각입니다.” 잠깐 자리 비운 새에 그런 사고를 칠 줄은 예상 못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낯선 손님을 데리고 들어와 전하와 단 둘이 두다니! 전하께 누를 끼치는 일 없도록 늘 살얼음 밟는 심정으로 수도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제롬은 아주 거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하다가 미친 듯이 화가 치밀었다. 로이를 향해 제롬은 북북 이를 갈았다. “파비안 들어오는 대로 나한테 오라고 해.” “예. 전하.” 휴고는 그 공주에 대해 샅샅이 조사해 보기로 결정했다. < -- 결혼할까요 -- > 밤이 으슥한 시간, 제롬은 공작저를 방문한 파비안을 맞이했다. 타란 공작의 보좌관인 파비안은 비록 일에 치여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더라도 최선을 다해 시간 외 근무는 기피했다. 어지간히 급한 일이 아니라면 파비안은 이 시간에 공작을 만나러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파비안은 심각하게 얼굴을 굳히는 형제, 제롬의 어깨를 두드렸다. 둘은 한 배에서 한 날 태어난 쌍둥이 형제이지만 암청색 눈동자 외에는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이 형제라는 것을 알게 되는 사람이 도리어 깜짝 놀라곤 했다. “별 일 아니니 얼굴 펴. 그냥 좀 전하께서 많이 궁금해 하시던 일이라. 어차피 내일은 쉴 거라서 그냥 오늘 보고 드리려고. 아직 안 주무시지?” “안 계신다.” “뭐야. 밤나들이 가신거야? 도착하니 파장이라더니, 그 꼴이네. 어쩔 수 없지. 아, 전하께는 내가 왔었단 말 드리지 마. 내일 쉴 거니까 불려나오고 싶지 않아.” 파비안은 성실한 수하의 자세에서 늘 반걸음 물러나 뺀질거렸다. 제롬은 혀를 찼지만 정말 중요한 일이면 그러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기에 뭐라 하지는 않았다. 미련 없이 몸을 돌리려던 파비안이 멈칫했다. “어디로 가셨어?” 제롬은 잠시 주저했다. “팔콘 백작부인.” “팔콘..팔콘이 누구..뭐??? 그 여자를 아직 찾으신단 말이야??” “목소리 낮춰. 다들 잔다.” “지금 그게 문제냐! 넌 뭐했어!” “...하긴 뭘 해. 주인이 누굴 침실로 부르시건 상관할 일이 아니야.” “상관을 안 하기는! 그 여자는 남편을 셋이나 잡아먹었다고! 무슨 저주가 걸린 여자인지 모른단 말이다!” “...네가 애냐? 저주라니. 그런 게 어딨어.” “로렌스 남작 영애는 어떻게 된 거야?” “전하 명으로 장미꽃을 보냈지.”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내가 알았으면.” “알았으면 뭐. 전하 침실에 여자 넣으려고? 주제넘은 짓 하다가는 전하께 죽는다. 넌 목이 몇 개라도 되냐?” “아 진짜.” 파비안은 온몸으로 짜증을 내며 머리를 북북 긁었다. “그 여자 이름만 나오면 왜 그렇게 예민해?” “말했잖아. 그 여자는 마녀라고. 그런 불길한 여자가 전하 근처에 있어선 안 돼. 전하께서도 벌써 1년 넘도록 그 여자랑 관계를 유지하고 계시잖아. 그 여자 말고 딴 여자는 이런 적 없었어. 틀림없어. 전하는 이미 그 여자한테 홀리셨다고!” “.... 장담하건대 전하 앞에서 그 말 했다간 넌 진짜 죽어.” “알아! 그러니까 닥치고 있잖아!” 이 녀석의 주인께 대한 충성심은 좀 이상한 쪽으로 변질되었다고 제롬은 생각했다. 파비안이 질색하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제롬 역시 공작이 팔콘 백작부인을 가까이 하는 것이 썩 유쾌한 건 아니었다. 그녀와 결혼한 남편 셋이 모두 결혼 후 1년도 안되어 비명횡사했다. 아무 병 없이 건강하다가 사고, 급사 등으로 덜컥 죽어버려서 팔콘 백작부인에게 저주가 걸렸다는 소문은 이미 사교계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리고 공작과 팔콘 백작부인과의 관계는 다른 여자들과 좀 달랐다. 공작은 다른 여자들과 교제하는 중에도 간혹 백작부인과 밤을 보냈다. 다른 여자들에게 하는 것처럼 값비싼 선물을 보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끊어지지 않고 두 사람 사이는 이어졌다. 그게 1년이 훌쩍 넘었다. 그리고 3개월 전 로렌스 남작 영애와 끝난 이후 다른 새로운 여자와 교제 없이 계속 백작부인하고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말을 했다가는 파비안이 더 길길이 날뛸 것이라서 제롬은 그냥 혼자만 알고 있기로 했다. “나 간다.” “어쩌려고.” 제롬은 파비안을 붙잡았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얌전히 집에 가겠다는 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주인이 계신 곳으로 보고 드리러 가야지.” 기어코 방해 하겠다는 말이었다. 파비안은 한 달 전 공주 한 명에 대한 조사를 명받았다. 조사를 하는 내내 왜 이 공주의 인적사항이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여자다. 그 마녀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파비안은 자신이 들고 있는 보고서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공작은 일을 시키면 결과를 가져올 때까지 별 말을 하지 않는데 이번에는 중간에 2번이나 어찌 되어 가느냐고 물었다. 상당히 관심이 있다는 뜻이었다. “여기 있어. 내가 다녀오지.” “...네가?” “가서 네가 중요하게 보고 드릴 것이 있어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드릴게. 귀가하신다면 모시고 오고, 나중에 듣겠다고 하시면 너도 그냥 얌전히 집으로 가는 거야. 어쩔래?” “...좋아. 몇 번 재촉하신 일이라고 꼭 전하께 말씀드려.” “알았어.” 십중팔구 공작은 귀가를 택할 것이다. 만약 공작이 나중에 듣겠다는 선택지를 택한다면 그때는 제롬도 팔콘 백작부인에 대해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해 보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이다. 파비안 말대로 공작과 백작부인의 관계는 상당히 오래 이어졌고, 지금껏 백작부인 외에 어떤 여자도 이런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공작이 백작부인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공작은 차갑고 무정한 사람이었다. 공작이 백작부인을 자주 찾는 데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겠지만 그 이유 중에 감정적인 것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제롬이 파비안과 달리 백작부인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이유였다. 널찍한 침대 위에 한 사내가 등에 커다란 쿠션을 받쳐 상체를 약간 들어 올린 상태로 기대 누워서 서류를 들추고 있었다. 사내 위를 타고 오른 나신의 여인이 두 손으로 그의 널찍한 가슴을 짚고 요염하게 허리를 돌리며 헐떡였다. “하아..으응..어..어때요?” 단단히 곧추 선 남성을 안으로 품은 여자는 교성을 흘리며 요분질을 했지만 서류를 넘기는 남자의 표정은 무심했다. “쓸 만하군.” “읏..응. 너무..한데요. 두 달..이나 걸려..작성 한 건데..” 아니타는 냉정한 평가를 내리는 남자에게 눈을 흘겼으나 그가 ‘쓰레기’라고 말하지 않은 것만으로 상당한 호평을 해 준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타는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엉덩이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 찧었다. 단단한 것이 안을 깊이 찌를 때마다 그녀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어..어때요?” “쓸 만하다니까.” “그거..말구요.” 서류를 옆으로 떨구면서 그는 픽 웃었다. 그가 상체를 일으키며 커다란 두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잡자 그의 것을 물고 있는 여자의 안이 죄어들었다. “이쪽도 쓸 만해.” “응..앗..당신은..점수에 너무 인색해요..나는 뭐..당신 점수 매길 줄 몰라 안하나..” “내 점수는 어떤데?” “쓸 만..해요. 당신도.” “흐음.” 그는 씩 웃더니 그대로 여자의 허벅지를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여자는 순식간에 눕혀지고 그는 그 위를 타고 올랐다. 그는 강하게 허리를 움직이며 그녀 안으로 돌진했다. 살이 맞부딪치며 퍽퍽 소리가 나도록 강한 힘에 여자가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하윽! 아아! 아악!!” 부드러운 여체가 그에게 매달렸다. 비명처럼 교성을 질러대는 여자의 안으로 들어가며 사정없이 몰아붙였다. 여자 입에서 죽겠다고 애원하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그는 멈추지 않았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먼저 항복하는 건 늘 여자 쪽이었다. 한바탕 정사가 휩쓸고 지나간 침실은 덥힌 공기가 아직 식지 않았다. 아니타는 넓은 사내의 가슴을 파고들며 만족스럽게 가르릉 거렸다. 탄탄한 근육아래 손으로 쓰다듬으면 아주 미세하게 느껴지는 흉터의 흔적들이 있었다.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외모, 몸을 달아오르게 하는 숙련된 키스와 애무, 그리고 밤을 새울 정도로 대단한 정력에 격정적인 정사까지. 아니타는 이 남자의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남자를 만나봤지만 이런 남자는 유일했다. 처음에는 그의 배경에 혹했다. 북부의 지배자로 불리는 타란 가문의 공작이라니. 평생 이런 남자와 언제 자볼 수 있겠나, 이런 호기심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그의 신분 같은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그렇게 대단한 남자라는 사실이 사무치게 안타깝다. 아니타는 그가 소피아 로렌스와 끝냈다는 사실을 알았다. 파티에서 우연히 마주친 소피아가 흡사 원수라도 보는 것처럼 노려보기에 짐작했다. 아니타는 소피아에게 유감은 없었다. 오히려 소피아 역시 그의 과거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좀 안타까웠다. 소피아 로렌스라면 어쩌면. 그의 마음을 잡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는데. 그가 여자에게 잡히기를 원하지 않으면서도 원하는 이중적인 마음이 있었다. 타란 공작은 사교계에서 그리 이름 높은 바람둥이가 아니었다. 의외로 사람들은 그의 여성편력에 대해 잘 몰랐다. 가장 큰 이유는 그는 사교계에서 영향력 있는 여성들과 관계를 갖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소피아 로렌스가 거의 유일하게 유명했다. 소피아는 유명한 미녀이긴 하지만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로렌스 남작가는 그리 권세를 지닌 가문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얼마간 데리고 놀다 버려도 뒤탈이 없다는 의미였다. 아니타는 그가 그런 점까지 계산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와 한 때 교제했던 여자들은 결혼하더라도 평탄하지 못했다. 아니타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정말 섹스를 잘 했다. 하룻밤에 셀 수 없이 여자를 천국으로 보낸다. 그 맛을 본 이후에 어떤 남자가 만족스러울 수 있을까. 처음에는 그의 권력이나 재력에 혹했다가도 시간이 지날수록 이 남자 자체에 빠져버린다. 그래서 여자들은 그에게 매달리며 집착하고 결국은 그에게 버림받는다. 그는 차가운 불같았다. 몸은 줘도 마음은 단 한 조각도 주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몸으로만 즐기자 생각했던 아니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마음까지 주어 버렸다. 하지만 그것을 드러내면 이 남자는 그녀를 버릴 것이다. 지금까지 다른 여자들에게 한 것처럼. 그래서 아니타는 자신의 마음을 결코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물질적으로 그가 필요한 것처럼, 서로 이득을 주고받는 관계처럼 행동했다. 다음에 언제 만나느냐 묻지 않고, 오래 연락이 없어도 결코 먼저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그렇게 1년 넘도록 그와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투자해 줄 거죠?” 아니타는 상단을 하나 운영 중이었다. 그 동안 간간히 그에게 얻은 조언으로 투자를 해서 제법 재미를 보았다. 이젠 상단 규모가 꽤 커져서 그에게 투자하라며 기획안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상단을 위해 그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실제로 그의 덕을 볼 생각도 얼마간 있었다. “검토해보지.” “뭐에요. 내 상단의 핵심 기밀까지 다 봐 놓구 이럴 거예요? 나 더 봉사해야 하는 건가요?” 아니타는 손을 아래로 내려 그의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그의 중심을 부드럽게 손에 쥐었다. “봉사는 내가 하고 있는 것 아니었나?” “어머. 어쩜 이렇게 자신만만하실까.” 아니타가 조물락거리는 손에서 그의 것이 힘을 더해 부피를 키워갔다. 그녀는 고개를 그의 가슴에 묻고 작게 도드라진 그의 유두를 빨아들였다. 혀로 유륜 주변을 돌리며 핥으면서 그녀는 손으로는 단단해진 그의 것을 쥐었다 놓으며 자극을 가했다. “나 뒤로 넣어줘요. 응?” 그가 몸을 일으키자 아니타는 재빨리 엎으려 엉덩이를 세웠다. 그의 손이 등을 누르면서 뒤에서부터 거대하게 일어난 그가 은밀한 길을 타고 깊이 들어왔다. “하아..으응...” 강하게 밀고 들어왔다 빠져나갈 그의 움직임을 예상하며 혀로 입술을 축이는데 침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주저하는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아니타는 이를 아득 갈았다. 감히 그와의 시간을 방해하다니. 저 년은 당장 내일 채찍질해서 내쫓아 버릴 것이다. “절대 방해하지 말라 이르지 않았더냐! 물러가라!” “귀인을 찾는 손님입니다. 고할 일이 있다고 뵙기를 청한다고 하십니다.” 그를 찾아온 손님이라고? 아니타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틀어 그를 살폈다. 그가 거절하기를 바랐으나 그는 짧게 생각을 마치고 그녀 안을 채우고 있던 자신을 빼냈다. 묵직한 감각에 아니타는 짧게 신음했다. “들어오라고 해.” 아니타는 실망을 감추고 바깥을 향해 말했다. “모시고 오너라.” 얼마 후 침실 문이 열리고 남자가 들어왔다. 제롬은 속이 다 비치는 슬립 차림의 여자가 가슴골이 다 보이도록 비스듬히 누워 있고, 그 뒤쪽에 상반신을 다 드러낸 채 주인이 앉아 있는 것을 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휴식을 방해 드려 송구합니다. 전하.” “무슨 일이야.” “파비안이 전하께 고할 중요한 일이 있다며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여러 번 재촉하신 일이라기에 전하 뜻을 여쭙고자 합니다.” “알겠다. 나갈테니 기다려.” 제롬이 물러가고 몸을 일으키는 휴고를 보는 아니타 얼굴이 창백했다. “가시..려구요?” “내 옷 어딨지?” 가슴이 미어진다. 잡고 싶었다. 가지 말라고 하고 싶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오늘 밤이 아니라 내일 듣는다고 하늘이 무너지겠는가. 망설임 없이 돌아갈 준비하는 그가 야속했다. 하지만 잡을 수 없었다. 매달리면 그는 매정히 뿌리치고 다시는 여기 오지 않을 것이다. 요즘 그가 그녀를 자주 찾아서 자신도 모르게 기대하는 마음이 생긴 것 같다. 갖고 싶다. 이 남자가 너무 갖고 싶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겠지만 너무너무 원해서 피가 마를 것 같았다. “절 이렇게 달아오르게 하고 그냥 가실 거예요?” 부드럽고 풍만한 가슴을 바싹 밀착했다. 교태어린 그녀의 유혹에도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가볍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출 뿐이었다. “내 옷. 가져오라고 해.” 아니타는 붉은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만 바로 하녀를 불러 잘 보관해 둔 그의 옷을 가져오게 했다. 아니타는 직접 그가 옷을 입는데 시중을 들었다. 일부러 그에게 밀착하고 애무하듯 스킨십을 했다. “정도껏 하지.” 그의 한 마디에 아니타는 흠칫했다. 그의 눈은 시릴 정도로 감정 없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유혹하면 열이면 열 뿌리치지 못하고 다 입었던 옷도 벗어던지며 달려드는 것이 대개 남자들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남자는 조금 전이 마치 거짓인 것처럼 이렇게 식어버릴 수 있을까. 아니타는 쓴웃음을 지으며 깔끔하게 물러났다. 두 번 다시 이 남자를 보지 못하는 것은 원하지 않으니까. “다 됐어요.” 아니타는 두어 걸음 물러나서 황홀하게 남자를 감상했다. 장신의 키에 균형 잡힌 몸매는 옷맵시를 돋보이게 했다. 아니타는 그의 몸만큼이나 그의 얼굴도 좋아했다.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열흘 정도 집을 비울 거예요.” 아니타는 도도하게 말했다. 이런 남자는 붙잡으려 하면 더 빠져나간다. 가끔은 먼저 간격을 벌려야 하는 것이다. 가버리는 남자에 대한 약간의 심술도 들어 있었다. 하지만 얄팍한 수를 부린 것을 금방 후회했다. 그는 마치 속이 빤히 들여다보인다는 것처럼 웃음으로 대답했다. 아니타는 늘 그런 것처럼 그를 침실 안에서 배웅했다. 절대 그를 쫓아나가 배웅하지 않고, 그가 올 때도 나가서 맞이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걸로 자존심을 지킨다는, 자기 위안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나가고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던 아니타가 천천히 걸어 발코니로 나갔다. 그를 태운 마차가 저 멀리 달려가고 있었다. 마차가 사라지고 나서도 꽤 한참동안 아니타는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 -- 결혼할까요 -- > “고작 이거라는 건가?” 휴고는 얄따란 몇 장 보고서를 대충 넘기며 파비안을 추궁했다. 맹랑한 공주에 대한 조사를 파비안에게 명한지 한 달. 지금껏 누구에 대한 조사도 이렇게 시간이 걸린 적 없었다. 오밤중에 그를 집으로 오는 수고까지 하게 만들었으면서 내놓은 결과가 실망스러웠다. “조사할 내용이 너무 없어 신중을 기하느라 그리했습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송구합니다. 전하.” 파비안은 처음으로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실감했다. 사람 뒷조사를 한 두 번 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캐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궁 안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이라 접근이 쉬운 것도 아닌데다가 비비안이라는 공주를 아는 사람을 찾을 수 없어서 정보를 얻을 길이 없었다. 휴고는 더 이상 파비안을 나무라지 않았다. 파비안 능력은 잘 알고 있다. 제대로 일을 하지 않고 변명을 늘어놓는 수하는 아니었다. 평민으로 자라다가 12살에 입궁한 공주. 표면적으로는 별궁 밖을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 사교계 데뷔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 번 씩 공주가 아닌 척 출궁하고 있었다. 파비안이 한 달을 감시하며 알아낸 결과였다. ‘사교계 데뷔도 한 적 없으면서 사교파티에서 그렇게 자연스러웠다고?’ 그녀가 파티에서 눈에 띄게 활동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사교 파티는 그리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지만 그건 어설픈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제가 쓴 외출패를 들고 직접 외출을 한다? 궁 출입이 언제부터 그렇게 허술했지?” “근위병들이 시녀로 알고 있었습니다. 궁에 워낙 왕족이 많아서 매일 드나드는 시녀나 시종들 수가 파악하기 힘들 정도라 합니다. 반입 반출하는 물건만 검사하고 그 외에는 철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매주 열심히 외출해서 뭘 하는가 했더니 가는 곳은 매번 같았다. 제법 이름난 여류작가의 집이었다. 여류작가 또한 만만치 않게 사람들과 교류가 적어서 두 사람이 만나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여류작가 집에 고용된 중년 부인뿐이었다. “녀석 정보는 이 작가에게서 얻은 걸로 추측된다..?” 그의 아들 데미안에 대한 정보는 극비는 아니지만 아무 기반 없이 궁에 갇혀 사는 공주가 알아내기에는 고급 정보였다. 휴고는 어떻게 공주가 그걸 알고 있는지 의문을 가졌고 그걸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유명한 작가입니다. 사교계 이면을 대단히 사실적으로 쓰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 꽤 사교계 소문에 정통한 정보꾼과 끈이 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만 한 달 동안 정보꾼으로 추측되는 자와 접촉한 적은 없었습니다.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보기 원하시면 사람을 계속 붙여두겠습니다.” “됐다. 중요한 건 아니니까. 결론은 정확한 정보는 공주라는 신분뿐이로군.” 대부분이 추측성 정보였다. 아무것도 아닌 공주인데 아무것도 정확하지가 않다. 그는 순식간에 다 읽은 얇은 보고서를 다시 읽었다. “상주하는 시녀가 없다는 건 뭐지?” “공주님 처소에서 일했다는 시녀는 대단히 많으나..대부분 며칠 이상을 넘기지 못하고 명부에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어디에도 끈이 닿지 않은 건 확실하고?” “틀림없습니다. 샅샅이 살폈지만 어떤 파벌과도 연결된 흔적은 없었습니다.” 더 이상 확인할 정보가 없었다. 휴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보통의 업무를 처리할 때와 다름없는 속도였다. “매주 같은 날에 출궁한다니 다음 외출 예정일은 내일이겠군. 데려와.” “예...? 내일..” 내일은 쉬는 날이다. “문제 있나?” “..아닙니다. 전하.” 심술을 부린 대가는 결국 휴일의 반납으로 돌아왔다. 파비안은 역시 그 마녀의 저주가 틀림없다고 이를 갈았다. “그 일 어떻게 됐어?” 놀만은 슬그머니 루시아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뭐가요?” “지난 번 나한테 물었던 2가지 갈림길 말이야. 네 얘기였잖아.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나한테 털어놓기는 힘든 일이지?” “...네. 미안해요.” “아냐. 사람은 누구나 비밀은 있어.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이라도 공유할 수 없지. 그냥 나는 네가 고민하는 것 같아서 잘 되고 있는지 정도는 물어도 될까 해서 말이야.” 사람의 심리를 미묘하게 분석하는 글을 많이 썼기 때문일까. 놀만은 눈치가 빠르고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보는데 탁월했다. 놀만은 항상 뚱한 필 부인의 기분을 기가 막히게 파악하곤 했는데 루시아는 아무리 봐도 알 수가 없었다. “지난 번 놀만이 해 준 이야기는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질렀어요. 그리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에요.” “그렇구나. 좋은 결과 나오면 말해줘야 해.” “네. 꼭 그럴게요. 근데요. 놀만. 요즘 내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을 때가 있어요. 나와 관련 있는 사람. ..이건 그냥 말할게요. 내 아버지란 사람.” 12살에 궁에 들어왔을 때, 꿈과 현실을 합쳐 총 2번 얼굴만 봤던, 이제는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그녀의 친부. “내 아버지는 나를 방치했어요. 굶어죽지는 않게 해주었으니 버렸다고 하긴 그렇지만. 12살에 딱 한 번 얼굴 본 것이 전부거든요. 그 전까지는 아무렇지 않았어요. 생물학적 아버지 같은 건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다고 생각했거든요.” 1년. 이제 1년 남짓 남았다. 1년이면 왕이 죽는다. “여전히 그 사람은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요즘은 자꾸 불쑥 그 사람에 대한 증오..그런 비슷한 감정이 들곤 해요.” 내궁 깊은 곳에 들어앉아 있는 왕의 면전에 대고 당신은 이제 곧 죽어, 라고 뇌까려 주고 싶었다. 흉하게 일그러질 그 면상을 보고 싶다는 잔혹한 충동이 들곤 했다. 많은 자식 중 하나라지만. 사랑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었지만. 왕이 최소한의 관심만 보여줬어도 그렇게 팔려가는 결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람이 죽으면 굉장히 통쾌할 것 같아요. 그래도 아버지인데..그러면 안 되는 거죠?” “무슨 소리야. 그런 게 무슨 아버지야.” 놀만은 담담한 표정의 루시아를 짠하게 바라보았다. “미워해도 돼. 아예 물 한 잔 떠놓고 저주를 해. 그래서 네 마음이 풀린다면 얼마든지 그래도 돼. 그 미움이 네 마음을 잡아먹지 않는다면 마음껏 싫어하고 미워해.” 루시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전부 놀만 때문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생판 남인데 챙겨주고 보듬어 주는 사심 없는 애정이 철저한 무관심을 보인 아버지와 비교가 되었다. 놀만의 우정과 사랑이 루시아 마음속에 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싹 틔웠다. 어느 새 옆으로 다가온 놀만이 두 팔을 벌려 루시아를 끌어안았다. “루시아. 넌 나이에 비해 너무 어른스러워. 인생은 짧단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도 다 못해.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만 아니면 무엇도 참지 마. 인생 선배의 조언이야.” 루시아는 아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면 오히려 루시아가 놀만의 인생 선배일 수 있었다. 루시아도 두 팔을 벌려 놀만을 마주 안았다. 마른 체형의 놀만의 품은 생각했던 것보다 포근했다. 이번 삶은 꿈속보다 더 행복한 것은 틀림없었다. 놀만을 알게 된 것 만으로도 그녀의 재생(再生)은 성공했다. 궁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한 남자가 자연스럽게 앞을 가로막았다. 흑갈색 재킷을 입은 젊은 남자는 꾸벅 루시아에게 고개를 숙이고 하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루시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받아서 열었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봉투를 열면 바로 보이는 면에 포효하는 흑사자 문양이 있었다. 그라면 지금쯤 아마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조사했을 것이다. 루시아가 외출한 것을 알고 기다리고 있는 것 정도는 놀랍지 않았다. “모시러 왔습니다.” 차가워 보이는 암청색 눈동자를 지닌 남자를 루시아는 꿈 덕분에 기억하고 있었다. ‘파비안. ’그는 타란 공작의 보좌관이었다. 타란 공작은 권력의 중심에 있던 것 치고는 교류하는 귀족들이 많지 않았고, 측근들도 제한적이었으며 곁에 둔 자는 중간에 잘라내는 일이 없었다. 그 중 파비안은 타란 공작의 사람 중에서 로이 크로틴 다음으로 유명했다. 타란 공작의 모든 일정을 관리하는 최측근 비서이자 보좌관으로, 타란 공작이 어느 파티에 참석할지 초대장을 걸러내는 일은 모두 파비안 손에 달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래서 귀족도 아닌 파비안 앞에서 콧대 높은 귀족들이 설설 기었다. “지금..말인가요?” “주인께서 일전의 제안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하십니다. 거절하시면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루시아는 흘끔 시선을 돌려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마차를 확인했다. 마차는 창문조차 없었고, 공작가 소속을 나타내는 표시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 마차를 타고 루시아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려도 그 일이 타란 공작가와 관련되었다는 흔적은 전혀 남지 않을 것이다. ‘철저하구나..어째 좀 무서운데. ’루시아는 두말없이 마차에 올라탔다. 루시아를 태운 마차가 출발해서 그리 오래 달리지 않고 멈추었다. 바깥에서 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온 루시아는 이곳이 타란 공작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난 번 한 번 왔을 뿐이지만 부분부분 눈에 익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파비안과 꼭 닮은 암청색 눈동자를 지닌 남자의 안내를 따라 루시아는 순순히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루시아가 응접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파비안은 주인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모셔왔습니다.” “혼자인가?” “예.” “순순히 와?” “예.” 휴고는 픽 웃었다. 하여간 재미있다니까. 애초에 혼자 공작저를 찾아왔을 때부터도 범상치는 않았지만 오늘 그녀가 타란 공작저에 오는 사실을 누구도 모를 터였다. 무슨 일을 당할 줄 알고 겁도 없이. 턱을 괸 휴고의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렸다. 그녀와의 결혼은 흥미가 가긴 했지만 그는 지금 결혼에 급하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철저한 조사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의문이 아직 남았다. 대단히 의심스럽지는 않아도 신뢰할 수는 없었다. 그 점이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그는 아무도 절대적으로 믿지 않는다. 언젠가 해야 할 결혼, 지금 하나 나중에 하나 누구랑 하나 마찬가지이긴 했다. 그래서 휴고는 동전 던지기를 해보았다. 마차를 보내 그녀가 그걸 타고 오면 앞면이고, 오지 않으면 뒷면이다. 그는 동전의 앞면을 좋아했다. 자신의 인생 중대사를 그렇게 단순히 결정했다.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루시아는 그녀를 응접실까지 안내한 남자가 내어주는 차와 과자를 맛보고 있었다. 차는 더할 수 없이 향긋했고 과자는 대단히 맛있었다. 루시아는 이 2가지만으로도 타란 공작가에서 평생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솜씨가 좋으시네요. 지금껏 먹어본 중에서 최고에요.” 남자는 루시아의 찬사에 잠시의 침묵 후에 답했다. “입맛에 맞으신다니 다행입니다.” 내어 준 과자를 벌써 반이나 비우며 즐거워하는 루시아를 보며 집사 제롬은 특이한 아가씨라고 평했다. 제법 많은 손님을 이곳에서 맞이해 봤지만 이렇게 긴장감 없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대부분 타란 공작을 만나기에 앞서서 찻잔에도 거의 손대지 못할 정도로 얼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공주라는 것을 알았다면 더 크게 놀랐을 것이다. 응접실 문이 열리자 루시아는 과자를 입에 가득 문 채 굳어버렸다. 안으로 들어오는 타란 공작을 확인하며 벌떡 일어났다. 그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루시아를 짧게 살피고는 그녀 앞에 마주앉았다. 그가 손짓하자 제롬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넓은 응접실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앉아요.” 루시아는 화들짝 놀라며 털썩 앉았다. 그녀 입안에는 볼이 부풀도록 과자가 가득했다. 뱉을 수는 없고 재빨리 부지런히 씹어 넘겼다. 목이 막혀서 차를 들이켰다. 그가 아무 말 없이 기다려 주는 것이 더 창피해서 그녀 얼굴은 발갛게 물들었다. 과자를 다 삼킬 쯤 그가 커다란 봉투를 테이블에 올려 그녀 쪽으로 밀었다. 열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한다. 봉투를 열어 안에 든 문서를 꺼냈다. 부끄러워 안절부절 못하던 그녀는 순식간에 표정을 가라앉히고 진지하게 읽기 시작했다. ‘18살이라 했던가. ’그녀는 나이에 맞게 어리게 보이다가도 때로는 놀랍도록 차분했다. 본디 왕족이나 귀족은 나이에 비해 조숙하지만 그녀는 그런 조숙함과는 뭔가 달랐다. 휴고는 처음으로 마주앉은 여자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단지 사람을 구별하기 위한 특징을 잡기 위해 머리카락 색깔, 대강의 생김새와 분위기에 포인트를 잡았다면 이번에는 그야말로 여자로서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분석했다. 미인은 아니지만 모난 외모는 아닌 그야말로 평범한 여자. 다만 눈동자 색은 상당히 독특했다. 얼핏 보면 금색으로 보이지만 그보다는 투명한 것이, 마치 호박(보석) 같았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외모도 몸매도 그를 전혀 자극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래서 오히려 아내감으로는 적격인지도 모르겠다. 봉투 안에 든 것은 2장의 서류였다. 친권포기서. 입적동의서. 여자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서류들이다. 여자들은 대개 법에 무지하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자라면서 철저하게 교육받았다. 이혼합의서까지 포함해서 절대로 함부로 서명하지 말아야 할 3가지. 가장 강력하지만 또한 거의 유일한 여자들의 힘이었다. “공주님과 결혼하는 조건은 그 2장의 서류에 서명하는 것입니다.” “...그게 다 인가요? 제가 지난 번 말씀드린 건..” “그 중 문서화 할 수 있는 조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요? 사생활의 자유가 필요 없으세요? 제가 전하께 사랑한다고 매달려도 괜찮아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뭘 모르는 아이처럼 묻는 그녀를 보며 그는 몹시 피로함을 느꼈다. 그는 말장난이나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건 아주 질색이었다. 속을 떠보는 짓도 아주 싫어한다. 그는 얕은 수에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럼 그 2가지도 추가하지요. 문서화 하지 않는 조건으로.” 그의 기대와 달리 그녀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에 서명하려고 펜을 들자 오히려 그가 당황했다. “잠시만. 지금 뭐하는 겁니까?” “서명하라고 하시기에...” “그 전에, 제 조건을 말씀드렸으니 공주님도 바라는 것이 있을 것 아닙니까?” “저도 조건을 걸어도 되는 거예요?” “당연합니다. 일방에만 유리한 계약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는 계약을 하려는 것이지 사기를 치려는 것이 아니었다. 루시아는 고민에 빠졌다.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냥 루시아 목적은 그와 결혼하는 것 자체다. 근데 준다고 하는데 필요 없다고 하기에는 뭔가 아까웠다. “시간이 필요합니까? 참고로, 오늘이 아니면 계약은 없습니다.” “왜요?” “파생되는 결과가 불확실하고 변수가 많습니다.” 다시 날 잡아 공주를 데려오고, 그 또한 일정을 조정해야 하고. 한 마디로 말해서 귀찮았다. 그녀와 결혼하기로 한 결정은 작은 변덕이었다. 내일은 마음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 < -- 결혼할까요 -- > “하나 여쭈어도 될까요? 여자의 사랑이 왜 싫으세요?” 그가 빤히 쳐다보자 루시아는 혹시 그의 상처라도 건드린 건가 싶어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제가..답변할 수 없는 질문 드린 건가요?” “그런 걸 묻는 여자는 처음이라 좀 신기했을 뿐입니다. 싫어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자의 사랑은 반드시 보답받기를 원하더군요. 난 답해줄 수 없으니 줄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상처는 무슨. 그냥 이 남자는 뼛속부터 이기적이었다. 즉,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면 일방적으로 사랑만 주는 건 사양하지 않겠다는 말 아닌가. 본인이 사랑으로 피눈물을 흘려봐야 할 텐데 말이지. 유감스럽게도 그럴 가능성은 그다지 없을 것 같다. 그의 사고방식이 바뀔 가능성도 없는 것 같고. 그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가져서 아쉬운 것이 없는 남자였다. “생각났어요.” “봉투 안에 즉시 작성이 가능한 계약서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아니에요. 전 문서는 필요 없어요. 전하께서 공작가 명예를 걸고 구두로 약속해 주시는 걸로 충분해요.” 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공작가 명예라. 문서보다 더 무섭군요. 뭡니까?” “두 가지에요. 첫째. 신체적 언어적으로 제게 폭력은 없을 거라고 약속해 주세요. 절대 전하를 모욕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꿈속 기억 때문인지 루시아는 아주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만들어 두고 싶었다. 말없이 루시아를 바라보는 그의 기세가 자못 사나워졌다. 이 여자는 자신을 여자에 대한 욕이나 폭행을 할 수 있는 남자로 취급하고 있었다. 모욕할 의도는 아니라는 그녀의 말을 일단은 믿어보기로 했다. 좀 언짢기는 해도 계약 조건으로 치기에는 대단히 간단했다. “둘째는?” “둘째는. ..전 최선을 다 할 거예요. 하지만 사람 마음은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전하께서는 될 거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제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제게 장미꽃을 보내주세요.” 도무지. ..이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휴고는 지난번에도 그녀에게 말했지만 정말 저 머리통을 열어보고 싶었다. 그녀가 다른 사람과 계약을 해본 사실이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겠다. 이건 엄연히 서로의 이득을 교환하는 계약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 앉기 전까지 자신에게 유리한 계약을 맺을 자신이 있었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 그리고 이건 그에게 유리한 계약이었다. 그러나 그의 교섭 능력 덕분이 아니라 순전히 상대방의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계약 내용을 파악 못해서 불리한 계약을 맺는 건 순전히 본인 탓이었다. 상대방은 조언해 줄 필요 없고, 하지 않아도 도의적 책임만 있을 뿐이었다. 도의적 책임 따위는 책임이 아니다. 그는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그에게 양심이라는 것이 밑바닥 어딘가 조금은 남아 있었나보다. 그는 이 어리석은 계약자를 위한 조언을 해주기로 했다. “좀 더 현실적인 조건을 말씀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공주님이 서명할 그 서류들의 가치를 잘 모르시는군요.” 남자가 아내에게 입적동의서나 친권포기서를 받으려면 어마어마한 재물을 대가로 지급해야 했다. “알아요. 그건 엄청나게 비싸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렇습니다.” “어차피 공작부인으로 있는 동안 의식주 걱정은 없잖아요. 그 외에 따로 재물은 필요하지 않아요.” 의식주라는 단어가 공주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처음 조건은..그렇다 칩시다. 두 번째 조건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저한테는 의미가 있어요. 살다보면요. 눈에 보이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것이 훨씬 중요할 때가 많아요. 그렇다고 제가 물질적인, 그러니까 돈을 우습게 보는 건 아니에요. 돈. 중요해요. 필요하죠. 없으면 아주 비참하거든요. 근데 어느 정도만 있으면 조금 더 많은 것과 별 차이 없어요.” 그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인생 다 살아본 사람 같은 말이로군요. 공주님 나이와 경험으로 추측건대 그럴 리는 없으니 어디서 개똥철학을 주워들으신 겁니까?” ‘인생 다 살아본 사람’ 이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뜨끔했다. “개똥철학이라 하셔도 좋아요. 아무튼 제 조건은 말씀드렸어요.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무리한 조건은커녕 너무 터무니없이 간단했다. 이건 압도적으로 그에게 유리한 계약이었다. 그런데 영 마음이 불편하다. “...좋습니다. 공주님의 조건. 이해했고, 받아들이겠습니다.” 긴장하며 숨죽이고 있던 루시아가 후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눈앞의 2장 서류에 즉시 서명하고 그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는 서류를 간단히 확인하고 챙겼다. “이걸로 약혼은 된 겁니다. 공증이 필요하면..” “아니요. 필요 없어요. 음. 네. 약혼된 것으로 알겠습니다.” ‘약혼’이라고 말하니 뭔가 굉장히 거창했다. 루시아는 좀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니까..난 이제..휴고 타란 공작의 약혼녀가 된 거구나. ’아직 결혼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이 약혼을 깨뜨릴 것 같지 않았다. 굉장히 희박한 확률을 뚫고 그녀의 도박은 성공했다. 그녀의 감격은 표정으로 드러났다. 그걸 보며 휴고는 ‘명예에 집착하는 타입인가. ’ 라고 생각했다.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야겠군. 외박 허가를 받아 외출한 건 아니었지?” 기분 탓인가? 왜 그의 말투가. .. “외출패를 들고 시녀인 척 외출이라. 그런 깜찍한 짓은 오늘 이후론 다시는 하지 마.” ...기분 탓이 아니었다. “왜 갑자기...” 반말이세요? 너무 직설적인가. 그럼 무례하시죠? 할 말을 고르고 있는데 그는 그녀의 불만이 뭔지 빤히 안다는 듯 소파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난 내 여자한테 이렇습니다, 저렇습니다. 안 해.” 루시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제가 언제부터 전하의 여..자가 되었나요?” “약혼이 성사된 순간부터.” “결혼한 건 아니잖아요! 결혼 할지 안 할지도 아직 모르는 거고!” “약혼의 뜻이 뭔지 모르나? 타란의 전통에 이혼은 없고, 약혼 파기도 없어.” 가신들이 들었다면 타란 공작가에 언제부터 그런 전통이 있었느냐 오히려 되물을 것이다. 그가 말을 한 지금부터 이제 타란의 전통이었다. “그..그렇다 쳐도. 약혼녀한테 이렇습니다, 저렇습니다, 왜 못하는데요? 그것도 타란의 전통인가요?” “나는 안 해.” “......” 정말 도무지 이 남자를 모르겠다. 처음에는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람 마음을 갖고 노는 한량인 줄 알았다. 그 다음에 만났을 때는 상대에 대한 기본적 예의는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의 편견과 달리 의외로 건실할지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오늘은 계약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굉장히 합리적이고 감정보다는 이성으로 작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모르겠다. “외출패 들고 외출 금지. 대답 안 하나?” “...그래도 나가겠다면. 어쩌실 건데요?” “궁금하면 해보든지.” “.......” 그래. 최소한 첫인상만큼은 틀리지 않았다. 협박이 생활이다. 이 남자 뭘 믿고 결혼 같은 걸 생각했지? 조금 전의 감격은 이제 불안으로 바뀌었다. 대박을 친 건지, 쪽박을 찬 건지 아직 도박 결과가 감이 안 잡혔다. “...그렇게 갑자기는. ..한 사람만 한 번만 만나면 안 될까요?” 그의 경고를 무시하는 것 보다는 허락을 구하는 편이 현명하다고 루시아는 판단했다. “만나면. 뭐라고 할 생각이지? 그 여류작가는 당신이 공주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 루시아는 2번 놀랐다. 이미 그가 놀만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사실과, 그의 입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나온 ‘당신’이라는 호칭 때문에. “그래도..마지막 인사는 하고 싶어요.” “평생 보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야. 약혼은 비공개사항이고, 나는 혹시 모를 구설수를 우려하고 싶지 않아.” “그럼 나중에 결혼하고 나서는 괜찮다는 말씀이세요?” 루시아가 눈을 반짝이며 반색하자 그가 순간 움찔했다. “...그래. 나중에는. 하지만 그 때도 오늘 계약에 대해 말을 흘리는 건 안 돼.” “저도 당연히 그럴 생각은 없어요. 전하께서는 생각보다 이해심이 많으시군요.” “...지난번에는 난잡한 놈을 만들더니 이번에는 이해심인가? 도대체 당신 머릿속 나는 얼마나 형편없지?” “...죄송해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는 우물쭈물하는 루시아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를 보며 줄곧 느껴온 위화감이 뭔지 알 것 같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를 무서워하거나 움츠러든다. 여자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교제했던 여자들도 겉으로는 교태를 부리며 웃어도 이면에 항상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를 상당히 편하게 대했다. 아직은 모르는 일이었다. 아직 그를 모르기 때문일 수 있으니까. 아마 그녀는 그에 대한 소문을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떠도는 소문의 일부만 알아도 당장 그를 보는 시선이 바뀔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괴물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그 소문을 부정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궁으로 돌아와 닷새 정도 지났을 때 루시아는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 ‘결혼이 반년 후에 있을지 1년 후에 있을지 모르잖아. 그럼 그 동안 놀만과 연락이 완전히 끊기면..걱정 많이 할 텐데. ’그러다 생각난 것이 편지였다. ‘그에게 말해서 편지를 보낼 수 있도록 해야겠어. 내용을 다 확인해도 좋다고 하면 그도 허락해 줄지 몰라. ’ [놀만. 이렇게 서신으로 작별 인사를 하게 되어 미안해요. 부디 날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아주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답니다. 중요한 일로 잠시 연락할 수 없겠지만 날 찾지 말고 기다려줘요.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그리 오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해요. 우리는 평생을 함께 할 우정을 나누었고, 그건 앞으로도 영원할 거예요. 밤낮이 바뀐 생활로 글을 쓰는 놀만의 건강이 걱정되는군요. 조금은 건강에 조심하기를 바라요. 영원한 우정을 담아. ] 만에 하나 편지가 놀만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읽게 되더라도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게 중요한 내용은 하나도 넣지 않았다. 놀만은 루시아의 필체를 알고 있으니까 이 편지를 받으면 서로 오래 연락이 되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안심할 것이다. 편지 작성을 마치고 문득 창밖으로 하늘을 보자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빨래나 해야겠다..” 루시아는 오전 내내 땀에 젖을 정도로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 침대 시트를 싹 걷어내고 커튼도 모두 빼냈다. 별궁 앞뜰에 커다란 나무통 몇 개를 가져다 물을 채우고 비눗물을 넣어 빨랫감을 넣고 밟아댔다. 한참 노동에 빠졌더니 아무 생각이 안 들고 마음이 후련해졌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루시아는 열심히 빨래를 밟았다. “여기서 일하는 아이냐?” 낯선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루시아는 고개를 돌렸다. 복식을 보니 여관이었다. 노동시녀와 달리 여관은 급수에 따라 색깔의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인 복색 형태가 통일되어 있었다. ‘여관이 여긴 무슨 일이지. ’ 루시아가 말똥말똥 바라보기만 하자 여관이 엄한 목소리로 추궁했다. “어찌 대답이 없느냐. 보아하니 여기서 일하는 아이 같은데 처음 보는구나. 공주님께서는 안에 들어 계시느냐?” ‘날 찾아..? 왜? 그보다 이 상황에서 뭐라고 해. ’공주 비비안 얼굴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지금 이 꼴로는 공주라고 해도 믿어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어허. 어서 답하지 못할까. 혹여 말을 하지 못하느냐? 공주님을 뵙고자 하는 귀빈을 모시고 왔다.” ‘귀빈? 날 찾아온 손님이라고?’ 별궁에 손님이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요즘 레이디 교양에 세탁일도 포함되는 줄은 몰랐습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서늘한 저음. 들려올 리 없는 남자의 목소리에 루시아는 그대로 굳었다. 끼기기긱 소리가 날 것처럼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자 도무지 여기 있을 수 없는 사람이 서 있었다. 흑발에 붉은 눈. 그의 머리 색깔과 어울리는 푸른색 끝단을 덧댄 검은 코트를 걸친 그가 특유의 표정 없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시아는 멍하게 넋을 놓았다. “시녀가 공주 얼굴도 모르다니 형편없군. 그런 괴상한 취미활동을 하니까 그런 겁니다. 공주님.” 상황을 파악한, 조금 전까지 호통을 치던 여관과 아마 함께 온 것으로 보이는 다른 여관들 얼굴이 흑색으로 썩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 얼굴이 바로 자신의 얼굴색일 거라고, 루시아는 생각했다. “아...안녕하..어쩐..일이신지...?” “우선 거기서 나오고 이야기 합시다.” 루시아는 화들짝 놀라 나무통 안에서 서둘러 나오려다가 발이 미끄러져 그대로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그렇게 볼썽사납게 넘어진 건 아니고 아프지도 않았지만 무지막지하게 창피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레 시선을 들자 그는 팔짱을 끼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지만 루시아는 어쩐지 그가 무척 한심하게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그가 갑자기 성큼 다가오자 루시아는 그의 존재감에 압도되어 바싹 얼어버렸다. 나무통 옆으로 다가온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걸 멍하게 바라보다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목이 꺾이도록 고개를 들어야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장신인 그가 더 거인처럼 느껴졌다. 큰 키에 체격을 가진 그가 전혀 둔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신기했다. 얼른 안 잡고 뭐 하냐고 호통 치는 것처럼 그가 눈썹을 찌푸리자 루시아는 얼결에 냉큼 손을 내밀었다. 커다란 손이었다. 그의 손에 잡힌 제 손을 보자 마치 어른 손에 잡힌 아이 손 같았다. 그가 손을 잡아 힘을 주자 루시아는 단번에 휙 끌려 올라갔다. 나무통을 나오는 루시아는 맨발이었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는 그의 시선에 루시아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정말 창피해서 귀가 화끈거렸다. “으앗!” 휙 몸이 들리자 루시아는 깜짝 놀랐다. “비눗물이 묻어요!” 그의 값비싼 코트를 더럽히는 것이 두려워 소리쳤으나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루시아를 안은 채 별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루시아는 버둥거리지 않고 얌전히 그에게 몸을 맡겼다. 하지만 울상을 지으며 시선은 못 드는 그녀를 보면서 휴고의 입술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 -- 결혼할까요 -- >그를 응접실에 두고 옷을 갈아입으러 침실로 들어왔다. “공주님. 시녀들은 대체 어디 있습니까?” “음. 그게...” 따라 들어온 여관들에게 어물어물 상황을 설명하자 다들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시녀 관리의 1차 책임은 여관들이었다. 이 일로 닥칠 후폭풍이 두려운 것이겠지. 옷을 갈아입는데 시중을 들어주는 여관들 손길이 아주 정중했다. 계속 흘끔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모양새가 어떻게 해서든 책임을 가볍게 하기 위해 도움을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루시아는 모르는 척 했다. 이들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시녀가 일하러 오지 않은 것을 부러 따질 생각은 없지만 나서서 항변해 줄 생각도 없었다. 여관들이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것은 잘못된 일을 걱정해서 라기 보다는 오늘 그녀를 찾아온 손님이 지나치게 거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이들이 무서워하는 건 권력자를 뒷배로 둔 공주님이었다. 응접실 소파에서 그와 마주앉아 여관이 내온 차를 신기해서 바라보았다. 참 재주들도 좋다. 별궁에는 이런 차가 없는데 어디서 이렇게 빨리 공수해 온 걸까. 시녀가 타 주는 차를 맛보는 것이 얼마만인지. 흘끗 시선을 돌리자 응접실 구석에 여관 둘이 대기해 서 있었다. 언제든 시중을 들 준비를 하는 것과 동시에 미혼인 공주를 남자와 단 둘이 있도록 할 수 없기 때문에 행하는 당연한 절차였다. “평안하셨습니까. 아까 보니 건강은 하신 것 같군요.” 공작의 인사에 루시아는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예. 전하께서도 평안하셨습니까. 기별 없이 갑자기 오시어 놀랐습니다.” “피차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번 불쑥 그의 공작저를 찾아갔던 일을 그는 지적하고 있었다. 자신이 한 짓이 있어서 할 말은 없지만 이 남자 참 뒤끝 있다.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공대를 해주는구나.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도 대단한 호의를 입은 것만 같았다. 아마 지난 번 그의 뒤바뀐 태도에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중요하게 드릴 말씀 있으니 저 여관들 말고 공주님 시녀들이 대신 자리를 지키라 하십시오. 믿을만한 사람으로.” “예? 아..지금 시녀가 없어서...” “자리를 비운 겁니까? 한 명도 남김없이?” 정확히 말하면 원래 아무도 없지만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일어났다. “괜찮으면 잠시 산책하지 않겠습니까?” 루시아는 몇 걸음 떨어져서 대기해 서 있는 여관들을 흘끔 보고 그의 제안에 응했다. 산책할 곳이라고 해봤자 별궁 주변의 비좁은 뜰이었으나 다소 멀찌감치 따라오는 여관들에게 두 사람 대화가 들리지 않는 정도의 공간을 잡기는 충분했다. “왜 시녀들이 할 일을 직접 하지? 외출패 들고 출궁한다고 본인이 시녀라고 착각하는 건가?” 단 둘이 되자 그는 바로 말을 놓았다. 보는 눈이 없으면 편한 대로 하는 건 성격인가 보다. 지난번에는 황당했지만 듣다보니 친밀한 느낌이 나서 이것도 괜찮네, 생각이 들었다. “...할 사람이 없는걸요.” “시녀들은 뭘 하고?” “음..그게. 사실..여기서 저 혼자 지내요.” “.... 시녀가 없어?” “네.” “이 별궁에서 혼자 지낸다는 건가?” “네.” “식사는? 청소는? 그것도 다 직접?” “.... 네.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에요. 남을 보살피는 것도 아니고 내 몸 내가 챙기는 건데...” “지금 그걸 말이라고.” 그가 억눌린 음성으로 말하다가 하, 헛웃음을 쳤다. “언제부터?” “..몇 년 되었어요.” “기가 막히는군.” 상주하는 시녀가 없다는 파비안의 보고서 내용이 이런 뜻이었나. 성격이 유별나서 일하는 사람이 자주 바뀌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아무리 별다른 세력이 없는 공주라 해도 왕족이다. 왕족에게 시중들 사람 하나 없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단단히 잘못된 행정 착오였다. 궁중 행정을 이런 식으로 형편없이 관리하다니. 그의 수하가 만약 일을 이딴 식으로 했으면 두 말 없이 모가지였다. “중요하게 하실 말씀이란 건 뭔가요?” “폐하께 결혼 허락을 받았어. 정확한 날짜는 정해지면 알려주지. 한 달을 넘기지는 않을 거야.” 오전 내내 왕하고 주도권 싸움을 했더니 그는 좀 피곤했다. 평소 찾아보지도 않던 딸을 마치 세상 유일한 금지옥엽인 것처럼 구는 뱃속 시커먼 왕을 상대로 팽팽한 신경전을 했다. 결국 그들은 피차 서로에게 원하는 것을 주고받기로 했다. 존재조차도 기억 못할 것이라 했던 그녀 말처럼 왕은 그녀를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나는 척 수를 쓰는 것이 빤히 보였다. 휴고는 처음부터 폐하의 16번째 따님이라 칭하며 단 한 번도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당황한 왕은 끝까지 ‘내 16번째 여식’이라 부르며 이름을 말하지 못했다. 아마 지금쯤 자신의 16번째 딸이 누군지 열심히 여기저기 뒤지고 있을 것이다.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닐 이들은 왕이 아닌 아랫것들이겠지만. 왜인지 모르지만 휴고는 왕에게 짜증이 났다. 그전에는 왕을 좋아하진 않았어도 사감은 없었다. 아비가 되어 오죽이나 못났으면 어린 딸 홀로 남자 혼자 사는 집을 찾아가게 만드는가. 지내는 궁에는 제대로 사람이 없어서 공주 몸으로 직접 세탁하고, 청소하고. 그녀는 왕족이라는 신분에 형편없이 못 미치는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녀의 비참했을 마음이 조금은 납득이 가면서 그 양반이 할 줄 아는 거라곤 자식 싸지르는 것밖에 없다고 독설을 퍼붓던 퀘이즈 말에 동감이 갔다. “...굉장히..일처리가 빠르시군요.” 그의 말을 루시아는 한참 만에 이해했다. 아무리 빨라도 반년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 경악할 속도였다. “시녀들에 대해서 내가 알아보도록 하지.” “그러지 마세요. 가만히 두어도 어차피 누군가 책임지게 될 거예요. 전하께서 나서면 더 엄한 벌을 받겠죠. 그러길 바라지 않아요.” “맡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면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해. 쓸데없는 관용을 베푸는군.”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저는 혼자 지내는 것이 좋았어요. 자유로웠거든요. 궁극적으로는 전하께도 잘 된 일일걸요.” “...내게 잘 된 일이라?” “이 결혼. 그런대로 만족하시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빠르게 처리하셨다고 생각해요. 제가 얌전히 궁에 갇혀 사는 공주였으면 전하께 결혼하자는 말은 꿈도 꾸지 못했을 거예요.” 그녀는 참 씩씩했다. 자그마한 몸 어디에서 그런 기운이 나오는 걸까. 그런대로 안주인 노릇은 잘 하겠다. 그는 어느 사이엔가 타란의 안주인이 된 그녀를 그려보고 있었다. “결혼을 마치는 대로 북부로 출발하려고 해. 한동안 그곳에서 지내게 되겠지.” 북부. 타란 공작가의 영지.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난다는 척박한 땅. “결혼식은 약식으로 하려는데 당신 생각은 어떻지?” 약식은 증인 몇 세워두고 혼인증서에 양 당사자가 나란히 앉아 서명하는 것이다. 아버지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가고 싶은 것도, 축하 받기 원하는 하객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루시아는 아무렴 어떠랴 싶었다. “네. 괜찮아요.” 여자의 평생 꿈인 결혼식을 형식적 서류 절차로 대체한다는 것은 누구라도 기겁할 일이지만 그걸 뻔뻔히 제안하는 사람이나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둘 다 보통의 경우는 아니었다. “전하. 청이 하나 있는데요. 놀만..그러니까 전하도 알고 계시는 여류작가한테 제가 써 둔 간단한 편지 한 통만 전해도 될까요? 중요한 내용은 하나도 없고 직접 읽어 확인해 보셔도 돼요. 전하 말씀대로면 북부로 가느라 수도를 떠나면 생각보다 오래 연락을 못 할 테고. 절 많이 걱정할 것 같아서.” “알았어. 편지 주면 전해줄게.” 어쩐지 조용해서 시선을 돌린 그는 순간 눈썹을 꿈틀했다. 엄청난 감격과 환희에 찬 눈빛으로 루시아가 두 손을 모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마치 여자에게 눈부신 보석 목걸이를 선물한 다음 만났을 때 그를 바라보던, 오히려 그보다 더 반짝이는 눈이었다. “감사해요. 전하. 전하께서는 생각보..생각했던 대로 참 좋은 분인 것 같아요.” 그녀는 확실히 그를 무서워하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그를 무슨 파렴치한 악당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 것 치고는 악당에서 좋은 사람으로 변신하는데 들여야 할 노력이 참 간단해 보였다. 그는 이 사실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아리송했다. 그건 대단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리 불쾌한 건 아니었다. ‘돈은 많이 안 들겠군. ’그는 약간의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처소는 옮겨야 해. 여긴 너무 외져있고 보안이 허술해. 내가 여길 다녀갔다는 소식은 곧 누군가 귀에 들어가겠지. 날 목적으로 하는 자들은 관심을 가질 테고. 아마 손님이 많아 질 거야.” “...그렇군요.” “사방팔방 떠들지 말고 얌전히 있어. 찾아오는 손님이라고 넙죽 아무나 만나지 말고.” 어쩜 말을 이렇게 예쁘지 않게 할까. 생각 없는 여자 취급하며 수하 다루듯 명령이었다. 조금 전까지 그에 대해 부드럽게 부풀었던 루시아의 감정이 한 순간 가라앉았다. 약간 쌓았던 점수는 다 깎아내려 오히려 0 점 아래로 파고들었다. ‘이상하지..근데도 싫어지지는 않네..’이게 많은 여자들이 매달리는 그의 매력인가. 제멋대로인 그의 무례함이 불쾌하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네. 또 일러둘 말씀 있으신가요?” 그는 잠시 틈을 두고 아니, 라고 대답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그녀는 좀 특이했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것 같으면서도 필요할 때는 순종적이고, 그러면서도 비굴하진 않았다. 그는 오기 부리며 꼿꼿이 고개를 드는 치들이 거슬리지만 발이라도 핥을 것처럼 비굴한 자들 또한 경멸했다. 그 사이 균형을 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녀는 꽤 만족스러운 계약자였다. 공작저에 돌아와 집무실로 들어오는 휴고의 뒤를 제롬과 파비안이 따라 들어왔다. 휴고가 벗어 건네는 코트를 받아서 제롬이 물러가자 내내 할 말을 꾹 참는 표정을 짓고 있었던 파비안은 다다다 말을 쏟아냈다. “대체 어디를 다녀오시는 겁니까. 혼자서 그렇게 말씀도 않고 훌쩍 다니시지 말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적어도 어디 가시는지 만이라도 언질해 주는 일이 그렇게 힘드십니까?” 파비안은 감히 휴고에게 잔소리를 쏟아내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머리가 허옇게 센 공작가의 충성스런 가신들도 하지 못하는 일이다. 휴고는 가끔 이 녀석 배를 갈라보면 간덩이만 그득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 적 있었다. “오늘 쉰다고 하지 않았던가?” 파비안은 꼬박꼬박 출퇴근 시간 다 지키고 5일 일하면 하루씩 휴일도 다 찾아먹었다. 공작을 보필하는 일 만큼이나 제 가정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나. 파비안만 가능할 것 같은 뻔뻔함이었다. 그러면서 몇 달 씩 처자식과 헤어져 전쟁터까지 두말없이 따라다니는 걸 보면 제 몸만 빼내는 미꾸라지는 아니었다. 꼭 해야 할 일은 결코 미루지 않지만 실속은 챙긴다. 그런 면에서는 휴고의 우직한 집사인 제롬과 형제이면서 아주 딴판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오늘 외출하신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씀하셨으면 제가 보필했을 겁니다.” “궁에 다녀왔다.” 파비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이라는 사람이 아무 수행원도 없이 휘적휘적 홀로 입궁이라니. 혹시 공작 신변에 위험이 있을까 걱정해서는 아니었다. 하늘 아래 공작을 무력으로 해할 존재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이곳은 전쟁터가 아니었다. 사람을 해하는데 검을 제외한 셀 수 없는 수단이 존재하는 곳이다. 아주 사소한 빌미가 어마어마한 눈덩이로 불어나는 중심지였다. 타란 가문은 원래 정치적 정적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다르다. 타란 가문 역사상 최초의 정계 진출이었다. 아직 적극적으로 정치 활동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태자와 손을 잡은 이상 권력의 소용돌이에 발을 내딛은 셈이었다. 태자는 적이 많다. 아주 사소한 틈만 보여도 비집고 들어오려고 사방에서 눈이 벌개져서 주시하고 있다. 그 눈은 타란 공작 또한 주시할 것이다. 정치권력과 밀접한 귀족은 결코 혼자 다니지 않았다. 어떤 사건이 발생할 때 증인이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작은 지나치게 무신경한 면이 있었다. 골치 아픈 일이 생기면 발바닥에 불나도록 뛰어다녀야 하는 사람은 파비안이었다. 공작은 함께 고민하는 척도 해주지 않았다. 다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맡겨둘 뿐이다. 파비안이 공작이 홀로 다니는 일 만큼은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였다. “...태자 전하를 뵈러 다녀오신 겁니까?” “음? 아..간 김에 그럴 것을 그랬군.” “태자 전하를 뵈러 가신 것이 아니면 무슨 용무로..” “결혼한다. 폐하께 허락 받고 왔어.” “.....” 파비안은 숨을 몰아쉬었다. 버럭 소리라도 지르는 무례를 저지를 것 같아서 이를 꽉 물었다. “그 공주님입니까?” “음.” “언제입니까?” “아마 한 달 안으로.” 한 달??!! 파비안은 부글거리는 속을 눌렀다. 전쟁터에서 부관으로, 평소에 보좌관으로, 공작을 옆에서 모시며 항상 실감하는 일이지만 공작은 앞 뒤 다 잘라먹고 난데없는 지시를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즉, 결정 과정은 혼자 다 처리하고 결론만 내려 명령하는 것이다. < -- 결혼할까요 -- > “영지에는 알리지 마.” “.... 예?” “식 끝내는 대로 바로 북부로 갈 거다.” 그건 또 언제 결정하신 사항이랍니까! 파비안은 정신없이 돌아갈 향후 한 달 안으로 이삿짐 쌀 생각을 하니 암담했다. 아니다. 그래도 한 달 전에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었다. “굳이 번거롭게 영지에서 올라올 것 없지. 그러니 그냥 결혼한다는 소식만 보내도록 해.” 일가의 주인 결혼식에 가신들을 참석하지 말라 하다니. 영지에 있을 몇 얼굴을 떠올리자 동정심이 들었다. 그들이 절절 매는 타란 가문의 주인은 독재자였다. 독선적이고 오만하기 짝이 없다. 파비안은 타란 공작을 주인으로서 존경하지만 인간적으로는 얽히기 싫었다. 공작은 타인을 짓밟는 게 너무 쉬운 사람이었다. 배려나 인간미 따위는 기대도 할 수 없다. 공작부인이 될 공주님에게 연민이 들었다. 그녀가 공작에게 그 어떤 것이라도 보답 받기를 기대한다면 결혼생활은 불행할 것이다. “섬 하나 있었지? 광산 있는.” “.....다이아 광산이 있는 세인트 제도의 섬 말씀입니까?” “그래. 그걸 지참금으로 처리해.” “...전하. 그건 너무 과한...” 평소답지 않게 파비안은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과하다 못해 아주 차고 넘쳤다. 파비안은 조사서를 휴고에게 올리면서 당연히 내용을 알고 있었다. 왕이 존재나 알고 있을지 의심스러운 잊힌 공주였다. 모친의 신분이 불분명한데다 이렇다 할 친척 하나도 없었다. “왕하고 서로 얘기 끝냈어. 결혼식은 따로 안 해. 약식으로 할 거다.” “......” 정말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야합도 아니고 일국의 공작이 결혼식을 안 해? 금지옥엽은 아니라도 어쨌든 공주인데 제대로 된 형식을 갖추지 않고 데려가는 건 왕실을 우습게 보는 처사였다. 광산 날름 받고 그러라 허락한 왕도 웃기는 건 마찬가지였다. 약식으로 결혼식을 대체하는 일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도무지 제대로 결혼식을 할 수 없는 급박한 상황, 즉 전시 중에는 대개 약식으로 한다. 순간 파비안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바로 영지로 내려가시는 겁니까?” 타란 영지는 골치 아픈 야만족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언제나 불안하다. 영지에 급박한 사정이 발생했다는 핑계는 늘 가능했다. “겸사겸사.” “..정말 영지에 무슨 일이라도..?” 공작은 픽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파비안은 공작을 잘 안다. 영지에 별다른 일은 없다. 결혼식을 안 한다는 건 순전히 공작이 귀찮기 때문일 것이다. 제대로 된 결혼식은 거의 꼬박 한나절이 걸렸다. 그 과정이 하기 싫은 것이 분명했다. “몇 가지 처리할 일을 정리해서 주겠다. 번거로운 건 싫으니까 소문나지 않도록 하고.” “예. 전하.” 파비안은 깔끔하게 주인의 명에 승복했다. 그는 자기 주제를 잘 알았다. 공작의 옆에서 일의 처리를 돕는 것이 보좌관으로 그가 할 일이지 공작의 의사 결정에 관여할 자격은 없었다. 정해진 선을 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오래 그가 공작을 곁에서 모실 수 있는 것이다. ‘혼적..때문인가..’공작이 왜 이 결혼을 하는지 짐작이 가는 곳은 그것뿐이었다. ‘가여운 공주님이로군. ’괴물에게 잡혀와 탑 꼭대기에 갇혀 쓸쓸히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공주님 그림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아마 피 한 방울까지 노예근성 있는 제롬이 알았다가는 감히 주인을 괴물이라 한다고 너 죽고 나 죽자 달려들 것이다. 제롬 녀석은 못 봐서 그런다. 전쟁터에서 공작의 활약을 한 번이라도 봤다면 아마. 상상만으로 소름이 돋아 파비안은 짧게 몸을 떨었다. 그렇다고 제롬이 그걸 보기를 바라지 않았다. 녀석에게는 타란 공작이 영원히 위대한 주인님으로만 남아 있기는 바랐다.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무심한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해서 공주님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여자는 사랑을 먹고 사는 생물이라고 했다. 파비안 아내가 파비안을 붙들고 새겨놓은 가르침이었다. 남편의 무관심 속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공작부인은 시드는 꽃처럼 말라죽어 갈 것이다. 우울한 얼굴로 술에 빠지거나 파티나 사치로 공허함을 채우려 하겠지. 무엇도 장담할 수 없지만 단 하나 장담할 수 있었다. 공작부인이 이후 어떻게 변하고, 비참해지더라도 공작은 관심도 주지 않을 것이다. 공작이 별궁에 다녀간 그 날 저녁에 루시아는 처소를 옮기게 되었다. 거의 내궁 바깥쪽에 위치한 별궁과 다르게 내궁 안쪽에 자리한 아름다운 소궁이었다. 소궁이지만 대부분 공간을 폐쇄했던 별궁보다 오히려 더 넓었다. 장미궁이라 불리는 이 소궁은 왕이 귀애하는 여인에게 선사한다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소궁을 둘러싼 넓은 정원에 장미 덤불이 가득했다. 늦봄이 될 무렵에는 온갖 색의 장미로 가득 차 그 향기가 멀리까지 진동 한다고 했다. 아마 루시아가 떠날 때까지는 그 광경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건 아쉬운 일이었다. 소궁에서의 생활은 매우 편안했다. 시녀들이 손발처럼 시중을 들어서 굉장한 호사를 누리는 귀부인이 된 것 같았다. 그의 말과 달리 찾아오는 손님은 없었는데 오직 한 사람만 끈질기게 만남을 청했다. “아프다고 말씀을 전해 주세요.” 오늘은 무려 시종장이 방문을 했다. 루시아는 테라스의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평소처럼 거절했다. 누가 봐도 병을 핑계로 한 것이라서 머리가 반쯤 허연 시종장이 쩔쩔맸다. “공주님. 폐하께서 용체가 많이 불민하시어 꼭 공주님이 찾아와 뵈어 주시기를 바라십니다.” “유감이군요. 어서 건강을 찾기를 바라신다고 전해 주세요. 나 또한 몸이 좋지 않아 움직일 수가 없네요.” “공주님.” “가보세요. 피차 서로 기운 낭비하지 말아요. 내가 가지 않을 거라는 건 알잖아요?” 축 어깨를 늘어뜨리며 돌아서는 시종장은 돌아가면 된통 깨지겠지만 그건 루시아가 알 바가 아니었다. 이건 아주 사소하지만 그녀만의 복수였다. 당신이 나를 한 번도 돌아봐주지 않았으니 나도 당신을 절대 보지 않겠다. 왕이 처음 사람을 보내왔을 때 그렇게 마음먹었다. 어차피 왕은 딸이 보고 싶은 것이 아니다. 타란 공작의 약혼녀가 보고 싶은 것이다. 타란 공작의 약혼녀라는 위명은 실로 대단했다. 고작 16번째 딸에게 면박을 당하면서도 왕은 감히 그녀를 끌고 가지 못했다. 시중을 드는 시녀들은 타란 공작과의 약혼 사실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왕이 애 닳도록 보자고 하는데 냉랭하게 내치는 공주님에게 대단한 뭔가가 있는 것 같아서 절절맸다. 우스웠다. 하루아침에 그녀의 처지가 바뀌었다. 그가 왜 그렇게 오만한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이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보면 자신도 곧 그렇게 될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 결혼이 다음 날로 다가왔을 때까지 여전히 누구도 루시아의 약혼 사실을 알지 못했다. 소문을 원치 않아 일부러 취한 조치인 것 같아서 루시아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시녀들이 아무리 살갑게 달라붙어도 루시아는 그들과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밤이 늦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아직 밤바람이 차서 밖으로 나가지는 못하고 달빛이 잘 드는 창가에 멍하게 앉아 있었다. 마음이 괜히 싱숭생숭했다. 그동안 그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중간에 몇 번 사람을 보내서 필요한 것이 있나 물었다. 지내는데 부족함은 없었지만 루시아는 딱 한 번만 원하는 것을 전했다. ‘폐하를 뵙고 싶지 않아요. 보지 않게 해주세요. ’혹시 왕이 약식의 증인으로라도 나타날까 싶어 청한 것이다. 이틀 전에 왔던 사람에게 전한 말이라 그 후 답변은 받지 못했지만 어쩐지 그가 부탁을 잘 알아듣고 조치해 줄 것 같았다. 오늘 밤은 유난히 달이 밝았다.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남편에게 사랑받으며 아이들과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고 싶은 소망을 막연히 그린 적 있었다. ‘내가 택한 길이야. ’ 후회는 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다 해도 절대 후회만은 하지 않으리라. 후회는 꿈속에서 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정말 이럴 셈인가?” 퀘이즈는 버럭 성을 냈다. 부드러운 회유가 실패하자 이제는 분노 작전이었다. 또 실패하면 다시 회유 작전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요즘 계속 이 과정의 반복이었다. “무슨 말씀 하셔도 갈 겁니다.” 휴고는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방방 뛰는 퀘이즈를 본 척 만 척 했다. “왜 하필 지금인가? 나를 노리는 자들이 시퍼런 칼날을 내 목전에 들이밀며-” “그러니까 쓸모 있는 녀석을 호위로 붙여드리겠다는 것 아닙니까.” 휴고가 영지로 내려간다는 말을 꺼낸 이후로 퀘이즈는 계속 아이처럼 떼를 썼다. 이대론 못 간다, 날 죽이고 가라,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얼핏 들으면 배신당한 연인에 대한 처절한 구애였다. 오히려 지켜보는 태자의 측근들이 민망해할 정도였지만 말하는 퀘이즈나 듣는 휴고나 안색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어차피 북부는 수십 수백 년 전부터 타란 공작가 땅이었어. 공이 얼마간 자리 비운다고 그 땅 어디 안 가.” “상가도 주인이 잠시 자리비우면 탈납니다.” 그 동안 전쟁 때문에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다. 잠깐 짬이 나면 퀘이즈가 붙들고 놔주지 않았다. 태자를 도와주기로 약속은 했지만 그는 수도 정계에 모든 걸 던져 뛰어들 생각은 없었다. 그의 터전은 북부였다. “그래서 기어코 이틀 뒤에 떠나겠다고?” “그렇다고 계속 말씀드렸습니다.” “정말 내가 이렇게 붙드는데도?” “우는 소리는 그만 좀 하시죠. 제가 없어도 당장 무슨 일은 없을 겁니다. 딱히 제가 있어도 도움 드릴 건 없습니다만.” “왜 없어! 공이 옆에만 있어도 눈치 보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게 좋은 겁니까? 태자 전하 눈치를 봐야지 왜 제 눈치를 봅니까.” “아무래도 좋다고.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여기저기서 튀어나올 것이란 말이지. 벌써부터 전리품 두고 얼마나 싸움박질 하는 줄 알아?” “전리품이요?” 휴고는 코웃음 쳤다. “그건 다 제 껍니다.” “그래, 다 내 꺼지.” “제 꺼라구요.” “공 것이니까 내 것이지.” 휴고는 작은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속에 구렁이 수십 마리는 들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휴고는 이렇게 능글대는 태자가 싫지 않았다. 괜히 경계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권력자 중에 휴고를 대하면서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사람은 퀘이즈가 처음이었고, 현재까지 유일했다. 그래서 태자가 내민 손을 잡았다. “2년만 있겠습니다.” “길어! 1년!” “2년입니다. 그 사이 왕위가 바뀌면 또 모르겠군요. 폐하께서 근래 건강이 좋지 않으신 것 같던데요.” “골골 80이겠지. 며칠 전에도 침전으로 계집을 들였더만. 노친네. 아무튼 그쪽 기운만 넘치지.” 곁에 있던 태자의 부관이 민망함에 헛기침을 했다. 태자는 오히려 잡소리를 끼어 넣은 부관에게 비난의 눈초리를 보냈다. 태자가 왕을 향해 그 양반, 노친네, 망할 부왕, 온갖 거친 소리를 다 하는 걸 측근들은 뻔히 알지만 아무리 들어도 참 적응이 안 되었다. 아마 그 소릴 듣고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는 사람은 타란 공작뿐일 것이다. “가보겠습니다.” “저녁 먹고 가지?” “바쁩니다.” “하여간. 한 번도 붙들리지를 않는군.” “아. 그리고 저 내일 결혼합니다.” 순간의 정적이 찾아왔다. 태자는 물론이고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대로 다 굳었다. “...뭘 해..? 공이 뭘 한다고?” 썩어도 준치라고. 역시 왕은 왕이었다. 결혼 날까지 새어나가지 않게 해준다고 왕이 약속했는데 태자조차도 모를 정도로 철저히 비밀을 지켰다. 태자도 그래서 매번 노친네 타령 하면서도 맘먹고 들이박지 못하는 것이다. 어설프게 받았다가는 오히려 튕겨 나올 것이 뻔하니까. “말씀은 드렸습니다. 약식으로 하니까 참석은 필요 없습니다. 참고로 하나 더 말씀드리면 결혼할 사람은 공주님입니다.” “공!” 태자의 외침 같은 부름에도 휴고는 인사를 남기고 떠나갔다. 휴고가 나가자마자 떼쟁이 아이처럼 굴던 태자의 기색이 확 변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그의 표정은 야차같이 무시무시했다. 부관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대체 뭐 하는 놈들이야!! 타란 공작이 내일 결혼을 한다는데 내가 왜 그 소식을 이제 와서 본인에게서 들어?!!” “송구합니다.” 부관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당장 어찌 된 일인지 알아오지 못해!!” “예, 예! 전하!” 시퍼런 안광을 쏟아내며 태자는 사납게 씩씩거렸다. “공주? 빌어먹을. 공주가 한 둘이어야 말이지. 공주에 관심 있었으면 진즉 말을 할 것이지. 내 누이를 줬을 거 아냐.” 휴고가 결혼 상대를 공주라고 말 한 순간 그는 어찌된 일인지 대충 짐작했다. “..망할 노친네.” 퀘이즈는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나는 세상 일 관심 없다는 초연함으로 무장해 내궁 깊은 곳에 앉아 뒤로는 온갖 일을 다 조종하는 검은 손이었다. 그래봤자 넌 내 손바닥이다 의기양양할 왕의 얼굴이 떠올랐다. 퀘이즈는 왕을 증오했다. 아주 치가 떨리도록 싫었다.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태자 자리에 퀘이즈를 올려 두고, 할 테면 해봐라 가소롭게 보는 것도 분통터졌다.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 두고 봅시다. ’퀘이즈의 푸른 눈이 활활 타올랐다. < -- 초야 -- >버진로드도, 축하를 보내는 하객도, 축복을 빌어주는 사제도 없었다.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아 휴고 타란과 비비안 헤세는 혼인증서에 서명했다. 지난번에 그가 준 서류에 서명할 때는 ‘헤세’는 모두 정자로 쓰고 ‘비비안’은 머리글자만 썼다. 흔한 서명방식이었다. 그러나 혼인증서에는 이름과 성을 모두 또박또박 정자로 쓰고, 그 아래에 이름을 머리글자만 쓰는 방식까지 총 2가지 서명을 모두 해야 했다. 비비안. 그녀의 이름이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메튼 백작과 5년 남짓 결혼생활이 파탄 난 이후부터 루시아로 살았다. 그러나 이제는 앞으로 죽을 때까지 그녀는 비비안으로 살아야 했다. 그녀는 비비안을 자신의 이름이라 생각한 적 없었다. 그 이름으로 살 때는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루시아와 비비안은 마치 다른 인물 같았다. 혼인증서에 서명해 그의 아내가 된 사람이 정말 자신이 맞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녀를 둘러싼 두꺼운 껍데기가 단단히 붙잡혔으나 진짜 그녀는 그 안에 숨어 있었다. 당장 껍데기를 부수고 나갈 힘은 없었다. 그런데 언젠가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붙잡힌 건 답답하지만 안심이 되고, 언젠가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은 숨이 트이지만 밑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불안했다. 루시아는 자신의 기분을 도저히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중년 남자 둘이 증인으로 입회하는 자리에서 간단한 절차만으로 루시아는 타란 공작부인이 되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루시아는 결혼식에 대한 미련은 없었지만 결혼식을 마무리하는 과정인 맹세의 입맞춤까지 생략된 것은 좀 아쉬웠다. 그는 딱 한 번 키스한 이후 가벼운 접촉도 하지 않았다. 안 보는 척 눈만 살짝 돌려 그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일자로 다물어진 입술에서는 그의 고집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적당한 두께의 저 입술이 루시아 입술에 닿았을 때 의외로 부드러웠다. 강한 흡입력으로 루시아 입술을 빨아들이며 입 안으로 침입했던 그의 혀가. .. “내일 오전 중으로 북부로 출발할 예정이야.” “네..네!” 갑자기 그의 입술이 열리자 루시아는 화들짝 놀랐다. 그가 좀 의아하게 보는 것 같아서 루시아는 얼른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 혹시 얼굴이 붉어졌을까봐 걱정이었다. ‘아우. 미쳤나봐. 너 뭐하니 진짜. ’ “수도에 머물고 싶으면 그렇게 해.” 조금 뛰던 가슴에서 파시식 소리 내며 바람 같은 것이 빠져나갔다. 혼인증서에 서명한 잉크가 마르지도 않았는데 그는 별거를 대수롭지 않게 거론했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에 여자로서의 흥미는 단 한 점도 비치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애정이 넘치는 결혼생활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조금은 씁쓸했다. 가슴 안쪽이 지끈 아팠다. 그는 마치 결혼이라는 울타리로 두 사람이 묶일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루시아는 아주 조금이라도 품었던 어리석은 아쉬움조차 모두 날려버렸다. “...함께 가겠어요. 하지만 전하께서 제가 수도에 머물기를 바라면 그렇게 할게요.” 감정이 섞이지 않은 것처럼 들리기를 바라며 조용히 답했다. 그의 말에 반발해서가 아니었다. 반드시 수도에 머물러야 하는 당위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눈을 아래로 내리뜨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이 온몸으로 꽂히는 것을 느꼈다. 루시아는 가능한 순종적으로 몸을 사려 지낼 생각이었다. 그가 여자에게 폭력을 휘두를 남자로 보이지는 않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남자의 폭력에 여자가 얼마나 무력한지 그녀는 경험한 적 있었다. “수도와 달리 즐길 거리는 없어. 각오해야 할 거야.” “괜찮아요.” ‘어차피 수도에서도 즐기며 살아 본 적 없는걸. ’마차가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더 이상 대화는 없었다. 마차에서 내려서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는 집무실로 휙 들어가 버렸다. 홀로 남겨진 루시아를 챙긴 사람은 집사 제롬이었다. “마님께 인사 올립니다. 집사로서 공작 전하를 뫼시고 있습니다. 제롬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나이는 대략 서른 남짓. 암청색 눈동자에 단정한 외모와 인상을 지닌 남자는 구면이었다. 공작이 보낸 마차를 타고 저(邸)를 방문했을 때 루시아에게 차를 대접했었다. 집사였구나. 공작가 저택의 집사라기엔 지나치게 젊었다. “반가워요. 지난 번 차는 정말 맛있었어요. 제롬.” 제롬은 순간 묘한 눈으로 루시아를 보았으나 빠르게 그런 기색은 사라지고 여상한 표정으로 사근사근 답했다. “감사합니다. 편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마님.” “이대로가 편해요. 아, 혹시 말투 같은 것이 공작가 규칙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고칠게요.” “아닙니다. 마님께서 곧 타란의 규칙입니다. 식사를 먼저 하시겠습니까, 휴식을 취하시겠습니까? 저택 안내를 도와드릴까요?” 뭔가 방금 굉장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조금 전부터 시작된 두통으로 깊이 생각할 수가 없었다. 루시아는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을 말했다. “쉬고 싶군요. 일단은...” “침실로 모시겠습니다.” 제롬은 침실로 루시아를 안내한 후 중년 여자 둘을 소개했다. “불편하신 것 없도록 마님 시중을 맡을 사람들입니다.” 제롬은 그들의 이름과 경력을 간단히 소개하고 물러갔다. 하녀들 시중을 받아 옷을 벗고 얇은 속치마만 입은 채 루시아는 침대로 직행해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잠에 빠져들었다. 단잠에 푹 빠졌다가 깨우는 목소리에 부스스 눈을 떴다. 다행히 머리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마님. 저녁 식사는 드시고 주무시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하녀가 곁에서 아주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루시아를 깨우고 있었다. 아직 주인의 성정을 모르니 잠을 깨워 혹시 불벼락 맞을까 지극히 긴장하는 표정이었다. “음..내가 얼마나 오래 잠들었나?” “족히 6시간은 되었습니다.” “...오래 잤네.” “저녁 식사를 준비 중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드시었나?” “집무실에서 간단히 하실 것 같습니다. 공무가 많으시면 종종 그러십니다.” 결론은 루시아 혼자 먹으라는 소리였다. 루시아는 결혼한 당일 남편 없이 홀로 앉아 지금껏 맛본 적 없는 진미로 차려진 저녁 성찬을 마쳤다. 조금은 서운했다. 밥 정도 같이 먹어 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한 집에 있으면서. 잠시 시무룩해 있었지만 빨리 털어내려고 노력했다. ‘기대하지 마. 기대하지 말자. ’이런 사소한 일로 자꾸 실망하다보면 결혼생활은 지옥이 될 것이다. ‘나는 평생 걱정 없는 평온한 보금자리를 얻은 거야. 그 놈에게서도 벗어났어. ’원래부터 원한 것은 그것이었다. 그런데 사람 욕심이란 참 끝이 없었다. 이제 막 결혼했으면서 벌써부터 결혼 생활에 대한 기대를 자신도 모르게 품고 있었다. 루시아는 시중을 들며 왔다갔다하는 하녀들을 눈으로 좇다가 의문이 생겼다. “제롬. 내 시중을 맡은 하녀들 말이에요.” “예. 혹여 무슨 실수라도 있었습니까?” “그건 아니에요. 보니까 그네들이 하녀들 중에서 나이는 물론 경력도 높은 편인 것 같은데 직접 내 잔시중을 맡긴 이유가 있나요?” 루시아는 꿈속에서 한동안 귀족의 하녀로 일한 적 있었다. 그래서 하녀의 경력이나 나이 등에 따라서 하는 일을 잘 아는 편이었다. “미리 설명 드리지 않아 죄송합니다. 마님께서는 오늘만 이곳에서 주무시고 내일은 영지로 출발하실 겁니다. 마님 시중을 드는 하녀들은 여정까지 마님을 모시며 시중을 들고, 마님께서 다시 수도로 올라오실 때 오는 동안 마님을 모실 이들입니다. 영지에서 지내시는 동안에는 마님을 모시는 일은 다른 하녀가 맡게 될 겁니다. ” “아. 이곳의 다른 하녀들은 수도에 기반이 있어서 떠날 수가 없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럼 나와 함께 간 하녀들은 영지에서 무슨 일을 하게 되지요?” “그들 나이와 경력에 맞는 일을 맡게 될 것입니다.” “이해했어요. 설명 고마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롬은 이 일로 루시아를 ‘야무지게 안살림을 맡아 하실 것 같다’고 평가했다. 루시아가 만약 알았다면 그런 거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을 것이다. 저택 내부를 안내받아 눈에 익히며 시간을 보냈다. 워낙 넓어서 다 들여다보지도 못했다. 저택 자체도 컸지만 저택을 둘러싼 빈 공간은 몇 배나 되도록 널찍했다. 수도 한 가운데 있는 집이라 하기에는 놀리는 공간이 지나치게 많았다. “여긴 원래 전통적으로 타란 공작가의 저택이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 타란 공작가는 수도에 거처가 없었습니다. 수 년 전에 마련한 것입니다.” “그래요? 대체 이전에 이곳의 주인은 누구였나요? 이렇게 넓은 저택이며 뜰이며. 엄청난 고위귀족이자 부호였던 모양이군요.” “주인은 여럿이었습니다. 한 10여 채 정도 구입했을 겁니다. 이 저택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허물었지요.” “.....아.” 루시아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는 꽤, 어쩌면 훨씬 더 부자였다. 욕조는 넓고 고급스러웠다. 사기로 빚은 흔한 욕조가 아니라 아예 바닥에 벽을 쌓아 고정시켜 만들었다. 하녀들이 일일이 물을 가져다 부을 필요도 없이 관을 연결해서 어디선가 불을 지피면 언제든 데운 물을 꼭지를 열어 쓸 수 있었다. 이런 시설이 있다더라 말은 들어봤지만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물을 긷는 일은 고용인 몫이었다. 그들이 아무리 힘들게 물을 데우고 날라도 그게 주인의 수고로 연결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일부러 많은 돈을 들여 이런 시설을 설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가 고용인들 수고를 생각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루시아 생각대로 공작이 시킨 일은 아니었다. 집안 관리를 천직으로 삼고 있는 제롬은 효율성을 중시했다. 집 여기저기를 뜯어 고치는 건 집사 제롬의 거의 유일한 취미라고 할 수 있었다. 목욕을 마친 후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젖은 머리를 말리고 피부를 매끄럽게 한다는 꽃향유를 발라주는 하녀들 손이 정성 가득했다. 결혼 첫날밤이라는 특별함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 오늘밤 여기 오지 않을 텐데. ’루시아는 확신했다. 내일 바로 영지로 떠난다고 했으니 전 날인 오늘은 푹 휴식을 취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영지에 내려가고 나서도 그가 과연 침실을 찾을지 알 수 없다. 어차피 자신에게서 자식을 볼 생각이 없을 테니까. 어쩌면 영영 그는 루시아 침실에 발을 들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아들이 있으니까. ’아들의 지위를 단단히 하기 위해 이런 결혼을 감행할 만큼 소중한 아들이었다. 만약 루시아가 아들을 낳으면 일이 아주 복잡해진다. 혼적에 입적해 적자로 인정받아도 진짜 적실 몸에서 태어난 적자와 지위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불안을 제거하는 최선은 아예 임신 가능성을 없애는 것이다. 그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그냥 하는 말일 것이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는 것도 어차피 증명할 수 없으니 그는 믿지도 않을 테고. 하녀들이 다 물러가고 루시아는 조용해진 침실에서 다시 침대 위에 누웠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 낮잠을 잤으니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차라리 잘 됐지 뭐...’그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그와 거리를 유지할수록 지킬 가능성이 컸다. 그와 짧은 키스 한 번 했다고 이렇게 콩닥거리는데 그보다 더 한 걸 하면 아마. ..루시아는 점점 얼굴이 달아오르자 얼른 두 팔로 마구 공중을 휘저었다. 마치 그녀의 머릿속을 엉크는 것처럼. ‘다른 생각을 하자. 다른 생각..다른 생각..공작부인이 돼서 해야 할 일..뭐가 있지..?’남편을 위해 해야 하는 내조 1순위는 사교활동이었다. 메튼 백작도 루시아를 그렇게 온갖 파티에 내보내지 못해 난리였다. 그 자의 기대만큼 해주지는 못했다. 몸은 몸대로 피곤하고 하는 일 없이 멀뚱히 서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아..사교활동. 나 그건 자신 없는데...’ 이걸 솔직히 말하지 않은 건 계약위반일까?꿈속에서 그의 아내였던 공작부인은 사교활동을 즐기는 데에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딱 봐도 값비싼 최신 드레스와 보석으로 온 몸을 칭칭 감고 도도하게 사교계를 누비고 다녔다. 여자들은 그 곁에 모여들어 낯간지러운 찬사를 쏟아냈다. ‘그러면서 뒤에서는 욕을 했지. ’공작부인은 원래 집안이 별 볼일 없었다. 사교계에 난데없이 굴러온 돌덩이였다. 박힌 돌을 자꾸 건드려대니 좋아할 리가 있나. 타고나기를 고아한 귀부인들과 시골 촌뜨기 출신 공작부인은 애초부터 공통화제가 없었다. 물론 대놓고는 누구도 공작부인 앞에서 싫은 티는 못 냈다. 루시아는 적극적으로 사교활동 하지는 않았지만 성실한 참여로는 독보적이었다. 그래서 굉장히 많은 것들을 보고 들었다. 사람들 무리에서 한 걸음 떨어져 객관적인 눈으로 관찰할 기회가 많았다. 공작부인의 화려함은 전혀 부럽지 않았다. 가끔은 발악하는 것처럼 보였다. 초반에는 그러지 않았던 공작부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제 위치에 스스로 취해버렸다. 갈수록 턱을 세우고 지위 낮은 자들을 공개적으로 공공연하게 깔아뭉개곤 했다. 메튼 백작부인으로 지내던 시간이 끝나고 한동안 사교계와 먼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귀족가 하녀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타란 공작부인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공작부인은 여전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며 더 악명을 쌓았다. 공작부인의 결혼 비화가 알려졌을 때 귀부인들이 그토록 소식을 퍼 나르며 깔깔거린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공작부인은 너무 많은 적을 만들었다. ‘그 후에는...’그 후에는 어찌 되었는지 모른다. 하녀 일을 하며 모은 돈으로 작은 집 한 채 마련하고 하녀 일을 그만둔 후 조용히 살았다. 시끄럽고 화려한 사교계 생활은 이후에 모르고 지냈다. 아주 가끔. 함께 일하다 친해진, 일하는 곳은 옮겼지만 여전히 하녀로 일하고 있는 친구 비슷한 사람이 찾아와 수다를 늘어놓는 중에 몇 가지 소식들이 들어있기는 했다. 그 중에 타란 공작과 관련된 소식이 있었던가. 그건 가물가물했다. ‘내가..그와 결혼했어. ’루시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럼..원래 공작부인이었던 그 여자는..어떻게 되는 거지?’그걸 이제야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이기심에 놀라고 말았다. < -- 초야 -- >‘어쩔 수 없잖아. ’양심의 가책은 짧았다. ‘남의 사정 같은 걸 봐 주었다가는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 ’루시아는 못되고 이기적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또 한 번 놀랐다. 하지만 그걸 고치고 착해지고 싶지 않았다. 착한 사람이 더 다치는 곳이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걸 아프게 배웠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잠이 오기는커녕 정신은 더 맑아졌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결국 일어나 침실에 불을 밝혔다. ‘침실 구경이나 하자. ’침실 내부의 모든 것은 큼직큼직했다. 침대도 그렇고 소파도 그렇고 가구도 그랬다. 고풍스럽기는 하지만 뭔가 여인의 침실로 쓰기에는 딱딱하고 서늘했다. 오늘만 자고 떠날 예정이 아니라면 여기저기 손대고 싶은 곳이 많았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조화는 있었는데 딱 하나 그것을 망가뜨리는 것이 있었다. ‘대체..이 그림은 뭘까..’침실 빈 벽 한 가운데 떡 하니 자리 잡은 이상한 추상화는 뭘 말하는지도 모르겠고, 이 침실에 어울리지도 않았다. 태자 퀘이즈가 보내온 그림 중 하나였다. 휴고는 보자마자 인상을 썼지만 제롬이 우물거리며 어찌할까요, 물었을 때 음울하게 답했다. “걸어.”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루시아는 아마 이 그림이 대단히 유명한 작가의 값비싼 작품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루시아의 생각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 태자는 자신의 그악스런 취미에 꼭 맞는 귀한 그림을 손수 골라 보내주었다. ‘와인장이 있네. ’침실 한 벽에 기댄 와인장은 몇 개 층으로 이루어져 수십 병의 와인이 층별로 반쯤 눕혀 가득 차 있었다. 루시아는 투명한 유리문 너머 진열된 와인들을 구경하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여자 침실에 와인장이 있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노부인의 침실이라면 모를까. 와인에 대해 잘 모르지만 달콤해서 루시아 입맛에 꼭 맞는 값비싼 와인 하나는 기억해두는 것이 있었다. 꿈속의 기억이다. 그것을 발견하자 루시아는 기뻐하며 유리문 밖에서 폴짝 뛰었다. 꺼낼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와인을 꺼냈다. “축배를 드는 거야. 그 정도는 해도 되겠지.” 아무도 축하해 주는 이 없는 결혼이었지만 그녀는 그녀 자신을 축하할 자격이 있었다. 와인장 옆에는 두 사람 정도가 겨우 앉을 수 있는 작은 테이블이 바로 붙어 있었다. 또한 와인장 안에는 와인잔은 물론이고 마개를 따는 기구도 비치되어 있었다. 완벽하게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 상태였다. 루시아는 마개를 따서 조금씩 따르며 허공을 향해 건배를 하고 홀짝홀짝 잔을 비웠다. “맛있다. ..응? 벌써 없어?” 몇 잔 마시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빈병이었다. 그래도 아쉬워서 입맛을 다시며 일어나다가 어질, 현기증이 돌아 다시 주저앉았다. “어..왜 이러지.” 몇 번 심호흡을 하고 다시 일어났지만 뱃속이 뜨겁고 여전히 주변이 빙빙 돌았다. “아..나..취했나봐...” 루시아는 비틀거리며 간신히 침대로 가서 누웠다. 색색 숨을 몰아쉬다가 골아 떨어졌다. 그러나 술기운을 빌린 잠은 숙면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얼마 못 가서 목이 탈 것 같은 갈증으로 깨어났다. ‘더워..목 말라..’루시아의 현재 몸에 술이 들어간 것이 처음이었다. 마신 와인이 비록 도수가 낮지만 처음 치고는 과음을 했다. 침실 내부는 제법 서늘한데도 불구하고 몸에 열이 나서 후끈거렸다. 루시아는 이리 저리 뒤척거리다가 입고 있던 잠옷을 벗어 내던졌다. 어차피 혼자 있는 침실이었다. 이제 여기는 그녀의 침실이었다. ‘난 성공했어. 그 자하고 결혼할 일은 없는 거야. 내 미래를 바꾼 거라구. ’술기운이 그녀의 해방감을 부추겼다. 더 과감하게 속옷까지 다 벗어 던졌다. 그녀의 새하얀 나신이 열이 올라 전체적으로 불그스름했다. 루시아는 침대 시트에 피부가 닿는 시원함이 좋아서 뒹굴뒹굴하다가 일어나 조금씩 비틀거리면서 침실 중앙쯤에 놓인 테이블로 걸어갔다. 물주전자와 유리잔이 은쟁반에 담겨 얌전히 놓여 있었다. 유리잔에 물을 따라 벌컥벌컥 들이마시며 타는 갈증을 해소했다. 달칵. 조용한 침실에서 작은 소리는 천둥처럼 들렸다. 반 박자 느린 반응으로 소리 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이미 침실과 응접실로 이어진 문이 열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며 들어서는 사람을 보자마자 루시아는 물잔을 입에 가져다 댄 그 상태로 굳어버렸다. 막 목욕을 마치고 가운 차림에 침실로 들어서던 휴고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불청객을 보며 멈칫했다. 숨 막히는 고요함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주 여유롭게 나신의 여자를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몇 시간을 정신없이 일했더니 머리가 조금 멍했는데 단번에 상쾌해지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이 여자는 뭐지, 생각했다가 다음에는 그래, 결혼을 했었지, 깨닫고 마지막으로 이 여자가 내 아내인가, 결론을 내렸다. 가늘고 긴 목을 따라 동그란 어깨, 부드러워 보이는 젖가슴에 앙증맞게 자리 잡은 선홍빛 유두, 쏙 들어가는 늘씬한 허리에서 둥근 곡선을 만드는 골반. 불을 밝힌 침실이라 그녀의 몸이 구석구석 제대로 보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배꼽 아래 아랫배 아슬아슬한 부분은 테이블 밑으로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한 걸음 옆으로 나오라고 해볼까. 그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파삭-날카로운 파열음이 고요함을 깨뜨렸다. 얼어붙어버린 그녀의 손에서 미끄러진 유리잔이 대리석 바닥에서 산산조각 났다. 움찔한 루시아가 시선을 떨어뜨리며 움직이려는 순간 그가 단호하게 명령했다. “가만히 있어!” 루시아 몸은 그대로 다시 얼어버렸다. 꼼짝하지 못하고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약간 주춤했지만 줄곧 시선을 마주치며 다가오던 그가 인상을 쓰는 것을 보자 또 다시 굳었다. 그는 가까이 오자마자 몸을 숙여 루시아의 등과 다리 아래를 받치고 번쩍 안아 들었다. 버적버적-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슬리퍼에 유리 조각이 밟히며 소리를 냈다. 침대까지 고작 몇 걸음 거리가 영원처럼 길었다. “다친 곳은?” 낮은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비로소 자신의 등이 보드라운 침대 시트에 닿았음을 깨달았다. “없..어요.” 루시아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재빠르게 그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이불을 끌어올려 몸을 가리고 고개를 침대에 푹 박았다. 그의 손이 닿았던 부분이 화끈거리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이불을 몸에 감고 꾸물거리는 애벌레처럼 그에게서 가능한 멀리 침대 끝으로 도망치는 그녀를 그는 흥미롭게 관찰했다. “알몸 환영을 해 놓고 이번엔 순진한 처녀 흉내인가?” 부끄러움과 놀람으로 저 깊이 어디론가 파고 들어가던 그녀의 정신은 그의 목소리에 깔린 조소를 느끼면서 반짝 돌아왔다. 못 됐다. 놀라지 않았느냐 묻기는커녕 저런 말투라니. 루시아는 고개를 쏙 빼고 그에게 쏘아붙였다. “갑자기 들어오셨잖아요!” “대단히 실례했군. 차후에는 문 밖에서 고함을 치도록 하지.” 루시아는 그가 농담을 하는 것인지 조롱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자신의 반응이 과민했다는 것을 깨닫고 머쓱했다. 어쨌든 그는 깨진 유리잔에 다칠까봐 걱정은 해주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발바닥에 셀 수 없이 많은 유리조각이 박혔을 것이다. “...오실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당신을 유혹하려 일부러 옷을 벗고 기다리던 것이 아니다. 루시아는 그 말을 돌려 표현했다. “내 침실이야. 주인이 들어오는 것이 당연하지.” “...집사가 이곳에서 자라고 했어요. 전하 침실이라고 말해주지도 않았어요. 부부가 침실을 공유하는 것도 공작가의 전통인가요?” 휴고는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제롬이 마님 침실 준비가 미진해서 어쩌고저쩌고 하는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워낙 갑작스러운 결혼이었고, 저택에서는 하루만 묵고 갈 것이라 집사는 마님을 주인의 침실로 안내한 것이다. 제롬은 완벽주의자였다. 준비가 부족한 침실에 모시느니 그냥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으로 쳤다. 어차피 결혼하셨으니 하루 정도 한 침실 써도 무슨 문제인가 생각한 것이다. “그런 전통은 없어. 중간에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군.” 그는 자신의 건망증을 아주 쉽게 아랫사람의 실수로 넘겨버렸다. “그럼..오해하지 않으시는 거죠?” 루시아는 그가 자신을 그렇고 그런 조신하지 못한 여자로 볼까 걱정했지만 그는 애초에 그런 건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그는 여자를 그런 기준으로 분류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에게 여자는 두 부류였다. 같이 자고 싶은가, 그렇지 않은가. 헤프건 조신하건 그런 건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알몸으로 자는 것이 취미인가?” 그는 단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그녀의 새로운 모습이 재미있을 뿐이었다. 루시아는 빨갛게 물든 얼굴로 그를 새침하게 노려보았다. “아니에요. 좀 더워서...” 도무지 덥다고는 할 수 없는 서늘한 침실 내부의 기온을 고려하면 납득할 수 없는 대답이지만 그의 시선 끝이 무심코 와인장 쪽에 닿자 그의 입술 끝이 올라갔다. “술 마셨어?” “.....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곳이 그의 침실이라면 루시아는 주인 허락 없이 와인장을 뒤져 와인을 꺼내 마신 셈이었다. 아아. 왜 그랬을까. 루시아는 꿈을 꾸고 난 이후 처음으로, 지금이 꿈이면 얼마나 좋을까 간절히 바랐다. “술에 취해 알몸으로 침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자라. ..우연이라 하기엔 참 교묘한 걸.” 그의 빙글거리는 말투는 루시아의 속을 뒤집었다. 자꾸 툭툭 건드리는 그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 세상 모든 여자가 당신이면 눈이 뒤집혀 달려드는 줄 알아?? 루시아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조금은 이성적으로 발끈했다.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전하 침실이라는 걸 몰랐고 오실 줄도 몰랐다고. 얼마나 많은 미인들이 옷을 벗고 전하 침대로 뛰어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제가 그랬다 해도 아마 그럴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유일한 여자일 텐데요. 오늘 오전 그 서류에 서명한 이후부터 말이죠.” 말을 끝내자마자 루시아는 아차 싶었다. 너무 되바라진 말투로 쏘아붙인 것 같았다. 그가 만약 여자가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남성우월주의자라면 그가 내보일 반응이 걱정되었다. 메튼 백작 그 자하고 살 때는 네, 아니오 대답 외에는 대화라고는 없었는데. 이 남자하고는 자꾸 말을 섞고 있는 자신이 낯설었다. 그는 반항적인 그녀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낮게 웃었다. “내가 넘겨짚은 말이 당신을 언짢게 했다면 사과하지. 미안하오.” “.......”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나?” “아, 아니에요. 조금 놀라서..미안하다는 말은..해본 적도 없는 분인 줄 알았어요.” 또 시작이었다. 당신이 그려놓은 나는 어떤 자인지 조목조목 항목을 달아 제출하라고 하고 싶었다. 하나씩 손가락으로 짚어 따져가면서, 이건 아니니까 지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도대체 당신 머릿속은 나는 어떤 놈이지? 내 소문을 듣고 그러는 건가?” “소문으로 전하를 재단하지 않았어요. 전 제가 보고 들은 것으로 전하를 판단한 것뿐이에요. 사과보다는 명령을 내릴 분이라 생각했어요.” “면전에서 그런 독설을 듣기는 또 처음이군.” “독설이라니요! 의견이라구요. 그렇게 매도하지 말아주세요.” 정색하는 표정이 진지했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그녀의 눈이 곧고 진지했기 때문에 터무니없는 제안을 참고 들어주었다. 솔직하게 온 힘을 다해 부딪치는 그녀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우습게도 그 터무니없는 제안을 받아들여 이 상황이 만들어졌지만. 그가 별 의미 없이 살짝 몸을 트는 순간 이불이 들썩할 정도로 크게 그녀가 흠칫했다. 흐음. 그의 눈썹이 스윽 올라가더니 다시 몸을 움직이자 이번에도 이불이 들썩했다. 내가 덮칠까봐? 맹수 앞에 작은 생물이 달달 떨고 있었다. 배부른 맹수라면 모른 척 하겠지만 배가 고픈 건가, 그냥 조금 허기가 들었나. 평소라면 사냥 할 가치조차 없는 작은 생물을 보며 그는 입맛을 다셨다. 왠지 유쾌해서 방패처럼 그녀를 둘둘 말고 있는 이부자리를 잡아 확 잡아당겼다. “꺄악!” 루시아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널찍한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불은 간데없이 루시아는 알몸인 채 그가 두 팔로 가두어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시아는 흐읍 호흡을 멈추었다. 빠져나갈 틈 없이 가로막은 그의 팔에 조금이라도 닿을까봐 손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당신이 알몸으로 내 침대에 뛰어들 자격 있는 유일한 여자라면서 왜 내가 올 거라 생각지 않았다는 거지? 오늘은 신혼 초야인데.” 아마 그는 오늘 밤, 침실이 달랐다면 그녀의 침실을 찾지 않았을 것이고 침실에 들어왔을 때 루시아가 곤히 잠든 상태였으면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그 옆에 누워 그냥 잤을 것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냥 그럴 마음이 안 드니까. 그녀는 그의 취향과 거리가 멀었다. 그는 육감적인 미인을 좋아했다. 한 마디로 동하지가 않았다. 그런데 그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과 별개로 그녀의 생각이 궁금했다. 그는 그전부터 계속 대체 이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나, 알고 싶었다. 루시아는 여자였다. 여자는 단순한 걸 복잡하게 생각한다. 루시아가 생각한 이유는 훨씬 많았다. 애정이 동반된 결혼이 아니고, 꼭 품어보고 싶을 만큼 대단한 미녀나 글래머도 아니고,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아들 때문이었다. 그는 아내의 임신을 원치 않을 것이다. 아이를 갖지 못한다고 했지만 그가 믿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임신이나 아이 얘기는 꺼내고 싶지 않았다. 어쩐지 그 말을 하면 이대로 그가 미련 없이 일어나 나가버릴 것 같았다. 그가 나가기를 바라지 않았다. 아무리 계약결혼이지만 결혼해서 초야조차 없다면 너무 비참했다. “내일..오전에 바로 영지로 내려간다고 하셔서..”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만 중요한 사실을 그에게 상기시키지 않은 사실이 그를 속인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마치 그걸 추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방비한 상태로 알몸으로 있다는 사실이 시간이 지날수록 뇌리에 박혀 점점 크기를 더해갔다. 몸에서 후끈후끈 열이 나는 것 같았다. 루시아는 조금씩 움직이며 두 팔을 교차해 가슴을 가렸다. 무의미하지만 수치를 느끼는 여자의 가장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신선한 반응이군. ’덤벼드는 여자들만 상대하다 보니 순진한 대응이 신기하기만 했다. 이 여자는 처녀가 분명했다. 그것도 아주 순진한 처녀. 알몸으로 그의 침실에 고의로 숨어들었다고 의심했던 의혹은 싹 사라졌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 재미가 없어졌다. 처녀는 성가시다. 제대로 즐길 줄 몰라서 재미가 없었다. 그에게 여자와의 정사는 불필요한 욕망의 찌꺼기를 버리는 배출구이자 쾌락을 즐기는 수단이었다. 가능한 경험 많고 능숙한 여자와의 잠자리가 더 즐거운 법이다. 그는 익을 대로 익어 떨어진 과일의 달콤함을 좋아했다. 어쩐다..아무래도 그녀는 겁먹은 것 같고. 굳이 싫다는 여자 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거부하면 안 해.” “..초야는..거부할 수 없잖아요.” 초야는 권리이자 의무다. 무려 법의 명문화되어 있다. 하지만 거의 사문화된 법이었다. 아주 오래 전 서로 생사를 걸고 싸우는 귀족 가문 간 화합을 강제하기 위한 수단이 두 가문의 결혼이었고, 그 때는 그 법이 필요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 날 국가 간 국경선이 고착화되고 영주들 간 영지전은 보기 드문 이벤트가 되었다. 그 법이 폐지되지 않은 건 가끔은 적용될 때가 있기 때문이었다. 초야가 없었음을 입증하면 결혼을 무효로 할 수 있는데 결혼하자마자 양쪽 중 누군가 급사했을 경우 적용했다. 수년에 1번 정도 적용될 때가 있다고 들었다. ‘법을 거론하다니. 정말 뭘 모르는 공주님이군. ’ “초야가 아니면 거부할건가?” “.... 오늘 하는 거 봐서요.” 심드렁하게 툭 내뱉었던 그는 여자의 반격에 푹, 웃음을 터뜨렸다. 새파란 얼굴로 긴장해서 덜덜 떨고 있는 주제에 제법 맹랑한 소리를 한다. 정말 뭘 몰라서 이러나, 알면서 일부러 이러나. “이봐, 공주님. 일단 시작하면 중간에 그만두지 않아. 각오는 하고 하는 말이야?” 루시아 눈에 꿈속에서 경험한 초야의 기억이 아른거렸다. 비곗살이 늘어진 메튼 백작은 루시아 몸을 올라타고 몇 번이고 삽입을 시도했지만 결국 발기가 안 되어 실패했다. 그러자 제 분을 못 이겨 씩씩거리다가 술을 진탕 마시고 뻗어버렸다. 그르렁 그르렁 요란하게 코를 골며 자는 남편이 된 낯선 남자 곁에서 쪼그려 밤새 벌벌 떨었다. 그보다 더 최악일 수는 없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무서울 것도 없었다. “각오로 하는 게 아니잖아요. 저는 전하와 전쟁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잠시 침묵한 그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갑자기 그의 분위기가 급변하고 주변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소름이 오도도 돋고 꼼짝할 수가 없었다. 이 사람 남자구나,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힘으로 당할 수 없는 남자 아래 누워 있는 나신의 여자. 도무지 항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상체를 일으킨 그가 목욕 가운을 벗는 것을 보며 루시아는 질끈 눈을 감았다. 허리에 낯선 손이 닿자 후읍- 숨을 들이켰다. . < -- 초야 -- >처분만 기다린다는 것처럼 눈을 꽉 감고 있는 루시아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차분해졌다. 겁 없는 이 작은 토끼를 확 눌러 잡아먹어버릴까 하는 마음이 잠깐 들었지만 입맛만 버릴 것 같다. 순진한 공주님한테 적당히 기분 좋은 서비스나 해 주고 남자가 뭔지 조금 가르쳐 줘야겠다. “이름” 꼭 눈을 감고 있던 루시아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네?” “침대 위에서까지 전하 소리 듣고 싶지 않군. 이름으로 불러.” “이름...?” “설마 내 이름을 모른다고 할 셈은 아니겠지?” “아뇨. 알아요. 음..휴..?” 그가 아무 말이 없자 루시아는 덧붙였다. “아니면 휴고...?” 이상하게 그의 침묵이 좀 길었다. 설마 이름이 틀렸나?? 그의 이름이 휴고가 아니었단 말이야?? 혼인증서에 서명하는 것을 분명 봤으면서 패닉에 빠져들기 직전 그가 어쩐지 주저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의 것으로.” “전의 것이면..휴..?” 짧은 순간 그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붉은 유리구슬 같은 그의 눈동자가 조금 일렁이는 것 같았다. 루시아는 어쩐지 그가 ‘휴’라고 불리는 일을 조금 특별하게 여긴다고 느꼈다. 애칭일까? 누가 불러준? 어머니? 아니면..사랑한 여자..?그에게 사랑한 여자가 있었을까? 그에게는 아들이 있다. 그 아들을 낳아준 여자는 누구였을까. 그 여자를 사랑했을까. 그 여자는 지금 어디 있고, 왜 헤어졌을까. “비비안.” 그에게 물어봐도 될까 고민하는데 갑자기 들려오는 자신의 너무나 낯선 이름에 루시아는 흠칫 놀랐다. 과민하게 놀라는 자신을 그가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아서 변명처럼 말했다. “이름으로..불리는 일이 없어서...” “이제부턴 많아지겠군. 비비안.” “......” 낮은 목소리가 그윽하게 귓가에 감겼다. 몹시 낯선 자신의 이름이 그의 입을 통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녀를 가리키며 정의했다. “비비안.” “.......”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그녀를 보며 휴고는 웃음처럼 한숨을 흘렸다. “고집. 당신 은근히 고집 센 거 알아?” “.... 제가 언제요.” “방금도.” “..당신은 억지 부리기 잘 하는 거 아세요?” “난 억지 같은 거 안 부려. 내가 하는 말은 다 옳으니까.” 그의 무지막지한 자신감과 오만함에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의 얼굴이 점점 다가와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까지 가까워졌다. 얕은 숨이 입가에 닿고 그의 입술이 내려앉자 루시아는 눈을 감았다. 꽉 다물고 있는 그녀의 입술 위를 그가 가볍게 몇 번 입을 맞추고 살짝 아랫입술을 빨아들였다. 그리고 다시 입술이 떨어졌다. “입 열어.” 그가 낮은 음성으로 명령했다. 긴장한 숨을 꿀꺽 삼키자 목구멍 안쪽이 탈 것처럼 아팠다. 살짝 얼굴을 붉히며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조그맣게 아, 하고 벌렸다. 그의 눈이 살짝 휘어지더니 이내 그가 그녀의 입술을 한입에 삼키면서 입 안으로 말캉한 살덩이가 들어왔다. ‘아.... ’그의 혀가 부드럽게 그녀의 입안을 더듬고 지나갔다. 천천히 그리고 꼼꼼하게 치열을 확인하고 볼 안쪽과 입천장을 스쳤다. 그와 혀가 서로 맞닿는 순간은 전기가 오른 것처럼 찌릿했다. 두 사람의 입술이 아슬아슬하게 떨어진 상태로 그가 말했다. “와인 맛이 나는군.” 루시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방향을 바꾸며 루시아의 입술을 다시 덮었다. 그의 말대로 키스에서는 와인 맛이 나서 취할 것 같은 몽롱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혀가 얽히고 타액이 섞였다. 그는 키스로 입안을 애무하고 있었다. 그의 혀가 그녀의 혀를 휘감고 빨아들였다 놓는 것을 반복했다. “흐...” 목 깊은 곳에서 작게 신음이 나왔다. 차분하게 시작했던 입맞춤은 조금씩 격해져 갔다.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그의 혀가 느닷없이 목 안쪽을 건드리면서 길게 훑어 지나갈 때는 자신도 모르게 시트를 꽉 쥐었다. 그는 루시아가 호흡이 벅차기 직전까지 키스하다가 입술을 떼고 몇 호흡 하게 한 후에 다시 시작했다. 몇 번이고 그렇게 키스는 계속 이어졌다. 어느 새 루시아의 딱딱하게 긴장했던 어깨 근육이 느슨하게 풀렸다. 그의 키스는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길고 긴 키스가 끝났을 때 루시아는 작게 숨을 할딱거렸다. 이것만으로도 너무 많은 것을 충분히 한 것 같았다. “부..불을. 너무 환해서...” “잘 보이는 게 좋아.” “그치만..” 울 것 같은 그녀의 눈시울에 휴고는 입을 맞추었다. “예쁜 몸이야. 보게 해 줘.” 붉어진 얼굴로 입술을 무는 그녀는 귀여웠다. 괜한 발림이 아니라 그녀 몸은 예뻤다. 적당한 크기의 둥근 가슴의 정점은 꽃물을 살짝 들인 것처럼 연분홍빛이고 가늘고 쏙 들어간 허리에서 골반으로 이어지는 곡선이 아름다웠다. 육감적이지는 않아도 충분히 매력적인 몸이었다. 그의 입술은 루시아 입술 위를 몇 번 누르더니 입술 옆에서 뺨으로, 뺨에서 귓가로 이어졌다. 귀 뒤쪽에 축축한 입술이 닿고 목을 타고 천천히 키스가 이어 내려온다. 루시아는 흐릿해진 눈을 느리게 깜빡거리며 그의 입술이 피부를 스치는 묘한 느낌에 빠져 들었다. ‘와인향인가..?’그녀의 몸에서 향이 났다. 코를 찌르는 향수가 아니라 살내음이었다. 처음에는 와인을 마셔서 그 잔향이 풍기는 건가 했다. 그런데 와인향과는 달랐다. 날 듯 말 듯 하면서 때때로 코에 스치는 상큼하면서 달콤한 향은 마치. ‘풋과일..과일향..’체향이었다. 이 여자의 냄새였다. 체향이 이렇게 향기로울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휴고는 쉼 없이 그녀의 살결에 코를 묻고 입술을 대고 혀로 핥았다. 그를 취하게 하는 이 향기가 후각인지 미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보들보들한 살결은 마치 기름을 먹인 실크 같았다. 혀로 핥아 올리면 거칠 것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이렇게 달래는 것처럼 부드러운 애무는 절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즐거웠다. 그는 입술이 닿을 때마다 미세하게 떨리는 반응이 사랑스러워서 가는 손목을 잡아들어 팔 안쪽에 입술을 대고 쪽 빨아들였다. 따끔한지 잡힌 손이 흠칫했다. 하얀 팔 안쪽에 붉은 흔적이 남은 걸 보며 그는 이번에는 반대 쪽 팔 안쪽에도 같은 자국을 남겼다. 살짝 인상을 쓰고 대체 지금 뭐하냐는 것처럼 보는 여자의 시선에 그는 싱긋 웃었다. 그의 입술이 목덜미를 따라 가슴 부근까지 내려왔다. “아!” 가슴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감각에 루시아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그가 그녀의 가슴 하나를 입안 가득히 삼켜 빨아들였다. 마치 아이가 엄마 젖을 무는 것처럼 그는 입술을 움직이다가 자극으로 솟아오른 유두를 혀끝으로 파고들었다. “학!!” 그는 유두 끝을 살짝 물고 혀로 간질였다. 루시아가 숨넘어갈 것처럼 신음을 흘리자 그는 혀끝으로 유륜을 따라 핥다가 다시 삼켰다. 그녀의 가슴은 보들보들하고 말랑말랑했다. 생크림 덩어리를 입 안에 무는 것 같아서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라도 녹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얌전히 누워 여전히 시트만 쥐고 있지만 몸부림치며 허리를 들썩이는 모습이 서서히 그를 자극해 하복부에 열이 몰리기 시작했다. 그는 타액으로 축축해진 한쪽 가슴에서 입술을 떼고 그 옆의 다른 가슴으로 옮겨 애무해 나갔다. 핥고 살짝 깨물었다가 삼키고 우물거리고 때로는 아프도록 강한 흡입으로 빨아들였다. 그의 혀가 움직일 때마다 등 아래에서부터 짜릿 짜릿한 감각이 타고 올라와서 루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야한 신음을 흘렸다. 가슴을 실컷 희롱한 그는 가슴골을 따라 키스를 이어 복부로 내려갔다. 대체 그의 입술이 어디까지 가는가 싶어 루시아는 두려움과 기대로 덜덜 떨렸다. 손끝이 하얗도록 시트를 움켜잡았다. “흣..” 그의 입술은 복부 아래까지 닿았다가 그 다음에는 허벅지 안쪽을 입을 맞췄다. 그 누구의 손도 닿지 않았던 허벅지 안쪽 깊은 곳까지 입술을 붙이고 살을 빨아들이자 따끔한 느낌이 났다. 허벅지에서 종아리까지 쪽 쪽 가볍게 소리가 나면서 그가 키스하자 루시아는 얼굴에서 열이 날 것 같았다. 발등을 마지막으로 입술이 떨어지고 다소 멍해진 정신이 돌아왔을 때 다시 올라온 그의 입술이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그의 손이 가슴을 쥐고 주무르다가 복부를 쓰다듬었다. 천천히 복부를 따라 미끄러져 내려가 허벅지 안쪽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 루시아는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찰나에 마주친 그의 붉은 눈이 기이한 열기를 품고 가늘어졌다. 반응을 관찰하는 것처럼 그는 시선을 붙들어 놓고 손가락으로 은밀한 숲을 헤치며 살짝 눌렀다. 흐읍 숨을 들이마시며 흔들리는 호박색 눈동자의 변화는 그를 충동질했다. “아!”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천천히 안으로 파고 들어왔다. 비명을 지르기는 했지만 아파서가 아니라 놀라서였다. 살짝 안으로 들어온 손가락이 빠져나가자 안도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그리고 좀 더 깊이 안으로 들어왔다. “읏...” 손가락이 들어왔다 나가는 움직임을 계속했지만 아플 정도로 깊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지금껏 누구의 침입도 허락지 않던 곳이라 이물감이 낯설었다. 비부에서 흐르는 액체가 그의 손가락과 마찰하며 젖은 소리를 냈다. 몸에서 열이 나고 등줄기가 오싹거렸다. 손가락 몇 개가 그녀의 음부를 누르며 문질렀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이 올 때마다 몸이 흠칫거렸다. 뭔가 간질거리는 것 같으면서도 기분이 나쁜 것도 같고 좋은 것도 같고 아픈 것도 같았다. 새된 호흡만 가쁘게 내쉬며 그녀는 올 듯 말 듯하는 감각에 집중했다. “아..” 갑자기 뭔가 훅하고 밀려와 몇 초간 저릿한 감각이 잔상을 남기며 빠져나가는 순간 그녀는 고개를 위로 꺾었다. 짧은 절정이 지나가고 머릿속이 멍해지면서 몸이 늘어졌다. 그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헤집는 느낌이 나른하게 좋았다. “어땠나? 순진한 공주님.” “...끝난 거 아니잖아요.” 남녀의 성관계가 남자의 성기를 여자 몸 안으로 넣는 행위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비록 꿈속이지만 아무리 엉망진창이었어도 루시아는 결혼을 했고 제대로는 한 번도 못했지만 그래도 남편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 머리카락 안을 흩트리던 손이 멈칫했다. “아는군.” “저 바보 아니거든요.” “어려서 궁에 들어가 시녀도 없이 지냈으면서 누구에게 배웠지?” “아..그건 채..책에서..” “책이라..지루한 활자로 얻은 지식이군. 책에서는 뭐라고 해?” “울고 소리 지르고 하던데. ..아무래도 거짓말이었나 봐요.” 빙글거리며 루시아를 놀리던 휴고 표정이 단박에 굳어졌다. 하아 숨을 내쉬며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이 여자 완전 천연원석이구나. 순진한데다 솔직하기까지 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능수능란한 여자보다 위험했다. 그는 사실 시작할 때는 이 이상 더 나갈 생각이 없었지만. “기대에 부응해야겠군.” 어느 정도는 다행이었다. 아까부터 단단히 일어난 그의 중심이 뻐근하게 아파오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꽉 죄는 그녀의 속살에 그는 완전히 흥분해 버렸다. 그는 두 손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하얀 허벅지 안쪽이 그의 손가락에 눌려 금방 붉어졌다. 빌어먹을. 그가 욕설을 삼켰다. 쩌릿하게 아랫배가 저려온다. 이 여자 피부는 왜 이렇게 말랑거리는 걸까. 새하얀 피부 안쪽에 틈도 없이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욕망이 치밀었다.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를 곧장 마주치지 않도록 살짝 시선을 비꼈다. 당혹해 흔들리는 눈을 보면 숨죽인 욕구가 터질 것 같아서였다. 그는 한손에 잡히는 그녀의 종아리를 쥐고 그의 허리를 감도록 둘렀다. “다리는 이렇게.” 그의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았다. 그녀의 가늘고 긴 다리가 그의 허리를 어설프게 감으며 더듬는 느낌에 그는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체온이 바짝 맞닿고 피부가 스치는 느낌에 하체가 욱신거렸다. 그의 육체가 과도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절대 그의 취향이 아니라 생각했는데. ‘...너무 길었어. ’금욕 기간이 너무 길었다. 결혼 말이 오가고 한 달 넘도록 여자를 안지 않았다. 욕구 불만이 될 만하다. 그는 대단히 신체 건강한 남성이었다. 여자 또는 살육 없이 열흘을 넘겨본 적 없다. 이번 한 달은 기록이었다. 딱히 아내 될 사람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고 한 건 아니었다. 영지 내려갈 준비로 바쁘게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는 그녀의 늘어진 팔을 잡아 그의 어깨를 잡도록 했다. “팔은 날 잡고. 긴장은 풀고 힘을 빼.” 루시아는 마치 닿으면 안 될 것을 만지는 것처럼 몇 번 손을 떼다가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근육으로 덮인 그의 어깨는 단단하면서도 탄력이 느껴졌다. 잘 했다는 듯 그가 웃자 가슴이 쿵쾅거렸다. “당신이 처음이 아니라면 황홀한 밤을 경험하게 될 거라고 약속하지.” 루시아는 귀를 의심했다. 그의 목소리는 지금껏 들어본 중에 가장 부드러웠지만 어쩐지 놀림을 받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처..음이라면요?” 그는 대단히 신선한 농담을 들은 것처럼 재미있어했다. “아마. 좀 아플지도 모르겠군.” 그는 사납게 일어난 중심을 쥐고 그녀의 좁은 입구에 맞추어 천천히 무게를 실었다.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아리한 통증과 이물감에 루시아는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이 정도는 견딜 수 있어. 루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힘 빼. 시작도 안 했어.” 반에 반도 안 들어갔다. 겨우 머리 부분만 밀어 넣었는데 좁은 내실이 틈도 없이 수축했다. 통증에 가까운 쾌감을 느끼며 그는 무작정 밀어 넣지 않기 위해 인내했다. “으..어떻게 하는...” 그는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작은 입술을 빨아들이고 말캉한 혀를 희롱하면서 한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고 부드럽게 애무했다. 굳은 몸이 풀리고 바싹 긴장한 복부가 느슨해졌다. 움직일 수 있는 길이 만들어지자 그는 깊이 안으로 전진했다. 날카로운 통증에 그의 어깨를 꽉 붙든 루시아의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하아..하아...” 루시아는 과호흡처럼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멈출 생각 없이 그는 계속 들어왔다. 서서히 안을 채우던 불덩이가 깊은 곳의 은밀한 막을 찢으며 단번에 들어왔다. “......!!!” 격통. 몸이 둘로 쪼개질 것 같았다. 좀 아픈 것이 아니잖아! 하복부에서 시작된 고통이 순식간에 그녀를 집어삼켰다. 눈앞이 어지럽고 턱이 덜덜 떨렸다. 너무 아프면 비명도 안 나온다는 걸 깨달았다. 아래를 꽉 채우는 압박과 동반한 끔찍한 통증이었다. 하체가 꽉 맞물리고 그의 상체가 위에서 밀착하며 눌러왔다. 몸을 비틀어 벗어나려 해도 꽉 잡힌 몸은 미동도 없었다. 고통을 덜기 위한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고개 옆으로 디딘 그의 팔이 닿자 그대로 콱 깨물었다. 갑작스런 팔의 통증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온전히 그녀에게 몸무게를 다 실어 누르지 않기 위해 디딘 팔을 그녀가 야무지게 깨물고 있었다. 근육으로 덮여 두꺼운 팔을 한 입 가득 문 채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그를 원망스레 노려본다. 그는 인상을 쓰면서 입으로는 웃었다. 가소롭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여자가 제 몸을 깨무는 짓 따위를 용납할 그가 아니지만 내버려 두었다. 통증이 오히려 그를 짜릿하게 자극했다. 그의 정신은 지금 딴 데 팔려 있었다. ‘끝내주는군...’ 여자 안쪽은 환상적으로 좋았다. 단지 좁은 것만이 아니었다. 아주 쫀득하게 그의 것을 눌러온다. ‘처녀라서 그런가..?’그러나 일전에 처녀를 안아봤을 때 딱히 좋지 않았다. 재미가 없어서 하던 중에 기분이 식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 여자는 왜 다를까. 기분이 식기는커녕 그는 날뛰고 싶은 욕구를 참느라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그녀를 만지고 애무하며 느낀 최소의 감상은 ‘작다’는 것이었다. 체구는 작고 뼈대는 가늘었다. 한 손에 쉬 잡힐 것 같은 여자의 목은 조금만 힘을 주어도 부러질 것 같았다. 유리 세공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마음과 흰 피부에 사나운 흔적은 남기고 싶다는 마음이 맹렬하게 싸우는 동안 그는 적당히 그녀와 더불어 기분 좋은 것만 하겠다는 처음 의도와 달리 키스는 너무 길어졌고, 그녀의 온몸을 핥으며 오히려 그가 심취해 버렸으며 손가락을 죄는 그녀의 속살에 그는 흥분해 버렸다. 내 탓이 아니라고, 휴고는 생각했다. 어린 아내가 겁 모르고 그를 충동질한 탓이었다. 무는 것이 힘에 부치는지 그녀는 깨물던 팔을 놓고 훌쩍거렸다. 칭얼대는 것처럼 우는 것이 제법 귀여웠다. 근데 그 모습이 그를 직격으로 자극했다. 그는 지금껏 믿어왔던 자신의 취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어금니를 물고 낮게 숨을 골랐다. 이렇게 흥분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이미 단단히 선 중심이 한계까지 부풀며 그녀의 안쪽 살이 밀착해서 꽉 눌러왔다. 미안한 일이지만 그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상체를 일으키자 두 사람의 사타구니가 완전히 맞닿고 그의 것이 뿌리 끝까지 들어갔다. “흑...” 새로운 충격으로 루시아 몸이 작게 경련했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빼내 성기에 묻어나는 붉은 혈흔을 확인했다. 항상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그의 눈동자에 열기가 어렸다. 다시 안으로 깊이 밀어 넣었다. “아윽!” 비명이 터졌다.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의 표정과 그를 받아들인 몸의 반응이 괴리를 보였다. 빠져나갈 때 마치 잡아 뜯듯이 딸려오는 내벽이 다시 들어가자 쭉 빨아들인다. 질벽의 주름이 도돌도돌한 돌기가 되어 그를 감싸 쥐면서 자극해댔다. 당장이라도 분출할 수 있을 것 같은 강한 쾌감이 뒷목을 서늘하게 했다. “아! 아파요! 움직이지 마요! 제발!” 루시아가 울며 애원하자 그는 그녀 안에 끝까지 자신을 묻은 채 멈추었다. 그는 이 상황에서도 멈출 수 있을 만큼 인내심이 강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그걸 조금도 감탄할 것 같지 않았다. “시작한 이상 끝까지 간다고 했을 텐데.” 힘을 준 그의 팔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아파요. 죽을 것 같다구요.” 울먹거리는 그녀에게 그는 태연함을 가장하여 냉정하게 대꾸했다. “안 죽어. 그랬다면 당신은 태어나지도 못했겠지.” 몹시 억울한 눈을 하는 그녀를 더 놀려주고 싶었다. “당신의 판타지는 충족된 것 아닌가? 소리 지르며 울게 해줬잖아.” 그가 다시 허리를 움직이자 루시아는 그의 말도 안 되는 억지에 항의하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루시아는 몇 번이고 애원했지만 이번에는 그는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속도가 붙었다. “악! 아악!” 사내를 모르는 루시아의 몸이 받아들이기에 그는 거대했고 능란했다. 농염한 여인이라면 자지러졌을 강한 힘은 지금의 루시아에겐 벅찬 고통이었다. 조금 전까지의 부드럽게 온몸에 입을 맞추던 애무가 거짓인 것처럼 그는 잔인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그가 꽉 채우며 강하게 들어올 때마다 숨이 턱 막히고 끔찍한 고통이 뒤따랐다. “아윽! 좀 천..천히잇!” “천천히..하고 있어.” 거짓은 아니었다. 그는 지금 최대한 절제하고 있었다. 아니었으면 진즉 그녀는 기절했을 것이다. 그래도 이럴 의도는 아니었다. 이렇게 거칠게 초야를 치를 생각은 아니었는데 몸이 통제를 따라주지 않았다. 젠장. 대체 이 여자 안쪽은 뭘로 만들어 진거지? 정말 빌어먹을 정도로 좋았다. 결합한 부위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시트를 적셨다. 예민한 그의 코에 비릿한 피냄새가 스쳤다. 정말 그는 반쯤 이성이 날아갔다. 퍽 퍽 그는 강하게 진퇴를 반복했다. “아앙! 악! 흐윽!” 귀가 따갑도록 죽어라 비명을 지으며 울어댄다. 엄살이라기에는 안색이 질려 흔들리는 눈동자가 상당히 아파보였다. 매달리듯이 어깨를 붙드는 작은 손끝이 그의 어깨를 파고들어 따끔한 생채기를 만들었다. 등에 손톱 자국 내는 것. 그가 정말 싫어하는 짓이다. 본래의 그라면 이미 짜증이 나서 여자를 내팽개치고 자리를 떴을 것이다. 헌데 지금은 그럴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붉어진 눈시울을 타고 또르르 흐르는 눈물을 보며 그는 기이한 고양감을 느꼈다. 오직 세상에 그 하나 밖에 없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매달려오는 작고 보드라운 몸을 물고 핥고 엉망으로 만들고 싶었다. ‘아파..’뜨거운 불이 하체를 지지는 것 같았다. 그의 강한 움직임에 따라 몸이 위 아래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예상했던 것과 너무 달랐다. 삽입하고 몇 번 움직이다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고통스럽고 뜨거우며 긴 과정이었다. 아픈 것보다도, 고통이 너무도 은밀하고 깊은 곳에서 일어나면서 실제 눈으로 보지 않아도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 더 힘들었다. 살덩이가 치닫고 올라왔다 빠져나가는 과정이 반복되자 죽을 것 같았던 하체의 통증은 점점 둔해졌다. “하아..하아....” 루시아 입에서 비명은 잦아들고 학학대는 거친 호흡만 쏟아졌다. 여전히 눈은 젖었지만 발갛게 눈가가 달아오르고 고통이 아닌 뭔가 다른 이유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아팠다. 여전히 아프지만..뭔가 이상했다. 갑자기 발끝부터 시작해서 정수리까지 순식간에 찌릿한 느낌이 확 타고 올라갔다. 하악, 비명을 삼킨 순간 그가 낮게 신음했다. “안이..요동을 치는군.” 그는 두 손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누르면서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녀의 작은 꽃샘에서 흐르는 핏물 섞인 애액이 엉덩이 골을 타고 흘러 허벅지를 적시고 그가 진입할 때마다 살이 맞부딪치면서 철썩거리는 소리를 냈다. 맞닿은 그들의 허벅지 안쪽이 핏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아. 흣..” 그녀의 입에서 고통의 비명이 아닌 교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조금씩 방향을 바꿔가며 안쪽을 찔러댔다. 그녀의 신음이 커지는 부분을 찾아내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아! 아앗..” 속살이 경련하면서 죄어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이 울 것처럼 일렁거리는 것을 보면서 그는 단번에 안쪽 깊은 곳을 건드렸다. “흐으윽!” 그녀의 온몸이 한 순간 경직되면서 흐느낌을 터뜨렸다. 그녀의 온몸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사실 아직 만족하기에는 한참을 멀었지만 더 했다가는 그녀가 기절할 것 같았다. 시간(屍姦)하는 악취미는 없으니까. 그는 목 깊은 곳에서 신음을 토해내며 그녀의 자궁 안쪽에 파정했다. 이런. 그는 숨을 몰아쉬면서 인상을 썼다. 여자 몸 안에 쏟은 건 처음이었다. 뜨거운 것이 몸 안 깊은 곳으로 쏟아지는 것을 느끼면서 루시아의 몸이 늘어졌다. 울음과 섞인 호흡이 멈추지 않아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 한다. ‘끝..난 건가..’긴 생각은 이어갈 수 없었다. 커다란 손이 다정하게 이마를 쓸어 올리는 것을 꿈처럼 느끼면서 루시아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 -- 초야 -- >몸이 이불 안으로 푹 꺼져 들어가는 것처럼 피곤했다. 눈을 뜨니 어둠을 막 몰아내는 어스름한 빛이 떠도는 새벽이었다. 옆에서 들려오는 옅은 숨소리는 루시아의 기분을 기이하게 만들었다. ‘그래..나..결혼했지..’목이 말라서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으...” 저절로 신음이 나왔다. 온 몸에서 둥둥 북이 울리는 것 같았다. 낑낑대며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을 딛는 순간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 휘청하면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다행히 아래에 러그가 깔려 있어서 무릎에 충격은 크지 않았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전신 근육이 다 뭉친 것 같은 지독한 근육통이었다. 다리 사이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은근한 통증과 아직도 뭔가 들어있는 것 같은 이물감이 더해져서 그야말로 온몸이 겉으로 속으로 다 아팠다. 손으로 조물조물 어깨와 팔을 주무르다가 루시아는 팔 안쪽에 이상한 자국이 난 것을 발견했다. ‘이게 뭐지?’푸르스름하게 변하고 있는 붉은 멍 자국이었다. ‘왜 이런 곳에 멍이 났지? 언제 부딪쳤었나. ’ 손가락으로 꾹 눌러보니 아프지는 않았다. 그런데 다른 쪽 팔 안쪽에도 비슷한 자국이 또 있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루시아의 기억속에 지난 밤 가슴이 아프도록 빨리던 감각이 떠올랐다. 조심스럽게 허리끈을 푸르고 가슴 앞섶을 열어 보았다. 가슴에도 똑같은 자국이 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다시 가슴을 여몄다. 얼굴로 열기가 올라 두 손으로 감쌌다. ‘아아아. 못살아, 못살아. 난 몰라. 어떡해. ’부끄러움이 밀물처럼 그녀를 삼켰다. 키스 한 번에 콩닥거리던 자신이 얼마나 한심했는지. 그보다 더 어마어마한 일들이 고작 하룻밤 사이에 일어났다. ‘이런 거야? 이런 거였어?’ 진짜 정사를 처음 경험했다. 꿈속에서 남편이었던 메튼 백작은 발기부전이었다. 무작정 루시아 하초에 문지르며 저 혼자 헐떡이며 몇 번 흔들다가 끝냈다. 소름이 끼쳤다. 도무지 왜 이 짓을 하는 걸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루한 활자로 얻은 지식이라 비웃던 그의 말을 이해했다. 어젯밤과 같은 경험은 결코 책으로는 알 수 없었다. 그건 단지 쾌감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훨씬 은밀하고 서로의 깊은 살이 맞닿는 행위였다. ‘어떻게 이런 걸 하고..헤어질 수가 있지? 이혼 같은 걸 할 수 있는 거야?’그건 대화였다. 오직 함께 한 두 사람만 나눌 수 있는 진한 대화. 신기하게도 그 전까지 딴 세상사람 같던 그가 오늘 아침에는 조금 가깝게 느껴졌다. ‘조금..아니 정말 아팠지만...’또 그걸 하자고 하면 싫다고 못할 것 같다. 분명 무지무지 아팠는데 근데 또 아프기만 한 것만도 아니었다. 커다란 몸 아래 눌리는 감각, 손이 피부를 쓸어내리고 입 맞추던 느낌, 그의 호흡소리와 붉은 눈동자에 흔들리던 열기. 해일처럼 온몸으로 밀려들어오던 그건..그걸 쾌감이라고 하는 건가..? 간밤 기억을 떠올리자 오싹하면서 허벅지 안쪽이 열이 났다. ‘그만!! 그만 생각해! 다른 생각, 다른 생각, 다른 생각..’루시아는 머리를 마구 좌우로 흔들며 생각을 털어내려고 애썼다. ‘내가 잠옷을 찾아 입었던가..?’그런 기억은 없었다. 그가 입혀 준 걸까, 하녀를 시켰을까. 땀을 꽤 흘린 것 같은데 몸이 보송보송했다. 루시아는 멍하게 저 멀리 보이는 침실 출입문을 응시했다. 정말 넓고 사치스러운 침실이었다. 높은 천장, 대리석 기둥, 고풍스러운 내부 장식. ‘난 어쩌면..엄청난 짓을 저지른 것인지도 몰라. ’공작가 일원이 되어 공작부인으로 살아갈 자격이, 능력이 과연 자신에게 있을까. 감당할 수 없는 것을 탐낸 대가를 언젠가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후회는..안 해. ’안 할 거라고 결심했다. 어떤 결과가 있더라도 감당하겠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치르겠다. 우는 소리 하지 않겠다. 침대에 누워 있는 휴고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생기며 눈을 떴다. 이미 아까부터 잠에서 깨 있던 그의 눈동자는 또렷하게 초점이 잡혔다. 기척에 예민한 그는 루시아가 끙끙대며 일어날 때부터 깨어 있었다. ‘대체 뭘 하는 건지. ’침대 아래로 털썩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이후 조용했다. 그는 이불을 걷어내며 일어나 침대를 내려가 빙 둘러 루시아 뒤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는 침대를 붙들고 일어나려고 낑낑거렸다. 도무지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다. 그는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다가가 조심스럽게 안아들었다. “어...” 돌아보는 호박색 눈동자가 크게 떠져서 텅 빈 침대 위와 그를 번갈아 왔다 갔다 했다. “잠버릇이 험하군. 이 넓은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다니.” 잠에서 깬 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도 근사하다, 잠시 넋 놓았던 루시아는 재빨리 정신을 챙겼다. “아...아니에요!” 그의 단단한 팔이 감싼 부근에 후끈 열이 날 것 같아서 루시아는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기는커녕 오히려 루시아가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느끼고 버둥거리기를 포기했다. “그럼 몽유병인가?” “물을 마시려고 일어나다가-” 루시아는 어쩐지 조금 민망해서 고개를 숙이고 작게 중얼거렸다. “걷는 게..좀 힘들어서..” 머리 위에서 작게 그의 한숨이 흘렀다. 성큼 그가 걸음을 옮겼다. 침대 밑에 둥글게 깔린 러그가 끝나는 근처에 벗어둔 슬리퍼를 신고 걷자 버적버적 소리가 났다. ‘아..어제 유리컵을 깨뜨렸지..’ 잊고 있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아마 맨발로 걷다가 유리조각을 밟았을 것이다. 그는 테이블 앞에 멈추어 가볍게 루시아를 한 팔만으로 안아 들고 물을 따른 유리잔을 건네주었다. “이번에는 떨어뜨리지 마.” “...네” 그는 자꾸 자신을 놀려댔다. 칫, 입 안으로 투덜거리며 물잔을 받았다. 그가 덩치만큼 힘도 세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그는 루시아를 마치 어린 아이처럼 가볍게 다루고 있었다. 한 팔로만 엉덩이와 허벅지를 받쳐 들고 있는데 굉장히 안정감이 있었다. “감사..해요.” 빈 잔을 받아 다시 테이블로 내려놓으며 그가 말했다. “다른 건?” “...네?” “화장실도 데려다줄까?” “아뇨!!” 루시아는 얼굴을 붉히며 바락 소리쳤다. 마주친 그의 붉은 눈이 어쩐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짙은 검은 머리카락이 평소에 정갈하게 정리된 것과 다르게 제멋대로 흐트러져 있는 것이 신기했다. 루시아는 손을 들어 흘러내린 그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의 미간이 살짝 꿈틀했다. 얼떨결에 한 행동이라 조금 부끄럽고 어쩐지 집요한 그의 시선이 버거웠다. 고개를 숙인 루시아는 흠칫했다. 가슴이 반쯤 드러나 유륜이 살짝 보였다. 아까 풀고 대충 느슨히 묶었던 허리끈이 풀어져 있었다. 귓가가 후끈거렸다. 루시아는 재빨리 앞섶을 잡아당겨 가슴을 여미려 했다. 그러나 그가 안고 있는 손에 옷자락이 밀려 잡혔는지 힘을 주어도 가려지지 않았다. “흡-” 그의 손이 덥석 가슴을 쥐었다. 놀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붉은 눈에 사로잡혀 루시아는 그대로 꼼짝할 수가 없었다. 뚫어지게 루시아를 응시하는 그의 붉은 눈동자가 갑자기 짙어지는 변화를 목도했다. 가슴은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 강하게 움켜잡자 루시아는 헉, 비명을 질렀다. 그는 루시아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대로 가슴을 한 입에 삼켰다. “아!” 짜릿한 느낌이 등을 타고 흘렀다. 그의 입술이 가슴 둔덕을 삼키고 혀가 유두를 간질였다. 이로 살짝 유두를 물고 혀끝이 유두 끝으로 파고들었다. “아! 하악!” 테이블에 눕혀져서 루시아는 두 손으로 그의 어깨 옷자락을 움켜잡고 그가 주는 자극에 몸을 떨었다. 그는 집요하게 두 가슴을 탐했다. 핥고 물고 빨며 쉴 새 없이 괴롭혔다. 그가 가슴을 빨며 나는 쪽쪽거리는 소리가 너무 민망했지만 몸이 뜨거워졌다. 허리끈이 풀려 바닥에 떨어지고 잠옷은 테이블 위에 펼쳐졌다. 순식간에 나신이 되고 오므리는 무릎을 열며 그의 다리 하나가 들어왔다. 다리 안쪽을 파고드는 그의 손이 음부를 문지르더니 안쪽으로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으읏...” 아리한 통증에 절로 신음이 나왔다. 그의 거대한 흉기에 상처 입은 그녀의 연약한 살이 아직 아물지 않았다고 고통을 호소했다. 그러나 그의 손가락이 몇 번 들어오고 빠져나가자 애액이 흘러 야한 소리를 냈다. 덕분에 통증이 조금 덜해졌다. “아픈가?” 루시아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간절하게 그를 보며 울상을 지었다. 아파요. 못하겠어요. 눈빛으로 애원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그보다 거대하고 뜨거운 것이 안쪽에 닿자 루시아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단단한 그의 중심이 연약한 살을 헤집으며 밀고 들어오는 순간 울음을 터뜨렸다. “쉬이...” 그는 달래듯 다정한 척 눈시울에 입을 맞추면서 더 깊게 밀고 들어왔다. “으흑..” 어제 밤 처음 그가 그녀의 생살을 찢고 들어올 때와는 또 다른 고통이었다. 속살이 쓰라리고 근육통으로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눈물이 눈시울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무게를 실어 습한 그녀의 속살을 파고들면서 테이블을 디딘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정말. ..기가 막히게 좋은 맛이었다. 착 달라붙는 속살이 그를 짜릿하게 자극했다. 입안에서 단맛이 도는 것 같은 느낌에 그가 혀로 살짝 제 입술을 핥았다. ‘사람..미치게 하는군. ’여자의 눈물, 표정, 끅끅대는 울음, 비명, 달콤한 체향에 부드러운 피부, 순진한 반응과 그의 것을 콱 물고 죄는 속살까지. 그녀의 모든 것이 그를 흥분시켰다. 그는 피냄새를 맡은 뱀파이어가 된 것처럼 갈증이 났다. 그의 안에 숨어 있는 야수가 당장 여자를 거칠게 범하고 성이 찰 때까지 취하라고 으르렁거렸다. ‘안 돼. ’본능대로 날뛰었다가는 한줌밖에 안 되는 이 여자는 죽는다. 어린 아내는 조금만 세게 잡아도 부서질 것처럼 작고 약한데다 아직 사내를 받아들이는데 익숙하지 못했다. 결혼 첫날 아내를 죽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가 우는 루시아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작은 입 안에 혀를 넣어 샅샅이 그녀의 입 안을 탐색했다. 그러면서 고조된 기분을 가라앉히고 날아간 이성을 가까스로 되돌렸다. 길게 이어진 키스는 루시아가 숨을 헐떡일 무렵에야 끝났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그가 천천히 빠져나가는 묵직한 감각에 루시아는 신음했다. 아직 끝난 건 아니라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가 루시아의 흐트러진 차림새를 정리해 주고 안아 들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루시아를 침대에 눕혀주었다. 루시아는 눈을 데구르르 굴리며 숨죽이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쉬워?” 루시아가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안 건드릴 테니까 자.” 루시아는 눈에 띄게 안도하며 느슨하게 몸을 이완시켰다. 그걸 보며 휴고는 쓴웃음을 삼켰다. ‘어린애군. ’한숨이 나왔다. 제 신세가 우습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했다. 단단히 성나 풀지 못한 중심이 아팠다. 가라앉게 내버려 두자니 시간이 걸려 괴롭겠고, 혼자 풀자니 그건 또 짜증나고. 그는 자위를 해본 적이 없었다. 여자가 부족한 적 없으니 욕구불만 될 일이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한숨 쉬는 그의 얼굴을 훔쳐보며 루시아는 감탄하고 있었다. 좀 더 사위가 밝아져서 잘 보이는 그는 확실히 손꼽을만한 미남이었다. 조각처럼 떨어지는 얼굴선에 좌우대칭 완벽하게 조화로운 이목구비. 곧게 뻗은 콧대와 날카로운 눈매. 뭐 하나 처지는 구석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타란 공작 앞에 ‘미남’이라는 수식어는 붙이지 않았다. ‘표정..때문인가..’그의 표정은 언제나 무심하고 차가웠다. 눈빛에서도 감정을 읽을 수 없다. 그의 기분이 좋은지 아닌지 조차도 그의 얼굴을 보고 짐작할 수 없다. 기사로서 무위가 소문으로 더해져 그는 굉장히 무시무시한 존재로 부상하여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그는 일어나더니 훌쩍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를 기어코 화장실로 가게 만든 장본인이 자신임은 생각도 못하고 루시아는 그저 눈호강 시켜주던 잘 생긴 얼굴이 사라지자 아쉬워했다. ‘왜 나와 결혼한 걸까..’모르겠다. 지금 와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얼마든지 루시아에게 제안한 조건들을 달고 여자를 골라 결혼할 수 있었다. 그 때는 그게 최선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앞뒤가 안 맞고 허술했다. 그는 이 결혼을 농담으로 비웃으며 거절했어야 하는 것이 옳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그는 심기가 불편했다. 결국 혼자 빼긴 했는데 만족은커녕 찜찜하기만 했다. 왜 여자를, 그것도 결혼한 아내를 옆에 두고 이 짓을 해야 하나. 언제부터 그렇게 신사처럼 굴었다고 답지않게 배려한답시고 이러고 있나 부글부글 속을 끓이며 침대로 왔다. 여직 잠들지 않고 데굴데굴 굴리던 호박색 눈동자가 자신에게 닿자 그는 짜증이 솟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만으로는 그의 복잡한 심사를 알 수 없었다. 가면을 쓴 것처럼 여전히 무심하고 서늘했으니까. “아직 안자고 있었나? 자두지 않으면 힘이 부칠텐데. 몇 시간 후에는 영지로 출발할거고 마차여행은 만만하지 않아.” “일정에 방해될 일 없을 거예요. 염려마세요.” 그의 눈길이 야무진 대답을 하는 루시아를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걷지도 못하면서?” < -- 초야 -- >루시아가 새치름하게 입술을 내밀고 그를 빤히 쳐다보자 그가 입모양으로 왜? 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또 하려고 했잖아요.” 순간 허를 찔린 표정을 짓던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 못 걷는 건 내 탓이란 소리군.” “...못 걷는 건 아니에요. 느낌이..좀 이상해서 그런거지...” “아침에 의사를 부를게.” “네?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루시아는 화들짝 놀랐다. 이 민망한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라고? 아무리 의사라 해도 그건 싫었다. 루시아는 자신의 건재함을 증명하려는 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가 근육의 결림과 하체의 찌르르한 통증에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금세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그녀를 보며 그는 쯧, 혀를 차고 침대에 걸터앉아 루시아 어깨를 잡아 부드럽게 다시 침대로 눕혔다. “힘들 것 같으면 확실히 말해. 내가 보기엔 오늘 떠나는 건 무리일 것 같으니까.” “전 정말 괜찮아요. 저 때문에 일정을 바꾸지 마세요.” “최소 사나흘은 마차를 타고 가야 해. 가는 길에 들를 수 있는 마을은 아마 없을 것이고. 내내 마차 안에서 지내야 할텐데 할 수 있겠다는 건가?” “네. 정말 괜찮아요.”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군.” 자신이 한 말은 책임을 져야 한다. 전부 할 수 있을 것처럼 큰 소리 쳐 놓고 나중에 변명을 늘어놓는 태도는 곤란했다.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힘에 부친다고 솔직히 밝히면 미리 예방책을 세울 수 있다. 나중에 어쩔 수 없었다고 물러서면 미리 조치할 수 있는 기회마저도 날려버리는 것이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괜찮아요, 전 걱정 마세요 말해놓고 나중에 가서 그 때 그 말을 그런 뜻이 아니었다, 왜 알아주지 않느냐 투정부리면 그는 그 자리에서 이별을 통보했다. 속에 쌓아두는 자는 꼭 뒤통수를 치기 마련이었다. “고집이 아니라..영지에 대단히 급박한 일이 있는 거잖아요. 제 몸이 조금 불편해도 참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싸늘해졌던 그의 표정에 금이 갔다. 영지의 급박한 사정. 확실히 그런 이유로 그는 약식으로 결혼식을 대체했다. 그 부분을 그녀와 정확히 이야기 나눈 것은 아니지만, 결혼은 약식으로 하고 끝나자마자 영지로 가고.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차마 그녀 면전에, 귀찮아서 그런 거지 영지에는 별 일 없다 말할 수가 없었다. 겸연쩍음을 감추느라 그의 목소리가 조금 친절해졌다. “..며칠 상간에 큰 일이 벌어질 정도로 급한 건 아니야. 오늘 아침에 출발하는 건 미루도록 하지.” 생각보다 이 남자, 고압적이나 냉랭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든 무시하지도 않고 대화를 나누는데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알면 알수록 그를 더 모를 것 같았다. 나쁜 사람은 아닌데 좋은 사람도 아니고. 이런 사람인가, 싶으면 저런 사람 같고. “하나만..여쭤 봐도 되요?” “안 돼. 어서 자.” “영지에서 급한 일 끝나면 바로 수도로 올라오실 거예요?” 이 여자가 진짜. 그가 서늘하게 쳐다봤으나 기가 죽은 표정이 아니었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부터 그를 대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얌전한 듯, 하고 싶은 말은 다 한다. 정말 성가시면 무시해 버리면 그만인데 꼬박꼬박 다 대꾸해 주는 자신도 이상했다. “한 동안 머물며 할 일이 많아. 언제 다시 수도로 올지 아직 예정이 없어.” 태자에게는 2년만 있다 올 거라고 말은 했어도 그의 계획 속에 그건 확정 기간이 아니었다. 얼마든지 더 길어질 수 있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그러니까..태자 전하께서 흔쾌히 그러라고 하시나요?” 예상 못한 질문이었다. 휴고는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가 태자와 같은 편에 서 있기는 했어도 아직 그가 태자를 위해 뭔가 적극적으로 한 건 없었다. 그에게 대놓고 그런 관계를 확정지어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특히 여자가. 이 여자가 권력에 관심 있나? 일단 그는 기억해 두었다. “흔쾌히는 아니었지.” 퀘이즈는 온갖 협박과 감언이설로 휴고를 꾀려 했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딱히 자리 지키고 있지 않아도 북부는 잘 굴러가도록 오랜 세월로 축적된 빈틈없는 행정체계를 갖추고 있지만 누가 주인인지 확실히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일단 결정 내리면..바꾸지 않으시는 군요.” 그의 한 가지 모습만은 뚜렷이 눈에 잡혔다. 일단 결정하면 흔들림 없이 신속히 추진한다. 서류에 서명한 날로부터 식이 치러질 때까지 고작 한 달이었다. 정말 쉴 새 없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 그야말로 정신을 차려보니 결혼 증서에 서명하고 있었다. “결정한 후 후회하신 적은 없으세요?” 그의 침묵이 따가웠다. “..주제넘은 질문이었다면..” “없어. 내 손 떠난 건 미련두지 않아. 되돌릴 수 없는 일을 붙잡고 있는 건 쓸데없으니까.” 그렇구나. 가슴이 싸하게 저려왔다. 버리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겠구나. 일이든, 사람이든, 여자든. 강하고 오만한 남자. 꿈속에서 봤던 그도 그랬다. 그는 늘 당당했고, 사람들의 경외를 당연한 듯 받았다. 그를 많이 동경했다. 다가가 말 한마디 붙이지 것도 허락되지 못한 처지라 멀리서 훔쳐보기만 했다. 자각하지 못했지만 아마 꿈속의 첫사랑은 이 남자였던 것 같다. 그래서 이 남자가 이렇게 손닿을 곳에 가까이 있다는 것이 경이롭다. 그의 아내가 되었고, 그의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맑은 눈이군. ’자신을 응시하는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를 보며 든 생각이었다. 그녀의 눈 속에는 욕망, 경외, 두려움, 평소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품는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여자들이 그의 아래 누워 그가 주는 권력과 재물과 쾌락에 취해 그를 유혹했다. 어떤 여자도 이렇게 맑은 눈으로 그를 본 적 없었다. 그녀가 독특한 건 성장환경이 남다르기 때문인가. 대개의 왕족처럼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부족함 없이 자랐다면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었을까. 어쩌면 어려서 평민들과 자란 것도 영향이 있을 지 모른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녀의 맑은 눈은 언젠가 추한 욕망으로 얼룩질 것이다. 그녀가 순수할 수 있는 것은 아직 더러움을 접하지 않아서일 뿐이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늦게 세상에 발을 디딘 것이다. 아둔한 여자 같지는 않으니 성가시게 굴지는 않을 테고, 덤으로 속궁합도 꽤, 솔직히 꽤 좋은 정도가 아니라 기가 막히게 좋았다. 급하게 해치운 결혼 치고 이 정도면 양호했다. “아무래도 내가 없어야 자겠어.” “전하께서는요? 더 안 주무세요?” “평소 기상시간이야.” “이렇게..일찍이요?” 메튼 백작은 항상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일어났다. 아마 평생 새벽 아침은 한 번도 보지 못한 건 아닐까 의심되는 인사였다. 그렇지만 메튼 백작이 유난히 게을러서가 아니었다. 대개 귀족들은 자정 넘어 취침하고 느지막한 아침에 일어났다. 무도회나 각종 모임이 대개 저녁 늦게 있기 때문이다. “침대에서는 전하 소리 하지 말랬지.” “...네. 쉽게..안 나오네요. 입에 안 붙어서 그런가..” 딴 여자들은 이름을 부르고 싶어서 안달을 했는데. 이 여자, 은근히 쉽지 않았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도 그의 몸에 손을 대는 등의 친밀한 접촉을 전혀 하지 않았다. 같이 밤을 보내고 나면 여자들은 늘 그에게 엉겨 붙었다. ‘어젯밤이 별로였나? 조금 전엔 괜히 건드렸나?’다른 여자들과 다르긴 했다. 다른 여자들은 그렇게 아파하며 울진 않았으니까.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의심해 본 적 없는 자신의 자부심을 점검해보기 시작했다. “비비안.” 그는 결코 속에 말을 담아두는 편이 아니지만 순진한 눈으로 말갛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초야의 감상은 어땠지? 물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녀의 입에서 나올 대답이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봐도 이 여자는 남자의 자존심을 위해 별로인 것을 ‘좋아요’라고 말해줄 것 같지가 않았다. “...내 이름보다도, 당신 이름을 부를 때 놀라지 않는 연습 먼저 해. 아니면 내가 부르는 게 싫어?” “.... 이름. 불편해요. 그 이름..” “안부를 수는 없잖아.” “다른 호칭도 있잖아요.” “다른 호칭? 다른 호칭이라. ..부인? 여보? 자기? 내 사랑? 귀염둥이?” 루시아 얼굴이 벌개졌다. 어떻게 저런 말이 저렇게 자연스럽게 저 남자 입에서 나올 수가 있지? “골라봐.”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노려보고만 있자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평범한 건 안 좋아하는 모양이군. 나의 햇살 이라든가, 영혼의 반쪽 이라든가.” “이름요! 그냥 이름으로 부르세요.” “음. 아무래도 나도 그게 나은 거 같아. 비비안.” 씨익 웃는 그를 보는 루시아 표정은 부루퉁했다. 역시 바람둥이가 맞긴 맞구나. 결혼했다고 그가 성실할 거라고 전혀 기대가 되지 않았다. 꿈속에서 그는 결혼 후에 공식적 애인은 없었지만 분명 숨겨둔 여자는 있었을 거다. “여기까지. 어서 자.” “근데요.” “비비안!” 루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나 참, 그가 중얼거리면서 즐겁게 웃는 그녀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평소 몇 시간이나 주무세요?” “서 너 시간쯤.” “매일이요??” “가끔은 한 두 시간만 눈을 붙일 때도 있고.” 루시아는 놀라 입을 쩍 벌렸다. 공작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이렇게 부지런한 사람이나 가능한 자리였다. “...죄송해요. 전 아무래도 못하겠어요. 하루 서너 시간만 자면 죽을지도 몰라요.” “.... 언제 당신보고도 그러라고 했나?” “전하..휴..당신이 그러시는데 공작부인으로서 제가 늦잠을 잘 수는..” 그는 재미있어 하는 것인지 어이없어 하는 것인지 낮은 헛웃음을 흘렸다. “가상하지만 그럴 필요 없어. 지금부터 입 다물고 자.” 그의 손이 루시아의 눈을 덮었다. 커다란 손에 거의 얼굴이 다 가려졌다. 그는 여자의 수다를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그녀의 재잘거림은 이상하게 거슬리지 않았다. 오히려 꽤 듣기 좋은 목소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귀찮게 해드려 죄송해요.” “.....” 귀찮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어두워진 시야 속에서 루시아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곧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색색 들리는 숨소리에 손을 치우자 그새 잠든 그녀를 보며 그는 피식 웃었다. 평화롭게 자고 있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일어났다. 그러나 다시 앉아 그녀 쪽으로 몸을 숙였다.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에 입을 맞추고 보드라운 날숨을 들이 삼켰다. 말랑거리는 아랫입술을 살짝 빨아들이면서 혀끝으로 핥았다. 몸을 일으키는 그의 표정이 어쩐지 복잡했다. 침실이 아닌 응접실에서 제롬과 하인 셋이 대기하고 있었다. 침실에는 공작가 안주인이 들어 계시니 감히 들어갈 수 없었다. 전(前) 공작부인이 세상을 뜬 날 이후 사라졌던 금남구역이 새로운 안주인의 등장으로 비로소 부활한 것이다. 목욕을 마친 휴고가 나오자 세 하인이 신속히 움직였다. 수건으로 주인 몸의 물기를 닦고 가운을 벗겨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왔다. 주인의 팔에 동그랗게 잇자국과 어깨에 붉은 생채기 흔적이 있으나 누구도 눈길조차 주지 않고 빠르게 옷으로 감추어졌다. 세 하인은 마치 한 몸인 것처럼 호흡이 척척 맞았다. 제일 어린 막내가 17살로 셋은 형제였다. 빈민굴에서 살던 가족 모두가 돌림병을 앓아 형제 셋만 살아남았다. 병 때문에 목소리를 잃은 고아가 된 3형제를 제롬이 거두어 교육시켰다. 기본적인 머리가 있고 성실한 3형제는 제롬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이제 더 이상 가르침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일에 능숙해졌다. “출발 준비는 완료되었습니다. 떠나기 전 최종 점검을 다시 하겠습니다.” “출발은 내일로 미룬다.” “예. 전하. 어제 저녁에 되돌려 보냈던 궁에서 나온 시종이 늦게 다시 방문했습니다. 전하께서 주무신다 하였더니 오늘 아침 다시 오겠다 했습니다.” 퀘이즈는 끈질겼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 아마 영지로 내려가도 매일같이 어서 수도로 오라고 징징거리는 서신을 보낼 것이 뻔했다. “오면 돌려보낼 것 없이 데려와. 궁에 다녀와야겠다.” 시간이 남았으니 얼굴 보며 달래야겠다. 차기 왕위를 둔 치열한 다툼이 물밑으로 벌어지는 상황이었다. 태자는 태자라는 이유로 1차 목표 대상이었다. 태자 말에 의하면 쥐뿔도 누리는 건 없으면서 표적만 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그가 영지로 내려가는 건 퀘이즈가 많이 양보한 덕인 것은 분명했다. “다녀올 동안 의사 불러.” 지금껏 공작은 단 한 번도 의사를 찾은 적 없었다. 오죽하면 타란 공작가에서 제일 한가한 사람이 주치의라고 했을까. 그래서 의사를 부른 목적이 공작 자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마님께서 편찮으십니까?” “아니다. 부를 것 없고, 공주가 일어나면 물어봐서 필요하다고 하면 부르도록 해.” 공작은 덧붙였다. “여의사로.” “..예. 전하.” 여의사? 제롬 두뇌가 팽그르르 돌아갔다. 왜 갑자기 여의사 타령인지 주인의 숨은 뜻은 좀 더 차분하게 생각해 보기로 하고, 어디서 여의사를 찾을지를 고민했다. 미리부터 실력 있는 여의사를 물색해 놔야겠다. “전하. 파비안입니다.” 문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휴고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파비안이 출근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급한 소식 치고 좋은 일은 없는 법이다. 들어오라는 대답에 파비안이 들어와 예를 올리고 서신을 내밀었다. “북부에서 온 급전입니다.” 서신을 펼쳐 내용을 살피는 휴고 안색이 가라앉았다. 말이 씨가 된 건가. 정말로 영지에서 일이 터졌다. 주인이 오래 자리를 비운 부작용이었다. 머리 검은 짐승은 주인이라는 것을 알려줘도 가끔씩 밟아주지 않으면 멍청하게도 그 사실을 잊곤 한다. 오히려 야만족이 그런 점에서는 신뢰할 만 했다. 확실히 공포를 각인시키면 딴 생각은 하지 못하니까. “기어오르지만 않으면 나는 꽤 너그러운 편 아닌가?” 그의 낮은 중얼거림에 분위기가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제롬과 파비안은 입을 꽉 다물고 주인 눈치를 살폈다. 대답을 기대해 묻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파비안. 지금 바로 북부 전역에 내가 방문할 것이라 전해라. 이 기회에 쭉 돌아봐야겠군.” “하오나 그랬다가는.” “상관없다. 얼마나 발악할지 기대되는군. 기왕이면 날뛰어줬으면 좋겠어. 그래야 밟는 재미도 있지.” “예. 전하.” 파비안은 깔끔하게 대답하고 물러갔다. “제롬. 나는 곧장 출발하겠다. 넌 마님을 모시고 오도록. 굳이 서둘러 올 필요는 없다.” “예. 전하.” 제롬은 바로 걸음을 옮겨 밖으로 향하는 공작의 뒤를 따랐다. 말 위에 오른 휴고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 “타란의 안주인이다. 예를 다해라.” “명심 거행하겠습니다. 전하.” 박차를 가하며 휴고를 태운 백마는 순식간에 달려 나갔다. 그 곁을 수행하는 기사들이 뒤따랐다. 그들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돌아선 제롬이 다시 한 번 공작이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타란의 안주인.” 공작이 별 대단한 말을 한 건 아니었다. 안주인께 예를 다 해라. 당연한 말을 했다. 근데 그 당연한 말이 휴고 타란 공작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심상치가 않았다. 공작은 절대 다른 사람을 챙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겉치레를 하느니 아예 안 하는 사람이다. ‘별 의미 없이 하신 말씀에 내가 의미를 두는 건가. ’두고 보면 알 일이었다. < -- 북부 -- >휴고가 저택을 떠나고 얼마 후 루시아는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잠에서 깼다.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켜 앉아 줄을 당겨 하녀를 불렀다. 어제 마신 와인 한 병의 후유증으로 위가 약간 쓰렸다. 마치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처럼 하녀는 금방 달려왔다. “일어나셨습니까. 마님.” “화장실..가고 싶은데 좀 도와주게.” 루시아는 하녀 부축을 받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발을 바닥에 내딛는 순간 다리 사이 안쪽이 아리하게 아파와서 인상을 썼다. “많이 편찮으십니까? 의사를 부를까요?” 루시아는 순간적으로 옆에서 부축해 주고 있는 하녀의 표정을 살폈다. 하녀의 말투는 사무적이었지만 그 안에 마치 ‘네가 어디가 아프고 왜 아픈지 알고 있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격지심이었는지 하녀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덤덤했다. 하녀가 나이 지긋한 중년인이라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스물 초반의 어린 하녀였으면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몹시 불편할 것 같았다. 루시아는 하녀들의 생활과 습성을 잘 알고 있었다. 주인 앞에서는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도, 다양한 감정을 표정에 드러내는 것도 금하도록 교육받지만 그건 주인 앞에서일 뿐, 뒤에서 저들끼리 있을 때는 웃고 떠드는 보통의 사람이었다. 하녀들은 숙식까지 고용주 집에서 해결하기 때문에 행동반경이 한정되고 시야가 좁았다. 자연히 그들의 관심은 고용주 가족에게 집중되었다. 주인의 말 한 마디, 행동, 소소하게 일어나는 일들은 반복적 하루를 보내는 하녀들에게 이벤트였다. 루시아는 하녀로 있을 때 묵묵히 일만 하는 편이었다. 입이 무겁고 성실한 루시아는 마님의 눈에 들었다. 오래 일한 하녀들을 제치고 파티까지 따라다니는 시중을 들게 되었다. 주인마님을 측근에서 모시게 되자 다른 하녀들이 세모눈을 하고 루시아를 따돌렸다. 루시아가 속살거리는 성격이었다면 마님에게 고자질해서 하녀들을 혼쭐내거나 하녀들을 휘어잡아 알량한 권력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그녀는 그냥 맡은 일만 열심히 했다. 인간의 속성은 그러면 고마워하기는커녕 더 우습게 본다. 그래도 루시아는 그런 일로 상처받지 않았다. 쓸데없이 파르르 하는 그들이 한심하기만 했다. 아무튼 루시아는 하녀들과 거의 친해지지 못해서 자기들끼리 깔깔거리는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다. 대충 분위기로 파악하면 별로 고상한 대화는 아니었다. 특히 주인부부가 한 침실을 쓰고 난 다음 날 그네들의 수다가 더 생기를 띄었다. 저들끼리 무슨 말을 하다가 까르르 웃는 것이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공작가 하녀들이라고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이 사석에서 자기들끼리 무슨 얘기를 하든, 그것이 직접 그녀의 귀에 들어오거나,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는다면 뭐라 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런 뒷사정을 잘 아는 바람에 그런 점까지도 저절로 신경 쓰게 되는 것이 좀 피곤할 뿐. “..아니. 조금 도와주기만 하면 돼. 그리고 어제 내가 유리잔을 떨어뜨려 깨뜨렸는데.” “모두 치웠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꼭 슬리퍼를 신으십시오.” 하녀들이 왔다갔다하며 청소하는 기척도 모르고 잤다. 아마 반쯤은 기절했는지도 모르겠다. 느릿느릿 걸음을 떼며 화장실을 다녀와서 다시 침대로 향하는 길에 문득 창밖으로 시선을 주며 걸음을 멈추었다. 옆에서 도와주던 하녀도 얌전히 멈추어 섰다. 발코니로 이어진 굳게 닫힌 창밖으로는 널찍한 저택의 뜰이 펼쳐져 있었다. 정말 넓긴 넓구나, 별 생각 없이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저 멀리서 저택을 향해 맹렬히 달려오는 뭔가를 발견했다. ‘로이..크로틴..?’마치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씩씩대며 달려오는 꼴이 점점 선명해졌다. 아침부터 무슨 일일까. 딱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데. “전하께서는 어디 계시지?” “새벽 일찍 북부로 떠나셨습니다.” “...안 계시다고?” “그 일에 관해서 마님께서 기침하시면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 집사가 마님을 뵈려 기다리고 있습니다.” “들어오라고 하지 왜.” “여기는 들어 올 수 없어서...” “아...” 남편과 함께 있는 중이 아니라면 귀부인의 침실은 금남구역이었다. 불륜에 관대한 제논이지만 집안 침실로 사내를 끌어들이는 일만은 용납하지 않았다. 현장을 들켰다가는 위자료 한 푼 받지 못하고 이혼 당해 쫓겨나도 항변하지 못했다. 정원은 되고 침실은 왜 안 되는데? 좀 우스운 관습이었다. 지난 번 전쟁으로 적국이었던 나라 중에는 제논을 문란한 나라라고 손가락질하는 곳이 있었다. 국가와 왕실을 모욕했다고 제논은 공개적 서한으로 맹렬하게 항의하며 물고 늘어져 결국 사과를 받긴 했지만. 글쎄. ..루시아는 딱히 그게 틀린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 떠나기로 한 건 어찌 되었나?” “주인님 명으로 일정은 내일로 미루었습니다.” “그럼 당장 급한 건 아니겠네. 집사를 보는 건 나중에 하지. 조금 더 자고 나서.” 하녀에게 꿀물 한 잔 가져오라고 해서 마신 후 다시 침대로 누워 눈을 감았다. 조금 전 봤던 로이의 잔상이 어른거렸다. 그는 저택에 없다는데 무슨 일일까. 깊이 생각하는 것도 귀찮았다. 루시아는 곧 다시 잠이 들었다.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다고!!” 아침부터 들이닥쳐 펄쩍 펄쩍 뛰는 로이의 발광을 딘은 대단히 대수롭지 않은 낯빛으로 구경했다. 붉은 머리카락은 마치 불이 붙은 것처럼 들썩거렸다. 워낙 많이 봐서 이젠 구경거리도 아니었다. “태자 전하는 어쩌고 왔어?” “알 게 뭐야! 난 아직 그거 한다고 대답 안 했다고!” 휴고는 수도를 떠나는 대신 태자 곁에 밑을 만한 호위를 붙여 주기로 약속했고, 로이를 간택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이긴 했지만 실력만큼은 누구도 따를 자 없었다. 아직까지 로이를 상대할 수 있는 무력을 갖춘 기사는 휴고만이 유일했다. 로이의 의사 따위는 상관없었다. 휴고는 늘 하던 대로 ‘해’ 명령했고, 재고해달라는 로이의 대답을 무시했다. 못한다고 바닥에 드러누웠다가 휴고에게 늘씬하게 두들겨 맞고 입이 댓 발은 튀어나와 호위를 시작한 것이 이틀 전 밤. 그래도 여전히 로이는 어떻게 하면 이 일을 그만둘 수 있을까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침에 공작이 보낸 사람 편으로 태자에게 서신이 도착했다. 태자를 측근 호위중인 로이는 어깨 너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간략한 설명으로 북부에 일이 생겨 급히 떠난다고 쓰여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로이는 기겁을 해서 달려왔지만 이미 공작은 떠난 뒤였다. “주군께서 이미 하라고 명하신 일이야. 어서 돌아가는 게 좋을걸. 호위 대상 곁을 비우면 안 되지.” “우이씨! 북부에서 일이 생겼다잖아! 그 재밌는 일에 날 빼놓다니!!” 딘은 로이를 한심하게 보며 혀를 찼다. “그게 재밌는 일이냐?” “하루 종일 꼼짝없이 태자 곁에 붙어 있는 것보다 100배는 재밌지! 이렇게 되면 혼자라도 쫓아갈 거야.” “얼씨구. 어디 한 번 해 봐라. 넌 주군 눈에 띄는 순간 죽는 거야.” 딘의 살벌한 예언에도 로이는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꼈다. “흥. 주군은 죽을 때까지 날 패기는 해도 죽이진 않아.” “.... 참 이상한 데서 자랑스러워하는군. 네 말대로 죽진 않아도 최소 팔 하나 다리 하나 2군데는 부러질 걸. 아니지. 어디 하나 부러지진 않지만 사흘 밤낮으로 두들기실 지도 모르지.” 로이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로이는 주군을 참 좋아하지만 가끔 발동하는 지랄 맞은 성격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나 로이를 제외한 다른 기사들은 공작의 구타가 로이 한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공작에게 기어오르는 건 로이가 유일했다. 그렇게 혼나고도 대차게 덤벼드는 걸 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참 대단했다. “그건 좀 아파. 근데 넌 왜 여기 있어? 주군 안 따라가고.” “난 북부까지 마님 호위하게 됐어.” “아. ..주군 결혼했지?” 로이는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들이 공작 결혼 소식을 듣자마자 입은 쩍 벌리는 추한 표정으로 놀라움을 표현했지만 로이는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로이의 정신세계는 보통 사람과 어딘가 살짝 달랐다. “음. 어떤 분이 마님이 되셨는지 좀 궁금해. 듣기로는 공주님이시라는데.” ‘난 아는데. ’아무리 생각 없는 로이이지만 그 날 공작저에서 만났던 공주님과의 일을 떠벌일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었다. 그 때 일만 생각하면 로이는 아직도 키득키득 웃음이 나오곤 했다. 공주님이 주군께 ‘청혼을 드리러 왔습니다. ’ 할 때 주군이 크게 당황하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자그마한 아가씨가 주군께 한 방 거하게 먹이는 것이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좀 걱정이다. 난 귀부인들 대하는 것이 그렇게..편치가 않아서.” “괜찮을걸.” “음? 마님을 뵌 적 있어?” 로이가 머리를 긁적였다. “뭐 그렇다기 보다는..괜찮을 거야. 내 감이야.” 딘이 쿡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네 녀석 짐승 같은 감을 믿어보도록 하마. 그보다 그만 포기하고 어서 돌아가. 집사 눈에 띄었다가는 잔소리 들어.” “으음..제롬은 좀..무서워.” 어쩔 때는 주군보다 더. “그건 고마운 일이군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로이의 안색이 순식간에 탈색되었다. 어느 새 나타난 제롬이 무척 엄한 얼굴로 로이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저승사자라도 마주친 것처럼 로이는 히익 숨넘어가는 비명을 질렀다. 다시 잠에서 깨었을 때는 이미 한낮이었다. 눈은 떴지만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었다. 온 몸이 바위가 되어 침대에 딱 붙어버린 것 같았다. 아침에 잠깐 일어났을 때보다 더 힘들었다. ‘아프다...’근육통이란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아프다. 최고 고통의 순간이 지나야 한 풀 꺾이는데 오직 시간만이 해결책이었다. 그의 말대로 오늘 이 상태로 마차 여행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했다. 눈만 감았다 떴다 운동하며 꼼짝없이 누워 있는 루시아를 곧 하녀가 들어와서 발견했다. 하녀는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루시아 곁에서 안절부절 못했다. “마님. 많이 편찮으십니까?” “...뭔가 가볍게 먹을 수 있는 것 부탁해. 일어나지 않고 침대에서 먹을 수 있는.” 루시아는 말을 하면서 이맛살을 찡그렸다. 목이 잠겨 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조금 깔깔한 정도였는데. “아. 예. 마님. 즉시 준비해 오겠습니다.” 잠시 후 하녀들이 쟁반 가득 이것저것 담아 가지고 들어왔다. 따뜻한 우유, 꿀에 버무린 과일과 견과류, 조그마한 크기로 구운 과자, 아직 따뜻한 빵 등등.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 앉아서 조금씩 먹어 속을 채우자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목욕도 하고, 잠깐 한 숨 더 자고 일어난 후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응접실에서 제롬을 만났다. 하루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된 루시아를 보며 제롬이 우려를 표했다. “주인님께서 마님 의향을 여쭈어 의사를 부르라 하셨습니다.” “의사는 되었어요. 그 분은 한 발 앞서 영지로 출발하셨다지요.” “예. 영지에서 온 급보를 받으시고 바로 출발하셨습니다.” 제롬은 혹시 마님이 이 일로 화를 내거나 서운해 하지 않을까 해서 조마조마했다. 급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결혼 다음 날 새신부만 남겨놓고 인사도 나누지 않은 채 언제 보게 될 것이라는 기약 없이 남편이 휙 가버린 것이다. 루시아는 애초에 이 결혼을 약식으로 한 것 자체가 그의 영지 일 때문이라고 알고 있었다. 새삼 서운할 건 없었다. “우리는 언제 출발하나요?” “아, 예. 예정은 내일이지만 주인님께서 서두를 것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님께서 편하실 대로 하시면 됩니다.” “예정이 내일이니까 내일 떠나는 걸로 해요.” “예. 마님. 가는 길에 대한 간략한 브리핑을 드리려고 하는데 언제가 괜찮으십니까?” “준비가 다 되었다면 지금 들을게요.” “예. 마님. 출발지는 수도, 도착지는 북부의 로암입니다. 로암은 도시 이름이기도 하면서, 그 도시 중심에 위치한 타란 공작가의 성(城)을 칭하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본래대로라면 무척 먼 거리입니다만 게이트를 타고 갈 예정이라 약 나흘로 잡고 있습니다. 혹여 전에 이용해 본 적 있으신지요?” “없어요.” 제논이 강대국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게이트’라고 불리는 마도구 덕분이었다. 어느 변방의 소식이건 늦어도 일주일이면 왕은 수도 가장 깊은 내왕 안에서 소식을 받아볼 수 있었다. 반란이건, 적의 침략이건 빠르게 대처가 가능했다. 게이트는 많은 나라에서 발견되었지만 제논에 압도적으로 많았다. 아주 먼 옛날 마법이 세상을 지배하던 때가 있었다. 한 때 세상을 지배했던 마도제국은 갑자기 멸망했다. 지금도 역사가들이 이유를 알아내고자 탐구하지만 아직까지 온갖 가설만 난무하고 확실한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마도제국 멸망을 기점으로 세상에서 마법사라는 존재와 마법적 지식 또한 사라졌다. 그러나 일부 마도구는 고대 유물이 되어 아직까지 전해졌다. 마도구는 대부분 국보로 관리되고 있다. 그 중 땅에 박혀 있어서 떼어낼 수 없고 사물을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시키는 마도구를 ‘게이트’라고 했다. < -- 북부 -- > “저택에서 출발해서 수도 게이트까지 마차로 반나절 정도 소요됩니다. 거기서 북부 게이트까지 이동한 후, 로암까지 마차로 사나흘 남짓 걸립니다.” “공작성에서 게이트까지 사흘이면 꽤 멀군요. 보통은 근처이지 않나요?” “북부에는 게이트가 5곳뿐입니다. 그나마 로암에서 가장 가까운 게이트 근처는 바위가 많은 거친 땅이라 사람이 거주하기 적당하지가 않습니다.” “5개뿐이라구요? 그 넓은 북부에?” “예. 5개뿐입니다.” 그래서 수도에서 활동하는 귀족들 중에 북부 출신은 거의 없었다. 왔다갔다 하기가 힘들기 때문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지만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근데요. 제롬. 게이트는..내가 알기로 아무나 이용할 수 없을 텐데요. 공무가 아니면 안 된다고 들었어요. 우리는 일종의 여행 아닌가요?” “엄밀히 따지면 그렇기는 합니다만. 사실 대부분 그런 이유로만 사용하는 건 아닙니다. 수도 게이트의 경우는 비용을 지불하면 사용합니다. 그리고 공작 전하께서 이용하겠다 하시는데 이유를 누가 묻겠습니까.” “.... 그렇군요.” 그녀의 남편은 거물이었다. 그런데 그 사실이 아직도 확 실감이 나지 않았다. 사교계에서 활동하는 여자들의 위치는 대개 남편 혹은 아버지의 지위에 따라 결정되었다. 왕비라고 반드시 사교계 여왕이 되는 건 아니지만 누구도 모르는 남작의 여식이 사교계 정점에 오르는 일은 절대 없었다. 여자들은 남편 혹은 아버지의 지위를 자신의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다. 공작부인이 위세를 부리면 남작부인은 나이에 상관없이 당연히 비위를 맞추어야 했다. 법은 아니었다. 그런데 누구나 당연히 그렇게 했다. 꿈속에서 그녀는 백작부인이었다. 메튼 백작 가문은 영지도 있고 나름 이름 있는 가문이었으며 수도 정계에 발을 들인지 꽤 되었다. 당연히 루시아보다 낮은 지위 여자들은 사교계에 널렸다. 그래도 루시아는 딱히 그들 대상으로 자존심을 세워 몰아세울 필요를 느낀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루시아는 메튼 백작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그래서 루시아는 확신할 수 없었다. 과연 다른 여자들처럼 자신도 남편의 지위를 내 것처럼 적극적으로 이용하며 즐기게 될까. “호위를 포함해 떠날 일행은 내일 떠나기 전에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다른 의문은 없으신지요?” “없어요. 혹시 내가 조심해야 할 것은 없나요?” “말씀드릴 것이 있다면 이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그 날 저녁은 편안한 휴식으로 시간을 다 보내고 일찍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전 날에 비하면 온몸에 기운이 돌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문제가 생겼다. 그와 밤을 보낸 이후 시작된 하혈이 멈추지를 않았다. 심각한 출혈은 아닌데 자꾸 속옷에 묻어나자 시중을 드는 하녀들이 가장 먼저 눈치 챘다. “마님. 아무래도 의사를 불러 진찰을 받아 보시지요.” 그래서 출발 예정 시간에 출발하는 대신 의사가 불려왔다. 여의사가. 인상과 풍채, 모두가 넉넉한 나이 지긋한 여의사는 잔뜩 긴장해 있었다. 여의사의 수는 많지 않았다. 여자가 의학을 배우는 경우가 드물고, 의사가 되었다 해도 실력은 늘 남자에 비해 부족하다고 평가받았다. 세간에 여자이기 때문에 여의사에게 진찰을 받는다는 의식은 없었다. 귀부인 침실은 금남의 지역이지만 의사는 제외였다. 굳이 여의사를 찾을 필요가 없으니 수요가 많지 않고 남자에 밀려난 여자 의사들은 그런대로 생계를 이을 수 있을 정도의 수준으로만 의료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여의사는 대개 의사인 남편을 따라다니며 돕다가 배워서 본격적으로 의학 공부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부가 모두 의사인 경우에는 쓸모가 많았다. 오늘 불려온 여의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녀는 사별하여 현재는 혼자였다. 어쨌든 여의사는 이런 어마어마한 귀족가 저택에 치료를 목적으로 방문한 건 처음이었다. 하녀를 따라 침실로 들어와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자그마한 여자를 본 순간 조금은 긴장이 풀렸다. 대단히 고압적인 귀부인을 상상했는데 여주인은 마치 소녀 같았다.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침대 위의 귀부인은 조금 발간 얼굴로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우물쭈물 하다가 도움을 바라는 것처럼 하녀를 쳐다보았다. 하녀가 눈치껏 귀부인에게 소인이 대신 설명할까요? 여쭈어 허락을 받고 목소리를 낮추어 증상을 설명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하녀의 말을 듣던 여의사 표정이 점차 기묘하게 풀어졌다. 그리고 흘끔 침대를 보며 웃음을 삼켰다. 이제 막 결혼한 새신부가 무척 귀여워 보였다. “마님. 혹시 통증이 있으십니까?” “...움직이면 조금..” “혹시 달손님 기간하고 겹치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지는 않네.” “처녀혈은 사람에 따라 달라서 약간 묻어나는 경우에 불과한 사람도 있고, 며칠 계속 흐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통증이 있다거나, 생리혈처럼 많이 흐르는 경우가 아니라면 가만 두면 멈출 겁니다. 심각한 증상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리하지 않고 휴식만 취하시면 길어봤자 사흘이면 괜찮으실 겁니다. ” 의사를 말을 들으면서 루시아는 얼굴이 점점 더 붉어졌다. 놔두면 괜찮을 것을 괜히 의사를 불렀다.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어요, 다 말하는 것 같아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아, 하지만 출혈이 멈추고, 최소한 움직여도 아프지 않을 때 까지는 교합은 자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성의 생식기는 무척 연약해서 자칫 잘못하면 크게 탈이 나지요.” “어차피...” 어차피 뭐? 그가 없으니 할 일 없다고? 그럼 그가 있으면 어쩐다는 건데? 루시아는 저 혼자 묻고 대답하며 점점 더 낯이 뜨거워졌다. “아..아무튼 알았네. 되었으니 가보시게. 수고했네.” “딱히 약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조금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몸을 보하는 약을 지어드리겠습니다.” 처방을 마치고 루시아 침실을 나오는 여의사를 제롬이 따로 불렀다. “제안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제롬은 유능한 집사였다. 공작이 여의사를 언급하자마자 재빠르게 실력 좋은 여의사를 수소문했다. 그나마 수도에는 여의사가 꽤 있는 편이지만 영지로 내려가면 쓸만한 실력을 갖춘 여의사는 찾기 힘들었다. 그는 결코 주인의 한 마디를 그냥 들어 넘기는 법이 없었다. 반드시 무슨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몇 배는 더 수고롭고 일이 늘어나지만 집사가 천직인 제롬은 전혀 힘들다 생각한 적 없었다. 그는 공작이 굳이 여의사에게 마님을 보이라고 말한 것을 대수롭게 넘기지 않았다. 로암에서 기다리고 있을 대를 이어 공작가 주치의 필립은 남자였다. 필립이 마님을 진찰하는 상황을 어쩐지 공작이 그리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촉은 잘 들어맞는 편이었다. 제롬은 안나에게 마님 주치의를 제안했다. 안나는 어제 잠깐 저택을 방문해서 제롬의 제안을 받았고, 오늘은 환자를 봐 달라기에 다시 방문했다. “수도를 영영 떠나게 되는 건 아니라고 하셨지요.” “예. 몇 년 안으로는 다시 수도로 오게 될 겁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안나는 갑자기 정든 곳을 떠나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어차피 혼자 몸이고 이런 대귀족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제안 받는 건 더도 없는 기회였다. 제롬은 예의 바른 미소로 활짝 웃었다. “타란 공작가의 식구가 된 것을 환영합니다. 안나.” 거의 침대에서 쉬며 시간을 보냈더니 이틀이 더 지날 무렵 하혈은 완전히 멈추었고, 몸 상태도 확실히 좋아졌다. 움직이면 다리 안쪽이 조금 얼얼한 느낌은 있었지만 뛰지만 않으면 불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출발을 앞두고 가장 느긋한 사람은 루시아였고, 루시아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분주했다. 특히 빠뜨린 것이 없나 두 번 세 번 점검하는 제롬이 가장 바빴다. 제롬이 가장 중요하게 체크하는 것은 이동하는 동안의 식량과 비상약, 마님의 편의를 위한 물품들이었다. 여정을 함께 할 사람들은 총 14인이었다. 루시아와 하녀 둘, 제롬, 안나, 벙어리 3형제를 포함한 하인 5명, 기사 4명. 제롬은 떠나기 전 응접실에서 마지막 티타임을 즐기고 있는 루시아에게 기사들을 소개하고자 했다. 루시아가 허락하자 제롬은 기사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루시아는 어쩌면 기사들 중에 로이 크로틴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 아침나절에 잠깐 봤던 그 맹렬하게 달려오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어딨냐고 찾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의문은 접어두었다. 기사 4명 중 1명만 스물 중반 남짓으로 어린 편이었고, 다른 셋은 그보다 네다섯 살은 더 많아 보였다. 모두 문가 근처에 서서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응접실 안쪽 소파에 앉아 있는 루시아와 멀찍이 떨어진 상태였다. “제롬. 혹시 기사들이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그건 아닙니다만. 마님께 혹시라도 위협적으로 보일까봐 그렇습니다.” 기사들은 아무래도 보통 사람보다 키가 크고 덩치가 있는데다가 갑주까지 걸치면 더 커보였다. 허리에 장검을 차고 있는 모습이 자못 위협적이라 기사를 처음 접하는 여자는 겁을 먹기 쉬웠다. 혹시나 마님께서 두려워할까봐 취한 조치였다. “괜찮아요. 좀 더 가까이 오라고 하세요. 그래도 얼굴 정도는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어야지요. 만약의 경우 날 지켜줄 사람들인데 그 때도 이렇게 떨어져 있을 수는 없죠.” 루시아는 기사의 큰 키와 덩치가 무섭지 않았다. 그런 것이 무서웠다면 처음부터 타란 공작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덩치와 키가 그 사람의 성품을 좌우하지 않는다고 꿈속에서 배웠다. 루시아는 꿈속에서 기사들의 무기나 갑옷을 수리하는 작은 공방을 운영한 적 있었다. “알겠습니다. 마님.” 기사들이 몇 걸음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제롬이 그들의 이름을 소개할 때마다 해당하는 기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 중 리더라고 소개된 가장 나이 많아 보이는 기사가 말했다. “마님. 호위 때문에 마님께 불편을 드리지는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마님께서는 한 가지만 숙지해 주시면 됩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위험한 일이 발생한 경우, 헤바 경 옆에서 결코 떨어지시면 안 됩니다.” 리더 기사가 말한 헤바 경의 이름은 딘 헤바. 4명 기사 중 가장 어려보이는 남자였다. “어째서요? 왜 리더인 경이 아닌, 헤바 경 곁에 있으라는 거지요?” “그건 이 중 헤바 경이 가장 뛰어난 실력의 기사이기 때문입니다. 헤바 경은 타란 기사단 7조의 조장이면서 공작 전하의 정예 기사 중 하나입니다.” “이해할 수 없네요. 기사들이 조를 짜서 움직일 때 리더는 나이가 아니라 실력 순으로 맡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요.” 기사들이 묘한 눈으로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그건 기사들의 문서화된 법이 아닌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내규나 마찬가지여서 기사들 사정에 좀 밝아야 알만한 규칙이었다. “그건..헤바 경이..” 리더 기사가 말을 잇지 못하자 딘이 직접 나섰다.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전 귀족도, 기사 가문 출신도 아닌 평민 출신 기사입니다.” “그래서요?” 그걸로 충분한 설명이 되었다고 생각한 딘은 오히려 루시아가 되묻자 다소 당황했다. “그러니까..혹시 마님께서 불편해 하실 수 있으니.” “그러니까. 평민 출신인 기사가 날 호위하는 기사들 리더로 있는 상황을 내가 불쾌해 할지도 몰라서 그랬다는 말이로군요.” “...그렇습니다.” “실력은 신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죠. 난 기사들의 규칙을 깨고 싶지 않아요. 리더는 경이 맡아주세요.” 딘이 흔들리는 눈으로 루시아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예. 마님.” 아까보다 훨씬 정중한 인사였다. 기사들을 내보내고 제롬이 놀라움을 표했다. “마님께서 기사들 규칙을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은 마님께서 여정 동안 기사들을 불편해 하실까봐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습니다. 헤바 경은 나이에 비해 실력이 뛰어난 기사입니다. 견습기사 기간 없이 바로 기사 서임을 받았습니다.” “어머나. 그건 검술 시합이나 마상 시합에서 우승했을 경우에나 가능하잖아요. 정말 대단한 실력을 가졌군요. 놀라워요. 겉으로 보기에는 참 순해 보이는 인상이었는데요.” “마님께서 더 놀랍습니다. 참 잘 아시는군요.” 루시아는 살짝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공방을 운영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그 경험은 루시아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메튼 백작은 뚱뚱해서 덩치 있어 보여도 키가 크지는 않았다. 그래도 루시아에게는 거대한 벽처럼 느껴져서 늘 그 자에게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공방을 운영하며 기사들과 자주 접하자 메튼 백작보다 훨씬 더 큰 덩치와 키, 때로는 험악한 인상을 가진 남자들이 메튼 백작과 비교할 수 없이 순수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개중에는 쓰레기 같은 놈들도 있었고, 수리비를 외상으로 달아놓고 떼어먹는 놈도 있었지만 때로는 다른 기사가 그런 놈을 잡아다 주기도 했다. 같은 무기를 다루는 사람이라도 용병과는 천지차이로 달랐다. 기사는 용병과 달리 검을 다루는 자신의 운명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마무리까지 아름다웠으면 참 좋았겠지만. 공방은 남자한테 홀려 홀랑 날렸다. 처음에는 기사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제대로 된 기사도 아니었다. 불명예스러운 이유로 고용 파기된 자유기사였다. 기사의 수치라며 다른 기사들이 분노에 차서 결국은 잡아다 주었지만 돈은 거의 되찾지 못했다. 사지 멀쩡하고 잘 생긴 기사가 들이댈 때부터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챘어야 하는 건데. 몸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다정한 애정을 베푸는 남자의 사랑을 순수하므로 진짜라고 착각했다. “크로틴 경은 함께 가지 않나요?” 제롬 표정이 일순간 좋지 않게 굳어졌다. “그 자..크로틴 경은 어찌...” “며칠 전 아침에 저택에 들어오는 것을 얼핏 보았어요. 그래서 난 함께 가는 줄 알았지요.” “아닙니다. 크로틴 경은 명을 받아 태자 전하 호위 중입니다.” “크로틴 경을 좋아하지 않는군요?” “...그런 사감이라기 보다는..좀 골치가 아픕니다.” 제롬이 말하는 골치의 의미를 어쩐지 알겠다. 괴팍하고 제멋대로 보이지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왜 ‘미친개’라고 불렸는지 감이 잡혔다. 루시아가 상상했던 그런 의미와는 아무래도 조금은 다를 것 같았다. < -- 북부 -- >루시아는 게이트를 타기 전에는 기대를 많이 했지만 처음 이용한 감상은 좀 실망스러웠다. 잠깐 사방이 어두워지고 약간의 현기증이 나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을 느낄 수 없었다. 눈 깜빡할 새에 먼 거리를 이동했다는 사실은 놀랍지만, 이동하는 거리가 눈앞으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펼쳐진다는 말은 헛소문이었다. 황량한 벌판을 따라 3대의 마차가 달려갔다. 루시아와 여자들을 태운 마차, 마부 노릇하는 하인들이 번갈아 타면서 쉬어가는 짐마차, 말을 타고 호위하며 달리는 기사들이 번갈아 타면서 쉬어가는 마차. 여정은 순조로웠다. 비 한 번 내리지 않는 날씨도 도와주는 것 같았다. 달려가다 쉬면서 식사하고 다시 달리고 날이 저물면 노숙을 했다. 2배 정도 시간을 들이면 마을을 찾을 수 있겠지만 최단 거리로 가는 길에는 사람이 사는 곳이 없었다. 마지막 날이 저물어갔다. 이제 오늘 밤만 보내고 내일 안으로는 도착이 확실했다. 마차 주변을 호위해 달리던 기사들이 적당한 곳을 찾고 하인들에게 세울 곳을 가리키며 신호를 보냈다. 마차가 모두 멈추자 제롬은 말을 몰아 루시아가 타고 있는 마차 곁으로 다가가 창을 두드렸다. 제롬은 가는 내내 마차 안에 타고 가지 않고 다른 기사들처럼 말을 몰았다. 먼지 때문에 닫아 둔 창문이 안에서 열렸다. “마님. 오늘은 이곳에서 쉬겠습니다.” “지금 내려도 되나요?” 제롬이 기사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주변을 대충 살펴 위험이 없다고 판단한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나오셔도 됩니다.” 잠시 후 마차에서 루시아를 비롯한 여자들이 모두 다 내렸다. 그들 안색은 모두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흔들리는 마차에 장시간 타고 달리는 건 대단히 고단한 일이었다. 길이 잘 닦여 있는 수도도 아니고 황량한 벌판을 달려가는 것이라 끊임없이 덜컹거렸다. 루시아는 묵묵하게 견디었다. 루시아가 잘 따라가니 다른 사람들이 힘들다고 말할 수 없었다. 덕분에 그들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최고의 속도로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다. “마님. 멀미는 좀 어떠신지요?” “괜찮아요.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계속 흔들리는 마차에 있었더니 멀미로 속이 울렁울렁하고 머리는 지끈거렸다. 안나는 꼭 약을 먹지 않고도 손바닥 일정 부분을 자극해 멀미나 두통을 좀 가라앉히는 신묘한 수법을 알고 있었다. 덕분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 루시아는 안나와 주변을 멀리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산책을 했다. 얼마간 떨어진 곳에서 딘이 뒤따랐다. 오는 내내 딘은 마님의 근접 호위를 자처했다. 다른 사람들은 부지런히 야영할 준비에 돌입했다. 말에게 먹이를 주고 식사 준비를 위해 모닥불을 피웠다. 땅을 판판히 고르고 혹시 주변에 숨어 있는 위험한 야생동물이 없는지 살폈다. 기사 하나가 저만치 보이는 루시아를 비롯한 사람들 인영을 한참을 보다가 툭 내뱉었다. “저런 분만 같으면 백번이라도 모시고 여행 다니겠어.” 다른 기사가 그에 답했다. “타란 공작가에 좋은 분이 안주인으로 들어오셨군.” 다음 날 아침 어스름히 해가 뜰 이른 새벽에 다시 출발했다. 오전 내내 달리다가 이른 점심을 먹기 위해 멈추었다. “다 왔습니다. 마님. 저기 보이는 곳이 로암입니다.” 제롬이 가리키는 곳에 누런 흙길이 끝나면서 푸른 초원이 덮이고 그 안쪽으로 건축물이 만들어내는 색색의 생기 있는 도시의 모습이 그려졌다. 중심에는 우뚝 거대한 성탑이 솟아 있었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였다. 로암이 실제로 가까워지자 루시아는 이제 마차 여행의 괴로움보다 설렘이 커져갔다. 지금 가장 궁금하고 만나보고 싶은 사람은 그의 아들이었다. 타란 공작에게 장성한 후계가 있다더라 소문을 들었을 때 그의 나이가 마흔일 무렵이었다. 당시 장성한 아들이라면 성년(남자 19살 여자 17살)은 지났을 것이니 한 20살 정도로 잡으면 지금 그의 나이를 따져봐서 아이는 한 4~5살 정도 되지 않았을까. 그를 닮았을까, 아니면 제 어머니를 닮았을까. 성격은 어떨까.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날 싫어하지는 않을까. 기대와 걱정이 교차했다. 루시아는 못된 계모 노릇은 하고 싶지 않았다. 진짜 어머니 같은 모정은 줄 수 없을지 모르지만 사이좋게 잘 지내고 싶었다. 마차가 초원에 들어서자 먼지 걱정 없이 창을 열 수 있었다. 창 안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루시아는 지나가는 풍경을 감상했다. 달리는 마차에서 다소 떨어진 상태로 기사들을 태운 말들이 옆을 달렸다. 그 사이에는 제롬도 있었다. ‘제롬은 집사인데..기사들과 친해 보여. ’제롬은 중간에 잠깐 마차를 타기는 했지만 대개 기사들과 함께 달리고 쉴 때에도 기사들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집사와 기사. 어찌 보면 접점이 없는 관계인데 그들은 제법 친밀해 보였다. 예상보다 훨씬 이른 도착이었다. 원래 예상은 오늘 밤 늦게 도착할 것이었지만 지금은 이른 오후였다. 마차는 북부의 수도라 불리는 도시 로암에 들어서서 공작가의 고성(古城) 로암을 향해 거침없이 달렸다. 지나던 사람들이 모두 지나가는 마차를 보면 멈추어 서서 수군거렸다. 루시아를 태운 마차에는 선명한 흑사자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마차가 도개교를 건널 무렵에 무거운 고동 피리 소리가 울렸다. 피리 소리가 채 끝나기 전에 마차는 성문 안으로 들어섰다. 곳곳에 감시탑이 세워진 외벽 안쪽으로 연병장 및 훈련소, 기사들이 머무는 휴식 공간 등이 있었다. 여기 저기 돌아다니던 기사들은 피리 소리가 들리는 순간 모두 그 자리에 멈추고 지나가는 마차를 향해 팔에 각을 세우며 앞으로 든 채 고개를 숙였다. 마차는 그들을 지나 내벽 안으로 들어가 거대하게 우뚝 솟은 중앙탑 앞에 멈추었다. 탑 앞에는 수십의 사람들이 나와 기다리고 서 있었다. 제롬이 밖에서 마차 문을 열자 안에서 하녀들이 나와 얼른 마차 밑에서 계단 장치를 꺼내 길을 만들었다. 몇 개 계단을 딛으면서 루시아가 내려오고 그 뒤를 안나가 따라 내렸다. 루시아는 고개를 들어 사방을 한번 둘러보았다. 돌벽으로 막힌 안쪽으로 높은 성탑이 여기 저기 하늘높이 솟아 있었다. 가장 거대한 규모의 중앙탑 옆으로는 부속하는 건물들이 여럿 있었다. 100여명은 족히 될 것 같은 사람들이 질서 있게 늘어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마님.” 제롬이 이끄는 대로 루시아는 사람들을 지나 중앙탑으로 들어갔다. 재질은 나무 같으나 마치 철문처럼 묵직한 느낌을 주는 거대한 문이 열리고 펼쳐진 것을 널찍한 홀이었다. “긴 여행으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마님.” “나만 고생한 건 아니었죠. 모두 다 수고가 많았어요. 오늘 같이 온 모두 푹 쉴 수 있도록 제롬이 신경 써 주세요.” “예. 마님. 염려하시지 않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마님께서는 어찌 하시겠습니까? 쉬시겠다면 침실로 안내 드리겠습니다.” “그보다 인사를 하고 싶군요.” “고용인들 인사는 천천히 받으셔도 됩니다.” “고용인들 말구요. 공작가 어른들 말이에요. 아버님이 안 계시다면 어머님이라든가, 혹은 다른 친척분들이라거나요.” “그런 분은 계시지 않습니다.” “아무도..안 계시다구요?” “예. 전 공작부부께서는 오래 전 세상을 뜨셨습니다. 다른 친척은 물론 형제자매 또한 계시지 않습니다. 공작 전하께서는 유일한 타란 혈족이십니다.” 루시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유일? 그럼 그의 아들은?’당장 물어보려다 멈칫했다. 어쩌면 그의 아들의 존재는 아직 공개된 상태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일전에 분명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 비밀은 아닌 것처럼 말했다. “...그렇게까지 피곤하지 않아요. 내부를 구경하고 싶은데요.” “안내 드리겠습니다.” 넓이에 비해 구조는 비교적 단순했다. “1층은 여러 개의 응접실과 회의실, 식당이 있습니다. 식당 옆으로 나가는 뒷문을 통해 정원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정원이 있어요? 구경하고 싶어요.” “.... 기대는 하지 않으시는 편이 좋습니다.” 정원에 나가자마자 루시아는 말을 잊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정원은 어디를 둘러봐도 이 화사한 봄 날씨에 꽃 한 송이 없었다. 여기도 저기도 정원 가득한 것은 사철 내내 푸른 덤불나무들 뿐이었다. “.....” 제롬이 민망한지 헛기침을 했다. “관리상의 이유로..” “...이럴 거면 대체 정원은 왜 만든 거예요?” “전 공작부인께서 살아생전에 조성했던 정원입니다. 보시다시피 워낙 규모가 커서 안주인이 안 계시는 상황에 관리가 여의치 않았습니다. 버려두기에는 흉물스러워서 취한 조치입니다.” “그 분이 지시하신 건가요?” “주인님께서는 정원 같은 건 신경 안 쓰십니다.” “.....” 그래. 그럴 것 같다. 다시 1층 홀로 돌아왔다. “왼쪽 계단으로 올라 2층으로 올라가시면 온전히 두 분의 개인 공간입니다. 두 분 각각의 침실과 응접실, 욕실이 있습니다.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 2층은 주인님 집무실입니다. 같은 2층이지만 두 공간이 2층에서 서로 이동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계단을 내려와서 1층을 통해야 합니다.” “제롬. 물을 것이 있는데요.” 루시아는 아무래도 내내 그의 아들이 신경 쓰였다. 만약 아들의 존재가 아직 비밀이라고 해도 제롬이 모를 것 같지는 않았다. “아까 전하께서는 타란 가문의 유일한 혈족이라 했지요.” “예. 마님.” “하지만. ..그 분께는 아들이 있잖아요.” 제롬의 얼굴이 단번에 덜떨어진 바보처럼 변했다. “...예?” “전하께 아들이 있으니 유일한 타란 혈족은 아니지 않나요?” “마님..알고. ..계셨습니까?” “그럼요. 알고 있었어요.” “...모르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나. 제롬. 설마 그 분께서 제게 그걸 말씀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럴 분은 아니잖아요.” 제롬이 아는 타란 공작은 충분히 ‘그럴 분’이었다. “난 여기 오자마자 그 아이를 만나게 될 줄 알았어요. 지금 어디 있어요?” “도련님은..현재 로암에 안 계십니다.” “어디 갔는데요?” “기숙학교에 계십니다.” “설마 나 때문에?” “아닙니다. 주인님께서 오래 전에 결정하신 일입니다.” “오래 전 이라구요? 대체 몇 살 이길래요?” “올해 8살이십니다.” 8살? 대체 몇 살이 낳은 아인거야? 나이를 따져보니 그의 나이 17살? 18살?‘...조숙하셨군요. ’17살에 아들을 얻었으면 대체 첫경험을 몇 살에 한 걸까. 그런데 사실 통계적으로 보면 여자 나이 15살 무렵과 남자 나이 17살 무렵에 가장 사생아가 많이 태어났다. 아직 제대로 된 분별력을 형성하기 전이고, 감정에 휩싸여 쉽게 이성과 잠자리를 가졌다. 제논의 남녀교제에 자유로운 분위기도 한 몫 했다. 성년이란 나이는 법제적으로 결혼이 가능한 나이였다. 실제 성년이 되었을 때 그 나이에 숫처녀와 숫총각은 거의 없었다. 그런 점에서 루시아는 이 시대의 천연기념물이었다. “..그 아이는 언제 와요?” “모르겠습니다. 기숙학교 가신 이후 한 번도 오신 적 없습니다.” “한 번도...? 그럼 전하께서 만나러 가셨어요?” “제가 알기로는 그러신 적 없습니다.” 루시아는 혼란스러웠다. 몹시 귀애하는 아들이 아니었던 말인가? 그래서 이런 결혼도 한 것 아니었나? 사생아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을 쏟는 그런 아들이 아니란 말인가? “마님. 도련님에 관해 의문이 있으시면 주인님께 직접 여쭈어 보시지요. 저는 섣부르게 어떤 말씀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알았어요.” 로암은 수백년은 족히 되었다는 고성(古城)이지만 부지런한 관리와 꾸준한 개보수로 겉으로는 고풍스러움을 간직한 채 내부는 편하고 깔끔했다. 루시아는 이곳이 썩 마음에 들었다. 생활도 만족스러웠다. 손 하나 까딱 하지 않아도 밥이 나오고 침구가 정리되고 목욕물이 대령되었다. 불만이 있을 리 없었다. 응접실 문이 조용히 열리고 집사 제롬이 들어왔다. 한 손에는 접시를 들고 있었다. 그는 루시아 앞의 테이블에 우아한 몸짓으로 접시를 내려놓았다. 루시아는 그가 찻잔을 내려놓을 때에도 단 한 번도 달그락 소리를 내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영지의 성과 수도에 저택에는 대개 각각 따로 집사를 두기 마련이지만 수도 저택은 물론이고 여기에서도 집사는 제롬이었다. 제롬은 상당히 유능한 집사임이 틀림없었다. 젊은 나이에 참 대단했다. “막 구운 파이입니다. 마님.” 먹음직스럽게 노릇노릇한 파이에서는 달콤한 사과향이 풍겼다. “어머나. 맛있겠다. 잘 먹을게요.” “너무 많이 드시지는 마십시오. 저녁 식사를 못 드십니다.” “이걸로 저녁을 대신하면 안 될까요? 매일 이렇게 먹다가는 살이 찌겠어요.” 아침과 점심은 간단하게 먹지만 저녁의 진수성찬은 지나치게 화려했다. 매일 이렇게 먹다가는 공작가 재산을 다 탕진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만큼. 거기다 중간에 간식까지. 제롬은 친절했다. 제롬 뿐 아니라 모두 혼자 있는 루시아가 우울해 할까봐 전전긍긍이었다. 그래서 유난히 식사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다. 갓 결혼한 새신부가 낯선 곳에서 남편 없이 혼자. 보통 여자들이 울고불고 할 일이지만 루시아의 적응력은 사막의 선인장 수준으로 탁월했다. “제롬. 뭐하나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예. 마님. 말씀하십시오.” 공작가의 유능한 집사 제롬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주 우아한 몸짓으로 찻잔을 채웠다. “이별의 장미는. 제롬이 보내는 건가요?” < -- 북부 -- >제롬의 손에서 떨어진 찻주전자가 테이블 위에서 엎어졌다. 찻물이 흥건하게 테이블 위를 적시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제롬은 멍하게 보고 있었다. 그의 인생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실수였다. 제롬은 몇 초의 시간이 더 지난 후에 겨우 엎어진 찻주전자를 바로 세우고, 하녀들에게 물걸레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죄송합니다. 마님.” “아니에요. 나한테는 찻물이 묻지 않았어요. 그보다 장미꽃을 보내는 건 누구 생각이었어요?” “.......” 제롬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자신도 모르게 눈동자를 돌리며 누군가 도와줄 사람을 찾았으나 있을 리가 없었다. 늘 여유가 있었던 제롬의 얼굴은 바늘 끝도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그가 지금 처한 위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생각해보니까 전하께서 그렇게 세심한 분이 아닌 것 같아서요. 이별의 뜻으로 장미꽃을 보내라고 직접 명하지는 않으셨을 것 같거든요.” “...마님. 그게...” “괜찮아요. 다 알아요. 제롬 생각이었어요?” “.... 예. 시작은 제가 임의로...” “이별의 뜻으로 붉은 장미를 보낸다구요? 좀 잔인한 거 아니에요?” “...노랑..입니다. 노란 장미입니다.” “아. 노란 장미였구나. 왜 하필 노란 장미였어요?” “...노란 장미 꽃말 중에..이별이 있습니다.” “우와. 정말요?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요? 제롬은 대단히 로맨티스트인가 봐요.” 루시아의 목소리가 밝아서 그런지 제롬은 서서히 긴장을 풀었다. 하녀들이 엉망이 된 테이블 위를 정리하자 그의 마음도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제 동생 아내가 꽃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간혹 꽃말을 말해주고는 하는데 얼핏 들은 기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미꽃 구입은 제수씨 꽃집을 애용했다. 파비안은 이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도랑치고 가재 잡는 격이라며 낄낄거렸다. 노란 장미를 주문하면 제수씨는 혼신을 다해 화려한 꽃다발을 만들어 보냈다. “동생이 있었군요.” “아, 말씀드리지 않았나 봅니다. 주인님 보좌관으로 있는 파비안이 제 동생입니다. 혹시 파비안을 본 적 있으신지요.” “물론이에요. 두 사람, 진짜...” “예. 닮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래봬도 쌍둥이입니다.” “세상에. 놀라워요. 그러고 보니 공작가에는 쌍둥이가 좀 많네요. 제롬도 그렇고, 주방장도 쌍둥이 형제라고 들었고. 하녀 중에도 쌍둥이 자매가 있구요. 전하 시중드는 아이 중에..아, 그들 3명은 형제는 맞지만 쌍둥이는 아니었죠.” “마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주인님께서도 쌍둥이셨으니.” “그 분께 형제가 있었어요?” 제롬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실수를 했다. 그는 지금껏 한 적 없는 실수를 짧은 사이에 2번이나 저질렀다. 더구나 말실수라니. 그건 그가 가장 한심하게 여기는 실수였다.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런 기색을 루시아는 빠르게 알아차렸다. “혹시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인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쌍둥이 형제분께서는 오래 전 이미 이 세상 분이 아닙니다. 마님께서도 언젠가는 알게 되실 일이겠지만 누구도 화제에 올리지는 않는 일이라..주인님 앞에서는 언급하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루시아는 사실 장미꽃보다도 그의 형제에 관한 일이 더 궁금했지만 무척 곤란해서 쩔쩔매는 제롬이 안 되어 보여서 화제를 돌렸다. “알았어요. 장미꽃 얘기나 더 해요. 마지막으로 누구에게 보냈어요?” 제롬이 굳은 표정으로 다시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제롬은 차라리 공작의 쌍둥이 형제 이야기를 더 하고 싶었다. 누군가 이 자리에서 그를 벗어나게 해준다면 기꺼이 끌어안고 감사의 키스를 날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괜찮다니까요. 혹시 레이디 로렌스?” “...예. 그걸 어찌...” “알게 될 기회가 있었죠. 아, 근데. 마지막이 레이디 로렌스면..팔콘 백작부인은요?” 제롬은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마님 입에서 쉴 새 없이 자꾸 폭탄이 떨어졌다. 그의 얼굴에서 이제 아예 여유는 사라졌다. 지금껏 이토록 누군가 그를 몰아세운 기억이 없었다. “전하께서 레이디 로렌스와 헤어지고 나서 만난 사람이 팔콘 백작부인 이잖아요. 그럼 마지막으로 장미를 보냈어야 하는 사람도 백작부인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 “괜찮아요. 그러니까 말해 봐요.” 가여운 제롬은 괜찮으니까 다 말해봐라, 라는 여자의 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 파비안이 옆에서 봤다면 그래서 네가 여자를 못 사귀는 것이라고 혀를 찼을 것이다. “...그건 주인님께서 지시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흐응...” 루시아는 살짝 입술을 삐죽였다. “그럼 전하께서 백작부인을 아직 만나신다는 말이로군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결혼하신 이후 만나신 적 없습니다. 하늘을 두고 거짓이 아니라 맹세할 수 있습니다.” 루시아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뭘 그렇게 정색을 하고 그래요. 만날 수도 있지.” “예?” “아니에요. 아무튼 고마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롬은 어쩐지 마님이 무서워졌다. “아, 그리고.” “예?” 제롬은 기겁했다. 마님 제발! 소리가 턱 밑까지 올라왔다. “왜 그리 놀라요. 내 시중드는 하녀들 말인데요.” 낭떠러지 밑으로 떠밀렸다가 누가 뒤에서 잡아주는 안도감을 느끼며 제롬은 정중한 집사로 되돌아왔다. “예. 마님. 마음에 차지 않으십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정해진 하녀가 시중들게 하지 말고 순번을 정해 며칠씩 돌아가며 하도록 조치해 줘요.” “지금 마님을 모시는 하녀가 무슨 실수라도 했습니까?” “특정한 하녀만 내 시중을 맡으면 하녀들 간 알력이 생기니까요. 그런 문제로 시끄러워지고 싶지 않네요. 하녀들끼리 패가 갈리면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나중에는 다른 문제로 번질 수 있어요.” 하녀들의 생태는 잘 아는 루시아가 생각해낸 조치였다. 제롬은 눈을 껌뻑이며 얼마간 루시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말씀하신대로 조치하겠습니다.” 아아. 마님은 정말 놀라운 분이었다. 제롬의 몸 안에 흐르는 노예근성 가득한 피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평생 단 한 분뿐인 주인. 그 주인이 둘로 바뀔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시작은 8년 전이었다. 전(前) 타란 공작이 급작스럽게 타계하고 고작 18살 어린 후계가 작위를 이었다. 얼마 안 되어 새로운 타란 공작은 전쟁 선봉장이 되어 북부를 떠났다. 타란 공작의 활약은 거대한 폭풍처럼 전쟁터를 휩쓸었다. 그의 무용은 하늘을 울리고 땅을 진동시켰다. 함께 전쟁터에 뛰어든 기사들은 모시는 주군이 누군지를 불문하고 타란 공작을 마음 속 주인으로 삼았다. 타란 공작이 엄청난 전공을 쌓는 동안 오히려 북부는 조용했다. 전쟁터와 북부는 대단히 거리가 멀었다. 타란 공작 이름이 아무리 높아져도 그게 북부와 아무 상관없었다. 아무리 명성을 쌓아도 북부인들에게 타란 공작은 드넓은 북부를 제대로 다스릴 수 있는지 검증받지 못한 주인이었다. 북부는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세월 동안 오직 타란의 지배를 받았다. 왕이라 해도 어지간하면 북부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 정도 장악력이라면 독립을 주장할만 하건만 타란 공작가는 단 한 번도 왕가에 반기를 든 적이 없었다. 일부 사람들은 타란 공작가를 북부의 왕이라 불러도, 명목상으로 타란 공작은 왕의 신하였다. 내버려두면 알아서 세금 바치고, 전쟁 나면 앞장서서 싸워주고, 더불어 국경의 야만족도 처리해주고. 괜히 건드렸다가 독립이니 어쩌니 하면 골치 아팠다. 북부가 타란의 권역임은 틀림없으나 모두 타란 가문에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것은 아니었다. 국경에서 멀리 떨어져 야만족의 침범할 위험이 덜해서 타란 공작가의 도움이 절실하지 않은 지역일수록 항상 저울질을 했다. 타란은 적당한 당근과 채찍으로 북부를 관리했다. 그러나 주인이 자리를 비우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북부는 다른 지역과 달랐다. 다른 대영주는 소영지에 일정 세금을 부과하고 정해진 세금만 내면 그 지역 영주에게 넓은 자율권을 보장했다. 그러나 북부는 타란 가문이 전역을 세밀하게 관리했다. 세금은 물론 영민의 삶까지 간섭했다. 영주의 횡포를 용납하지 않았다. 백성들은 살기 좋아도 귀족들의 불만은 쌓였다. 누려야 할 권리를 빼앗겼다고 생각한 영주들은 틈만 나면 딴 짓을 하려 했다. 북부에서 가장 남쪽 지역, 즉 수도 가까운 지역의 일부 영주들이 연계하여 모의했다. 왕에게 탄원해 타란 가문의 영지에서 분리되어 새 대영주를 임명해 달라 청할 작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동안 타란 공작가 눈을 피해 세금을 빼돌리고 무력을 키웠다. 그러나 그들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새로운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으으으으...” 목이 잠겨 신음 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몸은 땅 속으로 꺼질 것처럼 무거웠다. 쇠꼬챙이로 머리를 쑤시는 것 같은 통증으로 괴로워하며 브라운 백작은 게슴츠레 눈을 떴다. 눈을 몇 번 껌뻑였지만 잘 떠지지 않았다. 이마에서 뜨끈하고 끈적한 뭔가가 흘러내려 눈으로 자꾸 들어갔다. 떨리는 손을 들어 대충 이마를 닦아 확인하자 끈적한 액체의 정체는 반쯤 굳기 시작한 핏덩어리였다. 싸한 한기가 등을 타고 올라왔다. 그제야 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눈에 익었다. 그의 성(규모는 작지만 성의 형태를 갖춘) 중앙홀이었다. 숨죽여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확인한 브라운 백작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한 구석에 수십의 사람이 몰려 꿇어앉아 있었다. 얼굴은 눈물자국으로 엉망이고 아직도 어깨를 흔들며 울고 있으나 크게 소리도 내지 못했다. 모두 아는 사람들이었었다. 아내와 자식들. 측근 수하와 일가친척들까지. 그야말로 그와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자들은 모두 저기 있었다. 거기서 뭐 하고 있느냐 물으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백작과 눈이 마주친 가족은 더 엉망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소리 내지 못하고 꺽꺽대며 울기 시작했다. 그들 눈에 가득한 절망과 원망을 보며 브라운 백작은 넋을 놓았다. “쥐새끼를 놓쳤다고.” “송구합니다. 전하. “발걸음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렸다. 가죽신이 돌바닥을 밟으며 저벅저벅 내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열린 문을 통해 중앙홀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한 사람이 앞서고 다른 사람들이 옆과 뒤에서 따르는 식이었다. 브라운 백작의 눈이 커지며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 북부의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신체적 특징이었다. 타란 공작은 대대로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이었다. 평생 공작의 얼굴을 본 적 없는 사람이라도 그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흘끔. 검은 머리의 장신의 사내가 눈을 마주지차 브라운 백작은 소스라치며 주춤 물러났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마치 뱀을 마주친 개구리처럼 벌벌 떨며 꼼짝하지 못하고 무거운 무게추가 달린 것처럼 고개를 떨어뜨렸다. 한 걸음 앞까지 다가와 발이 멈추었다. 차가운 금속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백작의 턱에 닿았다. 날카로운 검의 면이 턱 밑을 받쳐 고개를 위로 올리게 했다. 순간 백작은 왜 지금 기절하지 않는 걸까 한탄했다. 가슴만 가린 검은 색 갑주는 찐득하게 뭔가 잔뜩 묻어 있었다. 색깔이 보이지 않으나 그것이 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노출된 팔 다리의 셔츠나 바지가 그야말로 완전히 피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작의 턱을 받치고 있는 검날은 물론이고 검은 머리 사내의 얼굴에도 피가 튀어 번져 있었다. 백작은 하의가 뜨듯하게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소변을 지린 것을 눈치 챘는지 검은 머리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브라운 백작. 본인 맞나?” “예..예.” “네 후계인 아들놈이 혼자 내뺐다. 어디라고 짐작할 만한 곳은?” “예...?” 휴고는 쯧, 혀를 찼다. 완전 넋이 나가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는 틀렸다. 쥐새끼 몰이는 좀 시간이 걸리겠군. 옆으로 손을 내밀어 손짓하자 기사 하나가 얼른 서류 하나를 건넸다. 휴고는 그것을 백작 앞으로 내던졌다. “거기 서명. 본인이 한 것 맞나?” 백작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집어 들어 확인했다. 왕에게 보내려 작성한 탄원서였다. 연계한 귀족들 이름이 쭉 서명되어 있고 그 중에는 본인의 것도 있었다. 몸을 받치고 있는 바닥이 아득한 무저갱으로 꺼지는 것 같았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사..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전하!”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살아야 한다는 것만 머릿속 가득했다. 목숨 대신이라면 어떤 대가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쳐도 좋았다. 무엇을 가지고 있고 어느 정도 재물을 당신께 바칠 것인지 설명하고 싶었지만 입안에서만 맴돌고 나오지 않았다. 심장이 타들어갈 것 같고 위가 바짝 죄이는 것 같이 아팠다. 저절로 눈에서는 마구 눈물이 흘렀다. “살려달라..어째 하나같이 새로운 놈이 없군.” 그의 목소리에 지루함이 담겼다. “고개 들어.” 뒤에서 누가 머리채를 잡아 거칠게 당기는 것처럼 백작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공포에 질린 백작을 바라보는 핏빛 눈동자는 무심했다. 자그마한 분노나 흥분조차 없었다. 백작은 그것이 더 무서워 오싹 소름이 돋았다.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사나운 살기를 눈치 챘다. 그건 사냥감을 바라보는 맹수의 눈이었다. 뒤에서 누가 머리채를 잡아 거칠게 당기는 것처럼 백작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공포에 질린 백작을 바라보는 핏빛 눈동자는 무심했다. 자그마한 분노나 흥분조차 없었다. 백작은 그것이 더 무서워 오싹 소름이 돋았다.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사나운 살기를 눈치 챘다. 그건 사냥감을 바라보는 맹수의 눈이었다. 뒤에서 누가 머리채를 잡아 거칠게 당기는 것처럼 백작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공포에 질린 백작을 바라보는 핏빛 눈동자는 무심했다. 자그마한 분노나 흥분조차 없었다. 백작은 그것이 더 무서워 오싹 소름이 돋았다.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사나운 살기를 눈치 챘다. 그건 사냥감을 바라보는 맹수의 눈이었다. < -- 북부 -- >휴고가 쥔 검이 목에 아슬아슬 닿을 정도로 겨누다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 가슴께에 닿았다. 왼쪽 심장이 위치한 바로 그곳. 거기서 멈춘 검 끝이 서서히 안으로 파고들었다. “컥..사..살려..” 제 심장에 검이 파고드는 것을 보면서도 백작은 몸을 뒤로 뺄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하는 것처럼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점점 더 검이 파고들수록 몸의 경련은 커지고 눈이 뒤집히며 입에서 붉은 선혈이 흘러 컥컥거렸다. 공작의 살인 행각에 이미 만성이 된 기사들은 뒤에서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이야. 저거 어려운 건데. 별로 힘도 주지 않으면서 어떻게 검이 옷을 뚫고 살 안을 두부처럼 파고드는 걸까. 파비안이 공작의 정예 기사들을 미친놈들이라고 칭하는 이유가 있었다. 죽어가는 자의 눈에서 천차만별 변해가는 감정을 보면서도 휴고는 눈동자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경련이 멈출 때까지 검은 계속 심장을 헤집었다. 고통보다 더한 공포로 몸부림치다가 백작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 심장에 박힌 검이 빠르게 빠져나와 그대로 목을 옆으로 내리쳤다. 퍽-목뼈가 갈라지는 소리가 나면서 잘린 목이 날아가 저만치 굴러갔다. “꺄아아악!” “아아악!!” 구석에 숨죽이고 있던 백작의 혈족들이 소리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시끄럽군.” 나지막한 소리에 뒤에 서 있던 기사들이 서로 눈짓하다가 백작의 혈족들에게 다가갔다. 사람들은 다가오는 기사들을 보며 더 발작적으로 울기 시작했다. “전하!!” 파비안이 소리치며 달려왔다. “다 죽이시면 안 됩니다! 여기 일할 사람이 없단 말입니다! 행정 마비란 말입니다!” 기사들이 걸음을 멈칫하고, 백작의 혈족들이 입을 꽉 다물어 있는 힘껏 울음을 참으며 마지막 구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파비안을 바라보았다. 혈귀처럼 온몸이 피범벅인 공작은 섬뜩함을 자아냈지만 파비안은 전혀 거리낌 없이 악악거리며 발을 동동거렸다. “로암에서 사람 데려오라고 했을 텐데.” “로암은 사람이 넘쳐나는 줄 아십니까? 일할 수 있을만한 사람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예외는 없다.” 총 13명의 영주가 작당을 했고, 휴고는 현재 7명 째 방문했다. 지나온 6개의 영지가 그야말로 초토화 되었다. 영주와 가신, 그 혈족까지 젖먹이 하나 남기지 않고 참살되었다. 그 수가 근 수백에 이르렀다. “예외 좀 만드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미 지나온 곳 일처리만 해도 등허리가 휩니다, 등허리가 휘어요!” “후환은 남기지 않아. 뭐하나. 내가 직접 해?” 기사들이 하, 대답하고 즉시 검을 빼어들었다. 칼로 살이 베이는 소리와 울음, 비명이 섞여 아비규환이었다. 근 5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모두 고깃덩이로 변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금방이었다. 순식간에 피비린내가 홀을 가득 채워 진동했다. “하아..” 파비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일거리가 눈에 보였다. 아 진짜! 이놈들은 왜 주제도 모르고 까불다가 이 꼴을 당해서 내 일을 보태는가! 수천 명 목숨보다 파비안은 자신의 휴식시간이 더 중요했다. 기사들이 보기엔 파비안이야말로 확실히 미친놈이었다. ‘예상은 했지만..완전 벌레 잡아 누르듯 죽이시는군. ’파비안은 이 참혹한 상황을 직접 만들어낸 공작보다도 스스로 야기한 놈들에게 더 책임을 전가했다. 자신이라면 공작에게 덤비느니 그냥 자살을 택하겠다. 놈들은 북부 지배자의 성정을 너무 몰랐다. 휴고는 복잡한 걸 싫어했다. 꼬인 실을 풀기보다 잘라버리는 쪽을 취한다. 수틀리면 용서란 없었다. “내일 새벽에 떠나겠다.” “예!” 기사들이 입을 모아 우렁차게 대답했다. 옆에서 파비안은 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처리 하나는 정말 빠르기도 하시지. 이대로 가다가는 다 마무리 하는데 한 달도 걸리지 않겠다. 영주 13명이면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다. 규모는 작지만 영지전 수준이다. 그러나 타란 공작가 기사들은 보통의 기사들과 수준이 달랐다. 꾸준히 야만족과 싸우며 기른 실력이었다. 실전 경험은 물론이고 살인 기술까지 탁월했다. 더구나 공작께서 친히 검을 휘두르는데 기사들이 조금이라도 몸을 사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공작을 비롯한 기사들은 독기가 바짝 오른 야만족들을 상대하고 전쟁터를 누비며 날뛰던 살인귀들이었다. 이런 작은 소영지에서 그들은 양 떼 속에 뛰어든 범이었다. 기사 하나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와 우두머리 기사에게 고했다. 단장 엘리엇이 공작에게 방금 들어온 소식을 전했다. “놈을 잡았다 합니다.” “데려와.” 고개 짓으로 대화를 나눈 기사들이 나가고 잠시 후에 기사 둘에게 양 팔을 붙잡혀 한 남자가 거의 질질 끌려왔다. 지저분하긴 했지만 비교적 상태는 양호한 젊은 남자는 곧 안의 참상을 보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기사에게 뒷목을 얻어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흐어어엉!” 남자는 바닥에 엎어져 발작적으로 통곡했다. 실컷 울도록 배려해줄 휴고가 아니었다. 걷어찰 작정으로 다가갔던 휴고는 울던 녀석이 느닷없이 이제는 웃기 시작하자 멈추었다. “푸하하하!!” 미친 건가, 싶었지만 눈은 제정신으로 보였다. “닥쳐라. 목을 따버리기 전에.” 나지막하지만 살벌한 경고에 남자는 웃음을 멈추고 크게 숨을 몰아쉬며 격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제대로 자리를 잡아 무릎을 꿇고 바닥에 고개를 박았다. “죽이십시오.” 처음이었다. 살려 달라 매달리지 않는 놈은. “뭐지, 이건?” 저한테 한 질문임을 알고 파비안이 얼른 나섰다. “브라운 백작의 전 처 자식입니다. 후계가 된 건 1년 남짓인데 아마 이번 모의가 발각될 경우를 대비한 희생양인 것 같습니다.” “딴 놈들은 이런 거 없었는데?” “브라운 백작은 좀 머리 굴리기를 좋아하는 자였습니다.” “여기는 저 놈에게 맡겨.” “정말이십니까?” 파비안이 반색했다. “죽여주십시오! 전하!” 살려주고 영지까지 주겠다는데 남자는 오히려 죽여 달라 매달렸다. 파비안이 이놈이 미쳤나 눈을 부라렸다. 겨우 일이 좀 줄어드는가 희희낙락했더니 초를 치고 있었다. “왜?” “제 몸에..제 몸에 흐르는 이 피가 증오스럽습니다.” 제 두 손을 마치 구역질나는 쓰레기처럼 일그러진 눈으로 바라보는 남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휴고의 입술 한쪽이 비뚜로 올라갔다. “증오하지만 스스로 버리지 못하겠다면 안고 살아라.” 내가 내 몸에 흐르는 피를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휴고는 남자에게서 돌아섰다. [ 내 이름은 히우다. 날 그렇게 부르던 새끼들 언어로는 마귀, 악마 뭐 그런 뜻이라더군. ][ 휴? 우와. 우린 생긴 것만큼이나 이름도 똑같네! 난 휴고야. ][ 휴가 아니라 히우라니까. 멍청아. ] [ 히우, 히우, 휴. 빨리 부르면 똑같잖아. 휴. 네 이름은 휴 인거야. ][ 난 지금껏 내가 혼자인 줄 알았어. 하지만 이제 우리는 혼자가 아니야. 그렇지? 휴. [ 병신. 머릿속이 아주 해맑다 못해 텅텅 비었구나. 저 영감탱이가 뭔 짓 하려는지 몰라서 그래? 너나 나 둘 중 하나는 죽일 거라고. ][ 내가 널 지켜줄게. ][ ...빌빌거리는 새끼가. ][ 그럼 너도 날 지켜주면 되잖아. ]그의 차갑게 얼어붙은 심장은 여전히 그 때를 떠올리면 날카로운 바늘로 쑤시는 것처럼 아팠다. [ 너를 위해서야. 휴. 사랑해. 내 동생. 나의 형. ] 휴고는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형제에게 언제나 말해주고 싶었다. 너는 틀렸어. 정말 나를 위해서였다면, 그 날 내 심장에도 칼을 박았어야 했다. 너는 이 한심하고 너절한 세상에 나를 버렸다. ‘술이 당기는군. ’그래봤자 취하지는 않겠지만. 이 세상의 모든 술을 다 마셔도 아마 그는 취하지 않을 것이다. 술도, 계집도, 살인도. 아무리 즐겨도 취할 수 없다. 그 어떤 일을 겪어도 미치지 않고, 아무리 생목숨 목을 잡아 뜯어 죽여도 악몽 한 번 꾸지 않았다. 타란 혈족에게 흐르는 피는 그렇게 지독했다. 그러니 괴물인 것이다. 그는 아무리 피에 젖은 혈귀가 되어도 순식간에 고귀한 귀족으로 바뀔 수 있었다. 2가지 모습이 모두 그 자신이었으니까. ‘지겨워. ’그가 사는 세상은 너무 지루했다. 루시아는 틈틈이 로암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로암 어디에도 루시아가 가지 못할 곳은 없었다. 중앙탑을 비롯한 부속 건물들을 높은 내벽이 둘러싸고 있으며 내벽 위에는 동서남북 4방향으로 탑이 솟아 있었다. 탑 위로 올라가면 아래 펼쳐진 로암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지만 그것 외에는 모두 똑같은 탑을 하나하나 모두 올라가 보았다. 그러나 오직 서쪽 탑만은 가지 못했다. 서쪽 탑으로 올라가는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몇 번을 와도 계속 잠겨 있자 곁을 따르는 하녀에게 물었다. “왜 여기는 잠겨 있지? 열쇠를 가져오너라.” “마님. 이곳은..들어가지 않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왜?” 하녀는 몹시 내키지 않는 안색으로 답했다. “유령이 나온다는 곳입니다.” 하녀는 몹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꺼낸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루시아는 잠시 후에 피식 웃었다. “유령? 누가 봤다든?” 하녀는 누가 유령을 봤고, 유령을 본 사람이 어떤 끔찍한 일을 맞았는지 친구의 친구, 먼 친척 누구의 아는 사람까지 꺼내가며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하녀가 직접 본 건 아니었고, 봤다는 사람 중에는 하녀의 가까운 사람도 없었다. 그야말로 어디서 주워들은 소문이었다. “그럼 유령이 왜 출몰한다는 것이지?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 “...저도 정확한 이유는 모릅니다. 하지만 다들 여기서 유령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하녀에게 좀 더 물어 확인해보자 이곳에서 유령이 나온다는 것은 그야말로 로암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에게 퍼져 있는 말이었다. 이 정도라면 그냥 뜬소문 정도가 아닌 뭔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루시아는 이 호기심을 해결해 줄 아주 훌륭한 해결사를 한 명 알고 있었다. “제롬. 물어볼 것이 있는데요.” 제롬은 마님 입에서 나오는 ‘물어볼 것’이라는 말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웠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고 코밑에 식은땀이 맺혔다. “예. 마님. 말씀하시지요.” “서쪽 탑. 들어가지 못하게 해 놓았더군요. 모두들 유령이 나온다고 입을 모아 말하네요. 정말 유령이 나오나요?” 제롬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 마님의 질문 중에 범상한 것은 없었다. “...그런 소문이 있습니다만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올라가 봤군요?” “예. 다만 올라간 사람이 누가 횡액을 당했다는 등의 근거 없는 소문이 자꾸 만들어져서 출입을 통제했습니다.”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왜 자꾸 그런 소문이 돌지요?” “...그 안에서 사람이 죽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나.” 루시아는 입으로는 안타까운 것처럼 탄식했으나 눈이 반짝거렸다. 그녀는 확실히 흥미진진해 하고 있었다. “누가, 왜, 어쩌다가요? 내성 안에서 살인이라니. 보통 사건이 아니었겠군요.” 하아. 제롬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을 마님께 알려드려야 하는지 그는 고민했다. 하지만 일개 집사인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안주인께서 모른다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제롬에게 루시아는 이미 완벽한 타란의 안주인이었다. “제가 주인님을 모시기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 저도 건너 들었을 뿐입니다. 서쪽 탑에서 돌아가신 분은 전 공작부부 내외분이십니다.” 추리 소설을 읽는 것처럼 가벼운 마음이었던 루시아 안색이 단번에 굳었다. “...세상에. 아니..왜.” “이 일은 타란 공작가의 비사입니다. 오래 전 일이고,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님께서는 마땅히 아셔도 될 것 같아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설이 길었다. 루시아는 긴장했다. “일전에 주인님께 쌍둥이 형제분이 있었다고 말씀드렸지요.” “기억해요.” “돌아가신 전 공작께서는 장차 후계 다툼이 일어날 것을 저어하셨습니다. 그래서 끔찍한 선택을 하셨지요. 아들 하나는 후계로 남기고 하나는 버리셨습니다. 죽이려 하셨는지 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버려진 분이 장성해서 나타나 공작부부 내외분 목숨을 앗았습니다.” 맙소사. 루시아는 이 엄청난 비사에 심장이 섬뜩 내려앉고 손이 저절로 떨렸다. “당시 주인님께서는 로암에 계시지 않아 화를 피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저는 이곳에 없었기에 정확한 사정까지는 모릅니다. 그 일로 전 공작부부 내외가 돌아가시고 주인님께서 작위를 승계하셨습니다.” 그가 과거에 그런 고통을 겪었다니. 그는 단 한 번도 아픔 따위는 느껴 본 적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럼. 그 쌍둥이가..친부모를 모두 해쳤다는 건가요?” “전 공작께서 친부는 맞지만 공작부인은 아닙니다. 주인님의 생모께서는 출산 후 얼마 안 되어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루시아는 안도했다. 친부를 자식이 살해한 건 분명 끔찍한 일이지만 친모는 아니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아마 그녀의 개인적 경험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루시아에게 친부는 증오할 가치조차 없는 존재였지만 어머니는 이 세상 유일하고 소중한 사랑이었다. “그는 정말..강하군요. 나는..상상도 못했어요.” “예. 강한 분입니다.” 그의 강함이 루시아는 어쩐지 너무 안타까웠다. 지금 당장 그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 어쩌면 그는 그런 엄청난 과거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이런 그녀의 마음이 오히려 그에게 성가실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가 조금 제멋대로 굴고 마음을 상하게 해도 지금 마음 같아서는 모두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 -- 공작부부 -- >빗방울이 투두둑 창문을 때렸다. 응접실에 가득한 차향에 마음이 평온해진다. 오후의 느긋한 티타임이었다. 루시아는 2층 개인 응접실 보다는 주로 1층의 손님용 응접실을 애용했다. 널찍한 응접실에 홀로 앉아 차를 마시는 이 순간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이 고즈넉했다. ‘한 달..인가...’결혼한 날부터는 한 달, 북부에 위치한 타란 공작가문의 고성(古城) 로암에서 지낸지는 약 3주가량 되었다. 수도 저택에서 그가 먼저 북부로 떠난 그 날 이후 지금까지 그는 소식도 없다. “마님. 오늘 저녁은 드시고 싶은 건 없으신지요?” “아무거나 괜찮아요.” 매일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이었다. 루시아는 여기서 먹는 저녁보다 더 호사스럽고 고급스러운 요리를 맛 본 적이 없었다. 제롬은 오늘의 간식으로 내온 과자를 먹어 치우는 루시아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처음에 공주님이 공작부인이 되신다기에 내심 걱정을 많이 했다. 까다로운 귀부인 변덕을 어찌 맞추어야 할까, 결혼하자마자 남편에게서 방치된 신부가 일으킬 히스테리를 어찌 감당할까 뒷골이 지끈했었다. 그런 우려는 이미 로암으로 오는 여정 중에 털어버렸다. 오죽하면 기사들조차 이렇게 모시기 쉬운 분은 처음이라고 감탄했을까. 고작 공작의 정부에 불과했던 여자들조차도 하려던 짓을 공작부인은 전혀 하지 않았다. 고용인들 기세를 누른답시고 하는 일에 괜한 트집을 잡는다거나, 제롬과 기싸움을 하려 하지 않았다. 알아서 맡기고 주는 대로 받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천성이 맑고 순한 분이었다. 제롬은 이런 분이 공작가 안주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진심으로 기꺼웠다. 부우웅-묵직한 고동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루시아가 놀라 제롬을 보자 그가 순간 긴장한 것을 보았다. 늘 조금의 여유를 지니고 있던 노련한 집사의 긴장은 루시아마저 긴장하게 만들었다. “주인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루시아 가슴이 콩콩 뛰기 시작했다. “마님께서 굳이 나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일어나던 루시아는 어정쩡하게 반쯤 서 있다가 다시 앉았다. “다른 뜻이 있어서는 아닙니다. 혹여 마님께서 놀라실까봐 그럽니다.” “놀라...다니요?” “자세한 말씀을 마님께 드리지 못했습니다만 이번 외부 일정이 좀 험한 일이라..대개 이런 때 귀환하시면 예민하십니다. 바로 목욕을 하러 들어가실 테니 그 후에 뵙는 것이 좋겠습니다.”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가는 집사를 배웅했다. 그가 왜 이렇게 오래 떠나 있어야 했는지, 정확히 영지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 잘 모른다. 이것 저것 사소한 것들은 캐고 다녔지만 정작 그가 하는 일은 묻지 않았다. 다만 우연히 기사들이 나누던 대화를 엿들은 적 있었다. [ ...죽었다고 봐야..][ 주군께서. ..용서..]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일부만 들을 수 있었지만 뭔가 사람들이 죽고 그 일에 공작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 정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야만족 문제일까..?’북부가 야만족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건 제논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 야만족이 국경을 넘어 북부 이남의 사람들을 위협하지 못하는 건 모두 타란 공작가 덕이라고 입을 모았다. ‘야만족과 소규모 국지전이 벌어진다면. ..그것도 전쟁은 전쟁이네. ’전쟁은 먼 나라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바로 얼마 전 전쟁이 끝났지만 제논은 참전만 했을 뿐 전쟁터가 된 적은 없어서 직접 전쟁을 피부로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런데 북부는 늘 전시 상황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왜 잊고 있었을까. ’ 루시아의 남편이 된 휴고 타란 공작은 전쟁의 흑사자로 불리는 남자였다. 베어 죽인 자를 셀 수도 없는 잔인한 학살자다. 휴고는 한 달 만에 모든 문제를 그의 방식으로 말끔히 해결했다. 졸지에 대부분의 행정인력을 잃고 무법지역으로 변한 곳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자들의 고충은 휴고가 알 바 아니었다. 원래 그의 계획은 오랜만에 북부 전역을 다 돌아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러려면 최소 반년 이상은 걸렸다. 그는 너무 길어지는 외유보다 귀환을 택했다. 비를 맞으며 말을 달려오느라 먼지가 섞인 빗물에 푹 젖은 모습으로 휴고는 로암에 당도했다. “강녕하신 모습을 다시 뵈어 기쁩니다. 전하.” 나열해 서 있는 고용인들을 배경으로 제롬은 정중히 예를 올리며 주인을 맞이했다. 공작에게서는 다가가면 베일 것 같은 사나운 기운이 넘실거렸다. 아직 살기가 갈무리되지 않아 그의 손에 죽어 죽어간 자들의 잔상이 넘실거렸다. ‘아무리 겪어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군. ’ 제롬은 주인의 이런 모습에 위화감을 떨치기 힘들었다. 성 혹은 저택이 생활공간의 전부인 제롬은 기사로서 활약하는 타란 공작을 단 한 번도 실제 보지 못했다. 제롬이 아는 공작은 빈틈없이 딱 떨어지는, 일상생활에서 반듯한 사람이었다. 화를 내거나 목소리를 높이는 일도 거의 없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정을 수행하는 관리 같았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공작의 다른 모습을 엿보는 순간마다 그는 바싹 긴장했다. “목욕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따끈한 목욕, 그리고 피로는 푸는 차 한 잔. 그러면 집사가 알고 있는 주인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별다른 일은?” 눈치 빠른 집사는 의례적 인사 속에 정말 주인이 묻고자 하는 것이 숨겨 있는 것을 잡아냈다. 주인은 이전에는 이렇게 뭉뚱그려 안부를 물은 적이 없었다. “따로 보고 드릴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마님께서도 평안하셨습니다. 전하를 마중하는 자리에는 제가 나오시지 말라고 전해드렸습니다.” “잘했군.” 그가 몸을 돌렸다. “1시간 후 회의다. 다들 들어오라고 해. 빠짐없이.” 목욕탕을 향해 사라지는 그의 뒤에 대고 제롬은 대답했다. 그리고 공작부인이 있을 응접실 방향으로 흘끔 시선을 돌렸다. 다 소집하라 하였으니 한 두 시간으로 끝날 회의는 아닐 것이다. 간단하게나마 마님과 재회 인사 정도는 나누시면 좋을 것을. ‘당장 적군이 밀어 닥치는 것도 아니고 회의는 좀 미루셔도 될 텐데. ’식이 끝나기 무섭게 부인을 영지로 끌고 내려와 성에 처박아놓고 소식 하나 없이 한 달 만에 돌아왔다. 누구라도 지나치다고 비난할 일이었다. 그래도 오자마자 마님 안부를 물은 것이 어딘가. 오랫동안 공작을 모셔온 제롬은 그 정도면 얼마나 대단한 관심인지 알고 있었다. ‘내가 괜한 의미를 둔 건 아닌 모양이야. ’[ 타란의 안주인이다. 예를 다해라. ] 제롬은 공작이 남기고 간 한 마디 속에 담긴 뜻을 경고로 유추해냈다. [ 주제 모르고 괜한 텃세 부렸다가는 다 죽는다. ]제롬은 공작의 경고를 무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틈이 날 때마다 철저하게 하인들과 하녀들을 교육시켰다. 다행히 제롬은 주인의 뜻을 제대로 읽어낸 것 같다. 딱히 의무감 때문만이 아니라 제롬은 안주인이 되신 분을 진심으로 받들었다. ‘파비안은 지금쯤..수도에 있으려나..’아무리 영지 내 일이라지만 영민도 왕의 백성.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 일을 왕께 고하고 문제가 커지지 않도록 협상의 임무를 띄고 파비안은 수도로 갔다. 수도로 가는 길에 파비안은 제롬에게 짧은 서신을 보냈다. [ 그 분께는 사람 목숨이 너무 가벼워. ]파비안의 고뇌가 느껴지는 짧은 한 줄이었다. 제롬은 형제의 고뇌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어 미안했다. 집사인 제롬과 달리 전쟁터를 따라다니며 부관 노릇도 한 파비안은 공작이 수없이 많은 목숨을 앗는 것을 보았다. 직접 본 것과 말로만 전해들은 것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파비안이 주인을 ‘폭군’이라 칭하는 것에는 동의했다. 겉으로는 경솔한 발언이라 나무랐으나 내심 같은 생각이었다. 탄압하고 착취해야 폭군인 것은 아니다. 뭐든지 원하는 대로 하며 거기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면 그게 폭군인 것이다. 바로 얼마 전에도 목격했다. 공작의 갑작스러운 결혼에 기함했어도 가신들 중 누구도 공작에게 불만을 제기하지 못했다. 다들 엉뚱하게 제롬을 붙들고 늘어져서 주인 결혼에 담긴 뜻을 파악하려고 했다. 제롬 역시 아는 바가 없었다. 파비안은 뭔가 알지도 모르지만 묻지 않았고, 파비안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들은 형제이지만 공과 사는 언제나 구별했다. ‘이 결혼이 전하께 조금이라도 의미가 되었으면 좋겠는데...’주인의 성정이 아주 조금이라도 유해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접시에 칼이 부딪치는 작은 소음이 조용한 식당에 메아리쳤다. 루시아는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여린 송아지 고기로 구운 최고급 스테이크의 식감을 음미했다. 처음에 먹었을 때는 어찌나 감동이었는지 목으로 넘어가는게 아까울 정도였는데 고작 몇 번 먹었다고 처음 느꼈던 감동은 파삭하게 바스라져 버렸다. 최고의 맛이라고 머리로는 인정해도 이제 더 이상 가슴으로 우러나지 않았다. 참 간사한 입맛이었다. 루시아 홀로 앉아 있는 식탁은 20명쯤은 앉아도 충분할 만큼 길고 널찍했다. 그가 돌아왔지만 오늘 저녁도 루시아는 혼자 식사 중이었다. 소리가 울리는 넓은 식당은 루시아를 제외하면 시중을 들기 위해 대기 중인 하녀 둘 뿐이었다. 낮에 그가 돌아왔다는 소식만 전해 듣고 해가 지도록 그의 얼굴조차 구경 못했다. 그는 목욕을 마치자마자 가신들을 모조리 불러 모아 회의를 시작했고 도무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예 식사할 생각도 없는지 하인들은 안으로 부지런히 차와 샌드위치를 날랐다. 처음에는 기다리려 했는데 집사가 먼저 드시는 것이 좋겠다고 권하자 어쩔 수 없이 조금 늦은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그는 정말 바쁘구나..’그와 알콩달콩한 신혼을 보낼 것이라고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 집에 사는 것이니 자주 얼굴을 마주치고 몇 마디 말이라도 나누며 편한 사이로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 했던 생각은 헛된 망상이었다. 한 집이라고 해도 생활공간 자체가 다른 이상 우연히 마주칠 일은 기적이 아니고서는 힘들 것 같다. ‘그에게 가족이 있었으면 좋았을걸. ’부모든 형제든 누군가 있으면 그들과 친해지는 노력이라도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그의 비극적인 가족사가 안타까운 것과는 별개로 기숙학교에 있다던 그의 아들이 보고 싶어졌다. 다행히 그녀는 외로움을 타는 편이 아니었다. 나름 꽤 독립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혼자서 뭐든 잘하는 편이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왔다. 다만 지나치게 무료한 것은 조금 힘들었다. 원래 그녀는 늘 분주했다. 별궁을 쓸고 닦고, 때 되면 식사를 준비하고 가끔은 외출도 하고. 그러면 하루가 순식간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의 생활은 편하다 못해 너무 할 일이 없었다. 접시에는 아직 스테이크가 반이나 더 남아 있었다. 그런데 더 이상 입맛이 돌지 않았다. 진짜 아깝지만 더 먹었다가는 체할 것 같았다. ‘그냥 다 먹어 버릴까, 먹고 나서 체해서 밤새 고생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음식을 남기다니. 그것도 이런 최고급 스테이크를. 벌써부터 사치에 빠져버린건가. ’ 복잡한 기분으로 접시를 노려보았다. “입맛에 맞지 않으십니까?” “아니에요. 오늘도 최고였다고 요리장에게 전해주세요. 그냥 조금. ..오늘은 배가 부르네요. 아까 과자를 너무 많이 먹었나 봐요.” 오후의 간식을 내가는 일은 늘 있었고, 루시아는 매번 내오는 간식을 거의 다 먹어치우고 저녁도 싹 비웠다. 그런데 오늘은 그 간식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제롬은 굳이 상기시키지 않았다. “아직도 비가 오나요?” “예. 아마 밤새 내릴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비가 안 오면 비록 볼품없는 정원이라지만 나가 산책이라도 할텐데. 유난히 오늘 하루는 길다고 생각하면서 루시아는 일어났다. “올라가 볼게요.” “차를 올려드릴까요?” “부탁해요. 아, 아니에요. 서재에 있을 생각이에요. 차는 나중에.” “예. 마님.” 로암에서 루시아 마음에 드는 곳 중 하나는 그의 서재였다. 까마득한 높이의 돔형 천장 서재는 남향쪽 벽이 거대한 반투명창이 빼곡해서 해질 무렵까지 햇빛이 들어와 내부가 환했다. 다른 삼면 벽은 천장에 닿도록 책장이 꽉 차서 3개 층으로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길을 선반으로 만들어 계단을 오를 수 있게 만들었다. 왼쪽에는 문이 없는 방이 하나 연결되어 방 안에는 소파와 침대 등으로 쉴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오른쪽으로도 방이 하나 있었는데 굳게 잠겨 있었다. 제롬 말로는 타란 공작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 등이 보관되어 있으며 오직 공작만 들어갈 수 있고, 제롬 자신 역시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다고 말했다. 상상 속에서 그려보던 환상적인 서재였다. 수도 저택에도 비슷한 규모의 서재가 있고 모든 책은 두 권을 구입해서 한 권은 이곳에, 한 권은 수도 저택에 비치한다고 했다. 수도 저택에도 있는 줄 알았으면 가볼 것을. 거의 침대에만 있느라 서재가 있는 줄도 몰랐다. 서재를 채우고 있는 책들은 정치, 경제, 역사, 문학 등 장르가 매우 다양했다. 아마 그의 책 읽는 습관에 그다지 편식은 없는 모양이다. 루시아는 그 중에서도 문학을 가장 좋아했다. 그 역시도 문학을 좋아하는지 다른 나라 작가의 번역서도 상당히 많았다. “어제 읽던 책이. ..찾았다.” 루시아는 감히 이곳의 책을 서재 밖으로 가지고 나갈 엄두는 내지 못해서 오직 서재 안에서만 얌전히 책을 읽었다. 혹시 책에 흘리기라도 할까봐 서재에 있을 때는 차도 마시지 않았다. 서재에 들어와도 된다고 그에게 직접 허락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집사가 괜찮다고 해서 넙죽 들어오기는 했는데 혹시 그가 불쾌해 하는 건 아닐까 조금은 걱정이었다. 서재 특유의 종이 냄새에 파묻혀 책에 빠져들었다. 거의 다 읽던 책이라 30여 분 정도 만에 마지막 장을 넘겼다. 끝, 이라는 마침표를 보면서 루시아는 천천히 표지를 닫았다. ‘괜찮았어. 조금 중간 중간 지루하긴 했지만 잔잔하네. 이 작가의 다른 책을 더 읽어볼까. ’ 루시아는 책을 다시 제 자리에 꼽고 책장을 살펴보았다. 잘 정리된 서재라서 같은 작가의 다른 책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어쩐지 끌리는 제목의 책이 있는데 문제는 그 책이 루시아의 시선보다 꽤 높게 있었다. 손을 뻗어 보자 간신히 손에 닿았다. 발끝을 올리면 꺼낼 수 있을 것 같다. ‘조금만 더. 조금만...’루시아는 낑낑거리며 시도했다. 될 듯 말 듯 애를 태우는데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진다. 한 팔이 부드럽게 루시아의 허리를 감싸 등 뒤로 단단한 가슴에 기대어졌다. 순식간에 풍기는 특유의 체취에 눈앞이 어지럽다. 다른 한 팔이 루시아가 그토록 힘겹게 공략하던 책을 손쉽게 빼냈다. “이것?” 머리 위에서 들리는 나지막한 음성에 루시아는 흠칫했다. 약간 낮고 부드럽게 울리는 목소리는 귀에 착 감겼다. 루시아는 반사적으로 그의 품에서 재빨리 빠져나왔다. 체취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지나치게 빨리 깨달은 자신에게 충격을 받았다. ‘기다..렸구나. 이 남자를. ’그녀는 그가 없는 로암에서 잘 먹고 잘 자며 매우 잘 지냈다. 정말 스스로 놀랄 정도로 훌륭히 적응했다. 그래서 그가 없는 동안 그다지 그를 의식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딱히 그를 애타게 그리워하거나 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를 보는 순간 루시아의 심장은 순수하게 환호하고 있었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뛰는 심장이 그에게 들킬까봐 조심스러웠다. “감사..해요.” 그가 내미는 책을 받아 품으로 안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데인 것처럼 놀라는 루시아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못마땅한 빛이 떠올랐다. 잠깐 허리를 감았을 뿐인데 손에 느꼈던 부드러운 감각이 잔상처럼 남아 주먹을 꽉 쥐었다. ‘회의는 끝난 걸까, 아니면 잠시 휴식 시간인가? 잘 다녀오셨냐 인사를 해야 하나. 뭐라고 말을 시작해야 하지..?’ 순식간에 수십가지 질문에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나 무엇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목 안으로 삼켜졌다. < -- 공작부부 -- > “돌아와서 인사가 너무 늦은 것 같군.” 그가 먼저 대화의 물꼬를 열자 루시아는 막힌 숨이 트였다. “바쁘신데 당연하지요. 회..의는 다 끝나신 건가요?” “오늘은.” “서..성이 굉장히 근사해요. 너무 넓어서..하루 만에 다 돌아보지도 못했어요.” “지내다보면 어차피 다니던 곳만 다니게 되어 있어.” “아..네. 그렇겠지요.” “저녁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던데.” “많이 먹었어요. 그게..매일 입맛이 마구 돌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오늘은 입맛이 없었다는 건가?” “예? 아..조금은..” “맛이 별로였나?” “주방장 솜씨는 최고에요.” “누가 불쾌하게 했다거나.” “너무너무 친절해요. 모두.” 나른하게 귀에 감기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루시아는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어쩐지 사실은 조금 맛이 없고 조금 불친절했다고 해도 그걸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물론 음식은 맛있었고 로암의 모든 사람들은 친절했다. 그가 조금씩 다가왔다. 주춤거리며 조금씩 뒷걸음질 치던 루시아는 결국 책장을 등 뒤에 대고 더 이상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가 바짝 다가와 한 팔로 책장을 짚고 마치 루시아를 가두는 것처럼 서서 다른 한 손으로 루시아의 머리카락을 손에 쥐었다. 소리가 들릴 것처럼 거세게 뛰는 심장이 아팠다. 한 달 전 일이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졌다. 그의 압도적으로 강한 힘과 그의 무게에 짓눌려 몸 안으로 파고들던 날카롭던 통증을 떠올리자 오싹했다. 음탕한 여자가 된 것 같아 당혹스러웠다. “날 봐.” 눈을 피해 시선을 아래에서 이리저리 돌리고 있던 루시아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한참 뒤로 꺾어야 할 정도로 그는 루시아에 비해 엄청나게 거대했다. 살짝 내리뜬 붉은 눈동자는 피를 머금은 유리알처럼 선명했다. 열정과 뜨거움을 상징하는 붉은 색에서 한기가 느껴진다는 건 참 기이한 기분이었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핏빛의 눈동자에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나와 있으면 불편해?” “..불편한 건 아닌데 좀 당황스러워요.” “무엇 때문에?” “전..아무래도 어색한데 전하께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요. 한 달 만에 뵙는 거고...” “한 달 만에 왔다고 바가지 긁는 거야?” “그게 아니라-!” 그가 입술 끝을 늘리며 웃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야릇해서 루시아는 심장이 덜컹했다. 긴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그가 고개를 숙여 다가와 바싹 가까이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입술이 닿는 순간 루시아는 쿵쾅거리던 심장이 콱 쥐어 잡혀 멈추는 것 같아서 눈을 감았다. 아랫입술을 살짝 빨아들인 그가 살짝 깨물자 놀라 그녀의 입이 벌어졌다. 순간 단번에 깊숙이 그의 혀가 입 안을 점령했다. 뜨거운 살덩이가 부드럽게 잇몸을 훑으며 천장을 간질였다. 혀끝이 그의 혀와 얽히자 짜릿한 감각에 목에서 신음이 흘렀다. 그가 루시아의 뒷목을 받치고 더 깊이 키스했다. 타액이 섞이는 질척한 소리에 루시아는 얼굴에서 점점 열이 나는 것 같았다. 배회하던 두 손이 자신도 모르게 그의 목을 감자 그의 팔이 강하게 그녀의 허리를 바싹 끌어안았다.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뜨겁지만 청량감이 느껴지는 어쩐지 정중한 그의 키스가 조금은 더 거칠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타인과 혀를 맞대며 타액을 교환하는 이 행위가 이렇게 기분을 들뜨게 하는 것인 줄 몰랐다. 꽤 긴 키스를 마치고 그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루시아는 달음박질한 것처럼 가쁘게 호흡했다. 정말로 신체적으로 숨이 막혀서 그런 것인지 분위기에 숨이 막힌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반쯤 나갔던 정신은 그가 목덜미를 깨물었을 때 반짝 깨어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새 그의 다리 하나가 루시아의 무릎을 가르고 들어와 두 사람의 복부가 맞닿아 있고 그의 팔은 그녀의 허리를 휘감아 단단히 안고 있었다. 어느 새 떨어뜨린 책은 바닥에서 뒹굴었다. 코앞에 바싹 다가와 있는 그의 붉은 눈동자는 여전히 잔잔했지만 루시아는 그 안에 이글거리는 무언가를 보았다. 순간 천장이 빙글 돌았다. 그가 루시아를 안아 들고 성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서재와 연결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그는 그녀를 내려놓았다. 제 몸을 타고 오르는 그를 멍하게 보던 루시아가 그가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신을 안으려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잠깐..잠깐요!” 그는 그 잠깐 사이에 순식간에 루시아의 가슴을 거의 다 풀어헤쳐 놓았다. 선뜩한 차가운 공기가 맨 가슴에 닿는 것을 느끼며 그보다 더 섬뜩한 한기를 느꼈다. 아픈 건 싫어! 무서웠다. 루시아는 두 팔을 교차해 가슴을 가렸다. “씻고..씻고 나서요.” 루시아 입에서 나온 핑계는 속마음과 달랐으나 막상 해놓고 보니 제법 그럴 듯 했다. “목욕했어.” “저 말이에요. 저!” “상관없어.” “전 상관있어요! 전하..휴. 제발..” 어젯밤 목욕 후 아침에는 세수만 했다. 오늘은 비가 와서 날씨가 눅눅해서인지 몸도 눅눅한 기분이었다. 무서운 것도 무서운 거지만 절대 이런 꿉꿉한 기분 상태로 그와 맨몸으로 뒹굴 수 없었다. 그의 눈썹이 스윽 올라가더니 순순히 비켜나 그녀가 일어날 수 있도록 손까지 잡아주었다. 루시아는 재빠르게 옷을 추스르고 일어나 쏜살같이 서재를 빠져나갔다. 늑대에게 목덜미를 물렸다가 간신히 풀려난 토끼처럼 달아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휴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온몸이 들끓어 오르는 욕망을 간신히 내리눌렀다. 울 것처럼 일렁거리는 호박색 눈동자를 떠올리자 간신히 누른 아랫배의 열기가 다시 치밀었다. 어차피 도망갈 곳은 없었다. 그녀의 행동범위는 오로지 로암 내부일 터였다. 그녀는 그의 아내이니까. 아내. 그는 그 단어가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 ‘아내’라는 명칭을 달고 있는 당사자가 그녀라는 점은 더 마음에 들었다. 휴고는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뭔가 일이 풀리지 않을 때의 습관 같은 행동이다. 그는 지금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녀를 안고 싶다. 그녀의 좁은 안으로 파고들고 싶다. 뜨겁고 습하던 그 안을 떠올리기만 해도 아랫배가 지끈하다. 그녀에게 욕정하고 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왜 그러는지가 분명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뗄 수 없는 대단한 미녀는 아니었다. 능숙하게 침대 위에서 즐길 줄 아는 여자도 아니었다. 초야에 그녀는 긴장해서 바들바들 떨었고 아파하며 뻣뻣하게 굳어 끙끙거렸다. 그의 몸에 손을 대면 마치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그와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는데다가 그는 마음껏 욕망을 풀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안은 기가 막히게 좋았다. 들어가는 순간의 그 압박과 뜨거움, 파도를 치는 것처럼 그의 것을 물고 자극하는 안쪽이 그를 순간 미치게 했다. 그의 움직임에 애써 따라오려는 그녀의 서툰 자극은 그의 마지막 인내심마저 끊어 버렸다. 그는 단 한 번도 침대에서의 일을 침대 밖으로 가져간 적이 없었다. 아무리 뜨거운 정사도 침대에서 내려오는 순간 싹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 날 이후 그녀의 잔상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 헐떡이던 신음, 그가 안으로 진입할 때마다 그의 어깨를 잡았던 그녀의 손끝에 들어가던 힘, 그의 것을 감싸던 내벽, 눈물 가득한 눈동자. 특히 그의 팔에 앙증맞게 남은 그녀의 잇자국을 볼 때마다 허리가 뻐근해지곤 했다. 그에게 정사의 쾌감은 살육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의 몸속의 피는 피를 갈구한다. 열기를 식히기 위해 일 년 내내 사람을 죽이고 다닐 수 없으니 그는 그걸 여자를 품어 풀어냈다. 그래서 사냥을 할 때는 굳이 여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그는 밤마다 그녀가 떠올라 하복부가 욱신거려서 뒤척이기 일쑤였고, 그렇다고 딴 여자를 안아 풀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가 북부 전역을 돌겠다는 계획을 취소하고 서둘러 귀환한 건 그래서였다. 그는 내내 몸이 달아 있었다. 그는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의 몸이 정말 그렇게 달콤한지. 어설프게 맛봐서 그저 미련이 남아 있는 것뿐인지. 후자라면 그저 미련만 사라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전자라면 나름대로 문제였다. 아무리 육체적인 끌림이라 해도 지금껏 그런 것 조차로도 그를 흔든 여자는 없었다. 그는 그 무슨 이유에서든 자신을 흔드는 것 자체가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서재로 나갔다. 아까 그녀가 들고 있다가 떨어뜨린 책을 주워들었다. 구겨진 책장을 대충 펴서 빈자리에 꽂으려다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읽으려던 것 같으니 나중에 가져가겠지. [ 서재에..계십니다. ]제롬이 어쩐지 망설이며 고하던 이유를 알고 있었다. 평소 그가 서재에 누군가 함부로 들어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서재 안에 있던 중에 손님이 오면 나가 맞을지언정 결코 안으로 들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서재에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다지 언짢지 않았다. 그 뿐인가. 서재 침대에서 그녀를 안으려 했다. 이전에는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그녀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을 결심한 것부터가 이미 그 답지 않았다. 거기서부터 뭔가가 어긋나기 시작한 걸까. 이 상태가 좋은지 싫은지 조차도 확실하지 않아 그게 가장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서재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어 전하, 제롬입니다. 하는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제롬은 들어오자마자 재빠르게 주인의 안색을 살폈다. 마님께서 서재를 거의 뛰쳐나오다시피 하시더니 침실로 들어가시더라. 목욕물을 준비하러가던 하녀들이 귀띔해 주었다. 더불어 마님 표정이 어쩐지 굳어 있었다는 나름대로의 추측도 덧붙였다. 제롬은 마님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살피고 있었다. 감시 목적이 아닌 세심한 보살핌이었다. 아직 이곳이 낯설 공작부인을 위해서 당분간 그럴 생각이었다. 그건 분명 공작가 안주인에 대한 집사의 도리에서는 한걸음 정도 더 앞서 나간 일이었다. 그는 괜한 오지랖이 넓은 사람도 아니고 과잉 충성으로 쓸데없이 기를 소모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은 최선을 다하지만 더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것이 그의 스타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런 수고를 하는 건 공작가 새로운 안주인이 흡족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공작가의 평온함을 깨뜨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예민한 사냥개처럼 파악냈다. 제롬은 안주인이 들어와서인지 삭막하던 성에 그런대로 활기가 도는 것이 기꺼웠다. 마님 시중을 들게 하기 위해 하녀들을 다수 들인 것도 한몫 했을 것이다. 사내들만 드글거리던 성에 젊은 여자들이 많아지자 딱딱하기만 했던 하인들 얼굴도 풀린 것이 눈에 보였다. 벌써 연애질 하는 몇이 있었지만 눈감아 주고 있었다. “전하. 마님께 서재에 들어가셔도 된다고 말씀 드린 것은 저입니다. 혹여 제가 주제넘었다면...” “공작가 안주인으로서 평한다면?” 제롬의 사죄에는 가타부타 말이 없고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휴고의 태도에 제롬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듣고 싶은 말을 모두 해주는 친절한 주인이 결코 아니었다. “어찌 감히 평가를 드릴 수 있겠는가마는 모두 마님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모두?” 네가 그런 게 아니라? 묻는 것처럼 그는 피식 웃었다. 제롬이 자진해서 추궁하지도 않은 일을 제 잘못으로 말하고 있었다. 혹시 자신이 그것 때문에 그녀에게 화를 냈을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아까 회의가 끝나자마자 마님께서 평소와 달리 저녁을 거의 잘 못 드셨다고 쪼르르 와서 전한 것도 제롬이었다. 그 말을 듣고 휴고는 조금 걱정이 되면서도 그녀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마무리는 잠시 미루고 곧장 그녀가 있다는 서재로 올라온 것이다. 제롬은 유능했고 그 유능함의 핵심은 맺고 끊음이 확실한 태도였다. 그래서 묘한 기분이었다. 제롬은 그의 여자라고 친절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과거에 그가 만났던 귀부인들 속을 은근히 긁어대곤 했다. 그가 교제한 여자치고 제롬을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여자는 제롬 얼굴에 주스를 끼얹기도 했다. 제롬의 험담을 휴고의 귀에 속살거리던 여자도 있었다. 물론 잘려나가는 쪽은 제롬이 아니라 여자들 쪽이었지만. “왜?” “공작가 안주인으로서 충분한 위엄을 갖추고 계십니다. 아랫사람을 함부로 다루시지 않습니다. 좋고 싫은 기호는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지만 괜한 트집은 잡지 않으십니다. 한편으로 하녀들을 적당히 조여서 하녀들이 지나치게 편하게 생각해 기어오르는 여지도 두지 않으십니다.” “그래...?” 그건 또 의외였다. 그녀는 왠지 하녀들에게도 그저 마음 좋은 주인이기만 할 것 같았는데 어린 나이에 비해 사람을 다루는 수단이 제법인 모양이었다. 안 그러면 제롬이 저렇게 그녀를 두고 찬사를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뭐하고 있지?” 더 했다가는 아예 제롬이 그녀를 두고 찬가라도 부를 기세라 그만 끊어냈다. “목욕중이십니다.” 그의 입술 끝이 만족스럽게 휘었다. 행동이 굼뜨지 않은 것이 마음에 들었다. “마님께서 서재에서 나온 후에 차를 올려달라고 하셨습니다. 두 분 차를 함께 올리겠습니다.” 두 분이 오붓하게 티타임을 즐기며 돈독한 정을 쌓음이 어떤지 슬쩍 주인 속을 떠보았다. 이번만큼은 제롬은 주인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 주인이 원하는 건 차 따위가 아니었다. “올리지 마.” 순간 제롬의 입가가 굳었다. “방해 하지 마라.” 굳어진 제롬의 입가가 풀리더니 대답처럼 고개를 숙였다. “아침에 깨우러 오지도 말고.” “분부 받들겠습니다.” < -- 공작부부 -- >수면 위에 둥둥 떠 있는 꽃잎들을 보며 루시아의 얼굴도 꽃잎처럼 붉게 물들었다. 하녀들이 그릇으로 물을 담아 루시아의 어깨위로 끼얹을 때마다 향료를 탄 물에서 은은한 향이 퍼져 나왔다. 루시아는 결코 목욕물에 이런 짓을 하라고 지시하지 않았다. 다 잔망스런 하녀들 짓이었다. 무슨 의도로 목욕을 하는지 빤히 보이는 것 같아서 부끄럽다. 더구나 정말로 그런 의도가 있으니까 더더욱. “어쩜. 마님께서는 이렇게 피부가 고우셔요.” “오일을 바르지 않았는데도 어쩌면 이렇게 매끄러울까.” “아기 피부도 마님보다 곱지는 않을 거예요.” 오늘따라 하녀들은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로암에서 처음 맞이하는 주인 부부의 합방에 그네들이 더 들떠 있었다. 루시아는 하녀들의 아부 섞인 찬사를 잠자코 들었다. 그녀 자신도 피부가 곱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다지 자부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그래봤자 남자들을 유혹하는 건 예쁜 얼굴과 글래머 몸매이지 피부가 아닌걸. 그도.. 그렇겠지. ’꿈에서 타란 공작은 수많은 여자들과 염문설을 뿌리고 다녔다. 간혹 파티에서 볼 때마다 여자가 달랐다. 그리고 여자들이 하나같이 가슴이 컸다. 흘끔 제 가슴을 내려다본 루시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혀 크다고는 말할 수 없는 가슴이었다. 그나마 허리는 조금 가늘고 골반이 있는 편이라 볼룸이 있기는 하지만 내세울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고 눈길을 확 끌 정도로 미녀도 아니고. 미녀라면 소피아 로렌스 정도는 되어야 그의 눈에 들 것이다. 루시아는 잠시 승전기념파티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그런 미녀도 가차 없이 버려져 그에게 매달렸다. 꿈속에서 봤던 그의 여자들은 모두 화려한 장미꽃 같았다. 그렇게 여자들을 바꾸며 끼고 다닌 것 치고는 그를 둘러싼 추문은 별로 없었다. 안 보이는 뒤로는 무슨 짓을 하는지 알바 없지만 결혼한 후에는 결코 아내 외의 여자를 공식적인 자리에 대동하지 않았다. 꿈속의 그는 아내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는 지켰다. 그래서 그 점은 안심이었다. 루시아에게도 그 정도 예의는 지켜줄 테니까. 목욕을 마치고 가운 차림으로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루시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가 테이블에 앉아 와인잔을 기울이다가 들어오는 루시아에게 시선을 던지면서 천천히 일어났다. 시중을 들러 함께 들어왔던 하녀들은 공작부부를 번갈아 보며 얼굴을 붉히더니 재빨리 물러갔다. 공작께서 목욕하는 것도 기다리지 못해서 이미 침실에 들어와 계시더라, 내일이면 아마 성에 쫙 소문이 퍼질 것이다. 루시아는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목욕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그렇다고 두려움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얼떨결에 휩쓸리다시피 치른 초야는 지독히 강렬했다. 그러면서도 그에게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희미해진 줄 알았던 초야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눈앞에서 그려졌다. 홀린 것처럼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와인을 한 잔 따르더니 마실 거냐고 묻는 것처럼 잔을 들어올렸다. 그 정도만으로 얇은 린넨 셔츠 한 장으로 감추어진 그의 유려한 근육의 움직임이 드러났다. 루시아는 꼴깍 목울대를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는 그가 주는 와인을 한 모금 맛보았다. 시큼하고 썼다. 좋아하는 맛은 아니지만 한 잔을 말끔히 비우고 빈 잔을 그에게 내밀었다. “더?”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한쪽 입술을 올리며 삐딱하게 웃으면서 잔을 채워주었다. 그마저도 다 마시자 뱃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며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녀의 금세 붉어지는 하얀 볼을 응시하던 그의 눈동자가 자그마한 입술에 묻은 와인을 붉은 혀가 나와 할짝거리자 짙게 가라앉았다. 그는 예고 없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뒷목을 받쳐 자신 쪽으로 당기며 붉은 입술을 삼켰다. 허공에서 배회하는 그녀 손에 들린 잔을 받아 테이블로 내려놓으면서 그는 그녀의 허리를 팔로 감았다. 경직한 그녀를 살살 달래는 것처럼 입술에 가볍게 몇 번 입을 맞추고 입 안으로 혀를 넣었다. 달콤 쌉싸름한 와인의 잔향이 느껴졌다. 잇몸을 한번 훑으며 짧은 입맞춤을 끝내고 입술을 떼어내며 시선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저 눈이 우는 걸 보고 싶다. “술. 즐기는 편인가?” “...특별한 날에는요.” 그는 어쩐지 만족스럽게 웃으며 다시 키스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과 혀가 만들어내는 감미로운 감각에 빠져들어 루시아는 그에게 기대 흐느적거렸다. 타액이 섞이며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흐트러진 가운 안으로 들어온 그의 손이 날개뼈를 감싸고 다른 손이 허리를 쓰다듬으며 가슴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아찔한 느낌에 루시아 몸이 소스라쳤다. 그의 다리가 그녀의 두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허벅지 안쪽을 밀착했다. 입술이 목덜미를 문지르며 그는 낮게 말했다. “떨고 있군.” 그의 말에 루시아는 비로소 자신이 떨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른하던 술기운이 확 날아갔다. “겁먹지 마. 이번에는 아프지 않을 거야. 그렇게 긴장하고 있으면 당신은 즐겁지 않을 거고 다칠지도 몰라.” 그녀의 떨림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자 휴고는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가 아는 그녀는 작고 약하지만 당차고 씩씩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면 극악의 나쁜 놈이라도 된 것 같았다. 나이 어리고 처음인 그녀를 상대로 초야의 그 날 상당히 거칠었다는 걸 그도 자각은 하고 있었다. 부드럽게 해도 모자랄 판에 닳고 닳은 여자를 상대하듯 그렇게 해댔으니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를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리스트에 분명 한 줄 더 추가가 되었을 것이다. 분명 좋은 말은 아니겠지. 빌어먹을. 그 날 자제 좀 할 걸. 뒤늦은 후회였다. 겁먹어 벌벌 떠는 그녀를 겁간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함께 즐기고 뜨거운 밤을 보내고 싶다. 그 동안 그와 침대를 공유했던 여자들은 밤을 즐길 줄 알았다. 그녀와 같은 경우는 처음이라 어떤 식으로 달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휴고는 그녀를 안고 침대로 향했다.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지만 손바닥에 닿는 팔 다리가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를 침대 위에 눕히고 그 역시 침대 위로 올라가 옆에 누웠다.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품으로 당겼다. 그의 손이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지만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루시아는 긴장이 가라앉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운했다. 아무래도 그는 초야를 반복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오늘 그녀의 침실에 든 것은 공작부부가 잘 지내고 있다고 외부에 보이기 위한 행동인 것 같다. 아마 자신을 배려해서 일부러 이러는 것이다. 집안에서 안주인의 입지는 남편의 사랑을 받을수록 확고해진다. 그러면 서재에서의 그의 친밀한 접촉은 무슨 의미였을까. 그 때 그를 거절하지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온갖 복잡한 상념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자는 건가?” “......” “이봐. 정말 자? 당신 재우려고 이러고 있는 거 아니야.” 그가 몸을 뒹굴 돌려 순식간에 루시아 위로 올라갔다. 루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타고 오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난처한 얼굴로 어쩐지 곤란해 하고 있었다. “피곤해?” “저는 괜찮지만..당신이야말로 피곤하실 것 같은데요. 돌아 오시자마자 회의에..” “난 괜찮아. 그런 건 아무 문제..아무튼 난 전혀 피곤하지 않아.” “...네. 음..그러시군요.” 체력이 참 좋으시네요. 말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그가 한숨을 크게 쉬었다. 남자가 제 몸에 올라타 있는데 멀뚱히 바라보는 그녀를 보자니 속이 터졌다. 이미 초야도 치렀겠다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대체 이 여자는. “당신 안에 들어 가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아.” “...네?” 루시아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하고 싶다고. 당신은 싫어?” “......” “당신이 싫으면 억지로는 손 안 대.” 그의 말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루시아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루시아의 침묵을 거부라고 생각했는지 그가 괴로운 표정으로 푹 한숨을 쉬었다. “정정해야겠군. 당신이 싫어도 난 지금 당신을 원해. 초야가 그렇게 끔찍했나?” “.... 저는.” 목이 탁 막혀왔다. 그의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를 원한다고 말한 것을 제대로 들은 것인지 귀를 의심했다. 그의 눈은 어딘지 모르게 간절함을 담고 있었다. 이 남자가 이런 눈빛도 하는구나. 신기하면서도 어쩐지 새침하게 그를 밀어내고 싶었다. “..당신이 즐겁지 않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절 놀리고 비웃으셨잖아요.” “비웃어? 내가? 당신을 놀린 건 인정해. 귀여웠으니까. 침대에서 여자를 비웃을 만큼 형편없는 놈은 아니야.” 그의 단호한 변명은 반드시 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귀엽다는 말에 루시아 얼굴에 살짝 홍조가 떠올랐다. “..다음 날 아침에..하다가 그만두셨고..” 그 날 오히려 그만두기를 바란 것은 자신 쪽이었으면서 루시아는 앙큼하게 그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런 이상함 조차 깨닫지 못할 만큼 다급했다. “이 여자야. 더 했으면 당신은 한동안 걷지도 못했어. 기껏 생각해서 참았더니만.” “..아팠단 말이에요.” 루시아는 뾰로통하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는 휴고도 할 말이 없었다. “하혈해서..이틀 더 수도 저택에 머물러야 했어요.” 안나는 분명 별로 심각한 증상은 아니라고 진단했지만 ‘하혈’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어감은 강했다. 사내와 첫 밤을 보낸 여자가 피를 흘리는 건 대부분 남자들은 알아도 자세히는 모른다. 그를 괜히 떠보려는 것은 아니었다. 이건 그에게 자신도 모르게 하는 투정이었다. 효과는 좋았다. 으으음, 무거운 신음은 거의 절망에 가까운 그의 심정을 대변했다. 지금껏 그와 불타는 밤을 보낸 모든 여자들은 더 적극적으로 그에게 구애하며 그의 아랫도리에 시선을 떼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와 보낸 밤의 감상을 표현했다. 그녀 같은 후유증을 호소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래서 이런 경우 어찌 대처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몸이 굉장히 약하니까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고 휴고 머릿속에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지금은. 괜찮아?” “...네.”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힘들게 성벽을 넘었더니 그 너머에 또 다른 성벽을 발견한 병사의 표정이었다. “그래서. 싫은가?” 이 남자는 자신을 원한다. 루시아는 조금 멍해졌다. 그는 얼마든지 다른 미녀를 침대로 데려갈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여자가 필요할 뿐이라면 이렇게 구구절절 구차한 설명을 하며 안달할 필요가 없었다. “비비안. 초야에 말했던 약속 지켜줄게. 처음 아니면 황홀한 경험하게 해준다고 했지.” 그는 이제 살살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지금 그의 영민한 두뇌는 어떻게 하면 이 여자를 안을 수 있을까에만 모든 것을 집중하며 돌아가고 있었다. “못 믿어요. 지난번에 거짓말 하셨잖아요.” 그녀가 자꾸 튕겨대니 그는 정말 속이 타들어갔다. “거짓말이라니. 난 분명 처음이면 아플 거라고 했어.” “좀 아플 거라 하셨죠. 엄청 많이 아팠거든요.” “그러니까 만회할 기회를 달라니까. 다시는 안 할 작정이야?” 비록 단순한 육체적 욕구 그 이상은 아니라 할지라도 루시아는 이 순간만큼은 구애를 받는 매력적인 미녀가 된 것 같았다.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마 조금은 기뻤다. 그를 향해 웃고 말았다. “오늘 하는 거 봐서요.” 휴고는 얼마간 간격을 두고 쿡, 낮게 웃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농담은 그와 상성이 꽤 맞는 것 같다. 가끔 툭 던지는 그녀의 말에 그는 늘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지금은 그녀의 허락이 즐겁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지간히도 애를 태우는군.” 정말 그의 인생 처음이었다. 여자한테 하자고 매달린 건. < -- 공작부부 -- >그는 상체를 일으켜 그녀의 두 다리를 잡아 벌려 자리 잡고 앉았다. 단단히 성난 그의 하복부가 다리 안쪽으로 밀착하자 루시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목욕 마치고 바로 욕실에서 나온터라 루시아는 가운 안에 아무것도 입지 못했다. 은밀한 맨 살에 바싹 닿은 그의 성기는 그의 바지 안에서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그가 셔츠를 벗어 침대 아래 내던지는 움직임이 다급했다. 그는 곧바로 그녀의 허리에 묶인 끈을 풀어 가운을 열었다. 뽀얀 나신이 드러났다. 줄곧 잔상처럼 나타나 그를 괴롭히던 모습 그대로였다. 하얀 목덜미에 도드라진 쇄골, 보드라운 생크림 같은 가슴과 늘씬한 허리선. 그가 샅샅이 눈에 담아 살피는 동안 루시아 역시 그의 상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초야에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다. 벌어진 어깨와 널찍한 가슴, 족히 그녀의 팔뚝 두께의 2배를 될 것 같은 그의 팔은 근육으로 뒤덮여 있었다. 빈틈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그의 몸은 마치 전신(戰神)같았다. 태생적으로 여성을 압도하는 남성의 강함이 느껴졌다. 그의 두 손을 루시아의 납작한 복부에 대더니 천천히 위로 쓸어올리며 가슴을 쥐었다. 조금 강한 힘이었지만 거칠지는 않았다. 그는 마사지를 하듯 손아귀 가득 가슴을 쥐고 부드럽게 주물렀다.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기묘한 감각이 전신을 휩쓸었다. 다리 안쪽에 맞닿은 그의 것은 계속 꿈틀거리면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루시아는 밭은 숨을 몰아쉬며 몸을 뒤틀었다. 그가 고개를 숙여 가슴 하나를 삼켜 빨기 시작했다. “아!” 유륜 끝을 깨무는 약간의 통증, 그리고 돌기를 빨아들이는 아찔한 쾌감에 루시아는 눈을 감았다. 그는 부드럽게, 그리고 자극적인 애무로 루시아의 몸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완전히 젖어 준비된 몸 안으로 그가 느릿하게 들어왔을 때 루시아는 탄성을 질렀다. “아프지..않지?” 루시아는 숨을 몰아쉬며 네, 짧게 대답했다. 조금 묵직한 둔통은 있었지만 아프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초야의 고통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였다. 어째서 여자는 처음에 몸을 열 때 그렇게 고통을 느껴야 하는걸까, 루시아는 진지하게 의문을 가졌다. “천천히 움직일 테니까, 힘들면 말해.” 그는 천천히, 그리고 얕게 그녀의 안을 드나들었다. 낯선 이물감이 안을 스치는 감각이 기묘했다. 손끝부터 저릿하면서 몸이 깊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같은 움직임을 반복하던 기둥이 단번에 깊은 곳까지 치고 들어왔다. “아!” 온몸이 저릿하게 울렸다. “아파?” “아..니요..” 아픈 건 아니었다. 분명 아픈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괴로웠다. 빠져나간 그가 다시 깊이 밀고 들어왔다. “잠깐..흑..” “아픈가?” “네..조금 뭔가..” 그가 움직이지 말고 잠시 기다려주길 바랐으나 그는 흐응, 중얼거리며 씨익 웃었다. “그럴 리가.” 단번에 묵직한 뜨거움이 몸을 가르며 들어왔다. “으흑!” “안이 이렇게 난리인데..아플 리가 없지. 안 그래?” 그가 귓가에 짓궂게 속삭이며 단번에 강하게 치고 들어왔다. 짧은 통증 끝으로 아릿한 느낌이 이어졌다. 순간 가볍게 절정을 느꼈다. 괴로우면서 달콤한 감각이었다. 루시아는 자신의 내부가 그를 삼키며 열렬히 좋아하는 것을 느꼈다. 그가 낮게 신음하는 소리를 듣자 아래가 짜릿하게 죄어들었다. 그가 귓가에서 으르렁거렸다. 그의 거친 숨소리에 그 역시 자신만큼 느끼고 있다는 생각에 루시아는 흥분했다. 그 흥분에 맞춰 내부가 맥박치면서 꽉 움츠러들었다. “욱...” 휴고는 아프도록 죄었다가 푸는 것을 반복하는 그녀의 내벽에 눈앞이 핑 돌아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사정한 것도 아닌데 그에 근접할 정도의 쾌감이 정수리를 타고 올라온다. 고통으로 경직되어 있던 처음과 달랐다. 충분히 맛보지 못해 아쉬웠던 미련이 아니었다. 순진한 표정과 투명한 눈빛을 지닌 그녀의 다리 사이에는 지독한 쾌락의 늪이 숨어 있었다. 그는 더 큰 쾌감을 갈망하며 허리를 빼고 더 깊이 파고들었다. “아!” 빠져나가는 것이 싫은 것처럼 그녀의 질은 단단히 그의 것을 붙잡았다. 그는 지그시 어금니를 사려물고 몸을 뺐다가 진입했다. 뜨겁게 조이는 내부를 느낄 때마다 그는 방사의 욕구를 참았다. 아직은 아니었다. 더 그녀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는 정사의 쾌감에는 비교적 담백한 편이었다. 처음 여자를 알고 하룻밤 여자 서넛이 다 늘어지도록 밤새 즐기며 놀던 한창 십대 때에도 늘 견고한 이성은 무너진 적 없었다. 그 수많은 여자들 중 누구도 그를 이렇게 흥분시키지 못했다. “아! 아응! 잠깐..잠깐 잠시..” 뇌를 잡아 주무르는 것 같은 아득하면서 기이한 감각에 루시아는 두려움을 느껴 그의 가슴을 짚어 두 손으로 밀어내려 했다. 그는 오히려 그녀의 두 손을 깍지로 잡아 침대 위로 누르며 정신없이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이 맞부딪치며 철썩 철썩 소리가 나도록 박아 넣었다. 헐떡이는 호흡과 섞이는 교성을 들으며 그는 등허리에서 올라오는 뻐근한 쾌감에 전율했다. 정말 미치도록 좋았다. “하아아악!” 루시아는 고개를 꺾으며 비명을 질렀다. 동공이 확장되고 저절로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도무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격하게 교접한 하체와 가장 먼 뇌에서 시작되는 쾌감이 번개를 맞은 것처럼 온몸으로 퍼져갔다. 숨이 차고 온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아득하게 어디론가 떨어지는 기분이 공포이면서 동시에 날아오르는 것 같은 짜릿함을 느꼈다. 도망치고 싶지만 절대 이 감각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모순이 함께 했다. 거대한 해일처럼 온몸을 쓸고 지나가는 쾌감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루시아는 그의 어깨를 꽉 끌어안고 있던 팔에 힘이 빠져 그대로 침대로 늘어뜨렸다. 아예 온몸이 축 늘어졌다. 그제야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있는 거친 그의 호흡을 들을 수 있었다. ‘맙소사. ’휴고는 탄식했다. 죽는 줄 알았다. 경련하는 내벽이 그의 것을 물고 잡아 비트는 감각에는 그저 헉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지금껏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파정은 한 적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예외였다. 그야말로 완전히 잡아먹히는 기분으로 사정했다. 정수리 끝에서 발끝까지 작살 맞은 물고기처럼 온몸이 떨려왔다. 복상사라는 단어의 정의를 그는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의 것을 잡고 있는 그녀 내부의 경련은 상당히 길었다. 제멋대로 날뛰던 처음과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느려지긴 했어도 가만히 안에 넣고만 있는데도 꽉 물었다 푸는 것을 반복했다. 그는 숨을 겨우겨우 가다듬었다. 어지간한 쾌감에는 단련되었다고 생각했다. 남자 서넛을 죽였다는 명기도 안아봤지만 그 때도 별거 아니군, 생각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는 팔로 딛고 상체를 살짝 일으켰다. 내려다본 시선 아래 그녀가 완전히 흐트러진 표정으로 헐떡이고 있었다. 그도 어쩔 수 없이 쾌락에 약한 남자였다. 제 아래 누워 있는 여자에 대한 뜨거운 갈망이 샘솟았다. 땀에 젖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젖은 눈시울에도, 코끝에, 턱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깊이 들어간 곳에도 키스했다. 흐려져 있던 루시아의 눈에 조금씩 초점이 돌아왔다. 쾌락의 정점이 지나고 상대적으로 느끼는 무기력함에 손끝하나 까딱할 수 없었지만 그것도 조금씩 시간이 지나자 괜찮아졌다.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가벼운 입맞춤이 쉴새없이 이어졌다. 그는 그녀의 얼굴과 목덜미를 오가며 가릴 것 없이 자잘한 키스를 쏟았다. 루시아는 부끄러우면서도 조금 들뜬 기분이 들었다. 자극적이지 않은 가벼운 키스는 어쩐지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었다. 꿈에서 결혼생활을 했으나 부부간 성에 무지한 루시아지만 조금 전 자신이 만족한 만큼 그 역시 만족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루시아는 기교를 부리며 남자를 유혹하는 방법 같은 건 알지 못했다. 관계에서도 소극적인 편 정도에 더해서 거의 목석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미약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이만큼 느끼고 반응하는 타고난 몸이었다. 최고의 명기로 꼽히는 창부들 중에서도 찾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루시아는 그런 건 몰랐다. 그냥 그가 지금 대단히 만족했고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 정도만 느꼈다. 그가 늘어뜨린 루시아 팔을 잡아 손바닥에 입을 맞추고 손목 안쪽부터 겨드랑이까지 쪽쪽 소리나도록 애무했다. 왠지 부끄러워져서 루시아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얌전히 그에게 몸을 맡겼다. 알아서 잡아먹으라는 것처럼 몸을 내맡기는 반응은 그를 더 자극했다. 그녀 안에 묻고 있는 그의 중심은 뿌듯하게 힘을 받아 부피를 키워갔다. 그는 상체를 일으키고 그녀 다리 하나를 잡아 어깨로 올렸다. 땀으로 촉촉한 그녀 종아리에 입을 맞추면서 부드럽게 허리를 움직였다. 흠칫 놀라 눈이 동그랗게 커진 그녀가 그와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내리자 그는 아랫배가 꽉 죄어드는 것 같았다. 그가 쏟아낸 정액을 머금은 그녀의 질은 아까보다 훨씬 미끈거리며 부드럽게 그의 성기를 품었다. 성기 대부분은 그녀 안에 넣은 채 기둥 부분은 조금씩 꺼냈다가 넣으면서 그는 뜨겁고 습한 그녀의 안에서 마찰되는 기분 좋은 쾌감을 즐겼다. “응..아아...” 미약한 신음이 루시아 입에서 흘러나왔다. 단단한 기둥이 내부를 헤집는 느낌이 적나라했다. 느릿하게 올라오는 쾌감이 좋았다. 그가 뿌리 끝까지 밀어넣을 때마다 루시아 몸이 아래 위로 조금씩 흔들렸다. 몸이 깊은 물에 잠긴 것만 같았다. 무겁게 늘어지면서도 부유하는 것 같았다. 절정을 느끼고 한껏 예민해진 속살을 그의 성기가 스쳐갈 때마다 전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요란한 교성을 지르는 것도, 보란 듯 교태스런 몸짓을 보이는 것도 아닌데 휴고는 그녀의 흐려진 눈빛과 젖어드는 눈시울에 손끝까지 저릿할 정도로 흥분했다. 미미한 반응이지만 그래서 꾸며내는 거짓 반응이 아닌 정말 느껴서 몸부림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뜨겁게 죄는 그녀의 속살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한편으로 빼냈다 밀어넣어 자극도 느끼고 싶었다. 허리를 둥글게 움직이며 안을 자극하자 바로 반응이 왔다. 잡아먹을 듯이 달려드는 내벽의 움직임은 그의 성기를 마구 주물럭거렸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분출하고 싶은 욕망을 내리눌렀다. 정말 요물이 따로 없었다. 벌어진 붉은 입술과 그 안에 보이는 작은 혀를 보자 맛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몸을 숙여 두 팔로 그녀 어깨와 허리를 감싸 들어올렸다. 마주 앉게 된 자세로 그는 그녀의 뒷통수를 품으로 당기며 입술을 삼키고 살짝 나온 혀를 빨아들였다. 말랑거리는 혀가 쉽게 그에게 잡혀주지 않았다. 끈질기게 쫓아가며 휘감고 살짝 물었다. 파득 놀란 혀가 얌전해졌다가 다시 도망쳤다. 쫓고 쫓기며 그는 앙큼한 그녀의 작은 입 속을 정복하는데 빠져들었다. 그 와중에도 한 손으로 그녀 엉덩이를 움켜잡고 허리는 계속 움직였다. 그녀 입안에 흐르는 맑은 타액을 삼켰다. 치열을 샅샅이 훑으면서 볼 안쪽 구석구석 건드리지 않는 곳 없이 애무했다. 루시아가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급하게 두드리고 나서야 그는 입술을 뗐다. “하아. 하아.” 도톰하게 부푼 입술을 벌리고 루시아는 마구 가쁘게 호흡했다. 그가 키득 웃으며 그녀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 뗐다. “코로 숨을 쉬어야지.” 질식시킬 것처럼 몰아가던 그를 원망스레 바라보던 루시아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알몸으로 남자와 뒤엉켜 있는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자마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누워서 그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아닌, 그의 허벅지에 걸터앉아 근육이 움직이는 그의 맨 가슴을 바라보고 있자니 민망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루시아가 시선을 피하자 그는 순간 약간 기분이 상했다. 일부러 쫓아가 시선을 마주하자 또 피한다. 집요하게 몇 번 그러다가 그녀가 수줍어 그런다는 것을 알고는 피식 웃었다. 남자 없이는 살지 못할 것 같은 음란한 몸을 지녔으면서 순진하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음란함은 그 밖에 알지 못할 것이다. 어쩐지 그 점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그가 다시 루시아를 눕혔다. 정면이 아닌 측면으로 돌아눕게 해서 다리를 옆으로 겹쳐 놓이게 하고 허벅지 사이를 뚫고 질 깊숙이 진입했다. “앗..으응..” 바뀐 자세는 이전과 다른 곳을 건드리며 자극했다. 얕게 건드렸다가 때로는 깊게 들어왔다. 아픈 걸 참기에만 급급했던 초야와 달리 루시아는 정사가 주는 쾌감에 빠져들었다. 의식이 돌아온 루시아는 지금 자신이 잠에서 깨어난 건지 기절했다 깨어난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머릿속이 멍하고 온몸이 나른했다. 그리고 좀 더 의식이 또렷해지자 귓가에서 숨소리가 들려왔다. 모로 누운 상태로 등 뒤에서 그가 자신을 끌어안고 있었다. 한 손이 허리를 감고 다른 한 손을 가슴을 쥐고 있고 그에게서 나오는 호흡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히익. ’등 뒤에 닿는 탄탄한 그의 가슴을 느끼면서 루시아는 몸을 살짝 움직이다가 경악의 비명을 삼켰다. 그의 것이 아직 자신의 안에 있었다. 온몸이 불에 타는 것처럼 열이 올랐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니, 간밤에 대체 얼마나 했는지도 모르겠다. 내려 있는 커튼 사이로 환하게 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봐서 분명 한참 전에 날이 밝은 것이 분명했다. 대체 시간이 얼마나 된걸까. 늘 해 뜰 무렵에는 일어나는 습관이라 이렇게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몸을 움직이는데 목덜미에 축축한 입술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저..전하..?” “..이름.” “..휴. 저..놔 주세요.” “싫은데.” 그의 입술에 목과 등 부근에 자잘하게 입을 맞추고 키스는 점차 짙어지며 따끔거리는 흔적을 만들었다. “전ㅎ..휴. 아침이에요.” 루시아의 작은 반항에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으며 오히려 몸을 일으키더니 루시아의 허리를 잡아 올려 엉덩이를 들게 하여 루시아를 엎드린 자세로 만들었다. 자신의 안에 들어와 있던 그의 것이 점차 부피를 늘려가는 것을 느끼며 루시아는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 뜨거운 것이 쑥 빠져나가더니 느릿하게 안으로 들어온다. “흐읏. ..” 그가 밀고 들어올 때마다 내부를 채우고 있는 탁한 액체가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짐승이 교미하는 것 같은 자세에 살이 맞부딪치며 나는 물 튀기는 소리는 수치심을 더하고 그것이 쾌감이 되었다. 완전히 기절하는 것처럼 잠든 루시아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는 보송하고 하얀 그녀의 볼을 깨물고 입술을 맛보고 목덜미를 핥았다. 부족했다. 맛보고 또 맛봐도 더해가는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그녀의 긴 목덜미를 깨물어 그녀의 내부를 채우고 있는 붉은 피라도 마시고 싶었다. 그러면 이 갈증이 조금이라도 해소가 될까. ‘미쳤군.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상큼한 풋과일 향을 풍기는 그녀의 체취를 들이마셨다. 이 여자의 몸은 마약이었다. 아니, 마약도 이보다는 달콤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정말 미친 것 같다고. 그는 그녀의 몸을 끌어안으며 생각했다.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상큼한 풋과일 향을 풍기는 그녀의 체취를 들이마셨다. 이 여자의 몸은 마약이었다. 아니, 마약도 이보다는 달콤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정말 미친 것 같다고. 그는 그녀의 몸을 끌어안으며 생각했다. < -- 공작부부 -- >아침. 루시아는 환하게 침실을 밝히고 있는 아침 햇살을 응시하며 눈을 깜빡이면서 남아 있는 잠기운을 몰아냈다. 몸을 돌려 두 팔로 몸을 지탱하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나른한 감각이 온몸을 두드렸다.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느끼는 노곤한 피로감이 이젠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근 한 달 째, 그는 매일 밤마다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그와 하는 건 꽤 많은 체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그는 도통 시작했다 하면 짧게 끝내는 적이 없고 그나마도 기진맥진해서 루시아가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해 잠들고 나서야 놓아 주었다. 밤새 시달리다 아침에는 노곤해서 병든 병아리처럼 꾸벅거리다가 좀 정신이 들 무렵이면 날이 저물고, 그러면 그에게 침대로 끌려들어가는 밤의 시작이었다. 어영부영 하는 사이에 순식간에 한 달이 지나갔다. 그나마 이제는 몸이 좀 익숙해졌는지 기상 시간이 점점 빨라지고 피로함이 덜해졌다. 처음 일주일은 거의 오후가 되어서야 일어났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절대. 그에게 이젠 좀 피곤함이 덜한 것 같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말을 했다가는 지금보다 더 못살게 굴 것이 뻔했다. 아무것도 못하고 침대에서만 하루를 보내는 건 그만하고 싶었다. 어젯밤은 그는 유난히 집요했다. 몸 안을 꽉 채우는 이물감이 아직도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힘들긴 해도 싫지는 않았다. 솔직히 좋았다. 아찔한 오르가즘을 몇 번 느끼는 만족스러운 섹스를 하고 나면 피곤해도 충족감이 들었다. 그는 능수능란하게 그녀를 좌로 굴리고 우로 굴리며 온 몸 구석구석 혀가 닿지 않을 곳이 없을 정도로 애무하며 희롱했다. 공간만 침실이라는 곳에 한정 되었을 뿐 침대 위, 아래, 테이블 위, 소파 할 것 없이 장소며 체위며 매일같이 색다른 발견을 하고 있었다. 그 남녀간 은밀한 놀이에 루시아는 도통 싫증을 느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짐승 같다고 기겁했던 후배위는 익숙해졌고, 그의 허벅지에 올라타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작 한 달 만에 그는 루시아를 정사의 기쁨을 아는 몸으로 길들여 놓았다. 줄을 당겨 하녀들을 불렀다.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느라 거울 앞에 서서 거울 속 제 모습을 바라보는 루시아의 표정이 기묘했다. 뒤에 서 있는 하녀들도 시선을 어디 둘지 몰라 고개를 숙이거나 눈을 돌렸다. 어깨가 깊이 팬 드레스를 입은 루시아의 목덜미며 어깨며 울긋불긋한 자국으로 난리였다. 이래서야 무슨 피부병이라도 걸린 사람 같다. 날은 점점 더워지는데 한 여름에도 목과 팔까지 다 가린 드레스를 입어야 하나. 루시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안 되겠구나. 다른 걸로 가져오렴. 목까지 가리는 걸로.” “예. 마님.” 하녀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루시아는 이젠 하녀들 보기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뻔뻔해졌다. 한 달 가까이 아침마다 이런 일을 겪으면 누구라도 그렇게 될 것이다. 신혼이니 그럴 수도 있지 주변에서는 생각하면서도 공작이 매일같이 그녀와 밤을 보내는 것에 다들 놀라는 것 같았다. 더불어 원래 친절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아예 그녀 앞에서 절절 맸다. 남편의 사랑만큼 대단한 권력은 없구나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낯 햇볕이 강해지기 전에 정원 그늘에 간이식 티테이블을 차려놓고 루시아는 느긋하게 차 한 잔을 마셨다. 날씨가 더 무더워지면 힘들겠지만 아직까지는 그녀의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참 삭막한 정원이야...’ 규모가 작지 않은 정원 전부가 사철식물로 가득했다. 꽃은커녕 가을에 낙엽조차지지 않고 봄부터 겨울까지 내내 똑같은 풍경일 것이다. 확실히 손은 덜 가겠지만 정원이라 내세우기도 우스운 꼴이었다. 정원을 꾸미는 일은 여주인의 몫이었다. 그 동안 유능한 집사 제롬이 살림을 맡아했지만 정원을 손댈 권한은 없었다. ‘정원 가꾸기를 해볼까...’루시아는 이제 공작(과 그 아들)을 제외한 유일한 타란 공작가 사람이고, 공작부인이었다. 그녀에게는 정원 뿐 아니라 내부 인테리어를 취향대로 가꿀 권한이 있었다. ‘따로 할 일이 없기도 하고...’성에 머물면서 루시아는 딱히 하는 일이 없었다. 꽃꽂이나 수놓기 등의 흔히 귀부인들이 시간 때우기로 하는 일은 변변히 배우지 못했고 취미도 없었다. 보석이나 장신구 등의 사치품을 구입하는 일에 흥미도 없었다. 하루 두세 시간 책을 읽는 것 외에 그저 차 마시고 산책하고 그렇게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이래서는..밥벌레 같은 걸. ’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꿈속의 루시아는 이런 신조를 강요받는 삶은 살았다. 백작부인으로 있을 때도 파티 참여 등 사교활동은 업무였다. 그녀의 생각을 휴고가 알았다면 도리어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왜 하는 일이 없지? 휴고 입장에서 그녀는 넘치도록(그의 욕심에는 아직 한참 부족한 점은 있지만) 아내 역할을 잘 해주고 있었다. “마님.” 슬슬 들어갈까 하는 와중에 제롬이 다가왔다. 제롬은 봉투 하나를 루시아에게 건넸다. 열어 보자 서류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짧게 내용을 훑는 루시아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내비예산이군요.” “예. 마님. 기존에 운용되던 예산이 아니다보니 새로 작성하는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내비예산은 귀족가 안주인에게 할당되는 예산이었다. 왕실로 치면 내명부 운영재정이다. 작위 귀족의 안주인 정도면 단지 한 남자의 아내가 아닌 그 가문의 살림 관리자였다. 안주인이 집안을 꾸리고 사람을 고용하고 파티를 열어 사교활동을 하는 모든것을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활동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른 예산으로 운용되던 고용비와 성을 운영하기 위한 기본 소요경비는 내비예산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오롯이 마님께서 새로 계획하시면 되는 신규 예산입니다.” “...신규..? 어떤 용도로 쓰라는 건가요? 내비예산은 원래 고용비나 경비로 쓰는 거 아니었어요?” “이후 차차 반영되겠지만 일단 올해는 아닙니다. 용도는 마님께서 정하시는 것입니다. 금액 안이라면 어디에 쓰시든 마님의 뜻입니다.” 이래서야 완전히 루시아의 사재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비용이라기에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도대체 이게 0이 몇 개인가.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의 금액인데 제롬은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말하고 있으니 공작가 쯤 되면 아예 경제 기본 단위 자릿수가 다른 모양이었다. ‘놀고먹는 건 끝났구나...’일종의 업무추진비가 나왔다. 당연히 타당한 성과를 내야 하는 것이다. 작위 귀족의 안주인에게는 누리는 권리만큼 당연히 의무도 따랐다. 잡음 없도록 살림을 꾸리는 것은 기본이고 귀부인들과 사교를 통해 남편을 내조해야 한다. ‘정원부터...’정원 꾸미기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꿈에서 메튼 백작과 결혼생활을 하는 중에도 정원은 가꾸지 않았다. 정원은 돈이 많이 들어가는데 메튼 백작은 그런 소비를 내켜하지 않았다. 제롬에게 뜻을 밝히자 제롬은 무엇이 필요하고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꼼꼼하게 조언을 주었다. 늘 똑같은 하루가 저물었다. 오늘 저녁 식사는 루시아 혼자였다. 아침과 점심은 각자 하지만 저녁의 거의 그와 함께 먹는 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가 오후에 외출해서 식사 시간이 지난 후에 귀가했다. 루시아는 평소처럼 서재에서 책을 읽다가 목욕을 하고 침실에서 젖은 머리를 말렸다. 원래 하녀들이 시중을 들어야 했지만 대개 이 시간에 그가 침실로 들어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하녀들은 빠지게 되었다. 달칵, 문소리가 들리고 역시 그가 들어왔다. 하녀들을 물리고 나서부터는 아예 그는 목욕 가운만 걸치고 침실로 들어왔다. 그건 루시아도 마찬가지였다. 허리끈을 묶어 단정히 하고 있으나 한 장의 목욕 가운 안에는 속옷도 입지 않았다. 화장대에 앉아 있는 루시아를 그가 다정하게 등 뒤에서 한 팔로 감으며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 감촉을 느끼며 루시아는 눈을 감았다.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이게 행복 일까봐. 나중에 잊지 못해 괴로울까봐 겁이 났다. “제롬에게 전하라 한 것이 있었는데. 받았나?” “네. 그래서..정원을 조성하려구요.” “정원?” “혹시 정원에 꽃을 심지 않은 건 당신 뜻인가요? 제가 손대도 괜찮아요?” “정원은 안주인 권한이지. 좋을 대로 해.” “먼저 조성사를 불러서 전체 계획을 잡아 설계해야 한대요. 초반에는 일꾼들이 많이 필요하고. 당분간은 조금 번잡스럽게 사람들이 드나들 것 같아요.” 휴고는 정원에 대해 모른다. 애초에 그런 건 관심 없었다. 정원을 사철 식물로 채워둔 것도 빈 채로 두면 너무 볼썽사납기 때문에 제롬이 한 조치였다. 그래도 그 넓은 정원을 새로 꾸미려면 사람이 많이 필요하고 돈도 꽤 필요하겠구나 정도는 짐작했다. “내비예산이 부족한가?” 휴고는 루시아가 정원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그렇게 해석했다. “네?” 루시아가 화들짝 놀랐다. 절대 돈을 더 달라는 소리가 아니었다. “증액은 많이는 곤란해. 올해 예산은 이미 확정되어서 가예산으로 뺀거니까. 내년엔 고려해보지.” 내비예산 규모를 정하는 건 가주의 권한이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내비예산 규모까지 혼인 조건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부부금실이 좋으면 내비예산 규모가 늘어나는 당연한 수순이고 반대로 남자가 이혼을 원할 경우 가장 먼저 하는 짓이 내비예산을 줄이는 것이다. 올해 예산은 이미 빼곡하게 짜여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규모로 잡았다. 내년에는 더 늘릴 생각은 처음부터 하고 있었다. 루시아가 확인하고 놀란 금액은 그녀의 생각과 달리 단지 공작가라서 당연한 규모가 아니었다. 귀부인 자존심 때문에 결코 누구도 자신의 내비예산 액수를 밝히지 않지만 아마 루시아의 내비예산이 얼마인지 들었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에요.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아니에요. 지금도 충분히 많아요. 그저 단지..사람들이 드나들면 번잡스럽게 생각하실까 해서 말씀드린 거였어요. 제가..괜히 정원에 손대서...” “로암에 하루 드나드는 자들이 수백이야. 일꾼들이 수천 명이 될 것도 아닐 텐데 무슨 상관이야. 정원은 안주인 권한이라고 했지. 당신이 정원 나무를 다 뽑아버리든 다 밀고 연못을 파든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그런 일을 내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어.” “.... 어떤 걸 제 임의로 할 수 있는지, 어떤 걸 허락을 구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전 어디까지 할 수 있어요?” 물끄러미 루시아를 바라보던 그가 그녀를 달랑 안아들었다.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고 그 옆에 비스듬히 턱을 괸 자세로 누워 그녀를 직시했다. “어디까지 하고 싶지?” 기회였다. 루시아도 그쯤은 알았다. 왕이 자신이 총애하는 애희에게 무얼 갖고 싶냐 묻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는 그녀와 잠자리를 만족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매일 그녀의 침실을 찾을 리는 없었다. 만족한 남자는 무척 관대해지기 때문에 여기서 그에게 얼마간 교태로 대단히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하는 것처럼. 휴고는 그녀의 입에서 과연 어떤 말이 나올까 기대했다. 그녀는 제법 고단수였다. 지금까지 그에게 무엇도 해 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청하는 것은 어지간하면 들어줄 생각이었다. 가능하면 재물 쪽이기를 바랐다. 권력을 탐하는 여자는 그는 별로 재미가 없었다. “그걸 잘 몰라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아시다시피..전 제대로 배우지 못했어요. 공작가 안주인이 무엇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 몰라요. 그걸 배우고 싶어요.” 루시아는 욕심 내지 않았다. 그녀는 욕심은 더 큰 욕심을 부르고 결국에는 화를 부른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공작부인으로 있는 이상 평생 동안의 부귀영화는 보장되었다. 물적인 부분에서 이미 더 바라는 것이 없었다. 권력 같은 건 애초부터 흥미도 없다. “선생이라...” 그가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했다. 의외의 부탁이지만 동시에 그는 자신이 먼저 신경써야 했다는 걸 깨달았다. 타란 공작가에는 그녀에게 조언을 해줄 가문의 어른이 아무도 없었다. 또한 그녀는 제대로 된 친정을 갖지 못했다. 당연히 배울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알아보도록 하지.” “감사해요.” 루시아는 그를 향해 활짝 웃었다. 그녀의 맑은 미소를 보며 그의 입술에도 저절로 미소가 올라왔다. 그녀의 웃음은 언제나 아이처럼 사심 없이 깨끗했다. 그를 유혹하려는 웃음은 분명 아닌데 그는 그녀의 미소를 보면 하체가 묵직해졌다. 지금도. 그는 애써 경건한 생각을 떠올렸다. 근데 도무지 뭐가 경건한지 모르겠다. 그나마 집무실에 쌓여 있을 서류 더미를 생각하니 좀 기분이 가라앉았다. 요즘의 그는 본능만 남은 짐승이 된 것 같았다. 그는 이어서 나올 그녀의 말을 기다렸으나 침묵이 길어지자 결국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네?” “더는 없나?” 눈동자를 한 번 굴리며 잠시 생각한 루시아가 네, 답하자 그녀를 바라보는 휴고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바보인가? 욕심이 없나? 아니면 앙큼한 머리 굴리기인가? 하지만 휴고는 정말 루시아가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다고는 믿지 않았다. 남자든 여자든 한 보 전진을 위해 세 발짝 물러서는 일쯤은 얼마든지 한다. 지금은 순진하게 고개를 갸웃해도 머지않아 그의 베갯머리에서 종알거릴 것이다. 그가 지닌 권력과 재력. 그것을 탐내지 않는 사람은 지금껏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 정원 가꾸기 말이야. 많이 힘든 건가?”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어요. 제가 직접 꽃을 심을 건 아니니까..그렇게 많이 힘들 것 같지는 않아요.” “정원. 꼭 해야 돼?” “정원에 신경 안 쓰신다면서요.” “정원에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당신 말하는 거야. 괜히 그런데다 기운 빼지 말라고. 그런데 쏟을 기운 있으면 나한테 주는 게 어때?” 그의 손이 허리를 더듬자 루시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그를 흘겨보았다. “...이 이상 더 무슨 기운을 내요. 아침마다 늦잠 자는 것도 민망해 죽겠다구요.” “그게 왜 민망해. 자랑스러워해야지.” “...왜 자랑스러워하는데요?” “당신 남편 정력이..” 루시아가 두 손으로 덥석 그의 입을 닫았다. 발간 얼굴로 그를 노려보다가 그가 혀로 할짝 손바닥을 핥자 기겁을 하며 손을 떼어냈다. 그러나 그의 손에 손목이 답삭 잡혀 그의 입 안으로 손가락이 삼켜졌다. 그의 혀가 손가락 안쪽을 핥으며 빨아들이자 손끝에서 시작되어 팔꿈치를 스쳐가는 오싹한 느낌에 루시아는 어깨를 움찔했다. < -- 공작부부 -- >루시아는 새빨갛게 물든 얼굴로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그러나 단단히 붙잡힌 손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디단 사탕이라도 맛보는 것처럼 느긋하게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입 안에 넣어 혀로 굴리며 끝을 쪽쪽 빨았다. 그의 입 안으로 손가락이 마디 끝까지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을 보며 루시아의 호흡이 점차 가빠졌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손가락을 혀로 감으며 그녀의 반응을 관찰하고 있었다. 손끝에서 짜릿하게 전기가 오르자 루시아는 몸을 움츠리며 입술 끝을 살짝 물었다. “휴..그만..” 고작 손가락이 빨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오싹하며 나른해지는 것이 부끄러웠다. 손목을 쥔 힘이 조금 약해지자마자 루시아는 재빨리 손을 빼냈다. 그대로 그에게서 도망치듯 몸을 돌리려 했지만 그가 더 빨랐다.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아 끌어당겼다. 강한 힘으로 단번에 끌려간 루시아의 이마가 단단한 그의 가슴에 부딪쳤다. 허리께의 커다란 손은 빠르게 가운 안으로 들어와 등의 맨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부드럽게 등허리를 만지는 그의 손길에 등을 따라 전율이 달렸다. 자연스럽게 앞으로 넘어와 가슴을 손 가득히 쥐었다. 그의 거리낌 없는 애무는 언제나 그녀를 당혹스럽게 했다. 그의 가슴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그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했다. 그의 눈에는 차가운 불이 있었다. 냉정한 눈빛에서 그녀에 대한 갈망을 읽을 때 루시아는 부끄러우면서 설ㅤㄹㅔㅆ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결코 진한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숨이 막혀서 그와 시선을 오래 마주할 수가 없었다. 눈을 내리깔아 시선을 피하는 그녀를 보며 휴고는 쥐고 있던 가슴에 약간 힘을 주었다. 살짝 흠칫 놀라는 반응을 보인다. 확실히 그녀는 그가 지금껏 상대한 여자들과 달랐다. 참 재미가 없다. 죽을 것처럼 비명을 질러대고 적극적으로 허리를 돌리며 온갖 교태를 부리고 웃으며 그를 유혹하려 하는 여자들에 비하면 소극적이고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다. 모든 여자들이 다 그렇게 밤기술이 뛰어난 건 아닐 테니까. 이상한 건 그였다. 이 여자를 품고 싶어 애가 달아 이제 막 색욕에 눈뜬 어린놈처럼 날뛰는 그가 이상한 거다. 말랑한 가슴을 주무르며 부드러운 촉감을 음미하던 그가 손을 내려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다가 다리 안쪽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품안에서 그녀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손끝에는 끈끈한 액체가 미끄러졌다. 그가 피식, 웃었다. 이 간극이 미치겠다. 여기 저기 조금 만졌을 뿐인데 그녀의 다리 안쪽은 완전히 젖었다. 여인의 몸이 내보내는 애액은 남녀간 정사를 만족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휴고는 그녀를 안으며 단 한 번도 결합을 돕는 향유를 사용한 적 없었다. 그녀의 비처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풍부한 물을 흘렸다. 그의 것을 감싸는 매끄러운 감각은 인공적인 향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키스에 눈이 흐려지고 만지는 것만으로 몸을 움츠리는 그녀는 지난 한 달 다소 나아지긴 했으나 비약적인 발전은 없었다. 늘 처음인 것처럼 수줍게 그를 받아들이면서 사내 없이는 못 살 것 같은 음란한 몸을 가졌다. 단단히 부푼 하체가 아파서 그는 살짝 인상을 썼다. 더는 여유가 없었다. 그는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는 몸을 일으켜 무릎을 그녀 엉덩이 아래 넣어 그녀의 허리 아래를 공중에 들리게 했다.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 것을 보며 그는 가느다란 그녀의 두 발목을 잡아당겨 그대로 삽입했다. “으흑!” 별다른 전희나 애무가 없었으나 그녀의 내벽은 그를 빨아들이듯이 삼켰다. 그는 그녀의 온몸을 애무하는 것도 꽤 좋아하는 편이라서 평소 전희 없이 삽입은 하지 않은 편이지만 때로는 오늘과 같이 무작정 밀어 넣는 경우도 있었다. 갑작스런 그의 공격에 놀란 루시아가 숨을 헐떡였다. 잠시 숨 고를 틈도 주지 않고 그가 방아질을 시작했다. “학! 아! 아학! 하악!” 강하게 때로는 얕게 그의 단단한 기둥이 루시아의 몸을 꿰뚫었다. 강한 그의 힘에 인형처럼 몸이 흔들리면서 루시아는 교성을 질렀다. 단번에 깊은 안쪽을 찌를 때마다 고통인지 쾌감인지 모를 감각이 그녀를 지배했다. 흐릿한 눈으로 그의 미려한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을 확인하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여자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남자의 몸이 아름답다고 그를 보며 생각했다. 눈가가 붉어지고 호박색 눈동자는 취한 것처럼 몽롱해졌다. 그가 주는 쾌락에 취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의 성기가 한계까지 커지며 더 꽉 죄는 압박을 느꼈다. 마를 것 같은 입술을 혀로 축이며 그의 것에 달라붙어 움직이는 속살을 느꼈다. 맛으로 치면 극상.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다. 그녀의 안은 늘 그의 견고한 이성을 뒤흔들었다. 그는 그녀를 허벅지에 앉게 하고 엉덩이를 움켜잡아 아래위로 박음질을 했다. 철썩이며 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아래위로 거세게 흔들렸다. 출렁이는 가슴을 그가 콱 깨물며 삼키자 그녀는 날카로운 단말마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뒤로 꺾었다. 커다란 손이 땀에 젖은 그녀의 등과 날갯죽지를 쓸어내렸다. 루시아는 두 팔을 그의 목에 감고 그가 골반을 잡아서 들어 올리고 내리찧을 때마다 거대한 그를 가득 품으며 신음을 흘렸다. 아래에서 위를 찌르고 올라올 때마다 심한 자극으로 눈에서 열이 났다. 그가 제 목을 감고 있던 그녀의 팔을 풀어내고는 그녀의 허벅지 안쪽에 손을 넣어 들어 올려 몸을 돌렸다. 자연스럽게 그를 등 돌리고 걸터앉은 자세가 되어 그가 허리를 튕기자 몸이 반동으로 튀어 올랐다. 루시아는 비명처럼 교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흑! 으흑! 아! 휴! 으응!” 루시아가 애원처럼 그의 이름을 흐느껴 부르자 그의 입술이 귓불을 물고 빨았다. “더. 더 울어 봐.” “흑..아응!” 등 뒤에서 그의 손이 가슴을 움켜잡고 뒷목을 물었다. 통증과 동시에 짜릿한 감각에 비명을 질렀다. 약간의 욱신거리는 통증을 그의 혀가 부드럽게 핥아냈다. 몸이 붕 뜨는가 싶더니 그대로 침대에 얼굴이 닿았다. 엉덩이가 치켜 올라간 자세로 그가 퍽 하고 강하게 들어왔다. “아!” 뒤에서부터 그가 추삽질을 시작했다. 땀에 젖은 살이 마찰하며 음란한 소리를 냈다. 루시아는 두 손으로 시트를 쥐고 그가 진입할 때마다 눈앞이 번쩍이자 눈을 감았다. 고개를 옆으로 튼 상태로 볼이 침대 시트에 쓸렸다. “읏..휴. 으읏..” 그녀 입에서 이름이 불릴 때마다 그는 하복부가 아닌 심장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통증 같은 쾌감에 그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두 팔목을 잡아 뒤로 당기면서 여린 속살 안으로 짓쳐 들어갔다. 뒤에서 들어오는 건 너무 깊었다. 하체에서부터 관통될 것 같다. 그는 짐승처럼 그녀를 탐했다.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것이 힘들다. 그러나 힘든 것과는 별개로 몸은 착실히 달아올랐다. “흐윽!” 쾌락의 파도가 밀려왔다. 강렬한 오르가즘에 그녀의 몸이 순간 경직되면서 동시에 그의 것을 물고 있던 내벽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며 조여들였다. 그의 움직임이 멈추고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는 파정하지 않았다. 쑥 그가 빠져나가더니 그가 늘어지는 그녀의 몸을 잡아 뒤집어 바로 눕게 했다. 그의 몸이 루시아 몸 위를 타고 오르며 단번에 안으로 들어왔다. “으응!!” 한껏 예민해진 질벽이 자극을 받아 파르르 경련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그의 혀가 입안을 더듬고 혀를 휘감았다. 짧지만 진득한 키스가 끝나고 그가 허리를 둥글게 움직이며 안을 휘젓자 루시아는 은근한 자극에 가쁘게 숨을 뱉었다. “하아..하아..” 휴고는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그녀의 이마를 쓸어 올렸다. 상기되어 붉어진 볼을 그의 혀가 길게 핥았다. 짭짤한 맛에 그녀의 체향이 섞여 달큼했다. 천천히 노를 젓듯이 허리를 돌리며 숨을 고르면서 살짝 벌어진 그녀의 붉은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간의 가르침이 헛된 것은 아니었는지 그녀의 두 다리는 그의 허리를 휘감고 있었다. 그가 허리를 움직이는 것에 제법 따라 반응했다. 그는 마구 밀어붙이던 아까와 달리 지루할 정도로 천천히 움직였다. 한 차례 절정으로 잔뜩 예민한 내벽이 쓸리는 자극에 온몸이 오싹오싹했다. 할딱할딱 호흡을 뱉으며 루시아는 멍하니 그를 보았다. 마주친 그의 눈매가 살짝 휘었다. 부풀어 오른 가슴을 그가 쥐고 유두를 문질렀다. 루시아가 움찔 반응하며 파드득 몸을 떨 때마다 그는 즐거워 하는 것 같았다. “지낼만 한가?” “.... 네?” “여기서 지내는 것. 적응했느냐고.” “네.” 그는 루시아에게 한 마디 더 들으려 일부러 말을 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딱히 그를 꺼려하거나 무서워하는 건 분명히 아닌데 묘하게 한 발자국 물러서서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그건 조금씩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너무 적응해도 곤란해. 영지일이 그런대로 정리가 되면 수도로 올라갈테니까.” 수도. 루시아는 순간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그건 뜨거워졌던 온몸의 피가 갑자기 식는 느낌이었다. 내년이면 왕이 죽고 오라버니인 태자가 즉위할 것이다. 새로 왕이 될 태자는 타란 공작과 매우 긴밀한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절대적 복종과 충성 보다는 든든한 동맹 관계에 가까운. 왕이 즉위하면 타란 공작은 왕의 부름을 외면하지 못해 싫든 좋든 수도로 올라가야 할 것이다. 지극히 평온한 이곳에서의 생활이 이미 끝이 예정된 시작이었다. 그리고 수도에서 아마 원래 그가 결혼했어야 할 그녀도 만날 것이다. 그가 계약결혼을 했다고 알려졌지만 그 소문을 그가 직접 인정한 건 아니었다. 어쩌면 루시아가 알고 있던 모든 소문은 다 거짓이고 실제로 두 사람은 열렬히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강한 힘이 그녀의 턱을 잡아 올리는 바람에 루시아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가 어쩐지 못마땅하게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짧게 그가 허리를 쳐 올리자 루시아는 헉 숨을 들이켰다. 다그치는 것처럼 지그시 루시아를 바라보던 그는 그녀의 두 다리를 잡아 어깨위로 올렸다. “딴 생각할 여유가 있단 말이지.” 낮게 중얼거린 휴고는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처연해진 그녀 눈동자 속에 자신이 없다는 것을 느끼자 대단히 불쾌해졌다. 하지만 그는 왜 불쾌한 것인지 알지 못했고 이유조차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그는 기분이 상했다. 그것을 여린 속살을 강하게 용두질 하는 것으로 풀어냈다. 호박색 눈동자가 쾌감으로 흐려지는 것을 보며 그는 만족했다. 며칠 후 저녁 식사 후 간단한 후식으로 차를 마시는 중에 휴고가 말했다. “내일 코르잔 백작부인이 올거요.” 다짜고짜 던지는 통보에 루시아는 당황했다. “내일 별다른 일정 있소?” 어차피 약속은 잡아 놓고 일정은 없느냐 묻는 것은 대체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루시아는 매일이 그 날 같은 나날을 보내던 터라 고개를 내저었다.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하나요?” 잠시 기다렸으나 그는 코르잔 백작부인이 누군지 왜 오는 것인지 설명해줄 기색이 없어서 루시아가 돌려 물었다. “일전에 부인이 바랐던 선생이오. 손님인지 아닌지는 알아서 하시오.” “...네.” 그는 정말 불친절한 남자였다. 표정이 없어 차가워 보이는데다가 어투는 딱딱 끊어졌다. 말수가 많은 것도 아니고 어떤 일을 하면서 이렇다 저렇다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나름대로 묻는 것은 꼬박꼬박 다 대답해 주는 것이 오히려 신기했다. ‘제롬에게 물어봐야겠네. ’코르잔 백작부인에 대한 정보는 제롬을 통해 얻어야겠다. 제롬은 주인에 대한 평가를 경솔히 입에 담지 않았지만 지나가는 말이나 과거의 짤막한 에피소드 등을 전해주곤 했다. 단편적 정보를 이렇게 저렇게 짜맞추면서 루시아는 대충 휴고에 대한 성정을 파악했다. 결론을 내리자면 그는 수하들에게조차도 대단히 불친절했다. 가타부타 설명하는 걸 싫어한다. ‘그에게 자꾸 이것저것 물으면 귀찮아할 거야. ’그녀의 말수는 확 줄었고, 딱히 뭐라 지적할 수 없는 그는 속으로만 끙끙댔다. 그는 아무런 의문 없다는 표정으로 차를 마시는 그녀를 흘끔거렸다. 다소 성가셔도 좋으니 저 작은 입이 종알거리는 것을 좀 봤으면 좋겠다. 초야에는 꽤 떠들어 그만 입 다물고 자라고 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 후에는 도통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코르잔 백작부인은 코르잔 백작의 모친이오. 정확히는 전 백작부인이지.” 아쉬운 쪽이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다. 결국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코르잔 백작부인이라는 호칭은 일종의 훈장이오. 백작부인은 북부 사교계의 대모라고 불리지. 젊어서 남편을 여의고 재혼하지 않고 백작을 키우고 가문을 지킨 여장부요.” “아. ..대단한 분이군요.” “예절과 교양에 능통해서 많은 귀족가 여식이 배움을 청하려 줄을 서 있다 하더군.” “그런 분을 너무 갑자기 청한 것 아닌가요? 그 분도 일정이 있을 텐데...” “가신의 몸으로 주인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 만한 영예가 어디 있다고.” 코르잔 백작이 가신이라고 해서 그 모친까지 가신인 것은 아닌데 너무 제멋대로잖아. 루시아는 오만한 그의 대답에 다소 떨떠름하다가 가만히 그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내가 이렇게 대단한 걸 알아둬라, 자랑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그렇게 유치한 사람이 아닌데..’루시아는 그를 완벽한 어른으로 정의하고 있었다. 농을 던져 그녀를 놀리거나 침대에서 짓궂게 슬쩍슬쩍 건드리는 것은 그가 순전히 바람둥이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군요. 감사해요. 제가 공작가 안주인이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겠지요.” “말로만?” “.... 네?” 휴고가 손짓하자 눈치 빠른 제롬은 대기해 서 있는 하인과 하녀들을 모두 데리고 빠르게 사라졌다. 갑자기 널찍한 식당에 단 둘만 있게 되자 루시아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그가 벌떡 일어나 테이블을 끼고 돌아 다가오자 더더욱 당황했다. 그가 루시아가 앉은 의자의 팔걸이를 두 손으로 붙들고 몸을 숙여 바로 그녀의 코앞으로 바싹 얼굴을 들이밀었다. “코르잔 백작부인은 아무리 나라고 해도 오라가라 하기는 까다로워. 노인네가 여간 깐깐해야 말이지. 본인 아들을 석 달 열흘 굴려도 눈 하나 깜짝 안할걸.” “그럼..어떻게 하신 거예요?” “자세한 건 알 필요 없고, 그만큼 신경 썼다는 소리야.” 대체 어쩌라고. 가끔은 이 남자가 원하는 걸 도무지 모르겠다. 대단하시네요! 말해서 자존심을 세워달라는 건지, 좀더 황송해하며 감사해 달라는 건지. 루시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살짝 엉덩이를 들어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답은 정답에 가까웠으나 정답은 아니었다. 잠시 뚫어져라 루시아를 바라보던 그의 입매가 슬쩍 올라갔다. “고작 이걸로?” 그녀의 답은 정답에 가까웠으나 정답은 아니었다. 잠시 뚫어져라 루시아를 바라보던 그의 입매가 슬쩍 올라갔다. “고작 이걸로?” < -- 공작부부 -- >그의 손이 루시아 턱을 틀어잡더니 격하게 그의 입술이 맞부딪쳤다. 벌어진 입술 안을 가르며 단번에 뜨거운 살덩이가 침입했다. 강하게 흡입하며 입 안 깊은 곳까지 건드린다. 혀뿌리가 얼얼할 정도로 그는 그녀의 혀를 휘감아 빨아 들였다. 눈앞이 흐려져서 루시아는 눈을 감고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격렬한 키스가 이어졌다. 타액이 뒤섞이고 질척이는 혀가 맞닿았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던 루시아를 가뿐히 안아들고 테이블 위에 앉혔다. 그러는 중에도 두 사람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조용한 식당에 진하게 두 사람 혀가 얽히며 내는 끈적한 소음이 메아리쳤다. 붉은 입술은 그의 입술에 삼켜지고 작은 입안은 그의 혀에 점령당했다. 입안을 거침없이 훑는 그의 키스는 마치 몸 안을 휘젓는 것 같았다. 그의 어깨를 감싸듯 목을 감은 그녀의 두 팔이 가늘게 떨렸다. 길게 이어진 키스가 끝나고 그는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그녀의 입술에 마무리처럼 입을 맞추었다. 그는 턱을 따라가다가 이어서 목에 입술을 붙였다. 그의 손이 옷 위로 강하게 가슴을 움켜잡았다. 그의 다리 하나가 그녀의 무릎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자 루시아는 화들짝 놀라며 두 손으로 힘껏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여..여기서 할 생각은 아니죠?”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휴고는 당혹스러워 하는 그녀를 보자 장난기가 치솟았다. “안 돼?” “안 돼요!” “이유. 납득할만하면 물러나지.” “바..밥먹는 곳에서 이러는 거 아니에요!” 목을 지분대던 그가 잠시 멈추더니 낮게 웃었다. “그럼 다른 곳은? 복도는 어때?” “절대 싫어요!” “정원은? 밖에서 해보고 싶은데.” “미쳤어요??” 처음 보는 그녀의 격한 반응에 그는 웃음을 참고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왜 안 되지?” “다른 사람이 볼 수도 있잖아요!” “볼 사람이 없으면 되는 건가? 성에 있는 자들 하나도 남김없이 다 내보내면 복도건 정원이건 해도 돼?” “으...”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루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도 없으면? 그러면 상관없지 않을까. 어차피 침실 안에서도 안 해 본 것 없는데. 장소가 바뀌는 것이 무슨 상관이람. 남녀가 결합하는 방법이 그렇게 다양할 수 있다는 걸 지난 한 달 아주 착실히 배웠다. 처음엔 정말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은근히 재미도 있고 자극적이었다. 루시아는 사람들이 왜 이걸 이렇게 열심히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아무하고나 뒹굴며 천박하게 노는 짓 따위는 절대 하고 싶지 않지만 두 사람은 부부였다. 침실 안에서 무슨 짓을 하던 누가 뭐라 할 수 있을까. 휴고는 그녀가 완전 기겁하는 모습을 기대했다. 그러나 예상을 벗어나 진지하게 검토하는 모습을 보자 살짝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정말 그녀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아주 다양하게 간신히 참고 있는 그의 욕망을 간질였다. 며칠은 일이건 뭐건 다 집어치우고 침실에 틀어박혀 만족하도록 그녀를 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녀 체력이 그걸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이 여자는 대체 왜 이렇게 작은가. 왜 이렇게 여리여리하지. 왜 이렇게 약한 거야. 부서질 것 같아서 세게 잡지도 못하겠다. 자신 때문에 그녀가 다친다면 아주 끔찍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그녀는 순진했지만 배우는 것은 아주 빨랐다. 밤마다 그는 가진바 온갖 기술을 그녀를 상대로 시연했지만 한 번도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당혹해하거나 부끄러워하긴 해도 은근히 열심이었다. 좋아. 오늘 밤에는 이런 저런 걸 해볼까. 새로운 시도를 상상하자 아랫배에 피가 몰리는 기분으로 그의 중심이 단단하게 일어났다. “아무..튼 여기는 싫어요..” 마나님이 싫다는데 어쩔 수 없지. 그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손을 잡아 테이블에서 내려오게 도와주었다. 그의 중심은 풀어달라고 강하게 아우성치고 있었지만 참았다. 그녀와 있을 때 그는 종종 자신의 인내심에 감탄하곤 했다. 아마 눈앞의 여자가 그녀가 아닌, 과거에 데리고 놀았던 여자들 중 하나였다면 의사에 상관없이 그대로 치마를 걷어 올리고 넣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그 여자들은 입으로는 싫다 해도 정말 싫은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휴고는 루시아를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었다. 그녀가 싫다고 하는 건 정말 싫은 거다. 그는 그녀의 뜻을 존중하고 싶었다. 이런 깊은 뜻은 이 철모르는 아내가 알아주기는 하는지. 테이블에서 내려오며 생글거리는 그녀의 순진한 표정을 봐서는 아무래도 전혀 모를 것 같다. “산책할거지?” 루시아는 저녁 식사 후 늘 가볍게 산책을 즐겼다. 그는 여전히 쌓여 있는 일거리는 잠시 미루어 두기로 했다. 조금 더 그녀 곁에 있고 싶었다. 뜨거워진 몸을 좀 가라앉히기도 해야겠고. “네.” “같이 나가지. 방해인가?” “아뇨. 좋아요.” 루시아는 반색하며 빠르게 대답했다. 그와 산책은 처음이다. 기쁜 내색을 뚜렷이 드러내는 발그레한 그녀 표정을 보고 그는 낮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다. 본격적인 여름은 아직 오지 않아서인지 저녁 바람은 제법 선들선들했다. 그와 나란히 거닐며 루시아는 흘끔거리며 그를 훔쳐보았다. 그녀의 속도에 맞추어 천천히 걷는 그의 배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동안 그에게 함께 하자고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같이 산책하는 건 꼭 해보고 싶었다. 그와 단지 계약에 묶인 부부가 아닌 연인이라도 된 것 같았다. “올해는 정원에 꽃만 가득 심을 생각이에요. 촌스럽겠지만 어차피 처음이니까 그러려니 하겠죠.” “꽃만 심으면 촌스러운 건가?” “그럼요. 정원 꾸미기가 얼마나 심오한 세상인데요. 아름다운 정원에는 적당한 조화로움이 필요하거든요. 솜씨 좋은 조경사나 정원사는 정말 구하기 힘들어요. 이미 대부분 다른 가문에 고용되어 있어요.” “빼내오면 되지.” “말처럼 쉽지 않아요. 다른 가문에서 거금을 제시하고 제롬을 고용하려 하면 제롬이 응해서 나갈거라 생각하세요?” “.... 그건 그렇군.” 루시아는 기분이 좋아서 평소보다 말이 많아졌다. 재잘거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도 기분이 좋아졌다. 바쁘지 않으면 종종 그녀와 함께 산책하는 것도 괜찮겠다. “지금은 어둡지만 저 나무 아래쪽은 낮에 그늘이 잘 져서 저 아래에서 아침마다 차를 마셔요. 여기에 성이 들어설 때부터 있었던 나무라 수령이 몇백 년은 훌쩍 넘었을 거라고 하던데요.” “그런가..?” 휴고는 새삼스럽게 거대한 아름드리나무를 보았다. 그가 어려서부터 살아온 곳이면서 오히려 처음 듣는 소리였다. 나무 수령 따위 관심사항이 아니었으니까. “괜찮아 보이는군. 처음은 저기가 좋겠어.” “네?” “정원에서 하는 처음은 저기로 정했다고.” “....” 그를 보며 입을 쩍 벌리는 그녀의 얼굴은 어두워 알 수 없으나 아마 빨갛게 물들어 있을 것이다. 그녀의 하얀 얼굴은 신기할 정도로 금방 붉은 사과처럼 익었다. 빠르게 성큼 앞서 가버리는 루시아를 보며 그는 씨익 웃고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서 방금 말한 나무 밑으로 끌고 들어갔다. 마구 버둥거리는 그녀를 나무에 기대게 하고 그 위를 덮치듯 눌렀다. 히익 비명을 삼키는 그녀의 귓불을 잘근 깨물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가만히 안 있으면 진짜 한다.” 그녀가 얌전해지자 그는 만족했다. 그리고 루시아는 숨이 차도록 키스 한 후에야 그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공작부부 저녁 식사 시중을 마무리는 못했지만 두 분만 오붓하게 남겨두고 식당을 나오는 제롬에게 하인이 다가왔다. “파비안님이 오셨습니다. 전하께서 언제 집무실에 드실지 알 수 없어 잠깐 집사님 업무실에서 기다리시게 했습니다.” “잘했다.” 기다리고 있던 파비안과 가벼운 포옹으로 재회 인사를 나누었다. 파비안은 이제 막 수도에서 내려온 참이었다. 공작의 과도한 사냥 때문에 어마어마한 선물을 왕 측에 안겨주어야 했다. 과연 왕이 영민들 목숨을 안타까워할까. 그건 아닐 거라는 점에 파비안은 제 머리카락을 몽땅 걸 수 있었다. 비록 혼자만의 내기지만 정말 통 큰 제물이었다. 파비안은 절대 농담으로라도 신체를 해하는 내기는 내뱉지 않았다. “으아. 피곤해 죽겠군. 얼른 전하께 보고 드리고 자러가고 싶어. 저녁 식사는 끝나신건가?” 괜한 엄살이 아니라 파비안 눈가에 피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내가 말씀 전해 드릴테니 그냥 가서 자라. 언제 나오실지 모르니까.” “왜? 네가 나와 있는 걸 보니 식사가 끝나신 거 아니야?” “두 분이 함께 계시는데 이야기가 길어질 수도 있으니까.” “두 분? 누구?” 아둔한 소리를 하는 형제를 보며 제롬은 혀를 찼다. “마님이시지. 누구겠어.” “마님? 마님하고 함께 저녁 식사를 하신거야? 호오. 어쩐 일이시래.” “전하께서 거의 매일 저녁 마님과 함께 저녁을 드신다.” “......” 늘 날카로운 영민함이 번뜩이던 파비안 표정이 대단히 멍청해졌다. “정말?” “정말.” “언제부터?” “전하께서 성에 귀환하신 날부터 계속.” 파비안은 몇 번이고 정말이냐 물었고 제롬은 참을성 있게 그렇다고 대답해 주었다. 파비안의 놀라움을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제롬 역시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전하 취향이 언제부터..아니, 이건 취향 문제가 아니지. 네 말은 전하께서 마님과 매일 저녁 식사‘만’ 하시는 건 아니라는 것 같으니까.” “거기까지만 해.” “헉. 진짜구나. 진짜인가보네. 맙소사. 믿을 수 없어. 같은 여자랑은 세 번 이상 한 침대를 안 쓰시는 분인데, 컥-” 파비안은 느닷없이 복부에 충격이 오자 배를 움켜잡으며 허리를 구부렸다. 형제의 배에 주먹을 날린 제롬이 이를 악물며 소리를 죽였다. “닥쳐라. 듣는 귀 많다. 세 번이 어째? 어디서 헛소문을 만들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만큼 대~단하신 분이라는 소리니까. 그 분은 남자들의 로망이라구.” “얼씨구. 그 말 고대로 앨리스에게 전해주마.” 아내의 이름이 거론되자 파비안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아..아니. 내가 그렇다는게 아니라 남들이 그런다는 소리라고. 괜히 앨리스한테 이상한 말 하지 마. 그리고 너 형수 이름 자꾸 부를래?” “형수 같은 소리 하네. 제수씨겠지.” “결혼을 해야 어른이 되는 법. 그러니 당연히 내가 형님이다.” 만날 때마다 늘 결론이 안 나는 싸움을 또 다시 반복하는 쌍둥이 형제였다. “흐음..그렇단 말이지. 이거야말로 반전인데.” 타란 공작이 공작위 자리에 오른 18살 때부터 곁에서 측근으로 모시기 시작한 그들은 지난 공작의 화려한 여성편력을 모두 알고 있었다. 공작이 대놓고 여자들을 유혹하지 않아도 그가 지닌 권력과 재력, 그리고 젊음과 매력에 끌려 끊임없이 여자들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수많은 여자들 중 누구도 공작의 마음을 잡지 못했다. 공작에게 여자는 그저 침대를 덥히는 용도였다. 즐겁게 놀다가 여자가 조금이라도 질척대기 시작하면 끝나는 거였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여자가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깔끔한 뒤처리는 그들 몫이었다. “아직은 모르지. 그 여자만 해도 일 년이 넘게 갔는데 뭐. 잠시 신혼이라는 놀이를 즐기고 계시는 것일지도 모르고. 내 생각엔 거의 그런 거겠지만. 으하암. 그럼 난 가서 자야겠다. 내일 아침 일찍 뵈러 오겠다고 말씀 전해 줘.” 이번엔 다르다. 제롬은 애써 설명하지 않았다. 지켜보면 알게 될 일이니까. 파비안이 말한 ‘그 여자’ 즉, 팔콘 백작부인과 공작은 일 년 넘게 만났지만 그 때도 공작은 그 여자하고만 만난 것은 아니었다. 지금과 같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오직 한 명의 여자에게만 집중한 적이 없었다. 다음 날, 코르잔 백작부인이 방문했다. 루시아보다 약간 클 정도의 키와 마른 체구를 지닌 우아한 백발의 노부인이었다. 젊었을 때 꽤 미인이었을 외모는 나이가 들었으나 여전히 고왔다. “마님께 인사드립니다. 마담 미셀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만나 뵈어 영광이에요. 마담 미셀. 갑자기 오십사 청해서 무례가 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군요.” 미셀의 눈썹이 스윽 올라가더니 엄격한 노부인 눈매가 살짝 휘어졌다. 사실 미셀은 여기 오기까지 적잖이 기분이 상해 있었다. 공작부인에게 가르침을 주기를 청한다는 형식이긴 했지만 거의 일방적인 공작의 명이었다. 미셀은 대단히 자존심이 강했다. 그녀를 움직이는 것은 권력이나 재물 따위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녀라 해도 공작의 명까지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들 녀석이 공작가 가신인 것을 둘째 문제고, 타란의 젊은 공작은 노부인의 자존심을 허허 웃으며 관대히 용납하는 성격이 결코 아니었다. 뻗대다가는 본전도 못 건진 다는 걸 알고 있기에 순순히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래도 은근히 기분이 상했는데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는 공작부인을 보자 마음이 풀어졌다. “마님께 가르침을 드릴 수 있다면 큰 영광이지요.” “감사한 말씀이네요. 부족한 점이 많은 제자라 스승께 큰 심려가 될까 걱정이에요. 이리로 오세요.” 응접실에 마주앉고 곧 하녀가 차를 내왔다. 루시아는 차를 마시는 미셀을 보며 감탄했다. 차를 마시는 모습이 저렇게 우아할 수도 있구나. 손짓 하나조차 쓸데없는 움직임은 용납하지 않는 것 같았다. < -- 공작부부 -- > “제가 변변히 배운 것이 없어요. 공작가 안주인이라는 자리를 맡기에 부족한 것이 많아서 전하께 청했더니 코르잔 백작부인을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 분을 청해달라고 말씀드렸어요. 대단히 바쁘신 분이라 들었는데 혹여 일정에 방해가 되었다면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려요. 아, 혹시 제 말투나 하는 행동이 예의에 어긋나도 말씀해 주세요.” 고집스럽게 꽉 다물려 있던 미셀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예절에 관해서는 마님께서는 이미 더 배우실 것이 없습니다. 예의의 본질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지요. 상대를 진심으로 대하는 마음을 배우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예절이랍니다. 마님께서는 이미 두 가지를 모두 갖추고 계시니 무엇을 더할 것이 있겠습니까.” “과찬이세요.” 루시아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다. 미셀은 어여쁜 손녀라도 보는 것처럼 흐뭇하게 웃었다. 공주라기에 어지간히 오만하겠구나 생각했다. 공작이 저를 부른 저의도 정말 가르치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 미셀이 사교계에서 큰 위치에 있다니 기선제압을 하려고 공작부인이 청한 것인 줄 알았다. 미셀은 타란 공작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결코 생각지 않았다. 그녀의 자식이건 손자이건 타란 공작을 귀감으로 삼기를 바라지 않는다. 유능하다고 훌륭한 사람은 아니다. 공작은 오만하고 독단적이며 사람과의 교류를 하찮게 여겼다. 그나마 사람 보는 눈만큼은 발군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그런데 이제 보니 여자 보는 눈도 제법이었다. ‘공작께서 좋은 아내를 얻으셨군. ’혹자는 과거 화려했던 공작의 여성편력 때문에 눈부신 미녀와 결혼할 거라 떠들었지만 뭘 모르는 소리였다. 공작은 대단히 냉정하고 이득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남자였다. 그래서 아내감은 아마 말 잘 듣고 성가시지 않는 선에서 적당한 수준을 고를 거라고 생각했다. 미셀은 결혼한 공작을 언젠가 보게 되면 나중일은 생각지 않고 꼭 한마디 하려고 했다. 공작부인께 애정을 주라고. 낭만적 사랑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버려두고 있다는 느낌은 주지 말라고. 애정을 받지 못하는 여자는 자신의 자리에 불안을 느껴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그러니 자존심만 살아서 잔뜩 가시를 세워 까다롭게 굴게 되는 것이다. 안주인이 편안하지 못하면 결국 가문이 흔들린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은 간과한다. 미셀은 자신의 예상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봐온 미셀은 한눈에 어떤 사람인지 눈에 보였다. 공작부인은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이었다. 불안도 우울도 보이지 않았다. 충분한 애정을 받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혼인하신지 두 달쯤 되셨던가요.” “네.” “그럼 이제 외부 활동을 하실 때도 되셨군요. 시작은 가볍게 티파티가 좋습니다.” “규모는 어느 정도가 좋을까요?” “시작이니 작아도 괜찮습니다. 10명 내외로 공작 전하 가신들 부인 위주로 초대하시지요. 누구를 초대할지는 집사에게 물어도 되실 겁니다. 공작 전하의 집사는 유능하지요.”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롬은 확실히 유능했다. “사실 저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일이 벅차요. 무도회 같은 것을 반드시 열어야 하는 건가요?” “공작가 안주인이시라고 해서 반드시 사교계 중심이 되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사교활동이란 적성에 맞아야 하지요. 그렇다고 아예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적당한 정도로만 하셔도 됩니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여자들만 초대하는 티파티나 정원파티를 여세요. 인원은 10명 내외에서 가끔은 30명까지 규모를 확대하는 것이 좋지요.” 코르잔 백작부인의 가르침은 대화를 통해 조언을 해주는 방식이었다. 두 시간 가까이 걸친 대화에서 루시아는 몰랐던 것을 배우고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아한 말투에 듣는 사람이 지루하지 않은 화교술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백작부인에게 루시아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마음이 움직인 쪽은 미셀도 마찬가지였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미셀은 루시아의 온화하고 악의 없는 성품에 반했다. 이런 성품을 지니는 사람을 만나기란 참 힘든 일이다. 나이차를 떠나서 멋진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미셀은 기분이 좋았다. “마님께서 말벗이 필요하시다면 조카아이를 소개드리고 싶군요. 행실은 비록 우아하지 못하지만 성품은 밝고 꾸밈이 없지요. 마님께서 북부 생활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도록 그 아이가 많은 도움이 되어 드릴 겁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고, 제 기분을 살피는 친구는 필요하지 않아요.” “호호호. 마님은 참 솔직하시군요. 케이트는, 아, 그 아이 이름이 케이트랍니다. 케이트는 친구 비위를 맞춰주는 예의를 갖추지 못했어요. 마님이 케이트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서로 친구가 될 수 없을 겁니다.” “관심이 가는군요. 기꺼이 만나고 싶어졌어요. 매력적인 숙녀분일 것 같아요.” “장점만큼이나 단점이 많은 아이지요. 제 친구의 약혼자가 바람을 피워서 친구를 기만했다며 망신을 주는 짓을 서슴지 않았어요. 누군가 그 아이 이름만 말하면 또 무슨 사고를 쳤나 싶어 머리가 지끈거린 답니다.” “하지만 조카를 사랑하시는군요.” 미셀은 빙그레 웃었다. 눈에는 조카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사랑스러운 아이니까요. 하지만 그 아이와 혼인하겠다는 용감한 남자가 과연 있을지는 걱정스럽더군요. 혼인도 하지 않았으면서 사랑으로 마음 앓는 아가씨들을 상담하고 다니지요. 마님께도 좋은 상담가가 되어 드릴 겁니다.” “하지만 전 이미 결혼했는걸요.” “결혼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에요. 혼인하시기 전에 전하와 얼마간 교제를 하셨나요?” “교제..요?” 루시아가 생각해보니까 그와 교제라고 할 만한 만남은 없었다. 만나자마자 청혼했고, 2번 째 만남에서는 계약서를 나누었으며, 3번 째 만남에서는 빨래를 하다가 그에게 걸려 야단 비스무리한 말을 들었다. 그 다음엔 혼인증서에 서명을 했지. “음. ..결혼 전에 전하를 3번 뵈었어요.” 찻잔을 든 미셀의 손이 잠시 멈칫하더니 찻잔을 내려놓았다. “세간에서 전하를 어찌 평하는지 말씀드려도 될까요? 사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상당한 모험이지요. 안주인께 부군에 대한 험담일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마님께서는 전하를 잘 알지 못하고 혼인하신 듯해서 조금 안타깝군요.” “말씀해 주세요. 마음에 담아두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그럼 먼저, 마님께서 평하는 공작 전하는 어떤 분인지 말씀해 보시겠어요?” “솔직..히요?” “네. 솔직히.” “으음. 그 분은..변덕이 심한 건 아니지만..멋대로세요. 맺고 끊는 것은 확실하시죠. 고개를 돌리면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으시겠지요. 무심하고 차가운 분이에요.” “이런. 괜한 말씀을 드렸군요. 마님께서 아주 잘 알고 계시네요.” 타란 공작은 껍데기만 보면 그보다 최상은 없었다. 근사한 외모와 몸매는 여자들의 환상을 키운다. 실제로 북부의 미혼 아가씨들 치고 공작을 실제로 한번이라도 본 이상 짝사랑에 빠지지 않는 여자가 없었다. 과감한 아가씨들은 실제로 공작에게 몸을 던져 유혹하기도 했다. 대개 공작은 그 유혹에 응했다. 그러면 여자들은 그와 곧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것처럼 착각에 빠진다. 착각에서 벗어나는 건 금방이었다. 여자가 먼저 상처받아 떨어지거나 조금이라도 애정을 갈구하기 시작하면 공작이 가차 없이 내쳐버렸다. 미셀의 가르침을 받던 수많은 아가씨들이 그렇게 상처받아 미셀 앞에서 눈물을 쏟았다. 덕분에 미셀은 타란 공작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 없으면서 누구보다도 공작의 침대 속 사정에 대해 훤하게 알게 되었다. 공작부부는 혼인한지 두 달 남짓 되었다. 신혼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시기였다. 그런데 공작부인은 꽤 정확하게 공작을 파악하고 있었다. 공작부인이 남편에게 푹 빠져있지 않다는 방증이었다. 미셀은 그것이 놀랍고 유쾌했다. “훌륭하세요. 마님은 자신을 잊지 않고 계시는군요. 여자란 참 슬픈 존재지요. 마음을 주면 그 대상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 대상이 사라지면 홀로 서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답니다.” 루시아는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을 들었으나 그리 기쁘지는 않았다. 루시아가 자신을 잊지 않을 수 있는 건 애초에 포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남편과 지나치게 거리를 두어서도 안 됩니다. 적절한 거리 유지가 참 중요한 것이지요.” “거리 유지..”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례한 질문을 드릴게요. 전하께서 일주일에 침실은 몇 번이나 찾으시지요?” “네? 아...” 루시아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매일..오세요.” 미셀의 눈이 살짝 커졌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그렇군요, 대답했다.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빠진 쪽이 오히려 공작이었다니. 혼자였다면 미셀은 웃음이라도 터뜨렸을 것이다. 순진해 보이는 공작부인이 새삼 달리 보였다. 갖지 못한 것에 더 애가 타는 것이 사내들이라 공작부인이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에 공작이 애가 단 것이 분명했다. “적당한 거리 유지라는 건..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차차 말씀드리지요.” 미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미 마님께는 더 가르쳐 드릴 것이 없는 것 같군요. ’ 공작부부 사이의 무게추가 시간이 갈수록 그녀 쪽으로 기울 것이 빤히 보였다. 그건 수많은 남녀 사이를 상담하고 직접 지켜보기도 한 미셀이었기에 가능한 추측이었다. 단 하나 미셀이 도무지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있었다. ‘대체 이 분의 어떤 매력이 공작을 흔들었을까...’아내의 마성의 몸에 홀딱 빠져 있다는 것을 백작부인은 당연히 알 수 없었다. 빠진 정도를 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코르잔 백작부인은 이후에 정기적으로 방문하기로 했다. 그리고 약 일주일 후 첫 티파티를 열기로 날을 정했다. “마님.” 하녀가 조심스럽게, 그러나 조금은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회임하신 것이 아닌지요?” “회임?” 루시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얼토당토 않는 말을 한다는 표정이었다. “두 달 넘도록 달손님이 없으십니다. 혹시 모르니 진찰을 받아보심이 어떠십니까?” 주인의 건강을 살피는 일은 시중드는 하녀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두 달이나 지나서야 주인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음을 발견했다는 것은 심각한 업무유기였다. 만약 특정한 하녀가 계속 루시아 시중을 들었다면 알아차리는 것이 훨씬 빨랐을 것이다. 그런데 하녀들은 며칠씩 돌아가며 시중을 들었다. 다른 하녀가 달손님 시중을 들었으려니 했다. 그래도 본연의 직무를 잊지 않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다가 누구도 그런 시중을 든 적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하녀들은 모두 식겁했다. 가장 먼저 의심되는 쪽은 임신이었다. 공작부부 사이가 뜨겁다는 건 로암의 내성 사람들이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아니다.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루시아는 조금의 흥분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쌀쌀맞게 대꾸했다. “하오나 마님. 그래도 의사를 불러 보이시는 것이...” “되었다 하지 않았니.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예. 마님.” 하녀는 물러갔지만 그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마님이 회임했고, 그 상태를 모르는 상태로 두었다가 아기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하녀들은 단단히 경을 치게 될 것이다. 안절부절 못하다가 쪼르르 제롬에게 가서 고했다. “마님. 하녀에게 말을 들어보니 건강에 문제가 있으시다는 것 같았습니다.” 제롬이 와서 말을 꺼낸 순간 루시아 얼굴에 설핏 짜증이 스쳐 지나갔다. 제롬 뒤에 함께 서 있는 하녀에게 그녀의 눈길이 잠시 멈추었다. 매섭게 노려본 건 아니었지만 하녀는 움츠러들었다. 어쩐지 처음 보는 마님 모습에 제롬은 긴장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님. 주치의가 마님을 불편하게 해 드린 것이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니에요. 말해두지만 난 회임한 것이 아니고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이미 전하께서도 다 아시는 일이지요.” 제롬은 잠시 침묵하며 할 말을 골랐다. “하오나 마님. 마님께 만에 하나 문제가 발생하면 저희는 큰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주인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이미 처음부터 그에게 아이를 갖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증명할 수 있냐고만 물었을 뿐 그 이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이제 와서 새삼 그 말이 사실이었다고 말하는 것보다 그건 거짓말이었고 임신할 수 있다고 말하는 쪽이 훨씬 더 그를 놀라게 할 것이다. “알고 계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에요. 하지만 다시 한 번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마님께서 말씀드렸다는 것을 제가 어찌 확인하면 되겠습니까?” 요즘 루시아에게 한 없이 순둥순둥해진 제롬이지만 그는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만 좋아서는 젊은 나이에 공작가의 이 엄청난 살림을 꾸릴 수는 없었다. “...제롬이 있는 자리에서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그걸로 됐나요?” “예. 마님. 심기를 불편하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집사의 일을 한 것뿐이겠지요. 하지만 저 아이.” 루시아 시선이 다시 하녀에게 꽂혔다. “나는 분명 되었다고 했는데 내게 두 번도 묻지 않고 바로 집사에게 달려갔군요. 나는 내 신변을 감시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지 않아요. 오늘로 내보내세요.” “.... 예. 마님.” 하녀는 꺼멓게 죽은 낯빛으로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제롬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착하고 순한 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맺고 끊는 것이 정확하다 못해 차가웠다. 아무래도 두 분은 천생연분 같은데. 낯선 마님의 모습에도 그저 흐뭇한 집사는 이미 팔불출이 거의 다 되었다. < -- 공작부부 -- >며칠 지나지 않아서 제롬은 루시아에게 매달렸다. “마님. 다른 건 모르겠지만 회임이신지 아닌지만 확실히 해주십시오.” 결국 루시아는 안나의 진료를 받았다. “회임이 아닙니다.” 안나가 고개를 내젓는 순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루시아와 대조적으로 제롬은 미세하지만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마님이 보기 전에 재빨리 그런 기색을 감추었다. 자신의 실망으로 혹시라도 마님께 상처를 드리고 싶지 않았다. “회임을 의심할 만한 무슨 증상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갑자기 불려와 임신 여부를 확인해야 했던 안나는 의아해 했다. 임신이 의심되는데 그걸 파악하지 못했다면 주치의로서 자신의 능력에 의심을 살까 걱정이었다. 제롬은 루시아와 약속했다. 회임인지 아닌지만 확인하기로. 월경을 하지 않는 몸 상태를 거론한다든가, 그런 상태에 대해 공작에게 알리는 일 등은 일단 루시아에게 맡겨 두기로 한 것이다. “아닙니다. 안나. 요즘 마님께서 피곤해 하시는 것 같아서..” “의사의 사견으로 마님께서 피곤해 하시는 건 다른 이유입니다. 여자 몸은 강철이 아니에요. 집사님. 공작 전하께 말씀 한 번 올려보시지요. 뭐든 적당해야 하는 겁니다. 기운이 펄펄 나야하는 저 젊은 나이의 마님께서 벌써부터 보약을 드신다구요. 일을 할 때도 휴식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것도 마찬가지에요.” 안나는 의사로서의 객관적인 의견을 말하는 것뿐이지만 그녀의 말이 길어질수록 분위기는 점점 묘해졌다. 제롬은 불편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루시아 고개는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마님도 힘드시지요? 전하께 말씀을 드리세요.” 그렇게까지 힘든 건 아닌데. 루시아는 발간 얼굴로 차마 그 말을 하지는 못했다. 지금 이 분위기에서 ‘그 분이 매일 내 침실에 드는 것이 좋아요. ’ 라고는 도무지 말할 수 없었다. “집사님이 힘드시면 제가 직접 말씀 올릴까요?” “아..아닙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서..어느 정도를..” “닷새. 그리고 하루 쉬세요.” “.... 예.” 민망해 하는 분위기를 읽으면서도 안나는 뻔뻔했다. 원래 의사가 환자 몸 상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민망해 하다가는 제대로 된 치료를 하지 못하는 법이다. 모두 물러가고 혼자가 되자 루시아는 침실로 들어와 큰 창을 열고 발코니로 나왔다. 부드러운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임신이 아니라고 한 순간, 잠깐이지만 제롬 목소리에서 기운이 빠졌다. 그래서일까. 루시아도 조금은 속이 상했다. 꿈속의 15살. 루시아는 초경을 시작했다. 그 증상이 그녀 몸이 여인이 되었음을 알려주는 신호라는 것을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본래 그 일은 대개 여관이 맡는데 별궁에는 여관이 없었고, 시녀들은 자기 일이 아니라 상관하지 않았다. 고아나 마찬가지인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공주는 시녀들에겐 모셔야 하는 주인이 아니라 뒤치다꺼리해야 하는 짐덩이였다. 월경혈이 묻은 침대보를 보았을 때 시녀들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늘어난 빨랫감을 챙겼다. 궁에 들어온 이후 루시아는 어릴 때의 발랄함을 거의 잃은 상태였다. 갈수록 소심해지고 말수는 적어졌다. 당시의 어린 루시아는 아랫사람을 부리는 위엄조차도 전혀 배우지 못했다. ‘나는 곧 죽을지도 몰라. ’몸에서 피를 쏟는다는 사실 자체는 소녀에게 공포였다. 그녀는 극한의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피를 멈춰야 해. 그러면..약을..약을 먹어야..’피를 멈추는 약. 그 때 루시아 머릿속에 정확히 떠오르는 약초가 하나 있었다. 삼엽쑥이라는 풀이었다. 삼엽쑥은 세 장 잎이 나는 대단히 흔한 잡초였다. 여기저기서 쉽게 볼 수 있고, 별궁 뜰에도 소복하게 돋아 있었다. 효과가 대단히 미약했기 때문에 약초라기보다는 잡초에 가까웠다. 실제로 의사들은 이 풀을 약으로 쓰지 않았다. 삼엽쑥을 푹푹 찌고 바싹 말려 빻아서 가루를 상처에 뿌리면 그런대로 지혈 효과가 있었다. 들이는 수고에 비해 미미한 효과라서 의사를 찾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평민들이 응급조치를 위해 흔하게 집에 비치하는 비상약이었다. 루시아는 삼엽쑥이 피를 멈추게 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다. 동네 아이들과 삼엽쑥을 캔답시고 여기저기 풀밭을 뒤지고 다녔다. 넘어져 무릎이 깨졌을 때 가루를 뿌리니까 잠시 후 피가 멈추는 것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루시아는 뜰에서 삼엽쑥을 캐서 복용했다. 어떻게 먹을 줄도 몰라 그냥 생으로 씹어 먹었다. 몸 안에서 피가 나니까 먹어야 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놀랍게도 효과는 나타났다. 월경혈이 멈추었다. 그래서 그 다음 달 또 다시 피가 나자 다시 복용했고, 그렇게 반년을 먹고 나자 그 이후부터 더 이상 월경은 없었다. 그녀는 당시에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불임이라는 단어 자체도 몰랐던 때였다. 그 후에 메튼 백작과 결혼 생활을 하던 중에 그 사실을 알았다. ‘다행이다. ’제일 처음 든 생각이었다. 절대 백작의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순간 낭떠러지를 걷다가 평지를 내딛는 것처럼 마음이 편했다. 결혼 생활이 끝나고 자유가 되었을 때 비로소 루시아는 자신의 몸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무월경의 상태는 그것 외에 딱히 몸에 어떤 이상은 없었다. 하지만 여자로서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루시아는 치료법을 찾기 시작했다. 찾아가는 의사마다 모두 고개를 내저었다. 그들은 삼엽쑥은 절대 먹어서는 안 되는 독초라고 입을 모았다. “뿌리는 건 몰라도..먹었다구요? 대체 왜 그런 짓을...” 대개의 의사는 루시아의 증상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 신기해했다. 루시아 경우와 비슷한 증상을 본 적 있다고 하는, 드물지만 유능한 의사도 있었다. “삼엽쑥을 여인이 월경 중에 간혹 뭘 몰라서 먹었다가 월경혈이 멈추었다는 증상은 본 적 있지만 장기 복용해서 아예 불임 상태가 된 건 처음 보는 경우라. ..그런데 결혼은 하셨습니까? 월경이 불규칙해도 임신은 가능합니다. 불임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월경이 불규칙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아이를 갖기 위한 노력을 해본 적은 없어서 정말 임신이 될지 안 될지는 확신을 갖고 대답할 수 없었다. 조금 더 잡지식이 많은 의사는 새로운 정보를 주기도 했다. “아주 오래 전 전쟁에 패하면 여자들은 무조건 잡혀갈 때, 원수의 자식을 배지 않으려 일부러 여자들이 삼엽쑥을 먹었다는 이야기는 있더군요. 월경혈이 멈추니까 당연히 피임효과가 있을 거라 여겼던 모양이지만 피임 효과는 없다고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의사들의 대답은 늘 애매모호했다. 루시아는 포기하지 않고 틈틈이 용하다는 의사는 모두 수소문해서 만나러 다녔다. 그러는 사이 나이는 점점 들어갔다. 거의 포기함 즈음이었다. 나이는 제법 들었고, 딱히 사는데 불편함은 없으니까 이젠 모르겠다 하는 심정이었다. 그녀가 살던 마을에 어느 날 우연히 떠돌이 의사가 들렀다. 처음엔 마을 사람들은 본인이 의사라고 주장하는 구질구질한 차림의 떠돌이 노인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동안 의사가 마을에 머물며 치료를 해주었는데 효과를 보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자 사람들은 몰리기 시작했다. 루시아는 밑져야 본전으로 의사를 찾아갔다. 의사는 마을 사람 누군가 남는 방을 내준 곳에 머물며 처음 마을에 왔을 때처럼 허름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깐 대화를 나누자 겉보기와 다른 모습이 드러났다. 노인의 표정과 말투는 정갈했고, 어딘지 모르게 기품이 있었다. “정말 아가씨가 삼엽쑥을 먹었단 말이오? 그래서 월경이 멈추었다고?” 처음 증상을 상담하면 의사들은 열이면 열 모두 굉장히 희귀한 동물을 바라보는 눈을 했다. 그 후에는 당혹해 했다. 그러나 이 의사는 달랐다. 몹시 놀라워하면서 동시에 재미있어 했다. “왜. 언제. 어느 정도나 먹었소?” 지금까지의 의사와 다른 반응을 보이자 루시아는 한 줄기 희망에 기대어 성심껏 모든 질문에 응했다. “초경부터라...” 순간 의사의 눈이 기이하게 빛났다. “혹시 아가씨, 처녀요?” “아니요. 결혼도 했었는걸요. 그러니까 저 아가씨 아니에요.” 사실 거의 처녀나 다름이 없기는 했지만 의사에게 그런 것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의사는 어쩐지 조금 실망하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내 눈에는 아주 어린 아가씨라오.” “이 상태는 불임이 맞나요?” “맞소.” 지금까지 의사 중 가장 정확한 답을 주었지만 절망적이었다. “저는..치료할 수 있는 건가요?” 의사는 껄껄 웃으며 지금껏 누구도 하지 못했던 완치를 장담했다. “아가씨는 운이 좋은 거요. 이건 우리 집안에만 내려오는 치료법이거든.” 그러면서 여러 가지 약초를 배합한 처방전을 주었다. 따로 적어준 것이 아니라 짐을 뒤져 노트를 꺼내더니 거기서 한 페이지를 북 찢어 주었다. “집안에만 내려오는 비법이라면서 이렇게 주셔도 되는 건가요?” “어차피 더는 필요 없는 것이라.” 그렇게 말하는 의사 표정은 좀 서글퍼 보였다. “정말..나을 수 있을까요? 다들 삼엽쑥은 독초라고 했어요.” 의사의 처방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동안 고생에 비해 너무 간단히 치료가 된다고 하자 이 상황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독초라..그렇게 알려져 있긴 하지만. 내 아가씨에게만 특별히 알려 주지. 삼엽쑥은 놀라운 효능이 있다오. 지혈 따위가 아니라 먹으면 사람 몸을 깨끗하게 정화시키지. 월경혈이 멈추는 것도 그런 이유라오. 하지만 인간의 몸 자체는 원래 불순물 덩어리. 억지로 정화한다고 좋은 건 없지. 삼엽쑥 효과가 너무 강해 그런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이지만 몸에 해를 주는 건 아니라오. 아가씨도 지금껏 딱히 월경이 없다고 어디 아프거나 하진 않았지?” “네.” “그리고 사실 삼엽쑥을 먹어 불임이 되려면 초경 때부터 장기간 먹어야만 하지. 바로 아가씨처럼. 그게 아니면 잠시 월경혈이 멈추기는 해도 그 외에 다른 증상은 없거든. 당연히 불임은 아니고. 하지만 사람들은 월경혈이 멈춘다는 증상 하나로만 독초 취급하더군. 아무튼 독이 아니니까 삼엽쑥 효과를 약화시키면 몸은 원래대로 돌아간다오. 이대로 지켜서 먹으면 분명 나을 것이오. 예쁜 아이 낳고 행복한 부모 되길 바라겠소.” 얼마 후 의사는 마을을 떠났다. 처음 의사가 왔을 때는 웬 놈이 굴러들어왔나 경계하던 마을 사람들은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루시아는 의사가 준 처방대로 약방에서 약초를 구입했다. “왜 이것들을 같이 사는 거요? 설마 이걸 같이 배합할 건 아니겠지? 이대로 먹으면 큰일 나요.” 의사가 주고 간 처방은 아무래도 상식적인 배합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루시아는 더 이상 나빠져 봐야 뭐가 있겠나 싶어 그대로 약을 만들어 복용하기 시작했다. 월 1회 이상. 월경이 시작될 때까지 꾸준한 복용. 먹는 방법도, 횟수도 간단했다. 과연 이래서 효과가 있을까 고개를 갸웃했지만 일단 믿고 복용했다. 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루시아는 월경을 시작했다. 꿈속이 아닌 지금의 루시아는 15살 똑같은 나이에 초경이 시작되었을 때, 꿈속처럼 당황하지 않았다. 병이 아니라는 것도, 죽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15살의 루시아는 꿈속과는 다른 이유로 심리가 몹시 불안정했다. 미래를 알면 뭐든 바꿀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별궁에 갇혀 사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어린 공주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다가올 미래는 반드시 그리 될 것이라는 예언처럼 느껴졌다. 21살에 그 자와 또 결혼할 생각을 하니 끔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공포는 초경을 시작한 순간 극에 달했다. ‘그 놈 애는 절대 낳기 싫어. ’의외로 임신이 그리 쉽게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세상엔 금실 좋아도 아이가 없는 부부가 많다. 더구나 메튼 백작의 성기능을 고려하면 그다지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아주 미세한 가능성조차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스스로를 불임으로 만드는 길을 택했다. 꿈속에서 만난 의사는 삼엽쑥을 독이 아니라고 했다. 그 때 받았던 치료 처방전은 기억에 남아 있었다. 언제든 약을 먹으면 치료할 수 있으니까 지금 당장 불임이 된다고 해도 걱정은 별로 없었다. 현재 루시아는 마음만 먹으면 불임을 치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그렇게 큰 소리 쳐놓고 이제 와서. ‘그 때는..이혼하게 될 줄 알았지..’그에게 결혼을 제안할 때만 해도 분명 몇 년 살면 그가 이혼을 요구할 줄 알았다. 아니면 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자신이 요구해도 될 거라고 생각했고. 그런데. ‘이혼..해줄 것 같지 않아. ’그가 가문의 전통을 들먹이지 않았더라도 그는 귀찮아서 이혼 과정을 진행할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여자가 죽도록 좋아져서 꼭 결혼하고 싶어진다면 모를까 아무리 봐도 그럴 가능성도 없는 것 같고. ‘후회하지 않기로 했잖아..다 감수하리라 마음먹었잖아...’그녀 인생에 아이는 없다. 결혼증서에 서명하는 순간, 그건 이미 각오했다. [ 예쁜 아이 낳고 행복한 부모 되길 바라겠소. ] 그 때 그 의사의 덕담은 꿈에서도 지금도 결국 이루어 질 수 없는가보다. 그 의사 이름이 아마. 루시아는 기억을 더듬었다. “필립.” 그래. 그런 이름이었다. 오후, 늘 하는 것처럼 제롬은 공작의 집무실로 조용히 차를 가지고 들어갔다. 누가 들어오는지 뻔한 일이라 휴고는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책상 곁에 서 있는 제롬이 물러가지 않자 고개를 들었다. 공작의 시선이 닿자 제롬이 입을 열었다. “전하. 내일 마님께서 티파티를 열기로 계획 중이십니다.” “그래. 들어 알고 있다.” “마님께서 여시는 첫 자리인데 축하 선물을 보내심이 어떠신지요.” “선물?” 그는 흐음, 중얼거리며 펜을 놓고 좀 더 편하게 의자에 등을 기댔다. “선물이라..” “예. 마님께서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그러고 보니 딱히 그녀에게 뭔가 선물을 해준 것이 없었다. 그는 알아서 선물을 주는 편이 아니라 이것저것 해달라면 해주는 스타일이라 아무것도 해달라는 것 없는 그녀에게 딱히 뭘 줘야할지 몰라 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나마 내비예산을 아주 두둑하게 챙겨준 정도일까. 해달라는 것도 아닌데 불쑥 뭔가 주기는 그렇지만 처음으로 북부 사교계에 데뷔하는 자리이니까 명분은 충분했다. 생각지도 못하다가 선물을 받으면 좋아하겠지?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그에게 감사를 표할 그녀를 생각하자 기분이 왠지 흐뭇해졌다. 뭐가 좋을까. 보석? 아니면 보석? 그것도 아니면 보석? 그가 떠올릴 수 있는 건 그것이 한계였다. 여자가 보석을 좋아하는 건 분명 확실한데 이상하게 그녀도 그걸 좋아할 것이라 확신이 생기지 않았다. 그의 고민은 깊어져 가고 제롬은 참을성 있게 주인의 답을 기다렸다. 제롬의 귀에 조용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롬은 생각하는 주인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나갔다가 잠시 후 다시 들어왔다. “전하. 밖에 필립 경이 와 있습니다. 오랜만에 로암에 돌아와 전하께 인사를 드린다고 합니다.” < -- 공작부부 -- >대대로 타란 가문에 속해 충성하는 주치의 필립은 휴고가 오랜 시간 영지를 떠나 있는 동안에 로암에 없었다. 정확히 누구도 필립이 어디를 갔는지 알지 못했다. 주변에 여행 좀 다녀온다고 훌쩍 떠나서 몇 년 동안 소식 하나 없었다. 가족과 친구가 없는 필립의 공석은 거의 영향이 없어서 누구도 그가 없다는 것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공작은 질병 한 번 앓지 않을 정도로 아주 건강했고, 형식적이지만 귀족이라면 누구나 받는 정기적인 의사의 검진 또한 받지 않았다. 휴고가 공작위에 오른 이후 주치의는 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제롬은 필립과 몇 번 인사를 나눈 것 외에는 그다지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돌아가신 공작의 주치의이기도 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래봤자 주치의. 분명 주치의인데 대외적으로는 남작이라는 점은 좀 특이했다. 대대로 공작가를 모셨다고 하니 공이 좀 많았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 밖에는 주치의를 전혀 신경 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필립 이름을 꺼내자마자 다소 풀어져 있던 주인의 표정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붉은 눈이 번뜩이는 것을 보며 제롬은 의아함을 느꼈다. 단순한 주치의가 아니었나? 짧은 순간 기억을 마구 뒤졌지만 주인과 필립 사이에 뭔가 잡히는 것이 없었다. 새삼스럽게 공작과 주치의가 서로를 보이지 않는 사람 대하는 것처럼 지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니까 필립이 공작을 만나겠다고 찾아온 것이 처음이었다. 말로는 주치의지만 공작은 단 한 번도 진료를 받은 적이 없었다. “...들여. 이후 부를 때까지 2층은 아무도 얼씬하지 못하게 해.” 차가운 목소리에 은근히 살기가 감돌았다.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불안을 느끼며 제롬은 공작의 명을 아주 충실히 따라야겠다고 생각했다. “.... 예. 전하.” 제롬이 나가고 잠시 후 머리가 반쯤은 희끗희끗한 회색 머리카락의 노인이 들어왔다. 남자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휴고가 앉아 있는 책상 앞 중앙으로 걸어와 정중하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잠시 말없이 남자를 노려보던 휴고는 고저 없는 메마른 음성으로 말했다. “오랜만이군. 늙은이.” 전혀 존중이 담기지 않은 호칭에도 필립은 불쾌해하지 않고 그저 엷은 미소를 띠었다.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 사이 장성한 사내가 다 되셨군요.” 일개 주치의라 하기엔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당당하고 귀한 분을 앞에 둔 자의 황송함이 없었다. 잔잔한 목소리 속에는 휴고를 마주하고 있는 감격이 드러났다. 마치 잘 자란 손자를 보는 조부인 것처럼. 그러나 얼어붙은 휴고의 눈빛은 풀리지 않았다. “듣기로는 여행을 갔다던데.” “돌아왔습니다.” “유감이군. 떠돌다 뒈졌으면 좋았을걸. 인사 했으면 꺼져. 이후 다시는 인사 따위도 오지 마. 내 앞에 그 면상 드러내지 말라고.” 마치 책이라도 읽는 것처럼. 휴고의 목소리는 건조했으나 내용만큼은 독랄했다. 뇌까리는 독설에도 필립의 안색은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조금은 안심하는 것 같았다. “여전하십니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 거야.” “도련님의 본질은 훌륭하십니다. 이 늙은이 목숨을 거두지는 않았으니까요.” 휴고는 코웃음을 쳤다. “착각하지 마. 내가 늙은이를 살려 두는 건 목숨 빚이 있기 때문이야. 그 아둔한 녀석은 목숨의 은인은 지켜야 하는 거라고 했거든.” 필립의 얼굴에 잠시 그리움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휴고 도련님은 선량한 분이셨지요. 그래서 타란의 주인이 되시기에 적합하지 않으셨습니다.” ‘휴고 도련님’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휴고의 눈빛이 아주 잠깐이지만 누그러졌다. “그래. 나는 악마 새끼라 이 더러운 자리 지키고 있지.” “휴 도련님.” “그 이름으로 한 번만 더 불러봐. 입을 찢어놓을 테니까.” 휴고의 기색이 사납게 변하며 필립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먹이를 노리고 도약하기 직전의 맹수처럼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일어나 눈 앞 노인의 멱을 물어 뜯어버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휴고의 사나운 분노에도 필립은 조금 안타까운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 분은 도련님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셨습니다.” “그딴 것 바란 적도 없어.” 휴고는 음산하게 이를 갈았다. 짐승이고 괴물이었던 히우는 휴고를 만나 휴가 되었다. 히우가 휴가 되는 순간 악마는 사람이 되었다. 타란의 주인은 휴고가 되었어야 마땅했다. 더러움으로 얼룩진 타란은 그 녀석만이 정화할 수 있었다. 사방 모든 것이 적이었던, 제 목숨을 지키려 그리 악을 부렸으나 실제 왜 살아야 하는지 의미조차 찾지 못했던 휴는 살아갈 이유를 찾았고, 목숨보다 귀한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뿐인 형제는 살아서 이 자리에 올라야 했다. 마귀로 불리던 히우가 아니라. “도련님이 그 자리에 계시실 바란 것은 누구보다도 휴고 도련님이셨습니다. 어차피 두 분 모두 타란의 핏줄이십니다. 마땅히 도련님 역시 타란의 주인이 되실 자격이 있습니다.” “마귀는 그 날 서쪽 탑에서 죽었어. 나는, 지금 여기 있는 나는 휴고다.” “도련님 것입니다. 언제쯤 당신께서 주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실 겁니까?” “영원히 그럴 일 없어. 난 그 녀석 나이만 차면 넘겨버릴 거니까.” 필립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데미안 도련님은 아직 어리십니다.” “그러니까 기다리고 있잖아.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참고 기다리고 있다고.” 휴고는 이를 악물며 대꾸했다. “휴고 도련님께서 피로 적신 자리입니다. 그래서 더 고귀한 자리입니다.” 잠시 필립을 노려보던 휴고가 서늘하게 일갈했다. “늙은이 머리 굴리기 잘하는 건 진즉 알았지. 그 날, 지금 같은 되도 않는 소리 지껄였으면 모가지를 뽑아 버렸을 텐데. 당시엔 벙어리처럼 닥치고 발치에 엎드리더니. 내가 그 날 일을 아는 놈들을 늙은이 빼고는 다 죽인 건 알아?” 처음으로 필립의 안색이 굳었다. “...흔적도 남기지 않으셨더군요.” “그래. 구역질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거든. 그러니까 늙은이. 네놈이 마지막이야. 어서 뒈지라고. 늙은이만 사라지면 더 이상 악취는 나지 않겠지.” “돌아가신 공작 전하께서는 오직 가문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선택?” 휴고는 두 손으로 거세게 책상을 내리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몸을 앞으로 내밀며 불타는 것처럼 이글거리는 붉은 눈동자로 필립, 아니 필립 너머에 보이는 누군가를 무시무시한 분노를 담아 노려보았다. 그의 노기는 금방이라도 끓어 넘칠 것 같은 용광로 같았다. “그 영감탱이는 아들 하나를 용병에게 노예로 팔아먹었으면서, 선택한 나머지 아들을 품에 안기는커녕 다시 둘을 바꿔치려 했지.” 선택된 휴고. 버려진 히우. 그러나 공작은 세월이 흘러 다시 휴고를 버리고 히우를 택했다. 휴고의 성정이 지나치게 순하다는 이유 때문에. 처음으로 매달렸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타인의 목숨을 위해. [ 네가 순순히 내 후계가 되면 녀석을 건드리지 않도록 하지. ]시키는 대로 다 했다. 순순히 교육을 받았고, 대외적으로 휴고의 모습으로 다녔다. 거친 말투를 버리고 귀한 공작가 자제로 변화했다. 사육된 짐승이 되어 공작 발치에 얌전히 엎드렸다. 그런데 몰랐다. 똑같은 이유로 휴고 역시 자신의 형제를 위해 어제까지 귀한 공자님으로서의 모든 것을 기꺼이 버렸다는 사실을. 두 형제에 끈을 달아 양손에 쥐고 흔들고 있었다는 것을 휴고가 먼저 알아차린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있는 한, 그리고 그것을 끝까지 이용할 공작이 있는 한 휴가 절대 자유로워 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휴가 로암을 비운 날, 휴고는 공작내외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그 곁에서 제 목을 긋고 죽었다. “벌레 한 마리 잡아 죽이지 못하던 녀석이 그런 짓을 하도록 몰아간 건 그 영감탱이야. 그렇게 뒈져도 할 말 없는 거라고. 선택? 그건 선택이 아니라 추악한 탐욕이었어.” “도련님.” “도련님 소리 그만 해. 타란의 주인이고 공작이다. 아직도 10년 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나?” 높고 굳건한 벽은 도무지 조금의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필립은 한숨을 쉬었다. 오랜 시간은 감정의 골을 조금도 좁혀주지 못했다. 이제는 어른이 되셨으니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건만. 헛된 기대였다. 타란 혈족이 이대로 끊기는가. 고귀한 혈통이 이대로 최후를 맞는 건가. 부친이 유언처럼 남긴 말대로 업보일까. 원래 타란 혈통에 쌍둥이가 태어난 선례는 없었다. 이변의 발생은 어쩌면 경고였는지도 모른다. “결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으로부터는 아이를 얻지 못하실 겁니다.” “그 이상 더 좋을 순 없지.” “안주인께서도 알고 계십니까?” “경고하는데 내 아내 곁에 접근하기만 해봐.” 휴고는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순간적으로 필립의 눈에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데미안 도련님께 신부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타란의 혈통은...” “닥쳐! 잘도 더러운 소리 지껄이는군.” 사람들은 모른다. 타란 가문이 언제부터 시작된 가문이고 왜 황량한 북부에 자리를 잡았는지. 왜 그 많은 힘을 가지고 왕의 신하를 자처하며 조용히 살고 있는지. 타란 가문의 진정하고 유일한 목적. 오직 대대로 타란 가문을 이어받는 가주와 아주 소수의 사람만 알고 있는 진실. 그것은 타란 혈통의 보존이었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욕심내기에는 매력이 없는 땅, 아무나 감당할 수 없는 곳. 북부는 타란을 위해 준비된 땅이었다. 이제 그걸 아는 사람은 휴고, 그리고 눈앞의 늙은이 밖에 남지 않았다. 휴고는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잡아 죽였다. 늙은이가 공작 눈을 피해 형제의 목숨을 구해준 적만 없었어도 옛날에 쳐죽였을 것이다. “그거 알아? 네놈들이 야만족이라 손가락질하는 저 북쪽의 그놈들도 제 누이하고 붙어먹는 짓은 안 해.” “일반인의 도덕 잣대로 판단하시면 안 됩니다. 타란 혈통은...” “닥치라고 했다.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고귀한 핏줄 얘기는 듣고 싶지도 않으니까. 평범하게는 여자들이 애를 배지도 못해! 괴물이지 그게 무슨 고귀한 핏줄이야!” 필립이 무거운 표정으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 아직도 그런 말씀 하시는군요. 그럼..휴고 도련님도 괴물입니까? 데미안 도련님은요.” “......” “돌아가신 공작 전하께서 비록 과한 방법을 택하기는 하셨지만.” 휴고는 하, 헛웃음으로 차갑게 조소했다. “내 친부라는 새끼는. ..그만 두지. 내 입이 더러워 질 것 같으니까.” “타란의 혈통은 이어져야 합니다.” “지긋지긋한 집착이군. 그런 더러운 짓은 내 대에서 끝이야! 미친 늙은이. 그 목이 붙어 있는 걸 신에게 감사해야 할 거다. 신 따위 있는 줄도 모르겠지만. 한 번만 더 날 꼭지 돌게 하면 빚이고 뭐고 없어. 살던 대로 로암이든 어디든 지금까지처럼 내 눈에 띄지만 말고 처박혀 있어. 더 이상 경고는 없다. 당장 나가. 내 아내 곁에 얼씬했다가는 그 자리에서 심장을 뽑아버리겠어.” 필립은 말없이 한참 휴고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려 집무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휴고는 일어나 책상을 짚고 있는 자세 그대로 씩씩 올라오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꽉 쥐고 있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죽여! 저 놈을 당장 죽여! 심장을 터뜨리고 목을 꺾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찢어 죽여서 짐승 먹이로 던져버리라고! 그 안에 있는 휴가 마구 날뛰며 소리쳤다. 온 몸의 피가 끓는 것 같고 붉은 눈동자는 마치 핏물처럼 선명하게 짙어졌다. 한참 만에 그의 숨소리가 편안해졌다. 그의 안에 있는 괴물이 튀어나와서는 곤란했다. 그는 휴고다. 휴고는 절대 이 자리에서 공작의 위신을 버리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늙은이를 죽이는 건 쉬웠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차라리 자신의 목숨 빚이었으면 그 따위 알바 아닐 것을. 휴고는 완전히 진정이 되자 제롬을 불렀다. “수도에서 여의사를 데려왔다고 했지? 안사람 주치의로.” “예. 전하. 불러올까요?” “그럴 건 없고. 저 늙..주치의 필립이 마님 곁에 접근하지 못하게 해라.” 필립이 그녀에게 당장 어찌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것 자체가 싫었다. 괜한 말을 해서 그녀 기분을 상하게 하는 건. 그래, 그런 것이 싫다. 호박색 눈동자가 슬퍼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예. 모르게 감시를 붙여 둘까요?” “로암 내성 안으로 들어오지만 않으면 내버려 둬.” “마님께도 일러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지 말라고 하면 묘하게 호기심이 드는 것이 사람의 심리. 휴고는 그녀가 아예 필립을 의식하는 것 자체를 원치 않았다. “.... 아니. 자연스럽게 마주치지 않게 해. 그녀가 의문은 갖지 않도록.”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순간 제롬의 머릿속에 서쪽 탑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스쳐 지나갔다. 당시 그 때 일을 직접 보았을 만큼 성에 오래 거주한 사람은 현재 아무도 남지 않았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하면. 그 사람이 주치의 필립이었다. 왜 갑자기 그 일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주인께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전하. 일전에 마님께서..서쪽 탑이 왜 잠겨 있느냐 물으신 적 있습니다.” 순간 휴고의 눈이 날카롭게 올라갔다. “그래서?” “알고 있던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전 공작부부께서 돌아가셨고, 전하의 쌍둥이 형제분이 그 분들을. ..송구합니다. 마님께서 아셔도 될 일이라 판단했습니다. 경솔했습니다.” “...아니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일 테니까. 듣고 뭐라고 하던가?” “조금 놀라기는 하셨지만 충격보다는. ..전하를 걱정하셨습니다.” “.......” 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 타고 한 바퀴 돌고 올 테니까 저녁 식사는 준비 하지 마. 좀 늦을지도 몰라.” 지나쳐가는 공작 뒤에 대답과 함께 고개를 숙였던 제롬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마님 선물은 어쩐다...” 그걸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었다. 겉보기에 공작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필립이 들어왔다 나가고 난 이후에 주변을 감싸고 있는 가시가 더 삐죽해진 느낌이었다. 그는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주인이 말해주지 않는 일을 파고드는 것은 올바른 집사의 자세가 아니다. “마님 선물은..꽃이 어떨까..” < -- 공작부부 -- >첫 티파티는 작은 규모였다. 공작가 가신들의 부인들, 주로 나이 지긋한 노부인들 대상으로 총 8명을 초대했다. 누굴 초대하는지는 제롬의 조언에 따랐다. 분위기는 내내 화기애애했다. 루시아는 살짝 긴장했었으나 막상 자리를 열자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언제든 물고 뜯을 준비가 되어 있는 수도 사교계와 전혀 달랐다. 북부에서 타란 공작부인은 절대적인 우위에 위치한 자리였다. 모두 듣기 좋은 말만 하고 공작부인의 기분을 맞추느라 여념이 없었다. 루시아가 권위를 앞세워 노부인들 자존심을 건드렸다면 아무리 앞에서는 웃음 지어도 뒤로는 공작부인에 대한 악평이 퍼져나가는 건 순식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루시아는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수준에서 예의를 다했다. 루시아는 주최자가 되어 티파티를 연 것은 처음이었다. 메튼 백작은 사교 활동을 하라고 달달 볶아 댔으면서 제대로 지원은 해주지 않았다. 티파티는 한 번 열기 시작하면 정기적으로 자리를 마련해야 했다. 한 번만 하고 그만 두는 것은 아예 하지 않는 것만 못했다. 정기적인 티파티는 제법 돈이 들었다. 구두쇠 메튼 백작은 돈을 움켜쥐고 달달 떨었다. 그런 주제에 제 몸이 먹고 쓰는 데는 대단히 너그러웠다. 비록 주최자로서의 루시아의 경험은 부족해도 꿈속에서 수년간 셀 수 없이 많은 파티를 참석했다. 주로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거의 듣기만 했고 자리 채우기만 급급했어도 경험은 경험이다. 참석자는 모두 노련한 노부인들이었다. 루시아가 주도하지 않아도 분위기는 잘 흘러갔다. 오히려 어린 아가씨들보다 노부인들 쪽이 다루기 편했다. 아가씨들끼리의 괜한 신경전도 없고, 다들 서로 오래 얼굴을 마주한 사이라 할 말 못할 말 가릴 줄 알았다. 노부인들 대화를 경청하면서 간혹 맞장구 치고 웃어주면 되었다. 놀란 건 노부인들 쪽이었다. 이제 18살이라는 어린 공작부인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다들 비슷한 나이의 딸이나 손녀 하나 둘 쯤은 있을 나이였다. 공작부인과 비교하자 그들의 자손은 철없는 어린애였다. ‘공주님이라더니 과연. ’‘기품이 있으시구나. ’‘이렇게 의연하시다니. ’ 루시아는 흔한 공주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왕족이었다. 왕궁 구경하러 수도 다녀오는 것이 큰 행사인 북부 사교계 귀족들에게는 공주라는 신분 하나만으로도 우러러보는 대상이었다. 그녀가 나이에 비해 유난히 차분한 모습을 모두 기품 어린 우아함으로 받아들였다. 나이든 사람일수록 젊은이의 참한 모습을 흡족해한다. 타란의 젊은 공작은 영 섣부르게 다가가기 껄끄러운 상대라 비교적 순해 보이는 공작부인이 노부인들 마음에 쏙 들었다. “조만간 성대하게 무도회 한 번 여셔야지요. 손녀 아이가 그걸 꼭 여쭤보라 하더군요.” “아직 계획 중에는 없어요. 이렇게 부인들 모시고 소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좋군요. 무도회는 너무 시끄럽고 번잡스러워서요.” “아주 좋은 생각이세요. 무도회 같은 건 열어봤자 젊은 것들 놀이터만 만들어주는 격이라.” “그럼요. 술에 취해 새벽까지 비틀대는 모습은 영 좋아 보이지 않지요.” 노부인들은 우르르 찬동했다. 자기들이 젊은 시절엔 어찌 놀았는지 따위는 그들 기억에서 사라진 것 같았다. “실례하겠습니다.” 한창 대화가 무르익어 가는 시점에 제롬이 테라스로 들어왔다. 티파티는 여성들만의 자리라 시중드는 사람도 모두 여자뿐이고 남자는 방해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무슨 일인가요? 집사.” “즐거운 시간을 방해 드려 송구합니다. 마님. 주인님께서 마님의 첫 사교 활동을 축하하는 의미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가지고 들어와도 되겠습니까?” 노부인들 표정이 단번에 흥미로 가득차서 서로 눈을 마주쳤다. 루시아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허락하자 하인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그들 모두 품에 한 아름씩 꽃을 안고 있었다. 붉은 꽃들의 향연이었다. 장미, 튤립, 국화, 제라늄..그야말로 종류별 모두 붉은 꽃으로 하인들이 테라스 구석구석에, 일부는 화병에 담아 테이블에도 여기저기 장식하기 시작했다. 테라스 내부는 순식간에 달콤한 꽃향기로 가득해졌다. 족히 수천송이는 됨 직 했다. “어머나, 세상에.” “공작 전하께서 이렇게 로맨틱한 분이었다니.” 아무리 나이 들어도 꽃을 좋아하는 여자. 노부인들은 체통을 버리고 환호성을 질렀다. 이젠 나이 지긋이 들어 젊은 날의 설레던 사랑은 시들해진 지금, 예상치 못하게 목격한 로맨스가 그들 열정을 뜨겁게 되살렸다. 기대 안한 선물을 받은 루시아 가슴도 두근거리며 뛰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선물 보내시며..전하라는 말씀은 없으셨나요?” 노련한 집사는 당황하지 않았다. “부디 오늘 테마에 어울리는 선물이기를 바란다 하셨습니다.” 루시아 눈이 살짝 커졌다. 그리고 집사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수고 많았어요. 집사. 감사 인사는 그 분께 직접 드리도록 하지요.” 티파티 자리를 파할 때까지 노부인들은 내내 부럽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에게 둘러싸여 루시아 얼굴은 꽃잎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루시아는 돌아가는 모두에게 모두 꽃 한 다발씩 품에 안겨 주었다. 그렇게 나누어 주어도 여전히 남은 꽃이 많았다. 귀부인들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아름다운 선물에 몹시 흡족해하며 돌아갔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마님. 귀가하는 귀부인들 안색이 밝은 것을 보아 티파티 자리가 다들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나 역시 즐거웠어요. 제롬도 수고했어요. 그런데 물어볼 것이 있는데요.” 제롬의 어깨가 순간적으로 굳었다. 요즘은 좀 뜸했던 마님의 공격이었다. “...예. 마님.” “꽃 선물. 그 분이 지시한 것 아니죠?” “예?” 제롬은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치는 것처럼 되묻고 말았다. 제롬이 대경실색하는 모습을 보며 루시아는 쿡쿡 웃었다. “나도 처음에는 선물인 줄 알았어요. 제롬이 한 마디 붙이지만 않았어도 속았을 거예요. 오늘 테마에 어울리기 바란다니. 그 분이 그렇게 섬세한 분이 아니라니까요. 어떻게 나보다 더 몰라요?” 차라리 제롬이 따로 전하는 말은 없었다고 했다면 정말 그가 보낸 선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그..마님. 저기..그게...” 가련할 정도로 버벅거리는 제롬을 루시아는 따뜻하게 위로했다. “괜찮아요. 선물 고마워요. 제롬.” “마님! 그게 아닙니다. 정말 주인님께서 선물을 보내려 하셨는데 무엇을 보낼지 고민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꽃으로...” “정말요?” “예. 이건 정말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마님.” 루시아는 흐음, 중얼거리며 안색마저 굳어가는 제롬을 미심쩍은 시선으로 살폈다. 제롬 표정이 너무 안 되어 보여서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알았어요.” “마님. 정말입니다.” “알았다니까요. 전하께는 감사 인사드릴게요.” 제롬은 이젠 다른 의미로 곤란해졌다. 공작에게 직접 감사 인사를 했다가 뭔가 말이 어긋나기라도 하면. ..하지만 이제 와서 또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리 좋은 뜻이었다고 해도 엄연히 마님을 기만한 행위가 될 수 있었다. “난 여기 좀 더 앉아 있을래요. 꽃향기가 참 좋네요.” “...예. 마님. 차를 가져다 드릴까요?” “이미 많이 마셨군요. 필요한 건 없어요.” 제롬이 물러가고 루시아는 한참 동안 조용해진 테라스에 하릴 없이 앉아 꽃향기에 심취했다. 티파티가 한참인 시간 동안 휴고는 회의 중이었다. 휴고는 가신, 기사, 지역 영주들과 정기적으로 회의를 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월 1회 정도이지만 회의 상대가 모두 다른 휴고는 최소 주 1회씩은 회의를 할 정도로 회의가 잦았다. 그의 회의 스타일은 회의 중으로 문제가 제기된 사안의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다보니 회의에 들어가면 끝날 때 사람들은 진이 다 빠진 표정으로 나오고, 오전부터 시작해서 저녁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오늘 회의 역시 티파티가 모두 끝나고 나서 한참 시간이 지난 후 마무리되었다. 다행히 저녁 식사 시간은 넘기지 않았다. 저녁을 먹기에는 조금 이르지만 뭔가 시작하기엔 어지빠른 시간이라 휴고는 제롬에게 루시아 행방을 물었다. “마님께서는 테라스에 계십니다.” 아. 티파티. [ 마님께서 여시는 첫 자리인데 축하 선물을 보내심이 어떠신지요. ]이런. 그는 작게 탄식했다. 선물을 보낸다고 해놓고 잊고 있었다. 어제는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서, 오늘은 오전부터 내내 회의라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직 오늘이 지난 것은 아니니까. 오늘 안에만 주면 좀 늦게 줬다고 해도 문제가 될 건 없겠지. “이 시간까지 티파티 중인가?” “아닙니다. 끝난 지 한참 되었습니다. 마님께서는 그냥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그리고..마님 선물에 관해 말씀이 없으시어 제 판단으로 테라스를 장식할 꽃을 보내 드렸습니다.” “음. 그래? 잘했군.” 역시 그의 집사는 유능했다. “안사람은 테라스에 있다고 했지?” 공작 뒷모습을 보며 제롬은 차마 마님께서 그 선물을 정말 주인님께서 보내셨는지 의심하고 계십니다, 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건 엄연히 자신의 실수였다. 주인님께 잘못을 숨기다니. 그의 집사 인생 처음이었다. 자괴감에 빠진 제롬을 뒤로 하고 휴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테라스로 향했다. 날이 저물어 붉은 노을빛으로 물들어가는 테라스에 들어선 순간, 휴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테이블에 턱을 받치고 눈을 감은 채 앉아 있었다. 마치 이 공간만 고요에 먹힌 것처럼 무겁지 않은 평온한 적막이 감돌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녀의 명상을 방해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궁금하기도 하면서 생각에 빠진 그녀를 당장 현실로 끌어내고 싶기도 했다. 그녀의 평화로운 얼굴을 바라보며 그의 마음도 점점 고요해졌다. 너무 편안해서 오히려 숨이 막힌다. 휴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가끔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고, 눈앞이 막막하기도 하고, 정체 모를 뭔가가 조금씩 그를 좀먹고 있는 것 같았다. 결코 유쾌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불쾌하지도 않은. 늘 모든 것이 명확했던 그의 인생에 그녀는 도무지 제 자리를 찾을 수 없는 퍼즐 조각이었다. 감겨 있던 그녀의 눈이 반짝 뜨였다. 그를 발견한 그녀가 햇살처럼 눈부시게 웃었다. 휴고는 순간 인상을 썼다. 바늘로 콕 찌르는 것처럼 가슴 안쪽이 따끔했다. 자꾸 몸에서 이상 증상이 보였다. 지금껏 질병은커녕 어지간한 상처는 놀라운 회복력을 보이는 몸이라 의사는 필요 없이 살아왔다. ‘..그 늙은이를 불러오라고 해야 하나.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은 필립 얼굴을 다시 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루시아는 벌떡 일어나 그를 향해 달려갔다. 즐거웠던 오늘의 티파티, 향긋한 꽃향기와 서서히 해가 지며 만들어내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노을, 모든 것이 그녀의 기분을 서서히 고조시켰다. 조용한 평화를 즐기며 그 기분이 극에 달했을 때 그가 등장했다. 루시아는 자신의 감격을 그의 품에 달려가는 것으로 표현했다. “어이쿠.” 갑작스럽게 쿵 부딪쳐 오는 그녀 때문에 그는 순간 주춤했다. 그의 허리를 두 팔로 꼭 끌어안고 얼굴을 그의 가슴에 비비며 품에 들어왔다. 그는 보드라운 그녀를 품으로 안으며 화답했다. 고개를 숙여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어쩐 일로 안하던 귀여운 짓을 다 할까. 오늘 티파티에서 배운 것이 이거라면 매일 열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면서 그녀의 턱을 살짝 잡아 가볍게 키스했다. “티파티는 즐거웠나?” “네. 선물 감사해요.” 그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테라스 여기 저기 가득한 꽃을 포착했다. 제롬이 그를 대신해서 했다는 선물이 그녀를 기쁘게 한 것 같아서 그도 흡족했다. 여자들은 대체 왜 꽃을 좋아하는 걸까. 먹지도 못하는 저런 걸.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차피 여자라는 생물 자체를 이해한 적 없었다. 화사함을 뽐내는 붉은 꽃들에게 무심히 시선을 던지던 그의 눈에 꽃 사이에 끼어있는 장미꽃이 들어왔다. 그의 눈매가 미세하게 굳어졌다. [ 제게 장미꽃을 보내주세요. ]갑자기 떠오른 그녀의 말 한 마디. 그는 몹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저 말을 언제 들었지?’아장아장 발걸음을 떼던 시절까지 떠올릴 수 있는 그의 탁월한 기억력에 오류가 발생했다. 마음이 다급해지니 기억은 더 혼잡해졌다. 불과 몇 개월 전 기억을 되살리려고 그는 고심했다. ‘그래. 계약..계약하던 날 그녀가 내건 조건이...’[ 제가 제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제게 장미꽃을 보내주세요. ]이런. 빌어먹을. < -- 공작부부 -- >차가운 얼음물이 머리 위에서 쏟아진 것 같았다. 아니다. 그보다는 더 끈끈하고 온몸을 옭아매는 것 같은, 악취 나는 오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기분 더럽군. ’그 말밖에는 표현할 말이 없었다. 성가신 불쾌함이 아니라 진창에 발목까지 푹 빠져서 겨우 발을 끄집어 낼 때 느끼는 정말 짜증나는 불쾌함. 아니야. 그런 것과는 달랐다. 적군 뒤통수를 쳤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알고 기다리는 놈들을 마주쳤을 때. 아니다. 그것도 아니야. 그는 자신을 사로잡는 이 기분의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 열심히 고민했지만 도무지 답이 도출되지 않았다. 그녀를 보자 맑은 눈으로 조금 의아한 듯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는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했다. “꽃..그렇게 좋은가?” “꽃이 좋다기보다는..선물을 보내 주신 것이 기뻐요.” 그녀의 표정은 밝았고 순수하게 기쁨을 표현했다. 아무래도 단순히 선물의 의미로만 받아들이는 것 같았지만 대놓고 물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러면 그가 보낸 선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테고 단순히 선물로만 알고 있었다면 그녀는 실망할 테니까.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군.” 그는 동요하는 마음을 감추고 겉으로는 아주 태연하게 대응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제롬을 향해 작은 앙금을 품었다. 하고많은 선물 중에 왜 하필 장미꽃이란 말인가. 여러 많은 종류의 꽃 중에 장미가 들어 있을 뿐이었지만 휴고는 눈에는 장미만 보였다. 휴고는 몸을 숙여 그녀를 가뿐히 안아들었다. 루시아는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당혹해 하는 비명을 질렀다. 그는 테이블에 걸터앉아 그녀를 무릎에 앉히고 두 팔로 꽉 끌어안은 채 그녀의 어깨에 턱을 괴었다. “전하..? 휴..” “잠시만.” 조금 버둥거리던 그녀가 얌전해지자 그는 생각을 시작했다. 작은 몸의 체온이 품 안에서 점점 따끈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차분하게 기억을 더듬었다. ‘노란..그래..노란 장미. ’처음에는 장미꽃만 보고 놀랐으나 당황의 순간이 지나가자 그는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눈을 돌리며 아무리 살펴도 노란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여자에게 이별의 의미로 보내는 노란 장미는 이곳에 없다. 그는 안도했다. 여자에게 노란 장미를 보내는 것을 그는 처음에는 몰랐다. 적당히 알아서 하라고 제롬에게 명했을 뿐, 어떤 방식으로 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런데 장미를 받은 여자가 그를 찾아와 눈앞에 노란 장미 다발을 내던진 적이 있었다. 몇 번 만나는 중에도 성격이 보통은 아니구나 생각했던 여자였다. 그 일로 휴고는 노란 장미라는 꽃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색깔이 알록달록하면 다 꽃이려니 했던 그가 장미라는 꽃의 종을 인식하게 되었다. 제롬이 왜 하필 노란 장미를 보냈는지는 묻지 않았지만 나름 의미가 있어보여서 하던 대로 하라고 했다. ‘그녀도 노란 장미라는 걸 알고 있나?’그녀와 계약하며 나눈 대화를 아무리 되새김질 해봐도 ‘노란’ 장미라고 특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 반응으로 봐서는 오늘의 장미를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별의 장미는 한 다발이었다. 이런 엄청난 꽃 무더기가 아니니까 엄연히 다르다고 그는 정의 내렸다. 한 가지 문제를 해결했고, 그는 다시 그 날 계약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가 내세운 조건은 2장의 서류였다. 그리고 부가적으로 둘이 더 있었다. 사생활의 자유. 절대 그를 사랑하지 말 것. ‘미친 놈. ’왜 그런 쓸데없는 사족을 붙였을까. 그는 원래 문서화 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면 계약 조건으로 삼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떠본다고 생각해서 맞대응한다는 것이 그런 결과를 가져왔다. 사생활의 자유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결혼해서 멀쩡한 아내 곁에 두고 딴 여자에 눈 돌릴 필요가 없지. 괜히 수고롭게. 그는 가끔 놀 수도 있지, 라고 했던 당시의 생각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었으나 어차피 그는 자신의 모순에 관대한 남자였다. [ 절대로 전하를 사랑하지 않겠어요. ]문제는 이거였다. 가슴과 등 앞뒤에서 강한 힘이 누르는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더구나 그녀의 맹세는 2중의 방패를 둘렀다. 그녀는 그에게 선언했다. 절대 당신에게 마음을 주지 않을 것이며, 만에 하나 그렇다고 해도 장미꽃으로 거절의 답을 주세요.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이라고 생각해서 흔쾌히 그러마 했다. ‘등신 새끼. ’그는 원래 스스로를 싫어하지만 그건 혐오에 가까운 감정이지 멍청하다고 여긴 적은 없었다. 그는 사실 신체와 두뇌의 능력에는 남부럽지 않게 자신이 있었다. 그의 자신감에 쩍쩍 금이 가고 있었다. “휴. 더워요.” 품안에서 그녀가 몸을 비틀었다. 그의 팔에서 힘이 빠지자 루시아는 두 손으로 그를 밀어내며 몸을 떼어냈다. 시원한 공기가 살갗에 닿자 후, 작게 숨을 내쉬었다. 더위로 조금 붉게 상기된 그녀를 그는 멍하게 내려 보았다. ‘이 여자는 날 사랑하지 않아. ’그래주면 고맙지. 과거 그는 여자들을 향해 그렇게 생각했다. 여자의 사랑은 성가시다. 원하지도 않는 마음을 줘 놓고 보답해 달라고 앵앵거렸다. 그들이 말하는 사랑은 결국은 다 그가 가진 것들에 기반을 둔 거래였다. 여자는 그가 가진 권력과 재물을 사랑했다. 그들은 공작 휴고를 사랑하는 것이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히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원하는 사람도 공작으로서의 자신이었다. 그런데 점점 그 확신은 흐려지는 중이었다. 그녀는 그가 가진 권력과 재물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직은 몰라.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사람 본색은 길게는 십 수년 숨겨지기도 한다. 그의 이성은 그렇게 말하는데 왜 그의 감성은 그녀는 뭔가 다르다고 자꾸 말하는 걸까. ‘그녀가 매달리기는 바라는 건가..? 다른 여자들처럼?’왜? 도무지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앞에 있었다. ‘그래서 만약 그녀가 매달리면..난 어쩌고 싶은 거지?’그런 일이 발생하면 그건 계약 조건의 불이행이었다. 계약 조건을 지키지 못하면 어쩌기로 했더라. 그의 눈동자가 순간 반짝 빛났다. 그들의 계약은 대단히 치명적인 빈틈이 있었다. 첫째, 문서화 되지 않은 계약은 법적인 효과를 주장할 수 없다. 둘째, 계약 내용 어디에도 조건을 지키지 못했을 때 계약 파기의 구체적 내용을 언급하지 않았다. 아예 이혼은 없다고 못 박지 않았던가. 이혼의 성가신 과정을 처음부터 차단하려는 의도로 한 말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영리한 선견지명이었다. ‘장미꽃? 그게 뭐. 영원히 장미꽃을 보내지 않으면 어쩔 건데. 또 보낸다고 해도 어쩔 건데. ’한참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 눈동자가 점점 의문으로 물들어갔다. 호박색 눈동자를 보며 그의 붉은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그의 아내였다. 누구도 감히 시비하지 못할 그의 여자였다. 혼인증서에 서명한 순간부터 그녀는 그의 그늘아래 온전히 묶였다. ‘이 여자는 내 꺼야. ’ 도출한 결론이 그는 몹시 만족스러웠다. 사랑이니 뭐니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 자그마한 여자는 결코 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여자에 대한 소유욕과 집착이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회의가 잘 풀리지 않으셨어요?” 그가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 달랐다. 워낙 거칠 것 없는 사람이라 그가 고민하는 문제가 있다고는 상상이 되지 않지만 북부는 넓은 땅이고 그는 많은 사람들 위에 서 있으니까 문제 하나 없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사실 루시아는 그에게 조금 샐쭉해 있었다. 아랫사람이 알아서 선물을 챙기게 하다니. 차라리 주지 않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제롬이 강력하게 주장하는 말에 의하면 그가 일단 선물에 대한 생각 자체는 있었다고 하니까 믿어볼까 하는 마음도 살짝 들었다. 그리고 오늘 티파티에서 귀부인들은 어리고 순해 보이는 공작부인이 아무래도 염려스러웠는지 몇 가지 조언을 건넸다. [ 사내란 단순해요. 복잡하게 생각할 거 하나도 없답니다. 꽃 한 송이를 줘도 세상에 그보다 더 귀한 선물이 없다는 것처럼 품에 쏙 안기며 고맙다고 하면 열이면 열 다 넘어간다니까요. ][ 암. 좋아하는 척을 자꾸 해야 선물도 자꾸 들어오지. 그리고 가끔은 우리 남편 수고했네, 힘드시지요, 이런 말로 달래주기도 하면서요. ] 이제 보니 그런 식으로 남편 쥐고 살았구만,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어떻고. 웃음을 쏟아내는 귀부인들 조언 같은 수다를 루시아는 얌전히 앉아 열심히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그의 품에 달려가 안길 때까지만 해도 귀부인들 조언에 따르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저 순수하게 그를 보는 순간 행복했다. 그런데 귀부인들 조언이 떠오르자 상황이 아주 딱 이었다. 그래서 루시아는 꽃 선물에 얽힌 뒷사정은 접어 두고 적극적인 감사를 표했다. “회의는 아무 문제없어. 선물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지?” 잡아먹을 것 같은 그의 눈빛에 루시아는 주춤주춤 그의 무릎에서 내려오려 했지만 그의 팔이 허리를 감았다. “네...” “마음에 들었으면 답례를 해줘야지.” 정말 이 뻔뻔한 남자. 그가 한 선물이 아닌 것을 빤히 알고 있는데 그는 양심의 가책 한 톨 보이지 않았다. 말해버릴까 싶다가도 그러면 제롬이 혼이 나겠지, 괜히 긁어 부스럼 내어 뭐하나 싶어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뭘 드려요?” “있다고 하면. 뭐든 가능한가?” “제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면요.” 그가 귓가에 대고 무언가 속삭이자 루시아 얼굴이 점점 빨갛게 달아올랐다. “안 돼요!” “금방 끝낼게.”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근처에 쪽쪽 소리 내며 닿았다 떨어졌다. “곧 저녁 식사 시간이라구요.” “그 전에 끝낸다니까.” 그가 퍼붓는 자잘한 키스에 그녀는 계속 저항했다. “못 믿어요.” “그 말 참 쉽게 나오는군. 언제부터 내 신뢰도가 그렇게 바닥을 쳤지?” “왜 그런지 가슴에 손은 얹고 생각을 해보세요.” 침대에서 매번 한번만 더, 이번이 마지막. 그의 꼬임에 설마 하면서도 그녀는 번번이 속았다. 그녀의 앙탈에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작은 영차, 소리를 내며 치맛자락 위로 그녀 허벅지 아래를 받쳐 들어올렸다. 그녀의 다리를 벌리는 자세로 바꿔서 자신의 허벅지 안쪽을 타고 앉도록 바싹 끌어당겼다. 루시아는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은 것처럼 마주 앉은 자세가 되어 목덜미까지 빨갛게 물들어서 그를 흘겨보았다. 옷이 가로막고 있지만 않으면 결합하는 자세와 다를 것이 없었다. 이미 잔뜩 흥분한 남성의 상징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이 남자, 정말로 여기서 할 셈이었다. “누가 오면 어떡해요.” “그 정도로 눈치 없는 집사 아니야. 우리가 여기서 안 나오면 알아서 통제할걸.” 그게 더 창피하단 말이에요! 루시아는 입술을 깨물며 어쩔 줄을 몰랐다. 이미 그의 손 하나는 슬금슬금 치마를 걷어내 안을 더듬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다른 손이 그녀의 등을 받쳐 품으로 당기면서 귓불을 살짝 깨물며 혀로 핥았다. “처음은 정원에서 하고 싶었는데 생각해보니까 날씨가 날씨니만큼 벌레가 있겠더군. 하던 중에 당신이 기절하면 곤란하잖아. 아니지. 상관없으려나. 꼭 벌레 때문이 아니라도 당신은 종종...” “...한 마디만 더하면 당신 입술을 깨물어 버릴 거예요.” 그는 키득거리면서 예, 마님. 대답했다. 새침하게 노려보는 그녀 눈가에 입을 맞추고 붉은 입술을 삼켰다. 훅 풍기는 그녀의 체향이 달았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시간을 알차게 이용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들은 제 시간을 훌쩍 넘긴 늦은 저녁을 먹었다. 오후의 집무실, 휴고는 제롬이 차를 가지고 들어와 책상에 놓아두고 돌아서는데 말했다. “앞으로는.” 제롬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다시 책상으로 다가와 얌전히 주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꽃은. 다른 꽃은 상관없지만 장미꽃은 안 돼. 그 꽃이 내 눈에 다시는 보이는 일 없게 해.” 주인이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제롬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혹시 어제 마님께 보내드린 선물로 마님과 의가 상하셨나. 하지만 두 분 분위기를 봐서는 그런 것 같지 않았는데. 문득 장미꽃 하니까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전하. 일전에 마님께서..노란 장미꽃 보내는 일을 제가 하느냐고 물으신 적 있었습니다.” 서명을 하려던 그의 손이 순간 멈칫한 순간, 펜에서 잉크가 똑 떨어져 서류 아래에서 번지기 시작했다. 그는 살짝 인상을 쓰며 그 서류를 옆쪽으로 밀어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받은 사람이 레이디 로렌스가 맞느냐 물으시기에..그렇다고 대답을 드렸습니다.” “.......” 승전파티의 그 날, 소피아 로렌스가 질척이던 걸 떼어내는 광경을 그녀는 적나라하게 목격했다. 잊고 있었다. 잊었던 것이 아니라 신경 쓸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는 말이 정확했다. 그녀가 파렴치한 악당처럼 그를 취급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또 뭐지?” 그의 목소리에 조금 날이 섰다. 제롬은 아무래도 불편해 보이는 주인의 심기 때문에 눈치를 살폈다. “왜 마지막이 팔콘 백작부인이 아니냐고 하시기에. ..그건 전하께서 지시하지 않으셨다고 답변 드렸습니다.” 겉으로는 서늘한 표정을 짓고 있으나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거기서 그런 식으로 대답하면 어떡해! 버럭 외치고 싶은 것을 속으로 삼켰다. 늘 유능했던 집사가 한 순간 눈치 없는 맹꽁이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보내. 장미.” “팔콘 백작부인..말씀이십니까?” “당장. 오늘.” “..예 전하. 아, 그리고 또 하나..” “뭐가 그리 많아.” 휴고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돌아나가는 걸 붙잡아 한 마디 했더니 기회를 잡은 것처럼 줄줄이 쏟아내고 있었다. “마님 주치의가 올리는 말씀입니다만. 마님 침실에 드시는 일은 좀 자제하시라고...” “뭐야? 그걸 왜 주치의가 상관하지?” “마님 건강상 이유 때문이라 했습니다. 닷새에 하루만큼은 마님께 휴식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마님의 건강. 그가 도무지 저항할 수 없는 절대 과제가 등장했다. 그의 아내는 작고 약했다. 사실 그렇게까지 루시아가 허약 체질은 아니지만 그의 뇌리에는 탈이 나면 아주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박혀 있었다. 한 달 넘도록 너무 쉼 없이 몰아치기는 했다. 그렇다 해도 정말 원 없이 해봤으면 적어도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닷새에 하루. 그는 급 우울해졌다. < -- 공작부부 -- >나신의 여체가 미세한 근육으로 뒤덮인 사내의 몸을 쿠션 삼아 기대 누웠다. 그의 어깨를 베고 윗가슴 부근에 뺨을 붙이고 루시아는 그의 손이 부드럽게 등 맨살을 쓸어내리는 것을 기분 좋게 음미했다. 그의 가슴에 얹은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피부의 탄탄함이 신기해서 손바닥에 살짝 힘을 가해 눌렀다가 놓는 손장난을 하는 중이었다. “내일부터 며칠 로암에 없을 거야.” “어디 가세요?” “영지 시찰. 앞으로도 한 달에 한 번에서 두 번 정도 돌아볼 예정이야.” 비록 신혼의 단꿈에 푹 빠져 있긴 해도 그는 해야 할 일은 잊지 않았다. “영주가 그런 일도 하나요?” “당연하지. 질서가 필요하니까.” 주인이 보이지 않으면 언제든 딴 곳에 눈 돌릴 놈들이라 그러기 전에 목줄을 단단히 죄어야 한다. 딴 데 한눈파는 놈들을 지켜보다가 눈을 파내 경고하는 것도 나름 재미나기는 하지만. 그는 그런 거친 표현을 그녀 앞에서 삼갔다. ‘영지 시찰..원래 하는 일이구나..’꿈속의 남편이었던 메튼 백작은 단 한 번도 영지를 방문하지 않았다. 루시아 역시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가끔 영지에서 세금을 가지고 올라오는 자들 면상에 보고서를 내던지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모습은 몇 번 봤지만. “오래 걸리세요?” “사나흘. 길면 며칠 더 걸릴 수 있고.” 며칠은 그가 없구나. 루시아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결혼하고 바로 로암에 내려와서는 한 달 가까이 혼자 지냈는데, 어느 새 그가 곁에 있는 것이 당연해졌다. 빨리 돌아오세요. 말하면 그가 성가셔할까..? “이틀 뒤 티파티라지?” 루시아의 2번째 티파티가 이틀 뒤로 잡혀 있었다. 첫 티파티 이후 거의 보름 만이었다. 첫 티파티의 성공에 힘입어 루시아는 두 번째 자리를 꽤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가 없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의욕이 사그라졌다. “네.” “당신에게 줄 것이 있어. 내일 아니면 모레 도착하겠군.” “뭔데요?” “선물. 지난 티파티 때 부족한 것 같아서.” 그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지만 루시아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갑작스런 그의 선물에 마음이 설ㅤㄹㅔㅆ다. “뭔지 여쭤 봐도 돼요?” “목걸이.” 워낙 담백한 그의 목소리에 루시아는 콩닥콩닥하던 기대감이 조금 식었다. 형식적인 선물 같은 건데 괜히 혼자 기대를 하고 있는 건가. 선물을 주며 밀당을 해 본 적 없는 그의 단순한 성격을 루시아는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보석. 혹시 싫어해?” “...보석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럼 됐고. 나 없는 동안 특별한 계획은 없나?” “이틀 뒤 티파티. 그 외에는...” “별 일 없다는 거지? 나 없다고 돌출행동 할 생각 말고 얌전히 있어.” “무슨 돌출행동이요?” “평소 지내던 대로만 하라는 소리야. 특히 외출은 안 돼.” 갑자기 그가 외출을 언급하자 루시아는 의아했다. 그녀는 로암에 도착한 이래 계속 성을 벗어나지 않고 지냈다. 처음에는 구경하느라 외벽 부근까지 나갔지만 그가 돌아온 이후에는 내성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내성에서만 지내도 필요한 건 모두 준비된 상태라 굳이 나갈 필요가 없었고, 그녀의 성격은 활동적인 것 보다는 어쩌면 지루할 수 있는 조용하고 변화 없는 생활을 즐기는 편이었다. 딱히 그 동안 그에게 외출하고 싶다고 말한 적 없는데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 왜요?” “나가고 싶어?” 내가 없는 동안 내 영역에서 벗어나지 마. 그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그거였다.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요. 이유를 확실히 말씀해 주셔야 저도 판단을 할 수 있지요.” “내가 자리에 없으니 안주인이 지키고 있어야지.” 그는 자신이 내놓은 그럴듯한 답변에 만족했다. 꼭 로암 깊은 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자리를 지키는 건 아니지만 루시아는 그의 말 속의 빈틈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저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 “네.” 잠시 그가 아무 말이 없어서 시선을 흘끔 들자 그가 바라보고 있었다. “더 일러 둘 말씀 있으세요?” 그가 웃으면서 고개를 숙여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빨아들였다. 순한 표정과 맑은 눈으로 바라보는 말 잘 듣는 아내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며칠 보지 못할 것이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타란 공작과 기사들이 아침 일찍 로암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필립은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거처는 로암(성) 외벽 안쪽의 구석진 곳이었다. 타란 공작가의 주치의 거처는 원래 내성에 있었지만 8년 전 주인이 바뀌면서 필립의 거처는 밖으로 밀려났다. 거처가 바뀌긴 했지만 공작은 그 외에는 별다르게 필립을 핍박하지는 않았다. 아무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말이 정확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여러 의학적 사료들이나 기록들 역시 그대로 거처를 바꿀 때 옮기게 해주었다. 필립은 자신의 목숨이 휴고의 가느다란 자비심에 기대고 있음을 잊지 않았다. 정확히 표현하면 자비라기보다는 대가였다. 목숨 빚의 대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공작의 모습을 필립은 찬탄했다. 타란 가문의 비밀을 아는 주변인이 쥐도 새도 없이 사라져 이제는 필립 혼자 남았어도 결코 공작의 잔인함을 비난하지 않았다. 타란 공작은 필립의 가문이 그토록 염원하며 매달린 타란 혈통의 결정체였다. 아득히 먼 옛날. 마법이 세상의 질서이던 때가 있었다. 당시 마도제국은 전 세계를 지배했다. 마도제국의 중심지가 위치한 곳이 이 제논이었다. 다수의 보통 인간이 존재했고, 그들을 지배하던 소수의 귀족이 있었다. 마도제국의 귀족은 보통의 인간과 다른 우월한 능력을 지닌 종족을 지칭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그 외에는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외모를 지녔으나 그들이 지닌 능력은 보통 인간에게는 절대적이고 압도적이었다. 타란은 마도제국 귀족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귀족은 자기들끼리의 통혼과 근친으로 혈통을 유지했다. 마도제국은 마법이 지배하는 나라였고, 마법적 힘은 오직 귀족만 보유할 수 있었다. 귀족만 타고난 혈통으로,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힘을 부여받았다. 소수의 귀족은 다수의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했다. 귀족은 마치 타고나기를 그런 것처럼 하나같이 잔인하고 자비가 없었다. 수천 인간이 달려들어도 귀족 하나를 당해낼 수 없었다. 지배 계급은 공고해지고 인간들의 절망은 깊어갔다. 영원히 이 질서는 깨지지 않을 것 같았다. 어느 날, 우주에서 날아온 운석 하나가 지표면과 충돌했다. 제법 큰 지진이 발생했지만 충돌 지점이 사람이 없는 황무지라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 학자들 몇이 관심을 가졌으나 그런 흥미도 곧 식었다. 그저 그런 기억할 가치도 없는 사건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 날을 기점으로 세상의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기에 가득하던 마법의 힘이 흩어졌다. 마법으로 구성되던 귀족들의 핏줄 속을 흐르던 힘이 사라지자 범인보다 못하게 추락했다. 보통 인간과 대적할 근력조차 남지 않았다. 착취에 신음하던 인간들이 다수의 힘으로 뭉쳐 들고 일어났다. 처음엔 두려워했으나 인간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무시무시한 광기로 변했다. 사냥이 시작되었다. 검은 머리 검은 눈의 귀족들은 모조리 잡히고, 추적당하고, 색출되어서 형체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으깨어 살해당했다. 마도제국의 흔적은 파괴되고 불타올랐다. 수십만 권 책은 재로 변하고 아무 이능을 보이지 않는 마도구들은 쓰레기로 전락했다.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멀리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날리는 재를 볼 수 있었다. 타란은 귀족이지만 반쪽이었다. 귀족들에게 따돌림 당하는 이단으로 평소에 귀족과 유대 없이 제 땅에서 조용히 살았다. 그건 타란 혈통의 먼 조상이 인간의 피가 섞인 혼혈이기 때문이었다. 타란의 혈족은 대대로 마법 능력이 약했고 귀족들은 수치로 여겼다. 그러나 이변이 발생한 날. 타란의 혈통 속에 잠들어 있던 인간의 피가 혈족의 피와 섞이며 오히려 강력한 신체와 두뇌의 능력으로 뒤바뀌었다.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외모가 검은 머리 붉은 눈으로 변화했다. 세상을 휩쓰는 인간들의 광기에서 타란의 남매가 살아남았다. 그들은 조용히 숨어들었다. 오직 가문의 재건과 혈통의 보존을 위해 그들의 존재가 완전히 잊히기를 기다렸다. 기다림의 시간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마도제국의 멸망으로 비로소 인간들의 세상이 시작되었다. 공통된 적을 물리친 인간들은 이제 자기들끼리 패를 나눠 처절하게 물고 뜯기 시작했다. 패자에 관한 기억은 빠르게 사라졌다. 수십 년 만에 마도제국은 옛 이야기가 되었고, 백여 년이 흐른 뒤에는 전설이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대기의 기운이 또 다시 변화했다. 운석이 떨어지기 전의 마법의 기운이 완벽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일부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던 마도구들의 이능이 돌아올 정도는 되었다. 인간들은 보물의 발견을 기뻐하며 마도구 발굴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보물탐색가가 최고의 직업으로 각광받았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 숨어 있던 타란의 혈족이 기지개를 폈다. 그들은 숨겨 두었던 가문의 보물을 꺼내 가문의 재건에 들어갔다. 뛰어난 능력과 카리스마로 세력을 규합해 가문을 세우는 건 금방이었다. 필립은 가문 재건 때부터 함께 한 몇 안 되는 인간의 후손이었다. 필립의 집안은 타란 혈통의 보존을 임무로 받아 오직 그것만을 위해 살아왔다. 마도제국 시절, 귀족과 인간 사이에는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다. 귀족들에겐 아무 상관없는 문제였지만 호기심 많은 학자들은 왜? 라는 탐구의식을 버리지 못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방법을 알아냈다. 귀족 입장에서는 참 쓸데없는 짓이었지만 원래 학자들의 연구는 쓸데없는 것이 더 많다. 그 지식 덕분에 태어난 타란의 먼 조상은 이후에도 그 문제에 꾸준히 관심을 가졌다. 비밀리에 연구를 계속해서 지식을 쌓았다. 반쪽 귀족이라 인간과 교합해 자식을 낳기 위해서는 여느 귀족과는 좀 달랐다. 연구와 시행착오를 거듭해서 드디어 타란 혈통만의 방법을 찾아냈다. 마도제국 시절에는 이 방법을 쓸 일이 없었다. 반쪽이라도 귀족은 귀족이었다. 타란 가문의 조상이 혼혈이긴 하지만 이후에는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귀족하고 혼인해서 흐려진 귀족의 피를 짙게 하고 귀족의 주류에 다시 들어가기 위해 애썼다. 세상의 모든 귀족이 멸망하자 타란은 인간과 혼인을 통해서만 혈통을 이어갈 수 있었다. 가문의 지식이 쓸모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통의 인간과 결합하면 반드시 딸이 태어났다. 가문을 이으려면 아들이 필요했다. 찾아낸 방법이 근친이었다. 타란의 가주는 이복누이를 아내로 들였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는 오직 아들 하나. 아들이 다시 가문을 잇기 위해서는 아내감이 필요했다. 아들의 신부를 만들어주는 것은 아버지의 일이었다. 타란 혈통이 아닌 보통의 여자와 결합해서 아이를 낳으려면 준비가 필요했다. 필요한 것은 아직 초경을 시작하지 않은 어린 여자아이. 초경이 시작되면 삼엽쑥을 반년 이상 복용하게 해서 월경을 멈추게 한다. 그 상태로 1년 이상 몸을 정화시킨다. 장차 아이의 아비가 될 타란 혈통의 사내는 준비된 여자의 처녀를 취해야 한다. 그리고 여자에게 삼엽쑥의 효능이 약화되는 약을 먹여 몸을 원래로 되돌린다. 다시 월경이 시작될 때까지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3년. 월경이 시작되기 전까지가 임신 가능기간이었다. 그 사이에 여자와 동침해서 아이를 갖게 했다. 임신 없이 월경이 시작되면 그 여자는 실패였다. 이 모든 일은 필립의 가문이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했다. 시간이 흐르며 관련된 지식은 필립 가문의 비전이 되어 전해지고, 타란 가문의 가주는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게 분리되었다. 이들은 서로 상부상조하며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왔다. 필립은 쌍둥이 형제가 태어난 순간부터 지켜보았다. 공작이 쌍둥이 중 하나를 죽이려 할 때 혹시 모를 패를 남겨두시라 만류했다. 공작은 잔혹한 호기심을 보였다. 하나는 최상의 배경에서 기르고 하나는 최악의 조건으로 생존하게 하면 과연 각각 어찌 자랄까. 공작이 아이 하나를 용병에게 노예로 파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지만 늘 멀리서 지켜보았다. 히우는 모르는 일이지만 어릴 때 필립이 손을 써서 목숨을 건진 일이 몇 번 있었다. 타란 혈통 특유의 잔인한 기질을 전혀 물려받지 않은 온후한 휴고, 철들기 전에 사람을 죽이는 독살스러움을 여지없이 내보였던 히우. 필립은 그들 형제 모두를 사랑했다. 그 중에서도 히우에 대한 애착이 더 강렬했다. 대를 이어 내려오며 인간의 피와 섞이면서 자연스럽게 타란의 피는 흐려졌다. 타란 혈족은 점점 인간화 되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태어난 히우는 완벽한 타란 혈통의 결정체였다. 뛰어난 육체, 영민한 두뇌, 강한 정신력, 냉철함과 잔인함. 바라마지 않던 타란 주인의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었다. 공작 역시도 버린 아들을 더 마음에 들어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다시 뒤바꾸려는 것을 묵인했다. 그러나 휴고를 죽이려는 것은 반대했다. 휴고에 대한 정이 있기도 했지만 타란 가문에 전례 없는 쌍둥이였다. 패는 그렇게 쉽게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했다. 세상일은 참 예측이 불가하다. 설마 히우가 휴고를 만나 사람의 마음을 배울 줄은 몰랐다. 태어나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다가 십수년 만에 처음 만난 형제가 서로를 적이 아닌 목숨보다 귀한 존재로 여길 줄은 몰랐다. 잔인하지만 냉철했던 선대에 비교해 죽은 타란 공작은 탐욕이 강한 편이었다. 그러한 점은 이전의 타란 가주들과 달랐다. 공작은 훌륭한 자식을 얻어 가문을 이어야 한다는 사명을 잊지 않았으나 살아생전 자신이 누리는 절대 권력을 놓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욕심은 언제나 화를 부른다. 지금은 휴고 타란이 된 히우 홀로 살아남았을 때. 필립은 그의 눈빛에서 이글거리는 증오와 환멸을 보았다. 그가 조만간 가문을 조각조각 분해하고 밟아 부스러기로 만들 것이라 직감했다. 데미안이 없었다면 분명 그리 되었을 것이다. 세상 어느 것에도 마음을 주지 않고 언젠가 다가올 끝을 향해서만 걸어가는 그가 안타까웠다. 그는 절대 인정하지도, 믿지도 않을 테지만 필립은 그를 사랑했다. 가족 없는 필립에게 쌍둥이 형제는 손자나 다름없었다. [ 경고하는데 내 아내 곁에 접근하기만 해봐. ]그래서 그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순간적이지만 그에게서 경계를 읽었다. 괜한 엄포가 아니라 새끼를 감싸고도는 어미 같은 예민함이었다. 죽은 휴고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어떤 분이기에.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뭘 어쩔 생각은 없고, 할 수도 없었다. 그저 공작부인이 어찌 생겼나, 성품은 어떠한가 확인하고 싶었다. 혹시 공작이 자리를 비운 틈에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 움직였지만 내성으로 들어가는 문 근처를 접근하는 순간 어디 숨어 있었는지 남자 서넛이 자연스럽게 앞을 가로막았다. “들어가서는 곤란합니다. 필립 경.” 필립이 헛, 낮게 탄식했다. 누가 지켜보고 있는 줄은 몰랐다. “날 감시하는 건가?” “내성으로만 들어가지 않으면 어떤 행동도 제한하지 않습니다.” “대체 왜? 이유가 뭔가?” “이유 같은 건 모릅니다. 지시받은 대로 할 뿐입니다. 항거 시 신체적 강제를 동반해도 좋다는 사전허락이 있었습니다.” “...알겠네.” 필립은 순순히 물러났다. 내성 안쪽을 향해 쩝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먼 하늘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또 떠나야 하는 건가..’마음 붙일 곳이 없으니 한 곳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살아생전 데미안 한 번 만나보는 것이 소원이지만 예전에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공작은 필립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공작은 가문의 비밀을 모두 혼자만 끌어안고 데미안에게 조차도 알려주지 않을지 모른다. ‘집착인가...’타란의 혈통에 매달린 그의 가문의 염원은 집착이라 해도 할 말 없었다. 필립의 아버지가, 조부가, 그 위의 선조들 역시 그러했다. 어려서 세뇌처럼 주입 받고 이제 다 늙은 노인이 되도록 박힌 사상이 그리 쉽게 바뀔 수는 없었다. 그는 아마 마지막 순간 눈을 감을 때까지 미련을 놓지 못할 것이다. < -- 공작부부 -- >제롬이 고급스러운 벨벳으로 감싼 큼지막한 상자 하나를 테이블에 올렸다. 루시아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천천히 상자 덮개를 위로 열었다. “헉.” 옆에서 기웃대며 곁눈질하던 하녀가 비명처럼 숨을 들이켰다. 하녀만큼은 아니었지만 루시아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상자 안에는 눈부시게 화려하고 셀 수 없이 많은 다이아몬드가 주렁주렁 달린 화이트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루시아는 보석 시세는 잘 모르지만 이건 보석이 아니라 보물이었다. 다이아가 이렇게 흔한 보석이었던가. 보통의 목걸이라면 마땅히 가느다란 금줄에 꿰어 가슴골에서 존재를 뽐내야 할 다이아들이 고작 목을 두르는 줄을 만드는 부속품으로 전락했다. 주인공 격인 큼지막한 다이아는 이것이 진정 유리 조각이 아닌 다이아몬드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이런 물건은 구경도 못 해봤다. 아마 귀부인들은 이런 걸 가지고 있어도 감히 무서워서 어디 나갈 때 목에 걸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감히 만져 봐도 될까 하는 마음에 몇 번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목걸이를 잡아들었다. 묵직한 무게감에 순간 손에서 놓칠 뻔 했다. “한 번 걸어 보셔요. 마님.” 하녀는 제가 더 신이 나서 냉큼 전신 거울을 가져왔다. 루시아는 목걸이를 걸고 거울 앞에 섰다. 목에서 느껴지는 무게는 마치 누군가 그녀 목을 두 손으로 감아 내리 누르는 것 같았다. 목덜미가 전부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로 촘촘히 베일을 썼다. “잘 어울리십니다. 마님.” 제롬이 흐뭇해하며 찬사를 보냈다. “대체..이건...” 그녀가 예상한 목걸이는 귀엽거나 혹은 여성스러운 흔한 장신구였다 왕가의 보물로 대를 이어 물려 줄 것 같은 이런 귀물이 아니었다. “정말 이걸..그 분이 구입하신 거예요? 내 선물로?” “생각보다 시간이 걸려 애석해 하셨습니다. 시찰을 떠나기 전에 드리고 싶어 하셨습니다.” “이건..너무 과하군요.” 마님의 떨떠름한 반응에 제롬은 당황했다. “과하지 않습니다. 마님.” “받는 사람이 부담을 느끼면 과한 선물이지요. 제롬. 전하께 부담스럽다 말씀드리면..언짢아 하실까요?” “예.” 제롬은 단호히 대답했다. 주인이 이 선물을 고르며 꽤 즐거워 한 것을 곁에서 지켜봤다. 주인이 여자를 위해 직접 선물을 고른 건 처음이었다. 과거에는 여자가 원하는 물건에 값을 치르라고 했을 뿐이었다. 그 점을 설명하다가 혹시 주인의 과거 연인들 이야기라도 꺼내 실수할까봐 제롬은 말할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마님의 유도심문에 넘어간 전적 때문에 극히 말조심을 하고 있었다. “부담 느끼실 필요 없습니다. 마님. 주인님 입장에서는 전혀 과한 선물이 아닙니다.” 주인님은 부유하십니다. 제롬은 그걸 말하고 싶었다. 루시아는 좀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에게 이런 선물은 머리빗 하나를 사 주는 것만큼 대수롭지 않다는 뜻으로. 루시아는 혼자 응접실에 앉아 목걸이가 담긴 상자를 보며 곰곰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대체 그가 이 선물을 준 속뜻이 뭔가 따져보고 싶었다. ‘그냥 첫 티파티를 축하하는 선물이겠지. 그는 부자니까 작은 반지 하나 선물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지도 몰라. ’첫 번째 가정이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알지 못했다. 아무리 그가 부자라도 가벼운 마음으로 선물할 물건이 아니었다. 이미 타국의 왕족이 예전에 보석 경매에서 낙찰 받은 물건을 그는 수소문해 웃돈까지 얹어 구매했다. 돈도 돈이지만 그의 수고가 들었다. 그녀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어서였다. 그가 지나치게 담백한 태도로 선물을 주는 바람에 작은 오해가 만들어졌다. ‘아니면..대가...? 그는 나와 자는 걸 좋아하니까..’두 번째 가정이었다. 그런데 이건 어쩐지 몸 주고 화대 받는 기분이라 영 기분이 나빴다. ‘습관 같은 걸까? 그는 연인이 많았으니까 여자들에게 선물을 주는 일이 일상이었겠지. ’세 번째 가정이었다. 이 가정도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첫 번째 가정이 가장 무난했다. 더 머리를 굴렸으나 더 이상 생각나는 건 없었다. 루시아는 아예 특별한 의미를 담은 선물일 것이라는 가정은 배제했다. 루시아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감당하기 벅찬 귀한 선물은 잔잔한 수면 상태를 유지하던 그녀 마음에 마구 돌팔매질을 해서 거친 파문을 일으켰다. 그와의 결혼 생활은 너무 예상과 달랐다. 굉장히 삭막할 줄 알았는데 소소한 기쁨과 행복이 넘쳐났다. 그의 말투는 불친절하고 달콤한 말 같은 건 해주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정했다. 딱딱 끊어지는 말투라도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은 하지 않았고, 소문이 우스울 정도로 그는 전혀 무섭거나 사나운 사람이 아니었다. ‘약속했는데..그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했는데..’자꾸 마음이 흔들렸다. 이러면 안 돼,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그가 개구지게 웃을 때마다, 그의 팔이 강하게 허리를 감싸 안을 때마다, 그의 입술이 뜨겁게 입 맞출 때마다 그녀의 마음이 갈대처럼 마구 흔들렸다. 그녀는 목걸이 상자를 바라보며 그를 원망했다. ‘왜 이런 걸 줘서..괜히 사람 기분 이상하게 만들어. ’가슴이 먹먹했다. 그래도 지금까지 잘 버텼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바지자락 붙들고 늘어질까 겁이 났다. 그러다 어느 날 노란 장미다발을 받는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는 예의를 아는 기품 있는 귀족이었다. 그래서 루시아에게 아내로서 예를 다하고 있을 뿐인데 그런 친절을 착각해서는 곤란했다. 그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몸은 확실히 좋아하는 것 같지만 그건 단지 육체적 욕망에 기인한 관심이었다. ‘정신 차리자. ’그녀는 크게 심호흡했다. ‘지금까지가 딱 좋아. 흔들리지 마. 네 심장은 돌로 되어 있는 거야. 이대로 그와 지금까지처럼 지낼 수 있어. ’아직은 괜찮았다. 아직까지는. 미혼 아가씨들만 초대한 두 번째 티파티의 즐거운 시간이 끝나고 마무리를 하는 중이었다. 붉은 머리카락의 아가씨가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루시아에게 다가왔다. “케이트 밀튼입니다. 아까 인사를 드렸었지요. 종조모님께 공작부인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코르잔 백작부인께서 제 종조모님이 되시지요.” “아. 나도 기억이 나는군요. 당시 마담 미셀이 조카 자랑을 하시며 내게 좋은 말벗이 되어 줄 것이라 하셨어요.” “종조모님이요? 믿기 힘들군요. 그 분은 언제나 저만 보면 눈썹부터 사납게 올라가시거든요.” “레이디 밀튼을 귀애하여 그러실 거예요. 내게는 레이디 밀튼 마음에 들지 않으면 친구가 되는 건 어림없다고 엄포를 두셨는걸요.” “아무튼 그 분이 그렇다니까요. 제게는 너 같은 말썽꾼을 거둬 주시려나 모르겠지만 혹시 친구라도 삼자 하시면 황송해하며 엎드리라 하시더군요.” 두 사람이 마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케이트는 호탕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크게 웃더니 오른손을 내밀었다. “케이트라 불러주세요.” 귀족 아가씨가 인사로 악수를 권하는 건 처음 봤다. 루시아가 조금 놀란 눈을 하자 케이트가 화들짝 놀라 손을 거뒀다. “이런. 제가 무례를 끼쳤습니다. 버릇이 돼서 종조모님께 야단을 들어도 고쳐지지가 않네요.” 루시아는 쿡쿡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쾌활하고 솔직한 이 아가씨가 루시아는 첫눈에 마음에 들었다. 케이트가 미소 지으며 그 손을 강하게 마주잡았다. “나도 이름으로 불러 줘요.” 비비안, 이라는 이름을 말하려다 멈칫했다. 그가 그 이름으로 자주 부르는 동안 자꾸 귀에 익어 그런지 옛날처럼 거부감은 많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편치 않았다. 친구에게 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어쩐지 진짜 그녀의 모습을 처음부터 감추는 것 같았다. “...루시아. 루시아라고 불러요. 어릴 적 이름이랍니다.” 두 사람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의기투합했고, 순식간에 친해졌다. 케이트는 소녀 같은 공작부인이 마음에 들었고, 루시아는 활기 가득하고 쾌활한 케이트가 좋았다. 그들은 서로의 모습을 통해 자신에게 없는 부분을 발견했다. 케이트는 이후 자주 로암을 방문해 루시아와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 돌아갔다. 케이트의 나이는 루시아보다 2살이 더 많았다. 루시아는 처음 사귀는 또래 친구에게 푹 빠져들었다. 그들이 친한 벗이 되기까지는 열흘이 채 걸리지 않았다. “혹시 공작 전하께서 루시아가 외출하는 것을 싫어하세요?” “호호. 그렇지 않아요. 그럴 분은 아니에요.” 아마 이 자리에 휴고가 있었다면 거리낌 없이 싫다고 답했을 것이다. 휴고가 그녀의 외출을 통제하지 않는 건 그럴 이유가 없어서였다. 내성 안쪽에서만 지내는데 나가지도 않는 사람을 나가지 말라고 할 필요가 없으니까. “이렇게 로암 안에만 계시면 답답하지 않으세요?” “괜찮아요. 가끔 티파티를 열고, 케이트도 이렇게 자주 와주고.” “그러지 말고 승마 배워보지 않으실래요? 말 타고 휙 한 바퀴 달리고 나면 속이 뻥 뚫리는 것 같거든요.” 케이트는 지나치게 얌전한 루시아에게 바깥 활동의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었다. 세상은 넓고 놀 것은 많다. “승마..? 위험하지 않을까요..?” “전혀요. 알고 보면 말 만큼 순한 동물이 없어요. 물론 처음부터 속도 내어 달리지는 못하겠지만 꾸준히 타다보면 금방 늘고. 아. 몸매 가꾸는 운동으로도 효과가 좋아요. 요즘 여자들 사이에 얼마나 유행인데요.” “그래요..?” 잠시 고민한 루시아가 답했다. “전하께 허락을 받아볼게요.” “아아..” 그의 얼굴을 쓰다듬어 내려오던 그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며 그의 어깨를 붙들려 했으나 땀으로 미끄러져 침대로 툭 떨어졌다. 손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떨리며 경련하고 있었다. 남자는 신음하며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쾌락의 절정에 치달으며 마구 경련하는 속살이 그의 것을 비틀어 쥐어짰다. “으응..흑..” 젖은 눈동자가 톡 샘이 차오르는 것처럼 눈물이 고여 주륵 흘러내렸다. 온몸을 휩쓸고 지나가는 쾌감의 파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붕 떠올라 허공을 부유하던 감각이 깊이 가라앉으면서 아득한 어디론가 떨어지면서 이대로 끝없이 추락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고 그의 상체는 그녀의 상체에 밀착해서 움직일 때마다 가슴과 예민하게 곤두 선 유두 끝이 그의 가슴을 스치면서 자극했다. 그는 사나운 신음을 흘리면서 그녀의 엉덩이를 두 손 가득 움켜잡고 깊은 샘 안쪽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조금은 느리게. 그의 감각근을 스쳐 지나가는 그녀의 속살을 느끼려는 것처럼. 그는 느리게 움직이다가 조금 속도를 가했다가 다시 천천히 움직이며 감질나도록 그녀를 다그쳤다. 물고 비틀어 깨무는 그녀의 안쪽은 마치 그의 침입을 저항하는 것처럼 격렬했다. 속이며 겉이며 잔경련을 일으키는 그녀의 몸 상태가 그녀가 극한 고조에 이르렀음을 알려주었다. 그는 예민하게 일어난 그녀의 안쪽을 그의 무기로 깊이 찔렀다. “흐읏. ..휴..제발..” 루시아는 흐느끼며 애원했다. 거칠게 마구 움직일 때보다 더 힘들었다. 한 방울 기력까지 모두 쥐어짜는 것 같이 힘이 부쳤다. 온 몸의 모든 감각이 다 일어나서 그의 손이 피부를 부드럽게 쓸어주는 것만으로도 통증처럼 느꼈다. “후우..어떻게 해줘..?” 조금 더 무게를 실어 묵직하게 안으로 파고들었다. 단단히 일어난 그의 성기는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그의 것에 착 달라붙어 움직이는 그녀의 안쪽도 끈질긴 건 마찬가지였다. 두 남녀의 성기가 만나 만들어내는 자극적인 움직임과 그것이 동반하는 쾌감은 당사자들에게도 가감 없이 전달되었다. 다만 그는 감당할 수 있었고, 그녀는 그렇지 못했다. “휴! 아! 싫어! 그만!” 휴고는 자신을 몸 안에 품은 여자가 몸부림치는 것을 내려 보았다. 공포에 질린 것처럼 확대된 동공과 젖은 속눈썹. 그는 고개를 숙여 이제 막 눈에 맺혀 흘러내릴 것처럼 방울진 눈물을 혀끝으로 핥았다. 벌어진 붉은 입술을 입안으로 쪽 빨아들이면서 열기 어린 입 안으로 혀를 넣었다. 입 안쪽은 한 번 건드렸다가 끝난 짧은 키스. 그리고 그는 다시 키스를 시작했다. 삼키고 핥고 건드리고 깨물고. 부드럽지만 노골적인 욕망을 숨기지 않는 짙은 입맞춤이었다. “그만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다시 안쪽 살을 헤집고 들어가고 있었다. 착 감싸오는 속살에 그의 호흡이 불규칙하게 흔들렸다. “흑..네..” “알았어.” 순간 그녀의 울먹이는 눈동자가 살짝 동그랗게 커졌다. 그의 눈이 휘어지면서 나른하게 웃었다. “조금만 더 하고.” 그럼 그렇지. 그녀는 또 속았다. 뭐가 그리 억울한지 그녀는 훌쩍이기 시작했다. ‘이거 위험한데.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얼굴은 먹잇감을 앞에 둔 배고픈 맹수처럼 허기와 탐욕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가 붉어져서 칭얼대기 시작하면 그의 하체는 바로 반응했다. 가뜩이나 흥분한 중심에 더 피가 몰리는 뻐근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안쪽을 깊이 건드리자 그녀는 인상을 쓰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한 입에 삼켜버리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그녀의 반응을 관찰하며 히죽 웃었다. 경험상 그녀가 좋아하는 안쪽 어딘가를 찌르자 파드득 몸을 떨며 교성을 흘렸다. 끊어질 듯 말 듯 작게 흘리는 교성이 그렇게 그를 자극할 수가 없었다. “한 번만 더 하자.” 그녀는 젖은 눈망울로 숨을 할딱이며 그를 의심스럽게 보았다. 이번에는 안속아. 그렇게 말하는 눈이었다. 싫다고 앙탈하는 그녀를 눌러 잡아먹는 재미도 좋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다 살살 꾀어 적극적으로 반응하게 하는 맛은 또 특별했다. “진짜 약속.” 그녀의 눈빛이 온순해졌다. 설마 하면서도 매번 혹시. 그녀는 셀 수 없는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그녀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 진짜, 이 귀여운 것. “엎드려서 엉덩이 들어.” 안을 채우고 있던 그가 쑥 빠져나가자 그녀의 몸이 흠칫했다. 우물쭈물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아무래도 이대로는 절대 그만둘 것 같지 않는 그의 기세를 느끼고 순순히 몸을 돌려 엎드렸다. 그녀의 하얗고 토실한 엉덩이가 그의 손아귀에서 일그러졌다. 등에서 허리, 엉덩이로 이어지는 탐스러운 곡선을 감상하면서 그는 뒤에서 단번에 밀어 넣었다. 그녀의 몸이 크게 한 차례 흔들렸다. “흐윽...” “하아. ..정말 미친다. 내가.” 맛보고 또 맛봐도 도무지 질리지가 않았다. 싫증나기는커녕 그녀를 안을 때마다 이런 거였나 새로웠다. 이 천상의 맛을 가진 여자는 그의 것이었다. 누구도 손대지 못한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소유권을 증명하는 표시를 새겨 넣고 싶었다. 요즘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 깊은 곳에 음험하고 끈적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결코 드러내지 않는 아주 은밀하고 조용한 어둠이었다. < -- 공작부부 --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이곳저곳에 부드럽게 살짝 닿았다 떨어지고 그녀의 허리부터 등까지 그의 손바닥이 붙어 천천히 위 아래로 움직였다. 그가 주는 후희의 나른함에 젖어 있다가 루시아는 느닷없이 떠오른 생각에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휴. 오후에 다녀간 레이디 밀튼이 재미있는 말을 했어요.” “레이디 밀튼..요즘 드나드는 밀튼 남작 여식 말이로군.” 밀튼 남작은 공작가 가신으로, 올곧으며 고지식한 성품을 지닌 자였다. 자식 교육 또한 성품만큼 바르다는 정평이라 여식인 밀튼 영애가 아내와 교류가 잦아지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그녀의 북부 생활이 즐거워진다면 바람직한 일이지 싶었다. “네. 저에게, 혹시 당신이 외출하지 못하게 하느냐 묻더라구요.” 등에서 움직이던 그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눈치 채지 못하고 루시아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제가 그럴 리 없다 했지요. 그러니까 저보고 승마를 함께 하자고 했어요.” 머나먼곳에서 “.... 승마?” “레이디 밀튼이 그러는데 재미있고, 운동도 된대요. 배워도 돼요?” “...위험할텐데.” “그렇게 위험하지 않대요. 여자들이 많이 탄다고 했어요.” “그렇게 배우고 싶어?” 그는 싫었다. 말 위에 올라 상기된 표정으로 숨을 몰아쉬며 말을 달리는 여자들 모습이 얼마나 사내들 눈을 사로잡는지 그는 경험으로 안다. 요즘 여자들을 위한 승마복을 보면 아주 가관이었다. 몸매 다 드러나게 달라붙는 꼴이 천박하기 짝이 없었다. 과거에 그 역시 딴 남자와 다를 바 없이 보기 좋다고 구경했고, 그는 결코 여자를 조신하거나 헤픈 정도로 구별하는 남자가 아니었지만 그건 이미 과거의 일이었다. 그는 지나간 사소한 일에 연연하지 않았다. “안 돼요?” 루시아가 그의 가슴에 뺨을 부비며 가련하게 눈을 깜빡거리자 그는 순간 뭐든 당신하고 싶은 대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아무리 그래도 승마는 안 돼. 엄한 놈들이 곁눈질 하는 꼴은 못 본다. 하지만 그녀가 결혼하고 처음으로 하는 부탁이었다. 안 된다고 하면 실망할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았다. ‘여자만 출입할 수 있는 승마연습장이. ..아마 로암에는 그런 것이 없는 것 같으니까 이참에 하나 만들어야겠군. ’로암 뿐만이 아니라 제논을 다 뒤져도 그런 곳은 없었다. 유일한 여성 전용 승마 연습장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먼 훗날 북부 사교계의 여성들의 중요한 사교 활동의 장소로 활약할 이곳이 단지 아내를 딴 남자 눈에 보이지 않기 위한 의지에서 시작되었다. “좋아. 대신 어느 정도 말을 몰 수 있을 때까지는 성 안에서 안전하게 익힌다고 약속하면.” 그녀가 승마를 배우는 동안 연습장을 만들어야겠다. 일주일 정도면 될 것이다. 그 안에 못 만들면 승마 선생에게 며칠 더 붙잡아 두라고 하면 될 일이었다. 승마 선생도 구해야겠다. 여자로. “네. 그럼 허락하시는 거죠?”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조심할게요. 감사해요!” 그녀가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와락 안겨들었다. 혹시 그가 허락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그는 합리적인 사람이니까. 얼결에 그녀를 품으로 안으면서 그는 얼마 전, 그녀에게 고가의 목걸이 선물을 안겨주었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는 처음으로 여자에게 줄 선물을 고르려고 고심했다. 그녀가 뭘 좋아할지는 모르겠고, 그나마 여자가 보석을 좋아한다는 건 경험으로 배운 일이라 결국 그의 선택은 보석이었다. 그런데 아무거나 주기는 싫었다. 타란의 안주인은 마땅히 특별한 것을 가져야 했다. 보석상들끼리 공유하는 정보지를 있는 대로 취합해서 고르고 골랐다. 그나마 쓸모 있는 것을 찾았다 했더니 이미 주인이 있었다. 눈에 든 물건이 생기자 더 이상 다른 건 안중에 없었다. 돈은 상관없으니 무조건 거래를 성사시키라고 교섭인을 보냈다. 생각보다 물건을 손에 넣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원래 그의 계획은 선물을 주고 시찰을 떠나려 했는데 결국 그녀가 받아드는 모습은 직접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귀환하는 길에는 꽤 기대했다. 그녀가 선물을 받고 감격해서 성대한 환영으로 맞아줄 줄 알았다. 그녀는 고맙다고는 했다. 그러나 뭔가 형식적인 감사 인사는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고맙다고 살포시 미소 지으며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그녀 면전에 진심이 없잖아, 따질 수는 없었다. 그는 조금 기분 상하면서 동시에 머쓱했다. 도대체 왜? 여자는 보석을 안겨주면 보석처럼 눈을 반짝거리는 것이 당연한 반응 아닌가? 그 선물을 고르느라 얼마나 신경을 썼는데 그게 마음에 안 차면 대체 얼마나 대단한 걸 줘야 만족할 건가. 그러다 슬쩍 제롬이 전한 말이 가관이었다. 부담스럽단다. 선물 주고 그런 말 들은 건 처음이었다. 어느 수준에 맞춰야 부담이 없는 건가. 그를 새로운 고민에 빠뜨렸다. 그런데 고작 승마를 허락했을 때의 반응이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줬을 때 보다 더 열렬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기대했던 진심이 담긴 감격의 감사 인사였다. 거금을 쏟아 부은 다이아 목걸이는 승마 허락만도 못했다. ‘돈은 안 들겠군. ’조금 허탈했다. 전에도 이 비슷한 생각을 한 적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어쩌면 목걸이 구입비용보다 승마연습장을 만들기 위한 제반 비용이 더 들어갈 수 있었다. 그의 회계 속에는 그 비용은 그 비용이 아니었다. 승마 문제를 해결하긴 했지만 그의 솔직한 마음은 언제나 시야에 들어오는 곳에 그녀가 있었으면 했다. 괜한 바람을 넣은 밀튼 남작의 여식이 살짝 괘씸했다. 하지만 덕분에 뭘 해주면 그녀가 좋아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으니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승마 연습장이 완성될 무렵 그녀는 베갯머리에서 종알거렸다. “휴. 로암 동쪽으로 조금 가면 굉장히 커다란 호수가 있다고 하던데요.” “음. 크지. 구경하고 싶어?” 그는 언제 시간을 내어 그녀를 데리고 한 번 다녀올까 생각했다. “이맘때 뱃놀이가 있다고 들었어요. 작은 배 한 척 보유하고 있는 귀족들이 많다던데 당신은 없어요?” “...없어.” 생전 뱃놀이 따위는 가 본적 없다. 그런 유흥이 있다더라 들은 기억도 없었다. 아마 들었겠지만 관심 없으니 잊었을 것이다. 물에 배 띄워 그 위에 앉아 있는 것이 어떻게 놀이가 될 수 있단 말인지 그건 할 일 없는 놈들 혹은 여자나 하는 짓이었다. ‘배를 사야겠군. ’그는 이미 과거의 자신을 잊었다. 그는 지나간 사소한 일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럼..레이디 밀튼이 초대했는데 다녀와도 될까요?” 또 밀튼 남작의 여식이었다. 그는 앞으로 모든 사단의 중심에 밀튼 영애가 있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위험하잖아.” “뱃놀이로 사고가 난 적은 없대요. 밀튼 가문이 소유한 배는 매우 튼튼해서 걱정 없다고 레이디 밀튼이 자신했어요.” “뱃놀이 날짜는?” “나흘 뒤에요.” 밀튼 남작은 공작가에서 날아온 공지사항을 받아 읽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껏 없던 일이라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막내딸이 며칠 후 뱃놀이 가겠다며 창고에 있던 배를 꺼낸다고 수선스럽게 다니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부르셨어요. 아버지.” “그래. 영주님으로부터 공지가 내려왔는데 네가 봐야겠구나.” 케이트는 부친이 주는 문서를 받아 읽었다. “...풍속 단속이요? 이게 대체 무슨 뜻인가요?” “글쎄다. 나도 영주님 의중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결론은 호수에서의 뱃놀이를 통제하시겠다는 것 같구나. 지금까지와 크게 다를 건 없을 거다. 다만 날을 지정해서 오직 여성들만 호수로 갈 수 있게 근방 출입을 통제하는 것인데 난 개인적으로 나쁘지는 않다고 본다. 딸 가진 부모라면 괜찮다고 할 것 같구나. 네가 뱃놀이를 언제 간다고 했지?” “사흘 뒤에요.” 밀튼 남작은 요즘 딸아이가 공작부인 말벗 노릇을 한다는 건 알지만 자세한 건 몰랐다. 둘이 서로 이름을 부를 정도로 가깝다는 것도, 케이트가 열심히 루시아를 불러내 놀려고 하는 것도, 뱃놀이를 같이 간다는 것도 몰랐다. 케이트 역시 굳이 그걸 가족에게 말하지 않았다. 온갖 걱정을 들을 것이 뻔했다. “마침 통제일이 사흘 뒤구나. 어차피 네가 가서 노는 데는 영향이 없겠지만 알고 있으라고 말해 두는 거다. 혹시 그 날 사내 녀석들과 어울릴 생각은 아니었겠지?” “그런 건 아니에요.” 부친의 집무실에서 나오며 케이트는 중얼거렸다. “...뭐지. 이건.” 사흘 뒤면 공작부인과 함께 뱃놀이하기로 한 날이었다. 단지 우연의 일치일까. 절대 아닐 것이다. 여성만 출입 가능한 승마 연습장이 만들어졌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긴 했다. ‘설마..루시아가 감금되어 살고 있는 건가??’그런 것 치고는 공작부인 얼굴에 그늘은 없었다. 억압받으며 사는 것 같지 않았다. 승마를 전하께서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고 생글생글 웃던 공작부인의 표정은 결코 작위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하던 케이트 얼굴에 점점 웃음이 떠올랐다. ‘어쩐지 좀..흥미로운데?’즐겁게 뱃놀이를 다녀오고 며칠 후였다. “휴. 레이디 밀튼이 오늘 다녀갔는데요.” 또 그 여자. 휴고는 그녀가 보지 못하는 사이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가 폈다. 이상하게 불길한 예감은 꼭 들어맞았다. 밀튼 남작의 여식은 그의 중대한 골칫거리로 부상할 것이다. 이젠 예감이 아닌 확신이었다. “여우 사냥이라는 것이 있대요.” 여우 사냥. 그딴 여자들 놀이에 사냥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 자체가 사냥에 대한 모독이었다. 새끼 여우를 잡아 길들여서 숲에 풀어 토끼를 사냥한다는데 과연 여자들이 죽은 토끼를 직접 만지기나 할 수 있을지 의심이었다. “정기적으로 모여서 여우 사냥을 한다는데 여우는 없지만 구경가보고 싶어요. 레이디 밀튼은 기르던 여우가 있어서 어떻게 하는지 보여준다고 했어요.” “...숲에서 위험한 야생동물이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호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작은 군락을 이룬 숲이 있다는데 거기는 전혀 위험한 동물이 없대요. 가장 큰 육식동물이 여우 정도래요.” 그녀가 말하는 곳이 어디쯤인지 대충 감이 잡혔다. 한 줌 모종을 떼어 심어 놓은 것처럼 다른 곳과 뚝 떨어져 군락을 이루는 작은 숲이었다. 그 정도 넓이라면 빙 둘러서 주변을 통제할 수 있었다. 여우 사냥이 정확히 어떻게 하는 것인지 확인해 봐야겠다. 여자들끼리만 가도 과연 안전한 것인지 또한. “안 돼요?”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 공격이 날이 갈수록 강력해지고 있었다. “...다녀 와.” “휴. 레이디 밀튼이요.” 그녀의 보드라운 피부를 어루만지며 후희를 즐기던 그의 미간이 꿈틀했다. 이번엔 또 뭔가. 그녀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올 때마다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뭐지?” “사흘 뒤가 생일이래요. 자택에서 파티를 연다는데 다녀와도 돼요? 동기 친구들만 초대하는 작은 모임이래요.” 요즘 그녀의 외출이 너무 잦다. 전부 밀튼 남작의 말괄량이 여식 때문이었다. 케이트 밀튼은 밀튼 남작의 고명딸이었다. 아들 넷 이후 태어난 늦둥이 딸이라 밀튼 남작의 딸 사랑은 지극했다. 부친의 관대함 속에서 네 명 오빠들과 뒤섞여 자란 케이트는 말괄량이로 유명했다. 오냐오냐했던 밀튼 남작도 이제 와서는 골치 아파 한다는 풍문이었다. 휴고가 가신의 딸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알 정도로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그 아가씨가 아내의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얌전한 루시아와 달리 케이트는 대단히 활동적이었다. 자신의 활동에 루시아를 끼워 넣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생일을 축하하러 왜 당신이 굳이 가야 하지?” “생일 축하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친구 집에 방문하고 싶은 거예요.” 그녀의 가고 싶어요, 공격이 시작되었다. 휴고는 그녀가 레이디 밀튼 운만 떼어도 뒷골이 지근거렸다. 그래도 지난 전적에 비하면 생일 파티 정도는 아주 양호했다. 여자들만 모이는 자리라고 하니까 그는 선선히 허락했다. “다녀 와.” “...근데요. 파티 끝나고 밤에 잠옷파티를 한다는데...” 빌어먹을 레이디 밀튼. 그럼 그렇지. 휴고는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밀튼 남작을 볼 때마다 그대 딸하고 내 아내하고 같이 놀지 못하게 해, 라는 말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아무리 못마땅해도 딱히 어떤 해를 끼친 건 아닌데 이유 없는 트집을 잡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밀튼 남작은 아주 충성스런 가신이었다. 친구를 사귀는 아내의 즐거움을 빼앗고 싶지도 않았다. “하루 자고와도 될까요?” “당신은 유부녀야. 외박을 하겠다는 건가?” “..역시 안 되는 거죠? 파티만 참석하고 돌아올게요.” 그녀는 시무룩한 음성으로 선선히 포기했다. 한 번 더 조르지도 않았다. 그녀의 베갯머리 송사는 그의 예측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그를 좌우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선물을 졸라대거나 누군가를 옹호 혹은 험담하지 않았으나 그보다 훨씬 더 그를 골치 아프게 했다. 차라리 보석을 달라고 해. 쇼핑을 하라고. 그는 몇 번이고 그 말을 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마차를 보낼 테니까 오전 중으로 돌아와.” 그는 낮은 한숨을 쉬며 허락했다. “그럴게요! 정말 허락 하시는 거죠?” “남편을 독수공방하게 하고 그렇게 신이 나나?” 허리에 두른 그의 팔에 힘이 꽉 들어가자 루시아는 흘끔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하루뿐이잖아요..영지 시찰로 사나흘 씩 자리를 비우기도 하시면서..” “그거와 달라.” “...순 억지.” 휴고는 삐죽이는 그녀의 입술을 덥석 물었다. 놀라 앙탈하는 그녀의 턱을 단단히 잡고 작은 입 안 깊숙이 혀를 넣었다. 구석구석 한 번 훑고 입술을 떼자 상기된 표정의 호박색 눈동자가 흐려져 있었다. 그가 그녀의 몸을 돌려 모로 껴안으며 목덜미에 입술을 붙이더니 길게 핥으면서 가슴을 움켜잡았다. “아!” “갈수록 말대답이 늘어. 남편 말은 하늘처럼 믿어야 착한 아내지.” “응..하지만. ..” “하지만 또 뭐.” “너무 착하게 굴면. ..매력 없다고..” 그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안 그래도 근래 톡톡 말대답하는 빈도가 늘었다 했더니 어디서 되도 않는 조언이랍시고 얻어들은 모양이었다. “사내를 유혹하는 기술이라도 배워왔나?” “기..술까지는 아니고...” “스승이 누군데?” “...레이디 밀튼이..” 아아. 정말 망할 레이디 밀튼. “스승과 제자가 뒤바뀌었군. 밀튼 남작의 여식은 아직 미혼일 텐데.” “레이디 밀튼은 매력적인 여성이에요. 배우고 싶어서..” 붉은 머리의 케이트는 루시아와 정반대의 매력을 가진 여자였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 당당한 말투, 좌중을 휘어잡는 화술을 지녔고 남자들의 구애에 결코 끌려 다니지 않았다. 루시아의 그녀의 모든 것이 부러웠다. 사랑을 아낌없이 주는 부모님, 든든한 오라버니들. 그녀가 갖지 못한 모든 것을 케이트는 갖고 있었다. “누가 누굴 배워? 당신은 공작부인이야. 북부 사교계 정점이지.” 그는 루시아를 옆으로 눕게 하여 뒤에서 끌어안았다. 가슴을 주무르면서 성난 그의 중심을 그녀의 엉덩이골 사이에 넣고 문질렀다. “어울려 노는 건 좋지만 밀튼 남작 여식의 말괄량이 짓을 배워오는 건 절대 사양하지. 그랬다가는 외출금지령을 내릴 테니까 정숙함을 잃지 말라고. 부인.” 뒤에서부터 서서히 그녀의 비부를 열며 단단한 그의 성기가 밀고 끝까지 들어왔다. 루시아의 엉덩이와 그의 허벅지가 바싹 맞닿았다. 두 몸이 하나가 되었다. 그가 시작하기 위해 가득 들어오는 순간이 루시아는 가장 황홀했다. 이 남자를 내 안에 품고 있구나, 만족감이 들었다. “으응...” “당신은 잘하고 있어. 지금까지 하던 대로만 해.” “네....” 휴고는 아내의 아주 작은 일탈도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그의 눈이 닿는 곳에 아주 얌전히 있어 주어야 한다. 늘 시선을 돌리면 언제나 있던 그 자리에 있는 편안함이 점점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는 상체를 일으켜 짧게 쳐 올리기를 반복했다. 그리 깊은 삽입은 안 되는 자세지만 그녀가 은근히 이 자세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힘이 덜 들고 자극이 적당하기 때문이었다. 짧게 끊어지는 신음을 흘리며 그녀가 숨을 헐떡였다. 여름이 끝나가고 있었다. < -- 공작부부 -- >제롬은 매일 하는 것처럼 오후의 차 한 잔을 준비해서 공작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일에 몰두한 주인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차만 곁에 두고 나오는데 책상에는 펼쳐진 서류만 가득하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요즘 자주 있는 일이라 제롬은 주인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나 발코니 창이 살짝 열려 있다.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자 난간에 기댄 장신의 사내 뒷모습을 보였다. 요즘 공작은 오후에 일을 하다가 전에는 없었던 게으름을 부렸다. 발코니 아래를 내려다보며 한참을 서 있곤 했다. 아래에는 근래 마님께서 부지런히 가꾸는 정원이 색색의 꽃으로 보기 좋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마님은 빈번히 직접 나와 정원을 걸어 다니며 꽃을 살핀다. 그 모습을 주인은 보고 있었다. 주인의 신혼이 초반 반짝 흥미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으나 이제는 아니라는 걸 안다. 방탕하게 놀던 사내가 결혼하고 다른 사람처럼 건실하게 바뀌는 경우가 있다더니 그 사례에 주인이 해당될 줄이야. 그래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주인은 과연 알고 있을까. 마님과 함께 있을 때의 주인의 시선은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곧바로 마님께 향하고 있었다. 곁에서 지켜보기에 간질간질한 똑바른 시선을 놀랍게도 마님은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의외로 마님은 꽤 많이 둔감했다. 두 분 사이는 참 뭔가 미묘했다. 분명 두 분 사이는 좋았다. 마님은 주인을 향해 깨끗한 미소를 짓고, 그토록 냉랭하던 주인님은 마님을 향해서는 온기가 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분 사이에는 뭔가 보이지 않는 얇은 막 같은 것이 있었다. 꼬집어 말하기에는 애매하고 막연해서 섣부르게 말로 꺼낼 수는 없었다. 마님이 어디서 뭘 하고, 누구를 만났는지 간략한 보고서를 매일 저녁 주인 책상에 올리는 건 어느 새 일상이 되었다. 그래서 제롬은 더 이상 보고를 미룰 수 없었다. 마님의 건강과 관련된 일이니까 더더욱. 제롬은 조금 망설이다가 발코니로 다가갔다. “전하.” “음.” “마님 일로..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에 휴고는 고개를 돌렸다. 제롬을 응시하다가 그는 제롬을 지나쳐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잠시 기다려도 제롬에게서 어떤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주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뭐가 그리 어렵지? 말해.” “...마님께서 줄곧 달손님이 없으십니다.” 루시아는 제롬과 약속했다. 제롬이 함께 하는 자리에서 그녀의 몸 상태에 대해 공작에게 말하기로.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루시아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혹시 마님께서 잊으셨나 해서 제롬이 언질을 했으나 마님은 당시에 알았다고만 답하고 그 뒤로 다시 침묵이었다. 제롬은 자신이 나서는 일은 어쩌면 월권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주인 건강을 챙기는 건 또한 집사의 일이었다. 제롬은 마님을 재촉해 억지로라도 모시고 와서 직접 말씀하도록 하는 것이 더 옳은가 여러 번 고민하다가 결국 그가 주인께 직접 고하는 쪽을 선택했다. “달손님?” “여인이 매달 겪는 신체적인...” “아. 계속해.” 휴고는 여성의 생리적 구조에 대해 상식적인 수준의 지식으로 숙지는 하고 있었으나 가장 밑바닥에 깊이 잠든 지식이었다. 그는 여자의 월경 주기를 느낄 정도로 한 여자를 줄기차게 만난 적이 없었다. 더구나 그는 여자의 임신 걱정을 해본 적 자체가 없다. 그야말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처음에는 태기가 있으신가 하녀가 의문을 가졌습니다. 주치의 진료를 받으셨으나 태기는 아니었습니다. 마님 말씀에 의하면 달손님이 원래 없으셨고 그런 증상에 관해 주치의 진료를 받으시는 것은 거부하셨습니다. 이미 전하께서 알고 계시는 일이라 그럴 필요 없다고만 하셨습니다.” “달손님..임신이 아닌데 그게 없다는 건 심각한 건가?” “결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아예 회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니까요. 그걸 확실히 알기 위해 마님이 진료를 받아 보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알고 있다니 뭘..” [ 저는 아이를 낳을 수 없어요. ] 휴고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 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분명 그녀는 그런 말을 했었다. 원래 저렇게 간단히 말할 일인가 고개를 갸웃할 정도로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녀의 대수롭지 않음에 그 또한 웃어 넘겼다. 그에게 그녀의 임신 여부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그녀는 아이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치 대단한 비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말했지만 그는 그저 재미있다고만 생각했다. “...그래. 알고 있었다.” 둔기로 얻어맞은 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했다. 뱃속에서부터 뒤틀린 불쾌함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을 향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분노였다. “주치의는 뭘 하는 거지?” “겉으로 드러나는 병증이 아니니 마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시면 의사는 진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지금 불러.” “...예. 전하.” 주인의 기분이 저조해졌음을 알아차린 제롬은 가타부타 덧붙이는 말없이 바로 물러갔다. 가만히 서서 그는 노기를 참으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자신의 불쾌함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차분하게 생각을 짚어갔다. 그녀는 그가 바라는 아주 이상적인 아내였다. 아랫사람들을 적당히 잘 조율하고 정말로 그를 전혀 성가시게 하지 않았다. 뭔가를 그에게 바라지도, 불평도 없었다. 근래 이것저것 요청하긴 했으나 그건 그가 여자들이 뻔히 할 것으로 짐작하는 그런 성가심과 달랐다. “하아. ..제길.” 그는 무거운 한숨을 뱉으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이런 건 정상이 아니다. 그녀가 평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그가 아내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파비안에게 받은 몇 장 보고서에 적힌 내용이 전부였다. 그들의 사이는 좋았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대화는 즐거웠고 잠자리는 늘 뜨거웠다. 하지만 정말 대화를 나눈 적이 있기는 한가. 그녀가 속마음 한 톨 그에게 드러낸 적 있었나. 그를 향해 그렇게 맑게 웃는 것으로 그녀가 모든 마음을 드러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갑자기 뭔가 떠오른 그는 제롬을 불러 그간 그녀가 지출한 내역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곧 제롬이 서류를 가지고 들어왔다. “의사는?” “사람을 보냈습니다.” “나도 진찰할 때 가보겠다.” “예. 전하.” 서류를 넘기며 내역을 훑는 그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정원을 가꾸는데 들어간 비용, 그 동안 몇 번 티파티를 열며 들어간 비용을 제외하면 개인적인 용도 사용 내역이 전혀 없었다. “재단사나 보석상을 부른 적이 한 번도 없나?” “없습니다.” “그 동안 외출도 여러 번 하고 몇 번 티파티를 열었을 텐데?” “선대 공작부인들께서 사용하시던 드레스나 타란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장신구가 있습니다. 드레스는 그 중 골라 고쳐 입으시고, 장신구는 사용 후 보관실에 반납하셨습니다.” 그가 미간을 꾹꾹 눌렀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화가 나는데 왜 화가 나는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네가 바란 것 아니었나. 마음속에서 다그치는 울림이 들려왔다. 그랬다. 그가 바랐던 결혼을 했다. 인형같이 자리만 지켜줄 아내를 그는 원했다. 그는 혼적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 결혼은 해야 했으나 남편의 의무는 거추장스러웠다. 그래서 거래를 했다. 그건 계약이었다. 서로의 이익이 충족된 계약. 그녀는 처음부터 필요한 건 공작부인이라는 이름이라고 했다. 당연히 공작부인이 되면 뒤따를 재물과 권력을 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결혼 후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처음부터 그런 건 그녀의 관심사항이 아니었다. 대체 무엇이 그를 불쾌하게 하는가. 그녀가 권력도 재물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왜 문제가 되나. 그에게 손해가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계약에 축배를 들어야 한다. 그는 계속 고민했다. 이 더러운 기분의 정체를 알아야 했다. 발밑을 받치고 있던 바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절망이고 불안이었다. 왜 절망하고 왜 불안하지?그것을 또 다시 고민할 때 제롬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치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원에는 꽃향기가 가득했다. 그 사이를 거닐면 그 향에 취하는 것 같아서 루시아는 잠깐 눈을 감고 서 있곤 했다. 요즘 그녀의 가장 큰 일거리는 정원 가꾸기였지만 직접 노동을 들이는 건 아니었다. 모든 일은 정원사가 알아서 했다. 루시아는 그저 어떤 꽃을 심을지 결정하고 잘 자라고 있나 돌아다니며 구경할 뿐이었다. 그런데 수고는 저들이 다해도 공치사는 그녀가 들었다. 때로는 조금 우스웠다. 하늘을 보자 이미 중천을 넘긴 해가 길게 그늘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시선 끝을 그의 집무실 방향으로 돌렸다. ‘아. ..없네..’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기 서 있던 그가 없었다. 간질간질 뒷목을 건드리는 시선이 어색하지만 사라진 것은 아쉽고, 복합적인 기분이었다. 그는 종종 일을 하다가 발코니로 나와 휴식을 취했다. 루시아는 그 모습이 보고 싶어서 자주 정원을 나왔다. 꽃을 살핀다는 핑계는 훌륭했으니까. 그를 볼 수 있는 시간은 대부분 저녁 시간 이후로 한정되어 있었다. 낮에 잠깐이라도 그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이맘때뿐이었다. 한 공간에서 지내지만 언제나 그는 늘 손닿을 수 없는 아득히 먼 곳에 있었다. 그는 정말 바빴다. 제롬 말로는 서류 더미에 파묻혀 일하신다고 했다. 사나흘에 한 번은 가신들을 불러서 반나절씩 회의를 하고, 그 와중에 영지 시찰을 잊지 않는 그는 정말 부지런한 영주였다. 메튼 백작은 수도에서 온갖 파티에 얼굴 내밀 줄만 알았지 영지 사정은 관심도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메튼 백작의 영지는 최악으로 꼽히는 몇 군데 중 하나였다. 과도한 세금에 못 이겨 영민들은 도주하거나 도주하다 잡혀 죽었다. 메튼 백작의 최후가 그처럼 비참했던 건 어쩌면 업보였을 것이다. 거의 매일 그들은 함께 저녁을 먹고, 대화를 했다. 밤마다 그는 그녀의 침실을 찾았다. 더 이상은 욕심이라는 걸 알지만 가끔은 허전해서 견딜 수 없었다. 깊은 호수의 살얼음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위태로움이 힘들어서 차라리 얼음이 깨져 호수 바닥으로 가라앉고 싶을 때가 있었다. “마님. 안으로 모셔오라고 하십니다.” “...누가?” 그녀를 데려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남편, 타란 공작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하녀에게 되묻고 말았다. “주인님께서 마님을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에 왜...?’불안한 마음으로 하녀를 따라갔다. 2층 응접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제롬 외에 주치의 안나가 있었다. 안나를 보는 순간 루시아는 직감했다. 안 그래도 제롬이 얼마 전 넌지시 물은 적 있었다. 언젠가 제롬이 결국은 그에게 말할 줄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가 주치의까지 불러 자리를 함께 할 줄은 몰랐다.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면 그건 그거대로 실망이었겠지만. 마치 초대 받지 못한 사람처럼 문치에 오도카니 서서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휴고 표정이 굳어졌다가 성큼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큰 키와 덩치의 그가 불쑥 눈앞에 나타나자 루시아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왜...” 그는 억눌린 표정으로 말을 하다 말고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에게 끌려가 소파에 앉고, 그는 옆에 앉았다. 안나는 드러나지 않게 조금씩 눈을 돌려 공작부부를 살폈다. 두 부부가 나란히 함께 있는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 본 건 처음이었다. 무서운 소문을 몰고 다니는 기사 출신의 공작과 조용한 성품의 가녀린 공작부인이 과연 어울리는 조합인가 의문을 가졌는데, 이렇게 함께 두고 보니까 의외로 어색함은 없었다. ‘저 덩치로 덤벼드니 마님이 그렇게 힘들어하시지. ’마님의 주치의 입장에서 안나는 속으로만 공작의 무식한 체력을 비난했다. “마님. 계속 달손님이 없으시다 들었습니다.” “...맞아요.” 루시아는 이 상황이 불편했다. 스스로 불임을 택했고, 언제든 치료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자신을 하자 있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 이 상황에서는 마치 자신이 몹쓸 병에 걸린 환자가 된 것 같았다. “초경도 없으셨습니까?” “..초경은 했어요.” “그럼 언제부터 없으셨습니까? 다치시거나 병을 앓으신 적 있습니까? 무언가 잘못 드신 것이라도 있습니까?” “.......” “주치의에게 제대로 설명하시오. 부인.” 평소보다 더 딱딱하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 때문에 루시아는 흠칫 놀랐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자 그의 붉은 눈동자가 차갑게 그녀를 보고 있었다. 어쩐지 그는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다. “.... 초경 때 약을 잘못 먹었어요.” “무슨 약을 드셨는지요? 중독 현상이 있으셨던 겁니까?” “어떤 약인지는 잘 몰라요. 중독 같은 건 모르겠어요. 아프지도 않았고, 지금까지도 딱히 몸에 이상은 없어요.” 꿈속에서 그토록 의사를 찾아 헤맸어도 치료법은커녕 의사들은 제대로 증상을 파악하지도 못했다. 안나에게 모든 것을 설명한다 해도 알 것 같지 않았지만 루시아는 가능한 자신의 증상을 숨길 수 있는데 까지는 숨겼다. 여성 질환은 섬세한 병이었다. 환자가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는데 의사가 답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더구나 들은 적도 없는 증상이라면 더욱 그랬다. 안나는 아무리 기억을 뒤져도 약을 먹고 월경이 영구적으로 멈추었다는 증상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마님. 좀 더 기억을 더듬어 주시지요. 당시 드셨던 약이 어떤 맛이었습니까? 무슨 이유로 약을 드셨지요? 얼마나 드셨습니까? 색깔은 어떠했고, 형태는 어떠했습니까?” “.... 모르겠어요. 어릴 때 일이고 약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기억에 남는 게 없어요.” 가만히 그들 대화를 듣고 있던 휴고가 몸을 틀어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나하고 얘기 좀 하고.” 그는 서 있는 자들에게 손짓했다. “다 나가.” < -- 공작부부 -- >공작의 눈치를 살피던 자들이 그 말에 모두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응접실에는 휴고와 루시아만 남았다. 루시아는 그와 나란히 소파에 앉아 경험하는 잠시의 침묵이 버거웠다. 그와 이런 시간에 이런 식으로 함께 있는 것이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 거짓말을 해?” “..거짓말..안 했어요.” “주치의에게 사실을 숨기고 있잖아. 말을 하지 않는 것도 거짓말이지.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거짓말을 왜 그리 열심이지?” 어떻게 알았을까. 마치 그가 마음이라도 읽는 것 같아 신기해서 빤히 보았다. 그가 한 팔로 루시아 허리를 감아 품으로 당기며 그런 속마저 읽힌다는 것처럼 말했다. “어찌 알았냐는 표정이군. 당신 거짓말 못해. 너무 드러나.” 루시아는 단지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몸을 비틀면서 두 팔로 그를 밀어내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일 하시느라 한창 바쁠 시간인데 방해 드렸네요. 신경 쓰게 해서 죄송해요.” 그는 소파에 앉은 채 서 있는 그녀를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가 나지막하지만 사나운 음색으로 말했다. “지금 내가. 그걸 탓했나?” “걱정하지 마세요.” “뭐가?” “어차피 낫지 않아요.” 거센 힘에 손목이 잡혀 루시아는 그대로 그의 품으로 넘어졌다. 버둥거리며 일어나려 했지만 그의 한 손이 팔을 붙들어 단단히 고정시키고 다른 손이 그녀의 턱을 잡아 눈을 마주하게 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당신이 낫지 않는 것이 왜 내가 안심해야 하는 일인데?” “처음부터 말씀 드렸잖아요.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흔들리는 호박색 눈동자를 보며 그의 붉은 눈동자 또한 흔들렸다. 루시아는 턱을 틀어 그의 손을 뿌리쳤다. 공중에서 잠시 배회하던 그의 손이 멋쩍게 내려갔다. 그녀는 움직여서 잡힌 팔도 빼냈다. 그녀의 거부 반응에 그는 당황했다. “관심 없으셨어요. 왜냐고 묻지도 않으셨어요.” “.......” “왜 갑자기 궁금해 지셨어요?” 그는 증명할 수 있냐고만 물었다. 그 후 한 번도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말이 사실이냐, 어디가 잘못 된 것이냐 묻지 않았다. 루시아는 아예 그가 까맣게 잊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 정도 뿐이었다. 그래서 비참했다. 날이 갈수록 그를 향해 뛰려고 하는 심장이 아예 굳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소원했다. “갑자기..궁금해지면 안 되는 건가?” “황송해서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죄송해요.” 짤막하고 쌀쌀맞은 대답을 하며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입을 꼭 다무는 그녀를 보며 그의 붉은 눈이 확 타오르는 것처럼 일어났다. 이 여자가 안하던 짓을 하고 있었다. 그의 신경을 콕콕 찔러댄다. 그는 별 일도 아닌데 언성 높이고 싶지 않아서 오히려 더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비비안. 지나간 일을 따지고 싶은 거야?” 루시아는 실망으로 가슴이 내려앉았다. ‘지나간 일이라 하시면..할 말이 없군요. ’그에겐 그저 지나간 일이었다. 루시아는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난 지금 당장, 당신 몸이 염려되어 하는 말이야. 의사에게 정확한 증상을 설명하고 치료를 받아.” 그의 말투는 평소보다 더 다정했다. 그의 친절함이나 다정함에 결코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루시아는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할 때마다 연가라도 듣는 것처럼 황홀하다가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깨어나곤 했다. “그러고 싶지 않아요.” “왜?” “나으면 당신이 곤란하니까요.” “내가 왜 곤란해?” “제가 아이를 갖는 걸 원치 않으시잖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크게 울렸다. “......” 휴고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아이기 때문에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는 자신의 피를 이은 혈육 자체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든 없든 어차피 임신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납득시키려면 너무나 많은 숨겨진 일을 그녀에게 설명해야 한다. 입 밖으로 꺼내 다시 기억으로 되새김질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그것들은 단지 과거에 발생한 사건이 아닌 진저리치는 악몽이었다. 루시아는 긍정처럼 침묵하는 그를 보며 가능하면 감정이 격앙되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제가 잘못 말했군요. 정확히 말하면 아무 관심도 없으셨죠.” 여자의 감이었다. 그는 결코 그녀에게서 자식을 얻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모순적이지만 피임을 신경 쓰지도 않았다. 루시아는 오히려 그 점이 더 야속했다. 그는 그 정도의 관심조차도 없었던 것이다. 만에 하나 아이가 생겼으면 과연 그는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아이만 빼앗아갈까, 아이에게 관심도 없을까, 그대로 뒤돌아 다시는 그녀를 찾지 않을까. 어떤 가정을 하든 다 최악이었다. “관심이 없는 건.” 당신 쪽이겠지. 그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데미안에 관한 것을 그에게 묻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그가 뻔뻔해도 그녀에게 그걸 따질 자격이 되지 못함은 알고 있었다. 그는 혼적이 필요해서 그녀와 결혼했지, 그의 아들을 보듬으라고 계약한 것이 아니었다. “당신이..관심을 원하는 줄은 몰랐는데.” 루시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어쩐지 그의 표정이 피로해 보였다. ‘안 돼!’안 그래도 아까 자신의 거짓말을 그가 드러나서 보인다고 말했을 때부터 그녀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다. 흔들리고 있는 제 마음까지도 읽힐까봐 신경이 곤두섰다. 그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그날 승전파티 때 소피아 로렌스에게 했던 것처럼 잔인하게 선을 긋는 말을 하면 아마. ‘내 심장은 터져버릴 거야.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아플 거야. ’그는 여자가 적당하게 거리를 유지해 주면 한 없이 다정해지는 남자였다. 그녀에게 해준 것처럼 그는 얼마나 많은 과거의 연인들에게 웃어주고 선물을 안겨 주었을까. 이별을 통보받은 여자들이 미련을 버리지 못해 매달리는 것은 그의 다정함을 잊지 못해서일 것이다. ‘그의 과거의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아. ’ 이대로. 평생 이대로 살아도 좋다. 물질적으로 풍족한 생활. 밤마다 뜨겁게 안아주고 부드럽게 웃어주는 남편. 더 이상 욕심은 과욕이었다. 꽉 쥐는 그녀의 주먹 안에 땀이 찼다. “원..하는 건 아니에요. 잊지 않고 있어요. 당신과의 계약.” 루시아는 자연스럽게 보이기를 바라며 그의 시선을 피하며 그의 품에서도 조금 떨어져 앉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그는 날선 눈으로 보고 있었다. “하. 그래. 계약.” 그가 헛웃음을 치며 짜증스럽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잊어 구석에 밀어두고 싶었던 건 그의 생각일 뿐이었다. 그녀에겐 여전히 단단히 묶여 생생하게 살아 있는 질긴 끈이었다. “나는 사생활을 즐겨도 되고, 당신은 내게 꽁꽁 마음을 닫고. 그게 우리 계약이었지?” 그는 거리를 두려고 하는 그녀의 간격을 단번에 좁혀 그녀 허리에 팔을 감아 당겼다. 애 쓰던 루시아의 노력은 아주 쉽게 무위로 돌아갔다. 다시 그의 품에 안긴 자세가 되었다. “그런데 그거 알아? 계약 조건을 지키지 못했을 때 어찌할 것인지는 전혀 이야기 한 것이 없다는 걸.” “제가 계약을 지키지 못할까봐 걱정 되세요?” “왜 이래 진짜? 말을 왜 그렇게 넘겨 뛰어?” “...죄송해요. 제가 좀 꼬였나 봐요.” 낯선 아내 모습에 휴고는 한참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얌전하게 말 잘 듣던 평소의 그의 아내가 아니었다. 더구나 그녀는 계속 그의 눈을 피했다. 단절과 거부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한 마디도 지지 않고 말하기는 했지. ’어쩌면 이 모습도 그녀였다. 그 동안 그가 보지 못했을 뿐, 정확히는 그녀가 그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본디 말꼬리 잡아 말이 늘어지는 걸 싫어하지만 그녀의 새로운 일면은 오히려 반가웠다. 얌전히 웃고만 있던 그녀의 진짜를 순간 엿본 것 같았다. “내가 사생활 자유..포기하면 당신도 꽁꽁 닫은 빗장 풀어줄 건가?” “...네?” 루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그가 대체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바람둥이 남자의 수법인가? 그는 “그러니까..” 하고 말끝을 흐리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치료 받아.” 그의 화제 전환에 루시아는 실망했다. “싫어요.” “비비안!” “아이를 가질 수 없으니까 아이를 못 낳는 건 괜찮아요. 그런데 치료가 되면. 아이 낳아도 돼요? 허락하실 건가요?” “.......” 그는 한숨을 쉬며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녀의 몸이 나아도 임신은 할 수 없다. 그를 구성하는 타란의 핏줄은 아무 여자나 잉태할 수가 없다.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어떤 여자의 태 안에서도 타란의 핏줄은 자라나지 못했다. 그가 수없이 많은 여자들과 즐겼으나 임신가능의 위험을 단 한 번도 걱정한 적 없는 건 그래서였다. 같은 타란의 피가 흐르는 혈족이 아닌 보통 여자가 타란의 핏줄을 잉태하려면 조건이 필요한데 그게 무슨 조건인지는 늙은이만 알고 있었다. 늙은이 거처를 내성 밖으로 내치면서 가지고 있던 자료를 달달 뒤졌지만 관련된 내용은 없었다. 아마 제 기억에만 넣어 놓던지 따로 문서가 있다면 누구도 모를 곳에 보관 중일 것이다. 그래서 그냥 간단히 늙은이 잡아다 족쳤다. 가문의 비전을 누설할 수 없다고 버티던 늙은이는 지하 감옥에 쳐 넣고 다신 햇빛 못 보게 해줄까 했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 아이의 아버지가 될 타란 혈족 사내의 피를 내어 1년 이상 꾸준히 복용시킨 후 그 여자의 처녀를 취해야 합니다. ]정말 구역질나는 조건이었다. 그 조건은 이미 처녀를 잃기 전에 완성되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아내는 이미 틀렸다. 그런 조건 같은 것 다 상관없이 임신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는 절대 후사를 남길 생각이 없었다. 이 세상에 그의 피를 이어 받은 존재가 있다고 상상만 해도 똥통에 빠진 것 같았다. 그가 임신 위험성이 없지만 언제나 체외 사정을 고집한 건 자신을 닮은 후손의 번식을 증오하며 형성된 일종의 습관이었다. 그는 새삼스럽게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달랐다. 왜 그녀는 예외였을까. 자궁 안에 파정하고 끌어안아 후희를 즐긴 건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녀의 밭에 자신의 씨를 뿌린다는 만족감마저 느꼈다. 자신의 무심함이 그녀에게 상처가 되었음을 인정했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그녀는 충분히 임신가능성이 있었다.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그녀의 사정을 잊고 있었으면서 임신여부를 신경 써주지 않았다. 왜 갑자기 궁금해졌냐는 그녀의 말은 야속함을 담은 원망이었다. 단편적이지만 그녀의 상처가 읽히자 그는 심장 언저리가 따끔거렸다. “치료가 되면 전 아이를 갖고 싶을 거예요. 그래도 괜찮아요?” 어차피 가질 수 없는 아이. 그는 얼마든지 말만으로 허락해도 되었다. 얼마든지 낳아도 좋다. 그렇게 말 한 후에 아이가 생기지 않아도 그녀는 그를 탓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그녀를 기만하고 싶지 않았다. 진실을 말해 줄 수 없다면 속이고 싶지도 않다. “...난 자식은 필요 없어.” “후계 문제 때문에 그러시면 각서라도 쓸게요. 계승권을 배제하는 약정서 작성도 상관없어요.” “그런 문제 때문이 아니야. 나는..내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아.” “이미 아들이 있으시잖아요.” “그 녀석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았다. 데미안이 그의 친자가 아니라는 걸 아는 사람은 이제 늙은이 하나 남았다. 하나 물꼬를 트기 시작하면 줄줄이 나올 것이 끝이 없었다. 그는 타란의 비밀을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데미안에게도 알리지 않을 것이다. 오직 그 혼자 끌어안고 영원히 묻어버릴 것이다. “그 녀석은 좀..달라. 당신이..그렇게 아이를 원하는 줄은 몰랐어.” 그는 정말로, 그 동안 그녀와 서로 겉만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내심을 전혀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죄송해요. 당신이 원하는 아내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을 텐데.” “비비안.” 그가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당신을 비난하려는 뜻이 아니었어. 단지 몰랐던 사실이 의외였을 뿐이야.” “처음에 결혼 이야기를 나눌 때 당신은 아이를 낳아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씀하셨어요.” “그건...” 상관없었던 것이 아니라 어차피 낳지 못할 것을 아니까 그걸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당시에 그는 혼적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아내는 그저 덤이었다. “이혼은 안 해주실 거잖아요.” 그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눈을 번뜩이며 으르렁댔다. “이혼? 어림없어.” 이혼 소리를 입에 올려? 그의 뱃속이 점점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부터 말했지. 이혼은 안 된다고. 죽어도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알아요. 타란의 전통. 물론 기억하지요. 하지만 아이를 낳으면 안 된다는 전통은 없잖아요.” “이혼 아니면 아이. 내게 선택을 하라는 거야?”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가 크게 일렁거렸다. 눈이 시큰거려서 혹시 눈물이라도 나올까봐 루시아는 더욱 그에게 보이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말은 오히려 그녀에게 둘 중 하나 선택하라는 것 같았다. “그런 뜻..아니에요.” “비비안. 이대로 지내면 왜 안 되는 거지?” “제 욕심이겠지요. 혼자가 되었을 때 함께할 사람이 있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왜 혼자인데?” “설마. 제 곁에 당신이 영원히 함께 있어 줄 거라고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뭐?” 낯선 외국어를 듣는 것 같은 그의 표정에 루시아 가슴 깊은 곳에서 불쑥 뭔가가 치솟았다. 그녀를 달래는 것처럼 도닥이는 그의 말투도 거슬렸다. 내 마음 같은 건 관심도 없으면서! 곁에 두기에 적당하고 편한 아내라고 생각하면서! 그를 상처주고 그가 아파하는 것을 보고 싶다. 무슨 짓을 해도 그의 가슴에 생채기 하나 남길 수 없다면 적어도 난처하고 곤란하게라도 하고 싶었다. 그런 못된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다. “당신은 절 사랑하지 않아요. 전 절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 사이에 뭐가 있나요? 이런 관계가 언제까지 갈 거라고 생각하세요?” < -- 공작부부 -- >그래서 뭐. 루시아는 그가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 어쩌라고. 처음부터 그러기로 한 것 아니었나? 냉막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무감정한 음성으로 받아칠 줄 알았다. 그런 대답을 어떻게 하면 더 싸늘하게 되돌려 줄 수 있을까, 그에게 버럭 쏟아낸 직후부터 고민했다. 그에게 상처주고 싶었던 건 진심이 아니었다. 진심인 줄 알았지만 정말은 그가 아파하는 모습을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적으로 그의 얼굴에 떠오른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참담함을 보았을 때 루시아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이 강철 같은 남자는 몹시 그다운 방식으로 고통을 표현했다. 치명적 상처를 입은 맹수가 힘겹게 숨을 쉬는 것처럼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마음은 그를 향해 손을 뻗어 안아서 위로하고 있으나 루시아의 몸은 그를 보며 얼어붙어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꼭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움직일 수도, 아무런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건 아주 짧았다. 그가 씁쓸하게 웃으며 그 웃음이 끝나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는 평소처럼 얼마간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순식간에 지나가 허상처럼 사라지는 그의 감정 변화를 엿본 일은 그녀에게 혼란과 좌절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이제 막 완성되려던 부드러운 케이크를 발로 짓이긴 기분이었다. “...그래. 당신에겐 이미 끝이 보이는군.” 차갑기 보다는 무덤덤한 목소리였다. ‘이 사람은...’루시아는 아주 잠깐이지만 진짜 그를 본 것 같았다. 늘 차가운 그의 표정과 말투는 그의 갑옷이었다. 그가 냉담한 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니라 삼키고 드러내지 않을 뿐이었다. “방금..” “뭐가?” 잠깐 사이에 꿈을 꾼 걸까. 보았어도 믿기지 않았다. 지금 그의 표정을 보면 조금 전 봤던 모습은 정말 착각인 것 같았다. 그녀가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그가 말을 이었다. “그렇군. 처음부터 끝은 있었어. 당신이 내게 장미꽃을 달라 한 건 그런 의미였겠지?” 그가 장미꽃을 언급하자 루시아는 차가운 한기를 느끼며 현실로 돌아왔다. 잠시 넋 놓았던 자신을 꾸짖었다. 지금 그와 중대한 기로에 서 있었다. 투정처럼 시작했으나 어느새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왔다. “...네. 맞아요.” 혹시라도 보이지 않는 끝에 매달려 어리석어 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 장미꽃으로 깨우쳐 달라고 했다. 그가 장미꽃을 보내 끝을 선언하면 혹시 언젠가 정신이 나가 있더라도 놀라 되돌아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신은 내게 장미꽃을 받으면. 어쩔 생각이었지?” 어쩌면 그가 자신의 마음을 떠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생각하자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녀는 조금 갈팡질팡하던 마음을 재빨리 바로 쥐었다. “그건..생각해보지 않았어요. 당신 말씀대로 그건 끝이니까요. 끝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없다.” 그는 나지막이 되뇌었다. “당신의 조건은 견고한가?” “.... 네. 제가 먼저 약속드린 일이었어요. 그걸 깨뜨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보답 받지 못해도 상관없으니 일방적으로 쏟기만 하는 사랑. 루시아는 절대 그건 하고 싶지 않았다. 일방적 사랑은 부모자식 사이에서도 어그러진다. 남녀 사이에서는 불가능한 사랑이다. 처음엔 자기만족에서 시작했어도 언젠가는 응답을 바랄 것이고, 대답해 주지 않는 상대에 대한 그리움이 미움으로 변할 것이다. 루시아는 그런 식으로 결국 그를 증오하고, 그 증오에 잡아먹히고 싶지 않았다. “.......” 휴고는 자신이 과욕을 부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은 정답이었다. 되돌려 줄 수 없으면서 그녀의 마음을 욕심내는 건 몰염치했다. 결혼하고 수개월을 지내는 동안 몰랐던 그녀를 이 잠깐의 대화만으로 발견했다. 무관심했던 건 그였다. 그녀가 보여주지 않았다고 그는 분노할 자격이 없었다. 능력 있는 조사관 파비안이 무려 한 달이나 걸려 작성한 그녀에 대한 보고서 속에는 그녀의 몸 상태에 관한 것은 없었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사실은 누구도 모를 그녀만의 비밀이었을 텐데 그에게 털어놓았다. 그녀는 이미 오래 전에 마음 한 조각을 그에게 보여주었지만 그가 내버렸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내민 손을 그는 이미 오래 전 쳐낸 것이다. “이혼은 없어.” “.... 네.” “당신은 내 아내야.” “네.” “당신이 어떤 끝을 내든. 그게 우리 관계를 변화시키지는 못해. “네.” 깔끔하고 순종적인 그녀의 대답은 오히려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는 그녀 어깨를 잡고 밀어 넘어뜨렸다. 그녀 몸이 소파 위에 뉘이고 그는 그 위에서 팔로 짚어 저항 없는 그녀를 내려 보았다. “무슨 뜻인지 알고 대답하는 건가?” 그의 손이 그녀 턱을 잡아 손가락이 보드라운 입술을 느릿하게 쓸었다. 성적 욕망이 담긴 진득한 손길에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감정과 관계없이 그가 원하면 몸을 열어야 한다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루시아는 그의 시선을 비껴서 처연하게 허공을 응시하더니 답했다. “네.” 휴고는 깊어진 붉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이 눅눅하게 가라앉았다. ‘훌륭해. 너는 완벽한 아내를 얻었군. ’그는 조소했다. 그가 바라마지 않던 대로 그는 아주 근사한 인형 아내를 얻었다. 이 여자는 그의 것이다. 그의 아내였다. 하지만 그가 가진 건 그녀의 껍데기였다. 그는 앞으로도 계속 인형 아내를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녀는 껍데기만 이곳에 남겨두고 알맹이는 그의 눈과 손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멀리 치워두었다. 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중요한 건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그녀의 껍데기였다. 마음 따위가 아니다. 그 까짓것 가져서 뭘 하겠다고. 그는 얼마든지 그녀를 쥐고 언제까지나 곁에 둘 수 있었다. 마음이 없다고 그녀가 어디로 가는 건 아니었다. 갑자기 휴고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는 자신을 사로잡은 불안과 절망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가 가진 무엇도 욕심 내지 않고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 것처럼 그의 터전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그녀에 대한 불안. 굳게 닫힌 그녀의 마음을 열 수 없어서 느끼는 절망. 그가 느낀 진짜 불안과 절망은 그것들이 아니었다. 흔들리는 스스로에 대한 불안과 절망이었다.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녀의 손에 심장이 잡혔다. 결코 바라지 않던 최악이 바싹 다가와 있었다. 공작위에 오른 이후 그는 철저하게 하나의 원칙을 관철해 왔다. 받는 만큼 되돌려 준다. 그가 여자가 주는 사랑을 거부하는 건 되돌려 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랑과 증오. 그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극단적 감정을 모두 겪었다.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좀먹는지 배웠다. 죽은 공작에 대한 증오, 그와 피를 나눈 형제에 대한 사랑. 전혀 접점이 없을 것 같은 사랑과 증오는 마치 한 몸처럼 그를 꼼짝할 수 없게 마구 휘둘렀다. 그의 의지는 없었고, 무력함에 절망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단지 히우로 살았을 때의 그는 야생짐승이었다. 생존을 위해 적을 죽이고 오직 살아남는 것만 걱정하면 되었다. 아침에 눈 뜨면 잠드는 저녁까지 생존만이 그의 삶의 전부였다. 형제를 만나 그는 사람이 되었지만 감정을 배우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는 형제를 사랑했으나 그 때문에 형제의 목숨을 쥔 죽은 공작에게 휘둘렸다. 죽은 공작에 대한 증오는 공작이 죽은 후 알게 된 타란 혈족의 비밀을 접하면서 몸을 타고 흐르는 피에 대한 증오로 바뀌어 그를 까마득한 어둠에 처박았다. 누구도, 무엇도 그를 휘두를 수 없다. 자신의 의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진저리치게 끔찍했다. 잃을까 가슴 졸이며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경험은 형제 녀석만으로 충분했다. 그의 마음은 견고해야 하고 그의 의지는 확고해야 한다. 특별한 존재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녀의 마음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의 마음이었다. 단순한 흥미와 욕망이라고 치부했으나 그의 심장이 그를 조롱했다. 넌 사랑에 빠졌어.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녀에게 휘둘린다. 그녀를 잃을까봐 두려움을 갖기 시작했다. 여자 하나에 이런 한심한 꼴이 되어버렸다. 납득할 수 없다. 그는 도무지 이 가정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큰 동작으로 소파에서 일어나 근방을 몇 걸음 서성거렸다. 어딘지 모르게 초조해 보이는 그를 보며 루시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오늘 그는 전에 모르던 일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그의 혼란은 길지 않았다. 금방 멈추어 서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치료 받아.” 다시 원점이었다. 루시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의사에게 정확하게 증상을 말 하고, 처방을 받아. 무슨 증상인지, 당신 몸이 왜 그런지는 알아야 하잖아.” “임신할 수도 있어요. 아이는 필요 없다는 생각. 바꾸신 건가요?” 그가 침묵하자 루시아는 소리치고 싶었다. 그냥 날 내버려 둬요! 차라리 지금까지처럼 내 몸 상태에 관심 갖지 말라구요! “.... 아이가 생길 일은 없어.” “그 말씀은. ..이제 별거인가요?” 똑바로 마주쳐오는 그의 시선을 루시아는 도전적으로 응시했다. 그는 시덥지 않은 소리를 한다는 것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왜 애를 만들기 위해서만 한다고 생각해? 당신도 함께 즐겼잖아.” “논점을 흐리지 마세요. 저는 치료를 받고, 당신은 계속 제 침실에 들어오고. 그러다 아이가 생기면 어쩌시려구요? 제가 알고 싶은 건 그거예요.” “그럼 내 애가 아니겠지.” 그는 무심히 툭 뱉어놓고 뒤늦게 실수를 깨달았다. 그는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은 임신을 생각하며 한 말이었지만 진실을 감추어 사정을 모르는 이상, 누가 듣더라도 그의 말은 심각한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아차 싶어 그녀 표정을 살피자 이미 그녀 안색은 안쓰러울 정도로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이를..인정할 일 없다는..말씀인가요, 아니면..제가 부정할 것이라고 단정하는 말씀인가요?” 잔인했다. 그는 몇 마디 말로 그녀 가슴을 난도질했다. 루시아는 전승파티에서 그와 소피아 로렌스의 대화를 엿들었을 때를 떠올렸다. 그 때 소피아 로렌스를 향했던 그의 무자비한 칼날은 그녀를 베고 지나갔다. 휴고는 자신의 실수가 그녀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는 걸 알았다. 사과를 하고 그녀를 달래야 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그의 안은 혼란과 초조로 제멋대로 날뛰었다. 그는 제 마음 조차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이 상황 자체에 그는 신물이 났다. 자꾸 고집을 부리는 그녀도, 사실을 설명할 수 없는 자신도. 복잡한 걸 싫어하며 모든 일을 쉽게 처리해 버리던 그에게, 뒤얽힌 지금의 상황과 자신의 감정이 지독히 피곤했다. “내 말은..” 하며 운을 떼고 잠시 말이 없던 그는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치료는..당신 좋을 대로 해.” 그는 몸을 돌려 응접실을 나가버렸다. 금방 조용해진 응접실에 홀로 남아 루시아는 쓰러지듯 풀썩 소파에 누웠다. 소리 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날 밤 그는 그녀의 침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식사는 한 사람 것만 준비되어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루시아는 기운이 쭉 빠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안 그래도 넓은 식당이 더욱 광활해 보였다. “주인님께서 근래 공무가 많으십니다.” 제롬이 변명처럼 공작이 왜 오늘도 저녁 식사에 함께하지 못 하는지 설명했다. “그렇군요. 혹여 부실하게 드시어 건강을 해하실까 염려되니 집사가 더 신경 쓰도록 해요.” “예. 마님.” 일주일 째 루시아는 저녁을 혼자 먹고 있었다. 그는 침실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며칠 째 그의 얼굴을 구경도 못했다. 그는 무척 바쁘다고 했다. 집무실에서 하루 종일 일만 하며 식사도 모두 그 안에서 간단하게 해결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루시아의 감은 그가 지금 그녀를 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전에 가끔 일이 많아 루시아가 잠들 때까지 집무실에서 나오지 않는 적이 있었지만, 그 때도 그는 새벽에 들어와 그녀를 끌어안고 잤다. 이제 겨우 일주일이었다. 천년은 흐른 것처럼 길어서 뒤돌아보면 겨우 며칠이었다. 그는 일이 바쁜 것이고 여자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겉보기에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 일주일이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될 수 있었다. ‘머리가 아파..’습관처럼 음식을 씹어 넘기지만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다. 겨우 식사를 마치고 안나에게 두통약을 받아 복용 후 침실로 들어왔다. 아침에 눈 뜨면 조금 괜찮아졌다가 밤이 되어 침대에 누우면 그 때부터 온갖 상념으로 잠 못 이루는 고통의 시작이었다. ‘왜 그랬어. 네가 망친거야. ’ 자책이었다. 왜 풍파를 일으켰을까. 그와 결혼한 건 안락하고 평온한 생활을 위해서였다. 그의 애정을 얻기 위함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와 계약까지 하며 분명히 했다. 거짓으로 계약만 해 놓고 나중에 혹시 모르는 거 아냐, 라는 약삭빠른 생각은 하늘을 맹세코 절대 하지 않았다. ‘그가 나빠. 차라리 처음부터 형식적인 부부로만 지냈으면. ’그에 대한 원망도 있었다. 그가 그렇게 다정히 대해주지만 않았어도 평생 고독을 각오했던 그녀의 결심이 무너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제 와서 칼로 베어내듯 딱 끊어버린 그의 태도는 그녀 마음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네가 선택했잖아. 후회는 절대 안 할 거라고 다짐했잖아. ’또 다시 자책이었다. 아이는 처음부터 아예 포기하고 있었으면서 왜 갑자기 욕심을 부렸을까. 쥐고 있는 것의 가치를 모르고 욕심을 부리다 잡은 것마저 놓치게 생겼다. 얼마 전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걸 그녀가 망가뜨렸다. 아무리 뒤척여도 잠이 오지 않았다. 루시아는 일어나 앉아 몸을 동그랗게 말고 두 팔로 무릎을 감쌌다. 결코 열리지 않는 침실 문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가슴이 너덜너덜하게 멍들어갔다. < -- 공작부부 -- >빠르게 서류를 읽고 아래에 서명했다. 따로 살펴볼 필요나 의문이 있는 사항에는 표시를 해 두고 옆으로 넘긴다. 왼쪽에는 그가 처리해야 할 일, 오른쪽에는 처리한 일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아무리 눈이 빠져라 서류를 읽고 지끈대는 머리를 누르고 일을 해도 왼쪽의 서류들이 바닥을 보이는 일은 없었다. 어느 순간 그는 내던지듯 펜을 내려놓고 몸을 뒤로 기댔다. 눈을 감아도 머릿속에서는 이걸 해야 하고 저걸 해야 하고 해야 할 일들을 그리고 있다. 지긋지긋하다. 얼마나 이 짓을 더 해야 하나. ‘10년?’10년이면 녀석이 몇 살이더라. 18살. 그 때야 겨우 학술원을 졸업할 나이였다. 10년으로는 안 되겠다. 15년이면 되지 않으려나. 아둔한 녀석이 아니니까 4~5년 가르치면 쓸모 있을 것이다. ‘15년이라...’아무리 최소한으로 잡아도 아득하게 멀었다. ‘이 짓을 15년을 더 해야 한단 말이지...’비가 오느라 어둑한 바깥 하늘을 창을 통해 내다보았다. 오늘은 아침부터 계속 비가 왔다. 그는 처음에는 창가로 아예 시선조차 두지 않았으나 결국 사흘 전부터는 발코니로 나가지 않은 채 정원을 거니는 그녀를 훔쳐보았다. 자신이 얼마나 꼴사나운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비 때문에 그녀를 오늘 보지 못했다고 투덜거렸다. ‘그 시간이 아니면 볼 수가 없는데. ’짜증스레 중얼거리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한심한 새끼. 가서 보면 되잖아. ’멀리도 아니고 계단을 내려가 조금만 가면 금방이었다. 지금 이 시간이면 그녀는 대개 1층 응접실에 있었다. 그녀의 생활은 단조롭고, 단순하지만 거의 시간마다 하는 일이 정해진 것처럼 규칙적이었다. 요즘은 외출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는 자기 일정보다 그녀 일정을 꿰고 있었다. ‘내가 이런 병신 짓을 할 줄이야. ’지금 그는 아내를 피하는 중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자신의 마음에게서 도망치고 있었다. ‘사랑? 웃기는군. ’그는 끊임없이 부정했다. 그의 마음은 오롯이 그만의 것이었다. 누군가로 인해 결코 흔들릴 수 없었다. 그렇게 자신하면서도 그녀를 만날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녀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이 다 무너질 것 같은 위기를 느꼈다. 일이 많다는 핑계로 밤이 늦도록 집무실에서 서류만 들이팠다. 식사도 집무실에서 간단하게 해결했다. 늦게 집무실을 나와 지난 몇 개월간 사용하지 않았던 그의 침실에서 잠을 잤다. ‘그녀 없이도 얼마든지 잘 지낼 수 있어. ’시험을 해보겠다는 핑계였다. 그의 냉철한 이성이 그에게 찌질하고 비겁하다고 비웃었으나 그는 외면했다. 첫 하루 이틀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래. 내가 여자 하나에 좌우될 리 없지. ’ 그는 철없는 아이처럼 의기양양했다. 그런 자신감이 무너지는 건 금방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미묘하게 기분이 저하되고 서류 내용은 머릿속에서 헛돌며 일처리 속도가 형편없이 떨어졌다. 같은 시간을 들여도 효율이 떨어지니까 일하는 시간은 늘어나기만 했다. 평소 자신답지 않은 상태에 불쾌감을 더하고, 일은 더 손에 안 잡히고 악순환의 계속이었다. 그래도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금단 현상을 부정하며 똥고집을 부리는 중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주변에는 그의 귀를 잡아당기며 따끔히 야단칠 사람이 없었다. “전하.” 밖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순간 짜증이 확 치밀었다. 저 목소리의 주인은 늘 일거리를 한가득 가지고 들어온다. 들어오라고 하자 역시나 빈 몸이 아니었다. 공작의 서기관 중 하나인 행정관리 아신은 사뭇 사납게 자신을 바라보는 휴고의 눈치를 쭈뼛거리며 살피면서도 꿋꿋하게 들고 있던 서류 더미를 책상 왼쪽에 올려놓았다. 슬금슬금 나가는 꼴이 얄미워서 휴고는 툭 던지듯 말했다. “그 녀석 방학이 언제지?" 아신은 언제 어디서든 어떤 질문을 들어도 대답할 수 있다고 늘 만발의 준비를 자신했다. 그러나 느닷없는 공작의 질문에 진땀이 났다. 다행히 명석한 머리는 그런대로 늦지 않게 답을 찾아주었다. "...방학은 따로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공작이 방학을 언급할 존재라면 한 명뿐이었다. 차기 공작위를 이을 후계로 지정된 공작의 하나 뿐인 아들, 데미안 타란. 정확히 말하면 사생아지만 죽고 싶지 않고서야 공작 앞에서 그 단어를 입에 올릴 자는 없을 것이다. 아예 공작가 가신 중 누구도 대놓고 데미안 존재를 거론하지 않았다. ‘다들 여전히 설마 하는 것 같지만..’바뀔 수 있는 일이라고 사람들은 은연중에 생각하고, 그러기를 바랐다. 공작은 아직 매우 젊었고 이제 막 결혼했다. 말은 못해도 사생아가 공작가 정통을 잇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이변이 없는 한 공작가 후계는 사생아 도련님이 될 것이라고 아신은 확신했다. 공작께서 가신들 다 불어모아 놓고 공표한 일이었다. 공작은 한 번 입 밖으로 꺼낸 일은 번복하지 않았다. 공작 후계의 등장은 일대 파란이 일 정도의 대사건이었다. 엄청난 스캔들이 의외로 널리 퍼지지 않은 건 가신들이 알아서 입조심한 덕이었다. 사생아가 장차 주인이 될지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불편한 심기 때문에 공론화 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요란한 신고식 치른 것 치고는..두 부자 사이가 영...’공작은 아들이 6살이 되자마자 기숙학교에 넣어버렸다. 오히려 주변에서 만류했다. 너무 어리시니 한 두 해 더 있다가 생각해 보심이 어떠신가 했더니 공작은 코웃음 쳤다. [ 어려? 6살이면 사막에 던져놔도 살아남을 수 있어야지. ]대체 그건 무슨 기준이냐 모두 경악했다. 어린 도련님 입에서 나온 말은 더 가관이었다. [ 사막보다는 확실히 기숙학교의 생존율이 높겠군요. 관대하신 처분에 감사드립니다. ]나이에 비해 징그러울 정도로 조숙했던 어린 도련님은 미련 없이 기숙학교로 떠났다. 그리고 2년. 공작은 정말 아들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언급조차 없었고, 도련님 역시 연락 한 줄 없이 집에 얼씬도 않았다. ‘이대로 지내다 졸업하는 10년 후에나 돌아와도 전혀 놀랍지 않을 거야. ’공교롭지만 공작의 데미안에 대한 무관심이 오히려 섣부르게 데미안에게 줄을 대거나 적대하려는 세력의 발생을 억제했다. ‘그런 의도로 일부러 그러시는 것일 수 있어,’ “전혀 나가지 못하나?” 아신은 재빨리 딴 생각을 구겨 넣었다. “외출은 가능합니다.” “오라고 해.” “...지금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이제 막 학기가 시작되었고, 외출을 하려면 최소 일주일 전에는 통보해서 허가를 받아야 하고..” “언제부터 내 말에 토를 달았지?” 까라면 까야 한다. 식은땀이 주룩 흐르는 것을 느끼며 아신은 경직된 표정으로 즉시 답했다. “...예. 즉시 전언을 보내겠습니다.” “수도로 사람 보내서 파비안 내려올 때 입적 서류 준비해서 가져오라고 하고.” ‘소공자를 혼적에 올리려 하시는구나. 혼적에 올라가면..정말 이젠 누구도 두말하지 못하겠군. ’공작이 후계로 한다고 공표했지만 사생아에 불과했다. 그러나 정식으로 혼적에 올라가면 공작의 적자가 되고 완벽하게 후계자가 되는 것이다. 혹시나 해서 기대하던 자들도 소공자가 혼적에 올라가면 포기해야 할 것이다. ‘공작부인께서 입적에 동의하셨나 보네. 두 분 금실이 꽤 좋다는 말이 돌던데 공작부인께서 아이를 낳으면 대체 어찌 되는 거야. 아들을 낳으시면 골치 아플 텐데...’"전하. 엘리엇입니다. " 들어오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중년의 기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기사단장 칼리스 엘리엇은 정중하게 예를 올린 후 들고 있던 긴 대나무 통을 올렸다. 휴고가 통을 받아 윗부분을 잡아당기자 뽁 소리와 함께 분리가 되고 안에 둘둘 말린 서신이 나왔다. 서신을 읽는 그의 눈매가 가늘어지고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올라오는 것을 보며 아신은 등줄기가 오싹했다. ‘쓰벌, 난 저럴 때 주군이 제일 무섭더라. ’"소집해. 7명. 차출은 그대에게 맡긴다. 지금 바로 준비되는 대로 출발하겠다. "비는 거의 멈추었지만 해가 저물어가는 오후였다. 새벽 일찍 떠나는 평소와 달랐으나 충실한 기사 칼리스는 두 말 없이 대답하고 물러갔다. "오랜만에 사냥이군. "‘인간 사냥’휴고의 중얼거림에 아신은 숨겨진 말을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에휴. 오늘 꿈자리 뒤숭숭하겠네. ’ 그는 행정관리라 피 튀기는 전쟁터와 거리가 먼데도 불구하고 몇 년 전 의도치 않게 공작을 따라 전쟁터에 간 적이 있었다. 그 때의 광경은 아직도 눈에 선해서 지금도 심장이 벌떡거렸다. 사람이 죽는 참혹함에 몸서리쳐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쉬워서, 공작의 칼질 한 번에 뎅강 뎅강 사람 목이 잘려 공중에 날아가는 모습이 비현실적이라 현기증이 났다. 흑사자? 아신은 그 별칭이 굉장히 미화된 것이라 생각했다. 검은 갑옷은 입고 전쟁터를 헤집는 타란 공작은 잘 봐줘야 사신이고 그야말로 악마였다. 피를 뒤집어 쓴 채 배부른 맹수처럼 나른하게 웃는 그를 보며 아신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런 미친놈. 뱉어놓고도 누가 들었을까봐 기겁했고 다행히 그의 독백은 전쟁의 광기에 취한 병사들의 함성에 묻혔다. 아신은 나름 세상 무서운 것이 없는 편이었다. 하고 싶은 말 참은 적 없고 가진 능력만큼 제법 지랄 맞은 성격은 그의 윗사람이건 부하이건 이를 갈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날 이후 아신은 오직 타란 공작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었다. 그는 공작의 무시무시함을 눈치 챘다. 물론 대외적으로 공작은 꽤 무서운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것보다 훨씬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전쟁터가 아닌 곳 에서의 공작은 매너 좋고 기사의 거친 면을 전혀 보이지 않아서 그를 대하는 사람들은 그저 대단한 무용을 지닌 젊은 공작이라는 점 자체에만 초점을 두었다. 그래서 더 무시무시했다. 전쟁터에서 보였던 그 피비린내 나던 광기를 감추고 검 한 번 들어본 적 없을 것 같은 고아한 귀족인 척 할 수 있다는 그 간극이 더 공포였다. "일정이 길어지십니까?" "가봐야 알겠지만 아무래도 좀 걸리겠군. ""하오면 자리를 비우시는 동안 도련님이 오시게 될 수도 있습니다. "휴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이가 어려도 녀석은 타란의 혈통을 이었다. 또래의 다른 8살짜리로 생각하면 곤란했다. 휴고는 이미 그 비슷한 나이에 살인을 했다. 설치한 함정으로 발목이 잘린 놈의 심장에 검을 박아 마무리를 했었지. 잠시 과거를 회상했던 그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녀석은 결코 순진한 어린애가 아니었다. 아직까지 핏줄의 광기가 발현되고 있지는 않지만 언제 터질지 모른다. 그래도 아직까지 녀석은 순한 편이었다. 꾸준히 전해 받는 소식에 의하면 녀석은 제 아버지의 멍청할 정도로 사람 좋은 점까지 빼닮지는 않았어도 잔인한 기질은 보이지 않았다. 녀석을 처음 본 날, 만약 녀석에게서 죽은 형제의 모습을 닮은 눈빛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을 것이다. 아무리 순해도 범의 새끼는 범. 녀석에 비해 아내는 순한 토끼였다. 그가 없는 새에 둘만 있을 일이 아무래도 걱정스러웠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염려하고 있음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 녀석, 자네가 가서 데리고 와. " “...네?” "오면서 확실히 경고해 두도록. 어머니에 대한 예를 다하라고. 혹여 다녀와서 내 귀에 이상한 말이 들리면. ""넵. 염려하시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신이 물러가고 얼마 후 제롬은 기사들이 떠날 준비를 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집무실로 달려갔다. ‘주치의를 불렀던 날부터였지. ’ 그 날 두 분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후부터 두 분 사이가 이상했다. 주인이 일방적으로 마님을 멀리 하고 있었다. 일이 바쁘다는 건 핑계였다. 주인은 늘 일이 많았다. 그러나 식사를 못하고 잠을 못 잘 정도는 아니었다. 하녀 말에 의하면 요즘은 두 분이 침실도 따로 쓴다고 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기운이 빠진 마님의 어깨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그러시는 거 아닙니다. 주인님. ’그의 마음에서 처음으로 주인에 대한 반항심이 고개를 들었다. 이 상태를 해결하지 않고 장기외유를 떠나신다니 도무지 왜 그러시냐 묻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제롬은 평소처럼 차를 덥혀 가지고 들어갔다. 은은한 차향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제롬은 빈 잔에 가득 차를 따랐다. “저녁 진지는 어찌 하시겠습니까.” “음. 준비할 필요 없다. 곧 나갈 거니까.” 휴고가 고개를 들고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사냥을 다녀올 거다. 일정은 정확히 몰라.” “.... 시간이 늦었습니다. 내일 새벽에 떠나심은 어떠신지요?” “아니. 준비 되는 대로 가려고. 이미 그렇게 지시했다.” “마님께는..” “대신 전해.” “.... 마님께서 큰 실수라도 하셨습니까?” 주인의 시선을 받으면서 제롬은 꿋꿋이 말을 이었다. “실수를 하셨다 해도 너그럽게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며칠 째 마님과 말씀 한 마디 하지 않고 계십니다.” “참견할 일이 아니야. 주제넘다.” “예. 주제넘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마님께서는 공작가 안주인이십니다. 이전에 전하께서 취하고 버리던 여인들과 다른 분입니다. 소중히 하셔야 합니다.” 휴고는 조금 커진 눈으로 제롬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살짝 피해 아래로 내리고 고집스럽게 서 있는 제롬을 보는 휴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 공작부부 -- >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 이 낯선 북부로 오셨습니다. 그런 상황이 힘들다고 불평 한 마디 없으셨습니다. 전하께서 외면하시면 마님은 정말 혼자가 되십니다.” 도대체 어떻게 한 배에서 태어났을까 의심될 만큼 기질이 천지차이로 다르지만 역시 제롬은 파비안과 피를 나눈 형제가 틀림없었다. 겁 없이 입을 놀리는 건 아주 판박이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한층 더 붉게 빛을 발했다. “요즘은 마님께서..” “입 다물어.” “전하.” “어디 한 마디만 더 해봐.” 살기까지 담긴 나지막한 음성에 제롬은 입을 꾹 다물며 시선을 떨구었다. 공작은 공연한 트집을 잡아 까다롭게 구는 주인은 아니었지만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만큼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기준은 제 분수에 넘치는 짓을 하는가에 달려 있다. 제롬에게 공작부부의 사적인 관계에 나설 권한이 없었다. 그건 제롬이 집사여서가 아니라 로암의 누구도 그럴 권한은 없을 것이다. 휴고는 지금 이 상황이 몹시 불쾌했다. 그녀가 달려와 대체 왜 그러냐 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제롬이라니. 평소 불필요한 일에 간섭하지 않고 제가 나설 일과 그러지 말아야 할 일을 철저히 구별하던 제롬의 답지 않은 짓이 예민하게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평소에 지극히 그녀를 챙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집사로서 충정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거슬렸다. “제법이야. 가서 날 찔러보라 하던가?” 그녀가 그랬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지금 잔뜩 꼬였다. “아닙니다! 전하, 마님께서는 절대!” 와장창! 제롬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찻잔이 나동그라져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입 다물라고 했다.” 휴고는 벌떡 일어나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제롬은 창백한 얼굴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실수했다. 나서지 않느니만 못한 결과였다. 남녀 사이에는 섣부르게 끼어드는 것이 아니라고, 파비안이 봤다면 말했을 것이다. ‘마님께 면목이 없군. ’주인에 대한 첫 반항은 깨갱 꼬리를 말며 끝났다. 괜히 참견해서 오해까지 키워 놓았다. 제롬은 푹푹 한숨을 내쉬며 조각조각 부서져 사방으로 흩어진 찻잔 조각들을 비로 쓸기 시작했다. 이게 이마로 날아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주인은 충분히 관용을 베풀었다. ‘파비안이 오면 조언을 구해볼까. ’쓸데없는 오지랖! 보나마나 신랄한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이다. 루시아는 찾아온 케이트를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서 일찍 돌려보냈다. 수다를 떨 기분도, 승마를 하러 나갈 기분도 나지 않았다. 케이트를 돌려보내기 무섭게 주치의가 방문했다. “마님.” 안나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안절부절 못하며 루시아 눈치를 살폈다. 그는 그 날, 치료는 마음대로 하라는 말을 남기고 갔으면서 다음 날부터 줄기차게 안나를 보냈다. “마님. 공작 전하께서 저녁마다 불러 치료는 어찌 되가느냐 물으십니다.” 안나는 제발 살려달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공작은 안나를 불러 따로 뭐라 하지는 않았다. 다만 불러서 어찌 되었냐 물을 뿐이지만 안나는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압박을 느꼈다. “부디 증상을 아시는 대로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며칠 상간으로 루시아 마음속에서 꾸준히 분노가 자라났다. 그에게 기만당하는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당장 집무실로 가서 그의 뺨이라도 올려붙이고 싶었다. ‘좋아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드리죠. ’ 루시아는 입을 열어 자신의 증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꿈에서 의사를 애타게 찾아다닐 때 그대로 가감 없이 말했다. 이미 치료법을 알지만 그걸 이용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만약 안나가 치료법을 찾아낸다면 거부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꿈속에서 그토록 오랜 시간을 들여 용하다는 의사를 셀 수 없이 만났지만 모두 치료하지 못했다. 떠돌이 의사에게 치료법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기가 막힌 우연과 운이었다. 그 우연과 운이 과연 이번에도 그녀를 찾아올까. 역시 안나는 들으면서도 혼란스러워했다. 몹시 당황한 안색이 삼엽쑥을 먹으면 잠시 월경을 멈춘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마님. 제 실력이 부족해서 솔직히 말씀드리면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방법을 알아내겠습니다.” 비장한 목소리로 다짐하며 안나가 물러갔다. 루시아는 잠시 멍하게 앉아 있다가 정원으로 나왔다. 휴고는 불쾌한 기분으로 집무실을 나와 무작정 걷다가 밖으로 나왔다. 비는 그쳤지만 해는 나올 기미가 없었다. ‘오늘은 이대로 날이 저물겠군. ’그는 어느새 정원에 들어와 있었다. 그는 재빨리 돌아서 나가려 했지만 그러기 전에 그녀를 발견했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막 봉오리 맺힌 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잠시 굳어 있다가 저절로 발걸음이 그녀로 향했다. 루시아는 허리를 펴며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를 보면서 갑자기 주변의 공기가 바뀌는 환상에 빠졌다. 모든 배경이 흐릿하게 멀어지고 오직 그만 눈에 들어왔다. 이와 비슷한 일을 전에도 겪은 적이 있었다. ‘수도에서..기사단 행진이 있었던 날..’꿈속이 아닌 현실에서 그를 처음 본 날. 그에게 화가 나 있었다. 밤마다 열리지 않는 침실 문을 노려보느라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해서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를 보기만 하면 달려들려 뺨을 쳐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본 순간 켜켜이 쌓여가던 모든 미움이 순식간에 물에 풀린 소금처럼 녹아버렸다. ‘나 정말 바보구나..’저 남자는 안 된다고 주문처럼 외며 꽁꽁 묶었다고 생각했는데 제 마음이 성긴 틈 사이로 다 빠져나간 것을 모르고 있었다.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동시에 아프게 할퀴어졌다. ‘그를 사랑해. ’어쩌면 좋을까. 수많은 그의 지난 여자들처럼 결국 마음을 지키지 못했다. ‘들키면 안 돼. ’그는 한 걸음 다가가면 두 걸음 물러날 것이다. 장미꽃을 받고 싶지는 않다. 아슬아슬한 모서리 끝에 선 심정으로, 루시아는 그를 보며 웃었다. ‘아...’휴고는 그녀의 미소를 보는 순간 계속 그를 괴롭히고 있던 불쾌감과 짜증이 순식간에 깨끗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껄끄러운 찌꺼기 한 점 남기지 않고 단 숙면을 취한 아침처럼 상쾌했다. 휴고는 비로소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그가 진정 두려운 것은 그를 흔드는 그녀의 존재가 아니었다. 저 미소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상상만으로도 위가 아프게 조여들었다. 그렇다고 했잖아. 비웃는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 “보세요. 이제 곧 꽃이 피겠지요? 며칠이면 만개할 거예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녀가 말을 걸어오자 휴고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군.” 그녀의 산뜻한 표정은 그를 비참하게 했다. 안달복달했던 자신과 달리 그녀는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바쁘시다고 들었어요. 잠시 바람 쐬려 나오셨어요?” “음..바쁜 건 대충 끝났어. 그런데 일이 생겨서 얼마간 나갔다 와야 할 것 같아.” “아...” 순간 잠시 시무룩했던 루시아가 다시 생긋 웃었다. “얼마나 걸리세요? 오래 다녀오시는 건가요?” “정확히는 모르겠군. 꽤 길어질 수도 있고. 왜 혼자 있지? 하녀는?” “심부름 보냈어요. 비가 그쳤기에 여기서 간단히 차 한 잔 마시려구요. 괜찮으면 함께 드시겠어요?” 방금 마시고 왔지만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 그러지.” 얼마 후에 하녀 몇이 접이식 테이블과 차 바구니를 들고 나타났다. 적당한 곳에 펼쳐진 테이블에 두 사람이 마주앉았다. “요즘 가물어서 걱정이었는데 한나절이지만 꽤 많이 비가 와서 다행이에요.” “뭐 하며 지냈지?” “평소와 같았어요. 정원 돌보고 책도 읽고. 왠지 이상해요. 서로 굉장히 오랜만에 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며칠 정도인데.” 며칠 정도인가. 그는 굉장히 길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에게는 그냥 며칠 정도였다. 그녀의 씩씩함이 대견하면서 서운했다. 손을 뻗어 그녀의 보드라운 볼을 만졌다. 말랑한 그녀의 피부는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자국이 남을 것 같았다. 약했다. 이 약한 존재가 이토록 강력하게 그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 날. 내가 말실수를 했어. 당신에게 사과하고 싶어. 당신을 부정한 여자 취급하려던 건 아니었어.” “......” “그러니까..타란 가문이 손이 귀해. 진짜 임신이 힘들어서..당신이 아이 갖기 힘들 테니까 기대했다가 실망하기 바라지 않았어. 그러다 말이 헛나왔어.” 그의 변명은 그다지 루시아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손이 귀하다면 거부 의사가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임신을 적극 지지하는 편이 더 납득이 가는 태도였다. 하지만 말을 하며 무척 고심하는 그를 보자 웃음이 나왔다. “네.” 웃으려 했는데 루시아 눈에서 툭 눈물이 흘러 떨어졌다. 당시 받았던 상처가 아파서가 아니었다. 이미 그를 용서했다. 그의 다정한 말투와 볼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기뻐서 마음이 아팠다.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며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일어났다. 한 걸음으로 티테이블을 끼고 돌아 그녀를 품으로 안았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리웠던 그의 품과 체취는 지옥을 헤매던 그녀 마음을 순식간에 천국으로 올려놓았다. ‘다시..이전처럼 돌아가자..’지난 몇 개월의 시간으로 다시. 언제 무너질지 모를 모래로 만든 성이라도 좋다. 파도는 보이지 않으니까 아직은 괜찮았다.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련다. 허공을 디딘 것 같았던 마음은 오히려 평온해졌다. 흔들리면 안 된다고 안절부절 못하다가 인정하고 나니까 편해졌다. 천국과 지옥은 그녀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었다. ‘그는 적어도..날 좋아하는 건 맞아. ’ 그가 이전의 연인들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모르지만 자신이 조금은 특별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자만은 아니지만 그 정도 자신감은 심어 둬야 굳건히 서서 그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게는 특권도 있어. ’그녀는 그의 합법적 아내였다. 지금껏 누구도 갖지 못한 명분이었다. ‘매달리지 않을 거야. 비굴하게 비위 맞추려고 하지도 않을 거야. ’비참해지는 사랑은 하지 않겠다. 그의 사랑을 구걸하지 않겠다. 무조건 그에게 순종하는 착한 아내 노릇도 하지 않겠다. 할 수 있는 만큼만. 그와 자신을 미워하게 되지 않을 정도까지만 있는 힘껏 그를 사랑해 보겠다. 그는 여자가 매달리지 않는 사랑을 받아본 적 있을까? 어쩌면 그를 당황하게 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즐거워졌다. ‘평생이 걸려도 좋으니까. 언젠가 당신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다면 내 인생이 허무할 것 같지 않군요. ’이대로 1년 5년 10년 살다보면 그를 천천히 물들일 수 있지 않을까. 원래 가랑비가 무서운 법이었다. 루시아는 그의 품에서 빼꼼히 고개를 들었다. “잘못하셨죠?” “응? 응..” “용서해 드릴게요. 대신 2가지 조건이 있어요.” “...조건. 뭔데.” 그는 그 단어 자체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첫 번째. 화해 키스.” 그의 눈이 살짝 커지다가 휘어졌다. 그의 얼굴이 천천히 내려오는 것을 보며 루시아는 눈을 감았다.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 다시 닿는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말랑거리는 입술이 그의 입안에 몇 번이고 삼켜지고 그의 입술에 문대졌다. 벌어진 입 안으로 들어온 그의 혀가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안 쪽 살을 훑으며 깊은 안쪽을 건드려 자극했다. 가볍지는 않으나 격해지지도 않는 아슬아슬한 선을 유지하며 길고 달콤한 키스가 끝났다. 그는 입술이 거의 맞닿은 채로 말했다. “두 번째는?” 다시 키스할 것처럼 다가오는 그를 밀어내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계약을 수정해요. 당신의 사생활 자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이 나빠요. 당신은 대놓고 바람 피운다고 말하는 거잖아요. 애인 만들어도 저 모르게 해 주세요.” 그는 꽤 당황해서 말없이 눈만 껌뻑이다가 조금 기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 만들어.” 그는 좀 억울했다. 결혼하고 다른 여자 눈길도 준 적 없는데. 전적이 있으니 몹쓸 바람둥이 취급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덧붙여서 만약 당신이 제가 싫어지거나, 싫증이 나거나, 다른 여자가 생겨서 절 떠나고 싶으면. 가장 먼저 제게 말씀해 주세요. 다른 사람 입을 통해 전달해 듣지 않게 해주세요.” 그는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잠시 잊고 있었군. 당신 머릿속 나는 아주 형편없는 놈인데 말이지.” 사랑하는 여자에게 멋진 남자가 되기는커녕 나쁜 놈으로 낙인찍혔다는 건 정말 오묘한 기분이었다. 이 또한 반박할 수가 없다. “아니라고 변명도 못하겠어.” 그는 중얼거리며 그녀 손을 잡아 올려 손등에 키스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그는 허리를 세우고 아까부터 주인 내외를 곁눈질하면서 안절부절 못하는 하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엘리엇 경이 준비를 마치고 명을 기다린다고 말씀 올려 달라 하셨습니다.” 그녀에 대한 마음을 깨달았으나 당장 변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보여주지 못할 것들도 많았다.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줄 수 없을지 결정할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이번 사냥은 그에게 시간을 벌어 줄 것이다. “나올 필요 없소. 다녀오지.” “...네. 건강히..다녀오세요.” 등을 보이며 멀어져가는 그를 보며 루시아는 가슴 언저리가 욱신거려서 두 손을 꼭 쥐며 가슴을 눌렀다. 언젠가 그가 저렇게 그녀를 떠나게 되지 않기를. 그녀는 간절히 소원했다. < -- 데미안 -- > "도련님. 행정 서기관 아신입니다. 기억하시는지요?" 흘끔 아래위로 아신을 짧게 훑더니 까닥 고개만 끄덕이고 마차로 휙 들어가 버린다. 찬바람 돌기가 제 아버지 못지 않았다. '씨 도둑질은 못한다더니..' 아마 공작의 어릴 때 모습이 딱 이러하지 않았을까. 흑발에 붉은 눈동자는 타란 공작 미니어처였다. 왕실 보물이라는 혈통 감별 마도구는 쓸 필요가 없겠다. 누구도 소공자가 타란 공작 핏줄이 아니라고는 절대 말 못할 것이다. '후우..내 팔자야. ' 그는 장거리 여행이라면 딱 질색이었다. 집과 로암만 왔다 갔다 하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에 지극히 만족하고 있거늘. 꽤 긴 여정을 저 썰렁한 꼬마와 마차 안에 마주앉아 갈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한숨이 났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무척 많이 자라셨습니다. 몰라 뵐 뻔 했어요. " 아신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분위기를 푼답시고 싱거운 소릴르 나불거렸다. 그답지 않은 짓이지만 계급이 깡패라고, 아신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타란 공작을 꼭 빼어 닮은 작은 타란 공작이 영 껄끄러웠다. 그리고 정말 몰라보게 자란 것은 사실이었다. '허어..8살이 뭐 이래. 서너살은 더 먹어 보이겠구만. 조카 녀석이 올해 10살인데 이보다는 작다고. ' 2년 전 6살 때에도 소공자는 기골이 장대했다. 그 때부터 이미 징조는 있었다. 여우새끼랑 호랑이새끼랑 아예 크기가 다른 것처럼. '이렇게 자라니 그런 덩치로 크는 거겠지. 아예 종이 다른가봐. ' ". ..어쩐 일이죠?" "예?" 한참 만에 열린 소공자의 입이 반가워서 아신은 반색했다. “날 데리러 올 군번은 아니잖아요.” “하..하하.” 그렇지. 그럴 군번은 아니지. 그 말이 8살짜리 입에서 나올만한 건 아닌 것 같지만. ‘날 기억하는 건 그렇다 쳐도..내 직위도 파악한다는 건가?’타란 공작가 핏줄은 뭔가 남다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면 억울하기도 하고 이해가기도 한다. 지금의 타란 공작을 봐도 그랬다. 기사로서 최고면서 머리도 좋았다. ‘원래 세상은 불공평하지. ’그걸 깨달았을 때가 그의 동심이 깨진 날이었다. “공작 전하 명이셨습니다.” 데미안의 눈이 조금 커졌다. 대체 왜?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도련님께서도 소식은 들으셨을 겁니다. 얼마 전 타란 공작가에 안주인이 들어오셨습니다.”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가 소식은 비교적 자세하게 전해 받는 편이었다. 장차 가문을 이어받으려면 제반 사정을 알아야 한다는 타란 공작의 뜻이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가문을 떠나 외부 소식과 단절된 기숙학교에 있었다고 해도, 그래서 몰랐다는 말 따위는 공작에게 통하지 않을 것이다. 데미안은 가문 소식을 적은 서신을 받으면 아예 달달 외워버렸다. “제 생각입니다만. 두 분이 모자지간이 되셨으니 가족으로서 서로를 알아야 한다고 판단하신 것 아닌가 합니다.” ‘모자지간이라고..?’데미안은 내심으로만 의문을 제기했다. 소년의 아버지는 그렇게 섬세한 사람이 아니었다. 공작이 돈독한 모자관계를 바랄 거라는 생각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아마 소년과 공작부인이 서로 물고 뜯어도 누구 한쪽이 죽지만 않으면 관심도 갖지 않을 것이다. “다른 말씀은 전혀 없으셨나요?” “아..그..도련님께서 어머니께 무례하지 않기를..바라셨습니다. 예를 다 하라고...” ‘그럼 그렇지. ’아신이 순화해 전달하지만 경고였다. 나대지 말고 얌전히 지내다 가라는 것이겠지. 아무리 후계라 해도 아직은 사생아. 괜히 공작부인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굳이 공작이 경고하지 않아도 데미안은 새어머니와 맞설 생각은 없었다. 혼적에 오르려면 공작부인의 동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예뻐요?” “예? 아..저도 몇 번 뵙지는 못한 터라..” ‘예쁘고 안 예쁘고는 한 번만 봐도 알 수 있는 거 아닌가. ’ 아신의 미적대는 대답에서 데미안은 결론을 내렸다. ‘그닥 미인은 아닌가보네. ’데미안은 새어머니에 대한 관심은 그걸로 접었다. 새어머니 입장에서 데미안이 결코 달가울 리 없고, 로암에서 지내는 동안 얼굴 몇 번 마주치면 그만일 것이다. 쥐 죽은 듯 얌전히 있을 것이다. 꼴 보기 싫어하면 눈에 띄지 않게 방에 박혀 지내고 어지간한 괴롭힘이라면 견딜 생각이었다. 공작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데미안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할 때가 되었으니 한 것이겠지. 냉정하고 필요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부친의 기질을 소년은 파악하고 있었다. 공작부인이 아이를 낳는다 해도 소공자 데미안의 지위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소년의 부친은 결코 좋은 아버지는 아니지만 그런 확고한 믿음은 주는 사람이었다. 데미안의 관심은 이제 학술원에 관한 것으로 온통 쏠렸다. 갑작스런 호출 때문에 이제 막 시작한 학기가 엉망이 되었다. 언제 다시 돌아갈지는 몰라도 초반 뒤떨어진 내용을 따라갈 일이 걱정이었다. 최악이면 이번 학기를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 ‘길어봤자 일주일이나 있으려나. ’오며 가며 버리는 시간을 포함해서 3주면 될 것이다. 돌아가서 뒤떨어지지 않으려면 헛된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된다. 마차의 짐칸에는 소년이 챙겨 넣은 책이 한가득 이었다.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타란 공작의 결혼 소식은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옮겨 사교계를 강타했다.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화제에 올렸다. 누구도 결혼식에 참석했다는 사람이 없으니 소문만 부풀고 사람들 호기심은 시들 줄 몰랐다. 퀘이즈 역시 그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돈과 시간을 쏟아 부었다. 공작부인이 된 여자가 공주라기에, 대체 누군가 싶어 조사를 시작했다. 아무리 뒤져도 나오는 것이 없었다. 정확한 정보는 이름과 나이가 전부였다. 공주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결혼하기 전 잠시 지낸 소궁에서 수발을 든 시녀들을 매수해 인상착의를 알아낸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점점 오기가 생겼다. 나름대로 부족할 데 없는 정보 인력을 가지고 있다 자부했는데 그들을 몇 개월 돌려도 정말 뭐 하나 걸리는 것 없이 깨끗했다. “이거 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아니고.” 퀘이즈는 어이가 없어서 탄식했다. 공주 찾기는 퀘이즈만 달려든 것이 아니었다. 왕실 정보부에서 나서서 비비안 공주가 지냈다는 별궁을 중심으로 조사가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시녀들의 명부 조작이 드러나 한바탕 궁이 뒤집어 지고 여관들이 책임을 지고 엄한 벌을 받았다. 12살까지 평민으로 살다가 궁에 들어왔다기에 어릴 때 살았던 마을에 사람을 파견했다. 공주의 모친과 친하게 지냈다는 사람조차 모녀에 얽힌 사정을 들어본 적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몇 개월 달달 뒤지고 뒤져서 겨우 공주 모친이 죽기 전에 궁으로 보냈다는 서신을 손에 넣었다. “여기도 단서는 없군..” 낡은 종이에 쓰인 짤막한 편지를 읽으며 퀘이즈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월 모일 왕과 동침했고, 공주를 낳았다, 라는 사실 관계 설명 외에 모친의 신분을 짐작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이름조차 쓰지 않았다. “설마..모친이 평민인가..?” 살짝 의심이 들었으나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노친네가 이 여자 저 여자 가릴 것 없이 마구 노는 것 같아도 취향은 있었다. 노동으로 굳은 살 박힌 손과 거친 피부를 지닌 평민 여자를 품었을 것 같지 않다. “크로틴 경. 정말 아는 거 없나?” 퀘이즈는 근접 호위로 늘 근처에서 떨어지지 않는 로이에게 몇 번째일지 모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없습니다. 알아도 몰라요.” 예의를 밥 말아먹는 말투는 언제 들어도 거슬려서 옆에 있던 부관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에 비하면 태자는 속으로는 어떤지 몰라도 겉으로는 표시내지 않았다. “딴 건 어쨌든 좋은데. 도대체 둘이 무슨 수로 만나서 결혼을 한 거냐고.” 궁금해서 죽을 것 같아! 충족되지 못한 호기심에 괴로워하는 퀘이즈를 보며 로이는 남모르게 히죽 웃었다. ‘난 알지. ’누군가 알고 싶어 발버둥치는 비밀을 혼자만 아는 일은 꽤 즐거웠다. “그러고 보니 크로틴 경. 내일 결투를 한다지.” “예.” 태자와 적대하는 파벌의 백작이 감히 태자에게 덤비지는 못하고 엄한 로이에게 시비를 걸었다. 늘 하던 말투로 퉁명스레 몇 마디 되받아 쳐줬더니 자길 모욕했다며 장갑을 내던졌다. 로이는 기꺼이 응했다. 지금껏 덤벼드는 놈을 피한 적 없었다. “살살해야 하나요? 내일 결투 말입니다.” 퀘이즈가 웃음을 터뜨렸다. “거 새로운 농담인가? 결투가 무슨 장난이야? 내 체면 생각할 필요 없으니 마음껏 싸우게.” 직접 나서는 것도 아니고 가문의 기사를 내보낼 것이면서 마치 제가 싸울 것처럼 으스대는 꼴이 정말 꼴불견이라 어찌 박살을 내줄까 벼르고 있었다. 분풀이는 대신 결투에 나선 기사가 감당해야겠지만 주인을 잘못 만난 것도 죄다. 다만 사고치는 건가 염려되어 태자에게 물은 것이다. 사고 치면 태자 체면이 문제가 아니라 주군께 맞아죽는다. “알겠습니다.” 허락도 받았겠다. 로이는 히죽 웃었다. 태자는 훗날 이 날을 잠깐 회상하곤 했다. 광견 크로틴의 시작이었다. 타란 공작의 결혼 소식을 듣고 꽤 많은 여자들이 속앓이 했다. 아니타는 그런 여자들과 달리 놀라긴 했으나 그저 조금 입맛만 썼다. 이미 3번이나 결혼한 전적 있는 그녀는 타란 공작과 결혼은 꿈도 꿔본 적 없었다. 잊지 않고 가끔 찾아주는 애인으로 만족했다. ‘언제고 새신부가 지겨워지면 그가 연락하겠지. ’여유를 갖고 기다렸으나 연락 대신 노란 장미가 배달되었다. 장미 다발을 앞에 두고 하루 종일 넋 놓고 있다가 열흘 넘도록 몸살을 앓았다. 간신히 몸을 추스르자 의문이 생겼다. ‘도대체 왜?’아무리 생각해도 실수한 것이 없었다. 절대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으며 어디 가서 대놓고 그와의 관계를 말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더 몸을 사렸다. 도무지 그의 결별 선언을 납득할 수 없었다. 단지 결혼했다는 이유로 애인을 정리한다고? 그는 절대 그런 양심적인 신사가 아니었다. 당장 그의 영지로 달려가 이유를 묻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아주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그의 결별 통보를 받고 수도 저택에 들이닥친 여자가 있었으나, 그 후 사교계에서 그 여자는 다시 볼 수 없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내린 결론은 공작부인이 된 비비안 공주였다. 새신부가 아니타의 존재를 알고 끊기를 종용했을 것이다. 어차피 그는 아니타에게 큰 미련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아내의 요구를 못 이긴 척 들어준 것이 분명했다. 아니타는 비비안 공주가 누군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만 알려 했다. 그런데 조금씩 드러나는 사실이 워낙 흥미로워서 어느새 아니타는 밤낮으로 비비안 공주 찾기에 골몰했다. 아니타는 어떤 정보부도 포착하지 못한 여자 특유의 시선으로 조사해 들어갔다. 가장 먼저 주목한 건 비비안 공주가 승전기념파티에 참석한 기록이었다. 별궁에 거의 갇혀 살아서 아는 사람 하나 없다는 공주가 사교 파티에 참석했다. 여자라면 누구나 의문을 가질 것이다. 드레스는? 화장은? 머리는?물속을 마구 휘젓다가 겨우 하나씩 건지는 것처럼 조금씩 비비안 공주에 대한 것들이 드러났다. 공주가 시녀 행세를 하며 빈번히 외출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드레스는 아마 직접 나가서 구한 것 같았다. 세상 물정 아무것도 모르는 공주님이 아니었다. 아니타는 테이블에 초상화 한 장 올려 두고 한참을 미동 없이 보고 있었다. 뒷돈으로 구한 비비안 공주 인상착의를 기반으로 제작한 초상화였다. 처음 봤을 때는 안심했다. 그의 취향과 거리가 멀었다. 그의 결혼이 단지 필요에 의한 것이라 결론을 내린 날은 모처럼 단잠을 잤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아니타의 마음은 초조함이 더해갔다. 그의 취향은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빠질 수도 있지 않을까. 사내란 새로운 것에 흥미를 갖기 마련이니까. 시녀 행세를 한 공주라는 특이한 점이 자꾸 신경이 쓰였다. ‘잠시 흥미를 가졌다 해도..금방 식을 거야. 언제고 그는 다시 찾아올지도 몰라. ’스스로를 다독이다가 다시 불안은 커졌다. 그는 노란 장미를 보낸 여자를 두 번 찾은 적이 없었다. 노란 장미를 받은 이후 아니타는 제대로 잠을 이루는 날이 거의 없었다. ‘그는 필요해서 결혼한 거야. 그는 여자를 사랑할 줄 모르는 남자니까. ’ 초상화 속 비비안 공주를 보며 아니타는 끊임없이 되뇌었다. 이 여자 저 여자를 오가며 정착을 못하는 그가 여자에 잡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거짓 소망이었다. 그녀의 오만이었다. 막상 그럴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녀는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거리며 뛰었다. 비비안 공주를 실물로 보고 싶었다. 그의 눈에 들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 불안을 가라앉히고 싶었다. ‘북부로 가서 그 모르게 확인만 하고 올까..?’게이트를 타지 않으면 수개월 마차여행을 해야 한다.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북부 게이트를 타려면 타란 공작 승인을 받아야 하고, 아무리 형식적인 승인 과정이라도 그가 혹시 알게 되면 뒷감당이 두려웠다. 언제고 두 사람이 수도에 올라올 테니까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이 나았다. ‘왜 시녀 행세를 했지? 궁을 나가서 뭘 한 걸까. 궁 밖에 애인이 있었던건...?’애인.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그녀의 비비안 공주 찾기 대장정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공주 얼굴만 확인하려 했던 처음 의도는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 -- 데미안 -- >로암 시내를 새카만 마차가 달려갔다. 거무튀튀한 목재로 만들어진 마차를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흑사자 문양이 그려져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까만색 마차가 신기해서 사람들은 이 마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가던 걸음을 멈추고 구경했다. 마차의 주재료로 사용된 흑목은 강철만큼 단단하면서 화재에 강해서 오래 전에는 군선의 재료로 사용되었다는데, 흑목 군락지에 병이 돌아 대부분이 고사(枯死)하는 바람에 지금은 흑목 가격이 같은 무게 금값을 뛰어넘었다. 휴고는 아내의 안전을 위해 흑목으로 마차를 만들어 주었다. 왕이나 탈 수 있을법한 마차를 타고 루시아는 종종 외출했다. 검은 마차가 달려가면 이제 사람들은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알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가도 얼굴조차 보기 힘든 높은 분이라서 마차가 지나가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마차가 도개교를 건너 성문을 들어설 때 고동 피리 소리가 울렸다. 루시아를 태운 흑목 마차는 계속 달려서 로암(성) 가장 깊은 안쪽 중앙탑 앞에 멈추었다. 고용인들은 안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모두 나와 있었다. 루시아는 승마를 마치고 돌아오면 늘 하던 것처럼 개운하게 목욕을 하고 응접실에 앉아 제롬이 타 주는 향긋한 차를 마셨다. “외출은 즐거우셨습니까. 마님.” “즐거웠어요. 에미리는 정말 착한 아이라서 서투른 내 지시를 잘 따라줘요.” 그녀의 애마 에미리는 휴고가 선물한 순하고 혈통 좋은 암말이었다. 말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생김새나 윤기 자르르한 털을 보면 좋은 말이라는 짐작은 할 수 있었다. 멋진 말이라고 칭찬을 들을 때마다 루시아는 어깨가 으쓱했다. “오늘은 누가 그러더군요. 에미리는 본인의 말 10마리와도 바꿀 수 없을 거라고. 에미리가 많이 비싼 말인가 봐요.” “예. 그런 편입니다.” 주인의 선물에 가격을 논하는 것은 예의가 없는 짓이라 제롬은 자세한 건 말하지 않았다. 루시아도 굳이 묻지는 않았지만 그가 마차며 말이며 귀한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보고 싶다..’ “언제 오실까요?” “예? 아..정확하지는 않지만 길어질 수 있습니다. 최대 한 달 까지는 생각하셔야 합니다.” “한 달이나. ..정확히 무슨 일이에요? 영지 일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전에는 그가 하는 일에 일부러 관심을 갖지 않으려 했지만, 이제는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었다. “일부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주인님께서 이번에 가신 일은 연례행사입니다.” 제롬은 주인께서 갑자기 자리를 비운 것은 사적인 이유가 절대 없으며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는 당위성을 강조하려 했다. 그는 공작부부의 극적 화해를 모르고 있었다. “마님께서도 북부 국경이 야만족과 닿아 있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그들은 구심점 없는 부족들인데 때때로 국경을 넘어와 약탈을 합니다. 주인님께서는 그들의 준동을 막기 위해 연 한 차례 토벌을 가십니다.” “그럼 매년 이맘때 항상 떠나는 일정이시겠군요.” “올해는 다른 해보다 이른 편입니다. 보통 초겨울 무렵 떠나시지요. 급전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그 동안 전쟁으로 신경을 못 쓰셔서 부쩍 약탈이 잦아졌다는 것 같았습니다.” “계속 불안에 떨어야 하는 북부 사람들은 힘들겠어요.” “국경에서 가까운 지역이 아니면 별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마시던 루시아가 짧게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세상에! 어떻게 그걸 잊고 있었지! 제롬. 오늘은 그 분 생신 아닌가요?” 예전에 제롬에게 물어서 기억해 두었던 그의 생일이 바로 오늘이었다. 계속 외우고 있었는데 그와 싸우느라 깜빡하고 말았다. “떠나시기 전에 내게 언질 좀 해주지 그랬어요. 생일인데 축하도 못 받고 야만족과 싸우고 계시겠군요.” 그가 너무 안타까워서 마음이 아팠다. “음..마님. 주인님께서는 따로 생일을 챙기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겠지요. 누가 본인 생일을 그렇게 챙기겠어요. 그건 주변에서 해주는 거예요.” “그게..언급하는 것도 싫어하십니다.” “...왜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다만, 주인님께서는 생일뿐만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일 같은 개인사를 떠올리기 싫어하시는 느낌을 종종 받았습니다.” 제롬은 결코 확신 아닌 추측이나 생각을 함부로 말하지 않지만 마님께는 아주 박박 긁어서 성심성의껏 답했다. ‘어린 시절에서 떠올리고 싶은 추억이 없다는 건가...’그건 참 슬픈 일이었다. 힘든 삶을 살았던 루시아에게도 절대적인 추억의 순간은 있었다. 12살 입궁 전까지 어머니와 살던 어린 시절은 넉넉지 못했지만 행복했다. 제롬에게 들었던 서쪽 탑에 얽힌 공작가 비극이 떠올랐다. 들을 당시에는 끔찍한 일이니까 생각하지도 말고 입에 담지도 말아야지, 하며 잊으려 애썼다. 그래도 서쪽 탑을 볼 때마다 떠오르곤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존속살인 자체보다 그 이면에 더 관심이 갔다. 죽은 공작은 분란을 막으려 아들 하나를 버렸다가 그런 최후를 맞이했다. 부모로서 하면 안 될 짓을 했으니 자업자득이었다. “제롬. 돌아가신 전 공작님을 뵌 적은 없다고 했지요?” “예. 저는 주인님께서 작위를 승계하실 무렵부터 모셨습니다.” “내 편견일지 모르지만 왠지 굉장히 냉혹한 분이었을 것 같군요.” 제롬은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단편적으로 들은 말에 의하면 마님 생각과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의 과거는 정말 평범하지 않구나. ’출산 후 곧 사망한 어머니는 얼굴도 모르고, 이버지는 이해득실을 따져 아들을 버렸다. 하나뿐인 형제는 혈육을 죽였다. 그가 그렇게 냉정하고 정 모르는 성격으로 자라는 건 당연했다. 오히려 그는 과거를 딛고 대단히 훌륭하게 잘 컸다. ‘갓난아이를 버리다니. 왜 그랬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돼. ’당장 문제가 발생한 것도 아니고 단지 분란의 소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갓 태어난 어린 아들을 버렸다. 그가 선택받아 공작가 후계로 자란 건 순전히 운이었다. ‘그가 버려졌다면..그가 죽은 형제의 입장이 되어 존속살인자가 될 수 있었겠지. ’수많은 귀족 가문들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끊임없이 후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지만 사생아마저도 입적해 키우는 마당에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는 없었다. 알려지면 만인의 지탄을 받을 짓이었다. ‘그는 타란 가문이 손이 귀하다고 했어. 손이 귀하면 쌍둥이를 더 귀하게 키워야지. ’ 앞뒤가 맞지 않았다. ‘데미안의 경우도 그래. 손 귀한 집안의 귀한 아들이잖아.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그의 후계였다. 엄하게 키우려고 기숙학교에 보낼 수 있다 쳐도 연락조차 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나치게 무관심했다. ‘아버지 정을 받고 자라지 못해 주는 법을 모르는 걸까?’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묘하게 이상한 것이 많았다. 끊임없이 속으로 묻고 답하며 점점 더 깊은 사고로 들어갔다. ‘그는 여자가 많았어. 사생아가 몇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지. ’꿈속에서 그에게 자식이 더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아이를 얻기가 워낙 힘들어서 데미안을 후계로 삼은 건가?’그러면 그가 루시아의 임신을 거리낄 이유가 없었다. 손이 귀할수록 가능한 많은 자손을 보는 것이 정답이다. 귀족들이 다산을 선호하고 자식들을 경쟁시켜 빼어난 후계를 골라내는 건 가문의 미래를 위해서였다. 단 하나뿐인 후계자는 무수한 위험을 내포했다. 그와 언쟁을 벌일 때는 감정에 휩쓸려 그의 말을 냉정히 분석할 수 없었지만 루시아는 찬찬히 그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 자식은 필요 없어. ][ 내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아. ]단지 후계 갈등을 저어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흔적’이라는 표현의 뉘앙스에는 근원적인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그럼 데미안은? 그가 원하지 않았는데 여자가 임신 사실을 알리지도 않고 낳았나?’가능성 없는 일은 아니었다. 억지로 아이를 떼는 것보다 차라리 출생이 여자 몸에 후유증이 적었다. 많은 사생아들이 그런 식으로 태어난다. 루시아 또한 그렇게 태어났다. ‘그가 정말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허술했을 리 없어.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의 좋은 면만 보고 싶지만 그가 냉정하고 잔인한 구석이 있다는 건 인정했다. 그가 정말 자식을 원하지 않았다면 강제 낙태를 시도했을 것이다. 겨우 낙태? 그는 그보다 더 심한 짓도 할 수 있을 걸. 그녀의 이성이 속삭였으나 무시했다. 어쨌든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의 가급적 좋은 면만 보고 싶었다. ‘아니야. 데미안이 태어났을 때 그의 나이를 따져보면..어린 나이니까 빈틈이 있을 수 있지. 그도 사람이니까 실수는 할 수 있어. ’지난 번 싸움으로 그의 내심이 얼마간 드러났기 때문인지 데미안이 사랑으로 태어났을 것 같지 않았다. ‘원하지 않았어도 태어난 아이는 죄가 없잖아. 그는 마치 데미안을 버려둔 것 같아. 대개 남자는 자기 혈육에 대해 진한 정을 느낀다는데..진짜 아들이 아니기라도 한 것처럼. .. “되는대로 마구 떠오른 생각 중 하나였지만 갑자기 어떤 강한 의혹이 확 그녀를 덮쳤다. ‘말도 안 돼. ’ “마님. 차를 더 올릴까요?” 제롬 목소리에 반짝 깨어나 손을 내려다보자 빈 찻잔을 쥐고 있었다. “아..그래요.” 찻잔이 차오르는 것을 보는 루시아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제롬. 소공자를..본 적 있지요?” 제롬은 움찔해서 루시아의 눈치를 살폈다. 이 분이 또 시작인가. 그런 표정으로 긴장했다. “..예.” “그 분과..많이 닮았나요?” “...예. 보시면 놀랄 정도로 아주 쏙 빼어 닮으셨습니다.” ‘내 비약이 너무 심했나. ..하긴 터무니없는 생각이지. ’혈육이 아닌데 후계로 삼아 무려 공작위를 물려준다는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치부하려 했으나 미진한 뭔가 자꾸 걸렸다. “데미안이 태어나는 걸 봤어요? 어떤 식으로 공작가에 들어오게 된 거예요?” 제롬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아무리 마님께 모든 것을 말하고 싶어도 한계치는 있었다. “송구합니다. 마님. 도련님에 관한 일은 함부로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주인님께 여쭈어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쉽지만 제롬을 다그쳐 곤란에 몰아넣고 싶지 않았다. 루시아는 한참을 생각했지만 뭔가 잡힐 것 같으면서도 아니고, 의혹은 있는데 뭐 하나 확실하게 결론 낼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날 저녁, 침실에서 잠들 준비를 하는데 하녀가 약을 가지고 들어왔다. 아직 치료법을 찾아내지 못한 안나는 여성 자궁에 이로운 보약 위주로 약을 올렸다. 한 모금 마시자 특유의 쌉쌀하고 떫은 약초맛이 났다. ‘그 약 맛은 꽤 독특했지. ’꿈속이지만 루시아는 당시 삼엽쑥에 중독된 몸을 치료하는 약의 맛을 기억했다. 상당히 독특했기 때문이었다. ‘바닐라향..그런 비슷한 맛이었어. ’ 다음 날, 점식 식사를 마치고 루시아는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마님!” 하녀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표정이 꽤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무슨 일이니?” “소..소공자님이..오셨습니다.”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주인을 닮은 소년을 보며 제롬은 애써 당혹스러움을 속으로 삼켰다. 그리고 소공자가 눈치 채지 못하는 선에서 맹렬하게 아신을 노려보았다. 아신은 찔끔하는 표정으로 슬쩍 시선을 피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련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정중히 인사를 하는 제롬은 여전히 흠잡을 곳 없었다. ‘당황하는군. ’데미안은 제롬을 멀뚱히 보며 생각했다. 정확히는 제롬의 완벽한 표정과 태도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제롬만 완벽하면 뭘 하겠는가. 주변에 늘어선 고용인들이나, 아까 성으로 들어올 때 맞이하던 근위 기사 표정이나 모두 얼굴에 쓰여 있었다. 네가 여기 어쩐 일이야, 라고. “오랜만이군요.” “먼 길 피곤하셨을 것 같습니다. 점심은 드셨습니까?” “아직이지만 나중에요. 흔들리는 마차를 계속 탔더니 속이 불편해요.” “예, 도련님. 그러면 쉬실 수 있도록 침실로 모시겠..” 제롬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 주변이 기이한 침묵에 휩싸였다. 데미안은 누군가의 등장을, 그리고 등장한 인물이 누구인 것까지 예상했다.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데미안도 고개를 돌렸다. 반쯤 열린 응접실 문으로 들어온 여자는 달려왔는지 어깨가 조금 들썩거렸다. 갈색 머리카락의 여자는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 보이고, 자그마했다. 그녀의 등장에 모두 숨을 죽이고 긴장했다. ‘저 여자인가...’타란의 안주인. 공작부인이며, 소년 데미안의 새어머니였다. ‘우와...’소공자가 왔다는 하녀 말에 그대로 달려왔다. 데미안을 보자마자 루시아는 감탄했다. ‘이렇게 닮을 수가 있을까. ’제롬의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 이목구비 생김새가 마치 공작을 찍어 작게 축소해 놓은 것 같다. 누가 그의 아들이 아니라고 의심할 수 있을까. ‘기가 막히겠지. 설마..후계로 공표한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데미안은 커진 눈으로 자신을 보는 공작부인을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막 결혼했는데 남편에게 사생아가 있다니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이후 공작부인이 취할 예상 행동을 나열해 보았다. 충격으로 굳어서 그냥 노려본다, 화가 나서 나가버린다, 혐오를 담아 벌레처럼 바라본다, 다짜고짜 일단 뺨 한 대 친다. 이것들은 하책이었다. 이런 반응을 보일 공작부인은 그다지 걱정할 필요 없다. 침착하게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다, 웃으며 아들로 대접해준다. 이건 상책이었다. 공작부인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그건 아주 좋지 않았다. < -- 데미안 -- > “처음 뵙겠습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데미안입니다.” 데미안은 공작부인에게 다가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반가워요.” 순한 어조의 대답에 데미안은 흘끗 시선을 들었다. ‘너무 충격을 받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걸까?’공작부인의 노란빛이 도는 눈동자 속에 그다지 적대감이나 혐오감은 없었다. 감정을 완전히 갈무리할 수 있을 정도의 고단수일지 모른다. 아직은 판단할 수 없었다. 겉모습만으로는 소년이 예측한 이미지와 달랐다. 공주라기에 오만하고 기품 있는 귀부인을 상상했다. 오만과 기품보다는 순수와 온화 쪽이었다. 예쁘냐 질문에 얼버무리던 아신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예쁜데...’ “마님. 도련님은 오랜 마차 여정 때문에 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아. 쉬어야지요. 마차 여행이 얼마나 고단한지 알아요. 시간이 점심때인데 식사는 어떻게 했어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럼 저녁까지 계속 빈속인데 그러면 안 돼요. 한창 성장기인데. 집사. 간단하고 속에 부담 없는 것으로 준비해서 들여요. 저녁 식사도 소화 잘 되는 요리로 준비하고.” “예. 마님.” 잠시 말없이 루시아를 바라보던 소년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하인을 따라 나갔다. 소년이 간 방향에서 눈을 못 떼며 루시아는 두 손으로 발그레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쌌다. ‘아. 세상에. 너무 귀여워. ’그 남자의 축소형이었다. 루시아가 보지 못했던 그의 어린 시절이 저기 있었다. 이목구비 생김새 뿐 아니라 무뚝뚝하며 차가운 표정도 판박이었다. “마님...?” 마님이 충격 받았을까 염려했는데 휙 고개를 돌려 돌아보는 마님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제롬. 8살이라면서요.” “맞습니다. 타고난 기골이 남다르십니다.” “그렇군요..하긴 그 분 아들이 작다는 게 말이 안 될 것 같아요.” “괜찮...으십니까?” “뭐가요?” “...아닙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귀여운 아이 같아요. 착해 보이고.” “.... 예???” 도련님은 절대 귀엽다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았다. 갓 태어나 아주 어린 시절에는 잠깐 그럴 때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절대 지금은 아니었다. 그리고 착하다니. 어딜 봐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공작을 그대로 닮지 않았나. 마님의 눈이 의심스러웠다. “저녁 같이 먹자고 하면 불편해 할까요?” “..마님께서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불편하긴요. 저녁 식사 시간이 기대되네요.” 발랄하게 응접실을 나가는 마님을 보며 제롬은 생각했다. 보통의 사람이 대처하는 자세와 완전히 동떨어졌다. 결혼한 지 몇 개월 안 된 신혼인데 다 큰 아들이 나타난 비극적 상황이었다. 마님의 반응은 절대 정상이 아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걸까. 어쩌면 마님은 조금은 철이 없는 분일지도 모른다. 제롬은 집사업무실로 아신을 끌고 들어갔다. 시선을 피하려 눈동자가 이리 저리 허공을 배회하는 아신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아신 경.” “뭐 말이오?” “도련님을 모시러 간다는 것을 왜 제게 언질해 주지 않았습니까?” “그야 뭐..이미 아는 줄 알았지.” “그런 생각이 들어도 저, 혹은 마님께 말씀드려야 하는 겁니다.” “...전하께서 그러라는 지시가 없으시기에...” 제롬은 뒷목을 잡았다. 이제 막 행정관이 된 초짜도 아니고 서기관씩이나 되는 자가 할 말인가. 아신 정도 경력이면 공작의 성정이 어떤지 파악하고도 남았다. 공작은 과정 없이 결정만 내려 명령하는 경우가 많고, 한 사람에게 만이라도 말을 꺼냈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수하들끼리 의사소통이 되었는가 여부는 관심 없었다. 소통이 안 되어 문제가 발생하면 전부 그들 잘못이었다. 그래서 공작가 가신들은 자기들끼리 종종 짧은 모임을 갖고 서로 알고 있는 사실들에 구멍은 없나 점검하곤 했다. “아신 경에게 그런 것까지 일일이 짚어줘야 합니까?” 다른 데에선 빠릿빠릿한 아신은 이상하게 가끔가다 공작과 관련된 일에서 융통성이 바닥을 쳤다. 제롬이 더 왈왈거리기 직전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빠끔히 문이 열리더니 파비안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뭔 일이야? 오, 아신 경. 오랜만입니다.” “파비안. 오랜만일세. 그럼 형제간 우애를 나누시게나. 난 이만..” 두 사람은 잠깐의 악수를 나누고 가볍게 어깨를 두드렸다. 인사가 끝나자마자 살아난 길 찾았다 싶은 아신은 쏜살같이 몸을 내뺐다. “왜 그래?” 제롬이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별 일 아니야. 지금 주인님께서 안 계신데 어쩐 일이야? 야만족 치러 가셨다는 소식 전달 못 받았어?” “알아. 다른 거 명 받아서 왔어. 도련님 오신 것 같던데.” “조금 전에.” “표정이 어째 안 좋네. 마님께서 많이 언짢아 하셔?”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언짢아하시기는. 얼마나 좋아하는지 발걸음마저 가벼워 보였다. 말해봤자 파비안이 뭔 헛소리냐 하는 눈으로 볼 것이라 설명하기는 포기했다. “갑자기 입적 서류 가지고 오라 하시기에 뭔 일인가 했더니 도련님이 오셨군.” “...입적 서류?” “마님께서 동의는 하신 건지 모르겠네. 두 분은 요즘 어때? 전하께서는 아직도 신혼 놀이 중이신가?” “말조심 해.” 제롬이 매우 불쾌한 듯 인상을 팍 찡그리자 파비안은 머쓱해서 어깨를 으쓱했다. “수도는 별일 없지?” “그 동네는 늘 별일이 있지.” 파비안은 얼마 전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을 떠올렸다. 태자의 호위 중인 로이 크로틴이 백작 가문 기사 하나를 반죽음 만들었다. 정당한 결투라면 뭐가 문제냐 싶겠지만 이게 참 애매했다. 실력으로 누른 건 맞지만 방법이 논란이었다. 로이는 검을 뽑지도 않고 기사를 도발했다. 내가 검만 뽑게 만들어도 패배를 인정한다며 상대 기사 뚜껑 열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덤비는 기사를 검집 채 아주 녹신하게 두들겼다. 그 소식을 듣고 파비안은 처음에 어이가 없었다가 나중에는 배를 잡고 웃었다. 저가 주군께 당한 걸 남에게 분풀이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과연 정당한 결투인가 논쟁이 발생했다. 백작 쪽은 그게 무슨 결투냐고 방방 뛰고, 로이 배후의 태자 쪽은 실력으로 졌으면 찌그러져라 비웃었다. 로이는 단번에 사교계 관심의 핵으로 급부상했다. 파비안은 그런 상황이 몹시 재미있었지만 제롬에게 말해봤자 별로 즐거워할 것 같지 않아서 그냥 혼자만 알기로 했다. “아. 요즘 소문 하나가 돌더라. 전하께서 지참금으로 내어 준 광산 얘기.” “그게 왜 소문으로 돌아?” 지참금은 마땅히 주고받은 양쪽만 알아야 하는 사적 비밀이었다. 받은 입장은 얼마 받고 딸을 판 것이고, 준 입장은 돈 내고 아내를 사온 격이라 체면을 위해 거론하지 않는 것이 마땅한 예의였다. “왜 돌겠냐. 말할 사람 뻔하지. 왕이 어디서 자랑삼아 말 했다가 퍼졌겠지.” “나 참.” 주책없는 왕을 향해 형제는 혀를 찼다. “아무튼 그래서 별별 소문 다 돌고 있어. 마님이 쳐다만 봐도 남자가 반하는 미녀라서 공작께서 한 눈에 반해 광산을 통째로 내주고 누구도 못 보게 영지로 끌고 갔다고들 하지.” 솔직히 마님이 그 정도는 아니잖아? 말하며 킬킬대는 파비안을 노려보며 제롬은 혀를 찼다. “마님 정도면 미인이시지.” “...뭐 잘못 먹었냐?” “흠흠. 사람들 근거 없이 입 놀리는 건 문제야. 이거 곤란한데...” “뭐가 곤란해. 전하께서는 소문 같은 거 신경 안 쓰셔.” 과연 그럴까. 제롬은 주인께서 마님 관련한 소문에 무관심하지 않을 거라고 예감했다.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오래 한숨 자고 일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밖은 환했다. 데미안의 침실이 위치한 곳은 중앙탑의 연결건물 중 하나로, 원래 목적이 공작의 자식들 양육공간으로 건축된 곳이었다. 최대 10명 아이들이 지낼 수 있도록 침실에서 학습실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넓었다. 기숙학교로 떠나기 전까지 소년의 침실이었던 2층 방에서 창밖을 내다보자 아래 펼쳐진 정원이 꽃으로 울긋불긋했다. ‘공작부인의 작품인가...’꽃은 이 삭막한 공작가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어색함은 없었다. 바람을 타고 은은하게 향기가 올라왔다. 평소 꽃에 대해 좋거나 싫거나 감정은 없었는데 정원 가득한 꽃이 보기는 좋구나, 라고 생각했다. 데미안은 정원으로 나왔다. 훨씬 더 짙은 향기가 훅 밀려들었다. “데미안.” 소년은 자신의 이름이 이렇게 달게 들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우뚝 멈추어서 다가오는 공작부인을 바라보았다. 몹시 반가워하는 공작부인을 보며 소년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반가워하지?’ “푹 잤어요? 일찍 일어났네. 배고프지는 않아요?” 부드럽고 맑은 목소리였다. 사근사근한 음성에는 호의가 잔뜩 담겼다. 데미안은 바싹 경계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어마어마한 고단수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혹시 내가 방해했나요?” “아닙니다.” 데미안은 친모에 대한 기억이 없고, 학술원의 재학생이나 교수나 모두 남자였다. 주방일이나 잡일을 하는 여자들은 중년 여자들이었다. 고용관계가 아닌 젊은 여자와 대화를 나눈 적이 없어서 영 껄끄러웠다. “...정원이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잔뜩 꽃만 심어 놨는데 괜찮아 보인다니 다행이네요.” “편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음. ..그래? 난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그게 편해?” “예.” “알았어. 산책하는 중이면 같이 잠깐 걸을까?” “.... 예.” 말없이 정원 소로를 따라 거닐며 루시아는 계속 소년을 흘끔거렸다. 정말 볼수록 신기했다. 그가 보고 싶었던 마음이 데미안을 보며 얼마간 충족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딱딱하고 정중한 말투까지도 어쩐지 그와 닮았다. “기숙학교에 있다고 들었어. 방학인거니?” “...방학은 없습니다. 외출은 할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다녀가라고 하셔서 온 겁니다. 공작부인께 인사를 드리라 하셨습니다.” “아....” 데미안은 그녀에게 확연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루시아도 그것을 느꼈다. ‘하긴 단번에 어머니라 불렀으면..음. ..좀 징그러웠을 것 같기는 하고..’귀족아이들은 철이 덜 들었을 때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오만방자하고 되바라진 경우가 많았다. 철들어도 여전한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나이가 들면 속마음대로 표현하지 않는 법을 배워서 겉으로는 의젓한 척 할 수 있었다. 데미안은 이제 8살이면서 기사처럼 군기가 잡혀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이 그대로 아이다워 보이기도 했다. ‘기숙학교의 위력인가. 모든 귀족아이들을 기숙학교로 보내는 것도 괜찮겠는걸. ’그녀가 그런 생각을 관철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건 이 땅의 모든 귀족 아이들에게 천운이었다. “데미안. 솔직히 말해서 널 당장 아들로 생각하기는 힘들어.” 이렇게 직설적일 수가! 데미안은 놀라 걸음을 멈추고 루시아를 보았다. “너도 그렇지? 날 어머니라고 생각하기 힘들잖아.” 이런 수법은 예상 못했는데! 데미안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슨 실수를..” “아니야. 나무라는 게 아니라. 당연하다고 말하는 거야. 우리는 이제 막 만났고, 서로를 모르니까 낯선 것이 당연해.” 그 남자보다 작은 붉은 눈이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루시아는 막 세상을 처음 배우는 어린 짐승을 떠올렸다. 처음 보는 존재를 탐색하는 것처럼 털을 앙증맞게 세우고 있었다. 휴고라는 거대 맹수의 시선에 익숙한 루시아가 보기에 데미안은 캬릉거리는 것에 불과했다. ‘귀여워. 귀여워. ’그녀의 손이 꼼지락거렸다. 소년의 볼을 살짝 꼬집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괜히 소년이 더 경계할까봐 루시아는 자제했다. “너와 난 겨우 10살 차이야. 내 나이를 따져보면 10살에 아이를 낳았다는 건데, 그럼 네 아버지는 범죄자가 되는 거지.” 데미안은 가볍게 터져 나올 뻔한 웃음을 얼른 삼켰다. “그러니까 우리 조금씩 친해보자. 딱딱하게 공작부인이라 부르지 말고 이름으로 불러. 루시아. 내 어릴 적 이름이야.” “.......” “앞으로 잘 지내보자. 데미안.” 케이트와 어울리며 루시아는 많은 부분에서 감화를 받았다. 근본적인 성격이 바뀌기는 힘들지만 당당한 케이트의 말투를 좋아해서 조금씩 닮아가고 있었다. 데미안은 악수를 청하며 루시아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공작부인이 바라는 것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왜 굳이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려는 걸까. 데미안은 공작부인에 비해 철저한 약자였다. 나이는 어리고 사생아였다. 장차 공작부인이 아이를 낳으면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공작부인이 관계 개선을 시도할 이유가 없었다. “힘들겠니?” “...아닙니다.” 데미안은 공작부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지만. ..아직 상대의 수를 읽을 수 없으니 일단 받는 수밖에. ’데미안은 비록 나이는 어려도 적의를 보이지 않는 상대에 오히려 이를 드러내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웃음으로 칼을 감춘다면 자신도 그리 할 것이다. 아직 데미안은 어리고 힘이 없었다. 숨죽이고 바싹 엎으려 있을 때였다. ‘쉽게 친해지기는 힘들겠네. ’데미안은 제 딴에는 감추고 있다 생각하겠지만 나름 이런 저런 삶의 경험이 많은 루시아 눈에 어린 아이가 세우는 경계심이 빤히 들여다보였다. 지금 너의 적이 아니라 말해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주변에 보듬어 주는 어머니 없이 부친의 따뜻한 관심을 받지 못하는 사생아의 처지는 누가 봐도 녹녹치 않았다.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을 거야. 사람의 진심은 언젠가는 보이는 법이니까. ’그를 사랑하는 만큼 그의 아들도 사랑해 주겠다고 루시아는 생각했다. < -- 데미안 -- >외출하고 돌아오는 안나의 양 손에는 끈으로 묶은 책이 잔뜩 들렸다. 그녀는 요즘 마님의 치료법을 찾기 위해 골몰하고 있었다. 책방을 싹 뒤져서 온갖 약초 관련 서적을 수집하고 책방 주인에게 언제든 관련 서적이 들어오면 연락 달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성문을 지나 성 안으로 들어오면서 안나는 저만치 지나가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중년 부인, 도로시를 발견했다. 큰 소리로 불러서 인사를 하려는데 도로시가 어떤 남자를 붙들고 호들갑스럽게 아는 척하며 허리를 굽실거리는 바람에 멀뚱히 지켜보았다. ‘차림새로 봐서는 높은 사람 같지는 않은데..’그들이 헤어지자 안나는 도로시에게 다가갔다. “누구에요? 처음 보는 사람 같은데.” “처음 봐요? 하긴. 워낙 역마살 든 분이라서. 공작가 주치의에요.” “공작가 주치의? 그런 분을 왜 뵌 적이 없을까요.” “성에 잘 안 계시거든요. 몇 년 소식 없다가 돌아오셨는데 며칠 머물고 다시 떠나셨어요. 이번에는 거의 두세 달 만에 오신 거예요. 또 언제 떠나실지 모르죠.” “주치의가 그렇게 자리를 비워도 돼요?” “우리 공작님이 워낙 튼튼한 분이라 의사가 필요 없으시지요. 가장 한가한 사람이 공작가 주치의라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해요. 그래도 저 분 실력 의심하는 사람은 없어요. 다 죽어 간 우리 막내 녀석도 저 분 덕에 살았거든.” 안나는 대화를 나누면서 필립이 사라진 방향을 계속 흘끔거렸다. 다음 날 안나는 필립의 거처를 찾아갔다. 외벽 안의 구석에 자리 잡은 나무집이었다. 집 주변에 키 큰 나무가 둘러져 있어서 이곳만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주치의는 비상시에 가장 빨리 달려갈 수 있어야 했다. 안나가 머무는 곳은 그래서 내성 안에 있었다. 공작가 주치의라면서 늘 자리를 비워 여행을 떠나고, 공작은 찾지 않고, 거처는 멀리 떨어져 있고. 아무래도 무슨 속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안나는 마침 뜰에 의자를 내어놓고 앉아 있던 필립을 발견했다. “안녕하십니까. 필립 경 되시지요. 전 공작부인의 주치의 안나라고 합니다. 공작가 주치의가 계시다기에 인사드릴 겸 찾아뵈었습니다.” 어쩐지 묘한 분위기의 노인은 탐색을 하는 것처럼 천천히 안나를 살펴보더니 인상 좋은 미소를 지었다. “반갑습니다. 필립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저도 안나라고 불러주세요.” “귀한 손님이 오셨군요. 들어오시지요. 차를 내오겠습니다.” 필립의 호의적인 반응에 안나는 조금 긴장했던 마음을 풀고 뒤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차를 마시면서 아무 의미 없는 신변잡기적인 인사를 몇 마디 나누다가 그들의 대화는 점점 의학 관련 내용으로 흘러갔다. 둘 다 의사이니까 하루 종일이라도 함께 떠들 수 있는 공통 화제를 가진 셈이었다. 안나는 대화를 나누며 2가지에 감탄했다. 필립 몸에 밴 정중하고 기품 있는 태도와 그가 지닌 의학적 지식이었다. 남작이라는 귀족 신분과 의사라는 직업 신분 둘 모두 나무랄 데가 없었다. 아무래도 의사인 안나는 필립의 우수한 의학 지식에 더 마음이 쏠렸다. ‘이 분은 명의야. ’필립의 식견은 감히 안나가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의사는 대개 자기만 아는 독특한 치료법이나 병에 관한 지식 몇 가지를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운을 떼면 필립은 모르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더 쉬운 치료법을 제시해 주었다. ‘이 분이라면..마님 증상을 알지도 몰라. ’원래 처음부터 안나의 목적은 마님 증상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님의 병은 일반 병과 다르게 개인적 비밀이었다. 환자의 비밀을 엄수해야 한다는 의사의 양심이 자꾸 걸렸다. 아무리 같은 곳에 적을 둔 주치의끼리라고 해도 선뜻 증상을 말할 수 없었다. 다른 환자라 둘러대 봤자 안나는 공작부인의 주치의였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었다. 안나는 결국 의학 공부만 실컷 하고 필립의 거처를 나섰다. 필립을 만나고 돌아온 안나는 제롬의 호출을 받았다. “드릴 말씀이 있어 오시라 했습니다. 오늘 필립 경을 만나셨더군요.” “절..감시 하신 건가요?” “아. 오해하지 마세요. 감시는 안나가 아니라 필립 경 쪽이니까요.” 예전에 필립이 내성에 들어오려는 것을 저지한 일을 공작이 듣고 상당히 불쾌함을 표했다. 주인이 대놓고 기분을 드러내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뭔가 있구나, 제롬은 판단했다. 제롬은 필립 주변에 더 촘촘히 감시의 눈을 붙였다. 제롬이 붙인 감시는 얼마 전 필립이 로암(도시)에 돌아오는 순간부터 발동했다. 제롬은 모르는 일이지만 필립을 감시하는 또 다른 눈이 있었다. 그들은 데미안 곁에 숨어 있는 호위들로 그들 임무 중 하나는 필립의 접근을 막는 것이다. 데미안이 로암에 왔기 때문에 현재 필립은 2중 감시를 받고 있었다. “만나지 말라는 건 아닙니다.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도 말할 필요 없습니다. 다만 필립 경을 마님과 만나게 하거나, 언급도 하지 말아 주세요. 마님께서 필립 경의 존재를 모르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왜 그래야 하냐고 안나는 묻고 싶었다. 납득할 수 없는 것들이 많지만 안나는 일개 주치의였다. 위에서 하라면 해야 하는 것이다. “만나는 건 상관없다고 하시면..필립 경이 유능한 의사시더군요. 마님 치료를 위해 치료법을 조언 받는 것은 괜찮은가요?” 제롬은 잠시 생각했다. “그 정도면 괜찮습니다. 다만, 그건 오직 안나의 치료라고 마님은 알고 계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위에서 주시하는 감시대상과 만나는 건 영 껄끄러운 일이라 안나는 며칠 필립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러다 필립이 또 훌쩍 여행을 떠나면 만날 일이 요원해진다 생각하자 초조했다. 결국 다시 필립을 만나러 갔다. “안나. 어서 와요.” 필립은 무척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듯 살가운 표정을 지었다. 안나는 오면서 내내 불안했다. 어떤 사람이기에 위에서 감시하는 건가, 큰 죄라도 지었나, 괜히 나까지 말려드는 건 아닐까 전전긍긍했으나 필립의 환대에 괜한 죄책감이 들었다. ‘죄를 지었다면 그냥 감시만 하진 않았겠지. 필립 경은 주치의지만 남작이기도 하니까 뭔가 정치적인 문제일거야. ’안나는 그 후로 꾸준히 필립을 찾아갔다. 의사에게 지식은 곧 재산이나 마찬가지인데 아낌없이 가르침을 주는 필립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필립 역시 늘 혼자였다가 대화가 통하는 친구가 생기자 생활이 한결 즐거워졌다. 다시 곧 떠나려던 생각을 접고, 안나와 대화를 나누고, 가끔은 함께 성을 나가 빈민들에게 의료 봉사를 했다. 두 사람 관계는 거의 스승과 제자 비슷하게 굳어갔다. 데미안이 온 이후 로암의 평온함은 여전했다. 루시아의 생활도 달라지지 않았다. 낮에 정원을 돌보고 저녁에는 서재에서 책을 읽었다. 마님이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자 조금 긴장했던 고용인들도 평소로 돌아갔다. 데미안은 열심히 공부 중이었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서 책만 들이팠다. 소년에게 학술원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끈이었다. 절대 놓을 수 없었다. 삼매경에 빠져 있던 소년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잠시 후 하인이 들어와 문치에 서서 말했다. “도련님.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알았다.”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지 모르고 있었다. 데미안은 미련 없이 책을 덮고 일어났다. 방을 나서서 식당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하루 2번. 점심과 저녁 식사를 공작부인과 함께 했다. 그저 같이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뿐인데 데미안은 갈수록 그 시간을 기다렸다. 식당에 도착하자 아직 아무도 없었다. 자리에 앉아 기다리다가 루시아가 들어오자 데미안은 얼른 일어나 의자를 빼내 루시아가 앉도록 도와주었다. “고마워. 데미안.” 루시아가 미소 지으며 인사하자 데미안은 고개만 살짝 꾸벅이고 제 자리로 가서 앉았다. 식사하는 내내 조용했다. 식사하면서 그들 사이에 대화는 거의 없었다.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데미안은 아이답지 않게 과묵했고, 루시아 역시 수다스러운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루시아도, 데미안도 함께 있는 침묵이 불편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식사를 하던 중에 데미안이 실수로 포크를 떨어뜨렸다. 얼른 하녀가 다가와 새로운 포크를 놓았다. 작은 실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매끄럽게 흘러갔다. 데미안은 날래게 움직인 하녀를 흘끔 보았다. 자신을 대하는 고용인들의 태도가 부쩍 조심스러워 진 것을 느끼고 있었다. 기숙학교에 가기 전에 데미안에게 무례하게 구는 고용인이 있었다는 건 아니다. 사생아다 어쩌다 말이 많아도 고용인 입장에서는 까마득히 높은 분이었다. 그러나 의무만 다하는 딱딱한 기계적인 모습이었는데 그 때에 비교하면 좀 더 적극적으로 시중을 들어주려는 모습을 보였다. 데미안은 모두 공작부인 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작부인은 데미안에게 호의를 감추지 않았다. 고용인들도 보고 듣는 것이 있으니 한결 데미안에게 조심히 행동했다. 데미안이 공작부인과 마주치는 시간은 하루에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 시간을 공부 하느라 식사 시간과 그 후의 산책 정도였다. 공작부인의 호의는 과도하지 않았고, 데미안의 속내를 끄집어내려 하지 않았다. 그 점이 갈수록 데미안의 경계를 누그러뜨렸다. 만약 데미안이 조금 더 나이를 먹었다면 더 마음이 꽉꽉 닫혀 있었겠지만 이제 겨우 8살이었다. 정이 그립지만 그게 뭔지 배우지 못한 어린 소년이었다. 저녁 식사 후 정원 산책을 서로 함께 하자고 말 한 적 없지만 자연스럽게 같이 걷고 있었다. “대부분 시간을 공부에 열심이라지. 기특하네.” 데미안의 귀 끝이 약간 붉어졌다. “학술원에 돌아가면..뒤처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방학이 아닌 외출이라고 했지. 그 외출은 아무 때나 나올 수 있는 거야?” “허가를 받아야 하고 연 30일로 제한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안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언제 오실지 알 수가 없어서 30일 안에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데미안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30일 제한은 큰 문제없을 것이다. 공작가는 그 정도 문제쯤은 얼마든지 무마할 수 있을 테니까. 다만 이래서는 이번 학기가 날아가게 생겼다. “데미안. 왜 아버지라고 안 부르니?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하셨어?” “...그건 아닙니다. 싫어..하실 것 같아서..” “왜 그렇게 생각해. 그건 네 지레짐작이잖아. 아버지라고 불러드려. 절대 싫어하지 않으실 거야.” “.......” “그리고 데미안. 내 이름도 안 불러 주더라. 일부러 호칭 생략하는 거 내가 모르는 줄 알았지? 나 부를 때 저기, 여기요. 이러는 거 아니지?” 소년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불러줘. 나도 데미안이라고 부르잖아.” “...예.... 루시아.” 한참을 아무 말 없던 데미안이 불쑥 말했다.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제가 밉지 않으십니까?” “안 미워.” 잠시의 틈도 없이, 루시아는 일상적 대화처럼 가볍게 답했다. “내가 널 미워한다고 생각하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말이 어딨어. 미워하는 감정은 상대방을 상처 입히는 만큼 본인도 괴로운 거야. 왜 그런 쓸데없는 감정으로 나를 괴롭히니? 난 널 미워하지 않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 없어.” “.......” 하지만 공작부인이 아이를 낳고, 그 아이 앞길에 방해가 된다면 그 순간부터 소년에 대한 호의는 악의로 변할 것이다. 데미안은 공작부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데미안. 난 결혼할 때부터 이미 너를 알고 있었어. 널 인정하는 조건으로 네 아버지는 나와 결혼을 하신 거란다.” 믿을 수 없다. “그 분은 아마 다정한 아버지는 아닐 거야. 그렇다고 그 분이 널 미워한다고 생각하지는 말렴. 표현에 서툰 분이야. 널 미워했다면 후계로 삼지도 않으셨을 거야.” 믿을 수 없지만. 데미안은 믿고 싶어졌다. 누구도 소년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천박한 사생아에 대한 경멸과 못마땅함, 아버지의 차가운 시선 속에 담긴 무관심 속에서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 루시아의 다정한 위로는 데미안의 마음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아버지를 미워하니?” 미움. 감히 그런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데미안은 제가 가진 것들이 얼마나 분에 넘치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귀족 아닌 생모를 둔 사생아 주제에 고위귀족 아버지에게 인지 받아 무려 공작가 차기 주인 자리를 내정 받았다. [ 졸업만 해. 그럼 이 자리는 네 거다. ] 공작은 데미안을 기숙학교에 보내면서 오직 그것만 조건으로 내밀었다. 터무니없이 쉬웠다. 무서운 아버지 덕에 소년을 못마땅하게 보는 시선은 많아도 직접적으로 해를 입히려는 사람은 없었다. 타란 혈족이라고는 공작 외에는 오직 데미안뿐이라 경쟁자도 없었다. 불만을 품는 건 주제 모르는 짓이었다. “...아닙니다. 존경하는. ..분입니다.” 소년이 재학 중인 기숙학교는 각국의 귀족이나 왕족이 모여드는 명성 높은 학술원이었다. 재학 시스템이 학생 별 맞춤이라서 데미안처럼 장기 기숙생활을 하는 학생이 있는가하면 가장 짧게는 2년 과정까지 매우 다양했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드는 사람들 중에 제논의 타란 공작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얼마 전 마무리 된 전쟁에서의 활약은 오히려 고국인 제논보다 다른 나라, 특히 적국에서 더 유명했다. 기사들에게는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다고 들었다. 데미안은 아버지가 너무 대단해서 감히 올려다 볼 수도 없었다. 학술원에서 데미안은 출신국은 물론이고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지냈다. 공작이 숨기라 한 건 아니었다. 데미안은 그런 대단한 사람 아들이 고작 너냐는 시선을 받을까봐 그게 겁났다. 소년의 목표는 오직 무사히 후계로 지위를 굳건히 해서 언젠가 공작위를 이어받는 것이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 공작이 되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등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자신은 그저 작위를 이을 후계로서만 필요할 뿐이니까 그 정도 쓸모도 없어 버려질까 두려웠다. 아버지의 애정은 바라지도 않았다. 아주 조금만 인정받는 것으로 족했다. 아주 쓸모없지는 않구나, 그 정도로만 봐주어도 바랄 것이 없었다. “그래. 아들이 아버지를 존경하는 건 바람직한 일이야.” 루시아는 내내 가슴에 뭔가 얹혀 있던 것이 쑥 내려가는 것 같았다. 타란 가문의 비극적 사건이 껄끄럽고, 두 부자 사이가 그다지 친밀하지 않은 것 같아서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다. “어떤 점을 존경해? 대단한 기사라서? 넓은 북부를 다스리는 능력 있는 영주라서?” “...강한 분이니까요.”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지만 루시아는 동의했다. 정답이었다. 루시아는 하늘 아래 그보다 강한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육체도 정신도 강인한 그는 기대고 싶은 남자였다. “그래. 그는 강한 사람이지.” 단단하고 굳건하게 서 있는 거대한 나무처럼. 그 밑동에 몸을 기대고 그늘에 숨고 싶을 만큼. “데미안.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니?” “네.” “될 수 있을 거야. 네 아버지 아들이니까.” “.....네.”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와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에 섞인 꽃향기가 아득할 정도로 달콤해서 데미안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말없이 걷는 그들 입가에는 미소가 올라와 있었다. 오늘도 평온한 하루였다. < -- 데미안 -- >데미안이 온 이후 잠시 뜸했던 승마를 다시 시작하려고 나갈 준비하는 중에 케이트가 방문했다. 두 사람은 가벼운 포옹으로 인사를 나눴다. 케이트는 그 동안 종조모인 코르잔 백작부인의 병수발을 드느라 한 동안 오지 못했다. 노환인지 부쩍 기력이 약해진 마담 미셀은 계단에서 넘어져 크게 발목을 접질렸다. 거의 움직이지 못할 지경이라 가장 어여뻐 하는 조카 케이트를 간병인으로 낙점했다. 엄하고 잔소리 많긴 해도 케이트는 평소 따르던 종조모라 기꺼이 곁을 지켰다. “마담 미셀은 좀 어떠세요?” “조금 다리를 절긴 하시지만 이젠 곧잘 걸어 다니세요. 루시아를 만나면 보내주신 약 감사하다고 전해 달라 하셨어요. 크게 효험을 보셨다구요.” “도움이 되었다니 기쁜 일이군요.” 마담 미셀은 초반에는 자주 로암을 드나들었으나 루시아가 몇 번 티파티를 열고 무난하게 사교활동을 이어가자 마침 건강상 이유로 방문이 뜸해졌다. 케이트가 자주 드나들면서부터는 케이트를 통해 전할 말을 주고받는 정도였다. “오늘 루시아를 만나러 온 진짜 목적은 이거예요.” 케이트는 처음부터 가지고 들어왔던 바구니를 테이블에 올렸다. “지난 번 드리기로 약속했던 선물이에요. 열어보세요.” 바구니 덮개를 조심스럽게 열어본 루시아가 탄성을 질렀다. “어머.” 갑자기 밝은 빛이 들어오자 눈이 부신지 까맣고 커다란 눈을 깜작거렸다. 연한 노란 빛 털이 솜털처럼 부스스한 새끼 여우가 커다란 귀를 움찔거렸다. 저를 내려다보는 루시아 시선을 잠깐 의식했지만 곧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눈을 감았다. 복슬복슬한 꼬리를 움직여 몸을 둥글려 제 몸을 덮었다. 두 손에 들어올 만큼 자그맣고 사랑스러운 생명체는 순식간에 루시아 마음을 빼앗았다. “세상에. 너무 예뻐요.” 루시아는 심장이 두근거려서 두 손으로 가슴을 짚었다. 여우 사냥을 구경 가서 여자들이 키우는 여우를 보았지만 이렇게 사랑스럽지는 않았다. “저도 이렇게 예쁜 녀석은 처음 봤어요. 커도 정말 아름다울 거예요.” 케이트는 여우 사냥을 위한 루시아의 여우를 한 마리 구해주기로 약속했었다. “어려서 자꾸 손을 타야 길들일 수 있어요. 수시로 들여다보세요. 성장기가 오기 전에 주인을 인식해야지 시기를 놓치면 이도저도 아니게 되거든요.” “그럴게요.” “여우 기르는데 유의할 사항은 따로 정리해서 보내 드릴게요.” “고마워요. 케이트. 이렇게 멋진 선물을...” 두 여자는 한 동안 신나게 여우 사냥을 화제로 대화를 나눴다. “내 정신 좀 봐. 승마를 가려던 참인데. 케이트도 함께 가지 않을래요?” “원래 계획에는 없지만 오랜만에 말을 타고 싶어졌어요. 저도 가요.” “아, 그리고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요.” 루시아는 하녀를 불러 데미안을 데려오라고 시켰다. “데미안이 와 있거든요. 모처럼 집에 온 거라 언제 소개할 수 있는 자리가 또 있을지 몰라서요.” “누구...?” “공작 전하 아들 말이에요. 이젠 내 아들이기도 하지요.” 케이트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예?” “혹시 들은 적 없어요? 내가 알기로 데미안이 후계라는 건 공표된 사실이라고 하던데요.” “...예..뭐. 들은 적은 얼핏..” 공작의 사생아는 북부 귀족들에게 금기어였다. 누가 입단속 시킨 것도 아닌데 알아서 입조심 했다. 타란 공작의 후계 아들이 수도 사교계에 전혀 소문이 돌지 않은 것은 북부인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타란 공작은 일부러 소문내지도, 알아서 하는 입조심에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북부에서 데미안은 붕 뜬 존재였다. “부르셨습니까.” 잠시 후 응접실로 들어오는 흑발의 붉은 눈 소년을 보며 케이트는 긴장의 숨을 삼켰다. 아직 그녀는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다. “데미안. 인사 하렴. 날 만나러 로암을 방문하는 거의 유일한 손님이라 할 수 있단다. 내 벗, 케이트 밀튼 양이지.” 데미안은 당혹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케이트를 무심히 보았다. 자신을 향한 저런 시선과 표정은 워낙 익숙했다. 그 동안 공작부인이 보여주는 순수한 호의에 잠시 착각에 빠져 있었다. 조금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데미안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레이디 밀튼. 아름다운 숙녀 분을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데미안입니다.” “아..네. 저야말로..영광입니다. 소공자님.” 케이트는 아주 오래 전 시내를 걷다가 드레스 자락이 말려 사지를 뻗으며 엎어질 때에도 이처럼 표정관리가 힘들지는 않았다. 옆에서 공작부인은 “어쩜, 말하는 것 좀 봐. 누가 아버지 아들 아니랄까봐.” 라며 해맑게 웃었다. 웃을 수 없는 희극을 보는 기분이었다. “데미안. 혹시 말은 탈 줄 아니? 아니면 망아지를 타야 하나?” “말 탈 줄 압니다. 학술원에서 배웠습니다.” “못하는 게 없구나. 케이트. 대단하죠? 8살인데 승마를 할 줄 안대요.” “아..네. 대단...하시네요.” 8살 나이에 망아지 아닌 제대로 말을 탈 줄 안다는 것은 분명 흔한 일은 아니지만 소공자 덩치는 보통의 8살을 훨씬 뛰어넘으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기사로 이름 높은 타란 공작의 아들 아닌가. 하지만 케이트는 뿌듯해하는 루시아 기분에 초 칠 생각은 없어서 맞장구 쳐주었다. “데미안. 지금 승마하러 가려는데 함께 가자.” 데미안은 흘끔 굳어 있는 케이트 표정을 살폈다. 애써 웃으려 하지만 달갑지 않은 불청객을 대하는 기색이었다. “아닙니다. 아직 봐야할 책이 있어서.” “공부도 좋지만 한창 뛰놀 나이에 그렇게 활동 없이 지내면 안 돼. 키 안 큰다?” 키. 민감한 화제에 데미안이 움찔했다. “아버지만큼은 커야지. 그렇지?”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트. 데미안이 함께 해도 괜찮겠지요? 미리 양해 구하지 않아 미안해요.” “아..니에요. 그런데 루시아. 우리가 가는 승마장이. ..여자만 출입 가능한데요..” “알아요.” 루시아는 그게 도대체 무슨 문제냐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했다. “데미안은 이제 8살이에요. 남자가 아니라구요.” 케이트는 보았다. 아주 잠깐이지만 일그러지는 소공자의 표정을. 전혀 8살로 보이지는 않는 큰 덩치와 나이답지 않게 곧은 자세로 서서 딱딱한 말투를 가진 소년이 갑자기 제 나이로 보였다. 케이트는 살짝 고개를 돌려 작게 풋, 웃음을 흘렸다. 무너진 소년의 자존심이 안 되어 보였다. 루시아는 승마장을 방문한 귀부인들이 인사를 건넬 때마다 데미안을 인사시켰다. 귀부인들은 하나같이 땡감 씹은 것처럼 떫은 표정을 지으며 떨떠름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일부는 루시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일부는 루시아가 너무 세상 물정을 몰라 어리석다는 시선으로, 일부는 걱정스럽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을 모를 리 없건만 루시아는 개의치 않았다. 간혹 데미안이 묘한 눈으로 루시아를 보곤 했다. “이 아이가 에미리야.” 루시아는 애마를 데미안에게 소개해 주었다. 데미안은 전체적인 모습을 보다가 놀라지 않도록 눈앞에서 천천히 다가가 말 등을 쓰다듬었다. “좋은 말입니다.” “말을 볼 줄 알아?” “좋은 말인지 아닌지 정도만 아는 것이고 전문가는 아닙니다.” “난 그런 것도 잘 모르겠던데. 에미리는 내 말이니까 가장 예쁘기는 하지만 다른 말들은 다 똑같아 보여서. 대단하지 않아요? 케이트. 데미안은 나이도 어린데 아는 것이 굉장히 많아요.” 기특함과 자랑스러움이 담긴 공작부인의 표정을 보며 케이트는 웃으며 맞장구 쳐주었다. 슬쩍 소공자를 보자 괜히 무안한지 고개를 돌리고 딴 짓이었다. 처음에는 루시아가 대체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모자지간이 사이좋게 지내면 나쁠 것 뭐 있겠나, 케이트는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승마장을 몇 바퀴 돌아 가볍게 승마를 마치고 두 여자는 휴게실로 들어왔다. 더 말을 타겠다는 데미안은 아직 밖에서 말을 달리는 중이었다. 휴게실 안은 테이블마다 삼삼오오 모여 앉은 여자들이 가득이었다. 처음 취지와는 다르게 승마장은 점점 여자들의 활발한 사교 장소로 자리 잡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데미안을 보는 사람들 시선이 차갑네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케이트는 듣기만 했다. “공작 전하께서 직접 공표하신 후계자인데 왜들 그러는 거죠?” “그건 아마..암묵적인 룰 때문일 거예요. 입적하면 적자로 인정한다고 법은 명시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입적한 아들이 작위를 물려받은 예는 거의 없어요. 백작 정도만 되어도 손에 꼽을 정도고 공후작은 아예 그런 예가 없을 걸요.” “...그렇군요. 그런 건 몰랐어요.” 꿈속에서 루시아는 자식이 없어서 백작부인으로 지낼 때 아예 작위 계승 문제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럼 만약 그렇게 입적된 자식 외에 정부인에게서 전혀 자식이 없으면 어찌 하나요?” “친척 중에서 양자를 들이죠. 대부분이 그렇게 해요.” 이른바 귀족의 자존심이었다. 사생아는 적자로 인정해 주는 것만도 감지덕지 하라는 것이다. 왕족이라고 해도 루시아 역시 따지고 들면 사생아인 셈이라 입맛이 썼다. 두 사람 테이블로 나이 지긋한 노부인이 다가왔다. 나이에 비해 정정해서 누구 못지않게 승마를 즐기는 필리아 백작부인이었다. 여성 전용 승마연습장이 생기고 백작부인이 입이 마르도록 타란 공작을 칭송하고 다니더라는 소식을 루시아는 얼핏 들은 기억이 났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의례적 인사를 나누고 백작부인은 2개의 꽃바구니를 테이블로 올렸다. “얼마 전 손녀를 얻었답니다. 북부 전통에는 손녀의 건강과 아름답게 자라기 바라는 소망을 담아 주변 사람에게 노란 꽃을 선물하지요.” “어머. 축하해요. 백작부인을 닮아 손녀가 건강하고 아름답게 자랄 거예요.” 다른 사람에게도 꽃바구니를 돌리기 위해 백작부인이 돌아서자 케이트가 말했다. “북부 전통이긴 한데 요즘은 안 하는 사람이 더 많아요. 필리아 백작부인은 이런 속설을 꽤 신뢰하거든요. 노란 꽃을 주는 것이 맞기는 한데. ..이 꽃을 주는 건 흔치 않은데. ..워낙 가격이 나가니까요. 필리아 백작부인이 정말 기쁜가 보네요. 거금을 쓰셨겠어요.” 루시아는 꽃바구니를 바라보며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노란 장미가 탐스럽게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승마에서 돌아오시는 여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여느 때처럼 고용인들이 모두 나와 서 있었다. 마차 문이 열리고 루시아가 마차에서 내려오면서 그녀 손에 들린 노란 장미 꽃바구니를 발견한 제롬이 식겁했다. “끄억.” 자신도 모르게 괴상망측한 소리를 낸 제롬은 얼른 헛기침으로 무마했다. 눈치 있는 고용인들은 모르는 척 했다. 루시아는 얄궂은 표정으로 제롬을 보다가 꽃바구니를 내밀었다. “선물 받았어요. 필리아 백작부인이 손녀를 얻었다 하더군요.” “예...” 꽃바구니를 받아들며 제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롬은 이제 노란 장미라면 꼴도 보기 싫었다. 응접실에서 루시아와 데미안이 마주 앉아 차를 마셨다. 그 곁에서 제롬이 차 시중을 들었다. “생각해보니까 정원에 장미가 없어요. 내년 봄에는 장미 정원을 만들어 보는 게 어떨까 하는데, 제롬 생각은 어때요?” 제롬의 낯빛이 굳었다. “장미는..다시 생각해 보시는 것이 어떠신지..” “왜요?” “...주인님께서 별로..좋아하지 않으십니다.” 루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롬을 보다가 데미안에게 말했다. “데미안. 솔직히 말해 보렴. 정원에 장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니?” “몰랐습니다.” “거봐요. 제롬. 꽃에 유난히 관심이 있지 않고서는 남자는 그런 거 잘 모를 텐데요. 그 분이 꽃의 종류나 구별을 하는지 의심인걸요. 하나는 확실히 구별하시겠네요. 노란..” “흠. 흠” 제롬이 괜한 헛기침을 하자 루시아는 풋,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장미는 심어도 그 색은 제외할 테니까 걱정 말아요.” 색깔이 문제가 아니라 장미꽃 자체를 아예 눈에도 보이게 하지 말라고 명하셨는데. 큰일 났다. 제롬 목덜미에 식은땀이 솟았다. 데미안이 제 방으로 돌아가고, 제롬은 할까 말까 내내 망설이던 말을 꺼냈다. “마님. 일전에 말씀하신 노란 장미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보낸 사람이 누구냐 물으셨지요.” “그랬지요. 기억해요.” “주인님 명으로 팔콘 백작부인에게 노란 장미를 보냈습니다.” 마님이 아무 말이 없자 제롬은 초조해졌다. 괜히 말했나! 기분이 상하신건가! “갑자기 왜요? 만나셨나 봐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제가 마님께서 그걸 궁금해 하셨다고 말씀드렸더니..보내라 하셨습니다.” “그렇군요.” 무심한 표정으로 루시아는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대답했다. 조금이라도 마님 기분을 파악하려고 제롬은 안절부절 못 했다. 루시아는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려 했다. 남편이 옛 애인 하나 정리한 일이 뭐 그리 대단해서 기뻐할 일이라고. 하지만 루시아 기분은 말랑말랑 풀어지고 있었다. 그 동안 데미안 덕분에 아슬아슬할 정도로만 찰랑거리던 그리움이 다시 샘솟았다. ‘언제 오실까. 보고 싶은데...’야만족 정벌을 떠난 지 한 달 째 되는 날, 자리를 비웠던 로암의 주인이 귀환했다. < -- 데미안 --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평소와 달리 공작에게서는 피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주인을 둘러싼 매서운 살기와 피 냄새에 제롬은 기겁하는 내색을 애써 감추었다. “마님께서는 주무십니다. 도련님이 와 계십니다. 특별히 보고 드릴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제롬은 주인이 제일 알고 싶을만한 일을 간략하게 보고했다. 간단히 고개만 끄덕이며 돌아서는 주인의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 하녀에게 목욕 준비를 재차 지시했다. 슬며시 몸을 돌려 막 내성을 빠져나가는 기사들 무리를 쫓아갔다. “헤바 경!” 기사들 중 하나가 걸음을 멈추고 제롬이 빠른 걸음으로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왜 그러십니까?” 딘은 어쩐지 심각해 보이는 제롬을 보며 의아해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평소 피를 묻히고 돌아오시던 분이 아닌데...” “아. 오다가 근처에서 도적떼를 만났습니다.” “근방에 도적이라니. 그 정도로 치안이 형편없지는 않을 텐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어디서 흘러들어온 놈들인지 모르겠지만 지나던 행상인 상대로 강도짓 하다가 주군께 발각되었습니다.” “...그렇군요. 전하께서 직접 치죄하신 겁니까? 잡도둑이 아니었나 봅니다.” 딘은 대답 대신 쓴웃음을 지었다. 전문적인 도적단은 아니었다. 걸식하다 유랑하는 자들이 도적질을 하다가 운 나쁘게 걸린 것이다. 치죄? 죄를 묻지도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서 다 목을 날려버렸다. 덕분에 강도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던 행상들은 감사보다는 공포에 질렸다. 도적놈들이라고는 하지만 개중에는 아직 성년이 안 된 어린놈들도 있었는데 공작은 전혀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그건 처벌이라기보다는 도살이었다. 익숙해 졌다고 생각하면서도 새삼스럽게 공작의 잔혹함을 볼 때마다 흠칫하는 때가 있었다. 바로 오늘처럼. “별 다른 일은 없었다는 말씀이지요?” “예. 뭐.” 딘은 어깨를 으쓱했다. 도적 몇 죽은 일을 별 다른 일이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야만족 정벌 하시면서 심기가 불편해 보이셨다거나...” 야만족을 정벌할 때의 주군의 살인 방식은 굉장히 잔인했다. 여느 전쟁에서 적을 죽일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공작의 그런 모습은 오직 야만족 정벌을 함께 하는 정예 기사만이 볼 수 있었다. 심기가 불편한지 어떤지 살필 말랑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걸 설명할 수 없는 딘은 그저 고개만 저었다. “알겠습니다. 고단한 여정이었을 텐데 쉬십시오.” “예. 그럼.” 휴고는 꽤 오랜 시간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몸에 배인 피 냄새를 모두 씻어내려는 것처럼. 그래도 여전히 그의 코 밑에 스민 피비린내는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껏 그것이 거스르다 생각한 적 없는데 자신을 마주한 제롬이 주춤하는 것을 보자 그녀가 떠올랐다. ‘그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그것을 깨닫는 순간 그전까지 전혀 아무렇지 않았던 찐득한 피의 느낌이 불쾌해졌다. ‘고귀한 귀족? 위대한 기사? 개소리. ’ 껍데기를 벗기면 그는 사냥꾼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을 사냥하는 학살자. 그는 제 핏속을 흐르는 광기를 자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피를 보고 싶다고 끈질기게 자신을 다그친다. 아마 전쟁이라는 수단이 아니었다면 그는 악명 높은 살인범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의 목뼈가 나가는 둔탁한 느낌에 전율하고 뜨거운 피비린내 속에서 해방감을 느꼈다. 죽음 앞에 절망하는 자들의 눈빛을 읽어도 죄책감 따위 모른다. 그는 단 한 번도 악몽조차 꾸지 않았다. 타란의 주인은 대대로 위대한 기사였고, 영민한 군주였다. 그래서 타란은 핏줄의 순혈에 집착했다. 그건 뛰어난 육체적 능력과 오성을 얻는 대가였다. 그는 성공작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자랑스러운 적 없었다. [ 저주받은 핏줄. 내가 기꺼이 마무리를 장식해주지. ]그는 공작위를 받으며 속으로는 사납게 포효하고 있었다. 죽은 선대 공작이 지옥에서라도 분에 겨워 날뛰기를 바랐다. 그러나 필립 그 늙은이가 데미안을 데리고 나타난 순간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말았다. 그의 대에서 끝내기는 이미 글렀다. 목욕을 마치고 휴고는 그의 침실에 들어서다가 발걸음을 돌려 아내의 침실로 들어갔다. 침실의 어둠은 금세 눈에 익었다. 침대에 누워 곤히 자고 있는 그녀를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간질거렸다. 조금 아픈 것 같으면서도 먹먹해서 그는 어쩐지 계속 보기만 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는 이불을 젖히고 그녀 옆으로 들어갔다. 부드러운 여체를 조금 강하게 품으로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코를 묻고 풋과일 같은 그녀의 체취를 들이마셨다. 눈을 감고 얼마간 있자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안에는 2가지 모습의 그가 존재했다. 피에 절어 인간들을 사냥하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타란 공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건 그가 2가지의 자신을 분리해 오가기 때문이었다.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정신병자라도 되었겠지만 그의 정신은 육체 이상으로 강인했다. 다만 아무래도 사냥꾼 히우에서 공작 휴고로 완전히 돌아오기 위해서는 그 반대의 경우보다는 시간이 걸렸다. 살인으로 흥분한 피의 광기가 내뿜는 살기를 가라앉히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품안의 온기 덕분인지 평소보다 더 빨리 진정이 되고 있었다. 그는 그녀 목에 입을 맞추고 잠옷 안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쥐었다. 말랑한 가슴을 주무르는데 그녀는 반응 없이 여전히 색색 자고 있었다. 오랜만에 남편이 왔는데, 이렇게 만지고 키스하는데도 자기만 하다니 못마땅했다. 처음 의도는 그냥 끌어안고 자려고 했는데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만지면서 더 만지고 더 느끼고 싶어졌다. 그는 몸을 일으켜 앉아 그녀를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냈다. 아래로 내려와 그녀 가느다란 발목을 붙들고 발등에 입을 맞췄다. 자그마한 발을 입에 넣고 혀로 핥으며 사탕을 굴리는 것처럼 빨았다. 발목에 키스하면서 혀로 길게 핥았다. 종아리에 입술을 붙이고 조금 강하게 빨아들였다. 이로 살짝 깨물며 키스했다. 진한 애무에도 여전히 그녀는 깨어날 줄 몰랐다. 그가 자고 있는 그녀를 깨우는 일은 가끔 있었다. 이 정도면 깨곤 했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깊은 수면에 빠진 그녀를 보자 오기가 생겼다. 그는 허리께로 손을 넣어 자그마한 레이스 팬티를 벗겨내고 두 손으로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하얗고 여린 허벅지 안쪽 살에 입술을 붙이고 빨아들여 흔적을 만들었다. 붉은 자국을 보며 그의 만족감에 짙은 미소를 지었다. 쉽게 보이지 않는 곳이라 그녀도 뭐라 하지는 않을 것이다. 본인이 이 자국을 과연 언제 발견할까. 그 순간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슬쩍 고개를 들자 여전히 그녀는 숙면 중이었다. “업어 가도 모르게 자는군.” 어디까지 버티나 볼까. 그는 다시 고개를 묻고 숲 안에 수줍게 가려 있는 샘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아랫입술에 입을 맞추는 것처럼 입술 끝으로 살짝 빨아 키스하면서 열기 어린 작은 입안에 넣듯 혀끝을 안쪽으로 넣었다. 야들한 살집을 핥고 혀끝으로 건드리기를 반복하자 보송하게 말라 있던 샘에서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체를 자극하는 기이한 열기에 루시아는 잠에서 깨어났다. 잠에 취해 반쯤 정신이 들자마자 느껴지는 허벅지 안쪽 깊은 곳에 가해지는 자극에 비음을 흘렸다. 뭐지? 채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강렬한 자극이 하체 안쪽을 파고들었다. “흐읏...” 두 다리는 단단히 잡혀 벌어진 채 다리 사이 깊은 안쪽이 쭉 빨렸다. 흠칫 허리를 떨면서 간신히 고개를 조금 들어 내려다보자 다리 사이에 고개를 묻고 있는 그가 보였다. 루시아는 잠기운에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두뇌를 애써 회전시켰다. 그가 돌아온건가? 언제? 하지만 생각을 오래 이을 수 없었다. 뾰족하게 세운 뜨거운 살덩이가 질구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루시아는 벼락 맞은 것처럼 파드득 떨며 비명을 질렀다. “아앗!” 손가락만큼 단단하지는 않으나 그보다 훨씬 예민하게 자극을 주는 그의 혀가 내부를 들고 나가기를 반복했다. 루시아는 그 은밀한 자극에 현기증이 날 것만 같았다. 손에 잡히는 시트를 움켜잡고 신음을 흘렸다. 자신도 모르게 허벅지를 오므렸으나 그의 손에 잡혀 있어 여의치 않았다. 무력하게 두 다리를 벌리고 그의 혀에 유린당했다. 그는 사막을 걷다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그녀의 샘에 입을 맞추고 흐르는 물을 빨아들였다. 촉촉하고 보드라운 살결을 맛보고 혀를 넣어 자극하며 반응을 즐겼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자 샘에서 흐르는 물이 늘어나며 짙은 향을 풍겼다. 혀끝에 작은 돌기가 느껴지자 그것을 파고들 것처럼 혀로 찌르며 이 끝으로 살짝 깨물었다. “하악! 아! 아응!” 작던 신음 소리가 자지러지는 비명으로 바뀌었다. 그 비명이 이내 흐느낌으로 바뀌는 동안 계속 그는 그녀의 음부에서 고개를 떼지 못했다. 입을 맞추고 핥아내고 빨아들였다. 그녀의 체액에서 풍기는 야릇한 맛과 향을 도무지 끊어낼 수가 없었다. 부풀어 오른 질 안쪽의 돌기를 삼킬 것처럼 빨자 그녀의 허리가 크게 들썩 공중으로 떴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혀로 그녀 몸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그를 멍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좀 더 사위가 밝았다면 홍조어린 하얀 볼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함이 아쉬웠다. 가슴께까지 밀려 올라간 네글리제 안으로 두 손을 넣어 가슴을 쥐었다. 검을 쥐느라 거칠어진 손바닥에 착 감기는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가슴을 음미하는 것처럼 주물렀다. 그녀의 피부는 최고급 실크처럼 매끄러워 만질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주근깨 하나 없이 뽀얀 그녀의 얼굴만큼이나 그녀의 속살 또한 우유처럼 하얗고 티 하나 없었다. 옷을 벗기지 않으면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오직 남편인 그만 볼 수 있다는 점이 그의 소유욕을 충족시켰다. 그녀의 납작한 복부에 입을 맞추고 천천히 위로 키스를 이어가며 올라갔다. 아예 잠옷을 가슴이 다 드러나도록 올려 탐스런 과실을 한 입에 덥석 삼켰다. 애무로 자극받아 단단히 일어난 유두를 혀로 간질이며 쭉 빨았다. 그녀의 살에서 달큼한 향이 난다. 할 수만 있다면 한입에 다 삼켜버리고 싶은 그런 매혹적인 향이었다. 할딱이는 호흡소리에 섞이는 신음 소리를 들으며 그는 어찌 이걸 참고 지냈는지 스스로의 인내심에 감탄했다. 그는 사냥 첫날부터 지독한 갈증과 허기에 시달렸다. 아무리 야만족을 사냥해 피 맛을 보아도 채워지지 않았다. 이젠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그는 자신의 마음에 묶어두었던 한 가닥 끈마저 끊어버렸다. 휘둘린다고? 휘둘리면 어때서. 그가 혼자 취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지 그녀가 먼저 그를 잡고 흔든 것이 아니다. 그는 한 손으로 늘어진 그녀의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이미 아플 정도로 단단히 일어난 그의 중심을 그녀의 은밀한 다리 사이에 넣고 다급하게 무게를 실었다. 한 번의 움직임으로 거침없이 그녀 몸 안의 길을 타고 단번에 뿌리 끝까지 들어갔다. 그녀의 몸이 작게 움찔하며 침입자를 받아들였다. “아!” “하아...” 몸을 지탱하며 침대를 짚은 그의 손이 시트를 쥐었다. 앓는 신음이 절로 입에서 흘렀다. 이거였다. 그의 것을 완벽하게 감싸 안으며 죄어오는 그녀의 미끈한 내벽. 조금의 빈 틈 없이 꼭 맞아 들어가 연결된 상태. 습하고 따뜻한 그녀의 안에 완전히 몸을 묻고 그는 더할 수 없는 충족감을 느꼈다. 그의 아래 누운 그녀의 가슴이 작은 움직임으로 오르락내리락 했다. 그의 타액으로 젖은 분홍빛 유두가 번들거리고 하얀 가슴은 그가 남긴 흔적으로 울긋불긋했다. 조금 전까지 마구 탐했던 과실은 여전히 그의 입맛을 자극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혀로 유륜을 돌리며 부드럽게 핥았다. 몇 번이고 장난치듯 간질이며 건드리다가 그대로 한 입에 쭉 삼켰다. “읏,, 아...” 입안으로 오물거리다가 강한 흡입력으로 빨아들였다. 느슨하게 혀로 굴리다가 이로 살짝 물고, 강하게 빠는 것을 반복했다. 자극이 되는지 그녀의 몸이 움찔하면서 짤막하게 신음을 흘렸다. 더불어 그를 품고 있는 여성 안쪽이 죄어들었다. 입안에서 부드러운 가슴도 좋지만 더는 가만히 있기 힘들었다. “허리 감아.” 그의 목소리 끝이 갈라져 나왔다. 그의 집요한 애무에 새된 숨을 내쉬던 루시아는 강하게 움직이며 안으로 파고들 그의 움직임을 떠올리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옆에 딛고 있는 그의 팔을 한 손으로 잡고 다른 한 손은 머리로 누르는 베개 밑으로 넣으면서 두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았다. 그의 한 손이 그녀 엉덩이를 움켜잡아 무릎걸음으로 조금 전진 하면서 그녀 허리를 공중에 띄웠다. 아슬아슬 끝만 담근 상태까지 빼내더니 묵직하게 뿌리까지 진입해 들어갔다. “흐읏...” 오랜만이라 그런지 그의 것이 더 크게 느껴져 버거웠다. 몸을 꽉 채우며 들어오는 힘에 숨이 턱 막혀서 루시아는 그의 팔을 잡고 있던 손에 꽉 힘이 들어갔다. 살짝 인상을 쓰고 있는 그녀를 보며 그가 말했다. “천천히?” 루시아가 입술을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느릿하게 빠져나갔다가 천천히 그가 허리힘으로 밀고 들어왔다. 빠듯하게 깊은 안쪽까지 닿는 느낌이 아릿했다. 루시아는 탄식처럼 한숨을 흘렸다. “아..으응..” 단단한 기둥이 몇 번이고 진퇴를 반복했다. 깊게, 그리고 얕게, 강약을 조절하는 움직임으로 부드럽게 풀린 내부는 곧 그의 것을 흡착하며 빨아들였다. “하아. ..정말...” 그가 탁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잡아먹히는 것 같아. 당신 속.” 그녀가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자 그는 꽉 눌러둔 자신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그녀의 여린 살 안쪽에서 마구 날뛰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가 없었다. 넣고만 있어도 좋지만 움직이면 더 환상이었다. 그의 허리짓이 점점 속도가 실리고 곧 거침없이 퍽퍽 밀어 넣었다. “아! 아앗!” 그의 허리 움직임에 맞추어 아래에서 그녀의 몸이 아래위로 흔들렸다. 그의 힘에 밀려 몸이 조금씩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몸을 비틀면서 신음 섞인 교성을 질렀다. 느릿하게 빠져나갈 때는 질벽이 딸려 나가는 것 같고, 강하게 치고 들어올 때는 둔탁하고 묵직한 압박감에 몸이 저릿저릿했다. 젖은 속눈썹에 그의 혀끝이 닿았다. 그가 귓불을 핥으면서 잘근 깨물며 속삭였다. “당신..느끼는 표정 보면..미치겠는 거 알아?” 그는 그녀 몸이 위로 밀려올라가지 않도록 허리를 단단히 잡고 강하게 쳐올렸다. 깊숙이 박힐 때마다 루시아는 눈앞이 번쩍거렸다. 귓가에 들려오는 그의 호흡이 거칠었다. “울 것 같은 눈을 하고선..아래는 쭉쭉 빨아들이지. 윽. ..지금..좋았어? 이렇게 하면 좋은가?” “아! 아응!” “말해봐. 더 깊이 넣어줄까? 이쪽을 찌르는 게 좋아?” 희롱하는 그의 말에 수치심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그녀의 내부는 그의 것을 적극적으로 끌어당기고 감싸 안았다. 민감한 내벽은 그의 성기에 착 달라붙어 빠져나갈 때는 마치 안쪽도 딸려나갈 것처럼 움직였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그녀에게도 엄청난 자극이었다. “아! 휴! 너무! 으응!” 자극이 너무 강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추락을 경험하는 것처럼 숨이 막혀왔다. 단단한 그의 성기가 하복부 안을 거칠게 쑤셔대며 긁어내리면 정신이 날아가는 것 같았다. 몸을 가를 것처럼 다리 사이 안쪽으로 뜨거운 기둥이 난폭하게 진입했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안쪽 깊은 살이 마찰당하고 비벼질 때마다 그녀는 뇌를 짓누르는 쾌감에 비명을 질렀다. 그의 빠른 움직임에 끊임없이 몸이 흔들리면서 헐떡거렸다. “하으윽!!” 절정에 치달아 루시아는 고개를 꺾으며 교성을 질렀다. 사납게 물어뜯는 내부의 움직임에 그의 목 깊은 곳부터 거친 신음이 터졌다. 쾌감으로 경련하는 안쪽으로 그는 계속해서 파고들었다. “흐응..응. 휴..잠깐..잠시만..” 격렬한 자극에 루시아는 흐느꼈다. 그가 조금만 멈추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녀의 애원이 도리어 그를 자극했는지 그는 오히려 더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그녀 안으로 정신없이 박음질해 들어가는 그의 엉덩이 근육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그의 허리를 감으려던 그녀의 다리가 자꾸 힘없이 미끄러졌다. 그는 그녀의 두 다리 발목을 잡아 어깨로 올렸다. 엉덩이가 들리자 그가 깊게 안으로 들어왔다. 몇 번의 추삽질을 하다가 한 손으로 그녀 발목을 나란히 잡아 든 채 그의 분신이 여성의 좁은 길을 열며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다. “아! 하악...” 힘들어. 그치만 좋아. 거침없이 아래에서 위를 찌르고 올라오는 힘도, 잡아먹힐 것 같은 그의 열정적인 움직임도, 흐려진 눈으로 보이는 그의 근육의 움직임도, 간헐적으로 흘리는 그의 낮은 신음을 듣는 것도 모두 너무 좋아 전율이 흘렀다. 그로 인해 그녀의 몸은 사내가 주는 기쁨을 배웠다. 봉오리가 맺히고 꽃잎이 벌어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만개해 가고 있었다. 황홀한 그녀의 몸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활짝 열렸다. 그에게 세우고 있던 벽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녀의 몸은 더 적극적으로 그의 구애에 반응했다. 오랜만에 만난 그의 아내는 그를 더 미치게 몰아갔다. 그는 그녀 다리를 옆으로 내려 후측위 자세를 잡아 조금 속도를 늦추어 움직였다. 부드럽게 안을 휘젓는 감각에 그녀는 눈을 감고 숨만 할딱거렸다. 움직이던 성기가 예민한 지점을 건드리고 자극할 때마다 그녀 미간에 살짝 살짝 주름이 생겼다. 그는 다시 그녀 발목을 잡아 벌리면서 정상위로 자리를 잡았다. 묵직하고 깊게 질벽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다시 그녀의 몸이 강하게 흔들리고 그가 주는 자극에 교성이 터졌다. 그의 어깨에 매달린 손이 미끄러지지 않으려 손끝을 세웠다. 손톱이 스치는 살짝 따끔한 감각은 잔뜩 부푼 그의 하복부에 한층 더 열기를 불어넣었다. “흐읏.... !” “...큭...” 그의 몸이 순간 경직되면서 그녀 자궁 깊은 안쪽으로 체액을 쏟아냈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질벽이 그의 것을 꽉 물어 비틀었다. 딛고 있던 그의 팔이 순간 휘청하면서 목 안쪽에서 그르렁대는 소리를 흘렸다. 그녀의 몸은 바들바들 떨며 쾌감에 몸부림쳤다. “하아. ..하아...” 호흡을 몰아쉬는 그녀의 몸 위로 묵직하게 그의 무게가 더해졌다. 완전히 기< -- 데미안 -- >조용한 침실에 두 사람의 호흡 소리만 울렸다. 루시아 숨이 고르게 진정될 즘에 고개를 묻고 있던 그가 빙글 몸을 돌려 옆으로 누우면서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아 품으로 당겼다. 한참을 그렇게 안고 있던 그가 그녀의 입술과 눈시울과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시작했다. “푸훗. 간지러워요.” “간지럽지 않은 걸로 해줘?” 휴고는 진득하게 속삭이며 목덜미를 깨물었다. 그의 손이 등에서 허리 아래로 슬그머니 미끄러지자 루시아는 몸을 틀어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밀쳐냈다. 손바닥에 매끄럽던 피부의 느낌이 사라지자 그는 고집스럽게 다시 손으로 그녀 엉덩이를 잡았다. 그러자 루시아가 이제는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안 돼요.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한단 말이에요. 아침부터 할 일이 많아요.” “뭘 하기에.” “사흘 뒤 정원파티를 계획하고 있어요. 처음 정원을 선보이는 자리라서 좀 규모를 크게 하려구요. 그래서 내일부터 정원 정리 하고 준비 하고 이것저것 신경 쓸 것이 많아요.” 나 없어도 아주 잘 지냈군, 그는 속으로 툴툴거렸다. “정원파티? 날이 서늘해지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꽃이 있어?” “늦가을 꽃이죠. 아무래도 봄이나 여름만큼 화사하지는 않지만 올해가 가기 전에 정원파티는 열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오랜만에 귀가한 남편보다 파티가 더 중요하다는 거군. 둘 중 뭐가 우선이지?” 또 다시 그의 손이 슬그머니 허리께를 쓰다듬으면서 그의 입술이 끈질기게 목을 지분댔다. 루시아는 그의 어깨를 찰싹 내리쳤다. “억지 부리지 마요. 그 말, 되게 유치한 거 알아요?” “어허. 어딜 남편 몸에 손을 대.” 짐짓 엄한 척하는 그에게 루시아가 우우, 야유를 보냈다. 그가 야릇하게 눈을 빛내다가 그녀를 향해 큰 동작으로 몸을 던지며 덮쳤고, 루시아의 작은 몸이 재빠르게 굴러가며 피했다. 침대가 풀썩거리도록 둘은 엎치락뒤치락 하며 까르르 터지는 웃음소리와 작은 비명이 뒤섞였다. 얼마 못가 루시아는 숨이 차서 헉헉 거리며 그에게 단단히 붙잡혔다. 좁은 침대 위에서 그를 상대로 한 번이라도 피할 수 있었다면 그가 봐주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그는 등 뒤에서 끌어안아 다리 하나를 그녀의 다리 사이에 넣고 한 손으로는 가슴을 잡으며 뒷목에 입을 맞추었다. 루시아는 몸을 조금 움직이려 해도 꼼짝할 수 없자 포기했다. 그의 손이 가슴을 자꾸 쥐고 만졌지만 내버려 두었다. “가신 일은 잘되셨어요?” “음. 당신은 뭐 하며 지냈지?” “별 일은 없..아니 있었네요. 데미안이 왔어요.” 아주 잠깐 그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의 품에 완전히 밀착해 있던 루시아는 느낄 수 있었다. “.... 알아.” 그에게 데미안은 어떤 의미일까. 루시아는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좀 더 느긋하게 그와 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제롬조차도 말을 아끼는 상황이라 섣부르게 접근하기 조심스러웠다. 그 동안 데미안을 대하며 느꼈지만 데미안은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자괴감과 부정에 대한 그리움이 비뚤어진 감정으로 변해도 이상하지 않을텐데 데미안은 곧고 순수한 소년이었다. 데미안 같은 아들이면 내 배로 낳지 않은 자식이라도 열은 키우겠다 생각했다. 이젠 그가 데미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볼 때였다. 그들이 서로에게 악감정이 없다면 이대로 냉랭한 사이를 유지하는 건 아까웠다. 두 사람은 같은 피를 나눈 유일한 관계 아닌가. 남녀간 사랑처럼 격렬하진 않아도 혈연간의 사랑은 좀처럼 끊기 힘든 질긴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점심 때 시간 어떠세요? 가능하면 식사 함께 해요.” 별 일 아닌 것처럼 말은 하면서 루시아는 혹시 그가 거절하면 어쩌나 고민했다. 만약 같이 밥조차도 먹기 싫은 관계라면 최악 중 최악이었다. “저녁으로 하지. 오전부터 회의 예정이야.” 다행히 그의 대답은 무난했다. 루시아는 작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무례하게 굴지는 않아?” 루시아는 아주 잠깐 생각한 후에 그의 말에 숨겨진 주어가 데미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정말 아들에 대해 잘 모르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데미안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런 질문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전혀요. 얼마나 깍듯한지 몰라요. 정중하고 어른스러워요. 데미안과 잘 지낼게요. 그 점은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건 걱정 안 해. 녀석이 기어오르면 말해.” 병사 굴리는 장교처럼 말하는 등 뒤의 그에게 루시아는 눈을 흘겼다. “어쩌시게요?” “충고.” 그가 하는 충고는 결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럴 일 없을 거예요. 당신 안 계시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잘 지냈는데요.” 그녀의 목소리에 점점 잠기운이 묻어났다. “..우리?” 삐딱하게 묻는 말은 잠에 빠져드는 루시아 귀에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인사가. ..늦었어요. 다녀오셨어요..” 거의 끝에는 웅얼거리는 그녀의 입술에 그는 키스했다. 얼마 후 색색 고른 호흡 소리를 내며 루시아는 잠들었다. “다녀왔어.” 다시 한 번 그녀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 그도 눈을 감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루시아는 혼자였다. 그의 기상 시간은 매우 이른 편이어서 아침에 혼자 눈 뜨는 건 익숙했다. 온 몸에서 느껴지는 나른한 감각이 지난밤이 꿈이 아니었음을 말해 주었다. 오랜만의 관계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팔로 디디며 몸을 일으켰다. “아...” 몸 안에서 묽어진 그의 체액이 허벅지를 따라 흘렀다. 아무리 겪어도 민망해서 루시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조금 진정이 되자 하녀를 불러 목욕 준비를 시켰다. 하녀들 시중을 받으며 루시아는 따끈한 물이 담긴 욕조에 몸을 담갔다. 아침 햇살로 보얗게 빛나는 그녀의 눈부신 피부에 붉은 흔적이 얼룩덜룩했다. 하녀들은 그 흔적을 흘끔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주인님께서 지난 밤 늦게 귀환하셨다더니 오자마자 못 참고 마님 침실에 드셨구나, 목욕을 끝내면 하녀들 사이에 소문이 쭉 퍼질 것이다. “그이는 집무실에 들어 계시니?” “회의 중이십니다.” “벌써?” “해뜨기 무섭게 불러들이셨습니다.” 정말 정력적인 남자였다. 그 아래 일하는 자들만 죽어난다. 그가 성을 비웠다가 귀환하면 즉시 회의 소집은 항상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는 가장 많은 일을 하면서도 가장 쌩쌩했다. 어젯밤 일을 떠올리는 루시아 얼굴에 살짝 홍조가 떠올랐다. 그를 다시 봐서 기쁘고, 그가 여전히 뜨겁게 그녀를 원해서 행복했다. 그녀의 기분은 물 위에 뜬 꽃잎처럼 가벼웠다. 세 가족이 처음으로 함께 하는 저녁 식사였다. 식당에 데미안이 가장 먼저 도착해 기다렸고, 루시아가 들어오자 데미안은 늘 그런 것처럼 의자를 빼내 그녀가 앉도록 도와주었다. “데미안. 아버지는 뵈었니?” “아직 인사드리지 못했습니다. 계속 바쁘신 것 같았습니다.” “그래, 오늘 많이 바쁘신 것 같더라.” 대답은 하면서 루시아는 살짝 입술을 삐죽였다. ‘아무리 바빠도 잠깐 불러 인사 하는 게 뭘 그리 힘들다고. 그럼 지금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한다는 거잖아. ’그는 정말 너무 무정했다. 데미안이 비뚤어지지 않게 이만큼 큰 것이 대견했다. 오늘은 루시아도 내내 분주해서 늘 함께 하던 점심을 같이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점심은 어떻게 했니? 굶거나 한 건 아니지? 내가 오늘 일이 많아서 신경을 못 썼어.” “먹었습니다. 파티 준비로 바쁘신 것 압니다.” 잠시 후 휴고가 들어왔다. 그의 시선이 일어난 데미안에게 잠깐 머물고 자리에 앉았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는 말도 없이 첫 가족식사가 시작되었다. 숨 막히도록 조용한 식당에서 루시아는 계속해서 두 부자를 번갈아 보았다. ‘둘 다 지독하네. ’화기애애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데미안이 기숙학교에 간 이후 정말 서로 한 번도 본적 없는지 루시아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오랜만에 보는 것이 분명한 꼭 닮은 두 부자는 서로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데미안은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했고..저 사람도 아들이 미웠으면 굳이 후계로 삼진 않았겠지. ’두 부자의 썰렁한 분위기는 날이 바싹 선 것처럼 건조했지만 루시아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두 사람이 대놓고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도 아니고, 루시아와 두 부자 각각과 사이는 문제가 없으니까 그리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중간에서 적당히 이어주면 좋아지겠지. ’루시아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리해서 관계 개선을 하려다가는 부작용이 더 클 것이다. 데미안이 기숙학교에 돌아가기 전까지 여기서 지내는 시간이 좋은 기억으로 남고, 그가 아들의 존재를 이전보다 더 의식하면 그걸로 되었다. 일단 그걸 첫걸음으로 삼을 것이다. ‘둘을 나란히 놓고 보니 정말 좋네. ’큰 휴고와 작은 휴고가 함께 있는 것 같았다. 루시아는 그저 둘을 번갈아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했다. 고용인들은 이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차분하게 식사하는 마님을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원파티 준비는 잘 되어가오?” 식사가 끝나갈 무렵 그가 물었다. “네. 순조로워요. 그 일로 드릴 말씀이 있어요. 데미안을 참석시키면 어떨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물을 마시던 데미안이 켁, 하는 작은 소리를 냈다. 흘끔 데미안을 본 휴고가 루시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인들 파티잖소.” “하지만 데미안은 남자는 아니잖아요. 이제 8살인걸요.” 잠시의 고요함. 쿡, 휴고가 짧게 웃었고, 데미안의 귀가 붉어졌다. “당신 말대로 8살은 남자가 아니지. 좋을 대로 하시오.” “데미안. 어떻게 생각하니?” “저는!” 데미안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지만 휴고가 지그시 보자 얌전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와. ’루시아는 두 부자의 완벽한 힘의 차이를 느꼈다. 평소 데미안은 도무지 8살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른스러웠다. 가뜩이나 큰 덩치에 딱딱하고 정중한 말투, 구사하는 어휘는 어른 수준이고 아이의 치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루시아는 자신의 8살 시절을 떠올려 봤지만 제대로 기억조차 없었다. 아마 동네 아이들과 뛰어놀기 바빴을 것이다. 그러나 휴고 곁에서 데미안은 가릉거리는 새끼 사자였다. 그에 비해 휴고는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아래를 나른하게 내려다보는 제왕이었다. 휴고의 거대한 앞발이 살짝 짓누르기만 해도 데미안은 켁 소리조차 못할 것 같다. ‘아버지를 존경하면서 어느 정도 어려워하는 아들은 바람직하지. ’두 사람 사이가 어느 정도만 개선되면 그녀 머릿속에서 그리는 근사한 부자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자 루시아는 흐뭇했다. ‘대왕 사자와 새끼 사자라..그러고 보니 타란 가문 문양이 흑사자였지. 아주 딱 들어맞네. ’ “오늘 식사 이후에 일정은 어떻소?” “별 다른 것은. 서재에 가서 책을 보려구요.” “오늘 꼭 읽어야 하는 책인가?” “그렇지는 않지만. 손님이라도 오시나요?” “이 시간에? 그런 무례한 손님은 맞을 필요도 없소.” “그럼...” “소화를 시킬 겸 가볍게 산책 하고 목욕을 하시오.” “...네?”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싶으면 일찍 잠자리에 들라는 소리요.” 휴고를 바라보던 루시아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사람 얼굴이 저렇게 붉어질 수도 있군. ’ 데미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했다. “...도대체 애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시뻘건 얼굴로 애써 목소리를 죽이며 말하는 루시아를 보며 그는 피식 웃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익!” 루시아는 그를 노려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홀을 나가는 그녀 뒤에 대고 휴고가 물었다. “어디 가는 거요?” “산책하러요!” 발소리가 쿵쿵 날 것처럼 루시아는 큰 동작으로 나가버렸다. 데미안은 그녀의 뒷모습을 멀뚱하게 바라보았다. 소년은 지금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두 분 대화의 어떤 점에서 루시아가 과한 반응을 보이는지 머리 좋은 소년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고민하던 소년은 작은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공작이 꽤 즐거운 것처럼 웃고 있었다. 싸늘한 미소, 혹은 비웃음을 보았지만 공작이 이런 식으로 웃는 것은 처음 보았다. 신기하면서 동시에 충격이었다. 한 자루 검처럼 매섭던 아버지가 조금은 사람 같았다. 잠시 후 나갔던 루시아가 다시 식당으로 들어왔다. “데미안. 같이 가자.” 데미안은 흘끔 공작 눈치를 살피다가 일어나 쪼르르 루시아 뒤를 따라갔다. 졸지에 혼자 남은 휴고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지난 밤 그녀가 했던 ‘우리’라는 단어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데미안을 거리낌 없이 부르는 그녀 모습을 보니 그가 없는 동안 둘이 꽤 친해진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둘이 험악한 관계이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는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 데미안 -- >정원을 따라 걸으며 데미안이 계속 루시아를 곁눈질했다. “하고 싶은 말 있어?” “좀..신기합니다. 전하를 무서워하지 않으시니까...” “데미안. 남편을 무서워하는 부인이 어딨어. 네가 커서 나중에 결혼하면 네 부인되는 사람이 널 무서워하면 좋겠니?”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어린 데미안은 아직 그런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소년에게 까마득히 높은 산꼭대기 정상 같은 공작을 루시아가 굉장히 편하게 대하는 것이 충격이었다. 데미안 눈에 루시아는 작고 순한 초식동물이었다. 그에 비해 공작은 크고 사나운 육식동물이었다. 절대 어울릴 수 없는 상극인 두 존재가 어울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소년은 혼란을 느꼈다. “그리고 자. 따라해 봐. 아버지.” “...아버지.” “옳지.” 루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소년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데미안이 놀라 반사적으로 주춤 물러서자 루시아 역시 놀라 손을 거두었다. 멈추어 선 그들 사이에 잠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미안. 나도 모르게. 기분 나빴어?” “아..아닙니다. 조금..놀라서..” 데미안은 지금껏 타인과 그 정도 가까운 접촉을 해본 적 없었다. “기분 나쁜 게 아니라...” “아이를 칭찬할 때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거든. 네가 싫어하면 하지 않을게.” 조금 우물쭈물하던 데미안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싫지..않습니다.” “그래? 그럼 지금 쓰다듬어도 괜찮아?”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는 천천히 손을 소년에게 뻗어서 까만 머리카락 정수리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렸다. 어려서 그런지 아이의 머리카락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몇 번 쓰다듬어 주고 루시아는 손을 뗐다. 첫날 소년을 봤을 때부터 꼭 하고 싶었던 걸 했더니 선물을 받은 것처럼 설ㅤㄹㅔㅆ다. 볼을 꼬집어보는 건 언제 할까, 루시아가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걷기 시작하자 데미안도 얼른 따라가 옆에 섰다. “루시아.” “응?” “아까. 식당에서 왜 화를 내신 건가요?” “응? 아니..그건 화 난 것이 아니라..그러니까..” 도무지 설명할 수도, 설명하고 싶지도 않아서 루시아는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화제전환을 할 수 있을까 골몰했다. 마침 머릿속에 때마침 잊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아! 데미안. 파티에서 입을 네 연미복이 없구나. 그걸 생각 못 했어. 혹시 가지고 있는 것 있니?” “없습니다.” “그래. 있을 리가 없겠지. 내내 학교에 있었는데.” “루시아. 전 참석하지 않아도...” 데미안은 이 기회에 어떻게 해서든 발을 빼고 싶었다. 이미 승마장에서 넘치도록 많은 여자들의 시선을 받았다.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그건 상관없지만 루시아를 향해 이상한 눈빛을 하는 건 불쾌했다. 괜히 자신 때문에 루시아가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아니야. 참석해야 돼. 으음.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지?” 루시아는 가급적 데미안의 의사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하지만 이번 정원파티에는 반드시 데미안을 참석시킬 생각이었다. 승마장에 데리고 다니며 인사는 시켰지만 공식적인 자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정원파티는 공식적 사교 모임이었다. 이번에는 규모가 커서 북부 사교계 이름 있는 귀부인들은 모두 초대했다. 그런 자리에서 정식으로 데미안을 소개하면 이전보다 데미안의 위상이 확 달라질 것이다. 물론 데미안은 아직 나이가 어리고 여자들만 참석하는 정원파티라서 그 자리가 공식적 사교계 데뷔는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사교계에 등장할 테고 그 전에 미리 사람들 기억에 심어두는 건 나중을 위해서 도움이 될 것이다. “아이가 입을 연미복은 기성복으로 구입해도 될 거야.” 들려오는 목소리에 두 사람이 멈추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어느 새 다가온 휴고가 그들 앞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로암에 와서 처음으로 아버지와 가까운 거리로 나란히 선 데미안이 멍하게 고개를 들어 거대한 아버지를 올려 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아버지를 본 것이 얼마만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정원파티니까 복장에 그리 까다롭게 신경 쓸 건 없어.” “다행이에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기성복이라면..데미안이면 한 12살 정도 것을 구해야 하려나요.” “녀석은 8살이야.” “데미안은 보통 8살보다 훨씬 크다구요. 또래와 비교해보면 거인이에요.” 휴고가 눈을 내리깔아 데미안을 보았다. 이 쪼그만 놈이? 그런 시선이었다. “언젠가 당신 보다 더 클지도 모르죠.” “흐음..” 중얼거리는 휴고의 음색이 어딘지 모르게 삐딱했지만 루시아는 알아채지 못하고 오히려 데미안이 눈치를 살폈다. ‘내가 감히 아버지보다 클 수 있을 리 없어’라고 생각하는 데미안은 혹시 루시아 말이 아버지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까 걱정이었다. “당신도 어릴 때 또래보다 훨씬 키가 컸을 것 같아요. 그렇죠?” “...기억 안 나.” 또래와 키를 비교하는 팔자 좋은 생활은 하지 못했다. 그가 데미안 나이였을 때 주변에 있던 노예 아이들은 대부분 제 나이조차 몰랐다. 그 역시 죽은 공작에게 납치되듯 로암에 오기 전까지는 정확한 자기 나이를 몰랐다. “일이 많으신 것 아니었어요? 바로 집무실로 들어가셨을 줄 알았어요.” “내가 방해한 건가?” 그가 조금 뚱한 어조로 말했다. 루시아는 오늘 내내 회의하느라 그가 좀 피곤한가 보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원래 오래 나갔다 오시면 더 바쁘시잖아요. 마침 잘 됐어요. 데미안이 아직 당신께 정식으로 인사 못한 것 같던데요. 데미안. 인사드리렴.” 데미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루시아 눈치를 한 번 살피고 말했다.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숙였던 고개를 들며 슬며시 루시아를 보자 루시아가 입 모양으로 ‘아버지’를 그렸다. 데미안은 용기를 짜냈다. “...아버지.” 휴고의 눈썹이 스윽 올라갔다. 딱히 그 호칭이 불쾌하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익숙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혐오와 증오 때문인지 그의 입에서는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말이었다. 죽은 공작 밑에 있을 때에도 공식적으로만 칭하고 아버지라 부른 적 없었다. 그의 침묵이 좀 길어지자 루시아가 슬쩍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가 눈을 마주치자 과할 정도로 생글생글 웃어 무언의 압박을 주었다. 그는 무심하긴 해도 눈치 없는 남자는 아니었다. 그는 나지막하게 답했다. “...그래.” 소년의 목덜미가 붉어졌다. 루시아는 흐뭇하게 그것을 보며 만족했다. 그가 어서 데미안의 귀여움을 알았으면 좋겠다. 오늘은 이걸로 되었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조금씩 천천히. “산책하실 거예요? 바쁘지 않으세요?” “산책하려고 나온 거야.” 왠지 자신을 자꾸 ㅤㅉㅗㅈ아내려 한다는 느낌이 영 못마땅한 휴고가 다시 뚱하게 답했다. ‘이 사람이 정말 많이 피곤한가 보구나. ’ 루시아는 생각했다. “그럼 셋이 같이 걸어요. 셋이 함께 하는 산책이 오늘 처음이군요.” “같이...?” 휴고가 흘끔 데미안에게 시선을 주었다. 데미안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왠지 이 자리에 자신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종이 다른 초식동물 루시아는 눈치 채지 못하는 사실을 비록 새끼에 불과하지만 기본적으로 육식동물이라는 종이 같은 데미안은 대왕 사자의 으르렁을 민감하게 포착했다. “전 들어가 보겠습니다. 봐야 할 책이 있어서..” “데미안. 식사 후 바로 책상에 앉으면 소화도 안 되고 좋지 않아.” “소화 다 됐습니다. 오늘 꼭 봐야 하는 책입니다.” 데미안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마치 도망치는 것처럼 재빨리 사라졌다. 루시아는 아쉬워하며 데미안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휴고는 만족감에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녀석. 영 쓸모가 없지는 않군. ’소년이 그토록 받고 싶었던 아버지에 의한 인정은 굉장히 쉽게 이루어졌다. “녀석과 사이가 좋군.” “친하게 지내라고 데미안을 오라고 하신 줄 알았는데요.” 서로 얼굴 정도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부른 것이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아직 나이가 어리니까 8살짜리 아들을 포용하는 건 좀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데미안 역시 무뚝뚝한 사내아이라 둘이 서로 이를 세우지만 않으면 소 닭 보듯 해도 관여치 않으려 했다. “정원파티에는 왜 데려가려는 거지?” “데미안을 사람들에게 소개할 기회가 거의 없으니까요. 당신 아들이고, 이젠 내 아들인데 사람들이 얼굴도 몰라서는 곤란하잖아요.” “...쉽군.” “네?” “당신 입에서 아들이란 말이 참 쉽게 나와서.” 그가 하는 말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없어서 루시아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루시아가 멈추자 휴고 역시 멈추어 섰다. “제가 데미안에 관심 갖는 것이 싫으세요? 혹시 제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아니야. 비비안. 그런 거 아니야.” 그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당신이 녀석과 그렇게 잘 지낼 줄은 몰랐어.” 휴고는 아까 그녀가 데미안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광경을 떠올렸다. 순한 강아지처럼 머리를 얌전히 내밀고 서 있던 데미안 모습이 낯설어서 그는 멈춰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 느닷없이 떠오르곤 하는 과거의 기억 한 조각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 야! 머리 만지지 말라니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도 툭하면 제 머리를 헤집는 휴고에게 휴는 버럭 소리쳤다. 머리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약점이었다. 적에게 노출된 순간 죽음과 직결이었다. 손목이 날아가고 싶지 않으면 용병은 결코 남의 머리에 손대지 않았다. [ 이건 친하다는 표시라니까. ]그렇게 사납게 버럭거려도 휴고는 늘 실실 웃기만 했다. [ 속없는 새끼. 넌 뭐가 좋아서 매일 쪼개고 있어? ][ 웃어. 웃으면 복이 온대잖아. 휴. ][ 하아..쓸개 빠진 놈. ]휴고는 제 머리를 불쑥 휴 앞에 들이밀었다. [ 너도 만져봐. ][ 치워. ][ 해보라니까. 원래 이런 쓰담쓰담은 부모가 해주는 거래. 근데 우린 해줄 사람 없으니까 서로라도 해줘야지. ][ 그딴 거 안 해줘도 되거든. ][ 난 해줬으면 좋겠어. 얼른. ]휴는 귀찮은 것처럼 대충 손을 내밀어 휴고 머리를 한 번 슥 쓰다듬었다. 헤헤 웃는 휴고를 보며 녀석의 머리카락이 참 느낌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녀석이 기어오르면 말해.” “그럴 일 없어요!” 휴고는 바락 되받아치는 그녀의 팔을 끌어 품으로 꼭 안았다. 품안에 폭 들어오는 작은 그녀를 조금 강하게 꽉 끌어안았다. 조금 당황하는가 싶던 그녀의 손이 등 뒤를 두르는 것을 느끼며 휴고는 미소를 지었다. 가끔 형제의 기억이 떠오르면 그는 달콤한 행복과 저미는 고통을 함께 느꼈다. 아픈 것은 여전하지만 그녀의 체온이 몸에 닿자 조금 들뜬 기분이 심장을 헤집는 것 같은 고통을 어느 정도 상쇄했다. [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있어. 언젠가는 소개해 줄게. ]어느 날, 형제는 그렇게 말하며 행복하게 웃었다. 형제가 살아있다면 그도 말해주고 싶었다. ‘나도 그런 여자가 생겼어. 이미 난 결혼은 했지만. ’그 날 저녁에 휴고는 집무실에서 대충 오늘 하루 종일 했던 회의 자료를 정리하고, 파비안이 두고간 보고서를 들추어 보았다. 파비안의 보고서는 주로 수도에 관한 소식이었다. 주요 권력자들의 움직임이라든가, 외국의 주요 인물의 입국 상황이라든가, 그들의 접촉 등등과 때로는 거대 상단의 눈에 띄는 거래 현황을 담기도 했다. 개 중에는 사교계에 떠도는 소문도 있었는데 파비안은 어차피 올려봐야 주인이 별 관심없다는 걸 알지만 아예 올리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라 일종의 형식적 보고였다. 파비안은 일 하나만큼은 정말 철두철미했다. 형식적 보고인 소문 취합에도 빈틈이 없었다. 공작 심기를 거슬릴 소문이라도 토씨 하나 빼놓는 법 없었다. 파비안은 공작이 넘긴 일거리가 넘쳐나 야근을 반복하면 더 열심히 눈에 불에 켜고 소문을 모으러 다녔다.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그래서 휴고는 비교적 자신을 둘러싼 해괴한 소문들까지 대부분 알고 있었다. 평소처럼 무심하게 소문 관련 내용을 훑어보던 휴고가 미간을 찌푸렸다. 수도에 흘러 다닌다는 그의 지참금 관련 내용이었다. “쯧.” 휴고는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왕이 그렇게 입이 가벼워서야 원. 퀘이즈 말에 의하면 그 노친네는 위엄 있는 척 잘 걷다가 꼭 삐끗한다고 했다. 그 말을 하며 퀘이즈는 “삐끗 정도가 아니라 발모가지가 부러지면 참 좋을 텐데 말이지.” 라며 암흑가 두목처럼 음험하게 웃었다. 뒤이은 소문을 읽어가던 휴고의 표정이 점점 묘해졌다. 공작부인이 유일무이한 미녀고, 남들이 보기 전에 공작이 낚아 채 영지로 끌고 갔다는 내용이었다. “으음..” 그녀를 엄청난 미녀로 묘사한 소문 대목에서는 그는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으나 ‘영 터무니없는 말은 아닌데. ’ 라고 생각했다. 남들에게 보이지 않으려 몰래 결혼을 했다는 대목에서는 ‘사실관계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아도 그런대로 맞는 소리군. ’ 이라고 생각했다. 딴 놈에게 보이지 않으려 승마장을 짓거나, 뱃놀이를 제한하는 등의 그의 노력은 아직도 현재 진행중이었다. 그가 영지로 끌고 갔다는 내용도 정확히 말하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결혼 하자마자 영지로 온 건 맞으니까. ‘별 문제될 소문은 아니군. ’그는 판단하며 서류를 덮었다. < -- 데미안 -- >루시아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감싸며 침실로 들어왔다. 그가 없을 때는 하녀들이 침실까지 들어와 마무리 시중을 들어주었는데 그가 오자마자 다들 알아서 침실 문 앞까지만 따라오고 줄행랑이었다. 화장대에 앉아서 머리카락을 꾹꾹 수건으로 눌러가며 물기를 제거했다. 한 달 가까이 남의 손에 맡겨두다 직접 하려니 더디었다. 아무래도 하녀 여럿이 붙어 등 뒤에서 꼼꼼하게 말려주는 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루시아는 그가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화장대 거울로 시선을 돌렸지만, 그는 곧바로 루시아에게 다가와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놀란 그녀는 수건을 놓쳐 떨어뜨렸다. “휴! 머리를 더 말려야 해요.” 이대로 자면 내일 아침 사자머리가 된다구요! “나중에 해.” “나중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녀가 뭐라 하건 말건 그는 그녀를 곧장 침대로 데려가 내려놓았다. 여전히 머리 어쩌고 종알거리는 입술에 그대로 키스했다. 단 과실을 베어 무는 것처럼 그녀의 아래 입술을 잘근 깨물고 바로 혀를 밀어 넣었다. 버둥거리는 그녀의 팔목을 침대로 누르면서 그는 더 깊이 그녀 입 안을 탐했다. 그녀는 아직도 뭘 모른다. 어설픈 반항은 오히려 남자를 부추긴다는 것을. 부드러운 입술에서는 단 맛이 스미는 것 같아서 혀로 핥았다. 여리고 말랑한 혀를 건드리자 놀라 움찔거렸다. 목욕한 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입안에 따끈한 열기가 있었다. 그녀의 내부도 이처럼 따뜻하겠지 생각하니까 아랫배가 지끈했다. 그는 흥분한 하복부를 그녀의 허벅지 안쪽으로 바싹 밀착해 지그시 눌렀다. 어설프게 그녀의 몸을 감싼 목욕가운을 들추면 곧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입구부터 꽉 조일 그녀의 여성을 생각만 해도 하체로 피가 몰렸다. 그녀도 그걸 느꼈는지 자꾸 틀던 몸이 얌전해졌다. 슬며시 잡고 있던 손목을 놔주자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으며 매달렸다. 그의 혀는 적절한 강약을 주며 그녀의 입안을 탐색했다. 새침하게 도망치는 그녀의 혀는 간단히 그에게 제압되었다. 그가 그녀의 입안을 희롱하며 진한 키스를 퍼부으면 루시아는 당해내지 못하고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당장이라도 교합할 것처럼 은밀한 곳에 맞닿은 뜨거운 그의 상징은 아슬아슬한 불안감을 주며 그녀를 더욱 고조시켰다. 혀뿌리가 얼얼하도록 그의 혀에 휘말려 강하게 빨리는 순간 루시아는 다리 안쪽이 찌릿해서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들썩했다. 그녀의 움직임은 밀착해 있던 그의 성기를 스쳐 문질렀다. 그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입술을 떼었다. 긴 키스에 혼이 나간 표정으로 루시아는 숨을 가쁘게 쉬며 그를 응시했다. “생각을 해봤는데.” 그의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도톰하게 부푼 그녀의 붉은 입술을 보는 눈빛이 이글거렸다. “당신이 빨리 지치는 건 한 번에 몰아해서 그런 것 같아. 방식을 바꿔보려고. 한 번 하고 좀 쉬다가 또 하고, 쉬다가 또 하고. 어때?” 빨갛게 물든 얼굴로 루시아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를 향해 인상을 썼다. “그런 거로 생각 같은 거 하지 말아요.” “그런 거라니. 중요하다고.” 그는 부풀어 오른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그럼 오늘은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 볼까.” 그의 눈빛이 마치 도약 직전의 맹수 같아서 루시아는 긴장된 침을 삼켰다. “저는..찬성하고 싶지 않은데요..” “음..그러면 오늘은 시험판.” “그게 뭐가 달라요!”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녀의 가운 앞섶을 잡아 양쪽으로 벌렸다. 뽀얀 그녀의 몸매를 잠시 눈에 담고 두 손 가득 가슴을 쥐었다. 조금 강하게 힘을 주자 그녀의 몸이 흠칫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배꼽 부근부터 혀를 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길고 긴 밤의 시작이었다. 두 다리가 그의 어깨에 걸려 엉덩이가 들렸다. 그가 깊이 안쪽까지 들어와 자극했다. 몸을 디딘 그의 팔을 잡고 그녀는 그의 성기가 진입해 들어올 때마다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물었다. 강하게 저릿한 느낌이 한 번씩 내부를 칠 때마다 수면의 표면장력에 몸이 부닥치는 것 같았다. “힘들어?”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배위 다음으로 오래 지속하기 힘든 자세였다. 그가 깊이 들어와 자궁까지 건드는 감각은 너무 자극이 심했다. 하지만 그는 좋아하는 자세였다. 뿌리 끝까지 그녀의 질벽에 바짝 죄는 느낌은 희열 같은 쾌감을 주었다. 그는 그녀의 발목을 잡아 옆으로 내렸다. 후측위 자세로 허벅지 안쪽을 스쳐 지나가 질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조금 얕게, 그리고 속도감 있게 허리를 움직였다. “으응..흣...” 몸이 옆으로 살짝 돌려 누운 상태로 그녀는 신음을 흘렸다. 적당한 자극이 좋은지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그녀는 약한 자극은 약한 자극대로, 강한 자극은 강한 자극대로 반응이 달랐다. 그녀는 성격만큼이나 얌전한 섹스와 적당한 자극을 좋아하지만 그는 과격하고 강한 자극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얼마간 괴롭히며 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는 그가 무척이나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하겠지만 뭘 모르는 소리다. 그가 얼마나 제 욕심을 참아가며 배려해 주는지 그녀는 모른다.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날뛰었다가는 그녀는 며칠 일어나지도 못하고 몸살을 앓을 것이다. 그는 매일 그녀를 안기 위한 노력으로 아주 섬세하게 자신을 절제하고 있었다. 의사 조언을 충실이 따라 닷새에 하루를 지키는 것도 그의 노력 중 하나였다. “흐읏!” 그녀의 몸이 한 번 크게 떨리며 내부가 좁게 움츠러들었다. 적당한 자극의 누적으로 적당히 기분 좋은 오르가즘을 느낀 그녀의 몸이 늘어졌다. 그는 그녀 몸에 자신을 묻은 채 내부의 조임이 풀릴 때까지 숨을 몰아쉬며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그는 그녀 몸을 굴려 엎드리게 했다. 편히 엎드린 자세로 누운 그녀를 얼마간 무게를 실어 누르며 그는 뒤에서 짧고 강하게 치고 들어갔다. “아!” 그는 마치 박자를 주는 것처럼 강하게 들어왔다가 부드럽게 빠져나가는 탁 탁 끊어지는 동작을 반복했다. 그녀는 짤막한 비명을 지르며 단단한 끝이 안쪽을 건드릴 때마다 시트를 꽉 쥐었다 놓았다. “아!” 그의 몸이 위에서 내리 누르는 무게마저 쾌감으로 다가왔다. 엉덩이 안쪽 살을 스치며 내부로 파고드는 느낌이 적나라했다. 아픈 건 아닌데 자꾸 비명이 나왔다. 그녀는 때때로 그의 부드러움이 오히려 거칠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그건 마치 사나운 짐승이 뒷목을 물고 흔드는 것처럼 그녀를 무력하게 하지만 그녀를 강하게 열망하는 사내의 욕망이 포효하는 것 같아 짜릿하기도 했다. 루시아는 그의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만져보았다. 살짝 물기가 있는 머리카락이 손가락을 스치는 것이 기분 좋아서 손가락에 감는 것처럼 쥐었다. 그의 입술이 목덜미에서 목을 타고 천천히 올라갔다. 팔을 디뎌 그녀에게 기대고 있던 상체를 일으킨 그가 그녀의 눈과 입술에 가볍게 여러 번 입을 맞추었다. “..데미안 말이에요.” 휴고는 그녀의 허벅지를 잡아 자신의 허리 쪽으로 감았다. 그녀 안을 빠져나가기 무섭게 관성처럼 질벽이 좁아져 그가 만든 길을 처음으로 되돌렸다. 그러면 그는 다시 빡빡한 속살을 헤치며 진입해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했다. 오돌도돌 스쳐가는 그녀의 내벽은 끊임없이 그를 자극했다. “보자마자..놀랐어요. 당신하고..너무 닮아서. 으읏..” 할퀴면서 빠져나간 그가 단번에 허리를 밀어 올리자 루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내 그가 천천히 속도에 강약을 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고 그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렸다. “아..그..그래서..” 루시아는 숨을 헐떡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조금 두근. ..거렸어요. 흡-” 거칠게 몸을 가르고 들어오는 느낌에 루시아는 그의 어깨에 손톱을 세웠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삼키고 단번에 혀가 안으로 들어와 입 안쪽을 자극했다. 짤막한 키스를 끝낸 그가 목선을 따라가며 어깨까지 입술을 붙였다. “..그 녀석을 보고 두근거렸다고? ...왜?” “당신..을..보는 것 같아서..” “그런 꼬마가 날 닮았다 하기엔 한참 일러.” “한참은 무슨..10년만 있어도 될 텐데요. ..아!” 더 이상 대화는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강한 움직임을 따라 가면서 루시아는 교성을 지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휴고는 베개를 겹쳐 쿠션을 만들어 등에 받치고 반쯤 일어나 앉은 자세로 기댔다. 루시아는 그의 허벅지에 앉아 상체를 모두 그의 복부와 가슴에 축 기대 늘어졌다. 고개를 옆으로 틀어 머리를 가슴에 기댄 그녀의 두 팔도, 다리도 힘없이 늘어졌다. 그의 손은 마치 달래는 것처럼 등을 아래위로 천천히 오갔다. 뜨거운 열기는 어느 정도 가셨으나 여운은 여전히 남았다. 무엇보다 그의 중심은 아직 그녀 몸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거대하게 일어난 그의 것은 그녀 내부에서 조금씩 꿈틀거리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루시아는 그가 언제 또 다시 움직임을 재개할지 몰라 조마조마했다. 그가 시도하는 새로운 방식은 루시아는 별로 달갑지 않았다. 쉰다고 하면서 잠을 재워주지도 않고 아주 밤을 샐 기세였다. “데미안을 왜 기숙학교에 보내셨어요?” 귀족 아이들은 어려서 대개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았다. 요즘은 학술원을 보내는 것이 유행이지만 그것도 대개 15살 전후 무렵에 3~4년 정도 경험을 쌓기 위해서였다. 공부 목적보다는 여러 귀족 아이들과 교류하고 인맥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공작가 후계 신분이 기숙학교 과정을 수료하는 일은 전무했다. 대개 거부나 귀족의 후계자 아닌 차남 이하가 정말 순수하게 공부를 목적으로 학자가 되고 싶으면 택하는 과정이었다. “내가 신경써줄 수 없으니까.” 필립이 데미안을 데리고 왔을 때, 휴고는 한창 전쟁으로 정신이 없었다. 겨우 시간을 내어 로암에 들르는 건 기껏해야 일 년에 몇 번이었다. 볼 때마다 무럭무럭 자라 있는 것이 좀 신기했지만 그에게 아이는 그저 동물 같았다. 아버지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그에게 난데없이 나타난 아이는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아이에게는 안전한 보금자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아마 데미안이 없었다면 그는 진즉 타란 가문을 내팽겨 치거나 조각내 밟아버렸을 것이다. 필립이 그런 점을 파악해서 아이를 데려왔나 생각이 문득 들었을 때는 이미 꽤 시간이 흐른 후였다. 데미안이 5살이 되었을 무렵, 전쟁의 분위기가 조금 느릿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자 그의 시간에 여유가 생기고 생각이 많아졌다. 상황을 보니까 전쟁이 더 확대될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전쟁이 체질에 맞았다. 북부로 돌아가 지루한 서류 작업에 치일 생각을 하자 지긋지긋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는 의문을 가졌다. 타란 가문 따위 어찌되든 그가 알 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북부는 좋아했다. 투박하며 거친 그 땅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북부가 평온하려면 타란 가문이 건재해야 하는 건 상식이었다. 쓸만한 후계 만들어 물려주면 되겠군. 결론을 내린 그는 데미안을 후계로 공표했다. 그는 다른 자식을 얻을 생각이 없고, 아예 남을 데려다 양자로 삼는 것보다는 그의 아들로 알려진 데미안을 후계로 삼으면 반발은 없겠지 생각했다. 그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다는 건 나중에 깨달았다. 가신들은 물론이고 북부 귀족들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왜 그런가 알아봤더니 그런 전례가 없단다. 그는 코웃음 쳤다. 전례? 그가 하면 그 때부터 전례가 되는 것이다. 귀족놈들이 뭐라 찡찡거리든 알바 아니지만 오랜만에 본 아이 눈에 드리운 어둠이 눈에 밟혔다. 아이를 향하는 뭇시선에 마음을 다친 것 같았다. 휴고는 그가 보듬어 키울 수 없다면 차라리 아무 편견 없는 곳에서 바른 교육을 받는 것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누구의 시선도 손도 닿지 않는 기숙학교로 보냈다. 루시아는 ‘그 아이가 미워 보낸 건 아니죠?’ 묻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거기까지 나가는 건 과했다. 아직 그가 데미안에 대해 어떤 마음인지 확실히 알지 못하는데 미리 재단하는 것은 오히려 그의 감정을 더 악화시킬 우려가 있었다. “이젠..제가 살펴주면 되니까 로암에서 이대로 지내게 하면 안돼요?” 그의 두 손이 엉덩이를 꽉 움켜잡자 루시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붉은 눈이 그녀를 내려 보고 있었다. “나는 녀석과 약속했어.”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가느다란 그녀의 몸이 흠칫하자 그의 혀가 살짝 잇자국이 난 목덜미를 부드럽게 핥았다. “졸업하면 훗날 내 자리를 준다고 했지. 지금 와 기숙학교 가지 말라고 하면 녀석은 소공자 자리에서 밀려났구나 생각할거야.” 그가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게 녀석을 위하는 거라 생각해?” “...아뇨. 제가 생각이 부족했어요.” 그의 입술이 짙은 호선을 그렸다. 그가 고개를 바싹 들이밀며 그녀 입술에 가까이 다가갔다. “귀여워하는 건 좋지만.” 그의 입술이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너무 멀리는 가지 마.” 루시아는 그의 말을 너무 주제넘게 아이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뜻으로 들었다. 휴고는 애를 예쁘다 하는 것은 정도껏 하되 부부 사이에 끄집고 들어오지 말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두 사람 의사소통에 발생하는 약간의 오해는 지금은 풀어질 수 없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두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단단히 붙들어 위에서 아래로 내리찧기를 반복했다. 루시아의 허리가 둥글게 휘어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두 팔을 뒤로 꺾어 그의 다리를 잡아 몸을 지탱하며 그의 거센 율동에 몸이 흔들렸다. “으응..아! 휴!” 몇 번이고 쳐올리며 그녀 안으로 돌진해 들어가던 그가 그녀의 양 어깨를 쥐어 앞으로 당기면서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거친 음색으로 그가 속삭였다. “하아..비비안..” 루시아는 그가 한숨처럼 그녀의 이름을 불러 주면 오싹 소름이 돋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이젠 더 이상 그가 부르는 비비안이라는 이름이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그렇게 불러줄 때마다 ‘비비안’이라는 또 하나의 자신을 발견하는 것 같았다. 내부가 움츠려들자 그가 신음을 삼키며 그대로 그녀를 침대에 바로 눕혀 위로 올라갔다. 그의 입술이 그녀를 덮쳤다. 그와 동시에 하복부 아래부터 살덩이가 묵직하게 치고 들어왔다. 옆을 딛고 있는 그의 팔을 꽉 붙들며 그녀는 순간의 짜릿함에 몸을 떨었다. 뿌듯하게 안을 채우는 감각이 생생했다. 그녀의 몸은 본능적으로 그를 더 깊이 받아들이려 허벅지를 열고 엉덩이를 들었다. 숨이 가쁘도록 키스하던 그가 고개를 들고 허리 운동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는 느리게 움직이다가 느닷없이 빠르게 그녀의 몸 안을 가르고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그의 아래에서 흔들리는 그녀의 입에서는 가냘픈 교성이 흘렀다. 루시아의 눈앞에서 그의 탄탄한 가슴이 움직였다. 쪼개지는 것 같은 잔근육과 작게 솟아 있는 유두를 보자 만져보고 싶었다. 그의 허리 움직임이 조금 느려질 때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을 더듬으며 근육의 움직임을 느껴보았다. 고개를 들어 살짝 혀로 핥았다. 그가 순간 몸을 움찔했다. 루시아는 다시 한 번 혀를 내밀어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유륜을 따라 둥글게 핥았다. 그가 작게 욕설을 삼키는가 싶더니 격하게 입술을 겹쳐왔다. 강한 힘으로 퍽퍽 안으로 박아오는 힘에 몸이 아래위로 흔들리고 터지는 비명은 그의 입술에 막혔다. 눈앞이 환해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불꽃이 터지는 것 같기도 해서 지금 눈을 떴는지 감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눈꼬리를 타고 주룩 흐르는 눈물을 그가 핥았다. 머릿속을 모두 태워버릴 것 같은 이 열기가, 힘들지만 좋아서 루시아는 그에게 매달렸다. < -- 데미안 -- >그에게 밤새 시달리다가 새벽녘에 겨우 잠들었다. 눈 뜨니 이미 날이 환했다. 루시아는 그의 새로운 방식에 반대였다. 집요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의 체력에는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루시아는 침대에 축 늘어진 채 일어나야 한다고 끝없이 생각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한 달 만에 이틀 연속으로 격한 운동을 했더니 온몸이 노곤했다. 얕은 수면에 들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카락을 간질여 루시아는 눈을 떴다. 언제 들어왔는지 그가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고 있었다. 잠이 덜 깨었나 싶어 멍하게 그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고개를 숙여 루시아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아직 안 일어났다기에 걱정돼서. 괜찮은 거지?” 입술에 닿는 부드러운 촉감은 현실이었다. 간밤에는 살짝 그가 미웠는데 얼굴 보니 사르르 녹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최소한의 양심은 있으셨군요.” 우회적으로 그를 비난하며 루시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의 작은 웃음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의 손가락이 모근을 스치면서 머리카락을 빗는 것처럼 쓸어내렸다. 조금은 간지럽고 기분이 좋았다. 머리가 완전 부스스할 텐데. 그 생각이 떠오르자 소르르 오던 잠이 확 달아났다. 루시아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왜 그래?” “..머리가..” “아픈가? 의사를...” “아뇨. 그게 아니라.” 루시아는 이불 사이로 빠끔히 눈만 내밀었다. “어제..젖은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 않아서..엉망일 거예요.”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는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여자의 마음이었다. 그녀의 말을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그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불을 확 들추었다. 짧게 비명을 지르고 붉어진 얼굴의 그녀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뭐가 어떻다고 그래. 예뻐.” 루시아는 더 달아오른 얼굴로 그를 빤히 보았다. “...바람둥이.” “...뭐?” “아니에요.” 그는 억울했다. 그녀가 그 단어로 그의 지난 날 행적을 꼬집으면 그는 솔직히 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아니었다. “비비안. 내가 무슨 실수했어?” “바쁘지 않으세요?” “말 돌리지 말고. 당신 리스트가 날 그렇게 정의하는 건 알지만 난데없이 지금 그 말이 왜 나오는 거지?” “무슨 리스트요?” “당신이 머릿속으로 내 욕 잔뜩 써놓은 리스트 있잖아.” “네?” 황망히 되물은 루시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리스트가 제 머릿속에 있다구요?” “꾸준히 한 줄씩 추가하는 거 아니었나?” 루시아는 다시 웃기 시작했다. 그는 뚱한 표정으로 숨넘어가게 웃는 그녀를 보기만 했다. 진지한 얘기 중에 그녀가 왜 그렇게 웃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웃음에 동조할 수가 없었다. “그럼 그 리스트가 언제 추가가 되는 건데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당신이 더 잘 알겠지.” 루시아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이 남자도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 하는구나.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내 욕’이라는 단어를 통해 그는 그녀에게 잘못한 것이 꽤 있다고 시인하고 있었다. 그는 실수를 할 것 같지 않은 사람이지만 한다고 해도 인정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 리스트 없어요. 그렇게 복잡한 감정 쌓아두지를 못해요.” “그럼 좀 전에 튀어나온 그 말은 뭐지?” 루시아는 새침하게 입술을 삐죽였다. “갑자기 그런 말씀 하시니까 그렇죠.” “무슨 말?” “예..쁘다고..” 루시아는 제 입으로 말하기 살짝 민망해서 말끝을 흐렸다. 참하다거나 귀엽다는 말은 들어봤다. 그녀는 자신의 외모가 예쁘다는 수식어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보고 느낀 걸 그냥 말해도 잘못인가?” 루시아는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그는 바람둥이지만 달콤한 말을 여자 귀에 속삭이는 유형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그의 말투는 불친절했다. 그는 가진 것이 워낙 많아서 알아서 여자들이 달라붙는 바람둥이였다. 루시아는 손을 뻗어 제 머리를 만져보았다. 역시 손에 만져지는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엉클어져 있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엉망일 것이 뻔했다. “예..뻐요? 이 모습이?” “뭐가 어떻다는 건지 모르겠군. 예뻐.” 그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마치 나무를 보고, 이건 나무다 말하는 것 같았다. 루시아가 미심쩍은 눈으로 계속 바라보자 그의 표정은 점점 난처해졌다. “표현법이 마음에 안 드는 건가? 당신의 아름다움이 너무 찬란해서 눈이 멀 것 같고..” “지금 놀리시는 거죠?” 루시아가 뾰로통하게 말하자 그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쩌라는 건지 말을 해.” “...예뻐요? 제가?” “예뻐.” 그가 무슨 생각으로 하는 말인지 모르지만 더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빈 말이래도 좋았다. 기분 좋고, 기쁘고, 마음이 간질간질해서 루시아는 그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는 어쩐지 불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웃지 마. 잡아먹고 싶어지니까.” 루시아가 까르르 웃자 휴고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렵지만 어쩐지 편안해 보이는 그녀가 보기 좋았다. 그를 사랑한다고 인정한 후 루시아는 한결 마음이 편해졌고 그녀의 분위기에서 여유가 묻어났다. 그는 로암을 떠나 있는 동안 그녀가 내내 마음에 걸렸다. 떠나기 전 그런대로 화해하기는 했지만 어딘가 미진한 것 같아 찜찜했다. 불을 끈 것이 아니라 안 보이게 덮은 것 아닌가 생각했다. 로암에 돌아가면 기분이 덜 풀린 그녀가 외면하면 어쩌나 걱정했다. 그녀는 그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잘 지내고 있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밝아졌다. 내가 없어도 그녀는 괜찮다고 생각하니까 가슴 안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이 여자가 갖고 싶어. ’그녀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다 갖고 싶었다. 당신만은 절대 사랑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여자 마음을 대체 어떻게 가질 수 있나. 그의 인생 최대의 난제였다. 그는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보지 못했다. 그가 사랑했던 형제는 그를 사랑한다면서 죽음을 택했다. 그녀는 그의 첫사랑인 셈이었다. 그러나 감정의 풋사랑을 알기 전에 너무 많은 육체적 사랑을 경험했다는 것이 그의 비극이었다. 사랑은 때로는 지극히 단순해서 솔직한 한 마디 고백이 만능열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가 알 리가 없었다. “계속 이러고 계셔도 괜찮아요? 바쁘시지 않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나긋나긋해 진 것을 그는 포착했다. ‘그녀는 예쁘다고 하면 좋아 한다’ 이제 휴고가 머릿속에 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한가하지도, 바쁘지도. 일을 하려면 끝이 없고, 안 하려면 얼마든지 쉴 수도 있지.” “그래서 안하려구요?” “그런 건 아니지만 당신이 안달할 필요는 없다는 소리야. 내가 일을 안 하면 곤란한가?” “...곤란하죠.” “왜?” “남편은 아내를 먹여 살려야 하니까요. 그러려면 돈을 벌어야 하잖아요.” 그가 큭큭 웃었다. 그는 루시아가 하는 말에 때로는 묘하게 보다가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루시아는 어떤 지점에서 그가 재밌어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당신을 먹여 살리는 건 대단히 쉬운 일이군. 돈을 벌어다 줘도 별로 쓰지도 않는 것 같고.” “쓰고 있어요. 파티를 여는데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데요.” “당신 사적인 소비 말이야.” “사적인 소비 하고 있어요. 정원에 심을 꽃도 사고...” “드레스나 장신구. 그런 거.” “쓰고 있어요. 드레스 수선하는데 은근히 돈이 들어요. 장신구는 타란 가문 보물 창고에 넘쳐나던 걸요. 죽을 때까지 차도 다 못할 거예요.” 귀부인들이 귀금속들을 부지런히 사 모으는 건 그것들이 곧 사재 축적이기 때문이었다. 어지간한 작위의 가문이면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귀금속이 어느 정도는 있기 마련이지만 그건 가문의 재산이었다. 이혼할 경우 귀부인들이 소유한 귀금속은 위자료와는 별도로 완전하게 자신의 소유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녀와의 대화가 어딘지 모르게 겉돌고 있었다. 휴고는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해 보았다. “내 돈을 쓰기 싫은 건가?” 루시아는 잠시 그가 한 말의 의미를 해석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의외로 그는 상당히 섬세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뜻밖의 모습을 발견했다. 어쩐지 그가 귀여워서 루시아는 계속 웃었다. 아무래도 이건 데미안과 함께 지낸 부작용이었다. 작은 휴고를 한참 봤더니 진짜 커다란 휴고를 봐도 예전의 위협적 느낌이 많이 반감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휴고의 노력이라는 걸 그녀는 생각도 못했다. 루시아가 승전파티에서 처음 마주했던 그를 떠올릴 수 있다면 지금의 그와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맹수의 제왕이 세상을 향해 포효해도 암컷 앞에게는 순한 것처럼 그 역시 그녀 앞에서는 한껏 기세를 죽이고 있었다. “왜 웃어.” 투덜거리는 그에게서 가만히 있어도 주변 사람을 압도하는 전쟁의 흑사자, 타란 공작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작은 토끼 루시아는 대왕 사자 발치에 앉아 귀엽다며 까르르 웃고 있었다. “의외라서 그랬어요. 그런 생각 같은 건 전혀 안 하시는 줄 알았거든요. 제가 원래 불필요한 쇼핑을 좋아하지 않아요.” “후..그래. 마님께서는 근검절약이 몸에 뱄지.” “좋은 거잖아요.” “누가 뭐래.” 절약을 하는 아내를 나무란다는 소리는 듣도 보도 못했다. 쓰라고, 내 돈을 써, 라고 말하는 것도 어쩐지 웃기는 일이다. 그의 아내는 꽉 쥐면 부서질 것처럼 약하면서 바위처럼 강인한 자신만의 주관이 있었다. 그녀는 그런 정 반대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모순이 없었다. 휴고는 그녀를 잡아 둘 미끼가 필요했다. 이미 결혼이라는 강한 결속이 둘을 묶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개인의 욕망에 기초해서 그녀가 도무지 그를 벗어날 수 없는 뭔가를 찾아야 했다. 돈은 아니다. 그렇다고 권력도 아니었다. 그녀의 사교활동은 해야 하는 최소한의 선에만 그쳤다. 교류가 잦은 사람은 별로 없고 북부 사교계 영향인사들과 적극적인 친분을 쌓으려 하지 않았다. 그가 하는 일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집무실에도 기웃거리지 않았다. 돈과 권력. ‘둘을 빼면 대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게 뭐가 있지?’돈과 권력 없는 밑바닥 계층도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살아간다. 그들은 뭘 주고받았을까. ‘아이인가. ’번뜩 떠오른 생각은 그의 기분을 암울하게 했다. 그는 제 피를 이은 아이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를 절대 바라지 않았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도 어차피 그는 그녀에게 아이를 줄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는 자신이 잘하는 것을 발견했다. 수많은 여자들을 통해 검증받았고, 나름 자신이 있었다. 그녀가 자신 없이는 외로워 밤잠 설치게 만들 수 있다면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좀 본능적이긴 하지만 원래 욕망이란 본능적일수록 더 탐욕스러운 법. 문제는 그녀도 그걸 좋아하느냐 인데 그는 아예 확신을 얻어 보기로 했다. “당신, 나랑 하는 거 좋아?” “...네?” “침대에서 만족하냐구.” 그를 바라보던 루시아의 얼굴부터 목덜미까지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뻔뻔한 그의 얼굴을 노려보며 그에게 등을 보이며 돌아누웠다. “조금만 더 자야겠어요. 당신은 어서 일하러 가세요.” 그녀의 외면에 그는 충격 받았다. 대답도 하기 싫을 정도로 형편없었나! 그는 다급히 이부자락을 잡아당겼다. “비비안. 뭐가 문제지? 횟수? 시간? 애무가 부족했어? 아니면 체위가..” 루시아는 벌떡 일어나 앉아 그에게 바락 소리쳤다. “충분하니까 그만 좀 해요! 어쩜 그러세요? 어떻게 그런..그런 말을..” 사과처럼 뻘건 얼굴로 씩씩대는 그녀를 보던 그가 씨익 웃었다. 당황해서 쩔쩔매는 그녀를 보니 놀리고 싶어졌다. “새삼스레 뭘 그래. 이보다 더 야한 말도 하는데.” “그..그건 상황이 다르잖아요.” “침실. 침대 위. 뭐가 다르지?” “같은 장소라도 시간에 따라 상황이 다른 거예요. 지금은 아침이고..” 그가 침대위로 무릎을 딛고 올라오자 루시아는 움찔했다. 도망칠 곳은 없지만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더 빨랐다. 어느새 침대에 누운 그녀의 몸을 그의 두 팔이 가로막아 빠져나갈 틈을 없앴다. “아침에 아예 한 적 없는 건 아니잖아.” “그 때는..당신도 늦잠을..” “당신 기준은 참 특이하군. 밤부터 해서 아침까지 하는 건 괜찮고, 아침에만 하는 건 안 되고? 그의 고개가 내려오고 루시아의 입술을 덮었다. 부드럽게 입술을 쓸어내리며 시작한 키스는 순식간에 격해져서 두 사람 혀가 뜨겁게 얽혔다. 입안을 샅샅이 뒤지는 것처럼 그의 혀가 잇몸을 훑고 입천장이나 볼 안쪽을 더듬었다. 잠시 떨어진 입술이 다시 덮쳐왔다. 그의 손이 가슴을 움켜쥐고 손끝으로 문지르자 루시아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이봐요, 짐승 씨.” 그의 붉은 눈이 커졌다. “이 이상 더하면 내일 오자마자 돌아가야 할 손님들에게 당신이 변명을 해야 할 거예요.” “하하하. 당신은 정말.” 그가 웃으면서 루시아를 끌어안았다. 그가 웃는 소리에 루시아는 몸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아...’루시아는 탄식했다. ‘나 지금 행복하구나. ’너무 행복하면 가슴이 저리다는 사실을 알았다. 루시아는 눈이 시큰해서 그의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 -- 데미안 -- >오후에 그는 집무실에서 열심히 서류 작업을 하다가 코에 스치는 차향에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은 알았으나 다른 일에 더 집중하느라 대충 흘렸다. 제롬이 조용히 두고 간 찻잔에 찰랑이는 차를 보며 그는 펜을 놓고 등을 기댔다. 찻잔을 들고 잠깐의 휴식을 위해 발코니로 나갔다. 파티 준비 때문인지 정원에 바쁘게 오가는 자들이 제법 많았다. 그는 시선을 돌리며 그녀를 찾았다. 정원 구석에서 그녀를 곧 발견했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 있는 까만 머리 아이의 뒷모습은 데미안이었다. ‘둘이 정말 친하군. ’중얼거리며 그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객관적으로 둘은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였다. 그녀가 데미안을 정원파티에 데려가는 것도 그는 조금은 걱정이었다. 적지 않은 자들이 그녀의 의도를 의심할 것이다. 그걸 그녀에게 말해둘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어리석은 여자가 아니었다. 데미안이 그녀를 곧잘 따르는 것이 신기했다. 그렇게 붙임성 있는 녀석이 아닌데. 고작 몇 주 만에 졸졸 따르는 강아지로 만들어 놓았다. 집사 제롬만 해도 그렇다. 우리 마님, 하면서 절절매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녀는 아무래도 주변 사람들을 제 편으로 만드는 신기한 능력을 보유한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건 적이 많은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일이지만, 그는 어쩐지 썩 유쾌하지 않았다. ‘뭘 하는 거지?’그녀와 아이가 머리를 맞대고 아까부터 쪼그려 앉아 있는 모습이 계속 눈에 걸렸다. 거리가 멀고 그가 보는 방향에서는 제대로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뭘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둘이 대체 뭘 하는 거야. ’그의 투덜거림에는 ‘날 빼고’란 말이 빠져 있는 것이 그의 진심이지만 너무 유치해서 그는 차마 속으로도 말할 수 없었다. 루시아와 데미안은 새끼 여우를 구경하느라 정신을 쏙 빼고 있었다. 커다란 귀를 가진 노란 빛의 새끼 여우는 아직은 어색한 발놀림으로 아장아장 걸었다. 두 사람 발치를 벗어나려 하면 손으로 살짝 가로막았다. 그러면 금방 포기하고 주저앉아 제 꼬리를 쫓아 돌기를 반복했다. [ 여우치고는 보기 드물게 순하고 얌전한 녀석입니다. 길들이기 쉽겠습니다. 케이트가 도움을 주려고 보내 준 경력 많은 사육사가 여우를 살펴본 후 한 말이었다. “데미안. 이름은 정했니?” “루시아. 정말..제가 이름을 지어도 괜찮아요?” “그럼. 네가 지어주면 기쁠 거야.” 루시아가 이름을 지어달라는 말에 데미안은 며칠을 고민했다. 온갖 사전을 뒤져보느라 공부도 뒷전이었다. “그럼..아샤.” “아샤? 의미가 있니?” “이름처럼..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무사히 잘 컸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이름이구나. 아샤.” 루시아는 여우를 들어 데미안에게 내밀었다. “이름 지어줬으니 안아줘 봐. 보기만 하지 말고.” “루시아. 전...” “어서. 떨어뜨리겠어.” 손에 잡혀 공중에 들린 시간이 길어지자 새끼 여우가 버둥거리며 몸을 뒤틀었다. 떨어뜨린다는 말에 데미안은 얼른 손을 내밀어 아주 조심스럽게 여우를 받아 안았다. 아샤는 긴 주둥이를 들어 소년을 한 번 보고 얌전히 품에 안겼다. 작은 살아 있는 생명체의 체온과 빠르게 뛰는 동물의 심장 박동 소리는 데미안에게 새로운 충격을 주었다. 가슴 벅찬 감동으로 데미안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살아 있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소년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기분이..이상합니다.” “왜?” “그냥 좀. ..싫은 건 아닌데 불편합니다. 가슴이 좀 따끔따끔하고..” 조금이라도 힘주면 큰일 날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데미안을 보며 루시아는 미소를 지었다. “데미안. 그건 사랑스럽다는 감정이란다.” “사랑..스럽다..?” “그래. 네가 태어났을 때 네 어머니도 널 안고 분명 그러셨을 거야. 너무 사랑스러우면 가슴이 아프거든.” 데미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참을 여우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품안에서 꼬물거리던 여우는 편하게 자세를 잡더니 턱을 소년 팔에 걸치고 눈만 깜작거렸다. 데미안은 고개를 들어 루시아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아이다운 그늘 한 점 없는 맑은 웃음이었다. 늘 무뚝뚝하고 경직되어 있는 소년이 터뜨리는 첫 환한 웃음은 루시아에게 진한 감동을 안겼다. 루시아도 데미안을 마주보며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조금 멀리 떨어져 그들을 바라보는 휴고의 붉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는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집무실을 나왔다.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던 그는 어느 정도 거리에서 둘이 뭐에 그리 정신이 팔려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뭐야 저건. ’조그마한 짐승 새끼가 꼼지락거리는 모습에 둘은 세상에 다시없을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집중해 빠져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가자 이제는 두 사람 대화 소리가 들렸다. ‘짐승에게 이름이라니. 쓸데없는 짓. ’그가 수년 째 타고 다니는 백마는 여전히 이름이 없었다. ‘...루시아..?’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저녁 산책길에서 두 사람 대화중에 그 이름을 얼핏 들었을 때는 잘못 들었나 했다. 그래도 어쩐지 내내 신경이 쓰였는데 이번에는 확실히 들었다. 왜 데미안이 저런 이름으로 그녀를 부를까. 공작부인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고, 하다못해 그녀의 이름도 아니고. 멈추어 서서 가만히 생각을 하다가 결론을 내릴 수 없어 그는 다시 걸음을 뗐다. 그러나 그는 두어 걸음 만에 다시 멈추고 말았다. 소년의 햇살처럼 환한 웃음을 보며 그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아릿한 통증을 느꼈다. ‘하...’그는 탄식했다. ‘너구나. ’그는 힘없이 웃었다. 소년의 웃음은 그가 형제를 처음 만난 날, 그를 향해 보여준 웃음과 꼭 빼어 닮았다. 그가 그리워했던 형제는 그가 깨닫지 못했을 뿐 언제나 그의 곁에 있었다. 그의 기억이 데미안을 처음 본 날로 돌아가 장면을 그렸다. 어느 날 필립이 아직 걷는 것이 어색한 어린 아이를 데려왔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타란 혈족의 특성 그대로였다. 애는 제롬 손에 맡겨 내보내고 둘만 남자 그는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저거 뭐야.” “휴고 도련님의 아드님입니다.” 처음에는 기가 막혔고 그 후에는 분노했다. 사내아이라니. 근친이 아니면 타란 혈족의 사내아이는 절대 태어날 수가 없었다. “지랄하지 마. 죽은 영감탱이 씨를 데려와 어디서 사기야.” “휴고 도련님께 연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들으신 적 없습니까?” 그는 욕설을 내뱉었다. “영감탱이 수작질이었나?” 화가 나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아닙니다. 휴고 도련님과 아가씨는 서로를 모른 채 사랑에 빠졌습니다. 데미안 도련님은 두 분 사랑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사랑?!! 개소리!” 그는 그 순간만큼은 죽은 형제 녀석에게 욕을 퍼부었다. 병신새끼.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만. “제 자식이 태어난 걸 녀석은 왜 몰랐어?” 제 자식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절대 자살을 택할 녀석이 아니었다. “데미안 도련님이 잉태된 사실을 휴고 도련님은 모르고 돌아가셨습니다.” “영감탱이도 모르고 뒈졌나?” “예.” 그건 쌤통이군, 지옥에서 약 좀 오르겠는데. 중얼거리며 그는 음험하게 킬킬 웃었다. “애 이름은 늙은이 네가 지었나?” “어찌 감히. 데미안 도련님 모친께서 지은 이름입니다.” “모친?” 그는 이죽거렸다. “내 이복누이겠군. 죽었다는 둘이 전부인 줄 알았더니 이복누이가 또 있었어. 그 영감탱이는 몇을 만들어 둔거야?” “알고 계신 대로입니다. 다만 아가씨는 어려서부터 워낙 몸이 약하고 잔병이 잦았습니다.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판단한 돌아가신 공작께서 폐기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돌아가신 공작께서는 아가씨가 죽었다고 알고 계셨습니다.” “폐기. 하! 그 미친 영감탱이가 충분히 할 만한 짓이야.” 그는 싸늘하게 조소했다. “그래서 죽어 마땅했을 이복누이가 어쩌다 녀석을 만나 사랑 놀음을 하다가 애를 낳았나?” “인연이란 참으로 예측할 수 없다고 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두 분 인연에 어떠한 간섭이나 의도는 없었다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인연? 지랄. 애 엄마는?” “산고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자세한 설명을 원하신다면..” “됐어.” 둘이 정말 서로에 대해 알았는지 몰랐는지, 정말 둘 사이 어떤 인위적 개입이 있었는지 여부는 어차피 둘 다 죽은 마당에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필립이 아무리 주절거려봐야 그게 진실이라고는 보장할 수 없었다. 늙은이 헛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보다 그는 당면한 문제에 더 집중했다. “그래서 저걸 어쩌라고. 내게 왜 데려왔어?” 아무리 형제의 아들이라 해도 죽어버린 형제는 아니었다. 그가 증오하는 죽은 공작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완벽히 별개의 인격을 지닌 개체인 것처럼. 더구나 갓 태어난 사실을 알린 것도 아니고 저만치 클 때까지 데리고 있다가 이제 데려온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휴고 도련님 혈육입니다. 마땅히 거두어 주셔야지요.” “개소리 지껄이지 말고 데려가. 눈앞에 알짱거리면 언제 죽이고 싶어질지 모르니까.” 그러나 필립은 데미안을 남겨두고 슬그머니 사라졌다. 사람을 풀어도 흔적도 못 찾게 숨어버렸다. 그럼 네놈은 죽을 때까지 꼬맹이 머리털 하나 보지 못하게 해주마. 그는 이를 북북 갈며 필립의 데미안 접근 금지 조치를 발동했다. 시간이 좀 지나서 슬그머니 나타난 필립이 데미안을 만나려 했다가 그가 심어둔 호위들 때문에 무산되었다는 보고를 들었다. 당시에는 홧김에 한 짓이었지만 참 잘한 짓이었다고 생각했다. 대충 애를 돌볼 사람 구해 맡겼다. 가뜩이나 전쟁으로 정신없었다. 거의 방치나 다름없이 내버려 뒀다. 몇 개월 만에 로암에 와 보니까 모두 데미안을 그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자기 입으로 내 아들이라고 한 마디도 안 했지만 그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꼭 닮은 외모 때문이었다. 데미안의 등장은 타란 가문을 그의 대에서 끝내려는 그의 의도를 무위로 돌렸다. 데미안에 대한 그의 감정은 복잡 미묘했다. 형제의 유일한 흔적이자 짐 덩어리. 애증까지는 아니지만 소년이 좋은 만큼 싫고 싫은 만큼 좋았다. 그러나 그는 형제를 꼭 닮은 소년의 웃음을 보며 깨달았다. 저주받은 타란 혈족은 그의 의도대로 그를 끝으로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그의 쌍둥이 형제는 타란 혈족에서는 절대 태어날 수 없는 돌연변이였다. 잔인한 광기를 피에 담아 타고나는 타란 혈족답지 않게 선하고 순수하며 생명을 사랑했다. 그런 형제의 피를 데미안이 이어받았다. 데미안이 이끌 타란 가문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할 것이다. 휴고가 다가오는 기척을 데미안이 눈치 채고 벌떡 일어났다. 여우는 품에 꼭 안은 채, 갑작스런 휴고의 등장에 적잖이 당황했다. 이 시간에 공부 안하고 노닥거린다고 야단맞는 건 아닐까 지레짐작 겁을 먹었다. 휴고는 무심한 표정으로 여우를 흘끗 보고 루시아에게 말했다. “여우 사냥은 구경만 하러 다니는 것 아니었나?” “그러려고 했는데, 레이디 밀튼이 여우를 한 마리 구해 준다고 했어요. 선물 받은 지 얼마 안 됐어요.” 그는 데미안 품에 안겨 눈을 굴리고 있는 하찮은 생물이 못마땅했다. ‘이젠 저런 짐승새끼까지 품에 끼고 돌 거란 말이지. ’잦은 외출에 데미안, 이제는 여우 새끼까지. 그녀를 갖는 길은 너무 험난했다. 마음만 같아서는 가둬두고 나만 보라고 하고 싶었다. “데미안.” “네? 네!” 휴고가 데미안을 앞에 두고 이름을 정확히 칭한 건 처음이었다. 데미안을 직접 부를 때는 ‘꼬마’라 하고, 다른 사람과 대화중에 데미안을 칭할 때는 거의 대부분 ‘녀석’이라고 했다. “여우 사냥은 사내가 하는 놀이가 아니다. 여자들의 하찮은 놀이지. 여우는 주인께 돌려주어라.” 그는 거만하게 명령했다. 루시아는 기가 막혀 그를 흘겨보았다. 여자들의 하찮은 놀이??데미안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재빠르게 안고 있던 여우를 루시아에게 건넸다. 내주는 손길은 조금 전 소년이 보여준 감동이 무색하게 약간의 미련조차 없었다. 루시아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따라오너라.” “네.” 소년은 군기 바짝 든 병사처럼 대답했다. “어디로 데려가세요?” “남자들끼리 할 얘기가 있어.” 그가 앞서 걸어가자 데미안은 다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루시아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재빨리 휴고 뒤를 쫓아갔다. 늘 차분한 소년답지 않게 신이 나 있었다. “..세상에. 뭐야. 두 남자가 날 따돌리는 거야?” 루시아는 어이가 없었다. 뒤도 안 돌아보는 데미안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그 동안 들인 공은 제 아버지의 말 한마디보다 못했나 생각하자 허탈했다. 저만치 멀어지는 두 부자를 보며 얼마간 분했던 마음은 금방 사라졌다. 꼭 닮은 두 뒷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유난히 가벼운 발걸음의 데미안 모습이 보기 좋았다. “부디 내가 질투 나도록 친해졌으면 좋겠네요.” 미소를 지으며 루시아는 일꾼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내일 정원파티를 위해 아직 마무리할 일이 많이 있었다. < -- 데미안 -- >막상 데미안에게 따라오라 했으나 솔직히 그는 아이와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잘 크고 있군, 대충 살펴보기만 했지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해본 적 없었다. “학술원 다니며 불편한 건 없느냐?” “없습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침묵이었다. 하면 할수록 더 끊임없이 샘솟는 것이 사람 사이 대화였다. 이제 겨우 말을 트는 두 사람 사이는 어색하기만 했다. “책은 많이 읽고?” “예. 좋아해서 많이 읽습니다.” 휴고는 데미안을 서재로 데려갔다. 지금껏 출입을 허락한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데미안은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입을 떡 벌리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빠르게 고개가 좌우로 움직였다. 학술원에 엄청난 규모의 도서관이 있기는 하지만 멋은 없었다. 개인이 소유하기에는 놀라운 규모와 근사한 분위기에 소년의 눈동자에 황홀한 빛이 어렸다. “저 곳도 서재입니까?” 데미안은 서재 오른쪽 벽에 이어진 굳게 닫힌 문을 보며 물었다. 순간 휴고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가 공작위를 승계 받은 이후 들어갈 수 있었던 곳. 오직 타란 가문의 가주만 들어갈 수 있는 곳. 타란 가문 비밀의 모든 것을 담은 곳이었다.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는 곳이다. 쓰레기가 들어 있지.” 그는 저 곳을 데미안에게 물려주지 않을 것이다. 언제고 데미안에게 타란의 주인 자리를 주기 전에 다 태워서 흔적도 남기지 않으리라 오래 전부터 마음먹었다. 타란의 비밀은 오직 그가 끌어안아 여기서 끝낼 것이다. “마음대로 구경해도 좋다. 책이 읽고 싶으면 언제든 와서 읽도록 해라.” “네! 감사합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근질근질 했던 소년의 몸은 곧바로 튀어나가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소년을 바라보는 휴고의 눈빛에 온기가 있었다. 금세 책 한권 빼 들고 독서 삼매경에 빠진 소년을 놔두고 휴고는 몸을 돌려 서재를 나왔다. 집무실로 들어서다가 ‘루시아’ 이름이 다시 떠올랐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문고리를 잡고 서 있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공작부인이 주최하는 정원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로암으로 향하는 귀부인들 마차가 아침부터 줄을 이었다. 공작부인은 늘 작은 규모의 티파티만 열고 무도회를 연 적 없어서 이번 정원파티가 역대 가장 규모가 컸다. 초대장을 가지고 로암에 입성하는 귀부인들 수는 근 100여명에 달했다. 노년층에서 미혼 아가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 북부 사교계의 유명 인사와 그렇지 않은 사람, 공작가 가신 집안과 그렇지 않은 귀족가문 등 구성을 다양하게 했다. 오늘 초대장을 받은 사람 모두 최소 한 번 정도는 공작부인의 티파티에 초대받은 적 있었다. 공작부인의 티파티는 소수의 사람들과 반복적 교류가 아닌 다양한 사람들과의 넓은 만남이 특징이었다. 공작부인의 사교 활동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달랐다. 큰 규모의 화려한 무도회를 꿈꾸는 이들은 아쉬움을 표했고, 기존 사교계의 유력 인사들은 공격적이지 않은 공작부인의 방식에 호의를 표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서 오세요. 와주셔서 기쁘군요.” 루시아는 차례차례 도착하는 귀부인들을 맞이하며 가벼운 포옹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끊임없이 들어오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웃어주는 것만으로 정신없었지만 약간의 틈이 나자 하녀를 불렀다. “데미안이 늦는구나. 아직 멀었는지 가서 보고 오너라.” “예. 마님.” 정원에 마련한 널찍한 공간에는 둥근 테이블 수십 개가 놓였다. 레이스 달린 하얀 테이블보를 덮고 테이블마다 정원에서 꺾은 꽃을 담은 화병을 놓아 장식했다. 지정 좌석은 두지 않아 자유롭게 앉을 수 있도록 했다. 귀부인들은 알아서 삼삼오오 무리지어 테이블을 하나씩 차지했다. 하녀들이 테이블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며 차를 올렸다. 정원은 여자들의 수다소리와 웃음소리로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바깥 일정을 소화하기에 참 좋은 날씨였다. 햇빛은 적당하고 바람은 거의 없었다. 이미 제법 서늘한 계절에 접어들었으나 오늘따라 포근했다. 한껏 기분이 고양된 귀부인들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레이디 밀튼. 어서 와요.” “초대에 감사합니다. 오늘 날씨가 아주 좋군요. 멋진 파티가 될 거예요.” 루시아는 케이트가 혼자 온 것을 확인했으면서 아쉬움을 내보였다. “마담 미셀은 못 오셨군요.” “예. 가능하면 꼭 오고 싶어 하셨는데 요즘 건강이 많이 안 좋으세요.” 코르잔 백작부인은 노환으로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약해지고 있었다. 많은 가르침을 받았던 입장에서 루시아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언제 한 번 뵈러 가야겠어요.” “종조모님께서 무척 기뻐하실 거예요.” 하녀가 쪼르르 다가와 고했다. “도련님께서 1층 홀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양해를 구하고 안으로 들어가는 루시아를 케이트가 걱정스럽게 보았다. 이번 정원파티에서 데미안을 소개할 것이라는 루시아의 계획은 사전에 들어 알고 있었다. 조금 우려를 표했지만 루시아의 생각이 확고해서 더 말리지는 못했다. ‘괜찮을까 모르겠네...’사생아가 작위를 잇는 문제는 남자보다 여자들 태도가 더 단호했다. 적실 자식을 제치고 혼외자가 굴러들어와 뒤통수 맞는 상황은 누구도 원치 않을 것이다. ‘루시아는 공주님으로 태어나 공작부인이 되셨는데. ..이상할 정도로 귀부인들 심리를 모르는 것 같아. ’케이트는 대단히 사람을 사귀는 폭이 넓었다. 마음만 맞으면 신분고하 가리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높은 신분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기본적인 마음가짐이 다른지 비교할 일이 많았다. 귀족 아가씨로 태어나 험한 일 한 번 겪은 적 없이 정해준 대로 결혼해 귀족부인으로 사는 전형적 귀부인들은 시야가 매우 좁았다.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아예 몰랐다. 오만하고, 까다로우며 자존심 강하고 이기적이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다 비슷비슷했다. 루시아가 그런 귀부인들 속성을 모른다는 건 아니었다. 대화 하다보면 가끔은 놀랄 정도로 더 예리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그런 귀부인들 심정을 동감하며 받아들이는 것과 달랐다. 케이트는 루시아가 신기했다. 그녀 정도의 위치에 있으면서 그녀와 같은 사람은 처음 보았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사람을 위에 서려 하지 않았다. 겸손한 척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천성이 그러했다. 내숭 없고, 가식 없고, 말 한 마디를 해도 늘 상대방을 고려했다. 그래서 케이트는 그녀와 함께 어울릴 때 가장 마음이 편했다. 케이트는 모여 있는 손님들 중에 유난히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있는 노부인을 보며 살짝 표정이 어두워졌다. 웨일즈 백작부인은 북부 사교계의 유명 인사였다. 종조모는 많은 사람들 존경을 받았으나 실질적인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종조모 성품이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웨일즈 백작부인은 종조모와 비교해 모든 것이 극과 극이었다. 실제로 두 사람 사이도 좋지 않았다. 웨일즈 가문은 북부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이며 부유했다. 웨일즈 백작부인은 자신이 가진 영향력을 마음껏 휘두르고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즐겼다. ‘종조모께서 활동이 뜸해지시니 요즘 더 활개 친다고 하던데..’승마를 하지 않는 웨일즈 백작부인이 승마장을 찾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루시아가 데미안을 승마장에 데려와 사람들에게 소개한다는 말을 듣고는 ‘역시 나이가 어리다는 건 어쩔 수 없군요. 현명한 조언을 줄 사람을 곁에 두셔야 할 텐데요. ’ 라고 말했다는 풍문을 전해 들었다. ‘오늘 괜한 분란을 만들지 않으면 좋겠지만..’걱정은 좀 됐지만 불안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케이트는 겉으로 순해 보이는 루시아가 얼마나 야무지고 단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중앙탑으로 들어간 루시아는 같은 자리를 맴돌며 서성이는 소년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근사하구나. 데미안.” 어른의 것과 형태가 같으나 크기만 작은 연미복을 차려 입은 데미안은 나무랄 데 없는 작은 신사였다. 루시아는 두 남자를 연미복을 입혀 나란히 세워보고 싶었다. 여자들이 눈을 못 뗄 것이다. 상상만 해도 흐뭇한 웃음이 나왔다. “조금..답답합니다.” “금방 익숙해질 거야. 손님들 다 오셨어. 어서 가자.” 데미안은 제 자리서 못 박은 것처럼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루시아.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데미안. 오늘 뿐이 아니라 넌 앞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 서야 할 거야. 오늘은 그저 시작에 불과해. 전혀 부담가질 필요 없어. 네게 못되게 구는 사람 있으면 말해. 혼내줄게.” 데미안이 물끄러미 보자 루시아는 두 손을 허리에 얹었다. “내가 못미덥구나? 좋아. 그럼 네 아버지께 일러줄게. 무서운 분이니까 단단히 혼내주실 거야.” 소년 입가에 작은 미소가 올라왔다. “가자.” 루시아가 데미안 손을 덥석 잡아끌어 걸었다. 갑작스런 접촉에 데미안이 순간 흠칫하면서 제 손을 붙든 손을 응시하고 순순히 따라 걸어갔다. 부드럽고 따뜻한 손이었다. 손에서 팔, 루시아의 뒷모습까지 천천히 시선을 이동했다. 빛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눈이 부셨다. 시린 눈부심이 좋아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주최자인 공작부인이 등장하자 소란이 점점 가라앉고 금방 조용해졌다. 루시아는 다양한 연령과 차림새로 앉아 있는 귀부인들을 한번 쭉 훑어 본 후 인사말로 파티 시작을 알렸다. “오늘 이 자리에 기꺼이 참석해 준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을 한 자리에 모시는 자리가 처음이다 보니 많은 미숙함이 있겠지만 부디 즐거운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루시아는 오늘 참석한 귀부인 중에서 나이가 많으며 영향력 있는 몇 명의 이름을 특히 호명해 감사를 표했다. 가장 먼저 이름이 불린 웨일즈 백작부인의 콧대가 올라갔다. 제 이름이 불릴 때마다 귀부인들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를 빌려 여러분께 꼭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답니다. 데미안. 이리 나오렴.” 사람들 시선에서 비켜 서 있었던 데미안이 루시아의 부름에 앞으로 나와 그녀 곁에 섰다. “모두 익히 들어 아실 겁니다. 장차 공작가를 이어 타란의 주인이 될 소공자입니다. 아직 어리지만 인사를 나누고 싶어 제가 불렀습니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의 소년의 등장에 대부분 사람들이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잠깐의 정적 이후 좌중이 술렁였다. 당황하는 쪽은 주로 미혼이나 젊은 부인들이고 나이 든 귀부인일수록 굳은 표정을 지었다. 조금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찻잔을 내려놓는 사람이 있었다. 웨일즈 백작부인이었다. 백작부인은 서늘한 표정으로 손을 무릎 아래로 내리고 입을 꼭 다물었다. 사람들 시선이 백작부인에게 몰렸다. 백작부인은 불쾌함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뿐이었다. 백작부인의 침묵이 점점 길어질수록 다른 사람들 안색도 점점 굳어졌다. 정원파티가 시작할 무렵, 휴고는 집무실에서 서류작업 중이었다. 그는 때마침 차를 가지고 들어온 제롬에게 물었다. “파티는 잘 진행 중인가?” “예. 손님이 거의 도착했다고 들었습니다.” “초대장을 받고 안 온 사람은?” 초대장을 받고 연락 없이 불참하는 짓은 주최자를 모욕하는 행위였다. 겁을 상실하지 않고서야 그럴 리는 없겠지만 데미안을 소개한다고 하니까 왠지 신경이 쓰였다.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을 텐데 그녀가 잘 대처할 수 있을지. “건강 문제로 불참을 알린 2명과 조금 늦게 도착한다고 알려온 2명을 제외하면 전원 참석입니다.” 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서류를 집중해 읽던 중에 다시 ‘루시아’ 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잠깐 잊었다가 곧 다시 떠오르고, 그 이름은 계속 그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궁금하지만 애한테 물어보기는 싫고, 대놓고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어쩌면 둘만 아는 서로를 부르는 애칭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젯밤 그는 아내를 안지도 못했다. 오늘 정원파티 때문에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아예 침실에서도 쫓아내려는 걸 절대 손 안대겠다고 약속하고 정말 얌전히 끌어안고만 잤다. 불끈거려 잠 못 드는 그를 두고 그녀는 색색거리며 잘 잤다. 그녀는 밤이 외로워 홀로 잠 못 드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돈도 권력도 정력도 아니면 무슨 미끼를 던져야 그녀를 잡을 수 있을까. “혹시 루시아라는 이름 들어봤나?” 답답한 마음에 하소연처럼 툭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제롬이 “예.” 대답하자 휴고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들어봤다고? 그게 누군데?” 주인의 심상치 않은 반응에 제롬은 긴장했다. 당연히 주인님이 알고 계시려니 생각하고 무심히 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주인 반응으로 봐서는 몰랐던 것 같다. ‘맙소사, 마님. 왜 주인님께서 모르고 계신 겁니까. ’제롬은 안타까움을 담아 마님을 불렀다. “...마님의..아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주인은 말이 없었다. 제롬은 식은땀이 났다. 정말 주인님께서는 모르고 있었다. 혹시 이 일로 두 분이 또 지난번처럼 심각하게 싸우시는 건 아닐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 안사람이 직접 말해주던가?” “아닙니다. 레이디 밀튼이 그 이름으로 마님을 칭하는 것을 우연히 들어서 마님께 여쭈었습니다.” “...알았다. 나가 봐.” 제롬이 나가고 조용해진 집무실에서 휴고는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고 멍해 있었다. 밀튼 남작의 여식이 알고, 데미안이 알고, 하다못해 제롬까지 아는데 그만 모르고 있었다. 그는 새삼스레 다시 충격을 받았다. 그 여자의 마음은 그의 앞에 굳게 빗장을 닫아걸고 있었고, 지금도 그랬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전 절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 끝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는 서류와 펜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잡아 책상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가슴이 먹먹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을 헤매는 것 같았다. 형제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원하는 것이 생겼는데 절대 그가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었다. 키가 닿지 않는 곳에 매달린 과실을 바라보는 목이 타 죽어가는 사람의 절실함이 그의 심정에 비견했다. 크게 몇 번 숨을 쉬어도 꽉 막힌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형제의 죽음 이후 그가 사는 세상은 무채색으로 느리게 돌아갔다. 지루하고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는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어느 덧 그의 세상은 선명하게 색을 입고 멈춘 것 같았던 그의 심장이 박동했다. 그녀를 잃으면 그의 세상은 다시 죽어버릴 것이다. 그의 아내로 있는 이상 그녀는 그를 떠날 수 없다. 그러나 결혼이란 제도는 마음까지 묶지 못했다. 세상의 어떤 계약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마음이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닌 이 상태라면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딴 놈에게 주면? 몸은 그에게 주면서 마음은 딴 놈과 나누면? 그는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것처럼 아득해지는 기분에 눈을 감았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깊이 침잠하던 그를 현실로 끌어올렸다. 대답하기 무섭게 아신이 급히 들어왔다. “전하. 전염병이 창궐했다는 급보입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 날씨에 무슨 전염병?” “수십 영민이 같은 증상을 호소하며 집단 발병했다고 합니다. 로암에서 말을 달려 서너 시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사태를 더 지켜보지 않고 연락을 해왔습니다.” 휴고는 즉시 몸을 일으켰다. 정말 전염병이라면 로암으로 번지는 건 최악 중 최악이었다. “즉시 출발하겠다. 기사들 대기시켜. 승마 가능한 의사도.” “예. 헌데 마침 필립 경이 로암에 머물고 있다 합니다만 필립 경에게 준비하라 할까요?” 휴고는 인상을 썼다. “그 늙..필립은 제외. 딴 의사 찾아.” 아신은 대답하고 물러갔다. 그는 보던 서류를 대충 정리해 두고 잠시 후 집무실을 나왔다. 소식을 전해들은 제롬이 발 빠르게 주인의 이름 없는 백마를 밖에 대기해 놓았다. 휴고는 다급히 달려오는 기사 중 하나에게 의사를 데리고 뒤따라오라 명하고 몇 기사들과 먼저 출발했다. < -- 데미안 -- >100명 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누구도 입을 열지도, 웃지도, 찻잔에 손을 대지도 않았다. 화사한 화장과 옷차림을 한껏 치장한 여자들이 하나같이 무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괴기스러웠다. 시작은 웨일즈 백작부인이었다. 루시아는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껴 그녀에게 물었다. “무엇이 문제인가요? 웨일즈 백작부인.” “오늘 정원파티는 여인들 파티로 알고 있습니다. 그 취지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직 아이일 뿐이에요. 이런 사례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특히 수도에서는요.” 루시아는 맨 마지막 말을 유난히 강조해서 말했다. 북부 사교계는 수도 사교계에 비하면 규모나 사람이나 비교할 수 없었다. 북부 사교계 유명인사라 잘난 척 해봐야 어차피 우물 안 개구리. 루시아는 백작부인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는 단어를 골라 강하게 경고했다. 이쯤에서 물러나는 것이 어떠하겠느냐고. “그리 말씀하시니 드릴 말씀은 없군요.” 웨일즈 백작부인은 일부러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노회한 백작부인은 수도를 거론하는 공작부인의 도발 정도는 우스웠다. 다만 조금 의외였다. 티파티에서 잠시 안면을 익혔을 때는 그저 얌전하고 순하게만 보았는데 제법 강단이 있었다. 하지만 심약한 것보다 차라리 이쪽이 나았다. 그래야 오늘 사건이 더 극적으로 보일 테니까. ‘공작부인 이름만으로 북부 사교계를 휘어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에 빠지신 겁니다. ’신분 서열이 절대적으로 작용하지 않는 유일한 세상이 있다면 사교계였다. 왕비라는 이유만으로 수도 사교계를 지배할 수 없는 것처럼 북부 사교계 또한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공주님 출신의 타란 공작부인이라는 자리는 허울만 좋았다. 공작부인이 조금만 머리를 굴릴 수 있다면 그쯤은 알고 있을 거라고 백작부인은 생각했다. 백작부인은 수도 사교계에 관심이 많아서 소문에 밝았다. 그래서 현재 수도에 공작부인을 두고 어떤 소문이 나돌아 다니는지 알고 있었다. 소문이 전부 진실은 아니겠지만 북부 사람들이 모르는 많은 것들을 백작부인은 알고 있었다. 공작부인은 내세울 친척 하나 없는, 수많은 공주 중 하나에 불과했고 공작과의 결혼에는 의문점이 많았다. 신빙성 있는 뒷소문에 의하면 왕과 공작이 무슨 계약을 했을 거라고 했다. 공작부인을 세상에 없을 미인으로 묘사한 소문을 듣고는 배꼽을 잡았다. 공작부부 금실이 꽤 좋다더라 하는 북부에 나도는 소문도 백작부인은 헛소문으로 치부했다. 사교계 소문에 능통한 백작부인은 타란 공작의 여성 편력을 잘 알고 있었다. 타란 공작은 절대 한 여자에 정착할 사내가 아니었다. ‘공작부인 자리를 오래 붙들고 계시려면 도움이 될 벗을 곁에 두셔야지요. 그런 뒷방 늙은이가 아니라. ’공작부인이 처음으로 만나 가르침을 청한 사교계 인사가 코르잔 백작부인이라는 사실은 꽤 화제가 되었다. 웨일즈 백작부인은 그 일로 유감이 있었다. 사교계 영향력은 자신이 훨씬 우위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코르잔 백작부인을 대모라 부르며 우러러 봤다. 코르잔 백작부인은 신부 수업이나 하는 뒷방 노인에 불과했다. 고작 자신보다 얼마 나이가 더 많다는 이유로 고고한 척 훈계를 늘어놓는 코르잔 백작부인이 꼴도 보기 싫었다. 요즘 눈에 안 띄어 속이 다 시원했다. 웨일즈 백작부인은 오늘 정원파티에서 어떤 수를 쓰든 자신의 존재를 공작부인에게 부각하려 했다. 그런데 때마침 공작부인이 아주 좋은 수단을 제공해 주었다. 백작부인은 소공자가 등장한 순간부터 순식간에 계산을 마쳤다. 웨일즈 백작부인은 침묵시위를 시작했다. 명분은 파티 취지였다. 데미안은 공작이 공표한 후계이며 그걸 공식적으로 문제 삼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백작부인이 내세운 명분이 단지 명분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백작부인을 시작으로 나이든 귀부인들이 함께 했고, 눈치 없이 수다를 떨던 젊은 아가씨들은 시간이 지나자 상황을 알고 주변을 의식하며 소극적으로 동조했다. 파티 시작을 선언한 지 족히 반시간이 훌쩍 지났으나 사람들은 표정 없는 인형처럼 앉아 있었다. 정확히 말해 전부 동조한 건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케이트는 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일부러 소리를 내며 차를 마시고 과자를 먹었다. 그러나 그녀 혼자 상황을 바꾸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녀가 대적하기에 웨일즈 백작부인은 너무 강했다. 케이트는 뒤에 종조모님이 버티고 있으니 대놓고 반발할 수 있지만 다른 힘없는 젊은 아가씨들은 그럴 수 없었다. 파티 깨기. 주최자와 참석자 간에 발생하는 힘겨루기 현상이었다. 또는 주최자가 사회적 도덕적 비난 대상의 잘못을 저지른 경우 일부러 사람들이 대거 참석해 사교계 방식으로 처벌을 하는 것이 이 파티 깨기였다. 방식은 간단했다. 참석자들은 침묵할 뿐이다. 처음부터 처벌의 목적이 아닌, 파티 중에 발생한 문제 때문이라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참석자들은 입을 꽉 다물고 불참을 선언했다. 사교계 영향력 있는 사람이 주도해서 시작하면 그와 비슷한 영향력을 가진 유력 인사가 반박하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들은 묵인하며 따르는 것이 규칙이었다. ‘종조모님이 계셨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케이트는 속으로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파티 깨기는 여자들의 전쟁이었다. 남자의 전쟁에서 볼 수 있는 죽음과 함성은 없었다. 그러나 때로는 더 잔혹하고 살벌했다. 또한 남자와 다르게 사교계 힘겨루기는 반드시 신분 서열이 절대적이지 않았다. 신분으로 찍어 내리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짓을 하는 순간부터 서서히 사교계에서 따돌림 당하게 되어 있었다. 루시아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하녀들은 하얗게 질러 구석에 몰려 서 있었다. 오히려 이 자리에서 데미안의 표정이 가장 덤덤했다. 루시아는 꿈속에서 파티 깨기가 일어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아주 소규모의 티파티나 남녀 구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 무도회에서는 불가능했다. 적당한 규모에 여자들만 참석하는 모임. 딱 오늘과 같은 자리에서 발생하곤 했다. 꿈속에서 경험한 바에 의하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로 파티 깨기가 일어난 적은 없었다. 사교계 알력 다툼, 무리 짓는 여자들끼리의 대립, 주최자가 불륜을 저지른 경우 불륜 상대 남자의 부인이 주도하는 처벌을 내세운 복수. 대부분이 그런 이유였다. 그녀는 파티 깨기가 어떤 식으로 마무리 되는지 알고 있었다. 주최자나 참석자가 한 발 물러나 겉보기만 그럴듯한 화해를 통해 무사히 파티를 마무리했다. 파티가 중간에 어그러지면 큰 망신이라고 여기는 주최자가 대부분 양보했다.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은 명백했다. 데미안을 내보내면 된다. 그러나 루시아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웨일즈 백작부인은 처음부터 잘못 생각했다. 공작부인의 현재 소극적인 사교 활동을 탐색 과정으로 보았다. 루시아는 사교 활동에 미련이 없었다. 우아한 척 대화로 물고 뜯는 사교 경험은 꿈속만으로 충분했다. 루시아는 서늘한 음성으로 사람들을 돌아보며 선언했다. “유감스럽지만 오늘은 여러분과 더불어 즐거운 시간을 나누지 못하겠군요. 이만 자리를 파하겠습니다.” 귀부인들 일부가 술렁거렸다. “배웅은 하지 않겠어요. 여러분들은 그럴 자격이 없군요.” 그녀는 하녀들에게 명했다. “손님들을 밖으로 안내해드려라.” 구석에 서 있던 하녀들이 고개 숙여 대답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녀들이 부산스레 움직이기 시작하자 귀부인들의 가면이 깨지며 저들끼리 서로를 마주보았다. “여러분은 오늘 타란의 안주인이며 공작부인인 나를 기만했습니다.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는 걸 머지않아 깨닫게 될 겁니다.” 그녀의 차가운 협박은 사교계 룰에 걸맞지 않았다. 여자들, 특히 나이 든 여자들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그러나 아무도 불쾌감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아무리 공작부인이 사교계에 영향력이 없다 해도 서열을 대놓고 무시하는 짓은 하지 못했다. “언젠가 여러분의 아들 혹은 손자는 내 아들을 주인으로 모시게 되겠지요. 부모가 자식 앞날을 망친다는 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로군요.” 루시아는 싸늘하게 일갈하며 몸을 돌려 그대로 중앙탑으로 들어가 버렸다. 공작부인이 사라지자 여자들의 술렁거림은 더 커졌다. “아우.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그러게 말이에요. 좋게좋게 넘어가지 뒷일도 생각 안하고 저지른대요.” “공작부인께서 화가 보통 나신 게 아니에요. 어쩌실 겁니까?” 비난의 대상은 주로 오늘 파티 깨기를 주도한 웨일즈 백작부인을 비롯한 10여명의 중장년 귀부인들에게 집중되었다. 자기들도 동조한 주제에 잘못을 떠넘기고, 그렇다고 비난하는 목소리를 높이지도 못하는 한심한 작태들이었다. “커흠.” 뭇시선이 불편한 주도자들은 떫은 표정으로 가장 먼저 자리를 빠져나갔다. 특히 웨일즈 백작부인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 될 리가 없는데 어째서..’파티 깨기는 아무리 사교 경험이 노련해도 정작 자기 일로 닥치면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된다. 백작부인은 이제 갓 결혼한 어린 공작부인의 사교계 경험은 일천하고 파티 깨기가 무엇인지도 모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당황한 공작부인은 반드시 소공자를 내보낼 것이다. 소공자는 공작부인의 친자가 아니니까. 백작부인이 파티 깨기라는 강수를 둔 것은 나름 계산한 바가 있어서였다. 어느 날, 백작부인은 공작부인이 공작의 혼외 자식을 데리고 다닌다는 말을 듣고 생각했다. ‘앙큼하군. ’공작부부는 허울만 부부였다. 공작부인이 자기 자리를 확보하려고 안간힘을 쓰다 생각해 낸 한 수가 소공자였다. 공작부인이 소공자를 어여뻐 하는 모습은 진심일 리 없었다. 어느 정신 나간 여자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제 자식 앞길을 막는 짓을 할까. 공작부인의 빤한 속셈에 장단 좀 맞춰볼까 해서 일부러 어려서 뭘 모르신다는 식으로 비꼬는 말을 흘렸다. 공작부인이 혼외자를 데리고 다니는 행위 그 자체를 불쾌해 하고 있다고 남들에게 드러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꼭 만나서 긴밀한 대화를 통해야 이루어진 다면 그건 아마추어였다. 진정한 프로는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다. 파티 깨기로 공작부인이 못이기는 척 물러나면 처음에는 자존심이 상해 씩씩대다가도 시간이 지날수록 썩 나쁘지 않은 사건이었음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공작부인은 남들이 보기에는 최선을 다했다. 혼외자 아들을 감싸려다 망신을 자초했다. 누가 봐도 혼외 자식도 넉넉히 포용하는 너그러운 어머니였다. 공작부인 마음이 어느 정도 풀릴 쯤 백작부인이 슬그머니 숙이고 들어가면 된다. 그러면 상했던 공작부인 자존심도 회복되고 두 사람은 긴밀한 친분을 다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백작부인의 가장 큰 실수는 루시아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아보지 않았던 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잦은 만남을 가졌다 해도 백작부인과 루시아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사상과 신념은 건널 수 없는 강을 사이에 둔 것처럼 전혀 달랐다. 지나치게 몇 수 앞을 내다보려 머리를 굴린 북부 사교계 거물은 제 발등을 제가 찍었다. “어떡하지요? 바깥 분이 아셨다가는 경을 칠거예요.”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 뻗으랬다고. 타란 공작께서 어떤 분인지 잘들 아시면서 왜.” “여자들의 사교계 일이에요. 남자가 나서는 건 경우가 아니죠.” “모든 일이 다 그렇게 경우 따져 일어난답니까? 안 그래도 공작부부 두 분 금실이 꽤 좋다 소문이 파다한데. 여자가 속살거리면 어느 남자가 당해요?” “아우. 모르겠네요. 한 동안 외출 삼가고 조용히 있어야겠어요.” “도대체 웨일즈 백작부인은 왜 그리 공작가 후계 일에 그리 파르르 하신대요?” “모르셨어요? 웨일즈 백작께서 혼외자로 들인 딸을 그렇게 끼고 돌았다잖아요. 결국 백작부인 딸이 아닌 혼외자 딸을 백작가에 시집 보냈죠.” “어머 그럼 백작가와 사돈 맺었다던 딸이..” “더 재미있는 건 웨일즈 백작부인이 며느리 눈물 빼가며 얼마 전에 혼외 손자 둘을 입적하게 했답디다.” “세상에.” 데미안은 차가운 붉은 눈으로 귀부인이 하는 짓거리를 눈과 귀로 담았다. 소년은 오늘 장차 그가 밟고 올라서야 할 자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았다. 루시아가 원했던 방향과는 전혀 달랐지만 어쨌든 훌륭한 배움을 얻었다. 일부 여자들은 무심코 데미안과 눈이 마주쳤다가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삼삼오오 남아 떠들던 여자들이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반 이상 수가 줄었을 때 데미안도 그 자리를 떴다. < -- 데미안 -- >루시아가 중앙탑으로 들어오며 뒤를 확인하자 곧 따라 들어올 줄 알았던 데미안이 없었다. 하녀에게 데려오라 시키고 응접실로 들어갔다. 응접실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눈을 감았다. 머리가 아파왔다. ‘내가 너무 안일했어. 파티 깨기라니. ’목은 꺾여도 자존심은 절대 꺾지 않는 귀부인들 고집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수도 사교계와 확연히 다른 분위기라는 점에 안심하고 있었다. 자신이 공작부인이라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자만하고 있었나 보다. 사교계에서 지위보다 훨씬 중요한 건 명성이나 오랜 세월 축적하며 쌓은 인맥인 것을 알면서 어리석게도 간과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북부 사교계 대모라는 코르잔 백작부인 인품에 깊이 감화 받아서 실질적 영향력은 더 강하다는 웨일즈 백작부인을 만나기 전에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티파티에서 두어 번 만났던 웨일즈 백작부인 눈빛은 뱀처럼 사람을 훑었다. 괜히 부딪칠 일 만들고 싶지 않아서 좋게 웃어만 주었던 것이 실수였던 것 같다. 그러니 자신을 우습게보고 이런 짓을 주도한 것이겠지. ‘만만치 않을 줄은 알았지만. ’그래서 케이트에게 가능하면 꼭 코르잔 백작부인을 모셔와 달라고 말했던 것이다. 안전 방패를 두고 싶었다. 설마 파티 깨기로 정면 대립각을 세울 줄은 몰랐다. ‘혼외자 일이 웨일즈 백작부인의 역린인가..?’노회한 사교계 인사가 저지른 짓으로 보기에는 너무 얄팍했다. 굳이 파티 깨기로 루시아를 망신 줘 봤자 얻는 것보다 장차 잃을 것이 더 많았다. 아무리 사교계에서 지위가 절대 조건은 아니라 해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더구나 수도에서의 왕 못지않게 북부에서 타란 공작가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웨일즈 백작부인이 루시아의 속을 괜히 넘겨짚어 계산해 그런 짓을 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악당은 악당이 알아보는 법. 아무리 사교계 군상들의 행태를 꿈속에서 관찰했어도 계략과 음모에 능한 사람 심리를 간파하기에는 루시아 마음에 꼬인 구석이 없었다. ‘사람 일은 꼭 이성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입적된 사생아가 작위를 이은 적 없다는 전례. 루시아는 그 문제를 좀 더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북부에서 이런 분위기라면 수도 또한 만만치 않을 텐데. ’그가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했다. 사교 파티에 데려간다는 것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으로 봐서 어쩌면 그는 별다른 생각이 없을지도 모른다. ‘데미안이 작위를 이어 받는 일은 장차 미래에 일어날 어떤 흐름의 단초가 될지도 몰라. 사람들이 꺼려하는 건 그것이겠지. ’너무 성급했다. 데미안이 곧 학술원으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동안 승마장에서 안면을 익혔고, 어차피 데미안의 정식 데뷔 자리가 될 수 없는 정원파티라는 점 때문에 가볍게 생각했다. 눈을 떠서 확인하는데 데미안이 아직도 보이지 않았다. 데려오라 하녀를 보낸 것이 언제인데. 두통 때문인지 짜증이 솟았다. 다시 다른 하녀를 불렀다. “소공자를 데려오라는데 왜 이리 늦는 것이냐.” 하녀가 곧바로 빠른 걸음으로 나가고, 잠시 후 들어왔다. “마님. 들어오십사 도련님께 말을 올려도 대답이 없으십니다. 먼저 마님 명을 받은 아이가 도련님 곁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습니다.” “데미안이 밖에서 무얼 하기에?” “아무것도..그냥 사람들을 보고 계십니다.” “.... 알았다.” 그들을 보며 아이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들어오면 물어봐야겠다. 루시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루시아.” 어느 사이 들어온 케이트가 옆에 앉아 루시아 손을 잡았다. 루시아는 눈을 뜨고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오늘 고마웠어요. 케이트.” “아니에요. 제가 전혀 도움이 못 되었네요. 너무 속상해 하지 마세요. 꼭 지나야 할 통과의례라 생각하세요.” 케이트는 루시아가 무너진 자존심에 자괴감을 느낄까 걱정했다. 그러나 루시아는 주최자의 자존심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꿈속이지만 귀족부인 수발드는 하녀 일까지 해봤다. 그녀의 자존심은 고작 그 정도로 굴욕을 느낄 만큼 알량하지 않았다. “괜찮아요. 미안하지만 케이트. 오늘은 그만 돌아가 주었으면 좋겠어요. 생각할 것이 많군요.” 케이트는 이해한다고 답하며 다정한 위로의 말을 몇 마디 더 건네고 돌아갔다. 루시아는 계속 주변에서 서성이는 제롬을 불렀다. “그이는 집무실에 계시나요?” “아닙니다. 급한 전언을 받으시고 출타하셨습니다. 오늘 안으로 돌아오실지 확실한 답은 없으셨습니다.” 루시아는 약간의 서운함과 안도감을 함께 느꼈다. “오늘 일은 내가 말씀드릴 테니까 직접 전해 드리지 말아요.” “예. 마님.” “그리고 안나를 불러 주겠어요?” 지끈거림이 점점 심해져서 아무래도 두통약을 먹어야 할 것 같다. 제롬마저 나가고 루시아는 하녀들도 모두 내보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들어와서 서 있는 데미안에게 손짓했다. “데미안. 이리 오렴.” 데미안이 다가와 루시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루시아는 놀라 기대 있던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소년은 남들이 자신을 어찌 보든 상관없었다. 호의적이지 않은 눈으로 보며 아무리 숙덕여봐야 그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끼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시선을 루시아에게 보내는 것은 싫었다. 데미안은 아직 사교계에 대해 잘 모르고 파티 깨기가 뭔지 모르지만 아까의 상황이 루시아를 망신 주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분했다. 자신의 미약함이 화가 났다. 만약 아버지가 그 자리에 계셨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아니야. 데미안. 왜 네가 사과를 해.” 루시아는 울컥 감정이 치밀어서 데미안을 일으키다가 품으로 안았다. 처음부터 데미안은 싫다고 했지만 자신이 억지로 설득해서 결국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 방식을 달리 할 것을 그랬다. 파티가 마무리 될 쯤 잠깐 소개만 해도 되었는데 너무 욕심을 부렸다. “미안해. 데미안. 내가 널 생각 못했어. 네가 상처 받을 걸 생각 못하고 너무 내 생각만 했어.” 좋은 향을 풍기는 부드러운 느낌이 좋아서 데미안은 숨죽이고 가만히 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루시아가 놀라 몸을 떼어 낼까봐. “미안해. 미안해.” “전. ..괜찮습니다.” 데미안은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아무 의미 없는 그런 여자들 시선 같은 건 아까 루시아가 ‘내 아들’이라는 말을 한 순간 싹 잊혔다. 그 말은 아직도 잔상으로 남아 계속 소년의 가슴을 두드렸다. “네 잘못이 아니야. 데미안. 결코 네 잘못 때문에 사람들이 그러는 게 아니란다.” 루시아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이어 들려오는 작은 흐느낌 소리에 데미안은 굳어버렸다. 저 때문에 울지 마세요, 머릿속에만 맴도는 말이 목에 턱 막혀 나오지 않았다. 조금씩 들썩이는 루시아 어깨에 조심스럽게 이마를 기댔다. 누군가 소년을 위해 울어준 것이 처음이었다. 목구멍이 죄일 것처럼 따갑고 눈이 후끈거렸다. 아주 조금. 소년의 눈이 젖었다. 우려했던 것과 다르게 해프닝으로 끝났다. 집단 전염병이 아니라 집단 식중독이었다. 이 날씨에 전염병이건 식중독이건 둘 다 흔치 않은 일이긴 했으나 공작이 직접 달려올 일은 아니었다. 파발을 띄워 공작을 허탕 치게 한 마을 영주는 안색이 거무죽죽했다. “독버섯이라고?” “예. 전하. 이 버섯이 겉보기는 식용 버섯과 같으나 먹으면 복통, 설사, 구토 및 온몸에 붉은 반점이 올라와 흡사 질병 같아 보입니다.” 때 마침 데려온 의사가 독초나 독버섯에 정통해서 오자마자 환자 몇 명을 살피고 이것저것 묻더니 남은 식재료 틈에서 버섯을 찾아냈다. 빠른 시간에 문제는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전염병의 두려움으로 벌벌 떨던 마을 주민들은 느닷없이 나타난 공작이라는 거물에 혼비백산하더니, 공작이 온 지 한 두 시간 만에 문제가 해결되자 경이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우리 공작님, 어쩌고 두런두런 떠드는 영민들 눈에 경외감이 가득했다. “근처에 나는 버섯이라면 여기 영민들이 모를 리 없을 터.” “예. 전하. 이 버섯은 이 근방에 서식하는 버섯이 아닙니다. 좀 더 기후가 찬 북쪽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어찌된 것인가.” “바른대로 고해 올리거라.” 휴고의 질문을 받은 영주가 포승줄에 묶여 바닥에 코 박고 엎드린 노인을 채근했다. 마을에서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며 원흉인 버섯을 공급한 상점 주인이었다. “예..예. 어..엊그제 상단을 통해 대량 식재료들을 구입했는데 어찌 된 일이지는 이놈도 잘..” “어허. 네 놈이 이 사태를 만들지 않았더냐. 대체 무슨 억하심정으로 주민들에게 독버섯을 풀은 게야?” “어이구. 억울합니다. 영주님. 이놈은 추호도 부러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요.” 노인이 눈물 콧물 흘리며 억울함을 토로하는 상황을 지켜보던 관리가 나서서 공작에게 고했다. “아무래도 그 상단을 추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대로 버섯을 구별하지 못하고 무분별하게 채취해서 공급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즉시 추적해 압송해라. 이와 비슷한 피해를 입은 경우가 없는지 상단 행로를 따라 조사하고. 의사는 남아서 환자들을 치료하도록. 마을에 풀린 버섯은 전량 회수해서 폐기하라.” “예.” 여기저기서 한 목소리로 답했다. “전하. 제가 상황 판단을 잘못하여 수고를 끼쳐 드렸습니다.” 영주가 어두운 표정으로 사죄를 올렸다. “아니다. 빠른 대처가 훌륭했다.” 노여움 살 것을 각오했던 영주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나머지는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예. 전하.” 더 이상 이곳에 볼 일은 없었다. 말을 타고 꼬박 세 시간을 달린 수고가 헛걸음이 되었지만 전염병이 도는 상황보다는 훨씬 나았다. 나머지 일을 처리할 사람 몇을 남겨 두고 휴고와 기사들은 로암으로 출발했다.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로암까지 이제 멀지 않았다. 휴고를 비롯한 기사들은 조그만 샘에 모여 말과 사람 목을 축였다. 휴고는 시간을 가늠해보았다. 로암에 입성할 쯤에는 꽤 어두워지겠다. 저녁 식사 시간을 맞추거나 혹은 그보다 조금 늦어질 것 같다. 휴고는 딘을 불렀다. “한 발 앞서 가서 내가 도착해도 피리를 불 것 없다 일러두어라.” 식사 전에 도착하면 좋지만 조금 늦는다면 한창 식사 중에 그녀가 부러 나와 마중하는 수고를 하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명을 받은 딘이 조금 앞서 출발하고, 잠시 후 휴고와 기사들도 말을 몰아 달리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달려 로암에 도착해 휴고를 태운 말은 내성 안까지 들어가 멈추었다. 말 등에서 내려오는 휴고를 발견한 하인 하나가 놀라서 안으로 달려 들어가 잠시 후 제롬이 뛰어나왔다. “전하께서 입성하시는데 어찌 아무런 소식을..” “내가 소란스럽게 하지 말라 했다.” 곧바로 집무실로 향하는 휴고 뒤를 제롬이 따랐다. 잠시 후에는 공작 시중을 전담하는 3형제가 갈아입을 옷을 챙겨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들 시중을 받아 휴고는 먼지 묻은 옷을 갈아입었다. “저녁 식사는?” “준비 중입니다.” “내가 늦지 않게 왔군.” 휴고는 곧바로 책상으로 갔다. 의자에 앉으면 가장 잘 보이는 앞에 가지런히 몇 개 서류가 놓여 있었다. 모서리에 붉은 색 표시가 되어 있어 급한 사안임을 표기했다. 숨 쉴 틈도 없군, 그는 중얼거리며 서류 하나를 집어 들어 들추었다. “정원파티는 잘 끝났나?” 그 파티 때문에 오늘 하루 종일 내성의 분위기는 어두웠다. 직접 말씀드리겠다던 마님 말씀을 떠올리며 제롬은 “예.” 대답했다. “저녁 준비 다 되면 불러.” 그는 책상에 반쯤 엉덩이만 걸치고 앉아서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루시아는 두통약을 먹고 잠들었다가 깨어난 후 계속 소파에 축 늘어져 기대 있었다. 약을 먹고 한 잠 자고 일어났는데도 두통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머리가 아픈 것이 짜증나고 이모저모 기분도 안 좋고 해서 루시아는 계속 침실 소파에 누운 채 훌쩍거리며 울었다. 저녁이 다 되어 겨우 두통이 가라앉아 몸을 추스르는데 하녀가 공작 귀환 소식을 알려왔다. “뭐? 들어오셨다고?” 루시아는 그가 오늘 안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녀에게 거울을 가져오라 해서 보니까 눈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눈 찜질을 할 것을 그랬다. “차가운 물수건을 가져오너라.” 루시아는 임시방편으로나마 찜질을 했다. 하지만 시간은 충분하지 못했다. 금방 저녁 식사가 다 되었다고 알린 것이다. “어떠니? 눈이 많이 흉하니?” “아까보다 한결 가라앉으셨습니다. 얼핏 보면 잘 모를 것 같습니다.” 식사 시간 중에만 그가 모르면 된다. 저녁을 먹고 그는 다시 집무실로 들어갈 것이다. 밖을 나갔다 오면 그는 좀 더 바빠지니까. 조금 더 찜질하면 곧 가라앉을 것 같다. 괜히 이만한 일로 울었다고 그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식당으로 내려가자 데미안이 먼저 와 있었다. 조금 늦게 휴고가 들어와 착석했다. 그는 숟가락을 들면서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의 미간이 꿈틀하며 손이 멈칫했다. 그가 숟가락을 탁 소리 나도록 테이블에 내려놓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당혹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성큼 다가갔다. 한 손을 테이블을 짚어 몸을 숙이면서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그녀의 붉게 부은 눈가가 확연하게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눈동자가 확 타오를 것처럼 짙어졌다. “왜 그래.” 루시아는 주변 시선을 의식해서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가 이렇게 반응할 줄 몰랐다. 혹시 눈여겨본다 해도 무슨 일이냐 나중에 물을 거라 생각했다. 고용인들은 물론이고 데미안까지 있는 자리라 못내 민망했다. “식사 먼저 하시고...” 그는 다시 그녀 턱을 단단히 쥐고 고개를 들이밀어 더 자세히 살폈다. 그녀의 맑은 호박색 눈동자마저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울었나? 왜? “제롬!” 늘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집사 제롬은 주인이 원하는 답을 내놓았다. “정원파티에서 귀부인들이 파티 깨기를 했습니다.” “파티 깨기?” “참석자들 다수가 침묵을 고수해 인위적으로 파티를 종료시키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유.” “.... 데미안 도련님..” 더 들을 필요 없었다. 그는 대강의 상황을 파악했다.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지?”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 안에 사나움이 있었다. “아무..아무 짓도..” 그들은 단지 침묵과 싸늘한 표정으로 파티를 거부했을 뿐 직접적으로 루시아에게 무슨 짓을 하지는 않았다. 불쾌한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울 만큼은 아니었다. 다만 데미안에게 미안해서 속상한 마음에 울었고, 이미 실컷 울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왜 그러냐고 묻는 순간부터 코가 시큰했다. 곁에서 누가 어르면 더 눈물이 나는 경우와 마찬가지였다. 그가 돌아오면 담담하게 오늘 있었던 일을 그에게 설명하려 했다. 그런데 그가 루시아의 눈물샘을 건드렸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것을 보는 휴고 표정이 굳어졌다. 휴고는 그녀가 앉은 의자를 뒤로 잡아당기고 그녀를 품에 안아들었다. 마치 아이라도 안는 것처럼 한 팔을 허벅지 아래 받치고 한 손을 그녀 등을 감싸듯 눌러 고개를 가슴에 묻게 했다. “식사는 2층으로 올려. 데미안. 너는 먹고 네 방으로 가거라.” “예.” 공작이 루시아를 안고 식당을 나서는 모습을 데미안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오늘 거의 하루 종일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던 루시아 걱정에 데미안 마음 역시 하루 종일 불편했다. 내일은 평소처럼 잘 웃는 어머니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 -- 데미안 -- >휴고는 그녀를 안고 침실로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그의 너른 가슴에 얼굴을 묻고 루시아는 눈물을 쏟았다. 그의 손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토닥토닥 등을 두드렸다. 흐느끼던 울음은 잦아들지 않고 오히려 더 커지면서 루시아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정원 파티 일 때문만이 아니었다. 스스로도 무엇 때문에 이렇게 울음이 터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서러웠고, 다정한 그의 위로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12살 궁에 들어온 이후 마음껏 울어보지 못한 켜켜이 쌓인 설움을 모두 씻어내는 것처럼 그렇게 울었다. 아무 말 없이 등을 쓸어주며 휴고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겉보기에 약해도 그녀가 얼마나 속이 단단한지 알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아프게 울까. 할 일 없이 파티만 쫓아다니는 여편네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만지기도 아까운 여자인데 속을 후벼 파? 내 이것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시커먼 분노가 뭉클뭉클 솟았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루시아는 그의 품에 늘어지듯 기대 훌쩍 훌쩍 울음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를 안아주기만 하고 울지 말라고 하거나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런데 오히려 그의 태도에서 무척 많은 위로를 받았다. 루시아는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도 시선을 내려 마주쳤다. “다 울었나?” 루시아는 다소 면구스러워서 고개를 끄덕였다. 원 없이 울고 났더니 어쩐지 홀가분했다. “세수..해야겠어요.” 눈물로 잔뜩 얼룩져 있을 얼굴을 보이기 부끄러웠다. 일어나려는 루시아를 그가 붙들면서 물수건을 내밀었다. 루시아는 우느라 몰랐지만 그 사이 하녀가 들어와 눈치 있게 곁에 챙겨두었다. 그녀는 수건을 받아 꼼꼼하게 얼굴을 닦아냈다. 그리고 얼굴을 묻고 한참 울었던 그의 셔츠 앞이 다 젖어 있음을 발견했다. “저 때문에 다..젖었네요.” 루시아는 주저하다가 셔츠 단추를 풀었다. 위에서부터 하나씩 풀면서 가슴 근육 굴곡이 드러나자 점점 손이 떨렸다. 중간까지 하다가 가슴이 쿵쿵 뛰어서 손을 놓았다. “갈아입으실 옷을 가져..” 그가 루시아 손목을 잡았다. 놀란 눈으로 마주친 그의 눈동자가 위험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마저 해.” 루시아는 떨리는 눈으로 그를 보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다시 바들바들 흔들리는 손으로 마저 그의 단추를 풀었다. 가장 밑의 단추까지 다 풀어 드러나는 맨가슴을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쓸었다. 탄탄한 피부에 감탄하며 유려한 선이 아름다운 근육에 가슴이 뛰었다. 갑자기 부끄러움이 밀려와 루시아는 얼른 손을 떼고, 일어날 것처럼 몸을 틀었다. 그러나 팔을 잡아 채 당기는 그의 손이 더 빨랐다. 그의 입술이 그녀 입술에 닿으며 빠르게 그의 혀가 입술을 핥고 지나갔다. 그는 맛을 보는 것처럼 입맛을 다셨다. “짜군.” 루시아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녀를 응시하는 그의 붉은 눈동자 속에 불꽃이 보였다. 그는 언제나 뜨겁게 원하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으면 그녀의 신체도 민감하게 반응을 보였다. 콩닥콩닥 뛰는 심장 정도는 귀엽고 순진한 반응이었다. 열이 나고 숨이 가빠지며 다리 안쪽 깊은 곳이 짜릿하게 아파왔다. 그의 붉은 눈을 보며 붉은 색이 이처럼 차가워 보이는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늘 이랬다. ‘당신은..침실을 함께 쓰는 여자를 항상 그런 눈으로 보나요?’ 소피아 로렌스가 처절하게 매달리던 광경이 떠올랐다. 세상에 남자가 타란 공작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닌데, 중얼거리며 혀를 찼었다. 그래서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고 함부로 남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소피아 로렌스의 심정을 이렇게 절절하게 이해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저런 눈으로 보다가 갑자기 차갑게 보면 과연 견딜 수 있는 여자가 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커졌다. 보답은 바라지 않고 마음 다하는 곳까지 그를 사랑하겠다는 결심은 이상하게 그가 다정하게 대해줄수록 흔들렸다. 이러다 언젠가 뻥 터져서 그가 경멸하는 매달리는 여자가 될까봐 두려웠다. ‘이대로도 좋아. ’지금 그녀는 충분히 행복했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고 뜨거운 남편이었다. 더 바라는 건 과욕이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루시아는 그의 어깨에 두 손을 얹어 누르면서 반동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그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위로 올라갔다. 그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느낌은 낯설면서 기묘한 우월감을 주었다. 루시아는 그의 어깨를 더 누르면서 고개를 내려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가 늘 그녀에게 하듯이 그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혀로 그의 입술을 핥았다. 조심스럽게 시작한 키스는 점차 도발적으로 변했다. 그가 가만히 있자 오히려 그녀가 더 적극적으로 입술을 문댔다. 입술을 떼며 루시아는 제가 한 짓이 너무 부끄러워 후끈거리는 얼굴의 열기가 온몸으로 퍼지는 것 같았다. “저 때문에 식사를 못하셨군요. 시장하실 텐데..”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그가 루시아 뒷목을 잡으며 사납게 입술을 부딪쳐왔다. 단번에 입술이 삼켜지고 그의 혀가 그녀 입안을 점령했다. 거침없이 움직이는 혀의 움직임에 그의 셔츠 깃을 잡은 그녀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숨이 막히도록 몰아세우는 키스는 길었다. 그의 입술이 떨어질 때 루시아는 가쁘게 숨을 할딱였다. “밥 소리가 나와?” 날 이렇게 미치게 해놓고? 그는 피가 끓어오르는 기분으로 으르렁댔다. “...저도 배고파요.” 휴고는 푹 한숨을 쉬었다. 그깟 한 두 끼 안 먹어도 상관없지만. “...당신을 굶길 수는 없지.” 휴고는 그녀를 그대로 안고 침실과 연결된 응접실로 나갔다. 테이블 위에는 차려둔 두 사람 식사가 있었다. 식사는 금방 끝났다. 배가 고프다던 루시아는 얼마 먹지 못하고 포크를 내려놓았고, 휴고도 그쯤에서 식사를 마쳤다. 루시아는 하녀를 불러 그가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라 시켰다. 소파에 앉아 그가 셔츠를 갈아입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그녀는 홀딱 심취했다. 드러나는 그의 상반신을 보면서 그녀는 망상을 하고 말았다. 그가 그녀 온몸을 핥아 애무하듯 그녀도 그를 눕혀놓고 맛보고 싶다 생각하다 화들짝 놀랐다. ‘정말 네가 미쳤구나. ’누군가 자신의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다행일 수가 없었다.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려고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데 그가 다가와서 소파 옆에 앉았다. “아직도 기분이 안 좋아?” “아니에요.” 루시아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의 팔이 넘어와서 그녀의 어깨를 살짝 쥐며 감싸 안았다. “당신 위로 덕분에 이제는 괜찮아요. 실컷 울었더니 속도 시원하고. 당신은 그런 경험 없어요?” “모르겠군. 울어 본 적 없어서.” 형제가 죽었을 때 가슴을 쥐어뜯는 것처럼 고통스러워서 말을 타고 멀리 나가 소리는 마구 질렀지만 눈물은 안 나왔다. 루시아는 울어 본 적 없다는 그의 말이 신기하지 않았다. 그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말해 봐. 무슨 일인지.” “...아까 들으셨잖아요. 파티 깨기로 정원파티는 엉망이 되었어요. 손님들이 데미안을 소개하는데 거부감이 컸지만 전 양보하기 싫어서 그냥 파티를 해산했어요. 사교계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에요.” “흔한 일인데 눈이 퉁퉁 붓도록 울어?” “그건..꼭 파티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제가 판단을 잘못해서 데미안에게 상처 준 것 같아서 속이 좀 상했어요.” 속이 조금 상한 정도로 그렇게 기력이 다 빠지도록 우나? 울음을 터뜨리는 여자의 심리는 그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할 일이니까 그는 납득이 가지는 않아도 넘어갔다. “그렇게 약한 녀석 아니야.” “네. 당신 아들이니까요. 그래도 이제 8살이에요. 어리다구요.” “주동자가 누구였지?” 부드럽게 달래듯 묻는 어조 속에 광폭함이 숨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멱을 딸 것 같은 잔혹함이 그의 붉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넘실거렸다. 평소에는 감추어 두는 휴의 본성이 깨어났다. 그는 그녀에게 고통을 준 자를 색출해 피 맛을 보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눈에 담긴 잔인한 맹수의 본성은 그녀가 고개를 드는 순간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뭘 하지 마.” “사교계 일은 여자들 일이에요. 당신이 나서면 안돼요.” 그가 나서면 완전히 난장판이 될 것이다. 북부 사교계 근본이 흔들린다. 그런 사태가 발생하면 마담 미셀은 물론이고 케이트조차도 등을 돌릴 수 있었다. “......” 그가 뚱하게 아무 대답이 없자 루시아는 다급해졌다. “약속해 주세요. 당신이 나설 일은 없을 거라고.” “내가 알아서 해.” “휴! 안돼요. 저를 위하면 그러지 말아요. 당신을 비난하지 못하고 절 손가락질 한다구요.” “누가 감히.” “휴!” 그녀가 눈동자를 일렁이며 애원하는 걸 그는 당해낼 수 없었다. “...알았어.” “약속하신 거예요?” “알았다고.” 그는 내심 투덜거렸다. 가만히 두면 안 되는데. 제대로 밟아서 찍 소리도 못하게 만들면 될 것을 그녀는 너무 마음이 약했다. 딴 건 몰라도 그는 제대로 밟아 놓는 것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다. 그녀에게 솜씨를 보여줘서 증명할 수도 없고. “어떡하려고?” “아직 생각 중이에요. 서둘러 앙갚음 할 생각은 없어요.” “유야무야 넘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당하고 가만있을 바보는 아니에요. 제가 잘 대처할게요. 걱정 마세요.” “뭐가 그리 복잡하지? 선동한 몇 끌고 와서..” 루시아가 고개를 홱 들고 눈꼬리를 세우자 휴고는 입을 다물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그런 짓 절대 하지 마세요. 남자와 달라요. 여자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목이 날아가면 죽는 건 여자나 남자나 마찬가지. 대체 뭐가 그리 복잡한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알았다고 순순히 대답했다. 순한 아내가 앙칼진 표정을 짓는 모습이 괜히 섬뜩했다. “당신은 정말 내 도움이 필요 없군.” 그녀는 정말 씩씩했다. 매달려 징징대는 것 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투정 정도는 부려도 좋으련만. “필요하면 말씀드릴게요.”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그가 없어도 그녀는 아무 문제없이 잘살 수 있다는 사실을 또 다시 확인한 것 같아서 그는 씁쓸했다. “데미안이 오기 전에 왜 녀석에 대해 묻지 않았지?” 오늘 정원 파티 사건을 따지고 들면 데미안 때문이었다. 그녀가 아이를 귀여워하는 것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아이에 대한 그녀 마음은 깊었다. 그래서 의외였다. 휴고는 얼마 전까지 그녀가 데미안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아이에 대해서 전혀 묻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신을 찾아간 날, 제가 데미안을 거론한 일로 저를 경계하셨죠. 당신이 그 후 제게 그 아이에 대해 먼저 말씀 않는데 제가 그 아이 이야기를 꺼내서 아는 척 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어요.” “왜?” “단지 궁금해 물어도 그걸 순수한 의도로 보기 힘들다는 걸 아니까요. 아마 제가 데미안에 대해 캐물었다면 무슨 의도로 그걸 묻나 생각하셨을걸요.” “......” 휴고는 허를 찔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결혼해 얼마 안 된 시점에서 그녀가 데미안에 관심을 보였다면 결코 자연스러운 관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속에 담아두는 성격이 아니면서 생각지도 못한 점에서 속이 깊었다. “데미안을 부른 건 혼적에 올리는 절차 때문이야.” “아직 처리 안 하셨어요? 혹시 제가 해야 할 일이 더 있어요?” “그런 문제 때문이 아니라 법적인 당신 아들이 되는 것이니까 녀석 얼굴 쯤은 알아야지. 그리고 아무리 오래 전 서류를 줬다지만 당신에게 말도 안하고 처리하지는 않아.” 루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그는 다소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를 할지 알겠군. 그런 건 물어보지도 않고 처리할 줄 알았다고 하려는 거지?” 루시아가 조금 멋쩍게 웃었다. 휴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난 악당이라고.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알아.” 루시아는 조금 풀죽은 기색의 그가 왠지 안 되어 보이고 미안했다.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정말이에요.” “...그럼 어떻게 생각하는데?” “당신은 굉장히 유능한 영주님이에요. 전 북부에 와 보기 전에는 이곳이 이렇게 안정적으로 살기 좋은 곳인 줄 몰랐어요.” “그런가.” 휴고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칭찬은 별로 기쁘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듣고 싶은 말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 -- 데미안 -- > “입적 절차는 복잡하지 않으니까 하루 이틀 내면 될 거야.” “그렇군요...” 정말 데미안이 아들이 된다고 생각하자 루시아는 마음이 설ㅤㄹㅔㅆ다. 그녀의 혼적에 입적한 이상 이제 데미안은 그녀의 가족이었다. 남편과는 이혼하면 남이 되어도 입적한 아들은 영원히 그녀 아들이었다. 그에게 이미 친권포기서를 주었기 때문에 데미안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지만 권리 여부가 모자 관계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제 아들이군요..” “그래. 당신 아들이니까 좋을 대로 해. 괴롭혀도 되고.” “...응? 이런 나쁜 아버지 같으니라고.” 루시아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비난했다. “뭐가?” “지금 계모한테 구박하라고 종용하는 거예요?” 그녀의 단어 선택은 그를 웃겼다. “구박할 깜냥이나 되나?” “무슨 뜻이에요?” “도리어 그 녀석에게 괴롭힘 당하지나 말라는 뜻이야.” “데미안이 절 괴롭힐 일 없을 거예요. 당신은 아직 데미안을 몰라요. 그 아이가 얼마나 착한데요.” 그가 피식 웃었다. 순해 보여도 타란의 핏줄이었다. 그보다 착한 사람은 없을 것 같던 그의 형제도 친부를 살해하는 독기를 보였다. “그리고 당신 아들이잖아요.” 루시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묘한 눈으로 자신을 보자 실제로 말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 그건 누구에 대한 신뢰지?” “...당신...을 닮은 데미안?” 그가 고개를 루시아 얼굴 가까이 바싹 들이밀었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마치 위협을 가하는 것처럼 말했다. “날 닮았으면 더 조심해야지. 나에 대한 소문을 모르나?” “.... 피를 마신다는 소문?” “...뭐?” 루시아는 당황했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말이었다. “아, 저기. 그러니까. 당신 소문..중에..” “피를 마신다고?”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다가 휴고는 몸을 그녀 쪽으로 돌려 끌어안듯 고개를 어깨 옆에 묻으면서 웃기 시작했다. 파비안의 충실한 보고 덕에 자신을 둘러싼 온갖 소문을 잘 알고 있지만 대놓고 그의 앞에서 피를 마신다며?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소문일 뿐이라는 거 알아요.” 루시아는 무안해서 변명했다. “아예 거짓말은 아니지. 전쟁을 하다 보면 얼마간 먹을 수밖에 없거든.” “아, 네...” “그게 궁금했나?” “아뇨.... 어쩌면 조금은. ..근데 옛날에 그랬던 거예요. 지금은 절대 그런 생각 안 해요.” 그는 계속해서 웃었다. 그가 불쾌해 하지 않아 다행이지만 그 말이 그렇게 재미있었나. 루시아는 그의 웃음 코드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다른 소문은?” “...몰라요.” “당신 정말 대담한 여자로군. 피를 마시는 괴물한테 무슨 생각으로 결혼하자 소리를 한 거야?” 놀려대는 그의 말을 들으며 루시아는 잠자코 얼굴만 붉혔다. 말실수를 먼저 했으니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제가 데미안 일에 이것저것 간섭해도 괜찮아요?” “새삼스레.” “지난번에 그러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내가 언제.” “귀여워하는 건 좋지만 너무 주제넘게 나서지 말라고...” “그러니까 내가 언제.” 루시아는 눈을 깜작거리며 대체 뭔 소리냐 말하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정말 전혀 그런 말을 한 적 없다는 눈치였다. 루시아는 가만히 기억을 더듬었다. 생각해보니까 그가 ‘주제넘게’라는 말로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다만 그런 식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말을 했다. 루시아는 어쩐지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어설프게 그가 하는 생각이나 말을 추측하지 말고 그냥 대놓고 물어보면 어떨까. “혹시..데미안 미워하세요?” “안 미워해.” 루시아는 굉장히 마음먹고 조심스럽게 한 질문을 그는 굉장히 쉽게 대답했다. “그럼..왜 데미안을 기숙학교에 보내셨어요?” “말했잖아. 내가 살필 수 없으니 보냈다고.” “그래도 기숙학교에 보내는 경우는 못 들었어요. 더구나 공작가 후계를요.” “남들이 어쩌건 무슨 상관이야.” “...그러니까 당신은 그걸 최선이라고 판단하셨다는 거군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는 막혔던 뭔가 갑자기 확 트이는 기분이었다. 어둠 속을 한참 더듬다 뭔가 손끝에 잡힌 것 같다. ‘이 남자를. ..조금 알 것 같아. ’생각해 보면 그는 루시아가 뭔가 물으면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진 않아도 대부분 대답은 꼬박꼬박 해주었다. “왜 데미안을 기숙학교에 보내놓고 연락 한 번 안하셨어요?” “녀석이 뭘 하는지 일주일 단위로 내 책상에 올라와. 잘 있는 거 알면 된 거지.” 신기했다. 이해할 수 없던 그의 행동은 다 이유가 있었고, 물어보니까 다 말해준다. 루시아는 머리를 굴렸다. 어디까지 대답을 해 줄까. 좀 더 곤란한 질문을 해도 괜찮은가. “그럼..” 그가 고개를 숙여 목덜미를 깨물자 루시아는 아얏, 작게 비명을 질렀다. “딴 남자 얘기는 그만 하지?” “...뭐에요. 당신 아들이거든요. 이제 8살 아이구요. 남자가 아니라구요!” “잔인하군. 남자가 아니라는 말이 얼마나 녀석 자존심 뭉개는 줄 알고는 있어?” “...세상에. 제가 경솔했어요.” 어리다 해도 남자 아이였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어린 소녀에게 넌 어리니까 절대 숙녀는 아니지 말하면 몹시 기분이 상할 것 같다. 의도치 않은 말이지만 데미안 기분이 얼마나 상했을까. ‘애도 참. 기분 좋지 않다고 솔직히 말해 주지. ’생각해보면 데미안은 그런 것을 시시콜콜 말할 아이가 아니었다. 그럼 설마 그에게 그걸 말했을까? 두 부자 사이가 그렇게나 가까워졌나? “데미안이 그래요?” “아니.” “근데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내가 그 입장이라면 그럴 거라는 소리야.” 루시아는 그에게 눈을 흘겼다. 하지만 그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남자니까 남자 마음을 더 잘 알 것이다. 루시아는 혹시 자신이 데미안에게 뭔가 또 실수한 건 없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에 그의 손이 자꾸 치근덕거렸다. 슬금슬금 내려온 손이 허리를 더듬고 목에서 귓가로 가볍게 입술만 닿았다 떨어지는 키스가 끈질겼다. “일하러 가셔야죠.” 단번에 산통을 깨는 그녀의 말에 그가 잔뜩 표정을 구겼다. “급한 일로 나갔다 오신 거잖아요. 그리고 외출 후에는 더 바쁘시구요.” “......” 그가 얼굴 가득 불만을 드러냈으나 루시아는 허리를 잡은 그의 손을 떼며 일어났다. 그가 뭘 바라는지 알지만 루시아는 여러 일로 하루 종일 기운을 뺐더니 지금 그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머리가 좀 무거워서 산책을 하고 싶어요.” 그는 결국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집무실로 향했다. 일하는 것이 즐거운 적 없지만 오늘따라 정말 하기 싫었다. 보상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우는 그녀를 안아 달래 준 수고를 이런 식으로 되갚아서는 올바른 사람의 도리가 아니었다. 그는 집무실로 들어갈 때까지 투덜거렸다. 그 날 밤, 목욕을 마치고 침실로 들어오는 그에게 루시아가 말했다. “당신 침실로 가서 주무세요.” “오늘은 또 왜!” 버럭거리는 그를 루시아는 흘겨보았다. “신경을 썼더니 몸이 좋지 않아요. 그래서 즐겁지 않을 것 같아요.” 몸이 좋지 않다. 즐겁지 않을 거다. 2번 연속으로 그녀는 무자비하게 그를 강타했다. “...알았어. 오늘도 얌전히 옆에서 잘게.” 그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망할 여편네들. 정말 이것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그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정말요?” “어제도 약속 지켰잖아.” 그래서 더 못 믿겠는데. 그는 영 못미더워 하는 눈을 하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아 침대로 몸을 던졌다. “휴!” 그는 버둥거리는 그녀를 더 꽉 안았다. “이대로 잔다고. 어허. 가만히 있어. 자꾸 그럼 나 흥분돼.” “어딜 만져요!” 엎치락뒤치락하며 한참을 그러다가 조용해졌다. 등 뒤에서 그에게 잡혀 루시아는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그는 다리 하나를 그녀의 두 다리 사이에 집어넣고 손 하나는 아주 당당하게 잠옷 안에 들어와 가슴을 쥐었다. 손 빼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을 것 같아서 루시아는 그냥 포기했다. “비비안.” 그가 귓가에서 불러주는 이름이 기분 좋아서 루시아 입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네.” “비비안.” “네.” 그가 또 “비비안” 부르자 이제 루시아는 “네.” 라고 대답하며 대체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당신 내가 처음에 이름을 불렀을 때 불편해 했었지.” “음. 네. 그랬어요.” “지금은 불러도 자연스럽군.” “네. 자꾸 들어서 그런지 익숙해졌어요.” 이제 루시아는 이전처럼 비비안이란 이름이 싫지 않았다. 타란 공작의 아내 이름은 루시아가 아니라 비비안이었다. 그녀는 비비안으로서 삶에서 새로운 행복을 찾았다. 고통만 있었던 비비안의 삶은 꿈속에서 끝났다. 그가 비비안이라고 불러주면 루시아는 그에게 하나뿐인 ‘비비안’이 된 것 같아서 가슴이 뛰었다.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그녀를 비비안으로 불러 줄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 그래?” 왜 나한테는 당신 아명을 알려주지 않는 거지? 그는 묻고 싶었다. 그런데 물었다가 들을 그녀 대답이 두려웠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고 하거나 ‘당신은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요’ 같은 대답을 들으면 어쩌나 그의 속이 타 들어갔다. 날 싫어하는 건 아니지? 결혼했으니까 어쩔 수 없이 한 침대 쓰는 상황을 묵인하는 건가? 날 절대 사랑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개선의 여지가 전혀 없나? 묻고 싶은 것들이 불쑥불쑥 목에서 튀어나와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속에 말을 담아 두고 참아본 적 없는 그는 몹시 생소하고 괴로운 경험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 입에서 나올 대답이 두려웠다. ‘당신만은 절대 사랑할 일 없다’는 말을 한 번 더 듣는다면 정신이 확 나가버릴 것 같았다. 정신이 나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끔찍했다. 그녀를 다치게 할까봐, 그랬다가는 정말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비안.” 그는 좀 더 힘주어 그녀를 끌어안고 뒷목에 코를 댔다. 항상 그를 취하게 하는 그녀의 향이 좋아 그녀 살결에 더 밀착했다. “네...” 이상했다. 그녀를 안고 있는데도 마치 그녀를 영영 잃은 것 같은 상실감이 밀려왔다. 심장이 너무 아파서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가슴을 뚫고 파고든 미증유의 힘이 그의 심장을 콱 잡아 짓이기는 것 같았다. 이렇게 아파본 적 있었던가. 그는 기억에 없었다. 어릴 때 용병 노예로 끌려 다니며 죽을 고비 몇 번 넘겼지만 아프다는 감각보다는 살았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점차 숨소리가 고르게 들리는 잠든 그녀를 안고 그는 한참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휴고는 가신들을 불러 모아 데미안을 정식 아들로 입적했음을 알렸다. “나는 이미 데미안을 내 후계로 하겠다고 공표했다. 그간 그대들이 적잖이 내 결정을 수용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도 내버려 둔 것은 어차피 내 결정을 바꿀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공작이 데미안을 후계로 하겠다고 발표한 이후, 소공자를 공식 석상에서 거론하는 일이 처음이라 가신들은 긴장한 표정이었다. “입적한 소공자는 이제 법적인 내 아들이다. 문제를 제기하고프면 찾아오라. 나는 대화를 나눌 준비가 언제든 되어 있으니까.” 공작의 입에서 나온 대화라는 단어는 죽이겠다는 협박보다 무시무시했다. 휴고는 가신들 앞에 서류 하나를 던졌다. 루시아가 절대 나서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지만 그래도 아예 손 놓고 구경만 하고 싶지 않았다. 정원파티 참석자 명단을 가져오라고 제롬에게 명했다. 제롬은 몹시 난처한 표정으로 마님을 거론했지만 쓰읍 혀를 한 번 차자 냉큼 가져왔다. 휴고는 개중에 가신 명단만 골라냈다. “그 명단에 이름을 올린 자는 집안 단속에 힘쓰는 것이 장차 이로울 것이다.” 이 정도면 휴고 입장에서는 가벼운 충고조차도 되지 못했다. 나서지 말라는 아내의 청을 이만하면 충실히 지켰다고 그는 만족했다. 공작이 자리를 뜨자 사색이 된 가신들은 명단에 달려들었다. 그들 귀에는 ‘그 명단에 이름 있는 놈은 다 죽었다 생각해라. ’는 말로 들렸다. 그들은 집에 돌아가 아내를 다그칠 것이고, 곧 사건을 파악할 것이다. 남편에게 혼쭐 난 귀부인들 입을 통해 당시 정원파티에 참석한 귀족들에게도 순식간에 퍼질 것이다. 공작부인 건드리면 뒤에 버틴 타란 공작이 불 뿜는 용처럼 나선다는 소문이 퍼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정원 파티 이후로 일주일이 흘렀다. 로암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했다. 루시아는 승마하러 가지 않고 일주일 내내 내성 안에만 있었지만 그 정도 외출 안하는 일은 처음이 아니었다. 정원 파티 다음 날부터 루시아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해서 주변인들도 금방 그 사건을 잊었다. 데미안은 제 방에서 책을 읽다가 발치를 툭 건드리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꼬리잡기를 하며 혼자 놀다 와서 부딪친 아샤를 보며 데미안은 미소를 지었다. 유난히 데미안을 따르는 새끼 여우는 요즘 거의 하루 종일 소년과 함께 있었다. 일주일 동안 데미안은 많은 생각을 했다. 정원 파티 사건은 소년에게 상처보다는 충격을 안겼다. 그렇게 자신의 미약함을 뼈저리게 느낀 적이 없었다. 처음 든 생각은 ‘아버지가 이 자리에 계셨다면. ’ 이라는 가정이었고, 결론은 아버지에 비하면 먼지만큼 형편없는 자신의 존재였다. 하필 그 날 공작은 출타를 했다. 로암에 있었어도 어차피 여자들 사교계 일에 공작이 끼어들기 힘들다는 사실을 데미안은 아직 알지 못했다. 다만 아버지의 부재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고, 그 때는 소년이 어머니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데미안은 자신이 어리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학술원에서 데미안은 또래 학년 중에는 가장 어렸다. 어디를 둘러봐도 다 소년보다 어른이었다. 세월의 흐름은 소년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지만 힘을 키우는 건 의지로 가능했다. 학술원에는 데미안이 어리다는 이유로, 알려진 신분 내역이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우습게보며 시시한 시비를 거는 녀석들이 있었다. 그런 허접한 놈들은 상대할 가치조차 없어 무시하면 무시하는 대로 더 난리였다. 그래도 데미안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건 데미안의 뛰어난 성적 때문이었다. 실력은 힘이다. 학술원에서 배운 것 중에 가장 쓸모 있는 깨달음이었다. 데미안은 아샤를 안고 일어났다. 하인에게 여우를 건네 제 집에 데려다 놓으라 하고 제롬을 통해 아버지를 뵙기를 청한다는 말을 넣었다. < -- 데미안 -- > “들어가시면 됩니다. 도련님.” 제롬은 집무실 앞까지 데미안을 안내했다. 커다란 문 앞에서 심호흡 한 번 하고 무거운 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갔다. 기숙학교로 떠나기 전, 딱 한번 이곳에 들어온 적 있었다. 기숙학교로 가라는 말을 꺼내며 공작은 소년에게 말했다. [ 널 공작가 후계로 선언하는 것으로 내 할일은 다했다. 나머지는 네가 할 탓이다. 졸업만 해. 그럼 이 자리는 네 거다. ] 그 날부터 데미안은 언젠가 아버지 뒤를 이어 공작위를 물려받는 일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무엇을 위해 공작이 되고 된 후에 무엇을 할지 생각한 적 없었다. 그냥 그 목표는 소년의 존재 의미였다. 소년이 살아가는 가치였다. 이제 데미안에게 진정한 목표가 생겼다. 공작이 되는 것은 그 목표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힘. 강해지고 싶다. 강한 힘이 있어야 지키고 싶은 사람을 지킬 수 있다. 아버지가 힘이 있어서 어머니를 지킬 수 있듯이 자신도 힘을 갖고 싶었다. 데미안은 아버지를 존경했다. 아버지는 위대한 기사였고,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처럼 될 자신이 없었다. 소년은 소년이 가능한 방식으로 강해지는 법을 찾아야 했다. 소년의 능력만으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학술원에서의 배움으로 얻는 실력이었다. 집무실 안의 공기는 조금 서늘했다. 가구에서 풍기는 특유의 옅은 나무향이 떠돌았다. 입구에서 사선 방향으로 놓인 널찍한 책상 위는 문서가 가득 쌓였다. 조용한 집무실 안에 간간히 서류 넘기는 소리만 울렸다. 데미안은 조용히 걸어 책상 앞에 몇 걸음 떨어져 섰다. 휴고는 슥 고개를 들어 데미안을 한 번 확인하고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긴 이야기냐?” “아닙니다. 그만 학술원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 말씀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어차피 이번 학기 수업을 따라가기는 틀렸을 텐데.” “네. 하지만 지금 돌아가면 계절 학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걸로 놓친 학기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한 학기 수료 못해도 졸업은 할 수 있다.” “저는 최고 성적을 받고 싶습니다.” “난 네게 졸업만 하면 된다고 했다.” “제가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왜?” “실력을 키워서 힘을 갖고 싶습니다.” 휴고는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눈빛을 받으며 데미안은 조금 긴장했다. 그는 찬찬히 데미안을 살폈다. 소년은 곧은 자세로 서서 시선을 살짝 내리고 있으나 주눅이 든 기색은 없었다. 눈치만 살피는 심약한 가신들보다 나았다. 휴고는 데미안을 처음 본 날을 떠올렸다. 필립이 데려온 데미안의 붉은 눈동자는 맑고 순수했다. 형제의 아들이라는 필립의 말을 그래서 믿을 수밖에 없었다. 타란의 피를 이은 녀석이 형제의 핏줄이 아니고서야 그런 눈을 가질 수 없었다. “힘이라.” 그는 피식 웃으며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펜으로 서명을 마치고 옆으로 넘겼다. “학자는 세상을 지배하지 못한다. 넌 학술원에서 배워서 키운 실력이 힘이 된다고 어찌 증명할 것이냐.” 데미안은 생각지 못한 문제 제기에 당황했다. “네 성적과 무관하게 졸업만 하면 이 자리는 네 것이다. 타란의 공작자리 정도면 훌륭한 힘이지.” 최소한 성적을 유지해 졸업장만 따든, 최고 성적으로 졸업하든 어쨌든 공작위는 소년의 것. 그래서는 아무리 노력해봤자 결과는 똑같았다. 데미안은 아버지가 주는 것이 아닌, 자신의 손으로 새로운 힘을 얻고 싶었다. 학술원을 다니는 학생 데미안이 오직 자신의 노력만으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힘. 고민하는 데미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데미안이 다니고 있는 학술원 ‘익시움’에는 학생 중에서만 뽑아 구성하는 ‘회’라는 조직이 있었다. 익시움 내에서 회의 권력은 상당했다. 회의 수장을 ‘시타’라고 불렀다. 데미안은 아직 어린 나이라 직접적으로 그들과 부딪칠 일은 없었다. 회의 구성원은 고학년들이었다. 가끔 교정을 지날 때마다 그들이 지나가면 마치 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학생들이 길을 트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그걸 보면서도 데미안은 크게 관심 갖지 않았다. 그 때까지 소년 목표는 그냥 졸업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관심이 생겼다. “시타가 되겠습니다.” 휴고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소년을 보았다. “시타는 학술원의..” “뭔지 안다.” 휴고는 학술원을 나오지 않았으나 학술원에 관심은 있었다. 단지 데미안을 보냈기 때문이 아니라 흐름 때문이었다. 제논 뿐 아니라 각국 귀족들은 갈수록 익시움에 자식을 유학 보내는 수가 늘고 있었다. 인맥 때문이다. 10년만 지나면 익시움 과정 수료는 귀족들의 필수 과정이 될 것이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했다. 학술원에도 권력과 계급이 있었다. 그래봤자 학술원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시간 제약 있는 권력이 뭐가 대수일까 하겠지만 원래 폐쇄된 공간일수록 권력은 더 절대적이다. 휴고가 보기엔 별 볼일 없는 소국의 왕 노릇보다 나았다. 학술원 시타의 권력은 전쟁을 치르면서 부쩍 강력해졌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강해지고 있었다. 데미안이 졸업할 쯤에 이르면 무시할 수 없는 힘이 될 것이다. 학술원 시타 출신이라는 경력은 혼외자라는 출생 신분의 한계를 상당 부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아이가 그런 먼 미래까지 생각한 건 아니겠지만 휴고는 데미안이 내린 결론이 상당히 재미있었다. 데미안의 학술원 생활에 관련한 보고서를 받아 보면 소년은 공부는 열심히 하지만 그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왜 갑자기 권력이 갖고 싶어졌을까. 과연 이 녀석이 얼마큼이나 해낼 수 있을까. 휴고는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공부만 들이판다고 가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예.” “명심해라. 어설픈 힘은 없느니만 못하다. 최고가 되고 싶으면 감히 곁눈질도 하지 못하게 올라서야 한다.” “예.” “네 어머니에게 입적이 된 건 알고 있느냐?” “예. 어..머니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학술원으로 돌아간다고 네가 말씀드려라.” “예.” “다 좋지만 학술원에서 사람은 죽이지 마라. 그건 좀 수습하기 까다로우니까. 혹시 그런 일 있으면 학술원 측에 알리기 전에 이쪽에 먼저 연락하고.” 역시 아버지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데미안은 그 사실을 또 한 번 깨달았다. “.... 예.” 데미안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나왔다. 소년이 나가고 잠시 후 그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네 녀석보다 네 아들놈이 수십 배는 야무지구나.” 형제를 떠올리면 늘 아프기만 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기분만 좋았다. 데미안이 루시아를 찾아간 시간은 때마침 오후 티타임이었다. 차를 마시러 2층에서 내려오던 루시아는 데미안과 마주치자 반색하며 응접실로 데려갔다. 두 모자는 응접실에 앉아 제롬이 솜씨 좋게 내린 차를 마셨다. “내게 용무가 있어 오는 길이었지? 무슨 일이니?” 이맘때는 데미안이 제 방에서 열심히 공부할 시간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학술원으로 그만 돌아갈까 합니다.” 입으로 가져간 찻잔이 멈추고 루시아는 잠시 아무 말 없다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혹시 정원파티 일을 아직 마음에 두고 있어?” “아닙니다. 수업을 따라가려면 이제는 돌아가야 합니다.” 데미안 나이 정도 아이라면 가기 싫다고 떼를 쓰며 드러누워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루시아는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데미안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가엽다고 여겼던 처음 생각은 달라졌다. 데미안과 많은 대화를 나누다 보니까 이 아이의 사고력은 어른에 이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데미안은 천재였다. 머리가 지나치게 좋기 때문에 보통 아이의 어린 시절은 데미안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루시아는 꿈속에서 데미안과 비슷한 아이를 알았다. 남편이었던 메튼 백작의 셋째 아들 브루노였다. 브루노를 잠깐이라도 가르쳤던 가정교사는 천재라고 입을 모았다. ‘데미안보다 1살이 더 많겠구나. ’ 루시아가 브루노를 처음 만났을 때 소년은 12살이었다. 브루노는 정말 메튼 백작 아들일까 싶을 정도로 머리도, 외모도 닮지 않았다. 부친에 대한 반항심이 커서 보란 듯 크고 작은 말썽을 일으켰다. 교묘한 악질 장난으로 가정교사를 툭하면 쫓아내는 일도 그 중 하나였다. 결국 메튼 백작은 브루노를 학술원으로 유학을 가장해서 쫓아냈다. 매사 냉소적이고 반항적이던 브루노는 굉장히 조숙했다. 그래서 루시아는 천재 소년의 어른스러움이 뭔지 알고 있었다. 천재라는 점만 빼면 브루노와 데미안은 전혀 달랐다. 데미안은 훨씬 더 귀엽고 사랑스러우며 착한 아이였다. “그래. 공부하러 가겠다는데 마땅히 기쁘게 보내줘야지. 언제 출발하려고?” “준비는 금방 될 테니 내일 아침에 가려고 합니다.” “내일 아침? 그렇게 금방?” 루시아는 그렇게 갑자기 데미안과 헤어질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다. 데미안은 루시아에게 아들이면서 친구였다. 데미안이 루시아에게 정을 얻은 것처럼 루시아 역시 데미안에게서 위안을 얻었다. 그를 꼭 닮은 소년을 보며 그가 없는 동안의 그리움을 견뎠고, 아이에 대한 애정이 커지는 만큼 그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도 더 깊이 깨달았다. “그럼..” 내년에 또 오는 거니? 물으려다가 루시아는 멈칫했다. 내년이면 왕이 죽고 수도로 올라갈 것이다. 그러면 데미안을 수도로 불러야 할 텐데 타란 공작가 영지인 북부에서조차 환대받지 못하는 데미안이 수도에서는 얼마나 눈총을 받을까 생각하면 차마 수도에서 보자고 할 수 없었다. 데미안이 좀 더 나이가 들어 사교계에 데뷔해도 될 쯤, 그 때까지는 지금처럼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기숙학교에 있는 편이 낫다. ‘시간이 지나면 뭔가 달라지겠지. ’그가 아무 생각 없이 데미안을 후계로만 임명했으리라 생각지 않는다. 그도 뭔가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내일 출발하려면 준비할 것이 많니?” “책만 챙기면 됩니다.” “그럼 나와 이야기 좀 더 할래? 학술원 생활이 어떤지 얘기해 줘.” “예.” 오후 몇 시간에 걸쳐 두 모자는 응접실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출발 준비를 마친 마차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마차를 몰 마부와 가는 여정 시중을 들 하인이 대기해 있고, 고용인들이 도련님 배웅을 위해 모두 나왔다. 휴고까지 나와 있었다. 떠난다는 인사말 들었으면 되었지 무슨 배웅이냐 했다가 루시아에게 원망의 말을 듣고 끌려나왔다. 열린 마차 문 앞에서 데미안과 루시아는 마주 서서 이별 인사를 나누었다. “건강 조심하고. 공부 열심히 하고.” “예.” “밥도 잘 먹고. 아프지 말고. 아..건강 얘기는 했지.” 아쉬워 자꾸 할 말을 찾는 루시아를 보며 데미안의 가슴 안쪽이 따뜻해져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마님.” 하인이 바구니를 들고 곁으로 왔다. 루시아가 바구니를 받아 데미안에게 내밀었다. 덮개가 반 열려 있는 바구니 안에는 아샤가 들어 있었다. 소년과 눈이 마주치자 여우 귀가 쫑긋거리며 움직였다. “아샤는 이미 널 주인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그러니 네가 데려가렴.” “여우 사냥을 위해 키우시는 거잖아요.” “괜찮아. 난 구경만 해도 되니까.” “하지만..학술원에서 동물을..” “그건 걱정 마. 네 아버지가 조치해 주신다 했으니까.” 그렇죠? 묻는 것처럼 루시아가 고개를 돌려 몇 걸음 떨어져 서 있는 그를 바라보자 휴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일석이조였다. 짐승 새끼를 알아서 치우겠다는데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애완동물을 키우지 못하는 학술원 교칙 같은 건 바꾸면 그만이다. 널리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휴고는 익시움에 데미안을 입학시킬 때 상당한 장학금을 쾌척하고 이사진에 합류했다. 의사 결정이 가능한 이사진 상당수를 매수해 두었기 때문에 휴고는 얼마든지 교칙을 입맛대로 바꿀 수 있었다. 사람들은 타란 공작을 힘을 추구하는 기사라 생각하지만 그는 실제로 꽤 치밀한 사람이었다. “학술원 생활에 아샤가 조금이라도 네 마음의 벗이 되었으면 해.” “예. 고맙습니다.” 바구니를 받은 하인이 마차 안으로 집어넣었다. “가보겠습니다.” “아. ..그래. 가야지. 데미안. 마지막 인사로 한 번 안아도 되겠니?” “...네.” 루시아가 팔을 뻗어 데미안을 끌어안았다. 잠시 허공에 떠 있던 데미안의 손도 루시아 등을 감싸 안았다. 데미안도 눈치가 있어서 공작부부 사이가 좋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필요에 의해 결혼했을 거라는 생각은 진즉 버렸다. 그리고 사이좋은 부부 사이에는 언젠가 아이가 태어날 것이다. 공작부부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면 데미안의 자리는 모래성이었다. 입적되었다지만 사생아. 진짜 적실로 태어날 아이를 데미안이 당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공작위 자리는 아무래도 좋았다. 동생이 태어나 그 자리를 가져간다 해도 기꺼이 내어 줄 것이다. 데미안은 단지 지키고 싶었다. 로암을 감싸는 이 따뜻한 온기를 지키고 싶었다. 어머니의 웃음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갖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포옹을 마치고 두 사람이 떨어졌다. “어머니.” 루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데미안을 멍하게 보았다. 갑자기 소년이 성큼 한 발 앞으로 다가오자 루시아는 살짝 흠칫했다. 데미안이 루시아의 손을 잡아들고 몸을 숙이며 정중하게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언제 다시 뵐지 모르지만 평안하시길.” 대답도 못하고 얼어붙어 있는 루시아를 향해 데미안은 눈이 반달처럼 보이도록 웃었다. 씨익 올라가는 입꼬리는 처음 보는 개구진 미소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휴고는 삐딱하게 헛웃음 치다가 피식 웃었다. 봐 줬다. 딴 놈이 저런 짓 했으면 오체분시였다. 데미안이 마차에 올라 마차가 출발하고, 마차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루시아는 넋 놓고 서 있었다. 그 곁으로 휴고가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뭐해?” “...어머니래요.” “어머니가 아니면?” “하..하지만 그렇게 부르는 건 처음이라..” ‘애도 참. 떠날 때 되어서 겨우 한 번 불러주고. ’ 서운한 마음과 ‘나보고 어머니라고 했어. ’ 감격한 마음이 교차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붉어진 눈시울 로 루시아는 그에게 홱 고개를 돌렸다. “보셨지요?” “뭘.” “역시 당신 아들이었어요. 벌써부터 바람둥이 짓을 하고 있다구요.” “......” 여자를 울리는 나쁜 남자로 크면 안 된다는 둥, 그런 아들로 키우지는 않겠다는 둥 루시아는 아쉬움에 발을 떼지 못하며 마차가 사라진 방향을 보면서 종알거렸다. 휴고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집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 -- 진실&거짓 -- >‘데미안이 갔어. ’ 생각하면 시무룩했다가 ‘어머니’라고 불린 기억이 떠오르는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치만 이제는 듣지 못하잖아. ’ 생각하면 다시 시무룩해졌다. 루시아는 데미안을 보내고 하루 종일 극과 극의 감정을 오가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마님. 목욕물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하녀는 벌써 3번째 고하고 있었다. 루시아는 아까부터 목욕하기 위해 속치마 차림으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알았다.” 대답만 하면서 고개를 푹 숙이고 계속 딴 생각에 여념이 없었다. 마님을 자꾸 재촉하는 일이 조심스러워서 하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옆에 서 있었다. 갑자기 강한 힘이 그녀의 턱을 잡아 올리는 바람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 새 들어온 그가 그녀를 내려 보고 있었다. 조금 서늘한 그의 붉은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휴고는 침실에 들어오자마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그녀를 보자 가슴이 덜컹했다. 혹시 울고 있나 숙이고 있는 그녀 고개를 들어 확인했다. 표정이 말짱한 것을 보고 얹힌 것 같은 불편함이 사라졌다. ‘그가 왜 벌써 왔지?’루시아는 눈을 돌려 하녀를 찾았다. 그러나 하녀는 이미 휴고가 들어올 때 냉큼 사라지고 없었다. 몇 번의 하녀 재촉을 건성으로 들어 넘긴 일이 기억났다. ‘아직 씻지 못했는데. ’루시아는 그걸 말하기 위해 그의 손에 잡힌 턱을 돌려 벗어났다. 하지만 말을 꺼내기 전에 그의 얼굴이 다가와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 그는 큰 동작으로 덥석 그녀 입술을 삼키며 그녀 양 어깨를 잡아 그대로 넘어뜨렸다. 그녀가 놀라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짚으며 밀어내려 했으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단번에 그녀 위로 올랐다. 한 손이 속치마를 끌어올려 허벅지 위까지 올리고 그녀 두 다리 사이에 무릎을 넣어 오므리는 다리를 벌렸다. 진한 키스가 이어지며 그는 그녀의 입술을 놔주지 않았다. 입 안 가득 점령한 그의 혀가 능란하게 움직이며 그녀의 입안을 자극했다. 그의 키스에 빠져 그의 어깨를 두드리던 그녀의 손에 점차 힘이 빠졌다. 그러나 그의 손이 팬티를 끌어내리자 루시아는 정신이 들었다. “응..!” 그녀가 거센 반항의 움직임을 보이자 흥분한 하체를 그녀 다리 안쪽에 바짝 붙이던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빨아들이던 그녀의 말랑거리는 혀를 놔주고 그녀 입술을 부드럽게 핥으면서 입술을 뗐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흐려진 눈빛의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갈급한 욕망으로 일렁거렸다. “왜.” “저 목욕을 아직...” “상관없어.” “전 상관있어요.” “그래서. 지금 이 상태에서 목욕하러 가겠다고?” “네.” 그녀의 표정에는 반드시 지금 당장 목욕하러 갈 거라는 의지가 충만했다. 그가 한숨을 흘렸다. “당신 일부러 이래?” “...뭘요?” “...아니야.” 정말 가지가지로 사람 미치게 한다. 그는 몸을 일으키면서 동시에 그녀를 안아 들어 마치 짐이라도 드는 것처럼 어깨 너머로 걸쳤다. “꺄아! 휴?!” 그는 한 팔로 가슴께에서 버둥거리는 그녀 허벅지를 감싸듯 안고 한 손은 그의 어깨에 걸쳐진 그녀 허리를 누르면서 성큼 걸었다. 그녀가 몸부림 쳐봤자 그의 발걸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가만있어. 씻고 싶다며.” 그는 그대로 욕실로 들어갔다. 끓는 물을 받아 부어 둔 욕조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이 올라와 욕실은 자욱했다. 욕실 문을 열며 들어올 때 안에 있던 하녀 하나가 놀라 달아났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녀 뒷모습을 보며 루시아만 ‘난 몰라’ 중얼거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는 욕실 바닥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잔뜩 붉어진 얼굴로 루시아는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오히려 그녀의 속치마를 훌렁 벗겨냈다. “꺄악!” 순식간에 팬티 한 장만 입은 상태가 되어 루시아는 두 팔로 가슴을 가렸다. 그는 한 걸음 떨어진 상태에서 팔짱을 끼고 천천히 그녀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았다. 침대 위에서가 아니라 세워 놓고 보는 것도 나름대로 절경이었다. 만족스럽게 감상하는 그를 목덜미까지 붉어져 보던 그녀가 주춤 한 걸음 물러났다. 그의 눈썹이 스윽 올라가며 멀어진 만큼 다가왔다. 그러자 그녀가 또 다시 물러났다. 그렇게 몇 번 뒷걸음질 치자 그녀의 등 뒤로 벽이 닿았다. 더 이상 도망칠 곳 없는 그녀 앞을 그가 가로막았다. 옆으로 빠져나갈 수도 없도록 팔을 디뎠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에게 안기는 것이 처음도 아닌데 지금의 상황과 자신의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서 루시아는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시선을 떨어뜨리고 어쩔 줄 몰라하는 그녀를 보며 휴고의 입끝이 올라갔다. 정말 이 여자는 가지가지로 그를 미치게 한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살짝 옆으로 틀면서 그녀의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그리고 다시 입술에만 살짝 입 맞추는 가벼운 키스를 했다. 그 다음에는 조금 더 길게 입술을 붙였다. 그 다음에는 그녀의 아랫입술을 빨아들이며 입술을 핥았다. 더 깊은 접촉을 바라는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는 기꺼이 그녀의 초대에 응해 그대로 혀를 밀어 넣었다. “응...” 가슴을 교차해 가리고 있던 그녀의 두 손은 어느 새 그의 어깨를 짚었다. 혀가 얽히며 할짝이는 소리가 욕실 안에 울렸다. 타액이 섞이며 질척이는 소리는 점차 커졌다. 그는 입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바닥에 내던졌다. 그의 손이 그녀의 복부를 살짝 누르며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가 팬티 안으로 들어갔다. 단단한 손가락이 안쪽을 누르자 키스에 심취해 있던 그녀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수줍은 샘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살짝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목을 감고 있던 그녀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끈질기게 탐했다. 작은 입술을 잇 사이에 넣고 잘근 거리며 깨물다가 강하게 빨아들였다. 서두르듯 서두르지 않으며 혀로 그녀의 치열을 꼼꼼하게 훑었다. 동시에 그의 손가락은 그녀의 은밀한 길 안쪽을 드나들었다. 그는 손가락 끝에서 미끌거리는 액체의 느낌에 점차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손가락 한 마디를 품는 그녀의 안쪽은 뜨겁고 좁았다. 그는 그녀의 팬티를 끌어내리면서 한 팔로 허벅지를 감싸 잡아 살짝 들어올렸다. 갑자기 발아래가 허공에 뜨자 그녀는 더 꽉 그의 목을 부둥켜안고 다리를 흔들었다. 그는 좀 더 그녀를 위로 안으며 팬티를 벗겨냈다. 그는 그녀를 내려놓으면서 벽에 붙은 그녀를 온몸으로 밀착해 눌렀다. 떨어진 입술이 귓가에 닿으며 그의 호흡이 귀에 닿아 소름이 일었다. “휴. 아직..” “준비된 목욕물이 눈앞에 있잖아. 하고 씻든 씻고 하든.” “그게 어떻게 같은..” “한 번만. 당신 남편 말라 죽는다고.” 그의 엄살에 웃음이 나와서 루시아는 조금 밀어내던 힘을 빼고 허락처럼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마녀가 따로 없군. ’ 그가 한숨처럼 중얼거리며 그녀의 다리 하나를 팔에 걸었다. 그의 중심은 이미 아까부터 잔뜩 힘이 들어가 뻐근할 지경이었다. 그는 아래에서 위로 쳐 올리듯 단번에 강하게 진입했다. 아래에서부터 치닫는 압박감으로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아!” 그는 지그시 이를 물고 정수리를 직격하는 쾌감에 전율했다. 그녀의 안쪽은 언제나 새로운 개척지였다. 몇 번이고 허리를 움직여 조금이나마 익숙해지면 견딜 수 있지만 맨 처음 넣을 때는 그는 늘 그대로 파정하고 싶은 욕구를 참아야 했다. 그는 허리를 뒤로 뺐다가 다시 위로 쳐 올렸다. 그의 움직임에는 조급함이 있었다. 강한 힘으로 그녀의 몸을 꿰뚫을 때마다 그녀의 몸이 아래에서 위로 크게 흔들렸다. “아! 흐읏. ..” 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감아 매달렸다. 다리 하나로 간신히 바닥을 버티고 있는데 그가 밀어 붙일 때마다 발끝이 아슬아슬하게 바닥에 간신히 닿았다. 잠시 나마 바닥에 딛을 것이 없다는 작은 불안이 그녀의 쾌감에 일조했다. 거대한 기둥이 그녀의 안쪽 깊은 곳까지 끊임없이 파고 들어왔다. 속살을 할퀴는 느낌이 아릿하면서 민감한 부분을 건드릴 때마다 머릿속에서 쩡 소리를 내며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다급한 몸짓으로 간절하게 그녀를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그녀를 갖는 이 순간에 그녀도 그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목에 매달린 팔에 더 힘을 주어 몸을 끌어올렸다. 그의 목을 더듬어 올라간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입술을 그의 귓가에 붙이고 입술 끝으로 그의 귓불을 물었다. 이 남자를 맛보고 싶다. 혀를 내밀어 목을 따라 귓가로 핥아 올렸다. “윽..비비안!” 그의 몸이 흠칫하면서 나무라듯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반응하지 않고 더 진하게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붙였다. 이를 세워 근육이 움직이고 있는 목을 물었다. “...이건 당신이 시작한 거야.” 그가 이를 갈 듯 말하며 그녀의 양 허벅지를 잡아 그의 허리를 감게 하고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잡았다. 그녀는 갑작스런 부유감에 짧은 비명을 지르며 그의 목을 꽉 안았다. 그가 목을 울리며 강하고 빠르게 진퇴 운동을 시작했다. “흑! 아응! 아아!” 루시아는 비명 같은 교성은 내지르며 눈앞이 빠르게 흔들리도록 온몸이 흔들렸다. 일그러지도록 그의 손아귀에 잡힌 엉덩이가 아프고 거칠게 그녀의 어깨를 입술로 문지르고 깨무는 그의 애무가 따가웠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 팡팡 터지는 쾌감으로 흐느낌이 터졌다. 욕실 안에 가쁜 호흡 소리, 신음소리와 비명 소리가 뒤섞여 울렸다. 두 남녀의 나체가 얽혀 야한 율동을 만들었다. 욕실 가득한 수증기와 땀이 뒤섞여서 그들 피부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그는 그녀를 벽에 등을 닿도록 세워둔 상태로 지칠 줄 모르고 그녀 몸을 열었다. 조이는 질벽을 헤집고 멋대로 움직이는 요망한 안쪽을 그의 무기로 사정없이 문댔다. “아! 휴!” 루시아는 그에게 매달려 뜨거워지는 눈가를 그의 어깨에 비볐다. 그를 단단히 붙들고 싶지만 그들 몸에 배인 끈끈한 땀이 마찰을 방해했다. 미끄러지지 않으려 두 팔 가득 그를 안으며 그녀는 온몸을 후려치는 쾌감에 가늘게 떨었다. “흐읏..!” 강렬한 오르가즘에 그녀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암흑과도 같은 절정에 완전히 먹혀 순간적으로 의식이 사라졌다. 발끝부터 시작한 뜨거운 기운이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타고 올라왔다. 뜨거운 불에 몸 안이 다 타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내벽이 미친 듯한 경련을 시작했다. 그의 몸이 경직되고 억눌린 신음을 토해냈다. 한계에 달한 그의 분신이 그녀의 깊은 안쪽에 정액을 쏟았다. 마구 움직이는 질벽에 눌리고 잡히고 쥐어 짜였다. 다리가 흔들릴 것 같아서 그는 벽 쪽으로 좀 더 몸을 기댔다. 뇌를 흔드는 쾌감이 힘들어 그는 눈을 감고 거칠게 호흡했다. 품 안에서 그녀의 몸이 헐떡였다. “하아..하아..” “후우..빌어먹을. 정말 이러다..죽겠어. 이 여자야.” 안 해도 죽겠고, 해도 죽겠고. 그는 품안으로 밀착하는 가녀린 여체를 힘주어 안았다. 기운이 빠지는지 늘어지는 그녀를 받쳐 안았다. 꽉 안아 서로의 가슴이 닿아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몸을 울렸다. 자신의 심장인지, 상대방의 심장인지 구분할 수 없이 섞이는 박동이 2배가 되어 감정을 고조시켰다. 뜨거워진 체온이 조금 식을 때 까지 얼마간 그렇게 안고 있다가 그는 그녀를 안고 욕조 안에 들어가 몸을 담갔다. 펄펄 끓던 물이 그 동안 식어서 들어가기 적당하게 따뜻했다. 루시아는 피부를 스치며 찰랑이는 물속에 앉아 그의 가슴을 쿠션삼아 등을 기댔다. 찰박이는 물소리 외에 조용한 욕실에서 그와 함께 하는 평화로움, 세상에 그와 단 둘이 있는 것 같은 기분에 나른히 빠져들었다. “아까 왜 그러셨어요? 화난 것처럼 제 얼굴 살펴보신 것.” “녀석이 가서 당신이 우는 줄 알았어.” “울긴요. 공부하러 당연히 가야할 곳으로 돌아가는 건데요.” 새끼 여우까지 덤으로 치워버렸을 때 그는 속이 다 시원했지만 생각을 해보니까 데미안과 새끼 여우 둘을 갑자기 다 떨어뜨린 그녀가 상실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로 정 붙일 짐승 새끼 하나 구해줘야 하나. 그러기 싫은데. 그는 얼마간 고민을 했다. 그녀가 부탁하면 들어주겠지만 먼저 나서서 묻지는 말자, 결론 내렸다. “편지 쓰고, 선물도 보낼 거예요. 직접 듣지 못하지만 편지로라도 어머니 소리 듣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요.” 녀석에게 너무 그렇게 관심 갖지 말라구. 그는 내심 투덜거리면서 두 손을 앞으로 뻗어 그녀 가슴을 쥐었다. 그녀의 몸이 작게 움츠러들었다. 그는 그녀의 목덜미와 어깨를 이어가며 가볍게 입맞춤을 반복했다. 두 손은 갈비뼈 부근부터 위로 쓸어 올리듯 가슴을 주무르는 동작을 되풀이했다. 그녀는 작은 한숨을 흘리며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댔다. 그가 고개를 틀면서 숙여서 입술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혀끝으로 그녀의 입술을 핥으면서 몇 번이고 짧은 키스를 했다. 가슴을 쥔 손가락이 유두를 잡아 살짝 힘을 주어 문지르자 그녀는 짧은 신음을 흘렸다. 그가 해주는 적당히 부드럽고 자극적인 애무에 빠져들던 그녀는 엉덩이 아래쪽에서 찔러오는 존재를 느끼고 얼굴을 붉혔다. 슬그머니 엉덩이를 앞으로 뺐지만 그는 더 붙으며 아예 노골적으로 닿았다. 조금씩 피하는데도 그가 자꾸 달라붙자 그녀는 손을 등 뒤로 돌려 성가신 그걸 잡아버렸다. 순간 그가 그대로 굳어버리고 그녀도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굳었다. 루시아는 손에 잡힌 그걸 그대로 잡고 있을 수도 느닷없이 놓을 수도 없었다. 그가 차라리 무슨 반응이라도 보였으면 좋겠는데 그대로 멈추어 아무 말 하지 않자 그녀는 너무 당황하고 부끄러워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흘끔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돌리자 그의 붉은 눈동자가 뚫어지게 그녀를 보고 있었다. “자..자꾸 움직여서..” 그가 짓궂게 웃으면 차라리 낫겠다. 그녀를 직시하는 눈동자 속에 거대한 기운이 사납게 넘실거렸다. 손안에 잡힌 그의 것이 커지는 생생한 느낌에 루시아는 엄마야, 중얼거리며 울상을 지었다. 생명체처럼 손에서 꿈틀대는 느낌을 견딜 수 없어 그녀는 손을 놓았다. 그 순간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아 몸을 돌리며 잡아먹을 듯 키스를 시작했다. 숨 쉴 틈 없이 그가 키스를 퍼부었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온몸을 어루만졌다. 어깻죽지를 감싸 잡으면서 허리 아래로 더듬어 내려왔다. 요란한 움직임에 수면이 파도를 치며 철벅거리는 물소리가 시끄러웠다. 그가 그녀를 마주 안으며 허벅지를 잡아 끌어내렸으나 물을 부력 때문에 미끄러졌다. 그는 한 팔로 그녀 허리를 감아 몸을 일으켰다. 그녀 몸을 돌리고 그녀 손을 잡아 욕조 턱을 잡게 했다. 그녀의 귀를 잘근 물면서 가라앉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꽉 잡아.” 루시아는 후들거리는 팔로 욕조 턱을 짚었다. 정신없이 밀어 붙이는 그에게 휘말려 숨이 가빴다. 그의 손이 뒤에서 허리를 단단히 잡았다. 곧 일어날 충격에 대비해 그녀가 입술을 물었다. 뒤에서 느껴지는 열기 때문에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고 소름이 돋았다. “흐윽!” 뒤에서 단번에 관통해 들어왔다. 몸이 크게 흔들린다. 붙잡고 지탱한 팔이 꺾일 것 같아 힘을 주었다. 쑥 빠져나간 그가 다시 강하게 퍽 치고 들어왔다. 눈앞이 번쩍했다. “으응!” 단단한 끝이 깊은 안쪽까지 건드렸다. 빈틈없이 몸 안을 꽉 채우며 안쪽 살이 거칠게 쓸렸다. 그의 성기의 굴곡진 부분이 민감한 부분을 강렬하게 긁어내렸다. 소름이 와득 돋으면서 싸하게 시원한 감각이 전신을 훑었다. 저릿한 통증과 쾌감이 동시에 그녀를 괴롭혔다. “아응! 휴! 아!” 계속되는 그의 강한 움직임을 견디지 못해 그녀의 팔과 다리가 흔들렸다. 그가 팔 하나를 앞으로 뻗어 그녀의 손 위를 깍지 끼며 누르고 다른 하나는 골반을 지탱해 잡았다. 그가 버티는 힘이 아니었으면 그녀는 진즉 힘이 빠져 자세가 무너졌을 것이다. 진퇴를 반복하는 그의 허리짓에 그녀의 몸이 인형처럼 흔들렸다. 그의 윗가슴을 베고 누워 루시아는 손가락 끝으로 그의 가슴 위에서 원을 그리면서 계속 망설였다. 그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물어볼까, 그만두자 두 가지 마음이 계속 왔다 갔다 했다. 데미안이 공작가에 온 이후에 생모를 만난 적 있는지, 그런 적 없다면 생모가 원하지 않아서인지, 그가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인지 궁금했다. 아무리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도 배 아파 낳은 친어머니의 애절한 마음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가끔은 서로 만나게 해 주는 것이 아이 정서에도 좋을 것 같았다. “휴. 저기..”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고 망설이자 눈을 감고 있던 그가 말했다. “뭔데.” “데미안...” 그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딴 남자 얘기 말고.” “딴 남자라니요. 지난번에도 그런 말 하시더니. 당신 아들이에요.” “딸은 아니잖아.” “.... 그렇다고 데미안 얘기를 아예 안 할 수는 없잖아요.” “침대에서는 하지 마.” 그럼 언제. 루시아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와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밤이 아니면 언제 이야기한단 말인가. 데미안을 미워하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왜 그는 아버지로서 자애로운 애정을 보여주지 않는지 모르겠다. 표현을 안 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그는 무관심에 가까웠다. 생각할수록 데미안이 기특했다. 그렇게 착하고 올바르게 크다니. “그럼 딱 하나만요. 궁금한 것이 있어요.” “음.” “데미안을 낳은 어머니는..데미안을 보고 싶다고 한 적 없나요?” “......” 이건 물어봐서는 안 될 질문인가. 루시아는 조금 긴장했다. “죽었어.” “아...” 루시아는 살짝 충격 받았다. “그래서 데미안을 데려오신 거예요?” “그런 셈이지.” “미인이었을 것 같아요. 데미안 어머니.” “몰라. 본 적도 없어.” “.... 네?” 루시아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순간 그의 표정에 낭패의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 -- 진실&거짓 -- >그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하지만 본 적도 없다는 말은 이상했다. 싸한 기분이 그녀의 등을 타고 올라갔다. 본 적도 없는 여자와 어떻게 아이를 만들 수 있나. 그녀의 침묵이 길어지자 그는 초조함을 느꼈다. 그는 되돌릴 수 없는 말 실수를 했다. 이미 그는 당황한 표정을 그녀에게 보였고, 수습하기에는 침묵이 너무 길었다. 다른 변명을 해 봤자 그녀는 믿는 척은 하겠지만 믿지 않을 것이다. “비비안.” 그녀의 이름을 불러놓고 그는 한참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디까지 그녀에게 말할 수 있고, 어디까지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머릿속이 마구 엉클어졌다. “설명하기 곤란하신가요?” “......” “..주무세요.” 데미안의 생모와 그가 무슨 관계이건, 참견할 자격이 없다고 루시아는 생각했다. 결혼 전부터 그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데미안 생모와 그의 관계는 결혼하기 전 옛 과거이며 이미 죽었다고 하는데 더 이상 따지고 들 주제가 못 되었다. 휴고는 가슴에 스산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아서 어두운 허공을 망연히 응시했다. 자신에게 확연하게 선을 긋는 그녀의 태도에 심장이 아렸다. 말실수를 깨닫는 순간 그녀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당혹스러웠던 기분은 차라리 사치스러운 감정이었다. 못 들은 것으로 생각하고 넘어가자. 루시아는 그렇게 마음먹고 잠을 청하려 했으나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가 한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짐작 가는 구석이 없었다. 그를 그렇게 쏙 빼닮은 데미안이 그의 아들이 아닐 리가 없었다. 하룻밤 불장난이라 기억에도 남지 않았다는, 이 남자 나름대로의 표현법인가. 꼭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만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럴 수는 있다. 그래도 자식을 낳아준 여자인데 얼굴도 모른다고 하는 건 너무했다. 루시아 속이 밑바닥부터 부글부글 끓었다. “당신은. ..나중에 제 얼굴도 잊으시겠네요.” 데미안 생모의 입장을 자신에게 투영했다. 지나간 여자는 자식을 낳아줘도 기억할 가치조차 없다고 그는 말하는 것 같았다. 아이도 낳지 못할 루시아의 가치는 더 형편없을 것이다. 심란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있던 휴고는 갑작스런 날벼락에 혼이 나갔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한 건지 몇 번이고 의미를 생각해야 했다. “...왜 그런 결론이 나와?” “당신 자식을 낳은 여자도 기억 못하는 분이잖아요.” “그런 게 아니야.” 그녀는 늘 자신에게 되뇌었다. 조급해서는 안 된다. 그를 사랑하는 길은 아주 길고 때로는 험난할 것이다. 지치지 않으려면 먼 곳을 바라보며 차분히 할 걸음씩 걸어야 한다. 다른 건 다 괜찮았다. 하지만 그의 무정하고 차가운 면을 접하면 그의 심장은 여전히 차갑게 얼어있구나 생각이 들어서 굳건한 의지가 조금씩 바스러졌다. 데미안에게 냉랭하게 군다고 생각할 때도 그랬다. 지금은 그가 단지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알지만, 알기 전에는 어쩌면 그는 누군가에 대한 애정이라는 감정 자체를 모르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혼란을 느꼈다. 그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 것은 안다. 어쩌면 꽤 좋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과할 정도로 마치 사랑에 흠뻑 빠진 남자처럼 다정하고 부드럽게 굴었다. 가끔 루시아는 그가 자신을 시험하고 있는 건가 의혹이 들었다. “본 적도 없다는 말씀은 대체 무슨 뜻이에요, 그럼? 본 적도 없는 여자가 당신 아이를 낳을 수 있나요?” 루시아는 말을 하다 보니 분이 나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도 몸을 일으켰다. “비비안. 당신 좀 흥분한 것 같은데...” “죄송해요. 주제넘게 흥분해서.” 휴고는 머리가 띵 했다. 이 모습은 얼마 전에도 봤다. 평소에는 그렇게 순하다가 한번 기분이 뒤틀리면 그녀는 말을 비꼬아 속을 긁었다. 방심하다가 난데없이 손을 콱 물린 것 같았다. 아픔보다 놀라움이 커서 화가 난다기 보다는 그저 황당했다. “비비안.” 일단 그녀를 진정시키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루시아는 몸을 틀어 뿌리치며 그에게 등을 돌렸다. 등을 보이는 그녀를 보는 순간 그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루시아는 갑자기 강한 악력에 양 어깨가 잡혀 인상을 찌푸렸다. 강한 힘이 그대로 그녀를 잡아 당겨 던지듯 침대로 눕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루시아는 정신을 차려보니 그가 위에서 그녀를 누르고 있었다. 그가 형형한 눈으로 바라보는 모습에 루시아는 흠칫했다. “그런 식으로..돌아서지 마.” “...네?” “내게 등 보이지 말라고.” 나직하게 말하는 음성에는 고저가 없었다. 루시아는 어쩐지 그의 감정 상태를 알 것 같았다. ‘화가..났어. ’생각해 보면 그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화가 나면 오히려 싸늘하게 가라앉는 것 같다. 왜 화가 났을까. ‘그를 뿌리치고 등을 돌려서? 과거에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한 경험이 있는 걸까?’ “안 그럴게요.” 루시아는 혹시라도 화난 그를 더 자극할까봐 차분하게 말했다. “놔 주세요. 놀랐다구요.” “...미안.” 한 순간이나마 사납게 일어난 기색은 금방 가라앉았다. 어깨를 움켜잡아 누르고 있던 그의 손에 힘이 풀렸다. 그가 물러나자 루시아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갑작스런 소강 상태였다. 둘 다 미묘한 분위기에 아무 말 없이 마주 앉아 있었다. 조금 머리가 식자 루시아는 자신이 뜬금없이 그에게 신경질을 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수였다고 그에게 사과하고. ..그만 자야겠다. 괜한 신경전으로 그와 감정을 곤두세울 필요 없지. ’ “...그 녀석. 내 친자식 아니야.” “.... 네?” 그가 툭 내뱉은 말이 너무 엄청나서 루시아는 갑자기 어지러웠다. “데미안..말씀이세요? 그 아이가..당신 아들이 아니라구요?” 그녀는 자신이 들은 말이 확실한지 다시 한 번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휴고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녀와 이 문제로 감정 상하고 싶지 않았다. 데미안 그 녀석 문제로 그녀가 자신을 단단히 오해해 더 최악으로 낙인찍히기 싫었다. “제롬에게 서쪽 탑 일을 물었다고 들었어. 내게 형제가 있었다는 이야기 들었지?” “...네.” “데미안은 내 형제 아들이야. 촌수 따지면 조카지.” 엄청난 진실 앞에서 루시아는 심장이 쿵쿵 뛰고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순식간에 머릿속에 수십 개 의문이 떠오르는데 뭐 하나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데미안은..그 사실을..” “녀석은 몰라. 나. 그리고 이제는 당신까지. 그 외에는 누구도 몰라.” 정확히 말해 한 사람 더, 필립이 알고 있지만 휴고는 거론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까..데미안은 당신 형님의 아들이란 말씀이군요.” “...그래.” 둘 중 누가 형이고 동생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 문제가 상관없는 건 둘 모두 마찬가지라서 누가 형이니 동생이니 다툰 적은 없었다. 휴고는 굳이 서열을 나누자면 죽은 형제 녀석이 동생보다는 형 쪽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 적은 있었다. 힘의 우위 때문이 아니었다. 사람 사이 서열이 꼭 힘으로만 나눌 수 없다는 것을 그는 형제를 만나서 배웠다. “나중에..데미안에게 알려 줄 생각이세요?” “녀석이 먼저 물어오지 않는 한 그러고 싶지 않아.” “아..그럼 저도 지켜야 하는 비밀이네요.” 루시아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의 혼외자가 아니니까 데미안이 그런 취급을 받을 이유가 없잖아. ’ 생각했다가 ‘전 공작을 살해한 패륜아의 아들이라는 것보다는 그의 혼외자가 더 낫겠구나. ’ 납득했다. “서쪽 탑 일을 들었을 테니 이상하다 생각하는 건 알아. 그 일은 알려진 바와 좀 달라. 그 녀석은 막다른 길에 몰려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어. 죽은 선대 공작이 자초한 면이 있고.” 루시아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의 말투에서 루시아는 많은 것을 보았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쌍둥이 형제가 복수를 위해 친부를 살해했다는 알려진 소문대로라면 한 번도 본 적 없을 형제에게 ‘그 녀석’이라는 친밀한 단어를 표현했고, 죽은 아버지를 ‘선대 공작’으로 부르며 ‘자초’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그녀는 소문을 접했을 때부터 제 자식을 버리는 죽은 공작의 냉혹함이 소름끼쳤다. 자세한 사정은 전혀 모르지만 루시아는 어쩐지 그의 형제가 행한 짓이 조금도 껄끄럽지 않았다. “형님과 친하셨군요.” 휴고는 조금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요?” “.... 아주.” 루시아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는 가족 하나 없는 혼자가 아니었다. 비록 현재 이 세상 사람은 아니지만 사랑을 나눈 가족이 있었다. 외로웠을 그의 어린 시절이 늘 마음에 걸렸는데 그에게 마음을 나눈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에 그녀는 가슴 따뜻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서 데미안을 당신 아들로 거두셨군요. 형님의 하나 뿐인 핏줄이니까.”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아니라 할 수도 없군. 데미안과 관련해서 내 형제에 관한 것까지 얽힌 일이 많아. 그런데 당신에게 모두 말할 수가 없어. 그러니까 내 말은 당신이라서 말하기 싫은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내가 죽어서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일들이야.” 그는 평소보다 길게 말을 늘였다. 루시아는 그에게 다가가 앉으며 두 손을 그의 손등에 얹었다. “괜찮아요. 당신이 말씀해 줄 수 있는 정도만 해주셔도 충분해요.” 사람은 때로는 죽을 때까지 가슴 속에만 묻어두는 비밀이 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가족이라도 공유할 수 없는 비밀. 루시아에게도 그런 비밀이 있었다. 그녀는 꿈으로 미래를 보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 살아 본 적 있는 일 같은 건 그녀가 평생 가슴에만 묻어둘 비밀이었다. “당신의 비밀을 누군가 아는 것이 당신께 고통이라면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 비밀은 당신을 고통스럽게 할지도 몰라.” “만약 그렇다면 당신께 매달려 볼게요. 그럼 그 때 다시 생각해 주세요. 제게 말해 줄 수 있는지 없는지.” “...그래. 그럴게.” 그는 그녀의 팔을 잡아 끌어안았다. 품 안 가득히 꽉 껴안고 그녀의 작은 어깨에 턱을 괴었다. 루시아도 두 팔 가득 그의 등을 감싸 그를 안고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들은 서로를 안아주었다. 그건 서로에 대한 위로이자 자신에 대한 위로였다. “데미안은 당신 아들이고, 제 아들이죠. 그건 변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죠?” “응.” “데미안은 부모의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인가요?” “그렇다고 하더군.” “그럼 데미안이 자라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알려주세요. 그 편이 아이에게도 좋을 거예요.” “...그래.” 그의 넓은 가슴에 푹 안겨서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 루시아는 약간의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난 왜 이렇게 못됐을까...’ 부모의 존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데미안에 대한 연민보다, 그가 과거에 사랑하는 여자와의 사이에 아이를 낳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 좀 더 크게 기쁨으로 다가왔다. 데미안이 진짜 그의 아들이었다고 알았던 얼마 전과, 그의 아들이 아님을 알게 된 지금 데미안을 귀애하는 마음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무래도 데미안을 보면 가끔, 낳아준 어머니가 누굴까, 누구라서 그의 아이를 낳았을까 호기심이 들었던 건 어쩔 수 없었다. 동시에 나는 그의 아이를 낳을 수 없겠지,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그가 자신의 자식을 ‘흔적’이라고 꺼려하던 말을 이제 이해했다. 그건 그의 진심이었다. 그에게는 비밀이 있고 상처가 있었다. 냉혹한 친부와 친부를 살해한 형제. 그는 핏줄을 남길 경우 혐오하는 자신의 가족사가 되풀이 될지 모른다는 공포를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녀가 꿈에서 본 미래가 두려워 스스로를 불임으로 만든 것처럼. ‘내가 낳은 아이의. ..엄마가 되는 일은 없겠구나. ’막연한 포기는 그래도 혹시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이유를 아는 포기는 납득이었다. 언젠가 그의 상처가 낫고 아버지가 될 마음의 준비를 갖출 날이 올 수도 있고,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는 쪽이 마음이 편할 것이다. ‘그래도 엄마는 되었잖아. ’배 아파 낳지는 않았어도 데미안은 그녀의 아들이었다. 그녀는 애달픈 마음을 애써 갈무리했다. 기분을 전환하려 그의 가슴을 밀어내고 그를 올려 보았다. “어쩐지 데미안이 당신을 닮지 않았다 생각했어요.” “언제는 꼭 닮았다며?” “외모는 그렇지요. 근데 속은 전혀 달라요. 데미안은 순하고 착하다구요. 당신한테 순하고 착하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잖아요?” 그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다가 씨익 웃으면서 그녀의 턱 아래에 고개를 들이밀어 키스했다. “대신 나는 당신에게는 순하고 착하게 굴잖아.” 그가 하는 달콤한 말이 놀라웠다. 루시아는 심장이 간질거려서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냐는 것처럼 그가 자꾸 얼굴 이곳저곳에 입맞춤을 하자 루시아는 정말 간지러워서 또 웃었다. “데미안이 당신 외모를 닮은 것을 보니까, 돌아가신 아주버님은 당신과 똑같이 생긴 쌍둥이 형제셨군요. 신기해요. 당신이 둘이었다니.” “내가 왜 둘이야. 그 녀석은 겉만 멀쩡했지 속은 완전..” 그녀가 또랑또랑 눈망울로 보자 그는 말끝을 흐렸다. “...좀 심약했다고..” 루시아는 그 말을 ‘착하다’는 말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했다. 역시 데미안은 진짜 친부를 닮아 그리 귀엽고 순한 것이었다. “돌아가신 아주버님 성함을 여쭈어도 돼요?” 그가 한참 아무 말이 없자 루시아는 “말씀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말을 덧붙였다. “.... 히우.” “어머나. 당신 이름과 같네요.” “어디가 같아?” “히우. 히우. 휴. 빠르게 읽으면 같잖아요.” “......” “휴. 당신 이름에는 당신과 형님이 모두 있군요.” 크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던 휴고는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비비안.” “네.” “비비안.” “네.” 이 여자가 없으면 나는 아마 죽을 거야. 그는 자신의 심장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뛰는 심장이 아리하게 아팠지만 달콤한 고통이었다. < -- 진실&거짓 -- >한동안 쉬었던 루시아는 사교 활동을 재개했다. 그전처럼 가벼운 티파티였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지금껏 하던 것처럼 두루 넓게 사람들을 초대했다. 루시아는 파티 깨기의 주도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일부러 빼지 않고 초대 명단에 넣었다. 루시아는 지난 정원 파티에서 협박을 섞어 공작부인의 위세를 보였다. 압박을 했으니 회유를 할 차례였다. 그녀는 북부 사교계에서 군림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다는 존재감은 심어둘 필요가 있었다. “공작부인. 지난번처럼 규모 큰 파티는 언제 또 계획이 있으신가요?” “그러게요. 그 때 전 초대받지 못해서 다음에 꼭 참석하고 싶었거든요. 그 때는 저도 소공자님을 소개 받을 수 있을까요?” “아쉽게도 그 아이는 지금 로암에 없답니다. 공부하러 갔어요. 하지만 다음에 기회가 되면 소개하도록 하지요.” 루시아는 웃으며 대답하면서 슬쩍 눈을 돌려 좀처럼 대화에 참여하지 못하고 쫓기는 사람처럼 불안한 몇몇 귀부인들 안색을 살폈다. 그들은 지난 정원파티에 참석했던 이들이었다. 정원파티 이후 이번이 3번째 티파티인데 사람들 태도가 다 비슷했다. 정원파티에 참석했던 쪽과 그렇지 않은 쪽, 둘로 나뉘었다. 참석했던 쪽은 다들 어디가 불편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오기 싫지만 억지로 참석한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루시아에게 인사를 건네는 표정에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섞였다. 루시아는 그들을 나무랄 생각이 없었다. 병사의 명령불복종이 죽음인 것처럼, 보통의 여자들은 사교계 거물의 행사에 반박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루시아는 그들 마음이 불편하지 않도록 지난 정원 파티 사건을 전혀 거론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과할 정도로 눈치를 살폈다. 그에 비해 정원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던 쪽은 오히려 더 과시하는 것처럼 데미안을 화제로 올렸다. 혼외자인 데미안 출신에 거리낌을 보이기는커녕 은근히 소공자라는 호칭을 빼놓지 않았다. 갑자기 뒤집힌 귀부인들 태도가 놀라웠다. ‘그이가 정식 입적했다고 공표해서 그런 건가...’짐작 가는 구석은 그것밖에 없었다. 역시 공작의 위엄은 대단했다. 루시아는 정원파티 이후 북부 사교계가 엄청나게 술렁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웨일즈 백작부인은 물론이고 당시 정원파티에 참석했던 사교계의 드센 노부인들이 하나같이 칩거 중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런가보다 했다. 노회한 노부인들이니 아무래도 공작부인 자존심 건드린 일이 걸려서 알아서 몸을 사리는구나 생각했다. 타란 공작이 반기를 든 지역 영주 일가를 모조리 잡아 죽였다는 소문이 한창 사교계에 파다하던 중이었다. 북부 귀족들은 타란 공작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해 있었다. 그 와중에 터진 정원파티 사건은 모두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공작부인을 망신 주었다고 타란 공작이 대노하여 가신들이 모두 불려가 크게 치도곤 당했다고 했다. 부부간 금실 관련 문제를 떠나서, 안주인 체면을 가주 본인의 자존심과 연결 짓는 유형이 있다. 타란 공작은 최소한 이런 경우에는 속한다는 증명이었다. 본래부터 북부의 주인인 타란 공작가는 폐쇄적이었다. 대대로 타란 공작은 수도 정계 진출은 물론이고 북부 귀족들과의 친밀한 관계에도 관심 없었다. 존재한다는 건 알지만 볼 수는 없는 지배자였다. 타란 공작이 전쟁으로 북부에 없을 때는 북부 귀족들은 보이지 않는 지배자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실력 발휘로 실제로 사람이 죽고, 사교계까지 흔드는 일이 발생하자 사람들은 다급해졌다. 그들은 지배자의 심경을 파악해서 안전을 보장받고 싶었다. 현재 공작과의 유일한 사적인 끈은 사교활동을 하는 공작부인뿐이었다. 귀부인들은 남편, 혹은 아버지로부터 특명을 받고 공작부인의 티파티에 참석했다. 루시아가 3번째 티파티를 열기 직전에는 초대자 명단을 확보하기 위해 아수라장이었다. 주변이 태풍으로 다 날아가고 있는데 태풍의 핵인 그녀는 고요했다. 그나마 그런 분위기를 소상히 알려줄 케이트는 입을 다물고 지켜보는 중이었다. 딱히 어떤 일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 분위기만 들썽거리고 있어서 뭐라 말해주기 애매했다. 루시아에게 ‘당신 남편이 무서워서 다들 벌벌 떨고 있어요. ’ 말할 수가 없었다. “공작부인께서는 날이 갈수록 미모가 더욱 빛을 발하시는군요.” 누군가 흘린 아부에 여자들 사이에 살벌한 기운이 감돌았다. “어머나. 전 처음 뵐 때부터 공작부인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더랬지요.” “호호호. 외모만이 사람의 전부는 아니지요. 공작부인께서는 외모 이상으로 더 고운 심성을 지니고 계신 걸요.” 여자들 사이에 불꽃 튀는 경쟁이 붙었다. 뻔뻔하고 혀가 매끄러운 귀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나서서 공작부인을 추앙하고, 차마 나서지 못하는 소심한 여자들은 끼어들 순간을 찾지 못해 우물쭈물 했다. 전쟁이었다. 루시아는 그들의 과열된 분위기를 대수롭지 않게 보며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아부 몇 마디에 기분이 좋아 흐느적거릴 만큼 그녀는 뭘 모르는 철부지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은 꿈속에서 아주 질리도록 보았다. 꿈속에서는 그녀가 중심이 된 적은 없었다. 변죽 좋은 성격이 못 되어 주변에 둘러싼 추종자가 되지도 못했다. 다만 멀리서 보면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관찰하며 재미있어 하거나 한심해 했다. ‘공작부인 자리가 참 대단하긴 하네. ’루시아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귀부인들도 하나 둘씩 입을 다물었다. 공작부인이 겉보기와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 있는 자들은 점차 알아차리고 있었다. “좋은 말들을 해주니 참 감사하군요. 그보다는 요즘 사교계에 재미있는 일은 없나요?” “제가 말씀드릴게요. 얼마 전에..” “그런 건 재미 축에 끼지도 못하지요. 제가 듣기로...” 이제 여자들은 앞 다투어 사교계 소식에 열을 올렸다. ‘오늘 티파티 분위기는 영 이상한 걸. ’루시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후에 단장 엘리엇이 보고서를 제출했다. 지난 번 전염병으로 오인한 독버섯 사건 관련 내용이었다. 사건은 순조롭게 해결되었다. 문제의 상단은 잡아서 진상을 파악해 보니까 악의는 없었다. 가지고 있던 버섯은 모두 회수해서 폐기 조치했다. 중과실을 인정해 책임자는 처벌하고 상단에는 거액의 벌금을 물렸다. “다른 피해 마을은?” “초반에 발견한 2개 마을 이후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상단 행로를 대부분 조사했으니 앞으로 추가 피해는 없을 것 같습니다.” 휴고에게 올라온 보고서는 사건 마무리를 해도 되겠느냐 확인을 요청하는 문서였다. 결재를 하면 조사 진행 중이라 발이 묶여 있는 문제의 상단은 벌금과 보상금을 지불하고 다시 상단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상당한 지불금을 해당 상단에서 두 말 없이 내기로 한 터라 더 문제 삼을 일은 없었다. 다만 한 개의 이름이 휴고 눈에 띈 것은 거래 허가가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는 상단에게 불운의 시작이었다. “...웨일즈? 상단주가 웨일즈 백작가인가?” “예.” 소유주가 누구건 상단의 일은 상법으로만 해결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상거래 문제는 돈으로 해결하면 그만이고 상단이 파산하지 않는 이상 소유 가문에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휴고가 상단주 이름을 이제 알게 된 것도 관련지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휴고의 눈동자에 어두운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녀가 서럽게 울고불고한 정원 파티 사건의 원흉에게 그는 깊은 원한을 품었다. 아내의 당부 때문에 나서지 못한 일이 두고두고 분했다. 건수 하나 잡으면 질기게 물어뜯어 주마 내내 벼르고 있었다. 그는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당시 정원 파티 일을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었다. 당연히 주동자가 웨일즈 백작부인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그 늙은 뱀에게 어떻게 경고를 해주나 하던 중에 기가 막힌 건수가 잡혔다. 그는 근엄한 표정으로 명했다. “이번 사건은 이대로 가벼이 넘길 수가 없다.” “하오면...” “아무래도 이번 일에 어떤 의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해당 상단의 과거 거래 내역과 납부한 세금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조사하라.” “철저히라 하시면...” “아주 탈탈. 먼지가 나오도록 털어.” 엘리엇은 음모나 계략에 둔감한 전형적인 기사였으나 이 일에 주군께서 뭔가 노리는 바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뭔지는 몰라도 그 상단은 주군께 단단히 찍혔다. 어쩐지 동정심이 들었다. “예. 철저히 조사하겠습니다.” 타란 공작을 비교적 잘 아는 수하들은 공작의 성품이 결코 호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집요하고 끈질긴 편에 가까웠다. 다시 말해 뒤끝은 길고도 길었다. 데미안이 학술원으로 떠난 지 한 달 반이 지났다. 데미안이 가자마자 바로 편지를 써서 보냈던 루시아는 약 20여일 후 답장을 받았다. 다시 써서 보낸 편지에 2번째 답장을 오늘 받았다. 봉투를 여는 그녀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용이 가득한 석장의 편지지가 나왔다. 어머니께, 로 시작하는 편지 맨 첫 장을 보고 루시아는 부르르 몸을 떨며 편지를 꼭 끌어안았다. 차근차근 편지를 읽어가는 그녀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편지 내용은 무슨 보고서 같았다. 수업은 무엇을 들었고, 밥은 무엇을 먹었고, 누가 무슨 얘기를 했고. 감정 표현 하나 보이지 않는 딱딱한 내용을 읽으며 루시아는 즐거웠다. 그 아이의 생활이 눈에 보였다. ?...날이 추워지고 있습니다. 건강에 유의하십시오. 데미안 올림. ?결코 짧지 않았던 편지가 끝나자 그녀는 크게 아쉬웠다.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야.” 연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데미안에게 보내기 위해 선물을 준비 중이었다. “마님. 손님이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늘 오던 레이디 밀튼이라면 하녀는 손님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손님이라니. 누구?” “웨일즈 백작부인입니다.” 루시아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연락 없이 갑자기 찾아오는 무례를 저지르면서까지 백작부인이 찾아온 이유를 모르겠다. 되돌려 보낼까 하다가 일단 들어보고 쓸데없는 소리하면 쫓아내자 결정을 내렸다. 하녀가 차를 내왔다. 루시아는 제롬을 부르지 않았다. 웨일즈 백작부인에게는 제롬이 타 주는 맛있는 차를 먹이고 싶지 않았다. 조금 싸늘한 태도로 앉아 있는 루시아와 다르게 백작부인은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 사이에 얼굴이 꽤 상했다. 감기라도 앓은 건가, 루시아는 지난 정원파티 때와 사뭇 달라진 안색이 의아했다. “어쩐 일인가요. 부인.” “갑자기 이렇게 뵙기를 청해 결례를 범했습니다. 공작부인께서는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평안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요. 솔직히 백작부인에게 유감이 있습니다. 처음 연 규모 있는 파티를 그런 식으로 끝내는데 부인이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는 걸 부인하진 않겠지요?” “무슨 드릴 말씀이 있겠습니까. 늙으면 때론 사리 판단 능력이 떨어지지요. 너그러이 봐 주십사 이리 찾아뵈었습니다.” 일부러 강하게 나갔던 루시아는 백작부인이 저자세로 나오자 차갑게 굳히고 있던 표정을 풀었다. “오늘 용건이 그것인가요?” “예. 사죄드리러 왔습니다.” 웨일즈 백작부인이 이렇게 순순히 숙일 거라 생각지 못했다. 나이 많고 사교계 거물이라 루시아는 정면충돌보다는 조금씩 서서히 압박을 가하려 했다. ‘뭔가 이상한데...’유난스럽게 쩔쩔매는 다른 귀부인들 태도가 마음에 걸렸는데 웨일즈 백작부인까지 이렇게 나오자 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용건이 그것뿐이라면, 알겠습니다. 부인의 사과는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하지만 오늘은 길게 이야기 나누고 싶지 않군요.” “아..저..” “더 용건이 있나요?” “공작부인께..간절히 청할 일이 있어서..” 부탁이라니. 정말 뻔뻔하기도 하지. 루시아는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웨일즈 백작부인은 그녀를 대단히 순하고 여리게 본 모양이었다. 루시아는 대책 없이 착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 관계에 있어서 꽤 차가운 면이 있었다. “나는 사사로이 청탁을 받지 않습니다.” “청탁이 아닙니다. 공작부인. 부디 공작 전하 진노를 풀어주십시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백작부인은 가문에서 소유한 상단이 현재 처한 어려움을 토로했다. 설명이 길고 자기변명이 대부분이었지만 복잡한 이야기 속에서 루시아는 핵심을 잡아냈다. “상단은 잘못을 저질렀고, 벌을 받은 겁니다. 공작 전하께서 공적으로 처리하신 일을 지금 사적인 감정으로 연결 짓는 겁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작 전하께서 공과 사가 철저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말고요. 다만 조금 엄한 분이라 약간의 자비를 베풀어 주십사 청을 드리는 것입니다. 늙은 것이 마음이 급해 이리 경우 없이 달려온 것을 부디 용서하세요.” 웨일즈 백작부인이 돌아가고 루시아는 생각에 잠겼다. 원래 처벌 받는 자의 입장에서 너그러운 벌은 없다. 들어보니 아무 죄 없는 사람을 트집 잡은 것이 아니었다. 죄를 벌하는 것은 북부의 질서를 관장하는 타란 공작가의 주인 권한이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 때문에 그들을 더 과하게 벌을 주고 있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자만심이 넘치지 않았다. ‘그는 아랫사람들에게 상당히 엄하구나. ’그녀에게는 그런 면을 전혀 보이지 않아서 생각지 못했다. 귀부인들이 요즘 그녀 눈치를 자꾸 살피는 것도 아무래도 그래서인 모양이었다. 근래에 그가 몇 번 엄격한 모습을 보일 일이 있었나보다. 지나가듯 한 번 그에게 물어봐야겠다. 그녀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 -- 진실&거짓 -- >날씨가 추워져서 저녁 식사를 마친 저녁 시간에는 정원에서 산책하기 힘들어졌다. 그녀는 요즘 산책을 못해 남는 시간에 뭘 할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날 때 마다 하는 뜨개질에 푹 빠졌다. 데미안에게 연말 및 새해 선물로 보낼 목도리였다. 부지런히 떠야 얼추 시간을 맞추어 보낼 수 있었다. 정원일도, 산책도 하지 못해 남는 시간을 모두 목도리 완성에 쏟아 부었다. 목욕을 마치고 그를 기다렸으나 평소보다 시간이 꽤 지나도 그가 들어오지 않았다. 연말이 다가오자 그는 부쩍 바빠졌다. 늦게 침실에 들어오거나, 때로는 하녀를 통해 먼저 자라는 말을 전할 때도 있었다. 그러면 그는 닷새에 하루를 그날로 대체해야 한다고 억지를 부리곤 했는데, 루시아는 그 억지를 들어주지 않았다. 들어주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가 늦을 것 같아서 루시아는 하녀에게 뜨개질 바구니를 가져오라 했다. 침대에 걸터앉아서 모양을 갖추어 가는 목도리 짜기를 계속했다. “그게 뭐지?” 어느 새 그가 다가와 그녀 손에 들린 뜨개질 거리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뜨개질에 정신을 빼앗겨 그가 들어오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얼른 정리해 바구니에 담았다. “뜨개질이에요. 목도리를 뜨고 있어요. 데미안에게 보내려구요.” 털실로 짠 목도리. 절대 그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었다. 그는 잘 추위를 타지 않아서 한겨울에도 특별한 방한복을 입지 않았다. 하물며 아이들이나 하는 털목도리라니. 아마 저것을 선물 받을 데미안도 두르고 다니려면 고역일 것이다. 단색도 아니고 붉은 바탕에 흰색으로 무늬를 넣은 그녀의 선택은 그녀가 얼마나 데미안을 어린애 취급하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저걸 겨우내 하고 다닐 데미안 녀석이 좀 안되었다. 저걸 녀석이 정말 하고 다니는지 심어 둔 호위를 통해 확인하리라 그는 사악한 마음을 품었다. 목도리가 갖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는 그녀가 털실 꾸러미를 정리해 담은 바구니를 침대 밑으로 내리는 동작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데미안을 보냈고, 덤으로 여우 새끼도 치웠는데 생각만큼 그녀는 온전히 그의 것이 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딴 데 정신 쏟는 곳이 많은지 모르겠다. 녀석에게 편지라도 오면 며칠은 들떠있는 모습이 확연했다. ‘그 녀석 어머니이기 전에 내 여자라고. ’그는 데미안에게 쏟는 그녀의 관심이 못마땅했다. 딱히 뭐라고 할 수는 없어서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더구나 그녀는 그에게 아직도 아명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비밀을 일부 말해주었다. 꼭 반대급부가 있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왜 데미안 녀석이 아는 것을 나는 몰라야 하는데. ’그 꼬마보다 자신이 못하다는 건 절대 납득할 수 없었다. “뜨개질은 어릴 때 배운 건가?” 그는 요즘 틈만 나면 슬쩍 슬쩍 그녀의 어린 시절을 물었다. 기어코 그녀 입에서 아명을 듣고 말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대놓고 묻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말해주면 어쩌면 그걸로 자신에게 어느 정도 마음을 열었다는 증거가 될 것 같았다. “네. 그래서 솜씨가 별로 좋지 않아요. 어머니 옆에서 건성으로 배웠거든요.” “어려서 어머니와 단 둘이 살았다고 했지?” “네. 궁에 들어가기 전까지는요.” “그럼 당신 어머니는 어린 당신을...” 그는 조금 주저하다가 노골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건 반칙이 아니다. 대놓고 아명이 뭐냐고 물은 건 아니니까. “보통..뭐라고 불렀지? 어머니가 당신을..” 그가 어머니의 정을 느끼고 자라지 못해 보통 다른 사람의 어머니와 자식 간 관계가 궁금한가보다. 루시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릴 때는 이름보다는 아가, 귀염둥이, 딸, 그렇게 부르곤 하셨죠.” 옛 일을 떠올리며 루시아가 미소 지었다. 오늘도 그의 유도심문은 실패했다. 그는 그녀 몰래 작은 한숨을 쉬며 낙담했다. “아, 당신께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정원파티 일에 관한 저와의 약속 잊지 않고 계시죠? 당신이 나서지 않기로 한 약속이요.” “잊지 않았어.” “정말이시죠?” “물론이지.” 그는 당당했다. 그는 양심에 거리낄 어떤 짓도 하지 않았다. 가신들 불러 모아 집안 단속 잘하라는 말은 수하들에게 충분히 할 수 있는 조언이었다. 독버섯 사건을 일으킨 문제의 상단을 이중 삼중 철저히 조사하고 있는 건 공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상단 주인이 웨일즈 백작가라는 사실은 그저 덤이었다. 그의 대답이 거침이 없어서 루시아는 그의 말을 믿었다. 루시아 입장에서는 웨일즈 백작부인보다는 그가 훨씬 믿음직했다. “이상한 말을 들었는데 헛소문이었나 봐요.” “무슨 소문?” “당신이 정원파티 때 일로 웨일즈 백작가 상단 사업에 타격을 주신다는, 그런 비슷한 말이었어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당신이 얼마나 공과 사를 철저히 구별하는 분인데.” “...물론..이지.” 그의 표정이 잠시 떨떠름했지만 루시아는 미처 포착하지 못했다. 얼마 후, 웨일즈 백작가문의 상단이 끈질긴 조사에서 무혐의로 풀려났다. 원래 부과된 징수금은 그대로였지만 해가 바뀌기 전에 다시 상단 활동을 재개하게 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타란 공작의 뜻을 바꾸고 싶으면 공작부인을 공략하라. 북부 사교계에서 정설로 굳어지고 있었다. 부관이 심각한 얼굴로 고했다. “태자 전하. 델링 후작이 정식 항의서를 보내왔습니다.” 퀘이즈는 혀를 차며 건네는 문서를 대충 훑었다. 주절주절 말은 많지만 결론은 후작의 명예를 모욕한 기사 크로틴을 처벌하도록 내달라는 요구서한이었다. 얼마 전, 델링 후작가 기사들이 로이에게 덤볐다가 몇 개월은 운신 못하게 반죽음 된 사건이 있었다. “떼로 덤볐다 진 놈들이 뭘 이리 말이 많아. 1명 상대로 다구리 치는 건 제대로 된 기사의 도라던가?” 시정잡배가 구사하는 은어를 번번이 내뱉는 태자의 말투는 도무지 적응이 안 되었다. 부관은 표정관리를 하며 말을 이었다. “저들이 문제 삼는 것은 결투 자체가 아니라 크로틴 경의 언사입니다.” “저들이 건드리고 싶은 건 크로틴 경이 아니라 나겠지.” 델링 후작은 태자의 반대쪽 세력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였다. 이번 일로 기사 크로틴을 태자에게서 떼어낼 수 있다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여럿이었다. 호위 기사 방패막이 되어 주지 못한 태자의 권위를 흠집 낼 수 있고, 뛰어난 실력의 호위를 떨어뜨려 태자의 빈틈을 노릴 수 있으며, 타란 공작이 내 준 호위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으니 두 사람 사이에 틈을 벌릴 수 있다. 퀘이즈는 바로 옆에 서 있는 로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로이는 제 얘기를 하는 줄 빤히 알면서도 남 얘기 듣는 것처럼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부관은 가끔 로이의 빤질빤질한 면상을 후려갈기고 싶은 욕구를 느끼곤 했다. “크로틴 경. 기사들 팬 건 뭐라 안 해. 그건 잘 했어. 죽인 것도 아니고 덤볐다 진 놈들이 문제 삼는 것이 적반하장이지. 근데 그런 말은 왜 했나?” “무슨 말이요?” “기사들보고 후작의 개라고 그랬다며.” “그렇게 말 안했습니다. 주인 발이나 핥는 개라고 했지.” 퀘이즈가 끄응 신음했다. “그 말이 그 말이지. 그래서 델링 후작가 기사들이 덤벼든 것 아닌가. 후작을 모욕했다고.” “그게 왜 모욕인지 모르겠는데요. 그냥 사실 말한 겁니다. 기사면 주인의 개지요. 개면 개답게 주인에게 꼬리치고 말 잘 들으면 되는 겁니다. 엄하게 시비 걸고 다니기에 한 마디 해준 겁니다.” 태자 뿐 아니라 이 자리의 다른 자들 표정이 황당함을 담았다. “기사는 주인의 개? 크로틴 경은 자신이 그렇다 생각한다는 건가?” “아무렴요. 전 주군의 개입니다. 짖으라면 짖죠. 왈왈.” 퀘이즈가 폭소를 터뜨렸다. 배를 잡고 테이블을 두드리며 웃는 태자와 달리 로이 외에 태자를 호위하는 다른 기사들 표정은 완전히 일그러져서 로이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눈물까지 날 정도로 웃다가 한참 만에 진정한 퀘이즈가 부관에게 말했다. “들었지? 자네가 크로틴 경이 모욕할 의사가 없었다고 잘 써서 항의 서한은 되돌려 보내.” “.... 예.” 확실히 저 놈은 미친놈이다. 아니, 미친개인가? 부관은 기사 크로틴은 가급적 건드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똥은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니까. “타란 공이 부럽군. 이런 충성스런 기사를 두고.” 태자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자신의 기사들을 스윽 스쳐보았다. 순간 눈이 마주친 기사들이 허공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헌데 타란 공은 북부에 틀어박혀 아예 수도에 올 생각을 안 해. 하다못해 새신부 공작부인이라도 한 번쯤은 올 줄 알았는데.” 결혼한 지 1년이 거의 다 되어가고, 새해를 맞이한 지 두 달이 훌쩍 넘었다. 원래 영지 출신 아닌 수도에 살던 공주님이 어찌 그렇게 잘 버티고 있는지 신기했다. 답답함을 견디지 못해 혼자만이라도 수도에 잠깐씩 들를 줄 알았다. 직접 비비안 공주를 봤던 자들이 증언한 인상착의를 들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소문이 사실인가 의심마저 들었다. ‘정말 그렇게 세기의 미녀라 공이 꼭꼭 숨겨두나? 아니면 취향인가? 하지만 과거 교제했던 여자들 보면 전혀 다른 타입이던데. ’비비안 공주 찾기는 아주 작은 성과는 있었다. 비비안 공주가 시녀 행세를 하며 외출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더 파고들기는 시간과 돈에 대비해 건지는 것이 없어 그만 포기했다. 적이라면 좀 더 뒤져 보겠지만 아군을 상대로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시녀인 척 외출이라. 제법 재밌는 짓을 할 줄 알잖아. ’퀘이즈는 있는 줄도 몰랐던 누이동생에게 호감이 생겼다. 늘 끊임없이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는 수도에서 파비안은 오늘도 열심히 일하는 중이었다. 오늘은 그나마 그가 좋아하는 일이었다. 수도에 떠도는 소문을 취합하는 작업이다. “호오. 이건 또 신선하네. 타란 공작 영지의 성 지하에 악마를 부르는 소환진이 있다고?” 그는 즐거워하면서 공작에게 올릴 보고서에 원색적인 소문 그대로 내용을 적어 넣었다. 파비안은 수하들로부터 올라온 보고서도 살폈다. 그 중 하나를 보며 표정이 굳었다. 여류 소설가 근처에 심어둔 수하가 올린 내용이었다. 공작부인이 되신 공주님의 유일한 지인이라 파비안은 수하를 시켜 정기적으로 놀만을 살폈다. 혹시라도 공작부인과의 관계를 알아챈 누군가가 접근해서 위해를 가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즉 감시 겸 보호였다. “팔콘 백작부인이 여길 왜 찾아갔지? 한 두 번이 아니군.” 보고서에 의하면 방문 목적은 여류 작가 소설의 팬이라고 했다. ‘이유가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파비안의 날카로운 감이 말했다. ‘아무튼 괜히 껄끄러운 여자란 말이야. ’그는 예전부터 팔콘 백작부인이 꺼림칙했다. 3번 결혼했고, 남편이 다 죽었다는 과거사의 불길함이 싫은 건 부차적 이유였다. 때로는 이유 없이 싫은 사람이 있다. 파비안에게 팔콘 백작부인이 그런 사람이었다.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방법도 있지만 파비안은 이 내용을 작성하는 보고서에 끼어 넣었다. 그가 유능한 가장 큰 이유는 상황판단이 빠르기 때문이었다. 공작부인에 관련한 소식을 허투루 넘겨서는 안 된다고 그는 판단했다. 공작께서 신혼 놀이를 하는 중이 아니라는 것을 그도 이제는 안다. 공작이 한 여자와 10개월 넘도록 한 침대를 쓰다니. 이건 전대미문이었다. 파비안이 보기에 공작은 바람둥이가 아니었다. 그건 그냥 본능적인 욕구 해소였다. 공작은 여자들과 최소한의 감정 교류조차 없었다. 그런 공작이 한 여자에게 정착할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떠올리게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파비안은 인생의 신비로움을 느꼈다.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 안나와 필립의 꾸준한 교류가 계속된 지 몇 개월이 훌쩍 지났다. 안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필립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지긋한 나이에도 학구열이 높은 안나의 열정을 필립은 기특하게 생각했다. 일주일에 한 번. 안나와 필립은 빈민 의료 봉사를 나갔다. 늘 하던 대로 뒷골목 후미진 곳에 간이 치료실을 차려놓고 밀려드는 환자를 받았다. 고된 일이지만 안나는 온갖 다양한 증상으로 찾아오는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실력이 부쩍 늘었다. “글씨, 이 멍청한 것이 약 만들라고 말리는 삼엽쑥을 처먹었다는 것 아니겄소.” 괄괄한 중년 부인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간이 진료대는 두 개 탁자를 조금 간격을 두어 그 사이를 얇은 천으로 벽을 만들어 조금 목소리를 높이면 옆에서 들리는 소리가 다 들렸다. 안나는 벽 너머에서 들리는, 필립을 찾은 환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알고 먹었나. 엄니가 나물 말려놓은 것 있대서 그건 줄 알았지.” “눈깔이 삐었지. 그게 왜 나물로 보여!” “그니까 왜 그걸 부엌에 뒀냐고!” 두 모녀는 주변이 떠나가라 서로에게 목소리를 높이며 옥신각신했다. 삼엽쑥! 안나는 진료를 멈추고 천으로 가린 벽에 시선을 고정했다. 차분한 필립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 탈이라도 생겼는가?” “아이고. 선생님. 이것이 그걸 처먹고 달거리를 안 한다지 않수. 계집애가 계집 노릇 못해 어찌하나 밤에 잠을 못 자겄소.” “쳇. 난 안하니 좋더만.” “미친것아! 애 못 낳는 석녀가 되고 싶어?” 안나는 벌떡 일어났다. 진료를 받던 환자의 당황한 표정이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안나는 그대로 천으로 만든 벽을 들추고 옆에 들어갔다. 안나에게 잠깐 시선을 준 필립이 환자에게 말했다. “이렇게 난리를 치면 진료를 봐 줄 수 없네. 조용히 하고. 환자는 삼엽쑥을 얼마나 먹었지?” “한 끼 반찬 정도..? 무쳐서 먹었거든요.” 옆에서 환자 모친이 “미친 것, 그 쓴 걸 나물이라고 신나서 처먹다니. 내가 사람이 아닌 식충이를 낳았지. 으이구. 내가 못살아.” 계속해서 구시렁거렸다. “첫 달거리는 언제 했고?” “재작년에 했든가..?” “삼엽쑥을 계속 먹은 건 아니지?” “아뇨.” “그럼 일시적 현상이니 다음 달에는 다시 달거리를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 모친께서도 별 걱정할 것 없소.” 도통 믿지 못해 몇 번이고 다짐을 받은 모녀 환자가 끝까지 소란스럽게 굴다가 퇴장했다. “무슨 일인가. 안나. 문제 있는 환자라도?” “...아닙니다.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무료 진료를 마무리하고 날이 저물어 돌아온 두 사람은 필립의 거처에서 차를 마셨다. “아까. ..삼엽쑥 복용한 환자 말입니다. 전 처음 보는 증상인데 필립은 그런 걸 다 아시는군요. 삼엽쑥이 지혈 효과가 있는 건 알지만 그걸로 월경이 멈춘< -- 진실&거짓 -- >차를 마시던 필립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눈동자에 떠오른 기광은 빠른 순간에 사라졌다. 그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흥미롭군. 그런 환자가 있나?” “예. 아예 무월경 상태가 되었어요. 좀 장기 복용을 했다더군요.” 그 동안 안나가 공작부인의 치료법을 찾기 위해 구입한 약초 서적만 수백 권이었다. 시중에 나온 책이란 책은 다 긁어모아 밤을 새워 읽었다. 로암에 거주하는 의사들을 수소문해서 부지런히 만나러 다녔다. 그러나 삼엽쑥을 먹어 월경이 멈춘다는 증상 자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안나는 차라리 직접 먹어서 실험을 해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이미 폐경기에 접어들었다. 다른 사람을 실험체로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오늘 우연히 환자를 접한 일이 놀랍고 허탈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빈민가를 뒤지고 다닐 것을 그랬다. 안나는 필립이 새삼 존경스러웠다. [ 도대체 어떻게 그런 대단한 의술을 익히셨나요? 책에도 나와 있지 않은 내용을 굉장히 많이 아시잖아요. ]알면 알수록 필립의 의술이 놀라워서 어느 날은 직접 물어보았다. [ 방랑기가 있어 돌아다니다 보니까 주워들은 잡다한 것이 많은 것뿐이지. ]필립은 겸양했지만 안나는 그가 오지를 찾아다니며 의료 봉사를 한 노력의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정말 위대한 의사였다. “필립. 여행을 다니며 많은 환자를 치료했다 하셨지요? 제가 너무 부끄러워요. 진정한 의술은 마음으로 행하는 것인데 제 의술의 미천함은 탐욕의 대가로군요.” “안나. 자네 의술은 훌륭해. 의욕 높고 환자에게 진실하지. 자네가 여자라는 이유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군.” “과한 말씀이세요.” 안나는 웃음을 베어 물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만약 그 순간 안나가 필립의 눈을 봤더라면 기이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의 눈동자가 괴괴한 빛으로 일렁거리며 조급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환자가 누군가?” 안나는 망설였다. 환자의 비밀을 지키는 건 의사의 의무였다. 그러나 안나는 겨우 찾아낸 유일하고 결정적인 단서를 놓칠 수 없었다. 그녀는 실마리조차 잡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았으나 쫓기는 심정이었다. ‘괜찮아. 그는 공작가 주치의고. ..대단한 의술을 지녔어. 빈민들을 찾아다니며 의술을 펼칠 정도로 진정한 의사지. ’왜 그가 감시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공작가에 해를 끼칠 사람이었다면 단지 감시 정도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을 굳혔지만 선뜻 마님을 구체적으로 입에 담기는 껄끄러웠다. “사실 제가 맨 처음 필립을 찾아온 것은 그 증상에 조언을 구하고 싶어서였어요.” 공작부인 주치의가 다른 의사에게 조언을 구한다면 환자가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안나는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필립에게 고개만 끄덕였다. “혹시. ..초경을 시작할 때 복용하셨나?” “아시는군요!” 안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치료법도 알고 계시나요?” “다행히 알고 있네.” “세상에!” 그토록 찾아 헤맨 치료법이 바로 옆에 있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솔직히 조언을 구했으면 그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래도 그런 수고에 시간을 쏟은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책을 들이파던 노력은 그녀의 실력에 보탬을 주었다. “환자는 어쩌다 삼엽쑥을 복용하셨나?” “어릴 때 무지하여 여인 몸의 변화를 제대로 알지 못하셨다는군요. 어린 마음에 지혈이 되는 약초라 해서 초경을 수습하려 하셨대요.” “얼마나 오래 복용했기에?” “반년 정도 복용했더니 그 후 계속 월경이 없다고 들었어요. 정말 치료가 가능한 것이지요?” “좀 더 들어보게. 이 증상은 치료가 되려면 특이한 조건이 필요하지. 처녀가 아니어야 하고, 둘 이상의 남자와 교합한 경험이 있어서는 안 돼.” 안나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증상 자체가 괴이하다 싶더니 치료 조건도 괴이했다. 안나는 공작부인을 치료한 경험 덕에 공작부인의 순결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은밀한 사생활이며 명예가 걸렸다. 잠시 망설였지만 의사가 환자 몸 상태를 민망해 하면 치료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의사로서의 신념을 선택했다. “문제없어요. 환자는 얼마 전 혼인했고, 초야 때 처음 관계를 가졌어요.” 안나는 고집스럽게 환자가 누군지 정확히 칭하지는 않았지만 피차 서로 알아듣고 있었다. “그럼 치료가 되는 건가요?” 필립은 시선을 조금 내리고 아무 말이 없었다. 안나는 그가 생각에 잠겼다고 여겨 기다렸다. 사실 필립은 격동에 휩싸인 자신을 겨우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는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가능하네.” “마님을 당장 뵈러 가요. 치료법을 찾았다고 하면 기뻐하실 거예요.” 당장 일어날 것처럼 안나는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녀는 자신의 입으로 직접 환자가 누군지 거론한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필립은 그녀에게 손짓으로 진정하라고 말했다. “이 치료법은 우리 가문에서만 내려오는 비전 중 하나라네. 정확한 조제법은 물려받은 노트를 찾아봐야 하는데 당장 가지고 있지 않아. 다른 곳에 두었거든. 자리를 비우고 다녀와야 할 것 같네.” 안나는 안타까웠다. 겨우 잡은 실마리를 놓칠까봐 조급증이 일었다. “오래 걸리시나요? 저도 함께 가면 안 될까요?” “자네를 데려갈 수는 없어서 미안하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비밀 장소라서.” “제가 너무 성급했군요. 무리한 말씀 드려 죄송해요.” “너무 그리 서둘지 말게. 틀림없이 치료법을 주겠네. 그러니 그 사이에는 환자에게 알리지 말게. 괜히 기다리게 할 필요 없지.” “그렇지요. 언제쯤 돌아오세요?” “늦어도 일주일 안으로는 돌아올 것이네.” 안나가 돌아가고 필립은 두 손을 깍지 껴서 마주 잡고 고개를 떨어뜨린 채 소파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불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응접실에서 그림자처럼 앉아 있는 인영은 누가 봐도 섬뜩할 만큼 스산했다. “크흐흐흐..” 필립이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미친 것처럼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끝이 아니었어! 아직 끝나지 않았어!” 온화한 표정을 잃지 않고 늘 감정을 절제하는 평소의 필립이 아니었다. 눈동자에 핏발이 곤두서고 이마에 혈관이 불거졌다.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표정에 집착과 광기가 덕지덕지 묻어났다. 전 공작이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고 새로운 공작이 작위를 승계하고 난 후 어느 날, 필립은 괴한에게 납치를 당했다. 기절했다 깨어나 보니 지하 감옥이었다. 하루를 꼬박 갇혀 있었다. 그리고 나타난 사람은 타란 공작이 된 휴였다. [ 늙은이. 네놈이 애새끼 만드는 법을 안다며? 말해 봐. 그 저주받을 방을 달달 뒤졌는데 그건 없더라고. ]공작이 되고 나서 처음 만난 휴는 변해 있었다. 뿌리 깊은 증오와 혐오가 눈동자에 넘실거렸다. 필립은 그 원인이 ‘저주받을 방’이라 부른, 타란 혈족 비밀의 방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 비밀방을 들어가셨군요. ][ 그랬지. 정말 재밌더군. 죽은 공작부인이 배고 있던 계집애가 장차 내 애를 낳을 예정이었어. 참 안타까운 일이지. 미래의 내 아내가 세상 빛도 못보고 제 어미 뱃속에서 고깃덩어리로 변해 버렸으니. 이럴 줄 알았으면 얼굴이나 확인해 둘걸 그랬어. 공작부인 배가 제법 불렀으니까 형태는 있었을 텐데 말이야. 말과 다르게 공작은 구역질이 나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 대단한 비밀이랍시고 휘갈겨 놓은 문서들을 보니까 공작부인은 아들을 낳아야 하니까 평범한 여자는 들인 적 없던데 이번은 내 어미가 죽어서 그랬나? 그래서 딸을 낳으면 예서 키울 수 없을 테니 빼돌렸겠군. ]공작부인이 딸을 낳으면 아이는 태어나 곧 죽은 것처럼 처리해 밖에서 키울 계획이었다. 필립은 긍정처럼 아무 대답하지 않았다. 공작은 제가 생각한 추리를 계속 늘어놓았다. [ 그 계집애랑 나랑 나이차가 있으니 계속 날 혼자 두지는 않을 테고. 뒈진 영감탱이는 미래의 내 아들의 신부가 될 딸을 낳아줄 여자와 날 결혼시켰겠지. 그런데 그러면 아들을 낳아줄 귀한 타란 혈족 여자가 정부인이 아니게 되잖아. 아들은 사생아가 되고. 그런 흠집을 낼 리가 없어. 그래서 생각해보니까 딸을 낳아준 내 아내는 얼마 안가 죽게 되었을 거야. 사고든 병이든. 밖에서 잘 자란 내 누이는 내 후처로 들어와 내 아들을 낳겠지. 어때? 내가 잘 때려 맞췄나? ][ 그런데 어쩌지? 내 이복누이가 다 죽어버렸으니 영원히 내 아들이 태어날 일은 없을 텐데. ]몹시 유쾌해하는 공작을 보며 필립은 돌아가신 휴고 도련님 핏줄이 잉태되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지금의 공작이라면 아는 즉시 모자를 죽일 것이다. [ 하지만 여전히 딸은 낳을 수 있지. 더러운 네놈들은 내 딸과 날 붙이는 일도 서슴없이 할 거야. 말해. 늙은이. 이 괴물 일족이 어떻게 혈통을 질기게 이어왔는지. 난 이 땅에 내 피를 이은 더러운 오물을 남길 생각 없으니까. ]필립은 공작이 삼엽쑥 관련한 사실을 알 경우 무슨 짓을 할지 예측했다. 불가능하다 해도 세상의 모든 삼엽쑥 뿌리를 뽑는 일을 시도할 것이고, 정히 여자가 필요하면 뒤탈 없는 창기를 구해 한 번 품고 죽이거나 같은 여자를 두 번 품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는 타란 혈족을 이을 가능성이 사라진다. 필립은 가문의 비전은 절대 누설할 수 없다고 버텼다. [ 여기 처박혀 평생 햇빛 보기 싫으면 입 다물고 있든지. ]필립은 공작의 협박을 못이기는 척 거짓을 늘어놓았다. [ 아이의 아버지가 될 타란 혈족 사내의 피를 내어 1년 이상 꾸준히 복용시킨 후 그 여자의 처녀를 취해야 합니다. ]그 터무니없는 말을 공작은 믿었다. 그가 얼마나 타란 혈족을 끔찍한 괴물로 생각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본인의 자발적 도움이 없으면 임신이 불가능하다 생각했는지 공작은 그 후 필립을 철저히 없는 사람 취급했다. 무관심한 틈을 타서 필립은 일의 진행을 멈추지 않았다. 타란 혈족은 대대로 핏줄의 광기를 이어받았다. 그건 살육이나 성욕의 충동을 일으킨다. 공작은 그 정도가 심했고, 형제가 죽은 이후에는 더 심해졌다. 한창인 십대 후반 언저리에는 살인을 하거나 계집을 안지 않고는 잠들지 못할 정도였다. 필립은 고아나 걸식하는 어린 계집아이들을 사서 삼엽쑥을 먹여 준비된 몸을 만들었다. 공작 입맛에 맞추려고 철저히 방중술을 가르치고, 공작이 처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가문 비전에 따라 처녀혈이 나오지 않도록 조치했다. 때마침 터진 전쟁은 기회였다. 필립의 접근이 훨씬 쉬웠다. 필립은 준비된 여자에게 파과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진통 효과 있는 마약을 먹여 공작의 막사에 들여보냈다. 살육의 광기에 흥분한 공작은 들이는 여자가 누군지 관심 갖지 않고 취했다. 필립의 시도는 늘 실패했다. 임신을 하려면 한 여자와 꾸준히 관계를 가져야 했지만 공작은 싫증을 잘 냈다. 필립이 입막음을 위해 실패한 여자를 죽인 수가 수십이 넘어갔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를 무렵부터 공작은 날뛰던 자신을 조금씩 절제하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실컷 피를 봐서 갈증이 얼마간 해소된 것일 수 있고, 스물 중반으로 향하는 나이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화려한 귀족 여자들에 취미가 들려 그들만 침대로 들였다. 필립이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고아처럼 귀족 여자를 구할 수는 없었다. 죽은 공작이 남긴 딸이라도 있으면 미래 데미안 도련님과의 자손을 노려보겠으나 불행히 타란 혈족 여자는 모두 죽었다. 폐기되었으나 필립이 죽은 공작 모르게 살려둔 아가씨는 데미안을 낳고 죽고, 미래의 공작부인으로 키워지던 아가씨는 불의의 낙마사고로 죽었다. 죽은 공작이 새로 맞아들인 공작부인 뱃속에서 자라고 있던 아가씨는 휴고 도련님 손에 모친과 함께 죽었다. 데미안 도련님이 태어난 건 하늘의 도움이었다. 그러나 데미안 도련님에게 신부가 없으면 타란 혈족은 끝난다. 공작의 협조 없이 아가씨를 얻을 길이 요원했다. 그런데 애써 구하지 않아도 준비된 조건을 갖춘 분이 공작부인이 되었다. 안나에게 치료가 될 수 있는 조건이 필요하다고 거짓을 말한 건 확인을 위해서였다. 완벽했다. 이것이야말로 기적이었다. 하늘은 아직도 타란 혈족의 건재함을 굽어 살피고 있었다. ‘머지않아 어여쁜 신부가 태어나실 겁니다. 데미안 도련님. ’그는 어둠 속에서 짙은 미소를 지었다. 타란 공작이 잠자코 지켜보지 않겠지만 그는 이미 대비한 계획을 세워 두었다.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숙원. 그의 핏속에 잠시 잠자고 있던 집요한 집착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하루걸러 한 번씩 안나가 지어 올린 약을 먹는 일은 이제 루시아의 일상이었다. 보통 저녁 식사 후 한 두 시간 정도에 하녀가 가져왔다. 루시아는 습관적으로 약그릇을 들어 입으로 가져간 순간, 놀라며 반사적으로 입을 떼어냈다. “...바닐라향..?” 다시 약그릇에 코를 바싹 들이밀고 냄새를 맡았다. 틀림없었다. 바닐라향이다. 꿈속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도 찾지 못한 치료법이었다. 기적처럼 만난 떠돌이 의사는 가문의 비전이라고 했다. 이렇게 쉽게 찾아낼 수 있는 약이 아니었다. 루시아는 하녀를 불러 안나를 데려오라 했다. “안나. 오늘 들인 약이 지금까지와 다르더군요.” “예. 새로운 치료약입니다.” “안나가 찾아낸 방법인가요?” “...예.” 안나가 누군가의 조언을 받았다고 대답했다면 루시아는 꿈속의 떠돌이 의사와 안나가 만났을지 모르는 기가 막힌 우연을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안나가 찾아냈다는 말은 믿을 수 없었다. < -- 진실&거짓 -- > “안나. 나는 일부 약초에 흥미가 있어 조금 공부를 한 적 있어요.” 그러면서 루시아는 3가지 약초 이름을 나열했다. 성분이 강한 편에 속해서 환자의 기본 체질에 따라 살피고 처방에 조심해야 하는 약초들로 그 정도 지식은 의사라면 기본으로 알아야 할 사항이었다. “그 약초들을 함께 배합해 약을 지어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나요?” 안나는 뜬금없는 공작부인의 질문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닌 지식에 기반해서 성실하게 답했다. “그것들은 절대 함께 약을 제조해서는 안 되는 약초들입니다. 각각 성질이 너무 다르고 강해서 복용하면 독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요? 그럼 안나는 내게 독을 먹이려 이 약을 가져왔군요.” “예??” 독살! 안나의 몸이 차갑게 식으며 팔 다리가 뻣뻣해졌다. 자그마한 눈앞의 여인이 갑자기 거대한 강철벽으로 솟아올랐다. 평소 아랫사람에게도 항상 적당한 예의를 갖추고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공작부인의 모습에 익숙해서 간과하고 있었다. 그녀는 안나가 주치의가 되지 않았더라면 평생 가도 얼굴 한 번 보지 못할 어마어마한 고위귀족이었다.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공작부인이 독살의 의심을 품으면 일개 주치의에 불과한 안나의 목숨이 날아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죄가 문제가 아니라 그런 의심을 품게 만든 것이 문제였다. ‘내가 공작부인 심기를 거슬린 것이 있나?’기억에 없는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열심히 머릿속을 뒤졌다. “이 약에서 바닐라 향이 나는 건 알고 있어요?” “예..예. 마님.” “그럼 그 3가지 약초를 배합해서 약을 달이면 바닐라 향이 난다는 건 몰랐나요?” “.... 예?” “안나가 찾은 치료법이라 했어요.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지요?” 루시아는 꿈속에서 떠돌이 의사가 주고 간 치료법으로 월경을 시작한 후, 치료법에 흥미가 생겼다. 약을 지어 먹으려고 약초를 사러갔을 때 함께 쓰면 큰일 날 약재가 있다는 약재상 말이 기억에 남았다. 전문적인 지식을 쌓을 목적이 아니라 그저 호기심에 공부를 시작했다. 특히 약에서 나는 독특한 향이 궁금했다. 몇 가지 약초를 빼고 섞으며 무수한 실험을 했다. 상식적으로 함께 쓰는 약이 아닌 3가지 약초를 섞어 달이면 바닐라 향이 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루시아의 추궁에 안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안나는 약 속에 어떤 약초가 들어갔는지 몰랐다. 필립이 건네준 약재는 가루 상태였다. [ 최소 월 1회 이상. 정기적으로 꾸준하게 월경이 시작할 때까지 복용하면 된다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3년까지도 걸리지. ][ 뭐가 들어갔는지 모르는 약을 환자에게 올릴 수 없어요. ][ 내 목을 걸고 장담하지. 정히 걱정되면 자네가 먹어 시험해 봐도 좋네. 보통 사람이 먹으면 아무 효능이 없는 약이니까. ][ 장기 복용이라 하셨잖아요. 장기 복용해야만 문제가 있을 수 있지요. ][ 안나. 내가 환자에게 해를 입힐 약을 지을 것 같은가? 정히 그러면 내가 직접 환자에게 설명하겠네. ]차라리 필립을 공작부인에게 데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예전에 집사는 안나를 불러서 치료법을 얻어도 안나의 치료라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 처음 치료법을 알았을 때는 흥분해서 잊었던 사실이 나중에 떠올랐다. 결국 약은 받아왔지만 필립에 대한 신뢰와, 의사로서의 양심, 치료를 하고 싶다는 욕망 속에서 치열하게 갈등했다. 본인이 직접 일주일간 약을 먹으며 몸에 이상이 없는지 살폈다. 그러다가 공작의 호출을 받았다. 타란 공작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안나를 불러 공작부인의 치료가 어찌 되어 가느냐고 물었다. 그러면 늘 안나의 대답은 같았다. [ 치료법을 찾는 중입니다. ]공작은 그 이상 더 추궁하지 않았고, 알았다는 대답으로 끝이었다. 그런데 치료법을 가진 상태로 공작의 부름을 받았더니 압박으로 느껴졌다. 결국 안나는 약을 공작부인에게 올렸다. ‘내가 도대체 무슨 미친 짓을 한 건가. ’루시아가 약의 성분을 추궁하고 나서야 안나는 깨달았다. 의사가 확신 없는 약을 환자에게 처방했다. 환자가 공작부인이라서 문제가 아니라 이건 의사로서 치명적인 판단착오였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마님. 사실은 제 치료법이 아닙니다. 그리고 독은 아닙니다. 이상 없다는 걸 제가 일주일을 먹으며 확인했습니다.” 안나의 노력과 고뇌가 느껴져서 루시아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안나가 내 상태를 상담했을 정도로 대단히 신뢰한 모양이군요. 누군가요?” “죄송합니다. 마님. 누군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약을 처방해 준 쪽에서 밝히지 말아 달라고 했나요?” 루시아가 생각하건대 꿈속 떠돌이 의사는 공을 탐할 사람이 아니었다. “......” 공작가 주치의 존재조차도 말할 수 없는 안나는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이 약을 먹을 수 없어요. 믿을 수 없군요. 이해하지요?” “예. 마님. 제가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날 치료하기 위한 마음에서 그랬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다음부터 거짓말은 하지 말아요.” “예. 마님.” 루시아는 안나가 치료법을 찾으면 거부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한 적 있었다. 그 때는 그에게 좀 화가 나 있었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이 바뀌었다. 그는 지금 아버지가 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지금 아이가 태어나면 태어날 아기는 물론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비극이었다. 루시아는 그의 환영을 받고 태어난 아이가 아버지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휴고는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랐고, 루시아는 아버지가 방치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둘 모두 정상적인 가정의 결핍을 겪었다. 부족한 그들이 만나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해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차라리 그들 사이에 태어나는 아이가 없는 것이 더 행복할 수 있었다. 아쉬움이 없지는 않았다. 그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남자 아이를 낳고 싶다. 그래도 지금은 아니었다. 꿈속의 고단했던 삶은 돌이켜 생각해보면 비극만은 아니었다. 꿈이 아니었다면 루시아는 이렇게 긴 인내심을 가지고 먼 미래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안나는 필립에게 약을 거부한 공작부인 뜻을 전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필립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다가 ‘허허..바닐라 향이 나는 약초 배합이라니..그걸 안다고..?’ 라며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날 공작부인과 만나게 해 주게. 그건 틀림없는 치료법이야.” “그럴 수가 없어요. 필립을 마님과 만나게도, 언급조차 해서는 안 된다는 윗분 명을 받았어요. 대체 무슨 잘못으로 감시를 받고 있는 건가요?” “개인적 문제야. 의술과는 관련이 없네. 자네는 이대로 마님 치료를 포기할 셈인가?” 안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로서는 방법이 없어요. 필립 말씀대로 필립이 직접 마님을 뵙고 설명드릴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만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을요.” “안나. 나는 환자를 앞에 두고 포기할 수 없네.” “.... 그럼 공작 전하께서 돌아오시면 여쭈어서..” 타란 공작은 지금 영지 시찰로 로암에 없었다. 필립은 지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공작이 돌아오면 절대 둘을 만나게 해주지 않을 것이다. 공작은 삼엽쑥에 대한 비밀을 모르지만 필립의 처방을 받은 후 공작부인이 임신을 하면 머리 좋은 공작은 단번에 필립이 수작 부린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아이는 태어나지 못하게 수를 쓸 것이 분명했다. 공작부인의 임신에 필립이 개입된 것을 공작은 몰라야 한다. 그러려면 필립은 공작부인을 만나야 했다. 일단 만나기만 하면 구슬려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환자와의 대화가 우선일세. 환자가 아이를 원하는지가 가장 중요해. 공작 전하께는 이미 혼외자로 들인 후사가 있다는데 공작께서 마님이 낳을 아이를 원하실 것 같은가? 귀족이란 비정하다네. 아내에 대한 애정과 후사는 철저히 구분하지. 마님도 자식이 있어야 노후를 기대할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자네는 마님이 이대로 영영 자식을 안아보지 못할 일이 안타깝지 않은가?” 필립의 차분한 설득에 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용인들이 공작부부에 대해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으면 두 분 사이가 오래 갈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본디 귀족들이란 그랬다. 결혼하고서도 남자나 여자나 각자 애인 따로 두고 즐기는 것이 귀족들 생태였다. 더구나 타란 공작의 과거 행적을 보면 충분히 그럴 만 했다. 남는 건 결국 자식뿐이다. 결혼하자마자 사생아를 아들로 입적해야 하는 공작부인이 가엷다고 고용인들은 뒤에서 숙덕거렸다. 안나 생각도 그들과 같았다. “제가 마님께 말씀드려 볼게요.” 안나는 이것이 마님을 위한 길이라 생각했다. “마님. 일전에 말씀드린, 치료법을 알려준 의사가 마님을 뵙기를 청합니다.” “그래요? 만나볼게요.” “하온데 마님. 그 의사는..사실 공작가 주치의입니다.” “공작가 주치의?” “전 일전에 집사에게서 공작가 주치의는 요주의 감시 인물이며 마님께서 만나서 안 되고, 존재도 알게 해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공작 전하 명이라 했습니다.” 안나의 표정과 말투가 비장했다. 꿈속의 은인을 다시 보는 구나, 조금 기대했던 루시아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럼 안나는 지금 큰 잘못을 하고 있군요. 내게 언급하지 말라고 했다는 명을 어겼어요.” “알고 있습니다. 책임을 지겠습니다. 하지만 마님. 그 의사는 반드시 마님께서 치료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나서 자세한 설명을 드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책임? 어떻게 책임을 지겠다는 건가요?” “.... 주치의 자리를 사직하겠습니다. 제가 너무 부족한 것 같습니다.” “.......” 자세히 살펴보니 안나의 안색이 초췌했다. 고민을 많이 한 표정이었다. “안나. 지난 번 약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안나가 본분만 지켰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어요. 왜 그렇게 무리를 해요?” “제가 주제넘은 짓을 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다만 마님께서 치료가 되시고 어여쁜 아기를 안아 보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루시아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쁜 사람은 아닌데 요령이 없었다. “날 만나고 싶다는 공작가 주치의 이름이 무엇이지요?” “...필립 경입니다.” “경?” “남작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떠돌이 의사 필립이 공작가 주치의였던가. 작위까지 가진 공작가 주치의가 무슨 이유로 방랑하고 있었을까. 꿈속에서 봤던 필립은 떠도는 생활이 익숙해 보였다. 잠시의 여행자가 아니었다. ‘그 때 타란 공작가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이 들어서는 아예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다. 사교계 소식은커녕 세상 돌아가는 일도 잘 몰랐다. 꿈속에서 가장 평온했던 시절이 새삼 원망스러웠다. 좀 더 관심 갖고 부대끼며 살았으면 좋았을 걸. ‘왜 그이는 공작가 주치의가 나를 만날 수 없도록 했을까. ’고작해야 주치의였다. 보기 싫은 자라면 아예 얼씬 못하게 추방하면 되었다. 굳이 감시의 눈을 심는 번거로운 방법을 택한 건 그답지 않았다. “공작가 주치의면 공작가에 몸담은 지 오래 되었다고 하던가요?” “집안 대대로 공작가 주치의라 들었습니다.” 집안 대대로라는 말을 듣자마자 루시아는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당신에게 모두 말할 수가 없어. 내가 죽어서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일들이야. ] ‘그가 지키고 싶은 비밀..그걸..그 주치의가 아는구나. ’이유모를 감이었다. 이해는 가지 않았다. 정말 그렇다면 주치의는 이미 그의 손에 죽었어야 했다. 그녀가 더 이상 뭔가 추측하기에는 단서가 너무 적었다. 하나만은 확실했다. 그는 그녀가 주치의 필립과 만나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는다. 만나더라도 그가 없는 지금을 기회로 그가 모르게 만나서는 안 된다고 그녀의 감각이 경고했다. “만나지 않겠어요.” 안나가 안타깝게 탄식했다. “안나. 안나는 의사로서, 그리고 공작가 사람으로서 잘못을 했어요. 의사로서 내게 한 실수는 내가 용서할 수 있으나 공작가 사람으로서 공작 전하 명을 어긴 것은 그럴 수 없군요. 사직은 받아들이지요. 다만 지금 당장은 아니에요. 아마 곧 수도로 올라가게 될 거예요. 수도로 갈 때까지만 맡도록 해요.” 그리고 루시아는 제롬을 불렀다. “제롬. 주치의 안나가 오늘 내게 공작가 주치의가 날 만나기를 원한다는 말을 전했어요. 하지만 제롬이 예전에 경고한 적 있다더군요.” 제롬의 날카로운 시선이 침통하게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안나에게 잠시 닿았다가 다시 마님을 향했다. “예. 마님. 주인님 지시셨습니다.” “그 분 명이라면 그럴 이유가 있겠지요. 나는 공작가 주치의를 만날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이 일은 내가 직접 그 분이 돌아오시면 말씀드리겠어요.” “예. 마님.” “안나는 내게 사직 의사를 표했지만 일단 내가 반려했어요. 수도에 올라갈 때까지만 주치의 자리를 맡을 거예요. 그러니 추가로 안나를 추궁할 필요 없어요.” “예. 마님.” 대답하는 제롬의 태도는 왕 아래 무릎 꿇고 준엄한 명을 받는 기사처럼 근엄했다. 마님의 현명한 결단에 제롬은 늘 감탄했다. 이 분이야말로 타란 공작을 안에서 든든히 받치는 가모 자리에 부족함이 없었다. 제롬은 자신이 모시는 두 분 주인님을 진정으로 존경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꺼웠다. < -- 진실&거짓 -- > “어서 와요. 케이트.” 사전 예고 없이 방문한 손님이지만 루시아는 그녀를 가볍게 안으며 반가움을 표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여전했다. 공작부인과 가신의 딸이라는 격차가 존재함에도 두 사람의 성품은 모든 장벽을 허물었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공작부인 루시아와 올곧은 성품으로 공작부인과의 우정을 이용하지 않는 케이트는 오직 사람 대 사람으로 서로를 대했다. “몸은 이제 괜찮아요?” “싹 나았어요. 그러니까 루시아를 만나러 왔지요.” 근 한 달간 케이트는 열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집에서 두문불출해야 했다. “병문안을 가고 싶었는데. ..미안해요.” 휴고가 절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루시아는 가지 못했다. 잠시 병문안 다녀오는 정도로는 열감기에 옮지 않는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요즘 열감기가 유행중이라는 이유로 아예 외출을 금지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안 오시기를 잘했어요.” 괜히 옮기라도 했다가는 후환이 두려웠다. 공작의 분노는 사고 싶지 않았다. 케이트는 루시아에게 요즘 북부 사교계 분위기가 어떤지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다. 한 달에 두 세 번의 티파티 외에는 공식 활동이 없는 공작부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교계 거물이 되었다. 거물은 거물인데 실체는 없는 그림자였다. 루시아는 대충 눈치는 챘지만 한 번 만나는 사람이 많아봤자 15명 정도의 소규모 티파티만으로는 대중 심리 파악에 한계가 있었다. 그녀가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그녀의 존재는 북부 사교계의 화제 중심이었다. 케이트는 요즘 북부 사교계가 공작부인 눈치를 보며 설설 기고 있다고 슬쩍 알려줄까요, 종조모님께 떠들었다가 괜히 경솔하게 굴지 말라고 야단을 들었다. 공작부인이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기 전에 남들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편견을 가져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고 마담 미셀은 엄하게 입단속 시켰다. “전하께서는 영지 시찰 중이시라지요.” “네. 보통 4~5일 걸리시니까 오늘 내일 돌아오실 거예요. 마담 미셀은 좀 어떠신가요?” “여전하세요. 잔소리는 더 늘어나셨죠. 저만 보면 공작부인 반만 닮으라고 하시는 말씀이 귀에 못이 박히겠어요.” “괜히 하시는 말씀이겠죠. 케이트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아름다운데요.” “전 루시아가 훨씬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고마워요.” 입 발린 칭찬에 감사하다는 듯 웃고 있는 루시아를 보며 케이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강조하지 않았다. 말해봤자 또 웃어넘길 테니까. 루시아는 대단한 미인은 아니지만 아련하게 계속 기억에 남는 청초한 매력이 있었다. 한 번 봤을 때보다 보면 볼수록 끌리고 자꾸 시선이 갔다. “날이 풀려서 여우사냥을 가려구요. 함께 가시죠.” “이제 막 병 낫고 일어났을 때 벌써 그런 걸 해도 되겠어요?” “그럼요. 문제없어요. 루시아는 여우가 없으니 구경만 하셔야 겠지만.” “구경만으로도 충분해요.” 부웅- 고동피리 소리가 들렸다. “전하께서 귀환하셨나 봐요.” 루시아는 따라 일어나는 케이트를 만류해 다시 앉혔다. “손님이니까 그냥 있어도 괜찮아요. 잠시만 자리 비울게요.” 루시아가 나가고 문이 닫혀 응접실에 혼자 남게 되자 케이트는 편하게 소파에 기댔다. 고동피리를 들으며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설렘을 케이트는 목격했다.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공작부부 금실 좋다는 소문은 꽤 파다했다. 그래도 다들 실체를 본 적 없으니 반신반의였다. 케이트 역시 부부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적 없었다. 그런데 공작부인이 남편을 좋아한다는 건 눈치 챘다. 대화나 표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드러내곤 했다. 얼마간 앉아 기다렸다. 찻잔의 차가 다 식어 미지근해 질 무렵 덜컥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린 케이트 눈이 휘둥그레졌다. 덩치 큰 흑발의 미남자가 성큼 안으로 들어오는데 그에게 손목이 잡혀 공작부인이 끌려 들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공작부인을 안으로 들이자 문을 닫고 그대로 닫힌 문에 기대게 하며 키스하기 시작했다. ‘우와...’난데없는 상황에 넋이 나가 케이트는 멍하니 두 남녀의 애정행각을 구경했다. 한 번도 공작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공작부인을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을 흑발 남자라면 공작일 것이 분명했다. ‘공작부부 사이가 꽤 좋다고...?’케이트는 그 소문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꽤 좋은 정도가 아닌 거 같은데. ’처음엔 그냥 멍하게 구경하고 있던 케이트의 얼굴이 점차 붉어졌다.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어여쁘고 상큼한 입맞춤이 아니었다. 뜨겁고 격정적이고 당장이라도 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 몸을 뒤섞을 것 같은 노골적인 욕망이 담긴 키스였다. 케이트가 앉아 있던 소파에서 출입구가 약간 비껴간 방향으로 마주보이는 형태라서 문에 기대고 있는 루시아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서 루시아와 눈이 마주쳐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는 것을 보자 케이트 얼굴도 달아오르면서 쿡 웃음이 나와 고개를 돌렸다. 한 순간이지만 케이트의 존재를 잊었던 루시아는 케이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너무 창피했다. 작게 쥔 두 주먹으로 있는 힘껏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얌전하던 그녀의 거센 반항에 그가 그녀 입안에 깊이 밀어 넣은 혀를 거두고 작은 입술을 한 번 빨아들인 뒤, 쪽 가볍게 입맞춤으로 마무리하며 입술을 뗐다. “왜.” “손님..손님이..” 새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일렁이는 호박색 눈동자와 젖은 속눈썹을 보자 휴고는 진심으로 이 자리에서 덮치고 싶었다. 여기서 정말 해버릴까. 저녁까지 못 참겠다. 며칠을 못 했더니 몸이 달아 미치겠다. 깔끔한 걸 좋아하는 그녀는 씻고 준비를 마치지 않은 상태로 허락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집무실에 앉아 일하다가도 문득 그녀를 끌고 와 책상에 엎어놓고 하고 싶은 충동을 몇 번이나 참았는지 모른다. 언젠가는 꼭 하고야 말겠다. “손님?” 흘끔 고개를 돌려 고개를 숙이고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그러나 그의 안색은 변함이 없었다. 루시아 허리를 감아 끌어안고 있는 한쪽 팔은 여전히 힘을 풀지 않았다. “레이디. ..밀튼이..” “아하.” 그 유명한. 그는 그녀 허리를 안은 채 소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케이트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허리를 숙였다. “공작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밀튼 남작의 여식, 케이트입니다.” “반갑소. 레이디 밀튼. 내가 두 사람 다과시간을 방해한 모양이군.” 그는 루시아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오.” 그토록 끈덕지게 붙들고 있던 허리를 미련 없이 놓고 그는 응접실을 나갔다. 나타날 때만큼 사라질 때도 한 바탕 폭풍이 몰아친 것 같았다. 마무리는 남은 자들의 몫이었다. 루시아는 휴고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뻔뻔해질 수 없었다.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한참을 아무 말 못하고 식어버린 차를 들이켰다. 두 사람은 꽤 오래 그렇게 말없이 마주앉아 있었다. “사..사냥 이야기를 하다가 말았지요. 언제라구요?” “5일..후에요. 꼭 참석해주세요.” 한참 이어진 그들의 대화는 어딘지 모르게 겉돌았다. 회의를 파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제롬은 즉시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의 원탁 상석에는 휴고가 앉아서 서류를 들추고 있었다. 드나드는 사람들로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회의를 끝나고 나서 삼십 분 가량 회의 내용을 대충 훑어보는 공작의 습관을 다들 알고 있었다. “전하.” “음.” 휴고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손을 내저었다. 차는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파비안이 와 있습니다.” “여기로 들어오라고 해.” 잠시 후 들어온 파비안이 인사 후 보고서를 올렸다. 파비안 얼굴만 확인하고 대충 고개를 끄덕인 휴고가 보고서를 받아 넘겨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팔콘 백작부인 이름은 왜 나오고, 그녀의 지인이라는 여류 소설가에게 접근이라니. “...이게 무슨 개소리야.” 파비안은 공작의 과격한 반응에 긴장했다. “드나든 지 한두 번 아니라면서 보고서를 이제 가져와?” 파비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라도 안 가져왔으면 정말 큰일날 뻔 했다 “죄송합니다. 판단이 부족했습니다.” 공작 성정을 아는 파비안은 깔끔하게 잘못을 인정했다.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던 다른 놈들이 얼굴로 뭔가 날아와 이마가 터지는 꼴을 여러 번 보았다. 추가 보고서 내용을 읽는 휴고의 표정이 점점 더 살벌해졌다. 파비안은 그 후 추가조사를 통해 팔콘 백작부인이 비비안 공주 뒷조사를 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시간이 부족해서 백작부인이 비비안 공주와 여류 소설과의 관계를 어떻게 추적했는가는 아직 조사 중이었다. “뒷조사? 감히.” 살기가 묻어나는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공작 앞에 서서 파비안은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투자업무 담당자 누구야. 들어오라고 해.” 잠시 후 아신이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면 아신이 담당자는 아니지만 마침 책임자가 오늘 자리에 없었다. 아신은 비교적 투자와 회계 쪽을 잘 알고 있었다. “팔콘 백작가에서 소유한 상단이나 벌인 사업에 투자한 것 있나?” 휴고는 팔콘 백작부인이 건네준 사업계획서를 검토해 보라고 담당자에게 준 일이 기억났다. 검토해서 수익이 날 것으로 판단되면 투자 여부를 결정하는 건 담당자 몫이었다. 휴고는 투자 관련해서는 전문 담당자에게 거의 일임하는 편이라 손해를 보고하지 않는 이상 관여하지 않았다. 아신이 재빨리 가지고 들어온 문서를 뒤져 금방 찾아내 보고했다. “투자금 다 회수해. 당장.” “당장. ..말씀이십니까? 최소한 한 달 전에는 미리 고지를 해야 하는..” “당. 장.” 휴고가 관자놀이에 손을 짚으며 딱딱 끊어 강조하자 아신은 자세를 바로 했다. “옙. 당장. 처리하겠습니다.” 아신이 각 잡힌 움직임으로 나가고 나서, 휴고는 긴장해 서 있는 파비안에게 명했다. “알아듣게 경고해. 허튼 수작 한 번만 더 하면 다음에는 목숨이라고.” 투자금 회수에 경고를 가장한 협박까지. 파비안은 처음으로 팔콘 백작부인이 아주 조금 불쌍했다. 타란 공작가 투자 사업은 규모가 큰 편이라 갑자기 돈이 빠지면 팔콘 백작가 사업이 휘청할 것이다. 그래도 한 때 정을 통한 여자인데 참 가차 없다. 사업주가 누구건 가리지 않고 일단 돈이 되면 투자하는 것이 진정한 투자자의 자세다. 타란 공작은 손해가 없는 이상은 변혁을 그리 추구하는 편이 아니었다. 공작이 감정적 이유로 투자금 회수를 하는 건 처음 봤다. ‘공작부인께 비비기 좀 해야 하나...’파비안은 자신의 생각을 수정했다. 공작은 파비안이 생각한 것보다 어쩌면 훨씬 더 공작부인에게 빠져 있었다. 저녁 식사 후 루시아는 휴고에게 잠시 시간을 내어달라고 청했다. 그녀가 할 말이 있다고 시간을 내달라고 한 것은 처음이라 휴고는 궁금하면서도 죄지은 것 없이 불안했다. 두 사람은 응접실 소파에 마주앉았다. “당신이 안 계신 동안 공작가 주치의가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해왔어요.”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서늘하게 식었다. 분명 그녀가 존재조차 알게 하지 말라고 명을 내렸다. 제롬에게 내린 명이 이행되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그의 시선이 대기해 서 있는 제롬에게 닿자 제롬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너무 노여워 마세요. 당신 명을 어긴 사람은 제 주치의에요. 주치의는 제 치료를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니다가 공작가 주치의를 만나 조언을 구했던 것 같아요. 당신이 일주일에 한 번씩 불러다가 치료에 대해 물어보셨다면서요. 주치의 압박감이 상당했을 거예요.” 루시아는 안나와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녀의 심리적 부담을 알게 되었다. 그가 안나를 불러 치료에 대해 묻는지 몰랐다. 그가 그 후 아무 말이 없어서 그녀의 치료에 대해 잊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꾸준히 관심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이 루시아는 고마웠고 감격이었다. “주치의 안나는 사직하기로 했어요. 당신 명을 어긴 일은 당신이 추가로 벌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루시아는 안나의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하녀를 통해 안나가 하는 노력은 루시아 귀에 들어왔다. 안나는 꿈속에서 루시아가 했던 수고를 대신하고 있었다. 안나는 시간 날 때마다 성 안 사람들의 무료 진료를 맡아 하고, 정기적으로 빈민들을 위한 의료 봉사에 힘썼다. 의사로서 충분히 진실한 사람이었다. 루시아가 꿈속에서 기적처럼 만난 필립을 안나가 찾아낸 건 분명 그녀의 노력이었다. 안나의 말을 들어보니까 공작가 주치의를 만나 꾸준히 교류해 그의 인성과 의술을 파악하고 나서 조언을 구했고, 약을 받아서는 직접 먹어 시험했다. 안나는 최선을 다했다. 안나의 잘못은 공작의 명을 어긴 것보다 루시아에게 뭔지 모르는 약을 가져온 일이 더 컸다. 중벌을 받을 일이지만 루시아는 어차피 그 약이 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그리 큰 문제로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약에 관해서는 루시아는 안나와 둘만 알기로 했다. 공작이 알았다가는 사직 정도로 벌이 끝나지 않을 거라고 루시아는 생각했다. 안나의 독단은 마음이 과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루시아는 안나가 조금 안타깝고 크게 벌할 생각이 없었다. 사실 루시아는 그와 관련된 껄끄러운 부분만 아니면 필립을 만나고 싶었다. 필립은 루시아의 오랜 병을 고쳐준 은인이었고, 꿈속에서도 마을 사람들에게 의술을 아낌없이 펼치는 진정한 의사였다. 세상에 의사는 많지만 진짜 의사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안나를 과하게 탓하고 싶지 않았다. 안나 또한 필립 못지않은 진실한 의사였다. “그러지.” “공작가 주치의는 내 치료법을 안다고 자신하더군요.” “...그렇군” 휴고는 그 늙은이의 의술 하나만큼은 뛰어나다는 걸 들어 알고 있었다. 늙은이라면 그녀의 치료법을 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자가 당신 주치의를 이용해 만나자는 말을 전했다는 거지?” 휴고는 필립의 의술은 어쨌건 그 놈 자체는 믿지 못했다. “아니에요. 주치의 안나가 적극 주선했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은 끝까지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 했대요.” 안나는 가능하면 모든 죄를 자신이 쓰고 최대한 필립을 감싸 말했다. 가뜩이나 감시를 받고 있는 필립에게 불똥 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안나에게 필립은 마음의 스승이고 진정한 신의였다. < -- 진실&거짓 -- >루시아는 제롬에게 자리를 피해달라고 말했다. 제롬이 물러가고 둘만 남았다. “당신이 공작가 주치의와 절 만나지 못하게 조치했다고 들었어요.” 휴고는 어차피 늙은이가 그녀에게 무슨 짓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그녀는 늙은이가 말하는 아이를 낳는 조건에서 벗어났다. 필립과 그녀를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은 혹시라도 헛소리를 할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단 둘이 만나게 할 수는 없지만 그가 함께 셋이 만난다면 늙은이는 괜한 소리를 하지 못할 것이다. 두 번 다시 꼴보고 싶지 않지만 치료법을 알고 있다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가 그녀의 치료법에 관심을 갖는 건 그녀의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다고 모두 말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아픈 건 싫다. 그녀의 주치의는 치료법을 찾고 있다는 답만 반복했는데 늙은이 의술이 뛰어나기는 한 모양이다. “만나지 못하게 조치한 건 그럴 이유가 있었어.” “네. 당신이 이유 없이 그러지 않으시겠지요.” “나와 함께라면 만나도 괜찮아.” “아니에요. 굳이 만날 생각 없어요. 저를 만나게 하기 싫은 것뿐만이 아니라 당신도 만나고 싶지 않은 것 같아요. 제 생각이 틀렸나요?” “.... 맞아.”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은 면상이었다. 필립은 타란 가문 혈통에 관한 치부를 모두 알고 있다. 필립의 존재는 휴고가 괴물이라는 증거였다. “혹시..공작가 주치의가 당신에게 해를 끼쳤나요? 당신이 그렇게 싫은 자를 굳이 내버려 두는 이유라도 있어요?” 필립이 딱히 휴고에게 해를 끼친 건 없었다. 타란 혈통을 잇는 문제로 죽은 공작과 뜻이 정확히 일치해 집안 대대로 해오던 짓을 충실히 했을 뿐이다. 입만 열면 혈통 타령이 거슬리긴 하지만 어차피 혈통 문제는 그가 협조해 주지 않으면 끝날 일이었다. 데미안과도 철저히 만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다. 늙은이가 실제 뭘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목숨 빚이 있어. 형제가 덕분에 몇 번 살았지.” 그는 해롭지 않다고 눈에 거슬리는 것을 치우지 않을 사람이 아니었다. 필립을 살려둔 건 목숨 빚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자신에 대한 벌이었다. 늙은이는 휴고가 품고 있는 어둠을 잊지 못하게 했다. 필립이 언젠가 죽을 때까지 휴고는 모래알이 발바닥에 밟히는 불편함을 끌어안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걸 감수하는 것은 나름대로 죽은 형제에 대한 속죄였다. “그랬군요..” 루시아는 의문이 풀렸다. 다행이었다. 꿈속의 은인은 역시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신 치료법을 안다잖아.” “당신은 그 주치의를 신뢰하지 못하잖아요. 절 치료하는 걸 믿을 수 있겠어요?” 휴고는 대답할 수 없었다. 늙은이를 믿지 못한다. 그 자에게 그녀의 치료를 맡기면 도무지 안심은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나 필립의 의술은 진짜였다. 고치지 못할 병을 고친다고 나설 자는 아니었다. “사실 전 제 몸 치료법을 알고 있어요.” “뭐?” “말씀드리지 않은 건 처음에 알릴 기회를 놓쳤고, 무조건 치료하라는 당신께 화가 나 있었거든요.” “.....” “그러니까 공작가 주치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아요. 당신이 바라지 않으면 접촉할 일은 없을 거예요.” 그는 복잡한 기분에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하면서도 가슴이 덜컹했다. 그녀가 크게 언쟁을 벌였던 당시 일을 거론한 건 처음이었다. 그건 보이지 않게 덮어놓은 불씨였다. 해결된 문제가 아니었다. 휴고는 언젠가 그 일을 다시 그녀와 이야기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전 병이 아니에요.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고 건강도 괜찮아요. 언제든 치료할 수도 있구요. 치료를 하지 않는 건 제 의지에요.” “나..때문인가? 내가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해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아이 문제는 차분히 생각해요.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저도 원하지 않아요. 당신께 말하지 않고 치료 할 일은 없을 거예요.” 그녀가 임신하지 못하는 건 그녀 몸이 문제가 있어서 아니었다. 치료를 한다 해도 어차피 그녀는 아이를 갖지 못할 것이다. 그건 전부 그가 저주받았기 때문이다. ‘왜 나는 이런 몸으로 태어났을까.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생겼다고 웃던 형제 얼굴이 떠올랐다. 녀석은 모르고 죽었지만 제 아들이 태어난 사실을 알았다면, 출생 관련한 비밀을 알고서도 기뻐했을까. 조금은 힘들어 했을지 모르지만 곧 받아들이고 앞으로의 행복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녀석이었다. 차라리 그 녀석이 부러웠다. 이복누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사랑만 하다가 끝까지 알지 못하고 죽었다. 휴고는 그녀에게 피를 먹이는 소름끼치는 짓을 하면서까지 임신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녀는 틀렸지만 가능하다해도 그런 짓은 하기 싫다.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녀의 치료 여부는 그의 손을 떠난 문제였다. 치료를 하라고, 하지 말라고도 할 수 없었다. 치료를 하라고 해서 그녀에게 임신의 헛된 희망을 품게 할 수 없고, 치료하지 말라고 해서 그녀와의 사이에 아이를 거부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싫었다. 그녀에 관해서는 모든 것이 항상 그의 의지를 벗어났다. “...당신이 데미안을 처음 봤을 때 나를 본 것 같았다고 했지.” “네. 어린 당신을 보는 것 같았어요.” 데미안 이야기가 나오자 루시아는 금방 눈빛을 반짝거렸다. 그는 여전히 녀석에 대한 그녀의 과도한 관심이 기분 좋지 않으나 시간이 갈수록 너그러워지고 있었다. 녀석이 그녀가 보낸 빨간 목도리를 날이 제법 풀릴 때까지 내내 목에 두르고 다녔다는 보고서를 받아보고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의 녀석에 대한 관심은 남녀의 애정과 다르다는 것은 안다. 그건 그가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모정이었다. 그는 이제는 그녀가 말하는 ‘당신을 닮은 데미안’이라는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를 꼭 닮은 그녀의 아이. 그녀의 어린 시절을 그려내는 작은 아이를 보는 기분은 어떨까. 그의 저주받은 핏줄의 증거인 검은 머리카락도, 붉은 눈동자도 지니지 않은 그녀의 아이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가슴 안쪽이 아프게 조여들었다. 남부럽지 않은 부와 권력을 그녀에게 안겨줄 수 있지만 그녀에게 아이는 줄 수 없었다. 지금은 괜찮다고 말하지만 나중에 그녀가 상처받으면 어쩌나. 아이가 갖고 싶다고 매달리면 어찌해야 할까. 빠져나갈 수 없는 영원한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었다. “안나. 주치의 고용 계약은 파기되었습니다. 이후 당분간 임시 고용계약을 체결하겠습니다.” 제롬의 말투에는 날이 서 있었다. 안나는 힘없이 대답하며 테이블 위에 펼쳐진 서류들을 하나씩 살폈다. 주치의를 그만 둔 후에 평생 지켜야 하는 비밀엄수약정서에 서명했다. “안나는 신뢰를 깨뜨렸습니다. 이후 임시고용이 마무리 될 까지 외출을 금하며 최소한의 사람들과의 접촉만 허락하겠습니다. 공작가 주치의를 만나는 것 또한 안 됩니다.” “.... 예.” “고용 기간 만료 후, 안나가 누구를 만나는지 지켜보는 눈이 있을 겁니다. 기한은 안나가 비밀엄수약정을 충실히 지킬 것이라 확신이 있을 때까지입니다. 혹시라도 의심이 갈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을 권하겠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감시를 받으며 살게 되었다. 안나는 자신이 저지른 짓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깨달았다. 그녀는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귀족을 진료해 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귀족들의 규칙과 습성을 전혀 몰랐다. 공작가에서 지내는 동안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의사라며 모두 호의적이었다. 몇 안 되는 윗사람은 그녀를 건드리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귀족가에서의 생활을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다. 그녀가 얼마나 인간적인 대우를 받았으며 관대한 처분을 받았는지 아마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될 것이다. “가능하다면 필립 경을 한 번만 만날 수 있을까요? 제게 많은 가르침을 주신 분입니다. 마지막 인사 정도는 드리고 싶어요.” “주인님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필립은 안나가 하루가 지나도록 연락이 없을 때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고, 타란 공작이 귀환할 때까지 찾아오지 않자 완전히 어긋났음을 알았다. 도무지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공작부인의 현재 처한 입장을 보면 아이를 갖는 것보다 간절한 문제는 없었다. 치료가 된다고 하면 당연히 덥석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다. 열흘 쯤 지나 안나가 찾아와 인사를 하러 왔다고 말했다. 안나 얼굴은 제법 상해 있었다. “마님은 필립을 만나기를 거절하셨어요. 공작 전하께서는 아마 사정을 들어 모두 알고 계실 거예요. 걱정하지는 마세요. 제가 가능한 필립께 불리하지 않도록 잘 말씀드렸어요.” 실패. 짐작은 했으나 확인을 하게 되자 그는 속이 탔다. 어째서. 바로 고지가 눈앞에 있는데 여기서 멈추어야 하는가. 그러나 그는 초조함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안나. 나 때문에 고초가 컸군.” “아니에요. 제가 경솔했던 거지요. 필립과는 이제 더는 만날 수 없고, 저는 아마 곧 주치의를 그만 두게 될 거예요.” “허어. 모든 벌을 다 안나가 받게 된 것 아닌가. 나 때문인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군.” 그녀가 주치의마저 그만두게 되었다는 건 최악이었다. 그나마 접근할 끈이 완전히 사라진다. “제게 과분한 자리였어요. 원래로 돌아가는 거지요.” “마님께 말씀드릴 때 내가 공작가 주치의라는 사정은 빼지 그랬나. 공작 전하께서 만나지 말라 하셨다는데 공작부인께서 선뜻 만나겠다고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을.” “어차피 필립을 감시하는 눈을 피해 만날 수는 없는 걸요.” 필립은 겉으로는 그건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속으로는 혀를 찼다. 너무 고지식한 여자였다. 감시하는 눈이 있기 때문에 타란 공작이 자리를 비웠을 때가 기회였다. 공작부인이 단호히 결정하면 그걸 막을 권한 있는 사람은 공작 외에는 없었다. 물론 나중에 공작 귀에는 들어가겠지만 일단 공작부인과 대화를 나눌 수만 있었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만 두고 어찌 하려는가? 자네가 그만두면 공작가에서도 손실이 클 텐데 인재를 이리 버리는군.” “인재는요. 마님 치료법은 결국 제 힘으로 찾지 못했고, 겨우 한 달에 한두 번 두통약 지어드리는 일 밖에는 하는 일도 없었어요. 하는 일에 비해 너무 과한 보수를 받았죠.” “...두통?” 필립의 눈에 찰나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편두통은 여자들에게 흔한 증상이죠.” “그렇지. 내가 아주 잘 듣는 두통 처방전을 아는데 보상이라 하기는 뭐하지만 선물로 주겠네. 효과가 정말 좋다네.” 편두통은 아주 흔한 증상이지만 의사마다 처방약은 다르고 효과도 달랐다. 잘 듣는 처방전은 의사의 재산이었다. 특히 두통약 같은 건 아주 희귀한 질병보다 훨씬 대중적이라서 약이 입소문이 나면 돈을 버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것도 가문의 비전 아닌가요? 그런 귀한 걸...” “나야 약으로 돈 벌 생각은 없지만 안나는 나처럼 살 수 없지 않은가. 좋은 약이 많은 사람들에게 쓰인다면 좋은 일이지.” “아아. 필립. 정말 감사해요. 마지막까지 이렇게 마음을 써 주시고.” “처방전은 수일 내에 사람 편으로 보내주겠네. 어차피 처방전이니까 중간에 누가 봐도 전달되지 못하게 막지는 않을 것이네.” 안나가 돌아가고 필립은 조금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럼. 두통약을 만들어 볼까.” 아주 작은 기회라도 놓치지 않는다. 그게 지금껏 필립이 살아온 방식이었다. 필립은 결코 남들 눈에 수상해 보이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가 조금이라도 위험해 보였다면 타란 공작은 그를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타란 공작이 아는 필립은 단지 고집 세고 미련 많은 늙은 의사일 뿐이었다. 필립의 집안은 타란 혈족 혈통에 관여했지만 그건 아슬아슬한 칼날 위의 동맹이었다. 지나치게 위험한 비밀을 쥐고 있으나 상대방에 비해 힘이 너무 약했다. 그래서 택한 생존의 방식은 바짝 엎드리는 법이었다. 필립의 가문 없이는 타란 혈족을 이어갈 수 없지만 결코 그걸 이용하려 들지 않았다. 둘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에 동맹은 깨지지 않고 이어졌다. 타란 가문의 가주는 대대로 미치광이가 많았다. 남들이 보기엔 멀쩡해도 속은 곪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죽은 공작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 공작 비위를 맞추며 필립은 살아남았다. 죽은 공작에 비하면 지금의 타란 공작의 성정은 오히려 더 깔끔했다. 삼엽쑥의 효능을 중화하는 약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험을 거듭해 만들어진 최종완결판이었다.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만들어진 조금씩 부족한 과정은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노트에 모두 적혀 있었다. ‘바닐라 향을 안다면..그걸 빼야겠군. ’그러면 효능은 떨어질 것이다. 1~3년이면 중화될 효과가 두 배 이상 더 걸리고, 임신의 가능성도 확연히 떨어진다. 나머지는 하늘에 달렸다. 하늘은 언제나 필립을 배신하지 않았다. 잘 듣는 두통약이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가문 비전에는 그런 약이 분명 있었다. 두통약 처방전과 중화약 재료를 배합해서 새로운 약을 하나 만드는 일만 남았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그의 약초 배합실력은 칭찬에 인색한 죽은 부친도 인정하는 재능이었다. 얼마 후 안나의 손에 두통약 처방전이 들어왔다. 필립은 곧 로암을 떠났다. 필립을 감시하던 눈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필립이 로암(도시)을 완전히 벗어나자 감시의 눈을 거뒀다. 안나는 처방전을 보며 감탄했다. “이런 식으로 약초를 배합하다니. 정말 획기적이야.” 그녀는 두통이 왔을 때 약을 지어 먹어보았다. 효과는 정말 굉장했다. 아무리 두통약을 먹어도 머리가 좀 무거운 기분은 얼마간 지속되는데 푹 자고 일어난 아침처럼 머리가 가볍고 상쾌했다. 안나는 내성에 거주하는 사람 중에 두통을 호소하는 환자에게 처방해 주었다. 그들의 반응도 안나와 다르지 않았다. 가끔 편두통 앓는 여자들이 안나에게 수개월 치 약을 지어갔다. 마님이 두통이 있다고 안나를 불렀을 때 안나는 새로운 약을 가지고 들어갔다. “안나. 이번 약은 정말 효과가 좋군요.” 정기적인 편두통이 오면 은근히 짜증이 났던 루시아는 약을 먹은 후 금방 가라앉는 효과에 감탄했다. “약이 마음에 드신다면 그만 두더라도 드실 수 있도록 넉넉히 지어두겠습니다.” “그래주면 고맙지요.” 봄이 지나고 여름에 접어들었다. 루시아가 결혼 후 로암에서 맞이하는 2번째 여름이었다. 평온한 나날이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은 내일 같은 날이 이어졌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 저녁 식사 시간에 그는 평화로운 나날의 종말을 고했다. “폐하께서 승하하셨다는군. 수도로 올라갈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소.” < -- 외전 데미안(1) -- >경고1. 스포가 있습니다. 스포 원하지 않으면 뒤로 가기 눌러주세요. 경고2. 단편 외전 아닙니다. 언제 완결될 지 모르니까 완결 후 보실 분들도 뒤로 가기 눌러주세요. 본편 중에 데미안이 출연할 일은 없습니다. 난 데미안이 뭘 하며 지내는지 궁금해서 잠이 안 온다 하는 분만 고고~필라체는 인구 30만이 채 안 되는 도시국가다. 필라체라는 국명보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종합 학술원 익시움이 더 유명했다. 익시움에 소속된 교수나 직원을 포함하면 익시움에서 생활하는 인구는 7만이 넘어가고, 파생 고용 인력까지 포함해 거의 15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익시움을 중심으로 생활했다. 익시움은 필라체의 국가사업이었다. 최고의 교육, 최고의 인맥을 쌓기 위해 익시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고가의 등록금을 지불하고 상당한 생활비를 소비했다. 그 돈은 학술원의 시설과 교수진에 대한 투자금이 되고 익시움의 질적 향상에 기여하여 학생들은 더 몰려든다. 선순환 반복 구조였다. 올해 15살의 크리스는 6년짜리 준심화과정 수료를 위해 익시움에 입학했다. 익시움의 교육과정은 크게 나이와 수준에 따라 예비학년, 준비학년, 본학년 과정으로 각 4년씩 총 12년 과정이 있었다. 이 과정은 학생들 입맛에 맞추어 서로 결합하거나 쪼갤 수 있었다. 준심화과정은 준비학년의 3~4학년 과정과, 본학년 4년과정을 합한 것으로, 크리스는 입학한지는 1년 차이며, 준비학년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익시움의 학습 과정은 대단히 어렵지만 성적이 바닥을 기어도 졸업장은 무조건 주었다. 거액 수업료를 받아 챙기는 학술원의 머리 굴리기였다. 대신 과정을 이수했다는 수료증은 일정 성적 이상만 주었다. 이런 시스템을 잘 모르면 졸업장만으로 학술원 과정을 훌륭히 마쳤다고 대외적으로 내세울 수 있었다. 불행히도 크리스의 부친은 이런 교묘함을 잘 알고 있었다. 크리스를 익시움으로 보내면서 졸업장만 받아올 경우 발가벗겨 가문에서 내쫓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올해 2학기 마지막 시험이 끝나고 겨우 1년 차 끝이 보였다. 크리스 성적은 간신히 턱걸이였다. 그래도 그게 어디냐. 계절 학기에 추가 수강을 듣지 않고 집으로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교정을 지나던 크리스는 학생들의 술렁임에 시선을 돌렸다. 교내 화제의 인물이 지나가고 있었다. 청년이라 하기엔 어리고 소년이라 하기에는 성숙한 흑발의 소년이었다. ‘하늘은 불공평해. ’크리스는 흑발 소년, 데미안을 볼 때마다 생각했다. 사내 녀석들만 우글거리는 시커먼 학술원에서 데미안은 수천 명 중에서 단 번에 눈에 띌 정도로 발군의 외모를 지녔다. 그 뿐인가. 단 한 번도 수석 자리를 내놓은 적 없는 무지막지하게 머리 좋은 녀석이었다. ‘거기다 어울리지 않게 저 여우는 뭐냐고. ’늘 데미안 발치를 쫓아다니는 샛노란 털의 여우는 오늘도 함께였다. 한낱 짐승이 굉장히 도도해 보인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었다. 데미안은 오늘도 여전히 자신을 향한 관심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학생들의 흘끔거리는 시선을 저렇게 무시하기도 힘들겠다고 크리스는 생각했다. ‘...확실히 닮았단 말이야. ’크리스는 데미안을 보면 항상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크리스의 고국 제논에서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크리스는 15살이 되어서 맞이한 올해 신년 파티를 사교계 공식 데뷔 무대로 삼았다. 엄청나게 돈이 많아서 성대하게 데뷔 파티를 여는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귀족들은 왕실에서 주도하는 신년 파티를 데뷔 무대로 삼았다. 규모가 크고 많은 귀족이 참석하기 때문이었다. 크리스의 집안이 가난하지는 않지만 부친은 그런 데 돈 쓰는 것을 싫어했다. 그 자리에서 크리스는 부부동반으로 참석한 타란 공작 부부를 처음 보았다. 타란 공작의 외모적 특성인 검은 머리나 붉은 눈은 꽤 유명해서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본 모습은 상상했던 것과 꽤 달랐다. 타란 공작을 둘러싼 소문이 무시무시해서 거칠거나 무서운 사람일 줄 알았다. 그런데 연미복을 갖추어 입은 타란 공작은 대단히 준수한 외모에 귀족다운 귀족이었다. 인상적이었던 타란 공작 모습이 눈앞에 동동 떠다니다가 익시움에 입학해서 데미안을 보자 충격이 머리를 내리쳤다. 데미안은 익시움에서 괴물같은 천재로 유명했다. 크리스와 동일한, 준비학년 3학년인데 듣기로는 12년짜리 기숙과정 중이라고 했다. 크리스가 절절히 실감하지만 익시움 과정은 어렵기로 유명했다. 보통 4년 과정을 4년에 졸업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1년 유예를 두어 5년에 마쳤다. 또한 전공은 크게 상업경제, 행정법률, 정치경영 셋으로 나누어 학생들은 그 중 1개 전공, 1개는 부전공으로 삼아 일부 과목만 들었다. 그런데 데미안은 3개 전공을 모두 듣는데다가 모두 수석에, 교양으로 듣는 검술과 승마 역시 최고였다. 가히 괴물이라 불릴 만 했다. ‘나랑 아예 종족이 달라. ’크리스는 부럽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혈연관계가 아니고서야 저렇게 닮을 수가 없어. ’크리스는 다른 사람이 이 같은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의아했다. 익시움 내에서는 불분명한 데미안의 신분에 대해 추측하는 여러 가지 말이 떠돌았지만 누구도 타란 공작을 언급하지 않았다. ‘하긴..타란 공작이 저런 큰 아들이 있다고 하기엔..너무 젊지. ’ 크리스는 데미안의 정확한 나이를 몰랐다. 다만 겉으로 보면 최소한 15살은 넘어 보였다. ‘타란 공작가에 공녀가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아들 얘기는 들어 본 적 없단 말이야. ’아들이 아니면 친척인가? 멀어져가는 데미안을 붙들고 직접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앞 좀 똑바로 보고 다니지?” 뒤돌아서던 크리스는 거슬리는 목소리에 다시 몸을 돌렸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광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저런 놈들이 시비거는 걸 보면 타란 공작가와 아무 상관없는 것 같기도 하고...’데미안이 들고 있던 책이 바닥에 떨어져 있고, 그 앞을 두 소년이 가로막고 서 있었다. ‘또 저 녀석들이네. ’빈번하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두 녀석은 데미안만 보면 시비를 걸지 못해 안달이었다. ‘저런 녀석들과 같은 고국에 적을 두고 있다는 게 수치라니까. ’데미안은 신분이 불확실했다. 어느 나라 출신인지도 불분명했다. 익시움에 다니니까 집에 돈이 있지만 기숙학교 과정을 다니는 것을 봐서 아마 귀족은 아닐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데미안에게 시비 건 녀석들에게 아무 불이익이 없자 데미안 신분이 별 것 아니라는 사람들 생각은 굳어져 갔다. 귀족이건 귀족이 아니건 그게 괜한 시비가 될 이유가 될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 생각이 모두 크리스와 같지는 않았다. 데미안은 어떤 경우에도, 누구 앞에서도 주눅이 드는 법이 없었다. 시비 거는 놈들은 그게 고까운 것이다. 신분에 대한 우월감이 뿌리박힌 녀석일수록 더했다. ‘오늘도 저러다 말겠지. ’곧잘 보는 광경이지만 싸움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없었다. 맞부딪쳐야 소리가 나는 법. 데미안은 아예 상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니 시비 걸던 놈들도 씩씩대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데미안은 괜한 시비를 거는 녀석들을 향해 속으로 혀를 찼다. 이놈들은 유치한 짓을 지칠 줄 모르고 끊임없이 시도했다. 이런 놈들은 데미안이 누군지 밝히는 순간 바닥에 엎드려 발이라도 핥을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데미안은 일부러 조용히 학술원을 다니고 있었다. 데미안은 8살, 정원파티의 기억을 잊지 않았다. 충분히 나이든 어른들이 힘 앞에서 비겁해지는 것을 보았다. 인간의 속과 겉이 다른 속성이 나이와 상관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데미안은 배경이라는 껍데기를 감추고 오직 실력만을 보였을 때 사람의 태도가 어떤지 봐두고 싶었다. 원하는 시타의 자리에 오르려면 오직 실력만으로는 불가능했다. 그건 정치적인 자리였다. 타란 공작가의 이름이 필요하다면 데미안은 기꺼이 이용할 것이다. 내년이면 준비학년 4학년이다. 준비학년이 끝나면 본학년 과정으로 들어가는데 ‘회’의 회원은 본학년 학생으로만 구성했다. 내년 중에는 타란 공작가 후계의 신분을 밝힐 생각이었다. 학술원 내에는 분명 데미안이 누군지 아는 사람이 있었다. 북부 귀족 출신이라면 대충 짐작을 했다. 하지만 데미안이 나서서 밝히지 않자 모두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북부 귀족 출신이 익시움에 재학 중인 경우는 극히 소수라서 비밀은 잘 지켜졌다.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낀 아샤가 털을 곤두세우고 이를 드러냈다. 그러나 아샤는 다 자란 몸으로도 발길에 한 번 채이면 날아갈 만큼 작았다. 시비건 소년들 역시 가소롭게 여우를 비웃고 있었다. “아샤.” 데미안이 이름을 불러 제지하자 아샤는 온순하게 돌아와 데미안을 올려보다가 데미안 뒤로 물러났다. 데미안은 혹시라도 아샤가 휘말려 다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아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아버지 당부를 지키지 못할 것 같았다. [ 학술원에서 사람은 죽이지 마라. ]데미안이 녀석들 시비를 받아주지 않는 건 귀찮아서였다. 유치한 시비는 화도 나지 않았다. 데미안은 이번에도 말없이 몸을 숙여 책을 그냥 짚어드는 길을 택했다. 탁, 손에 짚은 책이 밟힌다. 데미안이 그 발을 따라 시선을 올리자 갈색머리 소년이 비열하게 웃고 있었다. “사람 말 안 들려? 앞 똑바로 보고 다니라고. 잘못을 했으면 사과를 해야 할 거 아냐.” 오늘은 좀 과하다. 데미안의 붉은 눈이 물끄러미 갈색머리 소년을 응시했다. 왜 이런 불필요한 감정소모를 하고 있나. 고요한 데미안의 눈빛을 받으며 갈색머리 소년이 울컥했다. 자신을 한심하게 비웃는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너!” “그만해.” 보다 못한 크리스가 끼어들었다.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왜 시비야?” “넌 뭔데 끼어들어.” 갈색머리 소년은 불쾌해하면서도 크리스가 누구인지 알기에 조심했다. 아무리 국적과 신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익시움이라고 해도 배경은 결코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크리스는 갈색머리 소년과 같은 고국의 잘 나가는 후작가 아들이었다. “일을 시끄럽게 만들지 말라는 소리야. 넓은 길을 놔두고 일부러 부딪쳐놓고, 누가 봐도 시비를 거는 것이 뻔하잖아.” “누가 일부러 부딪쳐!” 둘이 실랑이 하는 사이에 데미안은 주섬주섬 떨어진 책들을 주워서 일어나 그들을 지나쳐갔다. 참 별거 아닌 걸로 저리 열을 내다니 기운들도 좋지, 생각하면서. 코트에서 손수건을 꺼내 밟힌 자국이 있는 책을 닦아냈다. 데미안에게 이 책은 특별했다. 좋은 책이 나왔다며 어머니가 보내주신 선물이었다. 아까 밟았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이 나갈 뻔 했다. 아마 크리스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그랬을 지도 모른다. “넌 어디가!!” 데미안에게 시비 붙였던 잿빛머리 소년이 데미안의 어깨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데비안이 반사적으로 물러서며 손을 쳐내고 들고 있던 책으로 목을 겨눴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검술 동작이라서 데미안이 주춤 손을 내렸지만 이미 잿빛머리 소년의 얼굴은 화가 나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잿빛머리 소년의 눈에 하얀 천이 눈에 잡혔다. 바닥에 떨어진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사실 잿빛머리 소년은 그렇게까지 악질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거 네꺼냐, 고 물으려는 순간 데미안이 동요하는 것을 보았다. 원인은 손수건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데미안은 무감정한 눈으로 무기질 생명체를 보듯 했다. 그것이 거슬려서 자꾸 건드리고 싶었다. 처음 보는 데미안의 동요가 잿빛머리 소년의 심사를 비틀리게 했다. “돌려줘.” 어머니가 수를 놓아 보내주신 손수건이었다. 데미안이 손을 내밀며 한 발 내딛자 잿빛머리 소년은 그만큼 뒤로 물러섰다. 데미안이 손을 뻗자 휙 손을 움직여 손수건을 잡지 못하게 했다. 그걸 몇 번 반복하자 데미안의 눈동자가 더욱 붉어졌다. 잿빛머리 소년은 은근한 즐거움을 느꼈다. 보란 듯 손수건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데미안에게 시선을 고정해 만족스럽게 웃으며 손수건을 발로 밟아 천천히 짓이겼다. 데미안의 눈동자가 확 타올랐다. 퍽- 갑작스러운 힘과 고통에 잿빛머리 소년은 나동그라졌다. 입가가 얼얼했다. 손으로 만져보자 피가 묻어나온다. 데미안이 자신을 쳤음을 인식하자마자 그대로 주먹 쥐고 달려들었다. “악! 이 여우새끼가!” 아샤까지 가세해서 주인의 적을 응징했다. 작은 몸으로 날렵하게 요리 조리 몸을 피하며 팔이나 발을 물었다. 익시움에서 보기 드문 진풍경이 발생했다. 네 명 소년과 한 마리 짐승이 치고받는 광경을 구경하려고 주변에 둥글게 원을 그리며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질서유지관이 달려오고 힘으로 뜯어말려 놓은 후에야 개싸움은 막을 내렸다. 학생에 대한 1차 징계권은 성적이나 교사에 대한 모욕에 관한 것이 아니면 회의 권한이었다. 회는 질서를 깨뜨린 4명 학생들에게 징계권을 발휘했다. 반성문 작성, 3일 수업 정지, 태도 점수 반영이었다. 그리고 유독 데미안에게는 7일이 정학 처분이 내려졌다. 이유는 데미안이 먼저 주먹을 휘둘렀다는 것인데 사실상 이유는 데미안을 제외하면 모두 신분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시비를 건 2명 쪽의 지인이 회원에 속해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크리스는 분노했다. 이건 지극히 불공정했다. 저쪽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 저열하고 유치했다. “이렇게 가만히 있지 말고 항의를 해! 공식적으로 소청위원회에 이의 제기하라고!” 1차 징계권 행사에 불만이 있다면 소청위원회에 재판을 신청할 수 있었다. 데미안은 자신의 기숙사 방까지 찾아와서 길길이 날뛰고 있는 크리스를 무표정하게 보다가 짧게 말했다. “됐어.” 무릎에 올라와 있는 아샤의 털을 쓰다듬는 손길은 느긋하고 부드러웠다. “되긴 뭐가 돼!! 그 자식들이 먼저 시작했잖아!” 크리스는 이번 일로 데미안 나이를 처음 알았다. 12살 이라고 했다. 최소한 자신과 동갑이라 생각했는데 나이를 알고 경악했다. 그 녀석들은 하나는 15살 다른 하나가 16살이다. 한참 어린 상대에게 시비를 걸고 그리 괴롭혀댄 것이다. “익시움에서 일주일 정학이 얼마나 큰 벌인 줄 알아? 네 학적부에 빨간 줄 긋는 거라고!” 타란 공작은 데미안보고 사고 치지 말라고 한 적 없었다. 퇴학이 아닌 어지간한 일로 아버지가 뭐라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학적부에 빨간 줄이 가든 말든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 정도 빨간 줄은 데미안이 시타가 되는 길에 장애가 되지 않았다. “너는?” “뭐가?” “나 때문에 괜히 끼어들었으니까. 네 학적부도 문제 있는 거 아닌가?” “수업정지 정도는 괜찮아. 처음이라 거의 경고 수준이니까.” 데미안은 얼결에 ‘아는 사람’이 된 크리스를 보며 대체 이 녀석은 왜 자신의 일에 나선 걸까 고민했다. 딱히 그 전에 어떤 교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기억에 없던 녀석이었다. “고맙다.” 씩씩대던 크리스는 놀라 데미안을 보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은 표정이었다. “뭐..뭐가..?” “그 때, 도와주려고 한 것. 나설 필요 없었지만.” 입이 히죽 벌어지던 크리스는 덧붙인 말에 울컥했다. 잠시 데미안을 노려보았지만 이내 풀었다. “정말 이의신청 안 할 거야?” “안 해.” “정학이면 통지서가 집으로 갈 텐데.” “.....” 그건 몰랐다. < -- 수도 -- >루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나이프를 떨어뜨렸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잊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모든 걸 다 잊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이대로 살고 싶었던 자신의 깊은 속내를 비로소 알아차렸다. “괜찮소?” “...네. 조금 놀랐어요. 갑작스러워서.” 루시아는 아무 의미 없는 친부의 죽음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잠시 멈추어 있던 시계추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숨 가쁘게 그녀가 본 미래가 펼쳐질 것이다. 그게 이렇게 끔찍한 기분이 될지 몰랐다. 왕비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즉, 왕의 모든 자식들은 적자가 아니었다. 그러니 아무도 태자가 될 정통을 갖지 못했고, 그래서 누구라도 태자가 될 수 있었다. 왕은 무려 20명의 아들을 두었지만 왕이 죽었을 때 생존해 있는 왕자는 태자를 포함해 5명뿐이었다. 왕의 26명의 공주는 대부분 살아 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공주는 왕위 계승권이 없기 때문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반면에 왕자들은 서로를 죽여야 왕의 길에 가까워졌다. 루시아가 작은 별궁에서 나름 평온하게 살아가는 동안 궁중에서는 살벌한 피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태자는 훌륭히 살아남은 승리자였다. 그렇지만 다른 경쟁자들을 완전히 제압하진 못했다.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태자는 자신의 세력을 굳건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타란 공작이 필요했다. 최후의 승리자가 결국 태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선봉에 타란 공작이 있었다. 루시아는 복잡한 정치싸움은 잘 몰랐다. 그래도 이후 그가 무척 바빠진다는 사실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영지에서의 그도 한가롭지 않았다. 그래도 비교적 관심을 쏟는 대상이 단순했다. 영지 살림을 살피고 가신들과 회의하고 가끔 시찰을 나갔다. 만나는 자들이 고정되어 있고 행동반경도 예측 가능한 범위였다. 그는 성실한 남편이었다. 그건 어쩌면 북부의 풍습이 일부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른다. 북부 사람들의 풍습은 수도와 다른 점이 많았다. 미혼남녀의 자유로운 성 풍조는 비슷했으나 북부에서는 일단 혼인 후에는 대체로 배우자에게 충실했다. 하지만 수도로 올라가면 그를 유혹할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제논은 성 풍속이 자유로운 나라였다. 특히 수도는 가장 개방적이었다. 결혼 여부는 아무 장애가 되지 못했다. 수도에는 그가 결혼한 것에 개의치 않고 몸을 던질 아가씨들이 넘쳐났다. 불안했다. 수도는 변수가 너무 많았다. ‘수도로 가면 그는 식어버릴 지도 몰라. ’ “..거요. 듣고 있소?” “네?” 루시아는 깜짝 놀라 또 다시 들고 있던 포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정말 괜찮은가?” “아..네. 죄송해요. 다른 생각을 하다가..” “다른 생각?” “가..갑작스러워요. 폐하가 원래 그렇게 건강이 좋지 않으셨나 생각하느라..” “원래 좋지 않았다고 들었소. 궁중의들 충고에도 술이나 여색을 탐하는 것을 전혀 자제하지 않았다 하더군.” 왕의 사인을 처음 알게 되었다. 남편에게 치부를 드러낸 것처럼 민망했다. 부친은 스스로의 방탕함으로 죽음을 자초했다. 꿈속에서와 마찬가지로 결국 부친과의 관계는 전혀 나아진 것 없이 끝나버렸지만 아쉬움은 없었다. “언제 올라가세요?” “새벽에 곧바로 떠날 생각이오. 서둘러야 해서 함께 가지 못하겠소. 부인은 조심해서 뒤따라오도록 하시오.” “네. 저도 준비가 되는대로 출발할게요.”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오는 그녀의 손을 그가 잡아끌었다. 얼결에 쫓아가며 흘끔 본 고용인들의 표정은 그러려니 무심했다. 공작부부의 어지간한 스킨십에 익숙해서 이젠 이 정도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루시아는 왠지 갑자기 창피했다. 정원으로 나가는 줄 알았더니 그는 그녀를 데리고 테라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를 꽉 품으로 안았다. 루시아도 두 팔로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휴? 갑자기 왜..” “고용인들 앞에서 이러는 거 싫어하잖아.” “......” 싫어하는 거 알면 다짜고짜 손을 잡아끌고 가거나, 다 보는 곳에서 뺨에 입맞춤 하는 짓을 하지 않으면 더 좋을 텐데. 어쨌든 그와 안고 있으니 좋긴 하지만 지금은 여름이었다. “더워요.” 그가 푹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놓았다. “덥다 소리 안 하고 좀 참으면 안 되나?” “.... 더운걸요.” “냉정한 여자 같으니라고.” 그가 투덜거리자 루시아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를 부드럽게 보던 그는 허리를 당겨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식사 내내 왜 딴 생각이야. 무슨 일 있어?” “그냥..좀 복잡했어요. 여길 떠날 생각 하니까 서운하기도 하고...” “안 가고 계속 여기서 살까?” 그의 말은 너무 유혹적이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터무니없는 말씀 마세요. 수도에 가서 하실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데미안 문제를 태자 전하께서 도와주기로 하셨다면서요.” “녀석 때문에 나보고 가서 일하라는 소리로군.”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일하는 건 당연한 거예요.” “.... 녀석이 내 수고를 나중에 알아주기는 할까.” “그럼요. 데미안은 그걸 모를 아이가 아니에요.” 그래봤자 그 녀석은 당신 뒤만 졸졸 쫓아다닐 텐데, 그는 중얼거렸다. 요즘도 꾸준히 둘이 편지 왕래를 하기에 궁금해서 녀석이 보낸 편지를 봤다가 질렸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어난 모든 일을 적은 보고서였다. 그걸 보면서 휴고는 따로 녀석이 뭘 하는지 보고받을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데미안은 잘 지내고 있지요?” “녀석에게 보고서 받아 보잖아.” “당신이 알아보는 소식도 있을 거잖아요.” 데미안은 여전히 학술원에서 신분 내역을 밝히지 않고 지냈다. 시타는 배경 도움 없이 가진 실력만으로는 가질 수 없는 자리인데 녀석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지켜볼 뿐이다. 어지간한 일에는 간섭할 생각 없었다. 사내아이는 강하게 키워야 한다. 데미안이 신분이 불확실한데다가 나이는 어리고 실력은 워낙 튀고, 붙임성 없는 성격이라 그런지 주변에 껄떡이는 녀석들이 있었다. 괜한 시비로 툭툭 건드려 대는 그런 놈들은 데미안이 나이가 들면 더 늘어날 것이다. 그런 것도 전부 녀석이 감당할 몫이었다. “물론 잘 지내고 있어.” 며칠 전에 데미안이 시비 거는 녀석들과 붙었다가 상대가 다수라 좀 드잡이를 했지만 그런 건 휴고가 보기에는 문제에도 속하지 않았다. 어디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병신이 된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상대가 다수라도 그런 허접한 꼬마들에게 맞다니. 자신이었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그 놈들 목을 다 따버렸을 것이다. 데미안은 겉만 멀쩡하고 심약한 형제의 아들이 틀림없었다. 그는 일전에 데미안에게 ‘학술원에서 사람 죽이지 마라’고 했지만 그건 처리하기 까다로우니까 죽여도 눈에 안 띄게 하라는 말을 돌려 말한 것이었다. “녀석은 됐고, 당신이나 조심해서 와. 마차 여행하면서 더위 먹지 않게 조심하고.” “알아서 챙겨줄 사람 많은데 무슨 걱정이세요.” 그는 여전히 다정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다정함은 더 섬세해졌다. 루시아는 그가 자신을 꽤 많이 좋아한다고는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안은 가라앉지 않았다. 수도에 있는 그의 전 연인들, 그의 매력에 빠져 유혹하며 달려들 미인들, 꿈속에서 그의 아내였던 그 여자까지, 발 딛을 곳이 없었다. ‘당신이 날 버릴까봐 겁나요. ’그를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중심을 잡고 서서 기대지 않고 부담주지 않는 사랑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자신의 오만이었음을 그녀는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그런 사랑이 정말 존재하기는 할까. 어딘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녀 주제로는 불가능한 사랑이었다. 서재에서 책을 읽던 루시아는 명치를 찌르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책을 덮으며 일어났다. 아까부터 답답하더니 아파오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 내내 음식이 목에 넘어가는 것이 힘들다 했다. 아무래도 얹힌 것 같아서 하녀를 불렀다. “소화제를 가져오너라.” 소화제 정도는 상비약이라서 굳이 의사를 부를 것까지는 없었다. 소화제를 먹고 얼마 후 먹은 것을 다 토해냈더니 속이 한결 시원해졌다. “마님, 괜찮으신지요?” “그래. 속을 비웠더니 편해졌어.” 내일 떠날 준비로 분주한지 그가 하녀를 보내 먼저 자라고 말을 전했다. 루시아 역시 내일 중에 짐을 싸고 할 일이 많을 것 같아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휴고는 거의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 집무실을 나왔다. 갑자기 수도로 가려니 급하게 마무리할 일이 많았다. 붙잡고 하려면 끝이 없었다. 새벽부터 말을 달려 수도로 가려면 조금은 자 두어야 했다. ‘왜 이런 한여름에 죽어가지고. ’수도로 가려면 긴 마차 여행을 해야 하는데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그녀가 몸이 상하지 않을지 걱정이었다. ‘1년만 더 살다 죽었으면 좋잖아. 노인네가 몸 생각해 적당히 놀 것이지. ’어디다 말하기 수치스러운 사인(死因)이었다. 여름에 죽은 것도, 지금 죽은 것도 불만이었다. 북부에서의 생활이 어느 정도 자리 잡혀 가고 있는 중이었다. 수도로 가면 또 언제 북부에 신경 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굴러가게 내버려 두면 지난 번 잡아 죽인 놈들과 똑같은 짓을 할 놈이 또 나타날 것이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문제 일으키면 또 잡아 죽이면 된다. 그의 고민은 수도에 올라가면 발생할 변수였다. 지금까지처럼 아내를 그의 울타리 안에만 가두어 둘 수 없을 것이다. 온갖 잡놈들이 그녀에게 접근할 텐데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직 그녀 마음을 얻지 못했는데 큰일이다. 아명조차 아직 듣지 못했다. 그는 심란한 마음으로 자신의 침실에서 간단히 목욕을 마쳤다. 귀족들은 부부의 침실을 각각 쓰는 것이 관습이었다. 아예 두 부부의 침실이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휴고는 자신의 침실을 욕실을 사용할 때 외에는 거의 쓰지 않았다. 오늘도 그는 곧바로 그녀의 침실로 들어갔다. 어두운 침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침대로 다가가 곧바로 그녀 옆에 누우면서 그녀를 품안으로 안으려던 그는 희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작은 신음소리였다. 그는 벌떡 일어나 침실에 불을 밝혔다. “비비안?” 얇은 이불을 들추고 등을 보이며 누워 있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몸을 돌렸다. 손에 닿은 그녀의 몸이 뜨거웠다. 이마에 손을 대자 열이 펄펄 끓는데 식은땀이 흥건했다. 그는 곧바로 하녀를 부르는 줄을 당겼다. “비비안.” 그는 몇 번이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전혀 반응이 없었다. 그는 다급한 마음에 그녀의 허리 아래 손을 넣어 품으로 안아들었다. 그녀의 몸이 축 늘어지자 그는 가슴이 섬뜩했다. “비비안!” 하녀가 들어오는 기척을 느끼자 휴고는 보지도 않고 버럭 소리쳤다. “의사 불러!” “예..예!” 허겁지겁 달려가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내성이 하나 둘 불을 밝히며 깨어났다. 휴고는 그녀 이마에 차가운 물수건을 얹었다. 침대 아래에는 그녀의 시중을 전담하는 하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하녀를 추궁했다. 하녀는 기가 잔뜩 죽어서 저녁 때 마님의 상태를 설명했다. “저녁 드신 것을 모두 토해내시고 일찍 주무신다고 하시었습니다.” “그 때 의사를 불렀어야지. 그런 식으로 마님 시중을 든단 말이냐?” “송..송구합니다.” 서릿발 같은 공작의 질책에 하녀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렸다.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자다가 달려온 안나가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안나는 하녀를 통해 증상을 전해 들었다. “마님 의식이 먼저 돌아오셔야 약을 드실 수 있습니다. 차가운 물수건으로 전신을 닦아 열을 내려 주셔야 합니다.” “저녁까지만 해도 멀쩡했다.” “급체하신 것 같습니다.” “체한 것이라면 왜 이렇게 열이 나지?” “체증으로도 고열은 물론이고 몸살도 날 수 있습니다.” 안나는 하녀에게 물었다. “마님께서 두통이 있다고는 하지 않으셨고?” “두통은..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녀가 잔뜩 풀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체하는데 두통도 있나?” “반드시 있는 증상은 아니지만 마님께서 평소 편두통이 잦으시어 확인했습니다.” “.... 편두통?” 순간 싸하게 바뀌는 분위기에 안나는 움찔했다. “잦다니? 얼마나?” “...한 달에 1~2번 정도. 편두통을 앓으시어 약을 조제해 드렸습니다.” “처음 듣는다. 왜 내가 모르고 있지?” “처음 로암에 오셨을 때 마님께서 누구나 흔히 앓는 가벼운 질환이라 굳이 전하께 말씀드릴 것 없다 하셨습니다.” “증상은 언제부터.” “...어릴 때부터 자주 두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크게 염려하실 바는 아닙니다. 편두통은 흔한 증상이고 마님께서는 심하신 편이 아닙니다.” 안나의 설명은 분위기를 바꾸는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어진 공작의 침묵은 무시무시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날 무렵이었다. 하녀들이 커다란 나무통에 지금 날씨에 구하기 귀한 얼음이 가득담긴 물을 담아 가지고 들어왔다. “다들 물러가라. 내가 하겠다.” 휴고는 그녀를 침대에 바로 눕히고 잠옷을 벗겨냈다. 얼음물에 담갔다 꼭 짠 차가운 수건으로 조심스럽게 식은땀으로 젖은 그녀의 몸을 닦아냈다. 손에 닿는 부분이 뜨거울 정도로 온몸에서 열이 났다. ‘대체 언제부터 열이 오른 것인지 모르겠군. ’고열에 의식이 없는 상태가 오래 되면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안다. ‘편두통이라고?’의사 말대로 흔한 증상이고 아무것도 아닐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아무것도 아닌 일을 자신이 모른다는 것이 화가 났다. 이럴 때마다 그는 도무지 허물 수 없는 그녀와의 벽을 느꼈다. 언젠가는 그녀가 마음을 열어주지 않을까 기대하지만 기다림은 너무 길고 지루했다. 그는 짜증과 초조함을 누르고 계속 수건을 바꿔가며 그녀의 몸을 식혔다. ㄹㅅㅇ 70~132 〓〓〓〓〓〓〓〓〓〓〓〓〓〓〓〓〓〓〓〓〓〓〓〓〓〓〓〓〓〓〓〓〓〓 < -- 수도 -- > '시원해...' 루시아는 뜨거운 불속에 갇힌 것처럼 헉헉거렸다. 몸에 닿는 차가운 기운 덕분에 조금씩 숨을 쉴 수 있었다. 차가운 것이 몸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리고, 체온이 닿는 부분이 미지근해 지는가 싶으면 다시 차가운 것으로 바뀌었다. 루시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그가 보이는데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비비안." 다급하게 그가 불렀다. "... 휴." 그녀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아-" 휴고는 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얇은 이불을 덮어주면서 그녀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입술을 누르고, 손가락에 손등에도 입을 맞췄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빗어주고 수건으로 이마를 닦아주었다. 그의 눈에 가득한 걱정을 보며 루시아는 속이 울렁거렸다. 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플 때 이렇게 지켜보고 걱정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어 준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처음이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흘러 툭 떨어졌다. 그가 안색을 굳혔다. "밖에 누구 없느냐! 의사는 어디 있나!" 줄을 당겨 부르는 것도 잊고 소리를 지르는 그의 손을 잡았다. '괜찮을 거야.' 루시아는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도에 올라가서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 평화와 행복이 깨지지 않을 것 같은 막연한 믿음이 생겼다. "휴. 수도로 가면 당신 바람피울 거예요?" "..... 뭐?" 너무 뜬금없었다. 이 여자가 정말 많이 아픈가보다, 휴고는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가 자신을 전혀 믿지 못하는 구나 힘이 쭉 빠졌다. 그녀의 마음은커녕 일단 신뢰부터 얻어야 할 것 같다. "절대 안 그래." 가만히 그를 보던 그녀가 살짝 웃었다. "그럼 됐어요." '믿어 보자. '그라면 다른 여자가 생겨도 속이고 숨어서 몰래 바람피우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당당하게 말을 하면 했지. 그는 의외로 거짓말을 잘 못했다. 그의 위치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갔다. 일방적으로 수하들에게 명을 내리면 그만인 그가 거짓말을 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수도에 올라가서 정치 싸움을 하려면 거짓말은 필수일 텐데.. 괜찮을까. '휴고의 차가운 가면은 오직 그녀 앞에서만 깨진다. 루시아는 꿈속에서 보았던, 하다못해 결혼 전에 보았던 그의 모습을 까맣게 잊었다.' 그럼 됐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이야. 되긴 뭐가 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고 그녀를 짤짤 흔들며 묻기 직전에 안나가 들어왔다. 안나와 루시아가 이런 저런 증상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동안 휴고의 머릿속은 굉장히 복잡했다. 여자가 이렇게 어려운 존재인지 정말 몰랐다. 여자는 보석만 주면 모두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나. 지금까지 그 무엇도 그를 이렇게 고뇌하게 하지 못했다. "소화제와 울렁임을 진정시키는 약을 지어드리겠습니다. 드시고 한숨 푹 주무시면 좋아지실 겁니다." 약 가져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계속 수건으로 그녀 이마의 땀을 닦아 주었다. 여전히 열은 뜨겁게 오르고, 힘든지 호흡이 고르지 않았다. 아픈 사람 붙들고 긴 말은 할 수 없어서 휴고는 당장 다른 생각은 다 멀리 치워버렸다. "왜 이렇게 미련해? 아프면 사람을 불렀어야지." "괜찮아질 줄 알았어요." "큰일 날 뻔했어. 의식이 없었다고." "새벽인가요? 일찍 떠나셔야 할 텐데 제대로 못 주무셔서 어떡해요." "지금 그걸 문제 삼는 게 아니잖아." 그는 그녀에게 화내지 않기 위해 한껏 목소리를 낮추었다. 화를 낼 만큼 그녀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단지 그의 마음이 서운할 뿐이었다. "자주 아프다며." "제가요?" "두통." "아... 그건 그냥.. 흔한 거예요." "완치할 수 없는 건가?" 루시아가 가볍게 웃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굉장히 중병 같은걸요. 심각하지 않아요. 자주 배앓이 하는 사람과 비슷해요. 어쩔 수 없는 거죠." "심각하건 그렇지 않건 난 당신이 아픈 것이 싫어." 그의 어머니가 아이를 낳고 금방 돌아가셨기 때문에 병에 걸리는 것에 그가 민감한가보다, 루시아는 생각했다. "아프지 않게 조심할게요." "뭐라는 게 아니라.. 어디 아프거나 다치면 내게 숨기지 마. 당신 남편으로서 그 정도는 알 자격 있어." "그럴게요." 하녀가 약을 가지고 들어왔다. 휴고는 그녀를 안아 일으켜 약 먹는 것을 돕고 보송하게 마른 잠옷을 입혀 주었다. 약을 먹고 루시아는 곧 잠들었다. 그걸로 한밤의 갑작스런 소란은 마무리가 되는 줄 알았다. 날이 채 밝기 전부터 루시아는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약을 먹은 것까지 모두 토해내고 열이 올랐다 내리기를 반복하며 끙끙 앓았다. 그녀의 열을 내리느라 휴고는 밤을 꼬박 새웠다. 다시 호출되어 달려온 안나에게 휴고는 분노를 표출했다. "체한 것이라 하지 않았나? 어찌 된 것인가! 약도 넘기지 못하는데!" 북부 귀족들이 보았다면 불 뿜는 용으로 화한다는 타란 공작의 소문을 떠올렸을 것이다. 처음 접하는 공작의 노기에 안나는 손끝이 저릴 정도로 긴장했다. 그리고 마님께 성분을 모르고 올렸던 필립 경의 치료약을 마님과 둘만 알기로 한 것이 천행임을 깨달았다. 공작이 그걸 알았다가는 목이 간당거릴 것 같다는 본능적 예감이 들었다. "아.. 아무래도 단단히 체하신 것 같습니다. 혹시 마님께서 충격을 받으시거나 크게 놀라는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심리적인 요인이 더해지면 체증이 더 심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왕의 죽음을 전한 것 외에 평소와 다른 일은 없었다.' 그 일로 그녀가 그렇게 충격을 받았다고? '그가 친부에게 아무 정이 없어서 그런지 보통 사람이 부모의 죽음에 품는 감정을 간과했다. 어릴 때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녀는 어머니 이야기는 곧잘 했으나 아버지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도 혈육인데 말 못할 감정의 찌꺼기가 있을지 모른다. 죽음 소식을 전하는데 너무 배려가 없었다. 자신의 무신경함에 화가 치밀었다. 루시아는 먹으면 토하기만 해서 이틀 내내 보리차만 마시다가 사흘째 되는 날 겨우 묽게 쑨 미음을 먹기 시작했다. 미음을 겨우 반 그릇 정도 비우고 다시 침대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수도로 올라가는 일에 내가 너무 걱정이 많았나 봐.'이렇게 단단히 체한 건 처음이었다. 서늘한 손이 이마에 닿는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그가 옆에 있었다. "... 열은 이제 좀 내렸군." 그는 수도로 올라가는 일정을 차일피일 미루고 곁에 붙어있다시피 했다. 미안하고, 고맙고, 그의 일에 차질이 생길까 걱정이었다. ".. 이젠 정말 괜찮아요." 괜찮다는 소리는 아주 입에 붙었다. 아픈 사람에게 불편한 감정을 내비치고 싶지 않아서 휴고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미음을 조금 먹었다며. 속은 편안해?" "네. 이제는 소화가 되는가 봐요. 울렁거리지 않아요." "다른 불편한 곳은? 식사를 그리 못했는데 어지럽지는 않나?" "며칠 안 먹는다고 안 죽어요. 그냥 좀 체한 거예요." "죽을병이어야만 병인 건 아니지." 아플 때에도 그녀는 바라는 것이 없었다. 겁날 정도로 열이 펄펄 끓고 먹은 걸 다 토해내며 괴로워하면서 아프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창백한 환자의 안색으로 그를 볼 때마다 언제 수도로 가시느냐 소리만 반복했다. 당신 정말 독한 여자라는 말을 그는 몇 번이고 속으로 삼켰다. 내가 그렇게 의지가 되지 않는 건가, 상실감이 들고 곁에서 지켜보기에 애가 탔다. "... 수도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재촉이 이젠 한계에 달했다. 서신만 줄기차게 보내던 태자가 참다못해 보낸 사람이 오늘 새벽에 들어왔다. 최소한 국장 기간이 끝나기 전에는 수도에 올라가야 했다. 아픈 그녀를 두고 가야 한다는 사실이 그는 몹시 짜증스럽지만 아내가 아프다는 핑계를 댈 수는 없었다. 막말로 죽을병에 걸린 건 아니었으니까. "전 괜찮아요. 가셔야 하잖아요." 전혀 그를 성가시게 하지 않는 그의 아내. 그런데 부디 성가시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녀가 가지 말라고 붙잡으면 아마 그는 다 때려치우고 곁을 지킬 것이다. 내 여자가 아파서 누워 있는데 왕이 죽은 것 따위 뭐가 대수인가. "푹 쉬어.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꼬박꼬박 약 먹고 식사도 챙기고." "갈수록 잔소리 는다는 것 아세요?" "싫으면 걱정하게 하지 마." 힘없이 웃는 루시아를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머리에, 이마에, 그리고 바싹 마른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비비안. 정말 괜찮겠어?" 걱정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하는데도 불안한 눈으로 한참 그녀를 보던 그가 결국 돌아섰다. 문이 닫히고 조용해지자 루시아는 앞이 흐릿해져서 눈을 깜빡였다. 눈물이 베개로 툭 떨어졌다. 아파서 그런가. 마음이 부쩍 약해진 것 같았다.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많이 아프고 힘들다고 투정 부리고 싶었다. [ 의지할 대상을 잃은 여자는 무너져 버린답니다. ]마담 미셀이 오래 전 해준 말이었다. 백작부인 말은 그른 것이 없었다. 제 발로 서지 못하고 그에게 의지하다가는 그가 떠나가면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마담 미셀이 말한 부부사이 적당한 거리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정확한 자가 있어서 정확히 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야. 얼굴 한 번 보기 힘들군." 과장된 반가움을 표하는 사내를 무심히 본 휴고는 별다른 반응 없이 그 앞에 털썩 앉았다. 그 무례함에도 퀘이즈는 전혀 개의치 않고 그저 기분 좋게 웃었다. "영지에 꿀 발라놨나? 공이 정말 1년이 넘도록 틀어박혀 있을 줄은 몰랐어." "영주가 영지를 잘 살피면 어차피 전하께도 좋은 일 아닙니까? 아니, 이젠 폐하이신가요?" "어차피 그리 될 일이지만 그래도 아직 즉위식은 안했으니까. 그런 걸 꼬장꼬장하게 따지고 드는 인사들이 있더라고." 퀘이즈는 어깨를 으쓱했다. 현재 왕권 대행 중인 그는 왕위는 당연히 자신의 것이다 자신하고 있었다. 태자가 왕위에 오른다는 명분을 뒤집기란 여간해서는 가능하지 않으니까. 호시탐탐 그의 자리를 노리는 배다른 형제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어도 그는 자신 있었다. 퀘이즈는 차를 마시며 무심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흑발의 사내를 보면서 꽤 오래 전, 자신의 충실한 조력자이자 책사였던 베너프 백작의 조언을 떠올렸다. [ 그는 맹수입니다. 전하. ]지난 해, 병사한 백작은 정말 아까운 인재였다. [ 길들여지지 않는, 길들일 수도 없는 야생의 맹수입니다. 그를 우리에 가두려 하지 마십시오. 배부른 맹수는 결코 코앞의 사슴도 탐내지 않는 법입니다. 그는 자신을 우리에 가두려는 자들을 적대하고자 기꺼이 전하의 곁에 설 것입니다. ][ 그의 충성을 기대하지 말라는 소리인가? ][ 불안한 충성보다는 확고한 동맹이 백번 낫습니다. 불경스러운 말씀이지만 어떤 왕도 타란 공작가의 충성을 얻은 적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타란 공작가는 건드리지 않는 이상 결코 웅크린 몸을 펴지 않습니다. ][ ... 그대 말대로라면 맹수를 등 뒤에 두라는 말이 아닌가. 목줄도 채우지 말고. ][ 전하 등 뒤에서 덤비는 자들 목줄기를 물어뜯어 줄 겁니다. 타란은 원래 가진 것이 많습니다. 전하께서 더 주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가 가진 것을 인정만 해 주어도 충분합니다. ]승하한 헤세 8세는 공보다 과가 많은 왕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치세는 상당히 길었다. 그가 가장 잘한 일은 타란 공작가를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헤세8세는 알려진 것보다 현명한 군주였다. 타란 공작가는 이상한 가문이다. 정확히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건국 시에도 이미 타란 가문은 존재했다. 당시 타란은 제논 건국에 지대한 공을 세우고 왕족 대우로 대공의 지위를 받고 대공령 자치권을 가졌다. 거의 형식적이었으나 왕위계승권까지 있었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정계에 진출하지 않았다. 절대 왕권을 추구한 2번째 왕조 때 모든 대공들이 대공의 지위를 빼앗기고 공작위를 받았다. 대공령은 영지로 격하되었다. 당시 대공들은 반발하다가 가문이 멸족의 길을 걸었는데 타란은 순순히 그러마 해서 오히려 왕위계승권은 여전히 보장받았다. 그 때도 타란은 정계에 관심이 없었다. 세월이 오래 흐르고 수많은 가문이 생멸을 반복하며 제논에 3번째 왕조 헤세가 집권했다. 타란은 여전히 건재했다. 또한 왕위계승권을 가진 유일무이한 공작이었다. 왕족이 모조리 죽지 않는 이상은 실현 불가능한 거의 형식적인 순위이긴 하지만 어쨌든 타란 공작은 거의 준왕족 대우를 받았다. 그 동안 타란 공작가는 정치에는 전혀 나서지 않았으나 전쟁을 통해 존재감을 더 강하게 드러냈다. 타란이 있기에 제논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기 시작했다. 왕비 혹은 재상을 몇 번 배출한 다른 공후작 가문보다 사람들 뇌리에 타란은 더 강렬하게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타란은 단 한 번도 왕권에 도전하거나 영지를 넓히지 않았다. 제논 건국 시 받았던 영역 그대로였다. 타란의 영지는 꽤 넓지만 가장 골치 아픈 부족국가와 국경을 마주했다. 야만족의 수없는 침략 방어는 타란 공작가의 몫이었다. 그 외에 전쟁이 일어나면 선봉에 서서 다 처리해 주었다. 어떤 왕은 그런 타란 공작가의 드러나지 않은 힘을 두려워해서 적대하기도 했는데 그러면 꼭 말년이 안 좋았다. 헤세 8세는 타란 공작가를 오롯이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길을 택했고, 퀘이즈 역시 그럴 생각이었다. "신혼 생활은 어땠나? 공작부인이 영지에 틀어박혀 지내는 걸 답답해하지 않았나보지?" 새신부가 칭얼대면 못 이겨 두어 번은 수도에 올라올 줄 알았다. 그렇게 발길을 딱 끊을 줄은 몰랐다. 일간에서는 태자와 타란 공작의 유대가 위험해진 것 아니냐 제멋대로 추측하기도 했다. 퀘이즈는 반대파가 타란 공작을 영입하려고 무수히 접근함을 알지만 내버려뒀다. 공작은 권력의 향방에 양 발을 딛고 줄타기 하는 짓을 절대 할 사람이 아니었다.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귀찮으니까. 그런 거 안 해도 타란은 건재하고, 타란은 정계에 관심이 없다. 퀘이즈는 그걸 알기에 걱정이 되지 않았다. "조용한 걸 좋아해서 그러지 않더군요." "별나군." 같은 누이인데 그렇게 다른 건 어머니가 달라서인가. 퀘이즈의 동복누이 캐서린은 파티광이었다. 아마 드레스와 보석, 그것을 자랑할 파티가 없으면 살지 못할 것이다. 눈만 높아서 결혼할 생각은 안하고, 더 나이가 들면 고를 사람도 없다는 말에도 들은 척 하지 않고 있다. 하긴 누구와 결혼해도 그 허영을 어찌 맞추고 살지 오히려 남편 될 쪽이 걱정이었다. ============================ 작품 후기 ============================마르티네리스 님, 함께행복하기 님, 월급루팡 님, 이쁜효니 님, 련89 님, jwieer12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그냥 급체입니다. 정기적인 편두통 또한 경험자로서 중병 아닙니다. ㅋㅋ 모두 너무 겁을 내시는군요. 지나간 내용은 문장, 용어, 일부 지적받은 내용을 반영해 가끔 수정하고 있습니다. 내용상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닙니다. < -- 수도 -- > "공. 결혼 한 번 더 안 할 텐가?" 누이는 타란 공작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공작이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파티광 누이는 일주일이나 두문불출했다. 왕족을 제외하면 일부일처가 법으로 되어 있으나 타란 공작은 빠져나갈 구석이 있었다. 공작 정도 되면 한두 명 후실을 들여도 법을 들먹이며 뒷말 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누이가 정실이 아닌 후실로 들어간다 해도 퀘이즈는 상관없었다. 타란 공작가 정도라면 불만 없다. "헛소리 하시려고 저 불렀습니까?" 안 그래도 퀘이즈를 보자 앓고 있을 그녀가 떠올라 심란하던 참이었다. 수도가면 바람피울 거냐는 그녀의 말이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때지 않는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곳이 수도 소문이라 저도 모르는 소문을 그녀가 듣고 오해하면 어쩌나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퀘이즈의 말은 끓는 기름에 물을 부은 격이었다. "해보는 말이지. 아무리 공이 결혼했어도 아마 방금 내가 한 말 같은 제안은 수없이 받을걸." 휴고가 과하게 정색하자 퀘이즈는 냉큼 발을 뺐다. "그런 득 될 것 없는 짓을 안 합니다." "득 될 것 없다니. 삼처사첩은 사내들의 꿈이지." "그 꿈 전하께서나 이루고 사십시오. 왕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겠군요." 퀘이즈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타란 공작은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고 참 애매했다. 여자들은 끊이지 않으면서 잘라낼 때는 가차 없었다. "... 그 후계 아들 말이야. 정말 그럴 셈인가?" "그럴 셈입니다." "아니 이젠 결혼을 했잖아. 앞으로 아이가 태어날 텐데. 아무리 공의 장자라고 해도 그렇지..." 그래봤자 사생아 아닌가? 라는 말을 퀘이즈는 입안으로만 삼켰다. 타란 공작의 혼외자 아들이 차기 공작위를 잇는데 아무 잡음 없도록 적극 지지해 주는 것. 그게 퀘이즈가 타란 공작을 정계로 끌어올 수 있었던 조건이었다. 혼외자가 타란 공작의 작위를 이어받는 일은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암묵적인 사회적 관습을 깨뜨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퀘이즈는 타란 공작을 얻기 위한 조건이라면 아주 쉽다고 생각했다. 퀘이즈 자신이 적자가 아니라 그런지 그런 문제에 고루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그가 결혼하자 퀘이즈는 조금 떨떠름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반쪽 누이지만 그래도 누이라고, 낳은 자식이 허수아비 취급받을 것이 괜히 기분 좋지는 않았다. "... 언제부터 제 사생활에 그리 관심이 많으셨습니까? 하실 말씀이 그런 거라면 가겠습니다." "아, 알았네. 사람하고는. 결혼을 해도 여전히 뻣뻣하구만." 퀘이즈는 타란 공작의 사생활에 아주 관심이 많았지만 이쯤에서 일단 접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그와 이후 국정의 향방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몇몇 중추적 인물들이 더 가세해서 이어진 논의는 비공식적이지만 참여한 사람 면면을 보면 거의 국무회의나 다름없었다. 꽤 길게 이어진 논의를 마치고 일어나며 휴고는 아까부터 계속 아는 척 하고 싶어 미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적발 사내의 어깨를 탁탁 두드려 주었다. "수고 많았다." 그저 좋다고 적발 사내, 로이 크로틴은 히죽 웃었다. 휴고가 가버리고 나서도 주인 기다리는 개처럼 몇 번이고 문 쪽을 바라보는 로이를 보다 못해 퀘이즈가 말했다. "크로틴 경. 정말 내 기사가 될 생각 없어?" "없는데요." 처음에 타란 공작이 기사를 하나 호위로 붙인다 했을 때 그 출신이 본디 평민이라는 말에는 조금 언짢았다. 더구나 예의 모르고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타란 공작의 측근만 아니었다면 진즉 호위고 뭐고 내쳤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진가가 드러났다. 지난 1년 크로틴 덕에 목숨을 구한 적이 부지기수다. 날고 기는 암살자들을 크로틴은 마치 벌레 잡듯이 때려잡았다. 그의 엄청난 실력을 알게 된 퀘이즈는 크로틴을 자신의 기사로 들이려고 틈날 때마다 꾀었지만 크로틴은 생각해 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 "대체 이유가 뭐야? 내 기사가 되면 지금 받는 것보다 많은 봉록과 권력을 가질 수 있는데. 그게 전혀 탐나지 않나?" "별로 관심 없어요." "대체 공작이 무얼 주기에? 기사로서 그를 존경하기 때문인가?" "좀 더 현실적인 이유죠. 주군이 비무 해주시거든요." "비무? 그건 어디서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죽을힘을 다해 덤벼도 상대가 다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건 주군뿐이라서요. 그런 재미는 딴 데서는 못 찾죠." "... 그렇군" 살짝 질렸다. 크로틴은 퀘이즈의 기사 그 누가 덤벼도 수십 합을 넘기지 못하는 대단한 실력자였다. 그것도 적당히 완급을 조절해 준다는 게 빤히 보였다. 제 주변에는 늘 최고의 기사만 있다는 자부심을 가졌던 퀘이즈는 충격이 컸다. 그리고 곧 인정했다. 자신의 기사들이 약한 것이 아니라 크로틴이 무시무시하게 강했다. '그렇게 타란 공이 강하다고?' 퀘이즈는 타란 공작이 전쟁터에서 검을 휘두르는 것을 수도 없이 직접 보았다. 대단하다는 건 알았지만 양떼 무리 속에 달려든 범처럼 압도적이라 딱 집어 어느 정도 실력이라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타란 공이 누군가와 비무하는 건 한 번도 보지 못했군.' 타란 공작이 검을 들 때는 적을 죽일 때뿐이었다. 생각해보면 참 무시무시했다. 기사 같은 무인은 대개 힘을 과시하기 좋아하는데 타란 공작은 기사임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검을 들지 않은 타란 공작과 마주하면 가끔은 그가 기사라는 걸 잊게 된다. "비무하면 누가 이기나? 경도 이겨본 적은 있겠지?" 로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태자 앞에서도 거리낌 없는 태도가 무례하지만 워낙 그래서 이제는 다들 그러려니 했다. "이겨요? 제가요? 그게 제 인생목표인데요. 이루어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단 말인가?" "주군은 비무도 사실 잘 안 해줘요. 귀찮다고. 죽이지도 못 할 거 뭐하러 힘 쓰냐고 하시더군요." "....." "어쩔 때는 검을 뽑아서 상대도 안 해주시죠. 검집 채 휘두르면 조심해야 돼요." "... 왜?" "기분이 별로라는 거니까요. 그럴 때는 비무고 뭐고 그냥 막 패요.." "... 그 대접을 받고도 거기가 좋은가?" "그야 전 주군이 신뢰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니까요." ".. 패는 것이?" "그게 신뢰의 증거죠. 주군은 때리는 귀찮은 짓을 하느니 그냥 죽이거든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의외의 수확은 있었다. 타란 공작은 알려진 것보다 상당히 성질이 더럽다. "타란 공!" 휴고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를 부른 목소리 주인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뒤를 몇 명이 뒤따라왔다. "시간이 괜찮으시면 함께 어울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서글서글한 미소를 짓고 있는 청년은 백작 데이빗 라미스. 라미스 공작의 장자로 성년이 되었을 때 부친의 영지 일부와 함께 백작위를 받았다. 태자와 사사로이는 처남 매부지간이었다. 퀘이즈가 왕이 되면 장차 권력의 중추에 오를 것이 확실시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나이는 휴고와 같았지만 그와 휴고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존재했다. 휴고는 공작이며 일가의 주인이지만 데이빗은 공작의 후계에 불과했다. 그러니 데이빗이 휴고를 타란 공이라 부르며 불러 세운 것은 몹시 무례한 짓이었다. 휴고를 그리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공작 이상은 되어야 했다. 굳이 따지고 들면 공작도 휴고에게 존칭을 써야 했다. 형식적이기는 해도 타란 공작의 위치는 준 왕족 대우였다. 겉으로는 붙임성 좋게 웃고 있으나 그 안에 감추어진 치기 가득한 경쟁심을 휴고는 읽어냈다. 애송이. 휴고는 비웃었으나 겉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다. "내가 어울릴 자리가 아닐 것 같소." 휴고는 데이빗을 비롯해 그 뒤에 붙어 있는 추종자들을 짧게 일별한 후 답했다. 라미스 공작 체면을 생각해 적당히 예를 갖춰 대해 주었다. "하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께서 함께 해 주신다면 자리가 더욱 빛이 날 텐데요." "나만 빛이 날까봐 염려되어 하는 말이오." 비꼬아 말하는 속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는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데이빗의 눈에 당황이 어리고 귀가 붉어졌다. 면전에서 이렇게 까이는 건 처음이었다. 주변의 모든 사람은 데이빗을 차기 공작으로 떠받들며 충복이 되기를 자처했다. "하하하. 정말 듣던 대로 거침없는 분이시군요. 부디 고견을 나누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런 건 부친께 들으시오. 부친께도 들을 것이 더 이상 없거든 찾아오든지." 휙 돌아서서 멀어져가는 타란 공작을 더는 붙들 수 없었다. 모멸감에 주먹을 꽉 움켜쥐는 데이빗의 눈치를 살피던 추종자들이 슬슬 거북한 속을 긁어주었다. "기사 출신이라 그런지 정말 무례하군요." "우리 모임에 끼웠다가는 오히려 더 해가 될 겁니다." 데이빗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기사 출신이라고는 해도 대단한 분이지요. 그러니 태자 전하께서도 그렇게 신뢰하시는 것이겠지요." "그래도 어르신께 비하겠습니까. 장차 이 나라 왕후가 되실 분의 아버님 아니십니까. 멀리 보면 경은 이 나라 왕위에 오를 분의 외숙이 되시겠지요." 추종자의 아부에 그는 기분 좋게 웃었다. '흥, 아무리 잘난 척 해봐야 내 아버지를 넘을 수는 없을 거다. 태자 전하와 우리는 아주 단단하게 혈연으로 묶여 있는 관계이니까.' 휴고는 아예 안중에도 없었지만 데이빗 홀로 타란 공작에 대한 경쟁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데이빗보다 높은 지위와 권세를 지닌 귀족은 많았다. 그러나 모두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었다. 그러니 데이빗 나이 중에서는 경쟁자가 없었다. 타란 공작은 데이빗과 같은 나이에 이미 공작이었다. 전쟁터를 휩쓸며 명성을 얻었고, 태자가 그를 얻으려고 그토록 정성을 쏟은 건 이미 다 아는 사실이었다. 부친조차도 입이 마르게 타란 공작을 칭찬했다. 곰의 탈을 쓰고 있으나 실상은 여우라고 하면서 그 앞에서 말과 행동을 조심하라고 부친이 몇 번이고 경고했으나 데이빗은 "네." 대답은 하면서도 속으로는 코웃음 쳤다. 타란 공작이 등장하자마자 모든 사람들 관심이 그쪽으로 쏠리는 것이 무척 못마땅했다. 데이빗이 한 번 만이라도 전쟁터를 누비는 타란 공작을 봤다면 그런 생각을 못했겠지만 지난 전쟁 내내 안전한 후방에만 있었다. '그래봤자 본질은 무식한 기사일 뿐.' 그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며칠 후에 루시아는 훌훌 털고 일어났다. 고작 체한 것 치고는 꽤 오래 침대 신세를 졌지만 후유증은 없었다. 며칠 부실하게 먹었던 것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점심은 물론이고 저녁까지 테이블에 더욱 정성 가득한 요리가 올라왔다. 소화에 무리가 없는 것으로만 고르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제롬. 하녀들이 많이 줄었네요. 못 보던 얼굴도 있고." "예. 마님. 상당수가 고용 기간이 만료되었습니다." 마님 시중을 드는 고용인들 자세가 형편없다고 공작은 갈아치우라 명했다. 어차피 대부분 고용인들이 임시 고용상태였다. 나중에 자원자는 수도까지 데려가려 했지만 일이 이렇게 되어서 그냥 모두 계약 해지했다. 수도 저택에서 일할 하녀들은 수도에서 수소문해서 다시 구할 생각이었다. 이후 로암(성)을 관리할 최소 하녀만 남겼다. 1년 넘도록 수발을 들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는데도 마님은 그저 "그렇군요." 한마디로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처음에는 순진하고 여린 분이라고만 생각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제롬의 생각이 바뀌었다. 대개 첫인상에서 크게 벗어나는 사람이 드문데 공작부인은 그런 점에서 참 신기한 분이었다. '참 강한 분이야.' 결혼 하자마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시집으로 들어와 살게 되면 불안하고 외로워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면 의지할 사람을 찾고, 대개 그 역할은 손발처럼 수발을 드는 하녀가 맡았다. 안주인이 총애하는 하녀가 생기면 이른바 하녀들 사이에 서열이 형성된다. 하녀들 알력싸움은 흠뻑 젖을 때까지 알 수 없는 가랑비 같았다. 심해지면 집사의 권한을 침범하는 경우까지 발생해서 대부분 귀족가문 집사들은 그런 성가신 고민을 안고 있었다. 공작부인은 아랫사람을 다루는 선이 확실했다. 필요한 일만 딱딱 시키고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나무랄 일이 있어도 간단히 지적만 할 뿐 필요 이상으로 화내지도 않았다. 그런 점에서는 공작과 거의 비슷하게 닮았다. 매질 한 번 한 적 없는데도 고용인들이 주인 부부 내외를 굉장히 어려워하는 건 엉길 여지를 아예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부부금실이 좋기 때문일까?'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아마 두 분 사이가 소원해져도 공작부인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다. 공작부인은 마음이 외롭지 않은 사람이라고, 제롬은 생각했다. "전하께서 충분히 몸조리를 하시고 이달 말쯤에 수도로 올라오라고 전언을 보내셨습니다." "무슨 몸조리를 그렇게 오래 해요. 그냥 체한 거예요. 다들 너무 유난이에요." 제롬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마님께서 고열 때문에 당시 주인님을 제대로 못 보셔서 그럽니다.' 제롬은 휴고가 의사를 부르며 한 바탕 난리를 칠 때 응접실에 있었다. 침실은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새벽에 다시 불려간 안나가 하얗게 질려서 나왔을 때는 마님이 그렇게 심각하게 편찮으신가, 가슴이 덜컹했다. 마님이 겨우 진정되어 주무실 때, 침실을 나온 주인이 제대로 된 치료를 하지 못하겠냐고 안나를 얼마나 닦달했는지 모른다. 제롬은 주인이 그렇게 극심한 감정을 표출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쩔쩔매는 안나를 얼마간 동정했다. 아마 흰머리가 한줌은 늘었을 것이다. '마님께서 이대로 계속 주인님 곁에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부디 간절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차를 마시는 루시아의 느긋한 만족감을 보며 제롬은 생각했다. ============================ 작품 후기 ============================온새미로W 님, 퍼플케이브 님, 아드밀란 님, 허롱 님, 너무죠아 님, 10579aa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다음은 재회편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남주여주. 이젠 다들 아실 듯. < -- 수도 -- > 사람들은 타란 공작 가문에 대해 잘 모른다. 대단히 유명한 기사 가문이라는 사실 외에 그 이상으로는 잘 몰랐다. 북부는 땅이 거칠고 거주하는 인구가 적으며 야만족과 국경을 맞대 허구한 날 전쟁이 벌어졌다. 타란의 영지인 북부는 대단히 넓지만 누구도 탐내지 않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돈 될 구석 하나 없는 땅이었다. 물론 공작가가 가난한 건 아니었다. 아무리 볼품없는 땅이라도 그렇게 넓은 땅의 주인이 가난할리 없으니까. 무력과 재력을 지닌 타란 공작 가문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그 너머를 보려하지 않았다. 타란 가문은 대단히 오랫동안 이어진 가문이었다. 눈에 띄게 흥성하지 않았으나 기운 적도 없다. 세월의 저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타란의 영지인 북부는 굉장히 오랫동안 공작가의 지배를 받았고 북부에서 타란 가문은 왕이나 같았다. 귀족들이 하찮게 보는 백성들의 지지는 때로는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아마 타란 공작이 앞장서면 북부 사람들은 두말없이 모두 그 뒤를 따를 것이다. 타란이 지닌 무력은 가문에 속한 기사단이 아니라 북부 백성 전부였다. 그걸 다른 귀족들은 알지 못했다. 북부는 평온하다. 늘 야만족과 전쟁을 치르는 북부가 평온하다는 것은 모순이지만 그 전쟁을 제외하면 평온했다. 북부에는 다른 영지에는 수시로 발생하는 봉기가 없었다. 야만족과 싸우기 위해 사람들이 단결해 그렇다 생각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다 먹고 살만 하기 때문이다. 타란 공작가는 공작이 누구건 그럭저럭 북부를 잘 관리했다. 지나치게 세금을 거두어 착취하거나 권력으로 찍어 누르는 일이 없었다. 상과 벌이 확실하고 아무리 귀족이라도 이유 없이 사람을 해할 수 없었다. 법만 지키면 불합리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북부가 얼마나 살기 좋은지 북부 백성들은 알고 있었다. 땅이 척박해 농사를 열심히 지어도 겨우 먹고 살만한 수준이지만 굶지는 않는다. 오히려 부유하지 않다보니 타락이 없었다. 북부인들은 모두 건실했으며 정직했다. 그것이 북부의 엄청난 자산이었다. 그리고 타란 공작가가 지닌 재력은 사람들의 상상 이상 이었다. 오랜 세월 후계 싸움 따위로 진을 빼지 않으면서 공작 작위를 지키고 고스란히 유지한 가문의 재력은 새끼를 치며 엄청나게 불어나 쌓였다. 타란 공작가가 야만족을 토벌하며 야만족 땅에서 얻은 몇 개의 보석 광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타국에서 활동하는 거대 상단 몇 개의 소유주라는 것도, 타국의 땅이나 섬을 엄청나게 사들여 가지고 있다는 것도 누구도 몰랐다. 제롬은 타란 공작이 마음만 먹으면 이 나라를 전복하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전복하고 나라를 세워 그걸 운영하는 건 또 다른 문제이지만, 어쨌든 그가 지닌 힘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이상이다. 제롬은 집사이기에 아주 세부적인 것까지는 모르지만 대충 알고 있는 수준으로만 봐도 그랬다. 그런데 공작은 가문에 애착이 없었다. 공작은 뭔가에 얽매인 것처럼 가문을 이끌었다. 그건 공작이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라기보다는 뭔가 끈적거리며 엉켜있어서 끊어내 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거였다. 냉정한 공작은 아주 간혹 그의 내심을 드러낼 때가 있는데, 그 때마다 공작은 늘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다. 제롬은 그 이유가 마님이라고 확신했다. 어떤 이유로든, 어떤 형태로든 주인이 마님을 잃는다면 과연 어찌될까. 그 후의 일은 상상하기도 무서웠다. 로암을 떠난 마차는 거의 열흘 만에 수도에 도착했다. 결혼하고 로암으로 갔을 때보다 시간이 배가 걸렸다. 가장 빠른 경로가 가릴 것 하나 없는 황무지라서 태양이 내리쬐는 한낮에는 달릴 수 없었다. 저녁과 새벽 시간을 적극 활용했다. 속도는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여정 역시 기사 딘이 호위했다. 지난 여정에서는 공작의 명이었다면 이번은 자청이었다. 딘은 순수한 마님에 대한 충심의 발로였으나 만약 딘이 아닌 다른 기사였으면 휴고의 심기가 불편했을 것이다. 휴고는 자신의 정예 기사들의 충심을 신뢰하는 편이고, 그 중 로이와 더불어 딘을 아꼈다. 말썽꾸러기 로이의 단순한 성품을 너그럽게 봐 주고, 실력을 믿는 것처럼 딘의 성실함과 진중함을 믿었다. 루시아는 1년 수개 월 만에 다시 보는 공작저를 보며 감개무량했다. 결혼 서약을 하고 오는 길에 그는 말했다. [ 수도에 머물고 싶으면 그렇게 해. ]그 때 그의 말을 받아들여 공작저에 홀로 떨어져 별거 생활을 택하지 않기를 정말 잘했다. 그랬다면 그와 영영 남처럼 지냈을 것이다. 지금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그를 알고 이해했다. 최소한 남들이 그들을 보고 겉만 부부라고 말하는 단계는 지났다. 저(邸) 안으로 들어서며 루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팔을 감쌌다. 무더운 바깥과 확연히 다른 시원한 내부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방열 기능을 완비한 뛰어난 설계 덕분이겠지만 루시아의 첫 인상은 집의 온기가 없다는 느낌이었다. 이곳에서 결혼 하고 며칠 묵었을 때는 몰랐다. 로암에서 지내다가 오니까 비교할 수 있었다. 차가운 돌벽의 로암이 이보다 더 따스함이 스며있었다. 꾸준히 관리를 했을 텐데도 역시 집은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이 실감이 갔다. 그리 오래는 아니지만 그가 이 차가운 넓은 집에서 혼자 지냈다고 생각하자 안타까웠다. "마님. 침실은 로암과 마찬가지로 주인님 침실 맞은편입니다. 여기 머무실 때 지내셨던 방과 복도를 두고 마주하고 있습니다." "내가 알아서 찾을게요. 바쁠 테니 일 보도록 해요." "예. 마님. 그리고 괜한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저택 밖으로 나가실 때는 뜰이라고 해도 반드시 하녀를 동반하십시오. 로암과 다르게 수도는 어디에 보는 눈이 있을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럴게요. 올라가서 한 숨 자야겠어요. 그이는 언제 들어오시지요?" "저녁까지 일정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늦으실 것 같습니다." 오늘 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루시아는 생각하면서 2층 침실로 올라갔다. 저녁 늦게 사람의 시선을 피해 모인 자리였다. 그 정도로 비밀스럽고 모인 사람 면면을 살피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거물이었다. 아마 이 사람들이 또 다시 비밀리 한 자리에 모이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태자 퀘이즈, 타란 공작, 라미스 공작, 필리프 후작, 데캉 후작. 태자를 제외한 4명의 공후작은 각자 지배하는 영지를 모두 합하면 국토의 반을 차지할 정도의 고위귀족이자 실세들이었다. "그래서 타란 공 생각은 어떻지?" 퀘이즈의 물음에 휴고는 잠시 생각했다. "전쟁은 일어납니다. 시기가 문제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 안에 반세력은 확실히 정리할 필요가 있지요." "으음..." 모두 침음성을 삼켰다. 종전이라 했으나 실제 휴전에 가깝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전쟁에 패해 많은 배상금을 물어야 했던 남서연합군 회원국들은 비싼 대가를 치르는 중이었다. 세금을 견디다 못해 곳곳에서 들고 일어나고, 내전에 휘청대며 일부 국가는 전복되어 왕조가 바뀌었다. 위기를 벗어나는 방법은 결국 전쟁일 수밖에 없다. "일단 내버려두고 저들이 힘을 키우도록 놔두자는 라미스 공 말씀에 동의합니다." "처음부터 그냥 정리하고 시작하면 뭐가 문제인데?" "괜히 가지만 치지 말고 뿌리째 뽑아야지요. 어설프게 청소했다가는 나중에 전쟁 중에 안에 적을 품고 있는 꼴 납니다." 반 태자 세력, 이른바 태자의 배다른 형제들을 어찌 처리할 것이라 논의하는 자리였다. 타란 공작과 라미스 공작은 일단 놔두고 나중에 치우자는 쪽이고, 두 후작은 깨끗이 정리하고 왕위에 오르는 것이 좋지 않겠나 하는 쪽이었다. 둘 다 일리가 있어 퀘이즈는 고민 중이었다. "타란 공이 결정권자라면 일단 지금은 놔둔다는 거지?" "아니요. 제가 결정권 있으면 지금 처리합니다." 엥. 다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휴고에게 시선을 모았다. "왜 말이 달라. 어설프게 청소하지 말고 나중에 뿌리를 뽑으라면서." "그게 정석이긴 합니다만 전 태자 전하가 아닙니다. 눈앞에서 거슬리게 알짱거리는 꼴 못 봅니다. 일단 다 죽여 놓고 시작 하는 게 성질에 맞죠." "... 아. 그런가." 퀘이즈는 문득 1년 수개월 전 타란 공작이 배신한 자들을 어찌 처리했는지를 떠올렸다. 1천명 가까이가 죽은 사건이었다. 북부 일에 어지간하면 관여하지 않는 부왕도 당시에 상당히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당시 부왕은 입막음으로 타란으로부터 거한 선물을 받았던 것이 틀림없었다. 마치 없던 일처럼 흐지부지 넘어가버렸다. "나중에 기어오르면 또 죽이면 되니까요. 지금 처리하신다고 해도 반대는 안 합니다. 뒷일 생각 안하고 다 잡아 죽이는 건 자신 있습니다만 그러면 곤란한 것 아닙니까?" 퀘이즈 표정이 떨떠름했다. 가축 잡아 죽이는 것도 아니고 사람 목숨을 벌레 잡듯 말하는 타란 공작을 완벽히 이해하는 건 평생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과격함이 드러날 때마다 퀘이즈는 묘하게 안심했다. 타란 공작이 여우같은 모사꾼 짓을 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었다. 세상일은 알 수 없는 것이고 단지 기분으로 사람의 일면을 파악하는 어리석을 짓을 할 퀘이즈는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어떤 사람을 파악할 때 그려지는 이미지를 본능적으로 신뢰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 음. 일단은 놔두고 상황을 지켜보도록 하지. 다른 분들 생각은 어떠시오?" 라미스 공작은 물론이고 후작 둘도 동의했다. 라미스 공작은 깊은 눈으로 타란 공작을 살폈다. 나이를 헛먹은 것은 아니었는지 그는 타란 공작이 부러 그리 말했다는 것을 눈치 챘다. 난 무식하게 그냥 지금 다 죽이고 싶은데 태자 네 생각은 어떤가, 하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그 반대쪽으로 생각을 굳히도록 몰아간 것이다. '으음...' 그는 무심코 자꾸 아들과 타란 공작은 비교하곤 했다. 아무래도 나이가 같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마다 아들놈은 필패. 애초에 그릇 자체가 달랐다. 타란 공작이 정계 권력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건 정말 다행이었다. 집에 돌아가면 다시 한 번 아들 녀석에게 단단히 경고해 둘 셈이었다. 괜히 치기로 타란 공작과 경쟁하려 할 생각을 하지 않도록. 아들 데이빗은 머리는 그런대로 비상한데 안하무인이었다. 어려서부터 우러름을 받기만 해서 무서운 것이 없다. 과감하게 일을 추진할 때는 장점이 될 수 있으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큰 문제가 될 것이다. 라미스 공작의 나이는 슬슬 사후를 걱정할 때가 되었다. 그런데 이제 막 왕이 될 태자는 한창 나이고 타란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왕의 치세에서 라미스 공작 가문을 지킬 사람은 그의 자식들이었다. 그러니 그의 관심은 후계 문제에 쏠려 있었다. 퀘이즈는 선왕을 닮지 않았다. 겉으로는 호인 같아도 대단히 성격이 강했다. 강한 왕권을 추구할 것이 분명한 왕에게서 가문을 지키려면 납작 엎드릴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점에서 데이빗은 불안했다. 저 잘났다고 들이받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데이빗보다는 로빈이 나을지도.' 라미스 공작은 자신감과 자존심이 너무 강한 데이빗보다 온순한 차남 로빈을 후계로 고려중이었다. 데이빗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주도할 수 없는 회의에 참석한다는 건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그는 조금은 그 동안 그가 주도했던 회의에 참석했던 가신들이나 지역 영주들의 노고를 이해했다. 어둠에 잠겨 있는 저택은 오늘 따라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수도로 올라오고 나서 그는 집에 들어갈 때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에게 집은 잠을 잘 곳이라는 외에 특별한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북부에서는 로암에 돌아가면 그를 기다리고 맞이할 사람이 있었다. 처음으로 집에 돌아간다는 기분이 뭔지를 느꼈다. 그녀가 수도를 향해 떠났다는 사실은 들었다. 절대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 오라고 했으니 시간은 좀 걸릴 것이다. 솔직히 그는 최대한 빨리 오라고 하고 싶었다. 마차에서 내리면서 휴고는 자신을 맞이하는 제롬을 보며 놀란 눈을 했다. "강녕하셨습니까. 전하." "언제 왔지?" "마님을 뫼시고 오늘 오전 도착했습니다." "별일은?" "여정 내내 마님께서는 무탈하셨습니다. 도착하시어 낮에 한잠 주무시고 조금 전에 침실에 드셨습니다." 듣는 둥 마는 둥 휴고는 제롬을 지나쳐 저택 안으로 들어가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 "듣는 둥 마는 둥 휴고는 제롬을 지나쳐 저택 안으로 들어가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 침실에 드셨습니다." < -- 수도 -- > 습관적으로 자신의 침실 문을 덜컥 열었다가 텅 빈 싸늘함에 잠시 가슴이 덜컹했다. 여기가 아니었다. 복도 맞은 편 문을 열자 어두운 침실의 침대 위에 누워 있던 그림자가 움직였다. "으음.. 지금 오시는 거예요?" 잠기운이 조금 묻어나는 목소리를 들으며 휴고는 심장이 뛰었다. 어떤 노래가 이보다 더 감미롭게 귀에 감길까. 성큼성큼 침대로 다가가 몸을 반쯤 일으켜 앉은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품안에 쏙 들어오는 부드러운 몸과 그녀의 체취가 몹시 그리웠다. 허전했던 그의 마음에 충만한 기쁨이 가득 차올랐다. 루시아는 강한 힘으로 꽉 누르는 그의 팔에 감싸이자 여행의 피로가 다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 그리웠던 그의 품을 만끽했다. 잠시 그렇게 서로의 온기에 취해 있다가 그가 그녀의 어깨를 양 손으로 잡아 품에서 떨어뜨리면서 그대로 입술을 겹쳐왔다. 뜨거운 살덩이가 입술을 가르고 입 안을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타액과 호흡이 뒤섞였다. 그의 입술이 격렬하게 맞부딪쳐왔다. 잠시 떨어졌다가 다시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몹시 달다는 듯, 애원하는 듯한 키스에 루시아는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그의 손이 얇은 잠옷 속을 파고들어 가슴을 꽉 쥐자 짜릿한 감각에 그녀는 흠칫했다. 가슴을 주무르고 곤두선 유두 끝을 손가락이 문질렀다. 그녀의 몸은 익숙한 그의 손길에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날이 더워 그녀가 입은 잠옷은 속이 반쯤은 비치는 하늘하늘한 소재였다. 잠옷 위로 더듬는 손에 그녀의 몸매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는 얇은 잠옷 위로 볼록 솟은 가슴 끝을 입술 사이에 넣고 살짝 힘을 주었다. "흐읏.." 자극을 받은 유두가 곤두서 있었다. 그는 잠옷 위로 도드라진 돌기를 혀로 핥으면서 이 끝으로 물었다. 그의 타액으로 축축하게 젖어드는 잠옷이 가슴에 찰싹 달라붙어 더 야하게 도드라졌다. 그는 얇은 막 너머로 느껴지는 그녀의 가슴을 마음껏 탐했다. 가로 막은 천이 거추장스러웠다. 부드럽고 달콤한 그녀의 피부를 맛보고 싶었다. 그는 그녀의 잠옷 앞섶을 잡아 그대로 옆으로 당겼다. 위에만 달려 있는 단추 몇 개가 튕겨 날아가면서 그의 손아귀 힘을 이기지 못한 얇은 잠옷이 북 소리를 내며 찢어졌다. 눈앞에 드러나는 하얀 과실을 그는 쭉 빨아 삼켰다. "하응!" 그녀의 손이 그의 머리카락 속을 파고들었다. 혀가 가슴을 굴리며 희롱하는 느낌에 허리부터 짜르르한 느낌이 올라왔다. 달아오르는 몸이 그를 받아들일 준비를 시작했다. 다리 안쪽이 뜨거워지고 아슬아슬한 감각이 몸 안에서 간질거렸다. 허리를 들썩이면서 두 다리를 오므려 꼬았다. 허벅지를 더듬는 그의 손이 팬티를 잡아 끌어내렸다. 순식간에 발목까지 내려온 팬티가 벗겨졌다. 그는 옷을 다 벗을 정신도 여유도 없었다. 바지만 내리고 그녀의 다리를 잡아 벌려서 허리로 둘렀다. 단단한 하복부가 바로 그녀의 은밀한 샘에 닿았다. 그가 조금 허리를 움직여 그녀의 입구를 문질렀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 괜찮아?"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입구에 맞닿은 뭉툭한 끝이 살갗을 밀어내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다급한 그의 몸짓에 비해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강하게 치고 들어가고 싶은 욕망을 참기 위해 그가 이를 악물었다. 근 보름만이라 급하게 했다가 부서질 것처럼 작고 약한 아내가 다칠까 걱정이었다. 그가 끝까지 다 들어오자 잠시 멈추었던 두 사람 호흡이 일시에 터졌다. 그녀의 작은 몸이 품기에 거대한 그의 흉기가 원래 있어야 할 곳을 찾은 것처럼 그녀의 안을 점령했다. 몸 안을 가득 채운 기분 좋은 압박감과 충족감에 그녀는 탄식처럼 한숨을 쉬었다. 좁게 수축한 질 안쪽을 빠듯하게 넓히며 들어온 그의 상징이 그녀의 몸 안에서 쿵쿵 박동치는 것 같았다. 너무 생생한 느낌에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파...?" "하아.. 아.. 니요." "좀... 힘이 들어갈 것 같으니까. 아프면 말 해." 그녀의 몸 안으로 무작스럽게 치고 들어가고 싶은 욕망을 참느라 휴고는 디딘 팔에 힘이 들어가 힘줄이 불거졌다. 그가 천천히 빠져나가더니 묵직한 힘을 실어 들어왔다. 통증 같은 아릿함에 그녀의 몸이 흠칫했다. 둔통은 아주 짧은 순간에 사라지고 등줄기를 따라 약한 절정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찌릿한 쾌감에 몸을 떨었다. 다시 천천히 쑥 물러난 단단한 끝이 좀 더 강하게 깊이 들어왔다. 루시아는 신음하며 그의 팔을 붙들어 셔츠 소매를 쥐었다. 그가 달려들어 키스할 때부터 예민하게 흥분한 그녀의 몸이 그를 적극 받아들이는 동시에 저항하는 것처럼 조여들었다. "흐읏..." "윽... 비비안.." 너무 좁아, 그가 거친 호흡으로 중얼거리면서 여린 속살을 죽 밀어내며 진입했다. 좁고 쫀득한 그녀의 안쪽이 어찌나 조이는지 그는 순간순간 아득했다. 그는 마구 달리고 싶은 갈망에 고삐를 쥐었다. 아직은. 그녀 몸이 조금 더 준비가 필요했다. 그 동안의 경험으로 이보다 훨씬 더 매끄럽게 물을 내어 길을 만들어 주어야 했다. 그는 마치 굶주린 짐승처럼 갈급한 몸짓으로 부드럽고 천천히 그녀의 몸을 열었다. 소중히 사랑받는 느낌이었다. 그건 어떤 격한 자극보다 그녀를 더욱 흥분으로 몰아넣었다. 엉덩이를 들어 그를 더 깊이 받아들였다. 완전히 맞물린 두 개 몸이 율동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가 조금씩 속도를 더하며 그녀의 속살에 마찰을 일으켰다. "응.. 좋아..." ".. 뭐?" 탁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중얼거린 그가 허리를 움직이며 그녀의 귓불을 깨물었다. 혀로 핥아 올리면서 크게 입을 벌려 한 입에 목을 물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목에서 팔딱거리는 맥박이 그녀 몸에서 풍기는 향의 근원인 것처럼 그는 강하게 쭉 빨았다. "다시 말해 봐." 그녀의 한 마디에 그는 척추를 따라 전율이 올랐다. 아무 기교도 섞이지 않은 한 마디 말에 하복부가 아파올 정도로 피가 몰렸다.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그녀의 진심이라 생각하자 큰 자극이 되어 그의 허리를 내리쳤다. "아! 응!" 그의 강한 추삽질로 그녀의 몸이 아래위로 움직였다. 루시아는 두 팔을 그의 목에 둘렀다. 고개를 그의 어깨에 묻자 상체가 살짝 떠올랐다. 그의 커다란 손 하나가 안정적으로 그녀의 등을 받쳐주었다. 빠른 움직임으로 그가 허리를 튕겼다. 그녀의 속살이 딸려 나올 것처럼 그의 성기에 착 달라붙었다. "핫.. 으읏.. 아.. 좋아.. 더 깊이.." "하. 당신 진짜." 그가 사납게 목 안으로 그르렁거렸다. "아! 아앗!" 정신없이 몸이 흔들린다. 다시 침대에 눕혀져 두 손을 그가 깍지를 껴 눌렀다.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쭉 빨아들인 그의 입술이 가슴 둔덕을 핥고 빨았다. 사납게 돌진하는 그의 남성이 속살을 마구 헤집어 민감한 안쪽을 찔렀다. 그녀의 질벽이 반응해서 파도를 타기 시작했다. "아아아!" 절정에 오른 그녀가 교성을 지르며 발끝을 오므렸다. 그의 것을 감싼 그녀의 내부가 격렬하게 움직였다. 그는 잠시 허리짓을 멈추며 필사적으로 사정을 참았다. 내부의 경련이 조금 잦아들자 그는 다시 뜨겁고 좁은 길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아! 아응! 휴!" 그녀가 애원처럼 교성을 질렀다. 촉촉하게 젖어드는 그녀의 눈가를 그가 키스했다. 그녀의 허벅지를 두 손으로 단단히 잡고 밀어붙였다. 그의 아래에서 흐드러진 그녀의 몸부림을 보며 그는 단 숨을 몰아쉬었다. 꿀을 입에 문 것처럼 달았다. 점차 고조되는 절정감이 마지막에 도달했을 때 그는 잇새로 신음하며 눈을 감았다. 경직된 그의 허리를 타고 정수리까지 쾌감이 치고 올라갔다. 그의 것이 울컥거리며 그녀의 내부에 정액을 쏟아냈다. 길게 이어진 그의 사정이 끝나자 두 사람이 몸이 그대로 무너졌다. 그의 호흡은 금세 진정이 되었지만 그녀는 꽤 오래 가슴팍이 오르내렸다. 그가 상체를 일으켰다. 몸 안 가득하던 그가 느릿하게 빠져나가자 허전함에 그녀는 흠칫 떨며 다리를 오므렸다. 온몸의 잔떨림이 계속 이어졌다. 그도 느껴지는지 그녀의 등 아래 손을 넣어 살짝 들어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밀착된 상태로 그녀는 호흡을 골랐다. 몸이 나른하게 늘어졌다. 여름이지만 체온이 닿는 뜨거움이 싫지 않았다. 그가 눈가, 입술 가리지 않고 얼굴에 자잘한 키스를 퍼부었다. "비비안." "네..." 소르르 잠이 올 것 같아서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한 번만 더 하자." 대답하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서로의 혀가 맞닿고 깊은 체온을 나누는 농밀한 키스가 이어졌다. 그녀는 숨을 할딱거리며 그의 키스에 호응했다. 어지러운 취할 것 같은 열기가 좋았다. 다정하건 뜨겁건 그녀는 언제나 그의 키스가 황홀했다. 그의 손이 루시아 허벅지 안쪽을 잡아 벌렸다. 여린 살에 금방 손자국이 남았다. "흑-" 그새 다시 힘을 받아 일어난 단단한 기둥이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가 쏟은 정액과 애액이 섞인 습한 내벽이 아무런 저항 없이 그를 쭉 삼켰다. 이러다 끝이 없겠다는 생각에 루시아는 양 손으로 그의 가슴을 짚어 밀어내려 힘을 주고 허리를 비틀었다. 그래봤자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힘으로는 어차피 당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약이 올라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매번 그러시잖아요." "봐 줘. 오랜만이잖아." "당신이 언제 그런 걸 따졌어요!" 매일 하나, 며칠 만에 하나 그녀를 가만 두지 않는 건 똑같았다. 매일 하면 하는 대로 괴롭히고 오랜만이면 그런 이유로 더 집요했다. 그는 물에서 건진 인어처럼 팔딱거리는 그녀를 간단히 제압해서 두 손목을 한 손으로 잡아 위로 올려 눌렀다. 그리고 한 손으로 그녀 허벅지를 잡아 허리힘으로 밀어 올렸다. 단번에 깊은 곳을 건드렸다. "흣.." "협조하면 정말 한 번만 더 할게." 그를 잠시 흘겨보다가 허락처럼 다리로 그의 허리를 더듬었다. 어차피 그가 순순히 물러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이 정도 제지를 해 두었으니 잠을 못자도록 붙들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끝을 모르는 체력을 자랑하는 그를 감당하다 못해 나름대로 익힌 요령이었다. 그는 가능한 그녀를 격하게 밀어붙이지 않으려 애썼다. 그녀를 상대로 하고 싶은 온갖 체위가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오늘은 참아야 했다. 정말 그녀를 배려한다면 오늘은 푹 자도록 두어야 했지만 그런 모순을 그는 무시했다. 지금 그는 욕망과의 싸움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계속 흔들어대는 그를 흐릿해진 눈으로 보면서 그녀는 간간히 신음을 흘렸다. 새삼 그가 옷을 입은 그대로 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의만 내린 상태로 허리를 움직이는 그의 아래에서 루시아는 나신 상태였다. 그 대조에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옷이..." "옷?" "옷이... 구겨지겠어요.." 그가 낮게 웃으며 확 쳐올렸다. "아!" "신경 쓰여? 당신은 벗고 난 입고 있는 것이?" "....." "벗을까? 그런데 벗으면 당신 오늘 못 자." 짓궂게 웃는 그에게 "벗지 마요." 짤막하게 대답하자 그가 웃으며 루시아 입술을 쭉 빨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단단한 팔이 루시아의 등을 감싸 어깨를 끌어안고, 루시아는 그의 어깨에서 가슴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있었다. 그는 물론이고 루시아 또한 나신으로 허리 아래쪽만 얇은 이불로 가리고 있었다. 지난 밤 결국 그는 옷을 다 벗어 던졌지만 약속은 지켰다. 루시아는 그의 가슴에 한 손을 얹고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렸다. 손바닥에 닿는 그의 가슴과 배에서 느껴지는 근육의 요철을 즐겼다. 허리를 감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그의 입술이 루시아의 볼에 닿았다 떨어졌다. "어쩐 일이세요?" "뭐가?" "게으름 부리고 계시잖아요." 그의 입술이 턱 아래 깊은 곳에 닿아 쪽 쪽 입을 맞추었다. 간지러워서 루시아 몸이 흠칫하며 웃음을 흘렸다. "가끔은 이런 날도 있어야지." 아침에 눈 떴을 때 그가 옆에 있는 것이 좋으면서도 낯설었다. 매일은 곤란해도 가끔은 이런 아침을 맞이하고 싶다고 말하면 그는 곤란해 할까. 루시아는 이 지나치게 부지런한 남자를 조금 더 침대에 묶어 두고 싶었다. 그 바람이 행동으로 나타나 손이 계속 움직였다. 탄력 있는 근육이 불거진 가슴을 손바닥으로 살살 만졌다. 단단한 근육의 느낌은 정말 근사했다. 가슴을 탐험하던 손이 뚜렷이 형태를 그리고 있는 복부 근육까지 내려갔다. 탁, 그가 루시아의 손목을 잡았다. 좀 더 만져보고 싶은데. 그의 방해가 야속해서 그를 보았지만 눈이 마주친 순간 작은 원망은 사그라졌다. 나른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붉은 눈동자 속에 뜨거운 기운이 맴돌았다. 그가 갑자기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아 품으로 확 끌어안았다. 두 사람 복부가 바싹 맞닿자 알몸인 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얇은 실크 이불뿐이었다. 이미 거대하게 존재감을 키운 그의 중심이 허벅지 안쪽을 찔러왔다. 얼굴을 붉히며 당황해 몸이 경직되는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며 그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유혹하는 건가?" 진득한 욕망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루시아는 저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가 부정하지 않고 그의 가슴에 고개를 묻자 이제 당황한 건 휴고였다. '왜 이렇게 귀엽게 굴지?' 수줍은 많은 아내는 날이 환히 밝은 시간에는 그와의 작은 접촉도 부담스러워했다. 평소라면 이런 기회를 마다할 그가 아니었다. 당장 숨 막히도록 키스를 하고 그녀의 하얀 나신에 틈도 없이 흔적은 남긴 후 아래로 눌러 뜨거운 그녀의 몸 안에 들어가... 젠장! 그는 소리 없이 포효했다. 오전에 도무지 취소할 수 없는 일정이 있다. 차려진 성찬을 두고 나가야 하다니!! 끄응. 그는 한숨을 쉬며 미련을 애써 물리쳤다. "나가봐야 해." ".. 네.." "더 자. 여행 피로가 아직 풀리지 않았을 테니." 말을 하면서 그는 좀 찔렸다. 여행 피로가 풀리기 전에 그토록 괴롭힌 건 정작 자신이었다. 푹 쉬게 해줬어야 하는데, 그는 형편없는 자신의 자제심이 한심했다. 혹시 또 탈이 나는 건 아니겠지 걱정스러웠다. 나갈 때 제롬에게 의사를 불러 진료를 받게 하라고 일러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보약도 지어 올리라고 해야겠다. 그녀는 너무 체력이 약했다. "네..." 웅얼거리며 대답하는 그녀의 턱을 들어 입술에 쪽, 입을 맞추고 휴고는 몸을 일으켰다. 협탁 위에 개어 놓여 있는 가운을 들어 걸쳤다. 그가 응접실로 나가는 것을 보면서 루시아는 고양이처럼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 작품 후기 ============================퍼플케이브 님, 매쉬매리골드 님, 이현(異現) 님, 웃음발작 님, 유제이UJ 님, eonchu 님, 와테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팬아트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제 뜰에 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퍼플케이브 님, 매쉬매리골드 님, 이현(異現) 님, 웃음발작 님, 유제이UJ 님, eonchu 님, 와테 님 쿠폰 감사합니다. < -- 수도 -- > 다시 일어났을 때는 거의 정오에 가까웠다. 루시아는 낯선 침실을 둘러보았다. 1년 넘도록 지낸 로암의 익숙함이 여기에는 없었다. 오히려 성보다 천장이 더 낮고 침실은 조금 더 작은데도 광활함이 느껴졌다. 이제는 여기서 지내는데 익숙해 져야 한다. 아마 기약 없이 꽤 오래 수도에서만 지내게 될 것이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루시아는 제롬에게 외출 준비를 말했다. "오래 못 본 지인을 만나러 가고 싶군요. 그런데 지인은 내 신분을 알지 못해요. 차차 이야기 하겠지만 오늘은 놀라지 않도록 눈에 띄지 않은 평범한 차림으로 다녀오고 싶어요." 루시아는 놀만을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수도에 오면 꼭 만나러 가야지 오는 내내 생각했다. 1년 넘도록 연락 한 번 하지 못했는데 걱정은 하지 않았는지, 그 동안 잘 지냈는지 궁금했다. "그 전에 마님. 의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의사라니요?" "주인님께서 나가시며 의사를 불러 마님께서 여행의 피로로 탈이 나지 않으셨는지 진찰하라고 하셨습니다." "......." 루시아는 살짝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렇게 여행의 피로를 걱정하는 사람이야말로 어젯밤 그녀의 수면 시간을 빼앗아 피로를 가중시켰다. "알았어요. 진료만 받으면 되는 거지요?" "보약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이 남자가. 잘 먹여 잡아먹겠다는 심보를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루시아는 자신의 몸이 약하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었다. 겉으로는 뼈대가 가늘어 체구가 작지만 잔병이 없는 건강한 몸이었다. 그런데 그와 결혼하고 나서 체력이 부족해 몸이 허덕인다는 것이 뭔지 알았다. 처음 신혼 한 두 달 차에는 몰랐다. 하지만 개월 수가 누적되어 1년이 훌쩍 넘자 안나가 닷새에 하루를 주장한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깨닫고 있었다. "... 그래요. 기왕이면 아주 농축된 영양으로 부탁해야 겠군요." "외출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마침 헤바 경이 있어서 호위를 맡기면 되겠습니다." 제롬은 루시아의 마음을 들여다 본 것처럼 착착 준비했다. 공작가 집사 같지 않은 투박한 재질의 옷차림을 하고, 딘 역시 기사라는 것을 알 수 없도록 가죽으로 된 갑주만 입어 흔한 호위처럼 보이게 했다. 마차 역시 타란 가문 문장이 없는 평범한 것으로 준비했다. 루시아가 말하는 방향으로 마차가 달려갔다. 루시아는 단출한 일행이라 생각했지만 그녀 모르는 비밀 호위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놀만의 2층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마차가 멈추었다. 마차에서 내려 놀만의 집으로 향하는 루시아와 몇 걸음 차이를 두고 제롬과 딘이 뒤따랐다. 루시아는 문을 두드렸다. 필 부인이 뚱한 얼굴로 나와 맞을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안에서 대답이 없었다. 몇 번을 다시 두드렸지만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외출한 건가. 놀만은 별로 외출을 하는 편이 아닌데. 외출했다 해도 필 부인이 있을 텐데.' 돌아서기 아쉬워서 문 앞에서 한참 서성거렸다. "루시아!" 멀리서 들려오는 외침에 몸을 돌리자 조금 멀리 있는 한 쌍 남녀 중 여자가 방방 뛰고 있었다. 루시아가 기억했던 깡말랐던 여자가 아니라 제법 살이 붙었지만 틀림없는 놀만이었다. "루시아 맞지!?" 놀만이 달음박질 쳐서 달려와 루시아를 와락 껴안았다. "세상에. 이게 얼마만이야. 어디 얼굴 좀 보자. 아유. 더 예뻐졌네. 얼굴 뽀얀 것 좀 봐." 놀만은 울먹이면서 루시아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이리저리 돌렸다. 공작부인의 귀한 몸을 함부로 대하는 광경을 보기 불편한 제롬과 딘이 슬쩍 시선을 돌려 피했다. 놀만은 호들갑스럽게 루시아 얼굴이며 손이며 만지면서 건강히 지냈구나, 다친 곳은 없구나, 같은 말을 몇 번 반복했다. "들어가자. 도대체 그 동안 어디서 뭘 하고.." "아 근데 놀만. 이 분은.." 루시아는 놀만과 함께 걷고 있다가 놀만이 먼저 달려가는 바람에 뒤를 쫓아와서 근처에서 뻘쭘히 서 있는 남자가 누군지 물었다. 남자는 아는 척 해 주는 것이 고마운지 냉큼 놀만 옆으로 붙었다. 놀만은 그를 밉지 않게 흘겨보며 팔꿈치로 툭 그를 쳤다. 친밀한 태도에 루시아의 눈이 커졌다. "인사를 잊을 뻔 했네. 토마스. 내 약혼자." "약혼자요?" 루시아는 놀라 큰 소리를 냈다. 놀만은 머쓱하게 웃으면서 토마스에게 간단히 루시아를 소개해 주고 얼른 가라고 쫓아냈다. 토마스는 같이 집에 들어가 대화에 끼고 싶어 하는 눈치가 빤했는데 놀만은 모르는 척 했다.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돌아서는 남자는 풍채가 좋고 순한 인상을 지녔다. 루시아 팔짱을 끼어 끌어당기던 놀만은 훤칠한 두 남자에게 관심을 보였다. "저 사람들은 누구? 혹시 너도.." 놀만이 루시아에게 야릇한 눈빛을 보냈다. 둘 중 누구야? 그런 눈빛이었다. 휴고가 들었으면 큰 일 날 오해를 루시아가 얼른 풀었다. "아니에요. 내 호위에요." "호위? 우와. 루시아. 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우리 할 말이 진짜 많을 것 같은 걸. 함께 온 분들은..." "저희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롬의 대답을 듣고 놀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차림새만으로 그저 그런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말투와 태도의 정중함에서 기품이 묻어났다. 남 밑에서 일하는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두 여자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2층 집을 주변으로 반경 어느 정도까지 주변을 경계하는 철저한 눈이 깔렸다. 루시아는 오랜만에 다시 들어온 놀만의 집안을 감상에 젖어 둘러보았다. 필요한 가구 외에는 꾸밈없이 건조한 응접실 분위기는 변함없었다. 놀만이 차를 내와서 둘은 소파에 마주앉았다. "필 부인은 어떻게 된 거예요?" "허리가 안 좋아서 그만 뒀어. 어차피 나도 곧 떠날 거라서." "떠나다니요?" "아까 봤던 약혼자 말이야. 그 남자 고향으로 가서 결혼하기로 했어." "놀만. 축하해요! 언제 가요?" "모레." "모레요? 이틀 뒤에 떠난다구요?" "그래. 하마터면 너를 못 볼 뻔 했네. 네가 올지 몰라서 이 집은 세를 놓아서 혹시 네가 오면 연락을 전해주기로 말 해놓은 참이었어." 루시아는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놀만은 루시아의 첫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그녀가 준 돈으로 드레스를 마련해 그를 만났고, 그녀가 해 준 조언에 용기를 얻어 타란 공작저를 찾아갔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루시아는 그와 결혼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편으로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루시아는 귀족과 평민 두 삶을 모두 경험했다. 그래서 평민이 바라보는 귀족이 어떤지 알고 있었다. 평민에게 귀족은 그들이 사는 세상에 전혀 섞일 수 없는, 땅과 하늘의 격차를 가진 존재였다. 공작 쯤 되는 고위귀족은 대다수 평민들은 평생 구경 한 번 하지 못했다. 놀만이 상대방의 신분에 따라 바뀌는 사람은 아니라고 믿지만 루시아의 진짜 신분을 아는 순간 마음의 거리를 느낄 수밖에 없다. 시녀인 루시아와 공주이자 공작부인인 비비안의 격차는 너무 컸다. 놀만에게 사실을 계속 숨기기는 괴롭고, 말하자니 그녀와 사이가 벌어질 것이 보여서 루시아는 내내 그것이 고민이었다. 이대로 놀만이 알던 루시아인 채, 놀만을 보내야겠다. 혹시 놀만이 살며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보살펴 주는 것으로 그녀 모르게 그녀의 평온한 삶을 지켜주고 싶다. "사실 나도 결혼했어요." "뭐? 정말??" "결혼하고 급하게 남편을 따라 먼 곳으로 가야 해서 놀만에게 연락을 할 수 없었어요. 미안해요." "그랬구나. 아니야. 내가 결혼을 하려고 하니까 뭐 그렇게 걸리는 것도 신경 쓸 것도 많은지. 이해해. 그럼 호위가 붙은 것도 남편이?"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놀만이 "좀 사는가 본데." 감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어떤 남자냐, 몇 살이냐, 어디 사냐, 어디서 만났냐, 쉴 새 없이 쏟아내는 질문에 루시아는 쩔쩔맸다. 루시아가 대답하기 곤란해 하는 기색을 눈치 채고 놀만도 자세한 건 묻지 않았다. 아무래도 평범한 남자와 결혼한 것 같지 않았다. 아까 호위라며 따라 왔던 남자들을 떠올렸다. '돈 많은 거상이나, 혹은 귀족과 결혼했는지도 몰라. 루시아가 어딘지 모르게 귀한 태가 나기는 했지.' "남편은 잘 해주고?" "네. 다정해요." "돈은 잘 벌고?" 루시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잘 벌어요." "밤에 그건.." "아우. 놀만!" "결혼 한 유부녀가 뭘 그리 순진한 척 해. 할 건 다 했을 거면서." 놀만은 얼굴이 빨갛게 물든 루시아를 보며 낄낄거렸다. 결혼 선배로서 후배에게 부부의 밤에 관해 조언해 줄 것은 없냐고 놀만은 루시아를 놀렸다. 루시아가 얼굴을 붉히며 입을 꼭 다물자 놀만은 그걸 보며 또 깔깔 웃었다. "네가 편지를 보내서 괜찮겠지 생각하려 했지만 사실 중간에는 좀 걱정을 했어. 좀 묘한 일이 있었거든." "묘한 일이요?" "내 소설 팬이라면서 어떤 여자가 찾아왔는데 누군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내 감으로는 귀족인 것 같았어. 드러내지 않으려 해도 말투라든가 행동이라든가. 뭔가 다르더라구." "귀족이라도 팬이 될 수는 있잖아요." "그건 그렇지. 근데 널 찾더라구." ".... 날.. 찾아요?" "몇 번 찾아오다가 네 인상착의를 말하면서, 네가 은행 계좌 만들 때 내가 보증했던 걸 묻더라. 왜 널 찾느냐 했더니 아는 사람이라 소식을 알고 싶다고 해서 그냥 아는 동생이라고만 했지. 막 캐묻는 건 아니었는데 은근히 네 얘기를 하도록 유도하기에 모르는 척 했어. 아는 사람 아니지?" "... 모르겠어요. 전혀 누군지 감이 잡히지 않아요." 누굴까. 루시아는 놀만까지 찾아와 자신에 대해 물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 그녀를 조사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아니라 그를 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그녀를 노릴 이유는 없지만 그의 정치적 정적들은 충분히 그를 노리기 위해 그녀를 이용하려 할 수 있었다. "지금도 와요?" "아니. 갑자기 딱 발길을 끊었어. 수개월은 넘었지. 그 후로는 한 번도 못 봤고." 루시아는 놀만에게서 자세하게 인상착의를 들어 기억해 두었다. 자신을 조사하려 했으니 분명 언젠가 접근해 올 것이다. "왜 그렇게 봐요?" 루시아는 놀만이 한참을 물끄러미 보자 물었다. "좀 변한 것 같아서." "오랜만이니까요." "아냐. 그런 거와 달라." 1년 넘도록 공작부인으로서 아랫사람들을 다루고 북부 사교계 귀부인들을 상대했던 여유와 노련함이 루시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놀만은 예리한 눈으로 그걸 포착했다. 하지만 정확히 뭔가 달라진 것인지, 이유가 뭔지 알 수 없으니까 그냥 뭔가 다르다 생각할 뿐이었다. "네가 없으니까 확실히 네가 얼마나 훌륭한 이야기꾼이었는지 알겠더라. 귀족 사교계 소식 들으려고 사람을 몇 번 사기는 했는데 네가 해주는 얘기만큼 재미도 없고 정보도 형편없었어."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있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타란 공작가 소식이었지." 루시아는 차를 마시다가 목에 걸릴 뻔 했다. "타란 공작이 결혼을 했대. 혹시 들은 적 있어?" "그.. 글쎄요." "하긴 뭐. 우리 같은 사람이야 귀족 누가 결혼하는지 시시콜콜 알지 못하지. 근데 타란 공작 결혼에 대해 소문이 흥미롭거든. 결혼식도 하지 않고 도둑 결혼하자마자 신부를 납치해서 영지로 끌고 갔다더라." "푹-" 루시아는 결국 입에 머금은 차를 뿜고 말았다. "왜 그래? 차가 너무 뜨거워?" "아.. 아니에요." 루시아는 놀만이 건네주는 손수건으로 치맛자락에 흘린 찻물을 닦아냈다. "어떡해. 얼룩 잘 안 지워질 텐데." "괜찮아요." "무슨 얘기.. 아, 그렇지. 타란 공작가. 아무튼 근데 공작부인이 된 여자가 나라를 망하게 할 정도로 엄청난 미인이라 공작이 눈이 뒤집혀서 그랬다고 하는데." "......" 루시아는 이제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나라를 망하게 할 미녀라는 공작부인이 놀만 눈앞에 있는 바로 나랍니다. "세간에서는 공작이 공작부인을 감금해서..." "노.. 놀만. 앞으로.. 여길 떠나서도 소설은 계속 쓸 거예요?" 더는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루시아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불확실해. 수도가 아니면 소설은 잘 팔리지 않으니까 돈이 될 지도 모르겠고. 그래도 그간 벌어 놓은 돈이 있으니까 걱정 없어. 약혼자가 고향에서 집안 대대로 상가를 운영하는데 벌이가 괜찮은가봐." "도대체 어쩌다 그렇게 된 거예요? 놀만은 사랑을 안 믿었잖아요." "그러니까 인생은 재밌는 거란다. 하하하." 장장 몇 시간에 걸친 놀만의 러브 스토리를 듣느라 오후가 훌쩍 지나갔다. 루시아가 듣기에는 그 동안 놀만이 쓴 소설에 비하면 굉장히 평범하고 진부한 만남과 연애였지만 놀만은 세기의 명작이라도 되는 것처럼 눈을 빛내며 이야기를 풀었다. 정말 놀만의 소설 속에 등장하던 여주인공처럼 사랑에 빠진 모습 그대로였다. "너는 어때? 행복하니?" 잠시의 간격을 두고 루시아는 "네. 행복해요." 라고 대답했다. 미소 짓는 표정에 묻어나는 행복은 거짓이 아니었다. 루시아는 진심으로 그와 함께 하는 오늘이 행복했다. 루시아의 진심은 놀만에게 충분히 전해졌다. 놀만은 기쁨과 안도가 섞인 표정을 지었다. "네 결혼 선물로 하면 되겠다. 이 집. 너한테 증여 처리했거든." ".... 이 집을요?" "은행에 네 계좌가 살아 있어서 은행장한테 맡겨 처리했어. 서류나 세금이나 다 처리했고 그냥 네가 받기만 하면 돼." "놀만. 이 집은 놀만이 처음으로 산 집이잖아요. 그런 귀한 추억이 있는 집을..." "그러니까 네가 받아줬으면 좋겠어. 이 집의 추억은 너와의 추억이니까. 팔고 싶지 않지만 내가 다시 수도로 언제 올지 알 수 없거든." 맞은편에 앉아 있던 놀만이 일어나 루시아 옆에 앉아 두 팔로 루시아를 꼭 안았다. "루시아. 네가 나이에 비해 너무 철이 들어서 늘 마음에 걸렸어. 꼭 행복해야 한다. 내가 살 곳 알려 줄 테니까 남편이 속 썩이면 나한테 와." "놀만. 고마워요. 난 놀만이 아니었으면..." 루시아는 목이 메어 말을 잊지 못했다. 둘은 서로를 안아 주며 울면서 재회의 기쁨을, 이별의 슬픔을 나누었다. 떠나는 날 배웅하겠다는 루시아를 놀만이 만류했다. 내일은 준비 때문에 하루 종일 정신없이 바쁘고 모레는 새벽 일찍 떠나니까 그런 수고 할 필요 없다고 사양했다. 놀만의 속마음은 호위까지 데리고 다닐 정도로 외출이 자유롭지 않은 루시아를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안에서 한참 인사를 나누었는데도 집 앞에 서서 아쉬움을 놓지 못했다. "잘 부탁합니다. 내가 동생처럼 생각하는 아이에요." 놀만이 제롬에게 당부의 말을 건넸다. "걱정 마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롬이 조심스럽게 루시아를 모시고 마차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놀만은 생각했다. '정말 괜찮아 보인단 말이야. 루시아 남편이 저런 사람이면 안심이 될 텐데. 에휴. 루시아가 이미 결혼을 했다니 내 작은 꿈은 끝났구나.' 놀만은 언젠가 루시아와 연락이 닿으면 토마스 남동생을 루시아에게 소개해서 둘을 결혼시킬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래서 아래동서로 데려와 평생 가까이 살고 싶었다. 나이 어린 루시아가 남자를 잘 몰라서 이상한 놈에 붙잡혀 고생하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운 마음과, 이제 혼자가 아니니까 안심이 되는 마음이 함께 했다. 마차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데도 놀만은 한참 동안 들어가지 못하고 서 있었다. ============================ 작품 후기 ============================햄톨 님, soohuynlove 님, 설은향 님, 허롱 님, 콜리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제 뜰은 제목 옆에 있는 작가 이름 클릭하면 뜰 가기 창이 뜹니다. 코멘으로 묻는 분이 계시더군요. 햄톨 님, soohuynlove 님, 설은향 님, 허롱 님, 콜리 님 쿠폰 감사합니다. < -- 수도 -- > 저녁 식사 시간에 휴고는 그녀의 외출에 대해 말했다. "외출을 했다고 들었소." "예. 오래 전 당신께 편지를 전달해 달라고 청한 지인이에요. 기억하세요?" "기억하오." 기억할 뿐만 아니라, 파비안이 지난 번 보고서를 올린 이후 여류작가를 더 밀착 감시 및 보호를 하고 있었다. 여류작가가 곧 결혼한다는 소식은 물론이고 상대 남자가 일부러 접근한 엄한 놈이 아닌지 신상까지 파악했다. 놀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란 공작가 정보부가 보증하는 수상하지 않은 남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제게 소중한 친구라서.. 수도를 떠난다는데 지낼 곳에서 혹시 무슨 어려움을 겪으면 도와줄 끈을 만들어 두고 싶어요." "조치하지." 그의 대수롭지 않은 승낙을 받고 그녀의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가 거절할 거라 생 각하지는 않았지만 쉽게 부탁을 들어주니까 마음이 들떴다. "그리고 혹시.. 저에 대해 소문이 돈다는데.. 아세요?" "수도에 소문은 언제나 많지." "정말 터무니없는 소문이라..."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고 포크로 접시만 뒤적이자 그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에 대해 나도는 소문은 파비안을 통해 모두 파악하고 있다. 소문이란 것이 대부분 터무니없어서 아주 악의적이지 않는 이상은 과민 대응하는 것이 오히려 역효과였다. 다행히 그녀에 대한 소문 중에 악질적인 내용은 없었다. 그가 모르는 안 좋은 소문을 그녀가 어디선가 들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그는 심기가 불편해졌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파비안을 불러 족칠 생각이었다. "소문은 원래 터무니없소. 어떤 소문?" 루시아는 조금 더 머뭇거리다가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차마 민망해 제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소문을 설명했다. "타란 공작부인이.. 대단한.. 미녀라서... 당신이 절 영지로..." "들어봤군. 그게 왜?" 별 것 아닌 소문이었다. 그녀가 지극히 불편해 하는 기색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는 물었다. 전혀 아무렇지 않은 그를 루시아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을 무슨.. 납치 감금범 쯤으로 묘사 했다구요." "나에 대한 소문 치고 그 정도면 양호한 편이지." 루시아는 꿈속에서 그에 관한 별별 소문을 다 들었다. 확실히 그가 자신에 대한 소문에 초연한 것을 이해했다. "하지만 절 무슨 세기의 미녀쯤으로 말하고 있어요. 어이가 없어서... 실제 제가 사교계로 나가면 사람들이 얼마나 수군거리겠어요." "왜 수군거린다는 거지?" 왜 이렇게 그가 말을 못 알아듣는지 모르겠다. "그야 전 세기의 미녀가 아니니까요." "무슨 소리요. 당신은 예뻐." 루시아는 순간 멍해서 그를 보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재빠르게 시선을 돌리자 고용인들은 모르는 척 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표정이 변하지 않는 고용인들이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 놀리지 마세요." "놀린 적 없어. 예쁘니까 예쁘다는 거지." 그는 간혹 짓궂게 그녀를 놀리기는 해도 실없는 농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이전에도 같은 말을 한 적 있었지만 그 때는 둘만 있을 때였다. 루시아는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정도로 달아오른 얼굴이 화끈거려서 도무지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대로 일어나 식당을 빠른 걸음으로 나갔다. 뜰로 나가는 그녀 발걸음을 뒤에서 강한 힘이 그녀 팔을 잡아 멈추게 했다. 어느 새 그가 바로 뒤에 있었다. "비비안. 내가 무슨 실수했나?" 예쁘다고 하면 좋아하는 것 아니었나. 그의 리스트에는 분명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녀의 반응에 당황했다. 루시아는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갑자기.. 창피해서.. 고용인들 앞에서 그러시니까.." "나 참. 고용인들 앞에서는 만지지도 말고, 이젠 말도 하지 말라고?" 루시아는 그의 허리를 두 팔로 끌어안으며 품에 기대 고개를 푹 묻었다. "네. ... 전 그런 거 싫어요." 대체 고용인들을 왜 신경 써야 하냐고 투덜거리면서 그의 손이 그녀 등을 감싸 마주 안았다. 그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루시아는 품에 고개를 비비며 배시시 웃었다. 행복하냐 묻던 놀만의 말이 떠올랐다. 행복해요, 라고 몇 번이고 대답해 줄 수 있었다. 그를 믿자고 생각한 이후부터 그녀는 조금 덜 불안하고 조금 더 행복했다.'그 놈의 소문.. 쓸데없이 놀리는 입을 하나하나 다 잡아 틀어막아 버릴 수도 없고... '다른 소문은 아무래든 상관없지만 그와 관련한 여자의 근거 없는, 혹의 과거의 추문이 나돌거나 그녀 귀에 들어 갈까봐 그는 요즘 걱정이 많았다. 덕분에 요즘 파비안은 밤낮 없이 소문만 수집하러 다니고 있었다. 수도에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 공작부인이 수도에 왔다는 소문은 퍼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세간의 시선에 시달리지 말고 쉬라고 휴고가 입단속 시켰다. 그래서 루시아는 아주 느긋한 며칠을 보내고 있었다. 이 휴식이 오래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동안 누릴 생각이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저택을 둘러보다가 뜰로 산책을 나왔다. 입구로 들어오는 대문에서부터 저택사이에는 꽤 넓은 평지가 있었다. 로암에는 방치되었을망정 정원이 있었지만 여기에는 정원 대신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시야를 가리는 나무들을 잔뜩 심었다. 그 사이로 소로가 쭉 놓여 있어서 산책하기에 좋았다. "오오!!!" 느닷없이 들려오는 큰소리에 루시아는 깜짝 놀랐다. 적발의 사내가 불쑥 나타나자 루시아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 이런 놀랐수? 나요 나. 우리 무지 오랜만이지요?" 적발의 사내. 로이 크로틴이었다. 그가 내미는 손을 잡으며 루시아는 일어났다. 그녀에게 로이는 특별한 인연이었다. 당시에는 몰랐으나 로이가 아니었으면 루시아는 결코 휴고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손님을 관리하는 일은 모두 제롬의 몫인데 빈틈없는 제롬 성격으로 봐서 그녀를 제대로 된 손님으로 판단해서 휴고를 만나게 해 주었을 리가 없다. 때마침 제롬이 자리를 비웠고 로이가 멋대로 루시아를 휴고와 만나게 해 주었다. 만약 그 때 거절당해 돌아섰다면 다시 찾아갈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 같다. 하늘과 로이가 동시에 도운 일이었다. "이젠 공작부인이시니 좀 다르게 해야 하나.. 근데 내가 좀 그런 거 잘 몰라서요." 히죽 웃는 로이의 얼굴에 악의는 없었다. 루시아는 싱긋 웃었다. "괜찮아요. 편한 대로 해요. 오랜만에 이렇게 만나 반가워요. 감사하다는 말, 꼭 하고 싶었어요." "감사? 뭘요?" "크로틴 경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공작 전하를 뵈었겠어요. 공작부인이 될 수 있었던 건 경 덕분이에요." "아니 뭐..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로이는 겸연쩍어서 턱을 긁적였다. 사실 로이는 당시에 루시아가 휴고에게 청혼할 때 파안대소한 일이 마음에 걸렸다. 비웃으려 한 건 아니었고 당시 상황 자체가 너무 재미있어서 그런 건데 사람들은 늘 로이의 말과 행동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오히려 감사를 듣자 조금 쑥스럽고 기분도 좋았다. '대체 이 사람이 왜 그런 악명을 지닌 걸까?' 꿈속에서 로이 크로틴은 미친개로 유명했다. 루시아는 로이와 딱히 접점이 없어서 소문으로만 들었지만 직접 마주한 로이는 악명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 솔직하고 쾌활하며 호의로 대하면 반드시 호의로 보답할 사람이었다.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되는구나.' 타란 공작을 둘러싼 소문에 의하면 그는 완전 피도 눈물도 없이 잔인한 괴물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소문만 해도 허무맹랑했다. 꿈속에서 대단히 많은 사교계 소식을 소문으로 접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들 중 대부분은 거짓이었을 것이다. 앞으로 직접 보고 들은 일이 아니면 소문에 귀 기울이지 말아야지, 루시아는 작은 결심을 했다. "그 동안 태자 전하 호위를 담당했다고 들었어요. 이 시간에 여기 있어도 괜찮아요?" "괜찮고말고. 난 더 이상은 죽어도 못하오. 주군 명이래도 더 이상은 못해! 1년 넘도록 아무데도 못가고 근접 호위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시오? 그나마도 간간히 덤비는 암살자 쳐 죽이는 재미만 없었어도 당장 때려치웠을 거요." "... 아. 네. 힘들었겠네요." "근데 주군은?" "안 계세요. 나가셨어요." "이런. 간만에 주군하고 한 판 하고 싶어서 달려온 건데." ".. 한 판..? 공작 전하와 싸우겠다는 거예요?" "음? 하하하! 싸우는 게 맞긴 하죠. 비무도 싸우는 거니까." "아.. 비무. 그거 위험하지 않아요?" "위험할 건 없소. 아마추어도 아니고. 어설프게 검을 휘두르는 것들이나 위험하지. 비무하는 거 구경한 적 없어요?" "없어요. 그래도 혹시 전하께서 다치시면..." 로이가 푸하하하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다치다니. 얼토당토 없는 말씀 하지도 마쇼. 세상에 주군 손끝하나 상하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걸요." '그가 정말 그렇게 대단한 기사일까? '그가 기사를 압도하는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 그가 검을 휘두르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해서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루시아는 꿈속에서 공방을 운영한 덕분에 기사라는 자들을 조금은 알았다. 고지식하고 단순한 면이 있으면서 가끔 성질이 폭발하면 눈에 뵈는 것 없는 성난 들소처럼 날뛰었다.' 그는 전혀 기사 같지 않아. '그에게서는 기사 특유의 거친 모습을 느낄 수 없었다.' 기사이기 이전에 공작이라 그런가..?'기사들을 제법 많이 보긴 했어도 귀족인 기사를 접한 건 아니었다. 그것도 무려 공작씩이나 되는 기사는. 그래서 살짝, 의문이 드는 것이다. 어쩌면 그가 공작이기 때문에 그가 지닌 무용보다 더 소문이 부풀려 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 타란 공작을 아는 사람이 들었다면 기가 막혀 입이 쩍 벌어질 생각을, 루시아는 하고 있었다. "크로틴 경!" 날카롭게 날을 세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제롬이 굳은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로이는 난처한 표정으로 실실 웃었다. "안녕. 오랜만." 제롬은 로이를 매섭게 노려보다가 루시아에게 정중히 말했다. "마님. 하녀를 대동하지 않고 혼자 다니시면 곤란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 이전에 그런 말을 했었지요. 조심하도록 하지요." 루시아는 자신의 경솔함을 자책하며 로이에게 살짝 목례한 후 두 사람을 남기고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까지 확인한 제롬은 다시 고개를 돌려 로이를 노려보았다. "대체 이게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타란 공작가 안주인이십니다. 이렇게 불쑥 나타나서 주변 사람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만날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어디에 숨은 눈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수도였다. 그리고 수도에서의 온갖 추문은 굉장히 별 것 아닌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미안." "조심 좀 하란 말입니다." "아, 미안하다고. 오랜만에 봐도 참 변하지를 않는구만. 그냥 나는 공작부인이 반가워서 그런 것뿐이라고." "사적인 감정 표현은 그게 무엇에서 비롯되었던 남편을 둔 여인에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주인님께서 언제까지나 관대하실 거라고 믿지 마십시오. 크로틴 경 때문에 마님을 두고 안 좋은 소문이 나면 굉장히 노여워하실 겁니다." "흐음. 하지만 주군은 여자 문제로 화내신 적 없는데." "그냥 여자가 아니라 마님이십니다. 말조심 하세요." 새끼를 감싸는 어미처럼 바싹 독이 오른 제롬의 모습이 낯설어서 로이는 눈을 껌벅거렸다. 공작의 여자들에게 무례하게 굴기로는 제롬도 못지않았다. 로이는 대놓고 그런다면 제롬은 은근히 긁는다고나 할까. 그런 점에서는 묘하게 쿵짝이 잘 맞았던 두 사람이었다. 다만 둘이 그러는 이유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로이는 재미와 심술로 그랬고, 제롬은 자기 본분을 망각해 공작부인이나 된 것처럼 설치는 여자들을 싸늘히 대한 것뿐이었다. 그 점만 제외하면 두 사람은 상극이었다. 고양이와 쥐 같은 관계였다. 재미있는 것은 무력이 훨씬 강한 로이가 쥐이고 제롬이 고양이였다. 로이가 사고를 치면 제롬은 엄청난 잔소리와 비난을 퍼부었다. 휴고에게조차 개개다가 얻어터지기 일쑤인 로이가 제롬에게만은 꼼짝하지 못했다. 제멋대로에 거칠 것 없이 나대고 다녀서 그런지 자로 잰 것처럼 정확하고 한 치 흐트러짐 없는 제롬에게 존경심 비슷한 자격지심을 느꼈다. "주군이 저 여자." 제롬이 매섭게 노려보자 로이는 얼른 말을 바꿨다. "공작부인을.. 좋아해?" "예." "많이?" "많이요." "으음.. 그럼 이전처럼 하면 주군이 화낼까?" "엄청 화내실 겁니다." 화내는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겠지. 제롬은 진심으로 로이가 걱정되어 강한 경고를 하는 중이었다. 다른 말썽이라면 주인님은 로이에게 관대했다. 하지만 마님과 관련한 일에 있어서는 절대 용서가 없을 것이다. "알았어. 뭐, 나도 저 여.. 공작부인이 싫지는 않아." "... 왜요?" "뭐랄까. 불쾌한 냄새가 안 나." "... 냄새요? 향수 냄새 말인가요?" 마님은 평소 과하게 향수를 뿌리는 편이 아니었다. 사실 그 점은 제롬도 좋았다. 귀부인들 뿌려대는 향수는 너무 지독해서 두 명만 모여도 냄새가 섞여 머리가 아팠다. "그건 아닌데.." 로이는 대체로 어떤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 기질을 본능적으로 파악하곤 했다. 아무리 주군 명이라지만 태자 곁에서 꼼짝없이 호위를 한 건 태자가 그런대로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얽매인 것을 싫어하는 로이가 휴고 곁에 붙어 있는 이유도 비슷했다. 주군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가 가장 컸고, 그 다음으로 주군 곁에 있는 사람 중에 특히 싫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암튼 그런 게 있어. 알겠으니까 조심할게. 주군 올 때까지 잠이나 잘래. 어디서 자면 돼?" "... 따라오세요." ============================ 작품 후기 ============================놀만이 남자인줄 알았다는 분이 많아서 충격 ^^;; 2화를 안 읽으셨나봐요 ㅎㅎ그 밖에도 작중에 '여류작가'란 말이 여러번 등장했답니다. < -- 수도 -- > 공작저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팔짱을 끼고 기대 앉아 있는 휴고는 생각 중이었다. 표정만으로는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가 없다. 맞은편에 앉은 파비안이 조심스럽게 주인 기분을 살폈다. "크로틴 경 행방을 알아볼까요?" 태자에게서 로이가 말도 없이 사라져 어디있는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무단이탈에 항명, 태만. 죄를 묻는다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녀석 치고는 오래 참았지." 파비안은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사실 1년 넘도록 아무 문제 일으키지 않고 이제야 이런 돌출행동을 했다는 사실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내버려 둬. 어디서 자다가 기어들어오겠지." 간만에 녀석에게 충고 좀 해야겠다. 약발이 떨어질 때가 되긴 했다. "호위 일은 이젠 그만해도 될 것 같고." 아직 태자이긴 해도 왕이 죽기 전과 죽은 후 왕권 대행을 하는 현재와 격차는 하늘과 땅이었다. 퀘이즈는 거의 왕처럼 철저한 호위를 받고 있었다. 지금 퀘이즈를 섣부르게 건드리면 반역으로 엮여서 가문 멸족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예. 전하." '예상대로군. 전하께서는 로이에게 관대하시니까. '로이가 들었다면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패는 게 무슨 관대냐고 버럭 하겠지만 파비안 뿐 아니라 주변인들 모두가 공작이 로이에게 너그럽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휴고에게서 로이와 같은 처우를 받지 못했다. 파비안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타란 공작에게 겁먹지 않고 끝도 없이 까불어대는 인사는 로이가 유일했다. 로이와 함께 있을 때의 타란 공작은 가끔 보통 사람처럼 보였다.' 미친개라.. 아주 딱 맞는 별명이지. '요즘 수도에서는 기사 크로틴을 칭할 때 광견 크로틴이라고 했다. 파비안은 가끔 공작에게 까부는 로이를 보면 저러다 일 나지 싶어 본인이 섬뜩했다. 그 녀석은 확실히 미친개가 맞았다. 미친개는 겁을 모르니까.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가 누구지?" "몇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파비안은 창밖을 내다보며 대충 현재 위치를 가늠했다. "가장 가까운 곳이라면 무슈 제프리의 의상실 혹은 마담 앙뜨의 의상실입니다." 남자 디자이너는 휴고의 선택지에서 제외였다. "마차, 돌려. 앙뜨 의상실로." 휴고의 명에 즉시 마차는 마담 앙뜨의 의상실로 향했다. 그녀는 분명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 중 하나였다. 유명한 디자이너가 몇이 있는데 그 중 누가 가장 유명하냐고 하면 딱 하나 뽑기는 애매했다. 어떤 스타일의 드레스를 선호하는가에 따라 첫손에 꼽는 디자이너는 사람 취향에 따라 제각각 이었다. 앙뜨가 오늘 큰손님을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앙뜨가 여자이고, 의상실 위치가 달리던 공작의 마차에서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타란 공작은 사전에 약속을 잡지 않았고, 폐점 시간에 느닷없이 방문했지만 VVIP대접을 받으며 특실로 안내받았다. 고급 의상실은 정치권력 정보에 굉장히 민감했다. 그들의 주 고객은 부자고, 부자는 대부분 고위귀족이며, 고위귀족은 대부분 권력자였다. 거대한 규모로 권력이 재편되는 지금 시기는 가장 민감했다. 불안요소가 있기는 해도 대부분 사람들은 태자가 무난히 왕이 될 것이라고 점쳤다. 새로운 왕의 최측근이 타란 공작이라는 사실은 돌아가는 분위기를 조금만 파악해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장차 감히 누구도 범접하지 못한 권력의 실세로 부상할 것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또한 공작가의 부유함은 덤이었지만 앙뜨에겐 그 덤이 더 매력적이었다. 콧대 높은 디자이너이자 의상실 주인 앙뜨는 어지간한 귀족들 앞에서 세우는 자존심을 감히 타란 공작 앞에서 세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매우 사근사근하고 다소곳하게 직접 손님맞이를 했다. "고명하신 분을 이리 뵈어 영광입니다. 전하." "길게 말하는 취미 없으니 간단히 하겠네." "하문하시지요." "내 아내 드레스가 필요하오." 화제의 공작부인! 앙뜨는 흥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표정관리를 했다. "혹시 동반하셨는지요? 마차에서 기다리고 계시는지..?" "의뢰하면 디자이너가 직접 방문하기도 한다고 들었소만." "예. 물론입니다. 전하. 언제 찾아뵈면 될는지요?" "내일..." 내일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오늘은 닷새의 하루 중 닷새째였다. 그녀가 수도 올라온 이후 사흘 연속 안았지만 여행 피로 때문인지 힘들어 해서 마음껏 못했다. 더구나 어제는 그의 귀가가 조금 늦었을 뿐인데 이미 그녀는 자고 있었다. 수도 올라오기 직전 그녀가 단단히 탈이 난 일 때문에 그는 조금 겁을 먹었다. 곤히 자는 그녀를 도무지 깨울 수 없어서 얌전히 안고만 잤다. 오늘은 어제 못한 것까지 뜨거운 밤을 보낼 작정이었다. 내일 그녀가 하루 종일 쉬면 다음 날 디자이너가 방문했을 때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계산을 마쳤다. "아니, 모레로 하지." "모레... 말씀입니까?" 앙뜨는 유명한 디자이너였다. 그녀에게 옷을 맞추고 싶은 사람이 줄을 섰다. 특히 다가올 대관식 때문에 요즘은 밤낮없이 바빴다. 한 달은 스케줄이 빽빽하게 꽉 차 있었다. 바쁘지 않은 평소에도 최소 일주일 여유를 두고 약속을 잡았다. 갑자기 당장 이틀 뒤 일정을 빼는 건 굉장히 무리한 일이었다. 앙뜨의 고민은 짧았다. 일단 눈앞의 고객이 너무 엄청났다. 공작부인이 앙뜨의 드레스를 입어서 얻을 수 있는 홍보효과와 당장 무리한 일정 변경으로 발생할지 모르는 손해를 비교해 주판을 튕겨보았다. 결혼하자마자 영지로 내려가서 누구도 제대로 한 번 본 적 없다는 공작부인은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귀부인들이 의상실에서 옷을 맞출 때마다 공작부인을 화제로 귀에 인이 박히도록 떠들었다. 공작부인의 첫 사교계 등장은 굉장한 관심일 것이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앙뜨는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소문의 공작부인을 볼 수 있다는 기대도 한 몫 했다. "내 아내는 좀 검소한 편이오. 그래서 드레스를 몇 벌 사는 것을 낭비라 생각하지." "어머나." "그리고 나는 내 아내가 공작가 안주인으로서 뭐든 최고를 가질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말씀입니까." "돈에 구애받지 말고 필요한 것을 전부 마련하도록 하시오. 내 아내를 어떻게든 구슬려 그걸 해내느냐는 그대 능력이오. 그 능력을 봐서 차후에도 그대와 거래를 계속할지 결정하겠소."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가만히 듣고 있던 앙뜨의 눈동자에 번뜩이는 빛이 돌기 시작했다. 간혹 아내나 딸이 훅 정신 나가서 지르는 것을 막으려고 방문하는 누군가의 남편, 혹은 아버지는 봤어도 돈을 쓰게 하라고 요구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세상에. 타란 공작이 이런 로맨티스트였다니!!'앙뜨는 황홀한 눈으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건 흡사 자신의 비밀 금고 속 금궤를 볼 때와 다름없는 눈빛이었다. "돈에 구애받지 말라는... 말씀이십니까?" "터무니없이 덮어씌우는 건 사양하지." "호호호. 저희가 그런 상식 없는 의상실이 아니랍니다." 앙뜨는 재빠르게 메모지에 숫자를 적어 넣었다. 그녀는 로맨스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현실주의자였다. 사랑은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 오직 황금을 기반으로 한 사랑만이 영원할 뿐! 돈에 구애받지 말고, 라는 애매한 경계를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해서 앙뜨는 영리하게 머리를 굴렸다. 자신이 생각한 최대한도의 1/2 정도의 금액을 적어 공작 앞에 내밀었다. 그녀는 고객의 혹시 모를 자존심까지 챙길 줄 아는 덕을 갖추고 있었다. "어떠신지요?" 과연 이 정도를 감당하실 수 있겠는지요, 앙뜨는 물었다. 드레스는 상당히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최신 제품일수록, 유일하고 독특한 디자인일수록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호기롭게 연인에게 큰소리치며 의상실에 들어왔다가 가격에 넋 놓고 체면 구기는 인사들을 적지 않게 보았다. 앙뜨의 도전장을 보는 휴고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가소롭다는 듯 픽 웃으며 펜을 들어 그 액수 뒤에 0 하나를 더 그려 넣어 단번에 앙뜨를 KO패 시켰다. 다시 메모지를 되돌려 받은 앙뜨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헉, 숨이 막히는 것 같아서 가슴을 움켜잡았다. 유레카! 머리 위에서 팡파레가 울려 퍼졌다. 인생 최고의 대박을 물었다고 행운의 요정이 탬버린을 흔들었다. "모.. 모레 틀림없이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능력을 보도록 하지." "맡겨주십시오." "아, 그리고 괜찮은 보석상 한 군데 소개해 줬으면 하는데. "로암에는 가문 소유의 장신구들이 상당하지만 그것들을 수도로 나르기에는 너무 번거로웠다. 그녀 소유의 장신구들이 별로 없다는 것도 그는 마음에 걸렸다. 고깃덩이를 앞에 둔 배고픈 짐승처럼 앙뜨의 눈이 번쩍거리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공작부인의 고아하신 격에 살~짝은 부족하지만 다른 곳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보석상을 안내 드리겠습니다. 전하. "앙뜨를 비롯한 직원들 모두가 건물 밖까지 나가서 허리를 깊이 숙이며 타란 공작을 배웅했다. 마차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우아하게 허리를 펴는 앙뜨의 눈은 뜨겁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당장 스케줄 조정에 들어간다! 무슨 일이 있어도 모레 하루는 싹 비워! 지금까지 제작한 모든 드레스며 구두며 모자며 디자인북 빠짐없이 준비하고! "앙뜨의 지시에 따라 조수들은 정신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 오늘부터 내일까지 밤새 앙뜨의 의상실은 불이 꺼지지 않을 것이다. 마차는 앙뜨가 추천한 보석상에 도착했다. 앙뜨가 친족과 공동으로 운영하는 보석상이었다. 앙뜨는 마부 옆에 길을 안내할 사람 하나를 붙여두는 세심함을 가장한 철저함을 잊지 않았다. 이미 한 발 앞서 언질을 받은 세피아 보석상은 미리 사람이 나와 최고의 예를 다해 공작을 맞이했다. 그 사이에 구경하던 몇 명 손님을 내쫓고 가게문을 내려 오직 한 사람 고객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휴고는 진열되어 있는 목걸이나 팔찌 등의 보석류들을 이것저것 가리키며 보이도록 했다. 세피아 보석상의 물건들은 수도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고급품이었지만 보석들을 보는 휴고 눈빛은 그리 마땅치 않았다. 급하게 사려니까 질이 낮은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사려는 것인지 구경만 하려는 것인지, 내오는 물건을 그저 흘끔 보기만 하고 다시 다른 물건을 가리켰다. 그러나 누구도 불편한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앙뜨가 미리 말해놓지 않았다 해도 이 정도의 거물급 손님이 방문해서 소소한 수입을 올린 적이 없다는 건 업계의 상식이었다. 여러 직원들이 달라붙어 신속하게 움직이며 어느 새 테이블 위에는 선보인 보석들이 잔뜩 쌓였다." 이걸로 하지." "정확히 어떤 것 말씀이신지.." 총지배인이 손을 비비며 허리를 굽실거렸다. 공작에게 선보인 물건들이 전부 최고급 고가품이라서 한 두 개만 팔아도 대박이었다. "전부." ".. 다.. 다.. 다 말씀입니까?" "파는 물건이 아닌가?" "아닙니다! 아니, 그러니까 맞습니다! 즉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총지배인 표정이 환희로 떨렸다. 오늘 판매로 인해 자신에게 떨어질 커미션을 생각하면 폭소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얼마나 걸리지?" "조.. 조금은 기다리셔야.. 금방 해드리겠습니다." 휴고는 테이블에서 맑은 황색의 물방울 모양 사파이어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 색과 닮았다. "이거는 지금 주고, 나머지는 배달해 주게." "급하지 않으시면 내일 날이 밝으면 배달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고가 물품들이라 안전을 기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하게." 보석상 하나를 거의 털다시피 해서 휴고는 귀가했다. 귀가한 주인의 옷시중을 들며 제롬은 오늘 발생한 작은 사건을 고했다. "그래서. 녀석이 어디 갔는지 모른다는 거군." "예. 전하. 송구합니다." 늘어지게 한 잠 자고 일어난 로이는 슬슬 휴고가 돌아올 때쯤이 되자 겁이 났는지 슬그머니 줄행랑을 쳤다. 녀석이 맘먹고 도망질 다니면 찾을 수 없고, 어디 있는지 알아도 휴고가 직접 가지 않는 이상 끌고 올 능력 있는 사람도 없었다. "나중에 오거든 내가 꼼짝 말고 있으라 했다고만 전해. 억지로 잡아두려 하지는 말고." "예. 전하." 목욕을 마치고 휴고는 아내의 침실로 들어갔다.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있는 그녀의 뒤로 다가가 뒷목에 입을 맞추고 들고 온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목에 차가운 것이 닿자 흠칫한 루시아는 거울로 정체를 확인하고 놀라 눈이 커졌다. 물방울 모양 보석이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마음에 안 들어?" "아, 아니에요. 예뻐요. 잠시 오늘이 무슨 날인가 고민했어요." "특별한 날만 선물을 받는 건 아니지."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엄청난 가격의 보석이라든가. 그런 건 아니죠?" 올해 봄, 생일 때 받은 선물을 생각하면 아직도 체한 것처럼 속이 눌리는 것 같았다. 그는 처음 선물했던 화이트 다이아몬드에 이어 올 봄에는 레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생일 선물로 주었다. 화이트 다이아몬드 목걸이만큼 다이아가 부담스럽게 주렁주렁 달리지 않아서 다음 티파티에 걸고 나갔다. 유난히 보석에 관심이 많은 귀부인 하나가 루시아의 레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알아보며, 그게 보석 경매에서 얼마에 낙찰 되었는지 떠벌렸다. 어마어마한 액수를 듣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비쌀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녀의 예상치를 훌쩍 뛰어넘었다. ============================ 작품 후기 ============================휘영청 님, 붉은달a 님, 햄톨 님, 록스토 님, letzgo02 님, 몸살림 님, loal 님, 퍼플케이브 님, 목하다현 님, 세이 님, 퍼플케이브 님, 머나먼곳에서 님, letzgo02 님, 랄룰리 님, tjsdo3634 님, miseen 님, o벼리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개기다(비표준어) 개개다(표준어) 라고 합니다. 맞춤법은 언제나 어려워요^^;토요일은 일이 있어서 밤 늦어서 한 편 올릴 수 있을 것 같아요. < -- 수도 -- > "그런 걸 원해? 아마 다음 달에 보석 경매가.." "아니요!!!" 그는 정색하는 루시아를 보며 피식 웃고는 몸을 돌려 침대 위로 올라가 두 팔을 베개로 삼아 털썩 누웠다. "당신 남편 부자야. 부자 남편 둔 여자답게 좀 즐겨봐." 루시아가 대답 대신 힘없이 웃었다. 그녀는 태생이 가난뱅이였다. 메튼 백작부인으로 살 때도 호사는 누리지 못했다. 꿈속에서 굶어 죽을 걱정은 해보지 않았지만 생계의 고민은 항상 떠안고 살았다. 청빈을 삶의 가치관으로 삼지 않았다. 여건이 안 되었을 뿐이다. 루시아는 다만 꿈속에서 봤던 공작부인을 잊을 수 없었다. 값비싼 드레스와 장신구로 치장한 공작부인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만약 그가 떠나가면 자신 역시 꿈속의 공작부인처럼 변할 것 같았다. 한 번 맛들인 사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허전함을 그걸로 채우려 할 것이다. 헤어날 수 없는 늪으로 발을 내딛고 싶지 않았다. "보석이 싫어? 아니면 주는 사람이 나라서 싫은가?" "그런 말씀이 어딨어요. 감사하고 있어요. 예쁘고 마음에 들어요." "당신 말에 진심이 없다는 건 알겠어." 딴 여자들처럼 간 쓸개 다 내줄 것처럼 호들갑스럽게 좋아하는 반응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묘하게 부담스러워 하는 모습이 그는 언짢았다. 수도 가면 바람피울 거냐는 그녀의 말은 두고두고 충격이었다. 침대에서는 뭐든 다 줄 것처럼 완전히 몸을 열어 그를 받아들이면서 그녀의 마음은 닫혀 있고,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선물마저도 거부하면 대체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인가. 그녀의 마음을 사기 위한 그의 부단한 노력을 그녀는 알아주지 않았다.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아깝고, 생각만 해도 가슴 안쪽이 저릿한데 그의 얼음마녀는 도통 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화 나셨어요?" "안 났어." 말과 달리 그는 뚱하게 대답했다. 루시아는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전에 만약 그가 저렇게 퉁명스럽게 말했으면 상처받아서 혼자 끙끙거렸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자신에게 진짜 화를 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툴툴거려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여유가 생겼다. 그에게 당당하게 오늘은 당신 방 가서 자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루시아는 그를 보며 일어났다. 그리고 입고 있던 목욕 가운을 천천히 벗었다. 스르륵 발밑으로 가운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누워 있던 그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가 경직된 붉은 눈으로 뚫어지게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끼며 그를 향해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하얀 나신에 호박색으로 빛나는 목걸이만 한 채, 자신을 보며 요부처럼 웃는 아내를 보며 휴고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루시아는 굳어 있는 그를 보면서 침대로 걸어갔다. 그녀 스스로도 놀란 대담함이었다. 항상 자신을 보는 그의 눈은 뜨거웠다. 소문으로 떠도는 것처럼 마치 환상적인 미녀라도 보는 시선이었다. 처음엔 부끄러웠지만 익숙해지다 보니까 '나도 조금은 매력적인가.' 착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를 유혹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침대로 올라간 그녀는 무릎걸음으로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위를 타고 올라가서 허벅지 안쪽으로 바싹 붙었다. 목욕 가운 아래에서 힘을 받아 일어나는 그의 성기를 엉덩이로 꾹 눌러 앉았다. 그의 목울대가 넘어가면서 그가 흠칫했다. 루시아는 목걸이를 잡아 황색의 사파이어에 입을 맞추며 그를 향해 야스럽게 웃었다. "목걸이, 어울려요?" "... 아주." 그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선물이 싫어서가 아니에요. 전 아주 간이 작다구요. 당신이 파산할까봐 걱정하는 심정을 헤아려 주세요." "하늘이 두 쪽 나도 그럴 일 없어." 루시아는 두 손을 그의 목욕 가운 안에 넣어 탄탄한 가슴을 느릿하게 쓸었다. 그의 흔들리는 눈을 보면서 그녀는 자신이 주도하는 이 상황에서 짜릿한 희열을 느꼈다. "여자의 사치는 나라 근간을 흔들 수도 있어요." 하물며 가문 하나는 어떻겠는가. 그녀가 그런 뜻으로 한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휴고는 생각했다. 당신이 원하면 나라 하나 세워 바칠 수 있는데. "얼마든지 흔들어 봐." 그 정도 감당 못할 타란 가문이 아니었다. 휴고는 비록 가문의 음습한 내력에 치를 떨고 있으나 가문의 저력은 인정했다. 그의 오만한 자신감에 루시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겸손은 휴고 타란의 미덕이 아니었다. 그의 입술이 다가오자 루시아는 살짝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가 다시 시도했으나 루시아는 또 다시 피했다. 대체 뭐하자는 거냐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입술에 기습적으로 입을 맞추고 재빨리 떨어졌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씩씩대는 그를 보며 루시아는 까르르 웃었다. 그가 달려들기 전에 루시아는 두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 어루만지며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뒷목을 잡아 누르면서 격한 키스로 되돌렸다. 구석구석 깊은 곳을 건드리는 그의 혀의 움직임을 따라가느라 그의 가운 앞섶을 꼭 쥔 두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는 혀뿌리가 얼얼할 정도로 강하게 그녀의 혀를 빨아들였다. 사납게 덤벼드는 그의 키스는 길게 이어졌다. 그 사이 그의 손 하나가 허리께를 더듬어 올라가며 어깻죽지를 쓸어 올렸다. 한참 만에 그가 입술을 떼었을 때 루시아는 흐릿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입안을 점령했던 그의 혀의 움직임이 잔상처럼 느껴졌다. 도톰하게 부푼 그녀의 붉은 입술을 보며 그는 제 입술을 핥았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지?" 그의 목소리에서 당혹스러움이 묻어나 루시아는 쿡쿡 웃었다. "당신 한테서요." "기억에 없어." "배운 걸 응용하는 건 바람직한 학생의 자세죠." 그는 곤란한 듯 묘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왕이 아닌 게 다행이군." "네..?" 여자 때문에 나라를 말아 먹는 탕왕이 될 것 같으니까.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두 손으로 그녀 허리를 감싸 쥐면서 그녀의 뽀얀 가슴을 삼켰다. "아..." 주도권이 빼앗기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의 강렬한 애무에 신음하며 몸을 뒤틀었다. 그는 언제나 뜨겁게 그녀를 원했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뒤에서 그가 무작스럽게 퍽퍽 밀고 들어올 때마다 그녀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두 손으로 시트를 꽉 쥐고 간신히 버틴 팔이 자꾸 휘청거렸다. "아! 아앗!" 그녀의 골반을 움켜잡고 그는 무자비하게 자신의 중심을 밀어 넣었다가 빠져나갔다. 자세 때문에 더 깊이 들어올 때마다 몸 안쪽이 저릿저릿했다. 너무 깊었다. 아픈 것인지 쾌감인 것인지 모르겠다. 비명처럼 교성을 질렀다. "아! 응!" 그의 허벅지가 엉덩이에 부딪칠 때마다 충격으로 몸이 흔들리고 눈앞이 번쩍거렸다. 그의 추삽질은 도통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견디다 못해 그녀의 팔이 꺾여서 상체가 무너졌다.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무릎도 힘이 빠져서 후들거렸다. 볼에 닿는 시트를 마찰의 느끼며 숨은 턱까지 찼다. 눈에 열이 올라 흐르는 눈물이 시트로 떨어졌다. "그.. 그만.. 읏..." 루시아의 애원에도 그는 오히려 엉덩이를 찰싹 치며 더 깊이 들어왔다. 자극을 받아 그녀의 내부가 더 꽉 그의 것을 조이자 움찔한 그가 다시 강하게 치고 들어왔다. 단단한 기둥이 깊은 안을 찌르는 감각에 몸이 소스라쳤다. 내벽을 할퀴는 자극이 척추를 타고 올라 올 때마다 눈앞이 어두워졌다 환해지기를 반복했다. "휴.. 흑... 힘들.. 힘들어요.." "착하지. 거의 다... 끝났어. 조금만 더." 달래는 척하는 그의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갈라져 나왔다.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지금 그는 머릿속의 뭔가가 끊어진 상태다. 애원이고 뭐고 먹히지 않았다. 아주 가끔이지만 그는 잔혹하게 그녀를 밀어 붙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온몸이 그의 거대한 송곳니에 물려 삼켜지는 것 같았다. "죽겠군. 얼마나 꽉 무는지... 숨도 못 쉬겠어." "흣.. 그런... 말 좀.." 루시아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싶었다. 그의 희롱이 수치스러우면서도 그 말에 흥분하는 몸의 변화를 느끼는 것이 더 부끄러웠다. 그가 강하게 박아 넣을 때마다 그녀의 몸은 쓰러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단단히 그녀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잡고 있는 그의 손이 아니라면 진즉 넘어졌을 것이다. 힘들어 죽겠는 와중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질이 경련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심장이 뛰는 것처럼 그녀의 내부가 박동할 때마다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의 근육으로 굴곡진 몸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그녀의 등으로 툭 툭 떨어졌다. 후배위 체위만으로 이렇게 여러 번 그녀의 절정을 유도한 건 처음이었다. 그녀가 힘들어하는 체위라서 평소 오래 유지하는 자세가 아니었다. 그의 성기를 받아들이며 흔들리는 그녀의 애원과 눈물이 그의 짐승 같은 소유욕과 정복욕을 자극했다. 내 것. 내 여자. 아무리 가져도 부족했다. "휴.. 제발... 으흑..." "그만 하고 싶으면... 그만 좀 조여. 당신이 놔주지를 않잖아." 손 하나가 가슴을 움켜잡아 주무르고 깨무는 뒷목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이제 끙끙 신음했다. 허리를 움직일 기운도 없었다. 도통 수그러들 줄 모르는 그의 성난 분신이 기세 좋게 그녀의 몸을 반복해서 꿰뚫었다. 이미 몇 차례 그가 안에 쏟아낸 정액이 그가 추삽질을 할 때마다 흘러내려 허벅지를 적셨다. 그녀의 엉덩이가 그의 허벅지에 부딪칠 때마다 철썩거리며 젖은 소리를 냈다. 밤꽃향이 진동한다. 흔들리는 시야가 어지러워서 그녀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의 손이 아프지 않을 정도로 루시아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다. 다른 한 손이 그녀의 배를 감싸듯이 잡아 위로 올려서 그녀의 엉덩이를 더 높이 올라가게 했다. 시트를 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흐윽!!" 강하게 치고 들어오면서 그가 파정했다. 내부로 뜨거운 것이 쏟아지는 느낌에 그녀의 온몸이 후들거리며 떨렸다. 방사의 쾌감을 즐기며 그가 목을 울리며 신음했다. 그녀의 자궁에 뿌린 씨를 싹 틔우고 싶다. 그가 쏟은 요체가 그녀의 몸 안 깊은 곳에서 뿌리를 박으면 그녀는 온전히 그의 것이 될 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그것만은 불가능했다. 휴고는 내부의 경련이 완전히 멈추고 꽉 조이던 힘이 다소 느슨해지자 천천히 허리를 빼냈다. 지탱하며 잡고 있던 손을 놓자 그녀는 그대로 스르르 쓰러졌다. 할딱이며 어깨가 아래위로 오르내리고 꼼짝도 하지 못하겠는지 미동도 없었다. 그녀의 허벅지를 타고 미처 삼키지 못한 탁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그걸 내려다보고 있는 휴고의 붉은 눈동자가 마치 타오르는 것처럼 붉어졌다. 목이 탔다. 타는 목을 축이려 소금물을 마신 것처럼 그녀를 품으면 풀어질 것 같은 갈증은 안을수록 더 심해졌다. 그는 그것을 다스리는 일이 무척 힘들었다. 그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그러자 욕망으로 탁해진 눈동자가 한층 맑아졌다. 더 이상은 안 돼. 그는 격동하는 갈망을 내리눌렀다. 땀에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 동그란 이마가 드러나게 했다. 눈을 감고 있는 그녀는 색색 숨을 몰아쉬었다. 잠이 든 건 아니었는지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며 올라갔다. 그를 바라보는 눈에 원망이 담기더니 눈을 감아버렸다.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면서 미안한 마음을 담아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오밀조밀한 그녀의 미간 사이에 살짝 잡혀 있던 주름이 서서히 펴졌다. 그는 가운을 걸쳐 입고 시트로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아 올렸다. 살짝 눈을 뜬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반응할 기운도 없는지 몸은 축 늘어진 채였다. 그는 침실에서 이어진 욕실을 향해 걸었다. 적당히 따끈한 목욕물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루시아는 죽은 듯이 자다가 해가 중천이 되어서 일어났다. '몸이 결려...' 남편이 정력가인 것은 나쁜 일은 아니지만 때로는 정도를 넘어서 문제였다. 끙끙대며 일어난 루시아를 맞이한 것은 아침에 배달되었다는 보석 상자로 만들어진 작은 산더미였다. 응접실 테이블 위에 쌓인 보석더미 곁에서 마치 제가 선물을 받은 것처럼 뿌듯한 표정을 짓고 하녀가 어서 구경하고 싶다고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이 남자가 정말..'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선물이라 해도 정도가 있다. 대체 이게 모두 얼마일까 생각하면 머리가 띵 했다. 저녁에 그가 들어오면 무슨 과한 소비냐고 한 마디 해둘 생각을 하다가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 언짢아하겠지.' 분명 그럴 것이다. 어제 목걸이 하나 시큰둥하게 받았다고 퉁퉁거렸는데 이것들을 반품하라 했다가는 화낼지도 모른다. 굳이 주는 선물에 한 마디 덧붙여 기분 상하게 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 꽃 한 송이를 줘도 세상에 그보다 더 귀한 선물이 없다는 것처럼 품에 쏙 안기며 고맙다고 하면 열이면 열 다 넘어간다니까요. 좋아하는 척을 자꾸 해야 선물도 자꾸 들어오지. ]북부 노부인들에게 들었던 조언이 떠올랐다. '후우.. 그래. 주는 건데 받자. 둬서 썩는 것도 아니고. 팔면 다시 돈이니까.' 받은 선물의 내용물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하나씩 정성스럽게 포장된 상자를 일일이 풀어 확인하고 한 번씩 몸에 착용해 보는 데만 오후가 다 갔다. 저녁에는 일찍 귀가한 그와 식사를 같이 할 수 있었다. 식사 중에 그가 말했다. "내일은 디자이너가 방문하기로 했소. 당신 드레스가 필요한 것 같아서." "... 드레스요?" "여긴 수도라오. 로암에서처럼 구식 드레스 고쳐 입고 다니면 비웃음 사겠지. 안주인 위신은 가문의 위신 문제요." 그의 말이 일리가 있어서 루시아는 두 말 하지 못했다. 수도 귀족들은 유행에 민감했다. 특히 신분이 높은 귀부인들의 차림은 많은 여자들 입에 오르내렸다. 유행의 선도자가 되지는 못해도 비웃음을 사도록 입고 다니는 건 곤란했다. 현재 그녀가 가진 드레스가 향후 수도에서 사교 활동을 하기에는 아무래도 적절한 수준은 아니었다. ============================ 작품 후기 ============================고남순님 님, 랄룰리 님, 됴됴새 님, 퍼플케이브 님, pure0angel 님, o벼리 님, 달빛유령 님, 웃음발작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이북 출판을 계약했습니다. ^^조아라 출판으로 나올 예정입니다. (리디북스, 교보문고, YES24, 반디앤루니스, 알라딘, 영풍문고, T스토어, 메키아, 인터파크, 바로북, 네이버, 북큐브, 오이북, 구글플레이북스, 에피루스 등에서 판매)정확한 출판 예정일이 나오면 다시 공지 올리겠습니다. 몇 군데 출판사 연락은 받았습니다만 조아라를 택한 건 계속 연재를 하면서 출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글을 쓰다 보니까 깨달았는데 전 피드백이 필요하더라구요. 출판 때문에 삭제를 하고 오직 출판을 위해서만 글을 쓰는 건 못할 것 같았어요. 개인지는 원래 생각이 없었습니다만 종이책을 원한다고 종종 말씀하시더군요. http://cafe. daum. net/buybooklucia 카페를 생성했습니다. (다음 카페)이곳에서 수량조사를 하겠습니다. 수량이 300부 이상 된다면 개인지 찍어 보겠습니다. ^^;카페 가입자격은 19살 이상으로 설정했으므로 책은 당연히 19금 출판입니다. 추가> 이북 역시 19금 출판이며, 이북과 개인지의 내용 차이는 없을 겁니다. 다. ^^;카페 가입자격은 19살 이상으로 설정했으므로 책은 당연히 19금 출판입니다. < -- 수도 -- > 식사 후 그와 뜰을 거닐었다. 로암에 있을 때부터 그가 시간이 나면 종종 그와 저녁 산책을 함께 했다. 그녀의 남편은 바쁘고 부지런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녀가 온전히 가질 수 있는 그의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루시아는 그와 한가롭게 걷는 이 시간이 값비싼 선물을 받는 것보다 기뻤다. "하나하나가 전부 아름답고 멋진 물건들이었어요. 전부 당신이 직접 고르신 거예요?" "그랬지." 그냥 한 번 쓱 보고 담으라고 했지만 직접 보고 고른 건 맞다고 휴고는 생각했다. "마음에 들어?" "네. 감사해요." 루시아는 선물을 주는 그의 마음이 어떤 보석보다도 고마웠다. "여자 장신구를 잘 아시나 봐요. 많이 선물해봐서 그런가..." 루시아는 말해 놓고 아차 싶었다. 그를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녀의 말은 선을 넘었다. 그가 불쾌해 할 것 같아서 말실수를 했다고 말하려는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비비안."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녀의 손목을 붙들고 걸음을 멈추었다. "결혼하기 전에 일은.. 잊어주면 안 될까?" 생각지 못한 그의 약한 모습에 루시아는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제가 결혼 전 일을 자꾸 언급했나요? 앞으로 조심할게요." "그런 뜻이 아니라. ... 좀 오래 전 일이기는 한데, 당신이 우리 계약을 수정하자면서 했던 말 기억해?" [ 애인 만들어도 저 모르게 해 주세요. 제가 싫어지거나, 싫증이 나거나, 다른 여자가 생겨서 절 떠나고 싶으면. 가장 먼저 제게 말씀해 주세요. ] "네. 기억해요." "당신 모르게 애인 만들 일 없고, 당신이 싫어지거나 싫증나서 떠날 일 없으니까 당신이 날 믿어줬으면 좋겠어." 루시아의 심장이 쿵, 크게 뛰었다. 그가 대체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머릿속에서 큰 회오리가 휘몰아쳤다. 실수를 한 사람은 그녀였다. 결혼 전 일을 언급해 굳이 과거의 그의 행동을 짚을 이유도, 자격도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는 못들은 척 넘기거나, 불쾌함을 드러내는 반응이 마땅하고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의외로 규칙에 얽매이는 성격인가? 결혼이라는 법적 계약이 성립한 이후에는 철저히 지키려는 성실한 남자인가? 그 동안 루시아가 지켜본 그의 모습과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라면 기존의 규칙을 바꾸는 자유롭고 제멋대로인 사람이었다. "... 왜요?" 생각의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 루시아는 그를 보며 멍하게 중얼거렸다. 아무 말이라도 꺼내 결론을 내고 싶었다. 별 의미 없이 한 말인데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망설이다가 뭔가 말을 할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왜...?' 흐려진 그의 표정이 그의 속내를 조금 드러냈다. 로이 크로틴이 그토록 자신하던, 하늘 아래 주군 손끝하나 상하게 할 사람 아무도 없다고 뻐기는 대단한 남자가 그녀의 짧은 말 한 마디에 상처를 입었다. 오래 전, 루시아는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당신만은 절대 사랑할 일 없다고 쏘아 붙였을 때, 아주 잠깐 그의 고통을 엿봤다. 그 때는 깊이 생각할 상황이 아니라 넘어갔고 잊어버렸다. 시간이 꽤 지난 일이어서 당시의 느낌이 정확히 떠오르지는 않지만 알싸한 기분은 남아 있었다. '혹시 내가...' 루시아는 가슴이 너무 벅차서 심장이 죄는 것처럼 아팠다. 아프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통증이었다. '내가 당신한테.. 의미가 있나요..?' "당신이.. 날 믿지 못하는 거 알고 있어. 왜 그러는지도 이해해." 그녀에게 실수한 일이 너무 많았다. 소피아 로렌스와의 만남을 보였을 때부터 최악이었다. 결혼 전에 서류부터 챙겼고, 사생활에 간섭 말라고 했다. 귀찮아서 결혼식을 생략하고, 초야에는 제 욕심만 채우느라 그녀를 배려하지 않았다. 결혼 후에는 또 어떤가. 철저하게 그녀의 몸만 원했던 건 그 자신이었다. "노력할게. 그러니까 당신이 나 좀 봐 줘." '왜..? 당신이 왜, 무엇을 위해 노력한다는 거죠? '루시아는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그를 말없이 보기만 했다. 그녀의 침묵이 길어지자 휴고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틀면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안절부절 못하는 그를 보고 있던 루시아 눈동자에 점점 또렷하게 빛이 돌아왔다.' 변덕일까..? '루시아는 그가 다른 연인들에게 어떤 식으로 했는지는 본 적 없었다. 가장 다정했던 한 때 그가 어떤 식으로 사랑을 속삭였는지 모른다. 루시아가 봤던 유일한 장면은 식어버린 연인을 무정하게 내치는 모습뿐이었다. 그 광경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근원적 공포로 자리 잡았다. 언젠가 소피아 로렌스의 처지가 자신으로 바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 결혼 전 일은 신경 쓰지 않아요." "정말?" "제가 그럴 자격 없잖아요." "......" 미치겠네. 그는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어떤 성벽이 이보다 더 견고할까. 그녀는 자신이 그어 놓은 선에서 저만치 떨어져 아예 근처에 얼씬하지도 않았다. "당신을 믿고 있어요." "... 믿는 다고..?" "애인이 생기면 몰래 만나지 않고 말씀을 해줄 거라고 믿어요." 그녀는 마녀가 틀림없었다. 그를 짧은 순간에 낭떠러지 밑으로 처박았다 끌어올리기를 반복했다. 휴고는 암담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매듭 끈을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꼬인 실을 푸는 것이 아니라 잘라버리는, 지금껏 해왔던 그의 해결 방식은 이 상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제가 왜.. 당신을 믿기를 바라세요?" 휴고는 말문이 막혔다. 이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는 가까스로 이유를 만들었다. "... 그야.. 믿지도 못하는 사람하고 한 집에 살 수는 없잖아." 그녀가 또 말없이 바라보자 휴고는 뭘 실수한 건가 싶어 긴장했다.' 모르겠어. '알 듯 말 듯. 해답에 근접한 것 같으면서도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가 날...? '아주 살짝 의혹이 들었지만 설마 그럴 리 없었다. 언젠가 그의 사랑을 얻고 싶다고 기대는 하고 있었다. 그건 막연하고 거대하고 언제 달성할지 모르는 커다란 소망이었다. 이렇게 간단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 선택지를 배제하고 그가 대체 왜 이럴까 이유를 찾아보았다.' 그는 나를... 꽤 좋아하기는 해. '그의 행동들은 남편으로서의 의무만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잘 해주려 한다는 것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좋아하니까.. 신뢰가 필요한 건가. '그는 기사고, 가문과 넓은 영토의 주인이었다. 신뢰하지 않는 사람을 곁에 둘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신뢰는 서로 주고받을 때 완전해지는 것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완벽한 설명은 못 되지만 그런대로 납득할 수는 있었다. "당신 말씀은.. 남편으로서 성실할 테니까 믿으라는 말씀이시죠?" 그녀가 한 줄로 정리하니까 맞는 것 같은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딱히 지적할 곳을 찾을 수 없어서 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그녀의 산뜻한 대답에 휴고는 미심쩍게 그녀를 보았다. 또 무슨 말로 뒤통수를 칠지 겁이 났다. "당신 하는 거 봐서요." 역시 그녀는 불안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 농담이면 재미없어." "농담 아니거든요." 루시아는 사실 정말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그가 너무 심각하게 받아치자 무안했다. 새침하게 말을 던지고 몸을 돌려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를 망연히 보다가 그도 걸음을 뗐다. 뭘 어떻게 해야 믿어준다는 건지 모르겠다. 이러다 엄한 소문 들은 그녀가 팩 돌아서는 건 아닐까. 파비안을 불러야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오늘도 파비안은 야근 확정이었다. 다음 날, 앙뜨가 조수 둘과 수명의 일꾼들을 데리고 공작저를 방문했다. 응접실로 안내 받아 들어가서 앙뜨는 잔뜩 들고 온 견본 드레스와 모자, 신발 등을 보기 좋게 진열하도록 일꾼들에게 지시하느라 분주했다. 항상 하는 작업이라서 손발이 척척 맞는 사람들은 순식간에 응접실을 의상실 분위기로 바꾸어 놓았다. 디자이너가 왔다는 말을 듣고 2층에서 내려온 루시아는 응접실을 들어서자마자 낯설어서 멈칫했다. 마침 작업을 마친 일꾼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앙뜨는 조수 둘을 뒤에 세워 놓은 채 깊이 허리를 숙였다. "공작부인께 인사 올립니다. 작은 의상실을 운영하고 있는 앙뜨입니다." 루시아는 앙뜨를 알았다. 직접 본 건 처음이지만 이름은 꿈속에서 익히 들었다. 앙뜨는 귀부인들 인기를 독차지하는 일류 디자이너 중 하나였다. 루시아는 백작부인으로 있는 동안 유명 디자이너로부터 드레스를 구입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메튼 백작은 저는 물 쓰듯 돈을 쓰고 다니면서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그게 가족이라 할지라도 지독하게 인색했다. 루시아는 몇 벌의 드레스를 유행 따라 수없이 고치며 돌려 입어야 했다.' 비쌀 텐데.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그거였다. 하지만 공작부인이면 사교계에 나갔을 때 여자들은 그녀가 입은 드레스가 누구의 작품이냐를 두고 수군거릴 것이다. 스스로 유행을 창조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었다. 능력이 없다면 유명한 디자이너 도움을 받는 길이 가장 무난했다. "반갑네. 오늘 날 도와주러 온다고 들었네." "귀인을 뵈어 영광입니다." 앙뜨는 무례하게 보이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날카로운 매의 시선으로 재빠르게 공작부인의 전체적인 모습과 분위기를 파악했다. 셀 수 없이 많은 고객들을 상대한 경험으로 필요한 핵심을 파악하는데 이골이 났다. 오늘 공작저를 방문하기 전까지 앙뜨는 설렘과 긴장으로 두근거렸다. 디자이너로 제법 이름 날린 이후, 고객을 만나기 전부터 이렇게 긴장한 건 처음이었다. 수습 시절 처음으로 가봉을 했을 때 느꼈던 짜릿함이었다. 앙뜨는 세피아 보석상으로부터 공작이 진열 상품을 싹 쓸어갔다는 말을 들었다. 곧 들어올 황금과 그녀의 오감을 자극하는 로맨티스트 공작의 등장에 가슴이 뛰어서 밤에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사교계 중심에 있는 귀부인들이 드나드는 앙뜨의 의상실은 온갖 소문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귀부인들 수다를 엿듣기만 해도 주워듣는 정보가 무궁무진했다. 근래에는 타란 공작부인에 관한 소문이 가장 활발하고 흥미로웠다. 아무리 솔깃한 소문이라도 대부분 거짓과 과장, 추측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앙뜨는 의상실의 어린 디자이너들과 다르게 소문에 혹하지 않았다. 그녀는 수많은 화제의 인물이 반짝 등장했다가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공작부인을 제대로 본 사람이 없어 소문이 소문을 더 낳고 있었다. 그건 메마른 길에 풀썩이는 먼지와 같았다. 공작부인이 정작 등장하면 비온 다음 날 아침처럼 싹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했다. 앙뜨의 생각은 타란 공작이 앙뜨에게 메모지를 쥐어 줄 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해서 세피아 보석상 물건 매진 사태에 이르러서는 위태롭게 무너질 기미를 보였다. 그리고 오늘 소문의 공작부인을 보는 순간 그녀의 가슴 속에서 뭔가 빵 터졌다.' 어머나 세상에.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한 여인이었다. 화려하고 육감적이며 도도한 귀부인들이 넘쳐나는 사교계에서 본 적 없는 타입이었다. 뭇 사람과 비교해서 앙뜨가 바라보는 세상은 많이 달랐다. 흔히 미인이라 말하는 인형 같은 미모는 너무 진부해서 재미가 없었다. 앙뜨가 정의하는 미녀는 자신의 창작욕을 자극해야 했다. 공작부인은 새로운 소재의 등장이었다. 매력적이고 신선했다. 소파에 마주앉아 하녀가 내온 차를 마셨다. 앙뜨의 눈은 쉬지 않고 공작부인을 탐색했다. "그 동안 제작한 드레스를 모은 디자인북입니다. 마음에 차는 작품이 있는지 훑어보시지요." 앙뜨는 제가 만든 드레스를 작품이라 칭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꽤 두꺼운 책을 무릎에 올려 한 장 한 장 넘겨 화려한 드레스를 구경하는 루시아 표정은 차분했다. 드레스 같은 건 꿈속에서 질리도록 보았다. 그녀는 패션은 잘 몰랐다. 그냥 덜 화려함과 더 화려함을 구분할 뿐이었다. 무도회에서 입는 드레스는 실용성 보다는 보이기 위한 용도라 몇 시간씩 입고 있으면 많이 불편했다.' 만만치 않겠는데.'앙뜨는 '내 아내는 검소하다. '고 한 타란 공작의 말을 이제 이해했다. 대개 귀부인들이 디자인북을 받아 보면 황홀한 표정으로 열망을 드러냈다. 공작부인의 감정은 너무 잔잔했다. 현재 공작부인이 입고 있는 드레스도 대단히 수수했다. 기본 재질이 고급스럽긴 했지만 멋을 낸 흔적이 없었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으신지요? 부족한 물건들을 선뵈어 송구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아니네. 모두 훌륭하고 멋지군. 그저 나는 잘 알지 못해서... 그대가 전문가이니 적당히 알아서 만들어 주게." 적당히 알아서. 이보다 최악의 고객은 없었다. 앙뜨는 위기의식을 느끼는 동시에 도전의식에 불타올랐다. 공작이 적어준 메모지의 금액이 아른거렸다. 손 뻗으면 잡을 수 있는 황금을 놓칠 수 없었다. "공작부인의 치수를 확인해도 될는지요? 잠시 이쪽으로 나오셔서 서 계시면 됩니다." 앙뜨는 루시아를 전신 거울 앞에 세워놓고 주변을 한 번 천천히 돌았다. 조수들을 부르자 신속하게 조수들이 공작부인 곁에 달라붙어 줄자로 치수를 재었다. 앙뜨는 조금 멀리서 공작부인 주변을 돌았다. 대강의 치수가 이미 그녀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려 옷을 만들었다.' 내 드레스가 안 어울려. '앙뜨는 빠르게 파악했다. 앙뜨의 드레스는 화려했고, 가슴을 돋보이게 하는 스타일이었다. 몸매를 육감적으로 드러나는 형태가 요즘 유행이었다. 그러나 앙뜨가 보기에 그런 형태를 공작부인이 입었다가는 어울리기는커녕 천박해 보일 위험이 있었다.' 공작부인은 하얀 종이야. 색을 입히면 달라지는 매력이 있어.'가냘픈 몸매는 육감적 매력이 아닌 가느다란 허리를 강조해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편이 좋겠다. 하얗고 티 없이 맑은 피부는 살짝 색조 화장으로 포인트를 잡아 주면 청초하면서 매혹적인 분위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앙뜨의 머릿속으로 새로운 그림이 그려졌다. 왕성한 창작욕이 일어났다. 앙뜨는 조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작은 손짓과 눈짓으로 알아듣는 조수들이 손발처럼 움직여 앙뜨가 원하는 것들을 가져왔다. 앙뜨는 현재 공작부인이 입고 있는 수수한 드레스에 레이스 천을 이용해 강조부분을 넣고, 드레스 형태를 약간 수정하면서 핀을 꽂았다. 마무리로 간단하게 분위기만 바꾸는 부분 화장을 했다. 모든 과정은 아주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앙뜨는 루시아를 거울 앞으로 데려갔다. 앙뜨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면서 "어떠신지요." 물었다. 거울 속으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루시아의 눈이 커졌다. 마치 마법 같았다. 뭔가 조금 만지고 건드렸을 뿐인데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졌다. 늘 입었던 드레스는 완전히 새로운 옷이 되었고, 거울 속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아름다웠다. 한 마디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뭔가 달랐다. "공작부인께서는 정말 매력적인 분이십니다. 이 매력을 왜 감추고 계셨는지 모르겠군요." 공작부인은 손을 들어서 제 얼굴을 만지며 감탄어린 표정으로 거울 속 모습을 확인했다. 앙뜨는 내심 '좋았어.' 외쳤다. 하이에나처럼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앙뜨의 사냥은 이제 시작이었다. ============================ 작품 후기 ============================rnjswlgp 님, amitanim 님, 매쉬매리골드 님, 이아수라 님, 퍼플케이브 님, miseen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여러분은 삽질의 절정을 보고 계십니다. 놀랍게도 구매 의사 있는 분이 300분이 넘었습니다. 이렇게 빨리 달성할 줄은 몰랐어요. ^^;;도움을 주는 분이 계셔서 출판 종이책 못지 않은 질 좋은 개인지 뽑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습니다. 신청 카페 게시판은 열어두겠습니다. 완결 후 개인지 제작 준비에 들어가면 다시 공지 드리겠습니다. 그 때까지 신청된 분들만큼 수량부수를 셈해 제작에 들어갑니다. 습니다. 습니다. 습니다. 습니다. 습니다. 습니다. 습니다. 습니다. 습니다. 습니다. 습니다. 습니다. 습니다. 습니다. < -- 수도 -- > 그의 귀가가 늦었다. 귀가하는 그를 맞이하는 루시아의 안색이 어두웠다. 시선이 바닥으로 향하고 있고 암울한 기운이 맴돌았다. 휴고는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그의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면서 고용인들 시선을 의식해 고개를 틀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턱을 단단히 잡았다. 자꾸 그의 눈을 피하려는 그녀의 태도가 몹시 거슬렸다. "왜 그러지." "....." "제롬!" 날카로운 공작의 부름에 즉시 제롬이 반응했다. 날이 갈수록 새로운 유능함을 개발하고 있는 집사 제롬은 주인 내외분께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연출하기 시작할 때 냉큼 고용인들을 눈짓으로 다 멀리 치워버렸다. "의상실 디자이너가 다녀간 후로 줄곧 언짢으십니다." 마님의 기분 상태를 파악하는 일은 이제 제롬에게 어떤 일보다 중요한 우선순위 과제가 되었다. "당신에게 무례하게 굴었나?" 루시아가 고개를 붕붕 돌렸다. "그럼 왜. 말해봐. 뭐 때문에 그렇게 언짢아?" "... 사고를 친 것 같아요." "무슨 사고?" "지.. 지금이라도 환불하면 안 될까요? 아직은 될지도 몰라요."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을 당장에라도 찾아내 맥을 물어뜯을 것 같던 휴고의 기세가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맡겨달라며 비장하게 말하던 디자이너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하던 만큼 제법 능력이 있었다. 그가 그녀를 잡은 손을 놓고 지나쳐가자 이제는 루시아가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 "얘기하다 말고 어디 가세요. 사고 쳤다니까요! 드레스를 무려 19벌이나 맞췄단 말이에요!!" 그 드레스에 따른 구두, 모자 등은 당연히 따라왔다. 드레스 못지않은 가격표를 붙인 덤이었다. 190벌도 아니고 19벌? 깔끔하게 20벌도 아닌 애매한 19이란 숫자는 뭔가. 휴고는 앙뜨에 대한 능력치를 하향 조정했다. 앙뜨가 들었다면 몹시 억울해 할 것이다. 19벌을 팔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아야 할, 공작가의 명예까지 들먹였다. "온종일 땀을 흘렸어. 먼저 씻고 싶군. 이야기는 그 후에 해." "당신이 금액을 들으시면 이렇게 태연할 수 없을 걸요!" "내가 놀라지 않으면 뭘 줄 거지?" "... 주다뇨?" "내기에는 보상이 있어야지." "언제 내기 한다고 했어요!" "뭘 줄지 생각해 놔. 내가 목욕하고 나올 때까지." 사람 말을 좀 들으라고요! 루시아는 항의를 담아 그를 불렀지만 그는 훌쩍 계단 위로 올라가 버렸다. 아 진짜. 이유 모를 분한 마음에 동동 발을 구르던 루시아는 큼큼, 낮은 헛기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루시아는 당황했다. 앙뜨가 두고 간 계산서가 계속 머릿속에 동동 떠다녀서 고용인들 앞에서 지켜야 할 체면이고 뭐고 다 잊고 말았다. 다행히 고용인들은 언제 흩어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안도하며 제롬을 보자 어쩐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할까요?" ".... 왜요?" "아직 목욕하지 않으셨고, 이미 주인님께서는 하러 가셨으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확 얼굴을 붉힌 루시아가 시선을 내렸다. 왠지 부끄러웠다. 제롬같이 점잖은 집사가 딱히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뭔가 타이밍이 묘해서. 루시아는 우물쭈물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목욕은 어차피 할 셈이었다. 더운 날씨 때문에 몸이 끈적이기도 하고. 그런데 이상하게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루시아는 조그맣게 대답했다. ".... 부탁해요." "예, 마님." 제롬은 빙긋 웃었다. 그는 과연 훌륭한 집사였다. 주인의 마음도 읽어낼 수 있는. '내가 아까는 정말 잠시 정신이 나갔었던 거야...' 루시아는 그녀의 돈을 쓰게 하도록 장사치가 달라붙어 온 힘을 다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루시아가 의상실을 방문한 상태였으면 조금 긴장했을지 모르지만 집이라는 환경에 지나치게 안심했다. 루시아는 집주인이고 앙뜨가 객이었다. 객이 주인에게 뭘 어쩌랴. 루시아는 너무 순진하게 생각했다. 앙뜨는 사교계 귀부인들을 상대로 단련한 노련함과 화술을 지니고 있었다. 약삭빠르지 않으면 까다로운 귀부인들 비위를 맞출 수 없었다. 루시아가 로암에 지내며 귀부인들의 아부에 익숙했지만 물건을 팔기 위한 장사꾼의 아부는 격이 달랐다. 앙뜨는 말솜씨만큼 지닌 솜씨도 훌륭했다. 괜히 일류가 아니었다. 루시아가 입고 있는 단순한 형태의 드레스를 이리저리 손보며 여러 가지 완전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루시아는 체면도 잊고 손뼉을 칠 뻔 했다. 앙뜨는 먼저 실력을 보여 루시아의 마음을 현혹했다. 앙뜨가 현란하게 설명하는, 패션에 관한 용어나 유행 등은 거의 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또 기이하게도 이해가 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앙뜨의 말만 들으면 루시아는 사람들 눈을 모으는 환상적인 미녀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터무니없는데 들을 때는 굉장히 그럴 듯했다. 앙뜨는 루시아가 놀만에게 들어 알고 있는 소문에 관한 것도 조금씩 흘리면서 공작부인, 더 나아가 공작가의 체면을 거론했다. 타란 공작께서 직접 의상실을 방문하실 정도로 대단히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도 강조했다. 그리고 모든 문제는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큰소리쳤다. [ 공작부인께서는 그저 마음 편하게 사교계 등장 날만 꼽으며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시면 됩니다. 타란 공작께서 세기의 미녀를 아내로 얻으셨다는 소문을 제가 사실로 만들어 드리지요. ] 루시아는 안 그러려 해도 소문을 신경 쓰고 있었다. 남 시선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녀가 아닌 그를 두고 입방아 찧을 일이 마음 편하지 않았다. [ 공작부인께서는 아름다우십니다. 다만 보석의 원석처럼 드러나지 못하고 있을 뿐이랍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 깊이 숨어 있지만 제대로 된 가공을 하지 않으면 원석은 돌멩이로 전락할 수 있지요. 제가 공작부인을 보석으로 가공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셔요. ]루시아는 홀린 것처럼 앙뜨가 내민 계약서에 서명했다. 앙뜨가 말한 물건들은 루시아가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는, 필수적인 것들이었다.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앙뜨가 돌아가고 나서도 루시아는 휩쓸린 기분에 얼마간 멍했다. 반쯤 나간 정신이 휙 돌아온 것은 오후에 배달된 계약서 사본과 계산서를 확인한 이후였다. 금액을 확인하며 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디자이너의 속살거림에 넘어간 대가가 그처럼 엄청날 줄은 몰랐다. 난생처음 구매한 일류 디자이너의 드레스 가격은 막연히 상상했던 수준이 아니었다. 하녀가 적당히 미지근한 물을 어깨 위에서 쏟았다. 목욕 시중을 드는 하녀를 손길에 영혼 없이 몸을 맡기고 루시아는 계속 드레스 생각에 빠졌다. '도대체.. 모자랑 구두는 왜 그렇게 비싼 건데. 하물며 장갑까지.' 루시아 상식으로 모자와 구두는 액세서리였다. 그나마 드레스는 남들 눈이 있어서 구색을 갖추지만 잘 보이지 않는 구두 등은 흉하지 않은 정도면 된다고 생각했다. 장갑 같은 건 꿈속에서 돈 주고 사 본 적도 없다. 드레스를 구매할 때 몇 켤레 덤으로 받았다. '거기다 전부.. 여름 드레스잖아.' 조금만 날이 서늘해지면 입을 수 없었다. '환불해야해. 그런 거금을 드레스 비용으로 날릴 수는 없어. 어차피 물건을 받은 것도 아니고 맞춤인데.' 원래 루시아는 당장 환불하려 했으나 제롬이 만류했다. 주인님과 의논해 처리하시라 조언했다. 물건을 구매했다가 환불하는 일은 체면상 중요한 문제였다. 특히 사치품의 경우는 안 좋은 소문이 날 우려가 있었다. 루시아가 끊임없이 환불을 고민하는 동안에 휴고는 그의 침실에서 목욕을 마치고 그녀의 침실로 들어왔다. 욕실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그는 테이블에 놓인 하얀 봉투를 집어 들었다. 계약서와 계산서. 그는 소파에 앉아 명세를 읽었다. 금액을 확인한 그가 픽 웃었다. 마음껏 써보라고 적어준 금액의 약 1/5 정도였다. 이만큼 쓰게 한 디자이너의 능력을 인정해야 할까, 사기꾼 같은 장사치의 말에 홀랑 넘어가지 않고 방어해낸 그녀의 방어력에 찬사를 보내야 하는 걸까. 디자이너는 정말 휴고가 써 준 금액을 다 쓸 작정이었을 것이다. 돈을 벌 기회를 날리는 건 바람직한 장사꾼의 자세가 아니다. 그런데도 물러섰다. 당시의 현장을 보지 못해 알 수는 없지만 아마 과하게 밀어붙였다가는 한 벌도 팔지 못한다는 위기를 느꼈을 것이다. 휴고의 예상대로 거의 들어맞았다. 앙뜨는 전진을 위해 한 발 물러섰다. 한 번으로 끝날 장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안주인의 사치로 말아먹는 귀족 가문을 심심치 않게 보았지만 오히려 그와 정반대의 이유로 신경 쓰게 될 줄은 몰랐다. 그녀가 타인에게 인색한 건 아니었다. 로암에서 정원을 조성할 때 일꾼들에게 평균을 넘는 후한 보수를 지급했다. 그런데 스스로에게만 적용하는 근검절약 정신에 아주 질려버렸다. 영지에서 머물 때는 상관없었다. 그녀의 화려한 옷차림이나 화사한 화장 같은 건 그는 아무래도 좋았다. 화장기 없는 뽀얀 피부를 만지는 것이 좋고, 진한 향수 냄새 없는 그녀의 상큼한 살 내음이 좋았다. 옷은 벗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겨울이 싫었다. 치맛자락이 너무 두껍고 무거웠다. 날이 추워서 침실 외에 다른 곳에서는 하기 힘들다는 점도 문제였다. 그런데 그는 원래 끈적이는 여름을 질색했다. 한겨울에 찬바람 맞으며 말을 타고 달리는 걸 즐겨 하곤 했다. 분명 재작년 겨울까지만 해도 그랬다. 휴고는 상관없는 문제라 해도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공작부인으로 사교계에 나서야 했다. 겉모습은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쉬운 기준이었다. 그녀가 공작부인의 격에 어울리지 않는 검소함을 보이면 덕을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뒷담화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는 그녀가 그런 너절한 화제의 대상으로 오르내릴 일이 싫었다. '디자이너를 한 번 만나야겠군.' 휴고는 디자이너의 능력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만나 계약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야겠다. '이중 계약서를 만들라고 해야겠어.' 진짜 금액을 적은 계약서는 그에게 보내고, 그녀에게는 대폭 줄어든 금액을 적은 가짜 계약서를 보내게 하면 된다. 그는 돈 문제 따위로 그녀가 고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 머릿속에는 그에 대한 문제만 가득 들어있어도 부족했다. "에구머니." 목욕 시중을 들던 하녀가 느닷없이 발랑 자빠져 주저앉았다. 미끄러진 건가 싶어서 흘끗 보는데 하녀들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루시아는 뭔가 이상한 예감에 고개를 들었다. 목욕 가운을 걸친 그가 열린 욕실 입구에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기대 서 있었다. 너무 놀라 입이 벌어졌다. 부를 새 없이 하녀들이 냉큼 다 사라졌다. 아주 신속했다. ".... 왜.. 그러세요." 투명한 물에 다 비칠 자신의 알몸이 신경 쓰였다. 루시아는 몸을 웅크리고 무릎을 세워 두 팔로 감싸 안았다. "너무 늦어." "다 했어요. 금방 나갈게요. 그러니까.. " 그가 성큼 다가오자 루시아는 움찔 물러섰다. 그래 봤자 욕조에 가로막혀 등이 눌리도록 바싹 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욕조 턱에 걸터앉아 무릎 사이로 푹 숙인 그녀의 턱밑에 손을 넣어 들어 올렸다. "왜? 같이 목욕도 하잖아." 루시아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불만을 담아 그를 쏘아보았다. "이런 적은 없었잖아요." "뭘?" "목욕 중에 들어오시는 거요." "그랬나. 그게 무슨 상관이지?" "하녀들 보기 창피하단 말이에요." 루시아는 꿈속 경험 때문에 하녀들이 주인들 안 보이는 곳에서 얼마나 깔깔대며 떠들지 빤히 보였다.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으면 그런 것까지 뭐라 할 수 없지만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루시아가 일했던 귀족 가의 주인 부부는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루시아가 여주인 시중을 들다가 이런 민망한 상황을 마주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당신은 이상한데 신경을 쓴단 말이야. 뭐가 창피한데?" "보는 눈이 있을 때는 조심하시라고요." 고용인의 눈을 신경 쓰는 그녀를 휴고는 이해할 수 없었다. 고용인은 손과 발 같은 것이다. 손과 발을 대체 왜 신경 써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기이한 곳에서 나름대로 기준이 높았다. 일꾼을 대할 때도 함부로 하는 일이 없었다. 그녀는 사람을 대하는데 너무 순하고 착했다. 그래서 약육강식의 수도 사교계에 그녀를 내놓을 일이 걱정이었다. 성직자가 될 것이 아니라면 착한 사람은 이용당하고 상처받을 뿐이었다. 인간은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꼬리를 마는 족속이었다. 힘 있는 자가 호의를 베풀면 저가 잘나 그러는 줄 기고만장하고 잔인하게 밟으면 오히려 존경하고 추앙했다. 그녀의 온화함을 이용하려는 자들이 넘칠 것이다. 그녀가 상처받지 않도록 그가 뒤에 버티고 있겠지만 그가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그녀를 지켜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변하는 건 싫었다. 그녀가 계속 이대로 이기를 바랐다. 아주 조금만. 그가 품에 안고 달래줄 수 있을 정도까지만 상처받아도 되지 않을까. 그녀가 쓰러지기 바라는 건 아니지만 가끔은 기댈 곳을 찾았으면 좋겠다. 아니, 가끔 보다는 좀 더 자주. 휴고는 무릎을 감싼 그녀의 손을 풀어서 잡아든 후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손가락 끝에도 키스했다. 팔목, 팔등, 팔 안쪽으로 그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가벼운 키스가 이어지면서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는 그녀의 뒷목을 잡아 물에 젖어 촉촉한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열기가 있는 작은 입안에 혀를 넣고, 당황해 물러나는 혀를 휘감았다. 혀에 감기는 말캉한 살의 느낌이 짜릿했다. 묙욕물에 섞인 향유와 그녀의 체취가 뒤섞여 취할 것 같았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못하는 그는 그녀를 안으며 종종 이런 것이 취한다는 거구나 느끼곤 했다. ============================ 작품 후기 ============================밀키아 님, 퍼플케이브 님, 머나먼곳에서 님, eonchu 님, 붉은넥타 님, 너무죠아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친절한 분들께서 개인지 신청자 수를 믿지 말라고 조언을 주시는군요. ^^이번 수량 조사는 개인지를 찍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조사였습니다. 당연히 제작시 다시 조사 들어갑니다. < -- 수도 -- > 그녀의 할딱이는 작은 호흡 소리는 그의 하체에 피가 몰리게 했다. 그녀가 욕조에 앉아 자신을 보며 놀란 토끼 눈을 할 때부터 그는 허리에 뻐근한 자극을 느끼고 있었다. 입술을 떼자 그녀가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 끝났다니까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그녀의 종알거림을 한 귀로 흘리며 그는 느긋하게 웃었다. "그럼, 보상을 받아볼까." 보상이라는 단어에 확 기세를 올리던 그녀가 뭔가 깨달았는지 풀죽은 음성으로 말했다. "보셨.. 어요?" "봤어. 말했지만 당신 남편 부자야." "부자라고 거금이 푼돈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는 그만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야지. 보상은 뭘 줄 거냐고." 루시아는 "무슨 보상이요!" 라고 항의했지만, 그가 당당하게 같은 말을 반복하며 보상을 요구하자 어쩐지 온종일 끙끙댔던 자신의 고민이 하잘 것 없는 것 같았다. '그래.. 복에 겨운 고민이지. 누가 나 같은 일로 고민하겠어.' 오늘 저지른 거금의 소비에 그는 손톱만큼도 관심 두는 기색이 없었다. 루시아 마음속 먹구름이 서서히 흩어졌다. 어차피 사교계에 나가려면 본래 그녀가 소유했던 드레스 등에 쓸모 있는 물건이 없어서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다음번에는 좀 저렴한 디자이너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그녀는 휴고와 앙뜨가 합심한 덫에 빠졌지만 그걸 아는 건 먼 훗날의 일이었다. "뭘 드려요?" 휴고는 대답 대신 그녀를 발끝에서 천천히 위로 올라가며 물속에 잠긴 그녀의 나신을 눈으로 훑었다. 붉은 눈동자에 담긴 욕망이 선명했다. 루시아 얼굴이 점점 달아올라 붉어지면서 "점점 갈수록 왜 그러세요!" 소리쳤고, 그는 "뭐가?" 하며 갸웃하면서 그녀의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어차피 또 씻어야 할 테니 더 경제적이잖아." 야하게 웃는 그를 보며 루시아는 울상을 지었다. 반사 작용처럼 그녀의 몸이 반응하면서 허벅지 안쪽이 당겼다. 그에게 점점 길들고 있었다. 야성을 잃고 애완동물이 되어 주인을 잃으면 더는 살아갈 수 없는, 데미안이 기르는 여우처럼. 어쩌면 자신은 이미 그런 상태가 아닐까, 루시아는 생각했다. 그녀를 난처한 상황에 몰아넣고 그는 즐거워 보였다. 그의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은 그녀였고 그는 늘 여유로웠다. 루시아는 그 점이 불만이었다. 무릎을 감싸던 팔을 풀고 욕조를 디디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로 고개를 들이밀어 입술에 키스하면서 아랫입술을 살짝 빨아들였다. 입술을 떼며 바라본 그의 눈이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그를 당황하게 한 것이 기분 좋아서 배시시 웃었다. "....." 흰 우유에 붉은 장미꽃잎을 띄운 것처럼 홍조 어린 그녀의 두 볼을 보며 휴고는 갈증을 느꼈다. 먼저 도발했으니 나중에 딴말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한 손으로 동그란 뒤통수를 잡고 보드라운 입술에 키스했다. 벌어진 작은 입안에 혀를 넣고 보들보들한 속살을 끈적이게 핥았다. 도망가듯 움직이는 혀를 잡아 휘감고 치열을 모두 확인하는 것처럼 구석구석 훑었다. 다디단 그녀의 타액을 삼키며 그는 길고 긴 키스를 이어갔다. 처음에는 주춤하던 그녀는 이내 그의 키스에 빠져들어 가느다란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능란한 그의 키스에 적극적으로 반응해 따라오는 그녀는 훌륭한 학생이었다. 가르치는 대로 쏙쏙 흡수하며 첫날밤 아, 하고 입을 벌리던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스킬은 상승했다. 열기를 품은 말캉한 혀를 빨아들이며 그는 매끄럽게 손에 감기는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다가 허리를 잡아 품으로 당겼다. 물기를 머금은 촉촉한 그녀의 피부는 생크림처럼 부드러웠다. 이 여자는 왜 이렇게 달콤할까. 왜 이렇게 품 안에 안고 있어도 갈증이 날까. 그녀를 다치게 할까 봐, 두렵게 할까 봐 그는 짐승의 욕구를 꾹 눌러내는 것만으로도 항상 괴로웠다. 욕망이 뒤섞이는 짙은 키스를 마치고 휴고는 달뜬 표정의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입고 있던 가운을 벗어 내던졌다. 근육으로 뒤덮인 그의 나신은 빈틈이라고는 없었다. 가운데 우뚝 선 그의 중심은 거대하고 단단해 보였다. 자기도 모르게 그걸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루시아 목울대가 꿀꺽 넘어갔다. 그가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서 있는 그를 루시아는 욕조에 앉은 자세로 꼼짝 못하고 올려다보았다. 이글거리는 붉은 눈으로 그녀를 샅샅이 분해할 것처럼 바라보던 그가 탁한 음성으로 명령했다. "이리 와." 움찔한 루시아는 그의 얼굴과 그의 성난 중심으로 번갈아 시선을 옮겼다. 강압적인 그의 눈빛에 소름이 돋으며 목이 턱 막히고 귀가 후끈거렸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물살을 가르고 무릎으로 걸었다. 그녀의 시선은 점점 눈앞으로 다가오는 그의 분신에 고정해 있었다. 그의 바로 아래까지 다가가서 그녀는 다시 한 번 그를 올려보았다. 그의 눈이 무언으로 명령했다. 루시아는 그의 명에 복종하며 기립해 있는 그의 분신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쥐었다. 처음 만져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주 가끔, 그리고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여러 번에 걸쳐서 그녀의 손이 제 분신을 쥐게 했다. 이제 그녀는 처음처럼 기겁하지 않는 정도에 이르렀다. 두 손에 빠듯하게 들어올 정도로 크고 살덩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했다. 그가 매일같이 그녀 안을 꿰뚫으며 집요하게 괴롭히는 흉측한 그것에 입을 가져갔다. 과거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을 그녀는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뭉툭한 끝에 입을 맞추고 혀를 내밀어 살짝 핥았다. 입을 벌려 삼켰다. 그녀의 작은 입안에 모두 삼키기는 무리였기에 윗부분만 입 안에 넣고 혀로 굴렸다.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의 반응은 루시아를 자극해 다리 안쪽이 아프게 죄어들었다. 진한 수컷냄새에 취한 암컷이 된 기분이었다. 그녀의 기술은 형편없었지만 서툴게 혀를 놀리는 것은 그 어떤 훌륭한 기교보다 그를 흥분시켰다. 그저 그의 것을 입에 물고 있는 그녀의 모습 자체로 충분했다. 키스도 못하던 순진한 어린 아내는 이제 그의 것을 입으로 핥는다. 새하얀 날개를 그의 색으로 물들이는 것 같은 쾌감이었다. 휴고는 머리채를 쥔 손에 살짝 힘을 주어 그녀를 떼어냈다. 그의 것을 물고 핥는데 심취해있던 그녀의 입술이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흥분해 상기된 표정과 흐려진 눈이 지독하게 야했다. 휴고는 강한 힘으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이제는 그가 무릎을 꿇어 그녀의 두 허벅지를 움켜잡아 벌리고 비부에 입을 맞추었다. 숲을 헤치고 그녀의 다리 사이 깊이 자리 잡은 꽃잎을 맛보았다. 꽃잎 아래 담뿍 머금은 꿀이 달았다. 여린 살결을 입술로 물고 강하게 빨아들였다. 그녀의 크림 같은 가슴을 탐할 때처럼 입을 움직였다. 갈라진 틈 안으로 혀를 넣었다. 뜨겁고 촉촉한 안쪽이 파고드는 혀에 쉽게 길을 내주지 않았다. "흣..." 루시아는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소름처럼 쾌감이 등을 타고 올라갔다. 더 깊이 들어오면 강한 자극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슬아슬한 정도까지만 감각을 유지했다. 다리에 점점 힘이 빠졌다. 그가 단단히 붙들고 있는 덕에 넘어지지 않았다. "흑... 으응... 읏.." 루시아 입에서 흐느끼는 신음이 흘렀다. 온몸이 그가 주는 자극에 집중하느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상체가 그의 어깨 위로 무너지고 두 손은 그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그에게 온몸 무게를 다 기대고 있는 것조차 버거웠다. 주저앉고, 눕고 싶었다. 키스할 때 그녀의 입안을 마구 건드려 혼을 쏙 빼는 것처럼 그는 혀를 놀려 그녀의 여성을 공략했다. 그녀의 샘은 향기로운 물을 흘렸다. 맑지만 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바닥에 접근하려는 시도는 하복부에 단단히 일어난 그의 상징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는 혀는 입구 안을 얕게 들어와 탐색하는 정도에 그쳤다. 꿈틀거리며 제멋대로 움직이는 혀가 주는 자극은 너무 은밀했다. 루시아는 수치와 흥분이 뒤섞여 몸을 떨었다. 그의 애무는 거침이 없었다. 그녀의 수줍은 장소에 입을 대고 탐욕스럽게 핥는 소리를 냈다. 그녀의 몸에서 흐르는 물을 그가 삼키는 소리를 들으며 어질어질했다. 그녀의 호흡과 신음이 점차 거칠게 변했다. 그의 머리카락을 쥔 손에만 힘이 들어가고 그의 손에 잡힌 두 다리는 이제 더는 그녀의 의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아!" 짧은 절정을 느끼며 그녀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척추를 타고 순식간에 강렬히 짓누르는 감각이 아찔했다. 그의 머리카락을 꽉 쥐었던 손에 힘이 풀리고 숨을 할딱거렸다. 그의 입술이 떨어지고 다리를 지탱하는 힘이 사라지자 그녀의 몸은 그대로 무너졌다. 휴고는 무너지는 그녀의 몸을 가뿐히 들고 욕조 턱에 걸터앉았다. 곤두선 자신의 분신 위에 그녀의 샘을 맞추고 천천히 주저앉혔다. 쑤욱 매끄럽게 들어간 그의 기둥을 그녀의 좁은 길이 한 번에 삼켰다. 두 사람 입에서 탄식 같은 신음이 터졌다. 루시아는 온몸을 바르르 떨며 그의 윗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단단한 끝이 안 깊은 곳을 찌르는 느낌이 오싹했다. 그의 입술이 뒷목과 목덜미에 인을 새겨나갔다. 따끔하고 간지러운 느낌이 어깨를 따라 이어졌다. 잠시 그녀의 몸을 달래던 휴고는 그녀의 골반을 잡아 위로 올렸다가 아래로 내리찧었다. 그는 압도적인 힘으로 지치지도 않고 몇 번이고 그것을 반복했다.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위아래로 흔들리며 루시아는 교성을 질렀다. 비명이 욕실 안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아! 아응!" 그는 수없이 그녀의 살 속을 짓쳐 들어갔다. 그녀의 무게가 가하는 힘으로 그의 성기는 질벽을 넓히며 안으로 쑥쑥 들어갔다. 움직임이 커지자 그의 목을 감았던 그녀의 팔은 땀과 물기 때문에 자꾸 미끄러졌다. 출렁이며 흔들리는 그녀의 가슴을 입에 물고 유두 끝을 혀로 파고들자 그녀의 안이 죄어들었다. 그는 능숙하게 그녀의 몸을 뒤로 돌려 자세를 바꿨다. 그를 뒤로 두고 앉은 자세로 그녀의 두 팔은 그의 손에 뒤로 잡혔다. 바뀐 자세는 그녀 안쪽의 다른 곳을 자극했다. 그가 허리를 튕길 때마다 그녀의 시야가 앞으로 튀어 나가며 물결치는 수면이 흔들렸다. 그의 허벅지에 앉아 있는 그녀의 발은 공중에 떠 있었다. 불안정한 자세는 불안함을 가중시키고 그녀를 흥분으로 몰아넣었다. 그가 아래에서 위로 강하게 박아 올릴 때마다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공중에 잠시 떠오른 그녀의 몸이 내려앉으면 동시에 거대한 살덩이가 몸을 꽉 채우고 들어왔다. 부상감과 낙하감, 쾌감이 더해져 그녀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하아악!!" 절정이 그녀를 휩쓸었다. 그녀의 몸이 경직하고 동시에 질이 경련했다. 그는 움직임을 멈추고 항거할 수 없는 짓눌림을 느끼며 파정했다. 목 깊은 곳에서 울리는 그의 신음을 들으며 루시아는 오싹한 쾌감을 느꼈다. 절정의 순간이 지나고 그녀는 가쁘게 숨을 내쉬며 몸이 늘어졌다.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그녀의 몸을 그가 붙들었다. 그가 압박이 느껴질 정도로 뒤에서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휴고는 하아, 낮게 한숨을 흘렸다. 조금 더 참으려 했는데 견디지 못했다. 그녀의 떨림이 조금 가라앉자 그는 그녀를 안고 일어났다. 욕실을 나와 침실로 들어갔다. 등에 푹신한 느낌이 들어 루시아는 눈을 떴다. 마주치는 그의 붉은 눈동자의 열기는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의 상체만 침대 끝에 눕힌 채 그는 침대 밖에서 좌위로 자세를 잡았다. 그녀는 그의 손이 허리 아래를 붙들 때 이어질 상황을 예측하고 눈을 감았다. 단번에 그가 안으로 들어왔다. "흣..." 그가 짧고, 그러나 강하며 빠르게 추삽질을 시작했다. 묵직한 자극이 안을 치고 빠졌다. 그녀의 몸이 작은 흔들림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는 간헐적인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틀었다. 달리는 것처럼 숨이 가빴다. 아까의 절정 여운이 남아 있는 내벽이 안을 건드리는 침입자에 맞서 경련했다. 그가 간간이 탁한 호흡을 뱉었다. 그는 그녀의 다리를 잡아 어깨로 올렸다. 그가 깊이 들어오자 그녀는 시트를 꽉 쥐었다. 자궁까지 닿는 느낌에 소스라쳤다. 그는 갈수록 그녀가 힘들어하는, 깊은 곳까지 닿는 체위를 이전보다 더 자주, 그리고 길게 했다. 루시아는 그의 집요함이 조금씩 더해진다는 생각이 간혹 들었다. 바닥 모르는 늪처럼 그는 조금씩 그녀를 삼키고 있었다. 자극이 너무 심해서 눈에 눈물이 맺힐 때쯤, 그가 쑥 빠져나가고 그녀 몸을 뒤집었다. 루시아는 엎드려 시트를 쥐고 한숨 섞인 신음을 흘렸다. 오늘 밤은 또 언제쯤 되어서야 끝이 날까. 허벅지 안쪽 살을 스치며 단단한 성기가 몸을 열고 들어왔다. 욕실과 침실을 번갈아가며 질펀하고 난잡한 섹스를 했다. 루시아는 완전히 기진맥진했다. 깨끗이 씻어 몸은 보송보송한데 다리 안쪽 깊은 곳의 아릿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와 셀 수 없이 몸을 섞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의 힘과 크기가 버거웠다. 루시아는 그의 몸 위에 누워 완전히 축 늘어졌다. 휴고는 그녀를 제 몸 위에 올려놓고 따끈한 그녀의 체온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뒤 허벅지를 지나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만지고 쏙 들어가는 허리선을 어루만졌다. 부드럽고 동시에 조금 끈질긴 손길이었다. 루시아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어서 그가 몸을 더듬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대관식 날이 잡혔어. 약 한 달 후." "생각보다 늦군요. 원래 대관식은 국장 후 그 정도 기간을 두어야 하나요?" 꿈속에서는 어땠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왕의 죽음, 국장, 새 왕의 즉위로 정신없이 상황이 급변하는 동안 별궁은 딴 세상처럼 조용했다. "좀 쓸데없는 관습이 있거든." 왕이 죽었다고 새 왕이 넙죽 왕위를 받는 것은 미덕이 아니었다. 귀족들이 왕을 추대하는 의식을 치르고 새 왕에게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기를 청했다. 관례상 3번을 거절하고 4번째 받아들여 새 왕은 그대들의 간곡한 뜻을 받아들여 어쩌고 하는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허락문을 발표한 후 대관식을 치렀다. 휴고가 보기엔 대단히 쓸데없는 짓이었다. "한 달이면 여름이 다 갈 거예요. 그러면 구매한 드레스가.." "어차피 입을 일이 많아. 당신이 수도에 있다는 사실은 이미 소문으로 퍼지기 시작했어. 당신 앞으로 초대장이 쏟아져 들어오겠지." 등을 타고 오르듯 부드럽게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 눈이 저절로 감겼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루시아는 밀려오는 졸음을 눈을 깜빡거리며 몰아냈다. "무슨 초대장이요? 파티는 못 여는 것 아니었나요?" 왕이 죽고, 새로운 왕이 즉위할 때까지의 파티 개최는 금지한다. "공식적으로는 그렇지만 파티는 원래 비공식이 더 많아. 지금도 매일 여기저기에서 파티는 열리고 있고. 티파티 같은 건 거의 제한이 없는 편이지." "티파티..." "대관식까지 외부활동을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 그래도 돼요?" "당신이 내키지 않으면." "제가 한 달을 집에서 꼼짝하지 않으면 죽을병에 걸렸다고 소문이 날 텐데요?" 그가 낮게 웃었다. "당신이 곤란하실 거예요." "날 곤란하게 하는 일은 세상에 없어." 오직 당신만 제외하면. 휴고는 속으로 덧붙였다. 루시아는 생각해 보았다. 어차피 꽁꽁 숨어 살 수는 없었다.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에 노출될 일이 부담스럽긴 해도 겁나지 않았다. 꿈속의 경험, 북부에서의 경험까지 더하면 그녀는 결코 첫 사교계 데뷔에 덜덜 떠는 뭘 모르는 아가씨가 아니었다. "처음이 대관식 같은 큰 무대인 것보다는 티파티에 나가서 분위기 파악을 하는 편이 더 낫겠어요." 북부와 분위기가 얼마나 다를지 궁금했다. 꿈속에서 그녀의 주 무대는 무도회였다. 메튼 백작은 루시아가 무도회를 나갈 것을 종용했기 때문에 힘들어서 낮에는 티파티를 나가고 밤에 무도회를 나가는 2개 일정을 모두 소화할 수 없었다. 티파티, 특히 10여 명 내외의 소규모 친분을 다지는 티파티는 한 번 나가기 시작하면 정기적으로 꾸준히 나가야 했다. 초대장을 받고 몇 번 빠지면 다시는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이벤트처럼 가끔 여는 사람 수가 많은 티파티(루시아가 열었던 정원파티 비슷한)만 몇 번 가보았다. 그리고 그 몇 번의 티파티에서 파티 깨기를 구경했다. 덕분에 북부에서 파티 깨기를 당황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래도 드레스는..." "그 얘기는 그만. 환불했다가는 당신 말대로 소문이 쫙 나겠지. 타란 공작가가 곧 파산할 거라고." 푸훗. 루시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디자이너 말에 의하면 당신이 의상실까지 다녀가셨다면서요?" 루시아가 앙뜨에게 혹해 넘어간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 곳을 드나드는 모습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가 직접 의상실에 들러 의상 제작을 부탁했다는 말을 듣고 감동했다. 다정한 부군과 백년해로하는 공작부인이 부럽다는 말을 연발하는 앙뜨의 말에 조금 으쓱했다. "왜 그러셨어요?" "... 뭘 하는데 꼭 이유가 필요한가?" "말씀 안 하시면 저 편한 대로 생각할래요." "... 어떻게?" "제가 남루한 차림으로 공작가 망신시킬까 봐 걱정되어 그러셨다고." "아니야. 그런 건 상관없어." 그녀 편한 대로의 생각이 자신에게 절대 유리하지는 않다는 걸 휴고는 깨달았다. "그럼요?" ".. 이유가 없으면 안 되나? 당신에게 사주고 싶었어. 이걸로는 안 돼?" 루시아는 웃으면서 "돼요." 라고 답했다. 그가 잠시 후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 당신하고 말을 하면 중간에 통역이 필요한 기분이 들어. 뭐가 문제일까." "그러게요. 전 안 그런데 뭐가 문제일까요?" "......" 그의 침묵에서 뚱한 표정이 떠올라 루시아는 키득키득 웃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뭐가?" '당신이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날 좋아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착각할 것 같으니까...'그는 루시아가 아무 말이 없자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더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루시아는 정말로 잠이 들었다. ============================ 작품 후기 ============================퍼플케이브 님, sodamm 님, 밀키아 님, 아드밀란 님, 파랑520 님, 붉은색 님, 금향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내일은 일이 있어서 못 옵니다~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 -- 수도 -- > 휴고가 말한 대로 초대장이 날아오기 시작하더니 사나흘이 지날 때쯤 조금 과장해서 포댓자루 하나 가득 초대장이 쏟아져 들어왔다. 루시아는 아직 수도 사교계에 공식 데뷔하지 않았다. 대관식까지 공식적 파티는 열 수 없는 시기라서 어느 파티에 참석하건 루시아의 공식 데뷔는 아니었다. 그녀의 데뷔는 대관식 축하연이 될 것이다. 그래도 사교 활동을 시작하는 첫 자리였다. 어디를 택할지 루시아는 신중하게 골랐다. 사람이 많은 자리를 제외하고 소규모 티파티 위주로 골랐다. 꿈속 기억을 더듬어서 이름을 들어봤구나 싶은 사람이 주최한 자리를 선별했다. 그래도 수십 장이 넘었다. 마지막으로 제롬의 도움을 받았다. 조르단 백작부인이 여는 티파티를 낙점했다. 백작부인은 수도 사교계 유명 인사였지만 소규모 친분 위주 활동을 좋아했다. 그래서 루시아는 꿈속에서 백작부인의 티파티를 가본 적 없었다. "조르단 백작부인은 수도 사교계의 한 축입니다. 친한 사람들과 모여 소소히 대화 나누기를 선호해서 자주 자리를 마련합니다. 어울리는 귀부인들 또한 조용한 활동을 취향으로 하고 있습니다." 제롬은 간단하게 백작부인에 대한 정보를 전달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이른바 드센 여자들이 모이는 자리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마님께서 수도 귀부인들과 친분을 다지기 위한 첫 자리로는 부담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날짜는 일주일 후였다. 루시아는 초대에 응한다는 편지를 백작부인에게 보냈다. 퀘이즈는 대관식을 앞두고 열의가 넘쳤다. 자신이 다스릴 왕국의 모습을 그리느라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뭔가를 했다. 힘이 되어줄 귀족들을 불러 모아 이야기를 나누고, 관리들을 통해 의견을 들었다. 귀족들과 친분을 위해 소규모 만찬회를 열고 기사들의 충성을 다지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혼자 있을 때조차 사색에 잠겨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퀘이즈가 특히 관심을 쏟는 자기 세력 인물이 몇 있었는데 대표적 인물이 타란 공작이었다. 공적으로, 사적으로 아주 질기게 휴고를 붙들고 놔주지 않았다. 휴고는 별다른 일이 없으면 점심은 퀘이즈와 함께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한담을 나누는 일도 포함이었다. "공작부인이 수도에 와 있다고 하던데, 언제 온 건가?" "좀 되었습니다." "허. 왜 나는 자꾸 공 소식을 다른 사람 입에서 듣지? 우리 자주 보는 편 아닌가?" "제 안사람 소식을 굳이 폐하께 말씀드릴 필요가 있습니까?" 퀘이즈는 귀족들의 왕위 추대를 받고 관습에 따라 사양한 상태였다. 그래서 아직 즉위하지 않았으나 왕으로 대우했다. "공 안사람이지만 내 누이도 되지 않나. 언제 한 번 입궁하라고 하지. 누이 얼굴 정도는 알아야지." "폐하께서 누이라 아시기 전에 제 아내가 되었으니 공작부인으로 대해 주시지요." 완곡한 거절이었다. 휴고는 공식적 자리가 아닌, 사적인 자리에서 아내를 왕과 만나게 할 생각이 없었다. 퀘이즈는 대단히 노련한 정치인이었다. 특히 속마음을 숨기지 않는 진실한 모습처럼 행동하는 데 탁월했다. 거짓말에 능통하다기보다는 대부분의 진실 속에 아주 작은 것을 숨기는 재주가 있었다. 순진한 아내가 닳고 닳은 정치인을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휴고는 퀘이즈를 아직까지만 신뢰할 뿐이었다. 전적으로 믿지도 않는다. 한발 물러나 있지만 내 뒤를 치지만 않으면 먼저 돌아설 일이 없을 것이라는 태도만 확실히 밝혔다. 영리한 퀘이즈는 휴고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복종이 아니라 동맹관계였다. 그래도 사람 심리란 멀어지면 가까이 가고 싶다. 틈 하나 없는 타란 공작보다는 공작부인을 공략할 수 있지 않을까 기웃거리고 있었다. 퀘이즈의 의도를 휴고는 쉽게 간파했다. 아내에게서 아명을 들으려고 어린 시절을 이것저것 묻다가 그녀의 외로움을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표정은 꿈을 꾸는 것처럼 아련했다. 친부의 사망 소식을 듣고 단단히 탈이 났다. 그녀는 가족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퀘이즈가 혈육의 정을 내세우며 든든한 오라비가 되겠다고 자처하면 그녀 마음은 기울 것이다. 아내 마음속에 형제에 대한 정이 생기면 이용당할 수밖에 없다. 그가 죽은 공작에게 이용당했던 것처럼. 왕족은 절대, 왕족이 아니라도 권력과 밀접한 자들 사이에 진정한 관계는 없었다. 그녀가 차가운 현실을 깨닫기보다는 가능하면 모르기를 바랐다. "공은 너무 삭막해. 오후에는 뭘 할 건가? 공과 몇 가지 의견을 나누고 싶은 사안이 있는데." 깔끔하게 물러설 줄 알았다. "급하지 않은 일이면 다음에 듣겠습니다. 오늘 오후는 일찍 들어가겠다고 벌써 몇 번은 말씀드렸습니다." 처리하지 못한, 영지에서 올라온 일거리가 산더미였다. 왕의 즉위 문제에 매달려 다른 일을 돌아보지 못했다. "그랬던가." 퀘이즈는 입맛을 다시며 의뭉스레 시치미를 뗐다. "그럼 내일 밤에 술 한 잔은 어떤가." 퀘이즈는 거절할 수밖에 없는 제안을 먼저 하고 마지막에 진짜 용건을 꺼냈다. 퀘이즈의 교묘한 수법을 알면서도 휴고는 못 이긴 척 넘어갔다. 어차피 왕과 손을 잡았다면 친하게 지내는 편이 나았다. "모레는 괜찮습니다." "모레라. 그도 좋군. 헌데 공은 술 마시는 날을 정해놨나? 왜 되는 날이 있고 안 되는 금빛대지 날이 있는지 모르겠어." 그야 내일 밤은 닷새째이고, 모레는 닷새의 하루이니까. 누구도 알 수 없는, 휴고가 저녁 일정을 정하는 기준이었다. 휴고는 돌아가는 길에 왕비 베스와 마주쳤다. 왕비 곁에는 데이빗이 함께 있었다. 베스는 방문한 남동생과 차를 마시고 배웅하는 길이었다. 휴고는 인사하고 지나치려 했으나 베스가 말을 걸었다. "오랜만입니다. 공. 폐하를 뵙고 돌아가는 길이십니까." "예.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마마." "공작부인 이야기는 익히 많이 들었습니다. 대관식보다 공작부인 소식이 더 화제랍니다." "하잘 것 없는 소문일 뿐입니다." "소문이 반드시 헛되지만은 않지요. 공작부인이 사교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만나 이야기 나누어 보고 싶군요. 부담 없는 오찬 자리를 마련할까 합니다. 오늘 중으로 초대장을 보낼 터이니 부디 거절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왕의 초대는 거절할 수 있어도 왕비의 초대는 거절하기 어려웠다. 왕은 누이로서 보자는 말이었지만 왕비는 공작부인으로서 얼굴 한 번 보여 달라는 말이었다. 여자들 사교계 일이라 특별한 사정이 없고서는 휴고가 관여할 수 없었다. 거절하려면 아내가 해야 하지만, 왕비의 초대를 거절할 명분은 없었다. "안사람이 기꺼이 초대에 응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의례적인 인사 몇 마디로 마무리하고 잠깐의 만남은 끝났다. 타란 공작 뒷모습을 보며 베스는 '여전히 무뚝뚝한 사내로군.' 하고 생각했다. 태자비 시절 귀족들은 남녀 가리지 않고 베스에게 접근했다. 어떻게 해서든 태자에게 한 발 걸치려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타란 공작은 단 한 번도 사적으로 말을 거는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남편이 공작과 친해지고 싶어서 안달했다. 대단히 당당하고 오만한 남자였다. [ 전하께서는 혹여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으십니까? 장차 이 나라 주인이 되실 분은 전하십니다. ]베스는 어느 날 궁금해서 퀘이즈에게 물었다. 타란 공작의 거만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봤자 왕국 일부 영지의 영주라고 생각했다. [ 아무 때나 세운다고 자존심이 아니오. 만용이지. 먼 미래를 보며 지금 고개를 숙이는 일이 뭐가 대수라고. 타란 공에게 사감은 없소. 사내라면 타란 공처럼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사는 삶이 부럽지. 장인어른께도 잘 일러두시오. 건드려서 이로울 것 없다고. ]남편의 뜻이 확고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베스는 타란 공작을 남편의 든든한 우군으로 인정했다. 베스는 복잡한 정치싸움은 잘 몰랐다.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관심을 둘 이유가 없었다. 공녀로 태어나 부족할 것 없이 자라다가 태자비가 되었다. 외가는 권세 있는 공작가문이며, 부친 라미스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이미 아들 셋을 낳아 후계 자리를 든든히 했고, 남편은 베스에게 지고지순하지는 않지만 존중해 주었다. 후궁 몇 두는 일 정도는 왕실에 시집온 여자로서 감수했다. 왕실의 여자치고 베스는 평탄한 삶을 살았고, 이 정도면 성공했다. 알아서 제 몫 찾아 먹는 남편을 걱정할 일 없고, 순조롭게 왕비의 관을 받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베스는 속이 꼬인 구석이 없었다. 모략으로 머리 굴릴 일도 없고, 걱정도 없었다. 그나마 유일한 걱정은 남동생 데이빗이었다. "너는 어찌 타란 공에게 그리 무례하게 구느냐." 베스는 데이빗을 나무랐다. 타란 공에게 묵례로 인사 후 한마디 말없이 서 있는 데이빗 때문에 베스는 공작과 이야기를 나누며 낯이 화끈거렸다. "저자는." "말조심하거라. 타란 공은 아버님과 같은 위치에 있는 분이다. 왜 이리 경솔한 것이야." 누님의 꾸중을 들으며 데이빗 표정에 심술이 찼다. 베스는 한숨을 쉬었다. 장차 공작가를 이어받을 소공자라고 너무 떠받들었다. 장남이라고 무조건 싸고돈 어머니의 잘못이 컸다. 베스는 남동생을 반면교사로 삼아 아들들에게 엄한 편이었다. "저도 나름대로 잘 지내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타란 공이 무례합니다." "데이빗. 무례하다는 표현이 적절치 않구나. 타란 공은 얼마든지 네게 무례해도 된다." "누님!" "긴말 하고 싶지 않구나. 언행을 조심하라고 누누이 말했다. 넌 어린애가 아니지 않느냐. 나는 여기까지만 배웅할 터이니 조심히 돌아가거라." 여기저기 다 입만 열면 타란 공, 타란 공. 이해할 수 없었다. 데이빗의 부친은 왕의 최측근이고 누님은 왕비였다. 조카는 언젠가 왕이 될 것이다. 마땅히 왕은 누구보다도 데이빗을 신뢰하고 가까이 두어야 했다. 하지만 퀘이즈는 데이빗에게 심드렁했고, 타란 공작과 함께 있을 때는 찬밥 취급이었다. 냉랭하게 몸을 돌려 멀어져가는 베스의 뒷모습을 보며 데이빗은 주먹을 꾹 쥐었다. 모처럼 이른 귀가라서 휴고는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저녁도 같이 먹고 산책도 할 수 있겠지.' 로암에 있을 때는 꼬박꼬박 저녁을 함께 먹었는데 요즘은 그마저도 힘들었다. 뭔가 쓸데없이 분주했다. 집에 가면 해야 할 일이 쌓여 있었다. 살짝 마음이 어두워졌다가 그래도 집에 가는 게 좋아서 금세 기분이 풀렸다. 모서리를 돌아 복도가 끝날 즘에 마주친 사람만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 터였다. '오늘은 어째 좀 성가시군.' 그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여자, 소피아를 보며 휴고는 생각했다. 가는 걸음을 두 번이나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휴고는 그냥 지나가려 했지만 소피아가 그를 불러 세웠다. "전하.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개된 자리에서 대놓고 무시할 수 없는 일이라 휴고는 어쩔 수 없이 멈추어 섰다. "늦었지만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나 또한 축하하오. 백작부인이 되었다 들었소." 소피아가 결혼한 앨빈 백작은 거상이었다. 경제 쪽에서 앨빈 백작은 중요도가 꽤 높은 인물이었다. 정치, 경제 등 영향력 있는 귀족들 정보는 꾸준히 듣는 편이라, 앨빈 백작이 로렌스 남작 영애와 결혼했다는 소식은 일찍이 들었다. "... 예. 축하.. 감사합니다. 오늘은 왕비마마를 뵈러 입궁한 참입니다." 소피아가 무슨 용무로 입궁했든 휴고는 관심 없었다. 그의 마음은 집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소피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지나가는 이들이 눈을 떼지 못했다. 소피아의 미모는 사람 눈길을 끌었고,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실연의 아픔을 겪은 후 처연함이 더해져서 남자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결혼했어도 소피아는 여전히 무도회만 참석하면 수많은 남자들의 연서를 받았다. 휴고 눈에는 소피아의 아름다움이 들어오지 않았다. 눈으로는 소피아를 보고 있으나 머릿속은 아내 생각으로 가득했다. 오히려 여자와 말을 나누고 있으니까 그녀가 더 보고 싶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소피아의 애처로운 눈빛은 보이지도 않았다. 차가운 붉은 눈을 보며 소피아는 충격받았다. 항상 혹시 하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오랜만에 다시 보면 그도 조금쯤 옛 추억에 흔들리지 않을까 기대를 품었다. 소피아의 결혼을 축하한다고 말하는 그의 태도는 여지없이 깔끔했다. 그녀의 오랜 불면의 밤도, 결혼 후에도 놓지 못했던 미련도 오직 그녀만 해당하는 일이었다. "그럼 이만." 주저 없이 지나쳐 가는 그를 보자 소피아는 다급했다. 이걸로 정말 끝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의 마음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알면서도 손은 저절로 그를 붙들었다. 그가 멈추어서 소매를 붙든 소피아 손을 보고 얼굴을 보며 노골적으로 성가신 감정을 드러냈다. 소피아는 화들짝 놀라 손을 놓았다. "행복.. 하십니까?" 그가 대답 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의 질문이 그렇게 불쾌했나, 소피아는 생각하다가 볼을 타고 흐르는 뭔가를 느꼈다. 자기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그는 저만큼 멀어져 가고 있었다. 울고 있는 여자에게 위로 한 마디 건네지 않고 가버리는 그는 변함없이 잔인했다. '왜 저는 안 되었던 건가요?' 그의 결혼소식을 들었을 때 소피아는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을 맛보았다. 그에게 달려가 묻고 싶었다. 그가 즉시 영지로 내려가지 않았다면 정말 그랬을 것이다. 실의에 빠진 소피아는 앨빈 백작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포기하는 심정이었다. 다 잊고 싶었다. 도피로 택한 결혼이 행복할 리 없었다. 부자인 남편 덕에 누릴 수 있게 된 풍족함 속에서 소피아는 항상 마음이 헛헛했다. 질긴 미련을 도무지 놓을 수 없었다. 가완성된 드레스 일부의 중간점검을 위해 방문한 앙뜨가 루시아의 입궁 소식을 듣고 흥분했다. "첫 입궁이시군요! 제가 도와드려야지요." "그런 수고까지 할 필요 없네." 타란 공작의 재방문으로 이중계약서를 통해 엄청난 수익을 보장받은 앙뜨는 의욕이 넘쳤다. 황금은 앙뜨의 예술혼을 불태우는 기폭제였다. 이미 예약한 고객은 어쩔 수 없다 쳐도 앙뜨는 요즘 찾아오는 고객은 모두 돌려보냈다. 앙뜨는 타란 공작부인의 전속 디자이너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첫 입궁은 일생일대 단 한 번뿐인 이벤트이지요! 마땅히 특별해야 합니다!" 뭘 하든 처음은 당연히 단 한 번뿐이다. 루시아는 앙뜨의 궤변과 열정에 밀리고 말았다. 입궁일 아침 일찍 앙뜨가 전쟁터를 향하는 병사처럼 중무장으로 방문했다. "왕비 마마를 뵙는 첫 자리이니 점잖고 우아한 스타일이 좋겠습니다. 공작부인은 어려 보이시니까 그 점을 보완해야겠어요. 기품 있지만 결혼한 귀부인답지 않은 상큼함을 표현하는 거지요." 앙뜨는 빛을 받으면 미세하게 반짝이는 비즈로 장식한 연한 보랏빛 드레스를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허리에 밴드를 묶은 효과를 주어 가느다란 허리를 강조하고 허리 아래에 풍성하게 퍼져서 상대적으로 몸매의 아름다운 곡선을 드러냈다. 상체는 몸에 달라붙는 형태로 어깨에서 팔 아래까지는 안이 들여다보이는 레이스로 소매를 만들었다. 가슴골이 드러나는 요즘 유행과 전혀 다르게 오히려 목선은 목 바로 아래까지였지만 전혀 답답하거나 고리타분하게 보이지 않았다. 머리는 틀어 올려서 가늘고 긴 목선을 보였다. 붉은 기운 도는 갈색 머리카락을 작은 하얀 다이아몬드가 박힌 핀으로 고정했다. 마무리는 마술 같은 앙뜨의 화장술이었다. 앙뜨가 귀부인들 사이에 인기가 높은 이유는 드레스 제작 솜씨 못지않게 뛰어난 화장술 덕분이었다. 보랏빛 펄을 눈에 바르고 눈꼬리가 살짝 올라갈 정도로 아이라인을 그렸다. 하얀 피부를 강조하면서 상큼함을 드러내려고 홍조를 드러내듯 볼터치를 했다. 거울 속 루시아는 앙뜨가 말한 대로 우아함과 발랄함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신기해.. 왜 내가 하면 이렇게 안 될까.' 루시아는 자신을 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꿈속에서 화려한 미인들 틈에 묻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화장이나 꾸민 스타일 덕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루시아의 표정이 달라졌다. 꿈속에서 루시아는 소극적이며 주눅이 들어 있고, 무도회를 즐기기보다는 지쳐 있었다. 현재의 루시아는 밝고 자신감이 있었다. 싱그러운 기운은 그녀를 돋보이게 했다. 거울 속 자신을 보며 루시아는 생각했다.'괜찮은걸. 조금은.. 예쁜 것 같아. "입궁하는 공작부인 마차를 기사 딘이 호위했다. 마차는 내궁 입구에서 멈추었다. 검을 든 외부인은 내궁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내궁 앞에는 루시아를 마중하려 나온 왕실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루시아가 타고 온 마차는 이곳에서 주인마님이 나오기를 기다려 대기할 것이다. 루시아는 마차를 갈아타고 내궁으로 들어갔다. ============================ 작품 후기 ============================퍼플케이브 님, zhiyan 님, smarttree 님, 꿈꾸는 여인 님, ♡HOLIC♡ 님, smarttree 님, fatmermaid 님, 너무죠아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어떤 작품과 닮았다는 등의 코멘은 삼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예 표절이라는 문제 제기가 아니라면 그런 코멘은 글을 쓰는 사람 힘을 빼거든요. < -- 수도 -- > "어서 오세요. 공작부인."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마." 환대로 맞이하는 베스를 보며 루시아는 기분이 묘했다. 꿈속에서 루시아는 베스와 제대로 대화 한 번 나눠보지 못했다. 사람들과 섞여 함께 인사했으나 아마 루시아를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곁에 붙어 아부를 쏟아내는 변죽 좋은 성격이 못 되어서 루시아는 근처를 뱅뱅 돌기만 했다. '어머..' 베스는 공작부인에 대한 소문을 거의 믿지 않았다. 선왕의 공주를 여럿 보았지만, 왕실 핏줄이 그런 미인일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공주중에서 그나마 캐서린 공주가 미인 축에 들었지만, 모친이 원래 대단한 미인이었다. 선왕의 후궁이었던 돌아가신 시어머니는 젊어서 왕국 최고의 미녀로 유명했고, 선왕의 총애를 가장 오래 받았다. 시어머니 미모에 비하면 캐서린은 한참 부족했다. 그 외에 공주들은 이상하게 별로 미인은 없었다. 선왕의 후궁들이 못난 외모는 아닌데도 공주들이 대개 친탁을 했다. 그래서 공작부인 미모에 대한 소문을 웃어넘겼다. 그런데 실제로 보는 공작부인은 베스가 봤던 공주들과 상당히 달랐다. 지금껏 봤던 전형적 미인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눈이 가는 고혹적이면서 풋풋한 매력이 있었다. 전혀 어울릴 수 없을 두 모습이 어색함 없이 조화로웠다. 가녀린 체구 때문인지 여자치고 그렇게 작은 키가 아닌데도 사내 품에 쏙 들어가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소문대로 세기의 미녀는 아니지만, 대놓고 그 소문 완전 엉터리라고 웃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그들은 잠시 소파에 마주앉아 짧은 대화로 서로를 파악했다. "이렇게 와 주어서 기쁩니다. 공작부인을 꼭 만나고 싶었어요." "저도 마마를 뵈어 영광입니다." 베스가 소문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분명 소문을 들었을 거로 생각하면 루시아는 살짝 얼굴이 달아올랐다. "공작부인은 정말 차분하군요. 내가 공작부인 나이 무렵에는 말 한마디 할 줄 몰라 덜덜 떨었답니다." 베스는 공작부인 나이가 이제 19살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자신은 그 나이 때 공녀의 지위를 누리며 파티를 쫓아다니느라 정신없었다. 결혼하고 태자비라는 지위에 자신을 맞추느라 행동을 조심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철이 들었지만, 처녀 때 베스는 놀기 좋아하는 보통 아가씨였다. "과찬이십니다." "말수도 적고. 부군을 닮았군요. 타란 공도 말수가 적으시지요." "송구합니다. 제가 말솜씨가 좋지 않습니다." "나무라는 것이 아니랍니다. 워낙 주변에 말 많은 사람이 많다 보니 참 편안하군요." 오찬 자리를 마련해서 루시아를 초대했다기보다는 루시아를 초대하기 위해 오찬을 준비했다는 편이 더 맞았다. 손님은 루시아뿐이었다. 분위기는 좋았다. 요리를 훌륭했고 대화는 적당히 가벼웠다. "근래 도는 소문으로는 타란 공이 부인을 위해 어마어마한 보석을 사들였다지요." 세피아 보석상은 자기들 상품을 자랑하기 위해 타란 공작이 만족하며 대량 구매했다고 홍보했다. 광고 효과가 뛰어나서 세피아 보석상 매출 급증으로 관계자 입이 귀에 걸렸다는 풍문이었다. "소문은 원래 과장되기 마련입니다. 마마." 루시아가 당황해서 얼굴을 붉혔다. "그래도 아무 근거가 없는 소문은 돌지 않지요. 언제 저택에 초대해 주지 않겠어요? 소문의 보석들을 구경하고 싶네요." "황공하옵니다.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마마." '참 맑은 사람이구나. '베스의 주변은 듣기 좋은 말만 골라 하며 꿀단지에 침을 흘리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공작부인의 순수한 분위기가 깊이 마음에 와 닿았다.' 무서운 타란 공 곁에 저런 부인이라. 공작부인은 과연 타란 공과 제대로 이야기는 나눌까? 타란 공 앞에서 겁먹어 덜덜 떠는 건 아니겠지? '좀 더 은밀한 사생활까지 궁금했다. 화려한 전적 있는 공작이 순진한 아내에게 별로 만족하지 못할 것 같았다.' 제대로 부부관계는 할까..? ' "시간이 나면 종종 이렇게 만나러 와 주지 않겠어요? 궁에 갇혀 사는 삶이란 가끔은 외롭답니다." "초대해 주시면 언제든 뵈러 오겠습니다. 마마." '참 다르네...' 베스는 또 다른 시누이, 캐서린을 떠올렸다. 캐서린은 굉장히 짙은 향을 풍기는 붉은 장미 같은 여자였다. 캐서린이 드레스와 보석을 사기 위해 써대는 왕실 예산 때문에 퀘이즈가 골치 아파하는 것을 몇 번 보았다. [ 왕위에 오르면 그 녀석 소비는 딱 잘라버려야지. 이거 원, 끝이 없으니. 얼른 시집보내야 할 텐데. ]베스는 남편의 다짐에 회의적이었다. 퀘이즈는 하나뿐인 동복 누이를 매우 귀애했다. 아마 선왕의 수많은 공주중에 제대로 대접받으며 부족함 모르고 자란 유일한 공주일 것이다. 그래서 자존심 강하고 지기 싫어하며 제멋대로였다. 악의는 없는데 하고 싶은 말은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상대방 마음 상관없이 말을 툭툭해서 베스는 캐서린이 던진 말 때문에 은근히 기분이 상한 적이 꽤 있었다. 그래도 나이가 들면서는 조금 나아졌다. 어릴 때는 정말 누구도 손을 못 대는 천둥벌거숭이였다. 캐서린에 비하면 공작부인은 순하고 겸손했다. 말 한마디 하는데 신중히 고르는 모습이 보였다. [ 누이로 볼 생각 말라고 타란 공이 딱 잘라 말하더군. ]공작부인을 초대해 식사한다고 하니까 퀘이즈가 전한 말이었다. 공작부인이건, 시누이건, 아무래도 좋았다.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베스는 친한 사람만 가끔 불러 식사하고 대화를 나누는 일을 좋아했다. 근래 자주 부르는 사람은 앨빈 백작부인이었다. '둘이 잘 사귀어도 좋을 것 같은데...' 생각했다가 아차 싶었다. 베스는 타란 공작의 과거 여자관계를 모두 알지 못하지만, 앨빈 백작부인이 과거 공작의 연인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소피아가 워낙 눈에 띄는 미녀라 관심 있는 사람이 많아서 귀부인들과 대화하다가 소문을 들었다. '두 사람은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게 하는 편이 좋겠군.' 공작부인이 과거 공작의 여자들을 얼마나 알고 있을지 궁금했다. "차는 장미궁으로 가서 마시는 건 어떨까요?" 베스가 제안했다. "요즘 장미궁에 꽃이 만발하답니다. 공작부인이 잠시 그곳에 머문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장미궁의 아름다움을 잘 알겠지요." "제가 잠시 머물 때는 꽃이 피지 않아 구경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마마 덕분에 구경할 기회를 얻었군요." "어머. 그랬나요. 잘 되었네요."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과 장소는 장미궁이었다. 언제나 마찬가지로 타란 공작과 왕의 점심 식사가 끝나고, 가벼운 주제로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시종장이 들어왔다. "폐하. 타란 공작께서 알아보기를 청한 일이 있어 고하려 하옵니다." 퀘이즈는 식사 시작 전에 휴고가 시종장을 불러 무슨 말을 하는 모습을 얼핏 본 기억이 났다. "말해 보아라." "예. 타란 공작부인께서는 왕비 마마와 점심을 드시고 장미궁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하옵니다." "아. 오늘 공작부인이 입궁한다는 소리는 왕비에게 들었지. 입궁한 건지 확인하려 그랬나? 별나기는. 어련히 잘 왔을까." 휴고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어디를?" "안사람이 들어왔다니 같은 공간에 있는 김에 보고 오려 합니다." 궁이라는 거대한 공간이 언제부터 같은 공간이라는 좁은 단어로 묶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퀘이즈는 찻잔을 든 채 생각에 잠겼다. "설명이 필요하군. 다급히 공작부인에게 전할 말이라도 있나? 그거라면 시종을 시켜도 될 텐데." "꼭 전할 말이 있는 건 아니지만 있다 해도 시종을 왜 시킵니까. 대화는 얼굴 마주 보고 하는 겁니다." "....." 분명 타란 공작은 모국어로 말하고 있는데 퀘이즈는 외국어처럼 들렸다. 말하는 겉의 뜻은 알아듣지만, 말하는 사람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게 대화의 정의를 가르쳐 주는 건가?' 라고 퀘이즈는 생각했다. 휴고는 더 시간을 지체할 생각이 없었다. 오후에는 회의가 있다. 얼굴 잠깐 보고 올 시간밖에 없었다. "회의에는 늦지 않게 오겠습니다." 휭 나가버리는 휴고를 잡을 수 없었다. 퀘이즈는 한참 고민하다가 부관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단순히 이 상황을 해석하면?" "... 타란 공작이 공작부인을 보고 싶어 만나러 간 것 같습니다만." "나도 그런 것 같으니까 하는 말이야." 상황은 알겠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집에 가면 매일 보는 얼굴이 왜 보고 싶은데? 한창 불붙은 연인들이나 하는 짓을 결혼한 지 1년이 훌쩍 넘은, 더구나 타란 공작이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어쩌면 뭔가 심오한 깊은 뜻이 있는지도 모른다. 퀘이즈는 깊은 사색에 빠졌다. 데이빗은 누님을 만나러 입궁했다가 누님이 손님을 맞아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말을 들었다. 앉아 기다리기 지루해서 누님을 찾아 나섰다. 장미궁으로 가셨다는 말을 듣고 천천히 그리로 갔다. 얼마 전 누님께 야단을 듣고 기분이 상하긴 했지만, 데이빗은 누님과 소원한 사이를 유지하고 싶지 않았다. 만나면 자꾸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해도 베스는 데이빗이 어쩌지 못할 위치에 있는 몇 사람 중 하나였다. 왕비이며 장차 왕의 모후가 되실 누님과 사이가 나쁘면 저만 손해였다. '누님은 여전히 날 어린애처럼 보시지만 두고 보라지. 언제고 날 달리 보실 테니까.' 왕이 중요한 뜻을 펼치기 위해서는 곁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자신은 그런 부류 중 으뜸이었다. 대관식 후부터 왕은 본격적으로 여러 가지 일을 벌일 것이다. 데이빗은 중요한 임무를 맡을 선봉장에 있다고 자신했다. 그때를 위해 데이빗은 부지런히 젊은 인재들을 모으고 있었다. 자신의 노력이 빛을 발할 날이 올 거라고 굳건히 믿었다. 장미궁에 가까워질수록 진한 향이 밀려왔다. 왕이 가장 총애하는 여인에게 내린다는 장미궁은 선왕 살아생전에는 내내 비어 있었다. 데이빗은 대관식 후에는 마땅히 그 궁을 누님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주 잠시 공주 하나가 머물렀다고 들었다. '그 공주가 타란 공작과 결혼했다지.' 타란 공작 위세가 참 대단했다. 보나 마나 그 공주가 장미궁에서 지내고 싶다고 졸랐을 것이다. '공주는 무슨. 왕족이니까 공주라 해주지 귀족이었으면 그냥 사생아잖아.' 데이빗은 타란 공작과 관련된 모든 것을 폄하하고 싶었다. 잠시 딴생각으로 길을 잘못 들어 입구가 아닌 정원으로 들어섰다. 데이빗은 돌아가야 한다는 성가심에 투덜거렸다. 갑자기 바람이 훅 밀려왔다. 여름 바람치고 제법 강해서 바닥 가득 쌓여 있던 꽃잎이 회오리가 되어 데이빗을 향해 달려들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눈을 찌푸려 바람을 피하고 제대로 시야가 트였을 때, 데이빗은 발치로 날아와 나뒹구는 모자를 발견했다. 레이스로 풍성하게 장식한 모자는 확실히 귀부인의 것이었다. 모자를 집어 들고 일어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데이빗은 그대로 굳었다. 날아간 모자 때문에 당황하는 여인이 데이빗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햇빛에 반짝거리는 호수 표면처럼 여인이 입은 드레스가 빛을 냈다. 햇살이 통과할 것 같은 하얀 피부는 금방 사라질 것처럼 투명했다. 주변 가득 흐드러지게 핀 새빨간 장미꽃잎처럼 유난히 붉은 입술이 선명했다. 데이빗은 환상적인 장미 정원의 분위기와 달콤한 꽃향기와 부드러운 바람과 햇빛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와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여인에게 그야말로 한눈에 반했다. 데이빗은 모자를 들고 여인에게 다가갔다. 사춘기 소년이 첫사랑을 느낀 것처럼 가슴이 마구 뛰었다. 한참 결혼 말이 오가는 약혼녀 얼굴 따위는 이미 저편으로 날아갔다. 여인 곁에는 시녀가 있었지만, 안중에 없었다. 여인으로부터 한 걸음의 거리까지 다가가 정중하게 모자를 내밀었다. "아름다운 귀인의 마음을 담은 모자가 제 발치로 날아왔기에 돌려드립니다. 부디 담긴 마음을 제가 품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루시아는 모자를 받으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풋,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이런 말을 얼굴색 하나 붉히지 않고 할까. 이렇게 노골적인 남자 작업을 받는 건 처음이라 루시아는 그저 웃음이 나왔다. 넓은 장미정원을 돌아보고 싶어서 왕비의 양해를 얻어 산책 중이었다. 갑작스러운 돌풍에 모자가 날아가 당황했고, 낯선 남자가 주워 다가와서 더 당황했다. 곁에 함께 있는 데려온 하녀와 왕비가 붙여준 시녀가 든든했다. 저택을 나가면 결코 혼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제롬의 조언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 돌발 상황이 일어날 수 있구나.' 라고 루시아는 생각했다. "모자를 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루시아는 이 상황 자체가 낯설어서 웃었지만, 데이빗 눈에는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였다. "목소리마저도 아름다우십니다. 저는 라미스 공작가의 데이빗 라미스 백작입니다." 데이빗이 자신을 소개하자 루시아는 꿈속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라미스 공작의 장남이었다. 파티장에서 여러 번 보았다. 타란 공작 못지않게 추종자들을 끌고 다녔다. 두 남자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파티장에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가끔 그런 날은 두 무리 집단이 만들어졌다. 루시아는 데이빗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다. 호인처럼 굴지만 오만했다. 타란 공작은 당당하고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오만함이었지만, 데이빗은 타인을 아래로 보는 오만함이었다. 순전히 루시아의 주관적인 시선이었다. 꿈속에서 루시아는 타란 공작을 마음에 품었으니까. 어쨌든 루시아는 데이빗의 웃는 얼굴을 보면 항상 위화감이 들었다. 얇은 가면을 얼굴에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느낌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하다가 아주 우연히 데이빗의 본 얼굴을 보는 일이 있었다. 대단히 큰 무도회 자리였고, 북적이는 사람들을 피해 잠시 인적 드문 구석진 곳에 기대어 쉬고 있었다. [ 뭐? 그게 정말이야? ]큰소리가 나서 살짝 보니까 데이빗이 어떤 남자와 함께 있었다. [ 정말 아버님이? ][ 예. 아무래도 심중에.. ]이를 아득 가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루시아는 흉하게 일그러진 데이빗 얼굴을 보고 놀라 다시 숨었다. 살기등등한 표정이 항상 웃고 다니던 평소의 모습과 전혀 달랐다. 루시아는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 한참을 숨어 있다가 조심스럽게 홀에 나갔다. 불안하게 뛰는 심장이 오래 가라앉지 않았다. 메튼 백작과의 결혼 생활이 끝나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꽤 시간이 흐른 후, 루시아가 하녀로 다시 사교계 소식을 접했을 때 라미스 공작은 노환으로 타계하고, 데이빗이 뒤를 이었다고 들었다. 타계한 라미스 공작의 차남이 사고로 죽은 지 꽤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하녀 일을 그만두고 한참 시간이 흘러서 우연히 한 자락 라미스 공작가 소식을 들은 것이 마지막이었다. 라미스 공작이 반역을 꾀했다가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했다고 들었다. 라미스 공작가를 친정으로 둔 왕비와 라미스 공작이 왕으로 세우려 했던 태자는 어찌 되었는지 그 후의 소식은 듣지 못했다. ============================ 작품 후기 ============================꿈꾸는소녀83 님, 퍼플케이브 님, 아라크네 님, 낙산홍 님, 재레미 님, 구리구리도사 님, 지오가인 님, Katie. 님, 허롱 님 쿠폰 감사합니다. 꿈꾸는소녀83 님, 퍼플케이브 님, 아라크네 님, 낙산홍 님, 재레미 님, 구리구리도사 님, 지오가인 님, Katie. 님, 허롱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 -- 수도 -- > "뵙는 순간 장미꽃이 사람으로 화한 줄 알았습니다." 어쩌면 먼 미래에 일어날지 모를 일을 회상하던 루시아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꿈속 기억을 겹쳐 남자를 보자 인상이 달라졌다. '혹시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걸까.' 남자의 접근의도가 의심이 갔다. "과찬이십니다." "과찬이 아닙니다. 지금껏 이런 미인을 뵌 적이 없습니다. 부디 고귀한 이름을 듣는 영광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름을 묻는 것을 보니까 누군지 알고 접근한 것 같지는 않았다. 루시아의 침묵은 데이빗의 마음을 더욱 조급하게 했다. "제가 어디 가서 이런 경솔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귀인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 것 같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시어 잠시 이곳을 걷지 않으시겠습니까? 가득한 장미 향에 취하면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어주시지 않을까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데이빗은 저돌적인 청년이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과감히 사랑을 고백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대신 빨리 타오르는 만큼 빨리 식는 편이다. 지금껏 어떤 여자로부터도 거절당한 적 없는 데이빗의 자신감은 충만했다. 자신이 돋보이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너무 화려해서 오히려 그를 누르는 미녀보다는 청초한 미녀를 좋아했다. 정원의 여인은 완벽하게 그의 취향에 부합했다. 데이빗은 자신의 감정에 푹 빠져서 그들을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루시아가 서 있는 방향에서 뒤쪽에 가까운 측면이었다. 루시아는 볼 수 없지만, 데이빗은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볼 수 있었다.'저애는 왜 여기 와서.. '베스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남동생이 공작부인에게 작업을 거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듣기에 민망해서 절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남동생이 어떻게 여자를 꾀는지 같은 일은 절대 알고 싶지 않았다. 잠시 공작부인을 정원에 두고 시녀들에게 다과를 준비하라고 지시하는 중에 타란 공작이 나타났다. 공작부인을 찾기에 무슨 다급한 일이 있는가 싶어 서둘러 정원으로 함께 들어왔다가 못 볼 꼴을 보고 말았다. 흘끔 시선을 돌려 옆에 서 있는 타란 공작을 올려보았다. 여전히 차가운 타란 공작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다행히 크게 노여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저놈을 어떻게 죽일까.' 베스는 남동생의 살인모의가 타란 공작 머릿속에서 구성되고 있음을 짐작조차 못 했다. 휴고는 아내에게 수작을 거는 잡놈을 보며 수십 가지 살인방법을 떠올리고 있었다. 차가운 가면 같은 얼굴 속에서 그의 눈에 사납게 불꽃이 튀었다. 휴고는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아주 기분이 좋았다. 그녀가 있다는 장미궁으로 오면서 자신의 등장에 그녀가 놀랄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원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펼쳐진 광경에 그의 기분은 순식간에 바닥을 쳤다. 향기로운 꽃에 파리 한 마리가 꼬이고 있었다. 그가 그동안 품 안에 꼭꼭 숨겨 지킨 꽃이 화사하게 피어 더 이상 향기를 감출 수 없는 지경이 이르렀다. 휴고는 이를 사리 물었다. 빌어먹을. 왜 저렇게 예쁜 거야. 그러니까 저런 놈팡이가 꼬이지. 그녀의 사랑스러움은 자신만 알면 되었다. 딴 놈들 기웃거리라고 거금을 처들인 것이 아니었다. 그의 표정은 겉보기에 변화 없으나 속은 분통이 터져서 부글부글 끓어 넘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는 조금 호흡을 크게 해서 간신히 참았다. 이성을 찾아야 했다. 내궁 안에서 왕의 처남을 죽일 수는 없었다. '뭐?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저놈이 정말 눈이 멀어봐야 저런 헛짓거리를 다시는 못하지.' 같이 정원을 걷자고 열심히 수작을 거는 꼴을 더는 보기 힘들었다. 휴고는 앞으로 나섰다. 루시아는 끈질긴 데이빗의 데이트 신청을 어떻게 거절해야 할까 고민 중이었다. 남자의 구애를 어떤 식으로 거절해야 서로의 체면이 상하지 않는지 북부에 있을 때 케이트에게 배워둘 것을 그랬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선약이 있어 곤란하군." 익숙한, 그리고 들을 때마다 가슴이 뛰는 목소리가 끼어들자 루시아의 눈동자가 확 커졌다. 어, 하는 사이에 그가 순식간에 가까이 다가와 루시아의 허리를 한쪽 팔로 감아 품으로 당겼다. "당신이 어떻게..." 루시아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허리를 감싸 안은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내 아내에게 무슨 볼일이지?" 데이빗은 갑작스러운 타란 공작의 등장에 놀라고, 자연스럽게 여인을 품으로 안는 바람에 다시 놀라고, 이어진 타란 공작의 말에는 충격으로 말문이 턱 막혔다. "아.. 내.. 그러면 공작.. 부인...?" 데이빗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크게 흔들렸다. 자신의 마음을 순식간에 앗은 여인이 이미 주인이 있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믿을 수 없어서 데이빗은 멍하게 루시아를 응시했다. 타란 공작의 품이 익숙한 것처럼 안겨 있는 모습은 또 다시 충격이었다. 데이빗 시선이 그녀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휴고의 눈썹이 꿈틀했다. 저놈에게는 보이기도 아까웠다. 눈 돌려!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참고 음산하게 그를 불렀다. "라미스 경." 데이빗 시선이 자신에게 와 닿자 휴고는 만족했다. "다시는 내 아내에게 이런 식으로 사적인 접근은 하지 마시오." 그리고 휴고는 눈빛으로 강하게 말했다. 꺼져. 애송이. 완전히 깔아뭉개는 시선이었다. 데이빗은 울컥했다. "말씀이 심하십니다. 잠시 한담을 나누었을 뿐입니다. 결혼했다고 여인이 소유물이 되는 건 아닙니다." 휴고의 귀에는 다시 수작을 걸겠다는 말로 들렸다. 죽으려고 용을 쓴다. 휴고의 붉은 눈동자가 선명하게 짙어졌다. 뒷일이고 뭐고 그냥 죽여 버릴까. 최소한 그녀만 없었어도 심각하게 고려했을 것이다. 그녀에게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휴고는 평소 데이빗이 안중에 없었다. 혼자 깡깡대는 꼴이 하룻강아지라 상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일로 휴고는 확실히 데이빗을 각인했다. 데이빗이 알았다면 여러 번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지금껏 자신은 타란 공작에게 무존재였고, 그나마 미운털이 박혀 존재감이 생겼으나 계기는 데이빗이 한눈에 반한 여자 때문이며, 그 여자는 타란 공작의 아내였다. "라미스 공은 재주도 좋지. 여벌 목숨이 있는 것처럼 세상을 사는 아들을 두었으니." 휴고는 생애 처음 점잖은 협박을 했다. "뭐.. 뭐요??" 데이빗은 호기롭게 상대하려 했다. 그러나 휴고의 무시무시한 살기를 받고 숨이 턱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셀 수 없이 많은 목숨을 앗은 진짜 살기였다. 용맹한 적장도 꼬리를 내렸다. 데이빗이 정면에서 받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데이빗은 파랗게 질려서 벌벌 떨다가 그대로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 꼴을 보며 타란 공작이 입술 끝을 올려 비웃었다. 데이빗은 피가 머리끝까지 몰려 어지러웠다. 분노, 수치, 굴욕. 살아오며 지금껏 느껴봤던 어두운 감정이 극한까지 치달았다. 타란 공작은 공작부인 손목을 잡아끌고 정원 다른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장미 덩굴 벽이 가려 두 사람 모습이 금세 사라졌다. 바닥에 널브러진 데이빗은 기가 막혔다. 왜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베스가 동생에게 다가갔다. 추태를 보인 동생을 향해 속으로 혀를 찼다. "괜찮은 게냐?" "누님! 저자가 하는 말 못 들으셨습니까? 절 죽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뭘 그렇게까지." 베스는 심드렁하게 받아쳤다. 휴고의 살기는 오직 데이빗만 향해서 베스는 그렇게까지 심각한 상황으로 느끼지 않았다. 그저 심약한 동생이 타란 공작 기세를 견디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러게 평소에 검술 실력을 연마하라 하지 않았니. 라미스 가문이 무가는 아니지만 검을 어느 정도 쓸 수 있어야 기사들의 충성을 받기 쉽지." "검술 실력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아무리 안하무인이라지만 어떻게 그런 협박을. 누님은 이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보십니까?!" 협박은 무슨. 베스는 남동생의 과한 표현이 못마땅했다. 사실 베스도 그런 생각을 살짝 했지만 데이빗이 방방 뛰니까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뭐든 자기 우선으로 생각하는 남동생 성품을 알고 있었다. "네가 먼저 잘못하였지. 공작부인에게 수작을 걸지 않았더냐." "제가 그걸 알았냐고요!" "아무튼 그만 일어나거라." 베스는 추한 꼴로 주저앉은 동생에게 인상을 썼다. 데이빗은 이를 악물었다. 자기도 이러고 싶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을 어쩌란 말인가. 시간이 더 지난 후 비틀거리며 겨우 일어났다. "정말 공작부인입니까?" "그래. 오늘 입궁해 나와 식사를 함께했지. 그러니 혹여 이후에 다시 보면 무례하게 굴지 말고." 데이빗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는 정말 낙담했다. 운명의 여자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누님은 왜 저런 미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은 겁니까. 공주였다면 누님이 먼저 아실 수 있었잖아요." "하다하다 이젠 별소리를 다하는 구나. 내가 공주들이 미인인지 아닌지 찾아보라는 말이니?" 베스는 남동생의 우는 소리를 냉정하게 잘라냈다. "급한 일 아니면 오늘은 그만 돌아가거라. 난 아직 손님대접을 더 해야 하니까." "... 손님이라면 공작부인 말씀입니까?"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관심에 베스는 쯧, 혀를 찼다. "타란 공 경고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구나. 헛된 수작 말고 돌아가." "참, 나. 기가 막혀서. 결혼한 여인은 다른 사람과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한다는 법이 있답니까?" 남편 앞에서 대놓고 부인에게 수작을 거는 짓은 물론 무례했다. 충분히 결투를 신청할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상대를 조롱하려는 고의성이 없다면 오히려 그런 일로 결투를 신청할 경우, 제논의 귀족 문화에서는 품위 없는 짓이라고 여겨 비웃음을 샀다. 제논 귀족들의 성 풍속은 대단히 자유로웠다. 남자건 여자건 애인이 있다는 이유가 이혼사유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남자의 사생아는 물론이고 여자의 사생아에도 관대했다. 결혼하고 연서를 받는 일은 흥밋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데이빗이 보기에 타란 공작의 행동은 추했다. 여자를 구속하려는 짓은 촌뜨기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눈앞에서 부인에게 접근하는 남자를 보면 남편 된 입장에서 기분이 나쁘겠지." 말은 하면서도 베스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타란 공의 반응은 과했다. 그건 누가 봐도 질투에 휩싸인 남자의 과격함이었다. '질투....?' 그것만큼 타란 공작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는 없을 거라고, 베스는 생각했다. 그에게 단단히 손목이 잡혀 루시아는 끌려갔다. 그가 내디딘 발걸음 간격이 너무 커서 그는 조금 빠르게 걷는 정도였지만 루시아는 종종걸음으로 달려야 했다. "휴. 무슨 일이에요? 왜 그렇게..." 화가 났느냐, 물으려 했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 루시아를 확 잡아당기며 키스하기 시작했다. 사방이 트여 있고, 누가 올지 모르는 정원이었다. 루시아는 기겁해서 그를 밀치려 했지만, 턱을 틀어잡은 그의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그가 그녀의 입술을 강하게 비비자 연약한 입술이 쓸리며 얼얼했다. 순식간에 그녀의 입안을 점령한 뜨거운 혀가 치열을 훑고 목 안쪽 깊은 곳까지 건드렸다. 숨 쉴 틈조차 주지 않고 밀어붙이는 격렬한 키스에 루시아는 숨을 할딱이며 간신히 쫓아갔다. 그는 입술을 떼었다가 방향을 바꿔 몇 번이고 다시 겹쳤다. 숨이 턱까지 찰 때 키스가 끝났다. 마무리로 그녀의 입술을 혀로 부드럽게 핥는 그의 붉은 눈동자는 정염으로 가득했다. "당신 디자이너를 잘라야겠어." 그가 미련을 놓지 못하고 그녀의 입술에 반복해서 가벼운 키스를 날렸다. "네?" "누가 이렇게 예쁘게 하고 나오래. 대충 하고 오지!" 직접 의상실을 방문해서 굳이 값비싼 디자이너를 붙여 준 사람이 딴소리하고 있었다. 루시아는 그의 억지가 터무니없지만, 예쁘다는 말에는 기분이 좋아서 그를 향해 곱게 눈을 흘겼다. 나오기 전에 봤던 거울 속 자신은 그런대로 예뻐 보이기는 했다. 난생처음 남자의 적극적 구애를 받아보고, 남편도 예쁘다 해주니까 루시아의 자신감이 더욱 커졌다. "그러시면 안 돼요. 앙뜨가 오늘 아침 일찍부터 얼마나 수고 많았는데요. 제 차림이 가문의 위신 문제라고 당신이 그러셨어요." 위신 따위 상관없었다. 그녀에게 드레스를 사 입히고 싶었을 뿐이다. 그녀가 추레하게 입고 다니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예쁘게 하고 다니는 것도 싫고. 그는 모순 속에서 방황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자리를 뜨면 어떡해요. 왕비마마께 무례라고요." "이 상황에서 그런 게 중요해?"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데요?" "그새.. 그자가 당신한테 집적대잖아!" ".... 네?" 루시아는 씩씩대는 그를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떨어진 모자를 주워 주었을 뿐이에요." 루시아도 바보가 아닌데 아까의 상황이 뭔지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굳이 그에게 남자가 내게 데이트 신청했다고 자랑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 단정하지 못한 행실로 공작가 명예를 더럽힌다고 오해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긴. 내가 다 들었는데. 그건 여자한테 수작 거는 전형적 수법이야." 루시아는 그를 새침하게 흘겨보다가 흐응, 중얼거렸다. "많이 해보셔서 아는군요." 이야기가 왜 거기로 튀는가. 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이럴 때마다 할 말이 없게 만드는 과거의 자신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었다. "아까의 상황이 여자에게 남자가 접근하는 상황이라 친다고 해도." 친다고 하는 게 아니라 바로 그런 상황이라고! "제가 그럴 생각 없으면 되는 거잖아요." 분기탱천했던 휴고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그녀의 지극히 담담한 반응이 그의 마음을 풀었다. "왜 이렇게 과민반응하세요. 공작가 명예에 손상 갈 행동은 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마세요." "... 그런 거 아니야." 루시아의 표정이 묘해졌다.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의 말뜻을 깊이 생각하기 전에 정신이 딴 곳에 팔렸다. 휴고는 그녀의 눈이 자신이 아닌 좀 더 멀리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녀 시선이 향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놈으로부터 떨어뜨려 놓으려고 무작정 그녀를 끌고 오느라 보지 못했다. 그들은 장미정원 중에서 노란 장미가 가득한 구역 한가운데 있었다. 하필. 휴고의 표정이 팍 일그러졌다. 그녀가 장미궁에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 작품 후기 ============================밤에 한 편 더 올게요~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 -- 수도 -- > 루시아는 북부에서 장미 정원을 조성하는 일은 실패했다. 제롬이 기를 쓰고 말리면서, 주인님께서는 장미꽃을 싫어하시고 어쩌고 열심히 이유를 갖다 붙였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지만, 제롬 노력이 가상해서 장미 정원은 만들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을 보니까 정말 장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가 보다. 루시아는 모르는 척 화제를 돌렸다. "왕비 마마께서 다과 준비 중이세요. 함께 하실 시간 되세요?" ".... 차?" 그는 시간이 없었다. 곧 시작할 회의 때문에 가봐야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데이빗도 그 자리에 있을 것 아닌가. 그놈이 있는 자리라면 자신이 자리를 지켜야 했다. "음. 괜찮아." 두 사람은 정원 바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휴고는 이 망할 장미들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장미라면 이제 아주 지긋지긋했다. 자신이 꽃 따위에 호불호 감정을 품을 줄은 몰랐다. 루시아는 데이빗이 마음에 걸렸다. 아직 먼 미래의 일이고, 반역이 성공했으면 모를까 어차피 실패해서 죽었다. 하지만 데이빗의 반역이 아주 조금이라도 그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까 봐 걱정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뭐라고 한단 말인가. 꿈에서 봤다고? 당장 일어날 일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가 조금이라도 데이빗을 경계했으면 좋겠다. 그가 방심해서 주변 경계를 게을리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아까 데이빗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보면 너무 무시하는 것 같았다. "휴. 정말 쓸데없는 질문인데요. 듣고 잊어주세요. 라미스 공작가가 반역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을까요?" ".... 반역?" "어디서 무슨 말 들은 것도 아니고 정말 쓸데없는 질문이에요. 개인적 호기심이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 위험한 말이라는 것도 알아요." 휴고는 라미스 공작을 떠올렸다. 그 노인 성품에 그럴 일은 없었다. 한참 나이어린 자신에게도 꼬박꼬박 공대를 해주는 노회한 정치인이었다. 퀘이즈는 사람 보는 눈이 까다로웠다. 단지 장인이라는 이유로 라미스 공작을 가까이 두는 게 아니다. "왕의 측근이고, 외손이 셋이나 되는데 그중 하나는 왕이 되겠지. 꽃밭을 제 손으로 망가뜨릴 이유가 없어." "당분간 말고... 음... 그러니까 아까 봤던 라미스 백작이 공작이 되고 나서 먼 미래에요." "......" 데이빗이 공작이 되고 난 이후. 휴고는 그때를 생각하자 조금 전처럼 확신을 하고 아니라고 답할 수 없었다. 지금은 애송이가 철모르고 까부는 걸 못 본 척 하고 있지만, 세월이 지나면 그자는 나이가 들고 모략에 능한 정치꾼으로 변화할 터. 그자가 자신에게 각을 세우고 있다는 걸 휴고도 알고 있었다. 그자가 공작이 되어 더 큰 힘을 얻어 그 힘으로 맞서려고 한다면. '반역 이전에 내 손에 죽는다.' 휴고는 방심해서 불씨를 남겨놓지 않았다. 라미스 공작과 왕의 체면을 생각해서 지금은 내버려두고 있을 뿐이었다. 워낙 가소로워서 우습게 보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하지만 그녀 말을 듣자 지나치게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공작가를 이어받을 라미스 공작의 적장자였다. 노쇠한 공작이 언제까지 공작가를 지킬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휴고는 데이빗 라미스, 그자에 대한 경계를 마음속에 심어놓았다. "그게 왜 궁금했지?"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까 그 사람이 당신을 보는 눈초리가 좀.." "걱정돼? 내가?" "... 쓸데없는 걱정인가요?" "그럴 리가." 휴고는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위로 들어서 손등에 키스했다. "걱정해 주는 건 좋은데, 안 그래도 돼.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는 정말 언제나 자신만만했다. 루시아는 소리 없이 웃음을 흘렸다. 이 남자라면 어떤 위기가 닥쳐도 다 헤치고 나갈 것이다. 든든한 성벽에 둘러싸여 보호받는 기분은 아늑하고 편안했다. "당신이 집사에게 노란 장미 보낸 일을 물었다고 들었어." 이미 노란 장미 정원에서 빠져나왔지만 휴고는 가득하던 노란 장미가 도통 마음이 쓰여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요. 제대로 마무리하셨다는 말은 집사에게서 들었어요." 루시아는 웃으며 넘어가려 했다. 노란 장미는 그리 오래 화제로 삼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그런 건 집사에게 묻지 말고 내게 물어." "그런 거라면 어떤 거요?" "궁금한 건 뭐든지." "당신이 무척 귀찮을 거예요." "안 그래." '딴 놈하고 말할 시간 있으면 나하고 한마디 더 해. '라고 휴고는 유치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충성스러운 집사 제롬조차 딴 놈이 되었다. 그는 예전이라면 생각도 못 했던 유치함을 아직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해도 아주 당당히 속으로는 생각하고 있었다. 루시아는 살포시 웃었다. 그가 성실한 남편으로 노력하겠다는 다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의 노력의 흔적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그는 밤마다 다음 날 자신의 일정을 간단하게 말해 주어서 루시아는 그가 어디서 뭘 하고, 왜 늦는지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그가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날 거로 생각지는 않지만, 그의 일정을 아니까 그럴 시간이 없다는 걸 알아서 더 마음이 편했다. 휴고의 우려와 달리 데이빗은 돌아가고 없었다. 소궁 테라스에서 왕비와 공작부부는 차를 마셨다. 베스는 태연한 척하고 있으나 자꾸 타란 공작에게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설마 타란 공작하고 마주앉아 차를 마실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급한 용무는 해결하셨습니까?" 베스는 타란 공작이 갑자기 찾아온 이유는 공작부인에게 급하게 전할 중요한 말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예. 해결했습니다. 아까의 무례는 사죄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공께서 동생이 공작부인께 저지른 무례를 너그러이 봐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따끔하게 야단을 쳐서 돌려보냈습니다." 베스가 역성을 들었으나 면죄부가 되지 못했다. 이미 데이빗은 휴고 뇌리에 콕 박혔다. 아주 안 좋은 쪽으로. 휴고는 오늘 안으로 데이빗 속옷 색깔까지 탈탈 터는 조사를 명할 생각이었다. 루시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가 여기 왜 왔는지 듣지 못했다. 베스의 시선을 피해 잠시 그와 눈이 마주쳤다. 루시아 눈에 담긴 의문을 읽은 그가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천천히 혀로 입술을 핥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루시아 얼굴이 확 붉어져서 고개를 숙였다. 아까의 키스가 떠올라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남자가 정말! 여기가 어디라고. '눈을 치뜨고 그를 노려보자 그가 피식 웃으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의 뻔뻔함과 여유로움이 정말 얄미웠다. "공작부인. 더운가요? 얼굴이 붉군요." "예? 아.. 괜찮습니다." 시녀가 들어와 왕비에게 다가와 고했다. 베스는 알았다며 시녀를 내보내고 묘한 표정으로 타란 공작을 보았다. "공. 폐하께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오후 회의 시작이 목전인데 왜 오지 않느냐 하시는군요." "회의가 있으셨어요?" 아까는 그런 말씀 없으셨잖아요! 대체 왜 이렇게 여유 부리는 건데요?! 주변 눈이 있어 비난하는 말을 속으로만 삼켰지만 그를 보는 루시아의 눈꼬리가 심상치 않게 올라갔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는 베스에게 인사하고, 루시아에게 "잠시." 말을 남기며 테라스를 나갔다. 루시아는 베스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베스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심상치 않았다. 물론 부부니까 냉랭하지는 않겠지 생각했지만, 베스 예상과 달리 공작부인은 타란 공을 전혀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모르는 척했지만, 둘이 자꾸 시선을 나누는 것을 보았다. 루시아가 테라스를 나가자 그가 기다리고 서 있었다. 왕이 사람까지 불러 찾는데 왜 이렇게 늦장일까. 루시아 속이 탈 지경이었다. 왜 나오라 했냐고 물으려는데 그가 성큼 다가오더니 갑자기 허리를 확 끌어안았다. 루시아가 화들짝 놀라 그의 어깨를 쳤다. 모셔가려고 기다리던 시종이 눈치 있게 몸을 슥 돌리는 것을 보며 루시아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이이가 정말. 왜 이래요! 다 보잖아요." 큰소리는 내지 못하고 루시아는 목소리를 잔뜩 죽이며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오늘 늦을 거야." "알아요. 어제 말씀하셨잖아요." "곧 집으로 갈 거지?" "... 네. 왕비 마마와 이야기 끝나면요." "잠들지 말고 기다려. 아까 하다 못한 거 마저 하게." "휴!" 그의 손이 루시아 턱을 잡고 키스했다. 짧고 진한 키스였다. 루시아는 경악했다. 휴고는 사과처럼 붉게 물든 아내의 볼에 다시 입을 맞추고 그녀를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뒤돌아 걸어갔다. 그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는 루시아의 꼭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오늘 집에 가면 다시는 이러지 못하도록 단단히 따질 것이다. "흠. 흠." 헛기침 소리에 루시아는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베스가 어느새 와 있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본 걸까. 루시아는 정말 민망해서 기절하고 싶었다.' 이거 아무래도. 터무니없는 소문이 아닌 것 같아.'베스는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공작부인을 보며 생각했다. 사람들은 소문의 초점을 '미녀 공작부인'에 맞추고 '홀딱 반해 영지로 끌고 내려간 공작 ' 부분은 미녀이기 때문에 나오는 결론으로 보았다. 베스는 소문의 전제보다 결론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편에게 말해주면 얼마나 놀랄까. 당분간 혼자 알고 있다가 남편이 뒤늦게 알고 놀라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티파티 날이 다가왔다. 루시아가 참석할 티파티의 주최자, 조르단 백작부인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롬이 정리해서 알려주었다. 나이는 38살. 백작과의 사이에 슬하 2남 5녀를 두고 있으며 장남의 나이는 15살로 얼마 전 생일에 사교계 데뷔 파티를 열었다. 5녀 중 셋째만 제외하고는 혼외자식이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정원에 관심이 많아서 그것에 대한 화제를 나누기 좋아하고 노래 솜씨가 빼어나다.' 와아... 원래 이런 걸 알고 가는 거였어..? '꿈속에서 메튼 백작부인이었을 때 누구도 루시아에게 사교계 정보를 주지 않았다. 정말 맨땅에 부딪히는 심정으로 아무것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온갖 파티에 참석했다.' 딸 5명 중 넷이 혼외자식이라고..?'몰랐던 사실이었다. 꿈속에서 기억하던 조르단 백작부인은 인맥이 넓고 다복한 가정을 꾸민 사람이었다. 자식이 많다기에 부부사이가 정말 좋구나, 순진하게 생각했다. 한편, 조르단 백작부인의 평온한 나날에 큰 풍파가 들이닥쳤다. 본래 10명 규모로 계획한 티파티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 온갖 인맥을 동원해서 끼어달라는 사람들 요청이 줄을 이었다. 누구는 빼고, 누구는 넣고. 도무지 10명만 추릴 수 없었다. 골머리를 앓는 백작부인을 보다 못한 가족이 조언했다. 아예 티파티 정원을 늘리라고. 백작부인은 소규모 티파티만 주로 열었다. 아주 가끔 모처럼 큰마음 먹고 1년에 한 번 정도 큰 규모로 열었다. 결국, 예정에 없이 50여 명이 참석하는 티파티로 취지가 바뀌었다. "티파티. 그거 갈 건가?" 한바탕 정사가 휘몰아친 침실 안은 끈적이는 기운과 야릇한 향으로 가득했다. 휴고는 그녀의 뒷목부터 도드라진 척추를 따라 입을 맞추며 저녁 내내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네. 내일인걸요." "좀 피곤한 자리가 될 것 같던데." 그는 아내에 관한 한 어떤 변수도 달갑지 않았다. 엎드려 있는 그녀의 나신 위로 휴고의 입술이 끈질기게 닿았다 떨어졌다. 등을 따라 엉덩이로 이어지는 곡선까지 내려왔다. "사람들이 제게 그렇게 관심이 많은 줄 몰랐어요." 티파티의 규모를 바꿀 정도였다니. 루시아는 이 일로 제법 놀랐다. 그리고 공작부인이라는 위치가 생각보다 더 대단한 자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체면을 손상하지 않기 위해 더 정신 바짝 차리고 사교 활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휴고는 쿡쿡 웃느라고 작게 흔들리는 그녀의 하얗고 토실한 엉덩이를 깨물었다. 짧은 비명을 지르며 그녀가 앙탈을 부렸으나 그는 탐스런 둔덕에 잇자국이 남은 것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가볍게 웃고 넘길 일이 아니야. 내일 자리는 취소하고 입단속시켜서 다른 일정을 잡는 건 어때?" "예의가 아니죠. 그랬다가는 저에 대한 악평부터 돌 거예요." 묵직하게 그가 위에서 기대왔다. 귓가에서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러면 그들은 입을 함부로 놀린 대가가 뭔지 알게 되겠지." 휴고는 진심이었지만 루시아는 흘려들었다. 사교계의 소문은 누가 손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불리한 소문이 나돈다고 출처를 찾아내 응징한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어리석은 시도를 그가 최초로 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일 티파티에 예정대로 참석하면 애초에 그런 소문이 돌 일 없어요. 취소 안 해요." "... 고집하고는." "흐응..." 그녀를 위에서 누르며 그는 그녀의 밀처 안으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한바탕 쏟아 낸 체액으로 촉촉한 내부가 그의 것을 매끄럽게 감싸면서 삼켰다. 그러나 그녀가 엎드려 있는 자세라서 진입이 쉽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두 손을 위에서 깍지로 잡아 누르면서 허리에 힘을 실었다. "몇 시에 끝나지?" "낮에 시작하니까.. 아.. 해 지기 전에는 끝.. 앗.." 그가 강하게 치고 들어왔다가 빠져나갈 때마다 오싹오싹했다. 단단한 끝이 안쪽의 예민한 부근을 쿡쿡 찔렀다. 루시아는 콱 시트를 움켜잡았다. 위에서 누르는 무게의 적당한 압박은 그녀의 흥분에 일조했다. "내키지 않으면 중간에 나와. 당신은 그래도 되는 위치야." "아앗!" "윽-" 갑자기 그녀의 안쪽이 확 조이자 그는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삼켰다. 절정을 느낀 내벽이 그의 중심을 꽉 문 채 경련했다. 루시아의 몸이 파들파들 떨리다가 퍼져버렸다. 조임이 어느 정도 풀리자 그가 혀를 찼다. "몇 번 넣지도 않았어. 벌써 가?" 그녀의 귀가 새빨갛게 물드는 것을 보며 휴고는 키득거렸다. "이러다 나중엔 손만 대도 가겠어. 부인." 그가 다시 허리를 움직이자 루시아가 헉 비명을 질렀다. "자.. 잠깐만요. 조금만.. 아... 쉬고.. 아응.." 그가 짧고 강하게 쳐올렸다. "혼자만 재미 보겠다?" "흐윽.. 아.. 맨날.. 으응.. 괴롭히고..." "말은 바로 해야지. 기분 좋게 해주잖아." 휴고는 그녀의 골반을 잡아 엉덩이를 세우고 뿌리 끝까지 진입했다. 깊은 안쪽을 건드리는 찌릿한 느낌에 루시아는 눈물이 찔끔 났다. 그의 움직임이 점점 격해지고 허벅지를 따라 체액이 흘렀다. 그가 진입할 때마다 물이 튀는 젖은 소리가 났다. 절정의 여운이 남은 상태로 그가 가차 없이 밀어붙이자 예민한 내벽이 꿈틀거리며 그의 성기에 착 달라붙었다. 그녀의 입에서 교성이 터졌다. "아! 하앗! 아앙!" "후우.. 비비안." 그가 탁한 음성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오싹한 쾌감을 느끼며 루시아는 자신의 몸이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조여드는 내부가 그를 자극하고 그의 움직임은 더 빨라졌다. "아윽! 하앙! 천천.. 천천히잇!!" 휴고는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철저하게 정복해 나갔다. 힘이 들어간 그의 승모근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녀의 샘은 마르지 않고 그녀의 질은 경련을 멈추지 않는다. 좁은 내벽을 파고들어 스치는 느낌에 전율했다. 파정 순간의 아득한 쾌감만큼이나 그의 성기를 애무하는 그녀의 속살이 좋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그녀의 내벽에 성기를 찔러 넣는 순간 그는 이 여자를 소유했음을 확인하며 희열을 느꼈다. 매일 끊임없이 수없이 확인하고 또 확인해도 부족했다. ============================ 작품 후기 ============================퍼플케이브 님, 쏭쏭님, 쭈녕이~ 님, 혜진 님, fairlady99 님, 아우20a 님, 아드밀란 님, 아키타이프7 님, 꿈꾸는소녀83 님, kreis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삽질이 길다, 억지다, 너무 끈다 등등. 이해할 수 있는 의견입니다만. 소설 보는 입장에서야 상황 다 아니까 그래보이지실제 자기 일이 되면 굉장히 시야가 좁아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입찬 말은 하는게 아니라고들 하지요. ㅎㅎ어쨌든 삽질. 제 소신으로 꾸준히 갑니다. 어차피 소설은 꾸준히 완결을 향해 달려가고 있어요~어쨌든 삽질. 제 소신으로 꾸준히 갑니다. < -- 수도 -- > 눈 밑이 꺼먼 파비안이 음울한 얼굴로 공작저로 들어왔다. 마치 유령처럼 슥 나타나서 제롬은 움찔했다. 파비안은 오랜만에 보는 형제에게 인사 없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전하께서는." "안.. 계신다." "오늘은 오후에 입궁하신다고 들었는데." "입궁하시지는 않았어. 마님께서 오늘 티파티 가시는데 바래다주러 가셨지. 기다리면 오실 거야." "뭐? 티파티?" 파비안이 눈을 번뜩였다. 눈에 형형한 빛이 돌았다. "부하는 이렇게 뺑뺑이 돌리고 당신께서는 부인 모시고 티파티라고? 나도 자는 마누라 등짝 보는 거 지겹다고! 토끼 같은 내 새끼들 얼굴도 제대로 보고 싶다고!" 원래 하던 업무는 전혀 줄지 않았으나 소문 취합 일을 더하고 데이빗인지 데이브인지 얼굴만 빤질거리는 놈 조사까지 하느라 허구한 날 밤샘이었다. 제롬과 파비안은 일이 서로 분리되어 있고 숙식 장소가 달라서 서로의 일을 잘 몰랐다. 그래서 제롬은 요즘 파비안의 야근 생활을 알지 못했다. "일이 많은가 보구나. 수당은 더 받잖아." 제롬이 아는 한, 파비안이 그런 걸 못 찾아 먹을 녀석이 아니었다. 파비안은 더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문제였다. 그의 근무시간에 비례해 소득은 급증했으나 아내가 그걸 더 좋아했다. 아이들 교육비를 들먹이며 늘어난 소득에 콧노래를 불렀다. "대체 언제부터 소문에 그리 신경 쓰셨다고 이리 달달 볶으시느냐고!" "왜. 요즘 안 좋은 소문 나돌아?" 제롬 표정이 심각해졌다. 마님을 두고 안 좋은 소문이 도는 건가. "전하 소문은 항상 안 좋았어! 요즘 두 분 사이에 무슨 문제 있어? 소문 때문에 분란이 있었냐고." "그런 거 없는데." 주인 내외는 아주 사이가 좋았다. 로암에서 머물 때보다 더 좋은 것 같았다. 아예 저녁 시간 이후에는 누구도 2층 침실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제롬은 주인이 결혼 전 수도에서 지낼 때를 떠올리면 천지개벽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냉기가 감돌았던 저택이 단지 마님 한 분 더 계시는 것만으로 진짜 사람 사는 집 같았다. 여러 집에서 일해 봤지만, 결혼한 지 1년이 훌쩍 넘었다면서 이렇게 애정 넘치는 부부는 처음 봤다고 고용인들끼리 숙덕거렸다. 제롬은 그 소리를 듣고 칭찬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그럼 대체 왜 그러시는 거야. 난 요즘 전하에 대한 존경심을 잃고 있다고." 형제 앞이니까 과한 농담을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제롬은 타란 공작부부의 자발적 노예이자 신도였다. 형제고 뭐고 없었다. "네 충성심을 의심해 보시라고 충언을 드려야겠군." "...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 근데 티파티. 귀부인만 참석하는 파티 아니었어?" "바래다주러 가셨다니까." "귀부인을 티파티 장소까지 에스코트하는 건 언제부터 생긴 관습이냐?" 그런 관습은 없다. 제롬은 대답 대신 헛기침을 했다. 차마 자신은 말할 수 없었던 일을 파비안이 지적하자 괜히 겸연쩍었다. 파비안은 한탄했다. "허허. 전하께서 완전히 변하셨어." 마님의 지인이라는 여류작가 약혼자 뒤를 캐라는 명을 받았을 때부터 조짐이 있었다. 요즘 일거리가 늘어난 것도 전부 마님과 관련한 일이 분명했다. 공작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공작이 처리하는 대부분의 일을 대충은 알고 있기 때문에 공작의 이기적인 면모를 자주 느꼈다. 겉보기에 공작가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 같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공작은 가문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았다. '가문의 돈과 힘이 늘어나면 내게 이익'이라고 생각했다. 둘은 비슷한 것 같아도 달랐다. 가문에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면 공작은 절대 자신을 희생하지 않고 미련 없이 버릴 분이었다. 이기주의 결정체 같은 분이 다른 사람을 중심으로 삶이 변화하고 있었다. 파비안은 주인의 변화가 그저 조심스러웠다. 계기가 하필 여자이기 때문이다. 여자라는 변수는 너무 불확실했다. 여자에게 푹 빠진 사내가 결말이 좋은 경우는 별로 못 봤다. 권력이나 재력 등 가진 것이 많을 경우는 더더욱. 파비안은 제 고민을 제롬과 나눌 수 없었다. 말해봤자 펄쩍 뛸 것이 뻔했다. 파비안은 짐짓 가벼운 어투로 투덜거렸다. "이러다 아주 마님 뒤만 졸졸 쫓아다니시겠구먼." 제롬은 '정말 그럴 가능성이 있겠는데.' 라고 생각했지만, 곧 주인에 대한 불경을 깨닫고 얼른 털어버렸다. 그리고 충성스러운 집사의 입장에서 파비안의 경솔한 발언을 나무랐다. 파비안이 저택에서 괴로움을 토로하는 동안 공작부부를 태운 마차는 조르단 백작저에 도착했다. 곧바로 열어주는 철문을 지나 마차는 저택 바로 앞에 멈추었다. 파티 시간에 맞추어 참가자의 마차들은 계속 들어오는 중이었고, 도착한 마차들이 여러 대였다. 마차에서 내리던 귀부인들은 타란 공작가 마차의 등장에 모두 발걸음을 멈추어 시선을 집중했다. 그들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마차 문이 열리고 나오는 사람은 기대했던 공작부인이 아니었다. 장신의 남자가 먼저 내렸다. 마차 안을 향해 손을 내미는 흑발의 남자를 보며 여자들이 수군거렸다. "타란 공작이잖아요." "정말이군요. 타란 공작이 여기를 왜." 마차 안에서 하얀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이 타란 공작의 손을 잡고,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스로 수를 놓은 숄을 어깨에 걸친, 상아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마차에서 내려왔다. 손을 잡은 남자와 확연히 드러나는 체격 차이는 여인의 가녀린 체구를 돋보이게 했다. 여인이 곱게 웃으며 공작을 향해 뭐라고 하자, 믿을 수 없게도 타란 공작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잡고 있는 여인의 손을 들어 손등에 입을 맞추는 태도에는 애정이 담뿍 담겨 있었다. 그리고 또 뭐라 이야기를 나누고 여인의 볼에 인사의 키스를 했다. 다시 또 이야기를 나누었다. 헤어짐이 아쉬워 떨어지기 싫어하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오히려 여인보다도 타란 공작 태도에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겨우 타란 공작이 마차 안으로 들어가고 하인이 문을 닫았다. 여인이 돌아서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는 여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다가 출발해서 백작저를 빠져나갔다. 귀부인들은 쪼르르 줄 서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광경을 입을 벌리고 보고 있었다. 루시아는 귀부인들이 멍하게 서 있는 모습을 흘끔 보며 신경 쓰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만약 그들이 루시아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면 응대했겠지만, 굳은 것처럼 서 있는 모습은 누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 설마.. 공작부인을 여기까지 배웅한 건가요?" 저 타란 공작이...? 라는 말은 생략했지만, 다 알아들었다. ".... 저도 그렇게 보입니다만." 누군가의 물음에 누군가가 대답했다. 티파티 장소까지 남편이 에스코트하는 경우는 처음 봤다. 안 된다는 법은 없었지만, 누구도 하지 않는 짓이었다. 더구나 그 짓을 타란 공작이 했다. 여기저기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짧은 탄식이 흘렀다. 귀부인 중 하나가 냉큼 걸음을 빨리 해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다른 누군가도 그 뒤를 따랐고, 이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소문 이상으로 충격적인 타란 공작부인의 등장이었다. 귀부인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가고, 여인들 틈에서 뒤쪽에 서 있던 여자가 마지막으로 남았다. 마차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는 소피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눈으로 본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루시아는 가장 먼저 파티 주최자, 조르단 백작부인과 인사를 나누었다. "초대 감사합니다. 백작부인."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부인을 뵈어 정말 영광입니다. 소문이 무색하도록 아름다운 분이시군요." 조르단 백작부인이 지극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공작부인에게서 어딘지 모르게 범접하기 어려운 기운이 느껴졌다. 막연히 생각했던 스무 살이 안 된 어린 아가씨가 아니었다. 루시아는 미소로 응대했다. 오늘 역시 아침 일찍부터 앙뜨가 수고해 주었다. 앙뜨가 말하는 오늘의 포인트는 '우아'와 '위엄'이었다. 공작부인으로서 사교 활동을 하는 첫 자리이며 가장 높은 신분이니만큼 말 많은 여자들을 눌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 표정이 중요합니다. 너희는 다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 이런 표정을 지어주시는 겁니다. ]앙뜨의 요구에 따라 표정 연습을 하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의상과 화장의 색깔은 상아색과 금색이었다. 앙뜨가 말한 대로 거울 속 루시아는 고고하고 도도해 보였다. 화려하지만 무거운 금색의 이미지는 무게 있는 기품을 더해주었다. 티파티 장소는 저택을 들어가서 뒤편으로 나가면 이어지는 뜰이었다. 야외에 기둥을 세우고 널찍하게 차양을 쳐서 햇빛을 막아 자리를 마련했다. 잘 가꾼 정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상당히 넓은 곳이었다. 사람 수가 많아 한 자리에 모두 모일 수 없는 오늘 같은 경우는 테이블을 나눠 앉았다. 대개 5~6인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을 여럿 두고, 주최자는 일정 시간마다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참석자들과 대화했다. 조르단 백작부인은 독특하게도 10인이 앉을 수 있는 대형 테이블을 하나 가운데에 배치하고, 나머지 5인용 테이블을 주변에 둘렀다. 공작부인의 자리는 10인용 테이블에 마련했다. 공작부인과 조르단 백작부인 자리를 제외한 8개 자리의 주인은 다 나름대로 오늘 이 자리에 앉기 위해 물밑 교섭을 했다. 하녀들이 분주하게 테이블 사이를 오갔다. 테이블에 함께 앉은 여자들끼리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수십 명이 모인 파티장은 곧 말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소피아 앨빈입니다. 앨빈 백작이 바깥분 되십니다." 루시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소피아가 그의 옛 여자라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었다. 소피아를 발견했을 때 조금 놀랐어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루시아가 놀란 건 다른 이유였다. '앨빈..? 앨빈 백작과 결혼했어..?' 꿈속에서 소피아는 후작부인이었다. 그리고 앨빈 백작가는 루시아가 하녀로 일했던 귀족가다. 그곳에서 일할 때 시중을 든 주인마님은 소피아가 아니었다. '달라.. 졌어..' 미래가 바뀌었다. '그래. 어쩌면 당연해. 내 미래를 바꿨어. 지금 그는 미혼이어야 해. 그런데 내가 그와 결혼했지. 난 원래 지금 별궁에 있어야 했고.' 그와 결혼한 이상, 루시아의 미래는 예측불가의 방향으로 들어섰다. 그의 미래 또한 마찬가지다. 조금이라도 두 사람과 관련 있는 사람의 미래까지 영향을 주는 일은 충분히 가능했다. 예상 못 한 곳에서 이제는 앨빈 백작부인이 된 소피아와 마주쳤으나 루시아의 마음에 동요는 없었다. 남편이 결혼 전에 정리한 옛 여자였다. 더구나 그렇게 냉정히 잘라내는 광경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마음 끓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 상황은 자연스럽지 않았다. 조르단 백작부인이 보낸 참석자 명단에 소피아의 이름은커녕 앨빈 백작부인도 올라 있지 않았다. 참석자 명단은 원래 수시로 바뀐다. 그걸 따질 수 없다고 쳐도 조르단 백작부인 정도의 사교계 인사가 소피아와 타란 공작의 과거에 대한 소문을 모르지 않을 터. 같은 테이블에 자리를 마련한 건 의도적이었다. 여자들에게 자리배치는 민감한 문제였다. 보기 싫은 여자가 있으면 아예 파티 불참도 한다. 앙숙끼리 같은 테이블에 앉으면 대형 참사였다. 그래서 수도 사교계처럼 인간 군상이 복잡한 세계에서 파티는 아무나 열지 못했다. 사람들 간 관계를 모두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루시아는 소피아가 자신을 소개할 때 조르단 백작부인에게 눈을 돌렸다. 눈이 마주친 백작부인이 움찔하며 시선을 돌렸다. 루시아는 살짝 찬웃음을 머금었다. 어떤 상황으로 유도해서 대처 반응을 보고 그 사람을 파악하는 일은 전형적인 사교계 방식이었다. 루시아가 사교계 관행을 몰랐거나 소피아에 대해 몰랐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건 사교 무대에 처음 등장한 공작부인에 대한 신고식이었다. 루시아가 대놓고 불쾌감을 표현하거나, 과민한 반응을 보이거나, 아예 소문에 무지해서 소피아와 정담을 나누면 오늘 이 자리를 참석한 귀부인들에게 훌륭한 구경거리를 제공하게 된다. 나중에 오늘의 상황을 알고 뒤늦게 불쾌해도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 그건 규칙이었다. 루시아는 메튼 백작부인으로서 사교계에 처음 나갔을 때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루시아는 짓궂은 질문을 연달아 받으며 대답을 못 하는 창피를 당했다. '차라리 질문을 받는 신고식이 더 귀엽겠군.' 자리배치는 본인이 시험을 당했는지도 모를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뒤에서 웃는데 본인만 모른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는 아예 사건 자체가 희미해져서 영영 잊을 수도 있었다. 처음 사교계에 나서는 초심자가 자리배치 같은 미묘한 문제를 알기 어려웠다. 아마 조르단 백작부인은 루시아가 알아차리지 못할 거로 생각했을 것이다. 루시아가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냈으니 속으로 진땀을 흘리고 있을 게다. 루시아가 메튼 백작부인이었던 경험만으로는 이런 문제를 잘 몰랐다. 직접 파티를 연 경험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하녀로 일하며 여러 번 파티를 개최하면서 자리배치에 골치 아파하는 마님을 보면서 안 사실이었다. 루시아가 조르단 백작부인을 택한 건, 백작부인에 대한 세간의 평을 믿어서였다. 소규모 티파티를 갑자기 규모를 크게 한다고 양해를 구하는 편지를 받았을 때도 괜찮다고 답장을 주었다. 루시아는 나름대로 조르단 백작부인에게 호의를 보였다. 그러나 조르단 백작부인은 루시아가 내민 손을 잡지 않았다. '타란 공작과 앨빈 백작을 저울질해서 앨빈 백작을 택한 건가.' 조르단 백작부인은 소란을 싫어한다고 들었다. 일부러 이 자리를 유도하기보다는 앨빈 백작부인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일 게다. 문제가 생겨도 책임은 앨빈 백작부인에게 떠넘기면 된다. 참석자의 요청을 받아들였을 뿐이니까. 소문은 몰랐다고 잡아떼면 되고. 모면할 길은 많았다. 타란 공작은 정치권력과 밀접하되 아직 완전히 권력의 궤도에 오르지 않았다. 앨빈 백작은 누구나 인정하는 경제 거물이었다. 돈은 권력보다 안정적이다. 본인의 선택 문제였다. 유감은 없었다. 그러나 장차 조르단 백작부인이 친구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루시아는 원래 일정에 없었던 파티에 참석해서 굳이 같은 테이블 자리를 요청한 소피아의 의도가 궁금했다. '옛 연인과 결혼한 여자가 누군지 궁금했나?' 그렇다 해도, 이건 현명하지 못했다. 루시아가 이번 일로 크게 앙심을 품으면 앨빈 백작가에 이롭지 않았다. 여자들 사교계 일은 여자들 문제라지만, 현실이 반드시 원칙대로만 돌아가지 않았다. 공사를 혼동하는 일은 가장 흔하게 벌어지는 오류였다. "앨빈 백작부인은 여전히 곱군요. 백작부인의 미모를 찬탄하는 여러 소문은 익히 들었답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아시겠지요." 루시아는 외모를 칭찬하는 흔한 말을 섞어 '나는 이미 소문을 알고 있으나 개의치 않는다.' 는 속뜻을 전했다. 이 자리의 귀부인들치고 돌려 말하는 뜻을 못 알아듣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순간적으로 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여기저기서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과찬이십니다." 라고 대답하는 소피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 작품 후기 ============================산사나무 님, masimo 님, 몽환의꿈 님, 박살낼껴 님, 월급루팡 님, ♡HOLIC♡ 님, 열둘의정월 님, 그기린그림 님, momorica 님, 퍼플케이브 님, 티에시아 님, 아드밀란 님, 날love 님, 크샤나크 님, eonchu 님, 이아수라 님, groomy 님, 썩은귤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님, 날love 님, 크샤나크 님, eonchu 님, 이아수라 님, groomy 님, 썩은귤 님 쿠폰 감사합니다. < -- 수도 -- > 야생의 세계와 다름없는 살벌한 사교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세를 파악하는 눈치는 필수. 귀부인들의 마음은 급속도로 공작부인에게 기울었다. 이제 처음 사교 활동을 시작하는 공작부인은 세상 물정 모르는 공주님도, 공작부인이라는 허울만 좋은 속 빈 강정도 아니었다. 큰 목소리를 내지 않고, 표정도 변하지 않고 남편의 옛 여자를 가뿐히 웃어넘겼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19살 아가씨의 여유가 아니었다. 오늘 이 자리 참석한 대부분 여자들 마음속에는 공통적인 호기심이 하나 있었다. '과연 얼마나 미녀인지 보자.' 그러나 이제 그 부분을 신경 쓰는 여자는 거의 없었다. 공작부인은 소문만큼은 미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못나다고 할 수 없었다. 어설프게 미인이면 '풋, 역시 소문이란.' 하며 넘어가겠는데 공작부인의 미모는 사람마다 의견이 갈렸다. 귀부인 중 누구는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누구는 과연 소문대로라고 생각했다. 공통점은 어느 쪽 입장이건 호감에 가까웠다. 요즘 미인의 조건인 화려한 미모와 글래머 몸매는 모든 여자가 가질 수 없었다. 대부분의 평범한 여자들은 미녀를 부러워하면서도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공작부인의 외모와 분위기는 '나도 저런 식으로 해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현재 유행과 다른 스타일의 드레스는 우아해 보였다. 루시아와 한 테이블에 앉은 여자들은 다 사교계에서 한가락하는 인물들이었다. 제법 영향력은 있으나 압도적이지 않고 고만고만한 인사들.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얼마나 줄을 잘 타느냐였다. 그들은 아주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공작부인의 추종자로 변모했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귀부인들은 부지런히 떠들며 공작부인에게 이야깃거리를 제공하고 계속 공작부인을 화제의 중심으로 삼았다. 루시아는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질문에 답해주면 되었다. 그 정도만으로도 테이블의 중심은 루시아였다. 여왕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 루시아는 조금 한 걸음 떨어져 자신의 위치를 즐겼다. 사교계 분위기는 잘못 휩쓸리면 기분에 취해 스스로 망신을 자초할 수 있다. 루시아는 그런 식으로 체면 구기는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 바깥에서 보면 명백한데 좁은 안쪽에 있으면 보이지 않는다. 루시아가 사교계 명성이 높으면 몇 번의 실수도 주변 사람이 알아서 덮어주지만, 아직은 이제 막 발을 들인 상태였다. 피곤할 정도로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편이 좋았다. "제가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데. 공작 전하께서 공작부인을 위해 보석상에 진열된 보석을 모두 구매하셨다고 하더군요." "아. 저도 들었어요. 세피아 보석상이었죠." "지금 공작부인께서 하고 계신 목걸이도 세피아 보석상 것이지요?" 루시아는 살짝 고개만 끄덕이며 웃었다. 여자들은 그걸 '공작이 보석상을 쓸었다'는 긍정의 대답으로 해석했다. 루시아의 목에 걸린 목걸이는 말이 필요 없는 증거였다. 소문에 반신반의했던 여자들은 "정말이었구나." 숙덕거렸다. "아까 공작 전하께서 공작부인을 에스코트하시어 여기까지 오셨더라고요." "저도 봤어요." "세상에. 정말요?아까 그 광경을 봤던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여자는 놀라움을 표하며 진귀한 장면을 보지 못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귀부인들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몰리자 루시아는 난처했다. 이렇게 관심이 집중될 일인지 몰랐다. 그가 바래다준다고 했을 때 '뭘 그렇게까지?' 라고 생각했으나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데려다 준다고 하고, 제롬도 아무 말 없기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인 줄 알았다. 무도회에 남자들이 에스코트하니까 비슷한 경우로 생각했다. 귀부인들은 남자가 티파티에 에스코트했다는 사실보다 그 남자가 타란 공작이라는 점에 더 놀랐다." 내가 처음 티파티에 간다 하니 걱정이 많으시더군요. 평소 세심한 부분에 신경을 많이 쓰십니다. "루시아의 평범한 답변에 귀부인들이 호들갑스러운 반응으로 호응했다. " 다정하기도 하시지. " "로맨틱하군요." 라며 중구난방으로 떠들었다. 아까의 광경을 직접 본 여자들은 단순한 에스코트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도 왕비 베스처럼 '세기의 미녀'라는 대목이 중요한 게 아니라 '홀딱 반한 공작'이 소문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테이블에서 소피아 홀로 고립되어 있었다. 입을 다물고 앉아 있는 소피아에게 눈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피아는 공작부인의 눈에 들려고 한마디라도 더 하려는 여자들을 둘러보았다. 얼마 전까지 소피아 앞에서 알랑대던 여자들이었다. 백작부인, 백작부인 하며 그렇게 떠받들더니 태도를 바꾸는 건 순식간이었다. 사교계 세태를 잘 알면서도 입맛이 썼다. 소피아를 괴롭히는 건 배신감이 아니었다. 아까 봤던 타란 공작 모습이 수십 번 넘게 눈에 떠올랐다. 따뜻하고 애정 가득한 눈으로 공작부인을 바라보며 손을 잡고 볼에 키스하는 스킨십은 자연스러웠다. 지독한 패배감과 비참함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나를.. 그런 눈으로 봐 주신 적 없어.' 타란 공작은 필요한 일이 아니면 파티에 잘 참석하지 않았다. 그의 파트너가 되어 파티에 참석한 건 고작 두어 번뿐이었다. 그를 만나는 건 침실이었고 아침에 눈을 뜨면 그는 항상 없었다. 선물을 조르면 금방 손에 들어오긴 했으나 심부름꾼을 통해서였다. 단 한 번도 그가 직접 준 적이 없었다. 그의 표정은 언제나 차가웠고, 드물게 표정만으로 웃었다. 시리도록 서늘한 붉은 눈동자가 그래도 자신을 봐 주는 것이 좋아서 소피아는 냉정하고 무뚝뚝한 그의 모습도 그저 다 좋았다. 그런 뜨거운 눈으로 여자를 볼 수 있는 남자였다. 여자를 향해 그런 따뜻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남자였다. 공작부인은 소문만큼의 미인은 아니었으나 사랑받는 여자의 자신감이 가득했다. 당당한 공작부인과 비교하면 자신이 대단히 초라했다. 가슴이 쥐어뜯기는 것처럼 아팠다. 공작이 에스코트한 일을 화제 삼아 떠들고 여자들이 호들갑을 떨자 소피아의 뱃속 깊은 곳에서 뭔가 불쑥 올라왔다. 공작부인의 여유로운 표정이 흔들리는 걸 보고 싶은 심술이 솟았다. "알려진 사실보다는 다정한 분이시지요. 얼마 전에 만나 뵈었지만 여전하셨습니다." 소피아가 입을 열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여자들은 차갑게 식은 분위기에서 섣부르게 입을 열지 못하고 몇몇이 자기들끼리 목소리를 낮추어 짜증스럽게 속삭였다. "왜 저런대요." "그러게 말이에요. 조용히 있어도 모자를 판에. "루시아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같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아 자신을 망신주려 한 의도는 괘씸했으나 넘어가려 했다. 매몰차게 버림받은 여자의 질긴 미련이라 이해하려 했다. 그에게 처참하게 거절당하는 광경을 목격한 일은 루시아 마음속에 내내 소피아에 대한 동정을 심어놓았다. 하지만 소피아는 정도를 넘고 있었다. 아무리 불륜에 관대한 분위기지만 절대 공개적으로 내세우는 일까지 용인하지 않았다. 세상 사람이 다 알아도 입을 다물어야 했다. 체면이 목숨만큼 귀중한 귀족에게는 심각한 문제였다. 타인의 배우자에 대한 사적인 언급을 당사자 앞에서 하는 건 빌미를 줄 수 있는 어리석은 짓이다." 내가 그분 일정을 알지만, 공무에 무척 바쁘시어 언제 시간을 내셨는지 모르겠군요. "루시아는 소피아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에 대한 믿음이 있고, 객관적으로 그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귀부인들이 '거짓말인 것 같은데...' 라는 시선을 자신에게 보내자 소피아는 얼굴을 붉혔다." 입궁했을 때 뵈었습니다." "그럼 그건 '만남'이 아닌 '인사'겠군요. 단어 선택을 신중히 하도록 하세요. 백작부인." 소피아가 얼굴을 확 붉혔다. 뭐라 말할 것처럼 입을 벌리다가 결국 꼭 다물고 고개를 숙이는 소피아를 보며 귀부인들이 혀를 찼다. 귀족들은 구차함과 추함을 싫어한다. 소피아의 태도는 귀족으로서 대단히 깔끔하지 못하고 지저분했다. "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 누군가 입을 열자 다시 분위기는 풀어졌다. 입술을 깨물고 앉아 있는 소피아는 외톨이었다. 아까는 새로운 주인공에 집중하느라 미처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면 이제는 귀부인들이 소피아를 바라보는 눈이 곱지 않았다. 남편 여자 문제로 속 끓이는 여자들은 꽤 많았다. 아무래도 여자보다 남자의 불륜이 흔했다. 겉으로는 초연한 척해도 속이 상한다. 같은 여자 입장에서 옛 관계를 들먹이는 소피아의 태도는 눈에 거슬렸다. "헌데 조르단 백작부인. 너무 이곳에서 자리를 지키는군요. 주최자의 본분을 다하셔야지요." 조르단 백작부인은 티파티를 시작하고 내내 루시아의 테이블에서 떠날 줄 몰랐다. 루시아가 지적하자 얼굴을 붉히면서 주춤 일어났다. 조르단 백작부인은 내내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런 조르단 백작부인을 보는 다른 귀부인들 몇몇 눈에 고소함이 깃들었다. 겉으로는 사람 좋은 척하면서 은근히 제 이득만 챙기는 조르단 백작부인 때문에 마음 상한 적 있는 여자들이었다. 슬슬 마무리할 시간에 접어들었다. 중간중간 하녀들이 차와 간식을 내오는데 적당한 시간 간격을 두고 총 3번의 차와 3번의 간식이 나왔다. 마지막 간식이 나오면 티파티는 끝이 나고 있다는 신호였다. 루시아가 마지막 케이크를 맛본 후 포크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것이 마치 신호가 된 것처럼 여기저기서 우르르 일어났다. 루시아의 테이블이 아닌 다른 테이블도 자기들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가운데 테이블을 관심과 부러움으로 계속 흘끔거리고 있었다. "다음에는 제 티파티에 꼭 나와 주셔요. 공작부인." "언제 또 외부 일정을 계획하시나요?" 루시아 주변으로 여자들이 몰려들었다. "공작부인." 여자들 목소리 중에 끼어든 소리 하나가 유난히 튀었다. 루시아는 몸을 돌렸다. 소피아였다. "오늘 만나 뵈어 영광이었습니다. 다음에 다시 뵐 기회가 있었으면 합니다." "글쎄요. 우리 피차 서로 보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귀부인들 몇이 킥킥 웃었다. 가방을 쥔 소피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가방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루시아에게 내밀었다. 남자들이 흔히 가지고 다니는 실크 손수건이었다. "지난번에 뵈었을 때 공작 전하께서 우는 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돌려드릴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언제 뵐 지 알 수 없어 공작부인께서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전해 주셨으면 합니다." 귀부인들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공작부인과 백작부인을 번갈아 곁눈질했다. 어느새 조용해졌다. 루시아는 손수건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거짓말을 하는구나.' 그는 과거에 잠시 인연 있었던 여자가 운다고 손수건을 건네는 신사가 아니었다. 그런 남자였으면 승전파티의 그 날,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입에 담아 여자를 떨쳐낼 리 없었다. 오기일까. 심술일까. 소피아의 속내를 알 수 없지만, 이 여자는 참 어리석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여자가 그를 잘 모르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건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루시아는 손수건을 받아서 물끄러미 보다가 소피아 시선을 맞추면서 손수건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조금 커지는 소피아 눈을 보며 루시아는 서늘하게 말했다. "백작부인. 그대는 거짓말로 날 능멸하고 있습니다. 이건 그분 물건이 아니에요." 소피아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아내가 남편이 가지고 다니는 손수건이 무엇인지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어야지요. 다들 그렇지 않습니까?" 귀족의 시중은 고용인이 전담했다. 아내라고 남편의 옷 시중을 들거나 손수건을 챙기는 일은 없었다. 당연히 남편이 손수건을 뭘 가지고 다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귀부인들은 잠시의 당혹감을 감추고 너도나도 대답했다. "그럼요. 당연하지요." "당연히 알아야 하는 일이죠. 어떻게 남편의 손수건이 뭔지도 모르겠어요." 루시아도 그가 어떤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소피아가 내민 것이 그의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백작부인의 행동은 내가 관용을 베풀 수 있는 선을 넘었어요. 오늘 일을 그냥 넘어가진 않겠습니다." 소피아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그제야 제가 얼마나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질투와 시기에 눈이 멀어 제정신이 아니었다. 남편, 그리고 부모님과 형제 등 가족들 얼굴이 떠올랐다. 남편인 앨빈 백작은 쉽게 어찌할 수 없다 해도, 친정인 로렌스 남작가는 힘이 없었다. 공작가가 밟으면 개미처럼 으스러질 것이다. 남편은 소피아만은 보호해 주겠지만, 손해를 감수하며 친정까지 지켜주지 않을 것이다. "고.. 공작부인. 용서하십시오. 제가 어리석어.." 소피아는 그 자리에 풀쩍 무릎을 굽혀 앉았다. 소피아를 내려다보는 루시아의 눈은 차가웠다.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모습은 루시아에게 전혀 감흥을 주지 못했다. 일은 다 저질러놓고 눈물로 수습하려는 작태가 역겨웠다. 망신을 당하는 일이 문제가 아니었다. 사교계에서 당하는 망신 같은 건 꿈속에서 워낙 겪어 그런 일로 상처받을 단계는 지났다. 소피아는 남편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깨뜨리려 했다. 두 사람이 해결해야 하는 두 사람 사이를 삿된 감상에 빠진 3자가 망가뜨리려 한 것이다. 루시아는 그걸 용서할 수 없었다. "댁으로 돌아가 자중하세요. 당분간 사교계에서 볼 일이 없었으면 하는군요. 어느 정도가 당분간인지는 스스로 생각하세요. 아주 신중히 생각해야 할 겁니다." 루시아는 냉랭하게 몸을 돌려 파티 장소를 빠져나갔다. 여자들 몇은 여전히 바닥에 앉아 울고 있는 소피아를 흘끔 보며 혀를 차기는 했으나 대부분은 서둘러 공작부인 뒤를 따라 나갔다. ============================ 작품 후기 ============================diapep 님, 눈물의정령 님, 아키타이프7 님, 아지러브 님, 열둘의정월 님, 월급루팡 님, 에나멜 님, groomy 님, smarttree 님, 날love 님, 아옹아옹 님, YuiSia 님, 허롱 님, amitanim 님, 룰루랄라ㅎㅎ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diapep 님, 눈물의정령 님, 아키타이프7 님, 아지러브 님, 열둘의정월 님, 월급루팡 님, 에나멜 님, groomy 님, smarttree 님, 날love 님, 아옹아옹 님, YuiSia 님, 허롱 님, amitanim 님, 룰루랄라ㅎㅎ 님 쿠폰 감사합니다. < -- 외전 또 다른 미래(1) -- > 날은 금세 어두워졌다. 필립은 하늘을 보며 시간을 가늠하다가 저만치 보이는 산을 보았다. 오늘 저 산을 넘어가기는 힘들겠다. 어둠 속에서 산을 타는 일은 어지간히 급하지 않으면 하지 않은 편이 좋다. 오랜 여행으로 노련한 여행자이지만 필립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 근처에 민가는 없었다. 오늘밤도 노숙이었다. 워낙 자주해서 하룻밤 잠자리 만드는 일은 뚝딱이었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마른 식량과 물로 저녁을 때웠다. 필립은 오늘 떠나온 마을을 떠올렸다. 여느 마을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경계를 하다가 금방 마음을 여는 사람들은 순박했다. 떠날 때 아쉬워하는 손길을 뿌리치는 일은 언제나 아쉬웠다. 아주 드물게 정착해 살아볼까 하는 곳도 있었으나, 얼마 견디지 못하고 다시 방랑길에 올랐다.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는 영원한 방랑. 필립에게 내린 천형이었다. "후후.. 나도 참.. 미련이 질기군." 아까 마을에서 봤던 삽엽쑥 환자가 떠올랐다. 나이가 들은 태는 났으나 말갛고 고운 표정을 지닌 여자였다. 설마 삼엽쑥을 먹은 환자를, 그것도 초경부터 먹어 불임이 된 환자를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평생 많은 환자를 보았으나 잠깐 삼엽쑥을 먹어 월경이 멈춘 경우는 봤어도 아까의 환자 같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일부러 만들어내지 않았는데 스스로 그리 되는 경우도 있었다. 세상은 참 넓고, 예상치 못한 일은 늘 일어났다. 여자에게 치료법을 주었다. 가문의 비전으로 물려받은 노트를 아예 찢어 주었다. 어차피 치료법은 필립의 머릿속에 있었으나 굳이 찢어서 건넨 이유는 의미가 컸다. 아주 끈질기게 매달려 있는 작은 미련마저 잘라내는 행위였다. 어차피 가족이 없는 필립이 죽으면 이제 영원히 묻힐 비밀들이었다. 그래도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다니던 것들을 드디어 오늘 버렸다. "처녀냐고 묻다니. 어리석은 놈아." 필립은 자신을 비웃었다. 거기서 왜 그런 질문이 튀어나왔을까. 그 여자가 처녀건 아니건 이제는 다 소용이 없는 일인데. 넋 놓고 모닥불을 바라보는 필립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노안에 가득한 눈물이 주룩 흘렀다. 느닷없이 떠오르면 울컥 치미는 감정을 견딜 수 없었다. 마지막 희망. 다 장성한 훌륭한 청년이 되었어도 영원히 자신에게는 어린 도련님이었다. 아주 오래 전 걸음마하는 어린 손을 붙들고 공작을 찾아갔던 그 날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했다. 그 분이 차가운 몸으로 땅에 묻힌 지 수년이 흘렀다. 공작은 그 후 북부는 내팽개치고 전쟁터만 떠돌았다. 모든 것은 끝났다. 마지막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데미안 도련님..." 오열하는 필립의 어깨가 들썩였다. 시신으로 돌아온 도련님 몸을 붙들고 하염없이 울던 그 날처럼 필립은 바닥에 몸을 구부리고 울었다. ============================ 작품 후기 ============================아주 짤막한 단편입니다. 루시아가 꿈에서 봤으나 루시아는 모르는 미래죠. 던 그 날처럼 필립은 바닥에 몸을 구부리고 울었다. < -- 사랑합니다 -- > "공. 부관하고 내기 하나를 했는데 말이지." 또 시작이군. 휴고는 생각했다. 퀘이즈는 가끔가다가 실없는 짓을 했다. "공이 손수건을 지니고 있나 없나 내기했지." 휴고는 무시에 가까운 태도로 말없이 듣기만 했으나 퀘이즈는 꿋꿋했다. "기사들은 손수건을 잘 안 가지고 다니잖나. 근데 공은 애매하단 말이지. 나는 공이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는 쪽에 걸었고, 부관은 가지고 있다는 쪽에 걸었어." "뭘 걸고 하는 내기입니까?" "내가 지면 잘 쓰는 단어 하나 안 쓰기로 했지." 퀘이즈는 입이 걸었다. 측근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부관은 기회만 되면 매달렸다. 이젠 왕위에 오르시어 이 나라 주인이 되시는데 체면을 손상하는 말투는 고치셔야 하지 않겠느냐. 퀘이즈는 부관이 뭐라거나 말거나 무시하면 그만이고 지금껏 그래 왔지만, 징징대는 빈도수가 늘어나자 은근히 성가셨다. 그러다가 좋은 생각이 났다. [ 그럼 나하고 내기를 하지. 단어 하나씩 걸고. ]규칙1. 내기 종목은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한다. 퀘이즈와 부관은 번갈아 내기 종목을 제안할 수 있다. 규칙2. 부관이 이기면 내기에 건 부적절한 표현은 퀘이즈가 이후 사용할 수 없다. 규칙3. 규칙2를 어기고 사용한 경우 내기 1회를 진 것으로 간주한다. 규칙4. 퀘이즈가 이기면 사용할 수 없는 표현을 하나 되찾는다. 굉장히 쓸데없고 구체적인 규칙까지 만들어 내기 장난을 시작했다. 끝없는 도돌이표였지만 부관은 이거라도 어디냐 싶어 받아들였다. 지금껏 1번 내기를 했고, 퀘이즈가 패했다. 퀘이즈는 대가로 '씨발'이라는 단어가 묶였다. 타란 공작의 손수건은 2번째 내기였다. 이번 내기에는 퀘이즈가 승하하신 선왕을 가리켜 '죽은 노인네'라는 부르는 표현을 걸었다. 퀘이즈가 이번에 지면 아주 엄숙하게 죽은 노인네를 향해 '선왕께서'라고 칭해야 한다. "그러니까 공. 말해 보게. 손수건 안 가지고 다니지?" 일생일대의 문제를 앞두는 있는 것처럼 초롱초롱한 눈빛을 하는 퀘이즈와, 간절함이 가득한 표정의 부관을 스윽 번갈아 보았다. 이런 긴장감 없는 분위기가 정말 괜찮은 건가. 휴고는 의혹이 들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왕과 손을 잡은 일이 잘한 짓인가 생각했다. "가지고 다닙니다." 퀘이즈는 충격에 빠졌고, 부관은 소리 없이 환호했다. 한마디 말로 두 사람을 천국과 지옥에 빠뜨린 휴고는 무심한 표정이었다. "그럴 리가! 공이 그런 걸 지니고 다닐 리 없어!" 만약 이 내기가 좀 더 옛날에 있었다면 내기의 승리자는 퀘이즈가 되었을 것이다. 휴고는 원래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굳이 필요할 일 있으면 누군가 시켜 닦을 것을 가져오게 하면 되었다. 그러나 휴고는 손수건을 가지고 다닌 지 좀 되었다. "그런 거짓말 안 합니다." 퀘이즈는 "이럴 수가." 한탄하며 애통해했다. 이번 내기를 이겨 잃어버린 '씨발'을 되찾으려는 노림수는 무위로 돌아가고 오히려 이제 앞으로 망할 노인네를 선왕이라 부르게 생겼다. "그럼 보여주게. 지금." 휴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으나 작은 한숨 한 번 쉬고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새하얀 손수건을 보고 눈이 커진 퀘이즈가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거친 감촉은 면이고 모서리에는 꽃으로 수가 놓여 있었다. 귀족 남자들은 대개 짙은 색의 실크 손수건을 가지고 다녔다. "... 공. 취향이 상당히 독특하군?" 면 손수건은 아이들이나 쓰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휴고는 당당했다. "손수건은 더러움을 닦기 위한 것. 본연의 기능에 면 손수건만큼 충실한 건 없습니다." 퀘이즈는 '내게 손수건의 기능을 가르쳐 주는 건가.' 라고 생각했다. 면 손수건의 오묘한 의미를 잠시 고민하던 퀘이즈는 새로운 눈으로 면 손수건을 살폈다. 공작이 워낙 당당하니까 볼수록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도 괜찮고, 하얀색도 깨끗해 보이고, 모서리 꽃도 나름대로 매력 있고. 수놓은 꽃은 정교하지 않아서 정감이 갔다. 아무래도 전문가 솜씨는 아니고, 공작부인 솜씨 같았다. 아직 얼굴도 못 본 누이동생이 만든 거로 생각하니까 가지고 싶어졌다. "으음. 공 말을 들으니 그런 것 같군. 그럼 이건 나 주게." ".... 예?" 주머니에 쏙 넣어버리는 왕에게서 다시 빼앗을 수 없었다. 고작해야 손수건 아닌가. 물론 휴고에게는 고작 손수건이 아니었다. 쓰기 위해서 지니고 다니는 물건이 아니었다. 일종의 부적이었다. 어느 날, 그녀가 하얀 면을 끊어 와서 손수건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시간을 내어 틈틈이 모서리에 수를 놓았다. 그렇게 한 보따리 만들면 몇 개월에 한 번씩 데미안에게 보냈다. 하얀 면 손수건 모서리에 꽃. 누가 봐도 아이 물건이었다. 지금껏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지도 않다가 난데없이 꽃 자수를 놓은 면 손수건을 갖고 다니겠다고 말하기가 계면쩍어서 몇 장 슬쩍했다. 차라리 당당히 달라고 할걸. 한순간 충동으로 그러고 나니까 더더욱 말할 수 없었다. 그 몇 장의 손수건은 휴고의 집무실 서랍 깊은 곳에 보관 중이었다. 이후 그녀는 모서리 꽃은 아무래도 남자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데미안 이름으로 자수를 바꿨다. 아무리 그녀의 수제품이 좋아도 그 녀석 이름이 박힌 손수건을 들고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꽃 자수의 손수건은 지금은 얻을 수 없는 초기 한정품이었다. 몇 장 안 되는데 빼앗기고 말았다. 삽시간에 그의 마음이 어두워졌다. 왕의 뻔뻔한 면상이 오늘따라 무척 보기 싫었다. 루시아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깊은 피로감을 느꼈다. 집에 들어서자 긴장이 순식간에 다 풀렸다. 아무리 꿈 속 경험이 있어도 첫 활동 무대였다. 사람들의 집중 된 시선 속에서 표정을 유지하는 일은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더구나 소피아가 신경을 건드려서 그런지 힘든 노동이라도 한 것처럼 몸이 노곤했다. 루시아는 저녁을 이른 시간에 먹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휴고의 귀가는 저녁 식사 시간을 넘겼으나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었다. 마중하는 그녀 모습이 보이지 않자 눈으로 찾았다. 묻지 않아도 알아서 대답하는 제롬이 답을 주었다. "일찍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오늘 바깥 일정이 피곤하셨던 것 같습니다." 휴고가 미간을 찌푸리자 제롬은 이어 말했다. "편찮다는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의사는 필요 없다 하셨고, 바깥에서 무슨 일이 있는 것도 아니라 하셨습니다." 휴고는 곧바로 그녀 침실로 올라갔다. 어두운 침실로 들어가서 침대에 걸터앉아 새근새근 자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보다가 손을 뻗어서 베개 위에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휴...? 다녀오셨어요?" 눈을 깜빡이며 루시아가 눈을 떴다. 덜 깬 잠기운에 목소리가 몽롱하게 잠겼다. "깨울 생각 아니었는데. 더 자." 낮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루시아는 웃으면서 기지개를 펴듯 두 팔을 위로 올리면서 그를 향해 뻗었다. 휴고는 미소 지으며 몸을 숙였다. 가느다란 팔이 그의 목을 감았다. 손으로 그녀의 등을 받쳤다. 얇은 잠옷 아래 따끈한 체온을 담은 피부가 느껴졌다. 그는 한 팔을 그녀 허리 아래 넣어 들어 올리며 품으로 안았다. 향긋한 그녀의 체향이 코를 간질였다. 심장이 사악 죄어들어서 휴고는 눈을 감았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니요. 그냥 조금 피곤했어요. 오랜만에 사람들 많은 곳에 나가려니 긴장했나 봐요." "티파티는 어땠어?" "티파티였지요." 휴고는 그녀를 품에서 떼어 눈을 마주했다. "그것뿐?" "그 외에 뭐가 있겠어요. 전 공작부인인걸요. 다들 제 눈치만 봤어요." 루시아는 굳이 소피아 일을 그에게 말할 생각 없었다. 소피아가 한 짓은 전적으로 소피아의 미련한 집착이 초래한 일이었다. 그의 잘못이 아니다. 그는 이미 결혼 전에 정리했다. 헤어지는 방식이 다정하지는 않았지만, 남녀의 이별에 다정함이 말이 되는가. 여지를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처럼 매몰차게 잘라내는 편이 나았다. 소피아에게 경고를 했으니 두고 볼 셈이다. 조용히 지내면 이 정도만 하겠지만, 사교계에서 나대는 모습을 보면 정말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루시아는 공작부인이었다. 시키면 죽는시늉이라도 할 추종자 몇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루시아 손을 더럽히지 않고 그들에게 살짝 눈치만 흘려도 그들이 소피아를 개망신 주고 사교계에서 얼굴도 들지 못하게 만드는 일 정도는 간단했다. 사교계는 용서와 관용을 너그럽다고 추앙하는 세계가 아니었다. 마땅히 제 권리조차 제대로 찾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로 비웃음을 산다.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마음 약한 모습을 보이면 뜯어먹으려 눈을 번뜩이는 자들이 넘쳤다. 패악을 부려 체면을 깎아서도, 뭐든지 좋게좋게 넘어가서도 안 된다. 루시아는 사교계에서 군림할 생각 없지만, 누구에게도 쉽게 보일 생각 없었다. "다행이군. 별일 없었다는 거지?" "네. 당신은요? 오늘 어떠셨어요?" 그는 빼앗긴 손수건을 떠올리자 잠시 우울해졌다. "늘 같은 하루였지." "근데 당신이 오늘 에스코트한 일로 얼마나 많은 질문을 받았는지 아세요? 전 그러면 안 되는 줄 몰랐다고요." 휴고의 눈썹이 스윽 올라갔다. "안 된다고 누가 그래." "아무도 안 한대요. 안 되는 거나 마찬가지죠." "내가 하면 이제부터 하는 거야." 루시아는 눈을 흘겼다. 또 나왔다. 아무튼, 그의 억지와 자만은 못 말렸다. "다음부터는 싫어요. 구경거리 되고 싶지 않아요." "... 도대체 당신은 왜 자꾸 남의 눈을 신경 쓰는 거야." "당신이 너무 신경 쓰지 않는 거예요." 그가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자 루시아는 눈을 조금 크게 뜨고 그를 보았다. 갑자기 그가 그녀를 확 끌어안으며 입술을 포갰다. 그의 이가 그녀의 여린 입술을 살짝 깨물며 입 안 가득 혀를 밀어 넣었다. 부드럽게 안을 훑는 움직임에 손끝이 찌릿했다. 루시아는 그의 목에 두른 팔을 쭉 펴며 손가락을 오므려 느슨한 주먹을 쥐었다. 격하지 않은 달콤한 키스였다. 휴고는 입술을 떼면서 쪽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녀를 다시 바로 눕혀주었다. "자. 당신 눈에 잠이 가득해. 난 가서 밤새 일이나 해야겠군." "일이 많으세요?" "당신 옆에 누워 불면의 밤을 보내느니 일이나 하려는 거지." ".... 당신. 매일 그 생각밖에 안 하죠?" "당연하지." 루시아는 기가 막혀 그를 보다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휴고는 오늘 루시아가 참석한 티파티 참석자 명단을 살폈다. 서류를 가지고 밤늦게 공작저에 온 파비안은 속으로는 투덜대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아주 성실한 표정을 지었다. 파비안이 가끔 공작에게 뻗대는 짓을 해도 기본적으로 공작이 무서운 사람이라는 점은 절대 잊지 않았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공작 심기를 건드릴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았다. 휴고가 오늘 참가자 명단을 가져오라 한 건 가벼운 기분이었다. 앞으로 그녀의 파티 참가는 자주 있을 거고, 그때마다 일일이 그가 참가자가 누군지 살필 수 없었다. 오늘은 첫 자리이니까 살펴보는 것이다. 대충 참가자를 눈으로 훑던 휴고의 눈가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씨발.' 퀘이즈가 자주 내뱉던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앨빈 백작부인이 아주 당당히 참가자 명단에 있었다. 잘못 봤나 싶어 몇 번을 확인했으나 틀림없었다. 갑자기 등에 쭉 식은땀이 솟았다. "이 티파티. 파티 중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주 상세하게 알아 와." 또 일이 늘어나는구나. 파비안은 속으로 흐어엉 울부짖었다. "언제까지 말씀이십니까?" "가능한 한 빨리." 휴고의 음성이 음산했다. 이럴 때는 무조건 기어야 한다. 파비안은 믿음직스럽게 답했다. "예. 모든 인력을 집중해 처리하겠습니다." 며칠 후 휴고는 보고서를 받았다. 파티 참석자 일부와 시중을 들며 왔다 갔다간 하녀들을 매수해서 당시의 상황을 가능한 한 상세하게 되살렸다. 그중에는 꽤 쓸데없는 여자들 수다들이 상당해서 양이 꽤 두꺼웠으나 휴고는 인내심을 갖고 읽었다. 다 읽고 난 휴고의 감상은 간단했다. '큰일 났다.' ============================ 작품 후기 ============================은으1레드 님, 그대의 미소 님, fairlady99 님, 코나빈스 님, ♡HOLIC♡ 님, 푸니 님, 아드밀란 님, 혼돈의 계승자 님, 휜야 님, 아키타이프 7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작 3만이 넘었더군요. 감개무량합니다. 투베에 올라 선작수가 갑자기 세 자리 수로 폭발할 때 수십번이나 새로고침하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ㅎㅎ제 취미를 충족하기 위해 쓰기 시작한 작품, 이렇게 많은 분들이 재미있게 읽고 응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선작 3만이 넘었더군요. < -- 사랑합니다 -- > 그녀가 잘 대처해 넘어갔지만, 하마터면 첫 사교 무대에서 망신을 당할 뻔했다. 남편의 과거 여자 때문에. '왜 내게 아무 말 하지 않았을까.' 그에게 화를 내며 비난을 퍼부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당일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따져 물을 가치조차 없이 마음이 이미 그에게서 돌아섰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왜 이렇게 자꾸 상황이 엿같이 돌아가는 걸까. 그나마 요즘 노력해서 그녀를 조금 말랑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스스럼없고 웃음도 많아졌다. 종알종알 즐겁게 떠드는 모습이 예뻐서 요즘 그의 기분은 구름 위를 밟는 것처럼 들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다시 얼음마녀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자 그의 기분은 곧바로 추락했다. 그는 자괴감에 빠져 끙끙거렸다. '궁에서 잠깐 인사밖에 안 했단 말이야.' 휴고는 억울했다. 그녀는 그에게 다양한 감정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휴고는 언제나 강자의 입장에 있었다. 약자의 억울함을 실감한 적 없다. 용병의 노예였던 어린 시절 - 쿠폰25장 안젤로니아 - 쿠폰10장초낭자 - 쿠폰5장퍼플케이브 - 쿠폰5장안젤로니아 - 쿠폰50장runa83 - 쿠폰10장 조차 분함을 감추고 뒤에서 칼을 갈았지 억울해서 속이 답답하다는 감정이 뭔지 몰랐다. '인사도 하는 게 아니었어. 모르는 척 할걸.' 자책하다가 '남편의 손수건이 뭔지 안다'고 말한 대목에서는 가슴이 뜨끔했다. 데미안 손수건을 슬쩍 한 걸 아내가 이미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한 건가. 멋쩍은 상황이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낯이 두꺼웠다. 아들 것을 아버지가 조금 가졌다고 문제가 될 건 없다. 그가 자신을 정당화하는 범위는 대단히 광범위했다. 휴고의 고민은 그녀가 자신에게 실망했는가 여부였다. 지난 며칠 뜨거웠던 밤을 생각하면 희망이 떠올랐다. 화가 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특별한 거리감을 느끼지도 못했다. 티파티에서 있었던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잊었을 지도.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마음은 꽁꽁 닫으면서 뜨거운 밤은 허락하는 잔인한 여자였다. 그의 우울함은 점점 분노로 변화했다. 이 모든 상황의 원흉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들에 대한 노여움이 점차 거센 불길로 타올랐다.'조르단 백작.. 앨빈 백작.. '그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남자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런 이성적 이유 따윈 지금 휴고의 머릿속에 없었다. 그들을 어찌 응징할지 그는 머리를 굴렸다. 조르단 백작은 당장 건드릴 명분이 없었다. 그러니 제쳐놓기로 했다. 잊힐 일은 없을 것이다. 그의 명단에 대기자로 기록되어 있을 뿐. 휴고는 아예 없는 일을 일부러 만들어내서 응징하는 방식은 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그건 졸렬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걸고넘어질 건수가 생기면 그걸 집요하게 물어뜯었다. 남이 보기엔 그거나 이거나 큰 차이 없을 거로 생각하겠지만, 남들 생각 따위 알 바 아니다. 그 자신에게 떳떳하면 그만이었다. 앨빈 백작으로 넘어가자 더 만만치 않았다. 마음먹고 밟으면 못할 일은 아니지만, 백작이 워낙 여기저기 뿌려둔 돈이 많았다. 섣부르게 건드리면 감싸고 돌 자들이 많았다. 그들까지 다 치우려면 일이 너무 커지고, 퀘이즈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멀리 치워야겠군.' 없앨 수 없다면 눈에 안 띄게 치우면 된다. 그동안 앨빈 백작이 차 유통 사업에 손을 댔다가 몇 번 실패했다고 들었다. 그걸 미끼로 삼아 사업상 이유로 얼마간 수도를 뜨게 해야겠다. 사람들은 시야에서 사라지면 관심도 멀어진다. 자연스럽게 소피아를 잊을 것이다. 타란 가문이 비공식적으로 소유한 상단 중에는 전문적으로 차만 유통하는 제법 규모 큰 상단이 있었다. 주 고객은 대부분 타국의 귀족들이라 타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앨빈 백작이 미끼를 물면 상당 기간 수도뿐 아니라 아예 제논을 떠나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휴고는 앨빈 백작에게 사업의 기회를 주는 셈이다. 이건 처벌이 아니라 상이었다. 그게 좀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일을 크게 벌이기보다는 이편이 깔끔하겠다. 앨빈 백작 사업 수완이 탁월하니까 덕분에 상단에 이익이 나면 좋은 일이고. 처리 문제를 생각하며 팽팽 돌아가던 두뇌는 그 후의 일을 생각하자 멈추었다. 그들을 처리한다고 지난 일이 없던 일이 되지 않았다. '물어볼까.' 물어보면 뭐라고 할까. 과거 여자 같은 건 신경도 안 쓴다고 하면 그것도 나름대로 속이 쓰릴 것 같은데. 불쾌해서 당신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다고 하면 그건 더 끔찍하고. 속에 있는 말을 참아본 적 없는 휴고는 근래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대는 말이 너무 많았다. 쌓이고 쌓여 울화병이 생길 지경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꽤 시간이 흘러 당시의 티파티가 일어난 날로부터 열흘이 지났다. 그 동안 루시아는 몇 번의 티파티를 더 다녀왔다. 이번에는 정말 10인 정도 참석하는 소규모 티파티들이었다. 오늘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 데미안의 편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저녁 산책 시간에는 데미안 학술원 생활을 미주알고주알 떠들었다. 어차피 따로 보고를 받아서 다 알고 있었지만, 휴고는 관심 있는 척 들어주며 기분을 맞추었다. 바로 지금과 같은 기회를 잡기 위해서. "비비안. 소문 하나를 들었는데." 휴고는 침대에 앉아 화장대에서 거울을 보고 있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시의 티파티 사건은 사교계에 파다하게 소문으로 나돌았다. 그 후 앨빈 백작부인이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더라는 말도 함께 돌면서 소문의 신빙성을 더했다. 휴고는 조사했다고 하지 않고 소문을 들은 것처럼 말을 흘렸다. "음. 네. 그런 일이 있었어요." 루시아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휴고의 오랜 고민이 무색했다. "왜 내게 말하지 않았지?" "사교계에서 있었던 사소한 일들을 어떻게 다 말씀드려요. 여자들 일인걸요." "... 사소한 일인가?" 속이 좀 쓰렸다. "당신을 믿었기 때문에 사소한 일이었어요." 푹 꺼졌던 그의 기분이 순식간에 살아났다. "어차피 당신이 아셨으니 이렇게 된 거 말씀드려야겠네요. 당신이 과거 교제했던 여자들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그는 이제 진땀이 났다. "그건.. 왜?" "누군지는 알아야 대처를 하니까요. 트집 잡으려 드리는 말씀 아니에요. 말 그대로 누군지 알아둘 필요성 때문이지요." "......" "네?" "... 알았어. 제롬에게 말해 두지." 그녀는 참 깔끔했다. 감정을 흘리는 법이 없다. 과거에 휴고는 제발 여자들이 그래 주었으면 바랐으나 지금은 아내의 마음 한 조각 얻으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아무리 기어 올라가도 그녀를 둘러싼 성벽의 높이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휴고는 일어나 루시아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작은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비비안. 난 모르는 일이야. 그 여자를 사적으로 만난 적 없어." 믿어 줘. 그런 일로 상처받지 말아 줘. 내게 마음 닫지 말아 줘. 수많은 간절함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알아요. 당신을 믿어요." 믿는다는 짧은 한마디. 그 말이 이처럼 마음 든든할 줄 몰랐다. 안도감으로 초조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편안해졌다. 다른 사람에게서 받는 신뢰가 이처럼 가슴 벅찬 일이었던가. 단순한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여자에게서 받는 신뢰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대로 괜찮을까...?' 가슴이 따뜻해지고, 가끔은 먹먹하고 어쩐지 아리면서 다디단 이 감정은 행복이었다. 그는 몰랐으면 모르되 이미 알아버린 이 달콤함을 도무지 놓을 수 없었다. 쥔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건 형제가 죽은 후 처음이었다. 그는 지금의 평온과 행복이 너무 두려웠다. 대관식의 날이 밝았다. 관례상 대관식은 폐쇄된 공간에서 입장객을 엄격히 제한하여 아주 엄숙한 식례에 따라 진행했다. 오전의 대관식이 끝나면 오늘을 포함해 3일간 성대한 파티를 예정했다. 특히 첫날인 오늘은 정오부터 해 질 무렵까지 가벼운 축하연을 열고, 해 질 무렵부터 새벽까지 열기로 가득한 무도회를 열 것이다. 나머지 이틀은 저녁부터 무도회만 예정하고 있었다. 나라의 새 주인이 여는 최초의 연회라서 규모가 어마어마했고, 참석자들도 엄청났다. 외국에서 온 사절단과 귀족들 수도 만만치 않았다. 작년 열었던 승전기념파티와 비교해서 규모는 엇비슷하지만, 오늘 자리는 참가하는 귀족들이 질적으로 더 우수했다. 흥청거리는 승전파티 분위기를 저어해서 불참한 귀족들도 오늘만큼은 빠지지 않고 모두 참석할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루시아는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동안 몇 번 티파티를 나갔으나 아무래도 가벼운 자리라서 마음가짐도 가벼웠다. 그러나 오늘은 선왕 승하 이후 최초의 공식 파티이며 루시아의 공식적인 사교계 데뷔 자리였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의 루시아의 전담 디자이너가 된 앙뜨는 어김없이 아침 일찍 조수들을 끌고 와서 루시아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치장했다. 오늘을 위해 앙뜨는 심혈을 기울여 신상 드레스를 제작했다. 앙뜨가 추구하는 오늘 이미지는 우아함과 섹시함이었다. "완벽하군요. 공작부인. 정말 나날이 아름다워지세요." 분홍의 펄이 빛나는 비즈를 아주 섬세하게 박은 분홍빛이 감도는 진주색 드레스였다. 어깨가 살짝 드러내도록 넓게 목선을 파서 쇄골이 두드러졌다. 팔 부분은 달라붙도록 좁았다가 소매 부근으로 내려올수록 주름을 넣어 부풀렸다. 드레스 자체가 기본 베이스에 레이스를 덧대어서 두 겹이었다. 다만 팔 부분은 윗부분이 약 1/3가량 레이스만으로 만들어서 안의 살이 비쳤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얌전한 스타일이었다. 반전은 뒤에 있었다. 뒤에 반 정도 과감하게 등을 드러내도록 팠다. 날갯죽지와 척추가 지나가는 얕은 골이 드러났다. 티 없이 하얀 등의 피부는 뭔지 모를 야릇한 느낌을 주었다. 뒤 허리 부분을 높여서 치맛자락의 풍성한 주름을 강조했다. 가는 허리가 부각되자 전체적으로 실루엣이 가는 몸매가 대단히 굴곡 있는 몸매처럼 보였다. 앙뜨는 제 손으로 만든 결과물에 만족했다. 아이들이 보는 동화책이 등장하는 마녀처럼 과장하여 손끝을 입에 대고 오호호호 웃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공작부인은 꾸미면 꾸미는 대로 보람이 있었다. 앙뜨의 창작력을 자극하는 완벽한 뮤즈였다. 거울 속 자신을 보는 루시아도 만족했다. 앙뜨의 솜씨는 나날이 진화하고 있었다. 매번 색다른 분위기를 어색함 없이 연출하는 점이 대단했다.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으면서 고혹적인,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순진해 보이는 면이 매력적이었다. "조금 거닐어 보시겠어요? 불편한 곳이 없는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루시아는 몇 걸음 왔다 갔다 걸었다. 상체에 착 달라붙은 부드러운 천의 느낌이 좋았다. 화려한 레이스는 움직일 때마다 나풀나풀 흔들렸다. 레이스에 박은 수많은 작은 다이아몬드가 반짝거리며 빛을 뿌렸다. 어마어마한 재료비가 들어간 고가의 드레스였다. 앙뜨는 대관식 드레스 3벌 제작에 타란 공작으로부터 백지 수표를 받았다. 예술혼이 폭발했다. "불편한 곳은 없네. 드레스가 매우 편하고 아름답군."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제 작품의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이끌어내고 계신 건 공작부인이셔요. 정말 잘 어울리세요." 앙뜨의 아부는 진심이 담겨서 루시아는 배시시 웃었다. 루시아 눈으로 보기에도 오늘의 그녀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마님. 주인님께서 조금 늦어지실 모양입니다." 하녀가 루시아 곁으로 쪼르르 다가와 말했다. "음, 그래? 마담. 다과 좀 하겠나? 수고한 사람을 그냥 보내기 마음에 걸렸는데 마침 시간이 남았군. 바쁘지 않다면." "기꺼이요. 초대 감사합니다." 공작부인이 티파티를 나간 이후 앙뜨의 의상실로 주문이 쇄도했다. 앙뜨는 의상실 이름으로는 의뢰는 받았으나 직접 맡는 의뢰는 모조리 거절했다. 공작부인 한 명에만 집중하기도 시간이 부족했다. 메인 디자이너가 담당할 수 없다고 하는데도 주문은 여전히 넘쳤다. 앙뜨는 돈을 쓸어 담고 있었다. 그전에도 잘 벌었지만 이제는 황금이 녹아 흐르는 강물을 퍼내는 것 같았다. 루시아와 앙뜨가 잠시의 티타임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휴고는 막 저택에 들어서고 있었다. 대관식이 끝나는 대로 그녀를 에스코트하러 다시 저택으로 왔다. 그는 조금 언짢았다. 사람들에게 붙잡혀 있느라 데리러 오기로 예정한 시간보다 조금 늦었다. 왕이 된 사람은 따로 있는데 그를 잡고 늘어지는 떨거지들이 왜 그리 많은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롬의 보고를 받고 그는 곧바로 응접실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는 그녀를 보며 휴고는 그대로 말을 잊었다. 잠시 멈추어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아주 천천히 그녀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며 찬찬히 살폈다. 아름답다. 아니 그 한 마디로 표현을 못 하겠다. 곱지 않은 시선이 살짝 앙뜨를 스쳤다. 이렇게까지 최선을 다할 필요는 없었다. '제길, 딴 놈들에게 보여야 한단 말이지.' 사내놈들이 볼 생각을 하면 아까워죽겠다. 남편이 동반하는 자리에서 추근거리는 명줄 아까운지 모르는 놈은 없겠지만, 앞으로 종종 홀로 무도회 보낼 일이 걱정이었다. 북부에 있을 때가 좋았다. 그때는 적어도 불나방 같은 사내놈들 걱정할 일은 없었는데. 마음만 같아서는 오늘 파티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덥석 안아 침실로 들어가고 싶었다. 이 여자는 내 것이다. 강렬한 소유욕이 음험하게 넘실거렸다. 자신의 어둠을 내보이면 혹시 그녀가 도망갈까 봐 그는 부드러운 미소로 그것을 감추었다. 그녀에게 다가갔다. 하얀 레이스 장갑을 낀 그녀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아름답군." 살짝 상기된 표정의 루시아가 생긋 웃었다. "당신도 멋져요." 검은 턱시도를 차려입은 그는 정말로 근사했다. 여자들이 공작새처럼 색색의 드레스를 입는 것에 비해 남자들은 대개 거의 비슷한 검은색 턱시도를 입지만 체형에 따라 살아나는 태는 제각각이었다. 큰 키에 벌어진 어깨, 날렵해 보이는 그의 몸매는 단순한 검은 턱시도를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옷으로 탈바꿈해 놓았다. 저 옷 안쪽에 자리 잡은 그의 단단하고 유려한 근육들을 알고 있는 루시아는 한층 더 그의 옷차림이 야하게 느껴졌다. 앙뜨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공작 부부를 관찰했다. 아내에게서 시선을 뗄 줄 모르는 공작의 눈에는 부드러운 애정이 가득했다. 정략결혼이 난무하는 귀족 세계에서 이처럼 애정이 충만해 보이는 부부다운 부부는 보기 힘들었다. "마담 앙뜨가 수고가 많았어요." 타란 공작 시선이 제게 향하자 앙뜨는 허리를 숙였다. "수고했네. 아직 더 할 것이 남았나?" "아닙니다. 전하. 준비는 다 마쳤습니다." 휴고는 그녀를 에스코트해서 마차에 올랐다. 그들을 공작가 사람들은 물론이고 앙뜨와 조수들까지 나와서 배웅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공작부부를 지켜보는 눈빛에 뿌듯함이 담겼다. 그 와중에 앙뜨의 머릿속은 새로운 계산을 하는 중이었다. 여자에게 푹 빠진 남자들에게 사라지는 개념이 하나 있다. 바로 금전감각이다. 여자에 대한 애정은 돈에 비례한다고 앙뜨는 굳게 믿었다. 아무래도 타란 공작은 아내를 위해 얼마든지 돈을 뿌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그 돈을 제 치마폭에 모두 담고 말겠다고 앙뜨는 결연하게 눈을 빛냈다. ============================ 작품 후기 ============================그릴자유 님, 마님34 님, 퍼플케이브 님, 매쉬매리골드 님, 블루마틴 님, 레아수이 님, TWILIGHT★ 님, jwieer12 님, eonchu 님, 아드밀란 님, 야간자율 님, 파이팅 76 님, 이지윤 님 쿠폰 감사합니다. 그릴자유 님, 마님34 님, 퍼플케이브 님, 매쉬매리골드 님, 블루마틴 님, 레아수이 님, TWILIGHT★ 님, jwieer12 님, eonchu 님, 아드밀란 님, 야간자율 님, 파이팅 76 님, 이지윤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 -- 사랑합니다 -- > 오늘 저녁 이후부터 3일 이어질 무도회는 외궁의 널찍한 홀에서 열리지만, 오늘 낮의 축하연은 내궁에서 개최했다. 속도를 가해 달려 궁에 도착한 마차는 내궁에 들어서자 아주 느리게 달렸다. 내궁에서는 마차가 일정 속도 이상 달리지 못하게 제한했다. 느린 속도 때문에 마차 내부의 흔들림이 거의 없자 휴고는 일어나 몸을 그녀 쪽으로 숙이면서 마차 벽을 짚고 키스하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내내 하고 싶은 걸 참느라 혼났다. 갑자기 덤벼든 진한 입맞춤에 루시아 얼굴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입술이 떨어지자 마주친 그의 눈이 열기로 가득했다. 그의 입술에 묻은 분홍색 자국을 발견하자 루시아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당신 입술에 화장품이 묻었어요." 휴고는 제 손으로 입술을 문질러 확인했다. 분홍빛 연지가 묻어났다. "손으로 문지르면 번져요." 루시아는 손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의 입술을 닦았다. "저도 번졌죠?" "내가 닦아주지." 루시아는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는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다시 키스했다. 깊게 혀가 섞이고 이어서 입술만 몇 번이고 빨아들이는 가벼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그는 새빨갛게 물든 그녀의 얼굴을 보며 즐겁게 속삭였다. "당신 입술은 다 닦였어. 나는 어떻지?" 닦아준다는 의미를 비로소 깨닫고 그의 어깨를 쳤다. 웃는 그를 흘겨보면서 손수건으로 그의 입술에 조금 묻은 흔적을 닦았다. "기껏 화장했는데..." "안 해도 돼. 앞으로도 입술에는 하지 마." "... 왜요?" "당신이 묻을까 봐 신경 쓰니까." "키스하지 않으면 되잖아요!" "왜 그래야 하는데?" 뚱하게 되묻는 말에 루시아는 말문이 막혔다. "화장의 꽃은 립스틱이라고요. 마무리 같은 거란 말이에요." "안 해도 예뻐." 그녀의 입술을 볼 때마다 붉고 촉촉한 입술을 삼키고 싶었다. 여린 입술을 빨고 잘근 깨물고 말캉한 혀를 괴롭히고 싶다. 그녀의 타액을 삼키고 붉어진 눈시울로 할딱거리는 그녀를 보고 싶었다. 왜 그걸 참아야 하는데? 그는 절대 그럴 생각도,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또다시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루시아가 손바닥으로 막았다.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그를 향해 루시아는 강한 거부 의사를 표했다. "때와 장소를 좀 가려요. 제발. 우리 지금 중요한 자리에 가는 중이라고요." 그는 순순히 물러나 마차에 등을 기댔다. 중요한 자리와 키스와의 상관관계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자리는 맞았다. 왕의 즉위 축하연이어서가 아니라 그녀의 데뷔 무대이니까. 느리게 움직이던 마차가 멈추었다. 밖에서 문이 열렸다. 휴고는 먼저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 안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루시아는 크게 한 번 심호흡 하고 일어났다. 마차와 바닥 사이에 제법 높은 턱이 있으나 그 사이를 간이 계단이 받치고 있었다. 그의 손을 붙들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밟아 마차에서 내려왔다. "긴장돼?" "조금요." 휴고는 그녀의 손끝에 입을 맞추었다. "당신보다 높은 신분은 손에 꼽아. 다른 사람이 당신 앞에서 긴장해야 해." "네." 그를 향해 생긋 웃었다. 그도 미소를 짓고 앞으로 시선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루시아도 앞을 보며 걸음을 내디뎠다. 홀에 들어서자마자 루시아는 수십, 수백 개의 시선이 자신에게 날아와 꽂히는 것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그를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를 지탱해 주는 커다란 손. 혼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곁에는 그가 있다. 약간의 불안감이 사라졌다. 잠깐의 정적이 지난 후 술렁이는 소리가 번지면서 점점 커졌다. 루시아는 주변에 시선을 주지 않고 똑바로 앞만 보며 그가 이끄는 대로 걸었다. 휙휙 지나가는 주변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멈추자 루시아도 멈추어 섰다. 그가 몸을 굽히고 고개를 숙인다. 루시아도 따라서 허리를 숙였다. "일어나시오. 유명한 공작부인을 드디어 보게 되는군." '아... '루시아는 고개를 들어 비로소 누구에게 인사를 했는지 알았다. 황금관을 머리에 쓴 예복을 입은 남자. 헤세 9세로 즉위한 제논의 왕. 루시아의 이복 오라버니. 퀘이즈였다. 곁에는 왕비의 관을 쓴 베스가 함께였다. "사적으로는 짐의 누이가 되지. 아니 그러하냐." "황공하옵니다." 친한 척 말을 건네는 왕이 낯설었다. 루시아의 이복형제는 꿈속에서 그녀를 메튼 백작과 결혼시킬 때도 명령 같은 문서 한 장을 보냈다. 왕에게 유감은 없었다. 그러나 순수하지 않은 왕의 관심이 달갑지 않았다. 왕의 관심대상은 누이동생이 아니라 공작부인이었다. 꿈속이었다면 루시아는 아마 감격했을 것이다. 당시 그녀는 외롭고 지쳤으니까. 그러나 현재의 루시아 곁에는 든든한 남편이 있었다. 형제의 정을 갈구할 필요가 없었다. "짐에게 오라버니라 해도 좋다." "어찌 감히. 과한 분부 거두어 주시옵소서. 폐하." 생긋 미소 지으며 허리를 살짝 숙여 대답하는 태도는 형식적인 겸양이 아니었다. 완곡하며 단호한 거절. 퀘이즈는 물끄러미 루시아를 보다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부부가 똑같이 만만치 않았다. 이런 물건이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별궁에 있는 줄도 모르게 살았다고? 수많은 군상을 살핀 날카로운 눈으로 보건대 맹한 공주님이 아니었다. 눈동자에 총기가 감돌았다. 아주 드물게 퀘이즈는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오늘 처음 보는 누이가 그랬다.' 죽은 노인네가 그나마 남긴 건 아들 하나인 줄 알았더니. '퀘이즈는 루시아를 칭찬하면서도 자화자찬을 잊지 않았다. 휴고는 날카롭게 경계하다가 그녀의 야무진 대처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삼켰다. 예쁘고, 착하고, 영리하고, 당차고. 휴고는 아내에 대한 수식어를 끝없이 늘어놓을 자신이 있었다.' 어라. '퀘이즈는 녹을 것 같은 눈으로 제 아내를 보는 타란 공작을 보며 뒷골이 띵했다. 이 놀라움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었다. 살짝 눈이 마주친 왕비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눈을 돌렸다. 왕비는 알고 있었군! 왠지 분했다. "공이 시켰지?" "뭘 말입니까." "처음 대면하는 누이가 짐에게 이렇게 냉랭하지 않은가." "오라버니 노릇을 하셨어야 말이지요." 가볍게 말을 섞는 두 사람을 루시아는 조금 놀란 눈으로 보았다. 생각보다 훨씬 왕과의 사이가 격의 없었다. 남편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는 공작부인을 보며 베스가 웃었다. 남편이 좋아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 아주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타란 공작이 왜 공작부인에게 빠졌는지 알 것 같았다.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삼삼오오 모였다. 왕과 타란 공작, 내외국의 권력자들이 제법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주변으로는 섣부르게 누구도 접근하지 못했다. 루시아는 왕비와 신분 높은 귀부인들과 함께 있었다. 왕비 곁에 루시아가 서 있고, 그 주변을 에워싸듯이 사람들이 서 있는 형태였다. 지금 루시아는 거의 왕비와 동급이었다. 왕당파에 속하는 공후작 가문 부인중에서 참석자는 공교롭게도 루시아뿐이었다. 라미스 공작은 공작부인이 세상을 뜬지 얼마 안 되었고, 필리프 후작부인은 친정어머니 상중으로 불참, 데캉 후작부인은 건강 이유로 불참했다.' 데캉 후작부인이 곧 세상을 뜨겠구나.'꿈속에서 소피아는 상처한 데캉 후작과 결혼했다. 이번에는 누가 데캉 후작부인이 될지 모르겠다. 사방에서 떠들어대는 여자들 말에 적당히 대꾸하면서 루시아는 드문드문 그를 눈으로 좇았다. '내 남편.. '저 근사한 남자가 그녀의 남편이었다.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단연코 그가 제일 멋졌다. 사람들 속에서 그는 당당했고, 그 당당함은 왕과 함께 있으면서도 빛바래지 않았다. 꿈속에서도 그랬다. 그는 단연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였다. 칵테일을 계속 홀짝거리면서 루시아는 기분이 좋아졌다. 술기운 때문인지 분위기에 취해서인지 모르겠다. 실없는 농담에 같이 웃어주고 적당히 말대꾸해주며 가끔은 그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를 훔쳐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제법 많은 여자들이 그에게 흘끔거리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에게 내 남자라고 자랑하고 싶었다. 뿌듯하지만, 한편으로 심술이 났다. 보면 닳으니까 보지 말라고, 그런 유치한 말을 하고 싶었다.' 아, 저 여자 가슴 크다. '수도 귀부인들의 차림새는 확실시 북부보다 과감했다. 깊은 가슴골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드레스가 너무 흔해서 나중에는 무감각해졌다. 야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가는 허리에 커다란 가슴을 가진 미녀는 대단히 자주 눈에 띄었다. 루시아는 자꾸 여자들 가슴으로 시선이 갔다. 안보는 척하면서 계속 보고 있었다. 꿈속에서 봤던 그의 여자들은 모두 가슴이 컸다. 그는 큰 가슴을 좋아하는 것이 분명했다.' 뭘 먹으면 저렇게 가슴만 커질까. '물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슬쩍 자신의 차림을 내려보았다. 드레스 자체는 꽤 화려했지만, 스타일은 얌전했다. 등이 드러나긴 해도 앞에서 보이지 않아 그런지 야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드레스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드레스는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하지만 몸매를 자신 있게 드러내는 여자들의 자신감은 조금 부러웠다. 루시아는 다시 고개를 돌려 여자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집중까지는 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듣고 있다는 태도는 보여야 했다. 휴고는 지루하게 떠드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이따금 그녀 모습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가 몇 잔째 칵테일 잔을 드는 것을 보며 저러다 취할까 걱정했다. 그리고 그녀가 몸을 돌리는 순간에 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속에서 불길이 확 일었다.' 뭐야. 저건. '그녀의 뽀얀 등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오는 내내 그녀 눈만 마주치느라 드레스를 세심하게 전부 살피지 못했다. 등이 저럴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는 앞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흔한 드레스와 다른 앙뜨의 드레스에 만족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다.' 잘라버리겠어. '그는 이를 갈았다. 디자이너를 바꿔야겠다. 돈을 충분히 줬건만 재료비를 아끼자고 등은 저렇게 파 놓은 건가! 그의 머리에서 김이 풀풀 솟았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내놈 전부 바닥으로 눈 깔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는 간신히 이성을 찾아 시종을 불렀다. "숄 하나 가져오게. 귀부인 어깨에 걸치는." 난데없는 명이었지만, 시종은 대답하고 어디서 구해야 할지 모르는 귀부인 숄을 찾으러 달려갔다.' 맛있어. ' 칵테일은 루시아 입맛에 맞았다. 그녀는 또 새로운 잔을 집어 들었다. "어머.." 주변에서 갑자기 탄성이 들려온다. 루시아가 고개를 돌리는데 어깨 위를 부드러운 숄이 덮었다. 그리고 팔이 쓱 내려와 루시아가 들고 있던 칵테일 잔을 가져갔다. "많이 마신 것 같소. 부인." 조금 전까지 저만치 있었던 그가 어느 사이에 와 있었다. 루시아는 당황해서 그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루시아의 빈손에 오렌지 주스를 쥐여주었다. 루시아는 눈으로 항의했다. 그는 보란 듯이 빼앗은 칵테일을 단번에 다 마셔버렸다. 그의 움직이는 목울대를 보며 루시아는 저곳에 입을 맞추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화들짝 놀랐다.' 취했나 봐. '정말 그의 말대로 너무 많이 마신 것 같다. "이건..." 루시아가 숄을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분홍색 드레스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푸른색 숄이었다. "추워 보여서 그러니 걸치고 있으시오." 춥기는커녕 오늘 날씨는 더운 편이었다. 루시아는 왜 그러느냐 묻고 싶었지만, 주변 눈이 있어서 잠자코 숄을 여몄다. 등 뒤에서 살짝 떨어져 등이 가려지는 모습을 확인하며 휴고는 만족했다. "그 새를 못 참고 부인을 찾으러 간 건가?" 퀘이즈가 유쾌한 음성으로 말하며 다가왔다. 퀘이즈는 내내 타란 공작이 공작부인에게서 눈을 못 떼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퀘이즈를 따라 한 무리 사람들이 우르르 따라왔다. 자연스레 여자들은 다 각자의 남편 옆으로 가서 부부끼리 서서 모여 있는 형태가 되었다. 그리고 이 무리에 끼고 싶어 안달한 자들이 바깥쪽에 더 넓게 원을 그리며 서 있고. 남자들이 끼자 대화는 재미없어졌다. 사소하고 잡스럽던 대화를 하던 여자들이 입을 다물고 남자들이 주로 정치가 어떻고, 국제정세가 어떻고 떠들기 시작했다. 루시아는 그런 얘기들이 별로 재미가 없었다.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지루함을 참으며 흘끔 그를 보았다. 그는 그리 대화에 많이 참여하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사람들은 그에게서 뭔가 이야기를 듣기를 원했고, 그가 간혹 입을 열면 모두 집중했다. 무리에 있던 누군가 어떤 주제를 꺼내자 그 주제로 약간의 논쟁이 벌어졌다. 그는 낄 생각이 없는지 관망하는 식이었고, 분위기는 제재하지 않을 수준까지만 열이 올랐다. 그래 봤자 루시아는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조금 더웠다. 숄을 벗고 싶어서 루시아는 그의 손등을 손끝으로 살짝 두드렸다. 그가 시선을 돌리자 숄을 벗을 것 같은 몸짓을 보였다. 그가 살짝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더운데.'왜 벗지 못하게 하는 거야. 뾰로통해 있다가 저만치 지나가는 가슴 큰 여자를 보고 슬며시 장난기가 솟았다. 다시 그의 손등을 두드리고 할 말이 있다는 눈으로 빤히 보았다. 그가 몸을 숙여 루시아 귓가에 속삭였다. "왜?" ============================ 작품 후기 ============================sh2 님, 블루마틴 님, 매쉬매리골드 님, 퍼프케이브 님, 실버미르 님, 굽다 님, 아키타이프7 님, 라사 님, shoya 님, 이즈니아 님, 달콤한나 님, amitanim 님, 날love 님, 닉호 님, 단해랑 님, 스니1 님, 붉은환상의달 님, 달빛유령 님, 상크미♡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이프7 님, 라사 님, shoya 님, 이즈니아 님, 달콤한나 님, amitanim 님, 날love 님, 닉호 님, 단해랑 님, 스니1 님, 붉은환상의달 님, 달빛유령 님, 상크미♡ 님 쿠폰 감사합니다. < -- 사랑합니다 -- > 루시아도 그의 귀 가까이 고개를 들이밀고 속삭였다. "가슴 큰 미녀, 좋아하죠?" 그가 유심히 루시아를 살피더니 다시 귓가에 말했다. "밑도 끝도 없이 대체 무슨 소리야." "남자들은 다 그렇대요." "입만 열면 헛소리하는 여자들 말에 귀 기울이지 마." 휴고는 그녀가 귀부인들에게서 괜히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헛소리하는 여자들 중에 제가 없을 거라는 자신감은 버리시라고요.' 루시아는 살짝 입술을 삐죽였다. 여자들 뒷말을 즐기지는 않아도 은근히 꽤 재밌다. 남을 헐뜯는 말만 아니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길만한 오락으로 수다만 한 것이 없었다. 맛깔나는 말솜씨 지닌 부인 한 명만 무리에 끼어도 웃고 떠들면 몇 시간은 훌쩍 지났다. "당신이 만났던 여자들이 다 가슴 큰 미녀였다던데요." 정말 그런 말을 들은 건 아니었다. 간 크게 대놓고 그런 이간질 하는 사람은 없었다. 제롬을 통해 입수한 그의 옛 여자들 중에 특별히 눈에 거슬리는 여자는 없었다. 공작부인 곁에 다가와 얼씬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여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루시아는 그의 진짜 과거 여자들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꿈속에서 봤던 미래의 그의 연인들이 더 생생한 기억 속에 있어서 신경 쓰였다. 타란 공작이 동반한 여자들의 미모와 당당함이 부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꿈속에서 봤던 공작부인조차 미인이 아니었어도 가슴은 컸다. 루시아는 약간의 취기에 평소보다 기분이 좀 올라 있었다. 작은 심술을 부리며 그를 놀리는 과감한 짓을 할 수 있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루시아가 오히려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당황하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태연할 것 같은 남자가 동요한다. 루시아는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의 팔을 잡아당겨 몸을 숙이게 해서 다시 귓가에 속삭였다. "설마 정말이었어요?" 기막혀하는 그를 보며 쿡쿡 작게 웃었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에 담기는 복합적인 다양한 감정 변화를 보았다. 화가 난 것 같으면서도 당혹스러움과 어이없음이 드러나는 보기 드문 진귀한 모습이었다. '세상에. 귀엽잖아.' 덩치 큰 이 남자가 사랑스러웠다. 오직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표정이었다. 심장이 간질간질해서 웃음이 나왔다. 휴고는 감히 겁 모르고 자신을 놀린 앙큼한 아내를 보며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다가가 살짝 귓불을 깨물었다. 화들짝 놀라 자신을 보는 그녀의 얼굴이 점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반응에 만족하여 태연하게 다시 고개를 들었다. '미... 미.. 미쳤어. 이 남자가 정말...' 루시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뻔뻔한 그를 노려보았다. '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짓을!' 루시아는 슬그머니 눈을 돌리다가 헉, 비명을 삼켰다. 두 사람 주변의 사람들이 아주 묘한 표정으로 공작 부부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표정 관리에 힘쓰는 귀족들이 노골적인 감정을 공공장소에서 드러내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다들 아주 흥미진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루시아는 그와 귓속말을 나누는 행동부터가 사람들 시선을 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얼굴에서 불이 날 것 같았다. 우선 이 자리를 피해야 했다. 루시아는 재빨리 도망가려고 했지만, 허리를 감아 당기는 그의 팔이 더 신속했다. "어디 가시오. 부인" 귀에 바싹 입술을 대고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루시아는 그의 팔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숙녀에게 그런 걸 묻는 건 실례예요. 놔 주세요." 그가 입술 끝을 늘리며 웃었다. '안 돼! 하지 마요!' 왠지 모를 불안한 예감에 루시아는 속으로 외쳤으나 이미 그의 입술이 루시아의 입술 위를 꾹 눌렀다가 떨어졌다. 주변 여기저기에서 헉, 하는 숨죽인 비명과 뭔가 바닥에 떨어지며 파삭 깨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주변을 둘러볼 용기는 도저히 안 나서 루시아는 허리를 잡은 그가 손을 풀어주자마자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달아났다. 정말 누가 봐도 그건 달아나는 거였다. 타란 공작을 중심으로 반경 일정 거리 공간은 마치 다른 세상인 양 기이한 침묵에 잠겼다. 이 사태를 야기한 공작만 홀로 태연자약했다. 지나가는 시종의 쟁반에 다 비운 잔을 내려놓고 새 잔을 집어 드는 움직임도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그는 원래 뻔뻔했다. 무안함, 부끄러움, 이런 단어 따위는 모른다. 그가 시선과 생각을 신경 쓰는 대상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 공작부인과 사이 좋아 보이는군." 퀘이즈가 침묵을 깼다.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처음엔 신기했는데 보자 보자 하니까 자신의 즉위 축하연에서 대놓고 둘이 연애질이었다. 눈꼴이 시었다. "신혼 아닙니까." 다들 고개를 끄덕이다가 위화감을 느꼈다. 결혼하고 1년 반이 지나지 않았나? 신혼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기엔 좀 모호한 기간이었다. 모두의 의문을 대표해서 퀘이즈가 물었다. "언제까지가 신혼인가?" "애가 태어나기 전까진 신혼이지요." 오호, 과연. 고개를 끄덕이던 사람들은 중요한 건 신혼기간의 정의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바로 어제 결혼을 했다 해도 조금 전 목격한 행위를 그 누구도 아닌 타란 공작이 했다는 점이 문제였다. 공작부부가 다정하게 귓속말을 나눌 때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논쟁 중이던 이들까지 입을 다물고 시선을 고정했다.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둘은 무슨 이야기를 그리하는지 즐거워 보였다. 아내를 바라보는 공작 눈에 가득한 따뜻함이 놀랍고, 사랑스럽다는 감정을 드러내는 애정표현에는 그저 입이 떡 벌어졌다. "... 공, 그대는 마치 사랑에 빠진 것 같군." 과연 폐하.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하는 말을 직설적으로 과감히 표현하는 퀘이즈에게 모두 속으로 손뼉을 쳤다. 휴고는 무표정하게 퀘이즈를 바라보았다. 왕의 말재간에 넘어가 소문의 실마리를 제공할 생각 없었다. "폐하께서 그런 단어를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타란 공작이 말을 돌리자 주변 사람들 표정에 아쉬움이 떠올랐다. 특히 여자들은 더 했다. 사흘 밤낮 떠들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만들 수 있었는데 아까웠다. 가끔은 아예 근거 없는 소문이 있어도 난데없이 만들어지는 소문은 없었다. 사소한 말 한마디라도 있어야 거기에 살을 붙인다. 사교계를 강타하는 소문은 다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음? 공은 짐을 대체 어찌 보고. 짐은 로맨티스트라네." 뭇 사람들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휴고는 픽 웃었다. 많은 목숨과 피를 발판삼아 오르는 자리가 왕좌다. 그 자리의 주인이 하는 말치고는 상당한 유머였다. 퀘이즈는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 형제들을 죽였다. 아무리 배다른 형제라고 해도 피를 나눈 혈육을 베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휴고가 퀘이즈 손을 잡을 이유 중에는 그런 과단성이 한몫했다. "말 나온 김에 공. 이 자리에서 비화 좀 풀어 봐. 공의 러브스토리에 관심 많은 이가 한둘이 아니거든." 왕의 위엄을 깎아내릴 수 있는 언사였으나 그게 퀘이즈의 묘한 매력이었다. 적당히 권위를 벗고 킬킬대며 농을 던질 줄 알다가도 위엄을 놓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선을 넘지 않는 줄타기에 능했다. 그래서인지 퀘이즈를 지지하는 젊은 귀족이 많은 편이었다. "됐습니다. 한마디가 백 마디로 변해 나돌 겁니다." "공은 소문 신경 안 쓰잖나." 휴고는 가슴 큰 미녀 좋아한다죠? 묻던 그녀를 떠올렸다. 그동안 혹시 그녀에 대해 나쁜 소문이 돌거나, 자신을 둘러싼 헛소문을 듣고 그녀가 오해할까 봐 부지런히 소문을 모았다. 아무래도 그 정도로 안 되겠다. 쓰레기 같은 풍문에 관심도 두지 않았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단속할 필요를 느꼈다. 루시아는 휴게실로 도망쳐 들어갔다. 파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널찍한 휴게실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물 한 잔 가져다 다오." 곁을 따라온 하녀를 심부름 보내고 루시아는 숨을 골랐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술기운이 가라앉을 때까지 쉬어야겠어.' 많이 취한 건 아닌데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들떴다. 실수는 이럴 때 저지른다. 하지만 곧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미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나. 그의 짓궂은 장난을 유도하고 말려든 일 자체가 실수였다. '그이가 남의 시선 신경 쓰지 않는 걸 알면서.'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되었다. 아무리 말해도 그가 바뀌지 않으니 자신이 조심했어야 했다. 하녀가 가져온 물을 마시고 숄을 벗자 시원한 공기가 어깨와 등에 닿았다. '설마.. 등 때문에..?' 루시아는 숄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왜 숄을 덮어 주고 벗지 못하게 하나 궁금했는데 이유를 알 것 같으니까 웃음이 나왔다. '그가 그렇게 보수적인 남자였나?' 아내, 혹은 연인의 노출을 싫어하는 남자들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가 해당할 줄은 몰랐다. 숄을 구하는 수고를 할 정도면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아무래도 앙뜨에게 불똥이 튀겠다. '잘 됐네. 이렇게 된 거 앙뜨와 거래하는 데 이용해야겠어.' 앙뜨는 첫 방문에 어마어마한 가격의 영수증을 보내 기함하게 했으면서 이번 대관식 파티 드레스 가격은 상당히 저렴하게 청구했다. 루시아는 승전파티 때 드레스를 구매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대목에는 평소보다 몇 배 비싼 가격이 시세였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사교 데뷔 드레스는 반드시 필요해서 잠자코 있었지만, 조만간 슬슬 어찌 된 일이지 알아볼 생각이었다. "공작부인. 휴식을 방해 드려 송구합니다. 잠시 인사 여쭈어도 될는지요?" 휴게실은 예법에 구속받지 않는 공간이었다. 왕비가 행차한다고 해서 쉬고 있던 여자들이 일어나 인사할 필요 없었다. 각자의 조용한 휴식을 방해하지 않고, 대화를 나누어도 큰 소리를 내면 실례였다. 루시아는 피곤한 상태는 아니라서 방해받은 휴식이 그리 성가시지 않았다. 인사를 건넨 여자를 바라보았다. "앉으세요. 레이디 앨빈." "아아. 절 기억하고 계셨군요. 기쁩니다." 오늘 앨빈 백작은 아내 소피아 대신 미혼 누이동생을 파트너로 데려왔다. 소피아는 그날 이후 칩거 중이었다. 아무리 대관식 파티지만, 만약 오늘 소피아가 나왔으면 루시아는 자신의 경고를 무시한 것으로 간주하려 했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오라버니가 올케의 실수를 꼭 공작부인께 사죄드리기를 원했습니다. 직접 기회가 닿지 않으면 제게 꼭 전해 드리라고 신신당부했지요. 정말 큰 잘못을 했습니다. 부디 너그럽게 봐 주셔요. 감히 용서를 바라지 않겠습니다. 노여움만 풀어주시기를 간곡히 청합니다." "나는 이미 잊은 일입니다. 레이디 앨빈이 사죄할 필요는 없어요. 앨빈 경의 사과는 받도록 하지요." "너그러우신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레이디 앨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공작부인이 정말 용서했다면 '백작부인과 언제 만나 담소나 나누자고 전하라.' 라고 훗날을 기약해서 금족령을 해제해 주었을 것이다. 형식적인 용서였다. 공작부인 나이가 어리니까 비위 맞추며 속을 살살 달래주면 금방 풀어질 줄 알았더니 오산이었다. 레이디 앨빈이 인사를 하며 일어났다. 루시아는 레이디 앨빈이 휴게실 구석으로 가서 어떤 여자와 대화하는 모습을 무심히 보았다. 대화 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아서 흥미를 잃고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서 여자를 다시 살폈다. '저 여자...' 짙은 밤색 머리카락, 고양이 같은 눈매, 살짝 올라간 입매와 눈 밑에 있는 눈물점. 여자는 놀만이 말해준 인상착의를 하고 있었다. 놀만을 찾아와서 루시아의 뒤를 캐물었다는 귀족 여자와 비슷했다. 루시아는 하녀에게 저 여자가 누군지 알아오라 시켰다. 하녀는 나이든 시녀들을 통해 금방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평소에도 눈치가 비상한 아이였다. "팔콘 백작부인이라고 합니다." "... 수고했다." 루시아는 꿈속에서 아니타를 본 적이 없었다. 얼핏 결혼을 3번 했다는 백작부인 소문을 들어봤으나, 팔콘 백작부인은 사교계에 모습을 잘 드러내는 편이 아니었다. 소피아와 그의 대화를 엿듣지 않았으면 팔콘 백작부인이 그의 내연녀였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왜 내 뒷조사를 했을까.' 노리는 대상이 자신인지, 자신을 이용해 그를 노리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소피아처럼 사적인 감정에서 저지른 짓일 수 있지만, 어떤 배후를 뒤에 두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정말 목적이 있다면 언제고 자신에게 접근할 것이다. 만약 저 여자가 무슨 이유에서건 자신에게 접근해 말을 붙인다면 루시아는 그에게 말할 생각이었다. 공작부인이 휴게실을 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는 아니타의 시선이 차가웠다. 지난 1년, 마음고생을 많이 한 아니타의 분위기는 그전과 다르게 변했다. 체중이 줄어 볼살이 빠지면서 인상이 강해지고 성미가 강퍅해졌다. 느닷없이 거액 자금이 예고 없이 빠져나가며 이유를 알아볼 여유 없이 뒷수습에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간신히 부도는 면했지만, 상단 지분의 대부분이 남의 손에 넘어갔다. 허울 좋은 껍데기만 남았다. 가문 사업 기반을 무너뜨린 자금 공격은 시작에 불과했다. 타란 공작의 보좌관이 찾아와 잔인한 마무리를 했다. [ 해서는 안 될 짓을 하셨더군요. 다른 사람 뒷조사 같은 건 감당할 능력 없으면 하는 게 아닙니다. 그분이 몹시 노여워하셨습니다. 이후 다시 이런 있으면 대가를 치를 각오해야 할 겁니다. 이 정도는 아주 가벼운 경고입니다. 그분은 경고를 무시한 자에게 용서가 없으시지요. ]평소 팔콘 백작부인이 마땅치 않았던 파비안은 경멸을 담아 비웃으며 주인의 경고를 전했다. 파비안이 돌아가고 아니타는 모멸감에 기절해서 며칠을 앓았다. 깨어난 아니타의 눈에 독기가 넘실거렸다. '여류 작가와 교류를 하고 있었군.' 비비안 공주가 여류 작가를 통해 자신에 대해 알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타란 공작에게 고자질했을 것이다. 공작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애정 없는 결혼이라 해도 자신에게 소속한 사람을 다른 누군가가 건드리는 일이 불쾌했을 것이다. 그래도 자신에게 가한 처분은 너무 과했다. 공작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중간에서 얼마나 날 나쁘게 말했기에.' 비비안 공주는 공작에게 고자질한 정도를 넘어서 무슨 해코지라도 당한 것처럼 말했음이 틀림없다. 그야말로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은 격이었다. 비비안 공주는 아예 겨냥해서 돌을 던졌고, 자신은 그 돌에 맞았다. '이런 식으로 내가 무너질 것 같아? 죽어도 혼자는 안 죽어.' ============================ 작품 후기 ============================눈물의정령 님, 아무로레이 님, 매쉬매리골드 님, RedSkin 님, amitanim 님, 그리고하나 님, 파랑520 님, 아드밀란 님, 푸니 님, 너무죠아 님, 탐묘 님, 굽다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제가 팬픽을 받았습니다. ㅎㅎㅎㅎ어쩐지 좀 부끄러운데요. /// 제 뜰에 가시면 볼 수 있습니다. 팬픽 주신분들 감사합니다. ^^지난 화 To be continued 방식에 반응이 매우 열광적이더군요. 이후 연재에 참고하겠습니다. 후훗다. ^^지난 화 To be continued 방식에 반응이 매우 열광적이더군요. 이후 연재에 참고하겠습니다. 후훗다. ^^지난 화 To be continued 방식에 반응이 매우 열광적이더군요. 이후 연재에 참고하겠습니다. 후훗다. ^^지난 화 To be continued 방식에 반응이 매우 열광적이더군요. 이후 연재에 참고하겠습니다. 후훗다. ^^지난 화 To be continued 방식에 반응이 매우 열광적이더군요. 이후 연재에 참고하겠습니다. 후훗다. ^^지난 화 To be continued 방식에 반응이 매우 열광적이더군요. 이후 연재에 참고하겠습니다. 후훗다. ^^지난 화 To be continued 방식에 반응이 매우 열광적이더군요. 이후 연재에 참고하겠습니다. 후훗다. ^^지난 화 To be continued 방식에 반응이 매우 열광적이더군요. 이후 연재에 참고하겠습니다. 후훗다. ^^지난 화 To be continued 방식에 반응이 매우 열광적이더군요. 이후 연재에 참고하겠습니다. 후훗다. ^^지난 화 To be continued 방식에 반응이 매우 열광적이더군요. 이후 연재에 참고하겠습니다. 후훗다. ^^지난 화 To be continued 방식에 반응이 매우 열광적이더군요. 이후 연재에 참고하겠습니다. 후훗다. ^^지난 화 To be continued 방식에 반응이 매우 열광적이더군요. 이후 연재에 참고하겠습니다. 후훗다. ^^지난 화 To be continued 방식에 반응이 매우 열광적이더군요. 이후 연재에 참고하겠습니다. 후훗다. ^^지난 화 To be continued 방식에 반응이 매우 열광적이더군요. 이후 연재에 참고하겠습니다. 후훗다. ^^지난 화 To be continued 방식에 반응이 매우 열광적이더군요. 이후 연재에 참고하겠습니다. 후훗다. ^^지난 화 To be continued 방식에 반응이 매우 열광적이더군요. 이후 연재에 참고하겠습니다. 후훗다. ^^지난 화 To be continued 방식에 반응이 매우 열광적이더군요. 이후 연재에 참고하겠습니다. 후훗 < -- 사랑합니다 -- > 몰락 귀족 막내딸로 태어나 반반한 외모 덕에 재력 있는 노상인과 결혼했다. 결혼 후 몇 개월 안 되어 남편이 갑작스러운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아니타는 순식간에 부자가 되었다. 돈이 있으니 신분도 갖고 싶었다. 자신에게 푹 빠진 남작을 이혼시키고 결혼했다. 두 번째 남편은 결혼 반년 만에 낙마 사고로 죽었다. 세 번째 남편은 사업하다가 만난 팔콘 백작이었다. 아니타는 신분이 탐이 났고, 백작은 돈이 필요했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 결혼했다. 결혼 1년차에 사업차 타국에 나갔던 백작이 열병으로 사망했다. 죽은 남편과의 사이에 자식이 없고, 작위를 물려 줄 후계를 지정하지도 않았다. 재혼하지만 않으면 법에 따라 아니타가 죽을 때까지 백작부인이었다. 몰락 귀족의 막내딸이 부유한 백작부인이 되었다. 남편들이 죽은 건 그녀의 탓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니타를 저주받았다고 손가락질했다. 편견과 맞서 싸우며 이 악물고 살았다. 자신을 채찍질한 만큼 남에게도 가혹하게 굴었다. 뒤에서 저주와 욕을 들어도 귀를 닫았다. 그만한 독기가 있으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돈과 신분을 갖자 사교계 명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만큼은 뜻대로 되지 못했다. 유명인사는커녕 아니타는 사교계의 외톨이었다. 품위 따지는 귀부인들은 아니타를 싫어했다. 불길하다고 이유를 붙였으나 아니타가 보기에 둘러대는 이유일 뿐 사실은 추한 질시였다. 남 뒷말만 할 줄 아는 잘난척하는 사교계 귀부인들과 다르게 아니타는 남자들과 대화가 통했다. 함께 경제를 논하고 사업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외모도 매력적이었다. 아니타는 더 보란 듯이 유혹해오는 남자를 거절하지 않고 때로는 필요하면 유혹하기도 했다. 기혼 미혼 따지지 않았다. '날 따돌린다고? 내가 너희 전부를 따돌리는 거야.' 귀부인들을 비웃으며 더 꼿꼿이 고개를 세웠다. 사업은 승승장구하고 다른 여자들과 달리 돈을 쓰는데 남편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 무도회를 나갈 일 있으면 아주 화려한 보석과 드레스로 꾸몄다. 부유함이 더해질수록 사교계 여자들도 대놓고 아니타를 무시하지 못했다. 콩고물을 얻어먹으려 달라붙는 여자들도 생겼다. 세상이 우스웠다. 몇몇 추종자들을 데리고 사교계를 누비고 다녔다. 그걸 몇 년 하다 보니까 사교계도 별거 아닌 거 같고 재미가 없어졌다. 그 후로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사교 활동을 하지 않았다. 돈이 불어나는 재미만 한 것이 없었다. 사업을 확장하는 데 더 힘을 쏟았다. 그러다 타란 공작을 만났다. 아니타는 비로소 자신이 모든 것을 얻었다는 충족감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가진 모두를 쏟아 부어 만든 자신만의 견고한 성이었다. 힘겹게 쌓은 성을 운이 좋아 공주로 태어나 운이 좋아 공작부인이 된 여자가 말 한마디로 무너뜨렸다.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토록 알랑대던 자들이 도움을 청하자 꽁무니를 뺐다. 재물도, 인간도 다 허상 같았다. 절치부심하다가 공작부인이 상경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이나 보자.' 공작부인이 참석한다는 티파티 초대장을 구하려고 했다. 가진 인맥과 연줄을 동원했다. 내가 구해주겠노라 큰소리쳤던 조르단 백작은 멋쩍은 표정으로 딴소리를 했다. [ 흠. 아내에게 말을 해 봤는데. 흐흠. 아무래도 좀.. ]뒷말을 듣지 않아도 뻔했다. 팔콘 백작부인 수준으로 넘볼 수 없는 파티 자리라고 비웃었을 것이다. 결국, 초대장을 구하는 데 실패했고 박탈감과 비참함을 느꼈다. 사업이 건재했다면 이런 수모는 겪지 않았으리라 생각하자 공작부인에 대한 원망이 싹텄다. 축하연 파티장으로 들어서는 공작 부부를 멀찌감치 떨어져 보았다. 변함없는 타란 공작을 보며 가슴이 뛴 것도 잠시, 사람들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입장하는 공작부인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번쩍이는 드레스로 몸을 감고 있었다. 속이 뒤틀려서 더 볼 수 없었다. 자리를 피해 휴게실로 들어갔다. 휴게실에서 레이디 앨빈을 만났다. 레이디 앨빈은 아니타가 꾸준히 공을 들인 인맥 중 하나였다. 잘난 오빠 만나서 부족함 없이 자란 철없는 아가씨였다. 가려운 곳 긁어주듯 비위를 살살 맞추는 건 노련한 장사꾼을 상대하던 아니타에게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레이디 앨빈은 아니타를 친구로 생각했다. 세간의 평이 비록 좋지 않지만 팔콘 백작부인은 여자로서 드물게 사업적 수완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곁에 붙어서 기분을 맞춰주고, 조언 덕분에 투자로 수익을 얻었다. 그 일로 오라버니에게 칭찬도 들었는데 팔콘 백작부인은 제 공을 내세우기는커녕 오히려 네가 대단하다, 똑똑하다 칭찬했다.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아니타의 사업이 어려워졌지만, 레이디 앨빈은 오히려 더 교류를 자주 했다. 이제는 자신이 도울 차례라고 말하며 위로했다. 사실은 팔콘 백작부인이 한창 잘 나가던 때 가졌던 자격지심이 사라졌기 때문이 솔직한 마음이었다. 둘이 친해지면서 종종 레이디 앨빈은 가끔 집안 사정을 떠들었다. 최근 올케와 타란 공작부인 사이에서 일어난 일도 한탄하며 늘어놓았다. '보통이 아닌데.' 아니타는 공작부인을 어리고, 세상 험한 줄 모르는 공주님이라고 우습게 봤던 생각을 수정했다. [ 레이디 앨빈이 대신해서 진솔한 사과를 해 보세요. 일이 잘 해결되면 앨빈 백작께서도 기뻐하시며 레이디 앨빈에게 상을 주실 겁니다. ]아니타의 부추김에 솔깃한 레이디 앨빈이 공작부인에게 접근해서 사과를 건넸다. 그러나 원했던 답을 얻지 못했다. 아니타는 레이디 앨빈을 위로하는 척하며 속으로는 공작부인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만만히 봐서는 안 되겠어. 생각보다 성격이 강해.' 언제고 기회는 있을 거라고 보았다. 자신과 공작부인 사이에는 커다란 신분 격차가 존재했으나 신분 차이는 절대적이지 않다. 본인의 삶이 그걸 입증했다. 사교계에 떠도는 공작부부에 관한 소문은 믿지 않았다. 아마 직접 눈으로 확인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아니타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상태에 이르렀다.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는 아니타는 이제 없었다. 루시아는 휴게실을 나와 복도를 따라 걸었다. 술기운은 금방 가라앉았다. 시녀가 종종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공작 전하께서 공작부인의 부재가 길어지시니 걱정되어 소인을 보내셨습니다." 쉬러 나온 지 3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 새를 못 참고 시녀를 보낸 그를 주변에서 유별나다고 볼 것 같아서 민망했다. "한발 앞서 가서 말씀드리게. 가는 길이라고." 시녀가 꾸벅 인사하고 다시 종종걸음으로 오던 길을 돌아갔다. "주인님께서는 항상 마님만 찾으십니다." 곁을 따르는 하녀가 말을 보탰다. "너까지 나를 놀리는 것이니?" "아닙니다. 마님. 놀리다니요. 보기 좋아 그러합니다. 저도 나중에 결혼하면 주인님, 마님 두 분처럼 살고 싶습니다." 하녀의 부러움 섞인 아부가 듣기 싫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 눈에 그리 좋아 보이는가 싶어서 조금 우쭐했다. 요즘 그와의 사이는 확실히 좋았다. 북부에서 지낼 때보다 얼굴을 보는 시간은 더 줄었는데도 오히려 더 돈독했다. 북부에서와 비교해서 뭐가 다를까 따져보았지만 딱 집어 말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의 말투가 변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그가 하는 말 한마디조차 무척 달콤하게 들렸다. 기분 좋게 걷던 루시아는 맞은편 저만치에서 이야기 나누며 오는 남자 몇을 보자마자 멈추어 서고 말았다. 곁을 따르던 하녀가 "마님?" 하고 불렀다. 루시아는 방패라도 되는 것처럼 숄을 여민 손을 꼭 쥐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 루시아는 숨을 들이마셨다. 이대로 지나치기를 바랐다. 두어 걸음 거리에서 그 중 한 남자가 루시아를 발견하고 탐욕이 가득한 눈을 빛냈다. 온몸에 쭉 소름이 돋았다. "오오. 공작부인 아니십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분께 인사드릴 기회가 닿아 기쁘지 한량없습니다." 과도한 호들갑을 떠는 남자의 인사를 무시할 수 없었다. 공식 사교계 첫 데뷔인 공작부인의 지나친 무례는 입방아 대상이었다.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추고 치가 떨리게 역겨운 남자 면상을 바라보았다. 루시아는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기 위해 눈에 힘을 주었다. 루시아의 키를 간신히 웃도는 땅딸막한 체구와 임신부처럼 툭 튀어나온 배를 가진 남자의 개기름이 흐르는 얼굴에는 욕심이 덕지덕지 붙었다. 히죽히죽 웃는 입에는 비굴함이 가득했다. 어떻게 해서든 권력자 곁에 빌붙고 싶어 안달이 난 눈은 교활했다. 꿈에서조차 보기 싫은, 루시아의 꿈속 남편. 메튼 백작이었다. "저는 메튼 가문의 가주이며 백작위를 승계받은 호리오 메튼이라고 합니다. 아아. 정말 아까부터 멀리서 뵈었지만 이리 가까이 뵈니 아름다움이 더욱 빛을 발하시는군요. 제가 평소 타란 공작 전하를 몹시 존경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위대한 타란 공작가 안주인께 인사를 드릴 수 있어 몹시 영광입니다." 메튼 백작은 비열한 상인처럼 손바닥을 비비며 나불거렸다. 루시아는 이 자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정의했다. 혐오. 그리고 공포. 꿈속에서 메튼 백작은 절망의 벽이었다. 결혼생활은 암흑이었다. 그나마 루시아가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우습게도 아무것도 모르고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정상적인 결혼생활이 뭔지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그렇게 숨죽이고 체념하며 살지 못했을 것이다. 꿈속의 기억이 악몽이라면 지금 결혼 생활은 깨고 싶지 않은 환상이었다. 그래서 메튼 백작을 마주치자 환상이 깨진 것처럼 공포가 밀려왔다. 섬뜩한 한기가 등을 타고 흘렀다. '이 자가.. 이렇게 왜소했나.' 현실에서 마주친 메튼 백작은 너무 형편없었다. 기사를 압도하는 덩치를 지닌 남편에 비하면 난쟁이였다. 꼭 안아주는 그의 넓은 품을 떠올리자 불안이 사그라졌다. 그가 발로 한 번 차면 저 멀리 날아갈 것 같았다. 왠지 눈앞의 남자가 대단히 우스워지고, 점점 공포는 옅어졌다. "공작부인. 부디 제게 공작 전하께 인사를 드릴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워낙 쟁쟁한 분들이 곁에 계시니 보잘것없는 저 같은 사람은 눈에 차지 않으시겠지만, 공작 전하의 손과 발이 되어 열심히 뛰기를 각오하고 있습니다. 기회만 주시면 훗날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루시아는 종종 메튼 백작의 비정상적일 정도로 권력에 집착하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곤 했다. 메튼 백작가정도면 영지가 있고 가문 역사도 길고 현재 처지에 만족해도 충분히 살 만했다. '이 자는 여전하구나. 하긴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지.' 메튼 백작은 이리저리 줄을 대려 발바닥 불나도록 돌아다니긴 했지만, 태자 쪽도 그 반대쪽도 그다지 탐내지 않는 쭉정이였다. 그야말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권력도 재력도 본인이 지닌 능력도 별 볼 일 없었다. 메튼 백작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지만 평생 언저리였다. 수면 밖으로 힘껏 몸을 날려도 그토록 바라던 다른 연못으로 건너가지 못했다. "서로 초면인데 무례하구려. 공작 전하께 용무가 있으면 직접 말씀드리시오." 루시아는 정색하며 말했다. 아무리 공작부인이라도 백작위 귀족에게 반하대 말투는 무례했다. 루시아는 다시는 이 자가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기를 바랐다. 그림자도 보기 싫었다. 이 자와의 끔찍한 인연은 현실에서 더는 없다. 그래서 일부러 무례하게 말했다. 당황, 그리고 불쾌함이 얼핏 메튼 백작의 탁한 눈동자에 스치는 걸 보았다. 꿈속에서 루시아는 백작의 눈이 저럴 때마다 공포에 떨었다. 제 심사가 비틀어져 패악을 떠는 날이었다. 루시아는 허리에 힘을 주었다. 거만한 모습으로 보이길 바라며 지나쳐 갔다. 가슴이 조금 떨렸지만 막힌 속이 뻥 뚫린 것처럼 통쾌했다.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깨물었다. 루시아는 지금부터 진정으로 꿈속 악몽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작품 후기 ============================한편 더 옵니다. 밤 늦어서요. 7시부터 기다리지는 마세요 ㅎㅎ============================ 작품 후기 ============================한편 더 옵니다. < -- 사랑합니다 -- > '내가 다짜고짜 뺨을 후려쳐도 날 어쩌지 못해.' 루시아의 뒤에는 타란 공작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세파에서 지켜줄 것처럼 든든한 남편이 버티고 있었다. 그가 무적은 아니겠지만, 저런 쓰레기를 치워줄 능력은 충분히 있었다. 저자를 두려워하던 꿈속의 자신은 이제 없었다. 그가 갑자기 보고 싶어서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에게 설명하기 곤란해도 지금 느끼는 이 희열을 나누고 싶었다. '저자는 결국 꿈속처럼 비참하게 죽겠지.' 루시아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 죽지 않을 수도 있어. 미래가 바뀌고 있으니까.' 결혼 5년 차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왕이 자신을 거스르는 자들을 잠자코 지켜보다가 드디어 칼을 빼 들었다. 훗날 피의 100일이라고 불린 환난의 시작이었다. 메튼 백작은 처음에 왕당파에 속하기 위해 열심히 기웃거렸으나 합류에 실패하자 반 대 세력에 발을 담갔다. 새가슴 메튼 백작이 진심으로 반역을 계획했을 리 없다. 그럴 배짱도 능력도 없었다. 그저 어떻게 해서든 권력자와 선이 닿아 비빌 작정이었을 것이다. 메튼 백작의 빤한 속내를 반대 세력 쪽 역시 눈치챘다. 서로서로 이용하는 관계였다. 이런 관계에서는 힘이 약한 쪽이 몰릴 수밖에 없다. 메튼 백작은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처럼 빼도 박도 못하게 걸렸다. 메튼 백작의 억울함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 왕이 보기엔 같이 치워버려도 아쉬울 것 없는 떨거지이고, 뒷배라고 믿었던 권력자들은 다 목이 달아난 후였다. 나름대로 유서깊은 가문이었던 메튼 백작가문은 하루아침에 멸문했다. 백작은 들이닥친 군사들 손에 잡혀서 제대로 재판받지도 못하고 즉결 심판으로 목이 잘렸다. 식솔들 역시 모조리 잡혀가서 얼마 후 참형을 당했다. 그나마 학술원에 있던 막내아들 브루노가 화를 피해 타국으로 망명했다고 아주 먼 훗날 소식을 들었다. 꿈속의 기억을 떠올리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군사들이 들이닥친 그 밤의 기억은 공포 그 자체였다. 당시 피의 100일을 지휘한 선봉장은 타란 공작이라고 들었다. '그날 밤 내가 잡혔다면 어쩌면 난 그이 손에 죽었을지도 모르겠네.' 메튼 백작가를 치던 날 밤에도 타란 공작이 군사들을 끌고 왔는지까지는 모르겠다. 금빛대지 그를 직접 보지 못했으니까. 그날 밤은 억압과 해방을 동시에 상징했다. 공포의 밤이었으나 루시아는 자유를 얻었다. 메튼 백작부인이었던 비비안을 버리고 루시아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하늘의 도움이었다. 그 일이 아니었으면 루시아는 꿈속에서 평생 메튼 백작부인으로 살면서 죽을 때까지 고통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잊자. 저자가 죽든지 말든지 나와 더는 관계없어.' 자꾸 저 쓰레기를 기억으로 되살릴 필요 없었다. 그럴 가치가 없었다. '.. 그래도 죽었으면 좋겠어. 아주 비참하게.' 죄 없는 메튼 백작가 다른 식솔들까지 휘말려 죽기 바라지 않지만, 꿈에서 본대로 백작의 죽음을 바라는 어두운 마음이 뭉글거렸다. "공작부인."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앞을 가로막아 걸음을 막는 남자를 보자마자 루시아는 짜증이 솟았다. 팔콘 백작부인, 메튼 백작에 이어 세 번 연속 달갑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래서 사람 많은 파티가 싫었다. 예기치 않은 일이 자꾸 일어나고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원하지 않아도 자꾸 보게 된다. "일전에 인사드린 저를 기억하시는지요. 라미스 공작가의 데이빗 라미스 백작입니다." 루시아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데이빗 눈에는 불편한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주변 가득한 광채에 눈이 부셔서 자신을 향해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보였다. "공작부인의 아름다움을 부족하나마 간단한 시구에 담았습니다. 부디 옥안으로 살펴 평해 주시기 부탁합니다." 데이빗은 장미정원에서는 그날부터 항상 품에 연서를 지니고 다녔다. 그날의 환상적인 첫 만남 이후 데이빗은 언제나 그녀가 눈에 아른거렸다. 당시 그녀의 옥음으로 듣지 못한 이름은 직접 알아냈다. 비비안. 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이름인가. 그녀를 위해 태어난 이름이었다. 결혼했으면 어떤가. 남녀가 마음을 나누는데 그런 형식적인 조건은 방해될 수 없다고 믿었다. 지금 당장 큰 욕심은 없었다. 그저 공작부인과 연서를 주고받으며 조금만 서로 알았으면 좋겠다. 루시아는 봉투를 물끄러미 보았다.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공개된 곳에서 연서를 주고받는 일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취급했다. 몇 가지 규칙은 있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주는 건 괜찮아도 그 반대 경우는 소문 거리가 되었다. 남자가 주는 연서를 받을 때도 직접 받으면 안 되며 하녀 혹은 옆에 있는 사람이 대신 받아야 했다. 하녀가 '받을까요?' 묻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루시아는 하녀에게 고개를 저었다. "라미스 경. 받을 수 없는 마음은 부디 거두어 주시지요. 이미 한 분의 지아비와 해로하겠다고 서약을 했습니다." 데이빗은 당황했다. 연서는 귀부인의 대외적인 매력을 나타내는 척도라서 거절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내 혹은 연인이 그런 것을 받았다고 불쾌해하는 태도는 품위 있는 귀족답지 못했다. 오히려 은근히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공작부인. 혹여.. 오해하실까 드리는 말씀이지만, 시 몇 구절 적었을 뿐입니다. 부인의 정숙함이 해가 될 일이 아닙니다." "관습에 대해 가르쳐 주실 필요는 없겠군요. 제가 받지 않겠다고 죄가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 그야.." "바깥분이 함께하는 자리가 아니면 사적인 대화는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루시아는 기분이 안 좋은 상태라서 직설적으로 대응했다. 데이빗은 운 나쁘게도 시기를 잘못 맞추었다. 인사하고 지나가는 루시아를 데이빗의 시선이 따라갔다. 수치로 벌겋게 물든 얼굴로 주먹에 힘이 들어가 손에 쥔 봉투가 구겨졌다. 항상 주변을 따라다니는 추종자들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시시덕거리며 지켜보다가 무안한 표정으로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워낙 인간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귀족 사회에서는 항상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악연을 만들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 루시아처럼 연서를 딱 잘라 거절하며 앞으로는 말도 걸지 말라고 하는 경우는 체면을 중시하는 귀족 사회에서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망신이었다. '어째서 저런 여인이 타란 공작과 결혼했단 말인가.' 데이빗은 배가 아파 죽을 것 같았다. 남편에게 정절을 지키려는 마음마저 그렇게 고귀해 보일 수가 없었다. 데이빗은 공작부부가 따로 떨어져 각자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 파티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공작부인을 보자마자 설레는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공작부인은 지난번 장미정원에서 봤을 때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때는 요정 같았다면 오늘은 여신 같았다. 귀부인들이 둘러싸고 있는 공작부인 곁으로 다가갈 수 없었다. 누님이 곁에 있다가 멀찍이 바라보고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노골적으로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누님의 경고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타란 공작을 주인공처럼 떠받드는 사람들 무리로 가고 싶지 않아서 추종자들과 하릴없이 파티장 근방을 맴돌았다. 추종자들이 지루해하는 기색을 더 무시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파티장으로 들어가려다가 공작부인을 발견했다.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뻤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을 다 잃은 망국의 왕이라도 된 심정이었다. 데이빗은 무안함과 서글픔을 동시에 느끼며 고개를 떨어뜨리고 서 있었다. 처음 겪는 실연이었다. '손에 쥐지 못하는 장난감일수록 더 애가 타는 법이죠. 라미스 경.'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는 아니타가 찬웃음을 지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공작부인을 둘러싼 추문이라...'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소문에 말려들면 걷잡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퍼지는 소문이 거대하게 살을 붙인다. 타란 가문의 안주인이 사교계를 뒤흔드는 추문의 중심에 서면 과연 타란 공작은 어떤 식으로 나올까. 필요에 따라 여자를 취했다가 버리는 공작이라면 가차 없이 아내를 버릴 것이다. '선왕의 수많은 공주 중 하나였다가 공작부인이 되었고, 이혼당한 전 공작부인으로 추락이라.' 제법 구미가 당겼다. 사교계에서 10년은 우려먹을 스캔들이 될 것이다. "광견이다." "광견 크로틴." 적발 사내가 등장하자 즐거운 연회장 분위기가 순식간에 불안하게 술렁거렸다. 로이는 몹시 삐딱한 표정으로 먹잇감을 찾아 어슬렁대는 들개처럼 느릿하게 이리저리 시선을 던졌다. 사람들은 혹시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사색이 되어 고개를 돌렸다. 1년 넘도록 로이는 태자의 근접호위를 하면서 태자와 동반한 파티나 모임에서 차곡차곡 악명을 쌓아 이제는 사교계 유명인사가 되었다. 호위로 태자 곁에 붙어 있으니 태자를 둘러싼 살벌한 파워게임에 원하지 않아도 휘말렸다. 비비 꼬아 말하는 귀족들 화법에 익숙하지 못해서 처음에는 시비 거는 줄도 몰랐다. 비꼬아 말해도 멀뚱멀뚱하게 보자 헛기침하며 물러서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호위하는 초반에는 그런대로 조용했다. 그러자 점차 로이를 무시하며 비웃기 시작했다. 전쟁터에서 떨친 이름은 사교계에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타란 공작이 내린 남작이라는 단승 작위를 가지고 있다지만, 원래 출신은 평민이었다. 신분 낮고, 무식하며 어수룩한 기사는 세습귀족이 아니면 사람취급 안 하는 귀족들이 보기엔 아주 우스웠다. 그러다가 태자와 반목하던 귀족이 로이와 시비가 붙어 장갑을 내던졌다. 로이는 흔쾌히 응해서 아주 녹신하게 두들겨 주었다. 로이는 적성에 맞지 않는 호위를 하면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었다. 그런데 칼부림을 하고 나자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젠 먼저 시비를 걸고 다녔다. 대부분 태자 반대쪽 세력이었기 때문에 태자는 방관하고 태자의 파벌은 은근히 부추겼다. 로이는 신 나게 들쑤시고 다니며 어떨 때는 하루 서너 건의 결투도 했다. 처음엔 멋모르고 결투에 응한 자들의 기사들이 반병신이 되고 나서야 사람들은 로이가 미친놈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후작가 기사들을 패고 난 후에 '기사는 주인의 개'라고 말한 발언이 사교계를 뒤집었다. 그 후 로이는 미친개로 불렸다. 피해를 당한 자들이 이를 갈아도 정당한 대결이라 명분이 없었다. 더구나 로이의 뒤에는 태자가 있고 더 나아가서는 타란 공작이 있었다. 사람들은 미친개의 꼬리를 밟지 않기 위해 극도로 몸을 사렸다. 왕이 죽고 호위 일을 호기롭게 내팽개친 후 후환이 두려워서 한동안 숨어 지냈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며 실컷 놀다 보니까 심심해졌다. 단순한 로이는 시간이 지나자 주군에게 혼날까 두려웠던 당시의 공포를 거의 잊었다. 오늘 대관식 파티에 사람들이 많이 온다기에 뭐 재밌는 일 없을까 해서 어슬렁거리며 왔다. 격식 있는 자리라서 로이처럼 갑옷을 입고 들어오는 기사는 없었다. 출입부터 금해야 하지만, 이미 유명한 로이를 근위병은 막지 않았다. 지나가다가 어깨를 툭, 부딪쳤다. 사과하려고 고개를 돌리는데 다짜고짜 중년 귀족이 성질을 냈다. "눈을 어디 두고 다니는 건가! 이 자리가 어떤 자리라고 갑옷을 입고 돌아다니고 말이야. 에잉. 쯧쯧쯧." '호오.'로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런 시비는 오랜만이라 신선했다. 중년 귀족은 꽤 오래 수도를 떠나 있다가 상경한 지 얼마 안 되어 광견 크로틴의 악명을 듣지 못했다. "그럼 그쪽은 눈도 없소? 왜 내가 피해 다녀야 하는데? 혹시 장님이라면 내가 사과하리다." "뭐.. 뭐야!! 이런 무례한 놈이!" 중년 귀족은 주변에서 사람들이 기겁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 기사 따위가 자신을 모욕한 것에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 "놈? 지금 나한테 놈이라고 했어? 말 함부로 하네. 당신, 목이 몇 개야. 앙?" "뭐.. 뭐.. 뭐 이런 인간말종 같은 놈이! 네 이놈! 내가 누군 줄 알고! 네가 감히 이런 무도한 짓을 하고서도 무사할 것 같으냐!" "댁이 누군데. 그래서 어쩔 건데." 어서 장갑이나 던져. 로이는 제발 누가 시비를 걸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중년 귀족은 재수 없게 딱 걸렸다. 불량스럽게 웃으며 성큼 다가서자 중년 귀족이 놀라 뒤로 물러섰다. "저런." "쯧쯧. 하필이면." 발생한 소란에 사람들의 관심이 향했다. 광견 크로틴은 마주치기도 끔찍하지만, 재난은 내 일만 아니면 상당한 구경거리였다. 사람들은 광견에게 혀를 차면서 은근히 사고를 일으키기를 바랐다. 체면 따지는 사교계에서 광견처럼 화끈하게 사고 치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오늘의 희생양에 동정을 보내는 동시에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에 빠져들었다. 퀘이즈는 뭇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헛기침을 했다. 즉위 축하연이었다. 이대로 사고를 치게 두면 왕의 위엄에 손상이 간다. 놔둘 수 없으나 말리면 과연 말을 들을지 의문이었다. 과거에 중재를 요청하는 자들 말을 못 들은 척 해왔던 터라 인제 와서 나서기는 우스운 모양새였다. "흠, 타란 공." 좀 말려보지? 네 부하잖아. 퀘이즈는 휴고에게 해결사 역할을 넘기며 슬쩍 발을 뺐다. ============================ 작품 후기 ============================RedSkin 님, 열둘의정월 님, 아롱ミ☆ 님, 매쉬매리골드 님, ssin04 님, chiz 님, 웃음발작 님, 나무포크 님, 사스래피 님, 달콤한나 님, 이즈니아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빨리 퇴고가 끝났어요.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 밤 10시쯤 올리려다가... ㅎㅎ내일은 노블 예고~생각보다 빨리 퇴고가 끝났어요. < -- 사랑합니다 -- > 휴고는 로이가 이 자리에서 무슨 깽판을 치든지 사실은 별로 관심 없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자리를 비운 아내에게 향해 있었다. 너무 오래 안 오는 것 같아서 시녀를 보냈다. 방금 보냈으면서 시녀가 굼뜨다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휴고는 쯧, 짧게 혀를 차고 걸음을 옮겼다. 모두의 시선이 움직이는 타란 공작에게 향했다. "과연 광견을 저지할 수 있을까." "수하니까 당연하지 않나?" "하지만 광견이잖아." 광견은 예측이 불가능했다. 사람들 의견이 분분했다. 곧바로 공작이 로이를 저지하러 갈 것이라는 사람들 기대와 달리 공작은 몸을 틀어 근처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테이블에서 나이프 하나를 집어 들었다. 샐러드를 자를 때 쓰는 날이 무딘 나이프였다. 대체 저걸 왜? 좌중은 의문을 품고 왠지 모를 기대감으로 공작을 주시했다. 휴고는 나이프를 한 손으로 가볍게 위로 몇 번 던졌다 받았다. 그리고 로이의 뒤통수를 향해 던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헉!!" "꺄악! " 여기저기서 짧은 비명이 터졌다. 로이는 중년 귀족을 쥐를 모는 고양이처럼 가지고 놀고 있었다. 로이의 덩치와 위협에 못 이겨 중년인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 거대한 원형 기둥에 등을 기댔다.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로이는 기둥에 한쪽 팔을 디디고 불한당처럼 중년인을 위협했다. 너무 겁을 먹어 장갑을 던질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는 점이 로이의 계산 착오였다. 휴고가 던진 나이프는 로이의 뺨을 스쳐 기둥에 박혔다. 공교롭게도 나이프가 박힌 위치는 기둥에 바짝 기대 부들부들 떨던 중년인의 눈 옆이었다. 남자는 거품을 물며 혼절했다. 중년인이 기절하기 직전에 로이는 볼이 따끔해서 손을 댔다가 묻어나는 붉은 피를 확인했다." 아씨! 어떤 새끼야! "로이가 사납게 소리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굳었다. 주변은 정적이었다. 모두 얼어붙어 있었다. 정확히 시선이 마주친 휴고는 로이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했다. '난 죽었다.' 로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눈앞이 절망으로 어두워졌다. 표정없는 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로이는 몸을 돌려서 주군에게 걸음을 옮겼다. 로이의 유연한 신체는 마치 관절에서 소리가 날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서 움직였다. 두 걸음 정도 앞까지 다가가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사람들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광경에 숨을 죽였다.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귀족들은 타란 공작의 강함을 풍문으로 들었을 뿐 실제로 목격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로이의 미친 짓은 꽤 많이 목격했다. 로이의 결투를 구경한 자들도 많았다. 성격은 지랄스럽지만 실력만큼은 발군이라고 모두 인정했다. 아무래도 눈으로 본 것을 더 신뢰할 수밖에 없다. 은연중에 사람들은 어쩌면 타란 공작보다 로이 크로틴의 실력이 더 강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었다. 미친 말처럼 날뛰는 로이의 고삐를 잡아채는 일은 아무리 주인이라도 좀 애먹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완벽한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잠시 잊고 있었다. 타란 공작은 전쟁의 흑사자로 불리는 기사였다. 적국에서 위대하다고 더 인정하는 무장이었다. 기세등등하던 광견이 겁먹은 강아지 같았다. 마음 약한 여자들은 야만스럽다고 로이를 비난하던 속마음을 잊고 동정심을 품었다." 안보는 새 질 안 좋은 장난을 배웠구나.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일어나. "로이는 벌떡 일어났다. 기합이 잔뜩 들어간 신병 같았다. '맞는다.' 로이는 예감했다. 로이의 예감은 안 좋은 예감일수록 틀린 적이 없었다. 주군이 화내는 건 너무 무서웠다. 제대로 복부 한 대 맞으면 여파가 족히 일주일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내장 터져 즉사고 자신이라고 해도 일주일은 제대로 식사 못하고 피똥 싼다고 보면 된다. 시선을 내리고 처분만 기다리던 로이는 각오하던 처분이 없자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어...' 주군 옆에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공작부인이었다. 그 와중에 로이는 '분홍색 드레스에 푸른색 숄은 뭔가 이상한데.' 라고 생각했다. 루시아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틈을 뚫고 그에게 갔다. 로이가 한창 사고를 치는 광경은 보지 못했고, 사람들의 이상한 분위기는 눈치채지 못했다. 오직 그만 시선에 담아 그를 목적지로 곧바로 가느라 주변에 눈 돌릴 틈이 없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조금 전까지 불쾌한 자들과 만나 껄끄럽던 찌꺼기 같은 감정이 사르르 사라졌다. 행복해서 웃음이 나왔다. 그가 곧바로 팔을 뻗어 허리를 감는 손이 든든했다. 그 후에 우두커니 서 있는 로이를 발견했다." 크로틴 경. 오랜만이에요. "어쩐지 넋 나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로이가 이상해서 루시아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음.. 즐거운 파티군요. 그렇지 않나요? "의례적인 인사였다. 큭, 어디선가 웃음이 터졌다. 범인은 왕이었다. 퀘이즈는 껄껄대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왕의 파안대소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웃기 시작했다. 이내 파티장은 왁자한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영문 모르는 루시아는 당황했다. '인사를 한 건데 왜 웃지? 뭘 실수했나?' 휴고는 허둥거리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품으로 당겼다. 엉거주춤 서 있는 로이에게 인상을 쓰며 눈짓을 보냈다. 당장 돌아가 근신하고 있어. 무언의 명령을 알아들은 로이가 얼른 사라졌다. 주군 성격상 나중에 다시 불러서 지난 상황을 따지며 처벌하지 않을 것이다. '목숨 빚은 잊지 않겠소. 마님.' 로이는 루시아를 찬양했다. 생명의 은인이었다. 희희낙락하며 빠른 걸음으로 부지런히 파티장을 빠져나가던 로이는 멈칫했다. 방금 지나친 여자를 확인하려고 몸을 돌렸다. 여자는 파티장 입구 쪽 사람이 거의 없는 곳에 홀로 서 있었다. 낯은 익은데 어디서 봤던 여자인지 기억은 잘 나지 않았다. '별로 안 좋은 냄새가 나.' 여자는 흥겨운 파티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음울한 기운을 내뿜으며 어딘가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정확히 누구를 보는지 알 수 없었다. 하필 그 사람들 중에는 공작부부도 있었다. 왠지 기분이 나빴다. 로이는 여자를 유심히 보다가 몸을 돌렸다. 기절한 중년인은 시종들 손에 들려 어디론가 실려 갔다. 누구도 불쌍한 중년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람들 몇은 타란 공작이 던진 나이프가 박힌 기둥 근처에 모여 수군거렸다. 돌기둥에 자루만 남고 박힌 나이프를 사람들은 경외와 공포를 담아 구경했다. 호기롭게 누군가 나서서 나이프를 빼려고 시도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얼핏 잘못 건드렸다가는 기둥이 무너질 수 있다는 전문가 말에 따라 나이프는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훗날 외국 사신까지도 한 번쯤 구경하고 가는 명물이 되었다. 오후가 지나 해질 무렵이 다가올수록 연회장에 사람이 더 많아졌다. 완전히 날이 저물면 지금 한창 준비하고 있을 외궁으로 자리를 옮겨 무도회가 시작될 것이다. 반나절 내내 웃으면서 사람들과 인사하고 이야기하느라 루시아는 얼굴 근육에 경련이 날 것 같았다. 누구와 인사를 했는지 기억도 못 하겠다. 계속 서 있었더니 다리가 아파서 푹신한 소파에 기대 누워 다리를 주무르고 싶었다. 오늘 루시아의 사교계 데뷔는 성공적이었다. 과장을 보태면 사람들은 루시아와 인사를 나누고 싶어서 줄 서서 기다렸다. 마땅히 오늘 주인공이어야 하는 왕과 왕비는 타란 공작부부에게 관심이 쏠리는 분위기를 용인했다." 피곤해? "루시아는 습관적으로 " 괜찮아요. "라고 답하려다가 " 조금 지쳤어요. "라고 직전에 대답을 바꿨다. 그에게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돌아갈까? "괜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그녀 입에서 지쳤다는 말이 나올 정도면 정말 힘든 것이다. 휴고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품으로 당겼다. 자신에게 기대 그녀의 다리가 디딘 무게를 조금 덜게 도와주었다. 확실히 그녀는 많이 지쳤다. 사람들 많은 곳에서는 접촉을 부담스러워하는 그녀가 순순히 그에게 안기듯 기댔다." 하지만 아직 무도회는 시작도 안 했는데..." "연회장에서 이 정도 자리 지켰으면 됐어. 두 자리 모두 참석하는 건 힘들어. 어차피 무도회 가서도 잠시 얼굴만 보이려 했어. 내일도 있으니까." "정말 집에 가도 돼요?" 휴고는 미소 지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집'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돼." 둘만의 세계에 빠진 공작부부 주변으로 사람들이 다소 멀찍이 떨어져 서성거리며 다가가지 못했다. ".. 대단히 진귀한 광경이지 않소." 퀘이즈는 보고 또 봐도 여전히 신기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타란 공작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거리낌 없이 애정 표현을! 변고가 일어날 징조인가! 남편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베스가 웃었다. "왕비는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내게 귀띔해 주지 않은 거요." "재미있으시라고 그리했습니다. 이런 소소한 일은 폐하께 기분전환이 되지 않겠습니까." 퀘이즈는 생글생글 웃는 베스를 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내는 아들 셋을 키우면서 점점 억척스럽고 천연덕스럽게 변하고 있었다. 요즘은 후궁을 들일 때 은근히 왕비 눈치를 보게 되었다. 제 어미에게 잘못하면 눈 뒤집혀 달려들 아들이 셋이었다. 늙어서 구박받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점수를 쌓아놔야 했다. "왕비는 어찌 보시오? 타란 공이 저러는 것이 진짜겠소, 그러는 척하는 거겠소?" "그것이 중요합니까?" 왕비 말이 맞았다.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타란 공작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아내에 대한 애정 표현을 했다는 것 자체가 모두에게 무언으로 이르는 말이었다. 이 여자 뒤에는 내가 있으니 감히 허튼짓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물론 타란 공작가 안주인은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공작이 대놓고 든든한 방패라고 선언하는 것과는 또 격이 달랐다. "공작부인이 꽤 바빠지겠군." "그렇겠지요." 타란 공작을 공략하기 위한 지름길이 공작부인이라는 사실을 이 자리에 함께하는 모든 자가 알아차렸다. 이미 수많은 사람이 공작부인을 향해 이글대는 눈빛을 쏘아대고 있었다. "헌데 캐서린은 뭘 하느라 얼굴도 비치지 않는 거지?" "이런 자리 싫어하시지요. 아시지 않습니까. 저녁 무도회는 나오시겠지요." 대체 언제 철들지 몰라 걱정인 누이를 떠올리며 퀘이즈는 혀를 찼다. 같은 누이인데 저렇게 다른 것은 어머니가 달라서인가. 그는 예전에도 한 적 있는 생각을 다시 했다. 슬슬 누이 신랑감을 찾아봐야 할 텐데 마땅한 자리가 없어 걱정이었다. 마차가 공작저에 도착했다. 밖에서 하인이 문을 열었으나 휴고는 일어날 수 없었다. 자신의 다리를 베고 아내가 아주 곤히 자는 중이었다. 궁에서 마차에 오를 때만 해도 멀쩡했으나 마차에 올라 얼마 안 되어 고개를 끄덕이며 졸더니 그가 그녀 옆자리로 옮겨 기대게 하자 금방 잠들어 버렸다. '많이 긴장했겠지. 피곤하기도 했을 테고.' 실수 한 번 없이 큰 무대를 의연하게 감당한 그녀가 기특했다. 오늘 과시하는 것처럼 곁을 지켰으니 누구도 그녀를 섣부르게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북부처럼 사람들 모아놓고 경고하는 방식은 할 수 없었다. 그는 오늘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공작부인을 건드리려면 타란 공작이 뒤에 버티고 있음을 기억하라고. 핀으로 잘 고정해 올린 머리가 그의 무릎베개를 베고 누워 오는 길에 일부가 풀렸다. 휴고는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음미했다. 아내를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이 온화하게 풀려 있었다.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랄 만큼 평화로웠다. 그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등을 받치고 다리 안쪽으로 팔을 넣어 안아 들었다. 그녀를 안아 든 채 저택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 침실까지 들어갔다. 침대에 내려놓자 조금 전까지 미동조차 없이 자던 루시아가 눈을 깜빡였다. "휴." 휴고는 자신을 향해 뻗는 그녀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입술을 눌렀다. "집이야." ============================ 작품 후기 ============================ "집이야." "집이야." "집이야." "집이야." "집이야." "집이야." "집이야." "집이야." "집이야." "집이야." "집이야." "집이야." "집이야." "집이야." "집이야." "집이야." "집이야." "집이야." "집이야." < -- 사랑합니다 -- > 멍하게 그를 보며 몇 번 더 눈을 깜빡이던 루시아의 시선이 점차 또렷해졌다. ".. 저도 모르게 잠들었네요." 잠깐의 단잠 덕인지 머릿속이 한결 개운했다. 일어나려는 루시아를 그가 살짝 도와주었다. "혹시 오늘 저도 모르는 실수 한 건 없어요?" "전혀." "후우.. 다행이다." 루시아는 침대 줄을 잡아당겨 하녀를 부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부터 벗고 싶었다. 하녀는 들어오자마자 저녁 식사에 대해 주인 부부 의중을 여쭈었다. "생각 없구나. 당신은요?" "나도 생각 없어." 하녀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침실을 나갔다. 그 역시 옷을 갈아입으려고 그녀의 침실을 나가려는데 루시아가 그에게 말했다. "아까... 연회장에서요. 라미스 경이 제게 편지를 주려고 했어요. 전 거절했고요." 연서는 거절했지만, 사교계 소문은 어떤 식으로 튈지 알 수가 없어서 혹시 몰라 그에게 말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뭐?" 휴고는 미간을 팍 일그러뜨렸다. 그놈이 감히 자신의 경고를 무시했다. 그놈을 탈탈 털어 조사하라고 한 지가 언제인데 파비안은 뭘 하는 건가. 불똥이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는 애꿎은 파비안에게 튀었다. "아무 일 없었으니까 라미스 공작가와 불편한 관계는 되지 마세요. 별거 아닌 일로 당신 일에 차질이 갈까 봐 걱정이에요." 루시아는 정치를 잘 모르지만, 타란 공작과 라미스 공작이 함께 힘을 보태 왕을 모시고 있다는 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사소한 감정적 문제로 어그러지기에는 너무 큰 문제였다. "당신이 걱정할 일은 없어." 휴고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죽일 자신이 있었다. 왕이건 비천한 노예이건 목이 날아가면 죽는 건 매한가지.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시시했다. 가진 것이 많은 자일수록 겁이 많다. 가문 따위에 미련 없고 시간만 죽이며 사는 그가 세상에 겁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지켜야 할 존재가 있었다. 아내를 세상의 풍파에서 완벽하게 지키려면 가문도, 가문이 가진 권력과 재물도 지켜야 했다. 예전이었으면 눈에 거슬리면 치우면 그만이었다. 라미스 공작 적장자가 아닌 라미스 공작 본인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신중히 접근해야 했다. 파비안에게 철저하게 조사하라고 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휴고는 옷을 갈아입고 간단히 목욕을 마친 후 간편한 차림으로 집무실로 들어갔다. 처리해야 할 일은 늘 쌓여 있었다. 휴고는 틈이 나는 대로 일거리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빠르게 살필 수 있는 서류 몇 가지를 확인하고 결재 서명을 했다. 집무실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이 있었다. 휴고는 여전히 분주하게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주인님." 제롬이 아닌 중년 여인 목소리에 흘끗 시선을 들었다. "무슨 일이냐." "마님께서 목욕 중에 욕조에서 잠이 드셨습니다. 도통 일어나지 않으시어..." 무리해서 깨울 수 없다면 하녀들이 끌어서 침대로 옮기면 될 일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휴고에게 고하러 온 것은 하녀의 판단이었지만, 그 판단이 틀리지는 않았다. 공작이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물러가 쉬어라." 고 명을 내린 것이다. 잠시 후 하녀들이 모두 물러간 텅 빈 목욕탕에 그가 들어섰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기대 누워서 루시아는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맑은 물에 잠긴 나신이 뽀얗게 비쳤다. 휴고는 욕조 턱에 걸터앉아 촉촉하게 젖어 있는 그녀의 붉은 입술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마치 붉은 물이 손에 묻어나올 것 같아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제 손을 살폈다. 순한 아기처럼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깊이 침잠했다.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 어딘가가 뭉클했다.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셔츠를 걷고 두 팔을 물 안에 넣어 그녀를 건져 올렸다. 타월을 깔아놓은 침대에 눕혀 또 다른 타월로 젖은 몸을 닦아냈다. 어둑한 침실 안에 그녀의 나신은 달처럼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을 느끼면서 이미 그의 하체는 단단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벌어진 작은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살짝 빨아들이고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다가 핥았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입술을 맛보다가 입안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그녀의 입안이 평소보다 더 열기가 있었다. 그녀의 치열을 훑으면서 입 안쪽 살을 더듬었다. 처음에는 반응이 없던 그녀의 혀가 자꾸 그의 혀와 맞닿으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감겨 있던 루시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올라갔다. 늘어져 있던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았다. 부드럽게 움직이던 그의 혀가 격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젖은 소리가 울렸다. "흣..." 그는 그녀 입안을 아주 샅샅이 뒤지는 것처럼 때로는 깊게 때로는 얕게 강약을 주며 길게 키스했다. 그의 키스만으로도 루시아는 완전히 달아올라 눈이 흐려졌다. 키스가 끝난 후에도 그의 입술은 쉬지 않았다. 눈, 코, 귓가에 자잘한 입맞춤을 퍼부었다. 귓불을 살짝 깨물고 귀 뒤를 핥아 올리고 목선을 따라 연속해서 입술을 붙였다. 축축하면서도 부드럽게 닿는 그의 입술을 느끼며 루시아는 다리 안쪽이 따끔하게 조여들면서 기이한 열기로 간지러웠다. 그의 손이 가슴을 움켜잡자 움찔한 루시아 입에서 탄식 같은 신음이 흘렀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그의 손가락이 가슴 둔덕을 주물렀다. 가슴이 그의 손아귀에서 야하게 일그러졌다. 휴고는 적당히 손안에 잡히는 말랑한 가슴을 어루만지며 목덜미를 길게 핥았다. 동그란 어깨를 깨물었다가 흔적처럼 남은 이빨 자국을 혀로 살살 핥고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몸에서 달콤한 향이 진동했다. 맛있다. 모조리 맛보고 싶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살결에 자꾸 혀를 대고 싶다. 하얀 피부에 붉은 흔적을 촘촘하게 새겼다. 내 것. 내 여자. 강렬한 소유욕과 욕망이 뒤섞여 그를 휘어잡았다. 그는 최고의 성찬을 앞에 둔 미식가가 된 것처럼 조금씩 그녀의 온몸을 삼켰다. 발가락 끝에서 이마에 이르기까지 그의 입술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느릿하게 조금의 쉴 틈이 없이 그의 입술과 혀가 핥고 빨았다. 커다란 손은 부드럽게 때로는 강하게 그녀의 온몸을 쓰다듬고 주물렀다. 그러면서도 크게 자극을 주는 부분은 무심할 정도로 방치했다. 그녀의 호흡이 가빠지고 몸을 뒤틀며 달콤한 고통에 괴로워했다. 루시아는 진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을 만지고 핥는 그의 애무는 간지럽고 때로는 짜릿짜릿하지만, 그 이상의 자극은 주지 못했다. 애가 타면서 민감한 감각이 일깨워지는 기분은 황홀했다. 괴롭지만 좋았다. 계속 더 해주었으면 좋겠다가도 어서 그의 거대한 상징이 몸을 꽉 채우는 압박을 느끼고 싶었다. 그와의 정사는 언제나 예측불가였다. 애무하는 강도나 들이는 시간은 언제나 달랐다. 적당히 달아오를 정도로만 애무할 때도 있고, 오늘처럼 오랜 시간을 들여 공을 들일 때가 있는가 하면 간혹 잔뜩 흥분해서 그대로 삽입할 때도 있었다. 그 중 어떤 것도 딱 잘라서 좋다 싫다 말할 수 없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가 능란하게 그녀의 몸을 굴려대는 것을 결코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그가 한입에 루시아 가슴 하나를 삼켜 흡입하는 것처럼 강하게 빨았다. 느릿한 자극에서 갑자기 강렬한 자극에 교성을 질렀다. 그의 혀가 빳빳하게 일어난 유두를 감싸고 이 끝이 살짝살짝 깨물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저절로 허리가 튕겨 올라가고 이미 젖어 있던 하체에서 뜨거운 뭔가가 흘렀다. 그가 몸을 일으켜 옷을 벗는 것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가끔은 자기 자신이 놀랄 정도로 과감해지지만, 평소에는 그의 맨몸을 보는 일이 부끄러웠다. 그의 양손이 루시아 발목을 잡아 벌렸다. 그리고 압도적인 강한 힘이 단번에 좁은 길을 타고 들어왔다. "하악!" 크게 확대된 동공으로 루시아는 헉헉 숨을 골랐다.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은근하고 감질나게 건드리기만 하다가 느닷없이 밀려오는 엄청난 자극에 숨이 막혔다. 한껏 예민해 있던 질벽은 갑작스러운 침입자를 거부하는 것처럼 꽉 눌렀다. 휴고는 한숨을 토했다. "후우.. 힘.. 빼. 너무 조이잖아." 단 한 번 들어온 것으로 루시아는 충만한 만족감과 미약한 절정을 느꼈다. 내벽이 경련하면서 그의 성기를 이리저리 눌러댔다. 휴고는 그녀의 귓가에 키득거리면서 속삭였다. "아무튼 야해가지고. 넣기만 해도 당신 몸이 좋아 죽는군" 루시아 얼굴에 확 열기가 몰리면서 수치심으로 자극받은 몸이 그를 꽉 죄자 그가 윽,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조금 쌤통이었다. 루시아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허벅지 안쪽에 힘을 주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재밌다. 루시아는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으면서 그와 맞물린 하복부를 콱 깨무는 것처럼 조였다. "비비안." 그가 으르렁거렸다. 장난스럽게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을 보며 휴고의 입 끝이 비뚜로 올라갔다. 해보자는 건가. 그는 피식 웃으면서 그녀 허벅지를 힘주어 잡아 벌렸다. 그가 쑥 빠져나갔다가 퍽 하고 밀고 들어왔다. 쿵 소리가 나는 것처럼 온몸이 저릿하게 울렸다. "아!" "정오에 당신 데리러 왔을 때부터 이러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어." 상대방을 잡아먹을 것 같은 치열한 정사의 시작이었다. 강건하게 기립한 성기가 여린 살을 거침없이 파고들어 자극하는 지점을 긁었다. 그녀의 내벽의 주름은 감각근에 착 달라붙어 이래도 견디나 보자는 것처럼 죄고 비틀었다. 그녀의 하얀 피부는 붉게 달아오르고 땀으로 촉촉하게 젖었다. 때로는 가냘픈 교성이, 때로는 자지러지는 비명이 침실 안에 울렸다. 그의 움직이는 근육을 타고 흐르는 땀이 시트로, 그녀의 몸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그의 입에서도 간헐적으로 신음이 흘렀다. 둘 다 반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서로의 몸만 갈구하며 한 몸으로 뒤섞였다. "하응- 응-" 늘씬한 두 다리가 그의 허리를 감았다. 그의 입술은 목덜미를 끈질기게 지분대면서 허리 아래 추삽질은 멈추지 않았다. 예민하게 부풀어 오른 가슴이 그의 가슴에 맞닿아 쓸릴 때마다 짜릿한 감각이 온몸을 휩쓸었다. 두 팔로 그의 어깨를 감으려 해도 땀에 미끄러져 자꾸 헛손질했다. 그가 무게를 실어 밀어붙일 때마다 루시아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졌다. 눈에서 열이 나서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저절로 고인 눈물이 또르륵 흘렀다. 조금만 더! 강렬한 쾌감의 파도가 밀려오기 직전이었다. 그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추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자 붉은 눈동자가 담긴 눈매가 살짝 휘었다. "아직은 안 돼." 휴고는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가 파르르 화내는 것을 느긋하게 감상했다. 그녀의 손이 땀에 젖은 그의 어깨를 내리쳐 따끔한 통증을 만들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오르가슴을 느끼면 그녀는 빨리 지친다. 그는 아직 만족스럽게 그녀를 맛보지 못했다. 휴고는 땀이 송골송골 맺힌 그녀의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었다. 루시아는 애가 탔다. 조금만 더 가면 쾌락의 절정이 앞에 있었다. 그녀 스스로 허리를 움직여 결합한 부분을 비비려 했으나 그의 엉덩이를 강하게 움켜쥐자 그조차 할 수 없었다. 이기적인 독재자 같으니! 아무리 발버둥쳐도 어차피 힘으로 그에게는 당할 수 없었다. 삽입만 한 채 그가 움직이지 않자 고조되었던 감각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그런데 그가 쿡 안쪽을 찔러왔다. "아!" 찡한 자극은 너무 약하고 짧았다. 나른하게 웃고 있는 그가 얄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한 번씩 무겁게 허리를 밀어 올리는 것을 반복한다. 몸이 짜릿하게 떨리는데 거기까지였다. 미칠 것 같았다. 숨을 헐떡이며 늘어져 있다가 그가 살짝 빠졌다가 묵직하게 들어올 때마다 눈을 질끈 감았다. ".. 해줘.."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그녀의 애원에 그의 눈매가 굳어졌다. "해줘요.. 해줘.. 더 강하게 넣어줘.." 그의 붉은 눈이 확 타올랐다. 살짝 이완된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두 팔을 그녀의 고개 옆으로 디뎌 지탱하고 그녀의 습한 안쪽으로 내질러 들어갔다. 단단한 기둥이 거칠게 질벽을 찔렀다. 빠져나갔다가 진입할 때마다 마찰하는 자극에 그녀는 흐느꼈다. "아! 아응!" 두 번, 세 번 밀고 들어오는 강한 자극은 루시아는 순식간에 정점에 올려놓았다. 벼락을 맞은 것 같은 쾌락이 순식간에 그녀를 삼켜버렸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그의 팔을 꽉 잡았다. 발끝부터 정수리 끝까지 모든 말초신경이 곤두섰다. 손끝을 세워 그의 팔을 긁었다. 손톱에 스친 붉은 자국이 줄을 그렸다. 입에서 흐느낌처럼 신음이 나오고 온몸이 덜덜 떨리며 질이 거센 경련을 일으켰다. 그가 움직임을 멈추고 거칠게 호흡했다. 쾌락의 해일이 물러가자 루시아는 그가 사정하지 않았음을 깨닫자 울상을 지었다. 도대체 얼마나 더 하려고. 그가 빠져나가자 루시아는 흠칫 몸을 떨었다. "엎드려." 그가 탁한 음성으로 명령했다. "휴. 오늘 나 힘들어요." "알아. 금방 끝낼게." 그는 맨날 지키지 않을 약속을 남발했다. "그럼 그냥 이대로 하면 안 돼요? 뒤로 하는 건 너무.. " 너무 깊이 들어와서 자극이 심했다. 추락하는 것 같은 감각은 몸이 피곤할 때는 견디기 힘들었다. 루시아가 칭얼거리자 그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 그녀의 발목을 잡아들었다. 그가 다리를 어깨에 걸쳐 올리려 하자 루시아가 이번에는 울먹거렸다. "그것도 싫어요. 오늘은 힘든 거 싫어요. 응?" 휴고는 끄응 신음했다. 아내의 체력은 너무 약했다. 사실 루시아는 보통 사람 기준으로 약한 몸이 아니었다. 매일같이 덤벼드는 그를 받아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오히려 보통 이상으로 건강했다. 그러나 휴고의 기준으로는 한참 부족했다. 그는 밤새도록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었다. 못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다리를 모아 옆으로 내리고 후측위 자세를 잡았다. 깊은 삽입이 안 되어 그가 제일 재미없어하는 체위. 그러나 적당한 자극을 좋아하는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체위. 그는 자리를 잡아 그녀의 살갗 속에 감추어진 균열을 열며 붉은 속살 안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움직이면서 진퇴를 반복하자 신음하는 그녀의 눈가가 발갛게 물들었다. 자극이 약하긴 하지만, 느끼는 그녀 표정이 귀여워서 나름대로 묘미는 있었다. '체력을 키우는 영약을 구해봐야겠어.' 휴고는 어떻게 하면 아내를 더 맛있게, 더 자주 잡아먹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잠시 딴생각을 했던 그는 다시 집중했다. 그의 허리 움직임이 점점 빨라졌다. 아래에서 그녀의 몸이 흔들렸다. 그녀의 다리 하나를 잡아 벌리면서 다시 정상위로 자리 잡았다. 그는 그녀의 골반을 잡고 강하게 짓쳐 들어갔다. "아! 흐읏.." 불그스름한 그녀의 눈시울이 젖어드는 모습이 그의 허리를 자극했다. 그는 단 숨을 몰아쉬었다. 자극이 부족했다. 그녀의 엉덩이 아래를 받쳐 들고 공중에 띄워 뿌리 끝까지 밀어 넣었다. 빠져나간 그가 재차 깊이 들어갔다. 꽉 조이는 속살에 그는 흥분했다. 눈앞이 번쩍하자 루시아는 비명을 질렀다. 그가 다시 강한 힘으로 하복부를 꿰뚫고 들어왔다. "아! 싫어!" 깊은 안쪽이 자극당하자 루시아는 울음을 터뜨렸다. 오늘은 싫다고 했는데! 그가 이런, 혀를 차며 몇 번 더 파고 들어가고 싶은 욕망을 참고 파정했다. 잇 사이로 신음이 터졌다. 눈앞이 아득했다. 몸이 후들거리는 쾌감이 잦아들자 그녀를 품으로 끌어안았다. 훌쩍거리는 눈가에 자잘하게 키스했다. 잔뜩 뿔이 나서 노려보는 그녀를 열심히 어르고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 작품 후기 ============================매쉬매리골드 님, 열둘의 정원 님, 아드밀란 님, 파랑520 님, eonchu 님, chiz 님, 허롱 님, 코우지 님, sens201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이번 한 주 열심히 달렸으니까 월요일은 쉴게요. ^^;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 -- 사랑합니다 -- > [ 그대는 마치 사랑에 빠진 것 같군. ]왕의 한마디는 질긴 잔상으로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질펀한 정사의 여운을 즐기며 휴고는 품에 안은 그녀의 등을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착 손에 감기는 매끄러운 피부의 감촉을 느끼면서 상념에 잠겼다. 사랑.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혈연 간 끈질긴 감정의 고리는 인정했다. 하지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녀가 만나 핏줄보다 끈질긴 유대를 가질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에게 여자는 그저 즐거운 놀이 상대였다. 그가 가진 권력과 재물에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여자들을 결코 경멸하지 않았다. 가진 것을 주고받는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거래였다. 여자와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그의 인생 자체는 끊임없는 거래의 연속이었다. 결혼도 그랬다. 시작은 분명히 훌륭하고 손해 볼 것 없는 거래였다. 육체적인 만족은 덤이었다. 아내는 만족스러운 거래 상대였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보니 그의 감정 상태는 곤두박질쳤다가 치솟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감정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를 인정하는 순간부터 불안정 속에 안정이라는 기이한 균형을 걷기 시작했다. 평온한 충족감 과 괴로운 불안감이 공존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휴고는 되짚어 올라가 보았다. '방심했어.' 휴고는 그녀에게 완전히 방심했다. 아내는 경계할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왕족이라지만 왕실과 연대는커녕 일가친척 하나 없었다. 권력욕이나 물욕 같은 개인적인 욕망도 없었다. 맹수인 그의 눈에 그녀는 이빨도 발톱도 전혀 없는 작은 초식동물이었다. 형편없이 약하면서 겁 없이 그의 발치에서 평화를 즐기는 그녀가 신기했다. 그녀 같은 존재가 지금껏 그의 곁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경계할 필요 없이 늘어져도 괜찮은 안도감은 대단히 편안했다. 아늑한 평온함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완전히 방심했다. 그가 이상을 느꼈을 때는 이미 그녀에 대한 감정이 물줄기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부정하면 할수록 돌이킬 수 있는 수준을 넘어 버렸다. 둑을 쌓아 막을 수 있는 냇물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바다가 되어버렸다. 그의 저주받은 핏줄 속에는 채워질 수 없는 갈증이 잠들어 있었다. 술을 퍼마시고, 여자를 취하고, 사람을 죽여도 해갈되지 않던 갈증을 그녀가 풀어주었다. 동시에 또 다른 지독한 갈증을 안겨주었다. '.... 사랑이라고?'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이 엄청난 변화를, 도무지 그 단어 하나로 정의할 수가 없었다. "... 제가 말이에요." 잠든 줄 알았던 그녀의 작은 속삭임이 선명하게 들렸다. "...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루시아는 연회장에서 봤던 메튼 백작이 자꾸 생각났다. 그자에 대한 공포를 극복했으나 그 대신 분노가 밀려왔다. 그런 천박한 돼지에게 고통을 겪은 사실이 분하고 억울했다. 꿈속과 다르게 그자가 죽지 않을지 모른다 생각하자 이가 갈렸다.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치가 떨렸다. 충동적으로 불쑥 말해놓고 루시아는 후회했다. 얼마나 뜬금없고 경솔한 말인지. 그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면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암담했다. 루시아가 말을 꺼내는 순간에 등에서 움직이던 그의 손이 멈칫했으나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그녀가 베개 삼아 기대 귀를 대고 있는 그의 심장 박동 소리는 평온했다. "어떻게 죽여줄까?" 그는 대단히 대수롭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르는 것처럼 말했다. "죽이기만 하면 되나? 병으로 죽을 수도 있고, 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괴한에게 살해될 수도 있고, 치정사건으로 죽을 수도 있고, 죄인으로 죽을 수도 있고. 반역으로 엮으면 가문까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할 수 있고." "치..." 아무래도 그가 자신을 놀리는가 싶어서 루시아는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만 기분은 풀렸다. 그런 쓰레기를 떠올리며 감정 소모를 할 필요가 없었는데 자신이 어리석었다. "누구냐고 안 물어요? 그게 먼저잖아요." "누구든 상관은 없지만, 왕이라면 당장은 좀 곤란한데. 시간이 필요하거든." 루시아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 "미쳤어요? 어떻게 그런 말을. 누가 들으면 당신이 죽어요!" "누가 날 죽여." 그가 오만하게 웃었다. "왕이라 해도 날 죽이진 못해. 나는 할 수 있어도." 라고 말하는 것처럼. 루시아는 눈앞에 죽음이 닥쳐도 당당할 것 같은 남자를 보며 어쩐지 힘이 빠졌다. 호들갑을 떤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후우. 알았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해서." 투덜투덜하며 그녀가 다시 눕자 휴고는 피식 웃으며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전혀 농담도, 허세도 아니었다. 그녀가 제 심장을 달라고 하면 배를 가를지도 모른다. 정말 그녀가 원하면 왕의 목이 대수일까. 미쳤구나. 그는 쓴웃음을 삼켰다. 이런 건 제정신이 아니었다. '뭘까.' 휴고의 붉은 눈이 위험스럽게 빛났다. 그녀의 마음에 어둠을 준 것이 대체 뭘까. 그럴 만한 일을 보고받은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이냐고, 누구냐고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심각하게 캐묻는 것보다 농담처럼 넘기는 편이 낫다. 어두운 감정을 그녀가 끌고 가기를 바라지 않았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 미워 견딜 수 없어서 당신을 고통스럽게 한다면." 그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루시아의 귀로 파고들었다. "반드시 내게 말해." 그녀의 마음에 어둠이 있다면 자신이 다 가져갈 것이다. "... 어쩌시려고요?" "글쎄. 어찌할까?" 그는 느긋하게 중얼거렸지만, 루시아는 어쩐지 그가 무척 위험하게 느껴졌다. "약속해. 그러겠다고." ".... 알았어요." "하지만 절대 그럴 일 없을 거예요!" 루시아가 덧붙였다. 농담을 진담으로 듣는다는 둥, 사람이 너무 심각해도 재미없는 거라는 둥 종알거렸다. 휴고는 노래를 듣는 것처럼 그녀의 재잘거림을 감상하다가 입술에 쪽 키스하고 품으로 꽉 끌어안았다. 위험했다. 알고 있다. 사내가 여자에게 미치면 얼마나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지 역사서는 사실을 증거 삼아 경고했다. 애첩에 빠져 나라를 말아먹은 수많은 탕왕을 얼마나 비웃었던가.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될 날이 올 줄은 진정 몰랐다. 이튿날, 휴고는 왕의 부름을 받아 오후에 먼저 나갔다. 저녁 무도회 호위 겸 에스코트는 기사 딘이 맡기로 했다. 앙뜨는 휴고가 막 저택을 나설 무렵 도착했는데,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앙뜨를 바라보는 휴고의 시선이 날카로웠다. 당장은 시간이 없어서 그냥 가지만, 언제 한 번 의상실을 방문해서 이후 드레스 제작에 참고해야 할 필수 사항을 일러둘 생각이었다. 충고이자 경고가 될 것이다. 자를까 생각도 해 봤으나 앙뜨가 만든 드레스는 아내에게 잘 어울렸다. 그녀가 아름답게 빛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아름답고 숭고해 보이는 건 괜찮았다. 그러나 음심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 휴고는 자기모순 속에서 나름대로 기준을 찾았다. 오늘 앙뜨는 푸른색 공단 드레스를 가져왔다. 오늘 드레스는 어제보다 과감했다. 휴고가 봤으면 기함해서 당장 벗기라고 성질을 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휴고는 못내 찜찜한 기분으로 왕과 만나는 중이었다. 드레스 상의는 오른쪽 허리에서 왼쪽 가슴을 덮어 쇄골이 드러나도록 왼쪽 어깨 바깥을 살짝 걸쳐 등으로 넘어가고, 반대쪽은 똑같은 대칭형으로 겹쳐서 주름을 넣었다. 소매가 없는 대신 푸른 사파이어를 손톱 크기로 가공한 보석 단추로 어깨를 장식했다. 어제의 드레스보다 등은 어깻죽지까지가 하한선으로 덜 드러났지만 가슴 라인은 어제보다 넓고 깊었다. 가슴골이 드러날 정도는 아니어도 아슬아슬했다. 같은 원단으로 허리선을 깔끔하게 감싸주어 늘씬하게 보이는 효과를 만들었다. 치맛자락은 풍성한 느낌을 주기 위해 여러 겹으로 둘러 제작했고 우아한 느낌이 나도록 뒤를 부풀려서 길게 빼주었다. 뒷허리에 커다란 레이스 리본을 달아 장식했다. 전체적으로 단순하면서도 화려한 느낌이 나는 드레스였다. 드레스를 차려입은 루시아는 한 송이의 푸른 장미꽃 같았다. 거울을 보며 루시아는 생각했다. '그이가 별로 안 좋아하겠는걸.' 등이 드러난다고 숄을 걸치게 한 보수적인 남편이었다. 무도회장에서 어제처럼 숄을 걸치고 다닐 수도 없었다. 앙뜨의 표정을 보니까 그저 제가 만든 드레스에 감격해 있었다. 루시아는 슬며시 웃었다. 앙뜨가 찾아온 첫날 홀랑 넘어가 넋 놓고 계약서에 사인한 일을 되돌려 줄 기회가 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마무리는 공작부인께서 가지고 계신 보물로 하지요." 루시아는 앙뜨와 드레스에 어울리는 보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 있었다. 앙뜨는 향후 드레스 제작 방향에 참고하기 위해 공작부인이 가진 보석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했다. 세피아 보석상에서 구매한 보석 외에 루시아가 가진 장신구는 그가 선물한 두 개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뿐이었다. 그걸 본 앙뜨는 거의 혼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두 개의 목걸이에 어울리는 드레스를 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화이트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아주 잘 어울릴 겁니다." 선물 받고 고이 모셔두기만 했던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수백 알의 다이아몬드가 주렁주렁 달린 목걸이는 루시아의 하얀 목덜미를 전부 감쌌다. 깊게 파인 가슴 라인 때문에 다소 썰렁해 보였던 목을 장식하며 푸른 드레스와 원래 한 세트처럼 어울렸다. '아주 무거운 목걸이라고 생각했는데.' 처음 선물 받아서 목에 걸었을 때는 무게에 질식할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 다시 착용한 목걸이는 뜻밖에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적당히 묵직한 무게가 마음에 안정을 주었다. 무도회 시작 시각을 조금 넘겨서 루시아는 파티장에 도착했다. 귀부인들이 순식간에 루시아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어머나. 공작부인. 오늘도 아름다우셔요." 귀부인들은 루시아의 목에서 번쩍거리는 다이아몬드 목걸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격차가 너무 커서 그런지 부러움보다는 그저 감탄만 했다. 어제 공작부부의 다정함을 목격한 귀부인들은 고가의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공작의 애정이 담겨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타란 공작부인인가요?" 조금 톤이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요란스럽게 떠들던 여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물길을 가르는 것처럼 사람들이 쫙 갈라지고 그 사이를 따라 한 여자가 걸어왔다. 화려한 금발의 미녀는 도도한 표정으로 콧대를 세웠다. 루시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이제야 만나는군요. 어제는 일찍 돌아가셨던데요." 국왕의 동복 누이 캐서린. 넘쳐나는 공주들 틈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귀한 대접 받은 진짜 공주님. 루시아의 꿈속에서 캐서린 공주는 앨빈 백작부인이었다. 왕은 정말로 누이동생을 사랑했다. 정략결혼으로 팔아치우지 않고 복잡한 정치싸움에 골치 썩을 일 별로 없는 돈 많은 백작가에 시집보냈다. 사치스럽고 복잡한 생각할 줄 모르는 누이의 성격을 파악해서 내린 조치였다. 루시아는 하녀 일을 한 경력도 없이 운 좋게 앨빈 백작가 같은 큰 귀족가에 채용되었다. 그리고 마님 눈에 들어서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마님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다른 하녀들 질시는 받았지만, 고가의 보수를 받으며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었다. 루시아는 메튼 백작부인으로 있을 때 캐서린 공주가 앨빈 백작과 결혼한 소식을 들었으나 까맣게 잊고 있다가 마님께 인사를 드릴 때 새삼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캐서린 공주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똑같이 공주로 태어났으나 두 사람 처지는 완전히 달랐다. 오라버니의 사랑을 받는 캐서린이 사교계를 누비고 다니는 모습을 항상 부럽게 바라보았다. 캐서린은 당연히 루시아를 알아보지 못했고 루시아 역시 알리지 않았다. 메튼 백작부인 비비안은 엄연히 반역한 죄인의 가족으로 도망자 신분이었다. 추적이 없어서 쫓기는 신세는 아니어도 떳떳이 밝힐 수는 없었다. 캐서린은 꽤 까다로웠으나 귀족 여인치고 유난하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공과 사가 확실했다. 사교계 경험으로 귀부인들 습성을 잘 아는 루시아는 눈치껏, 묵묵히 성실하게 맡은 일을 다 했다. 루시아는 캐서린의 모든 시중을 담당하고, 수많은 파티를 따라다녔다. 당시 캐서린은 사교계 여왕이었다. 남편의 부유함과 친정의 든든한 권력을 뒷배로 감히 캐서린의 자리에 도전하는 사람은 없었다. 단 한 사람. 타란 공작부인만 빼고. 그래서 캐서린은 타란 공작부인에게 이를 갈았다. 타란 공작 부부 결혼 비사의 출처는 캐서린이었다. "공주님께 인사드립니다. 비비안입니다." 루시아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은근히 두 사람 기세 싸움을 기대했던 귀부인들은 실망했다. 타란 공작부인이 이렇게 쉽게 먼저 물러설 줄 몰랐다. 루시아를 묘한 눈으로 보던 캐서린이 들고 있던 부채를 탁 치며 접었다. "그렇게까지 예를 차릴 건 없어요. 어차피 공작부인도 공주였고. 따지고 들면 공주보다는 공작부인이 낫죠." 쌀쌀맞은 목소리에 적대감은 없었다. 캐서린은 딱 한눈에 공작부인이 사교계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위협할 상대는 아니라고 감지했다. 캐서린은 타란 공작은 포기할 수 있어도 사교계 여왕 자리는 포기할 수 없었다. "서로 우리 존재도 몰랐네요. 그래도 자매인데. 하긴 난 지금도 누가 더 있는지 몰라요. 알아볼 생각도 없고." "사실 저도 폐하와 공주님 외에는 잘 모릅니다." "그 외에는 알 필요 없어요." 루시아는 살짝 미소 지었다. 정 없어 보이는 말투와 달리 캐서린이 그렇게 차가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루시아가 하녀 일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 캐서린은 일개 고용인 루시아를 불러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루시아가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확고히 하자 두 번 권하지는 않았지만, 저택을 나가는 전날 밤에는 불러 술 한잔하자고 했다. 루시아는 그때 정말 많이 놀랐다. 마님과 소파에 마주 앉아 마님이 직접 따라주는 와인잔을 받았다. 루시아가 오기 전에 이미 몇 잔 마신 캐서린은 조금 취기가 올라 있었다. 그만두고 뭘 할 것이냐, 가족은 없느냐, 결혼은 안 하느냐 주절주절 이것저것 묻다가 말했다. [ 파티를 가면 늘 보는 아이가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꼬박꼬박 파티에 나오는 아이가 자꾸 눈에 띄더구나. ]두서없이 시작하는 캐서린의 말을 루시아는 말없이 들었다. [ 그 아이와는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었어. 그런데 그 아이를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지. 흥겨운 파티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무표정을 하는 그 아이가 거슬렸어. 난 내가 그 아이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 ]와인잔을 기울이는 캐서린의 넋두리가 길어졌다. [ 어느 날부터 그 아이가 안 보이더구나. 알아보니까 내 자매였어. 폐하께서 정적들을 정리할 때 휘말렸다더군. 행방불명으로 생사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 뭐랄까. 캐서린은 말을 멈추고 한숨처럼 웃음을 흘렸다. 무심하게 캐서린의 말을 듣고 있던 루시아의 눈동자가 점점 흔들렸다. [ 모르겠구나. 내 마음이 뭔지 나도 모르겠어. 말 한마디 걸어 볼걸.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많이 어리지도 않을 텐데 내 기억 속에는 옛날 앳되던 모습에서 변하지 않아서인지 아이라고 부르게 되는구나. 살아 있으면 그 아이도 나이가 많이 들었겠지. 행방불명되고 얼마 후 죽은 채 발견되었다 들었다. ]루시아는 캐서린을 말을 듣고 나서야 왜 자신을 추적하는 수색꾼이 없었는지 깨달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지만, 백작부인 비비안은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다. [ 넌 말이지. 그 아이를 많이 닮았단다. 그래서 네가 자꾸 눈에 밟혔어. ]취해서 눈이 감기는 캐서린은 울 것처럼 흔들리는 루시아의 눈을 보지 못했다. [ 그 애는 참 예쁜 붉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졌었는데.. 네 검은 머리를 볼 때마다 자꾸 생각이... ]캐서린은 말을 잇지 못하고 소파에 기대어 잠들었다. 루시아는 다른 하녀를 불러 함께 마님을 침대 위에 눕혀 드렸다. 술자리로 어지럽힌 뒷정리까지 말끔히 끝내고 내일이면 떠날 마지막 날, 제 침실로 돌아와 누운 시간은 거의 새벽이었다. 루시아는 날이 샐 때까지 울었다. 그렇게 많이 운 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처음이었다. 경력도, 추천장도 없던 자신이 앨빈 백작가 하녀로 채용될 수 있었던 이유를 알았다. 아마 캐서린의 간섭이 있었을 것이다. 항상 루시아는 자신이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버려진 존재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자신을 기억하고 가슴 아파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큰 위로였다. ============================ 작품 후기 ============================아메a 님, 꿈꾸는소녀83 님, 시링 님, 매쉬매리골드 님, ssin04 님, RedSkin 님, 초낭자 님, dsfda 님, 바움 님, 이즈니아 님, 반외 님, 너무죠아 님, 공갈공주 님, 마히나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작품 공지로 팬아트를 올렸습니다. 멋진 팬아트 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님 쿠폰 감사합니다. < -- 사랑합니다 -- > "혼자 왔나요? 부군께서는?" "폐하께서 부르시어 저 먼저 왔습니다. 나중에 온다고 하셨어요." "바쁜 분이시죠." "네." 캐서린은 생글생글 웃으며 사근사근 대답하는 루시아를 낯선 눈으로 보았다. 얘가 왜 이러지. 캐서린은 당황했다. 캐서린은 겉으로는 고개를 숙이면서 내심 불편해하는 반응에 익숙했다. 부드러운 말투와 돌려 말하는 화법이 귀부인의 교양이라면 캐서린은 그런 의미에서 교양이 없었다. 귀부인들은 직설적인 캐서린 말에 상처받았다. 그러나 캐서린에게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고치지 않아도 곤란할 만큼의 문제는 겪을 일이 없었다. 남들이 불편해하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앞에서는 고개 숙이며 살살 웃는 건 다 똑같았다. '성격이 참 순하네. 나와 오라버니랑은 딴판인걸.' 캐서린은 공주였다는 타란 공작부인이 많이 궁금했다. 일부러 피한 건 아니지만,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두 사람은 행동반경이 달랐다. 캐서린은 티파티 따위는 절대 가지 않았다. 파티의 꽃은 무도회였다. 환한 낮에 차를 마시며 정숙한 척 앉아 수다만 떠는 티파티는 캐서린 취미에 맞지 않았다. 공작부인과 어제 마주칠 줄 알고 단단히 각오를 다졌는데 공작 부부는 축하연 자리만 참석하고 돌아갔다는 말을 들었다. 오늘은 분명히 만나게 되리라 생각했다. '단단히 기세를 눌러 놓아야지.' 비장한 기분으로 왔다. 그러나 타오르던 전투력은 루시아를 보자마자 피시식 꺼지고 말았다. 싸울 상대가 아니었다. 전의를 상실했다. "나와 얘기 더 해요. 조용한 곳으로 갈까요?" "네? 네." 앞서 걷다가 고개를 슬쩍 돌리니 뒤에서 얌전히 총총거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린 캐서린 입가에 살짝 미소가 올라왔다. 두 사람은 조금 멀리까지 걸었다.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 복도에 이르렀다. '구두가 좀 꽉 끼는 거 같아.' 루시아는 살짝 인상을 썼다. 몇 걸음 걷는 정도로는 몰랐는데 조금 많이 걷자 한쪽 발이 불편했다. "여긴 나 혼자 쓰는 휴게실이에요." 캐서린 공주만 누리는 특권이었다. 공동으로 쓰는 휴게실보다 작은 규모로 안락하게 꾸며져 있었다. 한가운데에 다리까지 모두 얹어 푹 기대앉을 수 있는 대형 소파가 있었다. 하지만 둘 다 드레스 형태가 망가질까 봐 편하게 앉지 못하고 조그만 소파에 살짝 걸터앉았다. "술 좀 해요?" "많이는 못 합니다." "그럼 술이 섞이지 않은 샴페인으로 하죠." 두 사람이 휴게실로 들어올 때 시녀도 따라 들어왔다. 지시를 받은 시녀가 잠시 후 샴페인과 유리잔을 가져왔다. 캐서린이 손짓으로 시녀를 내보내고 둘만 남았다. "결혼하고 계속 영지에서 지냈다죠. 북부에 볼만한 게 많던가요?" "수도에 비할 수는 없겠지요. 평온하고 지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북부 사교계는 어때요? 무도회는 자주 열리나요?" "한 번도 가본 적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대체 왜요?" "좋아하지 않는 편입니다. 제가 성격이 그리 활동적이지 못한 편이어서요." 캐서린은 조금 실망했다. 무도회에서 종종 보았으면 싶었건만. 귀부인들의 사교계 활동 취향은 극명하게 갈리는 경우가 있었다. 캐서린처럼 무도회만 즐기는 사람이 있고, 티파티처럼 소소하고 조용한 모임만 참석하는 사람이 있었다. 사교계 영향력은 아무래도 무도회 쪽이 컸다. "그럼 이런 파티도 편하지 않겠네요." "아예 나오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요." "하긴. 그럴 수는 없겠죠. 공작부인인데." 톡톡 쏘아붙이는 캐서린의 말투는 쌀쌀맞게 들렸다. 혹시 내게 화가 났나, 눈치를 살피게 하는 어조였다. 말을 곱게 하지 않아도 떠받드는 공주님이었다. 고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말투가 직설적이지만, 자존심 강하고 승부욕이 있을 뿐 성품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루시아는 마님으로 모시는 캐서린의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도도함이 부러우면서 가끔은 귀여웠다. "드레스는 어디 제품이에요?" "디자이너 앙뜨가 제작했습니다." "앙뜨? 흐음. 만들던 거 하고 좀 다른데... 난 앙뜨는 안 입어요. 내 취향에 안 맞아서." "지금 입으신 드레스가 잘 어울리세요." 루시아는 애매하게 웃었다. 입고 있는 드레스를 흉잡는 것 같지만, 캐서린은 그냥 싫어서 싫다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악의는 없으나 생각나는 대로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올케인 왕비 베스가 아주 질색하는 캐서린 말버릇이었다. "그 목걸이는 멋지군요. 취향이 훌륭해요. 직접 골랐나요?" "아닙니다. 선물 받았어요." "선물한 사람은 공작이시겠지요?" "네." 목걸이를 유심히 바라보는 캐서린 눈에 부러움이 있었다. 보석을 사려고 오라버니에게 졸라대지만, 최소한 양심은 있었다. 공작부인이 착용한 목걸이 같은 엄청난 물건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루시아는 캐서린이 얼마나 보석을, 특히 다이아몬드를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다. "마음에 드시면 언제든 빌려 드릴게요." "... 빌려준다고요? 그 목걸이를? 선물 받은 거라면서요." "선물 받은 물건이라고 빌려 드리지 못할 이유는 없지요." 캐서린은 기분이 이상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자신에게 무조건적 호의를 보여주는 사람은 오라버니뿐이었다. 올케가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나 성격적으로 잘 맞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처음 본 배다른 여동생이 이해할 수 없는 호감을 표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뭐가 아쉬워 이러나 하겠으나 타란 공작부인이 공주 캐서린에게 아쉬울 것이 없었다. 그 반대면 모를까. 얘가 마음에 들어. 친해지고 싶어. 캐서린이 다른 사람에게 이런 마음을 품은 건 처음이었다. "... 됐어요. 그 정도로 염치없지는 않네요." 루시아를 가만히 바라보던 캐서린이 들고 있던 칵테일 잔을 비웠다. "사실, 내가 타란 공작 전하를 많이 좋아했어요." 루시아는 웃었다. 알고 있었다. 캐서린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었다. 꿈속에서 캐서린이 타란 공작부인과 그렇게 앙숙인 데에는 첫사랑에 대한 미묘한 감정이 한몫했다. 옆에서 빤히 보였다. "이런 말. 무례하다는 거 알지만." "괜찮습니다. 기분 상하지 않았어요." 캐서린은 루시아는 잠시 보다가 피식 웃었다. "신기한 사람이군요. 공작부인 같은 사람 처음 봤어요. 뭐랄까. 마음을 편하게 해주네요. 공작께서 부인의 그런 점에 반해서 영지로 납치한 걸까요?" 잊고 싶었던 소문을 듣자 루시아는 난처한 표정으로 빈 잔만 만지작거렸다. "다들 타란 공작을 궁금해해요. 궁금해도 물어볼 사람이 없잖아요. 타란 가문에서는 사교계에 나오는 사람이 없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공작부인이 있죠. 앞으로 꽤 많이 성가실 거예요." "네..." "사실 나도 궁금해요. 어떤 분이에요? 1년 넘게 같이 살았으니까 잘 알겠죠." 루시아는 새삼 깨달았다. 그와 결혼한 지 1년이 훌쩍 넘었다는 사실을. 그와의 결혼 생활이 이렇게 순탄할 거라고 전혀 생각 못했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어려운 질문이었다. 여전히 그를 잘 모르겠다. [ 어떻게 죽여줄까? ]어젯밤 들었던 무시무시한 한 마디가 왜 그렇게 달콤했는지. 딱딱 끊어지는 그의 말투는 변함없는데 그걸 듣는 루시아의 귀가 어딘가 고장 났다. 별거 아닌 그의 말 한마디에도 루시아는 가슴이 뛰었다. "다정한... 분이에요." 캐서린은 순진한 표정의 공작부인을 조금 놀리고 싶었다. "다정하기만 해요? 침대에서도?" "네?" 화들짝 놀라며 얼굴이 붉어지는 루시아를 보면서 캐서린은 웃음을 삼켰다. 이런 반응은 오랜만이라 신선했다. 캐서린은 미혼이지만, 밤을 즐기는 여자였다. 아무하고나 문란하게 놀지는 않아도 몇 번 경험이 있고 어지간한 음담패설에는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티파티에서는 이런 얘기 못 들었죠? 거긴 다 꽉 막힌 부인들만 나오니까."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꿈속에서 수많은 무도회를 다녔어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 노골적인 대화를 나눌 만큼 친한 사람이 없었고, 대개 자정이 되기 전에 파티를 나왔다.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이어지는 무도회는 욕망의 해방구였다. 특히 진정한 환락의 파티는 자정부터 시작이었다. 이슥한 시간, 적당히 술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한 여자들이 쏟아내는 대화는 수위가 높았다. 앨빈 백작부인이었던 캐서린은 결혼 후 나름대로 얌전히 백작부인 노릇을 했다. 그렇게 질색하던 티파티를 저택에서 열고, 새벽 무도회는 나가지 않았다. 루시아는 꿈속에서 백작부인으로서, 하녀로서 수많은 파티에 다녔어도 새벽 무도회는 경험해보지 못했다. "새벽까지 무도회를 즐기지 않으면 들을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또 모르니까요. 혹시 들어도 그냥 웃어넘겨요. 아무렇지 않게. 얼굴 붉히거나 민망해하지 말고." "네." "부군을 위한 충고예요. 결혼한 귀부인이 수줍어하면 정숙하다고 봐주지 않아요. 제멋대로 뒷말만 하지. 소문이 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거예요." "... 무슨 소문이요?" "공작 전하가 밤일 못하는 고자일지 모른다고." "네? 아니에요!" 캐서린이 "아니면?" 말을 받으며 웃었다. 루시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바로 어젯밤이 떠오르자 얼굴에 열이 났다. 그는 절대 신사가 아니었다. 특히 침대에서의 그는 부드러우면서 무자비했다. 내일이 닷새의 하루였다. 오늘 밤은 더 집요하게 괴롭힐 것이 뻔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루시아의 얼굴이 더 벌겋게 익었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루시아를 보며 캐서린이 깔깔 웃었다. "이거 안 되겠네. 내가 몇 가지 좀 가르쳐 줄까요?" "... 무엇을..?" "들어두면 다 도움이 되는 지식이죠." 남녀의 은밀한 밤놀이에 대해서 경험에 비해 캐서린의 지식은 전문가였다. 아무나 붙들고 이런 이야기할 정도로 주책없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캐서린은 루시아에게 친밀한 호감을 느꼈다. 두 사람 다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서 오래 자리를 비우고 수다를 떨 수 없었다. 얼마 후 휴게실을 나오는 루시아 표정이 상기되어 있었다. 루시아는 오늘 정말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배웠다. 두 사람이 다시 파티장으로 향하는데 누군가를 발견한 캐서린이 눈이 샐쭉하게 올라갔다. 발걸음을 멈추고 공주님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던 여자가 캐서린이 다가오자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보는군. 백작부인." "... 예. 공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내 옆의 귀인이 누군지 모르는가?" 필요 이상으로 캐서린 말투에 날이 서 있었다. 루시아는 그걸 느끼고 슬쩍 캐서린 표정을 살폈다. "... 공작부인께 인사 올립니다. 아니타 팔콘입니다." 루시아는 이 여자와 이런 식으로 인사를 나누게 될 줄 몰랐다. 못내 찜찜함을 감추고 인사를 받았다. "어쩐 일인가? 침대 덥힐 사내가 필요해서 나왔나?" 루시아는 캐서린의 말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숙인 아니타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내 말이 고까운가?" "... 아닙니다. 공주님. 저는 다만 나라의 주인이 되신 국왕 폐하께 신민의 몸으로 축하드리기 위해..." "뻔한 말은 됐네. 가보게." 꾸벅 고개를 숙인 아니타는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루시아는 캐서린이 적대감을 보이는 모습이 낯설었다. 누군가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캐서린은 처음 보았다. 꿈속에서 타란 공작부인과 대립각을 세웠으나 면전에서 모욕하지는 않았다.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 같지만. 저 여자. 팔콘 백작부인이에요. 3번째 남편인 백작이 죽어서 남편 없는 백작부인이죠. 알고 지내지 마요. 말도 붙일 필요 없어요." "이유를 여쭈어도 될까요?" "품위 없는 여자예요. 어울려서 득 될 것 없다고만 알아둬요." 캐서린은 남녀가 자유롭게 즐기는 건 나쁘다고 보지 않았다. 본인이 유부남과 놀아보지는 않았어도 남이 그러는 걸 손가락질하지 않았다. 그러나 귀부인이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 몸을 던지는 짓은 캐서린의 기준으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건 천박한 창녀나 하는 짓이었다. 팔콘 백작부인은 그런 짓을 하는 여자였다. 캐서린은 18살 생일이 지난 후, 비로소 오라버니가 밤늦도록 즐기는 파티를 허락했다. 캐서린이 본격적으로 무도회장을 휩쓸고 다니기 전까지 여왕벌 노릇을 하던 여자가 팔콘 백작부인이었다. 캐서린은 그 점도 못마땅했다. 차라리 정면에서 부딪쳤으면 깔아뭉갰을 텐데 백작부인은 어느 날 갑자기 떨어져 나가서 그 후로 사교계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 캐서린이 아니타에게 이를 가는 가장 큰 이유는 타란 공작과의 스캔들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공작부인에게 밝힐 수 없으니까 두리뭉실하게 넘어갔다. '설마 타란 공작이 아직도 저 여자를 만나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캐서린은 자기 능력으로 타란 공작을 어찌할 수는 없겠지만, 팔콘 백작부인은 다시는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개망신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 작품 후기 ============================매쉬매리골드 님, 라미아11 님, 딸기홍차 님, 에나멜 님, 아낙스 님, 푸니 님, Katie. 님, 날love 님, 허롱 님, 뇨므 님, eonchu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 -- 사랑합니다 -- > 두 사람이 파티장으로 돌아가자 왕비가 입장해 있었다. 베스는 함께 와서 인사하는 두 시누이를 보며 적잖이 놀랐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둘이 만나면 꽤 험악하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했다. 공작부인 성품은 걱정 없는데 캐서린이 문제였다. "공작부인. 캐서린 공주님이 본디 좀 말을 편하게 한답니다. 이해하세요." 베스는 안 봐도 빤히 보이는 캐서린의 실수를 무마하려고 했다. 곧바로 캐서린의 반격이 들어왔다. "왕비 마마도 이젠 기력이 부족하시군요. 어제 하루 힘들었다고 눈 밑에 주름이 보이네요." "호.. 호호. 그럼요. 이젠 나이가 있는데요." 루시아는 애써 웃는 베스의 이마에 혈관이 두드러진 것을 보며 웃음을 참았다. 본격적으로 파티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연주자들이 자리를 잡고 파반느와 미뉴에트, 파스피에 등을 번갈아 연주했다. 춤곡이 바뀔 때마다 남녀가 커플을 지어서 댄스홀 공간으로 비워둔 중앙으로 나와 춤을 추었다. 루시아와 왕비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귀부인들이 하나 둘 댄스 신청을 받고 홀로 나갔다. 캐서린도 어떤 젊은 남자의 신청을 받아 나갔다. "아름다운 숙녀께 청하옵건대 한 곡 함께 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루시아는 자신을 향해 내민 손을 빤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올렸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나이는 스물 중반 정도. 잿빛 머리카락에 서글서글한 미소, 적당히 호감 가는 준수한 남자였다. 자신이 누군지 구체적인 신분 내역을 밝힐 필요가 없을 정도로 무도회에서 댄스 신청을 주고받아 춤을 추는 일은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가만히 보고만 있자 옆에서 귀부인들이 부추겼다. "나가보세요. 공작부인께서 오늘 같은 날 한 곡 추어 주셔야지요." "그럼요. 공작부인의 우아한 댄스는 무도회의 흥취를 돋우어 줄 겁니다." "미혼 여성들에게 아주 인기 많은 백작가 영랑이랍니다." 인기가 있건 없건 그건 루시아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단지 기왕 참석했는데 너무 소극적으로 파티에 임하는 건 그다지 좋지 않을 것 같다. 루시아는 처음 보는 남자의 손을 잡고 댄스홀로 나갔다. 미뉴에트가 연주되었다. 루시아는 남자의 어깨에 팔을 얹고 천천히 음악에 맞추어 돌기 시작했다. "부인께서는 오늘 가장 화사하고 청초한 꽃처럼 빛나시는군요.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 과찬이시군요." 남자의 틀에 박힌 찬사가 루시아의 귀에는 별로 들어오지 않았다. 허리를 짚은 남자의 손이 신경 쓰이고 살짝 스치듯 풍기는 남자의 향수 냄새가 낯설었다. 자꾸 남편과 비교하게 되었다. 그라면 좀 더 강하게 리드를 했을 것 같았다. '괜히 나왔나 봐.' 음악이 한 소절 끝나기 전에 루시아는 후회했다. 너무 지루했다. 더구나 구두에 쓸려 따끔거리는 뒤꿈치가 거슬렸다. 춤을 추면서 움직임이 커지자 단번에 찰과상을 입은 것 같다. 발을 디딜 때마다 욱신욱신해서 루시아의 얼굴에서 조금씩 표정이 사라졌다. 흥겨운 분위기 속으로 몇 사람들이 합류하자 사람들이 술렁였다. 왕을 비롯한 거물급 인사들의 등장이었다. 사람들은 지나가는 왕에게 상체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왕은 좌중이 갈라져 만든 길을 걸어 왕비에게 다가갔다. 왕비는 왕에게 예를 표하고, 왕의 중신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휴고는 재빠르게 그녀를 찾았으나 아무리 눈을 돌려도 왕비 근처에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안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옆에서 퀘이즈가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의 어린 아들놈이 제 어미 찾는 것과 겹쳐 보였다. 베스가 살포시 웃으며 홀 중앙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런 공. 그대 부인을 빼앗겼군." 퀘이즈가 유쾌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 그렇군요." '기필코 자른다. '사람을 쓰는데 단기간 내에 이렇게 여러 번 생각이 바뀐 적이 없었다. 휴고는 아내의 드레스를 보자마자 생각을 굳혔다. 오늘부로 디자이너는 모가지였다. 저런 천 쪼가리를 입히다니. 용납할 수 없었다. 다른 귀부인들과 비교해서 루시아의 노출이 과한 편은 절대 아니었지만, 딴 여자가 홀딱 벗고 춘다고 해도 별개의 문제였다. 휴고 눈에는 다 드러난 그녀의 가슴팍과 등의 하얀 피부만 눈에 들어왔다. 번쩍이는 목걸이가 목덜미를 거의 덮어서 노출을 최대한 가리고 있었으나 그런 것도 그의 기준에 충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목걸이 아래에서 언뜻 비치는 피부가 더 야하게 느껴졌다. 아내는 아름다웠다. 숭고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음심도 마구 자극했다. 지극히 이기적인 자신의 주관에 따라 휴고는 판단했다. 저건 절대 안 된다. 아내 허리에 손을 얹고 손을 맞잡아 빙글빙글 돌고 있는 저 놈팡이만 아니었어도 그의 기분이 이렇게까지 최악은 아닐 것이다. 휴고는 홀 가운데에서 춤을 추고 있는 여러 커플 중 한 쌍의 남녀-정확히 남자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첫 미뉴에트를 빼앗겼다. 아무도 의미를 두지 않는 일에 그는 의미를 부여하며 분노와 충격에 휩싸였다. 퀘이즈는 눈 돌릴 줄 모르고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휴고를 묘한 표정으로 살폈다.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공작 표정은 늘 보던 대로 차가웠다. 타란 공작은 감정 표현에 인색했다. 늘 무심하고 차가운 표정이었다. 퀘이즈는 타란 공작이 감정 부분의 어딘가 결여된 사람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근래 타란 공작은 공작부인과 관련하면 가면이 얇아졌다. 겉으로는 냉정한 표정이지만, 안쪽에서 활활 타오르는 뭔가가 보였다.' 완전 중증이군. 도대체 1년 동안 북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퀘이즈는 푸른 드레스의 공작부인을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못생겼다는 건 아니지만, 남자를 꾀는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호리호리한 몸매는 뭘 모르는 막 성에 눈뜨는 어린놈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할지 몰라도 여자를 어지간히 아는 사내라면 풍만하고 색스러운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다. 과거에 타란 공작이 교제한 여자들이 바로 그랬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리 심각한가?" "저놈을 죽일까 고민 중입니다." 근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어제 광견 크로틴을 다루던 공작의 위엄은 아직 짙은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담담한 말투 속에서 사람들은 죽음의 위협을 느꼈다.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타란 공이 미쳐가는구나. '퀘이즈는 긴장했다. 이제 막 시작한 그의 치세가 위기에 봉착했다. ".... 공. 진정하지. 짐의 즉위 축하연에서 피를 보겠다는 건가?" 퀘이즈가 정색하자 휴고는 슬쩍 퀘이즈를 돌아보고 다시 댄스홀로 시선을 돌렸다. 망할 미뉴에트가 참 길기도 하다. 춤곡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그의 인내심이 점점 바닥으로 향하고 있었다. "농담입니다." "... 그런 농담은 차라리 하지 말게." 어찌나 살벌한지 소름이 돋았다. "무도회의 꽃은 댄스지. 젊은 사람이 고루하게 왜 그러나."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고루한가 봅니다. 장갑을 던져보는 것을 한 번 해볼까 싶군요." 휴고는 그런 우스운 짓으로 결투 신청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되게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짓을 해볼 마음이 들었다. "......." 죽이겠다는 말과 다를 게 없었다. 퀘이즈는 몇 번 헛기침으로 썰렁한 주변 분위기를 환기했다. 때마침 미뉴에트가 끝났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공작부인을 향해 바로 움직이는 타란 공작을 보며 퀘이즈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세상은 참 지루하다. 어느 정도 변수는 삶의 활력소였다. 분명히 퀘이즈는 어제까지만 해도 타란 공작의 변화가 재미있기만 했다. 그런데 갈수록 이게 아니지 싶었다. 너무 큰 변수였다. 도무지 예측이 안 된다.' 너무 사적인 감정에 치우치면 좋지 않은데... '걱정하면서 좌중을 쭉 한번 보는 퀘이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저놈은 뭐야. '누이 캐서린이 오라비가 들어왔는데 인사하러 오기는커녕 구석에서 처음 보는 뺀질뺀질한 놈하고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퀘이즈는 당장 시종을 불렀다. 음악이 끝나고 루시아는 남자와 맞절로 인사했다. 남자가 뭐라고 말하는데 한 귀로 흘리며 루시아는 따끔거리는 뒤꿈치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하녀에게 다른 구두를 가져오라고 해야겠어.'더럽히기 쉬운 장갑, 굽이 망가질 수 있는 구두 등의 소품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기본적으로 비상용을 마차에 비치해 두었다. 아까 발이 조금 아플 때 갈아 신을 걸 그랬다. 루시아는 성큼 눈앞에 다가온 남자를 보고 눈이 커졌다. "언제 오셨어요?" 댄스 상대였던 백작가 영랑은 자신을 향한 타란 공작의 살벌한 기세에 혼비백산해서 도망쳤다. 루시아의 머릿속에서 이미 조금 전의 댄스 상대는 말끔히 사라졌다. 몇 시간 만에 다시 본 남편이 반가웠다. 남들 눈이 없으면 품에 폭 안기고 싶을 만큼. "방금. 어디 다쳤나?" "네?" "잘 못 걷고 있잖아." 루시아는 그가 어떻게 알았는지 신기했다. "구두가 좀. 발에 안 맞는 것 같아요. 갈아 신어야겠어요." "걸을 수 있겠어?" "그럼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그가 내민 손을 잡으며 자신 있게 한 걸음 내딛자마자 루시아는 지끈하는 통증에 걸음이 흔들려 그의 부축을 받았다. 아마 혼자였으면 이 정도쯤 아무렇지 않게 걸었을 것이다. 의지할 사람이 옆에 있으니까 마음이 약해졌다. 루시아는 점점 엄살이 느는 것 같아서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보았다. "조금 따끔해서 그래요. 괜찮아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휴고는 그대로 루시아를 안아 들었다. 루시아는 수많은 사람들 시선이 단번에 모이는 것을 느꼈다. "괘.. 괜찮다니까요." 그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자 루시아는 도무지 주변을 볼 수 없어서 고개를 그의 가슴 쪽으로 묻었다. 그녀를 안고 왕에게 간 휴고는 "안사람이 다쳤습니다.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라고 양해를 구했다. "... 그러시게." 파티장을 벗어나는 공작 부부를 바라보는 사람들 표정이 제각각이었다. 경악 혹은 부러움. 퀘이즈는 타란 공작의 저런 볼썽사나운 짓이 갈수록 더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휴고는 루시아를 안고 휴게실로 향했다. 두 사람 앞으로 시녀가 와서 "이쪽으로 오십시오." 라고 앞장섰다. 도착한 곳은 루시아가 아까 캐서린과 함께 있었던 개인 휴게실이었다. 루시아는 시녀를 보낸 사람이 캐서린이라는 걸 알았다. 아까 그 상황을 캐서린 역시 봤겠구나 생각하자 새삼스럽게 낯이 뜨거웠다. 휴고는 소파에 그녀를 내려놓고 아래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루시아가 그러지 말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오른쪽 발목을 잡아 구두를 벗기고 뒤꿈치를 살피고 있었다. 벗겨진 살갗에서는 피가 비쳤다. 쯧, 혀를 찬 그가 고개를 들고 눈이 마주친 시녀에게 손을 까딱해서 부른 후 짧게 명령했다. "약." 시녀가 고개를 꾸벅 숙여 대답하고 신속히 사라졌다. "구두가 왜 이 모양이야." 휴고는 앙뜨와 계약 해지할 명분을 또 하나 얻었다. "종종 있는 일이에요. 구두는 신어서 잠시 걸어보는 걸로는 잘 모르거든요." "그런 종종 있는 일을 없애자고 값비싼 디자이너 고용하는 거 아닌가?" 그의 말에 숨어 있는 앙뜨에 대한 비난을 눈치채고 루시아는 잠자코 있었다. 역시 그는 오늘 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트집을 잡고 있었다. 곧 시녀가 약과 붕대를 가져왔다. 루시아는 하녀를 불러서 마차로 가서 여분 구두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휴고는 그녀의 상처에 꼼꼼히 약을 바른 후 붕대를 감았다. "괜찮겠어? 돌아갈까?"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에요. 방금 오셨잖아요. 폐하께 인사도 드리지 못했어요." 그런 건 상관없었다. 휴고는 그냥 이대로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는 초조했다. 앞으로 그녀는 오늘 같은 자리에 많이 나설 테고 모든 자리를 그가 동반할 수 없었다.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는 높은 탑 꼭대기에 가둘 수 있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자신만 바라보게 하고 싶었다. "다 된 거지요? 어서 일어나세요." 닫힌 문을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그녀는 누가 들어올까 봐 신경 쓰고 있었다. 휴고는 다른 사람 눈을 자꾸 의식하는 그녀가 못마땅했다. 두 사람의 친밀함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싫어서 그러는 건가. 그는 은근히 이모저모 기분이 상한 터라 그녀를 곤란하게 하고 싶었다. 붕대로 감싼 발을 잡아 그대로 위로 휙 올렸다. 갑자기 무게 중심이 뒤로 쏠리자 루시아는 뒤에 손을 짚어 넘어지지 않게 몸을 지탱했다. 깜짝 놀라 그를 보는데 그가 발등에 입을 맞추었다. 경악해서 그를 바라보는 루시아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휴!" 그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짓궂게 웃으면서 이제는 드레스 자락을 올려 종아리 안쪽에 입술을 붙이더니 콱 깨물었다. "아!" 루시아는 황망해서 비명을 질렀다. "그놈 누구야?" "누구요?" "아까 그놈. 미뉴에트." "네? 아... 잘 몰라요. 무슨 백작가 영랑이라고 했어요." "모르는 놈하고 춤을 췄다고?" "모르는 사람하고 추는 경우가 더 많아요. 그런 걸 모르시지 않잖아요." 루시아는 그에게 잡힌 발을 빼내려고 버둥거렸다. "앞으로는 거절해."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놔 주세요." 그가 발목을 쥔 손을 놓자 안심한 것도 잠시, 그가 일어나 루시아 곁에 앉으면서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바싹 귓가에 입술을 붙이며 속삭였다. "발 정말 괜찮겠어? 내가 당신 안고 다닐까?" "당신 정말. 때와 장소를 가리라고 했죠!" 경험에 비추어 이 남자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을 짓이었다. 루시아는 기겁해서 두 팔로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럴수록 그는 더 단단하게 허리를 안았다. 그의 추근거림은 요즘 들어서 점점 침실을 벗어나고 있었다. 휴고는 계속 몸을 뒤틀어 벗어나려는 그녀를 더 꽉 안으면서 턱을 잡아 입술을 부딪쳤다. 휘둥그레 커지는 그녀의 눈을 마주해 웃었다. 입술 사이로 재빠르게 혀를 넣어 작은 입안을 깊이 훑었다. 입술을 떼자 목덜미까지 붉어진 그녀가 멍하게 그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그는 다시 키스했다. 말랑거리는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번갈아 빨아들였다.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그에게 붙들려 있던 루시아는 문이 움직이는 것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 그를 있는 힘껏 밀었다. "누가 왔어요." 휴고는 짜증 나는 심정으로 조금 열린 문을 노려보았다. "무슨 일인가." 목소리를 높이자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면서 시종이 쭈뼛거리며 들어왔다. 시종은 몇 번 밖에서 허락을 구했으나 답이 없어서 문을 열고 고개를 디밀었다가 황급히 놀라 물러났다. 아마 공작저 고용인들이었으면 아예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폐하께옵서 공작부인을 염려하시어 의관을 보내셨사옵니다." 쓸데없는 짓으로 방해하기는. 휴고는 왕의 과한 배려가 성가셨다. "되었다. 의관까지는 필요치 않은 일이니. 곧 갈 것이라고 폐하께 고해 올려라." 시종이 대답하고 나가는 와중에 하녀가 구두를 들고 들어왔다. 구두를 갈아 신는 그녀를 휴고는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정말 집에 가고 싶다. 무슨 핑계를 대서 빨리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마님. 어떤 노귀족이 마님께 꼭 전해달라는 물건을 맡겼습니다." 하녀는 주인님 눈치를 살피면서 마님께 고했다. 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정체 모를 물건 전달을 한단 말이냐? 평소에도 이런 식인가?" 주인님의 비난에 하녀가 어깨를 움츠렸다. 혼날지 모른다고 생각은 했다. 그런데 일개 하녀에게 매달리는 귀족 노인의 눈이 간절해서 외면할 수가 없었다. "경망스러운 아이가 아닌데 무슨 일인지 들어보고 싶어요." 휴고는 하녀에게 가져온 물건을 테이블에 올리라고 했다. 하녀가 품에서 꺼낸 물건은 손수건이었다. 남자 손수건이라는 수상쩍은 물건을 보는 휴고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마님께서 혹시 이걸 알고 계시는지 여쭈어 달라 했습니다." 하녀는 손수건을 펴서 한쪽 면을 보이게 했다. 휴고가 손수건을 집어 들어 확인했다. 귀족 가문의 인장이 손수건에 찍혀 있었다. 독수리의 머리. 휴고가 기억하고 있는 가문 중에는 없었다. 손수건에 별다르게 수상한 것이 없음을 확인하고 루시아에게 건네주었다. 인장을 본 루시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걸.. 노귀족이 전해 달라고 했다고? 다른 말은?" "본인이 바덴 백작이라고 하셨습니다." ============================ 작품 후기 ======================================================== 작품 후기 ============================엘릭소프르 님, 매쉬매리골드 님, 뉴스페이스 님, 초낭자 님, 밀물 님, 파랑520 님, amitanim 님, duck1024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 작품 후기 ============================엘릭소프르 님, 매쉬매리골드 님, 뉴스페이스 님, 초낭자 님, 밀물 님, 파랑520 님, amitanim 님, duck1024 님 쿠폰 감사합니다. < -- 사랑합니다 -- > 남부 변방의 귀족, 바덴 백작 가문의 가주 지오 바덴은 무너져 가는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백작의 어린 시절까지만 해도 집안이 이 정도로 어렵지는 않았다. 오랜 역사를 가진 가문이라서 지역 유지 노릇을 하면서 그런대로 작은 영향력은 발휘하고 살았다. 선친이 무리해서 사업하려다가 잘못되어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 가문 기반을 무너뜨렸다는 자책에 괴로워하던 선친은 마음을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고, 뒤처리는 아들 몫이 되었다. 바덴 백작이 넘겨받은 유산은 작위와 대대로 살아온 낡은 저택, 그리고 어마어마한 빚이었다. 작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많이 들었다. 매년 왕에게 상당한 세금을 바쳐야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빚은 늘어났다. 한을 품고 돌아가신 부친을 생각하면 도저히 작위를 포기할 수 없었다. 백작은 가문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가족을 돌볼 틈이 없었다. 빚을 줄이고 가문 회생을 위해 밖으로만 나돌았다. 아내는 묵묵히 남편 뒷바라지를 하며 두 아들과 딸 하나를 홀로 키우다시피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쓰러졌다. 아픈 아내 곁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금방 털고 일어날 줄 알았으나 아내는 얼마 못 가서 세상을 떠났다. 항상 그 자리에 있을 줄 알 았던 아내의 빈자리는 너무 컸다. 두 아들은 그런대로 아버지를 이해했으나 어린 딸은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을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풀었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 언제까지 빠져 있을 수 없었다. 백작은 상처받은 딸의 마음을 보듬어 줄 시간이 없었다. 아내 자리는 큰아들이 이어받아 동생들을 보살폈다. 막내딸이 어느 날 가출했다. 한창 중요한 사업 이야기가 오가던 중이라 한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들들은 아버지가 걱정할까 봐 알리지 않았다. 철없는 것이 어디 가 봤자 아는 친구 집에서 며칠 자다 오려니 해서 며칠은 찾지 않고 내버려 두었단다. 갈만한 곳을 모두 뒤져도 누이를 찾을 수 없자 오라비들은 그제야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좀 더 넓게 주변을 뒤지고 다녔다. 백작이 막내딸 실종 소식을 알게 된 건 사라진 지 한 달이 지나서였다. 백작은 아들 둘과 근 1년 넘게 딸을 찾아 헤맸다. 어디서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잘 될 것 같아서 투자했던 상단이 도산했다. 조금 살아나던 가문이 다시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이대로는 아들 둘과 같이 끌어안고 죽겠구나 싶어서 결국 딸 찾기를 포기했다. 그 후로 20여 년. 바덴 백작은 열심히 살았다. 누가 물어도 노력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노력만큼 보답을 주지 않았다. 하는 일마다 자꾸 어그러졌다. 조금 나아지는가 싶으면 다시 제자리였다. 한창 전쟁 중에 남부는 전쟁터에서 그리 멀지 않아서 전쟁 특수를 누렸다. 모두 돈을 버는데 바덴 백작은 그러지 못하는 소수에 들어갔다. 빚은 늘어갔다. 대대로 내려온 저택이 넘어갈 지경에 이르렀다. 어렵게 살면서도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 한 번 한 적 없는 백작은 큰 결심을 했다. 수도에 사는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백작은 어려서 수도에서 얼마간 유학 생활을 한 적 있었다. 그때 사귀었던 친구 중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 유일하게 기댈 끈이었다. 비싼 게이트를 타고 수도로 올 여력이 되지 못해서 바덴 백작은 노구의 몸을 이끌고 수개월의 여정 끝에 수도에 도착했다. 때마침 수도는 새 왕의 즉위식으로 크게 들떠 있었다. 친구를 찾아가니까 오랜만에 찾아온 어린 시절 친구를 크게 반기며 머물 방을 내주었다. 차마 아직 친구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친구는 그런대로 힘깨나 쓰는 백작가 아들이었다. 후계가 아니라서 백작위를 물려받지는 못했어도 내궁에서 열리는 즉위 축하연 초대장을 받을 정도는 되었다. 친구 덕에 처음으로 궁에 들어가 보았다. 축하연에서 백작은 말로만 듣던 높으신 분들을 실컷 구경했다. 무려 왕의 얼굴도 보았다. 그리고 타란 공작 부부, 정확히 말해서 공작부인을 보았을 때 백작은 넋을 놓았다. 가슴 속 깊은 응어리로 남아 있는 가여운 자신의 아내와 잃어버린 막내딸을 모두 닮아 마치 두 사람을 함께 보는 것 같은 귀부인이 거기 있었다. 어찌 저렇게 닮을 수 있을까. 백작은 멀리서 계속 공작부인을 훔쳐보았다. 친구에게 물어서 공작부인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친구는 떠도는 소문들을 취합해 알려주었다. [ 공주님이셨다고 하더군. 타란 공작과 결혼한 지 1년이 좀 넘은 정도로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 화제의 중심이야. 부인이고 딸아이고 집에서 입만 열면 그런 얘기라 아주 성가시다네. ]혹시 했던 마음이 팍 사그라졌다. 공주님이라니. 자신의 딸과 도무지 인연이 없는 신분이었다. 오랜만에 딸을 떠올리며 가슴앓이를 해서 그런지 그날 밤 꿈에서 딸을 보았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린 아가씨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데 꿈에서 깨어보니까 꿈에서 딸을 본 것인지, 낮에 본 공작부인을 본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게 기억하던 딸의 모습이 혼동을 일으켰다. 그 정도로 공작부인은 딸을 쏙 빼어 닮았다. [ 오늘 무도회 초대장을 얻을 수 있겠나? ]백작은 친구에게 부탁했다. 어렵지 않은 일이라며 친구는 흔쾌히 승낙했다. 오늘 다시 공작부인을 보면서 백작은 또 넋을 놓았다. 어제 봤을 때보다 더 딸과 닮아 보였다. 남이라면 저렇게 닮을 수는 없었다. 옆을 몇 번 지나다니면서 귀부인들과 이야기하는 공작부인을 살펴보았다. 웃는 모습이 딸과 똑 닮았다. 멀리서 볼 때는 알 수 없었던 눈동자 색은 맑은 호박색이었다. 아내와 똑같은, 그리고 딸과 똑같은 눈동자. 백작은 가슴이 벅차면서 후벼 파이는 것처럼 아팠다. 설마? 아니겠지. 혹시 몰라. 그럴 리 없다. 백작은 고뇌하며 갈팡질팡했다. 다가가서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어도 가까이 갈 틈이 없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빼곡했다. 낯선 노인이 접근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공작부인이 홀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다. 딸이 첫 무도회에서 춤을 추던 모습과 겹쳐졌다. 나중에 입장한 공작이 공작부인을 안고 파티장을 벗어났다. 백작은 멀리서 뒤를 밟았다. 공작부부가 점점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자 더 뒤를 따를 수 없었다. 공작부부가 사라진 복도 안쪽을 기웃거리며 안절부절못하고 한참을 서성거렸다. 낯익은 하녀가 안쪽에서 나오자 백작은 눈이 번쩍 뜨였다. 공작부인이 저 하녀를 불러 말하는 것을 어제와 오늘 여러 번 보았다. 늘 품에 넣어 다니는 인장을 손수건에 찍어 하녀 손에 쥐여주며 부탁했다. 혹시 공작부인이 자신의 딸과 무슨 관계가 있으면 바덴 가문의 존재를 알지 않을까. 한 가닥 미련이었다. 하녀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으나 다행히 손수건을 받았다. 얼마 후 주머니를 들고 돌아온 하녀가 아직 서 있는 백작에게 묵례하고 복도 안쪽으로 들어갔다. 백작은 초조한 심정으로 하녀가 가버린 방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루시아는 손수건을 바라보며 꿈속 기억을 회상했다. 지금으로부터 수년 후 만날 외삼촌 말에 의하면 외조부는 루시아가 결혼한 나이 21살 무렵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지금 바덴 백작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노귀족은 외조부님이 분명했다. [ 상심이 크셨지. 마지막까지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했던 저택이 남의 손에 넘어갔으니. 도움을 받으려고 수도까지 다녀오셨는데 잘 안 되었어. 노쇠한 분이 먼 여정으로 기력이 약해지신 이유도 있고. ]돌아가신 외조부님 뒤를 이어 백작위를 받은 외삼촌은 외조부의 차남이었다. 즉, 루시아 어머니의 작은 오빠였다. 원래 작위를 받았어야 하는 장남은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얼마 후 불의의 마차 사고를 당했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형님은 술로 연명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외삼촌은 말했다. 루시아는 세상에 혼자라고 생각했다가 찾은 외가 친척이 반가웠다. 의지하고 싶었다. 외가의 어려운 처지도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도움을 요청하는 외삼촌에게 남편 몰래 돈을 마련해 주었다. 메튼 백작을 소개해 달라고 해서 중간에서 다리를 놔 주었다. [ 난 어떻게 해서든 가문을 지키고 싶구나. 작위마저 잃을 수는 없어. ]외삼촌은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못할 일이 없다고 말했다. 다 쓰러져가는 가문을 짊어진 이름뿐인 백작 눈에 메튼 백작은 엄청난 힘을 가진 고위귀족으로 보였을 것이다. 외삼촌은 수도에 눌러앉아 메튼 백작을 매일같이 만나러 왔다. 루시아에게 자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으나 무슨 일을 하는지 외삼촌 표정에 활기가 넘쳤다. 시간이 지날수록 루시아는 메튼 백작부인으로 사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외삼촌에게 이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다. [ 미안하구나. 너를 도울 힘이 내게는 없다. 나는 네 남편의 도움이 필요해. 네가 참으면 안 되겠니? ]외삼촌의 거절은 큰 충격이었다.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언덕이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외삼촌은 루시아를 조카가 아니라 메튼 백작부인으로 보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외삼촌이 도울 능력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배신감을 느꼈다. 루시아는 남편 눈을 피해서 외가에 여러 번 돈을 보태주었다. 그러기 위해 얼마나 마음고생 했는지 모른다. 외가에 대한 애달픈 마음은 혼자만의 마음이었다고 생각하자 원망스러웠다. 외삼촌이 이혼절차를 돕는 일을 거절한 후 다시 돈 얘기를 꺼냈을 때, 루시아는 그걸로 인연을 끊었다. 메튼 백작을 만나러 저택에 드나드는 외삼촌을 그 후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메튼 백작 가문이 반역죄로 멸문하고 루시아는 외가도 휘말렸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반역자 명단에 바덴 백작 가문이 올라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저 넋 놓고 하늘만 봤다. 외삼촌을 원망했으나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얼마나 가문을 살리려고 노력했는지 곁에서 보았다. 메튼 백작 발이라도 핥을 것처럼 굽실거리는 모습도 보았다. 역모라는 오욕을 쓰고 죽은 외삼촌이 과연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차라리 서로 모르는 채 살았으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텐데. 루시아는 꿈속에서 회한으로 가슴을 쳤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절대 외가와 연을 맺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비비안." 루시아는 흠칫 고개를 들었다. 생각에 빠져 너무 넋을 놓고 있었다. "누구지?" ".... 모르는 사람이에요." 시선을 피하는데 그의 손이 턱을 잡아 눈을 마주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유난히 선명해서 루시아는 숨을 들이켰다. "당신 표정이 어떤지 알아? 말했지. 당신 거짓말이 서툴다고."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지 손수건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쉴 새 없이 다양하게 변했다. 하녀를 내보내고 휴고는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가 마치 울 것 같은 표정을 짓자 더는 보고 있을 수 없었다. 휴고는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말을 이었다. "말해. 누구야." "......" 고집스럽게 입을 다무는 그녀를 보며 휴고는 부글부글 속이 끓었다. 지금 상태에서 비밀까지 만드는 건 못 참겠다. "모르는 자야?" "......" "당신과 상관없어?" "......" 그의 다그침에 루시아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외조부의 등장이 혼란스러웠다. 꿈속에서 외조부는 존재를 알았을 때 이미 이 세상 분이 아니었다. 만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죄를 물어야겠군. 감히 공작부인에게 이런 위험한 물건을 보내다니." "위험한 물건이라니요?" "당신과 상관없는 자야. 신경 쓸 필요 없잖아?" 그의 핏빛 눈이 잔혹하게 빛났다. 루시아는 싸늘하게 말하는 그가 무서워서 왈칵 겁이 났다. 언젠가 그가 지금처럼 차갑고 잔인한 표정으로 돌아설 것 같았다. 깊은 절망으로 눈물이 쏟아졌다.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라 주룩 흐르자 휴고는 당황했다. 심사가 삐죽해져서 부리던 심술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녀를 울린 자신이 최저의 나쁜 놈처럼 느껴져 죄책감이 들었다. "비비안. 내가 잘못했어." 휴고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울음을 터뜨리며 거부하듯 몸을 뒤틀고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휴고는 더 꽉 그녀를 안았다. "미안해." 휴고는 몇 번이고 그녀의 귓가에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루시아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휴고는 얌전해진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무서워요" "안 그럴게." 그녀에게 겁을 주려던 건 아니었다. 무섭다는 말에 휴고는 의기소침해졌다. 그는 잠시 후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 묻지 않을게." 휴고는 자신의 비겁함이 한심했다. 자신이 끌어안은 비밀은 그녀에게 말하지 못하면서 그녀의 비밀을 용납하지 못하는 건 용렬했다. "말하기 싫어서가 아니에요.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그녀의 조금 긴 침묵을 그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아마 그분. 제 외조부님일 거예요." "당신, 외가가 없다고 하지 않았나?" "없다고 생각하고 살려고 했어요.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러기를 바라셨거든요." 루시아의 어머니는 죽는 순간까지 외가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 루시아는 꿈속에서 외삼촌을 만나고 나서야 알았다. 어머니는 왜 그랬을까 두고두고 생각했다. 가족에게 나쁜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아주 어릴 적 어머니에게 나는 왜 아버지가 없느냐고 떼를 쓴 적이 있었다. 우는 어머니를 보고 루시아도 죄송해서 같이 어머니를 안고 울었다. 잘못했다고 사과드리자 어머니는 말했다. [ 엄마도 엄마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그래. 아가. 네가 엄마를 슬프게 해서 우는 게 아니란다. ]아마 어머니는 철모르는 시절 집을 나와 사생아를 낳아 키우는 자신의 처지가 죄스러워 차마 집에 연락하지 못했던 것 같다. 집을 나온 후 집안 사정이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하니까 루시아는 왕실에 맡기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어머니가 끝내 외가를 알려주지 않은 건, 홀로 아이를 낳아 키우다가 죽은 막내딸의 비극을 집에 알리고 싶지 않았을 거라고, 루시아는 그렇게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했다. "만날 생각이 없는 건가?" "그러려고 했는데 지금은 모르겠어요. 어떻게 저를 알아보셨을까요?" "외조부라면 당신 어머니를 알 테니까. 당신이 어머니를 많이 닮았나 보군." "아니에요. 어머니는 저보다 훨씬 아름다운 분이었어요." "그럴 리가. 당신이 더 예뻐." 루시아는 그의 가슴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알아요? 제 어머니 보신 적 없잖아요." "안 봐도 알아." 루시아는 그의 억지에 배시시 웃으면서 다시 그의 품에 얼굴을 기댔다. "천천히 생각해. 그분과 연락이 닿을 방법은 내가 알아보도록 하지. 언제든 마음이 결정되면 말해. 만나기 싫으면 다시는 당신에게 접근하지 않게 조치하고 만나겠다면 자리를 만들어 볼 테니까." ".... 네." ============================ 작품 후기 ============================엘릭소프르 님, 매쉬매리골드 님, 바움 님, 키요미네 님, 아드밀란 님, 탐묘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벌써 10월 마지막 날이로군요. 8월 28일부터 연재 시작해서 두 달이 순식간에 지나갔어요. 완결까지 깔끔한 마무리 할 수 있도록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 < -- 사랑합니다 -- > 후기의 공지를 확인해 주세요~루시아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말없이 바라보자 그가 시선을 마주쳐왔다. 다정한 남편. 그가 곁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가슴 벅차고 눈시울이 시큰한 감격이라는 걸 꿈속에서는 알지 못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따뜻해서 가슴이 저렸다. 행복했다. 현재에 만족해야 한다는 걸 안다. '사랑해요. 휴. 당신을 사랑해요.' 입 밖으로 꺼내자마자 그의 눈동자의 온기가 단번에 식어버릴까 봐 너무너무 무서웠다. 그 한마디가 모든 것을 망가뜨릴까 봐 루시아는 겁에 질렸다. 예전에는 그저 두려 운 정도였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짙어지는 공포가 끔찍했다. '이 남자 없이는 나는 살 수 없을 거야.' 어두운 창고에 버려진 화분이 잎과 줄기가 바싹 말라 죽어가는 것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그에게 고백하고 싶었다. 자신에 대한 그의 마음을 확인받고 싶었다. 그도 나를 사랑하는 것 같아. 그렇지 않아. 그는 아직 그런 마음을 자각하지 못했어. 두 가지 의혹이 맹렬하게 그녀의 마음속에서 대립했다. 그러나 그녀는 도박을 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놀만의 조언대로 질러볼 수 없었다. 도박이 실패하면 후회하며 가슴을 칠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그가 미간을 찌푸리자 루시아는 흠칫 놀랐다. 생각이 읽혔는가 싶어서 가슴이 덜컹했다. "비비안. 내가 또 뭘 잘못했나?" 그의 손이 눈가를 닦아주어서야 루시아는 자신이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 어머니 생각이 나서. 감정이 좀 격해졌나 봐요." 휴고는 루시아가 눈물을 닦는 모습을 불편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우는 걸 보고 있자니 속이 울렁거렸다. 태어나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멀미란 이런 것인가 생각했다. "파티장으로 나갈 수 있겠어?" "괜찮아요. 염려하지 마세요. 실수하지 않을게요." "실수가 걱정되어서가 아니야. 힘들면 애쓸 필요 없어.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해." "너무 그렇게 응석받아주지 마요. 당신 없이 아무것도 못하는 어린애로 만들고 싶어요?" 그거 정말 좋은 말이군. 휴고는 생각했다. "부디." 루시아는 숨이 막힐 것 같아서 크게 호흡했다. 루시아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침을 삼키며 나오려는 말도 함께 넘겼다. 사랑해요. 하마터면 튀어나올 뻔했다. 그녀를 보고 있던 휴고는 지금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친 기분이 들었다. "비비안." "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들 주변을 떠돌던 아슬아슬하던 뭔가가 파삭 깨졌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 문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을 보며 휴고는 어쩐지 무척 짜증이 났다. 그는 문을 향해 "무슨 일이냐." 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까 왔던 시종이 주춤주춤 들어와서 눈치를 살폈다. 쏘아보는 타란 공작의 시선이 사나워서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폐하께옵서 두 분이 언제 오실지 알아오라 하셨습니다." "지금!" 휴고는 버럭 받아치고는 씨근거리면서 이를 악물고 말했다. "... 간다고 가서 말씀 올려라." 루시아는 울어서 망가진 화장을 고쳤다. 그와 다시 파티장으로 나가면서 복도를 유심히 살폈지만, 노귀족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을 보며 겉으로 웃어도 루시아는 내내 딴생각 중이었다. 가끔은 집중력이 흐트러져 멍해 있는 루시아를 몇 번 그가 자연스럽게 허리를 안거나 등에 손을 얹어서 깨워 주었다. 미안함을 담아 그를 보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는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우려하는 표정으로 "괜찮겠어? 돌아갈까?" 물었고, 루시아는 꿋꿋하게 "괜찮아요." 라고 대답했다. 잠시 휴게실에서 쉬고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온 루시아는 어떤 노신사와 짧게 시선을 마주쳤다. 노신사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저분이구나.'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이상했다.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무렇지 않았던 아버지처럼 외조부도 별다른 의미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명치끝이 답답하면서 심장 박동이 빠르게 뛰었다. 코끝이 찡하고 목이 타는 것처럼 아파서 루시아는 숨을 크게 쉬고 허리를 폈다. 꿈속의 기억이 반드시 나쁘지는 않았다. 꿈속 경험이 아니었다면 아마 울음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루시아는 다가오는 귀부인을 향해 웃었다. 공작부인으로서 대외적인 모습을 보여야 하는 자리였다. 루시아는 동요하는 자신의 복잡한 마음을 꾹 눌렀다. 사내의 상징이 여린 살을 헤집으며 밀고 들어왔다. 숨 막히도록 가득 채우고 들어왔다가 거칠게 빠져나간다. 퍽 퍽 살을 부딪치며 그가 허리를 움직여 진퇴를 반복했다. 오늘 그는 좀 거칠었다. 루시아는 그의 성기가 민감한 안을 찌를 때마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손이 루시아의 손을 깍지 껴 누르고 맞물린 하복부를 계속 밀어 올렸다. 두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은 채 루시아의 몸은 크게 위아래로 요동쳤다. 그가 내뿜는 열기가 너무 뜨거워서 맞닿은 피부가 데일 것 같았다. 루시아 입에서 흘러나오는 교성이 비명처럼 커졌다. [ 다정하기만 해요? 침대에서도? ]캐서린의 놀리던 말이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지금의 그는 절대 다정하지 않았다. 폭군처럼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 가차 없이 안을 꿰뚫고 들어와서 깊은 안쪽까지 점령했다. 좁은 질벽은 변덕을 부리는 것처럼 저항하듯 좁아지다가 빠져나가는 성기를 붙잡듯 달라붙었다. 잠깐씩 그의 미간이 좁혀지면서 더 묵직하게 치고 들어왔다. "흐읏!" 절정에 오른 그녀의 내벽이 그의 것을 꽉 물고 잡아당겼다. 그의 사나운 신음소리에 이어 뜨거운 것이 안으로 쏟아졌다. 루시아의 온몸이 잔 경련을 일으켰다. 쾌락의 해일이 물러가자 루시아는 온몸의 힘이 쭉 빠져서 헐떡였다. 그러나 그는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뜨거운 내벽에 담그고 있던 자신을 빼내고 루시아의 허리를 잡아 몸을 뒤집었다. 엉덩이를 세우고 허벅지 안쪽으로부터 그대로 단번에 깊이 삽입했다. "으흑-" 그는 루시아의 도드라진 등뼈를 따라 입술을 비비면서 끈적이는 키스를 했다. "아!" 뒤에서 강하게 치고 들어왔다. 루시아의 손이 시트를 움켜잡았다. 엉덩이가 강하게 그의 손에 잡혀 일그러졌다. 빠져나간 그가 철썩 소리가 나도록 강하게 박아 넣었다. 몸이 크게 흔들리고 팔이 휘청했다. 저릿저릿한 쾌감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오늘 그녀의 몸은 예민했다. 질이 조여들며 파고드는 그를 꽉 물었다. 그의 숨소리가 더욱 흥분해서 거칠어졌다. 뜨거운 열락의 시간이 지나고, 루시아는 그의 손이 온몸을 어루만지는 후희에 나른하게 빠져들었다. '시간을 끌고 오래 고민할 문제가 아니야.' 루시아는 아까 외조부를 스쳐본 후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외조부님을 만나보고 싶어요." "알았어." 그는 간단히 답하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그의 팔이 등을 감싸 힘주어 안아주었다. 온몸이 그와 맞닿아 적당히 압박해 눌리는 안정감은 모든 불안을 날려주었다. "그리고.. 내일 파티는 나가고 싶지 않아요." 내일은 즉위 축하 무도회 마지막 날이었다. 가면무도회를 한다고 하는데 루시아는 내키지 않았다. 이틀 연속 파티를 나갔더니 피곤했다. 자꾸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의외의 사람들과 마주치는 일이 힘겨웠다. 몸보다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 그가 허락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그의 대답은 빠르고 쉬웠다. "그래도 돼요? 즉위축하연인데.." "첫날 축하연을 빼면 무도회는 귀족들 놀라고 만드는 놀이터야. 모두 다 갈 필요 없어. 앞으로도 파티에 나갈지 말지 당신 좋을 대로 해." "... 안 나가고 집에만 있어도 돼요?" "돼." 바라는 바였다. 그래 주면 고맙지. 휴고는 생각하면서 그녀의 턱 안쪽에 고개를 디밀고 키스했다. "사교 활동이 힘들면 하지 마." 휴고는 아내가 사교 활동을 즐기지 않는다는 건 북부에서 지낼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들이 보면 지루할 만큼 단조로운 생활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휴고는 그녀의 내향적 일면이 마음에 들었다. 온갖 무도회를 쫓아다니며 사내놈들과 웃음을 섞는 일은 생각만 해도 불쾌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소문 따위는 상관없어. 당신은 어쩌고 싶지?" "... 티파티는 괜찮아요. 가볍게 이야기만 나누다 오니까 부담도 없고. 무도회는 너무 사람도 많고..." "대신 무도회보다 티파티가 시비가 벌어지는 일이 많지." "누가 저와 시시비비를 가리겠어요." "혹시 누가 당신 기분을 상하게 하면 말해. 담아두지 말고." "... 무슨 일 있으면 쪼르르 당신에게 와서 이르라고요?" "혼내줄게." 루시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휴고는 그녀의 입술과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었다. 간지럽다며 까르르 웃으며 고개를 흔드는 그녀의 거부에 개의치 않았다. "그럼 내일 앙뜨는 되돌려 보내야겠네요." 휴고는 내일 아침 앙뜨의 의상실로 사람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일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올 필요 없다고. 그는 오늘 파티 내내 사내놈들이 그녀를 곁눈질할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건 정말 피곤하고 불쾌한 과정이었다. "내일은 붉은 드레스라고 했어요. 당신이 선물한 레드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어울리는 정열적인 드레스라고 했지요. 그건 조금 궁금하네요." 정열적인 드레스. 휴고는 보지 않아도 그 드레스가 자신의 혈압을 급격히 상승시킬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내일 안 가겠다며." 그녀의 마음이 바뀔까 봐 휴고는 재확인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그녀 위로 올라갔다. 루시아는 말을 잊고 아연하게 그를 보았다. 설마.. 또? 의심하기 무섭게 그의 손이 복부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다리 사이 안쪽을 문지르며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더듬었다. "안이 아직 부드러워." 루시아는 확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넣을게." "에..?" 화들짝 놀라 그를 보는데 그의 두 손이 허벅지를 잡아 벌리고 그대로 몸을 묻었다. 압도적인 질량감이 하체에서 치닫고 올라왔다. "으..." 뻑뻑했다. 아릿한 통증을 느꼈다. "아파?" "조금.. 요.." 그런데 그는 허리를 빼고 다시 밀고 들어왔다. 은밀한 내부 살이 마찰하는 느낌이 생생해서 눈물이 찔끔 났다. 손으로 그의 디딘 팔을 찰싹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아파요!" "참아." 루시아는 기가 막혀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더없이 부드럽다가도 때로는 잔혹하게 굴었다. 약이 오른 그녀 표정을 보면서 휴고는 낮게 웃었다. 그녀에게서 다양한 감정을 끌어내는 일은 언제나 즐거웠다. 물러났다가 단번에 쳐올리자 그녀는 미간을 찡그렸다. 확실히 좀 아픈 모양이었다. 그도 조금은 따가웠다. 그녀 안은 너무 좁았다. 그만큼 했으면 좀 풀어져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리 짙은 애무로 녹진하게 풀어놓고 애액을 흐르게 하여도 늘 그녀의 안은 손가락을 조일 정도로 좁았다. 그게 미치게 자극적이었다. 몇 번 진퇴를 반복하자 매끄러운 액체가 그의 분신을 감쌌다. 그녀도 더는 아프지 않은지 미간에 주름이 사라졌다. 진입해 들어갈 때마다 흐느낌처럼 신음을 흘렸다. 상큼한 그녀의 체취가 후각을 마비시킨다. 북부로 돌아가고 싶다고 휴고는 생각했다.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두 사람만의 성에서 시간을 흐름을 잊고 살고 싶다. 그녀가 외가 친척을 찾은 일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외가와 교류가 많아지고 자신보다 그들을 더 의지하게 되면 어쩌지. 외조부 만날 일로 마음이 싱숭생숭한 그녀에게 드러낼 수 없는 불안이었다. "... 비안." 어렴풋이 그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다. 얼굴 여기저기에 촉 촉 무언가가 자꾸 닿았다 떨어졌다. 간지럽기도 하고 잠결에 성가시기도 해서 인상을 쓰면서 손을 내저었다. 그 손마저 잡혀서 손등이며 손가락 끝이며 자꾸 닿는 느낌이 입술 같았다. 루시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위로 올렸다.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잠기운을 몰아냈다. "휴...?" 루시아는 좀 더 선명해진 시야로 그를 확인했다. 침실은 이미 환했고, 그는 옷을 모두 차려입은 채였다. 그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여 루시아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정오가 지났어. 그만 일어나야지." "... 당신 때문이잖아요." 루시아는 오늘 새벽에 잠들었다. 그가 어찌나 끈질기게 놓아주지 않는지 언제 까무룩 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상쾌한 표정을 하고 있는 그를 노려보다가 눈을 감았다. "조금만 더 잘래요." "지금 일어나야 외조부님을 뵙지. 두 시간쯤 후에 모셔 올 거야." 잠기운이 단번에 사라졌다. 루시아는 눈을 크게 뜨고 자신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누가 오신다고요? 제 외조부님이요?" "만나 뵙고 싶다며. 마음이 바뀌었나?"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외조부님과 어떻게 연락을 하신 거예요?" "어제 하녀에게 머물고 계신 곳을 알아두라고 했어." 만나건 만나지 않건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우선 상대방의 연락 방법은 알아두는 것이 기본이었다. 당연한 일을 루시아는 전혀 생각조차 못했다. 그가 외조부님과 연락할 방법을 알아본다고 했을 때는 막연하게 그의 능력이라면 수소문해서 찾을 수 있겠지 생각했다. 이렇게 간단한 방법이 있는 것을. "... 하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그런 건 필요 없어. 시간 끌어봤자 감상에만 빠지겠지. 왜 외조부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지?" ".... 어머니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궁금했어요. 어머니 소식도 알려야 할 것 같고." "그럼 그 마음으로 만나 뵈어. 잡생각 만들어서 속 끓이지 말고." 루시아는 그가 놀라웠다. 전혀 생각지 못한 지점에서 날카로웠다.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상념이 많아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가 그런 걸 안다는 것이 신기했다. 결혼할 때 그의 빠른 추진력에 감탄한 적 있었다. 결정을 내리면 망설임 없이 밀고 나간다. 그는 긴 생각으로 절대 시간 낭비할 것 같지 않은 남자였다. '이 남자가 고민이라는 걸 할까? 자신의 결정에 후회는 해 봤을까?' 휴고는 요즘 하루하루가 번민이었다. 원인제공자는 전혀 알아주지 않는 고민과 후회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주인의 명을 받고 제롬이 직접 노신사를 모셔왔다. 외부적으로 타란 공작가에서 백작을 저택으로 모신 일이 드러나지 않도록 은밀히 조치했다. 휴고가 신중을 기하라고 명했다. 아직 아내가 외조부를 만난 이후 관계를 어떻게 만들지 결정하지 않았다. 공작가 외척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당장 달려들 굶주린 이리떼들이 잔뜩 있었다. 휴고는 아내의 외가라고 별다른 특별한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아내의 외조부라니까 존중은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그녀가 원하는 선까지였다. 응접실에서 루시아는 외조부를 기다렸다. 초조하게 서 있는 그녀의 곁에서 휴고가 한쪽 팔로 어깨를 감싸 안아주었다. 고용인들에게도 노신사의 방문이 특별해 보이지 않도록 루시아는 마중 나가지 않고 응접실에서 기다렸다. 닫혀 있던 응접실 문이 열리며 제롬이 반백의 노인을 모시고 안으로 들어왔다. 백작은 입구에 한참 서서 굳은 것처럼 루시아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 흔들리는 발걸음으로 천천히 루시아를 향해 걸어왔다. 루시아는 노인의 얼굴에서 꿈에서 봤던 외삼촌의 얼굴을 봤다.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도 보았다. 두 조손은 몇 걸음 사이를 두고 말없이 서로 바라보았다. "앉으십시오. 당신도 앉아." 휴고가 나서서 경직된 분위기를 풀었다. 백작이 소파에 앉고 루시아도 소파에 앉았다. "자리를 피해 주는 편이 좋은가?" 루시아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루시아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비비안입니다. .... 할아버님." 백작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몹시 애달픈 표정으로 루시아를 보며 소리 없이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한참 만에 겨우 한마디 했다. "아만다는...?" 백작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빠르게 응접실을 살폈다. 아만다가 보이지 않자 불안감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아무리 처음 보는 손녀가 딸을 닮아 사랑스러워도 절절한 애정이 자식에 비할 수 있을까. 불안해도 기대를 버릴 수 없었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이 자리에 오지 못했지만, 꼭 만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루시아의 가슴에 울컥 뜨거운 뭔가가 치솟았다. 이 분은 딸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였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얼마나 아버지가 보고 싶었을까 생각하니까 가슴이 저렸다. "... 돌아가셨어요." 루시아는 노인의 눈에서 수많은 감정이 뒤섞이는 것을 보았다. 놀람, 경악, 불신, 분노, 슬픔, 절망.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많은 고통스러운 감정을 담은 노인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자식을 잃은 부모의 비통함이 표정으로 드러났다. 백작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고개를 숙이고 꺽꺽 울기 시작했다. 루시아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안아주는 그의 가슴에 기대 얼굴을 묻었다. < -- 사랑합니다 -- > 처음 만난 두 조손이 나눌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어색하게 몇 마디 나누던 조손은 '아만다'라는 공통 화제를 통해 비교적 편하게 대화를 트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기억하던 딸의 모습, 딸이 기억나는 어머니의 모습.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으며 간간이 웃기도 했다. "펜던트. 찾고 계시지요?" 루시아는 외조부가 펜던트에 대해 물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참 대화가 이어져도 아무 말씀이 없어서 먼저 말을 꺼냈다. "... 그걸 네가 가지고 있니?" 백작은 조금 놀란 기색이었으나 루시아의 예상보다 덤덤한 반응이었다. 어머니가 가출할 때 들고 나온 문제의 펜던트. 루시아가 꿈속에서 외삼촌을 만난 계기였다. [ 그 펜던트는 바덴 백작가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란다. 누이가 가출할 때 그걸 들고 나갔는지 나중에 알았어. 제 딴에는 미안했는지 금고에서 펜던트를 빼 가면서 짤막한 편지를 넣어 두었더구나. ] 금빛대지 [ 뭐라고 쓰여 있었나요? ]외삼촌은 조금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 근사한 신랑감을 데려오겠다고 했다. ]어머니도 참 철이 없었구나. 루시아는 생각했다. "제가 지금 가지고 있지는 않아요." 루시아가 어릴 때 나무에서 떨어져 크게 다친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딸의 치료비 마련을 위해 펜던트를 전당포에 맡겼다. 빌린 돈이 제법 커서 어머니는 약속한 기일에 펜던트를 찾으러 가지 못했다. 루시아가 나중에 나이가 들어 상황을 끼워 맞춰 짐작한 정황이 그랬다. 어머니와 장을 다녀오는 길에 루시아는 전당포 유리창 너머 진열된 펜던트를 발견했다. [ 이거 엄마 거잖아요. ][ 응. 맞아. 잠시 맡겨놓은 거야. ][ 왜요? ][ 귀한 물건이라서. 잃어버릴까 봐. ]그 후 가끔 어머니의 발길이 전당포 앞에서 멈추는 것을 보았다. 우두커니 서서 가격표를 붙여 전시된 펜던트를 바라보는 어머니 표정은 슬퍼 보였다. 루시아는 어린 마음에 펜던트에 대해서 더 물으면 어머니가 속상해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나중에 커서 돈을 벌어서 저걸 어머니께 선물해 드려야지 결심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후 계속 잊고 있었다. 메튼 백작의 심부름으로 경매장을 갈 일이 있었다. 독특한 취미의 귀족들을 위한 골동품 경매가 있는 날이었다. 메튼 백작은 거기에 나올 독특한 디자인의 보석함을 낙찰받으라고 했다. 누군가에게 비비기 위해 선물할 물건이었던 것 같다. 왜 다 낡은 물건을 경쟁까지 하며 사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경매에 참가할 보석함은 뒤에 나올 거라서 꽤 긴 경매를 지루하게 지켜보았다. 경매 물건 중에 펜던트가 나왔을 때 루시아는 어머니의 물건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루시아는 경매장을 온 진짜 목적을 잊었다. 반드시 어머니 물건을 되찾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적극적으로 경매에 참석해서 펜던트를 결국 손에 쥐었다. 독특한 디자인의 펜던트는 탐내는 사람이 몇 있어서 루시아는 상당한 고가에 겨우 낙찰받았다. 메튼 백작이 보석함을 사라고 내준 돈을 대부분 썼으나 후환의 두려움을 잊을 정도로 루시아는 펜던트를 손에 쥐고 감격에 떨었다. 오랫동안 잊었던 어머니와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모든 시름을 다 잊을 만큼 루시아는 무척 오랜만에 기쁨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 레이디. 그 물건을 내게 되팔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중년 남자가 다가와서 다짜고짜 물건을 되팔라고 요구했다. 외삼촌과의 첫 만남이었다. [ 그 펜던트는 우리 집안의 가보입니다. ][ 유감이군요. 다시 되팔 생각이 없습니다. 어머니의 유품이에요. ]중년 남자는 끈질겼다. 루시아는 중년 남자와 실랑이를 하다가 펜던트가 어쩌다가 경매장까지 오게 되었는지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같은 여자를 각각 누이동생과 어머니로 두었음을 알았다. 기가 막힌 우연으로 마주친 처음 만나는 숙질이었다. 외삼촌은 누이동생의 부고를 듣고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살짝 코끝이 붉어졌으나 외조부처럼 통한의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아버지와 오라비의 차이일 것이다. [ 그 펜던트는 전설을 품고 있는 귀물이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가문이 위기에 처했을 때 가문을 살리고 명맥을 이어가게 해 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중요한 가보라는데 루시아는 제가 갖겠다고 고집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어도 집에 돌려주기를 바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외삼촌께 드렸다. "어머니가 급히 돈이 필요해서 팔아야 했어요. 독특한 모양의 펜던트였으니까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비록 지금 가지고 있지 않지만, 미래 언제 어디서 경매에 나올지 알고 있었다. 원래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요즘 생각이 바뀌는 중이었다. 꿈에서 봤던 미래가 달라지고 있었다. 경매에 펜던트가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골동품 시장을 수소문해서 찾아볼까 고민하고 있었다. 지금 루시아에게는 그럴 수 있을 힘이 있으니까. 꿈속에서 외삼촌은 펜던트를 되돌려받고 매우 기뻐했다. 가문을 짊어진 부담감에 짓눌려 미신 같은 가문의 전설이라도 기대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외조부의 반응은 달랐다.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구나. 네 어미가 유용하게 썼다면 그걸로 그 물건은 충분히 소용을 다 한 것이지." "가문의 가보라고 들었어요. 귀한 물건이 아닌가요?" "아만다가 그런 소리를 하였니?" 어머니에게 직접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루시아는 "네." 라고 답했다. "가보는 무슨. 그저 오래된 물건일 뿐이지." 백작은 젊어서는 한 때 가보에 얽힌 전설을 믿은 적 있었다. 그러나 부친이 한을 품고 세상을 뜨고, 아내를 잃고, 딸마저 가슴에 묻었다. 전설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가문의 위기? 그런 건 이미 수도 없이 있었다. 지금 나이에 이르러서 백작은 하늘의 무심함을 깨우쳤다. 전설 같은 것을 믿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다. "그저 다. 무슨 소용인가 싶구나." 백작은 남의 손에 넘어가는 저택을 건지려고 수도에 왔다. 평생 해 본 적 없는 아쉬운 소리 할 마음마저 먹었다. 그러나 딸의 죽음을 알자 모든 것이 부질없었다. 딸이 죽은 지 모르고 살아온 지난 수년의 세월이 덧없었다. 대체 뭘 위해 아등바등 살아왔는지 허무했다. "어여쁘게 자랐구나. 이리 잘 자라주어 고맙다." 딸이 남긴 한 점 혈육. 유일한 흔적을 보며 백작은 위로를 받았다. 그래도 이제라도 딸의 소식을 듣고, 몰랐던 손녀를 알았으니 그것도 복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이제 저는 지쳤습니다. 쉬고 싶군요.' 백작은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친구에게 돈을 부탁하려던 마음도 접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저택은 포기했다. '작위를 팔자.' 어둠의 경로를 이용하면 작위를 살 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작위 매매는 엄격히 법으로 금하지만, 알음알음으로 거래는 이루어졌다. 백작위 정도면 좋은 값을 받을 수 있다. 그 돈으로 아들 둘 살길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평생 짊어져 온 짐을 아들들에게까지 넘기고 싶지 않았다. "그만 가봐야겠다." 백작이 일어나자 루시아가 놀라 따라 일어났다. "가시려고요? 저녁이라도 드시고.." "아니다. 내가 저녁에 약속이 있구나. 다음에 시간이 나면 또 보자. 소식을 알았으니 언제든 만날 수 있지 않니." ".... 네." 돌아서서 응접실 문으로 향하는 외조부 뒷모습을 보며 루시아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태어나서 처음 뵈었고, 그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것처럼 낯설지 않았다. 휴고는 그녀를 품으로 안으며 귓가에 말했다. "내가 모셔다 드리고 올게." 루시아는 눈물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접실을 나가는 그를 보면서 눈물을 닦았다. 그가 곁에 있어줘서 고마웠다. 그저 지금은 모든 것이 감사했다. 휴고는 잠깐 사이에 벌써 저택을 나가 뜰을 걷는 백작 뒤를 따라잡았다. 노인네 걸음이 참 빠르기도 하다고 생각하며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해서 백작의 걸음을 세웠다. "아닙니다. 오늘 날씨도 좋고. 걸어가도 되겠습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백작은 큰 키와 체격의 헌앙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본디 무가라서 선조의 체격을 물려받은 바덴 백작가 남자들이 결코 작은 편이 아닌데도 백작은 시선을 올려야 했다. 제논의 귀족이라면 타란 공작 가문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전쟁의 분위기를 가까이 느낀 남부에서는 허드렛일을 하는 천것들마저 타란 공작을 화제로 떠들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즉위 축하연에서, 아까 응접실에서 손녀를 대하는 공작의 태도가 흡족하고 마음이 놓였다. 진심으로 손녀를 위해주는 마음 씀씀이가 보였다. 친지 하나 없이 외로웠을 손녀가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한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백작은 휴고의 권유를 거절하지 않고 함께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공작저를 벗어나 어느 정도 달리다가 멈추어 섰다. "수도에 어느 정도 머물 생각이십니까? 거처하실 곳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좋은 친구가 있어서 수도에 있는 동안 머물 곳은 걱정 없습니다." "말씀 낮추십시오. 어르신. 손위 어른 되십니다." 백작은 씁쓸히 웃었다. "손녀가 저리 다 크도록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할아비가 무슨 염치로 인제 와서 어른 노릇 하겠습니까. 그저 건강히 잘 지내고 있다고 가끔 소식을 듣는 것으로 족합니다." 휴고는 묘한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깔끔한 성정을 지닌 분이었다. 욕심이 없는 건 집안 내력인가. 휴고는 아내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기반을 수도로 옮길 의사는 없으십니까?" 휴고는 그답지 않은 제안을 했다. 바덴 백작가 뒤를 봐주겠다는 말이었다. 타란 공작가의 적극적인 뒷받침이 있다면 변방의 무너져가는 백작 가문은 수도의 신흥 세력 가문으로 부상해서 빠르게 자리를 잡을 것이다. "고마운 제안이나 사람은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내 자식들이 감당하기에 과분하군요." 거절하는 백작은 망설임이 없었다. 백작은 제 아들들을 과대평가하지 않았다. 타고나기를 권세 있는 가문에서 태어났으면 모를까 여태 이름뿐인 귀족으로 살아온 세월이 길었다. 큰아들은 지나치게 고지식하고 둘째 아들은 머리 굴리기를 잘하지만 도량이 좁았다. 둘 다 권력놀음을 하기에는 배포가 부족했다. 자식들이 걱정되어 편히 눈을 못 감을 것이다. "그러면 다른 도움이 필요한 일은 없으십니까? 부담 없이 말씀하십시오." "이 나이 먹도록 변변히 이루어놓은 일은 없어도 부끄럽지는 않게 살았습니다. 이제 만난 손녀에게 손을 벌리는 무도한 사람은 아닙니다." "안사람이 모르게 하겠습니다." 백작은 흐뭇하게 웃었다. "고맙습니다. 그 아이를 아껴주어서." 휴고는 당황했다. 아랫사람을 바라보는 어른의 인자한 시선을 받는 일이 처음이었다. 지금껏 자기 위에 아무도 없다는 오만함으로 살아왔지만, 뜻밖에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 제 아내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 당연한 일을 나는 하지 못하고 살았지요. 나처럼 소중한 사람을 잃는 과오를 저지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래오래 그 아이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세요. 행복하게 해주세요. 이 늙은이가 바라는 건 그것뿐입니다." 백작은 손녀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부터 이미 사랑에 빠졌다. 딸의 웃음을 그대로 닮아서 웃는 손녀는 사무치게 사랑스러웠다. 곱게 다 자랄 때까지 자라는 모습을 보지 못해서 서러웠다. "그 아이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백작의 붉어진 눈시울을 보며 휴고는 심장이 조금 아픈 것 같았다.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사랑하고...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아내였다. 그런데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노인을 보며 휴고는 진정으로 그녀와의 관계를 인정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고는 끝내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백작에게 수도를 떠나기 전에는 반드시 연락을 줄 것을 약속받았다. 이대로 외조부가 훌쩍 떠나면 아내가 몹시 서운해할 것 같았다. 신세 지고 있다는 친구의 저택 근방까지 백작을 모셔다 드리고 돌아와서 휴고는 아내의 뜻을 물었다. "당신은 어쩌고 싶지? 외가에 도움을 주기 바란다면 그렇게 해줄게." 루시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외가 친지들이 감당하기엔 공작가 외척의 자리는 너무 커요. 온갖 구설수에 말려들 거예요. 당신이 골치 아플 테지요." 두 조손이 말을 맞춘 것처럼 같은 말을 하는 것이 신기하다고 휴고는 생각했다. 휴고는 핏줄의 신비함을 느꼈다. 처음 만나는 조손은 대단히 닮았다. "난 괜찮아." "제가 괜찮지 않아요. 당신께 폐가 되고 싶지 않아요." "폐라니. 그런 말이 어딨어." 그가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보며 루시아는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품에 안겼다. 고개를 들어 그를 보면서 미소 지었다. "제 외가라는 건 알려지지 않았으면 해요. 외가는 금전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그 부분만 조금 도와주세요. 해주실 수 있죠?" "알았어." 대답하는 그의 표정은 부루퉁했다. 조금 전 말한 '폐가 되고 싶지 않다.' 라는 말에 여전히 기분이 상해 있었다. 루시아는 가끔 그가 퉁퉁거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오직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며칠 파티를 나가며 공식적인 자리에서 보는 그의 모습은 루시아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다. 처음에는 그가 화가 난 줄 알았다. 차가운 표정과 서늘한 눈빛. 그가 왜 그럴까 의아해하다가 사람들이 그런 그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대하는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그의 원래 모습이었다. 꿈속에서 봤던, 그리고 청혼해야지 마음먹고 승전기념파티에서 봤던 그의 모습이었다. 언제부턴가 잊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부드럽게 웃고, 따뜻하거나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에게 익숙해 있었다. 루시아는 비로소 자신만 아는 그의 얼굴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제가 말한 적 없죠?" "뭘." "저랑 결혼해 줘서 고맙다고." 그의 붉은 눈동자가 일렁이는 것을 보며 루시아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농담은 아니었으나 가벼운 기분으로 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의 눈동자에 기쁨이 가득하자 루시아는 어쩐지 감격스러웠다. 그의 한쪽 팔이 루시아의 등을 누르고 다른 팔이 허벅지 아래를 받치며 안아 들어 시선을 맞추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그럼요." "그럼 증명해 봐." "어떻게요?" "당신이 생각하는 내게 폐가 되는 짓을 해 봐. 내가 뒷수습할 사고 치는 것도 좋고." "... 어떻게 그게 증명이 되는 거죠? 그보다 지금 어디 가세요?" 휴고는 루시아를 안고 응접실을 나와서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고 있었다. 고용인 몇이 움찔했으나 모르는 척 다 고개를 돌리며 하는 일에 집중했다. 더는 고용인들 앞에서 내숭 떨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 저녁 식사는 조금 늦게 먹자고." "이이가 진짜!" 휴고는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른 그녀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짧은 키스를 했다. 붉어진 얼굴이 더 붉어지는 모습은 언제 봐도 신기했다. 그리고 아주 귀여웠다. 오늘 파티 일정 취소로 갑자기 시간이 많아졌다. 모처럼 생긴 휴일이었다. 휴고는 오늘을 알차게 보내고 싶었다. 침대에서. 며칠 후 루시아는 외조부와 점심을 함께했다. 외조부가 사람을 통해 그만 남부로 내려간다는 소식을 담은 짤막한 서신을 보내왔다. 루시아는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식사 대접을 드리고 싶어서 자리를 마련했다. 두 번째 만나는 조손은 조금 더 편하게 서로 대했다. 루시아는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할아버지를 알고 지낸 것처럼 편안함을 느꼈다. 핏줄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더 가까운 핏줄인 아버지는 남보다 못했다. 이제는 미움조차도 남지 않았다. 만약 어머니가 자신을 왕궁이 아니라 외가에 보냈다면 더 행복했을지 모른다. "그럼 제게 이미 조카가 있다는 말씀이군요." 루시아는 많은 친척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두 외삼촌은 결혼해서 큰외삼촌은 딸이 둘, 막내 외삼촌은 아들이 둘이었다. 큰외삼촌의 두 딸은 모두 루시아보다 나이가 많았고 그 중 첫째는 이미 아이 엄마였다. 루시아에게는 외숙부 둘과 사촌 형제 넷, 조카 남아가 하나 있었다. 꿈속에서 루시아는 외삼촌에게 얼핏 아들 둘이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비극적으로 돌아가신 큰외삼촌에 대해서는 묻지 못했고 외삼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제 막 걸음을 떼었지. 돌아가면 그새 많이 컸을 게야. 아이는 순식간에 자라니까." 외조부는 가끔 편지로 이런저런 집안 소식을 전해 주겠다고 말했다. "죄송해요. 할아버님. 제가 만나 뵈러 가겠다고 약속을 못 드리겠어요." 루시아는 남편에게 금전적인 도움만 부탁했으나 외조부께는 죄스러웠다. 더 많은 도움을 드릴 수 있는데 너무 박하게 대한다는 미안함이었다. "온다고 해도 말릴 거다. 난 네 외숙들에게 네 얘기를 할 생각이 없단다. 네 어미 소식도 그저 나만 알고 있으련다." 놀라 커진 눈을 하는 손녀를 보며 백작은 인자하게 웃었다. "네 외숙들에게 헛바람을 넣고 싶지 않구나. 가진 건 부족해도 집안은 화목하지. 그래도 내가 복이 있어서 며느리들 심성이 곱다. 나는 그냥 이대로가 좋다. 서운해도 이해해다오." "아니에요. 할아버님. 서운하기는요." 루시아는 손녀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외조부의 마음을 읽었다. 죄송하고 감사했다. 이런 아버지를 잃고 외삼촌이 얼마나 원통했을까. 꿈속에서 외삼촌의 절박한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제 출발하세요?" "오늘 돌아가려고 친구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온 참이란다." 백작은 친구에게 신세를 지면서 친구 사정도 그리 좋지 못하다는 걸 알았다. 부친이 돌아가신 후 대부분 재산과 작위를 물려받은 형님이 동생을 제대로 살펴주지 않는 것 같았다. 친구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럼 식사가 끝나는 대로 바로...? 왜 그렇게 서두르세요. 조금 더 머물다 가셔도 되잖아요." "늙은 아비 수도로 보내놓고 네 외숙들이 걱정이 많을 게야. 나 같은 늙은이가 지내기에는 수도는 번잡하기도 하고. 가는 길은 걱정 말아라. 게이트를 타고 갈 거니까. 손녀사위 덕분에 내 평생 호사를 다 누려보는구나." 외조부가 과장된 태도로 어깨를 으쓱하자 루시아는 웃었다. "언제든 오셔요. 이제 오시는 길이 그리 멀지 않으니까요." "그러마. 너무 자주 온다고 박대하지나 말아라." "박대는요. 그럴 일 없어요."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부간 의좋게 지내고. 사람이 괜찮더구나. 너를 많이 아껴. 내가 그래서 마음이 놓인다." "네. 좋은 사람이에요." 자식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부모에게 최고의 효도라고 했다. 루시아는 외조부께 잘살고 있는 현재의 자신을 뵈어 드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람 괜찮다는 외조부의 남편 칭찬에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한 번 안아 봐도 되겠니?"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었어요." 두 조손은 서로 안아주며 아쉬운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비록 언제 서로 다시 볼 수 있을지 기약이 없으나 영원한 이별이 아니었다. 그래서 루시아는 외조부를 담담하게 보낼 수 있었다. 외조부를 보낸 오후에 앙뜨가 방문했다. 항상 조수와 일꾼들을 주렁주렁 달고 오던 앙뜨는 단출한 홀몸이었다. 드레스를 가봉하려는 목적이 아니니까 혼자가 당연했으나 오늘따라 공작저의 위용에 주눅이 든 표정이었다. 무장해제당한 병사처럼 약해 보였다. '조수와 일꾼들을 부리며 잔뜩 이고 다니는 소품들이 앙뜨의 무기인가.' 자신감과 활기가 넘치던 앙뜨의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루시아는 표정관리를 했다. 기본이 장사꾼이었다. 기를 세워줘서 파고들 틈을 줄 필요는 없었다. "자네가 어쩐 일인가.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뵈어 송구합니다. 공작부인. 무례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정에 방해되었는지요." "마침 별다른 일은 없네. 이후에는 이러지 말게." "예. 공작부인." 응접실에서 두 사람이 마주앉았다.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루시아와 달리 앙뜨는 계속 공작부인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며칠 전 앙뜨는 청천벽력 같은 통지를 받았다. 타란 공작이 사람을 보내서 앞으로 드레스 제작을 맡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미 제작한 드레스 비용은 약속대로 모두 지급하겠다고 했으나 그런 푼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눈앞의 일확천금이 안개처럼 사라졌다. 며칠 잠을 못 이루는 불면증에 괴로워하다가 공작저를 방문했다. 사전에 사람을 보내 약속을 잡는 일이 순서에 맞지만, 그랬다가 거절당하면 아예 방문할 수 있는 명분이 사라진다. 그래서 무작정 찾아왔다. 공작부인이라면 한 번쯤은 만나줄 거로 생각했고 그 생각은 다행히 주효했다. "무슨 일인가." "며칠 전 가면무도회를 위한 드레스를 가져올 필요 없다고 하셔서 혹여 편찮으신 것은 아닌지 염려했습니다." "보다시피 건강하네. 피곤해서 일정을 취소했지. 그것이 용건인가?" 앙뜨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공작부인은 여느 귀부인들과 다른 점이 많았다. 쓸데없는 수다를 늘어놓으며 쉽게 말을 섞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이에 비해서 이상할 정도로 노련했다. 닳고 닳았다는 느낌보다는 관록이 느껴지는 여유로움이었다. 앙뜨는 말을 돌리기보다 정공법을 택했다. "공작부인.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유를 알고 싶어 찾아뵈었습니다. 제가 무슨 큰 실수라도 하였는지요."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모르겠군." "제가 공작부인께 잘못한 점이 있다면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그런 것 없네." "그러면 왜 제가 공작부인의 드레스를 제작하는 것을 이후부터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셨는지요. 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까?" 루시아는 모르는 소리였다. 그러나 짐작은 갔다. 남편이 앙뜨의 드레스를 못마땅해하더니 아예 앞으로의 계약 거부 통지를 보낸 모양이었다. 루시아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갈수록 유치해지는 이 남자를 대체 어찌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대관절 어느 귀족가에서 남편이 아내의 드레스 디자이너 바꾸는 문제에 관여한단 말인가. 아내가 소비한 비용을 문제 삼을 수는 있다. 누가 만든 드레스를 입는지 결정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여자의 선택이었다. 루시아는 앙뜨의 드레스가 마음에 들었다. 앙뜨는 루시아의 체형과 매력을 잘 살리는 디자인을 그릴 줄 알았다. 다른 누구를 고용해도 앙뜨보다 나을 것 같지 않다. "나는 자네 드레스가 마음에 들어. 하지만..." 공작부인이 말을 늘이자 앙뜨는 긴장된 숨을 삼켰다. "바깥분이 마땅치 않아 하시는 드레스를 입기는 곤란해서 말이네." "공작 전하께서 제가 만든 드레스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리 말씀을 하셨습니까?"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만. 자네 드레스가 좀. 단정하지 못하다고 하시더군." "....." 이게 무슨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인가. 단정하면 드레스가 아니다. 그걸 원하면 목까지 단추를 채워 올린 사제복을 입어야지. 지금껏 셀 수 없이 많은 귀부인들을 대상으로 드레스를 만들었지만, 그런 말을 하며 불만을 표하는 사람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앙뜨는 열심히 고민했다. 그리고 그간 제작했던 공작부인의 드레스들을 쭉 떠올렸다. 처음에 여름용 드레스를 계약하고, 대관식 드레스를 재계약했다. 초기 제작한 드레스까지는 불만이 없었다는 뜻이다. 뭐가 다른가. '처음에 만든 여름용 드레스는 가벼운 외출용으로 만들어서 무난했고. 대관식 드레스는 아무래도 과감했지. 무도회에서 입을 것이니까.' 그건가. 앙뜨는 알아차렸다. 그리고 어이가 없었다. 그 정도 노출이 싫으면 병이었다. 다른 드레스를 보라. 가슴이 반은 드러난다. 그런 드레스에 비하면 공작부인을 위해 제작한 드레스들은 아주 얌전했다. '정말 소문대로 감금해 놓고 사는 거 아니야?' 앙뜨는 의심을 품으면서 가련한 눈빛으로 두 손을 마주 잡았다. "공작 전하께서 얼마나 공작부인을 은애하시는지 어리석은 제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이후에 더욱 노력하여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제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공작부인. 솔직히 말씀드려서 어딜 가도 저만한 디자이너를 찾기 어려우실 거여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말했지만 자네 드레스에 만족하고 있어." 앙뜨의 눈이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그러니 나하고 계약을 하세." "예! 공작부인." "확실히 다시 말하겠네. 계약은 나하고 하는 거네." "... 예? 그야.." "전에 공작 전하와 무슨 계약을 했는지 묻지 않겠네. 이후에는 그런 계약은 없을 거네. 알아들었는가?" 미소를 짓고 있는 공작부인의 표정에 바늘 하나 꽂을 틈이 없었다. 앙뜨는 통한의 울음을 속으로 터뜨렸다. 대박이 물 건너갔다! "알아본즉, 보통 분기별로 드레스 두세 벌, 무도회용 드레스는 필요할 때 한두 벌 제작하는 것이 적정하다고 하더군. 나는 기존에 만든 것이 몇 벌 없으니 가을용, 겨울용 드레스로 각각 5벌씩 의뢰하겠네." 여름 의상으로만 19벌을 팔았던 과거에 비하면 곤두박질치는 수치였다. 그러나 앙뜨는 이마저도 감지덕지했다. 5벌이라도 어딘가. 타란 공작부인의 전속 디자이너라는 이름은 더 많은 부가가치를 안겨줄 것이다. 앙뜨의 눈앞에서 흐르던 황금 강물은 안갯속으로 사라졌으나 바닥에 널린 사금을 주울 정도는 되었다. 앙뜨는 냉큼 제안을 받아들였다. 루시아는 응접실에서 손수건에 수를 놓으며 저녁 식사 시간까지의 빈 시간을 활용 중이었다. 그녀의 자수 솜씨는 꽤 발전했다. 손수건 끝에 놓는 데미안 이름 자수는 멀리 보면 그럴듯해도 가까이 보면 정교함이 떨어졌다. 그런데 이제는 자세히 들여다봐도 어긋난 부분이 거의 없었다. '이번에는 손수건을 보내면서 책도 몇 권 넣어야겠어. 아이가 읽기에 좋은 책이 나왔던데.' 북부에 있을 때 데미안을 처음 봤던 날로부터 거의 1년이었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니까 1년 사이에 얼마나 많이 자랐을까 궁금했다. 데미안을 언제쯤 수도로 불러올 수 있을까. 무정한 아이 아버지는 루시아가 묻지 않으면 먼저 데미안 이야기를 꺼내는 적이 없었다. '티파티는 잘 관계를 만들면 여론 형성에 유리하니까. 데미안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지. 그 아이의 위치는 배척받을 수밖에 없어. 내가 편을 만들어둬야 해.' 사람 만나기가 버겁다고 피할 일이 아니었다. 루시아는 수를 놓으면서 한 아이 어머니로서의 책임감을 다졌다. "마님." 제롬이 기척을 내며 들어와서 말을 붙였다. "주인님께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오늘 귀가가 예상보다 이를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저녁 식사 시간보다는 조금 늦겠으나 함께 저녁을 들자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래요?" 어제 그는 오늘 늦을 것 같다고 말했다. 예상치 못하게 일찍 들어온다는 말에 루시아는 기분이 좋아졌다. 얼굴에 화색이 도는 마님을 보며 제롬은 고개를 돌려 웃음을 흘렸다. 고용인을 개의치 않는 주인 부부의 애정행각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주로 주인님에게 마님이 휘말렸으나 마님도 이전처럼 적극적으로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주인 부부의 충만한 애정은 은근히 고용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오늘도 하녀의 사직서를 받았다. 결혼을 한단다. 벌써 3명째였다. "제롬. 요즘도 내게 파티 초대장이 오지요?" "예. 마님. 갈수록 많아지고 있습니다." "무도회나 규모 큰 모임은 빼고. 소규모 티파티 위주로 초대장을 추려줘요." "예. 마님." 하고 대답한 제롬은 루시아가 수를 놓는 손수건에 시선을 고정했다. 주인이 항상 상의 안쪽에 넣어 다니는 꽃 자수 손수건이 떠올랐다. 거추장스러운 걸 질색해서 생전 손수건은 지니지 않던 분이었다. 주인의 변화는 정말 놀라웠다. 제롬은 가끔 가물가물한 주인의 옛 모습을 애써 떠올리곤 했다. 주인은 사나운 맹수에서 길들인 짐승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이상하게 보기 좋았다. 과거에 공작이 박한 주인이었다는 건 아니다. 지극히 합리적인 분이라서 괜한 꼬투리 잡는 일은 없었다. 단지 가끔. 제롬의 예민함이 주인이 은연중에 뿜어내는 살기를 잡아내곤 했다. 단 한 번도 소문의 무서운 모습을 접한 적이 없음에도 오싹함을 느꼈다. 사냥을 다녀오실 때 가장 심했고 평소에는 아주 드물지만, 꾹 눌러둔 뭔가가 흘러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반년 가까이 주인에게서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다. 과하게 표현한다면 '사람'이라는 거죽을 뒤집어쓰고 있던 주인이 진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마님. 주인님께도 수놓은 손수건을 선물해 드림이 어떠신지요?" "실크 손수건에 수놓으면 망가질 텐데요." "실크가 아니라 면 손수건에." "제롬. 어른 남자가 이걸 어떻게 지니고 다녀요." 쿡쿡 웃는 마님을 보는 제롬의 표정이 묘했다. 역시 마님은 모르고 계셨다. 시중은 고용인들이 다 맡아 하니까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만. "가지고 다니시지 않아도 마님의 선물에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음... 부끄러운 솜씨인데." 중얼거린 루시아는 "그럼 그이 이름자를 넣어서 만들어 봐야겠네요." 라고 대답했다. 제롬은 싱긋 웃었다. 주인 마음을 읽는 위대한 집사. 집사를 천직으로 타고난 그자의 이름은 제롬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보다 조금 늦게 휴고는 귀가했다. 따로 보고 드릴 일이 있어서 파비안이 따라 들어왔다. 오랜만에 제롬 얼굴도 볼 겸, 간만에 형제끼리 밥이나 먹을 생각이었다. 휴고는 들어오자마자 자신을 마중하러 나온 많은 사람들 중에서 반가운 유일한 한 사람. 아내의 허리를 팔로 감아 품으로 당기면서 가벼운 키스로 인사를 나누었다. "다녀왔어." "다녀오셨어요." 고용인들 앞에서 이러는 게 편치 않지만, 아주 싫지도 않은 그런 미묘한 감정으로 루시아의 안색은 발그레했다. "저녁은?" "아직 이요. 기다리라고 사람 보내셨잖아요." "배고프면 먼저 먹지." "그렇게 고프지는 않아요." 휴고는 제롬을 돌아보며 물었다. "식사 준비는 멀었나?" "바로 식당으로 가시면 됩니다." 주인 부부가 식당으로 들어가면서 모여 있던 고용인들이 제 할 일을 찾아 흩어졌다. 다들 이제 그러려니 하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고용인들은 부부라면 당연히 저런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좀 나이가 있는 고용인들은 경험상 냉랭한 주인 부부 사이가 얼마나 집안 분위기를 아슬아슬 불안하게 만드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차라리 아주 좋다고 생각했다. 모두 만족하는 상황에서 그렇지 못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뭐하냐? 너." 입을 쩍 벌리고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파비안을 보며 제롬이 혀를 찼다. "... 내가 이제는 헛것이 보이나 봐." "식사 시중들고 올 동안 기다려. 내 업무실에서 기다리든지, 먼저 저녁을 먹든지 좋을 대로 하고." 파비안은 식당으로 가려는 제롬을 붙들었다. "매일 저러셔? 매일 저런 닭살 돋는 짓을 하신단 말이야? 어째 아무도 놀라지도 않아?" "뭐. 이제는 익숙해서." 말세가 도래하고 있어. 세상이 망할 징조야. 어두운 기운에 잠겨 중얼거리는 파비안을 한심하게 한 번 보고 제롬은 식당으로 향했다. ============================ 작품 후기 ============================타릭천사 님, Katie. 님, 매쉬매리골드 님, 레이니엘 님, 말도안돼 님, 람람- 님, 포르티나 님, 나쯔히보시 님, 퍼플케이브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엽서 공모 그림은 보류하기로 했습니다. 공지를 참조해 주세요. 티나 님, 나쯔히보시 님, 퍼플케이브 님 쿠폰 감사합니다. < -- 사랑합니다 -- > 저녁 식사 후 산책 중에 루시아는 앙뜨와 새로운 드레스 제작 계약을 체결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그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슬쩍 살핀 표정이 영 마땅치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전 앙뜨의 드레스가 마음에 들어요. 앞으로도 계속 앙뜨에게 의뢰할 생각이에요." "알아서 해." "그러니까 당신이 앙뜨와 따로 계약하면 안 돼요." "... 무슨 계약?" 루시아는 그가 당황했다는 기색을 알아차렸다. 그가 앙뜨와 뭔가 계약을 했다고 추측할 뿐 확신은 없었다. 대관식 드레스 비용이 지나치게 저렴해서 이상하다고 생각만 했다. 그런데 앙뜨에게 '나와 하는 계약'이라고 말을 덧붙이자 앙뜨가 보인 반응으로 짐작했다. 앙뜨와 남편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계약이 있었다는 사실을. "앙뜨하고 지난 계약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했어요." "......" 루시아의 두루뭉술한 말에 휴고는 오해했다. 앙뜨가 자신과 맺은 계약에 대해 아내에게 모두 토설했다는 것으로. 앙뜨가 그 정도의 상식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아무리 루시아가 추궁해도 이중계약서와 대관식 드레스의 백지 수표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물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중계약서는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 나왔을 뿐이고 시행하기도 전에 공작이 계약 해지를 선언했다. 실질적 이득은 백지 수표밖에 없었다. 휴고는 입 싼 디자이너에게 앙심을 품었다. 앙뜨가 알았다면 억울해서 가슴을 칠 일이었다. "당신이 지나치게 돈 문제로 걱정하지 않기를 바랐어." 무력 못지않은 지략에 능하다는 타란 공작은 어설픈 유도신문에 홀랑 넘어가 버렸다. 루시아는 역시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눈치챘다. "앞으로 그 문제로 민감하게 굴지 않을게요. 당신도 다른 사람은 알고 저만 모르는 일 만들지 마요. 사실을 알았을 때 훨씬 더 속상할 거예요." "알았어. 안 그럴게." 루시아가 걸음을 멈추자 휴고도 멈추었다. 의문을 갖는 그의 눈을 보며 루시아는 두 팔 벌려 그를 끌어안으며 가슴에 안겼다. 자신에게만 온순한 남편이 사랑스럽고 고마웠다. 그의 팔이 등 뒤에서 마주 안아주는 것을 느끼며 루시아는 눈이 시큰했다. 지금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제롬의 업무실 창가 소파에 앉아 턱을 괴고 창을 통해 뜰을 내다보는 파비안의 표정이 퀭했다. 밖은 어두웠으나 저 멀리 끌어안고 있는 한 쌍의 실루엣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했다. 파비안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대체 산책은 언제까지 하시는 거야. 이러다 날이 새겠어." 얼른 보고하고 집에 가고 싶었다. 누구는 아내 없고 자식 없나. "넌 아까부터 뭐가 그리 불만이야." 제롬은 책상에 앉아 일을 처리하면서 계속 퉁퉁거리는 파비안을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 "내버려 둬. 난 지금 충격에서 벗어나려고 노력 중이니까." 식사가 끝난 후 두 분이 다정히 손 붙잡고 산책하러 나가는 모습을 보고 파비안의 입은 또 한 번 벌어졌다. "두 분 금실이 좋으면 마땅히 기뻐할 일이지. 넌 매사 삐딱한 게 문제야." "삐딱하니까 저분 밑에서 일하는 거라고! 얼마나 사람을 굴려대는지...! ... 됐다. 너한테 무슨 말을 하겠냐. 노예 자식. 넌 어디 가서 우리 부모님 아들이라고 하지 마." 투덜거리는 파비안을 제롬은 그저 한심한 눈으로 보았다. 창밖을 멍하게 보던 파비안은 갑자기 울컥해서 몸을 홱 돌려 소리쳤다. "넌 몰라서 그래! 저분이 어떤 분인지 알아? 네가 내가 본 걸 봤으면 이렇게 태연하지 못하다고!" 파비안은 처음으로 자신의 기억에 박힌 주군의 모습을 형제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뭐. 대체 뭐가 문제인데? 넌 네가 아는 주군 모습이 좋아?" "... 그렇다기보다는. 걱정 돼서 그러지.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탈 난다는 말이 괜히 있는 줄 아냐." "쓸데없는 걱정 사서 하지 마. 넌 말이나 조심해. 없는 사달도 만드는 입이니까." 냉정한 형제의 말에 파비안은 입안으로 구시렁거렸다. 파비안은 그간 밀착 감시를 통해 작성한 표적 '데이빗 라미스'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오랜 고생 끝의 결실이었다. 보고서의 도입부분은 표적에 대한 신상 정보였다. 나이, 가족관계, 친구관계 등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사항들이었다. 휴고는 대충 훑어보며 넘겼다. "표적의 성격이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호인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속이 좁고 교활하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세간의 평이 극단적이었다. 어울리는 귀족들이 평가한 데이빗은 괜찮은 사람이었으나, 힘없는 귀족이나 고용인 등 신분 낮은 사람들은 데이빗에 대해서 대부분 악평을 남겼다. 속과 겉이 다른 인간을 하도 많이 봐서 휴고는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휴고는 보고서 내용 중 데이빗과 관련한 의혹 부분을 읽었다. 데이빗이 수년 전 하녀를 건드려서 하녀가 임신했다고 주장한 내용이었다. 공식적으로 그 하녀는 보상을 받아 챙겨 일을 그만두고 떠났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진실은 달랐다. "이 하녀가 죽었을 거라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는 말이지?" "예. 당시 함께 일했던 친하게 지낸 하녀 말로는 떠난다는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합니다. 인사를 남기지 않고 떠날 사람이 아니라면서 사라지기 며칠 전부터 이상하게 불안해 보였고, 자는 척하면서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하녀 행적은?" "오래된 일이라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고향을 찾아가 봤으나 가족들도 소식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증거는 없고 정황뿐이군." 공작가 후계가 하녀 하나 죽였다고 사실이 밝혀져 봤자 처벌하기는커녕 타격을 주기도 어려웠다. 다만, 이런 사건들은 당사자의 성품을 파악하는데 아주 중요했다. 데이빗은 생각보다 위험한 짓을 할 수 있는 자였다. 귀족이 고용인을 학대하거나 처벌을 빙자해서 죽이는 일은 드물지 않게 일어났다. 그러나 죄를 뒤집어씌울지언정 어쨌든 죽였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하고, 겉과 다른 사실로 위장해 남모르게 죽이는 것하고는 달랐다. "하녀 일로 표적의 부친이 노여워했다고 합니다. 그 후 저택 내 하녀를 손대는 일은 없었습니다." "제 버릇 개는 못주지. 그래서 간 곳이 집창촌인가." 휴고는 보고서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 정도 신분이면 몸 던지는 여자가 많을 텐데." "같이 밤을 보낸 창기를 수소문해 알아봤는데, 가학적인 취미를 보였다고 했습니다. 철저하게 굴종하는 자세를 보이며 제 맘대로 상대를 다루는 것을 좋아했다고 했습니다. 귀족 여인을 대상으로 그런 취미를 충족하기는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휴고는 좀 짜증이 났다. 왜 이런 변태적인 새끼의 침대 생활까지 알아야 하는 건가. 이 한심한 놈을 조사까지 해가며 경계할 필요가 있는지 회의가 들었다. 데이빗의 개인적 신상에 대해서는 그 정도로 넘어가고 휴고는 근래 데이빗이 열정적으로 사람을 모아 만든 모임을 보고 피식 웃었다. "신국청년회? 미친놈." 신국(新國)이라는 말을 붙이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모르는 건가. 얼핏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한 역도들이라는 의혹을 주기 충분한 단체명이었다. 어느 정도 수준이나 되어야 말이라도 섞지. 어디 모자란 건 아닌지 지능이 의심되는 녀석이었다. "겉으로 내세운 목적은 젊은 인재를 모으겠다는 거군. 정말 딴마음 품고 만든 단체던가?" "딴마음이라기보다는 본래 목적에 충실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젊은 인재가 아니라 자신을 추종하는 젊은 인재를 모았습니다." "한심한 놈들만 모여 있겠군." 쓰레기는 아무리 모아봐야 쓰레기. 이름만 거창하게 내세워 이런 단체를 만들어봤자 휴고는 전혀 신경 쓸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회원 중에 눈여겨봐야 할 몇 명이 있었습니다. 회장으로는 표적을 추대해서 세워놓고 단체의 회칙이나 활동 방향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별책으로 작성했습니다." 휴고는 옆의 별책을 들어 내용을 넘겼다. 데이빗에 대한 내용을 볼 때는 '이런 병신' 하며 비웃는 표정으로 얼마간 지루함을 표하던 휴고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위험분자들이 여기 숨어 있었다. 권력의 가장 큰 두 대립 세력은 왕과 귀족이었다. 왕은 왕권 강화를 외치고, 귀족은 사병 확대와 영지의 자율권 보장을 외친다. 그런데 영지도, 작위도 갖지 못한 귀족들 중에 제3의 세력을 꿈꾸는 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학자 등 지식인들이며 전문 지식인에 의한 국가 경영을 주장했다. 그들은 제도 도입을 통해서, 왕과 고위귀족들이 모여 국정을 논의하는 방식을 철폐하고 법을 만들어 법으로 선출한 대신들이 나라를 경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왕이라 해도 법에 따라야 한다며 법치주의를 내세웠다. 아직 그들의 세력은 미미했다. 그들의 주장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휴고는 알고 있었다. 이들의 주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힘을 받고,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할 것이다. 휴고가 공작위에 오르고 들어간 가문 비밀의 방에서 얻은 지식이었다. 아득히 먼 옛날, 마도 제국이 세상을 지배할 때, 보통의 인간들이 보기에 귀족은 괴물처럼 강했으나 귀족끼리는 비슷한 힘을 가진 인간이었다. 그들은 마법적 힘을 사용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지금 인간이 만들어가는 세상과 비슷한 단계를 밟아 발전해 나갔다. 귀족끼리도 계급을 나누어 서로 차별했고, 더 가진 자와 덜 가진 자가 있었다. 서로 더 가지려고, 주도권을 잡으려고 싸우는 건 지금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실질적 권력은 없으나 지식으로 무장한 제3세력의 등장은 마도 제국에서도 일어났다. 이들의 주장 중 일부는 귀족을 누르고 싶어 하는 왕의 입맛에 맞았다. 왕이 이들을 기용하기 시작하면서 왕을 등에 업고 성장하다가 언젠가는 왕과 결별하고 자신들만의 세력을 만들어 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누구도 무시할 수 없으리라. 다수의 지지를 받는 새로운 세력의 부상은 상대적으로 왕권은 물론이고 기존 귀족들의 권리도 약화시켰다. 가문 비밀의 방의 지식은 타란 가문 가주들이 세상을 넓게 조망할 힘을 주었다. 대충 세상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세상의 흐름은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늦출 수는 있었다. '빠른 발전은 곤란하지.' 타란의 가주들은 절대 가문의 지식을 이용해서 세상의 발전을 꾀하지 않았다. 타란이 북부의 주인으로 남아 있으려면 발전은 곤란했다. 적당히 강한 왕권으로 다스리는 왕국이 이상적이었다. 인간 세상은 혼란할수록 발전이 이루어진다. 타란 가문이 나라의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나서서 처리해 주고 북부가 살기 좋도록 유지하는 건 괜한 짓이 아니었다. 현재에 만족하는 인간들은 변화를 꾀하지 않으니까. 과거에 휴고라면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가문 따위 어찌 되든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휴고는 최소한 자신이 죽을 때까지는 타란은 건재해야 하고, 이어받은 데미안도 무난히 가문의 부와 권력을 누리기를 바랐다. "이자들에 대해 더 알아봐." "예. 그리고 표적에 대해 아셔야 하는 사항이 더 있습니다. 보고서 마지막 장입니다." 다시 데이빗에 대한 보고서를 들어서 넘겨 본 휴고의 표정이 묘해졌다. "제 아들에게 사람을 붙였어?" "예. 단순히 뒤를 밟는 정도가 아니라 조사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들이 저희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게 신중을 기했습니다." 휴고는 생각에 잠겼다. 라미스 공작의 의중을 추론해 보았다. '큰아들을 마땅치 않아 하는군. 후계 구도까지 바꿀 생각인지도 모르지.' 잘하면 가만둬도 알아서 치워줄 것 같다. "표적에 대한 감시는 계속합니까?" "모두 철수하지는 말고 눈에 띄는 행적이 보이면 보고해." "예. 전하." "수고가 많았다. 그리고 이 물건을 수소문해보도록." 파비안은 공작이 건네주는 종이를 받았다. 종이에 스케치 되어 있는 그림을 요모조모 살펴보고서 펜던트라는 것을 알았다. 흔한 원형 모양 펜던트와 다른 특이한 형태였다. 휴고는 루시아 모르게 백작을 한 번 만났다. 수도를 떠날 때 게이트를 이용할 수 있게끔 조치하며 이후 언제라도 수도에 오려면 이용할 수 있도록 해 드리겠다고 말을 전했다. 그리고 펜던트에 대해 물었다. 휴고의 진짜 목적은 그것이었다. [ 골동품에 관심이 있습니까? ]백작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안사람에게 귀한 물건인 듯해서 찾아볼까 합니다." 라고 말하자 백작은 껄껄 웃으며 형태를 상세하게 그림까지 그려 주었다. 휴고는 물건을 수소문해서 아내에게 깜짝 선물로 줄 생각이었다. 그녀는 어머니를 많이 그리워하고 있으니까 선물을 받으면 무척 좋아할 것이다. 기뻐할 모습을 생각하면 벌써 기분이 좋았다. "소유주가 있다면 알아오면 됩니까?" "아니.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내게 가져와. 중간 과정은 보고할 필요 없다." 파비안은 대답하면서 다시 한 번 펜던트 그림을 보았다. 주군 입에서 수단 방법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것을 보면 대단한 귀물인가 보다. '마도구인가? 타국의 국보라면 빼내기 좀 성가시겠군.' 데이빗은 라미스 공작의 부름을 받아 집무실로 들어갔다. 가벼운 마음이었던 데이빗은 갑자기 안면으로 날아온 것을 피할 겨를이 없었다.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게야!" 부친의 노성을 들으면서 데이빗은 제 얼굴을 치고 떨어진 서류 뭉치들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크게 아픈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꾸중을 듣는 일이 처음이라 충격이었다. "누가 너더러 이런 짓 하라 했느냐!" 데이빗은 몸을 숙여서 바닥에 흩어진 서류 한 장을 집었다. 눈에 익은 이름이 쭉 나열된 명단이었다. 데이빗이 만든 신국청년회 회원들 이름이었다. 아버지가 이 모임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건 둘째 치고 왜 이렇게 화를 내시는 걸까. 데이빗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마님34 님, leehyuiji 님, 뽀로롱엘 님, zpfhfhjo 님, dpflzk 님, 아엘로 님, 아키타이프7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마님34 님, leehyuiji 님, 뽀로롱엘 님, zpfhfhjo 님, dpflzk 님, 아엘로 님, 아키타이프7 님 쿠폰 감사합니다. < -- 사랑합니다 -- > 잔뜩 일그러진 주름 가득한 부친의 얼굴은 평소 데이빗이 존경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추하고 역겨웠다. 데이빗은 서류로 얻어맞은 모멸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떨어뜨리고 이를 악물었다. "제가 잘못 했습니다. 아버지." 무조건 빌었다.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알지 못하는 잘못의 용서를 구했다. "대체 왜 이리 경솔한 게야." 무조건 비는 작전은 언제나 통했다. 부친의 음성에 담긴 노여움이 한결 누그러졌다. 슬쩍 고개를 들자 부친은 긴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데이빗은 떨어진 서류 몇 장을 더 주웠다. 자신이 만든 청년회에 대한 정보들이었다. 회원 명단은 물론이고 회칙도 있었다. 데이빗은 아직 이게 왜 아버지의 노여움을 샀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모른다고 하면 더 큰 야단을 들을 터라 데이빗은 묵묵히 서류를 주워 모았다. 다 주워 정리해서 부친의 책상 위로 올려놓고 뒤로 물러나 고개를 숙였다. 반성하는 아들의 모습이었다. "마음 맞는 친우들과 모임 하나 만든 일로 이렇게 아버지 심려를 끼칠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생각이 부족했습니다." "마음 맞는 친구? 사람들 끌어모아 머리 노릇 하는 짓이 말이냐?" '그게 뭘 어쨌다고. '데이빗은 아버지가 왜 이 난리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은 장차 아버지 뒤를 이어 라미스 공작가 주인이 되어 많은 사람을 지배할 위치에 오를 것이다. 왕의 곁에 나란히 서서 국가 중대사를 논하는 핵심인물이 될 미래를 의심한 적 없었다. 이해할 수 없으나 아버지는 항상 데이빗에게 자만심을 낮추고 아래에서 위를 보라고 했다. 데이빗이 보기에 자신은 아래로 내려다볼 자들이 개미처럼 많았다. 위에 서서 다스리는 연습을 미리 한다고 뭐가 문제인가. 그러나 데이빗은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항상 말씀하신 대로 많은 친구를 사귀려고 노력했습니다." "데이빗." 라미스 공작은 한숨을 쉬었다. 겉으로는 잘못했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반항하는 아들의 의뭉스러운 짓을 어느 정도는 눈치챘다. 그래도 나무라면 고치려는 태도를 보여서 그걸 위안으로 삼았다. 공작은 아들이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보다 멀리 보기를 바랐다. 아들의 나이 이제 겨우 스물 중반이었다. 경험도 지식도 부족한 어린 나이였다. 같은 나이에 이미 일가의 주인으로 부족함이 없는 타란 공작 같은 인물은 세기에 날까 말까 하는 난사람이었다. 천재를 일반인과 같은 범주에 두고 경쟁하려 해서는 안 된다. 천재는 천재 자신이 가는 길을 가도록 놔두고 저런 존재도 있구나, 생각하고 넘겨야 한다. 그런데 아들이 자꾸 타란 공작에게 치기 어린 경쟁심을 보이는 것 같아서 공작은 그것도 걱정이었다. 공작은 가능하면 큰아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적장자가 가문을 받아 잇는 것이 순리에 맞았다. 선례가 되고 분란의 여지가 가장 적었다. 큰아들에게서 자꾸 미덥지 못한 모습을 발견해도 넘어가는 건 그래서였다. "네가 만든 모임이 얼마나 큰 분란의 씨앗이 될 수 있는지 정녕 모르겠느냐. 신국이라니. 어떻게 그런 무도한 이름을 붙여." 데이빗은 입술을 짓이기듯 물었다.' 그거 때문이었군. '데이빗도 그 이름이 껄끄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청년회 부회장으로 있는 해리 경이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 세상의 모든 단어는 해석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정반대의 뜻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신국. 새 왕께서 즉위하시어 새로운 치세를 열어가는 뜻에 부합하는 이름이 아닙니까. 폐하께서 승하하신 선왕과 그리 좋은 관계가 아니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선왕의 그림자를 덮는 완전히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를 원하실 겁니다. ]설명을 들어보니까 매우 그럴 듯했다. "... 내부적으로만 쓰는 명칭입니다. 외부로는 청년회라고만 칭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다 조사하면 알 일을. 회칙을 만들고 회칙에서는 신국청년회로 칭하고 있지 않으냐." '그 뜻은 절 조사했다는 말씀이군요.' 데이빗은 충격과 동시에 배신감을 느꼈다. 아버지가 자신의 뒤를 캤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단지 폐하께서 새 치세를 열어 가시는데 보탬이 되고자 하는 뜻이었습니다." "속뜻이 아무리 좋아도 빌미를 만들지 않는 편이 낫다. 사방이 낭떠러지라서 매사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는 곳이 정치판이라고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예. 아버지. 말씀 깊이 새기겠습니다." "폐하에 대한 반 세력이 항상 틈을 노리고 있다. 폐하께서 널 오해하실 수도 있어." 데이빗은 부친이 안 해도 될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 왕이 왜 오해를 한단 말인가. 라미스 공작가 같은 충성스러운 가문을 믿지 않으면 곁에 누가 있어서 왕을 보좌하겠는가. 아버지는 왕의 장인이며, 누님은 왕비였다. 조카는 장차 왕위에 오를 것이다. 라미스 공작가는 완벽히 왕의 편이었다. "예. 아버지. 더 행동을 조심하겠습니다. 모임은 제가 책임지고 해체하겠습니다." "그래. 네가 말을 잘 알아들으니 안심이다. 당분간 영지로 내려가 있어라." "예? 아버지!" "자중하는 모습을 보여야지. 내가 알았으니 누군가 또 아는 사람이 있을 터. 오래 안 걸릴 게야. 1~2년 마음 수양한다고 생각하고 지내." 데이빗의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버지를 거역할 수 없었다. 아직 아버지와 비교해서 자신은 철저한 약자였다. "... 언제 가라는 말씀입니까." "이달 안으로 떠날 차비를 해라." "예."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가는 데이빗은 뒤에서 아버지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두 녀석을 반씩 섞으면 좋으련만. 로빈은 순하기만 하니..."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를 앙다물어 턱이 팽팽하게 조여들었다. 눈에서 불똥이 튀고 속에서 울컥 울화가 치밀었다. 도저히 표정을 갈무리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데이빗은 부친이 혹시라도 불러 세울까 봐 서둘러 집무실을 나왔다. '로빈...' 복도를 걸어가며 데이빗은 이를 빠득 갈았다. '제가 모르는 줄 아시겠지요. 아버지.' 공작가의 적통인 것처럼 가증스럽게 둘째 아들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우가 사실은 밖에서 들여온 자식이라는 걸 데이빗은 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는 유난히 데이빗만 싸고돌았다. 그저 장남에 대한 과도한 애정인 줄 알았다. 어머니는 누님에게도 그리 애정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조금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기도 했다. 어릴 때 뭘 몰라 잠시 가졌던 마음이었다. 15살 생일에 저택에서 성대한 사교계 데뷔 파티를 열었다. 그날 밤 평소 그런 적 없는 어머니가 잔뜩 취해서 데이빗의 침실을 찾아왔다. 어머니는 울면서 진실을 털어놓았다. [ 데이빗. 내 아들. 이 어미는 그 애를 볼 때마다 속이 찢기는 것 같았단다. ]로빈은 아버지가 사랑한 다른 여자에게서 본 자식이었다. 사생아임을 드러내고 입적해 키우는 다른 집과 달리 로빈을 진짜 공작부인의 아들인 것처럼 키우도록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요구했다고 들었다. [ 너보다 2살 어리다고 되어 있으나 사실 너보다 몇 개월 늦게 태어났어. 내가 널 품고 있을 때 그 계집도 아이를 품고 있었던 거야. 그걸 알았을 때 이 어미의 처참한 심정을 알겠니? ]로빈의 친모는 아이를 낳고 죽었고 아버지는 로빈을 데리고 왔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아들로 키워달라고 요구했다. 로빈은 7살 때까지 외갓집에서 자랐다. 몸이 약해서 그랬다는데 진실은 따로 있었다. 어머니는 그 후 한 달에 두세 번은 술을 마시고 데이빗을 찾아와 신세 한탄을 늘어놓았다. 데이빗은 어머니의 가슴에 그렇게 많은 한이 있었는지 몰랐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어머니가 가여웠다. 다른 여자 아들은 제 아들인 것처럼 키우며 속이 문드러졌을 어머니가 마음 아팠다. 그리고 아버지가 미웠고, 배다른 동생인지도 모르고 로빈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누님이 원망스러웠고, 로빈에게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아버지는 자신과 로빈을 바라보는 눈이 달랐다.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질책만 하면서 로빈을 바라보면서는 흐뭇하게 웃었다. 라미스 공작은 장차 뒤를 이을 아들에 대한 후계자 수업을 했을 뿐이지만, 데이빗의 잔뜩 꼬인 심사는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데이빗의 가슴 속에서 분노는 점점 자라고 있었다. 어머니는 누님이 왕비가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데이빗은 그것도 가슴 아팠다. 비록 어머니와 누님 사이가 데면데면했으나, 그래도 어머니는 누님이 태자비가 된 것을 은근히 자랑스러워했다. 데이빗은 언젠가 부친이 돌아가시고 공작위 자리에 오르는 날.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로빈. 언제고 반드시 네 녀석 목을 내 어머니 영전에 바쳐 어머니 한을 풀어드리고 말겠다.' 데이빗은 청년회 해체 얘기할 겸, 술로 심란한 마음을 달랠 겸 부회장 해리 경과 함께 주점으로 갔다. 고객의 비밀 보존을 위한 개별 방으로 꾸며진 고급 주점이었다. "이대로 해체는 무척 안타깝습니다. 이제 겨우 자리 잡아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라미스 경." "어쩔 수 없소. 아버지께서 저리 난리이시니. 나는 수도를 떠나야 하고." "그러면 제게 일임해 주시면 겉으로는 라미스 경과 무관하게 모임을 이어가겠습니다. 라미스 경이 수도를 잠시 떠나 계신 동안에 더욱 기반을 공고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래를 위해 숨겨둔 힘을 만들어 두셔야지요." 데이빗은 귀가 솔깃했다. 해리 경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겨우 만든 모임을 이대로 버리기는 아까웠다. "그럼 해리 경에게 맡기겠소. 지원은 해줄 테니 부디 내 힘이 되어 주시오. 해리 경 같은 인재를 곁에 두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오." "과찬의 말씀입니다. 저는 장차 라미스 경을 모시고 중대한 일을 하시는 데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데이빗은 기분 좋게 웃으며 해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해리는 황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속으로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디 가서 이런 물주를 찾을 수 있겠는가. 공작가 후계라는 큰 이름에 숨어서 세력을 키우는데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었다. 데이빗이 멍청하지는 않으나 기본적으로 누가 제 위에 있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똑똑한 자가 머리를 숙이면 아주 좋아했다. 그 점을 파고들어 기분만 잘 맞춰주면 다루기 쉬웠다.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아버지가 괜히 내 뒷조사했을 것 같지 않소. 분명히 누군가의 음해가 있었을 거요." "타당한 말씀입니다. 짐작 가는 곳이라도 있는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타란 공작밖에 없소. 그자가 그전부터 날 은근히 경계하고 있었지." 타란 공작이 미쳤다고 공작가 후계에 불과한 애송이를 상대로 날을 세울까. 해리는 데이빗의 근거 없는 자만심을 비웃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열심히 맞장구를 쳐 주었다. 해리의 위로와 칭송을 들으며 데이빗의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슬슬 자리를 파하고 일어날 때쯤 직원이 데이빗에게 메모를 전달했다. '주점 주인이 왜 날 보자는 거지?' 데이빗은 해리를 보내고 잠시 기다렸다. 방이 열리고 들어오는 사람을 보며 데이빗의 눈이 커졌다. 뜻밖에 매혹적인 젊은 미인이었다. 말려 올라간 입꼬리로 여자는 데이빗을 향해 사르르 웃었다. "고명하신 분을 이리 뵈어 영광입니다. 아니타라고 합니다." 루시아는 하녀가 깨우는 소리에 부스스 일어났다. 아직 어둑어둑했다. 어제 하녀에게 남편이 나가기 전에 깨워달라고 일러 놓았다. 루시아는 기지개를 켜며 힘겹게 잠을 몰아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매일 이런 꼭두새벽에 일어나다니 그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고 잠에서 깨려고 차가운 물을 한 잔 마셨다. "그이는 침실에 계시니?" "집무실에 들어 계십니다. 한 시간쯤 후 출타하실 예정이라서 마차를 준비 중입니다." 루시아는 제롬에게서 집무실로 들이려는 찻쟁반을 넘겨받았다. "집사 일을 빼앗아 미안해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마님." 문을 두드릴 필요 없이 그냥 들어가면 된다는 제롬 말에 따라서 루시아는 조용히 집무실로 들어갔다. 조금 서늘한 공기,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옅은 고가구 냄새. 문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널찍한 책상이 있고 책상에 앉아 일에 골몰한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루시아는 몇 걸음 걸어서 그를 조금 더 자세히 볼 수 있는 거리에서 멈추어 섰다. 조용한 집무실에서 들리는 소음이라고는 종이를 넘기는 작은 소리뿐이었다. 널찍한 책상 위에는 한 틈의 공간도 용납하지 않는 것처럼 빼곡하게 이것저것 널려 있었다. 마구잡이로 어지럽지는 않으나 서류와 책 등이 나름대로 질서를 갖추어 즐비했다. 여유 공간이라고는 그가 앉은 앞자리에서 일을 처리하기 위한 너비 정도로 얼마 되지 않았다. 루시아는 그가 일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이렇게 차를 가지고 집무실에 들어온 것도 처음이었다. 북부에서 지낼 때 초반에는 그의 집무실에 남들이 봐서는 곤란할 기밀 서류들이 잔뜩 있을 테니까 그런 걸 보기 위해서 드나든다는 의심을 주고 싶지 않았고, 나중에 가서는 혹시 그를 방해할까 봐 염려해서 집무실 근처는 가지 않았다. 집중해서 일하는 그의 모습은 정말 근사했다. 루시아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녀의 얼굴이 홍조를 띠었다. 일을 방해하기 무척 미안했다. 가만히 서서 그를 보기만 해도 좋았다. 멀찍이 싱그러운 새소리가 들리는 고요한 아침의 평화로움이 좋아서. 루시아는 우두커니 서서 그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작품 후기 ============================아리이꾼 님, wvxdyahoo 님, 퍼플케이브 님, 키즈트리 님, 와키루 님, 상크미♡ 님, wsrnc1 님, ?이슬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7시 7분에 올리는 건 예약 아이템 사용입니다~시간을 정해서 올리니까 마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쓰는데 도움이 되더라구요. 읽는 분들도 찾아 보기 쉬울 거구요. < -- 사랑합니다 -- > 휴고는 어떤 일에 집중하더라도 사람이 다가오는 기척에는 항상 민감했다. 어릴 때의 처절한 삶, 그리고 전쟁터에서의 생활이 그에게 주변을 항상 경계하라고 가르쳤다. 언제나처럼 제롬이려니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들어온 기척이 있으나 다가오는 기색이 없었다. 의아해서 고개를 들었다가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멋쩍어서 배시시 웃는 그녀를 보며 휴고는 잠시 굳었다. "... 비비안?" 그녀를 볼 수 있다고 기대하기 어려운 시간과 장소였다.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오는 그녀는 분명히 현실이었다. 휴고는 펜을 쥔 자세 그대로 찻쟁반을 책상에 내려놓는 그녀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제가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루시아는 찻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랐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찻잔을 그의 손이 닿을 위치에 내려놓았다. "아니야." 휴고는 재빠르게 대답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오래 걸려도 괜찮은데. 휴고는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릿속에서 조금 전까지 골치 아프게 구상하던 복잡한 일들이 훅 불어온 바람에 날린 듯 사라졌다. 다시 생각의 고리를 만들려면 다소 성가시겠으나 그런 건 상관없었다. "오늘 당신 생일이에요." "... 생일...?" 뜬금없는 소리를 듣는다는 그의 표정으로 루시아는 역시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짐작을 확신으로 굳혔다. "집사는 당신이 생일이 챙기지 않는다고 했어요. 어쩌면 당신은 기억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생일. 휴고는 살면서 그것에 의미를 둔 적이 없었다. 어릴 때는 제 생일이 언제인지 몰랐고 로암에 와서는 형제의 생일을 알면서 쌍둥이니까 생일도 같겠다고 판단해서 비로소 태어난 날을 알았다. 쌍둥이 형제 대신 소공자 노릇을 하며 생일상을 받았으나 그건 소공자 휴고의 생일이었다. 진짜 제 생일을 축하한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공작위에 오른 후에는 챙기지 않았다. 누군가 상기시키려 해도 거부했다. 생일로부터 얼마 후가 형제의 기일이었다. 생일보다도 그날이 더 신경 쓰였다. 그래서 생일 같은 건 언제부턴가 아예 잊어버렸다. "저는 당신 생일을 축하하고 싶어요." 루시아는 북부에서 결혼 후 처음 맞은 그의 생일을 그냥 지나친 일이 항상 걸렸다. 그가 생일을 챙기지 않는 이유가 그의 비극적인 가족사와 관련되었다고 생각해서 마음이 안 좋았다. 사람이면 누구나 살면서 크던 작던 상처를 입는다. 그는 강한 사람이지만, 강해도 다칠 수 있고, 다치면 아프다. 루시아는 꿈속에서 매우 아팠고 아픈 것보다 더 힘든 일은 "그래, 너 아팠구나." 라고 말하며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루시아는 자신이 그에게 그런 위로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건 제 선물이에요." 루시아는 찻쟁반에 얹어 두었던 작은 상자를 책상에 올려 그를 향해서 밀었다. 휴고는 선물 상자와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의 몸을 타고 흐르는 피는 저주였다. 그의 생일은 저주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탄생이 축하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굉장히 낯선 기분이었다. "안 돼요! 지금 보지 마세요." 선물로 손을 뻗던 휴고는 그녀의 외침에 멈칫했다. "나중에요. 저 보는 데서 말고요. 변변치 않은 선물이라... 창피해요." 제롬이 손수건 말을 꺼내고 나서 루시아는 면 손수건에 그의 이름자를 넣어 수를 놓았다. 그의 생일 선물을 목적으로 시작한 수놓기가 아니었다. 한 장은 정 없어 보여서 한 장 더 만들고, 둘보다는 셋이 나을 것 같아서 석 장의 손수건을 완성하고 보니까 그의 생일이 다가와 있었다. "선물에 그런 게 어딨어." "그래도. 나중에 보세요." 생일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볼품이 없었다. 그는 루시아의 생일에 값비싼 목걸이를 선물로 주었는데. 루시아는 그가 실망할까 봐 두 볼이 화끈거렸다. 생일 선물이라고 하지 말고 차라리 나중에 의미 없이 그냥 주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우물쭈물하는 그녀를 보며 휴고는 피식 웃었다. "알았어. 당신 없을 때 볼게." "당신 생일 선물로 뭘 해야 할지 떠오르는 것이 없었어요. 당신 돈으로 당신 선물을 하는 거니까." 휴고는 그녀의 생각이 재미있어서 웃었다. 가문 안주인에게 상당한 예산이 매년 책정된다. 그 돈은 엄연히 안주인의 사재였다. 그런데 여전히 그녀는 그 돈을 공금으로만 생각했다. 공금이라는 말이 반드시 틀리지는 않았다. 연말까지 남은 예산은 반환함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반환하는 귀부인은 없었다. 안주인이 결혼 생활 중 구매한 보석 소유권은 안주인에게 있었다. 이혼할 때 보석은 위자료에 포함하지 않고 모두 가져갈 수 있었다. 연말이 되면 보석상이 북적이는 건 그래서였다. 그녀는 지난 연말 상당 금액을 반환해서 그를 충격에 빠뜨렸다. 당시에는 이 여자가 내 돈이 싫어서 거부하나 속을 끓였지만, 이제는 그녀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안다. "휴.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도록 해 준 당신의 생일은 축복받아 마땅해요. 당신께 생일이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휴고는 일어나서 한걸음에 그녀에게 다가가 끌어안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받은 생애 최고의 선물이었다. "고마워." 가슴이 벅차올라서 휴고는 그녀를 더 꼭 안았다. 품 안 가득한 따스한 온기는 그의 마음도 따뜻하게 덥혔다. 은은하게 주변을 떠도는 차향과 뒤섞이는 그녀의 향이 좋아서 휴고는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저는 그만 방해하고 나가볼게요." "괜찮아." 자꾸 들러붙는 그를 간신히 떼어내고 루시아는 집무실을 나갔다. 닫히는 집무실 문을 보며 휴고는 몹시 아쉬웠다. 괜찮다고 하는데도 기어코 그녀는 나가버렸다. 조금 전까지 부드럽게 잡혔던 그녀의 느낌을 떠올리며 손을 바라보았다. 매몰찬 여자 같으니라고. 조금이라도 더 안고 싶고 만지고 싶은 건 항상 자신이었다. 그는 긴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다시 일이 손에 잡히려나 모르겠다. 아내는 아침부터 깜짝 등장해서 그를 완전히 흔들고 놓고 사라져 버렸다. 오늘 하루가 진짜 길겠다. 한탄하면서 휴고는 몸을 틀어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가 두고 간 선물을 발견했다. 대체 뭐기에 없을 때 보라고 한 걸까. 그녀가 사라진 상실감이 호기심으로 차올라서 그는 조금 기분이 살아났다. 의자에 앉아서 상자를 묶은 리본을 풀었다. 상자를 열어 안을 들여다본 채 그는 가만히 내용물을 바라보았다. 곱게 접혀 들어 있는 새하얀 손수건. 상자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손끝에 까칠한 면의 감촉이 익숙했다. 모서리에 수 놓인 이름을 한참을 물끄러미 보았다. 휴고는 몸을 숙여 책상 가장 아래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안에 소중히 보관 중인 손수건을 꺼냈다. 조금 서투른 솜씨로 놓인 꽃 자수 손수건. 그리고 그의 이름이 수 놓인 손수건. 두 장을 나란히 두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책상에 두 장 손수건을 펼쳐둔 채 그것들을 한눈에 담았다. 심장이 간질거리는 것 같으면서도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고. 손대면 소스라칠 것 같은 몽글 거리는 뭔가를 만진 느낌이었다. 휴고는 자신의 기분을 정의할 수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숨이 가쁜 것도 아닌데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막연하지만 손에 잡힐 것 같은 그런 기분.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인간이 느끼는 감정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알고 있으나 느껴본 적 없는 감정들. 그는 한참을 골라서 그나마 자신의 현재 기분에 거의 유사한 단어를 찾아냈다. 감동. 이런 기분이 감동인가. 사람들은 평소에 이런 기분을 느끼며 사는 건가. 그는 처음으로 보통의 울고 웃는 감정을 누리는 사람이 부러웠다. 이런 기가 막히게 좋은걸. 문이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휴고는 손수건을 챙겨서 서랍 안에 넣고 대답했다. 제롬이 들어왔다. "외출하실 준비가 끝났습니다. 마차 앞에서 파비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하." 휴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일어났다. "들어와서 기다리라고 해." 제롬은 자신을 지나쳐 집무실을 나서는 주인에게 고개 숙여 대답했다. 찻쟁반을 정리하려고 책상으로 다가갔다. 찻잔 가득한 차는 마신 흔적이 없고 찻주전자 뚜껑을 열어보니까 다 식은 차가 남아 있었다. '차 마실 여유도 없이 일이 바쁘셨나 보군.' 아주 없던 일은 아니라서 제롬은 대수롭지 않게 찻쟁반을 챙겼다. 루시아는 침실 소파에 앉아 남아도는 시간을 이용해 데미안에게 보낼 손수건에 수를 놓았다. 아침 햇살이 날을 밝히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며 뭔가 하고 있으니 꽤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 같았다. 한 장을 완성하고 유심히 살펴보았다. 데미안 이름은 워낙 많이 수를 놓아서 아주 말끔했다. '확실히 난 자수에는 재주가 없어.' 꽤 오래 수를 놓았어도 자수 솜씨는 늘지 않았다. 똑같은 것을 수놓아서 조금 나아질 뿐이지 도안을 바꾸면 다시 엉성한 솜씨로 되돌아갔다. 그에게 선물한 손수건을 떠올리자 낯부끄러웠다. 그의 이름은 낯선 도안이라서 그리 능숙한 완성도를 보이지 못했다. "물 한 잔 가져다주련." 구석에 앉아 있을 하녀에게 말했다. 유리잔이 갑자기 머리 위에서 얼굴 앞으로 내려오자 루시아는 하녀의 무례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소파 뒤에서 팔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기대왔다. 익숙한 느낌과 체취였다. "휴." "아침부터 열심이군." 루시아는 물잔을 받으면서 손에 들린 바느질감을 옆의 바구니에 담았다. '선물을 봤구나.' 얼굴이 화끈거려서 물을 들이켰다. 저녁에 선물을 주면 바로 얼굴 볼 일이 민망해서 일부러 아침에 가져다주었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그 때문에 무안했다. "당신은 너무 녀석에게 정성이야." "... 네?" "자식 같은 거 소용 있는 줄 알아? 다 제 살 길만 찾는다고." 루시아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고생고생해서 자식 번듯이 다 키워 놓고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는 나이 지긋한 사람처럼 말했다. "당신 몫까지 제가 하는 거죠. 당신은 너무 관심을 안 보이니까요." "사내아이는 끼고 키우는 거 아냐." "그렇게 끼고 돌지도 않았어요. 지금 나가시는 거지요?" 루시아는 뒤에서 두르고 있는 그의 팔을 풀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가 느지막이 나가는 경우가 아니면 이런 이른 시간에 그를 배웅한 적이 없었다. 매일 하지는 못해도 가끔은 해볼까. 루시아가 잠시 생각하는 사이에 어느새 그가 그녀 앞으로 확 다가왔다. "비비안." 대답하기 전에 그가 허리를 당기고 뒷목을 누르며 그대로 입술을 붙였다. 그녀의 아랫입술을 쭉 빨아들이고 벌어진 그녀의 입안으로 깊이 침범했다. 맞닿은 혀가 그녀의 혀를 휘감았다. 손끝이 짜릿했다. 루시아가 짧은 신음을 흘리며 그의 가슴에 짚은 손을 떨었다. 잠시 물러난 그의 혀가 목 안을 건드리고 입천장을 훑었다. 갑자기 시작된 그의 진한 키스에 루시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의 팔 안에 잡혀서 그가 이끄는 대로 뒷걸음질쳤다. 소파에 걸려서 주저앉는 그녀 몸 위로 그도 몸을 숙였다. 반쯤 누운 것처럼 기댄 그녀 위로 그가 타고 올랐다. 루시아는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았다. 입안 구석구석 애무하는 짙은 입맞춤이었다. 몸의 열기를 끌어올리고 갈망을 불어 일으켰다. 인사로 나누는 상큼한 키스가 아니었다. 여자를 갈구하는 사내의 유혹이었다. 일찍 일어나서 노곤했던 몸이 몽롱하게 풀어졌다. 침실 구석구석이 또렷이 보이는 환한 아침, 예상치 못하게 덤벼드는 남자 때문에 루시아는 당황하면서 동시에 달아올랐다. 색정적인 그의 키스에 그녀는 쉽게 무너졌다. 그의 입술이 귓가에 닿고 턱 아래에 붙이고 목을 따라 내려갔다. 그의 손이 옷 위로 가슴을 움켜잡자 그녀의 몸이 흠칫했다. "휴. 당신, 나가.. 나가셔야 하잖아요." "일정이 미뤄졌어." 기다리고 있는 파비안이 들었으면 뒷목을 잡을 소리였다. "대체 왜 안 내려오시는 거야. 지금 출발하셔도 아슬아슬한데." 파비안은 제롬의 업무실 안에서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중요한 일정이야?" "중요하지 않은 일정은 없어!" '취소하지 못할 일정도 없지.'라고 제롬은 생각했다. 주인은 성실해 보여도 은근히 제멋대로였다. "너 이렇게 내 일 아니다, 하지 말고 올라가 봐. 모셔오라고." 제롬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항상 바쁜 집사가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제롬은 오전 시간의 여유를 즐겼다. "두 분만 침실에 계실 때는 2층에는 누구도 얼씬 안 해." "왜?"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냐. 한심하게 자신을 보는 제롬의 시선을 받고 파비안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씩씩거렸다. "야! 아우 진짜. 내가 올라가서 모셔오련다!" "그럼 난 제수씨에게 연락해야 하겠네." "그건 왜?" "네 장례식에 쓸 꽃을 준비해 두라고." 파비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표정으로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갔다. 제롬이 혹시 정말 형제 장례식을 치를까 걱정되어 "어디 가냐." 라고 물었다. "취소되는 일정들 수습하러 간다!" 요란하게 쾅 소리 내고 문 닫고 나가는 모습을 보며 제롬은 "갈수록 저 녀석, 울뚝밸이 심해지네. 제수씨에게도 저러는 건 아니겠지." 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느긋하게 남은 차를 마셨다. ============================ 작품 후기 ============================매쉬매리골드 님, abcde123 님, 푸푸딩 님, eonchu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지난번 데이빗 출연이 많다고 성토를 하시는군요. 이 소설 그래도 주인공들이 굉장히 많이 나오는 편 아닌가요?주변 사람 얘기도 좀 해야 이야기가 나가죠. ㅋㅋㅋ지난번 데이빗 출연이 많다고 성토를 하시는군요. < -- 사랑합니다 -- > 휴고의 손이 발목에서부터 치맛자락 안으로 종아리를 타고 허벅지까지 더듬어 올라갔다. 그리고 치마 안에 몇 개 겹쳐 입은 속옷들, 팬티와 슈미즈를 단번에 아래로 끌어내렸다. 무릎 아래로 걸리는 속옷을 그를 아예 벗겨 바닥에 던졌다. 갑자기 하체로 바람이 들어오자 루시아는 다리를 오므렸다. 꽉 붙인 허벅지 안쪽으로 그의 손이 파고들었다. "흣..." 루시아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주 가끔, 밤의 연장 선상으로 아침에 그가 침대에서 추근거리다가 정사로 이어지는 경우는 있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덤비는 건 처음이었다. 놀라고 창피하고, 한편으로 그녀도 흥분으로 고조되었다. 그의 입술이 목덜미를 지분대면서 손은 옷 안으로 들어와 맨가슴을 잡아 주물렀다. 또 다른 손이 이슬이 맺히는 여린 살을 문질렀다. 애액으로 미끌 거리는 질 입구를 손가락이 찌르고 들어왔다. 깊지는 않게 몇 번을 들어왔다가 나가기를 반복했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젖은 마찰음을 냈다. "아!" 손가락이 어딘가를 건드리자 루시아는 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목에 자잘한 입맞춤을 하던 그가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루시아는 발갛게 달아오른 눈시울로 그를 보았다. 밝은 빛으로 그의 붉은 눈동자가 한층 선명해 보였다. 눈동자 속에 이글거리는 불꽃은 마치 그녀를 다 삼킬 것 같았다. 질 안쪽을 누르던 그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휴고는 그녀의 팔을 잡아 품으로 안아 들어서 자신이 소파에 앉은 후 허벅지 위에 그녀를 앉혔다. 그녀의 머리를 어깨에 기대게 한 후 등 뒤의 길게 이어진 단추를 풀었다. 그는 몹시 조급했으나 단추를 푸는 조금 성가신 과정을 즐길 여유도 있었다. 허리까지만 있는 단추를 모두 풀어서 그녀의 상체만 벗겨냈다. 소매가 없는 얇은 속옷은 위로 벗겼다. 또 다시 나온 가슴을 가린 속옷을 그대로 잡아 아래로 당겼다. 출렁 흔들리며 드러난 젖가슴을 한입에 삼켰다. "아..." 그의 손이 허리를 붙들고 루시아의 가슴을 물었다. 빳빳하게 일어난 유두 끝을 그가 혀로 굴리며 입술 사이에 물고 지그시 힘을 주어 비볐다. 루시아는 두 팔로 그의 머리를 감싸 안고 숨을 헐떡였다. 등 뒤로 오도도 소름이 쭉 돋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저린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혀끝이 유두의 정점을 파고들 것처럼 간질이자 루시아는 신음을 흘렸다. 하복부가 아프게 죄어들고 뜨거운 물이 샘을 따라 흘렀다. 그가 몸을 들썩여 바지를 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골반을 잡아 가까이 당겼다. 허벅지를 잡아 그녀의 몸을 조금 일으켜 세우고 조금씩 움직였다. 치맛자락에 덮여 보이지 않아서 감각에 의존해야 했다. 루시아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움직이다가 꿈틀거리는 살덩이가 다리 안쪽에 닿자 흠칫 놀라 몸이 경직되었다. 작은 입구에 맞닿은 뭉툭한 끝을 느끼며 그가 끌어당기는 대로 천천히 앉았다. 뜨거운 살덩이가 좁은 문을 열고 길을 찾아 들어갔다. "흑...." "후우..." 완전히 둘의 하체가 맞물렸다. 휴고는 그녀의 몸을 두 팔로 끌어안아 고개를 묻었다. 꽉 조이는 그녀의 안은 매끄럽고 뜨거웠다. 좋아서 죽을 것 같다. 하복부가 통증처럼 욱신거렸다. 심장이 뛰는 것처럼 그녀의 샘 안에 담근 중심이 쿵쿵거리며 울렸다. 그는 이를 사려 물고 더 꽉 그녀를 안았다. "아.. 하아..." 루시아는 기진맥진해서 숨만 몰아쉬었다. 온몸은 땀으로 젖고 하체에서는 그가 쏟아낸 체액이 허벅지와 엉덩이를 타고 흘렀다. 엎드려 누워 있는 루시아의 목덜미를 그가 깨물었다. 통증마저 쾌감으로 변해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멱이 물린 초식 동물이 된 것처럼 루시아는 반항하지 못하고 그에게 몸을 내주었다. 그의 손이 엉덩이를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이미 녹진하게 풀어진 다리 사이 좁은 길을 도무지 기세를 잃지 않는 단단히 곧추선 그가 헤집고 들어왔다. "흣.. 으응.." 땀에 섞인 그의 체취와 알싸한 밤꽃향이 진동했다. 루시아는 눈앞이 흐려져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가 두 팔로 침대를 디디면서 짧고 빠르게 쳐올렸다. 단단한 끝이 안을 찌를 때마다 루시아는 신음을 흘렸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자극에 숨이 막혔다. 구겨진 시트마저 선명히 보이는 환한 아침. 커튼을 모두 활짝 열어 둔 침실 안은 지나치게 밝았다. 그와 아침부터 이러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없는 죄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방탕한 생활이라니. "휴.. 지금 몇 시..." "글쎄." 그의 커다란 손이 루시아 골반을 잡아들자 몸이 딸려 올려갔다. 시트에 닿은 볼이 스륵 끌리며 마찰했다. 몸을 가득 채우고 있던 그가 허리를 뺐다. 몸 안의 가득하던 그가 천천히 빠져나가는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저절로 허리가 떨려온다. 그리고 그는 살이 부딪쳐 철썩 소리가 나도록 잔인하게 몸을 쪼갤 것처럼 들어왔다. "아!" "시간은 많아. 비비안. 안달할 필요 없어." 휴고는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며 탁한 음성으로 말했다. 몰아쉬는 두 사람의 호흡 소리에 맞추어 시트에 몸이 끌리며 버석거렸다. 젖은 살 부딪치는 소리가 몸서리치게 야했다. "누가.. 흣. 안달한다고.." "당신 몸이 안달하는걸. 날 무는 당신 안쪽이 얼마나 야한지 알아?" 좁고 쫀득하게 누르는 속살의 주름이 그의 성기를 끊임없이 자극했다. 아내의 몸은 그를 언제나 미치게 했다. 단순히 육체적 쾌락 그 이상의 충만함을 느꼈다. 그녀를 안으면 쾌락의 절정 이후에 허무함이 없었다. 오랜 굶주림을 겪다가 양껏 배를 채운 것처럼 만족스러웠다. 루시아는 그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버겁도록 힘들어도 몸은 끊임없이 반응했다. 그와의 정사는 루시아에게 항상 기쁨이자 고통이었다. 힘들지만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그가 주는 쾌감이 그러했다. 몇 번이고 퍽퍽 들이박히다가 서서히 밀려오던 쾌감의 파도가 거대한 해일이 되어 그녀를 덮쳤다. 눈앞이 아득하게 멀어지고 의식이 깊은 곳으로 떨어졌다. 온몸의 잔털이 다 일어나는 것 같았다. "아아아앗!!" 온몸을 파드득 떨며 교성을 지르자 뒤에서 그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절정을 느끼며 제멋대로 움직이는 내벽 안을 단단한 성기가 몇 번이고 쑤시고 들어왔다. 루시아는 뇌가 곤죽이 되어 버리는 것 같은 쾌감에 제대로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입만 벌리고 바들바들 떨었다. 그가 강하게 치닫더니 목을 울리며 신음했다. 이내 뜨거운 정액이 왈칵 거리며 안에 쏟아져 들어왔다. 수없이 겪었어도 여전히 낯선 감각이었다. 루시아는 흠칫 거리며 숨을 할딱였다. 내벽을 꽉 채우며 압박하던 거대한 성기가 쑤욱 빠져나갔다. 팔이 그에게 잡히고 힘없이 몸이 돌려졌다. 무심결에 시선을 내리자 그의 중심에 자리 잡은 성기는 애액으로 번들거리며 벌써 힘을 받아 일어나고 있었다. '... 아.. 못살아 정말.' 루시아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손이 턱을 잡아 돌려 벌어진 입술을 덮었다. 입술을 빨아들이다가 입안으로 들어온 혀는 거침없이 안을 헤집고 구석구석 훑어갔다. 그와 혀가 맞닿아 스칠 때마다 짜릿한 감각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농밀한 키스는 길게 이어졌다. 마무리처럼 아랫입술을 쪽 소리 내서 입을 맞추고 목을 베어 물었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 이를 세우고는 따끔한 감각이 느껴지도록 빨아들였다. "으응. 휴. 목에 자국..." 북부에서 지낼 때 신혼 초기 말고는 그는 목덜미 등 보이는 곳에 흔적은 가급적 남기지 않았다. 루시아가 질색했기 때문이었다. "사라질 때까지 집에 있어." "왜 그래요 진짜. 당신. 갈수록 심술이 늘어요." 휴고는 종알거리며 타박하는 그녀의 등을 받치고 늘어진 몸을 잡아 일으켰다. 그녀의 팔을 잡아 자신의 목에 팔을 두르게 했다. 루시아는 호흡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그의 허벅지에 걸터앉았다. 지쳐 감기는 눈꺼풀을 그가 끈질기게 쪼아대는 것처럼 입을 맞추었다. "내가 심술이 늘어?" "고용인들에게 보이기 싫어하는 거 점점 더하잖아요." "흐음. 진짜 심술이 뭔지 보여줘?" "이런 게 심술이에요!" 루시아는 웃는 그를 흘겨보았다. 그가 양손으로 루시아 턱을 부여잡고 입술과 콧등에 반복해서 키스했다. "휴. 멀었어요?" "음. 아직." 그만하자는 말이었는데 그는 한술 더 떴다. 기가 막혀서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허리를 뒤틀었다. 그는 오히려 그녀의 양쪽 허벅지를 움켜잡아 들어 올렸다. 루시아는 포기하고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단단한 기둥이 다리 사이 질벽을 타고 쭉 빨려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움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찌르르한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갔다.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지쳐도 몸은 착실하게 반응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아.. 응.." 그가 허리를 튕겨 올릴 때마다 몸이 아래위로 들썩거렸다.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루시아는 앓는 신음을 흘렸다. 그렇게 몇 번이고 흔들리다가 다시 몸이 눕혀졌다. 옆으로 누운 상태에 포개어진 다리 사이로 그가 깊이 들어왔다. "흐읏.."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바람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그 와중에도 내벽은 그의 것을 조이며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이래서는 그만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민망했다. 그가 가느다란 루시아의 발목을 잡아 벌렸다. 정면으로 눕게 되면서 묵직한 압박감이 밀고 들어왔다. 깊지는 않게 얕은 삽입이 속도감 있게 이어졌다. 기력은 다 바닥나 손가락도 꼼짝 못 하겠는데 자극은 계속 이어졌다. 흐릿한 시선으로 보이는 그의 유려한 근육 가득한 몸이 땀이 반사되어 번들거렸다. 그녀를 탐하고 있는 남자의 눈이 욕망으로 가득 차 넘쳤다. 루시아는 그가 자신을 원하는 지금의 뜨거움이 기뻤다. 하복부가 욱신거리며 꽉 죄어들었다. 그가 인상을 쓰며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이 야해서 자극받은 그녀의 안쪽이 다시 좁아졌다. 그가 신음을 삼키며 잠시 움찔했다가 다시 움직임을 재개했다. 루시아는 가냘픈 신음을 흘리면서 순식간에 짧은 수마에 빠졌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잠들어 버렸다. 따뜻하고 나른한 기분으로 루시아는 눈을 떴다. 뽀얀 증기가 공기 중에 떠돌고 있고 따뜻한 물이 가슴께에서 찰랑거렸다. 등 뒤에 맞닿은 널찍한 가슴의 단단한 근육이 루시아 몸을 기대게 하고 팔 하나는 그녀 허리를 휘감아 지탱하고 있었다. 루시아는 눈을 깜빡이며 주변 상황을 파악했다. 그가 루시아를 안은 채 욕조 안에 앉아 있었다. "휴... 지금 몇 시예요?" "몰라. 왜 자꾸 시간을 물어." 휴고는 그녀의 뒷목에 입술을 진득하게 붙였다. 목덜미를 따라 어깨로 입맞춤을 이어갔다. "당신 오늘 안 나가세요?" "나갔으면 좋겠어?" 들려오는 목소리가 뚱해서 루시아는 그의 표정을 연상하며 웃었다. "바쁘신 분이 예정에 없이 느긋해서 드리는 말이에요." "오늘은 안 바쁜 날로 정했어." 파비안이 진땀 쏟으며 열심히 수습 중이었다. 휴고는 고생 중인 파비안에게 조금도 미안한 마음이 없었다. 그게 수하가 할 일이었다. 이만한 월권도 없으면 무슨 덕을 보겠다고 밤낮으로 일에 치여 사는 삶을 감수할까. 휴고는 허리를 안고 있던 손으로 가슴을 잡아 민감한 정점을 잡아 문질렀다. 다른 손이 그녀의 다리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루시아는 그의 손이 스쳐 지나가는 곳이 자극될 때마다 흠칫 몸을 떨었다. 그가 두 손으로 가슴을 쥐더니 손가락을 움직이며 애무하고 뒷목을 따라 짙게 입맞춤을 했다. 희미하게 신음하며 루시아는 턱을 들어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댔다. 눈을 감고 그가 해주는 애무의 야릇한 감각에 빠져들었다. 휴고는 고개를 틀어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할짝 입술만 몇 번 핥던 그가 아랫입술을 살짝 물며 빨고 벌어진 입안으로 혀를 넣었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루시아 입안 구석구석을 더듬었다. 두 혀가 스치듯 닿았다가 떨어지고 서로의 입술을 삼킬 것처럼 깊이 붙은 입술이 움직였다. 그는 혀를 깊이 넣어 입안을 건드리다가 입술만 빨아들이기를 반복했다. 숨이 찰 무렵에야 긴 키스가 끝나고 가슴을 주무르던 손이 내려가 루시아 허리를 잡아 들어 올렸다. '아...' 곤두선 성기가 질벽을 타고 느릿하게 들어왔다. 물속이라 그런지 조금은 둔한 느낌이었지만 끝까지 다 들어와 그의 허벅지에 앉자 몸속 깊은 곳이 저릿했다. 아래에서부터 꽉 채우는 압박감에 숨을 몰아쉬는데 그가 허리를 쳐올렸다. "흣-" 몸이 앞으로 쏠리는 것을 그의 팔이 가슴 앞을 가로질러 잡아주었다. 그 팔을 두 손으로 교차해 잡고 루시아는 그가 허리를 퉁길 때마다 아래위로 흔들렸다. 물이 철벅거리며 몸을 때렸다. "아!" 그가 빠르게 쳐올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의 열기 때문인지 루시아는 순식간에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비명처럼 단말마 신음을 흘리며 루시아는 그의 팔에 매달려 정신없이 흔들렸다. 갑자기 그가 빠져나가고 루시아 허리와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그를 바라보도록 몸을 돌려 강한 힘으로 안아 올렸다. 공중에 붕 뜨는 불안감에 되는대로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는 순간 그의 성기가 바로 아래에서 위로 찔러 올렸다. "하앗!" 단단한 기둥이 몇 번이고 안을 쑤시고 들어왔다. 강한 손아귀가 엉덩이를 꽉 잡고 그가 거침없이 진퇴를 반복했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내벽은 그의 것을 꽉 죄면서 착 달라붙어 경련했다. 오돌오돌 소름이 돋고 등허리를 타고 전율처럼 쾌락이 온몸을 후려쳤다. "아으응!" 절정에 몸을 떨며 교성을 지르고 이어서 그도 신음성을 터뜨리며 파정했다. 두 팔로 그의 목을 안고 매달린 상태로 루시아는 헐떡이는 호흡을 이어갔다. 두 사람이 아직 연결된 상태에서 그녀의 안에서 흘러내리는 체액이 그의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가 그녀를 안은 자세 그대로 다시 욕조에 주저앉았다. 그의 가슴에 기대어 따뜻한 물이 가슴께까지 차오르는 부력을 느끼면서 루시아는 눈을 감았다. "더 못해요." 그가 대답이 없자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들었다. "휴!" 그가 쿡쿡 웃으면서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한숨 자고 밤에는?" "정말 양심도 없어!" 루시아는 빽 소리쳤다. 그가 키득거리는 모습을 보며 화낼 기운도 없어서 다시 몸을 기댔다. 그의 입술이 얼굴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다 귀찮았다.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죽은 것처럼 눈을 감은 상태로 루시아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윗전에게 굴려지는 파비안 역시 누군가의 윗전이었다. 평민 출신으로 공작이라는 고위귀족 신임을 받는 파비안은 수하들의 이상이자 존경의 대상이었다. 휴고는 많은 사람에게 이것저것 시키기 성가셔서 소수 인물 몇에게 다 일임해 맡기는 편이었다. 그래서 파비안은 직위에 비해 중요한 일을 많이 처리했다. 타란 공작은 일을 많이 시켜도 수하를 괴롭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상당히 괜찮은 상전이었다. 맡기면 중간에 간섭하는 일 없고, 어지간한 실수는 인정하고 죄를 구하면 넘어갔다. 대신 결과가 기준에 부족하면 다음 기회는 없었다. 그냥 깔끔하게 직위해제였다. 어쩌면 그게 더 공포일 수 있겠지만. 그런 점에서 지금껏 자리 보존하는 파비안은 유능했다. 그리고 꽤 악명 높은 상사였다. 얼마나 달달 볶으며 일을 시키는지 파비안 밑에서 3년만 견디면 늘어나는 업무 실력에 비례해서 흰머리와 주름이 는다는 말이 돌았다. 두 다리를 책상 위에 올리고 반쯤 눕다시피 의자에 기댄 거만한 자세로 파비안은 수하들의 보고를 받았다. 수하1이 보고했다. "표적은 이상 없습니다." 수하1의 표적은 공작가 전 주치의 안나였다. 안나가 비밀 엄수 계약을 지키고 있는지 감시 중이었다. 안나는 근래 두통약 제조로 돈을 긁어모으고 있었다. 파비안은 안나의 일상을 대충 간추린 보고서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 봐." 라고 말했다. 수하1이 나가고 바로 다음 사람이 들어왔다. 수하2의 표적은 팔콘 백작부인이었다. 파비안이 그냥 무조건 싫어하는 여자. 주군 명으로 팔콘 백작부인을 찾아가 경고를 빙자해서 약을 올려주고 왔던 날은 속이 시원했다. "표적의 특별한 움직임은 없습니다. 사업 문제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일도 요즘은 뜸합니다. 몇 개 가지고 있는 주점 운영에 열심입니다." 보고서를 살폈다. 아침부터 밤까지 거의 주점에서 살다시피 하는 것 외에 눈에 띄는 점은 없었다. 적극적인 여주인 노릇으로 손님을 끌어서 오히려 주점은 전보다 잘 되고 있었다. "나가 봐." 다음에 들어온 수하3의 표적은 데이빗이었다. "표적은 곧 수도를 떠날 준비 중입니다. 요즘은 매일 저녁마다 주점에 들르는 일 외에 눈에 띄는 행적은 없습니다." "주점이라... 주점에서 만나는 사람은 없고?" "혼자 움직입니다. 동행하는 자는 없었습니다." 파비안은 보고서를 들추었다. "비관해서 술독에 빠진 건가." 데이빗이 매일 드나든다는 주점 정보를 보는 파비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주점 이름이 눈에 익었다. 파비안은 팔콘 백작부인 보고서를 펼쳤다. 백작부인이 소유한 주점을 확인했다. 동일한 주점이었다. '우연인가?' 팔콘 백작부인은 술장사에 재주가 있었다. 신분과 지닌 부에 따라 입장객 수준이 다른 주점을 여럿 가지고 있으며 모두 성행 중이었다. 주점은 완전히 백작부인의 소유라서 투자금이 빠졌을 때도 전혀 타격이 없었다. 데이빗이 드나드는 주점은 고급 주점으로 귀족들이 즐겨 찾았다. 그런데 뭔가 석연치가 않았다. "표적이 주점에서 누구와 접촉하는 더 알아봐. 직원과 말 한마디 나눈 것도 보고해." "예." 이후 줄줄이 수하들의 보고를 들었다. 파비안이 자신의 업무에 가장 보람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 작품 후기 ============================샨시아 님, 얼음들 님, ssin04 님, sodamm 님, 퍼플케이브 님, 초낭자 님, 세잉 님, 허롱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샨시아 님, 얼음들 님, ssin04 님, sodamm 님, 퍼플케이브 님, 초낭자 님, 세잉 님, 허롱 님 쿠폰 감사합니다. < -- 사랑합니다 -- > 파비안은 휴고가 특별히 눈여겨보라고 지시한 자들에 대한 중간보고를 위해 공작저에 들렀다. 데이빗이 모임에서 공식적으로 탈퇴하고 부회장 해리 남작이 회장직을 맡아 청년회를 지속했다. 모임의 명칭을 미래청년회로 바꿨고 구성원 일부가 탈퇴하는 등 약간의 변화 말고는 기존의 모임과 거의 동일성을 유지했다. 청년회 회원 모두의 인적 사항을 기록한 보고서를 넘겨보며 휴고가 말했다. "모임 지원은 여전히 그놈이 한다는 거군." 데이빗은 탈퇴했으나 비공식적으로 여전히 청년회에 자금을 지원했다. "예. 그자의 측근이 표적을 만나 자금을 건넸습니다." '호부 밑에 견자가 태어나기도 하는군.'라고 휴고는 생각했다. 라미스 공작에게 어떻게 이런 아들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영지로 내려갔다지." "예. 며칠 전에 떠났습니다." 언제고 수도로 돌아오겠지만, 당분간 눈앞에서 사라졌으니 휴고는 더는 데이빗을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관심을 둘 시간이 아까웠다. 지금은 모임을 이끄는 해리를 비롯한 몇 명의 활동을 주의 깊게 지켜보다가 이용할 기회가 닿으면 잘 써먹고 싹 치워버리려고 생각 중이었다. "모임의 활동과 핵심 인물들 행적을 계속 주시하도록." "예. 전하. 하온데, 보고서로 드리지는 않았으나 고할 일이 있습니다. 그자가 영지로 내려가기 전에 매일같이 주점을 드나들었는데 팔콘 백작부인 소유의 주점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보고서를 넘겨보던 휴고가 시선을 들었다. 예상 못 한 인물의 등장이었다. 팔콘 백작부인? 휴고는 이미 그 여자를 오래전에 잊어버렸다. 투자금 빼라고 지시한 이후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다. 휴고의 기억 속에 아니타는 알아서 거리를 뒀다. 질척거린 적이 없었다. 현재 아니타의 마음속에 어둠으로 자리 잡은 루시아에 대한 원망을 휴고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둘이 만나던가?" "개인적인 만남이라기보다는 손님을 맞이하는 주점 주인의 관계였습니다. 주점의 특색이 손님마다 밀실을 제공합니다. 라미스 백작이 찾아가면 백작부인이 방에 한두 시간 들어갔다가 나왔습니다." "같이 밤을 보냈나?" "그런 정황은 없었습니다. 백작부인은 주점을 찾는 단골이나 거물급 손님이 찾으면 그들 방을 모두 드나들었습니다. 화술이 좋아서 백작부인과 대화하려고 주점을 찾는 이들이 꽤 많았습니다. 밀실이라는 특성 때문에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보고서가 없다는 말은 보고할만한 일이 없다는 거겠지." ".... 예." 정황상으로 데이빗과 아니타는 그냥 주점 주인과 고객이었다. 영지로 쫓겨 내려가는 데이빗의 심란한 마음을 아니타처럼 사람 홀리는 재주 있는 마녀가 속을 살살 달래어 단골로 만드는 일은 쉬울 것이다. 둘이 주점 외의 장소에서 만나는 일은 없었다. 아니타는 데이빗이 오면 꼭 방에 들어갔으나 예리한 눈으로 지켜본 수하 말에 의하면 밀실에서 둘이 성적인 접촉을 한 흔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야말로 대화만 나누었다는 것이다. 무슨 대화를 하는지 알아내려고 시도하기 전에 데이빗은 영지로 떠났다. 더는 그 주점을 찾을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 둘이 만나서 꾸밀 음모는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데이빗이 공작부인을 향해 품은 연정이나, 아니타 마음속의 추악한 질시 둘 중 하나라도 알았으면 뭔가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둘 다 파비안은 알지 못했다. 데이빗이 루시아에게 연서를 건넸다가 거절당한 일은 보는 사람이 없는 복도에서의 일이라서 소문으로 퍼지지 않았다. "뭔가 걸리는 것이 있나 보군." "합리적 이유는 없습니다만 그렇습니다." 휴고는 파비안의 능력을 신뢰했다. 저 스스로 이유를 알지 못해도 부지불식간에 포착한 뭔가가 있는 것이다. 꽤 오래전에 팔콘 백작부인이 아내의 뒷조사를 한 적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괘씸하기만 했으나 그건 휴고가 알던 깔끔하게 물러설 줄 아는 여자가 할 만한 짓이 아니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둘 다 사람 붙여 놔." "예. 그리하겠습니다." 파비안은 주군이 자신을 신뢰한다는 사실을 느끼며 뿌듯해 했다. "내가 찾으라는 물건은? 펜던트." 기분 좋아 올라가던 파비안 입꼬리가 내려갔다. "찾고 있습니다." "아직? 물건 하나 찾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송구합니다. 더욱 더 인력을 집중하겠습니다." 일을 시키고 주군이 재촉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파비안은 당장 내일부터 해야 할 일 1순위를 결정했다. 대관식 파티 이후 루시아는 소인원 티파티만 나가며 사교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모처럼 큰 파티가 왕궁에서 열렸다. 여자들만 참석하는 자선파티였다. 왕은 걸식하는 수도의 고아들을 살피기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서 귀족들 돈을 뜯기로 했다. 새 왕이 즉위해 여는 첫 자선파티였다. 많은 귀족이 참석해서 금고를 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왕은 캐서린에게 파티 주최를 일임했다. 국가 예산에 보탬도 되고, 누이의 사교 활동에 도움도 되고 일거양득 조치였다. 캐서린은 오라버니가 맡긴 임무를 열정적으로 소화했다. 최고의 규모로 열겠다는 포부를 갖고 수도의 어지간한 귀족에게 모두 초대장을 보냈다. 루시아 역시 당연히 초대장을 받았다. 초대장으로 부족해서 캐서린은 사람을 보내 루시아가 반드시 참석한다는 확답을 받아갔다. 정오 가까이 시작하는 파티 참석 준비를 돕기 위해 앙뜨가 오전에 방문했다. 앙뜨는 이번 드레스를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다. 정숙한 드레스의 기준을 세우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연한 주홍색 드레스는 앙뜨의 기준으로 매우 정숙했다. 쇄골이 드러나지 않도록 목선이 높고 팔목까지 모두 가렸다. 단지, 어깨와 팔은 반쯤 속이 비치는 레이스로 만들어서 어딘지 모르게 야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앙뜨는 이 정도면 아주 많이 자신의 기준과 타협했다. 루시아는 드레스를 입고 거울 앞에서 최종 점검을 했다. 하녀가 들어와 쪼르르 옆으로 와서 고했다. "주인님께서 지금 출타하십니다." 잠시 후 응접실 안으로 그가 들어왔다. 휴고는 거울 앞에서 몸을 반쯤 돌려 자신을 향해 미소 짓는 그녀를 보며 잠시 멈칫했다. 오늘의 그녀는 청순하면서 고혹적이었다. 일하러 나가기 싫다고 휴고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가서 허리를 가볍게 안고 볼에 키스했다. "먼저 나가봐야겠소. 당신은 언제 출발하지?" "한 시간쯤 후에요." 휴고는 시선을 내려 그녀의 드레스를 물끄러미 보았다. "디자이너가 가져온 새로운 드레스에요." 라고 루시아가 말하자 휴고는 "음." 하고 짧은 감상을 표했다. 휴고는 시선이 앙뜨에게 닿았다. 입 싼 디자이너에 대한 휴고 마음속의 작은 앙금이 풀어지지 않았다. 드레스도 마음에 안 들었다. 노출이 많지 않은데 이상하게 야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여자들만 오는 파티라니까 넘어가기로 했다. 앙뜨는 고개를 숙인 채 속으로는 격한 불만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마저도 단정하지 못하다 어쩌다 하기만 해 봐. 타란 공작이 의처증 걸렸다고 소문 내버릴 테니까.' 타란 공작이 별말 없이 시선을 돌리자 앙뜨는 안도하면서 흘끔 고개를 들었다. 공작 부부가 서로 "파티는 언제 끝나지." "오늘 늦으신다고 하셨죠. " 하루의 근황을 묻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 다시 만날 거 아닌가? 영영 헤어지기라도 하는 것 같네.' 슬쩍 하녀들을 보니까 자그마한 호기심조차 보이지 않고 무덤덤하게 서 있었다. 일상이라는 소리다. 대관식 파티 이후로 앙뜨는 의상실을 찾아오는 귀부인들에게 타란 공작 부부에 관련된 똑같은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 점잖게 말하는 귀부인은 부부 사이가 친밀하다고 표현했고, 표현법이 다채로운 귀부인은 아내를 보는 타란 공작 눈빛이 꿀처럼 달콤했다고 말했고, 과장된 소문을 퍼뜨리는 귀부인은 타란 공작이 공작부인에게 푹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더라고 말했다. '소문은 두 번 걸러 들어야 한다지만. 타란 공작이 푹 빠졌다는 과장된 소문 쪽이 맞겠어.' 앙뜨가 소문의 공작 부부를 목격한 감상평이었다." 어서 와요. "캐서린은 몹시 반가워하며 루시아를 맞이했다. 서로의 활동반경이 달라 좀처럼 마주칠 일이 없어서 계속 아쉬워하고 있었다. 캐서린은 마치 루시아가 공동 주최자라도 되는 것처럼 내내 옆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계속 함께 다녔다. 캐서린의 까다로운 성미를 아는 귀부인들이 놀라움을 표하며 수군거렸다. 안 그래도 타란 공작가라는 배경을 지닌 공작부인이 이제는 왕실과의 관계도 돈독히 하고 있다는 추측을 불러 일으켰다. 루시아를 향한 사람들의 접근은 더 집요해졌다." 공작부인은 갈수록 아름다우시군요. 오늘 입으신 드레스는 앙뜨의 최신작인가 봐요. 디자인 북에도 없던 건데. "공작부인의 전속 디자이너가 앙뜨라는 소문은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백작부인도 오늘 빛이 나는군요. 모자의 깃이 아주 탐스럽네요. 상당히 귀한 물건이겠어요. "그 사람이 걸친 것으로 사람의 등급을 매기는 허세 강한 백작부인에게 루시아는 어울리는 응대를 해주었다." 호호호. 역시 공작부인께서는 보는 눈이 있으셔요. 그럼요. 이게 얼마나 귀한 것인데요. 사흘 밤낮을 남편을 졸라 겨우 마련했답니다. 공작부인께도 깃털상인을 소개해 드릴까요?" "그래 주면 감사하지요." 성격과 말투가 강한 캐서린 옆에 루시아가 함께 있자 장미 가시 같은 캐서린의 기세가 다듬어졌다. 귀부인들은 어쩐지 이전보다 편하게 캐서린 곁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백작부인 여식이 얼마 전 사교계 데뷔를 했다죠. 배울 것이 많겠군요." 마치 네 딸이 부족한 점이 많다고 지적하는 것 같은 뾰족한 캐서린의 말투였다. 백작부인 안색이 미묘하게 굳고 주변 분위기가 굳어지는데 루시아가 말했다. "오늘 함께 오지 그랬나요. 백작부인.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텐데요. 경험은 배움이 되지요.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어도 백작부인이 동반했으면 공주님도 반갑게 어린 아가씨를 맞아 주셨을 텐데 말이죠." 캐서린이 새침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다음에는 데려오세요." 백작부인이 기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딸아이가 오늘 함께 오고 싶어 했지요. 언제 다음에 인사드리겠습니다." 캐서린이 시선이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루시아에 닿았다. 입가에 기분 좋은 웃음이 걸렸다. 휴게실에서 나오던 루시아는 들어오는 여자와 가볍게 부딪쳐 살짝 물러났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서야! 이 분이 누구신 줄 알고!" 날카롭게 화내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어디 있었는지 갑자기 튀어나온 귀부인이 루시아와 부딪친 사람을 비난했다. 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무슨 백작부인이었던 것 같다. 백작부인이 한둘이 아니라서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았다. "소.. 송구합니다. 정말 송구합니다." "세상에! 드레스에 화장품이 묻었잖아요! 대체 이걸 어쩔 참이에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처럼 백작부인이 소리쳤다. 새된 목소리가 몹시 거슬렸다. 루시아는 백작부인이 펄펄 뛰며 가리키는 자신의 어깨 부근을 보았다. '이걸 어떻게 발견했을까.' 살짝 화장품이 묻어 있었지만 아주 조금이었다. 호들갑 떠는 백작부인의 눈썰미 하나만큼은 인정해 줘야 할 것 같다. 죄송하다는 인사만 되풀이하며 굽실거리는 여자를 보며 루시아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꿈속에서 몹시 서툴고 실수만 연발해 숨을 구멍을 찾아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때를.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자가 몹시 안 되어 보였다. 옆에서 버럭 거리는 백작부인을 진정시켰다. "좋은 자리에서 언성을 높이고 싶지 않으니 그쯤 하세요. 나는 괜찮답니다." "아.. 흠.. 흠. 공작부인께서는 어쩌면 이렇게 관대하신지. 고우신 얼굴만큼이나 그 마음 씀도 아름다우셔요." 백작부인은 이제 루시아에게 찬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피곤해.'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지겨움을 알 것 같았다. "앞을 확인하지 못한 내 실수도 있지요. 괜찮은가요?" 고개를 숙이며 안절부절못하던 여자는 루시아의 말에 오히려 놀라 움찔했다. "괘... 괜찮습니다. 공작부인께... 이런 무례를 저질러..." "괜찮아요. 어느 가문 분이에요? 전에 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메튼.. 백작 가문의 알리사입니다." 루시아의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메튼 백작의 현재 부인이었다. ============================ 작품 후기 ============================밤에 하나 더 옵니다. < -- 사랑합니다 -- > 꿈속에서 이름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루시아와 결혼하기 전에 이혼한 2번째 부인이었다. 이혼하고 수도를 떠나 서부의 친정으로 가버렸다고 했다. 그래서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 그렇군요. 즐거운 파티가 되기를 바라요." 루시아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 지나쳤다. 메튼과 관련된 무엇과도 엮이고 싶지 않았다. 비록 그놈의 또 다른 희생양이었던 전 부인이라 하더라도. '아직 이혼한 상태가 아니었구나.' 메튼 백작부인의 움츠린 어깨와 마음고생이 엿보이는 무표정한 얼굴은 루시아의 꿈속 기억을 상기시켰다. '나도 저런 모습으로 주변에 비쳤겠지.' 메튼 백작에게는 어머니가 각각 다른 세 아들이 있었다. 그 중 막내아들 브루노는 루시아가 백작부인이 되기 전에 이혼한 전처의 아들이라고 들었다. 데미안보다 1살이 많으니까 브루노는 아마 지금 10살일 것이다. [ 지겨운 하루의 시작이군요. 백작부인. ]브루노는 절대 루시아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 꼬박꼬박 백작부인이라고 칭하는 건방진 소년이었다. 그런데 루시아는 허무함이 가득한 눈빛을 지닌 조숙한 소년이 싫지 않았다. 백작의 세 아들 중 둘은 루시아와 그다지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아서 서로 소 닭 보듯 했다. 간단한 인사 정도가 나눈 대화 전부였다. 그에 비해 브루노는 가끔 마주치면 짧게나마 말을 건네곤 했다. 정다운 대화는 아니었다. 브루노는 아이답지 않게 비꼬는 말투를 주로 썼다. 그래도 백작가에서 부르노가 유일한 대화 상대였다. [ 어쩌다 이 지옥으로 들어왔대요? ]소년의 조롱 같은 말에 루시아는 그저 힘없이 웃었다. 루시아를 물끄러미 보던 소년이 말했다. [ 내 어머니는 도망치는 데 성공했지요. 모든 짐을 다 버리고 아주 자유롭게. ]소년의 눈빛이 쓸쓸했다. 루시아는 소년이 말하는 짐 속에 소년 자신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 어머니가 보고 싶니? ]소년의 침묵은 길었다. 하지만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 [ 아니요. 절대. ]어느 날, 브루노가 무도회에 참석하고 지쳐 귀가한 루시아를 불렀다. 아이는 진즉 잠자리에 들었어야 하는 밤늦은 시간이었다. [ 백작부인. 내가 재미있는 비밀 하나 알려 줄까요? ]브루노는 루시아의 침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안 쓰는 빈방으로 루시아를 데려갔다. 아마 브루노가 조금 더 장성한 남자였으면 따라가지 않았겠지만, 루시아는 아직 어린 브루노를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다. 백작가에서 유일한 사람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 나만 아는 비밀인데 특별히 백작부인에게만 알려 주는 거예요. ]브루노는 사용하지 않아서 먼지가 잔뜩 쌓인 벽난로 안으로 몸을 들이밀어서 안쪽의 뭔가를 조작했다. 그러자 덜컹, 하는 소리가 들리며 벽난로가 천천히 돌아 어둠으로 뻥 뚫린 공간이 드러났다. 루시아의 놀란 표정에 만족했는지 소년이 장난꾸러기처럼 킬킬 웃었다. 따라오라며 소년이 안으로 들어갔다. 루시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따라 들어갔다. 브루노는 횃불에 불을 켜고 안에서 벽에 매달린 막대기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벽난로가 돌아서 닫히고 비밀 공간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 이 저택에서 증조부 때부터 살았다고 들었어요. 아마 그전에 저택의 원주인이 만든 것 같아요. 가족들은 아무도 모르거든요. ]동굴처럼 좁은 길을 걷다가 계단을 내려갔다. 꽤 한참을 내려갔다. 그러자 넓고 천장이 높은 공동이 나왔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지하인 것 같으나 어두컴컴하기는 해도 주변을 식별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공동 전체 벽에 희미하게 빛나는 기이한 물질이 잔뜩 발려 있었다. [ 야광 물질인 것 같은데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어요. 굉장히 오래되었을 텐데 아직도 빛이 난다는 것이 신기하죠. 어쩌면 오래전에는 이 안이 낮처럼 환했을지도 몰라요. 별로 구경할 것은 없었다. 인상 깊었던 구경은 짧게 끝났다. [ 여기서 밖으로 나가는 통로도 있어요. 그건 다음에 알려 줄게요. ]다음은 없었다. 브루노와 다시 밤늦게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부친을 향한 반항을 일삼던 브루노는 학술원으로 쫓겨 갔다. 소년이 가고 루시아는 한동안 허전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몸과 마음은 지치고 자신의 처지가 끔찍하게 싫었다. 루시아는 밤마다 자신을 옭아맨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루어지지 않는 기도에 절망하다가 브루노가 알려준 비밀공간이 떠올랐다. '도망가자. 누구도 날 여기서 꺼내주지 않아.' 루시아는 하루 날을 잡아 비밀공간을 탐험했다. 벽난로에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 공동에 도착해서 브루노가 말했던 다른 나가는 통로를 찾아보았다. 구석구석 살피다가 벽난로와 비슷한 장치를 발견했다. 숨겨진 문 너머로 좁고 어두운 길이 이어졌다. 루시아는 길을 따라 걸었다. 브루노 말에 의하면 대단히 오래전에 만들어졌을 텐데 돌벽으로 세워 만든 길은 무너진 곳 없이 멀쩡했다. 근 두 시간을 걸어 나온 곳은 수도 외곽의 공동묘지였다. 루시아는 어둠 속의 한 줄기 빛을 발견했다. 돈을 모아 보석을 사서 누구도 모르는 자신의 재산을 마련했다. 한동안 숨어 지낼 수 있을 마른 식량을 조금씩 가져다 공동에 쌓아두었다. 공동에는 작은 지하 우물이 있어서 물 걱정은 없었다. 1년 넘게 꾸준히 준비를 계속했다. 유난히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루시아는 평소에 몸은 피곤해도 불면증을 앓고 있었다. 침대에서 뒤척이다가 발코니로 나갔다. 그리고 횃불을 든 사람 무리가 저택으로 몰려 들어오는 광경을 보았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스산한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의 감이 뭔가 위험한 일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루시아는 즉시 보석함의 보석을 모조리 챙겨서 비밀 공동으로 들어갔다. 메튼 백작가 멸문의 날이었다. 공동에 숨어 공포를 시간을 보냈다. 어두컴컴하고 고요한 지하에서는 바깥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었다. 호기심에 올라가 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죽은 듯이 숨어 있었다. 지하에서 내는 어지간한 소리가 위에서 들릴 리 없는데도 발걸음조차 숨죽였다. 밤낮이 바뀌는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었다. 배고프면 마른 식량을 먹고 졸리면 잤다. 식량이 줄어드는 것을 보며 대충 시간을 가늠했다. 루시아는 어두운 공동에서 지독하게 홀로 견뎠다. 가장 끔찍한 건 식량 때문에 늘어나는 쥐떼였다. 구역질 나는 메튼 백작 면상을 떠올리며 참았다. 그자에 비하면 쥐는 귀여웠다. 그래도 견디는 데 한계가 있었다. 한 달이 지나자 찍찍거리는 쥐 소리를 들으며 움찔움찔 놀라 자다가 깨는 생활을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루시아는 나갈 준비를 했다. 오랫동안 어둠 속에 있다가 갑자기 햇빛을 보면 눈이 상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긴 통로를 따라 왕복 4시간을 걸어 공동묘지로 나가는 입구에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을 눈에 익히기를 일주일. 루시아는 드디어 밖으로 나갔다. 저녁의 묘지는 조용하고 스산했다. 두려워했던 추적은커녕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루시아는 가진 보석 중 몇 개만 챙기고 나머지는 통로 안쪽에 숨겼다. 준비해 두었던 낡은 옷가지로 갈아입고 후드를 깊이 뒤집어쓰고 묘지를 빠져나갔다. 사람들 눈을 피해 외진 곳으로 무작정 걸었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밤새도록 걸어서 더는 발에 감각이 없고 어스름하게 날이 밝아올 무렵이었다. 인적 없는 황량한 들에 홀로 서 있는 낡은 집 한 채를 발견했다. 루시아는 어디서든 쓰러져 자고 싶었다. 뒷일 생각할 겨를 없이 집으로 다가갔다. 조심조심 기웃거리며 접근하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노파가 나왔다. 노파는 당황하는 루시아를 빤히 보다가 갑자기 버럭 소리쳤다. [ 루시! 어딜 싸돌아다니다 이제 기어들어오는 거여! 냉큼 가서 물부터 길어와. 아침 먹게. ]루시아가 멀거니 바라보고 있자 노파는 계속해서 호통을 쳤다. 복잡한 생각하기 귀찮고 노파가 밥 소리를 하니까 배도 고파서 시키는 대로 물통을 들어 올렸다. [ 물은 어디서 길어야 하나요? ]노파는 멍청한 계집애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샘을 알려주었다. 처음 보는 노파가 막말하는데 이상하게 별로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루시아는 물통을 들고 샘터로 갔다. 그리고 물을 뜨며 수면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면서 비명을 질렀다. 루시아의 붉은 기운이 감도는 갈색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 있었다. 한 달 넘도록 어둠 속에 떨면서 그녀의 몸이 극도의 공포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노파의 정신이 이상한 것을 나중에 알아차렸다. 노파는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 못 하고 과거의 말만 되풀이했다. 노파에게 루시라는 이름의 딸이 있었고, 오래전 남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가 소식이 없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았다. 루시아는 노파가 약 반년 후 죽을 때까지 딸 루시가 되어서 노파와 함께 살았다. 과거인지 미래인지. 루시아는 귀가하는 마차 안에서 꿈속의 기억을 회상했다. 가끔 루시아는 생각했다. '내가 본 건 대체 뭐였을까. 나는 정말 미래를 예지하는 꿈을 꾼 걸까. 아니면 내가 미래를 한 번 살고 되돌아온 걸까.' 루시아는 꿈을 꾼 쪽으로 무게를 실었다. 분명히 자신의 삶이었는데 동시에 구경하는 기분도 함께 느꼈다. 루시아의 꿈속 삶은 고되고 힘들었다. 고통과 슬픔은 겪은 것처럼 생생했다. 그런데 어떤 한계선을 넘지 않았다. 아무리 힘든 고통도 루시아의 마음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지 않았다. 12살 때 꿈을 꾼 다음 날 아침. 루시아는 그것이 자신의 미래라고 확신했다. 그 후 미래를 바꾸려고 앞뒤 생각 없이 달리기만 했다. '어떤 부분은 자세하고 선명하지만 어떤 부분은 기억이 없어.' 루시아는 꿈속에서 자신의 노년기를 보았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하녀 일을 그만두고 한적하게 살던 나이 지긋한 시절까지만 어렴풋이 떠올랐다. 만약 미래를 살다가 되돌아왔다면 가장 최후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야 한다고 루시아는 생각했다. 꿈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였다. 누구와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루시아의 고민은 언제나 제자리였다. "잠시 들르고 싶은 곳이 있구나." 루시아는 하녀에게 마차를 돌리라고 했다. 놀만이 선물로 준 집에 가 보고 싶었다. 루시아는 아담한 이층집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놀만이 쓰던 가구가 모두 그대로 다 있어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정기적으로 관리해서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으나 사람이 살지 않아서 그런지 썰렁한 기운이 감돌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빨리 망가진다고 하던데. 세를 놓을까?' 루시아는 얼마 전까지 이런 작은 집 한 채 장만이 평생의 꿈이었다. 불과 2년도 안 되어 완전히 달라진 자신의 인생을 생각했다. 그녀의 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조금 두려워도 가슴 두근거리는 기대감이 더 컸다. [ 앞으로 어찌 될지 안다면 얼마나 재미없니? 인생은 원래 예측할 수 없어야 살 만한 거야. ]귓가에 들릴 것 같은 놀만의 말을 떠올리며 루시아는 피식 웃었다. 놀만은 현자였다. 최소한 루시아가 보기에는 그랬다. 다시 집으로 향하는 길에 잠시 마차가 멈추었다. 길에 마차가 모두 서 있었다. 상황을 살피러 다녀온 마부의 말을 하녀가 루시아에게 전했다. "마차 전복사고가 일어나서 길을 돌아서 가야 할 것 같다고 합니다. 마님."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차창 밖으로 지나는 길을 보던 루시아는 길이 묘하게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릴 때 살던 동네야...' 아련한 기분으로 바라보다가 루시아는 마차를 세우게 했다. 마차는 길 한편에 멈추고 루시아는 마차에서 내려와서 낡은 간판의 전당포 앞에 섰다. 유리창 너머에 가격표를 붙여 잡다한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루시아는 어머니와 손잡고 이 길을 지나던 옛 기억을 되살렸다. 루시아는 전당포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노인이 끼익 열리는 문소리에 깨어났다. 전당포 주인은 눈을 부릅뜨고 벌떡 일어났다. 화려한 차림의 귀한 자태의 여인과 옆에 다소곳이 서 있는 여자, 호위로 보이는 남자는 전형적인 귀부인과 수행인들이었다. 오래된 동네 전당포 주인으로서는 평생 맞이할 일 없는 손님이라 노인은 당황했다. "찾으시는 물건이라도...?" "이곳의 주인으로 있은 지 오래되었나?" "수십 년은 되었습니다." "10년도 더 지난 일인데 한 때 이곳에 잠시 머물렀던 물건의 행방을 찾으려 하네. 혹시 알 수 있겠는가." "어지간한 물건이면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모두 장부에 기재도 하고 있지요. 어떤 물건입니까?" 루시아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대략의 시기, 어머니가 펜던트를 가지고 전당포를 찾았을 때의 나이와 모습, 펜던트의 생김새를 설명했다. 전당포 주인은 기이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얼마 전에도 같은 물건을 찾는 분이 계셨지요." "내가 말한 펜던트를 찾았다는 말인가? 누가?" "젊은 남자였는데. 누군지는 모릅니다." 파비안의 수하가 펜던트를 찾으면서 돌아다니다가 들른 것이었으나 루시아로서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때 찾아온 사람에게도 말했지만. 그런 펜던트를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가게에 들어온 적도 없고." "그럴 리가. 내가 분명히 이곳에 진열된 것을 보았는데." "보시다시피 여기는 동네 사람 대상으로 하는 작은 가게입니다. 들어오는 물건이 다 빤하지요. 그런 귀물이 들어왔으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나이는 들었어도 아직 기억력은 쓸 만합니다. 수십 년간 펜던트 같은 물건을 맡아 둔 적이 없습니다." 전당포 주인의 표정에는 확신이 있었다. 루시아가 그럴 리 없다고 계속 말하자 아예 오래된 장부를 모두 내와서 보여주었다. 날짜 별로 누가 어떤 물건을 맡기고, 얼마를 빌려 갔으며 그 후 어떤 처리 과정이 있었는지 꼼꼼히 기록된 서류였다. 전당포 주인의 철두철미한 성격을 엿볼 수 있었다. 루시아는 20년에 달하는 기록을 샅샅이 살폈다. 노인 말대로 펜던트는 이곳에 온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을 숨기자고 일부러 장부조작을 했다고 보기 어려웠다. '내가 봤어. 어머니가 이 가게 앞에서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 작품 후기 ============================퍼플케이브 님, 매쉬매리골드 님, 유제이UJ 님, 그리고하나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60편이 넘어갈 때는 100편이면 끝날 거로 생각했지요. 95편(공지 빼고) 정도 연재할 때 120편이면 완결+외전+에필까지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11월 중순이면 마무리를 할 줄 알았어요. 근데 지금 내용 전개 상황에서 120으로 가능한가? 생각하니까. 으으으음.... ;;;;맞춤법, 오타, 비문 지적 등은 감사히 참고하고 있습니다. < -- 사랑합니다 -- > 루시아는 혼란과 의구심을 안고 전당포를 나왔다. 호위하며 따라붙는 딘이 물었다. "달리 들르실 곳이 더 있으십니까?" "아니요. 집으로 갈 거예요." 마차로 향하는 루시아와 하녀의 두어 걸음 뒤에서 딘은 손목을 입가로 가져다 대고 낮게 중얼거렸다. "지금 출발하신다. 목적지는 저택." 딘의 손목에는 단순한 형태의 은색 팔찌가 있었다. 은보다 견고해 보이고 광택이 났다. 한쪽 귀에도 특이한 장신구가 달려 있었다. 귀걸이라고 하기에는 모양이 기이한 갈고리 형태였다. 끝 일부가 귓속에 들어가 있고, 갈고리처럼 구부러진 부분이 귀 뒤를 감쌌다. 머리카락으로 덮고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루시아가 올라타는 마차에서 멀찍이 떨어진 네 방향에 각각 서 있는 마차가 있었다. 꺾어진 모퉁이 너머라서 루시아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위치였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마차 위에 평범한 인상의 마부가 앉아 있고, 마차 안에는 평복으로 위장한 갑 옷을 입은 기사들이 타고 있었다. "출발하신다. 1,2조 출발. 3조 대기하라. 4조는 후방을 맡는다." 지시를 내리는 기사의 손목과 귀에 딘이 한 것과 동일한 장신구가 있었다. 루시아는 자신의 호위를 동반하는 기사 딘 한 명으로 알고 있었다. 저택을 나서는 순간부터 마도구로 무장한 기사들로부터 얼마나 철통 같은 경호를 받고 있는지 몰랐다. 그들의 경호는 은밀해서 타인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루시아는 침실 소파에 기대앉아서 생각을 계속했다. 차분하게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었다. 어머니를 떠올리자 가슴속이 따뜻해졌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슬프기만 했는데 지금은 행복한 추억으로만 남았다. 지금 루시아가 행복한 덕분이었다. 어머니는 펜던트를 평소에는 서랍장 깊은 곳에 넣어두고 가끔 꺼내 보곤 했다. 가끔은 루시아가 옆으로 오는 것도 모르고 넋 놓고 보기도 했다. 어머니가 펜던트를 정말 소중하게 여긴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아마 펜던트를 보며 가족을 그리워하셨겠지. 돌아갈 수 없는 당신 처지를 슬퍼하시면서.' 어쩌면 어머니는 임신하지만 않았어도 고향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삶은 비관하며 루시아를 탓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항상 일을 해야 했다. 평소에는 동네 식료품점에서 일을 거들고 시간이 나면 뒷마당 작은 텃밭을 가꾸어 식비를 충당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항상 웃고 있었다. 부드러운 품으로 루시아를 자주 안아 주었다. 사랑하는 내 딸, 네가 있어서 엄마는 행복하단다, 어머니는 말해주었다. 어머니를 잃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절망해서 죽고 싶었던 만큼 어머니의 사랑을 떠올리며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어머니가 펜던트를 맡겨 급한 돈이 필요했던 건 내가 다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어머니는 펜던트를 전당포에 맡긴 적이 없었다. 전당포 주인의 말이 사실이면 루시아의 기억이 잘못되었다. '어릴 때 내 기억이 잘못되었다고 쳐도. 나중에 외삼촌과 펜던트 때문에 만날 수 있었어. 어쩌다가 펜던트가 경매장으로 가게 되었을까. 도둑맞았나?' 루시아에게 펜던트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자신의 뿌리를 찾게 해 준 물건이었다. '8살 때였을 거야.' 루시아는 어릴 때 크게 다쳤던 사고를 떠올렸다. 어릴 때 루시아는 동네 아이들과 극성스럽게 뛰어놀았다. 동네 어귀에 오랜 수령의 나무가 있었다. 동네 아이들과 나무타기 내기를 했다. 무서운 줄 모르고 까마득한 위까지 가장 먼저 올라가서 의기양양하게 아래를 내려보았다. 그런데 높은 위에 새가 둥지를 틀고 있었다. 위협을 느낀 어미 새가 공격을 가했고, 놀란 루시아는 중심이 흔들려서 추락했다. '그때 다쳤던 곳이 아마...' 오른쪽 다리 무릎 아래를 살피는 루시아의 눈가가 잘게 떨렸다. 흉터가 없다. 아주 매끈했다. 워낙 어릴 때 일이라 아물어서 다 사라졌나 생각하기에는 상처가 컸다.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흔적조차 없었다. '원래 없었나? 아니면 사라진 건가?' 평소에 다리의 흉터를 주의 깊게 살펴볼 생각하지 않았다. 펜던트 때문에 어릴 때 사고를 굳이 기억하지 않았으면 계속 잊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다친 기억도 잘못되었나? 아니야. 그런 큰 사건을 그렇게 생생하고 자세히 잘못 기억할 리가 없잖아.'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더니 머리가 아팠다. 루시아는 약을 먹고 침대에 누워 있다가 잠이 들었다. 루시아는 꿈에서 어린 시절을 보았다. 내일 뭐 하고 놀까 하는 생각만 하던 철없는 시절이 빠르게 지나갔다. 루시아는 차갑게 식어가는 어머니 곁에서 엉엉 울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루시아의 등을 쓸어주며 위로했다. 어린 것을 두고 어찌 눈을 감느냐며 안타까워했다. 어머니와 친하게 지낸 근처 살던 아주머니가 눈물을 훔쳤다. 서러움이 북받쳐 울면서 루시아는 어머니의 분신인 것처럼 두 손에 펜던트를 꼭 쥐고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왕실 근위대는 동네를 발칵 뒤집었다. 루시아를 데려가는 근위대 앞을 누구도 막아서지 못하고 멀찍이 보기만 했다. 텅 빈 눈의 어린 소녀는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따라갔다. 화려한 궁의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처음 보는 아버지라는 사람을 보면서 아무 감정이 없었다. 앞으로 지내게 될 곳이라는 별궁은 차갑고 쓸쓸했다. 황량하게 널찍한 침실에 누워서 엄마, 엄마 계속 중얼거리며 흐느껴 우는 소녀의 손에는 펜던트가 있었다. 루시아는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이 어두컴컴했다. 제법 오래 잠들었던 것 같다. 루시아는 멍한 표정으로 일어나 앉았다. '꿈이 아니야...' 조금 전 꿈은 기억의 한 조각이었다. '왜 잊고 있었을까.' 마치 얇은 막으로 덮여 있었던 것 같은 기억이 조금씩 떠올랐다. '펜던트는 내가 갖고 있었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펜던트는 루시아가 계속 목에 걸고 있었다. 궁으로 들어올 때도 가지고 있었다. 시녀들이 낡은 옷가지를 벗기고 루시아의 옷을 갈아입히는 와중에도 루시아는 누가 빼앗아 갈까 봐 한 시도 손에서 떼지 않았다. 점점 새로운 기억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어릴 때 기억에 모순이 있었다. 어릴 때 나무에서 떨어져 다친 일은 작은 동네에서 벌어진 큰 사고였다. 당시 루시아만 다치지 않았다. 루시아가 떨어지면서 부딪친 가지가 부러지며 다른 아이도 떨어졌다. 그 아이는 머리를 다쳐 죽고 말았다. 여자아이였다. "... 롯사." 그 아이 이름이었다. 루시아의 어릴 적 친구였다. 롯사가 죽고 롯사의 가족은 얼마 후 이사가 버렸다. 어머니가 친하게 지낸 동네 아주머니는 롯사의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롯사의 어머니는 방에 함께 있었다. 멀리서 소식을 듣고 온 건가? 그런데 아주머니 곁에 루시아 또래의 여자아이가 함께 울고 있었다. 롯사였다. [ 루시아. 이거 먹어야 해. 응? 네가 아프면 돌아가신 아줌마도 슬퍼하실 거야.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루시아가 이틀 넘게 음식을 거부하자 롯사가 루시아 손에 숟가락을 쥐여 주며 달랬다. '롯사는 어릴 때 죽었잖아.' 루시아는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이 둘이고 그 기억들이 마구 뒤섞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당포 주인의 말을 사실이라고 하자. 어릴 때 난 사고를 당하지 않았고, 롯사는 죽지 않았어. 어머니는 펜던트를 전당포에 가져가지 않았고, 나는 펜던트를 가지고 궁에 들어왔지.' 펜던트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궁에 들어온 첫날까지였다. 울고 잠든 다음 날, 펜던트는 사라졌고 루시아는 미래를 보았다. 그리고 루시아의 기억이 혼동을 일으켰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일 수도 있고, 펜던트가 가진 능력일 수도 있었다. '마도구...' 기이하고 비상식적인 현상을 일으키는 물건이 세상에는 존재했다. 어릴 때 왕궁에 처음 들어오자마자 딱 한 번 보았던 마도구. 그건 두 개의 술잔을 나란히 붙여놓은 것 같은 모양이었다. 두 개 술잔에 불순물 없는 깨끗한 물을 넣고 혈통을 증명하고 싶은 두 사람 피를 떨어뜨린다. 혈연관계가 없으면 아무 변화가 없고, 혈연관계면 핏물처럼 붉게 변했다. '펜던트가 마도구였을까?' 외삼촌은 펜던트가 바덴 백작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라고 했다. 마도구는 굉장한 귀물이라서 대부분의 마도구는 국가 보물이었다. 바덴 백작가처럼 다 쓰러지는 가문이 지닐 물건이 아니었다. 마도구라면 엄청난 돈을 받고 팔 수 있는데 외삼촌이 그걸 알았다면 진즉 팔아서 가문을 도모했을 것이다. '외삼촌도 몰랐던 거야. 할아버님도 모르시는 것 같았어.' 펜던트를 마도구로 전제하고 루시아는 새롭게 추리를 시작했다. '펜던트가 내게 보여준 건... 미래가 아니라 또 다른 내 삶이었어.' 또 다른 삶에서 루시아는 어릴 때 크게 다쳤고, 어머니는 펜던트를 팔았으며, 나중에 경매에 나온 펜던트를 통해 외삼촌을 만났다. 다른 삶이라고 해도 거의 미래를 본 것과 다름없었다. 루시아가 궁에서 얌전히 있다가 메튼 백작과 결혼했다면 같은 미래로 흘러갔을 테니까. '어릴 때 다친 일. 거기서부터 갈라졌구나. 그 사건이 또 다른 내 미래를 만들었어.' 현실에서 루시아는 다치지 않았다. 어머니는 펜던트를 팔지 않았다. 마도구의 이능은 루시아에게 작동해서 긴 꿈을 보여주었다. '알아봐야겠어. 롯사가 살아 있는지.' 아마 살아 있을 거라고. 루시아는 생각했다. '펜던트가 마도구라면 왜 어머니에게 발동하지 않았을까. 조건이 필요한가?' "비비안." 루시아는 흠칫 생각에서 깨어났다. 침대에 앉아 두 팔로 무릎을 감싸고 동그랗게 몸을 말아 앉아 있던 루시아는 고개를 들었다. 침실은 아까 잠에서 막 깨었을 때보다 더 어두웠다. 그가 언제 왔는지 바로 곁에 앉아 있었다. "휴. 언제 오셨어요?" 휴고의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방금. 당신이 돌아와서 지금껏 잔다기에." 어두운 침실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온 휴고는 침대에 앉아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무슨 생각이 그리 골똘한지 놀라지 않게 제법 기척을 내었는데도 그녀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파티에서 무슨 일 있었어?" "... 아뇨." "두통이 있었다며. 이달 들어 두 번째군. 대체 왜 몸에 이상이 없는데 꼬박꼬박 아픈 거지?" 편두통을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돌팔이 말을 휴고는 좀처럼 믿을 수 없었다. 이상이 있으니까 아픈 거 아닌가. "지금은 괜찮아요. 생각할 일이 있었어요." 어두운 침실에서 넋 놓고 생각할 일이 대체 무엇이었을까. 휴고는 그녀의 생각이 알고 싶었다. 가능한 그녀의 모든 것을 갖고 싶었다. 그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생각할 일인지 나는 알면 안 되는 건가?" "... 조금 황당한 생각이라서요. 듣고 웃으시면 안 돼요." "안 웃을게." "제가 할아버님께 말씀드렸던 펜던트 말이에요. 기억하세요?"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파비안의 닦달로 수하들이 이 잡듯이 여기저기 뒤지는 중이었다. "그 펜던트가 마도구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왜?" 루시아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궁에 올 때 펜던트를 가지고 왔던 기억이 났다고 말했다. 계기는 오늘 전당포에서의 일과 집에 돌아와 자는 동안에 꾸었던 꿈이라고 설명했다. 루시아는 자신이 겪은 일을 그에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아직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는 일이고, 비록 꿈속이지만 겪었던 고통스럽던 일들을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루시아는 얼마 전까지 미래를 본 꿈속 경험은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언젠가 그에게 말할 수 있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생각의 변화였다. "어릴 때 어머니가 펜던트를 팔았던 적이 없었어요. 펜던트가 뭔가 제 기억에 왜곡을 만들고 사라져 버린 것 같아요. 사라지는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본 건 아니었지만." 휴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침실에 불을 밝혔다. "기억 왜곡이란 부분이 심각한가?" "그렇지는 않아요. 단지 마도구라면 왜 외가에서는 그걸 몰랐을까 생각했어요." "모를 수 있어. 마도구에 대해서는 무엇하나도 정확히 밝혀진 것이 없으니까." 휴고는 가문의 비밀 기록을 통해 마도구가 마도 제국 시절에는 흔한 물건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나고 마력 장치가 망가져서 대부분의 마도구가 본래 기능이 뭐였는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갑자기 사라져 버릴 수도 있나요?" "어떤 마도구는 이능을 발하고 망가지거나 부서지기도 한다는군. 사라질 수도 있겠지." "마도구는 대부분 국가 보물이잖아요. 귀족 가문이 가지고 있을 수도 있어요?" "국보로 지정된 마도구가 널리 알려진 것뿐이지 마도구를 가진 가문들은 많아. 어떤 마도구를 가졌고 어떤 기능을 지녔는지는 가문 비밀이지. 귀족 가문이 지닌 마도구 일부는 암암리에 알려졌기도 하고." 마도구는 지닌 기능과 상관없이 엄청난 고가의 매매 대상이었다. 마도구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수집광들이 대단히 많기 때문이었다. 쓸모 있고 명확한 기능을 지닌 마도구의 가격은 부르는 것이 값이었다. "그럼 타란 가문도 마도구를 가지고 있어요?" "많아." 가문 비밀의 방에 잡다한 것들이 많았다. 휴고는 공작위에 오르고 얼마 후 뭐가 있나 싶어서 방을 뒤져 보았다. 서로 떨어진 사람들 간에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마도구를 발견했다. 대화할 수 있는 거리는 탁 트인 벌판에서 서로의 모습을 간신히 식별할 수 있을 정도까지였다. 호위를 하는 데 제법 쓸모가 있었다. 데미안을 호위하는데 유용하게 썼고 지금도 쓰는 중이었다. 남아 있는 같은 종류 마도구를 수도로 올 때 가져왔다. 그녀를 위한 호위대를 구성하고 마도구를 넘겼다. 휴고는 혹시 그들이 잃어버릴까 봐 걱정하지 않았다. 아내의 안전을 위해서 돈 몇 푼이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기사들이 신줏단지 모시듯 덜덜 떨고 있었다. "로암에 돌아가면 보여줄게." "마도구는 정말 그렇게 대단한 힘을 가졌나요?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는 마도구도 있다던데요." 휴고는 피식 웃었다. "헛소문이지. 마도구는 대부분 다 쓸모없어. 신기하기만 할 뿐. 제논 왕실이 지닌 혈통 감별 마도구가 널리 알려진 건 그만한 기능을 지닌 마도구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야. 어떤 나라 국보는 봉의 형태인데 어둠 속에서 빛난다더군. 쓸 곳은 찾아보면 있겠지만 국보라고 할 만큼은 아니지." 루시아는 사라진 펜던트의 의미를 생각했다. 펜던트가 다른 삶을 보여주는 이능을 지녔다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귀물이었다. "마도구에 관심 있어? 갖고 싶은 게 있나?"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마도구 수집 작전을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전적으로 루시아의 대답에 달렸다. "아니에요. 잠깐 혼란스러웠을 뿐이에요." 펜던트가 루시아에게 미래를 보여주었다면 루시아는 사라진 펜던트에 감사했다. 꿈 덕분에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사소한 사건만으로도 미래는 갈라질 수 있고, 선택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선택은 당신이에요. 당신의 선택도 나였으면 좋겠어요.' ============================ 작품 후기 ============================초낭자 님, 아옹아옹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가끔 제가 쓴 다른 소설 없느냐 묻는 분이 계시네요. 없습니다. 전혀. 이 소설 쓰기 전까지 오직 독자였어요. 로판을 즐겨 읽었죠. 성인요소가 더해진 오그라지게 달달한 로판이 정말 읽고 싶었어요. 아무리 찾아봐도 없더라고요. 내가 써서 읽자, 라는 마음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더라고요. 내가 써서 읽자, 라는 마음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팬아트는 올라오는 대로 공지에 추가하고 있습니다. 팬아트 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더라고요. 내가 써서 읽자, 라는 마음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팬아트는 올라오는 대로 공지에 추가하고 있습니다. 팬아트 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 < -- 사랑합니다 -- > 루시아는 그를 선택해서 새로운 자신의 미래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건 반칙이었다. 누구도 불행한 미래를 알고 피하는 선택을 하지 못한다. '그는 내 선택에 휘말린 것 아닐까?' 더 행복할 수 있을 그의 미래가 자신 때문에 어그러질까 봐 루시아는 두려웠다. 아무것도 모르고 루시아의 선택에 말려든 그에게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 '이기적이라고 세상 전부가 날 비난해도 좋아. 그를 사랑해. 그도 날 사랑해 줬으면 좋겠어. 내 욕심이 지나친 걸까?' 그의 손이 부드럽게 루시아의 볼을 쓸었다. 다정한 그의 손길에 루시아는 어쩐지 울컥했다. '이 사람은 날 어떻게 생각할까. 날 얼마큼 좋아할까. 내가 사랑한다고 하면 도망갈까?'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뭔가 바뀌었을 텐데. 그런 생각. 해보신 적 있어요?" "해봤자 무슨 소용이지? 어차피 지난 일인데." [ 내 손 떠난 건 미련 두지 않아. 되돌릴 수 없는 일을 붙잡고 있는 건 쓸데없으니까. 결혼한 다음 날 루시아가 '후회한 적 없느냐.' 라는 질문에 했던 대답과 거의 다르지 않은 대답이었다. 루시아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이런 남자였다.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 무정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의 인생관은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그를 바라보는 루시아의 마음이 달라졌다. 지금은 그가 무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지나치게 다정했다. 그의 다정함은 언제나 루시아의 마음에 거센 풍랑을 일으켰다. 행복이 더해지는 만큼 고뇌도 커졌다. 포기할 수가 없었다. 자꾸 기대는 커지고 이러다 그를 원망할까 봐 겁났다. "저는 해요. 만약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전 아직 별궁에 있었을 거예요. 얼마 후에 왕실에 지참금을 낸 누군가와 결혼했을 테지요." 휴고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말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려 했다. "가끔은요. 제가 너무 과분한 자리에 있는 것 같아요." "왜 그런 생각을 해." "경솔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저와 결혼한 것." 말없이 루시아를 바라보던 휴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뭘 또 잘못했어?" "... 네?" "그냥 말해. 그런 식으로 말 돌려서 철렁하게 하지 말고." 루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 앞에서도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남자가 한풀 꺾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혹시 자기도 모르는 잘못을 했을까 봐 그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뭐든 양보하고 모두 해 줄 것처럼 굴었다. 그의 사랑을 흠뻑 받는 기분이 들 때마다 루시아는 누가 그녀의 심장을 잡아 꽉 꽉 누르는 것 같았다. 남들이 두려워하는 사나운 맹수 같은 남자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루시아는 코끝이 시큰해서 주먹을 꼭 쥐었다. "당신이 잘못한 건 없어요. 제 자격지심이에요." "자격지심이라니?" "우리는 엄청 차이 나는 결혼을 했잖아요. 저는 사생아나 다름없는 이름 모를 공주. 당신은 국내외로 유명세 자자한 공작 전하. 당신 엄청 손해나는 결혼 한 거예요." 휴고는 살짝 인상을 썼다. 그녀가 스스로 사생아라고 말한 표현이 못마땅했다. 한 손으로 루시아의 허리를 감싸 안고 부드럽게 그녀를 눕히면서 위로 올라갔다. 손해나는 결혼. 휴고는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 몰랐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자신의 곁에 있기 꺼리는 이유는 무엇이든 싫었다. 자신과 그녀의 관계에 손해나 이득 따위의 개념을 넣을 수 없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파티에서 정말 아무 일 없었어?" "없었어요." "그러면 왜 그래." "제가 좀 못난이 같은 말을 했죠?" 휴고는 멋쩍게 웃는 그녀의 눈가에 입술을 붙였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비비안. 당신은 못난이가 아니고, 나는 손해나는 결혼을 하지 않았어." 루시아는 숨을 들이켰다. 그의 말은 부드럽게 그녀의 심장을 감싸는 것 같았다. "말했지만. 힘들면 참지 마. 애쓸 필요 없어. 당신이 하고 싶은 것만 해." 루시아는 한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감쌌다. 그의 볼을 쓰다듬으면서 루시아는 녹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귓가에 사랑한다고 속삭여 주는 것도 아닌데 그가 하는 말은 지독하게 달콤했다. "제가 당신에게 그다지 미덥지 못한가 봐요." "미덥지 못해서가 아니라 다치지 말라는 소리야." "누가 절 해치겠어요." "몸에만 상처를 입는 건 아니니까." 말로 사람을 죽이는 곳이 사교계였다. 어디에나 애먼 소리를 해대는 작자는 꼭 있었다. 공작 가문이라는 배경이 완벽히 아내를 지켜주지는 못했다. 휴고는 남이 뭐라 지껄이든 완벽하게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작고 약했다. 휴고는 늘 그녀가 걱정이었다. 루시아는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마음을 다치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가끔 느끼는 그의 섬세함은 정말 놀라웠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이런 애정을 받아본 적 있던가. 아내에 대한 마음 씀씀이로 보기에는 차고 넘쳤다. '어쩌면 그도 날...' 가슴 뛰는 예감에 설렜다. 아슬아슬하게 뭔가 잡힐 듯 말 듯했다. 루시아는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감정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마주 안아주는 그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다치지 않게 조심할게요." 다음 날, 루시아는 오전에 캐서린이 보낸 전언을 받았다. 오후에 차 한 잔 함께 하자는 초대였다. 어제 파티에서 어떤 귀부인이 루시아에게 캐서린이 듣지 못하는 곳에서 슬쩍 말했다. [ 캐서린 공주님을 이렇게 편하게 대하는 분은 처음 뵈었어요. ]성격 강한 캐서린을 잘도 견딘다는 직접적인 말을 에둘러 표현했다. 직접 루시아에게 그런 말을 건넨 사람이 극히 드물 뿐, 많은 시선이 루시아가 캐서린을 참고 있는 거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들의 오해를 풀 방법이 없으니 대응하지 않지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루시아는 캐서린을 견딘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다. 캐서린은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라서 꺾어진 곳 없는 사람이었다. 제멋대로인 점은 공주로서 과하지 않았다. 직설적이어서 듣는 사람 기분을 불편하게 하지만, 안하무인으로 경우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도 사랑을 받고 귀한 공주로 자랐다면 그렇게 도도한 공주님이 될 수 있었을까.' 상상이 되지 않아도 그런 삶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굴곡 없이 자라서 세상의 두려움을 모르는 캐서린의 철없는 자신감이 부러웠다. 루시아는 캐서린이 노인이 되어서도 지금처럼 고민 모르고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왕비 마마께서 끼워 달라고 전언을 보내셨네요. 둘만의 티타임은 다음 기회를 잡아야겠어요." 캐서린은 궁을 방문한 루시아를 맞이하며 툴툴거렸다. 두 사람은 왕비궁으로 이동했다. 베스는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유쾌한 화제는 없어도 소소한 대화가 즐거운 시간이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서로 알고 지낸 것처럼 루시아는 두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이 편안했다. '남이 아니라서 그런가.' 사람과의 사귐이 많지 않은 루시아는 두 사람으로부터 느껴지는 편안함이 신기했다. 얼마 전까지 말조차 나눈 적 없는 사이였다. '가족이란 이런 걸까.' 사적인 관계로 들어가면 캐서린은 자매, 베스는 올케였다. 그런 관계에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남과는 다른 뭔가가 있다고 느꼈다. "아까 시녀가 자수통을 들고 나가던데요. 언제부터 자수에 취미가 생기셨어요?" 베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처녀 시절에 나름대로 사교계를 누비며 열심히 놀았던 베스는 자수 같은 정적인 활동을 즐기지 않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평생 취미에 없는 일을 하고 있네요. 폐하께서 손수건에 수를 놓아달라고 하시더군요." 캐서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손수건에 수를요?" "이게 전부 공작부인 덕분이지요." 루시아는 생각지 못한 지적에 놀랐다. "공작부인 덕분이라니요?" "공작부인이 타란 공작께 수 놓인 손수건을 드렸답니다. 그걸 폐하께서 보시고 나도 하나 가져야겠다고 저보고 만들라고 하시네요." 캐서린이 깔깔대며 웃고 루시아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그걸 어쩌다가 폐하께서 보셨을까.' 그가 이런 선물 받았다고 자랑했을 리는 없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어떤 손수건인지 구경해보고 싶네요." "공작부인만 괜찮으면요. 마침 내가 가지고 있어요. 폐하께서 참고하라며 빌려 주셨거든요." "어머나. 보고 싶어요. 봐도 괜찮죠?" 캐서린이 자신을 보며 눈을 빛내자 루시아는 붉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잘것없는 솜씨로 만든 손수건을 보일 생각을 하자 창피했다. "댁에 돌아가 부군을 나무라지 마요. 공작부인. 폐하께서 손수건을 빼앗으셨답니다." 빼앗을 때 타란 공작 표정이 아주 볼만했다고 낄낄대는 남편을 보면서 베스는 '남자는 철이 언제 드는 걸까.' 라고 생각했다. 캐서린은 "오라버니가 별짓을 다 한다." 라며 또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시녀가 자수통을 가져왔다. 베스는 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캐서린에게 건넸다. 캐서린은 면 손수건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했다. 그리고 다시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은 '타란 공작이 이런 걸 들고 다닌다고?' 라는 의미가 담긴 것이 명백해서 루시아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수가 귀엽네요. 꽃이라니." 발그레하던 루시아 표정이 살짝 굳었다. "... 제가 잠시 봐도 될까요?" "그럼요. 원주인이신데." 캐서린이 흔쾌히 넘겨주는 손수건을 받아 확인하면서 루시아의 눈이 흔들렸다. 얼마 전에 선물한 그의 이름이 박힌 손수건인 줄 알았다. 모서리의 꽃 자수. 서툰 자수 솜씨는 아주 오래전 막 손수건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의 흔적이었다. 데미안에게 보내려고 만든 손수건을 그가 가지고 있었다고? 꽃 자수 손수건이면 수개월은 지난 일이었다. '이게... 무슨 의미에요?' 그녀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퀘이즈는 요즘 돈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왕이 되기 전에는 돈 문제가 이렇게 크게 고민되는 일인 줄 몰랐다. 쓸 곳은 넘쳐나는데 쓸 수 있는 돈은 한계가 있었다. "공. 어디서 돈을 벌 좋은 방법 없겠나?" "언제부터 장사치가 되셨습니까?" 퀘이즈가 아무리 징징거려봤자 휴고는 경제 관련해서는 조언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는 경제 전문가가 아니었다. 돈벌이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단지, 그런 전문가를 많이 수하로 거느리고 있었다. 휴고는 사람을 등용하는데 능력만 봤다. 신분은 따지지 않았고 능력을 보이면 보이는 만큼 충분히 보수를 챙겨주었다. 휴고의 밑에는 능력 있는 평민 출신 인재가 많았다. 휴고는 사람을 직위와 능력으로만 구별했다. 그건 그가 신분 체제에 회의를 품어서가 아니었다. 고귀하건 비천하건 목 잘리면 죽는 건 다 똑같았다. 왕이라고 여벌 목숨이 있는 건 아니다. 휴고는 제게 기어오르지만 않으면 어차피 그놈이 그놈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짐이 왕이 된 것인지 장사치가 된 것인지 모르겠네." "버는 일이 시원치 않으면 쓰는 일부터 줄이시지요." "안 그래도 궁중 예산부터 줄이고 있어. 선왕께서." 이 말을 하며 퀘이즈는 속으로 이를 아득 갈았다. 망할 노친네 같으니! 이제는 대놓고 말도 하지 못했다. 퀘이즈는 부관과의 내기에서 벌써 4번 연속으로 졌다. 쓸 수 없는 말이 늘어나면서 스트레스도 커졌다. "워낙 규모 크게 예산을 잡아서 말이야." 선왕은 씀씀이가 큰 왕이었다. 재물에 욕심이 많으면서 모으는 만큼 다 썼다. 특이하게도 수하들에게 이런저런 이유로 상을 내리기 좋아했고, 상을 줄 때는 아낌없이 뿌렸다. 변덕 심하고 국정 운영이 안정적이지 못했던 선왕이 인심을 잃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선왕께서 싸질러놓은 밥벌레부터 치워야겠어." 부관의 눈이 번뜩였다. 다음 내기에 쓸 단어를 결정했다. "내 배다른 형제가 몇인 줄 아나? 사내놈들은 대부분 다 죽었으니까 제쳐놓고. 공주만 스물여섯이네. 스물여섯! 이러니 예산이 뻥뻥 구멍이 나지." 퀘이즈는 씨근덕거렸다. 죽은 노친네의 얼굴도 모르는 자식들을 먹여주고 재워줄 의리는 없었다. 퀘이즈에게 피를 나눈 형제는 누이 캐서린뿐이었다. 요즘 조금 공작부인에게 관심이 가긴 해도 형제의 정을 느낄 만큼은 아니었다. "다 쫓아낼 생각이야." "어떻게 말입니까?" "각자 외가에서 거두라고 하고. 거둘 데 없으면 결혼시켜야지." 치졸한 결정이었다. 왕으로서, 혹은 가장 위의 손위 형제로서 너그러움은 조금도 볼 수 없었다. 휴고는 많은 장점이 있다고 퀘이즈를 평가하지만, 못지않은 단점도 많았다. 대표적인 단점은 쪼잔함이었다. 나쁘게 말하면 쪼잔함이고 체면을 따지느라 관대한 척 하지 않았다. 휴고는 퀘이즈의 쪼잔함이 자신에게 향하지 않으면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었다. 그런데 휴고는 갑자기 단편적인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아내가 찾아와 청혼한 날 그녀는 처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 공주는 왕실의 이익을 위해 언제든 팔려나갈 준비가 되어 있지요. 적당한 지참금만 받으면 왕실에서는 절 아무 곳에든 시집보낼 겁니다. 팔려나가기 전에... 제가 절 팔고 싶었어요. ]휴고는 뭔가 싸한 기분이 들었다. ============================ 작품 후기 ============================eonchu 님, 웃음발작 님, 아엘로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 -- 사랑합니다 -- > 공교롭게도 그녀는 어제 만약에 대해 이야기했고, 휴고는 만약이라는 가정은 쓸데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휴고는 만약을 그려보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만약 그가 그녀의 제안을 웃어넘겼다면. 한 발자국만 삐끗했으면 그녀는 지금 휴고 타란의 아내가 아니었다. 벌어지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여전히 '어쩌면 그럴 수도 있었다.' 라고 만약이라는 가정을 세우는 일은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휴고는 등 뒤가 섬뜩했다. 왕이 치워버리려고 하는 밥벌레 중에 그녀가 포함될 수 있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정해주는 남자와 결혼해서 다른 남자 아내가 된 그녀와 어디선가 마주칠 수 있었다. 다른 놈의 여자가 된 아내를 상상하면 속이 뒤집혔다. 그녀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신의 여자였다. 현실을 상기하면 식은땀이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휴고는 계속 뭐라고 말을 하는 퀘이즈를 흘끗 보았다. 자식을 방치한 죽은 왕도 나쁘지만, 눈 앞에 앉은 놈도 나빴다. 오라버니가 되어서 누이들 좀 챙기는 일이 뭐가 그리 어려워서. 휴고는 조금 전까지 퀘이즈의 배다른 형제 내쫓는 프로젝트의 예산 절감 효과에 내심 동조했다. 그러나 본인 일과 관련되는 순간부터 생각이 달라졌다. 밥벌레라니. 생각 할수록 불쾌했다. 자신을 사생아라고 칭했던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가 자신을 비하하는 모습을 처음 봐서 휴고는 적잖이 놀랐다. 휴고는 그 개념 속에 그녀를 넣어서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었다. '왕궁에서 지낸 생활이 매우 힘들었나?' 휴고는 아내의 어린 시절은 종종 들었으나 왕궁에서 지낸 동안의 이야기는 들은 기억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시녀가 없어서 직접 일을 했다. 그는 알고 있던 사실에서 새삼스러운 분노를 느꼈다. 그녀는 왕궁에서 지낸 시간을 기억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비참한 생활을 했음이 틀림없었다. [ 팔려나가기 전에... 제가 절 팔고 싶었어요. ]당시에는 그 말을 듣고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에 대한 깊은 죄책감이 날카로운 바늘처럼 가슴을 쿡쿡 찔렀다. 그를 찾아와 그런 말을 해야 했던 그녀의 비참함과 절망적인 심정을 왜 그때는 헤아리지 못했을까. 죽은 왕에 대한 불쾌함이 다시 치솟았다. '그렇게 뒈져도 싸지.' 휴고는 죽은 왕의 수치스러운 사인을 떠올리며 조소했다. 루시아는 집에 돌아와서 제롬에게 꽃 자수 손수건에 대해 물었다. 제롬은 속으로 웃으면서 겉으로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매일 확인하고 챙겨서 가지고 다니십니다." "... 언제부터요?" "수개월은 되었지요. 로암에서 지낼 때부터 입니다." "지난번에 내게 그이에게 손수건을 선물하라고 말할 때는 그런 말 하지 않았잖아요." "아시는 줄 알았습니다만." 제롬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마님께서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면 주인님께서 손수건을 어디서 얻으셨겠습니까." "......" 내가 준 적 없다. 루시아는 제롬에게 말할 수 없었다. 준 적 없다고 말하면 그가 손수건을 몰래 가져갔다는 상황으로밖에 설명이 안 되었다. 남편의 주인으로서의 권위를 훼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제롬은 이미 알고 있었다. 데미안 도련님에게 보내려고 하녀가 소포 꾸러미를 만들기 전에 완성된 손수건을 바구니에 담아 놓았는데 거기서 주인님이 몇 장 들고 가는 것을 무려 직접 목격했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주인이 도무지 할 것 같지 않은 해괴한 짓이라 놀란 것은 잠시. 제롬은 주인의 모든 것에 의문을 품지 않는 충직한 집사였다. 마님께 입 다물고 있었던 건 조심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두 분 사이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어서 제롬은 언제나 조심하고 있었다. "... 단지, 그걸 가지고 다니실지 몰랐다는 말이었어요." "헌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체면이 있잖아요. 어떻게 그런 면 손수건을 들고 다녀요. 누가 보면 웃어요." "걱정 마십시오. 주인님께서는 대범하십니다." 싱긋 웃는 제롬을 보면서 루시아는 새삼스럽게 제롬이 왜 유능한 집사인지 깨달았다. 나이답지 않은 능수능란함이 제롬의 능력 중 하나였다. 남편의 뻔뻔함과 제멋대로의 억지와 남들 상관하지 않는 이기적인 면모를 대범함이라는 단어로 포장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했다. 루시아는 손수건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그가 아들에게 보낼 손수건을 몰래 가져가는 장면을 상상하면 믿기지 않고 어이가 없기도 하고,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오면서 그가 왜 그래야 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손수건이 필요했으면 당당히 달라고 하는 편이 그에게 어울렸다. 그러지 못했던 그의 조심스러운 마음이 따뜻한 기운처럼 그녀의 심장으로 스며들었다. 손수건은 계기였다. 루시아는 그동안 그가 보여준 태도, 말, 표정으로 드러내는 감정을 하나씩 되짚었다. 어쩌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라는 생각으로 강하게 못 박았다. 순전히 그녀가 겁쟁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정리했다. '그를 사랑해.' 그의 마음을 짐작해 보았다. "어쩌면 그도.. 나를 사랑해. '문제는 그가 그걸 자각하고 있는지였다. 그는 아직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알지 못하고 여전히 부정의 단계에 있을지도 모른다.' 기다려야 할까. 아니면... 내가 먼저 말을 꺼내야 할까. '그에게 청혼하리라 결심하고 공작저를 찾아가던 그날 심정 이상으로 그녀의 앞에 선택하기 어려운 갈림길이 놓였다. 휴고는 귀가하는 마차 안에서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덮을 일이 아니야. 그녀와 이야기를 해야 해. '두 사람의 관계는 지금 아주 평화로웠다. 그들이 지금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다는 사실을 휴고는 외면하려고 했다. 지금 이대로 영원하면 좋겠지만, 언제 어디서 돌이 날아올지 알 수 없었다. 더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가기 전에 안전장치를 만들어야 했다. 망할 계약결혼. 당시에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유리한 계약을 했다고 흡족해하던 자신을 두드려 패고 싶다고 먼 훗날 생각하게 될 줄. 그들 결혼은 시작부터 잘못 끼운 단추였다. 바로 잡지 않고서는 나아갈수록 걷잡을 수 없이 얽힐 것이다. 최악의 예는 무수히 많았다.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을 수도, 그를 미워해서 외면할 수도, 지금처럼 그를 향해 웃어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변해버린 그녀를 보듬으며 인내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를 괴롭히고 힘들게 할지 모른다. 그러면 둘 사이는 최악으로 치달을 것이다. 휴고는 계약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때로 되돌아가 그녀와 다시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계약이라는 껄끄러운 문제를 해결할 때가 왔다. 귀가하는 그를 맞이하는 아내를 보며 휴고는 심장이 아릿하게 죄어들었다.' 이 여자 없이는 안 돼. '" 저녁은 드셨어요?" "시간이 몇 시인데. 먹고 왔어. 당신은?" "시간이 몇 시인데요. 저도요." 휴고는 그녀의 허리를 한쪽 팔로 감싸면서 걸음을 옮겼다. 고용인들은 알아서 흩어졌다. 제롬은 주인께 잡다하게 고하고 결재받을 일이 몇 가지 있었지만, 급하지 않았다.' 내일 받지 뭐. '오늘 일을 절대 내일로 미루지 않는 성실한 집사는 이제 예전처럼 시계추 같은 생활을 하지 않았다. "당신한테 할 말이 있어." "지금요?" "음. 지금이 좋겠어." 두 사람은 2층으로 올라갔다. 루시아의 침실에서 이어진 응접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휴고는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갈등했다. 대화고 뭐고 먼저 한 번 할까. 보드라운 몸이 옆에 찰싹 붙어 있으니까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오늘 입궁했었는데요." "응? 아.. 그런다고 했지. 좋은 시간 보냈나?" "네. 즐거웠어요." 루시아는 뭔가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어떻게 말머리를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당신이 내게 결혼하자고 찾아온 날 말이야." 루시아는 갑자기 그가 꺼낸 화제가 워낙 의외라서 그를 빤히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왜 나였지?" "... 그걸 이제 물으세요?" 결혼하고 1년 반이 지났다. 그의 질문은 너무 늦었다. "상관없었으니까." 처음에는. 상관없을 뿐 아니라 관심도 없었다. 그녀와의 결혼은 계약이었다. 계약이란 유리하면 그만이고 계약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시간이 지난 후에는 물을 수가 없었다. 그녀와의 결혼 생활이 아슬아슬한 난간을 디딘 것 같아서 계약 결혼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녀로부터 결혼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듣고 휴고는 많은 용기를 얻었다. 어쩌면 그녀는 그들의 결혼 생활을 꽤 만족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도에 올라온 이후 자신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더욱 살가워지는 것 같았다. 이 상태에 안주하고 싶기도 했다. "지금은 상관이 있어요? 어떤 점이요?" "... 난 당신의 후보 중 하나였나?" 그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어서 루시아는 그를 말없이 보았다. "그러니까. 당신 제안을 내가 거절했다면 딴 놈 찾아갔을 거냐고." 계약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휴고는 그것부터 알고 싶었다. 그 문제를 생각하면 휴고는 은근히 속이 부글부글했다. 그녀가 다른 놈 여자가 되었을지 모르는 가능성을 생각만 해도 부아가 났다. 벌어지지 않은 일로 그는 속을 끓였다. 루시아는 어이가 없기도 하고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어쩐지 웃음이 났다. "인제 와서 그게 중요해요?" "중요해." "왜요? 제가 그런 후보들이 있다고 하면. 지금 그걸 알아서 어쩌시게요. 그 사람 해코지라도 하시게요?" 그는 마치 긍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눈동자에 어떤 결심이 엿보였다. 정말 그런 후보가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기세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억지를 보며 루시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존재하지도 않는 누군가를 향해 마치 질투를 하는 것 같았다.' 질투...? '루시아는 왕비를 만나러 입궁했을 때 장미궁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루시아에게 관심을 표하는 라미스 백작에 대한 그의 과격한 반응. 그때 사실 조금 기분이 이상하기는 했다. 단순히 아내에게 접근하는 다른 남자에 대한 불쾌감이라 보기에는 감정적이었다. 그는 감정적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않는 남자였다. 루시아는 이것저것 떠오르는 가정들을 그때는 애써 무시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을 혼자 망상으로 만들어 내서 들뜨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루시아는 어쩌면 망상이 아니라는 희망을 엿보았다. "... 그런 후보는 없었어요." 그의 붉은 눈동자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기뻐하고 있었다. 루시아의 막연한 예감이 조금씩 형태를 잡았다. 심장이 쿵쿵 뛰고 입안이 말랐다. 그의 눈을 계속 바라보면서 루시아는 말을 이었다. "당신이 거절했으면 아마. 전 왕실에 지참금을 낸 누군가와 결혼했겠죠." 그건 그것대로 또 기분이 별로라고 휴고는 생각했다. 누군지 알 길 없는 괘씸한 놈을 향해 그는 불쾌함을 느꼈다. "외출을 나온 날이었어요. 전승기념파티가 열리는 날이었죠. 그날 오후에 기사단 행진을 하는 당신을 봤어요." 휴고는 그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사람들 구경거리가 되는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었다. 어쩔 수 없이 했던 광대 짓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날 파티가 당신과 첫 만남이었군." 휴고는 소피아 로렌스와의 일을 떠올리며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그 일을 다시 떠올리기 바라지 않아서 슬쩍 눈치를 살폈다. "저는 당신께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데미안을 온전히 인정하는 결혼을 제시하면 당신이 흥미를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 영 틀린 판단은 아니었어." 휴고가 그녀의 제안에 흥미를 느낀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과감하게 데미안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었다. "그게 이유 전부인가? 그건 너무." "네. 터무니없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도박이었어요." "도박?" "저는 궁에서 도망치고 싶었고, 보호자가 필요했어요. 당신의 권력과 부. 그게 필요했지요." "흐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는 그의 안색을 살폈다. 조금도 불쾌한 빛이 없었다. 그는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기분 나쁘지 않으세요?" "음? 아. 그런 건 아닌데. 좀 의아해서 말이지. 당신이 그렇게 충동적인 성격은 아닌 것 같아서. 그리고 권력과 부... 그다지 당신이 그런 걸 탐하는 것 같지도 않고." "저도 많이 망설였는데 하라고 말해 준 사람이 놀만이었어요." "놀만? 그 여류작가?" "놀만은 과감한 도전을 좋아했거든요." 휴고는 내심 그 여류작가를 살펴주라고 붙여놓은 자들에게 더 많이 신경 써 주라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권력과 부는 당신 기준이 커서 그래요. 전 의식주만 해결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으음. 의식주. 당신 입에서 그 단어를 듣는 건 참 묘하군." 중요한 문제를 고민하는 것처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루시아는 언뜻 웃음이 나왔다. "권력과 부 말고 개인적인 욕심도 있었어요." 그게 뭐냐는 듯 바라보는 그를 향해 루시아는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당신이 미남이라서." 그의 표정에 파동이 일었다. "저 당신 얼굴 정말 좋아해요." "... 칭찬인가?" "그럼요." "고맙군." 휴고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반짝반짝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그녀의 눈빛은 뭐랄까. 값비싼 보석을 보며 감탄하는, 평소 그녀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던 물욕에 가득 찬 표정이라 어쩐지 기분이 애매했다. "운이 좋았어." "그러게요. 운이 좋으니 공작부인이 되었죠." "당신 말고 나." 휴고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입술만 빨아들이는 가벼운 키스였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행운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바로 조금 전까지는. "당신은 도박에 인생을 걸 만큼 절실했고." 휴고는 고개를 틀어 다시 키스했다. "나는 당신 손에 잡힌 패였군." 휴고는 처음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에 감사했다. 부와 권력. 사는데 조금 편하기는 하지만, 편리함보다 더 큰 짐을 지우는 지긋지긋한 것들이라 여겼던 모든 것. 자부심도 비하도 하지 않고 그저 무관심했던 자신의 외모도. 그녀가 자신을 선택하는데 좌우했던 모든 조건. 여자들은 그가 가진 부와 권력을 좋아할 뿐이라고 여겼던 그가, 부와 권력이 있어서 그녀를 얻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당신을 도박패라고 표현할 의도는 아니었어요." 루시아가 변명했으나 휴고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서. 당신의 도박은 성공했어?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같은 도박을 벌일 만큼?" 그는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붉은 입술을 문지르며 쓸었다. 느릿하고 진득한 그의 손길을 느끼며 루시아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집요하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벅찼다. 주변을 떠도는 야릇한 성적 긴장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나른한 눈을 하고 있었다. 루시아는 홀린 것처럼 대답했다. "네. 몰랐던 옵션이 하나 더 있더라고요." "옵션?" 루시아는 와락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술에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췄다. 당황해 흔들리는 그의 눈을 보며 루시아는 야릇하게 웃었다. "정력...?" "... 이 마녀 같으니." 그가 달려들자 루시아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입술, 눈, 턱, 목 가릴 것 없이 마구잡이로 키스해대며 짓궂게 깨무는 그의 입술을 피해 그를 밀어내며 루시아는 숨이 차도록 웃었다. 휴고는 그녀의 맑은 웃음소리가 감격스러웠다. 이 웃음을 절대 잃고 싶지 않았다. 결혼해 줘서 고맙다는 그녀의 말에 휴고는 입장을 바꾸어 전적으로 동감했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그녀도 같은 마음으로 느끼며 그 말을 했기를 바랐다. "비비안. 나도 말한 적 없는 것 같아." "네?" "그날. 날 찾아와서 청혼해줘서 고맙다고." 루시아는 갑자기 숨이 막혔다. 그의 붉은 눈동자 가득한 애정과 기쁨을 보며 그녀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아.. 더는 안 돼. '눈시울이 화끈했다. 저절로 눈 가득 눈물이 고였다. 당황해 흔들리는 그의 눈을 보았다. 눈을 감았다가 뜨자 흐려진 시야가 맑아지면서 뜨거운 눈물이 타고 흘렀다. 가슴이 벅차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집어삼키는 감동을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흘러서 넘쳤다. 더는 감출 수 없었다. "사랑해요. 휴." 가슴 깊은 곳에서 치솟아 저절로 입 밖으로 나왔다. 고백과 동시에 루시아는 그가 없는 삶을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그는 루시아를 보고 있었다. 잠깐 경직된 그의 붉은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시시각각 변해가는 모습을 보았다. 놀람과 의심, 그리고 기쁨. 마지막으로 환희로 떨리는 눈을 보며 루시아는 깨달았다.' 나를 사랑해. 이 남자는... 나를 사랑하는구나.'감격으로 온몸이 떨리면서 이상하게도 그리 놀랍지 않았다. 무의식중에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을 계속했던 것 같다. 정면으로 맞서지 못했을 뿐이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루시아는 눈물 젖은 눈으로 그를 향해 행복하게 웃었다. "제게 장미꽃을 주실 건가요?" 휴고는 흠칫했다. 희열에 젖어 아득해지는 정신이 확 깨어났다. 눈가와 볼 전부가 눈물로 축축하게 젖은 그녀의 미소가 환상 같아서 휴고는 손을 뻗어 볼을 감싸 쥐었다. 손에 생생하게 잡히는 감촉은 신기루가 아니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 당신은 정말 마녀야." 이 상황에서 장미꽃이라니. 휴고는 진심으로 세상의 모든 장미꽃을 뿌리 뽑아 쌓아두고 불 싸지르고 싶었다. 평생 그녀를 당해낼 수 없을 것 같다는 불길하면서도 행복한 예감이 들었다. 휴고는 그녀를 품으로 당기면서 젖은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혀끝에 닿는 눈물의 짠맛이 달게 느껴졌다. 고개를 틀어 붉은 입술에 키스했다. 입안 깊은 곳의 여린 살을 훑으며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속눈썹을 바라보았다. 부드럽고 달콤하면서 그답지 않게 풋풋한 느낌의 키스가 끝나고 그는 입술을 뗐다. 휴고는 시선을 마주치는 그녀의 맑은 호박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모습이 그녀의 눈동자 가득히 담겼다. "나는." 목이 따가워서 휴고는 말을 멈추고 큼큼 소리 내어 목을 가다듬었다. 이게 목이 멘다는 거구나. 휴고는 새로운 감정 상태를 감각으로 배웠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새하얬다. '사랑해...? 날...?'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믿기지가 않았다. 거대한 어떤 힘이 작당해서 그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그의 침묵이 길어졌다. 루시아는 재촉하지 않으려 했으나 마음 밑바닥에 약간의 불안감은 남아 있었다. 그로부터 확언을 듣고 싶었다. "사랑해요." 그는 어딘가 아픈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사랑해요. 휴." 휴고는 신음처럼 내뱉으며 한숨을 쉬었다. "좀 쉬었다 해줘. 숨을 못 쉬겠어." 루시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제게는 말해주지 않으실 거예요?" "... 너무 짧아." 사랑해. 한마디로 표현하기에는 흘러넘쳐서 스스로 주체하지 못하는 마음이었다. 그 짧은 단어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그의 기쁨이자 고통이었다. 그녀를 품에 안고 있을 때의 안도감에서 비롯되는 기쁨, 별개의 두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근원적인 고통. 그녀의 미소는 그의 행복이고 그녀의 눈물은 그의 아픔이었다. 인간이 지난 언어의 한계를 이렇게 실감한 적 없었다. 그래도 그 단어뿐이었다.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뭔가를 작은 상자 안에 억지로 욱여넣는 것 같아도 그 말밖에 없었다. 휴고는 그녀를 품으로 꽉 끌어안았다. 아주 단단히 두 팔로 그녀의 등을 감싸 서로 심장이 맞닿아서 상대방의 심장 소리를 온몸으로 느끼도록 밀착했다. 품 안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감동적이었다. 오래전부터 그녀는 그의 아내였고 그의 여자였지만, 휴고는 비로소 그녀의 모두를 가졌고 그녀에게 온전한 자신을 모두 내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내 심장이야. 사랑해." 귓가에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루시아는 다시 눈물이 솟았다.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자신의 심장 소리인지 그의 심장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박동을 온몸으로 느꼈다. 벅찬 감동으로 가슴 안쪽이 저릿했다. 인간의 몸이 왜 자극에 노출되는 시간과 빈도에 비례해서 반응이 무뎌지는지 알았다. 지금의 행복과 감격을 동일한 정도로 계속 느낀다면 심장이 멈추어 버릴 것이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 안고 한참 앉아 있었다. 둘 다 한계까지 치달은 감정을 갈무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루시아는 놀만이 썼던 로맨스 소설의 내용을 떠올렸다. 주인공은 사랑을 확인하면서부터 고난의 길에 내던져졌다. 어떤 역경도 주인공은 항상 훌륭히 이겨냈다. 소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현실은 비교할 수 없이 가혹했다. 루시아는 자신의 앞에 놓인 현실의 달콤함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 앞에 장애는 없었다. 이미 그들은 합법적인 부부였다. "오늘 당신하고 결혼 때 계약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어." 그의 낮은 목소리가 몸에 울렸다. 루시아는 몸을 조금 느슨하게 빼서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이미 당신은 내게 입적동의서를 줬고, 데미안을 입적했지. 계약 조건은 이미 충족되었고 파기라는 말이 무의미하다는 건 알아. 그래서 당신 생각을 들어보고 싶었어." "계약은 이미 의미가 없는 걸요." 루시아는 그가 어떤 면에서는 고지식하다고 생각했다. "계약 조건이 아니었어도 전 기꺼이 데미안을 아들로 받아들였을 거예요. 사랑스럽고 사랑 받아 마땅한 아이니까요. 그리고 당신은 이미 제게 성실한 남편이 되겠다고 약속했어요. 아. 마지막 조건은 하나 남았군요. 제가 당신께 사랑한다고 하면 당신은 장미꽃을 주기로 하셨죠." 그가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보며 루시아는 웃었다. "하지만 제게 장미꽃을 주지 않으실 거잖아요." "... 당신 계속 그 얘기로 날 괴롭힐 거지?" "안 그럴게요." 루시아는 쿡쿡 웃었다. 그의 얼굴에 못마땅함이 가득한데 뭐라 할 수 없어서 답답하고 억울한, 그런 내심이 드러났다. "언제부터 저 사랑했어요?"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 모르겠어." 루시아는 조금씩 지난날의 특정 사건을 짚어가면서 "이때요?" 라고 물었고, 휴고는 "그보다 앞인가..?"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루시아가 "데미안이 왔을 때?" 라고 묻자 휴고는 잠시 생각했다. "아마 그쯤...?" "그렇게 오래요?" "당신이 둔해서 이러다 숨넘어가는 줄 알았어." 소심하게 속으로만 끙끙댄 남자가 말만 잘한다. 데미안이 왔을 무렵이면 거의 1년 전이었다. 루시아는 새삼스럽게 그를 보았다. 그럼 그가 1년 가까이 혼자 끙끙대고 있었다는 건가. 안타깝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했다. 루시아는 새침하게 말했다. "당신도 만만치 않아요. 전 당신보다 오래됐거든요." 잠시 후 그가 "뭐?!" 라고 소리치고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이 여자 진짜 잔인하네. 그러면서 날 절대 사랑할 일 없다고 선언했단 말이야?" 루시아는 기억을 더듬다가 "아..." 하고 중얼거렸다. 그 일을 그가 그렇게 마음에 두고 있을 줄 몰랐다. 말다툼하다가 오기로 한 말이었다. 그가 그 이후에는 다시는 관련된 화제를 꺼내지 않아서 루시아의 마음속에 그저 지나간 상처의 흔적으로 남았을 뿐이었다. '우리는 서로 너무 겁이 많았군요.' 루시아는 두 사람이 먼 길을 돌아와야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이름도 안 알려주고." "이름이라니요?" "당신 아명 말이야." 루시아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비비안이라는 이름 외에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 루시아를 아명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자신의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뒤늦게 깨닫고 "아..." 하고 중얼거렸다. "제가 말씀드린 적이 없나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그가 순간 울컥해서 버럭 하려다가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끄응, 중얼거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데미안 녀석이 알고, 심지어 집사까지 아는데 왜 나는 몰라야 하느냐고 구시렁대는 그를 보며 루시아는 웃음을 흘렸다. "제게 루시아라는 이름은 특별했어요. 어머니가 지어주신 이름이니까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궁에서 지낼 때 누구도 불러주지 않은 진짜 이름이었어요. 비비안 공주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 같았죠. 당신이 처음에 절 비비안이라고 불렀을 때는 어색하고 불편했어요. 비비안은 진짜 제 모습인 루시아를 감추는 껍데기라고 생각했지요."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는 그를 향해 루시아를 손을 뻗어서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 "이름은 불러주는 사람이 있을 때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당신이 절 비비안이라고 부를 때마다 가짜 비비안이 진짜가 되기 시작했어요. 저는 당신의 비비안이에요. 휴. 오직 당신만. 저를 비비안으로 부를 수 있으니까요." "......" "집사도 아는 이름보다는 당신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더 특별하잖아요." 그의 붉은 눈동자가 조금 시큰둥하지만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그런가? 하며 혹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루시아는 쿡쿡 웃었다. "데미안 손수건은 왜 훔치셨어요?" "훔치다니. 적절치 못한 단어군." 그는 당당하게 항의했다. 루시아는 뻔뻔한 그를 흘겨보았다. "좋아요. 왜 가져가셨어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녀석 것 하나 만들 때 내 것도 만들어." 맡겨 놓은 것을 내놓으라는 태도였다. 루시아는 그의 요구는 일단 무시하고 다음 공격을 가했다. "또 폐하께 빼앗기시려고요?" "......" 휴고는 탄식하면서 "인정사정없군." 하고 중얼거렸다. "당신 내게 평소 불만이 많았어. 아니라고 하지 마." "으음.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저도 마음고생 많이 했어요. 당신이 남자답게 용기를 냈으면 하지 않았을 고생이었죠. 청혼도 제가 하고 고백도 제가 하고. 와. 이제 보니까 타란 공작 전하 체면이 말이 아닌데요." "... 살살해. 이 여자야. 남편을 아주 난도질하는군." 루시아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당신이 소심하고 나쁜 남자라도. 사랑해요. 휴." "앞의 말은 빼주지?" 휴고는 투덜거리면서 그녀를 안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침실로 들어가서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고 "이야기하는 중이잖아요." 라고 항의하는 그녀의 앙증맞은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막았다. "이야기가 너무 길었어. 좀 쉬자고." 헛웃음 치며 기가 막혀 하는 그녀의 반응은 개의치 않았다. 곧바로 침대 위로 밀어 넘어뜨리면서 휴고는 그녀의 위로 올라갔다. 그의 손이 치맛자락을 들치고 허벅지 안쪽을 더듬었다. "그리고 당신이 말한 옵션. 성능을 시험해 봐야 하잖아?" "충분히 했어요!" 그녀의 반항은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어스름한 새벽. 휴고는 언제나 마찬가지로 비슷한 시간에 잠에서 깼다. 똑같은 시간에 아침을 맞이하고 시작하는 똑같은 하루.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삶이었다. 가끔은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까 짙은 허무를 느끼기도 했다. 휴고는 옆구리에 닿는 체온과 부드러운 피부를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회색빛 그의 세상에 유일한 총천연색으로 반짝거리는 그의 아내. 그의 사랑. 그녀가 있어서 그의 삶은 의미를 얻었다. 그녀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었다. 따끈한 그녀를 품에 안지 않고서는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녀가 수도에 올라온 이후부터 그는 자신의 침실을 이용하지 않았다. 주인이 찾지 않는 그의 침실은 한여름에도 썰렁했다. 휴고는 새근새근 자는 그녀의 허리 아래에 팔을 넣어 품으로 당기면서 꽉 안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로 눕혀주고 이불을 덮었다. 그녀가 뒤척이면서 옆으로 돌아누웠다. 드러나는 동그란 어깨에 입을 맞추고 휴고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주인의 기상 시간이 이르기 때문에 저택은 이른 아침부터 깨어나 움직였다. 언제나 시중을 전담하는 삼 형제의 손발 착착 맞는 시중을 받으며 휴고는 옷을 갈아입었다. 옆에서 제롬은 어젯밤에 보고하지 못한 잡다한 일들을 구두 보고하고 간단하게 결재를 받았다. "노란 장미 말이야. 왜 노란 장미였지?" 제롬은 주인의 뜬금없는 질문에 성실히 답했다. "왜 제가 노란 장미를 택해서 보냈느냐는 말씀이십니까?" 휴고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롬은 "꽃말 때문이었습니다." 라고 말하며, 세상의 대부분 꽃에는 '꽃말'이라고 하는 특정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꽃말? 별... 그래서 노란 장미 꽃말이 뭔데?" "이별입니다." 라고 제롬이 답하자 휴고의 표정이 상당히 안 좋아졌다. "그거와 반대되는 뜻의 꽃말을 가진 꽃은?" "붉은 장미는 정열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장미 말고." 휴고는 색깔 불문하고 장미라면 지긋지긋했다. "스타티세라는 꽃이 있습니다. 꽃말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그게 좋겠군. 매일 아침 그 꽃 한 다발씩 안사람이 일어나면 가져다줘." 휴고는 그녀 머릿속에서 장미꽃을 지워버리겠다고 생각했다. 보리스 엘리엇은 타란 공작가 소속 기사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18살이었다. 보리스는 단장 칼리스 엘리엇의 아들이었다. 두 엘리엇을 두고 동료들은 보리스를 작은 엘리엇이라 불렀다. 보리스는 그 호칭을 싫어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가 가장 존경하는 기사였으니까. 보리스는 오늘 엄청난 임무를 받고 수도로 올라왔다. 수도는 처음이었다. 거대하고 복잡한 도시 모습에 저절로 시선이 갔다. 게이트를 타는 것도 처음이라 신기한 경험에 적잖이 상기되어 있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려 했지만, 자꾸 흐물흐물 풀어져서 입을 헤 버리고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보리스." 보리스는 자신을 마중하러 나온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딘은 딱 봐도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수도 초행길 티를 내는 보리스를 보며 속으로 웃었다. "혼자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다." "아닙니다. 이 정도쯤은 당연히 할 수 있어야지요." 내가 혼자 여기까지 왔어요! 나 잘했죠! 라고 보리스는 표정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귀여운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딘은 웃음을 삼켰다. 처음 봤을 때 10살의 어린 소년이었다. 어느새 이만큼 자랐나 싶어 신기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주신 전언은 여기..." 보리스가 품을 뒤지려는 것을 딘이 저지했다. "네가 가져온 임무니까 끝까지 네가 해야지. 네가 주군께 직접 드리는 거다." "제가 직접..." 보리스의 눈동자가 감격에 겨워 반짝거렸다. 어렸을 때부터 주군은 영웅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다. ============================ 작품 후기 ============================은으1레드 님, enenfp 님, 퍼플케이브 님, 에나멜 님, 파랑520 님, amitanim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지난 화의 성대한 반응 감사합니다. 어제가 마침 빼빼로 데이였네요.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말이죠. 둘이 드디어 몸과 마음이 통하게 되었으니... 이젠 둘에게 시련을 내려야겠군요. 훗. 공작저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보리스는 계속 들떠 있었다. 그러면서 품 안에 든 전언을 누가 훔쳐가기라도 할까 봐 수시로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누가 봐도 귀중에 것을 지닌 자의 태도였다. 수도 거리를 걷다가는 틀림없이 소매치기의 표적이 될 것이다. 딘은 보리스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전언 내용을 대충 짐작했다. 야만족 토벌에 관한 소식일 터였다. 연례행사가 돌아오는 시기였다. "북부에 별일은 없고?" "로암은 별일 없는데 야만족 국경 근처는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국경으로 떠나신 지 꽤 되었어요." "... 그래? 단장님께서 따로 이르신 말씀은?" "특별한 말씀은 없으셨고, 출병이 있으면 참전할 수 있겠느냐고 하셨어요. 전 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제게 전언을 주군께 가져다 드리라고 하셨어요." 딘이 흠칫했다. '단장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이 녀석을 북부토벌에? 벌써?' 단장이 엄한 아버지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너무 일렀다. 이제 겨우 18살이었다. 어차피 보리스는 단장 뒤를 이어 정예 기사단에 합류할 것이다. 몇 년 뒤라 해도 늦지 않았다. 벌써 끔찍한 전쟁터에서 구를 필요가 없다고 딘은 생각했다. 타란 공작가에는 대대로 '정예'라고 불리는 기사단이 있었다. 공식적인 지위는 아니었다. 대우는 다른 기사들과 똑같았다. 다만, 오직 정예 기사단만 공작을 따라 1년에 한 번 토벌대를 꾸려 북부 야만족을 징계하여 다스렸다. 정예 기사단의 역사는 아득히 오래되었다. 대대로 타란 가문의 공작은 야만족을 직접 토벌할 때 동반하는 기사들을 직접 선별했다. 숫자는 10~15명 선으로 휴고는 딱 10명만 정예로 선발했다. 딘은 처음 정예로 선발되었을 때의 가슴 벅차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는 대대로 기사도 아니었고 평민 출신임에도 로이와 함께 정예로 뽑혔다. 정예가 된다는 건 명예로운 일이었다. 공작가 다른 기사들은 모두 부러워했다. 딱히 지위나 재물의 이득이 없어도 공작의 신임을 받는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정예가 된 기사들은 점점 실력이 올랐다. 토벌을 떠나며 오가는 동안에 공작이 직접 검술을 봐주었다. '하지만... 이 녀석이 감당할 수 있을까?' 헤헤 웃고 있는 보리스의 순진한 표정은 녀석이 여전히 어려 보이게 했다. 겉보기와 달리 녀석의 속은 꽤 튼실할 것이다. 단장이 제 아들을 오죽이나 잘 가르쳤겠느냐마는. 어릴 때부터 봤던 녀석이라 그런지 아무래도 걱정이 되었다. 정예 기사에게는 불문율이 있었다. 토벌하면서 있었던 그 어떤 일도 죽을 때까지 침묵으로 가져가야 한다. 겉으로 보이는 정예 기사단의 영예로움이 빛이라면 감추어진 부분은 어둠이었다. 야만족을 토벌할 때 공작은 굉장히 잔인했다. 영지전이나 국가 간 전쟁에서는 단번에 목을 쳐 버리고 말지만, 정예 기사들만 동반할 때의 공작은 그렇게 깔끔하게 처리하지 않았다. 사지를 자르고, 머리통을 밟아 뇌수를 터트리고,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맨손으로 심장을 잡아 뜯는다. 그러면서도 그 붉은 눈은 지독히 차갑게 가라앉아 있어서 차라리 피에 미쳐서 광분하는 것이 덜 무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예 기사들이 강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피바다를 헤집고 다니다 보면 누구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어지간하면 놀라지 않는 강심장을 지니게 되었다. 언젠가 토벌하고 오는 길에 노숙하며 로이가 공작에게 물은 적 있었다. 오직 로이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 주군. 대체 검은 놔두고 왜 그리 손으로 찢어 죽이는 거요? 그런 게 취미요? ]다들 얼어붙었다. 저 미친놈. 할 말 못할 말 못 가리고.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공작 눈치를 살폈다. 공작은 뜻밖에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잠시 간격을 두고 짧게 대답했다. [ 죽이는 게 실감이 나서. 안 그러면 아무 느낌이 안 나니까 내가 괴물 같거든. ]눈치 없는 로이도 더는 묻지 않았다. 딘은 그 말을 하는 주군의 무표정한 얼굴이 굉장히 고통스러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이상하게 그토록 잔인한 공작의 살인 행위에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다. 그냥 승냥이가 양을 사냥하는 순간을 보는 것처럼, 그런 자연의 약육강식의 질서를 구경하듯 무감정하게 보게 되었다. 공작저에 도착할 때부터 보리스는 얼어붙었다. 마차에서 내리는 딘을 따라서 내리고 무작정 딘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가고 복도를 따라 걸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딘이 인사하며 예를 올리기에 보리스도 반사적으로 따라 했다. "엘리엇 경의 아들이라. 오느라 수고 많았다." 보리스는 책상에 앉아 있는 흑발의 남자를 보며 저절로 떨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닙니다!" 제대로 된 인사말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뻣뻣하게 굳은 채 서 있다가 툭, 옆에서 딘이 등을 치자 화들짝 놀라서 허둥지둥 전언을 꺼내 공작에게 올렸다. 휴고는 자기 앞에서 사람들이 지나치게 긴장하는 모습을 종종 봐서 신경 쓰지 않았다. 칼리스가 보낸 전언은 북부의 소식 일부와 국경지대의 소식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특히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부분은 야만족의 동향이었다. 타란의 영지이며 제논의 최북부 지역 대부분과 국경을 맞대는 야만족은 부족민이었다. 수시로 국경 아래로 내려와 약탈했다. 소규모 부족이 수백이 넘어서 전쟁을 할 대상이 구체적이지 않았다. 도적질한 무리를 직접 잡아봤자 다른 부족들은 우리 일 아니라고 모르쇠였다. 기마 민족이라 공격하고 빠지는 속도가 순식간이었다. 어차피 목적이 식량 약탈에만 있기 때문에 조금 불리하다 싶으면 금방 내뺐다. 명예나 기사도 따위는 없었다. "마지막 토벌이 언제였지?" "1년 2개월 전입니다." "버러지들 청소할 때가 되긴 했군." 무심한 중얼거림에 진득한 피 냄새가 묻어 나왔다. 야만족이 지나치게 세를 형성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약탈방지를 위해 공작가에서는 정기적으로 기사단을 파견하고 공작이 직접 선두에 서서 그들을 이끌었다. 나라에서는 타란 공작가가 야만족을 상대해서 나라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진실도 아니었다. 공작가에서는 야만족을 구석까지 몰아넣지 않았다. 독하게 마음먹고 전쟁을 일으켜 향후 수십 년은 준동하지 못하도록 싹 쓸어버릴 여력이 있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야만족은 타란 공작가의 필요악이었다. 야만족이 있어야 타란 가문도 존재 의의가 있었다. 야만족이 골치 아픈 존재로 남아 있는 한, 타란 가문을 누구도 섣부르게 건드릴 수 없었다. 가문 비밀의 방에는 선조의 유훈이 남아 있는데, 야만족을 어찌 다루어야 하는지 나와 있었다. 첫째, 그들이 구심점을 가져 나라를 세우지 못하게 할 것. 둘째, 그들의 세력을 너무 약하게 만들지 말 것. 지금껏 흔들린 적 없는 원칙이었다. 여기까지는 정예 기사들이 아는 내용이었고, 오직 타란 가문의 가주만 아는 비밀이 하나 더 있었다. 야만족은 혈족의 몸에 흐르는 광기를 가라앉히기 위한 제물이었다. 나라를 지키는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마음껏 살인할 수 있었다. 역대 타란 공작가 가주들은 그렇게 피를 갈구하는 본능을 억눌러 왔다. 그리고 그 저주스러운 피는 휴고의 몸에도 흐르고 있었다. 구역질 나는 출생 비사가 아니더라도 휴고는 자신이 정말 인간이 맞기는 하는지 의심이 들 때가 있었다. '1년 2개월이라. 1년 넘도록 살인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몸이 근질거리는 갈증은 피를 보지 않으면 해소가 되지 않았다. 여자를 안으면 어느 정도 가라앉아도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상태는 아주 좋았다. 살인의 욕구가 치솟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귀찮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사들만 보내도 될 것 같은데 내가 갈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칼리스가 보내온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구심점이 생겼군. 부족을 통합하고 있다고...' 나라가 세워지면 더 큰 적을 맞대는 일은 둘째 문제고, 야만족을 상대하는 일이 국가 대 국가의 일로 넘어간다. 그러면 타란 가문에서 간섭할 여지가 줄어들었다. 타란 가문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놔둘 수 없었다. 타란 가문의 힘을 지금보다 약한 채로 데미안에게 넘겨 줄 수 없었다. 아버지로서 체면이 있지. 휴고는 조장급 이상의 기사들을 집무실로 불러 모았다. 수도에 남아 있을 기사와 함께 토벌대에 합류할 기사, 아내의 호위를 담당할 기사를 선별해 임무를 할당했다. "딘. 네가 계속 수고해 줘야겠다." "예. 주군." 마님 호위로 수도에 남게 된 딘은 두말없이 대답했다. "주군." 로이가 삐죽이 손을 들었다. "난 그냥 수도 남아 있을래요." 모두 로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저 녀석이 무슨 변덕이야.' 라고 말하고 있었다. 야만족 토벌을 나갈 때마다 가장 신나서 앞장서 날뛰던 녀석이었다. 지난해 태자 호위 때문에 혼자 참석하지 못한 일로 얼마나 원통해했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알았다. "너 또." 괜히 사람들 들쑤셔서 결투랍시고 애꿎은 사람 상하게 하는 재미를 아직 못 버렸나 싶어서 휴고의 눈이 사나워졌다. 대관식 파티 이후에는 얌전히 지내더니 슬슬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다. 주군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자 로이는 움찔하며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마님 호위를 제가 하겠다고요. 딘이 못할까 봐 그런 건 아니고. 다들 북부랑 수도랑 왔다갔다하는데 딘만 계속 수도에 박혀 있으면 야성에 젖는다고요." "... 타성에 젖는 거겠지." 휴고가 말하자 기사들이 큭, 웃음을 터뜨렸다. 로이는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큰소리쳤다. "사내가 그런 좀스런데 딴죽 거는 거 아니요." 휴고는 이놈을 일단 몇 대 패고 이야기를 계속할까 고민했다. "그리고 주군 안 계실 때 제가 더 나을 걸요. 실력을 떠나서 딘 녀석이 꽉 막혔잖아요. 마님께 무슨 일 생겨도 우선 '이러시면 안 됩니다.' 말부터 하고 볼걸요." 딘의 표정이 굳고 다른 기사들이 어깨를 떨며 웃음을 삼켰다. "나로 말할 거 같으면 일단 다 때려잡죠. 이래 봬도 지금 폐하를 1년 넘게 지켰습니다. 내가 그분 생명의 은인이라니까요." 내가 이렇게 대단해요. 의기양양해하는 로이를 바라보며 휴고는 한숨을 쉬었다. 나이는 어디로 먹었는지 철없는 아이처럼 구는 짓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저러겠지 싶어서 휴고는 이제 포기했다. "딘. 네 생각은?" "로이 의견은 일리가 있습니다. 융통성 부분에서는 로이를 따를 사람이 없으니까요. 주군 명에 따르겠습니다." 휴고는 고민했다. 실력 부분에서 로이가 발군이지만, 언제 어디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이 가장 큰 문제였다. 로이가 미친개로 불린다는 말을 들었다. 녀석에게 정말 잘 맞는 별명이었다. '일을 시키면 틀림없이 다 완수는 하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였다. 생각해보면 아내의 곁을 지킨다는 목적 완수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은 상관없었다. 녀석을 아내 곁에 붙여 놓으면 무슨 말썽을 부릴까 걱정은 되어도 아내의 안전만큼은 안심이었다. 든든한 파수꾼 노릇을 해 줄 것이다. 고민 끝에 휴고는 아내의 호위 임무를 로이에게 맡겼고, 딘은 토벌 기사로 합류하게 되었다. 루시아는 왕비의 다과 초대를 받아 입궁했다. 왕비궁으로 향하는 복도에서 낯익은 귀부인과 마주쳤다. 여인은 루시아를 발견하고 곧바로 멈추어 서서 고개를 숙였다. 앨빈 백작부인 소피아와의 만남이 그다지 달갑지 않아서 루시아는 그냥 지나치려고 했다. 그런데 소피아의 부른 배를 보면서 절로 걸음이 멈추었다. "곧 수도를 떠나게 되어 왕비 마마께 인사를 드리러 잠시 입궁했습니다. 공작부인."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개를 드세요. 몸을 그렇게 숙이고 있으면 태아에게 좋지 않을 것 같군요." 소피아가 부른 배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들었다. 전에 티파티에서 마주쳤을 때와 전혀 다른 사람처럼 평화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살이 조금 붙었는지 인상도 조금 바뀌었다. "수도를 떠난다고요?" "예. 바깥분 사업 때문에 외국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있는데 그런 여행을 해도 괜찮은가요?" "의사 말이 조심하면 문제없다고 했습니다. 바깥분은 수도에 남아 출산하라 하였지만, 그러면 너무 오래 남편과 떨어지게 되어서요." "... 그래요. 건강하고 어여쁜 아이를 출산하기 바라요." 지나가려는 루시아를 소피아가 "공작부인." 라고 불러 세웠다. "지난번에 저지른 제 무례를 다시 한 번 사죄드리겠습니다. 제가 참 어리석고 앞뒤 분간을 하지 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사 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진심으로 공작부인께 죄스럽게 생각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백작부인이 진심으로 그리 말해주니 나도 옹졸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군요. 다음에는 좀 더 편하게 서로 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루시아는 기쁜 안색으로 인사하는 소피아를 바라보았다. 소피아는 지금껏 봤던 모습 중에 가장 행복해 보였다. 곧 엄마가 된다는 기쁨에 푹 젖어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소피아는 루시아가 꿈에서 봤던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건강한 아이를 낳아 행복한 어머니가 되어 별 탈 없이 귀부인으로서 삶을 마감할 것이다. 앨빈 백작이 소피아에게 열렬히 구애하여 결혼까지 이른 과정은 로맨틱한 순정으로 여전히 사교계에서 나돌았다. 소피아가 저지른 사건을 앨빈 백작이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싸고돌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늘 없는 소피아 표정으로 봐서 소문은 아마 사실인 것 같다. '아기...' 루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납작한 복부에 손을 댔다가 흠칫 놀라 손을 뗐다. 소피아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cpeanut 님, 퍼플케이브 님, eunlah 님, 파랑520님, amitanim 님, 허롱 님, 날love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11월 15일에 깔끔하게 완결이 났을 때의 계획은 다음과 같습니다. 12월 1일자로 프리미엄 전환12월 혹은 1월에 이북 1~2권 발간11월 15일~12월 중순 원고 편집 및 표지 제작12월 20일~내년 1월 11일 개인지 신청1월 12일~1월 23일 개인지 인쇄1월 24일~2월 초 발송 완료완결 날짜가 미뤄지면서 계획도... (15일 완결이 물건너 갔어요...)12월 20일~내년 1월 11일 개인지 신청1월 12일~1월 23일 개인지 인쇄1월 24일~2월 초 발송 완료완결 날짜가 미뤄지면서 계획도... 루시아가 왕비궁에 도착하자 왕비뿐 아니라 캐서린도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번 예와 반대로 이번에는 캐서린이 소식을 듣고 오늘 자리에 끼어들었다. 세 사람이 앉아 나누는 대화는 편했다. 서로 잘 보일 필요 없고, 비위 맞추려고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 사교계 소식에 밝은 캐서린이 주로 흥미로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요즘 재미난 연극이 있어요. 보셨어요?" "연극을 보며 웃는다지요. 체신 없이..." 베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연극은 장엄한 서사시를 웅장한 무대를 만들어 연출하거나, 비극이 대부분이었다. 교양 있게 앉아서 조용히 감동하며 간혹 귀부인들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었다. '희극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였구나.' 루시아가 꿈속에서 사교계에 등장할 무렵에는 이미 희극은 유행처럼 번져 있었다. 루시아는 연극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의 삶이 고단한데 일부러 비극을 보며 울고 싶지 않았다. 희극은 볼 때만 좋고 실컷 웃고 나면 허무해져서 몇 번 보다가 말았다. "너도나도 다 체면 차리지 않고 웃는 것이 얼마나 속이 후련한데요. 왕비 마마도 한 번 가서 보세요. 전 세 번 봤지요." "세 번이나요?" 캐서린은 희극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 연극의 감동을 늘어놓았다. 베스의 표정은 이미 반쯤 넘어간 것 같았다. 캐서린은 루시아에게도 적극적으로 언제 한 번 함께 가서 보자고 제안했고 루시아도 그러자고 대답했다. "왕비 마마. 라미스 백작은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갑자기 영지로 내려갔다고 말들이 많아요." 베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일로 부친으로부터 간단한 언질이 있었다. "아버지께서 오래 영지를 둘러보지 못해 대신 내려보냈다고 하시더군요. 다른 의도는 없어요." 동생의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리 탐탁지 않은 동생이라도 어쨌든 동생이었다. 어머니는 데이빗만 오직 제 자식인 것처럼 끌어안고 베스에게는 관심조차 없었다. 어릴 때는 어머니도 동생도 원망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이가 들어 자식을 낳고 보니까 그저 어머니가 가여웠다. '참.. 같은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동생보다 착한 로빈이 믿음직하다니...' 베스는 로빈이 배다른 동생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로빈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저 부모님의 맞지 않는 결혼생활이 비극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혼 말이 오가며 사이가 극단적으로 벌어질 때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었다. 그러면서 어머니를 완전히 버리지도 못했다. 그건 분명히 아버지의 잘못이었다. "공작부인. 요즘은 사교 활동이 뜸하다면서요. 한 달 가까이 티파티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던데요." "네. 요즘 건강이 좋지 않아서요." 루시아는 얼굴을 붉히지 않으려고 애썼다. 목덜미와 팔 등 드러나는 부분에 그가 잔뜩 흔적을 만들어 놔서 얼룩덜룩한 상태로 공식 석상에 나타날 수 없었다. 이러면 밖을 못 나간다고 그에게 빽 소리쳤더니 오히려 더 재미가 들렸다. 참다 못해서 일주일 전에 더 하면 각방이라고 선언했다. 효과는 아주 좋았다. "저런. 요즘 날이 추워서 그런가요. 왕비 마마도 요즘 궁 안에만 계시더군요." 베스가 말없이 흐뭇하게 웃었다. 캐서린이 베스의 묘한 미소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눈이 커졌다. "조심하실 일이 생기셨군요!" "의관에게서 진단을 받아 안지 며칠 안 되었어요. 낌새가 있어서 조심하고 있었지요." "폐하께서 기뻐하셨겠네요." "이번에는 공주를 낳아 달라 하시더군요." 잠시 두 사람 대화를 알아듣지 못했던 루시아는 "아..." 하고 중얼거리며 베스가 손으로 쓰다듬고 있는 아랫배를 보았다. "감축 드리옵니다. 왕비 마마." "고마워요. 이미 아이를 셋이나 낳았는데 호들갑떨고 싶지는 않네요." "무슨 말씀이세요. 마땅히 축하드릴 일이죠. 오라버니께서 그렇게 공주를 입에 달고 다니시더니 이제 소원 푸시는 건가요?" "또 아들일지도 모르지요." "아... 그건 저도 좀. 귀여운 여자아이가 보고 싶은데요." "어머나. 남자 조카는 귀엽지 않으신가요?" "사내애들은 너무 드세요. 한 시간만 봐도 진이 다 빠진다고요." 시녀가 다가와 베스의 곁에서 작은 목소리로 고했다. "데려오너라." 베스는 시녀에게 지시하고 다른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했다. "에단이 낮잠을 자다가 잠투정이 부리는가 보군요. 잠시 즐거운 시간을 방해해야 할 것 같아요." 에단은 왕의 셋째 아들이며 올해 3살이었다. 루시아와 캐서린이 기꺼이 상황을 이해했고 잠시 후 시녀가 금발의 어린 사내아이를 안고 왔다. 아이는 눈을 비비며 심통이 찬 얼굴로 어머니를 보자마자 팔을 뻗어 목을 감으며 품에 안겼다. 베스가 손으로 아이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두드리면서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자식에게 사랑을 쏟는 어머니의 모습은 어떤 매혹적인 미녀의 웃음보다 아름다웠다. 숭고하며 신비로웠다. 루시아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가 무서운 꿈을 꾸고 자다 깨어 우는 자신을 안고 토닥토닥 두드려 진정시켜주던 기억이 났다. 어머니 품에 안겨 금방 새근새근 잠드는 어린아이의 모습에 어린 시절을 투영했다가, 사랑하는 아이를 안고 행복해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자신을 그려보고 있었다. '아이...'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의 사랑을 얻고 세상 모두를 얻은 것처럼 기뻐한 일이 불과 한 달 전이었다. 그녀의 인생에 아이는 없을 거라고 각오했다. 그의 사랑보다 더 일찍 포기한 문제였다. 굳은 각오가 왜 그의 사랑을 얻으니까 이렇게 쉽게 흔들리는지 모르겠다. 왕실마차를 타고 내궁 입구에서 내렸다. 가문의 마차가 공작부인을 저택까지 모시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루시아는 아까부터 계속 아이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이 이야기를 하기에 이르다는 건 알아. 이제 겨우 그와 서로 마주 보기 시작했는걸.' 알면서도 왕비 품에 폭 안긴 어린아이 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래서 평소와 다르게 호위 딘이 마중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하인이 내려주는 마차 계단을 올라 마차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휙 당기는 힘에 그대로 풀썩 넘어졌다. 짧은 비명을 지르며 넘어져 기댄 품이 익숙했다. "휴?" 휴고는 놀라 동그라진 그녀의 눈을 보며 입술에 키스했다. 허리를 한쪽 팔로 안고 한 손은 그녀의 팔을 붙들어 불안정한 자세를 지탱했다. 과실을 깨무는 것처럼 달콤한 그녀의 입술을 맛보고 말랑하고 따끈한 살덩이를 삼켰다. 그의 혀가 거침없이 작은 입안을 유영했다. 촉촉한 속살을 훑으며 그녀에게서 은은히 풍기는 찻잎의 잔향을 음미했다. 긴 키스를 마치면서도 그는 여전히 아쉬웠다. 숨을 할딱이며 발갛게 상기된 그녀의 입술에 다시 가볍게 키스했다. 그리고 마차 벽을 두드렸다. 준비되면 출발 신호를 내는 일은 동반하는 하녀나 하인이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마차 안에 주인 부부만 들어가 있고 아무 신호가 없어서 마차는 여전히 서 있었다. 신호를 받은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신이 어떻게..." "데리러 왔어." 루시아는 배시시 웃으면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등을 감싸 누르며 마주 안아 주는 가벼운 압박이 좋았다. 루시아의 마음속에 충만한 행복이 차올랐다. 조금 전까지 묘한 허전함이 사라졌다. 이대로도 좋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지금 누리는 기쁨을 외면하고 갖지 못한 것을 바라며 애타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 한 달. 겉으로 보기에 두 사람 사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 전에도 그들은 누구나 인정하는 잉꼬부부였다. 새삼스럽게 그들이 서로 사랑을 확인했다고 감격스러워 해봤자 다른 사람 눈에는 조금 더 유난스러울 뿐이었다. 휴고는 이제 고용인들이 보거나 말거나 시도 때도 없이 키스하고, 루시아는 예전처럼 기겁하지 않고 살짝 눈을 흘기는 정도로 말았다. 덕분에 제롬은 남모르는 고충이 있었다. 한 달 사이에 또 하녀 하나가 그만뒀다. 역시 결혼을 한다는 이유였다. 타란 공작가처럼 안정적이고 보수 높게 쳐주는 일자리를 박차고 몇 개월 만에 하녀가 이렇게 줄줄이 그만두는 일은 전무후무했다. 고용인들이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극악한 환경의 일자리라는 나쁜 소문이 돌 수 있어서 제롬은 그 부분을 신경 쓰느라 골치였다. "집으로 가지 말고 나들이할까? 요즘 웃으며 보는 연극이 있다 하던데." 루시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공교롭게도 아까 궁에서 연극 이야기가 나온 참인데 그가 가자고 하는 상황이 신기했고, 꼼짝없이 그와 단둘이 앉은 마차 안의 상황이 마치 납치해 놓고 도망갈 여지를 주지 않는 데이트 신청 같았다. 즐겁게 연극 관람을 마치고 루시아는 한껏 들뜬 기분으로 귀가했다. 원 없이 웃었던 재미있는 연극과 그와의 데이트는 루시아를 행복 꼭대기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잠자리에 드는 침실에서 그가 꺼낸 이야기는 루시아의 행복을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 북부에 가셔야 한다고요." "당신이 궁에 간 사이에 북부에서 전언을 가지고 기사가 왔어." 휴고는 오늘 외출 없이 저택 집무실에서 밀린 영지 업무 등을 처리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북부로 떠날 예정은 없었다. 이번 토벌은 기사들만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칼리스가 보낸 전언 내용을 보니까 아무래도 그가 직접 가서 상황을 살펴야 할 것 같았다. "얼마나 걸리세요?" "확실하지는 않아. 오가는 시간 제하면 최소 한 달이겠지. 더 걸릴 수도 있고." 일 때문에 떠나는 사람 발걸음을 무겁게 해서는 안 된다. 루시아는 그쯤은 알고 있으나 서운한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꿈결 같은 한 달이었다. 그와 함께 보낸 한 달은 찰나였다. 그러나 그가 없는 한 달은 영원과 같을 것이다. "그래서 저 달래려고 오늘 연극 가자고 하신 거예요?" "꼭 그래서는 아닌데. ... 조금은 그랬을지도. 잘못한 건가?" "아니에요. 제 기분 맞추려 하신 거잖아요." 루시아는 그의 세심함이 오직 자신에게만 향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내 기분 맞춰주려고 연극을 데려가는 타란 공작을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언제 가세요?" "내일 새벽." "그렇게 일찍..." "그쪽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한시라도 빨리 가 봐야 할 것 같아." "제가 배웅..." "그러지 마. 푹 자. 당신 두고 발이 안 떨어질 거야." 루시아는 더 고집부리지 않았다. 그가 발이 안 떨어지는 만큼 자신도 그를 보내기 어려울 것이다. 차라리 눈 뜨고 일어나서 그가 없는 것이 나았다. 침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를 휴고가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그녀의 몸을 한동안 안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심란했다. 마음만 같아서는 북부로 데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을 재촉해 말을 달려야 하는 속도를 그녀가 맞출 수 없고 위험한 국경 지대에 데려갈 수는 없었다. "내가 없는 동안 당신 호위는 로이가 맡기로 했어." "크로틴 경이요?" "말썽은 많아도 실력은 확실하니까. 당신에게 무례하게 굴어도 그러려니 해." "크로틴 경이 사람을 편하게 대한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리 나쁜 사람 같지 않은데 왜 그런 무서운 별명이 붙었을까요. 당신도 신뢰하는 기사잖아요." 루시아는 그에게 청혼하러 찾아왔던 날 목격했던 두 사람 모습이 주군과 기사라는 엄격한 관계보다 편하고 격의 없다고 생각했다. "그 녀석은 많이 사람 된 거야." 휴고는 옛 기억을 되살렸다. 로이와 첫 만남은 히우라고 불리던 용병 노예 시절이었다. 일부의 야만 부족은 사람을 납치해서 노예로 부리거나 대가를 받아 풀어주는 짓을 종종 했다. 히우를 노예로 부리던 용병이 납치된 귀족 가문 아들을 구해내는 의뢰를 받았다. 주인 용병 명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다가 붙잡혀 있는 다른 아이들을 보았다. 다른 아이들 처지를 동정할 말랑한 마음 따위는 없었지만, 유난히 독기 가득한 눈의 어린 소년이 눈에 띄었다. 혼자 사지가 묶여 독방에 갇혀 있었는데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아 그리되었다고 했다. 히우는 주인 용병이 자는 새벽에 몰래 숨어 들어가서 소년을 풀어주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냥 변덕이었다. 히우는 아무 말 없이 묶인 줄을 끊어주었고, 소년 역시 히우가 하는 짓을 경계하듯 노려보기만 했다. 자유의 몸이 되자 소년은 히우를 향해 히죽 웃었다. [ 은혜는 갚는다. ]그리고 히우가 소년을 다시 만난 건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다. 공작 부부가 형제의 손에 시해되던 무렵, 히우는 휴고가 되어 공작 후계로서 야만족의 침탈이 잦은 국경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런데 국경 지역을 돌아다니며 야만족만 보이면 쳐 죽이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 실력이 대단합니다. 아무리 야만족만 해한다고 하지만, 아무와 교류하지 않아서 위험한 자일까 봐 섣부르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그자가 또 나타났습니다! 야만족 여럿과 전투 중입니다. ]휴고는 전투가 벌어지는 근방에 가서 멀찌감치 녀석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야만족 서넛이 녀석 하나를 당해내지 못했다. 휴고는 녀석이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위험하다는 주변 만류에도 가까이 다가갔다. 녀석은 다가오는 휴고를 빤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가까이 가서 휴고는 녀석을 기억해 냈다. 어릴 때 야만족의 감옥에서 풀어준 소년이었다. 당시에 인상 깊었던 붉은 머리카락은 여전히 강렬했다. [ 왜 야만족을 죽이고 다니지? ][ 놈들이 내 가족을 죽였으니까. ][ 계속할 건가? ][ 달리할 것도 없고. ][ 할 일 주면 나와 가지 않겠느냐? ][ 재밌는 건가? ][ 훨씬. ]로이는 어릴 때 봤던 그 웃음처럼 히죽 웃었다. 휴고와 달리 로이는 어릴 때 인연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로암에서 벌어진 비극적 소식을 받고 휴고는 바로 로암으로 출발했고, 로이가 따라왔다. 정신없이 뒷수습하는 동안 로이를 잊고 있었다. 그동안 녀석은 뻔뻔하게 눌러앉아 잘 지내고 있었다. 몇 번 까불기에 힘으로 눌러 줬더니 좀 고분고분해졌다. 그리고 실력으로 못 당한다는 것을 알자 몹시 억울해하며 휴고에게 원망을 늘어놓았다. [ 재밌는 일 준다며! 이 사기꾼아! ]툴툴거리면서도 로이는 도망가지 않았다. 사람들과 지내는 최소한의 예절을 익히고 가문의 기사 몇 명과도 곧잘 어울렸다. 어느새 로이는 가문의 기사가 되어 있었다. 휴고는 모든 이야기를 전부 그녀에게 할 수 없지만, 일부분 로이와의 인연을 말해 주었다. 흥미진진하게 듣던 루시아가 감탄했다. "크로틴 경은 당신에게 특별한 사람이군요." "그런가?" "그럼요. 크로틴 경이 위험에 처하면 구하러 가실 거잖아요." 휴고는 로이가 위험에 처하는 일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녀석이 제 힘을 너무 믿고 불구덩이에 뛰어들어 위험을 자초하면 모를까. 만약 그런 한심한 경우라면 혀를 차고 고생하도록 놔둘 것이다. 하지만 녀석이 죽도록 두고 보지는 못할 것 같다. "음. 그럴지도." "당신은 참 알면 알수록 신기해요. 뭔가 평범하지 않은 일들이 주변에 많네요. 그럼 집사는요? 어떻게 만나셨어요?"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는 그녀의 눈빛 공격에 넘어갈 뻔했다. 휴고는 그녀를 안은 상태에서 자세를 바꿔 침대에 눕히고 위에서 아래에 누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침대에서는 딴 남자 얘기하지 말랬지." "먼저 시작한 사람이 누군데요." "내가 해도 당신은 안 돼. 호기심도 보이지 마." "정말 억지."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래서 싫어?" 루시아는 웃으면서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럴 리가 있나요." 귓가에서 들리는 그녀의 웃음소리는 그의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어디 가든지 호위 떨어뜨리지 말고. 어디서든 혼자 있지 마." "제 걱정보다 당신이 걱정이죠. 전쟁터로 가시는 거잖아요." "내 걱정은 전혀 할 필요 없어. 당신은 푹 자고 잘 먹어."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 해도. 당신을 걱정할 거예요. 다치지 않게 조심하셔야 해요." 휴고는 대답처럼 그녀를 더 꽉 안았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의 자신은 무엇보다 소중하고 귀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그녀라면 휴고가 아닌 히우도 사랑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봉인처럼 꼭꼭 감추어 둔 암흑 같은 어린 시절도 그녀의 맑은 색깔로 물들여 주지 않을까. 휴고는 언젠가는 자신의 민낯을 그녀 앞에 모두 드러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올해 안에 오시는 거죠?" 해가 저물기까지 채 두 달이 남지 않았다. "신년 아침은 당신하고 보낼게." 남자는 라미스 백작, 데이빗의 행동반경을 주시하는 임무를 받았다. 대충 어디를 다니고 누구를 만나는지만 알면 되었다.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밀착 감시 임무를 무사히 수행한 경험이 있어서 이 정도 임무는 아주 쉬웠다. '오늘도 어김없이 가는군.' 데이빗은 영지에 내려오고 나서 빈번히 마을 주점에 들러 술을 마셨다. 영지에는 수도처럼 귀족들만 따로 드나드는 고급 주점이 없었다. 평범한 마을 사람들이 다니는 허름한 주점에 영주의 아들이 납시면 술을 먹던 모두가 숨을 죽였다. 시끄럽던 주점이 순식간에 조용해지고 데이빗은 혼자 분위기 잡으면서 술을 마셨다. 중간에 나가려던 손님 몇이 데이빗 수행원들에게 치도곤을 당한 후로 아무도 나가지 못하고 그저 숨만 죽이고 앉아 있었다. 몰래 지켜보는 남자는 데이빗의 위세가 거북했다. 평민이었던 남자는 고향에서 으스대는 귀족 비위를 맞추지 않았다고 괜히 곤경을 당한 일이 있었다. 데이빗이 일어나서 주점을 나갔다. 손님으로 위장해 앉아 있던 남자도 슬그머니 일어났다. 주점을 나가자마자 재빠르게 시선을 좌우로 돌렸으나 데이빗 일행이 없었다. '그 새 어딜 간 거지.' 마을로 들어가는 어두운 길 안쪽에 사람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남자는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퍽!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으며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뭐하는 놈인지 알아봐." 쓰러진 남자를 노려보는 데이빗의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 수행원들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니야. 일단 감옥에 처넣어. 심문은 내가 나중에 하겠다." 데이빗은 이를 갈았다. 누가 사람을 붙였는지 대충 짐작했다. '날 영지로 내려보내고 감시까지 하신다는 말이지요. 아버지.' ============================ 작품 후기 ============================輝雅 님, 위칭아워 님, 퍼플케이브 님, 날love 님, 아엘로 님, 키요미네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12월 1일 프리미엄 전환은 완결이 늦어지면 늦어지는 만큼 전환도 늦어질 겁니다. 완결 되자마자 습작되고 프리미엄 전환 될까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타는 직원으로부터 특실에 귀빈을 모셨다는 말을 들었다. 아니타는 한껏 요사한 미소를 띠고 특실로 들어갔다. 취기가 오른 붉은 얼굴로 데이빗이 아니타를 보며 "오, 백작부인. 내가 왔소이다." 라고 호기롭게 외쳤다. 아니타는 눈짓으로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여직원들을 내보냈다. "먼저 기별을 주셨으면 제가 더 빨리 왔을 텐데요." "내가 갑자기 찾아와 불편하시오?" "그럴 리가요. 각하께서 자주 찾아주시면 최고의 영광이지요." 신분에 걸맞지 않은 과분한 호칭을 듣고 데이빗은 그저 좋다고 킬킬거렸다. "역시 날 알아주는 사람은 백작부인밖에 없소." "여기서는 백작부인이 아니라 마담 쥬엘이라고 불러 주시라니까요." "그랬지. 그랬지. 마담... 마담 쥬엘." 데이빗은 제 뒤를 밟던 정체 모를 놈을 감옥에 처넣으라 하고 분이 나서 무작정 수도로 올라왔다. 올라오고 보니까 집에 갈 수가 없었다. 아버지 눈에 띄었다가는 호되게 야단을 들을 터라 갈 곳을 찾다가 마침 술 생각이 나고 입안의 혀처럼 맞춰주는 백작부인이 생각나서 주점으로 갔다. 데이빗은 영지로 쫓겨 내려가기 전까지 매일같이 아니타의 주점에 들렀다. 파비안은 대체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나 궁금해했지만, 능력껏 알아냈어도 건질 것이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그동안 친분을 쌓았다. 정확히 말하면 아니타가 데이빗의 신뢰를 얻는 과정이었다. 아니타는 남자의 기분을 띄워 주는 화술에 능숙하고 남자들이 흥미를 갖는 정치 경제 등에 적당히 넓고 얕은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대부분 남자는 아니타와 대화를 나누면 쏙 빠져들었다. 밤을 함께 보내는 깊은 관계까지 가면서 아니타의 말솜씨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유일한 남자는 타란 공작이었다. 그건 휴고가 순전히 여자와 대화 자체를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니타는 타란 공작이 여자가 곁에서 떠드는 것을 성가셔하는 기색을 알고 되도록 조신하게 입을 다물었다. 휴고는 아니타의 화류계 여성 같은 면모를 알지 못했다. 알아도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수도로 올라오신 거여요? 다시 자주 뵐 수 있겠군요." "뭐 그렇다기보다는..." 술에 취한 데이빗은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데이빗이 하는 말은 대부분 다 비슷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 어머니에 대한 슬픔, 그리고 타란 공작에 대한 오기 비슷한 적대감. 아니타는 데이빗의 속이 상당히 비틀려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이런 사람일수록 이용하기 쉬웠다. 그래서 아니타는 데이빗이 자신에게 마음을 열도록 꾸준하게 신뢰를 쌓았다. 모든 말을 진심으로 동감해 주었고, 가끔은 술값을 받지 않았다. 당신의 친구가 되어 위로해 주고 싶다고 말했다. 술김에 슬쩍 신체적 접촉을 하는 데이빗을 밀어내며 슬퍼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의 몸이 아니라 진실한 친구로서의 관계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주점 여주인으로 대하던 데이빗이 백작부인에게 보이는 예를 갖추기 시작했다. [ 사내 열보다 그대가 낫소. 지금껏 여인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적 없었지만, 백작부인과는 가능할 것 같소. ]아니타의 마음 깊은 곳에는 타란 공작부인에 대한 원망과 더불어 타란 공작에 대한 미움이 더해갔다. 형편없이 추락하는 자신의 위치를 부정하면서 증오로 변질했다. 자신의 힘으로 타란 공작을 건드릴 수 없으나 공작부인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훌륭한 수단으로 점찍은 사람이 데이빗이었다. 아니타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일이 수월할 것 같았다. 데이빗이 품은 분노와 질시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날 사람까지 붙여가며 감시할 이유가 뭐겠소! 날 음해하는 자가 있어서지. 타란 그자가 날 이간질한 거요. 날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것이지!" 아무리 공작가 후계라지만, 이제 겨우 백작을 상대로 타란 공작이 음해 공작을 편다고? 아니타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절절히 동감하며 위로해 주었다. "각하께서도 당하고 계시지 말고 반격을 하세요. 타란 공작을 망신을 주는 일 정도는 쉽답니다." "망신...? 어떻게?" 데이빗이 흥미를 보이자 아니타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공작부인과 깊은 마음을 나누는 사이라고 소문을 내는 겁니다. 그런 소문이 나도 타란 공작이 각하를 찾아와 따질 수 없지요. 따지러 오면 그건 그것대로 망신입니다." 데이빗은 망설였다. 공작부인의 평판에 먹칠하는 짓은 아무래도 껄끄러웠다. 아무리 타란 공작에게 나쁜 감정이 있어도 데이빗 마음속에 공작부인은 가슴 설레는 풋사랑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소문은 가끔 진짜가 되는 일도 있답니다. 소문 때문에 만난 남녀가 친밀해지고 서로 의지하게 되기도 하지요." 데이빗은 공작부인과 제대로 대화를 나눌 기회만 있으면 공작부인이 자신의 매력을 느낄 거라고 자신했다. 소문이 나면 그걸 핑계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데이빗의 음흉한 마음을 잘 아는 아니타가 틈새를 파고들었다. "음... 하지만 가짜 소문을 내면 금방 들통이 날 텐데..." "가짜라니요. 진짜를 만들어야죠." "어떻게 말이오?" "소문은 그저 단서만 제공해 주면 됩니다. 남모르게 두 분이 만나고 있는 장면만 사람들 눈에 띄면 소문은 순식간에 번질 겁니다." 공작부인은 대부분 티파티만 참석하는 얌전한 사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작과 부부금실이 좋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지로 내려갔다고 알려진 데이빗과 공작부인이 은밀하게 만나는 장면을 연출하면 소문은 마른 잎에 불을 붙인 것처럼 순식간에 번져 추문으로 퍼질 것이다. 진위는 상관없었다. 아무리 나중에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져도 '그래도 근거가 있으니까 그런 소문이 났겠지.' 라고 말하는 사람이 꼭 있었다. 한 번 퍼진 소문은 가라앉힐 수는 있어도 박멸할 수 없었다. "며칠 후면 건국절입니다." 새 왕이 즉위 후 처음 맞는 건국절이었다. 공작부인은 무도회에 거의 참석하지 않지만, 건국절 파티는 빠지지 않을 거라고 아니타는 판단했다. "대대적인 파티가 있을 것이고 마침 타란 공작은 수도에 없습니다.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지요." "가장 큰 문제가 있소. 남들 눈을 피해서 무슨 수로 공작부인과 둘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오?" "그 기회는 제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음... 헌데 마담 쥬엘은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는 것이오?" 아니타는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이 한때 타란 공작의 연인이었고 무참히 버려졌다고 말했다. 기회가 닿으면 타란 공작에게 작은 복수라도 하고 싶다고 했다. 데이빗은 흥분해서 역시 그자는 무도하고 예의를 모르는 자라고 성토했다. "각하께서 한 가지만 도와주시면 됩니다." "그게 뭐요?" 아니타는 말할 듯 말 듯 애를 태우다가 데이빗이 뭐든 할 수 있는 도움이라면 주겠다고 다짐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라미스 공작가에 사람 모습을 바꾸는 마도구가 있다지요. 잠시 제게 그걸 빌려주세요. 그거면 됩니다." 건국절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입궁하려는 모든 마차는 입구에서 잠시 멈추어서 방명록을 작성했다. 타란 공작가의 마차 역시 형식적인 절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마차에 타고 있는 인원과 신분을 확인한 근위병이 로이에게 검을 두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기사보고 검을 내놓으라고?" 로이는 근위병에게 험상궂게 인상을 찌푸렸다. 로이의 악명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근위병이 움찔하면서 우물쭈물 대답했다. "궁에서 열리는 파티에는 검을 들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기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근위병은 죄가 없었다. 로이는 투덜거리면서 검을 풀어 건넸다. 어차피 로이에게 무기는 큰 의미가 없었다. 고수는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파티장에 있는 포크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포크도 필요 없었다. 목을 꺾으면 절명이니까. 검을 받은 근위병은 서둘러 마차를 들여보냈다. 미친개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 걸어 다니는 살인 무기는 당당하게 입궁했다. 타란 공작부인이 등장하자 주변으로 귀부인들이 몰려들었다. 여자들로 겹겹이 둘러싸인 루시아를 보며 로이는 생각했다. '마님. 인기 좋네. 저 여자들 얼굴을 다 기억할까?' 나중에 꼭 물어봐야지. 로이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계속 루시아를 주시했다. 태자를 호위할 때보다 더 신경을 곤두세웠다. 태자는 바로 옆에서 밀착 경호하면 되었는데 귀부인 호위는 거리를 두고 파티 분위기를 즐기는데 방해하지 않아야 했다. 사람들이 로이 곁에 다가가지 않으려 해서 덕분에 로이는 널찍한 공간에 서 있었다. 로이는 가끔 파티장을 넓은 시야로 살피는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저 여자.' 로이는 낯익은 여자를 발견했다. 로이가 사람을 기억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좋은 느낌이거나 반대로 아주 불쾌한 기운이거나. 여자는 즉위식 파티에서 봤던 나쁜 냄새를 풍기던 기분 나쁜 여자가 틀림없었다. 로이는 마님을 주시하면서 슬쩍슬쩍 기분 나쁜 여자를 살폈다. 여자는 다른 사람과 어울림이 없이 파티장을 왔다갔다하다가 구석에 서서 뚫어지게 한 군데를 바라보았다. 여자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여자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무리의 중심에는 마님과 캐서린 공주가 있었다. '묘하게 거슬리는데.' 마님 곁에 얼씬하면 저걸 어떻게 해야 하나 로이는 고민했다. 그런데 여자는 휙 몸을 돌려서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여자가 안 보이자 로이는 신발 안에 굴러다니던 모래를 빼낸 것처럼 후련했다. '저놈도 왔군. 하긴 이런 자리에 안 올 녀석이 아니지.' 데이빗 역시 로이가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태자를 호위할 때 줄기차게 봤다. 왕비의 남동생이라고 들었다. 로이를 볼 때마다 같잖은 것 보듯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이도 같잖게 시선을 마주해 주었다. 왕비 남동생만 아니었어도 몇 대 때려주는 건데. '웬일로 저러고 있지.' 데이빗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거의 숨어 있었다. 되도록 사람들과 아는 척하지 않으려 조심하고 있었다. 사교계 소식에 관심 없는 로이는 데이빗이 영지로 내려간 사정을 전혀 몰랐다. 그저 항상 잘난 척하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뿌듯해하는 녀석이 죄지은 자처럼 구는 것이 의아했다. 그리고 로이의 눈이 기이한 빛을 발했다. 기분 나쁜 여자가 다시 나타났고, 데이빗에게 다가가 둘이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아주 비밀스럽지는 않아도 어딘지 모르게 조심하는 태도였다. 그리고 여자는 파티장을 나갔다. 잠시 후에는 데이빗도 나갔다. '둘이 눈 맞았나?' 기분 나쁜 것들끼리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상하게 찜찜하네.' 로이는 다시 마님을 지켜보는 일에 집중했다. 아니타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서 공작부인, 그리고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공작부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로이를 번갈아 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미친개를 떼어 놓을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공작부인은 새벽까지 파티를 즐기지 않고 적당히 늦으면 돌아갈 것이다. '궁에서 열리는 파티에 기사를 달고 올 줄이야.' 귀부인이 파티장 안까지 기사를 대동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정해진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름 모를 남작 여식이 기사를 데리고 다녔다가는 유난스럽다고 웃음거리가 될 일이었다. 공작부인 정도면 대놓고 뭐라 할 수 없어도 출입인 신분을 엄격히 확인하는 궁에서 열리는 파티에 기사를 데려올 필요가 있나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로이는 무척 눈에 띄었다. 예복을 차려입은 사람들 틈에서 혼자만 경갑옷 차림이었다.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 공작부인은 무도회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타란 공작이 마침 수도에 없고 공작부인이 혼자 무도회에 참석할 오늘 같은 날이 또 언제 올지 알 수 없었다. '호위가 따라올 수 없는 곳... 화장실... 그래. 휴게실!' 아니타는 공작부인이 캐서린 공주의 휴게실을 이용하는 것을 본 적 있었다. 캐서린 공주가 따로 쓰는 개인 휴게실이 있다는 사실은 귀부인들 대부분 알고 있었다. 공주가 먼저 제안하기 전에 먼저 나서서 사적인 공간을 보여 달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귀부인 상당수는 공주의 휴게실을 기회가 닿으면 가보고 싶다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곤 했다. 아니타는 상황을 만들어보기 위해서 캐서린이 파티장에 있는 것을 확인한 후 공주의 휴게실로 갔다. 휴게실 위치는 사람들의 번잡함에서 벗어나려고 파티장에서 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위치는 아주 좋군.' 휴게실 앞은 근위기사 둘이 지키고 있었다. 모르는 척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기사들이 가로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공주님께서 이곳을 이용해도 좋다고 허락하셨어요." "공주님께 그런 지시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럼 안에 시녀가 있으면 불러 주겠어요? 공주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말씀이 있어요." 기사가 안으로 들어가서 잠시 후 시녀와 나왔다. 아니타는 재빠르게 시녀의 키와 체격을 가늠했다. 자신과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알자 착착 계획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상하군요. 이 시녀가 아니에요. 다른 시녀는 없나요?" "안을 지키는 시녀는 더 없습니다." 아니타는 "내가 뭔가 잘못 알았나 보군요." 라고 말하며 돌아섰다. '지키는 기사가 둘. 안에는 시녀가 하나라는 말이지. 우선은 기사부터 떼어내야겠는데... 라미스가의 도련님 도움을 받아야겠어.' 데이빗은 공주의 휴게실 앞을 지나가다가 기사 둘에게 손짓했다. "자네 둘. 이리 와 보게." 기사들은 잠시 서로 마주 보다가 데이빗에게 다가갔다. 여느 귀족이라면 말을 들을 이유가 없지만, 데이빗은 라미스 공작의 아들이며, 왕비의 동생이었다. 무시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잠시 따라오게." "하지만 저희는 여기를 지켜야..." "어허. 잠시면 된다니까." "그러면 저희 중 한 명은 여기 남겠습니다." "두 사람 도움이 필요해서 그러네. 금방일세. 잠깐의 도움도 못 주겠다는 건가? 이거 섭섭하군." 임무를 위해서는 마땅히 거절해야 옳지만, 그들은 힘없는 근위기사였다. 고위귀족이 앙심을 품으면 그들은 전혀 자기 자신을 변호할 기회 없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두 기사는 눈을 마주쳤다. 잠시면 괜찮겠지. 어차피 휴게실 안에는 시녀도 있었다. 데이빗이 기사들을 데리고 복도 모퉁이를 돌아가자 상황을 지켜보던 아니타가 재빠르게 휴게실로 들어갔다. 휴게실은 문으로 들어가면 내부가 보이지 않게 열 걸음 정도의 짧은 복도 식 입구가 있고 벽을 끼고 돌아서면 중간문을 통해 내부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아니타가 들어오자 시녀가 일어났다. "아까 뵌 분이시군요. 여긴 어찌 들어오셨습니까." "공주님께서 내게 이곳을 써도 좋다고 허락하셨네." "네? 저는 그런 지시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만." "그럼 밖에 기사가 지키고 있는데 내가 여기를 어찌 들어왔겠는가. 내가 거짓을 말한다는 건가?" 아니타가 짐짓 화난 것처럼 몰아붙이자 시녀는 우물쭈물했다. "정 믿지 못하겠으면 증거를 보여주지. 이리 와보게." 시녀는 아니타 앞으로 다가갔다. 아니타는 끼고 있던 반지를 돌려서 손바닥으로 향하게 하고 반지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안에서 미세한 침이 나왔다. 아니타는 다가오는 시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흠칫 놀란 시녀가 손을 뺐다가 잠시 후 눈이 돌아가면서 풀썩 쓰러졌다. 빠르게 정신을 잃고 서서히 마비되어 죽음에 이르는 독이었다. 서너 시간 안에 해독제를 섭취하지 않으면 시녀는 죽을 테지만, 아니타는 시녀의 목숨 따위는 상관없었다.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하고 나자 모든 빗장이 풀리는 은근한 쾌감을 느꼈다. 아니타는 휴게실 옆으로 이어진 화장실로 시녀를 끌어다 눕혔다. 안에서 옷을 벗기고 자신이 시녀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데이빗이 건네준 마도구 팔찌를 찼다. 거울 속에서 아니타의 모습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머리카락 색깔이 매우 흐린 갈색으로 눈동자 색이 흑색에 가깝게 진한 색으로 바뀌고, 전체적인 인상이 어딘지 모르게 달라졌다. 아니타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외모와 분위기의 변화였다. 귀족 가문이 지닌 마도구는 대부분 비밀에 부쳐 있지만 비밀리에 알려진 것이 몇몇 있었다. 라미스 공작 가문이 소유한 마도구가 그런 공공연한 비밀에 속했다. 마도구가 효과를 발휘하는 시간은 1시간. 한 번 사용하면 재사용까지 1년 가까이 시간이 필요하다고 데이빗은 말했다. 상관없었다. 아니타는 1시간이면 충분했다. ============================ 작품 후기 ============================위키12 님, 날love 님, 아드밀란 님, 게베레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ㅋㅋㅋ 어설픈 파비안의 수하. 실망시켜 드려 죄송합니다. 빈틈이 없으면 사건이 없잖아요. 주인공들 마구 굴리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요. ㅎㅎ길게 안갑니다. 가볍게 보세요~실망시켜 드려 죄송합니다. 파비안은 건국절 늦은 밤까지 일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줄어드는 휴식 시간만큼이나 늘어나는 수당을 두고 파비안과 아내 앨리스의 희비가 엇갈렸다. 감시하는 주인 눈이 없으면 좀 여유가 생길까 했더니 공작이 수도를 비우고 파비안은 더 바빴다. 주인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면 큰일이라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오늘도 안 왔군.' 파비안은 며칠째 미루어진 수하의 보고서가 신경을 건드렸다. 사람을 감시하는 일은 즉흥적인 돌발 상황이 많아서 계획이 소용없었다. 보고서 날짜가 며칠 어긋나는 일 정도는 종종 있었다. 그런데 감시 대상이 데이빗이라는 점이 자꾸 걸렸다. 주인과 비교하면 우스워서 그렇지 데이빗 정도면 거물급 귀족이었다. 더구나 수도와 달리 영지는 데이빗의 안방이었다. '두 명을 붙일 걸 그랬나. 이쪽은 별일이 없는데...' 다른 수하가 올린 팔콘 백작부인의 보고서는 '특이사항 없음'이었다. 요즘 팔콘 백작부인 감시는 동선만 파악하고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일정에서 어긋나지 않으면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 백작부인은 요즘도 주점을 돌며 운영에 관심을 쏟았다. '아예 주점 여주인으로 자리 잡을 작정인가. 과도하면 사교계에서 평판이 바닥을 칠 텐데.' 백작부인의 평판이 어찌 되건 알 바 아니지만, 멍청한 여자가 아닌데 대체 무슨 생각인지 조금 궁금했다. 파비안은 그동안 주점에 은밀하게 사람을 투입했다. 데이빗이 주점을 드나드는 이유가 뭐였는지 알아내야 할 것 같았다. 파비안은 한 번 꼬리를 붙들면 몸체가 드러날 때까지 절대 놓지 않았다. 데이빗이 밀실에서 백작부인과 단둘이 나눈 말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중간에 시중을 든 여직원을 통해 조각조각 데이빗이 내뱉은 말을 주워 모았다. 데이빗이 술김에 두어 번 타란 공작부인의 아름다움을 칭송했다는 말을 들었다. 파비안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다방면으로 알아보았다. 그래서 데이빗이 마님께 연서를 건네려다 거절당한 사실을 알아냈다. '미친놈. 감히 누굴 넘봐.' 놈이 마님께 괜한 수작질을 하다가 좋지 않은 일로 연결되면 주군의 노여움이 폭발할 것이고 아랫사람은 언제나 윗전 심리상태의 영향 범위였다. 파비안은 부르르 떨었다.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문을 두드리고 수하가 들어와서 짤막한 보고를 했다. 수하는 데이빗이 발족한 청년회 모임을 지금 이끌고 있는 해리를 감시 중이었다. 저녁에 잠깐 나타난 데이빗이 해리를 만나고 갔다고 보고하러 왔다. "뭐? 그자가 표적을 만나러 와?" "중요한 대화는 없었습니다. 그저 짧게 근황을 묻는 정도..." "놈들이 무슨 얘기를 했건 그게 문제가 아니야. 지금!" '데이빗이 지금 수도에 있다고? 이런 멍청한 녀석! '파비안은 데이빗에게 붙여둔 수하에게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많은 수하를 돌리다 보면 가끔 터무니없는 사고가 터지곤 했다. 파비안은 당장 수하들을 소집했다. 잡혀 있을 녀석 소식을 파악하고 빼낼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라미스 공작이 벌써 불렀을 리는 없고 대체 수도에는 왜 온 거지? 건국절 파티에 오려고? 겨우 그런 일로? '파비안은 가진 모든 정보를 취합해서 다양한 가능성을 만들었다.' 건국절 파티라면 데이빗과 백작부인이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가 되겠군. 하지만 은밀한 만남은 주점이 더 낫지. 굳이 파티에서 만날 필요가 있나? '파비안은 갑자기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파티에는 마님도 가셨어.'예감이 좋지 않았다. 로이가 지키고 있으니까 별일 없겠지만, 사람을 보내 로이에게 주의를 환기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파비안은 서둘러 궁으로 사람을 잠입시켰다. 시녀 차림으로 아니타는 휴게실을 나갔다. 그 사이 돌아와서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안에서 나오는 낯선 시녀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타는 선수를 쳐서 기사들에게 심각한 낯으로 목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대체 왜 자리를 비우셨나요. 지금 안에 공주님이 들어 계세요. 지키는 기사가 없다고 몹시 화를 내셨어요." 기사들 안색이 핼쑥해졌다. 재수가 없기도 오지게 없지. 그 사이에 공주님이 올 줄 알았겠나. 기사들은 억울했다. 대체 라미스 백작이 자기들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도움을 받을 일이 있다더니 붙들고 이상한 잡소리만 줄줄 하다가 됐으니 가보라고 했다. 기사들은 대체 이게 뭔가 싶어서 찜찜했는데 이런 식으로 재수 없게 걸릴 줄이야. 한 번 화가 나면 보통이 아닌 캐서린 공주님 성격을 알고 있었다. 공주님은 분명 근위대장을 불러 난리를 칠 것이고, 근위대장은 자기들을 불러 공주님에게 깨진 화풀이를 할 것이다. 눈앞이 노랬다. "그래서 제가 대충 둘러댔거든요." "어떻게 말이오?" 지옥에 빠진 기분이었던 기사들 표정이 확 살아났다. "안에 들릴지도 모르니까 이쪽으로." 기사들은 아니타를 따라갔다. 기사들의 출입구에서 멀어져서 시선이 돌아간 틈에 데이빗은 재빠르게 휴게실 안으로 들어갔다. "근위대장님 부름을 받은 것 같다고 공주님께 말씀드렸어요." "공주님께서 이해하시던가?" "노기는 조금 풀리셨어요. 나중에 꼭 공주님께 용서를 빌고 죄를 구하세요." "후우. 정말 고맙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언제부터 일하기 시작했나?" "공주님을 모신지 얼마 안 되었어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그들은 기분 좋게 인사를 나누었다. 아니타는 다시 휴게실 앞을 지키는 기사들에게 눈웃음을 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서성이던 데이빗이 아니타를 보며 잠시 움찔했다. "정말... 백작부인이오?" "예. 제가 맞아요." "허. 정말 다른 사람 같군. 그래서 이젠 어쩌면 되는 거요?" "여기 잠시 계세요. 제가 공작부인을 모셔 오지요." 아니타는 벗은 자신의 드레스를 팔에 걸치고 휴게실을 나갔다. 음식물로 더럽혀 도저히 드레스를 그대로 입을 수 없는 상태가 되면 귀부인들은 급히 드레스를 공수하곤 했다. 시녀나 하녀가 드레스를 들고 가는 모습은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저는 공주님 명으로 공작부인을 모시러 가요. 공주님은 공작부인과 중요한 이야기를 나눈다고 하셨으니까 절대 안으로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어요." "알겠네." 아니타는 복도를 따라 걷다가 사람 시선이 닿지 않는 창고로 쓰는 방에 드레스를 던져 넣었다. 아니타는 캐서린 공주의 시녀에게 다급히 폐하께서 조용히 공주님을 찾으신다는 말을 전했다. 누가 말을 전했는지 정확히 알기 어려워도 왕이, 그것도 다급히 찾는다는 말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생각대로 잠시 후 캐서린이 자연스럽게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아니타는 캐서린이 마차에 오르는 모습까지 확인하고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공작부인의 하녀에게 말을 전했다. "공주님께서 조용히 나눌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 폐하께서 공주님을 찾은 용건과 관련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니타는 공주의 휴게실로 향하는 복도 앞에서 기다렸다. 얼마 시간이 지나고 공작부인이 하녀와 나타났다. 조금 뒤에서 로이가 따라왔다. 루시아는 캐서린이 급히 자리를 비운 이유가 왕이 찾아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캐서린이 가기 전에 살짝 귀띔해 주었다. 그래서 왕명을 거론하는 시녀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왕이 공주를 찾은 용건에 수도에 지금 없는 남편과 관련된 소식은 아닐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공주님은 어디 계시느냐?" "휴게실에 들어 계십니다." 아니타가 앞서서 걷기 시작했고, 루시아는 따라갔다. 휴게실로 들어가려는 아니타는 기사들은 제지하지 않았다. 공작부인을 모시러 간다고 조금 전에 이야기를 나눈 시녀였다. 그리고 언제든 출입을 허락한다는 공주님 지시를 받은 공작부인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면서 아니타는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가장 뒤로 쳐졌다. 짧을 복도를 지나고 하녀가 중간 문을 열어 공작부인이 안으로 들어갈 때 얼른 하녀의 손을 붙들었다. 독침에 당한 하녀가 그대로 쓰러졌다. "어머나!" 짧은 비명을 듣고 루시아가 몸을 돌려 쓰러지는 하녀를 보았다. 다급히 달려와 하녀를 부축했다. 아니타는 하녀를 부축하는 손에서 힘을 빼고 품에서 향수병을 꺼냈다. "공작부인." 고개를 드는 루시아 얼굴을 향해 향수를 뿌렸다. 향수병에 든 것은 정신을 잃게 하는 마취약이었다. 루시아는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의식을 잃고 푹 고개를 떨어뜨렸다. 숨어 있던 데이빗이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아.. 아니. 대체. 어쩌자고 이런..." "잠시 정신을 잃은 것뿐입니다. 도와주세요. 공작부인은 소파로 옮기고 하녀는 안 보이는 곳에 치워야 합니다." 데이빗은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그냥 이 안에서 기다리다가 공작부인과 만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이런 식으로 뭔가 구체적인 수단을 가할 줄은 몰랐다. 데이빗의 마음에 갈등이 일어났다. 일이 너무 커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이었다. 데이빗은 이번 일로 자신에게 조금의 손해가 발생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공작부인과 나는 소문 정도는 감수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아니타는 망설이는 데이빗의 표정에서 비겁함을 읽었다. 어차피 데이빗의 배포가 고작 그 정도라는 것은 알고 있어서 실망은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아니타는 이번 일로 어쩌면 자신이 완전히 빠져나갈 수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엎질러진 물이었다. 여기서 데이빗이 물러나면 그야말로 자기 혼자 옴팡 뒤집어쓰게 되는 것이다. 데이빗이 조금이라도 관련되어야 빠져나갈 길도 생겼다. "모두 각하를 위해서 시작한 일입니다. 이제 겨우 시작인데 여기서 그만두시겠다면... 각하 뜻을 따르지요." 아니타는 모든 결정권을 데이빗에게 주겠다는 것처럼 말하면서 손바닥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이대로 혼자 내빼면 같이 죽는 것이다. 데이빗도 죽이고 공작부인도 죽이고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어 마무리하겠다. 아니타의 마음속에 악취 나는 독기가 자리 잡았다. 아니타는 시녀에게 독침을 찌르는 순간부터 가로막는 모든 금기를 다 벗어던졌다. 엄청난 해방감이었다. 살아오면서 꾸역꾸역 쌓이고 쌓였던 마음속의 어둠이 꾹 눌러져 있다가 단번에 터져 나오는 희열이었다. "음. 아니오. 여기까지 와서 비겁하게 도망가지 않겠소." 조금 전까지 도망갈 생각을 했으면서 데이빗은 비장한 표정으로 각오를 다졌다. "잠시 정신만 잃는다는 말은 사실이오? 공작부인에게 해가 가는 것은 아니겠지?" 데이빗은 진심으로 공작부인을 걱정하기보다는 공작부인에게 미치는 해가 자신에게 돌아올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그럼요. 공작부인에게는 아무런 해도 없습니다." 아니타의 눈빛에 감돌던 살기가 자취를 감추는 순간을 데이빗은 보지 못했다. 아니타는 요사스럽게 웃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공작부인에게 뿌린 약은 정말 잠시 정신을 잃게 하는 마취약이었다. 하녀와 화장실에 쓰러져 있는 시녀는 빠른 조처를 하지 않으면 죽을 테지만, 그건 굳이 말하지 않았다. 로이는 휴게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벽에 기대섰다. 옆으로 지나가는 시종이 로이와 눈을 마주치면서 특유의 신호를 보냈다. 로이는 자연스럽게 휴게실에서 조금 더 떨어진 곳으로 위치를 이동했다. 그리고 저만치 가고 있는 시종을 불렀다. "이봐. 이리 와봐." 지나가던 시종이 부름을 받고 로이 곁으로 왔다. 그리고 휴게실을 지키는 기사들을 등지고 서서 고개를 살짝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요주의 인물이 있습니다. 라미스 공작 장남 데이빗. 팔콘 백작부인. 두 사람이 혹시 마님 곁에 접근하는지 주의 깊게 살피라는 전언입니다." 휴게실 문이 열리고 시녀가 나왔다. 시녀가 로이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자 두 사람은 나누던 화제를 바꿨다. "가서 마실 것 좀 가져오라니까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이곳에서 술을 드시면 안 됩니다." 기다리기 지루해서 술을 가져오라는 기사와 요구에 따르기 곤란해서 쩔쩔매는 시종의 모습이었다. 별 의심 없이 아니타는 두 사람 옆을 지나갔다. 로이는 시녀가 자신의 앞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그리고 불쾌한 냄새였다. 같은 냄새를 가진 여자를 알았다. 그런데 저런 얼굴은 아니었다. 시녀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의 모습이었다. 별 의심 없이 아니타는 두 사람 옆을 지나갔다. 로이는 시녀가 자신의 앞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그리고 불쾌한 냄새였다. 같은 냄새를 가진 여자를 알았다. 그런데 저런 얼굴은 아니었다. 시녀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 누구? 데이빗하고 뭐?" "팔콘 백작부인입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여자라 이거지." 중얼거리는 로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벽에 비스듬히 기댄 몸을 세우고 곧바로 휴게실을 지키고 선 기사들에게 다가갔다. 드잡이할 시간 없었다. 로이는 양 주먹에 힘을 넣어 그대로 양쪽 기사 복부에 꽂아 넣었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컥,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지는 뒷목을 내리쳤다. 두 기사는 순식간에 기절했다. 쓰러지는 기사들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시종 차림의 남자에게 턱짓했다. "문 열어." 남자가 얼른 문을 열고 로이는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걸 살핀 후 안으로 기사 둘을 끌고 들어갔다. 남자가 따라 들어와서 문을 닫았다. 로이는 입구에 두 기사를 내팽개치고 중간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이는 광경은 소파에 눈을 감고 기대 누운 마님과 그 곁에 엉거주춤 서 있는 데이빗이었다. 로이는 순식간에 데이빗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쥐었다. "너 이 새끼. 마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컥컥. 아.. 아무짓도.. 잠시 정신을.. 잃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자 로이는 조금 힘을 풀어주었다. 데이빗은 쿨럭거리면서 두 손으로 제 멱살을 쥔 로이 손을 붙들고 성을 냈다. "이거 놓아라! 내가 누군 줄 알고!" "네놈이 누군지는 나중에 따지고.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데이빗는 비죽이 웃었다. "난 공작부인을 뵈러 왔다. 그게 무슨 잘못이지?" "여기에 아무나 들어올 수 없을 텐데. 네놈이 여기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어!" 로이가 데이빗 멱살을 쥐고 흔드는 동안 시종 차림의 남자는 소파에 기대 누워 있는 루시아 곁으로 다가가 맥을 짚었다. 바짝 긴장한 남자가 안도의 숨을 쉬며 로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루시아의 팔을 살짝 붙들고 흔들면서 "공작부인." 라고 반복해서 불렀다. 잠시 정신을 잃은 마취 성분의 약이라서 자극이 가해지자 루시아는 점점 깨어났다. 잔뜩 돌을 얹은 것처럼 머리가 묵직했다. 평소 앓던 두통과 다른 느낌이라서 루시아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인상을 쓰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저 머릿속이 멍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고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마님!" "크로틴... 경?" "일어날 수 있겠소?" 생각할 수 없으니 반사적으로 주어진 과제를 수행했다. 일어나야 한다. 루시아는 입으로 중얼거리며 소파에 팔을 디디고 옆에서 부축해주는 시종 도움을 받아 일어났다. "너 얼른 마님 모시고 나가. 남에 눈에 안 띄게. 뭔가 이상해." "예. 서두르십시오. 공작부인." 루시아는 재촉하는 시종을 따라 나섰다. 약간 어지러웠지만, 몇 걸음 걷자 무리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판단할 정신은 있었다. 로이가 그녀에게 해로운 짓을 할 리가 없다고 믿었다. 입구에 쓰러져 있는 기사들을 보고 놀라 숨을 들이켰다. 시종이 먼저 문을 열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아무도 없습니다. 나오십시오." 원래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복도였다. 두 사람은 복도를 따라 걸었다. "잠시. 누군가 옵니다.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직 휴게실에서 그리 멀리 벗어난 위치가 아니었다. 루시아는 장식품으로 잔뜩 갑옷을 세워둔 막다른 복도 방향으로 들어가 갑옷 옆으로 숨었다. 시종 차림의 남자는 태연하게 가던 걸음을 옮겼다. 꺾어진 모퉁이를 돌며 나타난 한 무리의 사람들은 열 명 정도 귀부인과 그들을 수행하듯 곁에서 걷는 시녀 차림의 아니타였다. 그들이 어느 정도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남자는 다시 되돌아가서 루시아를 나오게 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파티장으로 향해 걸었다. 루시아는 시종을 데리고 가는 귀부인처럼 자연스럽게 허리를 세웠다. "걸음을 늦추게. 서두르는 것처럼 보이니까." "예." 시종이 자기도 모르게 조금 빨라진 걸음을 늦추었다. 그리고 흘끔 공작부인을 보았다. 대단히 침착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상황을 알아보려 하지 않고, 비명 비슷한 소리도 내지 않았다. 마치 이런 상황을 많이 겪어본 것처럼 귀부인답지 않은 대처 능력이었다. 인적이 드문 복도를 벗어나자 여기저기 사람이 지나갔다. 종종걸음으로 어디론가 바쁘게 향하는 시종과 시녀, 예복을 입은 파티 객이 파티장의 소란스러움을 피해 잠시 나와 있기도 했다. 남자는 지나가는 시녀를 불러 세웠다. "공작부인을 파티장으로 모셔다 드리게. 그리고 의관을 불러주게. 공작부인께서 두통이 있다고 하시는군." "예." 남자는 자연스럽게 공작부인을 시녀에게 넘기고 공작부인의 몸에 이상이 없는지 점검을 위해 의관을 부르게 했다. 루시아는 남자와 짧게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시녀와 함께 파티장으로 향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여전히 머릿속이 멍했다. 하지만 루시아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계속 호흡을 빨리해서 몸의 순환을 재촉했다. 남자는 공작부인이 시녀와 함께 가는 뒷모습을 조금 멀리서 지켜보다가 천천히 뒤를 밟았다. 우연히 같은 방향으로 가는듯한 움직임이었다. 남자의 임무는 호위가 아니지만, 지금은 공작부인에게서 눈을 떼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당장 이거 놓지 못해! 이 무례한 놈이." 데이빗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고작 기사 따위에게 멱살이 잡혀 대롱대롱 매달린 꼴이 견딜 수 없이 치욕적이었다. 지금껏 어디서 이런 대접을 받아보았겠는가. 반드시 네놈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겠노라고 데이빗은 이를 북북 갈았다. 로이는 데이빗의 분노가 가소로웠다. 멱살을 쥔 손을 풀지 않고 고개를 바짝 들이밀었다. "말해. 네놈이 왜 여기 있어." "말했잖느냐. 공작부인을 뵈러 왔다고." "헛소리 지껄이지 마. 마님께서 그런 말씀 없으셨어." "흥. 호위 따위인 네놈에게 말할 수 없는 은밀한 사정이지. 나는 공작부인의 초대를 받아 온 거다." "이 새끼가." 로이는 으르렁거렸다. 데이빗은 움찔했으나 무식한 기사 따위의 기세에 눌린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 감히 자신을 상대로 무례한 짓, 태도, 막말까지. 이놈은 백번 죽어도 모자랐다. "곧 이리로 사람들이 올 거다. 넌 내게 이런 짓을 하는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로이의 눈이 번뜩였다. "사람이 와?" "공작부인을 두고 호위기사와 백작의 치정 싸움이라. 아주 재밌겠어." 데이빗은 로이의 약을 올리기 위해 되는대로 말을 퍼부었다. 사납게 윽박지르던 로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야생짐승의 그것처럼 감정이 담기지 않은 무기질의 눈으로 데이빗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웃었다. 새하얀 광소였다. 데이빗는 소름이 와득 돋았다. 그것은 죽음의 위협에 반응하는 생명의 본능적 감각이었다. 데이빗은 뭔가 말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로이의 두 손이 데이빗의 머리를 잡아 비틀었다. 콰직, 소리와 함께 데이빗의 의식은 그대로 끊어졌다. 로이는 숨이 끊어진 데이빗을 바닥에 내려놓고 일어났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휴게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적당히 가볍고 까불거리는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숨을 죽이고 도약 직전에 힘껏 몸을 움츠린 짐승처럼 로이의 주변에 고요하지만 사나운 기운이 맴돌았다. 로이는 지금 사냥꾼으로 돌아와 있었다. 북부에서 야만족을 잡아 죽이던 그때의 감각을 되살렸다. '이놈을 여기로 끌어들인 자. 분명히 다시 여기로 온다.' 데이빗은 사람이 온다고 말했다. 그러기로 약속이 되어 있는 것이다. 공범이 있다는 말이었다. 로이의 뇌리에 아까 앞을 지나간 시녀와 계속 신경 쓰였던 기분 나쁜 여자를 동시에 떠올랐다. 다르게 생긴 둘이 같은 냄새를 가졌다. 둘 사이에 뭔가 있었다. 로이는 휴게실 안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화장실에서 쓰러진 여자 둘을 발견했다. 여자 하나는 속옷만 입은 채였고, 또 다른 여자 하나는 마님의 하녀였다. 전형적인 중독 증상을 보이는 두 사람의 입술 색깔이 거무죽죽했다. 가만히 둬도 죽거나 운이 좋으면 살 수도 있었다. 로이는 1년 넘도록 태자를 호위하면서 제법 많은 것들을 보고 배웠다. 소문을 만들고 퍼뜨려 적을 상대하는 수도 귀족들만의 전쟁을 목격했다. 사내라면 정정당당히 검을 들고 싸워야지 대체 뭔 좀스러운 짓인가 생각했다. 그런데 소문의 효과는 때로는 검보다 치명적이었다. 로이는 지금 일어난 사건이 아마 그런 종류 비슷한 음모라고 짐작했다. '마님은 여자야. 여자한테 소문은 안 좋아.' 일은 벌어졌다. 로이는 뒷정리를 생각했다. 로이는 마님이 여기 있었던 흔적을 모두 없애기로 마음먹었다. 진정한 사냥꾼은 흔적도 후환도 남겨서는 안 된다. 증인부터 없애야 했다. 시녀와 하녀를 목을 꺾어 죽였다. 안면이 있는 하녀에게는 조금 미안했다. '미안. 나중에 지옥 가서 빌게.' 입구에 널브러져 있는 기사들을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그들은 마님이 휴게실로 들어오는 장면을 목격했다. 역시 죽여서 잘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기대 앉혀 놓았다. 모든 과정은 순식간에 끝났다. 순식간에 여러 목숨이 사라졌으나 로이에게 이것은 사냥이었다. 보통 사람이 살인 후 느끼는 공포와 죄책감은 없었다. 로이는 소파에 앉아서 눈을 감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예민한 그의 감각에 사람들이 무리 지어 오는 소리가 잡혔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발걸음이 휴게실 문 앞에 멈추었다. 달칵 작은 소리가 나며 문이 열리는 순간 로이는 눈을 떴다. 짧은 입구의 복도를 따라 사람들이 다가왔다. 중간 문이 열렸다. 십여 명에 달하는 귀부인들이 안으로 우르르 들어오려다가 로이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로이의 눈이 번쩍 빛났다. 문고리를 쥐고 서 있는 시녀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아니타는 복도에 공작부인의 호위가 보이지 않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휴게실 앞에 기사가 없는 것을 보며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그러나 우르르 뒤를 따르는 귀부인들이 어서 빨리 문을 열라고 재촉하는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대로 도망가면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더라도 귀부인들을 안으로 들이고 나서 기회를 봐서 자연스럽게 몸을 빼야겠다고 생각했다. 귀부인들은 절대 제 손으로 문을 열지 않았다. 아니타는 자기도 그런 귀부인이면서 속으로 짜증 냈다. 중간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아니타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로이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뱀 앞의 개구리가 된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너구나.' 로이는 여자가 모든 정황의 중심에 있음을 본능으로 판단했다. 이성보다 몸의 감각에 의존하는 사냥꾼의 기질에 따라 항상 지니고 다니는 단검을 팔등의 감추어진 부분에서 꺼내서 즉시 여자의 목을 향해 날렸다. 루시아는 파티장으로 돌아와 귀부인들 틈에 섞여들었다. 제대로 생각할 시간 없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연속적으로 밀어닥쳐서 가슴이 뛰고 손바닥에 식은땀이 났다. 그래도 겉으로는 말을 걸어오는 귀부인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겹도록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사교 활동을 했던 꿈속 기억은 루시아에게 대단히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음악과 사람들 목소리로 소란스러운 파티장 안으로 캐서린이 다시 입장했다. 캐서린은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않고 곧바로 루시아에게 다가왔다. 캐서린을 보자마자 혼란 상태에 빠져있던 루시아의 기억이 조금씩 질서를 잡기 시작했다. 시작점은 캐서린이 찾는다는 시녀 말을 듣고 휴게실로 가면서부터였다. "공주님. 내궁에... 다녀오신 건가요?" "헛걸음만 하고 왔어요. 폐하께서 찾으신 적 없으셨어요. 대체 누가 헛말을 전하는 짓을 했는지 찾아내서 엄히 죄를 물을 거예요." 캐서린이 앙칼지게 불쾌함을 표했다. 루시아는 자신이 뭔가 음모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시아를 노린 누군가가 캐서린을 먼저 거짓으로 유인하고 그걸 이용해서 루시아를 휴게실로 유인했다. '대체 왜? 누가?' 로이가 아니었으면 큰일이 날 뻔했다. 아까 휴게실에서의 상황을 떠올렸다. 로이가 멱살을 쥐고 있던 남자는 분명히 라미스 백작이었다. 아까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서 가슴이 답답하고, 로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이 됐다. "공작부인. 의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녀가 다가와 말했다. "의관이라니. 공작부인. 어디가 불편한가요?" "예. 머리가 좀..." "저런. 그만 댁으로 돌아가 쉬세요. 아무래도 공작부인은 늦은 시간에 활동하는 체질이 아닌 것 같군요." 사람들이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파티장 넓은 홀로 이어진 복도로 왕실기사들이 척척 갑옷이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빠른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이 공주의 개인 휴게실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알고 루시아 표정이 파리하게 굳어졌다. 한창 즐거운 파티 분위기를 망가뜨릴 수 있는 기사들의 집단 움직임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아무래도 무슨 큰일이 벌어졌나 싶어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오너라." 캐서린이 시녀를 보냈다. 기사들의 갑옷 소리가 멀어지고 루시아는 휴게실로 가서 의관의 진단을 받았다. 그 사이에 파티 분위기는 서서히 돌아왔다. 귀부인들은 캐서린 주변을 둘러쌌다. 귀부인 중 하나가 말했다. "저희도 언제 휴게실을 구경시켜 주셔요. 공주님."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래도 한 번에 많은 사람이 몰려갈 수 없겠으나 처음으로 개방하는 공주님 휴게실에 초대받는 영광을 받지 못해 서운했답니다." "무슨 말이죠. 내 휴게실을 개방하다니." "아까 시녀가 공주님 명으로 귀부인들을 데려가지 않았습니까? 공주님께서 휴게실을 개방한다고 첫 손님으로 꼽으셨는데요." "난 그런 지시를 한 적 없어요. 그럼 지금 내 휴게실에 내 허락을 받지 않은 자들이 가 있다는 건가요?" 캐서린이 날카롭게 되받아치자 귀부인들이 당황해서 서로를 돌아보았다. 의관의 별다른 이상 없다는 진단을 받고 루시아는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캐서린이 심부름을 보낸 시녀도 비슷하게 파티장으로 들어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캐서린에게 귀엣말을 전했다. 캐서린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캐서린은 루시아에게 "공작부인. 잠시요." 라고 말을 건네 사람들 사이에서 둘만 따로 떨어졌다. "공작부인. 놀라지 말고 들어요. 아까 기사들이 달려간 일이 뭔지 알아봤더니 사고가 난 모양이에요. 사고라기보다는..." 캐서린이 말을 잇지 못했다. 루시아은 짐짓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으나 꼭 쥐고 있는 두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불길한 예감이었다. 섬뜩한 한기가 등을 타고 흘렀다. 제발. 루시아는 입안으로 중얼거렸다. 로이에게 나쁜 일이 생겼을까 봐 가슴이 덜컹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났어요. 범인이 공작부인의 호위예요. 기사 크로틴." ============================ 작품 후기 ============================eunah666 님, 퍼플케이브 님, s013570s 님, 날love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사건 종료. 사건 종료. 사건 종료. 사건 종료. 사건 종료. 사건 종료. 사건 종료. 사건 종료. 사건 종료. 사건 종료. 사건 종료. 사건 종료. 사건 종료. 사건 종료. 사건 종료. 사건 종료. 사건 종료. 주군이 변했다. "당분간 이 마을을 진지로 삼겠다." "예. 주군." 가장 큰 목소리로, 반짝거리는 눈으로 주군을 바라보는 보리스를 보며 딘은 생각했다. 보리스는 이번 북부 토벌에 참가한 기사 중에서 가장 어렸다. 그리고 야만족과의 전투를 훌륭히 소화했다. 감정 표현이 많지 않은 엘리엇 단장이 아들의 성장을 흡족해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그리고 보리스의 표정에는 가문의 기사로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 중이라는 자긍심이 가득했다. 보리스가 첫 출격의 충격을 추스르기 쉽지 않을 거라는 딘의 예상을 깨뜨렸다. 주군이 변했기 때문이다. 주군은 야만족과의 전투를 주로 지휘만 했다. 예전처럼 정예 기사만 데리고 무차별적 살육을 하지 않고, 국경을 지키는 기사들도 합류하게 해서 전쟁을 수행했다. 기사들 우두머리를 불러 모아 전략을 짜고 다양한 전투 방식을 활용했다. 공작의 직접적인 지휘 아래 야만족과 싸우는 기사들은 굳은 각오로 전투에 임하고, 성취감과 뿌듯함을 누렸다. '만약 이것이 일시적 변화가 아니라면...' 딘은 바쁘게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정예 기사만 가진 어둠은 이제 사라지는 건가. 보리스가 새로운 정예의 시작이 되겠군.' 휴고는 이번 야만족 토벌을 이전과 다른 식으로 진행했다. 이전처럼 적당히 수만 줄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뭉치기 시작하는 부족을 흩어놓고 세력을 줄이고 이간질했다. 되도록 많은 기사를 동원해서 다양한 작전을 수행했다. 빠르게 뒤처리할 필요 없이 해결해서 어서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목표를 최우선으로 했다. 그리고 이전처럼 야만족을 봐도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피를 보고 싶다는 살육에 대한 욕구는 아내를 안고 싶다는 생각에 비하면 성가시기만 했다. 국경 근처의 마을은 항상 야만족 약탈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어서 기사들에게 협조적이었다. 위험하면서도 마을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고향에 대한 끈질긴 집착 때문이었다. 노인들이 다 죽어 없어질 즈음이면 젊어서 마을을 떠난 자들이 나이 들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끈질기게 명맥을 유지했다. 외진 마을에는 언제나 버려진 빈집이 있어서 그런대로 튼튼한 집을 하나 골라 대충 청소하고 사령부로 삼았다. 그래 봤자 먼지나 치우고 회의할 널찍한 책상 하나 마련한 것뿐이지만 휴고는 원래 겉보기 반지르르한 것을 따지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들어온 보고 전문을 읽는데 기사가 들어왔다. "주군. 마을 의사가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마을 의사가 왜." "필립이라는 이름을 전하면 아실 거라고 했습니다." 휴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닌다더니 공교롭게 여기 머물고 있는 줄은 몰랐다. 별로 반갑지 않은 얼굴인데 보지 말까 하다가 피할 이유는 뭐가 있나 싶었다. "들여보내." 기사가 잠시 후 필립을 데리고 들어왔다. 휴고는 기사를 내보냈다. 허름한 차림의 필립이 정중히 허리를 숙이는 모습을 말없이 보았다. "무슨 용건이야." "가까이 계시는데 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럴 것 없어. 피차 얼굴 봐서 좋을 것 없으니 모르는 척 살자고. 용건 끝났으면 꺼져." 필립은 유심하게 휴고를 살폈다. 자신의 얼굴을 이렇게 대놓고 빤히 보는 인간은 늙은이밖에 없었다. 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함을 표했다. "끌어내라고 할까?" "변하셨군요." "... 뭐?" "절 보는 눈이 그전과 다르십니다. 전에는 죽일 것처럼 살기를 보이셨지요." 휴고는 항상 늙은이가 지껄이는 개소리가 기분 좋은 적 없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늙은이 말에 그런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늙은이를 보는데 예전만큼 속이 뒤틀리고 구역질이 날 것 같지 않았다. 필립은 휴고가 가진 모든 악몽의 흔적이었다. 자신이 더럽고 끔찍한 괴물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매개체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전처럼 끔찍하지 않았다. "변하시면 안 됩니다. 진정한 북부의 주인으로서 냉정하고 비정해지셔야 합니다. 도련님이야말로 진정한 타란 혈족의..." 휴고는 한숨 쉬며 손짓하고 보던 전문으로 시선을 내렸다. 역시 늙은이는 입만 열면 헛소리였다. "나가." "... 마님께서는 평안하십니까?" 휴고의 붉은 눈동자가 핏빛으로 선명하게 짙어졌다. 필립이 바라던 대로 살기를 뿜으며 휴고는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더러운 주둥이에 담지도 마. 네놈이 관심 가질 이유가 없어." "단지 저는 마님께서 지니신 병증이 아직도 여전하신지 의사로서 염려하는 마음입니다. 지금이라도 필요하시면 치료법을..." "필요 없어." 휴고는 기사를 불러서 끌고 나가라고 명령했다. 기사의 손에 잡힌 채 필립은 말을 계속했다. "전 당분간 이 마을에서 머물 생각입니다. 혹시 마님을 치료하기 위해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불러 주십시오." 휴고는 무시했다. 필립은 밖으로 나가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저를 찾으실 날이 올 겁니다." 휴고는 코웃음 쳤다. 저 늙은이는 만나고 나면 뒤끝이 안 좋았다. 다음에는 절대 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주군. 급보입니다!" 기사가 급히 들어왔다. 기사가 건네는 작은 나무통은 수도에서 온 소식이라는 표식을 달고 있었다. 휴고의 표정이 굳어지면서 서둘러 전언을 꺼내 읽었다. 길지 않은 전언을 읽고 휴고는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놀라 굳어 있는 기사에게 명령했다. "칼리스... 엘리엇 경을 불러와. 당장!" 사흘이 지났다. 광견 크로틴이 저지른 엄청난 사건은 빠르게 소문을 덧붙여 수도 사교계에 퍼졌다. 귀족들은 좀처럼 발생하기 어려운 사건에 쥐떼처럼 몰려들었다. 사람이 둘만 모이면 모두 같은 내용을 화제로 삼았다.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큰일이라고 말하면서 모두 남의 집 불구경으로 즐기고 있었다. 로이는 살인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로이가 체포를 거부하고 달아나면 어쩌나 싶어서 출동한 왕실기사들이 긴장했으나 뜻밖에 순순히 포승줄에 묶였다. 캐서린 공주의 개인 휴게실은 범죄 현장이 되어 철저하게 관계자 이외 사람의 출입을 막고 조사단이 수없이 드나들었다. 루시아는 그날 사건의 진상을 채 알지 못하고 빠르게 귀가했다. 궁 밖에서 기다리던 호위들이 파티장으로 들어와 우선 귀가해야 한다고 청하는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루시아에게도 차분하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귀가한 이후 다시 한 번 주치의에게 몸 상태를 점검받고 공작저에서 사흘 내내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공작저 주변으로 물 샐 틈 없이 삼엄한 비상 경비 중이었다. 공작이 수도를 떠나기 전에 호위대장은 비상사태의 전권을 위임받았다. 마치 전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공작저는 철저한 보호 상태에 있었다. 몇 번 궁에서 공작부인을 참고인으로 부르려 했으나 공작부인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공작께서 자리를 비우신 상태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로 공작부인만 홀로 입궁할 수 없다." 라는 호위대장의 단호한 거절을 전달받고 왕은 다소 언짢아했다. 그래도 방법이 없었다. 공작부인을 데려오려면 공작저를 보호하는 기사들과 싸워야 하고 그건 타란 공작가와의 전쟁이었다. 퀘이즈는 절대 타란 가문과 척을 질 생각이 없었다. 파비안은 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고 즉시 공작에게 급전을 날렸다. 이후 새로운 정보를 얻을 때마다 추가 전언을 보냈다. 공작이 수도에 도착할 무렵에는 자신이 파악한 진상을 공작도 모두 알 수 있도록 조처했다. 현재 타란 가문 정보부는 치열하게 정보 수집 중이었다. 돈을 아끼지 않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맥을 활용했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오늘 파비안은 공작저에 들어왔다. 그간 상황을 마님께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마님께서 식사도 제대로 못 하시고 주무시지도 못한다고 이러다 큰일 난다고 제롬이 자꾸 보내는 전언을 무시할 수 없었다. 주군께서 돌아오시면 후폭풍을 생각건대 로이 목숨보다는 마님의 건강이 더 중요했다. 파비안은 어젯밤 왕의 특별한 배려를 얻어서 아무도 모르게 몰래 로이를 만나고 올 수 있었다. 로이는 지하 감옥 독방이 휴양지라도 되는 것처럼 느긋했다. 바닥에 옆으로 길게 누워서 팔로 고개를 디디고 있다가 파비안을 보자마자 손을 흔들었다. [ 여. 왔소? ]파비안은 갑자기 혈압이 솟구쳐서 이를 악물고 말했다. [ 미친놈아! 왔소? 그래, 왔다! 남은 이렇게 밤낮없이 뛰게 해 놓고 넌 뭐가 그리 태평이야? ][ 그럼 울까? ][ 으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내가 너 언젠가 이런 사고 칠 줄 알았다. 쳐도 어지간한 일을 저질러야지. 빌어먹을 놈. ]파비안은 로이를 향해 실컷 욕을 퍼부었으나 로이는 창살 너머에서 지루한 표정으로 귀만 후볐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더 부아가 나서 파비안은 제 가슴을 두드려야 했다. 로이는 체포된 날부터 지금까지 사건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왕이 파비안을 들여보내 준 것은 조금이라도 설득해서 사건 진상에 관한 정보를 내놓기 바라는 마음이었다. 형식상으로는 흉악한 범죄자로서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으나 그런 것치고 로이는 별다른 험한 대우를 받지 않았다. 아직 본격적인 문초도 없었고, 손가락 하나 상한 곳 없이 지하 감옥에서 제때 나오는 밥을 먹으며 잘 지내고 있었다. [ 얘기해 봐. 주변에 듣는 귀 없는 거 확인했으니까. ]로이는 당시 자신이 본 상황 그대로를 가감 없이 전달했다. 정보를 듣고 추리하고 상황을 끼워 맞추는 일은 파비안이 할 일이었다. [ 데이빗은 왜 죽였어? 목숨만 붙여놨어도 이 지경으로 암담하지는 않단 말이다. ][ 살려두면 후환이 되겠더라고. 죽여도 탈이고 살려도 탈이면 죽이는 게 낫지. ][ 잔인한 새끼. 짐승 새끼. 너 같은 놈이 지금껏 햇빛 아래 자유롭게 활보했다는 게 끔찍하다. 이 새끼야. ]파비안은 또 분을 못 이겨 씩씩대다가 말을 이었다. [ 백작부인은 왜 그렇게 증인들 많은 곳에서 대놓고 죽인 거야? 혼자 충분히 몸 뺄 수 있었잖아. 그것 때문에 빼도 박도 못하게 넌 현행범이 됐다고. ][ 그러라고 한 건데. ][ 뭐? ][ 내가 죽였다는 증거를 보여야 다 내가 죽였다고 믿지. 나 혼자 미친 짓 한 것처럼 보여야 주군이랑 마님이랑 연결이 안 될 거 아냐. ]이놈은 미친놈이지만, 머리 좋은 미친놈이라고 파비안은 생각했다. '주군 밑에는 제대로 정신 온전한 놈이 없어.' 파비안은 제 얼굴에 침 뱉는 한탄을 했다. [ 그 여자는 무조건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어. 우와. 근데 되게 신기하대. 그 여자가 죽자마자 모습이 변하는 거 있지. 그건 어떻게 된 거야? ]파비안은 끄응, 신음하며 답했다. [ 마도구야. 라미스 공작가 소유지. 지금은 공작가에서 도둑맞았다고 발뺌하고 있지만. ]죽은 팔콘 백작부인에게 대단히 수상한 점이 많아서 우선 로이를 놔 두고 왕실에서는 백작부인 조사에 집중했다. 라미스 공작가에서 잃어버렸다고 주장하는 마도구를 이용해서 시녀 행세를 하고, 캐서린의 휴게실을 무단 사용했으며, 손에 낀 반지에서는 독극물이 나왔다. 이미 죽어서 자백을 받을 수 없으나 백작부인의 저택이며 사업이며 가릴 것 없이 탈탈 털리고 있었다. [ 너 지금 가장 큰 죄가 뭔지 알아? ][ 사람 죽인 거잖아. ][ 그래. 딴사람은 몰라도 공작가 후계를 죽인 일은 문제가 크지. 그것도 그거지만 백작부인 죽일 때 왜 네 무기를 쓴 거야. 넌 허락받지 않고 왕궁으로 몰래 무기를 반입한 거라고. 왕의 시해 미수 혐의를 쓸 수 있단 말이다. ]로이는 턱을 긁적이다가 말했다. [ 그냥 습관적으로... ][ ... 그냥 죽어라. ]파비안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루시아는 급히 침실에서 내려왔다. 근심이 가득한 루시아의 얼굴은 며칠 사이에 까칠해졌다. 파비안과 응접실에 마주앉아 루시아는 다급하게 물었다. "크로틴 경은 만나 봤나요? 무사한가요?" '그놈은 무사하다 못해 아주 잘 놀고 있습니다. 그놈한테 죽은 목숨이 여섯이라고요. ' "예. 별 이상은 없습니다. 지하 감옥의 환경이 그리 좋지는 못하지만, 그런대로 적응하고 있습니다." 루시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날 캐서린 공주가 로이를 살인범으로 지목했을 때 놀라움보다는 안도감이 컸다. 살인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라는 소리는 최소한 로이가 무사하다는 말이었다. "크로틴 경은 어찌 되는 거지요?" 루시아는 로이가 데이빗과 팔콘 백작부인을 죽였다는 사실 외에 자세한 정황을 알지 못했다. 자신의 얼굴에 이상한 약을 뿌린 시녀는 팔콘 백작부인이었고, 휴게실에 함께 들어갔던 하녀가 돌아오지 않아서 뭔가 잘못되었다고 짐작만 했다. 로이에게 죽은 자는 여섯이지만, 그중 화장실에 있던 여자 둘과 기사 둘의 죽음은 수사에 관여한 사람만 알고 있었다. 특히 여자 둘은 중독 상태였고, 죽은 백작부인에게서 독이 발견되어서 로이는 두 사람에 대한 살인죄에 아직 용의 선상에만 있었다. 사교계에 퍼진 소문은 데이빗과 아니타, 두 사람을 로이가 죽였다고 되어있었다. "아직 수사 중입니다." "크로틴 경이 살인했다고 결론이 나면 사형을 당할 거예요. 다른 사람도 아닌 공작가 장남을 죽였어요." "... 그건 그렇습니다만." "내가 입궁해서 증언하겠어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면..." "그건 안 됩니다. 마님." 제롬과 파비안이 동시에 입을 모았다. "크로틴 경이 왜 지금까지 자기 변론도 없이 입을 다물고 있는지 헤아리셔야 합니다. 마님께서 나서면 마님도 사건의 당사자가 되십니다." 공작가 하녀의 죽음은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로이는 공작부인의 호위였으나 워낙 그동안 미친 짓을 해온 전적이 있어서 사람들은 놀라면서도 그럴 수도 있다고 받아들였다. 누구도 이번 사건에 공작부인을 연결 짓지 않았다. 그리고 캐서린 공주가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에 공작부인이 자신과 함께 있었다고 증언했다. 덕분에 아예 루시아는 이번 사건에서 배제되었다. 철통의 보안 속에서 저택 안에서 꼼짝하지 않는 것도 평소 활동이 많지 않은 공작부인의 성격으로 미루어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광경을 목격한 귀부인들 여럿이 기절해서 실려 나갔다. 공작부인의 충격 받은 심경을 유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파비안은 로이가 모든 관련자를 다 없애버렸기 때문에 아무리 수사를 면밀히 들어가도 로이만 입 다물면 어디서도 공작부인이 거론될 여지가 없다고 판단했다.' 미친놈이지만 녀석 방식대로 진짜 깔끔하게 해치우긴 했지. '파비안은 로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만약 공작부인이 나서서 상황을 반전시키면 주군께서 돌아오시는 날이 자신의 제삿날이라고 생각했다.' 전 오래 살고 싶습니다. 마님. 가늘고 길게 살고 싶다고요. ' "마님. 답답하시겠지만, 주군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급히 전갈을 보냈고 이미 오고 계시다는 답을 받았습니다." "그럼 나는 이대로 가만히 있어야 하는 건가요? 그 사이에 크로틴 경이 처형되면 어떡해요. 라미스 공작가에서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으니까 염려 놓으십시오." 왕은 로이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 태자 시절에 로이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분명히 타란 공작이 올 때까지 제대로 취조에 들어가지 않고 시간을 끌 것이다. 정치적인 이득에서도 황혼을 바라보는 라미스 공작보다 한창 젊은 타란 공작과 일을 도모할 미래가 훨씬 길었다. "크로틴 경같이 좋은 사람이 나를 도우려다 이런 일에 휘말리다니. 크로틴 경이 작정하고 사람을 죽였을 리 없어요. 적어도 라미스 백작과는 서로 몸싸움을 하다가 사고가 났을 거예요." 루시아의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눈물이 고였다. 곁에서 재빠르게 제롬이 건네는 손수건을 받아 눈가를 눌렀다. 파비안은 미묘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놈은 미친놈이라고 말할 수 없는 심정이 답답했다.' 어지간히도 마님께 잘 보였군.' "자세한 진상은 주군께서 돌아오시면 풀어 가실 겁니다. 마님께서 대충 당시 정황을 제게 말씀해주시긴 했지만, 크로틴 경이 입을 다문 상태라서 아직 정확한 경위를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당분간 답답하셔도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 알았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거군요." "마님께서 무사하신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파비안은 로이에게 욕에 욕을 퍼붓고 나왔지만, 마음 한 편에 잘했다는 생각도 있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라미스 백작과 공작부인이 함께 있는 장면을 말 많은 귀부인들이 목격하는 상황을 가정하면 정말 식은땀이 났다. 공작부인에 관한 추문으로 사교계는 들썩일 것이고, 귀환하신 주군 손에 한둘이 죽을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로이는 여섯의 목숨을 앗고, 다른 생목숨을 구했다. 휴고는 야만족과의 전투 지휘 전권을 칼리스에게 일임하고 바로 수도로 출발했다. 중간중간 말을 갈아타면서 최대한 속도를 내어 쉬지 않고 달렸다. 게이트에서 거리가 멀리 떨어진 최북단이라 게이트에 도착하는데 꼬박 닷새가 걸렸다. 수도 게이트에 도착하자마자 휴고는 다시 말을 몰고 저택으로 달렸다. 복잡한 거리를 질주하는 말 때문에 마차는 가던 길을 멈추고, 거리가 혼잡해졌으나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도록 공작 뒤를 멀찌감치 따르는 기사들이 수습했다. 말이 저택 바로 앞까지 도착해 휴고는 말에서 뛰어내려 바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하인이 집사에게 달려가 전했다. 제롬이 서둘러 업무실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2층으로 올라가는 주인의 뒷모습만 볼 수 있었다. 의욕이 하나도 없었다. 루시아는 침실 소파에 기대앉아 멍하게 있었다. 제롬이 자꾸 권해서 뭔가 먹기는 했지만, 뭘 먹었는지 맛을 모르겠다. 루시아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그날의 상황이 반복해서 재생했다. 쓰러지는 하녀, 자신의 얼굴에 뭔가 뿌려졌을 때 잠시 마주친 여자의 눈빛에 비친 증오와 승리감, 잠시 의식이 끊기고 깨어났을 때의 현기증과 라미스 백작과 드잡이하던 크로틴 경, 나가라고 소리치는 크로틴 경의 목소리. '그 여자가 팔콘 백작부인이었다고.' 마도구를 이용해 모습을 바꿨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대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 했던 것일까. 파비안은 아마 공작부인과 관련한 추문을 만들려던 시도 같았다고 말했지만, 루시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짓을 해서 대체 백작부인에게 도움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루시아는 사람 마음속의 추악한 비틀림을 공감할 수 없었다. 꿈속에서 많은 고생을 했어도 누군가를 향한 격렬한 증오를 불태워 본 적 없었다. '... 죽은 거겠지.' 하녀가 어찌 되었는지는 루시아에게 자세한 말을 아끼는 눈치였다. 지금껏 소식이 없는 것으로 봐서 죽었을 거로 생각했다. 아마 그때 쓰러질 무렵에 뭔가 잘못되었을 것이다. 루시아는 백작부인이 왜 자신은 해치지 않았는지가 오히려 궁금했다. 루시아는 뜨거워지는 눈을 감았다. '가여운 사람이 죄 없이 죽었구나.' 루시아는 하녀의 죽음이 마음 아팠다. 일부러 특정 하녀를 총애하지 않지만, 그 하녀는 우직하고 성실해서 마음에 들었다. 꿈속에서 하녀로서 일한 경험 때문인지 한낱 고용인의 죽음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억울한 개죽음이었다. 가족들은 어디다 하소연도 하지 못할 것이다. 고용인이라도 공작가에 소속된 이상 공작가 사람이었다. 루시아가 지켜 주었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자신이 무능력한 것 같고, 미안하고, 딸 혹은 누이를 잃은 가족들의 아픈 마음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갑자기 덜컥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루시아는 놀라서 눈을 떴다. 침실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을 보며 루시아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를 보며 그에게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두어 걸음을 내딛기 전에 이미 그가 빠르게 다가와 품으로 끌어안았다. "휴...?" 정수리 위에서 나지막한 그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너른 품에 안겨서 그의 팔에 단단히 감겨서 그리운 그의 체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혹시 백일몽이라도 꾸는 것인가 싶었다. "다친 곳은?" 선명한 그의 목소리는 환상이 아니었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서 휘청하는 루시아를 그가 부축했다. 휴고는 힘이 빠지는 아내의 몸을 안아서 소파에 앉혔다. 제 몸에 기대게 하고 한쪽 팔로 허리를 감싸 당겨 안았다. 한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쓸어 올리고 젖어들기 시작하는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휴. 크로틴 경이..." "알아. 당신은 어떻지? 기절했었다며. 주치의 진료는 받았어?" "잠시 정신을 잃게 하는 마취약 같은 거라고 했어요. 전 괜찮아요. 다친 곳도 없어요. 근데 저 때문에 크로틴 경이..." 울기 시작하는 아내의 고개를 품으로 안으며 휴고는 등을 토닥여 주었다. 집까지 달려오는 내내 주체할 수 없었던 불안이 그녀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자 씻은 듯이 사라졌다. 수도에서 전해온 로이의 짤막한 사고 소식을 접하자마자 휴고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아내였다. 사고가 일어난 장소와 죽은 자들 정보를 접하면서 휴고의 걱정은 점점 커졌다. 호위 중에 일어난 사고였다. 호위대상인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수도까지 무슨 정신으로 달려왔는지 모르겠다. 전언에 아내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말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온갖 불길한 상상에 괴로웠다. 만약 그녀가 손끝 하나라도 상했다면 관련자를 남김 없이 다 죽여 버리겠다고 분노에 차 있었다. "그만. 비비안. 울지 마." "어떡해요. 크로틴.. " "내가 알아서 할게." 휴고는 그녀의 턱을 잡고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눈물로 젖어 짭짤한 입술에 키스했다. "얼굴이 상했군. 밥은 제대로 먹었어?" "저는 괜찮아요. 저택에서 보호만 받았는걸요." "그건 당연한 거야. 아무 걱정하지 말고 잘 먹고 잘 자라고 말했지." "그건 이런 일이 생기기 전이었잖아요." "언제든 다 똑같아. 당신이 걱정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 루시아는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의 말대로 아무 걱정할 일이 없고 모든 일이 잘 될 것만 같았다. 전전긍긍하며 잠 못 이루며 뒤척거린 며칠이 쓸데없는 고생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 사건이 벌어진 날 이후 루시아는 처음으로 웃음 지었다. "당신 손이 차요. 얼굴도 차고." "말을 타고 달려오느라. 너무 차가운가?" "시원해서 좋아요. 머릿속도 맑아지는 것 같아요." 휴고는 헤실헤실 웃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두 손으로 그녀의 양 볼을 감싸 쥐고 입술이며 콧등이며 눈가며 마구 키스하기 시작했다. "휴.. 휴! 왜 그래요." "확인 중." "무슨 확인이요?" "정말 당신이 내 앞에 있는 것이 맞는지 확인 중이야. 며칠 내내 수도로 오면서 눈 감으면 보였다가 눈을 뜨면 사라지더라고." 휴고는 루시아가 그만 하라고 몇 번을 말하는데도 들은 척하지 않고 수십 번을 여기저기 입술을 붙이고 난 후에 놓아주었다. "가신 일은 어떻게 된 거예요? 중요한 일이었잖아요." "거긴 알아서 하라고 맡겨놓고 왔어. 여기 더 큰 일이 터졌잖아." 루시아는 시무룩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크로틴 경을 도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요."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그보다 뒷수습할 사고 한번 치라고 했더니 아주 크게 쳐 주셨군." 루시아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가 이전에 했던 말을 떠올리고 그에게 소리치며 그의 가슴을 내리쳤다. "지금 그런 농담이 나와요?" 그는 키득 웃으면서 재빠르게 그녀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했다. "그 정도로 별일 아니라는 거야. 속 끓이지 마." "정말 당신에게 방법이 있는 거죠?" "있어. 녀석은 무사할 테니까 염려 마." "크로틴 경은 당신에게 특별한 사람이잖아요. 크로틴 경이 다치면 당신도 마음이 아플 거예요. 당신이 슬퍼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휴고는 피식 웃으면서 두 팔을 크게 벌려 루시아를 안았다. 이상했다. 로이를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어 했어도 의미를 부여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자꾸 말하니까 정말 녀석이 그런 존재처럼 느껴졌다. "당신을 다시 봐서 기뻐요. 휴. 보고 싶었어요." 휴고는 예쁜 말만 골라서 하는 아내의 입술에 다시 키스했다. 루시아는 오랜만에 보는 남편과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그의 품에 기대서 소소한 이야기를 하던 중에 잠들었다. 사건 이후 계속 새벽까지 뒤척이는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그가 돌아와서 모든 긴장이 다 풀어졌다. 잠든 아내를 침대에 제대로 눕히고 휴고가 2층에서 내려왔을 때 이미 도착한 파비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파비안은 보고서를 올렸다. 휴고는 이미 오는 중에 계속 정보를 받아서 상황을 대략 파악하고 있었다. 두 연놈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이 유일하게 아쉬웠다. 살아 있었으면 겪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고통을 선물로 주었을 것이다. 사건이 벌어진 날로부터 일주일이 훌쩍 지났다. 사건 즉시 휴고가 있었으면 어떻게 해서든 무마할 방법을 찾았을 텐데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다. 로이가 저지른 짓은 아예 기정사실이 되어서 소문을 수습하기 늦었다. 왕의 처남인 라미스 백작의 죽음은 사람들 관심이 쉬 멀어질 화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이번 사건이 어떻게 해결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두 공작가의 전쟁으로 번지는 것 아니냐고 섣부른 추측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어려운 이유는 공작부인을 철저하게 배제하기 때문이었다. 휴고는 이번 일 어디에서도 아내가 언급조차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사교계 소문은 평생 따라다니는 꼬리표였다. 데이빗과 아니타가 공작부인을 해하려고 모의했다는 증거를 세워서 해결하면 아내가 받을 상처가 너무 컸다. 사람들이 온갖 추측성 발언으로 짓밟을 것이다. "녀석을 빼낼 방법은?" "여러모로 검토했습니다만, 불가입니다." 로이는 자기 변론은 물론 당시 상황도 설명하지 않았다. 자신의 죄를 정당화할 어떤 이유도 내세우지 않았다. 상황을 설명하려면 공작부인을 반드시 거론해야 하기 때문에 로이는 절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보고서 마지막 장에는 파비안이 수하들을 닦달해가면서 머리를 쥐어짜서 생각해낸 해결 방법 몇 가지를 제시했다. 가장 극단적인 방법은 오히려 데이빗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방법이었다. 공작가 장남의 죽음을 정당화할 죄라면 반역밖에 없었다. '반역...? 안 돼. 왕이 협조하지 않을 거야.' 규모가 너무 컸다. 반역으로 몰고 가자면 증거는 만들면 그만이었다. 마침 좋은 먹잇감이 있었다. 데이빗이 자금을 지원하는 청년회 조직을 얼마든지 나라를 뒤집을 역당으로 포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데이빗은 라미스 공작가의 후계였다. 데이빗의 반역은 라미스 가문의 반역이고 데이빗 혼자 죽어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주변에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권력 정점에 있는 라미스 공작가는 동지만큼이나 정적이 많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고 늘어져 공작가의 패망으로 끌고 갈 것이다. 그러면 왕비와 왕자들까지 줄줄이 엮일 곳이 끝이 없었다. 현재 라미스 공작가는 피해자였다. 라미스 공작은 왕의 장인이자 오른팔이었다. 퀘이즈가 아들을 잃은 라미스 공작이 억울하게 반역을 뒤집어쓰도록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빼돌린다...' 또 다른 방법은 로이의 방면을 불가능하다고 전제하고 빼돌리는 방법이었다. 이 방법은 반드시 라미스 공작가와 척을 지게 되어 있었다. 왕이 찬성하지 않을 것이며 결국은 왕에게 맞서는 일이었다. 왕과 싸울 일이 겁나지는 않았다. 북부에는 그만한 저력이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명분이다. 전쟁에 임하는 자에게 사기를 불어넣으려면 그들이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야 한다. 그래야 기꺼이 타란 가문을 위해 용감히 싸울 것이다. 흉악한 살인죄를 저지른 공작가 기사 하나를 구하고자 전쟁을 시작하면 겉으로 따르는 척해도 승복하지 못할 것이고, 그래서는 필패였다. 수도에 발붙이지 않고 아예 북부에 틀어박혀 지내는 방식을 취한다고 해도 퀘이즈가 가만히 봐 주지 않을 것이다. 퀘이즈는 등 뒤에 적을 내버려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언제가 되든 불안요소는 반드시 제거했다. 휴고는 제 한 몸은 언제든 지킬 수 있으나 아내는 약했다. 언제 어떤 빈틈이 있을까 봐 평생 마음 졸이며 살 수 없었다. 아내에게도 못할 짓이었다. 로이를 구하려면 왕의 협조가 필요했다. 휴고는 팔짱을 끼고 등을 기대고 앉아서 장고에 장고를 거듭했다. 주군의 결정을 기다리는 파비안은 숨을 죽이고 서 있었다. 파비안은 공작이 어떻게 이번 일을 해결할지 궁금했다. 아무리 고민해도 로이는 버리는 패로 쓸 수밖에 없었다. 공작가 후계를 죽인 일을 기사 하나 버려서 수습할 수 있다면 남는 장사였다. 집무실이 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침묵으로 조용했다. "입궁하겠다. 가서 폐하께 독대를 요청한다고 말을 전해라." "예. 전하." 파비안이 먼저 궁으로 떠나고, 잠시 후 휴고도 궁으로 향했다.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입궁했다. 어차피 타란 공작이 돌아온 사실이 호사가들 입을 통해 금방 알려지겠지만, 가능하면 모든 일을 조용히 처리하는 편이 좋았다. "허어. 공은 날아온 건가? 얼마 전까지 국경에 있었다더니." 퀘이즈는 휴고를 보자마자 유쾌하게 말했다. 매사 지나치게 진지하지 않은 점은 퀘이즈가 쓰고 있는 가면이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늘 비슷한 태도를 보이면 속내를 읽기가 어려웠다. "돌아오자마자 불미스러운 일로 뵙게 되는군요." "어쩔 건가?" 긴 이야기 할 것 없이 퀘이즈는 본론부터 꺼냈다. 사태가 무르익어서 손 쓸 여지는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껏 지하 감옥에 가둔 로이를 건드리지 않은 것만 해도 퀘이즈는 충분한 성의를 보였다. 왕비는 눈물바람이고 장인은 매일 찾아와 서운함을 표했다. 조사한 정황은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팔콘 백작부인이 왜 라미스 공작가 소유의 마도구를 가지고 있었는지, 왜 귀부인들을 캐서린의 휴게실로 몰고 갔는지, 시녀는 옷을 훔치려고 죽였다 쳐도 공작가 하녀는 왜 죽였는지 의문점이 많았다. 데이빗과 모종의 협의가 있었다는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었다. 무슨 일을 꾸미고자 했는지도 불분명했다. 백작부인의 집이며 사업이며 모두 털어도 나오는 것이 없었다. 주점에 데이빗이 자주 들렀다지만, 그건 죄가 아니었다. 라미스 공작가에서는 마도구를 도둑맞았다고 주장했으며 백작부인과의 관련성을 철저히 부정했다. 영지에 내려가 있던 데이빗은 건국절을 집에서 보내라는 부친의 특별한 배려로 올라왔고 순수하게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입궁했다고 주장했다. 관련자들은 로이가 모조리 죽였고, 유일한 당사자 로이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라미스 공작가의 주장을 반박할 증거가 없었다. 데이빗은 억울하게 살해당했고, 로이는 흉악한 살인범이었다. "상황이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안 좋지. 크로틴 경이 뭐라도 말해야 끼워 맞추지. 그것도 늦었어. 인제 와서는 어떤 말을 해도 뒤집기 틀렸다고. 그나마 라미스 공작가에서 데이빗의 죽음을 타란 공작가의 계획적인 음모로 몰고 가지 않는 것만도 많이 참고 있는 거네. 장인 요구는 간단해. 크로틴 경을 법에 따라 처형해 달라는 거지. 그거면 넘어가겠다고 했네. 오히려 아들의 죽음 앞에서 대단히 냉철한 태도를 보여서 짐이 놀랄 지경이야." "......" "크로틴 경 방면은 힘들어. 크로틴 경이 검을 갖고 있었다는 점도 문제야. 처남을 죽인 일을 어찌어찌 넘기면 장인은 그 문제를 걸고넘어지겠지. 짐을 시해하려는 목적이라고 주장해서 여론을 모으면 정치적 논란으로 비화하여 타란 가문도 휘말려. 짐은 그렇게 되기 바라지 않네." 아직 왕의 반 세력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들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지금, 왕의 가장 큰 힘 둘이 서로 맞서면 적에게 빈틈을 보이는 꼴이었다. 그 지경으로 진흙탕싸움이 되느니 퀘이즈는 로이를 처형하는 방안을 택할 것이다. "대체 크로틴 경은 왜 그런 건가? 사건과 관계없이 그냥 궁금해서 잠이 안 오는군." "녀석을 만나볼 수 있겠습니까?" 지하 감옥 독방은 이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돌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사방을 돌벽으로 만든 방이 있고, 창살로 벽을 세운 또 하나의 방에 죄수를 가두었다. 어찌어찌 창살 밖으로 빠져나왔다 해도 돌문 밖을 지키고 있는 기사를 상대해야 했다. 위험한 범죄자를 가두기 위한 감옥이었다. 로이가 위험인물이 맞기는 하지만, 퀘이즈가 로이를 독방에 둔 것은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였다. 라미스 공작가에서 원한을 갚으려고 죄수를 암살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었다. 돌바닥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던 로이는 돌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사람을 보며 일어났다. 돌문이 닫히고 두 사람만 남았다. "상한 데는 없고?" "멀쩡해요." 로이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주군의 첫 질문이 안위를 묻는 것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당시 상황은 파비안에게 전해 들었다. 말하지 않은 일이 있나?" "없소. 주군 참 빨리 왔네요. 더 걸릴 줄 알았는데." 로이는 어쩌면 주군이 오기 전에 자신이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 죽소?" 로이는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덤덤하게 물었다. 데이빗을 죽였을 때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건 알았다. 증인인 기사 둘만 죽이면 증거 남기지 않고 도망칠 수 있었다. 화장실에서 마님의 하녀를 발견하고 마음을 바꿨다. 하녀를 두고 가면 타란 공작가의 연결 고리를 남기는 셈이었다. 혼자면 몰라도 정신 잃은 여자를 데리고 폐쇄적인 궁에서 완벽하게 남의 눈을 피할 자신이 없었다. 더구나 데이빗은 사람이 오고 있다고 말했다. 시간이 넉넉지 않았다. 도망칠 수 없다면 공범인 여자까지 해치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로이는 휴게실로 들어서는 시녀를 보자마자 죽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로이의 판단은 옳았다. 만약 아니타가 살아서 잡혔다면 온갖 거짓말로 공작부인을 음해했을 것이다. 루시아는 꼼짝없이 사건 관련자로 묶여서 온갖 추측과 소문의 중심에 놓였을 것이다. 휴고는 인상을 썼다. "안 죽어." 휴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네 목을 지키려면 네 명예는 버려야겠다. 네 목보다 명예가 중요하냐?" "명예?" 로이는 히죽 웃었다. "그런 껍데기는 가져 본 적도 없소." 휴고는 피식 웃었다. "그럼 됐다. 조금 더 고생해라." 휴고는 로이를 잠시 바라보다가 짧게 던지듯 말했다. "잘했다." 로이는 히히 웃다가 돌아서는 휴고를 불러 세웠다. "이만하면 은혜 갚았소?" 휴고의 눈에 한 줄기 빛이 스쳐 지나갔다. "너..." 히죽거리는 로이를 보던 휴고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내게 다시 목숨 빚을 질 테니까 갚으려면 멀었지." "우와. 내가 왜 이 지경이 되었는데. 진즉 사기꾼이라는 걸 알았을 때 도망갔어야 했어." 탄식처럼 주절거리는 로이의 말을 뒷등으로 들으며 휴고는 독방을 나갔다. 그리고 지하 감옥에서 나오면서 파비안을 불러 은밀하게 지시했다. "사형수를 찾아라. 로이와 비슷한 체격과 머리색을 지닌. 체격이 첫 순위다." 파비안의 눈이 반짝 빛났다. 대답으로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움직였다. 휴고는 멀어지는 파비안 뒷모습을 보다가 저만치 보이는 내궁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왕과 협상을 할 차례였다. ============================ 작품 후기 ============================레자르 님, o벼리 님, 퍼플케이브 님, sakabatou 님, EastStar 님, 아자부주방 님, 초낭자 님, 날love 님, 아드밀란 님, 아엘로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캐서린은 왕비궁에 들렀다. 시녀에게 왕비 상태를 묻자 흐린 표정으로 "누워 계십니다." 라고 말했다. 캐서린은 작은 한숨을 쉬고 왕비의 침실로 들어갔다. 베스는 동생이 끔찍한 죽임을 당한 일로 큰 충격을 받아서 며칠 자리보전 중이었다. 혹시 복중 태아가 잘못될까 봐 궁의들이 부지런히 드나들고 있었다. "기운을 차리셔야지요. 홑몸이 아니십니다." 캐서린이 베스의 손을 잡아 위로했다. 베스는 생기 없는 표정으로 힘없이 웃었다. "동생을 많이 위해주지 못했어요. 볼 때마다 마땅치 않은 말만 했지요." 베스는 이렇게 갑자기 동생이 곁을 떠날 줄은 몰랐다. 마음에 미진한 구석이 있는 동생이었으나 그래도 하나뿐인 동복형제였다. 볼 때마다 잔소리한 것은 잘되라는 마음이었다. 동생이 죽고 나니까 잘한다는 한마디 해 줄 것을, 후회만 들었다. 아버지는 아들보다 가문이 중한 분이고 남편은 처남의 죽음에 크게 마음 쓰지 않는 눈치였다. 동생의 죽음에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 없어서 베스는 그게 더 마음이 아팠다. "크로틴 경은 나도 잘 아는 사람입니다. 덕분에 폐하께서 여러 번 구명을 받으셨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요. 왜 내 동생을 그리했을까요." "진상은 밝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든 결론이 날 거예요. 왕비 마마께서 이렇게 기운을 놓으시니 폐하께서도 걱정이 많으십니다." 캐서린은 베스를 위로하며 사건이 일어난 밤의 일을 떠올렸다. 캐서린이 왕명을 사칭한 자에게 속아 내궁에 갔을 때 마침 회의에 들어가려는 퀘이즈와 복도에서 마주쳤다. [ 네가 파티 중에 여기까지 어쩐 일이냐. ]캐서린은 왕의 말을 듣자마자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 바쁘신 모양입니다. 급한 일 아니니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헛말을 전한 자를 색출해서 혼내겠다고 씩씩거리며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오고 나서 얼마 후에 사건이 터졌다. 캐서린은 내궁을 다녀오느라 파티장을 비웠던 시간 동안 공작부인과 함께 있었노라 진술했다. 그래서 공작부인은 파티 내내 혼자 있었던 빈 시간이 없게 되었다. '팔콘 백작부인. 그 독사 같은 년이 언제고 일을 저지를 줄 알았지. 감히 내 휴게실을 그 꼴로 만들어?' 캐서린은 사건의 진상을 전부 알지 못했지만, 아니타가 공작부인에게 뭔가 나쁜 짓을 하려던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아니타가 과거에 타란 공작과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한때 혼자 타란 공작을 좋아한 적 있었던 여자로서의 감이었다. 비록 죽었으나 그년의 수작이 아예 무위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적극적으로 공작부인을 아예 제삼자로 빼냈다. 그래서 아니타가 캐서린을 왕명을 사칭해서 내궁에 보낸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퀘이즈가 그걸 알았다면 사건 조사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휴게실을 사용하는 사람은 캐서린 공주와 타란 공작부인뿐이었다. 캐서린을 멀리 보냈다면 노릴 사람은 타란 공작부인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런데 그럴 가능성을 차단하자 사건이 오리무중에 빠진 것이다. 왕과의 협상은 쉬웠다. 퀘이즈는 장인과 기질이 다른 처남을 평소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던데다가 로이에게 개인적인 호감이 있었다. 1년 넘도록 호위로 거느린 경험에 비추어 로이가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망종이 아니라는 믿음도 있었다. 휴고가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도움을 주겠다고 하자 퀘이즈는 흔쾌히 덥석 물었다. "근데 크로틴 경이 그러겠다고 하던가? 그대들은 정말..." 귀족에게 명예는 목숨보다 중했다.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명예를 버려서 목숨을 구한다는 발상은 아예 하지 못했다. 퀘이즈는 그러겠다고 대답한 로이나 그런 방안을 제시한 휴고나 둘 다 이해할 수 없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로이와 명예를 위해서 목숨은 초개처럼 버릴 수 있다는 퀘이즈는 양 극단에 서 있었다. 서로 이해하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조건이 있네. 짐 혼자 그러자고 해서 될 일이 아니야. 장인도 동의하면 짐도 받아들이지. 장인 설득은 공이 해야 할 것이고." "그러겠습니다.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이번 일의 진상은 모르고 넘어가 주십시오." 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 아는 입이 적을수록 비밀은 지켜지는 법. 이번 사건에서 아내를 완전히 떨어뜨리기 위해서 들이는 노력이 휴고는 전혀 수고스럽지 않았다. 그녀를 온실 속 화초처럼 보호하고 싶었다. 거동 하나하나가 사람들 관심을 끄는 공작가 안주인이었다. 사교계의 유명 인사라면 이름만큼 뒤따르는 소문이 끝이 없었다. 치명적인 추문이 아닌 한 감수하는 일이지만, 휴고는 조금이라도 불미스러운 일로 아내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를 바라지 않았다. "음? 짐은 그럼 크로틴 경이 왜 그랬는지 몰라야 한다는 건가?" 궁금해서 잠이 안 온다고 투덜거리는 퀘이즈 말을 휴고는 무시했다. "라미스 공과 이야기 나누고 결과는 말씀드리겠습니다." 휴고는 그날 저녁 바로 라미스 공작과 만났다. 두 사람은 시내의 귀족 전용 클럽의 밀실에서 마주 앉았다. 짤막한 인사를 나누고 휴고는 즉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가지고 온 세 권의 문서를 라미스 공작에게 건넸다. "맨 앞 권은 현재 수감 중인 내 기사가 사건 당일 상황에 대한 진술에 따라 구성한 내용입니다. 왜 아드님이 그렇게 되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을 겁니다." 휴고는 라미스 공작과는 돈으로 협상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아들의 목숨을 돈으로 바꿔칠 사람이 아니었다. 라미스 공작이 문서를 읽으면서 안색이 탁하게 흐려지는 변화를 지켜보았다. 라미스 공작은 데이빗의 죽음과 관련해 뭔가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공작부인과 연결해서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죽은 아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대체 아들이 공주의 휴게실에서 뭘 하려고 했는지, 마도구는 왜 백작부인에게 주었는지 알 길이 없어서 자다가 벌떡벌떡 일어나 가슴을 치곤 했다. 문서에는 로이의 진술 내용을 기초로 해서 그동안 데이빗과 아니타가 꾸준히 만난 행적과 주점에 심어 둔 사람에게서 얻은 정보, 데이빗이 공작부인에게 수작을 부린 전적 등 뒷받침할 여러 정황 증거를 함께 제시하고 있었다. '어리석은 놈. 어쩌자고...' 슬프게도 라미스 공작은 내 아들이 그럴 리 없다고 변호할 수 없었다. 거짓 증거를 만들어 아들을 모략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아들이라면 충분히 저지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깨닫자 라미스 공작은 아들을 잘못 키웠다는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지금껏 살아온 세월이 부질없이 느껴졌다. 그러나 라미스 공작은 노련한 정치인이었다. 절대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이 내용을 날조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아들의 실수를 인정하지요. 그렇다고 공작가 후계가 그런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 뭇사람들 입에 오를 내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실수라는 단어에 휴고의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갔다. '실수? 그대 아들이 그렇게 비명횡사한 것을 오히려 조상의 덕이라고 생각해야 할 거요. 그놈이 살아 있었으면 사지를 끊어 돼지 먹이로 던져버렸을 테니까.' 현실적인 이유로 놈을 죽이지 못해서 시간이 흘러 만약 놈이 공작위 자리를 받았다면 휴고는 라미스 가문의 파멸을 위해 가진 힘을 모두 집중했을 것이다. "다음 문서를 읽어 보십시오. 그것도 실수라고 하실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꾸준히 감시한 청년회에 관한 정보였다. 청년회에 자금을 데이빗이 담당하고 있었다는 증거와 청년회를 이끄는 수뇌들이 얼마나 위험인물인지 조사한 내용이었다. 물론 아직 청년회는 작은 조직에 불과했고, 수뇌부들도 이제 겨우 음지에서 벗어나려고 꿈틀거리는 정도였다. 그들을 엄청난 위험 분자들로 만들 수많은 증거를 그럴듯하게 꾸민 것은 타란 공작가 정보부의 작품이었다. 문서의 내용 진위를 따지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할 것이다. 당장 문서를 살피는 사람의 눈에는 전부 진짜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위험 단체를 타란 가문에서 수상하게 생각해서 포착해 조사하다가 점점 커다란 뿌리가 드러나고 더 파고들어 보니까 자금을 대고 있는 핵심인물이 데이빗이었다는 내용이었다. 이번 문서를 읽는 라미스 공작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신국청년회는 라미스 공작도 알고 있었다. 아들이 손 뗐다는 말을 믿었는데 자신의 눈을 피해 자금을 대고 있었다니. '이놈이 우리 집안을 망하게 하려고 작정을 했구나.' 아들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치밀었다. 평생 지키고 일궈온 가문은 라미스 공작에게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고 아들의 목숨보다 중요했다. 공작에게 첫째도 둘째도 가문이었다. 아들의 죽음에 냉철할 수 있었던 것도 그만큼 아들이 공작의 우선순위에서 많이 밀려 있기 때문이었다. 가문을 이을 아들은 더 있었다. 후계가 끊기는 문제는 없었다. 라미스 공작의 염려는 아들의 죽음으로 가문의 명예에 손상이 가는 일이었다. "그 내용이 폐하께 들어가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예상할 수 있을 겁니다." 라미스 공작은 무겁게 눈을 감았다. 왕은 비정한 구석이 있었다. 절대 적으로 간주한 자를 살려두지 않았다. 수많은 제 형제를 죽이며 태자의 자리를 지켰고 결국은 왕위에 올랐으며 왕위를 지키기 위해 피를 보는 일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왕이 문서 내용을 알면 지금 당장 문제 삼지 않아도 계속 마음에 의심을 품을 것이다. 당장은 라미스 공작가 힘이 필요해서 내버려 두겠지만, 언젠가 외척의 힘이 부담스러워지면 계속 품어온 의심이 불신으로 변해 공작가를 칠 것이다. 라미스 공작은 이젠 또 뭐가 나오나 두려운 마음으로 마지막 문서를 펼쳤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리며 페이지를 넘겼다. 절대 알고 싶지 않았던, 아들의 성적 취향 관련 내용이었다. 그동안 타란 공작가 정보부는 데이빗과 관련되어 건질 것이 있는지 집창촌을 계속 탐색했다. 데이빗이 여자를 학대하는 취향이 있다면 점점 과격해질 것이고 사고로 이어질 거로 보았다. 그래서 데이빗이 창기를 교살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마지막 문서는 최후의 보루입니다." 라미스 공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죽은 아들을 이런 걸로 뭘 어쩔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창기 몇을 죽인 일 같은 치부는 귀족들이 제 입에 담아 소문으로 말하기 너저분한 화제였다. 귀족들은 소문을 좋아하지만, 자신의 체면을 상하게 하는 소문은 말을 아꼈다.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캐서린 공주님의 휴게실. 공께서도 아시다시피 폐하께서는 사건 장소를 공주님의 휴게실이라고 지칭하는 말을 엄히 금하셨습니다." 왕의 조처는 효과가 있어서 사람들은 모두 이번 사건을 말할 때 궁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말했다. 사건 발생 장소가 캐서린의 휴게실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자들도 많았다. 왕은 제 누이가 이번 사건에 관련될 가능성을 차단했다. 따지고 들면 휴고가 하는 짓과 비슷했다. "오늘 협상이 결렬될 경우, 나는 그 문서를 폐하께 가져가서 라미스 백작이 캐서린 공주님에게 음심을 품고 있었다고 고할 겁니다. 마침 공주님의 휴게실이라는 최적의 장소이지요. 소문은 순식간에 퍼지니까요. 나는 폐하께 누이와 라미스 공 둘 중 하나를 택하시라 하겠습니다." "감히... 폐하를 협박하겠다는 거요?"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다는 내 각오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문서를 꾸깃 쥔 라미스 공작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라미스 공작은 한참의 침묵 끝에 몹시 피로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쩌자는 겁니까." "안사람 명예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내 기사를 살려야겠습니다." 불가! "라미스 공작이 말 끝나기가 무섭게 응답했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으십시오. 라미스 백작의 명예는 지켜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휴고는 뒷말을 속으로만 덧붙였다. 휴고는 이번 사건을 빠르게 해결해서 어서 사람들 기억에서 잊게 하고 싶었다. 라미스 공작이 죽을 때까지만 로이를 시선 닿지 않는 곳에 치워두고, 사건이 희미해질 즈음 진범은 따고 있었는데 억울하게 처형되었다는 핑계로 조용히 복권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려면 다시 왕과 새 라미스 공작과 재협상을 해야겠지만, 어렵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휴고는 사형수와 바꿔치는 자신의 계획을 간략하게 말했다. 라미스 공작도 퀘이즈 못지않은 묘한 눈으로 휴고를 보았다. 어떻게 귀족으로서 그런 생각을...? 라고 말하는 표정이었다. 라미스 공작은 가문의 명예가 가장 중요했다. 타란 공작가와 맞서 싸우기에는 나이가 많이 들어 그럴 기운이 없었다. 아들이 무고한 죽음을 맞아 억울한 상황이 아닌 이상 명예만 지켜진다면 아들 목숨은 눈감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사건에 안사람이 관련된 일은 폐하도 모르시는 일입니다. 공의 협조를 얻기 위해 유일하게 사실을 밝혔습니다. 나는 절대 이 일이 어떤 이유로든 밖으로 퍼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공께서 무덤까지 가져가셔야 할 겁니다." "... 좋습니다. 대신 이 청년회에 관한 모든 정보는 파기해 주십시오. 그리고 청년회는 내가 처리하겠습니다." "좋습니다." 협상 타결이었다. 휴고는 라미스 공작에게 건넨 세 권 문서 중에서 아내와 관련된 사건 진상을 담은 한 권만 회수했다. "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뭡니까?" "공이 가문을 지키려는 것처럼 나는 내 아내를 지키려는 겁니다." 너는 허울 좋은 가문을 지키려 하지만 나는 내 사람을 지킨다는 말을 돌려 말하는 것 같아서 라미스 공작은 물끄러미 휴고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붉은 눈동자 어디에도 비아냥대는 기색은 없었다. 라미스 공작은 휴고를 볼 때마다 신기했다. 북부라는 넓은 땅의 주인치고 타란 공작은 매우 담백했다. 잔머리를 굴리지 않고 언제나 당당하며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사람들은 고까워하지 않고 '타란 공작이니까. ' 라는 식으로 받아들였다. 사람 마음에 질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정치인으로서 대단한 재능이었다. 그래서 같은 나이의 아들을 볼 때마다 항상 부족해 보였다.' 내 덕이 부족한 것이지. 누구를 탓하겠는가. '아들의 부족함보다 잘한 점을 이끌어 아량 있게 감싸야 했다. 라미스 공작은 아버지로서, 한 가문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부족함을 사무치게 느꼈다. 타란 공작과 라미스 공작 간의 은밀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왕이 모른 척하자 상황은 물 흐르듯이 진행되었다. 파비안은 전국을 수소문해서 사형수 중에 그럴듯한 대리인을 찾아냈다. 죄를 심문하다가 매를 많이 맞아서 몸 상태가 별로였지만, 그래서 더 그럴듯해 보였다. 공작가 장남을 죽인 기사가 멀쩡한 모습으로 처형대로 가는 모습은 사람들 눈에 이상하게 보일 테니까. 왕은 짧은 교서를 내렸다. 사건 진상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어디에도 없고 그저 기사 크로틴의 죄를 인정하고 처형한다고만 했다. 워낙 높은 분이 관련된 사건이라 사람들은 자세한 내용을 몰라도 자기들끼리 추측성 말만 내놓을 뿐 그러려니 했다. 로이는 지하 감옥에서 나와서 포대 같은 두건을 뒤집어쓰고 포승줄에 묶여 걷다가 중간에 바꿔치기했다. 처형대로 향하는 자는 로이 흉내를 내는 사형수였다. 로이를 태운 창문조차 없는 마차는 곧바로 게이트를 향해 달렸다. 가능하면 빨리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수도를 떠나야 했다. 이미 손을 써 두어서 신분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게이트를 탈 수 있었다. 루시아는 계속 초조하게 응접실 안을 서성였다. 대외적으로 로이가 처형되는 시간이었다. 휴고는 입궁해서 라미스 공작과 함께 공식적으로 왕을 만나는 중이었다. 왕의 측근인 두 세력이 서로 앙금이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절차였다.' 무사히 게이트를 탔을까? '루시아는 로이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지 못하는 점이 안타까웠지만, 대외적으로 처형했다고 알려진 중죄인을 공작저로 들이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응접실 문이 열리고 제롬이 들어오자 루시아가 서성이던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뒤를 따라 파비안이 들어왔다. "크로틴 경은요?" "무사히 떠났습니다." 루시아는 크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서 어쩌면 좋을까요. 크로틴 경이 나 때문에 기사로서 명예를 잃고 북부로 쫓겨 가듯 떠나게 되다니." 휴고는 로이를 북부 국경으로 보냈다. 원래 로이가 신 나게 휘젓고 다니던 지역이었다. 로이는 안 그래도 그동안 몸이 근질근질했다며 다 죽여도 되느냐고 해맑게 물었다. 파비안은 마님의 안타까운 마음에 조금도 동감할 수 없지만, 미운 정도 정이라고 한동안 녀석을 못 보게 된다고 생각하면 시원섭섭했다. "내가 고맙고 미안해하더라는 말. 건강히 잘 지내라는 말 전해 주었나요?" "예. 전했습니다. 그런데 크로틴 경이 마님께 하나 여쭐 것이 있다고..." "뭔데요?" 그 미친놈이. 주어는 속으로만 삼키고 파비안을 말했다. "마님께서 파티에서 만나는 귀부인들을 모두 기억하느냐고. 그게 궁금하답니다." 로이는 몹시 진지한 표정으로 그걸 말하면서 꼭 답을 들어서 나중에 북부에 올 일 있으면 말해달라고 했다. 파비안은 그놈의 정신세계를 정말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루시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리가 있나요. 아는 척할 뿐이지요." "... 예. 나중에 전해 주겠습니다." 파비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했고, 루시아는 다시 웃었다.' 정말 좋은 사람이야. 내가 미안해하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날 배려하는구나.'루시아의 오해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잡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작품 후기 ============================퍼플케이브 님, 날love님, 리체르카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루시아는 피해자가 될 뻔 했지 정확히 피해자는 아닙니다. 요즘도 인정하기 어려운 정신적 피해를 소설 속 시대상에서 인정할 리 없고요. 하녀의 죽음은 하녀의 문제지 고용한 귀족의 문제는 아니지요. 객관적으로 데이빗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추행조차 하지 않았어요. 미수도 아닌 예비 음모입니다. 요즘 법으로 따져도 훈방조치입니다. 그런데 신분사회에서 공작 아들이 저지른 짓이면 절대 죽을 죄는 아닙니다. 로이가 다른 다섯명 죽인 것은 어떻게든 무마됩니다. 데이빗을 죽여서 문제가 된 거죠. 공작가 아들을 일개 기사가 죽였다. 신분사회에서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소설 읽는 입장에서는 속속들이 알지만, 소설 속 인물들이 보기에는 로이가 미친 짓 한거죠.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로이 무죄방면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을 붙인 건 로이가 억울하다는 분들이 너무 많아서요. ㅎㅎ그나저나 챕터 제목과 어울리지 않게 사건이 막 터지네요. 작은 시련 하나 끝났으니까 잠시 달달로 갑니다. 최종보스 필립 등장 전까지 즐기세요~그나저나 챕터 제목과 어울리지 않게 사건이 막 터지네요. 궁 안에서 공작가 후계가 살해된 사상 초유의 사건은 기사 크로틴의 처형으로 막을 내렸다. 사람들은 어딘지 미진한 구석이 많다고 수군거렸으나 그뿐이었다. 왕이 사건 종결을 선언하고 당사자인 타란과 라미스 두 공작가에서 말이 없었다. 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사건을 찾아 관심을 돌렸다. 이제 마무리만 남았다. 휴고는 파비안을 불러 남은 처리를 지시했다. 특히 왕에게 대가로 지급할 것들을 대충 정리해서 파비안에게 서류를 넘겼다. 파비안은 그 자리에서 대충 내용을 훑다가 안색이 퍼레지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목이 막혀서 침을 한 번 넘기고 공작에게 물었다. "전하. 정말... 이걸 전부...?" 서류에 적힌 부분은 드러난 타란 가문의 재산 중 10%에 달했다. 물론 타란 가문은 지닌 재산의 90% 이상이 드러내지 않은 상태로 은닉되어 있었다. 그걸 따지면 그렇게 큰 부분은 아닐지 모르지만, 돈 앞에서 작아지는 파비안의 간덩어리가 감당하기에는 어마어마했다. 그 미친놈 목숨값이 이렇게 비싸다니! 파비안은 눈앞이 혼미해졌다. "돈 주고 목숨을 살 수 있다면 싼 거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압니다. 알고말고요. 그래도 지나치게 통이 크십니다. 허어. 왕도 진짜 뻔뻔하기도 하지. 자기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이렇게 빼 가냐.' 파비안은 자기 돈도 아니면서 아까워 죽을 것 같았다. '마님 지참금으로 광산을 넘길 때부터 알아봤어. 주인이 이렇게 개념 없이 돈을 써 대서 균형을 맞추자고 검소한 분이 안주인으로 오신 건가.' 표정변화 없이 파비안은 속으로 계속 구시렁거렸다. "죽은 하녀에 대한 보상은 보통 어떤 식으로 마무리하지?" "가족에게 시신을 넘기고 미지급한 보수가 있으면 정산하며 장례비용 및 얼마간 보상금을 지급합니다." "보상금이 얼마나 되는데?" "관례상 받던 연간 보수의 5년 상당액입니다." 법제상 귀족이 평민을 죽일 경우 무죄는 아니지만, 거의 돈으로 배상하고 사건 종결이었다. 귀족들이 많이 몰린 수도를 제외하면 평민이 귀족과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두 신분은 아예 거주하는 곳과 활동 영역이 분리되어 있었다. 다만, 평민이 자진해서 귀족 영역에 발을 들인 경우, 즉 왕궁이나 귀족 가문에 소속되어 일할 때에는 재수 없으면 죽는다는 각오를 해야 했다. 그래도 많은 평민은 높은 보수 때문에 일자리를 얻으려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귀족 가문에서 10년만 일하면 가족을 모두 부양하고도 번듯한 집 한 채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신분제 국가가 그렇듯이 제논 역시 귀족 위주의 법으로 질서를 만들었다. 우연히 길을 지나가던 아무 죄 없는 평민이 귀족에게 죽은 경우가 아니라면, 하인이나 시종 등의 고용인이 높으신 분들 일에 휘말려 죽었을 때 온전한 시신이나 제대로 돌려받아도 다행이라고 여겨야 했다. '보상금이 얼마 안 되기는 하는군.' 휴고는 어젯밤 아내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 휴. 죽은 하녀의 남은 가족에게 충분히 보상해 주고 싶어요. 제가 지켜주지 못해서 마음이 아파요. ][ 보상해서 당신 마음이 편하다면 그렇게 할게. 하지만 당신이 고용인을 지킬 이유가 없어. 당신을 보호하라고 고용한 자들이야. ][ 맞아요. 그들은 절 보호하는 일을 하지요. 동시에 저도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크로틴 경이 저를 지켜 주었고, 저 대신 당신이 크로틴 경을 지켜 주었잖아요. ]휴고는 하인 등의 고용인들은 편리를 위한 도구라고 생각했다. 그들을 로이와 대등하게 두고 비교하는 그녀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대충 무엇인지는 파악했다. [ 그들도 생각하고 감정이 있어요. 가족이 죽으면 아프고 슬퍼요. 하녀의 남은 가족은 자신의 딸 혹은 누이를 죽게 한 자들을 원망할 거예요. 원망해봤자 그들이 뭘 할 수는 없겠지요. 그래도 나도 모르는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고 원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잖아요. ]하녀의 남은 가족이 아내를 원망의 상대로 삼아 미워하는 상황은 휴고도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 보상을 해주면 원망을 안 하나? ][ 돈이 어떻게 사람 목숨을 대신하겠어요. 대신 진심 어린 위로와 충분한 보상을 해주면 위로가 되지요. 위로를 받은 사람은 금방 상처를 추스를 수 있어요. 그러니까 휴. 그들에게 진심이 담긴 보상을 해 주세요. 그들의 죽은 딸 혹은 누이가 덧없이 죽은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일을 하다가 사고를 당했고, 훌륭한 인재를 잃어 유감스러우며 충분한 보상으로 위로를 전한다고 해 주세요. 마음 같아서는 제가 직접 남은 가족을 만나고 싶지만. ][ 그건 안 돼. ][ 네. 그러니까요. 저 대신 당신이 마음 써주세요. ]휴고는 여전히 아내의 지나친 동정심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해달라는데 어려운 일도 아니고 못 해줄 이유는 없었다. "죽은 하녀의 남은 가족들에게 하녀가 받던 연급 50년분을 보상금으로 주고 장례식에도 사람 보내서 위로의 말을 전해라. 남은 가족 중에 필요하다면 일자리 마련해 주고." "......" 파비안은 잠시 말을 잊고 주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파비안이 대답이 없자 휴고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고, 파비안은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녀 말고 로이에게 죽은 다른 자들은?" "왕실에서 보상금을 지급할 겁니다." 궁에서 일하는 자들이 궁에서 당한 사고이므로 왕실에서 보상함이 원칙이었다. 퀘이즈 입장에서는 이번 사건으로 손해가 없었다. 죽은 자들에 대한 보상이라고 해 봤자 국고에 보탠 팔콘 백작부인 재산 일부에서 지급하면 되었다. 죽은 팔콘 백작부인은 왕궁에 독극물을 반입한 죄로 왕의 시해를 모의했다는 죄를 인정했다. 죽은 시신을 처형하고 작위를 박탈했으며 가진 재산 전부를 국고 환수 조치했다. "왕실에서 지급할 보상금도 그리 크지는 않겠군."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그쪽도 비슷하게 처리해." 아내를 지키려던 로이에게 죽은 자들이니까 휴고는 그냥 깔끔하게 전부 다 마무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공작의 집무실을 나오는 파비안의 표정이 묘했다. 파비안은 닫힌 문 앞에 잠시 서 있다가 몸을 돌려 안쪽에 앉아 있을 공작을 생각하며 문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변할 수가 있구나.' 파비안은 사람이 절대 변할 수 없다고 보았다. 사람은 각자 타고난 기질이 있고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시간은 어릴 때뿐이며, 바꾼다 해도 근본을 바꿀 수 없고 나이가 들어 형성된 사람의 모습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파비안의 뚜렷한 주관을 흔드는 일이 눈앞에서 일어났다. 주군으로부터 죽은 하녀의 남은 가족을 챙기라는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파비안이 아는 공작은 악인이라기보다는 주변에 관심이 없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고 최소한의 필요 때문에 곁에 두는 사람 외에는 일이 어찌 돌아가든 다 맡겨두고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철저하게 일 자체만 살피고 사람 문제는 관심 없었다. 파비안은 자신도 공작의 그저 편리한 도구일 거로 생각했다. 가끔은 씁쓸하지만, 그래도 능력 인정받아서 일하는 것이 어디냐고 자신을 위로했다. 그래서 이번 로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을 보고 파비안은 솔직히 감동했다. 주인을 위해 목숨을 건 자를 주인이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구해 주었다. 귀족들이 매달리는 명예에 코웃음 치는 파비안은 살아 있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현실주의자였다. 그래서 로이를 살리는데 이보다 완벽한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주군을 위해 죽게 되어도 주군이 나 몰라라 버리지는 않겠구나, 믿음이 생겼다. 재수 없어 죽어도 남은 가족들을 걱정할 필요 없겠구나,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도 그놈 목숨 값이 그 정도는 절대 아니야.' 빠져나갈 생돈이 아깝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로이는 오랜만에 돌아온 북부 국경 지역은 태어나 자라던 마을 근처였다. 어릴 때 마을을 침략한 야만부족으로부터 부모를 잃고 복수를 다짐했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힘과 덩치로 마을 장사라고 불리면서 커서 큰 일할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그래서 자만했다. 복수하겠다며 야만족에게 덤벼들었다가 붙잡혀 끌려갔다. 어린 녀석이 힘깨나 쓸 것 같으니까 키워서 노예로 부리려고 야만족은 로이를 죽이지 않았다. 독종처럼 구는 로이의 독기를 빼놓는다고 매질하고 묶어 두기를 한 달. 이러다 죽겠구나 생각할 즈음에 웬 녀석이 몰래 접근해서 풀어주어서 구명을 받았다. 그 길로 도망친 로이는 자신의 부족함을 실감했다. 혼자 숨어 살면서 사냥을 통해 생명의 급소와 약점을 익혔다. 가끔 부족에서 떨어져서 멀리까지 나온 야만족 한둘을 죽이며 꾸준히 실력을 쌓았다. 그리고 드디어 부모의 원수를 갚았다. 혼자 몸이라 정면으로 부족 마을을 쳐들어갈 수 없었지만, 소수를 숲으로 유인해 수일에 걸쳐서 다 잡아 죽였다. 원수를 갚고 나니까 시원하면서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야인처럼 살며 가끔 덤비는 야만족 잡아 죽이고 사냥해서 식사 해결하고 그렇게 하루하루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주군을 만났다. 어릴 때 잡힌 자신을 도와준 은인이라는 걸 보자마자 알았다. 같이 갈래? 묻기에 따라갔다. 같이 있다 보면 은혜 갚을 기회가 오겠지 생각했다. "쳇. 겨우 갚았나 했더니 또 빚이라니." 로이는 투덜거리면서 나무 아래 늘어져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공식적으로는 죽은 자가 되어서 그런지 아무도 그를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로이는 국경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점점 멀리 와서 야만족 지역의 숲으로 들어왔다. 며칠째 사람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혼자 있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숲의 밤은 빨리 왔다. 잡아둔 토끼를 구워서 저녁을 때우고 로이는 모닥불 곁에서 모포를 덮고 잠자리에 들었다. 밤이 깊어지고 모닥불이 나무를 다 태워 불씨가 작아질 즈음, 발걸음 소리를 죽여 어둠속에 누워 있는 로이에게 접근하는 자가 있었다. 괴인은 품에서 비수를 꺼냈다. 살금살금 잠든 로이 곁까지 다가가 그대로 목이 있는 방향에 내리꽂았다. 아니, 내리꽂았다고 생각했으나 괴인의 시야가 갑자기 한 바퀴 돌고 등에 쿵 하는 충격을 받으며 바닥에 누웠다. 칼을 쥔 손목이 강한 힘에 잡히고 또 다른 힘에 목이 잡혀 있었다. 그리고 목을 압박하는 힘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괴인, 쿠야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날이 환하게 밝아 있었다. 손이 뒤로 돌려 몸이 나무에 꽁꽁 묶여서 움직일 수 없었다. 어젯밤 기억을 더듬으며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버석 소리가 나면서 덤불 뒤에서 로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등에 새끼 사슴 한 마리를 걸치고 있었다. 로이는 독기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는 나무에 묶인 여자를 흘끔 보고 잡아온 사냥감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무심한 손길로 멱을 따서 피를 빼고 작은 단검 하나를 이용해 가죽을 벗기고 관절 부위로 토막 내서 해체하는 손길이 익숙했다. 그저 짐승의 고기를 얻는 과정인데 쿠야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장면이라도 보는 것처럼 부들부들 떨면서 원독이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로이는 불을 피워 사슴을 구웠다. 쿠야는 놈이 무식하게도 많이 처먹는다고 생각했다. 꽤 시간이 걸린 식사가 끝난 후 로이는 쿠야에게 툭 내뱉었다. "너 뭐냐?" - 붉은 악마!독살스러운 눈빛으로 소리치는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로이가 말했다. - 그 말 오랜만에 듣네. 로이가 익숙한 부족 말을 하자 쿠야는 잠시 움찔하다가 다시 소리쳤다. - 치욕 주지 말고 죽여라!- 내가 뭘 어쨌다고 이래. 자는 사람을 죽이려고 달려든 건 너거든. - 너는 내 가족의 원수다!이를 바득바득 가는 여자가 살쾡이 같다고 로이는 생각했다. - 나 아무 짓도 안 했는데. 혹시 지금 내가 먹은 사슴이 네 가족이었냐? 미안. 여자는 부들부들 떨면서 죽여 버리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버둥거리며 소리 지르는 여자를 로이는 구경했다. 체구 작은 여자가 참 기운도 좋았다. 나이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성년이 막 지났을 정도? 수도에서 우아한 척 하는 귀부인들 구경을 실컷 하다가 독기 충만한 여자를 보니까 꽤 재미있었다. - 붉은 악마. 넌 내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물론이고 우리 마을 사람들 수십을 죽였다. 8년 전 일을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마구 소리 지르다가 기운이 빠졌는지 헉헉대던 여자가 하는 말을 듣고 로이는 기억을 더듬었다. 8년 전 마을 사람 수십을 죽일 정도로 대량 살인을 한 일은 한 번밖에 없었다. - 네 부모가 내 부모를 죽였어. 나도 원수 갚은 거야. 여자는 움찔했다. 그리고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참 고개 숙이고 얌전해진 여자를 보다가 지루해진 로이는 벌렁 누웠다가 낮잠이 들었다. 로이는 소변이 마려워서 낮잠에서 깨어나 주섬주섬 일어났다. 바지를 내리려다가 날카로운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로이가 소변을 누려고 선 장소가 여자 옆으로 두어 걸음 떨어진 곳이었다. 여자는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욕을 하고 있었다. 로이를 머리를 긁적이고 안 보이는 수풀 안으로 들어갔다. 로이가 일을 해결하고 돌아오자 여자가 말했다. - 너의 정당한 복수를 인정한다. - 헤에. 너 되게 깔끔하다. 그럼 이제 날 죽이려고 안 할 건가?- 그거와 그건 별개다. 난 내 가족의 복수를 해야 한다. - 그러니까 날 꼭 죽여야겠다고?- 그렇다. 그러니까 나도 죽여라. 로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단검을 꺼내 여자에게 다가갔다. 쿠야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예상했던 고통은 없고 아프게 묶인 손의 줄이 잘려나갔다. 갑자기 자유의 몸이 되어 쿠야는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절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날렵하게 몸을 날려 로이와 거리를 유지했다. - 이런다고 널 죽이지 않을 줄 아느냐. - 해. 네가 내 복수가 정당하다고 인정했으니까 나도 네가 날 죽이려는 걸 인정한다. 대신 순순히 안 죽어. 자신 있으면 해 봐. 쿠야는 잠시 로이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어릴 때부터 머릿속으로 그리고 또 그려왔던 붉은 악마의 무시무시한 모습과 일치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 형제의 원수. 쿠야는 마음을 다잡고 몸을 돌려 숲으로 사라졌다. 로이는 픽 웃었다. "앙칼진 계집이네." 왜 살려 보냈는지 모르겠다. 후환을 남긴 적이 없는데. '냄새가 나쁘지 않았어.' 한동안 심심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 작품 후기 ============================퍼플케이브 님, 시아른 님, 날love 님, 아엘로 님 쿠폰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마무리 + 로이의 약간 외전격 이야기였습니다. 챕터 이름에 변화를 주지는 않겠지만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은 내일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왕의 탄신 연회 날, 왕비가 모처럼 만에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동생의 죽음 이후 태아의 건강을 핑계 삼아 오랫동안 두문불출했던 왕비를 두고 사람들 사이에는 혹시 충격에 아이를 잃고 상심해 누워 있는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소문이 무색하게 왕비는 산달이 다가온 부른 배를 안고 평온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귀부인들은 앞다투어 베스에게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루시아도 베스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 역시 몇 개월 만의 만남이었다. 루시아는 내심 왕비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로이가 죽은 척 위장하고 빠져나간 사실을 왕비는 모를 것이라고 남편은 말했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더 낫긴 하겠지만,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왕비는 난데없이 형제를 잃어 괴로워했을 것이다. 아이까지 가진 상태에서 겪었을 왕비의 상심한 마음을 위로할 수 없어서 더 미안했다. "강녕하셨습니까. 왕비 마마." "공작부인도 잘 지냈나요. 오랜만이군요." 왕비가 조금 날카롭게 대하지 않을까 우려한 것과 달리 베스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미안한 기색을 조심스럽게 드러내는 공작부인을 보며 베스는 미소를 지었다. '이 사람이 무슨 잘못이 있겠나.' 동생을 잃고 베스는 한동안 공작부인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다. 공작부인이 어떤 잘못이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저 관련된 사람 모두 원망스럽던 시간이었다. 실의에 빠져 누워있는 베스를 찾아온 부친은 10년은 확 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들을 잃은 고통에 아버지도 힘드시구나, 했던 짐작과 달리 부친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내놓았다. [ 그만 잊으십시오. 왕비 마마. 그 녀석은. 저지른 짓이 있어 그렇게 된 겁니다. ][ 무슨... 아버지.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 자세한 내용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단지 녀석이 죄 없이 죽지는 않았다는 것만 알아 두세요. 귀한 분을 옥체에 품고 계십니다. 너무 상심하지 말고 마음 추스르세요. [ 아버지. ]부친은 긴 한숨 끝에 말했다. [ 못난 아비가 아비 노릇을 잘하지 못했나 봅니다. ]돌아서는 아버지의 축 늘어진 어깨를 보며 베스는 새삼스럽게 부친이 많이 늙으셨다고 생각했다. 항상 태산 같았던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가신 후 베스는 죽은 동생이 조금씩 원망스러웠다. '너는 어찌 죽어서까지 남은 사람 가슴에 못을 박는 것이냐.' 베스는 뱃속 아이를 생각해서 조금씩 동생의 죽음을 털어버리려고 애썼다. 평소 그다지 살가운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캐서린이 매일 같이 찾아와 주어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태교에만 힘쓰며 외부 활동을 자제하다가 첫 태동을 느꼈을 때. 베스는 마음 어딘가 있던 찌꺼기 같은 부정적인 잔여물을 모두 털어버렸다. 태어날 아이에게 예쁘고 좋은 생각만 전해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었다. "내가 조금 살이 붙었지요? 아이를 품고 있으면 이렇게 몸이 변하더군요." "오히려 더 편안해 보이십니다." "그래요. 요즘은 마음이 편해요. 아이도 안에서 잘 놀고." "예정일이 언제이옵니까?" "한 달 정도 남았지요. 그러고 보니 공작부인도 이제 소식이 올 때가 되었군요. 혼인한 지 2년쯤 되었지요?" "... 네." 루시아는 흐릿하게 웃으면서 베스의 부른 배에 시선을 주었다. '몸 안에서 다른 생명이 자라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꿈속에서 겪지 못했고 현실에서도 아마 겪지 못할 기분이 궁금했다. 아이가 자라면 뱃속에서 움직이며 발길질을 한다고 들었다. 그건 또 어떤 느낌일까. 출산의 고통은 죽을 만큼 힘들다고 들었다. 아이를 낳다가 잘못되는 여자들도 적지 않았다. 여자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그래도 좋아. 어떤 고통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루시아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왕과 귀족 몇과 함께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남편을 돌아보았다. 그는 단 한 번도 아이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그는 아직도 자식을 원하지 않을까?' 완연히 날씨가 풀리고 본격적인 봄이 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루시아의 마음속에 스며들어 흔들고 있었다. 아이가 갖고 싶었다. 그의 아이를 소중히 품다가 낳아서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에게 말하지 않고 불임을 치료하는 약을 먹을까? 몇 번을 생각했다. 두 사람은 아직 젊고 남은 시간이 많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루시아는 하루하루 날이 지나는 것이 아까웠다. "폐하께서 궁에 남아 있는 공주님들 혼사를 추진하신다지요." "저도 들었어요. 도대체 아직 궁에 남아 계신 공주님이 몇 분이시랍니까?" 아이 생각에 빠져 있던 루시아의 관심이 확 쏠리는 화제를 귀부인들이 떠들었다. 휴고는 옆에서 뭐라 떠드는 소리를 대충 흘러 들으면서 눈으로 아내를 찾았다. 남자끼리 여자끼리 모여 대화하는 관습 비슷한 행태가 휴고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계속 아내를 옆에 끼고 있고 싶은데 남들은 아무도 그러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내는 튀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가끔 그녀를 살폈다. 그건 습관과도 같았다. 오래 눈에서 보이지 않으면 괜히 불안했다. 그녀가 귀부인들과 이야기하다가 어딘가 잠깐 시선을 돌리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러는 모습을 몇 번 발견하자 대체 무얼 보는가 싶어서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아내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왕비가 있었다. '아직도 몇 개월 전 일을 마음에 두고 있나?' 데이빗이 죽은 사건을 그녀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지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좀 더 살펴보니까 그녀가 보는 곳은 왕비가 아니라 좀 더 아래, 눈에 띄게 부른 왕비의 배였다. 휴고는 갑자기 쿵 소리가 귀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목욕을 마치고 아내 침실로 향하면서 휴고는 파티 내내 마음이 쓰였던 일을 계속 생각했다. '아이가 갖고 싶은가...' 그녀가 원하는 것은 모두 천하를 뒤져서라도 가져다줄 수 있지만, 단 하나만은 줄 수 없었다. 아이. 그녀는 그의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그의 씨를 아무리 뿌려도 그녀의 태 안에서 절대 싹을 틔우지 못했다. 저주받은 그의 핏줄은 저주받은 방법을 취하지 않고서는 절대 자라날 수 없었다. 한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음껏 계집질해도 갑자기 기억조차 안 나는 여자가 부른 배 안고 찾아오는 일은 없을 테니까. 몸 몇 번 섞은 여자가 끔찍한 핏줄의 흔적을 낳아 키운다고 생각하면 아주 기분 더럽고 끔찍했다. 아마 특정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 제약이 없었으면 그는 제 자식을 가졌다는 여자가 나타날 때마다 모조리 다 죽였을 것이다. 형제가 죽고 공작이 되어 가문 비밀의 방을 들어갔다 나왔을 때 그는 제 몸에 흐르는 피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했다. 동맥을 끊어서 모조리 피를 다 쏟아내 버리고 싶다고 하루에도 수십 번을 생각했다. 휴고는 침실 문 앞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지금은?' 그는 기이한 위화감을 느꼈다. 두 손을 들어서 내려 보다가 주먹을 쥐었다. 살아 있다는 느낌. 숨을 쉰다는 감각. 평소에는 의식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가끔 세상에 존재하는 자신이 지긋지긋해서 견딜 수 없을 때가 있었다. 그러면 말이 달리다 지쳐 속도를 내지 못할 때까지 밤새 말을 타고 달리거나 며칠 밤새서 미친 듯이 일에 매달렸다. [ 변하셨군요. ]불쾌한 늙은이의 표정과 말이 떠오르자 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변했나?' 의식하지 않아서 자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뭔가 달라지기는 했다. 휴고는 시선을 들어 익숙한 아내의 응접실을 휙 둘러보았다. 따뜻했다. 정말 내부가 후끈해서가 아니라 느낌이었다. 휴고는 아내의 침실로 들어가기 위해 이 응접실을 지날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아내의 부드러운 몸을 품에 안고 촉촉한 입술에 키스할 생각을 하면서 들뜨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직접적인 체온으로 느끼는 뜨겁고 차가움만 구별하던 그가 사물에 느낌을 부여하는 유치한 짓을 하고 있었다. 휴고는 다시 제 손을 내려 보았다. 살아 있다는 기분이 예전처럼 끔찍하지 않았다. 살아 있으니까 그녀를 만지고 느낄 수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항상 고독했던 그의 인생에 이제는 그녀가 함께 있었다. 그는 언제부턴가 미래를 생각했고, 그가 생각하는 미래에는 언제나 그녀가 있었다. 그는 언제일지 모를 몇 년 뒤에 그녀가 아이를 안고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몽실몽실한 기분이 둥실 위로 떠오르다가 곧 무겁게 푹 가라앉았다. '나는 줄 수 없어.'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해줘야 할까. 그녀에게 자신의 더러운 출생을, 영원히 봉인하고 싶은 가문의 비밀을 털어놓아야 하는 걸까. 그것만큼은 싫었다. 악취가 들끓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절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어둠이었다. 그녀가 모든 진실을 듣고 나서 자신을 조금이라도 다르게 볼까 봐 겁났다. 그녀가 아이를 갖고 싶다고 하면 어떡하나. 그는 평소와 다르게 우울한 기분으로 문을 열었다. 휴고가 들어가는 것과 거의 동시에 루시아도 목욕을 마치고 침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루시아는 젖은 머리를 감싼 수건을 쥐고 저만치 서 있는 그를 경계했다. "머리 말릴 거예요. 오지 마요." 가끔 젖은 머리로 자면 다음 날 아침 부스스한 머리를 정돈하느라 고역이었다. 물을 뿌려 애써 손질해주는 하녀들 보기도 민망했다. 외출해야 하면 도무지 수습할 수 없어서 아침부터 다시 머리를 감을 때도 있었다. 보송보송하게 말릴 필요까지도 없었다. 적당히 마른 후 머리카락을 단정히 가라앉히는 유액을 발라주면 충분했다. 그런데 그는 그 시간조차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휴고는 털을 세우는 작은 동물처럼 경계하는 그녀를 가만히 보다가 한 걸음 내디뎠다. 슬금슬금 화장대로 가던 그녀가 움찔 놀라며 "오지 말라고요." 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걸음 물러서면서 오지 마, 오지 마, 표정으로 말하는 그녀를 보며 휴고는 삐딱하게 웃었다. '재밌는데.' 가라앉았던 기분이 위로 떠올랐다. 흥분도 되고. 루시아는 그가 팔짱을 끼고 자신을 바라보다가 씨익 웃으며 성큼 다가오자 오싹한 두려움을 느꼈다. 갑자기 쫓기는 가녀린 사냥감이 된 심정으로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갔다. 침대를 타 넘어서 건너편으로 도망가려던 루시아는 침대에 아슬아슬 닿기 직전 강한 힘에 잡혀 끌려갔다. 짧은 순간에 맹수에게 뒷덜미를 물린 공포를 느꼈다. "꺄악!" 팔이 허리를 단단히 감아서 붙들고 그의 가슴이 등에 밀착했다. 그의 입술이 귓불을 깨물며 쿡쿡 웃었다. "비명은 왜 질러? 당신 이런 거 좋아해?" "아니에요!" 휴고는 빨갛게 물든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하면서 목욕 가운 안으로 파고든 손으로 가슴을 쥐었다. 다른 한 손이 다리 사이로 들어가 젖어들기 시작하는 꽃샘을 문질렀다. 흠칫 떠는 몸을 더 꽉 안으면서 그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부인. 오늘 좀 야만스럽게 놀아볼까?" "휴!" 그에게 달랑 잡혀 들려서 루시아의 몸은 침대로 던져졌다. 루시아가 몸을 일으키기 전에 곧바로 그가 그녀의 몸을 타고 올랐다. 그의 두 팔 아래 가두어져서 루시아는 자신을 내려 보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얼굴이 불이 난 것처럼 화끈거렸다. 휴고는 목욕 가운의 앞섶을 잡아 옆으로 젖히고 드러나는 젖가슴을 눈에 담았다. 불그스름하게 물이 든 나신은 수밀도처럼 탐스러웠다. "당신 온몸이 빨개. 뭐 때문에 흥분한 거야?" "... 자꾸 놀릴 거예요?" 울 것처럼 눈시울이 붉은 그녀를 보며 휴고는 허리가 뻐근했다. 당장 넣고 싶은 욕구가 반, 그녀의 다디단 몸을 맛보고 싶은 욕구가 반. 이번에는 후자가 이겼다. 휴고는 그녀의 오므리고 붙인 무릎 사이에 다리를 비집고 넣어 벌렸다. 당혹해 흔들리는 호박색 눈동자는 또 다른 자극이었다. 두 손으로 허벅지를 잡아 벌리고 촉촉하게 젖은 다리 사이 안쪽으로 고개를 묻었다. 입을 맞추고 갈라진 틈으로 혀를 넣었다. "아!" 은밀한 곳에 닿는 섬세한 자극이 짜릿했다. 축축한 혀가 핥아 올리고 입술은 키스하는 것처럼 비비며 살갗을 살짝 물면서 빨아들였다. "아읏!" 루시아는 신음을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몸을 뒤틀어도 허리 아래가 그에게 잡혀서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몸에서 흐르는 물을 할짝거리는 젖은 소리가 수치스러웠다. 손가락만큼 단단하지는 않으나 그보다 질척이는 살덩이가 끝을 세워서 질 안쪽으로 얕게 들어왔다가 빠져나가고, 조금 더 깊게 들어왔다. 그녀의 몸이 파드득 크게 떨렸다. 강한 흡입력으로 빨아들이는 순간에 루시아는 교성을 지르며 허리를 들썩였다. 휴고는 경련해서 떨리는 입구를 혀로 길게 핥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절정으로 늘어져 있는 그녀의 흐릿한 눈빛이 색스러웠다. 휴고는 새빨갛게 물들어 고개를 돌려 손등으로 입술을 막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쥐어 시선을 맞추려 했지만, 그녀가 자꾸 눈을 굴렸다. "비비안. 왜 자꾸 눈을 피해." "... 창피해요." "뭐가." 휴고가 몇 번을 묻자 루시아는 작은 소리로 마지못해 말했다. "... 야해서..." 그녀 말의 의미를 가만히 생각한 휴고는 씨익 웃었다. "입으로 해 주면 기분 좋아서 창피해?" 그녀가 빨간 얼굴로 원망스럽게 보는 표정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그는 그녀의 턱을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벌어진 입술을 스치며 문질렀다. 루시아는 입안으로 들어와 안쪽을 누르는 손가락을 혀로 감쌌다. 할짝거리며 핥을 때마다 붉은 혀가 살짝살짝 드러났다. 살짝 눈을 위로 뜨고 보는 그의 얼굴에 이미 웃음은 없었다. 허기 가득한 짐승이 먹이를 앞에 둔 것 같은 욕망이 그의 눈 가득하게 묻어났다. 그가 손을 떼고 상체를 일으켰다. 자꾸 오므리려는 그녀의 두 다리를 벌리고 자리를 잡았다. 두 손으로 그녀의 종아리를 쥐고 아래로 잡아당기자 그녀의 몸이 그의 힘에 쭉 따라 내려왔다. 이후에 벌어질 일을 예상하며 루시아가 눈을 질끈 감는 순간 뜨거운 기둥이 순식간에 안으로 치고 들어왔다. "아!" 아릿함이 아주 짧은 순간에 사라지고 등줄기를 스쳐 지나가는 절정감. 그가 안에 들어온 것만으로 루시아는 찌릿한 쾌감에 몸을 떨었다. 그가 그녀의 골반을 잡아 하체가 서로 완전히 맞닿도록 밀착했다. 그녀의 허벅지가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가면서 자연스럽게 엉덩이가 공중에 뜨고 그의 분신이 뿌리 끝까지 들어와 안을 채웠다. 숨이 막히는 압박감에 루시아가 헉헉 숨을 몰아쉬는데 그도 거친 호흡으로 잠시 가만히 있었다. "당신 속살이... 안에서 잡아당겨." 붉은 얼굴이 더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그녀를 보면서 휴고는 살짝 허리를 움직였다. "흣..." "하아... 죽겠네. 진짜." 그의 성기에 달라붙은 쫀득한 속살이 움직이는 대로 딸려 움직이면서 꽉 죄어들었다. 휴고는 거의 매일 아내를 안지만, 항상 예측할 수 없게 움직이며 무한한 쾌락을 안겨주는 그녀의 안쪽이 신비롭다 못해 경이로웠다. 안으면 안을수록 중독이 되어서 그는 요즘도 열심히 지키려고 노력하는 닷새에 하루에 해당하는 밤에는 불끈거리는 욕망과 싸우며 꼬박 날을 지새워야 했다. 사랑하는 여자와 사랑을 나눈다는 만족감은 육체적 쾌감 이상의 정신적 쾌감을 주었다. 두 쾌감이 만나 이루는 충만감으로 느끼는 극한의 오르가슴은 도무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한 번 맛보면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환상적인 경험이며 저열한 충동적 쾌락이 아닌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는 포만감이었다. 그는 그녀의 엉덩이를 잡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이 흘리는 물이 만든 매끄러운 길을 따라 그는 깊이 탐색했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도돌도돌한 안쪽의 주름이 돌기가 되어서 그의 남근을 스치고 지나가며 자극했다. 그녀의 벌어진 붉은 입술에서 교성이 흘러나왔다. 뻐근하고 짜릿한 자극이 그의 척추를 타고 올라갔다. 현재 그의 몸에서 가장 예민한 신경이 모두 집중되어 있을 성기가 느끼는 뜨겁고 미끄럽고 눌리고 잡아 비틀리는 감각이 가져다주는 쾌감은 파정 순간의 쾌락 못지않았다. 그는 가능한 한 천천히 움직이면서 지금의 감각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서두르지 않고 자신을 탐하는 그의 움직임에 따라 천천히 흔들리는 시야로 루시아는 그를 올려 보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취한 것처럼 탁하게 흐려져서 살짝 미간에 주름이 잡힌 표정을 보고 있으니 루시아의 몸이 더 후끈하게 뜨거워졌다. 문득 캐서린에게 배운 지식을 써먹어 볼까 생각이 들었다. '뭐라고 했더라. 들어올 때 힘을 풀고 나갈 때 힘을 주라고...' 배운 지식에 따라 착실하게 몸으로 실현하자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그가 미간을 좁히며 엉덩이를 움켜잡은 손에 강하게 힘을 주었다. 그의 표정을 살피면서 힘을 풀었다 주었다 몇 번 반복하자 그가 신음을 삼키며 으르렁거렸다. "하지 마." 루시아는 숨을 할딱이면서 시치미를 뗐다. "뭘요...?"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그의 반응이 생각과 달라서 루시아는 당황했다. "... 남자가 좋아한다고 그랬는데." 그가 움직임을 멈추고 인상을 썼다. "누가?" "......" "뻔하군. 티파티에서 여자들이 모여서 그런 소리나 하고." 혀를 차는 그를 보면서 루시아는 죄 없는 귀부인들에게 아주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당신은 별로예요? 이러는 거?" 하복부에 다시 힘을 꽉 주었다. 그가 큭, 숨을 삼키며 그녀를 바라보는 붉은 눈이 확 타올랐다. "감당도 못 할 거면서 자극하지 마." 휴고는 그녀의 엉덩이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두 발목을 잡아 어깨로 올리면서 강하게 치고 들어갔다. 단단한 끝이 깊은 안쪽을 찌르는 자극에 루시아는 눈이 시큰했다. "흑!" "조금만 강하게 해도 울면서. 내가 얼마나 참는지 알기나 해?" 그가 속도를 내어 힘차게 박음질을 시작했다. 묵직하게 무게를 실은 살덩이가 안을 채우며 치닫고 올라왔다. "아! 아응!" 그의 흥분이 느껴졌다. 그가 가차 없이 밀고 들어와서 안을 쑤시고 찌르고 긁어 내렸다. 루시아는 예민한 안쪽을 쉴 새 없이 자극 당하자 몸서리를 쳤다. 깊은 안쪽이 닿으면서 미약한 통증을 느꼈다가 안이 거칠게 마찰당하는 쾌감에 전율했다. 내벽을 할퀴면서 빠져나간 그가 곧바로 진입해 안을 꿰뚫었다. 철썩이는 살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눈에 열기가 모이고 방울지는 눈물이 툭 떨어졌다. "아! 휴! 으흣..." 강렬한 절정에 다다라 루시아는 비명을 질렀다. 시야가 환해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며 끝없이 떨어지는 낙하감과 동시에 온몸이 떨리는 아득한 쾌감이었다. 그를 품은 안쪽이 쩌릿하게 죄어 들면서 진동하듯 경련을 시작했다. 그가 몇 번을 더 밀고 들어오다가 그녀의 자궁 안쪽에 정을 쏟아냈다. 루시아는 그가 꽉 끌어안는 압박감과 귓가에 들리는 그의 신음 소리를 들으면서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소름이 돋았다. 두 팔과 다리를 이용해 그를 휘감아 안았다. 두 사람의 가쁜 호흡 소리만 뒤섞이는 길고도 짧은 절정의 시간이 지나갔다. 흐느낌처럼 숨을 헐떡이면서 루시아는 캐서린에게 배운 지식은 그냥 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작품 후기 ============================ 오늘 파티장에서 귀부인들과 나눈 대화 때문에 루시아는 몇 개월 잊고 지냈던 꿈속 기억을 다시 되짚었다. 루시아가 또 다른 미래라고 이름 붙인 꿈속 기억은 이미 현실에서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루시아가 뒤섞인 어린 시절의 기억을 정리하기 위해서 어려서 자랐던 마을에 사람을 보내서 몇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어릴 때 함께 뛰어놀았던 롯사는 아가씨로 자라서 동네 청년과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꿈속에서 타고 놀았던 마을 어귀의 나무가 그루터기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십수 년 전, 루시아가 5살 되던 무렵에 벼락을 맞아 새카맣게 타서 흉하게 되어 베어버렸다는 것이다. 없는 나무를 올라타고 놀 수 없어서 어릴 때 사고가 없었다. 루시아는 나무에 벼락이 내리친 순간부터 미래가 갈라졌다고 생각했다. 달라진 미래가 있으나 여전히 똑같이 흘러가는 미래도 있었다. 왕이 공주들의 혼사를 추진하는 일이 그러했다. 루시아는 사교계 소문에 정통한 귀부인에게 슬쩍 메튼 백작부인의 소식을 물었다. [ 몇 개월 전, 그러니까 올해 초에 이혼했다지요. 친정 가문이 있는 서부로 내려간다고 들었습니다. ] 루시아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루시아가 메튼 백작과 결혼한 이유는 특별히 서로 조건이 맞아서가 아니라 루시아가 궁에 남은 공주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루시아가 없으니 이제 루시아보다 어리지만, 가장 나이가 많은 공주가 메튼백작과 결혼할 것이다. 자신의 끔찍한 미래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긴 격이었다. 허리를 감고 있던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몸을 살짝 옆으로 돌리면서 루시아와 잠시 눈을 마주치고 눈가에 키스했다. "왜 안 자." 휴고는 그녀가 잠들지 못하고 간간이 작은 한숨을 내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이 문제를 고민하는 건가 싶어서 그 역시 잠들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그녀가 아이 문제를 꺼내면 도망쳐서 될 일이 아니었다. 이야기하기는 해야 하는데 어느 선까지 말할 수 있을지 고민이 깊어졌다. "당신은요?" "옆에서 계속 한숨을 쉬잖아." "제가 그랬어요? 이제 조용히 할게요. 주무세요." "무슨 일이야. 걱정거리가 있어?" 혹시 아이 문제냐고. 입에서 말이 맴돌았다. "... 폐하께서 선왕의 공주들을 출가시킬 계획이라던데, 혹시 아세요?" 잔뜩 긴장했던 휴고는 그녀가 생각지 못했던 말을 꺼내자 맥이 빠졌다. "음. 들었어." 그녀가 할 말을 고르는 것처럼 주저했다. 휴고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오늘 메튼 백작부인이 이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메튼?" "잘 모르실 거예요. 그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가문은 아니에요." "친하게 지냈나?" "... 그냥 조금 알고 지냈어요." 루시아는 이런저런 사교계 소문을 그에게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휴고는 굳이 그녀가 누군가의 사적인 소식을 꺼낸 것을 봐서 그 백작부인과 꽤 친하게 지냈나 보다 생각했다. 루시아는 그의 어깨에 기대 누운 채 고개를 들었다. 손을 뻗어서 그의 얼굴을 감쌌다. 손바닥 전체로 느껴지는 그의 피부와 체온을 느끼며 루시아는 이것이 꿈이 아니라고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아주 가끔. 루시아는 이 모든 것이 꿈일까 봐 겁이 날 때가 있었다. 그의 그늘에서 이렇게 평온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것이 현실 같지 않았다. "... 왜?" 휴고는 제 얼굴을 만지는 그녀의 손을 잡아서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를 쓸어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의 다정한 손길이 좋았다. 루시아는 그의 커다란 손을 잡고 얼굴을 비볐다. 그녀의 어리광이 어딘지 모르게 애달파서 휴고는 덜컥 불안을 느꼈다. "왜 그러는 거야." "메튼 백작이 선왕의 공주와 결혼하지 못하게 손을 써 주세요." 루시아는 이대로 모르는 척 넘어갈 수 없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이복자매 중 누군가가 루시아가 꿈속에서 봤던 미래를 고스란히 대신 겪는다면 평생 죄책감을 벗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제가 지금 얼마나 이상한 소리 하는지 알아요. 이름도 모르는 이복자매이지만, 뻔히 보이는 불행을 못 본 척할 수가 없어요. 그런 자와 결혼하도록 둘 수가 없어요. 그자는 부인한테... 손찌검해요. 그보다 더 심한 짓도 해요." "비비안." 그녀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휴고는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보듬어 안았다.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으면 저는... 아마 제가 그런 자와 결혼하게 되었을 거예요." "왜 그런 생각을 해." 루시아는 이야기하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분노가 치밀고 꿈속 기억이 떠오르면서 격한 감정을 가눌 수 없었다. 그가 꼭 안아주며 등을 쓸어내리자 루시아의 끓던 감정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백작부인과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나눴나 보군." "......." "알았어. 내가 조치할 테니까 당신은 잊어버려." "... 정말요? 할 수 있는... 거예요?" 휴고는 그녀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고작 그 정도 일을 가능하냐고 묻는 건가. 작정하면 그는 왕도 갈아치울 수 있었다. "물론이지. 당신 남편 능력 쓸 만해." 품에서 그녀가 작게 웃었다. 그제야 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불안이 그에게도 전이되어 긴장하고 있었다. 그는 유쾌하지 않은 사적인 부부생활을 아내에게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괜한 걱정을 지운 메튼 백작부인이 짜증 나고 남편이라는 놈에게는 더 짜증이 났다. 휴고는 얼마 후 메튼 백작에 대한 상세한 조사 보고서를 손에 쥐었다. 그는 읽을수록 불쾌한 메튼 백작에 대한 서류를 넘기며 혀를 찼다. 첫 결혼은 5년 만에 이혼, 두 번째 결혼은 여자 쪽 집안에서 손을 써서 결혼 달포 만에 결혼 무효. 그리고 세 번째 결혼은 몇 개월 전에 이혼으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네 번째 결혼하기 위해 왕실에 청혼서를 넣은 것이 한 달 전이었다. 귀족의 이혼이 드문 일은 아니지만, 이놈은 과했다. 공식적인 자식은 아들 셋. 첫 부인에게서 낳은 큰아들과, 첫 부인 혼적에 입적한 혼외자 둘째 아들. 첫 부인은 입적을 조건으로 이혼한 것 같았다. 얼마 전 이혼한 부인이 낳은 셋째 아들이 있고 거두지 않은 혼외자도 몇 더 있었다. 젊어서 난잡했던 것치고 10년 가까이 자식을 낳은 적 없어서 아마 남성 기능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추측한다고 보고서에 쓰여 있었다. 쓰레기 같은 놈이지만, 휴고는 꽤 많은 지참금을 제시한 이놈의 청혼서를 퀘이즈가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퀘이즈는 오직 동복 누이 캐서린만 제 핏줄로 인정했다. 형제는 가능하면 죽이고 싶은 대상이고, 누이는 왕궁 예산만 축내는 식충이었다. 태자 시절부터 퀘이즈는 선왕이 여기저기 자식을 싸질러놓는 행위를 몹시 경멸했다. 선왕은 왕위를 두고 왕자들이 자기들끼리 죽고 죽이는 것을 방관했다. 오히려 자식들의 치열한 권력다툼이 자신의 영향력을 높인다고 생각했다. 부친을 본보기 삼아서 그런지 퀘이즈는 왕치고는 여자를 절제하는 편이었다. 후궁은 셋뿐이며 그것도 이해관계에 의한 필요 때문이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 후궁 사이에서는 자식도 없었다. 퀘이즈가 메튼 백작의 청혼서를 받아서 혼사를 추진하면 상대는 올해 18살이 되는 세실 공주였다. '이놈이 왕실에 청혼서를 넣을 것을 그녀가 어떻게 알았을까?' 휴고는 잠깐 의아했으나 그리 오래 생각지 않았다. 다른 생각이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내의 말대로, 아내가 아직 궁에 남아 있었으면 이놈과 결혼할 공주는 그녀가 되었을 것이다. 비비안 공주는 이 쓰레기의 아내가 되었을 것이다. 기분이 더러웠다. 발생하지 않은 일이지만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하나만으로 그는 차갑게 분노했다. 아내의 부탁을 어떤 식으로 해결할까 휴고는 고민했다. 이미 왕실로 올린 청혼서를 빼돌리는 일은 상당히 번거로웠다. 왕에게 말하자니 왕은 또 기회다 싶어서 뭘 요구할지 알 수 없었다. 이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할지 마음을 굳혔다. 휴고는 파비안을 불러 보고서를 주며 지시했다. "그자가 내 눈에 띄는 일 없게 치워." "복잡하게 합니까, 단순하게 합니까?" "단순하게." "예. 하온데 일전에 지시하셨던 펜던트 말씀입니다. 송구합니다.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파비안은 그동안 주군이 펜던트를 언급하지 않아서 보고서를 들고 공작저를 찾을 때마다 조마조마했다. 수하들을 닦달해서 뒤지지 않은 곳이 없지만, 단서조차 잡지 못했다. "음? 아. 그건 됐다." 휴고는 찾을 필요 없다는 말을 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수개월 찾느라 고생했을 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전혀 없었다.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파비안은 질책받지 않았다는 사실에만 그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나서 메튼 백작은 마차 전복 사고로 사망했다. 휴고는 메튼 백작의 사망 소식을 루시아에게 전했다. 물론 자신이 지시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당신 부탁을 처리하려고 알아보니까 그자가 사고로 죽었다더군." 그는 마치 이름 모를 떠돌이 개가 죽은 것처럼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루시아는 이해했다. 메튼 백작은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정말 떠돌이 개만도 못한 존재일 것이다. "... 사고요?" 루시아는 믿기지가 않았다. 꿈속에서 얼마나 저주했던가. 벌을 받을 테니까 제발 그놈을 죽여 달라고 빌었다. 간절한 저주가 통했는지 그래도 최후는 처참했지만, 마차 사고 같은 허무한 일로 죽을 것 같지 않은 자였다. 넋을 놓고 생각에 잠기는 그녀를 그의 팔이 감싸 안았다. "그자가 죽은 게 충격인가?" "... 충격? 네. 아마..." "왜?" "그렇게 시시하게는... 죽여도 안 죽을 것 같은 그런 자라 생각했어요." 휴고는 계속 궁에서만 살다가 바로 결혼해서 세상을 잘 모르는 순수한 그녀의 기준에 그자의 행태가 몹시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넘쳐나는 악을 기준으로 삼으면 메튼 백작 정도는 발바닥에 질척거리며 달라붙은 오물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을 알 필요 없었다. 메튼 백작 정도가 악의 정점에 서 있는 기준이 되는 것으로 충분했다. "이미 죽은 자야. 그만 생각해. 공주는 물론이고 그 누구와도 이제는 결혼하지 못하겠지." "... 그렇군요." 새삼 깨닫고 루시아는 감탄했다. "그럼 백작가는 앞으로 어떻게..." "아들이 있으니 작위를 물려받겠지." "이혼한 백작부인한테 어린 아들이 있어요." 메튼 백작이 죽었으니까 백작 가문이 역모에 휘말려 멸문할 미래가 바뀌고 브루노가 타국으로 망명할 미래 또한 바뀔 것이다. 루시아는 조숙한 소년 브루노가 말은 안 해도 제 어머니를 많이 그리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품이 필요한 아직 어린 아이였다. 작위를 물려받을 메튼 백작의 장남이 어린 동생을 관심으로 보살필 것 같지 않았다. 꿈속에서 봤을 때 서로 남같이 지내던 형제들이었다. "백작부인이 원하면 제 아들을 친정으로 데려갈 수 있게 조치할게." 휴고는 마음속 깊은 곳의 짜증을 누르고 다정하게 말했다. 그녀가 자꾸 딴 곳에 시선을 돌리는 것이 싫었다. 그녀의 모든 관심은 오롯이 그를 향해 있어야만 했다. 백작부인이 아들을 데리고 가기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그녀에게 굳이 말하지 않았다. 백작부인이 재혼을 하려면 아들이 짐이 될 것이다. 만약 백작부인이 아들을 택한다면 아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최소한 앞으로 10년 이상은 재혼할 수 없었다. 귀부인이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백작부인이 아들보다 제 안위를 먼저 생각할 가능성이 컸다. "정말요?" 정말 그런 걸 할 수 있어요? 반짝거리는 눈의 그녀를 보며 휴고는 피식 웃었다. 아내는 그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세상에 그가 할 수 없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사람 목숨을 가져가는 사신을 역할마저 그의 것이었다. 오직 죽은 사람을 살리는 신의 영역만 그에게서 비켜나 있을 뿐. "그러니까 이제 잊어버려. 그쪽은 더는 신경 쓰지 마." "그럴게요." 다 털어버릴 것처럼 생긋 웃는 그녀가 예뻐서 휴고는 그녀의 말랑거리는 볼을 깨물었다. 화들짝 놀란 루시아는 그를 흘겨보다가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품에 안겼다. "정말 많이 감사해요. 휴." "고마우면 선물." 쿡 웃음을 터뜨린 루시아는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사랑해요." "이걸로는 부족해요?" 라고 묻는 그녀를 꽉 안으면서 그는 그녀 귓가에 속삭였다. "넘쳐." 휴고는 이 자그마한 여자가 그에게 주는 행복이 믿기지 않았다. 이대로 정말 괜찮은지 누군가 답을 주었으면 좋겠다. 그에게는 가혹하기만 했던 그의 운명이 그를 이대로 내버려 둘 것 같지 않아서 불안했다. 제발. 더 욕심내지 않을 테니까 그녀 하나만 내게 허락해 줘. 항상 욕설만 퍼부었던 하늘 어딘가를 향해 휴고는 간절하게 소망했다. ============================ 작품 후기 ============================ 왕비는 여자아이를 낳았다. 휴고는 왕과 함께 있을 때 공주의 탄생 소식을 들었다. 공주가 태어났다는 말을 전해 들은 퀘이즈는 크게 기뻐했다. "하하하! 공주라고?" 꾸며낸 기색이 아니라 퀘이즈는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휴고는 그동안 퀘이즈가 은근히 태어날 아이가 여자아이였으면 바란다는 말을 지나가듯 몇 번 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려니 하며 넘겼는데 정말 좋아하는 퀘이즈를 보면서 기분이 묘했다. 아들이 이미 셋씩이나 있는데 아이 하나 더 태어난 일이 뭐가 저리 좋은지 잘 모르겠다. "공, 그대도 소식이 올 때가 되지 않았나?" "... 아직입니다." "그리 애지중지하는 공작부인 닮은 딸 하나 낳지 그러나. 짐은 공주를 보러 가봐야겠네. 공주라. 공주란 말이지." 왕이 오후의 남은 일정을 모두 취소해서 휴고도 평소보다 일찍 귀갓길에 올랐다. 마차에서 휴고는 내리 한숨을 내쉬었다. 공주가 태어난 소식은 곧 아내의 귀에도 들어 갈 것이다. 왕비의 부른 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모습이 아른거렸다. [ 당신의 비밀을 누군가 아는 것이 당신께 고통이라면 그러실 필요 없어요. ]돌이켜 생각하면 휴고는 그녀가 얼마나 조건 없이 자신을 이해해 주었는지 알 것 같았다. 휴고가 아이를 원하지 않는 정확한 이유를 묻지 않고 받아들였다. [ ... 하지만 그 비밀은 당신을 고통스럽게 할지도 몰라. ][ 만약 그렇다면 당신께 매달려 볼게요. ]아내는 거짓말을 했다. 휴고의 비밀이 아무리 그녀를 고통스럽게 해도 절대 말해 달라고 매달리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먼저... 이야기해야겠지.' 집에 돌아가니 아내는 외출 중이었다. 오늘 참석한다는 티파티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집무실에서 일하는 중에 제롬이 마님이 들어오셨다고 알렸다. "당신이 어쩐 일이에요?" 루시아는 그가 마중하자 놀라면서도 기뻐서 활짝 웃었다. 휴고는 그녀를 안으면서 가벼운 입맞춤으로 인사를 건넸다. 티파티는 재미있었느냐, 특별한 일 없이 즐거웠다, 일상적 대화를 나누며 두 사람은 2층으로 올라갔다. 휴고는 자연스럽게 응접실까지 함께 들어갔다. 루시아는 그가 뭔가 할 말이 있는 기색이라고 생각해서 이끄는 대로 소파에 앉았다. "당신도 곧 소식을 들을 테지만, 공주님이 태어나셨다고 하더군." "어머나. 그래서 일찍 들어오셨군요. 잘 되었네요. 캐서린 공주님이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좋겠다고 몇 번을 말씀하거든요." 그럴 때마다 루시아는 캐서린에게 "예쁜 공주님이 태어나실 거예요." 라고 답했다. 캐서린은 그저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루시아는 공주님이 태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폐하도 그러신 것 같았어." 휴고가 입을 다물고 잠시 대화가 끊겼다. 루시아는 어쩐지 그가 말을 꺼내기 곤란해하자 의아하면서 걱정이 되었다. "데미안에게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 갑자기 왜 데미안?" "태어난 아기 얘기를 해서 그런지 데미안 생각이 나서요." "그 녀석은 잘 지내. 무슨 일이 생길 일이 없어." "잘 있으면 됐어요. 당신은 왜 데미안 얘기만 나오면 퉁퉁거려요?" "뭐? 퉁퉁?" "애 아버지가 되어서 아들하고 신경전 하려 들지 마요." "신경전 하려는 게 아니라. ... 후우. 그래. 속 좁아 미안하군." 루시아는 웃으면서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잡고 그의 입술에 살짝 붙였다 떼는 입맞춤을 했다. "속 좁아도 괜찮아요. 사랑해요." "... 당신 변한 거 같아." "뭐가요?" 고개를 갸웃하는 루시아를 보면서 휴고는 딱 꼬집어 뭐라 말할 수 없지만, 갈수록 그녀에게 말려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고는 잠시 자신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봐도 아내는 자신보다 작고 약한데 왜 자꾸 자신이 약자의 입장이 되어서 아내의 기분을 살피고 아내 기분에 자신의 기분이 좌우되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그랬다. 태어난 공주를 화제 삼아 이야기하면서도 기분 좋아 보이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까 휴고의 마음도 덩달아 가벼워졌다. "아기 말이야." "태어나신 공주님이요?" 아니. 우리 아기. "루시아는 귀를 의심했다. 그의 입에서 '우리 아기'라는 표현이 나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손대면 쩡 하며 깨질 유리처럼 아슬아슬한 표정으로 루시아는 긴장된 숨을 삼켰다." 당신에게 오래전 말한 적 있지. 내게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고." "... 네." "아직도 난. 그 일을 당신에게 전부 말할 수 없어. 그런데 일부는 당신도 알아야 할 것 같아." 그리고 휴고는 잠시 말이 없었다. 루시아는 그가 이렇게나 말하기 주저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 "나는 당신에게 아이를 갖게 할 수 없어. 타란은 저주받은 가문이거든." 휴고는 일부는 감추고 일부는 드러내어 적절한 진실과 거짓을 섞어서 그녀에게 설명했다. 근친으로밖에 이어질 수 없는 가문의 비밀을 밝혔으나 이복누이가 아닌 친척으로 바꿔 말했다. 혈족이 아닌 여자와 자식을 낳기 위해서는 특수한 약초를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피를 먹어야 한다는 표현은 소름 끼쳐서 말도 하기 싫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던 루시아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친척뻘 여자와 결혼해야만 아들을 낳을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순결한 몸일 때부터 특수한 약초를 먹어야 한다는 거군요. 특수한 약초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공작가의 주치의 필립 경뿐이고요." "터무니없는 소리처럼 들린다는 거 알아." "당신 말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에요. 그럼... 데미안의 어머니는 당신과 친척이었네요." "... 그런 셈이지." 루시아는 굉장히 혼란스러웠지만, 생각해보니까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그에게 많은 여자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혼외자가 없다는 사실, 그가 초야부터 피임에 무심했던 점도 이해가 갔다. '친척이라고...?' 제논의 법은 육촌 이내 혈족의 혼인을 금하지만, 사촌의 결혼을 허락하는 나라가 제법 많이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친척 간의 결혼으로 그가 강한 혐오를 드러내는 사실이 이상했다. 그가 그렇게까지 도덕적인 규율에 민감할 것 같지 않았다. '사촌보다 가까운 사이 간 근친혼을 계속 해왔던 건가...?' 루시아는 더 깊이 생각하는 것은 그만두었다. 그가 말하지 않은 일을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그럼 당신과 결혼이 내정된 여자가 있었겠군요." "죽었어. 그리고 가문에 그런 여자가 더 없어. 타란 혈족에 남은 사람은 나와 데미안뿐이야. 그런 여자가 있다고 해도 자식 낳기 위한 결혼은 안 했어. 나를 끝으로 가문 혈통을 끊으려고 생각했으니까. 말했잖아. 저주라고. 이 저주받은 핏줄을 나로 끝내고 싶었어." 루시아는 복잡한 마음을 추스르기 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가문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강한 환멸을 갖고 있었다. 강철 같은 남자가 사실은 안쪽이 상처투성이였다. 루시아는 안타까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당신은 저주가 아니에요. 휴. 데미안처럼 사랑스러운 아이도 저주일 리 없어요. 당신이 세상에 존재해서 감사하고 있어요. 당신도 세상에 없었으면 절 만나지 못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당신도 당신을 사랑해 주세요." 휴고는 자신의 얼굴을 감싼 그녀의 두 손위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아마 그는 죽을 때까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를 저주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녀 말대로 살아 있으니까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셨군요." "당신과의 아이가 싫어서가 아니야." "네. 알아들었어요." 루시아는 멍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갑자기 기운이 쭉 빠졌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낳을 수 있으면 당신 아이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 루시아의 눈동자에 반짝 빛이 돌아왔다. "아이가 싫다고 하셨잖아요." "지금도 싫어. 하지만 당신 아이는 괜찮아." "그 말씀은. 만약 제가 우리 아이를 가졌으면 당신이 기쁘게 받아들였을 거라는 뜻인가요?" "기꺼이." 루시아는 그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라고 믿었다. 비록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그가 아버지가 될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이 루시아의 마음에 크게 와 닿았다. 자식이 싫다는 남자가 당신 아이면 좋다고 말하는 뜻 안에 담긴 그의 사랑을 볼 수 있었다. "고마워요. 휴. 당신의 마음으로 충분해요. 당신을 이해하고... 저는 괜찮아요." 포기했다고 생각했어도 아주 작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아기 문제를 루시아는 완전히 털어버렸다. 다 놓아버린 후련함과 어쩔 수 없는 서운함이 뒤섞여 눈물이 나왔다. 루시아는 눈물을 닦으면서 그를 향해 웃었다. 몹시 아파 보이는 그의 눈을 보자 루시아도 마음이 아팠다. "미안해요." "왜 당신이 내게 사과를 해." 휴고는 가슴이 저려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제가 너무 형편없이 약한 것 같아요." "무슨 소리야." 휴고는 탄식했다. "난 당신보다 강한 여자를 본 적이 없어." 휴고는 소리 없이 우는 루시아를 한참 안고 있었다. '변한 것이 없구나.' 형제의 죽음을 보며 자신의 무력함에 절망하던 그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휴고는 생전 처음으로 울고 싶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흘렀다. 루시아는 티파티에 함께 했던 귀부인들과 어울려 시내의 제과점에 들렀다가 집에 가는 길이었다. 새로 문을 연 제과점의 케이크 맛이 환상이라는 어떤 귀부인의 호들갑에 모두 혹해서 따라나서는데 루시아도 합류했다. 요 며칠 이상하게 단것이 자꾸 먹고 싶었다. 루시아는 제과점에서 케이크 두 조각을 먹어치우고 몇 조각을 더 포장했다. 마차의 창문 밖으로 조금씩 눈발이 휘날렸다. '함박눈이 되지 않으면 좋겠는데...' 눈이 쌓이면 마차가 달리기 어렵고 사고도 잦았다. 그가 오늘 늦게 들어온다고 해서 아무래도 걱정이 되었다. 그는 왕이 새로 야심 차게 구성한 행정기구 중부의 장을 맡으면서 부쩍 더 바빠졌다. 자정 넘게 들어오는 일이 늘어나면서 종종 루시아는 혼자 먼저 잠자리에 들곤 했다. 평소 남편이 바깥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편이 아니지만, 며칠 전에는 때려치우고 싶다고 투덜거렸다. 그는 루시아가 '그만두세요. 당신하고 함께 있을 시간이 부족해요.' 라고 맞장구 쳐주기 바라는 눈치였다. 모르는 척하자 혼자 구시렁거리던 그를 떠올리며 루시아는 슬며시 웃었다. 올해가 저물기까지 열흘이 채 남지 않았다. 루시아는 내일 있을 자선파티를 마지막으로 올해의 사교 활동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남은 연말 기간은 집에서 여유롭게 보내다가 신년 파티로 내년을 시작할 것이다. '벌써 올해가 끝나네...' 루시아는 소소한 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수도 사교계에서의 1년을 뒤돌아보았다. 가장 큰 사건이라면 아무래도 셀리나 공주님이 태어난 일이었다. 어린 공주님은 왕 부부와 오라버니 셋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며 어여쁘게 자라고 있었다. 그다음 사건은 캐서린의 결혼이었다. 캐서린이 구혼을 받아들이고 몇 개월 만에 결혼했다. 루시아가 봤던 미래보다 1년 이른 결혼이었다. 상대는 외국인이었다. 제논의 동맹국의 후작으로 여러 국가에 작위를 가진 국제 거상이었다. 퀘이즈는 1년의 1/3은 제논에서 지내는 것을 조건으로 작위를 내리고 결혼을 허락했다. 캐서린은 결혼 며칠 전 루시아에게 말했다. [ 공작부인이 행복해 보여서 부러웠어요. 그래서 결혼해볼까 생각했고. 나도 공작부인처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 그럼요. 행복하실 거예요. 제가 기도하고 있어요. 언니. ]캐서린은 놀란 눈으로 루시아를 보다가 환하게 웃었다. [ 고맙구나. 비비안. ]캐서린은 결혼하고 남편을 따라 출국했다. 남편의 고국에서 지내다가 내년 늦봄에 들어온다고 했다. 루시아가 꿈으로 봤던 미래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 캐서린의 부군이 되었을 앨빈 백작은 소피아와 결혼했다. 소피아와 결혼했을 데캉 후작은 후작부인이 죽은 후 아직 혼자였다. 루시아는 이제 더는 꿈속 기억을 떠올리지 않았다. 아주 가끔, 기억에 있는 사건이 일어나거나 어긋나는 일이 발생할 때 잠깐 생각하면서 혼자 웃곤 했다. 굉장히 선명했던 꿈속 기억이 점점 흐려진다는 기분도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루시아는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마차를 오래 타서 그런지 유난히 피곤했다. ".. 비안!!" 정신을 일깨우는 강한 외침에 루시아는 눈을 번쩍 떴다. 막혀 있던 숨이 갑자기 트이는 것처럼 호흡이 밀려와서 가쁘게 숨을 쉬었다. 주변 상황을 살피는 눈동자가 황망하게 흔들렸다. 강한 힘이 루시아의 등을 받혀 상체를 일으켜 어깨를 감싸 안고 있다는 것을 잠시 간격을 두고 깨달았다. 커다란 손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루시아의 이마를 쓸어 넘겼다. "... 휴?" 그는 단단한 가슴과 강인한 두 팔로 루시아를 품에 가두고 서로 심장을 맞댄 상태로 등을 도닥이면서 귓가에 괜찮다고 속삭였다. 그제야 루시아는 자신이 오한이 드는 것처럼 떨고 있음을 알았다. 어두운 침실과 그의 품. '아아. 여기가 현실이구나.' 바닥 없는 까마득한 아래로 추락하는 절망은 꿈이었다. 그게 꿈이고 지금이 현실이었다. 떨림이 서서히 가라앉고 잠옷을 흠뻑 적신 땀이 식어서 체온이 내려갔다. "악몽을 꿨어? 몇 번 흔들어도 깨지 못하더군." "... 네. 무서운 꿈이었어요." 12살에 보았던 꿈속 기억이 다시 꿈으로 나타난 것은 처음이었다. 메튼 백작가가 멸문하던 날 밤의 기억이었다. 홀로 어두운 비밀 공동에 숨어 숨죽여 떨던 지독히 길던 시간. 왜 새삼 그런 악몽을 꾸었는지 모르겠다. 떨림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으나 덫에 걸려 죽다 살아난 토끼처럼 불안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를 그는 심각한 눈으로 살폈다. "의사를 부를까?" "아니에요. 그냥... 조금... 놀라서 그래요." "물 가져다줘?"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휴고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화들짝 놀라 그에게 매달렸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지금은... 그냥 이대로..." "... 가지 않을 테니까 진정해. 옷은 갈아입어야지. 그대로 있으면 감기 걸려. 하녀 부를게. 괜찮지?" "... 네." 휴고는 줄을 당겨서 하녀를 불러 몇 가지 필요한 것을 가져오게 했다. 루시아에게 미지근한 물을 한 잔 먹이고, 따뜻한 물수건으로 땀에 젖은 몸을 닦아낸 후 마른 잠옷으로 갈아입혔다. 부모가 어린아이 돌보듯 서두르지 않으며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루시아는 행복했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면 영원히 깨고 싶지 않았다. 현실이라 다행이지만, 또한 현실이라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에게 완전히 몸을 맡긴 채 루시아는 그가 눕히는 대로 천천히 침대에 누웠다. 그의 어깨를 베고 등에서부터 허리를 감은 그의 팔이 든든했다. 그의 입술이 정수리와 이마 눈가와 입술을 가리지 않고 부드럽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등을 천천히 더듬어 쓸어내리는 그의 손은 조용한 위로였다. 서서히 조금씩 잠이 밀려왔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도 그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가 귀에 뭐라고 속삭이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잠들었다. ============================ 작품 후기 ============================ 아침에 눈을 뜰 때 그의 체온을 느끼는 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루시아는 눈 뜨자 바로 보이는 그의 수려한 옆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몸을 움직여서 고개를 바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추자 그가 눈을 떴다. 그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그도 웃으면서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던 팔에 힘을 주어 당기며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잘 잤어?" "네. 당신은요? 저 때문에 새벽잠 설치셨잖아요." "충분히 보충했어. 당신은 왜 내 오전 시간이 필요했지?" "네...?" "아침에 있어달라며." "아... 그게..." 속으로 생각한 줄 알았는데 입 밖으로 그걸 말했나 보다. "잠투정이었나 봐요. 신경 쓰실 필요 없었어요." "당신을 주치의한테 진료받게도 해야겠고." "진료라니요?" "어젯밤에 내가 눕는 기척을 전혀 모르고 곤하게 자더군. 새벽에는 잠을 설치지 않나. 아무래도 당신 몸이 허해진 거야." 루시아는 그가 유난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주치의를 부르는 것을 막지 못했다. 주치의는 꼼꼼하게 이것저것 물은 후 진료하고 아무 이상이 없다고 말했다. 루시아는 그것 보라는 듯 남편을 흘겨보았다. "말씀하신 피로함이나 단 것이 드시고 싶었다는 증상은 대개 여인들이 월경 시작 전에 흔히 겪곤 합니다. 곧 달손님 기간이 다가오지는 않으십니까? 이런 월경 증후군을 겪으신 적이 전에는 없으셨는지요?" 두 달 전 새로 고용한 주치의는 아직 루시아의 무월경 증상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주치의를 내보내고 루시아는 자신이 겪을 리 없는 증상이 나타난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꿈속에서 월경을 다시 시작한 후에는 항상 집에 달콤한 간식을 떨어지지 않게 비치했던 것 같다. 그가 옆에서 추근거리자 생각을 미뤄 두었다. 자꾸 가슴 안으로 파고드는 손을 떼어내며 루시아는 그에게 물었다. "안 바쁘세요?" "안 바빠." "그럼요. 저요. 침대에서 노닥거리는 일 해보고 싶어요." "흐음." 휴고의 손이 다리 사이를 파고들자 루시아가 화들짝 놀라 그의 팔을 찰싹 내리쳤다. "그거 말고요! 침대에 누워서 차 마시고 간단히 아침도 먹고. 그렇게 늑장 부리고 싶어요. 당신하고 같이요." "나쁠 건 없지. 먼저 한 번만 하자." "당신 한 번으로 안 끝내잖아요! 차 마실래요! 아침 먹고 싶어요! 침대에서!" 루시아가 완강히 거부하자 휴고는 항복의 표시로 끈덕지게 그녀 몸을 더듬어대던 손을 뗐다. "알았어. 가져오라고 해. 당신이 그토록 마시고 싶은 차." 루시아는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하녀를 부르는 줄을 잡아당겼다. 휴고는 소풍 가는 아이처럼 들뜬 그녀를 심드렁하게 턱을 괴어 바라보았다. 맛나게 먹던 사탕을 빼앗긴 것처럼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다. 아내는 여전히 뭘 모르는 아이 같다고 휴고는 생각했다. 대부분 귀족의 생활 방식은 밤늦도록 연회다 모임이다 바빠서 새벽에 잠들어 오전 늦게 일어났다. 침대에서 느긋하게 간단한 아침을 먹고 차를 마시는 일이 일상이었다. 그러나 그 일상이 타란 공작부부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루시아의 사교 일정은 거의 낮과 오후였으며 늦어봤자 해 질 무렵이면 귀가했다. 휴고도 특별히 바쁜 일만 아니면 저녁에 귀가했다. 휴고의 기상 시간은 해 뜰 새벽 무렵이고 루시아는 오전에 일찍 일어나는 편이었다. 그러니 침대에서 늦은 아침에 식사할 기회가 없었다. 누구나 하는 일상이지만 정작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그걸 루시아는 해보고 싶었다. 은은한 차향이 침실에 가득 퍼졌다. 분주하게 하녀들이 움직이며 준비하는 것을 보며 루시아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향을 음미했다. 쿠션을 등에 대고 편하게 그와 나란히 기대앉아 차를 마시고 싶었던 소원을 풀어서 몹시 기분이 좋았다. "오늘 늦으세요?" "평소와 비슷해. 당신은?" "오늘 가는 자선파티가 저녁에 끝날 거예요." "그럼 오늘 일정은 자선파티뿐인가?" "오후에 티파티 하나가 더 있어요." 간단한 아침 식사를 차린 간이 테이블이 침대 위로 올라왔다. 벌꿀을 뿌린 신선한 과일, 팬케이크 등으로 먹음직스럽게 준비된 전형적인 아침 식사와 평소와 다른 우유 2잔이었다. "오른쪽은 우유를 공급하던 상인이 새로운 가공법을 이용한 신제품이라고 가져왔습니다. 가격차이가 있지만, 전의 것보다 고소한 맛이 더해서 찾는 분이 많다고 합니다." 루시아는 오른쪽 우유 잔을 집어 들었다. 한 모금 마시자 고소한 풍미가 입안 가득 느껴졌다. "당신도 한 번 맛보세요. 맛있어요." 휴고는 흘끔 루시아가 내민 우유 잔을 보다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이면서 혀로 핥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개를 들어 어깨를 으쓱했다. "우유 맛이군." 루시아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를 노려보다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고용인들은 알아서 시선을 피하며 못 본 척하고 있었다. 공작가의 고용인들은 주인 부부의 어지간한 애정 표현에는 놀라지 않는 척이 아니라 정말 놀라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보는 눈이 많으니 뭐라 할 수도 없고, 루시아는 애써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어... 때요? 바꾸는 게 나을까요?" "당신 좋을 대로 해. 어차피 이 집에서 우유 마시는 아이는 당신뿐이니까." "... 아이요?" "아이잖아." 픽 웃으며 대꾸하는 그를 향해 기가 막혀 눈을 흘겼다. 아까 하자는 걸 거절했다고 심술을 부리는 것이 분명했다. 아이라고? 허리와 허벅지를 끈질기게 쓰다듬는 사람이 할 말인가. 다른 사람들 눈에 두 사람은 침대 위에서 사이좋게 붙어 앉아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한 손은 계속 가만히 있지 않았다. 루시아는 이불 속에서 더듬는 그의 손을 잡아서 떼어 내고 그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이라면서요." 휴고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루시아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으앗-" 휴고는 버둥거리는 그녀를 가볍게 진압하고 목덜미 한 곳을 깨물고 빨아들이며 핥았다. 아프고 간지럽고 따끔거리면서 짜릿한 느낌에 루시아는 몸을 움츠리며 끙끙거리다가 그가 놔 주자 정신을 차렸다. 그 새 두 사람만 남기고 고용인들이 모두 빠르게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눈치 빠른 고용인들은 두 분이 즐거운 시간을 가지라는 것처럼 간이 테이블까지 아예 침대 밑에 내려놓았다. 루시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만행을 비난하는 루시아의 눈빛에도 휴고는 꿋꿋하게 그녀의 목덜미에 남긴 진하고 붉은 흔적을 보며 만족해하고 있었다. "왜 그래요. 정말!" 두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는 걸 심드렁하게 보던 그가 가뿐하게 그녀의 손목을 붙들어 위로 올리고 씩씩거리는 그녀의 입술을 삼키며 그대로 덮쳐 눕혔다. 포기를 못 하고 밑에서 버르적거리는 그녀 귀를 혀로 핥으면서 희롱했다. "하지 마요!" "싫어." 약이 바싹 올라 눈을 마주치는 그녀를 보며 휴고는 즐거워했다. 장난 같은 분위기가 뜨거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으응..." 결합하여 뒤섞인 두 몸이 야한 율동을 만들었다. 늘씬한 두 다리가 튼실한 사내의 허리를 감아 그가 허리를 움직이는 대로 따라 흔들렸다. 비음이 섞인 교성이 끊어질 듯 말 듯 계속해서 이어지고 그의 입술은 끈질기게 그녀의 온몸을 탐했다. 시간을 알리는 햇살이 침실 안을 구석까지 밝혀놓았다. 아침의 밝음은 그녀 눈동자의 작은 흔들림조차 확인할 수 있어서 휴고는 만족스러웠다. 아침의 격렬한 정사로 오전 시간이 훌쩍 넘어갔다. 아침부터 기운을 뺐더니 온몸이 나른하게 늘어져서 루시아는 오늘 하루가 암담했다. 후희가 길어지자 슬그머니 걱정되었다. "더는... 안돼요. 준비해서 나가야 한단 말이에요." 여전히 그는 결합을 풀지 않고 그녀의 몸 여기저기에 입술을 찍었다. "휴." "알아들었어." 마무리처럼 입맞춤을 하고 몸 안 가득하던 그가 천천히 빠져나가는 느낌에 루시아는 흠칫했다. "저녁에 데리러 갈게." "그렇게 늦지는 않을 거예요. 저택에서 멀지도 않은걸요." 대꾸 없이 그가 침대에서 내려가면서 가운을 걸치는 것을 보며 루시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어나 앉아서 발치에 널브러진 잠옷을 주워 입었다. 많아 봐야 한 달에 두세 번 있는 저녁 일정이 생기면 그는 꼬박꼬박 데리러 왔다. 싫은 건 아니다. 아니지만... 갑자기 그의 손이 턱을 잡아서 들어 올려서 루시아는 움찔 놀랐다. "번번이 오지 말라는 이유가 뭐야." 마주친 붉은 눈동자가 차가웠다. "저번에는 내가 분명 데리러 간다고 했는데 조금 늦었더니 집에 먼저 돌아왔지. 내가 가면 곤란한 일이라도 있나?" 그가 언짢아하는 기색이 확연해서 루시아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 소문 때문에 그래요." "소문?" 루시아는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부부동반이 아닌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티파티 등 간단한 다과 사교 모임 외에는 외출하지 않았다. 간혹 저녁 모임이라도 있으면 꼭 공작이 데리러 온다. 그래서 두 부부를 두고 슬금슬금 소문이 돌고 있었다. 정확히는 타란 공작에 대한 소문이었다. 아내에 대한 의처증 때문에 거의 감금하다시피 한다는 소문이었다. 원래 소문의 당사자는 가장 늦게 아는 법이라서 루시아는 뒤늦게 누가 넌지시 농담처럼 말해주어서 처음 알았다. 얼마나 황당하고 기가 막혔는지 모른다. 의처증이라니! 감금이라니! 그 무슨 가당치 않은 소린가! 루시아가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을 꺼려서 무도회에 잘 참석하지 않는 것이고, 늦은 시간이라 걱정해서 남편이 데리러 오는 것뿐인데. "어떻게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막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분해서 파르르 하는 루시아를 보며 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감금이라. 마음만 같아서는 정말 그러고 싶다고 생각하는 그의 머릿속을 읽었다면 루시아는 기겁했을 것이다. 휴고는 근래 아내를 곁눈질해대는 수컷들을 견제하느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녀가 결혼한 유부녀이고 남편이 만만치 않은 명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뭇놈들이 그녀에게 접근하는데 아무 장애가 되지 않았다. 음모 따위의 거대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로맨스로 연서를 주고받거나 가벼운 공개 데이트를 즐기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 그 정도는 불륜으로 치지도 않았다. 루시아는 까맣게 모르는 사실이지만 꽃이나 서신 따위를 건네려는 꽤 많은 시도를 휴고가 모조리 중간에서 차단했다. 마음만 같아서는 괜히 집적대는 놈들을 다 자근자근 밟아놓고 싶었다. 그러나 고작 그런 일로 그런 짓을 했다가는 정말로 의처증 정신병자라고 사교계에서 낙인찍힐 것이다. 아내는 날이 갈수록 미모가 만개하는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얼핏 보면 순진해 보이다가 어떨 때는 농익은 여인 같고 어떨 때는 청초한 아가씨 같기도 했다. 최고의 드레스와 보석으로 치장하고 팔색조 같은 매력을 흘리니 시선이 모이는 것은 당연했다. 휴고는 그녀의 뒷목을 잡아 진하게 키스했다. 입술을 떼면서 흐려진 그녀의 눈을 보고 치미는 욕구를 간신히 참았다. "하녀는 데려가는 거지?" "항상 데리고 다니는 걸요." "두 명." "네. 알아요. 두 명." 건국절 파티 때의 사건 이후 루시아는 항상 하녀를 둘 데리고 다녔다. "호위도 떨어뜨리지 말고." "알았어요." "조금 늦을지도 몰라. 기다리고 있어. 딴 놈하고 말 섞지 마." "아우. 잔소리." 루시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큰 규모로 열린 자선 파티였다. 루시아는 끊임없이 인사를 건네는 귀부인들에게 아는 척해주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었다. "공작부인. 그간 평안하셨어요?" "백작부인. 오랜만이군요." 글렌 백작부인은 모친의 병환으로 한동안 수도를 떠나 친정에 가 있었다. 백작부인이 돌아왔다는 것은 모친의 병환이 나았거나 잘못되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고 후자일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루시아가 조심스럽게 묻자 역시 백작부인은 흐릿한 미소로 대답했다. 루시아는 백작부인에게 위로를 전했다. 인사가 끝나고 백작부인은 제 옆에 있던 젊은 아가씨를 루시아에게 소개했다. "고향에서 데려온 먼 친척 아이입니다." 파크 남작의 딸 소니아라는 소개를 듣자마자 루시아의 표정이 굳었다. '그 여자다.' 꿈속에서 남편의 아내였던 여자. 고고한 표정으로 사교계에서 활동하던 공작부인을 루시아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마음의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작부인." 곱슬머리의 발랄하고 귀여운 미소를 가진 아가씨였다. 꿈속 기억보다 수줍게 웃는 소니아는 화려한 파티가 신기해서 눈을 못 떼며 사교 경험이 미숙한 태도를 드러냈다. 꿈속에서 파티장을 휘젓고 다니던 모습과 대조적이었다. 루시아는 손끝부터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메튼 백작을 마주쳤을 때도 이처럼 끔찍한 기분은 아니었다. 다른 미래였지만, 남편이 직접 선택해서 결혼한 여자였다. 꿈속에서 남편이 공작부인과 어떤 관계였는지 영원히 알 길은 없었다. 소문처럼 단순한 계약 결혼이었을 수 있고, 어쩌면 그보다 더 가까운 부부였을 수도 있었다. 현실에서는 벌어질 일 없는 미래일 것이다. 알면서도 루시아는 지독히 입맛이 썼다. 데리러 온 남편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루시아는 계속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무슨 일 있었어?" 루시아는 고개만 내저었다. 이유 없이 괜히 그가 미웠다. 입을 열면 그에게 짜증을 낼 것 같았다. 자신이 아주 이상한 상태라는 자각은 있었다. 한숨 자면 좀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피곤해요. 일찍 올라가서 잘게요." 휴고는 평소와 다른 아내를 우선 내버려 두었다. 자고 일어난 후에도 계속 뾰족하게 굴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찬찬히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눈을 번쩍 떴을 때 사방이 어두웠다. 눈물이 멈추지 않고 온몸이 마구 떨렸다. 그가 자신 앞에서 차갑게 몸을 돌려 가버렸다. 꿈이지만 그 장면을 다시 떠올리자 날카로운 송곳이 심장을 찌르는 것 같은 통증으로 숨이 턱턱 막혔다. 더듬더듬 침대 위를 기어서 내려왔다. '그이를.. 그이를 봐야해. 어디지?' 루시아는 침실 문을 덜컥 열고 오직 그를 봐야 한다는 생각만 갖고 달렸다. 누가 그녀를 부르는 것도 같았지만 제대로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그의 집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자마자 측면으로 마주한 책상에 앉아 있는 그를 발견했다. 그가 놀라 돌아보는 얼굴을 확인하면서 다리에 기운이 빠져서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달음박질을 쳤던 호흡이 이제야 밀려왔다.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몇 번 가슴을 들썩이며 크게 숨을 몰아쉬는데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상체를 일으켰다. "왜 그래?" 순식간에 다가온 그의 체취는 안도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루시아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녀를 바라보는 휴고의 붉은 눈이 크게 흔들렸다. 강한 힘으로 그는 루시아를 끌어안았다. "무슨 일이야. 응?" 부드럽게 달래는 목소리였다. 루시아는 그의 가슴에 깊이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였다. 휴고는 품 안에서 그녀의 몸이 바들바들 떠는 것을 느끼며 안색을 굳혔다. "의사 불러!" 우르르 달려와 어쩔 줄 모르며 서 있는 고용인들을 보며 휴고는 짜증이 솟아 버럭 소리쳤다. 보이지 않는 제롬을 눈으로 찾다가 제롬이 일이 있어서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품에 있던 루시아가 고개를 세차게 좌우로 흔들었다. 휴고는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의사를 부르지 말라고?" 그녀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고는 한숨을 내쉬다가 그녀가 맨발인 것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옷차림도 그리 두껍지 않은 잠옷만 입은 채였다. 둘러서 있는 자들에게 물러가라 손짓하며 그녀를 보듬어 안아 들어 올렸다. 그녀를 안아 소파에 앉아서 담요를 덮어주고 여전히 그의 품에 고개를 묻고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단단한 팔이 자신의 등을 품으로 누르며 가볍게 토닥토닥 두드려준다. 편안한 압박을 느끼며 루시아는 반쯤 나갔던 정신이 서서히 돌아왔다. 다시 흐르는 눈물을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휴고는 눈물로 축축해진 루시아의 볼과 눈시울에 계속 입을 맞추었다. 루시아는 가슴의 통증이 더해지는 것 같아서 몸을 웅크렸다. 눈물은 계속 났다. 아직도 꿈의 잔상이 남아 그녀를 괴롭혔다. 날 버리지 마요! 아아. 정말 죽을 것 같아! 루시아는 밖으로 터지지 못하는 비명을 지르며 가슴을 움켜잡았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말을 해야 알지. 비비안. 울지 말고. 왜 그러는지 말을 해봐." 가라앉은 휴고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루시아는 그의 품에 고개를 묻고 계속 울기만 하다가 기운이 빠져서 잠이 들었다. 휴고는 아내를 침실로 데려가 눕히려 했으나 불안한 것처럼 그의 옷을 꽉 쥔 손을 굳이 풀고 싶지 않았다. 서류를 침실로 가져오라고 지시해서 아내를 한쪽 팔로 가슴에 기대게 안고 다른 손으로 서류를 들어 내용을 살폈다. 늘어져서 그에게 푹 기대고 있던 그녀의 몸에 미세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뜨고 아직 잠이 덜 깨었는지 몇 번이고 눈을 깜빡거렸다. 루시아는 얼굴을 기대고 있는 곳이 침대가 아니라 그의 가슴이라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생각의 속도가 매우 느리게 돌아갔다. 머릿속이 멍해서 시선을 들어 서류를 읽고 있는 그를 보았다. 그가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마주쳤다. 붉은 눈동자가 따스한 빛을 띠며 그가 루시아의 입술에 키스했다. "... 이상한 꿈을 꿨어요." "무슨 꿈?" "당신 집무실로 달려가서..." 말을 하면서 루시아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집무실로 달려간 것은 꿈이 아니었다. 휴고는 한숨을 쉬면서 서류를 내려놓았다. "집무실로 달려가는 꿈을 꾸기 전에 더 나쁜 꿈을 꿨어? 무슨 꿈인데?" 부드럽게 어르는 그의 말투와 목소리는 루시아의 바짝 조이는 가슴 어딘가 답답함을 풀어 주었다. "... 당신이." "내가?" "... 바람 피웠어요." "......" 말로 꺼내자 루시아는 다시 가슴 속에서 울컥 뭔가가 치솟았다. "절 버렸어요. 그 여자에게 갔어요." 목소리가 떨려오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눈앞이 흐려져서 눈을 깜빡이자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비비안." 그의 촉촉한 혀끝이 흘러내린 눈물을 따라 눈시울을 핥았다. 휴고는 그녀를 침대로 눕히면서 그 위로 올라 팔꿈치로 몸을 디디고 가깝게 시선을 마주쳤다. "사랑해." 루시아는 그의 짧은 한마디가 제멋대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기분을 순식간에 평정하는 작은 기적을 경험했다. "저도... 사랑해요." "내가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할만한, 그런 실수를 했어?" "... 꿈속에 나온 여자가 가슴이 컸단 말이에요." 휴고는 투정처럼 중얼거리는 루시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그가 가슴 큰 여자 좋아 했다는 소리를 그녀에게 지껄인 게 누군지 알기만 하면 갈아버리고 싶었다. 그가 여자의 큰 가슴을 좋아하는 것은 독특한 취향이라기보다는 그냥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의 가슴이 좋은, 그런 단순한 의미였다. 절대 그녀 이외의 여자가 눈에 들어온 적 없고 가슴에 눈길 준 적도 없었다. "난 당신 가슴을 좋아해." 나직한 속삭임에 붉어지는 얼굴은 그의 손이 잠옷을 파고들어 가슴을 쥐자 더 붉어졌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이렇게 조금만 만져도 곤두서고." 그는 가슴 둔덕을 주무르다가 손가락으로 유두 끝을 잡고 부드럽게 빙글 돌렸다. "혀로 핥아주면 바들바들 떨 정도로 민감하고." 휴고는 그녀의 가슴을 드러나게 해서 살짝 쥔 채 유륜을 따라 혀로 핥다가 약간 강하게 콱 깨물었다. 움찔,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반응했다. "당신 가슴을 참 좋아하긴 하는데." 그의 무릎이 루시아의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그의 허벅지가 루시아의 은밀한 곳에 바짝 닿았다. 동그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더 할 수 없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솔직히 여기가 더 좋아." 휴고는 자꾸 꿈틀거리는 그녀의 두 팔목을 한 손으로 잡아 위로 눌러 고정하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팬티 안쪽을 들어가서 손가락 끝으로 다리 사이 꽃샘을 문질렀다. 촉촉하고 끈적한 액체로 젖어들기 시작하는 안쪽이 그의 손가락이 들어오는 것을 부드럽게 허용했다. "벌써 이렇게 젖고. 나야말로 걱정해야 할 것 같아. 당신 몸이 너무 야해서."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그가 희롱하는 말에 약이 오르면서도 오싹오싹했다. 손목을 누르고 있던 그의 손은 어느새 사라졌지만, 루시아는 여전히 눌리고 있는 것처럼 욱신거려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잠옷이 위로 말려 올라가고 팬티가 벗겨졌다. 그의 두 손이 허벅지를 잡아 열고 그 사이를 빤히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아!" 뜨거운 것이 아래에 닿았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비처에 입을 맞추더니 빨아들였다. 그의 혀끝이 안으로 파고든다. 루시아의 허리가 저절로 튀어 올랐다. "아! 아흣..." 그의 입술이 더 강하게 움직이며 그녀의 몸에서 흐르는 물을 빨아들이고 그가 혀끝을 세워서 그녀의 내부를 드나들었다. 순식간에 루시아의 눈앞이 점멸하고 절정을 느낀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가 고개를 들어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면서 그녀를 보고 웃었다. 루시아는 도저히 눈을 뜨고 그를 볼 수가 없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 소리가 귓가에 들릴 것처럼 쿵쿵거렸다. 휴고는 몸을 일으켜서 바지를 내렸다. 이미 단단히 일어나서 튕겨 나오는 중심을 쥐어 그녀의 작은 주름에 맞추고 단번에 허리를 밀어 올렸다. "흑...." 루시아의 몸이 크게 한 번 펄떡거렸다. 몸을 꽉 채우는 그가 너무 커서 숨이 막혔다. 휴고는 신음 섞인 탄성을 흘렸다. 가만히 넣기만 하고 있어도 갈 것 같았다. 아내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꿈을 꾸었다. 이 몸을 두고 바람을 피운다고? 녹아버릴 것 같이 뜨겁고 좁은 이 안쪽을 대신할 것이 과연 있기는 할까. 휴고는 천천히 그리고 점점 속도를 높여가며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장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몇 가지 일이 있기는 한데 이미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린 지 옛날이었다. 그의 것을 쥐어짜며 파도를 타는 속살이 주는 자극을 느끼고 가느다란 신음과 흐느끼는 교성을 들으며 그의 정수리 끝까지 열이 올라서 어질어질했다. 그녀의 뜨거운 내벽은 마치 그의 심장을 감싸는 것 같았다. 육체적 쾌감을 넘는 충족감에 그는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루시아는 그의 품에서 신음하다가 어느 순간 시야가 암전되는 것처럼 기억이 없었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그가 루시아를 등 뒤에서 모로 끌어안고 목덜미를 타고 입맞춤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뒤에서부터 그녀의 안을 채우고 있는 그의 중심이 부드럽고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온몸이 나른한 와중에 은근하게 내부를 문지르는 그의 움직임에 작은 신음이 나왔다. 허리를 감은 그의 팔에 힘이 더 들어가고 가슴을 쥔 손가락이 움직였다. "좀 진정 됐어?" 그가 귀를 깨물며 귓불을 빨아들였다. 느릿하지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한층 유혹적이었다. 그의 손이 집요하게 가슴을 쥐고 주물렀다. 루시아는 아까 제가 한 투정을 떠올리며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꿈속의 내가 한 짓 때문에 비난받는 건 아무래도 억울하군. 설마 평소에 날 그렇게 보고 있었던 거야?" "아니에요. 제가... 이상한 억지 부렸어요. 미안해요." 정신이 좀 들고 나니까 루시아는 자신이 부린 추태가 몹시 부끄러웠다. 말도 안 되는 억지투정이었다. 자선파티에서 그 여자를 보고 그렇게 민감하게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 화풀이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꿈속과 다르게 많은 사람들의 인연이 바뀌는 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지금 그의 아내는 그 여자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당신, 괜찮아? 자꾸 꿈자리가 안 좋은 것 같은데." "그러게요." 생각해보면 며칠 사이에 부쩍 짜증도 늘어난 것 같았다. 어제는 별것 아닌 일로 하녀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루시아는 평소 자신이 변덕스러운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의 급격한 기분 변화가 당황스러웠다. 어디 아픈 것은 아니고 기분 문제라서 루시아는 이걸 몸의 이상으로 봐야 하는지 아닌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아..." 뭉근하게 안을 건드리는 그의 움직임에 루시아는 앓는 것처럼 희미하게 신음을 흘렸다. 엉덩이에 그의 허벅지가 마주 붙은 자세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그는 안을 휘젓는 것처럼 둥글게 허리를 움직였다. 짜릿할 정도로 격하지는 않은데 온몸이 늪에 빠진 것처럼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당신이 날 믿지 못하다니. 충격이 커." "... 잘못했어요." "아니야. 내 노력이 부족했어." 휴고는 그녀의 몸을 엎드리게 하며 위에서 타고 눌렀다. "앞으로 더 노력할게. 당신이 날 믿을 때까지." 그가 말하는 노력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루시아는 소리쳤다. "믿어요. 믿는다고요!" 루시아는 믿는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을 수십 번은 하고 나서야 그에게 한참 시달리고 기진맥진해서 풀려날 수 있었다. 루시아는 어딘지 모를 숲을 걷고 있었다. 숲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나무들이 빽빽했지만, 전혀 어둡지 않았다. 그녀는 맨발이었다. 발에 닿는 부드러운 이끼의 느낌이 간질거렸다. 홀린 것처럼 숲길을 걸었다. 마치 이리 오라고 길을 열어주는 것처럼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무성한 덤불이나 나뭇가지가 옆으로 비켰다. 그런데 그것이 신기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그냥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아...' 눈앞에 탁 트인 공간을 보며 루시아는 탄성을 질렀다. 마치 아늑한 보금자리처럼 작은 원을 그리는 공간이었다. 발목을 겨우 넘는 얕은 수풀이 융단처럼 깔려 있었다. 그리고 한가운데에 단 한 그루의 나무가 내리쬐는 햇볕을 받고 서 있었다. 오직 세상에 그 나무 하나인 것처럼. 성스러운 광휘가 비치고 있었다. 루시아는 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 가자 나무에는 종류를 알 수 없는 붉은 과실이 탐스럽게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모두 따서 치마폭에 담고 싶은데 아까워서 만질 수가 없었다. 루시아는 나무 주변을 빙빙 돌다가 유난히 붉고 매끈하게 예쁜 열매로 손을 뻗었다. 손으로 잡아 돌렸다. 열매가 나무에서 떨어져 온전히 손에 잡히는 순간에 갑자기 열매에서 환하게 빛이 뿜어 나왔다. 루시아는 번쩍 눈을 떴다. 아침이 밝아오는 익숙한 침실이었다. '꿈...?' 눈앞에 잡힐 것처럼 생생한 꿈이었다. 루시아는 새해 첫날 아침부터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기분에 사로잡혀 눈을 뜨고 한참을 누워 있었다. ============================ 작품 후기 ============================ 시간 흐름 정리 도우미루시아 18살 봄 결혼. 루시아 19살 여름 왕 죽고 수도로. 루시아 19살 겨울 건국절 파티 (데이빗과 아니타 사건)루시아 20살 늦봄 셀리나 공주 탄생현재 루시아 20살 겨울 연말~ 21살이 되는 새해 첫날. (곧 결혼 3년차)ever after 편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 '그래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끝내고 싶지는 않아서 12월 초까지는 연재가 될 것 같네요. ever after 편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 "... 님. 마님." 루시아는 눈을 떴다. 침대 곁에 하녀가 서 있었다. 나른하게 감기는 눈에 힘을 주어서 하녀에게 시간을 물었다. 정오까지 두 시간이 겨우 남은 늦은 오전이었다. 요즘 매일 늦잠이었다. 원래 루시아의 기상 시간에서 세 시간은 지났다. 루시아는 오늘 점심에 왕비와 식사 약속이 있어서 어제 하녀에게 아침에 늦게 일어나면 깨우라고 말해 놓았다. "세숫물을 들일까요?" "음. 그래." 하녀가 몸을 돌려 나가는 뒤로 루시아는 하품하면서 기지개를 켰다. '왜 이렇게 피곤하지.' 평소에 하녀가 깨우지 않아도 아침 일찍 일어나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눈을 뜨면 항상 늦은 오전이고 그마저도 푹 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며칠 계속 낮잠까지 자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어서 나타나는 춘곤증이라고 보기에는 잠이 많이 늘었다. 더구나 루시아는 예민하게 계절을 타는 편이 아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루시아는 아랫배를 잡고 잠깐 몸을 숙였다. 아랫배가 묵직하게 당기면서 콕콕 찌르는 통증이 있었다. 잠시 후 금방 사라졌으나 허리를 펴는 루시아의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며칠 전부터 이렇게 이유를 알 수 없이 배가 아팠다. 오래가는 것은 아니지만, 자꾸 신경이 쓰였다. '궁에 다녀와서 의사를 불러야겠어.'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입궁할 준비 하려면 시간이 없어서 주치의를 부르는 일은 오후로 미뤘다. 어디가 특별히 아픈 것은 아니라서 굳이 주치의를 부를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그녀의 건강 문제에 남편이 굉장히 예민했다. 증상을 무시하고 병을 키웠다가는 주치의가 일자리를 잃을 것이다. '안나가 사람은 괜찮았는데.' 안나를 내보내고 이후에 여러 명 주치의를 겪어보니까 안나가 실력은 물론이고 적극적으로 환자를 치료하려는 자세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들어온 주치의들은 진단을 내리거나 약을 짓는데 몸을 사리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루시아는 이후에 들어온 주치의들과 고용주와 고용인으로서의 형식적 관계만 유지하고 있었다. 세수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는 중에 시중을 들던 하녀가 말했다. "마님. 주인님께서 출타하시기 전에 의사를 불러 진료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루시아는 어젯밤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 요 며칠 당신 미열이 있는 것 같아. 내일 진료 받아 봐. 감기가 오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 "궁에 다녀와서 받을 테니까 주치의에게 일러두렴." "예. 마님." 베스는 왕비궁을 방문한 루시아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두 사람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루시아는 첫 화제로 셀리나 공주의 안부를 물었다. 셀리나는 두어 달 후에 1살 생일을 앞두고 있었다. 왕이 공주의 첫 생일을 축하하는 성대한 파티를 열 것이라고 신년 파티에서 널리 알렸다. 왕은 아들들에게는 적당한 부정을 보여준 것과 달리 유일한 딸은 애지중지했다. 얼마나 공주를 어여뻐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공주가 여자아이답지 않게 벌써 말썽을 부릴 조짐을 부려 걱정이에요." "지나친 걱정이세요. 아이 때는 조금 말썽도 부려야 건강하게 자란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어릴 때는 꽤 말괄량이였답니다." "어머. 공작부인이요?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데요. 공작부인 말을 들으니 좀 안심이네요." 요리가 하나씩 테이블에 올라왔다. 전채로 와인에 조린 토끼 간 요리가 나왔다. 루시아는 한 조각 잘라 입 안에 넣어 씹으면서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와인향과 섞인 토끼 간 요리 특유의 피 냄새가 섞여 속이 울렁거렸다. 평소 즐겨 먹는 요리는 아니어도 먹지 못하는 요리도 아니었다. 억지로 한 입 먹고 주스로 입을 헹궜다. 평소에는 좋아했던 달콤한 주스가 너무 달게 느껴졌다. 단맛보다 좀 더 새콤한 맛의 주스가 마시고 싶었다. 집에 가서 레몬즙을 첨가한 주스를 한 잔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새콤한 레몬 맛을 떠올리자 입맛이 돌았다. 이어서 나온 수프를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양파 수프 특유의 양파 냄새가 역했다. 양파 수프는 집에서도 평소에 자주 나오는 메뉴인데 물렸는지 입맛에 맞지 않았다. 요리로 내오지 말라고 해서 먹지 않은 지 며칠 되었다. 억지로 먹자면 못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루시아는 겨우겨우 서너 입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주스를 마셔서 입안의 양파 향을 씻어 냈다. 주요리는 송로버섯을 얹은 스테이크였다. 오늘 루시아를 초대한 왕비가 요리에 많은 신경을 썼는지 평소에 먹지 않던 고급 요리들이 올라왔다. 입에 넣지 않아도 풍기는 송로버섯 특유의 향기를 맡으니까 속이 메스꺼웠다. 루시아는 차마 스테이크에 입을 못 대고 다시 주스를 마셨다. 빈 주스 잔을 부지런히 채우는 시종의 손길이 바빴다. 석 잔의 주스를 마시며 루시아는 물배를 채웠다. 루시아를 유심히 보던 베스가 시녀에게 명해서 부드러운 빵을 가져오게 했다. 루시아는 시녀가 옆에 흰 빵을 가져다 두는 것을 보며 베스를 보았다. 눈을 마주치며 웃는 베스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빵을 집어 한입 물었다. 다행히 거슬림 없이 먹을 만했다. 식사 후 간단한 간식과 차가 들어왔다. 향이 강한 꽃차가 아니라 곡류를 볶아서 끓인 은은하고 고소한 차였다. 루시아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속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내가 속이 불편할 때 즐겨 마시는 차랍니다. 공작부인 입에도 맞는지 모르겠네요." "아주 맛이 좋습니다." 루시아는 잠시 주저하다가 물었다. "어떻게 만드는 차인지 알 수 있을까요?" 베스가 웃었다. "그럼요. 댁에 돌아가는 편에 만드는 법과 만들어 둔 것을 가져갈 수 있도록 말해 둘게요. 아무래도 공작부인 좋은 소식이 있나 보군요." "네?" "아이를 갖는 초기에는 평소 잘 먹던 음식 냄새가 그렇게 역할 수가 없답니다. 나는 증상이 유별난 편이어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며칠 동안 빵하고 차만 마신 적도 있었지요." 루시아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기만 하자 베스가 놀란 탄성을 질렀다. "어머. 아직 몰랐나 보군요. 하긴. 공작부인은 연치도 어리고 첫 아이니까 모를 수도 있지요." 루시아는 겨우 왕비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아닙니다. 그럴 리 없어요." "의사가 회임이 아니라고 하던가요?"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말 나온 김에 궁의를 부를까요? 아무래도 초기에는 회임 진단을 내리기 쉽지 않지요. 셀리나가 태어날 때까지 나를 담당한 궁의가 아주 의술이 뛰어나답니다. 타국에서 신비한 의학을 배워 왔고 오랫동안 많은 산모를 치료한 경력이 있어요. 손목에 뛰는 맥을 잡아서 임신을 알아내지요." 루시아는 궁의를 부르는 왕비를 막지 못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묘한 기대감을 버릴 수 없었다. 계속 자신의 몸 상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픈 것은 아닌데 전체적으로 어딘가 변한 것은 확실했다. 왕비의 부름을 받아 온 궁의는 나이가 지긋했다. 궁의는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고 루시아의 손목을 붙들어 한참 맥을 눌렀다. "공작부인은 평소 제가 진료하던 분이 아니라서 확신은 드릴 수 없습니다. 여인이 회임하기 전과 후의 맥이 달라져서 평소에 공작부인의 맥을 짚어 봤다면 확실하게 알 수 있으나 지금 상태로는 회임의 가능성이 높다고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궁의는 루시아에게 이것저것 증상을 물었다. 마지막 월경일이 언제였느냐는 질문에는 루시아는 대충 지난달이었다고 얼버무렸다. 주치의가 아닌 궁의에게 불임이라는 비밀을 말할 수 없었다. 그 밖에 몸에 나타난 몇 가지 증상을 듣고 궁의를 고개를 끄덕였다. "전형적인 회임 초기 증상들입니다. 보통 회임 증상이 두어 달 후에 나타나는 분도 있고, 예민한 분은 초기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한동안 몸을 조심하시다가 다음 월경을 시작하지 않으면 회임이 틀림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축하해요. 공작부인. 타란 공께서 아주 기뻐하시겠어요." 베스의 축하를 받으면서 루시아는 겨우 표정관리를 했다. 기쁨보다도 어리둥절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루시아는 실력이 뛰어나다는 궁의가 오진했을 가능성을 따져보았다. 그러나 상황이 지나치게 딱딱 맞아떨어졌다. 루시아의 몸에 일어난 여러 가지 변화를 임신 증상이라고 보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루시아는 집으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도 계속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문득 한 달 반전쯤 꾸었던 꿈이 떠올랐다. 깨고 나서도 한참 기분이 이상했고, 대개 꾸고 나면 곧 잊는 다른 꿈들과 달리 그 날의 꿈은 지금도 보일 것처럼 생생했다. 집에 와서 주치의를 불렀다. 그리고 자신의 불임 증상을 설명했다. 요즘 변한 몸 상태와 궁에서 궁의 진단을 받은 것까지 모두 말했다. 주치의는 한참을 고개를 갸웃했다. "마님의 증상은 회임의 전형적 모습입니다. 궁의까지 진단을 내렸다면 틀림없겠지요." "하지만 말했듯이 난 월경을 하지 않네. 그러면 당연히 불임이지 않은가." "월경이 없다고 불임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마님은 초경을 하셨고, 약초 섭취로 이상 현상이 나타난 것이지요. 몸은 스스로 치료하려는 성질이 있습니다. 어쩌면 마님께서는 저절로 치료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꿈속에서 필립은 루시아에게 불임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주치의 말대로 몸이 저절로 치료했을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 없었다. 꿈속에서는 아이를 가지려고 시도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꿈속 일이 반드시 현실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니까. "감축 드립니다. 마님." 주치의는 공작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공작가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고용인들 말을 들어보면 아이가 없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두 분 사이가 좋다고 했다. 하루라도 한 침실을 같이 쓰지 않는 날이 없어서 주인님 침실은 한기가 감돈다고 숙덕이며 웃었다. "정말... 내가 아이를 가졌다고 보는가?" 주치의는 혼란스러워하는 마님의 반응을 이해했다. 보통 임부는 임신 초기에 기쁨보다는 불안을 느끼고 기분의 변화가 심하며 우울해하는 예가 많았다. 임부는 몸의 보살핌만큼 정신적인 세심한 보살핌도 필요했다. 누구보다도 남편이 도와주어야 임부의 우울증은 더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 주치의는 따로 공작을 만나 마님을 위한 주의사항을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거의 확실합니다." "거의라는 말은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건가?" "마님은 흔치 않은 예입니다. 대개 임신은 월경으로 판단합니다. 월경이 없는 상태에서 몸의 이상 증상이 나타나면 임신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여인의 임신은 흔한 현상이지만, 확신하는 진단은 은근히 어려웠다. 임신 증상과 똑같이 월경이 끊기고 배가 나오기 시작해도 임신이 아닌, 상상임신이라는 증상도 있었다. 주치의는 마님의 불안을 가중하지 않으려고 상상임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우선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피로를 느끼지 않게 충분히 많이 주무시고 초기에는 외부 활동도 자제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가장 주의하셔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마님. 부부관계를 자제하셔야 합니다." 멍하게 있던 루시아는 얼굴을 붉혔다. "적어도 지금은 절대 안 됩니다.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고 확신이 드는 시기, 즉 배가 나오기 시작하는 무렵까지는 자극은 금물입니다." 주치의가 물러가고 루시아는 침대에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으로 심란했다. 그동안 몸에서 일어난 이상 증상을 하나씩 되짚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두통도 없네. 한 달? 아니야. 한 달 반? 거의 두 달 가까이 두통약을 먹은 기억이 없어.' 똑바로 천장을 보고 누워서 두 손으로 아랫배를 부드럽게 감쌌다.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아직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떤 증거도 없었다. 그런데 배 안에 생명이 자라나고 있다고 생각하면 몸이 붕 뜨는 것 같았다. 확실히 실감나지 않아서 좋은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임신일 리 없다는 의심을 버리지 못하면서 '어쩌면 혹시'라는 기대는 점점 커졌다. 이러다가 임신이 아니라는 진단을 들으면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내 불임 증상은 의사 말대로 기적처럼 저절로 치유되었다고 쳐도. 그이가 한 말에 따르면 내가 임신할 수가 없잖아.' 주치의에게 자신의 무월경 증상은 설명했으나 남편의 비밀에 속하는 타란 가문 사람들의 특이 체질은 말할 수 없었다. 남편도 불임이나 다름없었다. 루시아는 임신할 수 있는 타란 혈족의 여자가 아니고, 그렇지 않은 보통 여자는 순결할 때부터 특수한 약초로 몸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는데 거기에 해당하지도 않았다. 남편은 루시아에게 아이를 갖게 할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 그럼 내 애가 아니겠지. ]루시아는 북부에 있을 때 오래전 그가 했던 말이 떠오르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임신 소식을 전하고 그가 만약 같은 말을 또 한다면 슬픔을 넘어서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가 자신의 정절을 의심하면 그가 너무 미워서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아직 임신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그에게 말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아직 모르니까 당분간 입 다물고 있어야 하는 건가.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걱정은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루시아는 침대에서 한참을 뒤척이다가 잠이 들었다. 휴고는 오늘 일찍 귀가했다. 마중 나온 제롬이 마님께서 낮잠이 들어 아직 주무신다는 말을 전하자 인상을 썼다. "어디 아픈 건 아닌가? 내가 오늘 의사 진료를 받으라고 했을 텐데." "마님 일로 주치의가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휴고는 옷을 갈아입기 전에 곧바로 주치의부터 만났다. 주치의는 긴장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편안하게 대할 수 있는 마님과 달리 공작은 만날 때마다 긴장했다. 그래서 정말 닮지 않은 두 분이 부부가 되었다고 몇 번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마님께서 회임하신 것 같습니다." 남편에게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피를 잡지 못한 루시아의 고민은 쓸데없는 짓이었다. 남편에게 아직 말하지 말라고 주치의에게 일러두는 것을 까맣게 잊었다. 주치의는 그동안 마님을 진료하면 꼬박꼬박 결과를 공작에게 고해왔고 이번에도 당연히 공작에게 알리는 쪽으로 생각했다. 곁에서 함께 희소식을 들은 제롬이 웃음을 띠며 "이런 경사스러운 일이." 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휴고는 잠시 말이 없었다. "... 뭘 해? 회임? 아이 말인가?" "확실하지는 않으나 마님의 여러 증상이 대표적인 증거를 보이고 있습니다." 주치의는 오늘 루시아가 왕궁에서 궁의를 진단을 받은 일부터 요즘 마님의 이상 증세까지 연결해서 거의 임신이 확실하다는 설명을 이었다. 그리고 임신부의 심리 상태와 주의사항을 줄줄이 나열하는 의사를 말을 휴고는 잠자코 들었다. "회임이 아닐 가능성은?" 주치의는 아이 아버지가 된다는 소식을 들은 보통 사람과 사뭇 다른 공작의 반응에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지나치게 부부 사이가 좋으면 아이의 존재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남편이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런 경우인가 생각했다. "아주 드물지만, 상상임신이라는 증상이 있습니다. 아이를 간절히 원하는 여인이 겪는데 거의 임신 유사 증상을 보입니다. 하지만 그야말로 아주 희박한 일입니다. 마님이 평소에 아이 문제로 조급해하시거나 우울해하신 일이 없어서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휴고의 드러난 표정은 변화가 없었으나 사실은 대단히 당황하고 있었다. 느닷없이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서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아내에게 가문의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은 후 아내는 한 번도 아이 이야기를 꺼낸 적 없었다. 그래서 휴고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기억 저편에 밀어두고 있었다. "아이라고 언제 확실히 알 수 있지?" "가장 확실한 시기는 아무래도 태동이 있는 5개월 무렵입니다. 현재 마님께서는 길어봤자 회임하신지 두 달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휴고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의사 말대로면 확실히 알 때까지 앞으로 3개월. 너무 길었다. "가장 주의할 일은 부부관계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확실한 안정기가 될 때까지 최소 앞으로 3개월은 부부관계는 안 됩니다." "뭐?" 휴고는 의사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 작품 후기 ============================ 의심스러울 때는 최악을 가정한다. 휴고가 어떤 일을 판단할 때 지키는 원칙이었다. 임신을 최악으로 가정한다는 말은 어폐가 있지만, 휴고는 도저히 발생할 수 없는 현상인 임신을 확실하다고 전제한 후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나씩 짚어 나갔다. '아내는 아이를 갖지 못하는 상태라고 했지.' 월경하지 않아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불임이라고 했다. 동시에 치료법을 알고 있으니까 언제든지 치료할 수 있다고도 했다. 아내의 몸이 치료되었는지는 둘째 문제고 어쨌든 그녀는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보통의 여인이라고 다시 전제했다. 그녀가 임신할 수 있건 없건 그것이 큰 문제는 아니었다. 핵심은 휴고 자신, 타란 혈족의 괴상망측한 혈통이었다. '피를 먹어야 한다...' 휴고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면서 필립이 오래전 했던 말을 곱씹었다. 당시에는 필립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때는 가문에 대한 혐오가 극에 달해 있어서 필립이 말하는 피를 섭취하는 혐오적인 방식이 아주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매사 철저한 휴고가 필립이 정말 진실을 말했는지 다시 따져보지 않은 것은 생각하기도 싫었기 때문이다. '피라고? 웃기는 소리잖아.' 휴고는 이성에 기초해서 당시의 상황과 필립이 했던 말을 분석했다. 필립은 가문의 비전을 말할 수 없다고 버티다가 뜻밖에 순순히 자백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가문 비밀의 방에도 기록이 없는, 필립의 가문이 대대로 이어오며 지켜온 비밀을 그렇게 쉽게 털어놓을 것 같지 않았다. 필립은 아집이 강한 늙은이였다. 가문의 비밀을 토설하느니 제 목을 바치는 쪽이 어울렸다. '나한테 거짓말을 했다. 이거지.' 휴고의 입가에 싸늘한 웃음이 올라왔다. '감히.' 화가 나면서 기가 막혔다. 헛웃음이 터졌다. 주치의 따위가 거짓을 꾸며대지 못할 거로 생각한 오만함이 빚은 결과였다. 휴고가 필립이 조금이라도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으면 진즉 죽였을 것이다. 필립의 가문은 아무리 타란의 혈통을 잇는 유일한 비전을 갖고 있다고 해도 대대로 의사 가문이며 형식적인 작위 하나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오래 타란의 동반자 노릇을 한 것치고 필립의 가문은 오히려 고립되어 있었다. 필립은 가족이 없고 인간관계가 지극히 좁았다. 무슨 비밀이 그리 많은지 조수도 두지 않았다. 고작해야 주치의라고 가볍게 보았다. 필립을 살려 둔 것은 휴고 자신에 대한 처벌이었다. 필립은 죽은 형제에 대한 죄책감과 휴고 자신에 대한 혐오를 극대화하는 매개체였다. 죽은 형제의 목숨 빚 문제도 있어서 '네놈 목숨을 인위적으로 거두지는 않겠다.' 라는 알량한 자비심으로 내버려 두었다. '늙은이가 겁을 모르기는 했지.' 복종하는 척, 하고 싶은 말을 다 지껄여댔다. 그래서 필립과 대면하고 나면 항상 기분이 더러웠다. 그걸 꾹꾹 눌러 참아준 것만으로도 휴고는 필립에게 관대함을 베풀었다. '왜 거짓말을 했을까.' 토설하지 않으면 평생 감옥에서 살 각오하라고 협박했다. 필립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적극적인 거짓을 꾸며댄 짓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만한 행동이었다. 감정상으로는 괘씸하지만, 이성적으로는 그럴 수 있다고 판단했다. 혼자만 알고 있는 비밀을 거짓으로 말한다고 해도 어차피 아무도 모르고, 사실인지 증명할 사람은 휴고뿐인데 휴고는 진저리를 쳤으니까 필립이 거짓을 말했는지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거짓말은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왜 하필 피를 들먹였을까.' 휴고는 필립을 잡아서 끌고 왔던 그때 미치기 직전이었다. 가문이고 뭐고 눈에 보이는 것 없이 극도의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필립이 피를 먹여야 한다는 말을 그대로 믿고 자신의 몸에 흐르는 피에 대한 혐오가 극대화되면서 상대적으로 가문에 대한 분노가 아래로 눌렸다. 만약 필립이 당시 휴고의 정신 상태를 분석해서 일부 계산적으로 거짓을 말한 것이라면. '교활하고 머리가 좋아.' 입만 열면 가문의 혈통을 들먹이는 성가신 늙은이라고만 생각했다. 휴고는 필립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위험한 놈일 수도 있겠군.' 휴고는 그리 쉽게 사람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는 자신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필립에게 경계를 풀었다. 휴고의 경계를 사지 않도록 매사 조심했다는 뜻이다. '비전이 뭘까. 지금 다시 잡아와 묻는다고 해도 늙은이가 순순히 토설할 것 같지는 않은데... 비전이 무엇이든 간에 어떻게 임신할 수 있었을까. 늙은이가 무슨 수작을...' [ 저를 찾으실 날이 올 겁니다. ]턱을 괴고 있던 휴고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헛소리로 치부했던 늙은이가 남긴 한마디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로암에서 지낼 때...' 휴고는 필립이 아내를 치료하겠다며 아내의 주치의를 꾀어 접근하려던 시도를 기억했다.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순수하게 환자를 치료할 목적이었으면 휴고에게 말을 전해도 되었다. 아무리 늙은이가 꼴 보기 싫어도 환자를 치료하겠다는 뜻을 무조건 무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필립은 마치 휴고의 눈을 피해야 한다는 것처럼 행동했다. '치료는 핑계였을지도 모르지. 늙은이는 비비안을 만나고 싶었던 거야. 왜?' 혈통을 잇는 필립 가문의 비전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아내에게 시도할 여지가 있었다고 생각하면 앞뒤가 맞았다. 그러나 시도는 실패했다. 아내가 필립을 만나지 않았으니까. 끈질긴 늙은이였다. 휴고는 다른 건 몰라도 늙은이의 지칠 줄 모르는 타란 혈통에 대한 집착 하나는 인정했다. 필립이 포기하지 않고 수작을 부렸다고 충분히 의심할 만했다. '음식?' 음식에 수작을 부리는 짓은 아무래도 힘들었다. 음식재료는 제롬이 철저하게 관리하는데 수상한 것이 끼어들면 제롬이 모를 리가 없었다. 유일한 가능성은 제롬이 필립과 작당하는 것이다. 그럴 여지는 배제했다. 휴고는 사람을 잘 믿지 않지만, 믿으면 배신의 증거를 확인하지 않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사람에 대한 신뢰라기보다는 그 사람에게 맡긴 일을 처리하는 방식에 대한 신뢰였다. 제롬은 꼼꼼하고 철두철미했다. 제롬의 일 처리 방식을 휴고는 신뢰했다. '늙은이가 수작을 부렸다 치고. 늙은이는 성공을 예측했군. 안사람이 임신할 거로 생각한 거야.' [ 저를 찾으실 날이 올 겁니다. ] '왜 내게 굳이 그런 말을 했지?' 아내가 아이를 갖는 것이 필립의 바람이라면 잠자코 있어도 목적 달성이었다. 오히려 아내에게 무슨 짓을 했다고 자백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태어날 아기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아이가 태어나도 데미안의 신부가 필요하다는 필립의 개소리가 실현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걸 필립 또한 알고 있을 테고. 필립이 아기를 어찌할 주제가 못 되었다. 아내 주변은 철통 보호 중이었다. 필립이 공작저 근처를 기웃거리다가 눈에 띄어 휴고의 귀에 들어오면 거의 죽은 목숨이었다. 필립이 그런 무모한 짓을 시도할 자가 아니었다. '나보고... 만나러 오라는 소리군.' 휴고는 서늘한 웃음을 지었다. '나를 부른 소리였어.' 휴고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살기가 진득하게 묻어나는 광소였다. "좋아. 늙은이. 네놈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들어 보지." 휴고는 딘을 불렀다. "2년 전 야만족 토벌을 하다가 내가 수도로 급히 올라오기 직전에 진지로 삼은 마을 기억하나?" "예. 주군." "당시 마을에 공작가 주치의가 머물고 있었다. 필립. 기억하겠지?" "예. 누군지 알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 마을에 머물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없으면 근방을 다 뒤져서라도 찾아서 끌고 와. 늙은이 사정 봐줄 것 없이 최대한 속도 내서 데려와. 목숨만 붙어 있으면 된다." 명령을 받들어 딘은 즉시 북부로 출발했다. 루시아는 아침 햇살을 보면서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둑해지는 늦은 오후에 잠이 들었는데 눈을 뜨니까 아침이었다. "세상에. 지금까지 잔거야?" 중간에 한 번 깨지도 않고 푹 잤다. 요즘 계속 피곤했는데 몸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지나친 수면으로 찌뿌둥하기는커녕 머릿속도 가벼웠다. 루시아는 하녀를 불러서 세숫물을 들이게 했다. "그이는 출타하셨니?" "아닙니다. 집무실에 들어 계십니다." 휴고는 아내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침실로 들어왔다. 마침 루시아는 옷을 막 갈아입은 참이었다. 시중을 들던 하녀가 주인을 발견하고 꾸벅 고개를 숙이며 물러갔다. 휴고는 자신을 향해 웃는 그녀에게 곧바로 다가가서 끌어안았다. 루시아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잠시 당황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의사에게... 들으셨어요?" "들었어." 휴고는 어제 그녀의 낮잠이 너무 길어져서 걱정했다. 깨워서 뭐든 먹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주치의가 말했다. [ 하루 정도는 괜찮습니다. 마님 말씀이 요즘 피곤하셨다고 하니까 푹 주무시게 두는 것이 낫겠습니다. ]곤히 잠든 그녀를 끌어안고 휴고는 밤새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의 몸은 약간 열이 있어서 따끈따끈했다. 미열은 임신 초기에 흔한 현상이라는 의사 말을 기억하며 휴고는 애써 걱정을 접었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고마워. 그리고... 축하해." "... 뭘요?" "......" 루시아는 쿡, 웃음을 터뜨렸다. "의사가 그렇게 말하라고 했죠?" "... 음." 주치의는 그동안 공작에게 괜히 기가 죽었던 지난날을 만회할 기회라도 잡은 것처럼 일장 연설을 했다. 휴고는 주치의의 수다가 몹시 괴로워서 의사를 남자로 바꾸면 어떨까 잠시 고민했다. 주치의는 휴고에게 임부의 예민한 기분과 우울증에 대해 다양하고 극단적인 증상을 보였던 환자의 예를 들어가며 겁을 주었다. 임신부는 기분 변화가 심하고 예민하므로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상처받기 쉽다고 강조했다. 자신의 말투가 그리 다정하지 않다고 생각한 휴고는 걱정했다. [ 마님은 현재 불안한 마음 상태를 보이고 계십니다. 이럴 때일수록 남편께서 위로하고 진심으로 아이를 환영하는 뜻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주치의가 일러주는 그대로 읊었다. 루시아는 고개를 들어서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당신 말씀에 진심이 없다고요." "... 진심이 없는 게 아니라 솔직히 잘 모르겠어. 싫은 건 아니야." "무슨 말씀인지 알아요. 저도 그런 걸요. 실감도 안 나고. 어쩌면 임신이 아닐 수도 있고요." "궁의가 잘못 진단하지는 않았겠지." 루시아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담담한 그의 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기 어려웠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무덤덤한 남편의 반응을 좋아해야 하는지 걱정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임신했을 리가 없다며 부정하거나 더 나아가 뱃속 아이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최악의 반응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우리 아이예요." 그의 눈이 의아한 빛을 띠었다. "당연하지." 휴고는 루시아가 말한 속뜻을 읽지 못했다. 남편이 자신의 정절을 의심하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루시아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했다. 휴고는 아예 그런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예전에 자식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던 말을 아내가 아직 신경 쓰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말했지만 당신 아이라면 좋아.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서 얼떨떨해서 그렇지 싫은 건 아니야. 서운하면 미안해." "아니에요. 서운하지 않아요." 루시아는 아주 많이 행복했다. 그리고 그에게 감사했다. 그는 오랫동안 자식을 낳기를 거부한 사람이었다. 비록 당신 아이라면 괜찮다고 말하기는 했어도 그때는 태어날 리 없는 아이를 가정해서 한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실로 다가와 눈앞에 현실이 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아이를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그때 한 말이 루시아를 위로하기 위한 입바른 말이 아니었다. 루시아는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았던 불안이 사르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는 좋은 아버지가 되어 줄 거라는 확신 같은 예감이 들었다. 기쁘게 웃는 그녀를 잠시 보다가 휴고는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 루시아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꽤 길고 진한 키스를 나누었다.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있어." "저도요." 어떻게 임신이 되었을까. 남편 역시 그 문제를 고민하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네." "왜 어제까지는 괜찮고.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안 되는 건데?" "......?" "주치의가 돌팔이가 틀림없어. 당신 임신을 진단했다는 궁의에게 물어봐야겠어." "... 뭘 물어봐요?" 루시아는 자신의 말과 그의 말이 어긋나고 있다는 점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어렴풋이 알아차리고 표정이 점점 굳었다. "석 달은 못 한다니. 나를 말려 죽일 셈이 아니고서야." "미쳤어요? 어딜 가서 뭘 물어본다고요?" 루시아가 얼굴을 붉히면서 소리 지르며 그의 가슴을 내리쳤다. 휴고는 뭐가 잘못되었느냐는 것처럼 뻔뻔한 표정이었다. 루시아는 그의 가슴을 팍 밀어내며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러기만 해 봐요. 침실에 발도 못 들여놓을 줄 알아요." 밤의 즐거움을 포기해야 하는 것만도 날벼락인데 아내를 만지지 조차 못 한다니 그보다 더한 고문은 없었다. 휴고는 그녀에게 다시 팔을 뻗었지만, 아내가 야무지게 팔을 뿌리치며 피하자 충격받았다. "당신도 나와 같은 생각이라며." "아뇨! 전 다른 생각 중이었어요. 아이가 다치니까 조심하라는 건데 당신은 그렇게 그게 중요해요?" "다치다니. 내 자식이 그렇게 약할 리 없어." 당당하게 궤변을 내세우는 그가 얄미웠다. 루시아는 냉랭하게 몸을 돌렸다. "가서 하시던 일 하세요. 전 쉬고 싶어요." "또 자? 뭘 좀 먹어야지." "있다가 알아서 먹을게요." "비비안." 침대에 누워서 대꾸도 하지 않는 아내를 바라보다가 휴고는 침실을 나왔다. [ ... 몹시 심리 상태가 불안해지고 기분 변화가 심하며 짜증이 늘고... ]주치의가 강의한 '임신부의 심리상태에 관한 고찰'의 내용을 떠올리며 휴고는 한숨을 쉬었다. 아내는 아이를 가졌다.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주치의는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휴고가 보기에는 틀림없었다. 아니면 순하고 착한 아내가 저렇게 변할 리 없었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는 우울한 현실을 휴고가 깨닫게 되는 것은 좀 더 나중이었다. 휴고는 자다가 옆에서 몸을 흔드는 손길에 눈을 떴다. 루시아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휴고는 놀라 일어났다. "왜? 어디 아파?" "잠이 안 와요." 휴고는 잠시 당황했다. '낮에 그렇게 잤으니 잠이 안 오겠지.' 라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임신했다는 진단을 받은 날로부터 3주. 루시아는 잠이 늘었다. 과장을 보태서 거의 온종일 잤다. 저녁에 일찍 자고 아침에 늦게 일어나며 낮에는 낮잠도 잤다. 평생 잘 잠을 미리 다 자려는 것처럼 잠에 취해 지내는 생활이었다. 휴고는 요즘 거의 아내의 자는 얼굴밖에 보지 못했다. "내가 뭘 해주면 돼?" "그냥 잠이 안 오는 게 아니라 먹고 싶은 게 자꾸 생각나서..." "뭐가 먹고 싶어? 제롬에게 말하면 금방 대령할 텐데." "말했는데 구할 수가 없대요." 제롬이 구하지 못하는 음식. 휴고는 조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뭐기에?" "청포도요." "......" 이제 막 봄이 찾아왔다. 아직도 바깥 날씨는 바람이 매서웠다. 포도나무에는 이파리도 제대로 돋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도 못 구해요?" 그녀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다 뒤져서 찾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맺히지 않은 열매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없었다. 남부지역 아래로 한참 내려가면 기후가 온화한 나라가 있으나 그래도 지금이 포도 수확 철은 아니었다. 기대 가득한 또랑또랑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내에게 안 된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 찾아볼게." "와아." 목을 끌어안으며 품으로 안기는 그녀를 두 팔로 감싸 안으면서 휴고는 식은땀이 났다. '큰일 났다.' 퀘이즈는 왕비로부터 공작부인이 회임한 것 같다는 말을 살짝 전해 들었다. 그 말을 들은 후부터 공작부인이 외부 활동이 없어서 아이를 가진 것이 맞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거의 매일 타란 공작과 얼굴을 마주하는데도 한 달 가까이 영 좋은 소식을 전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러다가는 애가 태어나고 나서 태어났다는 말을 듣겠구나 싶어서 퀘이즈는 슬쩍 먼저 말을 꺼냈다. "공, 곧 아버지가 된다는 소식을 짐이 들었네만." "아버지가 된 지는 옛날입니다." 퀘이즈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타란 공작의 혼외자 아들을 떠올렸다. 무안한 헛기침을 몇 번하고 말을 고쳤다. "둘째를 본다는 말을 들었지." "... 예." "사람하고는. 좋은 소식은 어서어서 전해야지. 축하하네. 공작부인은 건강하고?" "예. 큰 탈은 없습니다." "다행이로군. 왕비는 공주를 가졌을 적에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해 고생이 많았지. 여인이 아이를 가지면 흔한 증상이라는데 공작부인은 어떤가?" "크게 고생하지는 않습니다." "아이가 공작부인을 닮아 순한가 보네. 공을 닮은 사내아이가 태어날지, 공작부인 닮은 공녀가 태어날지 궁금하군. 짐이 부관과 내기를 걸었는데 말이지. 짐은 아들이라고 걸었네. 짐은 공만 믿어." 퀘이즈는 아무래도 도박 운은 지독히도 없는 모양이었다. 껄껄 웃는 퀘이즈를 보며 휴고는 속으로 '여자아이입니다.' 라고 중얼거렸다. 태어날 아이는 반드시 아내를 닮아야 했다. 아니면 이런 고생을 하는 보람이 없을 거라고 휴고는 생각했다. 막간의 시간이 나면 공주의 사랑스러움을 줄줄이 늘어놓는 왕의 팔불출 자랑을 대충 들어 넘기면서 휴고는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는 고뇌로 한숨지었다. 지난 한 달. 이제 겨우 한 달. 한 달은 정말 긴 시간이었다. 아직 아이가 태어나려면 6~7개월은 더 남았다. 앞뒤로 밑이 까마득한 좁은 능선에 서서 오도 가도 못하는 암담함이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했다. 루시아는 음식을 거부하는 입덧 증상이 심한 편이 아니었다. 강한 냄새가 나는 음식을 거북스러워하지만, 대체로 식사는 곧잘 했다. 임신 기간 내내 거의 물밖에 넘기지 못해서 바싹 마르는 산모의 예를 들며 주치의는 다행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휴고도 그 말에는 동의했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먹으면 다 토해내는 입덧 증상으로 고생하는 아내를 곁에서 지켜보는 일은 무척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쉬운 일은 없었다. 입덧은 가벼우나 상대적으로 루시아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워낙 순한 성격이었던 터라 대조가 되어서 더 극적으로 변한 것처럼 보였다. 말투가 쌀쌀맞아지고 짜증이 조금 늘어난 것뿐이지만 아내의 변화를 겪는 휴고의 충격은 컸다. 오늘도 귀가한 휴고를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 틈에 루시아는 없었다. 제롬은 주인에게 어제와 똑같은 대답을 했다. "주무십니다." "저녁은?" "아직 들지 않으셨습니다. 낮부터 주무시는 터라..." 아내의 잠이 지나치게 많아진 것이 아닌가 걱정되어 휴고는 얼마 전 주치의에게 물었다. [ 잠이 많아지고 피로를 쉽게 느끼는 것은 임신 초기의 대표적인 증상입니다. 마님이 많이 주무시기는 하지만,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마님 정도면 대단히 무난하게 임신 초기를 겪고 계십니다. ]정상이라는 주치의 대답에 안심하면서도 섭섭했다. 치료의 방식으로 잠을 줄일 수 없다는 뜻이니까. 아내와 제대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눈 적이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낮에 집에 있으면 그래도 깨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텐데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오는 휴고의 바쁜 일정은 조금도 느슨할 여지가 없었다. 며칠 전에 휴고를 더욱 우울하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나마 매일 밤 아내를 품에 안고 자는 것으로 겨우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는데 그녀가 그런 접촉을 귀찮아하기 시작했다. 엊그제는 잠옷 안으로 손을 넣어서 조금 만졌다고 질색하면서 아예 곁에도 오지 못하게 했다. 휴고는 황당함과 억울함을 어디서 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시 주치의에게 물었다. 요즘 주치의는 공작의 상담사 역할을 하고 있었다. [ 임신 초기에는 남편의 신체적인 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반응은 있을 수 있습니다. 임신 중기에 들어서면 나아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조언이었다. 휴고는 주치의가 돌팔이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죄 없는 주치의에 대한 앙심을 키우고 있었다. 휴고는 아내의 침실로 들어갔다. 어둑한 침실의 침대 위에 누워 있는 형체를 향해 다가가서 조심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바라보기만 하는 중에 등을 보이고 누워 있던 루시아가 몸을 뒤척여 그를 향해 몸을 돌려 누웠다. 휴고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다가 자기도 모르게 멈칫하고 자괴감에 빠졌다. 왜 내 여자를 마음껏 만지지도 못하는 건가. 이런 불합리한 상황을 대체 누구를 탓해야 하는지. 휴고의 시선이 조금 아래로 내려가서 이불로 덮인 그녀의 배를 향했다. 그녀 자궁에서 자라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지의 생명체는 휴고를 인생 최대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래도 아기 탓을 하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아이를 갖는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히 생각했다. 그냥 아이가 생기면 자라다가 낳으면 끝나는 것인 줄 알았다. 이런 과정을 네 번이나 겪은 왕이 존경스러웠다. 휴고는 용기를 내서 손을 뻗었다. 보들보들한 뺨을 만지다가 그녀의 이마를 쓸어서 머리카락을 넘겼다. 루시아가 잠투정처럼 웅얼거리는 소리를 흘리자 휴고는 잠시 긴장했다. 그리고 루시아가 눈을 깜박거리는 모습을 보며 숨을 죽였다. "휴...?" 그녀의 반응이 온순했다. 휴고는 내심 안도의 숨을 쉬었다. 아내의 심리상태가 살얼음판 같아서 휴고는 전쟁터보다 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휴고는 자신을 보며 항상 웃기만 했던 불과 몇 개월 전의 아내가 몹시 그리웠다. 루시아는 그를 향해 웃으면서 두 팔을 뻗었다. 휴고는 이게 웬일이냐 싶어서 냉큼 화답해서 안았다. 부드럽고 따끈한 그녀를 안고 코를 스치는 향기를 맡으며 휴고는 행복은 정말 사소한 것에서 비롯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꿈에서 어머니를 뵈었어요. 젊고 아름답고 행복해 보이셨어요." "부디 매일 당신 꿈에 찾아오시기를 바라야겠군. 젊고 아름답고 행복한 모습으로." 루시아가 농담을 들은 양 웃었으나 휴고는 진심이었다. "저녁은 먹고 자야지. 지금 준비하라고 할까?" "별로 입맛이 없어요." "점심도 대충 먹었다며. 먹고 싶은 것 없어? 뭐든 생각나는 것 있으면 말해 봐." '당신 배 속의 아기가 당신 몸의 영양을 다 빨아먹고 있다는데.'라고 휴고는 주치의가 해준 말에 과격한 표현을 첨가해서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음... 있기는 해요. 그거면 입맛이 날 것 같아요." 휴고는 긴장했다. 이번에는 제발 구할 수 있는 음식을 말하기를 바랐다. 지난번 청포도는 결국 구하지 못했다. 며칠 시무룩해 있는 그녀를 보면서 휴고는 안절부절못하고 자신의 무능력을 실감해야 했다. "어릴 때 살던 마을에 야시장이 열렸거든요. 피터 아저씨가 구운 꼬치구이가 정말 맛있었어요." 뜬금없는 요구였으나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아서 휴고는 안심했다. 야시장. 피터. 꼬치구이. 핵심단어를 기억해 두었다. "알았어." "와아. 그럼 저녁은 그걸로 하면 되겠네요." "... 지금?" "지금이 아니면요?" 되묻는 루시아를 잠시 보다가 휴고는 한숨을 삼켰다. 즉시 제롬을 불러서 지시했다. 제롬은 직접 하인 몇을 데리고 마님이 어릴 적 살았다는 마을을 찾아갔다. 몇 시간 지나서 공수해온 꼬치구이를 받아 들고 휴고가 직접 2층으로 가지고 올라갔다. 루시아는 응접실에서 배내옷을 만들다가 남편이 가져오는 접시를 보며 기뻐하며 휴고를 흐뭇하게 했다. 그러나 겨우 몇 입 먹고 내려놓으면서 배가 부르다고 했다. "청포도는 언제 열릴까요?" 그놈의 청포도. 휴고는 아예 농장 하나를 사버릴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딘이 돌아왔다. 휴고가 필립을 잡아오라고 명령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났다. 휴고가 일러 준 마을에 갔더니 필립은 이미 떠난 지 좀 되어서 주변을 수색하느라 시간이 걸렸고,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서 찾아 데려올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안가에 데려다 두었습니다." "수고했다." 수도 외곽의 낡은 저택을 타란 가문 정보부의 안가로 이용 중이었다. 오래되어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는 저택은 상당한 넓이의 뜰이 에워싸고 있어서 밖에서는 담 안쪽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주변에는 바깥 외출을 하지 않는 괴팍한 노인이 주인이더라는 소문만 돌았다. 안가의 출입구는 저택과 조금 떨어진 곳의 비밀통로를 이용하기 때문에 외부적으로는 저택을 관리하는 고용인 몇 명만 드나들었다. 휴고는 밤늦은 시간에 남들 눈에 띄지 않도록 안가로 향했다. 겉보기에 낡은 저택 안쪽은 보강공사로 방음처리를 했다. 특히 지하로 내려가면 지하에서 어떤 소음이 나도 밖으로 퍼져나갈 일이 없었다. 방 앞을 지키고 선 기사들이 휴고가 나타나자 고개를 숙였다. 묵직한 돌문을 여는 동안 잠시 서 있던 휴고는 "따라 들어오지 마." 명령하고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멈칫했다. 딘을 돌아보며 손을 내밀었다. "검." 딘이 즉시 허리에 찬 검을 풀어 휴고에게 건넸다. 검을 쥐고 안으로 들어가자 금방 문이 닫혔다. 사방이 돌벽으로 막힌 그리 넓지 않은 방이었다. 방음이 철저해서 돌문을 닫으면 밖에서는 안에서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방 한가운데 의자가 둘 있었다. 의자 하나에는 필립이 앉은 채 손이 뒤로 의자에 묶였다. 철재로 만든 의자는 아예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휴고가 혼자 들어가겠다는데 기사들이 순순히 따른 것도 철저하게 안전장치가 마련되어 있어서였다. 휴고는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필립을 노려보았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필립의 안색이 초췌했다. 다친 곳은 없었지만, 밤낮없이 제대로 쉬지 못하고 마차에 실려 와서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혔다. 역시 나이는 속일 수 없다고 필립은 생각하고 있었다. 필립은 차가운 붉은 눈을 보며 흐릿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집어치워. "휴고의 냉랭한 반응에도 필립은 개의치 않았다. 이유 모르고 갑자기 끌려와 온몸이 꽁꽁 묶인 상태인데도 필립의 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이런 늙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휴고는 오늘따라 몹시 거슬렸다." 네놈이 왜 여기 와 있는지 알겠지." "말씀을 해주셔야 알지요." 휴고는 당장 이 늙은이 목을 비틀어버릴까 치솟는 살기를 눌렀다. "네놈이 날 불렀잖아. 그것도 의미 없이 지껄였다 할 참인가?" "아닙니다. 다만 도련님께서 절 찾으실 이유가 여럿 있어서 말입니다. 마님의 치료가 필요하십니까? 아니면, 마님께서 회임하셨습니까?" 휴고의 미간이 꿈틀하는 것을 보면서 필립이 눈을 크게 떴다. "마님이 회임하셨군요." 역시 하늘은 필립을 버리지 않았다. 공작부인의 두통약에 약을 섞어 넣으면서도 필립은 성공을 확신하지 않았다. 변수가 많았다. 마님이 그 두통약을 꾸준히 복용하리라고 장담할 수 없고, 약효가 떨어져서 삼엽쑥 중화의 치료가 더딜 뿐만 아니라 임신 가능성도 극히 낮았다. 그런데 2년 만에 임신이 성공했다. "감축 드립니다." 필립의 축하는 전혀 달갑지 않았다. 휴고는 검을 쥔 손에 힘을 꾹 주고 당장 검집 채 사정없이 내리치고 싶은 욕구를 참았다. "역시 네놈 짓이었군. 피? 날 능멸했을 때는 목숨 부지할 미련은 버렸겠지." "왜 제가 거짓말을 했다고 단정하십니까? 마님께서 다른 사내의 아이를 가졌다는..." 목 아래 서늘하게 닿는 예기를 느끼며 필립은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이었다. 휴고는 일어나서 뽑아든 검을 쥐고 정확히 필립의 목울대를 겨누고 있었다. 살갗을 찌르고 있는 검 끝은 필립이 조금이라도 말을 하면 순식간에 안으로 파고들 것 같았다. "한 번만 더 개소리해 봐." 필립은 휴고를 올려다보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우나 살기가 감도는 눈빛과 가라앉은 목소리. 필립은 휴고가 극도로 화가 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지간한 일에 긴장하지 않는 필립이 등 뒤가 스산했다. 검이 거두어지자 숨을 들이켰다. "가문의 비전입니다. 거짓으로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제 와서 물어도 네놈이 말하지 않을 테고." "말씀드려봤자 그건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비전 따위 알 바 아냐. 어차피 늙은이 죽으면 함께 묻힐 것들." "과거에 제가 한 거짓말이 노여워서 성가시게 절 잡아오라 하실 분은 아니지요." "잡소리는 닥쳐. 네놈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알아야겠어." 휴고는 아내를 보호하는 주변에 빈틈이 있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두통약입니다." 필립은 순순히 자백했다. 어차피 잡아 뗄 생각은 없었다. "두통약." 휴고는 강조해서 뇌까리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는 대로 어떻게 된 일인지 철저히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필립을 잡아 온 첫 번째 목적은 달성했다. "왜 날 보자고 한 것인지 말해." 필립은 물끄러미 휴고를 바라보았다. "제가 무슨 말을 할지 왜 그리 궁금하셨습니까?" "헛수작 부리지 마. 네놈은 살아서 이 방을 나가지 못할 거야." "죽이십시오. 살만큼 산 늙은이가 목숨에 무슨 미련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절 죽이지 못하실 겁니다. 제게서 알고 싶은 일이 있으실 테니까요." 흔들리는 붉은 눈동자를 보며 필립은 탄식했다. 맙소사. 아주 극히 희박한 확률이라고 생각했다. 로암에서 공작이 공작부인에게 유난한 반응을 보일 때부터 한 가닥 의심을 품었으나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여자에게 마음을 품고 약점을 만드는 일은 타란 가문과 북부의 주인이라는 큰 지위에 오른 사내가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필립은 세상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을 살아온 지혜로 깨달았다. 인간의 계획은 거대한 세상의 질서에 비하면 부질없었다. 계획보다는 당장 눈에 보이는 기회에 모든 노력을 다해 매달리는 것이 최고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필립이 공작부인의 임신에 매달린 것도 당시에 그것이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거창한 뒷일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우선 아이가 있어야 뒷일을 도모할 수 있었다. 공작부인이 아이를 가지면 공작은 높은 확률로 불륜을 의심하리라 생각했다. 공작 부부 사이가 멀어지고 태어난 아이가 방치되면 언제고 기회를 노릴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였다. 그러나 아주 희박한 가능성.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확률로 공작이 정말 공작부인에게 마음을 온전히 주고 신뢰할 경우를 대비해서 필립은 공작에게 한마디 뜻 모를 말을 남겼다. 필립이 북부 국경에서 의료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도 언제고 야만족 토벌 문제로 공작이 근방에 오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공작을 만날 기회를 잡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공작가 기사들에게 잡혀서 마차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면서도 필립은 설마 했다. 필립은 공작이 가문에 대한 분노를 풀고 진정으로 북부의 주인으로서의 자리를 받아들이기를 바랐지만, 여자에게 빠져서 마음이 약해지는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무엇이 알고 싶으신지 이 늙은이의 짐작을 말씀드리지요." 필립의 머릿속에 착착 계획이 그려졌다. 지금 막 생각한 계획이 아니라 만약을 대비해서 수개월 넘도록 설계했으나 실행할 일이 없으려니 생각하고 한편에 멀리 치워두었던 계획이었다. "타란 가문 비밀의 방 어디에도. 가문의 혈통을 이어줄 아들을 낳은 신부의 모친에 관한 기록은 없을 겁니다. 이복누이의 존재만 신경 쓰셨지, 이복누이를 낳은 여자들이 어찌 되었는지는 평소에 관심이 없으셨을 테지요." 필립은 붉은 눈동자가 타오를 것처럼 선명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이 적당한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를 출산하시고 마님께서 무탈하신지. 그것이 알고 싶어서 절 부르신 것 아닙니까?" ============================ 작품 후기 ============================ 휴고는 느물거리는 늙은이의 목을 당장 이 자리에서 쳐 버리고 싶었다. '간교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집착으로 똘똘 뭉쳐서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거짓말도 서슴지 않고 할 자였다. 휴고는 어쭙잖은 자비를 베풀어 필립을 살려둔 것을 깊이 후회하며 이를 갈았다. 다른 놈들 청소를 할 때 늙은이 역시 치워버렸어야 했다. 세 치 혀에 놀아나기 전에 영원히 입을 다물도록 지금이라도 죽여 버리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안다. 휴고의 냉정한 판단력은 그런 결론을 내렸다. 필립이 휴고의 안위 문제로 장난질을 했으면 코웃음 한 번 치고 망설임 없이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휴고는 그녀의 목숨을 걸고 도박할 수 없었다. 필립의 말대로 휴고는 아이를 낳고 그녀가 괜찮을지 의혹을 품었다. 같은 혈족이 아닌 보통의 여자는 특수한 방법으로 몸을 만들지 않으면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정상적인 임신이 아니었다. 타란의 유별난 혈통은 휴고에게 자기 정체성에 관한 의문을 항상 가져다주었다. 나는 정말 인간인가. 휴고는 언제나 그런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가뜩이나 약한 아내가 인간 같지 않은 생물의 씨를 품어 키워서 낳으면 정말 괜찮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휴고의 의문에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필립뿐이었다. 그래서 필립을 떠보려 했으나 오히려 필립이 휴고의 속내를 간파했다. 휴고가 필립을 잡아오라고 했을 때부터 이미 속이 읽혔다. 휴고가 아내를 걱정하지 않았다면 필립이 던진 한 마디의 의미를 고민하지 않았을 테고, 필립을 불러 굳이 무슨 뜻이었느냐고 확인하려 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필립은 공작이 자신을 노려보기만 하고 손에 쥔 검을 휘두르지 않는 것을 보면서 공작부인이 공작의 약점이 되었음을 확인했다. 필립은 묘한 상실감을 느꼈다. 완전한 존재가 인간화되는 비극을 목격하는 좌절이었다. '도련님은 완벽합니다. 그 완벽함에 어째서 흠집을 내려고 하십니까.' 공작은 고대 귀족의 유일한 혈통인 타란 혈족이 만든 최고의 역작이었다. 쌍둥이로 태어나서 결국 하나가 죽은 것도 지금의 공작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었다. 고귀한 희생이었다. 필립은 그렇게 생각했다. 죽은 휴고는 약하고 타란 혈족답지 않게 심약했다. 그런 피를 이어받은 데미안 도련님은 불완전했다. 데미안 도련님이 휴 도련님의 딸과 결합하면 또다시 완벽한 후손이 탄생해서 타란 혈족을 이어갈 것이다. 필립은 그런 미래를 그렸다. 목숨이 질겨서 오래 살면 볼 수도 있을 테고, 보지 못하고 죽어도 상관없었다. 필립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당장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뿐이었다. 필립은 완벽함을 내버리고 여자를 택한 공작의 선택에 관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어떤 말을 해도 공작은 귀를 닫을 것이다. 세상일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아서 좋지 않은 일에는 대부분 좋은 일이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공작의 변화는 좋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서 파고들 틈새를 찾았다. "마님께서는 무탈하실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네놈이 정말." 휴고는 이를 악물었다. 이놈을 당장 죽이라고 휴고의 마음속에서 거센 분노가 외쳤다. 검은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필립의 얕은수에 얼마든지 휘말려도 좋았다. 그래서 그녀가 무사하다면 감수할 수 있었다. "제가 어떤 말씀을 드려도 과연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 그래서?" "제가 먼저 신뢰를 드려야겠지요. 마님께서 배가 불러오기 시작할 즈음에 견디기 힘든 복통을 호소하실 겁니다." 필립이 두통약에 섞은 약은 최종 완결판으로 가는 과정에서 탄생한 불완전한 약이었다. 따라서 부작용이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임부들이 태아가 자라나서 자궁이 확장될 때마다 느끼는 통증을 심한 복통으로 앓았다. 배를 감싸 쥐고 데굴데굴 구르며 엉엉 울음을 터뜨릴 정도로 강한 통증으로 괴로워했더라고 기록은 말했다. 임부나 혹은 태아가 잘못되는 부작용은 아니었다. 그저 임부가 임신 기간 내내 아이가 커질 때마다 극심한 고통을 느낄 뿐. 하지만 필립은 그런 속 내용까지는 밝히지 않았다. "처방전을 드리겠습니다. 마님께서 복통을 느끼실 때 처방전대로 약을 드시면 복통이 가라앉으실 겁니다." 필립의 선조는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서 임부들이 겪는 부작용을 해소하는 약을 찾아냈다. 그렇게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현재 사용하는 약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약에 수작 부리지 않았다는 건 어떻게 믿지?" "믿지 못하면 쓰지 않으시면 됩니다." 휴고는 헛웃음을 쳤다. 그전까지 휴고가 알고 있던 필립이 아니었다. 거리낄 것 없다는 듯 몸 사리지 않고 휴고에게 맞서고 있었다. 휴고는 속이 뒤집힐 것처럼 거북하면서 대체 이놈이 무엇을 믿고 이러는지 궁금했다. 놈의 술수에 자신이 말려들 것이라고 확신하는 건가. 그 정도로 자신을 만만히 보고 있는 건가. 필립을 내치고 얼굴 보지 않은 지가 거의 10년이었다. 그 사이 휴고는 공작이 되었고 전쟁터를 휩쓸어 전공을 세웠으며 능구렁이 정치인들을 상대했다. 형제의 목숨이 담보로 잡혀서 죽은 선대 공작에게 뒷덜미 잡힌 채 꼼짝하지 못하던 그때의 자신이 아니었다. 휴고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놈에 대한 평가를 몇 단계 높였다. 고작해야 주치의 따위가 아니라 치열한 거래를 나누는 노련한 정치인의 자리에 놓았다. 로이를 살리려고 라미스 공작과 마주 앉았을 때의 기분을 되살렸다. 머리는 차갑게 식히고 겉으로는 적당한 분노를 내보였다. 놈의 말에 완전히 말려드는 태도를 보였다. "네놈 말대로 복통이 있으면. 이유는 뭐지?" "짐작하시는 대로입니다." "짐작? 내 속을 읽는다고 지껄이는 거냐?" "항상 괴물이라고 하셨지요. 마님은 배 속에 괴물을 키우고 계신 것 아닙니까?" 휴고는 들고 있던 검집을 휘둘러 필립의 머리를 후려쳤다. 둔탁한 소리와 동시에 필립이 "억!" 하고 짧은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머리에 가해진 강한 충격으로 현기증이 핑 돌아서 필립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눈을 감았다. 이마를 타고 주르륵 흐른 무언가가 무릎으로 떨어졌다. 필립은 똑똑 떨어져 옷에 스며드는 붉은 피를 응시했다. "네놈의 독사 같은 혓바닥은 언제고 뽑아버리고 싶다고 생각했지." 살기가 넘실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필립은 욱신거리는 통증으로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형형한 붉은 눈동자는 당장 달려들어 찢어 죽일 것처럼 필립을 노려보고 있었다. 필립은 사납고 잔인한 공작의 성품을 알고 있었다. 노여움이 극에 달한 공작 앞에 있는 자신의 목숨이 붙어 있다는 사실로 필립은 다시 확인했다. 공작부인은 공작의 절대적인 약점이었다. 휴고는 겉으로는 날뛰는 분노를 억누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분노보다는 필립의 말을 분석하고 있었다. 괴물이라는 말은 휴고가 자신을, 그리고 타란 일족을 칭한 말이며 그 말을 할 때마다 필립은 질색했다. 그런데 필립이 스스로 괴물이란 말을 꺼내 휴고를 자극했다. '날 화나게 해서 대화의 주도권을 잡으려 하는군.' "늙은이. 네놈 말대로 저주받은 타란 혈족은 괴물이야. 내가 태어나지도 않은 가문의 저주를 이은 자식에게 미련이 있을 거 같아?" 아이는 지워버리는 그만이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공작을 보면서 필립은 예상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그러지 않으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정말 마님을 잃고 싶지 않으시다면 말입니다." "또 개소리군." "타란의 핏줄은 무척 강한 생명력을 갖고 있습니다. 태아일 때부터 스스로 보호하려는 본능이 강력하지요. 약물로 낙태하려 하려다가는 오히려 모체만 위험할 겁니다. 이 말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믿지 않으셔도 어쩔 수 없지만, 마님께서 위험하실지 모를 그런 모험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 못 한다. 모험은 못 해. 발밑이 푹 꺼져 들어가는 막막함이었다. 휴고는 필립과 자신의 관계를 다시 재설정했다. 동등하지 않았다. 현재 휴고는 철저한 약자였다. 휴고는 가진 정보가 전혀 없고, 필립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위치에서 하는 거래는 형제가 죽은 이후 처음이었다. '정보가 필요해.' 필립이 쥐고 있는 필립의 가문이 대대로 전해오는 기록들을 손에 넣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공작위에 막 올랐을 때 샅샅이 뒤졌어도 찾지 못했다. 아이는 점점 자라 출산일이 다가올 테고 주어진 시간은 한계가 있었다. 어디서 기록을 찾을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휴고는 일어났다. 지금 필립과 더 말을 섞어봤자 가진 패를 다 드러내는 꼴이었다. 돌아서는 그의 눈에 비장함이 감돌고 검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하얗게 변색했다. 당장 검을 뽑아 목을 날려버리고 싶었다. 만약 필립이 뒤에서 휴고를 불러 세웠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신호를 받은 밖에서 돌문을 열었다. 휴고는 문밖으로 나와서 들끓는 심사를 가누지 못하고 한참을 굳은 것처럼 서 있었다. 기사들이 주군의 심상치 않은 기색에 숨을 죽였다. "딘." "예. 주군." "들어가서. 저 늙은이가 말하는 처방전 받아서 가져와. 철저히 감시해. 나 말고 누구도 저놈과 접촉하는 일 없게 해." 기사들의 대답의 들으면서 휴고는 지상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랐다. 발목에 쇳덩어리를 매단 것처럼 한 걸음 한 걸음이 지독히 무거웠다. 미친 듯이 소리 지르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막연한 누군가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자신의 운명,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며 조롱하는 하늘에 대한 분노였다.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밤이 이슥한 시간이었다. 휴고는 집무실에서 한참 멍하게 앉아 있었다. 생각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그쳤으나 도통 두뇌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두통약. 그래... 두통약부터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고...' 그 후는 모르겠다. 머릿속이 새하얀 백지처럼 비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발끝부터 천천히 그를 잠식하는 까마득한 어둠에 송두리째 잡아먹히는 끔찍한 무력함이었다. 그건 공포였다. 불안하게 뛰는 심장이 점점 거세게 울리면서 숨이 막혔다. 사지가 묶여 배가 갈리고 심장이 뽑히는 죽음이 눈앞에 다가온다고 해도 이 정도로 두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를 잃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휴고는 미칠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휴고는 새벽녘에 집무실을 나왔다. 그녀의 침실로 들어가서 곤히 잠든 아내를 우두커니 서서 내려 보았다. 이불을 젖히고 침대 위로 올라가 품 안으로 가득 그녀를 안았다. 미열이 있는 아내의 몸이 따끈따끈했다. 가슴에 차오르는 행복과 절망. 이 여자를 잃고는 살 수가 없었다. 아마 자신은 심장이 터져서 죽을 거라고 휴고는 생각했다. [ 제가 말한 적 없죠? 저랑 결혼해 줘서 고맙다고. ] "... 천만에. 당신은 지독한 늪에 빠진 거야." 그녀는 그날 자신을 찾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남들 다 갖는 아이를 갖는데 온갖 마음고생을 하고, 어렵게 가진 아이는 어미 목숨을 갉아먹는 원흉으로 원망할지 모르는 상황에 부닥친 것은 모두 그녀가 그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서로 모르는 인연으로 살았더라면 그녀가 이런 위험에 처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면 휴고는 평생 잿빛 풍경을 보며 얼어붙은 심장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휴고는 지금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그녀를 놓을 수 없는 자신의 이기심이 추악했다. "사랑해." 휴고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며 시큰거리는 눈을 감았다. 눈에 확 열기가 몰리면서 뜨거운 것이 눈 옆을 타고 흘렀다. 심장이 움켜잡히는 것 같고 목이 죄어드는 것처럼 아팠다.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휴고는 '운다.' 는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를 떠올렸다.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다.' 라는 건조한 표현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으로 뒤얽힌 감정의 울림이었다. 휴고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밤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어둠이 물러가고 새벽을 여는 햇살이 점점 침실을 밝히는 시간의 흐름을 응시하며 오랜 생각의 결론을 내렸다. 루시아는 오늘 아침은 조금 이르게 눈을 떴다. 등에 닿는 온기와 뒤에서 몸을 감고 안은 힘을 느끼면서 웃음을 지었다. 들썩들썩 움직여서 그를 마주 보도록 몸을 돌렸다. 시선을 마주치는 붉은 눈을 향해 생긋 웃고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커다란 손이 머리카락 안으로 들어와서 모근을 스치며 빗겨주는 손길이 기분 좋았다. "비비안. 북부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루시아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는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오래 걸리지 않도록 할게. 꼭 다녀와야 해." "... 네. 급한 일이신 거죠." "지금 같은 시기에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괜찮아요. 아직 아이가 나오려면 한참 멀었는걸요. 그전에는 오실 거죠?" 애써 아무렇지 않게 금방 털어내는 루시아를 바라보다가 휴고는 그녀를 꽉 안았다. 항상 괜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예쁘게 웃는 아내는 변한 것이 없었다. 휴고는 요즘 그녀가 부리는 투정과 짜증이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기뻤다. 그만큼 자신에게 의지한다는 증거 같았다. 휴고는 로암에 있는 가문 비밀의 방을 다시 한 번 철저하게 뒤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유일한 희망이었다. 아주 작은 단서라도 반드시 찾아내고 말겠다. 그녀를 안은 채 휴고는 결연하게 눈을 빛냈다. 북부로 떠난 휴고는 3주 만에 귀환했다. 휴고는 맞이하러 나온 제롬을 데리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안사람은 자는 건가?" "저녁 일찍 침실로 들어가셨습니다. 전하께서 오신 소식은 전하지 않았습니다." "잘했다. 내가 줬던 처방전. 어떻게 됐지?" 휴고는 북부로 가기 전에 필립이 준 처방전을 제롬에게 건넸다. 혹시 그녀가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괴로워하고, 주치의가 원인을 찾지 못하는데 고통의 정도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지속할 경우에 처방전의 약을 지어 먹이라고 말했다. 휴고는 부디 필립이 말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기를 바랐다. "말씀하신 대로 마님께서 심한 복통으로 힘들어하셨습니다. 주신 처방전의 약을 지어 드시고 금방 가라앉으셨습니다." 휴고의 기대는 무너졌다. 그는 깊이 낙담했다. "그리고 말씀하신 마님의 두통약 성분을 알아냈습니다. 전 주치의가 어떻게 그 처방전을 얻게 되었는지도 알아내서 보고서를 올려 두었습니다." 휴고는 책상 가장 위에 놓인 제롬이 올린 보고서를 들어 펼쳤다. 안나에게 접근한 필립의 음흉함을 다시 깨닫고 속으로 한탄했다. 이런 자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실수가 뼈아팠다. "하온데 마님께서 두통약에 관한 조사에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관심이라니?" "마님께서 어떤 두통약을 드시고 계신지 가장 먼저 확인 차 여쭈었는데 마님께서 그 일을 왜 확인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마님께서 드시는 두통약에 관련해서 조사할 것이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전 주치의를 불러서 직접 만나셨습니다." 휴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마님이 전 주치의와 제법 긴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지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휴고는 그녀가 전 주치의와 무슨 말을 했을지 도통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밀린 급한 서류를 몇 개 처리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2층으로 올라갔다. 가문 비밀의 방을 열흘 가까이 전부 뒤집어엎으며 뒤졌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가문 기록의 족보에 의하면 대대로 공작과 후계를 낳은 공작부인의 기록만 나와 있었다. 공작부인의 친정이나 모친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었다. 혈통을 잇는 부분에서 필립 가문을 수없이 언급했으나 어떤 방법인지에 대해서는 쓰여 있지 않았다.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휴고는 멈칫했다. 침실 안은 적당한 밝기로 불이 밝혀 있고, 침대 위에 누워 있던 루시아가 고개를 들며 기쁘게 소리쳤다. "휴! 언제 오신 거예요?" "내가 갈게. 일어나지 마." 당장 침대에서 뛰어 내려올 것 같은 그녀를 제지하고 휴고는 침대로 재빠르게 다가가 무릎을 디뎌 올라갔다. 자신을 향해 두 팔을 뻗는 그녀를 품으로 꼭 끌어안았다. "당신이 오셨는데 왜 아무도 내게 알려주지 않은 거예요." "당신이 자는 줄 알았겠지." "휴. 조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루시아는 휴고의 손을 잡아 자신의 아랫배를 덮게 했다. 휴고는 잠시 흠칫했다. 못 보던 몇 주 사이에 확연하게 배가 나와 있었다. "안에서 아기가 잘 있다고 신호를 보냈어요. 조금 전에요. 누워 있는데 안에서 물방울이 터지는 것처럼 퐁 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몰랐어요. 배가 고플 때 꼬르륵 소리 나는 것처럼 그런 것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또 퐁 퐁 하는 거 있죠. 그런데 갑자기 소름이 돋고 가슴이 막 뛰는 거예요. 그래서 알았어요. 아기가 말을 걸고 있다는 걸요." 루시아는 숨도 쉬지 않고 마구 말을 쏟아냈다. 그녀의 가슴 벅찬 감동이 확연히 드러나서 휴고도 가슴이 뭉클했다. 휴고는 아직 그녀의 아랫배를 덮고 있는 제 손을 내려 보았다. "... 이 안에 있다고...?" "네. 잠시 기다려 봐요." 두 사람은 숨죽이고 한참을 있었지만, 루시아의 배 속에서는 어떤 신호도 보이지 않았다. 루시아는 자신이 느낀 감동을 그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아가야. 움직여 봐.' 라고 몇 번을 속으로 말했지만 잠잠했다. "조금 전에 분명히 움직였는데." 하고 중얼거리며 실망하는 루시아에게 휴고는 부드럽게 키스했다. "잘 지냈어?" "네. 당신은 가신 일이 잘 해결되었어요?" "대충. 배가 많이 아팠다며?" "약 먹고 금방 괜찮아졌어요. 아픈 것보다 아기가 잘못될까 봐 그게 더 많이 무서웠어요." "... 그렇군." 필립이 아기를 지우려고 하면 모체를 위험하게 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어도 아이를 어찌해볼까 하는 시도는 이미 할 수 없다고 휴고는 생각했다. 아이를 잃고 절망하는 그녀를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필립이 이겼다. 휴고는 그녀가 무사하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필립의 수에 넘어갈 무엇이든 하겠다고, 비밀의 방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수도로 올라올 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휴. 당신이 오면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었어요. 두통약이요." ============================ 작품 후기 ============================ "두통약이 왜?" "아이를 가질 수 있었던 건 두통약 때문이죠?" "......" 휴고는 그녀가 참 신기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어떨 때는 어수룩하게 순진하다가 어떨 때는 대단히 날카로웠다. 루시아는 어떻게 임신할 수 있었는지 내내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가 제롬이 두통약에 관해서 묻자 예감이 이상해서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고 캐물었다. 마님의 질문 공세에는 언제나 약한 모습을 보이는 제롬은 "주인님께서 조사를 지시하셨습니다." 하고 순순히 대답했다. 그래서 루시아는 남편 역시 자신과 같은 의문을 갖고 계속 조사해 왔으며 어떤 식으로든 두통약과 관련이 있다는 단서를 얻었다고 짐작했다. 효과가 매우 좋아서 최근 계속 복용하는 두통약을 언제부터 먹기 시작했는지, 누가 지어줬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전 주치의 안나가 지어준 두통약에 문제가 있다는 점은 충격이었다. 루시아는 안나라는 의사를 기본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안나가 의도적으로 두통약에 뭔가를 섞었을 리 없다는 믿음에 기초해서 안나를 불러서 물었다. [ 안나. 안나가 지어준 두통약 속에 날 겨냥해서 특수한 약재를 섞었다는 정황을 의심하고 조사 중이에요. 나는 안나가 관련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조금도 숨기는 것 없이 솔직하게 모두 말해 주었으면 해요. ]안나는 경악한 표정으로 새파랗게 질렸다. [ 두통약 처방전은 로암에서 공작가 주치의 필립 경으로부터 받았습니다. 하지만 마님. 도무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럴 분이 아니에요. ]필립. 루시아는 그 이름을 들으며 기분이 이상했다. '묘한 인연으로 자꾸 얽히는구나.' 꿈속에서 루시아에게 치료 처방전을 준 고마운 사람이었고 현실에서는 세상을 떠난 남편의 쌍둥이 형제 목숨의 은인이었다. 그러나 남편이 필립을 꺼림칙해 하는 기색이라서 루시아도 필립을 마냥 좋은 사람이라고 호감을 느낄 수 없었다. [ 안나. 나는 지금 아이를 가졌어요. ][ 세상에! 감축 드립니다. ][ 고마워요. 안나도 알다시피 나는 불임이었어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치료되었고 원인이 두통약이라고 생각해요. ]안나의 표정이 점점 심각하게 굳었다. [ 내가 아이를 가졌다는 결과는 중요하지 않아요. 나도 모르는 약을 계속 먹어왔어요. 서서히 중독되는 독약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내가 왜 이번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는지 알겠지요? ][ 제가... 이용당했다는 말씀이군요. ][ 나는 안나를 통해 나를 만나려고 하는 필립 경의 요청을 거절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굳이 필립 경이 왜 그래야 했는지 의문이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말해 줘요. 필립 경과 만나 나눈 이야기까지도 모두. ]안나는 필립과의 만남부터 기억을 되짚었다. 차근차근 말을 하면서 미처 당시에는 몰랐던 필립의 의도를 깨닫고 몹시 충격을 받아서 나중에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긴 이야기를 마친 후 몇 번이나 루시아에게 사죄하며 초췌한 안색으로 돌아갔다. 안나로부터 얻은 정보로 루시아는 하나씩 의문을 해결하기 시작했다. 루시아가 알고 있는 치료약은 독특한 향이 있었다. 그러나 두통약에서는 그런 향을 맡을 수 없었다. 필립은 가문의 비전으로 치료약을 가진 사람이었다. 얼마든지 약의 배합을 바꿀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약의 독특한 향을 알고 있다는 정보를 안나로부터 듣고 그걸 없애는 치밀함을 보였어.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그리고 내 불임을 치료해봤자 나만 불임이 낫는다고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이는 평범하게 아이를 가질 수 없어. 여자가 특수한 약초로 몸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걸 필립이 모를 리가 없었다. '삼엽쑥!' 어디에나 널려 있는 잡초 같은 약초이지만, 누구도 정확한 효능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보면 특수한 약초가 맞았다. 꿈속에서 만났던 필립은 남들이 모르는 삼엽쑥의 특이한 효능을 자세히 알고 가문의 비전이라는 치료법을 갖고 있었다. 흔하지 않은 병에 대해서 필립의 가문은 왜 치료법을 찾아내서 비전으로 남겼을까. '나는 어릴 때부터 삼엽쑥을 먹어서 불임이되 불임이 아닌 특이한 몸을 만들었어. 거짓말 같은 우연이지만, 정말 이런 조건이 그이의 아이를 갖기 위한 조건이었다면.' [ 필립 경은 치료가 효과를 보려면 마님께서 초야를 치르기 전까지... 순결한 몸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군요. 왜 그때는 그런 말을 믿었는지... '필립은 내가 조건이 맞는지 확인한 거구나.' 루시아의 등 뒤를 타고 소름이 쭉 돋았다. 필립의 치밀함이 몹시 거북했다. 루시아는 남편이 돌아오면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어서 그에게 묻고 싶은 것도 있었다. 루시아는 안나와 나눈 대화를 빠짐없이 휴고에게 말했다. 휴고는 루시아가 하는 이야기의 사소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모두 새겨들었다. 제롬이 올린 보고서에는 나오지 않는 양질의 정보였다. 필립이 얼마나 교묘하게 필립을 신뢰하는 안나의 마음 빈틈을 파고들어 이용했는지 수법과 과정을 낱낱이 알 수 있었다. 뱃속에 수백 마리 구렁이를 담고 있는 필립의 교활함에 휴고는 치를 떨었다. '삼엽쑥이라고? 그게 관련이 있는 건가?' 휴고는 뭔가 감이 잡힐 듯 말 듯했다. 이 정보를 이용할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요. 휴. 제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점은 필립 경이 왜 그랬느냐는 거예요." 루시아가 가진 가장 큰 의문이자 해결할 수 없는 난제였다. 필립이 왜 그렇게까지 루시아의 임신에 수를 썼는지 모르겠다. 공작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보기에는 과도했다. 수법이 올바르지 못할 뿐 아니라 기분 나쁜 집착이 느껴졌다. "당신에게는 이미 후계가 있어요. 데미안이 당신의 적자가 아니라서 필립 경이 당신의 적자가 타란 가문을 잇기를 바란다고 해도. 전 아들을 낳을 수 없잖아요. 필립 경이 그걸 모를 리가 없고요." 루시아는 휴고의 눈에 당혹스러움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루시아가 무엇을 물어도 솔직하게 모두 대답했던 평소와 다르게 아무리 기다려도 다문 입이 열리지 않았다. 루시아는 가능하면 그를 곤란하게 하는 질문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말해주지 못하면 굳이 캐물을 생각도 없었다. 태동을 듣기 전이었다면 루시아는 물러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기가 보낸 신호를 느낀 감격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서 자라는 생명을 향한 경이로움과 가슴 뭉클한 모성애가 루시아의 마음속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아기와 관련한 문제를 모르고 넘어갈 수 없었다. "휴. 약속하셨지요. 제가 매달리면 당신의 비밀을 제게 말해 줄 수 있을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겠다고." 똑바로 시선을 마주치는 그녀의 흔들림 없는 호박색 눈동자에는 고집이 엿보였다. 휴고는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 들어서 좋은 이야기가 아니야. 당신에게도. 아이에게도." "저는 괜찮아요. 우리 아기도 괜찮을 거예요. 당신 아이가 약할 리가 없다고 자신하셨잖아요." 휴고는 짤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을 내가 어떻게 당하겠어." 휴고는 지난번 그녀에게 가문의 비밀을 털어놓으며 차마 말하지 못한 근친혼에 관한 진실을 털어놓았다. 몹시 혐오스러워할 것이라는 휴고의 예상과 다르게 타란 가문의 추악한 진실을 접한 그녀의 표정은 큰 변화가 없었다. 그저 미간을 찌푸리며 "필립 경은 헛된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군요." 하고 짤막한 소감을 말했다. "휴. 데미안은 제 아들이에요. 태어날 아이의 오라버니가 되겠지요. 저는 두 아이를 의좋은 오누이로 기를 거예요. 당신이 끔찍해하는 타란 가문의 비밀을 두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아요. 당신은요?" "나도 그래." "데미안이 자라서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문제가 되려나요? 평범하게는 아이를 낳지 못할 테니까요. 하지만 방법을 제가 알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요." "방법을 알다니?" "휴. 제가 타란 가문의 비밀 못지않은 허황된 이야기 하나 해 드릴게요. 상당히 긴 이야기가 될 거예요." 루시아는 자신의 비밀을 그에게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죽을 때 무덤까지 갖고 싶다던 가문의 비밀을 밝혔다. 남편이 그녀에게 보여준 온전한 신뢰를 보답하고 싶었다. 루시아는 12살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를 시작으로 긴 꿈으로 봤던 또 하나의 미래를 그에게 말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허무맹랑한 긴 이야기를 들으면서 휴고는 진지했다. "저는 제게 일어난 일을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지난번 말씀드린 어머니의 펜던트가 그런 기적을 보여줬다고 믿고요." "......" 휴고는 이야기가 끝나고 얼마간 말없이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믿기 힘든 이야기지요?" "믿어. 당신 말을 들으니까 오히려 뭔가 짜 맞추어지는 기분이야. 왜 진작 말하지 않은 거야?" "하지만 이런 이야기. 하기 쉽지 않잖아요. 어디 가서 말하면 저보고 미쳤다고 할 걸요." "최소한 그자..." "네?" "... 아니야." 휴고는 메튼 백작을 그렇게 쉽게 죽이는 게 아니었다고 내심 분통을 터뜨렸다. 순해 빠진 여자 같으니라고. 고작해야 공주와 결혼하지 못하게 손을 써 달라니. 이런 사정을 알았다면 그놈에게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고통을 모두 주고 가장 비참하게 죽여 버렸을 텐데! 휴고가 손을 써서 메튼 백작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그녀에게 뭐라 할 수도 없고. 이미 죽은 놈이지만, 더 괴롭히다가 죽이지 못한 사실이 휴고는 몹시 분했다. 속으로 씩씩거리다가 휴고는 그녀의 긴 이야기 속에 담긴 중요한 단서를 잡았다. "그러니까 당신은 삼엽쑥이라는 약초로 불임이 되었고. 그게 타란 혈족의 아이를 갖는 조건이라고 본다는 거지?" "네. 정말 기가 막힌 우연인 것 같아요." "당신이 알고 있다는 치료 방법. 내게도 알려 줘." 루시아가 꿈속에서 봤다는 처방전을 찢어준 노트는 필립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비전의 기록이 틀림없었다. '그 기록을 손에 넣어야 해.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야.' 도대체 어디에 숨겨 놓았을까. 로암에는 없었다. 오랜 세월 이어온 필립 가문의 기록물은 꽤 양이 많을 것이다.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상당한 공간이 필요하리라. 휴고는 오래전 기억을 되살렸다. 공작이 되기 전이었다. 형제를 살리기 위해서 죽은 선대 공작이 시키는 대로 인형 노릇을 하던 시절에 휴고는 한 달에 한 번 형제를 만나서 무사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창이 없는 마차를 타고 꼬박 하루를 달려서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도착하면 형제를 태운 마차가 도착해 있었다. 어디서 지내고 있느냐는 물음에 형제는 대답했다. [ 나도 모르겠어. 굉장히 작은 마을인데 감시자가 있어서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어. 너를 만나러 오려고 마차를 타기 전에는 항상 잠드는 약을 먹거든. 중간에 깨워서 밥을 먹이는 횟수를 따지면 며칠은 달리는 것 같아. ]형제가 말하는 작은 마을은 굉장히 외진 곳이고 일종의 안가 비슷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필립 가문의 은신처도 그곳이며 기록물도 그곳에 보관하고 있을 거로 짐작했다. 공작위에 올랐을 때 꽤 시간을 들여서 은신처를 찾으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로암으로부터 마차를 달려서 며칠이 걸리는 범위는 수색하기에는 너무 넓었다. '늙은이가 비밀 장소에 가서 치료약을 지어온다면서 일주일 만에 가져다주었다고 했지.' 안나의 진술은 중요한 단서였다. 필립은 치료약을 지으러 은신처에 다녀온 것이 틀림없었다. 조심성 많은 필립이 마차를 타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뒤를 밟히지 않는지 조심하면서 걸어갔을 테고 일주일 중에 약을 만드는 시간을 제외하면 노인 걸음으로 편도 사흘 거리. 그 정도면 작은 마을을 찾기 위해서 샅샅이 수색하기에 그렇게 넓은 범위가 아니었다. '마차로 며칠을 달리는 척 시간과 거리를 속였던 거야. 일부러 멀리 돌아서 착각을 일으킬 의도였겠지.' 실마리를 잡았다. 막막하던 앞이 확 트였다. 휴고는 벌떡 일어난 자신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아내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을 잡고 입술이며 눈이며 가리지 않고 마구 키스를 퍼부었다. "고마워. 이젠 됐어." 휴고는 멍한 그녀를 뒤로하고 빠르게 침실을 나가버렸다. 루시아는 그가 남긴 말이나 엉뚱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어쩐지 몹시 신이 난 것 같아서 피식 웃고 말았다. 루시아는 침대에 누워서 아랫배에 두 손을 올렸다. 아까 느꼈던 아기의 태동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아가야. 움직여 봐. 엄마야." 루시아는 조급해하지 않고 계속 말을 걸었다. 한참 만에 마치 대답을 하는 것처럼 안에서 퐁 하고 물방울 터지는 진동이 느껴졌다. 루시아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며칠 후 휴고는 안가를 찾았다. 필립을 가둔 지하의 밀실로 들어갔다. 휴고가 방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기사들이 필립을 이전처럼 의자에 묶어 두었다. 휴고는 필립을 노려보면서 천천히 마주 놓인 의자에 앉았다. 허기를 면할 정도로만 식사를 배급받고 햇빛을 오래 받지 못한 필립은 한 달 사이에 확 나이가 들어 보였다. 초췌한 노인을 바라보는 휴고의 눈빛에는 오직 살기만 가득했다. "오래 뵙지 못한 것을 보니 북부에 다녀오신 모양입니다." 휴고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무것도 찾지 못하셨겠지요." 말없이 노려보기만 하는 공작의 반응으로 필립은 자신이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했다. 필립은 곧 태어나실 귀한 아가씨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미칠 짓은 절대 할 생각이 없지만, 공작은 필립을 믿지 못할 것이다. 믿지 못하는 만큼 공작은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공작부인의 안전을 거래하자는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원하는 게 뭐야." "마님과 아가씨가 무탈하시도록 약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네놈에게 안사람 머리카락도 보일 생각 없어." "그러십시오. 제가 지어드리는 약만 드셔도 됩니다." 필립은 불신 가득한 공작의 눈을 보며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는 격언을 잊지 않았다. 필립은 공작의 거칠고 사나운 성정이 언제든지 터질 수 있다고 보았다. 사방이 꽉 막힌 막다른 길로 몰면 필립에게 휘둘리는 상황에서 느끼는 모멸감을 견디지 못하고 앞뒤 가리지 않고 필립을 죽일 가능성이 있었다. 공작을 적당히 몰아세워서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조건을 세워야 한다. "마님께도, 아가씨 곁에도 접근하지 않겠습니다. 데미안 도련님과 남매로 키우려고 하시는 뜻을 따르겠습니다." "... 그래서?" 공작의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지는 것을 느끼며 필립은 내심 됐다고 생각했다. "데미안 도련님의 신붓감이 꼭 마님께서 낳을 아가씨일 필요는 없지요." ============================ 작품 후기 ============================ "딴 여자에게서 애를 낳으라는 말인가?" 필립은 긍정처럼 침묵했다. '기발하게 머리는 잘 돌아가는 늙은이야.' 늙은이가 상계에 진출했으면 거상으로 이름을 날렸을 것 같다고 휴고는 생각했다. 임신한 아내와 곧 태어날 아기, 두 목숨의 안위를 빌미로 어떤 엄청난 요구를 할지 잔뜩 긴장한 상대방의 허를 찔러서 그 정도면 별 것 아닌 대가라고 마음의 짐을 덜어주는, 훌륭한 거래 방식이었다. 그러나 필립은 거래 상대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가장 기초적인 실수를 했다. 임신한 아내와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한 명목으로 다른 여자와 동침하는 일은 휴고가 수용 가능한 제안이 아니었다. 휴고는 성실한 남편이 되겠다는 약속을 절대 깨뜨릴 생각이 없고, 무엇보다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핏줄을 혐오했다. 곧 태어날 아이는 아내가 낳을 아이라서 특별할 뿐이었다.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가 그의 핏줄을 낳는다는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났다. 종족 번식을 위해 낯선 여자를 안아야 하는 상황을 떠올리니까 가장 큰 문제점은 물리적인 불가능이었다. '도저히 설 것 같지가 않은데.' 휴고는 팔짱을 끼고 시선을 내려서 하복부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신체 기능상의 문제로 요구에 응할 수 없다고 하면 필립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심각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잡생각이었다. 무엇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었다. 휴고는 필립을 잡아왔을 때부터 로암에 있는 필립의 거처와 북부 국경의 필립 거주지를 모두 뒤지고 필립의 은신처를 찾기 위한 수색을 지시해서 계속 찾고 있었다. 필립의 거처에서는 역시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고 필립의 은신처를 찾는 노력은 사막에서 바늘 찾는 일처럼 막연했다. 그러나 며칠 전 휴고는 범위를 좁히는 단서를 얻어서 구체적인 지시를 전달했다. 지금쯤은 명령을 하달받았을 것이다. 명색이 은신처이니만큼 쉽게 발견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몇 개월 안으로 찾을 수도 있고 더 시간이 걸릴 수도 있었다. 필립의 은신처를 찾을 때까지 막연히 기다릴 수 없었다. 오랜 시간 필립을 찾아가지 않으면 또 무슨 계략을 짜는 머리를 굴릴지 모른다. 휴고는 지금이 놈의 허를 찌를 적기라고 판단했다. 이제 휴고는 일방적으로 불리한 처지가 아니었다. 필립의 처방전이라는 유일하지만 강력한 정보를 손에 넣었다. 정보를 쥐자 휴고는 좀 더 멀리서 상황을 바라볼 여유를 찾았다. 필립의 고의적인 말 흘리기에 걸려든 자신의 가장 큰 실수를 깨달았다. 아이를 낳으면 아내가 위험하다는 필립의 말은 빈틈이 있었다. 만약 정말로 아이가 제 어미를 죽이고 태어나면 아이마저도 죽일 휴고의 성정을 필립이 모를 리 없었다. 수가 실패하면 타란 혈족의 귀한 아가씨가 죽는다. 타란 혈통에 미친 늙은이가 도박할 것 같지 않았다. '입만 열면 거짓말하는 늙은이니까. 휴고는 승부수를 띄워보기로 했다. 필립은 공작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은 것을 보면서 공작이 냉정하게 거래를 할 마음이 들었다고 판단했다. "네놈 제안을 이해할 수 없어." 휴고는 좀 더 필립의 계획을 알아보기로 했다. "무엇이 말씀입니까?" "애가 그렇게 쉽게 생기나?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애가 들어서지 않으면? 안사람이 무사히 애를 낳으면 네놈을 죽여 버릴 건데." 말끝에 진득하게 묻어나는 살기에도 필립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데미안 도련님의 신부가 되실 아가씨가 태어나실 때까지 마님은 제가 드리는 약을 계속 드셔야 할 겁니다. 그전까지는 효과가 미진한 약을 드릴 테니까요." 필립은 태어날 아가씨를 위해서 공작부인의 목숨까지 해할 생각은 없으나 공작부인에게 기력을 빼앗는 약과 회복하는 약을 번갈아 쓸 작정이었다. 시름시름 앓아누웠다가 필립이 주는 약을 먹고 원기를 되찾으면 공작은 약을 얻기 위해서 필립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네놈 뜻대로 애가 태어났다 치고. 그 뒤는 어쩌려고? 내가 네놈과 아이를 살려둘 것 같나?" "그 문제는 안전을 약속해 주시면 됩니다." "약속?" 휴고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약속하고 지킬 거라고 믿는 건가?" 그렇게 네놈이 순진하다고? 휴고는 한 편의 희극을 보는 것처럼 우스웠다. "믿고 싶습니다만. 안타깝게도 믿음이 부족한 세상이지요. 도련님께서는 타란 가문의 대를 잇는 중대한 문제가 저희가문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타란의 주인들이 순순히 납득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역대 타란의 가주들은 비밀의 방을 들어갔다가 나오면 하나같이 어떤 방식으로 혈족을 이어나가는지 알고 싶어 했다. 필립 가문의 선조들은 굳이 비밀을 꽁꽁 끌어안아서 위험을 자초하지 않았다. 타란의 가주들이 요구하면 궁금해하는 사실 대부분을 공개했다. 타란의 가주들은 호기심을 충족하는 대신 혼자만 알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며 기록으로도 남기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당연히 구두 약속은 아니었다. 약속을 강제하는 방법이 있었다. "저희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귀물이 있습니다. 계약자를 구속하는 마도구입니다." "재미있군. 그럼 그 마도구는 어찌 가져오려고? 네놈은 여길 한 발자국도 못 나가." "안전한 곳에 보관 중입니다만, 사람을 시켜 가져오게 해도 됩니다. 어차피 다른 사람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전속 마도구라서 계약 당사자 중 일방은 반드시 저희가문 사람이어야 합니다." 휴고는 특이한 마도구에 대한 흥미를 버렸다. 필립의 가문은 필립 혼자 남았다. 필립이 죽으면 마도구는 쓰레기가 된다는 소리였다. 조사한 바로는 필립은 젊어서 아내와 아들이 죽은 이후에는 새로 가족을 만들지 않았고 부친이 죽은 후 계속 혼자였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집착이 강한 늙은이가 자기 뜻을 이어받을 후손을 두지 않은 점은 이상했다.' 놈의 속사정은 알 바 아니지. '반드시 놈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놈의 가문은 필립의 죽음으로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여자는? 아무 여자나 애를 가질 수 없잖아." "준비되어 있습니다." "준비되어 있어?" 필립이 딴 여자를 품으라고 말할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정말 필립 입에서 여자가 이미 있다는 말이 나오자 기가 막혔다. 그동안 늙은이가 자신의 눈을 속이고 대체 얼마나 많은 짓을 꾸민 것인가. "내 허락 없이 독단적으로 그런 짓을 했단 말이지." "저희가문이 대대로 해왔던 임무입니다. 허락을 받아 하던 일이 아닙니다." "네놈이 준비한 여자가 애를 못 가지면?" "대신할 여자가 있습니다." "준비한 여자가 한둘이 아니군. 양성소를 차렸어." 휴고는 실소를 터뜨렸다. "사람을 종마 취급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휴고는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이런 취급을 받아들인 역대 타란의 가주들이 미친놈들이라고 휴고는 생각했다. "정리해볼까. 안사람에게 약을 지어주는 대가로 나는 네놈이 준비한 여자와 동침해서 애를 낳으라는 거군. 애는 네놈이 거둬 키울 거고 난 건드리지 않기로 약속하는 계약을 해야겠지. 그리고 그 이후에는? 데미안이 네 뜻대로 될 것 같나?" "그렇게 먼 미래는 아직 모릅니다. 저는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입니다." "미래를 안 본다..." 휴고는 중요한 단서를 얻었다. 필립이 자신만만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이를 낳으면 아내가 무사하지 못할 것처럼 말하는 필립의 태도는 진실에 기초한 당당함이 아니라 모닥불에 달려드는 부나방 같은 무모함일 수 있었다. "늙은이. 네놈이 뭘 원하는지 알겠다. 내가 언제까지 결정해야 하나?" "마님께서 산달이 다가오시기 전에 최소 한 달 전부터는 약재로 몸을 보하셔야 합니다." "안사람 배가 불러올수록 나는 불안해 지겠지. 교묘하게 파고들 줄 알아. 그것도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방식인가?" "......" 필립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이죽거리는 공작의 말투가 거슬려서가 아니었다. 필립은 스스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자신했다. 공작이 공작부인을 버리지 못하면 자신의 제안에 이끌려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믿음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공작의 태도는 아무리 봐도 불리한 계약을 앞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묘한 위화감을 떨칠 수 없었다.' 뭐가 잘못되었을까. '공작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선을 넘었는지도 모른다. 공작이 공작부인보다 자신의 자존심이 더 귀해서 공작부인의 안위가 어찌 되건 필립과의 거래를 거절하면 계획은 실패였다. 달이 차서 아가씨는 태어나도 공작부인은 무탈할 것이다. 필립의 거짓말을 공작이 간파하면 반드시 필립은 죽은 목숨이었다.' 아니야. 아무리 남녀의 애정이 한때의 광풍이고 정염에 불과하다고 해도 바람이 멈추고 불이 꺼지기에는 아직 이르지. '기세가 눌리면 끝이다. 발을 헛디디면 까마득한 아래로 추락하는 갈림길에 서 있는 상황이었다. "확실히 묻겠다. 네놈이 지어준 약을 먹지 않으면 안사람이 아이를 낳고 죽는 건가?" "마님이 무탈하시기 위해서는..." "예, 아니요, 로 대답해." "... 그렇습니다." "뭐가 그렇다는 거지?" "마님께서 오래 살지 못하실 겁니다." 속을 꿰뚫어볼 것처럼 자신을 응시하는 붉은 눈동자를 보며 필립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공작이 천천히 입 끝을 휘며 웃자 뒤가 섬뜩했다. "오늘 내가 늙은이를 찾은 건 무슨 개소리를 할지 궁금했기 때문이야. 실망시키지 않는군." 휴고는 필립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순간이 자신의 승리라고 직감했다. 그리고 그럴 자신이 있었다. "내가 북부에서 뭘 찾았을 것 같나?" "......" "삼엽쑥이라. 흥미로워. 그런 흔한 잡초가 타란 혈통을 잇는 비밀이었다니." 필립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머릿속은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공작은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이 정도 수는 예상했다. 말려들 생각이 없었다.' 안나를 통해 삼엽쑥에 대한 단서를 얻어서 괜히 넘겨짚으시는군. '필립은 평소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마님께서 삼엽쑥 복용으로 월경이 없는 증상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치료를 해드린다고 했지요." 휴고는 픽 웃고 약초의 이름을 하나씩 불렀다. 루시아가 꿈속에서 필립으로부터 받았던 처방전 내용이었다. 여유를 잃지 않던 필립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삼엽쑥의 완벽한 치료법은 역대 타란의 가주들에게 공개한 적 없는, 그야말로 필립의 가문 대대로 후손들에게만 이어오는 비전이었다. 가문의 비밀 노트를 읽지 않고는 알 수 없었다. "네놈의 은신처를 찾아냈지." 필립 표정이 회복 불가능하게 무너졌다. 흑색으로 변한 일그러진 안색이 경련하고 있었다. 휴고는 필립이 제대로 머리를 굴리기 전에 허를 찌르는 마지막 확인을 했다. "꽤 열심히 기록들을 살펴봤는데 어디에도 아이를 낳고 잘못된다는 말을 없더군." 휴고는 유심히 필립을 살폈다. 만약 그녀가 아이를 낳고 죽는다는 말이 사실이었다면 필립은 단번에 휴고가 거짓을 말했다고 알아차렸을 것이다. 거무죽죽한 필립의 안색이 변함없는 것을 보며 휴고는 소리 없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거짓말이었다. 아내는 무사하다. 그녀를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를 내려놓자 필립에 대한 강렬한 살의가 치밀었다. "차라리 죽음이 편한 고통을 겪게 해주겠다." 절대 놈에게 편안한 죽음을 내리지 않겠다. 휴고는 형형한 눈빛으로 필립을 노려보며 음산하게 말했다. "데미안을 끝으로 다시는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지닌 사내아이는 태어나지 않을 거다." 넋 놓고 있던 필립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휴고는 필립의 눈에 가득한 절망을 즐겁게 감상했다. "이 저주받은 혈족은 끝이야." 언제나 적당한 겉웃음과 여유를 보이던 필립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원망과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휴고를 노려보다가 괴상한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휴고는 오늘 이후 다시는 보지 않을 놈의 발작하는 꼴을 보다가 등을 돌려서 방을 나왔다. "혹시라도 놈이 자진하지 못하게 감시 철저히 해." 대답한 기사 하나가 안으로 들어가고 돌문이 닫히자 흘러나오는 소음이 사라졌다. 휴고는 안전에 안전을 기하기 위해서 당분간 필립을 그대로 둘 생각이었다. 수색대가 필립의 은신처를 찾고 아내가 아이를 무사히 낳을 때까지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다가온다는 공포, 가문의 비밀이 모두 드러나고 파괴되는 절망, 타란 혈족의 끝을 선언한 휴고의 마지막 말.' 셋 중에 놈을 가장 괴롭히는 건 과연 뭘까.'지상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를 억누르고 있던 타란 가문의 그림자에서 비로소 벗어나는 기분이었다. 완성된 분홍색 양말 한 짝을 들고 루시아는 흐뭇하게 웃었다. 손가락 몇 개가 겨우 들어가는 앙증맞은 크기가 사랑스러웠다. 요즘 루시아는 태어날 아기를 위해 이것저것 만드는 재미가 들렸다. 턱받이와 손수건을 여러 장 만들고 오늘은 아침부터 뜨개질로 양말을 뜨기 시작해서 한 짝을 완성했다. "어머." 루시아는 안에서 툭 움직이자 놀라 배를 보았다. 귀엽게 퐁 퐁 하던 태동이 언제부턴가 제법 큰 움직임으로 바뀌었다. 루시아는 배에 손을 얹고 조곤조곤 평소처럼 말을 걸었다. "아가야. 네가 신을 양말을 만드는 중이야. 그런데 엄마 솜씨가 미숙해서 겨우 한 짝 만드는데도 반나절이 걸리는구나." "말하면 알아듣나?" 루시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곁에 다가온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를 오후 시간에 보는 일이 무척 오랜만이었다. 요즘 남편은 무척 바빴다.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오는 평소 일정에 더해서 집에 있을 때에도 밤늦게까지 집무실에 사람이 드나들었다. 함께 있을 때도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는 모습이었다. 며칠 전에는 마차 가득 서류와 책이 실려 왔는데 며칠 내내 외출도 않고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럼요. 알아듣지요. 바쁜 일은 끝나셨어요?"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홀가분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보름 전에 휴고는 필립의 은신처를 찾았다는 보고를 받았고, 며칠 전 은신처에 있던 방대한 모든 기록물을 받았다. 그리고 며칠에 걸쳐서 기록을 뒤져서 여아를 출산한 여자들의 기록을 찾아냈다. 여자들은 모두 아이를 무사히 출산했다. 그리고 아이가 젖을 뗄 무렵에는 비밀 유지를 위해 처리되었다. 얼마든지 할 만한 짓이라서 놀랍지도 않았다. 그저 휴고는 아내가 아이를 낳아도 무탈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모든 짐을 다 내려놓은 심정이었다. 갑자기 아내가 몹시 보고 싶어서 곧바로 집무실을 나와 2층으로 올라왔다. 휴고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서 무릎에 놓인 작은 뜨개질 양말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이렇게 작아?" "저도 갓 태어난 아기는 보지 못해서 모르지만, 이것도 크대요. 그런데 금방 자란다고 했어요. 아, 지금 움직였어요. 어서요. 어서." 루시아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아 배에 올렸다. 기다렸으나 잠잠했다. "아무래도 날 싫어하나 봐." 휴고는 아직 태동을 느껴보지 못했다. 안에서 움직인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궁금한데 휴고가 손을 가져다 대면 조금 전까지 막 움직였다는 아이가 조용해졌다. 번번이 실망하는 남편이 안 되었고 귀엽기도 해서 루시아는 그를 위로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버지인데. 아무래도 수줍음을 많이 타나 봐요." "경계심이 많은 건 바람직하지. 태어나면 철저히 가르쳐야 해. 당신을 닮아서 겁이 없을까 봐 걱정이야." "제가 뭘요." "혼자서 날 찾아왔잖아. 그런 짓은 하면 안 돼." "그럼 당신과 결혼하지 못했을 텐데요? 또 다른 내가 지금의 나를 꿈으로 보고 있을지도 몰라요. 당신 충고를 따르면 좋겠어요?" 고민하는 그를 보며 루시아는 쿡쿡 웃었다. 안에서 툭, 움직임이 있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 입에서 작은 탄성이 나오며 서로 마주 보았다. 그걸 시작으로 연속해서 몇 번을 더 움직였다. 조금 전 느낀 움직임이 착각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아기가 당신에게 인사했어요." 휴고는 배에 손을 얹고 멍하게 부른 배를 보고 있었다. 정말 안에 생명이 자라나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점점 불러오는 그녀의 배를 보면서 신기하다고만 생각했다. 실제로 움직임을 느낀 기분은 뭐라 말할 수 없이 이상했다. 가슴 안쪽 어딘가가 짜릿하게 죄어들었다. 아내 문제로 가슴을 졸이면서 아이를 탓하는 마음이 밑바닥에 있었다. 그런 앙금이 사라지고 잘못 없는 아기 탓을 했다는 미안함과 무사히 잘 자라고 있는 아이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고개를 숙여서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발갛게 상기된 그녀를 보며 웃다가 한 손으로 그녀의 뒷목을 받치고 짙은 키스를 이었다. 말랑한 입술을 삼키고 작은 입안 구석구석을 더듬었다. 혀가 맞닿아 뒤얽히며 두 사람은 깊은 체온을 나누는 키스에 빠져들었다. 휴고는 그녀가 숨을 할딱일 때까지 격한 키스를 밀어붙이다가 마무리처럼 가벼운 입맞춤을 계속 이어갔다. "하자." 그의 눈에 정염이 가득했다. 루시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하게 해 줘. 석 달하고 보름을 참았어." 기겁할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그녀가 살짝 시선만 피했다. 설득과 애원, 모든 수단을 다 쓰려고 각오했던 휴고는 그녀의 반응이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의심스러울 때는 최악을 가정한다는 원칙을 버리고 휴고는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기로 했다. 이건 허락이야. 그녀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냉큼 안아 들었다.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고 탈의를 시작했다. "괜찮은 거지?" 누운 그녀의 위에 올라 배를 누르지 않게 조심하면서 팔로 몸을 지탱하고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 싫은데 거절하지 않는 상황은 달갑지 않았다. 휴고는 그녀와 함께 사랑하고 싶었다. 일방적인 욕망을 풀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루시아는 간절함과 갈망이 섞인 그의 눈을 보면서 얼굴을 붉혔다. "... 정말 하고 싶어요?" "한계야. 내가 얼마나 불면의 밤을 지냈는지 모르겠지. 옆에서 당신은 아주 잘만 자더라." 루시아는 살짝 입술을 삐죽였다. 아주 가끔 새벽에 잠에서 깰 때가 있는데 그때 보면 그는 잘만 자고 있었다. "싫어? 도무지 안 되겠어? 주치의한테 물어봤어. 조심히 하면 해도 된대. 깊이 안 넣으면 된다기에 해도 되는 체위도 몇 가지..." 루시아는 새빨간 얼굴로 그의 팔을 내리치며 빽 소리쳤다. "못살아 정말! 그런 걸 물어봤단 말이에요?" "의사잖아. 뭐가 어때." 뻔뻔한 그를 흘겨보다가 루시아는 머뭇거리면서 고백했다. "... 아이가 자라면서 몸이 달라져서... 당신이 매력을 못 느낄지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 또 이상한 꿈 꿨어?"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석 달이 지난 건... 옛날이잖아요." 루시아는 의사가 조심해야 한다고 선언한 석 달이 지나면 그가 바로 달려들 줄 알았다. 그런데 석 달째 되는 날부터 하루 이틀, 며칠이 지나도 그가 그런 기색이 없어서 서운하기도 하고 자신감이 사라지기도 했다. "요즘 당신에게 신경 못 쓴 건 알아. 미안해." 필립의 은신처를 찾는 일로 수시로 보고 받고, 기록을 받아서 뒤지느라 정신이 온통 그곳에 쏠려 있었다. 그녀가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가 보고 싶고 안고 싶었다. "바쁘셨다는 거 알아요. 이해해요. 그냥... 배는 나오고 살도 찌고..." 우물쭈물하는 그녀를 보다가 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나만 당신한테 애타는 줄 알았더니 당신도 하고 싶었군. 말을 하지 그랬어." "... 놀리기만 하고." 휴고는 키득거리면서 붉게 달아오른 사랑스러운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사랑해. 당신이 어떤 모습이어도." 루시아는 배시시 웃으면서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휴고도 그녀의 등아래 손을 넣어서 품으로 꼭 안았다. "난 당신하고 이렇게 안고만 있어도 좋아요." 휴고는 그녀를 품에서 떼어내고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마음이 바뀌었어?" 루시아는 지나치게 심각한 그가 우스워서 웃음을 꾹 참고 새침하게 말했다. "굳이 안 해도..." "이 여자가 진짜." 깔깔 웃는 루시아의 턱을 틀어쥐고 그의 입술이 달려들었다. ============================ 작품 후기 ============================ 선추코 및 읽어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본편 완결입니다. ^^ 이제 에필로그로 가겠습니다. 원고료 쿠폰 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본